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나(Jonas) 비둘기


호세아 - 요엘 - 아모스 - 오바댜 - 요나 - 미가

요나(Jonas) : 비둘기

1. 스불론 땅 갓헤벨 사람 아밋대의 아들.
2. 12소선지자 중 한 사람으로 요나서의 주인공
3. 주전 825년 여로보암 2세 때 하나님이 요나에게 앗수르 도성 니느웨로 가서 그 죄악을 책하고 장차 멸망할 것을 예언하라 하였다.
4. 니느웨 사람과 감정이 좋지 않아 다시스로 도망가다 폭풍을 만나 죄인 하나를 제비뽑아 물속에 던지는 그 제비에 뽑혀 바다에 던져졌다.
5. 여호와가 큰 물고기를 예비하여 요나를 삼키게 하여 고기 배속 에서 3주야를 지내게 되었다(요나 2장)
6. 요나가 그 가운데서 자복하고 기도할 때에 고기는 요나를 육지에 토하여냈다(요나 3장)
7. 요나가 니느웨로 가서 3일간 선포하자 그 성 주민들이 회개하였다(요나 3장)
8. 요나가 성밖에 나가서 어느 박넝쿨을 죽여 말라 버리는지라 요나가 심히 안타까와 할때 여호와의 말씀이"네가 하루 났다가 시들어지는 박넝쿨도 그롱게 아끼거둔 내가 이 큰성 니느웨의 12만명을 아끼지 않겠느냐"고 일깨워 주셨다(요나 4장)
9. 예수님이 죽었다가 사흘만에 살아나실 것을 요나를 들어 말씀하셨다(마태복음 12:39)
10. 헬라인과 로마인은 이 사실을 모두 확증하였다.


* 니느웨(Nineveh)
메소포타미아에서 가장 오래된 도시 중의 하나이다.
이곳은 현재의 이라크 티그리스 강변에 있는 도시로 앗시리아(BC 705-612)의 수도였다.


니느웨 사람들은 아주 지독한 백성으로 전쟁에서 승리한 후 패잔병들을 껍질을 벗겨 죽일 정도로 잔인했다고 합니다.

견고한 성읍으로 성벽의 높이는 대략 10m 정도, 성벽의 넓이는 당시 마차 3대가 다닐만큼 넓은 성벽이었다고 한다.
요나가 니느웨에 도착하기 전에 완전 일식이 일어났다(BC 763. 6. 15).
도시에 재앙이 닥쳐왔다(BC 763. 759)

 


 ♦ 7월 1일(목)

♦ 오늘 읽어야 할 말씀 : 요나 1:1∼17
♦ 묵상을 위한 주제 : 나의 연고(12절)
♦ 성구 : 그가 대답(對答)하되 나를 들어 바다에 던지라 그리하면 바다가 너희를 위하여 잔잔(潺潺)하리라 너희가 이 큰 폭풍(暴風)을 만난 것이 나의 연고(緣故)인줄을 내가 아노라 하니라.

“나의 연고(It is my fault)”란 “나의 잘못”이란 뜻입니다.
한 때 “내 탓이오!” 라는 구호가 유행처럼 스쳐지나갔습니다.
사회의 문제는 곧 교회의 문제이며, 교회의 문제는 목회자의 문제이며 동시에 그리스도인의 문제라고 하겠습니다.

요나(Jona, 비둘기)는 북 왕국 이스라엘의 왕 요아스의 아들 여로보암 2세(BC 793∼753) 시대에 활동했습니다(왕하 14:25). 이 시기는 큰 번영을 누렸으나 영적으로는 심히 부패하여 호세아, 아모스 선지자가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며 회개를 촉구하던 시기이었습니다. 이 때 요나는 이방 나라에 가서 말씀을 전하라는 명령을 받게 됩니다.

그러나 북 이스라엘을 끊임없이 공격했던 앗수르의 수도 니느웨에 가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라고 하는 명령을 요나는 도저히 이해하기 어려웠습니다. 그러므로 요나는 니느웨가 아니라 다시스로 도망하려고 욥바로 내려갔고 그곳에서 마침 다시스로 가는 배에 올라탔습니다. 공교롭게도 마침 다시스로 가는 배가 항구에서 떠날 준비를 하고 있었습니다. 이 배는 삼년에 한 번씩 운행하는 무역선이었습니다(왕상 10:22).

다시스로 도망하는 요나에게 이런 배를 쉽게 탈 수 있었다는 것은 큰 행운이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것은 우연의 일치입니다.

만일 잘못된 계획을 시도하려는데 모든 일이 순조롭게 진행된다면 그것은 행운이 아니라 불행의 시작일 뿐입니다.

왜냐하면 요나가 승선했던 그 배가 큰 풍랑을 만나 매우 위태롭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요나는 풍랑의 원인이 “나의 연고(It is my fault)”라고 고백합니다.

문제의 원인을 다른 사람에게서 찾는다면 문제는 점점 더 깊은 수렁으로 떨어질 것입니다. 그러나 모든 문제의 원인이 나에게 있다는 것을 깨닫는다면 생각하지도 못한 해결의 길을 찾게 될 것입니다.

이 풍랑의 원인이 내 탓이오!

요나의 이와 같은 영적 위대함의 고백이 사회 도처에서 절실하게 요구됩니다.
누가 먼저 이런 외침을 외쳐야 할까를 계산하지 말고 나부터 먼저 이런 외침을 내 삶의 자리에서 실천하므로 세상을 변화시키는 즐거움을 함께 나누어야 하겠습니다.

♪ 찬양 / 이 세상 풍파 심하고



예수 내 구주!
예수 내 생명!
예수 내 권세!

요나 1:12

그가 대답하되 나를 들어 바다에 던지라 그리하면 바다가 너희를 위하여 잔잔하리라
너희가 이 큰 폭풍을 만난 것이 나의 연고인줄을 내가 아노라 하니라.

* 연고(잘못, 실수)삼하 6:7 / 샬(shal) שַׁל

열왕기하 14:25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 종 가드헤벨 아밋대의 아들 선지자 요나로 하신 말씀과 같이 여로보암이 이스라엘 지경을 회복하되
하맛 어귀에서부터 아라바 바다까지 하였으니.

이방인(선장, 사공)

1. 자기 신을 부르고 물건을 바다에 던지니라(5절)
2. (선장) 일어나서 네 하나님께 구하라(6절)
3. 심히 두려워하여(10절)
4. 힘써 노를 저어(13절)
5. 무리가 여호와께 부르짖어(14절)
6. 여호와를 크게 두려워하여, 제물, 서원(16절)

요나(유대인)

1. 여호와의 말씀이 임하니라(1절)
2. 여호와의 낯을 피하여(3, 10절)
3. 깊이 잠이 든지라(5절)
4.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9절)
5. 바다에 던지라(12절)

낯(얼굴) 파님(pânîym) פָּנִים

오늘의 기도 

너는 일어나라!(2절)
신앙적 결단의 때(영적 자각)
영적생활에 불필요한 것들을 버리자
주관, 생각, 고집, 버릇, 약점, 교만, 신학, 아집….  

요나서는 예언서로 분류되기는 하지만, 예언자들의 방식으로 메시지를 전달하지 않고 사건을 통해 메시지를 전달하는 설화적 방식으로 기록된 책입니다. 그래서 요나서를 읽을 때는 이 책 안에 등장하는 여러 요소가 각각 무엇을 상징하는지를 새겨보는 묵상이 필요합니다.

예를 들어,
요나는 선택받은 백성 이스라엘(유대인, 히브리 사람)
니느웨는 이스라엘과 적대적인 이방 민족,
다시스는 땅끝,
바다는 세상 전체,
폭풍은 전쟁,
물고기는 이스라엘을 포로로 잡아간 나라를 상징

문학적인 방식의 묵상을 하게 되면, 요나서가 전하는 메시지를 더 잘 이해할 수 있게 됩니다.
이런 식으로 요나서를 묵상하게 되면 이 책이 단지 어떤 사람이 하나님의 명령에 불순종했다가 큰 변을 당한 후에 회개하여 돌아왔다는 간증을 기록한 책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 수 있게 됩니다.

요나서는 이스라엘과 그 주변 세계의 역사에 나타난 하나님의 섭리를 기록한 책임을 바르게 알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16절과 같은 말씀은 이스라엘의 멸망이 오히려 이방인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찬양하게 하는 계기가 되었음을 증언합니다.
예수님의 죽음이 온 세계로 하여금 하나님의 구원의 은총을 알게 하고 그 은혜를 찬양하게 한 계기가 된 것처럼, 하나님의 백성인 이스라엘의 멸망이 오히려 그 주변 민족들이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알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는 말씀입니다.  

이방 민족들은 요나의 몰락을 통해 하나님은 이 세계 전체를 주관하는 분으로서 어느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으시는 공평하신 분이심을 알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그분이 선택하신 민족에 대해서는 무조건적 포용을 보여주시고 그렇지 않은 이방 민족에 대해서는 배타적인 태도로 일관하시는 분이 아니심을 알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요나의 불순종을 통해서 ‘유일하고 전능하신 온 우주의 주인에게 선택받았다’는 것이 그 백성의 특권을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순종해야 할 사명을 나타내는 것임을 분명하게 깨닫게 됩니다.

그러므로 자신이 진정으로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믿는 사람은 어떤 의미에서든 배타적인 특권에 대한 기대를 버려야 하며, 모든 종류의 차별적인 행위를 경계하는 신앙을 지향해야 합니다. 잘하든 못하든 “믿습니다” 카드만 있으면 만사형통이라는 식의 잘못된 믿음이 오늘날 우리의 교회를 병들게 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선택받았다는 믿음이든, 구원받았다는 믿음이든 믿음은 특권이 아닙니다.
행위가 아니라 믿음으로 구원을 얻습니다만, 구원에 이르는 진정한 믿음은 반드시 행위로 이어집니다.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바르게 고백하는 신앙인이 되도록 기도하며 나아갑시다.


 요나서는 열두 권의 소선지서 가운데 하나인데 다른 소선지서와는 차이점이 있습니다. 다른 소선지서들은 선지자들이 메시지를 받아 증거한 것입니다. 하지만 요나서는 요나가 어떤 메시지를 증거한 것이 아니라 요나가 겪었던 경험을 이야기합니다. 그 경험을 통해서 간접적인 메시지를 증거하는 것이 요나서의 두드러진 특징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요나서를 황당한 전설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성경에는 요나의 아버지 이름이 아밋대라고 나와 있습니다. “여호와의 말씀이 아밋대의 아들 요나에게 임하니라 이르시되” (욘 1:1). 아버지가 있다는 것은 그가 실존했던 인물이었다는 것을 말합니다.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 종 가드헤벨 아밋대의 아들 선지자 요나로 하신 말씀과 같이 여로보암이 이스라엘 지경을 회복하되 하맛 어귀에서부터 아라바 바다까지 하였으니” (왕하 14:25). 여로보암 2세 시대에 요나가 이스라엘 국경이 회복될 것이라고 예언했는데 그대로 되었다는 말씀입니다. 열왕기하는 역사가가 기록한 책입니다. 역사가들은 전설이나 신화에 나오는 존재들을 실제 인물로 기록하지 않습니다. 북 이스라엘 예후 왕조에서 가장 번영을 누렸던 여로보암 2세 시대에 약 40년(B.C. 790-750) 동안 요나가 실제로 살아 있었고 실제로 예언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도 요나가 실제 인물이었다는 것을 확정적으로 증거하셨습니다. “요나가 니느웨 사람들에게 표적이 됨과 같이 인자도 이 세대에 그러하리라” (눅 11:30). “요나가 밤낮 사흘을 큰 물고기 뱃속에 있었던 것 같이 인자도 밤낮 사흘을 땅 속에 있으리라” (마 12:40). 예수님께서 실제 인물인 것처럼 요나도 실제 인물이고 예수님께서 실제로 사흘 동안 죽은 상태로 계셨던 것처럼 요나가 큰 물고기 뱃속에 밤낮 사흘을 있었던 것도 역사적인 사실이라는 말씀입니다. 
 요나서는 요나라는 선지자가 겪은 경험을 통해서 오늘날 우리에게 무엇을 말씀해주고 계신가를 살펴보며 읽어야 합니다. 

Ⅰ. 요나의 불순종의 네 가지 특징 

요나는 신앙의 초보자가 아니었습니다.
그리고 불경건한 불신자도 아니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종이고 하나님의 선지자였습니다.
그럼에도 그는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앗수르의 수도인 니느웨로 가서 말씀을 전하라고 했는데 요나는 욥바에서 배를 타고 다시스로 향했습니다.
이러한 요나의 불순종은 네 가지 특징이 있습니다. 

첫째, 애국적인 불순종

요나가 살고 있던 시대는 여로보암 2세가 다스리던 때로 이스라엘이 번영했습니다.
경제적으로도 여유가 있었고 군사적으로도 강했던 시대입니다. 하지만 당시 선지자였던 요나와 호세아는 그런 번영이 영구하지 않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것은 일시적인 번영이고 이스라엘은 조만간 망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깨달은 것입니다. 왜냐하면, 북방의 앗수르라는 나라가 최강대국으로 부상하면서 이미 아람이라는 나라를 정복했고 조금 있으면 이스라엘을 쳐들어올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요나는 앗수르가 잘되는 것을 보고 싶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요나에게 전하라고 하신 메시지는 40일이 지나면 앗수르의 수도 니느웨는 망한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40일이 지나기 전에 회개하면 살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요나는 자기가 40일 동안만 다른 곳으로 도망갔다가 오면 앗수르가 망하겠다고 생각하였습니다. 이와 같은 애국적인 동기에서 하나님께 불순종하여 나는 망하더라도 나라는 살려야겠다고 배를 타고 다시스로 간 것입니다. 배를 타고 일단 지중해에 들어가면 40일 이내로 돌아올 가능성은 거의 없기 때문입니다. 요나는 자신의 사리사욕 때문이 아니라 애국적인 동기로 불순종했던 것입니다. 

둘째, 죄악된 불순종

아무리 애국적인 동기라 해도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는 것은 죄입니다. 사무엘상 15장 22절에서 사무엘은 사울에게 이런 말을 했습니다. “사무엘이 가로되 여호와께서 번제와 다른 제사를 그 목소리 순종하는 것을 좋아하심 같이 좋아하시겠나이까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수양의 기름보다 나으니” (삼상 15:22). 요나는 이스라엘만을 생각했지만 하나님의 생각은 더 컸습니다. 이스라엘뿐만이 아니라 앗수르의 죽어가는 사람들도 살리는 것이 하나님의 계획이었던 것입니다. 요나는 그것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이해하지 못해도 순종해야 마땅한 것이었습니다. 불순종은 그 동기가 아무리 애국적이라도 죄인 것입니다.

셋째, 어리석은 불순종

요나는 바다에 배가 뜨면 하나님이라도 40일 만에 자신을 바다에서 육지로 데리고 올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하나님을 너무 과소평가 한 것입니다. 요나는 바다의 운송수단이 배밖에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바다의 운송수단이 배만 있습니까? 하나님께서 보실 때는 큰 물고기도 운송수단이었습니다. 물고기 뱃속에 갇혀 니느웨로 돌아가게 될 줄은 요나도 미처 몰랐던 것입니다. “내가 주의 신을 떠나 어디로 가며 주의 앞에서 어디로 피하리이까” (시 139:7). 우리가 하나님을 피할 수 있는 곳은 없습니다.

넷째, 편협한 마음의 불순종 

요나는 앗수르가 멸망하기를 원했지만 하나님께서는 앗수르를 구원하기를 원했습니다. 요나에게 앗수르 사람들은 원수였지만 하나님께는 불쌍히 여길 구원의 대상이었습니다. 요나가 불순종한 것은 하나님의 생각과 여러 부분 어그러져 있었기 때문에 요나는 도망간 선지자가 되었고 불순종한 선지자가 되었습니다. 어떤 동기에서든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는 것은 어리석은 죄입니다. 

Ⅱ. 요나의 불순종이 가지고 세 가지 결과

 요나의 불순종은 세 가지 결과를 가지고 왔습니다.
 
첫째, 수치(shame)

하나님의 선지자가 불신자들에게 망신을 당한 것입니다. 요나가 배를 타고 가는데 풍랑이 일어나고 사람들은 풍랑을 어떻게 해서든지 잔잔케 해보려고 노력합니다. 각자 자기 신께 빌고 배를 가볍게 하기위해 짐을 모두 바다에 던집니다. 그런데 선장이 배 밑으로 내려가 보니까 한 사람이 거기서 잠을 자고 있는 것입니다. “선장이 나아가서 그에게 이르되 자는 자여 어찜이뇨 일어나서 네 하나님께 구하라 혹시 하나님이 우리를 생각하사 망하지 않게 하시리라 하니라” (욘 1:6). 지금 배에 탄 모든 사람들이 살아보려고 노력하고 있는데 어떻게 혼자서 잠을 자고 있을 수 있냐는 것입니다. 이렇게 요나는 배 밑에서 잠을 자다가 망신당했습니다. 그런데 계속해서 풍랑이 잠잠해지지 않자 이것은 분명히 초자연적인 원인이 있을 것이라 생각하고 제비를 뽑아 누가 불순종해서 그런 것인지 알아보자고 했습니다. 거기서 요나가 딱 걸린 것입니다. 그러자 선원들이 요나에게 물었습니다. “청컨대 이 재앙이 무슨 연고로 우리에게 임하였는가 고하라” (욘 1:8). 요나는 이렇게 대답합니다. “그가 대답하되 나는 히브리 사람이요 바다와 육지를 지으신 하늘의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로라 하고 자기가 여호와의 낯을 피함인 줄을 그들에게 고하였으므로” (욘 1:9-10). 그것을 알고 선원들은 요나를 야단칩니다. “네가 어찌하여 이렇게 행하였느냐 하니라” (욘 1:10). 얼마나 부끄럽고 망신입니까? 목사가 불신자에게 야단맞는 것과 똑같은 것입니다. 순종은 영광을 가져오지만 불순종은 수치를 가져옵니다.

둘째, 큰 위험(great danger)

요나의 불순종으로 선원들도 죽게 되었고 요나도 죽게 되었습니다. 풍랑이 심해져서 배가 뒤집히면 모두가 죽는 것입니다. 우리 성도들이 불순종하면 우리도 위험하고 불신자들도 위험합니다. 목사, 장로, 권사, 집사가 죄를 지어 세상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을 부정적으로 생각하게 되면 그들은 하나님에게서 점점 멀어지고 지옥에 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불순종은 우리뿐만이 아니라 세상 사람들도 위험하게 하는 것입니다.

셋째, 징계(chastisement)

바다가 점점 더 흉흉해지니까 선원들이 요나에게 묻습니다. “너를 어떻게 하여야 바다가 우리를 위하여 잔잔하겠느냐” (욘 1:11). 그러자 요나가 대답합니다. “나를 들어 바다에 던지라 그리하면 바다가 너희를 위하여 잔잔하리라 너희가 이 큰 폭풍을 만난 것이 나의 연고인 줄을 내가 아노라 하니라” (욘 1:12). 선원들은 어떻게 산사람을 바다에 던지느냐며 자신들의 기술로 육지에 닿아보려 하지만 역부족이었습니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요나를 바다에 던진 줄로 믿습니다. 캄캄하고 풍랑이 이는 바다에 던져질 때 기분이 어떻겠습니까? 요나는 아마도 거기서 자신의 인생이 끝난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 순간이 얼마나 괴로웠겠습니까? “살아 계신 하나님의 손에 빠져 들어가는 것이 무서울진저” (히 10:31). 하나님의 징벌은 무서운 것입니다. 

