2025 시편 묵상




누가 '아쉬레(복된 사람)'인가

오늘은 현재 우리가 읽고 있는 시편에 대해 간략하게 살펴보고 시편 전체의 서론이며 핵심 내용이라 할 수 있는 시편 1편과 2편을 통해 하나님께서 어떤 사람을 '복 있는 사람' 또는 '복된 사람'이라 하시는지, '복된 사람'이 행할 바가 무엇인가에 대해 생각해 보겠습니다.

'시편'은 성경 전체의 핵심이다

탈무드에서는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5권의 율법서를 주었고 다윗은 5권의 찬양을 주었다고 하며 시편을 유대인들이 가장 중시하는 '토라(창, 출, 레, 민, 신)'에 비교합니다. 이는 시편이 내용적으로도 단순히 하나님께 기도하고 찬양하는 개인적인 기도만이 아니라, 성경 전체의 핵심적인 내용과 구약의 역사, 공동체 삶의 방향과 내용을 충실하게 담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신약에서도 구약의 본문을 인용할 때 이사야(419번)와 함께 시편(414번)을 가장 많이 사용하고 있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시편은 총 150편으로 되어 있는데 세부적으로 보면 5권으로 나뉘어 있습니다. 1권은 1편~42편, 2권은 42편~72편, 3권은 73편~89편, 4권은 90편~106편, 5권은 107편~159편입니다. 시편은 형식과 내용에 따라 찬양시, 탄식시, 감사시, 토라(말씀)시, 제왕시 등 다양한 내용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이런 구성은 그냥 마구잡이로 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권별, 편별로 그 내용이나 저자 등을 고려해 위치가 정해진 것입니다. 시편은 앞부분이 탄식의 간구에서 점점 적들과의 상황에서의 구원에 대한 간구로 진행되다가, 감사 찬양으로 전개되어 갑니다. 특별히 시편 150편의 마지막을 '할렐루야(여호와를 찬양하라)'로 마치는 것은 전능자이시고, 창조자이시며, 아버지이신 하나님에 대한 마땅한 고백과 확신과 감사라 할 수 있겠습니다.

'시편 1편'의 독특성

그런 의미에서 오늘 우리가 읽은 시편 1편의 위치와 내용은 독보적이라 할 수 있습니다. 시편 1편은 그냥 우연히 150편 시편 중에 첫 번째로 배치된 것이 아닙니다. 시편 1편은 시편 전체의 서론이고 핵심 내용입니다.

우리가 시집이나 찬양집을 발간할 때 편집자는 가장 첫 편을 무엇으로 할까 고민할 것입니다. 대체로 첫 편은 그 시집이나 찬양집의 내용을 포괄하는 것이나 개인이나 단체에 가장 의미 있다고 생각한 것을 넣을 것입니다. 시편 1편도 마찬가지입니다. 시편을 편집한 사람들은 깊은 기도 가운데 하나님의 뜻을 구하며 가장 먼저 넣을 시를 정했을 것이고 그 가운데 성령님의 감동하심이 있었을 것입니다.

시편 1편이 시편의 서론이고 핵심 내용이라는 것은 시편이 성경 전체의 내용을 포괄하고 있다는 것을 참작하면 시편 1편이 성경 전체의 서론이고 핵심이라는 것과 같은 이야기입니다. 그만큼 시편 1편은 중요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시편 1편의 내용을 제대로 이해하는 것은 시편, 아니 성경 전체 가운데 있는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는 데 결정적이라 할 수 있습니다.

시편 1편과 2편의 '아쉬레'

그런데 시편 1편은 시편 2편과 함께 살펴야 합니다. 왜냐하면, 시편 1편과 2편은 원래 하나의 시가 2개로 나뉜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는 시편 1편과 2편에 3편부터 붙여져 있는 특정 '표제'가 없는 것에서도 알 수 있고 특정 단어로 두 시가 'Inclusio(수미쌍관)' 되어 있는 것으로도 알 수 있습니다. 물론 내용적으로도 일관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 성경 시편 1편 1절에 있는 '복 있는 사람'은 히브리어로 '복되도다!' 또는 '얼마나 복된 지' 등의 일종의 감탄사 같은 말인 '아쉬레'입니다. 그러므로 시편 1편 1절은 "복되도다! 악인의 꾀를 따르지 않는 사람", "복되도다! 죄인들의 길에 서지 않는 사람"의 의미이며, 또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않는 사람은 얼마나 복된지" 등으로 번역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아쉬레'가 시편 2편의 마지막인 12절에도 등장합니다. 우리 성경에 "모든 사람은 다 복이 있도다"고 한 것이 바로 '아쉬레'입니다. 즉 시편 1편과 2편은 '아쉬레'라고 하는 단어 사이에 들어 있는 것입니다. 시편 1편과 2편은 '아쉬레' 즉, '복된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에 대해 설명하고 있는 것이며 바로 이 하나님 앞에서 '복된 사람'에 대한 내용이 시편 전체의 내용이고 성경 전체의 내용이며 하나님의 우리에 대한 뜻 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창조하시고 인도하시는 것은 우리에게 복을 주시고 우리가 복된 사람이 되어 궁극적으로 다른 사람과 민족과 국가에 복을 나누어 주는 복의 근원이 되기를 바라시는 것입니다(창 12:2~3).

'아쉬레'는 '하가'하는 자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약속하신 '복'을 어떻게 받고 누리고 사는지 알고 싶으십니까? 오늘 시편 1편과 2편이 설명하는 '아쉬레(복된 사람)'에 대해 마음을 열고 귀를 기울이시기 바랍니다. 지금부터 어떤 사람이 복된 사람이고 우리가 어떻게 복을 받고 누리고 살 수 있는가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시편 1편 1절은 "복된 사람은 악인들의 꾀를 따르지 않고 죄인들의 길에 서지 않으며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지 앉은 자"라고 말합니다. 참으로 옳은 말씀입니다. 세상을 살다 보면 어찌 그렇게 악인, 죄인, 오만한 자들이 많은지요. 악한 자들은 우리를 밤낮으로 꾀어 함께 속이고 불법을 하는 자로 살기를 요구합니다. 우리로 죄인의 길에 서게 함으로 '너도 똑같은 놈이야. 그러니 닥치고 있어, 시키는 대로 해, 좋은 게 좋은 거야' 라고 합니다. 그래서 결국 하나님보다 높아진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우리를 눌러앉게 합니다.

시편 1편 2절은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며 그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것만이 이런 악인, 죄인, 오만한 자에게서 벗어나 '복된 사람'으로 살 수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것'입니다. 율법은 우리가 알다시피 '토라'입니다. 이것은 시내 광야에서 모세를 통해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고 이를 지킴으로 제사장 나라요, 하나님 백성 삼겠다고 하신 바로 그 말씀입니다. 이렇게 주신 율법을 지킴으로 노예이고, 죽을 수밖에 없던 이스라엘 백성을 이집트 백성과 다르고, 가나안 족속과 다른 하나님의 백성으로 삼아 복의 근원이 되게 하겠다는 것입니다. 넓게 보면 오경(창, 출, 레, 민, 신)이고 좁게 보면 레위기의 말씀입니다.

하가1-읊조리다

이 '토라'를 밤낮으로 '묵상'하라는 것입니다. '묵상'은 히브리어로 '하가'입니다. '하가'라는 단어에 있는 여러 가지 뜻을 살펴보면, 복된 사람이 되기 위해, 아니 이미 복된 사람이 된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어떻게 묵상해야 하는지 알 수 있습니다. '하가'의 첫 번째 뜻은 '읊조리다'입니다. 단지 마음으로 음미하거나 명상하듯이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뜻을 음미하며 낮은 소리로 반복적으로 읽는 것을 의미합니다. 원래 동서고금 책을 읽을 때 눈으로만 읽지 않고 소리를 내어 읽었습니다. '렉시오 디비나(거룩한 책 읽기)'라는 프로그램이 유행인데 렉시오 디비나는 뜻을 음미하며 소리 내어 읽는 것입니다.

자주 말씀드리는 이야기이지만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반복해서 읽는 것은 중요합니다. 성경 말씀 각 단어나 각 절, 권, 나아가 특정 주제에 대한 신학적인 뜻을 이해하는 것도 중요합니다. 그러나 그보다 먼저 성경 말씀 자체에 대한 각 책의 줄거리와 내용을 이해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내용도 모르는데 뜻과 의미를 말하는 것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성경은 그렇게 복잡하고 어려운 책이 아닙니다. 시간을 내서 읽어 보면 그 내용과 줄거리를 이해할 수 있습니다. 다만, 책이 두껍고 여러 권이다 보니 쉽게 이해가 안 됩니다. 그래서 중요한 것이 다독입니다. 여러 번 읽으면 알 수 있습니다. '서백독이면 의자현'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책을 백 번 읽으면 뜻이 스스로 보인다는 의미입니다. 성경도 많이 읽으면 읽을수록 내용을 이해하는 데 좋습니다. 최소한 신앙 연수만큼 읽어야 합니다. 읽을 때 속으로 읽다 보면 잡생각도 많이 나고 졸리기도 하니 소리 내서 읽거나 여럿이서 읽는 것도 효과적입니다.

'아쉬레', '복된 사람'은 말씀을 밤낮으로 틈만 나면 읽는 사람입니다. 말씀을 읽다 보면 이해가 되고 힘이 나고 하나님께 집중할 수 있게 됩니다. 제가 군대 갔을 때 훈련소에서 6주간 훈련을 받는데 정말 힘들었습니다. 훈련도 힘들지만 걸핏하면 욕설과 얼차려를 주는데 마음이 얼마나 강퍅해지는지 온갖 짜증이 올라오고 폭력적인 본성이 드러납니다. 안 되겠다 싶어서 입대할 때 갖고 온 신약성경과 시편이 묶인 작은 성경책을 윗주머니에 넣고 정말 틈만 나면 읽었습니다. 얼마나 지독하게 읽었는지 그 모진 훈련을 받으면서 6주 만에 신약을 1번 다 읽었습니다.

그리고 이등병 생활 4개월도 그 못지않게 힘들었는데 이등병 생활하면서 다시 1번 읽었습니다. 이렇게 매일 틈만 나면 성경을 읽으니까 정말 마음도 다스려지고 하나님의 살아 계심도 피부로 느껴졌습니다. 훈련소에서 함께했던 동기 중에 제가 틈만 나면 성경 읽는 모습을 보고는 자기도 신앙생활을 하고 싶다는 친구도 있었습니다. 그 친구와는 다른 부대에 배치되었는데 제가 대대에서 군종병을 할 때 군종 집체 교육에서 다시 만났습니다. 그 친구도 중대 군종병이 되어 있었습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매일매일 '라마나욧 성경묵상표'를 따라 읽는 성경 말씀이 저를 돌아보게 하고 제 삶에 대해, 가정에 대해, 더함공동체교회에 대한 방향을 정하는 데 순간순간 생생한 지침이 됩니다. 성경을 밤낮으로 '읊조리는 것'은 '복된 사람'이 되는 길이며 사는 방법입니다.

하가2-으르렁거리다

뜻밖에 '하가'의 두 번째 뜻은 '으르렁거리다'입니다. 이는 맹수가 사냥감을 앞에 두고 으르렁거리는 것을 의미합니다. 말씀을 으르렁거리며 읽는다는 것은 전투하듯이 치열하게 읽는 것을 의미합니다. 큰 소리로 처절하게 읽으라는 것이 아닙니다. 낮은 소리로 읊조리지만 읽는 태도나 자세가 마치 전쟁터에 나간 군사와 같고 먹을 것을 앞에 둔 맹수와 같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시편은 '복된 사람'이 '의인'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의인'만 있는 것이 아니라 1절에 이미 등장한 것처럼 '악인', '죄인', '오만한 자'들이 득실거립니다. 그들은 조용히 자기 길을 가는 것이 아니라 '의인'들을 공격하고 함께 죄의 구렁텅이에 빠지기를 사자가 먹을 것을 찾아 헤매듯이 합니다.

그래서 시편 1편과 연결된 시편 2편은 "이방 나라들이 분노하고…세상 군왕들이 서로 꾀하여 여호와의 기름 부음 받는 자를 대적(시 2:1~2)"하고 있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의인'들이 "철장으로 그들을 깨뜨리고 부수어야(시 2:9)"한다고 선언합니다.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이 전쟁터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전쟁터의 한가운데 있습니다.

에베소서 6장 10절 이하는 마귀를 대적하기 위해, 이 땅 가운데 우리에게 닥쳐오는 싸움을 위해 전신갑주를 입으라는 말씀입니다. 진리의 허리띠, 의의 호심경(흉배), 복음의 신, 믿음의 방패, 구원의 투구 등 그러나 이 모든 것은 방어 무기입니다. 유일한 공격 무기는 '성령의 검' 즉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온갖 악인, 죄인, 오만한 자들과의 전쟁에서 승리로 이끄는 유일한 무기입니다. 맹수가 먹이를 포획할 수 있는 강한 발톱이며 이빨입니다.

하가3-경영하다

'하가'의 세 번째 의미는 한걸음 여기서 더 나갑니다. 시편 2편 1절은 "어찌하여 이방 나라들이 분노하며 민족들이 헛된 일을 꾸미는가"라고 하는데, 이때 우리가 사용하는 성경 개역개정에서 '꾸민다'로 번역한 말을 예전 성경 개역한글에서는 '경영하는가'라고 번역했습니다. 꾸민다, 경영한다, 이 단어가 바로 '하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는 것은 내 삶과 상관없이 그저 음미하고 반복해서 읽고 으르렁거리는 것이 아닙니다. 말씀을 읊조리고 으르렁거리는 것은 내 삶의 구체적인 현실에 대해, 내가 닥친 문제에 대해, 내 직장 속에서, 내가 고민하는 어떤 선택의 문제에 대해. 구체적으로 경영하고 일을 꾸미는 것입니다.

말씀에 길이 있고 답이 있다는 것입니다. 말씀이 내 삶과 관계없이 그저 무슨 경전 읽듯이, 주문 외우듯이 읊조리는 것이 아니라 한 말씀 한 말씀이 내 삶의 현실과 직결되어 길이 되고 답이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지 않으면 죽을 수밖에 없고 묵상하지 않으면 해결할 수 없습니다.

바로 그런 사람이 '의인'이며, 그런 사람이 '복된 사람(아쉬레)'이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는 사람이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철을 따라 열매를 맺고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같이 형통한다는 것입니다(시 1:3). 그런 사람을 여호와께서 인정하신다는(시 1:6)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날마다 하나님의 말씀을 '읊조리고', '으르렁거리고', '경영'하며 '하가'하는 '복된 사람(아쉬레)'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부탁합니다.

진정한 '아쉬레'의 비결

그러나 시편 1편과 시편 2편이 하나의 시편인 것을 고려해 연속해서 읽으며 묵상해 보면 '아쉬레(복된 사람)'가 단지 개인적으로 '하가(묵상)'하는 것으로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개인에게 초점이 맞추어져 있던 시편 1편과 달리 시편 2편은 그 범위를 개인에서 국가로, 국제적으로 확장시킵니다. 시편 2편은 이방 나라들과 민족들이, 그들의 군왕과 관원들이 여호와의 기름 부음받은 자를 대적해 그의 통치를 벗어나겠다고 선언하며 시작됩니다. 그러나 여호와께서는 자신이 세운 왕을 거룩한 산 시온에 세우겠다(시 2:6) 선언합니다.

하나님은 바로 그자를 '내 아들'이라 칭하고 '내가 낳았다'고 선언하십니다(시 2:7). 그리고 그에게 이방 나라를 유업으로 주사 땅끝까지 이르게 하고, 대적자들을 철장으로 질그릇같이 부술 것이라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들은 신약에서 예수님의 부활에 대해(행 13:33), 예수님이 천사보다 위대한 분이라는 것을 선언할 때(히 1:5), 예수님이 진정한 대제사장으로 임명되심(히 5:5) 등에 적용해 인용되고 있습니다. 또한 마지막 때에 예수님의 위대한 통치를 성취함에 대한 선언(계 12:5, 19:15~16)에 인용됩니다.

'기름 부음받은 자', '아들'이 누구입니까? 예.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에게 입맞춤으로 순종함으로, 완전히 항복함으로 '아쉬레(복된 사람)'가 되고 '의인'이 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어떤 사람이 '아쉬레(복된 사람)'입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읊조리고 으르렁거리고 경영하며 '하가(묵상)'하는 사람입니다. 어떤 사람이 '아쉬레(복된 사람)'입니까? 기름 부음받은 자, 하나님의 아들,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께 완전히 항복함으로 순종하며 그를 따르는 자입니다. 그러므로 결국 말씀을 묵상한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따른다는 것입니다. 이번 한 주간 하나님의 말씀을 '하가(묵상)'함으로 예수 그리스도에게 순종하고 그의 뜻을 쫓는 진정한 '아쉬레(복된 사람)'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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찰스 스펄전은 시편 1편이 시편의 서론으로 간주될 수 있으며, 시편 전체의 내용을 요약한다고 설명했다. 여기서 관심사는 우리에게 축복받는 길을 가르치는 것이다. 그리고 죄인들이 반드시 멸망한다는 사실을 경고하고 있다. 잠 24:19-20절을 보면, “너는 행악자들로 말미암아 분을 품지 말며 악인의 형통함을 부러워하지 말라 대저 행악자는 장래가 없겠고 악인의 등불은 꺼지리라”고 했다.

세상적인 안목으로 볼 때, 악한 사람이 잘 되는 것처럼 보이는 경우가 있다. 그런데 그런 것을 부러워하지 말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악인에게는 장래가 없기 때문이다. 여기서 “장래”라는 말이 히브리어 ‘아하리트’인데, ‘미래’라는 뜻도 있고 ‘끝’이라는 뜻도 있다. 그러니까 악인들에게는 미래가 없다. 끝이 없다. 그들은 마지막 심판 때에 전혀 소망을 가질 수 없는 상태가 되는 것이다.

반면에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은 어떻게 된다고 했나? 잠 23:17-18절을 보면, “네 마음으로 죄인의 형통을 부러워하지 말고 항상 여호와를 경외하라 정녕히 네 장래가 있겠고 네 소망이 끊어지지 아니하리라” 의인들, 즉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들은 “미래”가 있다고 했다. 왜 그런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에게는 끊어지지 않는 소망이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성도들이 끊어지지 않는 소망 안에서 축복의 삶을 살기 원하신다. 그러면 어떻게 그런 삶을 살게 되는 것인가? 어떤 사람이 축복의 사람이 되고, 어떤 사람이 간증을 남기는 사람이 되는 것일까?

1. 말씀이 진리가 된 사람이 축복의 사람이다.

1절에서, “복 있는 사람은 악인들의 꾀를 따르지 아니하며 죄인들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지 아니한다”고 했다. “복 있는 사람”의 길이란 무엇인가? 히브리어에서 복이라고 할 때 대표적으로 말하는 단어가 ‘바라크’라고 했다. 바라크는 생명이 살아갈 수 있도록 필요한 것을 주시는 것과 같은 복이라고 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 “복 있는 사람은”이라고 할 때, 사용된 단어는 ‘바라크’가 아니라 ‘에쉐르’란 단어이다. 히브리어 성서로는 시편 1:1절 말씀이 ‘아쉬레 하이쉬 아쉐르’로 시작된다. 여기서 ‘아쉬레’가 ‘에쉐르’의 복수형 단어이다. 직역하면 ‘~하는 사람은 복이 있도다’ 혹은 ‘복들이 있도다 ~하는 사람은’이라는 뜻이다. ‘에쉐르’는 ‘바라크’와 구별되는 ‘복’이란 뜻의 단어이다.

그런데 이것은 복을 받은 사람의 존재 상태를 표현할 때 사용된다. ‘에쉐르’는 ‘곧다, 솔직하다, 똑바로 가다’라는 뜻이 있다. 그러니까 ‘에쉐르’는 ‘똑바로 걸어가는 상태’이다. 하나님께서 정해 놓으신 길이 있고 목표가 있다. 그 정도의 길에서 벗어나지 않고 진리를 따라가는 것이 ‘에쉐르’이다. ‘하나님의 길에서 벗어나지 않는 것’을 복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그래서 시편 1편에서 복 받은 사람의 존재 상태를 다음과 같이 이야기하고 있다. 1절에서, “악인들의 꾀를 따르지 아니하며”라고 했다. 다르게 표현하면 ‘악한 생각을 가지고 걸어가지 않는다’는 뜻이다. 세상 사람들은 빠른 출세와 성공을 위해서, 부정한 방법을 사용하기도 한다. 그런데 복 있는 사람이란 ‘하나님이 아니라고 하시는 길’을 걷지 않는다는 것이다. 바른 길이 아니면 가지 않는다는 뜻이다.

그 다음으로 “죄인들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라고 했다. 하나님이 정해 놓으신 길과 목표가 있는데, 거기에서 벗어난 곳에 서지 않는다는 뜻이다. 여기서 “서다”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아마드’는 맞은 편에 정면으로 대치해서 서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니까 “죄인들의 길에 서지 않는다”는 것은 ‘하나님 맞은 편에, 하나님과 원수된 자리에’ 서지 않는 상태이다. 그것이 바로 ‘에쉐르’, 곧 “복 있는 사람”의 상태라는 것이다. “복 있는 사람”이란 하나님의 맞은 편이 아니라 “하나님의 편에, 말씀의 편에” 선다.

그 다음으로 나오는 말이 같은 맥락이다.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라고 했다. 여기서 “오만한 자들”이란 ‘조롱하는 사람’을 뜻한다고 했다. 그들은 하나님을 모욕하고 성도를 조롱한다. 왜 그럴까? 하나님을 진리로 받아들이지 못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말씀이 진리인 것을 인정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복 있는 사람이란 하나님을 비난하지도 않고, 성도를 조롱하지도 않는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진리이신 것을, 하나님의 말씀이 진리인 것을 믿고 받아들이기 때문이다.

결국 “복 있는 사람”이란 하나님의 마음과 같은 마음을 가진 사람이다. “복 있는 사람”이란 하나님이 정하신 길과 목표에 서 있는 사람이다. 그 길을 따라가는 사람이다. “복 있는 사람”이란 하나님의 말씀을 진리로 받아들이고, 그 진리를 말하는 사람이다. 이게 진짜 “복 있는 사람”인 것이다.

2. 말씀이 삶이 된 사람이 축복의 사람이다.

복이 있는 사람의 존재 상태를 좀더 적극적으로 표현한 것이 2절 말씀이다.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도다” 여기서 “즐거워하여”라는 단어가 ‘헤프초’인데, ‘기쁨, 소원’이란 뜻이다. 그런데 이 단어가 ‘소유격’ 표현이다. 그러니까 정확하게 말하면, ‘그의 기쁨, 그의 소원’이란 뜻이 된다. “복 있는 사람”의 상태란 어떤 상태인가? 하나님의 말씀을 자기의 소원, 자기의 기쁨으로 간직한 사람이라는 것이다. 악인들은 세속적인 꾀를 생각하는데, 복이 있는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을 생각한다. 그들은 말씀이 성취되는 것을 자기의 기쁨이며 소원으로 생각한다.

그렇게 마음에 하나님의 말씀을 소원으로 품고 있으니까 어떻게 되겠나? 기억하시나? 여러분이 마음에 어떤 소망이나 소원을 가득 품고 있으면 어떻게 된다고 했나? 그 소원이 입에서 흘러 나오게 되어 있다고 했다. 말을 하기만 하면 소원이 튀어 나오는 것이다. 그것이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도다”라는 말씀의 뜻이라고 했다. 여기서 “묵상하는도다”라는 말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예흐께’의 원형이 ‘하가’라는 단어이다. 무언가를 계속해서 “중얼중얼” 이야기하는 것을 뜻하는 단어이다.

본래 ‘하가’라는 단어는 의성어에서 나온 말이라고 했다. 어떤 의성어라고 했나? “비둘기가 우는 소리”라고 했다. 우리는 비둘기 우는 소리를 들으면 ‘구구구구’라고 표현한다. 그렇게 들리기 때문이다. 그런데 히브리인들은 비둘기가 우는 소리를 ‘하가하가’라고 표현한다. 그렇게 들리기 때문이다. 우리는 개들이 짓는 소리를 ‘멍멍’이라고 듣고 표현한다. 미국 사람들은 ‘바우와우’라고 듣고 표현한다. 이렇게 듣고 표현하는 것이 다르다. 히브리인들이 비둘기 우는 소리를 의성어로 표현한 것이 ‘하가’이다.

비둘기는 입만 열면 ‘구구구구’ 같은 소리만 한다. 하나님의 율법을 즐거워하는 사람이 이와 같다는 것이다. 말씀이 자기 안에서 소원이 된 사람, 하나님의 말씀이 자기의 기쁨이 된 사람이 그렇다는 것이다. 그는 비둘기가 입만 열면 ‘구구구’하는 것처럼, 일을 열었단 하면 ‘말씀, 말씀’만 하게 된다는 것이다.

사랑하시는 여러분, 어떤 사람이 “복 있는 사람”인지에 대해서 너무나도 분명하게 이야기하고 있지 않은가? 누가 “복 있는 사람”이라는 것인가? 자기 마음에 “하나님”밖에 없는 사람이다. 생각으로도 소원으로도 하나님 말씀으로 가득 차 있는 사람이다. 그래서 입만 열었다 하면 말씀이 자기 안에서 흘러나오는 사람이다. 이런 사람이 “복 있는 사람”이라는 것이다.

3. 말씀으로 인정받은 사람이 축복의 사람이다.

하나님께서 “복 있는 사람”의 삶을 어떻게 하신다고 했나? 3절을 보시라. “그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철을 따라 열매를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으니 그가 하는 모든 일이 다 형통하리로다” 놀라운 말씀이 지금 선포되고 있다. 사막과 같은 곳에 심겨진 나무도 물가에 닿아 있으면 열매를 낸다. 물가에 닿아 있으면 메마른 땅에서도 잎사귀가 마르지 않는다. 말씀에 사로잡혀서 사는 사람이 이와 같다는 것이다. 그래서 “복 있는 사람”은 “그가 하는 모든 일이 다 형통하리로다”라고 했다.

하나님이 가게 하시는 약속의 길에도 고난과 시련이 있다. 고난, 시련, 배신, 실패와 같은 것이 약속의 길을 막아선다. 그런데 하나님이 결국에는 그 길을 평탄하게 하신다. 약속의 길을 가게 하신다. 그래서 마침내 언약을 이루게 하시는 것이다. 이것이 성경에서 말씀하는 “형통”(=찰라흐)이라고 했다. 이렇게 형통하게 되니까 그 인생의 결국이 어떻게 되겠나? 6절에 보니까 “무릇 의인들의 길은 여호와께서 인정하시나 악인들의 길은 망하리로다”라고 했다. 바로 이것이다. 하나님께서 인정하신다고 했다.

히브리어로 시편 1편을 읽으면, 알파벳 첫 글자로 시작해서 마지막 글자로 끝을 맺는다. 1편의 첫 단어가 ‘아쉬레’인데, 히브리어 알파벳의 첫 자음인 ‘알레프’로 시작한다. 마지막 단어가 6절에 나오는 “망하리로다”에 해당하는 ‘토베드’인데, 히브리어 알파벳 자음의 마지막 글자인 ‘타우’로 시작한다. 그러니까 이 시는 알레프로 시작해서 타우로 끝나는 시이다. 알레프는 ‘하나님’을 뜻하는 글자이고, ‘타우’는 끝을 이야기하는 단어인데, ‘완성’을 의미한다. 히브리인에게 있어서 언어적 유희를 가미해서 시편 1편을 읽으면, “하나님께서 완성하신다.”는 의미가 보여진다. 이 부분이 재미있는 대목이다.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있어서, “끝”이란 그냥 마지막이 아니다. 그것은 미래이기도 하고, 소망이기도 하다. 그리고 더 중요한 의미로 그것은 완성을 의미한다. 악인들의 경우를 생각해 보시라. 그들의 삶은 완성되지 않는다. 4절에서 “악인들은 그렇지 아니함이여 오직 바람에 나는 겨와 같도다”라고 했다. 악인들은 시냇가에 심겨진 나무와 같아지지 않는다. 그들에게는 형통함이 없다. 그들에게는 미래가 없고, 소망이 없다. 왜냐하면 그들은 언약을 성취하는 사람들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들은 바람에 나는 겨와 같이 “완성되지 못하고” 흩어져 버린다.

5절에 따르면, 악인들은 심판을 견디지 못한다. 의인들은 심판 때에 하나님 나라의 완성된 백성이 된다. 그러나 악인들은 심판을 견뎌내지 못한다. 그들은 의인들의 모임에 들지 못한다. 그래서 그들의 결국은 6절에서 이야기하는 것처럼, “망하게 되는” 것이다. 그들의 삶은 완성되지 못한다. 미완의 삶, 심판과 저주의 삶으로 끝나는 것이 악인과 죄인의 결국이다. 반면에 의인들은 어떻게 된다는 것인가? “하나님이 인정하신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완성하신다.”는 것이다. 그래서 “복 있는 사람”의 길에는 간증이 따라오게 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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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쉐르(אֶשֶׁר)의 복을 받게 하소서!

시편 1:1-6

시편 1편은 평생 암송해도, 다시 암송해도, 세월이 지나서 암송해도 은혜가 되는 귀한 말씀입니다.
시편 전체 시편 150편의 주제가 되는 말씀이기도합니다.

저자는 여러 설이 있습니다. 다윗이라고 보기도 하고 시편 1편의 내용이 예레미야 17장의 내용과 같기에 예레미야가 저자라고 보기도 합니다.

[렘17:7] 그러나 무릇 여호와를 의지하며 여호와를 의뢰하는 그 사람은 복을 받을 것이라 [렘17:8] 그는 물가에 심어진 나무가 그 뿌리를 강변에 뻗치고 더위가 올지라도 두려워하지 아니하며 그 잎이 청청하며 가무는 해에도 걱정이 없고 결실이 그치지 아니함 같으리라

그 누가 저자라도 해도 문제가 아닙니다. 우리의 마음의 고백시편이기도 합니다. 복있는 사람이 되기를 원하는 기도의 고백입니다.  복福있는! 사람, 복福없는 사람이 아니라 복福있는! 사람이 되기 원합니다. 

그런데 이 복福-축복祝福이라는 히브리어 단어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바라크 בָּרַךְ의 축복이요
하나는 아쉐르(에쉐르 אֶשֶׁר)의 축복입니다.

바라크의 축복은 물질적인 것을 포함한 현세적, 가시적 축복입니다.

창세기의 생육(生育)의 축복이 바로 바라크의 축복이었습니다.

[창1:22]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바라크)을 주시며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여러 바닷물에 충만하라 새들도 땅에 번성하라 하시니라

아브라함에게 주신 축복도 바라크의 축복이었습니다.

[창12:2]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바라크)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너는 복이 될지라

그런데 시편 1편의 축복은 아쉐르 אֶשֶׁר의 축복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을 진정으로 만난 사람의 영혼 깊은 곳의 만족과 기쁨과 행복을 의미하는 영적 축복을 말합니다.
헬라어로는 마카리오스 μακάριος 라고 하는데 바로 예수님의 마태복음 5장의 마카리오스의 축복과 같습니다.

[마5:3]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 마카리오스 μακάριος)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

아쉐르의 축복은 영혼 깊은 곳의 축복입니다.

물론 바라크의 축복도 당연히 하나님께서 주시는 선물입니다. 그러나 그것 자체가 목적은 아닙니다. 하나님의 일을 위한 수단의 축복입니다. 그것 자체가 목적이 되면 신앙은 기복주의祈福主義가 되기 쉽습니다. 우리는 기복주의자는 아니지만 복을 하나님께 구하는 기복祈福은 정당한 기도임을 믿기에 현실의 축복을 위한 기도도 당당하게 드립니다. 

그런데 영원한 것은 바로 아쉐르의 축복! 영혼의 축복입니다. 바라크의 축복과 함께 결코 다함이 없는 에쉐르- 시편 1편의 축복을 받기 원합니다.

그런 복있는 사람은 어떤 사람입니까? 

깨닫는 사람, 악이 무엇인지, 죄가 무엇인지 오만함이 무엇인지 아는 사람입니다. 그 깨달음이 있기 원합니다. 그리고 그것을 '하지 않을' 결단력이 강한 사람입니다. 

[시1:1] 복 있는 사람은 악인들의 꾀를 따르지 아니하며 죄인들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악인의 꾀עֵצָה 에차 counsels는 대단한 것 같지만 결국 바닥이 드러나는 인간적인 꾀일 뿐입니다. 맑지 않습니다. 그 악인들과 함께 걷지 않고  does not walk ! 죄인들의 길에 함께 서지 않고  does not stand  , 오만한 자들과 함께 앉지  does not sit  않습니다.  

[시 1:1] Blessed is the one who does not walk in step with the wicked or stand in the way that sinners take or sit in the company of mockers.

누구와 함께 걸어야하는지, 어디에 서야하는지 어디에 앉으면 안되는지 아는 사람입니다.

중요한 것은 이것을 깨닫고 판단하고 분별하는 영적인 지혜, 생각의 힘입니다.

생각의 힘이 있기 원합니다. 욕심이 눈을 가리면 생각이 약해집니다. 그리고 항상 배워도 진리에 이르지 못합니다. 

[딤후 3:6] -어리석은 여자-는 죄를 중히 지고 여러 가지 욕심에 끌린 바 되어 [딤후 3:7] 항상 배우나 끝내 진리의 지식에 이를 수 없느니라

그래서 기도합니다. 생각의 힘을 주소서! 분별력과 판단력과 의지의 힘을 주소서! 생각하게 하시고, 결단하게 하소서! 내 자신의 기질과 경향을 스스로 알아 늘 조심하게 하시고 내 자신의 마음과 생각을 바로 지켜나가게 하소서! 

나는 무엇이 가장 즐거운 사람인가!

무엇보다 복있는 사람은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는 사람입니다.

[시편 1:2]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도다

오직!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는 사람! 즐거움 חֵפֶץ 헤페츠 delight 기쁨, 즐거움

나는 무엇을 할 때 즐거워하는 성향인가요? 어떤 것이 가장 즐거우십니까? 나는 무엇이 즐거운 것일까요? 이것이 그의 영성을 좌우할 것입니다. 이것이 그의 영적 품격이 될 것입니다.

여호와의 율법-성경 말씀을 묵상하고 기도하는 시간이 즐거우십니까? 그렇게 되기 원합니다!

내 기도하는 그시간 그때가 가장 즐겁다!”

세상의 즐거움도 많겠습니다. 멋진 연애를 하는 것, 일류 레스토랑을 가는 것, 비싼 가방이나 옷을 입는 것, 멋진 여행지를 구경가는 것은 어쩌면 누구에게나 본능적으로 '즐거운' 일일 것입니다. 그것 또한 지나치지 않으면 하나님의 축복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하나님의 말씀보다 '늘', '더' 즐거우면 아직 우리는 복있는 사람이 되고 있는 과정에 있을지도 모릅니다.

진정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게 될 때까지 얼마나 많은 세월이 걸릴까요?

지금 성경을 읽을 때 마음의 즐거움이 있다면 나는 이미 복을 받은 사람입니다.

[시편 1:2]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도다

주야晝夜로 그 말씀을 묵상한다는 것! 묵상(默想)הָגָה 하가 meditate 이라는 단어가 중요합니다. 내 생각을 발전시키고 내 생각을 훈련시키고 내 생각을 새롭게하는 과정이기 때문입니다.

계속 묵상하며 생각하며 거룩한 생각의 힘을 키워내는 것입니다.

말씀이 체질화되고 인격화되고 언어화되고 습관화되고 드디어는 자연스러운 즐거움이 되기를 기도하는 것입니다. 내면의 기쁨이 될 때까지 묵상하는 것입니다.
그런 축복을 받기 원합니다!

그러면 그의 인생은 시냇가에 심은 나무같이 될 것입니다.

[시1:3] 그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철을 따라 열매를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으니 그가 하는 모든 일이 다 형통하리로다

모든 생명있는 것은 잘 자라고 열매를 맺는 것이 중요합니다! 중요한 것은 그 보이지 않는 뿌리가 시냇가로 연결되어 있는 것입니다. 뿌리는 보이지 않습니다. 내 마음도 보이지 않습니다. 그런데 그 뿌리가 나아가 닿아있는 방향이 중요합니다.

보이지 않는 내 마음이 늘 닿아있는 곳, 내 무의식의 심연이 연결되어있는 곳, 그것이 하나님의 말씀이라면 내 영혼은 늘 아름답게 열매를 맺을 것입니다.

형통할 것입니다.

형통(亨通)의 히브리어 צָלַח 찰라흐 앞으로 나가다, 발전하다, 전진하다 라는 뜻이 있습니다. 앞으로 나아가고 전진하고 발전하는 것이 형통입니다! 꼭 형통하시기를 바랍니다!

악인들은, 바람에 나는 겨와 같습니다.

They are like chaff that the wind blows away.

너무나도 많이 보았습니다. 지금도 많이 보고 있습니다. 

바람에 날리는 겨와 같은 마음과 생각들이 시대에 가득합니다. 

어쩌면 나도 열매없는 겨와 같이, 바람에 나는 겨와 같이 살았는지도 모릅니다. 이제는 알곡이 되기 원합니다. 그렇게 살기 원합니다. 의인은 생산적인 삶을 살지만 악인은 생에 대하여 무의미만 남기고 부정적인 기록만 남기게 될 것입니다. 바람에 나는 겨와 같은 악인은 결국 불안정하고 무의미라고 무가치하고 순간성에 머무르고 말 것입니다.

[시1:4] 악인들은 그렇지 아니함이여 오직 바람에 나는 겨와 같도다 [시1:5] 그러므로 악인들은 심판을 견디지 못하며 죄인들이 의인들의 모임에 들지 못하리로다 [시1:6] 무릇 의인들의 길은 여호와께서 인정하시나 악인들의 길은 망하리로다

마지막에 알곡과 겨가 분명히 구분될 것입니다. 

세례요한은 이미 예수님을 통해 그 심판이 이루어질 것을 예고했습니다!

[눅3:17] 손에 키를 들고 자기의 타작 마당을 정하게 하사 알곡은 모아 곳간에 들이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우시리라

오늘! 알곡으로 살아가기 원합니다.

바람이 많이 부는 시대를 살아갑니다. 덧없이 날아가지 않기 원합니다. 

알곡으로 남아있기를 기도합니다. 

주님! 내게 진리에 대한 지적 능력! 지성知性! 생각의 힘을 주옵소서!
주님을 만나는 시간, 주님의 말씀이 진정한 즐거움이 되게 하시옵소서!
내게 주신 시간과 달란트가 열매를 맺어 알곡으로 살게 하시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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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 2편, 하나님 나라와 세상 나라의 종국

시편 2편은 “제왕시”이면서 “메시아 예언시” 혹은 “찬양시”이다. 시편 1편과 더불어 작자가 미상 시이다. 1편은 복으로 시작되고 2편에서는 복으로 끝마친다. 그래서 한 쌍의 시로 보는 학자도 있다.

시편 전체를 왕궁으로 비유할 경우, 시편 1편을 그 출입구라고 한다면 시편 2편은 그 왕궁의 보좌에 앉으신 메시야를 만나게 된다.

이방 나라들이 다윗 왕국에 대한 음모와 반약으로 통치를 거절하는 것을 비웃으시는 하나님이시다. 언약의 주로 오신 그리스도의 왕국의 우주적 통치를 예언적으로 노래하며 그 분을 경외하며 섬기기를 요청하고 있다.

본 시는 하나님 나라와 세상 나라, 두 왕국의 종국을 보며 준다. 또한 그리스도인들의 영적 신분과 영적 싸움의 현장과 삶의 원칙과 우선순위에 대하여 교훈하고 있다.

 

A. 이방 나라들의 음모와 하나님의 비웃음(1-6절)

1. 반역한 나라들에 대한 탄식(1-3절)

“1. 어찌하여 이방 나라들이 분노하며 민족들이 헛된 일을 꾸미는가 2. 세상의 군왕들이 나서며 관원들이 서로 꾀하여 여호와와 그의 기름 부음 받은 자를 대적하며 3. 우리가 그들의 맨 것을 끊고 그의 결박을 벗어 버리자 하는도다.”

표준 새 번역은 “1. 어찌하여 뭇 나라가 a) 공모하며, 어찌하여 뭇 민족이 헛된 일을 꾸미는가? (a.70인 역에는 격노하며) 2. 어찌하여 세상의 임금들이 나서고, 어찌하여 통치자들이 음모를 꾸며 주를 거역하고, 기름 부음 받은 분을 거역하면서 이르기를 3. 이 족쇄를 벗어 던지자. 동여맨 이 사슬을 끊어 버리자 하는가?”이다.

1절에 시인은 ‘어찌하여’라고 수사 의문을 통하여 놀람, 의분, 격정을 표출하고 있다. 히브리어 원문에는 “어찌하여”가 일석이조(一夕二鳥, double-duty) 기법으로 1절, 2절에 각각 2번씩 총 4개의 동사에 각각 적용할 만큼 강조하고 있다. 이것은 이방 나라(뭇 나라, 열방, 민족들, 나라들 등으로 다양하게 번역됨)의 이스라엘에 왕에 대한 반역에 대한 통탄과 의문을 제기하는 말이다. ‘어찌하여’는 좌절감을 나타내는 의문사가 아니라 이방 나라들의 반역적 행위에 대해 놀라움과 조소를 나타내는 수사 의문사이다(D. Kidner).

이스라엘 역사를 회고해 볼 때, 뭇 나라들(이방 나라, 민족들, 열방들)이 그동안 예루살렘 왕의 통치를 받으며 그에게 복종하였다. 그러나 새 왕이 등극하면서 여러 속국의 왕들이 음모와 반역을 꾀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 대하여 ‘어찌하여’ 어리석고 허무한 짓들을 하고 있는가 하며 수사 의문으로 놀라움을 나타내고 있다.

로저손과 맥카이(Rogerson & Mckay)는 “본문에서 언급된 열방은 직접적으로는 이스라엘 지배하에 있었던 이방 나라들을 가리킨다. 그러나 보다 넓은 의미에서 볼 때, 이는 하나님의 우주적인 통치에 도전하고 하나님의 백성들을 위협하는 모든 종류의 세상 사람들을 가리킨다” 라고 했다.

이 세상의 왕들과 관원들은 서로 꾀하여 여호와 하나님과 그의 기름 부음을 받은 왕을 대적하며 하나님의 통치를 속박으로 여기며 그에게서 벗어나기를 원했다. 악인들은 당을 지어 악을 행하며(롬 2:8), 하나님을 대적하는 일을 하지만, 그들의 모든 계획은 헛될 것이다.

여기서 '기름 부음 받은 자'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메쉬야’는 ‘하나님께 기름 부음 받은 자’란 의미로 여기서는 이스라엘 왕을 가리킨다. 이스라엘의 왕들(특히, 다윗 계열의 왕들)은 대관식 때 기름 부음을 받았다(왕상 1:45). 이 기름 부음은 하나님의 왕직을 대리하기 위하여 그 자신을 다른 사람들로부터 ‘구별한다’는 상징적인 의미를 나타낸다(출 28:41; 3:3; 삼상 10:1; 16:3).

당시 이방 나라들은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 세우신 왕의 통치와 체제를 벗어나기 위해 음모를 꾸미고 반역을 꾀하였다. 이것은 종말론적으로 만왕의 왕 되시고 하나님 나라의 통치자이신 메시야에 대한 다스림을 거부하는 세상 나라의 통치자인 악한 권력자, 악한 제도, 악한 영, 악한 무리를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본 시는 일차적으로 다윗 왕가의 정통성에 대한 제왕시(royl psalm)이나 긍극적으로는 장차 오실 영광의 왕이신 메시야 예언시(messianic psalm)이다.

 

다윗 왕가의 정통성을 말하는 제왕시이자

메시야 예언시인 시편 2편

유대의 종교지도자들과 헤롯 왕과 로마 총독 빌라도가 함께 연합하여 하나님의 보내신 메시아를 십자가에 죽게 하였다. 사도 베드로는 “과연 헤롯과 본디오 빌라도는 이방인과 이스라엘 백성과 합동하여 하나님의 기름 부으신 거룩한 종 예수를 거슬러 하나님의 권능과 뜻대로 이루려고 예정하신 그것을 행하려고 이 성에 모였나이다”라고 말하였다(행 4:27-28).

‘기름 받은 자’는 ‘기름 부음을 받은 자’를 뜻한다. 구약에서 왕, 선지자, 제사장이 기름 부음을 받았다. 기름 부음의 신학적 의미는 하나님의 선택받음, 직책 임명, 직분 수행에 필요한 성령님의 지혜와 덧입음을 뜻한다. 예수 그리스도는 기름 부음을 받은 자, 메시야로서 왕, 선지자, 제사장 등 3 중직을 수행하는 진정한 왕이요, 선지자요, 제사장이시다.

악한 자들은 하나님의 통치를 부정하고 그의 보내신 메시아를 대항하였지만, 그러나 그들의 계획은 실패할 수밖에 없었다.

뭇 나라들이 하나님께 분노할 이유가 없다. 하나님께 분노하여도 유익이 절대 없다. 오히려 하나님께 대적하는 것은 헛된 일이 될 뿐이다.

이방, 세상 통치자들이 함께 은밀하게 도모하고 음모를 꾸민다. 바벨탑 사건 때부터 인간들은 계속해서 서로 뭉쳐서 하나님을 대적해 왔다. 그들은 두 명 이상의 사람이 연합하여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이 한 사람이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보다 더 낫다는 어리석은 생각을 하였다.

3절에 “우리가...하자”라고 스스로 격려 내지 권고하는 언급을 볼 수 있다. 이것은 이방 왕들의 음모를 꾸미기 위한 악한 결의를 말한다. 그들은 이스라엘 왕이 부과한 여호와의 율법이나 통치 체제를 “맨 것과 결박” 혹은 “족쇄”와 “사슬”로 보고 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고 그의 명령을 따르는 것을 자체를 때로는 족쇄와 사슬로 여긴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도전하는 자유방임적 생각이며 태도이다. 하나님 말씀 가운데 사는 것이 자신을 얽어매고 결박하는 것으로 생각하는 것은 이미 자신의 영혼이 병들었거나 은혜가 소진되어 버린 상태라는 사실을 직시해야 한다.

현대 인본주의, 세속주의, 향락주의가 얼마나 하나님의 창조 질서를 깨뜨리고 성경적 윤리관을 파괴하는가를 심각하게 생각해야 한다. 인간의 교만의 극치인 현대 자유주의 극치는 곧 인간 스스로 하나님이 되는 엄청난 죄를 범하는 것이다.

 

2. 하늘에서 비웃으시는 여호와 하나님(4-6절)

“4. 하늘에 계신 이가 웃으심이여 주께서 그들을 비웃으시리로다 5. 그때에 분을 발하며 진노하사 그들을 놀라게 하여 이르시기를 6. 내가 나의 왕을 내 거룩한 산 시온에 세웠다 하시리로다.”

표준 새 번역을 다음과 같다. “4. 하늘 보좌에 앉으신 분이 웃으신다. 내 주께서 그들을 비웃으신다. 5. 마침내 주께서 분을 내고, 진노하셔서, 그들에게 호령하시며, 이르시기를 6. 내가 거룩한 산 시온 위에 나의 왕을 세웠다 하신다.”

세상 나라와 민족들과 그들의 왕들과 제왕들의 음모와 반역에 대하여 하늘에 계신 주님께서 정서적, 감정적 반응(4-5절)과 행동적, 정치적 반응(6절)을 보여주고 있다.

4절의 ‘하늘에 계신 자’는 매우 높은 분에 대한 칭호이다. 위엄 가운데 계신 하나님의 초월성을 나타낸다(시123:1). 표준 새 번역에는 ‘하늘 보좌에 앉으신 분’, ‘공동번역에는 “하늘 옥좌에 앉으신 야훼”, 기타 번역에는 ‘하늘에 좌정하신 분’ 등으로 번역하였다.

하나님은 단순히 ‘하늘에 계신 자’(개역 개정) 혹은 ‘하늘에 앉으신 자’(RSV, NASB)가 아니라 ‘하늘 보좌에 좌정하신 자’(the One enthroned in heaven, NIV, NJB, NAB)이시다.

또한, 그분은 ‘주'가 되신다. ’주‘는 히브리어로 '아도나이’이다. 그것은 만물을 소유하신 분(8:1), 지극히 탁월하신 주, 만물 위의 주를 나타내는 말이다. 하늘 보좌에 좌정하신 분은 바로 우주의 왕, 만유의 주가 되신다. 이 우주의 왕께서 ‘지상의 왕들’의 악한 도모와 음흉한 음모를 비웃으신다.

“하늘에 계신 분이 웃으실 뿐 아니라 주께서 그들을 비웃으신다”고 하셨다. '하나님이 웃으신다'는 표현은 신인동형론적(神人同形論的, anthropomorphic) 표현으로 하나님께서 그들의 반역 음모를 결국 이루지 못하게 하실 것이라는 의미를 암시하고 있다(37:13:59:8).

이처럼 하늘 보좌에 앉으셔서 전 우주를 통하시는 주권자가 되신 하나님께서 그분과 그분의 통치자들을 반역하는 자들에 대해 웃으실 뿐만 아니라 가소롭게 여기시고 비웃으신다라고 표현했다. 이것은 은연중에 하나님께서 모든 만물 위에 뛰어나심을 나타내시는 것이다(Kraus).

하나님은 인간들이 자기를 대적하여 음모하는 것을 보시고 웃으시고 비웃으신다. 하나님은 사람의 반대를 두려워하시거나 당황하거나 멈짓하지 않으신다. 하나님은 다만 그들의 음모와 도모에 대하여 비웃으실 뿐이다.

하나님은 하늘에 앉아 계시는 분이시기에 웃으신다. 그분은 영광스러운 보좌에 위대한 왕으로 앉아 계신다. 그분의 우주의 통치자로 앉아 계신다. 그분은 인간들처럼 다음에 무엇을 해야 할지 궁금해하면서 하늘 보좌 앞에서 이리저리 서성거리고 당황하고 계시지 않으신다. 하나님은 그분의 주권 속에 세상을 통치하기에 완전한 평화와 확신 속에 앉아 계신다.

하나님은 하늘에 앉아 계시기 때문에 웃으신다. 그분의 통치 영역이 세상의 왕좌가 아니다. 그분은 모든 피조물을 다스리는 권세를 지닌 하늘의 보좌에 앉아 계신다. 하늘에 앉아 통치하시는 하나님께서 이 땅을 두려워할 것이 무엇이겠는가?

보이스(Boise)는 “하나님은 떨지 아니하신다. 그는 광대한 하늘 성벽 뒤에 숨어 적의 수를 세시지 않는다. 그분은 자신의 왕국에 대하여 상대방 적수에 맞대응하기 위하여 충분한 군사력이 있는가 계산하지 않는다. 그는 당황하여 앉은 자리에서 일어나지도 않으신다. 그는 이 엄청난 지상의 바보들을 보고 그저 '웃기만 하신다’” 라고 적절히 비유적으로 말했다.

모건(Morgan)은 “하나님께서 비웃으시는 이 웃음은 의를 사랑하는 모든 사람의 위로가 된다. 그것은 거룩하신 하나님 능력의 웃음이기 때문이다. 또한, 그것은 하나님 사랑의 웃음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죄를 지은 인간의 고난을 기뻐하지 않으신다. 그분은 그분의 뜻이 성취되는 것을 막으려는 사람들의 모든 교만한 자랑과 폭력을 비웃으신다”라고 하였다.

여호와께서 모든 역사의 현상에서 악인들의 대적을 비웃으실 것이다. 지난 수 세기에 걸쳐 많은 악인이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그분의 왕국을 도전하고 핍박해왔다. 이 적들의 모든 일은 좌절되고 무너질 것이다.

역사적으로 한 예를 살펴볼 때, 기독교를 혹독하게 핍박했던 로마 황제 디오클레티아누스(AD 284-305 재위)가 있었다. 그는 극심하게 기독교를 박해하였다. 그는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를 무자비하게 박해했고 기독교를 말살하려고 계획을 세웠다. 그는 “기독교의 이름이 말살된다”는 문구가 적힌 메달을 만들어 매달라고 명령했다.

디오클레티아누스는 또한 그의 제국 국경에 다음과 같은 문구가 적힌 두 개의 기념물을 세웠다.

“디오클레티아누스 조비아누스 막시미아누스 헤라클레우스 카이사르레스 아우구스티(Diocletian Jovian Maximian Herculeus Caesares Augusti)는 로마 제국을 동서로 확장하고 공화국을 파멸로 몰고 간 기독교인의 이름을 말살시킨 공로를 인정한다.”

그는 이처럼 자신의 신상을 만들고 전 지역에 세우고 강제 숭배를 하게 하고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을 모든 곳에서 금지시켰다.

그러나 디오클레티아누스는 죽어서 역사 페이지의 한구석에 달린 한낱 각주처럼 사라졌다. 반면에 그 악한 자가 그처럼 혹독하게 말살하고 박해했던 예수 그리스도의 명성과 영광이 온 땅에 왕성하게 퍼져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이것은 바로 우주의 왕, 역사의 왕께서 땅의 악한 왕들을 통치는 비웃으시는 것이 아니겠는가?

6절에 “내가 나의 왕을 내 거룩한 산 시온에 세웠다”고 했다. 여기서 '내가'는 히브리 본문에서 강조 어법으로 사용되었다. 다윗 왕조의 왕을 세우신 이는 바로 하나님이심을 특별히 강조하고 있다. 그것은 메시아를 거절하고 대적하는 세상의 왕들과 메시야를 세우시는 하나님의 자신과 대조시킨다.

또 ‘나의 왕’이라는 말은 사람들에 의해서나 사람들의 혈통에 따라서가 아니고, 하나님의 특별한 작정과 뜻에 따라 세움을 받은 왕이라는 뜻이다. 메시아는 하나님의 권위를 가지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하나님의 일을 행하실 왕이시다.

‘내 거룩한 산 시온’은 하나님께서 구별하신 예루살렘을 가리킨다. 예루살렘과 다윗 왕조를 모두 하나님께서 세우셨음을 나타내고 있다. 하나님께서는 그가 세우신 그곳에 거하신다. 하나님께서 그의 왕 메시아를 그곳에 세우신다는 것은 메시아께서 그곳에 오실 것을 가리킨다. 이것은 신약시대의 메시야 도래와 그분의 통치를 예고하시는 말씀이다.

예수께서는 육체로 그곳에 오셨고 부활하심으로 자신을 주와 그리스도로 확증하셨고(행 2:36), 그의 복음이 예루살렘으로부터 온 땅에 전파될 것이며 장차 재림하심으로 온 세상을 심판하실 것이다(딤후 4:1).


B. 이방 나라에 대한 하나님의 명령(7-12).

1. 아들의 법령(7-9절).

“7. 내가 여호와의 명령을 전하노라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너는 내 아들이라 오늘 내가 너를 낳았도다 8. 내게 구하라 내가 이방 나라를 네 유업으로 주리니 네 소유가 땅 끝까지 이르리로다 9. 네가 철장으로 그들을 깨뜨림이여 질그릇 같이 부수리라 하시도다.”

표준 새 번역은 “7. 나 이제 주께서 내리신 칙령을 선포한다. 주께서 나에게 이르시기를 너는 내 아들, 내가 오늘 c) 네 아버지가 되었다. (c. 또는 너를 낳았다) 8. 내게 청하여라. 뭇나라를 유산으로 주겠다. 땅 이 끝에서 저 끝까지 네 것이 되게 하겠다. 9. 네가 그들을 d) 철퇴로 부술 때에, 질그릇 부수듯이 부술 것이다 하셨다. (d. 또는 철 홀로 다스릴 때에)”라고 되어 있다.

시편 저자는 하나님의 법령(의정서, 칙령, 영令) 전한다. 이것은 어떤 인물을 합법적인 통치자로 인준하는 증빙 문서를 의미한다(Kraus). 이 법령의 다윗 언약인 삼하 7:14의 내용과 일치한다. 다윗 언약에서 다윗과 그의 후손은 여호와의 양자로 선택되었다. 양자됨은 바로 하나님의 통치권을 부여받게 되었음을 뜻한다.  즉, 다윗 계열의 왕은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땅을 기업으로 받고 아울러 그의 대적들을 심판할 권세를 부여받은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그는 바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다(Weiser, Briggs, Rogerson, & Mckay).

여기서 하나님의 아들로 지목된 시온의 왕은 신약시대에 오실 메시야, 예수 그리스도를 보여준다. 이런 맥락에서 본 절은 구속 역사 관점과 언약 신약 관점에서 하나님의 나라에서 행하여질 예수의 대관식을 보여 준다.

또한, 본문 “너는 내 아들이라 오늘 내가 너를 낳았도다”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 나라의 왕으로 인정을 받는 동시에 그 증거들이 신약시대에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 가운데 여러 가지로 나타났다. 그것은 (1) 예수의 세례(마 3:17), (2) 변화 산상에서의 변모하심(마 17:5), 그리고 (3) 예수의 부활 등이다. 이 셋 중에 예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신 부활 사건은 그가 하나님의 아들과 만왕의 왕이심을 충분히 증거하고도 충분하게 남는다(Craigie).

그는 메시아의 예표가 되어서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 전한다. 이것은 성경에서 가장 핵심 내용인 ‘메시아에 대한 예언’이다. 저자는 본문에서 메시아에 대해 세 가지를 예언한다. 그런 맥락에서 본 저자를 다윗으로 본다.

 

첫째로, 메시아께서는 하나님의 아들이시다.

7절에 “너는 내 아들이라. 오늘날 내가 너를 낳았도다.” 여호와의 기름 부음 받은 자는 아버지 하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신 것을 기억하시며, 그가 아버지의 아들임을 밝히시고, 아버지에게서 ‘난 자’로서의 그의 신분을 강조하셨다.

히브리서 기자는 히브리서 1장 5절 “하나님께서 어느 때에 천사 중 누구에게 네가 내 아들이라 오늘날 내가 너를 낳았다 하셨으며 또 다시 나는 그에게 아버지가 되고 그는 내게 아들이 되리라 하셨느뇨”라고 언급했다.

이것은 예수님의 신성을 모든 천사보다 우월하신 증거로 인용한다. 히브리서 기자는 예수님께서 모든 천사보다 더 뛰어나고 뛰어난 이름을 받으셨다고 언급한다. 예수님께서 받으신 뛰어난 ‘이름’은 바로 ‘아들’이다.

일반적인 의미에서 때로는 천사들은 ‘하나님의 아들’들로 부른다(욥1:6). 그러나 아버지께서는 특정한 의미에서 어떤 천사에게도 ‘내 아들’이라고 말씀하신 적이 없다. 그것은 오직 삼위일체의 제2위이신 성자 하나님을 위한 것이다. 하나님의 아들이란 그 이름이 바로 메시야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제2위 성자, 아들 되신 하나님의 호칭이다. 놀랍지 않는가?

‘오늘날’은 언제인가? 하나님께도 우리처럼 과거와 현재와 미래가 있는가? 하나님께서는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신 자가 아니신가? 그러므로 하나님께 ‘오늘날’은 ‘영원한 현재’라고 표현할 수 있다.

하나님과 그의 아들의 관계는 영원적이다. 그것은 그의 아들의 신성(神性)에서 증거된다. 시간 세계 속에서의 관계라면 아들은 참된 하나님이 아닐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께서는 창세 전에 그가 아버지와 함께 누렸던 영광에 대해 말씀하셨다(요 17:5). 성경의 풍성한 증거대로, 예수 그리스도의 참된 신성은 그가 행하신 기적들과 부활로 확증되었다(요 20:30-31; 롬 1:4).

 

둘째로, 메시아 왕국은 온 세상 땅 끝까지 미칠 것이다.

8절에 “내게 구하라 내가 이방 나라를 네 유업으로 주리니 네 소유가 땅 끝까지 이르리로다”라고 했다.

"내게 구하라” 이는 하나님의 아들은 하나님 아버지께 언제든지, 어디서든지, 무엇이든지 구할 수 있는 특권을 받았다(20:4;21:2, 4;삼하 24:12;왕상 3:5). 하나님께 자유롭게 구할 수 있는 것은 바로 선택된 왕, 그의 아들이 가질 수 있는 특권 중 하나이다. 이것은 또한 하나님 자녀인 성도들이 받은 기도의 특권이기도 하다(요16:23-24).

이어서, “내가 이방 나라를 네 유업으로 주리니 네 소유가 땅끝까지 이르리로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것은 선택된 왕의 아버지이신 주 하나님은 온 우주를 소유하고 계신다. 그 아버지 되신 하나님께서 그분의 아들에게 온 땅을 물려주시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다. 아들은 아버지의 상속자(相續者)(마 21:38;갈 4:7)가 되기 때문이다.

크라우스(Krause)는 “‘그의 소유가 땅 끝까지 이르겠다’는 뜻은 그의 통치가 온 세상에 미칠 것이다”라고 해석했다. 또한 페로네(Perowne)는 “하나님께서는 자기의 택하신 자녀에게 '아낌없이' 무엇이든 주신다” 뜻이다고 했다. 이러한 사실은 그리스도를 통한 우주적인 통치를 예언한 것으로 볼 수 있다(Craigie, Rawlinson, Briggs).

사실, 이스라엘 역사상 그 어떤 왕도 8절의 제시된 것처럼 이방 나라, 곧 열방 모두를 복속시키고 땅끝까지 다스린 적이 없다. 솔로몬 경우에도 그의 통치권이 북으로 유브라데 강변까지 남으로 애굽 하수까지 미쳤다고 할지라도 두로같은 푀니시아 지역은 복속하지 못하였다(왕상 11:14-25).

물론 하나님의 약속에는 유브라데 강 이편에서 대해까지, 애굽 시내까지 이스라엘이 차지할 약속의 땅이다(창15:18-21; 신1:7; 수1:4; 왕상 4:21). 이 약속은 솔로몬 당대에 잠시 이루어졌을 뿐이다. 그 이후에는 더 이상 영토 확장이 이루어지지 않았고 그것은 하나님의 뜻이었다.

그러므로 시편 2장 8절의 ‘세상 끝까지’는 문자적 성취가 아니다. 이것은 상징적으로 하나님께서 의도하신 그 약속의 땅 전체를 의미하는 것이다. 또한 하나님 나라의 메시야 통치가 지역적인 가나안 약속의 땅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온 세상에 미친다고 선교학적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시 6:1-7; 68:31-32; 72:8; 사49:6; 단 7:14; 눅2:32; 행1:8; 행13:37)등이다.

메시야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모든 유업을 받으시고 온 세상을 심판하실 권세를 하나님 하아버지께서 맡기셨다. 요한복음 5장 22절 “아버지께서 아무도 심판하지 아니하시고 심판을 다 아들에게 맡기셨으니”라고 말씀하셨다.

또한, 종말에 이르러 요한계시록 11장 15절에 “일곱째 천사가 나팔을 불매 하늘에 큰 음성들이 나서 이르되 세상 나라가 우리 주와 그의 그리스도의 나라가 되어 그가 세세토록 왕 노릇 하시리로다”라고 예언하셨다.

구약의 다윗 왕국의 확장은 신약의 메시아 왕국을 예표하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온 세상의 모든 족속에게 전파될 것이며(마 28:19; 행 1:8) 각 나라와 족속과 백성과 방언에서 셀 수 없이 큰 무리가 구원을 얻을 것이다(계 7:9). 세계 복음화에 대한 시편 저자의 예언으로 오늘날 거의 이루어지고 있다.

 

셋째로, 메시아께서는 철장으로 세상을 다스리고 심판하실 것이다.

9절 “네가 철장으로 그들을 깨뜨림이여 질그릇 같이 부수리라 하시도다.” ‘저희를 깨뜨린다’는 원어(테로엠)는 고대 번역들(LXX, Syr, Vg)에서 ‘저희를 다스린다’(티르엠)는 말로 읽었다. 그리스도께서는 다니엘 2:34에서 ‘열방을 부서뜨리는 돌’로 예언되셨다.

철장(鐵杖, rod of iron)은 '쇠로 만든 지팡이나 막대기, 철퇴"이다. 쇠막대기로 질그릇을 부수는 것은 고대 역사에서 흔히 볼 수 있다. 질그릇, 항아리에 적국들과 그들의 왕들의 이름을 적어서 박살을 내면서 그들을 통치하고 지배할 것에 대한 상징적 행동을 나타낸다. 애굽의 왕들은 대관식 때에 주변 세계에 대한 자신의 통치권을 과시하기 위하여 주변 나라들의 이름을 적은 질그릇들을 깨뜨리곤 하였다(Kraus).

역사적으로 볼 때, 다윗 왕국이 이처럼 강력한 통치권을 행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이것은 메시야 되신 그리스도께서 초림의 부활 역사와 재림의 온 우주 심판을 예언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애굽의 왕은 자신의 권세를 과시하기 위해 상징적으로 질그릇을 깨뜨렸지만 메시야는 '실제로' 질그릇을 깨뜨림과 같이 온 세상을 다스리신다.

요한계시록에 계시된 그리스도를 ‘철장으로 다스리는 자’로 묘사되셨다(계 2:27; 12:5; 19:15). 그의 통치권은 그의 구원 사역에서 이미 이루어지고 있으나, 장차 세상을 심판하실 때에 완성될 것이다(행 17:31; 딤후 4:1).

어떤 학자들은 ‘깨뜨린다’는 단어가 파괴적인 용어이므로 온유하시고 겸손하신 그라스도의 통치를 묘사하는 말이 아니라고 주장한다(Wette, Hupfeld). 그러나 이 구절은 계시록에서 세 번이나 그리스도의 통치와 관련되어 인용되었다. 요한계시록에는 그리스도의 종말론적 통치를 묘사한 구절이 여러 곳에 나와있다(계 2:27;12:5;19:15). 로린손(Rawlinson)의 언급처럼 “그리스도의 통치에는 두가지 요소 즉, 평화적인 요소와 아울러 악한자들에게 무서운 형벌을 내리시는 심판적인 요소가 함께 내포되어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2. 이방 나라들에 주신 법령(10-12).

“10. 그런즉 군왕들아 너희는 지혜를 얻으며 세상의 재판관들아 너희는 교훈을 받을지어다 11. 여호와를 경외함으로 섬기고 떨며 즐거워할지어다 12. 그의 아들에게 입 맞추라 그렇지 아니하면 진노하심으로 너희가 길에서 망하리니 그의 진노가 급하심이라 여호와께 피하는 모든 사람은 다 복이 있도다.”

표준 새 번역에는 “10. 그러므로 이제, 왕들아, 지혜를 배워라. 땅 위에 있는 통치자들아, 경고하는 이 말을 받아들여라. 11. 두려운 마음으로 주를 섬기고, 떨리는 마음으로 주를 찬양하여라. 12. 그의 아들에게 입 맞추어라. 그렇지 않으면, 그가 진노하실 것이니, 너희가, 걸어가는 그 길에서 망할 것이다. 그의 진노하심이 지체없이 너희에게 이를 것이다. 주께로 피신하는 사람은 모두 복을 받을 것이다.

10절에서 12절은 이방인들에게 주는 법령이다. 이 법령에는 이방인들이 행하여야 할 일들 3가지를 소개한다. 첫째, 하나님을 경외하고 섬기는 것, 둘째, 그 아들에게 입맞추는 것, 셋째, 여호와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 등이다.

10절은 세상의 악한 자들에 대한 권고이다. 여호와의 기름 부은 자, 곧 메시야에 대한 도전에 대한 어리석음을 깨닫고 하나님께 대한 절대복종을 촉구하고 있다. 그들에게 지혜롭게 행동하고 그의 경고를 받아들여라고 권면하고 있다. 그 지혜로운 행동과 경고가 무엇일까? 그것은 바로 11-12절의 내용이다.

 

첫째, “여호와를 두려워하고 떨며 즐거워하라는 것”이다.

이 말씀에 대하여 랑게(Lange)는 “첫째로, 신앙적인 차원에서 여호와 하나님을 믿고 섬기라는 뜻이며, 둘째로) 정치적인 차원에서 여호와께서 세우신 왕에게 복종하면서 다윗 왕조의 속국으로 만족하라는 뜻이다”라고 했다.

이는 하나님을 믿고 그분께 순복하라는 권면이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은 사람이 하나님을 향해 가져야 할 가장 기본적 태도이다(잠 1:7). 떠는 것은 마땅히 두려할 자를 두려워하는 뜻으로 하나님께 대한 경외심을 촉구하는 것이다. 즐거워하라는 것은 하나님께 순복하는 것을 기쁘게 여기고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참된 기쁨과 만족을 얻으라는 말이다.

히브리서 13:28도, “우리가 진동치 못할 나라를 받았은즉 은혜를 받자. 이로 말미암아 경건함과 두려움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섬길지니”라고 교훈하였다. 경건함과 두려움과 기쁨은 성도들이 가져야 할 신앙생활의 올바른 덕목들이다.

 

둘째, 하나님의 아들로 오실 메시야에게 ‘입 맞추라’고 권한다.

입 맞추는 것은 주로 고관이 아랫사람의 겸손한 키스를 받는 복종의 키스를 염두에 두고 있습니다. 이는 또한 하나님께서 그분과의 관계에서 원하시는 애정을 뜻한다. 하나님은 우리가 그분 앞에서 우리의 합당한 위치와 자세를 갖추시길 원하실 뿐만 아니라 그분 안에서 기뻐하고 사랑의 관계를 갖기를 원하신다.

하나님의 아들은 하나님께서 보내신 구주와 중보자이시며 세상의 모든 왕들 중의 왕이시다. 모든 사람은 그를 구주와 주로 고백하고(롬 10:9; 고전 12:3) 그에게 복종하고 그를 사랑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의 진노하심이 그들의 길에 속히 임할 것이다. “만일 누구든지 주를 사랑하지 아니하거든 저주를 받을지어다. 주께서 임하시느니라.”(고린도전서 16:22).

하나님이 세우신 왕께 입맞추지 않으면, “길에서 망한다”고 했다, 그 뜻은 무엇일까? 일차적으로 객사한다는 의미가 있다. 또한 자기에 주어진 명에 다하여 살지 못하고 일찍 죽는다는 뜻이 있다. 이것은 각자가 처해 있는 상태에서 하나님 진노의 심판을 받는다는 뜻이다.

이스라엘 왕권에 도전하고 하나님의 아들 되신 메시야에게 순복하지 아니하고 대적하는 자는 그 악한 행위로 인하여 하나님의 심판을 받게 된다. 요한복음 3장 18절에 “저를 믿는 자는 심판을 받지 아니하는 것이요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아니하므로 벌써 심판을 받은 것이니라.”라고 말씀하셨다.

“하나님의 진노가 급하심이라”이라고 했다. 공동번역에는 “자칫하면 불붙는 그의 분노” 표준 새 번역에는 “자신이 걸어가는 그 길에서 망한다”고 했다. 하나님의 신속한 심판을 일컫는 것으로 두 번 다시 기회가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본 시는 진노의 무서운 경고로 끝나지 않고 복된 삶을 누리를 것을 권면하고 있다. 이것은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하심을 구하는 것이며 이방 나라들의 회심을 요청하는 것이다.

 

셋째로 “여호와께 피하는 모든 사람은 다 복이 있도다.”

이 말씀의 뜻은 문자적으로 “그 안에서 피난처를 찾는 자”이다. 곧 여호와 하나님을 의지하는 자이다. 이방 나라들이 하나님이 세우신 왕을 대적하고 음모를 꾸미지 말로 하나님을 피난처로 삼아야 진정한 보호를 받을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 준다.

하나님께 피한다는 것은 곧, 하나님만 의지하라는 뜻이다. 세상이나 세상 권세를 의지하지 말고 사람이나 그의 지혜도 의지하지 말고 돈이나 재물도 의지하지 말라는 권면이다. 사람이 참으로 의지할 자는 만복의 근원이신 하나님뿐이다.

결론을 맺으면 다음과 같다. 하나님을 대적하고 불신하는 자에게 결국 하나님이 어떤 분이심을 알고 그분을 바로 알고 섬기라는 교훈을 담고 있다. 하나님을 무시하는 자에게 진노하시나 그에게 피하는 자에게는 확실하고 분명한 도움과 보장을 받게 된다는 뜻이다.

또한 구속 역사와 언약 신학적 입장에서 볼 때, 아무리 이 세상 나라와 세상 권력이 그리스도의 나라, 그리스도를 도전하고 악한 도모를 꾸릴지라도 결국은 그리스도의 나라가 승리할 것임을 선포하며 그의 진노가 임하기 전에 하나님께 나와 굴복하고 그분을 경외하며 섬기라는 뜻이다. 늘 하나님을 온전히 경외하는 삶을 살아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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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 3편, 믿음으로 얻은 참된 평강


시편 1편과 2편은 시편 150편 전체의 서론이고, 시편 3편은 시편 150편 전체의 본론이다. 시편 3편으로 시편의 본론이 시작되면서 위기를 만나는 시편 기자인 다윗을 본다. 시편 3편은 다윗의 일생 중 가장 절망적이고 비참한 순간에 지은 시요, 기도요, 고백이다. 본 시편은 사랑하는 아들 압살롬의 반역으로 인해 황급히 신발을 벗은 채, 통곡하며 쫓길 때 그때 지은 비탄(悲嘆) 시이다.

절체절명의 순간에도 믿음으로 위기를 극복하는 고난의 인생사를 본다. 삶은 순탄하지 않고 험산준령의 인생길임을 보여준다. 시편 3편은 우리 인생의 현실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인생의 삶의 현장이다. 도저히 감당하기 어려운 진퇴양난의 절망적인 상황에서 참된 신앙인들이 가져야 할 믿음의 자세를 보여준다. 또한, 고통 속에서 그리스도인들은 외칠 수 있는 기도와 부를 수 있는 노래가 있음을 보여 준다.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다윗은 대적의 에워싸임 속에서도 깊은 단잠에서 깨어 아침 햇살과 더불어 믿음으로 아침기도를 드린다. 환경을 초월하며 하나님을 의지하는 자가 받는 참된 평강과 안식을 볼 수 있다.

시편 1편은 ‘말씀을 사랑하고 묵상하고 따르는 자’의 “복”을 말한다. 시편 2편은 ‘우주의 왕되신 왕이신 메시야를 섬기고 여호와께 피하는 자’의 “복”을 언급한다. 시편 3편은 ‘하나님 자신이 완전한 “복”임을 가리킨다.

1편, 2편은 “복”(아쉬레)는 상대적인 복된 상태 의미한다. 시편 3편은 하나님 자신의 절대적 복(베레카)임을 강조한다. 1, 2편은 인간의 측면에서 진정으로 참된 복의 상태가 무엇인지에 대해 변증적으로 말한다. 그러나 3편은 완전히 복되신 분으로서 사람에게 복을 주시는 절대적 하나님을 강조한다.

시편 1편, 2편의 상대적인 복이

시편 3편에서는 절대적인 복으로

1. 대적자에 대한 다윗의 탄식(1-4절).

[개정] <다윗이 그의 아들 압살롬을 피할 때에 지은 시> 1. 여호와여 나의 대적이 어찌 그리 많은지요 일어나 나를 치는 자가 많으니이다 2. 많은 사람이 나를 대적하여 말하기를 그는 하나님께 구원을 받지 못한다 하나이다 (셀라).

[새번역] <다윗의 아들 압살롬에게 쫓길 때에 지은 시> 1. 주님 나를 대적하는 자들이 어찌 이렇게도 많습니까? 나를 치려고 일어서는 자들이 어찌 이렇게도 많습니까? 2 나를 빗대어 하나님도 너를 돕지 않는다 하고 빈정대는 자들이 어찌 이렇게도 많습니까?

1.1. 다윗의 뼈저린 아픔의 탄식(1-2절)

본 시의 표제에 본 시편의 기자와 상황을 ‘다윗이 그의 아들 압살롬을 피할 때에 지은 시’라고 소개하고 있다. 본 시의 역사적 배경은 삼하 15장으로 다윗이 아들 압살롬의 반란으로 쫒길 때, 기록한 시이다.

성경 여러 곳에 피하는 인생의 모습이 그려져 있다. 아담과 하와가 여호와의 낯을 피한 경우(창3:8), 하갈이 사라의 얼굴을 피한 경우(창16:60), 야곱이 형 에서의 낯을 피한 경우(창35:1). 모세가 바로의 낮을 피한 경우(출2:15), 입다가 자기 형제들을 피한 경우(삿11:3), 다윗이 사울의 낯을 피한 경우(삼상 20:1; 21:11), 요나가 하나님을 피한 경우(욘1:3, 10) 등이 있다.

약자로 피하는 인생, 범죄자로 피하는 인생, 사명을 버린 자로서 피하는 인생이다. 다윗은 그가 범한 죄의 대가로 자산의 아들의 반란으로 쫓기고 피신하는 가운데 본 시를 기록하였다.

1.1.1. 다윗의 탄식 소리(1절).

1절에 다윗은 하나님께 탄원한다. 자신을 대적하고 치는 자들이 ‘어찌 그리 많은가, 하면서 탄식한다. 본 시도 이런 면에서 일종의 탄식 시이다. 다윗은 ‘여호와여’라고 하나님을 부르짖으며 절규의 기도를 드린다.

‘어찌’(히브리어, ‘마’)라는 의문부사가 1절에 2번, 2절에 1번 연속으로 나온다. 그 만큼 ‘대적들이’(1절), ‘일어나는 자들이’(2절), ‘대적하여 일어나는 자들이“(3절) 엄청나게 많다고 탄식한다. ’어찌‘는 다윗이 당면한 위기와 피할 수 없는 고통의 심각성을 잘 표현해 주는 단어이다(Kraus, Lange). 사면초가의 궁지에 빠진 다윗은 그의 수많은 대적과 그를 구원해 주실 하나님을 교차하면서 바라보고 있다.

혹자는 본 시의 상황이 다윗이 압살롬을 피하여 예루살렘 성전에서 막 빠져나온 때, 곧 요단강을 넘지 못한 때일 것이라고 추측한다(Rawlinson). 이때가 압살롬의 반란 기간 중에서도 다윗에게 가장 어려웠던 때였다(삼하 17:1-23)고 보는 입장도 있다.

1.1.2. 대적자의 조롱 소리(2절).

2절에 대적들이 다윗은 ‘하나님께 구원을 얻지 못한다’고 빈정된다. 그러한 조롱과 비웃음이 다윗을 더욱 비참하게 만든다. 그들의 조롱은 이미 범죄로 인해 하나님과 교제가 단절된 자신의 핍절한 심정에 더욱더 다윗을 비참하게 만들고 있다.

다윗은 자신의 아들 압살롬과 그의 추종 세력들의 반역으로 다급하게 왕궁과 수도 예루살렘을 피신하여 쫓겨갈 때에 ‘머리를 가리우고 맨발로 울며 갈 정도로 비참했다(삼하 15:13-16:4).

다윗이 신하들과 함께 피난 길 가운데 바후림에 이르렀다. 거기서 사울의 집 족속에 속한 시므이가 다윗과 다윗 왕의 모든 신복을 향하여 연달아 돌을 던지며 저주하고 빈정거렸다.

“피를 흘린 자여 비루한 자여 가거라 가거라 사울의 족속의 모든 피를 여호와께서 네게로 돌리셨도다 그 대신에 네가 왕이 되었으나 여호와께서 나라를 네 아들 압살롬의 손에 붙이셨도다 보라 너는 피를 흘린 자인 고로 화를 자취하였느니라”(사무엘하 16:5-8) 하였다.

2절에 ‘저는 하나님께 도움을 얻지 못한다.’ 여기서 도움은 ‘넓히다’, ‘공간을 만들다’의 뜻으로 전쟁에서 구출, 승리를 얻는 ‘구원’을 뜻한다. 죄에서 구원을 받는 속죄적 의미보다 위기 속에서 구원, 구출을 의미한다.

신자에게 스스로 “자신이 하나님께 도움을 얻지 못한다”고 생각할 만큼 양심의 가책이나 불신의 생각만큼 심령의 지옥을 만드는 것이 없다. 자신이 하나님과 전혀 상관이 없는 존재라는 불신과 불안감은 영혼을 핍절하게 만든다.

또한 주변 사람들로부터 “저 사람에게는 하나님이 도움이 없어, 하나님이 역사하지 않아”라는 말만큼 비참한 상황이 없다.

2절에 대적자들이 다윗을 가리켜, 즉 ‘나를’은 히브리 원어로 ‘레납쉬’로, 직역(直譯)하면 ‘나의 영혼에게 대하여’이다. 원수들이 다윗의 영혼을 질타하고 있다.

맨튜 헨리(Mattew Henry)는 그들의 비아냥거림이 “다윗의 몸에 가시가 아닌, 뼈 속에 칼이 되었다”고 했다. 하나님의 자녀는 하나님의 도움을 얻지 못하게 된다는 그 생각 만으로라도 매우 두려워진다. 나는 하나님께 도움을 얻지 못한다"라는 것을 말하는 것보다 그들을 더욱 괴롭히는 것은 없다. 성도가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절되면 본인의 영적 상태를 숨길 수 없다. 왜냐하면, 마귀와 주변 사람들이 먼저 직감하기 때문이다.

스펄전(Spurgeon)은 “우리가 하나님께 도움을 받을 수 없다고 스스로 두려움에 빠지는 것이 모든 고난 중에서 가장 괴로운 일이다”라고 했다. 여기서 발견하게 되는 신령한 교훈은, “신자의 범죄는 대적자에게 공격의 별미가 된다. 그러나 신자의 회개는 원수를 물리치는 강력한 무기”가 된다는 사실이다.

2절 말미에 ‘셀라’로 끝맺음한다. 시편 3편 2절에 처음 등장하는 셀라는 총 39편의 시편에서 68회 사용되었고, 하박국에서 3회(합 3:3, 9, 12) 등 구약 성경에만 총 71회 기록되어 있고 신약 성경에는 기록되어 있지 않다. 셀라의 문자적 의미는 ‘올리라’는 뜻이고 기능적으로 음악 적 막간을 위한 기호라고 할 수 있다. 또한 셀라는 ‘아멘’과 비슷한 뜻도 있다. 셀라가 나오면 ‘쉬어가라’는 노래의 기호이다. 성경을 읽을 때, 읽지 않아도 된다.

매튜 헨리(Mattew Henry)는 ‘셀라’를 다음과 같이 의미 있게 해석했다. 셀라의 뜻은 "그것을 주목하라" 또는 "거기에서 멈추고 잠시 생각해 보라"로 해석할 수 있다. 여기에서 다윗의 대적자들이 "저는 하나님께 도움을 얻지 못한다 하나이다"(셀라)라고 말하고 있다. 이것은 "잠시 거기서 멈추고 이러한 것에 대해 생각하라. 사단아 내 뒤로 물러가라. 주께서 너를 꾸짖으시리로다! 이처럼 사악한 암시를 걷어 치루라“고 했다.

  하나님께 도움을 얻지 못한다는 생각이 들 때는 절망의 골짜기를 지나는 듯 하다. (사진제공:정준모목사)

2. 하나님을 전적 신뢰하는 다윗(3-6절).

[개정] 3. 여호와여 주는 나의 방패시요 나의 영광이시요 나의 머리를 드시는 자이시니이다 4. 내가 나의 목소리로 여호와께 부르짖으니 그의 성산에서 응답하시는도다 (셀라) 5. 내가 누워 자고 깨었으니 여호와께서 나를 붙드심이로다 6. 천만인이 나를 에워싸 진 친다 하여도 나는 두려워하지 아니하리이다.

[새번역] 3. 그러나 주님, 주님은 나의 방패, 내 명예를 회복시켜 주시는 분, 나를 떳떳하게 살게 해주시는 분이시니, ) 4. 내가 주님을 바라보며 소리 높여 부르짖을 때에, 주께서는 그 거룩한 산에서 응답하여 주십니다. (셀라) 5. 내가 누워 곤하게 잠들어도 또 다시 깨어나게 되는 것은 주께서 나를 붙들어 주시기 때문입니다. 6. 나를 대적하여 사방에 진을 친 자들이, 천만 대군이라 하여도, 나는 두려워하지 않으렵니다.

2.1. 방패와 영광되시며 머리를 들게 하시는 주님(3절)

개역 성경에는 이 호칭 앞에 '그러나'라는 용어(웨)가 생략되어 있다. '그러나'란 말은 기도의 노래에서 흔히 시인이 절박감에서 벗어나 하나님에 대한 신뢰를 표현할 때 사용하는 부사이다(Kraus). 이 신뢰는 철저하게 하나님을 바라봄으로 생겨나는 것이며 결코 인간을 의지함으로 생겨나는 것이 아니다.

이처럼, 다윗은 자신을 공격하는 ‘수많은 대적”과 매우 대조적으로 “그러나 주님’이라고 고백한다. 위기 속에서도 소망을 잃지 않는 근거를 밝히고 있다. 현실적 상황은 이러함에도 불구하고 “그러나” 소망이 있는 것은 주님이 나에게 이런 분이시길 때문이다. 다윗은 언약의 말씀을 확고히 붙잡고 부르짖었다.

언제 죽을지 모르는 위기 속에서 다윗은 밤새 기도드린다. 아무리 원수들의 공격이 맹렬하다고 할지라도 다윗 자신이 믿고 의지하는 하나님은 자신을 돌보신다는 철저한 믿음의 고백을 한다. 2절에 대적자들은 다윗에게 하나님이 그를 버리신 것처럼 비양거린다. 3절에 “그러나” 다윗은 그에 반하여 하나님께서 자신을 버리지 않으셨다는 사실을 3가지로 반격하며 선포한다.

다윗은 자신의 범죄로 인한 대적자들의 음모와 반역에 대하여 당연시하면서도 양심의 가책을 느끼며 아파했을 것이다. 그러나 다윗은 자신의 범죄행위로 인한 위기적 상황에서도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를 바라보고 그분의 신실한 언약을 믿고 하나님께 회복과 구원을 간구한다. 여기서 믿음은 연약한 자신, 범죄한 자신, 그리로 인한 고난의 환경과 상황 속에서도 자신의 죄악을 인정하며 고백하며 주님의 구원을 바라보는 것이 진정한 믿음의 소유자임을 알 수 있다.

불안한 현실, 불확실한 미래, 이성주의과 인본주의의 물결이 온 세상에 가득 찬 시대에 다윗처럼 “그러나”(그럼에도 불구하고)라고 고백하는 다윗처럼 주님의 구원을 앙망하며 기도하며 여전히 소망을 노래할 수 있는 신자들이 이곳 저곳에서 주님 나라를 위해 헌신할 수 있기를 소망한다.

2.1.1. 방패가 되시는 주님(3절).

‘나의 방패’는 나를 온 사방의 공격에서 철저히 방어해 주는 ‘나를 두르는 방패’(a Shield aroud me, NIV)을 일컫는다. ‘방패’라는 히브리어 단어(마겐)는 시편 84:9,11; 89:18 등에서는 ‘주권자’라고 번역했다. 주님은 다윗 자신을 온 사방을 둘러막아 주시는 ‘방패’이면서 자신이 당면하고 있는 문제를 주관하신 ‘주권자’이심이라는 뜻이다.

또한 시편 76:3; 91:4에는 ‘병기’로 되어 있다. 주님은 우리를 공격하는 어떤 원수와 세력을 막아주시는 방패요, 병기이시며, 이러한 모든 것을 주관하시는 주권자가 되시기에 결국은 하나님께서 우리의 구원과 승리를 보장해 주신다는 미래적 소망을 표현하는 고백이다.

궁겔((Gunkel)은 "방패는 단지 한 면만을 막아 주지만 여호와는 모든 면을 다 막아 주신다"고 해석했다.

2.1.2. 영광이 되시는 주님(3절).

주님이 다윗 자신의 영광이라고 고백하고 있다. 영광은 명예와 평판을 뜻한다. 표준 새 번역에서 주님은 ‘내 명예를 회복시켜 주시는 분’으로 의역하였다. 다윗은 왕적 권위를 도전하고고, 반역과 음모와 함께 조롱을 당하였다. 이처럼 그의 명예는 땅바닥까지 추락되었다. 그러나 다윗은 원수들과 싸움에서 승리하게 하실 하나님께서 자신의 명예를 회복시켜 주시는 분으로 확신하고 있다.

또한, 영광은 하나님의 찬란하고 위엄찬 임재를 가리키는 것으로 하나님 자신이 다윗의 영광이 된다는 뜻과 더불어 하나님께서 다윗 자신에게 허락하시는 위엄과 존엄을 뜻하기도 한다. 범죄로 인하여 하나님을 떠날 때, 자신에게 임한 명예와 평판이 떠나 버린다. 그러나 하나님께 돌아올 때, 잃어버리고 떠나 버렸던 명예와 평판을 하나님께서 다시 회복하게 하신다.

또한 다윗은 반란으로 왕관을 벗은 채, 맨발로 도망자의 신세가 되어, 모든 왕적 권위의 영광이 추락 되어버렸다. 그러나 그는 땅의 왕으로서 자신의 영예가 추락 되어버렸지만, 천상의 왕, 우주의 왕되신 주님의 영광을 믿고 바라보는 다윗의 신앙고백을 볼 수 있다. 마치, 하박국의 고백처럼 모든 것을 잃어버린 상황, 모든 것이 살아져 버린 상황 속에서 여호와 하나님으로 인하여 기뻐하였듯이, 위기일발의 도망자 상황 속에서 자신의 모든 왕적 권위와 위엄을 상실해버렸을지라도 주님만은 빼앗을 수 없고 주님만은 자신의 영원한 영광이 되심을 고백하고 있다.

다윗의 이 고백은 “주는 내 유업과 내 잔의 분깃이시니, 주께서 나의 몫을 지키시나이다.”(시 16:5, 한글 킹 제임스 역본)라는 말씀과 “…여호와는 내 생명의 능력이시니 내가 누구를 무서워하리요?”(시 27:1) 등과 맥락을 같이 한다고 볼 수 있다. 일반적으로 인생들은 명예, 권력, 소유물 등에 자신의 영광을 찾는다. 그러나 다윗은 주님 안에서 그 영광을 찾았다.

메이어(Meyer)는 “오 내 영혼아, 너는 하나님을 너의 영광으로 삼았느냐? 다른 이들은 부, 아름다움, 지위, 성취를 자신의 영광으로 삼는다. 너는 그들이 이것들에서 발견한 것을 하나님에게서 발견하고 있는가?”라고 우리 스스로에게 자문자답할 필요가 있지 않는가?

  자신의 모든 명예가 실추되는 절망의 순간, 그 너머에 계신 하나님을 보는 시선 (사진제공:정준모목사)

2.2.3. 머리를 들게 하시는 주님(3절).

머리를 들게 하신 것은 법적 용어이다. 억울하게 누명을 쓴 피고가 재판장에 의해 죄가 없다는 것을 판결하고 인정하는 것을 일컫는다.

슈미트(H. Schmidt)는 “‘머리를 드는 자’란 판사가 법정에서 부복하고 있는 피고의 머리를 세우면서 ‘당신은 무죄요’ 라고 선언하는 장면과 연관된다”고 하였다.

델리취(Delitzsch)는 “하나님께서 실의와 좌절 가운데서 수그러진 다윗의 머리를 의기양양한 모습으로 들어 올리게 하시리라는 의미를 나타낸다”고 설명하였다.

요즈음 정치인들이 자신의 무죄를 주장하며, 단식에 돌입하는 우스꽝스런 모습을 보게 된다. 사법적 혐의가 있는 자는 자기 자신이 무죄임을 주장하고 입증하는 것이 아니다. 재판이란 일련의 과정을 통하여 무죄가 입증되어야 한다. 피고에 대하여 무죄로 판정될 때, 억울한 누명을 벗고 추락된 명예와 평판이 회복된다. 그때 숙여졌던 머리를 당당하게 들게 된다.

다윗은 원수들의 대적과 공격, 고소와 참소의 혐의를 벗고 머리를 들게 된다. 역사적으로 다윗은 감람산에서 수치로 뒤덮혔지만, 하나님께서 다윗의 명예를 회복시켜 주셨다. 이처럼 하나님을 신뢰하는 자에게 하나님께서 원수로터 승리를 주시고, 상실한 영예를 회복주시고, 뿐만 아니라 억울한 혐의를 벗게 하신다.

2.2. 부르짖을 때 응답하시는 주님(4절).

방패가 되시고, 영광이 되시고, 머리를 들게 하시는 주님께서는 위기 속에 기도할 때, 반드시 응답하시는 분이시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내가 부르짓고, 주님은 응답하신다”는 문장 패턴이다.

성경에서 ‘부르짖다’ 또는 ‘소리 내어 기도하다’라는 성경 구절 다음에는 대부분 ‘응답하겠다’혹은 ‘응답 되었다’라는 놀라운 약속의 말씀이 마치 세트처럼 따라오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히브리어로 ‘부르짖다’가 ‘쯔아흐’인데 마치 ‘으악’ 하면서 소리치는 것과 같다. 이것은 ‘살려달라’고 하는 부르짖음이다. 그러면 그 다음에는 반드시 하나님이 들어주겠다고 하시는 ‘샤마’가 나온다. 하나님께 부르짖으며 ‘쯔아흐’ 하면 하나님은 ‘샤마’ 해주신다는 기도의 신비이며 기도의 역사이다.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은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 (렘 33:3).

고난의 풍파 속에서 기도하지 않는 성도는 참으로 어리석고 교만한 자이다. 아직 발등에 불이 떨어지지 아니했기 때문이다. "너희 중에 고난당하는 자가 있느냐 저는 기도할 것이요(약5:13)." 죽느냐, 사느냐의 생사의 기로에서 다윗이 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과 최고의 선택은 부르짖는 기도였다.

다윗은 하나님 앞에 맨발로 기도의 자리에 뛰어들어 힘써 부르짖었다. 하나님께 부르짖는 기도의 결과 자기 마음속의 가득 찼던 두려움 먹구름이 사라지고 소망의 노래를 부르게 되었다. 죽을 고비를 만나는 엄청난 고통의 상황 속에서 낙심되어 계속 적으로 심적 괴로움과 정서적 불안이 몰려올 때, 하나님께 부르짖는 기도는 찬란한 아침 햇살을 맞이하게 될 것이다.

기도는 자신의 목소리로 부르짖는 행위이다. 기도는 심혈을 기울려 하나님께 부르짖을 때, 역사가 일어난다. 부르짖는 것은 단순히 악을 쓰고, 열정을 내는 것과 전혀 다르다. 하나님을 전적 신뢰할 때, 매달리는 영적 간절함을 뜻한다.

성경에 부르짖는 기도의 예가 많이 나온다. 성경에는 다윗은 물론 수많은 믿음의 사람들이 위기 상황 속에서 부르짖는 기도는 역전승의 역사를 가져온다는 사실을 수없이 증거하고 있다. 믿음의 사람들의 공통점은 위기를 만났을 때, 부르짖는 기도를 드린 자들이다. 믿음의 사람들은 부르짖는 기도의 훈장을 받은 자들이다.

원수들의 포위망 속에서 다윗이 전심으로 부르짖어 기도했을 때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사라질 뿐 아니라, 실제로 죽음의 수렁에서 생명을 보존하는 깊은 영적 체험과 더불어 기적을 체험하고 되었다. 우리가 영적으로 긴장감을 가지고 깨어 있지 않으면 범죄하게 되고 하나님을 쉽게 망각하게 된다. 우리가 무시로 깨어 있지 않으면 작은 문제 앞에서 자신이 비참하게 초라해지고 문제 앞에 굴복당하고 만다. 그러나 부르짖어 기도할 때, 영혼이 깨어나 힘을 얻고 근심, 걱정, 모든 두려움으로부터 벗어나게 된다.

위기일발의 상황 속에서 주님께 부르짖을 때, 그 결과는 무엇인가? 주님께서 성산에서 응답하신다(4절)고 했다. 성산(聖山)은 시편 2:6에서 언급된 ’거룩한 산’이다. 하나님이 왕을 세우시고 다스리시는 곳을 일컫는다. 다윗은 거룩한 산을 바라보며 하나님께서 온 세상을 통치하는 분임을 고백한다.

하나님의 법괘가 안치되어 있는 성막과 성전이 위치했던 시온 산을 가리킨다(시15:1; 43:3; 렘31:23; 단9:16, 20). 시온 산을 또한 하나님의 임재의 장소로 보았기에 성산이라고 불렀다.

위기일발의 상황에서

성산을 향하여 부르짖는 기도

출애굽 시에는 하나님께서 시내 산에 임재하셔서 자신을 계시하셨고 가나안에 정착 이후 다윗 왕국 시대가 열리면서 자기 백성과 언약을 맺으셨던 하나님께서 이제 자신의 처소를 시온 산으로 옮기셨다(시68:8, 17).

다윗은 기럇여아림에서 법궤를 가져다가 시온에 두었다. 그가 압살롬의 반란을 피하여 예루살렘을 떠날 때에 그것을 가지고 가지 못하였다(삼하 15:25). 사독에게 "하나님의 궤를 성으로 도로 메어가라"고 명했다(삼하 15:25). 그 이유는 피난 속에서 법궤를 이동하는 어려움도 있겠지만 다윗의 언약 사상에서 이해할 수 있다. 그는 기도 응답은 상징적 의미에서 시온 산에 있는 언약궤에 있다고 표현하지만 그 실제적으로 언약의 약속의 주 곧 거룩한 산 시온에 세워진 왕(2:6) 곧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 아버지는 항상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는 것을 바라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성전이 건축된 이후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이 임재하는 곳’, 그곳에서 혹은 그곳을 향하여 기도하는 관습이 생겼다. 다윗은 여기서 개관식을 거행했었다(시2:6). 다윗 왕을 성산에서 세우신 하나님께서 자신이 임재하신 곳에서 다윗의 기도를 응답해 주신다.

시편 여러 곳에서 기도의 응답이 시온 산에서 나온다고 기록하고 있다(시14:7; 20:2). 우리가 부르짖고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그 임재하신 곳에서 응답하신다. 신약시대에 이르러서는 하나님은 지역이라는 시온에만 계시는 것이 아니라, 무소부재하신 하나님께서 우리가 어디에서나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부르짖고 기도하면 응답해 주신다.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너희를 향한 나의 생각을 내가 아나니 평안이요 재앙이 아니니라 너희에게 미래와 희망을 주는 것이니라. 너희가 내게 부르짖으며 내게 와서 기도하면 내가 너희들의 기도를 들을 것이요, 너희가 온 마음으로 나를 구하면 나를 찾을 것이요 나를 만나리라” (렘 29:11-13)

예수님께서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그대로 되리라.”(막11:24) 교훈하시는 것처럼 기도 응답의 확신을 가지고 기도할 때 역사가 일어난다.

  위기의 상황에서 하나님 임재의 성산을 향해 부르짖는 기도 (사진제공:정준모목사)

2.3. 단잠을 자게 하시는 주님(5절)

개정 성경에 “5. 내가 누워 자고 깨었으니 여호와께서 나를 붙드심이로다” 또한 새번역 성경에 “5. 내가 누워 곤하게 잠들어도 또 다시 깨어나게 되는 것은 주께서 나를 붙들어 주시기 때문입니다.”라고 기록되었습니다.

마음이 평안할 때, 단잠을 잘 수 있다. 마음의 안정을 찾는 길은 무엇입니다. 하나님께 온전히 맡기는 것입니다.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빌4:4-7)

어떤 상황에서 밀려오는 염려, 근심, 걱정에서도 하나님을 의지하고 감사함으로 아뢰면 하나님께서 마음의 평강을 주시며 깊은 단잠을 잘 수 있다. 소망의 빛이 전혀 보이지 않을 때, 부르짖는 기도는 성산에서 떠오르는 밝은 아침 햇살을 보게 될 것이다. 위기 속에서 하나님을 향한 신뢰가 기도의 불씨가 되고 기도의 불길이 두려움의 세력을 물리치고 평강의 새벽을 맞게 된다.

2.4. 두렵지 않게 하시는 주님(6절).

개역 개정 성경의 본문 6절에 “천만인이 나를 에워싸 진 친다 하여도 나는 두려워하지 아니하리이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새번역 성경 본문의 6절에는 “6. 나를 대적하여 사방에 진을 친 자들이, 천만 대군이라 하여도, 나는 두려워하지 않으렵니다.”라고 번역하였다.

다윗을 포위한 자들은 ‘천만 사람’이 아니라 ‘천만 군대’이라고 번역하는 것이 옳다. 천만도 구체적인 숫자라기보다 ‘수많은’ 군대를 의미한다.

‘에워싸 진 친다’는 말을 군사적 용어로 ‘진을 치고 막 공격하려 한다’는 긴박한 상황을 의미한다. 전쟁의 소용돌이, 아수라장 속에서도 깊은 평강과 안식을 누릴 수 있는 것은 바로 하나님께서 돌보아 주신다는 믿음의 역사이다.

수많은 대적자의 군대가 사방에서 진을 치고 죽음의 위협으로 더욱 두렵고 무서운 밤을 깊어갔다. 그러나 하나님을 의지하는 다윗의 마음에는 샘솟는 평안과 확신이 가득차 있기에 아무런 두려움이 없다고 고백하고 있다(신 1:29, 3:22, 7:18, 20:1. 수 10:8).

  수많은 군대가 에워싸도 하나님을 그 중심에 모신 사람은 흔들리지 않는 성산 같다.(사진제공:정준모목사)

위기를 당하고 온갖 두려운 생각으로 몰려올 때, 아무리 몸부림치고 별수단을 다 동원해도 잠이 오지 않는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붙들어 주신다고 확신하니 별 어려움 없이 단잠을 잘 수 있다. 하나님은 사랑하시는 자에게 잠을 주시는 분(시 127:2)이시고 대적자들이 온 사방 둘러싸고 언제 공격해 올 줄 다급한 상황에서도 하나님이 자신을 붙잡아 주시고 하나님이 허락하지 않으시면 어떠한 해도 받지 않는다 확신이다.

사실 사람들이 자는 동안에도 숨을 쉬고, 심장이 뛰고, 장기가 작동하여 생명이 유지된다. 사람이 잠을 잘 때, 방어 기재와 능력이 없어 가장 위험한 순간이다. 그러나 잠자는 순간에도 하나님이 우리를 붙들어 주시고 보호해 주시기에 평안한 잠을 잘 수 있는 것이다.

오늘날 우리를 둘러싸고 무차별하게 공격하는 인생 문제들이 수없이 산적해 있다. 그 문제 속에 우리 자신이 침몰당하고 만다. 동서남북 사방에 이 문제, 저 문제 낙망과 좌절의 벼랑 끝에 서게 된다. 이때, 우리가 낙심하여 스스로 벼랑 끝으로 추락하느냐 아니면 벼량 끝에서 곧바로 하늘을 향하여 날 수 있느냐 그것은 믿음에 달려있다. 믿음은 날개이다. 소용돌이, 둘러싸인 현안 문제들을 제치고 창공을 나를 수 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께 향한 믿음이다. 믿음은 절망의 절벽에서 하늘을 향해 나는 날개이다.

3. 구원과 복을 주시길 간구하는 다윗(7-8절).

[개정] 7. 여호와여 일어나소서 나의 하나님이여 나를 구원하소서 주께서 나의 모든 원수의 뺨을 치시며 악인의 이를 꺾으셨나이다 8. 구원은 여호와께 있사오니 주의 복을 주의 백성에게 내리소서 (셀라)

[새번역] 7. 주님, 일어나십시오. 나의 하나님, 이 몸을 구원해 주십시오. 아, 주께서 내 모든 원수들의 턱을 치시고, 악인들의 이빨을 부러뜨리셨습니다. 8 구원은 주께만 있습니다. 주의 백성에게 복을 내려 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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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 4편, 고난 속에 믿음으로 얻는 기쁨과 평안

시편 3, 4, 5편은 모두 다윗이 쓴 비탄시이다. 다윗이 그와 맺는 하나님이 신실하신 언약에 근거하여 하나님께 구원을 호소하는 탄원시, 신뢰시이다. 시편 3편, 4편은 다윗의 아들 압살롬과 그의 추종자들의 반역으로 급박하게 쫓기는 다급한 상황에서 하나님의 긴급한 구원을 간구한다.

시편 3편을 아침의 기도이며, 시편 4편은 저녁의 기도로 한 쌍을 이룬다. 5편은 압살롬 반역이 터지기 직전에 다윗이 닥쳐올 위기 상황을 감지하고 하나님의 인도와 보호를 간구하는 시이다.

본 시편은 하나님을 절대 신뢰하는 자는 두려움이 몰아치는 밤조차도 평안히 맞이할 수 있음을 노래하는 ‘저녁 찬송시’이다. 본 시는 탄식과 애가로 시작되지만(1-2절), 신뢰의 찬양(7-8절)로 마무리하고 있다. 그래서 본 시를 비탄의 시, 애가의 시, 신뢰의 시라고 불리운다.

본 시의 표제에 ‘다윗의 시, 인도자(메낫체아크, 찬양대장, 지휘자, 혹은 파트장)를 따라 현악기(네기노스)에 맞춘 노래라고 하였다.

고난과 역경 중에서도 하나님의 보호와 구원을 확신하며 진정한 심령의 평안과 기쁨을 노래하고 있다. 오늘날 우리가 당면한 고난의 현재의 실존에서 오직 참 구원과 참 소망되신 주님을 전적 신뢰하는 가운데 누리게 될 기쁨과 평안을 찬양드리는 시다. 나그네 인생을 살아가는 신자들에게 형형색색으로 끊임없이 침노하는 각종 고난과 시련 속에 위로를 받고 또한 각자의 시편 4편을 노래해야 할 것이다.


1. 탄식: 나의 기도를 들어주소서(1절)

[개정] [다윗의 시, 인도자를 따라 현악에 맞춘 노래] 1. 내 의의 하나님이여 내가 부를 때에 응답하소서 곤란 중에 나를 너그럽게 하셨사오니 내게 은혜를 베푸사 나의 기도를 들으소서

[새번역] [지휘자를 따라 현악기에 맞추어 부르는 다윗의 노래] 1. 의로우신 나의 하나님, 내가 부르짖을 때에 응답하여 주십시오. 내가 곤궁에 빠졌을 때에, 나를 막다른 길목에서 벗어나게 해주십시오. 나에게 은혜를 베푸시고, 나의 기도를 들어 주십시오.

곤란을 당한 다윗이 자신의 의가 되신 하나님께 자신의 무죄함을 하나님의 공의에 호소하여 기도드리고 있다. 막다른 길목, 곤란의 상황에 벗어나 안전한 곳으로 인도해 주시길 확신하며 부르짖고 있다.

 

1.1. 의의 하나님(1절)

1절에 ‘내 의의 하나님(개정)’ 혹은 ‘의로우신 나의 하나님(새번역)’은 히브리 원문에 ‘엘로헤 티데키’로 되어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나에게 의를 주시는 분’이라기보다 ‘나의 하나님 곧 의의 하나님’이란 뜻이다. 하나님께서 공정한 재판을 주관하는 재판관처럼 자신의 억울한 상황을 잘 판단하셔서 자신에게 ‘의를 주시는 하나님’이란 뜻이다. 곧, '정의롭게 판단하시는 하나님'이라는 의미이다. 다윗의 대적들은 그를 정죄하고 대적하는 반면에 하나님께서는 바르게 판단하셔서 오해와 누명을 벗기신다는 뜻이다(Rawlinson).

벤게메런(vanGemeren)은 ‘의는 하나님과 그의 백성들 사이에 존재하는 아버지-자식관계를 가장 확실하게 드러내는 것’이라고 했다. 다윗은 하나님과 맺은 언약관계에서 자신을 의롭게 여기시고 하나님과 자신과의 관계가 확고하게 서 있는 ‘의’ 로 묘사하고 있다. 이것은 다윗의 자만이나 교만한 태도가 아니라 하나님과 맺은 의로운 관계 때문에 갖게 되는 자신감 혹은 확신이라고 볼 수 있다.

브릭스(Briggs)는 “하나님은 다윗의 송사를 원수를 대항하여 신원해 주시며, 그의 권리를 세워주시는 분”으로 해석하고, 비텐비져(Buttenwieser)는 ‘억울함을 보상해 주시는 분”으로 해석하였다.

‘의의 하나님’은 우리의 구원과 직결되기에 에게게 구원을 베푸시는 인자하신 하나님이시다. ‘내 구원의 하나님’(시18:47)이시며 또한 내 인자함의 하나님(시59:11, 18)으로서 ‘구원과 인자함을 베푸시는 하나님’으로 해석될 수 있다.

하나님은 우리가 억울한 일을 당했으나 우리의 억울한 사정을 잘 판결하셔서 우리가 의롭다고 판정해 주시는 분이시다. 인생사에서 얼마나 원통하고 억울한 일로 가슴에 멍이든 우리의 현실을 온전하게 억울함 없이 판단해 주실 분은 오직 우리 하나님, 의의 하나님뿐이시다.

 

1.2. 부르짖을 때 응답하시는 하나님(1절)

시편 여러 곳에 하나님께 부르짖을 때, 응답해 주시길 간구하고 있다(시3:5; 17:6; 27:7; 55:17; 86:6,7; 91:15; 99:6; 102:3; 118:5; 119:145, 146; 120:1; 138:3). 예레미야도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리라’라고 약속하셨다. 기도를 하는 것 자체가 중요하다. 그러나 기도하면서 응답의 확신을 갖지 않는다면 그 기도는 무용지물이다. 기도드릴 때, 기도 응답의 확신을 가져야 한다.

기도 응답에 대한 확신을 가지라고 교훈하는 몇 가지 말씀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 마태복음 7장 7~8절 - “구하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리하면 찾아낼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구하는 이마다 받을 것이요 찾는 이는 찾아낼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이니라”

* 마태복음 18장 19절- “진실로 다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중의 두 사람이 땅에서 합심하여 무엇이든지 구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그들을 위하여 이루게 하시리라”

* 마가복음 11장 24절-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그대로 되리라”

* 요한복음 15장 7절- “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

* 요한복음 16장 23~24절- “그 날에는 너희가 아무 것도 내게 묻지 아니하리라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무엇이든지 아버지께 구하는 것을 내 이름으로 주시리라 지금까지는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무 것도 구하지 아니하였으나 구하라 그리하면 받으리니 너희 기쁨이 충만하리라”

* 히브리서 11장 6절-“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

* 요한일서 5장 14~15절- “ 그를 향하여 우리가 가진 바 담대함이 이것이니 그의 뜻대로 무엇을 구하면 들으심이라 우리가 무엇이든지 구하는 바를 들으시는 줄을 안즉 우리가 그에게 구한 그것을 얻은 줄을 또한 아느니라”


 

1.3. 곤란에서 해결해 주시길 간구(1절)

‘곤란’(챠르)은 히브리에 동사 “챠라르”에서 나온 말이다. 그 뜻은 ‘묶다’, ‘제한되다’, ‘괴롭히다’, ‘좁은’, ‘부족한’ 등이다. ‘너그럽게 하다’는 ‘자리를 넓게 만들다’, ‘마음을 크게 갖는다’는 뜻이다. 문자적으로 ‘곤란 중 너그럽게 하셨다’는 것은 ‘협곡에 포위된 군대가 포위를 뚫고 넓고 광활 지역으로 빠져 나오는 해방과 승리’를 의미한다.

다윗이 위기를 당했을 때는 포위망에 갇혀있는 곤란 중에 있었다. 그러나 주님의 은혜로 적의 포위망을 뚫고 넓고 위험이 전혀 없는 지역(너그럽게 된 지역)으로 나오게 되는 것을 간구하고 있다.

젠거(Zenger)는 “위기에서의 구원을 얻게 됨에 대한 은유적 표현”이라고 했다. 생명의 위협을 받는 협곡(곤란)에서 구속을 받는 (너그럽게 되는 것)것이다”라고 하였다,

우리는 이렇게 기도할 수 있다. “주님, 오늘 당면한 제 인생의 협곡, 곤란에서 주님의 도우심으로 해방과 평안, 곧 너그러움을 주옵소서”

다윗은 과거에 이미 구원받은 신앙체험을 근거하여, 또한 하나님과 맺은 언약을 상기 하면서 확신에 찬 기도를 드린다. “곤난 중에 나를 너그럽게 하셨사오니”, 곧 이미 지난날에도 너그럽게 해주신바 있으신 하나님께 간구하고 있다.

신앙생활에서 지난 날 체험과 간증을 현재와 미래에 당면한 사건에 대한 하나님의 은총과 역사를 기대하고 호소할 수 있는 근거가 되고 큰 힘이 된다.

 

1. 4. 은혜 베푸시길 간구(1절)

주님의 은혜을 간구하는 것은 절박한 문제에 부딪칠 때, 나타나는 기도 내용이며 마땅한 자세이다. 주님은 부르짖을 때, 은혜를 베푸시고, 기도를 들어주시는 분이시다.

어려움을 당하면 기도하는 것은 인지상정(人之常情)이 아닐까? 곤란을 만나면 기도하는 신호이다. 곤란은 기도 시작으로 곤란을 끝을 내어야 한다. “너희 중에 고난당하는 자가 있느냐 그는 기도할 것이요 즐거워하는 자가 있느냐 그는 찬송할지니라”(약5:13).

다윗은 “내가 부를 때에 응답하소서,” “내게 은혜를 베푸사 나의 기도를 들으소서”라고 간구한다. 다윗이 자신이 가진 의(義)는 결코 자신의 것이 아니라 전적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로 얻은 것이다.

또한 자신이 처한 상황에서 구원도 전적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는 것이 마땅하다. 다윗은 자신이 현재 직면하고 있는 곤란 즉 환란과 위기에서도 하나님께서 자신의 마음의 여유와 안정을 주시고 그를 건져주시기를 간구하고 있는 것이다.


 

2. 촉구: 인생들아 주님을 위로하라(2-5절).

[개정] 2. 인생들아 어느 때까지 나의 영광을 바꾸어 욕되게 하며 헛된 일을 좋아하고 거짓을 구하려는가 (셀라) 3. 여호와께서 자기를 위하여 경건한 자를 택하신 줄 너희가 알지어다 내가 그를 부를 때에 여호와께서 들으시리로다 4. 너희는 떨며 범죄하지 말지어다 자리에 누워 심중에 말하고 잠잠할지어다 (셀라) 5. 의의 제사를 드리고 여호와를 의지할지어다

[새번역] 2. 너희 높은 자들아, 언제까지 내 영광을 욕되게 하려느냐? 언제까지 헛된 일을 좋아하며, 거짓 신을 섬기겠느냐? (셀라) 3. 주님께서는 주님께 헌신하는 사람을 각별히 돌보심을 기억하여라. 주님께서는 내가 부르짖을 때에 들어 주신다. 4. 너희는 분노하여도 죄짓지 말아라. 잠자리에 누워 마음 깊이 반성하면서, 눈물을 흘려라. (셀라) 5. 올바른 제사를 드리고, 주님을 의지하여라.

위기 속에서도 전적 하나님을 신뢰한 다윗은 승리가 자신에게 있음을 확신하였다. 다윗은 용기백배하여 대적자들에게 헛된 일을 하지 말고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와 그를 경외하기를 촉구하고 있다.

 

2.1. 헛된 일, 거짓을 그만 두라(2절)

‘인생들’은 원문에 ‘인간의 아이들아’로 되어 있다. 다윗에게 반역한 그의 아들 압살롬과 그의 추종자들을 가리킨다(삼하15:1-12). 그들에게 인간(이쉬)이라고 한 것은 유한성을 가리킨다. 다윗 자신에게 반역하고 대항하는 그들의 행위와 노력이 결국 헛되고 허사로 돌아갈 것을 의미한다.

또한 ‘인생들’이 지닌 뉘앙스가 ‘부자들’, ‘권세가’들로 이해하고 새번역에서는 “높은 자들’로 현대어 번역에서는 “권력 잡아 힘깨나 쓴다는 자들’로 번역했다. 이것은 압살롬과 그의 추종자들의 위치와 신상을 표현한 것 같다. 그러나 결국 그러한 부, 권력, 영화도 순간일 뿐이다.

‘어느 때 까지’ 혹은 ‘언제까지”는 견디기 힘들 것나 이해하기 어려운 일을 당할 때 탄식시에서 많이 등장한다. 때로는 삶의 긴 터널을 지나갈 때, 탄식하며 주님, 어느 때까지 이런 고난의 밤을 지내야 합니까? 하며 울부짖을 때가 있지 않는가?

‘나의 영광을 바꾸어 욕되게 하며’는 하나님이 세우신 다윗 왕국의 왕권에 도전하고 탈취하는 행위를 일컫는다. ‘ 헛된 일을 좋아하고 거짓을 구하려는가’ 의 ‘헛된 일’은 ‘허사’(리크)로 ‘어떤 일을 망치고 방해하는 악한 행위’를 뜻한다. 하나님이 세우신 다윗의 왕권에 도전하고 찬탈하려는 행위는 곧 하나님의 주권과 섭리를 거역하는 인간의 무모하고 부질없는 악한 행위라는 것이다. 또한 그들의 행위가 ‘거짓(카찹:궤휼, 잘못된 것, 거짓된 것)을 구하는 것’으로 보았다.

압살롬의 반역은 그의 계획 시초부터 거짓으로 시작되고 진행되고 거짓으로 마쳤다. 하나님이 세우신 직분, 권위, 제도에 대하여 반감을 가지고 불응하고 도전하는 것은 하나님 권위에 대한 도전이요, 그 일은 헛된 결과를 가져오며 거짓 행위임을 알아야 할 것이다.

압살롬의 거짓 행위를 추적해 보면 다음과 같다.

압살롬의 생애는 안타깝게도 거짓으로 일관되었다. 그는 이복동생 다말을 겁탈한 동생 암논을 살해하기 위해 마음에 없는 거짓으로 성대한 잔치를 베푼다. 부왕 다윗이 병석에 누워있는 동안 4년 동안 거짓으로 민심을 도적질 하였다(삼하 15:1-6). 반역을 도모하기 위해 무리들을 헤브론으로 군집시킬 때에도 제사드리고 간다고 부왕 다윗을 속였다(삼하 15:7-12). 병석에 누워있는 다윗 왕을 문병한 것도 다윗의 상황을 면밀히 확인하여 유언비어를 퍼뜨리기 위해 거짓으로 한 짓이다(시41:5-9).

압살롬은 늘 다윗의 왕권을 빼앗기 위해 거짓말만 즐겨하고 그의 입은 다윗을 축복하나 그의 속마음은 저주를 품는 간사스럽고 거짓으로 일관되었다. “너희가 그를 그 높은 자리에서 떨어뜨릴 궁리만 하고, 거짓말만 즐겨 하니, 입으로는 축복하지만 마음속으로는 저주를 퍼붓는구나( 셀라 )(시62:4).

결국 압살롬은 그처럼 자랑하던 자신의 머리카락이 나무에 걸리고 심장이 창에 찔려 비참한 종말을 맞이한다. 그의 생애는 간사와 거짓으로 일관되었다. 그러나 거짓으로 시작된 그의 반역이 허사로 끝나버린 사울 왕과 마찬가지로 가련한 인생이다. 어떤 경우에도 진실하게 살며 공의를 따라 살아가야 하겠다. 요즈음 거짓이 활기 치는 시대이다.

수원수구(誰怨誰咎:남을 원망하거나 탓할 것이 없음)의 세상이다. 정계, 언론계, 교육계, 군 당국, 교계 등 어느 한 분야에 정직을 찾아보기 힘든 시대이다. <“악한 사람들과 속이는 자들은 더욱 악하여져서 속이기도 하고 속기도도 하나니”(딤후 3:13). 종말의 징조 중 하나임을 지적한 바울의 교훈이 예사롭지 않다. 거짓없는 정직한 영성을 주옵시고, 정직한 세상을 만들기에 썩어지는 밀알이 되게 하소서, 아멘.


 

2.2. 하나님께서 택하신 자를 알라(3절)

하나님께서 다윗을 세워 그에게 왕권을 주신 것은 하나님의 놀라운 주권이요, 하나님 자신을 위하여 하신 일이심을 여러 성경에서 언급했다. 다윗은 이런 사실을 대적자들에게 선포하여 그들의 반역행위가 철저히 잘못된 것으로 다윗에게 범하는 죄악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께 범하는 죄악상임을 밝히고 있다.

다윗은 자신을 하나님이 택하신 ‘경건한 자’로 고백하고 있다. 이 뜻은 ‘거룩한 자’, ‘신실한 자’, ‘자비한 자’, ‘성도’ 등으로 표현된다. 이것은 하나님의 택함을 받고 전적 하나님을 신뢰하는 자신에 대한 확고한 신앙고백적 자아관이라고 할 수 있다.

‘택하다’는 뜻은 ‘구분하다’, ‘특별히 취급하다’는 뜻이다. 구약에서 매우 중요한 개념이며 선민사상을 강조한다(Brueggemann & Bellinger). “하나님께서 경건한 자를 구분하신다”(set apart, KJV, NIV, RSV, NASB) 혹은 “경건한 자를 위해 기이한 일을 행하다”(performs wondersNJB, NAB) 등으로 번역하였다.

경건한 자는 자기 스스로 경건하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그를 택하여 경건한 사람으로 세우시고 경건하게 살 수 있도록 도우셨기에 경건한 자라고 일컫는 것이다. 성경에 수없이 다윗을 하나님께서 특별히 택하심에 대한 사실을 언급한다. 그 이유 중 언약 신학과 사상에서 볼 때, 다윗은 바로 장차 오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모형적 인물, 그림자가 되기 때문이다.

2절에 언급된 ‘된 일을 좋아하고 거짓을 구하는 자’들에게 3-5절에 7가지 명령문으로 권면을 한다. ‘알아라’, ‘두려워마라’, ‘죄를 짓지 말라’, ‘잠자리에 누워 말하라’(깊이 반성하라), ‘잠잠하라’(눈물을 흘리라), ‘제사를 드리라’, ‘의지하라’ 등이다. 이는 더 이상 범죄하지 말고 하나님께 회개하고 돌아오라는 명령적 권면이다.

크레이기(Craigie)는 7개 명령문이 점진성을 띤 명령문으로 보고 다음과 같이 해석했다. “너희는 화와 분노로 가득해 떨 수 있다. 그러나 죄는 짓지 말아라! 너희 마음속이 악한 말로 가득할 수 있다. 그러나 밖으로 표현하지는 말아라! 조용히 침대에 누워라, 그곳에서는 나쁜 짓을 할 수 없다.”고 했다.

 

2.3. 떨며 범죄하지 말라(4절)

‘떨다’(라가즈)는 ‘분노하다’, ‘두려워 떨다’는 뜻이다. 크레이기Craigie)는 “분노함으로 떨 수는 있으나 어떠한 행위를 함으로 범죄하지는 말라”고 해석했다. 다윗은 압살롬과 그 추종자들이 자신의 잘못과 저지른 죄악에 대하여 두려워 떨면서 분하게 여기고 더 이상 죄짓지 는 어떤 행동을 하지 말고 회개하라고 강력하게 권고하고 있다.

수많은 밤을 기도로 새워본 다윗(시16:7; 17:3; 22:2; 57:8; 108:2)은 그들에게 잠자리에 누워 자신들이 행한 행위에 대하여 깊이 반성하고 자들이 범한 행동을 깊이 회개하고 돌이키라고 권면한다.

새번역에는 마음 깊이 반성하고 눈물을 흘리며 각성하라는 뜻으로 번역되어 있다. 다윗에 대한 압살롬과 그 무리들의 반역은 다윗을 왕으로 세우신 하나님의 주권에 대한 도전이요 범죄이기에 그들의 죄악을 깨닫고 회개하라고 촉구하고 있다.


2.4. 하나님을 의지하라(5절)

다윗은 대적자들에게 3-4절에서 7개 명령문으로 ‘이런 짓들을 하지 말라’로 부정적 명령을 한 후, 두 가지 긍정적 명령을 한다. ‘의의 제사를 드리라’(5절). 여호와를 의지하라(5절) 등이다.

첫째로 다윗은 의의 제사를 드리라고 권면한다. 압살롬은 하나님께 제사를 드렸지만 자신들의 반역 행위를 합리화하기 위하여 거짓된 제사를 드렸다(삼하 15:7-12). 다윗은 그러한 불의한 제사가 아닌 의의 제사, 형식적 제사가 아닌 진정성 있는 제사를 드리라고 권면한다. 의의 제사는 마음을 찢고 상한 심령으로 하나님께 진실하게 드리는 제사를 일컫는다(시51:17; 욜2:13).

하나님께서는 죄악을 품고 회개하지 아니한 제사를 받지 않으신다(시66:18). 하나님은 악인의 제사는 미워하시고 정직한 자의 기도는 기뻐 받으신다(잠15:8). 하나님이 원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 통회하는 마음을 원하신다(시51:19). 하나님은 회개하는 자의 희생제물을 기뻐하신다(시51:19). 하나님은 스스로 마음의 가죽을 베는 자를 찾으신다(렘4:4). 하나님은 마음을 찢고 돌아오기를 원하신다(욜2:3). 하나님은 성회와 아울러 악을 행하는 것을 미워하신다(사1:13). 하나님은 하나님의 전에서 거짓말하는 것을 심히 경계하신다(렘7:4). 하나님은 삶에서는 죄악을 짓고 하나님 전에서는 제사 드리는 거짓을 책망하신다(렘7:8-10).

두 번째로 다윗은 하나님을 의지하라고 권면한다.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은 자신을 전적으로 온전히 하나님께 드린다는 뜻이다(McCann). 하나님께서는 어떤 종교 행위 그 자체보다 그 행위자의 신실성, 곧 하나님을 신실하게 의지하고 살아가는 삶을 원하신다.

오늘날 성도들이 자신들의 삶의 현장에서는 하나님 없이, 하나님을 거슬려 살다가, 예배자리에 와서는 진실한 자기 성찰, 회개와 각성도 없이 형식적 예배와 감정적 열정에 몰입한다. 그러나 하나님이 원하시는 진정한 예배는 두렵고 떨리는 겸허한 마음을 가지고 그분 앞에 나아가야 한다. 하나님께 상한 마음으로 의의 제사를 드리고 그분을 전적으로 앙망하며 사모하며 의지하는 예배자의 삶을 살아야 하겠다.

 

3. 기쁨과 평안: 주의 얼굴을 비취소서(6-8절)

[개정] 6. 여러 사람의 말이 우리에게 선을 보일자 누구뇨 하오니 여호와여 주의 얼굴을 들어 우리에게 비추소서 7. 주께서 내 마음에 두신 기쁨은 그들의 곡식과 새 포도주가 풍성할 때보다 더하니이다 8. 내가 평안히 눕고 자기도 하리니 나를 안전히 살게 하시는 이는 오직 여호와이시니이다

[새번역] 6.수많은 사람이 기도할 때마다 "주님, 우리에게 큰 복을 내려 주십시오." "누가 우리에게 좋은 일을 보여줄 수 있을까?" 하며 불평하는 사람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 주님의 환한 얼굴을 우리에게 비춰 주십시오. 7. 주님께서 내 마음에 안겨 주신 기쁨은 햇 곡식과 새 포도주가 풍성할 때에 누리는 기쁨보다 더 큽니다. 8. 내가 편히 눕거나 잠드는 것도, 주님께서 나를 평안히 쉬게 하여 주시기 때문입니다.

다윗은 다시 한 번 더 하나님과 자신과의 관계를 재확인한다. 주변 사람들은 하나님께 복을 구하고 있는 실정이지만 다윗 자신은 이미 하나님께서 주신 무한한 복을 누리고 있음을 확신하고 있다. 주위 사람들은 땅의 복을 구하나 자신은 하나님의 얼굴, 즉 하나님 자체를 구한다고 확신에 넘치는 고백과 간구를 하고 있다.

 

3.1. 하나님 얼굴을 바람(6절)

6절의 ‘여러 사람’, ‘수많은 사람’은 2절의 교만한 대적자와 달리 6절에는 소심한 회의론자, 낙심한 자들을 일컫는다. 그들이 “우리에게 선을 보일자, 좋은 일을 보여줄 자가 어디에 있는가”하며 내뱉는 불신앙적 불평과 불만, 의심과 회의라고 할 수 있다.

‘선’(토브)은 추수절 수확물 혹은 수확물을 얻게 하는 비를 가리킨다고 하나 일반적으로 땅에서 얻는 물질적 복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불경기, 물가 상승, 이자율 급등, 직장 퇴출, 사업장 폐업으로 고통당하는 상황에서 누가 우리에게 선을 베풀까 의심하고 신앙을 포기하는 연약한 성도들을 보게 되는 안타까움을 흔히 볼 수 있다. 또한 땅의 것에 대한 관심, 육적인 일에 대한 집중으로 영적이고 수직적인 하나님과의 관계를 상실하는 안타까운 모습을 볼 수 있다.

다윗은 땅의 물질적인 풍요만을 구하는 수많은 인생들과는 달리 하나님의 얼굴, 하나님의 웃으시는 얼굴을 구하고 있다(6절). 대적자들의 입에서 뿜어내는 불 신앙적 회의와 불평에 대하여 다윗은 아론의 축복 기도문(민6:25-26)을 상기하면서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였다.

‘하나님 얼굴’은 구약에서 인간에게 주어지는 최고의 언약적 축복을 의미한다. 하나님의 얼굴을 보는 것은 이 땅에 어떤 물질적인 복과 비교될 수도 없고 비교할 수도 없는 복 중의 복이요 복 그 자체이다. 또한 하나님의 얼굴은 하나님의 임재를 뜻하는 것으로 하나님 임재 안에 있다는 그 자체보다 더 큰 은혜와 더 큰 복이 무엇이 있겠는가?

다윗은 1절에서는 ‘하나님’(엘로힘)으로 기도하였으나 여기서는 ‘여호와’(야웨)로 기도하고 있다. 이스라엘과 언약을 맺으신 그 신실하신 하나님, 여호와 이름을 부르며 축복을 간구하고 있다. 기도는 기도의 대상이신 하나님을 바로 알고 찾는 것이 중요하며 그 하나님의 성품, 능력, 약속을 바라보고 언약을 근거하여 기도하는 것이 기도의 본질이다.


 

3.2. 하나님이 주신 기쁨(7절)

하나님의 빛나는 얼굴을 체험한 다윗은 그에게 임한 기쁨은 햇곡식과 새 포도주의 풍성한 수확보다 더 큰 만족감을 고백하고 있다. 진정한 행복은 어떤 예배나 예식, 또한 거대한 종교 축제나 행사에 있는 것이 아니다. 더위기 풍성한 수확의 햇곡식과 가득 찬 새 포도주에서 오는 것이 아니다. 진정한 행복과 기쁨은 하나님의 얼굴을 보는 것, 하나님의 임재를 맛보는 것이다. 그 이유는 주님만이 우리에게 영원한 평안, 안식, 위로, 기쁨을 주시기 때문이다.

추수의 기쁨은 수고와 땀, 노동과 인내의 열매로 인간이 누릴 수 있는 최고의 보람으로 얻는 기쁨이다. 그러나 다윗의 심령 속에 흘러넘치는 영적 만족과 기쁨은 물질적 풍성함으로 오는 것과 비교가 되지 않았다. 보이는 물질의 풍요는 일시적이고 순간적이다. 그러나 여호와로 말미암는 기쁨은 영원하신 주님 그 자체이기에 그 누구도 빼앗아 갈 수 없고 영원하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주님이 주시는 영생과 천국의 소망이 아닐까?

 

3.3. 하나님이 주신 평안(8절)

추적자들에 의해 쫓기는 정황 속에서도 하나님이 자신을 지켜주시고 보호해 주신다고 확고한 믿음을 가진 다윗에게는 아무런 두려움 없이 평안히 잘 수 있었다고 고백하고 있다.

오직 주님만이 진정하고 온전한 보호자가 됨을 고백하고 있다. 자기 욕심과 죄책감 속에 두려움과 불안 속에 평안한 잠을 이루지 못하는 인생과는 차별된 참된 평강과 안식을 볼 수 있다.

‘평안히 눕고 자기도 하리니’에서 놀라운 진리를 발견하게 된다. 히브리 원어에는 ‘눕고’ 앞에 ‘함께’, 혹은 ‘한번에’라는 단어가 있다. 한글 번역에는 생략되었다. 게세니우스(Gesenius)에는 “be united” 또는 “make one”으로 번역했다. 또한 포세트(Fausset)에는 “at once”로 해석했다. 이것은 매우 의미를 잘 살린 해석으로 “눕고 자는 것이 동시에 바로 이루어졌다”는 뜻이다.

다시 말하면 “눕자마자 잠들었다”는 뜻이다. 대적자들이 자신의 목숨을 호시탐탐 노리고 있는 위기 속에서 눕자마자 잠들었다는 것은 상상 밖의 모습니다. 추적자의 쫓기는 자로서 피곤하여 바로 쓰러져 잠들었다는 뜻이 아니다. 자신을 안전히 거하게 하시는 분이 오직 여호와 곧 언약의 하나님, 약속을 신실히 지키시는 하나님을 의지하는 믿음의 잠, 안식의 잠, 평강의 잠이다.

현대인들이 제일 많이 복용하고 있는 약 중에 하나가 수면제이다. 현대 사회를 불면증 사회라고 불명예로운 이름이 부쳐져 있다. 최근 뉴스 보도에 따르면, “국민 3명 중1명, 한번 쯤 겪는다는 불면증..건강한 삶을 위한 첫 걸음은 '숙면’이라고 서울대 병원 정신 건강 의학과 이유진 교수의 글이 소개된 것을 보면 쉽기 그 심각성을 알 수 있다. 또한 불면증이 가져 오는 합병증도 매우 심각하다. 특히, 우울증을 동반하고 자살까지 이르는 심각성을 알 수 있다.

 


어떤 약물, 민간, 운동 요법도 근본 치료가 되지 못한다. 하나님을 신뢰하는 믿음의 처방이 반드시 따라야 한다. 아무리 위험한 위기일발의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이 함께 하시고, 하나님을 모신 자는 어디서나 환경을 초월하여 안전이 보장되는 것이다.

시편 40편 2절에 “나를 기가 막힐 웅덩이와 수렁에서 끌어 올리시고 내 발을 반석 위에 두사 내 걸음을 견고케 하셨도다”라고 고백하고 있다.

시편 78편 52-55절에 “ 애굽에서 모든 장자 곧 함의 장막에 있는 그들의 기력의 처음 것을 치셨으나 그가 자기 백성은 양 같이 인도하여 내시고 광야에서 양 떼 같이 지도하셨도다 그들을 안전히 인도하시니 그들은 두려움이 없었으나 그들의 원수는 바다에 빠졌도다 그들을 그의 성소의 영역 곧 그의 오른손으로 만드신 산으로 인도하시고 또 나라를 그들의 앞에서 쫓아내시며 줄을 쳐서 그들의 소유를 분배하시고 이스라엘의 지파들이 그들의 장막에 살게 하셨도다”

안전히 거하게 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다. 그분이 계시면 대적자의 공격, 험산준령, 검푸른 바다, 삭막한 광야, 뜨거운 태양 빛 그 무엇이 두렵겠는가? 하나님께서 그를 신뢰하고 의지하는 자에는 ‘안전히’, ‘평안히’ 인도하실 것이다.

모세도 요단강 동편에서 이스라엘 12지파를 축복하면서, 신명기 33장 27-28절에 “영원하신 하나님이 네 처소가 되시니 그의 영원하신 팔 아래에 있도다. 그가 네 앞에서 대적을 쫓으시며 멸하라 하시도다. 이스라엘이 안전히 거하며 야곱의 샘은 곡식과 새 포도주의 땅에 홀로 있나니 곧 그의 하늘이 이슬을 내리는 곳에로다.”

평화에 대하여 대표적으로 물리적 힘, 패권자의 힘으로서 평화(Pax) 있고 심령에 솟아나는 내면에 솟구치는 평화Shalom)가 있다. 다윗은 패권자의 힘을 상실하는 가운데서도 주님을 신뢰하는 믿음 가운데 하나님께서 주시는 평화, 평강이 있었다.

존 파이퍼(John Piper)는 “우리의 가장 우선적이고 최종적인 목적이 ‘오직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것’이 될 때, 우리는 비로소 ‘하나님과의 관계를 바로 회복하는 것’이고 이러한 것을 통해, 우리가 모든 조건과 상황에서 평안을 쟁취하는(Peace Making) 능력을 얻게 된다”고 했다.

주님께서 어떤 환경, 어떤 상황 속에서도 임마누엘로 안전하게 하시니 두려움과 불안 초조감 없이 눕자마자 평강의 잠을 곧 바로 잘 수 있는 것은 믿는 사람들의 참된 안식과 평강의 잠을 주시는 주님의 큰 은총이요 은혜요 선물이요 축복이다.

 

결론

본 시의 저자인 다윗은 참으로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자이다. 그는 위기 속에 자신이 그 상황을 다급하게 모면하거나 급박하게 탈출하기 위하며 하나님께 현상적이고 물리적인 도움을 구하지 않는다. 그는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하는 사람으로 긴박하고 다급한 상황에 대하여 그 심각한 현상과 문제들을 하나님께 토로하면서 하나님께서 자신의 삶의 현장에 분명코 개입하셔서 전화위복의 상황으로 급전시키고 회복시켜 주실 것을 믿고 고백하고 노래를 드렸다.

대적자들이 호시탐탐 자신의 목숨을 노리고 있는 상황에서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하는 기도를 통하여 자신의 두려운 마음과 걱정스런 생각을 바꾸게 하였다. 기도하는 사람은 그 기도를 통하여 자신의 처한 상황을 변화시키기보다 기도하는 자신을 기쁨과 평강으로 이끌어 준다.

기도를 통하여 상황에 대한 불평과 원망을 하기보다 하나님의 전적 도우심을 의지하고 신뢰하면서 참된 평강과 안식을 누리게 된다는 진리를 배울 수 있다.

험악한 인생길에 수많은 시험이 복병처럼 호시탐탐 밀려올 때에도 항상 주의 얼굴빛을 구하는 자에게는 세상이 감당할 수 없는 큰 기쁨과 평안을 누리게 된다. 그것은 보혜사 성령님께서 영원히 우리 안에 거하시며 참된 위로자가 되시면 진정한 문제 해결자가 되어 주시길 때문이다.

 


우리는 호라티오 스페포드(Horatio Spafford(1828-1888)가 작시한 "내 영혼 평안해 (It is well with my soul)"라는 찬송시 속에 4명의 자녀들의 생명을 동시에 빼앗아간 참람한 아픔의 심연 속에 주님이 주신 평화를 조금이나마 맛볼 수 있을 것이다.

이 찬송시를 썼던 호라티오 스페포드(Horatio Spafford(1828-1888)는 당시 시카고에서 성공한 변호사이자 부동산 투자자였다. 그와 그의 아내 에나(Anna)는 1명의 아들과 4명의 딸을 낳고 교회에서 자선 활동과 봉사의 삶을 살며, 신실하게 그리고 유복한 삶을 영위했던 가정이었다.

1871년 그들 가족의 불행이 다가왔다. 그 해에 성홍열(Pneumonia)로 네 살 된 아들을 잃었습니다. 몇 달 후 시카고 대 화재(Great Chicago Fire)로 인해 소유 재산의 대부분이 소실되었다. 그로부터 2년 후, 1873년 다시 큰 비극이 설상가상으로 닥쳤다.

인생사에 지친 가족들이 휴식을 취하려 온 가족이 유럽 여행을 계획했다. 가장인 호라디오 스페포드는 가족과 함께 할 계획이었지만 예기치 않은 사업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시카고에 머물고 아내와 자녀들을 먼저 보내게 되었다.

1873년 11월 21일, 프랑스 정기 여객선인 ‘빌 뒤 아브르’(SS Ville du Harve) 호에 호라티오의 부인 에나와 네 딸을 포함, 313명의 승객을 태우고 출항하여 미국에서 유럽으로 가기 위해 대서양을 건너고 있었다.

출항을 한지 약 4일 만에 대서양 바다 한가운데서 ‘빌 뒤 아브르’ 호는 스코틀랜드의 강력한 철제 선박인 락크 에론(Loch Earn)과 충돌했다. 갑자기 배에 있던 모든 사람들이 심각한 위험에 처했다.

에나는 서둘러 네 자녀를 갑판으로 데려왔다. 그녀는 그곳에서 네 자녀(Annie, Maggie, Bessie, Tanetta)와 함께 무릎을 꿇고 하나님의 뜻이라면 우리를 살려주시거나, 우리에게 닥친 위험을 잘 견디게 해 달라고 기도했다. 하지만 약 12분 이내에 이 선박은 4명의 호라티오 자녀들을 포함하여 226명의 승객을 대서양의 어두운 바다 아래로 수장시켜 버렸다.

배가 침몰한 지점에서 구조작업을 하던 선원이 잔해 위에 떠 있는 한 여성을 발견했다. 아직 살아 있는 에나였다. 그는 그녀를 배에 태웠고 그들은 9일 후 웨일즈 카디프에 상륙한 또 다른 큰 배에 실렸다. 거기에서 그녀는 남편에게 "혼자 살아남았으니 어떻게 해야 합니까?(Saved alone, what shall I do?)"라는 문구가 적힌 잊혀지지 않을 정도로 짧은 전보를 남편 호라티오 에게 보냈다.

혼자 살아남아 보낸 그의 아내의 전보를 보고 그는 충격과 절망에 빠졌다. 그러나 사랑하는 네 딸들을 잃고 정신없이 헤메고 있을 그의 아내를 생각하여 정신을 차리고 부인을 만나기 위해 사고 선박회사에서 제공하는 배를 타고 사고 현장으로 갔다.

가는 도중 선장은 그에게 말을 건넸다. “지금 배는 당신의 딸들이 잠긴 물 위를 지나고 있다”고 했다. 정신을 차리려 노력하던 그의 마음에 또 다시 커다란 파도가 일어나기 시작했다. 검푸르고 깊은 차디찬 바다 속에 잠들어 있을 딸들의 얼굴이 떠올라 너무나 괴로웠다. 그는 눈물로 통곡하며 밤이 새도록 하나님께 울부짖었다. “주님, 누구보다도 주님을 사랑했던 저에게 어찌하여 이토록 큰 시련을 주십니까?”

죽은 아이들의 얼굴이 밤새 자기 눈앞을 지나갔다. 그런데 이렇게 기도 아닌 씨름을 하던 중 그에게 갑자기 마음속 깊은 곳에서 형언할 수 없는 하나님에 대한 신뢰와 평안이 솟구쳐 오르기 시작했다. 세상이 줄 수 없는 하나님의 위로와 평안을 경험하게 되었다. 그의 입술에서는 평생 경험해보지 못한 평안을 고백하였다.

“It is well with my soul.” (내 영혼 평안해)의 시를 적었다. 시카고로 돌아온 그는 필립 폴 블리스(Philip Paul Bliss, 1838-1876)에게 자신의 아픈 사연과 고백을 들려주었다.

작곡자 필립 폴 블리스는 미국의 복음 성가 작곡자로서 가장 이름이 높던 복음 전도자였습니다. 스페포드의 고백과 시에 감동을 받은 블리스는 바로 그 자리에서 곡조를 붙였고, 이런 계기로 우리 말 찬송가 413장 <내 평생에 가는 길 순하든지>이다.

위와 같은 비극적이고 처참한 상황 속에서 좌절과 낙심 속에서도 주님의 위로와 평강을 체험한 후 위대한 찬송가가 탄생하게 되었다. “내 평생에 가는 길 순탄하여 늘 잔잔한 강 같든지, 큰 풍파로 무섭고 어렵든지 나의 영혼은 늘 편하다. 내 영혼 평안해 내 영혼 내 영혼 평안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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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 5편: 인도와 보호를 위한 아침 기도

본 시편은 애가 시편으로 분류된다. 간청의 시, 무죄 천명의 시, 보호의 시, 확신의 시, 피고소인의 기도 시 등으로 불린다.

본 시는 표제어에 나온 것처럼 다윗 왕의 시로서 다윗이 악인들의 횡포로 괴로워하여 하나님께 도움을 간청하는 시이다. 다윗은 아들 압살롬의 반란이 있기 직전 자신에 대한 반역의 음모가 원수들에 의해 꾸며지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 드린 기도이다.

이 시는 아침 희생 제사 전에 제사장들에 의해 낭독되었거나 개인 예배자들이 예배 시 입례 송으로 불린 것으로 알려져 있다.

내용 구조는 아침에 드린 기도 내용들(1-3절), 하나님이 싫어하시는 인생들(4-6절), 하나님께 간구하는 소원들(7-8절), 악인이 받는 벌(9-10절), 의인 받는 복(11-12절)으로 구성되어 있다.

 

1. 아침에 드리는 기도의 내용들(1-3절)

[개역 개정] <다윗의 시, 인도자를 따라 관악에 맞춘 노래> 5.1. 여호와여 나의 말에 귀를 기울이사 나의 심정을 헤아려 주소서 5.2. 나의 왕,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부르짖는 소리를 들으소서 내가 주께 기도하나이다 5.3. 여호와여 아침에 주께서 나의 소리를 들으시리니 아침에 내가 주께 기도하고 바라리이다

[표준새번역] <지휘자를 따라 관악기에 맞추어 부르는 다윗의 노래> 1.주님, 나의 말에 귀를 기울여 주십시오. 이 하소연을 살펴 주십시오. 2.이 탄식 소리를 귀 담아 들어 주십시오. 나의 임금님, 나의 하나님, 내가 주님께 기도를 드리니, 3 주님, 새벽에 드리는 나의 기도를 들어 주십시오. 새벽에 내가 주님께 사정을 아뢸 준비를 하고 기다리겠습니다.

본 시편은 다윗이 지는 시로서 인도자 혹은 지휘자를 따라 관악기(참고, 오늘날 NIV를 비롯하여 많은 번역본에서는 ‘플룻’으로 번역) 에 맞춘 노래이다. 다윗은 대적자들의 공격에 두려워하지 않고 위기 상황 속에서도 이른 아침에 하나님께 부르짖고 하나님의 도우심과 구원을 기다렸다. 다윗의 기도는 마음 중심에서 외치는 기도였고, 하나님의 왕권을 철저히 인정하는 기도였고, 하루가 시작되는 첫 시간에 온 마음을 다해 드린 기도였다.

 

1.1. 심정을 헤아려 주소서(1절)

다윗은 1, 2절에 ‘귀를 기울여 주소서’, ‘헤아려 주소서’, ‘들어주소서’ 등 세 개의 강조형 명령문을 사용하여 다급한 상황에 마치 황급히 주님이 계신 방을 노크하듯이 주님께 아뢰고 있다. 또한 다윗 기도의 긴박성은 물론 간절성, 끈기성을 보여주고 있다.

다윗이 거듭해서 3번씩이나 명령형을 사용하는 것은 그의 긴박한 상황에 대하여 주님께서 속히 개입하셔서 문제 해결을 해 주실 것에 대한 강렬한 요청이다. 특별히, 자신이 간구하는 ‘말들’(에메르), ‘심정’(하기그, 신음소리), ‘부르짖음(콜 쉐바, 부르짖는 외침) 등을 기울여 주시고, 헤아려 달라고 점점 더 간절하고 간곡하게 기도드리고 있다.

여호와, 즉 언약을 신실하게 지키시는 주님을 믿고, 그의 중얼거리고, 속삭이는 말, 더 나아가 그의 마음아리하는 속 심정, 더 강렬하게 울부짖는 목소리로 하나님께 탄원하며 기도드리고 있다.

다윗의 기도에서 기도 원리를 배울 수 있다. 기도 대상은 언약을 지키시는 신실하신 인격자 되신 하나님께 아뢰는 것이다. 기도의 자세는 점진적으로 더 강렬해지는 것을 볼 수 있다. 입술에서 나오는 말, 마음 깊은 곳에서 솟구치는 탄식과 신음, 그리고 울부짖음으로 기도 시간이 갈수록 더욱 강렬해 진다. 기도의 시간은 언제나 드릴 수 있지만, 하루가 시작되는 고요하고, 정숙한 이른 아침에 온전히 집중할 수 있는 시간이 된다.

 

1.2. 부르짖음을 들어주소서(2절)

1절에 ‘여호와’께로 부르짖는 기도가 2절에서는 ‘나의 왕’으로 바꾸어 부르고 있다. 다윗은 자신이 이스라엘의 왕임에도 불구하고 우주 왕이시요, 진정한 이스라엘의 왕이신 하나님께 부르짖고 있다. 자신이 왕으로 세우신 분이 진정한 통치자가 되신 분이 하나님이시기에 자신의 억울한 상황, 다급한 문제를 친히 재판관이 되셔서 올바르게 판단, 판결을 내려 달라는 간구이다.

여기서 ‘나의 왕, 나의 하나님’(시44:4; 47:6,7; 68:24; 74:12; 84:3; 95:3, 145:1 참조)이라고 부르짖는 것은 당시 최종 재판과 판결에게 있기에 다윗은 왕인 자신의 문제를 해결하실 분은 진정한 왕이시고 우주의 왕이신 하나님께서 판결하신 분이시기 때문이다.

세상에서 억울하게 누명을 쓰고 잘못된 판결을 받는 경우가 많다. 심지어 수십 년 후에 새로운 증거를 통해 무죄 판결을 받은 경우도 허다하다. 이처럼 세상의 법과 세상의 재판으로 진실이 가려져 억울한 누명을 쓸 때도 많이 있다. 이때,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오직 한 가지 밖에 없다. 진정한 재판관, 온전한 재판관, 정의의 재판관은 오직 우리의 왕 되신 주님뿐이시다.

 

1.3. 아침의 기도를 들어주소서(3절)

3절에 ‘아침’이 두 번 나온다. 아침은 동녘이 밝아오는 시간, 곧 새벽을 가리킨다. 아침 혹은 새벽은 아침 제사 시간과 기도 시간과 연관이 있다(왕하3:20; 16:15; 암4:4).

구약에서 아침 시간은 주님의 도우심이 임하는 시간으로 본다(시46:5). 아침에 큰 구원의 역사를 체험하였다(출14:24; 사37:36). 아침에 번제를 드렸다(겔46:13,14,15). 아침에 모세가 율법을 받았다(출19:16; 34:2). 아침에 제사를 드렸다(출29:38-42; 민 28:2-8). 아침에 여리고 성을 돌았고 아침에 무너졌다(수 6:12, 15).

맥케이(McKay)는 “새벽 시간은 하나님께서 도우시기 위해 오시는 시간, 하나님 자신께서 그의 사랑을 계시하는 시간, 하나님께서 새롭게 하시기 위해 오시는 시간이다”(시90:14; 애3:23; 습4:5 참조)라고 하였다.

구약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새벽에 어두움을 물리치고 떠오르는 태양은 어둠의 세력을 물리치고 구원의 빛으로 오시는 하나님의 현현으로 보았다. 그들은 빛을 통하여 어두움이 물러가는 것을 악, 죽음, 두려움, 공포가 물러가고 선, 생명, 기쁨, 평화가 임하는 것으로 느끼고 의미를 부여하였다.

아침에 주님께 기도드리고 아침에 주님의 응답을 기다린다고 하였다. 그런데 여기서 기도로 번역된 ‘아라크’는 ‘제사를 준비하다’. ‘제물을 차리다’(레1:8-9; 12) 뜻이다. 그것은 기도가 곧 제사요 제물을 하나님께 드린다는 뜻으로 해석할 수 있다. 또한 ‘아라크’는 ‘말을 내다’, ‘진술하다’, ‘사정을 아뢰다’ 등의 뜻을 가지고 있다.

그런데 다윗이 하나님께 기도하고(혹은 제사드리고, 혹은 사정을 아뢰고), ‘바란다’ 혹은 ‘기다린다”고 했다. 이것은 기도 응답 혹은 제사 열납, 혹은 의로운 판단, 재판의 결과를 기다린다는 뜻이다.

구약을 살펴볼 때, 아침 일찍이 행하였고(삼하15:2; 렘21:12; 시101:8)고 아침에 판결을 기다렸기에(삼하15:2), 다윗은 아침에 주님께서 정의롭고 공정한 판단을 내려 주시길 기다리고 있음을 고백하고 있다.


 

2. 하나님이 싫어하시는 인생들(4-6절)

[개역 개정] 4. 주는 죄악을 기뻐하는 신이 아니시니 악이 주와 함께 머물지 못하며5. 오만한 자들이 주의 목전에 서지 못하리이다 주는 모든 행악자를 미워하시며6. 거짓말하는 자들을 멸망시키시리이다 [표준새번역] 4. 주께서는 죄악을 좋아하시는 하나님이 아니십니다. 죄악은 주님과 어울릴 수 없습니다. 5. 교만한 자들 또한 감히 주님 앞에 나설 수 없습니다. 주께서는 악한 일을 저지르는 자들을 모두 미워하시고, 6. 거짓말을 일삼는 자들을 멸망시키시고, 피를 흘리는 것과 속이는 것을 좋아하는 자들을 몹시도 싫어하십니다.

 

2.1. 죄악을 기뻐하지 않으시는 하나님(4절)

다윗은 죄악을 기뻐하지 않으시는 하나님의 속성을 알고 그들의 특성을 밝히고 하나님께 그들의 행악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해 달라는 기도를 드린다.

하나님은 4절에 죄악을 좋아하지 않으시고, 5절에 미워하시고, 멸망시키시고, 6절에 싫어하신다. 하나님께서 죄인에게 긍휼을 베푸시는 사랑의 주님이시지만, 죄는 미워하셔도 죄인은 미워하지 않는다는 논리는 맞지 않는다. 성경은 죄와 죄인을 구분하지 않으시고 모두 싫어하시고 미워하신다. 다만, 죄인이 자신이 범한 죄를 회개하고 주님께 돌아올 때는 자비와 긍휼을 베푸셔서 용서해 주신다.

하나님께서 죄악을 기뻐하지 않으시는 그 이유는 악이 주와 함께 머물지 못하기 때문이다. 즉, 죄악은 주님과 어울릴 수 없기 때문이다(표준 새번역). 여기서 머물다, 유한다는 뜻은 ‘-의 손님이 된다’는 뜻이다.

고대 근동 아시아에서는 주인이 손님을 극진히 환대하고 대접하는 풍습이 있다(창18:1-8; 19:1-11). 우리나라에도 아직 그런 미풍양속(美風良俗)이 남아 있다. 그러나 악한 자는 그런 손님 대접을 받을 수가 없다. 악인이 비록 명예와 부와 권세를 다 누리고 있다고 할지라도 악인은 주님의 손님으로 주님과 함께 친밀한 교제를 나눌 수 없다.

시편 15편에 보면, 여호와의 장막에 유할 자가 누구인가?고 질문을 하고 있다. 그러나 시편 5장 4절 본문에는 “악인은 주와 함께 유하지, 거하지 못한다”라고 밝히고 있다.

그러면 하나님이 싫어하시는 죄인, 악인은 어떤 자인가? 5-6절에서 사중적으로 밝히고 있다. ‘오만한 자’, ‘행악자’, ‘거짓말하는 자’, ‘살인자(피흘리기를 좋아하는 자)’, ‘속이는 자’로 언급되고 있다.

하나님은 거룩하신 분(레11:44; 19:2; 20:26; 벧전 1:16)으로 조그만 죄악도 용납하지 아니하신다. 그런데 어찌 악이 가득 찬 죄인과 함께 거하시고 그 죄인들이 하나님 앞에 지체할 수 가 있겠는가?

다윗은 하나님이 싫어하시는 자들이 자신에게 악행을 행하고 있기에 그러한 죄악을 범하는 자들을 싫어하시는 하나님께 자신을 구원해 달라고 간구하고 있다.

 

2.2. 오만한 자를 미워하시는 하나님(5절)

다윗은 하나님이 미워하시는 오만한 자, 교만한 자의 공격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해 달하고 기도드리고 있다. 오만한 자, 거만한 자, 교만한 자들로 번역되어지는 이들은 ‘자기 스스로 자신을 높이는 자들’이다(시75:4; 롬 1:30; 고전 13:3; 고후11:17)이다. 브릭스(Briggs)는 ‘자랑쟁이’라고 번역하였고, 크리우스(Kraus)는 ‘자랑하는 자’, ‘어리석은 자’, ‘미친 자’(시83:3; 75:4 참조)로 번역하였다.

자신의 자랑거리 자체를 감사거리로 겸손히 여겨야 한다. 자랑거리가 있으면, 자랑거리를 주신 주님을 자랑하거나 주안에서 자랑해야 한다. 그러나 스스로 성공과 잘난 것을 자랑하는 것은 오만과 교만의 자태로 죄악의 근본이 된다.

오만한 자는 주님 앞에 서지 못한다. 주님의 거룩한 임재 앞에 머무를 수 없다. 오만한 자도 외형적인 종교적 의식에 동참할 수 있으나 근본 주님 앞에서 설수 없고 설령 선다고 할지라도 주님이 그와 함께 머무르시지 않고 역겨워하신다.

5절 하반절에 그런 자를 ‘악행자’로 칭하고 있다. 행악자는 ‘허망한 자’(사 58:9; 암5:5) 혹은 ‘궤사한 자’(잠17:4)로 하나님은 이런 모든 악을 행하는 자를 미워하신다. 케일과 델리츠(Kei & Delitzch)는 “오만한 자들에게는 어떤 고상함, 진실함, 순결함을 발견할 수 없다”라고 했다.

 

2.3. 거짓과 살인을 싫어하시는 하나님(6절)

다윗은 대적자들의 거짓말과 거짓 행동으로 살인을 서슴지 않고 저지르는 그들에 대하여 하나님께 간구하고 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그런 자들을 몹시 실어하시길 때문이다.

하나님이 싫어하시는 악한 행동을 하는 그들이 다윗을 대적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다윗은 하나님께 하나님의 속성에 반한 악행을 하는 그들을 막아주시고 그들로부터 보호해 달라고 간구하고 있다.

‘피 흘리기를 즐기는 자’는 ‘피 흘리는 죄를 지은 자’, ‘피에 주린 자’, ‘피 흘리는 것을 좋아하는 자’ 로 번역된다. 곧 ‘살인자’이다(삼하 16:7,8; 시 139:19). 특히, 사람을 죽이기 위해 극도로 악한 거짓말과 더불어 거짓말을 하는 자를 일컫는다.

살인은 실제로 사람의 생명을 죽이는 행위와 함께 의로운 자, 무흠자를 모함해서 죽이려는 의도와 행동, 그리고 사람을 마음으로 미워하는 모든 죄악을 일컫는다(요한일서 3:15).

거짓의 근원은 사탄이다(창3:4; 요8:44). 하나님께서 심히 미워하시는 것 중의 하나가 거짓이다(잠16:17,17,19; 11:1, 20:10; 슥 8:17). 거짓말 하는 자는 천국에 들어갈 수 없고(계21:8), 영원한 형벌인 유황불에 던짐을 받게 된다(계21:8).

하나님은 누구를 죽이기 위해 거짓과 속임수를 쓰는 행위를 몹시 싫어하신다. 크레이기(Craige)는 시편의 악인은 “하나님의 임재에서 추방된 사람들의 원형”이라고 했다. 우리의 삶은 두 길이 펼쳐져 있다. 하나님의 임재 속에 거하는 의인의 삶과, 하나님의 임재에서 쫓겨난 악인의 삶이다.

하나님의 성품에 근거하여 기도한 다윗, 하나님의 속성에 거역하는 자들에 대한 판단과 심판은 주님께 있다. 하나님 속성에 따라 기도할 때, 기도 응답의 확실성이 있다. 그러나 기도자 자신도 하나님의 성품과 속성에 합당한 거룩한 삶, 성화의 삶을 살아야 하겠다(약 2:21-24).


 

3. 하나님께 간구하는 소원들(7-8절)

[개역 개정] 7. 오직 나는 주의 풍성한 사랑을 힘입어 주의 집에 들어가 주를 경외함으로 성전을 향하여 예배하리이다 8. 여호와여 나의 원수들로 말미암아 주의 의로 나를 인도하시고 주의 길을 내 목전에 곧게 하소서

[표준새번역] 7. 그러므로 나는 주의 크신 은혜를 힘입어 주의 집으로 왔습니다. 경외하는 마음으로 주의 성전 바라보며, 주께 엎드립니다. 8. 주님, 나를 대적하는 원수를 보시고, 주의 공의로 나를 인도하여 주십시오. 내 앞에 주의 길을 환히 열어 주십시오.

다윗의 간절 두 가지 소원(6절)이 밝히고 있다. 하나님의 성품을 따라 살면서 그분의 인자하심을 얻는 것이고 주님을 예배하며 살길를 원하고 있다. 또한 다윗은 원수들로 인하여 자신의 소원을 이룰 수 없기에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간구하고 있다(7절).

 

3.1. 성전에서 경배를 드리는 소원(7절)

오직 나는 주의 풍성한 사랑을 힘입어 주의 집에 들어가 주를 경외함으로 성전을 향하여 예배하리이다 그러므로 나는 주의 크신 은혜를 힘입어 주의 집으로 왔습니다. 경외하는 마음으로 주의 성전 바라보며, 주께 엎드립니다.

7절에 ‘그러나’가 한글 번역에는 생략되었다. 앞 절에 하나님께 거하지 못하는 악인과 달리 다윗 자신은 하나님의 인자하심, 사랑과 은혜로 주의 집에 들어가 예배하기를 갈망하고 있다.

시편에서 자주 등장하는 ‘은혜’, ‘자비’, ‘사랑’은 바로 하나님의 속성을 가장 잘 표현하는 ‘헤세드’이다. 헤세드는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과 맺으신 언약에서 근거한다. 시편 136편에서는 절절마다 2번씩 헤세드를 노래한다. 하나님의 창조 사역에서(1-9절), 이스라엘의 역사에서(10-22절), 삶의 현실에서(23-35)에 반복에서 헤세드가 펼쳐진다.

그는 육신의 것이나 땅의 부와 풍요를 원하지 않고, 주님의 풍성한 사랑을 받으며, 주님께 예배하며 그 분과 더불어 살기를 원했다. ‘사랑’은 곧 주의 인자하심이다. 그것은 ‘은혜’와 ‘긍휼’을 베푸시는 하나님의 한량없으신 사랑이다.

다윗은 수많은 대적자들의 악랄한 음모에서 구원받을 수 있는 길은 오직 여호와 하나님의 그 인자하심, 그 사랑과 그 은혜를 의지할 것 밖에 없음을 깨닫고 거기에 매어 달렸다.

다윗은 주님의 사랑을 힘입어 주의 집에 들어가 하나님께 예배드리기를 원하고 있다. 여기서 ‘주의 집’은 솔로몬 때 지은 예루살렘 성전이 아니고 언약궤가 안치되어 있는 성막, 곧 여호와의 장막을 가리킨다. 그곳인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는 거룩한 처소로 ‘성전’이라고 불렸다(삼하 1:9; 3:3; 삼하 12:20).

다윗은 주님의 전에 들어가 주님께 대한 경외심으로 주님의 성전에서 경배를 드리겠다고 고백하고 있다. 이는 다윗이 얼마나 주님의 은혜를 갈망하고 사모하고 있는 가를 알 수 있다.

 

3.2. 길을 인도하시고 환히 열어주시길 간구(8절)

다윗은 하나님의 ‘헤세드’(사랑, 은혜, 자비)를 체험하였기에 주님께 담대하게 “주의 공의로 인도해 주소서’, ‘ 내 앞에 주의 길을 환히 열어주소서”라고 기도하였다. 그는 하나님의 헤세드 악인의 공격에서 보호해 주실 뿐 아니라 놀라운 길로 활짝 열어주시길 확신하고 간구하였다.

‘주의 의’는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구원’을 가리키는 의이다(롬 1:17). ‘주의 길’은 하나님께서 보여 주시는 말씀(시 25:4, 5, 12, 27:11, 32:8; 86:11)이요 응답이다. 다윗은 평생도록 자기의 길을 자기 스스로 택하지 않았다. 하나님께 맡기고 그분의 인도와 지도를 받았다.

시편 27:11 “11여호와여 주의 길로 나를 가르치시고 내 원수를 인하여 평탄한 길로 인도하소서’ 시편 86: 11 “여호와여 주의 도로 내게 가르치소서 내가 주의 진리에 행하오리니 일심으로 주의 이름을 경외하게 하소서” 등의 고백을 보면 알 수 있다.

성경에 인간의 길에 대하여 여러 교훈이 있다. 인간의 길이 자기 자신에게 있지 않다(렘 10:23). 인간의 길이 하나님께 있다(잠 5:21). 주께서 친히 길이 되신다(요14:6). 인간의 길을 하나님께 맡겨야 한다(시 37:5). 인간이 보기 좋은 길도 결국 사망이다(잠 14:12). 주님의 말씀은 인생길의 빛이다(시 119:105)등을 교훈을 되새겨야 한다. 하나님께 의의 길로 인도하시길 날마다 간구하여야 하겠다.

종교개혁을 앞두고 마틴 루터는 이렇게 고백했다. “내 갈 길 나 모르나 누가 나를 이끄시는지 내 확실히 아노니 내가 무엇을 두려워하리오. I do not know what my future will hold, but I do know who is leading me. Whom shall I fear?” 라고 자신의 가는 길을 주님께 맡기고 담대히 개혁의 불을 지폈다.


 

4. 악인이 받는 벌(9-10절)

[개역 개정] 9. 그들의 입에 신실함이 없고 그들의 심중이 심히 악하며 그들의 목구멍은 열린 무덤 같고 그들의 혀로는 아첨하나이다 10. 하나님이여 그들을 정죄하사 자기 꾀에 빠지게 하시고 그 많은 허물로 말미암아 그들을 쫓아내소서 그들이 주를 배역함이니이다

[표준새번역] 9. 그들의 입은 믿을 만한 말을 담는 법이 없고, 마음은 썩었습니다. 그들의 목구멍은 열린 무덤 같고, 혀는 언제나 아첨만 일삼습니다.10. 하나님, 그들을 정죄하셔서 제 꾀에 빠지게 하시고, 그들이 저지른 많고 많은 허물을 보시고서, 그들을 주 앞에서 쫓아내십시오. 그들은 주님을 거역하는 자들입니다.

다윗은 악인의 특징과 악인에 대한 기도를 드리고 있다. 악인의 특징 네 가지를 밝히고 있다. ‘신실함이 없는 자’, ‘심중이 심히 악한 자’, ‘목구멍이 열린 무덤 같은 자’, ‘아첨하는 자들’ 등이다. 악인에 대한 기도는 ‘자기 꾀에 빠지게 하소서’, ‘그들을 쫓아내소서’ 등이다.

 

4.1. 악인의 특징

다윗은 주님께 원수에 대한 악한 특징을 고발하고 그들을 주님의 공의로운 판결이 임하길 기도하고 있다. 악인의 4가지 특징을 요약하면 거짓말, 중상, 비방 등이다.

 

4.1.1. 말에 신실함이 없는 자.

다윗의 원수들은 전혀 근거 없는 거짓 비방으로 끊임없이 퍼붓고 있었고, 앞뒤가 맞지 않는 거짓 증거로 다윗을 심히 괴롭히고 있었다. 악인의 입에는 신실함이 하나도 없다는 뜻은 다음과 같다. “그들의 한 말은 하나도 믿을 수 없다”. “그들의 입은 믿을 만한 말을 담는 법이 없다”. “그들 말에는 성실함이 없다”는 뜻이다.

식언이비(食言而肥: 말을 먹고 살이 찐다는 뜻으로 늘 거짓말로 살아가는 사람), 자식기언(自食其言: 스스로 자신이 한 말을 먹어 버린다는 뜻으로 약속한 것을 스스로 어기는 사람), 이와전와(以訛傳訛:거짓말에 또 거짓말이 섞여 말한다는 뜻으로 거짓말에 더 거짓말을 보태는 사람) 등의 고사성어를 교훈삼아야 할 것이다.

다음 명언을 기억하고 말, 언어에 신실성을 가져야 하겠다.

플리톤은 “거짓말 그 자체가 죄일 뿐만 아니라 그 사람 정신까지 더럽힌다.” 아브라함 링컨은 “모든 사람을 얼마동안 속일 수는 있다. 몇 사람을 늘 속일 수도 있다. 그러나 모든 사람을 늘 속일 수는 없다.” 도스토예프스키는 “인생에서 무엇보다 어려운 거 인생에서 무엇보다 어려운 것은 거짓말을 하지 않고 사는 것이다.” 체호프는 “거짓말은 그 말한 사람의 눈빛을 비천하게 한다.”

거짓말을 삼가하고 말에 신실성과 정직성에 대한 성경의 교훈을 살펴본다.

“진실한 입술은 영원히 보존되거니와 거짓 혀는 눈 깜짝일 동안만 있을 뿐이니라”(잠언12:19).

“거짓 입술은 여호와께 미움을 받아도 진실히 행하는 자는 그의 기뻐하심을 받느니라”(잠언12:22).

“성실히 행하는 가난한 자는 입술이 패려하고 미련한 자보다 나으니라”(잠언19:1).

“오직 너희 말은 옳다 옳다, 아니라 아니라 하라 이에서 지나는 것은 악으로 좇아 나느니라”(마태복음5:37).

“누구든지 스스로 경건하다 생각하며 자기 혀를 재갈 먹이지 아니하고 자기 마음을 속이면 이 사람의 경건은 헛것이라”(야고보서1:26)

“무엇이든지 속된 것이나 가증한 일 또는 거짓말하는 자는 결코 그리로 들어오지 못하되 오직 어린 양의 생명책에 기록된 자들뿐이라”(계시록 21:27)

하나님 말씀은 나의 거짓을 적나라하게 들춰낸다. 그리고 주위의 사람들 소위 정치, 교계 지도자, 심지어 직장인, 학생, 어린이, 젊은이, 평신도의 거짓들도 드러나게 하신다. 정치인, 기업인, 사업인, 공무원,교사, 목회자, 농부, 어부, 의사, 법조인, 언론인, 스포츠맨 총망라해서 “정직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심지어, 교회, 교계 안에서 진리를 선포하면서 부정직함으로 포장된 것이 많다.

교회 지도자들 가운데 이름 없이 빛도 없이 정직하게 사는 목회자, 선교사, 평신도들이 많다. 그러나 그와 정반대인 온 지면에 이름이 부각된 자들 가운데 스스로 경건과 정직의 가면을 쓰고, 부정직의 탐익과 권세욕에 빠진 자들을 많이 본다. 그래서 이 시대가 어둡고, 살기 힘든 것이다. 그래서 교회가 세상의 빛이 되기보다 지탄을 받는다. 세상이 교회를 탓하고 걱정하는 시대가 되었다.

우리 주변에 어떤 사람들의 말에 대하여 반신반의(半信半疑)하는 경우가 많고 또한 어떤 이의 말에는 전혀 믿지 않고 냉소해 버리는 경우가 있다. 나의 입에서 나오는 말에 대하여 상대방이 어떤 반응을 하는 지, 얼마나 나의 말에 대하여 신뢰감을 갖고 있는지 스스로 자각해 볼 필요가 있다.


 

거짓말에 관한 시가 많이 있다. 그 중에 두 편을 소개해 본다.

[거짓말] 김형출 작

 

“사람은 하루에 거짓말을 몇 번씩 하고 있다.

나도 오늘 거짓말을 한다.

남을 배려하기 위해 거짓말을 한다.

 

나를 과시하기 위해 거짓말을 한다.

하지만, 양심에 가책 없이 거짓말은 하지 않는다

밥 먹듯이 거짓말 하는 잘 난 사람이 있다.

바로 나 바로 당신 오늘 또 거짓말을 한다.

바로 나 바로 당신.”

 

「문예사조」2003년 12월호

 

[새빨간 거짓말/ 박이화]

“먹다 보면

껍질만 남는 것이 석류다.

먹으면 먹을수록 새빨간 껍질만 쌓이는,

사랑하고부터 거짓말도 늘었다.

생각만 해도 신트림 끄윽 괴는

그 새콤달콤한 말 들키지 않으려

석류처럼 석류꽃처럼

내 입술도 반지르르 붉어졌다.

익다 보면 제풀에 단내 쩌억 풍기는

벗기다 보면 겉과 속이 한통속인

석류 한 통 다 먹고 나니 거짓말처럼

석류보다 더 많은 껍질이 쌓였다.

단물 쏙 빠진 알맹이까지 시금털털 껍질로 남았다.

생이 아름답다는 건 거짓말

사랑에 온통 정신 팔려

영영 지울 수 없는 얼룩만 남긴

​생이 아름답다는 건 거짓말

석류보다 석류꽃보다 더 새빨간 거짓말.

『흐드러지다』(천년의시작, 2013)

4.1.2. 심중이 심히 악한 자

심중(心中)은 마음 중심을 일컫는다. 심중이 악하다는 것은 “마음속에 항상 악한 생각으로 가득 차 있다.” “마음이 더러운 것으로 푹 썩었다.” “마음으로 흉계만 꾸미고 있다는 뜻으로 해석된다.”

히브리어 원문의 뜻은 “그들 속은 파멸이다.” 혹은 “그들의 속에서 쏟아내는 것은 멸망밖에 없다”는 뜻이다. 그래서 그들의 목구멍은 열린 무덤과 같다고 했다. 성경에서 전적 부패한 인간의 마음을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예레미야 17:9-10 절에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이라 누가 능히 이를 알리요마는 나 여호와는 심장을 살피며 폐부를 시험하고 각각 그 행위와 그 행실대로 보응하나니”

마태복음 12장 34-35절에 “독사의 자식들아 너희는 악하니 어떻게 선한 말을 할 수 있느냐 이는 마음에 가득한 것을 입으로 말함이라 선한 사람은 그 쌓은 선에서 선한 것을 내고 악한 사람은 그 쌓은 악에서 악한 것을 내느니라”

마가복음 7장 21-23절 “속에서 곧 사람의 마음에서 나오는 것은 악한 생각 곧 음란과 도적질과 살인과 간음과 탐욕과 악독과 속임과 음탕과 흘기는 눈과 훼방과 교만과 광패니 이 모든 악한 것이 다 속에서 나와서 사람을 더럽게 하느니라”

16세기 청교도 목사 피터 모펫(Peter Moffat)는 “여러분의 샘을 깨끗이 하는 것보다 여러분 자신의 마음을 깨끗이 하는 것에, 여러분의 양떼를 먹이기보다 여러분 자신을 먹이는 것에. 여러분의 집을 지키는 것보다 여러분의 마음을 지키는 데 주의를 더 집중해야 한다”고 했다.

코넬리우스 반틸(Cornelius Van Till) 은 ”하나님이 우리의 마음을 변화시켜 우리의 모든 생각이 그리스도께 복종할 수 있을 때까지 ‘마음, 이성, 의식’을 사용해야 한다.”고 했다.

존 오웬(John Owen, 1616년-1683)을 비롯한 청교도들은 마음을 지키고 다스리는 것에 대해 지대한 관심을 기울였다. 존 오웬은 ‘마음을 지키는 것’을 하나님의 마음에 합하며, 인생의 목표에 도달하는 것이라고까지 했다.

아더 핑크(Arthur Pink)는 “마음은 우리 책임 영역의 중심에 있으며, 마음을 개선하고 지켜야 한다는 당위성을 부인하는 것은 인간 책임을 포기하는 것이다.”

그는 또한, “마음을 지키는 일에 모든 것이 달려 있다. 마음을 지키게 되면 우리 삶의 모든 과정이 하나님의 마음에 따라 일치가 될 것이며, 우리 삶의 목적은 그를 따라 하나님을 즐거워하는 것이 될 것이다. 이것을 무시해 버린다면, 이 지상에서는 순종을, 이후에는 영광을 잃어버린 생활이 될 것이다.”하라고 마음을 지키는 일의 중요성을 거듭 강조했다.


 

한 농촌 교회 목사님의 [마음을 다스리는 기도문]을 소개한다.

하나님 아버지! 감사합니다. 이른 아침에 저희로 말씀과 함께 하루를 시작하게 하심을 감사드립니다. 주님 저희로 마음을 다스릴 수 잇게 하여 주시옵소서! 세상을 살다가 보면 저희 마음을 주체하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저희로 이 세상의 유혹에 사정없이 흔들릴 때도 많습니다. 저희로 세상의 유혹이 주는 쾌락에 대책 없이 저희의 마음이 끌려갈 때도 많습니다.

주 하나님 아버지! 저희의 마음을 주님께서 주장하여 주옵시고 저희의 마음을 주의 뜻대로 다스려 주옵소서! 저희 속에 정한 마음을 창조하시고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하여 주시옵소서! 저희의 마음이 세상적인 것에 의해 흔들리지 않게 하옵시고 평안한 마음 잔잔한 마음을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저희의 마음에 주님의 은총의 손을 얹어 주시어 너른 마음을 주시옵소서! 남의 허물을 너그러이 가싸 안을 수 있는 마음을 주옵시고 더 덜 오해하게 하옵시고 더 더 이해하게 해 주시옵소서! 저희의 마음을 주장하사 저희가 하는 말이나 행동을 다스려 주옵시고 저희가 하는 말이나 행실로 인해 저희의 이웃이 캄캄함을 경험하거나 지옥을 경험하지 않게 하옵시고 따뜻함을 주고 시원함을 주고 하늘나라를 경험케 하옵소서!

주님 저희의 마음이 따뜻한 사람이 되게 하옵시고 저희로 가슴이 열린 사람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저희의 삶이 이웃에게 유익을 줄지언정 해를 끼치지 않게 하옵소서! 저희로 따뜻한 인생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4.1.3. 목구멍이 열린 무덤 같은 자

목구멍은 소리를 내고 음식물을 삼키는 기관이다. ‘열린 무덤’은 시체가 보전되는 것으로 부패하는 시신으로 썩는 악취가 난다. 무덤을 파헤쳐 놓으면 무엇이 나오는가? 죽은 시체가 나온다. 이 세상의 냄새 중에서 가장 고약한 냄새가 시체 썩은 냄새라고 한다. 사람의 목구멍을 통하여 나온 것이 바로 열린 무덤에서와 같이 썩은 시체 냄새가 진동한다는 뜻이다.

악인의 목구멍이 열린 무덤 같다는 것은 악한 악담을 내뱉고 악독한 말로 사람에게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주고 심지어 죽이기기 까지 한다는 비유로 표현되고 있다. 사도바울은 전적 부패한 인간의 죄성을 논하면서 “저희 목구멍은 열린 무덤이요 그 혀로는 속임을 베풀며 그 입술에는 독사의 독이 있고14그 입에는 저주와 악독이 가득하고(롬 3:13-14)”라고 언급하였다.

예수님께서 악한 사람은 그 쌓은 악에서 악한 것을 낸다고 말씀하셨다(마 12:35). 중생한 자에게도 여전히 악한 본성이 남아 있어 날마다 정과 욕을 십자가에 못 박는 자기 통제와 훈련, 절제가 요청된다. 사도 바울은 성도들에게 “너희는 모든 악독과 노함과 분냄과 떠드는 것과 훼방하는 것을 모든 악의와 함께 버리라”고 교훈하였다(엡 4:31).

랠프 왈드 에머슨(Ralph Waldo Emerson, 1803-1882)이런 말을 했다. "사람은 누구나 그가 하는 말에 의해서 자기의 초상을 그려 놓게 된다"이처럼 말(언어)은 곧 그 사람의 인격이요, 삶이요, 열매요, 미래요, 결과이다. 말(언어)은 그 사람의 인격을 대표한다. 자신의 언어 관리가 자신의 인생의 행불행을 결정짓는다.

그리스도인이 되었다는 것은 옛사람을 벗어버리고 새사람을 입었다는 것이다. 그것은 바로 옛 언어생활을 벗고 새 언어생활을 하게 되었다는 뜻이다. 영적 전쟁에서 승리는 바로 언어생활의 승리와 직결된다. 향기 나는 언어생활, 즉 영혼을 치유하고 살리는 말은 성화된 인격, 성숙한 인격의 열매이다.

성도의 입에서 나오는 언어의 향기는 미국의 보타닉 정원의 예쁜 꽃 보다, 덴버 워싱톤 공원이 장미 꽃 향기처럼 향기로워야 한다. 로키산맥의 아름다운 딜론의 호수가에 핀 야생화보다 더 아름답고 그윽한 향기를 발하여야 한다.

 

4.1.4. 아첨하는 자들

아첨하다의 원어의 뜻은 ‘미끄럽다’이다. 아첨하는 것은 다른 사람의 기분을 맞추기 위해 과장되고 마음에 없는 거짓 칭찬을 하거나 호의를 표시하는 것을 일컫는다. 아첨하는 혀는 우선 보기에는 매우 미끄러워 보이는 그 혀 밑에는 독이 가득 차 있다.

압살롬은 아침 일찍이 왕에게 재판을 청하러 오는 사람을 가로채 그들에게 입을 맞추고 아첨하는 말로 사람들의 마음을 도적질하였다(삼하 15장 2-6절 참조). 성경에는 많은 곳에 아첨하는 자들의 언어적 특성과 그들의 종국에 대하여 언급하고 있다.

시편 12:2-3에, “저희가 이웃에게 각기 거짓말을 말함이여 아첨하는 입술과 두 마음으로 말하는도다 여호와께서 모든 아첨하는 입술과 자랑하는 혀를 끊으시리니”

시편 55편 21절에 “그의 입은 우유 기름보다 미끄러우나 그의 마음은 전쟁이요 그의 말은 기름보다 유하나 실상은 뽑힌 칼이로다”했다.

잠언 5:5-5절에 “대저 음녀의 입술은 꿀을 떨어뜨리며 그의 입은 기름보다 미끄러우나 나중은 쑥 같이 쓰고 두 날 가진 칼 같이 날카로우며 그의 발은 사지로 내려가며 그의 걸음은 스올로 나아가나니”라고 했다.

 

4. 2. 악인에 대한 심판 기도(10절)

다윗은 하나님께 행악자들에 대한 세 가지 기도를 드리고 있다. 첫째, 그들을 정죄하시하고 둘째, 자신들의 꾀에 빠지게 해달고 셋째, 그들을 쫓아내시라고 기도한다.

이 기도는 다윗이 복수심에 가득 찬 분노의 기도나 저주의 기도가 아니다. 죄와 죄인을 다스리는 하나님의 공의를 실현하기 위한 기도이다. 10절 하반절에 “그들이 주를 배역한 자”들이기 때문이라고 밝히고 있다.

 

4.2.1. 악인을 정죄하소서(10절)

다윗은 앞에서 악인들의 간악성을 지적한 후 하나님께 저희들에게 정죄해 주시길 간구하고 있다.

‘정죄하다’의 원문의 뜻은 ‘죄책이 있다’이다. 어떤 번역본에는 ‘저들에게 죄가 있다고 선포하소서’(NIV, NAB)라고 하였고, 어떤 번역본에는 ‘저들과 죄를 담당케 하소서’(RSV, NASB, NJB)라고 하였고, 어떤 번역본에는 ‘저들을 멸망시키소서”(REN)라고 되어 있다.

악인에 대한 정죄 기도는 원수에 대한 복수심이 아니라 하나님의 의를 드러내시라는 구약 성도의 간절한 표현이다. 또한 하나님께 기름부음을 받은 자에 대한 도전은 하나님께서 세우신 신정국가와 하나님의 주권에 대한 악한 자의 도전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공의가 실현되기 위한 기도이다.

신약 시대에 사는 성도들에게는 구약 시대의 저주시나 기도가 가능한가? 문제가 야기된다. 예수님 혹은 스데반처럼 원수를 사랑하고 축복해야 되지 않는가? 질문을 제기할 수 있다.

우리가 저주해야할 대상은 그들의 인격 자체가 아니라 그들의 행위 그들을 사로잡고 있는 악한 세력에 대한 저주이다. 그들 자체가 죽어지는 저주라기보다 그들이 악한 일에서 떠나고 그들의 추구하는 헛된 도모가 패망하도록 간구하는 기도이다. 그러므로 악한 세력과 영에 대하여 망하게 해 달고 저주 기도를 할 수 있으나 그 대상을 사람에게 악한 감정을 가지지 않도록 유의하여야 할 것이다.

 

4.2.2. 자기 꾀에 빠지게 하소서(10절)

다윗은 앞서 악인을 정죄한 결과로 그들이 스스로 자기 꾀에 빠지길 간구하고 있다. 다윗은 원수를 보복하려 하지 않고 하나님께 맡겼다. 하나님께서는 공의로 판단하셔서 그들을 벌하실 것이다. 하나님의 벌은 공의롭고 철저하며 사람의 보복보다 훨씬 더 무섭기 때문이다.

‘빠진다’는 ‘떨어진다’. ‘파멸되다’(시 20:8; 27:2; 36:12)는 뜻이다. 이 뜻은 ‘자가들의 꾀가 자신들의 패망을 가져 오게 하소서’ 라는 뜻이다. 악인들이 악을 심었으니 그들 자신들이 심은 대로 거두게 하시고, 원수들이 악한 꾀로 하나님의 세우신 자를 괴롭게 하였으니 자신들의 꾀에 스스로 빠져서 멸망되기를 간구하고 있다.

이 기도의 장면은 마치 모르드개를 죽이려고 50규빗이나 되는 높은 장대에 세운 하만이 오히려 그 장대에 자신이 걸려 죽게 되는 것을 연상케 한다(에 5:14; 7:10).

다니엘서에 보면, 악한 자들은 선한 다니엘을 사자굴에 던져 죽이려고 한 법령을 제정케 하였으나 그들과 그 처자들을 거기에 던졌다(단 6:7, 24). 하나님께서는 악인들이 스스로 자기 꾀에 빠져, 자기가 행한 대로 공의의 심판을 받게 되었다.

“아무도 자신을 속이지 말라 너희 중에 누구든지 이 세상에서 지혜 있는 줄로 생각하거든 어리석은 자가 되라 그리하여야 지혜로운 자가 되리라”(고전 3:18).

“세상 지혜는 하나님께 어리석은 것이니 기록된바 하나님은 지혜 있는 자들로 하여금 자기 꾀에 빠지게 하시는이라 하였고”(고전 3:19)

“주를 두려워하는 자를 위하여쌓아 두신 은혜 곧 주께 피하는 자를 위하여 인생 앞에 베푸신 은혜가 어찌 그리 큰지요, 주께서 그들을 주의 은밀한 곳에 숨기사 사람의 꾀에서 벗어나게 하시고 비밀히 장막에 감추사 말다툼에서 면하게 하시리이다”(시31:19-20).

 

4.2.3. 그들을 쫓아내소서(10절)

다윗은 그들을 ‘쫒아 내어 달라’고 호소하고 있다. ‘쫓아내다’는 것은 ‘추방하다’. ‘흩어 버리다’. ‘몰아내다’ 등으로 해석된다. 그들의 허물 때문이다. 허물은 하나님의 주권에 대한 반역 행위이다. 다윗은 이미 5절에 악인은 하나님 앞에 설 수 없다고 단언하고 선포하였다.

하나님께 주권과 하나님이 세우신 나라와 세우심을 받은 자에 대한 반역은 곧 하나님의 주권과 하나님이 이름에 대한 악한 도전 행위이다. 그래서 다윗은 그들이 포로로 잡혀가거나 뿔뿔이 흩어지거나 하나님 앞에서 쫓겨나서 그들이 감당했던 직책 등을 상실케 해달라고 기도했다.

신약 시대의 교회와 성도들에게도 일어날 수 있는 일련이 일들이다. 교회와 주의 성도들과 사역자들에 대한 핍박, 역행, 도전 등이 바로 그들의 세우신 주님의 이름과 주권에 대한 도전과 반역임을 알 수 있다.


 

5. 의인이 받는 복(9-10절)

[개역 개정] 11. 그러나 주께 피하는 모든 사람은 다 기뻐하며 주의 보호로 말미암아 영원히 기뻐 외치고 주의 이름을 사랑하는 자들은 주를 즐거워하리이다 12. 여호와여 주는 의인에게 복을 주시고 방패와 같은 은혜로 그를 호위하시리이다

[표준새번역] 11. 그러나 주께로 피신하는 사람은 누구나 기뻐하고, 길이길이 즐거워할 것입니다. 주의 이름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주님 앞에서 기쁨을 누리도록 주께서 그들을 지켜 주실 것입니다. 12. 주님, 주께서는 바르게 살아가는 사람에게 복을 베풀어 주시고, 큼직한 방패처럼, 그들을 은혜로 지켜 주십니다.

의인은 주께 피하는 사람, 주의 이름을 사랑하는 사람으로 주께서 그들에게 주시는 5가지 복을 언급하고 있다.

 

5.1. 기쁨을 얻는 복(11절)

다윗은 억울하게 고소를 당하고 위기를 직면했을 때, 하나님을 피난처로 삼는 의인이다(시64:1). 의인은 여호와로 인하여 즐거워하며, 그에게서 기쁨을 찾고(시16:11), 안식과 평안을 누린다. 하나님께서 의인의 기업(시16:5)이며 소망이며 전부(시17:15: 73:25)가 되기 때문이다.

의인을 ‘주님의 이름을 사랑하는 자’이다. 주님과 친밀한 언약관계를 맺는 자들이다. 주님의 이름을 아는 것과 주님의 이름을 사랑하는 것은 시편에 나타나는 평행구절이다. 이름은 속성을 나타낸다. 하나님의 속성인 그분의 거룩, 의, 자비, 긍휼 등을 알고 체험한 자를 의인으로 통칭한다.

주께 피하는 사람, 주님의 이름을 사랑하는 자 곧 의인은 주님께서 특별하게 보호하시고 복을 주신다고 고백하고 있다.

다윗은 원수들의 핍박 속에서도 하나님으로 인해 기뻐한다. 그는 자신뿐 아니라, 하나님께 피하는 자가 다 기뻐하며 영영히 기뻐 외치며 주의 이름을 사랑하는 자들은 주를 즐거워할 것이라고 말한다.

사도 바울도 데살로니가전서 5:16에서 “항상 기뻐하라”고 말했고, 빌립보서 4:4에서도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고 하였다.

 

5.2. 보호를 얻는 복(11절)

여기에 사용된 ‘보호’는 언약궤 덮개인 속죄소를 그룹천사가 날개를 펴서 ‘덮는’ 모습을 묘사할 때 사용되었다(출25:20; 37:9; 왕상 8:7; 대상 28:18). 그룹 천사들이 하나님의 임재 앞에서 속죄소를 날개를 펴서 보호하듯이 의인들을 보호해 주신다는 놀라운 의미를 담고 있다.

주님이 보호는 완벽하며 그 어떤 원수도 상황도 헤칠 수 없다(요 10:28; 롬8:31-39: 시 118:6-7). 하나님의 보호하심은 ‘가려짐’(출 40:3, 시 140:7), ‘덮어줌’(왕상 8:7; 욥40:22), ‘둘러쌈’(욥3:23), ‘막아줌’(욥38:8; 나2:5) 등을 뜻한다.

다윗은 또한 그 보호하심을 "돌로 높은 성벽을 만들어 요새화 시킨 견고한 성(城)"으로 비유 하였다. 그 성(城)은 어떠한 적의 공격 앞에서도 난공불락이기 때문이다.

다윗은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자였지만 사람들에게는 많은 미움을 받았다. 하지만 그는 주변 사람들로부터 미움을 받고 있을 때 하나님을 찬양하는 시(詩)를 지었다.

“나는 주의 힘을 노래하며 아침에 주의 인자하심을 높이 부르오리니 주는 나의 요새이시며 나의 환난 날에 피난처심이니이다 나의 힘이시여 내가 주께 찬송하오리니 하나님은 나의 요새이시며 나를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이심이니이다”(시 59:16-17).

"내가 찬송 받으실 여호와께 아뢰리니 내 원수들에게서 구원을 얻으리로다 사망의 물결이 나를 에우고 불의의 창수가 나를 두렵게 하였으며 음부의 줄이 나를 두르고 사망의 올무가 내게 이르렀도다 내가 환난 중에서 여호와께 아뢰며 나의 하나님께 아뢰더니 저가 그 전에서 내 소리를 들으심이여 나의 부르짖음이 그 귀에 들렸도다."(사무엘하 22:4~7).

베드로 사도는 성도들의 보호하심의 근거는 바로 믿음이라고 밝히고 있다. 벧전 1:5 “너희는 말세에 나타내기로 예비하신 구원을 얻기 위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능력으로 보호하심을 받았느니라’.

 

5.3. 즐거움을 얻는 복(11절)

이것은 한나가 기도 응답을 받은 후, 그녀의 마음이 즐거워했을 때(삼상2:1)에 같은 의미이다. 흑암 속에 광명한 아침의 빛을 얻을 때 솟아나는 기쁨처럼 위기일발의 상황 속에서 안전과 평화를 얻게 될 때, 깊은 영혼의 내면 속에 피어오르는 기쁨과 즐거움이다.

주님을 참으로 사랑하는 성도는 세상의 것에 즐거워하기보다 주님으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는 자이다. 웨스터민스터 소요리 문답 제 1문에 사람의 제일 되는 목적이 주를 인하여 즐거워하는 것이라고 밝히고 있다.

베드로와 사도들이 전도하다가 채찍을 맞았음에도 불구하고 주님의 이름을 위하여 능욕당하는 것을 합당한 것으로 여기고 기뻐했던 사실을 볼 수 있다(행5:41). 주님을 사랑하는 일 그 자체가 기쁘고 즐거운 일이기에 주를 위한 사랑의 수고가 아무리 고되고 괴로워도 즐거이, 기꺼이 감당할 수 있는 것은 주님이 세상이 주는 즐거움과 비교할 수 없는 참된 평강과 놀라운 즐거움을 주시길 때문이다.

 

5.4. 복을 얻는 복(12절)

원문에는 “여호와여, 의인을 축복하는 분을 바로 주님입니다”라고 되어 있다. 하나님을 의지 하고 살아가는 다윗은 고난과 역경 속에서도 주님께서 자신에게 복을 베풀어 주실 것에 대한 확고한 믿음을 고백하고 있다. 고난과 시련의 상황 속에서도 의인에게는 늘 주께서 함께 하시는 복이 있다.

여기에 사용된 ‘복’(히, 바렉)은 하나님께서 의인들의 영과 육에 은혜가 충만케 하셔서 삶의 활력과 생기와 기쁨이 넘치게 하신다는 의미이다. 여기에 사용된 복이 창세기 1장 천지창조 시, 그리고 신명기 28장에 언급된 복과 같은 단어임에 주목할 수 있다.

‘의인’에 대한 다양한 표현들이 있다. ‘주께 피하는 자들’, ‘주로 인하여 기뻐하는 자들’, ‘주의 이름을 사랑하는 자’들 등이다. 의인의 반역에 선 자들은 언제나 주님께 피하는 자들이고 주님의 이름을 사랑하고 주님으로 인하여 기뻐하는 자들이다.

의인 하박국은 모든 소출이 얻지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여호와로 인하여 기뻐했다(합3”16-18-19). 그가 바로 의인이요 그가 의인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합2:4)는 놀라운 로마서 1:16-17 단서를 제공하였다.

 

5.5. 방패로 호위를 얻는 복(12절)

방패는 하나님의 보호를 의미한다. 방패(shield)는 히브리어의 ‘마겐’으로, 적의 공격을 방어하는 무기(몸의 앞뒤와 전신을 가릴 수 있는 원통형 방패와 머리만을 가릴 수 있는 작은 방패가 있음)를 가리킨다.

"여호와여 나와 다투는 자와 다투시고 나와 싸우는 자와 싸우소서 방패와 손 방패를 잡으시고 일어나 나를 도우소서."(시편 35:1-2)

“여호와여 주는 나의 방패시요 나의 영광이시요 나의 머리를 드시는 자니이다.”(시편 3:3).

 

여기에 언급된 방패는 온몸을 막기기 충분한 방패를 일컫는다. 주님의 은혜로 호위해 주시고 주님의 날개로 보호해 주시고, 주님의 방패 전신을 감싸주신다고 철저한 보호를 확신하고 있다.

결론을 맺으면 다음과 같다. 다윗은 원수들의 무차별한 공격을 받았다. 그러나 그는 좌절하거나 실망하지 않고 고난 속에 하나님만 의지하고 기도를 드렸다. 그는 철저히 하나님을 신뢰하며 하나님의 공의를 구하여 하나님의 응답의 역사를 체험하는 아침에 기쁨으로 찬양과 감사를 드리고 있다.

특히, 의인된 그는 하나님의 이름을 사랑하고 의지하면서 주님께 믿음으로 나아갈 때, 주님이 주시는 기쁨, 보호, 은총, 승리를 체험함을 고백하고 있다. 우리의 삶의 현장에서 시시때때로 당면한 억울한 일, 고통스런 일, 난공불락의 문제들을 만날 때, 의인 다윗처럼 주님께 피하고 주님의 이름을 사랑하고 그 이름으로 부르짖을 하나님께서 이끌어주시는 승리와 보호, 은총과 기쁨을 체험하는 삶이되길 간구한다.

 


 

[시편 5편으로 드리는 영한 기도문]

 

주님, 저의 신음 소리를 들으소서

주님, 저의 탄식 소리에 귀를 기울이소서

저의 왕 되신 주님, 아침에 드리는 기도를 응답하소서

Lord, hear my groaning

Lord, listen to my groaning

Lord, my King, answer my prayer in the morning.

 

저의 억울한 사정을 주께서 판단하여 주소서

주님은 악인을 미워하시고 그들의 죄악을 판단하십니다.

May the Lord judge my unfair situation.

The Lord hates the wicked and judges their sins.

 

주께서 원수들의 입, 마음, 목구멍, 혀를 질책하여 주소서

주님 그들 스스로가 그들의 꾀에 빠지게 하소서

Lord, rebuke the mouth, heart, throat, and tongue of my enemies.

Lord, let them fall into their schemes.

 

주님, 저는 주님의 이름을 사랑하고 주님께 피합니다.

주님의 원수의 목전에서 저를 감싸주시고 큰 방패로 막아주셔서

기뻐하며 찬양하며 즐거움을 더해지는 은혜를 주소서, 아멘

Lord, I love your name and take refuge in you.

Lord, protect me from the sight of my enemies and keep safe me with a great shield.

Give us the grace to rejoice, praise, and increase our joy, Am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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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벤허의 세 가지 교훈

AD 26년 예루살렘은
로마제국의 통치하에 있었는데,
당시 예루살렘에
유다 벤허(Judah Ben-Hur)가
살고 있었습니다.

벤허는 당대 제일가는
유대 귀족이었습니다.

어느 날
로마의 지배하에 있던
이스라엘에 새로운 총독과
그를 보좌하는 사령관이 부임했습니다.
그런데 그 사령관은
다름 아닌 벤허의 옛 친구
메살라였습니다.

어린 시절 둘도 없는 친구였지만,
로마제국의 사령관인 메살라는 통치자로,
벤허는 억압받는 시민으로 살다 보니
첨예하게 대립했습니다.

그러던 중
신임 총독의 취임 행렬이 있었는데,
베란다에서 오빠 벤허와 함께
이를 구경하던 여동생이
아래를 내려다 보는 순간
오래된 기왓장이 떨어졌습니다.

이 사고로 말이 놀라 뛰면서
신임 총독이 낙마하는
대형 사고가 발생했습니다.
사실 그 누구의 잘못도 아닙니다.
오래된 기왓장이
스스로 떨어져 나간 사고였습니다.
그런데 출세욕에 눈이 먼
친구 메살라는 현장을 검증하고,
이들이 아무 죄가 없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이 기회에 유대인들에게
본때를 보여 주려고,
절친인 벤허의
계획 범행으로 몰고 갔습니다.
그리곤 아주 가혹하게 처벌했습니다.

메살라는
벤허의 어머니와 누이동생은
지하 감옥에 가두어 버렸고,
벤허는 노예로 팔아
갤리선에 노를 젓는
형벌을 내렸습니다.
갤리선은
로마시대에 노예나 죄인들을
쇠사슬로 묶어서,
노를 저어 전투를 하는
일종의 전투선입니다.
그렇게 벤허는 두 손이 묶여
갤리선으로 끌려 가던 중에
나사렛을 통과하게 되었습니다.

우물가에서 물을 먹는데,
로마 군인들은 유독
벤허에게는
물을 먹지 못하도록 금지했습니다.
목말라 쓸어져
죽을 지경에 이른 벤허에게
한 유대인이 와서 물을 먹여 주었는데,
결국 벤허는 그 물을 마시고
다시 힘을 얻었습니다.

걷고 또 걸어서
모진 고생 끝에
벤허는 갤리선을 탔고,
배의 가장 밑바닥에서
쇠고랑을 발에 차고
노를 젓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그를 담당하는 담당관은
유독 벤허에게 심한
채찍질을 가했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일이 생겼습니다.

그것은 복수심에 불타오른
벤허는 어려우면 어려울수록
더욱 더 강해졌고,
노 젓기를 통해서
그의 근육은 더욱 더 단단해졌고,
고통을 이겨내느라
눈은 더욱 더 빛났고,
끝까지 살아 남기 위해
몸부림을 치다 보니
강철 멘탈로 더욱 더 강해졌습니다.

그렇게 벤허는
1년이면 죽어 나간다는
갤리선에서 3년 동안이나
살아 남았습니다.
그런 벤허를
함대 사령관인 아리우스 제독은
눈여겨보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전쟁이 벌어질 때
벤허의 다리에 묶인 쇠사슬을 풀어주고,
치열한 해상전이 펼쳐지면서
전투 중에 아리우스 제독이
바닷물에 빠졌습니다.
이를 본 벤허는 지체하지 않고
바닷속으로 뛰어들어
아리우스 제독을 구했습니다.
이를 통해 벤허는
아리우스 제독의 총애를 받고,
시간이 흘러
그의 양아들이 되어
로마 귀족으로 신분 상승을 이루었습니다.

이렇게 인생 반전을 이룩한
벤허는 원수를 갚기 위해
메살라가 출전한
로마 최대 이벤트였던
전차 경주에 출전합니다.
메살라는 원수지간이 된
벤허를 죽이려고
전차 바퀴에 칼날을 달아
상대 전차를 갈아 버립니다.

그러나 벤허는 과거에 허약해 빠진
유대 귀족이 아닙니다.
노예선에서 수년 동안 갈고 닦은
강인한 체력과 멘탈로 무장한 벤허는
메살라와 한판 승부를 벌리는데,
총 아홉 바퀴를 도는
거대한 전차 경기장에서
서로 채찍으로 치고
칼날로 가는 사투를 벌입니다.
결국 벤허를 죽이려고
만든 전차 바퀴에 오히려
메살라가 치어 치료를 받다 죽는
비참한 최후를 맞이합니다.

그 후 벤허는
수소문 끝에
어머니와 누이 동생을 찾았는데,
그들은 당시에 모든 사람이
피하는 문둥병에 걸려
너무나도 비참한 삶을 살고 있었습니다.
이런 모습을 보고
충격과 슬픔에 빠진 벤허는
마지막 희망을 걸고
이들을 데리고 기적을 행한다는
예수님을 찾아갔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 언덕을 오르고 있었습니다.
무거운 십자가를 지고 가는
예수님께서 쓰러지자,
벤허는 황급히 물을 떠다가
주님에게 먹이려고 얼굴을 보았습니다.

그 분은 다름 아닌 자신이
나사렛에서 목이 말라 쓰려졌을 때,
자신에게 물을 먹여 준 분이었습니다.
그렇게 벤허는 십자가를 지고 가는
예수님을 따라 골고다 언덕에 올라갔습니다.

벤허는 그곳에서
예수님의 마지막 메시지를 듣게 되는데,
그것은
'아버지! 저들을 용서하옵소서!
저들은 자신이 무엇을 하는지 모릅니다.'

이 모습을 보면서
그 동안 복수에 사로잡혔던 벤허는
완전히 새 사람으로 거듭났습니다.

더욱 더 놀라운 사실은
예수님께서 숨을 거두자
하늘에서 천둥번개가 치면서,
벤허의 어머니와 누이동생의
문둥병이 깨끗이 치유되는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이 작품은
루 월리스(1827~1905)의 소설
'벤허'를 영화화한 벤허의 스토리입니다.

소설로 쓰여진 원작 벤허는
1800년대 말에
성경 다음으로 많이 팔렸고,
이후 50년이 넘는 동안
베스트셀러로 사랑을 받았고,
1900년대부터 2010년대 까지
무려 4번이나 영화로 만들어졌습니다.

1959년에 만든 '벤허'는
아카데미 역사상 최초로
11개 부문에서 상을 휩쓸었습니다.
저는 벤허를 여러번 보면서
왜 이렇게 이 작품이
많은 사람에게 사랑과 관심을 받았는지
궁금했습니다.

이 작품에는
세 가지 중요한 메시지가 있습니다.

첫째, 아무리 어려워도 목숨 걸고
노력하는 자는
인생 역전이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삶의 노력에는
속임수가 있을 수 없다!'
한 마디로 노력한 만큼
그 대가를 받는다는 것입니다.

벤허는
노예선에서 쇠고랑을 차고
노를 저으면서
오히려 몸이 더 강해졌고,
살기 위해 몸부림치면서
강철멘탈이 되었습니다.
지금 어렵고 힘들다고
모두 다 잘못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가 노력하면 오히려 더 잘되는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일 수 있습니다.

시편 119:71
고난 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둘째, 물 한 잔이라도 섬기는 삶을
살라는 것입니다.
벤허라는 영화 속에
예수님은 딱 두 장면 등장합니다.
한 장면은 예수님께서
벤허에게 말없이
물을 먹여 주는 장면이고,
또 한 장면은
벤허가 예수님께 물을 먹여 주는 장면입니다.

이것의 의미는 신앙은 결코
이론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신앙은 삶이고,
신앙은 구체적인 행동입니다.

야고보서 2:26
영혼 없는 몸이 죽은 것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니라!

그러니 목마른 자에게
물 한 잔이라도 성심껏 섬기는
삶을 사십시오!

셋째, 기적은 만남의 축복으로부터
온다는 것입니다.

벤허는
옛 친구인 메살라를 잘못 만나
한 순간에 인생 종쳤습니다.
그러나
벤허는 함대 사령관인
아리우스 제독의 눈에 들어
그의 양아들이 되었고,
예수님을 만나
복수에 사로잡힌 인생에서
용서하고 사랑하는
인생으로 거듭났고,
벤허의 어머니와 여동생은
예수님을 만나
문둥병이 치유되는
기적을 체험했습니다.

그렇습니다.
기적은 만남의 축복으로부터 옵니다.
만남의 축복을 소중히 여기십시오!

사순절 동안의 기도입니다.

주님!
인생은 한 편의 영화입니다.
이왕이면 내 인생에
어떤 어려움에도 굴복하지 않고
노력해서 인생 역전을 이루게 하옵소서!

물 한 잔이라도 섬기는 삶을 살게 하옵소서!

기적은 만남의 축복으로부터 옵니다.
2025년 사순절을 시작하면서
하나님과 예수님과 성령님과
만남의 축복을 베풀어 주시옵소서!
메살라처럼 나쁜 친구가 아니라,
좋은 사람을 만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대속죄(代贖罪) 

'기름때 묻은 원숭이의 미국 이민 이야기'
송석춘

공군 대위로 전역하고  현대자동차에 입사하여  차장으로 고속 승진했습니다.
당시 대졸 초임이 2만 원일 때  자신은 15만 원을 받았습니다.
좋은 직장을 퇴사하고 아들 둘, 딸 셋을 데리고 미국으로 이민왔습니다.
그런데 중학교 2학년인 큰 아들이 교도소에 가게 되었습니다.
자식을 잘 키우겠다고 이민 왔는데 아들은 학교에서 왕따를 당했고,
미국 아이들에게 놀림감이 되었습니다.
그 때마다 아들은 반격을 가했고,
이 때문에 교장에게 여러 차례 불려가 체벌을 받았습니다.
불만이 쌓인 아들은 어느 휴무일 이틀 동안  다른 미국인 친구와 함께
학교에 들어가 건물 이곳저곳을 쑥대밭으로 만들었습니다.
이 사건은 지역신문 1 면에 났고 온 가족은 좁은 응접실 구석에 모여 앉아 통곡했습니다.
“한국인의 얼굴에 먹칠했다.”는 비난은 기본이었고,
등하교 때  “그 집을 피해 가라.”는  한인들도 있었고,
“같은 교육구 학교에  내 아이를 보낼 수 없다.”며
전학을 시키는 부모도 있었습니다.
나이 젊은 어떤 한인은 면전에서 “당신 자식 교도소에 갔다며?” 하고 빈정거리며 말했습니다.
겨우겨우 섬기던 교회에서 조차도 성도들의 눈길이 예사롭지 않아 출석을 끊었습니다.
교장은  “세상에 이렇게 학교 건물을  때려 부순 사건은 처음입니다.
카운티(County: 자치주) 내의 어떤 학교에도 전학이 불가합니다. 안녕히 가십시오.”라고 했습니다.
그는 '아들 죄가 바로 내 죄' 라 생각하고 속죄를 위해 매주 주말에 온 가족을 동원하여
학교 청소를 하겠다고 했고, 교장은 '별난 아버지'라는 표정으로 허락했습니다.
이 별난 행동은 나중에 다시 한 번 플로리다 주 주류 사회를,
아니 전 미국을 흔들었습니다.
교도소에 간 중2 아들의 속죄를 위해  부부가 유치원과 초등학교에
다니는 네 아이와 함께 주말마다 학교에 나와 청소하는 장면을,
운동장을 청소하는 광경을 AP통신 기자가
“가족의 명예와 아들을 위해 부모는 모른 채 하지 않았다.”는
제하의 기사를 보도했습니다.
기사에는 “내 아들이 죄를 지었으면 내가 죄를 지은 것이다.
내 아들이 저지른 행위에 대해  변상은 물론 어떤 일이든 하겠다.”
라는 그의 말이 들어 있었습니다.
美 전역의 신문들이 AP통신 기사를 받아쓰면서
아들이 다니는 학교에는 며칠 만에 수백 통의 편지가 왔습니다.
변호사비로 쓰라며 5 불, 10 불 짜리 수표와 현찰을 동봉하기도 했습니다.
미국의 신문들은 아버지의 '아들 죄가 바로 내 죄' 라는 고백을 들어
“미국인 부모들도 본받아야 한다.” 라거나
“미국 교육계도 유교적 가족관계에서 이뤄지는 독특한 교육 철학을 배워야 한다.”
라는 논지의 기사와 논평을 내보냈습니다.
며칠 후에 반가운 소식이 가족에게 전달됐습니다.
법정에서 아들을 방면한다는 소식이었습니다.
교육청에서는 다니던 학교로는 되돌아 갈 수 없지만,
멀리 떨어진 다른 학교에는 갈 수 있다는 서한도 보내왔습니다.
그 후 말썽꾼 아들은 변하여 센트럴 플로리다 대학교(UCF) 학사와
플로리다 텍(FIT) 석사 학위를 받은 후
미 우주항공국(NASA) 산하 방산업체에 근무하며 고위 우주선 탑재 전문가가 되었습니다.
우주선을 쏘아 올릴 때 수십 명이 달라붙어 점검하는데
그 가운데 최고참으로 일하고 있습니다.
미국은 물론 전 세계에서 오는 'VVIP(Very Very Important Person)' 들에게
직접 브리핑하는 유일한 한국계라고 합니다.
'기름때 묻은 원숭이의 미국 이민 이야기'라는 책을 쓴 송석춘 씨 이야기입니다.
큰아들 송시영 씨가 사고를 쳤을 때만 해도
“아이고 저놈이 자라서 뭐가 될까?”
하고 걱정이 태산이었는데,
지금은 가장 가까운 곳에 살면서 자신이 좋아하는 낚시를
시도 때도 없이 함께 가 준다고 합니다.
선트러스트 은행 부사장으로 일하고 있는 큰딸도 명절 때마다
제법 큰 용돈을 보내주고 있답니다.
한 아버지의 대속(代贖)으로 사고뭉치 아들이 새로운 삶을 살게 되었고,
자녀들 모두 스스로 제자리를 찾아 우뚝 일어선 아름다운 가정사 입니다.
세상은 누군가를 위해 대속(代贖) 해 주지 않습니다.
그러나 아버지는 사랑하는 아들을 위해
대속(代贖) 할 수 있습니다.
내 몸처럼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여기저기에서 많이 접했던 글이겠지만
현재 우리나라 안에서는
아들이 상습도박과 매춘으로 신문방송이 도배를 해도 "아들은 남이다."고 하는 대통령되겠다는 僞人이 있으니 기가찰 노릇입니다.


이해(理解)와 배려(配慮)

다스릴 이(理), 풀 해(解)
짝지을 배(配), 생각할 려(慮)


이해와 배려

일본 도쿄에
이상한 식당이 있습니다.

시키지도 않은
엉뚱한 메뉴가 나오는
식당입니다.

라면을 시켰는데
우동이 나오고,
햄버거를 시켰는데
만두가 나오곤 합니다.

이래 가지고 어떻게 돈을 버나…
주문도 제대로 못받으면서
어떻게 장사를 하나
요즘 같은 세상에서는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어이 없는 식당입니다.

헌데
놀라운 것은
엉뚱한 음식을 가져다 줘도
화내는 손님이 한 명도 없고,

어느 누구도
불평하지 않고
주는 대로
감사히 먹는다는 사실입니다.

더군다나
이 이상한 식당은
사람들이 줄을 서서
기다릴 정도로 유명한
인기 맛집입니다.

이 어이 없는 식당이
유명 맛집이 된 이유는 무엇일까요?

이 식당을 찾는 고객들은
"바로 여기서만의
특별한 이해와 배려와
사랑이 넘치는
음식을 먹을 수 있다"고
이구동성으로 말합니다.

이 식당이 특별한 이유는
바로
‘아르바이트생들’때문입니다.

이곳의 아르바이트생들은
모두 여섯 명인데
'치매에 걸린 할아버지 할머니들’입니다.

이 분들은 최선을 다해
웃음을 잃지 않고
일하려고 노력합니다.

주문을 받아가지만
음식을 가져다 줄 때
누가 주문했는가도 헷갈리고
그래서 주문과는
전혀 다른 음식을 가져다 줍니다.

식당을 처음 방문한 한 손님은
"좀 당황했죠.
정말 주문한 것이 제대로 나올까,
두근거렸어요"라고 말합니다.

많은 자원 봉사자와
더불어 운영되고 있는
이 식당 한 관계자는

“어르신들이 비록 치매일지라도
아직 사회구성원의 일부라는
소속감을 주며,
식당을 찾는 고객들에게도
이 같은 인식을 공유하기 위해
운영하게 됐다"고 말합니다.

그렇습니다.
이 식당의 성공 비결은
바로
'이해와 배려'인 것입니다.

식당을 찾은 손님들은
주문한 음식이 안 나오고
다른 음식이 나와도,
가끔씩 물을 쏟아
바지나 치마가 적셔도
화를 내거나
얼굴을 찡그리지 않습니다.

알바생들이 조금 실수하고,
조금 느리고,
조금 서툴러도 괜찮습니다.

이곳을 찾는 손님들
모두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할머니들은
우리의 어린 시절,
모든 실수를 보듬고 길러주신
우리의 '어머니'이시기 때문입니다.

이 할아버지들은
우리의 어린 시절,
우리들이 공부하고
자랄 수 있도록 희생하신
우리의 ‘아버지’이시기 때문입니다.

이해와 배려의 의미를 깨닫게 하는
오늘입니다.






오늘 내가 슬픔을 넘어 기쁜 이유 


리차드 위트컴 장군(Richard S. Whitcomb)과
그의 부인 한묘숙 여사의
전설적인 실화 이야기다.

6. 25 한국전쟁에 참전한 미군 장성,
그는 당시에 미군군수 사령관이었다.

1952년 11월 27일,
부산 역 건너편 산의 판자촌에
큰 불이 났다.

판자집도 변변히 없어
노숙자에 가까운 생활을 하던 피난민들은
부산 역 건물과 인근에 있는
시장 점포 등이 유일한 잠자리 였는데
대화재로 오갈 데가 없게 됐다.

입을 옷은 커녕 먹을 것조차 없었다.
이때 위트컴 장군은
군법을 어기고
군수창고를 열어
군용 담요와 군복,
먹을 것 등을 3만 명의
피난민들에게 골고루 나눠 주었다.
 
이 일로 위트컴 장군은
미 연방의회의 청문회에 불려 갔다.
의원들의 쏟아지는 질책에
장군은 조용히 말했다.

"우리 미군은 전쟁에서
반드시 이겨야 하지만,
미군이 주둔하는 곳의 사람들에게  
위기가 닥쳤을 때 그들을 돕고 구하는 것
또한 우리의 임무입니다.

주둔지의 민심을
얻지 못하면
우리는 전쟁에서
이길 수 없고,
이기더라도 훗날
그 승리의 의미는
쇠퇴할 수 밖에 없을 것이기
때문 입니다" 라고 답하자,

의원들은 일제히 기립,
오래도록 박수를 쳤다.

다시 한국으로 돌아 온 뒤
장군은 휴전이 되고도 돌아가지 않고,

군수기지가 있던 곳을
이승만 정부에 돌려 주면서

"이곳에 반드시 대학을세워달라"
고 청하였다.
부산대학이 설립된 배경이다.

그러나 부산대 관계자도,
교직원도, 졸업생도 재학생도
이런 역사적 사실을 거의 모른다.

그리고 장군은 메리놀 병원을 세웠다.

병원기금 마련을 위해
그는 갓에 도포를 걸치고
이 땅에 기부문화를
조성하기 위해 애썼다.

'사람들은 장군이 체신없이
왜 저러느냐'고 쑤근댔지만 개의치않았고
온 맘과 힘을 쏟았다.

전쟁 기간 틈틈이 고아들을 도와온
위트컴 장군은
고아원을 지극 정성으로 운영하던
한묘숙 여사와 결혼했다.

위트컴 장군이 전쟁 고아들의
아버지로 불리는 연유다.

그리고 그는 부인에게 유언을했다.

''내가 죽더라도 장진호 전투에서
미처 못 데리고 나온 미군의 유해를
마지막 한 구까지  찾아와달라''고...

부인 한묘숙 여사는
그 약속을 지켰다.

북한은 장진호 부근에서  
길죽길죽한 유골만 나오면
바로 한묘숙 여사에게로  가져왔고,

한 여사는 유골 한쪽에
300불씩 꼬박꼬박 지불했다.

그렇게 북한이   한 여사에게
갖다 준 유골 중에는
우리 국군의 유해도 여럿 있었다.

하와이를 통해 돌려받은
우리 국군의 유해는 거의 대부분
한 여사가 북한으로부터
사들인 것들이다.

한 여사는 한 때
간첩 누명까지 쓰면서도
굴하지 않고 남편의 유언을 지켰다.
남편만큼이나 강한  여성이었다.

장군의 연금과 재산은
모두 이렇게 쓰였고,

장군 부부는 끝내 이 땅에
집 한 채도소유하지 않은 채
40년 전에 이생을 달리 했다.

부산 UN공원묘원에 묻혀 있는
유일한 장군 출신 참전용사가
바로 위트컴 장군이다.
끝까지 그의 유언을 실현한
부인 한묘숙 여사도
장군과 합장되어 있다.

이 땅에는  
이러한 장군을 기리는 동상
하나가 없다.

부산에도,
서울에도,
아니 부산대학교에도
메리놀병원에도 물론 없다.

그런데 오늘,
장군이 떠난지 꼭 40년 만에
뜻있는 사람들이 모여
위트컴 장군 조형물을 만들기로 결의했다.

늦어도 너무 늦었지만,
국가 예산 말고,
재벌 팔을 비틀지도 말고,

70여 년 전 수혜를 입었던
피난민 3만명,
딱 그 수만큼
1인당 1만원씩 해서
일단 3억을 마련하기로 했다.

브라보 !

민주주의의 생명은 참여다.
보은도 십시일반,
참여해야 한다고.
오늘 그 첫 결의를 했다.

1만원의 기적을 이루어보자.

70년 전,
전쟁고아들을 살뜰하게 살피던
위트컴 장군을 생각하면서,

메리놀 병원을 세워 병들고
아픈 이들을 어루만지던
장군의 손길처럼

대학을 세워 이 땅에
지식인을 키우려던 그 철학으로,

부하의 유골 하나라도
끝까지 송환하려고 했던
그 마음을 생각하며

각자 내 호주머니에서
1만원씩 내보자.
딱 커피 두 잔 값씩만 내보자.

1만원의 기적이 한국병을
고칠 수도 있지 않을까 ?

설마 이 땅에 1만원씩 낼 사람이
30만 명도 안 되지는 않겠지 ?
라고 생각하니
또 내 마음은 두둥실,
하늘을 날 것만 같다.

그리고 정부는
장군에게 무궁화
훈장을 추서한다는 소식이다.
너무 늦었지만 감사한 일이다.

정말 기쁜 날이다.

팝콘이 탁탁 터지듯이
그렇게 내 온 몸의 세포들이
기쁨에 겨워 꿈틀거린다.

에스프레소 덕분인가?
까뮈 엑스오 덕분인가?

이제 나는 죽어도
한묘숙 여사를 만나 웃으며
두 손을 잡을 수 있게 됐다.

브라보 !

부산출생
박선영  
국제대학교 교수의 페이스북 글입니다.



청어 / 쳥년처럼 살아가는 어르신


청년처럼 사는 어르신
나이 80· 90· 100세(歲)가 되어도
청년(靑年)처럼 사는 어르신을
줄여서 ‘청어’라고 한다.
청어는 나도 모르게
존경심(尊敬心) 우러나는 어르신으로
긍정적(肯定的) 열정(熱情)과
미래(未來) 호기심(好奇心)이 가득하다.
‘청어 DNA’를 심고 가꿔야
내 마음속 청어 떼가 뛰논다고 생각한다.
건강(健康) 백세(百歲)라는 말이
실감나는 세상(世上)이다.
여러분이 잘 아는
철학자(哲學者) 김형석 교수(敎授)님은
올해 104세 이신데
열심(熱心)히 강의(講義)하고
신문(新聞) 칼럼을 쓰신다.
요즘도 서울 뿐만 아니라
지방(地方)까지 강의가 있어
KTX를 타러 서울역에
자주 가신다고 한다.
100세가 넘으신 분이
서울에서 저녁 강의를 하고
곧바로 열차(列車)로 포항에 가서 잠깐 주무시고
조찬(朝餐) 강의를 하신다니
저절로 감탄사(感歎詞)가 나온다.
청어처럼 사는
또 다른 사람은
이길여 가천대학교 총장(總長)이다.
지난해 말에 ‘길을 묻다’ 라는
자전적 책을 내셨는데
큰 화제(話題)가 됐다.
시골 소녀(少女)가 큰 뜻을 품고
서울대학교 의과대학에 가고
미국 유학(留學) 후 귀국(歸國)해
길병원을 열어 의술(醫術)을 펼친 이야기부터
가천대를 명문대로 키우기까지
진솔(眞率)한 이야기가 담겨 있다.
이 총장의 인생철학(人生哲學)은 ‘박애(博愛)’다.
어려운 사람을 도와
따뜻한 세상(世上)을 만드는 것이다.
꾸준히 박애를 실천(實踐)하려면
먼저 스스로 역량을 키워야 한다.
이 총장은 남들보다
수십 배 더 노력(努力)하며
역량과 성과를 쌓아온 분이다.
도전(挑戰)과 열정(熱情)의 화신이다.
이길녀 총장은
젊은이와 대화(對話)를 좋아한다.
대화 내용(內容)도 70% 이상이
미래(未來)에 관한 것이라고 한다.
인공지능(人工智能)(AI) 시대(時代)에
새로운 인재(人材) 교육(敎育)의 방향(方向),
새롭게 펼쳐지는
바이오산업과 우주산업,
대학의 미래상 등을 말씀하시고
끝없이 질문(質問)한단다.
그녀의 나이는 올해 92세이다.
나이가 80~90세가 되어도
청년처럼 사는 분이 늘어난다.
넓고 푸른 바다를
마음껏 헤엄치는
등푸른 생선 청어(靑魚)가 저절로 떠 오른다.
청년처럼 사시는
어르신 ‘청어’를 보면
나도 모르게 존경심이
우러나오고 힘이 솟는다.
현존(現存)하는 사람 중
어떤 분이 청어일까 꼽아봤다.
한국의 ‘탑건’이라는 영화
‘빨간 마후라’의 주인공이며
 보수당 원로 신영균 선생님(94세),
국민(國民) 건강(健康)을 위해
세로토닌 문화(文化)를 이끄시는
이시형 박사(博士)님(90세),
활기(活氣)찬 목소리로
가요무대(歌謠舞臺)를 진행(進行)하시는
김동건 아나운서님(85세),
봉사(奉仕) 활동(活動)을 활발(活潑)히 하시며
맑은 목소리로 노래하는
김상희 가수(歌手)님(82세),
올해도 현역 최고령으로
연예인 골프대회에 참가한
국민배우 이순재님(89세) 등이
모두 청어로 부를 만한 분이다.
이들의 공통점(共通點)은 무엇일까?
이런 생각으로
자세히 살펴봤더니
몇 가지가 나왔다.
첫째,  늘 미래(未來)에 대한
호기심(好奇心)이 강하다.
둘째,  공익적(公益的)이고
이타심(利他心)이 크다.
셋째,  긍정적이고 잘 웃는다.
나이 들었다고
과거(過去) 전성기 추억(追憶)을 먹고 살면
청어가 아니다.
자기 혼자 잘 되겠다고
열심(熱心)히 살아도
청어가 될 수 없다.
긍정적 열정이 식으면
더 이상 청어가 아니다.
나이 들어 갑자기
청바지를 입는다고
청어가 되는 것이 아니다.
청어가 되려면   
젊은 시절(時節)부터 몸과 마음에
청어 DNA를 심고 가꿔야 ?한다.
이게 내가 찾아낸
‘청어로 사는 방법’이다.
매력적(魅力的)인 시니어가
많은 사회(社會)가 좋은 사회다.
나이가 들어서도
건강(健康)한 삶을 유지(維持)하며
세상(世上)을 위해 활기(活氣)차게
활동(活動)하는 분이 많으면
이 자체가 젊은이들에게는
희망(希望)의 메시지가 아니겠는가?
나도 청어로 살고 싶다.
끝없이 다가오는
미래라는 바다를 향해
힘차게 헤엄치고 싶다.
요즘 내 마음속에는
청어떼가 뛰놀고 있다.




틈을 만들어 주자


고대 페르시아를 떠올릴 때
많은 이들이 가장 먼저 생각하는 것은
고급 양탄자입니다.

페르시아의 장인들은 양탄자를 만들 때
한 올 한 올 손으로 만들어 가격이 비쌀 뿐만 아니라,
정교한 문양과 복잡한 기하학적 디자인,
자연을 모티브로 한 패턴이 특징이며,
중세 시대부터 왕실과 귀족들의 권위를 나타내는
요소로 사용되었습니다.

이렇게 어마어마한 가치와 아름다움을 뽐내는
예술과 문화의 결정체에도 잘 찾아보면
반드시 흠이 있기 마련입니다.

흥미롭게도 페르시아 양탄자에서 발견되는 흠은,
혼신의 힘을 다해 양탄자를 제작하던 장인이
일부러 남긴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이는 세상에는 완벽한 것이 없다고 여기는
그들의 장인 정신과 철학이 담긴
흠이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사람들은 이를
'페르시아의 흠(Persian Flaw)' 이라고  부릅니다.


틈이 있어야
햇살도 스며들 수 있듯이

틈이 있어야
다른 사람이 들어올 공간이 생기고,
이미 들어온 사람을 편안하게 만들어
줄 수 있습니다.

결국 틈이란,
사람과 사람 사이의 소통 창구와 같습니다.
완벽해지려 하지 말고 굳이 틈을 가리려
애쓰지도 마세요.

그 빈틈 사이로 사람들이 찾아오고,
그들이 인생의 동반자가 되어
내 삶을 지금보다 더 풍요롭고 행복하게
만들어 줄 것입니다.

* 오늘의 명언
완벽함이란 더 이상 보탤 것이 남아 있지 않을 때가 아니라,
더 이상 뺄 것이 없을 때 완성된다.
– 생텍쥐페리 –


예수님의 동상(銅像)과 기도(祈禱)


북유럽 어느 시골 성당에
사람 크기만 한
예수님의 동상이 있었습니다.

그 예수님 동상 앞에서 기도를 하면
소원이 잘 이루어진다는 소문이 나서
많은 사람이 찾았습니다.

그래서 수많은 사람들이 와서
기도를 하고 소원을 말했습니다.

그런데 그 교회의 문지기가
예수님이 서 있는 곳에
한번 서 있어 보는 것이
소원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 소원을 말하며
여러 날을 기도를 드렸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진짜로 음성이 들렸습니다.
"그래 네가 하도 소원을 말하니
딱 하루만 너와 자리를 바꾸겠다.
그런데 나와 한 가지
약속을 해야 된다.
너는 누가 와서 어떤 행동이나
기도를 하던지 아무 말도
하지 말아야 한다.
다시 말하지만
절대 말하지 말거라.  
알겠느냐?"

문지기는 절대 침묵하겠다고
굳건히 약속을 했습니다.

그래서 어느 날 문지기는
예수님의 동상이 되었고
예수님은 문지기가 되었습니다.

문지기가 예수의 동상으로 서 있을 때
첫 번째 사람이 왔습니다.

그는 아주 부자였고
도박을 즐기는 자였습니다.
 자기가 도박을 하러 가는데
돈을 잃지 않고 많이 딸 수 있도록
도와 달라는 소원이었습니다.

한참을 기도한 부자는 갔습니다.
그런데 돈다발이 들어있는 가방을
깜박하고 놓고 나갔습니다.
문지기는 가방을 놓고 갔다는 것을
알려주고 싶었지만
예수님과의 약속 때문에 침묵했습니다.

두 번째 조금 후에
아주 가난한 농부가 들어왔습니다.
자기 아내가 중병으로 누워있는데
치료비가 없습니다.
그러니 어떻게든
도와달라고 하는 내용이었습니다.

그  농부가
기도를 마치고 돌아가려다가
돈 가방을 보았습니다.
그 농부는 그것이
하느님의 응답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감사 기도를 드린 후
돈 가방을 들고 나갔습니다.

문지기는 그 돈 가방은
주인이 있다고 말해주고 싶었지만,
예수님과의 약속 때문에 참았습니다.

세 번째로 기도를 하러 온 사람은
배를 타고 먼바다로 나가는
청년이었는데 자신의 안전을 위하여
기도를 하러 온 것입니다.

청년이 기도를 막 시작하였는데
갑자기 예배당 문이 활짝 열리더니
돈 가방을 놓고 간 부자가 들어왔습니다.

돈 가방이 없는 것을 확인한 부자는
다짜고짜 기도하는 청년의 멱살을 잡고
돈 가방을 내어놓으라고
으름장을 놓았습니다.

청년은 이게 무슨 행패냐고 하면서
전후 사정을 이야기하였지만,
이미 분이 날 대로 난 부자는
청년을 이끌며 경찰서로 가자고 했습니다.

청년은 자기는 지금 바로 가지 않으면
배를 탈 수가 없다고 하면서
경찰서로 가는 것을 거부했습니다.
그렇게 옥신각신하며
다투는 것을 본 문지기는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말을 해 주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청년은 배를 타게 되었고
부자는 돈 가방을 찾을 수가 있었습니다.

그때 예수님이 노하신 음성으로
말씀하셨습니다.

"너는 나하고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
그러니 내려오너라."

그러자 문지기는 말했습니다.
"약속을 지키지 못한 것은 죄송하지만
그렇다고 예수님께서 화를 내실 정도로
잘못은 하지 않았습니다.
저는 잘못된 상황을 바로 잡아서
평화를 이루었을 뿐입니다."

그때 예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너는 나와 약속을
지키지 않은 것 만으로도
잘못이 큰 것이다.
그리고 네가 개입해서 해결한 것보다
침묵했으면 더 좋은 결과가 있다는 걸
몰랐던 것이다.

부자는 어차피
그 돈은 도박장에서 다 날릴 돈이니라.
그 돈이 농부에게 갔더라면
농부의 아내를 살릴 수 있었느니라.

더욱 잘못이 큰 것은
청년의 문제이니라.
청년은 그냥 두었으면
배를 타지 못해 살 수 있었다.
그러나 네가 개입하므로
그 청년은 배를 타게 되었고
그 배는 바다에서 침몰하여
죽게 되었느니라.
내가 침묵으로 임하는 이유를
이제 알겠느냐?"

인간들은 하느님의 침묵을
못 견뎌합니다.
인간이 하느님의 흉내를 낼
필요도 없습니다.
인간이 판단을 내릴 필요는 없습니다.
인간의 과도한 개입은
일을 그르칩니다.

원래 하느님은 침묵 중에 계십니다.
그리고 침묵 중에 일하십니다.
십자가에 예수님을 내어버리실 때
하느님께서는 그렇게 침묵하셨습니다.
이 세상의 죄를 지고
예수님이 죽으실 때
하느님은 침묵하셨습니다.
하루살이 곤충에도,
들에 핀 잡초 하나에도,
하느님의 뜻이 있습니다.

서로 조화를 이루기에
서로에게 유익을 주고
하느님을 찬양하는 것입니다.

똑같이 감옥에 갇힌 어떤 사람은
감옥의 먼지나 열악한 환경을 헤아리며
불평하는 사람도 있고,
어떤 사람은 밤하늘의 별을 세며
꿈을 꾸는 사람도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지난 과거의 불행과 실패,
일어나지도 않은 염려를 붙잡고 있고,

어떤 사람은
하느님의 약속의 말씀을 붙들고
기쁨을 보는 사람도 있습니다.

신앙인이란
우리 삶의 먼지를 헤아리고
불평하고 절망하는 사람들이 아니라,
밤하늘의 별을 헤아리며
새로운 희망을 붙들고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역사가 찰스 베어드는
꽃이 꿀벌에게 꿀을 빼앗기는
그 순간에도 하느님은
수정의 신비를 주신다고 했습니다.

밤이 어두울수록
하느님은 별을 더욱 빛나게 하십니다.

나는 특히 Mark Miller 교수가 작곡한
“I believe(나는 믿네)" 라는 노래에
큰 감명을 받았습니다.

그 노래의 가사는
1945년 독일 유태인 수용소 발견된
다음과 같은 낙서였습니다.

그 글은 어느 무명의
한 유태인이 죽음을 앞두고
벽에 쓴 글이라고 합니다.

I believe in the sun,
even when it's not shining.
(나는 태양이 비치지 않을 때에도
태양이 있는 것을 믿는다.)

I believe in love,
even when I don't feel it.
(나는 사랑을 느낄 수 없을 때에도
사랑이 있는 것을 믿는다.)

I believe in God,
even when God is silent.
(나는 하느님께서
침묵하실 때에도
하느님께서 살아 계심을 믿는다.)

고통 중에 부르짖는 욥의 기도도
침묵하시는 하느님께 부르짖는 내용입니다.

하박국의 기도도
불의한 일들에 대하여 침묵하고 계신
하느님께 부르짖는 절규입니다.

우리는 너무 호들갑을 떱니다.
하느님의 침묵에 못 견뎌합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침묵은
절망이라고 단정합니다.
그러나 하느님은 침묵하십니다.
하느님은 침묵 중에 계시지만
역사는 도도하게 흘러갑니다.

하느님이 돌리시는 역사의 맷돌은
비록 천천히 돌아가지만
정확하게 돌아갑니다.

하느님의 하시는 일은
지금은 보이지 않고 들을 수 없지만,
지나고 뒤돌아보면
세심하게 하나하나 섭리 가운데
이루어진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오늘도 세상은 부조리하고 혼란합니다.
정직하고 의로운 사람들이 고난을 받고
불의한 자들이 큰소리치고
활개를 치는 오늘이지만
하느님은 여전히 침묵 중에 계십니다.
그러나 우리는 믿습니다.
침묵 중에 섭리하시고,
침묵 중에 간섭하심을...
(글쓴이 :  미상 )

종교를 떠나서
우리가 살아가며 행복을 느끼게  하는
좋은 내용이라  생각되어 함께 공유하고자 합니다.





오직 찬양(讚揚)만을 드리라(시편 7:10-17)


내가 여호와의 의를 따라 감사함이여
지극히 높으신 여호와의 이름을 찬양하리로다.

1025년경 이탈리아의 목회자이자 음악이론가인
귀도 다레초(Guido d’Arezzo)가 저녁 기도를 마치고
찬송을 부르다가 찬송의 각 첫 구절을 본 따
점차 높아지는「음계」를 만들었습니다.

이후 수백 년에 걸쳐 조금씩 다듬어지고 변형되어서
오늘날 세계적으로 널리 쓰이는 「8음계」가 완성되었습니다.  

목회자가 만들고,
찬양의 첫 소절을 따서 이름 지어진 만큼
8음계인 「도, 레, 미, 파, 솔, 라, 시, 도」에는
다음과 같은 복음적인 뜻이 들어있다고 합니다.