Ⅲ. 요나를 바다에 던진 것은 누구인가? 

우리가 요나서 1장을 보면서 한 가지 중요한 질문을 던져야 됩니다. 누가 요나를 바다에 던졌습니까? 요나 1장 15절을 보면 선원들이 요나를 바다에 던졌다고 나와 있습니다. 그런데 요나가 바다에 던져지는 순간 큰 물고기가 하품한 것인지 밥을 먹으려고 한 것인지는 몰라도 입을 벌린 것입니다. 요나는 물고기 입속으로 들어가 뱃속에 머물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요나가 물고기 뱃속에서 소화되지 않도록 소화액을 막아주셨습니다. 소화불량에 걸린 물고기는 결국 니느웨 근처에서 요나를 토하게 됩니다. 참으로 놀라운 이야기입니다. 요나가 물고기 뱃속에서 기도하는 내용을 보십시오. “주께서 나를 깊음 속 바다 가운데 던지셨으므로 큰 물이 나를 둘렀고 주의 파도와 큰 물결이 다 내 위에 넘쳤나이다” (욘 2:3). 누가 자신을 바닷속에 던졌다고 합니까? 요나 1장 15절에는 분명히 선원들이 던졌다고 나와 있는데 요나는 주님께서 자신을 바닷속에 던졌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요나를 누가 던졌습니까? 선원들이 던졌지만 결국은 하나님께서 던지신 것입니다.

만약 창세기에 나오는 야곱의 열한 번째 아들 요셉에게 요나를 누가 바다에 던졌냐고 물어보면 하나님께서 던지셨다고 할 것입니다. 요셉은 17세에 형들의 미움을 받아 노예로 팔렸지만 30세에 애굽의 총리가 되었고 37세에 형들이 자기 앞에서 무릎을 꿇게 됩니다. 그때 형들에게 자신이 요셉임을 밝히자 형들은 복수를 당할까봐 두려워하자 요셉이 이렇게 말합니다. “당신들이 나를 이곳에 팔았으므로 근심하지 마소서 한탄하지 마소서 하나님이 생명을 구원하시려고 나를 당신들 앞서 보내셨나이다” (창 45:5). 노예로 판 것은 형들이 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하셨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 오늘과 같이 만민의 생명을 구원하게 하시려 하셨나니” (창 50:20). 요셉은 17세에 노예로 팔려가 애굽의 시위대장 보디발의 종노릇하다가 보디발 아내의 모함으로 감옥에 가게 됩니다. 거기서 13년 동안 고통스러운 세월을 보내게 되는데 그것을 누가 하게 한 것이냐? 하나님께서 하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요셉을 총리로 세워 자신의 가족도 살리고 애굽 사람들과 만민을 살리기 위해서 그렇게 하셨다는 것을 나중에 깨달은 것입니다. 

열왕기하 5장을 보면 아람의 군대장관 나아만이 문둥병에 걸립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을 침공했다가 잡아온 계집아이가 빨래를 하면서 이 사실을 알게 된 것입니다. 계집아이는 나아만 장군에게 사마리아에 있는 한 예언자 엘리사를 만나면 나을 수 있다고 이야기합니다. 그러자 나아만 장군이 눈이 번쩍 뜨여서 이스라엘을 찾아옵니다. 그런데 엘리사를 찾아가지 않고 요람 왕을 찾아간 것입니다. 그러자 요람 왕이 옷을 찢으면서 자신이 신도 아닌데 어떻게 문둥병을 고쳐주겠냐며 이것은 분명 시비를 걸어 쳐들어오려고 하는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이 소식을 들은 엘리사가 종 게하시를 보내서 요단강에 가서 일곱 번 씻으면 나을 것이라고 말해주었습니다. 그러자 나아만 장군은 당연히 마중 나와서 안수도 해주고 대접할 것으로 생각했는데 엘리사는 나오지도 않고 종 하나가 나와서 요단강에서 일곱 번 씻으라고 하니까 나아만이 화가 난 것입니다. 사람이 교만하면 화를 잘 냅니다. 자기가 아주 높은 사람이라고 생각해서 남들이 높은 사람으로 대접하지 않으면 화를 내는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나아만은 문둥병 환자로 왔지 장군으로 온 것이 아니었습니다. 요단강에 가서 일곱 번 씻으라는 엘리사의 말에 화를 내니까 종들이 어려운 일을 하라고 해도 해야 될 상황에 요단강에 일곱 번 들어가는 것을 왜 못하냐고 말하였습니다. 이 말을 듣고 나아만 장군이 요단강을 일곱 번 들어갔다 나오자 문둥병이 완전히 낫고 그 살이 어린아이의 살처럼 되었습니다. 그러자 나아만이 아람에 있는 신들은 다 가짜고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가 진짜 하나님이라고 하면서 하나님을 믿는 구원받은 백성이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나아만의 계집종에게 요나를 누가 바다에 던졌는지 물어본다면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자신을 잡아온 것이 나아만 장군인 줄 알았더니 하나님께서 나를 이곳에 오게 하셔서 결국 나아만 장군을 구원받게 하셨습니다. 요나를 던지신 분도 하나님이십니다.” 

 우리는 요나의 경험을 통해서 누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는지도 물어봐야 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로마 병정이 못 박았다고 그러고 또 어떤 사람들은 유대인들이 못 박았다고 합니다. 감상적인 사람들은 자신이 못 박았다고 이야기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성경은 하나님께서 못 박았다고 말씀합니다.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사 53:6). “여호와께서 그로 상함을 받게 하시기를 원하사” (사 53:10). 성부 하나님께서 성자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신 것입니다. 왜냐하면, 택하신 자들을 하나도 남김 없이 다 구원하시고자 그런 고난을 주신 것입니다. 

우리 삶 가운데는 우리의 어리석은 불순종으로 인해 초래되는 망신과 위험과 징계가 많습니다. 우리가 얼마나 어리석습니까? 저는 나이가 육십이 되어도 어리석은 짓을 했다고 생각할 때가 참 많습니다. 이처럼 우리의 불순종으로 초래되는 위험과 망신과 징계가 많지만 하나님께서는 우리 성도들에게 형벌을 내리지 않으십니다. 형벌은 불신자들에게 내리는 것입니다. 우리 성도들에게는 징계를 내리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삶 속에 하나님께서 징계를 내리시고 수치와 위험이 임하면 사람들은 자책을 합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자신에게 고통을 준 사람을 원망합니다. 하지만 자책하지도 마시고 원망하지도 마십시오. 왜냐하면, 궁극적으로 다 하나님께서 행하신 것이기 때문입니다. 불순종으로 인하여 내 삶에 고통이 왔다면 그것은 하나님께서 행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허물과 죄악도 모두 선으로 바꾸시고 우리의 고난이 도리어 다른 사람의 구원이 되는 은혜를 베풀어 주시는 분인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요나가 불순종하여 물고기 뱃속에서 삼 일 삼 야를 있다가 니느웨에 토해졌을 때 얼마나 고통스러웠겠습니까? 요나는 앗수르의 수도 니느웨에 가서 전하고 싶지 않았지만 할 수 없이 하나님의 말씀을 전합니다. “사십 일이 지나면 니느웨가 무너지리라” (욘 3:4). 이것을 영어로 하면 여덟 글자이고 히브리어로 하면 다섯 글자입니다. 요나는 가장 짧은 설교로 큰 부흥을 본 사람입니다. 다섯 글자의 설교를 통해서 니느웨 사람들이 왕부터 시작해서 짐슴까지 모두가 베옷을 입고 금식하며 회개하였습니다. 그래서 결국 하나님께서는 니느웨를 구원하셨습니다. 요나는 불순종하여 고난을 받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바꾸어 앗수르를 구원하신 것입니다. 

 “우리가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핍박을 받아도 버린 바 되지 아니하며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하고” (고후 4:8-9) 우리는 결코 망하지 않습니다. 아무리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고 거꾸러뜨림을 당해서 우리는 망하지 않습니다. 우리 삶에는 고난이 많습니다. “인생은 고난을 위하여 났나니 불티가 위로 날음 같으니라” (욥 5:7). 그러나 죄로 인한 고난이 와도 낙심하지 않을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의 고난을 바꾸어 선을 이루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롬 8:28). 

페니 크로스비(Fanny J. Crosby)
그녀는 세상에 태어난지 6주 만에 의사의 실수로 시력을 영구히 잃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녀는 1915년 95세로 생을 마감하는데 95년 동안 살면서 비록 눈은 보이지 않았지만 그녀의 영혼은 하나님을 얼마나 사모했는지 찬송 9000편을 만들었습니다. 그녀가 시각 장애인이 된 것으로 인하여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구원받았습니까? 제가 처음 예수님을 믿고 28세에 새벽기도를 나가게 된 것은 새벽기도 시간이 되면 동네 감리교회에서 카세트테이프에다 확성기를 연결해 찬송가를 틀었습니다. 그 소리를 듣고 일어나 새벽기도를 갔는데 그때 들은 “나의 갈 길 다가도록”이란 찬송이 얼마나 은혜가 됐는지 모릅니다. 동서남북 모두 막혀서 답답해도 위는 항상 열려 있습니다. 위에서 도움을 주시고 우리의 악을 선으로 바꿔주시는 하나님을 바라보며 낙심하거나 답답해하지 마시고 하나님의 위대한 승리를 경험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 7월 2일(금)

♦ 오늘 읽어야 할 말씀 : 요나 2:1∼10
♦ 묵상을 위한 주제 : 나의 서원(9절)
♦ 성구 : 나는 감사(感謝)하는 목소리로 주(主)께 제사(祭祀)를 드리며 나의 서원(誓願)을 주(主)께 갚겠나이다 구원(救援)은 여호와께로서 말미암나이다 하니라.

요나의 서원은 무엇이었을까요?
또한 이 시대를 살아가는 나의 소원은 무엇인가요?
나의 소원은 열매를 드리는 것입니다.
열매를 드리려고 “불낙지 목회”를 하겠다고 다짐하며 뉴욕으로 이주했습니다.
“불낙지”란 “불신자” “낙심자” “지체하며 머뭇거리는 자”를 구원하는 것입니다.
아직도 주님이 좋아할만한 열매를 드리지 못하여 늘 마음이 무겁습니다.
그러나 마음속에 품고 기도하는 “불낙지”들을 생각합니다.

물고기 뱃속에서 요나는 니느웨로 가라는 명령을 따라 순종하지 못한 것을 회개한 것이 아니라 “내가 받는 고난을 인하여 기도 한다”고 합니다(2:2).

기도하려면 여호와 말씀을 받았을 때 기도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기도하려면 다시스로 가기 전에 기도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기도하려면 배 밑창에 눕기 전에 기도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기도하려며 바다로 던져지기 전에 기도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여러분은 지금 어떤 때를 지내고 있습니까?
기도의 때를 붙잡고 풍랑이 오기 전에, 바다에 던져지기 전에 미리 기도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그 때 기도했으면 좋았을 텐데......
때 늦은 후회 보다는 물질적으로, 시간적으로, 신앙적으로 어려움을 경험하지 않고 미리 기도하는 일에 성공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 찬양 / 기도하는 이 시간

https://www.youtube.com/watch?v=nL5n45PYqJo

예수 내 구주!
예수 내 생명!
예수 내 권세!

(탈무드)
하나님과 천사들이 회의를 합니다.
내가 어디에 숨어야 하겠는가?
다양한 대답이 있었다.
숲속에, 땅속에, 하늘 꼭대기,
그런데 사람들은 어디든지 찾아온다.
그 때 한 천사가 하나님에게 "사람의 마음에 숨으십시오."
사람들은 하나님을 나의 밖에서 찾으려고 한다.
그러나 하나님은 내 안에서 찾아야 한다.

니느웨 / 합의

다시스(히-תרשיש(타르쉬쉬), 영-Tarshish)라고 불리운다.  / 전쟁, 정련, 해변
금속 '정련', '전쟁'이라는 의미를 가지는데,
특히 산스크리트어(Sanscrit)나 아리안어(Aryan)로는 '해변'(the sea coast)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요나 1:17(히브리 성경 2:1)

여호와께서 이미 큰 물고기를 예비하사 요나를 삼키게 하셨으므로 요나가 삼일 삼야를 물고기 배에 있으니라.              

예비하다(마나, mânâh) / מָנָה 
나누어지다. 할당하다. 준비하다

4:6, (박 넝쿨)준비하사
4:7, (벌레) 준비하사
4:8, (뜨거운 동풍) 준비하셨고

요나 2:9

나는 감사하는 목소리로 주께 제사를 드리며 나의 서원을 주께 갚겠나이다
구원은 여호와께로서 말미암나이다 하니라.

구원으로 인한 세 가지 변화 

1. 언어(감사), 2. 예배(제사), 3. 순종(서원)

감사(토다. tôwdâh) תּוֹדָה / 감사, 고백

제사(자바흐. zâbach) זָבַח  / 살륙하다, 제사드리다

서원(네데르. neder) נֶדֶר /


구원(예슈아. yeshûwʽâh) יְשׁוּעָה  / 구원, 복지, 구원받은 것

요나의 기도(1:17-2:9)

1. 물고기 뱃 속에서(2:1)
- 스올의 뱃속(2:2)

* 기도는 환경을 극복하는 것이다!

앗수르의 주신(主神) : 다곤(물고기 형상)
3일 : 변화의 시간(지하 세계를 내려가는 시간)
이삭의 번제물 3일의 길
예수님의 부활의 시간

2. 깊음속 바다 가운데(2:3, 5)
- 선원들 / 주께서 던지셨으므로 

* 기도는 주인이 누구인지 아는 것이다!
 


다곤(Dagon) 또는 다간(Dagan)은 메소포타미아 북서부에 살던 셈족(아카드, 아시리아, 바빌로니아)과 동부 셈족의 다산의 신이었다. 곡물, 생선, 어업의 신으로 표현되기도 한다.
아슈도드와 가자에 신전이 있었고 구약성서의 삼손이 죽은 곳이 가자의 다곤 신전으로 알려지고 있다.

3. 주의 성전을 바라보겠다(2:4)
- 주의 목전에서 쫓겨났을지라도

* 기도는 주님만 바라보는 것이다!

4. 영혼의 회복
- 내 영혼이 내 속에서 피곤할 때

* 기도는 영혼의 회복이다!

환경을 극복
역사의 주인을 아는 것
주님만 바라보는 것
영혼의 회복

오늘의 기도

신앙생활을 영적생활로 전환하자

언어, 생각, 행동, 습관, 삶


앗수르(Ashur, Assur)

1. 셈의 둘째 아들 이름 “셈의 아들은 엘람과 앗수르와 아르박삭과 룻과 아람이요”  (창 10:22)

2. 앗시리아 사람들이 섬기던 主神의 이름, 앗시리아의 최고의 신이며 앗시리아의 수호신이다.
고대 앗시리아 제국 시절에는 앗수르 신이 수메르 신화의 엔릴(Enlil)과 같은 신으로 숭배되다가, 중 앗시리아 제국시절에는 바벨론의 마르둑(Marduk) 신과 같은 위치로 숭배되다가, 신 앗시리아 제국시절에는 엔릴의 아버지인 ‘하늘 전체’를 뜻하는 안샤르(Anshar) 신으로 섬기기도 했다.

이 말은 앗시리아가 오랫 세월 동안 존속하면서 강성해져서 고대근동의 최강자로 군림할 때 마다 그들의 주신 앗수르의 위치를 타민족이 섬기던 최고 신과 같은위치로 숭배했다. 그들이 정복한 나라의 만신전에서 섬기던 최고신이 바로 앗수르 라고 주장한 것이다. 그래서 앗수르를 때로 엔릴, 때로 마르둑, 때로 안샤르로 여긴 것이다.

3. 고대 앗시리아(Old Assyrian Kingdom)의 최초의 수도 (도시 이름), 티그리스강의 상류  서쪽 제방에 위치하며 현재 이라크의 자브 천의 북쪽이다. (앗수르, 니느웨, 하란, 갈그미쉬 등 천도)

앗수르의 발굴은 1898년 독일 고고학자에 의해 시작되었다. 프리드리히 델리츠시에 의해 시작되어 1903~1913년까지 계속되었다. 16,000개 이상의 설형문자 점토판이 발굴되었다. 대다수가 베르린의 퍼가본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

이 중 앗수르의 주신에 대해 살펴보자.

주신인 앗수르 명칭은 표기에 따라 Ashur, Assur, Aššur, A-šur, Aš 으로 표기하기도 한다.
앗시리아 만신전(pantheon)의 최고신이다.
출토된 한 석비에 각인된 양각(陽刻) 은 신 앗시리아에 속한 것으로 앗수르 신(Ashur)이 두 날개를 달고 손에 활을 가진 모습(figure)이다. 태양을 상징하는 원반(disc)이 있다. 수레(wheel)처럼 보이기도 한다. 태양신의 전사의 모습이다. 이 석조(relief)는 주전 9세기 혹은 8세기에 속한다 (9th or 8th c. BC relief).

앗수르(Ashur) 신은 메소포타미아 남쪽 수메르에서 섬기던 니푸르(Nippur)의 주신인 엔릴(Enlil)로 간주되기도 있다. 엔릴신은 남부 메소포타미아의 만신전(萬神殿 pantheon)에서 가장 중요한 신들 중 하나로, 아내는 닌힐(Ninhil) 신이었다. Enlil + Ninhil = Ninurta, Zababa가 태어났다. 앗수르의 배우자는 물리수(Mullisu) 여신이다. 중기 앗수르 제국시절에 발달된 신화가 주전 13세기에 자리를 잡았고, 주전 8세기와 7세기 까지 앗수르의 신화는 계속 전해내려 왔다.

Anshar + Kishar = Enlil
Enlil + Ninhil = Ninurta, Zababa

앗시리아인들은 타민족을 정복하고서 그들에게 앗수르 신을 숭배하도록 강요하지 아니했다. 그 대신 앗시리아인은 피정복민들에게 선포하기를 그들이 섬기는 신들이 그들을 버렸다고 선전했다. 앗시리아가 사르곤시대(the Sargonid period, 주전 8~7세기)때 신바벨론을 정복했을 때, 앗수르 신의 이름을 설형문자로 안샤르(Anshar, 아카드언어로 “하늘 전체”)신의 기호로 사용하기 시작했다. 바벨론의 만신전에 앗수르신을 최고의 주신으로 모실 의도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본래 바벨론 만신전에 안샤르신과 그의 배우자 키샤르(Kishar, "땅 전체“)가 엔릴과 닌힐신 보다 서열이 앞섰다. 바벨론의 국가 창조신화(the Babylonian national creation myth)인 에누마 엘리쉬(Enuma Elish)의 사르곤 판에서, 마르둑(Marduk 바벨론의 주신)은 나타나지 않고 대신에 앗수르가 혼돈의 신 티아맛(Tiamat, the chaos-monster)을 죽이고 인간세계를 창조하는 것으로 나온다.

어떤 학자들은 앗수르가 앗시리아 신화에 자주 등장하는 태양원반(the solar disc)로 대표된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이것은 태양신 샤마쉬(the sun god Shamash)를 가리킨다. 앗시리아 왕들 중 앗수르 이름을 가지고 있다. 아슈나시르팔(Ashurnasirpal), 에살핫돈(Esarhaddon = Ashur-aha-iddina), 아슈르바니팔(Ashurbanipal).

 7월 3일(토)
                                                                              

 ♦ 7월 3일(토)

♦ 오늘 읽어야 할 말씀 : 요나 3:1∼10
♦ 묵상을 위한 주제 : 감찰(10절)
♦ 성구 : 하나님이 그들의 행(行)한 것 곧 그 악(惡)한 길에서 돌이켜 떠난 것을 감찰(監察)하시고 뜻을 돌이키사 그들에게 내리리라 말씀하신 재앙(災殃)을 내리지 아니하시니라.  

“감찰(監察)”이란 한자는 “볼 감(監)” “살필 찰(察)”이란 훈(訓)으로 “보살피고 살피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가 믿는 여호와 하나님은 이 땅위에서 전개되는 모든 것을 보살피고 살펴주십니다.

요나의 생(生)을 전반기와 후반기로 구분한다면 전반기의 생은 요나서 1∼2장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반면에 요나의 후반기 생은 요나서 3∼4장에서 찾습니다.

전반기의 삶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불순종했던 모습으로 “자기중심(self centered)”이었습니다. 그러나 후반기의 삶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순종하는 모습으로 “하나님 중심(God centered)”이라고 하겠습니다.


하나님은 모든 것을 감찰(inspection)합니다.

나는 지금까지 하나님 앞에서 자기중심의 삶을 살았는가?

아니면 하나님 중심의 삶을 살았는가를 점검해 보시기 바랍니다.


요나에게 두 번째로 주신 하나님의 명령은 무엇입니까?(2절)

“일어나 저 큰 성읍 니느웨로 가서 내가 네게 명한 바를 그들에게 선포하라.”

요나서 3장의 초점은 니느웨 백성들만을 구원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니느웨에 거주하는 많은 백성들이 하나님의 심판이 선포되는 순간 회개하므로 구원을 얻었다는 것을 말씀합니다.

“요나가 그 성읍에 들어가서 하루 동안 다니며 외쳐 이르되 사십 일이 지나면 니느웨가 무너지리라 하였더니 니느웨 사람들이 하나님을 믿고 금식을 선포하고 높고 낮은 자를 막론하고 굵은 베 옷을 입은지라. 그 일이 니느웨 왕에게 들리매 왕이 보좌에서 일어나 왕복을 벗고 굵은 베 옷을 입고 재위에 앉으니라”(4∼6절)

백성들이 하나님을 믿고, 금식을 선포하고, 베옷을 입고 나왔을 때 권력자들과 귀족들 그리고 왕에게까지 전달되면서 그 마음을 움직인 것입니다. 그 과정이 간단하게 묘사되었지만 한 국가 전체가 주님 앞에 돌아와 구원을 받기까지 다양한 복음 전달 과정을 거쳤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친히 니느웨 백성들의 마음을 열어주셨기 때문에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습니다. 이 사실은 하나님의 구원 역사는 몇몇 선교사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회개하기를 기다리는 모든 사람들에게 하나님께서 구원을 베풀어 주시며, 모든 인류가 구원 받기를 바라는 것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예비해 놓으신 구원 섭리 역사에 따라 부르심에 순종하기만 하면 그곳이 어디든지 구원의 기적이 일어날 수 있습니다.

오늘날도 요나처럼 불순종하며 살았고 하나님의 일에 참여할 수 있는 자격도 갖지 못한 우리들을 요나를 다시 부르신 것처럼 다시 기회를 주시고 또 부르십니다.

주님의 부르심에 순종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그 결과는 주님이 예비하십니다.
무슨 기대를 갖고 순종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예비하신 일을 위하여 무조건 순종할 때 하나님께 쓰임 받는 기쁨이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들을 향한 하나님의 섭리를 깨닫게 될 것입니다.

오늘도 요나처럼 순종하므로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일에 성공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 찬양 / 내 눈을 들어 살피니



예수 내 구주!
예수 내 생명!
예수 내 권세!

요나 3:10

하나님이 그들의 행한 것 곧 그 악한 길에서 돌이켜 떠난 것을 감찰하시고
뜻을 돌이키사 그들에게 내리리라 말씀하신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시니라. 

감찰하다(라아, râʼâh) רָאָה /
1. 보다, 2. 왕의 얼굴을 보다, 3. 하나님의 얼굴을 보다 

감찰하시는 하나님(엘 로이)
창세기 16:13

하갈이 자기에게 이르신 여호와의 이름을 감찰하시는 하나님이라 하였으니
이는 내가 어떻게 여기서 나를 감찰하시는 하나님을 뵈었는고 함이라.

갈대아 우르를 떠나고 10년이 지났을 무렵 아브람의 아내 사래는 남편에게 하나님이 자식을 주지 않으므로 여종 하갈에게 들어가라고 합니다. 아브람은 아내의 말을 듣고 하갈에게 들어갔고 하갈이 잉태하므로 여주인 사래를 멸시합니다. 사래는 네가 받는 모욕은 당신이 받아야 한다며 바가를 긁자 아브람은 당신 마음대로 하라고 합니다. 사래가 하갈을 학대하므로 하갈을 여주인의 집을 떠나 도망합니다.
그때 여호와의 사자가 나타나 하갈에게 네가 낳을 아들은 이스마엘이라고 하며 주인에게 돌아가라고 하므로 하갈은 주인에게 돌아갑니다.


구원은 하나님의 도움을 받는 것
시편 3:2

많은 사람이 있어 나를 가리켜 말하기를저는 하나님께 2)도움을 얻지 못한다 하나이다.

2) 구원 


사도행전 2:40b-41

너희가 이 패역한 세대에서 구원을 받으라 하니.
그 말을 받는 사람들은 세례를 받으매 이 날에 제자의 수가 삼천이나 더하더라.  

요나 3:4

요나가 그 성에 들어가며  하룻길을 행하며 외쳐 가로되
사십일이 지나면 니느웨가 무너지리라 하였더니.

니느웨 성을 삼일 동안 돌며 하나님의 말씀을 전한 것이 아닙니다.
다만 하룻길 즉 통계적으로 1/3에게만 전했습니다.
그런데도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요나의 외침을 들었던 니느웨 성의 사람들 전부에게 그 외침이 전파되어 심지어 왕까지도 회개에 참여합니다.
니느웨 성의 짐승들도 금식하는 기이한 일이 일어났습니다.

하박국 3:2

여호와여 내가 주께 대한 소문을 듣고 놀랐나이다
여호와여 주는 주의 일을 이 수년 내에 부흥케 하옵소서
이 수년 내에 나타내시옵소서 진노 중에라도 긍휼을 잊지 마옵소서.






대각성 운동
제1차 1735-1755, 영국 웨일즈 지방

에반 로버츠(Evan Roberts). 10만 명의 회심을 마음에 품고 기도
그 집회에 하워드 존스톤(Harward Johnston)
평양 장대현교회를 방문하여 설교 할 때 길선주장로의 결단 

오늘의 기도

니느웨의 회개
니느웨의 결단을 내 삶의 현장에서 

마을을 새롭게
도시를 새롭게
각 나라와 각 족속을 새롭게 

7월 5일(월)

요나 4:3

여호와여 원컨대 이제 내 생명을 취하소서
사는 것보다 죽는 것이 내게 나음이니이다.

* 생명(네페쉬. nephesh) נֶפֶשׁ 
숨, 생기, 냄새, 목숨 


생기란 무엇인가요?

하나님의 창조 작업에 있어서 절정은 사람을 만드신 예사롭지 않은 창조의 순간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되니라” (창세기 2:7).

하늘과 땅을 만드신 최고의 창조자께서는 사람을 만드실 때 두 가지 일을 행하셨습니다.
첫째,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셨고,
둘째, 생기를 코에 불어넣으셨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다른 모든 피조물과 사람을 구별시켰습니다.

이 한 구절에 인간 창조에 대한 세 가지 중요한 사실이 담겨 있습니다.

첫째는 하나님께서 그리고 오직 하나님만이 인간을 창조하셨다는 것입니다.

사람은 다른 생명체들로부터 진화하지 않았습니다.
비인격적인 힘들이 모여 사람을 만든 것이 아니었습니다.
모든 세포, DNA, 원자, 분자, 수소, 양자, 중성자, 전자들이 사람을 만든 것이 아니었습니다.
이러한 것들은 오직 사람의 육체를 형성하는 물질들일 뿐입니다.
주 하나님께서 사람을 지으셨습니다.
주 하나님께서는 물질들을 창조하시고, 그 다음에 그 물질들을 사용하셔서 사람을 만드셨습니다.

지으시고 라는 말은 “틀, 모형, 또는 형태를 만들다”를 의미하는 히브리어 야트사르를 번역한 것입니다.
이 말은 창조물을 만들어낼 수 있는 지능과 능력을 가진 토기장이의 모습을 연상시킵니다.
하나님은 사람의 형상을 염두에 두고 그 형상에 생명을 불어넣을 수 있는 능력과 지능을 가지신 대장 토기장이이십니다.
하나님은 당신이 원하셨던 것을 정확하게 이루어내실 수 있는 전지 (모든 것을 아는)와 전능 (모든 능력을 가진)의 소유자이십니다.

둘째,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생명의 호흡을 사람에게 불어넣으셨다는 것입니다.

사람은 “흙”이나 물질적 존재 그 이상입니다.
우리는 방금 하나님께서 땅의 흙으로 만드신 아담의 몸, 즉 땅 위에 생명 없는 인간 육체로서 누워있는 몸을 그려볼 수 있습니다.
그 때 하나님께서 몸을 구부리셔서 그 사람의 코에 당신의 “생기”를 “불어넣으”셨습니다.
하나님은 생명의 근원이시고, 직접 사람 몸 안에 생명을 넣으셨습니다.
이 생명을 넣어 주는 숨은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새 생명을 불어넣어주시는 요한복음 20:22 에서 다시 볼 수 있습니다.

셋째, 창세기 2:7은 사람이 생령이 되었다고 말씀합니다.

은 히브리어 네페쉬 로서 그 의미는 “살아있는, 숨쉬는, 의식을 가진, 살아있는 존재”입니다.
사람은 하나님께서 그에게 생명을 불어넣으시기 전까지는 생령이 되지 못했습니다.
육체적으로 움직이며 이성적이고 영적인 존재인 사람은 땅 위의 모든 살아있는 것들보다도 특별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생기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사람이 살아 움직일 수 있도록 불어넣어진 하나님의 생명과 능력입니다.
에 해당하는 히브리어는 루아흐로서 “바람, 숨결, 공기, 영”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의 생명은 계속해서 살아가는 것이며 사람의 무형적 부분은 영원히 살도록 디자인되었습니다.
오직 남는 질문은 ‘어디에서 살 것인가’하는 것입니다.

열왕기상 19:4b

여호와여 넉넉하오니 지금 내 생명을 취하옵소서 나는 내 열조보다 낫지 못함이니이다.

* 생명(네페쉬. nephesh) נֶפֶשׁ 
숨, 생기, 냄새, 목숨 

믿음의 갈등

도시 문화 : 광야 문화

광야의 삶
- 하나님의 도움이 없으면 생존 불가능한 곳
(하나님 중심)

도시의 삶
- 돈이 있으면 원하는 것을 마음껏 누릴 수 있는 곳
(물질 중심) 

요나 4:6

하나님 여호와께서 박넝쿨을 예비하사 요나를 가리게 하셨으니 이는 그의 머리를 위하여 그늘이 지게 하며 그의 괴로움을 면하게 하려 하심이었더라 요나가 박넝쿨로 말미암아 크게 기뻐하였더니.

요나의 기쁨은 무엇인가?



엘리야는 왜 죽여 달라고 합니까?

일반적으로 죽여 달라는 말은 두 가지로 쓰이는 것 같습니다.

하나는 내가 죽을 죄를 지었으니 죽여 달라는 자기에게 잘못이 있는 경우
다른 하나는 의견은 맞지 않고 맘대로 할 수도 없는 불편한 관계일 경우

그렇다면 ‘상황만 보고 기도하지 않은 경우’와 ‘승리에 도취하여 허를 찔려 일을 그르친 경우’ 모두 엘리야가 잘못하였기 때문에, 죽여달라는 엘리야의 말은 ‘이 죄인 면목 없습니다. 죽여주십시오’라는 뜻일 것입니다.

그런데 북왕조 이스라엘의 선지자가 왜 남왕조 유대 땅 최남단의 브엘세바까지 내려왔으며, 다시 광야로 들어가 로뎀나무 아래까지 와서야 그런 소리를 합니까?

그냥 아무데서나 석고대죄하면 되지 않겠습니까?
그러고 보니 엘리야의 말투는 무언가 불만스러워 투정하는 듯한 느낌은 들지언정, 죄인의 자세로 보이지는 않습니다.

“주여 넉넉하오니 지금 내 생명을 취하소서. 나는 내 열조보다 못합니다.”

죄인이라기엔 너무 뻣뻣해 보이지 않습니까?
내용인즉 ‘넉넉하니 죽여 달라’는 것과 자신이 ‘열조보다 못하다’는 것인데, 잘못했으면 ‘면목 없으니 죽여 달라’고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아무리 살펴봐도 엘리야가 자신의 잘못을 부끄러워하거나 자책하는 모습은 보이지가 않습니다.
오히려 오만하다고 할 만큼 당당하게 불평하는 모습이 보입니다.
그렇다면 갈등 때문이라고 보아야 하는데, 누구와의 갈등이며 무슨 갈등일까요?

1.  또 재앙입니까?(열왕기상 17:17-24)

엘리야는 사렙다 과부의 아들이 죽었을 때에 “나의 하나님 여호와여 원컨대 이 아이의 혼으로 그 몸에 돌아오게 하소서”라고 기도하면서 이상한 말을 덧붙입니다.

“또 내가 우거하는 집 과부에게 재앙을 내리사 그 아들로 죽게 하셨나이까?”
‘또 과부에게 재앙을 내렸다’고 하는데 암만 생각해도 부적절한 표현입니다.
엘리야가 하나님께 기도하거나 말씀드리는 장면이 여기가 처음입니다.
기도를 안 했다는 말이 아니라 성경이 이 대목을 처음으로 제시하고 있기 때문에 여기서 답을 찾아도 좋을 것 같습니다.

엘리야의 기도에서는 하나님께 대한 불만이 느껴집니다.
좀더 정확하게 말해서 이곳과 로뎀나무 아래서와 호렙산에서의 세 번에 걸친 하나님께 대한 언사(言辭)엔 일관되게 불만과 회의가 짙게 깔려있음을 읽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엘리야의 태도가 죄인이라기엔 너무 당당합니다.

하나님은 흔히 말하듯 ‘생사여탈권’을 가지신 분이십니다.
과부의 아들이 죽었을 때에 왜 아들을 죽였느냐고 불평하며 항의할 이유가 없습니다.
죽어서 안 될 특별한 약속이나 사연이 있는 것이 아니므로 그냥 ‘하나님 이 아이를 살려 주세요’라고 기도하면 되는 것이지 ‘왜 이 아이를 죽였느냐’고 항의하거나 ‘또 재앙을 내리시느냐’고 할 이유가 없다는 말입니다.
무식하면 용감하다고 당사자인 여인이거나 혹 우리 같으면 따지고 대들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의 신실한 종인 엘리야가 그럴 수는 없는 일입니다.
문제는 그래서 안 되는 엘리야가 그런다는데 있습니다.

하나님은 전지전능하신 분으로 이스라엘을 통치하십니다.
아합 왕과 백성들이 하나님을 떠나 우상을 섬겼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재앙을 내리셨고 비와 이슬이 그쳤습니다.
기근이 시작되면서 제일 먼저 고통당하는 것은 힘없는 백성들입니다.
사렙다 과부도 한 끼 식량을 끝으로 죽음을 준비했었습니다.
그런데 그 하나님께서는 선지자 엘리야를 매 끼니마다 까마귀를 통해 먹이셨으며, 과부의 집에서도 밀가루 통과 기름병의 기적으로 먹이셨습니다.

엘리야는 하나님의 종이면서 이스라엘의 선지자입니다.
선지자는 하나님과 백성 사이에서 일하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의 백성도 사랑합니다.
자신을 매일의 기적으로 보살피시는 하나님이 감사하기 짝이 없지만, 자기 백성은 기근으로 굶주리며 고통당하는 것을 생각하면 마음이 아픕니다.
자기 백성은 굶주리는데 백성의 어른이며 선지자인 자신만 매일 배불리 먹는다는 사실이 오히려 괴롭습니다.
차라리 백성과 함께 굶주리는 것이 마음이라도 편하지 않겠습니까?
그가 하나님의 종이고 이스라엘의 선지자라면 마땅히 가져야하는 마음가짐이라고 생각합니다.

자식의 고통을 대신할 수 없는 것이 부모에게는 고통입니다.
자식이 고통을 당하는데 음식이 넘어가겠으며 잠인들 편히 잘 수 있겠습니까?
엘리야는 배불리 먹는 것이 오히려 고통이요 괴로움이었을 것입니다.
자신을 매 끼니마다 기적으로 돌보시는 하나님의 전능하심이 왜 백성을 위해서는 재앙으로 밖에 내리시지 않으시는가?
아합 왕과 그 추종자들과 백성들까지 우상을 섬기는 죄를 범하였기에 기근이라는 재앙을 내리신 것을 이해 못하는 것은 아니지만, 하나님의 전능하신 능력으로 고작 이 재앙 밖에 달리 하실 방법이 없단 말인가?

하나님은 백성의 마음을 돌이키게 하시는 능력도 가지신 분이 아니신가?(18:37)
이런 생각들이 엘리야의 마음을 혼란스럽게 하였을 것입니다.

설사 재앙이 유일한 답이라고 해도, 재앙으로 달라지는 것이 무엇입니까? 정작 처벌의 대상인 왕과 그 추종자, 이세벨과 바알과 아세라 선지자들은 끄떡없이 잘 지내고 있습니다. 헐벗고 굶주리는 것은 힘없는 불쌍한 백성들뿐입니다. 그릿 시냇가에서 까마귀가 물어다 준 떡과 고기의 출처가 어디겠습니까? 아합 왕의 궁궐이나 바알과 아세라 제단에서가 아니면 어디에 떡과 고기가 있겠습니까? 엘리야의 눈에는 하나님의 통치 방법인 재앙으로는 되는 것이 하나도 없어 보입니다. 왕과 이세벨이 달라집니까, 바알 제사장들이 달라집니까? 그렇다고 백성들이 달라지는 것도 아닙니다. 그저 힘없고 가난한 백성들만 굶주리는 것 말고는 아무 것도 달라지는 것이 없습니다.

엘리야는 아이가 죽었을 때에 마음에 담아두었던 불만을 토로한 것이 아닐까요? 하나님께 대한 불만이 있어도 말할 기회가 없었는데, 아이가 죽자 기회로 알고 하나님께 항의하는 엘리야로 제 눈에는 보입니다. “또 재앙입니까?”

2. 또 숨으십니까?(열왕기상 19:1-4)

갈멜산에서 바알 선지자 450명과의 대결에서 승리를 거두고 바알 선지자들을 처단한 엘리야는 아합 왕에게 ‘곧 비가 올 것이니 식사를 하십시오’라고 권하였고, 또 비를 위하여 기도한 후 구름 조각을 보고 큰 비에 막히지 않도록 마차를 준비하라고 권합니다. 자기를 대적이라던 아합 왕이 순순히 따르는 것을 보면서 엘리야는 한 없이 기뻤을 것입니다. 왕이 자기 말을 들었다는 것은 곧 하나님의 말씀을 들은 것이므로, 이제는 하나님이 다스리는 나라가 도래하였다고 생각하였기 때문입니다.