  1. 도(Do)는 하나님(Domine)
  2. 레(Re)는 하나님의 음성(Reasonare)
  3. 미(Mi)는  기적(Miracle)
  4. 파(Fa)는 제자(Famuti)
  5. 솔(Sol)은 덮어줌(Solve)
  6. 라(La)는 가르치는 사람(Labii)
   7. 시(Si)는 거룩한 성령님(Sancte loannes)
  8. 그리고 마지막 도는 다시 하나님으로 끝을 맺습니다.

모든 노래를 이루는 음계의 시작은
하나님을 향한 목회자의 찬양으로부터 나왔습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가 부르는 모든 찬송은
오직 하나님만을 향해 있어야 합니다.
 
나를 만드시고 구원하신,
찬양받기 합당하신,
거룩하신 하나님께
매일 감사의 찬송을 올려드리십시오.
복되고 형통합니다. 아멘

주님,
찬양받기 합당하신 유일한 이름이
바로 주 하나님이심을 고백하게 하소서.

말씀 묵상과 기도를 쉬지 않듯이,
매일 우리의 목소리로
주 하나님을 높여 드립시다.

- 김장환 목사님의 여호와께 맡기라 중에서


치매(癡呆)와 물(水) 



🔹️인간에게 생기는 치매는
    나이 먹고 늙어서 생기는 병이 아닙니다.

🔹️치매는 물을 잘 마시지 않아 생기는
    병 중 하나입니다.

🔹️우리 몸은 면역체계가 가동됩니다.

🔹️우리 몸에 물이 부족하면,
    물이 없어도 살 수 있는 부분부터
    물 공급을 줄여 나갑니다.

🔹️이 때가 물을 잘 마시지 않는
      30대 부터입니다.
      4, 50대부터는 더 마시지 않습니다.

🔹️그럼 우리 몸 중 어디가
    먼저 늙어 갈까요?
    피부입니다.

🔹️피부가 말랐다고
    죽지 않습니다.
    피부가 늙어갑니다.

🔹️그래도 물이 부족하면
    어디를 줄여 나갈까요?

🔹️장기입니다.
    이 때는 5, 60대가 되겠네요.

🔹️그래서 이때부터
    여기 저기 아파지는 곳이
    많아지는 겁니다.
    물론 그동안
    많이 사용하기도 했지만......

🔹️최종적으로 물이 부족하면,
     뇌에 물 공급이 잘 되지 않습니다.

🔹️뇌가 아프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노인이 되면 질환 중에서
    뇌 관련 질환이 많습니다.

🔹️물 부족은 만병의 근원입니다.

🔹️반대로 물만 잘 드셔도
    질병 80%는 스스로 낫는다고 합니다.

🔹️물을 잘 드시면 치매 예방도 되고,
    치매도 늦출 수 있습니다.

🔹️문제는 물이 목에 걸려서
    먹지 못하는데 있습니다.

🔹️옛날 노인들이 하시는
      말씀 중에

🔹️물도 힘들어서 마시지 못한다며
    한 모금도 못 마시는
    노인들도  많았습니다.

🔹️사람이 늙어서 죽을 때는
    몸에 수분이 거의 빠져나가
     양자 파동이 없을 때 죽습니다.

🔹️물을 자주 마시는 습관을 들이세요

🔹️모든 건강과 질병은 식생활 습관과
    평소 생활습관이 90%이며,
    부모로부터 유전으로 물려받은 질병도
    습관으로 고칠 수있습니다.


온수(溫水)는 보약(補藥)


   우리가 상온(常溫)의 물만 마셔도
   몸은 몰라보게 건강해진다.

   냉수는 체온을 떨어뜨리는데
   체온이 1도 떨어질 때 마다
   면역력은 30%
   기초 대사력은 12%씩 떨어진다.

   냉수는 소화, 혈액순환,
   효소의 활성기능을 떨어뜨린다.

   냉수는 체내 산화를 촉진시켜
   노화를 촉진한다.

   암세포는
   저체온 상황에서 활성화되고,
   고체온에서는 얼씬도 못한다.

   우리가 병에 걸리면
   일단 몸이 불덩이가 되는데,
   그 이유는 무엇일까?

   몸이 스스로 알아서
   체온을 높여 몸속에 들어온
   병균을 죽이거나 퇴치하여
   살리는 생명의 자생능력이다.

   몸이 따뜻해지면
     '더 이상 지방 비축이 필요없구나' 라고
    인체가 스스로 판단해 음식을
    과다 섭취하지 못하게 하거나,
    몸속의 지방 비축을 스스로 제어한다.

    몸이 건강해지려면,
      일단 가정에서 부터
     생수나 식수를 냉장고 안에서
      밖으로 끌어 내도록 하라!

    세상 살기 싫으면
    냉수를 자주 마셔라!

    뜨거운 파인애플 물

     베이징 육군 종합병원의
     천희렌 교수는
     만약 이 소식을 받는 모든 사람들이
     다른 사람들에게 10부를 전달한 다면,
     최소한  한 명의 목숨은
     구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저는 제 책임을 다했습니다.
     당신도 할 수 있길 바랍니다.
     널리 전파해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뜨거운 파인애플 물은
        당신의 평생을 살릴 수
        있습니다.

      뜨거운 파인애플 물은
      암세포를 죽일 수 있습니다.

      얇게 자른 파인애플
         2~3조각을 컵에 넣고
      뜨거운 물을 부으면
      알칼리성 물이되며
      매일 마시면,
      아무에게나 좋습니다.

       뜨거운 파인애플 물은
       항암물질을 분비하는데,
       이것은 의학에서
       가장 최근에 개발된
       효과적인 암 치료법입니다.

       뜨거운 파인애플 과일은
       낭종이나 종양을 죽이는
       효과가 있습니다.
 
       모든 종류의 암을
       고칠 수 있다는 것이
       증명되었습니다.

       뜨거운 파인애플 물은
       알레르기의 결과 물인
       신체의 모든 세균과
       독소를 죽일 수 있습니다.

       파인애플 추출물이
       들어있는 약의 종류는
       단지 폭력적인 세포들을
       파괴할 뿐,
       건강한 세포에는
       영향을 미치지 않습니다.

       또 파인애플 주스에
       들어있는 아미노산과
       파인애플 폴리페놀은
       고혈압을 조절할 수 있어
       내혈관의 막힘을 방지하고
       혈액순환을 효과적으로 방지하고
       혈전을 줄일 수 있습니다.
          
       이것을 읽고 나서
       가족, 친구등
       다른 사람들에게 전해서
       건강을 지키세요!

       이 메시지를 묻어두지 말고
       퍼뜨리면 생명을 구할 수 있습니다.
       우리 모두 건강합시다!
       감사합니다.
       사랑합니다. 




이해와 배려

일본 도쿄에
이상한 식당이 있습니다.

시키지도 않은
엉뚱한 메뉴가 나오는
식당입니다.

라면을 시켰는데
우동이 나오고,
햄버거를 시켰는데
만두가 나오곤 합니다.

이래 가지고 어떻게 돈을 버나…
주문도 제대로 못받으면서
어떻게 장사를 하나
요즘 같은 세상에서는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어이 없는 식당입니다.

헌데
놀라운 것은
엉뚱한 음식을 가져다 줘도
화내는 손님이 한 명도 없고,

어느 누구도
불평하지 않고
주는 대로
감사히 먹는다는 사실입니다.

더군다나
이 이상한 식당은
사람들이 줄을 서서
기다릴 정도로 유명한
인기 맛집입니다.

이 어이 없는 식당이
유명 맛집이 된 이유는 무엇일까요?

이 식당을 찾는 고객들은
"바로 여기서만의
특별한 이해와 배려와
사랑이 넘치는
음식을 먹을 수 있다"고
이구동성으로 말합니다.

이 식당이 특별한 이유는
바로
‘아르바이트생들’때문입니다.

이곳의 아르바이트생들은
모두 여섯 명인데
'치매에 걸린 할아버지 할머니들’입니다.

이 분들은 최선을 다해
웃음을 잃지 않고
일하려고 노력합니다.

주문을 받아가지만
음식을 가져다 줄 때
누가 주문했는가도 헷갈리고
그래서 주문과는
전혀 다른 음식을 가져다 줍니다.

식당을 처음 방문한 한 손님은
"좀 당황했죠.
정말 주문한 것이 제대로 나올까,
두근거렸어요"라고 말합니다.

많은 자원 봉사자와
더불어 운영되고 있는
이 식당 한 관계자는

“어르신들이 비록 치매일지라도
아직 사회구성원의 일부라는
소속감을 주며,
식당을 찾는 고객들에게도
이 같은 인식을 공유하기 위해
운영하게 됐다"고 말합니다.

그렇습니다.
이 식당의 성공 비결은
바로
'이해와 배려'인 것입니다.

식당을 찾은 손님들은
주문한 음식이 안 나오고
다른 음식이 나와도,
가끔씩 물을 쏟아
바지나 치마가 적셔도
화를 내거나
얼굴을 찡그리지 않습니다.

알바생들이 조금 실수하고,
조금 느리고,
조금 서툴러도 괜찮습니다.

이곳을 찾는 손님들
모두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할머니들은
우리의 어린 시절,
모든 실수를 보듬고 길러주신
우리의 '어머니'이시기 때문입니다.

이 할아버지들은
우리의 어린 시절,
우리들이 공부하고
자랄 수 있도록 희생하신
우리의 ‘아버지’이시기 때문입니다.

이해와 배려의 의미를 깨닫게 하는
오늘입니다.



*정말 흥미롭네요!*

👍🤔🌻
*_세계 인구는 약 78억 명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에게는 큰 숫자일 뿐입니다._*

하지만 78억 명을 100%의 인구로 본다면 이 비율은 더 이해하기 쉬워집니다.

*100% 중*
11%는 유럽에 거주
5%는 북미에 거주
9%는 남미에 거주
15%는 아프리카에 거주
60%는 아시아에 거주

49%는 농촌에 거주
51%는 도시에 거주

12%는 중국어를 구사
5%는 스페인어를 구사
5%는 영어를 구사
3%는 아랍어를 구사
3%는 힌디어를 구사
3%는 벵골어를 구사
3%는 포르투갈어를 구사
2%는 러시아어를 구사
2%는 일본어를 구사
62%는 모국어를 구사

77%는 주택을 소유하고 있으며
23%는 거주할 곳이 없습니다.

21%의 사람들이 과식합니다.
63%는 원하는 만큼 먹을 수 있습니다.
15%의 사람들이 영양실조에 시달립니다.
48%의 사람들의 하루 생활비는 2달러 미만입니다.

87%의 사람들이 깨끗한 식수를 사용합니다.
13%는 깨끗한 식수를 사용하지 않거나 오염된 수원을 사용합니다.

75%는 휴대전화를 가지고 있습니다.
25%는 휴대전화를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30%는 인터넷에 접속할 수 있습니다.
70%는 인터넷에 접속할 수 있는 환경이 없습니다.

7%는 고등 교육을 받았습니다.
93%의 사람들이 대학에 진학하지 않았습니다.
83%는 글을 읽을 수 있습니다.
17%의 사람들이 문맹입니다.

33%는 기독교인입니다.
22%는 무슬림입니다.
14%는 힌두교인입니다.
7%는 불교인입니다.
12%는 기타 종교를 가지고 있습니다.
12%는 종교적 신념이 없습니다.

*26%가 14년 미만 생존*
*66%가 15세에서 64세 사이에 사망*
*8%가 65세 이상*
집이 있고, 영양가 있는 음식을 먹고, 깨끗한 물을 마시고, 휴대폰을 가지고 있고,
인터넷 서핑을 할 수 있고, 대학을 졸업했다면, 당신은 극소수의 특권층에 속합니다.
(7% 미만 범주)

*전 세계 인구 100% 중 65세까지 살 수 있는 사람은 8%에 불과합니다.*

*65세가 넘었다면 만족하고 감사하십시오. 삶을 소중히 여기고 순간을 붙잡으십시오. 당신보다 먼저 세상을 떠난 92%의 사람들처럼, 당신은 65세가 되기 전에 세상을 떠난 것이 아닙니다. 당신은 이미 축복받은 사람입니다.*
*자신의 건강을 돌보십시오. 남은 모든 순간을 소중히 여기세요!!!*
✍️ ✅미국에서 진행된 대규모 연구에 따르면:*

▪️사람의 가장 생산적인 연령은 60세에서 70세입니다.
▪️사람의 두 번째로 생산적인 단계는 70세에서 80세입니다.
▪️세 번째로 생산적인 단계는 50세와 60세입니다.
▪️이전에는 아직 정점에 도달하지 못했습니다.
▪️노벨상 수상자의 평균 연령은 62세입니다.
▪️세계 100대 기업 사장들의 평균 연령은 63세입니다.
▪️미국 100대 교회 목사들의 평균 연령은 71세입니다.
▪️아빠들의 평균 연령은 76세입니다.
▪️ 이는 사람의 가장 생산적이고 전성기를 맞이하는 시기가 60세에서 80세 사이임을 확인시켜 줍니다.
▪️이 연구는 의사와 심리학자 팀이 뉴잉글랜드 의학 저널(NEW ENGLAND JOURNAL OF MEDICINE)에 발표했습니다.
▪️연구진은 60세가 감정적, 정신적 잠재력의 정점에 도달하는 시기이며, 이는 80세까지 지속된다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따라서 60세, 70세, 80세 중 어떤 나이이든 인생에서 가장 좋은 시기에 있는 것입니다.

출처:* 뉴잉글랜드 의학 저널.

60대, 70대, 80대의 가족과 친구들이 자신의 나이를 자랑스러워할 수 있도록 이 정보를 보내주세요.
▪️"인생"이라는 이 "여행"은 생각보다 훨씬 늦게 시작됩니다!















2025 새벽 묵상 열왕기하



요시아(공동번역),
요시야(개역개정)(히브리어: יאשיהו, 그리스어: Ιωσίας; 기원전 640년경 ~ 기원전 609년경 재위)
유다 왕국의 16대 왕으로, 재임중 종교 개혁을 단행하였다.
많은 역사가들은, 그의 신명기 개혁운동 과정에서 성서에 속한 여러 책들이 편집되거나 확립된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

전왕 아몬과 보츠캇 출신 아다야의 딸 여디다의 아들이었던 요시야는 아몬이 죽임을 당하자 백성들에 의해 8살의 나이로 왕위에 올랐다. 그는 하나님에 눈에 드는 옳은 일들을 하였고 자기 조상 다윗의 길을 걸었다.

역대하는 요시아가 왕이 되었을 때 여덟 살이었다고 기록한다.
재위 8년째에 그는 "조상 다윗의 하나님을 비로소" 찾기 시작했고, 재위 12년째에는 예루살렘과 유다 전역에 있는 바알, 아세라 제단과 우상을 파괴하기 시작하였다.

그는 어린 몸으로 하나님을 찾아 산당과 아세라 목상, 조각 신상, 주조 신상들을 치우고 유다와 예루살렘을 정화하기 시작했다.
바알 제단도 무너뜨리고 제단 위 분향 단들도 부수었으며 아세라 목상과 조각 신상과 주조 신상들을 부수어 가루로 만들고는 그 가루를 우상들에게 제물을 바치던 자들의 무덤 위에 뿌렸다.

그리고 사제들의 뼈를 그 제단 위에서 태웠고 이렇게 유다와 예루살렘을 정화하였다. 므낫세와 에브라임, 시므온, 납달리에 이르기까지의 성읍들의 광장에서, 곧 온 이스라엘 땅에서 제단을 무너뜨리고 아세라 목상과 조각 신상들을 깨뜨려 가루로 만들고 분향 단들을 부순 다음 예루살렘으로 돌아왔다.

역대기에서는 요시아가 재위 18년 이전부터 추진하던 종교개혁을 자세히 기록하고 있는 반면, 열왕기하는 예루살렘에 있는 성전의 복원에서부터 기록을 시작한다.

요시야는 나라와 성전을 정화한 다음 아찰야의 아들 사판마아세야 성주와 요아하스의 아들 요아 기록관을 보내 성전을 보수하게 하였다.
그리고 므낫세와 에브라임, 나머지 이스라엘 지역의 모든 주민과 온 유다와 베냐민과 예루살렘 주민들과 레위인에게서 모은 돈을 힐기야 대제사장에게 내놓았다.

그 돈을 성전 보수 공사를 책임지는 일꾼들에게 나눠주고 일꾼들에게 성전을 고치고 보수하게 하였다.
또 목수와 석수에게도 돈을 주어 전 유다의 왕들이 폐가로 만들어 버린 건물들을 고치는 데 쓸 깎은 돌과 도리와 들보 재목을 사게 하였다.

그 사람들은 일을 성실히 하여 그들을 지휘할 사람으로 므라리의 자손 야핫오바드야, 크핫의 자손 즈카르야므술람 등 레위인들이 임명되었다. 악기를 잘 다루는 레위인들은 짐꾼을 감독하고 각종 작업을 하는 일꾼들을 지휘하였다. 그리고 몇몇 레위인들은 서기관, 행정관, 문지기 역할을 맡았다.

사람들이 성전에 들어온 돈을 꺼내고 있었는데 힐기야 사제가 모세를 통해 주어졌던 하나님의 율법서를 발견했다.
힐기야는 사반 서기관에게 책을 주고 사판을 그 책을 임금에게 보고하였다.

열왕기하 22장 8절에 나오는 '세페르 하토라(ספר התורה)'라는 구절은 여호수아 1장 8절 8장 34절에서 여호수아가 모세에게 받은 율법을 묘사할 때 사용한 구절과 동일하다.
본문에서는 이 책이 토라라고 명시하지는 않으나, 많은 학자들은 이것이 신명기의 사본이거나 신명기의 일부가 된 본문이라고 본다.
율법서의 내용을 들은 요시야는 힐기야와 사반의 아들 아히캄, 마가의 아들 압돈, 사반 서기관, 시종 아사야에게 명령해 힐기야는 왕이 보낸 이들과 함께 여예언자이자 하스라의 손자이자 톡핫의 아들 살룸 예복 담당관의 아내 훌다에게로 갔다.

이에 훌다는 이스라엘에 큰 재앙이 내릴 것을 예언했다.

고고학자들의 연구에 따르면, 법궤는 이스라엘의 기럇 여아림에 있었을 가능성이 크다고 한다.
기원전 7~8세기에 이 곳은 강력한 신앙의 중심지였고, 이 도시 유적에서는 이스라엘 북왕국과 관련된 일종의 거대한 신전이 발굴되었기 때문이다.
몇몇 학자들은 이 같은 발견과 역대하 35:3을 근거로, 사실 법궤는 성경에서처럼 왕국 형성 초기에 곧바로 예루살렘으로 옮겨진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 왕국 후기 요시아 통치기에 옮겨졌다고 주장한다. 
또한 고고학자들은 당시 팔레스타인 지방에서 성물을 상자 속에 넣어 운반하는 것은 매우 흔한 전통이었음을 지적하며, 법궤 속에 사실은 수천년 된 석상들이 대신 들어 있었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요시야는 사람을 보내 유다와 예루살렘의 원로들을 소집해 왕은 모든 유다인과 예루살렘 주민들과 제사장들, 레위인들과 높은 자에서 낮은 자에 이르기까지 모든 백성들이 성전으로 올라갔다.

그리고 성전에서 발견된 율법서를 모든 사람들에게 들려주었다. 그리고 계명과 법령과 규정을 잘 지켜 그 책에 쓰여 있는 계약의 말씀을 실천하기로 하나님의 앞에서 계약을 맺었고 예루살렘과 베냐민의 사람도 그 계약에 참여시켰다. 그리하여 예루살렘 주민들은 하나님의 계약을 잘 따르게 되었고 요시야는 모든 지역에서 역겨운 것들을 없애 버리고 하나님을 섬기게 하였다.

성경적 인물이다.

요시야는 예루살렘에서 하나님을 기리는 파스카 축제(유월절)를 지냈다. 유월절 양을 잡고 사제들에게 임금을 맡기고 성전에서 맡은 일을 잘 하라고 격려하였다. 또 온 이스라엘을 가르치는 레위인들에게 유월절의 준비에 대해 일러두었다.

요시야는 모든 백성이 유월절 제물로 쓸 수 있도록 어린양과 새끼 염소 3만 마리와 황소 3000마리를 기부하였다.
대신들도 백성들과 사제들과 레위인들을 위해 기부하고 성전 책임자들인 힐기야와 즈카르야와 여히엘도 사제들이 파스카 제물로 쓸 수 있도록 어린양과 새끼 염소 2600마리와 황소 300마리를 내놓았다.
레위인들의 지도자 코난야, 그의 동생 스마야와 느탄엘, 하사브야, 여이엘, 요자밧도 레위인들이 파스카 제물로 쓸 수 있도록 어린 양과 새끼 염소 500마리와 황소 500마리를 기부했다.

예배가 준비되었을 때 임금의 명령으로 사제들은 자기 자리에 서조 레위인들은 조에 따라 자리를 잡았다.
사람들이 파스카 양을 잡자 사제들을 그 피를 받아 뿌리고 레위인들은 가죽을 벗겼다.
그러고 나서 레위인들은 번제물을 따로 떼어 백성의 집안 갈래에 따라 나누어 주고 모세의 책에 쓰인 대로 하나님께 바치게 하였다.
황소도 그렇게 하였다.

그들은 법규대로 유월절 양을 불에 굽고 나머지 거룩한 제물을 냄비와 솥과 단지에 넣고 삶고 뛰어다니며 온 백성들에게 나눠주었다. 그런 다음에야 자신들과 제사장들의 몫을 준비하였다.

아론의 자손 사제들은 번제물과 굳기름을 밤까지 바쳐야 했으므로 레위인들이 자신들과 아론의 자손 자세장들이 몫을 준비하였다. 아삽 자손의 성가대는 다윗과 아삽과 헤만과 임금의 환시가 여두둔의 명령에 따라 제 위치에 서고 문지기들도 저마다 책임을 맡은 대문에 서 있었는데 레위인들이 그들의 몫을 준비해 주어 자기들의 일 자리에서 벗어날 필요가 없었다.

이렇게 하나님의 예배가 모두 준비되어 유월절을 지내고 하나님의 제단 위에 번제물을 바칠 수 있었다. 이렇게 요시야 임금은 어느 임금들 보다도 가장 성대하게 유월절을 지켰다.

기원전 609년 봄 또는 초여름에, 파라오 네카우 2세신아시리아 제국신바빌로니아 제국의 침공으로부터 원조하기 위해 출정을 떠난다. 네카우 2세는 군대를 비아 마리스 해안 도로를 따라 시리아로 배치한 뒤 블레셋과 샤론의 저지대를 따라 이동시키고, 남쪽의 이스르엘 골짜기에 있는 언덕의 능선을 넘을 준비를 했다. 이 때 요시아가 이끄는 유다 군대가 메기도에서 이집트군을 막아섰다. 그러나 유다 군대는 패퇴했고 요시야는 전사했다. 이집트는 아시리아와 합류하여 하란에서 바빌로니아인들과 싸웠다. 바빌로니아 연대기는 기원전 609년 담무스월부터 엘룰월까지 이어진 전투를 기록하고 있다. 그러므로 요시야는 기원전 609년 담무스월 이전에 사망하였음을 알 수 있다.[7]

구약성경은 요시아의 죽음에 대한 두 가지 기록을 전한다. 열왕기하에서는 네카우 2세메기도에서 요시아를 만나 죽였다고만 언급하고 있는 반면,[8] 역대하에서는 요시아가 이집트 궁수들에 의해 치명상을 입고 예루살렘으로 끌려가 죽었다고 말한다.[9] 후자의 경우 요시아의 죽음은 네카우가 신의 명령에 따라 한 말을 듣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적는다. 여기서 전하는 네카우의 말은 다음과 같다.[10]

유다 왕이여, 당신이 나와 무슨 관계가 있소? 나는 오늘 당신을 치러 온 것이 아니고 나와 싸움이 벌어진 왕실을 치러 가는 것이오. '어서 가라.'는 신의 명령을 받고 가는 길이오. 나와 함께 하시는 신의 손에 멸망하지 않으려거든 길을 막지 마시오.

— 공동번역 개정판, 역대기하 35장 21절

이 두 기록 중 역대기의 기록을 신뢰하지 않는 학자들이 있다.[11] 이들은 이 구절이 다른 왕인 아합의 죽음에 대한 묘사와 (1) 경고를 무시하고 전투를 벌인 것, (2) 전투 전에 변장한 것, (3) 화살에 맞아 죽은 것, (4) 화살에 맞은 뒤 남긴 말을 비롯해 많은 점에서 매우 유사하다고 지적한다. 따라서 의로운 왕의 죽음의 까닭을 특정한 죄로 돌리는 연대기의 종교적 의제로 서술되었다고 본다.[12]

특히 에릭 클라인은 메기도에서의 전투가 아예 실제로 벌어졌던 일이 아닐 수 있다고 말한다. 더 나아가, 노먼 핑켈슈타인이나 나답 나아만을 비롯한 일부 학자들은 열왕기에서 요시아가 네카우를 전투에서 조우한 것이 아니라, 네카우의 신하로 소환되어 조사를 받고선 이집트에게 바친 공물의 양이 정확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참수되었다고 본다.[13]

유대교 랍비 문헌은 요시아의 경건함과 그의 아버지 아몬에 대해 "아몬이 유다의 모든 악한 왕들 중 가장 죄가 많았던 사실은 탈무드의  다음 기록에서 알 수 있다.
아하즈는 제사를 중지했고, 므나쎄는 제단을 허물었고, 아몬은 성전을 황량한 곳으로 만들었고, [거미줄로 덮혀 판독 불가] 아하즈는 율법의 두루마리를[17] 봉인했고, 므나쎄는 신성한 이름을 도려냈고, 아몬은 두루마리들을 모두 불태웠다.[18] 아합은 근친상간을 허용했고, 므나쎄는 스스로 그 일을 저질렀으며, 아몬은 네로처럼 행동해 네로가 어머니 아그리피나로부터 들은 말을 들었다. 아몬은 아들 요시아가 존경받은 왕이 되었음에도 그 스스로의 이름을 앞으로 세상에 올 왕조에 기록되지 못하였다"라고 전한다.[19][20]

하란에서의 패배 이후, 파라오 네카우 2세는 상당한 병력을 남겨두고 이집트로 돌아왔다. 네카우는 돌아오는 길에 여호아하즈가 그의 아버지 요시아의 뒤를 이었다는 것을 알았다.[21] 네카우는 재위한지 3개월밖에 되지 않은 여호아하즈를 폐위시키고 형 여호야김을 그 자리에 앉혔다. 네카우는 여호아하즈를 포로로 데려가며 은 백 달란트와 금 한 달란트를 받아갔다. 메기도에서 요시아의 패배는 다윗 왕조의 종말을 의미하는데, 요시아의 후계자들은 단명했을 뿐만 아니라 이집트가 전통적인 지배권을 되찾으며 유다의 자치권이 무너졌기 때문이다.

요시아의 사망 이후 온 유다와 예루살렘이 그의 죽음을 애도했고 예언자 예레미야도 그를 위한 애가를 지었다.







* 남왕국 제8대 요아스왕 <7세에 왕위에 오르다> 

요 아 스 /  은혜를 원수로 갚은 유다 제8대 왕

1. 인적 사항

    (1) 요아스는 '주께서 주셨다'는 뜻.
    (2) 유다 왕 아하시야와 브엘세바 사람 시비아의 아들(왕하 12:1).
    (3) 고모 여호세바에 의해 생명을 건짐.
    (4) 남유다의 제8대 왕으로 40년간 통치.
    (5)두 아내를 둠(대하 24:3. 제사장 여호야다가 왕으로 두 아내에게 장가들게 하였더니 저녀를 낳았더라)

2. 시대적 배경

    B.C.835-796년까지 통치, 북이스라엘 왕 예후, 여호아하스, 요아스와 동시대의 인물이다.
    북왕국과의 관계가 단절된 이후 요아스 때에도 북왕국과 그리 우호적인 관계를 갖지는 못했다.
    이 시기는 가나안 땅 북방에 위치한 아람이 계속 남쪽으로 세력을 펼치던 시기로서 요아스 당시에도 아람 왕 벤하닷의 한 차례 큰 침입을 받았다.

3. 주요 생애

    출생

    B.C. 841 년

    여호세바가 구출

    대하 22:11

    숨겨져 6년간 양육

    대하 22:12

    여호야다에 의해 왕위에 오름

    7세, B.C. 835 년

    대하 23:11

    두 아내를 취함

    대하 24:3

    성전을 수리

    대하 24:5

    여호야다의 죽음

    대하 24:15

    우상을 숭배

    대하 24:18

    선지자의 경계 거절

    대하 24:19

    여호야다의 아들 살해

    대하 24:20,21

    아람군의 침입

    대하 24:23

    암살됨

    B.C. 796 년

    대하 24:25


4. 성 품

    (1) 여호야다의 조언에 따라 정직히 행하고, 성전을 수리할 만큼 현명하고 하나님을 사랑했던 자.
    (2) 성전 수리가 지연되자 재정관리 방법과 책임자를 달리하여 마침내 성전을 복원시킨 것으로 보아 행정력과 지도력을 갖춘 자(대하 24:5-14).
    (3) 여호야다가 죽자마자 신하들의 간언에 마음이 흔들려 우상을 섬길 만큼 심지가 유약한 자(대하 24:17).
    (4) 선지자 징계를 듣지 않고 더욱이 은혜를 베푼 여호야다의 아들 스가랴를 죽인 것으로 보아 경솔하고 배은 망덕한 자(대하 24:20-22).

5. 구속사적 지위

    (1) 아달랴로 인하여 다윗 가문의 멸절위기에서 하나님의 은총으로 말미암아 구출됨으로써 다윗 가문을 통한 하나님의 구속 계획을 이어가게 된 자.
    (2) 유다 열왕 중 처음으로 성전을 수리한 자.
    (3) 여호야다의 아들 선지자 스가랴를 성전 뜰 안에서 돌로 쳐죽인 자로서 하나님의 종을 핍박한 자.

6. 평가 및 교훈

    (1) 요아스는 제사장 여호야다가 살아서 자신에게 조언을 베풀 동안은 하나님 앞에 정직히 행하고 선정을 베풀었다.
    그러나 여호야다 사후에는 바알의 지도자들과 방백의 충동에 따라 악정을 행하였음을 보게 된다.
    이는 요아스의 믿음이 여호야다가에게 깊이 의존되어 하나님과의 주체적인 관계를 형성하지 못했음을 말해 준다.
    그러므로 우리도 눈에 보이는 신앙 인물이나 지도자에게 우리의 신앙을 의존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과 나와의 직접적인 관계를 맺어야 한다.
    그리할 때 어떠한 유혹에도 넘어가지 않고 버티어 나갈 수 있는 것이다.
    (2) 현명하고 분별력 있었던 요아스가 통치 말년에는 배은 망덕하고 잔인한 인간으로 변모했다.
    이는 요아스가 처음과는 달리 주님의 훈계로 자신을 부단히 경책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떠한가?
    처음 신앙생활을 할 때보다 현재에 더 경건한 모습으로 살아가는가?
    진정 주의 말씀아래 겸손히 나를 살펴서 항상 오늘보다 더 경건한 내일을 만들어야 하겠다.


* 남왕국 제16대 요시야왕<8세에 왕위에 오르다>

요아스(  יואש : Ιωάς 기원전 835년경 - 기원전 796년경 재위) <모. 지비야>
유다 왕국 8대 왕
처음에는 하나님의 뜻에 맞는 일을 했으나 후에는 변절하여 악한 일을 저지르다가 죽었다.

브엘세바 출신의 어머니 지비야의 아들로 태어나 7살에 왕이 되었다.
처음에 요아스는 제사장 여호야다가 살아있는 동안 옳은 일을 할 수 있었다.
한때는 요아스와 여호야다가 성금으로 돈을 모아 성전 보수를 맡은 이들에게 주고 석수들과 목수들을 고용해 성전을 고치게 했다.

성전 복구가 끝난 뒤 남은 돈은 그것으로 집을 위한 기물들을 만들었다.
그리고 여호야다가 살아있는 동안 내내 하나님께 번제물을 바쳤다.

그러나 여호야다가 130살로 죽은 후 유다의 대신들의 말을 듣게 되었고 하나님을 저버리고 아세라 목상과 다른 우상들을 섬겼다.
수많은 예언자들이 그에게 경고를 하였으나 말을 듣지 않았고 하나님의 영에 사로잡혀 경고하던 여호야다의 아들 선지자 스가랴를 살해했다.

이 해가 끝날 무렵 아람 군대가 요아스를 치러 올라와 유다와 예루살렘에 들어와 백성들 가운데 관리들을 모두 죽이고 전리품들을 가져갔으며, 요아스는 큰 부상을 입었다.
결국에는 암몬 출신 여자 시므앗의 아들 자밧과 모압 여자 시므릿의 아들 여호사밧이 일으킨 모반으로 밀로 궁의 침상에서 살해당했다.

훌다(Heldah)

유대왕 요시아 시대의 여선지인데 예루살렘 제 2통에 사는 살롬의 아내이다(왕하 22:8-20).
왕은 성전에서 발견된 율법책에 대하여 그 여선지에게 묻기위하여 힐기야를 파견하였다.
그가 하나님의 지시를 받아 그 책에 있는대로 재앙을 내릴 것이로되 왕이 이미 겸손히 옷을 찢고 통곡하였으므로 목전의 그 재앙을 면케되리라고 하였다.
요시아왕의 종교개혁을 도왔다(왕하 22:3-20, 대하 34:8-28).




5월 1일(목) 열왕기하 21-25장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요시야(23:25)

요시야와 같이 마음을 다하며 성품을 다하며 힘을 다하여 여호와를 향하여 모세의 모든 율법을 온전히 준행한 임금은 요시야 전에도 없었고 후에도 그와 같은 자가 없었더라.
Neither before nor after Josiah was there a king like him who turned to the LORD as he did--with all his heart and with all his soul and with all his strength, in accordance with all the Law of Moses.

요시야 왕은 남 유다 왕국의 16대 왕이었습니다.
요시야는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며 힘을 다하여 여호와를 잘 섬겼던 인물이며 이와같이 율법을 잘 지킨 왕은 이전에도 없었고 이후에도 없었다고 칭찬하는 왕입니다.

남 유다 왕국의 마지막 왕들을 먼저 정리한 후 그 이름들을 기억해 주시기 바랍니다.

16대 요시야(31년) - 요하난, 여호야김, 시드기야, 살룸(역대상 3:15)
 * 여호야김의 아들 : 여고냐, 시드기야(역대상 3:16)

17대 여호아하스(3개월)
18대 여호야김(11년)
19대 여호야긴(3개월)
20대 시드기야(11년)

요시야 왕의 업적을 소개합니다.







종교개혁을 단행한 "요시야(Josiah)"
‘요시야(Josiah)’라는 이름은 ‘여호와께서 격려하신다’라는 뜻이다.
부친은 아몬왕이고 조부는 므낫세왕그리고 증조부는 히스기야왕이다.
요시야는 아버지 아몬이 암살당하자 불과 8세의 어린 나이로 왕위에 등극하여 예루살렘에서 31년을 치리하였다.
우상숭배에 빠졌던 분열 왕국시대에 하나님 언약의 중요성을 깨닫고 유월절을 지킴으로 각종 우상을 타파하면서 요시야왕은 백성들의 마음속에 하나님을 존중히 여기는 신앙심을 갖게 해주었다. 

어둡고 암담했던 그 시대에 우상의 실체를 드러내고 전멸시켰던 요시야왕의 과감한 개혁은 오늘날 이 세상을 진리로 개혁해야 하는 우리들에게 마지막 종교 개혁자로서의 사명을 고취시켜 준다.
또한 하나님 보시기에 정직히 행하여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의 뜻대로 살았던 요시야왕의 생애를 통하여 우리는 하나님께 대한 경외심을 배우고 본받을 수 있다(왕하 22:1∼2).

시대적 배경 
솔로몬 이후 이스라엘은 두 나라로 나뉘어 분열 왕국시대를 맞이하게 된다. 북쪽 이스라엘(사마리아)은 여로보암왕이 10지파를 규합하여 나라를 세울 때부터 앗수르에 의해 멸망하던 호세아왕 시대까지(B.C.721) 하나님을 떠나 금송아지를 섬기는 등 각종 우상숭배에 빠져 있었다. 

또한 남쪽 유다 나라도 몇몇 왕을 제외한 대다수의 왕이 하나님 보시기에 악을 행하였고 백성들을 각종 우상 숭배에 빠지게 했다. 특히 요시야의 조부였던 므낫세왕은 치리 기간 중 너무나 많은 악을 행하였고 각종 우상숭배에 빠졌다. 그는 하나님께서 가증히 여기는 바알을 위하여 단을 쌓고 아세라 목상과 하늘의 일월성신(日月星辰)을 섬겼으며 또한 점치며 사술을 행하며 신접한 자와 박수를 신임하였다. 그리고 혹독하게 백성을 다스렸고 무죄한 자의 피를 심히 많이 흘렸다(왕하 21장 2∼16절). 그러한 일들은 하나님의 노를 격발하기에 충분했다. 

왕하 21장 20∼22절 “아몬이 그 부친 므낫세의 행함같이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하되 그 부친의 행한 모든 길로 행하여 그 부친의 섬기던 우상을 섬겨 경배하고 그 열조의 하나님 여호와를 버리고 그 길로 행치 아니하더니” 

이렇듯 그 시대적인 상황은 어지럽고 어수선하였으며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머물러 있지 못하다 보니 백성들의 생활은 도탄에 빠지고 영적 세계는 매우 피폐해졌다. 

성전을 수리하다
요시야왕은 8세의 나이로 왕이 되다 보니 초기에는 별다른 업적이나 치적을 나타낼 수 없었다. 그러나 즉위한 지 18년이 지나 사리를 판단할 수 있게 된 나이(26세)에는 나라의 상황을 세밀히 관찰하여 평가하고 크게 개혁을 단행할 수 있었다. 그는 먼저 대제사장 ‘힐기야’를 시켜 퇴락한 하나님의 성전을 수리하게 하였다. 

왕하 22장 3∼7절 “요시야 왕 십팔 년에 … 여호와의 전 역사 감독자의 손에 붙여 저희로 여호와의 전에 있는 공장에게 주어 전의 퇴락한 것을 수리하게 하되” 

그때까지만 해도 성전 주변 곳곳에는 바알과 아세라, 해와 달과 별을 섬기는 단들이 있었고 몰록과 아스다롯, 그모스, 밀곰, 태양수레 등 각종 이방나라 우상들과 섬기는 단들이 도처에 널려 있었다. 그것이 우상이라는 것을 사람들은 깨닫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하나님의 언약책을 발견하다
왕의 명령을 받고 성전을 수리하던 대제사장 힐기야는 성전 안에서 너무도 소중한 하나님의 언약책을 발견한다. 그것은 그야말로 기쁨의 소식이었으며 백성들의 마음을 하나님께로 인도할 수 있는 언약의 말씀이었던 것이다. 

왕하 22장 8절 “대제사장 힐기야가 서기관 사반에게 이르되 내가 여호와의 전에서 율법책을 발견하였노라 하고 그 책을 사반에게 주니 사반이 읽으니라”

대제사장 힐기야는 하나님의 언약책을 서기관 사반에게 전해 주었고, 사반은 왕 앞에 나아가 하나님의 언약책에 기록된 말씀을 봉독하였다. 

왕하 22장 9∼10절 “서기관 사반이 왕에게 돌아가 … 고하여 가로되 제사장 힐기야가 내게 책을 주더이다 하고 왕의 앞에서 읽으매”

하나님 언약의 말씀을 들은 요시야왕은 마음이 무너지는 심정이었다. 나라가 우상숭배에 빠져 있고 때로는 외적의 침입을 당하고 백성들이 하나님을 떠나 있었던 참담한 현실이 언약책에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아니한 결과라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왕하 22장 11∼13절 “왕이 율법책의 말을 듣자 곧 그 옷을 찢으니라 … 우리 열조가 이 책의 말씀을 듣지 아니하며 이 책에 우리를 위하여 기록된 모든 것을 준행치 아니하였으므로 여호와께서 우리에게 발하신 진노가 크도다”

할아버지(므낫세왕)나 아버지(아몬왕)가 온통 우상숭배에 빠져 있었던 형편으로 보아 요시야는 어린 시절 부패한 궁중에서 자랐고 그 누구한테도 종교적으로 올바른 가르침을 받기 어려운 형편이었다. 그러한 요시야의 심장을 찌르는 언약의 말씀은 그의 영혼을 사로잡았고 감동시켰던 것이다. 

유월절을 지키다
하나님의 언약의 말씀을 들은 요시야왕은 정신이 번쩍 들었다. 하나님의 언약(유월절)을 지키지 아니하므로 하나님의 노를 격발하고 진노를 샀던 선왕들의 역사가 스쳐 지나갔다. 

또한 예루살렘 도처에 각종 더러운 우상이 널려 있었고 심지어 성전 안까지도 우상으로 채워져 있었지만, 누구 하나 그러한 잘못을 지적하는 사람이 없고 올바른 진리를 가르치는 사람이 없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러한 현실 속에서 요시야왕에게 들려왔던 하나님의 말씀은 메마른 심령에 비를 내렸고 마음을 감화시켜 눈과 귀를 열어 주셨고 무릎을 힘있게 일으켜 세워 주셨다. 그리하여 요시야왕은 입을 열어 외쳤고 하나님의 언약(유월절)을 지킬 것을 굳게 다짐하였다. 

왕하 23장 2∼3절 “… 왕이 여호와의 전 안에서 발견한 언약책의 모든 말씀을 읽어 무리의 귀에 들리고 왕이 대 위에 서서 여호와 앞에서 언약을 세우되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여 여호와를 순종하고 그 계명과 법도와 율례를 지켜 이 책에 기록된 이 언약의 말씀을 이루게 하리라 하매 백성이 다 그 언약을 좇기로 하니라”

하나님 앞에서 언약을 지키기로 굳게 다짐한 요시야왕은 드디어 왕위에 나아간 지 제 십팔년에 하나님 앞에서 유월절을 거룩히 지키게 된다. 

왕하 23장 21∼23절 “왕이 뭇백성에게 명하여 가로되 이 언약책에 기록된 대로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를 위하여 유월절을 지키라 하매 사사가 이스라엘을 다스리던 시대부터 이스라엘 열왕의 시대에든지 이렇게 유월절을 지킨 일이 없었더니 요시야왕 십팔 년에 예루살렘에서 여호와 앞에 이 유월절을 지켰더라”

이 얼마나 감격스러우며 기쁜 일인가? 하나님이 택하신 백성으로서 당연히 기억하여 지켜야 할 이 소중한 절기 유월절을 참으로 오랫동안 지키지 못하다가 이제야 지키게 되었으니 얼마나 가슴 벅찬 일인가? 

대하 35장 1절 “요시야가 예루살렘 여호와 앞에서 유월절을 지켜 정월 십사일에 유월절 어린 양을 잡으니라” 

대하 35장 18절 “선지자 사무엘 이후로 이스라엘 가운데서 유월절을 이같이 지키지 못하였고 이스라엘 열왕도 요시야가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과 모인 온 유다와 이스라엘 무리와 예루살렘 거민과 함께 지킨 것처럼은 유월절을 지키지 못하였더라”

요시야의 종교개혁
북쪽 이스라엘은 물론 남쪽 유다 나라도 참으로 오랫동안 하나님의 언약을 잊고 살았다. 또한 온 나라가 하나님께서 가증히 여기시는 우상숭배에 빠져 있었다. 이때에 등장한 요시야왕은 하나님의 은혜로 문제 파악을 정확히 하였다. 하나님에게서 멀어져 있는 백성들의 마음을 일깨워 하나님의 언약을 지키게 하는 것이 급한 일이었다. 악명 높았던 므낫세왕의 52년 통치와 부왕이었던 아몬왕의 2년 통치 기간에 유다 나라는 더욱더 깊은 우상숭배의 죄악에 빠져 있었고, 성전을 모독하며 하나님의 언약은 멸시되고 있었다. 바알과 아세라 목상 앞에 나아가 제사를 드리는 일은 당연시되었고 너무 오랜 세월동안 습관화되어 있었다. 

이러한 잘못된 관행과 관습을 뜯어고쳐 올바르게 바로잡는 개혁에 요시야왕이 나서게 되었으니 참으로 하니님께 기쁨을 드리는 일이었다. 먼저 퇴락한 하나님의 성전을 수리하게 하였으며, 성전에서 발견한 언약책의 말씀을 읽게 된 요시야왕은 성령에 감동되어 하나님의 분명한 길을 알게 되었다. 언약의 말씀을 백성들에게 읽어주며 그들의 잘못을 깨닫게 해주었다. 철저한 회개와 아울러 하나님의 언약을 굳게 지킬 것도 다짐하였다. 

그리하여 먼저 성전 안에 있던 바알과 아세라와 하늘의 일월성신을 위하여 만든 모든 기명을 꺼내다가 예루살렘 바깥 기드론 밭에서 불사르고 우상을 섬긴 제사장들을 폐하며 예루살렘과 유다 여러 고을에 있던 각종 우상을 타파하였다. 그것은 그가 유월절을 지킴으로 우상과 신접한 자까지 다 멸하는 개혁에 착수하게 된 것이다.

왕하 23장 4∼7절 “왕이 대제사장 힐기야와 모든 버금 제사장들과 문을 지킨 자들에게 명하여 바알과 아세라와 하늘의 일월 성신을 위하여 만든 모든 기명을 여호와의 전에서 내어다가 예루살렘 바깥 기드론 밭에서 불사르고 그 재를 벧엘로 가져가게 하고 옛적에 유다 왕들이 세워서 유다 모든 고을과 예루살렘 사면 산당에서 분향하며 우상을 섬기게 한 제사장들을 폐하며 또 바알과 해와 달과 열두 궁성과 하늘의 모든 별에게 분향하는 자들을 폐하고 또 여호와의 전에서 아세라 상을 내어 예루살렘 바깥 기드론 시내로 가져다가 거기서 불사르고 …”

왕하 23장 23∼24절 “요시야왕 십팔 년에 예루살렘에서 여호와 앞에 유월절을 지켰더라 요시야가 또 유다 땅과 예루살렘에 보이는 신접한 자와 박수와 드라빔과 우상과 모든 가증한 것을 다 제하였으니 이는 대제사장 힐기야가 여호와의 전에서 발견한 책에 기록된 율법 말씀을 이루려 함이라”

하나님께 받은 축복
하나님 보시기에 정직히 행하여 그 조상 다윗의 모든 길로 행하고 좌우로 치우치지 아니하였던 요시야! 하나님을 존중히 여기며 공경하여 섬겼던 요시야! 참으로 오랫동안 지키지 못하였던 유월절을 지킨 요시야! 하나님께서 가증히 여기시는 더러운 우상들을 가차없이 멸하고 개혁을 이루어 백성들에게 하나님을 섬길 수 있도록 인도한 요시야왕을 하나님께서는 참으로 기뻐하시며 칭찬과 축복을 내리셨다. 

왕하 23장 25절 “요시야와 같이 마음을 다하며 성품을 다하며 힘을 다하여 여호와(하나님)를 향하여 모세의 모든 율법을 온전히 준행한 임금은 요시야 전에도 없었고 후에도 그와 같은 자가 없었더라”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시기를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마 22장 37절) 하시었다. 하나님을 섬기는 첫째 되는 계명! 하나님을 섬기는 백성으로서 마음과 뜻과 성품을 다하여 하나님 섬기는 이 첫째 계명을 완수할 수 있다는 것은 얼마나 큰 영광이며 축복이 되겠는가? 그런데 성경 66권, 모든 선지자의 기록 가운데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는 첫째 계명을 지킨 사람은 유다 왕 요시야의 행적 가운데서만 볼 수가 있다. 요시야왕은 모세의 모든 율법을 준행한 임금이라고 하였는 바 마음을 다하며 성품을 다하며 힘을 다하여 하나님의 첫째 되는 계명인 유월절을 지킨 것이 그에게는 큰 성공이고 축복이었다. 

우리에게 주는 교훈 
종교 개혁! 진리의 개혁! 이것은 오늘날 이 어둠의 세상을 깨우치라며 하나님께서 친히 우리에게 주신 거룩한 사명이다. ‘개혁(改革)’이라는 뜻은 잘못된 제도나 기구 따위를 올바르게 뜯어고치는 것이다. 오늘날 역시 요시아왕 당시처럼 온 세상이 하나님의 언약을 저버리고 온통 우상숭배에 빠져 있다. 이러한 시대에 하나님께로부터 마지막 종교 개혁자의 사명을 받은 우리라 한다면 옛적 요시야의 그 불붙는 마음처럼 하나님 말씀에 근거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이루려는 위대한 정신을 가지고 과감하게 개혁을 진행해 나가야 할 것이다. 

렘 5장 30절 “이 땅에 기괴하고 놀라운 일이 있도다 선지자들은 거짓을 예언하며 제사장들은 자기 권력으로 다스리며 내 백성은 그것을 좋게 여기니 그 결국에는 너희가 어찌 하려느냐”

예언된 말씀처럼 참으로 오늘날 이 세상에는 거짓과 불법이 난무하고 있다. 이밖에도 많은 거짓과 우상이 참인 것처럼 오도되고 있으니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가 없다. 이러한 시대에 하나님의 참 진리로 세상을 깨우치며 개혁해야 할 사명을 허락하셨으니 우리는 어떠한 마음과 정신을 가져야 하겠는가 ? 

요시야가 오직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하나님을 의지하여 모든 우상을 깨뜨리고 하나님 기뻐하시는 개혁을 이루어나간 것처럼 오늘날 하나님의 영원한 새 언약의 말씀을 들은 우리는 하나님 확신하는 믿음을 가지고 오직 하나님을 의지하여 하나님 기뻐하시는 진리의 개혁을 힘있게 이루어가는 마지막 종교 개혁자가 다 되어야겠다. 또한 마지막 종교 개혁자로서의 받을 축복을 세상의 돌들에게 빼앗기지 않도록 하여 요시야를 칭찬하셨던 것처럼 잘했다 칭찬 듣는 시온의 자녀가 되자.

요시야(Josiah)




시대 분열왕국 시대(B.C. 7세기경)

가족 관계 증조부: 히스기야
아버지: 아몬 어머니 : 여디다
아들 : 여호아하스

직업(특징) 남 유다 왕국 제16대 왕
활동 지역 예루살렘
통치 기간 31년
주요 행적 유월절 지킴
대대적인 종교개혁 주도

요시야(Josiah. יֹאשִׁיָּה)

13대. 히스기야 - 14대. 므낫세 - 15대. 아몬 - 16대. 요시야 <부 아몬 + 모 여디다>


요시야의 이름은 '여호와께서 고쳐주신다', '여호와께서 지지하신다'는 뜻이다.
아몬왕과 보스갓 사람 아다야의 딸인 여디다 사이에서 태어났다.
요시야8세에 왕이 되어 31년 동안 국가를 다스렸다(왕하 22:1).

여로보암이 만든 금송아지를 비롯한 각종 우상들을 타파하며 종교개혁을 주도했으며 유월절을 성대하게 지킴으로 마음을 다하여 하나님의 율법을 준행했다는 인정을 받았다.  

시대적 배경

이스라엘 왕국은 제3대 왕 솔로몬 사후 남 유다와 북 이스라엘로 나뉘었다. 북 이스라엘의 첫 번째 왕이었던 여로보암은 백성들의 마음이 예루살렘이 있는 남 유다로 향하지 않도록 하나님이 택하지 않은 곳에 금송아지 제단과 제사장을 세우고, 자기 마음대로 절기를 정해 제사를 행했다. 하루는 여로보암이 벧엘에 있는 제단에서 분향하고 있을 때, 유다에서 온 하나님의 선지자가 '장차 다윗의 후손 중 요시야라는 이름을 가진 이가 등장해 여로보암이 만든 산당과 제단을 파괴할 것'이라는 하나님의 경고를 전했다.[6]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로보암은 여전히 금송아지 우상을 숭배했고, 일반 백성을 제사장으로 삼는 등의 악행을 저질렀다.
시간이 흘러 남 유다의 제13대 왕 히스기야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른 므낫세는 부친이 없앤 산당과 우상을 다시 만들어 이방 신을 섬겼고, 하나님의 성전 안에 이방 신의 제단을 쌓았다. 또 힌놈의 골짜기에 있는 도벳 산당에서 자기 아들을 불태워 이방 신에게 제물로 바치는 등 악한 행위를 일삼았다.[7] 므낫세가 죽고 그 아들 아몬이 왕위에 올랐지만, 그도 아버지의 길을 따라 우상 숭배하는 악행을 행했다.[8] 이에 신하들은 반역을 일으켜 아몬을 죽이고, 아몬의 아들 요시야를 왕으로 삼았다.[9]

요시야의 생애

왕위 등극

다윗의 후손으로 태어난 요시야는 8세의 어린 나이에 왕이 되었지만 하나님이 보시기에 정직히 행했다.
왕위에 오른 지 8년에 다윗하나님을 찾았고, 12년에는 유다와 예루살렘에 있는 우상들을 없애기 시작했다.
요시야는 하나님의 뜻대로 나라를 다스리고자 했다.[11]

성전을 수리함

요시야가 나라를 다스린 지 18년째, 요시야는 대제사장 힐기야에게 서기관 사반을 보내 성전 수리를 지시했다.
힐기야는 성전 공사 감독을 레위인에게 맡겼다. 
이때 성전에서 여호와의 율법책이 발견되었다.
힐기야는 율법책을 사반에게 주었고, 사반은 요시야왕 앞에서 율법책을 읽었다.
요시야는 외적의 잦은 침입과 수많은 백성들이 우상 숭배에 빠진 참담한 현실이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한 결과였음을 깨달았다.
그는 율법에 기록된 대로 살지 못했다는 사실에 옷을 찢으며 크게 슬퍼했다. 
이에 온 백성을 불러 모으고 율법책의 내용을 읽어주며 유월절 등 모든 계명과 법도와 율례를 지키겠다고 다짐했다.
백성들도 율법책에 기록된 언약의 말씀을 따르기로 마음을 모았다. 

우상을 타파함

성전에서 발견된 율법책을 통해 유월절을 비롯한 하나님의 율법을 온전히 준수하는 것이 중요함을 깨달은 요시야는 대대적으로 우상을 타파했다. 먼저 여호와의 전에 있던, 우상을 섬기기 위해 만든 모든 기구와 아세라상을 내어다가 불태워 재로 만들었다.[15] 각 성읍에 있던 산당도 부수었고, 우상 숭배를 했던 제사장들을 폐했다.[16] 그리고 자식을 불살라 이방 신의 제물로 바쳤던 힌놈의 골짜기(도벳 산당)를 부정한 곳으로 만들어 더 이상 자식을 제물로 바치지 못하게 했다.[17] 태양신에게 바친 말들을 없애고 태양신을 섬길 때 사용하던 수레도 불태웠으며,[18] 솔로몬왕이 세운 이방 신의 제단을 헐고 그곳을 해골로 채웠다.[19]
요시야왕의 개혁은 이미 멸망해 앗수르(아시리아)의 치하에 있던 북 이스라엘 땅까지 이르렀다. 이는 요시야가 왕위에 있던 기원전 7세기경, 앗수르의 국력이 국가 내부 갈등으로 인해 약해져 있었기에 가능했다.[20] 요시야는 벧엘에 가서 여로보암이 세웠던 제단과 산당을 헐고, 그 주변 산에 있는 무덤의 해골을 끄집어내어 단 위에서 불살라 그 제단을 부정하게 했다. 이로써 여로보암 시대에 선지자를 통해 주신 요시야에 대한 예언이 성취되었다.[6]

유월절을 지킴

남 유다와 더불어 북 이스라엘 지역까지, 온 이스라엘을 정결하게 한 요시야는 성력 1월 14일 저녁에 어린양을 잡아 유월절을 성대하게 지켰다. 요시야는 유월절 제물로 어린양과 어린 염소 3만 마리와 수소 3000마리를 하나님께 바쳤다. 대신들도 제사장들과 레위인들을 위해 수많은 짐승을 제물로 드렸다.[21] 사사 시대부터 분열왕국 시대까지 이때처럼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 예루살렘 거민을 포함한 남 유다 사람들 그리고 북 이스라엘 무리가 모두 함께 유월절을 지킨 일은 처음이었다.[22]

선지자 사무엘 이후로 이스라엘 가운데서 유월절을 이같이 지키지 못하였고 이스라엘 열왕도 요시야가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과 모인 온 유다와 이스라엘 무리와 예루살렘 거민과 함께 지킨 것처럼은 유월절을 지키지 못하였더라 요시야의 위에 있은 지 십팔 년에 이 유월절을 지켰더라

- 역대하 35:18-19

요시야는 계속해서 유다 땅과 예루살렘에서 각종 우상들을 제거했다.[23] 그 결과, 요시야는 '마음과 성품과 힘을 다하여 율법을 온전히 준행한 왕'으로 하나님의 인정을 받았고, 그 행적이 성경에 기록되었다.[3]

요시야의 죽음


기원전 612년경, 바벨론(신바빌로니아)과 메대(페르시아)의 연합군에 의해 앗수르의 수도 니느웨(니네베)가 함락됐다. 하란으로 수도를 옮긴 앗수르는 애굽(이집트)의 바로(파라오) 느고와 연합하여 바벨론에 대항하고자 했다. 느고가 앗수르의 니느웨 탈환을 돕기 위해 유프라테스강으로 출병했을 때, 요시야는 느고의 계획을 방해하려고 나섰다. 느고가 요시야에게 사자를 보내 그와 싸울 의지가 없음을 표하며 길을 내달라고 했지만[24] 요시야는 그 말을 듣지 않았다. 므깃도 골짜기에 이르러 싸울 때, 요시야가 적이 쏜 화살을 맞았다. 간신히 예루살렘으로 돌아오긴 했으나 치명상을 입어 소생하지 못하고 사망했다.[25] 선지자 예레미야는 백성들과 함께 요시야의 죽음을 애도했다. 요시야는 예루살렘 조상의 묘실에 안치되었고, 그 아들 여호아하스가 뒤를 이었다.

교훈

요시야는 어릴 때부터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의 뜻대로 살려고 노력했던 왕이었지만, 즉위 후 18년 동안이나 하나님의 성전에 우상들을 그대로 두었다.
하나님의 계명인 유월절을 깨닫고 나서야 온 나라에 있던 각종 우상을 멸하고 대대적인 종교개혁을 실시하는 데 앞장섰다.
그 결과, 성경에 '마음과 성품과 힘을 다하여 율법을 온전히 준행한 왕'으로 기록됐다.
어느 시대든지 유월절을 지키지 않으면 하나님을 믿는다 해도 우상을 섬길 수밖에 없다.
다른 신을 섬기지 않고 오직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는 방법은 하나님의 계명인 유월절을 지키는 것이다. 
성경은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는 것이 곧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라고 가르친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의 계명들을 지킬 때에 이로써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 사랑하는 줄을 아느니라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이것이니 우리가 그의 계명들을 지키는 것이다(요한일서 5:2-3)



요시아 왕의 죽음(逆說의 죽음)

열왕기하 23장은 요시야 왕의 역동적인 신앙개혁의 모습을 담고 있다.
그는 성전 수리 중에 발견된 율법 책을 토대로 하여 무너진 신앙을 새롭게 구축하는 반면, 과거의 잘못된 신앙의 악습들을 깡그리 말소시킨다.
이스라엘 역사에서 요시아의 신앙개혁은 하나의 전대미문(前代未聞)의 일로 남는다.

그런데 23장 후반부에는 성군(聖君) 요시아의 죽음을 보도하고 있다.
그는 8세라는 이른 나이에 등극하여 30년의 선전(善政)을 펼치다가 38세라는 젊은 나이로 죽음을 맞이한다.
신앙의 관점에서 그의 죽음은 참 아쉽고도 큰 손해인 듯하다.
요시야가 죽은 당시에 [온 유다와 예루살렘 사람들이 요시야를 슬퍼하고 예레미야는 그를 위하여 애가를 지었으며 모든 노래하는 남자들과 여자들은 요시야를 슬피 노래하였다(대하 36:24~25절)]고 전한다.

너무나 아쉬워서 심정(心情)상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와 같은 요시야 왕의 죽음을 묵상해 본다.
그의 죽음에 대하여 열왕기 기자는 이렇게 전한다(29절).
[요시야 당시에 애굽의 왕 바로 느고가 앗수르 왕을 치고자 하여 유브라데 강으로 올라가므로 요시야 왕이 맞서 나갔더니 애굽 왕이 요시야를 므깃도에서 만났을 때에 죽인지라.]

개역한글이나 개정 번역에는 애굽 왕이 앗수르와 전쟁을 하기 위해 원정 길을 나선 의미로 번역하고 있으나 표준 새번역이나 영어 번역은 보다 구체적인 목적을 부연해준다:
[그가 다스리고 있던 때에, 이집트의 바로 느고 왕이 앗시리아 왕을 도우려고 유프라테스 강 쪽으로 올라갔다(During Josiah's rule, King Neco of Egypt led his army north to the Euphrates River to help the king of Assyria).]
즉 당시 앗수르와 신바벨론과의 갈그미스 전투에서 애굽은 앗수르를 돕기 위해서 원정했던 것이다.
요시아는 그 바로 느고의 원정길을 막아서다가 전사(戰死)하였던 것이다.

요시아 통치 시절, 유다의 원수인 앗수르는 쇠퇴기에 접어들었으나 신바벨론은 급부상하는 시기였다.
요시아 왕을 비롯한 남 유다는 이러한 시대적인 분위기에 들떠있었다.
그들은 <인간적인 카운트다운>에 돌입했었는지도 모른다.
그런 와중에 앗수르를 돕고자하는 바로 느고의 원정은 유다의 희망에 찬물을 껴 얹는 것과 같았다.
이는 요시야에게는 너무나 쉽게 인간적인 힘이 개입할 수밖에 없는 정황이 되고 말았다.
결국 그 일로 요시야는 죽는다.

그의 죽음에 대한 열왕기 저자는 이렇게 설명한다(25~26절). [요시야와 같이 마음을 다하며 뜻을 다하며 힘을 다하여 모세의 모든 율법을 따라 여호와께로 돌이킨 왕은 요시야 전에도 없었고 후에도 그와 같은 자가 없었더라 그러나 여호와께서 유다를 향하여 내리신 그 크게 타오르는 진노를 돌이키지 아니하셨으니 이는 므낫세가 여호와를 격노하게 한 그 모든 격노 때문이라.]

즉 요시아의 선정이 므낫세의 악정을 극복하기란 역부족이었다는 설명이다.

한편, 동시대의 역사를 또 다른 관점에서 해석했던 역대기 기자는 좀 더 부연 해석한다(대하 35:20~21절). [이 모든 일 후 곧 요시야가 성전을 정돈하기를 마친 후에 애굽 왕 느고가 유브라데 강 가의 갈그미스를 치러 올라왔으므로 요시야가 나가서 방비하였더니 느고가 요시야에게 사신을 보내어 이르되 유다 왕이여 내가 그대와 무슨 관계가 있느냐 내가 오늘 그대를 치려는 것이 아니요 나와 더불어 싸우는 족속을 치려는 것이라 하나님이 나에게 명령하사 속히 하라 하셨은즉 하나님이 나와 함께 계시니 그대는 하나님을 거스르지 말라 그대를 멸하실까 하노라 하나...]

이 부분은 아주 특이한 장면이다. 왜냐하면 애굽 왕 바로 느고의 입을 통한 하나님의 말씀이 요시아 왕에게 전해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서 요시아는 받아들이지 않는다(22~23절). [요시야가 몸을 돌이켜 떠나기를 싫어하고 오히려 변장하고 그와 싸우고자 하여 하나님의 입에서 나온 느고의 말을 듣지 아니하고 므깃도 골짜기에 이르러 싸울 때에 활 쏘는 자가 요시야 왕을 쏜지라 왕이 그의 신하들에게 이르되 내가 중상을 입었으니...]

즉 역대기 기자는 요시야와 남 유다의 판단과 행동보다 역사의 주관자 되시는 <하나님의 뜻>에 더 큰 비중을 두고 있다. 다시 말하면 아무리 앗수르가 쇠퇴하는 것이 명백하게 드러날지라도 그 때와 시기는 하나님께 달려 있지, 인간의 판단과 행동에 좌우되지 않음을 강하게 시사해준다.

사실상, 열왕기 저자 역시 아무리 요시야가 선정을 펼쳤을지라도, 그것보다 그 이전 므낫세의 악한 행동에 대한 <하나님의 간섭하심>에 더 큰 비중을 두고 있다. 즉 남 유다의 역사를 일개 왕이 이끄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관하신다는 것을 분명하게 시사해준다.

열왕기 저자나 역대기 저자는 역사의 주관자는 하나님이시며, 인생의 주인도 하나님이심을 요시야 왕의 죽음을 통해 역설적으로 메시지를 전해 준다. 다된 일 같고, 당연한 결과로 여겨질지라도, 모든 결정권자는 하나님이심을 인정하며, 그 분의 시간과 뜻에 따라야 한다. 그리스도인의 삶이란 하나님의 뜻 앞에 자아(自我)가 죽고, 하나님의 의지에 기꺼이 순종하며, 하나님의 은혜로 다시 살아나는 삶을 사는 것이다.

주님! 나는 죽고 예수로 다시 사는 삶을 선택하게 하소서. 영원한 생명이 되시는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종교개혁자 요시야(열왕기하 23:21-25, 역대하 34:1-33)

요시야란 이름의 뜻은 ‘여호와께서 도와 주신다’ ‘여호와의 낫게 한 자’ 또는 ‘고치시다’ 라는 의미입니다.
유대 왕 아몬의 아들로(마 1:10), 요시야는 8세에 왕위에 올라 31년 동안 통치했습니다.
요시야는 유다 왕들 중에서 가장 경건한 왕입니다(왕하 23:25).
선지자 예레미야는 요시야의 성실함에 비추어 요시야의 무가치한 후계자들을 정죄하였습니다(렘 22:15).
역대기에서 요시야는 아무런 주저함도 없이 히스기야의 모든 장점들을 지닌 왕으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의 조부 므낫세는 55년간이나 왕위에 있으면서 우상을 숭배하고 악을 행하다가 말년에 회개하고 새사람이 되어 나라에 선정을 베풀었습니다.
그런데도 그가 과거에 범한 죄가 너무나 컸기 때문에 우상 숭배하던 백성들의 마음은 좀처럼 하나님께로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그의 아들 아몬도 우상에게 제사를 지내고 악을 행하다가 하나님의 진노를 받아 2년 만에 죽었습니다.
요시야 왕은 이런 사악한 배경에서 자랐습니다.
그러나 그는 일평생 하나님만 섬기면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했습니다.
요시야는 어린 나이에 왕이 되었습니다.
그는 어렸지만 하나님 보시기에 정직히 행하며 다윗의 길로 행하였습니다.
그는 좌우로 치우치지 않는 확고부동한 신앙을 가지고 하나님을 섬기고 백성을 다스렸습니다.
그는 선대의 악한 왕들이 섬기던 우상을 제하고 우상을 섬기던 제단을 훼파하였습니다.
그리고 퇴락한 성전을 수리하고 정결케 하였습니다.
이 개혁은 유다 뿐 아니라 북국 이스라엘에 까지 미쳤으며 앗수르의 세력을 배제하는 운동이기도 하였습니다.

제사장 힐기야는 백성들이 여호와의 전에 연보한 돈을 꺼내다가 모세의 율법책을 발견하였습니다.
이 책을 서기관 사반이 왕 앞에서 읽으니 왕은 옷을 찢고 발견된 율법책에 비취어 볼 때에 자기와 그 백성과 그 나라의 장래가 어떻게 될 것인지 여호와께 알아보라고 하였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이 말씀대로 살지 아니함으로 하나님의 진노를 받았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요시야 왕이 여호와께 알아보기를 원했던 유다 백성들의 장래는 여선지자인 훌다가 예언했습니다.
유다 백성들이 이 율법책에 기록된 대로 살지 않고 사신 우상을 섬긴 결과 멸망할 것을 예언하였습니다. 그러나 요시야 왕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겸손히 자신의 옷을 찢고 통곡하며 회개하였으므로 요시야가 죽을 때까지는 재앙이 임하지 않을 것을 예언 했습니다.

요시야 왕은 여호와의 말씀에 근거하여 대대적인 종교개혁을 시작했습니다. 그는 유다와 예루살렘의 모든 장로들을 불러 모으고 모든 백성을 모은 후에 성전에서 발견한 율법책을 읽어 주었습니다. 그리고 왕이 먼저 하나님 앞에 언약을 세웠습니다. 그는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여 여호와를 순종하고 그 말씀대로 살기로 언약했습니다. 그는 모든 백성들에게도 오직 하나님만 섬기게 하였으므로, 요시아가 사는 동안에는 백성들이 하나님께 복종하고 떠나지 아니하였습니다. 그 후 애급 왕 바로느고가 앗수르 왕을 치려고 유대국을 통과하는 것을 막다가 므깃도 전투에서 죽으니 전 국민이 슬퍼하고 예레미야는 애가를 지어 불렀습니다(대하 35:24-25).

종교개혁을 단행한 요시야에 대하여 좀 더 살펴보고자 합니다.

1. 시대적 배경

B.C. 640- 609년경, 애굽(이집트)과 바벨론(바빌로니아), 앗수르(아시리아)가 근동지역의 지배권을 놓고 패권을 다투던 시기입니다.

2. 생애

① 부왕 아몬이 암살당하자 8세의 어린 나이에 왕이 되었습니다.(대하 34:1)

② 즉위 8년째 부터 하나님의 뜻에 따라 선정을 펼쳤습니다.(대하 34:3)

③ 즉위 12년에 모든 이방 우상을 파괴하고 이교의 예배를 폐함(대하 34:3- 7)

④ 18년에 성전을 수리함, 이때 율법서를 발견하고 대대적인 신앙개혁 운동을 펼침

⑤ 애굽과 교전 중인 앗수르를 돕기 위해 므깃도 전투에 참전했다 전사하였습니다.

3. 성품과 행적

① 선왕들의 실책과 우상숭배오 인해 퇴락된 성전을 수리하여 예배의식의 규율을 확립하였습니다.

② 율법서를 발견하여 대대적인 회개운동을 일으키고 종교개혁을 실시하였습니다.

③ 온갖 악행으로 범죄한 선대의 두 왕들과는 달리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다윗의 율례대로 선정을 베푼 어질고 신실한 왕입니다.

④ 하나님께 옷을 찢고 눈물로 회개하는 겸손한 성품의 소유자입니다.

⑤ 하지만 정치적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하나님의 뜻에 앞서 성급하게 행동하는 일면도 있었습니다.(왕아23:29)

4. 종교 개혁자로서의 요시야

교회의 부패와 타락에 반기를 든 종교 개혁가들의 보편적인 사상은 '하나님 중심', '말씀 중심'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모든 인본주의적인 악습과 제도를 개혁함과 동시에 평신도를 위한 성경 번역 및 성경적인 교리 체계를 수립하는 데 온갖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이러한 개혁 정신이 온 세계 교회를 변화시켰고 세계 도처에 많은 개신교들을 융성하게 하였습니다. 그런데 이들이 개혁의 기치로 건 하나님 중심, 말씀 중심 사상은 일찍이 유다 왕 요시야의 치적에서도 엿볼 수 있습니다. 그는 유다 역사상 전무후무(前無後無)한 성군(聖君)이였으며 또한 하나님께 인정받은 인물로서, 오늘날 개혁 교회의 귀감이 되고 있습니다.

1) 하나님 중심

요시야 종교 개혁의 첫 번째 목표는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여 여호와를 순종하는 것이었습니다. 여기에서 순종하다는 말은 '따르다'(삼상 30:21), '좇다'(신 11:28) 라는 상징적인 의미를 함축하고 있습니다. 요시아는 하나님께서 인도하시는 곳이면 어디든지 가겠다는 신념을 굳히고 이것을 종교 개혁의 목표로 삼았습니다. 우리 성도들도 이와 같이 매사에 하나님의 뒤를 따를 큰 각오가 있어야 합니다.

2) 말씀 중심

요시야 종교 개혁의 두 번째 목표는 언약의 말씀을 이루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다시 말하면 요시야는 말씀을 부흥시키고 또 그 말씀을 실행하는 데 목표를 두었습니다. 요시야 이전의 왕들은 우상을 섬기느라 하나님의 말씀을 망각하였지만, 요시야가 율법책을 발견하여 그 말씀에 순종하기로 하면서 하나님의 말씀은 다시 그들 속에서 살아 움직이기 시작했습니다. 이것은 말씀이 중세 암흑 시대에 교회의 부패에 의해 가려 있다가 종교 개혁자들의 개혁으로 다시 부흥하게 된 것과 같습니다. 참으로 요시야는 말씀 중심의 개혁가였습니다.

요시야의 개혁이념은 종교적 형식주의에 안주하던 종교가들을 질타하는 세례 요한에게서 다시 되살아났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아들이신 그리스도에 의해 그 원리는 다시 정립되었고 후에 교회사 가운데는 또다시 하나님 중심, 말씀 중심의 종교 개혁이 있었습니다. 이제 그로부터 약 오백년, 지금 우리 교회의 모습은 어떻습니까? 우리의 신앙 상태는 어떻습니까? 과연 성경이 보여 주는 개혁 정신을 따라 하나님과 말씀 중심의 신앙 위에 굳게 서 있습니까? 우리 안에 그 어떤 부패적인 요소가 있다면 우리는 과감히 그것을 개혁해야 합니다. 우리는 아담의 범죄로 인해 타락한 존재이므로 개혁하지 않으면 점점 더 부패의 정도는 심해집니다. 또한 신본주위(神本主義) 신앙은 사라지고 말씀은 우리 삶에 더 이상 영향력을 갖지 않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항상 개혁가의 자세로서 하나님 중심, 말씀 중심의 신앙에 바로 서야겠습니다.

5. 여호와를 향해 힘을 다한 사람 요시야

요시야는 불과 여덟 살의 어린 나이에 유다의 왕이 되어 31년 동안 나라를 다스리면서 힘을 다해 하나님을 섬긴 왕입니다. 요시야의 할아버지는 므낫세로 55년간 유다를 통치했으나 하나님 보시기에 악을 행했을 뿐만 아니라 무죄한 사람들까지 마구 죽여(21:16) 유다 모든 왕들 가운데 가장 악한 왕으로 유명했습니다. 므낫세가 죽고 아들 아몬이 왕이 되었을 때 백성들과 신하들은 새로운 시대가 오기를 기대했습니다. 그러나 아몬 역시 그 아버지와 조금도 다를 바 없었습니다. 하나님 보시기에 악을 행하고 우상숭배에 정신이 없었습니다. 기대했던 신하들은 대단히 실망했습니다. 그 아버지처럼 수십 년간 이런 사람을 왕으로 섬기고 이런 사람에게 나라를 맡기려 하니 걱정이 되었습니다. 결국 신복들이 왕을 반역하였습니다. 왕을 궁중에서 죽였습니다. 그러자 국민들은 또 반역한 신복들을 다 죽였습니다. 그리고 요시야가 비록 어리지만 그에게 왕관을 씌워 주었습니다.

어린 나이에 왕 된 요시야가 어떤 삶을 살았는지는 22:2에 기록된 종합평가에서도 잘 나타나 있습니다. 요시야가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히 행하여 그 조상 다윗의 모든 길로 행하고 좌우로 치우치지 아니하였더라. 그가 이렇게 하나님 보시기에 정직히 살수 있었던 것은 분명한 이유가 있었을 것입니다.

먼저, 그는 선왕인 할아버지와 아버지에게서 큰 교훈을 얻었습니다. 아버지가 불과 왕위에 오른지 2년만에 신하들에 의해 살해당한 것이 요시야에게는 충격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들이 왜 왕을 죽였을까요? 할아버지에게 고생한 사람들이 아버지에게도 큰 소망이 없음을 알 때 살해한 것이 분명함을 알았을 때 요시야는 정신을 차리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더 이상 백성들을 실망시킬 수 없었습니다. 하나님께 정직하고 백성들에게는 선정을 베풀기로 다짐한 것입니다. 우리가 선배나 조상에게 배울 수 있는 것은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나로 저분처럼 저렇게 살아야지 하는 것과 “나는 절대로 저렇게 살지는 말아야지” 하는 것인데 요시야는 후자의 교훈을 받았습니다.

또한 그는 나이가 너무 어렸습니다. 신하들이나 백성들에게 신뢰받기는 어차피 어려운 일이니 하나님께라도 인정을 받아야 했습니다. 이것이 그가 하나님을 향해 힘을 다한 왕이라는 칭호를 결정적인 동기가 된 것입니다.

첫째, 요시야는 여호와의 전을 깨끗이 수리했습니다.

하나님의 성전은 히스기야가 죽은 이후 누구에 의해 청소되거나 수리된 일이 없었습니다. 60여 년이나 누가 돌보지 않았으니 지저분하고 낡을 대로 낡을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옛날 요아스가 성전 수리를 위해 헌금을 모았듯이(12:4-14) 요시야도 성전 보수를 위해 은을 모았습니다. 요아스는 어머니(아합의 딸) 아달랴가 우상숭배 정책을 쓰면서 낡아진 성전의 보수를 위해 20세 이상의 장정에게서 주민세 성격의 은을 받았고 서원한 사람들이 몸값으로 드리는 은과 자원하여 드리는 은을 제사장들이 받아 성전 수리하는 데 쓰도록 하였던 것입니다.

어느 교회든지 그 교회의 성전을 보면 그 곳에서 신앙생활을 하는 성도들의 신앙 수준이나 교역자의 자세를 볼 수 있습니다. 신앙이 식어진 교회는 건물도 사방 구석이 낡고 지저분한 채로 있습니다. 누구나 청소하는 사람이 없고 덜렁거리는 창문을 고치는 사람이 없습니다. 그러나 열심이 있는 교회는 항상 건물이 깨끗하게 청소 정리되었고 부서지고 낡아진 곳을 찾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자세가 성전 관리하는 모습에서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청소를 해도 주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한 모습과 그저 할 수 없이 한 사람의 모습은 큰 차이가 있기 마련입니다.

둘째, 요시야는 종교개혁을 단행하였습니다.

대제사장 힐기야는 성전을 청소하고 보수하다가 율법 책을 발견했습니다. 성경이 흔치 않던 시대에 발견된 이 율법 책은 대단한 선물이었습니다. 수십 년, 아니 그 이상 성전의 어느 구석이나 창고에 처박혀 있던 것이 보수공사를 하다가 발견된 것입니다.

요시야의 종교개혁은 이 율법 책 때문에 절정을 이루게 됩니다. 율법 책을 읽어본 서기관 사반은 왕 앞에서 읽어 주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은 요시야는 옷을 찢었습니다.

거기에는 율법을 범하는 자들에게 내릴 경고와 저주의 말씀인 신명기 28장이나 레위기 26장 같은 내용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왕은 곧 이 말씀에 대하여 하나님께 묻도록 하였습니다. 제사장과 서기관들은 여선지 훌다를 찾아갔습니다. 선지자는 왕이 읽은 재앙과 진노가 내릴 것이라고 경고하였습니다. 하나님을 버리고 우상을 숭배했기 때문입니다. 다만 요시야는 이 재앙에서 제외될 것을 알려 주었습니다.

왕은 유다와 예루살렘의 장로들을 모았습니다. 다시 율법 책을 읽어 주었습니다. 그리고 그들과 언약을 세웠습니다.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여 여호와를 순종하고 그 계명과 법도와 율례를 지켜 율법 책에 기록된 언약의 말씀을 이루게 하기로 하였고 백성들은 그 언약을 따르기고 했습니다.

백성들의 전폭적인 지지를 얻은 요시야는 먼저 여호와의 전에 있던 우상숭배에 쓰이던 물건들을 꺼내어 예루살렘 바깥 기드론 밭에서 불살랐습니다. 그리고 아세라 상을 내다 불사르고 미동(남창)의 집을 헐었습니다. 이렇게 여호와의 전에서 시작된 개혁운동은 전국적으로 확산되었습니다. 23:4-20까지 읽어 보면 얼마나 철저히 우상의 뿌리를 뽑았는지 알 수 있습니다.

셋째, 요시야는 유월절을 지켰습니다.

이제까지 유월절을 지키지 않은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그 의미도 바로 기억하지 못하고 해마다 형식적으로 지켜온 절기였습니다. 그러나 성전을 깨끗이 수리하고 전국에 있는 우상의 제단을 헐어 버린 요시야는 온전한 마음으로 유월절을 지킬 수 있었습니다. 요시야는 백성들에게 명령하기를 이 언약 책에 기록된 대로 너의 하나님 여호와를 위하여 유월절을 지키라 하였습니다. 그들이 유월절을 지킨 모습은 역대하 35장에 자세히 나와 있습니다. 아무튼 사사가 이스라엘을 다스리던 시대부터 이스라엘 열왕의 시대에든지 유다 열왕의 시대에든지 이렇게 유월절을 지킨 일이 없었다고 했습니다.

습관적이고 관례적인 주일 성수나 절기를 지키는 일은 아무 의미가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일 주일에 하루, 주일을 성수하게 하시고 여러 기념할 절기를 주신 것은 그 의미를 바로 헤아려 하나님과의 신앙에 유익을 주기 위함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의미 없이 형식적으로 지나치는 절기는 차라리 지키지 않은 만도 못한 것입니다. 죄악의 사슬에서 해방된 그날의 감격을 잊지 않고 지켜지는 유월절, 일 년의 풍성한 수확과 소출을 감사하여 드리는 수장절, 율법을 받아 언약 백성이 된 것을 잊지 않고 지키는 칠칠절이 의미 있는 것처럼 우리에게도 주어진 절기마다 그 의미를 바로 알고 진정한 감사와 기쁨이 넘치는 절기를 지키는 일이 중요한 일이라 하겠습니다.

이렇게 성전을 수리하고 우상의 잔해를 제거하는 종교개혁, 다시 새롭게 지켜진 유월절, 이 모든 것은 모세의 율법을 온전히 지키려한 요시야의 값진 업적이었고 하나님은 이런 요시야를 인정하시고 기뻐하신 것입니다.

“요시야와 같이 마음을 다하며 성품을 다하며 힘을 다하여 여호와를 향하여 모세의 모든 율법을 온전히 준행한 임금은 요시아 전에도 없었고 후에도 그와 같은 자가 없었더라”(왕하23:25)

우리가 요시야를 통해 배울 교훈이 무엇인가를 살펴봅시다.


1. 요시야 왕은 태어나기 약 300년 전에 이미 여호와께서 선지자를 통해 “요시야란 아들이 태어나 우상숭배하는 제사장들을 죽여 그 뼈를 태우리라”(왕상13:2)하였습니다. 그 예언대로 요시야는 멸망직전에 있는 유다왕국을 바로잡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잘 통치하려고 힘썼습니다. 그는 16세 때 여호와를 찾기 시작했고 20세 때는 예루살렘의 여러 우상들을 훼파하였으며 6세 때는 각 지방에 있는 우상과 그 단들을 다 훼파하였습니다. 이만큼 그는 일찍부터 신앙생활에 굳게 서 있었습니다.

2. 등극한 요시야는 먼저 하나님의 성전을 깨끗이 하였습니다. 우리는 눈에 보이는 하나님의 성전 뿐 아니라 교회의 지체된 마음의 성전까지도 깨끗이 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죄의 마수가 뻗치는 곳은 어디든지 가지 말고, 죄악된 사람과는 교제를 끊는 단호한 자세가 필요합니다.

3. 요시야 왕은 즉시 자신의 옷을 찢었습니다. 고대 근동 지방에서 이런 행위는 깊은 후회와 자책의 표시입니다. 요시야는 왜 그토록 자책을 했을까요? 그 이유는 그가 하나님의 율법의 거룩한 기준을 듣는 즉시, 유다 왕국이 하나님의 명령을 전적으로 거역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더욱 중요한 것은 요시야가 단지 느끼는 데 그치지 않고, 무엇인가 행동했다는 것입니다. 그는 즉시 하나님이 그의 백성에게 원하시는 바를 따르기 위해 결단했고, 명령을 내려 행동을 취했습니다. 하나님 말씀에 대한 그의 응답은 즉각적이었고, 과감했습니다. 말씀을 듣거나 성경을 읽으면서 하나님의 뜻을 발견했을 때 우리는 어떻게 반응합니까? 우리는 단지 즉석에서 우리 삶에 적용하기 위한 진리를 찾고는 끝나지 않는가요? 또는 ‘며칠안에 시작하도록 하자. 언젠가 행동을 바꿀꺼야. 이건 그 당시에나 가능해’라면서 꾸물거리거나 적당히 합리화시키지 않는가요? 오늘이 지나가기 전에 결단할 것은 결단하자. 하나님은 당신으로 하여금 즉시, 그리고 온전히 순종 할 수 있도록 도우실 것입니다.

4. 요시야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겠다는 엄숙한 서약을 함으로써 하나님 말씀에 대한 확신을 표현했습니다. 진정으로 회개한 심령은 하나님께서 무엇을 명령하시든지 순종하겠다는 각오가 되어 있어야 합니다. 따라서 우리도 하나님이 주신 계명을 지킴으로써 하나님과의 신령한 연합을 이루어야 합니다.

5. 요시야의 개혁이 왕국분열 이후 전대미문의 대대적이고 전국적인 운동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사후 다시 우상숭배로 말미암아 국운이 기울기 시작한 것은 그의 개혁이 외형에 치우친 미완성 작품이었기 때문입니다. 즉 요시야의 개혁은 국가 외적인 생활에만 작용하였습니다. 왜냐하면 마음 속에 까지 파고드는 힘이 부족했기 때문입니다. 결국 국가를 완전히 소생시키거나 구원하는 데는 실패했습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진정한 개혁이란 마음으로 부터 시작되는 개혁이라는 사실을 명심해야 합니다.

6. 요시야가 거의 60여년 동안이나 사회의 곳곳에 뿌리박힌 온갖 우상숭배와 악한 제도를 철저하게 제거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악에 물들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단호한 결단력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7. 요시야는 비록 어린 나이에 왕이 되었지만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않는’(왕하22:2) 철저하게 하나님 중심적인 신앙관을 가졌기 때문에 과거의 오랜 악습과 부정을 척결할 수 있었습니다.

8. 하나님은 우리의 지식을 채우기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의 삶을 변화시키기 위해서 말씀을 주십니다. 다음을 묵상합시다.

 ① 당신은 성경 말씀을 어떻게 적용하고 있는가?

 ② 당신의 경우 말씀의 즉각적인 적용과 순종에 방해되는 요인들은 무엇인가?

 ③ 당신의 습관 중 당장 변화되어야 할 것들을 말씀을 듣고 기도하는 시간을 가져 보자.

9. 그토록 신실했던 요시아 왕은 하나님의 뜻을 분별치 못하고 오히려 하나님의 뜻에 역행하다가 죽었습니다. 애굽 왕 느고가 팔레스틴의 지배권을 획득하려고 앗수르를 도와 바벨론 왕을 치러왔을 때, 요시야 왕은 하나님께 묻지도 않고 군사를 이끌고 나아갔습니다. 즉 앗수르에 반감을 지녔던 요시야는 하나님의 뜻을 알지 못한채 인간적인 생각으로 바로느고의 행진을 저지하려 했습니다. 이에 하나님께서는 바로 느고를 통하여 당신의 뜻을 요시야 왕에게 전하여서 전투에서 물러서게 하십니다. 그러나 요시야는 이 하나님의 뜻을 분별치 못하였습니다. 그리하여 그는 하나님이 원치 않는 전쟁을 하다가 적군의 화살에 맞아 죽었습니다. 이렇듯 하나님 뜻보다 자신의 뜻이 앞서는 것은 항상 비극적인 결말을 가져옵니다. 따라서 우리 성도들이 생의 순간 순간에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가를 분별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가 하는 사실을 보여 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하나님의 원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가를 분별하라"(롬12:2)


또한 요시야처럼 신실했던 자도 넘어진다는 사실을 통해 우리 인간이 얼마나 허약하고 넘어지기 쉬운 존재인가를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사람을 신격화하거나, 의지하지 말고, 신앙생활에서 한 순간도 방심하지 말고 쉬지말고 기도해야 하겠습니다. 요시야는 기도하기를 잊어 인생을 수치스럽게 마감했습니다.

 참고로 요시야라는 동명이인으로 두 사람이 있습니다.(대상4:34, 슥6:10)

지금 우리는 ‘교회 성장 감소’라는 위기가 현실로 다가왔습니다. 그래도 이런 위기의식조차 갖지 못하는 무감각한 지도자들도 많이 있습니다. 한국교회의 위기를 맞이하고서 “올 것이 왔구나” 하는 체념에 빠지지 말고, 요시야 처럼 하나님 나라를 위한 열정의 회복과 도덕성의 회복, 역사의식을 가질 수 있도록 모든 목회의 역량을 집결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에게 있는 순교적 신앙의 유산으로 이러한 것을 되살릴 수 있다고 확신합니다. 한국교회여! 다시 부흥을 일으킵시다! 다시 뜁시다! 다시 일어납시다!


한국교회가 다시 부흥하려면 교회 안에서는 신자인데 교회 밖에서는 신자가 아닌 이중적인 생활을 회개하고 앞으로는 신앙과 생활이 일치해야 하겠으며 특히 목회자를 비롯한 지도자들이 회개운동이 선행되어야 하겠습니다. 예수님께서 전파하신 하나님의 나라는 사랑과 섬김의 나라입니다. 그리고 교회는 섬기기 위해서 오신 예수의 몸입니다. 따라서 섬김의 종으로 오신 예수의 몸된 교회는 마땅히 섬기기 위해서 존재합니다. 섬김을 거부하는 교회는 스스로의 존재의 의미를 부정하는 교회요 예수의 정신에서 떠난 것입니다. 성령이 떠난 교회는 영혼이 떠난 몸과 같습니다. 교회는 섬김의 운동을 해야 합니다. 한국교회가 가장 시급히 갱신되어야 할 과제는 무엇보다도 초대교회와 같이 하나님 중심, 말씀 중심 그리고 섬김의 공동체로 돌아가야 할 것입니다. 따라서 한국교회의 모든 목회자와 성도가 하나님과 이웃을 더욱 사랑하고, 하나님 말씀과 뜻대로 순종하고, 복음을 가지고 앞장서 나아가야 하겠습니다.  


기도 제목

1. 동성결혼 철폐

2. 성경적 가정의 회복

3. 공립학교와 각급 교사들의 영적 회복

4. 영화 TV 방송 인터넷 언론계의 복음화

5. 대통령과 장관들, 입법부 사법부와 군 지도자들을 위해

6. 각 주와 도시 및 교회를 위하여 기도

한국의 국가 기도의 날 제정을 위하여

1948년 5월 31일 제헌 국회가 개회할 때 기독교 국가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의장의 제안에 따라 의원이 기도하므로 모든 의원들이 함께 기도를 하였다는 역사적 사건을 기리며 그 날을 국가 기도의 날로 정하도록 모든 교회와 성도들이 관심을 갖고 새로운 한국을 세워나가야 하겠다.

기도 제목 / 이제는 달라지겠습니다!

1. 손해 보더라도 정직하게 살겠습니다!(경제 분야) 

2. 막말하지 않고 좋은 말만 하겠습니다!(언어생활) 

3. 퇴폐문화 멀리하고 깨끗하게 살겠습니다!(문화 분야) 

4. 방황하지 않고 가족과 함께 하겠습니다!(가정 회복) 

5. 외면하지 않고 이웃을 돕겠습니다!(사회봉사) 

6. 불편하더라도 참고 아끼겠습니다!(환경 공해) 

7. 대한민국을 사랑하겠습니다!(조국 사랑)



요시야 ― 남유다의 마지막 개혁자

1. 인적 사항

① 요시야는 ‘여호와께서 도와주심’이라는 뜻
② 남유다 제16대 왕, 8세에 즉위하여 31년간 통치(왕하 22:1)
③ 므낫세 손자, 유다 왕 아몬의 아들(왕하 21:24).
④ 모친은 보스갓 아다야의 딸인 여디다(왕하 22:1).
⑤ 아들로는 요하난과 여호야김과 시드기야, 살룸이 있음(대상 3:15).
⑥ 그리스도의 조상(마 1:10).

2. 시대적 배경

유다 왕국의 마지막 시대로 접어든 B.C.640년경부터 왕국 분열 후 유다 역사상 가장 부흥했던 시기인 B.C.609년까지를 주활동 배경으로 한다. 당시의 대외 정세는 남유다를 계속하여 위협하던 앗수르의 세력이 매우 약화된 때였다. 즉 앗수르는 무리한 대외정복 정책으로 국력을 많이 낭비하게 되었고 급기야 B.C.612년에 바벨론에 의한 수도 니느웨 城 함락(陷落)으로 멸망한다. 그리고 신흥 바벨론이 앗수르를 제치고, 새로운 국제 질서의 주도권을 잡고 일어나게 되었다. 그러나 그 세력이 활발하여지는 요시야 왕 말기부터였다. 그러므로 8세에 왕에 오른 요시야 왕 때에는 앗수르의 힘은 약화되었고, 아직 바벨론은 대외적으로 큰 영향을 행사하지 못하던 때였다. 그러므로 요시야 통치 초기의 유다 왕국은 평화로운 중에 여호와의 신앙을 제정할 수 있었다.

3. 주요 생애

여로보암 때에 출생이 예언됨

B.C.926년경

왕상 13:1,2

출생

B.C.647년

부왕 아몬이 암살 당함

8세, B.C.640년

왕하 21:23

왕이 됨

왕하 21:24

1차 종교 개혁 실시

20세, B.C.628년

대하 34:3

성전 수리

26세, B.C.628년

왕하 22:3-6

율법 책 발견과 대각성

왕하 22:8-13

백성들과 언약 체결

왕하 23:1-3

대대적인 종교 개혁 단행

왕하 23:4-15

유월절을 지킴

왕하 23:23

므깃도에서 전사

왕하 23:29

예루살렘에서 장사됨

왕하 23:30

4. 성품

① 8세의 어린 나이에 왕으로 즉위한 뒤 선왕들과는 달리 다윗의 율례를 모범으로 삼아 그 율례대로 선정을 베푼 것을 볼 때 어질고 신실한 자(왕하 22:2).

② 율법서를 발견한 후 말씀을 읽으며 옷을 찢고 눈물로 회개할 만큼 겸손하고 순종적인 자(왕하 22:10-13).

③ 백성들과 더불어 여호와 앞에서 말씀에 순종했다는 언약을 맺을 만큼 하나님을 철저하게 의뢰하는 자(왕하 23:3).

④ 대대적인 회개 운동 후에 우상 숭배의 제단과 그 형상, 또 이를 주관하는 자들까지도 제거할 만큼 결단력 있고 실천적인 자(왕하 23:4-15).

⑤ 하나님 말씀에 굳게 서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않을 만큼 가치관이 확고한 자(왕하 22:2).

⑥ 하나님의 뜻을 묻지 않고 자신의 판단으로 전쟁에 참여한 것을 볼 때 일면 경솔한 자(왕하 23:29).

5. 구속사적 지위

① 국가적으로 대대적인 신앙 개혁운동을 주도한 남유다 제16대 왕(왕하 23:4-15).

② 신앙적 암흑기에 여호와 예배 의식을 회복하고, 백성들과 더불어 하나님의 언약을 갱신한 지도자(왕하 23:1-3).

③ 이스라엘 분열 왕국 이후 유다 역사상 최대의 종교적 부흥기를 꾀한 왕(왕하 23:25).

6. 주요 업적

① 성전을 깨끗이 수리하고, 이 때 율법 책을 발견함(왕하 22:3-8).

② 성전에서 발견한 율법 책을 읽어 자신뿐만 아니라 우상 숭배에 빠져있던 백성들로 하여금 회개하며 하나님 앞에 돌아오게 함(왕하 22:8-19).

③ 백성들과 더불어 하나님 앞에서 언약을 갱신함(왕하 23:1-3).

④ 남방만 아니라 북방 이스라엘까지 온 이스라엘의 우상을 제거하고 정결케 함(대하 34:3).

⑤ 이스라엘 역사에서 사사 시대 이후 처음으로 모세의 율법을 따라 유월절을 지킴(23:21-23).

7. 실수

애굽 왕 바로느고를 통한 하나님의 경고를 듣지 않고 끝까지 므깃도 전투를 감행하다 죽임을 당함(대하 35:20-24).

8. 평가 및 교훈

① 요시야 왕은 8살이라는 어린 나이에 왕이 되었을지라도 선왕의 악행을 따르지 않고, 오직 다윗의 본을 따라 좌로나 우로나 치우침 없이 하나님만을 섬겼던 현군이었다(대하34:1-7). 곧 그는 즉위 후 먼저 하나님의 성전을 수리하고, 또 온갖 이방 신을 다 제하여 버렸을 뿐만 아니라, 온 나라의 하나님의 율법을 선포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모습은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이 세대에 물들지 말고 하나님의 선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여 살아가야 할 우리에게 결단력 있고 진취적인 신앙의 기상을 잘 보여준다. 당신에게도 이러한 신앙의 결단과 행동이 살아있는가? (롬12:2).

② 요시야 왕은 말씀에 대해 순종하겠다는 결심과 함께, 나아가 그 말씀대로 순종하는 삶을 살았다(왕하 23:21-25). 이러한 요시야의 모습은 말씀에 대한 지식은 많지만 그 말씀대로 실천하지 않는(약 2:14) 오늘날 많은 성도들에게 참 신앙이 어떠한 것인가를 잘 보여 준다. 실로 우리도 그와 같이 마음을 다하며 힘을 다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실천하는 자가 되어야 하겠다.

③ 요시야는 왕으로서 권위를 내세우는 개혁이 아닌, 자신부터 말씀에 근거하여 철저히 변화된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이방 우상 숭배에 젖어 있던 백성들을 회개시키고 국가적인 종교 개혁을 단행할 수 있었다(왕하 22:11-13). 이처럼 성도들도 먼저 겸손하게 자신을 말씀 앞에 복종시켜 변화하는 가운데 교회와 사회를 예리한 말씀으로 변화시켜 나아가야 한다(히 4:12). 실로 요시야가 오직 말씀에 준거하여 모든 개혁을 일으켰듯이 우리 역시 말씀에 근거하여 변화하는 모습과 노력이 있을 때 진정 이 사회가 하나님 앞에 무릎꿇어 경배드릴 수 있는 것이다.

9. 핵심 성구

“요시야와 같이 마음을 다하며 성품을 다하며 힘을 다하여 여호와를 향하여 모세의 모든 율법을 온전히 준행한 임금은 요시야 전에도 없었고 후에도 그와 같은 자가 없었더라”(왕하 23:25).








4월 30일(수) 열왕기하 18-20장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느후스단(18:4)

여러 산당을 제하며 주상을 깨뜨리며 아세라 목상을 찍으며 모세가 만들었던 놋뱀을 이스라엘 자손이 이때까지 향하여 분향하므로 그것을 부수고 느후스단이라 일컬었더라.
He removed the high places, smashed the sacred stones and cut down the Asherah poles. He broke into pieces the bronze snake Moses had made, for up to that time the Israelites had been burning incense to it. (It was called Nehushtan. )

십자가는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세상에 전파하는 강단이었습니다.
- 어거스틴

The cross was a pulpit, in which Christ preached His love to the world.
- Augustine


십자가는 단순한 처형의 도구가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이 가장 강력하게 선포된 자리였습니다.
십자가를 통해 우리는 내가 죄인임을 깨닫고,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는 길을 발견합니다.

복음은 바로 그 십자가에서 시작되며, 세상에 전해지는 가장 유일하고 강력한 메시지가 됩니다.

십자가는 매일의 삶에 생명력을 불어넣는 샘물과 같고,
자기를 부인하는 '자기 형벌'의 도구이며,
거룩한 삶을 향한 중심이 되어 끊임없이 나를 돌아보게 만듭니다.

결국 십자가는 기독교의  처음이자 모든 것이며,
하나님의 사랑이 오늘도 세상 가운데 선포되는 살아 있는 강단입니다.






 느후스단이란 히브리어 놋쇠 또는 구리라는 단어 "네호세트(nechôsheth)"에서 유래한 단어입니다.
그 의미는 구리 또는 놋쇠로 만들어진 것(a thing of brass)을 말합니다.

네호세트(nechôsheth) נְחֹשֶׁת 스트롱번호 5178

1. 놋쇠.  2. 놋쇠로 만든 물건.  3. 렘 6:28
발음 [ nechôsheth ]
구약 성경 / 133회 사용
관련 성경 / 동철(창4:22), 놋(출25:3, 신28:23, 사60:17),동(민31:22, 신8:9, 대하2:14), 놋줄(삿16:21), 차꼬(삼하3:34), 사슬(왕하25:7, 렘39:7), 쇠사슬(대하33:11, 36:6), 누추한 것(겔16:36).

1. 느후스단의 역사적 배경

느후스단은 구약성경 열왕기하 18:4에 등장하는 유물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불뱀 사건(민수기 21:4-9)에서 구원을 받기 위해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만들도록 명하신 놋뱀(bronze serpent)을 가리킵니다. 그 배경은 다음과 같습니다.

민수기 21장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과 모세에 대하여 불평하고, 그 결과 하나님께서는 그들 중에 불뱀을 보내어 많은 사람들이 죽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회개의 마음을 가진 백성들을 위해 놋뱀을 만들어 그것을 쳐다보는 자마다 구원받게 하셨습니다. 이것은 단순히 놋으로 된 뱀이 아닌, 하나님의 구원의 상징이었습니다.

세월이 흐르면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 놋뱀을 우상화하게 되었고, 그들은 이를 "느후스단"이라 불렀습니다. 이것이 단순한 금속 조각임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 사람들은 느후스단을 숭배하며 그 앞에 제사를 드렸습니다.

히스기야 왕은 하나님 앞에서 정직하게 행하며 이러한 우상 숭배를 폐지하려 했습니다. 히스기야는 느후스단을 파괴하며, 이것이 본래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만들어졌으나, 시간이 지나면서 사람들이 본래의 뜻을 잊고 그것을 숭배 대상으로 삼았음을 비판했습니다.

2. 신학적 의미

구원의 상징 : 놋뱀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구원의 도구로 주어졌습니다. 그러나 그것 자체가 구원이 아니라, 그것을 통해 하나님께로 향하는 믿음이 구원의 본질이었습니다. 신약에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사건을 인용하시며, 자신이 바로 그 놋뱀처럼 십자가에서 들려 믿는 자들에게 구원을 주실 것임을 선언하셨습니다(요한복음 3:14-15).

우상화의 위험성 : 느후스단 사건은 하나님의 선한 목적을 위해 사용된 상징조차도 잘못된 방식으로 숭배될 때 우상이 될 수 있음을 경고합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좋은 것도 인간이 그것에만 집중하고, 그것 자체를 숭배의 대상으로 삼을 때 신앙의 본질이 왜곡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형상으로 자신을 드러내지 않으시며, 오직 말씀으로 그분을 알기를 원하십니다.

예배의 순수성 : 히스기야 왕의 개혁은 하나님께 대한 순수한 예배를 회복하려는 시도였습니다.
그는 전통적으로 내려온 관습조차도 그것이 하나님의 뜻에 어긋날 경우 제거해야 한다고 판단했습니다.
이 점은 예배에서 형식보다는 본질이 중요함을 보여줍니다.

3. 현대적 적용

우상의 현대적 형태 : 느후스단이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우상화되었듯이, 오늘날 우리는 종종 형식적인 종교 생활이나 교회 전통을 절대화하며 본질을 잊어버리는 경우가 있습니다.
건물, 교회의 사역, 특정 교리나 전통 등을 하나님보다 우선시할 때 그것은 우리의 느후스단이 될 수 있습니다.

믿음의 본질 회복 : 하나님은 우리가 형식적 예배가 아닌, 마음에서 나오는 진실한 예배를 드리기를 원하십니다(요한복음 4:24).
예배가 형식적이거나 외형적인 것에만 집중될 때, 우리는 신앙의 본질에서 멀어질 수 있습니다.
따라서 느후스단의 교훈을 통해 우리가 진정 무엇을 숭배하고 있는지를 스스로 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개혁의 필요성 : 느후스단 사건은 때로는 우리의 신앙과 예배 속에서 개혁이 필요함을 상기시킵니다.
히스기야 왕이 모든 사람의 관습으로 자리 잡은 느후스단을 부수고 예배의 순수성을 회복한 것처럼, 현대 교회와 개인의 신앙에서도 영적 개혁이 필요할 때가 있습니다.
전통이나 문화적 요소가 오히려 하나님과의 관계를 방해할 때, 우리는 그것을 과감하게 제거하고 본질로 돌아가야 합니다.

결론

느후스단의 이야기는 하나님께로의 순수한 믿음우상 숭배의 위험성을 강력하게 상기시켜 줍니다.
우리는 느후스단 사건을 통해 우리의 신앙생활에서 형식적인 요소나 전통이 하나님과의 관계를 방해하지 않도록 경계해야 합니다.
현대 사회에서도 하나님께 대한 온전한 믿음과 순수한 예배를 추구하며, 우상화된 요소들을 제거하는 용기를 가져야 할 것입니다.

마태복음 7:21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Not everyone who says to me, 'Lord, Lord,' will enter the kingdom of heaven, but only he who does the will of my Father who is in heaven.

마태복음 16:24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Then Jesus said to his disciples, "If anyone would come after me, he must deny himself and take up his cross and follow me.

화려한 예배가 사람들을 감동시킬지라도 주님께서 기뻐하는 예배가 아닙니다.
십자가를 걸어놓았다고 그 자리가 거룩한 자리가 아닙니다.
십자가를 짊어지고 믿음으로 전진하는 것만이 바람직한 예배가 될 것입니다.

기독교 신앙과 상징
- 우리는 무엇으로 하나님을 알게 되는가?

기호와 상징의 차이

1. 상징(das Symbol. symbol)

본래 가지고 있는 뜻을 정확히 부연 설명하거나 의미 전달을 확실하게 하기 위하여 하나의 기호로 표현되어지는 것.

2. 기호(das Zeichen. sign)

상징을 주기 위한 하나의 신호적인 의미이므로 그 안에 아무런 의미나 뜻이 들어 있지 않다.

예를 들면 십자가는 예수의 고난을 상징한다.
십자가 그 자체는 하나의 예수의 고난을 상징하기 위한 하나의 기호(Zeichen)에 불과하다.

기독교 신앙 안에서의 상징의 필요성

왜 기독교는 상징이 필요한가?
- 상징이 주는 신앙적 의미 

신앙은 참된 하나님의 상징성을 통하여 우리가 바라보는 믿음의 대상을 의지하고 바라볼 수 있다.
우리가 하나님을 어떻게 확실히 알 수 있겠는가?
하나님을 의지하는 신앙의 대상은 상징적 요소를 통하여 하나님의 실재를 대변하게 된다.

기독교 상징을 통한 의미부여 :

우리가 하나님의 실재를 확인할 수 없기에 우리는 상징적인 요소를 가지고 하나님의 일부분을 투영하며 그 본체에 가깝게 의미부여하는 것이다.  

상징이 주는 신앙의 긍정적인 요소와 부정적인 요소

긍정적인 요소

1. 하나님에 대한 거룩성 수용

2. 타자로서의 하나님 이해

3. 하나님을 바라보는 다양한 시각의 가능성

부정적인 요소

1. 인간의 이해 방식에 따라 자의적 해석가능

2. 인간의 경험과 이성의 한계로 인한 하나님의 사고에 대한 고착화 우려  

우리의 삶에 있어서 신앙의 상징적인 요소가 있는가?

인간의 신앙의 자율성과 지속성을 강조하기 위하여, 특별히 신앙의 폐쇄성을 탈피하고 상징을 통하여 하나님에 대한 이미지와 투영을 가깝게 이해하게 하려는 것이다.

개신교는 상징적 요소를 가지고 있는가?
가톨릭은 상징을 절대화하여 우상적인 요소가 있고, 개신교에서는 본질적 상징마저 잃어버린 현실의 상황이다.

나는 신앙에 대한 어떤 상징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는가?
참된 기독교의 상징의 회복은 예배의 회복, 신앙의 회복, 삶의 회복이다.
우리 각자의 마음속에 참된 신앙의 자리를 갖기 위하여 상징의 의미를 회복하여야 한다.
상징이 고착화가 되면 우상이 될 수 있지만 상징이 사라지면 우리의 마음속에 하나님의 자리를 잃어버릴 수 있다. 특히 개신교는 상징의 신학이 회복되어야 한다. 예배, 찬양, 기도, 말씀에 대한 상징의 본질이 회복되어야 한다.

상징을 통하여 성서와 신앙을 위한 제언

성서는 과학적인 근거나 객관적인 자료를 위하여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신앙의 근거를 위한 텍스트로서 하나님을 믿고자 하는 신앙인 들에게 부여하는 하나의 상징적인 의미의 토대로서의 말씀이다.
자신을 어떤 대상물이나 상징적인 의미로 표현하고자 할 때, 대부분 그 자신이 투영하는 것에 대하여 자신의 생각과 의미와 정신이 반영되어져 있음을 알게 된다.
그렇다면 우리는 우리 자신의 이기적인 마음과 그릇된 편견 또는 자의적인 해석에 따라 자신을 마음대로 신앙을 판단하고 해석하고는 있지 않는가에 대한 진정한 반성이 있어야 할 것이다.

신앙은 소유가 아니라 개방이자 열림이다.
신앙은 자신의 삶만을 보호하는 방어막이 아니라 장애물과 난관을 헤쳐나가게 해주는 원동력이다.
신앙을 그러한 참된 의미를 각성하게 하고 자신의 나태한 모습을 새롭게 받아들이려는 믿음의 근거이다.

모세의 놋뱀(민수기 21:8)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불뱀을 만들어 장대 위에 달라 물린 자마다 그것을 보면 살리라.
The LORD said to Moses, "Make a snake and put it up on a pole; anyone who is bitten can look at it and live."

습관적인 불평과 불만에 사로잡힌 민족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도우심을 항상 잊어버리고, 어려운 상황에 부딪칠 때마다 습관적인 불평을 일삼아 하나님께 받은 은혜를 쉽게 망각하는 자들입니다.

가나안을 향하는 길에 에돔 왕이 자기 영토로 이스라엘이 지나가는 것을 용납지 아니함으로 지름길을 제쳐 놓고(민 20:21),
에돔 땅을 우회하게 되어 백성의 마음이 상하게 되었습니다(민 21:4).
그들에게 있어서 광야 길은 육체적으로 고역스럽고 사람의 마음을 지치게 만드는 곳이었습니다.
결국 인내심이 사라진 그들의 마음에 극한 분노가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분노와 원망 즉 남의 탓으로 돌리는 그들의 마음은 하나님이 보시기에 악했습니다.

하나님은 불뱀들을 백성 중에 보내어 물게 하셨고 죽음의 사건이 일어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불뱀을 징계의 도구로 사용하십니다.
이러한 불뱀의 습격으로 말미암아 백성들은 해결책으로 자신들의 범죄함을 인정하게 되었고 모세에게 여호와께 기도해달라고 간청합니다.
하나님은 백성들의 마음을 보시고 모세에게 이르시되 “불뱀을 만들어 장대 위에 매달아라. 물린 자마다 그것을 보면 살리라.”(8절)
모세는 놋뱀을 만들어 장대 위에 달았고 그것을 쳐다본 자들은 모두 살았다고 했습니다.
죄로 말미암아 얻은 사망에서 하나님의 용서와 은혜로 생명을 얻은 사건입니다.

신앙생활을 하면서 때로는 내가 원하는 방향으로 이루어지지 않을 때에 습관적으로 나오는 불평과 불만이 나의 마음을 쉽게 사로잡고 원망의 말을 서슴지 않고 하게 됩니다.
죄를 지을 때 마다 나에게 찾아오는 불편한 마음과 평안을 깨트린 상황에서는 무엇을 해도 만족함이 없습니다.
나에게 찾아오는 감정은 분노, 짜증, 우울, 고독이 밀려옵니다.
결국 감사가 없는 마음과 하나님의 뜻을 헤아리지 못한 인내심의 결여는 나에게 영적으로 큰 손해를 입히게 됩니다.
그러나 내가 모든 것의 원인을 나 중심적으로 생각하기 보다는 모든 상황을 다 알고 계시는 하나님 중심으로 생각할 때에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봄으로 죄 사함과 구원의 은혜가 나에게 임하게 됩니다.

나의 잘못된 생각과 하나님께 대한 믿음이 없던 것을 회개하며 내 삶을 돌이킬 때에 성령님이 내 마음 가운데 임하셔서 평안과 안식을 주십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놋뱀을 바라본 것처럼 나또한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을 바라보며, 하나님의 말씀을 의지해서 인생의 여정을 나 혼자가 아닌 성령님과 함께하는 믿음의 길을 걸어가야겠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종살이하며 많은 시련과 어려움을 겪다가 하나님의 은혜로 애굽에서 나와 가나안 땅을 향하여 갔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자신들을 애굽에서 건져내신 것, 많은 적을 이기게 하신 것, 불 기둥과 구름 기둥으로 보호하신 것, 광야에서 만나를 주신 것, 반석에서 물이 나게 하신 것 등은 기억하지 않고 조금만 문제가 생겨도 불평하고 원망했습니다.

민수기 21장에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길로 인해 마음이 상해서 하나님을 원망했습니다.

뱀에게 물린 자마다 쳐다본즉 살더라

하나님은 원망에 가득 찬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불뱀을 보내셨습니다.
불뱀이 천막 안을 기어다니고, 사람들이 불뱀에 물려 죽어갔습니다.
그러자 이스라엘 백성들이 모세에게 애원했습니다.

“여호와께 기도하여 제발 불뱀을 떠나게 해주소서!”

모세가 기도했지만 하나님은 불뱀을 떠나게 하시지 않았습니다.
대신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불뱀을 만들어 장대 위에 달라. 뱀에게 물린 자마다 그 뱀을 쳐다보면 살리라.”

모세가 놋으로 불뱀을 만들어 장대 위에 달았습니다.
성경에는 “뱀에게 물린 자마다 놋뱀을 쳐다본즉 살더라.”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불뱀에게 물렸는데 놋뱀을 쳐다보면 어떻게 삽니까?
요한복음 3장에서 예수님이 이에 대하여 말씀하셨습니다.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요 3:14~16)

성경에 등장하는 단어들에는 저마다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포도주는 기쁨을 나타냅니다.
기쁨이 있는 곳에는 포도주가 등장합니다.

기름은 성령을 나타냅니다.

금은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고, 은은 구속의 대가를 나타내며, 놋은 심판을 나타냅니다.

장대 위에 달린 놋뱀은 ‘심판받은 뱀’을 나타냅니다.
불뱀으로 말미암아 죽음이 왔고, 그 불뱀이 심판을 받았다는 의미입니다.
다시 말하면, 죄로 말미암아 죽음이 왔고, 죄가 심판을 받았다는 뜻입니다.
장대 위에 달린 놋뱀은 바로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킵니다.

구원은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을 바라보기만 하면 된다
불뱀에 물려 죽어가는 사람과 그의 아들이 이야기한다고 생각해 봅시다.

“아버지, 놋뱀을 쳐다보면 산대요. 놋뱀을 쳐다보세요.”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마라! 몸에 독이 퍼져서 고통스러워 죽겠는데 놋뱀을 쳐다본다고 살 리 있냐?”

“아버지, 쳐다보세요.”

“글쎄, 헛소리하지 마라니까!”

“아버지, 그래도 한번 쳐다보세요.”

“그만하라잖아!”

“안 됩니다. 그러다가 아버지 죽습니다. 제가 강제로라도 아버지가 놋뱀을 보시게 하겠습니다.”

아들이 아버지를 놋뱀이 있는 곳까지 모시고 가서 얼굴을 들어 쳐다보게 했습니다.
그러자 몸 안에 있던 뱀의 독이 사라졌습니다.

“이거 진짜 신기하네! 놋뱀을 쳐다보니까 몸이 싹 나았다!”

구원은 아주 간단합니다.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님을 바라보기만 하면 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원망해서 불뱀이 왔지.
죄로 인해 불뱀이 온 거야.
놋뱀은 그 뱀이 심판을 받았다는 것이니 우리 죄가 심판을 받았다는 의미구나. 그러면 죄가 끝났네!’
십자가는 단순히 기독교를 표시하기 위해, 혹은 보기 좋으라고 다는 것이 아닙니다. 십자가를 쳐다보십시오. 십자가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못 박혀 죽으심으로 우리 죄가 심판받은 곳입니다. 죄가 끝나고, 저주가 끝나고, 심판이 끝나고, 고통이 끝난 곳입니다. 그 사실을 깨닫는 순간, 우리가 죄 때문에 괴로워하고 고통하다가 십자가를 바라봅니다.
‘주님이 달리신 십자가! 저 십자가에서 예수님이 내 죄를 사하셨지!’


아리우스 가문의 반지

‘벤허’라는 영화가 있습니다.
등장인물인 벤허멧살라는 어릴 적에 친구였는데, 유대인인 벤허와 로마인인 멧살라는 자라면서 다른 이념을 가져 서로 원수가 됩니다.

멧살라는 예루살렘을 다스리는 호민관이 되어 유대로 돌아온 뒤 벤허를 로마군 함선에서 노를 젓는 노예로 만듭니다.
얼마 후, 로마의 최고 권력자인 집정관 아리우스가 해적들을 소탕하려고 함대를 이끌고 바다로 나가면서 벤허가 노를 젓는 배에 탑니다.

곧 로마군과 해적들 사이에 치열한 전투가 벌어지고 싸움 중에 아리우스가 바다에 떨어집니다.
그 광경을 본 벤허가 바다로 뛰어들어 아리우스를 구해 부서진 배의 큰 나무판 위에 올려놓습니다.
아리우스가 정신을 차려 자신의 배가 불길에 휩싸인 것을 보고는 자결하려고 하는데, 벤허가 그의 팔을 잡아 칼을 빼앗습니다.
잠시 후 함선들이 몰려오고, 아리우스는 해적일 거라고 생각하지만 배들이 가까이 와서 보니 로마군 함대였습니다.
아리우스가 배에 올라가자 한 장군이 ‘배 두 척만 잃고 해적들을 전멸시켰다’고 보고합니다.

로마로 돌아간 아리우스벤허를 양자로 삼고, 가문 대대로 내려오는 인장반지를 벤허의 손가락에 끼워 줍니다.
벤허는 어머니와 여동생 생각에 유대로 돌아가서 멧살라를 만나러 갑니다.
가기 전에 “아리우스의 아들로부터”라고 적은 선물을 멧살라에게 보냅니다.
멧살라가 선물을 보고 “집정관 아리우스에게 아들이 있었나?” 하자, 옆에 있던 장교가 최근에 양자로 삼은 아들이 있다고 말합니다.
그때 벤허가 나타나 멧살라가 깜짝 놀랍니다.

“네가 무슨 요술로 아리우스의 아들이 되었지?”

“요술의 주인공은 바로 너다! 네가 나를 노예선으로 보내 내가 전쟁터에서 아리우스를 구했다.”

그러고는 “표식은 알겠지?” 하고 서판에 인장반지의 문양을 찍어 멧살라에게 보여 줍니다.
벤허가 이전의 벤허가 아닌 로마에서 최고의 권력을 가진 집정관의 아들이기에 멧살라가 쩔쩔맵니다.
벤허가 말합니다.

“내 어머니와 누이동생의 소식을 알려다오. 그러면 모든 걸 잊겠다.”

“그건 총독의 허가를 받아야 한다.”

“허가를 받아내!”

벤허가 아리우스의 아들이 되어 가문의 반지를 껴도 그 능력을 모르면 멧살라에게 여전히 수모를 당해야 했겠지만, 벤허는 ‘아리우스 가문의 인장반지’가 가진 힘을 알았습니다.

다시 십자가를 바라보라

십자가에는 힘이 있습니다.
사탄이 자주 우리에게 속삭입니다.

“너, 거짓말했잖아! 너, 나쁜 짓 했잖아!”

우리가 죄를 지었다는 사실로 우리를 슬퍼하고 괴로워하게 만듭니다.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하고 근심하게 만듭니다.
사탄은 쉬지 않고 우리를 정죄합니다.

“네가 죄를 지었으니까 하나님이 너를 미워하고 벌하고 버리실 거야!”

그때 우리가 놋뱀을, 십자가를 쳐다보는 것입니다.

‘사탄아, 맞아. 내가 죄를 지었어. 하지만 저 십자가 앞에서는 죄가 죄가 아니야. 저 십자가에서 내 모든 죄가 사해졌어. 거기서 죄가 끝났어! 심판이 끝났어!’

놋뱀을 쳐다본즉 살더라.

이스라엘 백성들이 불뱀에 물려 고통하다가 놋뱀을 쳐다보면 모두 나았습니다.
마찬가지로, 사탄이 죄로 인해 우리를 조소하고 괴롭힐 때 십자가를 바라보면 그 고통에서 해방됩니다.

“너, 거짓말했잖아!”라고 해도,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셨어! 거기에서 내가 거짓말한 죄가 끝나고 모든 죄가 끝났어!’ 하면 됩니다.

성경은 확실히 그렇게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세상 어디에도, 하나님 앞에서도 우리가 지은 죄의 기록이 없습니다. 본래 가지고 있는 뜻을 정확히 부연 설명하거나 의미 전달을 확실하게 하기 위하여 하나의 기호로 표현되어지는 것.

2. 기호(das Zeichen. sign)

상징을 주기 위한 하나의 신호적인 의미이므로 그 안에 아무런 의미나 뜻이 들어 있지 않다.

십자가에서 흘린 예수님의 피로 모두 도말(塗抹)했습니다.
어디에도 우리를 정죄할 자가 없습니다.
십자가에서 흘린 피가 모든 죄를 눈처럼 희게 씻었습니다.

금이나 은같이 없어질 보배로 속죄함 받은 것 아니요
거룩한 하나님 어린양 예수의 그 피로 속죄함 얻었네

이 찬송을 옛날에는 입으로 불렀지만 이제는 마음으로 부를 수 있습니다.

속죄함 속죄함 주 예수 내 죄를 속했네
할렐루야 소리를 합하여 함께 찬송하세
그 피로 속죄함 얻었네

우리의 선한 행위로도 아니고, 노력이나 수고로도 아니고, 은혜로,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속죄함 받았습니다. 하나님은 예수님의 피가 어떻게 우리 죄를 씻었는지 가르쳐 주시기 위해 성경 구석구석에 구원에 관한 이야기들을 담아놓으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께 죄를 범해서 불뱀에 물려 죽어가다가 놋뱀을 쳐다보고 살았습니다. 처음에는 우리가 이 성경 이야기를 내용만 압니다. 그러다가 하나님의 은혜로 거기에 담긴 의미를 알게 됩니다. 놋뱀은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가리킵니다.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요 3:14~15) 예수님이 우리 죄를 짊어지고 십자가에서 심판을 받으셨습니다. 우리의 모든 죄가 십자가에서 끝났습니다. 심판받을 죄가 더 이상 남아 있지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 마음이 죄에서 해방되어 참된 자유를 얻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인 사람은 마음에서 저주가 끝나고 고통과 슬픔이 끝나 밝게 삽니다. 사탄에게 속아서 죄를 지었을 때 다시 십자가를 바라보십시오. ‘저기서 내 죄의 심판이 끝났어!’ 하나님이 우리에게 기쁘고 즐거운 삶을 값 없이 은혜로 주셨습니다. 우리 모두 이 복음을 인해 기뻐하고 즐거워하며, 땅끝까지 복음을 전하는 사람이 되길 바랍니다.





느후스단 (열왕기하 18:1-4)

광야에서 불뱀에 물린 이스라엘 백성들은 모세가 만들어 장대에 매달았던 구리뱀을 믿음으로 바라보면 살았습니다.  
그 뱀은 죄를 지은 백성들을 불뱀의 독으로부터 치료하기 위한 하나님의 처방이었는데 언제부터였는지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 구리뱀을 우상으로 섬기고 있었습니다.  

오늘 읽은 말씀에 히스기야 임금이 그 놋뱀을 파괴하고 누후스단이라 하였습니다.  
히스기야 왕이 모세의 놋뱀을 느후스단이라 부르며 가차없이 깨뜨려버리게 된 배경을 먼저 살펴보면 오늘 말씀의 의미가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유다 왕 히스기야는 아버지 아하스의 뒤를 이어 25세에 왕위에 올랐습니다. 
열왕기하 16장을 보면, 그의 아버지 아하스 왕은 예루살렘에서 16년간 통치하는 기간에 역대 유다 임금들 중에 우상숭배를 가장 심하게 했던 왕이었습니다. 
금송아지와 바알을 섬겼을 뿐 아니라 아들을 불에 태워 제물로 바치는 몰록을 섬길 정도로 타락한 왕이었습니다. 
북쪽 이스라엘과 아람 왕국이 연합하여 유다를 공격하여 궁지에 몰릴 때 아하스는 앗수르에 구원의 손길을 요청하며 예루살렘 성전과 왕궁의 금은 보화를 선물로 보냈습니다.  
그 당시 이사야 선지자가 애타는 심정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지만 아하스 왕은 하나님의 명을 거역하고 큰 나라 앗수르 제국을 의지하였습니다.  

아하스의 선물을 받은 앗수르 왕은 구원병을 보내 이스라엘과 아람 연합군을 함락시켰고 유다 왕 아하스는 앗수르 왕을 만나러 다메섹에 갔다가 거기에 있는 거대한 규모의 우상 제단을 보고 감명(?)을 받았습니다. 이 사람들이 이런 제단에 제사를 드리니 효험이 있는 모양이구나 생각하고 우리도 이렇게 크고 화려한 제단이 필요하다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그 제단의 구조와 규격 등을 그림으로 그려 제사장 우리야에게 보내 내가 예루살렘으로 돌아가기 전까지 이것과 똑같은 제단을 만들어놓으라 명령했습니다.  

예루살렘으로 돌아온 왕은 새롭게 세워진 제단을 보고 마음이 흡족하여 그 단에 제사를 드렸습니다.  그 정도가 아니라 예루살렘 성전에 있던 놋단을 북쪽으로 옮겨버리고 그날 이후로 모든 제사는 새로 만든 큰 단에 드리게 했습니다. 예루살렘 성전 문들을 닫아 걸었으며 등불을 끄고 성소에서 분향하지 아니했습니다.  예루살렘 곳곳에 새로운 산당을 세워 온갖 우상을 숭배하며 하나님께로부터 점점 멀어졌고 백성들은 고통 속에 시달렸습니다(역대하 28장). 

그와 같은 시대에 북쪽 이스라엘의 상황은 어땠을까요? 호세아가 왕으로 다스리고 있을 때  이스라엘 지파들은 여호와를 배반하고 모든 산 위에 산당을 짓고 바알과 아세라 우상을 섬겼습니다. 송아지 우상을 만들어 섬겼으며 하늘의 해와 달과 별을 숭배하였고 자녀를 불에 태워 제물로 바치는 몰록을 섬겼습니다.  하나님께서 진노하여 그들을 앗수르의 손에 붙이셨고 이스라엘은 앗수르에게 패하여 멸망하고 말았습니다. 

앗수르의 왕은 멸망당한 사마리아 성에 이스라엘 사람들을 대신하여 앗수르에 패한 이방 민족들을 강제 이주시켰습니다.  식민지 백성들이 앗수르에 대항하지 못하도록 뿔뿔이 흩어놓는 강제이주 정책을 사용한 것입니다. 그때 사마리아 성으로 들어온 이방 민족들이 각자 자기들이 섬기던 우상들을 가져왔습니다.  사마리아 성은 물론 이스라엘의 모든 성읍마다 산당을 짓고 거기 우상들을 모셨습니다. 이스라엘은 이때부터 이방인들과 피가 섞인 잡족이 되었으며 이방의 신상들이 득실거리는 종교 시장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한 가지 흥미로운 것은 하나님께서 이런 악행을 보시고 벌하여 이방인들 몇을 죽게 하셨더니 그들이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앗수르 왕에게 한 가지 청을 하였습니다. ‘우리가 이 땅을 주관하는 신을 섬기는 법을 몰라 이런 벌을 받았으니 전에 사마리아에서 여호와를 섬기던 제사장을 보내어 우리에게 그 신을 섬기는 법을 가르쳐주시기 바랍니다’  이 말을 들은 앗수르 왕이 사마리아에서 포로로 잡혀온 제사장 하나를 돌려보내 벧엘에 살면서 여호와를 어떻게 섬겨야 하는지 방법을 가르치게 하였습니다. 

그렇다고 이방 잡족들이 마음을 돌이켜 그때부터 여호와 하나님만 섬겼다는 말이 아닙니다. 각 민족이 각각 자기의 신상들을 만들어 사마리아 사람들이 세운 여러 산당에 두었고, 각 성읍마다 여호와를 섬기는 제사장을 세워 자기들을 위해 제사를 드리게 했습니다.  그 땅의 수호신에게 잘 보여야 재앙을 만나지 않고 평안하게 살 수 있다는 생각이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만 섬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그저 사마리아 지역의 수호신 정도로 여겨 섬겼다는 말입니다.  이것이 바로 앗수르에게 망한 이스라엘 땅에서 벌어진 혼합주의 신앙이었습니다. 

이럴 때 남쪽 유다 왕국에서는 아하스 왕을 이어 히스기야가 왕위에 올랐습니다. 조상 다윗의 의로운 길을 따랐던 히스기야는 가장 먼저 종교개혁을 실시합니다. 오늘 읽은 본문의 말씀처럼 여러 산당들을 무너뜨리고 거기 두었던 모든 우상들을 깨뜨리고 찍어버렸습니다.  그리고 모세가 만들었던 놋뱀을 부숴버렸습니다.  유다 왕국에 일대 개혁이 일어났습니다. 5절과 6절을 보면,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의지한 히스기야를 가리켜 ‘그의 전후 유다 여러 왕 중에 그런 왕이 없었으니 그가 여호와께 연합하여 떠나지 아니하고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하신 계명을 지켰더라’ 하였습니다. 

역대 어느 왕들보다 모세의 계명을 잘 지킨 히스기야가 모세가 만든 놋뱀을 부숴버렸습니다.  그리고 그 뱀을 가리켜 느후스단이라 불렀습니다.  왜 그랬습니까? 백성들이 그 놋뱀을 향해 향을 피우며 제사를 드리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모세의 놋뱀이 처음부터 우상으로 섬김받은 것은 아니었는데 언제인가부터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질병을 치료하는 신으로 섬겨졌던 것입니다.  느후스단이란 말은 그저 놋조각이라는 뜻입니다.  지난 주일 말씀드린 내용과 오늘 말씀을 연결지어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모세가 만들어 장대 위에 높이 달았던 놋뱀은 불신앙으로 멸망당하는 죄인들의 치료와 생명구원을 위해 하나님이 주신 은혜의 수단이었습니다.  불신앙을 신앙으로 바꾸게 하시는 하나님의 치료방식이었지 숭배의 대상은 아닙니다.  뱀의 모양을 한 그 놋조각이 하나님의 자리를 대신할 수 없습니다. 믿음으로 바라보느냐 아니냐를 판가름하는 상징적인 도구였습니다.  ‘놋뱀을 쳐다본다고 어떻게 죽을 사람이 살아나느냐 말도 되지 않는 소리 하지마라’ 하고 끝까지 거부하던 사람들은 고통 중에 죽어갔습니다. 

예수님은 모세의 놋뱀을 언급하시며 ‘나도 높이 달려야 하리니 누구든지 나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시기 위함이라’(요3:14, 15) 하셨습니다. 주님이 당하신 십자가의 희생이 나의 죄를 대신한 형벌임을 인정하고 그 십자가의 주님을 믿음으로 바라보는 사람은 영생을 얻습니다. 그렇습니다.  모세가 높이 든 놋뱀과 예수께서 달리신 십자가의 공통점이 무엇입니까?  죽음을 생명으로 바꾸게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입니다.  그 선물을 믿음으로 받는 사람은 누구든지 영원한 생명을 얻습니다.

전남 보성의 어떤 교회 목사 부부가(엄밀히 말하면 목사라고 할 수 없는 자칭 목사지만) 세 자녀를 굶기고 때려 죽게 했습니다.  처음에 신문기사를 읽었을 때는 정신질환을 앓는 부부가 아이들을 학대한 폭행치사 사건일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사건 내용이 자세히 밝혀지면서 이 부부의 어리석은 행동이 갈수록 기가 막혔습니다. 감기 든 아이들의 몸 안에 병을 가져다 준 귀신이 들었으니 때려서 내쫓아야 한다고 그렇게 무자비하게 아이들을 때렸습니다. 그냥 때린 것이 아니라 금식기도를 하며 어린 아이들에게도 음식을 주지 않고 굶겨가며 때렸습니다.  

이 정도면 정상적인 사람들이 아니고 정신질환을 앓는 사람이 분명합니다.  알고 보니 이 어리석은 부부를 부추겨 아이들을 죽음에 몰아넣게 하고 돈을 뜯어낸 또 한 여인이 있습니었다. ‘아이를 채찍으로 때려도 죽지 아니하리니 그를 채찍으로 때리면 그 영혼을 음부에서 구원하리라’(잠23:13, 14) 잠언의 말씀을 귀신 내쫓는 푸닥거리에 적용하였습니다. 같은 성경을 읽는 사람으로서 어떻게 이런 무지한 행동을 할 수 있을까 이해가 되지 않지요? 

   작년 5월 경북 문경에서 자기가 메시야라고 확신하는 사람이 십자가에 자기 손발을 못 박아 죽은 사건이 있었습니다.  이런 사람이나 이번 보성의 사건들 모두 성경을 자의적으로 해석하여 그리스도의 복음을 욕되게 한 결과입니다. 그리스도의 수난절이 되면 세계 곳곳에서 십자가 고난을 재현하는 이벤트가 벌어집니다.  십자가의 고통을 실제로 체험한다고 십자가에 손과 발을 못박는 이벤트를 벌입니다.  이런 사람들이나 경북 문경에서 일어난 자칭 예수의 엽기적인 자살 사건은 종교적 영웅심으로 자기를 과시하고픈 욕망에서 나온 행동들입니다.  예수를 믿는다는 사람들이 어찌 이런 어리석은 행동들을 하였을까요? 

어떤 사람들이 예수님의 고난을 재현한다고 무거운 통나무 십자가를 지고 행진하는데 코메디 같은 행동을 합니다.  십자가를 지고 행진하는데 십자가 밑에 바퀴를 달아 끌고 다닙니다. 연극 무대에서 공연 중이었다면 혹시 모르겠지만 기독교계에서 이름 꽤나 알려진 사람들이 날보란 듯이 쇼하는 모습을 볼 때 기가 막히고 부끄러울 뿐입니다.  십자가의 무게도 감당할 자신이 없으면서 바퀴달린 십자가 이벤트를 벌이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주님이 각자 자기에게 주어진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고 하신 것은 예수님과 똑같은 방식으로 십자가에 달려 죽거나 나무 십자가를 끌고 다니라는 말씀이 아닙니다. 십자가 지고 주님을 따르는 삶을 전혀 실천하지도 않으면서 겉으로 경건한 척 자랑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고난과 죽으심을 자신의 이익과 성공의 도구로 삼는 일입니다.

모세의 놋뱀 느후스단을 깨뜨렸던 히스기야의 종교개혁 관점에서 보면 이런 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이 아니라 자신들의 신념이나 자기 주관적인 어떤 신을 섬기고 따르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이 따르고 있는 신앙은 여호와 하나님 신앙이 아니라 느후스단을 섬기는 것이며, 예수 그리스도가 아니라 자기 신앙 신념을 따르는 사람들입니다.  주님이 제자들에게 각자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는 말씀이 정말 그런 뜻이었습니까?  

현대 기독교인들이 자신들도 모르는 사이에 심취되고 있는 왜곡된 신앙 행동은 무엇일까요? 복음의 본질을 놓치고 이기적인 욕심과 소원성취를 위해 종교행위에 몰입하는 일입니다.  예배당과 불당이라는 장소만 다르고 의식이 서로 다를 뿐 사람들이 추구하는 목표가 비슷하거나 동일하다면 그렇게 예수를 믿는 신앙은 성경의 가르침이 아닙니다.  나의 행복을 추구하느라 다른 사람의 불행에는 무관심하고 오로지 나의 행복을 위해 금식하며 맹렬하게 기도한다면 그것은 우상숭배와 미신이지 바른 신앙은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대신 성공과 번영을 최고의 목표로 삼는다면 성경이 말씀하는 진리가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죄를 사하러 오신 분이시지 사람들이 부자되고 성공하도록 도와주러 오신 분이 아닙니다.  인간의 죄와 심판을 말하기 꺼려하는 기독교는 세상의 도덕 종교들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입술로는 그리스도를 말하지만 인류의 죄를 대신하기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신 분으로 인정하지 않는다면 그들이 말하는 그리스도는 위대한 스승이나 도덕 선생에 불과합니다.  거기에는 구원이나 영생이라는 진리가 설 자리가 없습니다. 그리스도가 없는 기독교에 지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은혜의 선물들이 있습니다.  뜨거운 신앙 체험, 나에게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게 도와준 사람, 존경스런 신앙의 인물 등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 어떤 신비한 체험이나 사람도 하나님의 말씀을 대신할 수 없습니다.  말씀을 통해 예수님을 바라봐야지 예수께서 달리셨던 십자가를 섬길 수도 없습니다.  십자가 형상을 놋뱀 섬기듯 숭배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십자가는 우리를 대신하여 죽으신 그리스도의 희생을 상징하는 것이지 그 자체가 구원을 주는 것이 아닙니다.  심지어 하나님의 말씀이 기록된 성경책을 신성한 부적처럼 여기는 믿음도 있으니 이것도 조심해야 할 일입니다.  

우리의 생명과 구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아야지 본질은 외면하고 십자가라는 물질을 바라보거나 이차적인 축복에 더 관심이 있으면 그것이 곧 느후스단이고 불신앙입니다. 
‘달을 보라고 손으로 가리켰더니 보라는 달은 안 보고 손만 보더라’는 말과 같습니다. 

모세의 놋뱀을 통해 치료하시는 하나님을 믿음으로 바라보아야 했고,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신 하나님의 사랑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믿음으로 바라보아야 합니다. 

우리가 찍어 불태우고 깨뜨려야 할 누후스단이 무엇인가요?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빙자하여 자기 이익의 기회로 삼는 종교인들이나 종교 장사치들의 헛된 영웅심과 세속적인 욕심을 깨뜨리고 불태워야 합니다. 
놋뱀을 바라보라 했지 그것을 하나님 자리에 두고 섬기라 하지 않으셨습니다.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바라보라 하셨지 주님이 달리셨던 십자가 형상을 우상처럼 받들고 거기 절하며 기도하라 하지 않으셨습니다. 

높은 종탑에 십자가를 걸어놓았다고 모두 거룩한 교회는 아니며, 거실과 안방 벽에 십자가를 걸었다고 거룩한 백성의 집은 아닙니다.  
금과 은으로 도금한 십자가 목걸이를 목에 걸었으니 세상에서 어떻게 살든 그 행실과는 상관없이 경건한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 이름으로 기도하며 입을 열면 항상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말하고 있다고 모두 좋은 믿음, 좋은 신앙인은 아닙니다. 

그 중심에 진짜 주인공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빠진 모든 종교활동은 북쪽 이스라엘이나 남쪽 유다 사람들이 그렇게 열심히 따르고 제사했던 혼합주의 신앙에 불과합니다.  
히스기야가 부쉈던 놋조각 느후스단일 뿐입니다.  
사마리아에 강제 이주된 앗수르의 식민지 백성들이 섬겼던 다원주의, 혼합주의 종교에 불과합니다. 

옥스포드 대학 크라이스트 처지 컬리지의 성당에 가면 옥스포드 수호신을 기념하는 제단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 제단이 부서져 일부만 전시되었고 주변의 여러 조각상들을 보면 코가 깨지거나 얼굴이 무너진 흔적들이 있습니다.  
중세 기독교인들이 성경의 인물들이나 성인들의 조각상, 벽화 등을 너무 성스럽게 여기다 못해 그 앞에 촛불을 켜고 기도하며 거기 절하고 복을 비는 일들이 흔하게 일어났습니다. 
16세기 종교개혁자들이 이것을 비판하며 교회 안에 어떤 형상이든 세우거나 걸어놓지 못하게 하였습니다.  
그때 크라이스트 처치 컬리지 성당의 성상들도 대부분 파괴되고 교회 밖으로 내던져졌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가나안에 들어갈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너희는 아무 형상이든지 만들지 말고 거기 절하지 말라고 하신 이유를 알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무엇인가 눈에 보이는 것을 경배하고 싶어합니다.  
그래서 모세가 시내산에 올라가 계명을 받고 있는 40일을 참고 기다리지 못했던 이스라엘은 아론을 부추겨 금송아지 형상을 만들어 이것이 우리를 애굽으로부터 인도한 하나님이라 하며 그 앞에 절하고 제사를 드렸습니다.  
하나님조차 사람들의 손으로 만든 형상 속에 가두어 두고 자기들 마음대로, 자기들 편한 방식으로 섬기려 합니다. 

그리고 그 예배와 섬김의 궁극 목적은 자기 자신을 위함입니다.  
주문을 외면 불려 나오는 알라딘 등잔의 거인처럼 하나님은 그저 필요할 때 불러내어 도움을 청하는 수호신에 불과합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섬김의 방식이 아니고 하나님을 향한 신앙이 아닙니다. 정확히 말하면 우상숭배요 미신적인 습관입니다.  

성경은 말씀합니다.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 얻을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행 4:12)  
주께서 친히 말씀하시기를,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다’(요 14:6) 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 하나님의 무한하신 사랑이 아니고는 나에게는 도무지 구원 받을만한 아무 능력도 자격도 지혜도 없음을 인정하고 그분께 나를 내맡기고 의지하는 것 밖에는 다른 길이 없습니다.  
오직 그리스도의 은혜와 자비와 긍휼을 힘입어 주님만 바라보고 의지하는 주의 백성으로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모세의 놋뱀은 예수 그리스도를 예시한다.


모세의 놋뱀(민 21:9)은 타우형(헬라어 T자) 십자가라고 한다.
이 십자가는 예로부터 모세가 광야에서 치켜들었던 십자가라고 전해져 오고 있다.
모세의 놋뱀(민 21:9)은 예수 그리스도를 예시하기 때문에 이 십자가는 예언(의) 십자가라고도 불린다.
타우형 십자가는 축 늘어진 예수 그리스도의 힘겨운 어깨를 상기시킨다.
가로막대와 교차하는 세로막대의 윗부분이 생략된 모습은 십자가의 고통을 한층 극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놋뱀은 예수 그리스도의 모형이다.
예수는 자기의 십자가 죽음을 예언하고, 영적 의의를 모세 때 있은 놋뱀 사건을 인용하여, 부활의 예수를 바라봄으로써 그리스도인은 영생을 얻을 수 있음을 말하였다. '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하심이라''''고 요한복음 3장 14~15절에 나타나 있다.

요르단에서 꼭 가봐야 할 역사적 기독교 유적가운데 하나는 해발 835m의 느보산이다.
눈치 챘겠지만 모세의 출애굽 여정 중 마지막 기착지이기 때문이다.
40년 광야생활을 청산한 모세는 가나안으로 들어가기 직전 가나안 땅을 조망하고 숨을 거둔다.(신 32:49)

모세기념교회 옆 전망대에 서면 멀리 사해와 예리코(여리고) 지역이 한눈에 들어온다.
날씨가 좋으면 예루살렘의 올리브산(감람산)까지 보인다고 한다.
4세기 비잔틴제국 시대에 모세의 무덤위에 지었다고도 전해지는 모세기념교회는 지금도 그 교회 터가 남아 있다.
이 교회 정원에는 이탈리아 조각가 지오반니 판토니의 ''모세의 지팡이'' 작품이 세워져 있다.
놋뱀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복합시킨 작품이다.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에서 생활할 때 하나님에게 불평하여 불뱀이 그들을 물었다.
불뱀에 물린 이스라엘 백성을 낫게 하기 위해 모세가 하나님의 지시로 놋뱀을 만들었다.
그리고 이것을 장대에 매달고 그것을 보는 자는 살게 된다고 민수기 21장에 기록되어 있다.

믿음을 가지고 그것을 바라본 자는 모두 치료됐다.
나중에는 이스라엘 백성이 놋뱀을 우상으로 섬기게 됐는데, 히스기야는 이것을 부숴 버렸다

''여러 산당을 제하며 주상을 깨뜨리며 아세라 목상을 찍으며 모세가 만들었던 놋뱀을 이스라엘 자손이 이때까지 향하여 분향하므로 그것을 부수고 느후스단이라 일컬었더라''(열왕기하 18:4)고 기록돼 있다.

모세는 40년간 광야를 헤매다 결국 가나안 땅에도 들어가지 못한 채 느보산에서 가나안을 바라보기만 하다가 숨을 거뒀다.
느보산에 거대하게 세워진 모세의 지팡이 ''놋뱀''이 은혜를 잊고 하나님을 원망하다 불뱀에 물려죽은 이스라엘 백성의 ''어리석음''을 닮지 말라고 오늘도 경고하고 있다.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요 3:14~15)."

"모세가 놋 뱀을 만들어 장대 위에 다니 뱀에게 물린 자마다 놋 뱀을 쳐다본즉 살더라(민 21:9)."

"보라 내가 너희를 보냄이 양을 이리 가운데 보냄과 같도다. 그러므로 너희는 뱀같이 지혜롭고 비둘기같이 순결하라(마 10:16)."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이 겪은 놋 뱀 사건을 예수께서 니고데모와 대화중에 자신에게 닥칠 사건과 비교하여 언급하신 내용에 대해 여러 가지 주장이 분분하기에 서로 비교하고 그 해답을 찾아보기로 하자.

다섯 부류의 주장이 있다.

1. 전통적 주장 (1)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놋 뱀을 달게 하여 이를 쳐다본즉 뱀에 물린 자가 살게 되었으므로 놋 뱀은 예수의 십자가를 상징한다고 주장한다. 놋 뱀을 예수라 할 수 없으니 여호와께서 은혜의 선물이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모순(矛盾) : 죄로 죽을 수밖에 없는 자가 십자가를 쳐다봄으로 살게 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좇으라(마 16:24) 하였으며 육체와 합하여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매달아야(갈 5:24) 한다고 하였다.

그렇다면 뱀은 무엇인가?
뱀에 대한 해명이 뒤따라야지 구렁이 담 넘어가듯이 은혜로 포장하고 있다.

2. 일부 주장 (1)

놋 뱀은 사탄이므로 사탄이 매달렸으니 예수의 십자가 사건에서 내 자신 안에 있는 사탄의 속성을 독배로 마시고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이다.

모순(矛盾) : 예수는 죽을 권세도 있고 살 권세도 있어서 우리를 죄와 사망의 법에서 해방시키려고(롬 8:2, 갈 4:5) 바리새인들의 손을 빌어서 죽으신 것이지 사탄의 독배를 마신 것이 아니다.

3. 일부 주장 (2)

놋 뱀은 예수님이다.
놋 뱀 사건은 예수님 십자가 사건의 상징이라고 말하는 자들이 놋 뱀에 대하여 무엇이라 분명하게 말하지 않으므로 '놋 뱀이 예수이다' 주장하는데 주장하는 이유로는 마태복음 10장 16절에서도 뱀같이 지혜롭게 하라 했으니 뱀을 예수라 주장한다.

모순(矛盾) : 뱀은 사탄이다.
뱀같이 지혜롭게 하라는 말씀이 아니라 신중하라(프로니모스)고 하셨으니 돌다리도 두드려 보고 건너라는 뜻이지 뱀을 지혜롭다고 오역한 부분을 가지고 뱀과 예수를 동일시하는 실수를 저지르고 있다.
신중하고 순수하라는 것은 방법이 선해야 좋은 결과를 얻게 된다는 당부이다.

4. 전통적인 주장 (2)

어떤 주장도 하지 않고 애매모호한 입장으로 침묵하겠다는 부류가 있다.

모순(矛盾) : 해답을 내놓지 않고 있음으로 인하여 여러 가지 해석과 주장이 있어 오늘과 같은 혼란을 초래하였다.

5. 새로운 주장

놋 뱀사탄이지 예수님이 될 수 없다.
놋 뱀 사건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의 예표가 아니다.
십자가 사건 이후의 상황이다.
그 해답은 요한복음 3장 14절에 있다(스타우로스 원어성경연구원).

요한복음 3장 14절 번역에 문제가 있어 다시 번역한다.

"그리고 모세가 광야 안에서 뱀을 높인 것같이 이같이 인자를 높이게 됨이 마땅하다(요 3:14)."

뱀을 들었다는 것은 매단 것으로 보았고 인자가 들려야 하는 것도 십자가 사건으로 보았기에 내용이 풀리지 않고 꼬이기 시작했던 것인데 든 것이 아니라 높인 것이다.

아래에서 동일한 단어가 사용된 예를 살펴보자.

높이다(5312, 휘프소오)에 대한 고찰

휘프소오(
hüpsŏō) ὑψόω
1. 높이 올리다.
2. 높이다.


"누구든지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누구든지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5312)(마 23:12)."

"권세 있는 자를 그 위에서 내리치셨으며 비천한 자를 높이셨고(5312)(눅 1:52)."

"무리가 그에게 대답하되, 나의 삶은 율법에서 그리스도가 영원에 이르도록 머무신다고 들었는데도 당신은 어찌하여 인자를 높임을 받아야(5312) 한다고 말하느냐? 이 사람의 아들이 누구냐?(요 12:34)."

사도행전 2:33
하나님이 오른손으로 예수를 높이시매 그가 약속하신 성령을 아버지께 받아서 너희 보고 듣는 이것을 부어 주셨느니라.

"혹시 내가 너희가 높임을 받게(5312) 하려고 나를 낮추어 하나님의 복음을 값없이 너희에게 전함으로 내가 죄를 지었느냐?(고후 11:7)."

"주 앞에서 낮추라. 그리하면 주께서 너의 삶을 높이실 것이다(5312)(약 4:10)."

예수님을 높임 받게 한 사건은?

예수님이 높임을 받는 전제 조건은 낮아짐이다.
십자가에서 죽기까지 순종하심으로 낮아졌기에 하나님께서 예수를 높이시는 부활과 승천의 영광을 주신 것이다.
우리에게도 주시는 동일한 은혜의 말씀은 "주 앞에서 낮추라.

그리하면 주께서 너의 삶을 높이실 것이다(5312)(약 4:10)."
십자가의 죽음까지 자신을 낮추면 주께서 높여 주신다는(5312)약속이다.

광야에서 뱀을 높였다는 것을 어떻게 이해할까요?

고린도전서 10:7-10

저희 중에 어떤 이들과 같이 너희는 우상 숭배하는 자가 되지 말라 기록된바 백성이 앉아서 먹고 마시며 일어나서 뛰논다 함과 같으니라.
저희 중에 어떤 이들이 간음하다가 하루에 이만 삼천 명이 죽었나니 우리는 저희와 같이 간음하지 말자.
저희 중에 어떤이들이 주를 시험하다가 뱀에게 멸망하였나니 우리는 저희와 같이 시험하지 말자.
저희 중에 어떤이들이 원망하다가 멸망시키는 자에게 멸망하였나니 너희는 저희와 같이 원망하지 말라.
이스라엘 백성이 간음하다가 하루에 이만 삼천 명씩 죽었고 시험하다 뱀에게 멸망하였고 원망하다가 멸망하였으니.

여호와께서 모세의 기도를 들으시고 이러다간 다 죽이게 생겼기에 뱀(사탄)을 깃대(닛시) 위에 높이고 이를 쳐다봄으로 살도록 하여서, 구세주 예수를 보내시기까지 후견인과 청지기 아래서 종살이하게 두신 것이다.

이후 이스라엘은 뱀(사탄)을 높인 깃발을 들고 행진하기 시작하여 가나안에 들어갔고, 이후 히스기야 왕 이전까지 산당에서 분향하며 섬기고 있었으나, 여호와께서 놋 뱀을 파기하라 명한 적이 없었다는 점을 유념하여 볼 필요가 있다.

놋 깃대는 히스기야 왕에 의해 부서지게 된다(열왕기하 18:3~4)

"히스기야가 그 조상 다윗의 모든 행위와 같이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히 행하여 여러 산당을 제하며 주상을 깨뜨리며 아세라 목상을 찍으며 모세가 만들었던 놋 뱀을 이스라엘 자손이 이때까지 향하여 분향하므로 그것을 부수고 느후스단이라 일컬었더라."

왜 하나님께서는 뱀(사단)에게 이스라엘 백성을 맡기신 것인가?

포도원인 이스라엘을 맡겨 두심(사 5:7)

"이 비유로 백성에게 말씀하시되 한 사람이 포도원을 만들어 농부들에게 세로 주고 타국에 가서 오래 있다가 때가 이르매 포도원 소출 얼마를 바치게 하려고 한 종을 농부들에게 보내니 농부들이 종을 심히 때리고 거저 보내었거늘 다시 다른 종을 보내니 그도 심히 때리고 능욕하고 거저 보내었거늘 다시 세 번째 종을 보내니 이도 상하게 하고 내어 쫓은지라. 포도원 주인이 가로되 어찌할꼬 내 사랑하는 아들을 보내리니 저희가 혹 그는 공경하리라 하였더니 농부들이 그를 보고 서로 의논하여 가로되 이는 상속자니 죽이고 그 유업을 우리의 것으로 만들자 하고 포도원 밖에 내어 쫓아 죽였느니라. 그런즉 포도원 주인이 이 사람들을 어떻게 하겠느뇨(눅 20:9~15)."

유대인들 : 마귀 자식

"어찌하여 내 말을 알지 못하느냐? 이는 내 말씀을 들을 수 없음이로다. 너의 삶은 마귀인 아비에게서 난 삶이니 너희 아비의 정욕을 너의 삶도 행하려 하는구다. 저는 시작부터 살인한 자요, 진리가 그 안에 없으므로 진리 안에 서지 못한 것이다. 그가 거짓을 말할 때면 자기 삶에서 난 것으로 말하나니, 이는 그의 아비가 거짓말쟁이더라(요 8:43~44)."

서기관 바리새인 : 후견인과 청지기

"내가 또 말하나니 상속자가 모든 삶의 주인이지만 미숙아로 있는 기한에는 아무도 종에서 옮겨 가지 못한다. 오히려 아버지의 작정함까지 후견인과 청지기 아래 있도다. 이와 같이 우리도 미숙아로 있는 기한에 세상 초등 학문 아래서 종살이 당하고 있더니 기한의 충만이 이르매 하나님이 그의 아들을 율법 아래 속하여 아내에게서 낳아 내어 보내셨으니 율법 아래 있는 삶을 속량하려 함이요, 나의 삶이 아들의 명분을 쟁취하게 하려 하심이라. 너희가 아들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의 아들의 영을 너희 마음에 이르고자 내어 보내사 아버지 아빠라 외치게 하셨느니라(갈 4:1~6)."

뱀이란 단어의 의미는 무엇인가?

뱀은 창세기 3장 1절에서 처음 등장하며 창세기 3장 15절에서는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뱀의 후손과 여자의 후손이 원수이며 뱀의 후손은 머리요, 여자의 후손은 발꿈치로서 서로 상하게 할 것이라 하였으며 마태복음 4장에서는 예수를 시험하는 자로 등장하며 요한계시록 20장 2절에서는 옛 뱀, 마귀, 사탄, 천하를 꾀는 자로 나타나는 것을 보면, 어디 한군데도 뱀이 예수를 예표하는 성구는 없다.

은 히브리어로 '5175(스트롱번호) 나하쉬'라 하는데, 동사 '5172 나-하쉬 : 점치다'에서 유래한다.
동의어로는 '5173 나하쉬 : 점, 예지력'
'5174 네하쉬 : 놋쇠, 구리'
'5178 네호세트 : 청동, 놋쇠'

놋 뱀이란 뜻은 히브리어로 '네하쉬(뱀) 네호세트(놋) :
예지력 있는 점쟁이'라는 의미로 이해하면 될 것이다.

왜냐하면 기어 다니는 뱀의 히브리어 이름은 '텓트'이지만 성경에서는 사용되지 않았으며,
나하쉬
(뱀)은 예지력을 가진 자, 점쟁이로 언급하고 있다는 데 주의해야 한다.

결론

하나님께서는 인생의 구원 계획을 미리 수립하시고 각 날에 해당하는 시나리오를 정하셔서 그 과정을 학습하고 통과하게끔 하시고 일정한 날에 메시아를 보내 주셔서, 죄와 사망의 법에 붙여서 종살이하면서 믿음으로 낮아지고 순종하는 자들을 해방하시고 하나님의 아들의 명분을 쟁취하고 하나님나라를 상속하는 데까지 높이시려는 하나님의 계획을 설명하시는 말씀이다.


느후스단 우상 (열왕기하 18:1~4) 
 
대통령이 취임하자마자 제일 먼저 하는 일이 있습니다.
어떤 분은 경제 살리기에 나서기도 하고, 또 어떤 분은 각 나라를 순방하며 국제 외교에 뛰어들기도 합니다.
어떤 분은 상징적으로 농민들과 함께 모내기를 하기도 합니다.
이 모든 행동은 “내가 앞으로 이 나라를 다스릴 때 이 일을 가장 중요하게 여기겠다”는 의지의 표현입니다.
그만큼 한 나라의 통치자가 취임하자마자 제일 먼저 하는 일은 대단히 중요한 상징적 의미를 갖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성군 중 하나라 일컫는 히스기야 임금은 아버지 아하스의 뒤를 이어 25세에 왕에 오르자마자 제일 먼저 한 일이 바로 우상 타파였습니다.

이것은 “내가 앞으로 이스라엘을 통치하면서 가장 중요하게 여길 일은 바로 우상을 타파하고 하나님만 섬기는 나라로 만드는 일이다!” 하고 선포한 것입니다.

히스기야는 전국에 있는 산당(山堂)을 제거하고 각종 우상들을 깨뜨려 없애는 종교개혁을 단행합니다.
산당이란 이스라엘 백성들이 산 위에 우상을 섬기기 위해 세운 집들인데 이 산당이 이스라엘 전국에 산마다 널려 있었던 것입니다.
당시 하나님의 선민인 이스라엘 백성들 사이에 얼마나 우상 숭배가 만연했는지 알 수 있습니다.
또한 이스라엘 백성들은 남신(男神)인 바알 신과 여신(女神)인 아세라를 비롯해 정말 수많은 종류의 우상을 섬겼는데 그 가운데 히스기야가 종교개혁을 일으킬 당시 ‘느후스단’이라 불리던 특이한 우상이 있었습니다. 이것은 바로 모세가 만든 놋뱀입니다.

민수기 21장 4절부터 보면 출애굽 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호르 산에서 출발하여 홍해 길을 따라 에돔 땅을 우회하다가 길이 멀고 험하니까 하나님과 모세를 원망하기 시작합니다.

그들이 어떤 원망을 했나 들어볼까요? 5절에 나옵니다.

어찌하여 우리를 애굽에서 인도해 내어 이 광야에서 죽게 하는가 이곳에는 먹을 것도 없고 물도 없도다 우리 마음이 이 하찮은 음식을 싫어하노라

한 마디로 애굽에서 잘 살고 있는 우리를 왜 이런 황량한 광야로 끌고 나와서 죽게 만드느냐는 것입니다.
여기는 먹을 것도 없고, 물도 없다며 불평합니다.
하나님이 만나를 주셨지만 백성들은 만나를 보고 “이 하찮은 음식”이라고 말합니다.
우리는 이런 하찮은 음식 싫다는 것입니다.
애굽에 있을 때 살려달라고, 우리를 해방시켜 달라고 아우성치던 것은 또 언제고 이제 와서 “왜 애굽에서 잘 살고 있는 우리를 여기까지 끌어냈냐”고 불만입니다.

광야에서 처음 하나님이 만나를 내려주실 때는 환호하고 감격하더니 이제 와서 “이따위 하찮은 음식”에 이제 질렸다고 투덜거립니다.

하나님이 은혜 주신 것 다 잊어버리고 지금은 뭐가 없다, 뭐도 없다, 뭐가 불편하다며 원망한 것입니다.

이러한 이스라엘 백성들의 태도는 오늘 우리에게서도 종종 나타납니다.
과거에 베풀어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까맣게 잊어버리는 영적 건망증입니다.
하나님이 애굽에서 열 가지 재앙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을 구원하시고 홍해를 갈라 건너게 하신 것이 엊그제 같은데 벌써 다 잊어버렸습니다.
그리고는 지금 와서 부족한 것만 보이고 불편한 것만 보이니 원망하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이미 받은 놀라운 은혜는 다 잊어버리고 지금 없는 것, 부족한 것, 불편한 것만 보는 배은망덕한 죄입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지금까지 지내온 것 주의 크신 은혜라 하고 찬송은 잘 부르는데 정작 지금까지 하나님이 내게 베풀어주신 그 한량없는 은혜와 도우심은 다 잊어버리고 삽니다. 

이미 베풀어 주신 것에 감사할 줄 모르는 것이지요.
그러면서 지금 뭐가 부족하다고, 뭐가 불편하다고 투덜거리며 원망하기에 급급합니다. 하나님은 이런 영적 건망증에 걸린, 배은망덕한 사람들을 어떻게 하실까요?

그 벌은 불뱀들을 보내 백성들을 물게 한 것입니다.
불뱀은 한 번 물리면 몇 분 만에 즉사하는 맹독을 지닌 독사 종류입니다.
특히 사막에 사는 독사는 더 독합니다.
미국 사막지역에 사는 방울뱀은 물리면 수십 분 내에 즉사합니다.
하나님은 무서운 맹독을 지닌 불뱀을 보내 이스라엘 백성들을 물어 죽이게 한 것이지요.
이대로 간다면 모든 백성들이 다 뱀에 물려 죽게 생겼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렇게 잔인한 분이 아닙니다. 자비의 하나님이시지요. 그래서 백성들이 회개하자 모세에게 뱀에 물린 자가 살 방법을 일러 주십니다. 바로 놋으로 불뱀의 모양을 만들어 장대 위에 높이 매달게 하고 그 놋뱀을 보는 자는 살게 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여기서부터 시작됩니다.

이때 장대 위에 달린 놋뱀을 쳐다보고 살아난 사람들은 “이제 다시 하나님을 원망하거나 불평하지 말자” 하고 교훈을 얻게 끝냈어야 하는데 여기서 그치지 않고 그 놋뱀을 소중하게 보관한 것입니다.

민수기에는 놋뱀을 보관했다는 말이 안 나오지만 이 놋뱀이 세월이 흘러 히스기야가 왕위에 오를 때까지 보관되었다는 것을 보면 틀림없는 사실입니다.

그러면 왜 이 놋뱀을 보관했을까요?

놋으로 만들었으니 무게도 만만치 않을 텐데 그 힘든 광야생활에서도 이 놋뱀을 끝까지 보과난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우리는 그 까닭을 충분히 추측해 볼 수 있습니다.
한 마디로 신기했던 것입니다. 이 놋뱀 자체에 무슨 신비한 힘이 있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아, 내가 불뱀에 물려 다 죽어갈 때 장대 위에 달린 이 놋뱀을 한 번 쳐다보기만 했는데 언제 그랬냐는 듯이 멀쩡해지더라구요.”

사람들은 너무나 신기해하면서 이 놀라운 힘을 지닌 놋뱀을 잘 보관했습니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부터인가 그 놋뱀을 아예 우상으로 섬기기 시작한 것입니다.
아마 병이 들면 그 놋뱀 우상 앞에 가서 분향(향으로 제사 드림)하며 그 신기한 힘으로 고쳐달라고 빌었겠지요.

아무튼 히스기야 임금은 왕이 되자마다 이 놋뱀 우상을 부수어 버립니다.
다른 수많은 우상도 부수었는데 특히 이 놋뱀 우상을 부순 것을 본문이 기록한 데는 뭔가 이유가 있는 것 같습니다.

우상은 우상일 뿐

첫째로, 히스기야가 이 놋뱀 우상을 부순 후 그 이름을 ‘느후스단’이라고 부릅니다.

‘느후스단’은 히브리 말로 ‘놋조각’이라는 뜻입니다.
전에는 이 놋뱀 우상을 뭐라고 불렀는지 모릅니다.
아마 ‘전지전능하신 뱀님’ 이런 식으로 불렀겠지요.
하지만 이 놋뱀을 부숴버린 후 히스기야는 그 이름을 ‘느후스단’이라고 짓습니다.

이상하지 않습니까?
존재하고 있을 때야 이름을 붙이는 것이 당연하지만 부수어 버린 후에 이름을 짓는 것은 이해가 안 갑니다.
마치 형산강 다리가 멀쩡하게 서있을 때는 이름도 안 붙이다가 다 철거해서 없어진 다음에야 이름을 ‘형산강 다리’ 하고 짓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도대체 왜 이런 행동을 했을까요? 여기에는 신실한 믿음을 가진 히스기야 임금의 깊은 뜻이 들어 있습니다. 그것은 느후스단이라는 이름을 기억하고 교훈을 얻으라는 것입니다. ‘느후스단’이란 ‘놋조각’이라는 뜻이라고 했지요? 그러니까 이 이름은 이 놋뱀이 무슨 신비한 힘을 가진 것이 아니라, 누군가의 병을 고쳐주는 그런 능력을 가진 신이 아니라 그저 ‘놋조각’에 불과하다는 뜻입니다.

그렇습니다. 우상은 돌조각, 나무 조각, 쇳덩어리에 불과한 것입니다. 돌로, 나무로, 쇠로 만든 우상이 무슨 힘을 가지고 있거나 내 소원을 들어줄 리 만무하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똑똑히 깨달으라는 것입니다. 갓바위 부처 앞에서 기도하면 대학입학 시켜준다고 열심히 비는 사람들, 그것은 바위에 새겨놓은 돌덩어리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돌덩어리가 어떻게 내 소원을 들어주고 내 자녀를 대학에 들여보내 준다는 말입니까? 우리가 엎드려 절하는 대웅전의 부처상은 쇳덩어리에 불과하고, 우리가 지성을 드리는 영험한 바위와 영험한 나무는 바윗돌과 나뭇조각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집에 붙이고 몸속에 지니고 다니는 부적은 붉은 글씨가 쓰인 종잇조각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무생물인 나뭇조각, 돌덩이, 쇳조각이 내 소원을 들어주고 종잇조각이 나를 지켜준다는 말입니까? 오직 살아계신 하나님, 인격적인 하나님 한 분 만이 우리의 소망을 들으시고 우리에게 응답하실 수 있는 것입니다. 다시 한 번 기억하십시오. 우상은 돌덩이, 쇳조각, 나뭇조각에 불과합니다. 그 우상은 나를 고쳐줄 수도, 나를 지켜줄 수도, 내 소원을 들어줄 수도 없습니다.

교회 안의 우상

둘째로, 느후스단은 본디 장대 위에 단 놋뱀이었습니다.

불뱀에 물려 죽어가는 사람들이 그 장대 위에 달린 놋뱀을 보면 살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 장대 위에 달린 놋뱀은 바로 십자가 위에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하게 되었습니다. 요한복음 3장 14~16절에 보면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이 요한복음 3장 16절 정말 유명한 말씀 아닙니까? 그런데 그 바로 앞에 이 놋뱀 이야기가 나오는 것입니다. 모세가 광야에서 장대 위에 놋뱀을 달아 죽어가는 사람들을 살린 것처럼 인자(人子)이신 예수님도 들려야 할지니, 즉 십자가에 달려 죽으셔서 죽어가는 사람들, 사망권세에 신음하는 백성들을 살리신다는 뜻입니다. 바로 이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 외에는 그 무엇도 우리의 숭배나 섬김의 대상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뜻입니다. 장대 위에 달린 놋뱀이 숭배의 대상이 될 수 없는 것은 그 놋뱀이 사람들을 살린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죽어가는 사람들을 살린 것은 바로 하나님이십니다. 놋뱀은 하나님의 능력을 상징하는 대상에 불과합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어리석게도 자신을 살리신 하나님을 경배하지 않고 그 상징에 불과한 놋뱀을 숭배한 것입니다.

따라서 이 느후스단 우상은 오늘날 하나님 외에 다른 어떤 것을 숭배하는 우상을 뜻합니다. 특히 그것이 하나님의 은혜를 상징하는 것인데 하나님 외에 그 상징을 숭배할 때 아주 위험한 우상숭배가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기억하십시오, 여러분. 심지어 십자가조차도 우리의 숭배 대상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어떤 분들은 십자가를 보고 기도한다고 합니다. 잘못입니다. 눈으로는 십자가를 보더라도 우리는 십자가가 아닌 오직 거기 달리신 예수님만 바라보고 생각해야 합니다. 어떤 분들은 십자가를 몸에 지니고 다니면 이 십자가가 나를 지켜 줄 것이라고 믿습니다. 그래서 목걸이로 귀걸이로 십자가를 가지고 다닙니다. 마치 영화에 보면 흡혈귀 드라큘라가 덤벼들 때 십자가로 물리치는 것처럼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보수적인 교단은 아예 예배당 안에 십자가를 달지 못하게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십자가조차도 숭배의 대상이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십자가뿐만 아닙니다. 교회도 숭배의 대상이 될 수 없습니다. 교회는 하나님을 믿는 성도들의 모임일 뿐 교회 자체가 결코 숭배 대상이 아닙니다. 자기 교회를 사랑하고 자부심을 갖는 것은 좋지만 이것이 너무 심한 나머지 교회 자체를 우상시하고 내 교회만 옳고 좋은 곳이라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이미 교회숭배 우상에 빠진 것입니다. 목사도 마찬가지입니다. 목회자를 존중하고 사랑해 주시는 것은 고마운 일이나 목회자는 어디까지나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고 선포하고 가르치는 대리인에 불과합니다. 한 마디로 하나님의 심부름꾼입니다. 

주인이 심부름꾼을 보냈을 때 그 심부름꾼이 마치 자기가 주인인 양 착각하거나 아니면 주인이 받을 영광을 대신 받으면 안 되는 것처럼 목회자는 하나님 대신 영광을 받으면 안 됩니다. “저는 목사님 보고 교회 다닙니다.” 이런 말이 저 듣기에는 좋은 것 같지만 사실은 큰 함정입니다. 어느새 내가 하나님을 대신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날 교회에서 큰 힘을 가진 목회자들이 이런 함정에 빠지는 경우가 참 많습니다. 조심해야 합니다. 정리해 볼까요? 느후스단이 자신이 아니라 그 느후스단에 나타난 하나님의 능력이 우리를 살린 것처럼, 십자가 자체가 아니라 그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이 우리를 구원하신 것처럼 세상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대신하고 하나님 받으실 경배를 대신 받을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심지어 그것이 교회 안에 있는 것이라 할지라도, 또 우리 신앙에 대단히 중요한 존재라 하더라도 말입니다. 그래서 저는 이 느후스단을 “교회 안의 우상”이라고 이름 붙여 보았습니다. 신앙 안에 있지만 하나님을 대신한 우상이 되기 쉬운 것은 목회자나 어떤 사람(person), 재정이나 전통 같은 것입니다. 우리 모두가 조심해야 합니다.

표적의 우상

셋째로, 느후스단은 진정한 기적은 오직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뿐이라는 사실을 말해줍니다.

우리는 너무도 기적을 바라는 신앙생활을 합니다.
마가복음 8장 11절부터 보면 바리새인들이 나와서 예수님을 비난하며 이렇게 시험합니다. “하늘로부터 오는 표적을 보여 봐라. 그러면 네가 정말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을 믿어주마.” 그러자 예수님은 깊이 탄식하시면서 “내가 이 세대에 표적을 주지 아니하리라”하고 말씀하시곤 배에 올라 건너편으로 떠나가십니다.

오늘날에도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이 바리새인들이 구한 ‘표적’을 구합니다. 표적이란 영어로는 사인(sign)입니다. 어떤 특별한 사인을 보여 달라는 것입니다. 다른 말로는 이적, 기적이라고도 합니다. 그런데 오늘날 얼마나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표적’(sign)을 구하고 있습니까? 바리새인들처럼 하늘로부터 오는 신령한 사인이 있어야 예수 믿겠다는 것입니다. 지루한(?) 일상 신앙생활에서 벗어나 특별한 체험이나 사인을 받아야 예수 잘 믿겠다는 것입니다. 이왕이면 간증집회에 나와 간증하는 사람들처럼 죽을병이 고침 받거나 망해가는 사업이 다시 일어나거나 하는 이적이나 기적도 체험하면 금상첨화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들은 날마다 ‘특별한 은혜’를 구합니다. ‘특별한 체험’을 구합니다. 기적을 구하며 삽니다. 이것을 ‘표적(sign)의 우상’이라고 불러봅시다.

물론 이런 태도가 다 잘못은 아닙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특별한 체험이나 사인은 지치거나 낙심한 사람들에게 새로운 힘을 불어넣어 줍니다. 습관적이고 형식적인 신앙에 젖은 사람들에게 새로운 활력소를 불어넣어줍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가끔 사람들에게 특별한 체험이나 이적을 베푸십니다. 하지만 이런 특별한 체험이나 은혜만 사모한 나머지 일상적인 신앙생활은 지루하고 능력이 없는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큰 오해입니다. 특별한 표적이나 이적이 반드시 일상적인 신앙생활보다 우월하다고 믿고 나는 이런 특별 은혜 받았다, 나는 이런 특별한 체험했다고 자랑하는 것은 매우 위험한 일입니다. 저는 우리교회 목회를 하면서 가장 안타까울 때가 이때입니다. 

누구누구가 어떤 분에게 기도 받으러 다닌답니다. 어디 가면 신령한 분이 있답니다. 기도 받으러 가고 신령한 것 찾아가는 것이 뭐가 문제겠습니까? 저도 신령한 체험을 많이 한 사람이고 또 기도 받으면서 힘을 많이 얻은 사람이라 이런 일에 전혀 거부감이 없습니다. 하지만 문제는 이것입니다. 신령한 것, 특별한 것 좋아하다가 기도해준다는 그 사람이, 그 장소가 과연 건전한지 아닌지도 생각하지 않고 맹목적으로 찾아다니는 데서 문제가 생기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어디 기도 받으러 갈 때나 기도원이나 집회 갈 때 꼭 저에게 먼저 의논하라는 것이 이것 때문입니다. 제가 감시하려는 것이 아니라 여러분을 도와주려는 거예요. 과연 그 곳이, 그 사람이 건전한 신앙을 가진 사람인지 아니면 아주 위험한지 미리 알려주려는 것입니다. 

또 그런 곳에 가서 무슨 특별한 체험하고 은혜 받았다며 멀쩡하게 교회 잘 다니고 일상적인 신앙생활 잘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당신, 그런 식으로 예수 믿으면 안 돼. 그게 뭐야? 시시하잖아? 나처럼 특별한 은혜 체험해야지” 하고 깔보듯이 이야기한다면 그 분은 이미 교만의 우상에 사로잡힌 것입니다. 기억하십시오. 특별한 은혜나 체험도 좋지만 그것은 하나님이 정말 우리가 꼭 필요할 때 특별히 허락하는 별식(別式)과도 같은 것입니다. 광야에서 매일 만나를 먹고 어쩌다 한 번 별식으로 메추라기 주시는 것처럼 말입니다. 

그런데 정작 우리가 매일 먹고 사는 것은 이 만나인데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우리 마음이 이 하찮은 음식을 싫어하노라” 하면서 매일 별식으로 메추라기 달라고 조른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매일 만나 먹으면서 하나님 잘 섬기는 사람들 보고 “너희는 어떻게 매일 그 지겨운 만나만 먹고 사냐?”고 깔본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하나님이 모든 신자들에게 내 교회와 내 지도자, 내 목회자를 허락하신 까닭은 다른 무엇보다 내 교회를, 또 내 지도자와 내 목회자를 우선 중심으로 신앙생활 하도록 하신 것인데 별미만 좋아하며 거기에 우선권을 두고 쫓아다닌다면 어떻게 신앙이 건강하게 자라겠습니까?

나아가 기적이나 특별한 이적도 마찬가지입니다. 이적이나 기적을 하나님이 주실 때가 분명히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도 특별한 경우입니다. 바리새인은 예수를 인정하려면 “하늘로부터 오는 표적, 기적”이 있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들이 구한 것은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임을 증명할 만한 사인이었습니다. 주님은 깊이 탄식하며 “이 세대에 표적을 주지 아니하리라”고 말씀하신 것은 표적이나 이적 자체가 나쁘지는 않지만 잘못된 의도로 구하는 것은 단호하게 거부하신 것입니다. 

신앙생활의 전제로 표적이나 기적을 구하는 태도, 이런 것에 맹목적으로 매달리는 신앙을 경고하신 것이지요. 여러분, 분명히 기억하십시오. 우리에게 일어난 가장 놀라운 기적은 다름 아닌 예수님 자신이십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이 땅에 오신 것 자체가, 그 하나님의 아들이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십자가에 죽으신 사건 자체가 가장 위대하고 놀라운 기적인 것입니다. 이 놀라운 기적을 체험한 우리가 이 기적과는 비교도 안 되는 작은 기적이나 이적에 매여 살며 그것으로 하나님을 시험하면 안 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느후스단 우상은 우리에게 많은 것을 가르쳐 주었습니다. 오늘 설교 중에 나온 용어가 몇 가지 있지요. ‘영적 건망증’이나 ‘배은망덕의 죄’, 또한 우상은 쇳조각, 돌덩이에 불과하지 결코 우리를 도와줄 수 없다는 사실, ‘교회 안의 우상’ 그리고 ‘표적의 우상, 기적의 우상’ 등 꽤 많습니다. 이것을 다 기억하지 못해도 좋습니다. 한 가지만 분명히 기억하십시다. 하나님의 은혜로 죽어가는 사람들을 살린 놋뱀이 느후스단 우상이 되어버린 것처럼 교회 안에도 우상이 있을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우리의 신앙에도 우상이 있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 우상은 마치 열심 있는 신앙, 뜨거운 신앙처럼 위장하고 우리의 건강한 신앙을 위협합니다. 

우리가 이런 것들이 우상임을 깨닫고 하루빨리 버리고 건강한 신앙으로 돌아오지 않으면 우리는 평생 하나님 잘 믿는 줄 알고, 나는 아주 특별하게 잘 믿는 줄 착각하고 살다가 마지막 주님 앞에 섰을 때 그만 주님이 “나는 너를 모른다” 하시는 끔찍한 일이 벌어질 수도 있습니다. 이것이 신앙을 가장한 우상의 무서운 점입니다. 따라서 열심히 믿는 것도 중요하지만 바르게 믿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열심 있는 것도 좋고 뜨거운 것도 좋지만 바르게 믿지 않으면 오히려 훨씬 위험합니다. 올바른 신앙관 위에 건전하게 바르게 믿어야 우상숭배에 빠지지 않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습니다. 따라 하세요. “바르게 믿자!” 아무쪼록 오늘도 십자가에 달리신 주님만 바라보며 건강하고 건전한 신앙관 위에 바로 서서 오직 하나님의 능력과 영광만을 바라보는 여러분 되기 바랍니다.







기독교의 상징들

 

기독교의 대표적인 상징으로 우선 십자가가 있습니다. 여러분은 십자가를 보면 무엇이 떠오르십니까? 적십자나 병원이 떠오르는 분도 계시겠지만 아마 대부분의 사람들은 교회를 생각할 것입니다. 그런데 사실 십자가는 고대 근동의 앗수르, 이집트, 페르시아 그리고 로마에서 죄수를 처형하기 위해 나무로 만든 형틀입니다. 십자가 형벌은 죄수의 양팔을 사람의 키보다 약간 큰나무에 못박아 고정 시켜 매달려 있게 하는 것인데 이렇게 하면 피가 몸의 밑으로 몰리게 되고 혈액 순환이 제대로 되지 않아 호흡이 빨라지며 심한 고통을 격게 됩니다. 십자가 형벌은 사람을 한번에 죽이는 것이 아니고 3-5일간을 고통 속에서 서서히 죽이는 매우 가혹하고 치욕적인 형벌로써 로마시대에는 정치범이나 반역자들에게만 적용했던 사형법입니다. 그러기에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던 강도들은 단순한 좀도둑들이 아니라 정치범이거나 반정부세력의 테러리스트였다고 보아야 합니다. 이처럼 십자가는 죄와 형벌의 상징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이런 잔인하고, 끔직한 십자가를 교회의 상징으로 여기게 된 원인이 무엇입니까?

 

우리의 죄를 위해 대신해서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때문입니다. 여러분은 예수님이 우리의 죄를 위해 죽으셨다는 말씀을 많이 들으셨을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질문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왜 하필이면 그 고통스러운 십자가에서 죽으셨을까요? 차라리 사도바울처럼 참수를 당하시거나, 사도 도마처럼 창에 찔려 죽으시면 간단할 텐데 왜 하필 십자가에서 죽으셔야만 했을까요? 이것은 우연이 아닙니다. 신명기 21장 23절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23)그러나 너희는 그 주검을 나무에 매달아 둔 채로 밤을 지내지 말고, 그 날로 묻어라. 나무에 달린 사람은 하나님께 저주를 받은 사람이기 때문이다. 너희는 주 너희의 하나님이 너희에게 유산으로 준 땅을 더럽혀서는 안 된다.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십자가를 포함해서 나무에 매달려 죽는 것은 매우 치욕스럽고 ‘하나님게 저주를 받았다’는 상징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나무에 매달려 죽으신 것입니다. 우리의 죄 때문에 그냥 죽으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저주를 받아 죽으셨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주님이 대신 짊어지신 우리의 죄는 ‘하나님께 저주를 받으셔야 했을 만큼’ 크고 심각한 죄였습니다.

 

그러기에 이 은혜를 경험한 우리들은 십자가에서 형벌과 저주를 보기 전에, 우리가 받아야할 형벌과 저주를 대신 짊머지신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과 은혜를 발견하게 됩니다. 이것이 우리가 십자가를 보면서 눈물 흘리는 이유입니다. 십자가는 바로 주님이 죽으시고, 대신 내가 살게 된 은혜의 상징인 것입니다.

 





기독교의 오랜 역사와 전통에는 Icon (아이콘) 또는 Symble (심볼) 로 불리는 여러가지 신앙적 상징들이 있습니다.

 

 

1. 익투스 (ἰχθύς)

 

하나님의 아들 구원자 예수 그리스도

 




익투스 (고대 그리스어 :  ἰχθύς 이크투스, 대문자 표기로 ΙΧΘΥΣ)

 

Ιησους (예수) 

Χριστος (그리스도 - 크리스토스) 

θεου (데우) 하나님의  

Υιος(휘오스)  아들 

Σωτηρ (소테르) 구원자

 

'익투스'라는 단어는 '물고기'라는 뜻입니다. 

초대 교회에서는 이 물고기라는 단어를 상징적으로 생각했으며 위 단어의 첫 글자를 따서 익트스가 되었다는 학설이 유력합니다.

박해를 받았던 초대 기독교인들은 피아식별의 방법으로 물고기 그림을 암호처럼 그려서 활용했고, 물고기를 그린 사람의 뒤를 따라가면 기독교인들의 은신처 '카타콤'에 찾아 갈 수 있었다고 합니다.

익투스는

'하나님의 아들이자 구원자이신 예수 그리스도' 또는 '주는 나의 그리스도시요 하나님의 아들이시라' 라는 뜻으로 이해 할 수 있습니다.

 

 2. 키로(XP) 십자가

 

그리스도(Χριστοσ) 라는 헬라어의 단어 첫번째와 두번째 알파벳

 

 

 

영어 스펠링 PX 를 겹합한 것 처럼 보이는 이 아이코은 그리스도 Χριστοσ (크리스토스) 라는 헬라어의 첫번째와 두번째의 알파벳을 결합시켜 놓은 것 입니다.

X 를 헬라어로 [ㅎ키], P 를 [로ㅎ-] 로 부르기 때문에 키로 십자가 입니다.

 

이 아이콘은 기독교를 로마의 공인 국교로 삼은 '콘스탄틴 황제'가 꿈에서 본 것을 깃발로 삼아 전쟁터에 나갔다고 해서 널리 알려진 문장입니다.

 

키노문자는 가톨릭에서 많이 볼 수 있는 표식인데 '그리스도'의 헬라어 표기 'Χριστοs'의 첫째자와 둘째자를 겹친 것입니다. 이 글자는 헬라어이므로 '키로'(Chi Ro)로 읽어야지 '엑스 피'가 아닙니다. 이 표식의 유래는 로마 제국에서 기독교를 공인한 콘스탄틴 대제에서 시작이 됩니다. 콘스탄틴은 312년 로마의 티버강 너머 밀비안 다리에서 막센티우스와 격전을 벌이기 전날 밤 하늘에 십자가가 보였는데 십자가에는 “이 부호를 가지고 정복하라 In this sign, conquer”고 적혀 있었다고 합니다. 이 부호가 바로 키로문자였습니다. 그래서 콘스탄틴은 자신의 헬멧과 군기에 이 키로문자로 장식을 했고, 실제로 전투에서 정말로 승리해서 로마제국의 유일한 황제로 군림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 이듬해인 313년 그 유명한 밀라노 칙령을 내려 로마에서 기독교의 박해에 종지부를 찍었습니다. 그러기에 키로문자는 이제 로마가 기독교 제국으로 바뀌었다는 상징적인 의미가 있습니다. 똑같은 기독교의 상징이지만 물고기와 키로문자는 서로 완전히 상반된 배경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전자는 숨어있는 기독교를, 후자는 제국을 점령한 기독교입니다.

 3. INRI

 

(라틴어 : 나사렛, 예수, 유대인의, 왕) : 예수님의 십자가 명패

 

 

 

'빌라도'가 패를 써서 십자가 위에 붙이니 나사렛 예수 유대인의 왕 (I.N.R.I.) 이라 기록되었더라

예수의 못 박히신 곳이 성에서 가까운고로 많은 유대인이 이 패를 읽는데 히브리와 로마와 헬라 말로 기록되었더라

유대인의 대제사장들이 빌라도에게 이르되 유대인의 왕이라 말고 자칭 유대인의 왕이라 쓰라 하니

빌라도가 대답하되 나의 쓸 것을 썼다 하니라

 

[요한복음 19:19~19:22]  

 

라틴어 성경 요한복음 Evangelium Secundum Ioannem 19:19~19:22

scripsit autem et titulum Pilatus et posuit super crucem erat autem scriptum

Iesus Nazarenus rex Iudaeorum hunc ergo titulum multi legerunt Iudaeorum quia prope

civitatem erat locus ubi crucifixus est Iesus et erat scriptum hebraice graece et latine dicebant

ergo Pilato pontifices Iudaeorum noli scribere rex Iudaeorum sed quia ipse dixit rex sum

Iudaeorum respondit Pilatus quod scripsi scripsi

 

 

위 라틴어 성경에 나타난 바와 같이 INRI는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의 십자가 위에 붙인 나사렛 예수 유대인의 왕이라는 글의 라틴어(로마어) 첫글자만을 딴 것입니다.

Iesus Nazarenus, Rex Iudaeorum 나사렛 예수, 유대인의 왕 - 영어 / Jesus of Nazareth, King of the Jews)

 

  

 

 

 

 

 

    

4. IHS

 

고대 그리스어로 예수 'Ιησους' 의 첫번째, 두번째, 마지막 스펠링의 약자    

또는 라틴어라 'Iesus Hominum Salvator' (인류의 구원자이신 예수)

 

 

HIS 는 예수(Jesus) 를 뜻하는 약어 입니다. 

희랍어는 'Ιησους'라고 표기하며 ...η (에타)는 라틴어로 표기할 때  대문자로 'H' , σ(시그마) 는 대문자 'S' 가 되며, 양피지로 필사하던 시대 성경에 자주 등장하는 주요단어들을 약자로 기록하던 시절의 유래입니다. 

그후, 라틴어로 새로운 의미가 부가되었는데 옮겨쓰는 과장에서 새로운 의미를 더했다고도 추정되며 뜻에 비중을 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Iesus

    Hominum

    Salvator' (인류의 구원자이신 예수)

 

    라틴어에서 I J는 종종 구별되지 않고 혼용됩니다.

    예수Iesus 를 지저스Jesus라고 부르게 되는 과정이 이 I와 J가 구별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IHS라는 글은 JHS로 표기되기도 했습니다.

 


 

 

 

 

 

 

 5. 알파와 오메가

 

 

[계 1:8] 주 하나님이 이르시되 나는 알파와 오메가라 이제도 있고 전에도 있었고  장차 올 자요 전능한 자라 하시더라

[계 21:6] 또 내게 말씀하시되 이루었도다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마지막이라  내가 생명수 샘물을 목마른 자에게 값없이 주리니

[계 22:13]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마지막이요 시작과 마침이라

 

알파와 오메가는 헬라어 알파벳의 처음과 마지막 입니다.

세계와 인류의 처음이시고 마지막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하는 단어입니다.

     

 

[하나님의 표기]

 

그리스어 알파벳 기호 θ (세-타) theta; 를 하나님으로 표기합니다.

이는 헬라어 '테오스' (하나님 θεοs =Θεου) 의 머릿 글자와도 같으며 세계 각국의 표기는 아래와 같습니다. 

 

한   국 : 하나님

일   본 :    神

중   국 : 上   帝

미   국 : God

독   일 : Gott

터   키 : Tanrı

프랑스 : Dieu

그리스 : θεός

러시아 : бог

이태리 : Dio

스페인 : Dios

폴란드 : Bóg

아랍어 : الله

페르시아 : خداوند

포르투갈 : deus

우크라이나 : Бог

인도네시아 : Tuhan

 

6. 닭

 

 

마지막으로 소개할 기독교의 상징물은 ‘닭’입니다. 상징에는 긍정적인 기억을 위한 상징물도 있지만 부정적이고, 부끄러운 의미를 가진 상징물도 있는데 그 대표적인 것이 ‘닭’이라고 생각됩니다. 닭은 예수님의 수제자였던 사도 베드로와 관련이 있는데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기 전날밤 최후의 만찬에서 제자들에게 “너희가 모두 나를 버릴 것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기독교 상징 용어 설명

  • by 메리 페어차일드

그리스도인의 상징에 대한 예시 여행

의심의 여지없이, 라틴 십자가 - 소문자, t 자 모양의 십자가는 오늘날 기독교에서 가장 인정받는 상징입니다. 그러나 수세기 동안 많은 다른 표식, 식별자, 구별되는 표식들이 기독교 신앙을 대표합니다. 이 기독교 상징의 수집은 가장 쉽게 확인 된 기독교 상징의 그림과 묘사를 포함합니다.

크리스티앙 크로스

 셔터 잭 / 게티 이미지

라틴 십자가는 오늘날 기독교에서 가장 잘 알려져 있으며 널리 인정 받고있는 상징입니다. 어쩌면 예수 그리스도십자가에 못 박힌 구조의 형태 였을 것입니다. 다양한 형태의 십자가가 있었지만 라틴 십자가는 두 개의 나무 조각으로 이루어져 네 개의 직각을 만들었습니다. 오늘날 십자가는 십자가 위에서 자신의 몸을 희생함으로써 죄와 죽음에 대한 그리스도의 승리를 나타냅니다.

십자가의 로마 가톨릭 묘사는 십자가에 아직도 그리스도의 몸을 계시합니다. 이 형태는 십자가로 알려져 있으며 그리스도의 희생과 고통에 중점을 둔다. 개신교 회는 부활 한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강조하면서 빈 십자가를 묘사하는 경향이있다. 그리스도를 믿는자는 예수의이 말씀을 통해 십자가를 식별합니다 (마태 복음 10 장 38 절, 마가 복음 8 장 34 절, 누가 복음 9 장 23 절).

예수 께서 제자들에게 말씀 하셨다. "너는 내 추종자가되기를 원한다면, 네가 이기적 인 길에서 돌아 서서 네 십자가를지고 나를 따라야한다." (마태 16:24, NIV )

기독교 물고기 또는 Ichthys

   Ichthys 기독교 기호는 용어 설명 기독교 물고기 또는 Ichthys. 이미지 © 수에 Chastain

예수 물고기 (Jesus Fish) 또는 이시스 (Ichthys)라고도 불리는 기독교 물고기는 초기 기독교에 대한 비밀의 상징이었습니다.

Ichthys 또는 물고기 상징은 예수 그리스도의 추종자로 확인하고 기독교에 그들의 친화력을 나타내는 초기 기독교인에 의해 사용되었습니다. 이시스 (Ichthys)는 그리스어로 "물고기"라는 단어입니다. "기독교 물고기"또는 "예수 물고기"기호는 물고기의 윤곽을 따라가는 두 개의 교차 호로 구성됩니다 (가장 일반적으로 물고기는 왼쪽으로 "수영"합니다). 그것은 신원을 밝히는 비밀의 상징으로 초기 핍박받은 그리스도인들에 의해 사용 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리스어로 물고기 (Ichthus)라는 단어는 " 예수 그리스도 , 하나님의 아들, 구주"라는 약어를 형성합니다.

기독교의 추종자들은 흔히 물고기가 그리스도의 사역에 나타 났으므로 물고기를 상징으로 식별합니다. 그들은 성경 시대의 필수품이었고 물고기는 종종 복음서에 언급되었습니다. 예를 들면, 그리스도께서는 마태 복음 14 장 17 절에 있는 두 개의 물고기와 다섯 개의 빵 덩어리를 곱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마가 복음 1:17 절에 "와서 나를 따라 오너라. 내가 너를 사람 낚는 어부가되게 할 것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NIV)

기독교 비둘기

기독교 기호 용어 해설을 설명합니다. 이미지 © 수에 Chastain

비둘기는 기독교에서 성령 또는 성령을 나타냅니다. 성령 은 요르단 강에서 침례받을 때 비둘기처럼 예수님 께 내려 왔습니다.

... 그리고 성령은 비둘기 같이 육체적 인 형태로 그에게 내려 왔습니다. 하늘에서 소리가났다. "너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이요, 너와 함께하면 나는 기쁘다." (눅 3:22)

비둘기도 평화의 상징입니다. 창세기 8 장 홍수 후에 비둘기가 그 부리에 올리브 가지를 가진 노아 에게로 돌아와 하나님의 심판의 종말과 인간과의 새로운 언약의 시작을 나타 냈습니다.

가시 왕관

 Dorling Kindersley / 게티 이미지

기독교의 가장 생생한 상징 중 하나는 예수님십자가에 못 박으시기 전에 입었던 가시관의 면류관입니다.

... 그리고 나서 가시관을 뒤틀어 머리에 씌워 라. 그들은 오른손에 스탭을 배치하고 그 앞에 무릎을 꿇고 그를 조롱했습니다. "우박, 유대인의 왕!" 그들은 말했다. (마태 복음 27:29)

성서에서 가시는 종종 죄를 나타냅니다. 그러므로 가시 면류관은 적합합니다 - 예수 께서 세상의 죄를 담당하실 것입니다. 그러나 왕관은 기독교의 고난의 왕인 예수 그리스도, 왕의 왕, 그리고 주님의 군주를 상징하기 때문에 왕관도 적합합니다.

트리니티 (Borromean Rings)

 Borromean Rings 기독교 기호는 용어집 삼위 일체 (Borromean Rings)를 나타냅니다.

기독교에는 삼위 일체의 상징이 많이 있습니다. Borromean Rings은 신성한 삼위 일체를 상징하는 세 개의 연동 서클입니다.

" 삼위 일체 "라는 단어는 라틴어 명사 "trinitas"에서 유래했습니다. "trinitas"는 "three is one"을 의미합니다. 삼위 일체는 하나님이 하나라는 믿음을 나타냅니다. 아버지, 아들, 그리고 성령 님 과 동등하고, 영원한 교제 속에 존재하는 세 분명한 인격체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다음 구절은 삼위 일체 개념을 표현합니다 : 마태 복음 3 : 16-17; 마태 복음 28:19; 요한 복음 14 : 16-17; 고후 13:14; 행 2 : 32-33; 요한 복음 10:30; 요한 17 : 11 & 21.

트리니티 (트리 케라)

  기독교 기호는 용어집 트리니티 (Triquetra)를 묘사했습니다. 이미지 © 수에 Chastain

Triquetra는 그리스도교의 삼위 일체를 상징하는 3 부분으로 구성된 연상 기호입니다.

세계의 빛

 기독교 기호는 세계의 빛을 용어로 설명했습니다. 이미지 © 수에 Chastain

성경에서 하나님이 "빛"이신 것에 대한 언급이 너무 많으므로 양초, 불, 램프와 같은 빛의 표현은 기독교의 공통된 상징이되었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그에게서들은 메시지이며, 여러분에게 선언합니다. 하나님은 가볍습니다. 그에게는 전혀 어둠이 없다. (요일 1 : 5, NIV)

예수 께서 백성들에게 다시 말씀하실 때, "나는 세상의 빛이며, 나를 따라 오는자는 결코 어두움에 다니지 않을 것이나, 생명의 빛을 얻을 것"이라고 말했다. (요한 복음 8:12)

여호와는 나의 빛 이요 나의 구원 이시라. 내가 누구를 두려워 할까? (시편 27 : 1)

빛은 하나님의 현존을 나타낸다. 하나님은 불타는 덤불모세 에게 불꽃의 기둥으로 나타나 셨습니다. 하나님의 임재의 ​​영원한 불꽃은 예루살렘에있는 성전에서 항상 켜져 있어야했습니다. 사실 유대인 의 헌신 축제 또는 "빛의 축제"에서 우리는 마카비의 승리와 그레코 - 시리아의 포로 생활 속에서 신성 모독을당한 이후의 성전 재 헌법을 기억합니다. 비록 그들은 단지 하루 동안 충분한 성스러운 기름을 가지고 있었지만, 하나님은 기적적으로 더 많은 정화 된 기름이 처리 될 수있을 때까지 8 일 동안 그의 존재의 영원한 불꽃을 기적적으로 일으켰습니다.

빛은 또한 하나님의 지시와 인도를 나타냅니다. 시편 119 편 105 절은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의 발에 등불이고 우리의 길에 비춰 진다고 말합니다. 사무엘 하 22 장은 주님은 등불 이시며 어둠을 빛으로 변하게하십니다.

크리스티앙 스타

기독교 기호 용어 설명 스타. 이미지 © 수에 Chastain

데이비드 스타는 두 개의 연동하는 삼각형에 의해 형성된 여섯 개의 별 모양의 별입니다. 하나는 위로 향하고 하나는 아래로 향하게됩니다. 그것은 다윗 왕의 이름을 딴 것으로 이스라엘의 국기에 나타납니다. 유대교와 이스라엘의 상징으로 널리 인식되고있는 반면,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데이비드 스타와도 동일시합니다.

다섯개의 별은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탄생 과 관련된 기독교의 상징이기도합니다. 마태 복음 2 장에서 동방 박사 (또는 현자)는 신생아 왕을 찾아 예루살렘을 향한 별을 따라 갔다. 거기에서 그 별은 베들레헴 으로 예수님이 태어난 바로 그 위치로 인도했습니다 . 그 아이가 어머니와 함께있는 것을 발견했을 때, 그들은 절하고 경배하며 선물로 선물했습니다.

계시록 에서 예수님은 아침 별 (계 2:28, 요한 계시록 22:16)이라고 불립니다.

빵과 와인

 기독교 기호는 빵 & 와인 용어를 보여줍니다. 이미지 © 수에 Chastain

빵과 포도주 (또는 포도)는주의 만찬이나 성만찬을 상징합니다.

빵은 생명을 상징합니다. 그것은 생명을 유지하는 영양입니다. 광야에서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을 위해 날마다 마나를 저장 하시거나 "하늘에서 나는 빵"을 주셨습니다 . 예수님은 요한 복음 6 장 35 절에서 "나는 생명의 떡 이니 나에게 오는자는 결코 주 리지 아니 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NIV)

빵은 또한 그리스도의 육신을 나타냅니다. 최후의 만찬에서 예수께서는 빵을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며 말씀 하셨다. "이것은 내 몸이 너에게 주어 졌음 이니라."(눅 22:19).

포도주는 인류의 죄값을 지불하기 위해 쏟아 부은 피의 하나님 언약을 나타냅니다. 예수님은 누가 복음 22 장 20 절에서 "이 잔은 내 피의 새 언약 이니 너희를 위하여 부어진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NIV)

믿는 자들은 그리스도의 희생과 그의 생애와 죽음과 부활에서 우리를 위해했던 모든 것을 기억하기 위해 정기적으로 성찬을 취합니다. 주의 만찬은 그리스도의 몸에 대한 자기 점검과 참여의 시간입니다.

무지개

 쥬타 쿠스 / 게티 이미지

그리스도교의 무지개는 하나님의 신실 하심에 대한 상징이며 다시는 홍수로 지구를 파괴하지 않겠다는 그의 약속입니다. 이 약속은 노아와 홍수에 관한 이야기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홍수가 있은 후, 하나님께서는 하늘에 무지개를 놓아 노아 와 언약을 맺으셔서 땅과 모든 피조물을 홍수로 다시는 결코 멸망시키지 않으 셨습니다.

지평선 위로 높이 솟아 오르기 때문에, 무지개는 은혜의 일을 통해 하나님의 충실 함을 완전히 포용하는 방법을 보여줍니다. 예수 그리스도 를 믿는 신앙을 통한 하나님의 은혜는 일부 소수 영혼들만을위한 것이 아닙니다. 무지개처럼 구원복음 은 모든 것을 포괄하며 모든 사람은 그것을 보도록 권유받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 하사 독생자를 주 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을 것임 이니라. 하나님은 아들을 세상에 보내셔서 세상을 정죄하지 않으시 고 세상을 구원해 주셨습니다. (요한 복음 3 : 16-17, NIV)

성경의 저자들은 무지개를 사용하여 하나님의 영광을 묘사했습니다.

비가 오는 날에 구름 속에있는 활 모양처럼, 모든 주위에 밝기의 모습이 나타납니다. 그러한 것은 주님의 영광을 닮은 모습이었습니다. 그리고 내가 그것을 보았을 때, 나는 내 얼굴에 떨어졌고, 나는 말한 사람의 목소리를 들었다. (에스겔 1 장 28 절, ESV)

계시록 에서 사도 요한하늘계신 하나님 보좌 주위에 무지개를 보았습니다.

즉시 나는 성령 안에 계셨고, 나 앞에 하늘에 앉은 누군가가 앉아있는 보좌가있었습니다. 그곳에 앉은 사람은 재스퍼와 카네 리안의 모습을 보였습니다. 에메랄드를 닮은 무지개가 왕좌를 둘러 쌌다. (계시 4 : 2-3, NIV)

신자들이 무지개를 볼 때, 그들은 신의 충실 함, 모든 것을 포괄하는 은총, 그의 영광스러운 아름다움, 그리고 우리의 삶의 보좌에 거룩하고 영원한 존재가 있음을 상기시킵니다.

크리스천 서클

기독교 기호는 용어집을 묘사했습니다. 이미지 © 수에 Chastain

끝이없는 원이나 결혼 반지는 영원의 상징입니다. 기독교인 부부 의 경우, 결혼 반지 교환은 내재적 인 유대의 외적 표현입니다. 두 개의 마음이 하나로 결합되고 서로를 영원히 충실히 지키겠다고 약속합니다.

마찬가지로 결혼 계약과 남편과 아내의 관계는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신부 인 교회 사이의 관계를 묘사 한 것입니다. 남편은 희생적인 사랑과 보호를받으며 목숨을 바칠 것을 촉구합니다. 그리고 사랑하는 남편의 안전하고 소중한 포옹에서 아내는 자연스럽게 제출과 존중으로 응답합니다. 끝이없는 순환계에서 상징되는 결혼 관계 가 영원히 지속되도록 설계된 것처럼 그리스도와의 관계도 모든 영원을 위해 견디게됩니다.

하나님의 어린 양 (Agnus Dei)

  기독교 기호는 용어집을 보여줍니다. 하나님의 어린 양. 이미지 © 수에 Chastain

하나님의 어린 양은 사람의 죄를 속죄하기 위해 하나님 께서 주신 완전하고 죄가없는 희생 인 예수 그리스도를 대표합니다.

그는 압제 받고 괴롭힘을 당했지만 입을 열지 않았습니다. 그는 도살장에 어린 양 같이 인도되었다. (사 53 : 7)

그 다음날 요한은 예수님 께서 자기에게 다가와서 "보라, 세상 죄를지고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 이로구나!"하고 외쳤다. (요한 1시 29 분, NIV)

그리고 그들은 큰 소리로 외쳤다. "구원은 보좌에 앉으 신 우리 하나님, 어린 양에게 달려있다." (계시 7:10, NIV)

성경

기독교 기호 용어 설명 성경입니다. 이미지 © 수에 Chastain

성경 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이것은 기독교인의 생활 수첩입니다. 인류에 대한 하나님의 메시지 - 그의 연애 편지 -는 성경의 페이지에 들어 있습니다.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을받은 것이며의를 가르치고, 책망하고, 교정하고, 훈련하는 데 유용합니다 ... ( 디모데 둘째 3:16)

나는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하늘과 땅이 사라질 때까지, 하나님의 율법의 가장 작은 부분조차 그 목적이 성취 될 때까지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마태 복음 5:18, NLT )

십계명

기독교 기호는 10 가지 계명을 보여줍니다. 이미지 © 수에 Chastain

십계명 또는 율법은 이집트에서 그들을 이끌어 낸 모세 를 통해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신 율법입니다. 본질적으로, 그들은 구약의 법에서 발견 된 수백 가지 법칙을 요약 한 것입니다. 그들은 영적 및 도덕적 생활을위한 행동의 기본 규칙을 제공합니다. 십계명이야기는 출 20 : 1-17과 신명기 5 : 6-21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십자가와 크라운

  기독교 상징 십자가 및 왕관 용어 설명. 이미지 © 수에 Chastain

십자가와 왕관은 기독교 교회에서 친숙한 상징입니다. 그것은 믿는 자들이 지상에서의 삶의 고통과 시련 (십자가) 후에 받게 될 하늘 (크라운)에서 기다리고있는 보상을 나타냅니다.

시련을 견디는 사람은 복이 있습니다. 시험을 치른 후에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약속하신 삶의 면류관을 받게 될 것입니다. (야고보서 1:12)

알파 그리고 오메가

 기독교 상징은 알파 & 오메가를 보여줍니다. 이미지 © 수에 Chastain

알파는 그리스 알파벳의 첫 글자이고 오메가가 마지막 글자입니다. 이 두 문자는 함께 예수 그리스도 의 이름 중 하나 인 "시작과 끝"을 상징하는 모노그램 또는 상징을 이룹니다. 요한 계시록 1 장 8 절에 나오는 용어는 "나는 알파와 오메가 다"라고 주 하느님이 말합니다, "전능하신 분이 누구 시며 누구이며 앞으로 올 것인가?" 요한 계시록 에서 예수님에 대한이 이름이 두 번 더 나옵니다 .

"나는 끝났어. 알파와 오메가, 시작과 끝이야. 목이 말린 사람에게는 생명수 샘물을 마시지 않고 마실 것이다."(계 21 : 6 , NIV)

"나는 알파와 오메가, 처음과 마지막, 시작과 끝이다." (요한 계시록 22:13)

예수님에 의한이 진술은 그리스도교에있어 결정적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분명히 예수님 께서 창조 전에 존재 하셨고 모든 영원 토록 존재할 것임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그는 어떤 것도 창조되기 전에 하나님과 함께 있었기 때문에 창조에 참여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처럼 창조되지 않았습니다. 그는 영원합니다. 따라서 그리스도교의 상징 인 알파와 오메가는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님의 영원한 본질을 상징합니다.

Chi-Rho (그리스도의 모노그램)

Chi Rho  기독교 기호는 용어집 Chi-Rho (그리스도의 모노그램)를 보여줍니다. 이미지 © 수에 Chastain

치로 (Chi-Rho)는 그리스도를위한 가장 오래된 알려진 모노그램 (또는 문자 기호)입니다. 어떤 이들은이 상징을 "크리스 그램 (Christogram)"이라고 부르며 로마 황제 콘스탄틴 (Constantine) (AD 306-337)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이 이야기의 진실은 의심 스럽지만, 콘스탄티누스는 결정적인 전투가 있기 전에 하늘에서이 상징을 보았고, 그는 "이 표식으로 정복하십시오."라는 메시지를 들었습니다. 따라서, 그는 그의 군대에 상징을 채택했다. Chi (x = ch)와 Rho (p = r)는 그리스어로 "Christ"또는 "Christos"의 처음 세 글자입니다. Chi-Rho에는 여러 변형이 있지만 가장 일반적으로 두 글자의 겹침으로 구성되며 종종 원으로 둘러 쌉니다.

예수님의 모노그램 (Ihs)

Ihs  기독교 기호는 Ihs (예수의 모노그램)를 설명했다. 이미지 © 수에 Chastain

Ihs는 1 세기로 거슬러 올라간 고대 모노그램 (또는 문자 기호)입니다. 그리스어 "Jesus"의 처음 세 글자 (iota = i + eta = h + sigma = s)에서 유래 된 약어입니다. 서기관은 문자 위에 줄을 쓰거나 줄을 써 약어를 나타냅니다.


예배와 상징

 

가. 상징으로 가득 찬 예배 :

우리가 예배드리는 자리에는 각 종 상징물들이 놓여져 있다. 십자가, 설교대, 성찬상, 세례대, 촛대와 헬라어 알파와 오메가(Α Ω) 혹은 키로(☧) 등이 그것들이다. 예배 봉사자들은 회중과는 다른 복장(vestment)을 하고 있으며, 설교자는 설교대에 올라선다. 그러면 회중들은 선포될 하나님의 말씀을 기대하며 조용히 앉아서 귀를 기울인다. 함 께 신앙을 고백하고 주기도를 드린다. 그리고 찬송을 부를 때면 회중은 일어선다. 또 한 기도 인도자가 기도를 드릴 때면 마지막에 반드시 “아멘!”이라는 화답을 하기도 한다. 이런 모든 예배의 내용과 행위들이 사실은 상징들이다. 그러나 이것들은 상징이라고 알고 있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은 듯 하다. 어떤 의미에서 모든 종교적인 내 용과 행위들은 상징으로 구성되어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상징이 아니고서는 표현할 수 없기 때문일 것이다. 이렇듯 상징은 우리 예배에 깊이 뿌리를 내리고 있다. 그 런데 불행스럽게도 이런 상징이 갖는 의미를 바르게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이 다. 심지어 어떤 이들은 예배나 신앙생활에서 상징자체를 애써 외면하려고 한다. 그 리고는 상징이 우상처럼 될까 염려가 된다는 엉뚱한 해석을 한다. 상징과 우상을 구 별하지 못한다면, 거기엔 더 큰 문제가 있다고 생각된다. 바로 교육이 부재하다는 현 실이다. 잘못 이해하고 잘못 행동할 수 있는 것은 상징 이외에도 얼마든지 있을 수 있다. 그렇다고해서 눈을 딱 감고서 살아갈 수는 없는 노릇이 아닌가? 중요한 것은 상징의 의미를 제대로 배우는 일 밖에 없다고 하겠다.

나. 예수님과 성경 그리고 역사는 상징을 창조해 나갔다

예수님은 상징적인 용어들을 많이 창조하셨다.

가령 자신을 <선한 목자>(요 10:11),  <양의 문>(요 10:7), <세상의 빛>(요 8:12)과 <포도나무>(요 15:1-5)로 말씀하셨다.
제자들에게 대부분 비유로 가르치셨음을 알 수 있다(막 4:34).
이런 비유들은 대체로 상징들로 가득 찬 내용들이었다. 천국에 관한 비유들은 상징어들이다. <밭에 숨겨진 보화>(마13:44)나 <진주 장사꾼>(마14:45-46), <씨 뿌리는 농부>(마13:2-8), 그리고 <가만히 자라는 씨>(막4:26-29)와 같은 이야기들이다. 천국을 일상의 말로 소개하거 나 설명한다는 것이 불가능한 일이었을 것이다. 우리들이 땅에서 상상할 수 있는 그 어떤 것과도 다른 곳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부득불 땅에 있는 것들을 가지고 말씀하 셨던 것이다.

역시 성경 안에는 상징 언어가 풍부하다. 역사의 여명기에 하나님의 백성들은 자신들 들의 신앙을 상징을 창조해서 표현했음을 알 수 있다. 그들에게는 아직 성전도 없었 고,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도 없었다. 오직 그들은 상징 언어를 만들어 하나님을 만났 고 관계를 맺었다. 가령, 야곱은 하나님을 만난 후 거기에 돌단을 쌓았다. 그리고 거 기에 “하나님의 집” 이라는 의미를 부여하였다(창28:10-19). 가령 보통 일반인과 구별 되는 하나님의 사람을 일컫는 <나실인>이라는 사람을 세웠는데, 그들은 머리털을 깎 지않고, 독주를 마시지 않으며, 사체에 손을 대지 않음으로 <나실인>의 지위를 유지 하였다(민6:1-21). 그렇게 함으로 누구든지 그를 보고 하나님의 사람으로 인정하고 두 려워하였다. 또한 예배를 섬기는 제사장들에게는 특별한 예복(에봇)을 입도록 규정하 였다(출28:1-4).

이런 상징의 발전은 기독교 역사 속에서 풍부하게 이루어졌다. 가장 오래된 예전이라고 할 수 있는 로마 교회의 성직 서품의식도 7세기 후반기에서야 나타나는데, 거기에 보면 특별한 예복(vestments)이나 목사의 목에 두르는 영대(stole) 같은 것이 없었다.

이렇듯 상징은 우리로 영적인 것들에게로 눈을 돌리게 만드는데 크게 도움을 준다. 뿐만 아니라, 상징들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행하신 일들이고, 위대한 하나님의 일꾼들 의 관심사, 그리고 중요한 기독교의 가르침들을 기억나게 해 준다. 뿐만 아니라, 이와 같은 상징들은 예배드릴 마음을 갖도록 도와준다. 이런 의미에 있어서 상징들은 예배 자들의 순례생활에 있어서 필수인 이정표와 같은 구실을 한다고 하겠다.

다. 상징에 대한 일반적인 의미 :

일반적으로 상징이란 의사표현의 한 도구로, “추상적인 것을 구체화하거나 나타내는 것”이라고 정의한다. 우리가 사용하는 언어는 그 표현하고자 하는 의미를 전달하는데 있어서 대단히 제한적이다. 이렇듯 언어는 무엇인가를 말하지만, 상징은 그것을 나타내 보여준다. 언어가 한계에 부딪히게 될 때, 상징은 말하기 시작한다. 상징이 말하기 시작하면 언어는 침묵을 지킬 수 있다. 우리는 고개를 끄덕이거나, 손을 흔들거나, 반갑게 누군가를 포옹할 수 있다. 물론 이런 행동을 대신해서 언어로 전달한다고 한다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 아마도 우리의 삶에서 많은 아름다움이나 색채를 잃게 될 것이다. 말보다는 이상과 같은 상징적인 행동들은 우리의 삶을 더욱 풍부하게 만들어 주고 있는 것이다. 가령 우리는 ‘존경’이라는 말을 사용하지만, 그 의미를 제대로 전달 하고 있는지를 생각할 때, 왠지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는 것을 느낄때가 있다. 그러나 만일 존경의 표시로 <큰 절>을 올려드릴 수 있다. 그 때 언어가 주는 의미보다 훨씬 더 분명하고 깊은 감동을 전할 수 있다. 그런데 이런 상징들이 신앙생활에 사용 될 때, 얼마나 풍부하고 심오한 신앙으로 이끄는 도구가 되는지 모른다. 우리가 하고 있는 신앙생활이란 무한하고 영원하신 절대자와의 관계맺기 이기 때문에 상징은 가 장 적절한 대화의 재료가 될 수 있다. 신앙적인 표현 가운데는 언어로 표현할 수 없 는 것들이 많기 때문이며, 이런 경우에 상징보다도 더 적합한 도구가 없다고 하겠다.

   어느 예배당 제단 뒤 벽면에는 알파와 오메가란 희랍어 글자가 선명하게 조각되어 있었다. 만일 그 글자가 말하고자 하는 의미를 제대로 알고 있는 교인이라고 한다면, 예배당에 들어섰을 때, 그는 처음이 되실 뿐 아니라, 끝이 되시는 하나님이 여전히 자 신을 사랑하고 계시다는 생각에(계1:8), 그가 조금전까지 자신을 사로잡고 있었던 온 갖 근심과 걱정들이 사라지는 것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라. 예배와 관계된 상징의 종류들 : 상징에는 다양한 종류들이 있다.

첫째, 시간의 상징

생활의 리듬을 암시해 주는 한 주간(레 23:3),

언제나 주님의 부활을 기념하는 주일(계1:10),

작은 창조로써 아침(창1:1-31),

활동과 구별되는 시간인 저녁(창1:1-31),

수면과 침묵 그리고 죽음으로써 밤(요9:4)이 그런 것들이다.

둘째,  장소의 상징

하나님의 백성들의 모임인 교회(행2:46-47),

세상은 하나님이 허락하신 나그네의 집(시119:54, 고후5:1-3, 벧전2:11),

주님의 살고 피를 겸격으로 나누는 제단(마26:26-28),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되는 설교단,

하나님을 찬양하는 사람들의 자리 찬양대석, 등이 그런 것들이다.

셋째, 상징적인 사람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인 성도(고전1:2-3),

하나님의 사자(使者)인 목사(딛1:7-9),

천국 음악으로 섬기는 찬양대원(대하29:25-28),

하나님 나라의 일꾼으로서 직분자들(고전4:1-2),

하나님의 집인 교회를 돌보는 관리인(대상9:17-27), 등이 그런 사람들이다.

넷째, 거룩한 용어

하나님과 대화인 기도(마6:5-15),

마음으로 고백하는 신앙고백(막8:29),

한 마음으로 하나님께 부르는 찬송(시95:1-2),

말없는 기도인 묵상(시19:14, 119:97),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설교(잠30:5-6, 롬3:2, 벧전4:11),

하나님의 은총에 응답하는 봉헌(시96:8),

하나님의 은총을 비는 인사(삿6:12, 눅1:28) 등이다.

 

다섯째, 거룩한 행동

세례를 기억하는 십자성호,

화해와 용서로써 악수와 포옹(벧전5:14),

천국으로 향하는 순례로써 행진(시95:2),

권위와 하나님의 능력의 임재로서 안수(막10:16),

하나님의 은총을 선포하는 강복의 손(민6:22-26) 등이다.

 

여섯째, 예배를 돕기 위해 준비된 상징

두 개의 촛대와 촛불은 주님의 두 성품인 신성과 인성(마16:16, 요1:1-14),

촛불은 세상을 밝히는 빛이신 주님의 임재(시27:1, 요1:4-5),

생명의 근원인 세례대의 물(요한7:37, 행8:38),

승리를 말하는 깃발(렘50:2),

예배를 섬기기 위해서 입는 예복(출28:2-43, 삼상2:18),

하나님을 찬양하도록 돕는 오르간-악기(대하29:25-28),

주님의 사랑의 결정체인 십자가(고전1:18-24) 등이다.

 

일곱째, 경건한 자세들의 상징

하나님을 높여 드리기 위한 일어 섬(수7:10, 삼상9:26, 사60:1),

하나님의 말씀을 경청하기 위한 앉음(대상17:16-27, 막3:34-35),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을 구하는 무릎꿇음(시95:6, 엡3:15),

목적지를 향한 걸음(사40:31, 행3:6),

사람 사이의 교량으로서 인사(눅1:28) 등이다.

 

여덟째, 거룩한 의미를 전하는 글자의 상징

신앙고백을 요약한 물고기란 글자(Ιχθυς는 물고기라는 희랍어인데, ‘예수 그리스도 는 하나님의 아들 구세주’란 신앙고백의 첫 글자로 구성되어 있다.)

처음과 나중 되시는 하나님을 의미하는 Α Ω(알파와 오메가)
우리의 구주가 되신 주님을 의미하는 ☧(희랍어 크리스토스의 처음 두 글자)
사람으로 세상에 오신 예수님을 의미하는 ΙΗΣ(희랍어 예수의 줄임말) 등이다.

상징의 특징

모든 상징은 본질적으로 그 자체가 목표가 아니라, 그것이 지시하는 대상과 관계하는 매체요, 그것이 바라보는 주체를 섬기는 매체이다. 그런데 이런 상징들은 외적이고 내 적인, 그리고 영적인 특징을 가지고 있다. 상징의 외적 특징이라함은, 십자가나 어떤 의식을 집례하면서 행동하는 동작과 같은 유형적인 실재를 말하며, 내적인 특징은 한 집단이 그 상징에 부여하는 해석을 말하며, 영적인 특징이란 개인이나 집단이 외적인 상징과 내적인 의미와의 관련 속에서 만들어내는 에너지를 말한다. 가령, 십자가는 고 난과 죽음을 외적으로 암시하는 외적 상징과, 기독교인들에게 있어서는 하나님의 구원하시는 구체적인 행동으로 해석하는 내적 의미를 가지고 있고, 이로써 십자가는 모든 믿는 자들에게 구원의 확신과 기쁨을 주는 영적 에너지를 발산한다고 하겠다.

그런데 상징은 이런 특징 외에도, 역설적인 특징을 가지고 있다. 상징은 어떤 사람들 에게는 의미를 분명히 드러나지만, 다른 사람들에게는 그 깊은 의미가 감추어진다는 것이다. 마치 예수님의 비유가 모든 사람들에게 열려진 의미가 아닌 것처럼 말이다. 그래서 이런 상징들에 대한 교육이 선행되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이다.

 

상징은 의미를 공유할 수 있어야 한다. 

     이상에서 우리는 얼마나 많은 상징들 속에서 살고 있는지 새삼 놀라지 않을 수 없다. 우리들의 실제 신앙생활에 있어서도 상징은 폭 넓게 사용되고 있다. 이런저런 상징들로 인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더욱 잘 이해할 수 있고, 우리의 신앙이 자라날 수 있다. 어떤 언어로 표현할 수 없는 깊은 영적 의미를 전달해 주는 상징이라는 점에서 더욱 감사하지 않을 수 없다. 상징은 이렇듯 간결하면서도 심오한 의미를 전달한다는 점에서 중요한 수단이 아닐 수 없다(마13:13-43).

    그런데 문제가 있다. 우리 교회가 가지고 있는 많은 상징들 중에는 잘 알려지고 이해 되는 것들이 있는 반면에 그렇지 못한 상징들이 많이 있다는 현실이다. 다시 말하면 상징이 갖는 본래적인 의미를 알지 못할 때 심각한 괴리 현상이 일어난다는 말이다. 상징은 공감대가 형성된 사람들 사이에서 사용되기 시작하였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가면서 그 처음 상징의 의미를 바르고 분명하게 이해하지 못할 때, 자칫 우상을 섬긴다는 오해를 면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상징에 대한 교육이 절실하 다. 그리고 그 상징들을 신앙과 삶에서 나눌 필요가 있다. 그렇게 함으로 신앙의 표현을 적극적으로 하면서 살 수 있기 때문이다. 유럽을 여행할때, 대부분의 교회당 지 붕에 큰 장닭 한 마리가 앉아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옆에 앉은 아이가 물을 수 있다. “엄마, 저게 뭐야?” 그 때 “저건 말야, 베드로가 예수님을 세 번씩이나 모른다고 부인 했거든(마26:69-75). 그 때 예수님께서 말씀하신대로 장닭이 세 번 울었지. 엄마는 저 장 닭을 볼때마다, 나는 지금 예수님을 모른다고 부인하며 살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고 자신을 돌아본단다.” 이렇게 대답할 수 있다면, 그 아이는 그 장닭을 예사롭게 쳐다보지 않을 것이다.

예배에서 말과 상징의 균형과 전망 :

예배에서 말과 상징 사이에 균형이 깨지고 있다는 것은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예배에서 필요이상으로 말을 많이 하려고 하지만, 실제로 전달되는 의미는 그리 많지 못하다는 것을 모르고 있다.
모국어로 쉽게 설명할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 에 상징이 서 있을 자리를 잃은 것이다.
그리스도인도 아니요, 종교인도 아닌 에리히 프롬은 이런 말을 하였다.

“나는 상징적 언어를 우리 각자가 배워야 할 외국어라고 생각한다.
만일, 우리가 그것을 배우면, 지혜의 의미심장한 출처 가운데 하나인 신화와의 관계에 몰입할 수 있을 것이다.
진실로 그것은 내용과 형식에서 전인류에게 공통적이기 때문에 특히 인간적이라고 하는 체험분야에 대한 이해를 도울 수 있다.”

악수와 인사말이 서로 상충되지 않으면서, 서로의 따스함과 의미를 강화시켜 주듯, 언어와 상징행위는 서로를 보완해 주고 있다고 하겠다.

현대 기독자들이 말의 홍수속에서 살지만 실제로 그들의 마음에 오랫토록 남아있는 말이란 과연 얼마나 될 까?
오히려 이와같은 우리의 빈약한 언어를 보완해 주기 위해서 상징언어를 사용한다고 하면서 함께 공유하고 익히도록 할 때, 지금보다 훨씬 더 풍성한 신앙생활을 할 수 있지 않을까?

그 상징의 의미는 마음속에서 잘 보존될 뿐 아니라, 말보다는 훨씬 더 용이하게 기억되는 장점도 있기 때문이다.

예배에서 말과 상징이 균형을 이루므로 더욱 풍성한 신앙의 의미를 살려갈 수 있도록 하는 것은 오늘 교회 지도자들에게 달린 큰 과제가 아닐 수 없다.

* 자료출처 : https://lutherfriend.tistory.com/6246 [lutherfriend.tistory.com]




סֵפֶר 스트롱번호5612
1.

집필

2.

글을 읽거나 쓸 줄 아는 것

3.

학문

발음 [ çêpher ]
어원
어미활용 סִפְרִי, 복수 סְפָרִים, 복수 연계형 סִפְרֵי, 5608에서 유래
구약 성경
185회 사용



  • 관련 성경
    ☞책(출32:32, 신28:58, 시56:8, 렘36:13), 두루마리(민5:23), 증서(신24:1, 렘32:10,44),편지(삼하11:14, 왕상21:8, 에9:30), 역대지략(왕상14:19, 왕하8:23, 느12:23), 글(왕하5:6, 렘29:29, 나1 : 1), 조서(에1:22, 3:13, 8:10), 일기(에2:23, 6:1, 10:2), 학문(단1:4,17). [동] 기록하다(삼상10:25, 느7:5).

  • דָּבָר 스트롱번호1697
    1.

    2.

    복수로 쓰인 경우

    3.

    약속

    발음 [ dâbâr ]
    어원
    1696에서 유래
    구약 성경
    1442회 사용
    יוֹם 스트롱번호3117
    1.

    2.

    יוֹם: 낮에

    3.

    날마다

    발음 [ yôwm ]
    어원
    어미활용 יוֹמְךָ ,יוֹמִי, 쌍수 יוֹמַיִם, 복수 יָמִים, 복수 연계형 יְמֵי, 덥다는 의미의 사용하지 않는 어원에서 유래
    구약 성경
    2291회 사용



    4월 29일(화) 열왕기하 14-17장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역대지략(14:15)

    요아스의 남은 사적과 그 권력과 또 유다 왕 아마샤와 서로 싸운 일은 이스라엘 왕 역대지략에 기록되지 아니하였느냐.
    As for the other events of the reign of Jehoash, what he did and his achievements, including his war against Amaziah king of Judah, are they not written in the book of the annals of the kings of Israel?

    역대지략이란 용어가 구약 성경에서만 35구절 사용된 것으로 나타납니다.
    (열왕기상 11구절, 열왕기하 22구절, 역대상 1구절, 느헤미야 1구절).

    역대지략이란 이스라엘의 여러 왕대(王代)의 행적을 간략하게 적은 기록으로 성경에 포함된 역대기가 아니라 역대기 저자에 의해 활용된 자료라고 합니다.

    역대지략은 사관들에 의해 기록되었으며, 지금은 남아 있지 않으나 역대기의 편찬자는 바로 이 문서를 이용하여 역대기를 편집했을 것으로 추정합니다.

    역대지략에는 왕들의 남은 사적들을 기록한 이스라엘 왕의 역대지략(왕상 14:19), 유다 왕의 역대지략(왕하 15:6), 특정한 왕명(王名)이 들어간 다윗의 역대지략(대상 27:4) 등이 있습니다.

    역대지략은 과거 이스라엘과 유다 왕국의 역대 왕들에 대한 기록이라고 한다면 성도들의 행적에 대해서 기록한 것을 "생명책" 또는 "어린양의 생명책"이라고 합니다.

    요한계시록 20:15에서는 “누구든지 생명책에 기록되지 못한 자는 불못에 던져지더라”고 선언합니다.
    이 말씀에서 생명책은 천국에서 하나님과 영원히 살 사람들의 이름이 기록된 책을 말합니다.
    이 책은 구원받은 자들의 이름이 적힌 두루마리입니다.
    이 생명책은 요한계시록 3:5; 20:12과 4:3에도 언급되어 있습니다.
    이 책에 주 예수님의 피로 구속함을 받은 사람들의 이름이 적혀있기 때문에 이 책을 어린 양의 생명책이라고도 부릅니다(계 13:8; 21:27).

    여러분의 이름이 생명책에 기록되어 있는지 어떻게 확신할 수 있을까요?
    먼저 구원을 받아야 합니다.
    죄를 회개하고 주 예수 그리스도를 자신의 구주로 믿으십시오(빌 4:3; 계 3:5).
    여러분의 이름이 생명책에 기록되면 결코 지울 수 없습니다(계 3:5; 롬 8:37-39).
    진정한 성도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영원한 삶을 의심하지 않습니다(요 10:28-30).





    역대지략이란 무엇인가? (역대지략의 뜻과 의미)

    왕조에서 일어난 여러가지 사건을 간략하게 적은 역사 기록
    이것은 사관들에 의해 기록되었으며, 지금은 남아 있지 않으나 역대기의 편찬자는 바로 이 문서를 이용하여 역대기를 편집했을 것으로 추정한다
    성경은 '이스라엘 왕의 역대지략'(왕상 14:29; 왕하 1:18), '다윗왕의 역대지략'(대상 27:24), 그리고 '제사장 가계에 대한 역대지략'9느 12:23)을언급하고 있다

    1. 역대지략에 대해서

    역대지략이란 이스라엘의 여러 왕대(王代)의 행적을 간략하게 적은 기록으로 성경에 포함된 역대기가 아니라 역대기 저자에 의해 활용된 자료입니다.

    이것은 아마 왕국의 사관(史官)들에 의해 기록된 왕들의 국정일지(國政日誌)를 가리키는 것으로 보이는데(왕상 14:19) 분실이 된 관계로 오늘날 전해져 오지 않고 있습니다.

    역대지략에는 왕들의 남은 사적들을 기록한 이스라엘 왕의 역대지략(왕상 14:19), 유다 왕의 역대지략(왕하 15:6), 특정한 왕명(王名)이 들어간 다윗의 역대지략(대상 27:4) 등이 있습니다.

    그외에도 제사장의 가계(家系)와 명부(名付) 및 여러 가지 기록을 담은 것으로 보이는 역대지략(느 12:23)도 있습니다.


    2. 밧세바에 대한 다윗의 맹세에 대해서

    다윗이 밧세바에게 했다는 맹세, 즉 솔로몬에게 왕좌를 물려주겠다는 맹세는 성경 어디에도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다.
    그래서 일부 신학자는 다윗이 실제 그런 맹세를 하지 않았음에도 나단이 다윗의 연로함과 기억이 희미한 것을 이용하여 계략을 꾸민 것이라고 의심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역대상 22:9에 의하면 솔로몬을 향한 하나님의 선택이 이미 있었음이 분명하고, 열왕기상 1:28-30에서 보듯이 다윗이 즉각적으로 수긍과 대응을 한 것을 보면 기억이 희미하지 않았음이 분명합니다.

    그래서 비록 다윗이 밧세바에게 맹세를 한 기사가 성경에 기록되어 있지 않았다 할지라도 다윗이 그런 맹세를 했을 것이라고 추측됩니다.
    따라서 나단은 하나님의 뜻과 달리 아도니야가 왕이 되려는 위기 상황에서 다윗 왕으로 하여금 맹세를 재확인하고 이를 공식적으로 선포하도록 하기 위해 밧세바에게 이같이 권면한 것으로 보여집니다.

    역대지략(Book of the annals of the kings)

    역대 왕들의 역사기록을 말한다(왕상 14:19, 29; 15:23; 대상 27:24; 느 12:23).
    이것은 지금의 ‘역대상·하’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오늘날 분실된 문서로, 왕국의 사관들에 의해 기록된 문서로 여겨지고 있다.
    성경에는 ‘이스라엘 왕의 역대지략’(왕상 14:19; 왕하 1:18 등), ‘유다 왕의 역대지략’(왕상 14:29; 왕하 8:23), ‘다윗 왕의 역대지략’(대상 27:24), 제사장 가계에 대한 ‘역대지략’(느 12:23) 등이 언급되고 있다. 

    역대지략(sepher dibre hayyamim)

    역대지략(sepher dibre hayyamim)이라는 자료는 지금은 망실되었다고 한다.
    문자적인 의미는 세페르 디브레 하야밈[날마다의 사건의 일]라고 이해할 수 있다.
    역대지략(Book of Chronicles)은 문자적 의미는 '날마다의 사건의 일'로서, 왕국의 사관들에 의해 기록된 왕들의 국정일지, 또다른 말로 '왕조의 역사기록'을 가리킨다.
    현재의 역대기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고, 오늘에는 분실된 문서로, 열왕기의 편찬자가 역대기의 편집에 쓴 문서이다.
    그 실물은 분실되고 남아있지 않지만 본래는 2종의 역대지략이 있었다.

    (1) 이스라엘왕의 역대지략

    ㆍ왕상 14:19,15:31,16:5,14,20, 27, 22:39

    ㆍ왕하 1:18,10:34,13:8,12,14:15, 28, 15:11, 15, 21, 26, 31

    (2) 남쪽 유대왕의 역대지략

    ㆍ왕상14:29,15:7,23,22:45

    ㆍ왕하 8:23,12:19,14:18,15:6, 36, 16:19, 20, 21:17, 25, 23:28, 24:5

    이들은 상세한 기록이었는데, 열왕기 편찬자는 그의 사관(史觀)에 따라 정리하여  이용했다.
    또한 특정 왕명이 들어간 '다윗왕의 역대지략(대상 27:24)', 제사장 가계와 명부 및 여러가지 기록을 담은 것으로 보이는 '역대지략(느 12:23)'도언급되어있다.

    역대지략은 왕국의 사관들에 의해 기록된 왕들의 국정일지를가리킨다.
    현재의 역대기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고 오늘에는 분실된 문서로 열왕기의 편찬자가 역대기 편집에 쓴 문서이다.
    그 실물은 분실디고 남아 있지 않지만 본래는 2종의 역대지략이 있었다.
    왕하 1:18, 10:34, 13:8, 12, 14:15, 28, 15:11, 15, 21, 26, 31.

    생명책


    1. [시편 69:28]
    저희를 생명책에서 도말하사 의인과 함께 기록되게 마소서

    2. [빌립보서 4:3]
    또 참으로 나와 멍에를 같이 한 자 네게 구하노니 복음에 나와 함께 힘쓰던 저 부녀들을 돕고 또한 글레멘드와 그 외에 나의 동역자들을 도우라 그 이름들이 생명책에 있느니라

    3. [요한계시록 3:5]
    이기는 자는 이와 같이 흰 옷을 입을 것이요 내가 그 이름을 생명책에서 반드시 흐리지 아니하고 그 이름을 내 아버지 앞과 그 천사들 앞에서 시인하리라

    4. [요한계시록 13:8]
    죽임을 당한 어린 양의 생명책에 창세 이후로 녹명되지 못하고 이 땅에 사는 자들은 다 짐승에게 경배하리라

    5. [요한계시록 17:8]
    네가 본 짐승은 전에 있었다가 시방 없으나 장차 무저갱으로부터 올라와 멸망으로 들어갈 자니 땅에 거하는 자들로서 창세 이후로 생명책에 녹명되지 못한 자들이 이전에 있었다가 시방 없으나 장차 나올 짐승을 보고 기이히 여기리라

    6. [요한계시록 20:12]
    또 내가 보니 죽은 자들이 무론 대소하고 그 보좌 앞에 섰는데 책들이 펴 있고 또 다른 책이 펴졌으니 곧 생명책이라 죽은 자들이 자기 행위를 따라 책들에 기록된대로 심판을 받으니

    7. [요한계시록 20:15]
    누구든지 생명책에 기록되지 못한 자는 불못에 던지우더라

    8. [요한계시록 21:27]
    무엇이든지 속된 것이나 가증한 일 또는 거짓말 하는 자는 결코 그리로 들어오지 못하되 오직 어린 양의 생명책에 기록된 자들뿐이라

    요한계시록 20:12(개역개정)
    또 내가 보니 죽은 자들이 큰 자나 작은 자나 그 보좌 앞에 서 있는데 책들이 펴 있고 또 다른 책이 펴졌으니 곧 생명책이라 죽은 자들이 자기 행위를 따라 책들에 기록된 대로 심판을 받으니 

    하나님의 최후 심판

    또 내가 보니 죽은 자들이 무론 대소하고 그 보좌 앞에 섰는데.
    '죽은 자'에 대한 견해는 세 가지이다.
    1. 인류 전체를 의미한다고 주장한다(Beasley-Murray).
    2. 첫째 부활을 오직 순교자에게만 제한함으로 본절에서 나타난 죽은 자는 불신자들과 순교하지 않은 하나님의 백성들이라고 주장한다(Mounce).
    3. 첫째 부활을 그리스도에게만 충성을 다한 하나님의 백성 전체에게 해당되는 것으로 이해하여
    본절에 나타난 죽은 자는 오직 하나님을 대적한 불신자들을 의미한다고 주장한다(Ladd, Johnson).