갈멜산에서 이스르엘까지는 서울과 인천만큼 먼 거리입니다.
엘리야는 폭우가 쏟아지는 그 먼 길을 이 기쁨과 감격 때문에 달릴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세벨이 사람을 보내 자기를 죽이겠다고 협박합니다. 엘리야는 그녀의 협박에 겁을 먹고 도망할 사람이 아닙니다. 더구나 기도도 해보지 않고 도망하였다는 발상은 유치하기 짝이 없습니다. 오히려 엘리야는 코웃음을 쳤을 것입니다. ‘네가 아직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를 모르고 있구나’라고 생각하였을 것입니다. 그는 확신이 넘쳐 기도합니다. ‘하나님 이세벨을 처단하십시오. 이제 하나님께서 이 땅을 다스리시는 것을 저가 아직 알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분위기가 이상합니다. 불길한 생각이 스칩니다. 응답이 없으신 겁니다. 하나님께서 또 잠수(潛水)하셨음을 그는 감지합니다.

엘리야는 하나님께서 재앙이나 내리시면서 숨어 계시던 시대는 이제 지나갔다고 생각하였을 것입니다. 이제부터 본격적으로 진두지휘를 하시며 이스라엘을 다스리실 것으로 믿어 의심치 않았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다시 손을 빼신 것입니다. 엘리야는 부득이 도망을 갈 수밖에 없었고, 로뎀나무 아래서 죽여 달라고 하기에 이릅니다.

형편을 보고 도망하였다는 것을 기도도 안 해보고 상황만 보고 도망한 것으로 해석해서는 안 됩니다. 엘리야를 그렇게 신앙의 왕초보로 보게 되는 이유가 전체를 보지 못하고 앞뒤도 없이 토막내서 보는 습관 때문입니다. 기도로 죽은 자를 살려내는 엘리야입니다. 불을 내리실 하나님에 대한 전적인 믿음 때문에, 제물을 태울 나뭇단에 12동이의 물을 퍼붓는 엘리야입니다. 구름 한 점 없는 마른 하늘 아래에서 3년이나 오지 않던 비를 달라고 기도하고, 손바닥만한 구름 한 조각을 보고 큰 비가 내릴 것이라고 말하는 엘리야입니다. 이런 엘리야가 그 정도로 한심한 수준이겠습니까? 그 동안의 엘리야를 보았다면 이런 해석을 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대저 그 마음의 생각이 어떠하면 그 위인도 그러한즉...(잠 23:7).

엘리야가 사태를 낙관했다가 이세벨에게 허를 찔렸다는 해석도 맞지 않는 해석입니다. 이 싸움은 숫자 싸움이나 세 불리기 쪽으로 끌고 갈 문제가 아닙니다. 산야를 덮은 적진을 유린하는 관운장처럼 갈멜산에서 450명의 바알 선지자와 홀로 싸웠던 엘리야입니다. 또 갈멜산의 대결 후 며칠이 지난 것도 아니고 지금이 그날 밤일 것입니다. 낙관을 안 했다면 무슨 대책을 세워야했으며, 대책을 세운들 그게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이쪽으로 가다가는 문제의 본질을 희석시키거나, 초점을 딴 곳으로 호도하는 우를 범하기 십상입니다.

엘리야가 하나님께 떼를 쓰는 이유는 엘리야 자신이나 이세벨 따위가 문제가 아니라 바로 하나님이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이제는 백성들도 바알의 선지자들을 죽이라는 자신의 명령을 듣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되었습니다. 아합 왕도 하나님의 선지자인 자신의 말을 들었습니다. 이제 이 나라는 하나님께로 돌아왔습니다. 왜 입니까? 이제 하나님께서 전방위로 나서셨기 때문입니다.

갈멜산에서 바알 선지자들에게 큰 소리를 치면서 조롱할 수 있었던 것도 하나님의 전방위 복귀에 대한 약속 때문입니다(18:1). 제단 나무 위에 물을 12통을 붓게 한 것도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확신 때문이었습니다. 실제로 하늘에서 불이 내립니다. 그 불이 나무는 물론 물을 핥았고 흙도 태웠습니다. 3년 동안이나 오지 않던 비가 구름 한 조각 보이더니 폭우가 되어 쏟아집니다. 모두 하나님께서 이제 더 이상 숨어 계시지 않고 당신의 위대하신 모습을 수면위로 드러내셨다는 사실을 만방에 알리신 것이 아니고 무엇이란 말입니까?

이 하나님을 바알 선지자도 보았고, 백성도 보았고 왕도 보았습니다. 이제는 하나님이 숨어 계시지 않고 앞에 나타나셔서 이 나라를 다스리시기로 작정하셨음을 엘리야뿐만 아니라 백성들과 아합 왕도 의심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이제는 하나님의 이름이 모독을 당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다스리시고 백성들은 순종하였으니 이 땅에 재앙이 그치고 복이 내릴 것입니다. 백성은 굶주리지 않아도 되고 하나님의 이름은 높임을 받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도래하였습니다. 엘리야는 이 감격으로 갈멜산에서 이스르엘에 이르는 먼 길을 폭우 속에서도 달릴 수 있었습니다. 진정 하나님의 선지자 된 기쁨이 이런 것이 아니겠습니까?

하나님과 백성이 화목하여 복을 받는 나라를 보는 선지자의 기쁨. 그런데 이 기쁨이 순식간에 공수표가 되어 날아가 버리게 되었습니다. 이세벨 때문이 아닙니다. 엘리야 자신 때문도 아닙니다. 하나님이 문제입니다. 하늘에서 불을 내리신 분이, 12통의 물을 기름처럼 태우시는 분이, 3년 동안 비와 이슬을 그치게 하시던 분이, 마른 하늘에 구름 한 조각을 뜨게 하시더니 삽시간에 폭우로 마른 땅을 적시게 하시는 분, 이 하나님께서 발을 빼시는 것이 문제지 그까짓 이세벨 따위가 문제이겠습니까? 이제 하나님께서 이세벨 하나만 제거하시면 온전히 하나님이 다스리시는 아름다운 나라가 될 것입니다. 그런데 다 된 밥에 코 빠뜨린다는 속담처럼, 그토록 오랫동안 고대하던 하나님이 통치하시는 나라가 다 되었는데, 이세벨 하나만 제거하면 다 끝나는데, 여기서 또 발을 빼십니까?

‘당신이 이 나라를 다스리시나이까?’

이 말은 아합 왕이 나봇의 포도밭을 후한 값을 주고 사겠다는 데도 거절당하자 속이 상해서 식사를 거절했을 때에 이세벨이 한 말입니다(왕상 21:7). “왕이 이제 이스라엘 나라를 다스리시나이까?” 이방 여인의 눈에는 아합의 태도가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왕이라는 사람이 백성이 거절한다고 속이 상해 밥을 안 먹어? 그러고도 당신이 왕이요?’ 그녀는 즉각 거짓 증인을 세워 ‘왕에게 땅 팔기를 거절했던 나봇’을 간단히 제거하고 아합 왕에게 그 밭을 차지하게 합니다. 아합의 통치 방법과 이세벨의 통치 방식의 차이입니다.

이스라엘을 다스리시는 하나님의 통치 방법에 대한 엘리야의 불만이 바로 여기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나야 무능하니까 어쩔 수 없지만 전지전능하신 하나님께서 그렇게 밖에 못하십니까? 3년 동안 기근을 명하시고, 3년이 지난 지금 그 엄청난 기적을 베푸셔서 백성과 왕의 마음을 돌이키게 해 놓으시고서는 여기서 손을 떼십니까? 여기서 손을 떼시면 이 나라가 어찌 되겠습니까? 다시 옛 모습으로 돌아가 버리지 않겠습니까? 이세벨이 득세하면 우상을 섬기는 일이 횡행할 것이고, 왕이 다시 우상에게로 백성 또한 그리로 되돌아가지 않겠습니까?

아합 왕이 자기의 대적이라던 나의 말을 듣기 시작하였고, 백성들이 모처럼 “여호와 그는 하나님이시로다! 여호와 그는 하나님이시로다!”하면서 여호와를 부르며 바알 선지자들을 죽였건만, 지금 이 기회를 놓치면 어느 세월에 이 나라가 하나님이 다스리는 나라가 될 수 있겠습니까?’

3. 내 생명을 취하소서(열왕기상 19:3-8)

하나님께서 발을 빼신 이상 이스라엘에 더 머무를 수 없는 것은 자명한 일, 이스라엘을 떠나는 선지자 엘리야의 마음이 얼마나 답답하고 원통하겠습니까?

이스르엘에서 브엘세바까지의 먼 길을 걸으면서 그간의 일을 곱씹어 보면 볼수록 너무 아쉬워서 저절로 탄식이 나옵니다.
‘세상에, 그런 때가 오기를 얼마나 고대하고 사모하였던가?’
그렇다고 달리 방도도 없는 일, 이 모든 결정권이 하나님 손 안에 있고 그 하나님께서 이렇게 만들어 가시거늘...

브엘세바에 도착한 엘리야는 사환을 떼놓고 홀로 로뎀나무 아래 앉아서 죽기를 청합니다.
“여호와여 넉넉하오니 지금 내 생명을 취하소서. 나는 내 열조보다 낫지 못하니이다.”

넉넉하다는 말은 할 만큼 해봤다는 뜻입니다.
내가 하나님의 선지자로 하나님의 일을 할 만큼 해봤습니다.
그런데 더는 못하겠습니다.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즉 얼마나 답답하시고 꽉 막힌 분이신지 이제 알만큼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제 목숨을 취하십시오.
하나님의 종이 자살할 수는 없는 일이고, 살아 있으면서 하나님의 일을 안 할 수도 없고, 일을 하자니 속이 터져서 더 이상은 하나님과 같이 일은 못하겠고... 그러니 죽여 달랄 수밖에 없지 않습니까?

내 열조보다 못하다는 말은 이렇습니다.
모세나 많은 선지자들은 성공적으로 자신의 사명을 완수하였습니다.
모세는 출애굽의 사명을 감당하였고, 여호수아는 가나안 정복을, 다른 선지자들도 나름대로 맡겨진 사명을 다 해냈습니다.
그런데 나는 아무 것도 한 것이 없습니다.
하늘에서 불이 내리고 비가 왔지만 그것 뿐, 이뤄진 것이 아무 것도 없잖습니까?
모든 일에는 시기가 있는 법, 백성들이 여호와가 하나님이라며 환호하고, 아합왕이 순한 양같이 고분고분 말을 듣는 이 기회를 놓치면, 백성도 왕도 우상에게로 되돌아갈 것이 명약관화(明若觀火)한 일. 그래서 이쯤에서 손을 떼고 싶으니 나를 죽이십시오. 이런 뜻이 아닙니까?

오래 전 영화에 이런 장면이 나옵니다.
교도소에서 간수가 녹녹치 않은 죄수를 길들이고 항복을 받아내는 방법으로 땅을 파게 합니다.
가로 얼마, 세로 얼마, 깊이는 얼마. 다 팠을 때에 도로 메우게 하고 다시 파는 일을 반복합니다.
노동의 의미를 빼앗아서 꼿꼿한 죄수를 무너뜨리고 길들이는 방법입니다.

안타깝고 원통하고 착찹하고 아쉽고 분하고... 마음이 상한 엘리야는 하나님께 떼를 씁니다.
“죽여 주소서!”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죽여 달라는 엘리야를 천사를 통해 보살피십니다.
안마를 해주고 떡과 물을 공급하십니다.
왜 그러실까요? 하나님 나라를 위하여 매달릴 때에는 외면하시더니 이제 죽기를 원하는 엘리야를 보살피시는 이유는 도대체 무엇입니까?
종이 엘리야 밖에 없기 때문일까요?
그래도 쓸모가 있다는 뜻일까요?
‘기도도 안 해보고 도망한’ 한심한 엘리야가 아닙니까?
‘의기양양해서 낙관하다가 일을 그르친’ 교만한 종이 아닙니까?

우리는 너무 일에 비중을 두는 경향이 강합니다. 그러다 보니 ‘되어짐’에 대해 놓칩니다. 즉 사람에 대해 놓친다는 말입니다. 엘리야는 하나님께 불만이 많지만 하나님께서는 엘리야에게 불만이 없으십니다. 오히려 하나님과 백성을 위한 열정을 가진 엘리야가 귀하고 사랑스러우셨을 것입니다. 다만 하나님의 깊은 뜻을 모르고 마음이 상하여 괴로워하고 있는 엘리야를 아끼는 마음으로 천사를 보내 보살피시는 것이며 호렙산으로 부르셔서 설득하시려는 것입니다. 엘리야를 이해시키려고 그를 놓지 않으시는 것입니다. 일이 문제가 아니라 사람이 문제입니다. 그가 어떤 일을 하느냐는 그가 어떤 사람이냐에 달려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또 우리는 일의 분량에 초점을 맞추지만 그분은 일의 질에 관심이 있으십니다.

엘리야는 아직 하나님을 모릅니다.
그는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보면서 하나님이 마음에 들지 않습니다.
그가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기 때문이 아닙니다.
그가 이스라엘 나라와 백성에 대한 관심이 없기 때문이 아닙니다.
오히려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스라엘 나라와 백성들을 사랑하기 때문에 하나님을 위한 특별한 열심 때문에 하나님이 이해가 안 되고 불만스러운 것입니다.
그래서 당당하게 하나님께 불평을 하면서 죽여 달라고 떼를 쓰는 것입니다.
엘리야의 이런 중심을 아시고 사랑하시고 아끼시기에 하나님께서는 그를 설득하셔서 동의를 받아내고 싶으신 것입니다.
엘리야 같은 하나님의 종들에게 자신을 알리고 이해 받고 싶으신 것입니다.
나아가서 하나님의 뜻을 이해하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일을 맡기고 싶은 것이 하나님의 간절한 소원이기도 한 것입니다.


신명기 8:2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 사십 년 동안에 네게 광야 길을 걷게 하신 것을 기억하라
이는 너를 낮추시며 너를 시험하사  마음이 어떠한지 그 명령을 지키는지 지키지 않는지 알려 하심이라.  


요나 4:11

하물며 이 큰 성읍 니느웨에는 좌우를 분변하지 못하는 자가 십이만여 명이요 가축도 많이 있나니
내가 어찌 아끼지 아니하겠느냐?

네가 아끼는 것이 무엇이냐?


요나 4:6

하나님 여호와께서 박넝쿨을 예비하사 요나를 가리게 하셨으니 이는 그의 머리를 위하여 그늘이 지게 하며
그의 괴로움을 면하게 하려 하심이었더라 요나가 박넝쿨로 말미암아 크게 기뻐하였더니.

요나의 기쁨은 무엇인가?


요나의 어리석음 

1. 하나님의 뜻을 알지 못한 요나
2. 하나님의 자비를 모르는 요나
3. 심판의 메시지의 의미를 깨닫지 못한 요나

요나 4:10-11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네가 수고도 아니하였고 재배도 아니하였고 하룻밤에 났다가 하룻밤에 말라 버린 이 박넝쿨을 아꼈거든.
하물며 이 큰 성읍 니느웨에는 좌우를 분변하지 못하는 자가 십이만여 명이요 가축도 많이 있나니 내가 어찌 아끼지 아니하겠느냐 하시니라.

오늘의 기도

한 영혼에 대한 주님의 마음으로 주소서!

이기적인 생각을 버리는 은혜
하나님의 뜻 및 구원의 섭리를 깨닫는 은혜 




광야 신앙으로 무장하라(신명기 8:1~4)

1. 내가 오늘 명하는 모든 명령을 너희는 지켜 행하라 그리하면 너희가 살고 번성하고 여호와께서 너희의 조상들에게 맹세하신 땅에 들어가서 그것을 차지하리라
2.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 사십 년 동안에 네게 광야 길을 걷게 하신 것을 기억하라 이는 너를 낮추시며 너를 시험하사 네 마음이 어떠한지 그 명령을 지키는지 지키지 않는지 알려 하심이라
3. 너를 낮추시며 너를 주리게 하시며 또 너도 알지 못하며 네 조상들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네게 먹이신 것은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줄을 네가 알게 하려 하심이니라
4. 이 사십 년 동안에 네 의복이 해어지지 아니하였고 네 발이 부르트지 아니하였느니라.


우리는 문명화된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문명사회, 문명국가, 문명도시에 살고 있습니다. 도시는 매력적입니다. 사람들이 왜 도시로 몰려들까요? 그만큼 매력이 있기 때문입니다.
농촌에는 사람들이 떠나고, 사람들은 도시로 몰려들고 있습니다. 세상은 갈수록 도시화되고 있습니다. 모든 것이 도시에 모이고 있습니다.
그만큼 도시에는 사람들을 불러 모으는 힘이 있습니다. 도시는 언제나 매력적이고, 유혹적입니다. 도시로 가야 먹을 것이 있습니다.

도시는 힘을 모으고, 힘을 자랑하는 곳입니다. 그러나 도시는 굉장히 위험합니다. 온갖 사람들이 다 모여듭니다. 사람만 모이는 것이 아닙니다. 그곳에 사탄이 있습니다. 그래서 악이 작동하기 아주 좋습니다.
도시는 사탄이 활동하기에 편리한 무대입니다. 그리고 도시는 언제든지 하나님을 저항하는 문화로 가득 차있습니다. 세상의 힘을 자랑하는 곳입니다. 사람이 신(神)이 되는 곳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이 없어도 살 수 있을 것처럼 생각하고, 인간이 가진 것을 자랑하는 곳이 도시입니다. 도시는 스스로 하나님이 되려고 하는 사람들이 힘겨루기를 하는 곳입니다.

광야는 전혀 다른 곳입니다. 사람들은 광야를 별로 좋아하지 않습니다. 광야는 사람이 살 곳이 못 됩니다. 광야는 잠시 거쳐 가야 하는 곳입니다.
그런데 성경을 보면, 광야는 싫지만, 광야를 잘 통과하면, 매우 유익하고, 파워 넘치는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광야를 경험한 사람과 경험하지 못한 사람 사이에는 큰 차이가 있습니다. 성경에 보면,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광야를 통해 가나안으로 들어가게 하셨습니다. 반드시 광야를 거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광야의 길로 몰아가셨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광야는 선택이 아니라, 필수적인 과정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에게는 광야가 없습니다. 광야를 경험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오늘도 우리의 삶을 광야로 몰아가십니다.
광야는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있어서 필수코스입니다. 광야는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필수 중의 필수입니다.
최고의 스펙(spec)는 광야의 경험입니다. 다른 것이 다 있다 해도 광야를 체험한 스펙이 없으면,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은 무용지물(無用之物)이 되어버립니다.

예수님도 광야를 경험하셨습니다. 공생애를 시작하시기 전에 광야로 가셔서 40일을 지내셨습니다. 이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광야생활 40년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 역시 아라비아에서 3년 간 광야를 체험했습니다. 하나님은 그 시간을 통해 사도 바울을 새롭게 빚으시고, 그를 하나님의 사람으로 살게 하셨습니다.

모세의 광야생활 40년은 매우 유명합니다. 모세의 생애를 세 부분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애굽의 궁에서의 시간, 광야에서의 시간, 이스라엘 백성들을 출애굽시키는 시간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이 중에서 광야에서의 시간이 매우 중요합니다. 광야를 체험하기 이전과 광야를 체험한 이후의 삶이 완전히 다릅니다. 모세의 생애의 한가운데에 광야에서의 시간이 있습니다.

사무엘상에 보면, 다윗은 왕이 되기 전까지 광야에서 지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광야 체험을 비롯한 하나님의 사람들의 삶의 과정 속에 광야가 놓여있습니다.
광야의 체험 이전과 이후가 완전히 다릅니다.

왜 광야가 필요합니까?
신명기 8장 전체를 읽어보면, 광야를 경험하지 않고, 가나안으로 들어가는 것은 매우 위험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인간은 교만하기 때문입니다.

교만이 무엇일까요?
교만은 하나님을 대적(對敵)하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교만을 엄격하게 다루는 이유는 교만해지는 순간, 하나님을 대적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인간은 왜 교만합니까?
하나님을 망각(忘却)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인간은 쉽게 교만해집니다. 하나님을 망각하고, 스스로 교만해집니다. 그렇게 될 때, 인간은 자신의 능력을 자랑하고, 자신의 힘으로 살아갈 수 있다고 믿습니다.

오늘날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내 힘으로 살 수 있다고 착각하며 살아갑니다. 지금까지 내 힘과 내 재주, 내 능력으로 살아왔다고 생각합니다. 내가 열심히 했기 때문에, 내가 노력했기 때문에, 내가 땀 흘렸기 때문에 내가 여기까지 왔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생각이 쉽게 사라지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여기까지 인도하셨다.”라고 말하지만, 속에는 이런 생각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그리고 나중에는 생각 속에서 하나님이 없어져버립니다.

교만이 왜 무섭습니까?
하나님을 잊어버리기 때문입니다. 성경을 들고 다녀도, 하나님은 없습니다. 하나님을 잊어버렸습니다.

신명기의 키워드(keyword)는 ‘기억하라(remember)’, ‘잊지 말라(don't forget)’입니다.
이 단어가 계속해서 반복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1세대가 실패한 것이 무엇입니까?
그들은 하나님의 은혜를 망각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광야를 지나는 동안, 기적을 밟고 다녔습니다.
그들은 매일 기적 속에 살았습니다.
우리는 이것을 상황적으로 이해할 수 없습니다.

광야에는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만나를 내려주시며 그들의 마음이 어떠한지 보셨습니다.
모아두지 말라고 하신 말씀대로 지키는지 지키지 않는지 보셨습니다.

내일 만나가 내리지 않으면 죽습니다.
만나가 오늘로 끝난다면, 내일은 하늘이 닫혀서 만나가 내리지 않는다면, 광야에는 길이 없습니다.
그냥 죽을 수밖에 없습니다.
마치 벼랑 끝에 놓인 것과 같습니다.
하나님께서 붙들어주시지 않으시면, 떨어질 수밖에 없는, 매우 절박한 순간까지 이르게 됩니다.
이처럼 광야의 경험은 굉장히 위험합니다.

언제 어떤 일이 일어날지 알 수 없는 아찔한 순간입니다.
매우 힘들고 어렵고 까다로운 경험입니다.
모든 것이 시험이고 유혹입니다.

시험에 지면, 졸지에 최악의 순간으로 밀려날 수 있습니다.
우리는 광야의 수많은 시험을 통과하면서 하나님으로부터 ‘합격’이라는 판정을 받아야 합니다.
시험의 한가운데에 생존의 문제가 있습니다. 그런데 생존의 문제는 결코 만만하지 않습니다. 광야에서 생존하려면, 죽을지도 모른다는 공포가 엄습해옵니다.

처자식이 있고, 사업은 뜻대로 되지 않고, 신앙생활은 유지해야 하는데, 앞이 보이지 않습니다. 갈 길이 보이지 않는 순간이 옵니다. 막막합니다. 전세가는 올라가고, 돌려줄 돈은 없고, 집에서 나가야 할 상황입니다.

광야에는 길이 없습니다. 내가 내 힘으로 노력해서 해결할 수 있는 기미가 보이지 않습니다. 내가 노력해서 내 삶의 문제를 풀어갈 수 있는 기미라도 보인다면 괜찮을 텐데, 아무것도 보이지 않습니다.

급할 때 도시에서는 고리대금이라도 얻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광야에서는 아무런 기미도 보이지 않습니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습니다.

광야에서의 레슨(lesson)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아무도 없는 곳에서의 훈련입니다.
광야에는 의지할 사람이 없습니다.
의지할 것이 전혀 없는 곳이 광야입니다.
우리에게 도움이 되고, 우리가 의지할 만한 것이 전혀 없습니다.

광야 훈련을 받지 못하는 사람은 의지할 데가 많습니다.
기댈 언덕이 많습니다. 그런 사람은 광야 훈련을 받을 수 없습니다.
도움이 되는 사람이 보이는 곳은 광야가 아닙니다. 광야는 도움이 되는 것이 아무것도 없는, 절박한 상황입니다.

생존 훈련에서 중요한 것은

첫째, 환경 속에서 하나님이 책임지시는 것을 경험하는 것

광야에서 하나님의 공급의 특징은 충분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공급해주시지만, 충분하지 않습니다. 만나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공급으로 만족하는 것을 훈련해야 합니다. 의지할 것이 아무것도 없는 가운데 하나님의 공급이 주어졌습니다. 그런데 도시에서의 삶과는 비교할 수 없이, 만족스럽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에 만족하는 훈련을 해야 합니다. 그것이 어떤 것이든, 하나님께서 제공하시는 것으로 만족하는 훈련을 해야 합니다. 이것이 광야 훈련입니다. 광야에서의 하나님의 공급을 통해 생명을 쥐고 계시는 하나님을 경험해야 합니다.

아무것도 없는 곳에서 생존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아무것도 없는 곳에서 생존한다는 것은 하나님 외에는 불가능하다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이 없으면 한순간도 살 수 없는 환경이 되어야 광야를 확실하게 체험할 수 있습니다. 이것을 체험해보셨습니까? 하나님이 없으면 설명할 수 없는 인생을 경험해보셨습니까? 기댈 언덕도 없고, 도움을 구할 데도 없습니다.

하나님의 편에서 하시는 일은 하나님이 없으면 설명할 수 없는 인생으로 이끌어 가십니다. 언제 예배가 가능합니까? 광야에서 온전한 예배를 드릴 수 있습니다. 광야 체험을 통해 하나님이 하나님이심을 고백할 수 있습니다.
광야는 어떤 곳입니까? 빵보다 하나님을 먼저 배우는 곳입니다. 작은 것에서 하나님께 감사하는 훈련을 하는 곳입니다.

왜 우리는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경험해야 합니까? 우리는 우리의 생존을 위해 하나님을 이용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인정하는 훈련을 해야 합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에서 시험이 되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이 될 것인가,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예배할 것인가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내 삶의 도구로 이용하려 합니다.
그러나 광야를 통해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인정하고,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예배하는 훈련을 해야 합니다.

광야에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볼 것도 없고, 붙잡을 것도 없고, 귀에 들리는 것도 없고, 먹을 것도 없습니다.
그러나 도시의 삶은 이와 반대입니다. 볼 것도 많고, 느낄 것도 많고, 붙잡을 것도 많고, 귀에 들리는 것도 많습니다. 만날 사람도 많습니다.
이런 도시의 삶에는 하나님을 경험하는 데 방해가 되는 것이 많습니다. 많은 것들이 하나님과의 관계를 차단시켜버립니다.
하나님께 나아가기 전에 나에게 도움을 줄 사람이 많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문제를 해결하기 전에 내 문제를 풀 수 있는 환경이 주위에 널려있습니다.

광야는 하나님 외에 경험할 것이 없는 환경입니다. 아무것도 없고, 오직 하나님만을 경험할 수 있는 환경입니다. 그곳이 광야입니다.
광야는 모든 관계가 단절된 곳입니다. 하나님 외에는 관계 맺을 이가 없는 곳입니다. 불안정한 삶의 환경은 하나님을 만나기에 가장 적합합니다.
광야는 힘들고 위험한 곳이지만, 그곳에서 살아남는다면, 그곳이 오히려 축복이 됩니다.

본문 3절에 보면, “너를 낮추시며 너를 주리게 하시며 또 너도 알지 못하며 네 조상들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네게 먹이신 것은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줄을 네가 알게 하려 하심이니라”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이것은 광야의 체험을 통해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사탄의 첫 번째 시험에서 이 말씀을 인용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광야에서 40일간의 시간을 보내신 후에 마귀는 예수님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이 돌들로 떡덩이가 되게 하라”라고 말하며 예수님을 시험했습니다(마 4:3).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기록되었으되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 하였느니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마 4:4).
우리는 광야 체험을 통해 우리가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산다는 것을 경험하게 됩니다. 즉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을 책임지신다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먹을 것이 많다고 우리가 행복하고, 우리의 삶이 안전합니까? 하나님께서 책임지시지 않으시면, 우리가 가진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우리가 많은 돈을 쌓아놓았다 해도 하나님께서 우리의 인생을 책임지시지 않으시면, 우리가 쌓아놓은 것은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열심히 운동한다고 해서 건강이 보장됩니까. 하나님께서 책임지시지 않으시면, 실핏줄 하나가 터져도 죽을 수 있습니다.

광야 체험을 통해 삶의 무게 중심이 하나님 중심으로 바뀌는 것을 경험해야 합니다. 그렇게 되면 생존의 문제로 인해 삶이 흔들리지 않는 단계에 이르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면 받고, 기다리라고 하시면 기다리고, 주시는 대로 받고, 물질로 인해 휘둘리지 않고, 어떤 상황에서도 평온하게 살아가는 능력을 부여받게 됩니다. 여러분에게 이런 은혜가 있기를 축원합니다.
하나님이 나를 광야로 몰아가시는 것은 내가 어떻게 하시는가를 하나님께서 보십니다. 인생의 위기 순간에 우리가 어떻게 반응하는가를 하나님께서 보십니다.

그런데 우리는 어려운 문제가 생기면, 어려움에서 빠져나가려고 생각합니다. 기도할 때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려움에서 빨리 빠져나가게 해달라고 기도합니다. 문제가 지나가게 해달라고 기도합니다.
어려운 문제를 통해 하나님은 우리의 마음을 보십니다. 우리가 삶의 무게중심을 문제에 두지 않고, 하나님 중심으로 옮겨놓을 때, 하나님께서 내 인생을 책임져주시는 것을 확실하게 경험하게 됩니다.

안정된 삶은 어떤 것입니까? 하나님을 체험하고, 인생의 주관자가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믿을 때, 그 안에서 삶의 안정감이 찾아올 것입니다.
돈이 많다고 좋은 것이 아니고, 돈이 적다고 나쁜 것이 아닙니다. 돈의 많고 적은 것으로 인해 휘둘리지 않는 삶을 사는 것이 광야를 통과한 삶입니다.

생존의 문제를 영적으로 극복하고 나면, 우리에게 강력한 힘이 주어지고, 한 수 위의 삶을 살아가게 됩니다. 생존의 문제를 통과하고 나면, 한 수 위의 삶을 살게 됩니다. 차원이 다른 삶을 살아가게 됩니다.
세상의 사람들은 생존의 문제를 자기의 힘으로 해결하기에 급급한 삶을 살아갑니다. 그러나 우리가 생존의 문제를 통과하고 나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차원이 다른 인생으로 인도해주실 것입니다. 그 은혜가 있기를 축원합니다.

둘째, 숨는 것을 훈련하는 것

드러나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광야 훈련을 통해 주리게 하시므로 훈련시키시고, 낮추시므로 훈련시키십니다.

하나님은 광야의 시간을 통해 우리 안에 있는 많은 거품을 제거하십니다. 우리 안에 있는 허영심을 걷어내십니다. 교만을 제거하십니다.
살다 보면, 우리 안에 불순물이 많이 생깁니다. 찌꺼기가 많이 생깁니다. 우리는 우리를 과시하려고 하고, 드러내려 합니다.

요즘 사람들이 왜 상처를 잘 받습니까? 사람들이 정신적인 어려움을 많이 겪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왜 사람들은 열등감에 빠져 살아갑니까?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다고 열 받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사람들이 알아주어야 존재감이 생깁니까? 사람들은 이목을 집중시키기 위해 자신을 포장합니다.

그런데 광야는 하나님께서 나를 낮추시는 곳입니다. 하나님께서 낮추신다는 것은 나의 자아가 죽는 것을 의미합니다.
광야는 그리스도의 십자가 안에서 자아가 죽는 것을 경험하는 곳입니다. 나라는 존재를 더 이상 주장하고 고집할 수 없게 만드는 곳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사람들이 광야를 지나는 동안 하나님은 하나님의 사람들을 말랑말랑하게 만드십니다. 우리 안에 있는 혈기가 죽게 만드십니다.

우리 안에 있는 교만은 쉽게 죽지 않습니다. 우리의 교만의 뿌리는 매우 깊습니다. 광야가 아니면, 우리의 교만을 제거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광야를 지나지 않으면, 교만을 제거할 방법이 없습니다.
광야를 지난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의 차이는 여기에서 드러납니다. 광야를 통과하지 않은 사람은 고개를 빳빳하게 들고 있습니다. 누가 한 마디만 해도 발끈합니다. 완악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얼마나 완악했습니까. 목이 얼마나 뻣뻣했습니까.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광야로 내몰아가셨는데도 그들은 고개를 빳빳하게 들고 있었습니다.

광야는 우리를 정금 같게 만드는 곳입니다. 드러나지 않는 광야의 시간을 충분히 보낸 사람은 쓸데없는 일에 자신을 드러내려 하지 않습니다.
광야는 침묵하는 곳입니다. 광야에서는 자신을 증명할 이유가 없습니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기 때문입니다. 명함을 내밀 곳도 없습니다.
광야에서는 계급장이 다 떨어집니다. 어디에 사는지, 아버지가 어떤 분이신지 등은 아무 소용없습니다.

오늘날 우리의 문제는 언제나 준비되지 않은 상태에서 드러납니다. 섣불리 드러내는 것은 위험합니다. 실패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일찍 성공했거나 자신이 일찍 알려졌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자신을 드러내는 것에 많이 신경을 씁니다. 도시에서 살아가면서 사람들은 자신의 힘을 자랑합니다. 사람들은 팔에 완장을 찹니다. 어깨에 계급장을 붙입니다. 화려한 훈장을 달기 위해 애씁니다. 사람들에게 자신을 알리기 위해 혈안(血眼)이 됩니다.

그러나 광야에서는 그런 것이 필요 없습니다. 드러내는 것은 우리가 할 일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편에서 하시는 일입니다.
광야는 하나님의 사람들을 준비시키는 곳이지, 드러내는 곳이 아닙니다. 광야에서 충분히 준비되지 않고 나가면, 다시 광야로 돌아오게 됩니다.

모세도 다윗도 준비를 위해 숨는 시간이 필요했습니다. 모세가 광야에서 40년 있는 동안 하나님께서는 그를 숨게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준비되지 않은 모세를 광야로 집어넣으셨습니다. 다윗은 오랜 세월 동안 지루할 정도로 광야생활을 했습니다.
자신감이 가득했던 모세가 가시떨기 나무 사이에서 하나님을 만났을 때에는 인간적인 야심이 다 사라져버렸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그를 찾아오셨습니다.
다윗은 어두운 동굴을 전전했습니다. 아무나 왕실에 들어갈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드러난다는 것은 위험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이름이 알려진다는 것은 두렵고 위험한 일입니다.
광야는 자아의 죽음을 온전히 경험하고, 새롭게 태어나는 곳입니다.

우리가 할 일은 충분히 숨어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광야생활입니다. 우리는 숨어있으면서 홀로 지내는 법을 배우게 됩니다.
요즘은 아이들도 매우 심심해합니다. 어른들도 재미를 찾습니다. 그러나 역사에 일어난 중요한 일들은 재미없는 것을 반복하고 홀로 지낼 때 역사가 일어납니다.

홀로 지내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홀로 지낸다는 것은 무지하게 어렵습니다. 광야가 힘든 이유는 아무도 없기 때문입니다. 아무도 나를 알아주지 않고, 말할 곳도 없고, 홀로 있기 때문에 힘듭니다.
홀로 있으면, 처음에는 혼돈의 시간을 보내야 합니다. 홀로 있는 동안 자기 자신을 만나야 하기 때문입니다. 아직 정리되지 않은, 혼돈 속에 있는 자아를 만나야 하기 때문입니다.
만나기 싫은 사람이 자기 자신이기 때문에, 홀로 있는 것은 매우 힘듭니다. 준비되지 않은 나와 만난다는 것은 매우 곤욕스러운 일입니다.

홀로 있음의 끝, 고독의 끝은 죽음입니다. 미쳐버립니다. 홀로 있는 광야의 시간을 잘못 보내면, 병들게 됩니다. 우울증, 각종 중독 등은 홀로 있는 시간에 실패한 후유증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술을 마시고, 별짓을 다 합니다. 홀로 있기를 거부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홀로 있게 하시는 데에는 의도하신 바가 있습니다. ‘혼란한 너에게서 빠져나와 나를 만나라’는 의미입니다. 하나님과 독대(獨對)하라는 것입니다. 지금 이곳에 계시는, 유일하시고 지존자 되시는 하나님을 만나라는 것입니다.
광야에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오직 한 분만 만날 수 있습니다. 하나님과의 만남은 언제나 일대일입니다. 하나님은 청중과 만나시는 분이 아니고, 일대일로 만나주십니다.

하나님께서 홀로 있게 하시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우리가 하나님을 일대일로 만나러 하나님께 나아가지 않기 때문입니다. 교회 공동체 속에서 그룹으로는 하나님을 만나는데, 하나님과 일대일로 독대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존전(尊前)으로 나아가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종교적 의식에는 참여하는데, 하나님을 한 번도 경험하지 못했습니다. 종교적 분위기는 느꼈는데, 하나님을 경험하지 못했습니다.
종교적 분위기 속에서 단순히 흥분하는 것은 은혜라고 할 수 없습니다. 일대일로 하나님을 만나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코너(corner)로 모시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하나님께서 우리를 코너로 모시는 것은 하나님의 존전에 서게 하시기 위해서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계속해서 빠져나가려고 합니다. 딴청을 피우려고 합니다. 하나님 앞에 정직하게 서는 것을 두려워합니다.
우리는 붕붕 떠다닙니다. 요란하고 복잡하고 수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는 광장으로 가려고 합니다. 외로움을 떨치기 위해, 고독을 해결하기 위해 광장으로, 사람들이 모여 있는 곳으로 가려고 합니다. 그런데 그곳에는 하나님이 계시지 않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외로움을 이겨내려고 몸부림칩니다. 그러나 하나님과 독대하는 것에서는 멀어져갑니다.

광야는 어떤 곳입니까? 하나님과 친밀하게 보내는 곳입니다. 광야에 있으면, 단절로 인해 고통이 찾아오지만, 그것으로 인해 하나님과의 관계가 깊어지면, 그 후에는 우리의 삶에 새로운 회복이 일어납니다.
아무도 나를 알아주지 않고, 아무도 나를 봐주지 않는 가운데 자기 존재감을 잃어버렸던 삶에서 하나님과의 독대를 통해 자존감이 회복되고, 자신감을 가지게 되고, 아무도 알아주지 않아도 하나님 안에서 건강한 자아상을 갖게 됩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상처를 주지 않으십니다. 우리는 매우 외로워서 사람들을 만나는데, 우리가 만난 그 사람은 오히려 나에게 상처를 줍니다.
우리는 자신보다 잘난 사람을 만나면, 마음이 상합니다. 위축되고 기가 죽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절대지존자이시면서 사랑의 아버지이십니다.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은 위협적이지 않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만나면,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안정감을 경험하게 됩니다. 자신이 얼마나 귀한 존재인가를 깨닫게 됩니다.