    이 세 가지 견해중 마지막 견해가 가장 타당한 듯하다.
    한편 심판을 받기 위해 보좌앞에 선 자들에게는 두 종류의 책이 펼쳐져 있다.
    여기서의 두 책 중에서 첫번째 책인 행위를 기록한 책이 믿는 자들을 포함한 모든 사람의 행위를 기록하고 있는 것인지 아니면 불신자들의 행위만을 기록한 것인지 분명하지 않다(Johnson).

    책들이 펴 있고...죽은 자들이 자기 행위를 따라 책들에 기록된 대로 심판을 받으니.
    - 첫번째 책은 다니엘 7:10을 반영한 것으로 인간의 행위가 기록된 책이다. 하나님의 심판의 기준은 인간의 행위에 따라 심판이 이루어진다.

    다니엘 7:10
    불이 강처럼 흘러 그 앞에서 나오며 그에게 수종하는 자는 천천이요 그 앞에 시위한 자는 만만이며 심판을 베푸는데 책들이 펴 놓였더라.

    또 다른 책이 펴져 있으니 곧 생명의 책이라.
    - '생명책'은 인간의 행위가 기록된 책과는 달리 하나님의 백성의 이름이 기록된 책이다(출 32:32, 33; 단 12:1; 눅 10:20; 빌 4:3). 


    출애굽기 32:32-33 / 그러나 합의하시면 이제 그들의 를 사하시옵소서 그렇지 않사오면 원컨대 주의 기록하신 책에서 내 이름을 지워 버려주옵소서. 그러나 합의하시면 이제 그들의 를 사하시옵소서 그렇지 않사오면 원컨대 주의 기록하신 책에서 내 이름을 지워 버려주옵소서.

    다니엘 12:1 / 그 때에 네 민족을 호위하는 대군 미가엘이 일어날 것이요 또 환난이 있으리니 이는 개국 이래로 그 때까지 없던 환난일 것이며 그 때에 네 백성 중 무릇 책에 기록된 모든 자가 구원을 얻을 것이라.

    누가복음 10:20 / 그러나 귀신들이 너희에게 항복하는 것으로 기뻐하지 말고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으로 기뻐하라 하시니라.

    빌립보서 4:3 / 또 참으로 나와 멍에를 같이 한 자 네게 구하노니 복음에 나와 함께 힘쓰던 저 부녀들을 돕고 또한 글레멘드와 그 외에 나의 동역자들을 도우라 그 이름들이 생명책에 있느니라.

    이 책은 오직 어린 양이신 그리스도만이 열수 있는 책이다(3:5. 13:8. 21:27).
    이것은 오직 그리스도를 의지하고 그에게 충성한 자들만이 이 생명책에 기록되어 있음을 암시한다(Ladd).
    두 책, 즉 인간의 행위가 기록된 책과 오직 그리스도만을 의지함으로 구속을 받은 사람들의 이름이 기록된 책 사이에는 인간의 행위와 믿음이라는 모순이 있는 것처럼 보이나 사실상 아무런 문제가 발생될 수 없다.
    왜냐하면 사람의 행위는 그 사람의 마음에서 비롯되기 때문이다(Johnson).

    생명책이란 무엇입니까?

    요한계시록 20:15에서는 “누구든지 생명책에 기록되지 못한 자는 불못에 던져지더라”고 선언합니다.
    이 말씀에서 생명책은 천국에서 하나님과 영원히 살 사람들의 이름이 기록된 책을 말합니다.
    이 책은 구원받은 자들의 이름이 적힌 두루마리입니다.
    이 생명책은 요한계시록 3:5, 20:12, 4:3에도 언급되어 있습니다.
    이 책에 주 예수님의 피로 구속함을 받은 사람들의 이름이 적혀있기 때문에 이 책을 어린 양의 생명책이라고도 부릅니다(계 13:8; 21:27).

    여러분의 이름이 생명책에 기록되어 있는지 어떻게 확신할 수 있을까요?
    먼저 구원을 받아야 합니다.
    죄를 회개하고 주 예수 그리스도를 자신의 구주로 믿으십시오(빌 4:3; 계 3:5).
    여러분의 이름이 생명책에 기록되면 결코 지울 수 없습니다(계 3:5; 롬 8:37-39).
    진정한 성도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영원한 삶을 의심하지 않습니다(요 10:28-30).

    요한계시록 20:11-15에 묘사된 백 보좌 심판은 불신자들에게 주어지는 심판입니다.
    그 이름이 생명책에 기록되어 있는 사람은 이 심판을 받지 않을 것이라고 분명히 말하고 있습니다(계 20:12-14).
    경건하지 못한 자들의 운명은 정해져 있으며, 그들의 이름은 생명책에 기록되어 있지 않고, 그들의 심판은 확실히 이루어질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요한계시록 3:5를 어떤 사람이 구원을 잃어버릴 수도 있다는 “증거"라고 말니다.
    그러나 요한계시록 3:5의 약속은 주님께서 그 이름을 지우지 않으실 것이라는 약속입니다.
    “이기는 자는. . . 내가 그 이름을 생명책에서 결코 지우지 아니하고”.
    여기에서 말하는 이기는 자는 세상의 유혹과 시험, 악을 이긴 사람으로 구속받은 사람입니다.
    구원받은 사람은 하나님의 책에 기록되며 영원히 지워지지 않을 것이라는 약속입니다.

    이 부분에서 때로 혼돈을 일으키는 구절은 시편 69:28입니다.
    “그들을 생명책에서 지우사 의인들과 함께 기록되지 말게 하소서”.
    여기에서 말하는 “생명책”과 어린 양의 생명책을 혼돈해서는 안됩니다.
    다윗은 천국의 영생이 아니라 이 땅의 육체적 생명을 가리켜 말하고 있습니다.
    출애굽기 32:32-33에서 말하는 “책”도 다윗이 언급한 책과 같은 것입니다.

    하나님은 모든 것을 기록하고 계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자녀들을 알고 계시며 그들의 이름을 책에 영원히 기록하셨습니다.


    생명책과 어린 양의 생명책은 어떻게 다른가요?

    신약 성경에는 '생명책'에 대한 8개의 구절이 있고(시 69:28, 빌 4:3, 계 13:5. 8. 17:8. 20:12. 15. 21:17).
    2개는 어린 양 예수 그리스도께 속한 생명책을 언급합니다(계 13:8, 21:27).

     
    생명책에 이름이 적힌 사람들은 하나님께 속한 사람이고, 영생을 얻은 사람입니다.

    바울은 자기와 함께 일한 사람들을 일컬어 그들의 이름이 생명책에 적혀 있다고 말했습니다(빌립보서 4:3).
    여기서 다시 생명책에 이름이 적힌 사람들은 영원한 구원을 얻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같은 방식으로 요한계시록 3:5도 주를 믿는 사람들의 이름이 적힌 생명책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이 사람들은 세상적 삶의 시험을 이겨낸 사람들이며, 구원의 진실성을 증명한 사람들입니다.
    이 구절은 또한 생명책에 이름이 적히면, 예수님이 결코 그 이름을 지우시지 않을 것임을 분명히 밝히면서, 다시 한 번 영원한 보장에 대해 증명하고 있습니다.
    요한계시록의 이 부분에서 교회를 향해 말씀하고 계신 우리 주 예수님은 아버지 앞에서 자기 사람들을 시인하시겠다고 약속하십니다.
    이와 반대로 요한계시록 20:15은 생명책에 이름이 적히지 않은 사람들의 운명, 즉 영원한 불못에 대해서도 보여줍니다.

    요한계시록 13:8과 21:27에서 우리는 다시 한번 어린 양,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씻김 받은 모든 사람들의 이름이 들어 있는 “어린 양의 생명책”에 대한 언급을 볼 수 있습니다.
    “죽임을 당한” 어린 양은 당신의 희생을 통해 구원을 받은 사람들의 이름이 적힌 생명책을 가지고 계십니다.
    그들이 바로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에 들어갈 자들이며 (요한계시록 21:10), 하나님과 함께 천국에 영원히 거하게 될 자들입니다.
    생명책이 어린 양을 통해 영원한 생명을 받은 사람들의 이름을 기록한 것이므로, 생명책과 어린 양의 생명책은 하나이자 동일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4월 28일(월) 열왕기하 11-13장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전을 수리하라(12:5)

    제사장들이 각각 아는 자에게서 받아 들여서 전의 어느 곳이든지 퇴락한 것을 보거든 그것으로 수리하라.
    Let every priest receive the money from one of the treasurers, and let it be used to repair whatever damage is found in the temple.

    전을 수리하라(repair the temple)

    요아스(Joash)는 일곱 살에 남 유다 왕국 제8대 왕이 되어 40년을 치리하였으며 그의 중요한 업적은 성전을 수리한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요아스는 남왕국 유다왕 아하시야의 아들이었습니다.
    아하시야의 모친 아달랴가 왕의 혈족들을 전멸시키려 할 때 요아스의 고모 여호세바에 의해서 6년 동안 성전에서 숨어 지냈습니다.



    남국 유다왕 아하시야의 아들(B.C.837-800).
    아하시야의 모친 아달랴가 왕의 계통을 전멸할때 어린 요아스는 고모 여호세바에게 구원을 받아 6년간 성전에서 숨어 자랐다(대하 22:11).
    그 후 왕이 되자 아달랴와 바알의 제사장 맛단은 죽임을 당하였다.
    바알의 산전을 파괴하고 여호와의 성전이 수축되었다.
    그러나 대 제사장 여호야다가 죽은 후 타락하여 진언하는 스가랴(여호야다의 아들)를 성전에서 돌로 쳐 죽였다(대하 24:20-22).

    열왕기하 12장은 대체로 요아스의 왕권 강화에 초점이 맞춰져 있습니다.
    개인적으로는 왕권 강화라는 주제보다는 어린 시절부터 신앙 교육을 받았지만, 변질되는 신앙의 모습을 통해 이스라엘의 죄악을 보여주는 장면으로 생각됩니다.
    변화는 좋은 것이지만, 변질은 역시 나쁜 것으로 나타납니다.

    요아스의 지시대로 대제사장 여호야다는 제사장들과 함께 성전 수리를 위한 준비작업에 들어갑니다.
    우선 성전 수입에 관한 규칙을 만든 것으로 보입니다.
    성전 문 앞에 궤(헌금함)를 놓고 먼저 채워지는 것을 계산하여 밀봉하고 성전 맡은자의 손에 넘겨 성전 수리하는 사람과 재료를 위해 사용하게 했습니다.
    이러한 과정은 재정의 투명성을 위해 만들어 놓은 장치입니다.
    늘 말씀드리지만, 재정을 투명하게 하기 위해 아무리 좋은 시스템을 갖춰놓는다고 해도 쓰는 사람이 투명하게 사용하지 않으면 소용이 없습니다.

    15절에는 다소 놀라운 이야기가 등장합니다.
    여러 규칙을 통해 제사장들이 성전 수입에 손을 대지 않는 모습을 보여주지만 뜻 밖에도 은을 일꾼에게 주는 사람과 회계하지 않는 모습이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쉽게 말해 성전을 수리하는데 일꾼들에게 정확한 돈 계산을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언듯보면 쉽게 이해되지 않는 장면이지만, 조금 넓게 생각해보면 충분히 할 수 있는 일입니다.
    일꾼들은 자신들이 받을 사례에 대해 생각하지 않고 하나님의 성전을 수리하는데 최선의 노력을 기울이는 것이고, 일꾼에게 사례하는 쪽에서는 최선을 다해 일꾼을 섬기는 것에 노력하는 모습이 있기 때문입니다.

    사도행전 2장 44~47절에는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초대교회의 모습이 등장합니다.
    성령을 통해 초대교회 사람들은 자신의 것을 나누는 데 어색함이 없었습니다.
    "주고 받는" 사탄의 법칙이 아닌, "거저 받은 것을 거저 주는" 하나님의 법칙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모습입니다.

    우리가 사람들에게 섭섭하고 서운한 감정이 생기는 것은 '본전 생각'이 나기 때문입니다.
    목회자를 예로 들어볼까요?
    사역지가 없으면 "사역지만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고, 사역지가 생기면 "사례비 없어도 된다"고 했다가 나중에는 "내가 이렇게 열심히 하는데..."라고 생각하면서 섭섭한 감정을 드러냅니다.

    사회도 마찬가지죠. 취직만 해도 좋겠다고 했다가 시간이 흐르면 첫 본전 생각나는 것이 사람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망각의 은혜'를 찾아야 합니다.
    내가 헌신한 것에 대해서는 빨리 잊고, 누군가로부터 받은 것이 있다면 길게 기억하세요.
    그래야 이웃과 하나님 나라를 위해 헌신할 수 있게 됩니다.
    반대로 내가 헌신한 것을 잊지 못하고, 다른 사람의 헌신을 잊게 되면 섭섭한 '감정'이 전면에 등장하게 됩니다.
    이렇게 되면 모든 것이 뒤틀리게 되어 있습니다.

    제사장들은 요아스의 종교 개혁에 협조합니다.
    자신들의 기득권과 재산권을 다 내려 놓고 자신의 삶 보다도 하나님의 성전을 위해 헌신하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이러한 개혁은 쉽게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돈, 권력, 이성 문제에 대해 초월할 수 있어야 가능한 일입니다.
    제사장들(그리고 레위인들)은 오랜 시간 요아스의 개혁을 따르지 못했을 것입니다.
    오랜 시간 우상을 섬기는 사람들이 왕의 자리에 있었기 때문에 성전 수입만으로는 살아가기 어려웠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자신들의 위치가 '부'를 축적하는 자리가 아님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요아스의 개혁에 (싫든 좋든) 협조한 것으로 보입니다.
    최선을 다해 교회와 이웃을 섬기는 사람들을 보는 것으로 만족하지 마시고, 내가 할 일은 무엇인지 찾아보는 우리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헌신은 누군가의 강요가 아닌 하나님 앞에 선 단독자로서 해야 할 사명입니다.
    오늘도 주님 앞에서 제사장들과 같이 새로운 개혁을 일으키며 하나님 나라를 세워갈 수 있는 우리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요아스의 유다 통치

    남왕국 유다의 제8대 왕으로서 통치한 요아스의 영성에 대한 평가와 그의 치세하에서의 종교적, 정치적 상황 그리고 그의 죽음에 대한 것을 기록하고 있다.
    그의 종교적 사역은 제사장 여호야다의 섭정으로 이루어진 것으로서 요아스의 의로운 통치력을 나타내지만, 후에 언급된 그의 정치적 사업은 불신앙적 범죄로서 악정을 행했다.
    본장의 내용은 요아스의 선정과(1-3절), 성전 수리를 명하는 요아스(4-8절), 그리고 수리되는 성전(9-16절) 및 아람 왕 하사엘의 침입과 요아스의 최후가 기록되어 있다(17-21절).
    요아스 왕은 처음엔 성전 수리를 제사장들의 소관 사항으로 그들에게 맡겼는데, 후에는 왕 자신이 직접 주도하여 전국민적 운동으로 전개시켰다.
    이것이 그의 가장 큰 업적이다.

    요아스는 태어나자마자 하나님의 구원을 체험한 왕이었습니다.
    그는 아달랴의 손에서 극적으로 구출되었고, 또한 감격스런 즉위식을 치르기도 하였던 것입니다.
    이제 아달랴로부터 왕권을 빼앗아 즉위한 요아스는 흐트러져 있는 유다를 다스려 재정비하는 데 온 힘을 기울였습니다.
    그리하여 요아스 이후 근 100년 기간 동안 유다는 평온을 유지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1. 요아스의 40년 통치

    요아스는 역대 유다의 왕들 중 가장 어린 나이로 왕위에 올랐습니다.
    그는 7세에 즉위하여 40년 간 유다를 통치하였습니다.
    그는 자신의 고모부이자 은인이요, 스승이라 할 수 있는 대제사장 여호야다가 생존한 기간에는 여호와 보시기에 올바로 행동하였습니다. 요아스는 여호야다의 가르침에 힘입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여호야다가 죽자 요아스는 변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점차적으로 여호와의 말씀에 불순종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백성들의 경우에도, 이들은 바알의 제단을 훼파했으나 여호와가 금지한 산당에서 제사하는 행위는 계속 행하였습니다.
    아마도 다른 왕들처럼 요아스도 이 일을 대수롭지 않게 여겼기 때문일 것입니다.
    하지만 이는 분명히 율법에서 금한 죄악임에는 틀림없었습니다.

    a. 계속되는 백성들의 죄악(왕하 14:4)
    b. 여호와께 대한 일시적인 순종(수 24:31)

    2. 요아스의 성전 수리 명령

    요아스는 성전을 수리하고자 하는 계획을 세웠습니다.
    바알을 숭배하는 아달랴가 통치하던 6년 동안 성전이 많이 파손되고 손상되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요아스는 자신의 계획을 이루기 위해서는 물질이 필요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백성들이 성전에 헌금으로 바치는 각종 은을 모아 수리하고자 했습니다.
    그는 자신의 이러한 계획을 제사장들에게 알리고, 헌금된 은으로 성전 수리를 하도록 명령을 내렸습니다.

    a. 여호와의 전에 드린 헌금(왕하 22:4)
    b. 자원함으로 드리는 헌물(출 35:5)

    3. 요아스와 제사장들의 합의

    성전 수리에 대한 왕의 명령은 그가 통치한 지 23년이 되기까지도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그리하여 요아스 왕은 제사장들을 불러모아 성전 수리 작업에 진전이 없음을 지적하였습니다.
    그리고 나서 그 새로운 계획을 제사장들에게 제안하였습니다.
    즉 백성들이 직접 성전 수리 헌금을 내되 이를 제사장들이 관여하지 못하고, 또한 성전 수리 책임도 제사장에게 부과하지 않기로 하였습니다.
    다만 모든 것을 성전 수리 실무자들이 담당하도록 했던 것입니다.
    이러한 요아스의 제의에 제사장들은 흔쾌히 수락하였습니다.

    a. 성전 수리에 게으른 백성들(학 1:2)
    b. 전을 건축하라(학 1:8)

    4. 요아스의 성전 수리

    성전 수리를 위한 헌금

    대제사장 여호야다는 요아스의 명령대로 구멍 뚫린 큰 나무 궤짝을 성전 문 옆에 두었습니다.
    백성들이 성전 수리를 위한 헌금으로 은을 가지고 와서 제사장에게 주면 제사장들은 이 은을 궤짝 구멍에 넣었습니다.
    그 궤짝이 다 채워지면 왕의 비서와 대제사장이 이 은을 계수한 후 성전 수리의 감독자에게 그 은을 넘겨주었습니다.
    그러면 감독자는 성전 수리를 위해 열심히 일하는 목수와 건축하는 자, 미장이, 그리고 석수들에게 정직하게 인건비를 지불하였습니다. 그리고 남은 돈으로는 성전 수리를 위해 필요한 각종 재료들을 샀던 것입니다.

    a. 연보궤(막 12:41)
    b. 성전의 수리(왕하 22:5-6)

    정직하게 쓰여진 헌금들

    백성들은 경건한 마음으로 성전 수리를 위해 헌금을 바쳤습니다.
    이러한 헌금이야말로 거룩한 재물이었습니다.
    따라서 거룩한 헌금이 거룩하고 정당하게 쓰여져야 함은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성전 수리 감독자들은 모든 일들을 신실하게 수행하였습니다.
    어떠한 부정 축재도 하지 않고 정당하게 노력한 만큼의 대가를 일꾼들에게 지불하였던 것입니다.
    자연히 일꾼들도 열과 성을 다하여 성전 수리에 힘을 썼고 성전은 하루가 다르게 복원되어져 갔습니다.
    그렇지만 백성들이 부지중에 범한 죄와 이웃에 대한 과실을 사함받기 위해서 드린 속건제의 은과 속죄제의 은은 성전 수리하는 것에 드려지지 않았습니다.
    이러한 예물들은 제사장들의 생활 보장을 위해 제사장들에게 돌리도록 조치하였습니다.

    a. 헌금으로 만든 성전의 그릇(대하 24:14)
    b. 여호와의 성물(레 15:15-16)

    5. 요아스의 죽음

    1) 하사엘에게 조공을 바친 요아스
    아람의 하사엘 왕은 나신의 세력을 극대화하여 이스라엘을 침공하여 성공을 거두었습니다. 그 여세로 유다의 해안을 따라 침공해 나갔습니다. 그리하여 블레셋의 도시 중에 하나인 가드도 공략하여 점령하였습니다. 이 같은 하사엘의 침략은 이제 유다로 향하게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하사엘은 유다를 공략하기 위한 전위대를 예루살렘에 파견하였습니다. 이에 다급해진 요아스는 하사엘의 환심을 사서 위험을 모면하고자 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수많은 보물들을 하사엘에게 조공으로 바치게 되었습니다. 요아스는 왕실 내의 보물들과 성전 안에 있는 모든 금들, 그리고 선조들이 구별하여 여호와께 바쳤던 모든 신성한 성물들을 하사엘에게 다 주었던 것입니다. 그러자 하사엘은 자신의 군대를 철수하였습니다. 결국 요아스 왕은 왕궁 내의 모든 보물들과 자신의 생명을 맞바꾼 꼴이 되었습니다. 이는 요아스가 점차적으로 여호와를 떠난 결과로 나라가 약해졌으며, 이 같은 고초를 당하게 되었음을 보여 주는 사건이었습니다.
    a. 아람 왕 하사엘(왕하8:12)
    b. 앗수르에 바친 조공(왕하17:3)

    2) 요아스의 죽음
    하사엘에게 조공을 바친 요아스의 행적은 백성들에게 반감을 사기에 충분하였습니다. 또한 요아스가 대제사장 여호야다의 아들 스가랴를 성전 뜰 안에서 쳐죽인 행위는 백성들에게 큰 충격을 주었습니다. 따라서 요아스에 대한 적대감이 날이 갈수록 팽배해져 갔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요아스는 실라라는 지역으로 가던 중 밀로 궁에서 자신의 신복들에 의해 암살을 당하였습니다. 요아스를 암살한 장본인은 바로 요사갈과 여호사바드이었습니다. 이들이 왜 요아스를 암살했는지 분명히는 모르지만 스가랴를 죽인 것에 대한 보복 내지는 왕의 잘못된 통치에 반감을 가졌기 때문일 것으로 추측되고 있습니다. 요아스는 다윗 성에 장사되었고 유다의 왕위는 요아스의 아들인 아마샤가 계승하게 되었습니다.
    a. 암살되는 요아스(대하24:25)
    b. 밀로 궁(삼하5:9)

    결론
    요아스 왕의 통치는 대제사장 여호야다의 죽음을 기점으로 극명하게 대조를 이루었습니다. 그는 여호야다의 가르침에 힘입어 성전을 수리하는 등 의욕적인 선정을 베풀었습니다. 하지만 여호야다의 죽음과 함께 요아스의 신앙도 곤두박질하였습니다. 그 또한 하나님을 멀리하며 선지자 스가랴를 살해하는 등의 악행을 범하고 말았습니다. 그 결과 요아스는 하나님의 공의의 심판을 받아 하사엘에게 조공도 바치고 끝내는 신복들에게 죽음을 당하는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게 된 것입니다.

    단어해설

    1절. 예후의 칠년. 북왕국 이스라엘을 통치한 예후의 7년.

    3절. 산당. 이방인들이 바알이나 아스다롯을 섬기던 장소. 보통 산이나 구릉의 정상에 있었으며 그곳에 높은 단을 쌓아 제사를 드렸음. 이스라엘 백성도 가나안에 정착하여 이곳에서 하나님께 제사를 드렸기 때문에 이방의 우상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게 되었음.

    4절. 거룩하게 하여 드리는 은. 일종의 종교세로 정규적으로 하나님께 바치는 십일조임.

    5절. 아는 자. 성전에서 헌금을 계산하고 관리하는 담당 회계사.

    6절. 퇴락한. 원어 <qd<B,:베데크>는 건물의 '갈라진 틈'을 가리키는 말로 예루살렘 성전이 사람들의 무관심 속에서 오랫동안 방치되었음을 나타냄.

    8절. 응락하니라. '오다, 나타내다, 동의하다'를 뜻. 입술로만 승낙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판단에 의해서 행동으로 동의하는 것.

    10절. 계수하여. 원래는 '담다'라는 뜻. 고대에서는 화폐를 개수로 세지 않고 무게를 달아서 계산하였음. 봉하고. 원어 <rWx:추르>는 '속박하다, 포위하다, 동여매다'라는 뜻. 본문에서는 자루에 넣어 묶는 것을 의미.

    15절. 회계하지. 숫자를 나열하거나 계산함.

    16절. 속건제의 은. 성전에 바치는 헌금의 일종. 자신도 모르게 다른 사람에게 지은 죄를 회개하기 위해서 하나님께 드리는 돈.

    17절. 아람. 셈의 다섯 번째 아들인 아람의 후손들이 세운 나라. 이스라엘과는 적대적인 관계를 가졌음.

    18절. 구별하여. 원어 <카다쉬>는 '성결하다, 거룩하게 봉헌하다'를 의미.

    20절. 밀로. 예루살렘 동쪽에 위치한 성으로 요새로 쓰였음.

    신학주제

    성전 수리 사역 / 본문에는 요아스가 행한 종교 사역 중에 가장 큰 사역인 성전 수리가 언급되어 있다.
    그는 즉위 후에 첫 사역으로 아달랴의 통치로 인해 훼손된 예루살렘 성전의 기능을 회복시키기 위해 성전 수축을 명하였다.
    그러나 본문은 1차 수축의 실패와 그 대책, 그리고 백성들의 자발적인 헌신으로 완결되는 2차 수축의 전모를 기록함으로써 제사장들의 사명감 결여가 그 원인이었다는 암시적인 표현과 함께, 성전 수축이 왕의 지휘와 계획하에 이루어졌다는 사실을 왕의 사역 중심으로 기록하고 있다.
    이는 성전 수리 사역이 왕과 백성들의 협력으로 성취되었다는 하나님 나라의 보편성과 전체성을 엿볼 수 있도록 해준다.

    영적교훈 / 유다에 있는 예루살렘 성전은 그 외형상에 있어서는 별 문제가 없는 것같이 보였으나, 솔로몬 사후 예배에 대한 생각과 여호와께 대한 신앙의 문제는 점차 약화되어 성전이 없던 사사 시대에 성행하였던 산당 예배가 다시 고개를 들기 시작했다.
    게다가 여호람 왕이 이스라엘 왕들의 길을 따라 바알 숭배까지 허용했기에 그 심각성은 더욱 깊어 갔다.
    이러한 때 일어난 요아스의 성전 회복 운동은 바알 숭배로 말미암아 멀어져 있던 백성들의 신앙을 다시 여호와의 전으로 돌이킨 중요한 사건이었다.
    이처럼 성도들도 각자의 삶 속에서 요아스와 같은 신앙 회복 운동을 꾸준히 일으켜야 될 것이다.

    요아스의 성전 수리(열왕기하 12:1~8)

    7세에 남왕국 유다의 왕이 된 요아스는 제사장 여호야다가 자신을 교훈하는 동안에는 여호와 보시기에 합당하게 행하였으나, 산당은 없애지 않아 백성들이 그곳에서 제사를 드리고 분향하였습니다.    
    요아스는 성전의 부서진 곳을 수리하기 위해 제사장들에게 백성들로부터 직접 예물을 받아 성전 수리에 사용하도록 하였으나 제사장들이 이에 응하지 않자 백성들이 직접 성전을 수리하는 자들에게 드리게 합니다. 

    1. 성전을 수리하는 요아스(1~5절)

    예후가 (북왕국) 이스라엘의 왕이 된 지 7년째 되던 해에 요아스가 (남왕국 유다) 왕이 되어 예루살렘에서 40년을 다스렸습니다.
    요아스는 제사장 여호야다가 그를 교훈하는 모든 날 동안에는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하게(여호와 보시기에 합당하게) 행하였습니다.
    그러나 산당은 없애지 않았으므로 백성들이 여전히 산당에서 제사를 드리며 분향하였습니다.
    요아스가 제사장에게 이르기를 “여호와의 성전에 거룩하게 바치는 모든 은, 곧 각 사람이 통용하는 은이나 각 사람의 몸값으로 드리는 은이나 개인이 자원하여 여호와의 성전에 드리는 모든 은을 제사장들이 각각 아는 사람에게서 받아들여  성전의 어느 곳이든지 파손된 것을 발견하면 그것으로 수리하라”하고 말했습니다.

    각 사람이 통용하는 은(4절) :
    직역하면 ‘각 사람이 지나갈 때 내는 돈’이라는 뜻으로 모든 사람이 의무적으로 내는 세금 같은 돈을 뜻합니다.    
    20세 이상의 모든 사람은 반 세겔을 냅니다(출 30:11~16).

    각 사람의 몸값으로 드리는 은(4절) :
    각 사람이 성전에 바치는 성전세로 20세 이상 60세 이하의 남자는 은 50세겔, 여자는 은 30세겔을 바칩니다(레위기 27장).

    자원하여 여호와의 전에 드리는 은(4절) :
    각자 자원하여 하나님께 바치는 감사예물입니다.

    각각 아는 사람에게서 받아들여(5절) :
    위의 세 가지 헌금을 제사장들이 백성들에게 직접 거둬들이라는 것

    제사장을 책망하는 요아스(6~8절)

    그러나 요아스가 왕이 된 지 23년이 지나도록 제사장들이 성전의 부서진 곳을 수리하지 않았습니다.
    이에 요아스 왕이 대제사장 여호야다와 다른 제사장들을 불러서 말했습니다.
    “너희가 어찌하여 성전의 부서진 곳을 수리하지 않았느냐?
    이제부터는 너희가 아는 사람에게서 은을 받지 말고, 그들이 성전을 수리는 데를 위하여 직접 드리게 하라.”
    그래서 제사장들은 백성들에게 돈을 직접 받지도 않고, 또 성전 수리하는 일을 맡지도 않고 다른 사람들에게 맡기기로 하였습니다.



    우리의 몸 = 성전 + 장막(고전 3:16-17. 고후 5:1-5)

    I. 우리의 몸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교우들 가운데 건강이 안 좋으신 분들이 많습니다.
    여러 차례의 수술 때문에 얼굴도 야위고 몸도 야윈 분들이 적지 않습니다.

    창세기 2: 7에 보면 하나님께서 흙으로 사람을 지으셨습니다.
    그래서 범죄한 아담에게 주어진 심판 중에 하나가 흙으로 되돌아가는 것이었습니다.
    창세기 3: 19 말씀을 다같이 찾아서 읽어봅시다.
    "네가 얼굴에 땀이 흘러야 식물을 먹고 필경은 흙으로 돌아가리니 그 속에서 네가 취함을 입었음이니라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 하시니라." 

    우리는 우리가 흙으로 지음을 받았기 때문에 언젠가는 흙으로 되돌아갈 수밖에 없다는 운명을 잘 압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육신의 병마로 온몸이 일그러진 분들이나 숨을 거둔 분들의 시신을 볼 때마다 마음이 아픕니다.
    여러분,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우리의 육신(SOMA)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오늘 우리는 우리의 몸에 대하여 한번 생각해보는 시간을 가지려고 합니다.

    기독교는 육신은 무조건 악하고 영혼은 무조건 선하다는 영육 이원론(DUALISM)을 배격합니다.
    사실 초대 교회를 가장 큰 위기에 몰아넣었던 이단 종파도 이와 같은 이원론에 빠졌던 영지주의자들(GNOSTICS)이었습니다.
    이들은 물질로 만들어진 육체는 악하고 오직 영혼만 선하고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이라고 주장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연약한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셨다는 성육신론(INCARNATION)을 거부해버렸습니다.

    영지주의와 달리 우리 기독교는 육체를 긍정합니다.
    그래서 예수님 역시 우리와 똑같이 썩어질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셔서 육체가 겪어야 할 고통을 그대로 남김없이 당하셨다고 믿습니다.

    이제 오늘 우리는 사도 바울이 우리 인간의 몸을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지 주목해보려고 합니다. 먼저 바울은 고린도 전서에서 우리의 몸을 하나님의 성전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런 다음 고린도 후서에 가서 바울은 인간의 몸을 장막이라고 주장했습니다. '성전'과 '장막,' 이 두 가지 비유(METAPHOR)야말로 우리 몸의 속성을 그대로 말해줍니다.

    II. 우리의 몸은 하나님의 성전이다

    그렇다면 바울은 왜 우리의 몸을 성전으로 비유했을까요?
    이 문제를 바로 이해하기 위하여 우리는 고린도 교회가 얼마나 몸을 온갖 더러운 쾌락에 내맡긴 채 그릇되게 사용했는가를 알아야 합니다.

    고린도는 항구 도시로서 아주 부유한 상업 도시였습니다. 대개 항구 도시가 그렇듯이 고린도는 온 세상이 알아주는 향락의 소굴이 되었습니다. 희랍어 'CORINTHIAZOMA'라는 말은 '고린도인처럼 행하다'는 뜻인데 '매춘 행위를 하다'는 뜻으로 널리 쓰여졌다고 합니다. 그만큼 고린도는 음란 행위가 일반화된 도시였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바울은 이와 같이 음행에 젖어 몸을 함부로 사용하는 사람들에게 우리의 몸이 더 이상 우리 자신의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성전이라는 사실을 역설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몸이 하나님의 성전이라는 사실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세 가지 의미를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입니다.

    ① 성전은 하나님의 영이 계시는 거룩한 곳이다.

    고린도전서 3:16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거하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뇨."

    여러분, 성전의 제일가는 특징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그 성전에 계시는 것 아닙니까?
    거룩한 장소로 성별하셔서 하나님의 영으로 충만한 곳이 성전이 아닙니까?

    우리의 몸이 성전이라는 사실은 우리의 몸을 언제나 하나님의 거룩한 영으로 채워야 한다는 뜻입니다. 우리의 몸은 어떤 주인을 모시고 사는가에 따라 그 주인을 그대로 닮을 수밖에 없습니다. 존귀하신 주 하나님을 모시고 살면 존귀한 몸이 됩니다. 세상의 정욕을 주인으로 모시고 살면 추한 몸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성전이 성령의 전이듯이 여러분들의 육신이 성령의 지배를 받게 하십시오! 거룩한 영을 따라 움직이는 거룩한 몸이 되게 하십시오!

    ② 성전은 제사를 드리는 곳이다.

    여러분, 하나님의 성전이 지어지는 가장 중요한 이유가 무엇입니까? 하나님께 제사 드리기 위함이 아닙니까? 하나님께 각종 예물과 희생 제물을 드리며 하나님을 예배하기 위한 장소가 성전이 아닙니까? 그러므로 우리의 몸이 성전이라는 사실은 우리의 몸으로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데 쓰라는 말씀입니다. 우리의 몸을 하나님의 거룩한 사역을 위하여 봉사하는데 사용하라는 뜻입니다.

    사도 바울은 롬 12: 1에서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 여러분의 몸은 하나님께 거룩한 산 제사를 드리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선물로 주신 성전임을 잊지 마십시오!

    ③ 성전은 하나님의 소유이다.

    성전의 주인은 누구입니까? 아무리 인간이 공을 드리고 고생을 해서 성전을 건축했다고 할지라도 성전의 주인은 인간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주인이십니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몸이 성전이라면 우리 몸의 주인도 우리 자신이 아니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 몸의 주인은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 몸이 제것인양 함부로 자기 맘대로 사용해서는 안됩니다.

    어떤 군인이 훈련에 빠지기 위하여 잔꾀를 부렸습니다.
    자신의 새끼발가락에 자해를 입혀서 고장이 나게 만들었습니다.
    나중에 이 병사의 잘못을 알아낸 상관이 영창에 보냈는데 그 죄목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국가 기물 훼손죄'였습니다.
    군인은 몸 전체가 국가를 위해 바쳐진 몸인데 그 몸을 훼손했으니 국가 기물을 자기 맘대로 파손했다는 것이지요.

    성전의 주인이 하나님이듯이 우리 몸의 주인은 하나님이십니다.
    고린도전서 6:19-20을 보십시오.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의 것이 아니라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옳습니다.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으심으로 우리의 몸을 사셨습니다. 죄와 사탄의 지배하에 있던 우리의 몸을 엄청난 값을 치르시고 하나님의 소유로 만드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몸은 더 이상 우리의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멋대로 하나님의 소유물을 사용해서는 안됩니다.

    술이나 담배나 마약과 같은 나쁜 것으로 우리 몸을 축나게 해서는 안됩니다. 음행이나 노름이나 오락에 빠져 하나님의 성전을 악의 소굴로 만들어서는 안됩니다! 늘 건강하고 아름답고 경건하게 가꾸고 사용해야 할 의무가 우리에게 주어졌습니다! 

    여러분, 사도 바울이 롬 6: 12-13에서 주시는 말씀을 귀담아 들으십시오. "그러므로 너희는 죄로 너희 죽을 몸에 왕 노릇하지 못하게 하여 몸의 사욕을 순종치 말고 또한 너희 지체를 불의의 병기로 죄에게 드리지 말고 오직 너희 자신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산 자같이 하나님께 드리며 너희 지체를 의의 병기로 하나님께 드리라." 옳습니다. 여러분의 몸이 하나님의 것이매 하나님의 것이 되게 하십시오!

    그런데 이렇게 우리의 몸이 거룩한 성전인데 병에 걸리는 것은 무슨 이유일까요? 왜 툭하면 질그릇처럼 깨질까요? 왜 늙어서 쇠약해지고 결국은 싸늘한 시신이 될까요? 바울 선생에 따르면 그 이유가 우리 몸의 또 다른 속성, 즉 장막이라는 사실에 있다는 것입니다.

    III. 우리의 몸은 장막이다

    바울은 고후 5:1-5에서 부활 후에 우리가 영체(SPIRITUAL BODY)로 변형될 것이라는 사실을 역설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이 신비하고도 신령한 몸을 설명하기 위하여 이 땅위에서의 우리의 몸을 '장막,' 즉 '텐트'로 비유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몸이 장막이라는 사실은 무엇을 뜻할까요?
    세 가지 장막의 속성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① 장막은 영구용이 아니라 임시용

    유목 민족인 이스라엘 백성들은 장막 생활을 했습니다. 가축들이 풀을 뜯어먹을 수 있는 목초지를 찾아 이곳 저곳 장막을 치며 떠돌아 다녔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가 살고 있는 주택과 달리 장막은 언제나 일시적이었습니다. 한 곳에 장막을 쳐 놓고 일평생 그곳에 몸담아 사는 경우는 거의 없었습니다. 한마디로 장막은 영구용이 아니었습니다. 임시용이었던 것입니다.

    우리 몸이 장막이라는 것도 우리의 몸이 영원하지 않다는 사실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몸은 유한합니다. 일시적입니다. 여러분이 지금 아무리 아름답고 건강한 육체를 가졌다고 할지라도 그것은 오래가지 못합니다. 언젠가 늙고 일그러져 보기 싫을 날이 오고 쇠약해질 날이 오기 마련입니다.

    그래서 산이나 사막에서 수도 생활을 하던 중세의 신비주의자들은 사람의 해골을 옆에 놓고 그 해골을 쳐다보면서 자주 관상(觀想)에 빠졌다고 합니다. 인생무상을 깊이 체감하기 위해서였지요.

    여러분, 여러분의 몸은 장막처럼 일시적입니다. 영구하지 못합니다. 아침에 잠깐 보이다가 금방 사라지는 안개와 같습니다(약 4: 14). 풀의 꽃과 같이 허망한 것입니다. 이것을 인정하십시오!   

    ② 장막은 연약하다.

    그 옛날 바울이 살았을 때의 장막은 오늘 우리의 눈으로 볼 때 그리 튼튼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비바람이 칠 때 많이 흔들렸을 것입니다. 눈보라가 몰아칠 때 추위가 장막 안에까지 미쳐서 사람들이 덜덜 떨었을 것입니다. 우리의 몸이 장막이라는 사실 역시 우리가 연약한 존재라는 것을 말해주지 않습니까? 우리는 장막처럼 기후와 지형 조건에 'VULNERABLE,' 상처를 받기 쉽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성전인 우리의 몸에 왜 병마가 찾아오고 노쇠가 찾아오고 죽음이 찾아옵니까? 우리 몸의 또 다른 속성, 장막으로 지어졌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우리가 우리 몸을 성전처럼 거룩하고 깨끗하게 잘 관리했다고 할지라도 장막인 이상 온전할 수 가없습니다. 연약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것을 또한 인정하십시오!

    ③ 장막은 언젠가 거두어서 무너질 날이 온다.

    장막의 가장 중요한 특징이 무엇입니까?
    목적이 있어서 장막을 세웠다면 그 목적이 다 끝난 다음에는 반드시 해체하게 되어 있는 것이 장막이 아닙니까?
    한국에서 운동회를 하거나 마을의 큰 행사가 있을 때 꼭 큰 텐트를 여러 개 쳤습니다.
    그러다가 행사가 다 끝나고 사람들이 돌아갈 때가 되면 그 많은 텐트를 하나도 남김없이 거두어버리고 맙니다.

    우리의 몸이 장막이라고 하는 사실도 꼭 이 같은 이치입니다.
    하나님께서 성전인 우리의 몸을 통하여 영광 받으실 일이 다 끝날 경우 우리의 몸은 거두어야 합니다.

    고린도후서 5:1
    "만일 땅에 있는 우리의 장막집이 무너지면 하나님께서 지으신 집 곧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요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이 우리에게 있는 줄 아나니."

    이게 무슨 말씀입니까?
    땅에 있는 장막집, 곧 우리의 육체가 해체되면 하나님께서 직접 지으신 하늘의 집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 땅위에서의 육신의 장막이 무너질 때 훨씬 더 좋고 다시는 무너지지 않을 거룩한 하늘의 집, 즉 신령한 부활의 몸으로 바꾸어질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장막집이 무너진다고 해서 절망할 필요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영원히 무너지지 않을 거룩한 하늘의 집으로 변형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IV. 맺음말

    인간이 몸을 가지고 있는 것은 저주받은 것이 결코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셔서 주신 선물이 몸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몸은 우리의 것이 아닌 하나님의 성전입니다. 성전을 더러운 것으로 채우는 사람은 신성모독죄를 범하는 사람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몸을 학대하는 것 역시 하나님의 성전을 더럽히는 불경죄에 해당됩니다. 그러므로 할 수 있으면 여러분의 몸을 거룩하고 아름답고 건강하게 잘 관리하십시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쓰십시오! 성전을 성전답지 못하게 만들어서는 안됩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우리가 아무리 우리의 몸을 성전처럼 잘 관리했다고 할지라도 장막과도 같이 무너질 날이 올 것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의 몸은 장막처럼 영구하지 못합니다. 연약합니다. 모든 목적이 다 달성될 경우 반드시 해체할 날이 찾아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슬퍼하거나 절망할 필요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 기독교인들은 부활을 믿기 때문입니다. 땅의 장막이 무너지면 하늘의 신령한 집으로 다시 세워질 것을 믿기 때문입니다. 고전 16: 52-53에서 바울 사도가 말씀한 것처럼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겠고, 썩을 것이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아서 신령한 몸으로 변화가 될 것을 믿기 때문입니다.

    이와 같은 부활의 소망을 마음 속에 간직하시고 오늘 우리 몸에 찾아오는 가지가지의 고통을 잘 이겨내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아멘. 



    성도의 몸(에베소서 4:1-16)

    사람은 몸과 영혼으로 구성되어있다. 영혼 없는 몸은 짐승과 같고 몸 없는 영혼은 귀신과 같다. 영혼만 귀중한 것이 아니라 몸도 같이 귀중하다. 예수님은 우리의 영혼을 구하려 십자가를 지셨지만 삼일 만에 부활하실 때는 몸으로 부활하셨다. 그래서 바울은 우리에게 ‘너희 몸을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고 한다. 사람의 몸은 약 71%가 물이고 18%의 탄소, 4%의 질소, 2%의 칼슘, 2%의 인, 1%의 칼륨, 0.5%의 나트륨, 04%의 염소로 이루어졌다. 그 밖에도 모든 원소, 마그네슘, 아연, 망간, 구리 등이 조금씩 다 들어있다. 이렇게 단순한 물질의 집합처럼 보이는 몸이지만 정교하면서도 조직적으로 많은 일을 한다. 몸이 제대로 발휘하기 위해서는 각 지체들이 각자의 몫을 해주어야 한다. 눈은 눈대로, 발은 발대로, 손은 손대로 말이다. 그래서 사람들에게 소망이 무엇이냐고 물어보면 몸의 건강이라고 한다. 몸이 제대로 사용할 수 없다면 도대체 무엇을 할 수 있겠는가? 그런데 이렇게 소중한 몸의 정체는 무엇인가? 곧 몸은 무엇을 위해 존재하는가? 그냥 몸을 튼튼하게 유지하는 것이 목표인가? 아니면 몸의 즐거움이 목표인가? 그래서 먹고 마시고 노는 것이 몸의 목표인가? 오늘은 그것을 보려고 한다. 특히 성도의 몸은 무엇을 위한 존재인지를 보려고 한다.

    1. 성도의 몸은 하나님을 위한 것이다.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430년 노예생활을 하고 있었다. 그들의 몸은 바로를 위한 것이다. 바로는 그들에게 국고성인 비돔과 라암셋을 건축하도록 했고 이스라엘은 싫어도 해야 했다. 그 몸이 바로의 몸이었기 때문이다. 이 때 모세가 나타나 그들을 애굽에서 구출했다. 그리고 그들을 데리고 하나님의 산 시내산으로 인도하고 하나님과 계약을 맺었다. 이제부터 그 몸은 하나님의 몸이 되었다. 2천년 전 예수님이 오셨다. 사탄에게 노예가 되어 우리의 몸은 사탄의 몸이 되었다. 사탄이 시키는 대로 그 몸을 사용하였다. 몸은 사욕과 음란과 악의 도구가 되었다. 그 몸은 죄악의 도구가 되었다. 예수님은 갈보리 산으로 올라가 자신이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우리의 몸을 샀다. 그래서 우리의 몸은 예수님의 피 값으로 산 하나님의 몸이 되었다. 남자와 여자가 결혼하기 전에는 그들의 몸은 자유롭게 사용되었다. 그러나 결혼을 하면 달라진다. 남자의 몸은 여자의 소유가 되고 여자의 몸은 남자의 소유가 된다. 만약 그 몸을 배우자가 아닌 다른 이게게 준다면 이를 간음이라고 한다. 그 몸은 배우자의 것이기 때문이다. 성도가 마찬가지이다. 예수님의 피 값으로 산 몸은 예수님의 몸이고 하나님의 몸이다. 주님은 ‘너는 내 것이라’ 고 하였다. 남자나 여자나 가장 참을 수 없는 것은 배우자의 부정이다. 이스라엘의 몸은 하나님의 것이 되었다면 오직 그 몸을 하나님에게만 보여야만 한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그 몸을 바알이나 아스다롯 우상에게 보였다. 간음을 저지른 것이다. 결혼을 안 했으면 모르되 결혼은 약속이요 구속이다. 오직 하나님만이 내 몸의 소유자이다. 그 몸으로 다른 신에게 절할 수 없다. 왜 우리가 우상에게 절하면 안되나? 왜 불당에서 내 몸을 굽히면 안되나? 우리가 절에 가서 구경을 하고 불상을 보는 것은 관계없다. 나도 불교국가에 가서 절을 보고 불상을 본다. 그러나 몸을 굽히지는 않는다. 그것이 절에 갔으면 예의라고? 아니다. 결혼한 여자가 남의 집에 방문했다고 그 집 남자에게 내 몸을 주는 것이 예의인가? 아니다. 내 몸은 하나님께만 굽혀야 한다. 아람 나라에 나아만 장군은 나병환자였다. 이스라엘 엘리사 선지자에게 가면 나을 수 있다는 소식을 듣고 찾아갔다. 엘리사는 나와 보지도 않고 요단강에 몸을 일곱 번 담그라고 하였다. 몸을 담그라는 것이다. 나아만은 나았다. 얼마나 감격스러운가? 그가 가지고 온 예물을 드리려고 하니 엘리사가 받지를 않는다. 그래서 나아만이 노새 두 마리에 실을 흙을 주시면 고국에 돌아가 제단을 쌓고 거기에다 번제나 다른 제사를 드리겠다고 하자 엘리사는 허락한다. 그런데 다만 한가지만 용서를 구했다. 왕이 림몬의 신당에 들어갈 때 내 손을 의지하고 들어가 신당에서 몸을 굽히는데 그러면 자신도 어쩔 수 없이 내 몸도 굽히게 되는데 그것을 용서해 달라고 한다. 지금 그는 자신의 의사로 굽히는 것이 아니라 왕이 자기 손을 의지하기에 옆에서 도와 주다 보니 그럴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엘리사는 허락했다. 나아만이 지금 무엇을 얘기하고 있는가? 내 몸은 하나님의 몸이다. 그러니 그 분에게만 내 몸을 굽혀야 한다는 얘기다. 어찌 하찮은 돌이나 나무나 우상이나 돼지머리에 몸을 굽힐 수 있는가? 우리가 일제36년의 치욕적인 식민지배를 받았다. 그 치욕의 역사 속에서 교회도 치욕의 역사가 있었다. 한국교회가 1907년 평양 장대현 교회에서 시작된 평양 대 부흥을 통해 3년 정도의 짧은 시간에 기독교 인구가 3.5배 정도 증가하는 놀라운 성령의 역사가 있었다. 그러나 그렇게 한국 교회의 부흥이 시작되었던 평양이 현재는 가장 심각한 기독교 박해국가의 중심지가 되었다. 한국교회의 다수를 차지하고 있는 장로교는 해방 후 3차에 걸쳐 큰 분열을 일으키게 됐고 이후 사분오열을 거듭하여 지금은 수 많은 교단과 교파로 나누어졌다. 그 근본원인에 신사참배가 있다. 신사참배는 일제강점기에 신도사원인 신사를 곳곳에 세우고 한국인에게 강제로 참배하게 한 일을 말한다. 조선총독부는 동화정책의 일환으로 한국인에게 신사참배와 신도신앙을 강요했으며 처음에는 신사참배를 거부했던 종교단체들도 일제히 굴복하기 시작해 천주교, 성공회, 성결교, 구세군, 감리교 등 모든 교파가 신사참배를 결의했다. 장로교 역시 1938년 9월 10일 평양 서문밖 교회에서 제 27회 총회를 열어 신사참배를 결의했다. 지금 내 몸을 누구에게 굽히라고 하고 있는가? 내 몸은 하나님 이외에는 그 누구에게도 굽혀서는 안 된다. 아내든 남편이든 자신의 몸은 배우자 외에는 허락해서는 안 된다. 마귀가 예수님께 와서 ‘네가 내게 몸을 굽히면 이세상을 주겠다’고 했을 때 예수님은 ‘주 너의 하나님께만 경배하라’고 하였다. 왜? 내 몸은 하나님의 몸이기 때문이다. 이번 총회에서도 우리가 그 때 잘못 결의한 것을 회개하자는 헌의안이 들어와 있다. 잘못된 것은 용서받아야 한다. 예수님께서 죽으실 만큼 그 영혼과 몸을 귀하게 하셨다. ‘너는 내 것이라’ 선포하셨다. 그러므로 우리의 몸이 하나님의 몸이 됨을 한시라도 잊지 말라.

    2. 성도의 몸은 형제의 것이다.

    요1서 3:16절에 ‘그가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으니 우리가 형제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니라’ 하셨고 예수님은 친히 ‘너희가 서로 사랑하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많은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줄 알리라’고 하였다. 시편 133편에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함이 어찌 그리 아름다운고’하였다. 베드로가 예수님께 ‘형제가 내게 죄를 범하면 몇 번이나 용서하여 주리까 일곱 번까지 하오리까?’예수님은 ‘일곱 번씩 일흔 번이라도 하라’ 고 하였다. 원수라면 이렇게까지 말씀하시지 않을 지도 모른다. 형제니까 그렇게 사랑하라는 것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카인은 형제 아벨을 살해하였다. 최초의 살인이고 그것도 형제살인이다. 형제는 피로써 맺어진 형제가 있고 믿음으로 맺어진 형제가 있다. 우리는 피가 아닌 믿음이다. 피는 물보다 진하다고 한다. 돈은 피보다 진하다고 한다. 그런데 믿음은 돈보다 진하다. 예수님께서 마지막 만찬을 하셨다. 그리고 예수님은 이 마지막 만찬을 무척 원하였다고 하였다. 최후의 식사였다. 최후의 식사치고는 빈곤했다. 빵과 포도주가 다였다. 예수님은 빵을 나누어 주었다. 그리고 잔도 나누어 주셨다. 우리가 성찬식을 할 때 대부분은 목사님이나 장로님이 떡과 잔을 가지고 나누어 준다. 그런데 최초의 성찬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예수님 양편에 제자들이 각기 여섯씩 나누어 앉았다. 다빈치 그림에는 그렇게 그려 있다. 설사 그렇게 앉지 않았다고 해도 상관은 없다. 예수님께서 빵을 주셨다. 베드로에게 이만큼, 요한에게도 요만큼, 야고보에게도 요만큼 주셨을까? 포도주도 각각의 잔에 이 만큼씩 각각 따로 나누어 주셨을까? 아니다. 누가 복음에 보면 이것을 가져다가 ‘너희끼리 나누라’ 고 하셨다. 예수님이 일일이 나누어 주시 것이 아니라 한 덩어리의 빵을 둘로 나누어 주시면서 너희끼리 나누라고 하셨다. 내 앞에 빵이 왔다. 내 앞에 포도주가 왔다. 얼마를 떼어야 할까? ‘지금 나는 배가 고파. 누가 배가 고프던 말든 우선은 내가 먼저 받았으니 기회야 이왕 뗄 것 왕창 떼어야지’그렇게 생각하면 맨 나중에 ‘주여, 내 빵은 어디 있나이까?’ ‘주여, 내 포도주는 어디 있나이까?’하고 물을 것이다. 제가 신학교 2학년 때 신대원 전체가 운동장에 모여 성찬식을 한 적이 있었다. 한 400명 정도 이었을 것이다. 그때 시멘트 바닥에 다 앉았다. 그 때는 빵이 아니라 떡을 주었다. 큼지막한 것을 주면 앞에서 떼고 다음으로 넘기면 다음 사람이 떼고 하였다. 그러면 맨 마지막 사람이 뗄 때는 엄청 손때가 묻었을 것이다. 그래도 우리는 그런 위생관념 없이 먹었다. 그런데 포도주가 문제였다. 포도주도 조그만 잔이 아니라 대접에다 부어 앞 사람이 마시고 뒤로 돌리면 뒷사람이 마시고 또 뒷사람한테 돌렸다. 그러면 마지막 사람은 얼마나 입을 많이 된 대접으로 마셨을까? 지금 생각하니 위생적으로 문제가 많은 것 같다. 그런데 떡은 괜찮은데 포도주를 돌릴 때 우리는 성찬식이니 조금씩 마시고 뒷사람도 생각해야 한다. 신학생은 술을 마시지 못한다. 목사도 그렇다. 그런데 포도주가 오니 조금씩 마신 것이 아니라 어떤 이는 벌컥 마셨다. 그러니 얼마 못 가 포도주가 떨어졌다. 내 포도주는요? 중간에 갑자기 포도주가 떨어져 성찬식 중간에 포도주를 찾는다고 법석을 떨었던 적이 있다. 마지막 만찬은 무엇인가? 떡을 주고 잔을 주시면서 너희끼리 나누라는 것이 무엇인가? 바로 가족의 탄생이요 형제의 탄생이다. 너희는 형제요 너희는 가족이다. 너희끼리 나누라는 뜻이 그런 뜻이다. 내 몸은 성도의 것이다. 형제가 그런 것이다. 유대교의 한 랍비가 제자들에게 밤이 지나고 낮이 시작되는 때를 어떻게 설명할 수 있겠느냐고 물었다. 한 학생이 대답했다. "멀리 있는 동물을 보고 그것이 양인지 늑대인지 분간할 수 있는 때가 아닙니까?" 랍비가 대답했다. "좋은 대답이다. 그렇지만 내가 원하는 대답은 아니다." 두 번째 제자가 말했다. "멀리 있는 나무를 보고 그 나무가 올리브나무인지 무화과나무인지를 알 수 있는 때가 아닙니까?" "아니다. 정확한 대답이 아니다." "저희는 알지 못합니다. 랍비님 가르쳐 주십시오." "사람의 눈을 보고 그가 형제인지 자매인지 알아볼 수 있을 때, 그 때가 바로 아침이 되는 때이니라. 이를 구분할 수 없다면 아직도 밤이니라." 사람의 눈 속에서 원수의 증오가 아니라, 형제와 자매 됨을 읽을 수 있어야 한다. 진정으로 불쌍히 여기는 것은 상대방과 내가 동일화되는 것이다. 그의 아픔이 내 아픔이 되고, 그의 절망이 나의 절망이 된다. 그런데 그의 아픔이 내 아픔이 될 때, 그에게 치유가 시작된다. 그의 절망이 나의 절망이 될 때, 그에게는 희망이 싹튼다. 이것이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오신 이유이다. 예수님은 우리 인간의 육체의 한계를 입으시고, 지리적인 한계에도 함께 갇히셨고, 인종적 편견의 고통을 받으셨고, 종교의 억압과 정치의 잔혹함을 함께 겪으셨다. 인간의 죄악의 고통을 함께 당하시고, 인간의 병의 고통에 함께 우셨다. 예수님이 부활했을 때 막달라 마리아가 제일 먼저 예수님을 알아 보았다. 그 막달라 마리아가 예수님의 발을 만지려고 했을 때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를 만지지 말라 내가 아직 아버지께로 올라가지 못하였노라 너는 내 형제들에게 이르되 내가 내 아버지 곧 너희 아버지, 내 하나님 곧 너희 하나님께로 올라간다’하셨다. 예수님께서 자신의 제자들을 형제라 부르신 것이다. 내가 형제로서 너희를 사랑했으니 너희도 형제로서 서로 사랑하라는 것이다. 너희의 몸은 형제의 것이라고 한 것이다.

    3. 성도의 몸은 세상을 위한 것이다.

    주님은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요 빛’이라고 하셨다.
    예수님이 이 땅에서 세상에 속한 우리를 구원하셨다.
    이는 불타는 연기 속에서, 넘치는 홍수 속에서 건져 내신 것이다.
    그런데 누가 다시 불구덩이로, 물 속으로 들어가고 싶은가?
    우리는 그 세상에서 건짐 받은 사람이다.
    그런데 주님이 우리를 건진 이유가 다시 세상으로 보내시기 위함이었다.
    그럼 우리는 또 세상에서 빠져 버리라는 것인가?
    아니다. 우리를 다시 세상에 보내신 것은 빠지게 하려는 것이 아니다.
    세상에서 빛으로 소금으로 살아 아직 불구덩이와 물 속에 있는 자들을 건지려 함이다.
    그래서 주님은 우리를 그곳으로 보내면서‘두려워 말라 네가 물 가운데 지날 때에 물이 너를 침몰치 못하게 할 것이요 불 가운데 지날 때에 불이 너희를 사르지 못하게 하리라’ 하였고 ‘내가 세상을 끝날까지 너희와 함께 하겠다’고 하신 것이다.
    그리고 주님은 제자들을 보내시며 너희를 이리 가운데 보내는 양과 같다고 하였다.
    우리는 그 나왔던 세상으로 다시 돌아가야 한다.
    그 세상에 유행 따라 사려는 것이 아니라 세상을 구하려 가는 것이다.
    주님은 이것이 교회의 남은 고난이라고 하였다. 그래서 성도의 몸은 세상과 떨어져 살 수 없다. 세상과 떨어져 살면 어떻게 세상을 구할 수 있는가? 마귀는 세상은 자신의 소유라고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예수님은 ‘내가 세상을 이겼노라’고 하였다. 그 말씀은 세상은 더 이상 마귀의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마귀는 예수님께 ‘네가 내게 절하면 세상을 주겠다’고 하였지만 예수님은 자신이 십자가를 지고 다시 부활하심으로 세상을 접수하신 것이다. 등기부등본을 떼어보면 마귀의 이름에는 줄이 그어졌고 새로운 이름 예수 그리스도가 쓰여져 있을 것이다. 하나님은 여호수아에게 이스라엘에게 약속한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을 주시겠다고 하였다. 그 땅에는 이미 이방의 7부족의 족속들이 그 나름대로 문화와 종교와 경비를 하고 저마다 고유의 특성을 가지고 살고 있었다.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은 임자가 없는 것도 아니었고 손쉽게 얻을 수 있는 땅도 아니었다. 그런 땅을 이스라엘에게 주시겠다고 하였다. 여호수아에게는 두려워하지 말고 담대 하라 하였고 이 땅과 백성을 다 너희 손에 붙였다고 하였다. 그 세상은 이스라엘의 것이었다. 지금도 마찬가지이다. 이 세상은 이제 더 이상 마귀의 것이 아니다. 가나안 부족들이 전쟁을 선포한 것이 아니라 여호수아가 선포하였듯이 오늘도 마귀가 우리에게 전쟁을 선포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마귀에게 전쟁을 선포한 것이다. ‘내가 세상을 이겼노라’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으로 가르쳐 지키게 하라’고 하였다. 세상은 주님의 것이요 우리의 몸은 세상을 위한 것이다. 그래서 세상을 접수하려 다시 세상으로 가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세상에서 성공을 최우선으로 삼으려 하지 말라. 하나님의 나라가 되도록 최우선 하라. 이것을 위해 하나님께서는 모든 것을 주신다. 내가 세상에서 출세하기 위해 예수님을 믿는다면 이는 벌써 세상에 속한 자가 된 것이다. 하나님의 나라는 먹고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 안에서 의와 희락과 화평이라 하였다. 어떤 지도자가 젊은이를 위한 잡지에 다음과 같은 글을 썼다. “우리 중의 한 총명한 젊은이는 자신이 다니고 있는 고등학교 안에서 일어나는 모든 비기독교적인 일들에 대해 반대하는 분명한 태도를 가지고 있었다. 그는 항상 우호적으로 웃는 얼굴이었으며 독선적이 아니면서도 그것을 해냈다. 그가 학생 회장직의 입후보자가 되었을 때 그는 교내에서 춤을 추는 것을 찬성할 수 없음을 분명히 밝혔다. 주머니에 매일의 성경 말씀을 넣고 다니면서 그는 친구들에게 자신이 그리스도와 그의 교회를 사랑한다고 말하기를 부끄러워하지 않았다. 많은 학생들이 그가 매우 어리석다고 생각했다. 어떤 학생들은 그를 비웃었다. 그러나 그는 2,000명이 넘는 학생들의 절대적인 지지를 얻어 학생 회장으로 당선이 되었다. 한 학기의 임기를 마쳤을 때 학생들은 그가 재선에 입후보하기를 원했다. 그는 그 지역 사회에서 젊은이들의 방종을 배격하는 프로그램에 많은 공헌을 했으며 시 당국으로부터 특별한 상도 받았다. 그는 다른 사람들과 많이 달랐다. 그러나 그는 진정한 의미에서 기독교를 소유하고 있었기에 존경을 받았던 것이다. 그의 태도는 그리스도인으로서의 확신을 분명히 갖고 있으면서도 그것을 내세울 만한 용기가 없었던 다른 학생들에게 도움을 주었다. 그는 지도자가 되기에 충분히 강했으며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다른 사람들을 모을 능력이 있었다. 그러므로, 결국 그는 혼자가 아니었던 것이다. 그리스도를 위해 모든 것을 무릅쓴 그였기에, 그는 우정과 존경을 그리고 대중의 변덕스런 마음에 기초된 것이 아닌 그의 장점에 근거를 둔 인기로 보상을 받게 되었음을 알게 되었다.”

    우리 몸이 하나님의 성전(고린도전서 3:16-17)

    구약 시대에는 솔로몬이 지은 성전에 법궤가 있고, 거기에 하나님이 임재하신다고 하셨기에 그곳을 성전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오순절 성령 강림 후 성령 하나님은 성도들의 마음속에 임하여 계십니다.
    성령께서 입주해 계신다는 것은 곧 성령께서 저와 여러분의 주인으로 와 계신다는 의미입니다.
    우리가 아파트에 입주를 하면 그때부터 내가 그 아파트의 주인으로 마음대로 사용합니다.
    마찬가지로 성령이 우리 마음에 입주하시면 그분 뜻대로 쓰임 받는 도구가 되어야 합니다.

    ▶귀신이 내 마음에 입주하면 귀신이 시키는 언어와 행동이 있듯이 성령께서 입주하셔서 자리를 잡으면 성령께서 시키는 언어와 행동이 있습니다.

    고전12:3절에 우리로 하여금 '예수를 주'라고 고백하도록 만듭니다. 쉽게 말하면 성령께서 임하시면 '예수님을 가리켜 나의 생명의 주인'이시라고 고백하게 됩니다. ▶고백이 신앙을 좌우합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성경에서는 우리 몸이 거룩한 성전이라고 선언하고 있습니다. ▶왜 우리가 하나님의 성전입니까? ⑴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기 때문이며, ⑵주의 성령이 우리 몸에 거하시기 때문입니다.
    고후4:7절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이는 능력의 심히 큰 것이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
    ▶질그릇과 같다고 합니다. 질그릇은 ⑴볼품이 없습니다. ⑵깨어지기 쉽습니다. ⑶우리 인생을 흙으로 만들어졌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 질그릇 속에는 보배가 담겨져 있습니다. 이 보배는 두 가지인데, 하나는 '예수 그리스도'이며 또 하나는 '진리의 복음'입니다.
    ▶고후6:9절 이하를 보면, ▶무명한 자 같으나 유명한 자요 ▶죽은 자 같으나 보라 우리가 살고 ▶징계를 받는 자 같으나 죽임을 당하지 아니하고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아무 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지 자"라고 했습니다.
    ▶고후4:10절에 이 보배를 전하라고 합니다. "우리가 항상 예수 죽인 것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도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바울은 이 복음전파를 위해 예수님의 십자가를 짊어지고 간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복음전파가 그렇게 쉽지 않다는 것입니다. 복음전파는 세상말로 장난이 아닙니다. 목숨을 걸어야 합니다.
    ▶이제 우리는 우리 몸이 거룩한 성전임을 깨닫고 우리 몸을 잘 보존하고 관리해야 합니다.

    1. 우리 몸으로 죄를 짓지 말아야 합니다.

    많은 사람이 자신의 몸을 자기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기에 자기 맘대로 사용합니다. 그러면 안 됩니다. 우리 몸의 주인은 하나님이십니다. 그러기에 주인을 위해 주인이 원하는 곳에 사용되어야 합니다.
    내 것이라 생각하는 자체도 문제고 내 맘대로 사용할 수 있다고 생각하면 큰 오산입니다. 내 것이라고 내 맘대로 할 수 없는 몸입니다. 육신의 소욕에 이끌려 아무렇게나 살다보면 죄의 도구가 되어 버립니다.
    우리가 죄를 범하면 우리가 우리 육체뿐만 아니라 영혼에도 치명타를 가하는 것입니다. 성전을 더럽히면 하나님이 멸하신다고 하십니다. 그러기에 어떤 일이 있어도 죄를 멀리해야 합니다. 죄를 멀리해야 우리 몸이 거룩해 지는 것입니다.
    ▶어떻게 해야 죄가 멀어질까요? ▶죄가 무엇인지를 알아야 하고, ▶죄의 결과가 얼마나 무서운지를 알아야 합니다. ▶죄의 결과는 사망입니다.

    2. 내 몸을 학대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 몸은 우리 영혼의 그릇입니다. 그러기에 하나님은 우리 몸이 늘 건강을 유지하기를 원하십니다. 잘 관리하기를 원하십니다. 우리 몸이 우리의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것입니다.
    ▶우리의 건강을 해하는 도구로는, ▶몸의 과로는 성전을 더럽히는 죄악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7일 중에 하루를 쉬어야만 살수 있도록 사람을 창조하셨습니다.
    ▶술을 마시는 것은 주의 영이 성전 삼고 계신 내 몸을 더럽히는 행위이며, ▶담배도 마찬가지입니다.

    3. 남의 몸도 해롭게 하지 말아야 합니다.

    내가 성전이면 다른 사람도 성전입니다. 예수를 믿는 사람이라면 모든 사람이 하나님이 거하시는 성전입니다. ▶학대해서도 아니 되고 ▶미워해서도 아니 되며 ▶살인은 제일 큰 죄악입니다.

    4. 어떻게 하면 성령을 내 안에 영원히 모실 수 있습니까?

    ▶순결해야 합니다. 성령은 거룩하기 때문입니다. 성령을 나의 마음에 모시기는 했으나 내 마음 한 구석에 죄가 있다면 성령은 근심하고 괴로워하시다가 떠나가고 맙니다.
    ▶화목해야 합니다. 성령은 화목의 영입니다. 부모님을 주안에서 평안히 모시는 가정, 형제간에 우애가 있는 가정은 화목한 가정입니다. 마찬가지로 주님과의 화목을 이뤄야 합니다. 우리는 성령임을 ▶모셔들이고 ▶환영하고 ▶영접해야 합니다.

    5. 성령께서 오신 목적은 평강을 주시기 위함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두려워 문을 닫고 있는 제자들에게 오셔서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 찌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요20:19, 21, 26)
    하나님의 나라의 특징은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롬14:17)이라고 했습니다. ▶우리 가운데 평강이 있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먼저 하나님과 화목해야 하고(고후5:20), 형제와도 화목해야 합니다. 평강이란 화목한 관계를 의미합니다


    고린도는 어떤 도시였나?

    뿔이라는 뜻을 가진 고린도.

    “스파르타커스”의 본고장 또한 바로 이곳, 펠로폰네소스 반도로, 고린도와 이웃한 도시국가, “스파르타(Sparta)”였습니다.

    지금은 비록 인구3만 명의 작은 시골이지만, 고대 고린도를 그리스에서 가장 부유한 도시국가 중의 하나로 만든 참주(僭主) 페리안더(Periander) 이후 오랜 세월이 흐르는 동안, 상업이 번성하여 물질적인 풍요를 누리는 도시로 번영하다 보니 여러 인종들이 많이 모여 살게 되고, 그러다 보니 자연스레 동서 문화의 생활 습성과 또 여러 신들을 믿던 그네들의 종교가 서로 뒤엉켜 혼잡을 이루었던, 인구 60만명의 큰 도시가 되였었습니다.

    사도 바울이 “고린도 전. 후서”를 써서 고린도 교회로 보내던 로마 시대에는, 번창한 항구 도시가 다 그랬듯이 고린도 역시 심한 빈부의 차이와 부유층의 퇴폐적인 생활로 악명이 높은 곳이 되었지요.

    고린도에는 아프로디테(Aphrodite, 영어로는 Venus)”라는 여사제가 있어, 600피트나 되는 아크로고린도(Acrocorinth)라 부르는 산상에 신전을 지어 놓고는 무려 1,000명이나 되는 무녀들을 거느리며 고린도를 찾아온 뱃사람들을, 또 신들을 숭배한다는 미명 하에 사람들을 불러 드려 온갖 음탕한 짓들을 다 자행하였기에 고린도에 사는 사람들은 아무 거리낌 없이 음탕한 풍습에 젖게 되어 “고린도 사람”은 “음탕한 사람”의 대명사가 되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고린도로 가자!”하는 말은 남자들 사이에서 “몸 풀러 가자!”라는 말의 은어처럼 사용되였었다고 합니다.  (전 호의 답이 되었나요? ㅎㅎㅎ)

    시시포스(Sisyphus)

    아크로고린도(Acrocorinth)라고 부르는 산에 전해오는 재미있는 신화가 있습니다.

    그리스에서는 "신이 신과 결혼을 하면 신을 낳고, 신이 인간과 결혼을 하면 영웅을 낳고, 신이 동물과 결혼을 하면 괴물을 낳는다"는 말이 있습니다. 
    그래서 헤라클레스 같은 영웅도 많았고, 켄타우로스 (Kentauros)처럼 반은 사람이고 반은 말인 괴물도 많이 등장을 합니다.
    영원한 죄수의 화신으로, 현대에까지 잘 알려져 있는 시시포스(Sisyphus)가 바위를 굴려 올려야만 하는 산이 바로 아크로고린도(Acrocorinth)라고 부르는 산입니다.

    고대 코린토스 왕국에서 전설적인 시조로 받들었었던 시시포스는 바람의 신인 아이올로스와 그리스 사람의 시조인 헬렌 사이에서 태어난 영웅입니다.

    호머가 전하는 바에 따르면 시시포스는 “인간 중에서 가장 현명하고 신중한 사람”이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신들의 편에서 보면, 엿듣기 좋아하고, 입이 싸고, 교활할 뿐 아니라, 특히나 신들을 우습게 여긴다는 점에서 심히 마뜩잖은 인간으로, 일찍이 신들의 눈에 가시 같은 존재이기도 하였습니다.

    도둑질 잘하기로 유명한 전령 신 헤르메스는 태어난 바로 그날 저녁에 강보를 빠져나가 이복 형인 아폴론의 소 떼를 훔쳤습니다.
    그는 떡갈나무 껍질로 소의 발을 감싸고, 소의 꼬리에다가 싸리 빗자루를 매달아 땅바닥에 끌리게 함으로써 소의 발자국을 감쪽같이 지운 후, 시치미를 뚝 떼고 자신이 태어난 동굴 속의 강보로 돌아가 아무것도 모르는 갓난아기 행세를 하였답니다.

    아폴론이 자신의 소가 없어진 것을 알고 이리저리 찾아다니자 시시포스가 범인은 바로 헤르메스라고 일러바쳤던 것이지요.

    아폴론은 헤르메스의 도둑질을 제우스에게 고발하였고 이 일로 시시포스는 범행의 당사자인 헤르메스 뿐만 아니라 제우스의 눈총까지 받게 되었습니다.
    도둑질이거나 말거나, 감히 신들의 일에 오지랖 넓게 끼어든 게 주제넘게 여겨졌던 것입니다.

    그러던 어느 날 시시포스는 제우스가 독수리로 둔갑해 요정 아이기나를 납치해 가는 현장을 목격하게 되었습니다.
    아이기나의 아버지인 강의 신 아소포스는 딸을 찾아 사방을 헤매다가 고린도까지 오게 되었습니다.

    그 당시 시시포스가 다스리던 고린도에는 물이 귀해 백성들이 몹시 고생을 하고 있었지요.
    그래서 아크로고린도(Acrocorinth)에 마르지 않는 샘을 만들어 주면 딸이 있는 곳을 알려주겠다고 하자, 딸을 찾는 게 급했던 아소포스는 시시포스의 청을 들어주었고, 시시포스는 그에게 제우스가 아이기나를 납치해 간 섬의 위치를 가르쳐 주었습니다.
    아소포스는 곧 그곳으로 달려가 딸을 제우스의 손아귀에서 구해내려던 찰나,제우스가 던진 벼락에 맞아 새까맣게 타 죽었다지요.

    자신의 떳떳지 않은 비행을 엿보고 그것을 일러바친 자가 다름 아닌 시시포스임을 알아낸 제우스는 저승 신 하데스에게 당장 그놈을 잡아오라고 명령했습니다.

    그러나 영웅이자 현명한 시시포스는 저승사자가 당도하자 되레 그를 쇠사슬로 꽁꽁 묶어 돌로 만든 감옥에다 가두어 버렸습니다.
    명이 다한 사람을 저승으로 데려가는 저승사자가 묶여 있으니 당연히 죽는 사람이 없어지게 되었습니다.
    하데스가 이 어처구니없는 사태를 제우스에게 고했고, 제우스는 전쟁 신 아레스를 보내 저승사자를 구출하게 하였습니다.
    호전적이고 잔인하기 이를 데 없는 아레스에게 섣불리 맞싸우다가는 온 고린도가 피바다가 될 것임을 알고 시시포스는 순순히 항복했습니다.

    저승사자에게 끌려가면서 시시포스는 아내에게 자신의 시신을 화장도, 매장도 하지 말고 광장에 내다 버리고, 장례식도 치르지 말라고 은밀히 부탁한 후, 저승에 당도한 시시포스는 하데스를 알현하는 자리에서 눈물로 호소하는 척했습니다.

    "아내가 저의 시신을 광장에 내다 버리고 장례식도 치르지 않은 것은, 죽은 자를 수습하여 무사히 저승에 이르게 하는 이제까지의 관습을 조롱한 것인 즉 이는 곧 명계의 지배자이신 대왕에 대한 능멸에 다름 아니니 제가 다시 이승으로 가 아내의 죄를 단단히 물은 후 다시 오겠습니다. 하니 저에게 사흘간만 말미를 주소서."

    어째 “별주부전(鼈主簿傳 거북이와 토끼)”의 이야기와 비슷하지 않은가요? 

    시시포스의 꾀에 넘어간 하데스는 그를 다시 이승으로 보내 주었습니다.

    그 후 왕 노릇하며 오래 동안 잘 살았는데···. 그러나 아무리 영웅이라 한들 어찌 죽음을 이길 수 있었겠습니까?
    마침내 시시포스도 다시 저승사자의 손에 끌려 저승으로 갈수 밖에요.  
    저승에선 가혹한 형벌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하데스는 높은 바위산을 가리키며 그 기슭에 있는 큰 바위를 산꼭대기까지 밀어 올리라고 했습니다.
    시시포스는 온 힘을 다해 바위를 꼭대기까지 밀어 올리면 바로 그 순간에 바위는 아래로 굴러 떨어져 버렸습니다.
    시시포스는 다시 바위를 밀어 올려야만 했습니다.
    왜냐하면 하데스가 "바위가 늘 그 꼭대기에 있게 하라"고 명령했기 때문입니다.
    올리면 떨어지고, 또다시 올리면 또 떨어지고….
    그리하여 시시포스는 영원히 바위를 밀어 올려야만 하는 영원한 죄수의 화신으로 현대에 이르기까지 알려지게 되었던 것입니다.
    음행의 원천지인 신전이 있는 산이 바로, 올리면 굴러 내리는 일을 평생 하여야 하도록 형벌을 받은 그 산이라니 흥미 있는 일이 아닌가요?
    다시 굴러 떨어질 것을 뻔히 알면서도 또 산 위로 힘겹게 오르려는 영겁의 형벌!
    "고린도로 가자!” 라는 말뜻을 다시 한번 헤아려 보는 것이 좋을 것만 같습니다.



    1. 성전 수리를 명하는 요아스

     

     1) 성전을 수리하는 요아스(1~5절)

    요아스는 대제사장 여호야다 덕분에 죽지 않고 살아서 왕까지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요아스는 여호야다의 가르침대로 하나님 보시기에 합당한 삶을 살아갑니다.
    요아스가 왕이 된 후 첫 번째 한 일은 그의 할머니인 아달랴가 망가뜨린 여호와의 성전을 다시 회복하는 일입니다.
    요아스는 제사장들에게 성전의 부서진 곳을 복구할 것을 명합니다.
    성전을 복구하라는 명령은 여호와 하나님을 섬기는 신앙을 다시 회복하라는 명령과 같은 것이니 이 일은 하나님 보시기에 합당한 일이었습니다.

    성전복구를 위한 요아스의 구체적인 명령(4~5절)

    요아스는 제사장들에게 성전의 부서진 부분을 복구하라고 명하면서 그 복구 비용을 다음 세 가지의 헌금으로 충당하라고 명하였습니다.

    각 사람이 통용하는 은(4절)
    모든 사람이 의무적으로 내는 인두세(人頭稅)와 같은 성격의 헌금입니다.
    출애굽기 30:11~16을 보면 20세 이상의 모든 사람은 부자나 가난한 자나 할 것 없이 모두 동일하게 반 세겔을 낼 것을 규정하였습니다.

    각 사람의 몸값으로 드리는 은(4절)

    이것은 각 사람이 성전에 바치는 성전세로 20세 이상 60세 이하의 남자는 은 50세겔, 여자는 은 30세겔을 바치도록 되어 있습니다(레 27장)

    자원하여 여호와의 전에 드리는 은(4절)

    이것은 오늘날의 감사헌금과 같은 것으로 하나님께 바치기를 원하는 자가 자원하여 드리는 예물입니다.

     각각 아는 사람들에게서 받아들여(5절)

    여기에 십일조가 빠진 것은 십일조는 제사장과 레위인의 생활비가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유다 왕 요아스는 제사장과 레위인의 생활비를 제외한 모든 헌금을 성전 복구비로 충당하도록 명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제사장들이 각자 아는 사람들에게서 받아서 그것을 성전 복구비로 충당하라고 명했습니다.
    이것은 아달랴로 말미암아 바알 신앙이 남왕국 유다에 유입되었고, 따라서 헌금 바치는 일들이 많이 느슨해졌으므로 제사장들로 하여금 주변 사람들에게 헌금 바칠 것을 독려하여 성전 보수비로 사용하도록 한 것입니다.

    2. 성전 수리를 하지 않은 제사장들

    23년째 성전 복구가 지지부진하고(6절)

    그런데 요아스가 왕이 된지 23년이 지나도록 제사장들이 성전 복구에 전혀 나서지 않았습니다.
    성경에 그 이유가 나와 있지 않으니 잘 알 수 없습니다만, 본문의 문맥을 통해 추정하여 본다면 그것은 이웃에게 독려하여 받아들인 헌금을 자기들이 사용하지 않고 성전 복구비로 내놓아야 하기 때문으로 보입니다.
    신앙이 좋지 않은 때였으니 십일조가 잘 바쳐졌을 리 없었을 것이고, 그렇다면 제사장들의 삶이 그리 넉넉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제사장들은 그동안 성전세와 자원하여 바치는 헌금 등을 통해서 부족한 살림을 충당하였을 텐데 그것을 모두 성전복구비로 내라고 하니 신이 나지 않은 것입니다.

    제사장 여호야다를 책망하는 요아스(6절)

    그런데 요아스가 그가 왕이 된지 23년이 될 때까지 기다렸다 이때에 이 말을 한 것은, 이때 그의 나이가 30세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이때부터는 그의 고모부인 대제사장 여호야가의 섭정을 받지 않고 그가 독자적으로 왕권을 행사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요아스는 대제사장 여호야다를 포함한 제사장들을 불러 성전 수리를 하지 않은 것에 대하여 책망합니다.

    제사장들이 성전 수리에 열심히 하지 않은 이유 :

    제사장들이 왜 23년이나 성전 수리에 참여하지 않고 있었을까요?
    본문에 그 이유를 자세히 밝히고 있지 않으나 본문의 말씀에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두 가지 이유를 찾아볼 수 있습니다.

    제사장들의 이기심 때문

    위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왕의 명령이 없었다면 그 돈은 제사장들의 호주머니로 들어갈 돈입니다.
    그런데 그 돈을 성전 복구비로 사용하라고 하니 마음이 상한 제사장들이 이 일에 열심히 참여하지 않은 것입니다.

    제사장들의 체면 때문

    또 하나는 제사장들에게 그들이 아는 주변 사람들을 독려하여 헌금을 거두라고 한 점입니다.
    제사장 체면에 마치 오늘날의 영업사원들처럼 사람들에게 헌금을 내 달라고 부탁해야 한다는 것이 영 마땅치 않은 일이었던 것입니다.

    ➡ 그러나 이 일은 여호와의 성전을 복구하는 일이었습니다.

    제사장들은 하나님을 위한 일에 자기들의 이기심이나 체면 따위를 벗어던지고 왕이 명령한 그날부터 온 힘을 다하여서 했어야만 했습니다.
    이처럼 우리도 이기심이나 체면 때문에 하나님의 일을 훼방하는 자들이 되지 말아야 합니다.
    자칫하면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가 니다.

    3. 헌금이 성전 수리에 직접 사용되게 하라고 명하는 요아스(7~8절)

    요아스는 제사장들에게 헌금을 걷으라고 하니 그들이 움직이지 않았던 것을 보고, 생각을 바꾸어서 헌금을 바치고자 하는 자들이 제사장의 손을 통하지 말고 성전을 복구하는 자들에게 직접 가져다주게 하라고 명을 내립니다.
    그리고 제사장들은 성전을 복구하는데 일체 관여하지 말 것을 명합니다.    
    제사장들 역시 성전이 복구되어야 한다는 데에는 같은 생각이지만 자기들이 나서서 하고 싶은 일은 아니었으니 그렇게 하는 것이 좋겠다고 하여 성전 복구는 일꾼들이 직접 헌금을 받아서 하는 방식으로 하도록 돕습니다.

    ● 묵상 : 먼저 하나님 나라의 일을 하십시오.

    하나님의 일을 할 때 이들처럼 자기 이익을 따지면서 하지 마십시오.
    만일 하나님의 일을 할 때 이때의 제사장들처럼 자기 이득을 따져가며 한다면, 주께서도 우리에게 주님의 피의 권세를 거저 주셨던 모든 것을 다시 거두어 가실 것입니다.    
    주께로부터 거저 용서받았고, 거저 구원받았으며, 거저 영광을 얻었는데 우리는 주님의 일을 하면서 이득을 따진다면 우리를 위해 모든 것을 바치신 주님께 할 일이 아닙니다.

    4. 여호야다가 교훈하는 동안 하나님 앞에 정직히 행한 요아스(2절)

    그러나 대제사장 여호야다와 제사장까지 책망하면서 성전 복구를 완료할 것을 명령한 요아스는 그를 살려준 여호야다가 살아있는 동안에만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았습니다.
    여호야다가 죽자 기다렸다는 듯이 요아스는 말씀대로 사는 모든 일을 중단하며 아세라 목상과 우상들을 섬깁니다.
    이에 여호야다의 아들 스가랴가 그 일이 잘못이니 하나님께서 그의 일을 형통치 못하게 하실 것이라고 말하자, 요아스가 스가랴를 죽입니다.
    이에 하나님께서 진노하셔서 요아스가 그의 부하들의 칼에 맞아 죽게 하십니다(역대하 24:17~27).

    ● 묵상 : 사람을 의지하지 말고 하나님을 의지하십시오.

     신앙생활을 처음 할 때에는 누군가를 신앙의 롤모델로 삼고 그를 의지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그는 신앙에 도움을 주는 자에 불과합니다.
    우리가 믿고 의지할 자는 오직 하나님뿐입니다.
    요아스처럼 누군가를 지나치게 의지하면, 혹 그가 실족하여 믿음을 잃어버리거나 여호야다처럼 먼저 세상을 떠난다면 그와 함께 믿음도 같이 잃어버릴 위험이 있습니다.   
    우리는 오직 주님만 의지하는 자들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기도제목

    1. 주님의 일을 할 때 이해득실을 따지며 하지 말게 하옵소서.
    2. 주께서 우리를 먼저 섬기셨으니 우리도 주님을 온 마음을 다해 섬기게 하옵소서.
    3. 사람을 의지하지 말고 오직 주님만 의지하는 자들이 되게 하옵소서.


    사도 바울이 11장까지는 교리적인 부분을 증거하였는데, 즉 하나님께서 우리를 긍휼의 그릇으로 택하여 주시고, 불러 주시고, 하나님의 의를 입혀 주시고,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영이 중생하고, 새 생명을 받아 양자가 되게 하셨으므로 오늘 본문에서는 성도가 하나님의 은혜를 어떻게 보답해야 하는가를 권면하고 있는 내용입니다.

    바울은 형제들아 하면서 하나님의 모든 인애하심으로 로마서의 수신자들에게 권한다고 하였습니다. 우리의 구원은 행함으로 받은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무한하신 자비와 사랑으로 말미암아 얻은 것이므로 성도는 항상 그 은혜에 감격하여 그 사랑 안에서 권면을 받아 모든 믿는 일을 하여야 합니다.

    (고후 5:14)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시는도다 우리가 생각하건대 한 사람이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었은즉 모든 사람이 죽은 것이라"

    모든 사람은 하나님의 백성, 택한 백성을 의미하고 그들을 위해 죽으셨다는 뜻입니다. 우리 성도를 위하여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 성부 하나님께 성도의 몸으로 산제사를 드려야 합니다.

    본문에는 산 제물이라고 되어 있는데 산제물은 헬라어 원문의 뜻으로 '희생 제사', 또는 '제사 드리는 행위'라는 뜻입니다.

    성도의 몸은 성령의 전이라고 했습니다(고전 6:19). 그러므로 우리의 몸으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려야 합니다. 몸은 육신적인 몸만 가리키는 것이 아니고 성령과 중생한 영에게 이용된 마음과 몸을 가리킵니다(살전 5:23).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 영과 마음을 드리지 않는 물질(육신)만을 받지 않으시기 때문입니다(사 29:13). 하나님께서는 성도가 몸으로 산 제사 드리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산제물는 육으로 드리는 형식적인 제물이 아니라 마음과 영이 하나되어 드리는 영적 제물입니다. 그리스도와 생명적으로 연합되어 믿음과 순종과 감사의 마음으로 드리는 제물입니다.

    여기 제물에는 산 제물이 있고 죽은 제물이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죽은 제사와 산 제사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가인의 제사는 죽은 제사요 아벨의 제사는 산 제사였습니다. 아벨은 그 아버지 아담에게서 하나님께 제사드릴 때는 메시아의 언약을 믿고 희생의 피를 가지고 나아가야 한다는 말씀을 의지하여 구속제사를 드렸기 때문에 하나님이 그 제사를 받으시고 산제사로 인정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가인은 농작물로 제사를 드리는 소제의 제사를 드렸지만 메시아의 언약을 믿고 구속 제사를 드린 것이 아니라 형식에만 치중하는 불신앙적 제사였기 때문에 죽은 제물, 죽은 제사였고 하나님께서 그 제물을 받지 않으셨습니다.

    그러므로 산 제사를 드리려면 다음과 같은 조건을 구비해야 합니다.

    1. 하나님의 말씀대로 제사를 드려야 합니다(1).

    하나님은 산 제물로 영적 예배를 드리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언약, 그리스도의 언약, 구속 제사를 믿음으로 드려야 하고, 거기에 합당한 제물을 가지고 나가서 제사 드려야 합니다. 아무리 값진 제물을 많이 바치고, 성대하게 제사를 드린다고 해도 성경 말씀에 맞지 않는 제사는 모두 죽은 제사요 하나님께서 받지 않으시는 제사입니다.

    요한복음 4:24에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영과 진리로 예배할지니라”고 했습니다.

    가인이 제물로 드린 곡식은 레위기 2장에 나와 있는 소제의 제사입니다. 성경에 나왔다고 해서 무조건 괜찮다고 하면 안되고 성경이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뜻이 무엇인지를 깨닫고 드려야 합니다. 소제를 연구해 보면 이는 반드시 드려야 하는 의무제가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소제는 첫 이삭이나 곡식으로 제사를 드리고 싶을 때, 제사 드리는 사람이 감사함으로 드리고, 자원하는 마음으로 드리는 제사이기 때문에, 번제와 화목제와 더불어 자원제라고 부릅니다. 그러니까 반드시 드려야 하는 제사가 아니라 누구든지 드리고 싶을 때 그렇게 하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레위기 2장 1절에 "누구든지 소제의 예물을 여호와께 드리려거든..."이라고 하였습니다. 드리려거든 하는 것은 반드시 드려야 할 의무가 있다는 말이 아닙니다. 그러나 속죄제와 속건제는 인간이 죄인이므로 반드시 드려야 하는 의무제입니다.

    그러므로 가인은 반드시 드려야 하는 의무제를 빼먹고 곡식으로 드리는 자원제를 먼저 드렸기 때문에 하나님이 받지 않으신 것입니다. 반면에 아벨은 자신이 죄인을 인정하고 고백하는 자세로 그리스도의 구원이 필요하기 때문에 먼저 드려야 할 속죄제사를 드린 것이고 그 제사를 하나님이 받으신 것입니다.

    성경의 전체이 맥은 구속사입니다. 구속의 주님을 도외시하고 다른 것의 형식을 먼저 취하면 그것은 죽은 제사가 되는 것입니다.

    이사야 선지자 시대에도 이스라엘 백성들이 죽은 제사인 헛된 제사를 드렸습니다.

    이사야 1:13에 “헛된 제물을 다시 가져오지 말라 분향은 나의 가증히 여기는 바요 월삭과 안식일과 대회로 모이는 것도 그러하니 성회와 아울러 악을 행하는 것을 내가 견디지 못하겠노라”고 했습니다.

    이사야 시대의 사람들이 양이나 소의 피를 가지고 제사 드림으로 성경에는 맞는 제사를 드렸으나 그 피가 상징하는 그리스도를 믿지 않고 그리스도와의 영적 교통이 없이 의식적으로만 드렸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기뻐하지 않으신 것입니다. 오늘날에도 성도들이 하나님께 예배드릴 때에 성경에 맞는 예배를 드려야 되고, 또 영적으로 드려야 참 예배가 됩니다. 산 제사는 하나님께서 기뻐 받으시고, 죽은 제사는 기뻐하지 않으시고, 받지도 않으십니다.

    2. 이 세대를 본받지 말아야 합니다(2).

    '이 세대'란 속세를 말합니다. 속세는 더러운 세상을 의미합니다. 타락하고 저속한, 경건을 잃어버린 죄악 세상을 말합니다. 그것을 본 받지 않는 것이 거룩한 산 제사를 드리는 것입니다.

    빌립보서 2:15에는 이 세대를 가리켜 “어그러지고 거스리는 세대”라고 했으며, 마태복음 16:4에는 “악하고 음란한 세대”라고 했고, 사도행전 2:40에는 “패역한 세대”라고 했습니다.

    요한일서 2:16에는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 쫓아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 좇아온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이 세대를 본받는 자는 하나님께 산 제사를 드릴 수 없습니다.

    바울은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고 하였습니다(갈 6:14). 바울은 세상을 십자가에 못박고 십자가만 바라보고, 자랑하며 달음박질한 것입니다.

    3. 마음을 새롭게 해야 합니다(2).

    “마음(νούζ)은 영(πνεύμα)과는 달리 선악을 분별하고, 옳은 것을 계획하고 행하도록 명령을 내리는 기관입니다.
    마음은 영에 속한 것이 아니고 영과 별개의 기관인데 영이 사용하는 기관입니다.
    죽은 영도 타락한 인간의 마음을 이용하여 죄를 범하게 만들고, 중생한 영은 마음을 새롭게 하여 하나님을 섬기고 믿음을 지키고, 선한 일을 시행하도록 사고하는 능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마음을 새롭게 하려면 인간적인 결심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성령의 인도를 따라 중생한 영으로 살아야 새롭게 할 수 있습니다.

    또 진리를 순종하고 성령의 감동을 받아야 새롭게 할 수 있습니다.

    데살로니가전서 5:19-20에 “성령을 소멸치 말며 예언을 멸시치 말라”고 했습니다. 이것을 멸시하는 자는 마음이 새로워질 수가 없습니다.

    4. 변화를 받아야 합니다(2).

    이것은 심령의 변화를 말하고 근본적으로 바뀌는 것을 의미합니다.
    고상한 인격으로 변화되고, 친절한 기쁨이 넘치는 그리스도인으로 변화됩니다.
    술 담배 하던 사람이 변화를 받아 끊어버리게 되고, 조상 숭배하던 사람도 그것이 우상 숭배인 줄 깨달아 변화를 받아 끊어버리게 됩니다.
    산제사를 드리는 사람은 내적으로나 외부적으로 변화의 역사가 일어납니다.

    ​5.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한 뜻이 무엇인지 분별해야 합니다(2).

    분별하라 원어 δοκιμαζω (도키마조)는 시험하여 갈라놓는 다는 뜻인데 우리는 참진리와 비진리를 시험하여 갈라놓고 비진리는 떠나고 참진리를 따라가야 합니다.
    성도는 범사에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잘 찾아서 옳은 것이면 어디든지 따라가되 희생을 각오하고 몸을 바쳐 나가야 된다.

    성도들이 드리는 예배는 모두가 산제사, 영적 예배가 되어야 합니다.
    예배를 드리는 데 육은 끝나는 것으로 죽은 제사입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예배를 드리고,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마음을 새롭게 하고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한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는 신앙이 되어야 합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생명과 연합된 산제사, 구속의 진리를 믿고 그대로 순종하며 살아가는 변화의 역사가 성령으로 말미암아 크게 일어나는 그리스도인들이 다 되시기를 바랍니다.


    요아스의 성전수리 사역(4-16절)


    솔로몬 때 지은 예루살렘 성전이 아달랴의 악한 통치로 인하여 훼손되었습니다.
    요아스는 훼손된 성전을 회복하기 위해 제사장들에게 성전 수축을 명했습니다.
    여호와의 전에 거룩하게 하여 드리는 은 곧 사람의 통용하는 은이나 각 사람의 몸값으로 드리는 은이나 자원하여 여호와의 전에 드리는 모든 은을 제사장들이 아는 사람들에게 받아들여 전의 퇴락한 곳을 수리하라고 했습니다 (4-5절).

    은(銀) 은 당시 화폐 거래의 수단입니다.
    여호와의 전에 거룩하게 하여 드리는 은은 모세가 한 때 성막을 위해 거두었던 세금입니다(대하 24:6).
    사람의 통용하는 은은 인구조사에 의해 계수된 남자 장정 20세 이상 된 자들에게 부과한 인두세입니다(출 30:13-14).
    사람의 몸값으로 드리는 은은 서원하는 자들에게 제사장이 평가하여 징수하는 징수액입니다(레 27:2-8).
    첫 태생을 여호와께 바칠 때 드리는 세금도 여기에 해당합니다(민 8:15-16).
    여호와의 전에 드리는 모든 은은 성소에 바치는 자발적인 헌물입니다(출 35:21).
    그런데 이 돈을 제사장들과 레위인들이 각각 자기가 살던 성읍에 가서 잘 아는 사람들에게 받아 와 성전수리를 하게 했습니다.
    그러나 23년이 지나도록 퇴락한 곳을 수리하지 않았습니다.
    그 이유는 자세히 알 수 없지만 아달랴의 우상숭배 정책으로 피폐해진 제사장들과 레위인들이 그 돈을 생계수단으로 사용했기 때문일 수도 있고, 성전의 다른 필요한 기명들을 만드는 데에 사용했거나 믿음이 변질되어 수입이 매우 미미했을 수도 있습니다(13절).
    근본적으로 우상숭배가 횡행한 때라 제사장들과 레위인들에게 성전 회복에 대한 사명이나 능력이 매우 부족했으리라고 추측해 봅니다.
    여호야다의 권면을 받은 요아스는 성전 수축이 23년 동안 되지 않는 것을 보고 단점들을 보완하라고 다시 명령합니다.

    첫째는 성전수리를 위한 헌금을 직접 하게 했습니다.
    제사장과 레위인들에게 각 성에 가서 아는 사람에게 받아 오라고 했던 것을 이제는 제사장과 레위인을 거치지 않고 여호야다가 만든 궤를 번제단 옆에 두어, 문지기 제사장들을 통해 직접 넣게 했습니다.
    이 때 만든 헌금궤가 예수님 때까지 사용됩니다.

    둘째 성전 수리를 위한 헌금은 오직 성전 수리를 위해서만 사용하게 했습니다.
    비록 성전 기명이라 해도 성전 수리용 돈은 성전 수리에만 사용하게 했습니다.

    셋째 수리비를 성전 수리를 받은 감독자에게 직접 전달하게 했습니다.
    물론 감독자는 레위인이 맡았을 텐데 건축 담당자에게 직접 주어서 일군을 투입하는데 유용하게 했습니다.

    넷째 제사장과 레위인들의 생활을 보장해 주었습니다.
    속죄제와 속건제 헌물은 제사장에게 주게 했습니다.
    제사장이나 레위인을 위한 헌물과 성전수리를 위한 헌물을 구분하여 제사장들의 생계를 유지하게 해 주었습니다.

    이런 일련의 조치는 지난번 1차 수축 명령에서 나타난 폐단을 고쳐서 내린 조치입니다.
    그런 지시에 따라 여호야다가 궤를 만들게 해서 구멍을 뚫고, 그 궤를 성전 단 옆에 두었고 대제사장이 그 은을 계수하여 성전 수리를 맡은 자들에게 주고, 그들은 그 은을 성전을 수리하는 목수와 석수와 미장이 등 건축자들에게 곧장 주어 퇴락한 곳을 수리하게 했습니다. (7-16절).

    요아스의 성전수축 사역은 의미가 깊습니다.
    과거 솔로몬 왕은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주신 언약을 이행하기 위해 7년 동안 예루살렘 성전을 만들었습니다(삼하 7:12-13, 왕상 6:38). 그러나 그 성전이 지어진 지 130~140년 가까이 흘렀고 아달랴의 악정으로 인해 많이 훼손되었습니다(대하 24:7).
    그러기에 성전을 수축하는 것은 하나님의 언약을 회복한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요아스는 여호야다의 교훈을 받아 성전 사역을 잘 완수했습니다.
    오늘날 하나님의 성전은 우주적 성전도 있고 지역적 성전도 잇고 개인적 성전도 있습니다.
    우리는 어떤 의미의 성전이든 퇴락한 곳을 수축하는 정신을 가져야 합니다.
    느헤미야 시대에 성을 수축하다가 중단한 것처럼, 하박국 시대에 성전을 건축하지 않으려 했던 것처럼 넋을 놓고 있어서는 안됩니다.


    예수 시대의 유대 세금

    성경에는 세금에 관한 이야기가 많이 나온다.
    요셉은 이집트인들에게 20%의 세금을 매겼다(창 47:20-26).
    유대인들은 성막을 지을 때 최초로 세금을 냈다(출 30:11-16).
    사무엘이 왕정을 반대한 이유 가운데 하나도 세금 때문이다(삼상 8:14-18).
    이스라엘이 남왕국 유다와 북왕국 이스라엘로 나뉜 이유도 세금 때문이다. 솔로몬이 중과세를 매긴 것은 잘 알려져 있다(왕상 12:4)

    예수 당시 유대인들은 세금을 얼마나 냈을까?
    1년 수입이 500데나리온이라고 하면 세금 내역은 다음과 같다(데나리온은 보통 노동자의 하루 품삯).

    십일조 50 데나리온
    3년에 한번씩 두 번째 십일조 (450x10%x1/3) 15데나리온
    첫열매
    들어올려 바치는 것 (500-50)x1/50 9데나리온
    성전세 2데나리온
    총계 76 데나리온 (수입의 15.2%)
    정부에 바치는 세금을 포함하면 28% 정도

    이렇게 수입의 28%나 세금으로 바쳐야 하는 상황에서 "우리가 세금을 바쳐야 합니까?"(마 22:17)라는 질문은 자연스런 것이었다.
    이 질문은 무거운 세금에 대한 불만이 반영되어 있다. 헤롯 당시 어떤 물건에는 1,000%의 tax를 부과하는 경우도 있었다고 한다.

    종교세를 제외한 세금은 세리가 징수했다.
    1세기에는 로마가 이스라엘을 통치하고 있었기 때문에 세금은 로마의 손에 들어갔다. 로마 정부는 각 지역에 유대인들을 세리로 임명하였다. 로마인들을 세리로 파견하는 것보다 더 많은 세금을 거두어들일 수 있었기 때문이다. 한 동네에 같이 사는 사람들은 동네에서 어떤 일들이 일어나고 있는지, 누구네 수입이 어떤지 훤히 알고 있다. 따라서 그들을 통해 더 많은 세금을 거둘 수 있었다.

    세리는 로마의 앞잡이로 인식되었다. 그들이 거둔 세금으로 로마의 체제가 이스라엘에서 계속 유지될 수 있다고 믿었던 것이다. 그러나 모든 세금이 로마로 가는 것은 아니었다. 예를 들면, 갈릴리에서 거둔 세금은 갈릴리에서만 사용되었다.

    1998년 한국의 비리 공무원 가운데 80%가 세무 공무원인 것으로 발표되었다. 예수 당시도 지금처럼 세리는 부정이 많았다. 세리들은 거두어야 하는 것보다 더 많은 세금을 거두어 일정량만 로마에 바치고 나머지는 착복했다. 세례 요한도 그들에게 "정해 준 것보다 더 받지 말아라"고 가르쳤다(눅 3:13). 동족들에게 미움과 증오의 대상이 되었고 멸시를 받았던 것이다.

    세, 과세(taxation)

    당국이 사람이나 재산에 대해 세(돈, 물품, 혹은 노역)를 부과하는 일. 정부의 공공사업과 공무원, 또한 제사장을 지원하기 위해서 오랫동안 여러 형태의 과세가 있어 왔다.
    고대에 부과되던 세금에는 십일조, 조공, 통행세, 인두세에 더하여 소비재, 수출품, 수입품 그리고 상인들이 그 지역을 통과하며 운반하는 상품에 대한 세금이 포함되었다.

    여호와의 신성한 곳을 유지하기 위한 세금
    신성한 곳의 봉사는 세금을 통해서 유지되었다.
    의무적인 십일조는 아론계 제사장들과 레위인들의 주요 생계 수단이었으며, 그들은 적어도 한 번은 여호와께서 규정하신 세에 따라 전리품을 할당받은 적이 있었다. (민 18:26-29; 31:26-47. 십일조 참조)
    여호와께서는 또한 모세가 인구 조사를 한 후에, 등록된 각 사람은 “여호와의 헌금”으로 반 세겔(1.10달러)을 내야 하며 그것은 만남의 천막을 위해 사용해야 한다고 모세에게 지시하셨다. (출 30:12-16)
    해마다 인구 조사를 하지는 않더라도, 매년 일정액을 내는 것은 유대인들의 관습이 된 것 같다.
    예를 들어, 여호아스는 “모세가 명한 신성한 세금”을 내도록 요구하였다. (대둘 24:6, 9) 느헤미야 시대의 유대인들은 성전 봉사를 위해 해마다 삼분의 일 세겔(약 75센트)을 낼 의무를 스스로에게 부과하였다.—느 10:32.

     예수께서 지상 봉사를 수행하시던 무렵, 유대인들은 성전을 위해 두 드라크마를 냈다. 베드로는 예수께서 이 세금을 내실 것인지에 대해 질문을 받자, 긍정적인 대답을 하였다. 그 후 예수께서는 그 문제를 논하시면서, 왕들은 자기 아들들에게 세금을 부과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지적하셨다. 왕의 아들들은 왕실의 일원이며, 사실 그들을 위해서 세금을 걷기 때문이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성전에서 숭배를 받으시는 분의 독생자이셨지만 다른 사람들을 걸려 넘어지게 할 빌미를 제공하지 않으시려고 그 세금을 내도록 조처하셨다.—마 17:24-27.

     통치자들이 부과한 세금 이스라엘에 왕권이 확립됨에 따라, 왕과 왕의 집안사람들, 많은 정부 관리들과 종들을 지원하기 위해서 가축 떼와 소출의 십분의 일을 포함한 여러 가지 세금이 부과되었다. (삼첫 8:11-17; 왕첫 4:6-19) 솔로몬의 통치가 끝나자, 백성은 강제 노역에 징발되고 정부를 지원하는 데 너무 지친 나머지 솔로몬의 아들이자 계승자인 르호보암에게 ‘가혹한 노역과 무거운 멍에’를 가볍게 해 달라고 요청하였다. 르호보암이 그렇게 하기를 거절하자 열 지파가 반란을 일으켰다.—왕첫 12:3-19. 강제 노역 참조.

     외국의 지배를 받게 되었을 때, 이스라엘인들은 또 다른 형태의 세금을 내야 하였다. 일례로, 파라오 느고가 여호야김을 자신의 봉신(封臣)으로 삼고 유다에 무거운 벌금 혹은 조공을 부과하자, 여호야김은 신민들로 하여금 “각자에게 정해진 세율에 따라” 일정한 금액을 내게 하여 필요한 자금을 모았다.—왕둘 23:31-35.

     페르시아의 통치를 받던 시대에 유대인들(아닥사스다[아르타크세르크세스] 롱기마누스에 의해 면제를 받은, 신성한 곳에서 섬기는 제사장들과 다른 사람들은 제외됨)은 세금(아람어, 밋다 혹은 민다), 공세(벨로), 통행세(할라크)를 내야 하였다. (라 4:13, 20; 7:24) 밋다는 개개인에 대한 개인세를, 벨로는 소비재에 물리는 세금 곧 물품세를, 할라크는 여행자들이 도로의 관문이나 강 여울목에서 내는 통행세를 가리키는 것으로 생각된다. 밋다(느 5:4의 경우 「신세」, AS, KJ에서는 “공세”로 번역됨)는 세율이 상당히 높았음에 틀림없는데, 많은 유대인들이 그것을 내기 위하여 돈을 빌려야 했기 때문이다. 유대인들은 페르시아 사람들이 부과한 세금을 내야 했을 뿐만 아니라, 통상적으로 총독을 지원하기 위한 세금도 내야 하였다.—느 5:14, 15.

     기원 일 세기에 유대인들은 세금 납부를 몹시 불쾌한 일로 여겼다. 그 이유는 세금 징수원들 사이에 만연해 있던 부패 때문만이 아니라 세금을 내면 자기들이 로마에 종속되어 있음을 인정하는 셈이 되었기 때문이다. (세금 징수원 참조)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와 사도 바울은 “카이사르” 곧 “위에 있는 권위”에게 세금을 바치는 것이 합당한 일임을 알려 주셨다. (마 22:17-21; 로 13:1, 7. 카이사르 [하느님과 카이사르] 참조) 그리스도인 그리스어 성경에 언급되어 있는 여러 종류의 세금 중에는 텔로스(간접세, 관세, 혹은 공세; 마 17:25; 로 13:7)가 있다. 또한 켄소스(인두세; 마 17:25; 22:17, 19; 막 12:14)와 포로스(집과 토지와 사람에게 부과된 세금을 가리키는 것으로 여겨지는 보다 폭넓은 의미의 단어; 누 20:22; 23:2)도 언급되어 있다.



    구약에서의 세금 종류는 다양하며, 로마 제국 통치기의 유대인들에게는 토지세, 인두세, 재산세, 출입세, 가옥세 등이 있었습니다. 또한 교회에서 실시하는 헌금의 종류도 38가지로 알려져 있습니다. 성경에는 세금에 관한 이야기가 많이 나오며, 예수 당시 유대인들은 세금을 얼마나 냈는지에 대한 기록도 있습니다




    대수
    왕조
    이름
    재임기간
    비고
    1
    여로보암 왕조
    기원전 931년~기원전 910년
    초대 북이스라엘 왕이자 에프라임 지파 출신
    2
    기원전 910년~기원전 909년

    3
    바아사 왕조
    기원전 909년~기원전 886년
    나답을 제거하고 왕위에 오름, 잇사갈 지파 출신
    4
    기원전 886년~기원전 885년

    5
    시므리 왕조
    기원전 885년
    엘라를 제거하고 꼴랑 7일짜리왕위에 오름. 상나라 주왕 비슷한 최후를 맞이함
    6
    기원전 885년~기원전 874년
    시므리를 제거하고 왕위에 오름. 그 초기에 디브니의 세력이 오므리의 세력에 도전하다 패망함
    7
    기원전 874년~기원전 853년
    배우자는 이제벨 왕비, 유다에 딸 아달리야를 시집보내 혼인동맹
    8
    기원전 853년~기원전 852년
    유다의 아하시야와 동명이인
    9
    기원전 852년~기원전 841년
    동시대 유다의 여호람과 구별하기 위해 '요람'이라고도 부름
    10
    기원전 841년~기원전 814년
    유다의 여호람아하시야를 제거하고 왕위에 오름
    11
    기원전 814년~기원전 798년 |
    12
    기원전 798년~기원전 782년
    히브리어로는 '예호아쉬'로 표기되어 유다의 요아스와 구별됨
    13
    기원전 782년~기원전 753년
    최장기 재위
    14
    기원전 753년

    15
    살룸 왕조
    기원전 752년
    즈가리야를 제거하고 꼴랑 한달짜리왕위에 오름
    16
    므나헴 왕조
    기원전 752년~기원전 742년
    살룸을 제거하고 왕위에 오름
    17
    기원전 742년~기원전 740년

    18
    베가 왕조
    기원전 740년~기원전 732년
    브가히야를 제거하고 왕위에 오름
    19
    호세아 왕조
    기원전 732년~기원전 722년
    베가를 제거하고 왕위에 오름, 이스라엘 마지막 왕. 아시리아에 압송 억류됨






    고대 이스라엘의 성전 재정 운영에 관한 연구
    정중호(계명대)

    . 서론 

    고대 근동 지역의 성전들은 종교적 임무를 수행할 뿐 만 아니라 정치적이며 경제적인 기능까지 담당하고 있었다. 특히 성전이 왕의 통치와 연관되어 국가의 중요한 일에 깊숙히 관련되어 있었음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이러한 주변 환경 가운데 살아간 고대 이스라엘의 경우도 예외는 아니었다.
      이스라엘 역사와 사회상을 연구함에 있어서 왕실 중심의 연구만으로는 역사를 재구성하기 어렵다. 왕실 다음에 중요한 부분은 바로 성전이다. 성전의 실상을 연구하기 위해서는 성전의 체계 뿐 만 아니라 성전 운영에 있어서 핵심적인 요인인 성전 재정을 파악해야 한다. 본 논문의 목적은 바로 이러한 필요성에 부응하여 고대 이스라엘의 성전 역사를 재구성하는 연구의 일환으로 성전 재정 운영의 실상을 역사적으로 연구하려는 것이다.
      고대 이스라엘의 성전 재정 운영을 논의함에 있어서 우선 '성전'의 범위를 정할 필요가 있다. 예루살렘 성전과 같이 건물이 있는 성전이 있었는가 하면 제사만 드리는 소위 '야외 제단(open cultic place)'도 있었다. 또한 왕정시대에 중앙성전이 있었는가하면 '산당'이라 불리우는 지방성전도 있었다. 성전경제를 논의하기 위해서는 주로 예루살렘 성전을 중심으로 논의하게 되겠지만 중요한 지방성전인 '산당'도 역시 논의의 대상으로 포함시킬 것이다. 그리고 '야외 제단'에 대해서는 야외 제단의 특성상 남아있는 자료가 부족함으로 간략하게 언급할 수 밖에 없다.
      왕정시대에는 요아스 왕 시대와 요시야 왕 시대의 성전 수리 사건을 중심으로 논의할 것이고 포로 후기의 상황은 에스라와 느헤미야를 중심으로 논의할 것이다.


    II. 왕의 통치와 성전


      예루살렘 성전은 왕궁 곁에 있으며 왕실의 체플 역할을 하였다. 또한 왕궁과 성전은 일반 백성들의 생활영역과는 별도로 구분된 하나의 통치중심지역인 아크로폴리스(acropolice)를 형성하였다. 성전의 위치만 보아도 성전이 왕의 통치와는 불가분의 관계임을 알 수 있다. 남북으로 분열된 후 북왕국 이스라엘의 중앙성전은 벧엘과 단이었다. 벧엘 성전의 제사장인 아마샤는 벧엘 성전을 가리키며 "이는 왕의 성소요 왕의 궁궐이라"(암 7:13)고 하였다. 성전이 왕의 통치기구와 정확하게 연결되어 있었음을  확인해 주는 말이다.
      고대 근동 지역의 통치형태를 살펴보면 지상에 있는 모든 것은 신(神)의 소유이며 왕은 신의 대리자로 지상에서 통치하게 된다. 때로는 이집트같이 왕 자신이 신의 모습으로 혹은 대제사장의 신분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신의 대리자인 왕은 신성한 신분으로 백성 앞에 나타나며 신적인 권위를 등에 업고 통치를 하게된다. 종교와 정치가 하나로 통합된 이러한 통치형태가 있었던 시대에는 성전이 통치기구의 역할을 할 수 밖에 없다. 성전은 왕의 통치를 합법화시키는 역할을 하며 통치에 필요한 세금을 징수하는 창구역할을 담당하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왕권을 강화시키기 위해 왕이 성전을 건축하고 성전을 수리하며 증축하는 역할을 담당하게 된다. 고대 근동 지역에서 성전을 건축한다는 것은 승리한 신과 왕의 특권에 속하였다.
      고대 이스라엘의 성전도 예외가 아니었다. 왕이 신의 모습으로 등장하지는 않지만 왕은 하나님으로부터 기름부음받은 거룩한 신분으로 하나님을 대신하여 백성들을 통치하였다. 전형적인 왕의 통치시대를 출범시킨 다윗과 솔로몬은 성전 건축을 위해 준비하였고 또 건축하였다. 그리고 성전건축은 왕의 독자적인 사업이 아니라 하나님의 지시에 의해 계획되고 건설되었다. 성전건축은 단순한 건축사업이 아니라 왕실통치의 청사진이 담긴 사업이었으며 그 의도는 성전건축설계도에 나타나 있다(출 24:12-40:38; 겔 40:1-44:31).
      성전수리도 왕이 주도하였으며(왕하 12:7-17; 22:3-7) 왕권강화와 맥락을 같이 하였다. 요아스와 요시야는 어린나이에 즉위한 왕들이었다. 이들이 청년이 되어 왕권을 강화시키려 할 때 성전수리를 명하였고 결국 왕이 주도권을 쥐고 성전을 수리하였다. 그리고 성전을 수리할 때 성전의 재정을 왕이 관리를 통해 직접 관장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성전경제가 왕의 통치와 직접 연결되어 있는 모습을 볼 수 있는 것이다.
      지방 성전인 산당의 경우는 어떠한가? 산당을 비판한 신명기사가도 산당이 왕실에 의해 건축되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소위 '악한 왕' 뿐 만 아니라 '선한 왕'도 산당을 건축하였음을 지적하였다. 또한 예루살렘 제사장을 왕이 임명한 것과 마찬가지로 산당의 제사장도 왕이 임명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왕상 12:31; 왕하 23:5). 중앙성소와 마찬가지로 산당 역시 왕실의 통치기능을 수행하고 있음을 볼 수 있는데 산당의 기능 가운데는 세금을 거두는 기능도 있었다.
      성전 경제가 국가 경제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높다는 것은 무게와 부피를 재는 각종 단위가 성전에서 사용된 소위 성전단위(sanctuary weight)가 있었다는 점에서도 찾아 볼 수 있다(레 5:15; 27:3, 25). 특이한 것은 왕실 재산에 대해 언급하는 곳에도 성전단위만 언급되어 있지 별도의 왕실단위가 언급되어 있지 않다는 점이다. 왕실의 경제와 성전 경제가 명확하게 분리되지 않고 연결되어 움직이고 있다는 일면을 보여주는 것이다. 일반인이 상거래를 할 때는 다른 측정단위가 사용되었다. 아브라함이 아내 사라를 장사하기 위해 에브론의 밭을 살 때 "상인들이 통용하는 단위"로서 대금을 지불하였다(창 23:16).
      성전이 국가의 재산을 보관하고 관리하는 장소였다는 것은(왕상 15:18; 왕하 12:1; 18:15) 강대국에 조공을 바치는 모습에서 찾아 볼 수 있으며 강대국이 성전을 약탈하는 모습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 성전에 바쳐진 예물들은 성전 창고에 보관되었는데 이 창고는 국가의 재산을 보관하는 역할도 하였다. 약소국가였던 이스라엘과 유다는 강대국의 요구에 의해서 혹은 종주국에 조공을 바치기 위해서 성전 창고를 열어 그 보물들을 종주국에 바치곤 하였다. 솔로몬 시대의 성전 창고에는 다윗이 드린 것이 보관되어 있었다(왕상 7:51). 이집트 왕 시삭은 "야훼의 전과 왕궁의 보물"을 약탈하여 갔다(왕상 14:26 = 대하 12:9). 유다 왕 아사가 아람 왕 벤하닷에게 뇌물을 바칠 때 "야훼의 전 곳간과 왕궁의 곳간"(왕상 15:18)에서 은금을 취하여 주었다. 또한 유다 왕 요아스는 아람 왕 하사엘에게 "야훼의 전 곳간과 왕궁의 금"을 취하여 조공으로 바쳤다(왕하 12:19). 이스라엘 왕 요아스는 유다를 침공하여 예루살렘 성전인 "야훼의 전 곳간"을 헐어 보물을 탈취하였다(왕하 14:14). 유다 왕 아하스는 "야훼의 전과 왕궁 곳간"에 있는 은금을 취하여 앗수르 왕 티글랏빌레셀에게 예물을 바쳤다(왕하 16:8). 히스기야는 예루살렘을 침공한 산헤립에게 조공을 바쳤는데 "야훼의 전과 왕궁 곳간"에 있는 은을 바쳤다(왕하 18:15). 유다 왕 여호야긴이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에게 항복하고 바벨론으로 끌려갔을 때 느부갓네살은 "야훼의 전과 왕궁 곳간"(왕하 24;13)에 있는 것을 약탈하여 바벨론으로 가져갔다. 이러한 본문에서 알 수 있는 것은 왕궁에 있는 창고는 물론이요 야훼의 전에 있는 창고의 모든 권한이 왕에게 있음을 알 수 있다.
      성전창고에는 때로 왕실의 무기가 저장되어 있기도 하였다. 대제사장 여호야다가 혁명을 일으킬 때 성전에 있는 다윗 왕의 창과 방패를 분배하는 장면에서 그 증거를 찾아 볼 수 있다(왕하 11:10 =대하 23:9). 또한 도망하는 다윗에게 놉 제사장인 아히멜렉이 성전에 있던 칼을 주는 장면에서도 성전창고에 무기가 보관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다(삼상 21:10).


    III. 성전 수리 사건에서 나타난 성전 재정 운영


      1. 요아스 왕과 성전 수리


      열왕기하 12장(4-5, 7, 16절)에는 왕정시대 성전에 드리는 헌금 종류가 나타나 있다. 여기에 나타나는 헌금은 "야훼의 전에 거룩하게 드리는 모든 은(돈/예물)"(4절)이라 하였다. 즉 은(돈)으로 드릴 수 있는 헌금 종류인 것이다. 제사를 드릴 때 필요한 가축이나 곡식에 대한 언급은 없다. 따라서 이 헌금은 성전세의 성격이 강한 헌금이었다. 이제 그 내역을 살펴보자.


       1) 사람의 숫자를 헤아려 드리는 성전세로써 인두세(人頭稅).
      이러한 성전세는 출 30:11-16에 자세히 나와 있는데 빈부를 막론하고 20세 이상 남자이면, 이스라엘 땅에 살던 혹은 외국에 살던 간에, 각 사람이 생명의 속전으로 반세겔씩 야훼께 드리도록 규정되어 있다. {개역}에는 4절에 "사람의 통용하는 은"이라 번역된 부분이 바로 인두세인 성전세를 말하는 것이다. 히브리어성서(왕하 12:5 - {개역}에는 4절)에서 이 부분 즉 케세프 오베르 이쉬 를 직역하면 "사람이 건너갈 때 드리는 은"이라 번역할 수 있다. 미쉬나에는 양을 헤아려 십일조 양을 선별하는 방법을 제시해 주는데 그 방법은 양을 우리 속에 몰아넣은 후 양 한 마리씩만 통과할 수 있는 좁은 통로를 만들어 놓고 그 통로를 지나가는("오베르") 양 가운데 열번째 양을 십일조 양으로 택한다고 하였다. 짐승에 대한 십일조를 드리는 이러한 관습이 배경이 되어 사람에 대한 성전세를 드릴 때도 비슷한 표현을 사용한 것이다. 따라서 이 부분은 "사람의 수대로 드리는 은"이라 번역하는 것이 적합하다. 신약시대에도 반세겔의 성전세 제도가 있었음을 발견할 수 있다. 마태복음 17:24-27에 의하면 지방인 가버나움에서도 이 반세겔을 거두고 있었음을 알 수 있으며 예수님도 이 성전세에 대해 거부하지 않았다.  


        2) 사람의 성별과 나이에 따라 능력을 감안하여 드리는 성전세
      이 성전세는 레위기 27장에 자세히 설명되어 있다; 예를 들면 20세 이상 60세까지의 남자이면 은 오십 세겔이요 여자이면 은 30세겔을 바치도록 되어 있다. 이 성전세는 4절에 "각 사람의 몸값으로 드리는 은"으로 표현되어 있다.


        3) 자원해서 드리는 예물
      4절에 "각사람이 자원하여 야훼의 전에 드리는 은"이 이 예물을 말한다. 이 예물은 강제적인 것이 아니라 자발적인 것이며 성전에 제사를 드리기 위해 바치는 모든 자발적인 예물을 가리킨다.


      "야훼의 전에 거룩하게 드리는 모든 은"의 내역은 위와 같이 세가지로 정리해 볼 수 있으며 그 내용을 새롭게 번역해 본다면 다음과 같다;


            요아스가 제사장들에게 말하였다, "야훼의 전에 가져 오는 모든 은 곧 각 사람의 수대로 드리는 은, 사람들의 몸값으로 드리는 은, 그리고 각 사람이 자원하여 야훼의 전에 드리는 모든 은 등을... (왕하 12:4)


      그러면 요아스가 명령한 기본적인 내용은 무엇이었는가? 요아스는 4절에 나오는 세가지 예물들 즉 "야훼의 전에 드리는 것"으로 성전을 수리하라고 명령한 것이었다. 그러나 제사장들은 왕의 명령을 따라 성전을 수리하지 않았다(6절). 따라서 요아스는 여호야다와 제사장들을 불러 성전을 수리하도록 한번 더 명령하였다. {개역}의 7절 후반절을 보면 마치 백성들이 제사장을 거치지 않고 성전 수리를 위해 예물을 드리도록 명령한 것처럼 되어있는데, 히브리어 성서(MT, 8절)를 보면 제사장들이 "성전 회계로 부터의 은"을 받아 소유하지 말고 제사장들이 성전 수리를 위해 그 은을 내놓도록 되어 있다. 7절 후반절을 번역하면 다음과 같다;
            
            이제 너희들은 너희 성전 회계로부터 은을 취하지 말고 너희들이 성전 수리를 위해서 그것을 주도록 하여라.


      그러나 제사장들은 왕의 명령을 그대로 순복하기 보다 하나의 절충안에 동의하였는데 그것은 제사장들이 백성들로부터의 예물을 받지 않고 제사장들 단독으로 성전 수리도 하지 않는다는 절충안이었다(8절). 다시 말하면 8절의 "백성으로부터의 은"(4절의 "야훼의 전에 드리는 은"과 동일한 것) 즉 세가지의 예물을 제사장들이 포기하는 것을 말한다. 동시에 제사장들은 단독으로 성전 수리하는 책임을 벗었다. 그리고 요아스는 제사장의 몫을 분명히 하였는데 배상제사(속건제)의 은과 정화제사(속죄제)의 은을 "야훼의 전에 드리지 아니하고 제사장이 차지하도록 하였다"(16절). 여기서 야훼의 전에 드리는 것과 제사장의 몫을 구분하는 것을 볼 수 있다. 특별히 여기서 "야훼의 전에 드리는 것"이란 표현은 성전 창고에 들이는 것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즉 왕과 함께 계산해야하는 성전의 재산으로 분류되는 것이다. 자발적인 예물 몇 가지를 제외한 대부분의 헌금은 왕의 관리와 제사장의 통제 아래 성전 수리를 위해 사용하도록 결정된 것이다.  


      2. 요시야와 성전 수리


      요시야가 성전을 수리한 내용은 열왕기하 22:1-9와 역대기하 34:8-17 부분에 나타나 있다. 여덟살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오른 요시야는 청년이 되었을 때(26세) 성전을 수리하도록 명령하였다. 이 때 왕의 명령을 받든 사람들은 서기관 사반과 부윤 마아세야와 서기관 요아하스의 아들 요아였다. 이들은 대제사장 힐기야에게 왕의 명령을 전달하고 성전수리를 위해 성전에 바쳐진 돈을 기술자들에게 주었다.
      이러한 과정에서 발견할 수 있는 것은 성전에 바쳐진 헌금을 사용하는 권한은 대제사장이 아니라 왕에게 있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실제 그 헌금을 사용할 때는 대제사장이 참여하여 왕의 의도대로 헌금을 사용하고 있는 모습을 발견할 수 있다. 이 과정에서 왕의 신하들은 왕명을 대제사장에게 전달할 뿐 만 아니라 실제 그 헌금을 사용하는 과정에도 참여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다만 왕의 관리들이 어느정도 개입했는 지는 정확히 알 수는 없으나 성전수리와 같은 특별한 경우에는 상당히 세밀하게 참여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IV. 성전 재정을 운영하는 관리자들
     
     1. 왕정 시대의 성전 재정 관리자
        


    1) "문턱을 지키는 제사장들" - 쇼므레 하사프


      왕정시대에 성전 재정을 관리하는 모습은 열왕기하 12장에서 찾아볼 수 있다.


             제사장 여호야다가 한 궤를 취하여 그 뚜껑에 구멍을 뚫어 야훼의 전문 어귀 우편 곧 단 옆에 두매 무릇 야훼의 전에 가져오는 은을 다 문턱을 지키는 제사장들이 그 궤에 넣더라. 이에 그 궤 가운데 은이 많은 것을 보면 왕의 서기와 대제사장이 올라와서 여호와의 전에 있는대로 그 은을 계수하여 봉하였다.(왕하 12:9-10)


      예루살렘 성전 문전에 헌금궤를 놓아두고 "문턱을 지키는 제사장"이 관리하였다. 이 구절에서  "문턱"이라 번역한 히브리어 단어는 사프이다. "사프"는 성전문 맨 아래를 가로지르는 부분을 가리키며 성전과 세속세계를 분리시켜주는 경계선의 역할을 한다. 보통 바닥 보다는 약간 위로 올라와 비가올 때 물이 안으로 흘러들어가는 것을 방지하는 역할을 하기도 한다.
      "문턱을 지키는 제사장"은 단순한 수위나 경비원이 아니었다. "문턱을 지키는 제사장"은 성전의 제사장 서열에서 고위층에 속하는 제사장이었다. 대제사장과 부제사장 그 다음 중요한 인물이 바로 "문턱을 지키는 제사장"이었다(왕하 12:9; 22:4 = 대하 34:9; 왕하 23:4; 25:18 =렘 52:24; 35:4). 특히 "문턱을 지키는 사람"은 성전에 드린 예물을 수납하여 관리하는 직책을 감당하고 있었는데 요아스 왕 시대와(왕하 12:9) 요시야 왕 시대(왕하 22:4 = 대하 34:9), 그리고 유다 멸망 직전에(왕하 23:4; 25:18 =렘 52:24; 35:4) 이 사람들에 대한 기록이 남아있다. 요아스 시대에는 제사장이라 명시되어 있으나 요시야 시대에는 명시가 없다. 역대기에는 요시야 시대에 레위인이 "문턱을 지키는 자"로 되어 있으며 이들이 전국적으로 예물을 수납하는 직무를 수행하였다.


            저희가 대제사장 힐기야에게 나아가 전에 하나님의 전에 연보한 돈을 저에게 붙이니 이 돈은 문턱을 지키는 레위 사람이 므낫세와 에브라임과 남아 있는 이스라엘 사람과 온 유다와 예루살렘 거민들에게서 거둔 것이라.(대하 34:9)


      "문턱을 지키는 제사장"은 성전에 방이 있었으며 예레미야 시대에 그 중 한 제사장의 이름도 나타나 있다. 즉 살룸의 아들 마아세야가 바로 이러한 직무를 수행한 제사장이었다(렘 35:4).
      중요한 점은 성전 문전에 놓여진 헌금함에 담겨진 헌금을 사용할 때는 먼저 왕의 관리와 대제사장이 공동으로 그 금액을 계산하여 성전수리를 위해 지출하였다는 점이다. 성전재정을 왕이나 대제사장이 독자적으로 관리한 것이 아니라 왕과 대제사장이 공동으로 성전재정을 운영 관리하였다. 이러한 모습은 고대 이스라엘에만 국한하여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앗수르의 성전에도 나타나는 현상이었다. 앗수르의 성전관리에 관여하는 왕의 관리인 마르-이쉬타르(Mar-Ishtar)가 앗수르 왕 에살하돈에게 성전수리를 위해 보고한 편지가 있는데, 이 편지에서 그 관리는 제사장과 왕의 관리가 공동으로 성전재정을 계수하고 지출함을 언급하였다. 열왕기하 12장에 나타난 사건을 볼 때 왕이 성전운영에 대해 명령할 수 있다는 사실을 우선 발견할 수 있으며, 왕의 명령과 제사장의 의견이 합치되지 않을 때 왕과 제사장의 의견절충을 통해 새로운 대안을 만들어 낸다는 사실이다. 여호야다가 채택한 이 절충안, 즉 왕의 관리와 제사장이 공동으로 성전재정을 관리 운영하는 안은 고대 근동의 관습을 차용하여 실시한 것으로 짐작할 수 있다.
      요약하면 "문턱을 지키는 제사장들"은 왕정시대 예루살렘 성전에서 세번째 고위직에 있었던 제사장으로서 성전의 재정을 관리하는 제사장이었다. 이들은 헌금을 거두어 들이는 역할도 하였고 수납한 헌금을 관리하고 지출하는 임무도 수행하였다. 물론 독자적으로 할 때도 있겠지만 중요한 사안에는 왕의 관리와 공동으로 이 임무를 수행하였다. 이들이 포로 후기에도 동일한 명칭으로 활동했는지 여부에 관해서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왕정시대 역사를 기술하는 부분에만 등장한다는 점을 참조해 볼 때 왕정시대에 사용한 성전 재정 관리자의 명칭일 가능성이 짙다.    


        2) 성전 회계(temple-teller) - 마카르


      요아스의 성전 수리 사건 가운데 열왕기하 12장 5절과 7절에 나타나는 "아는 자에게서 받아들인..."이라는 구절이 논란의 대상이 되고 있다. 5절(MT 6절)과 7절(MT 8절)에서 "아는 사람"이라 번역한 마카르 란 단어는 구약에서 여기에만 나타나는 희귀한 단어이다. BDB사전에는 이 단어가 나카르 란 동사에서 파생된 명사형으로 분류하고 있다. 이 명사형의 뜻은 "아는 사람" 혹은 "친구"이다. {개역}은 이러한 분류에 따라 "아는 사람"이라 번역하였다.
      그러나 LXX에는 히브리어 모음이 변경되어 "그의 상업행위"라는 의미로 번역되어 있다. 그레이(J. Gray)는 라스 샤므라 텍스트(Ras Shamra Text, UT 82, 83, 113)에서 mkrm이 제사장과 함께 성전에서 어떤 직책을 맡고 있었던 점에 근거하여 희생제물의 가격을 사정해주고 예물의 정도를 결정해 주는 "사정자 (business assessor)"로 번역하였다. 몽고메리와 게만(J. S. Momtgomery and H. S. Gehman)은 "성전 회계 (temple-teller)"라 보았고 홉스(T. R. Hobbs)는 "수입 (income)"으로 번역하였다. "아는 사람"이라 번역한 것은 "마카르"의 어원을 "나카르"에서 찾았기 때문인데 이 어원은 적합하지 않다. 오히려 "마카르"에서 어원을 취하면 그 뜻은 예물을 평가하고 계수해주는 사람인 "사정자"를 가리키게 된다. 그리고 그 명칭은 "성전 회계"라고 하느 것이 오히려 이해하기 쉬울 것으로 판단되어 "성전 회계"라는 용어를 사용한다.
      요아스 시대의 성전 회계는 제사장의 지휘 아래 성전 재정의 실무를 담당하는 인원으로 추정된다. 이 인원은 아마도 성전 재정을 총괄하는 "문턱을 지키는 제사장"의 지휘를 받은 재정 담당 실무자였을 것이다.


      2. 포로후기 성전 재정 관리자


        1) 주조자 - 요체르


      페르시아의 다리우스 1세(Darius I Hystaspis) 시대에는 왕이 조공으로 받은 귀금속을 녹여서 토기에 넣었는데 토기에 모두 차면 토기를 깨어 귀금속을 보관하였다. 그리고 필요할 때는 이 귀금속을 잘라서 사용하였다. 동전이 일반화되기 이전, 적어도 주전 300년 이전에는 이러한 방법이 고대 근동에서 보편적으로 사용되었다.
      고대 근동에서는 귀금속을 주조하고 보관하는 일을 주로 성전에서 전담하였는데 고대 이스라엘에도 귀금속을 성전에서 주조하는 장면이 나타난다. 특별히 예루살렘 제2성전 시대에 귀금속을 주조하는 것과 관련된 본문이 스가랴에 나타난다.


            야훼께서 내게 이르시되 그들이 나를 헤아린바 그 준가를 토기장이에게 던지라 하시기로 내가 곧 그 은 30을 야훼의 전에서 주조자(토기장이)에게 던지고...(슥 11:13)


      {개역}에서 "토기장이"라 번역한 요체르 는 문맥에 맞지 않는다 하여 학자들은 히브리어 단어를 오차르 로 수정하여 "창고/곳간"으로 번역하는 경향이 있다. 예를들어 시리아어 역본이 대표적인 것이다. 그러나 토레이(C. C. Torey)는 70인역(LXX)과 아퀼라역(Aquila) 그리고 심마쿠스역(Symmachus)을 근거로 "요체르"를 귀금속을 주조하는 전문적인 단어임을 주장하면서 히브리어 성서(MT)를 수정할 필요가 없다고 주장하였다. 또한 "토기장이"는 토기를 굽는 과정에서 고도의 열을 낼 수 있는 방법을 알고 있기 때문에 귀금속을 주조하는 역할을 겸임할 수도 있다. 따라서 MT를 수정할 만한 충분한 근거가 없는 상태에서 굳이 MT를 수정할 필요가 없으며, 문제는 "요체르"를 어떻게 번역하는가에 있다. 즉 "토기장이"로 번역할 것인가 아니면 "(귀금속) 주조자"로 번역할 것인가 하는 것인데, 문맥상 여기서는 "주조자"로 번역하는 것이 오해를 줄이는 방법이 될 것이다.  
      귀금속을 주조하는 장면은 열왕기하 12:10에도 찾아 볼 수 있다.


            이에 그 궤 가운데 은이 많은 것을 보면 왕의 서기와 대제사장이 올라와서 야훼의 전에 있는 대로 그 은을 녹여서 계수하고,


    "녹여서 계수하고"라고 번역한 부분은 {개역}에서는 "계수하여 봉하고"로 번역되어 있다. 그러나 히브리어 성서(왕하 12:11)에는 봐야추루 봐임누 즉 "녹여서 계수하고"의 순서로 되어 있으므로 이 순서를 따라 번역을 시도한 것이다. 여기서 "녹이다"로 번역된 단어의 기본 뜻은 "묶다" 혹은 "만들다" 등의 뜻인 추르 인데 NEB와 NAB 등은 이 단어를 "주조하다/녹이다)"로 번역하였다.  은을 계수할 때 동전이 아닌 경우 무게로 달 수 밖에 없고 이 경우 은을 용기에 담거나 묶어서 저울에 달 수 도 있다. 또 다른 방법은 당시의 보편화된 방법인데 은을 녹여 그 무게를 달게 된다. 히브리어 성서를 그대로 직역하면 "만들어서(묶어서) 계수하고"로 번역할 수 있으며, 귀금속을 "만들 때" 당시의 보편적인 방법을 감안하면 "녹여서 계수하고"로 번역할 수 있다. 따라서 이 본문은 예루살렘 성전에서 은을 녹여 계수하는 즉 귀금속을 주조하는 장면을 묘사한 것이다.
      그러면 예루살렘 성전에 있는 "요체르(주조자)"는 어떤 역할을 하였으며 어떤 위치에 있었는가? 기본적으로 "요체르"는 흙을 구워 토기를 제조하는 토기장이를 가리킨다(사 30:14; 41:25; 64:8; 렘 18:4, 6; 애 4:2; 단 2:41; 대상 4:23). 이들은 높은 열을 내는 방법을 알고 있었으며 불을 다룰줄 아는 기술자들이었다. 따라서 이들은 토기 뿐 만 아니라 귀금속을 제조할 수 있는 능력이 있는 사람들이었다.
      토기장이만 불을 다룰줄 아는 것은 아니다. 대장장이도 있고 금장색도 있다. 성서에는 철을 다루는 대장장이나 금, 은 등 귀금속을 다루는 금장색 등의 기술자에 대해서는 다른 명칭을 붙이고 있다. 대장장이는 마스게르(왕하 24;14, 16; 렘 24;1; 29:2), 혹은 하라쉬(삼상 13:19; 사 44:12; 54;16) 등으로 부른다. 그리고 금장색(goldsmith)은 초래프(사 40;19; 41:7; 46:6; 렘 6:29; 10;9, 14; 51:17; 느 3:8; 31, 32)로 부른다. 이들 귀금속 주조자들이 성전에서 활동했다는 것은 여러 곳에서 그 흔적을 찾아 볼 수 있다. 우선 광야에서 성막을 건설할 때 필요로 했던 다양한 금, 은, 동의 기구들을 이들이 제조하였고(출 31:2-6), 예루살렘 성전을 건축하고 성전 기구들을 제조하는데 이들의 기술이 필요하였다(왕상 7:14).
      성전세를 비롯하여 성전에 바쳐지는 귀금속 형태의 예물들을 계수할 때는 토기장이, 대장장이, 금장색 등 누구든지 불을 다룰줄 아는 사람이 있어야 그 일을 처리할 수 있었다. 예루살렘 성전의 기술자는 귀금속을 녹여 일정한 형태를 만들어 성전 창고에 간수하였다. 따라서 왕정 시대에 성전 재정 운영을 담당한 "문턱을 지키는 제사장"의 지휘아래 귀금속을 계수하고 제조하는 실무자의 역할을 이들이 담당하였던 것이다.
      그런데 스가랴 11:13에는 "요체르"가 성전에서 예물을 수납하는 모습으로 나타나 있다. 이러한 모습은 "요체르"가 단순한 기술자가 아니라 성전 재정을 관리하는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왕정 시대에 "문턱을 지키는 제사장"이 담당했던 기능 즉 예물을 수납하는 기능을 포로후기에는 "요체르"가 담당하고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포로후기의 성전 재정 관리자는 "문턱을 지키는 제사장"이 아니라 "요체르"였을 가능성을 제기할 수 있다.
      이렇게 될 경우 "요체르"는 적어도 고위 제사장이어야 이 직무를 성전에서 담당할 수 있었을 것인데 "요체르"가 제사장이나 레위인이었다는 언급은 찾아 볼 수 없다. 굳이 찾아 본다면 아론이 금으로 금송아지를 만든 사건을 들면서 제사장이 귀금속을 제조한 예를 들 수는 있을 뿐이다(출 32:4). 스가랴 11:13을 근거로 해서 말할 수 있는 것은 "요체르"가 성전 재정을 관리하는 중요한 직무를 어느정도 수행하고 있었지만 그들이 제사장이었는지 혹은 레위인이었는지 또는 평민이었는지는 확인할 길이 없다. 오히려 다음에 논의할 포로후기의 성전 재정 위원회 아래서 귀금속 계수와 관리를 담당하는 역할을 했을 것으로 추정하는 것이 합리적일 것이다.


        2) 성전 재정 위원회


      왕정시대에는 예루살렘 성전이든 지방 성전이든 제사장이 성전 재정을 관리해왔다. 히스기야와 요시야의 개혁이 있기 전에는 지방에서 레위인이 제사장 역할을 하면서 지방 성전의 재정을 관리해왔다. 그러나 요시야의 개혁이 있은 후 예루살렘에 올라 온 레위인은 예루살렘 성전에서 예루살렘 성전의 사독계열 제사장과 동등한 지위를 얻지 못하고 하위직으로 밀려났다. 이 과정에서 레위인은 성전 재정에 깊이 관여할 수 없었다. 그러나 포로후기에는 느헤미야가 다시 레위인을 등용시키는 모습을 볼 수 있다.


            레위 사람들이 십일조를 받을 때에는 아론의 자손 제사장 하나가 함께 있을 것이요 레위      사람들은 그 십일조의 십분 일을 가져다가 우리 하나님의 전 골방 곧 곳간에 두되 곧 이스라엘 자손과 레위 자손이 거제로 드린바 곡식과 새 포도주와 기름을 가져다가  성소의 기명을 두는 골방 곧 섬기는 제사장들과 및 문지기들과 노래하는 자들이 있는 골방에 둘 것이라 그리하여 우리가 우리 하나님의 전을 버리지 아니하리라. (느 10:38-39)


    십일조를 받을 때 레위인과 제사장이 함께 공동으로 받고 관리하고 분배하는 것도 서로를 배려하여 시행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레위인과 제사장이 공동으로 성전의 재정을 관리하는 모습은 느헤미야 13:12-13에 더 명확하게 나타나 있다.


            이에 온 유다가 곡식과 새 포도주와 기름의 십일조를 가져다가 곳간에 들이므로 내가 제사장 셀레먀와 서기관 사독과 레위 사람 브다야로 고지기를 삼고 맛다냐의 손자 삭굴의 아들 하난으로 버금을 삼았나니 이는 저희가 충직한 자로 인정됨이라. 그 직분은 형제들에게 분배하는 일이었느니라. (느 13:12-13)


    십일조를 받고 관리하고 분배하는 일에 제사장과 레위인이 함께 동참하였다. 위에 나타난 명단을 살펴보면 제사장 셀레먀와 서기관 사독과 레위 사람 브다야와 맛다냐의 손자 삭굴의 아들 하난 등이 나타난다. 이 가운데 서기관 사독은 이름만 보아도 제사장임을 알 수 있다. 왕정 시대 서기관은 왕의 신하로서 법률적인 일과 왕명을 출납하는 일 그리고 국가 재정을 관리하는 일 등을 담당하였으며 제사장은 아니었다. 그러나 포로후기에는 제사장이 서기관의 직함을 사용하였는데 대표적인 예가 에스라였다(스 7:11). 즉 하나님의 율법을 맡아 율법에 관한 일을 담당하는 서기관 에스라였다. 따라서 서기관이라는 직함이 있어도 사독은 제사장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이 명단에서 하위직을 맡은 맛다냐의 손자 삭굴의 아들 하난은 족보상 레위인임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성전 재정을 관리한 이들 집단은 제사장과 레위인으로 구성되었음을 알 수 있다.   
      느헤미야는 이제까지 제사장이 관리해 오던 성전 재정을 개혁적인 차원에서 레위인도 성전 재정에 관여하도록 조치하였다. 느헤미야 13장에서 주목할 부분은 제사장과 레위인이 공동으로 재정 관리자 집단을 형성하였다는 것이다. 느헤미야 시대부터 나타난 성전 재정 관리자 집단을 S. J. Spiro는 느헤미야 13:12-13를 근거로 하베르 라 보았다. 원래 하베르라는 단어는 랍비 문학에 나타나는 단어이며 느헤미야에는 이 단어가 나타나지 않는다. 그런데 S. J. Spiro는 "하베르"의 전단계가 네에만 이라는 명칭의 성전 재정위원회임을 랍비문학에서 밝혀내었다. 바로 이 단어 "네에만"이 느헤미야 13:13에 나타나 있음을 발견하고 S. J. Spiro는 느헤미야 시대 "하베르"가 성전 재정위원회였음을 주장하였다. 그는 이 위원회가 유다 전역에 조직되어 있었다고 주장하였다. 동시에 이 위원회는 지역의 종교적 정치적 행정적인 역할도 감당하였음을 주장하였다. 그러나 J. Schaper는 포로후기의 재정위원회가 종교세 뿐 만 아니라 세속세금도 관리했음을 주장하면서 종교세만을 관리하는 "하베르"가 있었다는 가설에 대해 반대하였다. 또한 이 위원회가 유다 전역에 조직되어 있었을 수 없음을 지적하면서 J. S. Spiro의 주장을 반박하였다.
      느헤미야 13장에 나타나는 성전 재정 관리자들의 명칭이 "하베르"였는지는 아직도 밝혀지지 않고 있지만 적어도 이들이 재정 위원회를 형성하고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그리고 이들은 성전에서 받은 것을 분배하는 일도 하고 있었다. 즉 헌금의 수납과 관리와 분배까지 모두 관장하는 실질적인 재정위원회의 역할을 담당하였다.


        3) 레위인 성전 재정 관리자


      성전 창고를 관리하는 레위인 창고지기의 명단이 역대기상 26:20-28에 나타나 있다. 이들은 성전 창고를 관리하는 인원으로 자물쇠와 열쇠를 관리할 뿐 만 아니라 창고에 들어가는 물목과 창고에서 나가는 물목을 계수하고 관리하는 인원이었다. 단순한 창고지기가 아니라 성전 재정을 관리하는 실무자들이었다. 느헤미야 13장에 나타나는 재정 위원들 역시 그 명칭이 "창고지기"였다는 사실을 감안할 때 역대기상 26장에 나타나는 레위인 역시 중요한 성전 재정 관리자로 볼 수 있다.
      역대기 기자는 다윗이 이들을 배치했다고 기록하고 있지만 그 실상을 살펴보면 역대기 기자가 기록할 당시의 예루살렘 성전 인원 배치 명단이었음을 쉽게 알 수 있다. 명단을 분류할 때 문맥이 맞지 않는 20절의 아히야 는 수정이 불가피하다. "아히야"는 문맥상 70인역을 따라  아헤헴 즉 "그들의 형제" 라고 번역하는 것이 적합하다.  레위인들의 명단을 살펴보면, 게르손 자손과 고핫 자손으로 크게 나눌 수 있는데 게르손 자손은 주로 성전 운영과 종교 행사와 관련된 물품이 있는 "야훼의 전 창고"를 담당하였고(21-22절) 고핫 자손은 주로 전쟁에서 노획한 전리품과 야훼의 성전을 건축하는데 필요한 "성물 창고"를 담당하였다(23-28절).
      게르손 자손의 명단을 보면 여히엘리의 아들들인 스담과 요엘이 나타나 있다. 고핫 자손의 명단을 보면 게르솜의 아들 스브엘과, 엘리에셀의 아들들인 르하뱌, 여사야, 요람, 시그리, 슬로못 등이 나타난다.   
      느헤미야 시대에 구성된 성전 재정 위원회와 다른 점은, 레위인들 역시 역대기 기자 시대의 성전 재정을 관리하였지만 제사장과 동등하게 위원회의 일원이 된 것이 아니라 제사장의 지휘를 받으며 성전의 재정을 관리하는 실무자였다는 점이다.  


    V. 포로 후기 성전 재정 운영과 페르시아


      포로 후기의 성전 재정 운영자들이 십일조를 중심한 종교세를 관리하고 있었음을 보여주고 있지만 포로후기의 상황을 참작해 볼 때 이들이 국가의 세무행정 기능도 담당하고 있었을 가능성이 크다. 포로후기 특히 느헤미야와 에스라 시대에는 정치지도자와 종교지도자의 구분이 없었으며 통합해서 유다 백성들을 이끌고 있었다. 페르시아 제국의 통제를 받고 있었던 약소 민족인 유다의 역할 가운데 중요한 것은 세금을 거두어 페르시아에게 바치는 일이었다. 십일조와같은 종교세를 받고 있었던 성전이 이 일을 도외시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오히려 예루살렘 성전에 있었던 성전 재정 위원회가 종교적인 예물 뿐 만 아니라 세속적인 세금까지 관리하는 일을 담당할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J. Schaper에 의하면 당시 페르시아에 바치는 은과 금은 주조소에서 관리할 수 밖에 없었는데 예루살렘 성전이 이러한 주조 기능의 핵심이었으며, 후일 화폐로 통용된 동전을 주조할 수 있는 장소도 예루살렘 성전이었다는 것이다. 페르시아에 바친 세금의 종류에 대해서는 에스라 4:13, 20; 7:24에서 찾아 볼 수 있다. 즉 페르시아 왕에게 조공을 바치는 세금으로 보통 은으로 바치는 세금형태인 미다, 노동력의 정도에 따라 달라지는 인두세인 벨로, 토지세인 할라크 등이 있었다.
      예루살렘 성전이 페르시아의 세금을 수납하고 관리하는 기구였을 가능성은 크지만 J. Schaper의 주장같이 성전이 국세청이나 화폐주조창의 역할을 전담했다고 주장하기는 이르다. 이러한 주장에 대한 명확한 근거는 부족한 형편이다. "요체르"가 성전에 있었고(슥 11:13) 중요한 지위를 차지하고 있었다는 것은 인정할 수 있으나 "요체르"가 성전에만 있었다고 볼 수는 없다. 예를 들면 예레미야는 "요체르(토기장이)"에게 가서 토기를 사기도 하였다(렘 18:2, 3, 4, 6). 다시말하면 예루살렘 성전 외에도 "요체르"가 있었고 페르시아에 바칠 세금을 수납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앞에서도 논의한 바와 같이 포로후기의 "요체르"는 성전 재정 위원회 아래서 귀금속 계수와 관리를 담당하는 실무자 역할을 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비록 명확한 근거가 제시되지는 않았지만 십일조가 기본적인 세금이었음을 감안할 때 성전에서 세속적인 세금을 취급했을 가능성이 있다. 또한   페르시아의 통제 아래 그 영향을 받으면서 성전이 핵심적인 주조소의 역할을 하면서 세속세금의 일부를 담당하였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VI. 결론


      왕궁과 성전이 국가 경제의 중추적 역할을 담당했던 고대 근동의 상황과 마찬가지로, 고대 이스라엘의 성전도 왕실과 연결되어 국가 경제의 중요한 몫을 담당하였다. 왕이 성전을 건축하였으며 제사장을 임명하였다. 더구나 왕은 성전 수리를 주도하였으며 성전 재정을 관리하는 일까지 관여하였다. 강대국에 조공을 바칠 때 왕은 왕궁의 창고와 성전의 창고를 모두 열어 조공물품을 마련하기도 하였다.
      왕정 시대 성전 재정 운영에 관한 내용이 가장 명확하게 나타난 곳은 성전 수리 사건에 관한 기록이다. 유다 왕들인 요아스와 요시야가 왕권을 강화하는 시점에 성전을 수리하였는데 제사장과 협의하는 과정을 거치기는 하였지만 왕의 주도하에 성전이 수리되었다. 이 과정에서 왕은 제사장과 협동하여 헌금을 수납하고 관리하였다. 바벨론 성전의 "왕의 궤(king's chest)"와 같이 요아스도 예루살렘 성전에 "궤"를 마련하여 헌금을 수납하고 왕의 관리가 그 재정 운영에 참여하도록 하였다.
      성전 재정을 운영하는 관리자로는 왕정 시대에 "문턱을 지키는 제사장들"과 "성전 회계"를 들 수 있고, 포로 후기에는 "요체르(주조자)"와 "레위인 재정 관리자"와 "성전 재정 위원회" 등을 들 수 있다. 이 가운데 왕정 시대의 "문턱을 지키는 제사장"과 포로 후기의 "성전 재정 위원회" 등이 성전 재정을 관리하는 고위층이었으며 그 외의 인원들은 재정의 실무를 담당하는 실무자로 볼 수 있다. 이들은 헌금을 수납하고 계수하여 관리하며 분배하는 일 등을 관할 하였다.
      왕궁과 성전이 하나의 아크로 폴리스 안에 위치해 있으며 "성전단위(sanctuary weight)"를 공통으로 사용하고, 성전 재정의 최종 결정권자가 왕인 점을 감안할 때 고대 이스라엘의 성전이 세속적인 세금을 수납하고 관리하였을 가능성이 크다. 비록 명확한 근거가 충분하지 못한 실정이지만 정치와 종교의 구분이 힘들었던 포로 후기에는 페르시아의 영향을 받으면서 성전이 세속적인 세금을 관리하는 기능을 담당하였을 것으로 짐작된다.  





    4월 26일(토) 열왕기하 8-10장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예후는 왕이라(9:13)

    무리가 각각 자기의 옷을 급히 취하여 섬돌 위 곧 예후의 밑에 깔고 나팔을 불며 가로되 예후는 왕이라 하니라.
    They hurried and took their cloaks and spread them under him on the bare steps. Then they blew the trumpet and shouted, "Jehu is king!

    예후(Jehu. 그가 여호와시다)
    예후는 북 이스라엘 왕(B.C. 842-815 재위).
    제 4 왕조의 창시자이다.
    그는 본래 아람왕을 따랐으나 이스라엘 군대장이 되어 라못 길르앗에서 수리아와 싸웠다(왕하 9:25-).
    이때 여호람이 부상을 입고 엘리사의 기름부음을 받아 왕이 되었으나 예후는 신앙적 인물이 아니었고 수리아에 대항코자 친 앗수르 정책을 취했다. 
    그러나 수리아의 침공으로 예후는 실의의 죽음을 했다(왕하 10:35).


    열왕기하 8장 요약

    엘리사는 수넴 여인에게 7년간의 기근을 경고하고 피신하게 합니다(8:1-2).
    기근 후 그녀는 왕에게 자신의 땅을 돌려받고, 엘리사의 기적이 왕에게 알려집니다(8:3-6).
    한편, 아람 왕 벤하닷은 엘리사를 통해 병의 회복 여부를 묻고, 하사엘이 왕위를 차지하게 되는 계기가 됩니다(8:7-15).

    열왕기하 9장 요약

    엘리사는 예후를 북이스라엘의 왕으로 기름 붓도록 지시합니다(9:1-6).
    예후는 아합 왕가를 제거하며, 이세벨을 처단하고 아합의 예언된 심판을 이행합니다(9:22-33).
    이로써 하나님의 공의가 실현됩니다.

    열왕기하 10장 요약

    예후는 아합의 아들들과 바알 숭배자들을 모두 제거하여 이스라엘에서 바알 숭배를 근절합니다(10:18-28).
    그러나 그는 여전히 금송아지 숭배를 유지하여 온전한 개혁에는 실패합니다(10:29-31).
    그의 통치 기간 동안 이스라엘은 앗수르의 위협에 시달리게 됩니다.


    엘리사는 예후에게 기름 부어 이스라엘의 왕으로 삼으라는 명을 받습니다.
    기름 부음을 받은 예후는 이로써 하나님께 구별되고 하나님의 명을 감당하게 됩니다.
    그는 하나님 앞에 악을 일삼는 오므리 가문을 심판할 명을 받습니다.

    1. 오므리의 가문을 멸하시는 하나님 (9:1-13)

    ​하나님께서 오므리 가문에게 주신 예언을 이루시고자 하십니다.
    오므리로부터 시작하여 아합과 그의 아들들에 의해 자행된 우상 숭배를 비롯한 악한 일에 대해 갚으시고자 합니다.
    하나님은 엘리사를 불러 예후에게 가서 그에게 기름을 부으라고 하십니다. 엘리사는 하나님의 뜻을 따라 제자 중 한 청년을 택하여 예후에게 보냅니다. 보내기 전에 기름을 붓고는 속히 그 집을 나오라고 주의를 합니다. 이는 사람을 세우는 일이 사람의 일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뜻임을 알게 하십니다(1-3절).

    청년은 엘리사가 명한 대로 예후를 찾아 길르앗 라못으로 갑니다.

    그곳에 모인 군대 장관 중에 예후만 불러 엘리사가 정하게 하신 말씀을 그대로 전합니다. 하나님께서 아합과 이세벨이 행한 수많은 악한 일을 아시고 그 집안을 심판하시고자 예후를 택하셨음을 알립니다. 예후가 감당할 일은 오직 아합과 이세벨에 속한 심판을 이스라엘 온 백성에게 보이는 일이었습니다. 그 말과 함께 예후에게 기름을 붓고는 그 자리에 머물지 않습니다. 곧장 도망을 갑니다. 그곳에는 하나님께 부름을 받고 사명을 감당할 예후만 남았을 뿐입니다. 예후는 하나님께서 다른 장군들의 마음을 하나로 묶는 기적을 봅니다(4-13절).

    적용과 결단 (9:1-13)

    ​신자는 누구나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받은 사명이 있습니다.
    세상에 나가 하나님의 원수가 된 마귀의 일을 깨뜨리는 일입니다. 두렵고 어려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나 신자가 잊지 말아야 할 사실이 있습니다. 사명을 주신 분이 그 사명을 이루신다는 사실입니다. 신자는 오직 믿음으로 그 사명의 길을 포기하지 않고 달리는 일만 감당하면 된다는 사실입니다. 사명을 받고서 가야 할 그 길을 결코, 포기하지 않기를 기도합니다.

    1. 하나님께서 예후에게 청년을 보내시면서 그 자리에서 속히 떠날 것을 명하십니다. 그 이유를 생각해봅시다.
    2. 예후에게 주신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 예후는 아합의 집안을 멸절시키게 됩니다. 예후에게 가장 중요한 일은 무엇일지 묵상해봅시다. 내게 주시는 도전이 있다면 함께 나누어봅시다.


    전쟁에서 부상당한 요람왕은 치료를 위해 돌아갔지만, 예후는 길르앗 라못에 남아 군대를 이끌고 전쟁을 계속합니다. 이런 상황에서 엘리사는 예후를 왕으로 세우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신속하게 순종하며 제자를 보내서 예후에게 기름을 부으라 명령합니다.

     

    선지자의 제자 중 하나를 불러 이르되(1-6) 하나님은 주권적으로 왕을 세우기도 하시고, 폐하기도 하시는 분이십니다. 엘리사가 직접 가서 기름을 부어 예후를 왕으로 세우지 않고, 제자를 보낸 이유는 이 일이 하나님의 명령이긴 하지만, 요람 왕에 대한 모반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1). 왕이 살아있는 상태에서 예후에게 기름을 붓는 것은 왕에 대한 반역이기 때문에 은밀하게 행했던 것입니다. 사실 하나님은 이전에 엘리야에게 예후에게 기름을 부어 왕으로 세우라는 말씀을 주셨습니다(왕상 19:16). 그런데 이 말씀이 엘리사 때에 이루어진 이유는 나봇의 포도원 사건 이후에 아합이 죄를 뉘우쳐서 그 집에 대한 심판이 지연되었기 때문입니다. 엘리사는 제자에게 예후를 찾아 골방으로 들어가서(2) 이 일을 은밀하게 행하고 지체하지 말고 도망치라(3)는 것은 바로 엘리사에게 복귀하라는 명령입니다.

     

    너는 네 주 아합을 치라(7-10) 예후에게 기름을 부은 엘리사의 제자는 그가 해야 할 일들에 관해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예후를 왕으로 세우시려는 목적이 있으셨습니다. 그것은 아합의 집의 죄악에 대한 심판을 행하는 것이었습니다. 예후는 자신의 주인인 요람 왕을 쳐야 했습니다. 그런데 본문에서는 “요람 왕의 집을 치라”가 아니라 “네 주 아합의 집을 치라”고 표현한 이유가 있습니다. 오므리, 아합, 아하시아, 요람으로 이어지는 오므리 가문의 왕조 중에서 아합 왕의 죄악이 가장 극심했던 이유도 있지만, 열왕기상 19장 15-18절에 나오는 예언의 성취를 드러내기 위함 입니다. 이 예언의 말씀이 이루어지는 과정에서 예후가 도구로 선택된 것입니다. 특별히 이세벨의 비참한 최후에 대해서 언급하면서 “시체가 개들에게 먹힌다”(10)는 것은 가장 수치스럽고 비참한 일로써 그녀가 우상 숭배를 대표하는 상징적인 인물이고, 많은 하나님의 사람들을 죽였기 때문입니다. 주목할 것은 아합의 집안에 속한 모든 남자, 그 후손들이나 심지어 종들까지도 완전히 멸절된다는 것입니다(8-9). 여로보암의 집처럼(왕상 15:29), 바아사의 집처럼 말입니다(왕상 16:11).

     

    적용: 내 안에 있는 우상을 제거하지 않으면 ‘아합의 집’처럼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게 됩니다. 내 안에 있는 우상을 어떻게 제거하시겠습니까?

     

    예전에는 내가 원하는 것을 응답하셔야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시는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내 기도가 응답되지 않은 것에 감사하게 됩니다. 내 뜻보다 하나님의 뜻이 더 높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기도의 응답은 꼭 내가 원하는 방법, 방식이어야 할까요? 하나님이 내가 생각하는 것보다 더 크신 분임을 안다면 주님의 시간에, 가장 좋은 방법으로 역사하실 하나님을 바라볼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 설 교 >

    예후는 왕이라(열왕기하 9:1-13)

    하나님이 오해받고, 왜곡된 대표적인 주제는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입니다.
    세상에서는 ‘신’의 반대말 또는 비교 대상이 ‘인간’입니다.
    그래서 ‘신의 주권’이 강조되면 ‘인간의 자유’가 제한되는 것으로, ‘신의 영광’이 강조되면 ‘인간의 수고’가 희생당하는 것으로 여깁니다. 신의 뜻을 따르려면 인간의 뜻을 포기해야 하고, 신을 섬기려면 인간은 신에게 복종해야 합니다.
    세상에서 신과 인간은 양립할 수 없는 경쟁대상이기에 신이든 인간이든 둘 중에 하나를 선택해야 합니다.
    그러나 기독교에서는 ‘하나님’의 반대말 또는 비교 대상은 절대로 인간이 아닙니다.
    하나님과 인간은 경쟁대상이 아니고,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 것이 아닙니다.
    기독교에서 하나님의 반대말은 ‘죄’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주권’이 강조되면 ‘하나님의 책임’이 수반됩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강조되면 ‘하나님의 역할’이 요청됩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수고를 밝고서 영광을 얻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반응이 나올 수 있도록 인간에게 유익하고 좋은 역할을 해야만 합니다.

    하나님에 의해 인간의 자유와 평화와 행복을 누릴 때에야 인간이 하나님께 감사하고 찬양하고 영광을 돌릴 것이기 때문입니다.
    기독교의 하나님은 인간과 경쟁상대가 아니라 인간을 위해주시는 분, 인간을 위해 수고하고 헌신하며 충성하시는 분입니다.
    본문에서 하나님께서 예후를 ‘왕’으로 기름을 붓습니다.
    하나님께서 생각하는 ‘왕’과 사람들이 생각하는 ‘왕’이 참 다릅니다.

    열왕기서에 이스라엘과 아람의 전쟁이야기가 아합 왕 시대부터 여호람 왕 시대의 불과 30여년 사이에 다섯 번 정도 나옵니다.
    상황적으로는 늘 아람이 우세했는데 결과적으로는 늘 이스라엘이 이겼습니다.
    아람의 입장에서는 매우 억울할 것이고 더더욱 원수 같을 것입니다.

    분명히 두 나라는 매우 적대적인 관계인데 왕하 8:7절에서 엘리사가 적국의 지역인 다메섹을 방문하고, 아람의 왕은 엘리사를 불러서 일종의 국가기밀일 수도 있는 자기 병에 관해 질문을 하고, 엘리사는 하사엘이 왕이 될 것을 예언하는 정도로 우호적입니다.

    하지만 국제관계가 변해 8:28절에서 다시 전쟁이 있고 상황적으로는 북 왕국의 왕이 부상을 당하는 등 매우 불리한 상태에서 9장이 전개됩니다.
    일반적으로 나라가 위기에 처하면 가장 강조되는 것이 바로 ‘단결’과 ‘충성’입니다.
    대표적으로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는다’인데 하나님은 이 순간에 새로운 왕을 세우십니다.
    ‘전쟁 중에는 장수를 바꾸지 않는다!’고 하는데 하나님은 병법의 기초도 모르시는 것일까요?
    엘리사 선지자는 최소한의 애국심도 없는 것일까요?

    만약 전쟁 중에 장수 하나 바꾸는 정도가 아니라 아예 왕을 바꿀 정도라면 엄청난 인물, 누가 봐도 이 전쟁의 상황을 역전시킬 만한 장수가 등장해야 하고 이 일을 진행하는 사람도 누구에게나 인정을 받을 만한 지명도가 있고 영향력이 있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늘 저와 여러분의 예상을 깹니다.
    사람들이 나라를 강성하게 만드는 방법과 하나님이 나라를 강성하게 만드는 방법이 원천적으로 다르고, 사람들이 전쟁에서 승리하는 방법과 하나님이 전쟁에서 승리하는 방법이 근본적으로 다르고, 사람들이 생각하는 왕의 신분이나 역할과 하나님이 생각하는 왕의 신분이나 역할이 본질적으로 다르기 때문입니다.

    이 일을 진행하는 사람이 그냥 선지자의 제자입니다.
    당시 북왕국은 여호와가 아닌 우상을 섬기고 있어 엘리야와 엘리사 조차도 생명을 보장할 수 없는 상황인데 새로운 왕을 세우는 일을 전혀 비중이 없고 영향력이 없는 사람, 이름조차도 알려지지 않은 사람이 진행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역은 하나님이 행하실 것이기에 세우는 사람이나 세움받는 사람에게 초점이 맞추어져 있지 않습니다.

    위대한 선지자가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무엘의 경우 사울에게 기름을 붓는 것은 중요한 역할이 아니라 하나님을 버리는 일이기에 매우 하기 싫은 역할이었고, 다윗에게 왕으로 기름을 붓는 것은 사울에게 알려지면 죽을 지도 모르는 매우 위험한 역할이었습니다. 북왕국의 여로보암 왕을 기름부은 것도 매우 평범한 아히야 선지자였습니다. 이스라엘이 역사이래 최초로 민족이 분열되고, 지파가 붕괴되고, 나라가 갈라지는 엄청난 순간에 지명도도 없고 존재감도 없고 영향력도 없는 그냥 어떤 선지자에 불과한 아히야가 이 일을 감당했습니다. 이게 성경의 방식입니다.

    새로운 왕으로 세워지는 사람이 예후인데 예후가 어떤 사람인가를 파악할 때 왕으로 세워질 정도의 사람이라면 무엇인가 독특성이 있고, 가능성이 있고, 남들과 다른 우월한 것이 있었다고 생각하시면 안 됩니다. 예후는 그냥 매우 평범한 장수 중의 한 사람입니다. 2절에 ‘님시의 손자 여호사밧의 아들’이라고 소개가 되지만 실제로는 님시가 누구인지, 그의 아들이 누구인지, 그의 손자 여호사밧이 누구인지 모릅니다. 5절에 의하면 전쟁터에 군대장관들이 모여 있는데 예후는 유일한 장군도, 뛰어난 장군도, 대장군도 아니고 그냥 여러 군대장관들 중에 하나입니다. 11절에 장수들 간의 대화가 소개되고 있는데 정황으로 볼 때 예후가 대표가 아닙니다. 만약 예후가 높은 사람이었다면 아랫사람들이 높은 사람에게 발생한 일에 대해 묻기가 쉽지 않았을 것이고, 더군다나 질문한 사람들의 표현이 매우 거친 것으로 보아서 예후는 그들 중에 하급 장교인 것이 분명해 보입니다. 상황을 정리해보면 매우 평범한 선지자의 제자 중 한 사람이 매우 평범한 장군 중의 한 사람에게 기름을 부어 왕으로 삼은 것입니다. 하나님은 준비된 사람을 고른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예비 된 사람을 선택한 것이 아닙니다. 이것이 성경의 방식입니다.

     

    3. 예후는 왕이라

    예후가 왕으로 세움을 받자 조금 전까지 자신들의 동료 또는 자신들의 부하였는데 갑자기 태도가 돌변하여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예후를 높이고 스스로 자기들을 낮추었습니다.
    저들에게 왕은 권세요, 신이 선택한 사람, 신이 점지한 사람을 의미했기 때문입니다.
    근본적으로 하나님의 백성이요, 이스라엘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오랜 세월 하나님의 기준과 원리대신 이방적 기준과 원리, 세상적 기준과 원리, 죄의 기준과 원리를 따라 생활했기에 ‘여호와가 왕으로 세운다’고 함에도 불구하고 여호와의 기준과 원리를 생각하는 것이 아닙니다.
    여호와가 어떤 사람을 왕으로 세우는지, 여호와가 세운 왕의 위치가 어떠한지, 여호와가 세운 왕의 역할이 무엇인지 도무지 생각하지 않습니다. 오직 죄의 기준으로만 생각하고 반응하고 행동합니다.

    다윗의 경우 하나님은 다윗이 아무 공로도 없을 때에, 집안에서 부모나 형제에게도 인정을 받지 못할 때에,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전혀 알려지지 않았을 때에 왕으로 세우셨습니다.
    분명히 하나님이 선지자 사무엘을 통해 기름을 부었지만 기름부름을 받은 이후에도 다윗은 가족들이나 백성들에게 인정을 받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다윗이 골리앗을 물리치자 사울부터 백성까지 다윗에 대한 반응이 달라집니다.
    당장 사울의 군대에 차출되어서 왕의 무기를 담당하는 부관이 됩니다.
    후에 전쟁에 나가서 연전연승하자 사울은 군대 장관으로 삼고, 백성들은 ‘다윗은 만만이로다’ 칭송을 합니다.
    백성들의 관점에서, 다윗은 하나님이 기름을 부었기에 왕이 된 것이 아니라 공로를 세웠기에 왕이 된 것입니다.
    백성들에게는 하나님이 불렀다, 하나님이 세웠다, 하나님이 기름부었다는 것이 아무 소용이 없고 의미가 없었던 것입니다.
    다윗을 도우신 하나님을 본 것이 아니라 단지 다윗이 행한 업적만 본 것입니다.
    이것이 죄인들의 방식입니다.
    하나님께 쓰임받는 사람은 자신이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세워주셨다는 것을 인정하고, 하나님이 행하시는 위대한 사역에 내가 동참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 하나님의 사역을 현장에서, 직접 본인이 경험하고 있다는 사실에 감격하고 감사하는 것이 옳습니다.

    사람의 방식과 하나님의 방식
    사람의 방식은 그 사람이 무엇을 행하였는가에 관심을 갖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방식은 그 사람이 누구를 통하여 무엇을 하였는가에 촛점을 맞춥니다.

     








    여호람

    1. 여호람, 그는 누구인가요?

    여호람은 남 유다의 5대 왕으로, 아버지 여호사밧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올랐어요.
    열왕기하 8장 16절에 따르면, 그는 여호사밧이 아직 살아계실 때 공동 통치를 시작했는데, 이는 당시 정치적 안정성을 유지하려는 흔한 방식이었죠. 여호람은 32세에 왕이 되어 8년간 통치했어요(열왕기하 8:17). 이름 뜻이 “여호와께서 높이시다”라는 뜻이라니, 뭔가 기대감이 생기죠? 하지만 이 이름과는 달리 그의 행적은 그리 빛나지 않았답니다.

    ​여호람의 이야기는 북 이스라엘의 동명 왕 여호람(아합의 아들)과 혼동되기도 하는데, 오늘 다룰 여호람은 남 유다의 왕이에요. 이 점 꼭 기억해 주세요!

    2. 아합 가문과의 위험한 결혼

    여호람의 통치에서 가장 눈에 띄는 사건은 바로 그의 결혼이에요. 그는 북 이스라엘의 악명 높은 왕 아합의 딸 아달랴와 결혼했어요(열왕기하 8:18). 이 결혼은 단순한 사랑 이야기가 아니라 정치적 동맹의 산물이었죠. 문제는 이 결혼이 여호람과 유다 백성에게 엄청난 비극을 불러왔다는 거예요.

    ​아합 가문은 바알 숭배로 악명 높았는데, 아달랴를 통해 이 우상 숭배가 남 유다에까지 스며들었어요. 열왕기하 8장 18절은 이렇게 말해요: “여호람이 이스라엘 왕들의 길로 행하되 아합의 집과 같이 하였으니 이는 아합의 딸이 그의 아내가 되었음이라.” 쉽게 말해, 여호람은 아버지 여호사밧의 신앙심 깊은 길을 버리고 아합 가문의 타락한 풍습을 따랐다는 거죠. 이 선택이 그의 운명을 어둡게 만들었어요.

    3. 백성의 믿음을 배신한 왕

    여호람은 유다 왕으로서 여호와를 섬기기보단 우상 숭배에 빠졌어요. 이건 단순한 개인적 실수가 아니었어요. 왕의 결정은 백성 전체에 영향을 미치니까요. 열왕기하 8장 18절은 *“그가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하였다”*고 단호하게 기록하고 있어요. 아버지 여호사밧은 여호와께 충실한 왕으로 칭송받았는데, 아들 여호람은 정반대의 길을 걸었죠.

    ​흥미로운 건, 하나님께서 여호람을 즉시 벌하지 않으셨다는 점이에요. 열왕기하 8장 19절에 보면, *“여호와께서 그 종 다윗을 위하여 유다를 멸하시지 아니하셨다”*고 나와요. 다윗과의 언약 때문에 유다가 망하지 않은 거예요. 이 부분 읽으면서 여호람이 얼마나 큰 은혜 속에 있었는지 새삼 느끼게 되더라고요.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세요?

    4. 반역과 전쟁, 흔들리는 왕권

    여호람의 통치는 외부적으로도 위태로웠어요. 열왕기하 8장 20절부터 22절에 따르면, 그의 시대에 에돔이 유다의 지배에서 벗어나 반역했고, 립나라는 성읍도 독립을 선언했어요. 에돔과의 전투에서 여호람은 직접 군대를 이끌고 나섰지만, 밤에 적군에게 포위당한 상황에서 간신히 빠져나왔을 뿐 큰 승리를 거두지 못했어요. 이 사건은 그의 리더십이 얼마나 약했는지를 보여줘요.

    ​당시 유다는 북 이스라엘과 달리 비교적 안정적이었는데, 여호람의 실정으로 이런 기반마저 흔들리기 시작했죠. 백성들은 과연 어떤 마음이었을까요? 왕이 믿음을 저버리고 나라까지 위태롭게 하니 실망이 컸을 거예요.

    5. 비참한 최후와 그 뒤

    여호람의 마지막은 참담했어요. 열왕기하 8장 23절과 24절에 따르면, 그는 8년간 통치한 뒤 죽었고, *“그 백성이 장사한 후에 다윗 성에 장사되었으나 열조의 묘실에는 들어가지 못하더라”*고 나와요. 이게 무슨 뜻일까요? 당시 왕들은 보통 조상의 묘실에 안장되는 영예를 누렸는데, 여호람은 그 자격을 잃은 거예요. 백성들에게조차 인정받지 못한 왕으로 기억된 거죠.

    ​더 충격적인 건, 그의 죽음 뒤에 아들 아하시야가 왕이 되었지만, 어머니 아달랴의 영향으로 유다는 더 큰 혼란에 빠졌다는 점이에요. 여호람의 선택이 대를 이어 비극을 낳은 셈이죠.

    맺음말 : 여호람에게서 배울 교훈

    여호람의 이야기는 화려한 영웅담이 아니라 실패와 경고의 기록이에요. 그는 좋은 환경에서 시작했지만 잘못된 선택으로 자신과 나라를 망쳤죠. 특히 아합 가문과의 결혼은 단순한 정치적 결정이 아니라 신앙의 배신이었어요. 우리 삶에서도 선택의 중요성을 다시 생각하게 되네요.

    여호람, 아달랴, 요아스, 웃시야, 아하스

    여호람 (정략결혼을 한 남유다 제5대 왕)
     
    1. 인적 사항
    ① 여호람은 ‘여호와는 존귀하시다’라는 뜻. 
    ② 여호사밧의 아들로 (요람)(왕하 8:16).
    ③ 아합의 딸 아달랴와 결혼(대하 21:6).  
    ④ 남유다 제5대 왕으로 8년간 통치(대하21:5).
     
    2. 시대적 배경
      B.C.848-841년까지 통치, 북이스라엘 왕 요람과 동시대의 인물이다. 여호람은 선왕 여호사밧이 아합과 맺은 경혼 동맹의 제물이 된 자로서 아합의 딸 아달랴와 결혼하였다. 이 결과 여호람 당시 남왕국 유다는 북이스라엘과 밀접한 동맹을, 혈연관계에 있게 되었고 또 북왕국의 바알 종교도 들어오게 되었다. 이 당시의 국제 상황은 여호사밧 때와 유사하다.
     
    3. 주요 생애
     출생
            ―
           ―
     아합의 딸 아달랴와 결혼
            ―
      대하 21:6
     반대 세력 제거
      B.C. 848 년
      대하 21:4
     에돔과 림나의 반역
      B.C. 845 년
      대하 21:8
     우상 숭배 조장
            ―
      대하 21:11
     블레셋과 아라비아의 침입
      B.C. 842 년
      대하 21:16,17
     창자의 중병으로 사망
      B.C. 841 년
      대하 21:18-20
     
    4. 성품
    ① 등극 후 세력 강화를 위해 잠재적인 반대 세력이라고 판단되는 모든 아우와 방백 몇 사람을 살해한 것을 볼 때 잔인하고 정권욕이 강한 자(대하 21:4).
    ② 속국들이 독립하고, 또 블레셋과 아라비아의 침입을 받은 것으로 보아 통치력이 부족한 자(대하 21:10,16,17).
    ③ 아내의 사주를 받아 바알을 숭배하며 악정을 행할 만큼 신앙이 유약하고 주관이 없는 자(대하 21:6, 11).
     
    5. 구속사적 지위
      아내 아달랴로 인해 남유다를 바알 종교로 물들여 놓은 자.
     
    6. 평가 및 교훈
    ① 여호람은 선왕 여호사밧의 신실함을 본받지 못하고 폭정을 가하며, 우상을 숭배함으로 하나님의 심판을 면치 못했다. 이는 아무리 부모의 신앙이 신실하다 해도 자신의 신앙은 스스로의 경건에 대한 훈련에 좌우됨을 증거 한다.
     
    ② 여호람의 모든 악행의 원인은 수상숭배자인 아내를 맞이했기 때문이다. 이는 성도가 배우자를 선택함에 있어서 얼마나 신중해야 하는가를 교훈 하는 것이다.
     
    ③ 여호람은 다윗의 자손임에도 불고하고 우상 숭배로 일관하며 선지자의 경고조차도 무시했다. 그러나 이러한 여호람은 중병에 걸려 죽고, 또 열왕의 묘실에 묻히지도 못하는 비참한 종말을 맞이했다. 이는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하는 불신자의 종말이 어떠한가를 잘 보여준다.   
     
    7. 핵심 성구
      “저가 이스라엘 왕들의 길로 행하여 아합의 집과 같이하였으니 이는 아합의 딸이 그 아내가 되었음이라”(대하 21:6).

     

     

    87-아달랴 (왕위를 찬탈한 남유다 제7대 왕)
     
    1. 인정 사항
    ① 아달랴는 ‘여호와는 위대하시다’라는 뜻. 
    ② 아합과 이세벨의 딸. 오므리 왕의 손녀.
    ③ 남유다 제5대 왕 여호람의 아내, 아하시야 모친.
    ④ 유다 열왕 중 유일한 여왕(대하 22:12).
     
    2. 시대적 배경
      B.C.841-835년까지 통치, 북이스라엘 왕 예후와 동시대의 인물이다. 정략결혼에 의해 다윗 가문으로 시집 온 아합의 딸로서 한동안 북왕국과 밀접한 관계에 있었다. 그러나 예후의 반역으로 인해 아달랴의 친정 가문인 아합 가문이 몰락하게 됨으로써 아달랴는 북왕국과의 관계를 단절하였다. 한편 이 시기는 아람이 세력 확장을 위하여 계속해서 남․북 왕국을 침입해 오던 시기이다.
     
    3. 주요 생애
     출생
            ―
            ―
     여호람과 결혼
            ―
      왕하 8:16,17
     남편의 우상 숭배 조장
            ―
      대하 21:6
     남편의 죽음
       B.C. 841 년
      대하 21:19
     아들의 우상 숭배 조장
            ―
      대하 22:3
     아들의 죽음
       B.C. 841 년
      대하 22:9
     다윗 왕가의 자손 진멸
       B.C. 841 년
      왕하 11:1
     6년간 통치
            ―
      왕하 11;3
     여호야다의 혁명에 의해 살해됨
       B.C. 835 년
      왕하 11:14-16
     
    4. 성품
    ① 남편을 충동하여 우상을 숭배케 하고 악정을 하게 할만큼 사악한 자(대하 21:6).
    ② 다윗 왕가로 시집왔으나 친정의 교훈대로 아들을 양육한 것으로 보아 주관이 뚜렷하고 고집이 센 자(대하 22:3.4).
    ③ 아들의 통치 기간 중 섭정을 행하고 아들이 죽자 왕위를 차지하기 위해 학살을 자행할 만큼 잔인하고, 권력욕이 강한 자(왕하 11:1).
    ④ 6년 동안 외세의 간섭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왕좌를 지킨 것을 볼 때 정치적 역량이 뛰어 났던 자(대하 22:12).
     
    5. 구속사적 지위
    ① 여호람 당시 남왕국 유다에 바알 종교를 들여온 결정적인 자.   
    ② 다윗 가문의 씨를 진멸하려 함으로써 다윗 가문을 통한 하나님의 구속계획을 방해하려 한자(대하 22:10,11).
    ③ 남왕국 유다 역사상 유일한 여왕(대하 22:12).
     
    6. 평가 및 교훈
    ① 사악한 아달랴의 비참한 최후는 악인은 그 심은 행위대로 열매를 거두게 됨을 깨닫게 된다(갈 6:8).
    ② 다윗 가문으로 시집 온 아달랴가 유다 왕국을 바알 종교로 물들이며, 또 다윗 가문을 진멸하려 한 사실은, 믿지 않는 자와 멍에를 함께 하는 것이 자신과 후손에게 불행을 가져다 줄 뿐만 아니라 신앙생활에도 큰 장애가 됨을 보여준다(고후 6:14).

     



    유대인의 생각공부

    부자하면 떠오르는 민족이 있는데 바로 유대인이다.
    로스차일드가문부터 워렌버핏, 스티븐 스필버그까지 수많은 유대인들은 자본주의 철학에 영향을 끼쳤다.
    독일 경제학자 베르너 좀바르트는 "유대인들이 북반구에 분산 이주하지 않았다면 근대자본주의는 발생하지 않았다."고 했다.
    조그마한 동네가게에서 부터 거대 재벌에 이르기 까지 그들은 어떻게 세계 경제를 좌지우지 하게 되었을까?
    그 비밀과 그들의 사고방식을 생각해보자.

    ​첫째, 생각공부

    유대인은 말한다.
    경제적 자유를 찾는 첫걸음은 생각이다.
    여기서 생각이란 적극적인 자세, 다시 말해 사물이나 생활을 바람직한 방향으로 이끄는 긍정적인 생각을 말한다.

    당신이 누구든 나이가 몇살이든 지금 어떤 상황이든 학력이든 아무 문제도 되지 않는다.
    그들은 오직 한 가지 적극적으로 생각하면 돈을 벌어 가난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믿는다.
    그래서 다수의 사람들과 달리 부자가 되는 목표를 먼 미래로 설정하지 않고 적극적으로 사고를 확장하며 진지하며 능동적으로 자신의 주변에 있는 작은 일부터 실행에 옮겼다.
    유대인들은 하나의 사고에만 갇혀있지 않는다.
    틀에 얽매이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둘째, 알파와 오메가 전술

    유대상인들을 언급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속성은 알파와 오메가 전술이다.
    처음(알파)과 끝(오메가)를 모두 소유한다는 뜻이다.
    가령 A와 B가 경쟁한다고 할 때 유대인은 둘 중 하나를 선택하지 않는다.
    둘 다에게 투자하면서 둘 다로 부터 이익을 얻어낸다.
    지금도 유대인들은 석유관련 자본을 소유하면서 동시에 전기차 회사나 대체 에너지 기업에도 투자한다.
    그들은 어떤 싸움에서든지 항상 돈을 벌수 밖에 구조를 만드는데 능하다.

    ​셋째, 보이지 않는 지식

    봉이 김선달이 대동강 물을 팔았다면, 유대인은 눈에 보이지 않는 지식을 팔았다.
    실제로 탈무드에는 음악과 미술같은 지적인 활동이 금전보다 가치가 더 있다고 말한다.
    이들은 형태가 없는 일은 경쟁자가 적어 비교적 쉽게 비지니스를 확립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예컨데 월스트리트를 위시한 세계금융산업은 사실상 유대인의 손아귀에 있고 아이티 산업에서도 구글, 페이스북, 오라클 등 선두 기업 창업자 역시 모두가 유대인이다.
    영화산업은 아예 유대인에 의해 태동되었으며 할리우드 제작자 대부분이 유대인이다.
    이외에도 법률, 의료, 서비스 산업 대부분을 유대인이 주도하고 있다.

    ​넷째, 디테일이 성패를 결정한다

    '스놈'이라는 유대인이 금방이라도 망할 것 같은 백화점을 헐값에 사들였다.
    사람들은 그를 매우 어리석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모두의 예상을 뒤엎고 불과 3년만에 업계의 다크호스로 떠올랐다.
    과연 그가 어떻게 했길래 이런 폭풍적인 성장이 가능했을까?
    스놈은 백화점을 인수하고 나서 백화점의 쓰레기통을 뒤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고객들이 버린 영수증을 모아 어떤 상품이 인기가 있는지, 추가 구매하는 물품은 어떤 것들인지 분석하기 시작했다.
    이를 통해 고객들의 소비심리와 구매양상을 파악하여 백화점을 정상화하는데 걸리는 시간과 노력을 줄일 수 있었다.
    유대인은 작은 변화와 디테일이 만나면 엄청난 차이를 만들어 낸다고 말한다.

    다섯째, 1과 250법칙

    1과 250법칙은 고객 한명을 만족시키면 그 한명의 고객이 새로운 고객 250명을 데려올 수 있다는 의미이다.
    반면로 고객 한명을 화나게 하면 잠재 고객 250명이 달아날 수도 있다는 법칙이다.
    고객이 훌륭한 제품이나 서비스를 제공받으면 고객은 당신을 좋아하게 되고 어디를 가든 당신의 제품과 서비스를 홍보할 것이다.
    당연히 좋은 입소문을 널리 퍼지게 될 것이다.
    따라서 고객 한 사람을 단순한 판매대상이 아닌 250명의 고객으로 여겨야 한다.
    유대인은 언제 어디서나 서비스 제일주의, 진정성이 생명이라는 교훈을 되세기며 단골고객이 자신을 믿을 수 있게 만드는 전략을 사용해왔다.

    ​여섯째, 윈윈전략

    유대인은 사업이란 한 가족만 하는 것이 아니며 서로 돕고 서로 이익을 도모해야 자신의 부가 점점 늘어난다고 생각한다.
    이들은 악성 경쟁으로 인한 피해를 없애거나 최소화하기 위해 경쟁상황을 교묘하게 조정함으로써 양측 모두 이익을 얻는 윈윈 전략을 실현한다.
    이후 양적으로나 질적으로 한단계 높은 협력을 하게 되어 더 많은 부를 축적하게 된다.

    ​일곱째, 부정적인 감정을 다스려라

    부정적인 감정은 그 사람을 고통스럽게 할 뿐 긍정적인 변화를 거의 일으키지 못한다.
    부를 획득한 유대인은 결코 부정적인 감정에 휘말리지 않는다.
    부정적인 때문에 일을 그르치거나 쓸데없이 힘을 낭비하지 않는다.
    마지막에 웃는 사람이 승자라는 마인드로 자신과 상대방을 격려한다.
    세상은 주로 긍정주의, 낙관주의자들이 승리한다.


    여로보암 / 벧엘, 단에 우상을 세우고 이곳에서 제사를 드려야 한다

    단(Dan), 벧엘(Bethel), 종교의 중심지- 벧엘

    단(Dan) :

    야곱의 다섯 번째 아들이며 라헬의 종 빌하의 아들이다(창 35:25).
    납달리의 친형이었으며 성경의 여러 곳에 그와 함께 이름이 나타난다(창 35:25; 46:23; 출 1:4등).
    단은 이스라엘의 12지파 가운데 하나인 단 지파의 시조가 되었으며 오홀리압과 삼손은 단 지파 출신이다(출 31:6; 삿 13:2, 24).

    지명 :
    남쪽으로 유다, 서쪽으로 지중해, 북쪽으로 에브라임, 동쪽으로 베냐민의 땅과 경계를 이루는 지역이 단 지파에게 분배된 땅이다(수 19:40-46).
    그러나 이곳에는 강력한 아모리인들이 살고 있어서 단 지파는 이곳의 골짜기를 차지하지 못하고 산지로 쫓겨났다(삿 1:34-35).
    후에 단 지파가 북쪽으로 이동하여 취한 레센(라이스) 땅이 그들 조상의 이름을 따라 단 지파의 땅이 되었다(수 19:47. 삿 18장).

    여로보암 1세가 이곳에 금송아지를 세우므로 단은 우상숭배를 위한 장소가 되었다(왕상 12:25-33).
    ‘단으로부터 브엘세바까지’라는 말의 의미: ‘단에서 브엘세바까지’라는 관용구는 구약의 여러 곳에서 사용되었다(삿 20:1; 삼상 3:20; 삼하 3:10; 17:11; 24:2, 15; 왕상 4:25; 대상 21:2; 대하 30:5).
    이것은 이스라엘의 북에서 남까지의 전 지역을 묘사하며 이스라엘 최장 길이를 표시한다.


    벧엘(Bethel) :

    예루살렘 북쪽, 실로 북쪽(삿 21;19), 아이 서쪽(수 7:2), 라마 북쪽(삿 4:5)에 위치한 곳으로 현재의 ‘베이틴’(Beitin)으로 본다.
    갈대아 우르를 떠나 가나안에 들어온 아브라함은 벧엘 동편 산에 도착하여 제단을 쌓았다(창 12:8).
    이곳의 원래 이름은 ‘루스’였는데(창 28:19; 삿 1:23) 에서를 피해 밧단아람으로 도망가던 야곱이 자신과 함께하시는 하나님을 만나 그곳 이름을 ‘벧엘’, 즉 ‘하나님의 집’이라 칭하였다(창 28:10-22).

    후에 야곱은 밧단아람에서 가나안으로 돌아오는 길에 하나님의 지시를 받고 이곳에 와서 제단을 쌓고 ‘엘벧엘’이라 불렀다(창 35:1-7).
    야곱은 여기서 하나님으로부터 ‘이스라엘’이라는 새 이름과 조상들에게 하신 언약을 재확인받았다(창 35:9-15).
    한편 리브가의 유모 드보라가 죽어 묻힌 곳도 이곳 상수리 나무 아래이다(창 35:8).
    벧엘은 이스라엘이 가나안에 들어간 초기에는 베냐민 지파에게 분배된 곳이었으나(수 18:22) 후에는 에브라임 지파의 영토가 되었다(삿 4:5; 대상 7:28). 분열 왕국 시대에는 북이스라엘의 영토였으나 유다 왕 아비야가 이곳을 공략하여 유다의 영토로 편입되었고(대하 13:19) 바벨론에서 돌아온 뒤에는 베냐민 지파가 이곳에 거주하였다(스 2:28; 느 7:32; 11:31).

    신약 성경에는 이곳에 대한 기록을 찾아볼 수가 없다. 마카베오서에 의하면 마카베오 왕조 때 이곳이 번창했으며 로마의 베스파시아누스가 황제가 되기 전 마지막으로 정복한 곳이 이곳이라고 한다.

    성경 속의 또 다른 벧엘: 시므온 지파에게 할당되었던 성읍으로 ‘브두엘’(대상 4:30), ‘브돌’(수 19:4)이라고도 하였다. 다윗이 시글락 전투에서 탈취한 전리품을 이곳에 거주하는 장로들에게 선물로 보냈다(삼상 30:27).


    종교의 중심지, 벧엘

    사사 시대 이후로 이곳은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종교적인 구심점 역할을 한 곳이었다.
    이곳에 하나님의 법궤가 있었고(삿 20:27)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뜻을 묻기 위해 이곳에 올라와(삿 20:18) 번제와 화목제를 드렸다(삿 20:26; 21:4).
    사무엘이 이스라엘을 다스리기 위해 순회하던 세 곳 가운데 한 곳일 정도로 중요한 곳이었다(삼상 7:16).
    또한 선지자의 생도들이 이곳에 있었으며(왕하 2:3) 엘리야가 승천하기 전 이곳에 들렀다(왕하 2:2).
    그러나 여로보암 이후 벧엘은 우상숭배의 본거지가 되었다(렘 48:13).
    여로보암은 이곳에 금송아지를 세워 섬기게 하여 이스라엘 사람들을 우상숭배의 죄에 빠지게 하였다(왕상 12:28-29).
    북이스라엘의 제일 큰 성소가 되게 하였다(암 7:10).
    예후도 이곳에서 금송아지 섬기는 것을 계속하였다(왕하 10:29).
    이 때문에 벧엘은 아모스나 호세아 같은 선지자에게서 멸망에 대한 선포를 들었다(호 4:15. 암 3:14).
    호세아가 이곳을 ‘우상의 집’이란 뜻의 ‘벧아웬’이라고 칭한 데서(호 10:5) 이곳에서의 우상 숭배가 얼마나 극심했는지를 충분히 짐작하게 한다.
    요시아 왕 때 요시아의 종교개혁으로 이곳에 있던 우상 숭배의 제단이 파괴되었다(왕하 23:15).


    4월 25일(금) 열왕기하 5-7장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내 생각에는(5:11)

    나아만이 노하여 물러가며 가로되 내 생각에는 저가 내게로 나아와 서서 그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고 당처 위에 을 흔들어 문둥병을 고칠까 하였도다.
    But Naaman went away angry and said, "I thought that he would surely come out to me and stand and call on the name of the LORD his God, wave his hand over the spot and cure me of my leprosy.

    누가복음 5:5
    시몬이 대답하여 가로되 선생이여 우리들이 밤이 맞도록 수고를 하였으되 얻은 것이 없지마는 말씀에 의지하여 내가 그물을 내리리이다.

    노련한 어부 베드로와 목공의 일에 익숙한 예수
    물고기를 잡는 방법은 베드로가 전문가이었지만 자기 생각과 경험 및 판단을 포기하고 말씀에 의지할 때 나타난 결과는 이제까지 잡아볼 수 없었던 어획량을 경험하는 것이었다.

    늙은 젊은이


    1967년에 캐나다의 리키 갤런트라는 아이가 ‘프로제리아’란 병으로 죽었습니다.
    이 병은 나이는 어리지만 노쇠, 동맥경화, 탈모, 근육이완,주름살 등 노인의 육체적 증세가 나타나는 조로증세를 나타냅니다.
    이 아이는 당시 11세였지만 신체는 90세 된 노인이었던 것입니다.
    생물학적인 나이만 가지고 늙었다거나 젊었다고 하기 어렵습니다.
    이 세상에는 젊은 늙은이가 있고 늙은 젊은이가 있습니다.
    맥아더 장군은 “청년이란 생의 어떤 기간이 아니라 마음의 상태에 의해 결정된다.
    붉은 뺨이나 입술이 아니라 굳센 의지, 상상, 감정, 생명력에 달렸다.
    청년은 용기로 비겁을 이기며 모험으로 앞일을 안다”고 하였습니다.
    우리의 사고나 신앙이나 생활이 젊음의 상태를 유지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육체적 젊은이로서 뿐만 아니라 정신적,영적으로 젊은이가 되기를 바랍니다.

    골로새서 3:2
    위엣 것을 생각하고 땅엣 것을 생각지 말라.

    두 수도승이 순례길을 가다가 강을 만나게 되었다.
    그들이 강둑에 이르렀을 때 한 여성이 아름다운 옷을 차려입은 채 서 있었다.
    그녀는 혼자서 강을 건너자니 두렵기도 하고, 옷을 벗고 건널 수도 없어서 그렇게 서성거리고 있는게 분명했다.
    고민할 필요도 없이 한 수도승이 그녀를 업고 건너편 강둑까지 데려다 주었다.
    강둑에 여성을 내려놓고 두 수도승은 발걸음을 재촉했다.
    그런데 한 시간쯤 지났을 때, 다른 수도승이 비난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여자의 몸에 손을 대는 것은 분명히 옳지 않은 일이오.
    그것은 계율을 어기는 행동이오.
    어떻게 수도승의 몸으로 그런 불륜스런 행동을 할 수 있소? "
    여성을 업어 강을 건너다 준 수도승은 말없이 듣고 있다가 마침내 동료 수도승을 돌아보며 말했다.
    " 난 그 여성을 한 시간 전에 강둑에 내려 놓았다.
    그런데 왜 형제는 아직도 그녀를 등에 업고 있소?




    두 수도승이 순례길을 가다가 강을 만나게 되었다. 그들이 강둑에 이르렀을 때 한 여성이 아름다운 옷을 차려입은 채 서 있었다. 그녀는 혼자서 강을 건너자니 두렵기도 하고, 옷을 벗고 건널 수도 없어서 그렇게 서성거리고 있는게 분명했다. 고민할 필요도 없이 한 수도승이 그녀를 업고 건너편 강둑까지 데려다 주었다. 강둑에 여성을 내려놓고 두 수도승은 발걸음을 재촉했다. 그런데 한 시간쯤 지났을 때, 다른 수도승이 비난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 여자의 몸에 손을 대는 것은 분명히 옳지 않은 일이오. 그것은 계율을 어기는 행동이오. 어떻게 수도승의 몸으로 그런 불륜스런 행동을 할 수 있소? "
    여성을 업어 강을 건너다 준 수도승은 말없이 듣고 있다가 마침내 동료 수도승을 돌아보며 말했다.
    " 난 그 여성을 한 시간 전에 강둑에 내려 놓았다. 그런데 왜 형제는 아직도 그녀를 등에 업고 있소?


    내 생각에는(I thought) in my opinion

    어떤 낚시꾼이 낚시를 하는데 큰고기는 걸러내고 작은 고기만 바구니에 담더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는 것은 모든 낚시꾼들이 하는 것과는 반대로 하는 것입니다.
    작은 것은 놓아주고 보다 더 큰 것을 바구니에 담는 것이 상식이며 낚시법입니다.
    그래서 하도 이상해서 왜 그렇게 하느냐고 물었더니 "우리집 고기를 굽는 후라이팬이 15인치 밖에 안되서 후라이팬 안에들어가는 고기만 바구니에 담는다"는 것이었습니다.
    후라이팬의 크기만 생각할 줄 알았지 고기를 토막내서 굽는 것은 생각하지 못한 것입니다.
    사람이 생각이 부족하면, 생각이 막혀 있으면 손발이 고생하고 육체가 고생하게 되어 있습니다.

    사람은 다른 동물들과는 달리 생각을 하면서 사는 존재입니다.
    사람의 생각은 그 사람됨을 결정하는 중요한 요소입니다.
    무엇을 골똘히 생각하고 사느냐가 그의 인생을 결정하며 그의 미래를 결정하며 영생을 결정하는 것입니다.
    하루 중에 무엇을 가장 골똘히 생각하며 사십니까?
    그것이 여러분의 인생인 것입니다.

    "생각을 심으면 행동을 거두고,
    행동을 심으면 습관을 거두고,
    습관을 심으면 인격을 거두고 인격을 심으면 운명을 거둔다"는 말이 있습니다.

    사람의 운명이 어떻게 되느냐 하는 것은 그 사람의 생각에서부터 출발을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현대를 살아가는 많은 사람들이 모든 만사를 자기 위주로 생각하고 자기 고집만 내세우고 옛패러다임과 고정관념에 사로잡혀 살아 가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내 생각을 버리고 다른 사람의 생각을 존중하고 내 생각을 버리고 나보다 더 나은 이의 생각을 받아들여야 할 터인데 그렇지 못한 사람들이 너무나도 많아서 문제가 되는 것 같습니다. 

    문둥병에 걸린 아람의 나아만 장군도 "내 생각에는" 하면서 자기 생각에 갖혀있었습니다.
    "내 생각에는 이러이러 해야 한다"이러한 사고의 틀은 영적인 한계가 되고 영적인 경계가 되어 믿음의 기적을 일으키는데 장애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한 내 생각을 깨트리고 주님의 말씀을 받아들일 때 기적이 일어나게 됩니다.

    "특별한 의식을 통하여 고쳐줄줄 알았는데"라고 생각했습니다.

    나아만이 엘리사 선지자로부터 "요단강에 몸을 일곱번 씻으라"는 말을 전해듣게 되었을 때에 그는 "내 생각에는 저가 내게로 나아와 서서 그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고 당처 위에 손을 흔들어 문둥병을 고칠까 하였도다"라고 했습니다.
    자신의 신분과 위엄에 걸맞는 정결케 하는 거창한 의식을 기대했습니다.
    그는 아직도 체면을 따지고 신분을 따지고 형식을 따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는 선지자를 통해서 무엇인가 대단하고 거창한 의식을 행함으로써 자신의 병이 나을 줄 생각을 한 것입니다.
    무당 푸닥거리하는 식에 무슨 의식을 행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러한 기대는 오늘 우리 그리스도인들도 쉽게 빠질 수 있는 믿음의 과오입니다.

    나아만이 "자기 생각"에 사로잡혀 있을 때 노하여 물러가려는 일을 하려했습니다.
    분이 일어났습니다.
    그러나 믿음은 내 생각을 버리고 하나님의 말씀에 나를 맡기는 것입니다. 

    나아만은 자신의 병이 믿음으로 고쳐진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했습니다.
    믿음의 역사는 자신이 하나님의 능력을 온전히 믿을 때 일어나는 것입니다.
    선지자는 그것을 알게 해 주고 전해주고 도와주는 것일 뿐입니다.

    "아람에는 더 맑고 더 큰 강이 있거늘"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나아만이 생각할 때 요단강물보다 더 나은 물이 다메섹의 아마나와 바르발 강에 흐르고 있었습니다.
    다메섹의 강이 이스라엘의 모든 강물보다 더 깨끗하였던 것입니다.
    그래서 나아만은 "내가 거기서 몸을 씻으면 깨끗하게 되지 아니하랴"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를 치료한 것은 팔레스틴에 있는 요단강이냐 아니면 다메섹의 아마나와 바르발 강이냐하는 것에 있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그 강물 자체의 맑고 더러움의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선지자를 통하여 선포된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 곧 거기에 능력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붙잡고 요단강물로 뛰어드는 믿음이 그를 치료한 것입니다.
    요단강물이 능력이 있는 것이 아니라 순종의 강, 겸손의 강에 들어가는 믿음이 능력을 일으키는 것입니다.

    "왜 하필이면 일곱번이어야 하느냐?"라고 생각했습니다.

    왜 하필이면 요단강 물이어야 하며 왜 하필이면 일곱번이어야 하느냐 하는 문제에 빠지는 것은 우리 인간들이 빠질 수 있는 어쩌면 당연한 생각일지 모르겠습니다만 이것은 허망한 생각인 것입니다.
    우리가 뚫고 넘어가지 아니하면 안될 견고한 우리의 불신앙과 의심의 성벽입니다.
    이러한 생각은  우리의 믿음의 과오를 부채질하는 것입니다. 믿음은 하나님 말씀대로 전적으로 순종하는 것입니다. 요단강물에 7번씩이나 들어갔다 나왔다는 하는 일을 반복하는 것은 쓸데 없것처럼 느껴지기도 할 것입니다. 그러나 이처럼 쓸데 없는 것처럼 느껴지는 것일지라도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서 계속적으로 하는 것이 믿음인 것입니다. 왜 한번이나 다섯번이나 여섯번이면 안되느냐는 자신의 생각을 이기고 7번씩이나 반복하여 그 강물에 뛰어들었을 때 치료의 역사가 나타났던 것입니다.

    나아만은 하마터면 좋은 기회를 놓칠뻔하였습니다.
    그는 일생일대에 가장 큰 과오를 범할 뻔 한 것입니다.
     
    신실한 그리스도인들도 때때로 "믿음의 과오"를 범할 때가 있습니다.
    주의 말씀보다도 오히려 내 생각에는, 혹은 내 소견에는 이러저러하다는 자기 주장에 사로잡힐 때가 있습니다.
    이처럼 인간의 마음 가운데서 발생하는 아주 뿌리 깊은 본성에 의해서 이 믿음의 과오가 발생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보게 된 나아만 장군의 문둥병 치유 이야기 가운데 나타나 있는 그 자신의 모습이 우리가 "빠지기 쉬운 믿음의 과오"가 어떤 것인가를 명백하게 보여주고 있는 좋은 실례라고 생각이 됩니다.

    이처럼 "내 생각에는 이러 저러하니"라는 이 무서운 믿음의 적을 이기셔야 합니다.
    이런 생각은 믿음에 있어서 거치는 돌이며 우리를 믿음에서 넘어지게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를 믿음의 과오로 몰아넣는 불신앙적이고 악마적이고 사탄적인 것입니다.
    하나님 말씀 앞에 겸손히 머리숙이기를 배우지 아니하면 안되는 것입니다.
    나아만은 "내 생각에는"하였던 것을 무너뜨렸습니다.
    하마터면 내 생각을 고집하다가 과오를 범할 뻔 했는데 그 종들의 충고를 받아들였습니다.
    그리고 엘리사가 전해준 처방전을 믿고 요단강으로 내려갔고 그리고 그곳에서 일곱번 몸을 잠그었습니다.
    이로 말미암아서 그의 문둥병은 고침을 받았는데 그의 육신이 어린아이의 것과 같이 부드러운 살결로 회복이 되었습니다.
    믿음은 이처럼 내 생각을 버리고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전적으로 신뢰하고 의지하는 것입니다.


    호모 사피엔스, 호모 파베르, 호모 루덴스

    문명사가인 호이징하(J. Houizinga)는 3가지 개념으로 정리한 바가 있다(J. Houizinga, 1993).
    인간의 생각하는 능력을 강조하는 호모 사피엔스(Homo spiens)
    무언가를 직접 만들고 제작하는 특성을 강조하는 호모 파베르(Home faber)
    인간이 즐길 줄 아는 특성, 그래서 놀이하는 특성을 가지고 있다는 데에 착안하여 부르는 호모 루덴스(Homo ludens)

    호이징하는 인류문명, 심지어 전쟁까지도 인간의 놀이본능에서 시작되는 것이라고 하는데, 이와 같은 지적은 이른바 ‘문화우위의 시대’로 가고 있는 현 시대의 인간을 정확하게 말하고 있는 듯 하다.

    사람은 동물들과는 달리 생각을 하면서 사는 존재입니다. 
    우리 인간들은 아무리 생각을 하지 않으려고 해도 끊임없이 생각을 하게 되어 있습니다. 
    멍하니 있는 것 같아도 분명 뭔가를 생각하고 있는 것이고, 잠을 잘 때에도 생각은 멈추지 않고 계속됩니다. 
    70억이 넘는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모두 다 쉬임없이 생각을 하고 있고, 저마다 생각이 전부 같지 않습니다. 
    어떤 사람은 이런 생각을 하기도 하고, 어떤 사람은 저런 생각을 하면서 각자의 생각대로 생각을 합니다. 

    사람마다 생각이 다르다는 것을 깨닫게 해주는 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맞벌이로 일하는 한 부부가 있었습니다. 
    보통은 아내가 먼저 집에 들어오고 남편이 늦게 퇴근을 했지만, 가끔씩은 아내가 늦게 귀가하는 일도 있었는데, 그날따라 아내는 회사에 일이 많아서 늦게 퇴근을 해서 집에 오게 되던 날이었습니다. 
    아내는 많은 업무로 인해 지친 몸이었지만, 그래도 집에 들어가면 남편이 반갑게 맞아주면서 편안하게 쉬게 될 것을 생각하면서 집으로 바쁜 걸음을 재촉했습니다. 
    한편, 집에서는 남편이 먼저 퇴근을 해서 아내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남편 역시 피곤한 몸으로 만사가 다 귀찮은 상태에서 아내가 집에 오면 자신의 필요를 채워줄 수 있을 거라고 생각을 하고 있었습니다.
    드디어 현관문이 열리고 아내가 들어왔습니다. 
    그러자, 남편은 아내를 따뜻하게 맞아주는 것이 아니라, 이제 금방 신발을 벗은 아내에게 대뜸 한다는 소리가 “여보, 나 커피 한 잔만!”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아내가 얼마나 지친 모습으로 들어왔는지는 보지도 않고, 남편은 TV만 보면서 커피나 달라고 재촉했습니다. 
    그러자, 아내는 화가 치밀어 올랐습니다. 
    힘들기는 서로 마찬가지인데 “힘들었지? 밥은 먹었어?”라고 다정하게 말은 못해 줄 망정, 커피 심부름이나 시키는 남편이 못마땅했습니다. 
    아내와 남편의 생각은 이렇게 달랐습니다. 
    아내는 남편이 반갑게 맞아주면서 편하게 쉴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고, 남편은 아내가 오면, 커피 한 잔 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을 했습니다. 
    한 이불을 덮고 자는 부부인데도 생각이 이렇게 달랐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됐을 것 같습니까? 
    1번 : 아내가 신발을 던지면서 대판 싸웠다. 
    2번 : 그날로 이혼 도장 찍었다. 
    3번 : 커피를 남편 머리에 갖다 부었다. 
    4번 : 사이좋게 커피 마셨다. 
    몇 번일 것 같습니까? 
    정답은 4번입니다.

    남편이 커피를 달라고 했을 때 화가 치밀어 올랐지만, 그 순간 하나님께서 아내에게 이런 생각을 주셨다고 합니다. 
    “그래. 남편이 나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기다리다보니까 나와 같이 커피 한 잔을 함께 마시고 싶었나 보다.” 
    그렇게 생각을 해보니까, 아내의 기분이 좋아졌습니다. 
    그래서, 그날 밤 부부는 행복한 커피 타임을 가질 수 있었다는 얘기가 전해지고 있습니다.

    굳이 이런 이야기를 말씀드리지 않더라도, 이와 비슷한 경우를 충분히 겪어보셨을 것입니다. 
    저도 저희 집사람과 생각의 차이를 느끼게 되는 일이 많이 있는데, 결혼 전에 처음 만나던 때에 어떤 일이 있었냐면, 제가 옷이 그렇게 많지가 않습니다. 
    가짓수도 적은 데다가 대부분 싼맛에 산 거라서 데이트 할 때 입을만한 옷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한 번은 마음 먹고 좀 비싼 옷을 하나 사입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그 옷이 제일 좋은 거니까, 만날 때마다 그 옷을 입고 나갔습니다. 
    그런데, 나중에 결혼하고 나서 한 얘기였지만, 저희 집사람이 장모님께 한 얘기가, “엄마 그 사람은 맨날 만날 때마다 똑같은 옷만 입고 나온다.” 이렇게 얘기했다고 합니다. 
    저는 그래도 데이트할 때 좋은 옷을 입고 간다는 차원에서 새로 산 그 옷만 입고 나갔는데, 저희 집사람은 허구헌날 똑같은 옷만 입고 나오니까 그게 못 마땅했던 것 같습니다.

    결혼하고 나서도 저는 늘 싸고 양 많은 것을 좋아하고, 저희 집사람은 싼 거는 다 이유가 있으니까 좀 비싸더라도 제대로 된 것을 사야 한다는 생각이고... 해서 약간의 차이가 있었지만, 지금은 서로 잘 이해하면서 살아가고 있다고, 제 생각에는... 그렇게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여하튼 우리가 살아가다 보면,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데, 상대방은 자기 사고방식대로 나를 오해하는 경우도 있고, 부부 간에 시댁과 친정에 대해 생각하는 견해의 차이라든지 서로 생각하는 것이 달라서 갈등을 겪게 되는 일들이 비일비재합니다.

    오늘 본문 말씀에서도 이와 같은 모습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의 내용은 나병환자였던 나아만 장군이 엘리사 선지자에게로 와서 나음을 얻게 되는 장면이 나옵니다. 
    여기서 이 일이 있기 전에 아람왕은 자신의 신하 나아만의 병을 고쳐달라고 편지를 써서 이스라엘왕에게로 보냈습니다. 
    그랬더니, 이스라엘왕은 자기 생각대로 오해를 하고서는 이것은 분명, 아람왕이 공연히 트집을 잡아 싸울 기회를 찾으려는 것이라고 생각을 했습니다. 
    아람왕의 의도와는 전혀 다른 엉뚱한 생각을 했습니다. 
    하지만, 이것보다도 더 심각한 생각의 차이는 그 뒤에 나옵니다.

    엘리사 선지자는 이스라엘 왕이 옷을 찢었다는 얘기를 듣고서 나아만 장군을 자신에게로 보내달라고 전갈을 보내서, 나아만 장군은 이제 이스라엘 왕에게서 엘리사 선지자에게로 가게 되었습니다. 
    처음에 말씀드린 것처럼, 우리 인간들은 늘 끊임없이 생각을 하기 때문에, 나아만 장군 역시 엘리사 선지자에게로 가면서 여러 가지 생각들을 했을 것입니다. 
    내가 그에게로 갔을 때 그가 어떻게 할 것이라는 생각을 미리 갖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드디어 엘리사 선지자의 집 문앞까지 도착을 했습니다. 
    하지만, 어땠습니까? 
    나아만 장군의 생각과는 달랐습니다. 
    어떤 점이 달랐습니까?

    나아만 장군 생각에는 엘리사 선지자가 직접 나올 줄 알았습니다. 
    나아만 장군은 5장 1절 말씀에서 설명하고 있는 것처럼, 아람 나라를 구원한 적이 있는 큰 용사였고, 나라에서 크고 존귀한 자였습니다. 
    아람 나라 주위에 있는 나라들은 나아만이라는 이름만 듣고도 벌벌 떠는 명성 높은 장수였고, 권력의 정점에 서있는 사람이었습니다. 
    비록 나병에 걸리기는 했지만, 그 누구도 그를 상대하거나 얕잡아 볼 수 없었습니다. 
    그런 그였기 때문에, 그의 생각에는 당연히 엘리사 선지자가 공손히 자기 앞에 고개를 숙이고 나와서 자신의 병을 치료해 줄줄 알았습니다. 
    11절에서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내 생각에는 그가 내게로 나와 서서 그의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고 그의 손을 그 부위 위에 흔들어 나병을 고칠까 하였도다.” 
    나아만 장군 생각에는 엘리사가 직접 나올 줄 알았는데, 버릇없게도 사람을 보내서 한다는 얘기가 “가서 요단강에 몸을 일곱 번 씻으라”는 것이었습니다. 
    사실, 따지고 보면, 나아만이 이스라엘왕에게서 엘리사 선지자에게 찾아가는 것만 해도 자존심 상하는 일이었습니다. 
    그런 경우라면, 엘리사 선지자가 왕궁까지 직접 올라와서 치료를 해줘야지, 자기를 오라 가라 하는 것만도 기분 나쁜 일이었습니다. 
    하지만, 목마른 사람이 우물 판다고 그것까지는 감수를 하고 내려갔는데, 엘리사 선지자는 얼굴도 내비치지 않고 사람을 시켜서 치료법 한 마디만 던져줄 줄은 상상도 못한 일이었습니다.

    그것 뿐만이 아니었습니다. 
    나아만은 엘리사 선지자가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면서 자신의 병든 부위에 안수해서 고쳐줄 거라고 생각을 했습니다. 
    자신이 생각하는 어떠한 특정한 의식을 통해 고쳐줄 줄로 생각을 했습니다. 
    자신의 신분과 위엄에 걸맞는 거창한 의식을 기대했던 것입니다. 
    게다가 요단강에 가서 씻으라는 것도 자신의 생각과 부합하지 않았습니다. 
    다마섹에 있는 아마나와 바르발강이 훨씬 더 나은데 하필 요단강에서 씻으라는 것도 못마땅했고, 더군다나 그런 일을 일곱 번이나 반복적으로 해야 된다는 것도 자신은 전혀 생각지도 못한, 내 생각과는 전혀 다른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나아만은 어찌나 화가 났던지, 11절 말씀을 자세히 보면, 나아만 장군이 엘리사가 보낸 사람의 말을 듣고 난 후에, “내 생각에는 그가 이렇게 고칠까 하였도다”라고 말하고 나서 돌아간 것이 아니라, 그 말을 들은 직후에 바로 노하여 물러가면서 그 얘기를 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너무나도 격분한 나머지 두 번 생각할 것도 없이 바로 발길을 돌린 것입니다. 
    그의 성격이 얼마나 불같았는지를 엿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결국에는 어떻게 됐습니까? 
    부하들의 말을 듣고서 그 생각을 돌이켰습니다. 
    그래서, 엘리사 선지자가 시킨 대로 요단강으로 가서 일곱 번 몸을 잠그고 나니 어린 아이의 살같이 깨끗이 나음을 얻었다는 내용이 본문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말씀을 통해 우리가 생각해 보게 되는 것은, 우리는 나아만과 같이 “내 생각에는 이러하다”고 하면서 자기 소견대로 행하는, 믿음의 과오를 범할 때가 많이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생각, 주님의 말씀, 하나님의 뜻보다도 오히려 내 생각과 뜻을 주장하게 되는 경우가 적지 않습니다. 
    기도할 때에도 기도는 하나님의 뜻을 내 뜻에 맞추는 것이 아니라, 내 뜻을 하나님의 뜻에 맞추는 거라는 것을 이론적으로는 잘 알고 있지만, 기도한 내용들을 분석해 보면, 전부 내 생각대로, 내 뜻을 하나님께 주장하는 내용들이 너무나도 많다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40명 정원의 기독교학과에 목회자 자녀 120명이 원서를 넣었다고 해도 하나님은 하나님의 뜻대로 하실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는 우리 생각대로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내 생각에는 내 자녀가 꼭 합격해야 되는데! 내 생각에는 다른 아이들보다 내 자녀가 더 열심히 공부했기 때문에, 우리 아이는 재수했기 때문에 이번에는 꼭 합격해야 되는데! 
    내 생각에는 올 해 이 학과에 못 들어가면 큰 일 나는데! 
    교회에서 내 직분과 체면도 있기 때문에 이번에 떨어지면 안 되는데!” 이렇게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우리의 생각일 뿐 하나님의 생각은 우리의 생각과 다를 수 있습니다. “내 생각은 너희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 길과 달라서 하늘이 땅보다 높음같이 내 길은 너희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 생각보다 높으니라.”라고 하신 말씀처럼, 하나님의 생각은 우리의 생각보다 높으십니다. 우리 생각은 합격만이 좋은 것이라고 생각을 하지만, 하나님의 생각은 다른 데에 있습니다.

    하나님이 그런 생각을 갖고 계셨던 것을 누가 알 수 있었겠습니까? 그 누구도 알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분명히 알 수 있는 것은 무엇입니까? 내 생각과 하나님의 생각은 다르고, 하나님의 생각은 우리의 생각을 초월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사도 바울의 경우를 통해서도 깨닫게 됩니다. 
    사도행전 16장을 보면, 바울은 소아시아로 가서 복음을 전하고 싶은 마음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사도 바울의 생각이었고, 하나님의 생각은 달랐습니다. 
    그래서, 성령 하나님께서 바울의 뜻을 막아서시고, 그를 마게도냐 지역으로, 유럽으로 보내셨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자신의 애초에 생각했던 대로 되지 않은 것에 대해서 왠지 모를 실망과 좌절감을 느꼈을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바울을 마게도냐 지역으로 인도하신 이유는 무엇이었습니까? 무슨 생각이 있으셔서 그렇게 하셨습니까? 

    오늘날 많은 역사가들은 사도 바울이 자신의 생각대로 소아시아로 진출했다면 기독교는 오늘날과 같이 전 세계로 확장되지 못했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바울의 유럽 선교를 통해서 복음의 전환점이 마련되고, 복음이 세계 제일의 나라였던 로마로 들어가게 되었고, 복음이 로마를 정복하게 되었고, 복음의 로마 정복이 오늘날의 거대한 기독교를 낳는 씨앗이 되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바울이 생각한 대로 되지는 않았지만, 하나님은 하나님의 생각대로 일하셔서, 결국은 바울이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좋은 결과를 낳게 되었습니다.

    생각을 내려놓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내 생각을 내려놓지 못하게 되면, 나아만처럼 상처를 받고 분노하게 됩니다. 
    “내 생각에는 하나님께서 내게 이렇게 해주셔야 될 것 같은데...” 
    “내 생각에는 목사님이 이렇게 하시는 게 맞다고 생각되는데...” 
    “내 생각에는 교회에서 이렇게 해야 될 것 같은데...” 
    그렇게 생각할수록 상처를 받게 되고, 불평하게 되고, 분노하게 됩니다. 

    나아만 장군이 자기 생각대로만 했다면 어떻게 됐겠습니까? 
    그 결과를 우리는 충분히 상상할 수 있습니다. 
    자신의 생각대로 다시스로 행했던 요나 선지자가 어떻게 됐습니까? 
    그 답을 우리는 이미 잘 알고 있습니다. 
    자기들 생각대로 행했던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종말이 어떠했습니까? 
    내 생각대로 행한다는 것은 얼마나 위험한 일인지 모릅니다.

    숲속 마을에 숲속 마을을 다스리는 호랑이가 살고 있었습니다. 
    이 호랑이도 어느 날 아주 위험한 생각을 하게 됐습니다. 
    어떤 생각을 했느냐면, 험한 산 길을 다니다 보니까, 가시에 찔리기도 하고, 돌뿌리에 걸리기도 하고 발이 성한 날이 없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호랑이는 인간들이 도로 포장을 하고 있는 모습을 우연히 보게 됐습니다. 
    아스팔트를 깔아서 반들거리는 도로를 보면서, 호랑이는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나도 내가 다니는 산 길에 도로 포장을 해야 되겠다. 
    토끼들을 잡아다가 가죽을 벗겨서 내가 다니는 길에다가 깔아놓으면 발을 다치는 일이 없겠다.” 
    이렇게 생각을 하고 다니다가 마침 토끼 한 마리를 잡았습니다.  

    그리고, 토끼에게 “미안하지만 이 어르신이 산 길을 편하게 다니려면 니가 희생될 수밖에 없구나.”하면서 모든 산 길을 토끼 가죽으로 덮을 자신의 계획을 말해줬습니다. 
    그랬더니, 토끼가 하는 말이, “어르신, 참 놀라운 생각이십니다. 
    하지만, 이 산에 있는 우리 토끼들을 다 잡는다 해도 토끼 가죽 길을 만들기는 어렵습니다. 
    차라리, 제 꼬리를 잘라서 어르신의 발에 가죽신을 만들어 신으신다면 산 길 전체가 토끼 가죽길이나 다름없지 않겠습니까?”라고 얘기했습니다. 
    그래서, 토끼의 그 말 한 마디로 인해서, 그 숲 속에 있는 토끼들 모두가 무사할 수 있었다고 하는, 한 숲속 마을에 내려오는 전설이 있습니다.  

    자기 생각만 내려 놓으면! 
    자기 생각 하나만 바꾸면 모든 것이 평안할 수 있는데, 그렇게 하지 않고, 자기 생각만 관철하려 들게 되면, 피바람이 불게 되는 것입니다. 
    자기 생각대로만 하려고 하는 것은 이렇게나 위험한 것이고, 이것은 우리가 신앙생활 하는 데에 있어서 큰 걸림돌이고 무서운 믿음의 적이라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이 믿음의 적을 믿음으로 물리쳐야 합니다. 

    믿음이란 무엇입니까?

    내 생각을 버리고,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전적으로 신뢰하고 의지하는 것입니다. 
    루터가 말한 것과 같이 믿음은 이성을 십자가에 못 박는 것입니다. 
    신앙은 내 생각과 이성을 내려놓고 하나님의 뜻을 겸허하게 받아들여 순종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인생을 살아가다 보면, 나아만처럼 우리의 힘으로는 해결할 수 없는 인생의 나병과 같은 어려운 문제들을 만나게 됩니다. 그것은 우리의 사업장의 문제가 될 수도 있고, 내 가정과, 또 어떤 분들에게 있어서는 수능시험이 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우리의 힘으로는 어떻게 할 수 없는 이러한 인생의 문제들을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은 무엇입니까? 내 생각을 버리고 오직 하나님의 생각에 초점을 맞추고, 하나님의 뜻에 따르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을 해나가고 있지만, 우리 인생의 질병이 치료되지 못하는 것은 내 생각을 버리지 않고 있기 때문입니다. 

      믿음 생활이란 끊임없이 자기 생각을 버리고 주님의 말씀에 자신을 맞추어 가는 훈련입니다. 이런 훈련을 하지 못하면 그 사람은 인생에서 문제들을 결코 해결할 수가 없습니다. 믿음의 사람이 되고, 기적의 사람이 되고, 하나님의 치유의 역사를 체험하려면! 가장 먼저 내 생각을 버리고 하나님의 생각을 따라야 합니다. 내 생각에는 아닌 것 같지만, 하나님의 생각은 우리가 상상할 수 없는 놀라운 섭리하심이 있기 때문입니다. 

      많이들 들어보셨을 줄 아는데, 이런 글이 있습니다. “큰 일을 이루기 위해서 힘을 주십사 하나님께 기도했더니 겸손을 배우라고 연약함을 주셨다. 많은 일을 해낼 수 있는 건강을 구했는데 보다 가치 있는 일을 하라고 병을 주셨다. 행복해지고 싶어서 부유함을 구했더니 지혜로워지라고 가난을 주셨다. 세상 사람들의 칭찬을 받고자 성공을 구했더니 뽐내지 말라고 실패를 주셨다. 삶을 누릴 수 있게 모든 것 갖게 해 달라고 기도했더니 모든 걸 누릴 수 있는 삶, 그 자체를 선물로 주셨다. 구한 것 하나도 주시지 않았지만 내 소원 모두 들어 주셨다. 나는 가장 많은 복을 받은 사람이다.” 

      내 생각에는 큰 일을 이루기 위한 힘이 필요하고, 많은 일을 해낼 수 있는 건강이 필요하고, 부유함이 필요하고, 성공이 필요한 것 같지만, 하나님의 생각은 우리의 생각과 달라서 우리에게 연약함을 주시고, 병을 주시기도 하시고, 가난을 주시고, 실패를 주시기도 하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공만을 구하고, 합격을 구하고, 물질의 축복만을 내 생각대로 구하는 우리들이 되기 보다, 그 이전에 내 생각을 내려놓는 훈련을 쌓아가고, 하나님의 생각과 뜻을 읽는 훈련을 쌓아 나가서, 하나님의 생각대로 내 인생이 조율되어지고, 움직여질 수 있는! 그런 우리 모두의 삶이 되어지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생각과 착각(錯覺)

    착각이란 한자는 어긋날 착, 깨달을 각이란 훈으로 사실을 실제와 다르게 생각하는 것을 말합니다.
    생각이란 사물을 헤아리고 판단하는 작용을 말합니다.

    사람이 살아가는 모습을 보면 매우 영리하고 지혜로운 것 같습니다. 그러나 꼭 그런 것만은 아닙니다. 어떤 면에서는 짐승보다도 미련한 것이 사람입니다. 2004년도에 쓰나미가 일어났을 때 동물들은 미리 알고 다 도망을 갔습니다. 덩치 크고 미련해 보이는 코끼리도 산으로 도망갔습니다. 두꺼비도 엉금엉금 기어서 도망을 갔습니다. 그 지혜롭다는 사람들은 아무것도 모르고 보트를 타고 뱃놀이를 즐기다가 무수한 사람이 죽었습니다. 

    그러므로 야고보서 4장 13절~14절 말씀에“너희 중에 말하기를 오늘이나 내일이나 우리가 아무 도시에 가서 거기서 일년을 유하며 장사하여 이를 보리라 하는 자들아 내일 일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너희 생명이 무엇이뇨 너희는 잠간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니라.”하셨습니다. 

    또한 짐승들은 아무리 맛있는 먹이가 있어도 자기 위장 70%까지만 채운다고 합니다. 심지어 먹는 것 밖에 모르는 돼지도 자기 위장 70%를 넘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120%~200%까지 먹다가 채하고 탈이 납니다. 짐승들이 내일에 대한 염려나 근심을 하겠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사람들만 근심하고 걱정하다가 병이 납니다. 이렇게 미련한 것이 사람입니다. 

    또한 사람들은 누구나 다 착각을 잘합니다. 착각이란 현실과 다른 생각을 말합니다. 두 의대생이 복도를 걸어가는데 어떤 한 남자가 몹시 고통스러운 표정으로 허리를 숙이고 엉거주춤하게 걸어오고 있었습니다. 한 의대생이 그 모습을 보고“저런 자세는 류마티스 관절염이야”라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옆에 있던 의대생이“아니야 디스크 걸리면 저런 자세가 나오는 거야.”라고 했습니다. 서로 류마티스 관절염이냐 디스크냐를 두고 다투는데 그 남자가 가까이 다가오면서 아주 심각하게 묻기를“선생님 제가 너무 급한데 화장실이 어디 있어요?”라고 했습니다. 화장실 갈 일이 급해서 억지로 참으며 몸을 꼬며 다가오는 사람을 두고“류마티스 관절염이니, 디스크니”하고 다투었습니다. 

    아는 척하며 전문 병명까지 말했지만 착각이었습니다. 우리들도 의대생들처럼 이렇게 착각하고 살아갈 때가 많이 있습니다. 때로는 상대방은 전혀 모르고 있는데 스스로 착각을 하면서 오해를 하고 분노하고 또는 절망에 빠질 때가 많습니다. 그러므로 자신의 생각이나 경험을 너무 의지하면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잠언 23장 41절에는“네 사사로운 지혜를 버릴지어다.”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신앙생활이 무엇입니까? 신앙생활이란 내 생각, 내 방법을 버리고 하나님의 생각과 하나님의 방법을 따라가는 것입니다. 내 생각과 내 방법을 버릴 때 하나님의 생각과 하나님의 방법이 떠오르게 되는 것입니다. 내 경험을 버릴 때 하나님의 인도하심의 손길을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앙생활은 내 기준에서 하나님을 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기준에서 나를 보는 것입니다. 

    이사야 55장 8절~9절에“여호와의 말씀에 내 생각은 너희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 길과 달라서 하늘이 땅보다 높음 같이 내 길은 너희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 생각보다 높으니라.”라고 하셨습니다. 성경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생각과 하나님의 방법을 기록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내 생각과 내 방법, 내 경험을 다 버리고 하나님의 방법을 따라 순종하며 살아갈 때 그 사람은 반드시 복을 받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아람나라 군대장관인 나아만 장군이 자기 생각, 자기 방법을 버리고 하나님의 방법을 따르므로 자기의 소원을 성취한 내용입니다. 나아만은 어떤 사람입니까?

    一. 나아만은 문둥병자였습니다.

    열왕기하 5장 1절에 나아만에 대해 설명하기를“아람 왕의 군대장관 나아만은 그 주인 앞에서 크고 존귀한 자니 이는 여호와께서 전에 저로 아람을 구원하게 하셨음이라 저는 큰 용사나 문둥병자더라.”고 했습니다. 나아만의 직위는 군대장관이며 권력자요 존경과 부러움을 한 몸에 지니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화려함 속에 감추어진 심각한 고민이 있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힘으로 해결 할 수 없는 문둥병자였습니다. 당시 나병은 저주받은 질병으로 알려져 있었습니다. 

    나병은 전염이 되기 때문에 직위 고하를 막론하고 성 밖으로 쫓겨나게 됩니다. 시간이 지나면 나병은 속에서부터 썩어져서 일 년 이 년은 모르다가 삼 년쯤 되면 피부 겉으로 나타나면서부터 문드러지고 손마디가 빠지고, 눈썹이 빠지고, 얼굴이 일그러지는 무서운 병입니다. 그런 병에 걸렸으니 장군이면 뭐하고 권력이 있으면 뭐하겠습니까? 화려한 모습 속에 날마다 썩어서 죽어가고 있는 이런 나아만을 누가 행복한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육체는 나아만과 같지 않을지라도 정신적으로 영적으로 나아만과 같은 이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화려함 속에 감춰진 내면에 말 못할 고민들로 밤잠을 설치며 괴로워하면서 갈등하는 가정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행복해 보이는 모습으로 포장되어 있지만 속은 다 썩어져 가는 모습들, 겉은 거룩한 척 꾸몄지만 외식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쾌락을 즐기면서 만족이 없고, 소유한 것은 많은데 평안이 없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러니까 이혼하고 자살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러므로 현대사회에는 나아만과 별로 다를 것이 없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오늘 우리는 근본적으로 치유 받아야 할 것이 많습니다. 우리 자신과 가정과 더 나아가 이 사회 전반적으로 나아만과 같이 병들어 있다는 것을 인식해야 합니다. 나아만의 나병을 고친 분이 하나님이 셨듯, 병든 영혼, 병든 가정, 병든 사회를 치유하실 분은 오직 하나님 한분 밖에 없습니다. 이 주님께서 우리를 부르고 계십니다.“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마태복음 11:28) 하셨습니다. 