어느 자매가 귀한 형제를 만났습니다. 그런데 이 자매는 그 형제를 만나고 나면, 자신이 위축되는 것을 느꼈습니다. 그렇다면 그 형제와 계속 만나면 안 됩니다. 그 형제를 만나고 나면, 자신이 못난 사람인 것 같습니다.
집안 배경이 대단하고, 사회적으로도 많은 차이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사람을 만났을 때, 자신의 자존감이 상승하는 사람이 있다면, 계속 만나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상처를 주지 않으십니다. 우리를 질리게 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절대지존자이시면서 우리에게 따뜻하게 다가오셔서 마치 연인이 품어주는 것처럼 우리를 품어주십니다.

홀로 지낸다는 것은 단순히 혼자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하나님과의 교제가 깊어지도록 우리를 몰아가십니다.
절대고독, 외로움의 끝에서 하나님을 만나는 경험을 해야 합니다. 자기에 대한 애착으로 가득 찼던 자아중심의 삶에서 그리스도 중심의 삶으로 변화되어야 합니다. 변화된 후에는 사람에게 매이지 않습니다. 사람들에게 자신을 드러내려고 애쓰지 않습니다. 나라는 존재가 하나님 안에서 만족스럽습니다. 그렇게 살 때, 우리는 광야에서 하나님이 주시는 위대한 레슨을 경험하게 됩니다.

셋째, 광야는 단순하게 사는 법을 깨닫는 것

광야는 삶을 정리하게 합니다. 삶의 무게를 가볍게 합니다. 충분히 비워내게 합니다.
열심히 노력하지 않으면, 우리의 삶은 금세 복잡해집니다. 도시의 삶은 매우 복잡합니다. 삶이 복잡해지면 힘듭니다. 우리가 가려는 길을 갈 수 없습니다.

살아갈수록 인생이 힘들어지고 무거워집니까? 문제가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를 누르고 있는 것들을 수시로 정리하지 않으면, 그렇게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왜 우리를 광야로 몰아가십니까? 우리의 삶을 가볍게 하시기 위해서입니다. 이것도 있어야 하고, 저것도 있어야 하고, 모든 것이 있어야 하는 것처럼 생각하고 끌어 모으며 살아가기 때문에 삶이 힘듭니다.
그런데 광야로 가면 아무것도 필요 없습니다. 삶이 가벼워져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로 하여금 광야의 삶을 살아가게 하셔서 우리가 붙들고 있는 부질없는 것들을 내려놓게 하시므로 우리의 삶을 가볍게 하십니다. 이 은혜를 경험하시기 바랍니다.
주객(主客)이 전도(顚倒)되는 삶을 살면 안 됩니다. 목적을 위해 살 수 없게 만드는 무거운 짐들을 벗겨내야 합니다. 세월이 흐르고 나이가 들수록 삶이 가벼워지기를 축원합니다. 삶이 가벼워져야 합니다.

우리는 자칫하면 필요 없는 것을 위해 일하고, 필요하지 않은 것을 모으고, 필요하지 않은 것을 위해 투쟁하고, 중요하지 않은 것을 자랑으로 삼는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별것 아닌 것을 인생의 낙으로 삼고, 자랑으로 생각합니다.
정신 차리지 않으면, 우리의 인생에서 쓸데없는 것들을 치렁치렁 감고 살아가게 됩니다. 단순해지시기 바랍니다.

복잡한 인생을 살아가면, 바쁘기만 할 뿐입니다. 단순한 삶을 통해 삶의 군더더기가 떨어져나갈 때, 삶이 명료해집니다. 어떻게 살아야 하고, 무엇을 위해 존재해야 하는가를 분명히 알아가는 은혜가 있어야 합니다.
생각이 단순해져야 합니다. 왜 머리가 복잡해집니까? 생각이 복잡하기 때문입니다. 생각을 정리하는 방법은 특별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데 궁극적인 것이 아니면, 미련을 버려야 합니다. 세상적인 욕심을 포기하는 삶을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주리게 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생명줄을 붙들고 계십니다. 그리고 우리의 생명을 위협하십니다.
하나님은 그때 우리가 어떻게 하는가를 보십니다. 그 과정을 통과해야 합니다. 자신의 힘으로 해결하려 하지 말고, 하나님이 해결하시는 것을 경험해야 합니다.
그러면 한 수 위의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완전히 다른 인생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우리를 낮추십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낮추실 때에 고개를 들어서는 안 됩니다. 오히려 더 힘들어집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숨기십니다. 완전히 감추게 하십니다. 세상에서 잊힌 존재처럼 되게 하십니다. 하나님께서 낮추시면, 낮아져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코너로 몰아가십니다. 주변에 아무도 없는 곳으로 몰아가셔서 하나님 앞에 서게 하십니다. 하나님과 일대일로 만나게 하십니다.

하나님은 광야를 통해 우리의 삶의 무거운 것들을 다 내려놓게 하십니다. 지금은 우리가 붙잡고 있는 것이 아주 많습니다. 삶이 무겁습니다.
왜 염려하고 근심합니까? 왜 우울합니까? 왜 절망합니까? 세게 붙들었기 때문입니다. 내려놓으세요. 내려놓아도 죽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로 하여금 내려놓게 하시는데, 우리는 우리가 붙들고 있는 것을 내려놓으면 죽는 줄 생각합니다.

하나님은 우리로 하여금 광야를 통과하게 하십니다. 지혜로운 사람은 의도적으로 광야를 찾아갑니다. 여기서 ‘광야’는 지리적인 광야가 아니라, 상황적인 광야입니다.
광야는 자신도 모르게 쌓인 노폐물을 긁어내어 삶을 맑게 하고, 힘 있게 만드는 곳입니다. 세상에 대한 포만감으로 영적 기력을 잃었을 때, 영적 허기를 채우려면, 광야로 가야 합니다.

이전에는 광야가 싫었지만, 광야를 체험해본 사람은 광야를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그곳에서 하나님은 가장 원색적으로 경험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사람들은 나를 나답게 만들었던 광야를 일부러 찾아갑니다. 의도적으로 자신의 삶을 광야와 같이 만들어서 하나님 앞으로 나아가는 시간을 갖습니다.
삶에 노폐물이 쌓이고, 하나님 외에 의지할 것들이 나타날 때, 우리는 언제든지 광야로 가야 합니다.

도시의 한가운데서도 광야를 만들 수 있습니다. 자신이 의지하던 것을 스스로 끊어버리는 훈련을 해야 합니다. 집착하던 것에서 떠나는 순간을 만들어야 합니다. 그것이 광야를 만드는 것입니다. 때로는 곡기(穀氣)를 끊어버리고 금식하는 훈련을 해야 합니다.
우리는 도시 가운데서도 언제든지 자신을 광야로 몰아가야 합니다. 내가 의존하고 있는 것, 내가 붙들고 있는 것, 내가 집착하고 있는 것, 내가 자랑으로 삼고 있는 것, 집요하게 매달렸던 것들을 내려놓는 훈련을 해야 합니다.

의도적으로 광야를 찾지 않으면, 하나님께서 억지로 광야로 몰아넣어버리십니다. 그때는 좀 더 혹독해집니다.
우리는 문명의 이기들로부터 멀어질 필요가 있습니다. 자신이 붙들고 있는 수많은 것들을 내려놓아야 합니다. 때로는 휴대폰도 놓아버리세요.

광야는 힘들고 외로운 곳이기 때문에 우리 스스로 들어가려 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광야로 내모십니다.
모세는 미디안으로 도망쳤습니다. 다윗도 쫓겨 다닐 수밖에 없는 상황으로 내몰렸습니다. 처음에는 받아들이기 힘들지만, 나중에는 그것이 은혜임을 알게 됩니다.

광야는 매우 위험한 곳입니다. 그러나 잘 보내면, 한없는 축복의 장소입니다. 무엇인가 쉽게 풀리지 않는다면, 지금 광야에 들어가 있는지도 모릅니다.
거기에서 빠져나오기 위해 발버둥치지 마세요. 그러면 광야에서의 생활이 길어질 뿐입니다. 그것에서 하나님의 레슨을 받으시기 바랍니다.

다윗은 생애 가운데 광야를 떠돌아다니는 경험을 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시편에서 광야를 ‘나의 피난처’라고 표현했습니다. 그는 광야에서 하나님을 만났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보호 아래에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광야는 가장 위험한 곳이지만, 가장 안전한 곳입니다. 광야는 다윗에게 피난처였고, 피난처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광야를 지나는 순간, 우리의 삶은 힘들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과정을 통과하면서 하나님께서 많은 것들로부터 지켜주셨음을 깨닫게 됩니다. 광야에 많은 위험이 있었지만, 한편으로는 하나님의 보호 아래에 있었습니다.
광야에서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삶을 보호하시되 우리의 영혼을 지켜주십니다.

육체적으로는 편하지만, 영적으로는 고달픈 삶을 살아가는 사람이 많습니다. 육체적으로 세상적으로는 환경이 매우 좋습니다. 그러나 고달픈 인생을 살아가는 사람이 많습니다.
육체적으로 경제적으로 어렵고, 의지할 것이 없어서 오직 하나님께만 매달렸는데, 알고 보니 그때가 하나님을 가장 깊이 만날 수 있습니다. 아무것도 없었는데, 인생에서 가장 혹독하고, 가장 힘든 순간이었는데, 그 순간 하나님을 가장 깊이 만날 수 있습니다.
세상적으로는 부족한 것이 없고, 세상적으로는 모든 것이 갖추어져있지만, 가장 곤고한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광야는 피난처가 되고, 피난처는 하나님이십니다. 다윗은 “주는 나의 피난처시요”라고 고백했습니다(시 61:3, 142:5).
광야에서의 삶이 힘들고 위험했지만, 그곳이 없었다면, 다윗은 왕이 될 수 없었고, 세상을 이길 수 없었을 것입니다.

지금 광야를 경험하고 있습니까? 힘들고 의지할 것이 없습니까? 그러나 힘든 것을 빨리 피하려고 하지 마십시오. 지나가야 할 광야라면, 피하지 마십시오. 광야의 경험이 축복으로 바뀌는 것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광야에서만 누리는 축복과 은혜를 경험하고 나면, 전혀 다른 인생을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광야를 지나고 나면, 어떤 일이 벌어집니까?

첫째, 강해집니다.

광야 이전과 이후의 삶은 완전히 다릅니다. 광야를 체험한 사람과 체험하지 않은 사람은 다릅니다.
신앙생활을 대충 하던 사람도 광야를 경험하고 나면, 파워가 생깁니다. 이전에는 생존의 문제 앞에서도 뒷걸음질 쳤습니다. 먹고사는 문제로 인해 신앙은 늘 제자리걸음이었습니다. 그러나 광야를 경험한 이후에는 그런 문제들이 더 이상 삶의 유혹이 될 수 없습니다.
말씀으로 단단한 근육이 생겼습니다. “하나님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라는 말씀이 자신의 삶에 진리로 와닿고, 이 말씀이 육신이 되어 말씀의 진리를 붙잡고 살아가기 때문에 생존의 문제로 인해 유혹 받지 않고, 오히려 문제를 뚫고 나아가게 됩니다.

광야를 경험하고 나면, 힘이 생깁니다. 광야를 체험하고 나면, 광야를 체험하지 않은 사람을 이끌어내는 리더(leader)가 됩니다.
생존의 문제에 끌려 다니는 사람은 리더가 될 수 없습니다. 생존의 문제를 이긴 사람이 리더가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생존의 문제에 끌려 다니는 수많은 사람들을 진리로 이끌어가는 사람으로 우리를 사용하실 것입니다.

진리로 생존의 문제를 극복한 사람이 이 세상을 진리로 이끌어갈 수 있습니다. 생존의 문제로 인해 허덕이는 수많은 영혼들에게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라고 선포하며 그 말씀이 진리임을 확인시켜주는 삶을 살게 됩니다.

둘째, 삶이 풍성해집니다.

광야를 지나는 동안에는 모든 것이 퍽퍽합니다. 그러나 광야를 지나고 나면, 전혀 다른 세상이 다가옵니다. 광야를 통과한 이후에 가나안이 다가옵니다. 가나안이 그냥 주어지면, 가나안은 비극의 현장이 될 수 있습니다.

안타깝게도 이스라엘 백성들은 광야를 지나가는 데 실패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광야에서 40일간 금식하신 이후, 마귀의 시험을 이기셨습니다.
그리고 이후 예수님의 공생애는 거침없이 앞으로 나아갔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광야 생활 40일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광야 생활 40년을 상징적으로 보여줍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실패가 우리에게 모델이 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우리의 모델이 되십니다.
우리가 바라보아야 하는 승리의 모델은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돌들로 떡덩이가 되게 하라”는 시험을 이기신 예수 그리스도는 오병이어를 통해 5천 명을 먹이시고도 남는 기적을 일으키신 주인공이십니다.

광야를 경험하고 나면, 우리의 삶은 말할 수 없이 풍성해지는 은혜를 체험할 수 있습니다. 만약 예수님께서 광야를 경험하지 않고, 오병이어의 기적을 베푸셨다면, 그것은 위험합니다.
예수님은 떡이 아니라, 진리로 시험을 이기셨습니다. 그리고 오병이어의 기적을 베푸심으로 풍성함을 드러내셨습니다.

셋째,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용하십니다.

광야를 경험해야 하나님께서 쓰십니다. 하나님의 사람들은 광야 이후에 쓰임 받았습니다. 지금도 우리 주변에는 인생의 광야를 경험하고 있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하나님은 광야를 통하여 우리의 삶을 하나님의 도구로 사용하기 원하십니다.
광야를 경험하지 않으면, 우리가 하나님을 도구화하고, 하나님을 이용하려 할 것입니다. 그러나 광야를 경험하고 나면, 우리가 하나님께 온전히 쓰임 받는 도구가 됩니다.
자아 중심에서 하나님 중심으로 무게가 옮겨지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 사람을 사용하십니다.

광야는 피할 수 없습니다. 원하든 원하지 않든 광야는 다가옵니다. 오늘날 이 시대의 모든 사람들은 광야의 피해자입니다. 광야에서 죽어갑니다.
출애굽했지만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살지 못하고, 여전히 광야에서 죽어가는 수많은 피해자들을 누가 건져낼 수 있겠습니까. 광야에서 승리한 사람들이 그들을 건져내야 합니다.

광야에서 하나님을 만나면, 광야는 더 이상 두려움의 대상이 아닙니다. 다윗은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라고 고백했습니다(시 23:4).
그러므로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광야에서 하나님을 만나면, 광야에서 꽃이 피는 역사가 일어날 것입니다.

하나님을 만나기 직전까지 광야는 외롭고 두렵고 불안한 곳입니다. 하나님을 만날 때까지 방황은 계속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만나는 순간부터 광야에서의 방황은 끝납니다.
처음에는 누구든지 방황합니다. 광야와 같은 상황이 닥치면, 정신을 잃습니다. 죽는다고 고함치고, 악담을 합니다. 하나님과 주변 사람을 원망합니다.
우리의 인생길에서 처음부터 모든 것이 술술 풀리지는 않습니다. 광야를 거치지 않고 곧바로 가나안으로 들어가려는 생각을 내려놓아야 합니다.

모든 것이 잘되고 있다면, 그것은 비정상입니다. 무엇인가 잘 풀리지 않고, 문제가 터지고, 어려움이 올 때, 절망하지 마세요. 어렵고 힘든 순간을 경험한다 할지라도 하나님을 만나면, 그 순간부터 평안이 찾아올 것입니다.
광야에서 만난 하나님은 도시에서 만나는 하나님과 다릅니다. 경이롭고, 강력하십니다.

본문 4절에 보면, “이 사십 년 동안에 네 의복이 해어지지 아니하였고 네 발이 부르트지 아니하였느니라”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하나님은 사막에 길을 내시고, 반석에서 물이 나오게 하시는 분이십니다. 도시에서 먹을 것을 먹는 것과 아무것도 없는 곳에서 하나님께서 먹이시는 것을 경험하는 것은 다릅니다.

여러분의 삶이 광야로 몰려있다면, 앞으로 우리에게 광야가 다가온다면, 두려워하지 마세요. 광야를 거부하지 마세요. 광야를 피하지 마세요.
은밀히 말하면, 이 세상은 광야입니다. 영원한 천국에 들어가기까지 우리는 광야의 길을 걸어야 합니다. 광야는 힘든 곳이지만, 하나님은 광야를 통해 하나님을 더 깊이 경험함으로 새롭게 시작하게 하십니다.

도시의 삶 가운데 자신도 모르게 희미해진 하나님과의 관계가 광야를 통해 깊어질 때, 광야는 축복의 장소로 변하게 될 것입니다. 세상에 길들여진 영혼이 하나님께 길들여지는 경험을 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도시에 길들여져 있습니다. 하나님 없이도 살 수 있는 환경에 길들여져 있습니다. 우리는 광야의 경험을 통해 하나님께만 길들여지기를 축원합니다.
그때 광야는 하나님의 백성을 하나님의 백성답게 빚으시는 곳이 됩니다. 그런 의미에서 광야는 피할 곳이 아니라, 반겨야 할 곳입니다.

여러분의 삶에 광야가 없으면, 하나님을 잃어버릴 수도 있습니다. 광야는 하나님을 되찾게 하는 곳입니다. 광야는 하나님을 뜨겁게 만날 수 있는 곳입니다. 광야에서 만난 하나님의 사랑은 강력한 사랑입니다.
여러분이 하나님과 독대하시기를 축원합니다. 광야의 신앙으로 무장하여 전천후 인생을 살아가시기를 축원합니다.

세상의 어떤 것보다 독특한 영적 세계 안으로 들어가 하나님과의 신비롭고 경이로운 만남이 이루어지는 거룩한 곳 광야를 경험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은혜 속에 광야를 경험하시기 바랍니다.
광야를 통해 여러분들이 강력한 그리스도인으로 태어나, 광야에서 죽어가는 수많은 영혼들을 주님의 백성으로 이끌어내는 일에 쓰임 받으시기를 축원합니다.





폴 브래드쇼라는 사람이 릭 워렌 목사와 인터뷰한 내용이었습니다.

그 인터뷰의 내용을 세 가지로 요약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우리들이 세상을 사는 목적은 천국을 준비하는 것
둘째, 이 세상에는 고난과 불행이 있기 마련이라는 것
셋째, 삶의 목적은 부나 명예나 행복이 아니라 주님을 닮아가는 성결의 인격이고 나눔의 삶이라는 것

“사람들이 저에게 삶의 목적이 무엇이냐고 묻습니다.
저는 한 마디로 삶의 목적은 영원을 준비하는 것이라고 대답합니다.
Life is preparation for eternity.
우리는 영원히 살도록 지음을 받았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들이 하나님과 함께 하늘에 있기를 원하십니다.
어느 날 저의 심장은 멈출 것이고 저의 육체는 끝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저 자신이 끝나는 것은 아닙니다.
저는 세상에 60년 또는 100년을 살지 모릅니다.
그러나 저는 수 조년 또는 수 백만 조년을 영원 안에서 살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의 삶은 영원을 위해 몸을 푸는 것이고 의상 입기를 연습하는 것입니다.
This is the warm-up act - the dress rehearsal.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이 영원 안에서 영원히 계속할 일을 지금 세상에서 연습하기를 원하십니다.