    二. 나아만은 문둥병에서 고침 받았습니다. 

    불치의 문둥병으로 괴로워하던 나아만 장군은 문둥병으로부터 깨끗하게 치유되는 기적을 체험하게 되었습니다. 본문 14절에“그 살이 여전하여 어린아이의 살 같아서 깨끗하게 되었더라.”고 했습니다. 이러한 기적이 나타난 과정이 있었습니다. 

    첫째, 나병을 치유할 수 있는 희소식을 전해 들었습니다. 
    이에 대해 열왕기하 5장 2절~3절에 기록하기를“전에 아람 사람이 떼를 지어 나가서 이스라엘 땅에서 작은 계집 아이 하나를 사로잡으매 저가 나아만의 아내에게 수종들더니 그 주모에게 이르되 우리 주인이 사마리아에 계신 선지자 앞에 계셨으면 좋겠나이다 저가 그 문둥병을 고치리이다.”라고 했습니다. 

    나아만 장군의 집에는 이스라엘에서 붙잡아온 한 여자아이가 가정부로 일하고 있었습니다. 이 가정부 아이가, 화려함 가운데 나병으로 괴로워하는 주인 에게 희소식을 전했습니다. 우리나라에 가면 하나님의 사람이 있는데 그분을 만나면 고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오늘날 전도입니다. 복음입니다. 복음이 무엇입니까? 예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기쁜 소식입니다. 그분 예수님을 의지하고 섬기면 모든 문제가 해결된다는 소식입니다. 절망에 빠진 자에게 희망을 주는 소리, 낙심한 자에게 소망을 주는 소리, 지옥 갈 사람에게 천국 가는 길을 알려주는 소리가 복음이며 전도입니다. 
    우리도 만나는 사람들에게 이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나아만에게 기쁜 소식의 내용은 무엇이었습니까? 엘리사를 만나면 고침 받을 수 있다는 소식입니다. 확신 있는 소식입니다.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복잡한 것이 아닙니다. 자기가 알고 있는 것을 말한 것뿐입니다. 내가 알고 있는 예수님, 내가 알고 있는 교회, 내가 예배드리면서 깨달은 유익한 것을 이웃에게 말하는 것이 전도입니다. 

    엘리사가 바로 우리 주님의 모형이라면 오늘 우리는 어떻게 전해야 됩니까?“예수님을 만나면 해결됩니다. 예수님 만나면 평안을 얻습니다. 예수님 만나면 문제가 해결 됩니다. 예수님 만나면 치유 받을 수 있습니다.”라고 전해야 하는 것입니다. 

    삶의 의미를 잃은 자들, 기쁨과 평안을 잃은 자들, 인생의 답을 찾지 못해 무당이나 점쟁이를 찾아다니면서 방황하는 사람들에게“예수님이 평안이요, 안식이요, 길이요, 인생의 해답”임을 확신 있게 전해야 합니다. 요즘 우리 사회에 무속인들이 얼마나 많은지 80만 명이 넘는다고 합니다. 목사의 10배가 훨씬 넘는 숫자입니다. 하나님이 가장 기뻐하는 일이 무엇입니까 영혼을 구원하는 일입니다. 예수님이 왜 땅에 오셨습니까? 생명을 구원하고자 오셨습니다. 예수님이 왜 십자가에서 죽으셔야만 했습니까? 영혼을 살리기 위함입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후 승천하시면서 마지막으로 당부하신 말씀이 무엇이었습니까?“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면서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라 믿고 세례를 받으면 구원 받는다.”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도 기쁜 소식을 전하는 전도자의 삶을 살아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로마서 10장 13절~15절 말씀에“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그런즉 저희가 믿지 아니하는 이를 어찌 부르리요 듣지도 못한 이를 어찌 믿으리요 전파하는 자가 없이 어찌 들으리요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으면 어찌 전파하리요 기록된바 아름답도다 좋은 소식을 전하는 자들의 발이여 함과 같으니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피로 이루어 놓으신 구원의 은혜가 개인에게 전달되는 과정이 전도입니다. 이 외에 다른 길은 없습니다. 고린도전서 1장 21절에 말씀하시기를“이 세상이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고로 하나님께서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셨도다.”라고 하셨습니다. 전도라는 것이 한편으로는 미련한 것처럼 보이지만 이것이 하나님이 계획하신 구원의 방법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전해야 합니다. 전해야 구원받는 역사가 있습니다. 만일 나아만 장군의 집 개집종이 입을 다물고 있었다면 나아만 장군은 일평생 문둥병으로 고통당하다가 죽었을 것입니다. 이와 같이 예수를 알고 있는 우리가 입을 다물면 구원의 역사는 없습니다. 우리가 입을 다물면 죄악과 힘겨운 삶에 시달리며 고통당하다가 영원한 멸망에 처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당부하시기를“너는 말씀을 전파하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쓰라.”(딤후 4:2)고 하셨습니다. 

    둘째, 나아만이 자신의 생각을 버리고 순종했습니다. 

    나아만 장군은 자기 집 하녀의 말을 듣고 하나님의 사람 엘리사를 만나고자 이스라엘로 갔습니다. 그런데 엘리사는 나와 보지도 않고 저 요단강에 가서 일곱 번 몸을 씻고 오라고 했습니다. 그러자 나아만 장군이 화가 나서 하는 말이“내 생각에는 저가 내게로 나아와 서서 그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고 당처 위에 손을 흔들어 문둥병을 고칠까 하였도다.”(열왕기하 5:11)라고 했습니다. 이어서 12절에“다메섹강 아바나와 바르발은 이스라엘 모든 강물보다 낫지 아니 하냐 내가 거기서 몸을 씻으면 깨끗하게 되지 아니하랴.”라고 하면서 화를 내며 돌아 가려했습니다. 

    그때 동행한 신하들이 권면하기를“장군이여 당신이 나병을 고치러 왔으면 이것보다 더 한 것이라도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그것이 뭐가 어렵다고 그러십니까?”라고 했습니다. 이 권면을 받아들인 나아만 장군은 자기의 생각을 버리고 하나님의 선지자 엘리사의 말대로 요단강에 들어가서 일곱 번 씻고 나왔습니다. 그때 나아만의 문둥병은 어린아이의 살같이 깨끗하게 나았습니다. 

    나아만이 어떻게 치유를 받았습니까? 나아만이 11절에 말한“내 생각”이란 말을 주목하시기를 바랍니다.“내 생각”이 하나님의 능력을 힘입는 데에 장애물이었습니다.“내 생각, 내 상식, 내 경험”이 하나님의 능력이 임하는데 장애물이었습니다. 나아만은 마침내 장애물인 자신의 생각을 버렸습니다. 만약 나아만이 자기의 생각을 버리지 않았다면 그는 영영토록 나병환자로 고통 속에 살다가 죽었을 것입니다. 

    우리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치명적인 장애물이“내 생각”이란 것입니다.“내 기준, 내 생각, 내 방법”으로 하나님을 보기 때문에 내 뜻대로 안 되면 원망하며 불평하게 되고 또는 절망하고 좌절 할 때가 얼마나 많습니까? 오늘 우리도“내 생각, 내 방법, 내 기준”을 버리고 하나님의 방법, 하나님의 기준을 따라 살아가게 되시기를 바랍니다. 

    신앙생활이 무엇입니까?“내 생각”을 버리고 하나님을 먼저 생각하는 것이 신앙입니다. 사무엘상 23장 2절~4절을 보면, 다윗은 블레셋과 싸울 때에 먼저 하나님께 물었습니다.“하나님, 블레셋을 치리이까 말리이까?”내 생각을 버리고 하나님의 생각을 먼저 물어보았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내 생각을 버릴 때 하나님의 생각이 떠오르고“내 경험”을 버릴 때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내 아집”을 벼리면 하나님의 손길을 체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항상 내가 기준이 아니라 하나님의 기준에서 나를 생각할 때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게 됩니다. 

    본문 14절 말씀에“나아만이 이에 내려가서 하나님의 사람의 말씀대로 요단강에 일곱 번 몸을 잠그니 그 살이 여전하여 어린아이의 살 같아서 깨끗하게 되었더라.”고 했습니다. 나아만이 내 생각을 버리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했더니 그 결과 어린아이 살처럼 치유가 되었습니다. 내 생각을 버리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했더니 사람의 힘으로는 어쩔 수 없었던 문제가 해결된 것입니다. 

    신앙이 무엇입니까? 
    신앙의 결국은 순종입니다. 
    성경에 수많은 기적과 응답의 배후에는 순종이 있었습니다. 
    순종을 통해서 기적이 나타나고 응답이 나타났던 것입니다. 

    열왕기상 17장에 사르밧 과부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저주로 인해 온 천하가 가뭄으로 타들어가는 어려운 때였습니다. 
    하나님은 엘리야 선지자를 부잣집으로 보내신 것이 아니라 극히 가난한 사르밧 과부에게로 보내셨습니다. 
    가난한 과부에게 떡을 구하자 과부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의 사심을 가리켜 맹세하노니 나는 떡이 없고 다만 통에 가루 한 움큼과 병에 기름 조금 뿐이라 내가 나무 가지 두엇을 주워다가 나와 내 아들을 위하여 음식을 만들어 먹고 그 후에는 죽으리라”(왕상 17:12) 

    이때 엘리야가 다시 불쌍한 과부에게 말합니다.
    “두려워 말고 가서 네 말대로 하려니와 먼저 그것으로 나를 위하여 작은 떡 하나를 만들어 내게로 가져 오고 그 후에 너와 네 아들을 위하여 만들라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이 나 여호와가 비를 지면에 내리는 날까지 그 통의 가루는 다하지 아니하고 그 병의 기름은 없어지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왕상 17:13~14) 

    이 말에 사르밧 과부는 순종했습니다. 
    그 결과에 대해 열왕기상 17장 15~16절에 기록하기를“저가 가서 엘리야의 말대로 하였더니 저와 엘리야와 식구가 여러 날 먹었으나 여호와께서 엘리야로 하신 말씀 같이 통의 가루가 다하지 아니하고 병의 기름이 없어지지 아니하니라.”고 했습니다. 
    순종의 끝에 하나님의 역사가 있었습니다. 

    신약성경 누가복음 5장에는 베드로가 물고기를 잡는 기사가 있습니다. 
    고기잡이가 직업인 베드로가 밤새도록 그물을 내렸는데 한 마리도 잡지 못했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말씀하시기를“깊은 데로 가서 배 오른 편에 그물을 내리라.”하셨습니다. 
    이때 베드로가 말하기를 “선생이여 우리들이 밤이 맞도록 수고를 하였으되 얻은 것이 없지마는 말씀에 의지하여 내가 그물을 내리리이다.”(누가복음 5:5)하고 그물을 내렸습니다. 
    이 경우 상식에 비춰볼 때 순종할 상황이 아니었습니다. 

    베드로는 물고기 잡는 것이 직업인 전문가이고, 예수님은 내륙지방 나사렛에서 목수 일을 하신 분이므로 고기잡이에는 문외한이었습니다. 
    더욱이 물고기는 밤에 잘 잡히는 것이 상식인데, 간밤에 한 마리도 잡지 못한 물고기를 낮에 잡는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볼 때 말이 안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베드로가 말하기를“선생이여 우리들이 밤이 맞도록 수고를 하였으되 얻은 것이 없지마는 말씀에 의지하여 내가 그물을 내리리이다.”(누가복음 5:5)라고 했던 것입니다.

    누가복음 5:5-6
    시몬이 대답하여 가로되 선생이여 우리들이 밤이 맞도록 수고를 하였으되 얻은 것이 없지마는 말씀에 의지하여 내가 그물을 내리리이다 하고.
    그리한즉 고기를 에운 것이 심히 많아 그물이 찢어지는지라.

    이 상식에 벗어난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한 결과가 무엇입니까?
    “그리한즉 고기를 에운 것이 심히 많아 그물이 찢어지는지라 이에 다른 배에 있는 동무를 손짓하여 와서 도와달라 하니 저희가 와서 두 배에 채우매 잠기게 되었더라.”(누가복음 5:6~7)

    이것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한 결과입니다. 

    이사야 55:8~9
    내 생각은 너희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 길과 달라서 하늘이 땅보다 높음 같이 내 길은 너희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 생각보다 높으니라.

    왜 순종이 있는 곳에 하나님의 역사가 나타날까요? 
    순종은 살아있는 믿음의 증거이기 때문입니다. 
    야고보서 2장 17절에“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고 했습니다. 사람도 죽은 사람에게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하나님도 마찬가지이십니다. 죽은 믿음의 사람 즉 순종이 없는 사람, 행동하지 않는 사람에게는 하실 수 있는 일이 없습니다. 
    신앙의 위대한 힘이 무엇입니까? 내 방법 내 생각을 내려놓고 순종할 때 하나님의 역사가 시작되는 것입니다. 

    약 100년 전 이집트에서 3천년 된 고분을 발굴했는데 미이라가 나왔고, 그 옆에 꽃병이 하나 있었습니다. 이 꽃병을 런던의 대영박물관으로 보냈는데 그만 어떤 사람이 실수로 떨어뜨려 깨졌습니다. 꽃병이 깨지자 바닥에 몇 개의 완두가 있는 것을 발견했는데 너무 오래되어 겉이 쭈글쭈글했고 차돌처럼 딱딱했습니다. 전문가들이 연구 검토한 후 땅에 심었더니 30일 후에 새파란 싹이 돋아났습니다. 3천 년간 침묵을 지킨 생명이 잠에서 깨어난 것입니다. 

    생명이 있는 씨앗은 수분과 온도만 적당하면 3천년이 지났어도 싹이 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심겨진 땅은 사람의 마음입니다. 
    마음 밭에 심겨진 씨앗의 싹을 틔우는 습도와 온도는 순종입니다. 
    이처럼 살아있는 믿음 즉 순종하는 믿음이 있는 곳에는 하나님의 생명의 역사가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믿음의 열매가 순종이고, 순종의 열매가 축복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믿음으로 내 경험, 내 방법, 내 생각을 내려놓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며 나아가기 바랍니다. 

    “나아만은 큰 용사이나 문둥병자더라”
    오늘을 살아가는 현대인의 모습과도 같습니다. 
    풍요롭고 화려함 속에 감추어진 고뇌와 고통과 불안과 평안이 없는 삶, 이것이 우리들의 모습이 아닙니까? 
    포장된 행복, 만족이 없는 소유, 끝없는 불만 속에 우리들이 살고 있습니다. 
    나아만처럼 “내 생각”을 버리는 성도가 되기를 바랍니다. 
    아직도 내 생각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아직도 내 생각을 버리지 못하고 내 방법의 올무에 빠져 있지는 않습니까? 
    내 생각이 장애물이 될 때 하나님과의 교제가 끊어지는 것입니다. 
    나아만이 내 생각을 버리고 순종했을 때 치유됨과 같이 하나님 앞에서 내 방법을 버리시기 바랍니다. 
    내 생각을 버리시기 바랍니다. 
    내 기준이 아니라 하나님의 기준에서 나를 보시기 바랍니다.
    내 판단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따라야 합니다.
    내 경험이 아니라 하나님의 의도를 알아야 합니다.
     
    이것이 나아만 장군의 경험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입니다. 
    내 생각을 버리고 순종했을 때, 하나님의 능력으로 난제가 해결되었던 나아만 장군의 결단과 경험이 우리의 결단, 우리의 축복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열왕기하 5장 요약

    아람 장군 나아만이 나병에 걸리자 엘리사를 찾아와 치유를 받습니다(5:1-9).
    엘리사는 요단강에서 몸을 씻으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전하고, 나아만은 순종하여 나병에서 치유됩니다(5:10-14).
    이 사건을 통해 하나님의 능력과 은혜가 이방인에게도 미친다는 사실이 강조됩니다.

    열왕기하 6장 요약

    아람 왕이 이스라엘을 공격하려 하자 엘리사는 하나님의 계시로 아람 군대의 동선을 미리 알려줍니다(6:8-10).
    엘리사는 하나님의 능력으로 적군의 눈을 멀게 하고, 사마리아로 이끌어 그들을 살려 보냅니다(6:18-23).
    이후 아람 군대가 사마리아를 포위하지만, 기근 속에서 하나님의 개입으로 기적적인 구원이 이루어집니다(6:24-33).

    열왕기하 7장 요약

    엘리사는 기근 속에서 하나님의 풍성한 공급을 예언합니다(7:1). 나병 환자들이 아람 진영이 비어 있는 것을 발견하고 이를 전하자, 백성들은 아람 군대가 남긴 물자를 얻어 기근에서 벗어납니다(7:5-16). 하나님의 예언이 성취되어 절망적인 상황이 반전됩니다.


    영적 여정 / 믿음, 희망,사랑

    영적 여정의 단계들을 구분하려 시도한 것은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스(150-250년경)였다고 여겨진다.
    그는 영성 생활의 이상을 하느님에 대한 참된 인식으로 보았다.
    그는 인간이 관상을 통하여, 이어서 계명을 지킴으로써, 그리고 아가페적 사랑과 평정을 실천함으로써 이러한 참된 인식에 이르게 된다고 보았다.
    그는 이 단계들에서 각각 믿음과 희망과 사랑이 필요하다는 것을 말한다.

    첫 단계에는 믿음으로 열광을 억제하고 두려움으로 악을 피해야 하며
    둘째 단계에서는 희망으로 덕행을 실천해야 하고
    셋째 단계에서는 하느님을 위한 사랑으로 선을 실천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요한 카시아누스(360년경-435년)도 이와 유사하게 믿음, 희망, 사랑의 차이를 통하여 세 단계를 설명한다.
    그에 따르면, 믿음을 통한 두려움은 노예들의 속성이고
    희망은 보상을 받으려는 노력의 속성이며
    사랑은 하느님 자녀들의 특성이다.
    그러므로 인간은 영적 여정에서 차례로 믿음, 희망, 사랑의 여정을 거치게 된다.

    사랑의 진보

    클레르보의 성 베르나르도(1090-1153년) 사랑을 중심으로 여겨, 하느님께 대한 사랑의 단계들을 구분하였다.
    그에 따르면, 처음에는 자기 자신을 사랑하기 때문에 완덕의 길을 시작하고 자신의 무능함을 느끼면서 하느님을 찾게 되고, 다음으로는 하느님을 가까이 함으로써 하느님의 은혜와 하느님을 사랑하게 되고, 순수한 사랑으로 하느님을 사랑하게 된다는 것이다.

    에바그리우스 폰티쿠스(345-399년) 역시 영적인 삶의 단계를 셋으로 나누어 각각 실천, 관상, 신학으로 구분하였다.
    그의 영향을 받은 위 디오니시우스 아레오파기타(6세기 초 )도 신비 체험을 통해 하느님께 나아가는 단계를 정화, 조명, 일치의 상승적 단계들로 설명하였다.
    여기서 정화 단계는 죄와 싸우는 단계이고, 조명 단계는 덕을 실천하는 단계이며, 일치 단계는 하느님과 일치하고 신비 체험을 하는 단계이다.

    ​다른 예로,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누가 9:23)라는 말씀에서 자신을 버리는 것이 완덕의 첫 단계인 자기희생과 포기를 뜻하고, 십자가를 지는 것이 둘째 단계인 적극적인 덕행 실천을 뜻하며.
    하느님을 따르고 예수님과 내적 일치를 이루는 것이 마지막 단계인 일치의 길을 뜻한다고 설명하기도 한다.

    성 토마스 아퀴나스도 마찬가지로 세 단계를 구분하는데,
    성 아우구스티노에게서와 같이 사랑을 완덕의 핵심으로 여긴다.
    어떤 존재자의 완성이 그 자신의 궁극적인 목적을 실현하는 데에 있다고 할 때, 사랑만이 인간을 하느님과 완전히 결합시킴으로써 그의 최종 목적에 도달하게 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완덕에 이르는 세 단계에 관하여 그는 [신학대전]에서 이렇게 말한다.
    "무엇보다 먼저 사람은 하느님의 사랑과는 반대되는 방향으로 자신을 내몰아가는 자신의 욕망을 이겨내고 죄를 벗어버리도록 최선을 다해 노력해야 한다. 이것이 영적 삶을 시작하는 초보자들이 해야 하는 것이다. ...
    그 다음 단계로 이어지는 것은 영적 삶을 살아가는 사람 자신이 어떻게 하면 선에 더 나아갈 수 있는가에 대해 깊이 생각을 다하여 노력해야 하는 것이다. 이러한 노력이 바로 진보하고자 하는 자들의 일인 것이다. ... 세 번째의 단계로는 하느님과 온전히 일치하여 하느님 안에서 참된 복을 누리며 살아가도록 노력해야 한다. 이것은 완성된 자의 일인 것이다."

    영적인 삶의 단계를 세 단계로 나누는 것이 전반적인 추세임을 알아볼 수 있다.
    그 세단계는 정화-조명(빛)-일치 또는 초보자-진보자- 완성자의 단계들로 지칭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여정들이 반드시 시간 순서대로 나타나는 것은 아니다.
    성인들의 영적 안에서도 이와는 전혀 다른 순서가 나타나는 것을 볼 수 있는데, 예를 들어 성녀 소화 데레사의 경우 일찍 삼위일체 하느님과의 합일을 맛본 후 더 늦은 시기에 오랜 기간 동안 어둠을 겪기도 했다.
    실제로 많은 사람들의 삶에서는, 영적인 진보만 계속되는 것이 아니라 삶의 어떤 시기에는 영적인 퇴보도 있을 수 있다.
    그래서 일부 저자들은 "여러 단계들의 연속을 엄격하게 주장하지 않고 신적인 시련과 은혜, 위로와 실망의 교차"로 그 여정을 이해한다.


    "죽음"과 관련된 성경 구절

    창세기 2:17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 하시니라.

    창세기 3:19 

    네가 흙에서 취함을 입었으니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

    창세기 5:5

    아담은 구백삼십 세를 살고 죽었더라.

    창세기 35:29

    이삭이 나이가 많고 늙어서 기운이 다하여 죽어 자기 열조에게로 돌아가니 그의 아들 에서와 야곱이 그를 장사하였더라.

    출애굽기 12:29

    밤중에 여호와께서 애굽 땅에서 모든 처음 난 것을 치시니 왕위에 앉은 바로의 장자로부터 옥에 갇힌 자의 장자까지와 가축의 처음 난 것을 다 치시매.

    레위기 20:9

    사람이 자기의 아버지나 어머니를 저주하면 반드시 죽일지니 그가 자기의 아버지나 어머니를 저주하였은즉 그의 피가 자기에게로 돌아가리라.

    민수기 6:6

    그가 여호와께 바치는 구별된 자로 있는 모든 날 동안 시체를 가까이 하지 말 것이요.

    신명기 32:39

    이제는 나 곧 내가 그인 줄 알라. 나 외에는 신이 없도다. 내가 죽이기도 하며 살리기도 하며.

    여호수아 23:14

    보라 나는 오늘 온 세상이 가는 길로 가려니와.

    사사기 16:30

    삼손이 이르되 나의 죽음이 블레셋 사람과 함께하기를 원하노라 하고 힘을 다하여 몸을 굽히매 그 집이 무너져 그 안에 있는 모든 방백들과 온 백성에게 덮이니 삼손이 죽을 때에 죽인 자가 살았을 때에 죽인 자보다 더 많았더라.

    룻기 1:16-17

    어머니께서 가시는 곳에 나도 가고 어머니께서 머무시는 곳에서 나도 머물겠나이다. 어머니의 백성이 나의 백성이 되고 어머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시리니. 어머니께서 죽으시는 곳에서 나도 죽어 거기 묻힐 것이라.

    사무엘상 2:6

    여호와는 죽이기도 하시고 살리기도 하시며 스올에 내리기도 하시고 거기에서 올리기도 하시는도다.

    열왕기상 19:4

    자기는 광야로 들어가 하루길쯤 가서 한 로뎀 나무 아래에 앉아서 자기가 죽기를 원하여 이르되 여호와여 넉넉하오니 지금 내 생명을 거두시옵소서.

    열왕기하 13:14

    엘리사가 죽을 병이 들매 이스라엘 왕 요아스가 그에게로 내려와 자기 얼굴에 눈물을 흘리며 이르되 내 아버지여 내 아버지여 이스라엘의 병거와 마병이여 하매.

    역대하 32:33

    히스기야가 그의 조상들과 함께 누우매 그의 자손들이 다윗의 자손의 묘실 중 높은 곳에 장사하고.

    욥기 14:14

    사람이 죽으면 어찌 다시 살리이까. 내가 나의 모든 고난의 날 동안을 참고 내게 임할 변화(부활)를 기다리겠나이다.

    욥기 19:25-26

    내가 알기에는 나의 대속자가 살아 계시니 마침내 그가 땅 위에 서실 것이라. 내 피부가 벗김을 당한 뒤에도 내가 육체 밖에서 하나님을 보리라.

    시편 23:4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시편 49:15

    그러나 하나님은 나를 영접하시리니 이러므로 내 영혼을 스올의 권세에서 건져 내시리로다.

    시편 90:10

    우리의 연수가 칠십이요 강건하면 팔십이라도 그 연수의 자랑은 수고와 슬픔뿐이요 신속히 가니 우리가 날아가나이다.

    전도서 3:2

    날 때가 있고 죽을 때가 있으며 심을 때가 있고 심은 것을 뽑을 때가 있으며.

    전도서 12:7

    흙은 여전히 땅으로 돌아가고 영은 그것을 주신 하나님께로 돌아가기 전에 기억하라.

    이사야 25:8

    사망을 영원히 멸하실 것이라. 주 여호와께서 모든 얼굴에서 눈물을 씻기시며 자기 백성의 수치를 온 천하에서 제하시리라.

    이사야 53:5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

    예레미야 31:16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네 울음 소리와 눈물을 멈추어라. 네 일에 삯이 있을 것임이라.

    에스겔 18:4

    모든 영혼이 다 내게 속한지라. 범죄하는 그 영혼은 죽으리라.

    호세아 13:14

    내가 그들을 스올의 권세에서 속량하며 사망에서 구속하리니 사망아 네 재앙이 어디 있느냐.

    마태복음 10:28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실 수 있는 이를 두려워하라.

    마태복음 22:32

    나는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요 야곱의 하나님이라 하셨느니라.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요 살아 있는 자의 하나님이시니라.

    마가복음 8:35

    누구든지 자기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는 자는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와 복음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는 자는 구원하리라.

    누가복음 23:46

    예수께서 큰 소리로 불러 이르시되 아버지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 하고 이 말씀을 하신 후 숨지시니라.

    요한복음 3:16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요한복음 5:24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요한복음 11:25-26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사도행전 7:59-60

    그들이 돌을 던질새 스데반이 부르짖어 이르되 주 예수여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 하고. 무릎을 꿇고 크게 부르짖어 이르되 주여 이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로마서 5:12

    그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

    로마서 6:23

    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이니라.

    고린도전서 15:26

    맨 나중에 멸망받을 원수는 사망이니라.

    고린도전서 15:55

    사망아 너의 승리가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네가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빌립보서 1:21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라.

    히브리서 9:27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해진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

    요한계시록 1:18

    곧 살아 있는 자라. 내가 전에 죽었었노라. 볼지어다 이제 세세토록 살아 있어 사망과 음부의 열쇠를 가졌노니.

    요한계시록 14:13

    또 내가 들으니 하늘에서 음성이 나서 이르되 기록하라. 지금 이후로 주 안에서 죽는 자들은 복이 있도다 하시매 성령이 이르시되 그러하다. 그들이 수고를 그치고 쉬리니 이는 그들의 행한 일이 따름이라 하시더라.

     

    성경에서 말하는 '죽음'의 정의와 원인

    1. 죽음의 정의

    성경에서 죽음은 영적·육체적 분리를 의미합니다.
    육체적 죽음은 사람의 영혼이 육체를 떠나는 상태이며(전도서 12:7), 영적 죽음은 하나님과의 관계 단절을 가리킵니다(에베소서 2:1).
    죄의 결과로 죽음이 이 세상에 들어왔으며(로마서 5:12), 모든 인류가 이에 영향을 받게 되었습니다.

    2. 죽음의 원인

    죽음은 죄로 인해 들어온 결과로 성경은 설명합니다.

    • 아담과 하와의 불순종 : 창세기 2:17에서 하나님께서는 선악과를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고 말씀하셨고, 아담과 하와가 이를 어길 때 영적·육체적 죽음이 시작되었습니다(창세기 3장).

    • 죄의 삯 : 로마서 6:23은 "죄의 삯은 사망이요"라고 명확하게 말합니다.
      모든 인간은 죄인으로 태어나며(로마서 3:23), 이로 인해 죽음이 필연적으로 따릅니다.

    3. 죽음과 하나님의 심판

    성경은 죽음을 이후의 심판과 연결짓습니다.

    • 육체적 죽음 이후의 심판 : 히브리서 9:27은 "한 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해진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다"라고 말합니다.

    • 영원한 생명과 영원한 죽음 : 요한복음 5:29에 따르면, 구원을 받은 사람은 영생을, 그렇지 않은 사람은 영원한 형벌에 처하게 됩니다.

    4.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죽음의 승리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 죽음이 궁극적으로 패배할 것이라고 가르칩니다.

    • 예수님의 부활 : 고린도전서 15:54-55에서 "사망이 이김에 삼킨 바 되리라... 사망아 네가 어디 있느냐?"라고 선포하며 부활의 승리를 찬양합니다.

    • 영생의 약속 : 요한복음 11:25-26에서 예수님은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라고 말씀하십니다.

    5. 성도의 죽음에 대한 위로와 소망

    성경은 성도들에게 죽음을 두려워하지 말라고 위로합니다.

    • 천국 소망 : 빌립보서 1:21에서 바울은 "나에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라"며 천국에 대한 소망을 강조합니다.
    • 영원한 안식 : 요한계시록 21:4은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닦아 주시니 다시는 사망이 없고..."라고 말하며 성도들에게 영원한 안식을 약속합니다.

    6. 영적 죽음에서 생명으로의 회복

    성경은 회개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영적 죽음에서 생명으로 옮겨질 수 있다고 가르칩니다.

    • 영적 회복 : 에베소서 2:4-5에서는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라고 말하며 하나님의 은혜로 인해 새로운 생명이 주어짐을 설명합니다.
    • 복음의 능력 : 요한복음 5:24에서 예수님은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라고 선언하십니다.

    7. 결론

    성경은 죽음을 단순한 끝이 아닌, 심판과 영생으로 이어지는 영적 여정의 일부로 설명합니다.
    죽음은 죄로 인해 들어왔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에게는 부활과 영생의 소망이 주어집니다.
    성도들은 이 소망을 통해 두려움 없이 죽음을 맞이하며,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에서 안식을 누리게 됩니다.



    4월 24일(목) 열왕기상 1-4장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네가 반드시 죽으리라(1:4) 6. 16

    그러므로 여호와의 말씀이 네가 올라간 침상에서 내려오지 못할찌라 네가 반드시 죽으리라 하셨다 하라 엘리야가 이에 가니라 .
    Therefore this is what the LORD says: 'You will not leave the bed you are lying on. You will certainly die!' " So Elijah went.

    열왕기하 1장 요약

    북이스라엘 왕 아하시야는 높은 곳에서 떨어져 중상을 입고, 블레셋의 신 바알세붑에게 병의 회복 여부를 묻습니다(1:2).
    하나님의 선지자 엘리야는 그를 막아 하나님의 심판을 전합니다(1:3-4). / 네가 반드시 죽으리라!
    아하시야엘리야를 잡으려 하지만 하나님의 불이 군사들을 삼킵니다(1:9-12).
    결국 아하시야는 회복되지 못하고 죽습니다(1:17).

    열왕기하 2장 요약

    엘리야는 회오리바람을 타고 하늘로 승천하며, 엘리사가 그의 뒤를 이어 선지자가 됩니다(2:11-13).
    엘리사는 엘리야의 능력을 이어받아 요단강을 가르고 여러 기적을 행합니다(2:14-15).
    그는 백성들 사이에서 하나님의 권능을 증거하며 선지자로서의 사명을 시작합니다.

    열왕기하 3장 요약

    이스라엘의 여호람 왕과 유다의 여호사밧 왕은 모압 왕 메사를 대항하여 전쟁을 벌입니다(3:5-7).
    엘리사는 이들 연합군의 요청에 따라 하나님의 도움을 예언하고, 전투에서 물 공급과 승리를 얻게 합니다(3:16-20).
    그러나 모압 왕은 마지막으로 극단적인 제사를 드리며 저항합니다.

    열왕기하 4장 요약

    엘리사는 한 과부의 기름병을 채우는 기적을 비롯해 여러 기적을 행합니다(4:1-7).
    수넴 여인의 아들을 살리고, 독이 든 국을 해독하며, 백성들에게 음식을 나눠주는 등 하나님의 공급과 구원을 보여줍니다(4:32-44).
    이로써 엘리사는 하나님의 선지자로서 백성들 속에서 크게 존경받게 됩니다.


    네가 반드시 죽으리라(You will certainly die!)(1:4, 6. 16)

    열왕기상하는 원래 한 권의 책입니다.
    본문은 아하시야가 중병에 걸렸을 때 블레셋 에그론의 신 바알세붑을 의지한 것에 대한 하나님의 책망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바알세붑을 헬라식으로는 "바알세불"이라고 합니다.

    1절에 “아합이 죽은 후에 모압이 이스라엘을 배반하였더라”라고 말씀합니다.

    고대사회에서는 한 나라의 왕이 바뀌면 조공을 바치던 주변국들이 정치적인 독립을 꿈꾸며 바치던 조공을 철회하고 새 왕에게 항거하는 것이 일반적인 전례였습니다.
    그래서 새로 즉위한 왕은 이런 변화에 대처하기 위해 자신이 이전 왕만큼의 능력이 있다는 것을 과시하기 위해 또다시 원정과 정복 전쟁을 치러야 했습니다.
    아람과의 전쟁에서 3번이나 승리한 아합이 죽자, 북이스라엘에 조공을 바치던 모압이 반기를 들고 독립을 선언한 것입니다.

    열왕기하 3:4-5에 의하면 “모압 왕 메사는 양을 치는 자라 새끼 양 십만 마리의 털과 숫양 십만 마리의 털을 이스라엘 왕에게 바치더니 아합이 죽은 후에 모압 왕이 이스라엘 왕을 배반한지라”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모압이 이렇게 배신한 것이 오직 아합이 죽었기 때문이었을까요?
    다윗이 죽고 솔로몬이 즉위했을 때, 주변국 중에는 조공을 철회하거나 반란을 일으킨 나라가 없었습니다.
    그 많은 주변국 중에서 한 나라도 반란을 일으키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모두 다윗이 살아있을 때처럼 이스라엘을 섬겼습니다.
    무엇 때문에 그들이 잠잠했던 것일까요?
    성경은 그 해답을 솔로몬이 하나님만을 섬겼고 그로 인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보호하셨기 때문이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사명을 감당하고 있는 주의 종에게는 끊임없는 하나님의 보호하심이 계속해서 주어집니다.
    하나님을 바르게 섬기며 세상에 선한 영향력을 끼칠 수 있도록 악한 대적을 막아주시고, 이길 힘과 용기를 주시고, 때로는 기적을 일으켜서라도 든든히 설 수 있도록 도우십니다.

    이스라엘의 역사를 살펴보면,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잘 섬길 때에는 세계에도 평화가 임했습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떠나 불의에 빠졌을 때, 여지없이 세상에 제국들이 일어나고 불의가 세상을 지배했습니다.
    믿음의 사람들이 얼마나 중요한 일을 하고 있는지를 분명하게 보여줍니다.
    우리 믿음의 사람들이 바로 서면 세계가 평화를 누리게 되고, 우리 믿음의 사람들이 죄에 빠지게 되면 온 세계가 혼란에 빠지게 되는 것입니다.
    빛의 자녀로서의 삶을 신실하게 사는 여러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2절 함께 읽습니다.
    “아하시야가 사마리아에 있는 그의 다락 난간에서 떨어져 병들매 사자를 보내며 그들에게 이르되 가서 에그론의 신 바알세붑에게 이 병이 낫겠나 물어 보라 하니라”

    왕궁의 다락 난간은 왕궁의 가장 높은 지붕 근처에 만들어 왕의 휴식 장소나 명상하는 장소로 사용되었습니다.
    열왕기상 10:12에 솔로몬 왕도 이같은 난간을 만들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아하시야가 이러한 난간을 거닐다가 떨어지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아하시야가 어떻게 난간에서 떨어지게 되었는지 알 수 없지만, 앞선 열왕기상 22:52-53에 기록된 그의 교만한 마음을 하나님께서 낮추신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열왕기상 22:51-53
    유다 왕 여호사밧 제 십 칠년에 아합의 아들 아하시야가 사마리아에서 이스라엘 왕이 되어 이년을 이스라엘을 다스리니라.
    저가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하여 그 아비의 과 그 어미의 과 이스라엘로 범죄케한 느밧의 아들 여로보암로 행하며.
    바알을 섬겨 숭배하여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의 노를 격동하기를 그 아비의 온갖 행위 같이 하였더라.

    신명기 29:4
        그러나 깨닫는 마음과 보는 눈과 듣는 귀는
        오늘날까지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주지 아니하셨느니라.

    기도

       영의 눈과 귀를 열어주옵소서!
       - 깨닫는 은혜를 내려주소서
             악인은 공의를 깨닫지 못하나
             여호와를 찾는 자는 모든 것을 깨닫느니라(잠언 28:5) 

    그런데 그는 자기의 병이 나을지의 여부를 하나님께 묻지 않고 블레셋 에그론 사람들이 섬기던 우상인 ‘바알세붑’에게 묻기 위해 사자를 파견하는 어리석은 짓을 합니다.
    그가 생명의 위태로움을 느끼고 다급하게 생각했던 것은, 하나님이 아니라 ‘파리들의 주’라고 불리는 파리의 형상을 한 우상 바알세붑이었습니다.
    우리는 이 우상이 어떠한지 정확하게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파리는 곤충 중에서도 사람들에게 해를 끼치는 해충입니다.
    그런데 에그론 사람들은 이러한 파리를 신으로 섬기고 있었고 여기에 아하시야도 동참한 것입니다.
    파리에게 자기의 생명이 어떻게 될지를 묻다니 이 얼마나 어리석은 일입니까?

    그런데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들은 시대를 초월해서 자기에게 아무런 영향력을 미치지 못하는 태양과 달과 별과 바다를 섬기고 바위와 나무와 동물들을 섬깁니다.
    심지어 개구리를 섬기고 뱀을 섬기고 몸에 붙어사는 이를 섬기기까지 합니다.
    너무나도 비상식적인 것 같지만, 그러나 하나님을 모르면 이렇게 됩니다.
    성경 출애굽기에 기록된 열 가지 재앙에 등장하는 동물들도 다 애굽의 우상과 관련된 것입니다.

    인간들은 스스로를 굉장히 지혜롭고 위대하다고 생각합니다.
    만물의 영장이라고 자부합니다.
    그런데 이러한 인간이 자기들이 지배한다고 생각하는 만물, 그중에서도 파리, 개구리, 뱀, 그리고 자기들이 만든 신상을 신이라고 섬기고 있으니 이 얼마나 어리석은 일입니까?

    우리 자신을 살펴보기를 원합니다. “나는 과연 이러한 어리석은 우상 숭배에서 자유한 삶을 살고 있는가?” 스스로를 돌아보고 오직 하나님만을 섬기는 여러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3-4절 함께 읽습니다.
    “여호와의 사자가 디셉 사람 엘리야에게 이르되 너는 일어나 올라가서 사마리아 왕의 사자를 만나 그에게 이르기를 이스라엘에 하나님이 없어서 너희가 에그론의 신 바알세붑에게 물으러 가느냐 그러므로 여호와의 말씀이 네가 올라간 침상에서 내려오지 못할지라 네가 반드시 죽으리라 하셨다 하라 엘리야가 이에 가니라”

    아하시야가 자신의 병의 치유 여부를 묻기 위해 에그론의 신인 바알세붑에게 사자를 파견하자 하나님께서 그 사자에게 선지자 엘리야를 보내어 진노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진노는 아하시야의 어리석은 행동에 대한 진노였습니다.
    그가 하나님의 선민 이스라엘의 왕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찾지 않고 그들의 대적 블레셋의 우상 바알세붑을 찾은 것은 하나님에 대한 농락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그의 아버지 아합의 삶을 통해 충분히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체험한 상태였습니다. 8절에 그가 엘리야의 옷차림만 듣고도 알아본 것이 이를 증명합니다. 그러므로 그의 이러한 행동은 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을 만큼 큰 악행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네가 반드시 죽으리라” 크게 진노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긍휼이 풍성하신 분입니다. 인간의 생명을 천하보다 소중히 여기시는 분입니다. 심지어 악인들이 그의 죄로 인해 멸망하기보다 회개하고 돌이키는 것을 기뻐하시는 분이십니다(겔 33:11). 상한 갈대를 꺾지 않고 꺼져가는 등불도 끄지 않는 자비로우신 분입니다(마 12:20). 그럼에도 아하시야에게 긍휼을 베풀지 않으셨습니다.

    무엇 때문입니까?
    그의 죄가 너무 무겁고 커서가 아닙니다.
    그가 하나님의 긍휼과 은혜를 멸시했기 때문입니다.
    아하시야가 난간에서 떨어진 것은 하나님의 긍휼의 표현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일로 아하시야가 자기의 잘못을 깨닫고 회개하기를 바라셨습니다.
    만일, 아하시야가 회개했다면 병을 치유받게 되는 것은 물론 다른 큰 은혜도 입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아하시야는 그러한 하나님의 긍휼을 짓밟고 회개하기는커녕 도리어 바알세붑을 믿음으로 하나님을 멸시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긍휼과 사랑을 멸시하면 용서받지 못합니다.
    모든 죄는 용서받을 수 있으나, 이처럼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멸시하는 죄는 용서받지 못하고 긍휼 없는 심판의 자리에 서게 합니다(히 10:28-29).

    예수님께서도 사람에 대한 모든 죄와 모독은 사하심을 얻되 성령을 모독하는 것은 사하심을 얻지 못한다고 분명하게 말씀하셨습니다(마 12:31-32).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긍휼과 은혜를 베푸실 때 믿음의 자리에서 감사로 받을 수 있도록 날마다 말씀과 기도에 더욱 힘쓰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바알세불은 누구인가요?

    바알세불은 바알세붑의 헬라어식 이름입니다.
    바알세붑은 구약시대에 에그론이라는 고대 블레셋 도시에서 숭배된 이방 신으로 “파리 대왕”을 뜻합니다(열왕기하 1:2).
    고대 블레셋 지역의 고고학적 발굴에 의하면 금으로 된 파리 형상이 발견되었습니다.
    블레셋 시대 이후로 유대인들은 그 이름을 헬라어 신약성경에 따라 “똥의 대왕”을 뜻하는 “바알세불”로 바꾸었습니다.
    파리의 공격으로부터 구제 받기 위해 숭배했던 파리의 신을 딴 이름입니다.
    어떤 성경학자들은 바알세붑이 향후 바리새인들에게 지독한 경멸의 이름이 된 “오물의 신”으로도 알려져 있다고 생각합니다.
    바알세붑은 특히나 경멸받는 신이었기 때문에 그의 이름은 유대인들에 의해 사탄의 별칭으로 사용되었습니다.

    바알세불은 구약에서 나오는 가나안의 풍요의 신의 이름인 “바알”과 고귀한 집을 뜻하는 “세불”로 나뉠 수 있습니다.
    두 단어를 합쳐서 악마들의 신인 사탄을 위한 이름을 만든 것입니다.

    바알세불이라는 단어는 마태복음 10:24-25에서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을 묘사할 때 최초로 사용되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바알세불(마가복음3:22; 마태복음12:24)을 언급하며 예수님을 향해 “귀신의 왕을 의지하여 귀신을 쫓아낸다”고 말했습니다(마태복음9:34).

    마태복음 12:22에서 예수님은 귀신들려 눈 멀고 말 못하는 사람을 치유하셨습니다.
    그러자 무리가 다 놀라 “ ‘이는 다윗의 자손이 아니냐’ 하니 바리새인들은 듣고 이르되 이가 귀신의 왕 바알세불을 힘입지 않고는 귀신을 쫓아내지 못하느니라”고 말했습니다(마태복음 12:23-24).

    바리새인이 예수님의 엄청난 기적을 보고 예수님이 하나님으로부터 온 자임을 깨달은 무리와는 정반대로 반응했다는 사실이 놀랍습니다.

    바리새인들도 예수님께서 기적이나 그 어떤 인간의 도움을 받지 않고 초월적인 일을 하셨다는 것을 인정한 셈이었지만, 그 힘의 원천을 하나님이 아닌 바알세붑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악마는 순수한 선을 행하지 못한다는 것을 간과한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은 자기 중심적인 교만으로 사람들에게 예수님의 영향력이 커지면, 자신들이 더 이상 아무런 영향을 미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따라서 기적은 부정하지 못할 지라도 예수님의 힘의 원천이 악마들의 신인 바알세붑의 악한 힘이라고 말한 것입니다.

    더 중요하게 생각해 볼 것은 바알세불과 현대의 크리스천들의 연관성입니다.
    마태복음 10장은 예수님의 제자가 된다는 것은 무엇인지에 대한 핵심을 담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복음을 전하게 하기 위해 사도들을 세상으로 내보내려고 하십니다(마태복음 10:7).
    무엇을 해야 하고 무엇을 하지 말아야 할지에 대해 상세히 설명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을 삼가라 그들이 너희를 공회에 넘겨 주겠고 그들의 회당에서 채찍질하리라 또 너희가 내 이름으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다…”(마태복음10:17,22)고 하시고, 이어서 “제자가 그 선생보다, 또는 종이 그 상전보다 높지 못하나니 제자가 그 선생 같고 종이 그 상전 같으면 족하도다 집 주인을 바알세불이라 하였거든 하물며 그 집 사람들이랴”(마태복음10:24-25)고 말씀하셨습니다.

    즉, 우리에게 하시고자 하시는 말씀은 당시 바리새인처럼 사람들이 예수님을 사탄이라고 부른다면 그분의 제자들 역시 사탄이라 부를 것이라는 겁니다.
    요한복음 15장에서 예수님께서 선포하셨습니다.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면 너희보다 먼저 나를 미워한 줄을 알라 너희가 세상에 속하였으면 세상이 자기의 것을 사랑할 것이나 너희는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요 도리어 내가 너희를 세상에서 택하였기 때문에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느니라 내가 너희에게 종이 주인보다 더 크지 못하다 한 말을 기억하라 사람들이 나를 박해하였은즉 너희도 박해할 것이요 내 말을 지켰은즉 너희 말도 지킬 것이라 그러나 사람들이 내 이름으로 말미암아 이 모든 일을 너희에게 하리니 이는 나를 보내신 이를 알지 못함이라”(요한복음15:18-21).


    바알세불

    히브리어로는 'בעל זבוב‎(Baʽal Zebûwb, 바알 제부브)'
    라틴어로는 'Beelzebūb(베엘제부브)' 또는 'Baal-Zebul(바알제불)'로 음역되었다.
    한글 표기는 다양한데, 라틴어를 중심으로 한 가톨릭 표기와 히브리어를 기초로 한 20세기 초 역본에 근거하는 개신교 표기, 이 밖에 영어식 표기, 프랑스어 표기, 일본어 서적을 중역하며 들어온 표기, 영화 등 대중 매체에서의 표기 등이 혼재되어 있기 때문이다.
    바알제붑, 바알제불, 베엘제붑, 베엘제불, 바알세붑, 바알세불, 벨제붑, 벨제뷔트, 베르제뷰트, 베르제브브, 베르제부부, 벨제브브, 벨제부브, 벨제부르 등 거의 등장할 때마다 다르다고 봐도 좋을 정도이다.

    이 가운데 베르제브브, 베르제부부, 벨제브브, 벨제부브 등은 전부 일본의 가타카나 표기인 '베루제브브(ベルゼブブ)'를 중역하다 수입된 것으로, 라틴어 베엘제부브의 가나 음차에서 유래한 표기이며, 베르제뷰트, 벨제뷔트 등은 프랑스어에서 유래한 표기이다.

    이러한 문제점들 때문에 본 문서의 제목은 대한민국의 주요 교단에서 채택한, 공인된 한국어 성경의 표기들 중에서 가장 널리 쓰이는 것을 제목으로 삼았다.

    성경의 바알(Baal)

    I. 구약성경에서 이것은 페니키아 사람들 특히 두로 사람들의 우상을 가리킨다.

    바알 숭배는 아스다롯 숭배와 함께 히브리 사람들에게 특별히 사마리아에서 엄숙한 의식과 함께 도입되었다(삿 6:25-32; 왕하10:18, 28). 바알의 복수인 바알들(Baalim)은 바알의 형상들을 의미했다(삿 2:11; 10:10).
    엣바알, 여룹바알, 한니발 같은 이름들을 통해 바알 숭배가 페니키아와 카르타고 지역에 널리 퍼졌음을 알 수 있다.
    한편 바빌론 사람들은 이것을 벨이라 불렀다(사 46:1; 렘 50:2; 51:44).
    바빌론의 바알 숭배는 유명한 바벨탑에서 이루어졌는데 이 탑의 꼭대기 방은 별을 관측하고 그 기록들을 담아 둔 곳이었다.

    동방의 점성술에서 바알 숭배는 곧 천체 숭배를 뜻하였으며 그래서 많은 사람들은 바알이 태양신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리스와 로마 사람들은 이것을 행운의 신 주피터라 불렀다.
    그래서 주피터는 비너스와 함께 사람의 행운을 주관하는 존재로 받아들여졌고 따라서 그 관계가 바알과 아스다롯의 관계와 같은 것으로 이해되었다.

    바알의 형상들과 전들은 대개 높은 곳에 있었다.
    므낫세는 예루살렘 성전의 두 뜰에 하늘의 군대 특히 아스다롯을 위한 제단들을 세웠다(왕하 21:5-7).
    예레미야는 지붕에서 바알에게 경배를 드린 유대인들에게 경고를 주었으며(렘 32:29) 요시야는 아하스가 자기의 궁전의 난간에 세운 이런 제단들을 파괴시켰다(왕하 23:12).
    또 고대 사람들은 종종 인신 제물을 바알에게 드리기도 했다.
    예레미야는 바알의 산당들을 건축하고 자기 아들들을 불로 태워 바알에게 번제 헌물로 드린 유다와 예루살렘의 거주민들을 책망하였다(렘 19:5).

    바알, 아세라, 바알세불, 아스다롯

    • 바알(בּעל)

    바알'은 당시 모압과 아모리인들이 섬기던 남신(男神)으로서 태양을 상징한다(레 26:1-3).


    모압은 여러 우상들을 섬겼는데, 그 중 주신(主神)으로 '바알'(Baal)을 섬겼다.
    이 '바알'은 '주인'이란 뜻으로서(호 2:16), 주로 생산과 다산(多産)을 주관하는 것으로 믿었다.
    그러므로 이 바알 숭배와 관련하여 풍성한 생산을 기원하는 뜻으로 난잡한 혼음(groupsex), 인신 제사 등의 음탕하고 끔찍한 행위가 곁들여졌던 것이다.
    특히 바알 숭배자와 바알신전의 여인들과의 음행은 바알 제사의 절정이며 또한 바알 숭배자들의 의무였다.

    *참고 /  히브리어 '바알'은 본래 '주인', '남편', '소유자'란 뜻인데, 때로는 '우두머리'(a chief man) 또는 '지도자'(a leader)를 의미하기도 한다.

    이스라엘이 바알의 음란한 종교에 처음 빠진 것은 출애굽후 광야 생활을 할 때 발람의 꾀에 빠졌을 때이다.

    모압왕 발락은 이스라엘이 두려워 메소포타미아의 거짓 예언자 발람을 매수하여 이스라엘을 저주하려 했으나 하나님의 개입으로 뜻대로 되지 않았다.
    그리고 하나님의 강력한 역사로 결국 그는 이스라엘 축복하게 된다.
    발람은 예언 직후 자기 고향 메소포타미아(신 23:4)로 가지 않고 자기를 발람에게로 인도해 왔던 미디안 장로들과 함께 미디안 땅으로 갔던 것 같다.
    그리고 거기서 그는 이스라엘을 범죄케 하는 사악한 꾀를 발락에게 일러줌으로써 결국 이스라엘이 하나님께 저주(심판) 받도록 했다(계2:14).
    발락과 헤어진 발람은 자기의 예언이 이스라엘에게 길(吉)함을 알고 이스라엘 진영으로 찾아가 그 예언의 의미를 풀이해 준뒤, 발락이 보장해주었을 부(富)와 명예를 모세에게 요구하다가 거절을 당한다는 것이다.
    그런 후 격분한 그는 이스라엘에게 보복하기 위해 미디안 족속에게로 가서 사악한 꾀를 베풀어 이스라엘을 범죄케 했다(결국 그는 이 일로 비참한 최후를 맞이했다).

    발람의 이스라엘을 저주하기 위해 행한 음모는, "모압 여자들과 이스라엘 남자들이 음행"하게 한 것이다.
    모압여인들은 우상 승배 권유에 앞서 음행(淫行)을 미끼로 이스라엘남자들을 유혹하였으며, 그후에 자연스럽게 그들을 우상 숭배로 미혹하였다.
    그런데 이같은 미인계(美人計)를 통한 우상숭배 유도 계획은 발람의 머리에서 나왔다는 사실이 후일 분명히 지적되고 있다(민 31:16; 계2:14).
    즉 이같은 계획(바알브올 사건)은 발람의 꾀에 미디안과 모압이 연합하여 주도 면밀하게 시행되었던 것이다.
    한편 이 사건의 비극성은 후일 사도 바울에 의해 또다시 지적되고 있다(고전 10:8).
    실로 인간의 육체와 영혼은 유기적인 것으로, 한쪽의 부패는 곧 전인격의 타락으로 발전한다. 그런의미에서 하나님은 영육의 순결을 동시에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이다(출 20:3-5,14).

    바알 숭배와 관련하여 풍성한 생산을 기원하는 뜻으로 난잡한 혼음(groupsex), 인신 제사 등의 음탕하고 끔찍한 행위가 곁들여졌던 것이다. 특히 바알 승배자와 바알신전의 여인들과의 음행은 바알 제사의 절정이며 또한 바알 숭배자들의 의무였다.

    아마 주도 면밀한 계획하에서 모압사람들은 이스라엘의 지도자급 인사들을 주로 유혹했을 것이다.
    결국 이스라엘을 올무에 빠뜨리는 일에 모압과 미디안이 긴밀히 연락, 협조했던 것 같다.

    이 일은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에게 진노하게 했다. 하나님은 거룩한 의미에서 '질투하시는 분'(출 20:5;수24:19)으로서, 당신의 백성이 당신을 버리고 우상의 노예로 전락했을때 당신의 그거룩한 속성상 극열한 진노로 다가오신다.
    이는 역설적 의미에서 하나님께서 당신의백성을 얼마만큼이나 사랑하시는가를 대변해 주는 모습이기도 하다.

    백성의 두령들을 잡아 태양을 향하여 교수형에 처했다.
    이는 '사람들이 볼 수 있도록 공개적으로'라는 뜻이다.
    따라서 70인역(LXX)은 이를 '파라데이그마티제인' 곧 '공개적으로 수치틀 주다', '드러내다'로 번역하였다.
    한편 '태양을 향하여'란 말을 또 다른 측면에서 본다면, 우상 바알이 태양을 상징하기 때문에 본절과 같이 형벌을 가한 것으로 이해 할 수 있다.
    즉 하나님은 바알을 섬긴 자들의 어리석음을 적나라하게 보이시기위해 그들이 섬긴 그 '태앙을 향하여' 처형케 만드셨고, 그 결과 우상 숭배자들의 처참한 결말을 공개적으로 드러내셨다(22:41).

    그러나 훗날 이스라엘은 이러한 일을 거울로 삼지 않고 가나안 정착후에도 여전히 바알과 아세라 숭배에 깊숙이 빠져즐었다.

    바알 종교를 이스라엘 전역에 퍼뜨린 장본인은 이세벨이다.
    그녀가 지은 수많은 범죄, 즉 바알을 숭배한 우상 섬김의 배도(背道)는 음행과 다를 바가 없는 것이었다.
    또한 '술수'는 우상숭배에 따르는 일종의 마술 행위를 가리키는 것으로서 모세 율법에서는 이를 엄격히 금하고 있는 것이었다(출 22:18;신 18:10, 11).

    •바알세붑

    바알과 더불어 함께 알아야 할 것은 바알세붑이다.
    '바알세붑'(Baal-zebub)에서 '바알'은 '주'(Lord), '소유주', '남편' 등을 의미하며,
    '세붑'(제붑)은 '파리, 날벌레'라는 뜻이다(사 7:18; 전 10:1).
    그러므로 '바알세붑'은 '파리의 주', '날벌레의 주'라는 뜻이 된다.
    혹자(G. Rawlinson)는 '바알세붑'을 '베엘 사멘'(Beel-Samen)과 동일한 신으로도 보았다.
    '바엘 사멘'은 베니게인(Phoenician)들이 섬기던 '하늘의 주'이다(풀핏주석). 그러나 이것은 어원적인 자료의 지지를 받지 못한다. 그런데 70인역(LXX)은 '바알세붑'을 '바알 뮈안' 또는 '데온 뮈안'으로 번역하였다. 이와 관련해 혹자는 '데온 뮈안'을 파리 형상으로 된 신으로서 질병을 보내기도 하고 파리로부터 오는 질병을 지켜 주기도 하는 신이라고 주장하였다. 한편 신약에서는 '제붑'이 '제불'(Zebul)로 읽혀지고 있는데(마10:25), '제불'은 '왕'이라는 뜻이다. 이러한 사실은 '바알세불', 즉 '바알 왕'이라는 칭호가 '바알세붑'의 본래의 칭호라는 간접적인 증거가 된다. 또한 바알세붑은 후대 랍비들에 의하여 '바알세벧'(Ball-Zebel)이라고 불리워지기도 하였는데 이것은 '분토(糞土)의 왕'이라는 뜻이다. 이것으로 보아 왕이라는 뜻의 '세불'이 점차 '세붑', '세벧' 등으로 불리워진 것은 될 수 있는 대로 우상에 대하여 나쁜 인상을 심어 주려 한 탓으로 짐작된다. 따라서 후에 '바알세불'은 여호와의 적대자인 사단의 칭호로도 쓰이게 되었다(마 10:25; 막 3:22; 눅11:15).

    "제자가 그 선생 같고 종이 그 상전 같으면 족하도다 집 주인을 바알세불이라 하였거든 하물며 그 집 사람들이랴"(마 10:25)

    • 아세라
    '아세라'(Ashera)는 본래 두로(Tyre)의 신이었으나 후에 고대 근동의 여러 족속들, 특히 페니키아, 아모리족과 가나안족이 숭배하게 된 여신(女神)이다. 가나안 최고의 신 '엘'(El)의 아내이자 풍요와 다산(多産)의 신 '바알'(Baal)의 모신(母神)이기도 한 아세라는 성교(性交)와 전쟁의 신인데, 아낫(Anath), 아스다롯(Ashtaroth)과 더불어 가나안의 3대 여신 중 하나로 꼽힌다. 그런데 아세라는 주로 나무에 그 상(像)을 새겼으므로 단순히 '목상'으로만 불리우기도 하였다(레 26:1; 왕하 10:26).


    아세라는 '바알'을 비록한 여타 가나안 70우상의 모신(母神)이기도 했다. 아세라는 분열 왕국 시대에 여호와 신앙의 주요적으로 등장한다.

    '바알' 제단이 있는 곳에는 반드시 아세라 상이 세워져 있었다. 그러므로 이 두 우상의 숭배에는 필연적으로 성적 타락이 동반되었다(출34:13). 따라서 성경은 종종 바알과 아세라를 함께 연결하여 사용하고 있다(삿6:28; 왕하23:4). 한편 아세라 상은 흔히 푸른 나무 아래나 곁에 세워졌는데(왕상14:23; 렘17:2), 주로 나무에 그 상(象)을 새겼으므로, 단순히 목상(木象)이라고 명명되기도 했다(레26:1; 왕하10:26).

    • 아스다롯
    한편, '아스다롯'(Ashtaroth)은 '아세라'(Ashe-rah)와 더불어 풍요,다산, 사랑 또는 쾌락의 여신이다. 그런데 이 여신에 관한 난제는 아스다롯 및 바알과의 관계 문제이다. 과거에는 아세라와 아스다롯이 동일한 신인 것으로 오해되었으나 최근의 고고학적 발굴과 연구 결과 엄연히 구분되는 다른 두 신임이 판명되었다. 한편 아스다롯은 고대 근동의 여러 지방에서 두루 숭배되었느데 그가운데서도 특히 두로 (Tyre)와 시돈(Sidon) 백성들이 열렬히 숭배하였다. 이 아스다롯은 지역에 따라 여러 명칭으로 불리웠는데 헬라에서는 아프로디테(Aphrodite), 로마에서는 비너스(Vinus)로 알려져 있다.


    지금도 팔레스틴 지역에서는 이 여신 숭배와 관련된 진흙상들이 출토된다. 그런데 이 우상들은 유방과 음부를 두드러지게 만든 소규모의 우상으로, 당시 일반 가정에서 사용했던 것으로 판단된다. 그러므로 당시에 이 아스다롯 숭배가 얼마나 널리 퍼졌는지 알 수 있다. 삿 2:13; 삼상 7:3; 31:10

    한편, 이스라엘이 가나안 신을 섬기려면 반드시 그 종교의 속성상, 이들 종교의 여사제(女司祭)는 공인된 창기였으니, 신에게 제사드리러 나오는 남자는 곧 풍요와 다산을 상징하는 그러한 신을 대리한 이들 여사제와 성관계를 갖는 것이 곧 신과 접촉하는 행위(예배)를 저질렀음을 뜻한다.

    • 가나안의 다른 신들
    *왕하 17:31/ 아와 사람들은 닙하스와 다르닥을 만들었고 스발와임 사람들은 그 자녀를 불살라 그 신 아드람멜렉과 아남멜렉에게 드렸으며

    *다르닥(Tartak)은 아람 이주민들의 신으로서 숭배된 여신 아타르카티스(Atargatis)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 신은 라스 샤므라 사본들에 나오는 앗타르(Athar)와 아스다롯과 시리아인의 여신 아낫(Anath)을 혼합한 복합적인 존재이다.

    *아드람멜렉과 아남멜렉은 자녀를 불살라 바치는 것으로 보아 이 신은 몰록 종교와 연관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17절 주석 참조. 그래서 혹자는 이 신들이 스발와임의 몰록 신을 가리키는 이름이 아닌가 하고 추측하기도 한다. 그리고 또 다른 사람들은 이 신이 태양 신과 관계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기도 한다(Keil & Delitzsch). 아무튼 이 가운데 아남 멜렉(Anammelech)은 일반적으로 '아누'(Anu)라는 메소포타미아의 태양 신을 가리키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Hobbs).

    닙하스(Nibhaz)에 대해서는 전혀 알려진 바가 없다.

    한편 유대인의 전승에 의하면 위에서 언급된 신들 중 숙곳브놋은 암탉의 형상을, 네르갈은 수탉의 형상을, 아시마는 염소 형상을 띠고 있었다 한다. 그리고 닙하스는 개의 형상을, 아드람멜렉은 노새의 형상을, 아남멜렉은 말의 형상을 각기 띠고 있었다 한다(플핏, 메튜헨리 주석).

    이스라엘의 문제는 이러한 우상들과 더불어 또 여호와 하나님을 혼합하여 섬겼다는 것이다. 여호와를 경외했다는 것은 유일 신 하나님으로 알고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경배했다는 의미가 아니라 여러 신들 중 하나로 섬겼다는 의미다.

    • 우상숭배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
    *출 34:14/ 너는 다른 신에게 절하지 말라 여호와는 질투라 이름하는 질투의 하나님임이니라

    "질투의 하나님" - 이 표현은 하나님을 의인화시킨 신인 동형 동성론적 표현이다(20:5). 하나님은 무엇보다도 우상 숭배하는 자들에 대하여 질투하시는 분으로 묘사되는데, 그것은 자기 백성들이 하나님 외의 다른 대상에게 애정과 헌신을 바치는 것을 결코 용납치 않으신다는 것을 강조한 표현이다(20:5;신32:16;수24:19,20). 즉 하나님께서는 그의 택한 백성을 사랑하시기 때문에 자신에게 돌아올 고유한 영광이나 찬양이 자신의 피조물인 다른 대상에게 엉뚱하게 돌아갈 때, 그리하여 그 백성의 영혼이 헛된 우상에게 빼앗길 때, 당신의 속성상 우러나오는 그러한 공의로써 그러한 행위를 질투하시는 것이다. 특별히 본절에서 다시금 이러한 표현이 사용된 것은 다시는 금송아지 숭배와 같은 죄를 범하지 말라는 의미에서일 것이다.

    "그 땅의 거민과 언약을 세우지 말지니"(출 34: 15), 12절 내용의 재차 반복이다. 이처럼 하나님께서 가나안 족속과의 언약 체결을 강하게 금지하시고 있는 까닭은 이스라엘이 이미 하나님과 언약을 맺은 언약 백성이기 때문이다. 즉 이스라엘은 하나님께 대하여 책임과 의무를 지고 있는 백성이므로 또다시 우상을 숭배하는 이방 민족에 대해서 어떠한 책임이나 의무를 지게 되는 언약을 이중으로 맺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또한 언약을 맺게 되면 서로 상대방의 신을 인정하고, 함께 예배를 드리는 것이 당대의 관례였으니 하나님께서 그처럼 우상 숭배와 직결되는 가나안인과의 언약 체결을 금지하신 것은 지극히 당연하다.

    영적으로 죽는다는 것은 무슨 의미인가요?

    영적으로 죽는다는 것은 하나님과 분리되는 것입니다.
    창세기 3:6에서 아담이 죄를 지었을 때, 아담은 모든 인류에 죽음을 들여온 것이었습니다.
    아담과 하와에 대한 하나님의 명령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지 말라는 것이었습니다.
    그 명령은 불순종할 경우 죽게 될 것이라는 경고와 함께 내려졌습니다.

    “동산 각종 나무의 열매는 네가 임의로 먹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 (창세기 2:16-17).

    “네가… 반드시 죽으리라”라는 말은 문자 그대로 “죽어가는 너는 죽게 될 것이다”라고 번역될 수 있습니다.
    이는 영적인 죽음으로 시작되어, 점진적인 육체의 노쇠로 생애에 걸쳐 지속되며, 결국 육체적인 죽음으로 끝이 나는 지속적인 죽음의 상태를 의미합니다. 당장의 영적 죽음은 아담이 하나님과 분리되는 결과를 초래했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숨은 아담의 행동 (창세기 3:8)은 죄에 대한 비난을 여자에게 돌리려 했던 행동과 마찬가지로 (창세기 3:12) 그러한 분리를 입증합니다.

    불행하게도, 이 영적 – 그리고 결국은 육체적인 – 죽음은 아담과 하와에게 국한되지 않았습니다. 인류를 대표하는 아담은 모든 인류를 그의 죄로 끌어들였습니다. 바울은 로마서 5:12에서 아담의 죄를 통해 죄와 죽음이 이 세상에 들어왔고, 모든 사람들에게 퍼졌다고 분명히 말씀합니다. 또한, 로마서 6:23은 죄의 대가가 사망이라고 말씀합니다. 죄는 우리를 하나님으로부터 분리시키기 때문에, 죄인들은 죽을 수밖에 없습니다. 생명의 근원으로부터 분리되는 것의 당연한 결과는 죽음뿐입니다.

    하지만 단지 물려받은 죄만이 영적 죽음의 원인은 아닙니다. 우리 자신의 사악함 또한 그 원인이 될 수 있습니다. 에베소서 2장은 구원받기 이전에 우리가 허물과 죄로 “죽었[었다고]” 가르칩니다 (1절). 이것은 영적 죽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구원 이전에는 여전히 육체적으로 “살아” 있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영적으로 “죽은” 상태에 있었을 때,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셨습니다 (5절, 또한 로마서 5:8 참조). 골로새서 2:13은 이 진리를 되풀이합니다. “무할례로 죽었던 너희를 하나님이 그와 함께 살리시고 우리의 모든 죄를 사하시고.”

    우리는 죄로 죽었기 때문에 전적으로 하나님이나 하나님의 말씀을 믿을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예수님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고 (요한복음 15:5), 하나님의 이끄심 없이는 예수님께로 나아갈 수 없다고 거듭 주장하십니다 (요한복음 6:44). 바울은 로마서 8장에서 우리의 천성적인 마음은 하나님께 복종할 수도, 하나님을 기쁘게 해드릴 수도 없다고 가르칩니다 (7-8절). 타락한 상태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일들에 대해 이해조차 할 수 없습니다 (고린도전서 2:14).

    하나님께서 우리를 영적인 죽음으로부터 살리시는 행동을 중생이라고 부릅니다. 중생은 오직 성령에 의해,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서만 이루어집니다. 우리가 중생하면 그리스도와 함께 살게 되고 (에베소서 2:5), 성령에 의해 새롭게 됩니다 (디도서 3:5). 요한복음 3:3, 7에서 예수님께서 니고데모에게 가르치신 것처럼, 이것은 마치 두 번째로 태어나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에 의해 살게 되었으므로, 절대 진정으로 죽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는 영원한 생명을 가졌습니다. 예수님은 종종 당신을 믿는 것이 영원한 생명을 가지는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요한복음 3:16, 36, 17:3).

    죄는 사망으로 끝납니다. 그 사망으로부터 벗어나는 방법은 오직 성령의 인도를 받아 믿음을 통해 예수님께 나아가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의 믿음은 우리를 영적인 삶으로,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영원한 삶으로 인도합니다.

    “반드시 죽으리라” vs. “죽을까 하노라” – 하와를 위한 변명

    1. 하와의 문제적 발언

    말 한번 했다고 그렇게 비난 받은 사람이 하와 말고 또 있을까요?
    하와는 성경 전체에서 딱 두 번 말을 합니다(창 3:2-3, 창 4:1).
    첫 발언에서 하와는 하나님의 말씀을 인용하는데, “하나님의 말씀에 너희는 먹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 너희가 죽을까 하노라 하셨느니라( 창3:3, 개역개정)”는 표현은 하나님의 말씀(창 2:17)을 심각하게 왜곡한 것으로 많은 비난을 받아왔습니다.

    두 문장을 비교해 보자면,

    창세기 2:17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

    창세기 3:3 동산 중앙에 있는 나무의 열매는 하나님의 말씀에 너희는 먹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 너희가 죽을까 하노라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와 “동산 중앙에 있는 나무”는 둘 다 생명나무를 지칭하는 표현이라고 보더라도,
    1) “반드시 죽으리라”에서 “반드시”가 빠져 있고,
    2) “만지지도 말라”는 말은 하나님의 말씀에 없는데 하와가 임의로 첨가했으며,
    3) “죽을까 하노라”라는 표현으로써 반드시 죽는다는 하나님의 절대적이고 확정적인 말씀을 상대적이고 온건한 표현으로 왜곡하거나, 혹은 가능성의 수준으로 격하시켰다는 비난을 받습니다.

    하와는 처음부터 하나님의 말씀을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는 “의심의 영”으로 가득했고, 이렇게 말을 잘못 옮기는 것은 인류 최초의 여성으로부터 시작된 여자들의 고질적인 질병이며, 그래서 암탉이 울면 집안이 망하는 것이라는 데까지 나아가기도 합니다.

    그런데 정말 하와가 하나님의 말씀을 왜곡했을까요?

    원문 해석과 비교

    문제가 되는 본문의 히브리어를 분석해 보겠습니다.

    창세기 2:17 – 하나님의 말씀

    וּמֵעֵץ הַדַּעַת טֹוב וָרָע לֹא תֹאכַל מִמֶּנּוּ כִּי בְּיֹום אֲכָלְךָ מִמֶּנּוּ מֹות תָּמוּת

    “그러나 좋음(선)과 나쁨(악)의 지식(알게 하는)의 나무에 대해서는, 너는 그것으로부터 먹어서는 안 된다. 네가 그것으로부터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을 것이다.”

    여기서 “반드시(개역한글 “정녕”)”라고 번역한 부분은 부사로 “반드시”란 말이 쓰인 것이 아니고, “너는 죽을 것이다 (תָּמוּת)”라는 동사의 부정사 절대형 (מוֹת)이 동사 앞에 쓰인 형태로, 문법적으로 말하자면 “부정사 절대형의 강조적 용법”이라고 합니다.

    창세기 3:3 – 하와의 말

    וּמִפְּרִי הָעֵץ אֲשֶׁר בְּתֹוךְ־הַגָּן אָמַר אֱלֹהִים לֹא תֹאכְלוּ מִמֶּנּוּ וְלֹא תִגְּעוּ בֹּו פֶּן־תְּמֻתוּן

    “그러나 동산 한 가운데에 있는 나무의 열매에 대해서는, 하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그것으로부터 먹어서는 안 되고 그것을 만져서도 안 된다, 너희가 죽지 않으려면.”

    이 두 문장은 많은 표현들이 서로 다릅니다.

    첫째,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 (직역: 좋음과 나쁨의 지식의 나무)”라는 표현이 “동산 중앙에 있는 나무의 열매”로 바뀌었습니다.

    둘째, “만지지 마라”는 표현은 2장의 하나님 말씀에는 나오지 않습니다.

    셋째, “정녕 죽으리라”라는 말은 “죽지 않으려면/죽지 않기 위하여”라는 표현으로 바뀌어 있습니다.

    넷째, 무엇보다 가장 큰 변화는 주어(인칭-성-수)의 변화입니다.
    창세기 2장의 동사와 인칭어미는 2인칭 남성 단수(“너는”)인데 반해, 3장의 하와의 말은 2인칭 복수(“너희는”)로 되어 있습니다.

    이 차이들을 위에서 제기한 문제들에 비추어 살펴보자면,

    우선, 하와의 말이 하나님의 말씀에서 나타나는 강한 명령을 결코 완화시키지 않습니다.
    오히려 문제는 하와의 פֶּן־תְּמֻתוּן(펜-테무툰)을 “죽을까 하노라”라고 번역한 개역성경에 있습니다.
    히브리어 접속사 פֶּן־(펜-)은 “죽을 지도 모른다, 혹은 죽을 수도 있다”는 가정이나 가능성의 뜻이 아닙니다.
    “죽지 않기 위하여, 혹은 죽지 않으려면”의 뜻으로 영어로 주로 “lest – (should)”로 번역되는 접속사입니다 (참고: 공동번역/우리말성경 “죽지 않으려거든”; 새번역 “어기면 우리가 죽는다고 하셨다”).

    하와의 표현인 “죽지 않으려면/죽지 않기 위하여(פֶּן־תְּמֻתוּן 펜-테무툰)”라는 말은 부정사 절대형을 사용한 “반드시(정녕) 죽으리라”라는 하나님의 말씀에 비해 그 강도가 결코 낮지 않습니다. 같은 의미를 다른 표현으로 썼을 뿐입니다. 상식적으로 생각해도, “이거 먹으면 죽어”라는 말이 “죽고 싶지 않으면 먹지 마”라는 말과 대체 얼마나 차이가 난다는 말인가요. 이 두 문장 사이에 어떤 문장이 더 강하고 어떤 문장이 더 약한지, 그 세밀한 뉘앙스의 차이를 판단할 수 있는 사람들은 성경 히브리어의 원어민들밖에 없습니다. 안타깝게도 그 중 어느 누구 하나 지금까지 살아남아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혹여나 살아남았다고 해도 그 대답은 아마 사람들마다 똑같지는 않을 것입니다.

    또한, 부정사 절대형이 들어간 표현이 하나님의 명령에 얼마만한 강세를 더하는지 판단할 수 있는 사람 역시 더이상 세상에 존재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반드시/정녕 죽으리라"라고 말하면 100퍼센트 죽는 "강한 명령/단정"이고, 그냥 (부정사 절대형 없이) "죽으리라"고 말하면 살 가능성이 약간이나마 있는 "약한 명령/단정"이 되나요? 그렇다면 십계명의 "살인하지 말라, 도둑질하지 말라" 등의 명령들은 부정사가 사용되지 않은 약한 명령이라 가끔 어겨도 괜찮은가요?

    게다가 “만지지도 말라”는 하와의 첨가는 하나님의 명령의 강도를 보다 더 강하게 하면 했지 약하게 만들지는 않습니다. 하와의 "죽을까 하노라"가 하나님의 명령의 강도를 약화시켰다고 비난하면서, 왜 "만지지도 말라"가 명령의 강도를 더 강하게 하는 사실은 외면하는지 모르겠습니다. "죽을까"로 번역된 תְּמֻתֽוּן(테무툰)의 마지막 자음 “n(눈)”은 “energic-nun”이라고 불리는 것인데, 전통적인 문법적 시각에서 동사의 의미를 강조할 때 쓰이는 것으로 이해되고 있습니다. 참고로, 현대의 비교셈어학적 관점에서는 일종의 고어체 정도로 이해되고 있습니다.

    3. 하와 발언의 진정한 왜곡

    두 문장의 차이를 히브리어 원문으로 살펴보면, 앞에서 말했지만, 가장 도드라진 변화는 “주어”의 변화입니다. 창세기 2장 17절의 하나님의 명령은 2인칭 남성 단수, 즉 아담에게 주는 명령입니다. 바로 그 앞 절 2장 16절은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명하여 이르시되”로 시작함으로써, 2장 16-17절의 명령이 아담에게(만?) 주어지는 명령임을 분명히 합니다.

    사실 하나님이 이 말씀을 하실 때 하와는 존재하지도 않았습니다. 이 구절 다음에서야 “남자가 홀로 있음이 좋지 않다(18절)”고 하시며 여자를 창조하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따라서, 하와는 2장 17절의 하나님의 말씀을 직접 들은 바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그 말을 똑같이 반복하지 못했다는 비난을 하와 혼자만 감당해야 할 이유는 없습니다. 하나님이 하와에게 따로 전달하지 않았다면 분명 아담이 하와에게 전했을텐데, 전달 시에 오류가 발생했을 가능성도 고려되어야 형평에 맞을 듯 합니다.

    문법적으로만 따지자면, 2장 17절의 명령은 하와에게는 해당사항이 없습니다. 하지만 하와는 2장의 “너”를 “너희”로 바꾸면서 남자에게 주는 명령을 자기 자신까지 포함한 명령으로 받아들입니다. 만약 하와가 하나님의 말씀을 왜곡했다고 한다면, 가장 커다란 왜곡의 지점은 바로 여기입니다. 자기 남자에게 주는 명령에 자신까지 포함시킨 죄.

    한 가지 흥미로운 점은 3장 11절에서 하나님이 “네가 너에게 먹지 말라고 명령한 그 나무로부터 너는 먹었느냐”라는 문장에서 다시 2인칭 남성단수로 돌아간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3장 17절의 “내가 너더러 먹지 말라고 명령한 그 나무로부터 네가 먹었은즉” 역시 2인칭 남성단수입니다. 즉, 하나님은 하와에게 왜 선악과를 먹었느냐고 질책하지 않습니다. 다만, 아담으로 하여금 선악과를 먹게 한 사실만 문제가 됩니다.

    4. 정말 여자가 문제인가?

    정말 여자가 문제일까요?

    말을 잘못 옮기는 성향이 여성의 DNA에 흐르고 있다는 가정이 가능하다면, “하나님이 주셔서 나와 함께 있게 하신 여자 그가 그 나무 열매를 내게 주므로 내가 먹었나이다(창3:12)”에서 잘 드러나듯이, 하나님과 여자에게 일타쌍피로 책임을 전가하는 찌질함이 모든 남성의 DNA에 내재되어 있을 것입니다.

    만약 문제가 있다면, 자기 남자의 운명을 자신의 운명으로 받아들인 여자에게 책임을 전가한, 그리고 그 여자를 자기에게 준 신에게까지 연대책임을 물어 면피하려고 한 인류 최초의 찌질남이, 그리고 자기들이 번역해 놓고 그 번역을 빌미로 지난 2천년간 여성들을 비난해온 찌질남의 후예들이 오히려 문제가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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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열왕기하 정의

    열왕기하는 구약 성경의 역사서로, 이스라엘과 유다 왕국의 몰락 과정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북이스라엘과 남유다의 왕들이 하나님과의 언약을 저버리고 우상숭배와 불의를 행한 결과, 각각 앗수르와 바벨론에 의해 멸망하게 되는 과정을 다룹니다.
    특히 선지자들의 활동이 중심에 있으며, 엘리야와 엘리사의 사역이 하나님의 경고와 구원의 메시지를 전달합니다.
    열왕기하는 하나님의 공의와 신실하심을 강조하며, 백성들에게 회개와 순종의 필요성을 일깨우는 경고의 메시지를 담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주권과 역사적 개입이 어떻게 인간 사회에 나타나는지를 보여주는 중요한 신학적 기록입니다.


    열왕기하 1장 요약

    북이스라엘 왕 아하시야는 높은 곳에서 떨어져 중상을 입고, 블레셋의 신 바알세붑에게 병의 회복 여부를 묻습니다(1:2).
    하나님의 선지자 엘리야는 그를 막아 하나님의 심판을 전합니다(1:3-4).
    아하시야는 엘리야를 잡으려 하지만 하나님의 불이 군사들을 삼킵니다(1:9-12).
    결국 아하시야는 회복되지 못하고 죽습니다(1:17).

    열왕기하 2장 요약

    엘리야는 회오리바람을 타고 하늘로 승천하며, 엘리사가 그의 뒤를 이어 선지자가 됩니다(2:11-13). 엘리사는 엘리야의 능력을 이어받아 요단강을 가르고 여러 기적을 행합니다(2:14-15). 그는 백성들 사이에서 하나님의 권능을 증거하며 선지자로서의 사명을 시작합니다.

    열왕기하 3장 요약

    이스라엘의 여호람 왕과 유다의 여호사밧 왕은 모압 왕 메사를 대항하여 전쟁을 벌입니다(3:5-7).
    엘리사는 이들 연합군의 요청에 따라 하나님의 도움을 예언하고, 전투에서 물 공급과 승리를 얻게 합니다(3:16-20).
    그러나 모압 왕은 마지막으로 극단적인 제사를 드리며 저항합니다.

    열왕기하 4장 요약

    엘리사는 한 과부의 기름병을 채우는 기적을 비롯해 여러 기적을 행합니다(4:1-7).
    수넴 여인의 아들을 살리고, 독이 든 국을 해독하며, 백성들에게 음식을 나눠주는 등 하나님의 공급과 구원을 보여줍니다(4:32-44).
    이로써 엘리사는 하나님의 선지자로서 백성들 속에서 크게 존경받게 됩니다.

    열왕기하 5장 요약

    아람 장군 나아만이 나병에 걸리자 엘리사를 찾아와 치유를 받습니다(5:1-9).
    엘리사는 요단강에서 몸을 씻으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전하고, 나아만은 순종하여 나병에서 치유됩니다(5:10-14).
    이 사건을 통해 하나님의 능력과 은혜가 이방인에게도 미친다는 사실이 강조됩니다.

    열왕기하 6장 요약

    아람 왕이 이스라엘을 공격하려 하자 엘리사는 하나님의 계시로 아람 군대의 동선을 미리 알려줍니다(6:8-10).
    엘리사는 하나님의 능력으로 적군의 눈을 멀게 하고, 사마리아로 이끌어 그들을 살려 보냅니다(6:18-23).
    이후 아람 군대가 사마리아를 포위하지만, 기근 속에서 하나님의 개입으로 기적적인 구원이 이루어집니다(6:24-33).

    열왕기하 7장 요약

    엘리사는 기근 속에서 하나님의 풍성한 공급을 예언합니다(7:1). 나병 환자들이 아람 진영이 비어 있는 것을 발견하고 이를 전하자, 백성들은 아람 군대가 남긴 물자를 얻어 기근에서 벗어납니다(7:5-16). 하나님의 예언이 성취되어 절망적인 상황이 반전됩니다.

    열왕기하 8장 요약

    엘리사는 수넴 여인에게 7년간의 기근을 경고하고 피신하게 합니다(8:1-2).
    기근 후 그녀는 왕에게 자신의 땅을 돌려받고, 엘리사의 기적이 왕에게 알려집니다(8:3-6).
    한편, 아람 왕 벤하닷은 엘리사를 통해 병의 회복 여부를 묻고, 하사엘이 왕위를 차지하게 되는 계기가 됩니다(8:7-15).

    열왕기하 9장 요약

    엘리사는 예후를 북이스라엘의 왕으로 기름 붓도록 지시합니다(9:1-6).
    예후는 아합 왕가를 제거하며, 이세벨을 처단하고 아합의 예언된 심판을 이행합니다(9:22-33).
    이로써 하나님의 공의가 실현됩니다.

    열왕기하 10장 요약

    예후는 아합의 아들들과 바알 숭배자들을 모두 제거하여 이스라엘에서 바알 숭배를 근절합니다(10:18-28). 그러나 그는 여전히 금송아지 숭배를 유지하여 온전한 개혁에는 실패합니다(10:29-31). 그의 통치 기간 동안 이스라엘은 앗수르의 위협에 시달리게 됩니다.

    열왕기하 11장 요약

    아달랴가 유다의 왕위를 찬탈하여 왕가의 자손들을 살해하려 하지만, 요아스가 구출되어 성전에서 보호받습니다(11:1-3). 제사장 여호야다가 반역을 일으켜 아달랴를 처단하고 요아스를 왕으로 세우며, 우상들을 제거하고 하나님과의 언약을 갱신합니다(11:12-20).

    열왕기하 12장 요약

    요아스는 여호야다의 지도 아래 성전 수리를 진행하며, 하나님의 율법에 따라 통치합니다(12:4-16). 그러나 여호야다가 죽은 후 요아스는 신앙에서 멀어지고, 결국 신하들의 반란으로 인해 암살당합니다(12:20-21).

    열왕기하 13장 요약

    여호아하스와 여호아스가 이스라엘을 다스리는 동안, 아람의 억압이 계속됩니다(13:3-7). 엘리사가 죽기 전 여호아스에게 승리의 상징으로 화살을 쏘게 하고, 이스라엘은 아람과의 전투에서 부분적인 승리를 거둡니다(13:14-19).

    열왕기하 14장 요약

    아마샤 왕은 에돔과 전쟁에서 승리하지만, 교만하여 북이스라엘과 전쟁을 벌이다 패배합니다(14:7-14).
    그의 후계자인 웃시야는 통치 초기에 강력한 왕국을 이루지만, 이후 교만으로 인해 하나님의 징계를 받습니다.

    열왕기하 15장 요약

    이스라엘과 유다 왕국은 여러 왕들의 짧은 통치와 반란으로 혼란에 빠집니다(15:8-31).
    특히 북이스라엘은 계속되는 암살과 정권 교체로 인해 정치적 불안이 심화되며, 앗수르의 침략을 받게 됩니다.

    열왕기하 16장 요약

    유다의 아하스 왕은 앗수르의 도움을 구하며 하나님의 성전을 변형하고 이방 신들을 섬깁니다(16:7-10).
    이는 유다 왕국의 영적 타락을 심화시키고, 하나님의 진노를 초래하는 계기가 됩니다.

    열왕기하 17장 요약

    북이스라엘은 결국 앗수르에 의해 멸망하고, 백성들은 포로로 끌려갑니다(17:6). 저자는 이 멸망의 원인을 우상숭배와 하나님의 계명을 어긴 죄로 설명하며, 경고의 메시지를 전합니다(17:7-23).

    열왕기하 18장 요약

    히스기야 왕은 종교 개혁을 단행하고 하나님만을 의지하며 앗수르의 위협에 맞섭니다(18:4-7). 산헤립이 예루살렘을 포위하지만, 히스기야는 하나님께 기도하고 선지자 이사야의 예언을 통해 구원을 받습니다(18:28-37).

    열왕기하 19장 요약

    히스기야는 성전에 나아가 하나님께 앗수르의 협박을 올려드리며 간구합니다(19:1-4).
    하나님은 이사야를 통해 앗수르가 패망할 것임을 예언하고, 천사를 보내어 앗수르 군대를 전멸시킵니다(19:32-36).

    열왕기하 20장 요약

    히스기야가 병에 걸리자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하여 생명을 15년 연장받습니다(20:1-6).
    그러나 바벨론 사절들에게 국고와 성전을 보여준 후, 이로 인해 바벨론 침략의 예언을 받습니다(20:12-19).

    열왕기하 21장 요약

    므낫세아몬 왕은 우상숭배로 인해 유다를 영적으로 타락시킵니다(21:2-9).
    하나님은 선지자들을 통해 멸망을 예고하시며, 결국 아몬은 신하들에 의해 암살당합니다(21:11-24).

    열왕기하 22장 요약

    요시야 왕은 성전에서 율법책을 발견하고,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대대적인 종교 개혁을 단행합니다(22:8-13).
    그는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율법을 선포하고, 우상 숭배를 제거하며 언약을 갱신합니다(22:14-20).

    열왕기하 23장 요약

    요시야는 유월절을 성대하게 지키며, 모든 이방 신전과 우상들을 철저히 파괴합니다(23:21-25).
    그러나 유다의 영적 부패는 깊이 뿌리박혀 있었고, 결국 요시야는 전투 중에 전사하게 됩니다(23:29-30).

    열왕기하 24장 요약

    유다는 바벨론의 느부갓네살 왕에 의해 점차적으로 무너집니다(24:1-4).
    여호야긴 왕이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가고, 성전의 보물들이 약탈당합니다.
    시드기야가 마지막 왕으로 즉위하지만, 바벨론의 압박 속에서 반란을 꾀합니다(24:17-20).

    열왕기하 25장 요약

    바벨론 군대는 예루살렘을 포위하고, 성벽을 무너뜨립니다(25:1-4).
    시드기야는 붙잡혀 두 눈이 뽑히고 바벨론으로 끌려갑니다(25:6-7).
    성전과 왕궁은 불타고, 유다 백성들은 포로로 잡혀갑니다.
    그러나 여호야긴 왕이 바벨론에서 석방되며 하나님의 회복의 희망이 암시됩니다(25:27-30).














































































    2025 새벽 묵상 열왕기상





    여호사밧 왕과 이스라엘 왕 아합, 그리고 선지자 미가야

    성경에는 다양한 왕과 선지자들이 등장하며, 이들의 이야기는 우리에게 중요한 교훈을 줍니다.
    그중에서도 남유다 왕국의 여호사밧 왕과 북이스라엘의 아합 왕, 그리고 하나님의 선지자 미가야의 이야기는 신앙과 진리를 따르는 것의 중요성을 잘 보여줍니다.

    1. 여호사밧 왕과 아합 왕의 동맹

    여호사밧은 남유다 왕국의 4대 왕으로, 하나님의 율법을 따르고 신앙을 중요하게 여긴 왕이었습니다.
    반면, 아합 왕은 북이스라엘의 7대 왕으로서, 우상 숭배와 악행으로 유명했습니다.
    그러나 두 왕은 서로 사돈 관계를 맺으며 정치적 동맹을 이루었습니다.

    어느 날, 아합 왕은 아람(시리아)과의 전쟁을 계획하면서 여호사밧에게 함께 길르앗 라못을 공격하자고 제안했습니다.
    여호사밧은 즉시 응답하기보다 먼저 하나님의 뜻을 구해야 한다고 요청했습니다.

    2. 거짓 선지자들과 미가야 선지자 

    아합 왕은 400명의 선지자들을 불러 전쟁의 승리를 예언하게 했고, 이들은 모두 왕에게 유리한 예언을 했습니다.
    그러나 여호사밧 왕은 더욱 신뢰할 수 있는 하나님의 선지자를 찾기를 원했고, 결국 선지자 미가야가 불려 오게 되었습니다.

    미가야는 처음에는 아합 왕이 듣고 싶어 하는 말을 했지만, 결국 그는 진실을 말하며 이 전쟁에서 아합이 패배하고 죽을 것이라고 예언했습니다.
    아합 왕은 미가야의 예언을 듣고 화를 내며 그를 감옥에 가두었고, 자신의 뜻대로 전쟁을 강행했습니다.

    3. 아합 왕의 최후와 교훈  

    전쟁이 시작되자, 아합 왕은 변장하여 적군의 공격을 피하려 했습니다.
    그러나 우연히 날아온 화살이 그를 치명적으로 맞췄고, 결국 그는 죽음을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이는 미가야의 예언이 그대로 성취된 것이었습니다.

    진리를 따르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해야 함을 보여줍니다.
    여호사밧 왕은 신앙을 중요하게 여겼으나, 잘못된 동맹으로 인해 위험에 처하는 경험을 했습니다.
    아합 왕은 하나님의 뜻을 거부하고 자기 뜻대로 행동하다가 비참한 최후를 맞이했습니다.
    선지자 미가야는 자신의 안전을 희생하면서도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신실한 모습을 보였습니다.

    4. 결론

    여호사밧과 아합, 그리고 미가야의 이야기는 오늘날에도 중요한 교훈을 줍니다.
    하나님의 뜻을 구하고 진리를 따르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그리고 세상의 유혹이나 권력 앞에서도 신앙을 지키는 것이 얼마나 값진지를 다시금 생각하게 합니다.
    우리는 진리를 외면하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아합의 죽음을 통한 영적 의미(열왕기상 22:34~40)

    하나님의 의도는 시대가 어려워질수록 그 문제 속에서 우리가 정직하게 묻고 간절히 구하고 회개하고 돌아오면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를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아합의 죽음을 통하여 우리에게 주시는 영적 메시지 3가지가 있습니다.

    키에르케고르 ‘죽음에 이르는 병’
    키르케고르에 따르면 죽음에 이르는 병은 불안, 절망입니다.
    그러나 동시에, 절망을 느낀다는 것은 자신과 신의 관계를 더 뚜렷이 이해하려는 노력의 고통이기 때문에 그 자체가 축복이라고 합니다.
    인간 스스로는 결코 절망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탓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절망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요?
    키에르케고르는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통해서만 가능하다고 말합니다.
    “절망의 반대말은 희망이 아니라 믿음이다.”

    맥체인 성경읽기표에서 열왕기상 22장과 함께 연결하여 읽어야 하는 신약성경은 데살로니가전서 5장입니다.
    데살로니가전서 5장은 어느 날 갑자기 임하는 종말에 대하여 경고의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종말이 언제인지 알 수 없다는 것입니다.
    즉 우리가 이 땅 위에서 언제 죽음을 맞이하게 될지는 아무도 모른다는 것입니다.

    아합의 죽음을 통하여 우리에게 주시는 영적 의미는 무엇일까요?

    ‘위대한 교환’(the great exchange)이라는 영적 용어가 있습니다.
    예수그리스도의 죽으심으로 우리의 죄가 그분의 죄로 계산되고 그분의 의가 우리의 의로움으로 계산되어 교환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복음이요, 이것을 받아들이는 것이 신앙생활입니다.
    그런데 아합은 이것을 받아들이지 못했고 이 위대한 교환을 하지 못한 채 죽게 된 것입니다.

    이 예수님의 죽음 안에 ‘영원한 생명’이 감추어져 있습니다.
    그리고 이 죽음이라는 심판 안에 구원의 길을 보여 주시고 구원을 선물로 예비해 놓으신 것입니다.
    아합은 그 영원한 생명의 구원을 길을 걷어차 버리고 심지어 아들에게도 그것을 대물림하게 된 것입니다.
    이 놀라운 복음을 발견하지 못한 채, 나의 죄를 그분의 의로움으로 교환하지 못한 채, 지저분한 죽음으로 마무리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오늘 아합의 죽음을 통해서 저와 여러분이 이렇게 살아갈 것을 의도하고 계십니다. “나는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습니다. 이제 살고 있는 것은 내가 아닙니다.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서 살고 계십니다. 내가 지금 육신 안에서 살고 있는 삶은, 나를 사랑하셔서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내어주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갈 2:20 새번역)


    아합 – 이스라엘의 악한 왕

    아합이란 이름의 뜻은 "아버지의 형제"
    구약성경에서 가장 악명 높은 인물 중 하나인 '아합 왕'은 북이스라엘 왕국의 일곱 번째 왕으로, 성경은 그를 "그의 이전의 모든 사람보다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더욱 행한 자"라고 합니다.
    아합의 이야기는 단순히 '악한 왕'이라는 표면적인 묘사를 넘어 권력, 유혹, 갈등, 그리고 때때로 보이는 회개의 가능성까지 담고 있는 복잡한 이야기라고 하겠습니다.

    아합은 누구였을까?

    아합은 오므리의 아들로, 기원전 874년부터 853년까지 약 22년간 북이스라엘을 다스렸어.
    그의 아버지 오므리는 군사 쿠데타로 왕위에 올랐고, 사마리아 도시를 건설하여 새로운 수도로 삼았지.
    아합은 이 새로운 왕조의 두 번째 왕이었어.

    역사적으로 아합의 통치 기간은 북이스라엘 왕국의 정치적, 경제적 번영기였다고 해. 고고학적 발굴에 따르면, 사마리아는 그 당시 상당히 발전된 도시였고, 아합은 여러 견고한 요새와 건물들을 지었어. 특히 '상아궁'으로 불리는 그의 궁전은 화려함으로 유명했지.

    그는 또한 외교적으로도 영리했어.
    시돈의 공주인 이세벨과의 결혼을 통해 페니키아와의 동맹을 강화했고, 남유다 왕국과도 평화 관계를 유지했지.
    실제로 그의 딸 아달랴는 후에 유다의 왕비가 되었다.

    아달랴는 북이스라엘 아합 왕과 이세벨의 딸
    남유다 5대 왕 여호람의 왕비
    남유다 6대 왕 아하시야의 어머니
    아들 아하시야 왕이 북이스라엘 예후에게 살해당한 후 왕위에 올라 7년 동안 다스린 남유다 왕국 유일한 여왕이었다.

    아합과 이세벨 : 치명적인 동맹

    아합의 이야기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 중 하나는 그의 아내 이세벨과의 관계.
    이세벨은 시돈의 왕 엣바알의 딸로, 바알과 아세라 신을 섬기는 열렬한 신자.
    그녀는 아합과 결혼한 후, 이스라엘에 이방 신들의 예배를 적극적으로 도입했지.

    열왕기상 16:31-33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어.

    "느밧의 아들 여로보암의 죄를 따르는 것을 가볍게 여기며 시돈 사람의 왕 엣바알의 딸 이세벨을 아내로 삼고 가서 바알을 섬겨 예배하고, 사마리아에 건축한 바알의 신전 안에 바알을 위하여 제단을 쌓으며, 또 아세라 상을 만들었으니..."

    아합은 이세벨의 영향으로 이스라엘에 바알과 아세라 신전을 세우고, 수백 명의 이방 제사장들을 후원했어. 이는 하나님의 첫 번째 계명("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두지 말라")을 명백히 위반하는 행위였지.

    더 심각한 것은 이세벨이 여호와의 선지자들을 박해하고 죽이기 시작했다는 거야. 오바댜라는 신실한 관리가 100명의 선지자들을 동굴에 숨겨 구한 일화도 있어.

    엘리야와의 대결

    아합의 이야기에서 가장 극적인 장면은 선지자 엘리야와의 대결이야. 엘리야는 아합의 시대에 하나님의 메시지를 전하는 강력한 목소리였어. 그는, 아합의 우상 숭배에 정면으로 도전했지.

    가장 유명한 사건은 갈멜산에서의 대결이야. 3년간의 가뭄 후, 엘리야는 아합에게 도전했어 - 바알의 선지자 450명과 아세라의 선지자 400명을 갈멜산으로 모으라고. 그곳에서 누구의 신이 진짜 신인지 시험하기로 했지.

    두 제단이 준비되었고, 각자의 신에게 불을 내려달라고 기도하기로 했어. 바알의 선지자들은 아침부터 정오까지, 그리고 그 이후로도 춤추고 소리치고 심지어 자신을 베기까지 했지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어.

    반면 엘리야는 제단에 물을 세 번이나 부은 후 간단히 기도했고, 하늘에서 불이 내려와 제물뿐 아니라 제단의 돌과 흙, 그리고 도랑의 물까지 모두 태워버렸지. 이에 사람들은 "여호와 그는 하나님이시로다!"라고 외쳤고, 엘리야는 바알의 선지자들을 모두 처형했어.

    이 사건 후 비가 내리기 시작했고, 3년간의 가뭄이 끝났지. 하지만 이세벨은 엘리야를 죽이겠다고 위협했고, 그는 도망쳐야 했어.

    나봇의 포도원 사건

    아합의 도덕적 타락을 가장 분명히 보여주는 사건은 나봇의 포도원 사건이야. 열왕기상 21장에 나오는 이 이야기는 아합과 이세벨의 권력 남용을 적나라하게 보여줘.

    아합은 자신의 궁전 근처에 있는 나봇의 포도원을 탐냈어. 그는 나봇에게 그 땅을 팔거나 다른 땅과 교환하자고 제안했지만, 나봇은 조상의 유산이라며 거절했어. 이는 완전히 정당한 거절이었고, 레위기 법에 따르면 조상의 땅은 가능한 한 가족 내에 유지되어야 했거든.

    아합은 실망하여 침대에 누워 음식도 먹지 않았어. 이세벨은 남편의 상태를 보고 자신이 해결하겠다고 나섰지. 그녀는 왕의 이름으로 편지를 써서 나봇을 거짓으로 고발하게 했어 - 그가 하나님과 왕을 저주했다고. 이로 인해 나봇은 돌에 맞아 죽었고, 아합은 그의 포도원을 차지했지.

    하나님은 이 사건에 대해 분노하셨고, 엘리야를 보내 아합을 책망하셨어:

    "네가 죽이고 또 빼앗았느냐?... 개들이 나봇의 피를 핥은 곳에서 개들이 네 피 곧 네 몸의 피도 핥으리라."

    아합의 최후와 회개의 순간

    아합의 삶에는 몇 가지 흥미로운 반전이 있어. 그 중 하나는 그가 나봇 사건 후 엘리야의 책망을 듣고 실제로 회개의 모습을 보였다는 거야:

    "아합이 이 모든 말씀을 들을 때에 그의 옷을 찢고 굵은 베로 몸을 동이고 금식하고 굵은 베에 누우며 또 풀이 죽어 다니니라."

    이에 하나님은 그의 생전에는 재앙을 내리지 않겠다고 말씀하셨어. 이는 아합이라는 인물이 단순히 '악한 왕'이라는 일차원적인 모습만 가진 것이 아니라, 때로는 진정한 회개의 가능성도 가진 복잡한 인물이었음을 보여주지.

    그러나 결국 아합은 하나님의 경고를 무시하고 아람과의 전쟁에 나섰다가 죽임을 당했어. 그는 변장을 했지만, 한 병사가 우연히 쏜 화살에 맞았고, 그의 피가 전차 바닥에 고였어. 후에 그의 전차를 씻을 때, 개들이 그의 피를 핥았다고 해, 엘리야의 예언이 그대로 성취된 거지.

    열왕기상 22:38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어:

    "그 전차를 사마리아 못에서 씻으매 개들이 그의 피를 핥았으니 여호와의 하신 말씀과 같이 되었더라."

    아합 이후의 영향

    아합의 죽음 이후에도 그의 가족과 바알 숭배의 영향은 계속되었어. 그의 아들들인 아하시야와 여호람이 차례로 왕위를 이었고, 그의 딸 아달랴는 후에 유다 왕국을 찬탈하기도 했지.

    결국 아합의 가문은 예후의 반란으로 모두 몰살당했고, 이로써 오므리 왕조는 끝이 났어. 이세벨도 창문에서 던져져 개들에게 먹혔고, 이 또한 엘리야의 예언이 성취된 거야.

    그러나 아합의 통치가 남긴 가장 큰 유산은 아마도 북이스라엘 왕국에 깊이 뿌리내린 우상 숭배일 거야. 이 영적 타락은 결국 기원전 722년 앗수르에 의한 북이스라엘의 멸망으로 이어졌지.

    아합에게서 배울 점

    아합의 이야기에서 우리가 배울 수 있는 몇 가지 중요한 교훈이 있어:

    1. 영향력의 중요성: 아합은 이세벨의 강한 영향을 받아 우상 숭배에 깊이 빠졌어. 우리 주변 사람들, 특히 가까운 사람들의 영향력은 우리의 신앙과 가치관에 큰 영향을 미칠 수 있어.

    2. 권력의 유혹과 위험성: 아합은 왕으로서의 권력을 남용하여 개인의 탐욕을 채우려 했어. 나봇의 포도원 사건은 권력이 어떻게 정의와 도덕성을 왜곡할 수 있는지 보여주지.

    3. 회개의 가능성: 아합의 일시적인 회개는 아무리 악한 사람이라도 진정으로 회개하면 하나님의 자비를 경험할 수 있다는 희망을 보여줘.

    4. 행동의 결과: 아합의 삶은 우리의 선택과 행동에는 결과가 따른다는 것을 강력하게 상기시켜줘. 그의 우상 숭배와 불의한 행동은 결국 그와 그의 가문의 비극적인 결말로 이어졌지.

    5. 말씀에 대한 태도: 아합은 선지자 엘리야와 미가야의 경고를 무시하거나 적대시했어. 반면, 그가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였던 짧은 순간은 그에게 일시적인 은혜를 가져다주었지.

    현대인에게 주는 의미

    아합의 이야기는 오늘날 우리에게도 많은 의미가 있어:

    현대 사회에서도 우리는 종종 '바알'과 같은 현대적 우상들 - 물질주의, 성공, 쾌락 등 - 에 유혹될 수 있어. 아합의 이야기는 이런 우상 숭배가 어떻게 우리의 영혼을 타락시키고 결국 파멸로 이끌 수 있는지 경고해주지.

    또한 권력의 남용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중요한 문제야. 정치인이든, 기업 CEO든, 어떤 형태의 권력을 가진 사람이든, 그 권력을 어떻게 사용하는지는 중요한 도덕적 질문이야. 나봇의 포도원 사건은 권력이 약자의 권리를 침해하는 데 사용될 때의 위험성을 여실히 보여주지.

    마지막으로, 아합의 일시적인 회개는 진정한 변화와 일시적인 감정적 반응의 차이를 생각하게 해. 그는 순간적으로 회개했지만, 그것이 지속적인 생활 방식의 변화로 이어지지는 않았어. 이는 우리에게 진정한 회개는 일시적인 감정이 아니라 지속적인 삶의 변화를 수반해야 한다는 것을 상기시켜줘.



    길르앗 라못(RamothGilead) : 지역적 특성과 의미

    길르앗 라못(RamothGilead)은 성경에서 전략적 요충지이자 도피성 중 하나로 언급되며, 이스라엘 역사와 신앙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던 도시입니다.
    이 도시는 요단강 동쪽 갓 지파의 땅에 위치했으며, 군사적, 정치적, 영적 의미를 동시에 가진 장소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본 글에서는 길르앗 라못의 지역적 특성, 역사적 맥락, 영적 교훈을 통해 그 중요성을 5,000자 분량으로 심도 있게 살펴보겠습니다.

    1. 길르앗 라못의 위치와 지역적 특성

    (1) 위치

    길르앗 라못은 요단강 동쪽에 위치한 도시로, 오늘날 요르단의 북부 지역으로 추정됩니다. 이 도시는 갓 지파의 땅에 속했으며(신명기 4:43, 여호수아 20:8), 길르앗 지방의 중심지로 기능했습니다. “길르앗”은 요단강 동쪽의 광범위한 지역을 가리키며, 길르앗 라못은 이 지역의 주요 도시 중 하나로 언급됩니다.

    (2) 지리적 특징

    산악 지대: 길르앗 지방은 산악 지대와 고원이 혼재된 지역으로, 군사적 방어에 유리한 지형을 가졌습니다. 길르앗 라못은 이러한 지리적 이점을 활용하여 방어와 행정 중심지로 사용되었습니다.
    비옥한 땅: 길르앗은 목축과 농업이 발달한 지역으로, 경제적 안정과 번영을 가져다주었습니다. 올리브, 포도, 곡물이 풍부하며, 특히 길르앗의 유향과 약재는 당시 무역에서 중요한 상품이었습니다(예레미야 8:22).
    교통 요충지: 길르앗 라못은 요단강 동쪽과 서쪽을 연결하는 교통의 중심지로, 상업과 군사적 이동의 요충지 역할을 했습니다.

    (3) 도피성으로서의 특성

    길르앗 라못은 도피성으로 지정되었으며, 의도치 않게 살인을 저지른 자들이 보복자에게서 피할 수 있는 안전한 피난처 역할을 했습니다(여호수아 20:8). 이는 지역적 접근성과 안전한 환경을 고려한 선택이었습니다.

    2. 역사적 배경

    (1) 도피성으로서의 역할

    길르앗 라못은 레위 지파에게 할당된 48개 성읍 중 하나이자 도피성으로 지정되었습니다. 이는 살인자가 보복으로부터 안전하게 보호받고 공정한 재판을 받을 수 있는 장소를 제공하기 위함이었습니다. 도피성은 하나님의 자비와 정의를 실행하는 제도로서, 공동체의 평화와 질서를 유지하는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민수기 35장).

    (2) 이스라엘아람 전쟁의 중심지

    길르앗 라못은 군사적으로도 중요한 도시로, 아람(시리아)과의 전쟁에서 여러 차례 언급됩니다.
    아합 왕의 전투: 이스라엘 왕 아합은 아람과의 전쟁에서 길르앗 라못을 탈환하기 위해 전투를 벌였으나, 이 전투에서 치명상을 입고 사망했습니다(열왕기상 22:137).
    여호람 왕의 부상: 아합의 아들 여호람도 아람과의 전쟁 중 길르앗 라못에서 부상을 입었습니다(열왕기하 8:28).
    예후의 기름부음: 예후가 선지자 엘리사의 명을 받아 길르앗 라못에서 기름부음을 받고 북이스라엘의 왕으로 세워졌습니다(열왕기하 9:16). 이는 이 도시가 정치적 변혁의 중심지가 되었음을 보여줍니다.

    (3) 길르앗 지역의 중요성

    길르앗은 아람과 이스라엘 사이의 경계 지역으로, 전략적 요충지로서 지속적인 분쟁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이곳은 무역과 군사 이동의 교차로로, 양국 간의 전쟁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3. 길르앗 라못의 이름과 상징적 의미

    (1) 이름의 의미

    “길르앗 라못”은 히브리어로 "길르앗의 높은 곳" 또는 "길르앗의 언덕"을 뜻합니다. 이는 이 도시가 고지대에 위치했음을 암시하며, 전략적 요충지와 도피성으로서의 상징적 역할을 나타냅니다.
    “라못”은 높고 숭고한 장소를 가리키며, 이는 이 도시가 단순히 지리적 높이뿐만 아니라 영적, 군사적 중요성을 가졌음을 시사합니다.

    (2) 피난처와 보호의 상징

    길르앗 라못은 의도치 않게 죄를 저지른 자들에게 안전한 피난처를 제공함으로써 하나님의 자비와 보호를 상징합니다. 이 도시는 공정한 재판이 보장되는 장소로, 하나님께서 정의를 실현하시는 방식을 보여줍니다.

    (3) 전쟁과 평화의 상징

    길르앗 라못은 전쟁과 평화가 교차하는 장소였습니다. 아람과의 전쟁으로 인해 여러 차례 전쟁터가 되었지만, 도피성으로서 평화를 상징하는 역할도 수행했습니다. 이는 인간의 갈등 속에서도 하나님의 자비와 평화가 함께 작용함을 상징적으로 보여줍니다.

    4. 영적 교훈과 의미

    (1) 하나님의 자비와 공의

    길르앗 라못은 도피성으로서 하나님의 자비와 공의를 동시에 보여줍니다. 죄를 저지른 자가 재판을 받을 때까지 안전하게 보호받는 제도는 하나님의 정의와 사랑이 균형을 이루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2) 믿음의 피난처

    길르앗 라못은 신약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적으로 예표합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영원한 도피처가 되시며, 우리의 죄를 용서하시고 안전하게 보호하십니다(히브리서 6:1820).

    (3) 영적 승리와 헌신

    아합과 여호람의 패배는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한 결과로 해석될 수 있습니다. 반대로 예후의 기름부음 사건은 하나님의 계획과 뜻에 순종할 때 일어나는 영적 승리를 보여줍니다. 이는 우리도 하나님의 뜻에 헌신하며 살아가야 함을 가르칩니다.

    (4) 회복과 평화의 장소

    길르앗 라못은 죄와 갈등 속에서 회복과 평화를 제공하는 장소로 나타납니다. 이는 교회와 신앙 공동체가 길르앗 라못처럼 회복과 평화를 제공하는 공간이 되어야 함을 상기시킵니다.

    5. 오늘날의 적용

    (1) 하나님께 나아가는 피난처

    길르앗 라못은 우리가 하나님께 나아가 그의 은혜와 자비를 찾는 피난처를 상징합니다. 우리의 삶에서 고통과 두려움이 닥칠 때, 우리는 하나님께 피해야 합니다(시편 46:1).

    (2) 정의와 사랑의 실천

    도피성으로서의 길르앗 라못은 우리가 정의와 사랑을 동시에 실천해야 함을 가르칩니다. 사람들에게 공정하게 대하고, 필요할 때 자비를 베푸는 것이 믿음의 실천입니다.

    (3)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헌신

    길르앗 라못에서 예후가 기름부음을 받았던 사건은 하나님의 뜻에 헌신하는 삶의 중요성을 보여줍니다. 우리는 우리의 삶에서 하나님의 계획을 신뢰하며 순종해야 합니다.

    (4) 평화와 화해의 장소

    길르앗 라못은 전쟁과 평화가 교차하는 장소로, 오늘날 교회와 공동체가 평화와 화해를 이루는 공간이 되어야 함을 가르칩니다.

    결론

    길르앗 라못은 도피성으로서, 군사적 요충지로서, 그리고 영적 회복의 장소로서 중요한 의미를 가진 도시입니다. 이 도시는 하나님의 자비와 정의, 인간의 갈등과 하나님의 평화가 교차하는 상징적 장소입니다. 길르앗 라못의 이야기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 나아가 그의 자비를 의지하며 살아가도록 권면합니다. 또한, 우리가 정의와 사랑을 실천하고 하나님의 뜻에 헌신하며, 평화와 화해를 이루는 삶을 살아가야 함을 가르칩니다. 길르앗 라못의 교훈은 오늘날 우리의 신앙과 삶 속에서 여전히 중요한 메시지를 제공합니다.





    4월 23일(수) 열왕기상 21-22장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미가야(22:8)

    이스라엘 왕이 여호사밧에게 이르되 오히려 이믈라의 아들 미가야 한 사람이 있으니 저로 말미암아 여호와께 물을 수 있으나 저는 내게 대하여 길한 일은 예언하지 아니하고 흉한 일만 예언하기로 내가 저를 미워하나이다 여호사밧이 가로되 왕은 그런 말씀을 마소서.
    The king of Israel answered Jehoshaphat, "There is still one man through whom we can inquire of the LORD, but I hate him because he never prophesies anything good about me, but always bad. He is Micaiah son of Imlah." "The king should not say that," Jehoshaphat replied.

    미가야(Micaiah) : 누가 여호와와 같으랴
    이들라의 아들. 아합왕 때의 예언자(왕상 22:8, 대하 18:7)(열왕기상 22:8. 9. 13. 14. 15. 19. 24. 25. 26).
    그는 아합에게 불리워 아람(시리아)와의 전쟁에 이스라엘이 승전하리라고 아첨하는 예언자들의 말에 반대하여 이스라엘이 패전하리라고 기탄없이 예언하였기 때문에 투옥되었으나 이스라엘의 운명은 그 예언대로 들어 맞았다.

    거짓말하는 영(22:23) a lying spirit
    이제 여호와께서 거짓말하는 을 왕의 이 모든 선지자의 입에 넣으셨고 또 여호와께서 왕에게 대하여 화를 말씀하셨나이다.
    So now the LORD has put a lying spirit in the mouths of all these prophets of yours. The LORD has decreed disaster for you.

    여호와의 영(22:24) the spirit from the LORD
    그나아나의 아들 시드기야가 가까이 와서 미가야의 뺨을 치며 이르되 여호와의 이 나를 떠나 어디로 말미암아 가서 네게 말씀하더냐.
    Then Zedekiah son of Kenaanah went up and slapped Micaiah in the face. "Which way did the spirit from the LORD go when he went from me to speak to you?" he asked.


    미가야 (이믈라의 아들)는 '이믈라의 아들 미가야'는 열왕기상 22장역대하 18장에 등장하는 예언자로 북 이스라엘 아합 왕 때에 활동한 선지자입니다.
     
    '미가야'라는 이름의 뜻은 '누가 여호와와 같은가?' 이며 아합의 죽음을 예언했습니다.

    미가야는 시리아와의 전쟁을 일으키기 위해 북이스라엘과 남유다 왕국이 군사적 협정을 맺기 위한 협의 과정 속에 등장한다.
    북이스라엘의 아합은 3년 전 아벡전투에서 아란(시리아)에게 승리했었습니다.
    그리고 결과로 과거 북이스라엘의 땅이었던 길르앗라못을 돌려받기로 약속하고 시리아의 왕 벤하닷을 살려준다.
    하지만 벤하닷의 그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다.
    아합 왕에게 반환되기로 한 요단 동편 길르앗라못은 상업 및 군사도로의 요충지였기 때문이다.
    이에 아합은 시리아와 다시 전쟁을 일으켜서 약속한 길르앗라못 땅을 탈환하기로 결정한다.
    그리그 이 전쟁을 위해 남유다의 여호사밧이 함께 할 것이 요청된다.
    아합과 여호사박은 전쟁에 임하기 전, 이스라엘 민족의 전통대로 그들의 신 야훼에게 뜻을 묻기로 정하고 예언자들을 모으게 된다.
    이 때에 시드기야를 비롯한 400명의 예언자들과 더불어 이믈라의 아들 미가야가 등장하게 됩니다.
    북이스라엘 아합 왕과 남유다의 여호사박밧 왕이 동맹을 맺고 전쟁에 참여하기 전, 예언자들에게 신탁을 듣고자 합니다.
    아합 왕은 400명의 예언자들을 데려와 예언하게 했고 그들의 대표하는 예언자 시드기야와 400명의 예언자들은 전쟁에서 승리할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자 남유다의 여호사밧 왕은 의심하게 되고 다른 예언자를 찾습니다.
    아합과 여호사밧은 다른 400명의 예언자들처럼 미가야도 긍정적인 예언을 기대했지만 미가야는 하나님의 이름으로 진실을 말해야 한다며 전혀 다른 예언을 선포하기를 이 전쟁은 실패하고, 왕이 죽게되며 사람들이 목자없는 양 같이 흩어지게 될 것이라는 절망적인 예언을 합니다. 

    열왕기상 22:17(개역 개정)
    저가 가로되 내가 보니 온 이스라엘이 목자 없는 양같이 산에 흩어졌는데 여호와의 말씀이 이 무리가 주인이 없으니 각각 평안히 그 집으로 돌아 갈 것이니라 하셨나이다.

    또한 미가야는 자기가 본 하늘나라 회의의 환상에 대해 이야기하며, 앞선 400명의 예언은 거짓 영이 그들을 꾐으로 선포된 잘못된 예언임을 지적한다.

    열왕기상 22:19-21(개역 개정)
    미가야가 가로되 그런즉 왕은 여호와의 말씀을 들으소서 내가 보니 여호와께서 그 보좌에 앉으셨고 하늘의 만군이 그 좌우편에 모시고 섰는데 여호와께서 말씀하시기를 누가 아합을 꾀어 저로 길르앗 라못에 올라가서 죽게할꼬 하시니 하나는 이렇게 하겠다 하고 하나는 저렇게 하겠다 하였는데 한 영이 나아와 여호와 앞에 서서 말하되 내가 저를 꾀이겠나이다. 

    아합은 이 불길한 예언이 참인지 거짓인지 판명이 되기까지 미가야를 옥에 가두고 고생의 떡과 물을 마시도록 했다(왕상 22:24- 28).
    그러나 아합은 전쟁터인 길르앗라못으로 올라가서 아람왕의 병사들과 더불어 싸우다가 한 병사가 우연히 쏜 화살에 맞아 죽고 말았다(왕상 22:29-36).


    시드기야 vs 미가야

    오늘 본문의 배경은 솔로몬 이후 이스라엘이 '북이스라엘'과 '남유다'로 분열되어 80여 년이 지났을 때입니다.
    남북 왕국은 서로 치열하게 싸우기도 하고, 주변 국가들의 침략에 연합하기도 하면서 각각의 독립된 국가로 자리를 잡은 상황입니다.
    남 유다는 다윗 가문이 왕위를 이어 '여호사밧'이 4번째 왕으로 다스리고 있었고, 북이스라엘은 몇 번의 쿠데타를 거치며 7번째 왕인 '아합'이 다스리고 있었습니다.

    북 왕국은 분열 당시 10개 지파가 규합되었고, 남 왕국은 유다 지파, 유다로부터 땅을 나눠 가진 시므온 지파(수 19:9)와 인접해 있는 베냐민 지파 중 일부(왕상 12:21) 정도만이 규합되었습니다.
    그래서 북 왕국이 군사적, 경제적으로 훨씬 강성했는데 아합왕 때는 그 차이가 더욱 강력했습니다.

    '길르앗 라몬'을 되찾으려는 아합

    아합은 북쪽 아람에게 침략을 받아 수도 사마리아성이 에워싸이고 수모를 당했지만, 하나님께서 선지자들을 보내 도우심으로 2번이나 대승을 거두었습니다. 그렇게 패한 아람 왕 벤하닷은 이스라엘에게서 빼앗았던 땅들을 돌려주겠다고 약속하였고(20:34) 아합은 벤하닷을 놓아 줍니다.

    그로부터 3년 후(22:1), 벤하닷이 약속한 땅 '길르앗 라몬'을 돌려주지 않자 아합은 남 유다 왕 여호사밧에게 연합해서 길르앗 라몬을 찾아오자고 제안합니다.
    이때 여호사밧이 선지자들을 통해 이 전쟁에 대해 여호와 하나님의 뜻이 어떤지를 물어보자고 제안합니다(22:5).

    북이스라엘이든 남유다이든 하나님을 믿는 백성들로서, 왕은 전쟁에 임하기 전에 하나님의 뜻을 묻고 전쟁 이후 그 뒤처리에 대해서도 하나님의 뜻을 묻는 것은 당연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아합은 지난 날 아람이 쳐들어와 수도인 사마리아성이 둘러싸이는 절체절명의 위기를 맞았을 때, 하나님의 선지자들을 통해 전쟁에 승리했으면서도 자신의 공명심과 자만심에 빠져 있는 것입니다.

    이미 아람 왕 벤하닷을 자기 마음대로 살려 보냈을 때 선지자를 "여호와의 말씀이 내가 멸하기로 작정한 사람을 네 손으로 놓았은즉 네 목숨은 그의 목숨을 대신하고, 네 백성은 그의 백성을 대신하리라(20:41)" 경고를 받고 '근심하고 답답하여' 사마리아로 돌아갔었습니다.

    자만에 빠진 아합

    그리고 21장은 "그 후에 이 일이 있으니라"로 시작해 나봇의 포도원을 탐내어, 그를 모함하여 죽인 후 포도원을 빼앗는 아합과 이세벨의 끔직한 죄악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도움으로 아람에서의 전쟁에서 승리한 아합이 자기도취에 빠져, 벤하닷의 목숨을 대신할 것이라는 경고도 무시하고 오히려 선량한 자기 백성을 죽여 자기 욕심을 채운 것입니다.

    이렇게 교만과 자만에 빠진 아합은 하나님의 뜻을 살피지 않은 채 아람에게서 '길르앗 라몬'을 빼앗아 오기 위해 전쟁을 신속하게 준비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도 때로 무엇을 선택하고 결정할 때 하나님의 뜻을 묻고 기도하며 살피는 시간을 충분히 가지지 않습니다. 아합과 같은 실수를 저지르는 것입니다. 교만하고 자만에 빠져 내 지식, 내 경험을 의지합니다. 우리는 대체로 계획했던 일이 잘되었을 때, 무언가 진행하는 일들이 형통할 때 교만하기 쉽습니다. 요나가 니느웨로 가라는 명령을 어기고 다시스로 도망가기 위해 욥바에 배를 타러 내려왔을 때 그때 마침 배가 왔다(욘1:3)고 했습니다. 형통할 때 그때 조심해야 합니다.

    어떤 선지자를 따를 것인가

    다행히 남유다 왕 여호사밧이 여호와 하나님의 뜻이 어떠한지 물어보자(22:5)고 제안하지만, 이에 대한 아합의 반응은 시큰둥합니다. 자신에게 선지자가 400명쯤 있으니 그들에게 물어보자고 합니다.
    이에 400여 명의 선지자들의 답변은 한결같이 "올라가소서. 주께서 그 성읍을 왕의 손에 넘기시리이다(22:6)"는 것입니다.

    여호사밧이 보니 선지자라는 400여 명의 사람들이 신통치 않습니다.
    한 눈에 봐도 삯을 받고 듣기 좋은 소리만 하는 삯꾼들인 것입니다.
    그래서 다른 선지자가 있느냐고 재차 말합니다.
    이에 대해 아합의 답변이 가관입니다.
    '미가야'라고 한 명 있긴 있는데 그는 길한 일은 예언하지 않고 흉한 일만 예언하는 자라서 자신이 미워한다(22:8)는 것입니다.

    아합의 대답에 아합이 바라보는 선지자에 대한 평가가 있습니다.
    그는 자신에게 길한 예언을 하는 사람은 좋은 선지자이고 자신에게 흉한 예언을 전하는 선지자는 나쁜 선지자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아합은 하나님의 뜻은 안중에도 없습니다.
    선지자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고 그의 뜻을 전하는 자라는 것에도 관심이 없습니다.
    그저 자신의 권력, 명예, 재물 등 자신이 원하고 뜻하는 바를 응원하고 격려하는 소리를 듣는 것에만 관심이 있는 것입니다.

    그가 좋아하는 선지자는 '시드기야'와 같은 사람입니다.
    그는 권세를 상징하는 뿔을 철로 만들어 와서는 왕이 이것들로 아람 사람을 찔러 진멸케 할 것이라고 듣기 좋고 기분 좋게 비유를 맞춥니다(22:11).
    심지어 '미가야'가 아합왕이 패할 것이고 전쟁에서 죽게 될 것이라고 예언하자, 미가야의 뺨을 치고 역정을 냅니다.
    이는 왕에게 잘 보이고자 한 행동입니다.
    아합왕은 이런 시드기야와 400여 명의 삯꾼 선지자들을 좋아하고 그들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있는 것입니다.

    어떤 말씀, 어떤 목회자를, 어떤 사람을 좋아합니까?
    우리는 나를 위로하고 내가 하려고 하는 것이 맞는다고 해 주고 잘될 거다, 해 봐라, 힘내라 격려하는 소리를 좋아합니다.
    물론 사람을 위로하고 격려할 때 이런 말들이 필요합니다.
    그런데 정작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뜻입니다.
    하나님의 뜻이 어디에 있는가?
    때로 내가 포기하고 손해 보고 잘 안 되고 멈추어야 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일 수 있습니다.
    내가 듣기 좋고 싶은 소리가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제대로 듣는 것이 중요하지 않겠습니까?

    아합왕에게 듣기 좋은 예언을 하는 선지자들은 아합왕 주변에 있습니다.
    그가 부르면 언제든지 달려올 준비를 하고 있는 자들입니다.
    본문은 그들이 사마리아 성문 어귀 광장에서 왕복을 입고 앉은 '왕 앞에서' 예언을 하고 있다(22:10)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반면 참선지자인 '미가야'는 내시가 부르러 가야 할 정도로 한적한 곳에 떨어져 있고 스스로 먹는 것을 찾아 왕 앞으로 오지 않습니다.

    고생의 떡, 고생의 물

    '미가야'를 데리러 간 내시는 미가야에게 선지자들 말이 하나같이 왕에게 길하다고 하니 당신도 적당히 비위를 맞추라고 요청합니다.
    그러나 미가야는 "여호와께서 내게 말씀하시는 것 곧 그것을 내가 말하리라(22:13)"고 선언합니다.
    그리고 아합과 여호사밧 앞에서 자신이 받은 대로 전쟁에서 패할 것이고 아합왕이 죽을 것이라고 전합니다.

    아합은 그를 감옥에 가두고 '고생의 떡'과 '고생의 물'을 먹도록 합니다(22:27).
    이것이 참선지자의 길입니다.
    바른 말을 하고 바른 삶을 살면 고생의 떡과 물을 마시게 됩니다.
    그러나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기에 고생도 받아들이고 때로 죽음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세례요한은 헤롯의 부인 헤로디아의 딸 살로메의 요청에 의해 죽임을 당합니다.
    그가 죽임당한 것은 헤롯이 동생의 아내를 취한 것이 옳지 않다고 강력하고 공개적으로 비판했기 때문입니다(막 6:18).
    어차피 왕가의 일이니, 그냥 모른 체하거나 헤롯을 만났을 때 개인적으로 조언하는 정도만 했다면 세례요한이 죽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요한은 불의한 일에 대해 권력을 두려워하지 않고 바른 말을 하고 고생의 떡과 물을 마시고 죽음에 이른 것입니다.

    여호와의 말씀과 같이 되었더라

    마침내 전쟁이 일어났습니다.
    아합은 그날따라 특이한 행동을 합니다.
    자신은 병졸로 변장하고 전쟁터에 나갈 테니, 유다왕 여호사밧만 왕복을 입고 전쟁에 나가라는 것입니다.
    사실 이 전쟁은 남유다의 전쟁이 아니라 북 이스라엘, 즉 아합의 전쟁이기에 아합이 전쟁에 선봉에 책임자로 서야 합니다.
    아마도 아합은 전쟁에 나서면서 뭔가 불리한 낌새를 느낀 것 같습니다.

    아람 왕도 이날따라 전쟁에 나서면서 지휘관 32명에게 군사들을 신경 쓰지 말고, 왕만 잡으라고 명령합니다.
    처음 여호사밧을 향해 맹렬히 질주했던 아람 군사들은 그가 아합 왕이 아닌 것을 알고는 아합 왕을 찾아 나섭니다.
    그러던 중 한 병사가 무심코 활을 당겼는데, 이 화살이 병사로 위장한 아합 왕의 갑옷 솔기를 뚫고 박혔고 이로 인해 아합은 그날 저녁 죽고 말았습니다.

    군사들은 죽은 아합왕을 사마리아에서 장사했는데 왕이 죽었던 병거를 사마리아 연못에서 씻었고 그 씻은 물과 피를 개들이 핥았습니다. 성경은 이를 "여호와께서 하신 말씀과 같이 되었더라(22:38)"고 기록합니다.
    이때 '여호와께서 하신 말씀'이란 것은 아합이 나봇을 죽이고 포도원을 빼앗았을 때 엘리야를 통해 "여호와의 말씀이 개들이 나봇의 피를 핥은 곳에서 개들이 네 곧 네 몸의 피도 핥으리라(21:19)" 했던 말씀을 의미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보잘것없는, 평범한 백성일 뿐인 나봇의 죽음에 대해서 왕의 목숨으로 그 책임을 물으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정의는 때로 무심한 것 같지만, 정의가 행해지는 순간은 공평하고 신속하게 우리의 상상과 기대를 뛰어넘어 이루어집니다.
    우연히 쏜 것 같은 화살, 그리고 우연히 병거를 씻은 것 같은 연못, 모든 것이 우연히 일어난 것 같지만, 하나님께서 역사를 주관하시고 이끄신다는 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아합왕은 하나님의 뜻을 어기고, 외교적 목적으로 이방 나라의 공주와 결혼을 했습니다.
    그렇게 외교력을 통해 국가적 경제와 힘은 키웠지만, 대신 풍요와 번영을 상징하는 바알과 아세라를 섬기는 우상숭배를 허용했습니다. 이에 대한 엘리야 선지자가 가뭄과 갈멜산 기적 등을 통해 "여호와가 하나님이시라"는 강력한 메시지를 전했음에도 아합은 돌이키지 않았고, 선지자를 통해 아람의 침략을 물리침을 경험하면서도 회개치 않고 오히려 교만함만 커져 갔습니다.

    급기야 평범한 농사꾼인 나봇의 포도원을 빼앗기 위해 권력과 하나님의 말씀을 이용해서까지 그를 죽이는 처참한 일을 자행합니다.
    아합왕이 이렇게까지 우상숭배와 공평과 정의를 무시할 수 있었던 것 중 하나는 시드기야와 400여 명의 선지자들과 같이 하나님의 말씀과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 권력자의 입맛과 비위를 맞추며 자신들의 이익을 챙기는 거짓 선지자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누구 편에 설 것인가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권력자를 불의한 자를 비판하고 그에게 책임을 묻지만, 이 시대 우리가 시드기야로 살 것인가, 고생의 떡과 고생의 물을 마시는 것을 마다하지 않으며 미가야로 살아갈 것인가 우리는 선택해야 합니다.

    엘리야는 갈멜산 기적에 앞서 백성들에게 묻습니다.
    누가 하나님이냐?
    바알이냐 여호와냐?
    너희들이 어느 때까지 둘 사이에서 머뭇머뭇하려느냐?(왕상 18:21)
    누가 하나님입니까?
    명예입니까?
    돈입니까?
    권력입니까?
    내가 무엇이 되고 무엇을 갖는 것입니까?
    어느 때까지 머뭇거릴 것입니까?
    여호와께서 하나님이심을 고백합시다.






    선지자 미가야

    미가야는 아합왕 시대에 활동했던 인물로 엘리야와 더불어 활동한 참 선지자 중 한 명입니다.
    시대가 악해 고통 가운데서 하나님의 일을 하였습니다.
    미가야는 멸시와 고난과 시련을 당했지만 그 가운데서도 온전한 믿음을 지켰습니다.
    미가야의 모습은 최고의 주의 종 신앙 모습과 최고 신앙 성도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오늘 선지자 미가야는 어떠한 사람인가? 말씀을 통해 은혜 받으시기 축원합니다.

    1. 왕께 흉한 일을 예언함.(하나님 말씀 그대로 전함)
    8절 “ ,,, 흉한 일만 예언하기로 내가 그를 미워하나이다”
    여러분! 선지자 미가야 첫째 하나님이 주신 말씀 그대로 전합니다.
    원문에 ‘흉한 일 ’는 ‘나쁜, 비참, 해로운, 슬픈’ 의미의 뜻입니다.
    당시 이스라엘은 남 북으로 분리되어 북 이스라엘 아합 왕, 남 유다 여호사밧 왕은 사돈지간입니다.
    둘이 함께 수리아와 전쟁 벌입니다. 당시는 전쟁 승패 여부를 선지자에게 뭍은 관례입니다.
    거짓 선지자들은 모두 올라가 싸우소서 이들 모두 왕의 비유를 맞추는 자들이었습니다.
    여호사밧은 다른 선지자 여부 물었습니다. 항상 해로운 예언을 하는 미가야 선지자 부릅니다.
    미가야는 이 전쟁에서 아합 왕의 죽음을 예언합니다. 하나님 말씀을 더하거나 빼면 안 됩니다.
    더하면 성경에 기록된 재앙들 받습니다. 제하면 거룩한 성 천국에 못 갑니다. 우리는 성경을 따라야 합니다.
    성경을 앞세우고 성경의 진리를 따라 말하고 행하여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선지 미가야처럼 하나님 말씀 그대로 전하고 행하는 성도 되시길 축원합니다.

    2. 고생의 떡과 고생의 물을 마심.(말씀 때문에 고난 받음)
    27절 “ 말하기를 왕의 말씀이 이놈을 옥에 가두고 내가 평안히 돌아올 때까지 고생의 떡과 고생의 물을 먹이라 하였다 하라”
    여러분! 선지자 미가야 둘째 말씀 때문에 고난을 받았습니다. 원문에 “고생”은 ‘고통, 고난, 핍박’ 의미의 뜻입니다.
    하나님 말씀을 가감 없이 그대로 전하여 당한 고난 고통 핍박을 생생하게 보여줍니다.
    26절에 마가야를 잡아끌고 가고, 쇠사슬로 묶어 끌고 갑니다. 짐승 취급을 당합니다.
    시드기야가 미가야의 뺨을 때림 말씀 때문에 고난받습니다. 27절에 ‘이놈’은 인간적인 수치와 멸시를 겪었음을 뜻합니다.
    고생의 떡과 물을 마시게 합니다. 경제적 고통을 가합니다. 예수님 증인으로 복음을 바로 전하는 결과 미움 즉 핍박을 받습니다.
    베드로와 스데반은 하나님 말씀 그대로 전함으로 핍박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머리털 하나도 상치 않게 하십니다.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를 풀무 불에서 보호하셨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말씀 때문에 받은 고난 두려워하지 말고 승리하는 성도 되시길 축원합니다.

    3. 이름대로 살아감. (오직 예수님의 삶 예표)
    9절 “이믈라의 아들 미가야를 속히 오게 하라”
    여러분! 선지자 미가야 셋째 오직 예수님의 삶의 예표입니다.
    원문에 미가야는 ‘누가 여호와와 같은가’의 뜻입니다. 미가야는 자기 이름값을 하고 살았습니다.
    왕의 악행에도 굴하지 않고 이름대로 삶을 살았습니다. 모세는 ‘물에서 건져내다’는 뜻입니다.
    이스라엘 백성 애굽에서 건져냈고, 예수님의 인류 구원의 모습이 담겨 있고 그 이름대로 살았습니다.
    다윗은 ‘사랑받는 자’로서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자로서 합당한 삶을 살았고 예수님의 왕권을 보여주는 삶을 살았습니다.
    이름대로 살아야 합니다. 엘리야는 ‘나의 하나님은 여호와시다’라는 뜻입니다.
    그는 오직 하나님만이 참하나님이심 보여주는 삶을 살았고 예수님 선지자로서 모습입니다.
    예수님은 성령으로 잉태, 성령 충만한 삶으로 하나님 말씀 지키며 온전히 헌신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 말씀 붙들고, 말씀 때문에 고난을 받고, 예수님의 삶 사시길 축원합니다.



    선지자 미가야가 아합의 죽음을 예언함(열왕기상 22:1~28)

    * 본문요약

        유다 왕 여호사밧이 아합 왕을 찾아갔을 때

        아합이 아람에게 빼앗긴 길르앗 라못을 다시 되찾는 전쟁을 하자고 여호사밧에게 제의합니다.

        여호사밧은 먼저 여호와께 물은 다음에 전쟁을 하자고 하여

        아합이 선지자 400명을 모으자 그들은 아합의 승리를 예언합니다.

        여호사밧이 이들 이외에 다른 선지자를 구하자 아합은 선지자 미가야를 부릅니다.

        미가야는 처음에는 이스라엘의 승리를 예언하나 아합이 진실을 말하라고 하자

        하나님께서 거짓말하는 영을 선지자들에게 넣으셨다고 말하며,

        이 전쟁으로 아합은 죽게 될 것이라고 예언합니다.

        화가 난 아합은 미가야를 감옥에 가둡니다.

    찬 양 : 507장(새 455) 주님의 마음을 본받는 자

             347장(새 212) 겸손히 주를 섬길 때

    * 본문해설

    1. 여호사밧과 아합과의 동맹(1~4절)

    1) 그 후 아람과 이스라엘 사이에는 3년 동안 전쟁이 없었습니다.

    2) (전쟁이 없은 지) 3년째 되던 해에

       유다 왕 여호사밧이 (북왕국) 이스라엘 왕을 만나러 내려갔습니다.

    3) (북왕국) 이스라엘 왕이 자기 신하들에게 말했습니다.

      “길르앗 라못은 본래 우리의 땅인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그런데 어찌하여 그것을 되찾을 생각은 하지 않고 가만히 앉아 있기만 하느냐?”

    4) 그리고 나서 아합이 여호사밧에게 물었습니다.

      “길르앗 라못을 가서 나와 함께 싸우시겠느뇨?”

       여호와밧이 대답했습니다. “내가 왕과 하나이고 내 백성이 왕의 백성들과 하나이며,

       내 말들이 왕의 말들과 하나이니이다.”

    2. 선지자 400명이 아합의 승리를 예언함(5~14절)

    5) 그러나 여호사밧이 이스라엘 왕에게 다시 말했습니다.

      “청컨대 먼저 여호와의 말씀이 어떠하신지 물어보서서.”

    6) 그러자 이스라엘 왕이 선지자 400명쯤을 모으고 그들에게 물었습니다.

      “내가 길르앗 라못에 가서 싸워야 하겠느냐, 싸우지 말아야 하겠느냐?”

       그들이 말했습니다. “올라가옵소서. 주께서 그 성읍을 왕의 손에 붙이시리이다.”

    7) 그러자 여호사밧이 말했습니다.

      “여기에 우리가 물어볼 만한 또 다른 여호와의 선지자가 있지 아니하니이까?”

    8) 이스라엘 왕이 여호사밧에게 대답했습니다. 여호와께 여쭈어볼 수 있는 사람이

      “이믈라의 아들 미가야라고 하는 사람이 하나 있으니,

       그로 말미암아 여호와께 여쭈어볼 수는 있으나

       그 선지자는 내게 대하여 좋은 예언은 하지 않고 항상 흉한 것만 예언하였으므로

       내가 그를 미워하나이다(그를 싫어합니다). 여호사밧이 말했습니다.

      “왕께서는 그런 말씀을 마소서(여호와의 선지자에 대하여 그렇게 말해서는 안 됩니다.)”

    9) 그러자 이스라엘 왕이 한 내시를 불러 말했습니다.

      “가서 이믈라의 아들 미가야를 속히 데려오너라.”

    10) (북왕국) 이스라엘 왕과 유다 왕 여호사밧은 왕복을 입고

         사마리아 성문 어귀에 있는 광장(타작마당)에 마련된 보좌에 앉아 있고,

         선지자들은 모두 그 두 왕 앞에서 예언을 하고 있었습니다.

    11) 그때 그나아나의 아들 시드기야가 자기가 만든 철 뿔들을 가지고 나와서 말하기를

        “여호와께서 말씀하시기를

         ‘이것으로 너희가 아람 사람들을 찔러 진멸하리라’하셨나이다”하였고,

    12) 다른 선지자들도 모두 그와 같은 예언을 하면서 말했습니다.

        “길르앗 라못으로 싸우러 나가 승리를 얻으소서.

         여호와께서 그 성읍을 왕의 손에 넘기실 붙이시리이다.”

    13) 미가야를 부르러 갔던 신하가 미가야에게 말해습니다.

        “다른 선지자들은 모두 한결같이 (이구동성으로)

         왕이 승리할 것이라고 길하게(좋은) 예언을 하였으니,

         청컨대 당신도 그들과 같이 길하게(좋게) 말하고 왕을 격려해 주시오.”

    14) 그러자 미가야가 말했습니다. “여호와의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노니

         나는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것만을 왕에게 말하리라.”

    3. 선지자 미가야가 아합의 죽음을 예언함(15~23절)

    15) 미기야가 도착하자 왕이 그에게 물었습니다.

        “미가야야, 우리가 길르앗 라못으로 싸우러 가랴 말랴? ”

         미가야가 대답했습니다.

        “올라가서 승리를 얻으소서. 여호와께서 그 성을 왕의 손에 붙이시리이다.”

    16) 왕이 그에게 말했습니다. “내가 몇 번이나 네게 맹세하게 하여야

         네가 여호와의 이름으로 진실한 것만 내게 말하겠느냐?”

    17) 그러자 미가야가 대답했습니다.

        “내가 보니 온 이스라엘이 목자 없는 양같이 산 위에 흩어졌는데,

         여호와께서 이르시기를 ‘이 무리에게 주인이 없으니

         각기 평안히 자기의 집으로 돌아갈 것이라’하고 말씀하셨나이다.’”

    18) 이스라엘 왕이 여호사밧에게 말했습니다.

        “보십시오, 내가 뭐하고 합디까? 저자는 나에게 길한 것은 예언하지 않고

         흉한 것만을 예언한다고 당신에게 말씀하지 아니하였나이까?“

    19) 미가야가 계속해서 말했습니다. “그런즉 이제 왕은 여호와의 말씀을 들으소서.

         내가 보니 여호와께서 보좌 위에 앉으셨고,

         하늘의 모든 군대가 여호와 좌우편에 여호와를 모시고 서 있는데

    20) 여호와께서 ‘누가 아합을 속여 길르앗 라못에 올라가서 죽게 하겠느냐?’하시자

         하나는 이렇게 하겠다고 하고 하나는 저렇게 하겠다고 하였는데,

    21) 그때 한 영이 앞으로 나오더니 여호와 앞에 서서 말하기를

         ‘제가 그를 속여 꾀어내겠나이다.’

    22)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기를 ‘어떻게 하겠느냐?’

         그가 이르기를‘제가 거짓말하는 영이 되어 아합의 모든 선지자의 입에 들어가서

         그들이 모두 거짓말을 하도록 하겠나이다.’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너는 속이겠고 또 이루리라. 나가서 그리하라’하셨은즉

    23) 그러니 지금 보옵소서.

         여호와께서 거짓말하는 영을 왕의 이 모든 선지자의 입에 넣으셨고,

         또 여호와께서 왕에게 내릴 화(禍, 재앙)에 대하여 말씀하셨나이다.”

    - 거짓말하는 영(22절) :

        일반적으로 거짓말하는 영은 사탄이나 마귀를 가리킵니다.

        그러나 여기에서는 하나님께서 아합을 심판하시는 과정에서 진행되는 일이므로

        사탄이나 마귀가 아니라,

        천사 중의 하나가 아합을 충동하여 죽음에 이르게 하는 것입니다.

    4. 아합이 미가야를 감옥에 가둠(24~28절)

    24) 그러자 그나아나의 아들 시드기야가 가까이 와서 미가야의 뺨을 치며 말했습니다.

        “여호와의 영이 나를 떠나 어디로 말미암아 가서 네게 말씀하시더냐?”

    25) 미가야가 대답했습니다.

        “네가 골방에 들어가 숨는 그 날에 너는 모든 것을 알게 될 것이라.”

    26) 그러자 이스라엘 왕이 명령했습니다.

        “미가야를 붙잡아 이 성읍의 영주 아몬과 왕자 요아스에게로 끌고 가서

    27) 말하기를 ‘왕의 말씀이 이놈을 감옥에 가두고 내가 평안히 돌아올 때까지

         고생의 떡과 고생의 물을 먹이라’하였다고 전하라”

    28) 미가야가 말했습니다. “왕이 정말로 평안히 돌아오시게 된다면

         내가 전한 말은 여호와께서 하신 말씀이 아니리이다.” 미가야가 또 말했습니다.

        “여기에 있는 모든 백성아 나의 말을 다 들을지어다(이 말을 잘 기억할지어다).”

    * 묵상 point

    1. 400명의 거짓 선지자와 참된 말씀을 전하는 미가야 선지자

    ➠ 여호사밧에게 함께 전쟁을 하자고 제의하는 아합(1~4절)

        아람의 벤하닷과의 전쟁이 끝나고 3년 동안 아람과의 전쟁이 없었는데,

        전쟁이 없는지 3년째 되던 해에 아합이 본래 이스라엘 땅이었다가 아람에게 빼앗긴

        길르앗 라못을 되찾는 전쟁을 하자고 신하들에게 말합니다.

        그때 마침 아합을 찾아왔던 남왕국 유다의 여호사밧 왕에게

        아합이 함께 길르앗 라못을 치는 전쟁을 하자고 하자 여호사밧은 흔쾌히 승낙하면서,

        다만 전쟁을 하기 전에 먼저 여호와께 묻고 하자고 말합니다.

     1) 400명의 거짓 선지자들(5~6절)

        그러자 아합이 선지자 400명을 모아 예언을 하게 합니다.

        먼저 그나아나의 아들 시드기야가 철로 뿔들을 가지고 와서

        여호와께서 아합이 이것들로 아람을 진멸하리라고 하셨다고 예언합니다.

        그러자 나머지 선지자들도 모두 그의 말에 동조하며

        하나님께서 아합이 승리하리라고 말씀하셨다고 전합니다.

        그러나 이들은 모두 하나님께서 아합을 심판하시기 위해 그를 죽음으로 몰고 가도록

        400명의 선지자에게 거짓말하는 영을 보내셔서 거짓을 예언하게 한 자들입니다.

        그러므로 이들은 모두 하나님의 뜻과는 반대로 예언한 거짓 선지자들입니다.

     2) 아합에 대한 심판을 예언하는 선지자 미가야(15~23절)

        미가야는 처음에는 400명의 선지자처럼 아합의 승리를 예언했다가

        아합이 진실을 말하라고 말하자

        이 전쟁으로 아합이 죽어서 이스라엘이 목자 없는 양처럼 흩어지리라고 예언합니다.

        그리고는 하나님께서 아합을 죽음으로 몰기 위해 전쟁에 나가도록 해야겠는데

        어떻게 하면 좋겠느냐고 하나님 앞에 있는 하늘의 군사들에게 말씀하시자

        그 중 한 영이 나와 자기가 거짓말 하는 영이 되어 400명의 선지자들의 입에 들어가서

        아합이 충동 될 만한 거짓 예언을 하도록 하겠다고 말합니다.

        그러므로 이 전쟁은

        아합을 죽음으로 모는 전쟁이 될 것이라고 경고합니다.

     3) 400:1이 주는 숫자의 교훈

        갈멜산에서는 450명의 바알 선지자와 엘리야 한 사람이 싸워 450:1이었는데

        여기에서는 거짓 선지자 400명대 미가야 선지자 한 사람, 400:1의 싸움입니다.

        400명이 아합의 승리를 외치는데

        오직 미가야 선지자 한 사람만 아합이 죽는다고 말합니다.

        400명의 선지자들은 그 숫자의 힘을 동원하여 미가야 선지자를 폭행하고 협박합니다.

        그러나 그 숫자의 힘은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미가야 선지자가 한 사람일지라도

        그가 한 말이 하나님의 참된 말씀이면 하나님의 역사는 그를 통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2. 시대의 흐름을 타는 설교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설교

     1) 권력자를 기쁘게 하는 설교

        미가야 선지자를 부르러 갔던 아합의 신하는

        미가야에게 다른 선지자가 왕을 격려하는 예언을 했다면서

        미가야에게도 왕이 기뻐할 만한 예언을 해달라고 요청합니다.

        이것은 권력자인 왕을 기쁘게 하는 설교를 해달라는 것입니다.

        소위 말하는 어용 설교입니다.

        남왕국 유다가 바벨론에 망하기 전에

        선지자 예레미야가 혼자서 고독하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할 때

        유다의 마지막 왕 시드기야 주변에 이런 어용 선지자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시드기야는 그들이 전하는 말을 듣고 예레미야가 전하는 하나님의 말씀을 거부합니다.

        그러다 결국 시드기야는 아들이 죽는 모습을 마지막으로 본 후에

        두 눈이 뽑힌 채 결박되어 바벨론으로 끌려가는 비운의 왕이 됩니다.

        권력자는 자기의 권력으로 선지자나 설교자들의 메시지를

        자기가 듣기 좋게 바꾸게 하려 하지 말아야 합니다.

        이것은 닭이 솔개에게 쫓기다가 대가리를 모래에 파묻고는

        숨었다고 하는 것만큼이나 어리석은 짓입니다.

        또 설교자들 역시 권력의 힘에 눌려 하나님의 말씀을 왜곡하여 전해서는 안 됩니다.

        이 땅의 권세보다 하나님의 권세가 더 크다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2) 대중의 인기를 얻기 위한 설교

        ‘청중들이 좋아하는 설교’라는 주제의 설교 세미나들이 참 많습니다.

        청중들이 좋아하는 설교를 해야 교회가 부흥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설교는 자칫 하나님께서 싫어하시는 설교가 되기 쉽습니다.

        가령 소돔과 고모라에서 설교할 때 청중들이 좋아하는 설교를 하려 한다면

        그 설교가 어떤 설교가 되겠습니까?

        청중의 구미에 맞는 설교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설교를 하려 해야 합니다.

     3)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다 투옥된 선지자 미가야(24~28절)

        선지자 미가야는 하나님께서 아합을 죽음으로 몰기 위해

        이 전쟁에 나가도록 그의 마음을 충동하셨다고 전하자

        어용 선지자 시드기야는 “여호와의 영이 나를 떠나

        어디로 말미암아 가서 네게 말씀하시더냐?”하며 미가야의 뺨을 쳤고,

        아합 왕은 미가야를 감옥에 가두고는

        자기가 돌아올 때까지 고생의 떡과 고생의 물을 마시게 하라고 명합니다.

        고생의 떡과 고생의 물이란 죽지 않을 정도의 떡과 물만 주라는 것을 뜻합니다.

        권력자를 기쁘게 하는 설교를 거부하고, 청중들이 좋아하는 설교도 거부하며

        오직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예언만 고집하다가 결국 감옥살이까지 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바로 이것을 원하십니다.

    ● 묵상 : 내 귀에 듣기 좋은 설교만 찾는 자는 아합처럼 됩니다.

        마지막 때에는 이 세상이 온통 죄에 빠진 세상이 될 것이라고 주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마지막 때의 청중들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말씀을 듣기 싫어한다는 말씀입니다.

        이때 청중들이 좋아하는 설교를 찾아다니다가는 아합처럼 망하는 자들이 되고 맙니다.

        힘들고 어렵더라도 하나님께서 주시는 말씀을 전하는 자가 되십시오.

    3. 아합을 충동하여 심판에 이르게 하시는 하나님(19~23절)

        아합이 이세벨에게 충동 되어(왕상 21:25) 하나님께서 진노하실만한 죄를 범하자,

        하나님께서 아합을 충동하셔서 그를 죽음에 이르도록 하십니다.

        아합이 하나님의 말씀을 거부하고 계속 죄를 범하게 하는 이세벨에게만 충동 되자,

        그가 이세벨에게 충동 되는 것과 똑같은 방식으로

        그에게 거짓말을 하는 선지자들을 보내어서

        그들에게 충동 되어 자기 스스로 죽음에 이르는 길을 걷게 하시는 것입니다.

        다윗에게 쿠데타를 일으킨 그의 아들 압살롬이

        아히도벨의 좋은 지혜를 거부하고 후새의 말을 듣도록 하신 것 역시

        압살롬의 마음을 충동하셔서 그로 죽음에 이르도록 하신 것입니다(삼하 17:14).

    ● 묵상 :

        세상의 권세가 아무리 커도 하나님의 권세를 이길 수 없고,

        세상이 아무리 지혜롭다고 하더라도 하나님의 지혜를 이길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권세가 있다고 하늘 높은 줄 모르는 자가 되지 말고,

        지식이 있다고 교만한 자가 되지 마십시오. 하나님께서 교만한 자를 내치십니다.

    * 기도제목

    1. 아합처럼 죄에 충동 되어

       결국 파멸에 이르는 자가 되지 말게 하옵소서.

    2. 우리는 죄에 충동 되는 자가 아니라

       성령에 충동 되어 날마다 거룩해지는

       신실한 성도가 되게 하옵소서.


    미가야 선지자 이야기

    여호사밧 왕이 이스라엘의 아합 왕과 함께 길르앗 라못에 주둔하고 있는 아람 군대를 치기로 결의를 했습니다.

    여호사밧이 하나님께 묻겠다고 하자 아합이 자신의 궁에 있는 선지자 사백 명에게 전쟁이 어찌될 것인가 물었고 그들은 한 목소리로 하나님이 그들을 왕의 손에 넘기셨다고 대답했습니다.

    여호사밧이 다른 선지자는 없느냐고 묻자 아합이 미가야 선지자를 데려 오라고 합니다.
    그때의 이야기입니다.

       [역대하 18장]
    "12. 미가야를 부르러 간 사자가 그에게 말하여 이르되 선지자들의 말이 하나 같이 왕에게 좋게 말하니 청하건대 당신의 말도 그들 중 한 사람처럼 좋게 말하소서 하니
    13. 미가야가 이르되 여호와께서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노니 내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 곧 그것을 내가 말하리라 하고

    14. 이에 왕에게 이르니 왕이 그에게 이르되 미가야야 우리가 길르앗 라못으로 싸우러 가랴 말랴 하는지라. 이르되 올라가서 승리를 거두소서 그들이 왕의 손에 넘긴 바 되리이다 하니
    15. 왕이 그에게 이르되 여호와의 이름으로 진실한 것 이외에는 아무것도 말하지 말라고 내가 몇 번이나 네게 맹세하게 하여야 하겠느냐 하니

    16. 그가 이르되 내가 보니 온 이스라엘이 목자 없는 양 같이 산에 흩어졌는데 여호와의 말씀이 이 무리가 주인이 없으니 각각 평안히 자기들의 집으로 돌아갈 것이니라 하셨나이다 하는지라.

    17.이스라엘 왕이 여호사밧에게 이르되 저 사람이 내게 대하여 좋은 일로 예언하지 아니하고 나쁜 일로만 예언할 것이라고 당신에게 말씀하지 아니하였나이까 하더라.

    18. 미가야가 이르되 그런즉 왕은 여호와의 말씀을 들으소서. 내가 보니 여호와께서 그의 보좌에 앉으셨고 하늘의 만군이 그의 좌우편에 모시고 섰는데
    19. 여호와께서 말씀하시기를 누가 이스라엘 왕 아합을 꾀어 그에게 길르앗 라못에 올라가서 죽게 할까 하시니 하나는 이렇게 하겠다 하고 하나는 저렇게 하겠다 하였는데
    20. 한 영이 나와서 여호와 앞에 서서 말하되 내가 그를 꾀겠나이다 하니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어떻게 하겠느냐 하시니
    21. 그가 이르되 내가 나가서 거짓말하는 영이 되어 그의 모든 선지자들의 입에 있겠나이다 하니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너는 꾀겠고 또 이루리라 나가서 그리하라 하셨은즉

    22. 이제 보소서 여호와께서 거짓말하는 영을 왕의 이 모든 선지자들의 입에 넣으셨고 또 여호와께서 왕에게 대하여 재앙을 말씀하셨나이다 하니

    23. 그나아나의 아들 시드기야가 가까이 와서 미가야의 뺨을 치며 이르되 여호와의 영이 나를 떠나 어디로 가서 네게 말씀하더냐 하는지라.

    24. 미가야가 이르되 네가 골방에 들어가서 숨는 바로 그 날에 보리라 하더라.

    25.이스라엘 왕이 이르되 미가야를 잡아 시장 아몬과 왕자 요아스에게로 끌고 돌아가서
    26. 왕이 이같이 말하기를 이 놈을 옥에 가두고 내가 평안히 돌아올 때까지 고난의 떡과 고난의 물을 먹게 하라 하셨나이다 하니

    27. 미가야가 이르되 왕이 참으로 평안히 돌아오시게 된다면 여호와께서 내게 말씀하지 아니하셨으리이다 하고 또 이르되 너희 백성들아 다 들을지어다 하니라."

    이것은 그리스도께서 당하신 일입니다.
    거짓 선지자들 틈에서 거짓을 말하도록 강요당해도 끝까지 진리만을 말씀하시며 고난의 떡을 먹고 고난의 물을 마시셨어요.
    창조주가 피조물에게 뺨을 맞고 채찍을 맞고 온갖 조롱과 모욕을 당하셨어요.

    선지자들과 함께 고난의 떡을 마신 주님께서 오늘날의 선지자들인 우리 성도들 안에서 또한 고난의 떡과 물을 마시고 계십니다.

    그래서 우리도 저들과 똑같이 비록 지칠지라도 쓰러지지는 않습니다.
    우리가 거울에 비쳐진 모습이 바로 저 선지자들로 보이고 있는 것이니까요.









    선지자 미가

    구약 성경에서 선지자 미가는 정의와 공의를 강력하게 외친 인물로, 그의 메시지는 현대 사회에도 큰 울림을 주고 있습니다.
    그는 이스라엘의 지도자와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뜻을 전달하며, 특히 사회적 불평등과 부패에 대한 강한 비판을 펼쳤습니다. 오늘은 선지자 미가의 삶과 예언, 그리고 그가 남긴 중요한 메시지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1. 미가의 시대적 배경

    미가는 기원전 8세기경, 남유다 왕국에서 활동한 예언자입니다. 그는 유다의 여러 왕들, 즉 요담, 아하스, 히스기야 시대에 사역하였으며, 주로 예루살렘과 그 인근 지역을 대상으로 예언을 전했습니다. 당시 이스라엘과 유다는 정치적, 경제적 불안정 속에서 고통받고 있었습니다. 북이스라엘은 아시리아 제국의 위협을 받고 있었고, 남유다 역시 정치적 부패와 사회적 불의가 만연했습니다. 미가는 이러한 상황에서 정의와 공의를 강조하며, 사회적 약자들을 돌보지 않는 지도자들을 강하게 비판했습니다.

    2. 미가의 주요 메시지

    미가의 예언서(구약 성경의 "미가서")는 여러 장을 통해 다양한 주제를 다루지만, 그중에서도 핵심적인 메시지는 정의, 자비, 그리고 겸손한 삶을 강조합니다.

    정의의 외침 (미가서 6:8)

    미가의 가장 유명한 구절 중 하나는 다음과 같습니다:

    그가네게선한것이무엇임을보이셨나니

    ,여호와께서네게구하시는것은오직정의를행하며인자를사랑하며겸손하게네하나님과함께행하는것이아니냐

    .그가네게선한것이무엇임을보이셨나니,여호와께서네게구하시는것은오직정의를행하며인자를사랑하며겸손하게네하나님과함께행하는것이아니냐.

    광야의 선지자 이미지

    이 구절은 미가서의 핵심적인 메시지를 잘 보여줍니다. 미가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나님께서 요구하는 것은 화려한 제사나 물질적인 헌물이 아니라, 정의롭게 행동하고, 자비를 실천하며, 하나님 앞에서 겸손하게 살아가는 것이라고 가르칩니다.

    지도자의 부패와 사회적 불의에 대한 비판

    미가는 예루살렘의 지도자들이 부정한 방법으로 부를 축적하고, 법을 왜곡하여 가난하고 약한 자들을 억압하는 모습을 강하게 비판했습니다. 그는 이러한 불의한 행동들이 하나님의 심판을 불러올 것이라고 경고하며, 그들이 진정한 회개와 변화를 추구하지 않으면 멸망을 피할 수 없다고 말했습니다.

    평화의 예언 (미가서 4:3-4)

    미가는 미래에 올 평화로운 시대에 대한 희망적인 예언도 전했습니다. 그는 사람들이 칼을 쳐서 보습을 만들고, 창을 쳐서 낫을 만들며 더 이상 전쟁을 배우지 않는 날이 올 것이라고 예언했습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세우실 평화의 왕국을 상징하며, 미가는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공의가 실현되고 모든 이들이 평화롭게 사는 세상이 도래할 것이라고 선포했습니다.

    3. 미가와 다른 예언자들과의 비교

    미가는 다른 예언자들, 특히 같은 시기에 활동한 이사야와 비슷한 메시지를 전했지만, 그 표현 방식과 강조점에서 차이가 있습니다.

    이사야는 하나님의 구원 계획과 메시아의 도래를 강조하며, 구체적으로 왕족과 국가의 운명에 초점을 맞춘 반면,

    미가는 보다 서민적이고 사회적 정의에 큰 중점을 두고 가난한 자들과 억압받는 자들을 보호하는 메시지를 전했습니다.

    미가의 예언은 아모스와도 유사합니다. 아모스 역시 부유층의 탐욕과 사회적 불의를 강하게 비판하며, 가난한 자들의 권리를 옹호했습니다. 미가와 아모스 모두 하나님의 공의와 정의가 부패한 사회를 바로잡는 열쇠라고 보았지만, 미가는 더 나아가 평화의 비전을 통해 그들의 메시지에 희망을 추가했습니다.

    4. 미가서의 현대적 의미

    미가의 예언은 수천 년이 지난 지금도 많은 사람들에게 깊은 영감을 주고 있습니다. 오늘날의 사회에서도 부패와 불평등이 문제시되고 있으며, 미가의 메시지는 여전히 시의적절합니다. 정의로운 사회를 만들고자 하는 노력, 사회적 약자를 돌보고 부유층의 탐욕을 비판하는 목소리는 미가의 예언에서부터 비롯된 가치들입니다.

    특히 미가서 6장 8절의 말씀은 기독교뿐만 아니라 다양한 종교와 철학에서 윤리적 삶의 본질로 인용되며, 정의롭고 자비로운 삶의 기준을 제시합니다. 이는 개인적 신앙뿐 아니라 사회적 책임을 강조하는 면에서도 중요한 가르침입니다.

    5. 결론

    선지자 미가는 고대 이스라엘 사회에서 정의와 자비, 그리고 평화를 외쳤던 중요한 예언자입니다. 그의 메시지는 부패와 불의로 가득 찬 당시 사회에 대한 하나님의 경고였을 뿐만 아니라, 궁극적인 회복과 평화의 비전도 담고 있었습니다. 미가의 예언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우리의 마음에 울림을 주며,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에서 정의를 실천하고, 약자를 보호하며, 겸손하게 살아가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상기시켜 줍니다.




    신실한 선지자 미가야(역대하 18:4-22)

    우리는 미가야 선지의 말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과 같은 말을 들을 수가 있습니다. 본문 13절에 "내 하나님의 말씀하시는 것 곧 그것을 내가 말하리라"고 하였는데 이것은 예수님의 말씀과 같은 말입니다. 요 12:50에 "내가 이르는 것은 내 아버지께서 내게 말씀 그대로 이르노라"고 말씀하셨듯이 미가야의 말은 예수님의 이 말과 같은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미가야는 선지자의 사명에 충실하였습니다.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말씀을 받은 대로만 말하였습니다. 1. 거짓 선지자 400명이 있었습니다 본문에 아합과 여호사밧에게 승리를 예언한 400명의 선지자와 반대로 패배를 예언한 미가야 선지자의 모습이 나타났습니다. (1) 거짓을 말하는 자는 언제나 수가 많습니다. 그러나 다수가 반드시 진리는 아닙니다. 엘리야도 갈멜산 위에서의 결전에서 바알의 선지자 450명 아세라 선지자 400명, 계 850명과 홀로 대항해 싸웠습니다. (2) 거짓 선지자는 기세가 당당합니다. 그들은 철뿔을 만들어 가지고 승리를 왕 앞에서 확언하였습니다. (3) 거짓 선지자의 기원은 마귀입니다(요8:44). (4) 그 말이 매혹적입니다. 전쟁에 승리한다 하니 얼마나 통쾌한 말입니까? (5) 거짓 선지자의 예언은 전쟁에 패하고 아합 왕이 전사했을 때 거짓이 판명 되었습니다. (6) 거짓 선지자도 참선지자의 모양으로 가장 합니다(고후 11:4). 2. 참선지자 미가야 (1) 미가야에 대한 아합의 평가 7절에 "내가 저를 미워하나이다. " 아합은 엘리야를 자신의 적으로 간주했던 바와 같이 미가야도 자신의 적으로 간주했습니다. 미가야는 항상 담대하게 아합의 죄악과 그의 탐욕을 견책했으며 이로 인하여 아합은 미가야를 매우 미워하였습니다. 신실하고 담대한 사람은 종종 미움을 받습니다. 갈 4:16에 "내가 너희에게 참된 말을 하므로 원수가 되었느냐?." (2) 배척받은 미가야 선지자 일반적으로 정치와 종교는 분리되어야 합니다. 정치는 땅에 속하고 종교는 하늘에 속합니다. 그래서 정치와 종교는 각기 가지고 있는 고유한 기능을 가지고 충돌없이 관계를 유지하는 것이 그 상례입니다. 그런데 정치권력을 가진 자가본연의 직무에서 벗어나 월권을 하거나 부당하게 권력을 남용하는 경우 종교는 그런 권력 자에 게 마땅히 하나님의 말씀을 통하여 경고를 하거나 권면을 해야 합니다. 미가야 선지자는 선지자로서의 의무를 다하다가 아합의 비위를 거스렸던 것입니다. (3) 아합 왕은 하나님의 경고의 말씀을 무시했습니다. 아합은 이스라엘 역대 왕들 가운데 가장 악한 왕으로 평가를 받는 사람입니다. 전 이스라엘에 이방종교를 강요하고 이방 문화와 풍습을 유입하여 이스라엘을 혼란케 하였던 것입니다. 이는 분명히 범죄입니다. 이런 죄악을 경고하는 하나님의 말씀이 미가야에 의해 전달되었지만 아합은 오히려 미가야를 미워하고 배척했습니다. (4) 이에 대해 미가야가 취했던 입장 1) 하나님께 대한 전적인 의지:미가야는 아합을 의지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만 의지하였던 것입니다. 2) 하나님의 도우심에 대한 기대:미가야는 하나님께서 그에게 자신의 뜻을 계시해 주시며 말할 것을 가르쳐 주시리라는 사실을 확신하고 있었습니다. 3) 하나님 말씀만을 전하고자 하는 확고한 결심이 13절에 "내 하나님의 말씀만 내가 말하리라"고 했습니다. 참된 선지자의 징표는 하나님의 거룩한 진리를 존중하고 그 진리를 배신하거나 왜곡시키기 보다 차라리 죽는 편을 택하고자 하는 강한 결단력을 지니는 것입니다. (5) 미가야를 향한 아합의 박해 1) 다수의 견해-아합의 400명의 선지자들은 만장일치로 아합의 계획에 찬성했습니다. 다수가 좋다고는 하나 하나님의 진리에 위배되는 일은 아무리 많은 사람이 만장일치로 그것을 따른다 할지라도 그것은 그릇된 것입니다. 2) 어용 400명 선지자가 옳은지 미가야가 옳은지 판단하기가 어려웠습니다. 3) 이제 아합은 물리적인 폭력으로 미가야를 핍박하고 옥에 가두고 매질하며 결국 죽이려 하였으나 모두 헛수고에 불과했고 그럴수록 미가야는 참되고도 신실한 선지자로 높이 친송받았습니다. 3. 미가야는 하나님께서 전하라는 말씀만 전하였습니다 (1) 미가야는 사람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순교적 자세로 하나님 말씀만 전한 것입니다. (2) 하나님 말씀을 가감없이 전하였습니다. (3) 그는 핍박당하고 미움받으며 뺨을 맞고 옥에 갇혔고 외로웠습니다. (4) 유혹을 물리쳤습나다. 미가야는 왕의 내시로부터 적당주의의 권고를 받았으나 일축하였습니다. 아합 왕은 거짓 선지자의 말을 좇으므로 악에 악을 더하는 길을 갔습니다. 반면 여호사밧은 참선지자에 대하여 반신반의하여 결단력이 없어 악에 휘말려 들어갔습니다. (5) 미가야는 선지자의 본분과 책임을 다하는 하나님의 종으로서 그는 아합 왕에게 하나님의 경고를 직언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그대로 전하는 자는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말씀에 정통하여 모든 반대와 박해를 무릎쓰고라도 오직 하나님의 말씀만 전해야 하겠습니다. 왕정 시대에 이스라엘에서 사역한 선지자들과 유다에서 사역한 선지자들은 다음과 같다.













    무함마드의 무덤옆에 왜 예수님의 빈 무덤이?

    세계 4대 종교인 기독교(예수 그리스도), 이슬람(무함마드), 불교(석가모니), 힌두교(3억의 신) 중에서 창시자의 무덤이 비워있는 종교는 기독교밖에 없다
    무함마드도 석가모니도 죽어 무덤에 묻혔고 유일하게 예수의 무덤만 비워있다
    예수 그리스도는 그가 죽기전 다시 살아 날 것을 말씀하였고 실제 부활하였다
    부활하신 후 승천하기까지 40일동안 9번 제자들에게 나타났으며 한번은 500여명에게 나타나기도 하였다 (고전 15:6)
    예수 그리스도는 33세쯤 십자가에 처형되었고, 무함마드는 열병으로 62세에 사망했으며 석가모니는 80세에 이질(식중독)으로 사망했다
    예수 그리스도가 무함마드나 석가모니와 근본적으로 다른 이유는 이들은 단지 땅에서 온 인간에 불과하나 예수 그리스도는 하늘에서 하나님의 존재로 있다가 사람의 육체를 입고 외부에서 왔다가 다시 그 자리로 돌아가신 분이다
    (https://ko.wikipedia.org/wiki/%EC%84%9D%EA%B0%80%EB%AA%A8%EB%8B%88)

    1. 무함마드의 사망

    무함마드는 하지 순례 후 메디나로 돌아온 몇개월동안 두통과 열병에 걸려 고생하다가  632년 6 월 8 일, 62세의 나이로 아내 아이샤의 무릎에서 사망했다.
    하디스에서는 그가 독살되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는 아이사의 집 근처에 묻혔고 13세기에 무덤위에 그린돔이 세워졌다


    출생

    사망

    나이

    사망원인

    무덤

    예수 그리스도

    AD 1년

    AD 33년 

    33세

    십자가 처형

    비워있음(부활)

    무함마드

    AD 570년

    AD 632년

    62세

    두통과 열병

    메디나 예언자 사원

    석가모니

    BC 544년

    BC 624년

    80세

    이질(식중독)

    쿠시나라

    <사우디 메디나에 있는 호화로운 무함마드의 무덤과 예수님의 빈 무덤>
    특이한 것은 무함마드 무덤 옆에는 빈 무덤이 하나 있는데 예수를 기다리기 위한 것이라고 한다
    (https://en.wikipedia.org/wiki/Muhammad#cite_ref-206)
    무슬림들은 마흐디(mahdi) 구세주를 기다리고 있는데 마흐디는 이슬람의 종말론적 구원자로 
    5년,7년,9년 또는 19년 동안  통치할 것이다
    부활의 날 이전에 악의 세계를 격렬히 제거할 것이다
    그러나 꾸란에는 마흐디에 대한 언급이 없고 무함마드의 전승을 기록한 하디스에만 있다
    대부분의 시아파 전승에서 마흐디는 적그리스도를 물리치기 위해 이맘의 귀환으로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도착할 것이다
    수니파에서는 마흐디에 대한 개념이 없고 예수님이 이 역할을 수행하고 인류를 심판하실 것이다
    따라서 수니파에서 마흐디는 예수님의 칭호로 여겨지고 예수님(Isa)의 재림과 일치한다
    https://en.wikipedia.org/wiki/Mahdi
    그러나 이슬람세계는 적그리스도를 마흐디로 영접할 것 같다
    기독교 신앙에서 출발했던 무함마드는 거짓계시를 받아 진실과 거짓을 섞어 놓았다
    그는 오늘날 이슬람이 이렇게 거대해지고 잘못될 것이라고는 상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2. 석가모니의 사망

    석가모니는 예수보다 620년전에 출생하였고 불교의 교조다.
    석가는 부족명으로 “능하고 어질다”라는 뜻이고, 모니는 “성자”라는 뜻이다.
    다른 호칭으로는 세존 · 석존 · 불 · 여래 등의 10가지 존칭과 아명인 싯다르타 고타마가 있으며, 서양에서는 흔히 고타마 붓다라고 칭한다.
    석가는 샤카족의 중심지인 카필라 왕국(현재의 네팔)에서 국왕 슈도다나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16세에 동갑의 야수다라 사촌과 결혼하여 아들 라훌라를 낳았다
    인간의 삶이 생로병사가 윤회하는 고통임을 자각하고 이를 벗어나기 위해 29세 때  출가하였다.
    부다가야의 보리수 밑에서 수행하다가 35세에 깨달음을 성취하였다
    이후 인도의 여러 지방을 다니며, 포교와 교화에 힘썼고, 파바시에서 받은 버섯이나 돼지고기를 먹고 심한 이질(식중독)을 앓다가 쿠시나가르에서 80세로 사망하였다.
    한 인간의 불상을 세워놓고 복을 비는 어리석음이라니...
    사망 후 화장에 처해졌으며 화장유물은 8명에게 분할되었다
    석가모니가 설파한 가르침은 구두로 전달되다가 그가 죽은 지 400년 후에 처음으로 기록되었다
    석가의 존재에 대한 역사적 사실에 대해서 기록이나 고고학적 증거는 취약하다
    https://en.wikipedia.org/wiki/Gautama_Buddha

    <석가모니의 화장 탑(쿠시나가르)과 콜롬보에 있는 석가머니의 머리 유물>
    화장탑은 인도의 쿠시나가르에 있는 화장터 위에 세워졌다고 한다

    3.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

    사람이 죽었다가 살아나는 경우는 이따금 보고되고 있으나 이들이 다시 살아났다고 해서 사람의 육체 그대로이지 특별한 존재나 다른 육체가 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과 앞으로 성도가 부활하여 입은 새로운 몸은 늙거나 썩는 물질로 된 육체가 아니다
    부활하신 예수는 제자들에게 공간을 초월하여 나타나셨다
    우주의 모든 물질은 시간에 따라 물리적인 변화가 일어나 열화된다
    부활로 입은 몸이 열화되지 않는다면 비물질적인 것으로 예상되지만 제자들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질 수 있었다
    부활의 몸은 죽기 전 육신과는 재료가 다르지만 지구상에서 찾을 수 있는 물질은 아니다

    부활은 기독교가 다른 종교와 차별하게 만드는 핵심요소다
    바울은 만약 기독교인에게 부활이 없다면 세상에서 가장 불쌍한 존재라 말하기도 하였다
    그는 또한 부활의 영광이 사람마다 다르기 때문에 더 좋은 부활을 얻기 위해 힘쓰라 하였다
    아담이후 수백억명으로 예상되는 모든 사람은 어떤 식으로든 부활할 것이다
    성경은 부활의 순서와 종류를 언급하고 있다 


    구분

    시기

    거주지

    1

    첫째사망

    육체의 사망

    개별 사망

    음부,지옥,천국

    2

    둘째사망

    악인의 부활

    천년왕국 후

    불못

    3

    첫째부활

    순교자의 부활

    천년왕국 전

    천년왕국 왕노릇

    4

    둘째부활

    성도의 부활

    천년왕국 후

    천국

    5

    휴거(신부들)

    신부의 부활

    휴거(산채로 변형)

    새예루살렘성

     예수님이 올리브동산에서 잡혀가실 때 다 도망갔던 겁장이 제자들이 모두 순교할 정도로 변화된 계기가 부활한 주님을 본 것과 성령강림이었다
    그러나 부활은 사람이 죽어야 경험하는 것이다
    죽음은 고통이고 십자가의 희생과 연결되며 자기부정과 자아가 십자가에 죽어 통과되어야 부활의 영광에 참여할 수 있다
    신자들은 통상 신앙의 밝은면을 따라 고통을 통하지 않고 하나님과 친밀한 관계에 이르고 싶어한다
    이것을 긍정적인 믿음으로 착각하고 살아가니 더 큰 부활의 영광에 도달하지 못한다
    예수님을 본받으라고 외치면서 그 분이 걸어갔던 고난의 길에는 동참하려 하지 않는다
    고난의 크기와 부활의 영광은 비례관계에 있다

    힌두교 창시자, 힌두교 불교 차이, 힌두교 금기사항 총 정리

    힌두교에 대한 깊이 있는 이해를 돕기 위해 '힌두교 창시자', '힌두교 불교 차이', 그리고 '힌두교 금기사항'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이 글은 힌두교의 기원과 발전, 불교와의 관계, 그리고 힌두교의 독특한 교리와 금기사항에 대해 명확하고 이해하기 쉬운 정보를 제공합니다.
    특히 이 세 주제는 힌두교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열쇠가 됩니다.

    힌두교 창시자

    힌두교는 특정한 창시자가 없는 독특한 종교입니다.
    이는 힌두교가 다른 종교들과 구별되는 중요한 특징 중 하나입니다.
    힌두교는 수천 년에 걸쳐 인도의 다양한 문화적, 종교적 전통들이 융합하며 자연스럽게 발전한 종교입니다.
    이 과정에서 다양한 신화, 전설, 그리고 철학적 사상들이 힌두교의 교리를 형성하였습니다.

    • 역사적 배경 : 힌두교는 기원전 1500년경 인도 아리아인들의 종교적 신념에서 시작되었습니다.
    • 베다 문헌 : 힌두교의 초기 교리는 베다라고 불리는 고대 문헌들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 연속적 발전 : 힌두교는 시간이 흐르며 여러 철학적 사상과 신화가 추가되어 발전했습니다.
    • 리그베다 : 가장 오래된 힌두 경전인 리그베다는 힌두교의 기본적인 신념과 의식을 담고 있습니다.
    • 다양한 전통의 융합 : 힌두교는 다양한 지역적, 문화적 전통이 융합되어 형성된 포괄적인 종교입니다.
    • 구전 전통 : 초기 힌두교는 구전 전통을 통해 전달되었으며, 후에 문자로 기록되었습니다.
    • 역사적 영향 : 힌두교는 인도 사회와 문화에 깊은 영향을 미쳤습니다.

    힌두교 불교 차이

    힌두교와 불교는 뿌리가 같은 인도에서 시작되었지만, 여러 면에서 중요한 차이점을 가집니다.
    불교는 붓다(석가모니)에 의해 창시된 종교로, 힌두교와는 다른 교리와 실천을 갖고 있습니다.

    • 창시자의 존재 : 불교는 붓다에 의해 창시되었지만, 힌두교는 특정한 창시자가 없습니다.
    • 신의 개념 : 힌두교는 다신교로서 수많은 신들을 숭배하지만, 불교는 비신론적입니다.
    • 목표의 차이 : 힌두교는 모크샤(해탈)를 최종 목표로 삼는 반면, 불교는 니르바나(열반) 달성을 목표로 합니다.
    • 윤회와 카르마 : 두 종교 모두 윤회와 카르마의 개념을 받아들이지만, 그 해석과 적용에 차이가 있습니다.
    • 문헌과 경전 : 힌두교와 불교는 각각 독특한 경전과 문헌을 가지고 있습니다.
    • 의식과 행위 : 두 종교는 의식, 명상, 그리고 일상적인 행위에서도 차이를 보입니다.
    • 사회적 영향력 : 힌두교와 불교는 각각의 발전 과정에서 사회적, 문화적으로 다른 영향을 미쳤습니다.

    힌두교 금기사항

    힌두교에는 일상 생활과 관련된 여러 금기사항이 있습니다.
    이러한 금기사항은 종교적 신념, 문화적 전통, 그리고 사회적 규범에 깊이 뿌리를 두고 있습니다.

    • 소고기 섭취 금지 : 힌두교에서 소는 신성한 동물로 여겨져 소고기 섭취는 엄격히 금지됩니다.
    • 술과 마약 금지 : 정신을 혼미하게 하는 술이나 마약의 사용은 금기시됩니다.
    • 식사 관련 규칙 : 음식을 먹을 때는 오른손을 사용하고, 청결을 유지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 카스트 제도 : 전통적인 힌두 사회에서는 특정 계급이나 집단 간의 상호작용이 제한됩니다.
    • 결혼 관련 규범 : 특정 계급이나 집단 내에서만 결혼하는 것이 일반적입니다.
    • 죽음과 관련된 의식 : 죽음과 관련된 특정한 의식과 규범이 있습니다.
    • 부정과 정화 : 부정한 것으로 여겨지는 상황에서는 정화 의식을 거쳐야 합니다.

    이러한 힌두교의 특징들을 이해함으로써, 이 고대 종교의 복잡성과 심오함을 좀 더 깊이 이해할 수 있습니다.


    4월 22일(화) 열왕기상 18-20장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여호와는 산의 신(20:28)

    아람 왕의 신복들이 왕께 고하되 저희의 신은 산의 신이므로 저희가 우리보다 강하였거니와 우리가 만일 평지에서 저희와 싸우면 정녕 저희보다 강할찌라.
    Meanwhile, the officials of the king of Aram advised him, "Their gods are gods of the hills. That is why they were too strong for us. But if we fight them on the plains, surely we will be stronger than they.

    산의 신(Gods of the hills)

    28. 여호와는 산의 신
    때에 하나님의 사람이 이스라엘 왕에게 나아와 고하여 가로되 여호와의 말씀이 아람 사람이 말하기를 여호와는 산의 신이요 골짜기의 신은 아니라 하도다 그러므로 내가 이 큰 군대를 다 네 에 붙이리니 너희는 내가 여호와인 줄 알리라 하셨나이다 하니라.
    The man of God came up and told the king of Israel, "This is what the LORD says: 'Because the Arameans think the LORD is a god of the hills and not a god of the valleys, I will deliver this vast army into your hands, and you will know that I am the LORD.' "


    01/28 여호와는 산의 신이요 골짜기의 신은 아니라 하는도다
    열왕기상 20장22~열왕기상 20장 43

    열왕기상 20:28
    그 때에 하나님의 사람이 이스라엘 왕에게 나아와 말하여 이르되 여호와의 말씀에 아람 사람이 말하기를 여호와는 산의 신이요 골짜기의 신은 아니라 하는도다 그러므로 내가 이 큰 군대를 다 네 손에 넘기리니 너희는 내가 여호와인 줄을 알리라 하셨나이다 하니라

    그 선지자가 이스라엘 왕에게 나아와 해가 바뀌면 아람 왕이 왕을 치러 올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아람 왕의 신하들이 아람왕에게 나아와 이스라엘의 신은 산의 신이므로 그들이 우리보다 강하였지만 우리가 만일 평지에서 그들과 싸우면 반드시 그들보다 강할 것이니 군대를 정비하여 이스라엘과 싸우자고 하였습니다.
    아람왕은 그 건의를 받아들여 이스라엘을 공격하였고 이스라엘도 싸웠는데 아람의 군사들이 이스라엘군사 보다 휠씬 많았습니다.
    하나님의 사람은 이스라엘 왕에게 하나님이 산의 신일뿐 아니라 골짜기의 신임을 드러내고자 하신다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크게 승리하게 하셔서 하나님은 산의 신일 뿐 아니라 골짜기의 신이심을 드러내셨습니다.
    승리 후에 이스라엘왕 아합은 동정심과 명예심으로 아람왕 벤하닷을 살려주었고 하나님의 사람은 아합이 그로 인하여 죽임을 당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이스라엘 왕이 근심하고 답답하여 그의 왕궁으로 돌아갔습니다.

    하나님은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산이나 골짜기나 그 어디에나 살아계신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어제나 오늘이나 동일하게 살아계십니다.
    하나님은 후진국뿐 아니라 선진국에도 살아계십니다.
    하나님은 온전히 하나님의 이름만을 드러내기를 원하십니다.
    우리는 자신의 동정심과 명예심으로 하나님의 이름을 가리워서는 안 됩니다.

    우리가 어떤 상황에서도 감사할 때 하나님은 모든 것을 통해서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드러내실 줄을 믿습니다.
    제가 예배 후에 다음 주일 메시지를 완성하였습니다. 이번부터는 메시지를 완성하고 매일 주일 말씀을 읽으면 수정하여 주일날은 더욱 완성도 높은 메시지를 전하기 원합니다. 

    이스라엘과 아람의 두 번째 전쟁(열왕기상 20:22-34)

    우리 속담에 ‘은혜를 원수로 갚는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 말은 은혜를 받아서 감사해야 하는데, 오히려 무례하게 대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아합 왕에게 은혜를 베풀었습니다.
    한 번도 아니고 두 번이나 이길 수 없는 전쟁에서 승리하게 하셨습니다.
    그런데 아마 왕은 하나님을 기억하지 않았습니다.
    그뿐만이 아니라 본문에서는 하나님을 무시하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람이 전쟁을 계획하기도 전에 그들의 계획을 아합에게 알리셨습니다.
    벤하닷의 신하들은 앞선 패전 원인을 이스라엘의 하나님께서 산의 신이었다는 점으로 결론지었습니다.
    이에 벤하닷에게 골짜기에서 전쟁할 것을 권하고 승리를 확증합니다.
    그러나 그들은 대패했고 벤하닷은 사로잡힙니다.
    아합은 아람의 세력을 제지할 기회를 얻었으나, 어리석게도 벤하닷과 조약을 맺고 그를 살려둡니다.

    이스라엘과 아람의 두 번째 전쟁(22-34)

    만군의 여호와께서는 자신의 백성이 악한 세력으로부터 공격당하기 전에 미리 준비하게 하십니다.
    성도는 영적 전쟁을 두려워하지 말고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대비해야 합니다.
    어떤 상황을 다 아시는 하나님께서 미리 주신 말씀대로 싸우면 반드시 이기기 때문입니다.
    영적 대적의 공격을 이겼다 할지라도 교만하지 말고 또 다른 공격에 대비할 수 있도록 말씀을 따라 항상 깨어 준비해야 합니다.

    이스라엘의 선지자는 내년에 있을 아람의 보복 공격을 예상하고 준비하게 합니다.
    하나님께서 도우시겠지만 그것이 이스라엘의 준비를 면제하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준비가 승리로 이어지지는 않습니다.
    벤하닷도 신하들의 조언을 듣고 철저하게 보복을 준비합니다.

    아람의 전투 전략(22-25)

    하나님께서는 선지자를 아합에게 보내 아람이 다시 침략할 것을 예고하십니다.
    이 선지자는 첫 전쟁 당시 여호와의 말씀을 전달했던 자입니다(13).
    이번 하나님의 말씀에는 전쟁 시기와 대책이 포함되었습니다.
    아람은 해가 바뀌는 봄에 출정할 것이다.
    봄부터 건기가 시작되므로 공격과 전투에 용이하기 때문이며, 이는 벤하닷이 패전의 수욕을 씻기 위해 서둘러 공격할 태세임을 알립니다.
    하나님께서는 아합에게 전쟁을 대비해 힘을 기르고(하자크) 준비하라고 지시하십니다.
    이는 지난번 승전이 하나님 덕분인 것을 기억하고, 겸손히 전투를 대비하라는 의미입니다.

    한편 아람 궁에서는 왕과 신하들이 패전 원인과 후속 방안을 논의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 이후에 아람의 회의 장면이 나오는 것은 하나님께서 이들의 논의 이전에 그 내용을 이미 간파하셨음을 보여주고, 그의 전지전능함을 드러냅니다.
    이스라엘 수도를 공략했다 실패한 아람은 이번에는 신을 공격할 전략을 세웁니다.
    그들은 이스라엘이 지난 전투에서 강했던(하자크) 근원을 그들의 하나님께서 “산의 신”인 데서 찾았습니다(23).
    해발 400미터의 구릉지인 사마리아에서 싸웠기에 이스라엘의 신이 능력을 발휘했다는 뜻입니다.
    따라서 산 아래 골짜기(평지)에서 접전한다면 이스라엘의 ‘산의 신’의 영향력에서 벗어나 아람이 반드시 승리할 것이라는 논리입니다.
    고대인들에게 있어서 ‘신’은 모든 면에 전능한 신이 아니라 특정지역이나 지형, 역할 등에만 초월적인 능력을 가진 존재였습니다.
    바알바다나 비를 관할하는 폭풍의 신으로 여겼듯이, 이스라엘의 여호와를 산에서만 위력을 떨치는 신으로 오인했습니다.
    가나안 정착 이래 이스라엘은 사마리아와 예루살렘과 같은 산악지에 성읍을 건축하여 거주해왔고, 산악 전투에 능했습니다.
    그렇기에 많은 말과 병거를 가진 군대가 이스라엘에 맞서려면 평지 전투가 유리했습니다.
    옛적 드보라와 바락의 시대에 하솔의 군대 장관 시스라가 철 병거 900대를 끌고 기존 강 계곡에서 이스라엘을 공격한 것도 이 점을 참작한 전략이었습니다(삿 4-5장).
    그러나 당시 하나님께서는 상황을 역이용하여 건기에 말라 있던 기존 강에 폭우를 내리셨습니다.
    불어난 물과 급류로 병마와 병거는 무용지물이 되었고 이스라엘은 승리했습니다.
    이런 사건을 알 리 없는 벤하닷의 신하들은 다음 전투의 승리를 확신하며 왕을 설득합니다.
    또한 승리를 위한 새 전략으로 동맹국 왕들을 돌려보내고 그 자리에 총독을 세울 것과 패전으로 인해 수효가 준 군대와 말과 병거를 보충하고 재정비할 것을 제안합니다.
    신하들은 이같이 만반의 준비를 하고 평지에서 전쟁을 벌이면 아람이 반드시 이스라엘보다 강할(하자크) 것을 반복하며 승리를 확신합니다. 왕은 그들의 주장과 전략을 받아들여 그대로 시행합니다.

    그러나 벤하닷이나 신하들은 자신들이 하나님을 ‘산의 신’으로 전제한 것부터 잘못됐음을 전혀 알지 못합니다.
    그들은 강할(하자크) 것이라 장담하지만 하나님께서 이미 아합에게 힘을 기르게 (하자크) 하셨고 이스라엘의 승전을 보장하셨습니다.

    열왕기상 20:23. 강하다(하자크. châzaq) חָזַק 스트롱번호  2388

    1. 단단히 매다.   2. 굳게 유지하다. 3. 전치사 לְ가 수반되는 경우
    발음 [ châzaq ]
    구약 성경 / 293회 사용

    아람의 침입과 이스라엘의 승리(26-30a)

    봄이 되자 하나님의 예고대로 벤하닷이 이스라엘을 침공하지만, 이스라엘의 ‘산의 신’에게 완패합니다.
    아람 군대는 아벡으로 올라왔습니다.
    장소가 어딘지 정확히 알 수 없으나, 그곳이 평지라는 점은 확실합니다.
    이스라엘군도 소집되고 식량을 배급받고 진영을 쳤습니다.
    그들은 적은 수의 염소 두 떼 같았고, 상대적으로 수가 많은 아람 군은 땅을 가득 채웠습니다.
    이런 때 하나님의 사람이 다시 아합에게 와서 여호와가 승리를 주실 것을 선언했습니다.
    이번 승리의 약속은 아랍 사람이 “여호와는 산의 신이요 골짜기(평지)의 신은 아니라”고 속단한 데에 대한 하나님의 조치이기도 합니다(28).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에게 승전을 주어 아람만 아니라 궁극적으로 그의 백성이 하나님을 이스라엘의 여호와로 깨닫게 하실 것입니다.

    전쟁은 각 군대가 대치한 지 7일 째에 시작됐습니다.
    적은 염소 무리 같은 이스라엘 자손(27)은 그날 하루에 아람의 10만 보병을 무찔렀습니다.
    그날 죽지 않고 살아남은 자 27,000여 명은 아벡의 성읍으로 도망했습니다.
    그러나 성벽이 그들 위로 무너져 내렸습니다.
    이런 점들은 여리고 성벽이 무너진 사건을 상기시켜(수 6:20) 하나님의 주권적인 개입과 능력을 드러냅니다.

    결과적으로 하나님은 아람 군대에게 ‘산의 신’으로만 국한되지 않는 ‘전능자’임을 증명하셨습니다.
    가뭄 예고와 시작, 갈멜 산에서의 불의 응답, 사마리아 전투에서의 승리와 마찬가지로 이번 아벡에서의 승전에서도 자신의 말씀을 성취하심으로써 아합과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여호와임을 알게 하셨습니다(28).
    하나님께서는 그의 백성이 하나님께서 누구신지 확실히 깨닫고 그에게로 돌아오기를 기다리십니다.

    아합과 벤하닷의 조약(30b-34)

    아람에게 대승을 거둔 아합은 항복한 벤하닷과 조약을 맺고 맙니다.
    벤하닷은 이스라엘에 패하여 신하들과 아벡의 성읍으로 도망했습니다.
    앞서 사마리아 전투에서는 마병의 원조를 받아 도망할 수 있었지만(20), 이번에는 전투지를 크게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그와 무리는 성읍의 가장 구석진 곳(“골방”, 30)에 숨어야 할 만큼 궁지에 몰렸습니다.
    하나님을 산의 신으로 여기고 골짜기의 신은 아닐 것이라 판단했던 신하들이나 그들의 말을 철석같이 믿었던 벤하닷은 아람의 완패를 통해 이스라엘 하나님의 전능함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신하들은 벤하닷을 살리기 위해 이번에는 이스라엘 왕의 취약점을 공략합니다.
    그들은 이스라엘 왕들이 ‘인애’의 왕들(“인자한 왕”, 31)이라는 평을 기억했습니다.
    이는 조약 맺을 가능성을 타진해보자는 뜻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그들의 지략은 어리석었지만 아합에 대한 전략은 영리했습니다.
    그들은 참회와 항복의 표시로 굵은 베를 허리에 여미고, 밧줄 같은 띠를 머리에 두르고, 이스라엘의 왕에게 가겠다며 벤하닷의 허락을 구합니다.
    그렇게 하면 아합이 벤하닷의 생명을 살려줄지도 모른다고 설득합니다.
    그 후 그들은 자기들이 말한 그대로 실행하여 아합 앞에 나아갔습니다.
    그들은 아합에게 자신들의 왕 벤하닷을 ‘당신의 종’이라고 부르며, 그가 자기 생명을 살려달라고 간청했음을 밝힙니다(32).
    아합은 ‘그가 살아있냐’고 물으며 뜻밖에도 벤하닷을 자기의 “형제”라고 대답합니다(32).
    신하들은 이를 좋은 징후로 여겨 재빨리 아합의 말을 받아 ‘벤하닷이 아합의 형제’라고 응수합니다.
    아합은 벤하닷을 데리고 오라고 명합니다.
    또한 그가 오자 병거에 태워 자신과 동등한 대접을 해줍니다.

    벤하닷은 자신의 목숨을 건지기 위해 두 가지 조건을 제시하며 아합에게 조약을 맺자고 회유합니다.
    첫째, 부친인 벤하닷 1세가 아합의 부친에게서 뺏은 모든 성읍을 아합에게 반환한다는 약조입니다.
    이때 아합의 부친은 오므리가 아닌 ‘바아사’를 가리킬 수 있습니다.
    바아사 때(15:20) 벤하닷 1세가 북이스라엘의 여러 북방 성읍을 친 일이 있었는데(15:2), 이후 엘라와 오므리 때에 그 성읍들을 되찾았다는 기록이 따로 나오지 않기 때문입니다.
    둘째, 벤하닷 1세가 사마리아에서 자신의 이름을 딴 성읍을 만든 것처럼 다메섹에 아합의거리를 만들라는 제안입니다.

    아합은 하나님께 묻지도 않고 벤하닷과 조약을 맺고 그를 풀어줍니다.
    하나님을 산의 신으로 모욕하고 이스라엘을 업신여겨 쳐들어온 그의 죄는 헤아리지 않고, 정치, 경제, 사회적 유익만 따져 조약을 맺은 것은 섣부르고 어리석은 처사입니다.
    더구나 ‘바로 내가 이 조약으로 당신을 풀어주겠소’라고 하며(34), 벤하닷을 풀어줄 권한이 자신에게 있고, 그에게 호의를 베푸는 대인이 바로 자기 자신임을 과시합니다.
    이처럼 아합은 승전을 위해서는 하나님께 순종했으나 승전 후에는 순종의 길을 버렸습니다.
    이제 그에게는 심판만 남아 있습니다.


    사단은 지금도 다양한 미끼로 성도를 유혹하는데, 성도가 야망이나 욕심에 빠지게 되면 결국 세상과 타협하고 말 것입니다.
    그런 사람은 하나님의 뜻에 온전히 순종할 수 없습니다.
    영적 대적과의 싸움에서 온전히 승리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주신 말씀대로 준비하고 믿음으로 싸우며 영적 야합을 거절하고 악한 요소를 철저히 제거해야 합니다.

    아합과 벤하닷의 전쟁(열왕기상 20:1-43)

    17장에서부터 19장까지는 줄곧 엘리야를 통해 역사하셨던 하나님의 섭리하심을 다루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내용의 전개는 이후 21장에서도 계속됩니다.
    그러한 가운데 20장은 아랍 왕 벤하닷과 이스라엘 왕 아합 사이에 벌어졌던 전쟁에 관해 소개하고 있습니다(B.C. 856년).

    아람의 도발

    엘리야를 통한 하나님의 놀라운 기적 앞에도 회개하지 않은 아합 왕은 그 재임기간 엄청난 국가적 환난을 만납니다.
    이스라엘의 숙적 아람 왕 벤하닷이 대군을 이끌고 침공한 것입니다.
    우상 숭배의 악행을 끊지 못하는 아합과 이스라엘 백성들이 스스로를 돌아보아야 할 기회를 준 것입니다.

    ​“아람의 벤하닷 왕이 그의 군대를 다 모으니 왕 삼십이 명이 그와 함께 있고 또 말과 병거들이 있더라 이에 올라가서 사마리아를 에워싸고 그 곳을 치며”(1절)​

    아람 왕 벤하닷의 침공은 대규모였습니다.
    자신을 따르는 32개국 왕들의 연합군을 모아서 사마리아를 포위했습니다.
    숫자도 문제이지만 ‘말과 병거’로 중무장했습니다.
    고대 전투에서 고립된 성의 포위 공격은 공포 바로 그 자체였습니다.
    이때 벤하닷은 사자를 보내서 아합 왕을 협박했습니다.

    ​“네 은금은 내 것이요 네 아내들과 네 자녀들의 아름다운 자도 내 것이니라 하매”(3절)

    이미 승리 한 것과 같은 오만함이 넘치는 협박입니다.
    전쟁에도 대의명분이 있어야 하는데, 벤하닷이 일으킨 전쟁은 그저 힘으로 상대국의 재산과 여인을 빼앗아가겠다는 날강도 같은 심보뿐입니다.
    그러나 아합은 이러한 무례한 협박에 속 터지게 비굴한 모습을 보입니다.

    ​“이스라엘의 왕이 대답하여 말하기를 내 주 왕이여 왕의 말씀 같이 나와 내 것은 다 왕의 것이니이다 하였더니”(4절)

    하나님을 외면하고 우상을 섬기고 자기 맘대로 살아온 사람들은 위기 앞에서 그 실체가 그대로 드러납니다.
    아합은 엄청난 대군의 포위공격에 오금이 저려서 꼼작도 못합니다.
    이런 왕을 둔 이스라엘이 참 안쓰럽습니다.

    그런데 이런 굴욕적인 외교도 소용이 없었습니다.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하고 꼬리를 내리는 상대를 얕보지 않을 수 있으랴!
    벤하닷은 한술 더 떠서 강하게 밀어붙입니다.

    “내일 이맘때 내가 내 신복을 네게 보내리니 그들이 네 집과 네 신복의 집을 수색하여 네 눈이 기뻐하는 것을 그들의 손으로 잡아 가리라”(6절)

    한 번 싸워보지도 않고 자기 수하를 이스라엘 성안으로 보내서 보물과 여인들을 취해 가겠다는 말도 안 되는 통보를 한 것입니다.
    첫 번째 위협부터 강하게 거부해야 했는데 겁쟁이 아합의 비굴한 태도가 더 화를 자초하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은 무시하고 우상을 섬긴 아합이 대적 앞에서는 무서워 떠는 무력함을 보입니다.
    평소 그가 섬기던 우상 신들에게는 도움을 청할 엄두도 내지 못합니다.
    지도자가 죄 가운데 있으면 위기를 맞아도 헤어나지 못하는 무기력함을 나타냅니다.
    죄는 인간을 비참하게 만듭니다.
    세상에 단호히 맞서지 못하고 굴복하는 아합의 모습은 하나님 없는 인간의 실체를 그대로 보여줍니다.
    강하고 담대하려면 하나님께 온전히 순종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사람에게 비굴하게 엎드리게 됩니다.

    이런 상황에서 비굴한 아합 왕조차도 벤하닷의 두 번째 요구는 응할 수 없는 조건이기 때문에 나라의 장로들을 다 모아서 의견을 구했습니다. 그 때도 아합은 나약하고 비굴하게 말합니다.

    ​“이에 이스라엘 왕이 나라의 장로를 다 불러 이르되 너희는 이 사람이 악을 도모하고 있는 줄을 자세히 알라 그가 내 아내들과 내 자녀들과 내 은금을 빼앗으려고 사람을 내게 보냈으나 내가 거절하지 못하였노라”(7절)

    정말 부끄럽지 않습니까?
    자기가 두려워서 거절하지 못했다는 말을 장로들 앞에서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히려 장로들이 강경하게 주장합니다.
    “왕은 듣지 말고 허락하지 마옵소서!” 장로들이 왕보다 낫습니다.

    이에 용기를 얻은 아합은 사람을 보내 벤하닷의 두 번째 요구를 거절합니다.
    그런데 그의 거절하는 말투도 비굴함 담겨있는데, 벤하닷을 가리켜 ‘내 주 왕’이라고 하고, 자신은 ‘종’이라고 격하시킵니다.
    장로들의 결의에 용기를 좀 얻긴 했지만 아직도 아합은 떨고 있었던 것입니다.

    모세 때에도 가나안 땅 정탐을 마치고 돌아온 각 지파의 젊은 리더들은 가나안 땅 거민들은 ‘거인’이라고 하고 자신들은 ‘메뚜기’와 같이 보잘 것 없다고 했습니다.
    그러면 믿음대로 됩니다.
    이것은 겸손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자녀로서 절대 가져서는 안 될 비참한 열등감일 뿐입니다.

    아합 왕의 대답을 들은 벤하닷은 그렇다면 공격을 재개해서 사마리아를 잿더미로 만들겠다고 공언합니다.
    사실 벤하닷도 자신의 요구가 무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는 어차피 전쟁하고 싶어서 나온 것이었기에 그냥 돌아갈 생각은 없었습니다.
    악한 세상 세력과의 싸움은 우리가 피하려 한다고 피 할 수 있는 게 아닙니다.
    적이 이토록 무섭게 몰려오면 두려움을 억누르고 하나님만 의지하고 나가서 정면 승부해야 할 때가 있습니다.
    피할 수 없는 싸움을 피해 가면 훗날 더 큰대가를 치르게 됩니다.

    벤하닷의 호언장담에 아합 왕은 마지막 자존심으로 이렇게 맞받아칩니다.
    “갑옷 입는 자가 갑옷 벗는 자 같이 자랑치 못할 것이라 하라 하니라”(11절).
    쉽게 말해서 “길고 짧은 것은 대봐야한다”,
    “한번 붙어 보기 전엔 아무도 승패를 장담할 수 없다”는 뜻입니다.
    전쟁을 하기도 전에 큰소리치지 말라는 것입니다.
    쥐도 코너에 몰리면 고양이를 문다고, 아합이 의외로 강하게 나오자 벤하닷은 드디어 연합군에게 공격 진형을 갖추게 합니다.
    벤하닷은 병력과 무기의 절대 우위를 믿고 오만하기 짝이 없었습니다.
    적국 이스라엘의 전력과 자신들의 전력 분석은 철저하게 하고 왔지만 벤하닷이 계산에서 빠뜨린 것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계신다는 것이었지요.

    “사람이 마음으로 자기의 길을 계획 할지라도 그 걸음을 인도하는 자는 여호와시니라”(잠언 16:9).

    하나님, 벤하닷의 대군을 물리치시다

    1. 첫 번째 승리

    ​벤하닷의 사신들이 아합의 의도를 전하자, 연합한 왕들과 진중에서 술을 마시고 있던 벤하닷은 진영을 차리라고 명령했습니다.
    사마리아 성 앞으로 몰려 와서 총공격 진형을 갖추는 적의 대군을 보면서 이스라엘은 두려움에 사로잡혔습니다.
    그때 한 선지자를 통해 하나님의 말씀이 아합에게 전해집니다.

    ​“한 선지자가 이스라엘의 아합 왕에게 나아가서 이르되 여호와의 말씀이 네가 이 큰 무리를 보느냐 내가 오늘 그들을 네 손에 넘기리니 너는 내가 여호와인 줄을 알리라 하셨나이다”(13절)

    하나님을 잘 믿지도 않고 우상숭배에 열심인 아합 왕과 백성들에게 왜 이런 승리의 약속을 주셨을까요?
    하나님께서는 우상 숭배에 빠진 아합과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번 기회를 통해 다시 한 번 여호와만이 참 하나님이심을 깨닫기 원하셨습니다.
    엘리야를 통한 분명한 증거에도 회개치 않는 자들에게 다시 한 번 기회를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채찍과 징계를 통해서도 우리에게 깨달음을 주시지만 뜻하지 않은 축복을 통해 깨달음을 주시기도 하십니다.
    내 능력보다 더한 축복이 올 때 내가 노력한 것 이상의 열매를 거두게 될 때 우리는 자만하지 말아야 합니다.
    착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겸손히 하나님께로 돌아와야 합니다.
    뜻밖에 축복의 말씀에 힘을 얻은 아합 왕은 하나님의 구체적인 작전을 묻습니다.

    ​“아합이 이르되 누구를 통하여 그렇게 하시리이까 대답하되 여호와의 말씀이 각 지방 고관의 청년들로 하리라 하셨나이다 아합이 이르되 누가 싸움을 시작하리이까 대답하되 왕이니이다 아합이 이에 각 지방 고관의 청년들을 계수하니 이백삼십이 명이요 그 외에 모든 백성 곧 이스라엘의 모든 자손을 계수하니 칠천 명이더라”(14-15절)

    이에 하나님의 선지자는 “각 지방 고관의 청년들”을 선봉에 세우라는 의외의 작전 지시를 하달합니다.
    이스라엘 지방 장관들에게 속한 경험 없는 젊은 장교들을 최선봉에 세우라는 것입니다.
    베테랑 병사나 장교들이 아니었습니다.
    더구나 이들의 숫자는 다 합쳐도 232명에 불과했습니다.
    그들을 뒷받침 할 이스라엘 군인들도 7천 명밖에 되지 않았습니다.
    제대로라면 몇 십만 병력을 동원할 수 있는 이스라엘인데 이것밖에 숫자가 안 되는 걸로 봐서 많은 병사들이 전의를 상실하고 도망갔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처럼 전쟁에 능한 용사도 아닌 젊은 장교들 2백여 명을 앞세워 아람의 큰 군대를 상대하라는 것은 무슨 뜻입니까?
    간단합니다.
    이 전쟁을 주관하고 승리로 이끌 주체는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모두에게 뚜렷이 각인시키자는 것입니다.
    상대도 되지 않는 자들을 통해 전쟁을 치르게 해서 승리를 얻었을 때 그것이 오직 하나님 은혜였음을 인정하도록 한 것입니다.

    정오가 되자, 이스라엘 군은 선지자의 말에 따라 젊은 장교들을 앞에 세우고 공격을 개시했습니다.
    이 때 기가 막히게도 상대인 벤하닷 왕은 장막에서 32명의 왕들과 함께 먹고 마시고 만취한 상태였습니다.

    총공격을 앞두고 최고 지도자라는 사람들이 대낮까지 술에 만취해서 파티를 벌였으니 이들이 얼마나 이스라엘 군을 깔보고 있었는지 알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 군 선봉군이 고작 2백여 명에 불과한 젊은 장교들임을 보고받은 벤하닷은 설마 그 숫자로 자기들의 엄청난 대군을 상대하러 오리라고는 생각지 않았습니다.
    화친하러 오는 사절단이 아닌가라고 생각했습니다.

    ​“각 지방 고관의 청년들과 그들을 따르는 군대가 성읍에서 나가서 각각 적군을 쳐죽이매 아람 사람이 도망하는지라 이스라엘이 쫓으니 아람 왕 벤하닷이 말을 타고 마병과 더불어 도망하여 피하니라 이스라엘 왕이 나가서 말과 병거를 치고 또 아람 사람을 쳐서 크게 이겼더라”(19-21절)

    하나님이 함께하시는 그 작은 군사들이 공격을 개시하자 아람의 대군이 정신을 못 차리고 무너지기 시작했습니다.
    수많은 부하들을 잃은 벤하닷이 간신히 목숨을 살려 도망할 정도의 참담한 패배였습니다.
    하나님의 승리였습니다.

    벤하닷의 두 번째 침공

    그러나 아직 안심할 수 있는 상황은 아니었습니다.
    이스라엘 군을 깔보고 하나님을 모른 까닭에 뜻하지 않은 패배를 당하긴 했지만 아직도 아람 왕의 세력 은 강대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선지자는 의외의 승리에 취해있는 아합 왕의 주의를 환기시켰습니다.

    ​“그 선지자가 이스라엘 왕에게 나아와 이르되 왕은 가서 힘을 기르고 왕께서 행할 일을 알고 준비하소서 해가 바뀌면 아람 왕이 왕을 치러 오리이다 하니라”(22절)

    아합은 아람이 다시 공격해 오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하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적이 다시 반격해올 시기까지 정확히 알려주시면서 아람 왕의 2차 침략을 준비하라고 하셨습니다.
    한 번의 성공에 도취해서 거기에 안주하면 큰일 납니다.
    여리고 성을 무너뜨린 여호수아의 군대가 바로 다음 아이 성 싸움에서 어이없는 패배를 당한 것만 봐도 알 수 있습니다.

    어처구니없는 패배를 당한 아람 왕은 다시 한 번 이를 악물고 독한 마음을 품고 제 2차 침공을 준비 했습니다.
    객관적 전력에선 전혀 질 수 없는 싸움을 졌기에 그들도 자신들의 패배가 이스라엘의 하나님 때문이었음을 깨달았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상황 파악은 거기까지였습니다.
    그 다음은 자기들 수준에서 하나님을 해석했습니다.

    ​“아람 왕의 신하들이 왕께 아뢰되 그들의 신은 산의 신이므로 그들이 우리보다 강하였거니와 우리가 만일 평지에서 그들과 싸우면 반드시 그들보다 강할지라”(23절)

    ​당시 우상 신들은 각자 전문 분야가 있었고, 전문 지역이 정해져 있었습니다.
    예를 들어 헬라의 신 포세이돈은 바다의 신, 아레스는 전쟁의 신, 아폴로는 태양의 신이 어서 각각 신들을 부르는 용도가 달랐습니다.
    그래서 벤하닷의 참모들은 이스라엘의 하나님도 그런 수준으로 본 것입니다.
    하나님이 사마리아 같은 고산지대 요새에선 강하지만 평지 싸움에선 위력을 발휘 못할 것이라고 보았습니다.
    상황 해석이 전혀 잘못된 것이지요. 전능하신 하나님의 능력을 전혀 알지 못하는 영적 무지의 소산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잃어버린 군대를 다시 재정비하고, 말과 병거를 다시 확실히 준비해서 평지 전쟁을 준비했습니다.
    그러나 벤하닷이 아무리 군사력을 새롭게 준비해도 하나님 앞에서는 아무 소용없는 일이었습니다.

    마침내 한해가 지나고, 아람 왕의 대군이 제2차 침공을 단행했습니다.
    이번엔 평야 지대인 “아벡‘에서 양쪽의 군대가 맞붙었습니다.
    이번에도 역시 이스라엘 군은 수적으로 절대 열세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아람 군을 다시 한 번 이스라엘의 손에 붙이겠다는 약속을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산의 신이다”라고 자기 맘대로 하나님을 해석한 아람 군대의 생각도 다 알고 계셨습니다.
    그래서 이번엔 그들이 자신하는 평야 전쟁에서 다시 한 번 하나님의 능력을 보여 주셨습니다.

    ​“그 때에 하나님의 사람이 이스라엘 왕에게 나아와 말하여 이르되 여호와의 말씀에 아람 사람이 말하기를 여호와는 산의 신이요 골짜기의 신은 아니라 하는도다 그러므로 내가 이 큰 군대를 다 네 손에 넘기리니 너희는 내가 여호와인 줄을 알리라 하셨나이다 하니라”(28절)

    ​* 골짜기(6010) 에메크(ʽêmeq ) עֵמֶק 스트롱번호 6010

    1. 골짜기 넓은 구렁
    2. 복수형 עִמְקִים : 주민이 사는 골짜기
    발음 [ ʽêmeq ]
    어원 / 6009에서 유래
    구약 성경  / 43회 사용

    양군이 서로 대치한지 7일째 되던 날 벌어진 전투에서 이스라엘군은 하루에 아람 군 10만을 죽이는 엄청난 전과를 올렸습니다.
    거기다 도주하다 무너지는 성에 깔려 죽은 아람 군이 2만 7천이어서 도합 13만에 달하는 적의 대군이 궤멸되었습니다.
    3년 간 계속된 한국 전쟁에서 전사한 국군 전사자가 약 16만 명 정도였음을 생각할 때 하루에 13만 대군을, 특히 요즘처럼 중화기도 없이 전멸시켰다는 것은 실로 엄청난 전과였습니다.
    이로써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는 그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산의 신’만이 아니라 언제 어디서 나 홀로 만물을 다스리시는 전능의 하나님이심을 선포하신 것입니다.

    세상은 하나님을 다른 여러 신들 가운데 하나로 인식하고 하나님의 무한한 능력과 주권을 진정으로 믿지 못합니다.
    그러기 때문에 예비하신 축복을 누리지 못합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풍요로운 삶을 살지 못합니다.
    하나님을 아는 만큼, 그분의 능력을 신뢰하는 만큼 삶은 풍성해집니다.​

    아합 왕의 실수

    무참한 패배에 아람 군대는 완전히 전의를 상실했습니다.
    이제는 국가의 존망을 걱정해야 할 처지가 됐습니다.
    다급해진 벤하닷의 참모들은 굵은 베로 허리를 묶고 테두리를 머리에 이고 눈물을 뚝뚝 흘리며 비굴한 모습으로 아합 왕 앞에 찾아와 엎드렸습니다.
    굵은 베와 테두리는 참회와 애통을 나타내는 것으로 상대의 긍휼을 구하는 행동입니다.
    전쟁에서 패했을 때 완전한 항복을 표시하는 것으로 최대한의 관대한 처분을 얻고자 하는 행동입니다.
    얼마 전까지 네 재산과 여인들은 다 내 것이라고 한껏 오만방자하던 모습과는 딴판입니다.
    이것이 세상 권력자들의 실체입니다.
    힘이 있으면 하늘 높은 줄 모르게 오만하고 힘을 잃으면 이렇게 비굴해 집니다.
    믿을 게 못됩니다.

    문제는 어리석은 아합이 이들의 비굴한 연극에 넘어갔다는 사실입니다.
    두 차례의 승리가 모두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였다는 것을 잊고 한껏 교만해진 아합은 이들의 속임수를 알아차리지 못하고 아람 왕 벤하닷을 ‘나의 형제’(32절) 라고 말했습니다.
    ‘형제’라니, 무슨 형제가 대군을 이끌고 침략해서 그렇게 잊지 못할 모욕을 준단 말입니까?
    그런데 아합은 그 모욕을 까맣게 잊었던 듯싶습니다.
    엄청난 수의 아람 군대를 두 번이나 물리친 데다 이제 그들이 비굴한 태도로 애원하자 아합은 이일을 이루신 하나님에 대해서는 까맣게 잊고 경솔한 반응을 보였습니다.

    아합이 벤하닷을 ‘형제’라고 부르자 아람의 신하들은 때를 놓치지 않고 “네, 벤하닷은 아합 왕의 형제입니다”(53절)하면서 매달렸습니다. 이에 우쭐해진 아합은 통이 큰 영웅인 것처럼 호기를 부리며 벤하닷을 데려오라고 합니다.
    벤하닷은 아합을 보자마자 아합의 허영심을 부추기는 제안을 합니다.
    제안의 내용을 살펴보면 큰 양보를 한 것 같지만 사실 빼앗은 성읍들을 돌려주는 것은 패전국으로서 당연히 해야 할 일이었습니다.
    나라 전체를 다 멸망시키고 빼앗아가도 할 말이 없었습니다.
    승자로서 당연히 취할 수 있는 권리인데도 아합은 그 말에 한껏 마음이 고무됐습니다.
    게다가 승자로서 적의 수도에 자신을 기념하는 거리까지 만들어 주겠다니 너무 기분이 좋았습니다.
    또한 여기에는 아람과 약조를 맺어 항상 이스라엘을 위협하는 강대국 앗수르의 위협에 대비하겠다는 정치적 계산도 작용했습니다.
    그래서 침략의 괴수인 벤하닷을 즉시로 놓아 주고 말았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지극히 인간적인 생각이었을 뿐 우상을 섬기고 불순종하는 아합에게 과분한 은혜로 두 차례의 기적 같은 승리를 주신 하나님의 뜻을 전혀 무시한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이 받을 자격이 없는 사람에게 의외의 축복을 주실 때는 다 뜻이 있는 것이었습니다.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오라는 메시지입니다.
    인간적인 수단들을 의지하지 말고 하나님만 의지하라는 메시지입니다.
    그래서 절망적인 상황 가운데 승리의 약속을 주신 것입니다.
    그런데 정작 승리를 얻었을 때 하나님을 생각하지 않고 인간적인 호기를 부리면 그 축복이 맥없이 흘러나가 버립니다.

    출애굽 첫 세대는 가나안 땅에 들어가게 될 것이라는 약속의 말씀에 믿음으로 화답하지 못했습니다.
    아무리 기쁜 소식이라도 믿음으로 화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무익할 뿐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우리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실제화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믿음으로 화답하면 그리스도 안에서 약속한 안식에 들어 갈 수 있습니다.
    그 안식은 승리를 의미하며 평안을 의미하며 축복을 의 미합니다.
    믿음을 계속해서 지켜나가며 하나님의 말씀을 붙잡을 때 우리는 온 전한 안식을 누릴 수 있습니다.

    아합 왕은 하나님이 막강한 적을 자신의 손에 붙이시겠다는 그 약속을 믿음으로 끝까지 붙잡지 못했습니다.
    뜻밖의 승리와 상대의 비굴한 굴복에 잔뜩 고무되어 인간적인 타협을 했습니다.
    그것이 재앙의 원인이었습니다.
    이렇게 살아남은 아람은 훗날 두고두고 이스라엘을 괴롭히는 올무가 되었습니다.

    아합이 이런 어리석은 결정을 하게 된 것은 하나님을 알지 못하여 영적으로 무지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을 받지 아니 하나니 저희에게는 미련하게 보임이요 또 깨닫지도 못하나니 이런 일은 영적으로라야 분변함이니라”(고전 2:14)

    영적으로 무지하면 하나님의 축복을 받고도 그 의미를 이해하지 못하여 축복을 온전히 누리지 못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도 “진주를 돼지 앞에 던지지 말라”고 하셨습니다(마 7:6).

    ​고린도후서 6:18 / 전능하신 주
    너희에게 아버지가 되고 너희는 내게 자녀가 되리라 전능하신 주의 말씀이니라 하셨느니라 .


    하나님이 전능하시다(omnipotent)는 것은 무슨 뜻인가요?


    전능(omnipotent)이라는 말은 “모든”을 의미하는 omni-와 “능력”을 의미하는 potent가 합성된 말입니다.
    전지(omniscience)와 무소부재(omnipresence)의 속성과 마찬가지로, 우리가 아는 바와 같이 하나님이 무한하시다면, 그리고 하나님이 주권자이시라면, 결과적으로 하나님은 또한 전능하셔야만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시간, 모든 방법으로, 모든 것들을 다스리시는 모든 능력을 갖고 계십니다.

    욥기 42:2에서 욥은 하나님의 능력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주께서는 못 하실 일이 없사오며 무슨 계획이든지 못 이루실 것이 없는 줄 아오니.”

    욥은 하나님께서 당신의 계획을 이루시는 데 있어 전능하시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또한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도 이스라엘 백성과 관련한 당신의 목적을 완수할 수 있는 모든 능력을 가지고 계시다는 것을 상기시켜 주셨습니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여호와의 손이 짧으냐 네가 이제 내 말이 네게 응하는 여부를 보리라.”

    창조물보다 하나님의 전능함을 더 뚜렷이 볼 수 있는 곳도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거기 있으라…” 하시니 그렇게 되었습니다 (창세기 1:3, 6, 9, 등).
    사람이 창조를 하기 위해서는 도구와 재료가 필요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저 말씀하셨습니다.
    그러자 그 말씀의 능력으로 말미암아 무(無)로부터 모든 것이 창조되었습니다.
    “여호와의 말씀으로 하늘이 지음이 되었으며 그 만상을 그의 입 기운으로 이루었도다” (시편 33:6).

    하나님의 능력은 또한 하나님께서 창조물을 보존하시는 것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사람과 짐승을 구하여 주시[는 능력]” (시편 36:6)으로 말미암아 유지되는 재생 가능한 자원들로부터 얻어지는 모든 것을 포함해, 음식, 옷과 피난처 등 우리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주시는 하나님의 공급하심이 없었다면 지상의 모든 생명들은 사라지고 말았을 것입니다.
    지면의 대부분을 덮고 있는 우리가 어쩌지 못하는 바다는 하나님께서 그 경계를 정하지 않으셨다면 우리까지 덮고 말았을 것입니다 (욥기 38:8-11).

    하나님의 전능하심은 정권과 지도자들에게까지 확장됩니다(다니엘 2:21).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계획과 목적에 따라 그들을 제지하기도 하시며 그들 마음대로 행하도록 허락하기도 하십니다.
    하나님의 능력은 사탄과 그 귀신들에 대해서도 무한하십니다.
    욥에 대한 사탄의 공격은 특정 행동에만 국한된 것이었습니다.
    사탄은 하나님의 무한하신 능력에 의해 저지되었습니다(욥기 1:12, 2:6).
    예수님은 빌라도에게 모든 능력의 하나님께서 그에게 권한을 부여하지 않으셨다면 아무 능력도 갖지 못했을 것이라고 일깨워 주었습니다 (요한복음 19:11).

    전능하신 하나님께서는 무엇이든 하실 수 있습니다.
    그런데, 성경에서 말하길 하나님께서 어떤 일들을 하실 수 없다고 할 때, 그것이 하나님께서 그의 전능하심을 잃어버리셨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예를 들어 히브리서 6:18은 하나님께서 거짓말을 하실 수 없다고 말합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거짓말 하실 능력이 없다는 의미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당신의 도덕적 완벽성 때문에 거짓말을 하시지 않기로 선택하셨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은 전능하시고 악을 미워하심에도 불구하고 당신의 선한 목적을 따라 악이 일어나도록 허락하기도 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목적을 펼치시기 위해 어떤 악한 사건을 사용하십니다.
    인류의 속량을 위해 하나님의 완전하고, 거룩하고, 죄 없는 어린 양을 죽인 그 지상 최대의 악한 사건이 발생한 것도 그러한 이유입니다.

    성육신하신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도 전능하십니다. 예수님의 능력은 수많은 치유와 오천 명을 먹이신 사건 (마가복음 6:30-44), 폭풍을 잠잠하게 하신 (마가복음 4:37-41) 기적들과, 나사로와 야이로의 딸을 죽음에서 살리심으로써 (요한복음 11:38-44, 마가복음 5:35-43) 보여주신 삶과 죽음도 다스리시는 궁극의 능력 안에서 엿볼 수 있습니다. 죽음은 예수님께서 오신 궁극적인 이유로서, 예수님은 죽음을 멸하시고 (고린도전서 15:22, 히브리서 2:14) 죄인들로 하여금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도록 하시기 위해 오셨습니다. 우리 주 예수님은 당신의 생명을 놓을 수 있는 능력과 그것을 다시 일으킬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고 분명히 말씀하셨는데, 그 사실은 성전에 대하여 이야기할 때 비유적으로 표현되었습니다 (요한복음 2:19). 예수님은 만일 필요했다면 당신의 수난 시기 동안 당신을 구할 수 있는 열 두 군단의 천사들을 부를 수 있는 능력을 갖고 계셨지만 (마태복음 26:53), 다른 이들을 대신하여 자신을 바치셨습니다 (빌립보서 2:1-11).

    위대한 비밀은 이러한 능력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과 연합된 신앙인들에게 전해질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바울은 “그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고 말합니다 (고린도후서 12:9). 하나님의 능력은 우리가 가장 약할 때에 우리 안에서 가장 강해집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우리 가운데서 역사하시는 능력대로 우리가 구하거나 생각하는 모든 것에 더 넘치도록 능히 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에베소서 3:20). 그것이 우리의 죄에도 불구하고 은혜 가운데서 우리를 계속 붙들어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며 (디모데후서 1:12), 그 능력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실족하지 않습니다 (유다서 1:24). 하나님의 능력은 하늘의 모든 무리에 의해 영원 무궁토록 찬양 받으실 것입니다 (요한계시록 19:1). 그것이 우리의 멈추지 않는 기도가 되기를!


    엘 샤다이(전능하신 하나님) 창세기 17:1~2

    전능한 하나님(엘 샤다이)

    17장에서 처음으로 나타난 하나님의 명칭이다.
    엘은 '강한 자'의 뜻으로 하나님의 보편적 칭호
    샤다이의 뜻은 명확하지 않다.
    그러나 그 배경으로 '강한 자'(샤다드) '명망시키는 자'(샤다드), '전적 충족 또는 자기 충족자', '수리아어 산(Shadu)의 의미', '전능자'(pantocravtwr; 판토크라톨)등을 말한다.
    이중 처음 두 가지가 유력하다.
    그렇다면 '강한자'를 표시하는 두 낱말이 중복됨으로 '극히 강한 자, 전능자, 강하고 강한자'의 뜻이 분명하다.
    이런 전능하신 하나님이셨기 때문에 아브람에게 행하여 '완전하라'(웨헤이 타밈)고 명령하셨던 것이다.
    왜냐하면 당신의 전능하신 능력과 손으로 붙들어 주시겠다는 약속을 전제하고 있기 때문이다.
    '엘 샤다이'의 하나님을 믿는 성도는 결코 좌절할 이유가 없고 언제든지, 무슨 어려운 일을 만나든지 담대할 수가 있다.
    그것은 전능하신 하나님 곧 '엘샤다이'의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고 능력을 베풀어 주시기 때문이다.

    '능력과 욕망이 평형을 이루고 있는 자는 절대 행복자이다' 이 말은 '루소'의 말입니다.
    99세 때까지도 '친자손'이 없어 낙심하는 아브라함에게 하나님께서는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니 '완전'히 행하라고 위로하십니다.
    '전능하신 하나님', 즉 '엘 샤다이' 라는 명칭은 '유력하다, 강하다'라는 뜻의 '사드'(dv)라는 말과 '엘'(la) 즉, '하나님'이라는 낱말과 합친 하나님의 별호입니다. 이처럼 성경은 하나님을 '전능자'로 증언해 줍니다(참조; 욥42:2;렘32:17). 성도들은 이 전능하신 하나님을 의뢰하기에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벧4:13)있다고 고백할 수 있습니다.

    1. 전능의 참된 의미

     우리가 '전능하신 하나님'이라고 고백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아무것이나 다 하시는 분'이라는 뜻이 아닙니다. 전능은 하나님의 '절대적인 주권'과 '완전 거룩하신 뜻'과 깊게 연관된 하나님의 본성입니다. 그러기에 '전능'은 오직 '하나님의 본성'안에서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을 다 하실 수 있음을 의미합니다. 몇 가지 예를 들자면 ① 하나님은 이 세상의 폭군들처럼 그 가진 권세로 '악'을 행하실 수 없으십니다(참조; 합1:13;딤후2:13;히6:18;약1:13). 만일 하나님께서 행하신다면 참된 의미에서 '전능하신 하나님'은 될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악을 행하는 자는 자신을 제어할 능력이 결여된 자며, 사랑을 행할 능력이 상실된 자이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전능의 힘은 오직 그 의와 사랑의 본성의 제한을 받습니다. ② 하나님은 인간들처럼 모순된 일까지 행하실 수 없으십니다. 즉 창조와 섭리에 있어서 '네모가 난 원'같은 것을 만드실 수가 없으시며, '거짓을 띤 참'과 같은 가치관을 만드시고 행하실 수도 없으십니다. 물론 성경에는 '말하는 나귀'(참조; 민22:28)나 '그리스도의 성육신'같은 '초자연적인 기적'들이 허다하게 있는데, 이러한 사건들은 모두 다 하나님의 전능하심에서 기인된 일들로 증언해 줍니다. 그러나 그 모든 기적에는 하나님의 '거룩하신 뜻'과 '신적인 본성'에 위배되거나 모순된 요소가 없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의로우시고 거룩하신 속성이 잘 반영되고 있음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와 같이 '참된 전능자'이신 하나님을 의뢰하는 성도들의 '영적 특권'이나 '은사'들도 하나님의 거룩하신 본성과 뜻 안에서 제한되어 있음을 유념해야 합니다(참조; 마7:22,23;고전14:1,32,33). '전능하신 하나님을 섬기고 그분께 큰 능력을 받았으니 아무것이나 다 행할 수 있다'라고 여기는 것은 잘못된 생각입니다. 또 큰 기적과 이적을 행한다 해도 그것이 하나님의 의와 사랑의 성품과 영원한 인생 구원의 뜻을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면 그 능력은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이 아님도 유의해야 할 것입니다(참조; 눅21:8;살전2:9-12).

    2.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일

     그렇다면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무슨 일을 인생들에게 행하시기에 성경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을 '엘 샤다이'라고 부를 것을 요구할까요? '칼 발트'라는 신학자는 말하기를 '하나님의 전능성은 우리 인생의 생사를 주관하시기에 의미 있다'고 했습니다. 무슨 뜻인가 하면 하나님께서 아무리 전능하신 능력이 있다 해도 우리 인생들의 '구원 문제'와 관계가 없다면 아무 의미가 없다는 뜻입니다. 그러기에 '칼빈'이라는 신학자는 바울 사도의 고백을 예로 들어 '전능하신 하나님'의 주된 사역을 지적했는데, 바로 '만물을 자기에게 복종케 하실 수 있는 자의 역사로 우리의 낮은 몸을 자기 영광의 몸의 형체와 같이 변케'(빌3:21) 하실 수 있기에 인생들이 '전능자'로 경배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하지' 라는 근대 신학자는 '엘 샤다이'라는 별호는 인생들과의 '구원의 언약'을 능히 이루시는 하나님임을 강조한다고 했던 것입니다. 그는 말하기를 이 세상의 죄악과 자연 질서가 인생을 죄에서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언약을 반대하고 방해하더라도 하나님은 능히 그 모든 것을 그리스도 안에서 이기고 성취할 수 있는 능력이 있으시기에 '엘 샤다이'로 부를 수 있다'라고 했습니다. 유에서 무를 창조하신 하나님께서 성육신하신 예수 그리스도안에서 죄인을 의인으로, 인생의 불행을 행복으로, 육의 인간을 영의 인간으로 변화시키실 수 있기에 그 야말로 '전능하신 하나님'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탄도 큰 기적과 이적은 행할 수 있으나 바로 그와 같은 '인생 구원'의 능력은 없기에 거짓된 존재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3. 전능하신 하나님과 성도

    하나님은 그 전능성을 확신하지 못하고 인간적인 방법으로 자손을 얻으려고 했던 아브라함에게(참조; 창16:1-3) '내 앞에서

    행하며 완전하라'고 하십니다.

    이 말씀은 '큰 민족'을 주시겠다는 하나님의 전능하신 언약만을 의뢰하라는 의미입니다(참조; 창12:1-3).

    아브라함은 그 후 하나님의 전능성만을 의뢰했기에 '죽은 몸'에서 '이삭'이라는 생명을 얻었고, '믿음의 조상'이라는 축복을 얻었습니다(참조; 롬4:18-21; 히12:11,12).

    우리도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허락하신 하나님의 전능하신 구원의 언약을 의뢰합시다(참조; 롬4:22-25). 또 현세의 모든 시험과 환난도 하나님께서 능히 극복하게 해주실 줄로 믿읍시다(참조; 롬8:32).

    그리고 장차 '요단 강'저편 '영광의 나라'에 들어갈 때, 나 같은 죄인까지도 천국 백성의 반열에 속하게 해 주신 것을 발견하고

    '엘 샤다이'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온전히 깨닫게 될 것입니다(참조; 계1:1-6).