그 다음, 이 세상에서의 삶은 문제들의 연속입니다.
Life is a series of problems.
우리는 지금 하나의 문제 안에 있든지, 하나의 문제로부터 벗어났든지, 또는 다른 하나의 문제 안으로 들어가든지 합니다.
이렇게 하신 이유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평안보다는 우리의 인격에 더 관심이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행복보다는 우리의 성결한 삶에 더 많은 관심이 있습니다.
God is more interested in your holy life than in your happy life.
우리는 이 세상에서 어느 정도 행복을 누릴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삶의 목적은 아닙니다.
삶의 목적은 그리스도를 닮는 인격의 성장입니다.

지난 해는 저의 생애에 있어서 가장 위대한 해였지만 제 아내가 암에 걸리는 가장 힘든 해했습니다.
저는 인생이 기차 길의 두 철로와 같다고 봅니다.
우리의 삶에는 좋은 일과 나쁜 일이 언제나 함께 있습니다.
우리는 수많은 사람들의 수많은 기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제 아내를 치유하시거나 편안하게 해 주시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그것은 그녀에게 아주 힘든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녀의 인격을 강하게 하셨고, 다른 사람들을 섬기는 사역을 주셨고, 간증을 주셨고, 그 녀로 하여금 하나님과 사람들에게 더 가까이 갈 수 있게 해 주셨습니다.

저는 지난 해 제 책이 1500만부나 팔려서 갑자기 부자가 되었고 갑자기 유명하게 되었습니다.
저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돈과 명예를 주시는 것이 우리 자신이나 우리의 편안한 삶을 위해서 주시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많은 돈의 수입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생활방식을 조금도 바꾸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는 새 것을 무얼 사드리지도 않았습니다.
우리는 작년 중반부터 교회로부터 사례를 받지 않기로 했습니다.
우리는 교회를 개척하고 지도자를 양성하고 가난한 자를 돕고 병자를 돌보고 차세대를 교육하기 위해서 ‘평화 기획’(Peace Plan) 이라는 재단을 설립하여 지원하기로 했습니다.

저는 이런 질문을 합니다.
‘나는 소유를 위해 살려고 하는가?’
‘인기를 위해서 살고 있는가?’
‘압력에 이끌려서 살려고 하는가?’
‘죄책감과 증오와 물질주의에 이끌려서 살려고 하는가?’
‘나를 향하신 하나님의 목적에 이끌려서 살려고 하는가?’

저는 아침에 일어날 때 제 침대 옆에 앉아 하나님께 아룁니다.

‘하나님 만일 제가 오늘 아무것도 한 일이 없더라도 당신을 더 알게 되기를 원하며 당신을 더 많이 사랑하게 되기를 원합니다.’

하나님께서 저를 이 땅에 두신 것은 단지 할 일들의 목록(to-do list)을 완수하라고 하심이 아니라고 봅니다.
하나님께서는 내가 하는 일 보다는 나의 존재에 더 관심을 가지고 계십니다.
He is more interested in what I am than what I do.
그래서 우리를 가리켜 ‘인적 존재들’ (human beings) 이라고 부르지 ‘인적 행동들’ (human doings) 이라고 부르지 않습니다.” 아주, 아주 귀한 고백들입니다. 너무 긴 광고를 했지만 아주 유익한 광고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들이 세상을 살아가는 목적은 천국을 준비하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는 고난과 불행이 있기 마련입니다. 삶의 목적은 부나 명예나 행복이 아니라 주님을 닮아가는 성결의 삶이고 나눔의 삶입니다. 어떻게 미국에서 살고 있는 미국 목사님이 이런 귀한 고백을 했는지 놀랍습니다.

지난 주일 "욥의 인내와 결말 이야기"를 했는데, 오늘 아침에는 "죽기를 구한 엘리야의 절망 이야기"를 하려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지난 주일 욥에 대한 설교를 축복해주셔서 많은 사람들이 새로운 깨달음과 감동을 받게 되어서 얼마나 감사한지 모르겠습니다. 그 전 주일 히스기야에 대한 설교도 하나님께서 축복해주셨습니다. 오늘 아침 설교도 하나님께서 축복해주셔서 많은 사람들이 새로운 깨달음과 감동을 받게 되기를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도와주셔야 우리는 바로 생각할 수도 있고, 바로 느낄 수도 있고, 바로 설교할 수도 있고, 바로 설교를 들을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아침 설교 제목은 “죽기를 구한 엘리야의 절망 이야기”입니다. 우리는 세상을 살아가면서 죽고 싶은 절망에 빠질 때가 종종 있습니다. 요사이 우리 나라에 자살하는 사람들이 점점 늘어나고 있다고 합니다. 특히 노인들 중에서 자살하는 사람들의 수가 늘어나고 있다고 합니다. 살고 싶은 소망이 끊어지고 죽고 싶은 절망에 빠지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불신자들뿐만은 아닙니다. 조용기 목사님도 오래 전에 여의도 교회당을 건축하면서 여러 가지 일로 너무 힘이 들어서 건물 꼭대기에서 떨어져서 죽고 싶은 충동을 느낀 때가 있었다고 고백했습니다. 남포교회의 박영선 목사도 너무 힘이 들어서 죽고 싶어서 수면제를 많이 먹은 때가 있었다고 얼마 전에 고백하는 말을 들었습니다. 사람들은 세상을 살아가면서 죽고 싶은 절망에 빠질 때가 종종 있습니다.
  오늘 아침에는 위대한 하나님의 사람 엘리야가 죽고 싶은 절망에 빠진 이야기를 하려고 합니다. 선지자 엘리야가 로뎀 나무 아래 앉아서 하나님께 이렇게 호소했습니다. “여호와여 넉넉하오니 지금 내 생명을 취하소서”(왕상19:4). 사실 이 비슷한 말을 욥도 한 일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나의 구하는 것을 얻게 하시며 나의 사모하는 것을 주시기를 내가 원하나이다. 이는 곧 나를 멸하시기를 기뻐하사 그 손을 들어 나를 끊으실 것이라”(요16:8,9). 이제 "죽기를 구한 엘리야의 절망 이야기"를 세 가지로 나누어 하려고 합니다.

  첫째, 엘리야가 너무 큰 일을 한 것이 절망에 빠진 배경이라고 생각합니다.
  아마 엘리야만큼 대단히 큰 하나님의 일을 한 사람도 별로 없을 것입니다. 엘리야가 갈멜산에서 하나님께 기도했을 때 하늘에서 불이 내려와서 번제물과 모든 것을 태워버렸습니다. 엘리야는 대단한 기도의 사람이었고 대단한 능력의 사람이었습니다. “저녁 소제 드릴 때에 이르러 선지자 엘리야가 나아가서 말하되 아브라함과 이삭과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여 주께서 이스라엘 중에서 하나님이 되심과 내가 주의 종이 됨과 내가 주의 말씀대로 이 모든 일을 행하는 것을 오늘날 알게 하옵소서 여호와여 내게 응답하옵소서 내게 응답하옵소서 이 백성으로 주 여호와는 하나님이신 것과 주는 저희의 마음으로 돌이키게 하시는 것을 알게 하옵소서 하매 이에 여호와의 불이 내려서 번제물과 나무와 돌과 흙을 태우고 또 도랑의 물을 핥은지라 모든 백성이 보고 엎드려 말하되 여호와 그는 하나님이시로다 여호와 그는 하나님이시로다 하니 엘리야가 저희에게 이르되 바알의 선지자를 잡되 하나도 도망하지 못하게 하라 하매 곧 잡은 지라 엘리야가 저희를 기손 시내로 내려다가 거기서 죽이니라”(왕상18:36-40). 엘리야는 대단한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대단한 인기를 얻었습니다. 엘리야를 거슬릴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엘리야가 또 갈멜산 꼭대기에 올라가서 땅에 꿇어 엎드려 기도했을 때 하늘에서 비가 쏟아져 내렸습니다. “엘리야가 갈멜산 꼭대기로 올라가서 땅에 꿇어 엎드려 그 얼굴을 무릎 사이에 넣고 그 사환에게 이르되 올라가 바다 편을 바라보라 저가 고하되 바다에서 사람의 손만한 작은 구름이 일어나나이다 가로되 올라가 아합에게 고하기를 비에 막히지 아니하도록 마차를 갖추고 내려가소서 하라 하니라 조금 후에 구름과 바람이 일어나서 하늘이 캄캄하여지며 큰 비가 내리는지라 아합이 마차를 타고 이스르엘로 가니 여호와의 능력이 엘리야에게 임하매 저가 허리를 동이고 이스르엘로 들어가는 곳 까지 아합 앞에서 달려갔더라”(왕상18:42-46). 엘리야는 대단한 기도의 사람이었고 대단한 능력의 사람이었습니다. 엘리야는 대단한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대단한 인기를 얻었습니다. 그의 승리와 인기는 하늘에 사무쳤습니다. 엘리야를 거슬릴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이것이 열왕기상 18장 마지막 부분이 기록한 엘리야의 승리의 모습이었습니다.
  그런데 열왕기상 19장 첫 부분은 갑자기 엘리야가 죽기를 구하는 극심한 절망에 빠진 모습을 기록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이 이렇게 극히 대조적인 모습을 기록해서 우리들에게 보여 주신 이유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아무리 위대한 하나님의 사람이라도, 아무리 위대한 선지자나 사도라도 너무 큰 일을 하고 너무 큰 승리를 거두었을 때 자만에 빠질 수도 있고 허탈감에 빠질 수도 있고 그리고 절망에 빠질 수도 있다는 중요한 진리를 보여주시기 위함이라고 생각합니다. 사람은 너무 큰 승리를 거두고 너무 큰 인기를 얻을 때 자만에 빠지게 되고 허탈감에 빠지게 되고 그리고 절망에 빠지게도 됩니다. 삼손이 그랬습니다. 솔로몬이 그랬습니다. 사울 왕이 그랬습니다. 지금 엘리야가 그랬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공할 때 너무 잘 될 때 극히 조심해야 합니다. 극히 겸손해야 합니다. 릭 워렌 목사님처럼 소박하고 검소하고 겸손하여야 합니다.  

  둘째, 엘리야가 이세벨의 협박에 기가 질려서 절망에 빠졌다고 생각합니다.
  아합 왕은 감히 엘리야에게 대항하지 못했는데 그의 아내 이세벨은 엘리야에게 대항하며 협박까지 했습니다. “아합이 엘리야의 무릇 행한 일과 그가 어떻게 모든 선지자를 칼로 죽인 것을 이세벨에게 고하니 이세벨이 사자를 엘리야에게 보내어 이르되 내가 내일 이맘때에는 정녕 네 생명으로 저 사람들 중 한 사람의 생명 같게 하리라 아니하면 신들이 내게 벌 위에 벌을 내림이 마땅하니라 한지라”(왕상19:1-2). 아합 왕은 기가 죽어서 엘리야에게는 한 마디도 못하고 집에 가서 그의 아내 이세벨에게 고해바쳤습니다. 그런데 이세벨은 조금도 기가 죽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발악을 하며 엘리야에게 대들었습니다. 엘리야를 죽이겠다고 협박까지 했습니다. “내가 내일 이맘때에는 정녕 네 생명으로 저 사람들 중 한 사람의 생명 같게 하리라 아니하면 신들이 내게 벌 위에 벌을 내림이 마땅하니라.” 여자는 약하기도 하지만 아주 강하고 독합니다. 아주 무섭습니다. 하나님의 사람 엘리야는 그만 이세벨의 독기에 질리고 말았습니다. 그러지 않아도 너무 큰 승리에 도취되어 자만에 빠져 있었는데 이세벨의 독기에 기가 질려 쓰러지고 말았습니다.
  엘리야는 걸음아 날 살려라 하고 도망을 치기 시작했습니다. “저가 이 형편을 보고 일어나 그 생명을 위하여 도망하여 유다에 속한 브엘세바에 이르러 자기의 사환을 그곳에 머물게 하고 스스로 광야로 들어가 하룻길쯤 행하고”(왕상19:3-4). 멀리멀리 광야에까지 도망을 쳤습니다. 여자의 독기가 무섭기는 무서운 것 같습니다. 하나님의 사람 엘리야가 무서워서 도망을 쳤으니 우리는 두말할 필요도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사탄이 하와를 꼬여서 아담으로 하여금 선악과를 따 먹게 했고, 기생 들릴라를 꼬여서 삼손으로 하여금 머리 털을 깎게 했고, 밧세바를 사용해서 다윗으로 하여금 간음죄를 짓게 했고, 엘리야로 하여금 광야로 도망치게 했다고 생각합니다. 엘리야는 한 참 도망가다가 로뎀 나무 아래 앉게 되었습니다. 자기의 모습이 너무나 초라하게 보였을 것입니다. 지금은 하늘의 소낙비는 고사하고 마실 물 한 모금도 없었습니다. 뜨거운 모래 바람만 불고 있었습니다. 지난날의 화려했던 모든 승리는 한갓 꿈에 불과했습니다. 모든 것이 캄캄하게 보였습니다. 앞으로 가면 사막이요 뒤로 돌아가면 이세벨의 군대가 자기를 잡으려고 달려올 것이었습니다. 결국 엘리야는 죽기를 구하게 되었습니다. “한 로뎀나무 아래 앉아서 죽기를 구하여 가로되 여호와여 넉넉하오니 지금 내 생명을 취하옵소서 나는 내 열조보다 낫지 못하니이다”(왕상19:4). 사람은 지극히 초라하고 연약한 존재입니다. 계집 종 앞에 선 사도 베드로의 모습도 지극히 초라하고 연약했고 이세벨 앞에선 엘리야의 모습도 지극히 초라하고 연약했습니다. “여호와여 넉넉하오니 지금 내 생명을 취하옵소서, 여호와여 넉넉하오니 지금 내 생명을 취하옵소서.” 이것이 하나님의 사람 엘리야의 모습이었습니다. 왜 이와 같은 부끄러운 모습을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보여주시고 계십니까? 우리도 그렇게 될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시기 위함이라고 생각합니다.  

  셋째, 죽기를 구하는 절망에 빠진 엘리야에게 하나님께서 찾아오셨습니다.
  하나님은 참으로 이상하신 분입니다. 히스기야가 항복할 때, 욥이 항복할 때, 엘리야가 절망에 빠져서 죽겠다고 탄식할 때, 바로 그때 찾아오시는 분이십니다. 물론 갈멜산 위에서도 불로 그리고 비로 응답하신 분이십니다. 그러나 절망에 빠졌을 때는 하나님께서 오셔서 엘리야를 어루만져주셨습니다. 엘리야를 찾아오신 천사와 하나님의 사자는 성자 예수님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승리할 때는 불로 비로 응답하셨지만 지금은 하나님께서 친히 오셔서 친절하게 어루만져주셨습니다. 손으로 어루만져주셨습니다. 그리고 떡과 물을 먹여주셨습니다. 마치 디베랴 바닷가에 찾아오신 예수님의 친절하신 모습과도 같았습니다. “로뎀 나무 아래 누워 자더니 천사가 어루만지며 이르되 일어나서 먹으라 하는지라 본즉 머리맡에 숫불에 구운 떡과 한 병 물이 있더라 이에 먹고 마시고 다시 누웠더니”(왕상19:5-6).
  우리가 승리할 때 찾아오시는 하나님도 감사하지만 우리가 병들었을 때 우리가 쓸어져서 죽어갈 때 찾아오셔서 우리들의 병든 몸과 죽어가는 몸을 어루만져주시는 주님을 만나는 것은 너무너무 값지고 너무너무 눈물겹고 너무너무 감동적인 체험입니다. 병들고 상처 입은 몸과 마음을 가지고 탕자가 아버지께로 돌아갔을 때 자기를 안아주시고 자기의 입을 맞춰주시는 아버지를 만난 체험은 탕자에게 있어서는 가장 값지고 가장 눈물겹고 가장 감동적인 체험이었을 것입니다. “아버지가 저를 보고 측은히 여겨 달려가 목을 안고 입을 맞추니”(눅15:20). 지금 엘리야는 그와 같은 체험을 한 것이었습니다. 물론 처음에는 정신 없이 하나님의 사자가 어루만져주고 먹여주는 떡과 물을 받아 먹고 잠시 후 그대로 잠이 들었습니다. 우리는 때로는 심령이 너무 절망하고 마비되어서 주님께서 오신 것도 제대로 알아차리지 못할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잠만 잘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또 오셔서 또 어루만져주고 또 떡과 물을 먹여주십니다. “여호와의 사자가 또 다시 와서 어루만지며 이르되 일어나서 먹으라 네가 길을 이기지 못할 까 하노라 하는지라 이에 일어나 먹고 마시고 그 식물의 힘을 의지하여 사십 주 사십 야를 행하여 하나님의 산 호렙에 이르니라”(왕상19:7,8).
  저는 로뎀 나무 아래서의 엘리야의 모습은 새로 태어나는 엘리야의 모습이라고 생각합니다. 갈멜산 위에서의 엘리야의 모습은 지극히 높아진 위대한 하나님의 사람 엘리야의 모습이었습니다. 로뎀 나무 아래서의 엘리야의 모습은 지극히 낮아진 겸손의 사람 엘리야의 모습이라고 생각합니다. 갈멜산 위에서의 엘리야의 모습은 하나님의 능력의 손을 체험한 모습이었지만 로뎀 나무 아래서의 엘리야의 모습은 하나님의 어루만짐의 손을 체험한 모습이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께서 모세를 낮추시고 겸손하게 하셔서 하늘로 데려가신 것처럼 하나님께서 엘리야를 낮추시고 겸손하게 만드셔서 하늘로 데려가셨다고 생각합니다.
  이제 말씀을 맺습니다. 갈멜산 위에서의 승리도 중요하지만 로뎀 나무 아래서의 절망도 필요합니다. 갈멜산 위에서 승리하여 바알의 선지들을 죽이는 것도 필요하지만 로뎀 나무 아래서 자기 자신을 죽이는 것도 필요합니다. 성경의 모든 말씀들은 우리들에게 필요한 말씀이고 우리들에게 그대로 적용되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지난 세 주 동안 비슷한 말씀들을 들었습니다. 히스기야가 항복했을 때 하나님의 은혜를 받았고, 욥이 항복했을 때 하나님의 은혜를 받았고, 엘리야가 절망했을 때 하나님의 친밀한 은혜를 받았습니다. 저와 여러분들도 절망을 두려워할 필요는 없습니다. 베드로와 같은 실패를 두려워할 필요도 없습니다. 주님께서 오셔서 우리를 어루만져 주시면 됩니다. 떡을 먹여주시고 물을 먹여주시면 됩니다. 요사이 피곤하고 지친 분들이 많이 있습니다. 지금 우리들이 사는 세상이 그렇습니다. 모든 것이 잘 되지 않습니다. 죽고 싶을 때도 있습니다. 바로 그런 때가 주님께서 오셔서 우리들을 어루만져 주시는 때입니다. 저는 우리 주님께서 오셔서 우리 강변의 모든 성도들을 어루만져주시기를 바랍니다. 주님의 살을 먹여주시고 피를 먹여주시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우리의 남은 삶이 주님께서 주시는 새 힘을 의지하여 사십 주 사십 야를 달려가도 피곤치 않기를 바랍니다. 엘리야에게 주셨던 친밀한 은혜, 어루만져주시는 은혜를 저와 여러분들에게 모두 부어주시기를 바랍니다. “엘리야의 하나님 아버지, 우리들에게 오셔서 우리들도 어루만져 주시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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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세아(Hosea) : 여호와는 구원이시다

1. 잇사갈 지파 사람으로 12소선지중의 한 사람
2. 웃시아 왕 때부터 히스기야 왕 때(B.C 785-725)까지 예언하였으니 선지자 중 가장 오래 예언하였다.
3. 호세아서에서는 이스라엘 백성이 우상 숭배한 죄를 깊이 책망하고 구세주 오실 것을 신망하였다고 신약에 3차 인용하였다(마태복음 9:13, 로마서 9:25, 베드로전서 3:10-12)


요엘(Joel) : 여호와는 하나님이시다

1. 요엘서는 그 책의 저자가 선지자 요엘이라고 한다( 1:1).