    주제관주

    · 전능하신 하나님
     
    a. 하나님에게는 불가능한 일이 없음(창17:1)
     

    b. 심판과 멸망의 권세를 가지심(눅12:5)
     

    c. 하나님은 모든 일을 그 뜻대로 진행하심(엡1:11)
     

    d. 성도는 하나님의 인도대로 따라야 함(신1:33)

    전능하신 하나님

    전능의 의미

    1. 모든 일을 가능케 함(창세기 17:1)
     아브람의 구십구세 때에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나타나서 그에게 이르시되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 너는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
     

    2. 지극히 높음(창세기 14:18)
     살렘 왕 멜기세덱이 떡과 포도주를 가지고 나왔으니 그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제사장이었더라
     

    3. 만물의 생육과 번성을 주관함(창세기 28:3)
     전능하신 하나님이 네게 복을 주어 너로 생육하고 번성케 하사 너로 여러 족속을 이루게 하시고
     

    4. 절대적인 능력을 가짐(창세기 49:24)
     요셉의 활이도리어 견강하며 그의 팔이 힘이 있으니 야곱의 전능자의 손을 힘입을 이라 그로부터 이스라엘의 반석인 목자가 나도다
     

    5. 세상을 공의로 재판하고 역사함(욥기 8:3)
     하나님이 어찌 심판을 굽게 하시겠으며 전능하신 이가 어찌 공의를 굽게 하시겠는가
     

    6. 모든 행위와 역사가 완전함(전도서 3:14)
     무릇 하나님의 행하시는 것은 영원히 있을 것이라 더할 수도 없고 덜 할 수도 없나니
     

    b. 하나님의 전능하심
    ㉠ 하나님의 주권에서 기인함

    ① 천지를 창조하신 창조주의 권위(사40:26)
     너희는 눈을 높이 들어 누가 이 모든 것을 창조하였나 보라…그의 권세가 크고 그의 능력이 강하므로 하나도 빠짐이 없느니라
     

    ② 공의로우신 권위(잠8:8)
     내 입의 말은 다 의로운 즉 그 가운데 굽은 것과 패역한 것이 없나니
     

    ③ 세상의 권력 위에 있는 주권(욥12:19)
     제사장들을 벌거벗겨 끌어가시고 권력이 있는 자를 넘어뜨리시며
     

    ④ 영원한 주권(출15:18)
     여호와의 다스리심이 영원 무궁하시도다 하였도다
     

    ㉡ 하나님의 전지 능력에서 기인함
    ① 숨은 자의 악행을 아심(창3:8)

    ② 도망한 자를 찾으심(욘1:3)

    ③ 땅 끝끼지 감찰하심(욥28:23,24)

    ④ 장래 일을 아심(렘1:5)

    2. 전능하신 하나님의 사역

    a. 피조물에 대하여
    ㉠ 말씀으로 창조하심(창1:3)

    ㉡ 열방을 통치하고 다스리심(암1:1,2)

    ㉢ 굴복케 하심(롬8:20)

    ㉣ 악을 징벌하심(시94:10)
     

    b.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 시험을 이기는 권능을 주심(마4:1-11)

    ㉡ 병을 고치는 권능을 주심(막1:23-27)

    ㉢ 죽음을 이기는 권능을 주심(요10:17,18)

    ㉣ 구원을 이루는 권능을 주심(히7:25)

    c. 성령을 통하여
    ㉠ 복음을 힘있게 하심(롬15:19)

    ㉡ 교회와 성도 위에 강림하심(롬15:16)

    3. 전능하신 하나님에 대한 성도의 자세

    a. 하나님의 자녀 된 특권을 소유함(하2:11)
    ㉠ 하나님의 이름으로 고난을 함께 받음(롬8:17)

    ㉡ 하늘의 유업을 이름(갈3:29)
     

    b. 하나님을 경외함(시119:63)
    ㉠ 마음과 뜻을 다해 순종함(신26:16)

    ㉡ 그 길이 형통하게 됨(수1:8)
     

    d. 하나님의 역사를 믿음(요14:1)
    ㉠ 환난 중에도 믿음으로 기다림(약5:7)

    ㉡ 하나님의 응답을 믿음(마21:22)

    ㉢ 하나님의 구원을 믿음(막16:16)


    하나님, 아합을 심판하시다

    자기 마음대로 벤하닷을 살려 준 아합에게 즉시 하나님의 심판이 선포되었습니다. 축복의 말도 선지자를 통해서 왔듯이 심판의 말도 하나님의 선지자를 통해서 선포되었습니다. 두 가지 사건이 나오는데, 하나는 선지자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자기 동료에게 자기를 치라고 명했습니다. 그러나 동료는 인간적인 정리 때문에 그대로 행하길 꺼려했고 그 결과 하나님의 심판을 받고 죽었습니다. 이것은 인간적인 판단으로 벤하닷을 살려 준 아합에게 대한 하나님의 다가올 심판을 상징이었습니다.

    두 번째로는 선지자가 눈을 가리고 변장하여 왕이 지나갈 때에 한 사건을 판결해 달라고 했습니다. 어떤 사람이 포로 한명을 맡으면서 그를 제대로 지키지 못할 경우 그 생명을 대신하든지 은 한 달란트를 내야한다는 약속을 했는데 그 포로를 잃게 되었으니 어찌해야 하냐는 것이었습니다. 이 사건에 대한 평결은 전혀 어려울 게 없었습니다. 포로를 잃은 자가 자기 약속대로 죗값을 치러야 한다고 아합은 판결했습니다. 아합은 그것이 자기 얘기인 줄 몰랐습니다. 사람은 자기 일일 때는 주관적이 되어 상황 판단을 잘못하지 만남의 일을 볼 때는 아주 객관적으로 상황 판단을 잘합니다. 남의 바둑 훈수 둘 때는 잘 보입니다.

    그때 선지자가 눈 가리운 수건을 벗으니 비로소 왕은 하나님의 선지자인줄 알았습니다.

    “여호와의 말씀이 내가 멸하기로 작정한 사람을 네 손으로 놓았은즉 네 목숨은 저의 목숨을 대신하고 네 백성은 저의 백성을 대신하리라 하셨나이다”(42절)

    벤하닷은 하나님께서 그에게 지키도록 명한 포로였으며, 아합이 자의적으로 그를 살려준 것은 명백한 죄였으니 이제 그 죗값을 치러야 한다는 것입니다.
    말씀을 무시하고 제멋대로 그를 놓아준데 대한 책임으로 이제 아합은 자신의 생명을 내놓아야 했습니다.

    아합 왕은 이 무서운 심판의 말을 듣고 “근심하고 답답하여 했다”(43절)고 했습니다.
    원어에는 ‘분노했다’는 의미도 담겨있습니다.
    그런데 그는 근심하고 하고 분노했을 뿐 죄를 깨닫고 회개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밧세바 사건 때 다윗의 죄를 깨우칠 때도 선지자 나단을 통하여 비슷한 방법으로 다윗의 죄 를 지적 하셨습니다.
    그때 다윗의 반응은 완전히 달랐습니다.
    시편 51편에 나오듯, 다윗은 그 즉시로 뼈를 깎는 회개를 했습니다.
    그러나 아합은 그저 근심 할 뿐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죄를 지적하시는 것은 그를 정죄해서 멸망케 하려는데 목적이 있는 게 아닙니다.
    죄를 깨닫고 회개함으로써 멸망에서 구원을 얻게 하기위한 질책인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에 대해 무지했던 아합은 이런 사실을 몰랐기에 근심했을 뿐 회개하지 않았습니다.

    1. 아람의 공격에서 이스라엘을 방호하시는 하나님의 의도는 무엇입니까?
    2. 아람과의 전쟁에서 이긴 아합의 실수와 그 결과는 어떻게 되었습니까?
    3. 하나님이 지적하실 때 어떤 자세가 필요합니까?


    엘 샤다이
    엘 샤다이(El Shaddai)는 하나님의 히브리어 이름 중 하나입니다.
    구약에서 등장되는 하나님의 이름은 다양한데요,
    주로 야훼(Yhwh) 엘로힘(Elohim)이 사용되는데,
    야훼가 약 6700회, 엘로힘이 약 2500회 정도 등장한다고 합니다.

    엘 샤다이 (El Shaddai) - 창 17:1, 출 6:3
    엘 엘리욘 (El  Elyon) - 창14:19
    엘 로이 (El Roi) - 창 16:13
    등의 엘(El)이 들어간 하나님의 이름이 등장합니다.  

    하지만 엘 샤다이(El Shdai)의 ShaDai는 문법적으로 봤을 때  "가슴"을 뜻하는 ShaD와 더 연관이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게다가 히브리어에서는 어미에 "i"나 "ai"가 오게 되면  대부분 "나의"라는 의미가 됩니다.
    위와 같이 해석했을 때, 엘샤다이는 "하나님은 나의 가슴이다"라는 뜻이 됩니다.

    사랑, 헌신, 따뜻함..
    어린 아이는 어머니의 젖으로부터 생명을 유지하는 영양분을 공급받습니다. 

    우리가 보는 성경에서의 El Shaddai는 주로 "전능하신 하나님(God Almighty)"로 번역되어 있는데, 이는 히브리어 샤다이(ShaDai)가 '파괴하다', '압도하다'라는 뜻을 가진   동사 리슈도드(leShDoD)와 연결되어 있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도둑,강도를 뜻하는 히브리어 쇼데드-ShodDeD 역시 같은 어근을 갖고 있습니다.)

    이런 맥락에서 엘 샤다이는 "모든 필요를 공급하시는 하나님"으로   번역되는 것이 더 원어의 의미에 가깝다고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이름 '엘 샤다이(El Shaddai, אל שדי)'

    하나님의 이름은 성경에서 하나님의 성품과 사역을 나타내는 중요한 요소입니다. 그중 '엘 샤다이(El Shaddai, אל שדי)'는 하나님을 '전능하신 하나님(Almighty God)'으로 나타내는 명칭으로, 특히 구약 성경에서 하나님의 절대적인 권능과 신실하신 보호를 강조하는 데 사용됩니다. 이 명칭은 창세기에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언약을 맺으실 때 등장하며(창 17:1),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을 지키시고 복을 주시는 전능한 분임을 드러냅니다. 본 논문에서는 '엘 샤다이'의 언어적 기원, 신학적 의미, 성경적 사용, 그리고 기독교 신앙에서의 중요성을 깊이 있게 논의하고자 합니다.

    '엘 샤다이'의 어원과 언어적 의미

    '엘 샤다이'는 두 개의 히브리어 단어 '엘(El, 하나님)'과 '샤다이(Shaddai)'의 결합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엘'은 성경에서 하나님을 가리키는 일반적인 명칭이지만, '샤다이'의 정확한 어원에 대해서는 다양한 견해가 존재합니다. 일반적으로 '샤다이'는 '전능한(Almighty)'이라는 의미로 해석되며, 이는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하시는 분임을 나타냅니다.

    '샤다이'의 의미적 해석

    '샤다이'의 의미에 대한 주요한 해석은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샤다이'는 히브리어 동사 '샤다(שדד, 파괴하다, 압도하다)'에서 유래하였다는 견해입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그의 능력으로 세상을 다스리시며, 필요할 때 심판하시는 전능한 분임을 강조합니다. 둘째, '샤다이'는 '샤다(שד, 가슴 또는 젖을 뜻함)'에서 유래하였다는 해석입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어머니가 자녀를 보살피듯 풍성한 공급과 보호를 베푸시는 분임을 나타냅니다. 셋째, '샤다이'를 '산(God of the Mountain)'과 연결하는 해석도 있습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높은 곳에서 다스리시며, 강력한 힘으로 보호하신다는 의미로 사용됩니다.

    그러나 이러한 해석들이 모두 학문적으로 완전히 확정된 것은 아닙니다. 어떤 학자들은 '샤다이'가 고대 셈어 계열의 언어에서 차용된 단어일 가능성도 있다고 주장합니다. 따라서 이 용어의 기원에 대한 논의는 계속되고 있습니다.

    '엘 샤다이'와 하나님의 언약

    '엘 샤다이'라는 이름은 성경에서 하나님의 언약과 깊이 연관되어 사용됩니다. 창세기 17장 1절에서 하나님께서는 아브람에게 나타나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 너는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그의 언약을 신실하게 이루시는 분임을 강조하는 표현으로, '엘 샤다이'라는 명칭이 단순한 힘의 상징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에게 신실하시며, 그 언약을 반드시 성취하시는 분임을 나타냅니다.

    '엘 샤다이'와 아브라함 언약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실 때 '엘 샤다이'로 자신을 계시하신 것은, 그분께서 아브라함과 맺은 언약을 확증하시고, 그의 후손을 번성하게 하시겠다는 약속을 이루실 전능한 하나님이심을 나타냅니다. 창세기 28장 3절에서 이삭이 야곱을 축복하며 "전능하신 하나님이 네게 복을 주시어 네가 생육하고 번성하게 하시며"라고 말한 것도 같은 맥락입니다. 즉, '엘 샤다이'는 하나님께서 인간의 불가능한 상황 속에서도 자신의 뜻을 이루시는 분임을 강조하는 명칭입니다.

    '엘 샤다이'와 모세의 시대

    출애굽기에서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야훼'라는 이름으로 자신을 계시하시지만, 하나님께서 조상들에게는 '엘 샤다이'로 나타나셨음을 언급하십니다(출 6:3). 이는 하나님의 구속 사역의 점진적인 계시를 보여주며, 하나님께서 시대에 따라 다른 방식으로 자신의 이름을 드러내시는 과정을 설명합니다.

    '엘 샤다이'와 하나님의 능력

    하나님께서 '엘 샤다이'로 계시되신 것은, 그분이 창조 세계와 인간 역사 속에서 절대적인 능력을 가지신 분이라는 신학적 의미를 갖습니다. 이는 시편과 선지서에서도 반복적으로 등장하며, 하나님께서 전능하신 능력으로 그의 백성을 보호하시고 인도하시는 분임을 강조합니다.

    '엘 샤다이'와 하나님의 보호

    시편 91편 1절에서는 "지존자의 은밀한 곳에 거주하며 전능자의 그늘 아래에 사는 자여"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전능자'는 '엘 샤다이'로 번역되며, 하나님께서 그분을 신뢰하는 자들에게 보호와 피난처가 되심을 나타냅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단순한 심판자로서만이 아니라, 그의 백성을 보호하고 인도하시는 사랑의 하나님이심을 보여줍니다.

    '엘 샤다이'와 신자들의 삶

    '엘 샤다이'라는 이름은 신자들에게 하나님을 절대적으로 신뢰하고 의지할 것을 요구합니다.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모든 필요를 채우시고, 그분의 능력으로 우리의 삶을 인도하시며 보호하심을 믿는 것이 중요합니다.
    신약에서도 하나님의 전능하심이 강조되며,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구원의 역사가 이루어진다는 점에서 '엘 샤다이'의 의미는 더욱 강화됩니다.
    그러나 현대 사회에서 신앙 생활을 하는 신자들이 '엘 샤다이'의 의미를 온전히 이해하고 적용하는 것은 쉽지 않은 과제입니다.

    '엘 샤다이'의 신학적 함의

    '엘 샤다이'라는 이름은 하나님의 속성을 드러내는 중요한 신학적 개념을 포함합니다.
    첫째, 하나님은 전능하신 분으로서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하시며, 인간의 한계를 초월하여 역사하십니다.
    둘째, 하나님은 신실하게 그의 언약을 이루시는 분이시며, 그의 백성을 결코 버리지 않으십니다.
    셋째, 하나님은 보호자이시며, 신자들에게 풍성한 은혜를 베푸시는 분입니다.
    넷째, 하나님의 전능하심은 단순한 권능이 아니라, 그의 사랑과 자비 속에서 실현됩니다.

    결론

    '엘 샤다이'라는 하나님의 이름은 단순한 전능성을 강조하는 명칭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과 맺으신 언약을 신실하게 이루시는 분이라는 점을 강조합니다.
    또한,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을 보호하고 인도하시며, 인간의 한계를 넘어 일하시는 분임을 나타냅니다.
    이러한 점에서 '엘 샤다이'는 신자들에게 하나님을 더욱 신뢰하고, 그분의 전능하신 보호 아래 살아가도록 권면하는 중요한 신앙적 개념이 됩니다.
    신자들은 '엘 샤다이' 하나님을 의지하며, 그의 능력 안에서 믿음의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산신(山神)

    산을 지키고 다스리는 산신에게 종교적인 믿음을 바치는 민간신앙.

    산신령”이란 한국 신화에서 산을 지키고 다스리는 신령을 말합니다.
    이들은 주로 백발에 긴수염을 가진 할아버지로 묘사되며, 꿈 속이나 산 중의 알 수 없는 곳, 연못, 옹달샘 등에서 등장합니다. 이 기사에서는 산신령의 역할과 특징, 한국에서의 산신 신앙, 그리고 대중문화 속의 산신령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한국 신화에는 다양한 신적 존재들이 등장하는데, 그 중에서도 산신령은 자주 등장하는 신입니다.
    산신령은 산의 신격화된 존재이며, 산을 지키고 다스리는 역할을 합니다.
    이 들은 주로 남성으로 표현되지만 여성으로 표현될 때도 있으며, 특히 긴수염을 가진 할아버지로 표현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산신령은 꿈 속이나 알 수 없는 장소에서 등장하여 산 속에서 길을 잃은 사람들에게 올바른 길로 인도하거나 그들을 보호하는 역할을 합니다.

    산신 신앙은 산을 지키고 다스리는 산신에게 종교적인 믿음을 바치는 민간신앙이다.
    산악신앙은 천지 및 천체 신앙과 함께 자연신앙의 주요 골간을 이룬다.
    고대국가의 건국신화에서도 산은 건국자가 강림하는 곳이자 사후에 되돌아가는 신의 주거지였다.
    고려시대에는 태조 때부터 5악과 5진의 산을 지정해 제사지내는 산으로 숭앙했고 이는 조선왕조에 계승되었다.
    민속신앙에서의 산악과 산신은 지역수호신의 성격도 강하게 가지는데, 산신은 산신령·신령으로 불리고 노인 또는 호랑이로 믿어지기도 한다.
    그래서 마을공동체에서 지내는 동신제가 산신제로 인식되기도 했다.


    산신(山神), 산왕대신(山王大臣) 또는 산령대신(山靈大臣)은 한국신화에서 산의 신령이다.
    무속뿐만 아니라 불교에서도 숭배의 대상으로 삼고 있다.

    무속신앙에서의 산신

    행운, 수명장수 및 부를 관장한다.
    산신도에서 주로 호랑이와 동자를 데리고 있는 모습으로 나타난다.
    소설 태백산맥에서 무당 소화가 섬기던 신이 신령 또는 산신이다.
    비 바람을 다스리기도 한다.

    불교에서의 산신

    산지가 많은 한국의 특성상 불교가 들어오기 전부터 산악숭배 사상이 있었다.
    도교의 칠성이 습합되어 불교에서 칠성여래가 되었다면, 산신은 한국 민간신앙의 신에서 불교의 호법신 변모했다.
    산신은 사찰의 호법신.
    불교신도들에게는 건강, 부귀영화, 질병소멸을 해준다.
    불교국가 중에서 한국 사찰에서만 별도의 전각인 산신각을 두고 있다.

    산신은 전통 신앙과 신화에서 산을 다스리거나 산이 신격화된 신을 말한다.
    한국의 무속이나 한국 불교에서는 산신령, 산령대신 또는 산왕대신이라고도 하며, 주로 흰 옷에 긴 흰수염 등으로 묘사된다.
    실존했던 인물 중 일부는 자신의 연고지에서 산신으로 추대받아 모셔지기도 한다.
    종종 신선과 착각하는 경우가 있는데, 신선과는 다르다.
    그외 그리스 로마 신화의 우로스 등 다른 여러 문화권의 신화에서도 이러한 산의 신을 찾아볼 수 있다.

    과거 한국 호랑이가 산마다 있었던 한국에서는 산신의 정체를 호랑이로 설정한 곳이 많다.
    또한 한국 불교에서는 절의 한 구석에 있는 산신각이나 삼성각에 가면 산신 탱화를 걸어놓는데 호랑이가 인간 모습으로 변신한 산신을 그린다.

    4월 21일(월) 열왕기상 15-17장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그 후에는 죽으리라(17:12)

    저가 가로되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의 사심을 가리켜 맹세하노니 나는 떡이 없고 다만 통에 가루 한 움큼과 병에 기름 조금 뿐이라 내가 나무가지 두엇을 주워다가 나와 내 아들을 위하여 음식을 만들어 먹고 그 후에는 죽으리라.
    "As surely as the LORD your God lives," she replied, "I don't have any bread--only a handful of flour in a jar and a little oil in a jug. I am gathering a few sticks to take home and make a meal for myself and my son, that we may eat it--and die."

    그 후에는 죽으리라(and die)
    일사각오(一死覺悟)의 신앙은 믿음을 지키려는 굳센 의지를 말합니다.
    아합 왕은 북 이스라엘의 일곱번째 왕으로 역사가들은 그를 가리켜 우상을 섬겼던 가장 악한 왕이었다고 평가합니다(왕상 16:30-33).

    열왕기상 16:30-33
    30. 오므리의 아들 아합이 그의 이전의 모든 사람보다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더욱 행하여
    31. 느밧의 아들 여로보암의 죄를 따라 행하는 것을 오히려 가볍게 여기며 시돈 사람의 왕 엣바알의 딸 이세벨을 아내로 삼고 가서 바알을 섬겨 예배하고
    32. 사마리아에 건축한 바알의 신전 안에 바알을 위하여 제단을 쌓으며
    33. 또 아세라 상을 만들었으니 그는 그 이전의 이스라엘의 모든 왕보다 심히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를 노하시게 하였더라

    악한 왕이 치리하던 시대에 하나님의 사람 선지자 엘리야가 일어났습니다.
    그런데 3년 동안 비가 내리지 않아 백성들은 극심한 가뭄으로 인하여 고통을 받고 있었습니다.
    이때 엘리야가 사르밧 지방에서 한 과부를 만나 그녀에게 마실 물을 요구하고 심지어 먹을 것도 요구합니다.
    마침 과부는 마지막 남은 밀가루 한 줌으로 한 끼를 준비하여 그것을 아들과 더불어 먹고 이제는 죽어야 할 형편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과부가 엘리야에게 마실 물을 떠다 주었으며 마지막 남은 밀가루로 만든 음식도 엘리야에게 주었다고 합니다.

    만일 내가 그 현장에 있는 과부의 입장이었다면 나는 그 과부처럼 나눌 수 있었을까?
    나는 도저히 할 수 없는 일을 과부는 주저하지 않고 행합니다.
    과부의 믿음 때문에 그때부터 과부의 집에 있는 밀가루 통에 밀가루가 계속  남아 있었습니다.
    기름병에 기름이 마르지 않았습니다.

    의로운 과부를 먹여 살리려고 하나님은 엘리야를 그 과부의 집으로 보낸 것입니다,

    죽음을 각오한 신앙은 이와 같이 전능하신 여호와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할 수 있는 은총의 기회를 열어주신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주기철 목사님의 일사각오를 위한 신앙
    에스더의 일사각오를 다짐하여 죽으면 죽으리라고 다짐하며 왕 앞에 나갈 수 있는 믿음
    사르밧 과부처럼 마지막 남은 밀가루와 기름 조금을 선지자를 위하여 쏟아 붓는 거룩한 용기

    오늘의 시대를 살아가야 할 우리들에게 필요한 것은 바로 이러한 믿음입니다.
    그 후에는 죽을지라도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그 일을 올바르게 감당할 때 하늘의 만나와 메추라기는 내려올 것입니다.

    마지막 시대에는 믿는 자를 만나는 것이 어렵다고 하셨습니다.
    형식적인 믿음은 도처에 널려 있습니다.
    그러나 하늘과 땅을 흔드는 생명력이 있는 믿음을 찾는 것이 어렵다고 합니다.

    이제 우리는 일어나야 합니다.
    새로운 마음과 결단으로 다시 시작합시다.
    지난 날의 어둠을 모두 물리치고 새 날이 다가올 수 있도록 창을 열고 새 바람 새 물결 새 은혜를 사모합시다.
     


    사르밧 과부(Widow of Zarephath), 소박하지만 큰 믿음의 소유자

    사르밧 과부. 그녀는 어찌 보면 성경의 수많은 역사 속에서 흘러간 단역 중 하나에 불과할 수도 있으나, 그녀는 기근으로 고통스러워하던 이스라엘에서 유일하게 하나님의 은총을 입었고 예수님께서 친히 그녀를 언급하심으로 그 사실을 확증하셨다(누가복음 4:26).
    구원의 근원이신 예수님께서는 왜 그녀를 언급하셨을까?

    예수님께서 주신 말씀은 우리의 구원과 관련이 있다.
    사르밧 과부의 이야기를 통해 오늘날 우리도 구원을 위해 무엇을 깨달아야 할지 하나님의 뜻을 살펴보자.

    엘리야와 사르밧 과부

    당시 이스라엘에는 오랜 세월 비가 오지 않았다.
    비가 끊어지자 시냇가들은 다 말라버렸고 먹을 것을 구하기도 힘들어졌다.
    온 나라가 이처럼 큰 기근 속에 허덕이는 가운데, 엘리야는 하나님의 명령대로 사르밧으로 향했다.
    그곳에서 만날 한 과부로부터 도움을 받을 것이라는 말씀이었다.

    성문에 이르게 된 엘리야는 하나님의 말씀대로 한 과부를 만났다.
    엘리야는 그녀를 불러 물과 떡 한 조각을 줄 수 있는지 부탁했다.
    그러자 그녀는 자신의 기구한 상황을 기근처럼 건조한 어투로 설명했다.
    현재 자신이 가진 것은 통 안의 가루 한 움큼과 병에 든 적은 기름뿐이며, 지금 줍고 있는 나뭇가지로 불을 지펴 자신의 아들을 위해 음식을 만들어 먹고 그 후에는 죽게 될 것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과부의 말을 들은 엘리야는 재차 그녀에게 물과 떡을 청했다.

    “두려워하지 말고, 내게 먼저 음식을 주시오. 하나님께서 당신의 통과 병에서 가루와 기름이 끊임없이 날 것이라 약속하셨소.”

    그 말을 어떻게 믿을 수 있을까?
    먼저 가루 한 움큼으로 떡 하나를 만들어 선지자에게 바치고 그 후에 자신과 아들을 위해 음식을 만들라고 하는데, 그에게 음식을 만들어 바친 후에 무슨 재료가 남아 있어서 아들과 나눠먹을 음식을 차린단 말인가?
    여러 복잡한 마음이 들었겠으나 과부는 결국 엘리야의 말대로 먼저 떡을 구워 엘리야에게 대접했다.

    그 후 어떻게 되었을까?
    사르밧 과부와 그녀의 아들은 엘리야의 말대로, 그에게 음식을 만들어 바친 후 자신들이 먹을 음식을 만들었다.
    그리고 그날뿐 아니라 그녀와 그녀의 아들은 아주 오랜 기간 동안 엘리야와 식사를 함께했다.
    하나님의 약속대로, 다시 비가 내리는 날까지 통의 가루와 병의 기름이 마르지 않는 기적을 체험하게 된 것이다(열왕기상 17:8~16).

    사르밧 과부, 그녀의 믿음

    오랜 기간 비가 내리지 않은 탓에 굶어 죽을 위기에 처한 상황이었다.
    집 안에 있는 양식은 겨우 한 움큼의 가루와 약간의 기름뿐.
    배고픔의 고통와 죽음의 두려움까지 염려하며 하루하루 힘겹게 버티고 있는 상황 속에서 선지자 엘리야의 부탁을 받은 사르밧 과부는 어떤 심정이었을까?
    곧 굶어 죽게 될 어린 아들을 바라보는 어미의 입장에서 볼 때 엘리야의 말은 결코 쉽사리 들어줄 수 있는 부탁이 아니었다.

    기근 속에서 사르밧 과부에게 가장 절실했던 것은 당장 먹을 양식인 떡과 기름이었다.
    그러나 과부는 가장 절체절명의 위기 속에서 자신과 아들보다는 하나님의 사람 엘리야를 먼저 대접했다.
    과부가 하나님을 먼저 생각하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경외심을 보였을 때 그 행위로 인해 자신도 아들도 죽음을 면하는 축복을 받게 되었다.
    만약 부족한 믿음으로 인해 잘못된 선택을 하여, 떡을 만들어 자신과 아들만 먹었다면 그 기나긴 기근의 시간 동안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을까. 얼마 지나지 않아 그 일을 후회했으리라.

    오늘날 우리의 믿음도 이처럼

    오늘날 하나님을 믿는다 하는 신앙인들의 자세도 이와 같아야 할 것이다.
    아무리 힘들고 어려운 상황이 있더라도 항상 하나님을 먼저 생각해야 한다.
    하나님의 백성에게 있어 항상 정답은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잊지 말자.

    나 여호와가 말하노니 … 나를 존중히 여기는 자를 내가 존중히 여기고 나를 멸시하는 자를 내가 경멸히 여기리라.(사무엘상 2:30)

    예나 지금이나 하나님께서는, 어떤 열악한 상황에서도 당신을 먼저 생각하는 사람을 찾고 계신다.
    하나님을 믿고 또 하나님의 기적을 체험하고자 하는 이들이라면 스스로의 신앙에 대해 한 번쯤 되돌아보는 것도 큰 도움이 될 듯하다.
    나는 과연 사르밧 과부처럼 항상 하나님의 말씀을 절대적으로 따랐는가?
    나는 하나님을 존중히 여기는 자였는가 아니면 멸시하는 자였는가?
    만약 부끄러운 부분이 많이 떠오른다면, 이제부터라도 하나님의 말씀을 경외하며 절대적으로 순종해 보자.
    성경 속 기적의 역사가 당신의 일상이 될 것이다.





    여호와(יהוה)께서는 엘리야 선지자를 보내어 아합 왕을 벌하기로 작정하셨다.
    엘리야의 기도가 없이는 비를 내리지 않는, 고난의 땅으로 만들려는 것이었다.


    여호와(יהוה)께서는 그의 백성들을 사랑하신다.
    그러므로 악한 자들을 벌하실 때, 그의 사자들을 대신 보내어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하게 하신다.
    여호와(יהוה)께서 엘리야 선지자에게 이르시기를, 아합 앞에 가서 이 같이 전하라 말씀하셨다.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노니, 내 말이 없으면 수 년 동안 비도 이슬도 있지 아니하리라."


    어느 누가 왕 앞에서 이런 말씀을 전하고, 살아남을 자가 있겠는가?
    그러므로 여호와(יהוה)께서는 엘리야를 요단 앞 그릿 시냇가에 숨기시고, 까마귀들에게 명령하여 먹고 마시게 하였다.


    시내가 마르고 이슬조차 내리지 않는 가뭄의 땅에서, 어떻게 양식을 구하겠는가?
    대부분의 사람들이 죽을 수밖에 없는 지경에 이르렀을 때였다.
    하나님은 믿음의 사람 사르밧 과부의 생명을 구원하기 위해, 그곳에 엘리야 선지자를 보내셨다.


    성경에 자세한 기록은 없지만, 사르밧에 살고 있는 과부는 신실한 믿음의 여인임을 알 수 있다.
    그는 먹을 것이 없을 때에, 아들과 함께 죽을 생각을 하였다. 집에 조금 남은 밀가루와 기름으로 한 끼 식사를 해결한 후 죽기를 각오하고, 들에 나가 나뭇가지를 줍던 중이었다.


    그때 엘리야가 나타나 그 여인을 불러 이르되, 청하건대 네 손의 떡 한 조각을 내게로 가져오라 하였다.
    그가 이르되,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노니, 나는 떡이 없고 다만 통에 가루 한 움큼과 병에 기름 조금뿐이라.
    내가 나뭇가지 둘을 주워다가 나와 내 아들을 위하여 음식을 만들어 먹고, 그 후에는 죽으리라 하였다.
    엘리야가 그에게 이르되, 두려워하지 말고 가서 네 말대로 하려니와, 먼저 그것으로 나를 위하여 작은 떡 한 개를 만들어 내게로 가져오고, 그 후에 너와 네 아들을 위하여 만들라 하였다.


    세상 사람들이 볼 때, 참으로 염치없는 사람으로 생각할 것이다.
    어떻게 한 끼 식사도 해결하기 힘든 여인에게, 자기 먹을 것을 먼저 달라고 말할 수 있을까?
    이것이 선지자가 할 행동인가?
    참 선지자라면 자신이 죽을지언정, 이웃을 살려야 하지 않겠는가?


    그러나 참 선지자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사역하는 자이다.
    그러므로 과부와 그의 식솔들을 살리기 위하여, 순종의 질서를 먼저 요구하신 것이다.
    여인은 하나님의 말씀을 신뢰하는 자였기에, 엘리야 선지자의 말씀대로 순종하였던 것이다.


    엘리야 선지자는 여인이 만들어 준 떡을 먹고, 이렇게 축복하였다.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이, 나 여호와가 비를 지면에 내리는 날까지 그 통의 가루가 떨어지지 아니하고, 그 병의 기름이 없어지지 아니하리라."


    그가 가서 엘리야의 말대로 하였더니, 그와 엘리야와 그의 식구가 여러 날 먹었으나, 여호와께서 엘리야를 통하여 하신 말씀 같이 통의 가루가 떨어지지 아니하고, 병의 기름이 없어지지 아니하였다.


    이 말씀은 구약시대 때의 말씀이다.
    구약시대 때에는 성령의 권능이 역사하던 시대였다.
    다시 말해, 이적과 기적이 나타나는 시대였다. 성령의 권능으로 홍해를 가르고 죽은 자를 살리던 시대였다.
    그러므로 본문 말씀은, 구약시대 때의 순종을 나타낸 말씀이다.


    그러나 오늘날에도 이러한 말씀으로 성도들을 억압한다면 어떻게 될까?
    성령의 권능은 신약시대 초기 때까지 역사한 것이지, 오늘날에도 역사하는 것이 아니다. 오늘날은 사도들이 죽은 후, 달란트의 재능으로 사역하는 시대이기 때문이다.(마 25:14~46)


    그러므로 지도자와 성도들은, 성령의 가르침 안에서, 서로가 본이 되는 삶을 살아가야 하는 것이다. 지도자는 본을 보이고, 성도들을 겸손으로 순복하여야 하는 것이다.(벧전 5:1~6)


    베드로전서 5장
    1. 너희 중 장로들에게 권하노니 나는 함께 장로 된 자요 그리스도의 고난의 증인이요 나타날 영광에 참여할 자니라
    2. 너희 중에 있는 하나님의 양 무리를 치되 억지로 하지 말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자원함으로 하며 더러운 이득을 위하여 하지 말고 기꺼이 하며
    3. 맡은 자들에게 주장하는 자세를 하지 말고 양 무리의 본이 되라
    4. 그리하면 목자장이 나타나실 때에 시들지 아니하는 영광의 관을 얻으리라
    5. 젊은 자들아 이와 같이 장로들에게 순종하고 다 서로 겸손으로 허리를 동이라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대적하시되 겸손한 자들에게는 은혜를 주시느니라
    6. 그러므로 하나님의 능하신 손 아래에서 겸손하라 때가 되면 너희를 높이시리라


    엘리야 선지자는 여호와(יהוה)의 말씀을 대언하는 믿음으로 살았고, 사르밧 과부는 생명을 살리는 순종의 믿음으로 살았다.
    여호와(יהוה)의 권능은 죽은 자도 살리신다.
    그의 아들 예수를 죽음에서 부활하게 하신 것처럼, 장차 우리들도 믿음으로 본을 보이고, 믿음으로 순종할 때에 구원의 약속이 이루어질 것이다.

     "너는 일어나 시돈에 속한 사르밧으로 가서 거기 머물라 내가 그 곳 과부에게 명령하여 네게 음식을 주게 하였느니라"(9절) 하는 말씀으로 시작을 합니다. 

    이 사르밧 여인은 신약에서 예수님이 칭찬하신 여인입니다.  (눅4;25-26)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엘리야 시대에 하늘이 삼 년 육 개월간 닫히어 온 땅에 큰 흉년이 들었을 때에 이스라엘에 많은 과부가 있었으되 26엘리야가 그 중 한 사람에게도 보내심을 받지 않고 오직 시돈 땅에 있는 사렙다의 한 과부에게 뿐이었으며” 

    어째서 이 이방여인이 하나님의 눈에 쏙 들었을까요? 엘리야를 보내어서 살려야 할 만큼 대단한 이유가 무엇일까요???  선민 이스라엘에도 많은 과부가 있었는데 그들은 뭐가 부족해서 하나님이 외면하시고 선지자를 사르밧 과부에게 보내실까요?  오늘 본문을 통해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무엇을 말씀하시나요? 

    먼저 시돈이 어떤 땅입니까? 그냥 외국이 아니라, 이스라엘왕인 아합을 타락하게 했던 이세벨의 친정아버지 엣바알이 다스리고 있는 땅입니다. 

    (왕상21;25) “예로부터 아합과 같이 그 자신을 팔아 여호와 앞에서 악을 행한 자가 없음은  그를 그의 아내 이세벨이 충동하였음이라”  

    아합을 충동하여 이스라엘을 바알과 아세라의 우상 천지로 만들어 나라를 망하게 한 이세벨의 고향입니다. 하나님께서 지금 엘리야를 그런 땅으로 가라고 명령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일단은 엘리야도 우리와 똑같은 사람입니다. 엘리야가 시돈에 속한 사르밧으로 가라는 명령을 받았을 때 이 명령이 엘리야에게 대단히 어려운 명령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의 선지자가 왕궁에 우상숭배를 끌여들인 이세벨의 아버지가 다스리고 있는 땅을.. 더구나 이방 여자에게 얹혀 살기위해, 먹고 살기위해서 찾아가는 것은 도저히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는 일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보내시고, 엘리야는 순종합니다. 가까운 길도 아닙니다. 그릿 시냇가에서 사르밧까지 가는 길은 100km가 넘는 먼 길입니다.  길이 제대로 없던 때였고,  길이 있어도 사람들이 왕래할 수 있는 큰 길은 이미 엘리야를 체포하기 위해 아합의 군사들이 깔려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사르밧까지 가는 길에는 사막도 있습니다. 그런 길을 걸어서 가야하고, 사람들의 눈을 피해서 가야 했습니다. 

    그러면 왜 하나님께서는 하필 이런 명령을 엘리야에게 하실까요? 
    우리는 귀한 것을 귀하게, 천한 것은 천하게 여길 수 있어야 합니다. 정말 귀한 것이 무엇이지를 보고도 모르는 사람은 참으로 답답합니다.  

    (마25;28) “그에게서 그 한 달란트를 빼앗아 열 달란트 가진 자에게 주라 29무릇 있는 자는 받아 풍족하게 되고 없는 자는 그 있는 것까지 빼앗기리라” 하는 말씀에서 하나님의 마음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먼저 축복받은 사람들이 그 받은 은혜를 귀한 것으로 생각하지 않을 때, 그것을 빼앗아서 그들이 싫어하는 사람들에게 주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자기의 백성들로 시기(猜忌)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아이들이 젖을 제대로 먹지 않으면 엄마들이 다른 아이에게 젖을 주는 흉내를 냅니다. 그러면 아이가 시기가 나서 젖을 제대로 먹게 되는 것과 같습니다.   실제로 다윗의 자손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소중히 붙들지 않을 때 하나님께서는 왕의 자리를 공사판의 감독이었던 여로보암에게 주셨습니다. 그것처럼 이스라엘에도 수많은 과부들이 있었지만... 엘리야선지자를 사르밧에 있는 이방인 과부에게로 보내는 것 자체가 이스라엘을 시기하게 하려는 것입니다. 

    성도여러분, 소중한 것이 있지요. 무엇이 소중한 것입니까? 잃어버렸을 때, 없을 때 너무나 아쉬운 것이 가장 소중한 것입니다. 여러분에게 정말 소중한 것이 무엇입니까? 건강입니까? 건강이 얼마나 소중한지는 병이 들어봐야 안다고 합니다. 사람입니까?  옆에 있을 때는 몰랐는데 없으니까 너무 귀하게 느껴지면 그 사람은 소중한 사람입니다. 돈입니까? 음식입니까? 공기입니까? 사람들은 매일 호흡하는 공기가 소중한 줄을 모릅니다. 그러나 물에 들어가면 공기가 없어서 5분이 안 되어 죽지 않습니까?  모른다고 소중하지 않은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가장 소중한 것은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하나님께서 지금이라도 우리에게서 손을 떼신다면, (절대 그럴리는 없지만) 수백 수천마리의 귀신들이 이때다 하고 우리들에게 달려들어... 모든 것을 빼앗아 갈 것입니다. 욥에게 그랬습니다.  재산을 쳐서 하루 아침에 거지로 만들고, 가정을 쳐서 7아들과 3딸이 한날 한시에 죽임을 당하고,  몸을 쳐서 정수리부터 발끝까지 악창이 나서 재에 앉아 기와로 자기 몸을 긁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지금이라도 우리에게서 손을 떼신다면, 죄를 먹고 마시면서 살다가 영원한 지옥으로 떨어지는 것이 우리 인생입니다.

    엘리야선지자를 사르밧에 있는 이방인 과부에게로 보내는 것 자체가 이스라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을 시기하게 하여 여호와 소중함을 알게 하려는 것입니다.   성도여러분, 사르밧으로 가는 엘리야를 보면서 우리는 지금 우리에게 있는 은혜가 무엇인지를 알고 그것을 정말 소중하게 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물론 하나님은 엘리야도 사랑하십니다.

      매듀헨리는 '왜 하나님께서 엘리야를 사르밧으로 보내셨는가’  하는 질문에 "이스라엘에 우상을 퍼트린 이세벨의 아버지가 다스리고 있는 땅에서도 하나님께서는 자기 종을 삼년이 아니라 삼십년이라도 보호하고 먹이실 수 있는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모든 사람들, 특히 이세벨에게 가르치고 싶어 시돈땅에 보내셨다" 고 지적하고 있습니다. 우리 하나님은 능력의 하나님, 전능하신 하나님이십니다.   

      이제 엘리야가 힘든 여행을 마치고 시돈에 속한 사르밧에 도착을 했습니다. 사르밧 성문에 이르렀을 때, 나뭇가지를 줍는 한 과부를 보았습니다. 뭔가 느낌이 왔을 것입니다. ‘저 여인이구나’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런데 참 이해하기 어려운 상황입니다.  성도여러분, 이때 당시에 과부나 고아라는 말은 거지라는 말과 같은 말입니다. 

    요즘은 여권이 신장되어 많이 달라졌지만... 2,900년 전의 남성중심 사회에서 남편이 없다는 말은 아무것도 없는 거지라는 말입니다. 실제로 이 여인은 굶어죽기 직전입니다.  하나님의 명령을 받아 갔던 엘리야가 사르밧에 가서 만난 상황이 바로 그런 상황이었습니다. 즉 엘리야에게도 믿음이 필요한 상황이라는 말입니다. "하나님이 나를 인도해서 사르밧으로 가라고 했으면 최소한 몸을 의탁하고 거처를 정할만한 그런 사람이어야 하는 데...이것 참 내가 뭔가 잘못 본 것 아닌가?" 엘리야가 그렇게 생각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이 가난한 과부에게 몸을 의탁하여 살아야하고 하나님께서 이 여인을 통해 놀랍게 역사하실 것이라는 것을 엘리야도 믿어야 합니다. 아멘.

    우리는 사람 아닙니까?  
    왜 하필 사르밧 과부인지, 왜 하필 이 여인인지 그 이유를 알아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도 이 여인처럼 하나님의 기적의 주인공이 될 수 있습니다.  사르밧 과부에게는 충분한 이유가 있습니다.    

    첫째, 친절(Kindness)

    친절을 다른 말로 긍휼(Compassion)이라고 합니다.
    나뭇가지를 줍고 있었습니다. 
    “나뭇가지 둘을 주워다가 나와 내 아들을 위하여 음식을 만들어 먹고 그 후에는 죽으리라” 하는 마음입니다. 
    그런 참담한 마음으로 나뭇가지를 줍고 있는데... 어떤 남자가 나타났습니다. 
    얼굴이나 옷차림이나 딱 보니까 외국인인데 이스라엘사람입니다. 그런데 그 남자가 말합니다. "청컨대 그릇에 물을 조금만 가져다가 나로 마시게 하라"(10절). 

    참 부담스러운 요청입니다. 
    여러분, 물이 돌아서서 그냥 뜰 수 있는 것이었다면 물 한 그릇 주는 것이 뭐 그렇게 대단한 것이겠습니까. 
    그러나 중동 지역은 그런 곳이 아닙니다. 우리나라처럼 그냥 '냉장고 열고 여기 있습니다.' 하는 곳이 아닙니다. 
    더구나 지금 이 지역은 계속되는 가뭄으로 시냇가도 물이 말랐던 그런 시기입니다. 
    물 값이 금값입니다. 
    상당한 수고를 해야 되는 요구였습니다.  
    그리고, 지금 이 여자가 어떤 상황입니까?  절망적인 상황 아닙니까? 

    지나가는 나그네가 물을 달라고 했을 때 즐겁게 줄 수 있는 상황이 아니라, 어쩌면 당신에게 물주기 전에 '내가 먼저 죽겠소' 라는 생각을 품을 만큼 이 여인의 상태는 비참합니다.  
    그렇다고 이전에는 배불리 먹었느냐?  
    며칠을 허리띠를 졸라 매었을 것입니다. 
    이제는 더 이상 버틸 수가 없어서 나뭇가지를 주워다 불을 피워 가루를 비벼 떡을 만들어 마지막으로 먹고 나면 이제 죽는다 하는 상황입니다. 
    하지만 이렇게 어려운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이 여인은 친절(親切)했습니다.  
    '물을 가지러 갔다' (11절)고 합니다.   

    저는 이 여인에게서 하나님이 보내는 사람의 특징을 봅니다. 
    친절입니다. 자기도 곧 굶어죽을 입장에서도 여전히 한 가닥 긍휼이 남아있지 않습니까? 
    처음 보는 외국 사람이 목이 말라하는 것을 보면서 ‘아이구 안 됐구나’하는 친절, 긍휼히 여기는 마음이 그냥 드러난 것입니다. 
    나병에 걸렸지만 여전히 종들에게 아버지 같았던 ‘나아만’하고 비슷합니다.  
    이것이 이스라엘에도 많은 과부가 있었지만 이방여인인 사렙다 과부만이 구원을 받은 이유입니다. 

    속담에 "콩 한쪽도 나눠 먹는다"
    아무리 작은 것이라도 나눌 수 있다는 뜻입니다.
    작은 것이라도 나누려는 공동체적 유대감이 중요합니다.

    초대교회로 돌아간다는 것은 급성장하는 것을 기대하는 동기에서 생각합니다.
    그러나 초대교회는 나눔에 있었습니다.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엘리야 시대에 하늘이 삼 년 육 개월간 닫히어 온 땅에 큰 흉년이 들었을 때에 이스라엘에 많은 과부가 있었으되 26엘리야가 그 중 한 사람에게도 보내심을 받지 않고 오직 시돈 땅에 있는 사렙다의 한 과부에게 뿐이었으며” (눅4;25-26)  

    이 여인은 하나님의 특별한 선택을 받을 만한 이유가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긍휼을 베푸시는 사람은 모르는 사람에게도 친절하고, 긍휼히 여기는 마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둘째, 순종(Obedience) 

    친절한 여인에게 엘리야는 또 뭐라고 합니까? 

    (12) ‘그가 가지러 갈 때에 엘리야가 그를 불러 이르되 청하건대 네 손의 떡 한 조각을 내게로 가져오라’  

    이때 과부는 기가 막힌 대답을 합니다.
     “그가 이르되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노니 나는 떡이 없고 다만 통에 가루 한 움큼과 병에 기름 조금 뿐이라 내가 나뭇가지 둘을 주워다가 나와 내 아들을 위하여 음식을 만들어 먹고 그 후에는 죽으리라”(12) 마지막 떡을 만들어 먹고 죽으려고 하는 절망 중에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엘리야는 이 말을 듣고... 뭐라고 합니까?   

    여러분 같으면 뭐라고 말하겠습니까?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합니다. “엘리야가 그에게 이르되 두려워하지 말고 가서 네 말대로 하려니와 먼저 그것으로 나를 위하여 작은 떡 한 개를 만들어 내게로 가져오고 그 후에 너와 네 아들을 위하여 만들라 14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이 나 여호와가 비를 지면에 내리는 날까지 그 통의 가루가 떨어지지 아니하고 그 병의 기름이 없어지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 (13-14) 

    셋째, 나눔(Sharing)

    마지막 남은 가루와 기름으로 떡을 만들어 먹고 죽으려는 사람에게 ‘나를 위하여 작은 떡 한 개를 먼저 가져오라’ 는 것입니다.  자기 주머니를 털어 보태 주어야 하나님의 종 아닌가요? 어떻게 하나님의 종이 먼저 나에게로 가져오고 나서 나머지를 너희가 먹어라 할 수 있습니까? 이 여인에게 참 고통스러운 요구입니다. 지금 먹고 죽으려고 조금 남겨 놓은 밀가루 한웅큼 밖에 없는데 어떻게 사람이 그걸 나눠 달라고 한단 말입니까?  이런 상황에 그걸 나눠 먹자?  기가 찬 요청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말씀을 바르게 보아야합니다. 
    엘리야는 주의 종인 나에게 먼저 떡을 달라고 말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주의 종이 우선이라고 이방여인에게 주장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합니다.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이 나 여호와가 비를 지면에 내리는 날까지 그 통의 가루가 떨어지지 아니하고 그 병의 기름이 없어지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 (14절)  

    그런데 이런 기적이 일어나는 조건이 뭐냐... 13절입니다. ‘먼저 그것으로 나를 위하여 작은 떡 한 개를 만들어 내게로 가져오고 그 후에 너와 네 아들을 위하여 만들라’  이 말씀은 우선순위를 가르쳐주는 말씀이면서, 순종을 요구하는 말씀입니다. 

    (마 6:33)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는 말씀과 같은 의미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모든 것을 주시는데 그 조건이 무엇이냐...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구하라, 즉 먼저 말씀에 순종을 하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정말 놀랍게도 이 이방여인은 처음 보는 외국인인 엘리야를 통해 선포된 하나님의 말씀에 그대로 순종을 합니다.  그녀는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작은 떡 한 조각을 선지자에게 먼저 줘버린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작은 떡 한조각보다 더 귀하게 여겼습니다.  그랬더니 정말 하신 말씀대로 통의 가루가 다하지 않았고, 병의 기름이 떨어지지 않았습니다.  

    이것이 바로 성령의 능력입니다. 하나님의 성령의 능력은 이스라엘의 수많은 과부들에게 나타나지 않고 오직 이 이방인 과부에게 나타났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녀가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었기 때문입니다. 이 이방여인은 하나님의 말씀을 믿었습니다. 그랬더니 하나님의 말씀의 능력이 나타난 것입니다. 

      성도여러분, 순종은 모태신앙의 사람들만 하는 것이 아닙니다. 순종은 처음 말씀을 접하는 이방여인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수많은 과부들에게는 이런 믿음의 행동이 없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이 능력이 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구하지 않았습니다. 

      말씀의 가치를 알지 못하는 자는 복을 빼앗기게 됩니다.  우리가 위기 가운데 하나님의 말씀을 붙드는 것은 생명줄을 붙드는 것이고 그 말씀이 우리를 살게 할 것입니다. 만약 이 말씀을 믿지 못하면 한 조각 떡을 더 먹고 그 다음에는 굶어 죽게 될 것입니다.

       오늘 이 본문에서 이 여인에 대한 소개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얼굴이나 외모, 이름이 무엇인지, 남편이 누구였는지 전혀 관심이 없습니다. 좀 배운 사람인지, 어떻게 불행하게 과부가 되었는지 이 여인의 과거에도 관심이 없습니다. 성경이 이 여인에 대해 소개하는 것은 이 여인의 믿음입니다. 비참한 환경에 있었던 여인이었지만 그가 하나님의 말씀을 신뢰하고,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순종의 태도를 보일 때 놀라운 하나님의 축복을 받는 다는 이 사실을 전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인생을 이야기할 때,  하나님께서 우리를 보고 평가하실 때, 오직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 앞에 순종한 사람인지 아닌 지를 보십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말씀은 알지만 사람이 어찌 성경대로 사나!!" 하는 이런 말버릇을 고쳐야 합니다. 적어도 하나님을 예배하는 사람이라면, 하나님께서 그렇다고 하실 때 그 말씀 앞에서 우리는 아멘하면서 순종하는 사람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으면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할 수 없습니다. 내가 말씀을 의지해야 능력이 나타납니다. 

    우리가 말씀에 기회를 주지 않을 때가 얼마나 많습니까?  하나님이 사르밧 과부에게 그렇게 행하셨다는 사실을 아는 것만으로는 충분치 않습니다. 동일한 하나님께서 오늘 우리의 삶 속에서도 역사하십니다.  이방여인이며, 전혀 여호와신앙도 아니었던 이 여인은 말씀 앞에서 순종했습니다.   동일하신 하나님께서 오늘 내게 사르밧 과부의 이야기를 통하여 무엇을 말씀하시며, 나로 하여금 무엇을 고치기를 원하시며, 무엇을 포기하기를 원하시고, 무엇을 새롭게 행하기를 원하시는 가를 알아야 합니다.   순종의 삶을 배울 수 있는 귀한 시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말씀이 여러분의 삶 속에 축복의 말씀이 되기를 바랍니다. 

      엘리야가 오기 전까지 사르밧 과부에게는 땔 나무도 없었고 먹을 양식이라고는 통에 가루 한웅큼과 병에 기름 조금 뿐이었습니다. 그러나 15,16절에 보니 “저가 가서 엘리야의 말대로 하였더니 저와 엘리야와 식구가 여러날 먹었으나 여호와께서 엘리야로 하신 말씀같이 통의 가루가 다하지 아니하고 병의 기름이 없어지지 아니하니라”고 했습니다. 한 끼의 양식도 채 되지 않았던 가루와 기름이 적어도 2년 반 동안이나 먹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법칙입니다. 하나님은 약속을 하시고, 우리는 그 약속을 믿고 나갈 때 하나님의 약속은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에게 기적이 왜 일어나지 않습니까? 그것은 순서가 잘못 되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먹고, 쓰고, 남은 것을 하나님 앞에 드리려고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법칙은 먼저 하나님께 드리는 것입니다. 

    한 말씀을 더 드립니다. 실상 우리가 따져보면 환경이 그래서 그렇지 떡 한 조각은 그렇게 큰 것이 아닙니다.  한 끼 식사도 안 되는 ‘작은 떡 한 개’ 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이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은 극히 작은 것입니다. 그런데  ‘작은 떡 한 개’ 가 왜 그렇게 많아 보이고, 왜 그렇게 아까울까요?  성도여러분, 우리가 하나님 앞에 먼저 드리는 것은 ‘작은 떡 한 개’ 라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그 작은 떡 한 조각을 아껴봐야 굶어죽는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습니다. 오차파 작은 떡 한 조각입니다. 문제는 순서입니다. 말씀을 믿고 우선순위를 지키는 것입니다. 믿음을 보인 이 여인처럼 적은 것을 먼저 말씀대로 순종하는 행동으로 많은 양식을 얻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먼저 드린 ‘작은 떡 한 개’ 로 세 사람 이상이 몇 년을 먹을 수가 있게 되는 일이 설교를 듣는 우리에게도 있기를 원합니다. 하나님의 풍성함 속에서 부요함을 누리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기를 원합니다.

    긍휼이 있는 여인에게 긍휼을 베푸신 하나님.
    먼저 말씀을 순종하는 여인에게 약속하신 기적을 베푸신 하나님.
    그러나 하나님의 역사는 이것이 끝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말씀을 믿고 ‘작은 떡 한 개’ 를 먼저 드린 이 과부를 사랑하셨습니다. 그녀에게 더 큰 복, 영원한 복을 주시기로 하셨습니다.  

    뭘까요? 죄용서 받는 복,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는 복입니다. 떡만 먹는 복이 아니라 영혼구원의 복입니다. 사실 이 과부는 매일 하나님의 공급을 체험하면서도 아직 하나님을 좀 대단한 신(神), 놀라운 우상 정도로 생각을 합니다. 더구나 하나님이 자기를 사랑하신다는 것은 전혀 모릅니다. 

    이제 그녀의 아들이 병으로 죽습니다. 
    여러분, 과부에게 아들이 죽으면... 통에 가루가 다하지 않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물론 자기는 목숨을 이어가니... 그것을 나쁘다고 할 수야 있겠습니까 마는... 그녀의 삶은 별 의미가 없지 않습니까?  

    “여인이 엘리야에게 이르되 하나님의 사람이여 당신이 나와 더불어 무슨 상관이 있기로 내 죄를 생각나게 하고 또 내 아들을 죽게 하려고 내게 오셨나이까”(18) 

    이 여인은 엘리야에게 이상한 말을 합니다. 아들이 병에 걸려 죽었는데 엘리야에게  “내 죄를 생각나게 하고 또 내 아들을 죽게 하려고 내게 오셨나이까”합니다. 아마도 이 여인은 과거에 죄를 지은 것 같습니다. 그 죄의 결과로 아이를 낳은 것 같습니다. 엘리야를 보면 자꾸 자기의 죄가 생각이 납니다. 이것은 참 좋은 것입니다. 

    여러분, 사람들이 목사를 보면,  교회 다니는 성도들을 보면 자기의 죄가 생각나야 합니다. 그래야 그 목사가 좋은 목사고, 그 성도가 예수님을 바로 믿는 성도입니다. 물론 우리는 사람들의 죄를 지적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만 전합니다. 하지만 우리가 바르게 믿으면 사람들이 우리를 보면서 자기의 죄를 돌아보게 되는 것입니다.    

      이 과부는 엘리야를 볼 때 마다 계속 과거의 죄가 생각나서 마음이 불편했습니다. 3년 6개월의 긴 가뭄속에서 엘리야를 통한 하나님의 축복과 은혜 때문에 좋을 것 같은데... 이 여인은 엘리야를 보면서 과거의 죄에 대한 부담을 느끼고 있습니다. 그러다가 아이가 병들어 죽게 되니까 하나님께서 선지자를 보내어 자기를 살리셨다는 것이 아니라, 자기의 죄를 심판하셨다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냥 죄 많은 자기를 굶어 죽게 하지, 죽이려면 죄지은 자기를 죽이지 왜 아들을 죽게하느냐,  왜 나만 살려서 더 고통스럽게 심판하냐고 원망을 합니다. 

      엘리야는 여인의 원망에 아무 대답을 하지 않습니다. 
    이런 것은 사람끼리 원망하고 따진다고 해서 해결될 성질의 것이 아닙니다. 그 대신에 엘리야는 하나님께 부르짖으면서 기도했습니다. 이스라엘의 우상숭배 때문에 하늘을 닫고 비를 내리시지 말라는 모진 기도를 했던 엘리야가 이번에는 아이를 살려달라고 하나님께 부르짖었고 마치 자기의 생명을 나누어 주는 것처럼 아이위에 세 번 몸을 펴서 엎드렸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아이를 다시 살려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여인을 사랑하셔서 죄를 용서하시고 영혼을 구원하러 오신 것이지, 죄를 치고, 아이를 죽이러 오신 것이 아니라는 것을 분명히 알게 되었습니다.  아이가 다시 살게 되었을 때 “여인이 엘리야에게 이르되 내가 이제야 당신은 하나님의 사람이시요 당신의 입에 있는 여호와의 말씀이 진실한 줄 아노라 하니라” (24) 고 고백합니다. 이 여인은 죄 용서와 죽은 자를 살리는 기도의 능력을 체험하게 됩니다.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만납니다.  떡을 먹고 몸만 사는 것이 아니라 죄용서와 영혼도 구원을 받게 됩니다. 

    마치 마태복음 5장에서 각종 불치병과, 귀신들림, 간질, 중풍에서 기적적인 고침을 받은 사람들에게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 하시는 것과 같습니다. 심령이 가난해져서 천국을 소유하지 못하면...  각종 불치병과, 귀신들림, 간질, 중풍 에서 기적적인 고침을 받은 것이 무슨 의미가 있느냐 하는 것이지요. 그래봐야 또 죽을 것이고 마침내 지옥입니다. 정말 중요한 것은 죄 사함과 영혼의 구원입니다. 천국을 소유하는 것입니다. 

    이제 말씀을 마칩니다. 이스라엘에 수많은 과부가 있었지만 이 시돈의 사르밧 과부에게만 육체적 구원과 죄 용서와 영혼의 구원이 있었습니다.  성도 여러분, 교회는 이런 곳입니다. 교회는 가난한 이웃을 돕는 곳이고,  죄에 사로잡혀서 고통 받는 사람들에게 죄용서와 영혼구원을 알게 해주는 곳입니다. 우리 교회가 엘리야처럼 이런 일들을 다 감당하는 교회가 되기를 원합니다. 

    이 오늘 이 시간... 사르밧 과부에게 있었던 일이 예배드리는 우리에게도 있기를 바랍니다.  말씀을 먼저 선택합시다. 말씀을 믿읍시다. 한 조작 떡을 아끼며 욕심내어도 죽는 것은 변하지 않지 않습니까?   우리가 말씀 순종의 주인공이요, 죄 사함의 주인공이요, 영혼구원의 주인공이 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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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대인의 근본악 ‘편견’과 핵심 죄성 ‘탐욕’ : 21세기에서 기독교 원죄론의 탈바꿈

    1. 전통적 원죄론의 허(虛)와 실(實)

    오늘날도 정통적 기독교 설교강단에서는 인간 원죄설을 중요한 교리 중 하나로서 강조한다. 그것을 강조해야만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설이 더 효능적 힘을 얻기 때문이다. 그런데 정통적 원죄설이 도대체 무엇을 의미하느냐고 물으면 다소 당황하게 된다. 성경문자주의 무오설을 주장하는 입장에서 원죄(原罪)는 맨 처음 인간조상 아담과 이브가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고, 선악과를 따먹고, 하나님처럼 되려고 했던 용서하지 못할 범죄를 말한다. 그 범죄의 대가는 인간의 '흙으로 돌아갈 죽음, 노동과 산고의 고통, 그리고 에덴의 동산에서 추방'으로 요약된다(창3:1-24). 그리고, 아담과 이브의 이 결정적 단 한 번의 범죄 대가는 그들의 후손들에게 유전적으로 영향을 끼쳐 모든 인류도 원죄의 징벌아래 있다는 교리이다.

    그러나, 중세기가 끝나고 근세 이후 특히 17-18세기 계몽주의 시대 이후, 인간사회는 정통적 원죄론을 받아들이지 않게 되었다. 우선 창세기 3장 타락설화를 역사적 실제사건으로 이해하는 문자주의적 성서해석을 비판하여 창세기 3장 경전내용은 어떤 종교적 의미를 말하려는 '설화'(說話)라고 본다. 뿐만 아니라 아담과 이브의 불순종과 범죄의 대가를 그 후손들에게까지 무조건적으로 책임을 묻는 것은 하나님의 공정한 정의에 어긋난다고 본다. 가장 결정적으로 원죄설을 의심하게 만든 이유는 원죄의 유전적 계승이론의 허구성을 지적한다.

    죄란 인간의 인격적 자유와 정신적 영적 책임성과 연결될 때만 의미를 가질 수 있는 것인데, 인간의 성욕을 죄악시하고 인간 부부의 성관계를 통해 생물학적 유전형질이 후손에게 유전될 뿐만 아니라 죄성도 유전된다는 주장은 인간의 생물학적 유전자이론을 자유, 인격, 책임성, 독립성을 지니는 후손에게 무조건 짐 지우는 어불성설의 불합리하고 무자비한 어리석은 교리라고 생각하게 된 것이다. 이상은 정통적 원죄론이 지닌 허구성이다.

    그렇다면, 원죄설은 이제는 아무런 실질적 의미를 갖지 못하는 폐기처분하여 버려지고 무시해버려도 좋은 무가치한 것이란 말인가? 경박한 인본주의 신학자들이 아닌 진지한 철학자나 신학자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기독교 원죄론은 인간이해에 있어서 아주 중요한 진리를 말하는 것이고, 창세기 타락설화는 깊은 상징적 진리를 가르치고 있다고 본다.

    계몽주의 완성자라고 칭함 받는 임마누엘 칸트도 '근본악'(根本惡)을 말했고, 폴 틸리히는 원죄론이란 "인간실존의 근본적 소외성"을 지시한다고 했고, 라인홀드 니버는 원죄성의 핵심은 "인간의 자기중심적 이기심"이라고 보았다. 오늘날 21세기를 살아가는 인갈들에게 원죄성은 누구나 피하지 못하기도 하고 빨려 들어가는 '편견과 탐욕' 문제라고 필자는 보고 싶다. 그 점을 이번 칼럼에서는 이야기 해보려고 한다.

    오늘 한국사회와 美, 中 G2 열강을 두 축으로 하는 위험수위에 다다르는 지구촌을 직시할 때 무엇이 문제인가? 특히 한국사회는 2022년 3월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국민의 심성은 '편견과 탐심'으로 완전히 갈기갈기 찢겨지고 분열되어 서로 사생결판 혈투를 벌이고 있다. 문대통령의 국정 수행평가를 놓고만 보더라도, 문대통령 정부가 잘못한 점도 많지만 국민의 40% 전후는 긍정적 평가를 한다. 다른 한편, 야권에서는 0(제로)% 평가절하도 부족하여 망국과 이적 행위자라고까지 악담하는 부정적 평가의 국민수가 역시 40% 전후를 나타낸다. 이런 양극화 현상은 보통문제가 아니다. 기독교 신학은 그 근본원인을 성찰하고 타개책을 제시해 보아야 한다.

    2. 심층심리학과 지식사회학에서 본 '탐심'의 분석

    한국사회에서 2대종단이라고 일컫는 기독교와 불교에서도 가장 큰 죄의 이름으로서 탐심 혹은 탐욕이 제일 첫 번째 자리를 공통적으로 차지하고 있을 만큼 탐심(탐욕)은 인간학의 근본문제이다. 기독교 전통에서 3대죄(3大罪)는 탐욕(concupiscence), 교만(hubris), 불신앙(unbelief)을 꼽는다. 불교에서 3독심(3毒心)은 단어를 줄여서 흔히 '탐진치'(貪瞋痴)라고 하는데 우리말로 욕망, 분노, 어리석음이다.

    기독교와 불교가 공통적으로 큰 죄라고 규정하는 탐욕은 인간이 생물학적 존재로서 생존본능에 필수적인 식욕이나 성욕 등 단순한 욕망이 아니다. 인간 이외 어느 동물도 평생 사용하고도 다 사용 못할 필요이상의 물질적 점유를 시도하는 경우는 없다. 가만히 생각해보면, 인간의 탐욕(탐심)은 인간 본성 속에 만족할 수 없고 잠재울 수 없는 근본적 갈증 해소를 위한 끝없는 욕망이 있는 것 같다.

    물질적 재화의 증식과 소유를 향한 무제약적 재산욕망, 돈 쥬앙(Don Juan)적인 성적욕망, 성직자들에게도 끈질긴 명예욕망은 정신분석학적 시각에서 보면 일종의 질병이다. 자기를 과시하고 자신의 유한성을 그런 것들로서 보완 혹은 보상해 보려는 절박한 심리다. 철학적 신학용어로 말하자면 '죽음예견' 곧 인간의 유한성과 허무성을 잠재의식이 감지하면서 몸부림치는 '존재론적 불안의식'을 감추려는 몸짓이다. 그것이 실존적 인간존재의 무한탐욕의 비밀이다.

    기독교에서 말하는 나머지 다른 두 가지 큰 죄 곧 교만(hubris)과 불신앙(unbelief)이 창조주 하나님에 대한 영적 쿠데타의 감춰진 동기라고 한다면 그 실행적 행동 쿠데타 현상이 욕망 또는 무한 탐심으로 나타난다. 불교에서도 나머지 다른 두 가지 커다란 마음의 독(毒)으로 규정된 진에(분노)와 우치(만물의 因緣生起 理致를 모르는 어리석음)보다 탐심을 첫 번째로 나열하는 이유를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쉽게 생각해보자. 불교에서는 고타마 시타르타가 깨우치고 설법한 가장 중요한 핵심 종지가 "삼라만유 그것 자체가 독자적 실체를 가진 존재가 아니라 이런저런 원인과 관계가 어우러져 현상적으로 나타나는 잠정적 존재들이요 일시적 현상들이다"라고 가르치는 '인연생기론'(因緣生起論)이다. 그러한 가르침을 불자들은 일생동안 귀가 아플 정도로 수천 번 듣고 공부하고 다짐하고 수행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조계종이라는 최대불교집단의 상층부를 형성하는 고승들 사이에 권력다툼, 재산다툼, 고답적인 명예욕의 추태가 왜 그치지 않는 것인가? 단순하게 불교핵심종지를 깨우치지 못해서 그렇다고 설명되지 않는다. 인간은 우주와 인간의 존재가능에 필요한 원리와 이법을 다 알고서도 욕망과 탐심에 사로잡히는 실존인 것이다.

    인간실존의 탐심과 탐욕의 발생, 작동, 지속과정은 너무나 오묘하고 복잡해서 실존적 존재인 인간 스스로도 그러한 줄 모르게 빠져들고, 강화하고 은폐하고 자기를 정당화하는 확신범이 된다. 왜 그럴까? 지식사회학(知識社會學)은 인간의 지식이나 정신문화의 일반적 주장들, 다시 말해서 철학적 이념, 사회/정치/경제학적 신념 등은 역사적 사회적 조건들의 관계성 안에서 형성되는 것임을 주장하는 문화사회학의 일종이다. 독일학자 칼 만하임(Karl Mannheim)이 그 대표적 인물이며 그의 유명한 저술물 『이데올로기와 유토피아』가 우리말로 번역되어 있다. 지식사회학은 인간의 지식과 이론주장이 순수하거나 만고불변의 정당성을 지니지 못하고 그 신념, 이념, 교리를 주장하는 개인이나 집단의 사회적 이해관계에 자기도 모르게 오염되고 있다는 것을 밝히는 학문이다. 그들의 핵심적 주장을 한마디 개념으로 표현하는 어휘는 '사유의 존재 제약성'(思惟之存在制約性)이라는 용어이다.

    쉽게 생각해보자. 동서양을 막론하고 왕조사회 안에서 왕들과 귀족들, 그리고 그 사회를 이끌고 가던 엘리트 지식인 집단은 사회적 신분제도나, 토지의 독점권 등이 당연한 합당한 질서이며, 심지어 하늘이나 신이 인가해준 신성불가침의 것이라고 주장했고 실제로 그렇다고 굳게 믿었다. 근세 이후 사회질서에서 자본주의적 사회가 발전하면서 형성된 서양의 부르주아 계층들이나 오늘날 신자유주의 세계질서와 코로나펜데믹 환경 안에서 형성된 새로운 귀족층들도 그들의 재산과 특권을 유지해주고 보장해주는 정치이념과 사회법 질서가 가장 옳고 선한 좋은 질서요 진리라고 믿는다. 다른 생각이나 사회변혁 세력집단이나 주장은 반국가단체, 빨갱이, 이단론자, 위험집단이라고 주장하고 그런 자들의 퇴출과 박멸을 옳다고 확신한다.
    흔히 통상적으로 말해서 하나의 살아있는 사회는 세 가지 영역의 인간 활동의 상호협력과 상호견제 속에서 발전한다고 말한다. 그 세 가지 범주는 정치권력(입법, 행정, 사법부 권력), 경제권력(기업, 금융, 무역유통 권력), 문화권력(언론, 대학, 문화예술, 종교)의 삼분법이 그것이다. 그런데 가장 위험하고 불행한 사회는 세 분야의 엘리트들이 일종의 암묵적 카르텔을 형성하여 기득권을 강화하고, 그 사회를 극단적인 빈부양극화 사회, 이념적 갈등사회, 진보보수 진영 간 투쟁사회로 고착시키는 상황에 처한 사회이다. 작금 한국사회가 그런 사회적 질병현상을 노정하고 있다는 것은 심각한 위기인 것이다. 대통령 선거라는 정치적 정당간의 권력투쟁을 계기로 이러한 사회 양극화현상 분열대립 현상이 그 사회의 공멸과 해체로 이어질 만큼 심각한 수준에로 도달하고 있다.

    3. 해석학에서 본 인간의 '근본악'으로서 '편견'의 문제

    20세기 동안 정신과학 분야에서 이루어진 학문적 결실 중 한 분야에 해석학(hermeneutics)이 있다. 해석학이란 글자 그대로 텍스트를 바르게 이해하는 이론이다. 텍스트에는 경전, 소설 등 문학작품, 미술작품, 오선지에 그려진 음악 악보 등 문자나 기호로 표현된 것이 있다. 그러나 텍스트는 반드시 문자나 기호로 표현된 것만 아니다. 인간사 생활 속에서 일어난 역사적 사건들, 신문에 나오는 정치적 기사거리들, 사람 얼굴표정 등도 텍스트가 될 수 있다.

    현대 해석학에서 더 중요한 학문적 논쟁은 텍스트를 "바르게 이해하는 기술이론"이 아니라 도대체 객관적으로, 나와 다른 사람들 마음속에 일어났던 체험과 그 표현들을 '이해'한다는 것이 왜 가능하며, "이해란 무엇인가? 이해는 아무 전제 없이, 자연과학자들이 물리적 자연법칙에 따라 자연의 운동을 이해하고 계산하고 예측하듯이, 정신과학 영역에서도 엄밀하고 객관적으로 타당한 이해가 가능한 것인가?"의 물음이 큰 문제였던 것이다.

    흔히 어떤 사건이나 현상을 앞에 놓고서 "우리 서로 마음을 비우고, 이성적으로 냉정하게 이 사건과 문제를 이해해보자!"고 말한다. 고의적 선입관, 악의적 편견, 이해타산에 마음이 이미 오염된 주장을 하지 말자는 다짐이다. 성숙한 사람이라면 마땅히 그러한 자세 곧 선입견 없이 마음을 비우고 텍스트 곧 기록물이나 사건을 바르게 이해하려는 자세를 취해야 옳다. 그러나 조금 더 곰곰이 생각해 보면 "마음을 비운다!"는 말은 글자 그대로 마음을 백지상태로 만들어놓고, 흰백지에 그려지는 텍스트나 사물을 사진 찍듯이 객관적으로 이해할 수 있다는 뜻일까?

    결론적으로 말하면, 특히 정신과학의 산물인 텍스트와 역사적으로 발생한 정치적 경제적 문화적 큰 사건의 의미를 '이해' 하려할 때, 백지상태의 비운 마음으로서는 이해작용 그 자체가 불가능하다는 것이 현대 해석학 학문의 결론이다. 사람의 마음이나 두뇌활동은 카메라와 같은 기계가 아니기 때문이다. 마음이나 생각하는 두뇌는 텍스트를 대하고 사건을 이해하기 이전에 이미 어떤 삶의 체험으로 형성된 관점, 가치 지향성, 옳고 그름, 선하고 악함, 아름답고 추함 등에 관하여 어떤 전이해(前理解, pre-understanding)혹은 선입관(先入觀, preconception)을 가지고 있다. 전이해(前理解)와 선입관(先入觀)은 편견(偏見, prejudice)으로 변질되기 쉽지만, 그 세 가지 단어의 의미는 조심스럽게 구별되어야 옳다. 전이해와 선입관은 굳이 고의성을 갖는 마음 상태가 아니라 자연스럽게 그 사람의 삶 체험 속에서 형성된 이해의 밑바탕이다. 텍스트, 사물, 사건을 바라보는 일차적 관점이다. 그러나 편견은 고의적 감정, 의도적 적대감이나 호불호 감정에 물든 마음 상태를 말한다.

    한 가지 사례를 들어보자. 1961년 5월 16일 새벽, 박정희 소장을 비롯한 일군의 군인들은 엄중하게 헌법이 금지시킨 정치적 개입활동금지 조항을 무시하고, 무력정변 곧 쿠데타(coupdetat)를 일으켜 정권을 잡고, 그 뒤 한국 사회는 군사정권이 약 30년간 지배하게 되었다. 한국 현대사를 규정짓는 이 군사반란 사건에 대한 국민들의 반응과 이해 곧 '해석'은 동일하지가 않았다. 왜 동일한 역사적 사건을 두고 이해와 평가가 다를까? 사건을 당하여 반응하기 전, 사람이 갖는 전이해(前理解)가 다르기 때문이다. 그래서 한국 사회는 5.16 군사정변을 어떻게 볼 것인가의 근본적 문제를 핵심으로 하여 그 사건을 긍정적으로 보려는 보수집단과 부정적으로 보려는 진보집단으로 양분되게 된다.

    긍정적으로 보려는 보수적 집단은 박정희의 쿠데타는 5.16 당시 극도의 정치적 혼란과 사회 무질서를 잠재우고, 남북대결 상태에서 공산화를 막고, 군사정권 연장을 통해서 극도의 국민경제 빈곤상태를 극복하는 산업화를 이룩한 공적을 지적하면서 쿠데타를 긍정적으로 본다. 한국 현대사(1960-1990) 과정에서 발생한 인권유린, 민주정치제도 중단, 기생관광 등 사회도덕심의 타락, 빈익빈 부익의 양극화, 지방색의 고착화, 농민과 노동자들의 희생 등은 어쩔 수 없는 '필요악' 정도로 가볍게 이해한다.

    다른 한편, 5.16 군사정변을 부정적으로 보는 진보적 입장은 전혀 다른 평가를 하게 된다. 군인들이 총칼을 들고 무력으로서 장권을 잡는 일 자체가 원천적으로 용납될 수 없다고 본다. 군사정변은 호랑이 등에 올라탄 사람이 내려오면 잡혀먹이게 되니까 어찌하든지 계속 달릴 수밖에 없다. 그래서 장기집권의 명분을 만들려고 한일 굴욕외교를 통한 국교정상화를 강행하여, 한국 산업화의 기본자금으로 삼고, 자본주의 경제사회에서는 있을 수 없는 국가주도의 중앙집권적 정치, 경제, 문화 권력의 독점지배사회를 만들었다. 인권, 민주질서, 언론의 자유나 집회결사의 자유 등은 철저히 억압되고 재벌기업과 보수언론의 장악을 통해 "우리도 한번 잘 살아보세!"라는 대중마취제 구호를 내걸고 인간이기를 그치고 돼지처럼 묵종하며 살기를 강요한 어두운 시대였다고 이해한다.

    부마사태의 민중항쟁을 군사력으로 진압하려는 군사정권 상층부의 의도를 간파한 김재규라는 중안정보부장이 박정희를 살해함으로써 박정권의 마성적 통치 전략에 종지부를 찍게 하였다. 김재규는 전두환의 신군부세력에 의해, 국가원수 시해범으로서 사형 집행되었다.

    현대 한국인이라면 다 알고 있는 한국 현대사의 비극적 역사를 잠깐 언급하는 이유는 왜 동일한 5.16 쿠데타를 바라보고 평가하는 입장이 그렇게도 서로 다를 수 있는가의 문제의식을 공유하기 위함이다. 앞서 언급한 지식사회학과 해석학의 이해이론에 의하면, 텍스트와 역사적 사건을 해석하는 전이해(前理解)가 다르기 때문이다. 사람들의 전이해(前理解)를 구성하는 결정적 중요 요소들은 그 사람이 어떠한 '생활환경' 속에서 성장했는가, 사회경제적 이해관계에서 안전하고 부유함을 누린 기득권자인가 아닌가, 다른 이웃사람의 희비애락에 감정이입 할 수 있는 공감능력과 역지사지(易地思之) 할 수 있는 자리바꿈의 상상력이라도 남아 있는가 없는가 등이 그 사람의 전이해(前理解)를 결정하는 중요한 요인들이다.

    '편견'은 현대인들의 원죄성이라고 볼 수 있다. 지나친 '편견'은 편견을 지닌 집단이나 개인을 병들게 하고 역사의 진로를 뒤틀리게 한다. 집단적 '편견'은 플라톤이 『공화국』에서 비유로 말한 '노예들이 갇혀있는 깊은 동굴' 같아서 그 동굴에서 탈출이 거의 불가능하게 되어있다. 어떤 용기 있는 노예가 동굴 밖 광명천지 세계를 직접 체험하고 돌아와서 동료 노예들에게 말해줘도, 그들은 믿지 않고 도리어 '안정된 질서'를 혼란하게 만드는 선동가로서 규탄하고 매장시키고 만다.

    국민들의 편견을 더욱 가속화 시키고 요지부동의 신념체계로 탈바꿈 시키는 5대공신을 지적하고자 한다.

    5대공신은 무엇인가?

    1. 타락한 언론,
    2. 변질된 보수종교 집단,
    3. 지식을 팔고 사는 대학교수들과 문화인들,
    4. 돈줄을 대는 대기업체,
    5. 타락한 권력집단(국민을 그들의 밥으로만 아는 타락한 집단)

     '편견과 탐욕'의 정신적 동굴에서 벗어나서 밝은 태양 아래에서 바르게 세상을 보는 눈을 갖게 하는 것, 그것이 참 종교가 해야 할 가장 중요한 일이 되는 것이다.


    카발라(Kabbalah) 유대교 신비주의 사상

    카발라(히브리어: קַבָּלָה 캅발라, Kabbalah[1])는 유대교 신비주의 사상을 말한다. 히브리어 '카발קבל'에서 온 말로, '구전 토라의 신비 곧 입에서 입으로 전래된 그러나 비밀스러운 지혜와 믿음[≒전통]'을 가리킨다.[2] 세계의 도처에서 볼 수 있는 신비주의 전통과 일맥상통하는 형태를 보인다 할 수도 있다. 카발라는 예루살렘 성전 파괴이후의 유대교 신비주의의 양식을 그대로 쫓고 여타 신비주의처럼 특정한 카발라 교의(敎義)의 독선주의도 배제 안된다. 다양한 해석 방향성이 있다.

    많은 유대인은 카발라를 토라 연구의 연장선상에서 보기도 하며 토라<모세오경>에 내재된 깊은 의미를 연구하는 비밀יסוד인 것으로 간주한다.기본적으로 카발라적 해석의 토라(모세오경)의 연구는 전통적으로 다음과 같은 네 단계로 나뉜다.[3][4]

    • 페샤트(Peshat פשט) : 히브리ㅡ아람어 문법적으로 나타난 뜻
    • 레메즈(Remez רמז) : 비유하거나 은유성으로 해석되는 뜻
    • 데라쉬(Derash דרש) : 랍비 문학 곧 넓은 의미의 구전 율법 미드라쉬들적 해석
    • 소드(Sod סוד) : 토라(모세 오경)에 내재한 비밀(영적 또는 에소레틱한 사실)을 신비주적 사고로 해석

    토라에 내재한 비밀 연구[소드סוד]를 카발라라고 한다.[출처 필요]

    카발라의 중심이 되는 오래된 책은 바히르(Bahir)와 헤이카롯(Heichalot)이[5] 있고 나중에는 13세기경의 조하르(Zohar)가 있다.또한 sefer yetzirah.

    카발라는 말 그대로 유대교신비주의이고 내재해서, 백과사전을 포함해, 일반으로 통용되는 완전하고 정확한 설명이 없으나 학자인 게르솜 숄렘, 아서 그린, 다니엘 마트, 모셰 이델은 카발라 여러 문서를 명확하게 현대적으로 조명했다. 학자인 게르솜 숄렘마틴 부버는 유대교를 카발라적 사고로 대중화했다고 평가된다.

    역사

    카발라는 오랜 유대교의 역사와 그 근간을 같이 하는 듯하지만, 대체로 예수 사후 100년 이상이 지난 가운데 구약이 완성되고서 형성되기 시작했다는 쪽에 무게를 둔다. 지역상으로는 프랑스와 스페인에서 크게 전개되고서 이슬람과 힌두교와 접촉하고 교류해 다양한 모습을 노정(露呈)했다.[출처 필요]

    메르카바

    메르카바(Merkabah는 →신의 전차)라는 뜻으로, 천상(天上)으로의 상승이나 하강을 기초로 신의 전차에 접근을 뜻하는데 천상은 유대의 세계관인 하늘 7개를 넘어 천상의 궁전으로 하는 도약이다[6]. 이때 유대 제사장들이 착용하는 우림과 둠밈[7] 이용해 재주 부리는 사람을 보호해야 한다고 간주되고 하강은 지하로 실제로 내려가지 않고 재주 부리는 사람 자신의 내면으로 들어가는 것을 뜻한다.[출처 필요]

    • 관련 저작: 랍비 아키바의 《메세 메르카바》(Maaseh Merkava →전차의 길)
    • 카발라 형성 과정 중 가장 초창기 단계로 추측된다.[출처 필요]

    아인 소프

     이 부분의 본문은 아인 소프모나드입니다.

    아인 소프(히브리어: אין סוף, Ain Sof[8] →무한(無限), 끝 없음, 신)은 전술한 비존재[출처 필요]나 음존재[출처 필요]나 비근거[출처 필요]를 대상으로 한 카발라다운 대상이다. 신을 아인 소프이라 부른 사람은 12세기의 맹인 랍비라고 한다.[출처 필요]

    세피로트

     이 부분의 본문은 세피로트입니다.

    세피로트(Sefirot)는 철자를 뜻하고 카발라 문헌인 세페르 예치라에[9] 연유한다.[출처 필요]

    아인 소프가 감춰진 신의 무한성을 뜻한다면, 세피로트는 세상에 현현(顯現)한 신을 지칭한다. 세피로트는 근원에서[10] 뻗어 나온 나무와 같은 모습을[11] 형성하고 각 가지는 신이 드러난 힘을 반영하거나 근력(筋力)을 나타낸다.[출처 필요]

    세피로트의 힘의 반영은 신과 피조물을 매개하지 않고 자신 내에서 벌어지는 사건으로 간주되므로 양극의 대대들은 신성한 혼인에 의거하여 서로 합일한다고 간주한다.[출처 필요]

    세피로트의 나무는 평면으로 그려지지만, 실제는 상이한 단계의 열 가지 차원과 그런 것의 관계를 표현한다. 이런 것은 흔히 아래로 늘어지는 생명나무 형태로 묘사되지만, 종종 포함되고 겹쳐지는 원으로도 표현된다.[출처 필요]

    세피라

    세피로트는 상이한 빛이나 투명한 그릇 열 개로 구성되었는데 각 빛을 세피라라고[12] 한다. 그런 것은 각각 케테르(Keter→왕관), 호크마(Hochma→지혜), 비나(Binah→이해), 헤세드(Chesed→자비), 게부라(Gevura→힘), 티페레트(Tiferet→아름다움), 네짜흐(Netzach→승리), 호드(Hod→위엄), , 예소드(Jesod→기초), 말쿠트(Malchut→왕국)으로 구성되어 있다.[출처 필요]

    • 세페르 예치라(Sefer Jetzirah) →창조의 서
    • 세페르 조하르(Sefer Zohar) →광휘의 서


    유대 신비주의 카발라



    카발라 (Kabbālāh): 중세 유대교의 신비사상. 유대교에서의 신비주의적 교설이나 관행은 이미 탈무드로 거슬러 올라가며, 바빌로니아(메소포타미아)에서 율법주의적 유대교와 함께 원초적으로 존재하고 있었다. 이것이 중세 유럽으로 전해져 크게 전개된 것에 대해 카발라(전통·전승)라는 말이 쓰인다. 독일에서의 카발라는 기도·헌신·명상·금욕생활에 힘씀으로서 영혼의 앙양(昻揚)을 얻어 숨은 불가지신(不可知神)의 영광(카보드)을 환상으로 본다는 신비체험을 강조한다. 한편 프로방스(남프랑스)·에스파냐지방에서 발전한 카발라에서는 숨은 신은 그 속성인 10가지 세피라(지혜·자비·공정·아름다움 등)를 통해 파악되는 것으로, 이것의 복수(複數)인 세피로트를 구사해서 우주의 창조과정·구조·유지를 논하고 신과 그 피조물 세계의 조화와 통일을 사색하였다. 에스파냐에서의 신비사상은 1300년 무렵 출판된 《조하르(광휘의 책)》에 나타나는데 이는 유대인 신비가의 교과서가 되었다.


    카발라(קַבָּלָה)는 유대 신비교의(또는 유대교 신비주의)를 말한다. 카발라는 '전통'이라는 뜻이며, 세계의 여러 곳에서 볼 수 있는 신비주의 전통과 그 맥을 같이 한다. 카발라는 신비주의의 양식을 그대로 따르며, 여타 신비주의와 마찬가지로 특정한 카발라 교의의 독선주의 또한 배제된다. 많은 정통 유대인들은 카발라를 토라 연구의 연장선상에서 보고 있으며, 토라에 내재되어 있는 깊은 의미를 연구하는 것으로 간주한다. 토라의 연구는 전통적으로 다음과 같은 네 단계로 나눈다.

    ⓐ 페샤트(Peshat): 표면적인 의미
    ⓑ 레메즈(Remez): 비유나 은유적인 의미
    ⓒ 데라쉬(Derash): 랍비 또는 미드라슈적으로 재해석함
    ⓓ 소드(Sod): 토라가 담고 있는 비밀의 신비적인 해석


    토라의 내재적인 비밀을 연구하는 것(소드)를 카발라라고 한다. 카발라의 중심이 되는 책으로, 오래된 것은 바히르(Bahir), 헤이카롯(Heichalot) 등(1세기 저작이라고 믿어진다)이 있으며, 나중에는 13세기경의 조하르(Zohar)가 있다. 카발라는 말 그대로 신비주의, 내재적이기 때문에, 백과사전을 포함하여, 일반적으로 통용되는 완전하고 정확한 설명이 없다. 그러나 게르솜 숄렘, 아서 그린, 다니엘 마트, 모셰 이델과 같은 많은 학자들은 카발라 문서들을 명확하게 했다. 게르솜 숄렘, 마틴 부버와 같은 학자들은 하시드 유대교가 카발라를 대중화한 것이라고 보았다.


    (1) 이름
    한국어:카발라, 히브리어:קַבָּלָה, 영어:Kabbalah[그 외:Cabala, Cabalah, Cabbala, Cabbalah, Kabala, Kabalah, Kabbala, Qabala, Qabalah, Kaballah, or Kabballa.], 에스페란토:Kabalo. 카발라는 히브리어 '키벨'에서 온 말로 말 그대로 '전례된 지혜와 믿음[≒전통]'을 가리킨다. (여기서 전통은 어디까지나 비전되는 비교적인 전통을 말한다.)


    (2) 역사
    카발라는 오랜 유대교의 역사와 그 근간을 같이 하는 것으로 보지만, 대체로 예수 사후 100년 이상이 지난 가운데 구약이 완성되고 나서 부터 형성되기 시작했다는 쪽에 초점을 둔다. 지역적으로는 프랑스와 스페인에서 크게 전개되었으며, 이후 이슬람, 힌두교와 접촉·교류 등으로 다양한 모습을 드러내었다.


    (3) 메르카바
    메르카바[Merkabah]는 신의 전차이며, 이 것은 천상으로의 상승 또는 하강을 바탕으로 신의 전차에 다가가는 것을 말하는데, 천상의 경우 유대의 세계관인 7개의 하늘을 넘어 천상의 궁전으로 도약하는 것이다. (행위자체만 놓고 본다면 이 것은 새가 되어 천상으로 상승한다는 샤먼들의 탈혼술과 유사한 것이다.) 이 때 필요한 것이 유대 제사장들이 착용하는 우림과 둠밈[Urim veTumim]으로 술자를 보호한다고 여겨진다. 그리고 하강은 실제 지하로 내려가는 것이 아니라 술자 자신의 안(깊은 내면)으로 들어가는 것을 말한다.


    ★ 관련저작 : 랍비 아키바의 메세 메르카바[Maaseh Merkava:전차의 길]
    ★ 카발라 형성 과정 중 가장 초창기 단계라고 여겨진다.

    *메르카바 [merkava]: Merkabah라고도 씀. (히브리어로 '戰車'라는 뜻) 예언자 에제키엘이 묘사한 하느님의 보좌, 또는 '전차'(에제 1). 초기 유대교 신비주의자들은 이 환상을 보기 위해 명상을 했다. 메르카바 신비주의는 AD 1세기 팔레스타인에서 번성했으나 7~11세기에는 바빌로니아가 그 중심지였다. 메르카바 신비주의자들은 무아경의 환상에서 천상의 위계질서와 하느님의 보좌를 본 듯하다. 메르카바 신비주의 문학에서는 환상가의 영혼이 하늘로 오르는 것을 악한 천사들이 곳곳에 버티고 있는 일곱 영역, 즉 '천상 거주지들'을 통과하는 위험한 여행으로 묘사한다. 환상가들의 목표는 전차 위에 자리잡고 있는 하느님의 보좌를 보는 것이다. 메르카바 신비주의는 영지주의 신앙으로부터 강한 영향을 받았다.


    메르카바 신비주의 입문자들(체누임)은 도덕성이 뛰어난 선별된 소수의 사람들로 제한되며, 입문에 앞서 금식을 해서 스스로 준비해야 했다. 환상여행을 잘 하려면 특정 주문으로 각 천상 거주지 입구를 지키는 악한 천사를 달래야 했다. 정확하지 않은 주문을 쓸 경우 심한 상처를 입거나 끔찍한 죽음을 당하기도 했는데, 이에 대해 탈무드는 메르카바에 몰두한 4명 가운데 1명은 죽고 1명은 미쳤고 1명은 배교했으며, 오직 랍비 아키바 벤 요셉만 실제로 환상체험을 했다고 경고했다. 메르카바 수행자들을 가리켜 '초자연 세계 탐험가들'(요르데 메르카바)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현대 유대교 신비주의 학자 게르숌 게르하르트 스콜렘은 그 말이 자아의 내면 깊은 곳으로 내려가는 것을 뜻했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메르카바 운동에 관한 가장 오래된 문헌은 2권의 '헤칼로트' 본문으로, 소(小)'헤칼로트'는 랍비 아키바가, 대(大)'헤칼로트'는 랍비 이스마엘 벤 엘리샤가 쓴 것으로 여겨진다. 〈에녹서 Book of Enoch〉와 하느님을 매우 과장된 신인동형설(神人同形說)로 묘사하는 〈신적인 차원 Shi ⁽ur qoma〉은 메르카바와 같은 전승에 속한다.


    (4) 아인 소프
    히브리어:אין סוף, 영어:Ain Sof, Ayin Soph, En Sof. 아인 솦[Ain Sof]은 앞서 말한 비존재(또는 음존재;비근거 등)에 대한 카발라적인 대상으로 그 것은 이름 그대로 무한(無限)을 뜻한다. (≒무한, 끝 없음, 신) 신을 아인 솦이라 부른 이는 12세기의 맹인 랍비 이삭 이라 한다.


    *카발라의 경전
    ① 조하르 (Zohar): 유대교 신비주의 카발라의 근본경전. 13세기 에스파냐에서 활동한 모세스 데 레온이 편찬하였다. 《세페르 하 조하르(Seper ha-zohar)》는 <빛나는 책>이라는 뜻이다. 2세기의 신비주의자 시메온 벤 요하이와 그 제자들이 편찬했다고 하는 《구약성서》의 최초의 5서(五書;모세 5경)와 《룻기》 《아가(雅歌)》 《예레미야애가(哀歌)》의 카발라적 해석이 중심이다. 생명의 나무인 10개의 세피로트, 최초의 사람 아담(아담카드몬), 천지창조의 비밀, 악의 기원 등이 문자와 수치변환법(게마트리아)을 구사하여 종횡무진 전개되어 있다.


    ② 세페르예치라 [Sefer Yetzira]: (히브리어로 '창조의 책'이라는 뜻) 주술과 우주론에 관한 가장 오래된 히브리어 원전. 이 책은 우주가 22개의 히브리어 알파벳과 10개의 신의 수(sefirot)에서 생겨났다고 주장한다. 이것들이 하느님이 우주를 창조할 때 사용한 '32가지의 은밀한 지혜의 길'을 이룬다고 했다. 이 책을 종종 아브라함이 지은 것으로 잘못 알려져 '우리 조상 아브라함의 알파벳'(Otiyyot de Avraham Avinu)으로 불렸다. 그러나 이 책은 3~6세기의 것으로 나중에 내용이 더 첨가된 작자 미상의 작품이다.〈세페르 예치라 Sefer Yetzira〉는 10개의 세피로트라는 극히 중요한 개념을 발전시켰는데, 이것은 뒤에 유대교에 깊은 영향을 끼쳤다. 이중 처음 4개의 세피로트는 우주의 원소들(하느님의 영·공기·물·불)을 나타낸 반면, 나머지 6개의 세피로트는 공간의 방향을 나타냈다. 이러한 세피로트와 알파벳 문자들은 또한 창조의 소우주인 인간 몸의 각 부분과도 관련이 있다. 중세 독일의 경건주의인 하시디즘은 이 예치라의 방식을 마술로 창조된 피조물인 '골렘'(golem)과 연결시켰다. 〈예치라〉에 관한 중요한 해설서들로는 사아디아 벤 요세프(882~942)의 해설서와 이사크 벤 솔로몬 루리아(1534~72)의 해설서가 있다.

    ③ 세페르 하 바히르 [Sefer ha-bahir]: (히브리어로 '광명의 책'이라는 뜻)〈구약성서〉를 주로 상징적으로 해석한 주석 책. 이 책의 기본 주제는 히브리어 알파벳의 모양과 소리가 갖는 신비적인 의미이다. 〈세페르 하 바히르 Sefer ha-bahir〉가 카발라(난해한 유대교 신비주의)의 발전에 끼친 영향력은 중대하고 지속적인 것이었다.


    이 책은 12세기 말엽 프랑스의 프로방스에서 처음 나타났던 것으로 보인다. 카발라주의자들은 이 책을 그보다 훨씬 오래된 것으로 보며, 전승된 책 중 가장 오래된 것은 랍비 네후니야 벤 하카나(1세기경)가 지은 것으로 잘못 생각하고 있다. 또한 이 책에 실린 많은 이야기는 타나임(1~3세기)과 아모라임(3~6세기)으로 불리는 초기 유대교 학자들이 쓴 것으로 간주했다. 이 중세기의 책을 객관적으로 분석해보면 〈세페르 하 바히르〉의 저자는 이전에 동방에서 유럽으로 흘러들어 온 특정한 신비적 문구와 개념을 단순히 자신의 작품 속에 통합했다는 것이 드러난다.

    〈세페르 하 바히르〉는 체계가 없고 대체로 해석하기 어려우며 히브리어와 아람어가 섞여 씌어졌지만, 신비주의적 상징주의를 카발라에 도입했고 카발라를 통해 유대교에 들어왔다. 20세기 유대교 학자인 게르숌 게르하르트 숄렘은 이 책을 유대교 사상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것으로 평가한다. 예를 들어 〈바히르〉에는 10개의 '신의 유출물'에 대한 설명 중 가장 오래된 것을 담고 있으며, 이 유출물은 신비한 방식으로 창조와 우주의 존속을 상징하며 또한 설명해준다. 이들 10개의 '말씀들'(ma⁽amarot)은 3개의 상위적인 현현과 7개의 하위적인 현현으로 나누어지며 카발라에서는 이 말씀들이 세피로트(숫자들)로 널리 알려져 있다. 또한 〈바히르〉는 카발라의 사상에 영혼의 환생 개념과 신의 창조 능력의 유출을 상징하는 우주적·영적 계보의 관념을 끌어들였다. 게다가 이 책은 악을 하느님 자신 안에서 발견되는 한 원리로 말하고 있다. 이 책의 마지막 부분은 라자 라바(위대한 신비)라고 불리는 고대의 한 신비주의 본문에 관해 많은 것을 묘사하고 있다. 카발라주의자들은 〈바히르〉를 권위있는 책으로 간주했지만, 그밖의 사람들은 그것을 이단적인 것으로 배척했다.

    (5) 스페인의 카발라
    그 다음 세기에 〈세페르 하 테무나 Serfer ha-temuna〉는 스페인에서 씌어졌는데, 이것은 우주순환의 개념을 발전시켰다(→ 〈세페르 하 테무나〉). 각 순환기마다 하느님의 속성에 따라 토라에 대한 해석이 달라진다는 것이다. 결국 유대교는 불변의 진리를 담은 종교가 아니라 각 순환기, 즉 시대마다 토라가 달라지는 종교로 제시된다. 또한 스페인에서는 〈세페르 하 조하르 Sefer ha-zohar〉를 탄생시켰는데, 이 책은 몇몇 사람들에 의해 토라에 버금 가는 신성함을 가진 책으로 인정되었다(→ 〈세페르 하 조하르〉). 이 책에는 창조의 신비와 신성한 10가지 숫자들의 기능을 다루고 있으며, 악·구원·영혼에 관한 신비로운 사유가 나타나 있다. 1492년 스페인에서 추방된 유대인들은 과거 어느 때보다 메시아 대망과 종말론에 사로잡혀 있었기 때문에 카발라는 많은 사람들의 관심의 대상이 되었다.


    (6) 루리아의 카발라
    16세기 중엽 카발라의 최대 중심지는 갈릴리의 사페드로, 이곳은 카발라주의자 중에서 가장 유명한 사람 중의 하나인 이사크 벤 솔로몬 루리아가 말년을 보낸 곳이다. 카발라를 연구하는 현대 유대인 학자 게르솜 게르하르트 숄렘에 따르면, 루리아보다 더 큰 영향을 미친 것은 〈세페르 하 조하르〉 뿐이다. 루리아의 카발라는 신의 빛이 '물러남'(tzimtzum)으로써 최초로 우주가 창조된다는 것, 빛의 입자들이 물질(qellipot:'껍질들')로 침전된다는 것, 집중적인 신비생활과 끊임없이 악과 투쟁하여 유대인들이 '우주의 회복'(tiqqun)을 얻게 된다는 것 등 여러 가지 기본적인 교리를 발전시켰다(→ 되찾음). 루리아의 카발라주의는 17세기 유대인들의 메시아 운동인 샤베타이 운동을 정당화하는 데 사용되었다. 또한 18세기에 시작되어 오늘날에도 여전히 일부 주요 유대인 공동체들 안에서 유행하고 있는 사회·종교 운동인 현대 하시디즘 교리 역시 루리아의 카발라의 영향을 받았다.

    (7) 크리스쳔 카발라
    유대 카발라의 연장에 있으며, 카발라에 관심을 표한 그리스도인들에 의하여 전개된 카발라를 말한다.

    유대교 랍비들의 카발라 사상이란 무엇인가?

    카발라 관련 도서(이스라엘 서점, E. S. Cho)

    카발라란?

    카발라는 우리나라에서는 생소하나 외국에서는 유명 대중 가수 마돈나나 한때 미 프로야구 최고의 대스타였던 알렉스 로드리게스가 이 종교에 빠졌다고 알려져서 유명세를 탄 유대 신비주의이다.
    사실 카발라는 그 역사가 오래 되었음에도 국내에는 기독교적 관점에서 해석한 이렇다할 관련 논문이 별로 없었다.
    더구나 카발라의 창조론에 대한 기독교적 해석은 전무한 형편이다.
    아마 이교적 색깔에 대한 부정적 인식 때문이 아니었을까 생각해본다.
    하지만 성경의 하나님은 풍성하신 분이시다.
    성경은 우리 인간의 눈과 귀를 억지로 막아버리는 옹졸한 구석으로 몰아넣지 않는다.
    하늘과 땅의 하나님이요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모든 것을 창조하신 하나님이다.     

    신비주의는 아니나 신비적인 기독교

    성경은 신비주의를 추구하지는 않으나 신비적이다.
    여전히 과학적 분석을 거부하는 천사들의 존재나 에녹의 승천이나 에스겔의 하나님 체험이나 불말과 불마차와 함께 승천한 엘리야의 경험은 경천동지할 신비적 현상이었다. 모세와 엘리야가 예수님 곁에 일시 재림한 변화산 사건이나 예수님의 모든 삶 자체가 대단히 신비적이다. 다만 그 체험이 너무나 엄청난 신비들이라 인간 경험 밖의 체험이라 여기고 언급 자체를 꺼려 왔을 뿐이다. 기독교는 다분히 예수의 기독론적 신비만 역사적 사실로 다루는 데 집중하여 왔다. 그런데 카발라는 놀랍게도 기독교도들이 잘 언급하지 않는 이런 성경의 건드리기 어려운 미묘한 곳들을 건드려 기독교도들을 곤혹스럽게 만든다.

    하나님은 지성을 창조하신 분이다. 그 지성을 가진 우리 인간은 깊고 적극적으로 하나님을 아는 일이 필요하다. 또한 지성은 때로 지성인에게 신앙적 증명의 부담을 요구하기도 한다고 기독 철학자 내쉬(R. Nash)는 주장한다. 그런데 우리 자신의 선험적 이해(a priori)나 태도만을 성경 속에서 찾아내는 방식으로는 성경을 잘못 읽는 오류에서 벗어날 수 없다. 에벨링(Ebeling)이 지적했듯이 "루터에 의하면 하나님의 말씀은 항상 우리에게 우리의 적(adversarius noster)으로 다가온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의 현재 상태나 우리가 당연히 받아들이기를 원하는 것을 우리에게 단순히 강화시켜 주거나 확증해주지 않는다". 이렇게 성서의 지평과 해석자의 지평이 융합하는 것은 그리 수월한 문제는 아니다.

    소망의 이유를 묻는 사람들

    그런 가운데 그리스도인들은 이 복잡다단한 포스트모던 상황의 21 세기를 맞아 여전히 사도 베드로가 말하듯 소망의 이유를 묻는 자들의 다양한 질문에 신앙적 답을 준비해야 하는 무거운 사명을 가지고 있다. 그런데 부흥과 성장에만 집중하는 사이에 한국 기독교는 신앙적, 신학적 성숙을 외면하여 왔다. 이런 값싼 기독교의 경향은 지성의 포기로부터 다가왔다. 그 중에서도 신학과 과학의 문제 그리고 창조론 교리는 그동안 국내 그리스도인들이 가장 방치해 놓은 분야였다. 그러는 사이 한국교회는 기원 문제, 핵문제, 인간 복제 문제, 광우병 문제, 환경 문제 등등 신학과 과학이 함께 소리를 외쳐야 되는 일들에 있어 철저히 대중 앞에 무기력함을 경험했을 뿐이다. 이것은 결코 간단한 일들은 아니다. 그러나 힘들더라도 지금부터라도 차근차근 시작해야 할 일이다. 창조론 오픈 포럼 운동은 지난 2007년 이 문제에 눈뜬 몇몇 크리스천 과학자, 신학자, 과학철학자들을 중심으로 이렇게 출발하였다. 과학자와 신학자가 본격적으로 만난 국내 최초의 모임이 되었다. 국내 기독교 역사에 비해 너무 늦은 감이 없지 않다. 그러나 앞으로 하나님의 크신 행사를 즐거워하며 연구하는 지속적 모임이 되기를 소망한다.

    국내 기독교도들에게는 생경하나 유대적 배경을 가진 이 신비주의에 대한 작은 창조론적 모색도 이런 창조론 운동의 지평이 풍성해지는 데 작은 주춧돌하나 던지는 일이 되기를 바랄 뿐이다.

    카발라의 기원

    카발라 (Kabbala)는 중세 유대교의 신비사상을 말한다. 하지만 유대교에서의 신비주의적 교설이나 관행은 이미 탈무드 시대로 거슬러 올라가며, 바벨론(메소포타미아)에서 율법주의적 유대교와 함께 원초적으로 존재하고 있었다. 이것이 중세 유럽으로 전해져 크게 확산되면서 카발라(전통·전승)라는 말이 쓰이게 되었다.

    오늘날 많은 정통 유대인들은 카발라를 토라 연구의 연장선상에서 본다. 즉 토라에 내재되어 있는 깊은 의미를 연구하는 것으로 간주한다.

    토라의 연구는 전통적으로 다음과 같은 네 단계로 나눈다.
    첫째 페샤트(Peshat)는 표면적인 의미를 다루고,
    둘째 레메즈(Remez)는 비유나 은유적인 의미를 다룬다.
    셋째 데라쉬(Derash)는 랍비의 해석 또는 미드라쉬(Midrash)적 재해석을 말한다.
    넷째 소드(Sod)는 토라에 담긴 내재적인 비밀을 연구하는 것으로 카발라라고 한다.
    토라가 담고 있는 비밀의 신비적인 해석을 소드(Sod)라 하는데 토라에 담긴 내재적인 비밀을 연구하는 이 소드를 카발라라고 한다.

    카발리스트들은 자신들의 카발라 사상이 하나님께서 아담과 모세에게 전한 구전(口傳)이 최고의 학문을 연구하고 공부한 하나님이 택하신 신실한 교사들에 의해 입에서 입으로 전해진 비전(秘傳)의 형태로 내려온 것이라고 주장한다.
    이것은 부도덕한 사람들이 하나님 말씀을 오역(誤譯)할 위험을 배제하기 위한 방법이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카발리스트들은 카발라 사상에는 성경에 다 담지 못한 하나님 자신에 대한 신비한 사상과 하나님의 창조에 대한 신비한 내용들이 들어있다고 주장한다.
    이 같은 확신은 신비를 도구화하는 누를 범하기도 했다.
    13세기 유럽에서 카발리스트들이 우리의 부적이나 수리수리마수리처럼 "아브라카다부라"(ABRACADABRA)라는 주문의 효과를 기만하고 과장하여 마법적 액막이의 도구나 부적처럼 사용한 것은 신비주의가 어떻게 사람을 기만하는 가를 보여준다.

    신비주의를 닮아가는 한국 기독교

    최근 한국기독교는 빠르게 이 같은 미신적, 신비적 기독교화되어가는 걱정스런 현상들이 곳곳에서 나타나고 있다. 기독교가 신비적이라고 신비주의화 되면 큰일난다. 기독교는 바른 믿음으로 돌아가야 한다. 그것은 성경에 대한 바른 해석에 기인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최근 독버섯처럼 피어오르는 한국기독교의 신비주의화를 막아야 한다. 그 모든 것은 다시 성경으로 돌아가 바른 믿음, 바른 신학이 무엇인지 살펴보고 그 속에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참 된 진리와 해석을 찾는 데서 출발해야 한다. 그 길을 다시 추구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은 너무나 많은 미숙한 자들이 신앙과 신학을 엉망진창으로 만들어버린 것이 작금의 한국교회 모습이기 때문이다.
    이를 위해 기독교에는 아주 생경한 이 유대 신비주의에 대해 신앙의 눈으로 좀 더 살펴보자.


    수피즘 : 이슬람 신비주의자들



    https://sarak.yes24.com/blog/s25s25/review-view/2460972




    옛날 어느 숲 속에 몹시도 가난한 나무꾼 부부가 살았다.
    나무꾼은 늘 투덜거리며 불평불만이 많았다.
    나무꾼은 매일 산에 나무를 하러 갔는데 며칠에 걸쳐 엄청 큰 참나무에 도끼질을 하고 있었다.

     


    나무꾼이 온 힘을 다해 나무를 찧으려 할 때, 요정이 나타나 나무꾼에게 이야기한다.
    나무를 살려달라는 요정을 보며 나무꾼은 측은한 마음이 들었다.
    숲에 다른 좋은 나무들도 많이 있으니 요정의 소원을 들어주자며 참나무를 살려주었다.
    요정은 감사의 뜻으로 나무꾼이 원하는 무슨 소원이든 세 가지를 들어주겠다고 말하고 사라졌다.

     


    일을 마치고 집에 돌아온 나무꾼은 배가 너무 고파 아내에게 저녁을 먹자고 말했다.
    아내는 저녁이 다 되려면 2시간은 더 걸린다고 하자 나무꾼은 혼잣말로 두 시간을 어떻게 기다리냐며 투덜거렸고 소시지 하나만 먹으면 딱 좋겠다고 이야기했다.
    그때 나무꾼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천장에서 소시지 하나가 떨어졌다.

     

    나무꾼은 너무 놀라 천장을 쳐다봤고 아내도 영문을 몰라 나무꾼에게 무슨 일이냐며 묻자 나무꾼은 있었던 일을 아내에게 말해주었다.  
    아내는 화를 내며 고작 소시지 하나 먹겠다고 소원을 하나 쓴 거냐며 구박했다.

    너무 화가 난 나머지 아내가 '저 소시지가 당신 코에 확 붙었으면 좋겠네'라는 아내의 말이 끝나자 소시지가 나무꾼의 코에 가서 붙었다.
    어이없게도 소원을 하나 더 쓴 것이다.
    나무꾼 부부는 서로를 원망하며 코에 붙은 소시지를 떼려 했지만 딱 붙어 떨어지지 않았다.

    소원을 써서 코의 소시지를 떼고 싶었던 나무꾼, 그러나 그렇게 하기가 싫었던 그의 아내는 계속 남편의 코를 잡아당겼다.
    너무 아파 진물까지 나기 시작하니 나무꾼은 소시지가 코에서 떨어졌으면 좋겠다며 마지막 세 번째 소원을 써버렸다.

    그날 이후로 나무꾼과 아내는 투덜거리지 않고 사이좋게 살았다는 이야기다.

    -끝-

    감상평

    내가 나무꾼이었다면, 그 상황에서 어떤 소원을 빌었을까?
    나는 가장 현실적으로 우리가 부자가 될 수 있기를 바라지 않았을까?
    가난은 사람을 부정적으로 만들기 쉽다.
    나도 받아놓은 대출로 인해 수입에 비해 나가는 지출 금액이 많다 보니 짜증이 많아진 것이 사실이다.
    그러한 상황 속에서 긍정적인 생각을 한다는 것이 결코 쉽지만은 않다.
    그래서 나무꾼의 모습이 내 모습처럼 느껴졌다.

    어찌 보면 인간의 욕심이라는 것이 무섭다는 것을 보여준다.
    너무 배가 고팠던 나머지 나무꾼은 소원을 허무하게 소시지 하나에 썼다.
    아내는 어이없는 소원을 쓴 남편에게 화를 냈고, 소시지는 남편의 코에 가서 붙었다.
    짜증과 불평, 원망으로 인해 한 번 더 허무하게 지나가버렸다.
    남은 한 가지 소원이라도 다른 데 써 보겠다고 애쓰는 아내의 모습이 안타까웠다.
    그리고 이 부부가 짜증이 많았던 것, 투덜거리고 부정적인 삶이 이어지다 보니 사소한 일에도 다투고 서로를 향한 비난이 많았을 것이다.

    가진 것이 없어도 서로 사랑하는 부부였다면 아무래도 소시지 하나에 세 가지 소원을 모두 사용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기회는 누구에게나 찾아온다.
    그러나 그 기회를 위한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면 어리석은 선택을 할 수 있다.
    동화 이야기지만 40대 가장인 나에게도 많은 교훈을 주는 이야기다.

    부정적이고 욕심을 내는 것보다 서로 아끼고 사랑하며 사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깨닫게 되었다.
    정신 똑바로 차리고 살아야겠다.

     

     

     

     

    옛날 어느 마을에 부자가 살고 있었다. 그는 많은 종들을 거느리고 있었다. 부자는 종들이 열심히 일해준 덕분에 가세가 크게 일어난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종들에게 돈을 챙겨주어 고향으로 돌려보내려고 했다. 문제는 누가 열심히 일을 했는지, 누가 게으름을 피웠는지 알 수 없다는 것이었다.

    어느 날 부자는 종들을 모아놓고 말했다.
    “내가 잠시 외국에 다녀오려고 한다. 그때까지 엽전을 꿸 수 있는 굵기로 새끼줄을 꼬아두어라”

    주인이 출타하자, 게으른 종은 더욱 게으름을 피우며 방탕한 생활을 했다. 하지만 부지런한 종은 날마다 열심히 새끼를 꼬았다.

    그런데 한참 후에야 돌아올 줄 알았던 주인이 곧 귀국한다는 소문이 들려왔다. 게으른 종들은 부랴부랴 새끼줄을 꼬기 시작했다. 엽전을 꿸 수 있는 굵기로 꼬아두라는 주인의 말은 까맣게 잊은 채, 자신이 받은 지푸라기를 남기지 않기 위해 굵게 새끼줄을 꼬았다. 그러나 부지런한 종은 지금까지 해오던 대로 일정한 굵기의 새끼를 길게 꼬았다.

    이윽고 집에 돌아온 주인이 종들을 불러모으고 다음과 같이 얘기했다.
    “자네들, 마지막까지 수고해주어서 고맙네. 내가 너희들을 그냥 보내기가 서운해서 돈을 주려고 하네. 여기에 엽전들이 많이 있으니 자네들이 꼰 새끼줄에다 마음껏 꿰어서 가져가게”

    게으름을 피우던 종들은 발을 동동 굴렀다. 자신들이 꼰 새끼줄에 엽전이 들어가지 않았기 때문이다. 반면 주인의 말대로 새끼를 꼰 부지런한 종들은 수천 개의 엽전을 가지고 고향으로 향했다

     


    기독교 철학자이며 전도자였던프란시스 쉐퍼(Francis A. Schaeffer) 박사님은 그의 생애 말년에 암에 걸려 투병생활을 해야 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픈 몸을 이끌고 사랑하는 조국과 젊은이들에게 말씀을 전하기 위해서 강단에 섰습니다.
    그리고 얼마 남지 않은 생애의 마지막 설교를 자신의 온 힘을 쏟아 피를 토하듯 전합니다.
    "사랑하는 젊은이들이여!
    여러분의 젊음을 어디에 쓰려고 합니까?
    행복한 삶을 사는 데에 인생의 목표를 두고 계십니까?
    예수 믿지 않는 사람들도 행복을 추구하며 그것을 목표로 삼고 삽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믿는 우리들은 달라야 하지 않겠습니까?
    지금 우리들의 문제는 바로 행복만을 구하고 거룩을 구하지 않는데 있습니다.

    행복을 영어로 "happiness"라고 하는데 이 단어는 본래 "happen" 즉 '우연히 발생하다'는 뜻의 동사에서 유래했다고 합니다.
    우리들의 인생 목표가 우연하게 일이 잘되고 우연하게 돈이 벌리고 우연하게 성공하는 것이 되어야 하겠습니까?

    산상수훈에서 복은 "happiness"가 아니라 "blessing"이라는 단어로 표현합니다.
    'blessing' 이란 '피를 흘리다'라는 'bleed' 라는 단어에서 파생했다고 합니다.
    앵글로색슨족은 피의 제사를 통하여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를 맺는 것을 축복이라고 합니다.
    따라서 축복이란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맺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우리들은 세상의 행복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시는 복을 구해야 합니다.
    그 복은 거룩한 전쟁에서 이겼을 때에 얻게 되는 것으로 하나님 앞에 부끄럽지 않은 거룩한 삶이 곧 축복된 삶이라고 하겠습니다.

     

     

     

     

    태양아 너는 기브온위에 머무르라 달아 너도 아얄론골짜기에 그리할찌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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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복(福)

    바라크() בָּרַךְ 스트롱번호 1288

    1. 무릎을 꿇다.  2. 하나님께 기원하다.  3. 피엘형 בֵּרֵךְ
    발음 [ bârak ]
    구약 성경  / 256회 사용

    에쉐르(아쉐레)
    אֶשֶׁר 스트롱번호 835

    1. 행복.  2. 시 1:1. 3. 2:12
    발음 [ ’esher ]
    어원  / 833에서 유래
    구약 성경  / 40회 사용
    • 1. 명사, 남성 행복, 시1:1, 2:12, 32:1, 2, 33:12.

    참고 정보

    문법설명 / 연계형 אֲשְׁרֵי, 복수형으로만 쓰임

    연관 단어

    • 연계형 아쉐레이 אֲשְׁרֵי, 복수형으로만 쓰임

    • 관련 성경  /  행복한 사람(신33:29). [동] 복되다(왕상 10:8, 대하9:7, 잠28:14), 복이 있다(시40:4, 단12:12).


    그리스도의 고난을 본받아(베드로전서 2:21-25)

    토마스 아킴퍼스와 현대인 우리

    토마스 아킴퍼스의 불후의 명작 『그리스도를 본받아 (De Imitatione Christi)』는 15세기에 쓰였으나 그 진리는 시대를 초월하여 오늘날에도 깊은 울림을 전해준다.
    아킴퍼스는 “그리스도의 발자취를 따르는 자는 어둠 속에 걷지 아니하리라”라고 선포하며,
    그리스도의 삶과 고난이 우리에게 본보기가 되어야 함을 강조한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우리가 진정으로 예수님을 사랑한다면, 그분의 고난에 동참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의 길을 통과하는 자만이 그분의 영광에 이를 수 있기 때문이다."

    오늘날 우리의 삶에서 마주치는 수많은 고난과 역경은 단순한 시련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며 그분을 본받을 수 있는 귀한 기회이다.
    고난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영광으로 인도하시기 위한 섭리의 도구이며, 그 과정에서 우리가 점점 예수님을 닮아가는 성화의 여정이다.

    본고는 베드로전서를 중심으로 <그리스도의 고난과 신자의 고난>이 어떻게 연결되어 있는지 살펴보고, 일상 속에서 그리스도를 본받아 살아가는 실천적 믿음의 길을 모색하고자 한다.
    2025년 고난 주간을 통하여 진정한 그리스도의 고난의 의미를 되새기며 우리의 영적 삶에 적용하고자 한다.

    베드로서 주제 : 그리스도의 고난은 하나님의 구속 계획의 중심

    신약 그리스어 원문에서 “고난”은 πάθος (pathos. 고난, 시련) 라는 단어로 표현된다.
    이 용어는 단순한 아픔을 넘어, 하나님의 구속 역사 속에서 그리스도의 순종과 희생의 경험을 담고 있다.

    πάθος, ους, τό 스트롱번호 3806
    1. 수난. 2. 욕정
    발음 [ pathŏs ]
    어원 / 3958의 변형에서 유래
    • 1. 수난, 고난.
    • 2. 욕정, 롬1:26, 골3:5, 살전4:5.
    • 관련 성경 /  (부끄러운) 욕심(롬1:26), 정욕(골3:5), 색 욕(살전4:5).



    ‘πάσχω (paschō. 겪다, 경험하다)’에서 파생된 이 단어는, 예수님의 십자가 위에서 드러난 무한한 사랑과 희생의 순간들을 함축한다.
    히브리서 2:10에서는 “고난으로 말미암아 온전하게 되신” 예수님을 언급하여, 고난이 구원의 완성을 위한 필수적 과정임을 증거 한다.

    πάσχω 스트롱번호 3958

    1. 경험하다.  2. 잘못 살다. 3. 고난당하다
    발음 [ paschō ]
    • I. 경험하다, 겪다, 당하다.
      • 1. 잘못 살다, 비참한 상태에 있다, 마17:15.
      • 2. 고난당하다, 겪다, 견디다.
        • a. 고난당하다, 마17:12, 눅22:15, 행1:3, 고전12:26, 빌1:29.
        • b. 견디다, 당하다, 행28:5, 고후1:6, 히5:8.
    문법설명 /  [기본형] 미래3인칭단수 παθεῖται, 제 2부정과거 ἔπαθον, 완료 πέπονθα, 완료 분사 πεπονθώς

    • 문법설명  /  [기본형] 미래3인칭단수 παθεῖται, 제 2부정과거 ἔπαθον, 완료 πέπονθα, 완료 분사 πεπονθώς

    • 관련 성경  /  고난받다(마16:21, 살전2:14, 벧전4:1), 고생하다(마17:15), 괴로움을 받다(막5:26, 갈3:4), 애쓰다(마27:19), 해 받다(눅13:2, 행1:3, 9:16), 상하다(행28:5), 고통받다(고전12:26), 환난 당하다(고후1:6), 고난당하다(히2:18).


    존 칼빈 (John Calvin)은 『기독교 강요』에서 “그리스도의 고난은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이 완벽하게 조화를 이루는 구속의 신비”라고 설명하며, 그분의 고난에 참여할 때 부활의 능력 또한 경험됨을 역설한다.

    마틴 루터 (Martin Luther)는 “ '십자가 신학(Theologia Crucis)'을 통해, 고난이 신앙의 본질임과 동시에 하나님의 구속 계획의 핵심"임을 강조하였다.

    존 오웬 (John Owen)은 "고난을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특권'으로 보며, 신자의 영적 정화와 부활 영광의 예표임"을 설파하였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십자가 위에서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마태복음 27:46)의 외침을 통해 인류의 죄를 대신하여 겪으신 극심한 고통을 드러내셨다. 이 절망의 순간에도, 그분의 순종과 희생은 우리를 위한 구속 계획의 핵심이었다.

    2세기 순교자인 폴리갑 주교는, 극심한 고난 속에서도 “그리스도의 길을 따름으로써 하나님의 나라에 참여함을 믿는다”라고 굳게 고백하며 순교하였다. 그의 순교는 오늘날 수많은 신자에게 고난 속에서도 그리스도의 본을 따르는 귀한 믿음의 모범으로 회자된다.

    우리 각자가 직면하는 질병, 상실, 관계의 어려움, 직업적 도전 등의 고난을 단순한 불행으로만 여기지 말고,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하는 순례의 과정으로 바라보자. 매 순간 “주님, 오늘 제가 겪는 고난을 통해 주님의 은혜와 사랑을 깊이 깨닫게 하소서”라는 기도의 마음으로 고난을 기꺼이 받아들이자.

     

    제 1장 : 고난 속에서 산 소망으로 이겨내라 – 믿음의 시련과 정금 같은 가치

    베드로전서 1:3–7에 나타난 “ '산 소망' , 헬라어 ἐλπίδα (elpida; 소망, 확고한 약속)와 ζῶσαν (zōsan; 살아있는, 생명력 있는)의 결합으로, 단순한 희망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과 영원한 구원의 확신을 의미"한다. 또한 “ '믿음의 시련'은 δοκίμιον τῆς πίστεως (dokimion tēs pisteōs; 믿음의 시험, 정련의 과정)으로, 신앙을 정금처럼 다듬는 하나님의 도구를 상징한다".

    존 칼빈 (John Calvin)은 "시련이 믿음을 정화하는 필수 과정임을 설명하며, 고난 속에서도 산 소망을 잃지 말 것"을 권면한다.

    챨스 스펄전 (Charles Spurgeon)은 “하나님은 그분의 자녀들에게 가장 무거운 십자가를 맡기신다”는 말씀으로 "고난이 하나님의 특별한 사랑의 증거"임을 상기시킨다.

    리처드 백스터 (Richard Baxter)는 "고난이 우리의 소망을 하늘로 이끄는 하나님의 방식"이라고 설명하였다.

    초대 교회 신자들은 극심한 박해 속에서도 “살아있는 소망”을 붙들며, 믿음의 시련을 통해 정금보다 귀하게 다듬어졌다".

    17세기 청교도 목사 존 번연은 감옥에서 『천로역정』을 저술하며, 감옥의 쇠창살이 자신을 하나님의 부활 소망으로 인도하는 귀한 시련임을 확신하였다.

    우리의 직장, 가정, 사회에서 만나는 다양한 시련 속에서도 “살아있는 소망”을 붙들고, 하루를 마무리할 때 “오늘의 시련이 내 믿음을 더욱 단련시켰음을 감사드립니다”라는 마음으로 기도하며 고난을 극복할 수 있다.

      존번연은 고난의 감옥에서 천로역정의 빛을 밝혔다.

    제 2장: 그리스도 고난의 본을 따르라 – 순종과 희생의 모범

    베드로전서 2:21의 “본(ὑποδείγμα, hypodeigma; 모범, 패턴)”은 그리스도의 순종과 희생, 그리고 그분의 발자취를 따르는 삶의 이상을 가리킨다. “발자취를 따르다 (ἐπακολουθήσητε τοῖς ἴχνεσιν, epakolouthēsēte tois ichnesin)”는 표현은, "그리스도의 삶을 세밀하게 모방하여 따르라"라고 요구한다.

    마틴 루터 (Martin Luther)는 “십자가의 길을 걷는 것이 곧 그리스도를 따르는 길”이라고 설파하며, 고난 속에서도 침묵과 순종의 모범이 신앙의 핵심이라고 가르쳤다.

    칼 바르트 (Karl Barth)는 "그리스도의 고난이 신자의 삶에 본보기가 되며, 이를 모방함으로써 구원에 참여하는 것임을 역설"하였다.

    디트리히 본회퍼 (Dietrich Bonhoeffer)는 “값싼 은혜가 아닌 값비싼 은혜”를 구하는 삶이 진정한 제자도의 길"임을 강조하였다."그리스도에로 부르심은 죽음에로 부르심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모욕과 억울한 고난 속에서도 한결같은 순종과 온유함을 보여주셨다.

    디트리히 본회퍼 목사는 나치 정권 아래에서도 동료들을 위해 헌신하며 그리스도의 본을 따랐고, 그의 순교는 오늘날 우리에게 고난 속에서도 순종과 희생의 본보기가 되는 생생한 증거로 남았다.

    억울한 상황이나 부당한 대우를 받을 때, 감정적 반응보다는 그리스도의 침묵과 순종을 본받자. 매일 고난을 닥칠 때, “오늘 나는 어떻게 그리스도의 발자취를 따랐는가?”라고 자기 점검하고, 지속적으로 기도와 묵상으로 그 모범을 실천하도록 힘써야 하겠다.

     

    제 3장 : 선을 행하며 고난을 극복하라 – 불의 속에서도 선을 선택하는 용기

    벧전 3:17의 “선을 행함 (τὸ ἀγαθὸν ποιεῖν, to agathon poiein)”은 단순한 도덕 행위를 넘어,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의도적이고 지속적인 선행을 의미한다. 이는 고난 가운데에서도 불의를 바로잡고 선을 선택하는 신자의 결단을 드러낸다.

    헤르만 바빙크 (Herman Bavinck)은 "고난 속에서도 선을 행함으로써 하나님의 섭리가 드러나고, 신자의 내면이 정화됨을 확인할 수 있다".

    제임스 패커 (J.I. Packer)는 “고난은 우리를 더 깊은 신앙으로 인도하는 도구”라고 설명하며, 선을 행하는 것이 곧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길임을 강조하였다.

    베드로전서는 선을 행하며 고난을 감내하는 것이 신앙의 본질적 태도임을 가르친다.

    마더 테레사는 인도 콜카타에서 가난과 질병 속에 있는 이웃을 위해 헌신하며, 불의한 상황에서도 선한 선택을 실천함으로써 그리스도의 사랑을 온전히 나타내었다.

    우리가 불의하거나 도덕적 위기에 직면할 때, 주저하지 않고 선을 선택하는 용기를 내자. 작은 선행을 꾸준히 실천하여,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 임함을 체험하는 삶을 살아가야 한다.


     

    제 4장 : 고난은 영광의 길임을 나타내라 – 불시험을 통한 믿음의 정화

    벧전 4:12의 “불시험 (πύρωσις, pyrōsis)”은 금속이 불에 녹아 정련되는 과정을 나타내며, 고난을 통해 신자의 믿음이 정화되고 순수하게 다듬어짐을 의미한다.

    존 오웬 (John Owen)은 고난을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특권”이라고 표현하며, 이를 통해 신자의 믿음이 한층 깊어지고 정금처럼 귀하게 된다고 설명하였다.

    제임스 몽고메리 보이스 (James Montgomery Boice)는 "고난 없이는 참된 영광도 없음을 역설하며, 고난 속에서 나타나는 하나님의 은혜가 곧 부활 영광의 전조"임을 강조하였다.

    고난을 경험할 때 우리는 불 속에서 금속이 정련되듯, 신앙이 정화되어 강해짐을 체험한다.

    중국의 왕밍다오 목사는 23년간의 투옥 중에도 불굴의 신앙을 지켜, 고난을 통해 그리스도의 고난을 체험하며 부활의 영광을 미리 맛보았다. 그의 간증은 우리에게 고난이 신앙의 값진 열매로 이어질 수 있음을 보여주었다. 손양원, 주기철 목사님과 옥중 성도들도 고난이 영광임을 보여준 산 증인들이다.

    매일 저녁, 하루 동안 겪은 고난을 돌아보며 “이 시련이 내 믿음을 어떻게 정화시키고 있는가?”를 돌아보며 감사드리자.

     

    제 5장 : 고난 속에서 겸손과 각성으로 승리하자 – 영적 전쟁에서 승리하는 힘

    베드로전서 5:6-8에서 사용된 “겸손 (ταπεινοφροσύνη, tapeinophrosynē; 낮은 마음, 겸허한 태도)”과 “깨어 있음 (νήψατε γρηγορήσατε, nēpsate grēgorēsate; 맑은 정신과 경계)”은, "신자가 영적 전쟁 속에서 자신을 낮추고 하나님의 도우심에 온전히 의지해야 함을 강조한다".

    아브라함 카이퍼 (Abraham Kuyper)는 “세상의 모든 영역은 그리스도께 속해 있으므로, 신자는 언제나 겸손과 기도로 무장해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마틴 로이드 존스 (Martyn Lloyd-Jones)는 “깨어 있음은 내면의 영적 방패로서, 대적의 유혹에 맞설 힘을 부여한다”고 설파하였다.

    워치만 니 (Watchman Nee)는 "겸손이 영적 전쟁에서 승리하는 첫걸음임을 역설하며, 신자의 일상에서 반드시 실천되어야 함"을 강조하였다.

    신자는 고난 중에도 하나님의 능력에 전적으로 의지하며, 겸손과 깨어 있음으로 영적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다.

    2차 세계대전 당시 한 선교사는 체포되어 고문받는 와중에도 기도와 묵상으로 자신의 내면을 단련하며, “내 고난 속에서 주님의 은혜를 의지하리라”라고 굳게 믿었다. 그의 겸손과 깨어 있음은 동료 신자들에게 큰 위로와 영적 용기를 전해주었다.

    매일 아침 “오늘 내가 어떤 영적 전쟁에 직면할 것인가?”를 자문하며, 하나님의 전신갑주로 무장하는 기도로 하루를 시작하자. 또한, 교만이나 두려움 대신 겸손하게 하나님께 의지하는 모습을 일상 속에서 실천할 때, 고난의 불시련을 이길 수 있다.

     

    결론 : 믿음의 여정은 그리스도의 고난을 본받아 살아가는 삶

    베드로전서는 신자가 이 땅에서 겪는 고난을 단순한 시련이나 저주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하며 부활의 영광을 준비하는 귀한 은혜의 통로임을 선포한다.
    토마스 아킴퍼스의 [그리스도를 본받아]는 우리가 그리스도의 발자취를 따라, 고난 속에서도 결코 빛 바라지 않는 산 소망과 순종, 겸손의 자세를 유지하도록 초대한다.

    “고난(πάθος, pathos. 고난, 시련)”
    “소망 (ἐλπίδα, elpida. 확고한 약속)”

    단순한 감정이 아니라, 구원의 약속과 부활의 생명력을 상징한다.
    그리스도의 순종과 희생은 신자들이 반드시 본받아야 할 모범이며, 고난은 우리의 믿음을 정금처럼 단련시키는 하나님의 도구이다.

    존 칼빈, 마틴 루터, 존 오웬, 아브라함 카이퍼 등은 고난을 신자의 성화와 영광 준비의 과정으로 보았으며, 고난 속에서도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확신할 것을 강조하였다.
    그들은 신자가 고난 중에도 그리스도의 발자취를 따를 때, 참된 승리와 부활의 영광을 누리게 됨을 가르친다.

    기도문

    사랑과 은혜의 주님,
    오늘 이 말씀을 통하여 우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하는 귀한 길을 발견하게 하심을 감사드립니다.
    주님, 토마스 아킴퍼스의 진리와 베드로전서의 가르침 속에서, 우리가 우리의 고난을 단순한 시련이 아니라, 주님의 은혜로 다듬어지는 소중한 순례의 과정임을 깨닫게 하소서.
    우리에게 주어진 모든 고난 가운데서도 예수님의 모범을 따라 침묵과 순종, 겸손으로 그 길을 걸어가게 하시고, 매 순간 기도와 묵상으로 주님의 인도하심을 경험하게 하옵소서.
    특히 오늘 우리 각자의 어려움이 주님의 영광에 참여하는 값진 도구가 되게 하시며, 고난 끝에 부활의 영광을 누릴 수 있는 소망을 주시기를 간절히 기도드립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솔로몬의 우상숭배: 아스다롯, 밀곰, 그모스, 몰록의 신들에게 분향하며

    열왕기상 11장에는 다윗과 밧세바 사이에서 태어난 솔로몬이 나이가 들어서는 수많은 이방 여인들을 후궁과 첩으로 맞이하므로 그 여인들이 들여온 여러 우상들을 숭배하는 죄악을 범하게 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솔로몬 하면 지혜를 떠올리지만 가증한 자였다는 것을 확인하였습니다.
    그가 잠언이나 시편을 몇편 지었든 상관 없이 말입니다.

    1. 이방 여인들과 통혼하지 말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거역

    하나님께서는 그 마음에 흡족한 자였던 다윗을 기뻐하여 그 아들 솔로몬에게 엄청난 풍요와 축복을 주게 됩니다.
    솔로몬은 하나님의 성전을 지었고 가장 특출한 지혜로서 이스라엘 뿐 아니라 주변국으로 부터도 칭송을 받는 왕이었습니다.  그런데 사람의 죄성은 부를 축적하고 잘되고 나면 그 죄악된 본성을 드러내게 됩니다.

    육을 입은 사람치고 성공하고 번영하고 잘되는 거 싫어하는 사람이 없죠.
    후궁이 700명, 첩이 300명 이었다는 것이 도무지 믿기지 않을 정도입니다.

    사람은 사람과 접촉을 하면서 서로 상호 영향을 주고 받는데, 이 솔로몬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내린 " 서로 통혼하지 말라 그들이 반드시 너희의 마음을 돌려 그들의 신들을 따르게 하리라! "라는 금지 명령을 가장 첨예하게 어긴 자가 되었습니다.

    2. 아스다롯, 밀곰, 그모스, 몰록 이라는 우상들.

    솔로몬이 나이 들어서는 그의 아버지 다윗의 마음과 같지 아니하였다고 여러번 적고 있습니다. 
    아버지 하나님의 마음은 솔로몬으로 인해 근심하였고 분노하였을 것입니다.

    시돈 사람의 여신 아스다롯(ashtoreth), 암몬 사람의 가증한 밀곰(milcom), 모압의 가증한 그모스(chemosh), 암몬 자손의 가증한 몰록(molech)을 위하여 예루살렘 앞 산에 산당을 지어서 이방 여인들이 그들의 신들에게 분향(burned incense)하며 제사(offered sacrifices)드리게 하여!  여호와의 눈앞에서 악을 행하였습니다.

    요즘 기독교 내에서 죽은 전직 대통령에 대해 분향소를 차리고!  추모 예배 형식으로 또 다른 전직 대통령을  기념하고 있던데, 그것을 주도한 자들은 그에 합당한 형벌과 심판을 당할 것입니다.

    3. 하나님의 두 번의 경고.

    여호와께서 진노하시고 두 번이나 그에게 친히 나타나 다른 신들을 따르지 말라고 하였으나 솔로몬은 순종하지 않고 배역을 하게 됩니다.  
    이 일로 하나님께서는 크게 진노하셔서 이스라엘을 빼앗아 솔로몬의 신하에게 주고, 한 지파만을 솔로몬의 후손에게 주기로 하십니다.  다만 다윗과 맺은 언약으로 인해 솔로몬 때에는 그러하지 아니하고 그 아들때 부터 이스라엘이 갈릴 것이라고 합니다.

    이것은 북이스라엘과 남유다로 나뉘는 단초가 되는 것이죠.

    4. 가장 큰 번영을 누렸던 솔로몬의 배반과 역행이 나은 비극.

    사람은 육의 필요가 최우선적으로 생각이 들 수 밖에 없는 것 같습니다. 
    아담의 타락 이후로 사람은 영적인 것을 사모하기 보다는 육적인 필요를 채우기 위해 모든 수고를 다하며 갈등하고 싸웁니다.

    사람이라는 것이 가증한 면이 있는게 하나님께서 부어주신 은혜로 축복과 번영을 누리게 되면 그것을 감사하고 누리는 것을 넘어서  방탕하고 성적으로 타락하게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백제 시대에 의자왕이 3천 궁녀를 거느리고 살았다는 얘기가 있던데, 실제로는 과장된 면이 많이 있었다고 합니다. 
    한 가지 정확한 것은 풍요와 번영이 오게 되면 사람들은 더 이상 하나님께 충성하는 것이 귀찮고 번거로운 것이 되고 만다는 것입니다.   누릴 것이 이렇게 많고 잠자리에서 즐겨야할 여자들이 수백 명인데 뭐하러 하나님의 그 딱딱한 계명을 지켜야 하는지 하는 생각이 들 수 밖에 없는 것이죠.

    솔로몬의 전철을 따라 헌금 횡령과 성폭행으로 자신의 영혼을 망가뜨려 버린 이유의 근저에는 탐욕이 도사리고 있었고, 이미 그것을 돌이켜 회개할 수 있는 단계를 훨씬 넘어선 것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그런 그들이 점쟁이 무당들이 하는 초혼제를 하고, 이슬람도 좋고 불교에도 구원이 있다 여기면서 함께 행사를 하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결과 같습니다.  







    4월 19일(토) 열왕기상 11-14장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솔로몬의 대적(11:14)

    여호와께서 에돔 사람 하닷을 일으켜 솔로몬의 대적이 되게 하시니 저는 왕의 자손으로서 에돔에 거하였더라.
    Then the LORD raised up against Solomon an adversary, Hadad the Edomite, from the royal line of Edom.

    솔로몬의 대적으로 등장하는 인물은 "하닷"(11:14), "르손"(11:23), "여로보암"(11:26)입니다.

    왜 솔로몬의 대적이 등장하는가?

    그 이유는 하나님을 버리고 시돈 사람의 여신 "아스다롯"과 모압의 신 "그모스"와 암몬 자손의 신 "밀곰"을 숭배하며 다윗처럼 행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고 합니다(11:33).

    하닷은 다윗이 멸망시킨 에돔의 후손으로 애굽으로 망명했다가 솔로몬 시대에 에돔으로 돌아와 솔로몬을 대적하였다.
    르손은 다메섹을 거점으로 솔로몬 시대에 아람의 왕이 되면서 솔로몬을 대적하였다.
    솔로몬의 이름은 샬람에서 나왔으며 샬람은 모든 것이 잘 돌아간다는 뜻입니다.

    시돈 사람의 가증한 아스다롯

    시돈은 두로와 베이루트 중간에 위치한 중요 항구 도시이다(사 23:2).
    '아스다롯'(Ashtaroth)은 '아세라'(Ashe-rah)와 더불어 풍요,다산, 사랑 또는 쾌락의 여신이다.
    과거에는 아세라와 아스다롯이 동일한 신인 것으로 오해되었으나 최근의 연구 결과 엄연히 구분되는 다른 두 신임이 판명되었다.
    한편 아스다롯은 고대 근동의 여러 지방에서 두루 숭배되었느데 그가운데서도 특히 두로 (Tyre)와 시돈(Sidon) 백성들이 열렬히 숭배하였다.
    아스다롯은 지역에 따라 여러 명칭으로 불리웠는데 헬라에서는 아프로디테(Aphrodite), 로마에서는 비너스(Vinus)로 알려져 있다.
    아스다롯, 풍요의 여신으로 가나안에서 바알과 더불어 많이 섬긴 우상이다.

    아스다롯과 관련된 지명으로는 '아스드롯 가르나임'이 있다.
    그 뜻은 '두 뿔의 아스드롯'이란 뜻이다.
    그러나 이곳의 정획한 위치에 대하여서는 알려진 것이 없는데 사해 동쪽 약 45km 지점에 위치한 가르나임 성읍 부근인 것으로 추정된다.

    아스다롯을 섬기는 방식은 성경에서 가증히 여기는 성적인 방종과 타락상을 반영한 것이었다.

    구약성경에 사용된 창녀라는 단어는 보통 두 가지였다.
    당시 가나안 땅에는 '조나'와 '케데솨'라고 불리우는 두 종류의 창녀들이 있었다.
    '조나(זנה)'라는 단어는 통상적인 일반 창녀들을 말한다.
    '케데솨'는 우상 숭배를 위하여 '거룩히 구별된 여자'란 뜻이다.
    '케데솨(קדשׁה)'라는 단어는 '거룩한' 혹은 '봉헌하다'란 뜻을 가진 '카다쉬(קדשׁ)'에서 파생된 말인 것을 보아도 알 수 있다.
    이 창기들은 생식력(生殖力)을 주관한다고 생각한 당시 가나안 땅의 여신 아스다롯(Astaroth)을 섬기기 위해 헌신된 자를 가리켰다.
    이들은 음란 행위를 통하여 여신을 섬기는(신 23:18) 성창녀(聖娼女)로서 당시 가나안 땅의 음란한 풍조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이스라엘 백성은 엄중한 하나님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가나안 정착 초창기부터 이 여신 아스다롯을 숭배했다.
    "곧 그들이 여호와를 버리고 바알과 아스다롯을 섬겼으므로"(삿 2:13)

    • 모압 사람의 가증한 그모스

    그모스(Chemosh)는 모압인들이 민족신(수호신)으로 태양의 신이자 전쟁의 신이다.
    그리고 ' 그모스'(Chemosh)란 명칭은 '정복자'라는 뜻일 것으로 추측된다.
    때문에 성경에서 모압인들은 종종 '그모스의 백성' 으로 불리우고 있다(민 21:29; 렘 48 : 46).
    그런데 그모스를 가리켜 '가증한 그모스'라고 칭하는 까닭은 그모스에게도 몰록처럼 인간 제사가 드려졌기 때문이다.
    그모스는 암몬의 신 몰륵과 쌍둥이 형제라고 한다.
    또한 이러한 우상을 섬기는 제사 의식은 매우 잔인하며 음란한 행위가 항상 동반되었다.
    고고학적 발굴 결과 '그모스'는 그 양 옆에는 횃불이 불타고 있으며 손에는 창과 칼과 방패를 들고 있는 모습으로 그려져 있었다고 한다.

    "모압 왕은 전세가 불리한 것을 보고 칼을 찬 자기 부하 700명과 함께 적진을 뚫고 에돔 왕이 있는 쪽으로 탈출하려고 하였으나 실패하였다.
    그러자 그는 자기 뒤를 이어 왕이 될 맏아들을 잡아다가 성벽 위에서 불로 태워 모압 신에게 제사를 드렸다.
    이것을 본 이스라엘 연합군들은 자기들에게 내릴 재앙을 생각하고 두려워 그 성에서 물러나와 모두 자기 나라로 돌아갔다."(열왕기하 3:26‭-‬27)

    당시의 모압왕은 '메사'(Mesha)였다.
    메사라는 이름은 모압 비문(Moabite stone)의 기록에 나타나 있는데 그는 B.C. 9C 중반 모압의 한 도시인 디본(Dibon)을 병합했다.
    또한 그는 약 40년동안 예속 되었던 이스라엘에 대해 항거해 반란을 일으킨 장본인이었다.
    또 디본에서 발견된 이 비문을 보면 모압은 그모스 신의 진노로 인해 이스라엘의 오므리 왕조로부터 큰 고난을 당했으나 메사 왕 시대에 와서야 다시 그모스 신이 영광을 얻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는 북이스라엘에 대해 반란을 일으켜서 성공한 것을 자축적으로 언급한 듯하다.

    암몬 자손의 가증한 밀곰

    밀곰(Milcom)은 일명 몰렉(Moloch), 몰록(Moloch, 왕상 11:7), 말감(Malcam, 습 1:5)으로 불리우던 암몬인들의 민족신이다.
    이 신을 섬기는 제의(祭義)의 특징은 인신(人身) 제사에 있었는바 성경에서 가장 가증한 신으로 언급되고 있다(레 20:1-5).
    특히 유아(幼兒) 희생 제사로 유명하다(20:2-5. 왕상 11:7. 렘 32:35).
    한편 이 우상의 재료는 놋이었고, 그 머리는 힘센 황소(bull)의 모양을 하고있었다.
    그리고 그 팔은 마치 어린이를 맞아들이려는 듯이 앞으로 쭉 뻗어 있었다.
    또한 이 우상 바로 전면 좌 우측에 맹렬한 불길이타고 있었던 듯하다.
    이로 볼때 고대 이방 족속들은 가장 위대한 불인 태양을 섬기기위해 이 우상을 만는듯 하며, 당시 부모들은 자식들 중 하나를 택하여 이 우상에게 바치면 남은 자녀들에게 복이 온다고 생각하여 자기 자식을 이 우상에게 주었던 것 같다(메튜 헨리 주석).

    몰렉 숭배의 행패가 지역과 민족, 그리고 시대에 따라 일정치 않았기 때문에 그 정확한 제사 의식은 알 수 없으나, 대체적으로 초창기에는 이 의식이 유아를 직접 불에 때우는 인신 제사의 형태였다기보다는 문자 그대로 타오르는불 사이를 지나도록 함으로써 아이를 우상에게 구별시키는 일종의 성별식(聖別式)으로 행해진 것으로 보는 학자들도 있다.
    그러나 후대에는 정말로 아이를 불에 던져 태우는 인신 제사의형태를 취한 것이 여러가지 증거들로 확인 되었다.
    따라서 성경 기록에 의하면, 아하스(Ahaz) 시대 때 벌써 벤힌놈(Ben-Hinnom) 골짜기에서 아이를 죽여 뜨겁게 가열된 몰렉의 팔에 안기워 결국 불태우는 유아제사에 대한 언급이 나타나고 있다(겔 16:20, 21; 20:31. 렘 32:35. 왕하 23:10).
    이같은 사실은 예루살렘 근처 벤 힌놈(Ben-Hinnom) 골짜기에서 행해진 이 제사를 가리켜 선지자 에스겔이 '학살'(slughtering)이라 불렀고(겔 16: 21), 예레미야가 '불에 살랐다'(burning in the fire)고 지적한 사실에서도 확인된다.

    우상숭배란 형상을 만들고 그 형상을 숭상하는 것도 있었지만 현대인들에게는 탐욕을 우상숭배라고 한다.

    골로새서 3:5(개역개정)
    그러므로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 곧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이니 탐심은 우상 숭배니라.

    그러므로
    - 본절은 앞서 언급한 2:20-3:4을 상기시킨다.
    특히 3,4절에서 언급한 신학적 기초를 가리킨다.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
    - ‘죽이라’에 해당하는 헬라어 ‘네크로사테’에 대해서 혹자는 ‘죽은 것으로 여기라’로 해석한다(Bruce).
    그 근거로 ‘네크로사테’가 부정 과거로서 이미 이루어진 것을 의미하며, 3절에서 바울이 ‘죽은 것’을 선포한 점을 들고 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은 신분상 그리스도의 구속을 통해서 죄에 대해서 죽었고, 의인이 되었지먄(롬 3:24) 현재의 삶은 죄와 투쟁하는 삶이다.
    따라서 ‘네크로사테’는 현재의 삶 속에서 죄와의 투쟁을 암시하며, 과단성 있는 행위를 통한 죄의 제거를 의미한다(마 5:29, 30).
    한편 ‘지체’는 신약성경에서 문자적으로 신체의 여러 부분을 가리키나(마 5:29, 30. 롬 6:13,19. 약 3:6).
    본절에서의 ‘지체’는 신체적 부분을 의미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본절의 문맥에서 ‘악의 목록’들이 ‘지체와’와 동격으로 나타나기 때문이다.
    그래서 혹자는 ‘지체’를 ‘악’으로 해석한다(Calvin, Hendriksen, Vaughan).
    그러나 바울은 단순히 ‘지체’와 ‘악’을 동일시하는 차원뿐 아니라 그 이상을 말하고 있는 듯하다.
    바울이 사용한 ‘지체’는 옛 본성에 이용되어서 범죄하는 여러 중류의 죄의 차원의 범주를 훨씬 넘어선 것으로(O' Brien, 롬 6:19. 7:23), 도덕적인 인격을 시사한다(Lightfoot).

    음란(4202)
    - 혼외정사(살전 4:13)와 같은 불법적 성관계를 의미한다.
    ‘음란’이란 말은 신약 시대의 헬라에 편만했던 문란한 생활을 반영한다(Lohse).
    바울은 음란을 금지하는 명령에 무조건 순종할 것을 요구하였으며(고전 6:18. 갈 5:19) 이를 어기면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을 수 없음을 경고하엿다(고전 6:9).

    음란(포르네이아. pŏrnĕia) πορνεία, ας, ἡ 스트롱번호 4202

    1. 매음.  2. 음란.  3. 부정
    발음 [ pŏrnĕia ]
    어원  / 4203에서 유래
    • 1. 매음, 음란, 부정, 간음, 행 15:20, 고전 5:1, 갈 5:19.
    • 관련 성경  / 음란(마 15:19, 막 7:21, 고전 6:13), 음행(마 5: 32, 행 15:20, 고전 5:1, 계 2:21), 추악(롬 1:29).


    부정(167)
    - ‘부정’은 음란보다 더 넓은 의미로 때로는 육체적 부정을 의미하기도 하지만(마 23:27) 넓은 의미에서의 도덕적인 부정 즉 사상이나 행동, 말 등의 불순함을 의미하기도 한다(Vaughan).
    여하튼 이것은 육체의 일이며(갈 5:19) 성령 안에서의 삶과는 조화를 이룰 수 없다(Lohae, O' Brien).

    부정(아카다르시아. akatharsia) ἀκαθαρσία, ας, ἡ 스트롱번호 167

    1. 불결.  2. 폐물. 3. 부도덕
    발음 [ akatharsia ]
    어원  / 169에서 유래
    • 1.  불결, 불순, 더러운 것.
      • a.  [문자적으로] 폐물, 찌끼, 쓰레기, 마 23:27.
      • b.  [상징적으로: 도덕적 의미] 부도덕, [특히 성적인 의미에서의] 악덕, 고후 12: 21, 갈 5:19, 엡 5:3, 골 3:5.
             《반》 ἁγιασμός, 롬 6:19, 엡 4:19, 살전 4:7.
    • 관련 성경  / 부정(롬 6:19, 골 3:5), 더러움(마 23:27, 엡 4:19). 부정하게 하심(살전 4:7).

    사욕(3806)과 악한 정욕(1939)
    - ‘사욕’은 색욕을 발하는 구끄러운 욕망을 의미하며(롬 1:26. 살전 4:5),
    ‘악한 정욕’은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에게 불순종하게 하는 사악한 욕망을 의미한다(Lohse).
    악한 정욕은 그리스도를 영접하기 이전의 자연인을 지배하며, 그 자연인 안에 거하는 죄의 현현이다(O'Brien).
    그것은 육욕(갈 5:16, 24).

    사욕(파도스. pathŏs) πάθος, ους, τό 스트롱번호 3806

    1. 수난.  2. 욕정
    발음 [ pathŏs ]
    어원  / 3958의 변형에서 유래
    • 1.  수난, 고난.
      2. 욕정, 롬1:26, 골3:5, 살전4:5.

    • 관련성경 / (부끄러운) 욕심(롬1:26), 정욕(골3:5), 색 욕(살전4:5).

    악한 정욕(에피두미아.  ĕpithümia) ἐπιθυμία, ας, ἡ 스트롱번호 1939

    1. 욕망.  2. αἱ περὶ τὰ λοιτὰ ἐ.: 다른 것에 대한 욕망
    발음 [ ĕpithümia ]
    어원  / 1939에서 유래
    탐심(4124)은 우상 숭배니라(1495)
    - ‘탐심’은 앞서 언급한 네가지 ‘악’과 상관성을 갖고 있으며(Carson) 물질에 대한 무절제한 욕심을 의미한다.
    ‘탐심’이 ‘우상 숭배’와 동일시되는 것은 사람이 하나님과 물질을 겸하여 섬길 수 없기 때문이다(마 6:24. 엡 5:5, O' Brien).

    탐심(플레오네크시아.  plĕŏnĕxia) πλεονεξία, ας, ἡ 스트롱번호 4124

    1. 탐심.  2. 탐욕.  3. 눅12:15
    발음 [ plĕŏnĕxia ]
    어원  / 4123에서 유래
    • 1.  탐심, 탐욕, 눅 12:15, 롬 1:29, 고후9:5.
    • 관련 성경  /  탐욕(막7:22, 롬1:29, 벧후2:14), 탐심(눅12:15, 골3:5, 벧후2:3), 억지(고후9:5).

    우상숭배(에이도로라트레이아. ĕidōlŏlatrĕia) εἰδωλολατρέια 스트롱번호 1495

    1. 우상 숭배.  2. 고전 10:14. 3. 골 3:5
    발음 [ ĕidōlŏlatrĕia ]
    어원 / 1497과 2999에서 유래
    • 1. 우상 숭배, 고전 10:14, 골 3:5, 벧전 4:3.
    • 관련 성경  /  우상 숭배(고전 10:14, 벧전 4:3).



    아스다롯, 그모스, 밀곰(몰렉)

    5절.  이는 시돈 사람의 여신 아스다롯을 좇고 암몬 사람의 가증한 밀곰을 좇음이라

    가나안 땅에는 국가 신(수호신)을 비롯해서 인간의 행과 불행과 관련된 다양한 신들을 섬기고 있었습니다.
    성경에 언급된 대표적인 신들을 소개합니다.
    가나안의 바알과 시돈의 아스다롯을 들 수있다(삿2:13. 10:6. 삼상 12:10. 왕상 16:31. 18:18).
    모압의 그모스(삿 11:24. 민 21:29. 왕상 11:7, 33. 렘 48:7)
    암몬의 몰록(왕상 11:7),
    블레셋의 다곤(16:23. 삼상 5:2-7)

    성경에 언급되지 않은 가나안 땅에 유행했던 신들은 다음과 같습니다.
    신전의 우두머리 "엘"
    전쟁의 신 "아낫"
    죽음의 신 "못"
    폭풍우의 신 "테슛"
    모신 "한나"
    시리아의 폭풍의 신 "아닷"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 땅 가나안에 정착하면서 이러한 우상들을 섬김과 동시에 여호와도 같이 섬겨 종교적 혼합주의(syncretism)에 빠져 있었습니다.
    한편 이러한 신들은 조각품에 지나지 않고 사람이 고안한 것에 지나지 않으므로,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의 선민은 그 우상들을 두려워 할 필요가 없었다.
    그리고 그 신들이 보호하고 있다는 가나안 열국 역시 두려워할 필요가 없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은 우상 숭배에 빠진 결과 그러한 신들을 두려워하게 되었으며 열국들의 침략에 대해서도 속수 무책이었다.

    • 시돈 사람의 가증한 아스다롯
    시돈은 두로와 베이루트 중간에 위치한 중요 항구 도시이다(사 23:2).

    '아스다롯'(Ashtaroth)은 '아세라'(Ashe-rah)와 더불어 풍요,다산, 사랑 또는 쾌락의 여신이다. 과거에는 아세라와 아스다롯이 동일한 신인 것으로 오해되었으나 최근의 연구 결과 엄연히 구분되는 다른 두 신임이 판명되었다. 한편 아스다롯은 고대 근동의 여러 지방에서 두루 숭배되었느데 그가운데서도 특히 두로 (Tyre)와 시돈(Sidon) 백성들이 열렬히 숭배하였다. 이 아스다롯은 지역에 따라 여러 명칭으로 불리웠는데 헬라에서는 아프로디테(Aphrodite), 로마에서는 비너스(Vinus)로 알려져 있다.

    아스다롯, 풍요의 여신으로 가나안에서 바알과 더불어 많이 섬긴 우상이다.

    아스다롯과 관련된 지명으로는 '아스드롯 가르나임'이 있다. 그 뜻은 '두 뿔의 아스드롯'이란 뜻이다.그러나 이곳의 정획한 위치에 대하여서는 알려진 것이 없는데 사해 동쪽 약 45km 지점에 위치한 가르나임 성읍 부근인 것으로 추정된다.

    아스다롯을 섬기는 방식은 성경에서 가증히 여기는 성적인 방종과 타락상을 반영한 것이었다.

    구약성경에 사용된 창녀라는 단어는 보통 두 가지였다. 당시 가나안 땅에는 '조나'와 '케데솨'라고 불리우는 두 종류의 창녀들이 있었다.

    조나(זנה)이라는 단어는 통상적인 일반 창녀들을 가리키는 반면, '케데솨'는 우상 숭배를 위하여 '거룩히 구별된 여자'란 뜻이다. 케데솨(קדשׁה)라는 단어는 '거룩한' 혹은 '봉헌하다'란 뜻을 가진 '카다쉬(קדשׁ)'에서 파생된 말인 것을 보아도 알 수 있다. 이 창기들은 생식력(生殖力)을 주관한다고 생각한 당시 가나안 땅의 여신 아스다롯(Astaroth)을 섬기기 위해 헌신된 자를 가리켰다. 이들은 음란 행위를 통하여 여신을 섬기는(신 23:18) 성창녀(聖娼女)로서 당시 가나안 땅의 음란한 풍조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이스라엘 백성은 엄중한 하나님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가나안 정착 초창기부터 이 여신 아스다롯을 숭배했다. "곧 그들이 여호와를 버리고 바알과 아스다롯을 섬겼으므로"(삿 2:13)

    • 모압 사람의 가증한 그모스
    그모스(Chemosh)는 모압인들이 민족신(수호신)으로 태양의 신이자 전쟁의 신이다. 그리고 ' 그모스'(Chemosh)란 명칭은 '정복자'라는 뜻일 것으로 추측된다. 때문에 성경에서 모압인들은 종종 '그모스의 백성' 으로 불리우고 있다(민 212 : 29;렘 48 : 46). 그런데 그모스를 가리켜 '가증한 그모스'라고 칭하는 까닭은 그모스에게도 몰록처럼 인간 제사가 드려졌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그모스는 암몬의 신 몰륵과 쌍둥이 형제라고 한다. 또한 이러한 우상을 섬기는 제사 의식은 매우 잔인하며 음란한 행위가 항상 동반되었다. 고고학적 발굴 결과 '그모스'는 그 양 옆에는 횃불이 불타고 있으며 손에는 창과 칼과 방패를 들고 있는 모습으로 그려져 있었다고 한다.

    "모압 왕은 전세가 불리한 것을 보고 칼을 찬 자기 부하 700명과 함께 적진을 뚫고 에돔 왕이 있는 쪽으로 탈출하려고 하였으나 실패하였다. 그러자 그는 자기 뒤를 이어 왕이 될 맏아들을 잡아다가 성벽 위에서 불로 태워 모압 신에게 제사를 드렸다. 이것을 본 이스라엘 연합군들은 자기들에게 내릴 재앙을 생각하고 두려워 그 성에서 물러나와 모두 자기 나라로 돌아갔다."(열왕기하 3:26‭-‬27)

    당시의 모압왕은 '메사'(Mesha)였다. 메사라는 이름은 모압 비문(Moabite stone)의 기록에 나타나 있는데 그는 B.C. 9C 중반 모압의 한 도시인 디본(Dibon)을 병합했다. 또한 그는 약 40년동안 예속 되었던 이스라엘에 대해 항거해 반란을 일으킨 장본인이었다. 또 디본에서 발견된 이 비문을 보면 모압은 그모스 신의 진노로 인해 이스라엘의 오므리 왕조로부터 큰 고난을 당했으나 메사 왕 시대에 와서야 다시 그모스 신이 영광을 얻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는 북이스라엘에 대해 반란을 일으켜서 성공한 것을 자축적으로 언급한 듯하다.


    (파리 르브르 박물관의 '모압 왕 메사의 비석’. 열왕기하의 '오므리 왕'과의 전쟁내용도 포함되어있고 그모스의 배우신 '아시달 그모스'에게 인신제사를 바쳤던 기록이 있어 성경 연구에 중요한 자료가 된다. 높이:1m 10cm)

    •암몬 자손의 가증한 밀곰
    밀곰(Milcom)은 일명 몰렉(Moloch), 몰록(Moloch, 왕상 11:7), 말감(Malcam, 습 1:5)으로 불리우던 암몬인들의 민족신이다.이 신을 섬기는 제의(祭義)의 특징은 인신(人身) 제사에 있었는바 성경에서 가장 가증한 신으로 언급되고 있다(레 20 : 1-5). 특히 유아(幼兒) 희생 제사로 유명하다(20:2-5; 왕상 11:7; 렘32:35). 한편 이 우상의 재료는 놋이었고, 그 머리는 힘센 황소(bull)의 모양을 하고있었다. 그리고 그 팔은 마치 어린이를 맞아들이려는 듯이 앞으로 쭉 뻗어 있었다. 또한 이 우상 바로 전면 좌 우측에 맹렬한 불길이타고 있었던 듯하다. 이로 볼때 고대 이방 족속들은 가장 위대한 불인 태양을 섬기기위해 이 우상을 만는듯 하며, 당시 부모들은 자식들 중 하나를 택하여 이 우상에게 바치면 남은 자녀들에게 복이 온다고 생각하여 자기 자식을 이 우상에게 주었던 것 같다(메튜 헨리 주석).


    몰렉 숭배의 행패가 지역과 민족, 그리고 시대에 따라 일정치 않았기 때문에 그 정확한 제사 의식은 알 수 없으나, 대체적으로 초창기에는 이 의식이 유아를 직접 불에 때우는 인신 제사의 형태였다기보다는 문자 그대로 타오르는불 사이를 지나도록 함으로써 아이를 우상에게 구별시키는 일종의 성별식(聖別式)으로 행해진 것으로 보는 학자들도 있다. 그러나 후대에는 정말로 아이를 불에 던져 태우는 인신 제사의형태를 취한 것이 여러가지 증거들로 확인 되었다. 따라서 성경 기록에 의하면, 아하스(Ahaz) 시대 때 벌써 벤힌놈(Ben-Hinnom) 골짜기에서 아이를 죽여 뜨겁게 가열된 몰렉의 팔에 안기워 결국 불태우는 유아제사에 대한 언급이 나타나고 있다(겔 16:20, 21; 20:31; 렘 32:35; 왕하23:10). 이같은 사실은 예루살렘 근처 벤 힌놈(Ben-Hinnom) 골짜기에서 행해진 이 제사를 가리켜 선지자 에스겔이 '학살'(slughtering)이라 불렀고(겔 16: 21), 예레미야가 '불에 살랐다'(burning in the fire)고 지적한 사실에서도 확인된다.


    솔로몬 왕이 누리던 부귀영화와 이스라엘의 강력함은 계속 유지될 것 같았지만, 그렇지 못했습니다.
    이 땅에 영원한 부귀도 없고, 영원한 권력도 없습니다.
    얻었다가 잃고, 높아졌다가 낮아지며, 올라갔다가 내려가는 것의 반복입니다.
    더구나 하나님을 떠난 영화(榮華)는 금방 사라져버리는 허상(虛像)과 같습니다.

    오늘 본문은 솔로몬의 왕권에 손상을 입을 일들이 벌어지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일단 두 사람이 솔로몬의 대적이 되어 일어났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에돔 사람 하닷이 솔로몬의 대적이 되었는데(14절), 이는 사무엘하 8:2~14에 나온 사건이 배경을 이루고 있습니다.
    다윗 왕이 요압과 더불어 에돔을 쳐서 에돔 사람을 다 죽일 때에 에돔 왕의 어린 아들이 가까스로 살아남아 애굽에 피신해 있다가, 애굽의 바로에게 보호를 받으면서 성장하였고, 바로의 처제를 하닷에게 주어 결혼까지 하고 지내다가 다윗 왕과 요압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다시 에돔으로 돌아와서 다윗 시대에 당했던 것을 복수하려고 기회를 엿보고 있었습니다(14절~22절).

    솔로몬의 또 다른 대적은 엘리아다의 아들 르손이었습니다(23절).
    엘리아다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거의 없습니다.
    르손은 원래 소바 왕 하닷에셀의 수하였는데, 하닷에셀에게서 도망하였다가 다윗 왕이 소바를 칠 때에 사람들을 모아 다메섹으로 가서 거기에서 수리아의 왕이 된 자입니다(23절, 24절).
    다윗 왕 때 다윗이 소바를 무찔렀었기에 소바 출신 르손도 복수의 기회를 찾았던 것으로 보입니다(25절).

    이렇게 에돔의 하닷과 수리아의 르손이 솔로몬에 대적하며 솔로몬을 괴롭히는 존재가 되었습니다(25절). 이들은 다윗 왕의 강력함에 굴복하였고, 솔로몬 왕이 강력한 권세를 떨치고 있을 때에는 숨죽여 있다가 솔로몬의 왕권이 쇠퇴할 기미가 보이자 슬금슬금 일어나서 솔로몬을 대적하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상황이 벌어진 것은 하나님이 하신 일이라고 오늘 본문은 소개하고 있습니다. 14절에 “여호와께서 에돔 사람 하닷을 일으켜 솔로몬의 대적이 되게 하시니…”라고 기록하고 있고, 23절에서도 “하나님이 또 엘리아다의 아들 르손을 일으켜 솔로몬의 대적자가 되게 하시니…”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하닷이 일어나서 솔로몬의 대적이 되게 하신 것이나, 르손이 일어나서 솔로몬의 대적이 되게 하신 것이 모두 하나님께서 하신 일이라고 기록한 것입니다. 솔로몬의 마음이 하나님에게서 떠나서 온갖 우상을 섬기는 죄악을 저지르자 하나님께서 솔로몬을 징계하시기 위해 대적들을 일으키신 것이라고 기록한 것입니다.

    하나님을 떠나면 호시탐탐 노리는 대적에게 틈을 내어줄 수밖에 없음을 알아야 합니다. 온전히 하나님만 따르며 하나님을 따르면 하나님께서 보호하시지만, 하나님을 떠나면 하나님의 보호하심을 기대할 수 없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 안에 온전히 거할 때 우리의 삶이 안전할 수 있음을 기억하고 오직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살아가는 삶이길 소망합니다.

    하닷은 에돔 왕의 자손으로, 이스라엘의 요압장군이 에돔 남자를 제거할 때 애굽의 바로에게 피하여 살아남은 자입니다.
    한편 르손은 다윗이 소바인들을 칠 때 도망하여 다메섹에서 왕이 된 자입니다.

    본문은 크게 네 가지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솔로몬의 대적 하닷, 하닷을 환대한 애굽, 에돔으로 돌아간 하닷, 솔로몬의 대적 르손 등입니다.

    ‘요압은 에돔의 남자를 다 없애기까지 이스라엘 무리와 함께 여섯 달 동안 그 곳에 머물렀더라 그 때에 하닷은 작은 아이라 그의 아버지 신하 중 에돔 사람 몇몇과 함께 도망하여 애굽으로 가려 하여’
    -
    솔로몬의 대적자 하닷에 대한 소개입니다.
    이스라엘의 군대장관인 요압이 에돔을 정벌할 때, 6개월 동안 머물면서 에돔의 남자들을 죽입니다.
    당시 하닷은 왕자로, 몇 명의 신하들과 함께 애굽에 망명합니다.
    여러 가지 이유로 바로는 그를 환대하고 자신의 처제와 결혼도 시킵니다.
    요압이 죽었다는 소식에 그는 에돔으로 귀국해 나라를 일으킵니다.
    그전까지 숨죽이고 있었던 것은 다윗과 요압이 그토록 공포의 대상이었기 때문입니다.

    ‘다윗이 소바 사람을 죽일 때에 르손이 사람들을 자기에게 모으고 그 무리의 괴수가 되어 다메섹으로 가서 살다가 거기서 왕이 되었더라‘ - 솔로몬의 또 다른 대적자 르손에 대한 소개입니다.
    그는 아람 소바 왕 하닷에셀의 부하로, 다윗과의 싸움에서 전세가 불리해지자 왕을 버리고 도망갑니다.
    그리곤 산적의 두목이 되어 세력을 키우다가, 솔로몬의 통치 기간중 다메섹에 대한 이스라엘의 통치력이 약화되자 다메섹을 점령하고 스스로 왕이 됩니다.
    여기서 다메섹은 아람의 왕국으로, 수도의 역할을 하는 성읍입니다.
    아람과 수리아, 시리아 같은 말입니다.
    그 당시 아람은 아람 소바, 아람 나하라임, 아람 벧르홉, 그리고 다메섹과 같이 필요에 따라 동맹을 맺어 군사협조를 하는 형태의 도시국가들입니다.

    ‘솔로몬의 일평생에 하닷이 끼친 환난 외에 르손이 수리아 왕이 되어 이스라엘을 대적하고 미워하였더라‘
    - ’
    그렇지 않아도, 솔로몬은 대적자 하닷에게 시달리고 있었는데,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수리아 왕 르손에게도 괴롭힘을 당하며 시달렸다‘는 말입니다.
    ’일평생‘은 솔로몬의 평생이 아니라, 재위 기간중 후대를 말합니다.
    그 시기에 솔로몬은 이스라엘의 왕으로써 못 쓸 일을 했으니, 곧 여호와를 버리고 이방신들의 신전을 수 없이 세워 영적타락을 거듭한 것입니다.
    이는 곧 하나님의 율례를 지키지 않고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진 것으로, 따라서 하닷과 르손은 솔로몬을 향한 여호와의 심판입니다.
    솔로몬은 그 때 깨달아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습니다.
    결국 나라는 분열되고, 이후 이스라엘은 끓임 없이 적들의 공격을 받습니다.
    더 나아가 그들의 지배를 받게 되고, 점차 쇠약해지다가 급기야 그들로 인해 멸망하고 맙니다.

    하나님은 일찍이 다윗에게 그의 후손이 여호와의 명령과 법도를 지키지 않으면 사람 막대기로 치시겠다고 예고한 바 있습니다.
    하닷과 르손은 솔로몬을 향한 인간 막대기입니다.
    그 지혜로운 왕이 그걸 보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 때는 이스라엘의 태평성대입니다.

    우리도 현재 태평성대를 누리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1950년 6월 25일 전쟁을 겪은 대한민국입니다.
    그러나 한국은 현재 세계 경제 10대국의 나라가 됩니다.
    불과 약 74년 뒤입니다.
    이 시대는 6.25에 비하여 태평성대라고 할 수 있으니, 이 모두 보이지 않는 분의 보호와 은혜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 큰 중국과 러시아 그리고 일본 사이에 있는 자그마한 땅이 약 5,000년 동안 없어지지 않고 존속되고 있으니 이를 부인할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국외정세는 불안합니다.
    특별히 북한은 늘 우리에게 위협적이고, 중국은 말할 것도 없고, 일본도 여러 가지로 우리를 괴롭힙니다.
    국가와 민족을 위해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나라가 없으면 개인의 행복도 없습니다.
    어떤 교회는 오래전부터 우리나라 최초의 초음속전투기 KF-21의 성공적인 비행과 백두산이 폭발되지 않도록 기도한다고 합니다.
    또 어떤 교회에서는 통일 시 북한에 교회를 세우기 위한 자금을 준비한다고도 합니다.
    매우 고무적입니다.
    그렇게 고공에서 바라보는 시각을 갖고 기도해야 될 것입니다.
    6.25 같은 막대기를 다시 쓸까 두렵습니다.

    위협하고 괴롭히는 나라가 있을 때 솔로몬은 돌이켜야 했습니다.
    그 시기를 놓치자 나라는 두 동강이 나버리고, 결국 두 나라 모두 망하고 맙니다.
    우리 주변에 괴롭히고 있는 나라가 있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기도하라는 싸인 입니다.
    하나님의 심판은 경고 없이 오지 않습니다.
    기도하는 우리가 하나님의 마음을 아는 사람들입니다.

    4월 18일(금) 열왕기상 8-10장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주의 계신 곳(8:30)

    종과 주의 백성 이스라엘이 이곳을 향하여 기도할 때에 주는 그 간구함을 들으시되 주의 계신 곳 하늘에서 들으시고 들으시사 사하여 주옵소서.
    Hear the supplication of your servant and of your people Israel when they pray toward this place. Hear from heaven, your dwelling place, and when you hear, forgive.

    39. 주는 계신 곳 하늘에서 들으시고 사유하시며 각 사람의 마음을 아시오니 그 모든 행위대로 행하사 갚으시옵소서 주만 홀로 인생의 마음을 다 아심이니이다.
    then hear from heaven, your dwelling place. Forgive and act; deal with each man according to all he does, since you know his heart (for you alone know the hearts of all men),

    주의 계신 곳(your dwelling place) Where the Lord is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하늘(솨마임. shâmayim)  שָׁמַיִם 스트롱번호  8064

    1. 하늘. 2. 하늘을 향하여
    발음 [ shâmayim ]
    구약 성경 / 421회 사용

    하늘(우라노스. ) οὐρανός, οῦ, ὁ 스트롱번호  3772

    1. 하늘.  2. 마 5:18.  3. 마 5:34
    발음 [ ŏuranŏs ]
    어원  / 3735와 동일어에서 유래한 듯함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하나님은 우리의 아버지

    ①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주기도문을 시작하시면서 기도의 대상인 하나님을 누구로 부르라고 가르치고 계십니까?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르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아버지는 헬라어로 아빠(abba)입니다.
    하나님을 아빠로 부르면서 기도하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아빠로 부르도록 가르치신 것은 예수님의 독특한 어법입니다.
    어린이가 아버지를 친근하게 부를 때 ‘아빠’라는 말을 사용합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을 아빠로 부르라고 가르치신 것은, 하나님의 성품이 친밀함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아빠’ 또는 ‘아버지’로 부르는 것은 언약신학의 표현입니다.
    언약이란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선택하시고 자기 백성 삼으시고 그들에게 자신이 하나님 노릇 해주시겠다고 약속해주셨습니다.

    독일 신학자 요야킴 예레미야스(J. Jeremias) “예수 그리스도를 전후한 유대 문서 어느 곳에서도 유대인들이 하나님을 아빠라고 부른 예가 없다”고 합니다.
    유대인들은 하나님을 부를 때 거룩한 하나님, 전능하신(전능하신) 하나님, 여호와 하나님, 초월적인 하나님에 대한 경외심을 가지고 있었기에 하나님을 친근하게 부를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아주 혁명적으로 하나님을 ‘아빠’라고 부른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아빠로 부르는 순간 하나님의 자녀라는 관계로 바뀌게 됩니다.
    하나님의 자녀로서 가장 기본적인 의미는 ‘상속자’라는 것입니다.
    하늘과 땅을 지으신 하나님을 우리가 아빠로 부르는 순간, 그분의 모든 부요함을 내가 상속받을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아빠로 부르는 기도를 통해서 우리는 하늘의 부요함을 끌어 쓸 수 있는 축복을 누리게 됩니다.
    하나님을 아빠로 부를 수 있는 자격과 권한을 누가 부여했습니까? 예수님이십니다.

    (질문) 하늘에 계신 우리 아빠여 라는 기도 속에서 당신이 느끼는 친근한 감정은 어떤 것입니까?

    하나님은 어디에 계신 분입니까?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하늘에 계신 분

    하나님을 아빠라 부르는 것은 친근감을 강조한다면, ‘하늘에 계신’다는 것은 하나님의 초월성을 강조합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에는 내재성과 초월성이 함께 강조되고 있습니다.

    요한복음 14:20
    그 날에는 내가 아버지 안에,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너희가 알리라.

    요한복음 15:10-11
    내가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의 사랑 안에 거하는것 같이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거하리라.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어 너희 기쁨을 충만하게 하려함이니라 .

    요한복음 16:33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하시니라


    삼층천(三層天)에 대한 이해

    1. 바울이 (고전 12:2)에서 말하는 세 번째 하늘이 무엇을 의미하는 지에 대해서는 많은 설명이 제시되어 왔습니다.
    하늘이 7계층으로 되어 있다고 하는 신앙은 유대 랍비들과 조로아스터 교에서 발견이 됩니다.
    그러나 이러한 개념이 바울 시대에 지배적이었는지에 대한 것은 확실하지 않습니다. 제가 보기에 바울이 말한 세 번째
    하늘이란 개념은 7계천이란 유대적 개념에서 빌려 온 것 같지는 않습니다.
    그 이유는 성경 어디에도 하늘이 7계단으로 되어 있다고 말한 곳이 없으며, 또한 위로 하늘이 4계단이나 더 있었다면 바울이 세 번째 하늘에 갔다온 것을 그렇게 자랑스럽게 말하지는 않았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고전 12:2)을 보면 바울은 자신이 세 번째 하늘에 갔다온 이을 진술하면서, 자신이 가장 탁월한 영적인 세계에 갔다온 것처럼 말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바울의 개념은 하늘을 몇 개로 구분하던 구약 성경에서 빌려온 것으로 보입니다.
    하늘이 여러 계층으로 되어 있다고 암시하는 구절은 구약 성경에서 몇 군데 있습니다.

    예를 들어서 (신 10:14)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하늘과 모든 하늘의 하늘과 땅과 그 위의 만물은 본래 네 하나님 여호와께 속한 것이로되"(신10:14).

    여기에 보면 "하늘"과 "모든 하늘의 하늘"이 구분되어 언급되고 있습니다.
    일부 학자들은 이 구절에서 앞에 언급된  "하늘"은 우리가 눈으로 볼 수 있는 하늘을 말하고, 뒤에 나오는 "모든 하늘의 하늘"은 하나님께서 계시는 초월적인  하늘을 의미한다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와 비슷한 표현이 (왕상 8:27)에도 등장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참으로 땅에 거하시리이까 하늘과 하늘들의 하늘이라도 주를 용납하지 못하겠거든 하물며 내가 건축한 이 성전이오리이까?(왕상 8:27)"

    특히 (시 68:33)을 보면 하나님께서 "옛적"(창조 전?)에 "하늘들의 하늘"(창조 전의 하늘?)을 타셨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표현들을 보면 구약에 나오는 "하늘들의 하늘"은 눈에 보이는 하늘(대기권과 별이 있는 하늘)과 구별되는  하늘로서, 눈에 보이지 않는 초월적인 하늘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또한 신약 성경에도 눈에 보이는 하늘과 구별되는 초월적인 하늘에 대한 언급이 나옵니다.
    마가와 누가, 그리고 베드로 사도는 예수님께서 부활 후에 "하늘로 올리우셨다"(막 16:19, 눅 24:51, 행 1:10-,3:21, 벧전 3:22 등)고 말하고 있으며, 바울도 예수께서 "하늘 위에 오르셨다"(엡 4:10)고 말하고 있습니다.

    여기에 나오는 하늘은 눈에 보이는 하늘과는 다른 초월적인 하늘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점에서 생각해 볼 때에 (고후 12:2)에서 바울이 말한 세 번째 하늘은 눈에 보이지 않는 초월적인 하늘로서 하나님과 그리스도, 그리고 의인들의 영혼이 있는 곳을 언급한 것으로 보입니다.

    이는 바울이 뒤에서 세 번째 하늘을 '낙원"과 동일시하고 있는 것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고후 12:4).

    우리가 잘 아는 대로 낙원은 그리스도와 죽은 의인들의 영혼들이 거하는 처소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러면 왜 바울은 영적인 하늘을 둘째 하늘이라고 말하지 않고 세 번째 하늘이라고 말했을까요?

    아마도 바울은 대기권을 첫째 하늘로 보고, 별이 있는 광활한 천체를 둘째 하늘로 보았으며, 그리고 그

    리스도와 의인들의 영혼이 있는 초월적인 하늘을 세 번째 하늘로 간주한 것으로 보입니다.

    2.  에베소서 6;12절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에 대한 것이 아니요, 정사와 권세와 이 어두움의 세상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에게 대함이라' 했습니다. 잘 보세요 '하늘에 있는 악의 영'이라니, 그럼 하나님도 하늘에 계시고,  악한 영들도 하늘에 있다는 말인데, 하나님과 악한 영이 함께 있을 수 있습니까? 뭔가 이상하지 않나요?

    '하늘'은 세 종류의 하늘이 있고 각 하늘마다 일어나는 일이 다 다릅니다. 이해하기 쉽게 설명하면 하늘이라고 해서 다 같은 하늘이 아니라 3개의 하늘이 있다는 말입니다. (우리 개역성경은 세 단어를 모두 '하늘'이라고 번역해 버려서  하늘을 뒤죽박죽(?)만들어 놓는 우를 범하고 있습니다.)

    3층천 - 우라노이스(헤븐)  마태복음 5:18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 일획이라도 반드시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

    마태복음 5:34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도무지 맹세하지 말찌니 하늘로도 말라 이는 하나님의 보좌임이요.

    피조물계를 초월한 영원한 하늘, 거기에는 타락된 어떤 영향도 미치지 아니하고 하나님만이 온전히 존재하고 계신 가장 높은 하늘(왕상8:27, 역대하2:6, 시148:4)

    하늘(우라노스. ) οὐρανός, οῦ, ὁ 스트롱번호  3772

    1. 하늘.  2. 마 5:18.  3. 마 5:34
    발음 [ ŏuranŏs ]
    어원  / 3735와 동일어에서 유래한 듯함


    2층천 - 에프라니우스(스페이스) 요한계시록 8:13

    내가 또 보고 들으니 공중에 날아가는 독수리가 큰 소리로 이르되 땅에 사는 자들에게 화, 화, 화가 있으리니 이는 세 천사들이 불어야 할 나팔 소리가 남아 있음이로다 하더라.

    * 공중(메소우 라네마. mĕsŏu- ranēma) μεσουράνημα, ατος, τό 스트롱번호 3321

    1. 하늘 꼭대기.  2. 중천. . 계 8:13
    발음 [ mĕsŏu- ranēma ]
    어원 /  3319와 3772의 파생어에서 유래
    • 1.  하늘 꼭대기, 중천, 계 8:13, 14:6, 19:17.
    • 관련 성경  /  공중(계 8:13, 14:6, 19:17).


    대기권을 더 벗어난 그 위쪽에 타락한 악한 영들이 지배하고 있는 하늘.
    그러니까 우리의 기도가 1층천 우라노이스의 하늘까지 정확하게 올라가지 못하면 악한 영이 있는 데로 갈 수 있다는 것을 알고 하시라 그 말이에요.
    그렇게 기도를 많이 하고 여러가지 신비한 체험을 했다던 사람이 막판에 이단 교주가 되는 경우가 종종 있는데 왜 그렇습니까? (영 분별을 할 수 있는 사람들은 그 이유를 금방 알지요.)

    기도하면서 하도 뭘 보기를 원하고 체험하기를 소원하니까 중간 하늘(계 8:13)의 마귀가 기도를 가로채 뭔가 보여 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기도하면서 뭘 봤다, 뭘 받았다는 사람은 일단 조심해야 됩니다.


    1층천  - 아에르(스카이) 에베소서 2:2

    그 때에 너희가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속을 좇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이라.
    in which you used to live when you followed the ways of this world and of the ruler of the kingdom of the air, the spirit who is now at work in those who are disobedient.

    * 공중(아에르. aēr) ἀήρ, έρος, ὁ
    스트롱번호 109

    1. 공기.   2. 공중.  3. 계 9:2
    발음 [ aēr ]
    어원  / ἀθά ‘숨쉬다, 불다’에서 유래
    • 1.  공기, 계 9:2, 공중[지구를 둘러싼 하층 하늘], 행22:23, 엡2:2, 살전4:17.
    • 관련 성경  /  공중(행 22:23, 엡 2:2), 허공(고전 9:26, 14: 9), 공기(계 9:2, 16:17).


    시간세계의 하늘.
    인간이 바로 숨쉬며 살 수 있는 대기권, 우리가 눈을 들어 보는 저 파란 하늘입니다.
    이 하늘 역시 에베소서 2:2 '공중(이에르)의 권세 잡은 자' 들에게 지배를 받고 있기 때문에 악한 영의 영향이 미치고  있는 곳입니다.
    가장 수준이 낮은 곳입니다.
    그래서 눈에 보이는 돌덩이나, 그 안에 우글거리는 벌레 밖에 없는 고목(古木)이나 달이나 해를 바라보며 기도하는 종교는 가장 수준이 낮은 종교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정확하게 "하나님의 하늘에 계신 분에게 기도해라."
    악한 영이 지배하는 그 하늘도 아니고,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대기권도 아니고, 하나님이 계신 그 곳을 향해서 기도해라고 정확하게 주소를 가르쳐 주신 것입니다.

    3.  하늘 [히] 솨마임  i!yim'v;(shamayim) [아람] @yim;ve](shemain) [그] oujranov"(ouranos) [영] Heaven

    구약성경에 의하면, 하늘은 하나님에 의해 창조되고, 여러 하늘이 있는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창 1:8,14, 신 10:14 기타). [하늘]로 역된 대표적인 히브리어 명사 [샤-마임]은, 복수형으로서, [물의 장소],

    [높은 하늘의 대양]을 뜻하고, 그리스어의 [우라노스(복수, 우라노이)]는 하늘, 또는 대기를 뜻하는 말이다.

    복수형들을 쓰고 있는 것으로 보아, 여러 하늘이 생각되고 있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구름의 하늘(왕상 18:45),

    새의 하늘(창 7:23), 그 위에 하늘이 있는데(창1:20), 그것은 투명한 원형천정으로, 거기에 해와 달과 별 등의 천체가

    자리를 잡고 있다(시8:3). 그 위에 하나님께서 거주하시며, 나타나시는 하늘이 있다

    (시11:4;신26:15;왕상22:19;마 5:12,16,45,48,23:9). 그 곳에는 천사도 살고 있고(마24:26,28:2;막13:32;눅22:43),

    구속된 자들이 최후로 이르는 곳이다(마5:12,6:20,18:10;엡3:14;벧전1:4;계 19:1).

    그리스도는 하늘에서 내려오시고 (요3:13), 부활 후 하늘로 올라가셨다(행1:11;엡4:10). 그리스도는 거기서 성도들을

    위해 중보하시며, 죽은 자와 산 자를 심판하시기 위해, 다시 그 곳에서 오신다(마24:30;살전4:16;히6:20,9:24).

    이 하늘은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것으로서(창1:1;1:8,14), 종말시에는 새롭게 된다(벧후3:13;계21:1,2). 하늘은

    하나님의 보좌가 있는 곳인데서, 예수는 하늘을 향하여 기도하시고, 하늘을 향하여 가리켜 맹세하는 것은,

    하나님께 맹세하는 것으로 의미하셨다(마14:19,23:22;눅18:13).

    후대의 유대인은, 하늘을 7층으로 된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그것은 [모든 하늘 위]로도 불리웠다(엡4:10).

    바울은 [세째 하늘]에 올라갔던 경험을 말하고 있는데, 이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추측이 행해져, 첫째, 둘째, 셋째의

    하늘 등으로 구별하기도 하나, 바울이 그 구별을 생각하며, 쓴 것으로는 여겨지지 않는다.

    칼빈(Jean Calvin 1509-1564 프랑스의 종교개혁자, 신학자)이 설명하고 있는 대로, '3 이라는 숫자는, 여기서는

    지극히 높은, 아주 완전한이라는 말 대신에 씌어져 있는 것이다'.

    성경적 의미에서의 [하늘]은, 초자연적 세계,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세계의 총체로서, [하나님]의 보좌가 있는,

    거룩하고, 완전한, 하나님의 영광으로 빛나는 나라를 말한다. 특히 신약에서는 현재의 하늘은 인간의 죄로 말미암아

    더럽혀져 있고, 땅이나 바다와 함께 마침내 소멸될 운명에 있다(마24:35).

    바울은 그리스도인의 싸움은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과의 싸움임을 말하고(엡6:12), 요한계시록은, 하늘에 있어서의

    천군과 사탄의 군세와의 우주적인 처절한 싸움의 광경을 모사하고(계12:7-12), 또한 하나님 나라의 완성은 새 하늘과

    새 땅의 실현과 동시에, 그리스도에 의해 성취될 것을 말해 주고 있다(계21:1-4).

    [하늘]로 역된 원어는 히브리어와 아람어에 있어서는 모두 셋이 보여진다.

    1. [샤하크 qj'v'(shachaq)](시68:34)는 명사로서, [잘게부순다, 가루(모양)로만든다](beat fine, pulverize)는

    동사 [샤-하크 qj'v;(shachaq)]에서온말로서, [티끌](사 40:15)로도역되어잇는데, 거기서얇은것으로서의 [구름]

    을의미하고, 복수형 [셰하-킴 !yqij;v](shechaqim)]에의해 [구름](clouds)을가리켰다(욥38:37).

    이것은문맥에서공간을의미하는경우에는다음에나오는 [샤-마임]과동의어로서, [공중](욥36:28), 또는

    [하늘](시68:34)로번역되어있다.

    2. [샤-마임]은 [높아진다](be high, lofty)는어근( hm;v;)에서온말인듯하고, 복수형 [ !yim'v;(shamayim), pl.]

    만으로표현되어있다(일반적으로 heavens로역).[셰마인]은아람어명사로, 역시복수형으로씌어져있는데,

    [공중](단 2:38, 4:12,21), 또는 [하늘](스;5:12,6:9,10,7:12,21,23,23;단2:18,19,28,37,44,4:11)로번역되어있다.

    3. [우라노스 oujranov"(ouranos)](복수 oujranoiv)는 [하늘] 또는 [대기]를뜻하는헬라어명사로서, 우주의

    일부분으로, 또는하나님의거처(보좌)에대해씌어져있고(마5:18;23:22), [공중](마6:26), [하늘](마3:16,17,5:12,16)

    로 번역되어있다

    < 의견. 넷 >

     1. 좁은 의미의 궁창

    궁창(히브리어 '라키아', 헬라어 '스테오마', 라틴어 'Firmamentum')은 '두들겨 펴다',

    '때려 확장시킨다'는 '라카'에사 파생된 말로 곧 '두들겨 넓게 편 판'이란 뜻입니다.

    히브리인들은 이 판이 단단한 금속판일 것이라고 믿었습니다.욥기 37장 18절

    땅 위를 에워싸고 있는 궁창이 하늘에 대량으로 축적된 물을 지탱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단단한 고체여야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창세기 7장 11절;시편 78편 23절

    즉 궁창은 단단하고 고정되어 있는 땅의 천장 혹은 지붕으로 이해하였고, 이 지붕은 기둥 역할을 욥기 26장 11절하는

    높은 산들에 의해 지탱되고사무엘하 22장 8절 있는 줄로 믿은 것입니다.욥기 38장 22절

    2. 넓은 의미의 궁창

    궁창은 넓은 의미에서 '하늘' 전체와 같은 개념으로 쓰이고 있는데, 이 때의 궁창은 대기권의 하늘을 의미할 뿐 아니라,

    가시권의 천계 및 비가시권의 높은 하늘까지도 포함하는 말입니다.

    여기서부터 궁창 즉 하늘의 층 개념이 형성되었는데 대체적으로 다음과 같은 三層天의 하늘이 있는 것으로 믿어졌습니다. 

     1)우리의 머리 위쪽에 있는 공간의 하늘

    사람들이 호흡하는 공기를 포함하고 있는 대기권의 하늘. 공중의 조류들이 날아다니고, 구름이 떠다니며, 또한 비, 바람,

    우뢰, 이슬 등이 내려오는 장소로 이해하였습니다.시편 147편 8절;욥기 38장 29절

     2)광대한 우주 공간으로서의 하늘

    해와 달과 별 및 뭇 유성들이 붙어 있는 궁창 판과 그 거대한 양의 물을 포함하는 광대한 우주 공간으로서의 하늘로

    이해하였습니다.욥기 9장 9절,38장 31절;시편 33장 6절

     3) 하나님과 천사들의 거처로서의 하늘

    비록 히브리인들이 하나님의 무한성과 편재성을 언급하고는 있지만, 한편으로는 지극히 높은 하늘이 분명 하나님의

    거처일 것으로 소박하게 믿고 있었습니다.

    < 의견. 다섯 >

    세째하늘:Third heaven [그] trivton oujranon'(triton ouranou) [영] Third heaven뜻은 [하늘의최고처

    (가장높은곳)]. 랍비들은파라다이스와동의어로썼다. 신구약성경에 있어서하늘은, 복수형으로표시되어있는데,

    하늘은몇겹의두터운층으로되어있고, 그 [최고의하늘] t/br;[} ('raboth)이하나님의거처로생각되었다

    (시2:4,11:4;사40:22).

    엡 4:10에의하면, 그리스도는 [모든하늘] 위에로올라가셨다고말해져있고(히4:14), 바울은 그리스도안에있는

    한사람이일찍이 [세째하늘](third heaven)에끌려올라간일이있었음에대하여말하고있다(고후12:2).

    이 [세째하늘]이란, 랍비들의해석으로는파라다이스이고, 바울도그렇게이해한듯하다(고후12:4). 파라다이스는,

    본래공원,정원을뜻하는폐르샤어인데, 그리스어역구약성서(칠십인역 Septuaginia)가히브리어에서번역할때,

    에덴동산을파라다이스로역하여하나님의동산, 천국을의미하는것으로되었다. 이파라다이스는, 신약에서는,

    이것이외에눅 23:43, 계 2:7에나올뿐이다.

    "태초에하나님이천지를창조하시니라"(창1:1).

    '하늘'이라는의미의히브리어는복수이다. 성경에는세가지의하늘에관해언급하고있는데,

    이세 가지하늘은모두하나님께서창조하셨다.

    첫째하늘 - 새들과구름의집

    "그잎사귀는아름답고그열매는많아서만물의식물이될만하고들짐승이그그늘에있으며공중에나는새는

    그가지에깃들이고무릇혈기있는자가거기서식물을얻더라"(단4:12).

    "공중에나는새를보라심지도않고거두지도않고창고에모아들이지도아니하되너희천부께서기르시나니

    너희는이것들보다귀하지아니하냐"(마6:26).

    둘째하늘-해와달과별들의집

    "하늘이하나님의영광을선포하고궁창이그손으로하신일을나타내는도다"(시19:1).

    세째하늘- 천사들과죽은성도들의집

    "내가그리스도안에있는한사람을아노니십사년전에그가세째하늘에이끌려간자라

    (그가몸안에있었는지몸밖에있었는지나는모르거니와하나님은아시느니라)" (고후12:2).

    성경은 세 개의 하늘이 있음을 보여 준다. 성경의 하늘들  참조.

    첫째 하늘 - 새들과 구름이 거하는 곳.

    “내가 본즉, 보라, 사람이 없으며 하늘들의 새들이 다 도망갔고”(렘 4:25; 단 4:12; 마 6:26; 8:20 비교).
    첫째 하늘은 아름다운 곳이지만 구원받은 사람들이 영원히 거할 처소는 아니다.

    예레미야 4:25
    내가 본즉 사람이 없으며 공중의 새가 다 날아갔으며.
    I looked, and there were no people; every bird in the sky had flown away.

    다니엘 4:12
    그 잎사귀는 아름답고 그 열매는 많아서 만민의 식물이 될만하고 들짐승이 그 그늘에 있으며 공중에 나는 새는 그 가지에 깃들이고 무릇 혈기 있는 자가 거기서 식물을 얻더라.
    Its leaves were beautiful, its fruit abundant, and on it was food for all. Under it the beasts of the field found shelter, and the birds of the air lived in its branches; from it every creature was fed.

    마태복음 6:26
    공중의 새를 보라 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창고에 모아 들이지도 아니하되 너희 천부께서 기르시나니 너희는 이것들보다 귀하지 아니하냐.
    Look at the birds of the air; they do not sow or reap or store away in barns, and yet your heavenly Father feeds them. Are you not much more valuable than they?

    마태복음 8:20
    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거처가 있으되 오직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 하시더라.
    Jesus replied, "Foxes have holes and birds of the air have nests, but the Son of Man has no place to lay his head."

    II. 둘째 하늘 - 해와 달과 별이 있는 곳

    “내가 네게 복을 주고 복을 주며 또 네 씨를 하늘의 별들같이 바닷가의 모래같이 번성하게 하고 번성하게 하리니 네 씨가 자기 원수들의 문을 소유하리라”(창 22:17, 시 19:1 비교,).

    창세기 22:17
    내가 네게 큰 복을 주고 네 로 크게 성하여 하늘의 별과 같고 바닷가의 모래와 같게 하리니 네 가 그 대적의 문을 얻으리라.
    I will surely bless you and make your descendants as numerous as the stars in the sky and as the sand on the seashore. Your descendants will take possession of the cities of their enemies.


    시편 19:1
    하늘이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고 궁창이 그 손으로 하신 일을 나타내는도다.
    The heavens declare the glory of God; the skies proclaim the work of his hands.


    1960년대에 이르러서야 사람들은 처음으로 첫째 하늘을 가로질러 둘째 하늘로 가는 우주선을 만들었다.
    비록 둘째 하늘이 광대하고 아름답다 해도 첫째 하늘처럼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들이 영원히 거하는 처소는 아니다.

    III. 셋째 하늘(삼천층, 천국, 새 예루살렘) - 하나님께서 거하시는 곳.

    “내가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한 사람을 알았는데 그 사람은 십사여 년 전에 셋째 하늘로 채여 올라갔느니라. (몸 안에 있었는지 내가 말할 수 없으며 몸 밖에 있었는지 내가 말할 수 없으나 하나님은 아시느니라)”(고후 12:2, 왕상 8:27, 30 비교). 바로 이곳이 하나님께서 거하시는 실제의 셋째 하늘이다.

    고린도후서 12:2
    내가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한 사람을 아노니 십 사년 전에 그가 세째 하늘에 이끌려 간 자라(그가 몸 안에 있었는지 몸 밖에 있었는지 나는 모르거니와 하나님은 아시느니라)
    I know a man in Christ who fourteen years ago was caught up to the third heaven. Whether it was in the body or out of the body I do not know--God knows.

    열왕기상 8:27
    하나님이 참으로 에 거하시리이까 하늘하늘들의 하늘이라도 주를 용납지 못하겠거든 하물며 내가 건축한 이 전이오리이까.
    But will God really dwell on earth? The heavens, even the highest heaven, cannot contain you. How much less this temple I have built!

    열왕기상 8:30
    종과 주의 백성 이스라엘이 이곳을 향하여 기도할 때에 주는 그 간구함을 들으시되 주의 계신 곳 하늘에서 들으시고 들으시사 사하여 주옵소서.
    Hear the supplication of your servant and of your people Israel when they pray toward this place. Hear from heaven, your dwelling place, and when you hear, forgive.


    수 천 년의 노력 끝에 사람들은 첫째 하늘에서 둘째 하늘로 갈 수 있었지만 아무리 우주 공학이 발달해도 둘째 하늘에서 셋째 하늘로 사람을 데려다 줄 우주 왕복선을 만드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런 여행은 ‘뇌’에 의해 가능하지 않고 오직 ‘피’에 의해서만 가능하다.
    그래서 우리 주 예수님께서는 사람이 다시 태어나지 않으면 이런 하늘에 들어갈 수 없고 심지어 볼 수도 없다고 말씀하셨다.

    이 하늘은 셋째 하늘, 하늘의 하늘, 가장 높은 하늘 등으로 불리며 하나님뿐만 아니라 그분의 거룩한 천사들이 여기에 거한다(마 6:9).
    (마 6:9, 킹흠정)
    그러므로 너희는 이런 식으로 기도하라.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여겨지게 하옵시며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는 바로 이 하늘에 가셔서 우리를 위해 중보하며 자신의 백성이 와서 영원히 거하게 될 처소를 준비하고 계신다(엡4:10; 히8:1; 9:24-28).

    한편 예수님 안에서 죽은 자들은 모두 죽는 순간 바로 이 셋째 하늘에 간다. “내가 말하노니 우리가 확신에 차서 원하는 바는 차라리 몸을 떠나 주와 함께 있는 그것이라”(고후5:8; 빌1:23). 여기서 ‘몸을 떠난다는 것’은 육체적 죽음을 가리키며 우리 성도들은 죽으면 곧바로 주님과 함께 셋째 하늘에 있게 된다. 중간 대기소나 연옥 같은 장소로 간다는 것은 성경과는 동떨어진 미신이다.

    하나님께서 거하시는 이 셋째 하늘에는 구원받은 사람들이 거할 도시가 있으며 신구약 성도들은 바로 이 도시를 바라보았다. “이는 그가 기초들이 있는 한 도시를 바랐기 때문이라. 그것의 건축자와 만드신 분은 하나님이시니라”(히11:10; 참조 시46:4; 87:3; 요14:2-3). 그런데 이 도시 즉 새 예루살렘은 영원히 셋째 하늘에 있지 않고 하나님의 인류 구속 계획이 끝나면 하늘에서 새 땅으로 내려온다(계21:2). 바로 이 도시 새 예루살렘이 구원받은 성도들이 영원히 거할 천국이다.

    (계 21:2, 킹흠정)
    나 요한이 보매 거룩한 도시 새 예루살렘이 신부가 자기 남편을 위하여 단장한 것 같이 예비한 채 하늘에서 [하나님]으로부터 내려오더라.






    첫째 하늘, 둘째 하늘, 셋째 하늘

    바울은 셋째 하늘에 이끌려 다녀왔다고 고백했다.
    셋째 하늘은 낙원(천국)이다
    첫째와 둘째가 있으니 셋째도 있을 것이다

    첫째 하늘, 둘째 하늘, 셋째 하늘을 각각 1층천, 2층천, 3층천이라 칭한다
    1층천(First Heaven)은 사람의 거주지로 땅을 상징하며 지구에는 첫째 하늘(sky)이 있다
    2층천(Second Heaven)은 사탄과 악령들의 거처로 바울은 공중(air) 권세로 표현했다
    3층천(Third Heaven)은 하나님께서 계시는 셋째 하늘로 천국(heaven)이다

    첫째 하늘과 셋째 하늘을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궁금한 것은 둘째 하늘이다.
    둘째 하늘은 어디에 있을까?

    둘째 하늘은 첫째 하늘과 셋째 하늘 사이에 있는 중간지대(Midheaven)처럼 보인다

    지구와 천국 사이에는 우주(universe)가 있다
    그렇다면 공중 권세는 우주에 있는 것일까?

    ​"그때에 너희는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조를 따르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 역사하는 영이라" (엡 2:2)

    ​공중(air)은 영적으로 다양한 의미로 사용된다
    흑암의 권세가 거처하는 장소이고 영적으로는 어두움의 영역이다
    사탄의 거처가 우주에 있다 하더라도 우주 전체를 통치한다는 의미는 아니다
    행성 하나 정도에 거처를 정하고 있을 것이다

    ​가브리엘 천사는 다니엘에게 하나님의 응답을 전하러 가다가 바사 군주가 21일 동안 막고 가브리엘 천사를 볼모로 잡았다 (단 10:13)
    가브리엘 천사를 막을 수 있는 영은 사탄 자신 밖에 없을 것이다
    사탄은 땅과 천국 사이 어디선가 가브리엘 천사를 막았고 미가엘이 와서 도와 주었다
    그런데 천국에서 지구에 오려면 우주를 통과해야 하기 때문에 공중은 우주가 아닌가 추정하기도 한다
    사탄은 하나님의 보좌에 출입할 수 있는 권세를 허락받았다
    그는 보좌 앞에서 성도를 참소하는 역할을 한다
    그러나 사탄과 타락한 천사들의 처소가 모두 천국에 있다는 것은 아니며 사탄이 항상 천국에 머물러 있다는 의미도 아니다
    타락한 천사들의 일부는 무저갱에 갇혀 있다

    "그들에게 왕이 있으니 무저갱의 사자라 히브리어로는 그 이름이 아바돈이요 헬라어로는 그 이름이 아볼루온이더라" (계 9:11)
    "그들이 그 증언을 마칠 때에 무저갱으로부터 올라오는 짐승이 그들과 더불어 전쟁을 일으켜 그들을 이기고 그들을 죽일터인즉" (계 11:7)

    ​또한 유다서에는 흑암에 갇힌 천사들이 있다고 기록했다

    "또 자기 지위를 지키지 아니하고 자기 처소를 떠난 천사들을 큰 날의 심판까지 영원한 결박으로 흑암에 가두셨으며" (유 1:6)

    흑암에 갇힌 천사들은 창세기 6장에 기록된 하나님의 아들들로 사람의 딸과 결혼하여 네피림 자손을 낳은 천사들로 보인다
    유다는 다른 사례도 창세기와 에녹서에서 인용했는데 에녹서 6장에는 이들의 수가 200명으로 기록되었다
    이들은 종신형을 받고 흑암이라는 제3의 장소에 갇혀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그렇다면 사탄과 타락한 대다수 천사들의 거처는 어디인가?
    이사야는 사탄이 하늘에서 떨어져 나갔다고 한다

    "너 아침의 아들 계명성이여(루시퍼) 어찌 그리 하늘에서 떨어졌으며" (사 14:12)

    반역한 천사들은 외모와 성품이 흉칙하게 변했기 때문에 그들은 천국에서 추방당했을 것이다

    아담과 하와도 범죄하였을때 에덴에서 추방되었다

    또 계시록에서는 붉은 용 사탄이 하늘의 별 1/3을 끌어다 땅에 던졌다는 기록이 있다

    "그 꼬리가 하늘의 별 삼분의 일을 끌어다가 땅에 던지더라" (계 12:4)

    하늘에서 천사들의 반역사건이 있었을 때 천사들 중 1/3이 반역에 가담했다는 말이 여기에서 유래되었다

    그런데 계시록에는 하늘에서 일어난 천사들의 전쟁을 기록하였다

    "하늘에 전쟁이 있으니 미가엘과 그의 사자들이 용과 더불어 싸울새 용과 그의 사자들도 싸우나 이기지 못하여 다시 하늘에서 그들이 있을 곳을 얻지 못한지라

    큰 용이 내쫓기니 옛 뱀 곧 마귀라고도 하고 사탄이라고도 하며 온 천하를 꾀는 자라

    그가 땅으로 내쫓기니 그의 사자들도 그와 함께 내쫓기니라" (계 12:7~9)

    사탄과 미가엘 사이에 전쟁이 일어났다.
    예수 그리스도는 사탄과 직접 상대하지 않으신다

    "이 후에는 내가 너희와 말을 많이 하지 아니하리니 이 세상의 임금이 오겠음이라 그러나 그는 내게 관계할 것이 없으니" (요 14:30)

    ​그리스도께서 사탄과 직접 상대한 것은 사람으로 오셨을 때, 세 가지 시험을 받았을 때가 유일했다.
    이는 우리도 주님처럼 세상의 유혹과 테스트를 통과해야 함을 알려준다.
    사탄과의 전쟁은 군대 천사장 미가엘이 상대한다.
    사탄을 쇠사슬로 결박한 이도 이름 없는 한 명의 천사였다 (계 20:1~3)

    ​그런데 계시록 12장의 미가엘과 사탄과의 전쟁은 어디에서 일어난 것인가?
    그리고 이 전쟁은 과거 사건인가? 미래 사건인가?
    여러 견해들을 보면 다음과 같다

    ① 3층천에서 사탄은 최초 반역한 때의 전쟁으로 과거 사건이다

    반역한 천사들의 1/3이 천국에서 추방당한 것은 과거 사건이지만 미가엘 군대와의 전쟁도 과거 사건인가?
    여자의 정체를 밝히기 위해 과거 사건인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 장면도 기록되기는 했다(계 12:1~2)

    ② 2층천에서 일어난 전쟁이다

    이 전쟁에서 패배한 사탄은 1층천으로 쫓겨난다
    그러나 현재 사탄은 참소의 자격이 박탈되지 않았으므로 이는 미래 사건이다.

    둘째 하늘과 셋째 하늘은 영적입니다.
    둘째 하늘은 과연 어떤 곳일까요?
    성경에 따르면, 스스로 교만하고 범죄/타락하여 마귀/싸탄('도전자')이 된 천사장 헬렐(라틴어 '루키페르', 영어 '루시퍼')과 그의 따르미 천사들은 셋째 하늘에서 쫓겨난 뒤로 공중 권세를 잡은 존재로 활동하고 있습니다(이사야 14:11-17, 에제키엘=겔 28:11-17, 요계 12:4).
    주님께서는 마귀를 '세상 신', '세상 임금'으로 부르셨습니다. 즉 공중에서 세상을 지배하고 있는 것입니다(에페소서 2:2).
    이들이 바로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입니다(에페소 6:12).
    물론 이 하늘은 결코 셋째 하늘일 수가 없습니다.
    따라서 이들이 진치고 있는 이 '공중', '하늘'이 바로 둘째 하늘이 아니고 뭣이겠습니까?
    에페소 6:12에 묘사됐듯, 둘째 하늘은 세상의 어떤 군대나 정부 조직보다 체계적이고 조직인, 일사불란한 마귀의 영적인 정부와 본부 즉 계급사회가 구축된 곳으로.. 여기서 악한 천사들은 지상 곳곳에 고루 심어 둔 '강한 자'들과 (저급한) 악령들을 통해 지상의 모든 정부와 조직체를 떡 주무르듯 조종합니다! 그래서 온갖 악과 음모가 자행되고 있는 겁니다.
    영적/비가시적 요소가 가시적 요소보다 훨씬 더 실재적이지요. 가시적인 모든 것은 영적인 것들의 그림자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이 땅과 첫째 하늘과 둘째 하늘은 언젠가 다 말려서 사라지고 불타버릴 때가 옵니다(페트로B=벧후 3:7,10-13, 요계 6:14, 20:11, 21:1).
    바로 하나님이 새 하늘과 새 땅을 창조하실 때이지요!



    ③ 3층천에서 자기의 지위를 되찾기 위해 2층천에서 3층천으로 쳐들어간 전면전이다

    그러나 이 전쟁에서 패한 사탄은 2층천에서도 거처를 빼앗기고 1층천으로 쫓겨난다 (미래 사건)

    추정하기에는 ②항이 유력하지만 전쟁의 장소가 in heaven으로 기록하고 있어서 ③항일 가능성도 있다

    그러나 구약에서는 모든 하늘들을 heaven으로 기록했는데 거주지 전체를 상징한다

    사탄은 결국 지속적으로 추락한다

    3층천(천국) → 2층천(공중) → 1층천(지구) → 무저갱(천년) → 불못(영원)

    사탄이 땅으로 쫓겨나면서 변화 요인이 생겼다

    ① 우리 하나님 앞에서 밤낮으로 참소하던 한정된 권한이 박탈당한다

    "우리 형제들을 참소하던 자 곧 우리 하나님 앞에서 밤낮 참소하던 자가 쫓겨났고" (계 12:10)

    ② 땅과 바다(지구)는 화(禍)가 증가한다

    "땅과 바다는 화있을진저 이는 마귀가 자기의 때가 얼마남지 않은 줄을 알므로 크게 분내어 너희에게 내려갔음이라 하더라" (계 12:12)

    타락한 악령들이 지구를 새까맣게 덮으면 어떤 일이 일어날지 상상하기 힘들다

    ③ 하늘의 전쟁에서 패한 마귀는 땅에서 전쟁을 일으킨다

    이스라엘을 제거하려 하지만 땅에서도 실패한 후 최종 아마겟돈 전쟁을 일으켜 재림하시는 그리스도에게 도전한다

    "용이 자기가 땅으로 내쫓긴 것을 보고 남자를 낳은 여자를 박해하는지라

    여자의 뒤에서 뱀이 그 입으로 물을 강 같이 토하여 여자를 물에 떠내려 가게 하려 하되 땅이 여자를 도와 그 입을 벌려 용의 입에서 토한 강물을 삼키니" (계 12:13~16)

    ④ 사탄은 분노하여 여자의 남은 자손을 제거하려고 한다

    여자의 남은 자손은 이방 교회에서 휴거되지 못하고 환난에 남은 신자들이다

    7년 환난 중에는 더 이상 교회라는 용어를 사용하지 않는데 교회도 물리적으로 더 이상 존재하기 힘들기 때문이다

    이 때는 성도들을 개별적으로 박해한다

    "용이 여자에게 분노하여 돌아가서 그 여자의 남은 자손 곧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며 예수의 증거를 가진 자들과 더불어 싸우려고 모래 위에 서 있더라" (계 12:17)

    결국 용과 짐승과 거짓 선지자는 전 세계의 기독교인들을 얼마든지 죽이려고 한다

    땅에 쫓겨난 마귀와 그의 타락 천사들에게 남은 시간은 약 3년 반 정도다

    그 후에는 무저갱에 천년간 감금된다

    타락한 천사들은 어떻게 될까?

    그들은 초자연적인 주님의 말씀에 따라 불못으로 추방될 가능성이 높다

    두 명의 짐승도 이때 산 채로 불못에 던져진다

    천년 후에 곡과 마곡을 미혹하는 것은 사탄 자신 혼자뿐이다

    타락한 천사들은 7년 환난을 끝으로 더 이상 역할이 없다

    사탄을 불못에 던지지 않고 무저갱에 감금한 이유는 천년 왕국 후에 곡과 마곡을 미혹할 역할이 아직 남아있기 때문이다

    무저갱은 임시 감금 장소지만 불못은 한번 던져지면 다시 나올 수 없다

    환난에 남은 성도들은 죽을지언정 최후 승리를 하게 될 것이다

    "또 우리 형제들이 어린 양의 피와 자기들이 증언하는 말씀으로써 그를 이겼으니 그들은 죽기까지 자기들의 생명을 아끼지 아니하였도다" (계 12:11)

    이들에게 일시각오 순교정신이 필요하다

    ​땅에서 이토록 비참한 상황이 전개되는 와중에 하늘에서 큰 음성이 선포된다
    "그러므로 하늘과 그 가운데에 거하는 자들은 즐거워하라" (계 12:12)
    하늘에 거하며 즐거워하는 무리는 누구인가?
    이들은 휴거로 올라온 신부들이다

    신부들은 하늘로 끌려 올려가고(휴거), 마귀는 땅으로 쫓겨나서 남은 신자들을 박해한다(순교)
    휴거와 순교, 어떤 길을 선택할 것인가?
    환난 전에 신부로 준비하는 슬기로운 다섯 처녀들이 하늘에 있고 잠에 빠져 준비하지 않은 미련한 처녀들이 땅에 있다.
    미련한 처녀들에게도 두 번째 순교의 기회가 있다는 것은 다행이다.

    "그러므로 너희도 준비하고 있으라  왜냐하면 너희가 생각하지도 않은 시간에 인자가 올 것이기 때문이다" (마 24:44)

    새 하늘과 새 땅을 보는 사도 요한(계 21:1-8)

    요한계시록 21장에서는 사도 요한이 새 하늘과 새 땅을 보게 됩니다.
    이전의 하늘과 땅은 모두 사라졌습니다.
    바다도 다시 있지 않습니다.
    천국이 열렸습니다.
    구원받은 백성이 영원히 살아갈 세계가 펼쳐지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 천국에 들어가기 위해서 예수님을 믿어야 합니다.
    예수님을 믿지 않으면 구원은 없습니다.
    인간은 스스로 구원받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면서 우리가 믿음 생활을 해야 하겠습니다.
    시대가 흘러가면서 복음이 빛을 발할 때가 있습니다.
    그때는 세상이 혼탁하고 어두울 때입니다.
    세상이 혼돈하고 어지러울 때 복음은 빛을 더 냈습니다.
    지금 시대도 마찬가지입니다. 세상의 정치, 경제, 종교에 이르기까지 혼탁하고 어지럽습니다. 하나님의 공의는 사라졌고 인간의 의만 나타내며 거짓과 불법과 권력이 난무하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그런데도 인간들은 하나님께 회개하지 않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믿지도 않고 인정하지도 않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복음은 땅에 떨어졌고 종교계도 타락하여 세상과 결탁하고 영혼을 살리는 데는 관심이 없고 세만 불리는데 정신이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의를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행위의 의를 드러내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믿음으로 구원을 외치는 것이 아니라 인간 행위의 구원을 외치고 있습니다.
    이럴 때 복음은 더욱 빛을 발하게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의가 더 빛나게 됩니다.
    복음은 작은 것 같지만 엄청난 힘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함께하시기 때문입니다. 지금 세상은 종말이 없는 것처럼 생각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마지막을 준비하지 않고 이 세상이 끝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우리는 이럴 때 종말을 준비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새 하늘과 새 땅이 도래한다고 말씀합니다. 세상이 힘들어지고 어두워질 때 우리는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바라보아야 합니다. 세상이 코로나로 창궐하고 있지만 하나님은 하나님의 백성을 끝까지 지켜서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게 합니다. 구원받은 자는 이 세상이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에게는 새 하늘과 새 땅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이곳에서 영원히 살게 됩니다.


    창세기 1:8, 하늘(שָׁמַיִם, 샤마임, heaven)


    개역개정 성경과 ESV의 창세기 1장 8절

    하나님이 궁창을 하늘이라 부르시니라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둘째 날이니라

    And God called the expanse Heaven. And there was evening and there was morning, the second day.

    히브리어 성경의 창세기 1장 8절

    וַיִּקְרָ֧א אֱלֹהִ֛ים לָֽרָקִ֖יעַ שָׁמָ֑יִם וַֽיְהִי־עֶ֥רֶב וַֽיְהִי־בֹ֖קֶר יֹ֥ום שֵׁנִֽי׃

    שָׁמַיִם(샤마임, 하늘, heaven)에 대한 정리와 여러 해석들

    שָׁמַיִם(샤마임, 하늘, heaven)은 남성 명사입니다.
    그리고 쌍수로 문자적으로 '두 개의 하늘'을 의미하지만 일반적으로 '하늘, 하늘들, 창공' 등으로 번역한다.
    그리고 아마도 샤마임은 '높다'를 뜻하는 동사 샤마에서 유래된 것이므로, '높은 곳'이라는 의미를 함축한다(B. D. Lexicon of th OT).

    1. שָׁמַיִם(샤마임, 하늘, heaven)의 의미 - 하늘, 창공

    שָׁמַיִם(샤마임, 하늘, heaven)은 물리적 하늘, 즉 보이는 하늘, 창공을 뜻한다.
    하늘은 공중에 있는 모든 것을 포함하며, 문맥에 따라 하늘 전체를 가리킬 수도 있고 단지 일부분만을 가리킬 수도 있다.
    하늘과 땅이 함께 우주를 구성하며 하나님에 의해 창조되었다(창 1:1).
    하늘에서 비가 오고(창 8:2), 눈(사 55:10)과 서리가 내리고(욥 38:29), 이슬이 생겨나고(신 3:13, 창 27:28), 우뢰(삼상 2:1)가 발하며, 불이 내려오기도 한다(왕하 1:10, 욥 1:16).
    하늘에는 새가 날고 있다(창 1:30, 신 4:17, 렘 8:7, 잠 23:5).

    하늘은 구름으로 어두워지고(왕상 18:45), 바람으로 맑아진다(욥 26:13).
    하나님은 그의 곳간에서 바람을 내신다고 한다(시 135:7).
    슥 2:6에서는 하늘의 사방 바람에 대하여 말한다.
    하늘은 해와 달과 행성과 별들을 붙들고 있다(창 1:14, 창 15:5, 사 14:12, 암 5:26).

    은유적으로 성경은 하늘의 창문(창 7:11, 왕하 7:2, 말 3:10)에 대해 언급하며, 하늘은 문(창 28:17, 시 7:23), 기둥(욥 26:11), 기초(삼하 22:8)를 가지고 있고 천막이나 커튼같이 펼쳐져 있는 것으로 말한다(사 40:22).
    이러한 비유적 표현은 종종 현상학적이며, 또한 편리하고도 생생한 힘이 있다.
    따라서 이스라엘이 불순종할 때 하늘은 철(레 26:19)이나 놋(신 28:23)과 같이 되고 필요한 만큼의 비를 내리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2. שָׁמַיִם(샤마임, 하늘, heaven)의 의미 - 하나님께서 계시는 하늘

    שָׁמַיִם(샤마임, 하늘, heaven)의 또다른 의미는 하나님이 거하시는 거처인 '하늘'이다.
    하늘은 하나님의 거처이며(신 26:15, 왕상 8:30-49, 대상 21:26, 시 139:7-8).
    하나님은 하늘에서 통치하시며(신 4:35-36, 신 33:26, 신 33:27), 간구를 들으며(왕상 8:30-39, 왕상 8:54-56, 대상 21:26, 대하 7:14, 느 9:27, 시 20:6) 재앙을 내리신다(창 19:24, 삼상 2:10, 단 4:13-17).
    에스겔은 하늘이 열리고 거기 계시는 하나님의 이상을 보았다(겔 1:1).

    하늘은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고(시 19:1), 그의 의를 선포하고(시 50:6, 시 97:6), 그를 찬양한다(시 69:34).
    그러나 하늘이 아무리 장대하다 할지라도 창조주 하나님에 비하면 보잘것없는 것이니 예배해서는 안된다(출 20:4, 렘 44:17-25).
    하늘은 비록 하나님의 보좌이긴 하지만(사 66:1) 어느 날 그 종말이 오나니 연기같이 사라질 것이며(사 51:6) 두루마리 같이 말릴 것이다(시 34:4).
    그때에 하나님께서 새 하늘과 새 땅을 창조하실 것이다(사 65:17, 사 66:22, 벧후 3:13, 계 21:1-4).

    3. שָׁמַיִם(샤마임, 하늘, heaven)의 의미 - 의인화된 하늘

    שָׁמַיִם(샤마임, 하늘, heaven)은 또한 여러가지 관계에서 의인화된 '하늘'. 사 1:2, 렘 2:12, 욥 15:15, 시 50:6, 시 97:6, 시 89:5.









    왜 예수님은 초월하신 하나님을 말씀하고 계십니까? 우리 인간을 구원하려면 초월하신 분이셔야 하기 때문입니다. 초월하다는 말은 무한하시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이 초월하시기에 우주를 만드시고 또 다스리고 인간을 구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초월하신 하나님이 우리의 아빠 노릇을 해 주셔야 우리가 구원을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초월성을 부인하는 신론을 범신론이라고 합니다. 힌두교나 불교가 대표적인 범신론 종교입니다. 이런 종교의 구원론은 자력 구원론입니다.

    반면에 거꾸로 신의 초월성은 강조하나 신의 내재 즉 신이 우리를 구원하러 우리에게로 와야 한다는 측면을 부정하거나 약화시키는 신론이 있는데 그것을 이신론이라고 합니다. 대표적으로 이슬람이 여기에 속합니다. 이슬람 신학에서는 우리 인간을 구원할 수 있는 신이 존재합니다. 바로 알라입니다. 그들은 기도의 첫마디에 “알라는 위대하시다”라고 고백합니다. 그러나 그 알라는 하늘 저 꼭대기에 홀로 앉아 있을 뿐이지, 결코 타락한 세상에 오지 않습니다. 결국 자력으로 구원받아야 합니다. 그래서 메카를 순례하고, 금욕을 하고, 라마단 금식을 하며, 하루에 다섯 번씩 기도를 하고, 동냥을 많이 주어서, 적선을 많이 해야 한다고 하는 자력구원에 빠지고 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존재에 대해서 설명하기를 하늘에 계시는 초월적인 분이지만, 우리에게 오셔서 아빠 노릇해주시는 친근한 내재적인 분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기독교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믿는 하나님이십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을 땅에 계신 아버지라고 하지 않고, 하늘에 계신 아버지라고 강조하며 부르셨습니다. 땅의 아버지가 없어서 고독하신 분이 있습니까? 하늘에 계신 아버지가 바로 나의 아버지요 우리의 아버지라는 사실을 기억하고 기뻐하십시오. 땅의 아버지가 못마땅하고 변변하지 못해서 불평하는 분들이 있습니까? 전능하신 하늘의 아버지가 바로 여러분 곁에 계시다는 사실을 알고 감사드리십시오. 땅에 계신 아버지가 아무리 존경스럽고 훌륭해도 나와 더불어 영원히 계시지 못합니다. 그러나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는 나와 더불어 영원히 함께 거하십니다. 땅에 있는 아버지는 여러 가지 면에서 불완전하나 하늘에 계신 아버지는 완전하시고 완벽하시고 온전하신 아버지이심을 믿습니다.

    또한, 땅에 있는 아버지는 재산, 지능, 지혜, 지식, 건강, 감정에 한계가 있지만, 하늘에 계신 아버지는 모든 것을 소유하시고 우리를 부요함으로 인도하시는 분이십니다. 이 하늘의 아버지를 찬양하며 영광 돌리는 위대한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누가복음에 보면 탕자의 비유가 나옵니다. 아버지로부터 재산을 분배받은 후 집을 떠나 모든 재산을 탕진한 작은 아들이 깊은 절망과 좌절 가운데서 자신에게 남아 있는 마지막 희망을 발견했습니다. 그것은 아버지께서 자기를 아직 기다리고 계신다는 사실이었습니다. 그는 아버지께 돌아가면 자신을 받아 주실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 모습 그대로 아버지께로 가서 그 품에 안겼던 것입니다.

    오늘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은 이 비유의 작은 아들과 같습니다. 우리는 아버지께로부터 위탁받은 값진 것들을 모두 탕진하고 못쓰게 만들었습니다. 우리 스스로 생명의 질서를 파괴하였습니다. 희망이 사라지고 삶의 목적이 무너져 내린 우리들이 살 수 있는 길은 “하늘에 계신 우리 아빠”에게로 우리의 시선을 고정시키고 돌아서서 기도해야만 합니다. 이것이 사는 길입니다.

    ③하늘에 계신 아버지는 누구의 아버지인가?

    우리 아버지

    주기도문은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로 시작합니다. 이 기도문에 중요한 단어가 또 하나가 있습니다. 바로 하늘에 계신 아버지는 “우리” 아버지라는 것입니다. ‘나’만의 아버지가 아니라 “우리” 모두의 아버지입니다. “우리”라는 말에는 공동체적 의미를 포함하고 있고, 보편성과 우주성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라는 기도를 드릴 때, 우리는 미움과 시기와 질투와 인간적인 감정들을 다 내려놓고 당신도 나와 같이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진심으로 고백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아버지입니다.

    한국 사람의 아버지이고 일본사람들의 아버지이고 북한 사람들의 아버지이고 열방의 모든 백성들의 아버지이십니다. 이것이 예수님이 가르쳐주신 첫 번째 기도입니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라는 기도문을 기쁨으로 통과하기를 바랍니다.

    질문) 당신의 마음에 미움의 대상이 있는지요? 어떤 편견 때문에 그들을 위해 기도하기가 싫은지요. 내가 미워하는 사람에게도, 하나님은 아버지가 되십니다. 하나님은 ‘나’만의 아버지가 아니라 “우리” 모두의 아버지입니다. 당신의 기도가 막히지 않기 위해서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대상16:26 - 주님이 만든 하늘들 (첫째, 둘째, 셋째 하늘)

    백성들의 모든 신들은 우상들이나

    {주}께서는 하늘들을 만드셨도다. (대상16:26-하단박스)

     

     

    주 하나님은 하늘들을 만드신 분입니다 (대상16:26)..

    하나님은 물을 나누셔서 하늘들을 창조하셨습니다 (창1:6-8).

     

    성경에는 셋째 하늘까지 나와 있습니다 (고후12:2).

     

    1. 첫째 하늘

    첫째 하늘은 우리가 말하는 대기권, 즉, 구름이 보이고 비행기가 날아가는 하늘입니다.

     

    2. 둘째 하늘

    둘째 하늘은 시148:3-4을 통해 정리해 보겠습니다.

    시148:3에 해와 달과 별들이 언급된 것으로 봐서 우주 공간이라 생각됩니다.

     

    heavens of heavens (하늘들의 하늘들) 이며 waters that [be] above the heavens (물이 하늘들 위에 있다),

    즉 하늘들의 하늘들이라는 것은 하늘 위에 있는 또 하나의 하늘이 있는 것을 알수 있고,

    복수의 하늘들이므로 첫째 하늘과 둘째 하늘, 그 위에 물이 있는 것입니다.

     

    첫째하늘인 대기권 위에 둘째하늘인 우주 공간이 있고, 그 위에 거대한 물층이 있고, 그 위에 셋째 하늘이 있습니다.

     

    물층은 창1:6-8에 언급되었는데 물들과 물들이 나누어져 궁창 위의 물과 궁창 아래의 물로 나누어졌습니다 (창1:7).

    궁창은 물들 가운데 있습니다 (창1:6).

     

    그 궁창을 하나님이 하늘이라 부르셨습니다 (창1:8).

    바로 이것이 둘째 하늘, 즉 우주 공간입니다.

    이 궁창, 즉 우주 공간을 해와 달과 별들로 채우셨습니다 (창1:14-17).

    그리고 궁창(하늘) 아래의 물들은 한곳으로 모여 바다가 되었습니다 (창1:9-10).

     

    둘째 하늘은......

    높은 곳에 처소를 둔(옵1:3) 사탄이 거하는 공간입니다.

    공중(air)의 권세 잡은 통치자가 있는 곳입니다 (엡2:2).

     

    용과 그의 천사들이 이곳으로부터 쫒겨 땅으로 내려왔습니다 (계2:9).

    이 곳은 영적 사악함이 있는 높은 처소입니다 (엡6:12).

    이 곳에서 사탄이 번개같이 떨어졌습니다 (눅10:18).

     

    이 곳이 창조된 날에는 하나님이 “좋았더라”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창1:8).

    왜냐하면 이 하늘은 깨끗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욥15:15).

     

    3. 셋째 하늘

    셋째 하늘은 바울이 언급한 낙원이 있는 하늘입니다 (고후12:2).

    성도가 죽어서 가는 천국이 성경에 ‘하늘(Heaven)’로 번역되었습니다.

     

    예수님이 부활한 후, 그 곳에는 새로운 처소가 마련되고 있습니다 (요14:2-3).

    주님은 다시 오셔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을 그 곳으로 데려 가실 것입니다.

     

    우리는 새 하늘과 새 땅에 사는 하늘나라 백성이 될 것입니다.

    새 하늘과 새 땅에(계21:1), 새 예루살렘이 지어지고(계21:2) 우리는 그 영원한 세상에 살게 될 것입니다.

    새 예루살렘이 있는(계21:2) 새 하늘과 새 땅이 있는 그 곳은 시간의 제약이 없는 무한 세상입니다.

     

    전 우주적으로 의가 통치하는 무한 상태, 끝이 없는 세상입니다.

    하나의 하늘과 하나의 땅으로 구성되었고, 바다가 없습니다.

     

    셋째 하늘은.......

    이 하늘은 거룩한 하늘 입니다 (시20:6).

    이 하늘은 측량할 수 없습니다 (렘31:37).

     

    이 하늘에는 우리가 거주할 집이 있습니다 (요14:2, 고후5:1).

    이 하늘의 새 예루살렘이 우리가 거할 처소입니다 (계21:2).

    이 하늘에는 우리가 소원하고 바라던 모든 것이 있습니다.

     

    이 하늘에는 우리가 만날 주님이 계십니다.

    주님의 얼굴을 보게 되고

    만유의 주 하나님과 완전한 연합을 이루게 됩니다.

     

    [성경비교] 대상16:26

    1. KJV는 people (사람들, 만백성) 이라 했고, NIV는 nations (만방, 만국) 라고 했습니다.

    우상을 만드는 것은 사람들입니다.

     

    2. idols에 대한 한글 번역의 오류

    흠정역과 한킹은 우상들이라 했고, 개역, 개정은 헛것이라 했습니다.

     

    idol의 뜻은 우상, 신상(神像); 숭배의 대상, 경애(敬愛)의 대상 등입니다.

    단어의 뜻 그대로 우상들이라고 번역해야 합니다.

     

    3. LORD의 한글 번역의 오류

    개역, 개정은 LORD를 여호와라고 번역했습니다.

    번역의 오류입니다.

     

    하늘들을 만드신 분은 하나님 뿐 아니라 예수님이기도 합니다.

    예수님은 신약의 LORD이며 창조주 하나님입니다.

     

    LORD를 주라고 번역해야 창조주 예수님을 연결할 수 있습니다.

    단어 그대로 번역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관련구절]

    * 창1:6-8 ¶하나님께서 이르시되, 물들의 한가운데 궁창이 있고 또 그것은 물들에서 물들을 나누라, 하시고

    / 하나님께서 궁창을 만드사 궁창 위의 물들에서 궁창 아래의 물들을 나누시니 그대로 되니라.

     

    / 하나님께서 궁창을 하늘이라 부르시니라. 그 저녁과 아침이 둘째 날이더라.

     

    * 고후12:2 내가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한 사람을 알았는데 그 사람은 십사여 년 전에 셋째 하늘로 채여 올라갔느니라. (몸 안에 있었는지 내가 말할 수 없으며 몸 밖에 있었는지 내가 말할 수 없으나 하나님은 아시느니라.)

     

    <둘째하늘>

    * 시148:3-4 해와 달아, 너희는 그분을 찬양하라. 빛을 내는 모든 별들아, 너희는 그분을 찬양할지어다

    / 하늘들의 하늘들아, 또 하늘들 위에 있는 물들아, 너희는 그분을 찬양할지어다.

     

    * 창1:14-17 ¶하나님께서 이르시되, 하늘의 궁창에 광체들이 있어서 밤에서 낮을 나누고 또 그것들은 표적들과 계절들과 날들과 해(年)들을 나타내라.

     

    / 또그것들은 하늘의 궁창에서 빛이 되어 땅 위에 빛을 주라,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

     

    / 하나님께서 커다란 두 광체를 만드사 큰 광체는 낮을 다스리게 하시고 작은 광체는 밤을 다스리게 하시며 또 별들도 만드시고

    / 하나님께서 그것들을 하늘의 궁창에 두사 땅 위에 빛을 주게 하시며

     

    <지구의 바다>

    * 창1:9-10 ¶하나님께서 이르시되, 하늘 아래의 물들은 한 곳으로 함께 모이고 마른 육지는 드러나라,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

     

    / 하나님께서 마른 육지를 땅이라 부르시고 물들이 함께 모인 것을 바다들이라 부르시니라.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좋았더라.

     

    <사탄이 거하는 하늘 - 둘째 하늘 >

    * 엡2:2 지나간 때에는 너희가 그것들 가운데서 이 세상의 행로를 따라 걸으며 공중의 권세 잡은 통치자 곧 지금 불순종의 자녀들 가운데서 활동하는 영을 따라 걸었느니라.

     

    * 계2:9 그큰 용 즉 저 옛 뱀 곧 마귀라고도 하고 사탄이라고도 하며 온 세상을 속이는 자가 내쫓기더라. 그가 땅으로 내쫓기니 그의 천사들도 그와 함께 내쫓기니라.

     

    * 엡6:12 우리는 살과 피와 맞붙어 싸우지 아니하고 정사들과 권능들과 이 세상 어둠의 치리자들과 높은 처소들에 있는 영적 사악함과 맞붙어 싸우느니라.

     

    * 눅10:18 그분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사탄이 하늘로부터 번개같이 떨어지는 것을 내가 보았노라.

     

    * 창1:8 하나님께서 궁창을 하늘이라 부르시니라. 그 저녁과 아침이 둘째 날이더라.

     

    * 욥15:15 보라, 그분께서는 자신의 성도들을 신뢰하지 아니하시나니 참으로 하늘들이라도 그분의 눈앞에서 깨끗하지 아니하거든

     

    <셋째 하늘>

    * 요14:2-3 내[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내가 너희에게 말해 주었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해 처소를 예비하러 가노니

     

    / 가서 너희를 위해 처소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받아들여 내가 있는 곳에, 거기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

     

    * 계21:1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보았으니 이는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이 사라졌고 바다도 다시는 있지 아니하였기 때문이더라.

     

    * 계21:2 나요한이 보매 거룩한 도시 새 예루살렘이 신부가 자기 남편을 위하여 단장한 것 같이 예비한 채 하늘에서 하나님으로부터 내려오더라.

     

    * 시20:6 {주}께서 자신의 기름 부음 받은 자를 구원하시는 줄 이제 내가 아노니 그분께서 자신의 거룩한 하늘로부터 자신의 오른손의 구원하는 능력으로 그의 말을 들으시리로다.

     

    * 렘31:37 {주}가 이같이 말하노라. 만일 사람이 위로 하늘을 잴 수 있고 아래로 땅의 기초들을 찾아낼 수 있을진대 나 또한 이스라엘의 모든 씨가 행한 모든 것으로 인하여 그들을 버리리라. {주}가 말하노라.

     

    * 고후5:1 만일 땅에 있는 우리의 이 장막 집이 해체되면 하나님의 건물 곧 손으로 지은 집이 아니요, 하늘들에 있는 영원한 집이 우리에게 있는 줄 우리가 아느니라.

     

    역대상16:26 people (사람들, 만백성) vs. nations (만방, 만국)

      흠정역, 한킹, 한국어 권위역 / KJV

    개역, 개역, 공동번역 / NIV

    만백성의 모든 신들은 우상들이나 {주}께서는 하늘들을 만드셨도다. (흠정역)

     

    사람들의 모든 신들은 우상이나 주께서는 하늘들을 지으셨도다. (한킹)

     

    왜냐하면 민족들의 모든 신들은 우상들이나, {주}께서는 하늘들을 만드셨기 때문이다. (한국어 권위역)

     

     

    만방의 모든 신은 헛것이요 여호와께서는 하늘을 지으셨음이로다 (개역)

     

    만국의 모든 신은 헛것이나 여호와께서는 하늘을 지으셨도다 (개정)

     

    뭇 민족이 섬기는 신은 모두 허수아비지만, 야훼께서는 하늘을 만드셨다. (공동번역)

     

     

     

    For all the gods of the people [are] idols: but the LORD made the heavens. (KJV)

     

     

    For all the gods of the nations are idols, but the LORD made the heavens. (NIV)

     







    솔로몬이 인간적 수단에 의지하여 나라를 정치 경제적으로는 크게 부강 시켰습니다.
    그러나 그 부작용으로 이스라엘로 우상숭배의 타락에 빠지게 하고, 또 재임 기간 내내 대규모 건축토목공사에 동원된 백성을 피곤케 해 나라가 남북으로 나뉘게 되는 원인을 제공한 것은 분명 큰 잘못입니다.
    그럼에도 성전을 건축하고 봉헌하면서 백성을 대표하여 여호와께 드린 기도를 보면 통치 초기의 그의 믿음은 순전했던 것 같습니다.

    우선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단순히 상천하지에 한 분이라는 그분의 실존성만 아니라 당신의 백성과 종들에게 행한 언약을 신실히 지키시는 분이라고 고백합니다.
    성전 건축의 공로와 영광도 아비 다윗에게 행한 약속을 당신께서 지키신 것이라고 오직 하나님께만 돌린 후에 앞으로도 그 언약대로 자신과 이 나라를 이끌어 달라고 간구합니다.(22-26절)

    이어서 하나님이 성전을 짓게 한 목적을 정확하게 깨닫고 그대로 입술로 시인합니다.
    그 웅장하고 아름답게 지어진 성전이라도 하나님을 도무지 용납할 수 없다고 고백했습니다.
    사람이 지은 전에 하나님이 도저히 거할 수 없고 오직 당신의 이름만을 두시되 자신과 백성들의 기도를 하는 곳으로만 활용하겠다고 합니다.(27-30절)

    그런데 솔로몬 본인과 백성들이 성전으로 직접 오거나 성전을 향해 보면서 하늘에 계신 하나님께 드릴 기도의 내용이 무엇이라고 말합니까?
    본문 30절 끝에 “사하여 주옵소서(forgive)”라는 한마디로 표현되어 있습니다.
    자신과 백성들이 하나님과 그분의 계명을 위반한 죄들을 회개하는 기도를 이곳에서 드릴 테니 당신의 이름으로 용서해달라는 것입니다.

    실제로 31절 이하에 기도할 내용을 구체적으로 설명하면서 주께 범죄 한 것(31, 33, 35절)이라고 했습니다. 기근, 온역, 황충, 적국침입, 재앙, 질병 등도 자기들 마음의 재앙에 원인으로 돌리고 인생의 마음을 홀로 아시는 하나님이 판단하여 사해달라고 합니다.(37-40절) 특별히 범죄치 아니하는 사람이 없으니 저희를 불쌍히 여겨달라고 간구했습니다.(46,50절)

    오늘날 많은 신자들이 새벽기도에 나와서 행하는 기도의 내용과 많이 다른 것 같지 않습니까?
    지금 이스라엘에게 가장 큰 경제적 부요를 가져다 준 왕이 자신과 백성은 죄 사함의 기도만 하겠다고 했습니다.

    그렇다고 당시는 개인과 나라에 일어나는 흉사를 전부 죄로 인한 하나님의 형벌이라고 간주한 탓이라고 즉, 영적으로 미개했기 때문이라고 단순하게 해석해선 안 됩니다.
    “주의 앞에서 부르짖음(cry)과 비는 기도(prayer)를 들으시옵소서.”(28절) 그는 간구보다 부르짖음을 먼저 말했습니다.
    범죄 한 일에 대한 철저한 회개가 먼저 내지 반드시 따르는 기도를 하겠다는 뜻입니다.
    비록 모든 나쁜 일들이 죄를 일일이 징계한 결과라고 신학적 오해가 있었다고 쳐도 하나님이 주시는 징벌이 너무 괴롭다는 뜻입니다.
    어서 빨리 그 징계에서 벗어나고 싶다는 간절한 소원이 울음으로 저절로 튀어나왔다는 뜻입니다.

    과연 우리의 기도에 내 죄를 사해달라는 간구가 얼마를 차지하며 제일 먼저 그 기도부터 하겠습니까?
    내 허물과 연약함을 고쳐 거룩하게 자라게 해달라는, 아니 내 믿음을 강하게 세워달라는, 아니 내 시선이 세상으로 향하지 않게 해달라는 기도라도 해야 하지 않습니까?
    세상에서 형통하고 내 일신이 안락해지는 일만 기도하고 있으니 구약 백성보다 훨씬 못한 신앙 아닙니까?
    예수님이 다시 오시면 오늘날 한국교회의 예배당부터 청소하고 문을 다 닫아버리지 않겠습니까?
    틀림없이 새벽 기도하는 바로 그 시간에 찾아와서 말입니다.



    '하나님의 색깔' 상징…대제사장의 옷 색깔도

    고대 유대인들의 개념에 하나님은 하늘에 계셨다.
    이스라엘 산지에서 바라보는 그 하늘은 참 맑고 청명하다.
    즉 그 파랗고 깨끗한 하늘에 계시는 분이 바로 여호와 하나님이셨다. 우리가 바라보는 푸른 하늘은 바로 하나님이 왕으로 보좌에 좌정하고 계시는 곳이며, 그 이 상은 바라볼 수가 없다. 그래서 하나님을 상징하는 색깔은 하늘의 색인 청색이 된 것이다.
    수 없었다.

      만약 부정한 것이 있다면 그것을 덮어서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드러내지 않아야 했다. 또한 하나님이 하늘에 계신다는 개념을 따라 유대인들은 기도할 때 하늘을 향해서 두 손을 들고 기도했으며, 하나님이 계신 곳을 묘사할 때는 반드시 하늘로 묘사했다.

    “여호와께서 하늘 곧 여호와에게로서 유황과 불을 비같이 소돔과 고모라에 내리사”(창 19:24).
    “이스라엘 하나님을 보니 그 발 아래에는 청옥을 편 듯하고 하늘같이 청명하더라”(출 24:10).
    “종과 주의 백성 이스라엘이 이곳을 향하여 기도할 때에 주는 그 간구함을 들으시되 주의 계신 곳 하늘에서 들으시고 들으시사 사하여 주옵소서”(왕상 8:30).
    “여호와께서 그 보좌를 하늘에 세우시고 그 정권으로 만유를 통치하시도다”(시 103:19).
    “오직 우리 하나님은 하늘에 계셔서 원하시는 모든 것을 행하셨나이다”(시 115:3).
    “여호와께서 그 높은 성소에서 하감하시며 하늘에서 땅을 감찰하셨으니”(시 102:19).
    “만군의 하나님이여 구하옵나니 돌이키사 하늘에서 굽어보시고 이 포도나무를 권고하소서”(시 80:14).

    에봇 받침 겉옷을 전부 청색으로

     “너는 에봇 받침 겉옷을 전부 청색으로 하되”(출 28:31).
    “그가 에봇 받침 긴 옷을 전부 청색으로 짜서 만들되”(출 39:22).

    대제사장은 이스라엘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대리자였으며, 이스라엘과 하나님을 잇는 가교와 같은 존재였다. 그는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뜻과 의지를 드러내는 자이며, 또 하나님을 향해서는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을 대표하여 속죄를 할 수 있는 존재였다.

    그러므로 대제사장은 하나님의 대리자로서 하나님의 색깔을 상징적으로 몸에 나타내야 했다. 그래서 대제사장의 에봇 받침 겉옷은 모두 청색이어야 했다. 또한 이외에도 대제사장의 옷에는 청색이 많이 나타났는데, 관 띠를 메는 끈 역시 청색이었으며(출 28:37), 흉패를 메는 끈 역시 청색이었다

    청색 보자기

     “또 성소에서 봉사하는 데 쓰는 모든 기명을 취하여 청색 보자기에 싸서 해달의 가죽 덮개로 덮어 메는 틀 ㎰� 두고”(민 4:12).

    청색이 하나님의 색이었기에 그 하나님의 대리자는 청색으로 된 옷을 입었다면 그분에게 제사드릴 때 사용되는 모든 도구들을 덮는 보자기의 색깔은 어떠해야 했을까? 성막에서 사용되던 모든 기명들을 덮는 보자기의 색 역시 청색이었다. 증거궤는 순청색 보자기로(민 4:5), 진설병상은 청색 보자기로 깔고(민 4:7), 등대와 모든 기구들을 청색 보자기로 덮고(민 4:9), 또 금단을 청색 보자기로 덮고(민 4:11), 모든 기구들을 청색 보자기로 덮는다(민 4:12). 즉 모두 하나님을 위해 사용되는 기구라는 상징이었다.

    청색 끈을 더하라

     “이스라엘 자손에게 명하여 그들의 대대로 그 옷단 귀에 술을 만들고 청색 끈을 그 귀의 술에 더하라”(민 15:38).
    “너희가 내게 대하여 제사장 나라가 되며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 너는 이 말을 이스라엘 자손에게 고할지니라”(출 19:6).

    고대에 청색이라는 것은 대단히 귀한 염료(murex)에서 나오는 것이었다. 그래서 아무나 색깔이 들어가 있는 옷을 입을 수 없었다. 심지어는 이렇게 청색 실을 하나 구입하려고 해도 그 가격이 너무 많이 들어서 하나님의 명령이기는 하지만 대부분의 많은 유대인들이 청색 끈을 옷단에 달고 다닐 수 없었다고 한다. 급기야 랍비들이 회의를 하여 옷단 술에 청색 끈을 다는 것은 자유롭게 자신의 의사를 따라서 하도록 했다. 오늘날 이스라엘에 거주하고 있는 유대 종교인들의 옷술(Zizit)을 보면 청색 끈을 달고 있는 사람이 거의 없는 이유가 바로 그것이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모든 이스라엘 남자들에게 청색 끈을 하나씩 더하라고 하신 이유와 뜻은 무엇이었을까?
    청색은 하나님의 색이었으며, 그 하나님의 대리자인 대제사장의 옷 색깔 역시 청색이어야 했다. 거기에 더해 모든 이스라엘이 자신과 하나님과의 관계를 나타내는 옷술에 청색 끈을 더한다면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색, 대제사장의 에봇의 색을 갖게 되는 것이다. 즉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이 모두 하나님의 소유이며, 하나님 앞에서 대제사장과 같이 존귀한 존재들이라는 것이다.

    바로 이 청색 끈의 상징과 개념을 베드로는 그대로 채용하여 베드로전서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오직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 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자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게 하려하심이라”(벧전 2:9).


    허버트 조지 웰즈 (Herbert George Wells)

    단편소설 가운데
    ‘대주교의 죽음’이 있습니다.
    믿음이 뛰어난 대주교가 있었습니다.
    그는 항상 기도하고, 성경을 보며, 경건하게 사는 사람입니다.
    매일 아침 일어나 묵상으로 기도하고, 종일 기도를 반복하면서 하나님께 나아갑니다.
    기도하는 사람은 언제나 기도를 시작하는 말이 있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천지의 주재이신 여호와 하나님’,
    ‘나를 도우시는 하나님’,
    ‘살아계신 하나님 아버지’,
    ‘좋으신 하나님’ 등등입니다.
    어느 날 저녁, 대주교는 늘 하던 대로 교회에서 기도를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같은 말로 하나님을 불렀습니다.
    “오, 전능하신 하나님 아버지!”.
    그런데 그 순간 갑자기 하늘에서 “오냐, 무슨 일이냐? (Yes, what is it?)”하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대주교는 이 소리를 듣자마자 심장마비를 일으켜 죽는다는 이야기입니다.

    웰즈의 단편은 날카로운 풍자를 담고 있습니다.
    대주교는 평생 하나님을 믿었는데 그 하나님이 살아 계시고, 하나님이 기도를 듣고 있고, 그 기도가 응답이 되리라고 생각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지식이 있었지만 체험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정말 대답이 있자 놀라서 심장마비로 쓰러진 것입니다.
    하지만 대주교가 본래 그런 신앙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처음에는 하나님을 향한 간절함이 있었고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기도하였을 것입니다.
    하지만 오랜 세월 기도하면서 간절함과 사모함이 사라졌고 습관적인 기도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아무 생각이 없이 기도하다가 하나님의 소리에 놀라 심장마비를 일으킨 것입니다.

    우리의 모습은 어떠합니까?
    혹시 대주교의 모습은 아닙니까?
    하나님이 살아 계신 것을 믿는다면 그 하나님을 느껴야 합니다.
    작은 신음에도 응답하시는 하나님을 고백한다면 세미하게 들려오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어야 합니다.
    하지만 우리의 기도와 예배도 형식과 습관에 치우치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처음에는 그렇지 않았는데 점점 본질은 사라지고 흔적만 남아있는 모습이 아닙니까?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마태복음 6:9~13)

    투명인간이나 타임머신 등으로 유명한 영국 소설가 웰스의 “대주교의 죽음”이라는 단편이 있습니다.
    어느 성당에 존경받는 대주교가 있었습니다. 
    날마다 교회에 나가서 습관적으로 기도를 합니다. 
    오! 전능하신 하나님 아버지 그렇게 습관적으로 기도를 합니다.
    그런데 어느 날 역시 성전에 들어가서 오! 전능하신 하나님 아버지 그렇게 기도하니까 하나님께서 ‘오냐? 무슨 일이냐?’ 하고 응답을 했습니다.
    그러니까 대주교가 깜짝 놀라 가지고 심장마비로 죽었답니다.

    하나님이 응답하리라고 기대하지 않고 오! 전능하신 하나님 아버지하고 습관적으로 부르다가 하나님이 정작 응답을 하니까 깜짝 놀란 겁니다.
    오늘도 기도하면서 하나님이 응답할 것이라는 기대 없이 기도할 때가 있습니다. 
    습관적으로 그저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하고 그저 부를 때가 있습니다. 특별히 주기도문은 예배의 시작이나 끝날 때 하나의 의식으로 외워 버릴 수가 있습니다. 어떤 뜻도 생각하지 아니하고 그저 외워버립니다. 그래서 루터는 주기도문은 최고의 순교자라고 표현했습니다.  이제 주기도문을 순교시키지 말고 살려내야 겠습니다.  주기도문의 바른 뜻을 알고 기도하여서 응답받는 성도들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주기도문의 첫째 내용은 기도의 대상입니다.
    기도는 하나님과의 대화인데 대화를 하려면 대화하는 상대의 이름을 부르고 난 다음에 대화가 시작되는 것 아닙니까? 아버지! 하든지 선생님하든지, 아무개야 하든지, 상대방의 이름을 불러놓고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하나님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 기도하면 하나님을 먼저 불러야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먼저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하고 이름을 먼저 부르고 기도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에게 기도할 때에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불러놓고 아버지께서 오냐하는 소리를 듣고 기도한번 해 보세요. 우리의 기도가 달라지게될 것입니다.  그런데 하늘에 계신 우리아버지하고 아버지가 듣던 안듣던 상관하지 아니하고 내가 할 이야기만 다다다다하고 나면 듣는 아버지 입자에서는 무엇이라고 하겠습니까?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하고 기다렸다가 내 마음에 하나님께서 그래 내가 듣고 있다하는 이런 응답, 음성이 들려지고 난 다음에 기도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 기도만 바로 할 수 있다고 하면 기도의 방향이 달라지고 기도의 태도가 달라지고 인생이 다 달라지게 될 줄 믿습니다.  현대인에게 가장 문제가 되는 것이 열등감, 죄책감, 불안감, 공포감이라고 이야기 합니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하는 기도만 바로하면 모든 열등감에서 다 벗어날 수 있고, 모든 불안감에서 벗어날 수가 있습니다.  이 세상에서 하늘에 계신 하나님을 부를 수 있는 사람보다 더 복 받은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그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보다 더 큰 축복이 어디 있습니까?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보다 더 존귀하고 더 뼈대 있는 집안이 없습니다. 가문이 좋다 뼈대가 있다라는 말을 하는데 하나님의 자녀되는 것만큼 뼈대 있는 집안이 어디 있겠습니까?  이제 주님께서 가르쳐주신 이기도 따라서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하는 이 기도부터 바로 기도하여서 기도하는 것 마다 응답받는 성도들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1. 하늘에 계신 하나님

    먼저 기도의 대상은 하늘에 계신 우리아버지입니다. 하늘에 계신 하나님 아버지라는 말은 초월해 계시는 하나님, 크신 하나님 전능하신 하나님, 어디든지 계시는 영원하신 하나님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하나님이 나와 상관이 없으면 아무런 소용이 없습니다.  그런데 그 하나님이 나의 아버지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이 첫마디 속에 초월해계시는 크신 하나님과 그러면서 동시에 나와 가장 친밀한 아버지 되시는 하나님 이 두가지 개념이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하는 이 가운데 다 포함되어져 있는 것입니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여 라고 할 때 하늘이 어떤 곳입니까?  높은 곳입니다. 그래서 권력에 있어서 높은 권력이 무엇입니까?  지금은 대통령이고 옛날에는 임금님 아닙니까?  높다라는 이 말은 다스린다는 말 입니다.  그러니까 하늘에 계시는 하나님 이 말은 다스리시는 하나님 온 우주만물과 인간의 생사화복을 홀로 주장하고 다스리시는 하나님이란 뜻입니다. 

    또 하늘에 계시는 하나님이라는 뜻은 하늘은 땅은 비교가 되지 않습니다.  하늘과 땅은 완전히 다릅니다.  땅에는 냄새나고 땅에는 눈물과 한숨이 있고 땅에는 온갖 지저분한 것이 있습니다.  그러나 하늘에 올라가보세요. 하늘에 한 1Km 만 올라가면 거기에는 구름도 없습니다. 거기에는 바람도 없습니다.  전혀 다릅니다.  이와 같이 하늘에 계신다는 말은 하나님은 땅과 구별되어진 거룩한 하나님이시라는 뜻입니다.  또 하늘이라는 뜻은 넓고 크다는 뜻입니다. 실제로 이 우주가 얼마나 광활합니까? 이 우주를 지구라고 하면 지구는 야구공보다 더 작습니다.  지금도 발견되어지는 별들이 있는데 몇 십 억년 거리에 있다고 하지 않습니까?  이것은 환산이 되어지지 않습니다.  그래서 빛의 속도로 거리를 재는데 빛의 속도 재각하는 순간 지구를 7바퀴 반을 도는 이런 속도로 1년만 간다고 할지라도 그 거리를 우리가 상상도 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10억년을 가야 그 별을 발견할 수 있다는 말인데 그러면 그것이 상상이 되어집니까?  그런데 하나님은 이런 하늘 어디든지 계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니까 얼마나 하나님이 크신 하나님이십니까. 하나님은 조그만 하나님이 아니십니다.  하나님은 온 우주에 가득하신 하나님이십니다.

    그래서 예수 믿으면 우리의 간이 커집니다.  배짱이 커집니다.  예수 믿는 사람은 모든 생각하는 것이나 삶이 크도록 되어져 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크신 하나님이기 때문에... 그래서 윌리엄 케리라는 구두수선공은 그 가슴속에 하나님에 대한 개념이 오게되었을 때 영국에서 저 인도까지 복음을 전하는 선교사로 갑니다.  가서 인도말로 사전을 만들고, 인도말로 성경을 번역합니다.  그리고 나서 말합니다. 하나님을 위하여서 큰 것을 시도하라. 하나님에게 큰 것을 기대하라고 말했습니다. 왜냐면 하나님은 크신 하나님이기 때문입니다.  하늘에 계신 다는 말 안에는 하나님은 전능하신 분이라는 뜻입니다.  이 큰 우주만물을 다 창조하신 분이니까 얼마나 전능하신 분입니까 그 하나님이 하늘에 계시니까 아래 모든 것을 내려다보고 있습니다.  다 아신다는 말입니다.  전지(全知)하신 하나님이시다 하늘에 계신 하나님이 어디든지 어느 하늘이든지 다 계십니다.  본래 하늘이라는 말은 하늘들이라는 말입니다.  모든 하늘에 다 계신다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그 하나님은 편재해 계신 어디든지 계신다는 것입니다.

    하늘에 계신 하나님은 불변하시는 하나님이라는 말입니다.  하늘은 변하지 않습니다.  땅은 변합니다. 그러나 하늘은 변하지 않습니다.  하늘에 계신 하나님이라는 이 말은 영원하시다는 말입니다.  하늘의 끝이 보입니까?  끝이 없을 만큼 영원 합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은 영원하신분입니다.  하나님에 대해서 우리가 어떻게 정의 할 수 있겠습니까? 이 온 우주에 가득한 하나님을 인간의 좁은 두뇌를 가지고 하나님은 이런 분이다 저런 분이다 어떻게 우리가 정의하며 다 알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조금 전에 말씀드린 이것만 정리해 본다 할지라도 하늘에 계신 하나님 이 말뜻 안에는 높은 곳에서 인류를 다스리시는 하나님 그리고 우리와 다른 구별되어진 거룩하신 하나님 그리고 그 하나님은 크고 위대하신 하나님 얼마나 크고 위대하시냐?  전능하신 하나님 그리고 모든 것을 다스리시는 전지하신 하나님 그리고 편재하시는 하나님, 그리고 불변하시는 하나님 영원하신 하나님 이런 하나님 개념이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하는 말에 포함되어져 있는 것입니다. 

    그리므로 우리가 주기도문으로 기도할 때에 하늘에 계신 이렇게 기도하게 될 때에 이 안에 있는 개념 우리를 다스리시고 거룩하게 하시고 크고 위대하시고 전능하시고 전지하시고 편재하시고 불변하시고, 영원하신 이런 하나님에 대한 개념과 믿음을 가지고 기도할 수 있어야 되겠습니다.

    이런 하나님이니까 우리가 기도할 수 있지 하나님이 전능하지도 않고 하나님이 하늘에도 안계시고 하나님이 능력도 없으시면 우리가 무엇 때문에 기도하겠습니까?  이렇게 다스리시고, 전능하시고 전지하시고 편재하시고 불변하신 이런 크고 거룩한 하나님이기 때문에 그런 하나님 앞에 마음 놓고 기도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하늘에 계신하면 이런 의식을 가지고 언제나 기도하여서 그 기도만 해도 가슴이 뜨거워지고 가슴이 넓어지고 우리에게 큰 문제가 있다고 하여도 그보다 큰 하나님에 비하면 아무것도 안되어져서 모든 염려를 다 주께 맡겨버릴 수 있는 성도들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2. 우리 아버지

    그런데 그렇게 크고 위대하고 전능하신 하나님이 나와 상관이 없으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세계 최고의 재벌이 빌 게이츠인데 그 빌 게이츠와 나와 상관이 없으면 그가 가지고 있는 모든 재물은 나에게 아무 유익이 없습니다. 하나님이 아무리 위대하고 크셔도 나와 상관이 없으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그런데 그 하나님이 누구라고 했습니까? 우리 아버지라고 했습니다.  이 세상에서 나를 제일로 사랑하시는 분이 아버지입니다.  물론 동양에서는 아버지가 너무 엄격하십니다. 아버지 이미지가 별로 좋지 않는 분들도 있습니다.  요즘은 아버지가 애들하고 친구처럼 놉니다. 오히려 잔소리하고 공부하라하고 또 고함치는 것은 어머니입니다.  그래서 어머니보다도 아버지를 좋아하는 자녀들이 많아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 아버지들의 아버지들 좀 나이드신 분들의 아버지들을 생각해보세요. 얼마나 아버지들이 엄격했습니까?

    오히려 어머니의 사랑이 마음에 와 닿지 아버지의 사랑은 마음에 와 닿지 않습니다.  그래서 내촌감삼같은 사람은 말하기를 동양에 이 엄격한 아버지 밑에서 자란 사람들이 아버지의 사랑과 아버지하면 그 사랑이 느껴지지 않는다고 하면 하나님 아버지라고 부르지 말고 하나님 어머니라고해도 좋다 그렇게 말한적 있습니다.  하여튼 아버지라고 하는 말은 사랑하는 분의 대명사입니다.  이 세상의 어떤 종교도 성경이 말하는 이런 아버지의 개념으로 그들의 신을 부른 적이 없습니다.  구약 성경에도 아버지라는 표현이 나오기는 합니다. 이사야서 63장16절상반절에 보면 “주는 우리 아버지시라” 64장16절하반절에서도 우리를 지었기 때문에 아버지 개념으로 불러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하나님을 우리가 가리는 아버지의 개념으로 그 아버지를 부르지는 않았습니다.  오히려 두렵고 가까이가지 못할 분이고 가까이가면 죽을 수밖에 없는 심판하시는 무서운 하나님으로 생각되어졌지 친근한 아버지로 느끼지 않았다고요 그래서 여호와라는 이름을 얼마나 두렵게 생각했던지 여호와라는 이름을 잃어 버렸어요.  그래가지고 여호와인지 야훼인지 몰라가지고 지금도 순복음 교단에서는 여호와라는 말 대신 야훼라는 말을 쓰지 않습니까?  그렇게 아버지의 이름을 부를 수 없을 만큼 아버지에 대한 두려움을 가지고 있었다고요. 

    그런데 예수님은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불렀습니다.  복음서에만도 예수님이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표현한 곳이170번이나 나오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12살되던 때에 예수님의 부모들과 더불어 예루살렘에 유월절을 지키기 위해서 갔습니다.  유월절을 다지키고 내려오는데 예수님의 부모들을 당연히 예수님께서 따라 올 줄 알았는데 하룻길을 가다가 예수를 찾으니까 없습니다.  그래서 찾고,  찾고 찾아가지고 3일 만에 예루살렘 성전에 올라가니까 율법학자들하고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어찌해서 너를 찾도록 했느냐?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무엇이라고 애기 했습니까?  “어찌하여 나를 찾으셨나이까 내가 내 아버지 집에 있어야 될 줄을 알지 못하셨나이까” 내 아버지 집에 있는 것이 당연하지 않습니까?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공생애 3년 동안에 성전을 청결케 한 일이 2번 있었습니다.  공생애를 시작할 때 있었고, 맞칠 때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성전에 들어가서 돈 바꾸는 사람의 상을 엎어버리고 비둘기를 막 날려버리고 그러면서 내 아버지의 집을 장사하는 집과 강도의 소굴로 만들지 말라 그렇게 질타하지 않습니까! 이 성전을 내 아버지의 집이라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이야기 했습니다.  겟세마네 동산에서는 아버지 아버지께서는 모든 것이 가능하오니 이 잔을 내게서 옮겨 주실 수 없습니까?  그렇게 애원합니다.  십자가에서 마지막 숨을 거두는 순간에  아버지여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합니다.  그렇게 말합니다.  예수님은 일생동안 내내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릅니다.  꼭 한번 인류의 모든 죄를 걸머지시고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는 그때만은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그렇게 절규했습니다.  그것도 보통아버지라고 부른 것도 아니고 때로는 아바 아버지라고 불렀습니다.  이 아바라는 말은 아람 말인데, 우리가 말하는 아빠라는 말입니다. 

    이렇게 예수님은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친근하게 부르시고 그리고 우리들에게도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것은 기독교외에는 다른 종교에서는 있을 수가 없습니다.  우리의 기도의 대상은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입니다.  하나님이 옆집 아저씨가 아닙니다. 우리 아버지고 나의 아버지십니다.  어떤 사람이 아들의 전도를 받고 교회를 처음 나가보았습니다.  그런데 다들 기도하는데 자기아들이 기도하는데 무엇이라고 하냐면 하늘에 계신 아버지 하고 기도합니다.  자기 아들이 하나님 보고 아버지라고 하니까 그러면 하나님하고 나하고 촌수는 어떻게 될까? 따져보니까 자기는 형님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하지 않고 하나님 형님이라고 기도했다고 하지 않습니까? 하나님은 우리의 형님이 아닙니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아무리 나이를 많이 먹었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은 아버지십니다.  하나님 앞에서 나이를 따지면 갓 태어난 애만도 못합니다.  이렇게 크고 위대한 분이 내 아버지시다.  이런 고백을 할 수 있는 사람이라고 하면 얼마나 복 받은 사람이겠습니까?  우리는 이렇게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다 부르지 않습니까? 그럼으로 나는 정말 이 땅에서 최고로 복 받은 사람이라고 믿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미국의 신학자 부시넬이라고 하는 학자는 예수 그리스도의 모든 사역과 그 놀라운 교훈들이 일체 없었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을 우리 아버지라고 가르쳐주신 그것만 가지고도 그는 분명히 일류 최대의 스승이었다고 이야기했습니다.  하늘에 계신 하나님이 나의 아버지라는 이 사실은 얼마나 놀라운 축복이고, 얼마나 놀라운 소식입니까?  여러분들 이것 하나만 바로 알면 다른 문제들은 이 안에서 다 해결되어집니다.  이것을 안믿기 때문에 염려하고 이것을 안믿기 때문에 걱정하고 이것을 안믿기 때문에 절망하지 하나님이 내 아버지시다.  하늘에 계신 하나님이 내 아버지시다 이것만 믿으면 세상 살기 참 편합니다.  걱정 없습니다.  복되게 살아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1) 아버지라 부르면 대답하십니다.
    로마서 8장 15절에 보면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였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아바 아버지라 부르짖느니라” 아빠! 아빠! 그렇게 부르짖는다  말입니다.  천진난만한 아이가 아버지를 부를 때에 아빠 그렇게 부르지 않습니까? 나이가 50쯤된 중늙은이가 아버지를 바라보고 아빠 그렇게 부르면 징그럽지 않습니까? 유치원 다니는 어린애가 초등학교 다니는 어린애가 아빠를 만났을 때 아빠하고 달려가는 그 모습 얼마나 아름다습니까?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불러보세요 그것도 하나님 아빠하고 불러보세요 조용할 때 혼자서 하나님 아빠 하고 불러보세요. 집에 가서 불러보라면 안불러 보니까 지금 한번 불러봅시다. 하나님 아빠하고 불러 봅시다.  “하나님 아빠” 좀 가슴이 뜨거워집니까? 정말 내가 하나님이 여기 계신다고 생각하고 혹은 하늘에 계신 하나님을 향해서 하나님 아빠하고 불러보면 우리의 가슴이 뜨거워지고 눈물이 핑 돌지 않을 수 없습니다.

    “나를 지으신 주님”이라는 찬송이 있습니다.  2절에 보면 주는 내 아버지 난 주의 소유 내가 어디를 가든지 날 떠나지 않네 내 이름 아시죠. 내 모든 생각도 아빠라 부를 때 주가 들으시죠. 아빠라 부르면 어떻다구요? 아빠가 들으신다고 했습니다. 우리가 하늘에 계신 우리아버지 아빠라 부르면 하나님은 들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귀를 지은 내가 어떻게 너희 소리를 안듣겠느냐 하나님은 그렇게 우리에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아빠라고 아버지라고 부를 때 내 기도를 들으시는 하나님인 줄 믿고 기도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 세상 아버지는 바쁘면 대답안할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 아버지는 아빠라고 부를 때 마다 언제나 들으시는 하나님임을 믿고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그래 하는 음성을 듣고 기도하여 응답받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2) 아버지는 책임지십니다.

    아버지는 자녀에 대해서 모든 것을 책임지십니다.  아버지는 자녀를 먹여살리는 양육의 책임을 집니다. 교육의 책임을 집니다.  보호의 책임을 집니다. 기러기 아빠가 되기도 하면서 자녀를 공부를 시키기도 합니다. 몇일 전에 신문에 보니까 남자가 얼마나 연약한지 남자가 혼자서 한달만 살면 무너진다는 겁니다.  남자의 삶이 무너진다는 겁니다.  그런데 자기가 망가지고 무너지는 한이 있더라도 자식이 잘되기 위해서 기러기아빠가 되지 않습니까? 직장에서 온갖 수모를 다 당해도 처자식 먹여 살리기 위해서 그 수모를 다 참습니다.  세상에 부모는 자식이 성인 될 때 까지 늘 책임을 집니다.  이 세상의 부모는 자식을 책임지지 않는 부모가 혹시 있다고 할지라도 그러나 하나님 아버지는 하나님의 자녀들을 책임져 주시겠다고 약속해 주셨습니다. 

    너희가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이런 것은 이방인 아버지 없는 고아들이 하는 걱정이야 너희 아버지께서 너희에게 있어야 할 것이 무엇인지 알고 있으니 그런 것 걱정하지 말고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말씀대로 살아라. 그러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여주마고 약속하셨습니다. 빌립보서 4:19 “나의 하나님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영광 가운데 그 풍성한 대로 너희 모든 쓸 것을 채우시리라” 너희 모든 쓸 것을 채우시리라고 약속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자녀들의 삶을 책임져 주시고 채워주신다는 이 사실을 확실히 믿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3. 아버지는 보호하십니다.

    또 부모는 자녀를 보호하십니다.  부모는 자녀의 생활을 위험에서보호하고 질병에서 보호하고 사고에서 보호해 주십니다.  이 세상의 부모는 능력의 한계가 있어서 지키다가 지키다가 보호할 수 없을 때가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아버지는 우리를 졸지도 주무시지도 아니하고 낮의 해와 밤의 달이 상치 않도록 우편에서 그늘되어 주시고 모든 환란을 막아주시고 우리의 출입을 지금부터 영원까지 지켜주겠다고 약속하고 있습니다. 

    1967년 6일 전쟁 때 이스라엘 군인 20명이 이집트 군대 3개 사단을 물리친 적이 있습니다.  이집트군이 손을 들고 항복하고 나왔습니다.  왜 그런가 알아보니 이집트 군대가 이스라엘군과 싸우는데 엄청난 군대가 이스라엘 군대와 같이 싸우고 덤벼드는 모습을 바라보았습니다.  도저히 안된다고 생각해서 손을 들고 항복하고나왔습니다.  나와서 보니까 이스라엘 병사가 20명밖에 없어요. 하나님께서 그들의 눈에 하나님의 군대을 보여주어서 그래서 안되겠다. 생각하고 손들고 나왔습니다.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백성을 지킬 때 이와 같은 방법으로 지킬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호수아 23장 10절에는 “너희 중 한 사람이 천명을 쫓으리니” 했는데 그렇게 지켜 주실 것이라고 약속해 주시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아버지가 되셔서 우리를 이렇게 지켜주실 줄 믿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는 사람은 얼마나 복 받은 사람인줄 모릅니다.  이 세상 사람들에게 하나님을 아버지라 불러 보라고 해보세요? 그들은 하지 못합니다.  왜냐면 그들은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얼마나  아버지를 부르는데 편안합니까? 아버지 부르면 얼마나 힘이 솟습니까?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사람은 하나님이 창조하셨으나 다 하나님의 자녀가 아닙니다.  마치 목수가 의자를 만들어도 그 의자를 내 자식이라고 하지 아니하고 자기의 혈통을 따라서 난 자식이라야만 자식이라고 하는 것처럼 이 세계에 있는 모든 사람들을 다 창조하셨지만 다 하나님의 자녀라고 부르지 아니하시고 예수 그리스도의 피 값으로 산, 피로써 씻은 사람만 하나님의 자녀로 부르시는데 우리에게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와 축복과 이런 호칭과 명칭을 주었으니까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

    이렇게 크고 위대하신 하나님이 내 아버지니까 이런 복이 어디 있습니까? 이런 하나님의 자녀의 권세를 누릴 수 있기를 바랍니다.  하늘에 계신 우리아버지 하고 대화하고, 아빠하면서 대화하고 필요한 것 구해서 하나님의 자녀답게 살아갈 수 있는 성도들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빌게이츠의 아들이 돈이 필요한데 아버지에게 달라고 하지 않아서 거지꼴로 살아간다면 얼마나 바보입니까?  빌게이츠와 비교 안되는 하나님, 통치자하나님 거룩하신 하나님, 크고 위대하신 하나님, 전능하신 하나님, 전지하신 하나님, 편재하신 하나님, 불변하신하나님, 영원하신 창조주하나님이 나의 사랑하는 아버지인데 구하여서 얻지 못하고 살아간다고 하면 얼마나 어리석은 사람입니까? 이제 하늘에 계신 하나님 아버지 하고 기도해서 응답받고 살아갈 수 있는 성도들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미국의 어느 직장에서 한 직원이 출근해 보니까 자기 책상위에 아무 이유도 없이 통보도 없이 해고 통지서가 책상위에 놓여 있었습니다.  그는 분노했습니다. ‘이놈들을 죽여야지’하는 마음을 가지고 뛰쳐나왔습니다. 얼마쯤 있다가 그는 다시 집에 돌아왔습니다.  그는 아내에게 이야기 했습니다. 내가 이 세상에 나가서 이것저것 다 해보니까 아무것도 되는 일이 없는데 나는 이제 죽는 길 밖에 없다고 했습니다.  내가 원수를 갚고 죽겠다고 그러니까 아내가 남편에게 이야기 합니다. ‘당신은 모든 일을 다 해보았다고 하지만 내가볼 때 당신이 하지 않은 것 꼭 한 가지 있는 것 같습니다. 그것이 무엇인가 하면 당신의 문제를 진지하게 하나님 앞에 내어 놓고 기도하는 것을 하지 않은 것같다’고 이 말에 그 남편은 충격을 받습니다.  그러면기도해보아야 겠다고 아내와 더불어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기도하는 중에 과거에 미워했던 마음 상사들 죽이고 싶던 마음이용서하는 마음으로 바꼈습니다.  하나님께서 새로운 아이디어를 주셨습니다. 길을 열어 주셨습니다.  집을 담보로 돈을 내어서 조그만 건축업을 시작하였습니다.  여행을 하다보니까 값비싼 호텔들은 좋기는 한데 너무 값이 비싸고 좀 돈이 적은 호텔에 들어가면 너무나 지저분해서 돈도 저렴하고 깨끗한 호텔을 지을 수 없을까. 그래서 그런 호텔을 짓기 시작했습니다.  이분이 바로 세계적인 호텔 홀리데이 인 이라고 하는 호텔의 창업자 케몬스 윌슨입니다.

    우리가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길을 열어주십니다.  이렇게 우리의 기도를 들어주시는 좋으신 하나님을 아버지로 섬기고 있으니 우리는 얼마나 행복한 사람들입니까?  땅에 아버지가 없어서 고독하신 분 있습니까? 하늘에 아버지가 있음을 믿고 기뻐하기를 바랍니다.  땅의 아버지가 못마땅하고 변변치 못해서 불평하는 분이 있습니까?  전능하신 하나님 아버지가 내 아버지임을 믿고 감사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땅의 아버지가 아무리 좋아도 해어질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하늘 아버지는 영원토록 나와함께 동행하십니다.  땅의 아버지는 때로 불안전하여서 나를 잘못인도하고 잘못 충고할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늘 아버지는 전지하셔서 나를 바르게 인도하실 수가 있습니다.  땅의 아버지는 나에게 때로 인내하지 못해서 화를 내실 때도 있지만 하늘 아버지는 끝까지 인내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이 땅의 아버지도 참 좋지만은 하늘 아버지하고는 비교가 되지 않습니다.  이 놀라운 아버지를 내 아버지로 모셨으니까 이 하나님을 내 아버지로 모셨으니까 이제 찬양하고 감사하고 기도하여 복되게 살아가는 성도들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제 기도할 때 마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하면은 그저 하늘에 계신하면 하나님의 위대하심, 하나님의 크심이 믿어지고, 기억나고, 아버지하면 그 아버지의 사랑하심 아버지의 친밀하심이 하나님의 자상하심이 가슴속에 물밀듯이 내 마음속에 밀려와서 기도할 때마다 힘이 솟아나고 믿을 가지고 기도하여 응답받고 살아 갈 수 있는 영락의 온 성도들 될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





    4월 17일(목) 열왕기상 4-7장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야긴과 보아스(7:21)

    이 두 기둥을 성전의 주랑 앞에 세우되 오른쪽 기둥을 세우고 그 이름을 야긴이라 하고 왼쪽의 기둥을 세우고 그 이름을 보아스라 하였으며.
    He erected the pillars at the portico of the temple. The pillar to the south he named Jakin and the one to the north Boaz.

    야긴(Jakin)과 보아스(Boaz)는 솔로몬 왕이 건축한 성전 입구에 세워진 두 기둥(柱)을 말합니다.

    야긴이란 의미는 "저가 세우리라" 또는 "그가 확립한다"
    보아스의 의미는 "그에게 능력이 있다" 또는 "유력자"라고 합니다.


    솔로몬 성전의 두 기둥, 야긴과 보아스

    역대하 3:15-17
    성전 앞에 기둥 둘을 만들었으니 높이가 삼십오 규빗이요 각 기둥 꼭대기의 머리가 다섯 규빗이라. 성소같이 사슬을 만들어 그 기둥머리에 두르고 석류 백 개를 만들어 사슬에 달았으며 그 두 기둥을 성전 앞에 세웠으니 왼쪽에 하나요 오른쪽에 하나라 오른쪽 것은 야긴이라 부르고 왼쪽 것은 보아스라 불렀더라.

    솔로몬이 성전을 건축할 때 성전 앞에 놋으로 기둥 두 개를 만들어 세웠습니다.
    그리고 그 두 기둥에 이름을 붙였는데 오른쪽의 기둥은 ‘야긴(יָכִין)’이라 하고 왼쪽의 것은 ‘보아스(בֹּעַז)’라고 칭했습니다.
    ‘야긴’의 뜻은 ‘그가 세우실 것이다’이며 ‘보아스’는 ‘그에게 능력이 있다’입니다.

    ​성전 건축 공사 과정에 관한 성경의 기록들이 작업의 진행 순서 그대로 써졌다고 볼 수는 없겠으나 그래도 대략 유추하기는 성전의 두 기둥이 각종 기구들을 만드는 과정에서 초반에 만들어진 것을 추정됩니다.
    솔로몬이 기둥을 세우고 굳이 기둥의 이름까지 지어 불렀는데 그 기둥 이름이 다윗이 하나님께로부터 성전 설계도를 받았을 때부터 정해졌던 것인지 혹은 솔로몬이 임의로 지었는지 알 수는 없으나 분명한 것은 계속 진행되어갈 성전의 건축 과정에서 결국 하나님께서 세워나가실 것이고 그것을 성취할 능력이 하나님께 있음을 상기하며 하나님을 의지하게 한 것으로 보입니다.

    성전 건축에 동원되어 각 분야를 맡아서 일하는 사람들은 세워져 있는 기둥을 바라보면서 ‘야긴-그가 세우실 것이다’, ‘보아스-그에게 능력이 있다’라는 것을 되새기며 그 거룩한 하나님의 전 건축 공사 작업에 임했을 것입니다.

    이 두 기둥의 이름은 성전이 완공된 후에는 이것을 세우신 이가 솔로몬이 아니라 하나님이 자신의 능력으로 세우셨음을 인정하는 신앙고백이 되었을 것입니다.
    나아가서 백성들이 이 성전을 드나들 때마다 앞으로의 모든 역사에서도 하나님께서 세우실 것과 그분께 모든 능력이 있음을 항상 기억하게 될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중심엔 예루살렘 성전이 있고 성전의 중심엔 언약궤와 두 기둥이 있습니다.
    언약궤는 지성소에 안치되어 있어서 일반 백성들은 볼 수가 없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성소에 있는 떡상, 금등대, 분향단 등도 제사장들에게만 허용된 장소, 일반 백성들에게는 볼 수 없는 성소라는 공간 안에 있습니다.
    일반인들은 아마도 번제단과 물두멍을 볼 수 있고 무엇보다 눈에 두드러지게 보이는 것이 이 두 기둥이었을 것입니다.
    성전을 방문하는 모든 사람에게 가장 눈에 띄는 그 두 기둥은 과거와 현재와 앞으로의 모든 역사에서 ‘하나님께서 세우실 것이다’, ‘그분에게 능력이 있다’라고 무언의 메시지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수없이 말해 왔을 것입니다.
    놀랍게도 이것은 하나님의 구속사에서 놀라운 예언이 되었습니다.

    성경에는 많은 예언들이 있습니다.
    어떤 예언들은 하나님께서 친히 말씀하시거나 선지자를 통해 확실한 예언의 형태로 말씀하시는가 하면 또 어떤 예언들은 전혀 예언의 목적으로 한 것이 아닌데 계시의 형태로 매우 중요한 예언이 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예를 든다면 ‘여호와 이레’가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독자 이삭을 모리아 산으로 가서 번제로 드리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은 즉각 순종하여 이삭과 함께 종들과 번제 드릴 나무와 불씨를 가지고 모리아 산으로 향합니다. 산어귀에 이르러 아브라함은 나귀와 종들은 그곳에 기다리게 하고 이삭에게 번제할 나무를 지게 하고 자신은 불씨와 칼을 들고 산을 오릅니다.
    한참을 올라가던 이삭이 너무도 궁금한 나머지 아버지에게 질문을 합니다.
    “아버지, 불과 나무는 있거니와 번제할 어린 양은 어디 있습니까?”(창 22:7)
    통상적으로 제사를 드리려면 나무와 불뿐만 아니라 반드시 제물을 준비해야 하는데 그날은 아무리 봐도 제물이 보이지 않았던 것입니다. 이에 아브라함이 이삭에게 대답합니다.
    “내 아들아 번제할 어린 양은 하나님이 자기를 위하여 친히 준비하시리라”(창 22:8)

    ​산에 오른 아브라함은 제단을 쌓고 나무를 벌여놓은 후 이삭을 결박하여 나무 위에 올리고 칼을 들어 그를 잡으려 합니다.
    하나님께서 급히 개입하셔서 아브라함의 행동을 중단시켰습니다.
    아브라함은 그때 근처에 숫양이 수풀에 뿔이 걸려 있는 것을 발견했고 그 양을 잡아다가 하나님께 번제로 드렸습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이 그 땅 이름을 ‘여호와 이레’라고 불렀습니다. 그 의미는 ‘여호와께서 준비하신다’입니다. 이것은 예언을 목적으로 그렇게 한 것이 아닌데 매우 중요한 계시적 예언이 되었습니다. 그 모리아 산에서 우리를 대신하여 드려지는 희생제물을 하나님께서 친히 준비하실 것이라는 메시아 예언이 된 것입니다. 따라서 ‘여호와 이레’로 불려지는 땅이 궁극적으로 말하려고 하는 것은 우리의 삶에서 하나님이 우리의 앞길이나, 우리에게 필요한 것들을 준비해 주실 것이라는 일상적인 내용의 의미가 아니라 우리의 구속자를 하나님이 친히 준비하신다는 내용입니다.

    본 이야기로 돌아와서 성전 앞에 세워진 야긴과 보아스 두 기둥은 하나님께서 장차 친히 자신의 능력으로 하나님의 성전을 세우시리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여호와 이레’처럼 메시아와 관련된 매우 중요한 계시적 예언입니다.

    솔로몬의 성전은 이후에 바벨론 느부갓네살에 의해서 완전히 파괴되었고 포로 되었던 백성들이 돌아오면서 스룹바벨의 지휘 아래 재건되었습니다.
     북 이스라엘 멸망 / 기원전 722년 앗수르 살만에셀
     남 유다 멸망 / 기원전 586년 바벨론 느부갓네살

    물론 이것 역시 야긴과 보아스의 성취입니다.
    어느 누구도 이스라엘이 바벨론의 포로 상태에서 해방되리라는 것을 상상하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오직 자신의 능력으로 그들을 해방시키셨고 본토로 돌아오게 하셨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완전히 파괴되었던 성전도 다시 세우셨습니다.

     제2성전 스룹바벨성전 

    하나님이 친히 하신 것입니다.
    이렇게 재건된 성전은 로마의 분봉왕이었던 헤롯에 의해 화려하게 증축되었습니다.

     제3성전 헤롯 대왕의 증수
    그때가 바로 예수께서 이 땅에 임하신 시점이었습니다.

    요한복음 2:20.
    유대인들이 가로되 이 성전은 사십 육년 동안에 지었거늘 네가 삼 일동안에 일으키겠느뇨. 

    ​예수께서 공생애 사역을 시작하신 후 첫 번째 유월절을 맞이하여 예루살렘 성전에 올라가셨습니다.
    성전 안에서는 제물로 드려질 소와 양과 비둘기를 파는 사람들과 환전해 주는 장사치들로 소란스러웠습니다. 예수께서 “이것을 여기서 가져가라 내 아버지의 집으로 장사하는 집을 만들지 말라” 하시며 노끈으로 채찍을 만들어 짐승들을 모두 쫓아내시고 환전상들의 상을 뒤집어엎으셨습니다(요 2:13-16).

    당황하고 화가 난 유대인들이 예수께 “네가 이런 일을 행하니 무슨 표적을 우리에게 보이겠느냐?”하고 질문했습니다. 예수께서는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 유대인들은 46년 동안 지어진 성전을 허물라 하고 사흘 만에 일으키겠다는 예수님의 말씀을 도무지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요한복음을 기록한 요한은 “그러나 예수는 성전된 자기 육체를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하고 설명을 첨부했습니다(요 2:21).

    건물로 이루어진 성전이 아니라 살아있는 성전이 세워졌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의 육체였습니다.
    요한복음 1:14에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라고 기록합니다.
    ‘거하신다’는 헬라어로 ‘스케노오(σκηνόω)’이며 ‘장막을 치다’라는 의미입니다.
    이것은 이 땅에 최초로 천막으로 세워졌던 이동형 하나님의 집인 ‘성막’을 연상시켜 줍니다.
    하나님의 집이 천막 형태의 성막을 거쳐 건물로 지어진 고정된 성전으로 예수님의 시대까지 왔습니다.

    성전의 역사에 새로운 시대가 열렸습니다.
    하나님이 친히 육신을 입어 살아있는 성전이 되어 오신 것입니다.
    이사야 8장 14절의 “그가 성소가 되시리라”는 예언의 성취입니다.

    그가 성소가 되시리라 그러나 이스라엘의 두 집에는 걸림돌과 걸려 넘어지는 반석이 되실 것이며 예루살렘 주민에게는 함정과 올무가 되시리니.
    and he will be a sanctuary; but for both houses of Israel he will be a stone that causes men to stumble and a rock that makes them fall. And for the people of Jerusalem he will be a trap and a snare.

    ​사람들에 의해 건축된 동물 제사를 드리는 성전이 아니라 하나님이 자신의 능력으로 친히 세우시는 참 성전의 시대가 시작된 것입니다. 이것은 계시적 예언이었던 ‘야긴’과 ‘보아스’의 성취입니다.
    솔로몬이 그 두 기둥의 이름을 지을 때 메시아 시대를 염두에 두고 한 것은 아니겠으나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자신이 친히 이루실 계시로 미리 섭리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친히 자신의 성전을 세우실 때 사람들이 만든 것은 사용 기간이 다 끝난 것입니다.
    ‘이 성전을 헐라’는 말씀은 유대인들이 자신을 죽음에 넘겨줄 것에 대한 예견인 동시에 건물 성전의 시대가 끝나고 결국 폐기될 것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이후 A.D.70년에 로마에 의해서 다시 한번 예루살렘은 파괴되고 성전은 돌 위에 돌 하나도 덧놓이지 않게 철저하게 훼파되고 말았습니다.
    사람의 손으로 지은 성전은 그 역할을 다한 것입니다.

    ​장차 이루어질 예언으로 본다면 유대인들은 장차 제3성전을 다시 건축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께서 의도하신 것이 아닙니다.
    건물 성전의 기능과 역할은 이미 끝났기 때문입니다.
    다만 예수를 메시아로 깨닫지 못한 유대인들이 자신들 나름대로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을 위해 추진하는 것을 그냥 허용하실 뿐입니다. 물론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이스라엘의 국가적, 신앙적 회복과 함께 마지막 때의 징조와 사건들로 사용하시긴 합니다.
    예언은 하나님께서 주도적으로 하려고 정하신 것을 미리 말씀하신(예정,豫定) 부분들도 있고 하나님의 의도와는 무관하게 장차 일어날 일들을 미리 아시고 말씀하신 내용(예지,知豫)들도 있습니다.

    세계 정부, 혹은 그림자 정부에 대해서 관심을 가진 분들이 상당히 있을 겁니다. 소위 음모론으로 치부되는 그 중심에 프리메이슨(Freemason)이라는 비밀 조직이 있습니다. 물론 지금은 폭로자들에 의해서 상당히 많이 알려진 단체지만 그 이전에는 조직과 활동이 완전히 베일에 싸여 있었습니다. 이 프리메이슨의 정체성을 나타내는 상징 이미지들이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미국 1달러 지폐에 등장하는 ‘피라미드’와 그 위에 그려진 모든 것을 본다는 ‘호루스의 눈’도 그중 하나고, 체스판 같은 ‘체크무늬 바닥’, ‘컴퍼스와 삼각자’를 맞댄 이미지, 그리고 또 하나는 오늘 말하고자 하는 두 기둥입니다. 이 기둥은 솔로몬 성전을 모방해 온 것입니다. 이 조직은 마지막 시대에 적 그리스도의 출현과 깊은 연관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세운 두 기둥은 새로운 세계질서로 들어가는 통로로 설명되며 ‘그가 세우신다’에서 ‘그’는 하나님이나 그리스도가 아니라 적그리스도인 것입니다. 적그리스도가 자신의 능력으로 이 땅에 자신의 통치체계를 구축하겠다는 강력한 의지를 나타낸 것입니다. 사단은 언제나 하나님의 역사를 모방하여 왜곡하거나 하나님의 자리에 자신을 대입시켜 하나님의 영광을 찬탈하고 자신의 영향력을 극대화하여 사람들을 지배하려고 합니다. ‘야긴’과 ‘보아스’는 결코 그들에게 적용될 수 없습니다. 그들의 제국이 일시적으로 세워질지 몰라도 결국은 무너지되 그 무너짐이 매우 심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께서 오직 자신의 능력으로 세우신 ‘야긴’과 ‘보아스’의 참 성전이었습니다. 그런데 성령의 강림 후 성전의 개념은 더욱 확장되었습니다. 이제 하나님의 성령을 받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의 ‘성전’이 된 것입니다.

    “너희는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계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고전 3:16)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고전 6:19)

    고린도전서 6:19-20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의 것이 아니라.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광을 돌리라.


    우리가 하나님의 성전이 되려면 하나님의 영이 그 안에 임해야 합니다. 모세에 의해 세워진 성막도 하나님의 집이 되기 위해서는 건축을 마친 후 최종적으로 하나님의 영이 쉐키나 구름으로 그 안에 충만하게 임할 때였습니다. 솔로몬이 건축한 성전도 마찬가지입니다.

    “...모세가 이같이 역사를 마치니 구름이 회막에 덮이고 여호와의 영광이 성막에 충만하매 모세가 회막에 들어갈 수 없었으니 이는 구름이 회막 위에 덮이고 여호와의 영광이 성막에 충만함이었으며”(출 40:33-35)

    “제사장이 성소에서 나올 때에 구름이 여호와의 성전에 가득하매 제사장이 그 구름으로 말미암아 능히 서서 섬기지 못하였으니 이는 여호와의 영광이 여호와의 성전에 가득함이었더라”(왕상 8:10-11)

    거듭난 하나님의 백성들은 ‘교회(에클레시아)’라고 부릅니다. 그들은 성령을 받았기 때문에 그 안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는 하나님의 성전입니다. 개인적으로도 하나님의 성전이고 집합적으로도 하나님의 성전입니다. 예수께서는 자신이 친히 자신의 ‘교회(에클레시아)’를 세우시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또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마 16:18)

    그가 친히(야긴) 자신의 능력으로(보아스) 하나님의 집(성전, 에클레시아)를 세우시겠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교회’를 일컬어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교회'라고 칭했습니다(행 20:28). 그가 자기 피로 세우신 진짜 하나님의 성전인 것입니다. ‘교회’는 건물이 아니라 ‘물과 성령으로 거듭난 사람들의 모임’입니다. 그것이 바로 성전이고 하나님의 집입니다.

    “만일 내가 지체하면 너로 하여금 하나님의 집에서 어떻게 행하여야 할지를 알게 하려 함이니 이 집은 살아 계신 하나님의 교회요 진리의 기둥과 터니라”(딤전 3:15)

    하나님이 친히 세우시는 것은 건물도 아니고 국가도 아니고 종교단체도 아닙니다. 세상에서 불러내어 물로 씻기고 성령으로 거룩하게 하신 공동체입니다. 그것이 그가 세우신 진정한 성전입니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아직도 하나님의 경륜을 구분하지 못하고 이해하지 못함으로 예배당 건물을 하나님의 성전으로 생각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예배당 건축을 성전 건축으로 동일시하는 착각에 빠지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모이고 활동하고 사역하기 위해 건물이 필요한 것은 분명합니다. 인원이 많고 사역의 범위가 넓어지면 그에 따라 더 넓은 공간도 필요할 수 있습니다. 그러한 필요를 위해 어떤 규모의 건축을 하든 그것은 얼마든지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집’이나 ‘성전’이라는 구약적 개념으로 건물을 세우는 것은 그릇된 것입니다. 여전히 성전의 개념을 가졌기 때문에 최고급의 재료로 비싸게 지어야 한다고 생각하여 천문학적인 액수의 헌금을 쏟아붓게 됩니다.

    온 세계에 오직 하나밖에 없었고,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명령으로 건축되었던 거룩한 건물마저도 새로운 참 성전으로 인해 폐기되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자신의 생각대로 지은 건물을 하나님이 거하시는 거룩한 ‘성전’이라니요? 하나님은 특정한 '건물'에 거하지 않으십니다. 그의 백성들 안에 거하십니다.

    하나님이 친히 세우신 것이 ‘거룩한’ 것입니다. 거룩한 집이고 거룩한 백성입니다. 사람들이 임의로 만들고 그것을 거룩하다 할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이 친히 자신의 것으로 세우신 야긴과 보아스의 성전은 예수 그리스도이며, 거듭난 한 사람 한 사람이며, 그런 사람들로 이루어진 ‘교회(에클레시아)’입니다.

    “그의 안에서 건물마다 서로 연결하여 주 안에서 성전이 되어 가고 너희도 성령 안에서 하나님이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느니라”(에베소서 2:21-22)

    사람들이 세운 건물은 언젠가 모두 무너질 것이나 야긴과 보아스로 세워진 그리스도와 거룩한 교회는 영원할 것입니다.


    4월 16일(수) 열왕기상 1-3장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내가 왕이 되리라(1:5)


    때에 학깃의 아들 아도니야가 스스로 높여서 이르기를 내가 왕이 되리라 하고 자기를 위하여 병거와 기병과 전배 오십인을 예비하니.
    Now Adonijah, whose mother was Haggith, put himself forward and said, "I will be king." So he got chariots and horses ready, with fifty men to run ahead of him.

    내가 왕이 되리라

    다윗이 헤브론에서 낳은 아들 여섯 명이 있었습니다.
    첫째는 암논(아히노암 소생)
    둘째는 길르압(아비가일의 소생)
    셋째는 압살롬(마아가의 소생)
    넷째는아도니야(학깃의 소생)
    다섯째는 스바댜(아비달의 소생)
    여섯째는 이드르암(에글라의 소생)

    다윗의 아들들은 자기가 왕이 되려는 생각을 갖게 됩니다.
    암논은 압살롬의 누이를 겁탈한 후 압살롬에게 살해 당했습니다.
    압살롬은 암논을 죽인 후에 결국 죽임을 당했습니다.
    이번에는 아도니야가 아버지 다윗이 나이가 많아 늙었을 때 반역을 한 사건입니다.
    그는 스스로 왕이 되려고 하였으나 결국은 죽고 맙니다.
    아도니아의 반역을 살펴봅시다.
    그는 용모가 매우 좋은 사람이었습니다(왕상 1:6).
    “그는 압살롬 다음에 태어난 자요 용모가 심히 준수한 자라 그의 아버지가 네가 어찌하여 그리 하였느냐고 하는 말로 한 번도 그를 섭섭하게 한 일이 없었더라”

    용모는 빼어났지만 그의 마음은 탐욕으로 가득합니다.

    압살롬도 용모가 빼어난 아들이었습니다(삼하 14:25).
    “온 이스라엘 가운데에서 압살롬 같이 아름다움으로 크게 칭찬 받는 자가 없었으니 그는 발바닥부터 정수리까지 흠이 없음이라”

    다윗의 아들들 중 용모가 뛰어난 두 아들 모두 아버지에게 반역한 못된 아들이었습니다.
    겉은 그럴듯한데 속이 비고 악한 욕망으로만 가득한 자들이 있습니다.
    겉만 가꾸지 마십시오. 속이 중요합니다. 겉만 보고 그것을 중요하게 여기는 의식들이 우리 사회를 병들고 무너지게 합니다.
    “스스로 높여서”
    5절 “그 때에 학깃의 아들 아도니야가 스스로 높여서 이르기를”
    자기 스스로를 높입니다.
    이것은 사탄을 닮은 것입니다. 예수님의 가장 중요한 모습은 스스로 낮추신 것입니다.
    높이는 자는 무너집니다. 하나님께서 낮추실 것입니다.
    하나님이 높이셔야 높아집니다.
    시 75:6,7 “무릇 높이는 일이 동쪽에서나 서쪽에서 말미암지 아니하며 남쪽에서도 말미암지 아니하고, 오직 재판장이신 하나님이 이를 낮추시고 저를 높이시느니라”
    아도니아는 스스로 높이지 않아도 이미 높은 자입니다.
    그는 다윗의 네 번째 아들이지만 왕위계승 서열 1위인 왕자입니다.
    그것만으로도 높습니다. 그런데 욕심은 한이 없습니다.
    그 높아지고자 하는 욕망으로 인해 그는 가진 모든 것을 잃고 맙니다.
    “내가 왕이 되리라”
    5절 “내가 왕이 되리라 하고 자기를 위하여 병거와 기병과 호위병 오십 명을 준비하니”
    아도니아는 내가 왕이 되겠다고 선언합니다.
    그러나 왕은 내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세우시는 것입니다.
    아도니아의 아버지 다윗을 세우신 분은 하나님입니다.
    행 13:21,22 “그 후에 그들이 왕을 구하거늘 하나님이 베냐민 지파 사람 기스의 아들 사울을 사십 년간 주셨다가 폐하시고 다윗을 왕으로 세우시고 증언하여 이르시되 내가 이새의 아들 다윗을 만나니 내 마음에 맞는 사람이라 내 뜻을 다 이루리라 하시더니”
    다윗은 왕이 되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자기에게 주어진 일에 목숨을 거는 삶을 살았을 뿐입니다. 그리고 기회가 주어지면 하나님의 이름을 높이고 싶어 했을 뿐입니다.
    그런 그를 하나님께서 세우셨다는 것입니다.
    바울 사도가 로마서에서도 밝히는 말씀이 있습니다.
    롬 13:1 “각 사람은 위에 있는 권세들에게 복종하라 권세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지 않음이 없나니 모든 권세는 다 하나님께서 정하신 바라”
    성공하려고 하지 마십시오. 성결하십시오. 그러면 하나님께서 세우시고 하나님께서 높이십니다. 결국 아도니아가 무너지고 하나님께서는 솔로몬을 세우시고 높이시고 왕을 만드십니다. 아도니아가 몸부림 쳐도 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세우실 사람 세우고 맙니다.
    아도니아는 사람을 붙잡았습니다.
    그는 어떻게 이런 반역을 구체화했나요?
    7절 “아도니야가 스루야의 아들 요압과 제사장 아비아달과 모의하니 그들이 따르고 도우나”
    아도니아는 누굴 잡아야 자신이 왕이 되는데 유리한지 판단했습니다.
    그래서 군사령관과 제사장을 자기편에 끌어들였습니다.
    가장 중요한 두 사람입니다. 군대를 장악하는 것은 권력을 잡는데 기초입니다. 게다가 이스라엘 사회에서 제사장을 자기편으로 만드는 것은 무엇보다 중요한 것입니다.
    아도니아는 이렇게 중요한 사람은 붙들었지만 하나님을 내 편이 되게 하지는 못했습니다. 사람을 다 내 편 만들어도 하나님을 내 편이 되게 하지 못한다면 모든 것은 허망합니다.
    사람 내 편 만들려고 애쓰지 마십시오. 사람의 인기를 끌기 위해 애쓰고 누군가 힘있는 사람의 지원을 받으려고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다 잃어도 하나님 편에 서시고 하나님을 붙드십시오.
    사람이 많다고 이기고 성공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하나님 편에 선 사람을 당할 수는 없습니다.
    함께 하는 사람이 없어도 하나님 보시기에 아름답게 서면 하나님이 그의 편 되어 주십니다. 그런 사람을 상대하는 것은 위험합니다. 그런 사람을 무너뜨리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그런 사람과 상대하는 것은 하나님을 상대하는 것입니다.
    다윗이 골리앗을 꺾지 못한 이유가 그것입니다. 사울 왕이 그 막강한 힘을 가지고도 다윗을 상대하지 못한 이유가 그것입니다. 사울이 결국 무너지고 맙니다.
    이렇게 사람의 힘을 끌어 모아 자기 욕심을 채우려는 아도니아의 모습은 이미 반역을 시도했던 압살롬과도 닮아 있습니다.
    악한 자들은 닮은꼴이 있기 마련입니다. 압살롬도 인심을 사기 위해 애썼습니다.
    삼하 15:6 “이스라엘 무리 중에 왕께 재판을 청하러 오는 자들마다 압살롬의 행함이 이와 같아서 이스라엘 사람의 마음을 압살롬이 훔치니라”
    또 압살롬은 가장 똑똑한 사람을 자기편으로 만들었습니다. 다윗의 모사였던 아히도벨까지 자기편으로 만들었습니다.
    삼하 15:12 “제사 드릴 때에 압살롬이 사람을 보내 다윗의 모사 길로 사람 아히도벨을 그의 성읍 길로에서 청하여 온지라 반역하는 일이 커가매 압살롬에게로 돌아오는 백성이 많아지니라”
    이것은 다윗도 몹시 당황하고 두려워했던 일입니다.
    그러나 이 때 다윗은 하나님을 붙듭니다. 자기에게 대단한 힘이었던 아히도벨이 압살롬 편에 서버릴 때 다윗은 오히려 하나님을 더욱 붙들면서 회복합니다. 승리하는 사람의 다른 점입니다. 사람들이 내게서 떠나갈 때 오히려 하나님과 더욱 가까워집니다. 그러기에 다윗을 누구도 이길 수 없었습니다.
    아도니아의 반역은 실패합니다.
    껩데기만 그럴 듯 하고 속에는 교만과 탐욕이 가득한 아도니아는 실패합니다. 하나님께서세우시지 않으면 누구도 설 수 없습니다.
    내가 높아지려고 애쓰지 마십시오. 하나님의 마음에 드는 사람 되고 하나님이 보시기에 아름다운 중심을 가꾸면 됩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높이고 세우시고 붙들어 주십니다.
    성공을 꿈꾸지 마십시오. 성결을 향해 가십시오. 하나님이 잘 아십니다.



    아도니야(Adonijah) - 여호와는 주
    다윗의 넷째 아들로서 학깃의 아들(삼하 3:4).
    형 압살롬이 죽고 왕위 계승 문제로 솔로몬과 다투었다.
    요압 장군과 아비아달 제사장이 아도니야를 지원했으나 결국 나단은 밧세바를 시켜 다윗으로 하여금 솔로몬을 계승자로 임명.
    아도니야는 일시에 목숨을 건졌으나 결국 죽임을 당했다(왕상 1:5-2:25).


    이스라엘의 왕은 하나님께서 세우십니다.
    사람이 정할 수도, 사람이 세울 수도 없습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께서 통치하시는 나라입니다.
    그런데도 아도니야는 ‘스스로’ 왕이 되려고 했습니다. 그에게는 하나님이 없었습니다. 자기 스스로를 높여 왕이 되는 것에만 관심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을 섬기며 하나님의 뜻에 따라 세워지는 것이 이스라엘의 왕이었지만, 아도니야는 하나님을 업신여기고 스스로 교만해져서 오로지 왕의 권력만 탐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우리는 하나님께서 교만을 얼마나 증오하시는지, 그리고 그러한 교만한 자들을 어떻게 징계하시는지 성경 여러 곳에서 볼 수 있습니다. 출애굽의 지도자 모세 앞에서 자기를 높이고 이스라엘을 반역의 길로 선동했던 ‘고라’ 일당은 하나님의 심판으로 땅이 그 입을 열어 그들과 그들의 집과 그들에게 속한 모든 사람과 그들의 재물을 삼켜 멸망 시켰다고 말씀합니다(민 16장). 헤롯 왕이 교회를 박해하고 스스로를 높여 하나님께 돌려야 할 영광을 자신이 취하자 벌레들이 그의 몸을 먹어 죽고 말았습니다(행 12:23). 이처럼 하나님은 교만한 자들을 심판하십니다. 그러나 반대로 자기를 낮추고 겸손히 살아가는 성도들에게는 한없는 사랑과 축복을 부어주십니다(눅 22:26, 전 5:5).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 앞에 겸손한 자가 되어야 합니다(잠 11:2).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살아계시고 역사하심을 믿고 하나님 앞에서 겸손해야 합니다(벧전 5:5-6). 진정으로 하나님을 인정하고 자기를 낮추며 섬기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우리를 높이 세우십니다(약 4:10). 그리고 우리를 통해 선한 일을 이루십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마가복음 10:43-44에서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의 구원은 예수님의 낮아지심으로 주어졌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겸손과 섬김을 본받아야 합니다. 우리는 자신을 더 많이 낮출수록 더 큰 힘을 발휘할 수 있는 존재들입니다. 오늘, 낮아짐을 통해 예수님의 크신 사랑과 섬김, 겸손의 능력을 세상에 더욱 밝히 드러내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6절에는 아도니야가 어떤 사람인지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는 압살롬 다음에 태어난 자요 용모가 심히 준수한 자라 그의 아버지가 네가 어찌하여 그리 하였느냐고 하는 말로 한 번도 그를 섭섭하게 한 일이 없었더라”

    아도니야는 압살롬 다음에 난 자, 용모가 심히 준수한 자, 그리고 다윗 왕에게 한 번도 섭섭한 소리를 듣지 않았던 자라고 소개합니다.
    그런데 저자는 아도나야의 성품과 인격에 대해서는 한마디 언급하지 않습니다.

    사무엘상 16:7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 하시더라”
    라고 말씀을 하는데,

    아도니야는 자랑할 만한 신앙이나 인격이 없었습니다.
    아도니야는 사람들의 눈에는 여러 가지 자랑할 만한 외적인 조건을 갖추고 있었지만, 정작 내면을 보시는 하나님 앞에서는 내놓을 것이 하나도 없는 인물이었습니다.
    그는 다윗의 셋째 아들 압살롬과 매우 흡사한 인물이었습니다(삼하 14:25).

    여러분, 대개 사람들은 그가 얼마나 부자냐?, 그 사람의 외모는 어떤가?, 어떤 직업을 갖고 있는가? 등 주로 외적인 가치에 근거해 사람을 판단합니다. 그러나 성도는 그러한 가치관을 가져서는 안 됩니다. 성경은 잠언 21:2에 “사람의 행위가 자기 보기에는 모두 정직하여도 여호와는 마음을 감찰하시느니라”라고 말씀합니다. 사람들의 눈에 아무리 그럴듯해 보여도, 하나님은 신앙과 인격을 보시고 사람을 평가하십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은 무엇에 가치를 두고 있습니까? 6절에 기록된 아도니야의 조건들은 하나님 앞에 아무것도 아니었습니다. 우리는 돈, 권력, 외모 등의 외적인 조건에 근거해 사람을 판단해서는 안 됩니다. 그에게 하나님을 향한 중심이 있는지 살펴야 합니다. 오늘, 사람들의 평가에 따라 좌우되지 않고, 하나님 앞에서 정직하고 신실한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8절 함께 읽습니다.
    “제사장 사독과 여호야다의 아들 브나야와 선지자 나단과 시므이와 레이와 다윗의 용사들은 아도니야와 같이 하지 아니하였더라”

    ‘같이하지 아니하였더라’라는 말은 당시 주류였던 아도니야 일당이 악한 일을 계획할 때, 거기에 결탁하지 않고 자기의 자리를 지켰다는 뜻입니다.
    그들은 자신을 왕이라 선언하는 아도니야와 거기에 가세한 군사령관 요압과 제사장 아비아달의 세력이 얼마나 강한지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계획이 성공할 경우, 자신들에게 어떤 위험이 닥칠지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실제로 9-10절에 그들만은 잔치에 초청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무엇이 옳은 것인지에 정확하게 알고 있었고, 흔들리지 않고 자신의 신앙과 자리를 지켰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을 믿는 사람은 현실이 아무리 힘들고 어려워도 믿음과 의리를 지킵니다.
    결코, 불의와 타협하지 않습니다.
    물론, 그로 인해 세상이 주는 즐거움과 편안함을 빼앗길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믿는 사람은 불의한 자들과 운명을 같이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능력과 보호하심은 어떠한 가운데에서도 의를 지키는 자에게 주어짐을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이것저것 핑계를 대며 불의한 이들과 함께 거하며 현실의 어려움을 피하는 자들에게는 영원한 파멸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우리를 성도라 부르시고 거룩한 백성으로 삼으신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거룩하고 의로운 삶을 살기를 원하시고 또 응원하십니다. 생명의 길에서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않기를 원하시고 또 도우십니다.

    디모데후서 3:12
    “무릇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박해를 받으리라”

    믿음의 삶을 사는 사람에게는 어려움과 시련이 따르게 마련입니다.
    그러나 그 모든 과정에서 하나님의 보호하심이 함께 하며, 그 과정을 통해 우리의 신앙과 인격이 성장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어떠한 경우에도 타협이라는 얄팍한 꾀를 버리고 주어진 의의 길을 끝까지 당당하게 걸어가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하나님 아버지, 아도나야의 어리석음을 기억하는 저희가 되게 하여 주옵소서.
    우리의 구원은 예수님의 낮아지심으로 주어졌기에 자신을 더 많이 낮출수록 더 큰 힘을 발휘할 수 있음을 믿고, 낮아짐을 통해 예수님의 크신 사랑과 섬김, 겸손의 능력을 세상에 밝히 드러내는 저희가 되게 하여 주옵소서.
    또한, 성도는 현실이 아무리 힘들고 어려워도 믿음과 의리를 지켜야 함을 기억하고, 어떠한 가운데에서도 의를 지킴으로 하나님의 능하신 손길 아래 거하는 저희가 되게 하여 주옵소서.


    열왕기상은 다윗의 죽음, 솔로몬의 통치, 성전 건립, 대언자 엘리야와 사악한 왕 아합과 아내 이세벨의 대결
    역사뿐만 아니라 정치적 교훈 및 영적 교훈을 깨닫게 합니다.





     16


    엄지(Thumb)

    영어로는 thumb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엄지척'(엄지를 척 올리는 것)을 영어로 thumbs up이라고 하죠.
    엄지를 올린다는 건 '어떤 것을 찬성하거나 호의적으로 생각하는 것'을 의미하겠죠?

    특히 뭔가 아주 마음에 들면 양손 모두 들어 엄지척을 해줘야 하니까 'two thumbs up'이라고 합니다.
    예문을 한번 볼까요?

    I loved that movie so much that I would give it two thumbs up! (The Free Dictionary, n.d.)
    나는 그 영화가 아주 마음에 들었어. 쌍따봉을 주겠어!


    thumbs up이 있다면, thumbs down도 있을 것 같지 않나요?
    thumbs down은 '어떤 것을 찬성하지 않고 반대 의사를 가질 때' 쓰는 표현입니다.

    We applied for a loan, but the bank gave us the thumbs down. (Cambridge Dictionary, n.d.)
    우리는 대출을 신청했지만, 은행은 승인해주지 않았어.

    검지(Index finger)

    검지는 불리는 이름이 꽤나 다양한데요,

    우선 forefinger! 이때 'fore-'은 '앞부분'이라는 뜻인데 대충 느낌이 오시나요?
    보통 무엇인가를 가리킬 때 검지를 번쩍 들고 앞으로 찌르잖아요. 그 이미지를 머릿 속에 그려보면 될 것 같습니다.

    index finer라고도 자주 부르는데요,
    라틴어 어원을 생각해보면 말 그대로 'pointing finger(가리키는 손가락)'이라는 뜻이라고 합니다.

    신기하게도 검지를 first finger라고도 부르더라구요.
    사실 손에서 첫번째는 엄지라고 생각하기 쉬운데, 엄지를 제외하고 하나씩 세어보면 검지가 첫번째라서 이런 이름이 생긴 것 같습니다.


    중지(Middle finger)

    중지는 매우 심.플.하게 그냥 middle finger입니다
    한국에서도 서구 문화에서도 중지를 들어올려서 보여주는 건 다 offensive gesture(모욕적인 제스처)라고 생각합니다.


    약지(Ring finger)

    네번째 손가락은 보통 반지를 끼는 손가락이죠?
    그래서 약지는 ring finger라고 부릅니다.


    새끼 손가락(Little finger)

    이것도 마찬가지로 아주 명쾌한 표현입니다.
    새끼 손가락은 영어로 little finger라고 부르면 됩니다. 제일 작은 손가락이니까요!

    pinky finger (혹은 pinkie)라고도 부르는데,
    네덜란드어에서 pink가 'little finger'라는 뜻이라고 하네요.

    우리 새끼 손가락을 걸고 하는 약속 있죠? 그걸 영어로는 'pinky promise'라고 합니다.

    손바닥(Palm)

    손바닥을 보면 생명선, 운명선, 애정선 등 여러가지 손금이 있죠?
    이런 손금을 보고 운을 점치는 것을 영어로는 'palm reading' 이라고 합니다.
    말 그대로 '손금을 읽는 것'이니까요!

    palm이 들어간 다른 표현으로 이런 것도 있습니다.
    In the palm of one's hand (~의 손바닥 안에 있다)

    [정의]
    to have control or influence over (someone) (Merriam Webster Dictionary, n.d.)
    누군가에게 영향력, 통제력을 끼치다.

    [예시]
    She has her boss in the palm of her hand. (Merriam Webster Dictionary, n.d.)
    그녀의 보스는 그녀의 손바닥 안에 있다.

    이 표현은 한국어에도 있는 말이라 그런지 의미가 그냥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지죠?
    이것말고도 손과 관련된 영어 표현이 훨씬 더 많을 것 같은데, 일단 오늘은 여기까지 하도록 하겠습니다!!





    월요일 : 엄지손가락(Thumb) 기도, 번제의 삶

    엄지는 심장에서 가장 가깝습니다.
    그래서 가장 가까운 사람들을 위해 기도합니다.
    먼저, 오늘 주신 말씀을 기억하며 나 자신, 그리고 가족, 형제, 이웃을 위해 기도합니다.
    주일에 예배를 드리지 못한 분들을 위해 기도합니다.
    구약성경의 다섯 가지 제사를 삶에 적용하여,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은 어떤 일인지, 내가 무엇을 하면 하나님께서 자랑스러워하실지 그것을 생각하며, 자신의 모든 것을 하나님께 헌신하는 ‘번제의 삶’을 결단합니다.

    화요일 : 검지손가락(Index finger) 기도
    forefinger, first finger

    검지는 무엇을 가리킬 때 쓰는 손가락입니다.
    오늘 주신 말씀을 기억하며 목회자들과 교회학교 교사들, 이 땅의 선생님들, 해외 선교사들을 위해 기도를 합니다.
    다음 세대를 위해 헌신하는 분들을 위해 집중하여 기도합니다.
    구약성경의 다섯 가지 제사를 삶에 적용하여, 생명을 주신 하나님께 성결함으로 모든 삶을 드리는 ‘소제의 삶’을 결단합니다.

    수요일 : 중지손가락(Middle finger) 기도, 화목제의 삶

    중지는 가장 긴 손가락입니다.
    나라를 지키는 사람들, 대통령을 비롯한 위정자, 공무원, 정치인, 경제인들을 위해서 기도합니다.
    북한을 위해서 기도합니다.
    저녁에 있을 수요예배를 위해 기도합니다.
    구약성경의 다섯 가지 제사를 삶에 적용하여, 하나님과의 관계를 다시 한번 되돌아보는 ‘화목제의 삶’을 결단합니다.

    목요일 : 약지손가락(Ring finger) 기도, 속죄제의 삶

    약지는 손가락 중에서 힘이 가장 약한 손가락입니다.
    병든 분들, 여러 가지 일에 실패한 분들, 삶의 형편에 지쳐서 믿음이 연약해진 분들을 위해 기도합니다.
    구약성경의 다섯 가지 제사를 삶에 적용하여, 한 주간 살아오면서 하나님 앞에 범죄한 일이 없는지 스스로를 돌아보는 ‘속죄제의 삶’을 결단합니다.

    금요일 : 새끼손가락(Little finger) 기도
    Pinky finger. Pinkie


    소지, 곧 새끼 손가락은 가장 작습니다.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 소년소녀가장, 독거어르신을 위해 기도합니다.
    교회의 전반적인 기도 제목과 주일 예배를 위해 기도합니다.
    구약성경의 다섯 가지 제사를 삶에 적용하여, 이웃과의 삶에서 잘못한 것은 없는지 돌아보는 ‘속건제의 삶’을 결단합니다.

    토요일 : 손바닥(Palm) 기도 

    내 손안에 있다고 말합니다.
    내 영향력 안에 있는 것들을 위하여 기도합니다.
    다른 말로 중보 기도라고 하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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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열왕기상. 하도 사무엘 상 하처럼 히브리어 성경에는 한 권의 책이었다.
    히브리어 명칭은 '말킴' (왕들) 이다.
    70인역에서는 제3왕국기, 제4왕국기라고 되어 있다.

    내용과 주요 사상

    ​열왕기는 솔로몬 왕이 된 때부터 시작하여 나라의 분열 그리고 두 나라의 멸망과 또 바벨론 포로생활에서 여호야긴이 돌아오는 때까지의 남북 두 나라에 관한 역사에 관한 기록이다.

    탈무드 성경 바바 바트라(Baba Bathra)에 의하면 예언자 예레미야가 예레미야서와 열왕기 그리고 애가를 썼다고 되어 있지만 여러가지 면에서 그 주장은 불확실한 주장 이다.

    본서는 예레미야와 동시대의 어떤 예언자가 이미 있던 문서들을 자료로 삼아 옛 역사의 사건들에 관하여 기록한 것이라고 생각된다.
    본서의 내용을 연대별로 세 부분으로 나누어 구분 할 수 있다.

    ​솔로몬 왕 시대(주전 979-933년, 왕상 1~11장)

    다윗왕이 노쇠하자 왕위 계승을 둘러싸고 암투가 벌어졌다.
    장군 요압과 제사장 아비아달의 후원을 얻은 넷째 아들 아도니아와 장군 브나야와 제사장 사독과 선지자 나단 의 후원을 얻은 솔로몬 사이에 왕위 계승의 싸움이었는데 결국 솔로몬이 등국하였다.
    솔로몬왕은 놀라운 지혜로 나라를 잘 다스리고 많은 부귀와 영광을 누렸으며 7년에 걸쳐 성전을 건축하고 13년 걸려 왕궁을 건설하였다. 그러나 지나친 노동력의 동원과 무거운 세금징수, 그리고 많은 이방인들과 그들을 통해서 들어온 잡다한 우상숭배 등으로 국민의 반감을 샀다.

    분열 왕국시대(주전 933-722년, 왕상 12~왕하 17장)

    ​솔로몬이 죽은 후 나라가 분열되어 그의 아들 르호보암은 남쪽 두 지파의 왕이 되어 유다 왕국을 다스리고,
    여로보암이 북쪽의 10지파를 규합하여 북쪽에 이스라엘 왕국을 세웠다.

    북쪽 이스라엘에는 아합왕이나 여로보암 2세와 같은 영도력이 강한 왕들이 나오기는 했지만 정변이 많아 여러 왕이 암살되었고 남쪽 유다에서는 르호보암의 후손이 대개 통치하였다.

    당시의 예언자들은 엘리야, 엘리사, 이사야, 아모스, 호세아등이며 이들의 예언자 운동은 이 시기를 이 민족의 역사상 위대한 각성의 시기가 되도록 하였다.

    유다 왕국의 역사(주전 722-561년, 왕하 18~25장)

    ​북왕국이 멸망할 때 남왕국 유다의 왕은 히스기야이었다.
    이사야의 경고에 감동되어 종교개혁을 단행하고 나라를 중흥시키려고 많은 노력을 한 훌륭한 왕이었다(왕하 19: )
    그 후 요시야왕 때에 율법서를 발견하고 전국적인 종교 개혁을 단행했다 (왕하 22:-23: )
    그러나 요시야왕은 아깝게도 애굽과의 전쟁에서 전사하고 말았다.
    그 후 친 애굽파와 친 바벨론파로 국론이 둘로 나뉘어 갈팡지팡하다가 586년에 바벨론 왕 느브갓네살에게 점령되어 멸망하였다(왕하24~25장)


    내용 대분해


    솔로몬 왕의 통치 (왕상 1:1-11:43)

    1) 다윗왕의 최후 (왕상1:1-2:11)
    2) 솔로몬왕의 통치 시작 (왕상2:12-46)
    3) 솔로몬의 결혼 (왕상3:1-28)
    4) 솔로몬왕국의 정부조직 (왕상4:1-34)
    5) 성전 건축 (왕상5:1-7:51)
    6) 솔로몬이 성전을 헌당함 (왕상8:1-66)
    7) 하나님과 솔로몬과 언약을 맺음 (왕상9:1-28)
    8) 스바여왕의 방문 (왕상10:1-29)
    9) 솔로몬왕의 통치가 끝남 (왕상11:1-43)

    왕국의 분열 (왕상 12:1-16:34)

    ​1) 북쪽 10지파와 분열함 (왕상12:1-33)
    2) 여로보암의 파멸을 예언자들이 예고함 (왕상13:1-14:20)
    3) 남왕국의 르호보암, 아비얌,아사의 사적 (왕상14:21-15:24)
    4) 북왕국의 나답, 바아사, 엘라, 시므리의 사적 (왕상15:25-16:20)
    5) 북왕국의 오므리, 아합의 사적 (왕상16:21-34)

    엘리야와 아합왕 (왕상 17:1-22:53)

    ​1) 엘리야가 가믐을 예고함 (왕상17:1-24)
    2) 갈멜산 사건 (왕상18:1-46)
    3) 엘리야가 시내산에서 하나님을 만남 (왕상19:1-21)
    4) 한 선지자가 아합왕을 격려함 (왕상20:1-43)
    5) 아합왕이 나붓의 포도원을 빼앗음 (왕상21:1-29)
    6) 선지자 미가야가 아합의 죽음을 예고함 (왕상22:1-53)

    열왕기상 장별 요약 강해

    열왕기상 1장 요약

    다윗이 늙자 수넴 여인 아비삭을 들여 수종 들게 한다.
    아도니야가 왕이 되려 하지만 나단과 밧세바 다윗에게 알리고 솔로몬이 왕이 되도록 한다.

    • 1-4절 수넴 여인 아비삭이 다윗을 수종들다.
    • 5-10절 아도니야가 왕이 되려하여 사람들을 모아 잔치하다.
    • 11-27절 나단과 밧세바가 다윗에 이 사실을 알리고 옛약속을 되새기다.
    • 28-53절 솔로몬이 왕ㅇ되고 아도니야 사람들은 흩어지다.


    1:1  솔로몬 왕의 등극
    1:5  아도니야의 음모
    1:11 솔로몬 추대 운동
    1:15 다윗과 밧세바의 면담
    1:22 나단의 계책과 다윗의 결단
    1:32 솔로몬 즉위식에 대한 다윗의 명령
    1:38 기름 부음을 받은 솔로몬
    1:40 아도니야의 음모 실패와 솔로몬의 관​


    열왕기상 2장 요약

    다윗은 왕이된 솔로몬에게 주의해야할 일들과 기억해야할 사람들을 알려 줍니다. 솔로몬은 하나씩 정적들을 제거하여 왕이를 공고히 합니다.

    • 1-12절 다윗의 권면과 죽음
    • 13-18절 아도니야가 밧세바에게 수넴 여인과 결혼하도록 청하다.
    • 19-25절 밧세바의 말을 듣고 아도니야의 의도를 알아챈 솔로몬이 아도니야를 제거하다.
    • 26-35절 제사장 아바아달을 사독으로, 군사령관 요압을 대신해 브나야를 세우다.
    • 36-46절 시므이를 죽이다.

    2:1 솔로몬 왕권의 확립
    2:1 다윗의 마지막 권면
    2:10 다윗의 죽음
    2:26 아바아달의 파면
    2:28 요압의 최후
    2:36 시므이의 최후


    열왕기상 3장 요약

    솔로몬은 지혜의 왕이다. 하지만 그의 지혜는 스스로 생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물임을 강조하고 있다. 아이가 바뀐 여인의 판결은 솔모몬의 지혜가 갖는 특징으로 인간의 본성을 헤아리를 힘을 가지고 있음을 말한다.

    • 1-3절 솔로몬이 바로 딸과 결혼, 산당에서 분향함
    • 4-15절 기브온 산당에서 일천번제 지혜를 구함
    • 16-28절 아이가 바뀌 두 여인을 판결함

    왕상3:1 솔로몬이 지혜를 구함

    왕상3:1 통치 초기의 종교적 상황

    왕상3:4 솔로몬의 일천 번제

    왕상3:16 솔로몬의 지혜로운 재판


    열왕기상 4장 요약

    4장은 솔로몬의 능력과 위엄을 말합니다. 얼마나 대단한 존재인지를 과장스럽게 말합니다. 심판론적 관점에서 전개되는 열왕기의 관점상 4장의 화려함은 하나님을 거역할 경우 하나님께서 주신 많은 복과 능력도 순식간에 사라질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주시는 이도 하나님이시고, 가져가시는 분도 하나님이시다.

    • 1-6절 솔로몬의 신하들
    • 7-19절 지방 관리들
    • 20-28절 솔로몬 왕궁의 하루 식량
    • 29-34절 솔로몬의 지혜를 들으러 오는 사람들

    왕상4:1 솔로몬의 정치

    왕상4:1 솔로몬의 신하들

    왕상4:7 솔로몬의 열두 관장

    왕상4:20 이스라엘 왕국의 평안과 발전

    왕상4:29 솔로몬에 대한 소문


    열왕기상 5장 요약

    솔로몬은 성전 건축을 위해 다윗과 친한 히람에게 소식을 전해 도움을 청한다. 히람의 도움으로 성전 건축이 시작된다.

    • 1-6절 솔로몬이 히람에 성전 건축을 위해 도움을 청하다.
    • 7-12절 히람이 제안을 수용하고 솔로몬이 선물을 히람에게 보내다.
    • 13-18절 성전 건축을 위한 역군들

    왕상5:1 성전 건축을 준비함

    왕상5:1 솔로몬과 히람의 교역 약속

    왕상5:13 성전을 건축할 사람들


    열왕기상 6장 요약

    솔로몬은 최선을 다해 성전을 건축한다. 하나님은 솔로몬에게 나타나 법도와 율례를 따르면 다윗에게 한 약속이 이루어지리라 재확시켜 주신다. 열왕기 기자는 성전이 중요한게 아니라 율례와 법도가 중요함을 강조하고 있다.

    • 1-10절 솔로몬이 성전 건축을 시작한다.
    • 11-13절 하나님이 솔로몬에게 나타나시다.
    • 14-38절 성전 건축을 마치고 외부를 치장하다. 성전은 7년 동안 건축되었다.(38절)

    왕상6:1 성전 건축이 완성됨

    왕상6:1 성전 외곽의 건축

    왕상6:11 솔로몬에게 임한 하나님의 말씀

    왕상6:14 성전 내부 장식

    왕상6:23 지성소의 두 그룹

    왕상6:29 문설주와 문짝

    왕상6:37 성전의 건축 기간


    열왕기상 7장 요약

    솔로몬은 13년에 걸쳐 자신의 궁전을 지었고, 성전 건축을 마친 후 히람이라는 장인을 불러 성전 기구들을 만들게 했습니다. 히람은 두 기둥, 바다, 물두멍 등 청동 기구들을 제작했습니다. 이외에도 많은 성전 기구들이 만들어졌고 성전 내부에 배치되었습니다. 이후 솔로몬은 다윗이 헌납한 금, 은, 기물들을 성전 곳간에 두어 성전의 완성을 마무리했습니다.

    1. 솔로몬의 궁전 건축 (1-12절)
    2. 히람의 성전 기구 제작 (13-47절)
    3. 성전의 금, 은 기물 배치 (48-51절)

    왕상7:1 솔로몬 궁전 건축

    왕상7:13 두 놋 기둥

    왕상7:23 놋 바다

    왕상7:26 놋 물두멍과 받침

    왕상7:40 놋 기구들

    왕상7:48 금 기구들


    열왕기상 8장 요약

    솔로몬은 이스라엘의 모든 장로와 족장을 예루살렘에 모아 성전으로 언약궤를 옮겼습니다.
    제사장들이 궤를 지성소에 두었고, 하나님의 영광이 성전에 가득 찼습니다.
    솔로몬은 하나님을 찬양하고 기도하며, 백성들이 주님께 순종하고 용서를 구할 때 응답해 주시길 간구했습니다.
    그 후 왕과 백성들은 화목제와 번제를 드렸고, 성전 봉헌을 기념하여 14일간 큰 절기를 지켰습니다.

    1. 언약궤를 성전으로 옮김 (1-11절)
    2. 솔로몬의 성전 봉헌 기도 (12-53절)
    3. 제사와 축제 (54-66절)

    8:1 솔로몬의 성전 봉헌
    8:1 법궤가 성전에 안치됨
    8:12 성전 건축후의 설교
    8:22 솔로몬의 봉헌 기도
    8:54 솔로몬의 권면
    8:62 화목제의 희생 제물을 드림


    열왕기상 9장 요약

    솔로몬이 성전과 왕궁 건축을 마친 후, 하나님께서 다시 나타나 솔로몬과 언약을 갱신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솔로몬이 그분의 계명을 지키면 이스라엘의 왕위를 굳게 하시겠지만, 불순종하면 나라가 멸망하고 성전이 버림받을 것이라고 경고하셨습니다.
    이후 솔로몬은 히람과의 교역을 통해 도시들을 주고받았으며, 성전과 여러 건축 프로젝트를 완료했습니다.
    솔로몬은 이방 백성들을 노역시켜 많은 성을 건축했습니다.

    1. 하나님의 두 번째 나타나심 (1-9절)
    2. 솔로몬의 외교와 건축 활동 (10-19절)
    3. 솔로몬의 노역과 종교적 활동 (20-28절)

    9:1 솔로몬에게 다시 나타나신 하나님
    9:1 하나님의 언약
    9:10 솔로몬과 하람의 교역
    9:15 솔로몬의 건축 사업
    9:25 솔로몬의 제사


    열왕기상 10장 요약

    스바 여왕이 솔로몬의 지혜와 명성을 듣고 예루살렘을 방문해 그를 시험했습니다.
    솔로몬은 모든 질문에 답했고, 여왕은 그의 지혜와 부에 크게 감탄하며 많은 선물을 주고받았습니다.
    솔로몬은 금과 귀한 재료들로 많은 물건을 만들었고, 해상 무역을 통해 엄청난 부를 축적했습니다.
    그의 지혜와 부는 온 세상에 알려졌고, 여러 나라에서 조공을 바치며 솔로몬의 지혜를 듣기 위해 왔습니다.

    1. 스바 여왕의 방문과 솔로몬의 지혜 (1-13절)
    2. 솔로몬의 부와 교역 (14-22절)
    3. 솔로몬의 명성 및 부의 확장 (23-29절)
    10:1 솔로몬의 전성 시대
    10:1 하나님의 언약
    10:15 솔로몬의 건축 사업
    10:25 솔로몬의 제사
    10:26 솔로몬의 무역

    열왕기상 11장 요약

    솔로몬은 많은 이방 여인들과 결혼하여 그들의 신들을 따르며 하나님 앞에 범죄했습니다. 그의 노년에는 아내들이 그를 유혹해 우상 숭배를 하게 했고, 하나님은 이에 진노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솔로몬의 불순종 때문에 그의 왕국을 찢어버릴 것을 예고하시고, 여러 대적들을 일으키셨습니다. 그러나 다윗과의 언약 때문에 솔로몬의 생애 동안은 나라가 분열되지 않았고, 그의 아들 르호보암 때에 왕국이 분열될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1. 솔로몬의 이방 아내들과 우상 숭배 (1-8절)
    2.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 예고 (9-13절)
    3. 솔로몬의 대적들 등장 (14-25절)
    4. 여로보암의 반역과 솔로몬의 죽음 (26-43절)

    왕상11:1 솔로몬의 아내들과 타락

    왕상11:1 솔로몬의 우상 숭배

    왕상11:9 하나님의 경고

    왕상11:23 르손의 반역

    왕상11:26 아히야의 예언


    열왕기상 12장 요약

    르호보암이 왕위에 오르자, 이스라엘 백성들은 노동을 덜어달라고 요청합니다. 그러나 르호보암은 그 요청을 거절하고 더 가혹하게 다스리겠다고 선언합니다. 이에 북이스라엘 10지파는 여로보암을 왕으로 세우고 반란을 일으켜 나라가 분열됩니다. 남유다는 르호보암의 통치를 받았으며, 여로보암은 금송아지를 만들어 이스라엘이 우상을 숭배하게 했습니다.

    1. 르호보암의 통치 시작 (1-15절)
    2. 이스라엘 왕국 분열 (16-20절)
    3. 여로보암의 우상 숭배 (21-33절)

    왕상12:1 왕국의 분열

    왕상12:1 왕국 분열

    왕상12:1 르호보암의 어리석음

    왕상12:16 이스라엘 열 지파의 분열

    왕상12:25 여로보암의 왕국 확립


    열왕기상 13장

    한 하나님의 사람이 여로보암의 제단에 와서 하나님의 심판을 예언합니다. 제단은 갈라지고 여로보암의 손이 말라붙으나, 그가 회개하자 손이 회복됩니다. 그러나 이 하나님의 사람은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고 길에서 다른 예언자의 유혹을 받아 함께 식사하다가, 하나님의 벌을 받아 사자에게 죽임을 당합니다. 이 사건 후에도 여로보암은 회개하지 않았습니다.

    1. 하나님의 사람의 예언과 기적 (1-10절)
    2. 예언자의 유혹과 하나님의 사람의 죽음 (11-24절)
    3. 여로보암의 고집 (25-34절)

    왕상13:1 여로보암과 하나님의 사람

    왕상13:1 우상을 섬기다가 징계 받는 여로보암

    왕상13:11 하나님의 사람의 불순종

    왕상13:20 하나님의 사람의 죽음

    왕상13:33 여로보암의 계속된 악행


    열왕기상 14장

    여로보암의 아들이 병들자, 그의 아내는 예언자 아히야를 찾아가 아이의 회복을 구합니다. 아히야는 여로보암의 집에 심판이 임할 것을 예언하며 아이는 죽을 것이라 말합니다. 그 예언대로 아이는 죽고, 여로보암 가문은 멸망할 것을 선언받습니다. 동시에 남유다의 르호보암도 악을 행하였고, 애굽 왕 시삭이 예루살렘을 공격해 왕궁의 보물들을 약탈해 갔습니다.

    1. 여로보암 가문에 대한 심판 예언 (1-18절)
    2. 르호보암의 악행과 시삭의 침략 (19-31절)

    왕상14:1 분열 왕국 두 왕의 죽음

    왕상14:1 아히야의 예언

    왕상14:17 여로보암 아들의 죽음

    왕상14:21 르호보암의 유다 통치와 죽음


    열왕기상 15장

    아비암이 유다의 왕이 되었으나 하나님 보시기에 악을 행했습니다. 그의 아들 아사가 뒤를 이어 왕이 되었고, 그는 하나님을 따르며 우상 숭배를 제거하는 개혁을 단행했습니다. 반면, 북이스라엘의 왕 나답은 악을 행하다가 바아사에게 살해되었고, 바아사가 왕위에 올라 여로보암의 가문을 모두 멸망시켰습니다. 바아사 역시 여로보암처럼 악을 행하며 하나님 앞에서 죄를 범했습니다.

    1. 아비암의 통치와 악행 (1-8절)
    2. 아사의 종교 개혁 (9-24절)
    3. 나답의 죽음과 바아사의 통치 (25-34절)

    왕상15:1 분열 왕국

    왕상15:1 아비얌의 유다 통치

    왕상15:9 아사의 유다 통치

    왕상15:25 나답의 이스라엘 통치

    왕상15:33 바아사의 이스라엘 통치


    열왕기상 16장

    바아사가 계속 악을 행하자,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그의 가문이 멸망할 것을 예언받습니다. 그의 아들 엘라가 왕이 되었으나, 신복 시므리에게 살해됩니다. 시므리는 왕이 되었으나, 7일 만에 오므리가 반란을 일으켜 왕이 됩니다. 오므리는 사마리아를 세우고 통치하다가 그의 아들 아합이 왕위에 오릅니다. 아합은 바알 숭배를 장려하며 이스라엘 역사상 가장 악한 왕으로 평가받습니다.

    1. 바아사의 악행과 심판 (1-7절)
    2. 엘라의 죽음과 시므리의 짧은 통치 (8-20절)
    3. 오므리와 아합의 통치 (21-34절)

    왕상16:1 바아사 왕조의 몰락

    왕상16:8 엘라와 가문의 멸망

    왕상16:15 시므리의 통치

    왕상16:21 오므리의 이스라엘 통치

    왕상16:29 아합의 죄악


    열왕기상 17장

    엘리야가 아합에게 하나님의 명령으로 3년간의 가뭄을 예언합니다. 엘리야는 하나님의 지시로 그릿 시냇가에서 까마귀의 도움을 받아 살아갑니다. 이후 과부의 집으로 보내져 과부와 그의 아들이 기적적으로 가루와 기름이 끊어지지 않는 축복을 경험합니다. 과부의 아들이 죽자, 엘리야가 그를 기도로 살려내며 하나님의 능력을 드러냅니다.

    1. 엘리야의 가뭄 예언 (1절)
    2. 그릿 시냇가에서의 생존 (2-7절)
    3. 과부의 집에서 기적과 부활 (8-24절)

    왕상17:1 엘리야의 초기 사역

    왕상17:1 엘리야의 첫 예언

    왕상17:8 사르밧 과부의 집에 거하는 엘리야

    왕상17:17 사르밧 과부의 아들을 살린 엘리야


    열왕기상 18장

    가뭄 3년 후, 엘리야는 아합을 만나 갈멜산에서 바알의 선지자들과 대결을 제안합니다. 바알 선지자들이 제단을 쌓고 기도했으나 아무런 응답이 없었고, 엘리야는 하나님께 기도해 불이 내려와 제단을 태웠습니다. 백성들은 하나님을 인정하며 바알 선지자들을 처형했습니다. 이후 엘리야의 기도로 비가 내리기 시작하며 가뭄이 끝났습니다.

    1. 엘리야와 아합의 만남 (1-19절)
    2. 갈멜산에서의 대결 (20-40절)
    3. 비의 재강림 (41-46절)

    왕상18:1 엘리야와 오바댜

    왕상18:1 사마리아의 가뭄과 기도

    왕상18:7 엘리야와 오바댜의 만남

    왕상18:16 엘리야와 아합의 만남

    왕상18:20 엘리야와 바알 선지자들의 대결

    왕상18:41 엘리야의 기도로 비가 내림


    열왕기상 19장

    엘리야는 이세벨의 위협을 피하여 광야로 도망칩니다. 그는 절망 속에 하나님께 죽기를 구했으나, 하나님의 천사가 그에게 먹을 것을 주며 힘을 회복시킵니다. 하나님은 호렙산에서 엘리야에게 나타나 세미한 음성으로 말씀하시며, 하사엘을 아람 왕으로, 예후를 이스라엘 왕으로, 엘리사를 엘리야의 후계자로 세우라고 명하셨습니다.

    1. 엘리야의 도피와 절망 (1-8절)
    2. 하나님의 나타나심과 위로 (9-18절)
    3. 엘리사의 부름 (19-21절)

    왕상19:1 엘리야와 하나님

    왕상19:1 호렙 산으로 피신한 엘리야

    왕상19:9 엘리야에게 임한 계시

    왕상19:19 엘리야의 소명


    열왕기상 20장

    아람 왕 벤하닷이 이스라엘을 공격하지만, 하나님은 아합에게 승리를 주셨습니다. 벤하닷이 다시 이스라엘을 공격했으나 또 패배했습니다. 아합은 벤하닷을 사로잡았지만, 하나님의 뜻을 어기고 그를 풀어주었으며, 이로 인해 하나님의 심판이 예언되었습니다.

    1. 벤하닷의 첫 번째 공격과 패배 (1-21절)
    2. 두 번째 공격과 이스라엘의 승리 (22-30절)
    3. 아합의 불순종과 예언 (31-43절)

    왕상20:13 아합의 승리

    왕상20:1 벤하닷의 무례한 요구

    왕상20:13 아합의 첫 번째 승리

    왕상20:22 아합의 두 번째 승리


    열왕기상 21장

    아합은 나봇의 포도원을 빼앗고자 했으나, 나봇이 거절하자 이세벨이 음모를 꾸며 나봇을 죽이고 포도원을 차지했습니다. 이에 엘리야는 하나님의 심판을 예언하며 아합의 가문이 멸망할 것을 선포했습니다. 아합이 회개하자 하나님은 그의 생애 동안에는 심판을 연기하셨습니다.

    1. 나봇의 포도원을 차지한 아합 (1-16절)
    2. 엘리야의 심판 예언 (17-26절)
    3. 아합의 회개와 심판의 연기 (27-29절)

    ○왕상21:1 나봇의 포도원을 빼앗은 아합

    왕상21:1 나봇의 포도원을 탐내는 아합

    왕상21:5 이세벨의 모략으로 나봇이 죽음

    왕상21:17 엘리야의 예언

    왕상21:27 일시적인 아합의 회개


    열왕기상 22장

    아합은 유다 왕 여호사밧과 연합해 아람과 전쟁

    을 벌였으나, 예언자 미가야는 아합의 죽음을 예언했습니다. 아합은 변장을 했지만 전쟁 중에 화살을 맞고 죽었습니다. 여호사밧은 선한 왕이었고, 그의 통치 후 아하시야가 북이스라엘의 왕이 되었습니다.

    1. 이스라엘과 유다의 동맹 전쟁 (1-28절)
    2. 아합의 죽음 (29-40절)
    3. 여호사밧과 아하시야의 통치 (41-53절)

    왕상22:1 아합의 죽음

    왕상22:1 이스라엘과 유다의 동맹

    왕상22:5 거짓 선지자들의 예언

    왕상22:13 미가야의 예언

    왕상22:29 아합의 죽음

    왕상22:41 유다를 통치하는 여호사밧

    왕상22:51 이스라엘을 통치하는 아하시야



    열왕기상 내용 요약



    열왕기서는 솔로몬 즉위로부터 예루살렘 멸망과 바벨론 포로에서 여호와긴이 돌아오는데 까지의 남북 양국의 역사를 기록하고 있다. 열왕기상의 주제는 이스라엘과 유다의 번영은 이스라엘 백성과 왕이 계약에 얼마나 충실하느냐에 달려있다는 사실에 집중하고 있다.

    (1) 솔로몬의 통치(1:1~11:43)

    1) 왕위 계승의 투쟁(1:1~2:46)

    2) 솔로몬의 지혜와 내각 구성(3:1~4:34)

    3) 성전 건축(5:1~7:51)

    4) 성전 봉헌(8:1~66)

    5) 솔로몬의 전성과 퇴세(9:1~11:43)

    (2) 분열 왕국의 역사(12:1~17:41)

    1) 이스라엘의 여로보암 1세(12:1~17:41)

    2) 유다에서 온 하나님의 사람(13:1~34)

    3) 여로보암 아들의 죽음(14:1~18)

    4) 여로보암1세의 죽음(14:19~20)

    5) 유다왕 르호보암(14:21~31)

    6) 이스라엘과 유다의 초기 전쟁(15:1~16:28)

    7) 엘리야의 활동(16:29~22:50)

    8) 엘리사의 사역(22:51~22:53)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2025 새벽묵상 사무엘하



    김수환 추기경 /  "고맙습니다. 사랑합니다"

    석가모니 /  "다른 누구로도 말고, 오직 스스로를 등불로 삼으라"

    알렉산더대왕 / "To the strongest!" 라는 짧은 말이

    카이사르(아우구스투스) / "내가 인생이라는 연극에서 내 배역을 잘 연기했더냐? 그랬다면 박수를 쳐다오"

    유비 /  "착한 일을 작다고 아니 하면 안되고, 악한 일은 작다고 하면 안된다" 

    징기스칸 / "죽음이 도대체 무엇인지 알 수 없을 정도로 충분한 잠을 잤구나."

    이순신 /  "싸움이 급하니, 나의 죽음을 알리지 마라" 

    데카르트 / "자, 이제 출발해야지"

    이완용 /  "내가 보니까 앞으로 미국이 득세할 것 같으니 너는 친미파가 되거라"

    간디 / "오 신이시여"

    오빌 라이트 /  "바람은 높아.....이제 날 수 있겠어"

    . 문천상(1236~1282)

    중국 남송의 시인, 정치가. 원나라(몽고) 징기스 칸이 남송을 함락한 뒤, 문천상의 재능을 높이 사며 전향을 권유했다. 하지만 그는 거절하고 죽음을 택했다.

    "이제 내가 할 일은 다 했네."


    괴테

    독일의 시인, 극작가, 소설가. 작품으로 '파우스트',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등을 남겼다.

    "좀 더 빛을!"(Mehr Licht!)


    마르크스(1818~1883)



    독일의 경제학자·철학자·언론인. '자본론'을 집필했다. 공산주의를 사실상 창시한 인물이다.

    "꺼져! 마지막 말은 살아있을 때 충분히 말하지 못한 바보나 하는 거야."

    (Hinaus! Letzte Worte sind für Narren, die noch nicht genug gesagt haben.)


    엘리자베스 1세(1533~1603)

    영국의 여왕. 영국 절대주의의 전성기를 이뤘다. 국교(성공회) 확립을 꾀하고, 종교적 통일을 추진했다.

    "내가 가진 모든 것은 이 짧은 순간을 위한 것이었군."

    (All my possessions for a moment of time.)


    이승혁 / 행복한 예수쟁이가 되자!





    유언(遺言)

    히브리서 9:16-17

  • 유언은 유언한 자가 죽어야 되나니
  • 유언은 그 사람이 죽은 후에야 견고한즉 유언한 자가 살았을 때에는 언제든지 효력이 없느니라.
  • In the case of a will, it is necessary to prove the death of the one who made it,
  • because a will is in force only when somebody has died; it never takes effect while the one who made it is living.

    * 유언(in the case of will) - 의지의 경우

    1242. 디아데케(
    diathēkē) διαθήκη, ης, ἡ  

  • 1. 유언.   2. 법령. 3. 조약
    발음 [ diathēkē ]
    어원 / 1303에서 유래

  • 관련 성경  /  언약(마 26:28, 행 3:25, 히 8:9), 구약(고후 3:14), 유언(히 9:16).
  • 유언은 유언한 자가 죽어야 되나니...살았을 때에는 언제든지 효력이 없느니라
    -'유언'에 해당하는 헬라어 '디아데케'는 두 가지 의미를 지닌다.
    (1)언약.
    (2) 유언. '디아데케'는 신약성경에서 보통 '언약'을 가리키나 본절에서는 '유언'을 의미한다.
    유언은 언약과는 달리 반드시 죽음을 전제로 하는 것으로 그리스도께서 새 언약의 중보자가 되기 위해서 죽어야만 하셨음을 시사한다(Hewitt, Lane).
    이러한 죽음의 필요성은 언약의 절차에서 비롯된다.
    구약에서 언약의 비준(批准)은 희생 제물에 의해서 보증된다(창 15:9-21;출 24:3-8;시 50:5;렘 34:17-21, G.E. Mendenhall).
    그리스도는 이러한 새 언약의 비준을 위한 희생 제물로서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과 맺고자 하시는 새 언약을 이루기 위해서 오셨으며(요 4:34;6:38, 39) 아들을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는 새 언약의 효력이 발휘될 수 있도록 죽으셔야만 했다(8:9-12;요6:40).



  • 역대상 23:27
    다윗의 유언대로 레위 자손이 이십세 이상으로 계수되었으니.
    According to the last instructions of David, the Levites were counted from those twenty years old or more.

    * 유언(the last instruction) - 마지막 지시

    1697. 다바르(
    dâbâr) דָּבָר  

    1. 말.  2. 복수로 쓰인 경우. 3. 약속
    발음 [ dâbâr ]
    어원/ 1696에서 유래
    구약 성경  / 1442회 사용

    다윗의 유언대로
    - 다윗이 자신의 죽음을 앞두고 솔로몬과 신하들에게 남긴 유언(遺言)은 28, 29장에 상세히 언급되어 있다.
    본절에 따르면 그때 다윗은 성전에서 봉사할 레위인의 연령을 20세로 낮추도록 다시금 지시하였음이 분명하다.


    이사야 38:1
    그 즈음에 히스기야가 병들어 죽게 되니 아모스의 아들 선지자 이사야가 나아와 그에게 이르되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너는 네 집에 유언하라 네가 죽고 살지 못하리라 하셨나이다.
    In those days Hezekiah became ill and was at the point of death. The prophet Isaiah son of Amoz went to him and said, "This is what the LORD says: Put your house in order, because you are going to die; you will not recover."

    집에 유언하라( Put your house in order) - 집을 정리하라

    6673. 차브(tsavצַו    

    1. 명령.  2. 지시. 3. 사 28:10
    발음 [ tsav ]
    어원 / 6680에서 유래
    구약 성경 / 9회 사용
    • 1. 명사, 남성 명령, 지시, 사28:10,13, 호5:11.
    • 관련 성경 / 교훈(사 28:10,13), 명령(호 5:11).


    그 즈음에
    -
    히스기야 왕은 29년을 통치하였다(왕하 18:2).
    그중 15년은 질병이 나은 후에 여호와의 은혜로 생명이 연장된 기간이다.
    따라서 본문의 사건은 그의 재위 14년째에 일어난 것으로 보아야 한다.
    이때의 앗수르왕 산헤립이 유다를 공격한 때와 시기적으로 일치한다(36:1).
    히스기야 왕이 치명적인 병을 얻어 죽음을 선고받은 후에 여호와 앞에서 그토록 슬퍼하며 통곡한 것도 이와 연관하여 생각할 수 있다. 즉, 그가 슬퍼한 것은 자신의 갑작스런 죽음보다도 오히려 그의 죽음으로 인해서 민족이 당할 비극적인 처지를 더 걱정했기 때문이다.
    어떤 학자들(Calvin, Vitringa)은 히스기야의 질병이 앗수르 군대 퇴각 이후에 발생하였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것을 받아 들이기는 어렵다.
    그 이유는 히스기야 왕의 기도의 응답으로 그의 치유 뿐만이 아니라, 예루살렘 성의 구원까지 약속되고 있기 때문이다(6절).
    따라서 본장과 39장의 사건은 36, 37장보다 시간적으로 앞에 위치한다고 추론할 수 있다(Lange, Leupold, Oswalt, Delizsch).

    히스기야가 병들어 죽게 되니
    - 히스기야가 무슨 병에 걸렸는지 확실히 알 수는 없다.
    다만 21절의 '종처'(腫處)라는 말을 근거로 할때, 그의 병이 염증을 동반하는 치명적인 병-가령, 종기나 등창 같은-이라는 사실을 추측할 수 있을 뿐이다(레 13:18;욥 2:7 참조).

    네가 죽고 살지 못하리라
    - '살지 못하리라'는 말은, 죽음이 임박했으며 그것을 피할 수 없다는 사실을 강조하기 위해서 덧붙여진 것이다.
    히스기야에게 이 말은 결코 변경될 수 없는 냉혹한 사형 선고처럼 들렸을 것이다.
    그러나 이것이 나중에 철회되었다는 사실에서 알 수 있듯이, 인새의 운명과 관련된 하나님의 선고에도 집행 유예(執行猶豫)는 있다(출 32:6-12 참조).
    언제나 인생에게 복주기를 소원하시는 하나님은 또한 그의 종들이 기도를 기꺼이 들으시며 응답하시기를 기뻐하시는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의 뜻은 불변하나, 성도의 기도는 그것을 이루는 과정과 방법을 변경시킬 수 있다.
    이것이 기도의 능력이다(Oswalt).
    하나님의 주권을 믿는 히스기야의 겸손과 기도의 열심을 우리는 본받아야 하겠다.








    4월 15일(화) 사무엘하 23-24장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다윗의 마지막 말(23:1)

    이는 다윗의 마지막 말이라 이새의 아들 다윗이 말함이여 높이 올리운 자, 야곱하나님에게 기름 부음 받은 자, 이스라엘의 노래 잘하는 자가 말하도다.
    These are the last words of David: "The oracle of David son of Jesse, the oracle of the man exalted by the Most High, the man anointed by the God of Jacob, Israel's singer of songs :

    다윗의 마지막 말(the last words of David)

    운동 경기마다 전반전과 후반전이 있고 그 사이에 Half time이라는 잠깐의 틈이 있는 것 같아요.
    배구, 농구, 축구, 골프까지도 전부 전/후반이 있더라고요.
    왜 그렇게 했을까?
    전반 마치고 나서 생각하고 리뷰하면서 새로운 전략을 짜고 또 후반 게임에서 이기겠다는 다짐을 하는 시간이 Half time입니다.
    인생도 어떤 면에서는 게임과 같아요. 특히 하나님의 자녀들은 영적 전쟁의 게임속에 있는 것입니다.
    세상 스포츠는 지면 패자고 승리하면 승자로 상급이 있고 하지만 영적 전쟁에서 실패하면 그건 죽는 것입니다.

    Spiritual Half Time

    지혜로운 사람들은 시간이 새롭게 될 때마다 자기의 영적인 Half time으로 과거를 돌이켜 보고 새로운 마음으로 미래를 향해서 달려가는 거에요.
    일반적으로 나이로 보자면 Half time은 30~40대 정도 되겠죠.
    여러분들 나이가 40세가 가까워 왔다면 절반의 인생은 지나 간겁니다.
    그러면 Half time에 무엇을 해야 되는가?
    내가 누구인지 자기 정체성을 점검해야 됩니다.
    하나님이 만드신 나, 하나님이 주신 나의 것, 그리고 하나님이 허락하신 유일한 나의 현장을 점검하는 것이 지혜로운 사람이에요.
    우리가 열심히 살아왔지만 그 목적이 무엇이었으며 무엇을 향해서 살아왔는지도 생각해 봐야해요.
    불신자들은 창세기 3장의 나만을 위해, 창세기 6장의 보이는 물질을 위해, 그리고 창세기 11장의 자기 성공의 목적을 향해 달려가지요. 그러나 어느날 점술, 무속, 우상앞에 그 인생들은 무너지며 불신자 상태 속에서 결국은 방황하다가 후손에게 영적 되물림을 물려주고 자기는 스올이라는 지옥불로 가게 되있어요.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내가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하는 인생 설정을 해야 되는 겁니다.
    사도 바울은 빌3:13-14에 자기는 하나님의 은혜를 받고 선교사로 살아가지만 잡은 것으로 끝나지 않고 앞으로 있을 잡아야 하는 푯대를 향해 달려간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지금까지의 이민 생활속에서 여러가지 고난과 열악한 환경속에서 열심히들 살아오셨습니다.

    어떤분은 보이는 세계도 정복해서 뿌듯하게 잘 살고 계시죠. 그러나 보이는 세계를 정복 했다고 해서 하나님과의 끈을 놓쳐서는 안됩니다. 그 끈을 놓치지 않도록 하나님이 전도자를 통해 CVDIP의 메시지를 주셨어요. Half time을 지나 어느날 마지막 말을 할 그 날이 있다는 것을 어릴 때 부터 생각한다면 미래가 촉망한 렘넌트가 될 겁니다. 히9:27에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해진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라고 했어요. 아직까지 여러분 인생의 참 목적과 방향이 설정되지 않았다면 CVDIP를 개인적으로 정돈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부탁합니다. 물질, 건강, 명예, 권력도 좋지만 사람은 고전10:31절 대로 먹는지 마시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 했어요. 이렇게 살다보면 어느날 60대, 70대가 찾아오고 이 세상을 떠날 그 날이 찾아오는 거에요. 그 날에 우리는 나 스스로에게 내 인생을 어떻게 평가할 것인가, 그리고 후대들에게 뭐라고 기록하여 남기고 한 인생의 영혼을 전달해 줄 것인가…

    다윗은 자기 정체성을 알았다(삼하 23:1)

    다윗은 먼저 자기 정체성을 알았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이는 다윗의 마지막 말이라고 했어요. 그러면서 자기가 이새의 아들이라고 표현했어요. 이새의 아들이라는 것은 별로 좋은 뜻이 아니에요. 삼상20:30에 “사울이 요나단에게 화를 내며 그에게 이르되 패역무도한 계집의 소생아 네가 이새의 아들을 택한 것이 네 수치와 네 어미의 벌거벗은 수치됨을 내가 어찌 알지 못하랴” 그리고 삼하20:1에 다윗의 부하 세바가 배신할 때 다윗을 부르기를 이새의 아들이라고 했어요. 왜 이새의 아들이 깔보고 비하하는 말이냐 하면 촌사람 이새의 아들이라는 것입니다. 다윗은 그 말에 요동치지 않았어요. 다윗은 스스로 말하기를 이새의 아들 다윗인 내가 말함이라 했어요. 부모를 무시하지 않는 다윗에게는 하나님이 이 땅에서도 잘되고 장수하는 축복을 말씀따라 허락하셨어요. 비록 목동의 아들로 태어났지만 하늘 배경으로 살아가니까 이스라엘의 왕이 되었어요. 우리의 참 배경은 하나님 아버지가 되야 될 줄로 믿습니다. 롬8:15에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우리가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짖느니라” 다윗은 세상을 두려워하지 아니하고 자기 배경을 부끄러워 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배경속에서 앞으로 달려갔던 믿음의 사람이었어요. 그리고 다윗은 자기 인생의 주권자가 하나님이심을 고백했습니다. 삼하23:1에 “이새의 아들 다윗이 말함이여 높이 세워진 자, 야곱의 하나님께로부터 기름 부음 받은 자, 이스라엘의 노래 잘하는 자가 말하노라” 다윗은 낮은 자였는데 하나님이 왕권을 주셨다는 얘기에요. 하나님은 약삭빠르고 못된 야곱을 고쳐서 하나님의 사람으로 사용하시고 야곱의 씨를 통해서 요셉과 그리스도가 나온 거에요. 우리는 하나님이 함께 하시면 모든 문제 끝인 줄로 믿습니다. 이스라엘의 노래 잘하는 자로서 다윗은 하나님을 높이는 하나님의 사람이었어요. 사랑하는 여러분, 다윗처럼 나의 정체성은 가문으로부터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새로운 피조물인 그리스도안에서 새롭게 만들어진 줄로 믿습니다. 사43:4에 “네가 내 눈에 보배롭고 존귀하며 내가 너를 사랑하였은즉 내가 네 대신 사람들을 내어 주며 백성들이 네 생명을 대신하리니” 처럼 다윗은 스스로의 자존감이 굉장히 높았어요.

    다윗은 하나님의 천명(天命. Heavenly Mission), 소명(召命. Calling), 사명(使命. Mission)속에 살아가야 함을 알았다(삼하 23:2)

    그리고 다윗은 하나님의 천명, 소명, 사명 속에 살아갔어요.
    삼하 23:2
    “여호와의 영이 나를 통하여 말씀하심이여 그의 말씀이 내 혀에 있도다”

    다윗은 이미 하나님의 영인 성령을 체험한 사람이었어요.
    구약은 하나님이 말씀으로 나타나셨고 신약은 말씀으로 계신 하나님이 육신으로 나타나셔서 우리가운데 거한다고 했어요.
    육신으로 나타나셔서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는데 그 육신으로 오신 예수님은 하늘로 다시 승천하시고 성령으로 우리와 함께 하신 줄 믿습니다.
    마 10:19-20에 예수님이 제자들을 현장으로 파송하시면서 “너희를 넘겨 줄 때에 어떻게 또는 무엇을 말할까 염려하지 말라 그 때에 너희에게 할 말을 주시리니 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라 너희 속에서 말씀하시는 이 곧 너희 아버지의 성령이시니라”
    그리고 사람은 창조자의 뜻을 이루는 것이 참 사람이라는 것을 알아야 되요.
    원래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았고 생육하고 번성하며 땅에 충만하고 정복하는 권세가 주어졌어요. 사사기를 통하여 보면 이스라엘의 역사는 하나님 중심인 그 때는 나라가 흥하고 백성들이 태평하고 가정이 행복했어요. 그러나 하나님을 등질때마다 그 나라는 전쟁, 재앙, 고통이 있었다는 것을 알아야 해요. 세계사를 바로 알고 사명의식이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그런 사람들은 말씀을 붙잡고 기도줄을 놓치지 않고 현장을 바라보며 살아가는 자들이에요. 3오늘의 주인공이 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다윗은 사람을 다스릴 때 공의로 다스렸어요. 그리고 삼하23:3에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말씀하시며 이스라엘의 반석이 내게 이르시기를 사람을 공의로 다스리는 자,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다스리는 자여” 다윗은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다스리는 자였어요.

    하나님의 언약속에 있는 자의 삶 (62가지 성취자)

    하나님의 언약속에 언약의 성취를 바라보는 그런자들은 삼하23:4 “그는 돋는 해의 아침 빛 같고 구름 없는 아침 같고 비 내린 후의 광선으로 땅에서 움이 돋는 새 풀 같으니라 하시도다” 처럼 된다고 했어요. 아침 햇살은 그리스도입니다. 그 햇살이 주장하는 나라는 하나님 나라에요. 돋는 해의 아침 빛과 구름 없는 아침을 맞이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그리고 비 내린 후에 광선을 맞이하는… 다 그리스도 예수를 말하는데 비가 온후 광선, 햇빛은 무지개를 만듭니다. 그러면서 땅에서 움이 돋는 새 풀과 같다고 했어요. 이 축복이 삼하23:5에 “내 집이 하나님 앞에 이같지 아니하냐 하나님이 나와 더불어 영원한 언약을 세우사 만사에 구비하고 견고하게 하셨으니 나의 모든 구원과 나의 모든 소원을 어찌 이루지 아니하시랴” 다윗의 인생은 참 파란만장한 인생이었어요. 장인이 죽이려 하지, 부하는 배반하지, 아들이 아버지를 죽이려고 군사들을 이끌고 쳐들어 왔어요.

    만일 나의 마지막 날이 내 앞에 다가왔다면 나는 무슨 말을 할 것인지 생각해보셨는지요?
    마지막 할말은 무엇인가?

    그 마지막 말과 후손들과 보이지 않는 후손들에게 뭐라고 말할 것인가… 하나님의 사람으로 너는 이와 같은 복을 받고 살고 네 집의 후손들이 이런 복을 받고 살리라는 그 마지막 말을 남겨야 될 줄로 믿습니다. 사람말과 환경에 치우치지 말고 십자가에서 다 이루신 그리스도를 붙잡기 바랍니다. 언약중의 언약은 그리스도 입니다. 우리가 현실에 흔들리지 말고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의 방향으로 나아가기를 바랍니다. 이 수고는 절대로 헛되지 아니한 줄로 믿습니다. 고전15:57절 말씀이죠. 그리고 주신 시대적 사명을 딱 붙잡아야 되요. 목사님이 자꾸 외치고 마음속에 간직된 237개국에 빛을 발하는 공동체 선교시대에 협력자만 되어도 하나님은 축복하실 줄로 믿습니다. 그 사명속에 기도로, 마음으로 동참하고 손에 손을 잡고 237개국을 향해 함께 달려가는 믿음의 사명자들 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아제아제 바라아제, 뜻, 의미, 반야심경, 가버리게 하네, 가버리게 하네, 부처님 세계로 완전히 건너가네, 아제아제 바라아제 바라승아제 모지 사바하

    아제아제 바라아제 바라승아제

    <반야심경>의 마지막 구절인 ‘아제아제 바라아제 바라승아제, 모지 사바하’

    ‘가버리게 하네! 가버리게 하네! 
    부처님 세계로 완전히 건너가네!
    깨달음이여, 아~만세!

    한문으로 읽혀지는 아제아제 바라아제 바라승아제, 모지 사바하(揭諦揭諦 波羅揭諦 波羅僧揭諦, 菩提 娑婆訶)는 음역된 것으로 우리말로는 그대로 번역 할 수 없다.
    그 뜻을 알고자 하면 인도의 고대 글자인 산스크리트어의 원음을 알아야 한다.

    산스크리트어 원음은 ‘가떼 가떼 빠라가떼 빠라상가떼 보드히 스바하(gate gate pragate prasam.gate bodhi svh)’

    이 문구는 일반적 문장이 아니라 진언 혹은 주문이라고 알려져 있다.
    진언이나 주문은 주로 번역을 하지 않으나 보기 드물게 이 문장은 번역을 하기도 한다.

    진언이란 주로 몸과 마음과 호흡이 깊은 명상으로 하나가 되었을 때 터져 나오는 소리를 말한다.
    깊은 명상 속에서는, 마치 물고기가 노니는 투명한 어항 속을 들여다보는 것처럼 사물의 본모습을 확연히 볼 수 있다.

    <반야심경> 속의 주인공인 관세음보살은 이렇게 진리를 이해하고 세상을 꿰뚫어 본 뒤, 모든 고통을 극복하였다. 완벽한 해탈에 이른 그는 기쁨의 탄성을 질렀는데, 그것이 바로 이 진언이다. 

    ‘아제(gate)’는 가버린 것을 의미한다. 
    괴로움에서 해탈로 가버린 것이고, 혼란스러움에서 고요한 명상으로 가버린 것이다.
    반복어 ‘아제아제(gate gate)’는 가버리고 또 가버린 것이다.
    ‘바라아제(pragate)’는 아주 먼 저 곳 끝, 파라다이스(부처님 세계)까지 가버린 것을 말한다.  
    ‘바라승아제(prasam.gate)’는 완전히 저 먼 곳 피안의 세계에 가버린 상태를 말한다. 

    그러니 ‘아제아제 바라아제 바라승아제’는 ‘가버리네 가버리네! 부처님 세계로 가버리네! 부처님 세계(피안)로 완전히 가버렸네!’라고 번역 할 수 있다.
    이어서 ‘모지 사바하(bodhi svh)’는 ‘모지(bodhi)’가 깨달음을 뜻하고, ‘사바하(svh)’는 기독교의 할렐루야처럼 기쁨과 행복에서 나오는 소리를 말 한다. 

    굳이 표현해 보자면 ‘이루어지이다!’ 혹은 ‘만세!’,
    젊은 세대들 표현이라면 ‘아싸!’ 정도로 번역 해 볼 수 있을 것 같다.
    그러면 ‘모지 사바하’는 ‘깨달음이여, 아~(만세)!’가 되겠다.

    정리하자면 반야심경의 마지막 구절인 이것은
    이 경의 핵심인 ‘공(空)’을 이해하고 깨달은 희열을 외마디 탄성으로 표현한 진언이다.
    굳이 ‘아제아제 바라아제 바라승아제, 모지 사바하’를 번역해 보자면 다음과 같다. 

    ‘가버리게 하네! 가버리게 하네! 
    부처님 세계로 완전히 건너가네!
    깨달음이여, 아~만세!

    아제아제 바라아제

    한승원

    줄거리
    비구니들의 절인 청정암의 여승 진성은 신비스러움의 세계와 이상을 좇는 인물이다. 같은 절에서 행자 생활을 하고 있는 순녀는 은선 스님의 남다른 보살핌을 받아 대중들의 입에 오르내릴 정도임에도 아직 계를 받지 못하고 있다.  
    순녀는 남다른 과거를 앓고 있다……. 어머니, 오빠와 살아온 그녀는 스님인 아버지를 고등학교 때 처음으로 만나지만 그 스님은 자신의 지난날을 후회하는 가운데 '너희 아버지는 실패했다'는 말을 남기고 다시 떠나 버린다. 아버지의 입적(入寂)과 대학 입학시험에 떨어진 오빠의 자원 입대 이후, 순녀는 새로 부임한 국어 선생 현종을 보고 그에게서 아버지의 모습을 찾으려 한다. 고독하고 우울한 분위기의 현종 선생은 전교생의 관심 대상이 되며 순녀도 늘 그의 행적에 주목한다. 그러던 중 여름방학을 맞아 집을 나선 차에 역 대합실에서 우연히 현종 선생을 만나게 되고 두 사람은 함께 여행길에 나선다. 그 길에서 현종 선생의 아내의 죽음에 대한 이야기를 듣게 된 순녀는 평생 그에 곁에 붙어 있겠다고 결심한다. 그러나 방학이 끝난 후 학교에는 현종과 순녀 사이를 가리키는 헛소문이 떠돌아 결국 현종 선생은 학교를 그만두게 되고 순녀의 가슴에는 깊고 큰 구덩이가 패게 된다.  
    ……진성은 대학에서 공부를 하고 오라는 은선 스님의 뜻에 따라 절을 떠나게 된다. 그러나 대학 생활에 쉽사리 적응하지 못하는 진성은 은선 스님이 있는 청정암으로 돌아가고 싶어한다. 방학 때 청정암에 돌아온 진성은, 이제 청화라는 법명을 얻은 순녀가 박현우라는 한 남자의 생명을 구해 주고 이를 계기로 절에서 쫓겨나는 것을 지켜보며 그녀를 비웃는다. 그러나 한편으로 진성은 자신의 내부에서 완전히 떨쳐지지 않는 미망으로 인해 방황할 때마다 순녀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진성이 만행에서 돌아왔을 때 은선 스님은 중생들 속에 깊이 들어가서 그들의 아픔과 고난을 함께하지 않은 것을 꾸짖는다. 진성은 은선 스님이 기다린 것이 자신이 아니라 속세를 헤매고 다니는 순녀임을 깨닫고 크게 실망한다.  
    한편 박현우가 순녀와의 사이에서 생긴 아기를 어딘가에 버리고 돌아온 뒤 그녀를 떠나가자, 순녀는 낙도에 있는 병원에서 간호사로 일하게 된다. 과중한 업무를 마다하지 않고 누구보다도 성실하게 수행하는 가운데에서도 그녀는 자신의 젊음과 원기가 하릴없이 외롭게 사그라져 가는 것에 슬픔을 느낀다. 얼마 후에 환자 수송차를 운전하는 송 기사와 결혼하게 된 그녀는 성심껏 환자와 주민들을 돌보면서, 현종 선생이 출간한 시집으로 마음을 달랜다……. 섬마을에 콜레라가 돌자 온 마을이 공황에 빠지고 병원에선 환자를 돌보기에 정신이 없다. 그러다가 시간이 지나 전염병이 진정되고 병원 관계자들이 모여 잔치를 벌이던 날, 모든 이들의 칭찬을 받아 흥겨운 분위기에 젖어 있었던 송 기사가 갑자기 밤중에 죽고 만다. 
    ……은선 스님의 열반이 가까워 올 무렵, 폭설이 쏟아지는 어느 밤에 순녀가 청정암에 돌아온다. 진성은, 고개를 숙이고 울기만 하는 순녀와 누워 있는 은선 스님 사이에 말없는 교감이 흐르고 있음을 알아챈다. 은선 스님은 열반하기 전 효정과 정선 스님에게, 몸소 체험하여 법도를 깨달은 청화(순녀)도 자신의 귀한 상좌라는 말과 함께 순녀를 부탁한다. 순녀와 둘이 남겨지자 은선 스님은 한 아기가 청정암에 버려졌었다는 것과 그 아이가 지금 어디서 키워지고 있는지를 알려 주고 열반에 들어간다. 
    은선 스님의 다비식이 진행되고, 순녀는 은선 스님이 얘기한 버려진 아기가 자신이 낳은 아기라고 확신한다. 그러나 아기를 데려다 키워 왔던 윤 보살은 순녀에게 그 아이의 죽음 소식을 전한다. 불길이 사그라진 다비대에서 사리를 찾는 진성은, 은선 스님의 유골을 찾아 품에 감추는 순녀를 빈정거린다. 이튿날 순녀는 낙도를 향해 떠나며 『반야바라밀다심경』의 주문을 중얼거린다. '가자, 가자, 더 높은 깨달음의 세계로 가자', '아제아제 바라아제'. 

    한승원의 장편소설 『아제아제 바라아제』가 '문이당 청소년 현대문학선'의 일곱 번째 기획물로 출간되었다. 출간 당시 베스트셀러였던 『아제아제 바라아제』는 1989년 영화화되어 대중적으로 더욱 널리 알려진 작품이다. 이 작품이 이제 청소년물로 각색되어 출간됨으로써 청소년 독자들에게도 '깨달음의 길을 열어 가는 것이 참다운 자유인이 되어 가는 것'이라는 철학을 보다 가깝게 접하고 이해할 기회가 마련되었다. 
    『아제아제 바라아제』는 초월적인 이상 세계를 좇는 진성과 파계하고 맨몸으로 세속을 떠도는 청화, 두 여승의 파란만장한 삶을 통해 참다운 자유인의 길을 일깨워 주는 구도 소설의 대표작이다. 제목 '아제아제 바라아제'는 '가자, 가자, 더 높은 깨달음의 세계로 나아가자'는 뜻으로, 이 작품은 구도의 길에서 얻은 깨달음의 보석을 어둠 속에서 슬프게 살고 있는 사람들과 나눠 가는 모습을 여실히 보여 준다. 불교를 작품의 주요 배경으로 하고 있음에도 이 작품의 내용과 메시지는 종교적 영역을 뛰어넘어, 정신적 방황과 미망을 극복하는 과정이 세상 사람들 모두에게 보편적으로 중요한 과제임을 인식하게 하는 데 초점을 맞추고 있다. 
    아울러 탁월한 문학적 상상력으로 형상화된 정현주의 일러스트는 『아제아제 바라아제』를 이끌고 가는 상징적 이미지들을 잘 드러내 줌으로써 청소년 독자들이 작품을 보다 심도 있게 해독하는 데 훌륭한 코드가 되고 있다.  

    목차
    무소뿔처럼 혼자서 가라
    여승과 도화살
    꿀벌은 꽃잎을 해치지 않고
    파계
    심심삼천에 붙는 불
    깨들음의 진주
    고기가 놀아서 물은 흐려지고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
    어둠의 시간에서 빛의 시간으로
    아제아제 바라아제

    가장 세속적인 곳에서 중생을 보듬는 보살행

    한승원 소설 원작…거장 임권택 감독의 ‘대승불교관’ 드러낸 영화
    수행 매진하는 진성 스님과 세간 속 순녀의 대승적 수행 비교 구도
    은사 스님의 열반 후 다시 저잣거리로 향하는 순녀로 대승 지지

    ‘아제 아제 바라아제’는 소설가 한승원의 소설을 원작으로 하며, 한승원이 각색한 영화다. 모든 시대는 그 시대의 고유한 색과 음이 존재한다고 한다. 영화도 동시대의 풍경과 공기를 프레임에 담는다. 시대적 풍경과 분위기를 담는다는 명제에 충실한 영화가 바로 ‘아제 아제 바라아제’다. 

    이 작품은 두 개의 화두를 담아낸다. 하나는 작품 속에서 제시한 ‘달마 대사는 왜 얼굴에 수염이 없는가’이고 다른 하나는 1980년대 시대적 화두인 ‘역사의 변화와 세상의 구원을 위해 지식인과 종교인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이다. 이 영화가 1989년에 제작됐다는 사실, 그리고 한국 역사와 한국 문화를 씨줄과 날줄로 엮여 영화를 만들어 온 감독 임권택의 존재가 두 개의 화두를 직시하게 한다. 임권택 감독은 대승불교의 길의 제시를 통해 두 화두를 통합한다. 

    첫 시퀀스에서 순녀(강수연 분)에게 은선 스님은 ‘어디서 왔는가’라고 묻는다. 고향인 광주 이전에 어머니 뱃속 그 이전에 자신의 근원을 물은 것이다. 순녀는 이 질문에서 출발하여 어디로 가야 하는가에 대한 답을 보여준다. 

    영화의 이야기는 포크형 구조다. 하나의 이야기가 여러 갈래로 나누어진다. 앞부분은 순녀의 개인 서사가 일직선으로 뻗어간다. 순녀가 행자 생활을 하는 동안, 회상 장면으로 아버지와의 만남과 열차 여행 그리고 이별 장면을 제시한다. 더 거슬러가서 고등학교 시절 현종 선생님과의 만남과 함께 백제 문화권의 여행과 입산의 과정이 펼쳐진다. 순녀는 자살에 실패한 박현우(한지일 분)를 만나서 탄광촌으로 떠난다. 이 지점에서 저잣거리에서의 순녀의 삶과 대비되는 진성 스님의 수행과 만행이 평행 편집되어 두 개의 서사로 나누어 진다. 

    순녀와 인연을 맺은 많은 남성들은 아버지 혹은 아들 같다. 월남전 참전 용사인 부친은 참회를 위해 입산 수도하였으며 순녀에게 하늘의 구름을 보여주면서 “저 구름이 너의 아버지이다”라고 말하고 떠난다. 순녀가 아버지라는 뜬 구름을 찾지 말고 자신의 길을 갈 것을 돌려 당부한 셈이다.

    순녀의 또 다른 아버지는 광주 민중항쟁 때 임신한 아내를 잃은 현종 선생님이다. 그는 아내의 못다 이룬 꿈을 위해 멸망한 백제와 패배한 동학농민혁명을 배경으로 한 대서사시를 집필하려고 답사한다. 두 사람의 여행은 학교 당국의 오해로 현종과 순녀의 이별을 야기한다.

    두 인물이 아버지를 표상한다면 ‘당신은 나의 빛이며 내 목숨은 스님 것’이라고 순녀에게 애원하는 현우는 아들과 같다. 은선 스님은 수행은 산에서만 하는 것이 아님을 강조하면서 순녀를 저잣거리로 내보낸다. 이와 같은 순녀의 행보는 대승불교를 경유하여 불교세계를 녹여내려는 임권택 감독의 의도에 부합한다. 

     임권택 감독의 영화는 길 영화로 대표되며 ‘실패한 자의 떠돌기’라는 임권택의 인물을 작가적으로 특징한다. 세상에서 신산한 삶을 겪으면서 스스로 수행하고 깨달음을 얻는 주인공 순녀는 임권택의 실패한 자들이 자기완성의 길을 가는 로드무비의 주인공으로 캐스팅 1순위가 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임권택 감독은 정성일과 대담에서 대승불교에 대한 관심을 피력하였다. 첫 장면의 천불전 장면에 대해 “천불전이 상징하고 있는 것은 ‘모두 다 부처가 될 수 있고 구원받을 수 있다’는 것”이라며 “대승적 수행이란 바로 중생과 더불어 있음을 보여주기 위해 전면에 내세웠다”고 연출 의도를 밝혔다. 우리의 보편적인 삶은 겉은 정주민이지만 속은 떠돌이라는 임권택 감독의 뿌리 깊은 사유도 드러난다. 

    그는 “우리가 뿌리 내리고 살고 있다고 믿는 것도 더 깊이 들여다보고 있으면 어쩌면 떠돌고 있는 삶”이라고 말했다. 이는 영화 속 순녀의 삶과도 닮았다. 그녀는 절에서 탄광촌으로, 탄광촌에서 섬으로, 다시 절로 그리고 다시 저잣거리로 떠돈다. 그녀는 연좌제로 인해 막장의 광부가 된 현우와 상이군인인 병자, 병원의 기사인 송기사까지 사회적 타자를 껴안고 살아갔다.

    그녀는 많은 인간 군상과 인연을 맺었지만 감독은 “남자들과의 모든 관계도 그런 자비심의 발로이며 불행에 빠진 사람들을 구하고자 하는 수행의 과정”이라고 설명한다.

    현우와 술 취한 순녀가 여관방에서 행한 정사 장면은 순녀의 정서를 드러낸다. 순녀는 현우를 거부하다가 얼굴을 은선 스님이 주신 모자로 가리면서 허용한다. 은선 스님은 모자를 주면서 속세에서도 수행자의 삭발을 가리면서 수행자로 살 것을 당부한다. 그리고 몸은 속세에 있지만 정신은 절에 두고 있기를 우회적으로 전한다. 모자로 얼굴을 가리는 행위는 애욕의 거부와 수행의 경계 확장으로 읽을 여지를 만들어낸다. 

    대승불교는 속세에서 보살행하는 순녀를 긍정하지만 마지막 장면에서 순녀를 배척하는 보살들과 진성 스님의 질타는 소승적 입장에서의 거부감을 드러낸다. 은선 스님은 열반을 앞두고 순녀의 손을 들어준다. 은선 스님은 ‘오욕의 진창 속에서도 깨달을 수 있다’고 말하며 순녀의 수행을 지지하고 격려한다. 

    은선 스님의 다비식을 마치고 진성 스님은 유골을 수습하는 순녀를 미망에 빠져있다고 질타한다. 순녀는 탑 천 개를 만들겠다고 말한다. 진성 스님은 탑을 세우겠다는 욕심을 미망으로 치부한다. “미망을 뒤집어쓰지 않고서 어찌 미망 속에 갇힌 중생을 구할 수 있겠습니까?” 순녀는 반문한다. 

    ‘반야심경’의 독경 소리가 들리고 순녀는 저잣거리로 향한다. 순녀는 대승불교의 행보를 이어간다. 대승도 소승도 모두 깨달음을 향한 길에서 우열과 옳고 그름이 없겠지만 임권택 감독은 대승의 길에 대한 지지를 표명한 셈이다. 


    다윗의 용사들 (삼하 23:8-39)




    둘째 세 용사의 업적(13~23절)

     

    13) 또 30명의 두목 가운데 세 사람이

         곡식 벨 때(추수가 시작될 무렵)에 아둘람 동굴에 있는 다윗을 찾아갔습니다.

         그때 블레셋 군대는 르바임 골짜기에 진을 치고 있었습니다.

    14) 그때 다윗은 산성이 있었고, 블레셋 군대의 주둔지는 베들레헴에 있었습니다.

    15) 다윗이 간절한 마음으로

        “베들레헴 성문 곁에 있는 우물물을 누가 내게 마시게 할까”하고 말하자

    16) 세 용사가 블레셋 진영을 뚫고 나가

         베들레헴 성문 곁에 있는 우물물을 길어 가지고 와서 다윗에게 바쳤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그 물을 마시기를 기뻐하지 않고,

         그 물을 여호와께 제물로 부어드리며(땅에 쏟아버리며)

    17) 이렇게 말했습니다.

        “여호와여, 다시는 내가 나를 위하여 이런 일을 하지 아니하리이다.

         이는 목숨을 걸고 갔던 사람들의 피가 아니니이까?”하고 마시기를 즐겨하지 않았습니다.

         이 세 용사가 한 일은 이러했습니다.

    18) 스루야의 아들 요압의 아우 아비새가 이 세 사람의 두목이었습니다.

         그는 한 번 창을 들면 300명은 거뜬히 죽였습니다.

         그러므로 그는 세 명의 용사 가운데서도 큰 이름을 얻었습니다.

    19) 아비새는 이 세 용가 가운데 가장 존귀한 자로 그들의 두목이었으나,

         처음 세 용사에 미치지는 못했습니다.

    20) 여호야다의 아들 브나야는 갑스엘 출신의 용사로, 큰 용맹을 떨친 자였습니다.

         그는 모압의 장수 아리엘의 아들 둘을 쳐 죽였고,

         또 눈이 올 때 구덩이에 내려가서 사자 한 마리를 쳐 죽였습니다.

    21) 브나야는 또 막대기 하나만을 가지고도 창을 가진 애굽의 거인에게 달려가서,

         그의 손에 든 창을 빼앗아 그것으로 그를 죽인 일도 있었습니다.

    22) 여호야다의 아들 브나야가 이런 일을 해서

         그 세 용사 가운데 하나로 이름을 얻었습니다.

    23) 그는 30명의 용사들보다는 존귀한 자였으나, 처음 세 용사에 미치지는 못했습니다.

         그러므로 다윗은 그를 자기의 시위대장(경호대장)을 삼았습니다.

     

     

    2. 다윗의 30명의 용사들(24~39절)

     

    24) 30명의 용사들의 이름은 다음과 같습니다.

         요압의 아우 아사헬과, 베들레헴 사람 도도의 아들 엘하난과,

    25) 하롯 사람 삼마와, 하롯 사람 엘리가와,

    26) 발디 사람 헬레스와, 드고아 사람 익게스의 아들 이라와

    27) 아나돗 사람 아비에셀과, 후사 사람 므분내와

    28) 아호아 사람 살몬과, 느도바 사람 마하래와

    29) 느보다 사람 바아나의 아들 헬렘과, 베냐민 자손으로 기브아 사람 리배의 아들 잇대와

    30) 비라돈 사람 브나야와, 가아스 시냇가에 사는 힛대와

    31) 아르바 사람 아비알본과, 바르훔 사람 아스마웻과

    32) 사알본 사람 엘리아바와, 야센의 요나단과

    33) 하랄 사람 삼마와, 아랄 사람 사랄의 아들 아히암과

    34) 마아가 사람의 손자이며 아하스배의 아들인 엘리벨렛과,

         길로 사람 아히도벨의 아들 엘리암과

    35) 갈멜 사람 헤스래와, 아랍 사람 바아래와

    36) 소바 사람으로 나단의 아들인 이갈과, 갓 사람 바니와

    37) 암몬 사람 셀렉과, 스루야의 아들 요압의 무기 들고 다니는 브에롯 사람 나하래와

    38) 이델 사람 이라와, 이델 사람 가렙과

    39) 헷 사람 우리야입니다. 이렇게 해서 모두 합하여 37명입니다.

     

     

    * 묵상 point

     

    1. 둘째 세 용사의 충성심

     

     1) 다윗을 향한 세 용사의 충성심(13~16절)

     

        다윗의 마지막 말에 이어 기록된 세 용사보다는 조금 못하지만,

        다윗의 충성스러운 또 다른 세 용사가 있었습니다.

        요압의 아우 아비새와, 여호야다의 아들 브냐야,

        그리고 이름 없는 또 한 사람을 합하여 세 명의 용사가 그들입니다.

     

        이들의 충성심을 나타내는 에피소드 하나가 소개됩니다.

        다윗이 아둘람 동굴에 있을 때이므로 사울에게 쫓기던 때의 일입니다.

     

        그때 블레셋이 르바임 골짜기에 진을 치고 있었는데,

        다윗이 “베들레헴 성문 곁에 있는 우물물을 누가 떠와서

        나에게 마시게 할 자가 없을까” 하고 혼잣말로 중얼거렸습니다.

        그런데 그 말을 듣고 이들 세 용사가 블레셋 진영을 뚫고 들어가서

        베들레헴 성문 곁에 있는 우물에서 물을 길어 와서 다윗에게 바쳤습니다.

     

        17절은 이들 세 사람의 하는 일이 이와 같다고 했습니다.

        다윗이 명령을 내리면 그것이 무엇이든 이렇게 그 명령에 충성했다는 말입니다.

     

        ● 묵상 :

     

           사무엘서를 마감하면서

           이들 세 용사가 다윗에게 충성하는 에피소드를 이렇게 소개하는 것은,

           이들이 다윗을 충성하는 모습 그대로

           우리도 하나님께 충성해야 한다는 것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다윗에게 충성된 자도 그 충성됨을 기뻐하여 이렇게 성경에 그 이름이 기록되었는데,

           하나님께 충성된 자는 얼마나 더 귀한 이름으로 기록되겠습니까?

     

     2) 세 용사의 용맹(18~22절)

     

        두 번째 세 용사 가운데 가장 존귀한 자(우두머리)는 요압의 아우 아비새입니다.

        그는 창을 한 번 들면 300명은 거뜬히 죽였습니다.

        그러므로 그는 세 명의 용사 가운데서도 가장 용맹스러운 자로 큰 이름을 얻었습니다.

     

        그리고 세 용사 가운데 한 사람인 여호야다의 아들 브나야는

        모압의 장수 둘을 죽였습니다.

     

        또 눈이 왔을 때 브나야가 구덩이에 빠졌는데 그 구덩이에 사자가 있었습니다.

        본래 사자는 배부를 때는 옆에 짐승이 지나가도 상관하지 않지만

        굶주렸을 때는 아주 포악해집니다.

        그런데 사자가 구덩이에 빠져 며칠을 굶주렸고, 브나야 역시 그 구덩이에 빠졌으니

        도망할 수도 없는 좁은 곳에서 포악한 사자와 마주친 것입니다.

        그런데 브나야는 한 주먹에 그 사자를 때려 죽였습니다.

     

        또 브냐야는 막대기 하나만을 가지고도 창을 가진 애굽의 거인에게 달려가서,

        그의 손에 든 창을 빼앗아 그것으로 그를 죽인 일도 있었습니다.

     

     3) 그러나 처음 세 용사에는 미치지 못하였더라(19, 23절)

     

        그러나 이들 세 용사는 삼하 23:8~12에 나오는 처음 세 용사보다는 못하였다는 말을

        두 번이나 반복하였습니다(19, 23절).

     

        그러나 우리는 사무엘서를 보는 동안

        처음 세 용사들인 아디노와 엘르아살과 삼마의 이름을 잘 들어보지 못했습니다.

        그러므로 당연히 두 번째 세 용사들인 아비새와 브나야가

        다윗의 가장 용맹스러운 용사들이라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전혀 이름도 나오지 않았던 처음 세 용사가

        가장 충성되고 가장 용맹스러운 자였다고 기록합니다.

     

        이것은 처음 세 용사가 가장 용맹스럽고,

        나라를 위하여 공도 가장 많이 세운 자들이었으나

        그들이 겸손하여 자기를 잘 드러내지 않았다는 것을 뜻합니다.

     

        그리고 요압의 아우 아비새는 그들보다 못한 자들이었으나

        자기를 드러내기를 좋아하는 자이니 그 이름이 더 많이 기록된 것입니다.

     

    ● 묵상 : 그러므로 사람보다 하나님께 충성된 자가 되십시오.

     

        아비새와 브나야는 세상 사람들에게는 더 많이 알려진 자들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름 없는 처음 세 용사들을 더 충성된 자로 여기셨습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오직 하나님만을 사랑하며 섬기는 자들을

        더 기뻐하시고 그 이름을 더 기억하십니다.

        그러므로 이들처럼 오직 하나님께 충성된 자가 되기에 힘쓰십시오.

     

     

    2. 다윗의 신실함 : 다시는 내가 나를 위하여 이런 일을 하지 아니하리이다

     

     1) 세 용사가 떠온 물을 하나님께 제물로 바치는 다윗(14~17절)

     

        블레셋 군사들이 르바임 골짜기에 진을 치고 있을 때에

        다윗이 혼자말로 베들레헴 성문 곁의 우물물을 마시고 싶다고 중얼거린 것을 듣고

        아비새와 브나야와 이름 없는 또 다른 사람,

        이 세 용사가 블레셋 진영을 뚫고 들어가서 그 물을 길어 온 것입니다.

        이것은 실로 엄청난 용기이고, 엄청난 충성입니다.

     

        그때 다윗은 그 물을 마시지 않고 하나님 앞에 제물로 바칩니다.

        그것은 물이 아니라 목숨을 걸고 떠온 용사들의 피와 같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자기가 이 물을 마시면 하나님 앞에 죄를 범하는 것이라며,

        그 물을 하나님께 제물로 바칩니다.

     

        다윗은 가장 귀한 것은 언제나 하나님께 바쳐야 한다는 믿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피와 같은 그 귀한 물을 마시지 않고 하나님께 바치는 것입니다.

     

     2) 다시는 내가 나를 위하여 이런 일을 하지 아니하리이다(17절)

     

        그리고 다윗은 다시는 자기 자신을 위하여 부하들에게 목숨을 걸게 하는

        이런 짓을 하지 않겠다고 하나님께 약속합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권세를 자기 자신을 위해서는 사용하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오직 하나님께서 명하신 일을 위해서만 왕의 권력을 사용하겠다는 것입니다.

     

        다윗은 이 약속을 끝까지 지켰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그를 완전한 자로 인정하신 것입니다.

     

     

    3. 하나님의 백성들의 이름들(24~39절)

     

        처음 세 용사와 두 번째 세 용사와 나머지 31명의 용사들의 이름이 하나하나 기록되었고,

        마지막에 다 합하여 37명이라 하고는 다윗의 용사들에 대한 소개를 마칩니다.

     

        뒤에 31명은 그냥 이름만 기록되어 있습니다.

        무려 16절이나 할애하며 이름만 기록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제일 마지막에 기록된 헷 사람 우리야를 제외하고는 우리가 아는 사람도 거의 없습니다.

        그럼에도 이렇게 길게 이름을 기록하는 이유는,

        하나님 나라의 생명책에 이렇게 주님의 백성들의 이름이

        하나하나 기록되어 있다는 것을 증거하기 위해서입니다.

     

    ● 묵상 :

     

        주님을 참되게 믿는 자들의 이름이 이렇게 주님의 생명책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 생명책에 기록된 자는 한 사람도 빠짐없이

        모두 영원한 기쁨의 나라, 주님의 영광의 나라에 들어갈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들처럼 누가 보든지 안 보든지 주를 섬기기에 힘쓰는 자들이 되십시오.


    4. 요압의 이름이 빠졌다

     

     1) 다윗의 부하 중 가장 강력한 장군 요압의 이름이 빠졌습니다.

     

        그런데 한 가지 주목할 만한 사실은 다윗의 군사령관이었던 요압의 이름이 빠진 것입니다.

        아마도 두 번째 세 용사 중에 이름을 기록하지 않은 한 사람이

        바로 요압이 아닐까 싶습니다만, 어쨌든 그의 이름은 여기에 기록되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하나님 나라의 생명책에도 그의 이름이 기록되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2) 그는 다윗의 총사령관으로 있으면서 사사건건 다윗을 힘들게 했습니다.

     

        요압은 마음을 다해 순종하기보다,

        자기 권력을 이용해 자기의 사사로운 이익을 챙겼습니다.

        아브넬을 죽였고, 다윗의 명령을 어기고 압살롬을 무참히 살해했으며,

        총사령관의 자리에 계속 머물기 위해 그의 경쟁자 아마사를 죽였습니다.

     

        그리고 다윗이 힘들어할 때 그를 더욱 궁지에 몰아넣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기름 부어 세우신 자를 순종하지 않고 도리어 고통스럽게 한

        요압의 이름이 마지막 용사들의 명단에 빠진 것입니다.

     

    ● 묵상 :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그저 사람들이 보기에만 그럴듯하게 겉으로만 하나님을 섬기는 척하는 사람은

        요압처럼 하나님의 생명책에 이름이 기록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섬길 때 순전한 마음으로 섬겨야 합니다.

        처음 세 용사들이 오직 다윗을 섬기기에만 충성하였던 것처럼,

        우리도 오직 하나님 섬기기에만 충성된 종이 됩시다.

     

     

    * 기도제목

     

    1. 다윗의 용사들이 다윗에게 충성한 것처럼

       우리도 주께 충성된 종이 되게 하옵소서.

     

    2. 끝까지 충성하여

       37명의 다윗의 충성된 사람들처럼

       주님의 생명책에 그 이름이 기록된 자들이 되게 하옵소서






    다윗의 용사 가운데 두번째 3용사에 대한 말씀이 있다.

    다윗은 암둘람 동굴에 숨어 있는 처지이고 블레셋은 베들레헴에 주둔해 있다.

    다윗은 소원을 듣고 블레셋 진영으로 들어가 베들레헴 성문 곁

    우물물을 길어다가 바친자들이다.

    그러나 다윗은 용사들의 목숨을 건 피 같은 물을 마시지 않고 여호와께 드린다.

    다음으로 다윗을 경호하며 전쟁을 수호한 30 용사들의 명단이 소개 된다.

    다윗의 용사는 헷 사람 우리아까지 포함해서 총37명이다.

     

    말씀묵상:

    다윗의 용사들이 소개되고 있다.

    첫번째 3 용사가 소개 되었다.

    단번에 800명을 죽인 첫번째 용사는 요셉밧세벳 이였다.

    두번째는 블레셋과의 전쟁에서 이스라엘 백성이 다 도망가도 담대히 싸운자이다.

    이름이 알르아살이다.

    세번째는 녹두나무 밭에서 블레셋과 맹렬히 싸운 삼마이다.

    이들 3명의 공통점은 큰 업적들을 세운 사람들인데 다 하나님이 함께 했던 자들이다.

    하나님이 함게 하심으로 큰 승리를 얻었던 자들이다.

     

    오늘 본문에는 또 다른 3 용사가 소개 되고 있다.

    3명의 이름은 잘 모르겠지만 대표자는 아비새이다.(18)

    시대적 배경이 설명되어 있다.

    다윗이 아둘람 동굴에 숨어 있을 때이다.(13) 다윗의 초기 시대라고 볼 수 있다.

    블레셋 사람들이 침입하여 르바임 골짜기에 진을 쳤다.(13)

    블렛셋의 주둔지는 베들레헴이였다.(14)

    전쟁 중에 다윗은 고향 베들레헴의 성문 곁 우물물을 마시고 싶었다.(15)

    이 때에 오늘 소개되는 3 용사가 블레셋 진영으로 가서 

    베들레헴의 성문 곁 우물물을 가져왔다.(16)    

    그러나 다윗은 그 우물물 마시기를 기뻐하지 아니하고 여호와께 부어 드렸다.(16)

    왜냐하면 이는 부하들이 목숨을 걸고 가져 온 것으로 피 처럼 귀했기 때문이다.(17)

    다윗은 다시는 자신이 이런 일을 하지 않겠다고 하나님 앞에 맹세한다.(17)

     

    희생을 각오한 충성된 부하들의 헌신적인 모습이 참 감동이다.

    믿음의 동역자도 바로 이런 모습이어야 한다.

    헌신적인 봉사와 희생적인 사랑과 마음을 움직이는 배려와 존중이 필요하다.

    내가 이런 믿음의 동역자 되길 기도한다.

     

    아비새는 창으로 300명을 죽이고(18) 두 번째 3 용사의 두목이 되었다.(19)

    브나야는 사자를 쳐 죽인 용사이다.(20)

    또 막대길 가지고 애굽 사람의 손에서 창을 빼앗아 죽인자이다.(21)

    왕의 시위대 장관에 임명된 자이다.(23)

     

    나머지 30명의 명단이 계속해서 이어져 나오고 있다.

    소바 사람, 암몬 사람, 헷 사람등 이방인도 포함이 되어 있다.

    하나님의 일을 함께 하는데 있어서는 출신 성분이 중요하지 않은가 보다.

    학연, 지연, 출신 성분을 따지지 않고 오직 한 가지 목표

    비전이 같을때 연합하고 합력하여 선을 이루어 가는가 보다.

     

    말씀을 보면서 다윗이 얼마나 훌륭한 인물인가 다시 한번 느껴진다.

    현재는 다윗의 황혼기인 것 처럼 보여 지는데

    인생의 마지막에 자기 힘들고 어려웠던 때의 자기를 충성스럽게 도와 준

    용사들의 이름을 한 한명 기록해 준다는 것이 얼마나 위대한지 모르겠다.

    세상에서는 1등만을 기억하고 위대한 이인자들은 기억도 않는다.

    그러나 다윗은 전체 37명의 이름을 하나하나 업적과 함께 기록한다.

    때때로는 출신 지역까지 심지어 이방인들까지도 포함해서 공적에 따라서 기록한다.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하신 주님을 찬양한다. 아멘.




    1.   첫 번째 세 용사’ (8~12)

    사무엘하 23장은 다윗의 용사들에 대해 말하는데, 다윗을 위해 전쟁터에서 용맹스럽게 목숨 바쳐 싸운 군인들의 명단을 기록합니다. 23장의 뒷부분은 안 읽었지만 맨 뒤에 보면 총수가 37명이라고 나와 있습니다(39). 그런데 세어 보면 사실은 36명입니다. 이 사람들이 어디 족속인지와 함께 죽 명단이 나와 있습니다. 먼저 다윗의 용사 중 가장 용맹한 ‘세 명’에 대한 일화가 간단히 나온 다음에 ‘삼십 명’의 용사들의 이름이 특별한 사건 없이 죽 나옵니다.

    역대상 11장에도 다윗의 용사들 명단이 기록되어 있는데, 사무엘하 23장과 역대상 11장 명단 사이에 차이점이 있습니다. 먼저 기록된 용사들의 숫자가 역대상 11장에는 46명으로 나오는데, 여기서는 실질적으로 36명이라는 점이 다릅니다. 또한 그 두 명단에 모두 나오는 용사들 가운데 이름이 다르고 소속이 다르게 나오는 등 서로 일치하지 않는 예들이 있다는 겁니다.

    두 명단 사이의 가장 큰 차이점은 그 명단이 나오는 문맥에 있습니다. 앞뒤에 무슨 일이 있었는가가 다릅니다. 역대상 11장의 명단은 다윗이 왕이 되는 대관식이 나온 다음 명단이 주어집니다. 그러니까 다윗이 왕으로 통치를 시작할 때가 그 명단을 작성한 배경입니다.

    그뿐 아니라 역대상 11장에 기록된 다윗의 용사 46명은 훨씬 더 많은 용사들의 일부입니다. 명단에 굉장히 많은데 그중 일부만 적은 겁니다. 그리고 다음 장인 역대상 12장에서는 다윗을 도운 용사들의 이름을 추가적으로 죽 말해 줄 뿐 아니라, 용사들을 도운 병사들의 숫자도 지파별로 몇 명인지 기록하고 있습니다.

    반면 오늘 본문인 사무엘하 23장에 기록된 명단은 다윗을 원수들의 손아귀에서 건지신 하나님을 찬양하는 시 다음에 나옵니다. 22장이 시편 18편과 거의 같은 내용이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찬양하는 시 다음에 이 명단이 나온다는 것은, 사무엘하 이야기의 결론으로 주어진 것입니다.

    유대인 주석가 아브라바넬이라는 사람은 역대상 11장에 나오는 용사의 명단과 사무엘하 23장에 나오는 명단이 왜 다른가 하는 이유를 이런 식으로 설명합니다. 역대상에 기록된 다윗의 용사들은 다윗이 왕이 되는 즉위식에 참석해서 충성을 선언한 인물들이라는 겁니다. 반면, 여기 사무엘하 23장에 나오는 용사들은 끝까지 다윗에게 변함없이 충성한 사람들, 즉 어떠한 어려움이 있어도 다윗을 떠나지 않고 다윗의 뜻을 거역하지 않았던 진짜 충신들이었다고 설명합니다. 그래서 역대상에 나오는 수가 더 많은 것은 당연합니다.

    만약 이런 유대인 주석가의 설명이 맞는다면, 사무엘하 23장에 기록된 용사들은 단순히 용맹하고 싸움을 잘하는 장수들이 아니라 다윗에게 끝까지, 변함없이 충성했던 용사들이었고 충신들이었던 겁니다.

    그런 사람들이 여기에 37명이었다고 되어 있는데, 실제적으로는 36명이 나옵니다. 그러니까 이름이 안 나오고 빠진 사람이 한 명 있습니다. 그 사람이 누구인가? 그 사람은 놀랍게도 가장 다윗을 위해서 많은 일을 감당했던 사람이었던 동시에 또한 다윗에게 가장 골칫거리가 되었던 요압입니다. 요압은 이 명단에 포함되지 않습니다. 이것은 놀랍고도 큰 의미를 우리에게 던져줍니다.

    1)  요셉밧세벳

    “다윗의 용사들의 이름은 이러하니라 다그몬 사람 요셉밧세벳이라고도 하고 에센 사람 아디노라고도 하는 자는 군지휘관의 두목이라 그가 단번에 팔백 명을 쳐 죽였더라” (8절)

    첫 번째로 소개된 용사는 다그몬 사람 요셉밧세벳인데, 에센 사람 아디노라고도 합니다. 이 이름은 별명이었을 가능성이 큽니다. 역대상 11장 11절에 학몬 사람의 아들 야소브암이라는 사람이 나오는데, 그 사람과 같은 사람입니다. 야소브암도 별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요셉밧세벳은 역대상 12장에 따르면 다윗이 블레셋에 망명해서 시글락에 머무를 때 다윗의 부하가 되었다고 되어 있습니다. 해마다 첫째 달에 2만 4천 명을 이끌고 나가서 전쟁을 했습니다(대상 27:2).

    여기 보면 그는 군지휘관이었고 그중에도 ‘두목’이었습니다. 이 사람이 ‘군지휘관의 두목’이라는 말은 가장 용맹한 ‘세 사람(용사)의 우두머리’였다는 겁니다. 세 사람 중에도 대장이었다는 말입니다.

    여기 ‘세 용사’ 또는 ‘세 사람’이라는 말이 계속 나오는데 그게 무엇입니까? 100% 정확하게 알 수는 없지만, 그래도 죽 성경을 읽어보면 ‘세 사람’이라고 되어 있어도 사실은 세 명이 아닙니다. 앞에도 ‘세 사람’이라고 나오고 뒤에도 ‘세 사람’(또는 ‘세 용사’)라고 나옵니다.

    그리고 ‘세 사람의 우두머리’로 나오는 사람이 두 명입니다. 요셉밧세벳이 그렇고, 뒤에 보면 요압의 아우 아비새도 세 사람의 우두머리라고 나옵니다. 그렇다면 누가 우두머리라는 말입니까? 세 명 중 우두머리가 두 명이면 나머지 한 명만 부하라는 말인가 하고 생각할 수 있는데 그게 아닙니다.

    첫 번째 세 용사가 있고 두 번째 세 용사가 있었다는 겁니다. 특A급인 최고의 용사 세 명이 있었고, 그다음 레벨 세 명이 있었다는 말입니다. 특A가 세 명, A가 세 명이었습니다. 그다음 세 명도 엄청난 용사들인데, 그들을 능가하는 세 명이 또 꼭대기에 있었다는 겁니다. 그래서 제일 최고의 특A급 세 명의 우두머리가 바로 요셉밧세벳이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보다시피 이 사람은 여기서 우리가 처음 보는 사람입니다. 별로 알려진 사람도 아닙니다. 그렇게 최고의 용사인데 전혀 나오지 않다가 여기 잠깐 나오고 역대상에 잠깐 나옵니다. 오히려 요압 같은 사람은 여기 끼지도 못하는데 계속 나왔습니다.

    무엇을 말해 줍니까? 사람들이 얼마나 인정해 주고 사람들 앞에 얼마나 잘 보이느냐가 중요한 게 아니라는 겁니다. 하나님의 시각은 정확하게 우리 마음을 꿰뚫어 보십니다. 이스라엘에는 잘 알려졌는데 다른 민족들에게는 잘 알려지지 않았을지 몰라도, 이런 요셉밧세벳 같은 사람은 최고 중의 최고였다는 것을 여기서 인정해 준다는 겁니다.

    요셉밧세벳은 특수부대 30명 중에도 세 용사에 속하는 사람이었고, 그중에도 첫 번째 세 용사의 우두머리였습니다. 그리고 이 사람의 무용담이 무슨 신화나 전설 같은 스케일로 소개되고 있습니다. 그가 얼마나 엄청난 용사였는지, 단번에 800명을 쳐 죽였다고 되어 있습니다.

    사실 이것은 일종의 히브리어 과장법입니다. 이 말은 창을 들고 한 번 휘둘렀더니 800명이 다 넘어졌다는 말입니다. 실질적으로 그게 말이 됩니까? 800명을 한 번 휘둘러 다 닿을 수도 없습니다. 실제로 800명을 죽였더라도 한 번 휘둘러서 다 죽인 게 아닙니다. 그런데 그 정도로 엄청난 용사, 최고의 용사 중의 최고의 용사였던 사람이 바로 요셉밧세벳이라고 하는 ‘생소한’ 사람이었습니다. 우리에게는 생소하지만, 하나님은 잘 기억하고 계셨습니다.

    2)  엘르아살

    ‘세 사람’의 두 번째 용사는 엘르아살입니다.

    “9 그 다음은 아호아 사람 도대의 아들 엘르아살이니 다윗과 함께 한 세 용사 중의 한 사람이라 블레셋 사람들이 싸우려고 거기에 모이매 이스라엘 사람들이 물러간지라 세 용사가 싸움을 돋우고 10 그가 나가서 손이 피곤하여 그의 손이 칼에 붙기까지 블레셋 사람을 치니라 그 날에 여호와께서 크게 이기게 하셨으므로 백성들은 돌아와 그의 뒤를 따라가며 노략할 뿐이었더라” (9-10절)

    아호아 사람 도대의 아들 엘르아살은 블레셋과의 전투에서 큰 공을 세웁니다. 여기 보면 세 용사가 싸움을 돋우었다고 되어 있는데, 이것은 상대방 군대를 향해 조롱하고 도발하는 역할을 말합니다.

    다윗이 어렸을 때 군대에 있는 형들에게 도시락을 가져다주려고 갔는데 그때 블레셋에서 엄청난 거인 장수 골리앗이 나와서 싸움을 돋우고 있었습니다. 그를 ‘싸움을 돋우는 자’라고 했습니다. 그가 나와서 막 이스라엘을 저주하고 그 군대를 저주하고 하나님을 저주하는 역할을 하고 있었던 겁니다. 그러나 아무도 그에게 다가가지 못했습니다. 워낙 대단한 장수였기 때문입니다.

    여기서도 마찬가지로 특A급 세 용사가 블레셋을 상대로 그것을 하고 있었다는 겁니다. 실제로 여기서 ‘싸움을 돋우었다’라고 번역된 히브리어는 골리앗이 이스라엘을 향하여 싸움을 돋우었다고 했을 때와 같은 말입니다.

    블레셋 사람들이 전쟁 진을 갖추자 이스라엘 백성들이 물러갑니다. 두려움에 사로잡혀 후퇴했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사람들이 물러갔다는 것은, 싸움을 피해 평야에서 높은 데로 올라갔다는 것을 암시합니다. 백성들이 무서워서 후퇴했을 때 엘르아살이 일어나 나가서 큰 승리를 거둡니다.

    여기 특이한 표현이 나오는데 “그가 나가서 손이 피곤하여 그의 손이 칼에 붙기까지 블레셋 사람을 치니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검을 든 손이 더 이상 움직이지 못할 정도가 될 때까지 싸워서 이겼다는 겁니다. 본문은 하나님이 그를 통해 큰 승리를 거두게 하셨다고 밝히고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크게 이기게 하셨으므로”(10).

    그때 산으로 피했던 백성은 전투가 끝나자 내려왔고, 그들이 한 일은 그저 따라가며 전리품을 취하는 것뿐이었다고 설명함으로써 하나님이 주신 승리의 기쁨에 그들도 동참하게 되었다고 말합니다. 그러니까 엘르아살도 대단한 용사입니다. 혼자서 다 하니까 얼마나 대단합니까? 이런 장군만 하나 있으면 다른 군인들은 든든했을 겁니다.

    3)  삼마

    특A급 ‘세 사람’의 셋째 용사는 삼마라는 사람입니다.

    “11 그 다음은 하랄 사람 아게의 아들 삼마라 블레셋 사람들이 사기가 올라 거기 녹두나무가 가득한 한쪽 밭에 모이매 백성들은 블레셋 사람들 앞에서 도망하되 12 그는 그 밭 가운데 서서 막아 블레셋 사람들을 친지라 여호와께서 큰 구원을 이루시니라” (11-12절)

    삼마에 대한 설명 역시 블레셋과의 전투를 배경으로 합니다. 같은 전투에서 이렇게 된 것이 아니라 여러 전투가 있었고 세 사람은 각각 공을 세웠다는 겁니다. 그런데 여기서 블레셋이 “녹두나무가 가득한 한쪽 밭”에 모였다고 되어 있습니다.

    이곳의 지명이 바로 레히라는 곳입니다. 레히와 연결되는 인물이 바로 삼손입니다. 사사기 15장에서 삼손이 블레셋을 당나귀 턱뼈로 다 쳐 죽인 곳이 바로 레히입니다. 그후 목이 말라서 하나님께 간구하니까 하나님이 물을 주신 바로 그곳입니다.

    엘르아살의 전투가 세 용사의 도발로 시작된 것이었다면, 삼마의 전투는 블레셋이 약탈하기 위해 침략한 것을 막아내기 위한 전투였습니다. 레히에는 녹두나무가 가득한 밭이 있었는데 블레셋이 바로 그것을 약탈하기 위해 침략해온 겁니다. 이때 이스라엘 백성들(군인들)은 또다시 두려워서 도망했습니다. 하지만 삼마는 홀로 서서 블레셋 사람들로부터 그 밭을 지켜냈다는 겁니다. 혼자서 지켜냈으니 얼마나 놀라운 사람입니까?

    아마도 그는 그 순간 블레셋과 싸우면서 오래전 바로 이 장소에서 자기 민족을 위해 이 블레셋과 싸웠던 삼손을 생각하며 싸웠을지 모릅니다. 성경은 그가 승리한 것을 가리켜서도 역시 “여호와께서 큰 구원을 이루시니라.”(12)라고 하며 하나님께서 이루신 큰 구원이라고 설명합니다.

    2.   세 용사의 충성심을 보여주는 베들레헴 우물 사건 (13~17)

    지금까지는 특A급 세 용사의 이름을 소개하고, 그들을 유명하게 만든 사건들을 짧게 설명했는데, 13절 이후에는 그들이 어떻게 다윗의 최고 엘리트 용사의 반열에 들게 되었는지를 보여주는 중요한 한 사건을 말해 줍니다.

    앞선 이야기들이 세 용사의 신화적이고 전설 같은 전투 능력을 이야기했다면, 이 사건은 다윗에 대한 그들의 충성심을 강조하는 이야기입니다. 즉, 그들이 ‘세 사람’(최고의 용사)의 영예를 얻은 것은 남들보다 훨씬 강한, 다윗 왕을 향한 충성심 때문이었다는 것입니다.

    18절 이후에 보면 두 번째급 세 사람(용사)이 나오는데, 그것은 두 번째 세 용사가 아니라 첫 번째 세 용사였다고 알 수 있습니다. 여기서는 첫 번째인지 두 번째인지 알려주지 않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문맥을 보면 첫 번째 세 명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두 번째 세 용사도 용맹하고 엄청난 장수였지만 그들은 다윗을 곤란하게 만든 사람들이었습니다.

    두 번째 세 용사 중 두 명만 이름이 나옵니다. 아비새와 브나야입니다. 세 번째 사람은 이름이 안 나오는데 학자들은 아마도 요압이었을 것이라고 봅니다. 그런데 일부러 명단에서 그의 이름을 뺐다는 겁니다. 워낙 불충한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이 세 명은 다윗을 힘들게 할 때가 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래서 13~17절에 나오는 세 용사는 그들이 아니라 첫 번째 세 용사였을 것이라고 봅니다.

    사무엘서에서 다윗의 누이 스루야의 아들들 아비새와 요압은 언제나 다윗이 사울과 대적하는 문맥에 등장합니다. 물론 요압은 다른 나라와의 전쟁에서도 군대장관으로 나가 싸웠습니다. 그러나 블레셋과의 싸움에는 별로 나오지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물을 길어 오는 사건의 주인공 세 사람은 앞의 세 사람, 즉 요셉밧세바, 엘르아살, 삼마라고 생각할 수 있는 겁니다.

    그렇다면 사무엘서에서 주인공들의 이름을 정확히 드러내지 않은 이유는 도대체 무엇입니까? 앞에서는 이름뿐 아니라 누구 아들이라고까지 다 나오는데 왜 여기서는 이름이 안 나옵니까? 그것은 유대인의 전통 때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위해서 목숨을 바친 사람들의 이야기를 전할 때는 주인공 이름을 밝히지 않는 것이 유대인의 전통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사람들이 명예를 드높이려고 일부러 순교하며 죽을까 봐, 그것을 방지하기 위해서 그런 전통이 생겼다는 겁니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사무엘서는 다윗 하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사람이라고 둘을 연결해서 이야기해주는 것입니다. 결국 다윗의 후손 중에 메시아(그리스도, 구원자)가 오시는데, 다윗이 메시아에 대한 모형이라는 사실을 이해하면 이것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또 삼십 두목 중 세 사람이 곡식 벨 때에 아둘람 굴에 내려가 다윗에게 나아갔는데 때에 블레셋 사람의 한 무리가 르바임 골짜기에 진 쳤더라” (13절)

    ‘삼십 두목 중 세 사람’ 즉 30명의 대장 중 세 사람이라는 표현에서 알 수 있듯이, ‘세 사람’은 다윗의 30 용사의 일부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23장에서 전부 37명이라고 기록되어 있지만 실제로 36명의 용사들의 이름을 기록하기 때문에, 30 용사가 있고 세 명의 용사가 따로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굳이 그렇게 구분할 필요가 없습니다. 평소에 다윗은 자신의 경호 부대의 병력을 30명으로 일정하게 유지했습니다. 그런데 이 37명(또는 36명)의 명단에 이미 죽어서 없는 아사헬(요압과 아비새의 동생)과 다윗이 죽게 만든 우리아와 같은 사람의 이름도 여기 들어가 있습니다. 전쟁에서 이렇게 죽는 용사가 나올 때마다 30명에 새로 충원해야 했습니다. 한 명이 죽으면 채워 넣고, 또 다른 사람이 죽으면 또 채워 넣다 보니까, 36명 또는 37명의 이름이 나오게 된 겁니다.

    그러니까 ‘세 사람’은 다윗의 ‘삼십 용사’ 안에서도 최고 엘리트 트리오였다는 것, 그 최고 엘리트 트리오가 둘이었다는 것, 그중에도 가장 최고가 처음 나온 세 사람이었다는 것, 그 외에도 엄청난 세 사람이 또 있었다는 것입니다. 특히 첫 번째 세 용사는 누구보다도 다윗을 향한 충성심이 대단히 깊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14 그 때에 다윗은 산성에 있고 그 때에 블레셋 사람의 요새는 베들레헴에 있는지라 15 다윗이 소원하여 이르되 베들레헴 성문 곁 우물 물을 누가 내게 마시게 할까 하매” (14-15절)

    블레셋과의 전쟁 중 블레셋 사람들의 부대가 있는 곳에 베들레헴 성문 우물이 있었습니다. 이 배경이 언제인지도 확실하지가 않습니다. ‘아둘람 굴’(13)이 언급되기 때문에 다윗이 왕이 되기 전 아둘람 굴에 피해 있을 때 사울 군대가 블레셋 군대와 싸우고 있었고 다윗은 다른 데 있었다고 보는 학자들이 있습니다. 반면 ‘르바임 골짜기’(13)라는 말이 나오기 때문에 사무엘하 5장에 나오는 블레셋과의 전투를 가리킨다고도 볼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 전투가 어떤 전투였든지 간에 다윗이 블레셋과 대치하는 중 갑자기 블레셋 군대가 진치고 있는 베들레헴 우물물이 마시고 싶었습니다. 베들레헴이 어떤 곳입니까? 자기 고향입니다. 베들레헴은 예루살렘에서 약간 남쪽으로, 블레셋과 가까워 블레셋이 잦ㄹ 쳐들어올 수 있는 곳입니다.

    아마도 이 우물은 다윗이 어릴 때 양을 치면서 물을 마시게 하고 자기도 마시곤 했던 우물이었을 가능성이 큽니다. 자기가 물을 마시던 그 우물이 갑자기 생각난 겁니다. 그래서 ‘저 베들레헴에 있는 우물물을 내가 마시면 얼마나 좋을까.’ 하며 깊은 생각에서 나온 말이 아니라 그냥 해본 말입니다.

    물을 마시고 싶은데 ‘물 중에서도 내 고향 베들레헴에 있는 우물물을 마실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이때 다윗은 베들레헴에서 멀리 떨어진 산성에 있었습니다(14). 그런데 놀랍게도 세 용사는 목숨을 걸고 그 먼 길을 달려가서 우물물을 떠서 가지고 옵니다.

    “세 용사가 블레셋 사람의 진영을 돌파하고 지나가서 베들레헴 성문 곁 우물물을 길어 가지고 다윗에게로 왔으나 다윗이 마시기를 기뻐하지 아니하고 그 물을 여호와께 부어 드리며” (16절)

    ‘나는 베들레헴 우물물 좀 마셨으면 좋겠다.’라고 할 때 만약 여러분이 다윗의 부하였다면 어떤 생각이 드시겠습니까? ‘아무 물이나 마시지, 베들레헴이 어딘데 무슨? 게다가 블레셋 군대가 거기 있는데 무슨 베들레헴 우물? 그냥 이거나 드세요.’라고 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니까 이 세 용사가 얼마나 충성스러운 사람들인가가 나타나는 겁니다. 그게 뭐라고 왕이 원한다고 목숨을 걸고 가서 물을 떠오지 않습니까? 가는 길에 블레셋 군대를 뚫고 가야 합니다. 또 물을 떴어도 오늘 길에 다시 블세셋 군대를 뚫고 와야 합니다. 이게 얼마나 힘든 일입니까? ‘왕이 원하시는 것이라면 우리는 하겠습니다.’라고 하는 엄청난 충성심입니다. 이 사람들이 괜히 최고의 엘리트 트리오 세 명 안에 들어간 게 아닙니다.

    이 세 용사가 다윗이 목을 축이도록 목숨을 걸고 적진 안에 들어가 물을 길어 왔고, 그때 다윗은 그 용사들의 행위에 큰 감동을 받습니다. 그래서 그 물을 마시지 않고 땅에 쏟아부어 버립니다. 다윗이 그 물을 여호와께 부어 드렸다고 되어 있습니다.

    그랬더니 어떤 사람은 이런 식으로 말을 합니다. 이 사람들이 멀리 베들레헴까지 가서 블레셋 군대를 뚫고 우물에 가서 물을 떠 오는 동안 다윗은 이미 물을 실컷 마셨다는 겁니다. 그래서 물을 떠 왔을 때 ‘주여, 제가 이 물을 어떻게 마시겠습니까?’라고 했다는 겁니다. 하지만 이건 그냥 사이드 스토리라고 생각하시면 되겠습니다. 그렇다고 해도 마시면 될 것을 하나님께 부어서 드렸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에배를 드린 겁니다.

    <삼국지>에서 조자룡이 유비의 부인들과 아들을 구하기 위해 홀로 적진에 들어가 온갖 위기를 벗어나서 아들을 구하여 왔을 때, 유비가 구해온 그 아들을 땅에 던져 버리고 조자룡에게 가서 크게 위로했다는 일화가 있습니다. 또 6.25 한국전쟁 때 이승만 대통령이 압록강 물을 마시고 싶다고 해서 군인들이 압록강의 물을 수통에 담아 온 적이 있다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이르되 여호와여 내가 나를 위하여 결단코 이런 일을 하지 아니하리이다 이는 목숨을 걸고 갔던 사람들의 피가 아니니이까 하고 마시기를 즐겨하지 아니하니라 세 용사가 이런 일을 행하였더라” (17절)

    다윗이 세 용사의 목숨값인 그 물을 마시지 않고 버렸다는 것은 그가 정말 자기 용사들을 아끼며 위하는 통치자였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이 이야기의 시간적 배경이 ‘곡식을 벨 때’(13)라고 되어 있는데, 이것은 블레셋이 이스라엘을 약탈하기 위해 침공하기 좋은 때였다는 것을 암시해줍니다. 곡식을 벨 때이니까 그것을 빼앗으러 오는 게 아닙니까. 또한 ‘곡식을 벨 때’라는 것은 다윗의 갈증도 어느 정도 설명해 줍니다. 이때는 건기의 끝자락으로 물이 귀한 때였습니다.

    이때 블레셋과의 전투에서 세 명의 용사가 블레셋 진영을 깨고 들어가 우물을 길어 왔다는 것은 정말 놀라운 업적입니다. 다윗이 말한 것처럼 그들이 길어 온 물은 그들의 목숨값입니다. 그들의 피입니다. 그냥 물이 아닙니다. 같은 물이라도 콸콸 나오는 것과 한 방울이 아쉬울 때 마시는 것은 가치가 다릅니다. 그런데 다윗은 그것을 마시지 않고 땅에 부어버립니다.

    다윗이 훌륭한 왕이 된 것은 하나님이 이끌어주셔서 된 것이고, 또한 그를 따르는 충성스러운 부하들의 도움이 컸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결코 다윗이 혼자 잘나서 위대한 왕이 된 게 아닙니다. 그런데 다윗의 부하들은 왜 목숨까지 걸어가면서 다윗을 위해 충성하며 싸웠습니까?

    첫째, 다윗의 용맹함을 그의 부하들이 그대로 따랐기 때문입니다. 다윗은 졸장부인데 부하들만 용맹한 게 아닙니다. 다윗은 어떤 용사보다도 용맹하고 뛰어난 용사였습니다. 행동으로 모범을 보이는 리더였습니다. ‘얘들아, 나는 여기 있을 테니까 나가서 싸워라.’ 하는 리더가 아니라, ‘나가자! 나를 따르라!’ 하던 리더였습니다.

    다윗이 골리앗과 싸울 때, 그때는 어렸지만 그 후의 전투에서도 어떤 사람보다 용맹한 모습을 보였습니다. 다윗의 부하들은 그런 다윗 왕의 모습을 보고 배운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용사들이 어디서 갑자기 나온 게 아니라 보고 배워서 그와 같이 용맹한 용사들이 나온 것입니다.

    보고 배우는 게 얼마나 중요합니까? 자녀들이 듣고 배우는 게 아니라 보고 배운다는 것은 누누이 하는 말입니다. 아무리 ‘이거 해라. 저거 해라. 이거 하지 마라.’라고 해도 잘 안 됩니다. 그런데 아빠 엄마가 모범을 보여줄 때, 하라고 안 해도 따라 합니다. 보고 배우기 때문입니다.

    둘째로, 다윗은 자신을 위해 이기적으로 행동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들이 그것을 배운 겁니다. 사울은 개인적인 질투와 야망을 위해 군대를 동원하면서, 지금 나가서 블레셋과 싸워야 하는데 다윗을 잡아 죽이겠다고 쫓아다녔습니다. 군사력을 낭비했습니다. 개인의 질투 때문에 눈이 멀어서 군사력을 낭비하는 사람이었던 사울의 부하들은 그런 그의 명령을 따르긴 했지만 마음속 깊이 충성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다윗의 부하들은 다윗의 명령이 이스라엘과 백성을 위한 것이라는 확신이 있었습니다. ‘다윗은 정말로 하나님을 위하고 우리 이스라엘을 위한다. 백성을 위해 싸우는 분이시다.’라고 확실히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그들은 전심으로 다윗에게 충성했고 그의 말을 따랐습니다. 믿을 만한 사람이니까 따랐지, 못 믿을 만한 사람이면 어떻게 따르겠습니까?

    또한, 다윗은 왕이었음에도 자기가 잘못하고 죄를 지었을 때 바로 회개하고 돌아왔습니다. 부하들은 그것을 보고 배웠습니다. 다윗은 갈증 해소를 위해 부하들에게 베들레헴에서 우물물을 길어 왔으면 좋겠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부하들의 생명을 위협하는 무리한 요구였음을 깨닫고는 하나님 앞에서 회개한 겁니다. 이것이 바로 부하들의 충성심을 일으키고 그를 더욱더 따르게 한 요소였던 겁니다.

    생각해보십시오. 이때 용사들이 물을 떠 왔는데 목숨 걸고 떠 왔으니 얼마나 많이 떠 왔겠습니까? 근데 그때 다윗이 그것을 받아서 마시면서 ‘이야, 시원하다!’라고 한다면 다른 용사들의 사기가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런데 “하나님, 이것은 이들의 목숨값입니다.”라고 하며 하나님 앞에서 부어버릴 때, 충성심이 활활 타오르며 ‘내가 저분을 위해 내 목숨을 바치리라.’라고 하지 않았겠습니까?

    그런데 예수님은 다윗보다 훨씬 더 위대한 리더이십니다. 자신이 생명까지 주신 분입니다. 성도는 완전한 리더이신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입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위해 스스로 생명을 내어주는 용기와 희생을 보이셨습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시고 행하신 모든 것은 자기 자신을 위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사명을 위해, 또 우리를 위해 하신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예수님을 제대로 알면 ‘나도 예수님을 위해 내 목숨을 바쳐 충성하겠다.’ 하는 결단이 나오는 겁니다.

    가끔 선교사님들이 선교지에서 고생하다 순교했다는 소식을 듣습니다. 특히 이슬람 국가에서 처형당하거나 테러범에게 죽임을 당했다는 소식을 들으면 슬프고 낙심이 됩니다. 어떤 때는 의문도 듭니다. ‘왜 하나님은 저분들을 지켜주지 않으셨나? 이것은 헛된 죽음이 아닌가?’ 그러나 실제로 돌아가신 분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낭비가 아니라고 하셨습니다. 주님을 향한 충성심 때문에 얼마든지 그렇게 할 수 있는 것이라고 고백했습니다.

    3.   두 번째 세 용사’ (18~23)

    1)  아비새

    “18 또 스루야의 아들 요압의 아우 아비새이니 그는 그 세 사람의 우두머리라 그가 그의 창을 들어 삼백 명을 죽이고 세 사람 중에 이름을 얻었으니 19 그는 세 사람 중에 가장 존귀한 자가 아니냐 그가 그들의 우두머리가 되었으나 그러나 첫 세 사람에게는 미치지 못하였더라” (18-19절)

    여기 “세 사람”이 나오는데 또 “첫 세 사람”이 나옵니다. 이것만 보아도 요셉밧세벳, 엘르아살, 삼마로 구성된 첫째 세 사람과 구별되는 둘째 세 사람이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특A급 세 사람 트리오가 있었고, 그다음인 A급 트리오가 있었는데, 그중의 우두머리가 아비새였다는 겁니다.

    역대상 11장을 보면 ‘세 사람’의 반열에도 ‘첫째’와 ‘둘째’가 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스루야의 아들 아비새는 둘째 세 용사의 우두머리였는데, 왜 그를 자꾸 ‘요압의 동생’이라고 강조하는가 하면 요압이 없는 것을 보여주기 위함입니다. 요압의 이름이 여기 들어가 있지 않습니다.

    어떤 학자들은 요압이 너무 잘 알려져 있기 때문에 굳이 그의 이름을 넣지 않아도 되어서 그렇다고 말하지만, 그것보다는 그가 지나치게 다윗의 일을 간섭하고 개입하면서 아브넬, 압살롬, 아마사 같은 사람들을 죽였기 때문에 그래서 다윗에게 불충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다윗의 용사들은 단순히 잘 싸우는 군인이 아니라 다윗에게 충성하는 충신들이었습니다.

    요압의 동생 아비새의 이야기는 첫 번째 용사인 요셉밧세벳과 매우 비슷합니다. 그가 한 번 휘두르니까 300명이 죽었습니다. 그는 두 번째 세 사람에 들었는데, 첫 번째 세 용사에는 미치지 못했다고 기록합니다. 그의 충심이 미치지 못했다는 겁니다. 단순히 군사력이 모자랐다는 게 아니라, 다윗을 향한 마음이 첫 번째 세 사람보다 못했다는 말입니다.

    2)  브나야

    둘째 세 사람의 두 번째 용사는 여호야다의 아들 브나야입니다.

    “20 또 갑스엘 용사의 손자 여호야다의 아들 브나야이니 그는 용맹스런 일을 행한 자라 일찍이 모압 아리엘의 아들 둘을 죽였고 또 눈이 올 때에 구덩이에 내려가서 사자 한 마리를 쳐 죽였으며 21 또 장대한 애굽 사람을 죽였는데 그의 손에 창이 있어도 그가 막대기를 가지고 내려가 그 애굽 사람의 손에서 창을 빼앗아 그 창으로 그를 죽였더라” (20-21절)

    그는 다윗 아래서 블렛 사람과 그렛 사람의 지휘관이 되었고(삼하 20:23), 후에 아도니야의 반란 때 솔로몬을 지지하고 아도니야를 처단하는 업적을 세운 사람입니다(왕상 2:25). 또 솔로몬 아래서 요압을 대신해 군대장관이 됩니다(왕상 2:35). 본문은 그런 브나야가 어떻게 자신의 용맹을 처음 알렸는지를 보여 줍니다. 그는 유다의 최남단인 에돔 접경 지역의 도시(수 15:21) 갑스엘 출신의 용사인데, 많은 업적을 남긴 사람입니다. 그의 무용담이 세 가지나 나옵니다.

    먼저, 그는 “모압 아리엘의 아들 둘을 죽였”다고 나오는데(20), 원어에는 ‘아리엘 둘을 쳤다.’라는 식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아리엘이 두 명이라는 식으로 보일 수 있기에 개역개정은 ‘아리엘의 아들’로 고쳐 번역했습니다.

    둘째로, 브나야는 눈 오는 날 구덩이 안에 내려가 사자를 죽였습니다. 지금도 아프리카의 부족 가운데 용사로 인정받으려면 사자 사냥에 성공해야 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삼손도 사자를 죽여 자신의 용맹을 인정받았음을 생각할 때, 사자와 싸워 이기는 것이 용사의 상징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구덩이에서 사자와 싸우는 것은 절대적 힘에서 밀리는 사람에게 불리합니다. 왜냐하면 움직일 공간이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눈 오는 추운 날은 사자에게 더 유리한 환경입니다. 그런데 브나야는 사자를 이겼을 뿐 아니라, 그것도 악조건에서 이겼을 정도로 엄청난 용사였다는 것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셋째로, 그는 막대기로 장대한 이집트 사람의 손에서 창을 빼앗고 그 창으로 그를 죽였다고 되어 있습니다(21). 다윗도 그랬습니다. 골리앗을 죽일 때 그의 칼로 그의 목을 베었습니다. 이 사람은 역대기에 의하면 키가 ‘다섯 규빗’의 ‘거인’입니다. 220~230 센티미터(7’4“)나 되는 엄청난 거인입니다. 지금 NBA 선수 중 최장신 정도 되는 키입니다. 그러니까 이런 묘사는 브나야가 다윗과 비슷하게 용맹한 장수였다는 것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22 여호야다의 아들 브나야가 이런 일을 행하였으므로 세 용사 중에 이름을 얻고 23 삼십 명보다 존귀하나 그러나 세 사람에게는 미치지 못하였더라 다윗이 그를 세워 시위대 대장을 삼았더라” (22-23절)

    시위대 대장을 삼을 정도로 용맹한 장수였지만 앞의 세 사람에게는 미치지 못했습니다. 역시 충성심에서 그랬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첫째 세 사람과 둘째 세 사람을 구분하는 것은 전투 능력보다는 충성심이었습니다.

    [나가는 말]

    첫째 세 사람과 둘째 세 사람인 여섯 명 모두가 대단한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두 번째 세 사람 중 세 번째 용사는 나오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다윗을 배신한 사람이었을 가능성이 높은데, 그게 바로 요압이었을 것이라는 데에 대부분 학자들이 동의합니다. 그래서 요압은 이 37명의 용사 명단에 들어가지 못합니다.

    아비새나 브나야는 용맹했고 공을 많이 세웠습니다. 그러나 이들이 사실은 무모하게 행동할 때도 많았습니다. 사자가 구덩이에 빠졌는데 왜 일부러 거기 들어가서 싸웁니까? 참 무모한 일입니다. 거인과 막대기로 싸운 것도 무모한 일입니다. 공은 세웠지만 무모했고 말을 잘 안 듣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랬는데도 왜 오늘 본문에서 이런 사람들의 이야기를 쭉 합니까? 이렇게 거칠고 제어가 안 되고 막 나갈 수 있고 조폭과 같이 될 수 있던 사람들이 다윗을 만났기 때문에 용맹한 장수로 변화되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겁니다. 훌륭한 리더를 만남으로 변화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한계는 있지만 변화되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예수님의 제자들도 형편없는 사람들이었고 그냥 놓아두면 어떻게 될지도 알 수 없는 인생들이었는데, 예수님을 만나서 변화되어 사도가 되고 땅끝까지 복음을 전하다 순교하는 놀라운 사람들로 변화되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그들이 성경에 나오는 것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도 이 땅에서 누구를 만나느냐, 어떤 리더를 만나느냐에 따라 인생이 바뀔 수 있습니다. 그런데 가장 최고의 리더가 누구입니까?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참된 리더, 최고의 리더이신 예수님을 따르며 그분의 가르침과 질책 속에서 성장하는 사람은 반드시 값지고 귀한 인생을 살게 됩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따른다고 하면서도 요압처럼 자기가 주인 노릇을 하고 자기가 마치 왕인 것처럼 자기 마음대로 행동하고 자기가 원하는 대로 가면, 여기서 요압의 이름이 빠진 것처럼 주님께 인정받지 못하는 실패한 인생이 되고 만다는 것입니다.

    사실은 어느 용사보다 요압이 제일 유명한 사람이었습니다. 어느 누구보다 제일 높은 위치에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여기 명단에는 나오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그를 인정하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세상의 인정을 받고 싶습니까, 하나님의 인정을 받고 싶습니까? 물론 다 받으면 좋겠지만, 하나님의 인정은 반드시 받아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런 인생을 살기 위해서 예수님을 믿고 따르며, 어떻게 따르는지를 배워야 하고 연습해야 하고 훈련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주님의 신실한 제자로, 인정받는 인생으로 나아갈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첨부 1

    본문에 다윗의 영웅들에 관한 두 번째의 목록이 나습니다. 그러나 여기에 포함된 것은 다윗이 아둘람의 요새에 피난하였던 초기시대로 되돌아가는 매력있는 이야기입니다. 다윗은 블레셋 사람들이 점령하고 있는 도성 베들레헴의 우물에서 나는 샘물을 갈망했습니다. 그들의 충성과 사랑에 감동되어 다윗은 그 귀한 물을 하나님께 대한 희생물로 땅 위에 쏟고 마시지 않았습니다. 그 이유는 자기 무사들이 취한 희생적 모험을 생각할 때 그 물이 그의 눈에는 피와 같이 보였기 때문이었습니다. 히브리 사람들에게는 피는 생명의 요소를 함축한 것이므로 언제나 하나님 앞에 쏟아버려야 하고 이를 결코 소비해서는 안되었다는 것을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대상 11:10-41에 영웅들에 대한 똑같은 목록이 있는데 이것보다 본문이 더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1. 제 1급의 세 용사의 업적(8-12절) 본문의 세 용사는 다윗의 용사 중 제 1급에 속합니다. 이들이 하나님에게 받은 것은 체력과 용맹이었습니다. 세 용사의 이름은 첫째가 다그론 사람 요셉 밧세벳이요, 둘째가 아호아 사람 도대의 아들 엘르아살이요, 세째가 하랄 사람 아개의 아들 삼마인데, 이들이야말로 다윗의 군부의 최고의 용사들입니다. 요셉 밧세벳은 다윗의 12군단 중 제 1군장으로써 (대상 27:2) 단번에 적군 800인을 타살한 무공을 빛내고 있습니다. 다음 엘르아살은 제 2 군단장으로써 이는 이스라엘이 블레셋 군대에 패한 때에도 홀로 서서 칼이 손에 붙어 떠나지 않기까지 싸워 마침내 여호와의 도우심으로 전세를 만회케 하였으므로 백성들이 돌아와서 노획물을 취하도록 한 그야말로 최후일각까지 싸운 끈기있는 용장입니다.(9-10절). 그리고 삼마 역시 블레셋과의 전투에서 패하여 병사들이 모두 도망친 후에도 녹두나무가 무성할 밭에서 벌떼처럼 모여오는 적군을 맞아 홀로 버티고 서서 여호와의 도우심으로 큰 승리를 거둔 용사입니다.(11-12절). 특별히 더 귀한 일은 이들의 공로가 무한히 크면서도 그 승리의 영광을 오직 여호와께 돌리고 있다는 점입니다. 이것이 다윗의 군대의 정신이며 승리의 비결이기도 합니다. 2. 세 용사의 의리(14-17절) 블레셋과의 전쟁은 또 다시 일어나 다윗은 고지산성에 있고 블레셋 진영은 베들레헴 저지에 있는 계곡 르바임에 표진했는데, 다윗은 산성에서 자기의 고향 베들레헴을 내려다보면서 사모의 정에 끌어올랐으며 더구나 성문 곁에 있는 우물물을 단 한 번이라도 마셔보고 싶은 갈증을 느끼었습니다. (1) 용감스럽게 물을 길어왔습니다. 때는 추수기여서 날씨는 더웠고 몸은 피곤하고 갈증은 심했습니다. 마실 물이 산지에 없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다윗은 “베들레헴의 우물물을 단 한모금이라도 마셔보았으면” 하고 간절히 바랬던 것입니다. 그래서 세 용사는 다윗의 갈증을 해결해 주기 위해 생명을 내놓았습니다. 이 세용사의 의리는 용감스러운 행위로 나타났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만용이 아니고 성령의 감동에 의한 것이며, 하나님의 뜻을 앎으로 움직여진 것입니다.(대상 12:18-23). (2) 다윗은 거절할 것은 용감스럽게 거절했습니다. 때마침 다윗의 심정을 이해한 충성된 세 용사는 화살이 빗발치듯하는 적진에 뛰어들어 적군과 충돌하면서 성문 곁 우물물을 길어다가 다윗에게 바쳤을 때, 다윗은 그 우물물을 마시기를 거절했습니다. 심히 목마른 사람이 자기 앞에 있는 물을 거절하기란 어렵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생명을 내걸고 길어온 물을 받아들고 “이는 물이 아니라 자기 생명을 돌보지 않고 갔던 용사들의 피라”고 느껴져서 감히 마시지 못하고 여호와께 부어 드렸더니 피는 사람이 마실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분깃이라(레 17:10-16)는 율법의 규례를 따라 하나님께 드릴 제물로 삼았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종은 거절할 것은 언제나 깨끗이 거절할 줄 알아야 합니다. 이들의 왕에 대한 충성심은 모든 군인들의 사표가 되며 특히 그리스도의 정병으로서의 오늘의 신자들에게 하나의 본보기가 되는 것입니다. 군인들에게 있어서 절대불가결의 요소는 충성심인 것입니다. 3. 제 2급의 용사의 업적(18-23절) 이 부분에 기록된 삼 인의 다윗의 용사 중 제 2급에 속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들은 다윗을 위해 생명을 내걸고 물을 길어온 용사입니다. 첫째 용사는 요압의 아우 아비새로서 저는 다윗의 제 4군단장(대상 27:7)이며 여기 삼 인 용사 중에 두목입니다. 아비새는 투장의 명수로써 일거에 300인을 사살한 용장입니다. 둘째 용사는 여호야다의 아들 브나야로써 이는 일찌기 모압아리엘의 아들들을 죽였고, 눈이 오는 겨울에 함정에 빠진 사자를 쳐 죽였으며 창 대신 막대기를 가지고 애굽인을 쳐 죽인 무용에 빛나는 자입니다. 세째 용사는 그 이름이 생략되었으나 이상의 두 용사를 보아 이도 역시 두 사람과 비견할 수 있는 용사임을 추측할 수 있습니다. 이상에서 언급한 3조의 세 용사 중 첫 세 용사가 제 1급으로 충, 용, 지(忠勇知)를 겸비한 자들이라면, 둘째 세 용사는 불타는 자들이며, 세째는 용감무쌍한 자고서 부각되어 있습니다. 우리의 왕되신 주님은 오늘도 충, 용, 지, 덕(忠勇知德)을 겸비한 용사의 출현을 고대하고 계십니다. 4. 삼십인의 용사(24-38절) 본문 마지막 부분에서 32인의 용사들의 얼굴을 또한 보게 됩니다. 하지만 이를 통칭 30인 용사라고 부릅니다. 이 30인 용사는 다윗의 군단장을 위시하여 각각 개인적인 특기를 자랑하는 유능한 용사들인 것입니다. 24절에 “요압의 아우 아사헬은 삼십인 중에 하나요 또 베들레헴 도도의 아들 엘하난과”라고 했습니다. 아사헬에 대해서 삼하 2:18, 대상 11:26-41에서 “아사헬의 발은 노루같이 빠르더라”라고 묘사하고 있으며 아브넬에 대해서는 2:23에서 “아브넬이 창 뒤 끝으로 그 배를 찌르니 창이 그들을 뚫고 나간지라”라고 했습니다. 엘하난은 삼하 21:19에 보면 골리앗의 아우 라흐미를 죽인 사람으로 나옵니다. 그런데 이들의 공통점은 베들레헴 사람입니다. 25절에 보면 “하롯 사람 삼훗과 하훗 사람 엘리가와” 라고 했습니다. 하롯은 삿 7:1에 “기드온과 그를 쫓은 모든 백성이 일찌기 일어나서 하루 샘곁에 진쳤고”라고 했습니다. 길보아산 서북쪽에 있는 곳이요 거기 동굴에서 나오는 샘이 큰 못을 이루었고 요단강으로 흐릅니다. 그 곳 사람 삼훗은 대상 27:8에 “오월 다섯째 장관은 이스라엘 사람 삼훗이니” 라고 하였습니다. 또 26절에는 “발디 사람 헬리스와 드고아 사람 익게스의 아들 이라와”라고 했습니다. 발디는 사울의 딸 미갈의 남편되었던 사람의 이름이기도 한데 (삼상 25:44) 30인 용사 중의 하나로 지명이 되었습니다. 또 거기 출신 헬레스가 30인 중 일인이 되었습니다. 드고아(삼상 14:2)는 슬기있는 여인의 출신처요, 선지자 아모스의 고향(암 1:1) 이기도 합니다. 27절에서는 “아나돗 사람 아비에셀과 후사 사람 므분내와” 라고 했습니다. 아나돗은 예후와 예레미야의 출신지 (대상 12:3 렘 1:1)인데 아비에 셀도 이곳 사람으로 그는 대상 27:12에서는 “구월 아홉째 장관은 냐민자손 아니돗 사람 아비엘이니”, 라고 설명합니다. 또 후사는 용사를 많이 낸 곳입니다. 삼하 21:18에는 “후사 사람 십부라가 장대한 자의 아들 중에 삽을 쳐 죽였고”라고 했는데 십부라는 므분내와 동일한 사람입니다. 28절에 “아호와 사람 살몬과 느도바 사람 마하래와” 라고 했습니다. 아호아는 9절에 나왔습니다. 여기도 많은 용사가 나왔습니다, 느도바는 갈렙 자손의 살던 곳(대상 2:54)으로 예루살렘에서 22키로미터의 거리에 있는데 스붑바벨 때 귀환자들의 거주지요 거기서 노래하는 자가 나왔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느 12:18에 “노래하는 자들이 예루살렘 사방들과 느도바 사람의 동리에서 모여오고” 라고 했습니다. 거기서 마하래 같은 용사가 나왔습니다. 29절에서는 “느도바 사람 바아나의 아들 헬렙과 베냐민 자손에 속한 기브아 사람 리배의 아들 잇대와” 라고 했습니다. 느보아에서도 인물이 많이 나왔습니다. 바아나란 사람은 성경에 여러명이 나오는데 여기서도 헬렙의 아버지로서 나옵니다. 기브아는 베냐민 영으로 그 곳 사람 리배의 아들 잇대를 말합니다. 30절에 “비라돈 사람 브나야와 가아스 시냇가에 사는 힛대와”라고 했습니다. 비라돈에서는 사사 압돈이 나왔습니다. 삿 12:13에 “비라돈 사람 힐렐의 아들 압돈이 이스라엘 사사이었더라”고 했습니다. 브나야는 여호야 다의 아들 브나야와 다른 사람으로 대상 27:14에 보면 “십일월 열한째 장관은 에브라임 자손에 속한 비라돈 사람 야나” 라고 했습니다. 가아스 시냇가는 수 24:30에서 보듯이 “가아스 산 북” 그 산에서 내려오는 시내인 듯합니다. 거기사는 첫대가 30인 용사 중에 끼었습니다. 31절에 “아르바 사람 아비알본과 바흐훔 사람 아스마과”라고 했습니다. 아르바는 수 14:15에서는 “헤브론의 옛 이름은 기럇 아르비라 아르바는 아낙 사람 가운데 가장 큰 사람이었더라” 라고 했습니다. 아르바는 헤브론을 가리키는 것이며, 아비알본은 아비엘입니다. 대상 11:32에서 “아르바 사람 아비엘과”, 삼하 3:16에서 “바르흠은 혹바우림” 과 같은 지방입니다. 32절에 “사알본 사람 엘리아바와 야센의 아들 요나단과”라고 했습니다. 사알본이나 엘리아바는 이곳 밖에 나타나지 않으며, 야센은 대상 11:34 에 “기손 사람 하셈”과 통하는 이름입니다. 32절에 “하랄 사람 삼마와 아릴 사람 시랄의 아들 아히암과”라고 했습니다. 삼마는 삼하 23:11-12에 “백성들은 블레셋 사람 앞에서 도망하되 저는 그 발 가운데 서서 막아 블레셋 사람을 친지라 여호와께서 큰 구원을 이루시니라”고 했습니다. 이런 공을 세운 이로 첫 삼인 중 한 사람입니다. 아랄에서는 아히암이 났습니다. 34절에 “마아가 사람의 손자 아하스배의 아들 엘리벨렉과 길로 사람 아히도벨의 아들 엘리암과”라고 했습니다. 다윗이 암몬왕 나하스가 죽었을 때 그 아들 하눈에게 조문사절을 보냈더니 도리어 욕을 보인 일이 있습니다. (삼하 10장). 양국의 전쟁시에 암몬이 마아가 왕과 연합전선을 벌였으나 다윗에게 패전하여 점령당한 곳입니다. 이 마아가에서 30인 용사 중 한 사람이 났습니다. 아히도벨은 다윗의 참모이다가 그 손녀 밧세바의 일로 압살롬에게 붙었다가 자기 참모가 통하지 않음으로 삼하 17:23에 보면 “스스로 목매어 죽으매” 라고 했습니다. 그 아들 엘암은 밧세바의 아버지입니다(삼하 11:3). 그는 다윗의 장인이 되었습니다. 35절에 “갈벨 사람 헤레스와 아람 사람 바하래와” 라고 했습니다. 갈멜은 나발의 고향입니다(삼상 25:2). 유다 족이 얻은 땅입니다. 헤레스는 이곳 밖에 안 나옵니다. 아랍은 아라비아 족 중의 이름입니다. 이 지방에 살던 바아래가 용사 중 일인입니다. 36절에 “소바 나단의 아들 이갈과 갓 사람 바니와” 라고 했습니다. 소바도 다윗에게 점령 당만 곳입니다. 그 곳 사람이 다윗에게 용사로 일했던 것입니다. 나단의 아들 이갈이 고했고, 갓 지파 아들 바니를 말했습니다. 다른 곳에는 나타나지 않은 이름입니다. 37절에 “암몬 사람 셀렉과 스루야의 아들 요압의 병기 잡은 자 브에롯 사람 나하래와” 라고 했습니다. 다음으로는 암몬인으로 다윗의 용사 셀렉을 말합니다. 또 나하래를 말합니다. 브에롯 사람은 베냐민 족속입니다(삼하 4:2).이 족속의 나하래도 삼십인 중 일인입니다. 38절에 “이델 사람 이리와 아델 사람 가랍과” 라고 했습니다. 아델은 기럇여아린 족이니 대상 2:53에 보면 “기럇여아림 족속들은 미델 족속과” 라고 했습니다. 이들은 30인 중에 두 사람이 되었습니다. 26절에 익게스의 아들 이라와 본 절의 이라입니다. 가렙도 이델 족입니다. 39절에 “헷 사람 우리아라 이상 도합이 삼십 칠인이었더라”고 했습니다. 여기 기록된 32인에다가 제 1급의 세 용사와 제 2급의 세 용사 중 두 사람을 합쳐서 37명이 됨을 말합니다. 이 37인 위에 총사령관 요합 장군이 있습니다. 요압은 성격이 조급하고 사려가 깊지 않은 자입니다. 그러나 그의 창은 수명의 동료마저 살해하기는 하였으나, 그의 다윗에 대한 충성은 전혀 두 마음이 없는 그야말로 일편단심의 충절을 가진 자입니다. 그가 압살롬을 죽인 후 총사령관 직에서 면직된 후에도 왕에 대하여 추호의 불평이나 원망을 한 일이 전혀 없음을 보면 요압은 확실히 다윗 왕국의 공신임에는 틀림없습니다. 다윗 왕국은 다윗만으로 된 것이 아니며 적어도 37인의 용사와 12군단의 4천의 군대의 충용이 합하여 이루어졌다고 또한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축복으로 말미암아 빛나는 왕국을 건설할 수 있었다는 사실을 결코 잊어서는 안됩니다. 오직 다윗에게 위대함이 있었다면 충성된 용사들의 힘과 하나님의 은혜를 한데 묶어 초점을 모으게 한 그의 신앙과 진실이 있을 뿐이며 그의 애국 애족의 숭고한 정신이 있을 따름입니다. 다윗은 이런 면에서 또한 그리스도의 모형이 되는 것입니다.







    8-12, 다윗의 용사들 :

    ①다윗이 거느린 용사들의 이름은 이러하다.

    하크모니 사람 요셉 바쎄벳은 세 용사 가운데 우두머리였다.

    ②그 다음으로 아호아 사람 도도의 아들 엘아자르가 있었는데,

              그도 세 용사 가운데 하나다(9-10절).

    ③그 다음으로 하라르 사람 아게의 아들 삼마가 있었다.

     

    ⇒다윗을 힘껏 도와 그를 왕으로 세운 용사들이 있다.

    그 중 가장 출중한 용사들의 행적을 소개한다.

    이상 세 용사의 용맹은 참으로 대단하다.

    하지만 동시에 하느님이 그들과 함께 나가시는 일들은 더욱 대단하다.

    하느님께서는 하느님 나라를 위해 다윗을 세우셨지만

    다윗 혼자 나라를 힘겹게 다스리도록 내버려 두지 않으셨다.

    그들에게 충성스러운 부하들을 보내 주셨다.

    그래서 성경은 단순히 그 용사가 훌륭하다 기록하지 않는다.

    그들이 나가 행한 일을 기록할 때 함께 기록된 이름이 바로 하느님이다.

     

    13-17, 세 용사의 헌신 :

    ①수확 철에, 삼십 인의 우두머리 가운데 세 사람이

    아둘람 동굴에 있는 다윗에게 내려갔는데,

    필리스티아인들 무리가 르파임 골짜기에 진을 치고 있었다.

    ②그때 다윗은 산성에 있었고 필리스티아인들의 수비대는 베들레헴에 있었다.

    ③다윗이 베들레헴 성문 곁 우물물을 먹기를 바랐다.

    ④그러자 그 세 용사들이 필리스티아인들의 진영을 뚫고,

    베들레헴 성문 곁에서 우물물을 길어 다윗에게 가져왔으나,

    다윗은 마시지 않고 그 물을 주님께 부어 드린다(16절).

     

    ⇒이 세 사람은 앞 절에 언급된 3인이 아니라,

    아비새와 브나야, 그리고 익명의 한 사람이다(18, 22절).

    이들은 둘째 3인으로서 이들의 충성은

    첫째 3인(요셉 바쎄벳, 엘르아잘, 삼마)에 못지않았으나

    능력 면에서 첫째 3인에게는 미치지 못하였다(23절).

    고향의 향수로 베들레헴 우물물을 간절히 바라는 다윗 왕을 위해

    세 용사는 목숨을 걸고 적진을 돌파하여 물을 떠오지만,

    다윗은 그들의 생명이나 다름없는 물을 마시지 않고

    주님께 부어드림으로써 자신의 지위와 권력을 남용하지 않고그들과 同生共死 하리라 결단한다.

     

    18-23, 아비사이와 브나야의 공적 :

    ①츠루야의 아들 요압의 아우 아비사이는 삼십 인 부대의 우두머리였다.

    ②여호야다의 아들 브나야는 세 용사와 함께 이름을 날렸다. 다윗은 그를 호위대장으로 삼았다.

     

    ⇒다윗에게는 그를 도와 이스라엘을 굳건하게 세운 부하들이 있었다.

    앞에서는 다윗의 군대 지휘관 세 명과 30인 중의 세 용사의 모습을 살펴보았다.

    여기에서는 그 세 명 중에 두 명의 이름과 그들의 업적을 소개한다.

    다윗 곁에는 가장 출중한 삼 인 외에도 첫 삼인에 들지 않지만

    다양한 지파에 속한 많은 용사들이 다윗과 함께하며 하느님 나라를 이루었다.

     

    24-39, 용사들의 명단 :

    24-39절에 서른일곱 명의 용사들 명단이 나열되고 있다.

     

    ⇒본문(24-39절)을 따를 경우 용사의 수는 도합 31인이 된다.

    그런데 여기 37인이라는 수는 다음과 같이 산정되었을 것이다.

    ①첫 3인의 용사단(8-12절)과

    ②둘째 3인의 용사단(13-23절) 및

    ③세째 그룹의 31인의 용사단(24-39절)의 수효를 합하여 산정했을 것이다.

     

    ⇒유다 지파만 아니라 다양한 지파와 지역에서 용사들이 나왔고

    이방 출신 용병들도 있다(24~39절).

    출신과 인종과 배경은 다르지만 같은 목적 아래 하나를 이루는 개방적인 공동체이다.

    특히 이 명단에는 마땅히 들어가야 할 다윗의 군대장관 '요압'이 빠져 있다.

    그는 기록할 필요가 없이 "위대한" 용사이거나 기록되어 서는 안 될,

    그 나라를 위협하는 '위험한' 인물인 듯 보인다.

    또한 명단의 마지막에는 다윗의 희생양인 헷 사람 우리야가 소개되고 있다.

     

    한편 이 용사들의 명단에 '요압'(Joab)이 빠진 이유로서 우리는,

    ①요압이 全軍의 군대 장관이었기 때문에 생략되었을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②그러나 또한 요압은 헌신적으로 충성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아브넬과 압살롬, 그리고 아마사 등을 살해하는 무자비한 행동을 하였고,

    아울러 솔로몬 왕을 대적하는 반란에 가담하였기 때문에

    본 명단에서 삭제되었으리라는 추측도 무시할 수 없다.

     



    아제 아제 바라아제는 불교 용어로,
    가버린 것을 의미합니다.
    반복어 ‘아제아제 (gate gate)’는 가버리고 또 가버린 것입니다.
    ‘바라아제 (pragate)’는 아주 먼 저 곳 끝,
    파라다이스 (부처님 세계)까지 가버린 것을 말합니다.





    4월 14일(월) 사무엘하 20-22장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그 후에야(21:14)

    사울과 그 아들 요나단의 뼈와 함께 베냐민 땅 셀라에서 그 아비 기스의 묘에 장사하되 모두 왕의 명대로 좇아 행하니라 그 후에야 하나님이 그 땅을 위하여 기도를 들으시니라.
    They buried the bones of Saul and his son Jonathan in the tomb of Saul's father Kish, at Zela in Benjamin, and did everything the king commanded. After that, God answered prayer in behalf of the land.

    그 후에야(After that)
    아하레 켄(아하레 켄) אַחֲרֵי־כֵ
    ן
                                     3651 310

    그(3651)  켄(kên) כֵּן    

    1. 똑바로 선.  2. 올바로. 3. 복수형 כֵּנִים
    발음 [ kên ]
    어원  /  3559에서 유래한 불변사
    구약 성경  / 565회 사용
    관련 성경  /  옳다(출10:29, 민27:7), 명령하다(출39:43),올라가다(삼상9:13), 알다(대하32:31), 같다(겔42:11), 보다(삿6:22), 아니하다(느2:16), 나아가다(에4:16), 되다(전8:10). [부] 어떻게(민10:31), 마땅히(삼하13:12). [명] 후(창6:4, 41:31, 삼상9:13).


    후에야(310) 아하르( ’acharאַחַר   

    1. 뒤에 있는 것.   2. 뒤에. 3. 후에
    발음 [ ’achar ]
    구약 성경  / 17회 사용
  • 관련 성경  /   뒤따르다(창37:17, 삼하11:8, 겔5:2), 따르다(출15:20, 룻2:2, 삼하7:8), 바라보다(출 33:8), 본받다(레20:5), 따르다(민14:24, 신 13:2, 삼상12:14), 떠나다(신7:4, 왕하17:21), 데리다(삼상25:13), 잇다(왕상1:13,24), 속하다(왕상21:21), 복종하다(왕상21:26, 대하34:33), 섬기다(왕하10:29, 대상5:25), 향하다(왕하19:21), 순종하다(왕하23:3, 대하34:31), 다하다(욥21:21), 찾다(욥39:8), 시종하다 (시45:14). [명] 종자(느5:15, 13:19), 나중(잠 28:23), 장래(전7:14), 주민(렘50:21), 자취 (신12:30), 후군(수10:19).



  • 셀라
    - 베냐민 지파의 땅이나(수 18:28), 그 정확한 위치는 알려져 있지 않다.

    그 후에야 하나님이... 들으시니라
    - 사울가와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가 진정되었음을 보여 주는 말이다.
    구체적으로는 3년 기근이 종식되고, 비가 그 땅에 내렸음을 가리킨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과의 진정한 교제를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하나과의 교제를 가로막고 있는 방해물을 적극 제거해야 한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시 66:18; 사 59:2; 요일 3:21, 22).

    시편 66:18
    내가 내 마음에 죄악을 품으면 주께서 듣지 아니하시리라.
    If I had cherished sin in my heart, the Lord would not have listened;

    이사야  59:2
    오직 너희 악이 너희와 너희 하나님 사이를 내었고 너희 가 그 얼굴을 가리워서 너희를 듣지 않으시게 함이니.
    But your iniquities have separated you from your God; your sins have hidden his face from you, so that he will not hear.

    요한일서 3:21- 22
    사랑하는 자들아 만일 우리 마음이 우리를 책망할 것이 없으면 하나님 앞에서 담대함을 얻고
    무엇이든지 구하는 바를 그에게 받나니 이는 우리가 그의 계명들을 지키고 그 앞에서 기뻐하시는 것을 행함이라.
    Dear friends, if our hearts do not condemn us, we have confidence before God.
    and receive from him anything we ask, because we obey his commands and do what pleases him.


    "그 후에야"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가로막는 것이 있으면 서로 소통(소통)할 수 없다는 것을 말합니다.
    과연 하나님과 사람 사이를 가로막는 것은 무엇일까요?
    그것을 죄라고 합니다.

    날이 흐리고 소나기가 퍼붓는 날 비행기를 타고 고공으로 올라가면 높은 하늘에는 해가 맑게 빛나고 있습니다.
    태양 빛이 밝게 비추고 있을 때 손바닥으로 눈을 가리면 햇빛을 볼 수 없습니다.
    빛나는 해를 하나님으로 구름과 손바닥을 죄라고 하면 하나님과 사람 사이를 가로막는 것은 "죄"라고 하는 얼룩입니다.
    얼룩은 반드시 깨끗하게 씨겨내야 합니다.

    오늘 주신 말씀의 결론인 14절 말씀을 보니, ‘그 후에야 하나님이 그 땅을 위하여 기도를 들으셨다’ 고 합니다. 
    그 후에야 기도를 들어주셨다는 겁니다. 
    지금 기도하는 사람은 다윗입니다. 
    그것도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다윗이 기도하는데,  그 후에야 기도를 들어주시다니, 그 전에 어떤 일이 있었는지 참 궁금해집니다. 
    성도여러분, 우리 하나님은 나의 기도를 들으시고 꼭 응답해 주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나의 기도를 들어 주신다’ 
    이 사실을 확실하게 아시고 우리에게 응답을 주시는 하나님께 구하시기를 바랍니다. 
     
    기도를 들어주시긴 하는데 언제 들어주시는가?  
    ‘그 후에야’ 들어주신다는 겁니다. 
    이 말은 그 이전까지는 다윗의 기도를 들어주시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물론 모든 기도가 다 이렇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은 우리에게 기도응답에 대한 분명한 원칙하나를 말씀하고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기도에 응답받기 위해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무엇인가? 
    간단합니다. 
    그 이후의 상황을 만들면 됩니다. 
    그 이전을 넘어 그 이후로 가면 됩니다.  
    그 이전 상황 속에 머물러 있는 한, 우리의 기도는 응답을 받지 못할 수가 있다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그 이전과 그 이후의 차이는 무엇일까요? 
    어떻게 하면 그 이후의 상황으로 넘어갈 수 있을까?  
    이제부터 오늘의 말씀을 구체적으로 풀어가면서 우리가 기도에 응답받을 수 있는 길을 찾아보겠습니다.  
     
    이스라엘 전역에 굉장한 가뭄이 들었습니다. 
    21장 1절 “다윗의 시대에 해를 거듭하여 삼 년 기근이 있으므로 다윗이 여호와 앞에 간구하매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이는 사울과 피를 흘린 그의 집으로 말미암음이니 그가 기브온 사람을 죽였음이니라 하시니라 ” 

    연거푸 삼년동안이나 기근이 들었다고 합니다. 
    다윗이 하나님 앞에 기도합니다. 
    그러나 아무리 기도를 해도 소용이 없고, 아무리 기다려도 응답이 오질 않습니다. 
    3년이나 기근이 계속되었습니다. 
    다윗은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응답이 없이 3년이 지났습니다. 
    왜 응답하시지 않나? 
    답답해하는 다윗에게 하나님이 말씀하십니다. 
    “이는 사울과 피를 흘린 그의 집으로 말미암음이니 그가 기브온 사람을 죽였음이니라 하시니라” 
    문제는 사울이었습니다. 
    사울이 기브온 사람들을 죽여 피를 흘렸기 때문이라 하십니다. 
    기브온 사람들을 죽인 사울의 죄 값으로 지금 너희들이 고생한다는 겁니다.     

    먼저 우리가 꼭 기억해야할 참 놀라운 사실은 지금은 다윗의 시대라는 것입니다. 
    사울은 이미 죽었습니다. 
    그런데 이미 죽은 사울이 살아있을 적에 한 행동이 다윗의 시대에 3년 기근으로 나타났다는 것입니다. 
    한 사람의 범죄는 그냥 그 사람만의 범죄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지금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약1;15)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 하신 말씀이 생각납니다.  
    사울의 죄가 장성하여 다윗의 시대에 3년 기근이라는 사망을 가져온 것입니다. 
    성도여러분, 왜 하나님께서는 잊혀진 사건을 되살리실까요?  
    두가지 이유가 있다고 봅니다. 

    첫째는 기브온 사람들에게는 잊혀진 사건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사울에게서 죽임을 당하는 와중에 겨우 살아남은 사람들에게는 과거의 일이 아니라 현실의 일입니다. 
    기브온 사람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5절입니다. “우리를 학살하였고 또 우리를 멸하여 이스라엘 영토 내에 머물지 못하게 하려고 모해한 사람” 사울은 기브온 사람들을 학살하였습니다. 
    기브온 사람들이 아예 이스라엘 영토 안에서 살지 못하게 하였습니다. 
    그 학살에서 겨우 살아남은 기브온 사람들에게는 사울의 학살이 추억으로 끝나는 일이 아니라 아직도 여전히 현실입니다.  

    둘째는 사울의 행동이 언약을 어기는 행동이었기 때문입니다.  
    사울이 기브온 사람들을 죽인 것이 왜 그리 큰 죄가 되는 것일까요? 
    또 살인죄를 지은 것은 사울이니 사울만 벌하시면 될 것을, 왜 온 백성에게 이런 엄청난 벌을 내리시는 걸까요?   
    여호수아서 9장입니다. 
    모세의 뒤를 이은 여호수아가 가나안 땅을 정복하던 때였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홍해를 가르고 애굽 군대를 수장시키며, 요단강을 가르고 여리고성을 무너뜨렸습니다. 
    이 소문을 들은 기브온 사람들이, 맞서 싸울 생각을 거두고, 다 헤진 옷을 입고, 다 떨어진 신발을 신고, 곰팡이 난 떡을 가지고서 여호수아를 찾아와 거짓으로 화친을 청했었습니다. 
    그 때 여호수아는 꼼꼼하게 알아보지도 않고, 저들에게 속아 여호와의 이름으로 화친을 맺어 주고 말았습니다. 
    앞으로 기브온 사람들을 해치지 않겠다고 약조했던 것입니다. 
    물론 여호수아가 저들에게 속은 것이긴 하지만, 결론은 하나님의 이름으로 맹세했다는 점이 중요했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으로 맹세까지 하면서 저들의 머리털 하나라도 건드리지 않겠다고 약조했으니, 그 약조를 지켜야 했던 것입니다. 
    어쨌든 그렇게 해서 기브온 사람들이 이스라엘 공동체 안에서 함께 살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렇게 세월이 400년이나 흘렀습니다. 
    그런데 사울이 왕이 된 다음 기브온 사람들을 보니 심기가 불편했습니다. 
    왜 저들이 우리와 함께 살아야 하는가? 
    저들은 우리와 같은 피가 아닌데, 그것도 선지자 여호수아를 속이고 화친을 맺은 가증한 것들 아닌가? 
    내가 왕이 된 이참에 아예 저들을 정리하리라!   
    “기브온 사람은 이스라엘 족속이 아니요 그들은 아모리 사람 중에서 남은 자라 이스라엘 족속들이 전에 그들에게 맹세하였거늘 사울이 이스라엘과 유다 족속을 위하여 열심이 있으므로 그들을 죽이고자 하였더라...”(2절) 
    결국 사울 왕은 기브온 사람들을 대대적으로 학살하고 이스라엘 나라 안에서 살지 못하도록 그들을 해칩니다. 요즘 말로 하면, 일종의 인종 청소라고나 할까요? 성경은 이것을 “사울이 이스라엘과 유다 족속을 위하여 열심이 있으므로 그들을 죽이고자 하였더라” 라고 말씀합니다. 민족을 위한 열심이었습니다. 사울은 이스라엘의 왕으로서 자기가 하는 일이 옳다고 스스로 확신했습니다.  문제는 이 일이 하나님의 언약을 어기는 일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으로 맹세를 했으면 지켜야 마땅하거늘, 그 맹세를 저버리고, 아무 이유도 없이 민족주의적임 감정으로 400년 이상이나 같이 살고 있던 저들을 학살한 것입니다.  사울은 어떤 사람입니까? 자기의 열심으로 하나님의 맹세를 어긴 사람이었습니다.  여러분, 죄는 씨앗입니다. 잘못 심은 씨앗입니다. 나중에 악한 열매로 돌아옵니다. 정말 죄를 멀리하시기 바랍니다.  하지만 우리의 모든 죄는 예수님의 십자가에게 다 댓가를 치렀습니다. 예수님께서 피를 흘리시는 죽음으로 우리의 모든 죄값을 처리하셨습니다. 그러니 안심하십시오. 죄책감도 다 던져버리셔도 됩니다. 예수님의 피가 감당하지 못하는 죄는 없습니다. 우리에게는 참 평안이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무엇을 교훈합니까? 
    사울의 죄는 하나님의 언약을 파괴하는 죄였습니다. 
    깨어진 하나님의 언약은 회복되어야 합니다. 
    사울이 일방적으로 깨트린 하나님의 언약은 다시 회복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3년 기근은 죄의 댓가라기 보다는 언약회복의 댓가 로 보아야 할 것입니다.

    우리 부모 세대가 자식들에게 복의 근원이 될지언정, 화근이 되어서는 안 되어야 할 것입니다. 
    나 덕분에 내 자식들이 복을 받을지언정, 부모 때문에 화를 입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특히 가장 자녀들에게 안 좋은 것이 우상숭배의 죄입니다.  
    (출 20;5) “그것들에게 절하지 말며 그것들을 섬기지 말라 나 네 하나님 여호와는 질투하는 하나님인즉 나를 미워하는 자의 죄를 갚되 아버지로부터 아들에게로 삼사 대까지 이르게 하거니와” 
    자녀 3-4대까지 내려간다고 하십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부모의 죄 때문에 자녀들이 벌을 받거나, 우리 부모의 죄로 인해 자녀들이 기근의 고통을 받는 일은 절대로 일어나지 않아야 할 것입니다. 
    오직 자녀들에게 하늘의 복을 전해주는 축복의 통로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다윗은 살아남은 기브온 사람들에게 묻습니다. 
    “다윗이 그들에게 묻되 내가 너희를 위하여 어떻게 하랴 내가 어떻게 속죄하여야 너희가 여호와의 기업을 위하여 복을 빌겠느냐 하니”  
    이 다윗의 질문에서 우리는 중요한 것을 발견합니다. 
    다윗은 이스라엘을 뭐라고 표현합니까? 
    ‘여호와의 기업’이라고 합니다.  
    ‘내가 어떻게 속죄하여야 너희가 여호와의 기업을 위하여 복을 빌겠느냐’ 합니다.  
    다윗에게 이스라엘은 ‘나의 나라. 내가 다스리는 나라’ 가 아니라 ‘여호와의 기업’입니다. 
    이것이 다윗의 생각입니다. 

    여러분은 여호와의 기업입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의 백성이요, 자녀입니다. 
    자녀는 부모의 기업입니다.  
    깻잎 밭, 인삼 밭, 직장이나 사업이 여러분의 기업이라고 생각할 수 있지요.  
    그 기업이 잘되기를 기도합니다. 
    소출이 풍성하고 땅을 더 사서 밭과 논이 늘어나고 인정받고 승진하기를 축복합니다. 
    그러나 여러분의 진정한 기업은 밭이나 논, 직장이 아니라 자녀입니다. 
    부모는 부자인데 자녀는 손을 대는 것마다 망해서 거지가 되는 것과, 부모는 가난한데 자녀는 갈수록 부자가 되는 것을 생각해 보십시오. 
    어느 것이 복입니까?  
    자녀가 잘되는 것이 복입니다. 
    자녀가 부모의 기업이기 때문입니다.  
    자녀가 부자면 ‘나이 들어서 혼자 살겠다. 
    자녀들 힘들게 안 하겠다’ 는 말 할 필요도 없습니다.  
    좋은 집에서 넓은 방에서 대접 받으면서 호강하면서 같이 사는 것이 더 좋지 않습니까?  
    자녀가 부모의 기업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자녀인 여러분은 하나님의 기업입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기업인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기업인 여러분을 복 주시고 잘되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목사도 교인들이 잘되기를 기도합니다. 
    왜냐면 교인들이 목사의 기업이기 때문입니다.  
    교인이 잘 되고 형통하고 복 많이 받는 것이 곧 목사가 복 받는 것입니다. 
    교인이 많아지는 것이 기업이 확장되는 것입니다. 

    이제 기브온 사람들이 ‘여호와의 기업’인 이스라엘을 위해서 해결책을 제시합니다. 
    “기브온 사람이 그에게 대답하되 사울과 그의 집과 우리 사이의 문제는 은금에 있지 아니하오며 이스라엘 가운데에서 사람을 죽이는 문제도 우리에게 있지 아니하니이다” 저들은 은과 금이 문제가 아니라고 합니다. 
    즉 배상금이 문제의 해결책이 아니라는 것이지요.  
    ‘사람을 죽이는 문제도 우리에게 있지 아니하니이다’ 하는 말은 이스라엘중에 섞여 사는 자기들이 사람을 합법적으로 죽이는 권한이 없다는 말입니다. 

    기브온 사람들의 해결책은 이렇습니다. 
    “우리를 학살하였고 또 우리를 멸하여 이스라엘 영토 내에 머물지 못하게 하려고 모해한 사람의 자손 일곱 사람을 우리에게 내주소서 여호와께서 택하신 사울의 고을 기브아에서 우리가 그들을 여호와 앞에서 목 매어 달겠나이다”  

    사울과 그 집안이 기브온 족을 살해한 죄는 금전으로 해결될 일이 아니라, 무참한 학살에 동참했던 사울 집안의 7명을 처형하도록 해달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사울 집안의 7명을 처형할 장소로 “사울의 고향 기브아” 에서 목매달아 죽이되 “여호와 앞에서” 죽이도록 해달라는 것입니다.이로서 모든 죄와 원한 관계를 완전히 청산하겠다는 겁니다. 
    이 말 “여호와 앞에서”은 사울 집안의 7명을 처형하는 것이 단순한 보복이 아니라 이스라엘에 내린 하나님의 진노인 3년 기근을 진정시키기 위한 하나님의 공의라는 것입니다. 
    언약 위반에 대한 공의로운 하나님의 심판이라는 것입니다.  
    다윗 왕은 언약을 회복하고 3년 기근의 재앙을 해결하기 위해 기브온 사람의 요구대로 사울 집안의 7명을 내어줄 수밖에 없었습니다.  
    다윗은 ‘아야의 딸 리스바에게서 난 자 곧 사울의 두 아들 알모니와 므비보셋과 사울의 딸 메랍에게서 난 자 곧 므홀랏 사람 바르실래의 아들 아드리엘의 다섯 아들을’ 저들에게 넘겨주었고, 저들은 그 일곱 아들을 나무에 매달아 죽입니다. 
    사울 왕의 언약파기에 대한 심판이었습니다. 
    사울 집안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은 이렇게 정확하게 진행되었습니다.  
    여기서 사울의 일곱 아들에게 카메라를 비추어 봅니다. 
    저들 아들들의 입장에선 정말 억울한 일입니다. 
    자기 아버지의 죄 때문에 아들들이 죽어야 했기 때문입니다. 
    저들에게 죄가 있다면 아버지 잘못 만난 죄밖에 없었습니다.  
    여러분 이 사건에서 우리는 무엇을 느껴야 합니까?  
    저는 ‘이어짐’을 느꼈습니다. 
    누구의 탓 만이 아닙니다. 
    한 두 사람의 죄는 그것으로 끝이 아닙니다. 
    이어집니다. 
    사울의 책임이라고 말한다면 그 사울은 이미 죽었지 않습니까? 
    죽으면 그 책임도 끝납니까?  아니오! 이어집니다. 
    마치 부모님 사업이 잘되면 자녀가 외국 유학이라도 부담 없이 가지만, 부모님의 사업이 부도가 나면 다니던 학교도 그만두고 편의점 알바라도 해야 하는 것과 같습니다. 

    죄를 이어가는 사울 같은 사람이 있는 반면에, 죄를 끊어버리는 사람도 있습니다. 
    지금 다윗이 하는 행동이 죄를 끊어버리는 행동입니다. 
    또 ‘리스바’라는 여인이 등장합니다.  
    자기의 두 아들을 포함한 7사람의 비참한 죽음을 지켜보던 사울 왕의 첩 리스바는 바위에 굵은 베를 가져다가 펴고 죽은 7시체들의 곁에 머물면서 밤낮으로 그 시체를 지키기 시작했습니다. 
    (10절) “아야의 딸 리스바가 굵은 베를 가져다가 자기를 위하여 바위 위에 펴고 곡식 베기 시작할 때부터 하늘에서 비가 시체에 쏟아지기까지 그 시체에 낮에는 공중의 새가 앉지 못하게 하고 밤에는 들짐승이 범하지 못하게 한지라”  
    언제 부터입니까? 
    “죽은 때는 곡식 베는 첫날 곧 보리를 베기 시작하는 때더라” 했습니다. 
    그러면 언제까지입니까? 
    “하늘에서 비가 시체에 쏟아지기까지”입니다. 
    보리를 베는 봄부터 정상적인 우기인 가을까지는 약 6개월입니다. 
    6개월이라는 시간을 낮에는 공중의 새가, 밤에는 들짐승이 시체를 훼손하지 못하게 했습니다. 
    당시 죽은 사람의 시체가 공중의 새와 들짐승에게 먹히는 것을 가장 수치스럽게 생각했고 하나님의 저주를 받은 것으로 여겼습니다.  
    리스바는 아들의 시체가 포함된 7사람의 시체가 수치를 당하지 않도록 낮에는 중동지방의 뜨거운 햇볕을 무릅쓰고, 저녁에는 광야의 추위와 무서움을 이겨내며 “비가 시체에 쏟아지기까지” 그렇게 했다는 것입니다.

    이 비가 무슨 비입니까? 
    3년 기근이라는 하나님의 진노가 풀어지는 비입니다. 
    우기를 맞아 내리는 그런 비가 아니라 악인에 대한 형벌을 보시고, 공의의 심판을 보시고, 언약을 다시 회복시키시는 표시로서 내리는 비입니다.  
    ‘리스바’는 하나님의 진노가 풀려 비가 시체 위에 쏟아질 때까지 새와 짐승의 위협을 막아내는 정성과 사랑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그 시체의 모습은 어떠했을까 아마도 보기에 흉할 정도로 뼈만 남았을 것이고 말라버린 미이라 같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리스바’는 그 곁을 지키고 있었습니다. 
    왜입니까? 저들의 어머니이기도 했기에 그랬을 것입니다. 
    그러나 단지 어머니라는 것을 넘어섭니다. 
    그녀는 그냥 아들의 죽음을 애도하고, 그 시체를 지킨 것 만이 아니라  “하늘에서 비가 시체에 쏟아지기까지” 라고 성경이 기록하기 때문입니다.  
    물론 이것은 어머니의 마지막 사랑이라고 말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리스바’의 행동의 핵심은 “비가 시체에 쏟아지기까지” 입니다. 
    그래서 ‘리스바’의 행동은 믿음의 행동입니다. 
    아들들의 죽음이, 7명의 죽음이 아버지 사울의 죄의 댓가로 인한 징벌적인 죽음이 아니라 언약을 회복하고, 여호와의 기업인 이스라엘에게 축복의 비를 오게 하는 거룩한 죽음이 되게 하는 믿음의 행동입니다.   
    이러한 ‘리스바’의 행동은 죄를 끊고 축복을 회복하는 행동입니다. 
    하나님과 이스라엘을 화해하게하는 행동입니다. 
    우리가 다 이 ‘리스바’를 본받기를 원합니다.  
    ‘리스바’의 행동은 또 다른 화해를 불러옵니다. 
    이런 모든 이야기를 다 들은 다윗 왕이, 사울 왕과 그 아들 요나단과 그리고 일곱 왕자의 유골을 수습하여, 마침내 국장으로 엄숙하게 장례식을 치러줍니다. 
    (13-14절) 
    “다윗이 그 곳에서 사울의 뼈와 그의 아들 요나단의 뼈를 가지고 올라오매 사람들이 그 달려 죽은 자들의 뼈를 거두어다가 14사울과 그의 아들 요나단의 뼈와 함께 베냐민 땅 셀라에서 그의 아버지 기스의 묘에 장사하되 모두 왕의 명령을 따라 행하니라” 라고 합니다. 
    조상의 묘실에 장사합니다.  
    어쩌면 인간적으로는 다윗이 그렇게 하고 싶지 않았을 수도 있습니다. 
    사울에게 당한 끔찍한 일들을 생각하면, 오히려 그의 시신을 예루살렘 성벽 위에 내다 걸고 싶었을 수도 있지 않습니까? 
    그러나 다윗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그때까지 사울과 요나단의 뼈는 길르앗 야베스 사람들에 의해 야베스 땅 에셀 나무 아래에 장사 되어있었습니다.  
    다윗은 이들의 뼈를 이장하여 가족의 묘실에 장사지내 주려고 가져온 것입니다.  
    또 사람들은 7명의 뼈도 같이 거두어다가 사울과 그의 아들 요나단의 뼈와 함께 베냐민 땅 셀라에서 그의 아버지 기스의 묘에 장사하였습니다.  
    사울 왕과 그 아들 요나단, 그리고 일곱 왕자의 유골을 수습하여, 국장으로 엄숙하게 장례식을 치러준 것입니다.  
    다윗은 예를 갖추어, 그 아비의 묘에 장사하되, 모든 백성들을 향해서도 국장에 참여할 것을 명했습니다. 
    그렇게 해서 왕 뿐만 아니라 모든 백성이 왕의 명대로 좇아 행했더니, 그 후에야 하나님이 그 땅을 위하여 기도를 들으시고 비를 주셨던 것입니다. 

    이일은 먼저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화해입니다. 
    또한 사울 집과 이스라엘백성들 사이의 화목이기도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과 기브온 주민과의 화해도 됩니다. 
    사울이 자기 조상들과 자기 때문에 죽은 7명의 아들들과의 화목도 됩니다.  
    나아가서 다윗과 사울 집과의 화목도 됩니다.   

    사무엘하 21:14b
    “모두 왕의 명령을 따라 행하니라 그 후에야 하나님이 그 땅을 위한 기도를 들으시니라”고 합니다. 

    화해를 온전히 행동으로 실천했을 때에 하나님은 이 때 비로소 기도를 들으셨습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방해물을 제거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방해물을 제거하는 행함이 있어야 하나님은 기도를 들으십니다. 
    하나님은 가문과 가문, 사람과 사람 사이의 맺힌 것을 온전히 풀리기를 바라십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마 5:23-24) 
    “그러므로 예물을 제단에 드리려다가 거기서 네 형제에게 원망들을 만한 일이 있는 것이 생각나거든 24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벧전3;7) 
    “남편들아 이와 같이 지식을 따라 너희 아내와 동거하고 그를 더 연약한 그릇이요 또 생명의 은혜를 함께 이어받을 자로 알아 귀히 여기라 이는 너희 기도가 막히지 아니하게 하려 함이라” 부부사이에도 막힌 것이 없어야 기도가 막히지 않는 것입니다. 남편 여러분, 아내와 막힌 것이 없도록 하십시오. 사람사이에 막힌 것이 화해를 통해 허물어 졌을 때 그때 하나님과의 사이에 기도도 열립니다. 

    이제 말씀을 마칩니다. 
    ‘그 후에 기도를 들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과 진정한 교제는 방해물을 적극적으로 제거하고 화해를 이루면 응답 됩니다. 
    이 땅에 기근이 물러가고, 비가 내리고, 또 태풍이 비껴가고, 수확이 풍성케 되기 위해서는 ‘리스바’같은 여인이 필요합니다. 
    인간관계에서 화해를 이루는 사람들이 많이 필요합니다.  
    세상 사람들은 대개 원수 갚는 일을 잘 합니다. 
    때론 원수 잘 갚는 사람을 미화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우리 성도들이 해야 할 일은, 오직 은혜를 갚는 일과 자비를 베푸는 일입니다.  
    내가 받은 은혜만 생각하시고, 그 은혜 갚는 일에 집중하시기 바랍니다.  
    내가 받은 하늘의 자비만 생각하시고, 어떻게 하면 나도 당신에게 자비를 베풀 수 있을지 고민하시고 실천하시기 바랍니다. 
    ‘리스바’같은 성도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 후에야 하나님이 그 땅을 위하여 기도를 들으시니라!”

    사무엘하 21:5-6
    저희가 왕께 고하되 우리를 학살하였고 또 우리를 멸하여 이스라엘 경내에 머물지 못하게 하려고 모해한 사람의.
    자손 일곱을 내어 주소서 여호와의 빼신 사울의 고을 기브아에서 우리가 저희를 여호와 앞에서 목매어 달겠나이다 왕이 가로되 내가 내어 주리라 하니라.

    * 학살(칼라누) 3615
    칼라(kâlâh) כָּלָה 스트롱번호 3615

    1. 완성하다.  2. 지나가다. 3. 소모되다
    발음 [ kâlâh ]
    구약 성경  / 206회 사용

    *멸하여(딤마) 1819
    다마(dâmâh) דָּמָה

    1. 닮다.  2. 시 102:7. 3. 겔 31:8.
    발음 [ dâmâh ]
    구약 성경  / 30회 사용



    우리를 학살하였고 또 우리를 멸하여
    '학살하였고'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칼라'(3615)
    '멸하여'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솨마드'(1819)는 모두 '진멸하다', '멸망시키다'는 뜻이다.
    우리는 이와 같은 기브온 사람들의 증언을 통해서, 사울이 그들을 가나안 땅에서 완전히 진멸하려 했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즉 사울은 '이방 세력 멸절'이라는 미명하에 자신의 공명심과 명예욕을 충족시키고자 기브온 사람들을 전부 죽이려 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사울의 인간적인 정책은 결국 실패로 돌아가고 말았으며, 오히려 보복의 화를 자초하고야 말았던 것이다.
    그러므로 참으로 여호와를 위하는 일은 그 목적과 실행 방법 및 실행 원칙이 공명 정대하고 선해야 한다.

    기브온 족속과 사울 왕조의 얽히고 설킨 이야기

    기브온의 사신들이 갖고 온 음식은 곰팡이가 핀 일반적으로 먹을 수 없는 음식이었는데 어떻게 이것을 먹을 수 있었을까?
    이것은 두 가지로 해석되고 있다.

    첫째, 계약 체결을 위해 곰팡이가 난 양식의 일부를 실제로 먹었다는 것
    둘째, 그냥 양식을 취하기만 하고 먹지는 않았다는 해석​

    지금이라면 당연히 곰팡이가 난 음식을 먹지 않았겠지만, 근동 지방의 관습을 고려할 때 계약 체결의 완성을 위해 곰팡이 피지 않은 쪽의 음식 일부를 떼어 나눠 먹었을 가능성이 크다.
    음식을 먹고 안 먹고의 문제보다 더 큰 문제는 가나안의 모든 족속을 멸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고 기브온 족속과 계약을 체결했다는 것이다.

    ​이스라엘의 수장이었던 여호수아는 기브온족을 죽이지 않고 살리겠다는 조약을 맺었고 이스라엘 지파의 족장들도 모두 동의했다(수 9:15).
    그러나 그들이 저지른 엄청난 실수를 깨닫는 데는 3일밖에 걸리지 않았다.
    계략에 넘어간 것이기는 하지만 엄연히 하나님의 이름을 걸고 체결했기에 다시 바꿀 수 없었다(수 9:18).
    속임수까지 써가며 이스라엘 민족과 함께 살아가기를 간절히 원했던 기브온 사람들은 그들의 소원대로 이스라엘 민족에 동화되었고 하나님의 제단을 섬기는 영광스러운 삶을 살아가게 되었다.
    그러나 이들의 삶은 사울 왕 때 완전히 유린당하였고 기브온족 전체가 몰살당할 위기에 처하게 됐다.

    2. 역사를 왜곡하는 사울

    사울은 이스라엘의 초대 왕이라는 영예를 안았으나 여러 번 하나님의 뜻과 어긋난 행동을 했다.
    여호수아는 기브온족을 살려 하나님의 제단을 위해 나무를 패고 물을 긷는 자들로 삼았다(수 9:27).

    ​이런 기브온족의 삶은 비록 이방인이었으나 하나님의 제단을 섬기며 헌신 된 삶을 살았기에 선교적인 측면에서 시사하는 바가 크다.
    만민을 구원하기 위한 하나님의 선교(Missio Dei)가 구약의 역사에도 나타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과정이야 어쨌든 오랜 세월 동안 이스라엘 민족에 편입돼 성전을 섬기며 살아오던 기브온족이었는데 사울왕이 갑자기 그들을 말살할 계획을 세우고 실행했다.
    성경은 사울이 이런 일을 계획하고 실행한 것은 이스라엘과 유다 족속의 환심을 사기 위한 것이라고 기록하고 있다(삼하 21:2).

    ​이 사건은 기브온 족속에게 큰 충격이었을 것이다.
    성경은 사울이 언제 얼마나 많은 기브온 사람을 죽였는지 구체적으로 기록하고 있지 않다.
    그러나 사무엘하 21장 5절은 사울이 기브온족을 '학살'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학살'에 해당하는 히브리어는 '칼라누'이다.
    이 단어의 뜻은 '끝내다'(finish), '완성하다'(accomplish)는 의미이다.
    사울이 기브온 사람 한두 명을 죽인 것이 아니라 기브온족 전체를 말살시키려는 계획을 갖고 있었고 실제로 실천에 옮겼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무고한 기브온 사람들이 억울한 죽음을 맞았음에도 불구하고 이 문제는 사울과 다윗의 왕권 교체와 맞물려 사람들의 관심 밖으로 밀려나 완전히 묻혀 버렸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이것을 잊지 않으셨다.
    다윗 왕 때 3년 동안의 큰 기근이 발생했다.
    다윗은 계속되는 가뭄이 무엇 때문인지 알기를 원했고, 하나님께서 사울이 흘린 기브온 사람들의 피 때문이라고 말씀하셨다(삼하 21:1).

    3. 솔로몬의 재판에 비할 다윗의 판결

    왕위에 오르기 전, 사울은 한없이 겸손한 사람이었다.
    그러나 보좌에 오른 뒤 완전히 달라졌다.
    그는 자신의 왕권을 지키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
    사울은 백성들의 환심을 사기 위해 무엇이든 하려고 했다.
    기브온족도 마찬가지였다.
    피의 순수성을 강조하며 이방 족속에게 반감을 품고 있던 일부 백성들을 만족시키기 위해 하나님의 제단을 섬기고 있던 기브온족을 완전히 말살하려 했다.
    하지만 그의 뜻을 이룰 수는 없었다.

    ​시간이 흐르고 다윗이 왕으로 등극했다.
    그러나 다윗은 왕으로 등극했음에도 불구하고 이 문제를 바로잡지 못하고 있었다.
    어쩌면 다윗은 사울왕 때 벌어진 일이기 때문에 크게 신경 쓰지 않았을 수도 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사울의 때 뒤틀렸던 역사와 공의를 다윗을 통해 다시 바로 세우기를 원하셨다.

    ​성경에 기록된 재판 중에 으뜸이라고 할 수 있는 두 판결은 솔로몬의 판결과 다윗의 판결일 것이다.
    모두가 잘 아는 것처럼, 한 아기를 두고 서로 자기 아이라고 다투던 두 여인에 대한 솔로몬의 판결(왕상 3:16~28)은 역사상 가장 지혜로운 판결 중의 하나로 기록되고 있다.
    솔로몬의 판결과 같이 지혜가 번뜩이는 판결은 아니지만, 하나님의 마음에 쏙 들게 한 것이 다윗의 판결이다.

    1) 피해자 중심의 판결

    ​다윗은 먼저 기브온 사람들에게 '어떻게 해결해 줬으면 좋겠냐'고 묻는다(삼하 21:3).
    일방적인 행정명령이나 법 집행이 아니라 피해자 중심으로 문제를 해결해 나간다.
    기브온 사람들은 자신들을 살육하는데 가담했던 모든 사람을 벌해 달라고 하지 않는다.
    단지 자기 민족을 학살하는데 주동적인 역할을 했던 사울의 아들 7명을 내어 달라고 요구한다(삼하 21:6).
    사울의 일곱 아들은 한날에 기브온 사람들에 의해 목매달려 죽었다.
    그런데 여기서 기브온족의 모든 원한이 풀리고 3년 동안 기근으로 고통을 받던 땅에 비가 내린 것은 아니다.

    2) 화해의 판결

    비록 죄 없는 기브온 사람을 학살하는 일을 기획하고 실행했다가 그 벌로 죽은 사울의 아들들이었지만 다윗은 목이 매여 죽은 이들의 시체를 거둬들인다.
    그리고 사울과 요나단의 뼈와 함께 그들의 할아버지이며 사울의 아버지인 기스의 묘에 가족장으로 합장을 한다.
    이렇게 다윗이 죽은 사울의 아들들을 위해 장사 지내는 것을 마쳤을 때, 하나님께서 비로소 그 땅을 위한 기도를 들으셨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다(삼하 21:14).

    하나님의 공의를 세우는 것은 단순히 원한과 억울함을 푸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공의는 사랑과 은혜, 화해와 용서 안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다윗이 사울의 아들들의 시체를 거둬들여 가족묘에 장사지낸 것처럼, 죄는 미워하되 사람은 미워하지 않는 긍휼함이 공의 가운데 있어야 한다.
    사무엘하 21장에 기록된 기브온족과 이스라엘 백성 간의 얽히고 설킨 사건은 하나님의 언약과 공의, 공의가 실현된 이후의 화해와 용서가 어떻게 이루어져야 하는지를 단편으로 보여 주는 사건이라 할 수 있다.



    그 후에야 기도를 들으신 하나님(삼하 21:1-14)

    모든 종교에는 경전과 교리가 있습니다.
    기독교안에도 감리교, 장로교, 순복음교회의 교리가 조금씩 틀립니다.
    그리고 기독교는 경전이 성경이라 합니다.
    종교마다 경전이 기준인데 우리는 성경이 기준입니다.
    성경에서 빗나가면 그것은 잘못된 겁니다.
    해석의 각도에 따라 조금은 틀릴 수가 있지만 중요한 맥은 똑같아야 합니다.
    정상적인 교회는 예수님이 그리스도, 구원자, 주님이라 하고 이것을 언약이라 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피가 없이는 구원을 얻을 수 없고 부활의 능력 없이는 구원을 체험할 수 없는 거에요.
    이것은 말씀의 중요성을 설명한 것이고 그 다음으로 교인들 즉 거듭난 식구들이 기도응답을 받아야 되요.
    기도응답의 체험없이는 신앙생활에 힘이 없어요.
    기도는 하나님과의 깊은 축복을 나누는 것이기 때문에 기도응답을 받아야 될 줄로 믿습니다.
    그리고 우리안에 있는 그리스도가 성령으로 전달 되어지는 증인이 되어야 되요.
    말씀과 기도와 전도를 누리는 것을 오늘의 축복이라 합니다.
    말씀, 기도, 전도가 맞물려 증인이 되면 신앙생활이 힘이 있고 역동적으로 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의 신앙은 나의 감정, 기준, 체질, 생각의 신앙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하나님의 말씀 붙잡고 기도하고 전도의 증인되는 오늘이 여러분의 신앙생활이 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1. 왜 기도하는가? – 자녀의 특권

    오늘 본문속에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들… 다윗은 하나님의 자녀이고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조건없이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선택받은 백성, 선민입니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이 보이는 하나님(예수님)으로 오셨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한 자가 하나님의 백성이에요.
    그 외에는 윤리, 도덕이 좋아도 절대로 하나님의 백성이 아닙니다.
    구약시대에는 이스라엘 사람들만 하나님의 백성이고 그 외의 사람들은 이방인으로 하나님의 백성이 아닙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백성들이 가만있어도 천국가는데 왜 기도를 해야 하는가?
    이 기도는 하나님이 허락하신 특권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부르시고 의롭다 하시고 영화롭게 하실 하나님의 주권가운데 있는 언약의 백성이에요.
    그런데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상의 현장은 불신자나 신자나 똑같이 밥먹고 일하고 학교다니는 모습으로 살아갑니다.
    우리는 세상에 속한 자 이지만 세상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온 영을 받은 자라고 바울은 고백하고 있습니다.
    이는 우리로 말미암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로 주신 것들을 알게 하려 하심이라 했어요.
    신자의 삶의 방법은 하나님과 함께 사는 거에요.
    인생은 하나님이 주신 것을 누리는게 신자의 삶의 방법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것이 너무 많아요.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하나님이 은혜로 주신 것을 알아야 되고 감사해야 될 줄로 믿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자녀들이 살아가면서 어려운 일들이 몸에도 정신에도 옵니다.
    이유는 우리가 하나님과 깊은 소통이 안되기 때문이에요. 그래서 불신자들에게는 문제가 문제이지만 우리는 그 문제를 해결 할 수 있고 해결 못한다 할지라도 뛰어 넘을 수 있는 길이 있으니 그 길이 기도인줄로 믿습니다. 기도는 성삼위 하나님과의 연합이 기도에요. 롬8:15에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우리가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짖느니라” 우리는 하나님을 아빠 아버지라고 부른다고 했어요. 사랑하는 여러분, 기도가 다른게 아니에요. 하나님을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그래야 아버지가 즉각 우리와 눈동자를 맞춰 주시는 거에요. 그런데 아버지의 사랑과 모든 특권을 누구에게 줬어요? 아들에게 허락하신 거에요. 예수 그리스도가 하늘과 땅, 아버지의 권세 가지고 이곳에 오신 줄 믿습니다. 이것을 증거하시려고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요10:30에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 하신대”라고 했어요. 그래서 우리의 기도는 꼭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하는 겁니다. 성삼위 하나님이 나와 함께하는 연합의 비밀이 기도라는 겁니다. 요14:13에 “너희가 내 이름으로 무엇을 구하든지 내가 행하리니 이는 아버지로 하여금 아들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으시게 하려 함이라” 이 말씀은 예수님과 연합, 성자 제2의 하나님과의 연합을 가리키는 겁니다. 그리고 롬8:26에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는 마땅히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사랑하는 여러분, 기도는 다른것이 아니고 성삼위 하나님과 하나님의 자녀인 나와의 하나되는 연합의 비밀인 줄로 믿습니다. 기도할 때 성삼위 하나님은 이미 영광 받으신 줄로 믿습니다. 그러니까 기도한다는 자체가 축복이에요. 그래서 문제가 문제가 아닌 이유는 우리가 기도할 수 있기 때문에 문제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빌4:6-7에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했어요. 여러분, 축복중의 축복은 마음의 평안일 줄로 믿습니다. 가난해도, 못 배워도, 병들어도 괜찮아요 내 마음에 하나님의 평안이 차고 넘치면 그곳이 하나님의 나라 될 줄로 믿습니다. 잠16:9에 “사람이 마음으로 자기의 길을 계획할지라도 그의 걸음을 인도하시는 이는 여호와시니라” 저는 죽을 때까지 가장 강조하고 싶은 것이 하나님의 말씀속에 거하는 신앙, 언약적 신앙을 갖기를 소원합니다. 영적인 힘도 길러서 육신의 피곤함도 덜고 지혜도 갖고 다른 사람들한테 무시함 받지 마시고 또 체력도 건강하시고 경제력도 있고 사람과의 만남의 축복도 있는 5력의 증인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기도응답은 우리가 기도할때 No, Yes, Wait 이렇게 3가지 결론으로 주십니다.

    2. 위기 속의 다윗 (삼하 21:1)

    오늘 다윗이 위기를 당했어요.
    다윗이 왕이 된 후 나라가 3년동안 기근에 처했어요.
    3000년전 농경시대에 다윗의 나라에 3년동안 비가 내리지 않았다는 것은 국가적 재앙입니다.
    그런 재앙속에 다윗왕은 어떻게 해결해야 할지 몸부림을 치다가 3년이 되어서 하나님앞에 나아갔다 했어요.
    삼하 21:1에 “다윗이 여호와앞에 간구하매” 그리고 마지막 14절에 “그 후에야 하나님이 그 땅을 위한 기도를 들으시니라” 했어요.

    우리가 언약의 백성이 확실하다면 살아가면서 문제가 있더라도 낙심하지 말고 절대 절망이 있다 할지라도 절대 소망이 기도속에 있다는 것을 놓치지 말아야 될 줄로 믿습니다.
    “기도는 우리의 안식 빛으로 인도하리”
    기도는 우리의 안식인 줄로 믿습니다.
    여러분의 자녀, 남편, 돈이 안식이 아니에요… 우리의 기도속에 있는 안식은 하나님이 주체가 되는 줄로 믿습니다.
    기도하는 자에게는 미래가 있고 기대감이 있고 제자와 하나님의 일꾼이 될 확률이 있는 거에요.
    오늘 다윗이 여호와앞에 나아가 기도하니까 하나님이 말씀하십니다.
    삼하 21:1에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이는 사울과 피를 흘린 그의 집으로 말미암음이니 그가 기브온 사람을 죽였음이니라 하시니라”
    사울 집안 때문에 너희 민족이 고통을 받고 있다고 하십니다.

    문제를 기도속으로 가지고 가보세요.
    하나님께서 다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다윗이 하나님의 대답을 들은 후 기브온 땅에 달려가 물어봅니다.
    기브온 사람들에게 삼하 21:3에 “다윗이 그들에게 묻되 내가 너희를 위하여 어떻게 하랴 내가 어떻게 속죄하여야 너희가 여호와의 기업을 위하여 복을 빌겠느냐하니” 그리고 4절 마지막에 “왕이 이르되 너희가 말하는 대로 시행하리라” 합니다.

    기브온 사람들이 말합니다.
    5-6절에 “그들이 왕께 아뢰되 우리를 학살하였고 또 우리를 멸하여 이스라엘 영토 내에 머물지 못하게 하려고 모해한 사람의 자손 일곱 사람을 우리에게 내주소서 여호와께서 택하신 사울의 고을 기브아에서 우리가 그들을 여호와 앞에서 목 매어 달겠나이다 하니 왕이 이르되 내가 내주리라 하니라”

    그렇게 다윗은 사울의 후손 일곱 사람을 내어주고 기브온 사람들은 그들을 산 위에서 여호와 앞에 목 매어 달매 그들 일곱 사람을 동시에 죽입니다.

    일곱 사람

    - 리스바가 낳은 두 아들(21:8)
    1. 알모니
    2. 므비보셋
    - 아드리엘의 5 아들

    그런 후 10-11절에 “사울의 첩 리스바가 그 시체에 낮에는 공중의 새가 앉지 못하게 하고 밤에는 들짐승이 범하지 못하게 한지라 이에 리스바가 행한 일이 다윗에게 알려지매” 다윗이 감동을 받고 사울과 요나단의 뼈와 그 일곱명의 시체를 가져다가 베냐민 땅 셀라에 있는 사울의 아버지 기스의 묘에 합장을 해서 장사를 치러 줍니다.
    그리고 마지막 14절에 “그 후에야 하나님이 그 땅을 위한 기도를 들으시니라”

    사랑하는 여러분, 다른 사람이 잘못 한것도 내가 지고가면 하나님은 나를 축복하실 줄로 믿습니다.
    바로 그것이 그리스도의 마음입니다.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님은 나의 죄를 위하여 친히 감당하시고 부활하셨습니다.

    삼하 21장에 나온 기근속에서 하나님의 응답을 이끌었던 다윗의 마음이 우리 아버지, 어머니, 목사님, 장로님, 집사님들의 마음이 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하나님 아버지, 은혜와 사랑에 감사를 드립니다.
    다윗이 잘못한 일도 아니지만 사울이 잘못한 것도 본인의 죄값으로 모든 것을 하나님 말씀앞에 순종했던 다윗처럼, 또 왕의 명령에 따라 순종했던 많은 동역자들처럼, 우리 모두를 하나님 말씀앞에 순종하는 믿음의 사람들로 축복하여 주시옵소서.
    그래서 세계복음화의 237개국을 향한 주역자의 교회로 축복하여 주시옵소서.
    오직 우리를 남은 자로 남을 자로 남길 자로 축복하여 주시옵소서.
    우리의 기도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드려지는 참된 기도로 축복하옵소서.
    우리의 시선을 하나님과 일치되는 시선으로 축복하옵소서.
    내 정욕을 위한 기도가 아니고 우리 아버지의 뜻을 구하는 참된 기도로 축복하옵소서.


    사무엘하 1-10장 / 다윗 왕이 되는 과정, 업적
    사무엘하 11-20장 / 다윗의 범죄와 하나님의 징계, 시련
    사무엘하 21-24장 / 앞부분에서 누락된 사건의 추가 기록

    오늘 본문은 이스라엘에 있었던 3년 기근과 기브온 사람들이 사울의 후손을 처형한 사건에 대하여 기록하고 있습니다.

    1절 
    “다윗의 시대에 해를 거듭하여 삼 년 기근이 있으므로”

    당시 사람들은 오랫동안 비가 내리지 않는 것을 하나님의 심판으로 여겼기에, 하나님께서 특별히 선택하여 기름 부어 세운 다윗 왕의 통치시대에 3년이나 기근이 있었다는 것은 매우 중대한 문제였습니다.
    생각에 따라 하나님이 다윗을 이스라엘의 왕으로 합당하게 여기시지 않는다는 의미로 여겨질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다윗은 재앙의 원인이 무엇인지 하나님께 묻게 되었고, 하나님께서는 ‘사울이 기브온 사람들을 죽인 죄’로 인함이라고 응답하셨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반드시 진멸하라”고 명하셨던 가나안 족속 중 일부였던 기브온 사람들의 원한을 갚아 주시기 위해 선민 이스라엘을 징계하신 것은 상식적이지 않은 일이었습니다.
    그럼에도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 이같은 징계를 내리신 것은 사울이 기브온 사람들을 학살한 것은 그들의 조상인 여호수아가 하나님 앞에서 했던 맹세를 저버린 악한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으로 한 언약을 쉽게 생각하고, 자기의 이익을 위해 일방적으로 언약을 파기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을 정복할 때, 하나님께서는 가나안 족속을 불쌍히 여기지도 말고 그들과는 어떤 언약도 하지 말고 그들을 완전히 진멸하라고 단단히 명령하셨습니다(신 7:1-2).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먼 데서 온 사람들로 위장한 기브온 사람들에게 속아 그들과 언약을 맺고 말았습니다(수 9:3-21).
    하지만 그 언약은 속아서 맺은 언약이었지만 하나님의 이름으로 맺은 언약이었기에 이미 맺은 이상, 어떤 경우에도 지켜야 했습니다.
    만일 그 언약을 어긴다면 그것은 거룩하신 하나님의 이름을 더럽히는 것이었습니다.

    2절에 기록된 것처럼, 민족적인 배타성이 강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잘 보이고 싶어서 이방인인 기브온 사람들을 학살하는 악한 죄를 저지르고 말았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죄는 그냥 무시하고 넘어갈 수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렇게 되면 하나님의 언약과 공의가 무너지는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당사자인 사울이 이것을 회개할 리는 만무했습니다.
    그는 이미 하나님을 떠난 자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사람 다윗의 시대에 이스라엘에 3년간이나 기근의 재앙이 임하게 하심으로 다윗과 백성들이 그들 가운데 있는 죄를 깨달아 그것을 해결하도록 하신 것입니다.

    이러한 사실에서 우리는 지금 우리에게 하나님께서 주시는 어떠한 시련이 있다면, 그것은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무언가 해결하지 않은 죄가 있기 때문일 수 있겠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물론, 우리에게 찾아오는 모든 시련을 죄의 결과로 볼 수는 없습니다.
    욥의 경우처럼, 어떤 특별한 죄가 없이도 하나님의 특별한 섭리로 인해 시련이 임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러나 많은 경우, 우리의 그릇된 행위나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징계로 인해 시련이 오게 됩니다.

    그리고 우리는 예수님의 구속의 은혜를 힘입어 산다고 하지만 은연중에 이전의 죄악 된 습관을 버리지 못하고 그것을 반복하여 행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또 양심이 무뎌져 그러한 죄를 심각하게 여기지 않고 방치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러할 경우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징계하여 죄를 생각나게 하시고 그것을 통해 죄 문제를 해결하게 하십니다.
    그러므로 만일, 알 수 없는 시련이 계속된다면 여러분의 삶을 곰곰이 돌아보아 무언가 하나님의 은혜로부터 떨어질 만한 일이 없는가, 하나님 앞에서 아직 해결하지 못한 죄는 없는지 살피시기 바랍니다(전 7:14).
    그리고 만일 해결하지 않은 죄가 생각난다면, 그 죄를 철저하게 회개하시기 바랍니다.
    철저한 회개만이 당면한 시련을 속히 극복할 수 있는 길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은 우리 성도들의 죄를 결코 용납하시지 않기 때문에 우리가 죄를 해결하지 않은 채 살아간다면 징계에 의한 시련을 피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죄를 범하고도 회개하지 않고 그대로 살아감으로 하나님의 징계를 피하지 못했던 이스라엘의 역사는 이 사실을 분명하게 증거해 줍니다.
    오늘, 기도하실 때, 지금 나에게 주어진 모든 시련과 근심 걱정 염려들이 나의 죄로부터 비롯된 것은 아닌지 살피시고, 죄 문제를 해결하심으로 하나님의 평안을 다시 회복하시는 여러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그러나 지금의 고난을 죄 문제가 아니라 나를 단련하시는 하나님의 섭리로 응답을 받으셨다면, 더욱 말씀과 기도로 하나님의 크신 일을 감당하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3절에, 다윗이 기브온 사람들에게 “내가 너희를 위하여 어떻게 하랴 내가 어떻게 속죄하여야 너희가 여호와의 기업을 위하여 복을 빌겠느냐?”고 물었습니다.
    이에 대하여 기브온 사람들은 4절에서 “사울과 그의 집과 우리 사이의 문제는 은금에 있지 아니하오며 이스라엘 가운데에서 사람을 죽이는 문제도 우리에게 있지 아니하니이다”라고 대답을 했습니다.

    기브온 사람들은 물질적인 보상을 원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원한을 갚아 달라고 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들은 사울의 악행으로 인해 파기되었던 이스라엘과 자신들과의 언약이 바로 세워지기를 원했습니다.
    그래서 5-6절에, 자기 족속을 죽인 사울의 자손 가운데서 일곱 사람을 내어달라고 요구했습니다.
    이것은 자기 족속을 죽인 사울의 자손들을 죽임으로써 사울로 인해 깨어진 언약이 새롭게 회복되기를 원했던 것입니다.

    여러분, 만일 기브온 사람들이 이에는 이, 눈에는 눈으로 갚았다면 그 원한은 계속 돌고 돌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다만 깨어진 언약이 회복되기를 원했습니다.
    그를 위해 필연적으로 따를 수밖에 없는 속죄의 제물을 요구했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속죄의 제물을 바치므로 깨어졌던 이스라엘과 기브온의 언약이 회복되었습니다.

    여러분, 이처럼 죗값은 은금으로 갚을 수 없습니다.
    오직 목숨으로 갚아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예수님께서 우리의 죗값을 대신 갚아 주셨기에 잠시 실수로 하나님과의 언약을 어기더라도 우리의 목숨으로 갚지 않고 예수님의 공로를 의지하여 회개함으로써 언약을 계속해서 유지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오늘, 사울의 죄악과 그의 후손들의 희생을 보면서 죄의 삯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 다시 돌아보며, 죄로부터 구원받은 자로서 믿음의 길을 흔들림 없이 걸어가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간절한 마음으로 축원합니다.

    7-9절에, 다윗은 요나단과의 맹세를 생각하여 요나단의 아들 므비보셋을 속죄 제물 대상에서 제외하고 사울의 두 아들과 사울의 외손자 다섯 아들을 붙잡아 기브온 사람들에게 주어 그들의 목숨으로 죗값을 갚게 했습니다.

    사울의 2 아들
    사울의 외손자 5

    그러자 14절에 하나님께서 다윗의 기도를 들어주셨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사실에서 하나님께서는 약속이 지켜지지 않는 사회를 심판하시되 약속을 소중하게 여기고, 약속이 지켜지지 않았을 때 그것을 즉시 바로잡는 공동체를 축복하심을 깨닫게 됩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약속을 매우 소중하게 여기십니다.
    사람 간의 약속이라고 해도 그것이 온전히 지켜지기를 원하십니다.
    왜냐하면, 약속을 고의로 어기고 잘 지키지 않는 사회는 거짓되고 부패한 사회로서 그러한 사회에서는 하나님의 공의가 실현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사람 간의 약속이라도 제대로 지키지 않을 때는 그들이 더이상 부패하지 않도록 심판의 회초리를 드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약속을 신중하게 하고, 이미 한 약속은 반드시 지켜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약속을 잘 지켜야 하는 가장 큰 이유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모든 축복도 약속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약속을 잘 지키지 않는 사람은 하나님을 신뢰할 수 없게 됩니다.
    오늘, 나는 약속을 얼마나 소중하게 여기며 살아가는지, 또, 약속을 잘 지키며 살고 있는지 돌아보고, 한번 한 약속은 반드시 지킬 수 있도록 믿음으로 결단하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하나님 아버지, 사울 왕은 사람에게 잘 보이기 위해 하나님과의 언약을 파기했습니다.
    그리고 그로 인해 자신의 후손 일곱 명이 희생되는 아픔이 있게 했습니다.
    그런데 저희도 알게, 모르게 사울처럼 행할 때가 있음을 고백합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다윗이 요나단과의 언약을 기억하여 므비보셋을 살려준 것처럼, 예수님의 보혈의 언약으로 인해 회개하는 저희를 버리지 않으시는 하나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하나님 아버지, 이러하신 하나님의 사랑을 기억하며 작은 약속이라도 소중하게 여기며 반드시 지키는 저희가 되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4월 12일(토) 사무엘하 16-19장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시므이의 저주(16:11)

    또 아비새와 모든 신복에게 이르되 내 몸에서 난 아들도 내 생명을 해하려 하거든 하물며 이 베냐민 사람이랴 여호와께서 저에게 명하신 것이니 저로 저주하게 버려두라.
    David then said to Abishai and all his officials, "My son, who is of my own flesh, is trying to take my life. How much more, then, this Benjamite! Leave him alone; let him curse, for the LORD has told him to.

    시므이의 저주와 다윗의 반응

    다윗은 아들 압살롬의 반역으로 예루살렘을 급하게 떠나게 됩니다.
    다윗의 일행이 바후림이란 지역에 도착했을 무렵 사울의 친족 시므이가 다윗과 그 일행을 향하여 저주를 퍼붓습니다.
    비록 다윗이 급하게 떠나는 신세이지만 그래도 왕입니다.
    신하들이 시므이를 당장 죽여버리겠다고 할 때 다윗은 신하들을 만류하며 이렇게 말합니다.


    시므이(Shimʽiy) שִׁמְעִי 스트롱번호 8096

    1. 유명한 : 이스라엘인의 이름 ‘시므이’.   2. 출 6:17.  3. 민 3:18
    발음 [ Shimʽiy ]
    어원  /  8088에서 유래
    구약 성경  /  43회 사용
    • 1. 고유명사  유명한 : 이스라엘인의 이름 ‘시므이’, 출6:17, 민3:18, 삼하16:5, 왕상1:8, 4:18, 에2:5.
    • 관련 성경  /  시므이(출 6:17, 민 3:18, 삼하 16:5, 왕상 1:8, 4:18, 에 2:5).
    * 8088. 세마(shêmaʽ) שֵׁמַע 스트롱번호  8088

    1. 들음.  2. 명성. 3. 음악
    발음 [ shêmaʽ ]
    구약 성경  / 17회 사용
    • 1. 명사, 남성  들음, 욥 42:5, 시 18:45(44)
    • 2. 명사, 남성  명성, 풍문, 보고, 출 23:1.
    • 3. 명사, 남성 음악, 노래, 시 150:5.
    • 관련 성경  /  소식(창 29:13, 사 23:5, 나 3:19), 풍설(출 23:1), 명성(민 14:15, 신 2:25, 왕상 10:1, 대하 9:1, 사 66:19), 소문(욥 28:22, 렘 37:5, 합 3:2), 큰소리(시 150:5).  [동] 듣다(욥 42:5, 시 18: 44), 들려주다(호 7:12).
    게라(Gêrâ) גֵּרָא 스트롱번호 1617

    1. 곡물: 이스라엘 사람들의 이름 ‘게라’.  2. 돌아다니다.  3. 소멸하다   4. 창 46:21.  5. 삿 3:15.
    발음 [ Gêrâʼ ]
    어원  /  1626에서 유래한 것으로 보임
    구약 성경  / 9회 사용
    • 관련 성경 /  게라(창 46:21, 삿 3:15, 삼하 16:5, 대상 8:3,5).

    * 1626.  גֵּרָה 스트롱번호 1626

    1. 낱알.  2. 히브리의 가장 작은 무게 단위
    발음 [ gêrâh ]
    어원 / 1641에서 유래
    구약 성경 / 5회 사용
    • 1. 명사, 여성 낱알
    • 2.명사, 여성 히브리의 가장 작은 무게 단위 [한 세겔의 20분의 1], 출30:13, 레27:25, 민3:47, 18:16.
    • 관련 성경  /  게라(출30:13, 민3:47, 겔45:12).


    사무엘하 16:5
    다윗 왕이 바후림에 이르매 거기서 사울의 친족 한 사람이 나오니 게라의 아들이요 이름은 시므이라 그가 나오면서 계속하여 저주하고

    다윗이 바후림이라는 지역에 도착했습니다.
    그곳에 사울의 친족인 게라의 아들이며 시므이가 나와서 다윗을 저주합니다. 
    바후림은 시므이의 고향으로서 사울의 가문에 속한 자이기 때문에 다윗이 싫었습니다.
    사울 가문은 베냐민 지파이고 다윗은 유다 지파이기 때문에 시므이는 싫었습니다.
    태생 자체가 다릅니다.
    시므이는 자신의 아버지 게라로부터 온전한 신앙을 전수받지 못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름에 나타나고 있는 것처럼 떠돌아다니는 신앙을 배웠습니다.
    정착하여 온전한 신앙을 배워야 하는데 유목민처럼 떠돌아다니니 제대로 된 믿음을 갖지 못했습니다.
    이런 신앙을 가지니 결국 멸망받을 수밖에 없는 자가 되었습니다.
    시므이가 온전한 신앙을 배웠다면 다윗을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왕으로 세웠다는 것을 인정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신앙을 온전하게 아버지로부터 배우지 못하니 인간이 원해서 세운 자신의 가문에서 나온 사울 왕을 추대하고 믿었습니다.
    육적으로는 자신의 가문에서 나왔으니 얼마나 좋겠습니까?
    하나님은 사울 왕을 폐위시키고 다윗 왕을 세웠습니다.
    시므이도 이것을 인정해야 합니다.
    그러나 마음속에 이것을 인정하지 않고 있다가 압살롬에 의해서 다윗이 쫓겨나자 이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생각하여 저주를 퍼붓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런 신앙을 가져서는 안 됩니다.
    사울 왕은 인간이 요구하여 세운 왕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뜻대로 살지 않았습니다.
    자신의 정욕적인 뜻대로 살았습니다.
    예배도 자신 마음대로 드렸고 자신의 공적을 내세우기 위해서 기념비도 세웠습니다.
    시므이는 이런 자의 신앙을 따라갔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죄를 지어도 하나님께 회개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사울 왕을 버리고 다윗을 왕으로 세웠습니다.
    그럼 다윗 왕을 인정하고 따라야 합니다.
    우리도 예수 그리스도가 나의 왕이라는 것을 믿고 따라야 합니다.
    율법주의자는 사울 왕과 같은 인간의 본성을 따라가는 자들입니다.
    인간을 구원자로 믿고 가는 자들입니다.
    우리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가 나의 구원자이며 만왕의 왕이라는 것을 믿고 따라야 합니다.
    이런 신앙이 정착된 신앙입니다.

    시므이의 이름을 통해서 무엇을 깨달아야 할까요?

    시므이가 다윗 왕을 쫓아다니면서 저주했던 것을 하나님은 모두 기억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들으시고 시므이를 저주하게 됩니다.
    시므이는 다윗이 죽고 난 후에 솔로몬에게 죽게 됩니다.
    지금 당장은 저주를 모면하여 넘어가는 것처럼 보이지만 시간이 흘러 반드시 자신 생전에 하나님이 갚아준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믿음이 아닌 율법으로 구원을 얻을 수 있다고 말하는 것도 예수 그리스도를 저주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을 하나님은 들으시고 때가 되매 저주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믿음이 아닌 인간의 행위로 구원을 얻을 수는 없습니다.
    이런 자들이 기회를 보면서 시므이처럼 주님을 배반하고 환경과 상황에 따라서 모욕하게 됩니다.
    우리는 주님을 두 번 십자가에 못 박으면 안 됩니다.
    시므이도 다윗 왕의 통치를 받으면서 살았던 사람입니다.
    이런 자가 다윗을 저주하고 있습니다.

    사무엘하 16:6
    또 다윗과 다윗 왕의 모든 신하들을 향하여 돌을 던지니 그 때에 모든 백성과 용사들은 다 왕의 좌우에 있었더라.

    시므이는 다윗에게만 저주하는 것이 아닙니다.
    다윗 왕을 따르던 신하들에게 돌을 던지면서 저주하고 있습니다.
    시므이는 구원받지 못한 자의 표상입니다.
    사울의 신앙을 따라가면서 자신만 높이고 여호와 하나님을 섬기지 않았던 자입니다.
    이런 자가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하고 있는 다윗과 그의 신하들을 저주합니다.
    지금도 똑같습니다.
    교회 안에서 시므이와 같은 자들이 있습니다.
    자신의 신앙은 흔들리는 신앙을 가지고 있으면서 환경과 상황에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받은 성도를 핍박합니다.
    저주하고 돌을 던지면서 괴롭힙니다.
    그것도 힘들고 어려운 상황이 왔을 때 저주합니다.
    율법주의자들은 남의 약점을 파고들어 후벼대면서 고통을 줍니다.
    다른 사람에게 약점을 들추어내어 수치를 줍니다.
    이런 자의 신앙이 시므이와 같은 신앙입니다.
    우리 주님도 시므이와 같은 유대인들에게 이런 모욕과 수치를 받았습니다.
    주님을 따르던 성도들이 핍박받고 순교했습니다.
    스데반도 같은 민족에게 돌에 맞아 순교했습니다.
    우리는 어떤 환경에서도 시므이의 신앙을 따라서는 안 됩니다.

    사무엘하 16:7
    시므이가 저주하는 가운데 이와 같이 말하니라 피를 흘린 자여 사악한 자여 가거라 가거라

    시므이가 저주하는데 강도가 점점 세지고 있습니다.
    피를 흘린 자여 사악한 자여 떠나가라고 합니다.
    지금 다윗의 마음은 비통합니다.
    자신의 아들 압살롬에게 쫓겨가는 신세인데 그 틈을 타서 시므이는 사악한 자라고 말합니다.
    다윗의 마음을 더 아프게 만들고 있습니다.
    (사악한 자여 : 벨리야알 1100 무가치함, 무익함, 파멸)
    시므이는 다윗에게 무가치한 사람이라고 저주합니다.
    파멸될 자이며 더 이상 쓸모없는 왕이라고 저주를 퍼붓고 있습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예수 그리스도께서도 유대인의 왕으로 오셔서 구원하려고 했는데 그들은 주님을 무가치한 자로 여기고 너도 구원하지 못하면서 어떻게 우리를 구원하냐고 떠들어댔습니다.

    다윗과 시므이(사무엘하 16:5-8)

    사울의 지파인 베냐민 사람들 중에는 다윗에 대한 분개심이 아직도 계속 깃들어 있었습니다.
    사울의 친척 중의 한 사람이었던 시므이는 미갈과 관련이 있었던 바후림을 지나갈 때에 분명한 말로 다윗에게 “돌 투족을 당하고 피흘린 자”라는 저주를 했는데, 이러한 저주를 받으면서도 다윗은 이를 완전히 참고 견디었습니다.
    그는 자기 호위병들이 시므이를 처치하지 못하도록 막았습니다.
    그 이유는 이것마저도 자기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의 경륜 안에서 되어지는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는 자기 아들에게 사랑과 존경도 받지를 못했는데 어떻게 사울의 일가에게 존경을 기대할 것인가를 생각했습니다.
    다윗을 저주한 시므이는 어떤 위인이었는지 본문을 통해서 몇 가지로 생각하고자 합니다.

    시므이는 하나님께 기쁘신 뜻을 몰랐습니다.

    하나님의 기쁘신 뜻이 무엇이었습니까?
    하나님께서 사울 왕을 폐하시고 이새의 아들 다윗을 택하여 이스라엘의 왕으로 삼으신 일입니다.
    그러나 시므이는 하나님의 기쁘신 뜻을 전연 생각하지 못했고 그저 단순히 인간의 감정으로 “다윗이란 놈은 비루하고 정권야욕에 눈이 어둡고 우리 베냐민 지파의 원수요 사울의 족속을 죽인 살인마이다” 이렇게만 생각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압살롬의 반란에 대해서는 “네가 왕이 되었으나 여호와께서 나라를 네 아들 압살롬의 손에 붙이셨도다”고 은근히 기뻐하고 좋아했습니다.
    아히도벨의 모략대로 시므이는 압살롬의 왕국이 견고해지기를 바랐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기쁘신 뜻 가운데서 마침내 사울의 정권은 붕괴되고 압살롬의 왕국은 후새의 모략대로 따르니 곧 실패하고 말았습니다(삼하 17:14).
    시므이야말로 평생을 두고 하나님을 단 한 번이라도 찾은 때가 없었습니다.
    그저 인본주의적인 사고로 살다 끝낸 사람입니다.

    시므이는 다윗 왕을 저주했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대로 성경을 보면 다윗 왕같이 마음이 어질고 선량한 분은 없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마음에 꼭든 분입니다(행 13:22).
    그러나 그도 사람의 아들이기에 밧세바로 인한 단 한 번의 실수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눈물로 애통하는 시편 51편의 회개의 기도를 다 들으시고 용서해 주셨습니다.
    그 후 다윗의 등불을 여전히 끄지 않겠다고 언약하셨고 그리스도께서 다윗의 후손에서 탄생하셨습니다(마 1:1).
    다윗이야말로 우리의 믿음의 조상이요 성왕입니다.
    그런데 시므이는 그러한 다윗을 저주했습니다.
    본문에 저주한 내용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1. 계속하여 저주했습니다(삼하 16:5).
    골리앗 장군이 소년 다윗을 저주할 때에는 자기가 섬기는 신들의 이름으로 단 한 번만 저주했습니다(삼상 17:43).
    그러나 시므이는 다윗 왕을 연발로 저주했습니다.

    2. 독한 말로 저주했습니다(왕상 2:8).
    하나님의 기름 부음 받은 종을 독한 말로 저주했으니 용서를 받을 수 없는 큰 죄악입니다(왕상 2:44).

    3. 돌을 던지며 티끌을 날리면서 저주했습니다(삼하 16:13).
    이것은 포학과 야비가 뒤섞인 저주 방법입니다.

    4. 피흘린 자, 비루한 자라고 저주했습니다(삼하 16:7).
    피흘린 자는 살인자란 뜻이고, 비루한 자란 비겁한 자란 뜻입니다.

    5. 여호와의 이름을 들먹이면서 저주했습니다(삼하 16:8).
    “여호와께서” 라고 두 번씩이나 들먹거렸습니다.
    성경 중에 시므이같이 남을 독한 말로 저주한 사람도 없었습니다.
    이 때 아비새 장군은 참다못해 “왕이여 이 죽은 개가 어찌 내 주 왕을 저주하리이까 청컨데 나로 건너가서 저의 머리를 베게 하소서” 했습니다.
    그 때 다윗이 말하기를 “스루야의 아들들아 내가 너희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 저가 저주하는 것은 여호와께서 저에게 다윗을 저주하라 하심이니 네가 어찌 그리하겠느냐 내 몸에서 난 아들도 내 생명을 해하려 하거든 하물며 베냐민 사람이랴 혹시 여호와께서 나의 원통함을 감찰하시리니 오늘날 그 저주 까닭에 선으로 내게 갚아주시리라”고 했습니다.
    이 때 다윗은 온유와 겸손과 인내와 관용의 미덕을 하나님 앞에서 나타내셨습니다.
    과연 다윗은 원수를 축복 하였기에 축복을 받았고, 시므이는 남을 저주하므로 사형을 받았습니다.
    이와 같이 시므이의 큰 잘못은 여호와의 기름 부음 받은 중을 저주한 죄입니다.
    그것도 다윗의 곤경을 틈타서 악담하며 저주한 것은 결코 용서할 수 없는 죄악입니다.

    시므이는 예루살렘을 떠났습니다.

    압살롬의 반란이 끝나고 다윗은 개선장군으로 예루살렘으로 다시 입성하시게 되었습니다.
    이 때 맨 먼저 환영나온 분이 시므이였습니다.
    그는 베냐민 사람 1,000명과 함께 요단강을 밟고 건너와서 다윗 왕을 환영했습니다.
    그 때 마침 다윗은 나룻배를 타고 요단강을 건너려고 하던 때였습니다.
    시므이는 왕 앞에 엎드려 말했습니다.

    사무엘하 19:19-20

    “내 주여 원컨데 내게 죄 주지 마옵소서 내 주 왕께서 예루살렘에서 나오시던 날에 종의 패역한 일을 기억하지 마옵시며 마음에 두지 마옵소서 왕의 종 내가 범죄한 줄 아옵는고로 오늘 요셉의 온 족속 중 내가 먼저 내려와서 내 주 왕을 영접하나이다.”

    이 때 옆에 있던 아비새 장군이 말하기를 “왕이여 시므이가 여호와의 기름 부으신 자를 저주하였으니 그로 인하여 죽어야 마땅치 아니하리이까”했습니다.
    이에 다윗은 말하기를 “스루야의 아들들아 나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 오늘 같은 날에 어찌 피를 보겠느냐” 맹세하므로 살려주었습니다.
    그 후 다윗은 하나님 잘 섬기다가 세상을 떠나게 되었습니다.
    그는 아들 솔로몬을 불러서 여러 가지 유언을 하다가 맨 나중에 시므이에 대해서 유언을 했습니다.
    “바후림 베냐민 사람 게라의 아들 시므이가 너와 함께 있나니 저는 내가 마하나임으로 갈 때에 독한 랄로 나를 저주하였느니라 그러나 저가 요단에 내려와서 나를 영접하기로 내가 여호와를 가리켜 맹세하여 이르기를 내가 칼로 너를 죽이지 아니하리라 하였노라 그러나 저를 무죄한 자로 여기지 말지어다 너는 지혜있는 사람인즉 저에게 행한 일을 알지니 그 백발의 피를 흘려 저로 음부에 내려가게 하라.”

    그 후 다윗 왕은 세상을 떠났습니다.
    하루는 솔로몬이 시므이를 불러서 말하기를 “너는 예루살렘에서 너를 위하여 집을 짓고 거기서 살고 어디든지 나가지 말라 너는 분명히 알라 네가 나가서 기드론 시내를 건너는 날에는 정녕 죽임을 당하리니 네 피가 네 머리로 돌아가리라”고 했습니다.
    그 때 시므이가 대답했습니다.
    “이 말씀이 좋사오니 내 주 왕의 말씀대로 종이 그러하겠나이다”
    그리고 시므이는 날이 오래도록 예루살렘에 머물렀습니다.
    3년 후 하루는 시므이의 두 종이 가드로 도망을 갔습니다.
    그들을 자기 주인에 대한 왕의 금족령을 혹시 알았는지도 모릅니다.
    시므이는 나귀에 안장을 지우고 아무 생각없이 가드 아기스에게 가서 두 종을 데리고 예루살렘으로 돌아왔습니다.
    이 소식을 들은 솔로몬은 시므이를 불렸습니다.

    열왕기상 2:42-44
    “네가 어찌하여 그렇게 하였느냐 내가 네게 이른 명령을 지키지 아니하였고 또 내 부친에게 행한 바를 네가 스스로 아나니 여호와께서 네 악을 네 머리로 돌려보내시리라”

    브나야에게 명하매 칼로 쳐 죽이고 말았습니다.
    예루살렘은 하나님의 품을 의미합니다.
    아무리 죽을죄를 지어도 하나님 품을 떠나지 않으면 살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시므이는 그 예루살렘을 아무 생각없이 떠났기에 죽음을 당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승천 직전에 사랑하는 제자들에게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내게 들은 바 아버지의 약속하신 성령을 기다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들도 예루살렘 성 안에서 하나님의 품으로 알고 생활합시다.
    오늘은 시므이의 실패의 원인을 생각했습니다.

    시므이는 하나님의 기쁘신 뜻을 몰랐습니다.
    시므이는 다윗 왕을 저주했습니다.
    시므이는 예루살렘을 떠났습니다.
    우리는 악한 시므이를 선대한 다윗 왕의 온유와 겸손과 인내와 관용을 본받는 생활을 해야 하겠습니다.

    시므이의 저주
    이제 다윗은 도망자다.

    다윗은 비록 이빨빠진 호랑이지만 한때 전쟁의 맹수였다.
    예루살렘성도 난공불락인 요새이다.
    싸워서 이길수도 있다.
    하지만 다윗은 아들 압살롬의 손에 아비의 피를 묻히고 싶지 않았다.
    아들과 맞서 싸울수도 없고 아들의 손에 죽을수도 없는 진퇴양란의 상황이다.
    더군다나 아들 압살롬은 아비를 죽이고도 남는 놈이다
    자신의 아들 압살롬은 하늘을 두려워하지도 않는다.
    다윗은 자신의 삶속에서 가장 비참한 순간을 맞이하고 있다.
    살아있는 아버지를 두고 쿠데타를 일으킨 아들의 반역에 그는 속수무책 도망할수 밖에 없다.
    다윗과 따르는 무리들이 예루살렘에서 약4km 떨어진 바후림이란 곳에 도착했을때 시므이란 작자가 따라 붙었다.
    시므이란 작자는 무너진 사울왕가가 존립했더라면 동경해마지 않는 소위 특권층의 권력과 삶을 누릴수 있는 최고 엘리트 가문 베냐민지파의 인물이었다.
    시므이는 사울왕가가 다윗왕가에게 왕권을 일방적으로 빼앗겼다고 생각했다.
    그는 초야에 묻혀있으면서도 사울왕가의 화려한 부활을 꿈꾸며 자신의 지파 베냐민지파의 결속을 다져오고 있었다.
    베냐민지파쪽에서 보면 분명 다윗은 적법한 왕이 아니다.
    한때 사울의 아들 이스보셋이 잠깐 이스라엘의 왕이었던 적도 있다.
    그래서 원래는 베냐민 지파가 권력의 중심이어야 된다고 생각했고 자기들이 누렸던 그 기득권에 미련이 너무 많았다.
    사실, 사울이 죽고 왕권을 두고 다윗 가문과 사울 가문사이에 물밑에서는 권력암투가 벌어지고 있었다.
    마침 바후림에서 다윗은 필연인지 우연인지 자신의 간접적 사연이 있었던 곳임을 기억했다.
    다윗은 자신의 왕권의 정통성을 유지하기 위해 사울의 딸인 조강지처 미갈이 필요했었다.
    잊혀졌던 여자였다.
    사실 미갈은 다윗의 조강지처였으나 다윗이 사울을 피해 광야에서 도망자생활을 할때 사울은 미갈을 발디엘에게 시집을 보내 버렸다.
    사울은 악한영에 사로잡혀 자신의 집안과 다윗의 관계를 완전히 끊어버리고자 했었다.
    다윗이 후에 왕이 되어 정치적 의도로 미갈을 다시 찾아 올때, 이곳은 그녀의 남편인 발디엘이 울면서 여기 바후림까지 쫒아 왔던 사연많고 눈물많은 곳이다.

    발디엘은 미갈을 사랑했나보다.

    남자의 눈물은 어떤 의미인가?
    인생의 가장 아름답고 꽃과 같은 시간(화양연화)을 함께 보낸 그 시절 미갈과 발디엘은 그곳에서 서로의 얼굴을 마주하며 이별의 눈물을 흘려야만 했다.

    무엇이 그들을 갈라 놓았나?

    우연챦게도 미갈과 발디엘을 갈라놓은 이장소에서 다윗은 시므이에게 저주 세례를 받는다.
    시므이는 정치계에서 밀려난 자이지만 다윗에게 숙청대상이며 경계대상이다.

    시므이는 분노를 쏟아낸다.

    “피를 흘린 자여 사악한 자여 가거라 가거라. 사울과 그 가족을 죽인 죄를 여호와께서 갚아 주셨구나.네가 사울왕의 자리를 빼앗았으니 여호와께서 그것을 네 아들 압살롬에게 주었구나 . 너는 사람을 죽였으니 벌을 받아 마땅하도다.”

    시므이는 착각도 단단히 하고 있다.
    사울의 피는 사울이 자초한것이다.
    다윗과 무관하다.
    다윗의 다음 왕은 솔로몬이지 압살롬이 아니다.
    믿고 싶은대로 믿는 건가?
    그 저주안에 감추어진 이루어지지 못한 갈망, 좌절된 소망에 그의 분노는 폭발했다
    노골적으로 다윗에게 모욕을 준다.
    백성이 다 듣고 있다
    이때 스루야의 아들 아비새가 당장 건너가서 저 놈의 목을 치게 하소서!
    “스루야의 아들들아 이것이 너희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
    내 몸에서 난 아들도 나를 죽이려 하는데 하물며 이 베냐민 사람이랴?”

    다윗은 자신의 죄때문에 일어난 일에 누구를 탓할수 없었다.
    하지만 다윗은 하나님과의 언약을 상기하며 자신의 신세를 숙명으로 받아들인다.
    다윗은 악을 선으로 갚아주시는 하나님을 기억한것이다.
    그들이 그 자리를 떠나는 중에도 시므이는 돌을 던지며 먼지를 날리며 따라오면서까지 저주를 퍼붓는다.

    압살롬의 난이 진압되고 다윗이 다시 예루살렘으로 복귀할때 요단을 건너는중 시므이는 베냐민 사람 1000명과 사울 집안의 종 시바와 아들 15명, 종 20명과 함께 대규모 환영 퍼레이드를 하며 다윗을 만나 절을 하고 용서를 빌었다.

    다윗이 왕권이 회복되니 제일 먼저 마중나온 것이다.
    그렇다면 시므이에 대해서 다윗이 용서를 했을까?
    다윗은 아들 솔로몬에게 권력 이양을 할때 궁중에 아직도 시퍼렇게 살아 있는 시므이에 대해서 주의를 준다.
    다윗은 호시탐탐 기회를 엿보고 있는 시므이를 평생 의식한 것이다.
    다윗이 죽고 솔로몬이 즉위하자 다윗의 유언에 따라 솔로몬은 시므이에게 예루살렘에 살며 다시는 기드론 시내를 건너지 말라는 명령을 내린다. 예루살렘 안에서, 솔로몬 눈앞에서 유배생활 하란 말이다.
    시므이는 이 약속을 3년 동안 지켰다.
    그러나 시므이의 종들이 가드 임금 마아카의 아들 아기스에게로 달아나는 일이 벌어진다.
    결국 시므이는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을 벗어나 종들을 잡아왔고 이 일이 빌미가 되어 솔로몬의 명령으로 군대 장관이자 여호야다의 아들 브나야에 의해 죽임을 당한다.

    솔로몬의 명령을 깜박 잊은건가?
    아니면 설마하며 시간이 흐르다보니 임금말이 말같지 않게 여겼나?
    정확하지 않다. 그는 자신의 생명줄인 예루살렘을 벗어나고야 말았다.

    다윗은 시므이 사건을 덮고 지나갔다.

    유다가 완전히 망한후에도 사람들은 다윗왕조의 부활을 꿈꿔왔다.
    다윗은 모든 판단을 하나님께 맡긴 사람이다.
    그때그때 마다 자신이 판단하고 칼이 지나갔으면 그 백성은 다윗을 잊었을 것이다.
    다윗 왕국은 인간의 쟁취가 아닌 하나님의 주권으로 이루어졌으며 개인적 감정보다 왕국의 가치가 우선시 된 왕국이었다.
    내가 주도하는 삶이 아니고 하나님께 맡기는 삶이 되어야겠다.


    시므이의 저주와 다윗의 대처(사무엘하 16:5-14)

    다윗이 아들 압살롬의 반역을 피해 도망하는 중에 일어난 일입니다.
    다윗 왕과 그를 따르는 추종자 600여명 가량은 이제 베냐민 땅 바후림이라는 지역을 지나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느닷없이 사울왕의 친족(친척)되는 시므이라는 자가 나와서는 다윗과 다윗일행을 저주합니다.
    저주하면서 돌을 던지고 흙먼지를 다윗과 일행을 향해 흩날립니다.
    다윗의 일행 가까이서는 자신이 없었던지 좀 먼발치에서 떨어져 산비탈로 일행을 따라 내려가면서 다윗과 일행을 저주합니다.
    분명 낙담과 슬픔에 잠겨있을 다윗과 일행들을 향해 욕설과 저주를 퍼부으며, 말그대로 불난 집에 부채질하고 있습니다.
    시므이 혼자서 다윗을 저주했는지, 아니면 베냐민 사람들과 함께 하면서 제일 선봉에서 서서 비방하고 저주했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시므이 혼자 했다면 미쳤거나, 아니면 간이 배밖으로 나온것 둘중에 하나 였을 것입니다.
    아니면 다윗에 대한 증오가 너무 커서, 에스더 처럼 죽으면 죽으리라는 일사의 각오로 다윗과 무리들을 저주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시므이는 다윗과 일행을 향해 돌을 던지며 저주합니다.
    다윗이 실력이 죽지 않았다면, 몸이 기억한다면, 그 옛날 골리앗을 무찌를 때 처럼 물매돌 5개까지 필요없겠고, 짱돌 2-3개 정도면 시므이 이마에 정확하게 꽂아 넣을텐데 말입니다.

    사람을 향해 돌을 던지는 이 행위…. *간음하다 붙잡혀온 여인을 정죄하는 무리들에게 예수님께서는 ‘너희중에 죄없는 자가 돌로 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스데반 집사도 군중들의 돌에 맞아 죽었습니다.
    아간과 그의 가족들, 모든 소유물, 심지어 그의 가축들까지 모두 돌에 맞아 죽고 불살라 졌습니다.
    이처럼 돌을 던지는 행위는 죄인을 죽음으로 심판하는 행위입니다.
    시므이는 다윗을 이미 죄 지은자, 죽어 마땅한 자로 정죄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는 돌을 던지며 말하기를 “피를 흘린자, 사악한 자”로 다윗을 규정하며 “가거라 가거라” 합니다.
    영어 성경으로 보니 Get out – Get out ..꺼져라 꺼져라 우리 사울왕을 베출한 베냐민 땅 바후림에서 후딱 꺼지라는 말입니다.

    므이처럼 ‘자로 시작하는 성경인물들의 이름이 아주 별로 입니다.
    시므리 별로입니다.
    북이스라엘 왕조 ..여로보암.. 어쩌구.. 시므리, 오므리…. 누가누가 더 악하나 악한왕 끝판왕 아합으로 이어지는 ..7일 천하로 끝난 왕, 나는 죄를 심으리의 므리 , 나는 오므리..왕..아주 별로입니다.
    아들들을 자신이 보는 앞에서 모두 처형당한 인간적으로 볼때 너무 안됬지만 비운의 유다 마지막 왕 드기야도 있습니다.
    야곱의 아들중에도 있지요.. 잔해하는 기계, 세겜과 하몰추장, 감언이설로 할례받게 한 마을 남자들을 모조리 무자비하게 칼로 집단 살인을 저지른 야곱의 아들 레위와 므온.. 그리고 오늘 본문의 므이, 결국 본색을 드러낸 므비보셋의 종 바까지.. 이 바는 발음에 유의해서 읽으셔야 합니다.

    므이가 다윗을 저주하는 이유?

    첫째, 사울의 피를 갚아주신다는 것(8절)

    사울의 족속의 모든 피를 여호와께서 네게로 돌리셨도다 그를 이어서 네가 왕이 되었으나 여호와께서 나라를 네 아들 압살롬의 손에 넘기셨도다 보라 너는 피를 흘린 자이므로 화를 자초하였느니라 하는지라.

    지금 도망하는 이유는 사울의 가정에 흘린 피를 여호와께서 갚아준 것이라고 믿기 때문입니다.

    사울 족속의 모든피를 말합니다.
    시므이가 직접적인 언급을 하진 않지만, 비단 사울왕의 죽음뿐만 아니라, 아들 요나단의 죽음도 모두 다윗 탓으로 돌리고 있는 듯 합니다.
    요압이 죽인 아브넬의 죽음도 다윗 탓이고, 낮잠을 자다 목이 잘려 머리만 다윗에게로 보내진 이스보셋의 죽음도 레갑과 바아나의 일탈이 아닌 다윗이 사주한것으로 믿고 있는듯 모든 피를 다윗이 흘린것으로 치부하며 모함합니다.

    ​둘째, 친족 사울 왕위를 다윗이 빼앗은 것 때문

    시므이가 다윗을 저주하는 이유는 친족이었던 사울의 왕위를 다윗이 찬탈, 강탈 한것이라고 잘못 믿고 있기 때문이었던것 같습니다. 친족이었던 사울이 왕으로 있을때 자신도 한자리 꾀찰수 있었을 것인데, 모든 것이 숲으로 돌아가 버린 그 원흉이 다윗에게 있다고 보는것 같습니다.​

    셋째, 압살롬이 왕위를 빼앗은 것이라고 믿기 때문 

    시므이 그가 다윗과 그 추종자들을 저주하며 비방하는 것을 실행에 옴긴 결정적인 이유는 다윗의 아들 압살롬에게 왕위가 넘어 갔다고 판단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잘못된 확신, 자기 자신의 손해, 정치적 상황을 보니 충분히 다윗을 저주해도 되겠다는 판단이 깔린듯 합니다.
    그러니 다윗과 일행을 보자마자 돌을 던지며 저주를 퍼붙는 것입니다.

    ​출애굽기 22:28
    너는 재판장을 모독하지 말며 백성의 지도자를 저주하지 말지니라.

    시므이는 하나님의 율법을 어긴자인 것입니다.
    또한 잘못된 정보와 판단으로 다윗을 정죄하며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을 판것입니다.
    즉 그것이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는 것입니다.

    시므이 그는 철저한 기회주의자였습니다.

    사무엘하 19:16-20
    바후림에 있는 베냐민 사람 게라의 아들 시므이가 급히 유다 사람과 함께 다윗 왕을 맞으러 내려올 때에.
    베냐민 사람 천 명이 그와 함께 하고 사울 집안의 종 시바도 그의 아들 열다섯과 종 스무 명과 더불어 그와 함께 하여 요단 강을 밟고 건너 왕 앞으로 나아오니라.
    왕의 가족을 건너가게 하며 왕이 좋게 여기는 대로 쓰게 하려 하여 나룻배로 건너가니 왕이 요단을 건너가게 할 때에 게라의 아들 시므이가 왕 앞에 엎드려.
    왕께 아뢰되 내 주여 원하건대 내게 죄를 돌리지 마옵소서 내 주 왕께서 예루살렘에서 나오시던 날에 종의 패역한 일을 기억하지 마시오며 왕의 마음에 두지 마옵소서.
    왕의 종 내가 범죄한 줄 아옵기에 오늘 요셉의 온 족속 중 내가 먼저 내려와서 내 주 왕을 영접하나이다 하니..

    다윗왕에게 돌을 던지며 저주하며 의기 양양할때는 언제고 이제 180도 돌변한 모습입니다.
    베냐민 사람 천 명이 그와 함께 하고..
    다윗 일행이 600명 가량 인데, 그보다 많은 사람 숫자1000명을 데리고 다윗에게 나아온 것은 무슨 의도였을까요?
    혼자 나서기 불안해서 였을까요?
    아니면 천명 정도는 급히 모을 수 있는 자신은 영향력 있는 인물이라는 것을 과시하며 보여 주기 위한 것이었을까요?

    압살롬이 전투에서 죽고 다시 전세가 역전된 것을 보게 되자 시므이는 번개같이 태세 전환하며 다윗 왕앞에 바짝 엎드립니다.
    이처럼 그는 처세에 능한 기회주의자였습니다.
    한나라의 왕에게 대들고, 여러가지로 주제 넘게 선 넘다가 후에는 진짜 선을 넘었다가 죽게됩니다.
    남은 평생 예루살렘 지역에서만 살아야하는 솔로몬왕의 자택연금과 같은 명령을 어기고 예루살렘 지역을 넘었던 사실이 발각되어 처형당해 죽게 됩니다.
    비참한 말로를 맞이하였습니다.

    다윗의 반응과 대처

    ​돌을 던지며 저주를 퍼붓는 시므이를 보자 화가 치민 아비새가 건너 가서 시므이의 머리를 배도록 해달라고 다윗에게 요청합니다.
    하지만 다윗은 허락하지 않습니다.
    다윗의 반응은 달랐습니다(10-11절).

    10. 왕이 이르되 스루야의 아들들아 내가 너희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 그가 저주하는 것은 여호와께서 그에게 다윗을 저주하라 하심이니 네가 어찌 그리하였느냐 할 자가 누구겠느냐 하고.
    11. 또 다윗이 아비새와 모든 신하들에게 이르되 내 몸에서 난 아들도 내 생명을 해하려 하거든 하물며 이 베냐민 사람이랴 여호와께서 그에게 명령하신 것이니 그가 저주하게 버려두라.

    ​시므이의 험한 욕설과 저주는 여호와께서 시키신 일로 고스란히 자신의 죄로 인해 야기된 것임을 다윗은 인정하며 인지하고 있는 것입니다.
    시므이의 저주에 대한 대한 다윗의 대처는 무엇을 하는것이 아니라 그저 시므이가 저주하게 내버려 두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이 저주에 대한 다윗의 대처였습니다.

    ​그러나 또한 다윗은 자신이 당하는 비방과 저주가 부당한 것이라면 여호와 하나님께서 자신의 원통함을 헤하려 주실 것이라는 믿음, 회복시켜 주실 것이라는 믿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12. 혹시 여호와께서 나의 원통함을 감찰하시리니 오늘 그 저주 때문에 여호와께서 선으로 내게 갚아 주시리라

    선하신 하나님, 자신에게 신실하셨던 여호와 하나님께 대한 믿음을 고난과 저주가운데에서도 포기하지 않는것, 그것이 여호와 하나님에 대한 다윗의 믿음이었고, 신앙적 대처였습니다.

    ​다윗이 스루야의 아들 아비새야! 하지 않고 스루야의 아들아! 라고 말한 것을 생각해 봤으면 좋겠습니다.
    이 말은 무슨 말입니까?
    그것은 아비새 뿐만 아니라 요압을 포함하는 말입니다. [스루야의 아들들 : 요압, 아비새, 아사헬 (아브넬 쫒다가 죽임당함)]

    개인적인 생각은 아마도 다윗은 압살롬과 자신의 해후를 도운 요압의 어설픈 중재로 이 사단이 난것에 조금은 책임이 있다고 생각한것 같습니다.
    짜증아닌 짜증을 아비새뿐만 아니라 요압에게도 부린것 같습니다.
    의문의 패를 당한 요압입니다.
    요압이 아브넬을 죽인것도 베냐민 지파사람들에게 원한을 사고 시므이 같은 정치적 반대 급부 세력을 만들게 되는, 다윗에게는 정치적으로도 큰 곤경에 빠지게 되는 일이었습니다.
    다윗이 한나라의 훌륭한 왕이었지만, 동시에 뒤끝 장난아니었던 사람이었습니다.
    솔로몬에게 요압도 나이 많아 거의 죽을 날이 얼마 남지 않았을 텐데도 불구하고 백발이 성성한 요압이 평안히 죽지 못하게 하라고 합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의 인간 진상 시므이도 제거 대상입니다.
    나이 많은 백발의 시므이도 피를 흘리고 죽어 스올(무덤)에 내려가도록 잘 처리하라고 솔로몬에 당부아닌 당부를 하고는 다윗이 숨을 거둡니다.

    다시, 오늘 본문으로 돌아와서그가 저주하는 것은 여호와께서 그에게 다윗을 저주하라 하심이니 (10절 중반) 시므이가 자신을 저주하는 것은 여호와 하나님께서 명하신 일로 믿고 있습니다. 왜냐면 그는 자신의 죄과를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시편 51편 1-3절의 기록을 보면..(PPT)

    하나님이여 주의 인자를 좇아 나를 긍휼히 여기시며 주의 많은 자비를 좇아 내 죄과를 도말하소서 나의 죄악을 말갛게 씻기시며 나의 죄를 깨끗이 제하소서 대저 나는 죄과를 아오니 내 죄가 항상 내 앞에 있나이다(시51:1-3) 이 시편 51편은 다윗이 밧세바를 범하고 우리야를 교살한 후 나단 선지자가 다윗에게 와 다윗을 책망한 후에 다윗이 회개하며 하나님께 기도한 내용입니다. 다윗은 지난 자신의 죄과를 잘 알고 있었습니다.

    어떤 이유가 있었는지 모르겠지만.. 한나라의 왕으로서 국운이 달린 전쟁에 직접 나서지 않았습니다. 나태하게 궁에 남아 낮잠을 자다 일어나 산책을 하다, 목욕하는 밧세바를 보게 됩니다. 그녀를 보고 음욕을 품은것에 그치지 않고, 왕의 지위를 이용해 그녀를 데려다 통간합니다. 밧세바가 임신하자 남편인 우리야를 데려와 교묘히 일을 꾸미지만 허사로 돌아갑니다. 충직한 우리아를 맹렬한 전장터 맨앞에 보내어 교살 시킵니다. 큰 아들 암논이 다말을 겁탈한 것을 듣고는 그저 버럭 화만 낼뿐 어떤 조치를 취하지 않습니다. 자신의 딸이 어려움을 겪고 있을터인데 딸 다말을 다윗이 위로했다는 소리 못들어 봤습니다. 발바닥부터 정수리까지 흠이없는 외모로는 요셉도, 모세도, 그리고 자신 다윗도 압살하는 압살롬이었기에, 자신의 뒤어 왕위에 올라야 했기에, 죄를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그저 눈감아 버린 것.. 이 모든 일들, 자신의 지난 과오와 죄과를 다윗은 잘 알고 있습니다.

    다윗의 지금 까지 겪어온 일련의 일들은 나단 선지자를 통해 선포된 하나님의 심판이 이루어진 것입니다.

    1. 다윗의 집안에 칼로 인한 재난이 영원토록 떠나지 않게 될 것
    2. 다윗과 다윗의 집에 재앙을 일으킬 것
    3. 다윗의 아내들을 빼앗아 다른 사람들에게 주어 백주 대낮에 동침할 것

    다윗은 은밀하게 그일을 행했지만 하나님은 드러내신다고 하셨습니다.

    예언들은 암논의 다말 강간, 압살롬의 암논 살해, 압살론의 반란과 다윗의 후궁 10명과의 동침, 솔로몬의 아도니아의 처형 사건등으로 이루어졌습니다. (13:1-29, 16:21, 18:14-15, 왕상 2:24-25).

    이는 다윗이 하나님의 은혜를 잊어버리고 탐욕과 거짓, 행음과 살인으로 기울어진 데 대한 다윗 가계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의 결과들입니다.

    죄는 이처럼 무서운 형벌이 뒤따른 사실을 다시금 기억했으면 좋겠습니다. 다윗 한사람의 범죄로 말미암은 결과들이 무섭습니다. 자세한 내막은 알지 못하지만 인구조사를 범죄함으로 3일동안 7만명이나 전염병으로 죽습니다. 아담 한사람의 범죄로 인해 죄가 땅에 들어 옵니다. 7만명이 뭡니까? 모든 사람이 죽게 되는 운명에 처해 집니다.

    그러나 한사람 예수그리스도로 인해 모든 사람이 생명 얻게 되는, 구원얻게되는 길을 여셨습니다.

    영원히 죽을 수 밖에 없던 저와 여러분들을 위해 한분 예수 그리스도, 하나님께서 친히 이땅에 오시어 피흘림이 없이는 사함이 없기에 십자가 피 흘려 주시고 죄사함 받는 길을 열어 놓으셨습니다.

    우리는 너무나 값진 하나님의 약속을 친히 받은 자들입니다. 하나님의 궁극적인 약속 예수그리스도를 선물로, 은혜로 받았습니다. 이 크신 은혜를 저버리고 죄짓고, 정욕과 세상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 옛사람을 다시 입겠습니까? (개) 토한것을 다시먹고, (돼지) 몸을 씻고도 다시 더러운 구덩이에 도로 눕겠습니까? 아니면 오직 심령으로 새롭게 되어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사람을 입겠습니까? 죄의 유혹은 늘 도사리고 있습니다.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고전10:12)고 말씀합니다. 이제 선하신 주님의 음성을 따라, 그 나팔소리를 듣고 구름기둥과 불기둥 바라보면 인도하심만 따라 갑시다.

    다윗과 동일한 하나님을 믿는 우리들이 다른 사람으로부터 이유없는 모진 비방과 인신 공격을 당할 때가 생긴다면 시므이의 저주에 대한 다윗의 반응과 대처를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마음과 뜻을 다시금 헤아려 보고 자신의 모습을 돌아보는 기회로 삼는 믿음의 태도를 유지할 수 있는 믿음을 지켜야 합니다.
    늘 신실하셨던 여호와 하나님께 대한 믿음을 다윗이 고난과 저주가운데에서도 포기하지 않는것, 그것이 또한 여호와 하나님에 대한 저와 여러분의 믿음과 신앙적 대처이기를 기도합니다.

    삶의 모든 순간에, 낙담하고 기막힌 웅덩이와 수렁에 빠져 허우적 거리고 있을 때에라도 여전히 하나님께 대한 소망을 품고, 죄인들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신 주님만 바라며 기도하는 일에 성공하시기 바랍니다.


    4월 11일(금) 사무엘하 13-15장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압살롬의 반역(15:10)

    이에 압살롬이 정탐을 이스라엘 모든 지파 가운데 두루 보내어 이르기를 너희는 나팔소리를 듣거든 곧 부르기를 압살롬헤브론에서 왕이 되었다 하라 하니라.
    Then Absalom sent secret messengers throughout the tribes of Israel to say, "As soon as you hear the sound of the trumpets, then say, 'Absalom is king in Hebron.'

    다윗이 헤브론에서 낳은 아들들

    1. 다윗 + 아히노암(이스르엘 여인) = 암논
     * 친구 <요나답> 다윗의 형 '시므아'의 아들

    2. 다윗 + 아비가일(갈멜사람 나발의 나내) = 길르압
    3. 다윗 + 마아가(그술 왕 달매의 딸) = 압살롬, 다말(딸)
    4. 다윗 + 학깃 = 아도니야
    5. 다윗 + 아비달 = 스바댜


    4년에 이르는 압살롬의 반역 준비와 헤브론에서의 반란 봉기에 대한 기록입니다.

    1. 먼저 1절에 “그 후에 압살롬이 자기를 위하여 병거와 말들을 준비하고 호위병 오십 명을 그 앞에 세우니라”라고 말씀합니다.
    여기서 ‘호위병’이란 왕이 행차할 때 앞서 달리며 길을 여는 병사를 의미합니다.
    압살롬이 이렇게 병거와 말들을 준비하고 거기에 호위병까지 둔 것은, 반역에 필요한 기초적인 병력을 갖춤과 동시에 차기 왕위 계승권자로서의 위용을 과시하기 위함으로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행차는 당시 이스라엘에서는 볼 수 없는 모습이었습니다.
    그러므로 그가 이러한 행동을 한 것은, 당시 이방의 왕들이 자기의 위용을 과시하기 위해 병거를 타고 많은 호위병을 거느리며 행차하는 관례를 모방한 것으로 보입니다.
    압살롬은 3년간 ‘그술’에 머물면서 외조부인 그술 왕의 화려한 행차 모습을 보고서 백성들의 관심을 끌기 위해 그 모습을 흉내 낸 것입니다.

    그러나 압살롬은 신정국가의 왕위 계승자로서 위엄과 신비감을 더하고자 이방의 관습을 끌어들이며 자신을 포장할 것이 아니라, 인품과 경건을 쌓는 모습을 보여야 했습니다.
    그렇게 하는 것이 마땅한 자세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인품과 경건을 훈련하는 대신 외식하는 자의 모습을 보였습니다.
    3-6절에 기록된 것처럼, 사람들 앞에서 자신이 공의롭고 선한 사람인 것처럼 위장함으로써 사람들의 마음을 훔쳤습니다.

  • 거기서 이스라엘 무리가 다윗의 신복들에게 패하매 그 그곳에서 살륙이 커서 이만에 이르렀고
  • 그 땅에서 사면으로 퍼져 싸웠으므로 그 수풀에서 죽은 자가 칼에 죽은 자보다 많았더라
  • 압살롬다윗의 신복과 마주치니라 압살롬이 노새를 탔는데 그 노새가 큰 상수리나무 번성한 가지 아래로 지날 때에 압살롬머리털이 그 상수리나무에 걸리매 저가 공중에 달리고 그 탔던 노새는 그 아래로 빠져나간지라
  • 한 사람이 보고 요압에게 고하여 가로되 내가 보니 압살롬이 상수리나무에 달렸더이다



  • 예나 지금이나 사탄에 속한 악한 사람들은 언제나 자신을 가장 그럴듯하게 포장하는데 힘을 기울입니다.
    그렇게 포장하여 사람들의 마음을 훔치고 그들 위에 군림합니다.
    그를 통해 하나님의 공의를 무너뜨리고, 선으로 위장된 거짓으로 진리를 파괴하고 거짓이 지배하는 세상으로 타락시킵니다.

    압살롬의 미혹에 넘어가 그를 따랐던 사람들도 모두가 결국에는 비참한 결과를 맞이하게 됩니다(18:7-10).

  • 7. 거기서 이스라엘 무리가 다윗의 신복들에게 패하매 그 그곳에서 살륙이 커서 이만에 이르렀고.
  • 8. 그 땅에서 사면으로 퍼져 싸웠으므로 그 수풀에서 죽은 자가 칼에 죽은 자보다 많았더라.
  • 9. 압살롬다윗의 신복과 마주치니라 압살롬이 노새를 탔는데 그 노새가 큰 상수리나무 번성한 가지 아래로 지날 때에 압살롬머리털이 그 상수리나무에 걸리매 저가 공중에 달리고 그 탔던 노새는 그 아래로 빠져나간지라.
  • 10. 한 사람이 보고 요압에게 고하여 가로되 내가 보니 압살롬이 상수리나무에 달렸더이다.

  • 여러분, 우리 예수님은 유대인들이 아무리 자신들을 경건한 자처럼 위장할지라도 그들의 중심에 있는 위선과 악을 정확하게 꿰뚫어 보셨습니다(마 23:25-28).
    그리고 그들을 마귀의 자식들이라고 칭하셨습니다(마 12:34).
    이처럼 세상 사람들은 다 속일 수 있어도 하나님은 속일 수 없습니다.
    결국에는 하나님의 준엄한 심판 앞에 설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말씀과 기도를 통해 사람의 중심을 볼 줄 아는 통찰력을 키워야 합니다.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부끄러울 것이 없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모든 것을 다 갖춘 압살롬이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 사탄의 미혹에 빠져 스스로 멸망의 길을 자초했듯이 우리도 그러한 위기에 빠질 수밖에 없게 될 것입니다.

    3절. 압살롬은 “네 일이 옳고 바르다마는 네 송사를 들을 사람을 왕께서 세우지 아니하셨다”라며 다윗왕에 대한 백성들의 불만을 부추겼습니다.
    이 말을 좀 더 쉽게 번역하자면 “당신 말은 내가 보기에도 옳고 정당하지만 그런 이야기가 왕의 귀에 들어가기나 할 것 같소?”라는 뜻입니다.

    4절에 “내가 이 나라의 재판관이 된다면 소송할 일이 있어 재판을 받으려는 사람은 누구든지 내 앞에 와서 공정한 판결을 받을 것이오”라고 하며 백성들을 선동했습니다.
    압살롬은 백성들에게 자기 아버지인 다윗 왕을 직무 유기자로 무고하게 비방함으로써 백성들과 다윗 사이를 이간질하여 백성들의 마음을 자기에게로 향하도록 만들었습니다.

    5절에, 누가 앞에 와서 그에게 존경의 마음으로 절을 하려고 하면 손을 내밀어 붙잡아 일으키며 입을 맞추어주었다고 말씀합니다.
    당시, 자기에게 엎드려 절하는 자를 일으켜 붙들고 입을 맞추는 행위는 그를 동료나 가족처럼 생각한다는 표시였습니다.
    이러한 압살롬의 겸손한 행동은 그것을 본 사람들에 의해 온 이스라엘로 퍼져가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은 자신의 목숨을 바쳐 믿고 따라도 후회하지 않을 만한 지도자를 만났다는 확신을 갖게 했습니다.

    이처럼 압살롬은 뛰어난 외모와 유려한 말 솜씨, 그리고 거짓된 처세술을 동원하여 당시 다윗 왕에게 불만을 품고 있던 사람들을 자기 편으로 끌어안았습니다.
    그리고 이를 통해 반란의 준비를 해 나갔습니다.
    성경은 이러한 그의 행동을 6절에, “이스라엘 사람의 마음을 압살롬이 훔치니라”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는 마치 성도들과 하나님 사이를 이간하여 성도들을 교회에서 훔쳐가는 악한 마귀와 같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거짓된 사실을 믿게 하여 다윗을 신뢰하는 그들의 마음을 훔쳐갔습니다.

    이시대에도 압살롬과 같은 자들이 우리 주변을 서성입니다.
    뛰어난 외모와 유려한 말 솜씨, 그리고 거짓된 처세술을 동원하여 압살롬처럼 우리의 마음을 훔치려는 자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우리의 마음을 훔쳐서 멸망의 구렁텅이로 몰아세우려고 온갖 수단을 다 사용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깨어 진리와 거짓을 분별하는 지혜를 소유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들의 간계를 깨닫지도 못한 채 망하고 말 것입니다.

    7절 이하에 압살롬은 드디어 반역을 저지릅니다.
    그런데 그는 자신의 악한 목적을 이루기 위해 하나님의 이름까지 서슴없이 도용합니다.
    그는 예전에 암논을 살해할 때도 그러했듯이, 이번에도 4년 동안 은밀하게 반역을 준비해 왔습니다.
    특히, 이 기간 동안에 다윗에게 향해 있던 백성들의 마음을 자기에게로 돌려놓기 위해 온갖 술수를 다 썼습니다.

    14절에 ‘다윗의 모사 길로 사람 아히도벨’까지 포섭했습니다.
    아히도벨은 밧세바의 할아버지로서, 아마도 압살롬은 다윗이 밧세바와 간음하고 우리아를 죽였다는 말을 함으로써 그를 반역에 끌어들였던 것 같습니다. 
    이처럼 모든 반역의 준비를 마친 압살롬은 헤브론으로 가고자 하나님의 이름을 이용하며 다윗을 속입니다.
    자신이 하나님께 서원한 것을 지키기 위해 헤브론으로 간다고 말하면 다윗이 막지 않을 것을 알고 거짓말을 했습니다.
    그는 다윗의 신실한 신앙을 악용했습니다.

    어떠한 일이 있더라도 자신의 이기적인 목적을 이루기 위해 하나님의 이름을 앞세우는 일을 해서는 안 됩니다.
    자신의 사욕을 위하여 하나님의 이름을 앞세우는 것은 사탄적인 행위입니다.
    자기의 이기적인 목적을 이루기 위해 하나님의 이름을 도용하는 것은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직접적으로 훼손하는 중대한 범죄 행위입니다.
    그러므로 그러한 사람은 결코 하나님의 심판을 피하지 못합니다.
    세상에서도 사람의 이름을 함부로 도용하면 형사상 무거운 형벌을 받는데, 하물며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컬으며 그 이름을 더럽히는 자가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수 있겠습니까?
    그들은 압살롬의 경우가 보여주듯이, 당장은 아니라 할지라도 결국에는 하나님의 준엄한 심판을 받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어떠한 경우에도 하나님의 이름을 자신의 사욕을 채우는 도구로 사용하지 말아야 합니다.
    오늘, 성도로서 하나님의 이름과 영광을 훼손하지 않기 위해 더욱 주의하며 삼가하기를 다시 한번 결단하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압살롬의 치밀한 계획과 자기 의로 가득찬 복수심이 실제로 이루어지는 날이 그에게 다가왔습니다.
    아버지 다윗을 설득시켜 헤브론에 가서 자신의 뜻을 세우는데 성공합니다.
    본문 말씀에 보면 ‘자기를 위하여’(1절)라는 구절이 나옵니다.
    압살롬이 하는 모든 일들은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는 것을 확실히 알 수 있는 말씀입니다.

    자기를 위하여 일을 하는 자는 먼저 사람들의 마음을 훔치는 작업을 합니다.(6절)
    그래서 자신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민심을 움직이는데 성공하게 됩니다.
    더욱이 사람들은 압살롬이 꾸민 모든 일을 알지 못하고 그저 따라가기만 했다고 나옵니다.(11절)

    압살롬이라는 인물이 아무리 왕의 아들이라 하고 언변과 지혜가 뛰어나 보일지라도 아무 생각 없이 그를 따라간다는 것은 사람들의 어리석은 군중심리가 얼마나 낭비하는 인생을 살게 하는지 짐작할 수가 있습니다.
    다윗의 모사 아히도벨도 포섭하고 다윗 왕을 모반하는 일에 동참시키는 것을 보면 민심을 움직이는 압살롬의 계략이 탁월하고 시기적절하게 기회를 잘 선택한 것 같습니다.

    나의 삶속에서 압살롬과 같이 내 자신을 위해 일하고 있는 것은 없는지 생각해봅니다.
    하나님의 뜻을 물어보는 것은 뒷전에 미루고 내가 계획을 세우고 이루기 위해 온갖 수단과 방법을 동원한 적은 없는지 살펴보아야겠습니다.

    비록 내가 원하는 방향으로 모든 일들이 진행되고 이루어 진다해도 과연 그것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방향인지 물어보는 기도의 시간이 필요할 것 같습니다.
    압살롬처럼 나를 위하여 내 뜻대로 살아가는 것은 하나님의 방법이 아닌 것 같습니다.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며 살아가는 것이 신자의 도리이고 예수님의 제자다운 삶이라는 생각이 묵상을 하는 가운데 다가옵니다.


    한 눈에 보는 압살롬 이야기(13-18장)

    13장
    / 압살롬이 여동생 다말을 범한 암논을 죽이다.
    14장 / 다윗이 도망간 압살롬을 용서하다
    15장 / 압살롬이 아버지 다윗에게 반역하다
    16장 / 압살롬의 책사 아히도벨의 계략
    17장 /  아히도벨의 계략 실패와 죽음  
    18장 / 압살롬의 죽음과 다윗의 통곡


    이 기도문은 1948년 5월 31일 제헌국회 제1차 본 회의록에 속기된 것으로서 임시의장을 맡으신 이승만 박사는 단장 의장석에 등단하여 전 국회의원들에게 먼저 하나님께 기도하자고 제안하여 이윤영 목사의 기도로 시작된 제헌국회 기도문이다.

    1948년5월31일 제헌국회 제1차 회의록 기록:

    임시의장 이승만 박사가 의장석 등단하여 전 국회의원들에게 먼저 하나님께 기도하자고 제의하고, 이윤영 의원(목사)이 기도했다.

    임시의장 (이승만) :

    대한민국 독립민주국 제1차 회의를 여기서 열게 된 것을 우리가 하나님께 감사해야 할 것입니다.
    종교 사상 무엇을 가지고 있든지, 누구나 오늘을 당해 가지고 사람의 힘만으로만 된 것이라고 우리가 자랑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에게 감사를 드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나는 먼저 우리가 성심으로 일어나서 하나님에게 우리가 감사를 드릴터인데 이윤영의원 나오셔서 간단한 말씀으로 하나님에게 기도를 올려주시기를 바랍니다.

    이윤영 의원 기도 : (일동기립)

    이 우주와 만물을 창조하시고 인간의 역사를 섭리하시는 하나님이시여, 이 민족을 돌아보시고 이 땅에 축복하셔서 감사에 넘치는 오늘이 있게 하심을 주님께 저희들은 성심으로 감사하나이다.
    오랜 세월 동안 이 민족의 고통과 호소를 들으시고 정의의 칼을 빼서 일제의 폭력을 굽히시사 하나님은 이제 세계만방의 양심을 움직이시고 또한 우리 민족의 염원을 들으심으로 이 기쁜 역사적 환희의 날을 이 시간에 우리에게 오게 하심은 하나님의 섭리가 세계만방에 현시하신 것으로 믿나이다.
    하나님이시여, 이로부터 남북이 둘로 갈리어진 이 민족의 어려운 고통과 수치를 신원하여 주시고 우리 민족, 우리 동포가 손을 같이 잡고 웃으며 노래 부르는 날이 우리 앞에 속히 오기를 기도하나이다.
    하나님이시여, 원치 아니한 민생의 도탄은 길면 길수록 이 땅에 악마의 권세가 확대되나 하나님의 거룩하신 영광은 이 땅에 오지 않을 수 없을 줄 저희들은 생각하나이다.
    원컨대, 우리 조선독립과 함께 남북통일을 주시옵고 또한 민생의 복락과 아울러 세계평화를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거룩하신 하나님의 뜻에 의지하여 저희들은 성스럽게 택함을 입어 가지고 글자 그대로 민족의 대표가 되었습니다.
    그러하오나 우리들의 책임이 중차대한 것을 저희들은 느끼고 우리 자신이 진실로 무력한 것을 생각할 때 지와 인과 용과 모든 덕의 근원되시는 하나님께 이러한 요소를 저희들이 간구하나이다.
    이제 이로부터 국회가 성립되어서 우리 민족의 염원이 되는 모든 세계만방이 주시하고 기다리는 우리의 모든 문제가 원만히 해결되며 또한 이로부터 우리의 완전 자주독립이 이 땅에 오며 자손만대에 빛나고 푸르른 역사를 저희들이 정하는 이 사업을 완수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하나님, 이 회의를 사회하시는 의장으로부터 모든 우리 의원 일동에게 건강을 주시옵고, 또한 여기서 양심의 정의와 위신을 가지고 이 업무를 완수하게 도와주시옵기를 기도하나이다.
    역사의 첫걸음을 걷는 오늘의 우리의 환희와 감격에 넘치는 이 민족적 기쁨을 다 하나님에게 영광과 감사를 올리나이다.

    이 모든 말씀을 주 예수 그리스도 이름 받들어 기도하나이다. 아멘.












    사무엘하 15장은 압살롬이 아버지 다윗을 반역한 내용과 다윗이 도망간 내용입니다.

    압살롬은, 자기가 탈 수레와 말 여러 필을 마련하고, 호위병도 50명이나 거느렸습니다.
    압살롬은 아침마다 일찍 일어나서, 성문으로 들어오는 길 가에 서 있으면서 소송할 일이 있어서, 판결을 받으려고 왕을 찾아오는 사람들을 만나기 시작했습니다.

    압살롬은 그들을 만난 자리에서 억울하고 힘든 상황을 들어주면서 다윗 왕을 헐뜯기 시작했습니다.
    다윗 왕이 백성들이 가지고 오는 모든 송사를 다 들어줄 수 없을 뿐만 아니라, 백성들이 당한 억울한 일을 대신 풀어줄 사람도 다윗이 세우지 않았다고 말했습니다.
    대신에 자신이 나라의 재판관이 되면, 자기가 나서서 공정하게 판결할 거라고 말했습니다.

    또 누가 가까이 와서, 엎드려서 절을 하려고 하면, 그는 손을 내밀어서, 그를 일으켜 세우고, 그의 뺨에 입을 맞추곤 하였습니다.
    압살롬은, 왕에게 판결을 받으려고 오는 모든 이스라엘 사람에게 이런 식으로 하였습니다.
    압살롬은 이렇게 하여서, 이스라엘 사람의 마음을 사로잡았습니다.
    다윗에 대한 불만은 쌓여가고 압살롬에 대한 인기는 높아만 갔습니다. 

    압살롬의 반역, 그 시작은 아주 사소한 일 때문입니다.
    압살롬은 이해 받고 싶었고, 사랑 받고 싶은 아들이었습니다.
    압살롬은 아버지의 사랑을 받고 싶은 아들이었습니다.
    압살롬의 반역은 아버지 다윗의 무관심 때문입니다.
    아버지의 부재, 사랑 결핍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아들 압살롬을 살인자에 반역자가 되게 했습니다.

    니체, 프로이트, 버드란트 러셀, 샤르트르, 카뮈 같은 유명한 철학자들과 대표적인 지성인들이 종교와 관련하여 갖고 있는 공통점은 무엇일까요?
    방금 언급된 사람들이 모두 무신론자들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과 관련하여 이들 사이에는 또 하나의 공통점이 있습니다.
    그건 바로 이들 모두가 한결같이 아버지를 일찍 여의였거나, 설령 있었다고 해도 아버지와의 관계가 정상적이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들에게는 모두 아버지로부터 받은 상처가 있었습니다.

    ‘폴 비츠’라는 저명한 심리학자요 뉴욕대학교 심리학교수가 있습니다.
    폴 비츠는 무신론자들의 성장 배경 연구를 통해 무신론과 심리학의 관계를 설정하는 새로운 시도를 한 사람입니다.
    그가 쓴 유명한 책이 《Faith of the fatherless》, ‘아버지가 없는 사람들의 믿음’입니다.

    그의 말에 따르면, 무신론자는 신이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아니라, 신이 없다고 믿는 사람들입니다.
    무신론을 주장하는 무신론자들의 심리적 배후에는 아버지에 대한 온갖 상처와 안 좋은 기억들, 부정적 태도가 있다는 것이 그의 주장입니다.

    아버지를 일찍 여의고 아버지의 사랑을 제대로 받아 보지 못한 아이들은 성장하면서 지나친 분노와 열등감에 빠집니다.
    하나님을 아버지로 받아들이는 데 상당한 어려움을 겪습니다.
    아버지가 옆에 있지만 아버지와의 따뜻한 대화나 스킨십이 없었던 아이들 역시 성격이 삐뚤어지고, 폭력적으로 변한다고 합니다.

    ​사무엘하 15:7-12절은 압살롬이 반역을 일으켜 헤브론에서 왕이 된 이야기입니다.

    이렇게 4년이 지났습니다.
    압살롬의 인기는 점점 높아만 갔고, 다윗에 대한 지지도는 점점 떨어지고 있었습니다.
    압살롬은 이제 자신의 생각을 행동으로 옮길 때가 되었다고 생각했습니다.

    압살롬은 왕에게 헤브론에 가서 제사를 드리고 오겠다고 말했습니다.
    압살롬이 외할아버지 집에 머물 때에 하나님께 서원한 것이 있었다고 뻥을 칩니다. 압살롬이 시리아의 그술(외할아버지 집)에 머물 때에, 여호와 자기를 다시 예루살렘로 돌려보내 주기만 하시면, 헤브론으로 가서 여호와께 예배를 드리겠다고 서원했다는 겁니다.

    다윗은 압살롬의 말을 찰떡같이 믿었습니다.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겠다는데 막을 수 있습니까? 하나님께 한 서원을 갚겠다고 하는데 안 보낼 수 있습니까? 그래서 압살롬의 요청을 듣고 보낸 거지요. 다윗의 허락을 받은 압살롬은 곧바로 헤브론으로 내려갔습니다.

    그러나 압살롬은 이스라엘의 모든 지파에게 첩자들을 보내서, 나팔 소리가 나거든 압살롬이 헤브론에서 왕이 되었다!” 하고 외치라고 하였습니다. 그 때에 200명이 압살롬과 함께 예루살렘에서 헤브론으로 내려갔습니다.

    압살롬을 따라 예루살렘에서 헤브론으로 간 사람들은 아무 것도 모르고 그냥 따라간 사람들입니다. 압살롬의 손님으로 초청받은 것일 뿐이며, 압살롬의 음모를 전혀 알지 못한 채로, 그저 따라가기만 한 사람들입니다. 이들은 다윗에게 큰 해를 입힐 사람들은 아닙니다.

    압살롬은 또 사람을 보내서, 다윗의 참모이던 길로 사람 아히도벨을 그의 성읍인 길로에서 올라오라고 초청하였습니다. 아히도벨이 다윗에게 큰 위협이 될 인물입니다. 머리가 아주 비상한 사람입니다. 아히도벨은 길로에서 정규적인 제사 일을 맡아 보고 있었습니다. 이렇게 반란 세력이 점점 커지니, 압살롬을 따르는 백성도 점점 더 많아졌습니다.

    사무엘하 15:13-18절은 압살롬이 반역한 소식을 듣고 다윗이 도망친 내용입니다.


    전령 한 사람이 다윗에게 와서 이스라엘 백성의 마음이 모두 압살롬에게로 기울어졌다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다윗은 예루살렘에 있는 모든 신하에게 서둘러, 모두 여기에서 도망가자고 말했습니다. 머뭇거리다가는 아무도 압살롬의 손에서 살아 남지 못할 것이라고 말합니다. 당연히 신하들도 사태의 심각성을 알기에 다윗의 말에 순종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왕은 왕궁을 지킬 후궁 열 명만 남겨 놓고, 온 가족을 거느리고 예루살렘을 떠났습니다. 왕이 먼저 가고, 모든 백성이 뒤를 따라 나섰습니다. 그들은 벧메르학에 이르자, 모두 멈추었습니다. 왕의 신하들이 모두 왕 곁에 서 있는 동안에, 모든 그렛 사람과 모든 블렛 사람이 왕 앞으로 지나갔습니다. 가드에서부터 왕을 따라 온 모든 가드 군인 600명도 왕 앞으로 지나갔습니다.

    사무엘하 15:19-23절은 도망가는 다윗을 따라 나선 가드 사람 잇대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잇대는 블레셋 가드 출신의 군인입니다. 다윗이 이스라엘의 왕이 되기 전부터 함께 하던 사람인 것 같습니다. 사울을 피해 가드 왕 아기스에게로 피했을 때 만난 사람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잇대는 사울을 피해 도망 다닐 때, 다윗 곁에서 큰 힘이 되어준 사람입니다.

    다윗은 잇대가 얼마나 귀한 사람인지 잘 알고 있습니다. 여기저기 도망 다니며 함께 고생해봤기 때문에 지금 이 길이 얼마나 힘든 길인지 잘 압니다. 그래서 다윗은 잇대에게 자신을 따르지 말고 돌아가라고 말합니다. 새 왕을 모시고 사는 게 편할 거라고 말합니다. 다윗은 여호와께서 은혜와 진실하심으로 잇대와 함께 해달라고 간절히 기도해줍니다.

    그러나 잇대는 다윗과 생각이 달랐습니다. 잇대를 보는 순간, 한 여인이 떠오릅니다. 자기를 따르지 말고 친정으로 돌아가라는 나오미의 말에 죽어도 어머니를 따르겠다고 대답한 며느리 룻 말입니다. 잇대는 룻 처럼 여호와의 살아계심과 다윗 왕의 살아계심을 두고 맹세합니다. 임금님께서 가시는 곳이면, 살든지 죽든지, 자신도 따라가겠다고요!

    그리하여 가드 사람 잇대도 자기의 부하들과 자기에게 딸린 아이들을 모두 거느리고 다윗과 함께 건너 갔습니다. 물론 잇대가 가장 먼저 건너갔지요. 이렇게 해서, 다윗의 부하들이 모두 그의 앞을 지나갈 때에, 온 땅이 울음 바다가 되었습니다. 왕이 기드론 시내를 건너 가니, 그의 부하도 모두 그의 앞을 지나서, 광야 쪽으로 행군하였습니다.

    사무엘하 15:24-29은 다윗이 자기를 따르겠다고 언약궤를 들고 온 제사장 사독과 아비아달을 돌려보내는 내용입니다.

    압살롬이 반역해서 도망가는 중인데, 사실 한 사람이 귀한 때 아닙니까? 제사장 사독과 아비아달이 함께 가면 백성들의 지지를 얻기가 더 쉽습니다. 그런데 다윗은 제사장 사독과 아비아들을 예루살렘으로 돌려보냅니다.

    여호와의 언약궤는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합니다. 사울이 블레셋과 전쟁할 때 이기기 위해 여호와의 언약궤를 가지고 갔습니다. 제사장 사독과 아비아달은 비록 다윗이 압살롬의 반역으로 도망가고 있지만 여호와의 언약궤를 가진 자가 승리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사독과 아비아달이 언약궤를 들고 다윗에게 왔는데, 다윗은 언약궤를 가지고 예루살렘으로 돌아가라고 했습니다. 언약궤가 있으면 큰 힘이 됩니다. 제사장 사독과 아비아달이 곁에 있으면 큰 도움이 됩니다. 하지만 다윗은 자신의 이익보다 하나님의 뜻을 먼저 구합니다. 다윗은 하나님께서 하실 일을 기대하는 믿음의 사람입니다.

    다윗이 사독에게 말한 것을 보세요. 다윗의 믿음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궤를 다시 도성 안으로 옮기시오. 내가 주께 은혜를 입으면, 주께서 나를 다시 돌려보내 주셔서, 이 궤와, 이 궤가 있는 곳을, 다시 보게 하실 것이오. 그러나 주께서 나를 싫다고 하시면, 오직 주께서 바라시는 대로 나에게서 이루시기를 빌 수밖에 없소.”

    다윗은 제사장 사독에게 자신을 따르지 말고 돌아가라고 말하였습니다. 사독 혼자 돌아가라고 한 게 아닙니다. 제사장 사독과 아비아달 뿐만 아니라, 사독의 아들 아히마아스와 아비아달의 아들 요나단도 데리고 가라고 말했습니다. 일이 어떻게 진행되는지 광야 나루터에서 기다리고 있을 테니까 두 아들을 통해 소식을 전해달라고 부탁합니다.

    그리하여 사독은, 아비아달과 함께 하나님의 궤를 다시 예루살렘으로 옮겨다 놓고서, 그 곳에 머물러 있었습니다. 그 시간 다윗은 무엇을 하고 있었을까요? 기드론 시내를 건너 광야길로 걷다가 이제 감람 산길로 올라가고 있었습니다. 그의 머리를 가리고 맨발로 울면서...

    사무엘하 15:30-31은 울면서 도망치는 다윗 이야기

    다윗은 올리브 산 언덕으로 올라갔습니다.
    그는 올라가면서 계속하여 울고, 머리를 가리고 슬퍼하면서, 맨발로 걸어서 갔습니다.
    다윗과 함께 있는 백성들도 모두 머리를 가리고 울면서, 언덕으로 올라갔습니다.

    그 때에 누가 다윗에게, 압살롬과 함께 반역한 사람들 가운데는 아히도벨도 끼어 있다는 말을 전해주었습니다.
    이거 큰 일 났습니다.
    아히도벨, 그 놈 머리가 아주 비상하거든요.
    그때 다윗이 한 일은 기도입니다. 다윗은 다급한 상황에서 하나님께 기도하였습니다.

    “하나님, 부디, 아히도벨의 계획이 어리석은 것이 되게 하여 주십시오.”

    사무엘하 15:32-37절은 다윗의 친구 후새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후새는 장차 아히도벨의 모략을 무너뜨리는데 혁혁한 공을 세울 인물입니다.
    다윗이, 하나님을 경배하는 산 꼭대기에 이를 때에, 아렉 사람 후새가 슬픔을 못 이겨서 겉옷을 찢고, 머리에 흙을 뒤집어 쓴 채로 나아와서 다윗을 맞이했습니다. 후새가 다윗을 따라가려고 온 겁니다.

    하지만 다윗의 생각은 달랐습니다. 다윗은 후새에게 자기와 함께 떠나면, 짐만 될 거라고 예루살렘 성으로 돌아가라고 말했습니다. 압살롬을 만나거든, 그를 임금님으로 받들고, 이제부터는 새 임금의 종이 되겠다고 말하라고 시켰습니다.

    이제까지는 압살롬의 아버지 다윗을 섬기는 종이었으나, 이제부터는 다윗의 아들, 새 임금 압살롬의 종이 되겠다고 말하라고 시켰습니다. 그것이 다윗을 돕는 길이고, 아히도벨의 계획을 실패로 돌아가게 하는 길이라고 하면서요.

    후새를 남겨두는 것, 이것이 아히도벨의 모략을 무너뜨릴 하나님의 놀라운 방법이었습니다. 다윗은 후새에게 그 중요한 일을 맡기고 보내면서 그 곳에 가면, 제사장 사독과 아비아달이 도와줄 거라고 말했습니다. 다윗은 후새에게 예루살렘으로 돌아가서 아히도벨의 모략을듣고 제사장 사독과 아비아달에게 전해주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면, 제사장들은 자기 아들들에게 그 말을 전해주고, 제사장의 아들 아히마아스와 요나단은 그 말을 다윗에게 전하게 됩니다. 하늘이 무너져도 쏟아날 구멍은 있는 법입니다. 하나님께서 아히도벨을 무너뜨릴 드림 팀을 준비해두셨습니다. 아히도벨을 무너뜨릴 드림 팀은 후새와 제사장 사독과 아비아달, 제사장의 두 아들 아히마아스와 요나단입니다.

    다윗의 계획을 다 들은 후, 다윗의 친구인 후새는 성으로 들어갔습니다. 같은 시간에 압살롬도 예루살렘에 도착하였습니다. 압살롬은 어디에 있다고 예루살렘으로 온 겁니까? 압살롬이 헤브론에서 왕이 되었잖아요? 다윗은 왕궁을 버리고 도망치고 있고, 압살롬은 의기양양하게 예루살렘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리고 그 다음 이야기는 내일 함께 나누겠습니다.

    적용 질문  /  아히도벨이 반역한 압살롬을 도와 다윗을 무너뜨리려고 하는데, 다윗이 자기를 따르겠다고 언약궤를 들고 온 제사장 사독과 아비아달을 돌려보낸 이유는 무엇입니까?



    압살롬의 반역과 다윗의 심정

    압살롬 반역이야기는 사무엘하 15장부터 19장까지 장황하게 이어진다.

    압살롬에 대한 우리의 편견은 썩 좋지 않은데 왜 그렇게 장황하게 기록하고 있을까?
    압살롬 반역이야기보다도 다윗의 심정을 말하려는 것은 아닐까?
    얼핏 보기에는 다윗의 심정을 파악하기 어렵다.
    그러나 하나님의 마음과 합한 다윗을 서술하는 글이기에 분명 다윗의 심정이 잘 나타나 있으리라 믿고 찾아볼 필요가 있다.

    압살롬 반역 이야기를 대충 요약해보고 이어서 다윗의 심정을 분석해보고자 한다.

    다윗은 예루살렘 왕이 된 후 하나님으로부터 언약을 받는다.
    천국과 같은 살게 됨을 뜻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밧세바를 범하고 그의 남편을 죽게 하였다.
    단순한 음행 사건이라 치부하기에는 너무나 큰 사건이며, 우리아를 죽인 사건은 역시 그렇다.
    보다 깊이 들여다 볼 때 아담과 가인의 범죄를 섞어놓은 듯한 느낌이 든다.
    새로운 창조세계를 시작할 때 범해버린 원죄와 같은 것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다.

    다윗은 그 후 큰 아들 암논에 의한 다말의 강간 사건을 경험하고 이어 다말의 동생인 압살롬에 의해 암논이 죽게 하는 사건을 경험한다. 어쩌면 다윗 본인의 범죄를 바라보았던 하나님의 심정을 다윗은 느꼈을 것이고 잘못을 깊이 뉘우쳤을 것이다.
    더욱이 이 사건은 다윗의 왕권을 이을 왕주들의 다툼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세월이 흘러 다윗이 이제 60세 쯤 되었다.
    압살롬의 반역으로 새로운 시련을 겪는다.
    왕권에 대한 압살롬의 욕심이 담겨진 이야기이다.
    이 압살롬의 반역이야기가 사무엘하 14장부터 시작하여 압살롬이 죽음을 기록한 19장까지 전개된다.
    13장에서 시작된 압살롬의 이야기의 연속이며, 20장에 언급한 세바 반역 사건과도 연관이 되니 압살롬의 이야기는 장황한 편이다.

    왜 압살롬 반역 사건을 그렇게 장황하게 말하는 것일까?
    역대기에는 기록하지 않았기에 열왕기 기자는 특별한 기록의 목적이 있으리라 여겨진다.
    우선 생각해볼 때 압살롬의 반역사건은 다윗의 범죄함에 따른 징계로 생각할 수 있다.
    신명기적 구속사의 특징이기 때문이다.
    또 다른 목적을 생각해본다면, 다윗의 범죄함을 바라보았던 여호와 하나님의 심정을 다윗에게 알게 하기 위해서 아닐까?
    징계가 “하나님의 아들됨”을 가르치는 것이라면 단순한 징벌의 의미를 넘어서 깨닫게 하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따라서 본고는 압살롬의 반역 사건을 겪는 다윗의 심정을 찾아보는데 그 목적이 있다.

    압살롬의 반역 사건의 시작은 압살롬이 예루살렘으로 돌아오는 것으로 시작된다.
    요압의 도움으로 돌아온다.
    그런데 다윗과의 만남이 없어 다윗과 압살롬과의 긴장감을 성경 기자는 지적한다.
    다윗은 분명 마아가 가문의 권세를 인식하고 있었기에 압살롬을 다음 왕이 될 수 있는 세자로 여겼을 수도, 하나님의 뜻을 알기에 압살롬이 왕이 될 수 없음 역시 알고 있었을 수 있다.
    훗날 솔로몬이 왕이 되었기에 압살롬은 왕이 될 수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당대에 다윗의 마음은 두 갈래였을 것이다.
    솔로몬은 초등학생 저학년 정도의 어린 나이였기 때문이다.

    압살롬은 당대의 군대장이었던 요압 장군에 의지하였다. 요압장군을 포섭하고자 하였는데, 요압 장군 역시 다윗의 심중을 잘 알지 못하는 터라 다윗과 압살롬 사이에서 망설일 수밖에 없다. 몇 차례 요압에게 전갈을 보냈으나 연락이 없자, 밭에 있는 보리에 불을 지른다. 이 사건은 단순한 에피소드가 아니라 압살롬이 요압을 회유하여 완전히 자기편으로 강압적으로 만드는 과정을 기록한 것이다.

    사무엘하 15장은 본격적으로 반역의 길을 걸어가는 압살롬 이야기가 전개된다.

    압살롬은 이스라엘 사람의 마음을 훔쳤다라고 말하고 있다(삼하 15:6).
    다윗의 권위보다 압살롬의 권위를 이스라엘 사람들이 더 크게 여겼다는 의미이다.
    그게 가능할까?
    다윗의 나이 60세 쯤 되었고, 압살롬은 28, 29세 쯤 되었을 텐데 말이다.
    어쩌면 전술한 바와 같이 압살롬의 집 마아가의 권세가 대단했기에 가능하지 않았을까?
    다윗이 어느 정도 압살롬을 세자로 인정하였기 때문이 아닐까(물론 완전한 세자로 인정하지 않았지만)?
    특히 3절에서 다윗이 백성들의 하소연(송사)를 들어줄 자를 세워주지 않았기에 압살롬이 그 이야기를 들어줄 자임을 강조한다.
    압살롬의 계략은 성공적이었다.
    다윗은 그런 압살롬을 지지해주었던 모양이다.
    압살롬은 헤브론 왕이 되겠다고 하자 다윗 역시 그 청을 들어주었다.
    어쩌면 후대 왕으로 삼기 위한 과정으로 여겼을 수 있지 않았을까?

    그런데 그런 다윗의 마음과 달리 압살롬은 예루살렘 왕궁마저도 아버지 다윗에게서 빼앗으려 하게 된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인정을 받았고 헤브론에서 왕이 되는 더욱 욕심이 생겼나보다.
    결국 다윗은 예루살렘을 도망치게 되었다.
    다윗이 압살롬에게 쫓기며 도망 다니는 생활은 신학적으로 어떤 의미를 담으려 했을 것인가?

    15장 17절에 “벧메르학”이라는 지역 이름이 나온다.
    뜻은 “집에서 먼 곳” 즉 “먼 궁”의 의미이다.
    그런데 실제 그곳은 기드론 시내(골짜기)를 건너기 이전의 장소이기에 다윗 왕궁에서 멀지 않은 곳이다(다윗궁은 예루살렘 성전터 아래에 있으며 바로 옆이 기드론 골짜기(시내)이다).
    벧메르학은 다윗 성에서 떠나는 다윗의 심정을 표현하기 위해 사용한 용어이다.

    더욱 중요한 구절은 23절이다

    온 땅 사람이 큰 소리로 울며 모든 백성이 앞서 건너가매 왕도 기드론 시내를 건너가니 건너간 모든 백성이 광야길로 향하니라(삼하 15:23).

    온 땅 사람이 큰소리로 울었다고 말한다.
    온 땅은 오늘날로 말하면 교회를 의미한다.
    예루살렘을 떠나야만 하는 교회가 되었고, 모든 백성과 다윗 왕은 기드론 시내를 건너야만 한다.
    건너면 광야이다.
    실제 기드론 시내(골짜기)를 건너면 감람산이기에 예수님께서 감람산에 오르거나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시기 위해 건너가셨던 일들을 생각나게 한다.
    기드론 시내를 건너면 한적한 곳이라는 의미이고 그곳을 광야라 칭한다(누가복음에서 한적한 곳과 광야는 같은 용어이다).
    그곳은 기도하시던 곳인 셈이다.
    다윗이 기드론 시내를 건너는 것은 바로 하나님의 뜻을 알기 위한 삶을 의미하리라.
    “건너가다(아바르)” 신학은 히브리인의 정체성이요, 기독교의 핵심적인 가치일 수 있다.
    다윗의 도피생활은 “건너가야” 만날 수 있는 여호와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생활로 기자는 기록했으리라 여겨진다.
    마치 홍해를 건너야만 광야가 나오고, 광야에서 다시 요단강을 건너야 예루살렘에 입성할 수 있다.
    다윗과 그를 따르는 자들은 요단강을 다시 건너며 최종적으로 요단강을 다시 건너 돌아옴으로써 예루살렘으로 귀환함으로써 압살롬의 이야기는 마무리되는 이유는 거기에 있다.

    기드론 시내를 건너간 다윗은 시련이 뒤따른다.
    므비보셋의 종 시바가 거짓으로 다윗을 아프게 한다(삼하 16:3).
    므비보셋은 요나단의 아들이 아닌가?
    아들처럼 함께 식사를 하였던 그가 사울 왕정의 복원을 꿈꾸며 반역하였다는 이야기에 커다란 아픔을 경험하게 된 것이다.
    또한 사울의 친족 시므이의 저주를 듣게 된다.
    시므이 역시 베냐민 지파이면서 사울의 친족이다.
    돌을 던지며 강한 저주를 퍼부었다.
    시바의 거짓말이나 시므이의 저주는 사울 왕정의 복원을 꿈꾸었던 베냐민지파의 저주이며, 압살롬은 베냐민 지파의 세력을 등에 업고 반역을 일으켰음을 의미한다.

    다윗의 더 큰 아픔은 그에게 큰 가르침을 주었던 모사 아히도벨의 배반이다.
    아히도벨은 아내 밧세바의 조부이면서 자신의 가장 가까운 스승과 같은 존재이다.
    뿐만 아니라 함께 전장터에서 생사고락을 같이 했던 용사이자 친구였던 엘리암의 아버지가 아닌가?
    그가 자신을 미워하며 배반하게 될 줄 몰랐다.
    아마도 밧세바의 전 남편 우리아를 죽인 다윗에 대한 증오심이 있었던 모양이다.
    아이도벨은 압살롬에게 다윗의 후궁들과 동침하라고 말한다.
    고대 근동의 역사를 볼 때 전쟁에서 승리를 거둔 후 있을 수 있는 관행이었으니, 그와 같은 행위는 압살롬이 왕이 되었음을 선포하는 행위인 셈이며, 다윗에게는 치욕적인 일이 아닐 수 없다.

    ​다행히 동행하는 이들도 있었기에 견딜 수 있었다.
    그들은 목숨까지 받칠 수 있는 이방인 출신이다.
    잇대가 그렇고 후새가 그렇다.
    그리고 오랜 세월 함께 했던 그렛 사람, 블레셋 사람, 가드 사람 육백 명이 다윗의 호위병이 되었다.

    다윗이 요단을 건너가게 되고 마하나임에 이른다.
    마하나임은 어디인가?
    야곱이 하란에서 돌아올 때 천사를 만난 곳이 아닌가?
    다윗 역시 이곳에서 암몬 족속 나하스의 아들 소비와 도데발 사람 암미엘의 아들 마길과 로글림 길르앗 사람 바르실래가 찾아와 환대를 한다(삼하 17:27-29).
    그들은 하나님께서 보낸 천사와 같지 아니한가. 하나님의 은혜를 느끼게 하는 구절이다.
    다윗은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경험하였다.
    성경 기자는 그것을 강조하고 있는 셈이다.

    압살롬과의 전투에서 압살롬은 죽게 되고 다윗이 승리를 거둔다.
    압살롬의 죽음에 대한 묘사가 참으로 흥미롭다.


    사무엘하 18:9
    압살롬이 노새를 탔는데 노새가 큰 상수리 나무 번성한 가지 아래로 지날 때에 압살롬의 머리가 그 상수리 나무에 걸리매 그가 공중과 그 땅 사이에 달리고 그가 탔던 노새가 그 이래로 빠져 나간지라.

    노새, 상수리 나무 가지에 머리가 걸리고, 공중과 땅 사이 등 묘사에 사용한 단어들이 재미있다.
    노새는 귀인이나 왕이 탄다.
    상수리나무는 성스러움을 표현한다.
    머리는 왕권을 의미한다.
    공중은 하늘이며 땅은 세상이다.

    그 모습을 상상해볼 때, 왕권에 대한 욕심이 결국 죽음에 이르게 하였음을 묘사하는 것으로 여겨진다.
    압살롬의 죽음은 하나님의 도우심을 다윗이 회복하게 됨을 말하고 있다.

    기자는 다윗이 아들 압살롬의 반역을 어떻게 극복하였는지를 설명하려 했을 것이다. 그것은 다윗이야말로 하나님의 마음과 합한 자이기 때문이다. 다윗이 하나님의 마음을 닮아가려 한 구절만을 다시 찾아보겠다.

    다윗 왕궁에서 도망칠 때의 일이다.
    사독 제사장과 아비아달 제사장이 레위 사람들과 언약궤를 메고 나와 뒤따른다.
    그 때에 다윗은 사독에게 명령한다.
    그 언약궤를 다시 가져가라고.

    사무엘하 15:25
    하나님의 궤를 성읍으로 도로 메어가라. 만일 내가 여호와 앞에서 은혜를 입으면 도로 나를 인도하사  내게 그 궤와 그 계신 데로 보이시리라.

    다윗의 명령은 마치 예언처럼 들리지 않은가?
    여호와 하나님의 언약에 대한 신뢰를 분명히 보여주는 회복의 메시지로 들린다.
    또한 아히도벨이 압살롬과 합류하였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다윗은 기도한다.

    여호와여 원하옵건대 아히도벨의 모략을 어리석게 하옵소서 하니라.(삼하 15:31)

    “어리석음”은 세상적 지식으로서의 지혜이다.
    여호와 하나님의 입장에서 볼 때 어리석은 지혜일 뿐이다.
    아히도벨의 모략은 다윗 한 사람만을 죽이면 이스라엘 전체를 얻을 수 있다는 것으로 세상적으로 볼 때 참으로 탁월한 지혜인 셈이다.
    그러나 다윗의 편에 서서 스파이로 침투한 후새는 이스라엘 백성의 마음을 얻어야 하는 게 우선이라 말하여 압살롬은 후새의 계략을 좋아한다.
    이는 하나님의 마음인 셈이며, 하나님 나라의 원리인 셈이다.
    결국 다윗은 죽음에서 모면하고 아히도벨은 자결을 하는 결과를 낳는다.

    세 번째 다윗의 마음을 읽을 수 있는 대목은 시므이가 저주를 퍼부었을 때의 일이다.
    시므이를 충분히 죽일 수 있었지만 죽이려는 장군 아비새에게 명한다.

    그(시므이)가 저주하는 것은 여호와께서 그에게 다윗을 저주하라 하심이니 ......(삼하 16:10)

    사실 아들 압살롬이 다윗 자신을 저주하고 죽이려하는데 하물며 베냐민지파는 오죽하였으랴. 다윗은 여호와 하나님의 뜻이라 여겼다. 자신의 행위에 대해 여호와께서 참으며 언약 백성으로 거듭나도록 지켜 봐 주셨기에 다윗 역시 여호와의 마음을 닮고자 했을 것이다.

    네 번째 압살롬과의 전쟁에서 승리를 눈앞에 두었을 때의 일이다. 아들 압살롬을 죽이지 말고 잘 대우해주라고 말했으며, 또한 압살롬이 죽자 “압살롬 내 아들아, 압살롬 내 아들아”하고 다윗은 울음을 그치지 않는다. 사도세자를 쌀 뒤지에 가두어 죽였던 영조의 마음과 전혀 다른 이야기이다. 아들이 반역자라고 생각하면 죽여야만 마땅하지만 다윗은 달랐다.

    다윗은 아들 압살롬에게 반역을 당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럼에도 삶에 ‘예’라고 답했다. 여호와 하나님의 징계임을 알았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메고 골도다 언덕을 오르실 때의 모습과 똑같은 상황으로 여겨진다. 돌을 던지는 예루살렘 백성에게, 자신을 죽이려하는 유대교 지도자들에게 불평한 말씀 안하시고 발이 부르트고 피가 나오는 상황 속에서 여호와 하나님의 뜻임을 깨닫는다.

    내 원대로 마옵시고 하나님의 뜻대로 하옵소서.

    압살롬의 이야기를 장황하게 기록한 목적은 후대 예수 그리스도의 삶처럼 다윗의 삶의 모습을 강조하기 위한 것이 아닐까?
    죄인인 인간을 바라보는 여호와 하나님의 마음을 압살롬의 반역을 바라보는 다윗의 심정을 통하여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전하고자 하는 것이 아닐까?











    4월 10일(목) 사무엘하 10-12장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다윗의 소위(11:27)

    그 장사를 마치매 다윗이 보내어 저를 궁으로 데려 오니 저가 그 처가 되어 아들을 낳으니라 다윗의 소위가 여호와 보시기에 악하였더라.
    After the time of mourning was over, David had her brought to his house, and she became his wife and bore him a son. But the thing David had done displeased the LORD.


    다윗의 소위(所爲)

    (현대인) 다윗이 행한 일
    (새번역) 다윗이 한 이번 일
    (공동번역) 다위이 한 이일
    (새한글) 다윗이 했던 이 일
    (NIV) David had done displeased(다윗이 불쾌하게 행했다)
    (NASB) David had done was evil(다윗이 행한 일은 악했다)
    (KJV) David had done displeased(다윗이 불쾌하게 행했다)



    다윗 왕의 범죄 - 간음(사무엘하 11:2-4)

    요압에게 내린 다윗의 지령

    우리아를 밧세바와 동침시켜 자신의 범죄를 은폐하려는 계획이 실패로 돌아가자, 다윗은 또 다른 악한 계획을 세웁니다.
    그것은 우리아를 죽이는 계획이었습니다.
    다윗은 우리아가 전쟁터로 돌아갈 때 요압에게 쓴 편지를 맡깁니다.
    그 내용은 맹렬한 싸움에서 우리아를 앞세우고 후퇴하여 우리아를 전사케 하라는 지시였습니다.
    요압은 다윗의 명령에 따라 우리아를 전사케 합니다.
    우리아는 아무 죄도 없이 다윗의 악한 궤계에 따라 죽음을 당하였던 것입니다.

    솔로몬의 사자 브나야에게 살해당하는 요압

    열왕기상 2:33-34
    저희의 피는 영영히 요압의 머리와 그 자손의 머리로 돌아갈지라도 다윗과 그 자손과 그 집과 그 위에는 여호와께로 말미암은 평강이 영원히 있으리라 여호야다의 아들 브나야가 곧 올라가서 저를 쳐 죽이매 저가 거친 땅에 있는 자기의 집에 매장되니라.

    우리아의 전사 소식을 전하는 요압

    요압은 다윗의 지시를 좇아 우리아를 죽게 한 후에 사자를 다윗에게 보내어 우리아의 전사 소식을 전하게 했습니다.
    우리아의 전사 소식을 전해 들은 다윗은 마음 속으로 기뻐하였을 것입니다.
    다윗은 우리아의 장사가 마치매 밧세바를 궁으로 데려와 자신의 아내로 삼습니다.
    밧세바의 임신 때문에 시간을 지체할 수 없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전투 결과의 보고
    사무엘하 12:27
    사자를 다윗에게 보내어 가로되 내가 랍바 곧 물들의 성을 쳐서 취하게 되었으니.

    여호와 보시기에 악한 다윗의 소위

    다윗은 간음죄를 범하고 그 죄를 숨기기 위하여 살인죄까지 범하게 되었습니다. 죄는 더 큰 죄를 잉태하는 것입니다. 사무엘서 기자는 다윗의 소위가 여호와 보시기에 악하였더라고 기록하였습니다. 다윗은 모든 사람에 대해서는 완전 범죄를 했을지 모르지만, 여호와께서는 그의 모든 생각과 행위를 감찰하고 계셨던 것입니다. 다윗은 하나님을 잠시 동안 잊음으로써 이와 같은 범죄를 저지르고 말았습니다. 이같은 다윗의 실수는 하나님 앞에 있다는 의식으로 유혹을 피한 경건한 요셉의 행위와 대조됩니다(참조, 창 39:9).

    여호와 보시기에 악한 다윗의 소위

    지혜로우신 하나님의 심판
    시편 31:2
    여호와께서도 지혜로우신즉 재앙을 내리실 것이라 그 말을 변치 아니하시고 일어나사 악행하는 자의 집을 치시며 행악을 돕는 자를 치시리니.

    안목의 정욕에 빠짐(요한일서 2:16)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안목의 정욕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 좇아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 좇아 온 것이라.
    For everything in the world--the cravings of sinful man, the lust of his eyes and the boasting of what he has and does--comes not from the Father but from the world.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앞절에서 언급된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에 대한 사랑'의 예이다.
    이 세 가지 예중에서 첫번째는 나머지 두 가지에 대한 일반적인 원리를 나타내는 듯하다(Smalley).

    육신의 정욕.
    '육신'의 헬라어 '사르코스'는 일반적으로 신체적인 의미에서 인간을 의미하나 본문에서는 '영적인'것과 대조를 이루는 악한 욕망의 근원을 의미한다.
    '육신의 정욕'은 타락한 사람의 본성으로 하나님을 대적하고 자기 만족만을 추구하는 자세를 의미한다(Barker, Stott).

    안목의 정욕.
    이것은 외적인 것을 봄으로 유혹을 일으키는 성적인 욕망은 물론 모든 사물을 탐닉하는 욕망을 의미한다(Marshall, Bultmann).

    이생의 자랑(*, 헤 알라조네이아 투 비우).
    여기에 나타난 속격에 대한 견해에 따라 두 가지로 해석될 수 있다.
    1. 주격으로 이해할 경우 본문은 세상적인 물질이나 명성에 대해 과대 평가하여 자랑하는 허세를 의미한다.
    2. 목적격으로 이해할 경우 본문은 세상적인 것에 대한 자랑을 의미한다.
    '이생의 자랑'은 두 가지 의미를 모두 내포하고 있다.
    즉 그것은 소유하고 있는 물질 뿐만 아니라 태도나 행위를 자랑하거나 혹은 과대 평가하여 허세를 부리는 것을 의미한다(Marshall, Law).

    다 아버지께로 좇아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 좇아온 것이라.

    그리스도인들이 세상을 사랑하지 말아야 하는 이유이다.
    '...로 좇아온'으로 번역된 헬라어 '에크'(*)는 기원을 나타내는 전치사이다.
    요한은 '에크'를 사용하여 상반절에서 언급된 세 가지 예, 즉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 모두 하나님에게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세상, 곧 사단이 지배하는 타락한 사람들의 마음에서 비롯된 것임을 밝히고 있다.
    그러기에 세상과 하나님 아버지는 절대로 공존할 수 없으며 그리스도인들은 절대로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해서는 안된다



    거닐다가<와이트할례크>

    다윗이 왕궁 지붕 위를 거닌 것은 저녁 바람을 쐬기 위한 일상생활로 볼 수 있다.
    그러나 다윗은 낮잠을 자다가 일어난 상태이다.
    현재 이스라엘이 랍바를 에워싸고 교전 중에 있는 긴장된 상태임에도 불구하고 다윗이 낮잠을 즐겼다는 것은 다윗의 나태한 신앙 상태와 왕으로서 무책임함을 보여 주며 범죄하게 된 배경을 제공해 주는 것이다.

    목욕을 하는데<로헤체트>

    '씻다' 라는 <라하츠>에서 유래된 것으로 '씻음, 목욕'을 뜻하는데, 이스라엘은 제의를 행하기 전에 하나님 앞에서 깨끗하게 서기 위하여 몸과 손을 씻는 관례가 있었다.
    밧세바의 목욕하는 행위를 의도적인 것으로 보는 견해도 있지만, 그것은 본문의 문맥상 어울리지 않으며 다윗 궁이 높기 때문에 지붕에서 이웃 집 마당의 우물이 보인 것으로 볼 수 있다.

    아름다워 보이는지라<토바트>

    '좋은, 아름다운, 기쁜, 귀중한' 이라는 단어로, 보기에 좋은 물건의 모양이나 여인의 고운 자태, 남성의 잘생긴 모습을 나타내는 데 사용된다.
    이것은 밧세바의 용모가 뛰어났음을 의미하기도 하지만 신앙적으로 왕으로서 나태해진 다윗의 마음이 유혹에 이끌린 상태를 나타낸다.

    알아보게 하였더니<와이드로쉬>

    시각적으로 유혹을 받은 다윗이 이제는 정욕에 이끌려 간음을 자행하기 위해 구체적인 행동을 함을 나타낸다.

    동침하매<와이쉬카브>

    '눕다' 라는 동사 <솨카브>는 부정적인 관계에서 이루어지는 성관계를 나타내는데, 부정함을 없애는 의식을 행했다 해도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하고 남의 아내와 관계를 가진 위선적인 의식이었다. 


    밧세바와 간음한 다윗(사무엘하 11:1-4)

    다윗은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자라고 했습니다.

    사도행전 13:22
    폐하시고 다윗을 왕으로 세우시고 증거하여 가라사대 내가 이새의 아들 다윗을 만나니 내 마음에 합한 사람이라 내 뜻을 다 이루게 하리라 하시더니 .

    그런데도 인간인지라 하나님 앞에서 간음 죄를 지었습니다.
    하나님이 원하지 않는 죄를 지음으로 다윗의 가정에 문제가 생겼습니다.
    암논이 여동생을 겁탈하는 죄가 일어나게 됩니다.
    압살롬이 암논을 죽이는 살인 죄가 만들어졌습니다.
    이 모든 것이 다윗이 밧세바와 동침하므로 일어난 일들입니다.

    간음죄를 범하는 다윗

    안목의 정욕으로 유혹받음(아가 4:9, 요한일서 2:16)

    이스라엘 군대가 출전하여 암몬 자손을 멸하고 랍바를 에워싸고 있을 때에 다윗은 예루살렘 궁전에 있었습니다.
    저녁때에 다윗이 침상에서 일어나 왕궁 지붕 위에서 거닐 때에 한 여인이 목욕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다윗은 안목의 정욕으로 인한 유혹을 받았습니다.
    다윗은 왕으로서 절대 권력을 갖고 있었기에 이러한 유혹에 넘어가기 쉬운 상황에 있었습니다.
    그런데 다윗은 그 순간을 인내하지 못하고 유혹에 넘어가 그 여인을 불러 동침하였습니다.

    다윗의 범죄(마태복음 5:28, 베드로후서 2:14)

    다윗은 하나님 앞에서 간음죄를 범하였고 신복 우리아에 대해서 군신간의 의리를 저버렸습니다.
    신하가 생명을 걸고 왕과 나라를 위해 적군과 싸우고 있을 때 다윗은 그의 아내를 범하는 파렴치한 범죄를 저질렀던 것입니다.
    이로써 다윗은 왕으로서 지켜야 할 의무와 도리를 저버렸습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자였고 믿음의 사람이었으나, 왕이 되어 안일함 속에서 영적으로 나태해지므로 이와 같은 범죄에 빠지고 말았습니다.
    성도가 날마다 깨어 기도하지 않으면 이와 같은 유혹에 넘어가 범죄에 빠질 우려가 많이 있습니다.

    밧세바의 임신(레위기  20:10-11, 시편 113:9)

    다윗은 자신이 저지른 죄를 아무도 모를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밧세바가 다윗의 아이를 잉태하므로 그의 범죄가 드러날 위기에 놓였습니다.
    우리아는 오랫 동안 전쟁터에 나가 있었으므로 밧세바의 임신은 곧 다윗의 범죄를 알리는 증거가 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이와 같이 범죄는 드러나게 되어 있습니다.
    사람의 눈은 피할 수 있을지 몰라도 전지하신 하나님의 눈을 피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다윗의 범죄 은폐

    우리아를 부르는 다윗(잠언 12:22, 잠언 26:24-25)

    다윗은 전방에서 전투에 임하고 있는 우리아를 보내라고 요압에게 기별합니다.
    다윗은 우리아가 오자 요압과 군대의 안부와 전투 상황 등을 묻고는 우리아에게 집에 가서 쉴 것을 명합니다.
    다윗이 우리아에게 행한 일은 자신의 범죄를 은폐하기 위한 연극이었습니다.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가, 우리아가 집을 비운 동안 잉태한 것이 드러나면 자신의 악행이 알려질 것이 두려워 우리아를 그 아내와 동침하게 함으로써 밧세바가 잉태한 아이가 우리아의 아이인 것처럼 속이려고 한 것입니다.
    이러한 다윗의 계획은 하나님이 보시기에 가증한 악행으로 죄를 숨기기 위해 또 하나의 범죄를 더하는 행위였습니다.

    집에 가지 아니한 우리아(딤후 2:4, 고전 4:1-2)

    다윗의 계획은 실패로 돌아가고 말았습니다. 그는 우리아를 밧세바와 동침시켜 세상 모든 사람을 속이고 자신의 범죄를 은폐하려 했지만, 우리아가 집에 들어가지 않았던 것입니다. 우리아는 집에 돌아가지 아니하고 왕궁 문에서 기거했던 것입니다. 다윗은 다시 한 번 우리아를 집에 들어가도록 시도하였으나 실패하였습니다. 우리아는 전쟁터에서 수고하는 동료들을 생각하여 자기 혼자 집에 들어가 편히 쉬며 아내와 동침할 수 없다고 고집합니다. 다윗은 일부러 우리아에게 술을 많이 마시게 해서 집으로 들여보내나 우리아는 취중에도 집에 들어가지 않고 왕궁 문에서 잠을 잤습니다.

    실패로 돌아간 악한 궤계(시 107:27, 잠 23:35)

    다윗은 자신의 범죄를 은폐하려고 갖은 애를 다 쓰고 연극까지 했지만, 우리아의 충성심 때문에 그 계획은 실패로 돌아갔습니다. 다윗은 사람들만 속이면 자신의 범죄를 은폐 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으나 하나님께서는 그 계획을 실패하게 하셨던 것입니다. 사람이 악한 마음으로 아무리 계획을 세워도 하나님께서 막으시면 절대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살인죄를 범하는 다윗

    요압에게 내린 다윗의 지령(왕상 2:33-34)

    우리아를 밧세바와 동침시켜 자신의 범죄를 은폐하려는 계획이 실패로 돌아가자, 다윗은 또 다른 악한 계획을 세웁니다. 그것은 우리아를 죽이는 계획이었습니다. 다윗은 우리아가 전쟁터로 돌아갈 때 요압에게 쓴 편지를 맡깁니다. 그 내용은 맹렬한 싸움에서 우리아를 앞세우고 후퇴하여 우리아를 전사케 하라는 지시였습니다. 요압은 다윗의 명령에 따라 우리아를 전사케 합니다. 우리아는 아무 죄도 없이 다윗의 악한 궤계에 따라 죽음을 당하였던 것입니다.

    우리아의 전사 소식을 전하는 요압(삼하 12:27)

    요압은 다윗의 지시를 좇아 우리아를 죽게 한 후에 사자를 다윗에게 보내어 우리아의 전사 소식을 전하게 했습니다. 우리아의 전사 소식을 전해 들은 다윗은 마음 속으로 기뻐하였을 것이니다. 다윗은 우리아의 장사가 마치매 밧세바를 궁으로 데려와 자신의 아내로 삼습니다. 밧세바의 임신 때문에 시간을 지체할 수 없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여호와 보시기에 악한 다윗의 소위(사 31:2, 요일 2:16)

    다윗은 간음죄를 범하고 그 죄를 숨기기 위하여 살인죄까지 범하게 되었습니다. 죄는 더 큰 죄를 잉태하는 것입니다. 사무엘서 기자는 다윗의 소위가 여호와 보시기에 악하였더라고 기록하였습니다. 다윗은 모든 사람에 대해서는 완전 범죄를 했을지 모르지만, 여호와께서는 그의 모든 생각과 행위를 감찰하고 계셨던 것입니다. 다윗은 하나님을 잠시 동안 잊음으로써 이와 같은 범죄를 저지르고 말았습니다. 이같은 다윗의 실수는 하나님 앞에 있다는 의식으로 유혹을 피한 경건한 요셉의 행위와 대조됩니다(참조, 창 39:9)



    다윗의 인격에 대한 심리학적 해석

    성서학에서 심리학적 해석은 다른 전통적인 해석 방식에 비해 등한시되거나 좋지 않은 해석 방식으로 여겨지기까지 한다.
    이는 전통 신학에 비하여 심리학의 역사가 짧기 때문이기도 하고, 소위 영적 문제를 심리적으로 해석한다는 선입견에서 비롯하기도 한다.
    그러나 심리학은 인간의 행동을 이해하려고 시도하는 점에서 성경에 나타난 등장인물의 인격과 행위를 분석하는 데 도움을 준다.
    이 글은 방법론적으로 성경의 최종 본문을 중심으로 성경이 묘사하는 다윗의 인격을 단일체로 받아들여 그의 인격에 접근한다.
    또한 심리학적 해석방법 가운데 특별히 다중지능 이론, 특질 이론, 동기 이론에 따라 다윗의 행동과 인격을 파악하려고 시도한다.

    다윗은 여러 가지 성격다중적인 삶의 모습을 보이는 대표 인물이다.
    하나님을 믿고 시로 찬미한 훌륭한 신앙인인 동시에, 부하 우리야를 죽이고 그의 아내 밧세바를 빼앗은 파렴치범이기도 하다.
    자신의 아내 미갈에게는 극도로 냉담하지만, 자신의 적대자들에게는 매우 온정적이기도 하다.
    이처럼 다윗의 삶과 행위에 나타나는 복잡함은 다윗의 인물 자체에서 비롯하거나, 아니면 다윗과 관련된 여러 본문이 취합되는 가운데 발생한 것일 수 있다.
    다윗은 음악, 문학, 정치, 전투 등의 여러 영역에서 뛰어난 능력을 보인 동시에, 일반인들조차 이해하기 힘든 욕망과 야망에 사로잡혀 있기도 하다.
    그의 이중 혹은 다중의 면모와 동기는 하나님에 대한 신앙 안에서 통합되는 과정을 거친다.
    다윗을 비롯한 모든 인간은 그 내면에 빛과 어두움을 함께 가지고, 이들 사이에서 투쟁하고 나아가는 존재이다.


    다윗에게 깨진 세 가정

    성경에 나오는 인물을 해석하는 원칙이 있습니다. 
    그것은 로마서 3장 10절 말씀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입니다. 
    동시에 주께서 하신 말씀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노라”입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성경의 인물, 소위 위대한 믿음의 사람들을 의인시 하거나 영웅시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아브라함, 모세, 요셉, 다윗, 다니엘 등을 비판하면 바로 반발하는 사람이 많은 것을 보면 잘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도 죄 많은 인간이고,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이 아니면 구원받을 수 없습니다. 

    그런면에서 오늘은 다윗의 이중성과 관련된 논문 한편을 소개하겠습니다. 

    토론토 틴델 신학교 구약학 교수인 John Kessler가 “성과 정치 : 사무엘서에 나오는 쫓겨난 남편의 모티프 (Sexuality and Politics: The Motif of the Displaced Husband in the Books of Samuel)입니다. 

    다윗은 하나님께서 직접 선택한 사람(삼상 13:14),  여호와의 종(삼하 3:18, 7:5, 8,26), 여호와의 기름부음 받은 자(삼하 12:7, 22:51, 23:1)와 같은 존칭이 부여되었습니다. 
    신약성경도 다윗에 대해 똑같은 찬사를 보냅니다(눅 20:41, 행 13:22-36). 
    그러나 이러한 긍정적인 서술에도 불구하고 사무엘서는 다윗에 대해 매우 다른 모습을 그립니다. 
    그의 정치적 야망과 무능한 가족 관계를 사정없이 비판합니다. 
    또한, 다윗이 경력을 쌓는 과정에서 세 명의 남성(나발, 발디엘, 우리아)과 그들의 아내를 자신의 아내로 삼는다는 점도 중요합니다. 
    세 여자를 아내로 맞이하는 과정을 통해 다윗이 점차 타락하는데, 이는 다윗의 이중성(선과 악)을 보여줍니다. 
    사무엘서는 왜 이렇게 다윗의 잘못을 적나라하게 기록하였을까요?
    Kessler 교수는 이 점을 고민하면서 논문을 썼습니다. 


    1. 나발, 아비가일, 다윗

    나발은 악행을 저지르는 거친 사람으로 어리석은 사람의 전형입니다. 반면에 아비가일은 지혜롭고 아름다운 여인으로 등장합니다. 나발의 양떼를 돌봐주었던 다윗이 나발에게 먹을 것을 요청하였는데 거절당합니다. 그때 다윗은 분노하여 칼을 빼들고 피의 보복을 감행하려고 합니다. 그런 다윗 앞에 아비가일이 나타나 다윗을 지혜롭게 설득합니다. 성경은 가볍게 분노한 다윗에게는 면죄부를 주고, 나발은 자신의 어리석음으로 파멸했는데, 이 모든 과정에 하나님이 개입하셨음을 보여줍니다. 아비가일은 다윗에게 여호와의 축복과 왕위 계승자로 선언하고(삼상25:28), 다윗의 정적(나발)을 저주합니다(삼상25:26). 나발이 죽은 후 다윗은 아비가일을 아내로 맞이합니다. 다윗이 의도하지 않았지만, 다윗과 연관된 나발의 가정은 결과적으로 깨어졌습니다. 물론 이 과정에서 다윗은 불명예스러운 행동을 하지 않았습니다. 

    2. 발디엘, 미갈, 다윗

    다윗에 의해 직접적으로 깨어진 가정은 발디와 미갈입니다. 다윗은 아히노암과 아비가일 외에 네 명의 아내를 더 얻었습니다(삼하3:2-5). 사울이 죽은 후 다윗은 통일 왕국을 이루는 과정에서 아브넬과 동맹을 맺습니다. 다윗은 동맹을 맺는 조건으로 미갈을 돌려달라고 요청합니다(삼하3:12-13). 이는 분명 정치적 차원의 요구입니다. 

    미갈과 발디엘의 결혼이 합법적인지는 불분명합니다. 성경 저자는 사울이 미갈을 발디엘에게 줄 권리도 없고, 다윗이 미갈을 돌려달라고 요구할 권리도 없음을 명시적으로 밝힙니다. 성경 저자는 미갈을 돌려달라고 요구하는 다윗을 은연중에 비판합니다. 삼하 3:2-5까지  다윗은 이미 네 아내와 결혼했음을 언급합니다. 따라서 성경을 읽는 독자는 삼하 3:12-13에서 네 명의 아내를 가진 다윗이 소중한 한 명의 아내, 미갈을 발디엘에게 빼앗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다윗이 아브넬에게 말합니다. 

    “내가 네게 한 가지 일을 요구하노니 나를 보러올 때에 우선 사울의 딸 미갈을 데리고 오라 그리하지 아니하면 내 얼굴을 보지 못하리라”(삼하3:13)

    그는 미갈을 ‘사울의 딸’이라 부르므로 미갈의 정치적 중요성을 강조합니다. 그는 미갈이라는 한 인격체에 대해선 아무런 관심이 없습니다. 그는 북이스라엘에 기반을 두었던 사울왕의 딸을 가지고 싶었을 뿐입니다. 미갈은 북이스라엘과 남유다를 하나로 묶어주는 고리에 불과할 뿐입니다. 미갈은 그저 정치판의 졸이었습니다. 

    다윗은 미갈을 내 아내(삼하3:14)라고 부르지만, 성경 저자는 미갈의 남편은 발디엘이라고 밝힙니다(삼하3:15,16)

    “이스보셋이 사람을 보내 그의 남편 라이스의 아들 발디엘에게서 그를 빼앗아 오매’(삼하3:15)

    성경 저자는 미갈의 신분을 의도적으로 대조하므로 다윗의 무자비함을 드러냅니다. 

    발디엘은 하나뿐인 아내를 빼앗기고 울면서 미갈의 뒤를 따릅니다. 고대 시대 남성이 공공장소(길)에서 운다는 것은 극히 예외적인 일입니다. 이는 이스라엘의 모든 사람에게 자신의 억울함을 호소하는 것이고, 동시에 성경 독자들에게도 호소합니다. 히브리 원문에 보면 아브넬이 이중명령어 즉 “저리 가! 돌아가라!”고 합니다. 이는 암논이 다말을 강간하고 했던 이중 명령(일어나 나가라)와 같습니다. 발디엘은 다말처럼 굴욕과 수치심을 느끼며 조용히 명령에 복종합니다. 

    다윗은 아비가일과 결혼할 때처럼 더 이상 수동적이지 않습니다. 그는 적극적으로 행동합니다. 자신의 요구가 가져올 사회적 영향의 부정적 측면(가정을 깨트렸다는 비난)보다 긍정적 측면(북이스라엘과의 통합)에 관심이 있었습니다. 미갈을 요구하는 다윗의 행동이 완전히 불법적인 것은 아닐지라도 비판받을 요소는 분명 있습니다. 

    3. 우리아, 밧세바, 다윗

    밧세바를 강간하고 우리아를 죽인 일은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비방당한 나발이나 희생당한 발디엘과 달리 우리아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선하고 신실한 인물로 묘사됩니다. 
    다윗이 그를 불러 밧세바와 잠자리를 가지도록 유도할 때 우리아는 이렇게 대답합니다. 

    “우리아가 다윗에게 아뢰되 언약궤와 이스라엘과 유다가 야영 중에 있고 내 주 요압과 내 왕의 부하들이 바깥 들에 진 치고 있거늘 내가 어찌 내 집으로 가서 먹고 마시고 내 처와 같이 자리이까”(삼하 11:11)

    전통적으로 언약궤(법궤)에 대한 연대감은 경건의 상징입니다. 
    그는 경건하고, 충성스럽고, 자제력이 있고, 공동체와 연대를 존중합니다. 
    반대로 다윗은 속임수와 이기심의 화신으로 자제력도 없고, 냉담하며, 불충실하고, 배신과 살인을 일삼고 공동체를 심각하게 깨뜨리는 인물입니다. 
    다윗은 아주 악한 마음으로 우리아의 가정을 깨트렸습니다. 

    사무엘서는 여러차례 군주제의 폐해를 경고하였습니다. 
    신명기는 왕이 여러 명의 아내를 두어서는 안된다고 하였습니다(신 17:17). 
    이스라엘이 왕을 요구할 때 사무엘은 왕이 이스라엘의 딸들을 갖가지 명목으로 취할 것이라고 경고하였습니다(삼상 8:13). 
    신명기 학파(신명기에서 열왕기서에 이르는 저자들)는 일부다처제 및 정략 결혼과 관련된 군주제를 위험하고 의심스러운 제도로 간주했습니다. 
    이스라엘의 상황에서 어쩔 수 없이 허락하지만, 넘지 말아야 할 선은 분명 있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그 경계선을 무너뜨렸고, 후대 이스라엘의 모든 왕은 아무런 거리낌 없이 군주제를 악용했습니다. 

    나발과 발디엘과 우리아는 모두 일부일처제를 따랐습니다.
    반면에 다윗은 정치적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자기의 이기적인 욕망을 채우기 위해, 때로는 자존심 때문에 남의 가정을 파괴하면서까지 여러 명의 아내를 두었습니다.

    그렇다면, 사무엘서는 왜 이런 일들을 여과없이 기록했을까요? 
    타락은 어느 순간 갑자기 일어나지 않고 점진적으로 일어납니다. 
    다윗의 타락이 바로 그 예입니다. 
    아비가일과 미갈과 밧세바를 아내로 맞이하는 과정에서 그는 점점 타락합니다. 
    그는 가장 이상적인 장군 우리아를 살해하고 그의 가정을 깨트렸습니다.
    그런데도 하나님은 다윗의 죄를 용서하고, 죽음을 유예하며, 그를 지지하고 그에게 가능성을 부여했습니다.
    그건 그의 잘못과 죄악을 정당화하는 것이 아닙니다. 
    시편 저자는 이렇게 노래합니다(시편 32:1)

    “허물의 사함을 받고 자신의 죄가 가려진 자는 복이 있도다” 

    다윗은 이스라엘을 대표하는 왕입니다. 
    이스라엘도 다윗처럼 참담한 실패에도 불구하고 여호와는 계속해서 그들과 관계를 맺습니다. 
    마침내 이스라엘은 그들의 죄악으로 말미암아 멸망하고 바벨론의 포로가 됩니다. 
    그때 포로로 끌려간 유배자들은 이 사무엘서를 읽으면서 다윗의 패러다임을 보았습니다. 
    허물과 죄가 많지만, 벌을 받고 망한 것 같고, 죽은 것 같지만, 눈을 들어 여호와 하나님을 바라보고 의지한다면 기회와 희망은 있다는 패러다임입니다. 
    이러한 패러다임은 현대 독자들에게도 유효합니다(요한복음 3:17)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그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


    4월 9일(수) 사무엘하 7-9장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사람 막대기와 인생 채찍(7:14)

    나는 그 아비가 되고 그는 내 아들이 되리니 저가 만일 를 범하면 내가 사람 막대기와 인생 채찍으로 징계하려니와.
    I will be his father, and he will be my son. When he does wrong, I will punish him with the rod of men, with floggings inflicted by men.

    사람 막대기(with the rod of men)
    인생 채찍(with floggings inflicted by men)

    징계(懲戒) : 징계할 징. 혼날 징(懲), 경계할 계(戒)
    - 허물이나 잘못을 뉘우치도록 나무라며 경계(警戒)함.
    - 부정(不正)이나 부당(不當)한 행위(行爲)에 대하여 제재(制裁)를 가함.

  • 욥기 5:17
    볼찌어다 하나님께 징계받는 자에게는 복이 있나니 그런즉 너는 전능자의 경책을 업신여기지 말찌니라.

    사무엘하 7:14
    나는 그 아비가 되고 그는 내 아들이 되리니 저가 만일 죄를 범하면 내가 사람 막대기와 인생 채찍으로 징계하려니와.

    * 징계(3198) 야카흐(yâkach)  יָכַח 스트롱번호 3198

    1. 앞에 나서다.  2. 다투다.  3. 히필형 הוֹכִיחַ

    발음 [ yâkach ]
    구약 성경  / 59회 사용


  • 징계(懲戒) / 징계할 징, 경계할 계
          - 허물이나 잘못을 뉘우치도록 나무라며 경계함.
    연단(鍊鍛) / 불릴 연, 불릴 단
         - 몸과 마음을 굳세게 함
    형벌(刑罰) / 형벌 형, 죄 벌
          - 범죄자에게 제재를 가함. 




  • 맹자 "하늘이 장차 어떤 사람에게 큰 임무를 맡기려 할 때는..."

    중국 전국시대의 유교 사상가.
    전국시대에 배출된 제자백가(諸子百家)의 한 사람이다.
    공자의 유교사상을 공자의 손자인 자사(子思)의 문하생에게서 배웠다.
    도덕정치인 왕도(王道)를 주장하였으나 이는 현실과 동떨어진 이상적인 주장이라고 생각되어 후에게 채택되지 않았다.
    그래서 고향에 은거하여 제자교육에 전념하였다.

    하늘이 장차 어떤 사람에게 큰 임무를 맡기려 할 때는, 반드시 먼저 그의 마음을 괴롭게 하고 그의 뼈를 수고롭게 하며 그의 몸을 굶주리고 궁핍하게 만들어 그가 행하고자 하는 바를 어지럽게 한다. 이는 이 사람의 마음을 분발하게 하고 성질을 참게 하여 그가 할 수 없었던 일을 해낼 수 있게 하기 위함이다.” -맹자 고자편-

    오늘날까지 많은 사람들 사이에서 회자되고 있는 맹자의 가르침 가운데 하나다. 맹자는 큰 뜻을 이루고자 한다면 시련을 극복하고, 유혹을 물리칠 수 있는 신념이 있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가 이 같은 이야기를 꺼낸 데는 당시 상황과 맥이 닿아 있다. 맹자가 활동했던 시기는 춘추전국시대로, 혼란이 극에 달한 시기였다.
    제후들 간에 벌어진 빈번한 전쟁으로 수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고, ‘자식이 아비를 시해하는 자가 있다’는 그의 기록에서 사회 질서 또한 매우 문란했음을 읽을 수 있다.

    이 같은 혼란한 시기를 살아간 맹자는 여러 나라를 돌아다니면서 많은 경험을 하며, 자신의 정치사상을 군주들에게 전했다. 그리고 ‘맹자’ 7편을 저술하며 그 사상을 정리했다. 하지만 그의 생애에 대한 기록은 거의 없어 태어난 시기와 나라가 분명치 않고, 다만 기원전 4세기 후반, 노나라와 인접한 추(鄒)국에서 태어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수양으로 본래 마음 회복”
    맹자 가르침의 핵심은 크게 ‘성선설’과 ‘왕도정치’로 좁혀진다. 맹자는 ‘사람치고 선하지 않은 이가 없다’고 주장했다. 그는 그 예화로 ‘우물가의 어린아이’를 들었다.

    한 어린 아이가 우물가에 들어가려는 것을 본다면 모두가 놀라 측은한 마음이 들게 되는데, 이는 그 부모와 친교를 맺기 위함도, 벗들로부터 칭찬을 받기 위함도 아니요, 이는 선한 본성이 내재돼 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하지만 선한 본성이 있다 하더라도 외적․환경적이 이유로 악하게 변할 수 있기 때문에 끊임없는 자기 수양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맹자는 이 같은 수양을 통해 궁극적으로 다다를 수 있는 이상적인 인간은 ‘호연지기(浩然之氣)’를 갖게 된다고 말했다. 그는 호연지기가 무엇인지를 묻는 제자에게 말로 표현할 수 없다고 전제하며 “도의에 근거한 흔들리지 않는 바르고 큰 마음, 천지간에 가득한 넓고 큰 정기로 공명정대하여 조금도 부끄러움이 없는 도덕적 용기”라고 답했다.

    ◆“덕으로써 백성 다스려야”
    맹자는 정치사상으로 ‘왕도정치’를 내세웠다. 그는 임금이 백성을 다스림에 있어 힘과 무력 대신 어진 마음과 덕으로써 감화시켜 다스릴 때 백성들이 그를 진심으로 존경하고 따를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의 저서 ‘맹자’에는 “가장 귀한 것은 백성이다. 그 다음이 사직이며, 임금이 가장 가벼운 존재”라는 기록이 있다. 곧 임금은 백성들과 그들의 평안을 위해서 존재한다는 ‘민본(民本) 사상’이 바탕에 깔려 있다. 그의 ‘성선설’과 ‘왕도정치’를 비롯한 사상들은 후대 유학 사상의 발달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 하늘이 장차 그 사람에게 큰 사명을 주려 할 때는
    반드시 먼저 그의 마음과 뜻을 흔들어 고통스럽게 하고,
    그 힘줄과 뼈를 굶주리게 하여 궁핍하게 만들어
    그가 하고자 하는 일을 흔들고 어지럽게 하나니
    그것은 타고난 작고 못난 성품을 인내로써 담금질을 하여
    하늘의 사명을 능히 감당할 만하도록
    그 기국과 역량을 키워주기 위함이다.

     

    맹자 고자 장구 하 (告子 章句 下) 에 나오는 말인데, 그 부분 전문을 싣겠습니다. 번역은 직역입니다.

     

     道는 若大路然하니 豈難知哉리오 人病不求耳니라

    도     약대로연       기난지재       인병불구이
    도란 큰 길과 같으니 어찌 알기가 어렵겠는가? 사람들이 그것을 구하지 않는 것이 병일 뿐이다.

     

    天將降大任於是人也인댄 必先苦其心志하며 勞其筋骨하며 餓其體膚하며

    천장강대임어시인야        필선고기심지       노기근골        아기체부

    하늘이 장차 큰 일을 어떤 사람에게 맡기려 할 때는 반드시 먼저 그 마음을 괴롭히고,그 몸을 지치게 하고, 그 육체를 굶주리게 하고 

     

    空乏其身하야 行拂亂其所爲하나니 所以動心忍性하야 曾益其所不能이니라

    공핍기신       행불란기소위           소이동심인성        증익기소불능

    그 생활을 곤궁하게 해서 행하는 일이 뜻과 같지 않게 한다.
    이것은 그들의 마음을 움직여서 그 성질을 참게 하여 일찌기 할 수 없었던 일을 더욱 하도록 하기 위해서이다.

     

    人恒過然後에 能改하나니

    인항과연후    능개

    사람은 언제나 과오를 저지른 뒤에야 고칠 수 있으니

     

    困於心하며 衡於慮而後에 作하며 徵於色하며 發於聲而後에 喩니라

    곤어심       형어려이후     작        징어색      발어성이후     유

    마음에 곤란을 당하며 생각대로 잘 안된 뒤에야 분발하고, 얼굴빛에 떠오르고 음성에 나타난 뒤에야 깨닫게 된다.

     

    入則無法家拂士하고 出則無敵國外患者는 國恒亡이니라

    입즉무법가필사       출즉무적국외환자    국항망

    안으로 법도가 있는 (사대부) 집안과 (임금을) 보필하는 선비가 없고, 밖으로 적국과 외환이 없으면 그런 나라는 언제나 망한다.


     

    然後에 知生於憂患而死於安樂也니라

    연후    지생어우환이사어안락야

    그런 뒤에야 우환 속에서도 살아나고 안락한 가운데도 망한다는 것을 알게 되는 것이다.







  • 사람 막대기와 인생 채찍이란 징계(懲戒)를 받는 것을 말합니다.
    이 말씀은 여호와 하나님께서 선지자 나단을 통하여 다윗 왕에게 알려준 것입니다.

  • 다윗은 어디를 가든지 여호와 하나님께서 이기게 하셨습니다(삼하 8:6, 14).
    사람들이 좋아하는 만사형통(萬事亨通)한 삶을 누리고 있었습니다.
    심지어 다윗은 백향목으로 지은 궁궐에서 지내고 있을 때 문득 여호와의 궤는 천막(장막)에 머물고 있다는 생각에 얼른 여호와의 궤를 모실 수 있는 성전을 건축하려는 생각을 갖게 되었습니다.
    다윗은 즉시 나단 선지자를 불러 자신의 생각을 말하자 선지자는 그것 참 좋은 발상이라며 성전을 건축할 것에 동의했습니다.
    그런데 그 밤에 하나님은 나단 선지자에게 계시하시기를 다윗이 성전 짓는 것을 허락하지 않고 다윗이 낳은 아들이 그 전을 건축하게 될 것이라고 일러주셨습니다.

    그리고 만일 그 아들이 죄를 범하면 사람 막대기와 인생 채찍으로 징계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다윗의 아들로서 성전을 건축한 왕은 솔로몬입니다.
    솔로몬은 가장 지혜로운 왕으로 알려졌습니다.
    그런데 지혜로운 왕이 죽은 후에 그 나라가 둘로 나누어졌습니다.
    너무 똑똑해서 나라를 둘로 분열하도록 그 원인을 제공한 것입니다. 


    사람 막대기와 인생 채찍으로 징계하려니와
    사람 막대기와 인생 채찍은 같은 뜻으로

    사람 막대기와 인생 채찍으로 징계한다는 말은 아버지가 아들에게 체벌을 가하면서까지 훈육을 하듯이, 하나님께서도 자신의 백성들을 징계하면서까지 그들을 의로운 길로 인도하시겠다는 것을 의미하는 문학적인 표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시 89:32;잠 3:12;히 12:6,7 참고). 사람 막대기와 인생 채찍은 같은 의미를 강조하기 위해서 다른 표현으로 반복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 말로 "인생채찍"으로 번역됨 라은 원래 "사람의 아들들의 채찍"이란 말로서 "사람 막대기"와 다를 바가 없습니다. 이 말은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징계하실 때에 주로 사람들을 이용하신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이 말에는 꼭 사람뿐 아니라 여러 가지 환경도 포함하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다음의 구절들도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내 율례를 깨뜨리며 내 계명을 지키지 아니하면, 내가 회초리로 그들의 죄를 다스리며 채찍으로 그들의 죄악을 벌하리로다!(시 89:32)"

    "대저 여호와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시기를 마치 아비가 그 기뻐하는 아들을 징계함 같이 하시느니라(잠3:12)."

    "주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시고 그가 받아들이시는 아들마다 채찍질하심이라 하였으니, 너희가 참음은 징계를 받기 위함이라 하나님이 아들과 같이 너희를 대우하시나니 어찌 아버지가 징계하지 않는 아들이 있으리요!(히 12:6-7)"


    2. 성경을 보면 하나님께서 범죄한 자녀들을 돌이키기 위해서 징계의 손길을 펴신 일들을 종종 발견할 수 있습니다. 이때에 하나님께서 사용하시는 매는 주로 사람인 경우가 많으며 때로 자연 재해나 주변 환경을 이용하실 때도 있습니다. 다음 구절들을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 하나님께서 하닷을 통해서 범죄한 솔로몬을 대적하게 하심

    "여호와께서 에돔 사람 하닷을 일으켜 솔로몬의 대적이 되게 하시니 그는 왕의 자손으로서 에돔에 거하였더라(왕상 11:14)."

    * 하나님께서 예후를 통해서 거역하는 아하시야를 징계하심
    "유다의 왕 아하시야가 이를 보고 정원의 정자 길로 도망하니 예후가 그 뒤를 쫓아가며 이르되 그도 병거 가운데서 죽이라 하매 이블르암 가까운 구르 비탈에서 치니 그가 므깃도까지 도망하여 거기서 죽은지라(왕상 9:27)."


    하나님이 인생 채찍과 사람 막대기로 우리를 연단하실 때

    시편 63:3
    주의 인자하심이 생명보다 나으므로 내 입술이 주를 찬양할 것이라. 

    부제를 보면 다윗이 유다 광야에 있을 때에 쓴 시입니다.
    다윗은 사울을 피해 유다 광야에 있을 때가 있었고, 아들 압살롬을 피해서도 유다 광야에 있었습니다.

    오늘 시 내용을 보면 다윗이 사울에게 쫓기고 광야를 헤맬 때 쓴 것처럼 보입니다.
    그가 사는 곳은 마르고 황폐한 곳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곳에서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봅니다.
    다윗은 자신의 생명보다 더 소중한 주의 인자하심을 바라봅니다.
    그는 주님의 사랑을 믿음으로 광야에서 기름지고 풍요로운 삶을 살아갑니다.

    1. 마르고 황폐한 땅에서 주를 갈망한다

    “하나님이여 주는 나의 하나님이시라 내가 간절히 주를 찾되 물이 없어 마르고 황폐한 땅에서 내 영혼이 주를 갈망하며 내 육체가 주를 앙모하나이다(1절)”.

    다윗은 물이 없어 마르고 황폐한 땅에 있었습니다. 광야는 나무도 없고 그늘도 없습니다. 그는 마실 물이 없었고 먹을 음식이 없었습니다. 그는 사울에게 쫓기고 있었습니다.

    다윗은 몸만 황폐한 곳에 있는 것이 아니라 마음도 황폐하였습니다. 그때 다윗은 광야에서 사람들의 도움을 찾지 않았습니다. 물질을 구하지 않았습니다. 무기와 군사력을 의지하지 않았습니다 이런 것이 그의 도움이 되지 못하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는 자신의 인격적인 하나님을 찾습니다. 그의 영혼은 목마른 사슴이 물을 찾듯, 간절히 주를 찾습니다. 배고플 때 빵을 찾듯, 그의 육체는 주를 앙모합니다. 생수의 강물이 흐르게 하시는 하나님을 찾습니다.

    때로는 육체가 건강한데 영혼이 고통스러울 때가 있습니다. 때로는 영혼이 기쁜데 육체가 고통할 때가 있습니다.

    다윗은 육체와 영혼이 다 고통 중에 있습니다. 그런 가운데 주님이 도와 주시기를 열망하고 있습니다. 그는 쫓기고 생명의 위험이 있습니다. 그는 이것을 사울의 문제로 생각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과 관계로 생각합니다.

    다윗은 사람에게 핍박받고 전쟁이 있고 질병이 있어도, 하나님을 앙망합니다. 어떤 어려움 중에도 하나님께 기도하면서 하나님을 앙망합니다.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모든 문제가 풀릴 것을 믿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문제를 먼저 해결해야 합니다.

    2. 광야가 성소와 같다

    “내가 주의 권능과 영광을 보기 위하여 이와 같이 성소에서 주를 바라보았나이다(2절)”.

    다윗은 광야에서 주님이 자신과 함께하심을 믿었습니다. 광야조차 하나님이 함께 계시자, 거룩한 땅이 되었습니다. 그는 광야가 성소로 여겨졌습니다.

    다윗은 성소와 같은 광야에서 간절히 주를 바라봅니다. 그는 광야에서 주님이 함께 하셔서 주의 권능과 영광을 보여 주시기를 갈망합니다. 주님이 권능으로 자신을 도와주시기를 갈망합니다.

    하나님의 권능과 영광은 광야에서 잘 드러납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에서 많은 하나님의 영광을 보았습니다.

    하나님은 40년간 만나를 주셨습니다. 메추라기를 풍성히 먹게 하셨습니다. 바위에서 물이 나게 하셨습니다. 우리는 부족하고 없을 때 하나님의 영광을 볼 수 있습니다.

    3. 주님의 인자하심이 생명보다 낫다

    “주의 인자하심이 생명보다 나으므로 내 입술이 주를 찬양할 것이라 이러므로 나의 평생에 주를 송축하며 주의 이름으로 말미암아 나의 손을 들리이다(3-4절)”.

    다윗이 이렇게 광야를 성소로 인식할 수 있었던 것은 주님의 인자하심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주의 인자하심이 생명보다 낫다고 고백합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것은 바로 생명입니다. 천하를 얻고도 생명을 잃으면 소용 없습니다. 특히 죽음과의 거리가 한 걸음 사이인 위기 상황에서는 더욱 생명이 소중합니다.

    그러나 다윗은 생명보다 소중한 것이 있었습니다. 그는 주님의 인자하심이었습니다. 주의 인자하심이 생명보다 낫다는 말은, 주의 인자하심이 있을 때 생명이 가치가 있다는 말입니다.

    내가 살고 죽는 것보다 하나님의 사랑이 중요합니다. 나 중심으로 생각할 때, 나만 편하면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좀더 고차원적으로 생각하면 생명보다 중요한 것이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하나님이 나를 사랑한다고 생각하면 지금 죽어도 좋습니다. 주의 인자하심이 없다면, 그는 살았으나 죽은 자와 같습니다. 우리도 저 사람의 사랑을 받을 수 있다면 오늘 죽어도 좋다고 합니다. 사랑이 모든 것보다 위에 있습니다.

    다윗은 주의 인자하심을 절대적으로 믿고 살았습니다. 주의 인자는 주님의 한결같은 사랑입니다. 하나님의 언약에 기초한 사랑입니다.

    다윗은 비록 사울에게 쫓기고 있어도 그것조차 하나님의 사랑으로 보였습니다. 하나님이 인생 채찍과 사람 막대기로 그를 연단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는 하나님의 인자를 믿으니 자신이 있는 곳이 천국처럼 변하였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영원한 사랑을 믿고 주를 찬양하였습니다.

    우리가 병원에 있어도, 주님이 나를 사랑하노라 말씀하시면 병이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사랑이 충만하고 감격하면 지금 죽어도 좋습니다.

    다윗은 광야에서 헤매고 있습니다. 장래도 보장되지 않습니다. 생명의 안전도 보장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다윗이 주의 사랑을 느낄 때 주를 찬양합니다.

    신앙의 극치는 찬양입니다. 행복의 극치는 감사입니다. 아무리 좋은 집에 살아도 감사가 없으면 행복이 아닙니다. 초가집에 살아도 감사하면 행복합니다.

    다윗은 광야에서 지금 하나님을 찬송할 뿐 아니라 평생 주를 송축하고자 합니다. 그는 두 팔을 치켜들고 하늘에 계신 주님을 찬송하였습니다. 그는 평생에 함께 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믿었습니다.

    다윗은 평생에 주의 사랑이 있었으므로, 주님을 찬양합니다. 나중에 자녀들 간에 살인과 강간이 있습니다. 아들이 반역을 합니다. 인구조사를 하고 전염병이 창궐합니다.

    그래도 그는 평생에 생명보다 나은 하나님의 사랑이 있으므로 하나님을 찬송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평생 함께 하시는 하나님의 인자를 믿을 때 평생 하나님을 찬송할 수 있습니다. 아멘.

    4. 내 영혼이 주로 만족할 것이라

    “골수와 기름진 것을 먹음과 같이 나의 영혼이 만족할 것이라 나의 입이 기쁜 입술로 주를 찬송하되 내가 나의 침상에서 주를 기억하며 새벽에 주의 말씀을 작은 소리로 읊조릴 때에 하오리니 주는 나의 도움이 되셨음이라 내가 주의 날개 그늘에서 즐겁게 부르리이다(5-7절)”.

    사람은 골수와 기름진 것을 먹을 때 만족합니다. 배가 부르면 평양 감사가 부럽지 않습니다. 그러나 사람은 육의 양식으로만 살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먹을 때 만족이 생기고 힘이 납니다.

    다윗이 주님의 인자하심을 믿을 때, 다윗의 영혼은 골수의 기름진 것을 먹을 때같이 만족하였습니다. 우리의 영혼을 만족시키는 것은 주님의 사랑입니다.

    물질도 사람도 우리의 영혼을 만족시키지 못합니다. 다윗은 광야에서 주님의 사랑을 믿고 만족하였습니다. 그는 더 이상 바랄 것이 없습니다.

    사자떼가 수십 마리 있어도, 그 앞에서 토끼나 노루가 놀 때 먹지 않는 경우가 있습니다. 사자는 배부르게 먹고 있으면 다른 것을 먹지 않습니다. 식사 시간 외에는 먹지 않는다고 합니다.

    내가 만족하면, 아무런 것도 필요하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탐욕으로 끝임없이 물질을 추구합니다. 그러나 다윗은 하나님으로 만족하고 더 이상 자신의 욕망을 추구하지 않습니다. 그는 기쁜 입술로 주를 찬양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살과 피를 통해 우리에 대한 사랑을 확증하여 주셨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살과 피를 먹고 성령을 받으면 골수와 기름진 것을 먹는 것 같이 만족하고 주님을 찬양합니다.

    다윗은 광야 침상에서 잘 때 주님을 기억하였습니다. 밤새 하나님을 기억하였습니다. 잠자리에 들어서도 주님만을 기억하고 밤을 새우면서도 주님만을 생각합니다.

    새벽에 일어나서 침상에서 주님의 말씀을 읽으면서 찬양하였습니다. 그는 주님의 말씀을 통하여 생명보다 귀한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생각하였습니다.

    주님의 인자하심을 믿으면 우리 주위에 있는 문제를 넉넉히 수용할 수 있습니다. 화를 내지 않습니다. 우리가 알 수 없이 짜증이 날 때는 뭔가 잘못된 것입니다. 만족이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주 안에서 만족감이 있을 때 모든 것에서 주님을 찬양할 수 있습니다. 다윗이 밤과 새벽으로 말씀을 묵상하며 기도할 때 하나님은 다윗의 도움이 되셨습니다.

    다윗은 자신을 도우신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사실 광야에서 다윗은 하나님의 도움을 많이 받았습니다.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그는 먹고 살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사울의 공격과 블레셋의 공격에서 다윗을 안전하게 지켜 주셨습니다. 다윗은 자신을 도우시는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그는 주의 날개 그늘 아래서 즐겁게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주의 날개 그늘은 하나님의 보호입니다. 그는 광야에서 방황했지만 주의 보호 아래서 쉼을 얻었습니다 그의 마음에는 하나님 나라가 있었습니다.

    5. 나의 영혼이 주를 가까이 따른다

    “나의 영혼이 주를 가까이 따르니 주의 오른손이 나를 붙드시거니와 나의 영혼을 찾아 멸하려 하는 그들은 땅 깊은 곳에 들어가며 칼의 세력에 넘겨져 승냥이의 먹이가 되리이다(8-10절)”.

    다윗의 영혼은 주님을 가까이 따랐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주야로 묵상하였습니다. 주님의 말씀과 친밀한 교제를 하였습니다. 그는 주님의 마음에 합한 삶을 살았습니다.

    그러자 주님께서 오른손으로 다윗을 꼭 잡아주셨습니다. 주님은 권능의 손으로 다윗을 보호하여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다윗의 편이었습니다. 하나님은 다윗을 복 주시는 자를 복주시고 다윗을 저주하는 자들을 저주하십니다. 다윗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영혼을 찾아 멸하려 하는 그들을 땅 깊은 곳에 들어가게 하실 것을 믿었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을 칼에 의해서 죽음을 당하게 하십니다. 결국 승냥이가 그들의 시체를 먹을 것입니다.

    다윗은 자신을 죽이고자 하는 사울의 무리를 하나님이 심판하실 것을 믿었습니다. 그는 승리를 확신하였습니다.

    6. 왕은 하나님을 즐거워한다

    “왕은 하나님을 즐거워하리니 주께 맹세한 자마다 자랑할 것이나 거짓말하는 자의 입은 막히리로다(11절)”.

    하나님께서 우리의 임금님에게 승리를 안겨 주시니, 우리의 임금님은 이 일로 즐거워하십니다. 하나님의 이름으로 맹세하는 사람들은 다 왕과 함께 승리를 기뻐합니다.

    하지만 거짓말을 하는 사람들은 말문이 막힐 것입니다. 다윗은 하나님을 찬양하다, 갑자기 왕에 대해 말합니다.

    여기서 왕은 사울 왕이 아닙니다. 다윗은 왕이 되기 전이므로 다윗 자신을 말한다고 보기도 어렵습니다. 왕은 그리스도입니다.

    그리스도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즐거워합니다. 하나님이 그리스도에게 승리를 안겨 주시니, 그리스도는 승리를 주신 하나님을 즐거워합니다. 그리스도는 자신을 믿는 자에게도 승리를 주십니다. 그리스도로 인하여 주님께 맹세한 자마다, 하나님은 그리스도와 동일하게 승리를 주십니다.

    다윗은 한계 상황에서 그리스도를 생각합니다. 그리스도를 의지합니다. 그는 그리스도를 통하여 승리를 주시는 하나님을 자랑합니다.

    거짓말하는 자는 왕이신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자입니다. 그들은 수치를 당합니다. 하나님은 그들이 부끄러움을 당하여 그들의 입은 막히게 됩니다.

    결론적으로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은 마르고 황폐한 땅입니다. 그러나 이곳에 하나님께서 함께하심으로 우리는 안전할 수 있습니다. 생명보다 나은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있음으로 황폐한 세상에서도 천국처럼 살 수 있습니다.

    광야 같은 세상에서 생명보다 나은 인자를 주시는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사람 막대기와 인생 채찍

    다윗 언약의 축복 중 하나는 아비에게 베푸신 은총을 아들에도 베풀어 왕위를 이어받는 아들이 혹 범죄하게 되어 주의 길을 떠나더라도
    사람 막대기와 인생 채찍으로 징계할찌언정 사울 왕의 경우처럼 하나님의 은총을 거두지는 않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약속은 실제 솔로몬이 다윗의 위를 이어 왕이 되었을 때 그의 재위 초기와 중기의 신앙은 정말 좋았으나 말기에 이르러 이방에서 데려온 처첩들에 의해 그의 마음이 흐려지고 우상숭배의 길로 들어섰을 때 하닷이나 여로보암 같은 대적자들을 일으켜 그를 낮추시고 힘들게는 하였어도 사울의 경우처럼 왕위를 빼앗기게 하고 하나님의 은총을 거두신 것은 아니었습니다(왕상 11:14-22).

    이처럼 내가 잘못된 길로 갈 때 하나님께서 사람 막대기와 인생 채찍으로 고통을 주시어 징계할찌라도 은총을 거두지 않으신다는 것은 정말 은혜 중에 은혜가 아닐 수 없습니다.


    너희에게 이런 징계가 없으면 사생자요 버리운 자라(히 12:8)

    지금까지 살아온 인생의 날들을 돌이켜 볼 때  내가 정말 힘들고 어려운 과정을 통과했던 시기를 돌이켜 보면 다윗이 하나님 중심의 사람이 되게하기 위해 사울에게 쫒기어 애매히 고난을 받으며 영적 단련을 받는 것 같은 시기도 있었지만 내가 범죄하고 고집 피우며 겸손히 낮아지지 않으므로 하나님께서 사람 막대기와 인생 채찍으로 나를 힘들게 하시며 낮추시고 징계 하셨던 때가 있었던 것을 추억하게 됩니다

    그 당시에는 내가 모두 옳았고 징계가 부당하다고 생각되며 싫었지만 오늘의 말씀에 비추어보니 내가 사람으로 인하여 고통을 받으며
    힘들었던 모든 과정이 결코 우연한 것이 아니었음을 확인하게 됩니다.

    오 주님 !
    사람 막대기와 인생 채찍으로 나를 힘들게 하신 것들도 모두 택하심의 은총이며 사랑이었던 것을 깨닫고 진심어린 감사를 드립니다

    징계를 받을 당시에는 고통 스러운 것이지만 이로써 연단을 받은 자들은 평강의 열매를 맺는다고 하셨사오니 내가 받은 징계의 날들이 헛되지 아니하여 주님의 뜻을 이루게 하옵소서.



    인생 막대기와 사람 채찍(열왕기상 11:14-25)

    다윗이 하나님의 성전을 짓기를 사모하였으나 하나님께서 허락하지 않으시고 그 대신 그 몸에서 낳게 되는 아들이 성전을 짓게 되리라는 언약을 나단 선지를 통해 전달케 하신 그 밤에 다윗의 뒤를 잇게 되는 이 아들[솔로몬]에 대한 의미심장한 말씀도 함께 주셨는데 나는 그에게 아버지가 되고 그는 내게 아들이 되리니 그가 만일 죄를 범하면 내가 사람 막대기와 인생 채찍으로 징계하려니와 내가 네 앞에서 물러나게 한 사울에게서 내 은총을 빼앗은 것처럼 그에게서 빼앗지는 아니하리라(삼하 7:14)

    오늘의 말씀은 일찍이 다윗의 시대에 나단 선지자를 통해 전달하셨던 하나님의 말씀이 어떻게 그대로 이루어졌는지 상세하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가장 싫어하시는 우상 숭배의 자리까지 떨어진 이 솔로몬이 그냥 그대로 아무 탈 없이 태평성대를 이루어가고 아무런 징계도 나타나지 않는다면 이스라엘은 진정 하나님께서 다스리시는 하나님의 나라가 아니며 솔로몬 역시 하나님께 버려진 자일 수밖에 없습니다.

    부와 영광의 극치에서 태평성대를 누렸던 솔로몬 왕국에 솔로몬을 대적하고 괴롭히는 에돔 사람 하닷이 등장되고 수리아 왕 르손이 등장하게 되는 것은 우연함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일으키신 대적 자들 이라고 설명하고 있는 열왕기 저자의 반복된 기록은(11:14, 23)
    오고 오는 모든 세대의 하나님의 백성들과 하나님의 교회들이 귀담아 들어야할 말씀입니다.

    히브리서 12:6
    주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시고,  그의 받으시는 아들마다 채찍질 하심이니라. 

    시험도 다 같은 시험이 아니라 나의 신앙을 한 단계 업그레이드 시키는 시험이 있고 나의 신앙을 무너뜨리려는 유혹의 시험이 있는 것처럼 내가 사람으로 인하여 당하는 고통에도 다윗에게 사울의 핍박이 있었던 것처럼 나의 신앙을 업그레이드 시키는 고통이 있는가 하면
    나와 하나님과의 관계가 어그러졌기 때문에 따라올 수밖에 없는 인간 고통이 있습니다.

    이럴 때는 나를 괴롭히고 힘들게 하는 사람을 맞싸우며 제거하려고 하기보다 나를 이런 상황에 두신 하나님의 인생 막대기와 사람 채찍을 기억하면서 고통의 매를 순히 맞으면서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을 위해 힘쓸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면 뭇사람의 마음을 주장하시는 하나님의 역사로 사람과의 관계도 회복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미가 6:9
    너희는 매를 순히 받고, 그것을 정하신 자를 순종할지니라. 

    다윗이 범죄 후 심지어는 자기 자식까지도 사람 막대기가 되어 자신의 대적 자가 되며 심지어 사울의 집 사람인 시므이에게는 말로 다할 수 없는 모욕적인 말을 들었어도 하나님이 나에게 시킨 것이라고 받아드리며 온갖 수욕을 달게 받아 드림으로(삼하 16:10)
    하나님께 불쌍히 여김을 받고 모든 것을 회복하는 은총의 사람이 된 것은  범죄하여 하나님과의 관계가 어그러졌으나 다시 회복되는 자들이 본 받아야 할 아름다운 모델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나 어찌된 일인지 솔로몬에게는 이런 모습이 보이지 않는 가운데  그의 생애가 마감이 되고 그의 후대에서 나라는 둘로 쪼개어지며
    모든 부와 영광이 막을 내리는 것을 봅니다.

    주님 !
    내가 범죄 함으로 사람의 미움을 받으며
    인생 막대기와 채찍의 고통을 당할 때
    나를 버리지 아니하시고
    여전히 붙잡고 계시는
    주님의 사랑인 것을 깨닫게 하옵소서.

    주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시고,
    그의 받으시는 아들마다
    채찍질 하신다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고통 받을 때
    내 마음이 교만하고 강팍하여
    인생 막대기와 채찍을 순히 받지 않음으로
    더 깊은 고통과 수렁에 빠지지 않게 하시고

    이것을 정하신 이를 순종하고
    매를 순히 맞음으로
    주께 불쌍히 여김을 받으며
    더 깊은 신앙으로 연단되고
    주님께 더 깊이 사랑을 받는
    은총의 사람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


    사람채찍 & 인생막대기

    1. 회개와 징계

    범죄한 인간들에게 있어서 하나님을 다시 만나고 하나님과 교통할 수 있는 길을 열어주는 것으로 회개 기도만큼 중요한 게 없습니다. 회개가 무엇인지 잘 이해하지 못하면 우리는 타락한 상태에서 회복되지 못하고 결국 죄로 말미암아 점점 몰락하게 되는 인생을 살게 됩니다. 그러나 어떤 죄를 지었다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시는 그 음성을 깨닫고 하나님의 의도를 알고 회개하게 되면 하나님은 동에서 서가 먼 것처럼 우리 죄를 기억치 않으신다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자꾸 기억하고 생각하지만 하나님은 기억하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회개 기도가 중요한데, 많은 경우에 우리는 오해하고 있습니다. 요일1:9에 보면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고 회개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케하신다”고 약속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우리의 잘못된 상태를 하나님께 자백하고 회개하는 것이 하나님과의 교통을 다시 재개할 수 있는 계기를 제공하는데, 이때 우리가 주의할 것은 하나님을 비인격으로 대하기가 쉽다는 것입니다. 기계적으로 “내가 죄를 지었습니다. 하나님 용서해 주십시오”라고 고백만 하면 마치 죄가 다 용서되는 것으로 우리는 생각합니다. 우리가 슬픔을 느끼는 것처럼 하나님도 슬퍼할 줄 아는 인격이십니다. 그런데 우리가 반복해서 동일한 범죄를 저지를 때 하나님은 우리를 안타깝게 생각하십니다. 만일 자녀들이 실수를 하거나 무슨 잘못을 저질렀을 때 엄마에게 와서 잘못했다고 용서를 빌면 용서를 해줍니다. 그러나 두 번 세 번 동일한 죄가 계속되면 엄마는 용서해주지 않습니다. 아이의 입장에서는 분명히 잘못했다고 용서를 빌었으니 된 것 아니냐고 생각할지 몰라도 그런다고 해서 두 사람의 관계가 정상으로 회복되는 게 아닙니다.

    회개라는 개념은 내 쪽에서 진실되게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마는 더욱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나를 어떻게 생각하시느냐 하는 것입니다. 죄를 몇 번 고백했다는 것이 회개의 중심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하나님께서 용서하셨는가를 생각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인간들이 범죄 했을 때 그 죄만이 아니라 그것의 바탕이 되는 마음을 해결하기 원합니다. 이것을 성경에서 ‘구속(救贖)’이라고 말합니다. 구속이라는 개념은 넓은 의미의 회개를 말하는 것으로, 모태에서부터 죄악 중에 출생했고 어린 시절부터 죄 짓기를 쉽게 생각했으며 습관적으로 잘못된 생각을 갖고 있고 기질 속에 혈기와 분노가 있는 근본을 고치는 것을 말합니다. 그런데 이런 문제들은 관심을 갖지 않은 채 내가 누구에게 화를 냈다, 또 무슨 실수를 저질렀다는 등 드러난 사건만 회개하는 것을 하나님은 원치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그 사건을 근거로 해서 그 밑에 있는 근본적으로 타락한 인간의 모습이 하나님의 성품, 하나님의 형상으로 변화되기를 원하십니다. 그래서 우리가 회개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계속해서 어떤 죄에 대한 징계를 주십니다. 그때 “내가 다 고백했잖아요. 잘못했다고 뉘우쳤잖아요?”라고 항변하지 말고 하나님의 의도가 어디 있는가를 이해하고 징계하심의 뜻을 우리가 붙잡아야 합니다.

    창 3장에 보면 인간이 범죄 했을 때 하나님께서 가죽옷으로 인간의 죄 문제를 덮어주셨습니다. 수치를 가리우시고 하나님 앞에 의로운 존재로 세우셨습니다. 그러나 그 죄에 대한 대가도 치르게 하셨습니다. 여자에게는 아이를 낳을 때 해산의 고통을 더하게 하셨고 남자를 사모하며 남자의 다스림을 받게 하셨습니다. 또 남자들에게는 땀을 흘리고 수고해도 척박한 땅에서 수고한 대가를 다 얻지 못하고 어렵게 가족을 부양하면서 직업을 통해서 다루심을 받고 정결하게 되는 구속의 방법도 마련하셨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많은 경우에 은혜로 죄사함 받고 입술로 고백하여 용서받는 것만 중요하게 생각하고 생활 가운데서 사람을 통해서, 환경을 통해서, 고통의 시간들을 통해서 다루심을 받는 이 연단과 구속의 뜻을 이해하지 못함으로 오랜 세월 믿어도 근본적인 본성이 변화가 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정결케 되기를 원하십니다. 마귀를 닮았던 우리의 종자가 하나님의 종자로 돌아오기를 원합니다. 하는 일마다 행악의 씨앗을 뿌렸던 우리가 이 땅에 하나님의 생명을 흩뿌리는 하나님의 일꾼들이 되기를 원하십니다.

    삼하7:14-16에 이런 말씀을 주십니다. “나는 그 아비가 되고 그는 내 아들이 되리니 저가 만일 죄를 범하면 내가 사람 막대기와 인생 채찍으로 징계하려니와 내가 네 앞에서 폐한 사울에게서 내 은총을 빼앗은 것 같이 그에게서는 빼앗지 아니하리라 네 집과 네 나라가 내 앞에서 영원히 보전되고 네 위가 영원히 견고하리라 하셨다 하라”

    범죄 했을 때 하나님께서 양의 피를 통해서만 이 아닌 사람 막대기와 인생 채찍으로 우리 속의 인격구조를 정결케 하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아마 가정마다 어려움이 다 있을 것입니다. 부부 관계의 어려움, 자식 문제, 혹은 시댁이나 친정의 어려움 등 갖가지 문제가 많습니다. 교회 안에서도 나와 이해관계가 없는데도 괜히 나를 미워하고 내가 하는 일마다 시비를 거는 사람이 있을 수 있습니다. 이 모두가 사람 막대기와 인생 채찍으로 우리를 구속하는 하나님의 방법입니다.

    다윗이 치사하게 범죄를 했습니다. 권력을 이용해서 우리아의 아내를 빼앗고 나서 그것도 부족해서 자기의 죄를 은폐하기 위해서 그를 최전선에 배치해서 전쟁터에서 죽게 만듭니다. 하나님이 나단 선지자를 통해서 그의 죄를 지적했고, 그때 다윗은 침상이 젖도록 중심으로 하나님 앞에 회개했습니다. 하나님이 이 다윗의 회개기도를 받으시고 용서를 하셨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삼하12:-20: 까지에서 다윗의 가정과 이스라엘 나라에 우환이 계속됩니다. 하나님이 분명히 용서하셨는데도 불구하고 다윗이 저지른 범죄 때문에 다윗 왕가에 계속 어려운 일들이 나타났습니다.

    12장에서는 밧세바의 첫아들이 시름시름 앓다가 죽습니다. 13장에는 큰 아들 암논이 배다른 여동생 다말을 범하는 근친상간의 죄를 범합니다. 그러자 다말의 오빠인 압살롬이 2년 후에 암논에게 복수를 합니다. 피비린내 나는 형제 살육(殺戮)의 역사가 다윗 왕가에 나타납니다. 15장에 보면 압살롬이 외조부가 있는 그술로 도망쳤다가 3년 만에 돌아와서 자기 스스로 왕이 되고 다윗을 배역합니다. 다윗은 이 사건 때문에 도망을 쳐야 했습니다. 18장에 가면 충신 요압이 압살롬을 죽이자 다윗은 자기를 배신한 아들임에도 불구하고 단장이 끊기는 고통과 슬픔을 느낍니다. 20장에 보면 베냐민 사람 세바가 열 지파의 지지를 얻어서 또 다윗을 반역합니다.

    이렇게 다윗의 범죄한 사건 이후에 다윗의 왕가와 이스라엘 전체가 계속 어려움을 겪게 됩니다. 죄를 용서하셨음에도 불구하고 다윗의 범죄의 영향력은 계속 끊어지질 않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의 의도는 이 사건을 출발로 해서 다윗 속에 있는 기질, 못된 성품, 육신의 욕망대로 살려고 하는 잘못된 성향, 그의 피속에 흐르는 망령된 행실 등을 깨끗하게 해서 다윗을 하나님이 계획하신 수준까지 끄집어 올리려는 계획이 있으셨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 회개 기도하는 것을 이렇게 생각합니다. 십일조를 잘 안 내다가 회개하고 철저하게 십일조를 내면 하나님께서 갑자기 물질을 쏟아부어 주실 것을 기대합니다. 그런데 웬걸요. 수입에 더 어려움이 있습니다. 내가 주의 일을 안해서 어려움이 있다고 생각하고 주일학교 교사도 하고 성가대도 하고 할 수 있는대로 다 합니다. 그 다음부터 문제가 착착 풀어질 것으로 기대했는데 안 풀어집니다. 그때 우리는 당황합니다. 예수를 잘못 믿고 불의하게 살아서 어려움이 있는지 알았더니 예수를 잘 믿어도 어려움이 있구나 생각합니다. 이때 하나님의 의도를 이해하지 못하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시는 높은 뜻을 놓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변화시켜서 가장 좋은 길로 인도하시려고 하는 그 절호의 찬스를 우리가 놓치는 것입니다.

    사람 막대기와 인생 채찍으로 우리를 인도하실 때 우리가 하나님의 그 인도하심에 복종해야 합격을 합니다. 하나님은 왜 다윗을 징계하셨습니까? 하나님이 다윗을 선택하신 데는 큰 뜻이 있으셨습니다. 그를 통해서 이 땅에 예수 그리스도가 오셔야 했습니다. 이스라엘 나라에 하나님 나라의 모형을 보여줘야 합니다. 따라서 다윗이 지금 범죄해서 죄를 회개하고 돌이켰다는 사실이 중요한게 아니라 다윗의 존재 자체가 하나님의 뜻을 펼칠 수 있는 하나님적인 존재로 변해가도록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었습니다.

    2. 하나님의 징계에 대한 바른 응답

    다윗이 징계받을 때, 하나님께서 정결케하기 위해서 그를 다루실 때 다윗은 어떻게 응답했습니까? 그것은 오늘을 사는 우리에 귀중한 귀감이 됩니다. 하나님 뜻대로 살아 볼려고 하는데 일이 잘 안 풀려질 때 어떤 자세로 하나님의 뜻에 응답해야 할 것인가를 가르쳐 줍니다.

    1)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고 자신을 포기함

    첫 번째로, 우리가 고난 당할 때 이 고난의 배후에 하나님의 주권적인 개입이 있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합니다. 우리는 예배 때마다 신앙고백을 통하여 우리의 믿음을 고백합니다. 하나님이 나의 창조주요 나의 삶을 지배하시는 통치자요 결국 심판하러 오실 심판의 주라는 사실을 입술로는 고백합니다. 나의 태어남, 나의 매일의 일상적인 삶의 진행, 인생을 마치기까지의 모든 삶의 여정들이 하나님의 장중에 있다는 사실을 입술로는 고백합니다. 그러나 실상 우리가 어떤 사건 앞에 부딪혔을 때, 어떤 어려움을 당하거나 고통스러운 시간을 지날 때에는 하나님이 아닌 사람이 한 것으로 생각하고 자신에 대해 절망하거나 또 어려움을 준 사람을 정죄하기도 합니다.

    어려움을 당할 때 다윗이 어떻게 응답했는지를 잘 보십시다. 삼하16:5-14까지입니다. “다윗 왕이 바후림에 이르매 거기서 사울의 집 족속 하나가 나오니 게라의 아들이요 이름은 시므리라 저가 나오면서 연하여 저주하고” 압살롬이 반란을 일으켜 다윗이 지금 도망을 치게 됐습니다. 도망쳐 나오는데 이미 몰락한 사울 왕가의 이름도 없는 시므이라고 하는 사람이 그를 저주하고 비난하고 욕을 합니다. 다음 9절을 봅니다. “스루야의 아들 아비새가 왕께 여짜오되 이 죽은 개가 어찌 내 주 왕을 저주하리이까 청컨대 나로 건너가서 저의 머리를 베게 하소서” 지금 왕의 좌우에는 군장들이 다 무장을 하고 왕을 호위하고 있습니다. 그 중에 아비새라는 장군이 내가 저 개 같은 자를 가만 두지 않겠다고 할 때 다윗이 뭐라고 말합니까? 10-11절에서 “왕이 가로되 스루야의 아들들아 내가 너희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 저가 저주하는 것은 여호와께서 저에게 다윗을 저주하라 하심이니 네가 어찌 그리하였느냐 할 자가 누구겠느냐 하고 또 아비새와 모든 신복에게 이르되 내 몸에서 난 아들도 내 생명을 해하려 하거든 하물며 이 베냐민 사람이랴 여호와께서 저에게 명하신 것이니 저로 저주하게 버려 두라” 다음 12절에서는 “혹시 여호와께서 나의 원통함을 감찰하시리니 오늘날 그 저주 까닭에 선으로 내게 갚아 주시리라 하고”라고 말합니다.

    다윗은 이 사건을 시므이가 아닌 하나님의 손길로 보았습니다. “정말 내가 회개했는지, 내가 잘못했다고 고백했던 그 사실을 내가 시인하는지를 하나님이 지금 보고 계신다. 하나님이 하신 일이라면 너희가 어찌 이 일을 막을 수 있겠느냐? 내가 여기서 합격해야 하나님이 내 원통함을 풀어 주실 것이다.” 생각합니다.

    사람이 잘 나갈 때는 누가 옆에서 뭐라고 해도 기분이 덜 나쁩니다. 그러나 사업이 좀 어려워진달지 집안에 어떤 어려움이 있을 때는 누가 옆에 와서 빈정거리거나 약을 올리면 오장육부가 다 뒤집어집니다. 그것도 내 기준에서 볼 때 좀 수준있는 사람이 얘기를 한다해도 견디기 힘든 일인데 자기 주제 파악도 제대로 못한다고 평소에 생각했던 사람이 경멸과 모독의 언사로 “그건 하나님이 내린 저주”라고 비난한다고 생각해 보세요. 아무리 도망치는 상황이라 해도 일국의 왕인 다윗을 지금 그런 식으로 대접을 한다는 것은 상식을 초월한 일입니다.

    하나님께서 내게 고난을 주시고 역경의 시간을 주셨을 때, 사람들이 나를 무시하고 멸시하고 질책할 수 있습니다. 그때 우리는 어떻게 응답해야 합니까? 시므이가 아니고 하나님이라는 이 비밀을 빨리 붙잡아야 합니다. 그 사람이 아닌 그의 뒤에 하나님이 계시다는 사실을 빨리 인정해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주권 하에 사는 성도들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로 우리를 불러 주셨습니다. 아들을 죽여서 우리를 사셨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이 우리를 망하게 놔두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그렇게 무정한 분이 아닙니다. 우리가 망해가도록 방치하는 분이 아닙니다. 우리가 다 건강하게 살기를 원하고 다 잘되기를 원하고 이 땅에서 성공하기를 원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왜 우리의 축복을 제한하셨습니까? 죄를 지으면서 잘되는 것은 허망한 것이요 거품이기 때문에 차라리 적나라한 나의 비참한 모습을 보고 내가 죄를 버리고 정결케 된 모습으로 하나님 앞에 서기를 원하십니다. 그래서 회개했음에도 불구하고 다윗으로 하여금 압살롬의 반역을 통해서 고통을 당하게 하고, 시므이를 통해서 진짜 다윗이 회개한 사람으로서의 마음을 가지고 있는지를 테스트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내가 싸워야 할 대상은 시어머니가 아닙니다. 남편이나 아내가 아닙니다. 바로 내 자신입니다. 타락한 본성을 갖고 있고 하나님의 축복을 막고 있고 하나님의 계획을 무시하고 딴 길로 가려고 하는 타락한 나의 기질과 본성이 내 원수입니다. 싸워야할 대상이 누구인가를 잘 생각하셔야 합니다. 목사나 장로가 아닙니다. 비아냥거리는 김집사가 아닙니다. 열받게 하는 자녀가 아닙니다.

    얍복강 가에서 야곱이 밤을 새워 진땀을 흘려가며 씨름했던 ‘그 어떤 사람’, 야곱은 그 밤에 그 사람의 정체가 누구인지 몰랐습니다. 그러나 아침에 동녘이 밝아올 때 드디어 깨달았습니다. 밤새도록 자기를 시달리게 했던 사람은 하나님이셨습니다. 20년 동안 삼촌의 집에서 삼촌에게 이용당하고 사촌 형제들에게 시달리고 빼앗기고 잃어버리면서 살았던 그 많은 세월들, ‘그 어떤 사람’, 내가 가는 곳곳마다 복병으로 숨어 있으면서 나를 괴롭히고 나를 힘들게 했던 ‘그 어떤 사람들’, 결국은 나의 환도뼈를 부러뜨려서 절뚝거리게 만들어 버리고 마는 그 어떤 사람이 내 부모가 아니고, 시동생이나 시누이가 아니고, 내 돈 떼먹고 도망친 그 놈이 아니라 누구라고요? 하나님입니다. 내 환도뼈가 위골되어서 절뚝거려야 이 씨름은 끝이 납니다. 지지 않으려고 계속 버티면 이 씨름은 더 길어집니다. 고난의 기간은 우리가 단축할 수 있습니다. 2년 만에도 가나안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구태여 40년을 채울 이유가 없습니다. 이제 그만 고난의 세월을 더 벌지말고 하나님의 의도를 빨리 잡아야 합니다. 브니엘의 하나님을 만날 수 있어야 합니다.

    2) 말씀으로 돌아가 순종함

    두 번째로, 다윗이 어려움을 당했을 때 그는 말씀으로 돌아섰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거스리고 순종하지 않았기 때문에 타락이 왔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구원받고 영적으로 성장하고 회복되면 반드시 말씀과의 관계가 회복돼야 합니다.

    다윗이 처음에 범죄했을 때 나단 선지자를 통해서 하나님이 지적하신게 무엇이었습니까? 삼하12:9-10에서 “그러한데 어찌하여 네가 여호와의 말씀을 업신여기고 나 보기에 악을 행하였느뇨 네가 칼로 헷 사람 우리아를 죽이되 암몬 자손의 칼로 죽이고 그 처를 빼앗아 네 처를 삼았도다 이제 네가 나를 업신여기고 헷 사람 우리아의 처를 빼앗아 네 처를 삼았은즉 칼이 네 집에 영영히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셨고” 9절에서는 “하나님의 말씀을 업신여겼다”고 말하고 10절에서는 “나를 업신여긴 일”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범죄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를 대적하는 것이요 하나님의 말씀을 멸시하는 것입니다. “고난당하기 전에는 내가 그릇 행하였더니 이제는 주의 말씀을 지키나이다”(시119:67) 우리가 어려움 당하기 전에는 멋대로 살았습니다. ‘그릇 행하였다’는 말은 하고 싶은 대로하고 살았다는 것입니다. 정욕이 요구하는 대로, 욕심이 요구하는 대로 기분 나쁘면 배신해 버리고 기분 좋으면 아첨이라도 하는 것이 우리의 옛 본성이었습니다. 그러나 고난 당한 이후에는 어떻게 합니까? “내가 말씀을 지키나이다.” 이제는 내가 마음대로 살지 않고 말씀대로 산다는 것입니다. 시119:71에 보면 “고난 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인하여 내가 주의 율레를 배우게 되었나이다”라고 말씀합니다. 고난 당한 사건을 통해서 다윗이 하나님의 공의로운 율례를 배우게 됐다고 했습니다. 이것이 고난이 주는 유익입니다.

    우리가 어려움 당하기 전에는 내 멋대로 살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징계의 손길 아래 붙잡히게 되고 하나님이 연단하실 때에는 내 모습을 버리고 말씀 앞에 돌아서야 합니다. 말씀의 인도를 받아야 합니다.

    성령을 좇아 행하라고 했습니다. 그러면 성령을 따르는게 무엇입니까? 쉽게 얘기해 봅시다. 내가 지금 어떤 사람을 미워하는 마음이 있습니다. 그런데 내 속에서 하나님은 그를 사랑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사랑하라. 그를 품어주라. 기다려줘라.” 내가 이때 어느 메세지에 순종해야 합니까? 여러분, 말씀을 따른다고 하는 개념을 어렵게 생각하지 마십시오. 나도 나를 용납 못하는데 내 남편을 어떻게 평생 100점을 주면서 살 수가 있습니까? 착각하지 마세요. 조석(朝夕)으로 변하는 이 감정을 누가 충족시켜 줍니까?

    우리는 감정을 따라 사는 사람이 아니고 내가 싫어도 하나님의 말씀이 따르라고 하면 따라가야 합니다. 내가 좋아도 말씀이 안된다고 하면 거절해야 합니다. 이것이 말씀을 지키는 삶입니다. 이 비밀을 깨달은 사람이 고난을 통해 연단된 사람입니다. 우리의 감정은 여전합니다. 그러나 내가 의지로 결단해야 하나님께서 도와주십니다. 내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말씀으로 돌아와야 회복이 있고 축복이 있습니다. “나의 가는 길을 오직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정금같이 나오리라”(욥23:10) 다음 11절부터는 정금으로 될 수 있는 비결이 나옵니다. 반드시 내게 향한 하나님의 뜻이 이루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겠다는 결단을 해야 합니다.

    금광석을 정금으로 만들려면 반드시 제련을 해야 합니다. 부숴뜨리고 녹이고 하는 이 작업을 해야 하는데 하나님께서 우리를 정금처럼 쓰시기 위해서 사람 막대기와 인생 채찍으로 우리를 정결케 하십니다. 고생한다고 다 정금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누가 정금으로 변합니까? 누가 하나님의 뜻을 성취해 드릴 수 있습니까? 말씀 앞에 자기를 복종시키는 사람입니다. 기분 나쁘고 분노가 치밀어도 하나님께서 말씀하신다면 양보하고 포기할 수 있는 그 사람이 쓰임 받을 수 있습니다.

    3) 자기를 버리고 하나님을 선택함

    세 번째로, 다윗은 고난 당할 때에 자기를 버리고 하나님을 선택했습니다. 자기를 쳐서 복종시키는 일을 통해서 하나님의 마음을 샀습니다. 삼하15:14을 봅니다. “다윗이 예루살렘에 함께 있는 모든 신복에게 이르되 일어나 도망하자 그렇지 아니하면 우리 한 사람도 압살롬에게서 피하지 못하리라 빨리 가자 두렵건대 저가 우리를 급히 따라와서 해하고 칼로 성을 칠까 하노라” 다윗을 따랐던 심복들이 그대로 있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다윗은 도망을 쳤습니다. 압살롬을 대적해서 빼앗겼던 왕위를 다시 되찾을려 하지 않고 도망을 칩니다. 어떤 면에서 너무 비겁하지 않느냐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다음 구절에서 우리는 다윗이 왜 그렇게 하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19-20절 “그 때에 왕이 가드 사람 잇대에게 이르되 어찌하여 너도 우리와 함께 가느냐 너는 쫓겨난 나그네니 돌아가서 왕과 함께 네 곳에 있으라 너는 어제 왔고 나는 정처없이 가니 오늘날 어찌 너로 우리와 함께 유리하게 하리요 너도 돌아가고 네 동포들도 데려가라 은혜와 진리가 너와 함께 있기를 원하노라” 다윗이 왕좌를 빼앗기고 도망자의 신세에 있을 때 남아있는 사람들을 어떻게 설득이라도 시켜서 한 사람이라도 더 자기 편으로 만들어야 합니다. 그런데 지금으로 말하면 수도방위사령관격인 잇대가 육백 명을 거느리고 다윗을 좇아 왔습니다. 다윗이 뭐라고 말합니까? “나는 도망자의 신세다. 지금 나를 따라 오지 말고 돌아가서 압살롬을 섬기라”고 하는 것입니다. 기가 막힌 얘기를 합니다.

    또 있습니다. 삼하25:26절을 봅니다. “왕이 사독에게 이르되 하나님의 궤를 성으로 도로 메어가라 만일 내가 여호와 앞에서 은혜를 얻으면 도로 나를 인도하사 내게 그 궤와 그 계신 데를 보이시리라 그러나 저가 말씀하시기를 내가 너를 기뻐하지 아니한다 하시면 종이 여기 있사오니 선히 여기시는 대로 내게 행하시옵소서 하리라” 대제사장이 하나님의 법궤를 가지고 따라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법궤가 있어야 하나님의 임재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언약궤만 가지고 나오면 압살롬이 아무리 날뛰어도 이길 수 있다고 생각할 수 있는 것입니다. 다윗 편에서가 아니라 대제사장이 언약궤를 들고 와서 같이 가자고 하는데 다윗이 뭐라고 합니까? 언약궤를 다시 가져가라고 합니다. 그러면서 “하나님께서 그 마음을 돌이키시면 내가 다시 언약궤를 볼 것이요 언약궤가 있다 할지라도 하나님이 거절하시면 나는 버림받은 사람이다”라고 합니다. 철저하게 하나님과의 관계로 봤습니다. 이게 중요합니다.

    다윗이 이 엄청난 고난의 현장에서 다시 왕위(王位)를 회복할 수 있었던 이유가 여기 있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어려운 일을 당하게 되면 평소에는 인격적으로 잘하다가도 도망칠 구멍을 미리 만들어 놓습니다. 자신의 체면과 입지를 위하여 보다 많은 사람을 확보함으로 지지를 얻어 자기의 정당성을 드러낼려 합니다. 그러나 다윗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이 엄청난 고난을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해석합니다.

    문제는 내 안에 있지 법궤가 있고 없고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수많은 용사가 나를 지원해 주고 언약궤가 따라온다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나를 합당하게 생각하지 않으면 내게 축복이 없다. 그러나 내가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이 된다면 이 모든 위기는 다 원상복귀될 것이다” 다윗은 이것을 믿고 살았던 사람입니다. 뒤처리를 깨끗하게 합니다. 사람이 어려움을 겪거나 코너에 몰리면 그 사람의 본체가 드러납니다. 정말 그 사람이 하나님을 주인으로 모시는 사람인지 하나님을 이용하는 사람인지를 알 수 있습니다.

    엘리의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가 불레셋과의 전쟁에서 졌을 때 어떻게 했습니까? 법궤를 가져와서 하나님을 이용해 전쟁에 이기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블레셋에게 대패했고 법궤마저 빼앗겼습니다. 다윗은 알고 있었습니다. “법궤가 온다고 해서 하나님이 오시는 것은 아니다. 내 중심이 중요하다. 내가 하나님께 범죄하였고 하나님이 지금 나에게 근신의 기간을 주셨는데 내가 권모술수를 사용하여 인간적인 방법으로 내 자신의 의로움을 드러낼 수 없다” 말하고 다 포기했습니다. 모든 욕망, 모든 생각들을 하나님께 복종시켰습니다. 하나님이 기분 좋으셨을 것입니다. 근신하는 기간 동안에는 권모술수를 버려야 합니다. 사람에게 받는 지지를 위해 하나님을 잃으면 안됩니다.

    4) 말을 조심함

    네 번째로, 우리가 어려움을 당할 때 특별히 입술의 표현을 조심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우리 인간에게 주신 통치권이 언어를 통해서 실행됩니다. 예를 하나 들어 내가 로마 시대의 황제라고 가정해 봅시다. 내가 농담으로 “저놈은 죽어 마땅한 놈”이라고 한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 사람은 곧 죽임을 당했을 것입니다. 통치권자이기 때문에 내가 농담을 하고 장난을 해도 내가 하는 행동에 의해서 한 사람의 운명이 왔다 갔다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있어서 입술의 권세라고 하는 것은 대단한 것입니다.

    민수기 14:1-3, 26-30을 보면 가나안 땅이 너무 정복하기 어려운 땅이라고 정탐꾼들이 불평을 할 때 이스라엘 백성들은 다 반란을 일으켰습니다. 삽시간에 부정적인 말들이 온 백성들을 지배하게 됐습니다. 그래서 “차라리 우리가 애굽을 안나왔으면 더 좋았을 뻔했다. 차라리 우리가 광야에서 죽었으면 더 좋았을 뻔했다.”라고 이야기했습니다. 그때 하나님이 들으셨습니다. “내가 너희 말을 들었다. 너희가 원하는대로 행하리라.” 말씀하셨습니다. 사람 앞에 한 말을 누가 들었어요? 하나님이 들으셨습니다.

    여러분, 말조심 하십시오. 이스라엘이 망한 이유가 무엇입니까? 시78:9-20에 보니까 “그뿐 아니라 하나님을 대적하여 말하기를 하나님이 광야에서 능히 식탁을 준비하시랴 저가 반석을 쳐서 물을 내시매 시내가 넘쳤거니와 또 능히 떡을 주시며 그 백성을 위하여 고기를 예비하시랴 하였도다”라고 합니다. 이 말이 무슨 말이냐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을 떠나면서부터 지금까지 40년 동안 하나님이 계속해서 만나와 메추라기를 주셨고 반석을 깨뜨려서 생수가 터져 나오게 하셨는데 좋을 때는 감사하고 찬양하던 사람들이 조금 어려워지니까 하는 말이 “언제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식탁을 예비하셨어요? 물을 주었다고요? 아이구 고기 맛 본 지 오래 되었습니다.”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들으십니다. 왜 복을 발로 찹니까? 농담으로 했을지라도 책임을 져야 합니다. 장난이라도 그런 표현을 쓰지 마십시오. 하나님께서 들으십니다.

    욥이 고난을 당할 때 욥기 2장 9절을 보면 그 아내가 이렇게 얘기를 합니다. “그 아내가 그에게 이르되 당신이 그래도 자기의 순전을 굳게 지키느뇨 하나님을 욕하고 죽으라” 그러자 욥이 무엇이라고 대답합니까? 욥2:10입니다. “그가 이르되 그대의 말이 어리석은 여자 중 하나의 말 같도다 우리가 하나님께 복을 받았은즉 재앙도 받지 아니하겠느뇨 하고 이 모든 일에 욥이 입술로 범죄치 아니하니라” 이것은 잘 될 때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하나님이 계시는지 안 계시는지 정신이 아득해지는 그런 위기의 상황에서 입술로 범죄하지 않았다는 말입니다. 왜요? 하나님께서 사람의 입술에 권세를 주셨기 때문입니다.

    3. 마음이 깨끗한 자, 하나님의 사람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이 땅을 살면서 정결케 되기를 원하십니다. 깨끗하게 되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의 갈망은 우리가 큰 일을 하고 위대한 사람이 되는 게 아니라 종자가 바뀌는 것입니다. 욥기서 1장 말씀을 읽어보면 하나님께서 욥을 의인이라고 인정을 했습니다. 에스겔서 14장 14절과 20절을 보면 이 지상에 살았던 사람 가운데 가장 의로운 사람 세 사람을 노아, 다니엘, 욥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욥이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고 인정 받은 이유는 요즘으로 말하면 그가 교회당을 건축하고 헌금을 얼마를 했고 전도를 몇 사람 했고 어마어마한 사역을 했고 굉장한 직분을 받아서라고 표현하지 앉습니다. 욥이 하나님 앞에 인정받은 것은 순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함에 악에서 떠난 자였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깨끗한 성품, 아름다운 마음씨를 가졌다는 말입니다.

    예수 믿고 구원받았다고 하는 것은 우리가 굉장한 사역을 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게 아닙니다. 그보다 더 먼저 해야 할 게 있습니다. 우리의 옛사람의 성품이 예수님의 성품으로 바뀌는 것입니다. 성령이 충만하게 되면 성령의 열매인 9가지 열매를 맺게 되는데 그것이 다 외적인 행함이 아니라 내적인 성품입니다.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온유와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온유와 충성과 절제가 다 내적인 성품입니다. 마태복음 5장을 보면 소위 팔복이라고 해서 팔복을 소유한 사람들의 특징 8가지를 말하는데 심령이 가난한 자, 애통하는 자, 온유한 자, 마음이 청결한 자, 긍휼히 여기는 자,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 화평케 하는 자, 의를 위하여 핍박받는 자입니다. 이게 다 내적인 성품입니다. “하나님, 내가 장차 큰 쓰임 받기 원합니다.”라는 기도를 드리시는 분이 있다면 먼저 자기 마음을 정결케 하고 지켜야 합니다. 하나님의 마음에 내 마음이 합해져야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신앙의 본질을 자꾸 오해하고 있습니다. 겉으로 드러난 것이 먼저가 아닙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먼저입니다. 마음이 깨끗해지지 않으면, 마음이 하나님께 합당한 사람이 되지 않으면 그의 행위나 사역은 외식이 됩니다. 사람 막대기와 인생 채찍으로 우리를 다루시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우리의 속사람, 우리의 성품, 우리의 기질, 우리의 가치관, 우리의 생각을 신령하게 바꾸기 위함입니다.

    다윗은 치졸한 행동을 했던 사람입니다. 무능한 사람이었습니다. 자기 집안에서 근친상간이 벌어지고 형제들 간에 서로 죽이는 일을 했을 때에도 공의롭게 통치하지 못했습니다. 다윗이 도덕적으로 순결하고 일을 잘했기 때문에 하나님께 인정받은 게 아닙니다. 사도행전 13:22절에 보니까 “이새의 아들 다윗을 만나니 내 마음에 합한 사람이다 내가 저를 통하여 내 뜻을 이루리라”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마음에 드는게 중요합니다. 사람의 평판이나 여론을 의식하지 마십시오. 사람들이 나를 옳다고 인정해주고 안하고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나를 어떻게 보시느냐, 하나님이 지금 내 마음을 어떻게 보고 계시느냐, 내가 하나님 앞에 몇 점 짜리냐, 이것을 회복하는게 우선입니다.

    다윗이 다시 왕권을 회복했습니다. 하나님이 다시 원상으로 되돌려주셨습니다. 멋있게 쓰임 받았습니다. 그래서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라”는 기록이 나옵니다.

    아브라함 역시 좀스러운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자기 신변의 안전을 위해서 아내를 두 번씩이나 팔아먹은 사람입니다. 그가 잘나고 똑똑하고 대단한 행위를 해서가 아니라 고난을 겪으면서 그가 하나님의 마음에 합당한 사람으로 변화되어갔기 때문에 그를 사용할 수 있었습니다.

    사무엘서의 저자가 압살롬의 반역을 거론하고 다윗 왕가의 비극을 계속 나열한 것은 다윗이 위기를 만났을 때 어떻게 하나님 앞에 응답했는가를 보여주기 위해서입니다.

    여러분, 환경적으로 어려운 문제가 해결이 안되고, 시어머니가 나를 괴롭히고, 부부간의 문제가 해결이 안되고, 자식이 골치를 썩이고 나를 괴롭히는 등 사람 막대기와 인생 채찍이 끊어지지 않습니까? 구속사적으로 해석하십시오. 하나님이 내 마음을 정결케 하기 위해서 일하시는 것이라는 사실을 붙잡고 하나님 앞에 엎드리게 되면 반드시 회복됩니다.

    다윗처럼 우리도 왕권을 회복합시다. 실수했다고 낙심하지 맙시다. 고통의 시간들이 너무 힘들다고 좌절하지 맙시다. 함부로 말하지 맙시다. 우리의 중심이 결실을 거둘 때가 옵니다.

    최선을 다했는데도 풀리지 않는 영적인 문제들을 안고 우리가 신앙생활하고 있습니다.
    얼마쯤 더 기다려야 좋은 날을 볼 것입니까?
    내 원수가 나를 비난하며 생각지도 않은 사람들이 나를 무시하고 멸시하는 경험들을 가질 때가 많습니다.
    주여, 이 고난의 현장 속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게 하시고 내가 무엇을 해야할 지를 깨닫게 하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묵상자료 

    1. 환경적으로 꼬인 문제를 푸는 가장 중요한 열쇠는 무엇입니까?
    2. 고난과 역경에 대처하는 다윗의 자세는 어떠합니까?
    3. 나를 위해 쓰임 받는 ‘사람 채찍과 인생막대기’는 누구입니까? 나는 그들을 어떻게 대하고 있으며 그들을 통해 들려주시는 하나님의 음성은 무엇입니까?


    징계(懲戒) 예화(例話) 35편


    징계의 뜻
     
    영적 무감각은 신자들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징계하고 계신다는 것을 깨닫지 못하게 한다.
    나는 하나님께서 그들의 삶에 허락하신 고통 때문에 하나님을 원망하는 사람들을 자주 만나게 된다.
    그때마다 나는 그들과의 대화 속에서 그들이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지 않았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그들은 온갖 죄 가운데 빠져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자기들이 당하는 고통과 죄 사이의 상호 관계성을 전혀 깨닫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한번 시작하신 것을 성취하시기 전에는 성도에게 가하시는 연단을 결코 완화하시지 않는다.
    우리가 복종하기를 거부할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징계의 매를 더욱 더하실 뿐이다.
    하나님의 최종 목표는 우리로 그 분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형상을 닮게 하시는 것이다.

    당신은 지금 당신의 삶 속에서 하나님의 징계를 체험하고 있는가?
    만약 하나님께서 당신의 반역과 불순종의 결과를 당신이 면할 수 있도록 계속 내버려 두셨다면, 당신은 지금 어떻게 되었겠는가?

    하나님께서 멸망을 향해 달려가고 있던 당신의 발걸음을 돌려 그분께로 향하게 하셨다는 사실이 이해되는가?
    히브리서 기자의 말처럼 “징계는 당시에는 즐거워보이지 않고 슬퍼보인다.”
    그러나 당신이 하나님께 그분의 사역을 완수하도록 맡기고 허락한다면, 당신은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의의 평강한 열매를” 거두는 체험을 하게 될 것이다.

    초달치 못하는 자
     
    어느 한 사람은 15살난 중학생 아들이 3번이나 사고를 내어 학교에서 경고장이 와 아버지가 학교로 불려 갔습니다.
    이런 경우 아버지는 아들에게 "내 체면이 있으니 좀 봐 달라"는 식으로 이야기하면 안됩니다.
    그러나 그는 집에 돌아와서 아이를 데려다 놓고 [이제부터 너를 위해서 너도 조금 고생하고 나도 조금 고생하자]라고 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는 3일동안 금식 기도를 하고 와서 아들과 같이 기도하고 매를 때린 후 또 기도하기를 [하나님, 제가 이 아들을 잘못 키웠습니다.
    기도도 등한히 하고 잘못 가르쳤으며 나쁜 성격을 유전시킨 것을 회개합니다.
    앞으로 이 아이를 위해서 더 가르치고 기도할 수 있도록 해주십시오]라고 회개하며 기도하였더니 그 아들이 아버지 앞에 무릎을 꿇고 울먹이면서 [아버지, 다시는 그런 일이 안하겠습니다]라고 용서를 빌었으며 그후 그 아이는 절대로 그런 일을 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자녀들을 훈계하며 잘 양육할 수 있도록 인도하시는 주님을 찬양합니다.

    자녀들을 초달할 때의 원칙

    첫째, 징계는 하나님의 명령이기 때문에 한다는 것을 자녀들에게도 납득시켜야 합니다.
    어떠한 규율을 정해 놓고 그 법에 순종하지 않을 때에는 징계하는 것이 하나님의 명령이라는 것을 알려야 합니다.

    둘째, 반드시 준비기도를 하고 매를 때려야 합니다.
    이것은 특별히 아들들에게 해당되는 것이고 딸들에게는 매를 때리지 말고 다른 벌, 즉 베개를 머리에 이고 있게 한다든가 성경말씀을 어디에서 어디까지 읽으라든가 하는 융통성 있는 방법을 사용해야 할 것입니다.

    세째, 본인의 동의를 구하고 때려야 합니다.
    매를 때로 놓고 아버지에게서 정이 떨어지고 불쾌하게 느껴진다면 매를 때리지 않는 편이 낫습니다.
    매를 때린 후에도 존경심이 생기 도록 기술적으로 교육적으로 해야 합니다.

    넷째, 분노나 즉흥적인 감정으로 때리면 절대로 안됩니다.

    다섯째, 사랑의 원리에 의해 때려야 합니다.

    "초달을 차마 못하는 자는 그 자식을 미워함이라 자식을 사랑하는 자는 근실히 징계하느니라 "(잠 13:24)

    인간의 타락과 징벌
     
    아담의 속성과 죄를 짓기 전의 아담의 하나님과의 관계는 어떠했습니까?

    A. 아담의 혜택
    아담은 동물의 이름을 지을 수 있었고 하와와의 관계를 인식할 수 있는 이해력과 추리력을 가지고 있었습니다(창 2:19-23). 하나님께서는 또한 그에게 언어를 사용할 수 있는 능력을 주셔서 하나님과 그 자신의 의사소통이 가능하게 하셨습니다(창 2:16, 20, 23).

    B. 아담의 도덕적 속성
    우리가 타락 전에 아담의 도덕적 속성을 어떻게 묘사하든지 간에, 그가 죄가 없었다는 사실은 분명합니다. 어떤 사람은 이 사실이 일종의 '수동적인 거룩성(passive holiness)'으로 아담이 나쁜 것으로부터 깨끗한 존재였음을 의미한다고 말합니다. 아담의 거룩성은 그에게 하나님과의 완벽한 교제를 즐길 수 있도록 할만큼 탁월한 것이었습니다. 아담이 죄를 짓기 전까지 그 하나님과의 교제는 '수동적인 거룩성'이라고 말하기에는 너무 견고한 것이었습니다.
    나는 다음과 같은 묘사를 더 선호합니다. "아담은 견고하지 않은(unconfirmed, 왜냐하면 아담은 시험을 통과하지 못하고 시험에 실패했기 때문이다), 피조물적인(creature, 왜냐하면 그의 거룩성과 창조주의 거룩성은 같지 않았기 때문이다), 거룩성(holiness, 왜냐하면 그는 단순히 깨끗한 존재 이상의 의미를 지닌 존재였기 때문이다)을 가지고 있었다."

    C. 그의 책무
    땅에 대한 통치권을 행사하는 것(창 1:26, 28)이 그의 책무였습니다. 신통치학자들(theonomists)은 모든 종류의 하나님을 반대하는 것들을 철폐함으로, 세계의 모든 구조가 그리스도의 주권 아래에 놓이게 해야 함을 사람들에게 확증시키기 위해서 '땅에 대한 통치권을 행사하는 것'을 소위 '문화적 사명(cultural mandate)'라고 이해합니다. 개혁주의 학자들은 오늘날 사회의 모든 측면에서 '구약성경의 율법 확립(the establishment of the Old Testament law)'을 강조하지 않는다는 점만 빼고는 신통치학자들과 유사한 이해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땅을 정복하라"는 구절이 홍수 이후의 노아 및 노아의 후손들(우리도 포함)에게 주어진 명령이 아닙니다(창 9:1). 더 나아가서 창세기 1:28에 나오는 "정복하라(subdue)"는 단어는 '반죽하다(knead)' 혹은 '밟다(tread)'라는 어근으로부터 온 단어로 사람이 번성할 수 있도록 '땅을 경작하는 것(bringing the earth under cultivation)'을 언급하는 단어입니다. 아담은 땅에 충만하게 될 사람들을 뒷받침할 수 있도록 땅과 땅의 피조물들을 관리해야 했습니다. 이러한 책무는 아담이 에덴 동산을 다스리고 지키도록 명령받은 것(창 2:15)과 같은 맥락에 있습니다.

    II. 시험

    궁극적으로 시험은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느냐 혹은 순종하지 않느냐에 관한 시험이었다. 그것을 증명할 수 있었던 특별한 방법은 '에덴 동산에 있는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를 먹지 않는 것'에 의해서였습니다. 어떤 의미로 그들이 실과를 먹을 수 있었던 다른 많은 나무들과 비교해서 그들에게 주어진 명령은 '소소한 금지(a minor prohibition)'였습니다. 그러나 다른 의미로 그러한 명령은 그들이 하나님께 순종하느냐 아니면 불순종하느냐를 보여줄 수 있는 특별한 방법이었기 때문에 '중대한 문제(a major matter)'였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이 자발적으로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고 하나님을 섬기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분은 인간이 로봇이 되기를 원하지 않았습니다.

    III. 유혹자

    사단은 현명하게도 그 자신을 드러내어, 즉 하와가 사단을 보고 조심하여 스스로 경계심을 가질만한 상황을 만드는 것 대신에 하와가 친숙하게 생각했던 피조물을 이용했습니다. 그때 하와는 뱀과 함께 얘기했던 내용에 대해서 경계하지 않았습니다.

    IV. 유혹

    A. 사단의 거짓
    거짓은 소중한 것을 제거한 상태에서 가능한 한 진짜의 것과 비슷한 모습으로 찾아옵니다. 거짓의 아비 사단은 하나님과 같지는 않지만 이전에 하나님과 같이 되려는 야망을 가진 적은 있었습니다(사 14:14). 사단은 자신의 계획이 하나님의 계획과 같지만 온전한 순종이라는 제한을 두지 않는다는 제안을 가지고 하와에게 접근했습니다. 그리고 사단은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너무 지나친 제한을 두셨을 것이라는 암시를 심어주었고, 하와는 그 생각에 빠져들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나서 사단은 그녀에게 그러한 제한성을 가지고 있지 않은 그 자신의 계획을 제의하기에 이르렀다. 그래서 하와가 금지된 실과를 먹는다면 그녀가 하나님처럼 될 수 있다는 그릇된 희망을 심어주었습니다.

    B. 하와의 합리화
    사단의 제안을 곰곰이 생각해 보았을 때, 그녀는 그 실과가 먹기에 좋아 보이고 아담을 위해 좋은 것을 제공하는 것이 그녀의 아내로서의 책무라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게다가 하나님께서 그들이 즐기도록 그처럼 많은 다른 것을 만드셨다면, 왜 하나님께서 눈에 보기에 아름다운 그 실과를 금지하셨을까? 물론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현명하게 되기를 틀림없이 원하셨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 실과를 먹는 것이 바람직하거나 심지어는 꼭 필요한 조치였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 실과를 먹지 말라는 하나님의 명백한 명령이 그녀의 마음으로부터 사라지게 되었습니다. 결국 그녀는 그 나무의 실과를 따서 먹게 되었습니다.

    V. 징벌

    A. 인간에 대해(창 2:7-13)
    1. 옷을 해 입음으로 증명되는 죄책감(창 2:7)
    2. 하나님의 낯을 피함으로 증명되는 교제의 상실(창 2:8). 이것은 또한 인간에게 정신적이고 육체적인 죽음을 동시에 초래했습니다. 죽음은 언제나 분리(seperation)를 의미합니다. 타락 즉시 아담과 하와는 영적 분리를 겪게 되었고, 동시에 그들의 몸은 부패 과정으로 들어가기 시작했으며 결국 육체적으로 죽게 되었습니다(롬 5:12).

    B. 뱀에 대해(창 3:14)
    뱀은 비천한 존재라는 표시로 기어다니도록 정죄 받았는데, 이 사실은 뱀에 대한 징벌이 가해지기 전에 뱀은 아마 똑바로 선 피조물이었을 것이라는 점을 보여줍니다. 천년왕국에서조차 이러한 모습은 지속될 것입니다(사 65:25). 사실상 타락한 상태의 인간이 생물에 대한 어느 정도의 통치권을 여전히 행사할 수 있도록 모든 생물계도 인간의 타락에 의해 영향을 받게 되었습니다(롬 8:20).

    C. 사단에 대해(창 3:15)
    1. 사단의 후손과 여자의 후손. 사단의 후손(모든 잃어버린 자들, 요 8:44; 엡 2:2)과 여자의 후손(모든 하나님의 가족들) 사이에 적대감이 존재할 것입니다. 여자의 후손인 한 분(예수 그리스도)이 십자가에서 사단의 정수리에 죽음의 타격을 가하지만(히 2:14; 요일 3:8), 반면에 사단은 그리스도에게 고난("발꿈치를 상하게 하다")을 초래할 것입니다. 기독교가 등장하기 전의 유대인들은 창세기 3장 15절에서 희미하게나마 메시야 사상을 받아들였습니다.

    D. 하와 및 여자에 대해(창 3:16)
    1. 잉태. 하나님은 여자의 잉태하는 고통("잉태와 고통"이 아님)을 더하셨습니다. 어린아이의 탄생에는 이제 고통이 수반되게 되었습니다.
    2. 여자는 그녀의 남편을 사모하게 되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 구절을 수고 및 출산의 고통에 대한 보상적 요소라고 이해합니다. 이를테면 출산의 고통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그녀의 남편에 대해서 깊은 성적인 매력을 느끼게 되고 그로 말미암아 아이를 낳으려는 소원을 가지게 된다는 것입니다.
    3. 통치의 질서. 죄악된 세상에서의 질서의 필요성 때문에 여자는 남자에 의해 다스려질 것입니다. 신약성경은 이러한 질서를 철폐하지 않습니다(고전 11:3; 14:34; 엡 5:25-25; 딛 2:3-5; 벧전 3:1, 5-6).

    E. 아담 및 남자에 대해(창 3:17-24)
    1. 땅에 대한 저주. 땅은 아담의 죄 때문에 저주를 받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땅은 가시와 엉겅퀴를 내게 되었고, 땅의 소산을 얻기 위해서 아담은 더 많은 수고를 해야 했습니다. 타락이 있기 전에 아담에게 있어서 노동은 즐거운 것이었고 만족스러운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이제는 어렵고 공허한 것이 되었습니다.
    2. 죽음. 아담과 인류는 죽어서 땅의 흙으로 돌아가야 했습니다.
    3. 추방. 아담은 에덴 동산으로부터 쫓겨나게 되었는데 그러한 모습은 하나님과의 교제가 끊어졌다는 사실을 지리적이고 영적인 상징으로 보여준 것이었습니다.

    참고할 내용

    위와 같은 특별한 징벌과 더불어, 아담과 하와의 죄에 대한 두 가지의 중요한 내용이 지적될 필요가 있습니다.

    첫째, 모든 죄는 다른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칩니다.
    하와의 죄는 아담에게 영향을 미쳤고, 아담의 죄는 모든 인류에게 영향을 미칩니다.
    어느 누구도 다른 사람들과 관련되지 않는 상태에서 완전히 개인적으로 죄를 지을 수는 없습니다.
    우리가 하는 혹은 하지 못하는 모든 일은 여러 가지 모양으로 소수 혹은 다수의 사람에게 영향을 미칩니다.

    둘째, 죄는 한 번 범해지면 결코 되돌려질 수 없습니다.
    용서는 이루어질 수 있고, 교제는 회복될 수 있으나 역사는 변해질 수 없고 삭제될 수 없습니다.
    아담과 하와가 한 번 추방되면 에덴 동산으로 다시는 되돌아올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이런 두 가지 참고사항에 대한 또 다른 측면의 내용이 있습니다.
    죄가 다른 사람에게 영향을 미치지만 은혜와 선도 다른 사람에게 영향을 미친다는 것입니다.
    역사는 삭제될 수 없지만 우리가 역사의 교훈을 잘 배울 수 있다면 미래는 달라질 수 있습니다.
    타락은 모든 인간에게 영향을 미쳐서 부패와 죽음을 초래했고, 그 타락의 시간은 인류 역사상 가장 어두운 시간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죄가 있는 곳에 은혜가 더하고,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사람은 영원히 거하게 될 것입니다(롬 5:20. 요일 2:17).

    징계의 복(신명기  8:5-6)

    너는 사람이 그 아들을 징계함 같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징계하시는줄 마음에 생각하고.
    하나님 여호와의 명령을 지켜 그 도를 행하며 그를 경외할찌니라.

    한 목회자에게 세 아들이 있었습니다.
    둘째아들이 중학교 3학년 때 주일에 교회에 가지 않고 친구들과 강으로 놀러갔습니다.
    저녁이 되어 불안한 마음으로 집에 돌아왔을 때 아버지는 채찍을 들고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종아리를 때리면서 아버지는 말했습니다.
    “나는 네가 일류대학에 가고 출세해서 돈 많이 벌기를 바라지 않는다.
    하나님 사랑하고 믿음을 지켜 신앙의 자식이 되기를 더 원하고 있다.
    왜 거룩한 주일을 우습게 여기느냐?”

    종아리를 맞던 아들은 잘못을 고백하고 용서를 빌었습니다.
    그 후 그 채찍은 아들의 신앙과 장래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습니다.
    지금 변호사가 된 그 아들은 모범적인 가정을 이루었고 교회에 훌륭하게 봉사하고 있습니다.

    성경은 채찍에 대한 분명한 교훈을 주고 있습니다.
    사무엘하 7장 14절에 “나는 그 아비가 되고 그는 내 아들이 되리니 저가 만일 죄를 벌하면 내가 사람 막대기와 인생 채찍으로 징계하려니와” 하시면서 채찍 없는 인생은 불쌍하게 된다고 교훈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주님은 채찍으로 그 사랑하는 자를 징계하십니다(히 12:6). 우리가 진정 영혼을 사랑한다면 채찍을 들어야 합니다. 채찍은 아프지만 하나님은 그 은총을 빼앗지 않습니다(삼하 7:15). 영혼을 때리는 채찍은 바로 내 자신에게 먼저 필요합니다.

    바울은 이것을 깨달았습니다.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기가 도리어 버림이 될까 두려워함이로다”(고전 9:27) 부자는 자기 영혼에 대해 채찍을 들지 않았습니다. 그 영혼은 저주 받았고 음부에 떨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채찍 없는 세대는 영적 암흑입니다. 채찍 없는 엘리 제사장과 그 아들들의 방자함이 제사장 가문을 망하게 했듯(삼상 2:34) 영혼을 때리는 채찍을 통해 구원과 생명의 존귀함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당신은 진정 영혼을 사랑하십니까? 그러면 채찍을 드십시오.

    한 사형수가 형장에서 죽으면서 마지막으로 그의 어머니를 불렀습니다. 사형수는 어머니의 귀에 대고 “내가 이렇게 사형수가 된 것은 어머니 때문이에요. 당신이 내가 잘못할 때 한 마디라도 꾸짖었다면 이 지경까지는 되지 않았을 텐데”라고 말하고 어머니의 귀를 물어버렸습니다.

    외아들인 자식이 나쁜 짓을 할 때 그 어머니는 채찍을 들지 않았던 것입니다. 결국 아들은 버릇을 고치지 못하고 사형수가 되고 만 것입니다.

    지금 우리에게 채찍이 있는지요? 방자하게 행할 때 꾸지람이 필요하고 오만해질 때 채찍이 있어야 합니다. 미국 속담에 “매를 아끼면 자식을 버린다”는 말이 있습니다. 한국 속담에는 “예쁜 자식 매로 키운다”는 말이 있습니다.

    부모가 야단칠 때 ‘네, 알겠습니다. 잘못했습니다.’ 하고 뉘우치는 자녀는 희망이 있습니다. 그러나 부모가 야단친다고 대들고 거역하는 자녀들은 학교에서 선생님께 대항하고 사회에서도 법을 지키지 않아 실패한 인생을 살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부모에게 순종하고 선생님께 순종하고 사회에서는 직장상사에게 순종하고 법을 잘 지키는 사람은 훌륭한 인물이 됩니다. 성공적인 삶을 삽니다. 더 나아가서 부모에게 효도하는 효자가 됩니다.

    어렸을 때부터 엄하게 키워야 성공하고 효자가 됩니다. 부모보다 키가 커지면 그 때는 늦습니다. 초등학교 때 길을 잘 들어야지, 중학생, 고등학생이 되면 이미 늦은 것입니다.
    "초달을 차마 못하는 자는 그 자식을 미워함이라 자식을 사랑하는 자는 근실히 징계하느니라 "(잠13:24)
     
    잘될 때 근신하라
     
    신실하게 신앙 생활을 하는 한 가정이 있었습니다. 주일이면 부부와 어린 아들 세 식구가 교회의 맨 앞자리에 앉아 예배를 드리고 열심히 봉사했습니다.
    하루는 그 가정의 남편이 목사님께 승진을 위해 기도해 달라고 했습니다. 목사님은 그를 위해 진심으로 기도했고, 드디어 그는 승진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승진을 하고 재산이 점점 늘어나면서 교회에서 그 가족이 앉던 예배 좌석이 가끔 빈 자리가 되곤 했습니다. 그러더니 결국에는 아예 주일 예배에 불참했습니다. 목사님이 심방을 해서 알아보았더니, 그들의 말인즉 조용한 호숫가에 별장을 한 채 샀는데 주말이면 그곳에 가서 수상 스키를 타기 때문에 주일 예배에 참석할 수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이후 불과 몇 개월이 지나지 않았을 때의 일입니다. 아들이 호수에서 수상 스키를 타다가 물에 빠졌는데 그 순간 쏜살같이 지나가던 다른 보트에 받쳐 그만 그 자리에서 즉사하고 말았습니다.

    귀한 아들을 졸지에 잃고 크게 낙심한 그들은 그때서야 비로소 다시 교회를 찾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세 식구가 나란히 앉았던 자리에는 이제 두 부부만이 앉아 예배를 드리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세상의 탐욕에서 돌이키지 않는다면 재앙은 속히 임합니다

     

    바늘 도둑이
     
    어느 바닷가 조그만 마을에 한 어린 소년이 살고 있었습니다. 소년은 날마다 바닷가에 나가서 놀았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소년은 물새알을 발견해 그것을 양쪽 호주머니에 넣고 얼른 집에 돌아와 어머니께 보였습니다. 소년의 어머니는 아무 말 없이 물새알을 맛있게 요리해 주었습니다.
    다음 날도 소년은 바닷가에 나갔지만 이제는 노는 것에 더이상 관심이 없고, 하루 종일 물새알을 찾아 헤맸습니다.

    하루는 물새알을 못 주워 힘 없이 집으로 돌아가는데, 어느 집에서 ꡒ꼬꼬댁ꡓ하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가까이 가보니 암탉이 알을 낳고 우는 소리였습니다. 소년은 물새알 대신 이번엔 달걀을 갖고 돌아왔습니다. 어머니는 또 말없이 그것을 요리해 주었습니다.

    다음 날부터 소년은 바닷가로 나가는 대신 누구네 닭이 알을 낳는지를 살폈고, 그렇게 시작된 소년의 도둑질 버릇은 어른이 되면서 점점 더 대담해지고 규모가 커져 결국 교수대에 매달리게 되었습니다.

    사형이 집행되기 전 그는 울고 있는 어머니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어머니, 제가 어린 시절 물새알이나 달걀을 가져왔을 때 저를 훈계하셨더라면 이렇게까지 되지 않았을런지도 모릅니다."
    당신은 당신의 자녀를 하나님께 드렸습니까? 아니면 당신이 소유하고 있습니까?

     

    사랑의 징계
     
    이스라엘 백성들이 우상 숭배로 하나님을 반역하자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징계를 내리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백성답게 살기 위해서는 반드시 변화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징계는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 가서 치욕을 당하는 것이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백성으로 삼으신 우리를 사랑하시되, 우리의 가증스러운 반역에 대해서는 엄중한 징계로 다스리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백성이 된 우리가 불신의 세상과 함께 정죄당하도록 방치하지 않으시고 징계하시는 것입니다.
    이러므로 우리는 온갖 가증스러운 행위들을 버리고 오직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답게 살아가야겠습니다.

     

    책망과 회개
     
    "자주 책망을 받으면서도 목이 곧은 사람은 갑자기 패망을 당하고 피하지 못하리라" (잠 29:1)

    몇 년 전, 어떤 여자가 죽을병에 걸린 적이 있었습니다. 그 때 그 여자는 이웃에 사는 기독교인에게 이런 맹세를 했습니다."만일 하나님께서 내게 새로운 생명을 허락하신다면 앞으로는 전혀 딴 사람이 되겠습니다. 애들을 교회에 데려가고 또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방식대로 자라도록 하겠습니다"

    그 후 그녀는 완전히 회복되었으며 몇 개월 도안은 맹세를 잘 지켜 나갔습니다. 그러나 점차 시간이 흐르면서 다시 옛날의 생활방식으로 돌아가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옛 친구와 어울려 차를 몰고 가면서 술을 조금씩 마신 것이 원인이 되어 커다란 교통사고를 내고야 말았습니다.

    부모가 자식을 기를 때, 자식이 한 번 잘못했다고 해서 회초리를 들지는 않습니다. 여러 번 책망을 하고 난 다음에도 자식이 그 책망을 무시하고 여전히 자행자지하면, 그때는 회초리를 들고 종아이를 때리는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도 오래 참으십니다.

    하지만 일단 깨닫고 하시고자 때리시면 감당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때리시기 전에 회개의 기회를 주십니다. 그 것이 하나님의 자비입니다. 그러나 회개하지 않고 완고하면 파멸의 날이 다가오는 것입니다. 반면 마음이 깨어지고 회개하는 사람은 주님께서 용서하시고 회복시켜 주십니다

     

    징계의 복2
     
    히12:8 "징계는 다 받는 것이거늘 너희에게 없으면 사생자요 참 아들이 아니니라 "

    한 어린 소녀가 그녀의 음악 교사에게 피아노를 치면 손가락이 아프다고 말했더니 그 선생은 다음과 같이 대답했습니다.
    "아픈줄은 나도 알지만 손가락이 튼튼해지기도 한단다. "
    그래서 소녀는 다음처럼 대답하여 옛 부터 지금까지의 교훈을 요약했습니다.
    "선생님, 튼튼하게 만드는 것은 모두가 아픈 것 같군요."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자녀들의 고통을 결코 헛되게 하시지 않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슬픔 중에서도 당신을 신뢰하는 자들을 매우 사랑하시며 고통의 통로로 다가오는 귀중한 영혼을 강하게 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우리가 고통당하도록 허락하시지 않는 한 당신께서 조차 우리를 위해 하실 수 없는 일들이 있으니, 당신께서도 과정이 없이 과정의 결과만을 이루실 수는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들"에 속하는 사람은 모든 것을 소유합니다! 제 궤도를 운행하는 별들이 그를 위해 싸우고 부는 바람마다 그의 닻을 부풀게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무가치한 영혼에게 시련을 주시지 않습니다.
    오늘도 징계의 사랑을 깨닫고 인내로서 아름답게 살아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빌리 그래함의 딸
     
    빌리 그래함에게 안네 로츠라는 큰 딸이 있습니다. 이 딸은 지금 미국 노스 캐롤라이나 주 랄리시에 살면서 성서연구 지도자로 수고하고 있는데, 이 딸의 어렸을 때 이야기입니다. 잘못을 저질러서 어머니 루스 여사가 매를 드니까(빌리 그래함 목사의 가정 교육은 엄격한 것으로 소문나 있고,

    이렇게 엄격한 가정교육 덕택에 지금은 가족 모두가 전도 사역에 동참하고 있읍니다)안네는 얼른 “엄마. 내가 잘못한 것이 아니고 내 안에 마귀가 있는데 그 놈이 잘못하게 했어.”하고 둘러대더라는 것입니다.

    어머니 루스 여사는 “오. 알아. 그래서 나는 그 마귀를 쫓아내려고 하는 거야.”하면서 회초리로 딸을 때렸습니다. 두 시간 뒤에 딸이 또 잘못을 저질러서 루스 여사가 매를 드니까 딸은 얼른

    “엄마. 마귀란 놈이 벌써 내 속에서 밖으로 도망갔어.”
    하더라는 것입니다. 루스 여사는 하는 수 없이 회초리를 놓을 수밖에 없었다고 합니다. 딸은 이렇게 애교로 매를 피했지만 우리는 죄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에서 피할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은 죄에 대한 심판을 반드시 하십니다.
    그리고 우리는 우리의 죄를 숨길 수 없습니다.

    민수기 32:23에는 “너희 죄가 정녕 너희를 찾아낼 줄 알라”고 되어 있고,

    잠언 28:13에는 “자기의 죄를 숨기는 자는 형통치 못하나 죄를 자복하고 버리는 자는 불쌍히 여김을 받느니라”



    그릇된 신앙
     
    계 3:14-22 "무릇 내가 사랑하는 자를 책망하여 징계하노니 그러므로 네가 열심을 내라 회개하라" (계3:19)

    얼마 전 TV에서, 최근 성장하고 있는 호주 불교의 실상을 취재한 프로그램이 방영되었습니다. 그런데 그곳의 한 주지는 호주 불교의 성장을 그리 환영하지 않는다고 말했습니다. 그 이유는 절을 찾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색적인 동양문화에 대한 호기심과 건강을 위해 도움이 된다는 심신수양에만 관심이 있을 뿐 정작 불교의 교리나 가르침에는 무관심하다는 것이었습니다.

    실상은 기독교도 다를 바 없습니다. 절기마다 가득 찬 기도원이나 때마다 호황을 이루는 철야예배는 사업이 번창하고, 건강이 좋아지고 자식이 잘 됐으면 하는, 자기 중심적인 그릇된 신앙의 표현이 대부분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사람들에게 신기한 마술사 정도로 인식되는 것을 원치 않으셨습니다. 구속의 참된 의미는 접어둔 채 자기 욕심만 채우려는 이기적인 자들에게서 떠나 있기를 원하셨던 것입니다. 예수님의 능력은 그것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에게 쓰여지며 천국 복음의 증거들로 제시되었습니다. 혹시 우리의 믿음도 세상작인 복과 이적만을 쫓는 믿음이 아닌지 반성할 때입니다.
    "저희가 다 자기 일을 구하고 그리스도 예수의 일을 구하지 아니하되"(빌2:21)

     

     

    요한 웨슬러 어머니 수산나의 징계
     
    감리교의 창시자였던 요한 웨슬리의 어머니 수산나는 모두 19명의 자녀를 키웠습니다. 엄청난 숫자입니다. 그러나 수산나는 그들을 하나같이 신앙적으로 훌륭하게 잘 길렀습니다.
    한 번은 수산나가 자기 아이들에게 사과를 하나씩 나누어주었습니다. 그리고 남은 것은 바구니에 넣어 높은 선반 위에 올려 놓았습니다.

    그런데 요한 웨슬리는 더 먹고 싶은 욕심에 의자를 놓고서 어머니 몰래 선반 위에 있는 사과를 꺼내어 훔쳐먹었습니다. 나중에 수산나가 그 사실을 알고서는 요한 웨슬리를 불러다가 따끔하게 혼내었습니다.

    그에게 얼마나 매질을 했는지 그의 맞은 자리에서 피가 흐를 정도였습니다. 나중에 요한 웨슬리는 그때 일을 회상하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만일 그때 내가 어머님께로부터 실컷 매를 맞고 혼나지 않았다면 나는 아마도 지금의 내가 될 수 없었을 것이다."
    하나님의 자녀인 우리가 영으로서 몸의 행실을 죽이지 않으면 성령께서는 탄식하십니다. 더 나아가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바른 길로 인도하시기 위해서 징계하시는 것입니다.

     

     




    사랑의 징계는 복입니다
     
    신명기 8;1∼6 “너는 사람이 그 아들을 징계함 같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징계하시는 줄 마음에 생각하고”(신 8:5)

    어려움을 전혀 겪지 않고 사는 사람은 없습니다. 만일 어떤 사람이 ‘고통과 어려움 없이 사는 비법을 가르쳐 주겠다’고 말한다면 그건 보나마나 사이비입니다. 예수님은 사람의 삶은 근본적으로 무거운 짐을 지고 가는 것이라고 분석하셨습니다. 마태복음 11장 28절 말씀입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정도와 사람에 따라 차이가 있어서 그렇지 어려움은 누구나 있습니다. 어려움이나 고난에 빠지지 않도록 지혜롭게 삶을 관리해야 합니다.
    그러나 어떻게 해서든 어려움을 만나지 않으려고 하는 것은 어리석은 태도입니다. 이런 자세를 가지게 되면 삶이 소극적이고 폐쇄적으로 변합니다. 새로운 것을 시도하는 용기가 사라집니다. 특히 오늘날처럼 변화가 심한 세상에서는 이런 사람은 아무것도 성취하지 못합니다.

    누구에게나 어려움이 있다면 중요한 것은 그 어려움을 어떻게 이해하고 극복해 나가느냐 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이스라엘 민족의 광야 생활을 해석하는 영적 시각을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광야는 사람이 살기 어려운 곳입니다.

    이스라엘 민족의 광야 생활은 얼마나 어려움이 많았겠습니까. 그러나 광야 생활은 이스라엘 민족의 아버지인 하나님께서 당신의 자녀를 성숙시키기 위한 훈련 과정이었습니다. 광야 생활의 이런 의미를 깨닫는다면 그 광야의 훈련은 감사할 조건이 됩니다.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따기 위해 노력하는 선수는 감사하는 마음으로 감독의 고된 훈련을 따라갑니다. 감독이 자신을 금메달 선수로 만들려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아버지가 성도들의 인생에 대해 가지고 계신 계획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려움은 그 어떤 것이든 훈련 과정으로 생각하십시오. 아니,생각이 아니라 사실이 그렇습니다. 우리 가정의 자녀들이 삶의 어려운 과정을 신앙적인 시각으로 이해하고 해석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매와 훈계
     
    “말에게는 채찍이요 나귀에게는 자갈이요 미련한 자의 등에는 막대기니라” (잠 26:3)

    황 희 정승에게는 방탕한 생활을 일삼는 아들이 하나 있었습니다. 그는 아들에게 여러 차례 조용한 목소리로 훈계를 했었습니다. 그런데도 아들은 주색에 빠져 학문을 소홀히 했습니다. 이에 어느 날 밤 황 희 정승은 아들이 술에 취하여 집에 돌아오는 것을 보고 친히 문밖으로 나가 아들에게 공손히 인사를 하고 맞아들였습니다. 그러자 아들이 매우 놀라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아버님, 어이된 일이옵니까? 의관 속대를 하시고 저를 맞아주시다니요?” 이 때 황 희 정승은 정중히 대답했습니다. “네가 아비 말을 듣지 않으니 어찌 내 집 사람일 수 있겠느냐? 한집 사람이 아닌 나그네가 집을 찾으매 이를 맞는 주인이 인사를 정중히 차리지 않으면 어찌 예의라 이르겠느냐?” 이후 황 희 정승의 아들은 크게 뉘우치고 행실을 고쳐 학문에 정진했음은 물론입니다.

    미련한 사람은 아무리 좋은 말로 타이르고 또 타일러도 도무지 듣지 않습니다. 그러나 가슴 깊이 박힐 정도로 한 번 호되게 훈계를 들으면 정신을 차리고 말을 듣습니다. 미련한 사람은 남의 말을 듣지 않고 고집을 부리며 제멋대로 어리석은 짓만 하지만 사랑으로 온전히 훈계를 한다면 변화될 수 있는 것입니다. 때로 사랑의 매도 필요한 것입니다.

     

    자녀 징계 8계명
     
    1. 약한 마음을 품고 감정적으로 징계하지 말고 자신을 이성적으로 통제할 수 있을 때에만 징계하라.
    2. 미리 징계 기준과 방법을 자녀에게 맞게 고려하여 공평하고 일관성 있게 징계하라.
    3. 자녀에게 징계 받는 이유를 납득시킨 후 징계하라.
    4. 손으로 직접 때리거나 얼굴이나 머리를 심하게 때림으로써 자녀에게 모욕감을 주지 말라.
    5. 아무도 없는 곳에서 징계하라. 많은 사람 앞에서 받는 징계는 심각한 수치심과 모멸감(侮蔑感)을 준다.
    6. 징계는 자녀가 잘못을 범한 즉시 시행하라.
    7. 징계 후에는 반드시 사랑과 용납의 자세로 자녀를 위로하고 감싸주라.
    8. 징계 받았던 일에 대해 자녀가 행동 수정을 했을 때 그에 따른 칭찬과 보상의 말과 행동을 잊지 말라.

     

     

    회복
     
    신한은행에 민 씨라는 지점장이 있었습니다. 그는 신한은행 설립위원으로서, 실력이 뛰어난 인정받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일본 오사카 지점으로 발령을 받아 해외근무를 하는 동안 실적이 부진하여 철저히 실패하게 되었습니다. 다시 서울에 돌아와서 지점장을 맡게 되었지만, 그곳에서도 여전히 실적이 부진했습니다.

    그래서 더 이상 그 은행에 있을 수 없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그는 징계의 의미로 금융연수원 파견연수 명령을 받게 되었습니다. 철저히 밑바닥에 떨어지게 된 것입니다. 그 동안은 자기가 잘나고 능력이 있는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두 번 실패하고 연수원까지 떨어지자 그는 비로소 하나님 앞에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 나는 실패한 인생입니다. 나는 인생의 밑바닥에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나와 함께 하여 주시옵소서.”
    그리고 교회에 나가서 성경 공부도 열심히 했습니다.
    그런데 그때 마침 신한은행 명동 지점장 자리가 나오게 되어, 그는 명동 지점장으로 가게 되었습니다.

    그는 책상에 앉는 순간 먼저 두 손을 모으고 하나님 앞에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이 지점의 주인은 하나님입니다. 이 은행의 지점장은 하나님입니다. 그러니 모든 일이 주님 뜻대로 되게 하옵소서.”
    그는 날마다 새벽 기도를 드린 후에 출근을 했습니다. 그리고 일을 결정할 때마다 하나님 앞에 기도를 드렸습니다.

    그 뒤부터 영업 실적이 올라가서 신한은행 전체 300개 지점 중에서 1등을 차지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은행에 근무한지 30년 만에 가장 좋은 성적을 거두어 은행장의 자리에 오르게 되었습니다. 한번 만에 하나님의 뜻에 맞게 성공적인 삶을 사는 것이 가장 좋습니다. 그러나 잘못된 길을 가서 한번쯤 구겨질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회복입니다.

     

    어머니의 채찍
     
    조지 W 부시 미 대통령 가문의 성공 비결은 엄격한 가정교육에 있다. 부시 대통령의 어머니 바버라 부시 여사는 ‘훈련소 조교’로 불릴 만큼 자녀들을 철저하게 훈육시켰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이다.

    물건은 항상 제 자리에 놓아라. 귀가시간을 엄수하라.” 바버라 여사는 이런 글이 쓰인 쪽지를 자녀들의 방에 붙여놓았다. 한번은 아들 부시가 텍사스 주지사에 출마한다는 소식을 듣고 기자회견을 열어 아들에게 경고의 메시지를 보냈다.

    “그것은 대통령의 아들이 취할 태도가 아니다. 출마의사를 당장 철회해야 한다.” 부시는 어머니의 뜻에 따라 주지사 출마를 포기했다. 세계의 명문가들은 대부분 이런 엄격한 교육을 통해 만들어졌다.
    어머니는 최고의 교사다. 어머니의 격려와 채찍이 자녀를 건강한 인격체로 만든다. 자녀에게 무조건 칭찬만 해주어라. 그러면 그 아이는 아주 버릇 없고 이기적인 사람이 될 것이다.



    네 자식을 징계하라
     
    "네 자식을 징계하라 그리하면 그가 너를 평안하게 하겠고 또 네 마음에 기쁨을 주리라"(잠29:17)

    어느 날 유명한 부흥사인 무디에게 어떤 여자 교인 한 사람이 찾아와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제가 아무리 범죄해도 하나님은 저를 그대로 놔두시데요. 그러므로 하나님은 계시지 않는 분이신 것이 분명해요."

    이 이야기를 듣고 있던 무디는 그 여인을 지그시 바라보면서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부인! 부인은 지금 부인이 스스로 그리스도인이 아니라는 사실을 증명하고 있습니다."
    "왜요? 제가 교회를 얼마나 오래 출석했는데요."

    무디는 다시 이렇게 말했습니다.
    "당신이 그리스도인이라면 하나님은 당신을 그대로 놔두지 않았을 것이요."
    옛말에 '엄하게 키운 자식이 훗날에 효도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자식을 키울 때, 잘한 것은 칭찬해주고 잘못한 것은 징계하며, 말로 꾸짖어서는 안되면 채찍으로 때려서라도 바른 길로 가도록 교육 시켜야 합니다.

    이렇게 잘 교육시켜 놓으면, 훗날 자식이 장성한 후에 부모에게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그리고 올바른 인생의 길을 가며 부모에게 효도하여 부모를 편안하게 기쁘게 해주는 것입니다.
    * 묵상: 당신은 하나님과 부모님께 영광을 돌리는 그리스도인입니까?

     





     

    사랑으로 징계하라
     
    징계는 부모로서 반드시 행사해야 할 중요한 권리이자 책임입니다. 그러나 이 징계에도 방법과 기준이 있어야 합니다. 자녀에게 징계를 할 때는 먼저 시기가 적절해야 합니다. 가장 좋은 것은 자녀 스스로가 깨닫도록 기회와 시간을 주는 것입니다.

    때로는 자녀 쪽에서 부모에게 고백할 수 있을 때까지 기다리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그렇게 되면 자신을 믿고 기다려준 부모에 대해 고마움과 신뢰를 느끼게 될 것입니다. 부모가 개입하여 책망하고 훈계해야 할 때가 되면 이야기를 하십시오. 그러나 장황하게 설교조로 늘어 놓는 것은 적절하지 않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감정을 절제하는 일입니다. 감정을 드러낸 반응은 아이들에게 거부감을 갖게 합니다. 징계의 기본 원칙과 기준은 성경입니다. 징계는 부모의 개인적인 기준이나 평가에 의해서가 아니라 성경적인 견해와 관점에서 행해져야 합니다.

    부득이하게 체벌을 할 때에는 직접 손을 대지 말고 회초리와 같은 도구를 사용하는 것이 좋습니다. 자녀의 잘못된 행실의 옷을 벗기기 원한다면 따끔한 꾸중과 냉정한 지적보다는 따뜻한 사랑의 표현이 더욱 효과적입니다.

    몰아부칠수록 고치려하기보다는 움추러들게 됩니다. 징계가 필요할 때마다 무엇이 진정 자녀를 변화시킬 수 있는가를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우물에 빠진 고양이
     
    독립문성결교회 담임이었던 임영재 목사의 전도사 시절 이야기다. 시골 교회에서 밤 설교를 하고 돌아오는데 온 동네가 떠들썩했다. 우물에 도깨비가 나타났다는 것이다. 임 전도사가 우물 안을 들여다보니 파란 불 두개가 깜빡거리고 있었다.

    긴 대나무로 그것을 꾹 찔렀더니 ‘야∼옹’하는 소리가 났다. 쥐를 쫓다가 우물에 빠진 고양이었다. 임 전도사는 고양이를 구해주기로 마음먹었다. 그는 대나무 끝에 그물을 달아 고양이에게 내밀었다. 그러나 고양이는 계속 반항했다.

    그대로 방치하면 죽을 것이 뻔했다. 임 전도사는 결국 막대기로 고양이를 쳐서 실신시켰다. 그리고 뜰채에 담아 구출했다. 따뜻한 방에 고양이를 눕혔더니 곧 깨어났다.
    하나님은 강퍅한 죄인을 구원하실 때 이 방법을 사용하신다. “너희가 어찌 매를 더 맞으려고 더욱 더욱 패역하느냐 온 머리는 병 들었고 온 마음은 피곤하였으며”(사 1:5)

     

     

     
     
     

     

     

    유태인의 교육
     
    가정에서 아이들에게 벌을 주는 것은 아이들이 성장하는 것을 돕는 가장 좋은 수단이다. < 구약 성서>에서 ‘아이를 그 가야할 길을 따라서 가르쳐라. 그리하면 나이가 들어도 그것을 떠나지 않으리라.(잠언 22: 6)’라고 씌어 있다.아이를 그 가야할 길로 나아가게 하기 위해서 벌을 주는 것이다.

    그러므로 벌은 반드시 한편으로는 애정의 표현이 따라야 한다. 벌로서 끝나 버리면 부모는 권위에 의해서 아이들을 지배하게 되고, 아이들은 그 개성을 자유롭게 나타낼 수 없게 되어 도리어 위축되어 버릴 것이다. 이래서야 아이들의 성장을 돕는 수단이 될 수 가 없다.

    ‘오른손으로 벌을 주면 왼손으로 안아줘라.“하는 유태의 낡은 속담은 벌에는 애정이 따라야 한다는 것을 뜻하는 말이다. 그리고 그 말마따나 유태인은 무슨 도구를 써서 아이들을 때리는 잔인한 일을 하지 않고 흔히 손으로 두들긴다.

     

     

     
     
     

     

     

    회초리에 대한 감사
     
    옛날에 선비가 제자와 함께 길을 걷고 있었습니다. 길가에 풀뿌레 나무가 서있었습니다. 선비는 그 나무를 보자 공손히 그 앞에 섰습니다.

    그리고 두 손을 모으고 허리를 굽히고 세 번 절을 하였습니다. 제자가 이상하여 물었습니다.
    "선생님! 도대체 누구에게 절을 하신 것입니까?"
    선비가 웃으면서 말했습니다.
    "저 나무에게 절 한 것이지"
    "왜 나무에게 절을 하십니까?"
    선비가 말했습니다.

    "이상할 것 없네. 저 풀뿌레 나무는 나에게는 가장 영향력을 미친 스승이라네"
    "무슨 말입니까?"
    "내가 어렸을 때였지. 내가 망나니로 개판치며 살고 있을 때 아버지가 이 나무를 꺽어서 회초리를 만들었지. 그리고 내 종아리에 피가 나오도록 쳤어. 나는 그 때 아버지를 원망하였지만 결국 이렇게 크게 일하게 되었지. 그래서 나는 이 나무만 보면 그 생각이 나. 이 나무 때문에 내가 바로 살게 되었어

     

     

     
     
     

     

     

    꾸짖어주세요
     
    역사상 어진 정승으로 으뜸은 '황희 정승'(1363-1452)을 들 수 있습니다. 황희 정승은 남을 꾸짖지 않은 사람으로 유명합니다. 그 이유야 정확히 알 수 없지만 '망령된 사람은 짐승과 같다. 짐승을 나무라서 무엇하리'라는 맹자의 가르침을 따르지 않았을까 생각해봅니다.

    왜냐하면 황희 이후 최고의 인물이었던 김종서와, 훗날 영상까지 된 황수신 에게 만큼은 인정사정 보지 않고 혹독하게 야단을 쳤기 때문입니다. 황희의 눈에는 이 두 사람만 사람으로 보이고 나머지 중생들은 짐승으로 보였을 수 있습니다.

    이 나라에 사람이 없는 것인지, 아니면 황희 정승과 같은 큰 인물이 없는 것인지, 도무지 쓴 소리를 하는 '어른'이 안보이네요. 국민을 꾸짖을 만한 위치에 있는 분들이 꾸중이나 책망을 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땅을 치며 통곡을 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분들은 국민을 개나 돼지취급을 하고 있음이 확실하기 때문입니다.

    나라뿐만 아니라 가정에서도 꾸지람이 사라진지 오래 되었습니다. 어른들은 아이들은 상전으로 앉혀놓고 비위 맞춰주기에 급급합니다. 아이들을 꾸짖지 않는 다면 그것은 아이들을 짐승으로 만드는 것입니다. 당연히 부모는 짐승을 사육하는 셈이지요.

    "내 아들아 여호와의 징계를 경히 여기지 말라. 그 꾸지람을 싫어하지 말라. 대저 여호와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시기를 마치 아비가 그 기뻐하는 아들을 징계함과 같이 하느니라"(잠3:11-12)

     

     

     
     
     

     

     

    사랑의 매
     
    잠13: 24
    "초달을 차마 못하는 자는 그 자식을 미워함이라 자식을 사랑하는 자는 근실히 징계하느니라"

    옛날에 작지만 평화로운 나라가 있었습니다. 어느 때부턴가 이웃 나라의 왕 때문에 이 평화스러운 나라에 괴로움이 찾아왔습니다. 이것저것 시비를 걸어오는 것입니다. 평화스러운 나라의 왕은 고심 끝에 젊고 현명한 사람을 뽑아서 사신으로 보냈습니다. 그런데 그 사신을 보고 이웃 나라의 왕은 몹시 언짢아하였습니다.

    "당신 나라에는 그다지도 인재가 없단 말이오? 수염도 나지 않은 사람을 내게 보내다니..." 젊은 사신은 대답했습니다.

    "왕께서 수염의 길이로 사람의 됨됨이를 판단하신다는 것을 저희 왕께서 미리 아셨다면 아마도 저 대신 염소를 보내셨을 것입니다." 이 말을 들은 이웃 나라의 왕은 다시는 그 나라를 괴롭히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렇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가치 있고 소중한 것은 이와 같은 지혜입니다. 솔로몬이 일천 번제를 드리면서 하나님께 지혜를 구하자 하나님께서는 크게 기뻐하시며 구하지 않은 많은 것까지 더해주셨습니다. 그것은 모든 부귀와 행복의 근원이 지혜로부터 시작됨을 잘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 이 땅에는 지혜와 지식이 무너지는 소리가 들립니다. 공교육이 무너지고, 사도도 제자도도 없습니다. 그리고 교실은 대학에 들어가는 학원으로 전락해버리고, 학원에서 공부하고 학교에서 잠을 잡니다. 학교에서 선생님이 때리면 폭력이고, 학원에서 강사가 때리면 사랑의 매라고 합니다.

    무엇 때문에, 왜 이 땅이 이렇게 변했을까요?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자원은 물이나 땅 속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숲이나 들판에 있는 것도 아닙니다. 그것은 누구도 빼앗을 수 없고 누구도 꺾을 수 없는 마음속에 있는 지혜입니다.
    "채찍과 꾸지람이 지혜를 주거늘 임의로 하게 버려두면 그 자식은 어미를 욕되게 하느니라"(잠29: 15)


    어느 날 유명한 부흥사인 무디에게 어떤 여자 교인 한 사람이 찾아와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제가 아무리 범죄해도 하나님은 저를 그대로 놔두시데요. 그러므로 하나님은 계시지 않는 분이신 것이 분명해요." 이 이야기를 듣고 있던 무디는 그 여인을 지그시 바라보면서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부인! 부인은 지금 부인이 스스로 그리스도인이 아니라는 사실을 증명하고 있습니다."
    "왜요? 제가 교회를 얼마나 오래 출석했는데요."
    무디는 다시 이렇게 말했습니다.

    "당신이 그리스도인이라면 하나님은 당신을 그대로 놔두지 않았을 것이요."
    옛말에 '엄하게 키운 자식이 훗날에 효도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자식을 키울 때, 잘한 것은 칭찬해주고 잘못한 것은 징계하며, 말로 꾸짖어서는 안되면 채찍으로 때려서라도 바른 길로 가도록 교육 시켜야 합니다.

    이렇게 잘 교육시켜 놓으면, 훗날 자식이 장성한 후에 부모에게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그리고 올바른 인생의 길을 가며 부모에게 효도하여 부모를 편안하게 기쁘게 해주는 것입니다.
    "징계는 다 받는 것이거늘 너희에게 없으면 사생자요 참 아들이 아니니라 " (히12:8)
    "네 자식을 징계하라 그리하면 그가 너를 평안하게 하겠고 또 네 마음에 기쁨을 주리라"(잠29:17)


    현대의 많은 교육학자들은 자녀교육에 있어서의 체벌의 문제, 즉 매의 사용에 관해서는 대부분 부정적인 견해를 나타내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들은 자녀에게 체벌을 가하는 것은 폭력적이며 비인격적이고 비교육적이라 말하며, 오직 사랑으로 끊임없이 인내하는 가운데 자녀를 양육하면 자녀는 올바로 성장할 수 있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들의 주장은 성경의 견해와는 정반대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오늘 본문 말씀은 물론 성경 여러 곳을 통해서 자녀를 채찍으로 근실히 징계할 것을 명하십니다.

    "상하게 때리는 것이 악을 없이 하나니 매는 사람의 속에 깊이 드러가느니라"(잠20: 30)
    그 사랑많고 인자하신 하나님께서는 왜 처벌을 통한 징계를 명하시는 것일까요? 거기에는 반드시 그에 합당한 이유가 있습니다.

    문제는 다만 부모들이 체벌을 가함에 있어서 잘못된 방법을 사용하는 데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기에서는 현재 자녀를 양육하고 있는 부모에게는 물론 앞으로 부모가 되실 분들을 위해 매의 필요성과 그 올바른 사용 방법 그리고 하나님의 징계에 대해 살펴보고자 합니다.

    1. 사랑의 매는 반드시 필요합니다.
    감리교의 창시자였던 요한 웨슬리의 어머니 수산나는 모두 19명의 자녀를 키웠습니다. 엄청난 숫자입니다. 그러나 수산나는 그들을 하나같이 신앙적으로 훌륭하게 잘 길렀습니다. 한 번은 수산나가 자기 아이들에게 사과를 하나씩 나누어주었습니다.

    그리고 남은 것은 바구니에 넣어 높은 선반 위에 올려 놓았습니다. 그런데 요한 웨슬리는 더 먹고 싶은 욕심에 의자를 놓고서 어머니 몰래 선반 위에 있는 사과를 꺼내어 훔쳐먹었습니다. 나중에 수산나가 그 사실을 알고서는 요한 웨슬리를 불러다가 따끔하게 혼내었습니다.

    그에게 얼마나 매질을 했는지 그의 맞은 자리에서 피가 흐를 정도였습니다. 나중에 요한 웨슬리는 그때 일을 회상하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만일 그때 내가 어머님께로부터 실컷 매를 맞고 혼나지 않았다면 나는 아마도 지금의 내가 될 수 없었을 것이다."

     

     

     
     
     

     

     

    어루만짐
     
    한 번 물면 쇠토막도 부러뜨리는 무서운 입을 가진 사자가 위협을 느끼자 자기 새끼를 입으로 물고 어디론가 달려가는 모습을 텔레비전에서 보았습니다. 천천히 걸어가는 것이 아니라 새끼를 입에 물고 전속력으로 달려가더군요. 그리고 안전한 곳에 도착하여 입을 벌리고 새끼를 바닥에 놓았습니다.

    귀여운 사자 새끼는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 재롱을 피웠습니다.
    자신보다 훨씬 큰 동물들도 한번 물면 숨통이 끊어질 때까지 놓지 않는 그 무서운 사자의 입이 어떻게 그렇게 자신의 새끼를 입에 물고도 상처 하나 안내고 달릴 수 있을까요? 그것은 사자의 입이 새끼를 어루만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어루만진다는 것은 부드럽게 감싸안으면서 안전하게 보호하는 모습입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자녀들을 그렇게 어루만지십니다. 때로는 하나님의 무서운 징계가 나를 덮치는 것 같이 보여도 그것이 바로 위험에서 나를 어루만지시는 하나님의 방법입니다. 겁내지 마세요. 사자의 입 속에 들어갔어도 안전한 것은 사자의 새끼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징계를 받아도 그것은 사랑의 징계입니다.

     

     

     
     
     

     

     

    매를 맞는 이유
     
    어떤 사람은 누워먹는 팔자가 좋다고 해서 밤낮 누워먹다가 무량병이 들었다는 것이다. 유명한 의사가 내가 고쳐준다고 가족과 의논하고 박달 망치를 차고 들어가서 사정없이 욕을 한다.
    "야 이놈아, 너 돈푼이나 있다고 밤낮 누워먹어? 너는 이 사회에 하루 살아야 하루 해독이요 이틀 살아야 그만큼 이 나라 이 사회에 해독인 기생충 같은 놈이야. 너 같은 놈은 때려 죽여야 한다"고 사정없이 두들 긴다.

    무량병자는 마누라를 부르고 자식을 부르나 종무소식(終無消息)이다. 이러다가는 정말 죽겠구나 하고 있는 힘을 다하여 발동하며 일어난다. "야, 이놈이 일어나누나" 하고 다시 후려갈기니 둥싯둥싯 달아나면서 한 번만 살려 주시면 일 잘하겠다고 백배 사죄를 한다.

    그래서 무량병 든 놈을 때려서 살렸다는 것이다. 우스운 이야기 같지만 참말 한국 민족이 이렇게
    매를 맞고 한국 교회가 많은 매를 맞는 것은 일어나서 일하라는 것이다. 남을 위해 일하는 것은 곧 나를 위함인 줄 알아야 하느니라.
    출처 : 어느 목사님 설교 중에서

     

     

     
     
     

     

     

    훈계와 책망
     
    잠29:1
    "자주 책망을 받으면서도 목이 곧은 사람은 갑자기 패망을 당하고 피하지 못하리라"

    골프 천재 타이거 우즈가 1997년에 20세의 나이로 세계 골프대회에서 우승했습니다. 하지만 코치는 우즈의 스윙 폼이 좋지 못함을 지적했습니다. 그리고 코치는 스윙 폼을 바꾸는 것은 매우 힘든 일이기 때문에 앞으로 2년 동안은 우승을 생각해서는 안 된다고 일러 주었습니다.

    우즈는 코치의 훈계를 받아들여 당장의 우승을 생각하지 않고 스윙 폼을 고치는 일에 전념하였습니다. 힘들고 어려운 2년 동안의 교정훈련을 잘 견디어냈습니다. 드디어 2년이 지난 1999년, 14개 세계 대회에서 무려 10번을 우승했습니다. 그는 코치의 훈계를 받아 들였기 때문에 좋은 결과가 나온 것입니다.

    심지 않고 거둠은 없습니다. 주님은 심지 않고 거두기만 바라는 자를 게으르고 악한 종이며 무익한 종이라고 책망하셨습니다. 그리고 이미 준 것마저 빼앗아 열심히 장사하여 갑절로 남긴 충성된 종에게 주셨습니다. 달란트 비유에 나온 말씀입니다.

    십자가 없는 면류관은 없습니다. 잘못된 습관은 힘들어도 고쳐야 합니다. 책망을 받아 들이냐, 받아들이지 않느냐가 때로는 행복과 불행의 갈림길이 되기도 합니다.

     

     

     
     
     

     

     

    징계를 통한 교훈
     
    시118:18
    "여호와께서 나를 심히 경책하셨어도 죽음에는 붙이지 아니하셨도다(118 :18)

    논산에 살고 있는 한 여집사의 간증입니다. 그 집사는 남편의 구원을 위해 늘 기도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봄날에 아이들이 서울대공원으로 소풍을 가자고 졸랐습니다. 주일에만 쉬는 남편도 함께 가기를 바랐습니다.

    한 번만 남편의 부탁을 들어 주면 나중에 교회에 이끌기도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딱 한 번만 주일성수를 접어두고 가족이 함께 과천 서울대공원까지 왔습니다. 그런데 입구 부근 모퉁이에서 커다란 쓰레기 수거차가 달려와 그 집사의 가족을 덮쳤습니다.

    목숨을 잃은 사람은 없었으나 그 딸은 오래도록 병원에 있어야 했고, 가족들 모두가 심한 고통을 당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비록 죽음에는 이르지 않게 하셨지만 비싼 대가를 치르고
    깨닫게 하신 하나님께 눈물어린 감사를 드렸다고 합니다.

    하나님은 성도들을 사랑하시기에 징계를 하십니다. 만약 우리가 '사생아'라면 징계를 받지 않을 수 있으나 우리는 살아계신 하나님의 자녀이기에 잘못한 일에 대해 징계를 받는 것이 당연합니다. 중요한 것은 그 징계의 목적이 우리를 망하게 하려는 것이 아니라 유익하게 하고 믿음을 세워 주기 위함이라는 사실입니다. 우리가 이 사실을 깨닫는다면 큰 은혜가 될 것입니다

     

     

     
     
     

     

     

    체벌의 필요성
     
    1973년 어느 학교의 6학년생인 러셀이란 소년이 고의적으로 창밖으로 공
    을 던져 그의 선생에 의해 매를 맞았는데 이를 안 소년의 어머니가 체벌금
    지를 주장하며 학교 당국에 상대를 고소를 했다.


    그리고 2년후 대법원에서
    판결이 났는데 공립학교 교사는 부모의 반대가 있더라도 체벌은 가능하다고
    했다.


     단 매질은 다른견책수단에 실패했을 때 사용해야 하며 어떤 경우에
    는 처벌을 미리 학생에게 통보해야하고 부모의 요구에 설명서신을 보내야
    한다는 것이었다.

     

     

     
     
     

     

     

    사랑의 징계
     
    어느날 유명한 부흥사인 무디에게 어떤 여자 교인 한 사람이 찾아와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제가 아무리 범죄해도 하나님은 저를 그대로 놔두시데요. 그러므로 하나님은 계시지 않는 분이신 것이 분명해요." 이 이야기를 듣고 있던 무디는 부인을 지그시 바라보면서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부인! 부인은 지금 부인이 스스로 그리스도인이 아니라는 사실을 증명하고 있습니다."

    "왜요? 제가 교회를 얼마나 오래 출석했는데요" 라고 부인이 반문하자 무디는 다시 이렇게 말합니다. "당신이 그리스도인이라면 하나님은 당신을 그대로 놔두지 않았을 것이요."

    그렇습니다. 징계는 자녀에게만 있는 것입니다. 자녀이기 때문에 하나님이 우리를 징계하시는 것입니다. 자녀를 사랑하는 부모는 자녀의 잘못을 그대로 방관할 수 없어서 사랑하는 자녀를 향해서 사랑의 채찍과 매를 듭니다. 그처럼 우리 하나님은 당신의 자녀들을 그대로 방관하지 않으십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삶 속에 하나님의 징계가 올 때, 그것이 해석되고 징계로 확신될 때 하나님을 원망하지 마십시오. 그것은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사랑의 매는 아끼지 말아야 한다
     
    다섯살 된 한 어린이가 아버지로부터 호되게 매를 맞았다.어린이는 강한 호기심으로 교회의 헌금 주머니에서 동전 하나를 훔쳤던 것이다.이 어린이는 그날의 실수를 교훈삼아 평생 단 한번도 남의 것에 손을 대지 않았다.그는 땀흘리지 않고 거액을 벌어들일 수 있는 기회가 많았다.그러나 이를 단호히 거부했다.

    이 사람의 정직성은 갈수록 빛을 발해 미국의 대통령에 당선됐다.그는 대통령 재직시 ‘인기없는 지도자’로 불렸으나 지금은 ‘사랑의 지도자’로 통한다.지금도 주일에는 교회학교 교사로 봉사한다.


    또 연장가방을 들고 전세계를 다니며 집없는 사람들에게 ‘사랑의 집’을 지어주고 있다.이 사람이 바로 사랑의 집짓기 운동 총재인 지미 카터.

    어린 시절,부모의 따끔한 질책이 헌금을 훔친 이 어린이를 대통령으로 만들었다.매를 아끼면 자녀를 망친다.단 그 매 속에는 반드시 사랑이 담겨 있어야 한다.

     

     

     
     
     

     

     

    매맞는 것을 감격스러워 하라
     
    아이들은 부모들에게 매를 맞을 경우 자신의 부모들이 자기를 싫어한다고
    생각하기 일쑤입니다. 그러나 부모들이 매를 드는 것은 자식을 사랑하지
    않기 때문에 드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사랑하기 때문인 경우가 더 많습
    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는 방법도 이와 같습니다.


     하나님께서
    는 나쁜 일들을 통해서 우리를 사랑한다는 것을 보여 주시기도 합니다.
    만일, 당신이 원치 않는 고통을 당하고 있다면 "하나님은 저를 좋아하시
    지 않는군요."하고 말하기 전에 "하나님, 제가 무엇을 어떻게 하기를 바
    라십니까 ?"하고 겸손하게 주님의 뜻을 물으시기 바랍니다.


    만약 당신이
    그렇게 하신다면 당신은 하나님께서 당신을 최상의 것으로 인도하기 위해
    세밀하게 간섭하고 계시다는 사실을 발견하고, 감격에 찬 감사의 기도를
    드리게 될 것입니다.

    꾸중보다는 격려가 낫다
     
    에베소서 4:29
    무릇 더러운 말을 너희 입밖에도 내지 말고 오직 덕을 세우는 데 소 용되는 대로 선한 말을 하여 듣는 자들에게 은혜를 끼치게 하라.

    "온량(溫良)한 혀는 곧 생명나무라도 패려한 혀는 마음을 상하게 하느 니라" - 잠 15:4.

    "오직 오늘이라 일컫는 동안에 매일 피차 권면하여 너희 중에 누구든 지 죄의 유혹으로 강퍅케 됨을 면하라" - 히 3:13.

    어느 교회에서 성찬식을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목사가 한 소년에게 성
    찬식에 쓸 포도주를 가져오라고 시켰습니다. 그런데 그 소년은 너무 긴
    장한 나머지 그만 포도주가 담긴 병을 떨어뜨리고 말았습니다.


    화가 난
    목사는 조심성 없는 아이라고 소년을 호되게 야단쳤습니다. 그 일 이
    후로 그 소년은 더이상 그 교회에 출석하지 않았으며, 결국 하나님에
    게서 멀어졌습니다. 다른 교회에서도 그와 비슷한 일이 있었습니다.


    그 러나 그 교회 목사는 소년을 야단치는 대신 다음과 같은 말을 했습니
    다. "네가 너무 긴장해서 포도주를 엎질렀나 보구나. 너무 당황해 하지
    마라. 하나님은 네 마음을 잘 아신단다.


    하나님 일을 하는 데 긴장하는
    걸 보니 너는 커서 훌륭한 목사가 될 것 같구나" 훗날 그 소년은 정말로
    훌륭한 목사가 되었습니다.


    우리는 꾸중은 잘하지만 격려는 잘 못합니
    다. 그러나 사람들은 꾸중 대신 격려를 필요로 하고 있습니다. 이왕이면
    격려를 하십시오.
    사랑 담긴 격려는 나약한 한 사람을 위대한 지도자로 만들 수 있습니다.

    징계(견책)하라
     
    북극 탐험대의 한 사람인 존 프랭클린은 어느 날 눈과 빙산 사이에서 추위에 떨며 잠든 일행을 보았습니다.
    탐험 대장은 30분이 지나면 의식이 없어진다는 사실을 알고 그들을 깨웠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는 얼지 않습니다. 우리는 단지 얼마간 쉬기를 원할 따름입니다."

    30분이 지나자 그들은 잘 움직여지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탐험 대장은 그들을 치고 때렸습니다.
    그들은 오두막 안으로 비틀거리며 들어갔고 살아났습니다.
    그들을 때린 손이 그들을 구해 낸 손이 된 것입니다.

    건방지고 으스대는 사람은 징계를 받아도 듣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들 따라다니던 어리석은 사람들은 그가 징계 받는 것을 보고 정신을 차립니다.
    한편 명철한 사람은 잘못했을 때 굳이 징계까지 할 필요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금방 깨닫고 잘못을 고치기 때문입니다.
    지혜롭게 명철한 사람이라 해서 실수나 잘못을 저지르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이런 사람은 꾸짖으면 빨리 알아듣고 바로 돌이킬 뿐 아니라 이전보다 더욱 지식을 얻고 지혜로워 지는 것입니다.

    거만한 자를 때리라 그리하면 어리석은 자도 경성하리라 명철한 자를 견책하라 그리하면 그가 지식을 얻으리라?"


    백성을 신칙 하라
     
    찬송가 256장은 한국 교회가 즐겨 부르는 노래입니다. “눈을 들어 하늘 보라 어지러운 세상 중에 곳곳마다 상한 영의 탄식소리 들려온다…”
    일제 치하에서 한국 교회의 찬송가는 절름발이가 되었습니다. 일제의 정책에 반대되는 내용의 찬송가를 삭제하고 사용해야만 했기 때문입니다. 해방 2년 뒤인 1947년에 우선 급하게 임시로 펴낸 찬송가에는 256장의 가사가 이러했습니다.

    “눈을 들어 산을 보라 만신초목 욱였구나. 곳곳마다 가시덤불 굴어있는 해골 떼라. 재목 없어 집 못 짓고 살 곳 없어 방황하는,맹수 밥이 되는 영혼 주의 종아 어이 할꼬”
    해방 후 나라의 피폐한 모습이 눈에 선하지요. 그러나 오늘날의 사람들에게는 제대로 와닿지 않는 시대 지난 표현들로 금방 눈에 띕니다.

    신학을 처음 공부할 때 어느 교수님이 오늘 우리가 묵상하는 본문을 가지고 ‘돌격하시는’ 하나님에 대해서 실감나게 설명한 일이 있습니다.
    한국 교회가 쓰고 있는 개역 성경이 ‘참 재미있는 말로’ 번역해 놓았다고 했습니다.
    출애굽기의 이 부분을 읽으면 늘 그 생각이 납니다.
    얼마나 재미있고 또 실감나는 표현인지 모릅니다.
    “나 여호와가 그들을 돌격할까 하노라”(22·24절).
    백성이 경계선을 넘는다는 것도 그렇습니다.
    ‘돌파’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젊은 세대 가운데 신칙(申飭)이란 말을 쉽게 이해하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입니다.
    신칙은 ‘단단히 타일러 경계하는 것’을 말합니다.
    개역개정판 성경을 보면 21절이 훨씬 쉽게 이해됩니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내려가서 백성을 경고하라.
    백성이 밀고 들어와 나 여호와께 와서 보려고 하다가 많이 죽을까 하노라”

    성경은, 찬송가도 그렇지만 시대가 바뀌게 되면 또 새롭게 번역되어야 합니다.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가장 쉽고 정확하게 이해하도록 고쳐 옮겨야 합니다.
    중세를 흔히 암흑시대라고 합니다.
    성경 말씀이 묻혀있었기 때문입니다.
    종교개혁이 그 어두움을 걷어냈는데 개혁자들이 성경을 당시 평범한 사람이 이해할 수 있는 말로 번역했기 때문입니다.
    성경을 사랑하여 읽고 묵상하는 사람은 빛 가운데서 살아갑니다.

    출애굽기 19:20∼25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내려가서 백성을 신칙하라 백성이 돌파하고 나 여호와께로 와서 보려고 하다가 많이 죽을까 하노라”(출 19:21).


    4월 8일(화) 사무엘하 4-6장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여호와 앞에서 뛰놀리라(6:21)

    다윗이 미갈에게 이르되 이는 여호와 앞에서 한 것이니라 저가 네 아비와 그 온 집을 버리시고 나를 택하사 나로 여호와의 백성 이스라엘의 주권자를 삼으셨으니 내가 여호와 앞에서 뛰놀리라.

    (개역개정) 내가 여호와 앞에서 뛰놀리라.
    (새번역) 주님 앞에서 기뻐하며 뛸 것이오.
    (공동번역) 나는 앞으로도 야훼 앞에서 춤출 것이며.
    (현대인의 성경) 나는 앞으로도 여호와를 기쁘시게 하는 일이라면 계속 춤을 출 것이오.
    (NIV) I will celebrate before the LORD.
    (KJV) therefore will I play before the LORD
    (NASB) therefore I will celebrate before the LORD

    세상 모든 사람은 이미 하나님 앞에 있는 실존입니다(Coram Deo)
    코람 데오(coram deo) /  In the presence of God
    코람 호미니부스(coram hominibus) / Before men

    코람 데오<Coram Deo, 신전의식(神前意識, 하나님 앞에서>라는 말은 하나님의 임재 혹은 신전사상(神前思想)를 의미하는데 라틴어 2개 단어인 코람(coram)과 데우스(Deus)가 합쳐진 합성어이다.
    라틴어 coram은 '면전에서 혹은 앞에서'(in the presence of)라는 의미
    Deo라는 단어는 Deus(God, 하나님)의 탈격(ablative, 명사를 부사처럼 사용하기 위한것)이다.
    이 두 단어가 결합하여 Coram Deo가 되었다.
    이 말은 영어 before God(하나님 앞에)인데 coram hominibus(before men, 인간 앞에서)와 대비되는 말이다.
    주로 기독교 신학에서 사용하는 용어인데 "하나님 앞에서"라는 말이다.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의 권위 아래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아가는 신학사상이다.
    인간을 지켜보시는 그분 앞에서 살아가는 것을 의미한다.
    이 말은 하나님의 임재라는 말로도 쓰인다.
    영원하신 하나님께서 시간과 공간의 영역안에서 자신을 친히 나타내시는 거룩한 행위이다.
    독일의 신학자 게하르트 에벨링은 코람 데오와 비슷한 의미로서 임재관계(Coram-Relation)라는 용어를 사용하는데 그는 이 개념을 마르틴 루터의 생각으로부터 가져왔다.
    그것은 하나님의 임재의 면전에서 그리고 세상의 면전에서 인간의 상황을 다루는 것이며 동시에 물질적 존재론에 대해서 관계적 존재론의 대체를 의미하는 것이다.

    로마서 14:8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라.


    코람 호미니부스(coram hominibus, 인간들 앞에서)

    기독교에서 사용하는 신학적 용어이다.
    이말은 코람 데오(Coram Deo, 신전의식(神前意識, 하나님 앞에서)라는 말과 반대되는 말이다.
    리차드 밀러는 이 두 용어는 서로 대조되는 것으로 본다.
    하나님의 임재와 반대되게 인간 중심으로 인간의 관점에서 보는 것이다.

    신학사상

    코람호미니부스는 기독교 신앙에 유혹적이지만 궁극적으로는 신앙을 파괴한다고 본다.
    텍사스의 번영신학의 주창자 조엘 오스틴, 로버트 슐러는 인간 중심의 메시지를 전하였다.
    그것은 코람 데오와 반대적인 메세지이다.
    인간중심적 메세지와 인간이 원하는 내용을 전하는 것은 전형적으로 인간 앞에서 효과를 추구하는 인본주의적 사상이다.
    여호와의 눈을 약화시키는 신앙적 이탈로 인간의 이성과 자율성에 대한 주도적인 역할을 강조할 뿐이다.
    종교개혁자 칼빈(칼뱅)은 인간이 먼저 하나님의 얼굴(coram deo)을 먼저 보고 인간 자신을 면밀하게 검토하지 않는다면 자신에 대한 참된 지식에 도달하지 못한다고 한다.(존 칼빈, 기독교강요 1:1:2)


    신앙적인 삶은 두 개의 명제 앞에서 펼쳐야 합니다.
    첫째는 하나님 앞에서(코람 데오. Coram Deo)
    둘째는 사람 앞에서(코람 호미니부스. Coram Hominibus)

    나는 하나님 앞에서 부끄러움이 없었는가?
    나는 사람 앞에서 부끄러움이 없었는가?

    다윗은 여호와의 궤를 오벳 에돔의 집에서 다윗 성으로 옮겨올 때 힘을 다하여 춤을 추었습니다.
    그러나 사울의 딸 미갈은 다윗이 춤을 추는 것을 보고 업신여겼습니다.

    다윗이 춤을 추는 것과 춤추는 다윗을 업신 여기는 미갈을 볼 때 누가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바람직한 모습이라고 하겠습니까?

    바꾸어 말하면 헌법재판소에서 대통령 탄핵을 인용한 판사들과 판사들의 판결에 대하여 울분을 토하는 사람들을 비교할 때 누가 더 자유민주주의에 합한 사람일까요?

    다윗이 왕으로서 여호와의 궤가 다윗 성으로 옮겨올 때 기뻐하며 춤을 출 수 있었던 것은 왕의 권위보다 여호와 하나님의 권위가 더 우월하다는 것을 믿고 인정했기 때문입니다.

    만일 헌법재판소의 여덟 명의 판사들이 회유와 협박과 여론몰이식의 힘으로 위협할지라도 자유민주주의의 가치를 확신한다면 공의로운 판결을 회피할 수 있었을까요?

    좌파 정치의 은밀한 조작에 민감한 정신을 차리고 깨어 있는 우파의 예리한 눈동자가 있었을까요?
    좌파에서는 헌법재판소의 판결이 4:4 또는 5:3으로 기각이 될 것이라고 우파의 민심을 안심시킨 후에 판결하는 날 전원 일치 탄핵으로 판결하므로 허탈하게 만들었다는 것을 왜 인식하지 못할까요?

    미갈은 은밀하게 다윗을 업신여겼을지라도 여호와 하나님은 오히려 다윗을 붙잡아주셨습니다.
    왜냐하면 춤을 추며 행동하는 다윗이 더 사랑스럽기 때문입니다.

    자유대한민국을 사랑하십니까?
    그렇다면 이제는 행동해야 합니다.
    모두가 광장에서 거리에서 골목에서 힘을 모아 외쳐야 합니다.

    기독교 윤리학자 리차드 니버(Helmut Richard Niebuhr, 1894∼1962)는 인간의 이상형은 예수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으로부터 두 가지를 본받아야 하는데 하나는 하나님을 향한 절대 신앙이며, 또 하나는 인간을 향한 절대 사랑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을 향한 절대 신앙과 인간을 향한 절대 사랑을 실천해야 하는 세상은 온갖 부조리와 갈등의 구조가 분명하게 드러나는 현실입니다.
    이와 같은 현실에서 사도 바울은 주와 동행하기 위해서 이렇게 고민했습니다.

    갈라디아서 1:10
    이제 내가 사람들에게 좋게 하랴 하나님께 좋게 하랴 사람들에게 기쁨을 구하랴 내가 지금까지 사람의 기쁨을 구하는 것이었더면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니라.

    사람을 기쁘게 해야 할까요?
    하나님을 기쁘게 해야 할까요?

    이 말씀을 다른 성경으로 읽어보면 이렇게 번역합니다.

    사람의 마음을 기쁘게 할까?
    하나님의 마음을 기쁘게 할까?

    신앙생활의 자세를 두 가지로 소개할 수 있습니다.
    하나는 ‘코람 데오(Coram Deo)’는 ‘하나님 앞에서(Before God)’ 라는 뜻이며, 또 다른 하나는 ‘코람 호미니부스(Coram Hominibus)’는 ‘사람 앞에서(Before Men)’ 라는 뜻입니다.


    코람 데오는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을 잘 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마음을 기쁘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기쁘게 하는 것을 주와 동행하는 삶이라고 하겠습니다.

    주와 동행하는 삶을 ‘코람 데오(Coram Deo)’ 라고 합니다.
    ‘코람 데오(Coram Deo)’는 ‘하나님 앞에서(Before God)’ 라는 뜻의 라틴어입니다.
    주와 동행하는 삶은 나는 항상 하나님 앞에서 살아간다는 믿음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로 이 세상에 오셨던 예수님께서도 십자가의 죽음이라는 사건을 생각하며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이렇게 기도하셨습니다.
    이런 기도가 ‘코람 데오(Coram Deo)’의 신앙이라고 하겠습니다.

    어느 목회자가 여러 지역을 순회하고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런데 사택에 불이 나서 모든 것이 타버렸고 심지어 두 아들마저 불에 타 죽고 말았습니다.
    그 때가 독일에서 종교개혁이 일어난 후 개신교회가 활발하게 번성하던 시기였습니다.
    주위에서 들려오는 이야기가 결코 듣기 좋은 이야기는 아닙니다.
    도대체 왜 내게 이런 일이 일어났을까?
    낙심할 수밖에 없는 환경에서 목회자는 아무도 없는 숲속으로 들어가서 기도합니다.
    그때 그 목회자의 마음에 참 평강이 찾아왔습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놀라운 찬송을 불렀습니다.

    내 주여 뜻대로 행하시옵소서
    온 몸과 영혼을 다 주께 드리니
    이 세상 고락간 주 인도하시고
    날 주관하셔서 뜻대로 하소서.

    신앙생활에 은혜가 넘쳐나는 해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신앙생활을 잘 하려면 ‘코람 데오(Coram Deo)’ 즉 ‘하나님 앞에서(Before God)’ 라는 신앙생활을 위한 명제를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반면에 사람의 마음을 기쁘게 하는 것을 ‘코람 호미니부스(Coram Hominibus)’ 라고 합니다.
    ‘코람 호미니부스(Coram Hominibus)’는 ‘사람 앞에서(Before Men)’ 라는 뜻의 라틴어입니다.

    가룟 유다는 최후의 만찬 자리에서 예수를 팔아넘길 음모가 드러났습니다.
    이때 가룟 유다는 ‘코람 데오(Coram Deo)’의 길을 포기하고 ‘코람 호미니부스(Coram Hominibus)’의 길을 선택했습니다.
    그 결과 예수를 팔아넘긴 후 스스로 목매어 죽는 죽음의 길로 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기쁘게 하는 것과 사람의 마음을 기쁘게 하는 것의 결과는 이미 가룟 유다의 선택에 의해서 분명하게 드러났기 때문에 우리들은 하나님의 마음을 기쁘게 하는  ‘코람 데오(Coram Deo)’ 즉 ‘주와 동행하는 삶’을 위하여 함께 경주하는 2019년을 맞이해야 하겠습니다.

    어떻게 하면 주와 동행하는 삶을 실천할 수 있을까요?
    오늘의 말씀을 함께 읽어보겠습니다.

    에녹은 육십 오세에 므두셀라를 낳았고. 므두셀라를 낳은 후 삼백년을 하나님과 동행하며 자녀를 낳았으며. 그가 삼백 육십 오세를 향수하였더라.

    에녹은 므두셀라를 낳은 후 삼 백년을 하나님과 동행했습니다. 에녹이 므두셀라를 낳은 후에 하나님과 동행하게 된 이유가 무엇이었을까요? 그 이유를 에녹이란 이름과 므두셀라 라는 이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에녹(Enoch)이란 이름은 ‘바친다’는 뜻입니다.
    에녹은 하나님에게 바쳐진 인생 이었습니다. 우리들도 하나님에게 바쳐진 인생으로 2019년을 맞이해야 하겠습니다. 하나님에게 바쳐진 삶이 곧 에녹이었습니다. 하나님에게 온전하게 바쳐졌기 때문에 이 세상에서 누구나 경험하는 죽음을 경험하지 않고 살아있는 모습 그대로 하늘로 올라갔습니다.

    왜 에녹은 하나님에게 바쳐질 수 있었을까요?

    에녹 당시의 평균 수명은 대략 630년이었습니다. 그런데 에녹은 365년을 살았습니다. 평균 수명보다 훨씬 적게 살았습니다. 일반적으로 평균 수명보다 적게 살았다고 하면 무슨 몹쓸 질병에 걸렸거나 아니면 사고를 당했을 것이라고 생각할 것입니다. 그런데 에녹은 몹쓸 질병에 걸린 것도 아니었고 사고를 당한 것도 아니었습니다. 에녹은 므두셀라를 낳은 후에 하나님과 동행했습니다. 세상에서 하나님과 동행하던 에녹은 어느 날 갑자기 하늘로 올라가서 영원한 동행을 하고 있습니다.

    므두셀라(Methuselah)라는 이름은 ‘창을 던지는 사람’ 이란 뜻입니다.

    므두셀라는 성경에서 가장 오랫동안 살았던 사람이었습니다. 얼마를 살았다고 합니까? 969년을 살았다고 합니다. 에녹은 365년을 살았는데 므두셀라는 969년을 살았습니다. 그렇게 오래 살았던 아들 므두셀라를 낳은 후에 에녹은 깨닫는 것이 있었습니다.

    첫째는 영원한 것은 없다!

    에녹이 살았던 시대에 창을 던지는 사람이란 성을 지키는 사람입니다. 성을 지키는 사람이 969년 동안 그 성을 지켰다면 잘 지킨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러나 969년 보다 더 많은 2천년 동안 성을 지킨 사람과 비교할 때는 잘한 것이 아닙니다. 에녹은 므두셀라가 969년 동안 육체라는 성을 지키지만 결국은 죽는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러므로 죽는다는 것은 성을 빼앗기는 것을 암시합니다. 이 세상에는 아무리 오래 살아도 영원한 것이 없다는 것을 에녹을 깨달았습니다.

    시편 127:1
    여호와께서 집을 세우지 아니하시면 세우는 자의 수고가 헛되며 여호와께서 성을 지키지 아니하시면 파수군의 경성함이 허사로다. 

    둘째는 심판이 다가올 것이다!

    므두셀라는 이름은 므두(무투, death)와 셀라(살라크, send)가 합성한 이름으로 므두셀라가 죽으면 심판을 보낸다는 뜻입니다. 이때 심판은 노아의 홍수를 말합니다.

    에녹이 므두셀라를 낳은 후에 300년 동안 하나님과 동행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아무리 오래 살아도 영원한 것은 없으며 그 다음에는 심판이 있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에 하나님과 동행할 수 있었습니다.

    주와 동행하는 삶은 이 세상에서 가장 멋진 삶이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에녹은 하나님과 동행하던 중 어느 날 갑자기 하늘로 올라가버렸기 때문입니다.

    히브리서 11:5
    믿음으로 에녹은 죽음을 보지 않고 옮기웠으니 하나님이 저를 옮기심으로 다시 보이지 아니하니라 저는 옮기우기 전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라 하는 증거를 받았느니라. 

    에녹은 죽음을 경험하지 않고 하나님 나라에 들어간 사람이었습니다.

    에녹처럼 살아서 주님 앞으로 가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에녹과 같이 될 수 없다면 건강하고 자유롭게 활동하면서 주와 동행하다가 어느 날 잠을 자는 것처럼 고요하게 주님 앞으로 가는 것을 기도합니다.

    에녹과 같은 삶을 원하신다면 주와 동행하는 삶을 결단하시기 바랍니다.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했다는 것은 거룩한 동행자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모든 가족들이 거룩한 동행자로 세워지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거룩한 동행자가 될 수 있는 말씀을 소개합니다.

    디모데전서 4:5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로 거룩하여짐이라.
    It is consecrated by the word of God and prayer.

    하나님의 말씀은 성경입니다.

    그러면 기도는 무엇일까요?

    기도는 성경대로 살아가는 힘을 공급받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고 하셨습니다. 그의 나라와 그의 의는 하나님의 말씀이 실현되는 나라입니다. 왜 기도합니까? 하나님 나라가 실현되기 위한 힘을 공급받기 위한 것입니다. 현실에서 부딪친 문제 해결을 위한 것이 아니라 오직 주님의 나라가 이 땅에 세우려는 힘을 얻기 위한 것입니다.

    돌에 맞아 죽는 고통스런 현장에서 스데반은 ‘주여, 저희들을 용서하여 주옵소서!’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주여, 저 돌이 방향을 바꿔 돌을 던진 사람의 이마에 맞아 마치 골리앗이 쓰러지듯 넘어지게 하옵소서! 이렇게 기도한 것이 아닙니다.


    루터의 저서 《식탁대담》 〈세상의 본질에 관하여〉라는 장에서
     이 세상의 사람들을 세 부류로 나누고 있다.

    첫째,  죄를 깨닫지 못하고 태평스럽게 살아가는 사람
    자신의 부패한 본성과 행동을 인정하지 않고, 자신의 죄를 깨닫지 못한채 양심의 가책없이 태평스럽게 사는 사람

    둘째, 죄를 알기에 두려움에 사롭잡혀 살아가는 사람
    율법앞에서 두려워 하며 하나님의 진노를 느끼며 좌절감에 시달리며 사는 사람

    셋째, 믿음으로 살아가는 사람
    자기 죄를 인정하고, 죄로 인하여 멸망할 자임을 잘 알면서 복음에 귀기울이고,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로 값없이 주시는 은혜로 죄사함 받음을 믿고 하나님앞에서 의롭다함을 받으며 온갖 선행으로 믿음의 열매를 나타내며 사는 사람




    해어화(解語花)라는 단어를 아시나요?
    풀 해(解), 말씀 어(語), 꽃 화(花)
    해어화는 "‘말을 알아듣는 꽃" 이라는 뜻으로 "미인(美人)"을 일컫는 말이라고 합니다.
    중국(中國) 당나라(唐) 때에, 현종(玄宗)이 양귀비(楊貴妃)를 가리켜 말하였다는 데서 유래(由來)했다고 합니다.

    또 다른 의미는 ‘기생(妓生)’을 달리 이르는 말.

    유래 / 개원(開元)의 치(治)라는 칭송(稱頌)을 받았던 당나라(唐--) 현종(玄宗)은 얼• 마 뒤 국가 재정(財政)의 곤란(困難)과 양귀비(楊貴妃)와의 사치(奢侈)한 궁중(宮中) • 생활(生活) 때문에 정치(政治)에 싫증을 내게 되었고, 이 때문에 나라는 어지러워졌 다.

    양귀비(楊貴妃)는 본디 현종(玄宗)의 제18왕자(王子)인 수왕(壽王)의 비였는데, 현종• (玄宗)이 무혜비(武惠妃)를 잃은 뒤, 양귀비(楊貴妃)를 보고 그 미모(美貌)와 재치(才• 致)에 반해 27세인 그녀를 왕비(王妃)로 삼았다.
    현종(玄宗)은 그녀에게 함빡 빠져 그 일족(一族)을 모두 높은 벼슬에 앉히고 정치• (政治)를 돌보지 않았다.
    어느 화창한 날. 태액지(太額池)에 핀 아름다운 연꽃을 바라보다가 현종(玄宗)은 문• 득 왕비(王妃)를 가리키며 좌우에 서있는 궁녀(宮女)들에게 「연꽃의 아름다움도 어• 찌 말을 알아듣는 이 꽃만 하겠느냐(何如此解語花耶).」라고 말했다고 함.

    * 何如此解語花耶
      하여차해어화야

    何 - 어찌 하, 멜 하, 꾸짖을 하 

     1. 어찌.   2. 메다.   3. 무엇   4. 어느    5. 왜냐하면

    如 - 같을 여, 말 이을 이 

     1. 같다  2. 같게 하다  3. 따르다   4. 조사   5. 음력 2월의 이칭

    此 - 이를 차  

     1. 이  2. 이곳   3. 이것   4. 이에   5. 이와 같은

    解 - 풀 해, 흩어질 해 

     1. 풀다  2. 흩어지다   3. 흩음   4. 풀리다   5. 깨닫다

    어 - 말씀 어, 알릴 어

     1. 말씀  2. 알리다   3. 말   4. 고함    5. 말하다

    花 - 꽃 화

     1. 꽃   2. 꽃이 피다  3. 꽃답다   4. 무늬   5. 흐려지다

    耶 - 어조사 야, 간사할 사, 간사 사

     1. 어조사   2. 간사하다   3. 아버지를 부르는 말    4. 옛 명검(名劍)의 이름



    해어화(解語花)라는 단어를 아시나요?
    풀 해(解), 말씀 어(語), 꽃 화(花)
    해어화는 "‘말을 알아듣는 꽃" 이라는 뜻으로 "미인(美人)"을 일컫는 말이라고 합니다.
    중국(中國) 당나라(唐) 때에, 현종(玄宗)이 양귀비(楊貴妃)를 가리켜 말하였다는 데서 유래(由來)했다고 합니다.

    또 다른 의미는 ‘기생(妓生)’을 달리 이르는 말.


  • 유래 / 개원(開元)의 치(治)라는 칭송(稱頌)을 받았던 당나라(唐--) 현종(玄宗)은 얼마 뒤 국가 재정(財政)의 곤란(困難)과 양귀비(楊貴妃)와의 사치(奢侈)한 궁중(宮中) 생활(生活) 때문에 정치(政治)에 싫증을 내게 되었고, 이 때문에 나라는 어지러워졌다.
    양귀비(楊貴妃)는 본디 현종(玄宗)의 제18왕자(王子)인 수왕(壽王)의 비였는데, 현종(玄宗)이 무혜비(武惠妃)를 잃은 뒤, 양귀비(楊貴妃)를 보고 그 미모(美貌)와 재치(才致)에 반해 27세인 그녀를 왕비(王妃)로 삼았다.
    현종(玄宗)은 그녀에게 함빡 빠져 그 일족(一族)을 모두 높은 벼슬에 앉히고 정치(政治)를 돌보지 않았다.
    어느 화창한 날. 태액지(太額池)에 핀 아름다운 연꽃을 바라보다가 현종(玄宗)은 문득 왕비(王妃)를 가리키며 좌우에 서있는 궁녀(宮女)들에게 「연꽃의 아름다움도 어찌 말을 알아듣는 이 꽃만 하겠느냐(何如此解語花耶).」라고 말했다고 함.





  • 4월 7일(월) 사무엘하 1장-3장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활 노래(삼하 1:18)


    명하여 그것을 유다 족속에게 가르치라 하였으니 곧 활 노래야살의 책에 기록되었으되.
    and ordered that the men of Judah be taught this lament of the bow (it is written in the Book of Jashar.)

    활 노래(this lament of the bow)
    다윗이 사울 왕과 그의 아들 요나단의 죽음을 슬퍼하며 지은 노래를 말합니다.

    활노래(7198) 케쉐트(qesheth) קֶשֶׁת 스트롱번호 7198

    1. 활.  2. 무지개
    발음 [ qesheth ]
    구약 성경  / 76회 사용
    • 1. 명사, 여성 활, 사냥꾼의 활, 창 27:3, 병사의 활, 호 2:20(18), 화살이 미치는 거리, 창 21:16
    • 2. 명사, 여성 [은유적으로] 무지개, 창 9:13, 겔 1:28.
    문법설명  / 복수 קְשָׁתוֹת, 복수 연계형 ׃קַשְׁתוֹת

    • 관련성경 / 무지개(창9:13,14, 겔1:28), 활(삼상2:4, 느4:13, 시7:12), 활 쏘는 자(삼상31:3, 렘4:29), 화살(시76:3).


    활 노래라
    - 원문에는 노래라는 말이 없고 오직 '케쉐트', 즉 '활'이라고만 되어 있다.
    그런데 다윗이 이처럼 자신의 '애가'를 '활'이라고 명명한 까닭은 아마 다음과 같은 이유에서였을 것이다.
    1. 사울이 죽게 된 이유중 하나가 블레셋인의 화살을 맞은 때문이다(삼상 31:3).
    2. 다윗을 위기에서 구해 준 것도 요나단의 활이었기 때문이다(삼상 20:17-42).
    3. 사울과 요나단이 속한 베냐민 지파는 활쏘는 자들로 유명했었기 때문이다(대상 8:40;12:2).
    4. 무엇보다도 다윗의 노래 중에 '요나단의 활'이라는 말이 언급되고 있기 때문이다(22절).

    야살의 책
    - 여기서 '야살'(*)은 '의로운 자'(righteous one)란 뜻이다.
    그러므로 '야살의 책'은 '의로운 자의 책'으로 번역될 수 있다(Keil & Delitzsch,Lange).
    이 책은 이곳외에 수 10:13에도 언급되어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책이 최소한 여호수아와 사무엘 이전에 존재하였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전해지지 않고 있다.
    따라서 이 책의 기원이나 그 정확한 내용도 알 수 없다.
    다만 추측컨대 이는 이스라엘 민족 역사상 위대한 인물이나 큰 사건을 노래한 서사시를 수록했던 고대 문서였을 것이다(Glodschmidt, Keil).



    한글 성경에서는 "활 노래"라고 번역하였지만 히브리 성경에는 "활(케쉐트)" 이라고 합니다.
    '케쉐트'라는 활은 성경에서 때로는 "무지개"라고 번역하기도 합니다.

    본문에서는 "활"이라고 하며 다윗이 사울 왕과 그의 아들 요나단의 죽음을 슬퍼하며 지은 것이라고 합니다.

    다윗과 요나단의 관계는 모두에게 귀감이 되는 우정이라고 칭송합니다.
    그러나 사울과 다윗의 관계는 결코 아름다운 관계가 될 수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윗은 사울의 죽음도 요나단의 죽음을 슬퍼하는 것처럼 슬퍼합니다.
    이러한 다윗의 모습에서 정치인의 바람직한 모습을 배워야 하겠습니다.

    아말렉 사람이 죽어가는 사울의 간청에 의하여 사울을 죽였다는 이야기를 듣고 다윗은 소년을 시켜 그를 죽이라고 명령합니다.
    왜냐하면 사울은 하나님이 기름을 부터 세운 왕이었기 때문입니다.
    다윗을 그토록 미워하고 죽이려할지라도 사울과 같은 마음과 행동으로 앙갚음을 하는 것이 아니라 원수 갚는 것이 하나님께 있다는 믿음으로 마지막까지 사울을 이스라엘의 왕으로 존경한 것을 본 받아야 합니다.



    유승민의원은 장제원 전 의원을 죽이야 내가 더 앞서 갈 수 있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5년 전부터 성폭행을 주장하는 여성을 동조하여 매월 돈을 받게 하였다고 합니다.
    그 돈이 무려 200억 정도라고 하며 마지막까지 모함하는 일에 동조하는 것이 정치 풍토라고 하겠습니다.
    그런데 그 여성이 장제원을 모합하려고 고의적으로 흥분제를 먹이고 호텔에 투숙하여 마치 성폭행한 것처럼 고소하고 매월 돈을 받아왔다는 것을 사죄하는 마음으로 양심선언을 하고 말았습니다.


    , 다윗이 사울과 요나탄의 죽음을 애도하는 노래를 짓다(1,17-27)

     

    17-18, 애가를 지어 부르다 :

    ①다윗이 애가를 지어 사울과 요나단의 죽음을 애도하고,

    ②‘활의 노래’라 이름 붙여 유다의 자손들에게 가르치라고 일렀다.

     

    원문에는 노래라는 말이 없고 '케쉐트', 즉 '활'이라고 되어 있다.
    그런데 다윗이 이처럼 자신의 ‘哀歌’를 ‘활’이라고 말한 이유가 무엇일까?

    첫째, 사울이 죽게 된 이유 중 하나가 블레셋인의 화살을 맞았기 때문.
    둘째, 다윗을 위기에서 구해 준 것도 요나단의 활이었기 때문(삼상 20:17-42).
    셋째, 다윗의 노래 중에 ‘요나단의 활’ 이라는 말이 언급되고 있기 때문(22절).

    19-21, 이스라엘의 영광을 잃다 :

    ①이스라엘아, 네 영광이 산위에서 죽임을 당하였도다.

    ②이 소식을 갓과 아스글론 거리에도 전하지 못하게 한다(20절).

    ③21절은 사울과 요나단이 죽음을 애도하는 시적 표현이다.

     

    22-25, 두 용사의 죽음을 애도하다 :

    ①. 22절은 과거 사울과 요나단의 武勇을 회상하며 찬양하고,
    ②. 23절은 살았을 때는 백성으로부터 칭송을 받았음을 말한다.
    ③. 24절은 사울이 통치 기간 중에 누렸던 안정과 번영을 시사하고,
    ④. 25절은 두 용사의 죽음을 슬퍼한다.

    이처럼 다윗은 자기에게 惡을 행한 政敵 사울의 단점은 숨기고
    장점, 곧 존경할 만한 점들만을 이 애가에서 노래하고 있다.
    이러한 이유는 성격상 이 노래가 두 용사의 죽음을 애도하는
    애가이기 때문이기도 하나 무엇보다 빼놓을 수 없는 것은 다윗의 성품이 매우 관대한 때문이라는 점이다.
    이러한 그의 성품은 장차 신정 국가의 왕으로서의 합당한 자격을
    보여 주는 동시에 그의 고귀한 신앙 인격을 드러내 준다.

     

    26-27, 요나단의 죽음을 애도하다 :

    ①다윗과 요나단의 사랑을 노래한다(26절)

    ②어쩌다 용사들이 쓰러지고 무기들이 사라졌는가?”

    다윗은 애가를 통해 사울과 요나단을 진심으로 칭송한다.
    애가 어디에도 사울의 허물과 약점은 찾아볼 후 없다.
    그들은 전장에서 누구보다도 강한 용사이고 이스라엘의 영광이다.
    한날에 두 용사를 한꺼번에 잃은 것은국가적인 슬픔이고 큰 손실이 아닐 수 없다.
    다윗은 두 용사의 죽음이 블레셋의 비방거리가 되지 않길 바라면서,
    그가 할 수 있는 최고의 경의를 담아 애도를 표현한다.
    활 노래를 통해 다윗의 성숙한 인격과 마주하게 된다.
    그가 애도한 두 용사의 용맹 못지않게 다윗은 성숙했다.
    인격은 그 사람을 다는 저울이 된다.




    사울의 죽음과 다윗의 애가(사무엘하 1:1)

    본문은 다윗이 시글락을 약탈했던 아말렉 족속을 멸절시킨 뒤 다시금 시글락에 돌아와서 거주하고 있을 때를 배경으로 사건이 전개된다.

    1. 사울의 사망소식을 접한 다윗(1-16)

    ① 사울과 요나단의 죽음에 대한 소식을 접한 다윗은
    ② 거짓말의 결과-죽음
    아말렉 소년의 죽음
    ③ 슬퍼하는 다윗
    정적인 사울의 죽음을 기뻐하기는 커녕 오히려 이스라엘의 지도자가 죽음을 슬퍼하고 있다.

    2. 다윗의 활노래(17-27) 애가
    ① 사울과 요나단의 죽음으로 인한 자신의 슬픔(17-19, 25-27)
    ② 사울과 요나단의 미덕에 대한 칭찬(20-24)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생각하는 다윗(19-21)
    원수에 대한 뜨거운 사랑(21-24)
    옛 친구에 대한 깊은 우정이 잘 나타나 있다.(256)





    다윗의 애가(哀哥) "활 노래"

    사무엘하 1:17 ~ 27은 다윗이 사울과 요나단의 죽음을 슬퍼하며 지어 부른 애가이다.
    이 애가는 크게 나누어 '사울과 요나단의 죽음에 대해 극도의 슬픔을 토로하는 부분(17~21, 24~27절)과 사울과 요나단의 용맹과 미덕을 칭송하는 부분(22~23잘)으로 구분된다.

    이상과 같은 다윗의 애가는 일명 '활 노래'라고도 불리우는데 내용이 매우 뛰어나고 아름다운 구약의 애가 중 하나로 손꼽힌다. 
    이 애가를 통해 다윗은 자신을 최후의 순간까지 죽이려 했던 사울을 용서함은 물론 그의 용맹을 칭송하기까지 한다(23절).
    그리고 사울의 죽음으로 인해 이스라엘이 이방인들에 의해 조롱을 받게 될 것을 염려한다(20절).
    또한 자신에 대한 요나단의 우정이 여인에 대한 사랑보다 더 깊은 것이었다고 칭송한다(26절).

    다윗은 개인적인 감정이나 이해관계를 초월하여 신앙적이며, 민족적인 차원에서 사울과 요나단의 죽음을 슬퍼했다.
    그 가운데서도 특히 사울의 단점을 드러내지 아니하고 장점을 부각시켜 칭송한 다윗의 인품은 조만간 신정적 왕정 체제 아래에서 신정 왕국을  이어갈 자로서 하나님과 사람들의 인정을 받기에 충분한 성숙된 성품이 아닐 수 없다.

    왜냐하면 그가 요나단 뿐 아니라 사울에 대해서까지 찬사를 아끼지 않은 것을 보면 얼마나 고결한 인품의 소유자였던가를 알 수 있기 때문이다.
    즉 다윗이 요나단에 대해서는 서로 우정을 나눈 친구란 점에서 칭찬하였다 하더라도, 자신을 죽이려 했던 사울에 대해서까지 칭찬을 하며 죽음을 애도한 것은 실로 성숙된 신앙 인격의 발로라 아니할 수 없다. 
    여기서 우리들도 그 같은 다윗의 신앙 인격을 본받고 연마해야 함은 물론이다(잠 17:91, 빌 4:52).

    파스칼은 "인간의 비참을 모르고 하나님을 알면 교만을 낳는다. 하나님을 모르고 인간의 비참을 알면 절망을 낳는다"고 하며, 슬픔과 역경을 경험한 사람이 하나님을 바로 섬길 수 있다고 했다.

    이 사실을 입증한 사람이 다윗이었다.

    하나님을 떠난 삶은 반드시 패배한다.
    그로 인해 하나님을 욕되게 하며, 자신은 고난을 당하게 된다.
    따라서 우리는 능력이 되시는 하나님을 떠나서는 안 된다.
    우리는 주님의 산 증인으로, 항상 주를 전파해야 한다.
    이렇게 행할 때에는 평화가 주어지며 슬픈 노래를 중단시킬 수 있는 것이다(레 26:63).
    우리 생애에는 슬픈 노래가 주어지지 않도록 말씀을 충실히 이행하는 사람이 되어야 하겠다.


    다윗의 '활 노래', 야살의 책

    1. 다윗이 아말렉을 물리치고 시글락에서 이틀을 머물렀다.

    아말렉(Ama-lekites) : 아말렉으로 시작된 족속 전체를 통칭한다.
    시내 반도와 네게브 사막 북동쪽의 황폐한 땅에 살았던 이들(창 14:7)은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을 가장 먼저 공격한 민족으로(출 17:8), 이들은 여러 번 이스라엘과 적대적인 관계로 묘사되었다(삿 3:13; 6:3; 삼상 15:20; 27:8).

    이스라엘 백성들은 가데스에 이르렀을 때, 불순종함으로 인해 아말렉에게 패하고 말았다(민 14:43-45).
    또한 사사기에서는 아말렉이 미디안과 연합하여 모압 왕 에글론을 도와 북이스라엘을 공격했음을 기록하고 있다(삿 3:13; 6:3, 33).

    사울 왕은 “이제 너는 아말렉을 쳐서 그들의 모든 소유를 남기지 말고 진멸하라”(삼상 15:3)는 명령을 받고서 아말렉을 공격하였으나 완전히 멸망시키라는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지 않았고, 결국 사울은 하나님께 버림을 받았다(삼상 15:18-19). 사울의 진멸을 피해(삼상 15:9) 남아 있던 아말렉인들은 술과 애굽 땅으로 지나가는 부근에 살고 있었는데, 다윗에 의해 다시 공격당하고 말았다(삼상 27:8-9). 아말렉인을 멸절시키라는 하나님의 명령은 히스기야 때 시므온 자손에 의해서(대상 4:43), 또 에스더 때 아말렉의 후손인 하만과 그 일족을 처형함으로써 성취되었다(에 7:9-10). 이는 “아말렉은 열국 중 으뜸이나 종말은 멸망에 이르리로다”(민 24:20)라고 했던 발람의 예언이 이루어진 것이었다.

    아말렉, ‘여호와 닛시’를 부르게 한 족속

    출애굽 때 르비딤에서 이스라엘과 접전할 당시 여호수아를 전방에 내보낸 모세는 산 위에서 아론과 훌의 도움을 받아 계속 손을 들고 있음으로써 승리를 가져왔다(출 17:8-16). 이를 기념하여 단을 쌓고 ‘여호와 닛시’라고 했다. 이때 하나님은 아말렉 사람을 완전히 멸망시킬 것이라고 하셨는데(신 25:19), 이는 아말렉 사람들이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았고 이스라엘이 광야를 지날 때 피곤하여 뒤떨어진 약한 사람을 쳤기 때문이었다(신 25:18).

    시글락(Ziklag) :
    유다 남쪽 에돔 변방의 성읍(수 15:31)으로 시므온 족속에게 분배된 곳이다(수 19:5; 대상 4:28-30).
    사울 통치 기간에는 블레셋의 영토였는데 가드 왕 아기스가 이곳을 다윗에게 주어 다윗과 그의 가족, 그를 따르는 사람들이 거주하였다(삼상 27:6).
    다윗이 이곳에 거주할 때 다윗을 따르는 많은 무리가 다윗에게 돌아와 하나님의 군대를 이루었다(대상 12:1-22).

    그 후 시글락에는 다윗이 1년 4개월 동안 계속 거주하였고 그술 사람과 기르스 사람, 아말렉 사람을 치는 본부 기지가 되었다(삼상 27:6-11).
    그리고 아말렉 사람들이 이곳 시글락을 침입하여 불사르고 부인들과 아이들을 잡아갔을 때, 다윗은 아말렉을 공격하여 잡혀갔던 아내들과 아이들을 구출하였다(삼상 30:1-20).
    다윗이 사울의 사망 소식을 들었던 곳도 시글락이었다(삼하 1:1-2).
    또한 시글락은 포로지에서 귀환한 유다 자손이 거한 곳 중 하나였다(느 11:28).

    2. 기름 부은 자는 ‘그리스도(Christos) <메시아. Messiah>

    ‘메시아(Messiah)‘는 구원자를 의미하는 히브리어이다.
    헬라어는 ’그리스도(Christos)‘이다.
    이 단어는 ‘기름 붓다’(to anoint)라는 어근에서 비롯된 것으로, 특별한 사역을 위하여 하나님의 ‘기름 부음을 받은 존재’(the anointed)라는 뜻이다.
    메시아란 유대 전통에서는 “기름 부음”을 받아서 왕의 자리에 오른 사람을 가리킨다.
    이 단어는 유대인들에게는 이들이 민족적 역경과 고난 가운데 구원과 해방을 기대하는 구원자의 상징이었다.
    그리고 하나님의 백성을 위한 새로운 시대를 여는 하나님의 대리자에 대한 상징이었다.

    “여호와의 메시아”(Messiah) 같은 표현이 구약성경에서는 왕, 제사장들, 선지자들, 족장들, 이방의 왕 고레스, 민족의 구원자에게 사용되고 있다

    “다윗이 그에게 이르기를 네 피가 네 머리로 돌아갈지어다 네 입이 네게 대하여 증언하기를 내가 여호와의 기름 부음 받은 자를 죽였노라”(삼하 1:16).

    기름 부은 자는 왕과 제사장과 선지자였다.
    성경에는 7,000개가 넘는 사건이 예언됐고 성취됐는데 그 중에 가장 중요한 말이 ‘기름부음 받은 자’라고 할 수 있다.
    “여호와께서 자기에게 속한 바 기름부음 받은 자를 구원하시는 줄 이제 내가 아노니 그 오른손에 구원하는 힘으로 그 거룩한 데서 죄에게 응답하시리로다”라고 했습니다.

    첫째, ‘기름부음 받은 자’의 의미

    신앙생활을 하다가 문제가 되고 교회를 빠졌다가 말았다가 하거나 정치나 경제인 속에 기독교인이 있어도 아무런 영향을 끼치지 못하는 이유가 ‘그리스도’라는 단어를 모르기 때문이다.

    예컨대 유럽인들이 처음 미국으로 건너갔을 때 원주민들은 금과 다이아몬드가 귀중한 보석인 줄 몰랐다.
    그래서 그들은 사탕 한 봉지와 다이아몬드 한 봉지씩을 맞바꾸었다.
    얼마나 바보였는지를 알 수 있다.
    그런 식의 신앙생활을 하면서 잘 아는 것처럼 말할 때 참 안타깝다.

    ​둘째, 누구에게 기름을 부었다는 것인가?

    어느 날 이새의 집에 대제사장이 와서 “아들은 다 나와 보라”고 한 것이다.
    그런데 “다 나온 것이냐?” 할 때 “조그마한 아이 한명이 목동으로 있다”는 것이다.
    데리고 오자 성령 충만한 사무엘이 볼 때 하나님의 성령이 임했다.
    그러자 사무엘이 다윗을 불러서 “앞으로 비밀을 지키라.
    너는 이스라엘의 왕이 될 것이다.
    하나님이 내게 지시를 하였으니 어떤 일이 있어도 기다리고 참고 입을 조심하라”고 당부하고 그 머리 위에다 기름을 부은 것이다.

    여호와의 기름 부음 받은 자란 왕, 제사장, 선지자라는 것이다.
    기독교는 그리스도가 없으면 안된다.
    ‘성령으로 기름 부으셨다’는 것을 모르고 신앙생활을 한다는 것은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셋째, 기름 부음 받은 자의 신분은 어떤 것인가?

    우리가 헌금을 드리는데 번제를 받으시고 모든 소제를 기억하실 것이다. 우리는 구원을 받기 위해서가 아니고 구원을 받았기 때문에 소제와 번제를 드리는 것이다.

    ‘기름 부음 받은 자’란 성령 충만을 말하는데 성령 충만 받기 위해 기도하고, 말씀 듣고 헌금하는 것이다. 그래서 불신앙에 속지 말아야 한다. 특히 마귀가 유혹하는 말을 조심해야 한다. 마귀가 유혹하는 말에 넘어가면 신앙의 힘이 빠지게 된다. 이를 막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인간관계를 잘해야 하겠다. 그리고 세상에 동화되어서는 절대 안된다. 하나님 안에서 신앙생활을 해야 하는 것이다.

    한번은 엔게디 광야에 굴에서 부하들하고 숨어있는데 절호의 기회가 왔다. 사울이 그 굴에 변보러 들어왔다. 다윗은 저 굴 구석에 숨어있는데 거기에 와서 창, 칼 다 내놓고 바지가랑이 다 내놓고 쪼그려 앉아서 엉엉 하고 힘을 쓰고 있다. 단칼에 목을 날릴 수 있다. 부하들이 다윗에게 말했다. 하나님이 그 사람을 맡겼다. 당신 손에 붙였다. 이 기회다. 그냥 똥과 함께 날려 버려라! 그때 다윗이 뭐라고 말했나? 자기 사람들에게 이르되 내가 손을 들어 여호와의 기름 부음 받은 내 주를 치는 것은 여호와께서 금하시는 것이니 그는 여호와의 기름부음을 받은 자가 됨이라.

    “내가 손을 들어 여호와의 기름 부음 받은 자를 치는 것을 여호와께서 금하시나니 너는 그의 머리 곁에 있는 창과 물병만 가지고 가자 하고 다윗이 사울의 머리 곁에서 창과 물병을 가지고 떠나가되”(삼상 26:11~12).

    이것은 두 번째이다. 두 번째 들을 지나는데 들에 사울이 자기 군대들을 둘러싼 그 가운데서 다 깊이 잠을 자고 있다. 거기에 가서 단칼에 목을 치든지 창으로 찔러 버릴 수 있어서 군인들이 다윗에게 또 기회가 왔다. 단칼에 그냥 목을 베십시오. 하나님이 기름 부은 자를 내가 절대 손댈 수 없다. 하나님이 기름 부은 자는 하나님이 처리하신다. 내가 처리하지 않는다. 그는 하나님의 권위를 절대 존중했다. 하나님이 기름 부으심으로 하나님의 권위에 나는 도전하지 않는다. 그래서 사울의 물병하고 창만 들고 나간 것이다.

    그래서 나중에 산에 올라가서 왕이여 내가 왕을 죽이려 했으면 죽였겠는데 안죽였는데 왜 나를 잡으려고 따라 다닙니까? 하고 그렇게 고함친 적이 있다. 사울이 다윗의 손에 몇 번이나 죽임을 당할 수 있는데도 불구하고 사울은 다윗이 하나님을 존경하므로 하나님이 기름 부어서 왕을 삼은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권위를 무시해서 죽이지 않겠다고 안 죽인 것이다.

    하나님의 종은 지원병이 아니다. 지원한다고 하나님 절대 주의 종으로 삼지 않는다. 주의 시키는 일을 위하여 하나님이 택하여 세우는 것이다. 하나님은 지원병은 받지 않는다. 그러므로 잘못하면 하나님께서 심판하고 징계하실 것이다.

    “나의 기름 부은 자를 손대지 말며 나의 선지자들을 해하지 말라”(시편 105:15).

    기름은 하나님이 부었고 선지자는 하나님이 보냈으므로 그를 헤하는 것은 하나님이 하시는 것이다. 사울의 최후는 블레셋과의 전쟁에서 하나님이 죽였다. 하나님이 적군의 손을 통해서 사울을 죽이고 다윗을 왕으로 삼은 것이다. 하나님의 기름 부은 자를 존경하는 것은 하나님을 존경하고 대접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다윗을 또 사랑하는 것은 성경 전체에서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말을 다윗이 처음 사용한 것이다. 아브라함도 믿고 순종한다고 말했지 사랑한다는 말 안했다. 그리고 다른 선지자들도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말 안했는데 다윗이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말을 했다.

    사랑한다는 말을 왜 그렇게 겸연쩍게 못하나? 그것이 우리 한국 가정에서 가장 모자라는 것이 남편이 부인을 쉽게 사랑한다는 말 안한다. 구라파나 서양에 가면 남편들이 부인을 끌어안고 사랑한다고 뺨에 뽀뽀해주는 일이 많다.

    다윗은 개인적인 결점이 많았으나 하나님을 절대로 사랑하고 사랑한다는 말을 많이 했다. 다른 사람들은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말 안했는데 시편에 다윗만큼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고백한 것이 많이 한 사람이 없다. 다윗은 고난을 경험한 뒤에는 탄식시를 하나님께 간구하는 것이 응답되었을 때는 감사시를 하나님의 위엄과 사랑과 은혜를 체험했을 때는 찬양시를 지었는데 다윗은 하나님을 진심으로 사랑했던 이스라엘의 가장 위대한 왕이었다.

    다윗은 “나의 힘이신 여호와여 내가 주를 사랑하나이다”(시편 18:1)라고 고백했고 다윗은 최초로 하나님께 사랑을 고백한 사람이다. 아브라함도 이삭도 야곱도 그리고 모세와 여호수아도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고백은 안했다. 경외하고 존경한다고는 했지 사랑한다는 말 안했다. 하나님께서 다윗의 말에 감동하시고 그를 사랑했다.

    “다윗을 왕으로 세우시고 증언하여 이르시되 내가 이새의 아들 다윗을 만나니 내 마음에 맞는 사람이라 내 뜻을 다 이루리라”(행13: 22).

    다윗은 자신의 모든 삶을 하나님께 내어 맡기고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고백한 사람이다. 골리앗과 싸울 때에도, 전쟁을 나갈 때에도, 자신을 죽이려던 사울 왕에 대해서도, 밧세바를 범한 후 회개 할 때에도 다윗은 항상 먼저 하나님을 찾았다. 그는 곤란할 때 자기 스스로 해결하려고 하지 말고 하나님 앞에 나가서 회개하고 자백하고 믿고 의지했다. 다윗은 모든 일을 할 때 기도로 시작했다.

    “나의 왕,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부르짖는 소리를 들으소서 내가 주께 기도하나이다 야훼여 아침에 주께서 나의 소리를 들으시리니 아침에 내가 주께 기도하고 바라리이다”(시편 5: 2)라고 기도한 것이다.

    절대적인 믿음. 우리는 살아가면서 한계에 부닥친 후에야 비로소 인간적인 계산이 얼마나 부질없는가를 절감하고 괴로워하는 것이다. 스펄전 목사님은 이렇게 말했다. “인간이 하나님 앞에서 할 일은 계산적인 믿음을 가지는 것이 아니라 절대적인 믿음을 가지는 것이다. 계산은 하나님이 하신다” 내가 계산하지 말라는 것이다. 빌립은 5천명 먹일 때 예수님께서 저 사람들에게 먹을 것을 주라고 할 때 그 먹이기 위해서는 돈이 얼마나 필요하고 음식이 얼마나 필요하다고 계산을 한 것이다. 계산은 예수님이 하실 일이지 빌립이 할 일이 아닌 것이다. 안드레는 주님께서 먹이라는 말을 듣고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고 나온 것이다. 계산 안했다.

    계산하는 사람이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남자만 오천명 부녀자 기만명을 먹이려고 나왔으면 정신 빠진 놈이지. 그런데 계산을 안하고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고 먹이려고 나왔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다. 절대적으로 순종하는 것, 하나님이 하라고 하면은 책임은 하나님께 맡기고 나가는 것이다.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을 거느리고 홍해 앞에 섰을 때 2백만 이스라엘 백성을 거느리고 홍해를 건너야 되는데 배도 없고 다리도 없다. 뒤에는 애굽 군대가 다가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벡성이 도로 돌아가서 항복하자. 도로 종으로 돌아가는 게 좋겠다고 할 때 모세는 뭐라고 말했나? 너희는 오늘 가만히 있어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싸우는 것을 보라. 하나님이 책임져 주신다. 우리는 군대도 없고 병거도 없고 마차도 없는데 계산은 모세는 하지 않았다. 가만히 있어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서 싸우는 것을 보라. 계산은 하나님이 하신다. 하나님이 홍해를 갈라놓고 난 다음 이스라엘 백성을 홍해를 통해서 건너가게 하시고 뒤에 따라오는 애굽 군대를 다 물로써 덮어서 죽였으니 하나님 계산 바로 하셨다. 우리의 삶에 있어서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 무엇을 마실까 하나님이 계산하시는 것이다. 네 일을 주께 맡겨라. 그리하면 주께서 돌보신다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오늘 우리가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정성을 다하여 무조건하고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고 믿는 우리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네 짐을 여호와께 맡기라 그가 너를 붙드시고 의인의 요동함을 영원히 허락하지 아니하시리로다”(시편 55: 22)라고 말씀하셨다.

    3. 두 용사 /  전쟁은 여호와께 속한 것이다.

    “다윗이 블레셋 사람에게 이르되 너는 칼과 창과 단창으로 내게 나아오거니와 나는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 곧 네가 모욕하는 이스라엘 군대의 하나님의 이름으로 네게 나아가노라 오늘 여호와께서 너를 내 손에 넘기시리니 내가 너를 쳐서 네 목을 베고 블레셋 군대의 시체를 오늘 공중의 새와 땅의 들짐승에게 주어 온 땅으로 이스라엘에 하나님이 계신 줄 알게 하겠고 또 여호와의 구원하심이 칼과 창에 있지 아니함을 이 무리에게 알게 하리라 전쟁은 여호와께 속한 것인즉 그가 너희를 우리 손에 넘기시리라”(삼상 17: 45~47).

    “이스라엘아 네 영광이 산 위에서 죽임을 당하였도다 오호라 두 용사가 엎드러졌도다”(삼하 1:19).

    “오호라 두 용사가 전쟁 중에 엎드러졌도다 요나단이 네 산 위에서 죽임을 당하였도다”(삼하 1:25).

    “오호라 두 용사가 엎드러졌으며 싸우는 무기가 망하였도다 하였더라“(삼하 1:27).

    길보아 산(Mount Gilboa) :
    이스르엘 골짜기 동쪽 끝에 있는 모레(Moreh) 언덕의 남쪽에 위치해 있는 산으로, 높이는 해발 530m 정도 된다.
    길보아 산은 요단 계곡에서 이스라엘 평야에 이르는 계곡 가까이에 있었기 때문에 전쟁이 많이 일어났던 장소이다.
    사울은 길보아 산에서 블레셋과 전투를 벌였는데, 이곳에서 세 아들과 함께 블레셋과 싸우다가 전사했다(삼상 31:1, 8).
    사울과 요나단 등의 전사 소식을 접한 다윗은 이스라엘이 패배했던 장소인 길보아 산을 향해 “길보아 산들아 너희 위에 우로(雨露)가 내리지 아니하며 제물 낼 밭도 없을찌어다”라고 저주(詛呪)했다(삼하 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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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에른스트 블로흐(Ernst Bloch, 1885-1977)
    독일의 철학자, 희망의 신학자 몰트만에게 영향을 주었다.
    나치의 탄압을 피해 미국으로 망명했다.
    2차 대전 후 동독의 라이프치히에서 교수가 되었지만 관료주의에 반항하다가 교수직을 박탈당하고 서독으로 망명하였다.

    1885년 7월 8일 루트비히스하펜 암 라인에서 유대인 철도 공무원의 아들로 태어났다.
    뮌헨과 뷔르츠부르크에서 철학, 물리학, 음악을 공부하고 대학 입학 후 여섯 학기밖에 지나지 않은 1908년 「리케르트와 근대 인식론의 문제에 대한 비판적 해명」이라는 제목의 논문으로 박사 학위를 취득하는 탁월한 천재성을 드러냈다.

    이후 그는 루카치, 브레히트, 벤야민, 크라카우어, 아도르노 등 동시대의 지성인들과 친교를 맺으며 루카치와의 표현주의 논쟁으로 자신의 이름을 세상에 알렸으며 생애의 마지막 순간까지 왕성한 체력과 정신력으로 저술 활동에 몰두하여 철학, 정치 경제학, 신학, 문학, 사회학, 역사학, 정치학, 법철학, 예술 등 가히 백과사전적이라 할 정도로 폭넓은 분야를 섭렵하며 수많은 저술을 남겼다.


    에른스트 블로흐의 희망의 원리: 유토피아 철학


    안녕하세요, 철학 애호가 여러분! 오늘은 20세기의 위대한 철학자 중 한 명인 에른스트 블로흐(Ernst Bloch)와 그의 대표작 "희망의 원리(The Principle of Hope)"에 대해 깊이 있게 탐구해보려고 합니다. 블로흐의 사상은 현대 철학에 큰 영향을 미쳤으며, 특히 그의 유토피아 철학은 우리에게 희망과 변화의 가능성을 제시합니다.

    이 글을 통해 우리는 블로흐의 사상을 이해하고, 그의 철학이 우리의 일상생활과 어떻게 연결될 수 있는지 살펴볼 것입니다. 마치 재능넷에서 다양한 재능을 발견하고 공유하듯이, 블로흐의 철학에서도 우리는 인간의 무한한 가능성과 희망을 발견할 수 있을 것입니다. 자, 그럼 희망의 철학으로 가득한 여정을 시작해볼까요?

    1. 에른스트 블로흐: 희망의 철학자

    에른스트 블로흐(1885-1977)는 독일 출신의 마르크스주의 철학자로, 20세기의 가장 영향력 있는 사상가 중 한 명입니다. 그의 철학은 희망, 유토피아, 그리고 인간의 잠재력에 대한 깊은 탐구로 특징지어집니다. 블로흐의 사상은 단순히 학문적 영역에 머물지 않고, 실제 세계의 변화와 혁명적 사고에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블로흐는 "아직-되지-않은-것(Not-Yet-Become)"이라는 개념을 통해 미래의 가능성과 현재의 잠재력을 연결했습니다. 이는 마치 재능넷에서 사람들이 자신의 숨겨진 재능을 발견하고 발전시키는 과정과 유사하다고 볼 수 있죠. 우리 모두 내면에 "아직-되지-않은" 무언가를 품고 있으며, 이를 실현시킬 수 있는 잠재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 블로흐 철학의 핵심입니다.

    블로흐의 주요 저서:

    • 희망의 원리 (Das Prinzip Hoffnung, 1954-1959)
    • 유토피아의 정신 (Geist der Utopie, 1918)
    • 자연법과 인간의 존엄 (Naturrecht und menschliche Würde, 1961)

    블로흐의 생애와 사상은 20세기의 격동적인 역사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습니다. 그는 두 차례의 세계대전, 나치즘의 부상과 몰락, 그리고 냉전 시대를 겪으며 자신의 철학을 발전시켰습니다. 이러한 경험들은 그의 사상에 깊은 영향을 미쳤고, 특히 희망과 유토피아에 대한 그의 관점을 형성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1885출생 1918"유토피아의 정신" 출간 1954-1959"희망의 원리" 출간

    1977사망

    블로흐의 철학은 단순히 추상적인 이론에 그치지 않습니다. 그의 사상은 실제 세계의 변화와 혁명적 사고에 큰 영향을 미쳤으며, 오늘날까지도 많은 사람들에게 영감을 주고 있습니다. 그의 "희망의 철학"은 우리가 더 나은 미래를 꿈꾸고 그것을 실현하기 위해 노력할 수 있는 이론적 기반을 제공합니다.

    다음 섹션에서는 블로흐의 대표작인 "희망의 원리"에 대해 더 자세히 살펴보겠습니다. 이 책은 블로흐 철학의 정수를 담고 있으며, 현대 사회에서도 여전히 큰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마치 재능넷이 다양한 재능을 연결하듯이, 블로흐의 "희망의 원리"는 우리의 현재와 미래를 연결하는 철학적 다리 역할을 합니다. 함께 그 의미를 탐구해볼까요?

    2. "희망의 원리": 블로흐 철학의 정수

    "희망의 원리(Das Prinzip Hoffnung)"는 에른스트 블로흐의 대표작으로, 1954년부터 1959년 사이에 3권으로 출간되었습니다.
    이 방대한 저작은 블로흐 철학의 핵심을 담고 있으며, 희망과 유토피아에 대한 그의 독특한 관점을 상세히 설명하고 있습니다.

    "희망의 원리" 주요 개념:

    • 아직-되지-않은-것 (Not-Yet-Become)
    • 구체적 유토피아 (Concrete Utopia)
    • 앞으로-향하는 꿈 (Forward-Dreaming)
    • 희망의 존재론 (Ontology of Hope)

    2.1 아직-되지-않은-것 (Not-Yet-Become)

    "아직-되지-않은-것"은 블로흐 철학의 핵심 개념 중 하나입니다. 이 개념은 현재 속에 잠재된 미래의 가능성을 의미합니다. 블로흐는 우리의 현실이 단순히 "있는 그대로"의 것이 아니라, 항상 "되어가는 과정"에 있다고 보았습니다.

    이는 마치 재능넷에서 사람들이 자신의 숨겨진 재능을 발견하고 발전시키는 과정과 유사합니다. 우리 모두는 "아직-되지-않은" 잠재력을 가지고 있으며, 이를 실현시킬 수 있는 가능성을 지니고 있다는 것이죠.

    아직-되지-않은-것 현재

    미래 잠재적 가능성의 실현 과정

    2.2 구체적 유토피아 (Concrete Utopia)

    블로흐는 "구체적 유토피아"라는 개념을 통해 현실과 이상을 연결하고자 했습니다. 그는 단순히 공상적이거나 비현실적인 유토피아가 아닌, 현실 속에서 실현 가능한 유토피아를 추구했습니다.

    구체적 유토피아는 현재의 조건과 가능성을 바탕으로 더 나은 미래를 상상하고 실현하려는 노력입니다. 이는 우리가 일상에서 작은 변화를 만들어내는 것부터 시작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재능넷을 통해 자신의 재능을 공유하고 발전시키는 것도 일종의 구체적 유토피아를 실현하는 과정이라고 볼 수 있겠죠.

    구체적 유토피아의 특징:

    1. 현실에 기반을 둔 이상
    2. 실현 가능한 목표 설정
    3. 점진적인 변화와 발전
    4. 개인과 사회의 상호작용

    2.3 앞으로-향하는 꿈 (Forward-Dreaming)

    블로흐는 "앞으로-향하는 꿈"이라는 개념을 통해 인간의 상상력과 창조성의 중요성을 강조했습니다. 이는 단순히 공상에 빠지는 것이 아니라, 더 나은 미래를 적극적으로 상상하고 그것을 향해 나아가는 과정을 의미합니다.

    앞으로-향하는 꿈은 우리가 현재의 한계를 넘어서 새로운 가능성을 모색하게 합니다. 이는 예술, 과학, 기술 등 모든 분야에서 혁신과 발전의 원동력이 됩니다. 마치 재능넷에서 사람들이 새로운 재능을 발견하고 발전시키는 것처럼, 우리 모두는 앞으로-향하는 꿈을 통해 자신과 사회를 변화시킬 수 있는 잠재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앞으로-향하는 꿈의 과정 현재 상상

    실현 창조적 과정을 통한 미래 실현

    2.4 희망의 존재론 (Ontology of Hope)

    블로흐의 "희망의 존재론"은 희망을 단순한 감정이나 심리적 상태가 아닌, 인간 존재의 근본적인 특성으로 보는 관점입니다. 그는 희망이 우리의 존재 방식 자체에 내재되어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희망의 존재론에 따르면, 인간은 본질적으로 미래를 향해 열려 있는 존재입니다. 우리는 항상 "되어감"의 과정 속에 있으며, 이 과정에서 희망은 우리를 앞으로 나아가게 하는 원동력이 됩니다. 이는 마치 재능넷에서 사람들이 끊임없이 새로운 재능을 발견하고 발전시키는 과정과 유사합니다.

    희망의 존재론의 핵심 주장:

    • 희망은 인간 존재의 본질적 특성
    • 미래를 향한 개방성
    • 변화와 발전의 가능성
    • 능동적인 미래 창조

    "희망의 원리"에서 블로흐가 제시한 이러한 개념들은 단순히 철학적 이론에 그치지 않습니다. 이들은 우리의 일상생활과 사회 전반에 깊은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실천적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다음 섹션에서는 블로흐의 유토피아 철학이 현대 사회에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 그리고 우리의 삶에 어떻게 적용될 수 있는지 더 자세히 살펴보겠습니다.

    3. 블로흐의 유토피아 철학: 현대적 의미와 적용

    에른스트 블로흐의 유토피아 철학은 20세기에 탄생했지만, 21세기인 오늘날에도 여전히 큰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그의 사상은 현대 사회의 다양한 영역에서 새로운 해석과 적용을 찾고 있으며, 우리의 일상생활에도 깊은 영향을 미칠 수 있습니다.

    3.1 현대 사회에서의 희망의 의미

    현대 사회는 빠른 기술 발전, 글로벌화, 그리고 복잡한 사회 문제들로 인해 때로는 불확실성과 불안감이 증가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블로흐의 희망 철학은 우리에게 새로운 관점을 제시합니다.

    블로흐의 "아직-되지-않은-것" 개념은 현재의 어려움 속에서도 미래의 가능성을 볼 수 있게 해줍니다. 이는 개인적 차원에서 자기 계발과 성장의 동기가 될 수 있으며, 사회적 차원에서는 긍정적인 변화와 혁신의 원동력이 될 수 있습니다.

    현대 사회에서 희망의 역할:

    • 불확실성 속에서의 방향성 제시
    • 개인과 사회의 발전 동력
    • 창의성과 혁신의 원천
    • 사회 문제 해결을 위한 긍정적 에너지

    예를 들어, 재능넷과 같은 플랫폼은 블로흐의 철학을 실천하는 현대적 예시라고 볼 수 있습니다. 사람들이 자신의 숨겨진 재능을 발견하고 발전시키는 과정은 "아직-되지-않은-것"을 실현하는 과정이며, 이를 통해 개인과 사회가 함께 성장하는 "구체적 유토피아"를 만들어갈 수 있습니다.

    3.2 기술 발전과 유토피아적 사고

    블로흐의 유토피아 철학은 현대의 기술 발전과 밀접한 관련이 있습니다. 인공지능, 빅데이터, 가상현실 등의 첨단 기술은 우리에게 새로운 가능성의 세계를 열어주고 있습니다.

    이러한 기술들은 블로흐가 말한 "앞으로-향하는 꿈"을 실현할 수 있는 도구가 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인공지능을 통한 질병 예측과 치료, 가상현실을 활용한 교육 혁신, 빅데이터를 통한 사회 문제 해결 등은 모두 유토피아적 사고와 기술의 결합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기술과 유토피아의 융합 기술 유토피아

    혁신 기술과 유토피아적 사고의 상호작용

    하지만 동시에 블로흐의 철학은 우리에게 기술 발전의 윤리적, 사회적 측면에 대해 생각해볼 것을 요구합니다. 단순한 기술적 진보가 아닌, 인간의 존엄성과 사회적 가치를 고려한 "구체적 유토피아"를 추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3.3 환경 문제와 지속가능한 유토피아

    현대 사회에서 가장 시급한 문제 중 하나인 환경 문제에 대해서도 블로흐의 철학은 중요한 시사점을 제공합니다. 기후 변화, 자원 고갈, 생태계 파괴 등의 문제는 우리에게 새로운 형태의 유토피아적 사고를 요구하고 있습니다.

    블로흐의 "구체적 유토피아" 개념은 환경 문제에 대한 실천적 해결책을 모색하는 데 도움을 줄 수 있습니다. 재생 에너지, 순환 경제, 생태 도시 등의 개념은 환경 보호와 경제 발전을 동시에 추구하는 구체적 유토피아의 예시라고 볼 수 있습니다.

    환경 문제에 대한 유토피아적 접근:

    1. 지속가능한 발전 모델 구축
    2. 생태계와 인간 사회의 조화로운 공존
    3. 친환경 기술 혁신
    4. 글로벌 협력을 통한 환경 문제 해결

    이러한 접근은 재능넷과 같은 플랫폼을 통해 더욱 활성화될 수 있습니다. 환경 관련 지식과 기술을 가진 사람들이 자신의 재능을 공유하고, 이를 통해 더 많은 사람들이 환경 문제에 관심을 갖고 참여하게 되는 것입니다.

    3.4 사회 정의와 유토피아적 비전

    블로흐의 유토피아 철학은 사회 정의 실현에도 중요한 의미를 지닙니다. 그의 "희망의 원리"는 단순히 개인적 차원의 희망이 아닌, 사회 전체 의 변화와 발전을 위한 집단적 희망을 강조합니다.

    블로흐의 관점에서 볼 때, 진정한 유토피아는 모든 구성원이 평등하고 자유로운 사회를 의미합니다. 이는 현대 사회에서 여전히 존재하는 불평등, 차별, 빈곤 등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지속적인 노력의 필요성을 상기시킵니다.

    사회 정의 실현을 위한 유토피아적 비전:

    • 경제적 불평등 해소
    • 교육 기회의 평등
    • 인권과 다양성 존중
    • 민주주의의 심화와 확장

    이러한 맥락에서 재능넷과 같은 플랫폼은 사회 정의 실현을 위한 도구가 될 수 있습니다. 다양한 배경의 사람들이 자신의 재능을 공유하고 서로 배우는 과정을 통해, 교육과 기회의 격차를 줄이고 더 평등한 사회를 만들어갈 수 있습니다.

    3.5 개인의 삶에서의 유토피아적 사고

    블로흐의 철학은 거시적인 사회 변화뿐만 아니라, 개인의 일상생활에도 적용될 수 있습니다. 그의 "아직-되지-않은-것" 개념은 개인의 성장과 자아실현에 대한 새로운 관점을 제시합니다.

    우리 각자의 삶에서 "구체적 유토피아"를 추구한다는 것은, 현실적 조건을 고려하면서도 더 나은 미래를 향해 꾸준히 노력한다는 의미입니다. 이는 자기계발, 커리어 성장, 인간관계 개선 등 다양한 영역에서 실천될 수 있습니다.

    개인의 유토피아적 성장 과정 현재 자아 성장 과정

    이상적 자아 지속적인 자기 실현과 발전

    예를 들어, 재능넷을 통해 새로운 기술을 배우거나 자신의 재능을 다른 사람들과 공유하는 것은 개인의 유토피아적 성장 과정의 일부가 될 수 있습니다. 이는 단순한 지식 습득을 넘어, 자신의 잠재력을 실현하고 사회에 기여하는 과정이 됩니다.

    3.6 글로벌 차원의 유토피아적 비전

    21세기의 글로벌화된 세계에서 블로흐의 유토피아 철학은 국제적 협력과 연대의 중요성을 강조합니다. 기후 변화, 팬데믹, 경제 불평등 등 전 지구적 문제들은 개별 국가의 노력만으로는 해결하기 어렵습니다.

    블로흐의 "구체적 유토피아" 개념은 이러한 글로벌 문제에 대한 실천적이고 협력적인 접근을 요구합니다. 국가 간의 경계를 넘어 공동의 목표를 향해 노력하는 것, 그것이 바로 21세기의 글로벌 유토피아일 것입니다.

    글로벌 유토피아를 위한 과제:

    1. 국제적 협력 체계 강화
    2. 문화적 다양성 존중과 상호 이해 증진
    3. 글로벌 시민의식 함양
    4. 지속가능한 발전 목표(SDGs) 실현

    이러한 맥락에서 재능넷과 같은 플랫폼은 글로벌 차원의 지식과 재능 교류를 촉진함으로써, 국경을 초월한 협력과 이해를 증진시키는 역할을 할 수 있습니다.

    결론 : 희망의 철학, 미래를 향한 나침반

    에른스트 블로흐의 유토피아 철학은 단순한 이론적 논의를 넘어, 우리의 현실을 변화시키고 더 나은 미래를 만들어가는 실천적 지침이 될 수 있습니다.
    그의 "희망의 원리"는 불확실성과 도전으로 가득한 현대 사회에서 우리에게 방향성과 용기를 제공합니다.

    블로흐의 철학을 통해 우리는 현재의 한계에 안주하지 않고, 끊임없이 "아직-되지-않은-것"을 향해 나아갈 수 있습니다.
    이는 개인의 성장, 사회의 발전, 그리고 글로벌 차원의 협력을 이끄는 원동력이 될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블로흐의 유토피아 철학은 우리에게 희망의 중요성을 일깨워줍니다.
    희망은 단순한 감정이 아닌, 더 나은 세상을 만들어가는 적극적인 행동의 원천입니다.
    우리 모두가 "구체적 유토피아"를 꿈꾸고 실현해 나갈 때, 우리는 진정으로 더 나은 미래를 만들어갈 수 있을 것입니다.

    이러한 맥락에서 재능넷과 같은 플랫폼은 블로흐의 철학을 실천하는 현대적 도구가 될 수 있습니다.
    우리 각자의 재능과 지식을 공유하고 발전시키는 과정을 통해, 우리는 개인과 사회의 "아직-되지-않은-것"을 실현해 나갈 수 있을 것입니다.
    함께 꿈꾸고, 함께 성장하며, 함께 더 나은 미래를 만들어가는 것, 그것이 바로 블로흐가 말하는 "희망의 원리"의 실천이 아닐까요?

    사람은 빵보다 희망을 먹고사는 존재다

    에른스트 블로흐(1885-1977)는 독일계 유대인 철학자이다.
    1885년 독일 남서쪽에서 유대인 철도노동자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평생을 가난하게 살았다.
    그는 63살에 처음 교수가 되기 전까지 일정한 직업이 없는 재야 학자로 살았다.
    1917년 유대인이라는 이유로 스위스 망명을 한 후 1933년부터는 나치를 피해 방랑한 15년간 유럽 여러 도시와 미국에서 막노동을 하면서 살았다.
    그러면서도 그는 뛰어난 여성들과 세번이나 결혼을 하고, 베버나 지멜, 루카치, 베냐민, 브레히트, 아도르노를 비롯한 당대의 수많은 석학이나 예술가들과 만나 뜨거운 우정을 나누고 치열한 토론을 했다.

    30년이 넘는 최악의 망명 상황에서도 그 수많은 책을 썼다.
    1차 세계대전으로 인해 스위스에 망명한 이듬해에 낸 <유토피아의 정신>, 나치에 쫓긴 지 3년이 지난 1935년에 낸 <이 시대의 유산>을 비롯하여 많은 책을 썼다.
    그러나 그는 그 절망의 순간을 살면서 희망의 끈을 놓치지 않았다.
    그는 절망했기에 희망을 더욱 절실히 추구했다.

    그는 제2차 세계대전 후 동독에서 환갑이 지나 처음으로 교수가 되었다.
    그러나 곧 공산주의 정권과 마찰을 일으켜 10년 만에 1957년에 퇴직당했다.
    74살 때 완전히 고립된 상태에서 <희망의 원리>를 20년 만에 완성했다.
    <희망의 원리>는 사실 반세기에 걸친 블로흐 사상의 결산이었다.
    그는 76살 되던 1961년 서독으로 이주하여 1977년 숨을 거두었다.
    <희망의 원리>는 철학이나 문학 또는 역사 등 인문사회과학만이 아니라 음악, 미술, 건축 등 모든 예술분야와 기술, 과학, 의학 등까지도 아우르는 책이다.
    모든 학문과 예술 분야를 ‘희망’이라는 하나의 키워드로 꿰뚫는 사상서라는 점에서 ‘희망의 백과사전’이다.

    블로흐는 이 책에서 희망에 대해서 다섯가지로 정의를 했다.

    첫째, 인간은 빵을 먹고 사는 것이 아니라 본질적으로 희망을 먹고 산다.
    둘째, 희망을 잃어버린 사람은 이미 삶 자체를 잃어버린 사람이다.
    셋째, 희망이 힘이다.
    희망이 없는 사람은 아무리 좋은 조건에서도 삶을 포기하지만 희망이 있는 사람은 최악의 상태에서도 극복하게 된다.
    넷째, 희망은 그냥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배우고 훈련해야 한다.
    다섯째, 희망은 인간을 인간답게 하고 행복을 약속해준다.

    철학자는 예수 믿는 사람이 아닙니다.
    그런데 독일의 신학자인 몰트만은 에른스트 블로흐의 “희망의 원리”를 읽고 나서 희망의 신학을 발전시켰습니다.
    몰트만은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희망을 주시는 분이시다.
    희망의 원천이 그리스도이시다.
    희망의 원천이 하나님이시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에게 주신 희망을 누리고 바로 이 희망을 전도하는 것이다.”고 했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불행한 사람은 가난하거나 병든 사람이 아니라 희망이 없는 사람입니다.
    희망이 있는 한 인생은 불쌍하지 않습니다.
    희망이 없는 사람은 죽고, 희망이 있는 사람은 삽니다.
    절망은 인간을 죽이는 독약이고, 희망은 인간을 살리는 명약입니다.


    하나님께 소망을 둔 사람(시편 146:1~5)

    "인간은 희망을 먹고 사는 존재이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를 가리켜 사회심리학자 에리히 프롬호모 에스페란스(homo esperans)라는 용어를 사용했습니다.
    직역하면 ‘희망의 존재’라는 뜻입니다.
    밥을 안 먹고도 여러 날 버틸 수 있지만 희망이 사라지면 한 순간도 살아갈 수 없습니다.
    성경에서는 희망이란 말보다 소망이란 말을 자주 사용합니다.
    희망 이란 말 대신 소망이란 말을 사용하겠습니다.
    아무리 어려워도 소망이 있으면 삽니다.
    반대로 소망이 없으면 금세 죽게 됩니다. 이런 사실을 잘 설명해 주는 이야기 두 가지를 소개해 드립니다.

    첫번째 이야기

    어느 무더운 여름날 공장에서 일하던 한 청년이 하도 더워서 어쩔 줄을 모르다 지하실에 큰 냉동 창고를 발견했습니다.
    잘 됐다 싶어 땀이나 식힐 심산으로 냉동창고 문을 열고 들어갔습니다.
    그때 철커덕 소리가 나면서 문이 닫혀버렸습니다.
    그 문은 안에서는 열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청년은 당황한 나머지 문을 두드리고 악을 써봤지만 구해줄 사람이 없었습니다.
    절망감에 사로잡힌 청년은 상상을 합니다.
    “내 몸이 점점 얼어간다. 몇 시간 후면 죽겠구나.”
    이틀 후 사람들이 냉동 창고의 문을 열어 보았을 때는 이미 싸늘한 시체가 되어버리고 말았습니다.
    어처구니없는 것은 그 냉동 창고는 가동되지 않았고 기온이 섭씨 15도에 불과했습니다.
    산소도 충분했습니다.
    그 청년을 죽인 것은 살인적인 냉기가 아니라 절망이었습니다.

    두번째 이야기

    <인생찬가>로 유명한 시인 롱펠로는 지독한 고통 속에 인생을 보낸 사람입니다.
    그는 두 번이나 부인과 사별했습니다.
    첫번째 부인은 오랫동안 병을 앓다가, 두번째 부인은 끔찍한 화재로 사별하게 됐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인생을 예찬하는 시를 많이 썼습니다.
    말년에 기자가 그에게 질문했습니다.
    “어떻게 극한 고난 가운데 인생을 그토록 아름답게 노래할 수 있었습니까?”
    그러자 그는 정원의 늙은 사과나무를 가리키며 말했습니다.
    “저 나무가 나의 스승이었습니다. 늙은 나무지만 언제나 새로운 가지가 돋아나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었죠.”
    그는 고목나무에서 인생의 소망을 본 것입니다.
    그래서 고난 속에서도 기쁨으로 인생을 살 수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흔히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어려운 환경이나 조건이 우리를 불행하게 만든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엄밀히 말하면 환경이나 조건 자체가 아니라 그것을 보고 우리 마음에 소망을 상실하는 데 그 원인이 있습니다.
    동일한 악조건 하에서도 소망을 품는 사람은 당당하게 살아갈 수 있고, 행복할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요즘 우리 사회에 이런 저런 어려움이 많다 보니까 자살하는 사람들이 급증하고 있습니다.
    작년 한 해 동안 자살자가 무려 8천 명이 넘었고, 지난 10년 동안 두 배로 늘었다고 합니다.
    놀랄 일입니다. 얼마 전엔 재벌 총수가 자살해서 우리 모두에게 큰 충격이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빚 때문에 혹은 가정불화 때문에, 실직해서, 대학을 졸업한 청년들은 취직이 안돼서, 청소년들 중에는 성적이 오르지 않아서, ... 다양한 이유로 자기 목숨을 끊고 있습니다. 얼마나 괴로웠으면 그럴까 이해는 하면서도 안타까움을 금할 수 없습니다. 자살은 이유 여하를 막론하고 하나님 앞에 범죄 행위이기 때문입니다. 생명은 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것입니다. ‘생명’이란 살라(生)는 하나님의 명령(命)인 것입니다. 어쨌든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죽음을 선택하는 것은 겉으로 나타난 이유들보다 사실은 그들의 마음 속에 엄습한 절망 때문입니다. 조그마한 소망이라도 남아 있었다면 결코 죽지 않았을 겁니다. 소망이 있으면 ‘자살’이 아니라 ‘살자!’가 되는 법입니다.

    이렇게 볼 때 우리 인생에서 가장 소중한 것 중 하나는 소망입니다. 비유하면 소망은 산소와 같은 것입니다. 산소가 없으면 질식하는 것처럼 소망이 없으면 인생은 질식해 버립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소망의 사람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어려운 세상이지만 얼마든지 굳건하게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런데 유의할 사항이 있습니다. 이 세상에서 사람들이 붙드는 소망 중에는 헛된 소망도 많다는 사실입니다. 그런 소망은 당장은, 잠시 동안은 살아갈 용기를 주고, 삶에 대한 의욕을 불어넣어 줍니다. 그러나 나중에 그것이 헛된 것으로 밝혀지면 더 큰 절망의 수렁에 빠집니다. 그때는 모든 게 무너지게 됩니다. 도저히 회생이 불가능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소망을 갖되 참된 소망, 영원히 후회함이 없는 소망을 가질 수 있기를 바랍니다.

    시편 기자는 오늘 본문에서 헛된 소망과 참된 소망을 대조해서 설명하고 있습니다. 아무쪼록 이 말씀을 잘 살펴보시고 참된 소망을 붙드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저와 여러분은 후회 없는 인생, 영원히 행복한 인생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헛된 소망 : 우리가 포기할 것

    헛된 소망도 소망이기에 어느 정도는 삶에 의욕을 줍니다. 그러나 언젠가 실망할 때가 옵니다. 그러므로 헛된 사람은 당장은 행복해 보여도 ‘잠재적으로 불행한 인생’입니다. 마치 시한폭탄과 같은 겁니다.

    그러면 헛된 소망이란 어떤 것일까요?
    두 가지로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하나는 막연한 소망이요, 또 하나는 ‘세속적인 소망’입니다.

    막연한 소망:
    근거도 없고, 불확실한데 그냥 기대를 걸어보는 것입니다.
    없는 것보다는 훨씬 낫지만, 후일 기대에 어긋나면 크게 실망하고 비관할 위험성이 있습니다. 심한 경우는 폐인이 되기도 합니다. 예를 들어 도박장에서 가질 수 있는 소망입니다. 옛날에는 금광(노다지) 찾아다니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요즘도 대박이 터질 것 같은 막연한 소망을 갖고 사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한번만 더, 한번만 더 ... 그러다가 오히려 그 소망이 좌절되고 쪽박을 차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속지 말아야 합니다.

    세속적인 소망 :
    세상의 재물, 권세, 건강, 향락 등에 관해 소망을 갖는 것입니다. 물론 이런 소망과 기대가 있기에 사람들이 나름대로 열심히 살아가는 게 사실입니다. 만일 이런 것조차 없다면 사람들이 노력도 안하고, 세상은 정지될지도 모릅니다. 그 런데 문제는 이런 종류의 소망은 이루지 못하면 못하는 대로 실망하고, 이룬다 해도 언젠가 실망하게 됩니다. 왜냐하면 이 세상에 있는 모든 것들은 세월이 흐름에 따라 부침을 거듭하고, 종내는 죽음과 더불어 모든 게 다 사라져 버리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온갖 부귀영화를 누려보았던 솔로몬의 고백을 들어보십시오. 전1:14 “내가 해 아래서 행하는 모든 일을 본즉 다 헛되어 바람을 잡으려는 것이로다”

    그러므로 여러분, 재물에 소망을 두지 마십시오. 성경은 곳곳에서 이를 경계합니다. 시39:6 “진실로 각 사람은 그림자같이 다니고 헛된 일에 분요하며 재물을 쌓으나 누가 취할는지 알지 못하나이다” 잠11:28 “자기의 재물을 의지하는 자는 패망하려니와 의인은 푸른 잎사귀 같아서 번성하리라” 잠23:5 “네가 어찌 허무한 것에 주목하겠느냐 정녕히 재물은 날개를 내어 하늘에 나는 독수리처럼 날아가리라” 그래서 사도 바울은 이렇게 권면합니다. 딤전6:17) “네가 이 세대에 부한 자들을 명하여 마음을 높이지 말고 정함이 없는 재물에 소망을 두지 말고 오직 우리에게 모든 것을 후히 주사 누리게 하시는 하나님께 두며 ...”

    세상 권세에도 소망을 두지 마십시오. 권세라는 게 별 게 아닙니다. 풀의 꽃과 같은 겁니다. 벧전1:24 "그러므로 모든 육체는 풀과 같고 그 모든 영광이 풀의 꽃과 같으니 풀은 마르고 꽃은 떨어지되 ..." 화무십일홍(花無十日紅) 아닙니까? 권불십년(權不十年)이란 말도 있죠. 그런데 요즘에 이 말의 새로운 버전이 나왔습니다. 권불오년(權不五年)이랍니다. 정권만 바뀌면 권력의 실세들이 추풍낙엽처럼 떨어지는 모습을 봅니다. 그런 모습을 보면 안타깝기도 하고, 인생이 바로 저런 거로구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래서 야보고 선생은 우리 인생을 가리켜 안개라고 표현합니다. 약4:14 “내일 일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너희 생명이 무엇이뇨 너희는 잠깐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니라”

    그러므로 성도 여러분! 우리는 꼭 기억합시다. 재물이든 권세든 영원한 가치, 하나님의 선한 뜻을 위해 얻기도 하고 사용하기도 해야 비로소 의미가 있고, 후회가 없습니다. 그런 것들은 도구일 뿐 우리 인생의 목적도 아니고, 소망도 아닙니다. 그래서 본문에서 시편기자는 뭐라고 말씀합니까? 3절~4절. “방백들을 의지하지 말며 도울 힘이 없는 인생도 의지하지 말지니 그 호흡이 끊어지면 흙으로 돌아가서 당일에 그 도모가 소멸하리로다”

    참된 소망 : 우리가 붙들 것

    시편 기자는 이제 헛된 소망을 버리고 참된 소망을 붙들 것을 말씀합니다. 5절.
    “야곱의 하나님으로 자기 도움을 삼으며 여호와 자기 하나님에게 그 소망을 두는 자는 복이 있도다” 그렇습니다. 이 세상에 속한 것들은 그 어느 것도 아무리 대단해 보이는 것도 언젠가 나를 실망시킵니다. 믿는 도끼에 발등 찍힌다는 말이 바로 그런 거 아닙니까? 오직 하나님만이 우리를 도우시는 분이요, 우리의 소망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들에게, 당신의 자녀들에게 결코 실망시키는 일이 없습니다. 우리가 세상 살 동안에도, 이 세상을 떠날 때도 우리를 실망시키지 않습니다.

    충분히 그러실만한 분입니다.
    시편 146:6 말씀대로 그분은 창조주 하나님이이요 전능자이십니다. 불가능한 게 없습니다. 게다가 그분은 진실한 분입니다. 약속을 꼭 지키십니다.

    시편 146:7~9 말씀대로 사랑과 자비의 주님이십니다. 그분은 정말 우리를 사랑하시기에, 불쌍히 여기시기에 끝까지 책임져 주십니다. 5절에 ‘야곱의 하나님’이란 표현도 중요한 말입니다. 야곱과, 이스라엘과 언약하신 하나님이란 뜻입니다. 그분은 역사 속에서 한번도 언약 백성인 이스라엘을 단 한번도 배신한 적이 없습니다. 다만 그들이 배신했을 뿐입니다. 그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우리에게 아버지가 되십니다. 주님이 되십니다. 그러므로 그분이 우리 인생을 책임져 주십니다. 붙들어 주십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평생토록 축복하십니다. 그리고 고난이 닥쳐와도 피할 길을 열어보시고, 이길 힘을 주십니다.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하십니다. 심지어 죽음이 닥쳐와도 우리를 책임져 주십니다. 그래서 잠14:32에 뭐라고 말씀합니까? “악인은 그 환난에 엎드러져도 의인은 그 죽음에도 소망이 있느니라” 그렇습니다. 십자가에서 대속의 제물이 되신 예수님은 사망 권세 이기시고 부활하셨습니다. 부활의 주님이 나의 주님이 되시기에 죽음이 닥쳐와도 괜찮습니다. 우리에게 영생이 있고, 천국과 부활의 소망이 있습니다.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사람들에게 친구가 셋이 있다고 합니다.
    첫째 친구는 아주 친한 친구라서 죽고 못 사는 사이입니다.
    그 친구의 이름은 재물입니다.
    둘째 친구는 친한 친구라 자주 만나고 끈끈하게 지냅니다.
    도움을 주고받습니다.
    그 친구의 이름은 사람입니다.
    셋째 친구는 별 볼일 없는 친구입니다.
    만나면 만나고 못 만나면 못 만나고 ... 그럭저럭 지내는 친구입니다.
    이 친구의 이름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정말 이 이야기대로 세상 사람들은 돈을 제일 좋아하고 사람들과 인맥을 형성하면서 살아갑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멀리 합니다.
    소홀히 여깁니다.
    재물이 내 인생을 얼마나 책임져 주는가?
    그리고 사람들이 얼마나 책임져 주는가?
    유용한 도구이고 서로 사랑하면 살 존재이지만 한계가 있습니다. 재물은 죽음 직전까지만 유익합니다. 사람들은 장례식까지 도와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죽음 이후에는 속수무책입니다. 오직 예수님만이 이 세상에서도 죽음 너머 내세에서도 우리에게 완전한 도움이 되십니다. 그러기에 예수님만이 영원한 소망이 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하나님이 함께 계시는 한, 예수님이 우리 안에 계시는 한 절망은 없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의 사전에는 절망이란 단어가 없습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심을 믿는 한 어떤 상황에서든지 소망이 있습니다. 더 나아가 소망 없는 사람들에게 소망을 전해줄 수 있습니다. 사도행전 27장을 보면 유라굴로 광풍 사건이 나옵니다. 바울이 복음을 전하다 죄수 아닌 죄수의 몸으로 로마에 압송됩니다. 그런데 배가 유라굴로 광풍을 만납니다. 그때의 절망 상태를 행27:20~21은 이렇게 묘사합니다. “여러 날 동안 해와 별이 보이지 아니하고 큰 풍랑이 그대로 있으매 구원의 여망이 다 없어졌더라 여러 사람이 오래 먹지 못하였으매 ... ” 살 소망조차 사라졌습니다. 완전한 절망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승객들의 한 가운데 당당하게 나섭니다. 그리고 외칩니다. 행27:22~25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이제는 안심하라 너희 중 생명에는 아무 손상이 없겠고 오직 배뿐이리라 나의 속한 바 곧 나의 섬기는 하나님의 사자가 어제 밤에 내 곁에 서서 말하되 바울아 두려워 말라 네가 가이사 앞에 서야 하겠고 또 하나님께서 너와 함께 행선하는 자를 다 네게 주셨다 하였으니 그러므로 여러분이여 안심하라 나는 내게 말씀하신 그대로 되리라고 하나님을 믿노라” 얼마나 통쾌합니까? 선주도, 선원들도, 로마 군인들도 벌벌 떨고 있을 때 당당하게 외치는 바울의 모습! 이게 바로 하나님께 소망을 둔 사람의 모습입니다. 바울은 그 소망을 나눠주었습니다. 그 결과 276명이 살아납니다.

    이 세상을 둘러보십시오.
    과연 어디에 참된 소망이 있는지 ... 영원히 후회하지 않을 진짜 소망 말입니다.
    세상에 있는 것들은 한결 같이 우리에게 실망을 주는 것들뿐입니다.
    하나님 없으면 소망도 없습니다.
    그런데 어리석게도 사람들이 하나님을 찾지 않습니다.
    믿는 성도들마저 엉뚱한 데 가서 기웃거립니다.
    정말 안타까운 일입니다.
    참된 소망이신 하나님만 바라보기 바랍니다.
    언젠가 세상 모든 줄이 끊어질 날이 옵니다.
    재물의 줄, 명예의 줄, 권세의 줄, 인맥의 줄, ...
    그러나 끊어지지 않는 소망의 줄이 있습니다.
    전능자 하나님을 믿는 신앙의 줄입니다. 소망의 줄입니다. 우리는 이 소망을 승리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 참된 소망이신 하나님이 없어서 세상에서 방황하는 사람들, 죽어가는 사람들에게 소망의 복음을 전해 주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소망의 증인들입니다. 소망의 하나님을 소개해 주십시오. 죽음을 이기고 승리하신 부활의 소망 예수 그리스도를 전해 주십시오. 이것이 그들을 위한 최상의 선물입니다.
    참된 소망으로 행복한 인생 살아가시고, 이웃에게 소망의 증인으로 나서야 하겠습니다.


    삼하2장

    다윗 장군 요압, 사울 장군 아브넬

    다윗은 요압이 죽인 아브넬을 위해 애가를 불렀다.

    ▶아사헬(Asahel): 다윗 왕의 누이인 스루야의 아들로 들노루처럼 빨리 달리는 특기가 있었다(삼하 2:18). 또한 그는 요압과 아비새의 친동생이다(대상 2:16). 다윗이 정권을 잡는 과정에서 다윗의 장군 요압과 사울의 장군 아브넬 사이에 치열한 전쟁이 있었는데 이때 요압측 군세가 우세하여 아브넬이 도망가자 이를 붙잡기 위해 뒤를 좇다가 아브넬에게 창에 찔려 죽임을 당했다(삼하 2:18-23).

    ▶아브넬(Abner): 사울의 군사령관으로 사울의 삼촌이었던 넬의 아들이다(삼상 14:50).

    그는 사울이 다윗을 추격하는 것을 도왔지만(삼상 26:5) 다윗과 몇 사람들이 사울의 진에 몰래 들어가서 머리 옆에 창을 꽂아두고 돌아올 정도로 방비를 소홀히 했기 때문에 다윗으로부터 사울을 제대로 보호하지 않았다는 책망을 들었다(삼상 26:13-16).

    또한 그는 사울의 아들인 이스보셋을 왕으로 세웠으며(삼하 2:8-10), 다윗의 군사들과 기브온 근처에서 후퇴하던 중 자신을 추격해온 아사헬을 죽였다(삼하 2:12-32).

    그때 아브넬은 사울과 다윗이 전쟁하는 동안 권세를 잡았고 사울의 첩을 통간하기까지 했다(삼하 3:6-7). 이로 인해 이스보셋의 책망을 들은 그는 다윗과 결탁하였지만(삼하 3:8-21), 요압의 동생을 죽였다는 이유로 요압에 의해 살해당하였다(삼하 3:22-27). 다윗은 이런 아브넬의 죽음에 대해 애석하게 여겨 애가(哀歌)를 지어 불렀으며, 백성들도 슬퍼했다(삼하 3:31-39).

    아브넬의 죽음을 위해 부른 노래

    다윗은 아브넬을 위해 애가를 지었다(삼하 3:33). 애가는 ‘키나’(Kinah)라고 하는데, ‘슬픈 노래’ 또는 ‘조가’(弔歌)로 죽은 자를 애도하는 노래이다. 이외에도 사울을 위한 애가(삼하 1:19-27), 예레미야가 부른 요시야를 위한 애가(대하 35:25) 등이 있다.

    아브넬은 요압에 의해 죽임 당했는데, 당시 요압은 다윗과 아브넬과의 회담이 국사를 논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다윗을 속여서 공격하기 위함이라고 항의하며(삼하 3:23-25), 아브넬을 뒤쫓아가서 죽였다(삼하 3:27). 하지만 요압이 아브넬을 죽인 실제 이유는 동생의 죽음을 복수하기 위해서였다(삼하 3:27, 30).

    이에 대해 다윗은 자신에게 아무 죄가 없음을 말하며(삼하 3:28), 백성들에게 아브넬을 위해 애도하도록 했다(삼하 3:31). 그리고 자신이 직접 애가를 지어 불렀다(삼하 3:33-34).

    ​..............................

    이스보셋(Ishbosheth): 사울 왕의 여러 아들 가운데 한 사람으로, 그는 사울이 죽은 후 약 2년 동안 북쪽 이스라엘 지파들을 다스렸다. ‘자랑, 힘’이란 뜻을 가진 단어에서 비롯된 그의 이름은 아마 에스바알(‘바알의 사람’이라는 뜻)의 다른 이름일 것이다(대상 8:33; 9:39).

    사울의 아들 이스보셋의 일생

    블레셋과의 전투에서 패한 사울이 도망가다가 길보아에서 죽었으며, 사울의 아들 요나단과 아비나답과 말기수아가 전사하자(삼상 31:2) 사울의 사촌이자 군대장관이었던 아브넬은 사울의 아들 이스보셋을 요단강 건너편 마하나임에서 왕으로 추대했다(삼하 2:8-9). 이후 사울의 집에서 점점 권세를 잡게 된 아브넬(삼하 3:6)은 사울의 첩 리스바와 통간한 것이 원인이 되어 이스보셋과의 사이가 악화되었다(삼하 3:7-8). 아브넬은 북쪽 지파들을 다윗에게로 돌아서게 하려는 음모를 꾸몄으나(삼하 3:12-19) 요압이 다윗을 방문하고 돌아가는 아브넬을 다시 헤브론으로 불러 죽임으로써 무산되었다(삼하 3:26-27). 이스보셋의 실제적인 후견자가 없어지자 그의 두 군장 레갑과 바아나가 이스보셋이 한 밤중에 쉬고 있는 동안에 그를 암살했다(삼하 2-4장). 이스보셋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다윗은 사울의 집안으로부터 모든 이스라엘에 대한 통제권을 획득하게 되었다.

    다윗 왕의 아들:

    “다윗이 헤브론에서 아들들을 낳았으되 맏아들은 암논이라 이스르엘 여인 아히노암의 소생이요 둘째는 길르압이라 갈멜 사람 나발의 아내였던 아비가일의 소생이요 셋째는 압살롬이라 그술 왕 달매의 딸 마아가의 아들이요 넷째는 아도니야라 학깃의 아들이요 다섯째는 스바댜라 아비달의 아들이요 여섯째는 이드르암이라 다윗의 아내 에글라의 소생이니 이들은 다윗이 헤브론에서 낳은 자들이더라”(삼하3:2~5).

    “다윗이 헤브론에서 올라온 후에 예루살렘에서 처첩들을 더 두었으므로 아들과 딸들이 또 다윗에게서 나니 예루살렘에서 그에게서 난 자들의 이름은 삼무아와 소밥과 나단과 솔로몬과 입할과 엘리수아와 네벡과 야비아와 엘리사마와 엘랴다와 엘리벨렛이었더라 “(삼하5:13~16).

    축복과 저주의 갈림길

    1.바알레유다(Baalah of Judah): ‘유다의 바알레’라는 뜻으로(삼하 6:2), 이는 기럇여아림(‘숲의 성읍’)의 옛 명칭이다(삼상 7:1-2). 원래 기브온 사람들이 이곳을 ‘바알라’(Baalah)라고 부르다가 나중에 유다에 속하게 되면서 ‘유다의 바알레’라고 불리게 되었다. 기브온에서 서남쪽으로 약 8km떨어진 곳에 위치해 있으며, 법궤가 이곳에 오랫동안 머문 것으로 알려진 곳이다(삼하 6:2).

    2.아비나답(Abinadab): 기럇여아림 사람으로, 블레셋에서 돌아온 여호와의 궤를 자기 집에 두고 20년 동안 아들 엘리아살에게 지키도록 했던 사람이다(삼상 7:1-2).

    아비나답의 집에 있던 여호와의 궤 (20년+40년+10년=70년간)

    다윗은 정권을 잡게 되자 20년간이나 아비나답 집에 보관되어 있던 여호와의 궤를 다윗 성으로 옮겨오도록 했다(대상 13:5). 수레에 여호와의 궤를 싣고 아비나답의 집에서 나올 때, 웃사와 아히오(아효)가 궤를 실은 수레를 몰고 있었다(대상 13:7). 그런데 수레가 기돈의 타작 마당에 이르자 갑자기 소들이 뛰놀았고, 웃사는 궤가 떨어지지 않도록 손으로 궤를 붙들었다(대상 13:9). 이에 대해 하나님은 노하셨고 그 자리에서 웃사를 치셨다. 그 뒤부터 그곳을 ‘베레스 웃사’(‘웃사를 쳤다‘는 뜻)라고 불렀고, 그후 여호와의 궤는 오벧에돔의 집에 보관되었다(대상 13:6-14).

    아효(Ahio): 아비나답의 아들로 웃사와 형제 사이이다(삼하 6:3). 아비나답의 집에서 언약궤를 가지고 나올 때 앞에서 지휘했다(삼하 6:4).

    “진영을 떠날 때에 아론과 그의 아들들이 성소와 성소의 모든 기구 덮는 일을 마치거든 고핫 자손들이 와서 멜 것이니라 그러나 성물(聖物)은 만지지 말라(촉수금지) 그들이 죽으리라 회막 물건 중에서 이것들은 고핫 자손이 멜 것이며”(민4:15). 수레에 싣는 일은 이방인의 관습이었다.

    3.오벧에돔(Obededom): 가드 사람으로 하나님의 법궤가 그의 집에 석 달 간 머물러 있었다. 다윗은 아비나답의 집에 있던 법궤를 예루살렘으로 옮기려 하였으나 도중에 웃사가 죽는 사고가 발생하자 법궤를 오벧에돔의 집에 두었다(삼하 6:10-12). 역사가 요세푸스의 글에서 찢어지게 가난했던 오벧에돔은 부자가 되었다. 대대로 성전의 귀한 문지기로 지냈다.

    4.다윗 성(city of David): 다윗이 공격해서 얻었던 예루살렘(삼하 5:6-8)과 다윗의 출신지(눅 2:4; 요 7:42)를 말한다. 다윗이 여부스 사람의 소유였던 예루살렘을 점령한 뒤 ‘시온 산성’이라 불리던 것을 ‘다윗 성’이라고 이름했다(삼하 5:6-8).

    다윗 성은 높은 지대로 남, 동, 서쪽을 30-40m나 되는 깊은 골짜기가 둘러싸고 있었다. 다윗은 이곳을 정치, 종교의 중심지로 만들었는데, 통일왕국의 첫 수도가 된 다윗 성은 인구가 3,500- 5,000명 정도 되는 곳으로 성장했다. 다윗 성에는 실로암 수로, 히스기야 수로, 워렌의 수구(the Canal of Warren) 등을 통해 물이 공급되었으며, 다윗의 군대가 여부스를 공격할 때도 이 수구를 통해 성내에 침입했을 것이라고 추측된다(삼하 5:8). 이런 수로들은 BC 2세기경부터 AD 1세기 경까지 사용되었다. 다윗은 오벳에돔의 집에 있던 하나님의 궤를 이곳으로 옮겼으며(삼하 6:12, 16), 압살롬을 피해 도망가면서 법궤를 가져갔던 다윗은 사독과 아비아달 제사장을 통해 법궤를 다윗 성으로 돌려보냈다(삼하 15:24-29). 솔로몬은 바로의 딸을 취하여 다윗 성에 두기도 했다(왕상 3:1; 9:24).

    한편 느헤미야는 성벽을 재건축하면서 다윗 성에 있던 샘문(느 2:14; 12:37), 다윗 성의 층계(느 3:15; 12:37), 다윗의 묘실(느 3:16), 다윗의 궁(느 12:37), 용사의 집(느 3:16), 수문(느 3:26) 등을 언급했다. 이 다윗 성은 성전 남쪽 오벨 언덕을 중심으로 한 ‘옛 예루살렘’ 지역이었다고 추측된다.

    또 다른 다윗 성은 다윗이 태어나고 자란 베들레헴이다(눅 2:4, 11). 다윗은 이곳에서 양을 쳤고(삼상 17:12, 15) 기름부음을 받았다(삼상 16:13, 4; 룻 4:11). 신약에서 ‘다윗의 동네’라고 알려진(눅 2:4, 11; 요 7:42) 곳은 다윗뿐 아니라 예수님이 태어나신 베들레헴을 가리킨다. 다윗 성은 메시아 탄생과 성취의 장소였던 것이다(미 5:2; 마 2:6).

    ▶하닷에셀(Hadadezer): 아람의 소바 왕으로 르홉의 아들이다(삼하 8:3; 대상 18:3). 그는 유브라데 강 유역의 지배권을 회복하려고 출정하였는데 다윗에게 패배하고 말았다(삼하 8:3-4; 대상 18:3). 이때 다메섹 아람 사람들이 그를 도우러 왔지만 다윗에게 다시 패배하고 아람도 다윗에게 조공을 바치는 속국이 되고 말았다(삼하 8:5-6; 대상 18:5-6).

    그후 하닷에셀은 아람 사람이 이스라엘 군대에게 패배하여 도움을 요청하였을 때 군대장관 소박을 보내 이스라엘을 공격하게 하였지만 다윗에 의해 패배하고 말았다(대상 19:16-19).

    하닷에셀로부터 빼앗은 놋 : 하닷에셀은 디브핫과 군에 많은 놋을 다윗에게 빼았겼는데 이 놋은 훗날 솔로몬이 성전을 지을 때 놋바다와 기둥과 놋그릇을 만드는 데 쓰여졌다(대상 18:8)

    ▶므비보셋(Mephi-bosheth): 요나단의 아들로 사울과 요나단이 죽었다는 소식을 들은 유모가 므비보셋을 안고 도망하다가 떨어뜨려 다리를 절게 되었다(삼하 4:4).

    다윗은 왕이 된 후 요나단과의 우정과 약속을 기억해 마길의 집에 있던 므비보셋을 불러 친아들처럼 대우했다(삼하 9:3-11). 압살롬의 반역 때 시바의 모함으로 인해 다윗이 므비보셋의 모든 소유를 시바에게 주기도 했으나(삼하 16:1-4), 반역이 진압되어 다윗이 다시 왕이 되었을 때는 므비보셋의 진심을 알게 되었고 다시 그의 소유를 되돌려 주게 했다(삼하 19:24-30). 므비보셋의 아들 미가를 통해 태어난 자손들 중에서는 이름난 용사들이 나왔다(대상 8:34-40; 9:40-44). 그의 또 다른 이름은 므립바알이다(대상 8:34; 9:40).

    “그가 절하여 이르되 이 종이 무엇이기에 왕께서 죽은 개 같은 나를 돌아보시나이까 하니라......므비보셋에게 어린 아들 하나가 있으니 이름은 미가더라 시바의 집에 사는 자마다 므비보셋의 종이 되니라”(삼하9:8, 12).

     ▶아비새(Abishai): 다윗의 군대 장관으로 용맹스러운 용사이다(삼하 23:18-19,삼상 26:7; 삼하 21:7). 어머니는 스루야이며, 형은 요압, 동생은 아사헬이다(삼하 23:18, 24). 그는 다윗이 사울을 피해 도망다닐 때 십 광야 동굴에서 자고 있던 사울(삼상 26:6-9)과 다윗을 저주하는 시므이(삼하 16:5-8)를 죽이려고 하였으나 다윗의 반대로 죽이지 못했다.

    하지만 동생 아사헬을 죽인 아브넬을 죽여 동생에 대한 복수를 하였고(삼하 2:18-23; 3:22-27, 30), 다윗을 대적하여 일어난 세바의 반란을 진압하였다(삼하 20:6-22). 또한 그는 암몬과 아람 족속과의 전쟁 때 혁혁한 공을 세웠으며(삼하 10:9-10) 블레셋과의 전쟁에서 다윗을 죽이려는 블레셋 장수 이스비브놉을 죽여 다윗의 생명을 구했다(삼하 21:15-17).

    “아침이 되매 다윗이 편지를 써서 우리아의 손에 들려 요압에게 보내니 그 편지에 써서 이르기를 너희가 우리아를 맹렬한 싸움에 앞세워 두고 너희는 뒤로 물러가서 그로 맞아 죽게 하라 하였더라 요압이 그 성을 살펴 용사들이 있는 것을 아는 그 곳에 우리아를 두니 그 성 사람들이 나와서 요압과 더불어 싸울 때에 다윗의 부하 중 몇 사람이 엎드러지고 헷 사람 우리아도 죽으니라”(삼하11:14~17).

    “네 주인의 집을 네게 주고 네 주인의 아내들을 네 품에 두고 이스라엘과 유다 족속을 네게 맡겼느니라 만일 그것이 부족하였을 것 같으면 내가 네게 이것 저것을 더 주었으리라 그러한데 어찌하여 네가 여호와의 말씀을 업신여기고 나 보기에 악을 행하였느냐 네가 칼로 헷 사람 우리아를 치되 암몬 자손의 칼로 죽이고 그의 아내를 빼앗아 네 아내로 삼았도다”(삼하12:8~9).

    ▶밧세바(Bathsheba): 길로 사람 아히도벨의 손녀이며(삼하 16:23; 23:34) 엘리암의 딸이다(삼하 11:3-4). 암미엘의 딸로도 기록되었다(대상 3:5). 헷 사람 우리아의 아내였으나 다윗과 불륜의 관계를 맺은 후 다윗의 아내가 되었다(삼하 11:3-4; 12:24). 다윗과의 사이에서 첫 아이를 낳았으나 하나님의 징계로 아이를 잃게 되었고(삼하 12:15-23) 후에 시므아, 소밥, 나단, 솔로몬을 낳았다(대상 3:5).

    아도니야가 반란을 일으켜 왕위찬탈을 꾀할 때 나단과 함께 다윗에게 솔로몬을 왕위 계승자로 삼을 것이라는 약속을 회상시켜 솔로몬을 왕위에 앉게 하였다(왕상 1:11-40). 솔로몬이 왕위에 오른 후 아비삭을 아내로 맞이하게 해 달라는 아도니야의 부탁을 솔로몬에게 청했으나 오히려 이 일로 아도니야는 처형당하게 되었다(왕상 2:13-25). 밧세바는 예수님의 족보에 나온다(마 1:6).

    “압살롬이 도망하여 그술로 가서 거기에 산 지 삼 년이라 다윗 왕의 마음이 압살롬을 향하여 간절하니 암논은 이미 죽었으므로 왕이 위로를 받았음이더라”(삼하13:38~39).

    ▶그술(Geshur): 모세의 지휘 하에 정복한 요단 동편에 있는 나라로 바산 왕 옥의 영토였다(수 12:5). 므낫세의 아들 야일이 취하였으나(신 3:14) 그 주민은 몰아내지 못했다(수 13:13).

    압살롬 모친의 출신지 : 다윗은 그술 왕 달매의 딸 마아가와 결혼하여 압살롬을 낳았는데(삼하 3:3; 대상 3:2) 압살롬은 동생 다말을 강간한 이복 형 암몬을 죽이고 외조부가 있는 그술로 피신하였다(삼하 13:38; 15:8). 그때 요압은 다윗의 마음이 압살롬에게 기울어 있는 것을 알고 압살롬을 귀환시키기 위해 계책을 꾸몄고(삼하 14:1-3), 결국 압살롬이 그술에서 예루살렘으로 다시 돌아오게 하는 데 성공하였다(삼하 14:4-24).

    “이스라엘 무리 중에 왕께 재판을 청하러 오는 자들마다 압살롬의 행함이 이와 같아서 이스라엘 사람의 마음을 압살롬이 훔치니라..... 이에 압살롬이 정탐을 이스라엘 모든 지파 가운데에 두루 보내 이르기를 너희는 나팔 소리를 듣거든 곧 말하기를 압살롬이 헤브론에서 왕이 되었다 하라 하니라 그 때 청함을 받은 이백 명이 압살롬과 함께 예루살렘에서부터 헤브론으로 내려갔으니 그들은 압살롬이 꾸민 그 모든 일을 알지 못하고 그저 따라가기만 한 사람들이라 제사 드릴 때에 압살롬이 사람을 보내 다윗의 모사 길로 사람 아히도벨을 그의 성읍 길로에서 청하여 온지라 반역하는 일이 커가매 압살롬에게로 돌아오는 백성이 많아지니라.... 이에 사람들이 압살롬을 위하여 옥상에 장막을 치니 압살롬이 온 이스라엘 무리의 눈앞에서 그 아버지의 후궁들과 더불어 동침하니라(삼하15:6,10~12,22).

    ▶아히도벨(Ahithophel): 길로 출신 다윗의 자문관이다(삼하 15:12). 압살롬이 반역을 일으켜 다윗이 피신하자 압살롬은 아히도벨을 초청했는데 이때 아히도벨은 다윗을 배반하고 압살롬을 따랐다(삼하 15:12; 대상 27:33). 아비도벨이 다윗을 죽이기 위해 압살롬에게 군대를 요청하자 다윗은 전략적으로 압살롬 진영에 들여보낸 후새로 하여금 아히도벨의 책략을 좌절시켰다(삼하 17:1-14). 아히도벨은 자기 제안이 좌절되자 고향으로 돌아가 목을 매어 자살했고, 아비의 묘에 장사되었다(삼하 17:23).

    ▶후새(Hushai): 아렉 사람으로, 압살롬의 반역으로 인해 도망치던 다윗을 기드론 시내를 건너 하나님을 경배하는 마루턱에서 맞이했던 사람이다(삼하 15:32-37). 또한 그는 거짓으로 압살롬의 편이 되어(삼하 16:15-18), 압살롬이 아히도벨의 책략이 아닌 자신의 책략을 받아들이도록 하였고 이것이 결국은 다윗을 돕는 결과를 낳았다(삼하 17:5-16).

    ▶아히마아스(Ahimaaz): 레위 지파 아론의 후손으로 사독의 아들이며 아사랴의 아버지이다(대상 6:8, 9, 53). 그는 압살롬이 다윗을 반역하여 난을 일으켰을 때 압살롬의 궁정에서 다윗에게 비밀정보를 전달했다(삼하 15:27, 36). 압살롬이 죽자 요압이 구스 사람으로 하여금 그 소식을 다윗에게 전하게 하자 구스 사람보다 앞질러 다윗에게 달려갔으나 소식을 먼저 전하지는 않았다(삼하 19:29-32). 나중에 그는 솔로몬의 딸 바스맛을 아내로 취하고 납달리 땅을 다스리는 관장이 되었다(왕상 4:15).

    왕의 골짜기(King’s Vally, Vally of Shaveh): 소돔 왕이 아브라함을 만났던 넓은 계곡(창 14:17)으로 압살롬은 이곳에 기념비를 세웠다(삼하 18:18). 이 계곡은 사웨 골짜기와 같은 곳으로 예루살렘 근처에 위치한다. 압살롬의 기념비(삼하18:18).

    아마사(Amasa): 다윗 정권에 반기를 든 압살롬이 요압 대신 세운 군대 장관으로 이드라의 아들이다(삼하 17:25). 요압이 압살롬을 암살하면서 반란이 평정되자 다윗에 의해 다윗 군대의 군장으로 임명되었으나 요압에 의해 살해 당했다(삼하 20:10).

    브나야(Benaiah): 대제사장 여호야다의 아들로(대상 27:5, 삼하24:20) 다윗 왕 시대 열두 군대사령관 중의 한 명으로 시위대 장관이다(대상 11:22-25). 3인의 용사 중 하나로 그는 함정에 빠진 사자 한 마리와 장대한 애굽 사람 한 명과 모압인 두 명을 죽였다(대상 11:22-23; 27:5; 왕상 1:38). 솔로몬의 명령을 받고 아도니야와 요압을 처형했으며(왕상 2:25-34), 요압을 대신하여 솔로몬 왕의 군대장관이 되었다(왕상 2:35; 4:4).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반응하라

    “나의 반석(磐石)이시요 나의 구속자이신 여호와여 내 입의 말과 마음의 묵상(黙想)이 주님 앞에 열납(悅納)되기를 원하나이다”(시19:14).

     **반석(Rock): 넓고 펀펀하게 된 큰 돌로 ‘안전하고 견고함’을 뜻한다.

    팔레스타인에는 산악지역이 많아서인지 성경에는 반석(바위)에 관한 내용이 많이 나오는데 성경에서 말하는 반석은 험한 암벽으로 둘러싸인 천연 요새지를 말한다. 문자적인 뜻으로 쓰인 곳도 있지만(출 17:6; 33:21; 민 20:8; 삿 6:21; 13:19; 마 7:24) 대개는 힘, 확고부동, 안전한 장소를 상징하는 말로 쓰였다. 그래서 반석은 이스라엘 백성을 보호하시는 하나님을 상징하는 용어로 많이 사용되었다(신 32:4; 삼상 2:2; 삼하 22:32; 시 18:2; 28:1; 61:2; 71:3; 합 1:12). 하나님은 물이 없어 목말라 하는 이스라엘 백성을 위해 반석에서 물을 솟게 하셨다(출 17:6; 민 20:8). 신약에서는 이 사건을 예로 들며 영원한 생명수를 주시는 예수님을 반석에 비유하고 있다(고전 10:4). 예수님은 그분의 말씀을 듣고 행하는 사람은 반석 위에 집을 짓는 지혜로운 사람과 같다고 하셨다(마 7:24).

    ‘반석 위에 교회를 세운다’는 의미: 베드로는 주는 그리스도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신앙고백을 하였다(마 16:16). 이 말을 들으신 예수님은 “너는 베드로(작은 돌멩이, 페트로스;petro)라 내가 이 반석(페트라;petra) 위에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고 선언하셨다(마 16:18). 여기서 ‘반석’은 무엇을 상징하는 것일까?

    첫째는 예수 그리스도라고 해석하는 견해가 있다.

    어거스틴이나 루터는 이 말이 이사야 28:16의 반영이라고 보았다. 신약의 다른 구절에서도(롬 9:33; 고전 10:4) 그리스도를 반석이라고 본 점에서 본문에서 말하는 반석은 그리스도를 의미한다고 보았다. 그렇지만 본문의 문맥 전후 상으로 볼 때 이 해석은 무리가 있는 것으로 보인다.

    둘째는 반석이란 별명을 가진 베드로 자신을 가리키는 것이라고 해석하는 것이다.

    그래서 가톨릭은 이 해석에 기초하여 베드로는 교회의 기초라고 주장한다. 그리고 베드로의 뒤를 이은 교황이 교회의 참 권위자이며 교황이 다스리는 교회가 참 교회라고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이 해석을 받아들이기 어려운 점 가운데 하나는 베드로는 남성이지만 반석이란 단어는(페트라) 여성명사라는 점이다. 그리고 베드로는 신앙고백 바로 다음에 예수님으로부터 책망을 받았다는 점이다(마 16:33). 또한 다른 성경 본문에서 교회의 기초는 예수 그리스도 자신이시자(고전 3:11) 간접적으로 신앙고백을 하는 성도들임을 말씀하고 계신다(엡 2:20). 그러므로 베드로란 인격을 교회의 기초로 볼 수 없다고 본다.

    그러면 그 의미는 무엇인가? 반석 위에 교회를 세우신다고 할 때의 ‘반석’은 베드로의 신앙고백을 가리키는 것으로 예수님을 주로 고백하는 신앙고백 위에 교회를 세우신다고 말씀하셨던 것이다. “너의 이름은 페트로스(베드로)라 그리고 네가 고백한 진리는 페트라(반석)라. 내가 그(페트라)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라”로 해석할 수 있다.

    묵상(Meditation) :

    깊이 생각하는 것을 말한다.
    묵상의 어원은 원래 라틴어 ‘메디켈루스’라는 말로서 ‘약’(Medicine)이란 말의 어원이기도 하다.
    약이 몸 안에 들어와 온 몸에 퍼져 약효를 내듯이 묵상이란 어떤 한 생각이나 사실이 인간의 내면으로 들어가서 영향을 미치는 것을 뜻한다.

    하나님은 모세를 이은 지도자 여호수아에게 모세를 통해 주신 율법(律法)을 주야로 묵상하고 지켜 행하면 평탄과 형통의 축복이 있을 것이라고 말씀하셨다(수 1:8).

    또한 시편(詩篇) 기자는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주야로 묵상하는 자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같이 시절을 좇아 과실을 맺으며 그의 행사가 다 형통할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시 1:1-2).  

    ‘열납(悅納)’은 ‘제단에 올려진 제물’로 ‘하나님이 받으실만한 흠 없는 제물’이어야 한다.
    하나님 앞에 자신의 삶이 받아드려지기를 간구한다.
    하나님이 열납해 주시기 원하는 두 가지는 입의 말과 마음의 묵상(黙想)이 하나님 앞에 올려져 주님이 받으시길 원한다.
    죄(罪)의 지배를 가장 많이 받는 입과 혀로 실수(失手)하고 죄짓는다.
    세상의 모든 것은 다 다루는데 혀는 다룰 수가 없다고 한다. 묵상한 것이 입에서 나온다.

    “이와 같이 혀도 작은 지체로되 큰 것을 자랑하도다 보라 얼마나 작은 불이 얼마나 많은 나무를 태우는가 혀는 곧 불이요 불의의 세계라 혀는 우리 지체 중에서 온 몸을 더럽히고 삶의 수레바퀴를 불사르나니 그 사르는 것이 지옥 불에서 나느니라 여러 종류의 짐승과 새와 벌레와 바다의 생물은 다 사람이 길들일 수 있고 길들여 왔거니와 혀는 능히 길들일 사람이 없나니 쉬지 아니하는 악(惡)이요 죽이는 독(毒)이 가득한 것이라”(약3:5~8). “음행과 온갖 더러운 것과 탐욕(貪慾)은 너희 중에서 그 이름조차도 부르지 말라 이는 성도(聖徒)에게 마땅한 바니라 누추함과 어리석은 말이나 희롱(戱弄)의 말이 마땅치 아니하니 오히려 감사(感謝)하는 말을 하라”(엡5:3~4). 혀는 그대로 두면 안된다. 말과 마음의 묵상은 연결되어 있다. 말로 표현(表現)되지 않은 것까지도 하나님은 관심(觀心)을 갖고, 우리의 마음에 둔 것까지도 하나님이 받으시는 제물(祭物)이 될 수 있다. 묵상은 하나님과의 자연스런 교제이다.

    하나님 말씀을 듣고 나면 기도와 찬양의 예배가 가능하다. 하나님 말씀을 듣고 난 첫 번째 반응은 죄를 가볍게 여긴 것까지 회개(悔改)가 나온다. 죄를 깨닫는 것이 은혜(恩惠)다. 자기 의(義)로 무장한 ‘바리새인’들이 남의 죄(罪)를 지적할 줄은 알았지만 자신의 죄는 보지 못하는 종교적 열심뿐이었기에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는 장본인이 되었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활력(活力)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劍)보다도 예리하여 혼(魂)과 영(靈)과 및 관절(關節)과 골수(骨髓)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판단(判斷)하나니 지으신 것이 하나도 그 앞에 나타나지 않음이 없고 우리의 결산을 받으실 이의 눈 앞에 만물(萬物)이 벌거벗은 것 같이 드러나느니라”(히4:12~13).

    “그리스도의 말씀이 너희 속에 풍성히 거하여 모든 지혜(知慧)로 피차 가르치며 권면(勸勉)하고 시(詩)와 찬송(讚頌)과 신령한 노래를 부르며 감사(感謝)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을 찬양(讚揚)하고”(골3:16). “복(福) 있는 사람은 악인(惡人)들의 꾀를 따르지 아니하며 죄인(罪人)들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傲慢)한 자들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오직 여호와의 율법(律法)을 즐거워하여 그의 율법(律法)을 주야로 묵상(黙想)하는도다 그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철을 따라 열매를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으니 그가 하는 모든 일이 다 형통(亨通)하리로다”(시1:1~3).

    [제사장과 백성들의 죄]

    “내 이름을 멸시(蔑視)하는 제사장(祭司長)들아 나 만군의 여호와가 너희에게 이르기를 아들은 그 아버지를, 종은 그 주인을 공경(恭敬)하나니 내가 아버지일진대 나를 공경(恭敬)함이 어디 있느냐 내가 주인(主人)일진대 나를 두려워함이 어디 있느냐 하나 너희는 이르기를 우리가 어떻게 주의 이름을 멸시(蔑視)하였나이까 하는도다/ 너희가 더러운 떡을 나의 제단에 드리고도 말하기를 우리가 어떻게 주를 더럽게 하였나이까 하는도다 이는 너희가 여호와의 식탁은 경멸(輕蔑)히 여길 것이라 말하기 때문이라/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가 눈 먼 희생제물을 바치는 것이 어찌 악하지 아니하며 저는 것, 병든 것을 드리는 것이 어찌 악하지 아니하냐 이제 그것을 너희 총독(總督)에게 드려 보라 그가 너를 기뻐하겠으며 너를 받아 주겠느냐/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는 나 하나님께 은혜(恩惠)를 구하면서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여 보라 너희가 이같이 행하였으니 내가 너희 중 하나인들 받겠느냐/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가 내 제단 위에 헛되이 불사르지 못하게 하기 위하여 너희 중에 성전 문을 닫을 자가 있었으면 좋겠도다 내가 너희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너희가 손으로 드리는 것을 받지도 아니하리라/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해 뜨는 곳에서부터 해 지는 곳까지의 이방 민족 중에서 내 이름이 크게 될 것이라 각처에서 내 이름을 위하여 분향(焚香)하며 깨끗한 제물을 드리리니 이는 내 이름이 이방 민족 중에서 크게 될 것임이니라/ 그러나 너희는 말하기를 여호와의 식탁은 더러워졌고 그 위에 있는 과일 곧 먹을 것은 경멸히 여길 것이라 하여 내 이름을 더럽히는도다/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가 또 말하기를 이 일이 얼마나 번거로운고 하며 코웃음치고 훔친 물건과 저는 것, 병든 것을 가져왔느니라 너희가 이같이 봉헌물을 가져오니 내가 그것을 너희 손에서 받겠느냐 이는 여호와의 말이니라/ 짐승 떼 가운데에 수컷이 있거늘 그 서원하는 일에 흠 있는 것으로 속여 내게 드리는 자는 저주를 받으리니 나는 큰 임금이요 내 이름은 이방 민족 중에서 두려워하는 것이 됨이니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말1:6~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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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물고기의 IQ는 0.3

    물고기의 IQ는 0.3이라고 한다.
    다른 물고기들이 낚시에 걸려 물 밖으로 끌려가는 것을 보고서도 또 입질을 한다.
    그리고 또 끌려가는 동료의 발버둥치는 모습을 보고서도 여전히 입질을 계속한다.
    IQ가 0.3의 수준에 머물러 있기 때문이다.

    그러면 정치인의 IQ는 얼마나 될까?
    역시 0.3이라고 한다.
    동료 정치인이 뇌물을 먹고 끌려가는 것을 보고도 또 뇌물을 먹는다.
    그래서 10년 전에도, 작년에도, 오늘도 끌려가는 정치인은 여전히 발생한다.
    그 일은 내일도 앞으로도 계속 나타날 것이다.
    그러면 보통 사람들의 IQ는 얼마나 될까?
    역시 0.3을 넘지 못한다.
    그러기에 지난 날의 은혜를 곧 잊어버리고 옆 사람이 하나님을 믿어 복받는 것을 보면서도 하나님을 믿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정치가가 가져야 할 5감

    ​1. 치고 빠질 줄 아는 박진감
    2. 말과 행동에서 나오는 이질감
    3. 선거에서 졌을 때 아는 패배감
    4. 선거에서 이기고 공약 까먹는 건망감
    5. 지고 또 나오는 뻔뻔감

    왜 비싼 돈 쓰면서

    ​진실에 가까운 사람일수록 그에게서는 좋은 기운이 풍겨 나온다.
    반대로 거짓에 가까운 사람일수록 나쁜 기운을 뿜는다.
    어쩔수 없는 일이다.
    꽃에서는 향기가, 똥에서는 악취가 나게 마련이니까.
    거짓말에 험담에 욕설까지도 서슴지 않는 이 나라 정치인들 모습을 텔레비전 화면으로만 봐도 기분이 언짢아지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왜들 비싼 돈 쓰면서 그런 장면을 화면에 담고 또 그 화면에 눈길을 모으는지 모르겠다.

    위가 바르면 아래는 저절로 바르게 된다.

    ​'위에 있는 사람이 바른 도리로써 아랫사람을 거느리면, 아랫사람은 자연히 바른 일을 하게 된다.'는 것이 정치의 근본이다.
    이 말은 <논어> "안연"에 있는 공자의 말이다.

    계강자라는 노나라 실권자가 공자에게 정치를 물었을 때 공자는 이렇게 대답했다.

    "정치라는 것은 바른 것이다. 그대가 거느리기를 바른 것으로 하면 누가 감히 바르지 않겠는가."

    바르게 하는 것이 정치인데, 정치를 한다는 사람 자체가 바르지 못한 일을 하니 다른 사람이야 말해 무엇하겠느냐는 뜻이다.

    * 참조 : 삼하 23:3,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말씀하시며 이스라엘의 바위가 내게 이르시기를 사람을 공의로 다스리는 자,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다스리는 자여


    왕상 9:4-5
    네가 만일 네 아비 다윗의 행함 같이 마음을 온전히 하고 바르게 하여 내 앞에서 행하며 내가 네게 명한대로 온갖 것을 순종하여 나의 법도와 율례를 지키면

  • 내가 네 아비 다윗에게 허하여 이르기를 이스라엘 위에 오를
  • 동네 대표 뽑는 날

    오늘은 동네 대표를 뽑는 날이다. 그런데 이웃들이 선거에 별 관심이 없는 모양이다. 월드컵을 핑계삼지만 더 큰 문제는 정치 불신과 동네에 대한 애착이 부족한 탓이다. 이런 현상을 통해 정치인과 후보들은 크게 반성해야 할 시점이다. 정치인들은 정책 대결보다 다른 후보 약점 잡기에 더 열들을 올리고 있으니 한심한 일이다. 또 월드컵 대회 기간을 피해 지방선거날을 잡았어야 했다. 동네에 함께 살지만 동네일에 관심이 없는 것은 부동산 가격 폭등으로 인해 잦은 이사 때문이다. 정치인들은 부동산 가격 폭등에 쾌재를 부르며 서민들의 어려움은 애써 외면하지 않았을까? 이사를 가더라도 그때까지 우리 동네는 우리가 살펴야 한다. 이제부터라도 동네 대표는 의로운 사람을 뽑아야 한다. 선거의 불참은 자기의 가정을 거짓 대리인에게 위탁하는 꼴이다.

    성경에 “의인이 많아지면 백성이 즐거워하고 악인이 권세를 잡으면 백성이 탄식하느니라”고 말씀하셨다. 동네 대표를 뽑는 선거에 좋은 후보가 없다면 차선의 후보를 잘 골라 투표해야 한다. 이것이 대의정치의 바른 길이며 살기좋은 동네를 가꾸는 자세일 것이다.

    7. 논어의 정치

    논어 안연(顔淵)편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제자 자공이 스승되는 공자에게 정치에 대해서 여쭈어 보았습니다. 스승 되는 공자는 아주 간단하게 명료하게 대답했습니다. 나라가 바로 설려면 식량이 넉넉하고 군비가 충실하고 그리고 신의가 있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중국말은 함축성 있게 표현됩니다. 족식족병 민신지의(足食足兵 民信之矣)라고 말했습니다. 제자는 다시 물었습니다. "그 세 가지 중에 부득이 하나가 빠져야 한다면 무엇을 뺄 수 있겠습니까?" "그럼 군비를 빼야지" 했습니다. 여기서 군비란 국방문제를 말하고, 식량이란 경제문제를 말하는 것입니다. 이제 제자는 또 물었습니다. "그러면 나머지 둘 중에 또 뺄 수밖에 없다면 무엇을 뺄 수 있겠습니까?" "그럼 식량을 빼야지" 국방문제 아무리 중요하지만 경제문제가 우선이요, 국방보다 경제요. 경제보다 더 중요한 게 신의(信義)라고 말했습니다. 그는 이렇게 주를 달았습니다. 사람은 어차피 한번 죽는 거야. 다 아무리 경제가 좋아도 언젠가는 다 죽는 거니까 중요한 것은, 사는 동안에 가장 중요한 것은 믿음이라고 했습니다. 백성의 믿음을 잃어버리면 국가와 정치는 무너진다 라고 말했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지금 믿을 수 있습니까? 저는 서글프게 생각하는 것이 바로 이 점입니다. 나라에서 무슨 말을 해도 백성들이 믿으려들지 않습니다. 오히려 믿는 것이 바보라고 생각합니다. 안 믿는 것이 지혜라고 생각합니다.

    8. 그리스도인과 선거

    얼마 안 있으면 국회의원을 뽑는 총선이 치러집니다. 시민단체들이 공천 부적격자들을 발표하고 기독교계에서는 기독교 정당 창당을 서두르고 있습니다. 국민 대부분이 이번 총선은 그 어느 때보다 중요하다고 입을 모으고 있지만 아직도 그 향방을 예측하지 못하고 있는 것같습니다. 정치에 무관심하거나 누구를,어느 정당을 선택할 것인지를 잘 몰라서일 수도 있습니다. 많은 국민이 정치에 등을 돌린 이유는 그동안 정치가들이 정직하지 못하고 실천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정치가들이 우리를 실망시켰다 하더라도 우리 그리스도인은 정치에 무관심하면 안됩니다. 왜냐하면 국회의원들은 입법활동 등을 통해 우리의 생활에 큰 영향을 주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만일 정치나 정치가에 대해 무관심한다면 국가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일지도 모릅니다. 특히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 마음에 합한 국회의원들이 선출되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잘 뽑아야 된다는 사실은 알지만 막상 유권자들은 후보 중에서 누군가를 선택해야 할 때 그 결정이 그리 쉽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교회에 다닌다는 조건 하나만 보고 그 사람을 택하는 것은 올바른 방법은 아닙니다. 후보자들에 관한 여러 정보를 모으는 것은 중요합니다. 열심히 일한 흔적이 있는지 살펴보십시오. 그가 내세우는 정책들이 실현 가능성이 있는지 보십시오. 새로운 것을 주장하여 신선감이 있는 정책이라면 더욱 실현 가능성을 검토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이전 선배들이 이룬 업적을 과소평가하거나 무시하는 태도를 가진 것은 아닌지 살펴보십시오. 과거의 것을 무조건 비난만 하는 사람이라면 선한 업적을 이루기보다는 분쟁만 일으키기 쉬운 사람입니다. 국제적 감각은 있는지, 도덕적 인격을 갖추고 있는지 보십시오. 이를 위해 몇 가지를 체크해 보십시오. 교회에 다니는 사실만으로는 부족합니다. 그가 그 지위를 기꺼이 하나님의 정의와 사랑을 실천하기 위해 드릴 수 있는 사람인지 보십시오. 이런 사람은 도덕적 인격을 가지고 있는 사람으로 보아도 큰 실수가 없을 것입니다. 욕심을 부린다면 소문으로라도 그의 가정생활에 대해 귀를 기울여 보십시오. 부부관계는 원만한가, 자녀와의 관계는 좋은가. 가정생활에 성공한 사람은 반드시 좋은 소문이 나게 마련입니다. 가정생활에 실패한 사람은 우리 정치 지도자로 세우기에는 흠이 있는 사람입니다.

    /주명수(밝은교회 목사)

    9. 신앙과 정치

    어떤 신학자는 “모든 것은 정치”라고 말했습니다. 그만큼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은 정치적 관계로 둘러싸여 있습니다. 그러나 그는 곧 “그렇다고 정치가 다는 아니다”고 하였습니다. 그것은 우리 신앙인들의 정치에 대한 관심은 하나님 나라의 실현에 대한 관심에서 비롯되기 때문입니다. 신앙인인 우리는 자신의 유익보다는 이웃들의 잘됨에 목적을 두어야 합니다.

    유례없는 정치적 난세를 맞이한 오늘, 우리 신앙인들은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고 오히려 자신이 누릴 수 있는 바를 나누는 실천에 앞장서야 하겠습니다. 그러나 나눔은 그리 간단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가진 권력과 재화를 나누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런 나눔을 구체화하기 위해 발달된 학문이 정치학과 경제학입니다. 그러므로 더욱 구체적인 나눔을 위해 우리는 신앙과 전문성을 겸비한 사역자들을 필요로 합니다. 우리 교회가 평신도 사역에 관심을 가져야 하는 이유와 우리의 2세들을 폭넓게 양육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임성빈 목사(장신대 교수)

    10. 아직 봄이 이른가 봅니다

    봄! 무엇인가를 기대하게 하는 희망의 계절입니다. “내게 기다려지는 것이 있다면 계절이 바뀌는 것이요, 희망이 있다면 봄을 다시 보는 것이다…내가 좋아하는 말이 ‘조춘’(早春)이라면 가장 싫어하는 말은 ‘춘궁’(春窮)이다…” 이른 봄이라는 의미의 ‘조춘’은 좋으나 묵은 곡식은 다 떨어지고 햇곡식은 아직 익지 않아 겪는 봄철 보릿고개의 궁핍을 말하는 ‘춘궁’은 싫다는 뜻입니다. 모든 것이 새롭고 만물이 소생하고 연한 새순의 싱그러움이 있는 봄,희망찬 봄에 가난은 이야기하고 싶지 않다는 봄의 예찬자 피천득님의 글입니다. 춘궁을 싫어하기는 다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그러나 왠지 오늘 우리의 정치적 현실을 보노라면 희망의 조춘이 아니라 춘궁이 느껴집니다. 승자들도 없는 싸움들을 보노라면 아직 우리에게는 봄이 이른가 봅니다. 온기가 살아나고 소망의 움이 돋아나는,하나님의 공의와 영광이 가득한 진정한 이 나라의 봄을 소망합니다.

    /최병남 목사(대전중앙교회)

    11. 선거철이 되면

    종교를 한낱 성취를 위한 목적의 도구 정도로 이용하려는 정치인들이 많습니다. 특히 선거철이 되면 그럴 듯하게 신심을 흉내내면서 덕을 보려는 가련한 현상들이 기승을 부립니다. 천주교인인 모 야당 대표가 취임 첫날을 ‘고해와 참회의 날’로 보냈다고 합니다. 그는 먼저 명동성당에 들러 고해성사를 했습니다. 그리고 다음에는 불교의 대표적 사찰인 조계사에 들러 108배를 했고 이어서 영락교회에 들러 회개 예배를 드렸습니다. 그가 성당에 들른 것은 매우 당연한 일입니다. 그러나 그의 행보가 불교와 개신교로 이어지고 있는 것은 종교의 속성을 본질적으로 거스르는 행위가 됩니다. 그것은 종교적인 행위가 아니라 정치적인 행위였습니다. 세상은 진실을 찾고 바른 길을 세우기보다는 실리를 따지는 일에 익숙하고 결과를 얻기 위해서는 수단을 가리지 않습니다. 교회는 달라야 합니다. 참신앙인은 하나님을 자기성취를 위한 도구로 삼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주머니속의 도구가 아니라 마음의 중심에 계시게 합니다. 그리고 그 뜻으로 삶 전체를 채웁니다.

    12. 당신은 어디에 가고 싶소?

    링컨이 하원의원으로 출마했을 때 경쟁자로 목사가 입후보한 적이 있었습니다. 합동유세 중에 주일이 되자 링컨이 다른 당에서 입후보한 경쟁자가 설교를 하는 교회에서 예배를 드리게 되었습니다.

    목사인 상대 정당의 후보가 설교하면서 “천국 가고 싶으신 분 손 드시오”하니까 전 성도가 손을 들었습니다. 이어서 그가 “지옥 가고 싶은 사람 손 드시오”하니 아무도 손을 들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뒤를 돌아보니 링컨이 강대상 뒤 의자에서 졸고 있었습니다. 조느라고 아무 반응을 보이지 않았던 것입니다.

    기회를 잡은 그 후보는 링컨에게 망신을 줄 요량으로 큰 소리로 외쳤습니다. “링컨씨! 당신은 어디에 가고 싶소?” 그러자 링컨이 의자에서 벌떡 일어나면서 큰 소리로 재치있게 대답했습니다. “예! 저는 할 수 있다면 국회에 가고 싶습니다!”

    다음달에는 국회의원 선거가 있습니다. 하나님을 경외했던 링컨 같은 인물이 선출되도록 우리 기도합시다.


    13. 공휴일과 정치

    1939년 미국에서는 공휴일인 추수감사절이 11월 마지막 날로 예정되어 있었습니다. 이때 많은 상인들이 루스벨트 대통령에게 추수감사절을 한 주 앞당겨 달라는 로비를 맹렬히 벌였습니다. 크리스마스 대목기간을 조금이라도 더 늘려 보려는 속셈이었습니다. 결국 경기침체를 걱정하던 대통령은 8월 중순에 이번 추수감사절을 한 주 앞당길 것이라고 공표하였습니다. 그런데 이 결정은 많은 혼란을 불러일으켰습니다. 틀린 달력을 만든 업자들은 참으로 난감하였습니다. 어떤 주는 그 결정을 따랐고 다른 주는 전통을 유지하기로 했습니다.

    엄청난 혼란에 당황한 대통령은 다음 해에는 원래대로 되돌리는 결정을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더욱이 의회는 다시는 대통령 마음대로 추수감사절 날짜를 변경할 수 없도록 하는 법안마저 제정하였답니다. 추수감사절을 상업적 정치적 목적으로 이용하려던 유혹이 결국 큰 혼란을 초래하였던 것입니다. 주5일 근무제 도입과 공휴일을 재조정해야 하는 시점에서 우리도 이런 유혹에 빠지지 않도록 깨어 있어야 할 것입니다.


    14. 마음을 낮추어라

    성경: 롬12:16

    "서로 마음을 같이 하며 높은 데 마음을 두지 말고 도리어 낮은 데 처하며 스스로 지혜 있는 체 말라"

    필리핀이 아름답고, 명랑한 나라가 되려면 공무원의 부패와 부정을 근절해야 한다고 외침으로써 필리핀의 대통령이 되었던 막사이사이는, 겸손하고 성실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루손도의 한 대장장이의 아들로 태어났으나, 가난에 지지 않고, 역경에 꺾이는 일이 없이 자라났습니다. 어릴 때부터 보고 겪고 느끼는 필리핀 민족의 슬픔과 불행을 어떻게 해서든지 없애야 하겠다는 높은 생각과 거짓 없고 올바른 사람이 되겠다는 그의 결심은 자동차 운전수 노릇을 하는 동안에도 옳지 않은 동료들에게 물들지 않게 했습니다. 착실하고, 근면하며, 성실한 그는 인정되어 양코 버스 회사의 지배인이 되고, 제2차대전후는 국방 장관, 마침내는 대통령까지 되었습니다. 그때 그의 연령은 겨우 46세, 그러나 대통령이 되었다고 해서 그는 전과 조금도 다름이 없었습니다. 소박하고, 겸손했습니다. "나의 직책은 대통령이지만, 나의 마음은 이 나라의 한 병사이다"이것은 곧 막사이사이가 늘 품고 있는 신념이었습니다. 그러므로 그는 늘 백성들과 같은 처지에서 살고, 같은 곳에 있었으며, 같은 생활을 하고, 또 같은 마음을 지니고 있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대통령이 된 후, 그가 골똘히 생각한 것은 이 나라의 백성들이 고생하는 까닭이 무엇인가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공무원들이 권력을 사사로이 이용하고, 권세를 쓰는 때문이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이러한 폐단을 없이 하기 위해 그는 공무원들의 재산을 모조리 등록하게 하여, 부정한 뇌물을 받아 부해지는 일이 없게 했던 것입니다. 이러한 조치는 대단히 효과를 거두었습니다. 첫째 공무원들로 부정한 짓을 하지 못하게 했을 뿐 아니라, 일반 국민들이 정부를 믿게 되어, 말 할 수 없이 부패했던 정치가 맑고 깨끗한 정치로 바뀌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가 비행기 사고로 조난당한 때, 필리핀 뿐 아니라, 전세계 인민이 그의 조난을 슬퍼했습니다. 오늘도 겸손으로 아름답게 살아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15. 기독교인의 국가관

    본문: 로마서 13:1-7 * 찬송: 259장

    "모든 자에게 줄 것을 주되 공세를 받을 자에게 공세를 바치고 국세를 받을 자에게 국세를 바치고 두려워 할 자를 두려워하며... 존경하라"

    이 말씀은 우리 기독신자에게 국가와 권세와 정치에 대한 태도를 가르쳐 준 말씀입니다. 주권의 근본은 다 하나님께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참으로 권세는 하나님께로 나지 않음이 없습니다.

    미국 헌법에 '감사하리로다 전능하신 하나님, 그는 우리에게 자신의 관헌을 택하는 권을 주셨도다'고 하였습니다. 그들의 그 권을 하나님께 맡겼기 때문에 전 세계에서 가장 주권 정치가 잘 되며 축복 받는 나라가 되었습니다. 또 "그 권세가 있는 자는 하나님의 일군됨"을 기억하여야 합니다. 만약 이 책임을 잘하지 않으면 하나님께서는 주권을 옮기시기도 하고 나라를 망하게도 하십니다. 그러므로 모든 정치가는 하나님을 경외할 줄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에게"라고 하신 것처럼 완전 분리주의는 그리스도의 교훈에도 적합하며 교회는 영적 범위 안에서 완전 자유이고 간접적으로 국가의 정신적 기초가 될 것입니다. 다시 말하여 주권이 하나님께 있는 줄 알아 영광을 돌리는 경건한 명령에 순복하고, 공의에 기초하여 자유와 평등이 실현되는 국가를 만들 의무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빛과 소금의 직책을 감당하여야 할 것입니다.

    * 기도: 사랑이 많으신 주님, 모든 나라의 정치가 하나님의 의를 나타낼 수 있게 하옵소서.

    16. 권력중독증

    19세기 미국의 신학자 클라크(James Clarke)는 정치인을 정치가(statesman)와 정치꾼으로 불려지는 정략가(politician)로 나누었습니다. 정략가는 다음 선거를 생각하고, 정치가는 다음 세대를 생각한다고 했습니다. 권력 중독증에 걸린 사람들은 오로지 다음 선거를 생각합니다. 말로는 벤담(Jeremy Bentham)이 말하는 국민의 복리증진, 이른바 '최대다수의 최대행복'을 보장하는 것이 정치의 목적이라고 하지만 실제는 자신과 다른 집단이 권력을 잡고 국민을 행복하게 하는 것을 시기하고 방해합니다. 정권을 잡기 위한 갖가지 이슈를 만들어 '밀어내기(push)'와 '끌어당기기 (pull)'를 통해 편을 가르고 차기 선거 의 유리한 고지를 점령하기 위해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세 불리기에 몰입합니다.

    술 중독에 걸리면 음주가 생활을 위한 활동 중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이 되어 버리듯 권력 중독에 걸리면 모든 것을 권력 회득에 초점을 맞춥니다. 패거리나 시정잡배들처럼 옳고 그름은 적이냐 동지냐에 따라 결정되고 사고는 흑백 논리의 감옥에 갇혀 버리게 됩니다. 순수를 잃어버리고 늘 저의가 무엇인지 추측하고 자신에게 유리한 쪽으로 해석하여 자기 합리화를 꾀합니다. 권력 중독증에 걸린 사회에 사는 정치 소비자들은 늘 정치 중독자들을 욕하면서도 정치 게임을 즐기며 자신도 모르게 정치 논리의 노예가 되어 버립니다. 신앙인은 권력 중독으로 신앙의 양심을 마비시켜서는 안됩니다. 권력은 지배를 위한 것이 아니라 섬김을 위해 주어진 것입니다. 최고의 권력을 가지고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은 “인자의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막 10:45)”라고 말씀했습니다.

    17. 글래드스턴의 독서열

    영국의 정치가 글래드스턴은 디즈레일리와 더불러 19세기의 영국의회정치를 대표하는 인물이다. 그는 옥스퍼드 대학을 졸 업한 후 1833년에하원의원이 되었고, 59세 때 정계에서 물러날 때까지 네 차례나 내각을 조직했다. 대단한 독서가기도 했던 그는 많은 논문과 저서를 남겼는데, 그의 다음과 같은 말을 듣는다면 이해가 갈 것이다.

    "나는 뜻밖에 생기는 1분을 그냥 흘려 버리지 않기 위해 항상 소책자를 주머니에 넣고 다녔다."

    그가 읽은 책은 정치, 경제, 외교 분야의 것들이 아니었다. 오히려 시를 비롯해 소설 등의 문학서를 애독했다. 그 이유에 대해 글래드스턴은 "소설을 읽고 시를 음미하는 것은 심신을 달 래는 데 매우 유익하기때문이다."라고 피력하였다. 그는 또 40대 후반에 고대 헬라의 시인인 호머에 관해 연구한 것을 전 3권으로 펴냈다. 이는 그의 꾸준한 독서가 밑받침되었 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우리는 높은 이상주의와 평화주위를 견지한 대정치가로 알려진 그의 정치이념도 그의 독서에 의해 배양되었다고 짐작할 수 있다, 정치인은 항상 책을 가까이 해야 한다.

    18. 정치는 솔선수범

    자로가 공자에게 정사를 묻자 공자가 대답했다.

    "솔선해서 행하며 백성의 수고를 위로하라."

    자로가 자세한 설명을 청하자 공자가 다시 말했다.

    "솔선해서 행하고 백성을 위로함을 게을리 하지 마라."

    * 참조: 잠12:24, 삼하23:3

    19. 정치란 예술이다.

    "정치란 여러 교수들이 상상하는 것과 같은 학문이 아니고 예술이다."

    이 정치규정론은 비스마르크가 1884년 3월 15일 의회에서 행한 유명한 말이다. 정치는 그만큼 생명력과 변화가 많다는 말이다.

    * 참조: 엡1:21, 6:12

    20. 정치에서 버리는 순서

    자공이 정사를 묻자 공자는 "식량을 풍족케 하고 군비를 튼튼히 하며 백성이 위정자를 믿게 하여야 한다." 고 대답했다.

    자공이 "부득이하여 버릴진대 삼자 중 어느 것을 먼저 버려야 합니까?" 라고 묻자 공자가 대답했다.

    "군비를 버려라."

    자공이 또 "부득이하여 버릴진대 남은 둘 중에서 어느 것을 먼저 버려야 합니까?"라고 묻자 공자가 대답했다.

    "식량을 버려라. 자고로 모든 사람에게 죽음이 있거니와 백성이 신의가 없으면 천지 사이에 몸 둘 곳이 없는 것이다.

    * 참조: 사1:4, 삼상30:13, 겔26:16

    21. 정치의 기본은 인재등용

    중궁이 계씨의 재상이 되어 공자에게 정사를 묻자 공자가 대답했다.

    "부하 관리를 먼저 단속하고 작은 허물은 용서하며 현자와 인재를 등용하라."

    중궁이 공자에게 "현자와 인재를 어떻게 알아서 등용합니까?" 라고 되물었다. 이에 공자가 대답해 주었다.

    "네가 아는 현자와 인재를 먼저 등용하면 네가 모르는 현자와 인재는 다른 사람이 버리지 아니하고 추천할 게 아니냐?"

    * 참조: 왕상4:21, 대하7:18

    22. 정치의 다섯 가지 미덕과 네 가지 악덕

    자장이 공자에게 물었다.

    "어떻게 정치를 해야 옳으니까?" 공자가 대답했다.

    "다섯 가지 아름다운 것을 높이고 네 가지 악덕을 물리치면 정치를 좋게 하리라."

    자장이 "무엇을 다섯 가지 아름다운 것이라 합니까?" 라고 묻자 공자가 대답했다.

    "군자는 은혜를 되풀되 낭비하지 않으며, 백성을 수고롭게 하되 원망을 사지 않으며, 하고자 원하는 바가 있으되 탐하지 않으며, 편안하되 교만치 않으며, 엄하되 사납지 않은 것이니라."

    자장이 "무엇이 은혜를 베풀되 낭비하지 않는 것입니까?"라고 물었더니 공자가 대답해 주었다.

    "백성의 의로움을 따라서 이롭게 함이 또한 은혜를 베플되 낭비치 않음이 아닌가? 수고롭게 할 만한 것을 가려서 수고를 끼치면 또 누가 원망하랴? 어질고자 원하면 인(仁)을 얻으니 어찌 탐욕이라 말하랴? 군자는 사람의 많고 적음이 없으며 사물의 작고 큰 것이 없으며, 감히 거만치 않으니 이 또한 태연하되 교만치 않음이 아니가? 군자는 의관을 바르게 하며 눈짓을 존중하여 몸가짐이 엄연하니 사람이 바라보고 두려워하면 이 또한 위엄 있되 사납지 않음이 아닌가?"

    자장이 "네 가지 악덕은 무엇을 말합니까?" 라고 묻자 공자가 말했다. "가르쳐 보지 않고 죽임을 학살이라 하고, 일을 시켜 보지 않고 이루어진 일을 책망함을 난폭이라 하고, 명령을 태만히 하고 기한을 재촉함을 도둑이라 하고, 이왕 주어야 할 상여물을 주는데 출납에 인색함을 유사라 하니라."

    23. 그리스도인과 포퓰리즘

    정치인들이 최근에 자신의 의정활동을 알리고 지지기반을 확충하는 방법으로 홈페이지를 활용하고 있다는 기사를 접한 바 있다. 어느 의원의 경우 홈페이지의 방문객 수가 230만명을 넘는다고 하니 이제 정치활동도 시대에 따라 다변화, 다각화되지 않고는 정치한다고 명함도 내밀 수 없는 시대가 되어 버렸다. 하지만 이러한 경우 네티즌들의 기호와 취향을 쫓아만 가는 자칫 ‘포퓰리즘’(populism)에 빠질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올 수 있다. ‘포퓰리즘’ 이라는 말은 매우 다양한 의미들이 함축되어 있어 단순히 번역을 통해 그 말뜻을 바로 이해하기란 쉽지 않다. 그러나 대중의 지지를 얻기 위해 원칙과 일관성 없이 편의적이고 기회주의적 자세로 대중의 인기 몰이에 급급한 ‘대중영합주의’라고 이해하면 어떨까 싶다. 물론 민의를 수렴하여 대중의 뜻을 존중한다는 민주주의적 관점에서 볼 때 포퓰리즘을 비난만 할 수는 없다고 말할 수 있을 런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포퓰리즘을 가리켜 ‘대중영합주의’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은 단지 사전적 개념에 따르기 보다는 역사 속의 실례를 반영한 것이다. 아르헨티나의 페론과 그의 추종자들이 대중영합적인 방식을 통해 나름대로의 독재체제를 구축했으며, 1890년 미국의 인민당(People’s party)이 공화당과 민주당이라는 양당구도에 대항하기 위한 방편으로 농민과 노조를 대상으로 경제적 합리성을 도외시한 선심성 정책을 남발했던 사례들이 그 대표적인 경우다. 여하튼 한국의 정치현상을 설명하는 데 포퓰리즘이라는 말이 빠지지 않는 것을 보면 한국의 정치가 그리 환영받을 만한 입장에 서있지 못함을 추측할 수 있다. 이러한 포퓰리즘은 다만 오늘날의 정치적 상황을 묘사하는 데 쓰이는 말은 아니다. 성경을 읽다보면 포퓰리즘과 관련한 말씀들을 발견하게 된다. 포퓰리즘에는 하나님보다는 인생으로부터 위로와 칭송을 얻고자 하는 심리적 정서가 깔려 있다. 시편 146편 3절은 “방백들을 의지하지 말며 도울 힘이 없는 인생도 의지하지 말지니”라고 하면서 보다 원천적인 차원에서 포퓰리즘이 안고 있는 문제점을 차단할 것을 요청하고 있다. 다시 말해 방백도 인생도 아닌 하나님께만 전적으로 의지해야 할 것을 가르치고 있는 것이다. 포퓰리즘에 영향을 받았던 대표적 인물이 신약시대의 빌라도 이다. 그는 예수님을 심문하고 난 후 예수님에게서 무슨 악한 일을 하였다는 증거를 찾지 못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가복음 15장 15절을 보면, “빌라도가 무리에게 만족을 주고자 하여 바라바는 놓아 주고 예수는 채찍질하고 십자가에 못박히게 넘겨주니라”고 기록하고 있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대목은 바로 빌라도가 “무리에게 만족을 주고자 하여”라는 말이다. 이 말은 빌라도가 총독으로서의 원칙과 소신없이 ‘대중영합적’ 자세를 취하고 말았음을 암시한다. 바울은 갈라디아서 1장 10절을 통해 “내가 사람들에게 좋게 하랴 하나님께 좋게 하랴 사람들에게 기쁨을 구하랴”라고 우리에게 묻고 있다. 새해에는 사람들에게 잘 보이기보다 먼저 하나님께 잘 보임으로써 더 밝고 희망찬 내일을 만드는 주역이 되도록 하자.

    /배현성 목사(한세대학교 교수)

    24. 정치인 자질

    고대 아테네의회 진행 중에 한 의원이 갑자기 소리를 질렀다. 독수리에게 쫓기던 작은 새 하나가 회의장 안으로 들어와 그에게 안긴 것이다. 그런데 그 의원은 새를 바닥에 팽개쳤다. 이런 모습을 본 다른 의원들이 일제히 그를 규탄했다.

    "위기에 몰린 새를 보호하지 못하는 의원이 어찌 불쌍한 서민들을 돌볼 수 있겠는가. 긍휼한 마음이 없는 이런 정치가에게 아테네의 미래를 맡길 수 없다"

    결국 그 의원은 만장일치로 의회에서 쫓겨났다.

    25. 정치인

    한강에 다섯 명의 사람이 빠져서 허우적거리고 있을 때 119에 신고해서 구조대원들이 그들을 건져냈는 데 4명만 구했다는 것이다. 책임자가 왜 한 명은 구하지 않았느냐고 질책을 했더니 그 사람이 바로 정치인(어떨 때는 국회의원이라고도 함)이라는 것이다. 그랬더니 책임자가 1천200만 명이 마시는 한강물을 오염시킬 수 없다고 그를 빨리 구하라고 했다는 것이다. 우리나라의 정치를 움직이는 사람들의 행태들은 국민을 실망시킬 뿐만 아니라 아예 무관심하거나 포기를 하게 하고 있다. 그런데도 그들은 "국민을 위하여"라는 말을 부끄럼없이 말하고 있다. 우리는 이러한 정치인들처럼 한심한 사람이 되지 말고 양심과 정의를 수호하는 일꾼이 되자.

    26. 정치가들과 게

    한 무리의 정치인이 바닷가를 거닐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뭔가 심각한 이야기를 하고 있었습니다. 정적을 제거할 계략을 짜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때 그들은 게를 잡고 있는 어부를 만났습니다. 어부는 게를 잡아서 바구니에 넣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바구니에는 뚜껑이 없었습니다. 한 정치인이 어부에게 말했습니다. “바구니에 뚜껑이 없군요. 그러면 게들이 다 도망칠 텐데요.“

    그러자 어부는 태연하게 말했습니다. “아무 염려 없습니다. 이 게들은 정치인들과 비슷한 놈들이라서 한 마리가 기어오르면 다른 놈들이 곧 끌어내립니다. 다른 놈들이 올라가는 꼴을 보지 못하거든요.“

    오늘날 정치판을 보면 이 게들의 모습이 생각납니다. 지금 정치자금 문제로 각 정당이 서로 상대를 끌어내리기 위해서 전쟁을 치르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 나라의 정치인들을 위해서 진정으로 기도해야 합니다. 진정 나라를 위해서 일해 달라고 말입니다.







    사무엘하는 24장으로 구성된 책
    다윗의 통치와 그의 생애를 소개합니다.
    다윗 왕조의 확립과 죄와 회개 그리고 가족 간의 비극, 반역과 하나님의 신실함을 말씀합니다.


    사무엘하 요약

    사무엘하는 다윗왕의 등극으로 시작하여 인구조사에 대한 징계로 끝을 맺고 있다. 본서는 다윗이 이스라엘의 왕으로서 어떻게 국가를 하나님의 공의로 통치하는지를 보여주고 있다.

    다윗은 이스라엘의 전체 왕이 아닌 유다 지파의 왕으로 시작하였다. 당시 이스라엘은 과도기 국가의 체제였고, 북쪽의 이스보셋왕과 남쪽의 다윗왕으로 나뉘었다. 그리고 통일을 위한 남북 전쟁이 있었으며 북쪽 지파들 전체의 동의를 얻어 통일왕국의 왕으로 추대되었다.

    예루살렘을 수도로 정하고 하나님의 법궤를 예루살렘으로 옮겨온 다윗은 하나님을 향한 깊은 신앙의 소유자였을 뿐만 아니라 나라 전체를 공의로 다스렸던 훌륭한 왕이었다. 또한, 밧세바 사건을 통해서 죄를 지었던 인간적인 모습도 보였지만 자신의 죄를 고백하고 회개하는 겸손함도 보여주었다.

    그는 아들의 반역으로 말미암아 또다시 도피생활을 했지만 신하들의 대처로 부자간의 전쟁을 종식시켰고, 반란을 평정하고 모두에게 은혜를 베풀었다.

    주요 내용 및 요점 정리

    1장

      ◈ 사울의 죽음

      사울의 죽음을 아말렉 사람이 와서 다윗에게 알리다.
      자신이 사울을 죽였다고 말하는 아말렉 사람을 다윗이 죽이다.
      다윗이 사울과 요나단의 죽음을 기리는 노래(활노래)를 지어 부르게 하다.

    2장

      ◈ 분열된 이스라엘

      다윗이 헤브론으로 가족들과 이주하고 그곳에서 유다의 왕이 되다.
      아브넬이 사울의 아들 이스보셋을 이스라엘의 왕으로 삼다.
      이스라엘이 유다와의 전쟁에서 패하다.
      아브넬이 자신을 뒤쫓아오는 유다의 아사헬을 창으로 죽이다.

    3장

      ◈ 아브넬의 배반과 죽음

      다윗이 헤브론에서 낳은 아들들 : 암논 길르압 압살롬 아도니야 스바댜 이드르암.
      아브넬이 이스라엘왕 이스보셋을 배반하고 다윗에게로 가다.
      유다의 요압이 자기 동생 아사헬의 복수를 위해 아브넬을 죽이다.
      다윗이 아브넬을 장사지내다.

    4

    ◈ 이스보셋의 죽음

    사울의 군지휘관 바아나와 레갑이 낮잠을 자고 있는 이스보셋을 죽이다.

    다윗이 이스보셋을 살해한 바아나와 레갑을 죽이다.

    5

    ◈ 다윗왕

    이스라엘 장로가 다윗에게 기름부어 온 이스라엘의 왕으로 삼다.

    다윗이 예루살렘을 정복하여 이스라엘의 수도로 삼고 다윗성을 쌓다.

    다윗이 아내와 첩을 더 두고 아들 딸을 더 낳다.

    다윗이 블레셋과의 전쟁에서 승리하다.

    6

    ◈ 언약궤

    언약궤를 옮기다가 웃사가 죽자 다윗은 궤를 오벧에돔의 집으로 보내다.

    주께서 오벧에돔의 집에 복을 주시자 다윗이 궤를 다윗성으로 옮기다.

    미갈이 다윗이 언약궤 앞에서 춤춘 것을 비방하다.

    7

    ◈ 나단과 다윗

    주께서 나단을 통해서 다윗과 그 왕국에게 축복의 약속을 하시다.

    다윗이 하나님의 약속과 축복에 대해서 감사의 기도를 드리다.

    8

    ◈ 정복 전쟁

    다윗이 이웃의 국가(블레셋, 모압, 소바, 시리아, 에돔 등)와 전쟁에 승리하다.

    전쟁에 승리하여 전리품을 주께 드리고 정복지로부터 조공을 받다.

    다윗이 자신의 신하들에게 알맞은 직분과 직책을 주다.

    9

    ◈ 므비보셋

    다윗이 요나단의 아들 므비보셋에게 토지를 주고 그에게 은총을 베풀다.

    시바가 므비보셋의 종이 되다.

    10

    ◈ 암몬과 전쟁

    다윗이 암몬왕 나하스가 죽자 신하를 보내 조문하게 하다.

    암몬왕 하눈이 신하의 의견을 들어 다윗의 신하에게 욕을 보이다.

    암몬왕이 시리아군을 고용하여 이스라엘과 전쟁을 진행하다.

    시리아가 군대를 집결하여 다윗과 싸웠으나 패하여 이스라엘을 섬기다.

    11

    ◈ 밧세바

    다윗이 우리야의 아내 밧세바를 범하다.

    다윗이 우리야를 최전선으로 보내서 죽게 하다.

    다윗이 밧세바를 데려와 아내로 삼다.

    12

    ◈ 책망과 회개

    나단이 비유를 말하면서 다윗의 죄를 책망하고 주의 징계의 말을 전해주다.

    나단의 말을 들은 다윗이 죄를 고백하고 회개하다.

    주께서 다윗의 죄를 물어 밧세바 사이에 낳은 아이를 죽이시다.

    다윗과 밧세바 사이에 솔로몬 태어나다.

    다윗이 암몬의 도성 랍바를 쳐서 점령하다.

    13

    ◈ 암논과 압살롬

    암논이 압살롬의 여동생 다말을 강간하다.

    압살롬이 여동생의 일로 앙심을 품다가 암논을 죽이다.

    압살롬이 다윗의 눈을 피해서 그술로 도망하다.

    14

    ◈ 요압과 압살롬

    요압이 압살롬을 돌아오게 하려고 지혜로운 여인을 다윗에게 보내다.

    다윗이 지혜로운 여인의 말을 듣고 요압을 시켜 압살롬을 돌아오게 하다.

    압살롬이 요압을 만나지 못했기에 그를 만나려고 요압의 밭에 불을 지르다.

    압살롬과 다윗이 만나 화해하다.

    15

    ◈ 압살롬의 반역

    압살롬이 백성들의 마음을 훔치고 헤브론에서 스스로 왕이 되다.

    다윗이 압살롬의 반역을 피해 예루살렘을 떠나 도피하다.

    다윗이 사독과 아비아달, 그리고 후새를 예루살렘으로 돌려보내다.

    16

    ◈ 다윗의 도피

    도피하던 다윗에게 시바가 음식을 갖고 찾아와 므비보셋을 모함하다.

    시므이가 도피하던 다윗을 찾아와서 저주를 퍼붓다.

    압살롬이 예루살렘에 입성하자 후새가 찾아가 위장 전향을 하다.

    압살롬이 아히도벨의 말을 듣고 다윗의 후궁과 동침하다.

    17

    ◈ 계략과 모략

    아히도벨이 다윗을 죽이기 위한 계책을 압살롬에게 말하다.

    압살롬이 후새의 의견을 들어 그의 계책을 채택하다.

    후새가 사독과 아비아달에게 전하여 다윗으로 하여금 요단강을 건너게 하다.

    아히도벨이 자신의 계략이 실패하자 집으로 가서 자살하다.

    압살롬이 군대를 이끌고 도피하는 다윗을 추격하다.

    소비와 마길과 바르실래가 도피하는 다윗을 위해 음식을 준비해 오다.

    18

    ◈ 아버지와 아들의 전쟁

    아버지와 아들의 전쟁이 시작되었고 압살롬의 군대가 다윗군에게 패하였다.

    압살롬이 상수리나무에 머리가 걸려있을 때 요압이 창으로 찔러 죽이다.

    아히마아스와 구스 사람이 승전 소식을 다윗에게 전하여 주다.

    다윗이 압살롬의 죽음에 대해 통곡하다.

    19

    ◈ 다윗의 귀환

    요압이 죽은 압살롬만 그리워하고 슬퍼하자 다윗에게 찾아와서 항의하다.

    유다 사람이 다시 돌아오는 다윗을 맞이하러 나가다.

    시므이와 므비보셋과 바르실래가 돌아오는 다윗을 마중하다.

    다윗이 돌아오는 것으로 인해 유다 사람과 이스라엘 사람들간의 분쟁이 일어나다.

    20

    ◈ 반란

    베냐민 지파 세바가 반란을 일으키다.

    요압이 아마사를 죽이다.

    지혜로운 여인이 세바를 죽이게 해서 요압에게 넘겨주다.

    각각의 직책을 얻은 다윗의 관리들.

    21

    ◈ 기브온 사람들

    기브온 사람들이 사울의 후손 7명을 죽이는 것을 다윗에게 요청하다.

    다윗이 사울의 후손 7명을 넘겨주자 기브온 사람들이 나무에 매달다.

    블레셋과의 전쟁에서 다윗의 장군들이 거인들을 죽이다.

    22

    ◈ 승전가

    다윗이 사울에게서 건져주신 여호와를 찬양하며 노래 부르다.

    23장

      ◈ 유언

      다윗이 남긴 마지막 말.  
      다윗의 용사인 요셉밧세벳, 엘르아살, 삼마의 업적.
      다윗의 용사 30인의 부대원과 그들의 업적.

    24장

      ◈ 인구조사

      다윗이 요압을 시켜서 이스라엘 전체 인구조사를 하다.  
      선지자 갓이 세 가지 재앙을 다윗이 선택할 수 있도록 하다.
      다윗이 아라우나에게서 산 땅에서 제사를 드리다.





















    사무엘하 개요와 내용 파악하기

    사무엘하는 다윗의 통치에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사무엘상은 사울 왕의 죽음으로 끝이 났습니다.
    사무엘하는 다윗이 통일왕국을 이루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다윗의 좋은 면도 나오지만 밧세바와 간음 사건을 통해서 가정이 풍비박산이 되는 내용도 나옵니다.
    다윗이 우리아를 살인하여 죽이고 밧세바와 간음하고 형제간에 간음한 사건도 나오고 압살롬의 반역 이야기도 나옵니다.
    이런 모든 일들을 통해서 다윗 왕이 완전하지 않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사무엘하를 읽으면서 하나님 앞에서 죄를 짓지 않아야 된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죄를 지으면 하나님의 징계가 있다는 것을 기억하고 하나님 앞에서 구원받은 자의 온전한 삶을 살아야 하겠습니다.



    사무엘하 개요와 내용 파악하기

    사무엘하의 내용은 다윗 왕의 역사이다.
    본서의 특징적 진리는 죄에 대한 징계이다.
    본서의 각 장의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1-10장.  다윗의 승리적 통치

    1장 / 사울의 죽음을 슬퍼함.

    2장 /  다윗이 유다의 왕이 됨.

    다윗이 30세 때이며 사무엘에게 기름부음 받은 지 약 10년 후.

    3장 /  아브넬의 죽음.

    4장 /  이스보셋의 죽음.

    5장 /  다윗이 온 이스라엘의 왕이 됨.

    6장 / 하나님의 궤를 예루살렘으로 옮겨옴.

    다윗은 바알레유다로 가서 하나님의 궤를 모셔 오려하였다(2절).
    그 궤는 사울 시대에 오랫동안 방치되었던 것 같다.
    그 궤는 기럇여아림에 두어졌었고(삼상 7:1-2) 사울 때에도 사용된 적이 있었으나(삼상 14:18), 다윗은 그 궤를 몹시 찾았고 마침내 에브라다에 있는 나무밭(야알의 땅=삼림의 땅)에서 찾았다(시 132:1 -7).
    바알레(바알라)는 곧 기럇여아림(‘삼림의 성’)이다(수 15:9).

    7장 / 다윗에게 주신 약속.

    8장 / 다윗의 승전들.

    9장 / 므비보셋을 선대함.

    10장 /  암몬 왕 하눈의 실수.

    11-24장, 다윗의 범죄와 고난

    11장 / 다윗의 범죄(간음과 살인).

    12장 / 나단을 통한 책망.

    13장 / 강간과 살해.

    14장 /  압살롬이 돌아옴.

    15장 / 압살롬의 반역.

    16장 / 시므이가 다윗을 저주함.

    17장 / 후새의 모략.

    18장 / 압살롬의 죽음.

    19장 / 다윗이 다시 예루살렘으로 돌아옴.

    20장 / 세바의 반란.

    21장 / 3년 기근.

    22장  다윗의 시.

    23장 /  다윗의 37용사들.

    24장 / 인구 조사의 죄(교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