2. 저작 연대는 주전 835-800년 사이에 기록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3. 기록 목적은 유다는 어마어마한 메뚜기 떼에 의해 황폐화됩니다.
메뚜기 떼의 침략은 곡물, 포도밭, 정원 및 나무 등 모든 것을 파괴합니다.
요엘은 메뚜기를 통해 행군하는 인간 군대를 상징적으로 묘사하며 이 모든 파괴를 유다의 죄로 인해 그 나라에 임할 하나님의 심판으로 보고 있습니다.
이 책은 크게 두 가지 주요 사건을 조명하여 줍니다.
하나는 메뚜기의 침입이고 다른 하나는 성령의 부으심입니다.
이 책에 대한 초기의 성취는 사도행전 2장에서 베드로가 인용한 것처럼 오순절날에 발생한 사건과 연관됩니다.

4. 핵심 구절
요엘 1:4, “팥중이가 남긴 것을 메뚜기가 먹고 메뚜기가 남긴 것을 느치가 먹고 느치가 남긴 것을 황충이 먹었도다”
요엘 2:25, “내가 전에 너희에게 보낸 큰 군대 곧 메뚜기와 느치와 황충과 팥중이가 먹은 햇수대로 너희에게 갚아 주리니”
요엘 2:28, “그 후에 내가 내 영을 만민에게 부어 주리니 너희 자녀들이 장래 일을 말할 것이며 너희 늙은이는 꿈을 꾸며 너희 젊은이는 이상을 볼 것이며”

5. 요약
메뚜기의 끔찍한 재앙 뒤에는 그 땅 전체에 임하는 심각한 기근이 뒤따릅니다.
요엘은 이러한 일들을 촉매제로 사용하여 유다에게 경고의 말을 전합니다.
사람들이 신속하고 온전하게 회개하지 않는 한, 적군은 메뚜기처럼 땅을 황폐화시킬 것입니다.
요엘은 모든 백성과 그 땅의 제사장들에게 하나님의 용서를 구하면서 금식하며 겸허해질 것을 호소합니다.
그들이 반응한다면, 그 나라에 물질적인 축복과 영적인 축복이 새롭게 있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주의 날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그때에는 모든 열방이 그분의 심판을 받게 되기 때문에 이와 비교할 때 끔찍한 메뚜기 떼들은 고작 하루살이처럼 보일 것입니다.

요엘서의 가장 중요한 주제는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의 날인 주의 날입니다.
이 날은 하나님이 그분의 진노와 능력과 거룩의 속성을 계시하시는 날이며, 그분의 원수들에게는 무시무시한 날입니다.
첫 번째 장에서 주의 날은 역사적으로 그 땅에 임하는 메뚜기의 재앙으로 체험됩니다.
2장 1-17절은 요엘이 메뚜기 재앙과 가뭄에 대한 은유를 사용하여 회개에 대한 부름을 새롭게하는 과도기 장입니다.
2장 18절-3장 21절은 종말론적인 용어로 주의 날을 묘사하고, 회개에 대해서는 육체의 회복(2:21-27)과 영적인 회복(2:28-32), 그리고 국가적인 회복에 대한 예언으로 답변합니다(3:1-21).

6. 예표

구약이 개인적인 죄이든 국가적인 죄이든 죄에 대한 심판을 말할 때마다 예수 그리스도의 강림이 예표됩니다.
구약의 선지자들은 계속해서 이스라엘에 회개하라고 경고했습니다.
하지만 그들이 회개를 했을지라도 그들의 회개는 율법을 지키는 것과 행함에 제한되었습니다.
그들의 성전 제물은 십자가에 달려 단번에 영원히 바쳐질 궁극적인 희생의 그림자였습니다(히 10:10).
요엘은 주의 날에 임할 하나님의 마지막 심판은 "크고 심히 두렵도다 당할 자가 누구이랴”(욜 2:11)고 말합니다.
그 대답은 우리 스스로는 그런 순간을 결코 견딜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죄를 속죄하기 위해 그리스도를 믿는다면 심판 날에 대해 두려워 할 것이 전혀 없습니다.

7. 적용

회개가 없다면 심판은 가혹하고 철저하며 확실할 것입니다.
우리의 신뢰는 우리의 소유가 아니라 하나님 여호와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때때로 우리를 그분께 더 가까이 가도록 하기 위해 자연, 슬픔 또는 다른 일반적인 사건을 사용하실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분의 자비와 은혜 안에서 우리의 구원을 위한 확고한 계획을 마련하여 주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죄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우리의 죄와 그분의 완전한 의를 교환해 주셨습니다(고후 5:21).
더 이상 시간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심판은 밤의 도적같이 신속히 올 것입니다(살전 5:2).
우리는 준비하고 있어야 합니다.
오늘이 구원의 날입니다(고후 6:2).
“너희는 여호와를 만날 만한 때에 찾으라 가까이 계실 때에 그를 부르라 악인은 그의 길을, 불의한 자는 그의 생각을 버리고 여호와께로 돌아오라 그리하면 그가 긍휼히 여기시리라 우리 하나님께로 돌아오라 그가 너그럽게 용서하시리라“(사 55:6-7).
오직 하나님의 구원을 붙들어야 우리는 주의 날에 있을 그분의 진노를 피할 수 있습니다.


아모스(Amos) : 무거운 짐을 진 자(짐을 지는 사람)

1. 주전 8세기의 이스라엘의 예언자.
2. 베들레헴 남쪽 10Km지점 돌 많은 드고아의 목자 겸 뽕나무를 재배했었다(호세아 1:7, 14)
3. 그는 고향 유대를 떠나 북왕국 이스라엘의 벧엘에서 당시의 왕 여로보암 2세의 정치와 종교적 타락을 공박했었다(호세아 7:7-9)


오바댜(Obadiah) : 여호와의 종, 여호와를 경배하는 자



1. 오바댜는 그가 살고 있던 유다와 가장 가까운 나라인 에돔 족속을 향한 심판을 나타내고 있다. 또한 택한 백성을 향한 하나님의 회복을 선포하고 있는 책이다.

2. 배경

오바댜의 예언은 유다 백성이 바빌로니아에서 유배 생활을 하고 있던 주전 587년과 538년 사이의 어느 시기에 전해졌다.
이 예언은 사해 남단에서 남남동에 위치해 있던 에돔이라는 나라를 향하여 그 멸망을 선포하는 내용으로 되어 있다.
다윗과 솔로몬이 다스리던 동안에 이스라엘은 에돔을 지배하였지만, 그 이후로는 에돔의 영토는 그 소유권을 둘렀고 자주 전쟁이 벌어졌는데, 이것은 아카바만으로 통하는 주요 교역로가 에돔의 영토를 통과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주전 4세기경에는 이들이 페트라를 그들의 수도로 하여 새로운 나라를 세웠다.
이때 많은 에돔인들이 이두메아로 이주하였다.
그러나 많은 에돔인들은 에돔 땅에 그대로 남아서 나바테아인들과 동화되어 그대로 살았다.

3. 내용

오바댜의 예언 내용은 매우 간결하고 짧은 에돔 족속에 대한 한정된 심판처럼 보이나, 담겨 있는 의미는 심오하다.
하나님의 백성 유다에게 행한 에돔의 교만하고 악한 행동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은 전 우주적인 심판으로 확대된다.
그리고 이스라엘의 회복, 하나님의 통치, 하나님의 나라의 완성을 묘사하고 있다.
오바댜 예언의 핵심적인 내용은 이방인에 대한 하나님의 공정한 심판과 이스라엘의 회복이다.
남은 자가 땅을 회복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언약에 대한 갱신이다.

4. 구조

제1단원(1-9절)에서는 사탄적 삶을 사는 에돔의 오만에 대한 하나님의 징벌 선포(1-4절)와
이 선포의 성취 역사(5-7절)가 언급되며,
이를 바탕으로 미래의 종말론적 심판이 예고된다(8-9절).

제2단원(10-15절)에서는 에돔이 저지른 죄악의 역사적 실례를 통하여 에돔의 지혜의 부정적 실체를 고발하며, 에돔을 포함한 모든 민족들이 그들이 저지른 죄악 때문에 징벌을 받을 심판의 날이 가까이 왔음을 선포한다.

제3단원(16-21절)에서는 에돔의 사악함과 무지와 죄악에 대한 하나님의 징벌, 선민 이스라엘의 승리와 회복, 공의의 하나님 여호와의 주권 선포와 하나님의 통치 등을 함축적으로 전개하며 삼단 양식을 마감한다.

5. 제목

구약의 선지서 중 가장 짧은 책인 본서의 표제는 다른 선지서들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저자의 이름에서 유래되었다.
한글 개역 성경의 표제 '오바댜'는 구약 히브리 원전의 표제 '오바디아'의 음역으로, 그 뜻은 '여호와의 종', '여호와를 경배하는 자'이다. 70인역(LXX)과 벌게이트역(Vulgate)에서도 히브리 원전의 표제를 음역한 '옵디우'와 '압디아스'를 본서의 표제로 사용하고 있으며, 이를 따라 대부분의 영어 성경에서도 '오바디아'를 본서의 표제로 사용하고 있다.

6. 저자와 기록 연대

본서의 저자가 '오바댜'라는 사실은 본서 자체의 증거(1:1)만 있을 뿐 성경의 다른 내증은 없다. 그러나 이 사실은 유대인들의 전승과 교부들의 증거 및 종교 개혁자들의 증거 등의 풍부한 외증으로 초대 교회 초기부터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별다른 논란없이 그대로 받아들여져 왔다. 본서의 기록 연대는 예루살렘 성이 멸망한 직후인 B.C. 586년경으로 볼 수 있다.

7. 신학적 주제

오바댜의 예언들은 묵시를 통해 오바댜에게 주어졌다.
거기에는 풍부한 신학적인 주제들이 담겨 있다.
10-14절은 형제관계와 인간관계 속에 내재된 의무들에 관한 것이고,
3-4,8절은 열방들의 죄악과 오만을 다루고 있으며,
15-16,21절은 여호와의 날에 최종적으로 드러날 모든 열방에 대한 하나님의 주 되심을 선포한다.
15절은 인간의 죄로 인한 결과들을 다루고
17,21절은 남은 자라는 주제를 다룬다.
이와 같이 오바댜서는 민족주의적이고 보복적인 냄새를 풍기는 편향된 냉용을 담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성경의 몇몇 기본적인 신학을 담고 있는 책이다.
또한 하나님의 정의에 대한 사실을 강조하고 있다.
"원수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 살아계신 하나님의 손에 빠져 들어가는 것이 무서울진저"(히 10:30-31).
하나님의 은혜에 복종하고 응답한 자는 모든 것을 가진 자이나, 그분의 은혜를 교만하여 져버린 자는 모든 것을 잃어버린 자인 것이다.

요나(Jonas) : 비둘기


1. 스불론 땅 갓헤벨 사람 아밋대의 아들.
2. 12소선지자 중 한 사람으로 요나서의 주인공
3. 주전 825년 여로보암 2세 때 하나님이 요나에게 앗수르 도성 니느웨로 가서 그 죄악을 책하고 장차 멸망할 것을 예언하라 하였다.
4. 니느웨 사람과 감정이 좋지 않아 다시스로 도망가다 폭풍을 만나 죄인 하나를 제비뽑아 물속에 던지는 그 제비에 뽑혀 바다에 던져졌다.
5. 여호와가 큰 물고기를 예비하여 요나를 삼키게 하여 고기 배속 에서 3주야를 지내게 되었다(요나 2장)
6. 요나가 그 가윤데서 자복하고 기도할 때에 고기는 요나를 육지에 토하여냈다(요나 3장)
7. 요나가 니느웨로 가서 3일간 선포하자 그 성 주민들이 회개하였다(요나 3장)
8. 요나가 성밖에 나가서 어느 박넝쿨을 죽여 말라 버리는지라 요나가 심히 안타까와 할때 여호와의 말씀이"네가 하루 났다가 시들어지는 박넝쿨도 그롱게 아끼거둔 내가 이 큰성 니느웨의 12만명을 아끼지 않겠느냐"고 일깨워 주셨다(요나 4장)
9. 예수님이 죽었다가 사흘만에 살아나실 것을 요나를 들어 말씀하셨다(마태복음 12:39)
10. 헬라인과 로마인은 이 사실을 모두 확증하였다.






























































북한 지하교회


미 풀러신학대 박사논문

북한에서도 진정한 종교 활동이 가능할까?
기독교의 경우 북한의 조선그리스도교연맹(조그련)이 남한 교회들의 지원을 받아 세운 위장기관인 봉수교회칠골교회를 제외하고는 표면상 교회란 없어 보인다.
겉으로 드러나 있지 않은 지하교회가 북한 내 소수 실제 존재하고 있다는 소식이 탈북민들의 증언을 통해 간간히 전해져 오긴 했지만 공신력 있는 자료를 통해 밝혀진 내용은 거의 없었다.

최근 미국 풀러신학대에 제출된 박사논문이 북한 지하교회에 관한 주제와 구체적 통계를 다루고 있어 주목된다.
이반석 목사(모퉁이돌선교회)가 금년 5월 이 대학에서 수여할 박사학위 논문 ‘북한 지하교회에 대한 선교학적 이해’는 해방 이후부터 현재까지 북한 내 교회와 목회자들의 실상을 다루고 있다.

이 목사는 논문에서 1945년 해방 이후 김일성정권의 기독교 탄압이 노골화될 때부터 2006년까지 북한에서 순교한 목사들이 밝혀진 것만 354명이 되는 것으로 집계했다.

해방 전후와 6·25 전쟁 중 대부분의 북한지역 목회자들은 남하했는데 순교한 이들은 대부분 교회를 지키기 위해 떠나지 않고 남은 이들이다.
통계에 잡히지 않은 목회자들까지 고려한다면 순교한 목회자들은 더 늘어날 것으로 예상된다.


김일성은 1971년 한 일본 언론인(미노베 기자)을 만나 “북조선에서 모든 교회는 사라졌다”고 말한 바 있다고 한다.
북한교회의 목회자들을 철저히 색출해 모조리 처형했다는 고백인 것이다.
하지만 논문은 그 시점 이후에도 일부 목회자들이 지하교회 활동을 했다는 사실을 밝혔다.
드물기는 하지만 일부는 현재까지도 생존해 북한교회의 재건을 위해 기도하고 있다고 한다.

논문은 이들의 신분이 공개돼 처형당하는 일이 최근에도 일어나고 있다면서 이들의 안전을 위해 구체적 기술은 삼가야 한다고 밝히고 있다.

논문에 의하면 1995년부터 2006년 사이 목회자의 신분이 밝혀져 처형된 이들은 77명에 달하며 이중 4명은 목사로 밝혀졌다.

논문을 통해 밝혀진 순교사례들하나. 2,000명 규모 지하교회 사건 이 목사의 박사논문은 또한 북한에서 발생한 기독교박해사건을 구체적으로 기술하고 있다.

가장 규모가 큰 지하교회 사건은 1957년에 발생한 이만화 목사와 교인들의 순교사건이다.

평안북도 용천군 지역에서 교인 2,000여명이 참석하는 지하교회를 이끈 이만화 목사는 10여개의 협동농장에서 500여개의 구역회를 조직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들이 김일성정권 당국에 노출된 것은 1957년 8월 27일 최고인민회의 제2기 대의원선거가 있던 날이었다. 이만화 목사는 교인들에게 기독교를 박해하는 김일성을 지지하는 투표에 참석하지 말라고 독려했고 이에 교인들은 투표장에는 갔지만 투표용지를 투표함(흑백함)에 넣지 않았다. 하지만 투표함에서 나온 투표용지와 유권자 숫자가 2000표가 차이가 나는 것을 알게 된 사회안전원들이 무엇인가 이상하다고 판단해 평안북도 용천군 일대를 집중하여 수색했다. 비밀경찰 200여명과 중앙당 집중지도반 500여명이 용천지역을 급습하여 가택과 농장 등을 샅샅이 조사했고 때마침 주일예배를 드리던 두 가정이 사회안전원들에게 들켜 체포되자 이만화 목사가 자진 출두해 지하교회의 실상이 드러나게 됐다. 이만화 목사는 주민들을 한 사람씩 은밀히 전도해 오랜 시간에 걸쳐 교인들을 양성했다고 한다. 가정예배를 드리다 발각된 두 가정의 가족들은 혹독한 고문 끝에 지하교회의 실상을 밝히지 않을 수 없었고 이때 산악의 토굴과 숯가마 등을 이용해 예배를 인도하던 교회 지도자 130여명이 검거됐다고 한다.

이 사건으로 이만화 목사를 비롯한 36명이 총살당하고 나머지는 수용소로 유배를 가거나 감옥으로 간 것으로 밝혀졌다.


평북 ‘카타콤’ 사건 종교탄압을 피해 지하동굴에서 생활했던 로마시대의 ‘카타콤’ 비화는 이미 역사적 사실로 밝혀졌다.

북한 사회에서도 기독교 신앙을 지키는 것이 로마시대의 카타콤과 같은 고립무원의 삶을 각오해야 한다는 것으로 드러났다.
1966년 평안북도 박천군 상추리에서는 야산의 한 토굴에서 13명의 지하교인들이 발각돼 체포된 후 곧바로 처형되는 사건이 있었다. 이들은 머리털과 수염도 깎지 못한 채 짐승처럼 살았고 5년 동안 계속된 토굴 기도생활에 무릎이 쪼그라들어 잘 걷지도 못했다고 한다. 이들은 이전에 김 목사라는 이를 지도자로 따랐는데 1961년 김 목사가 체포된 후 모두 행방불명됐다가 5년 만에 토굴에서 발견됐던 것이다. 이들은 박천군 중남리, 청룡리, 청산리 등에 거주했으며 김 목사가 전도한 사람들이었다고 한다. 김 목사가 처형된 후 그가 전도한 신자들은 대부분 체포돼 수용소로 보내졌지만 이들 가운데 13명이 남아 토굴 속에서 살며 신앙생활을 영위했던 것이다.

평양 하수구 지하교인 사건

또 다른 카타콤 사례는 이듬해인 1967년에 드러났다.
그해 9월경 평양 일대에 큰 홍수가 일어났는데 이로 인해 수년간 평양의 지하 하수구에서 살아온 기독교인 집단이 발각되는 일이 발생했다. 평양 시내가 홍수로 침수되자 종교탄압을 피해 지하로 숨어들었던 기독교인들이 지상으로 나올 수 밖에 없었는데 이들의 행색을 이상히 여긴 북한 경비정에 의해 모두 체포됐다.

당시 평양에 살던 탈북민 이민복 씨(자유북한인연합 대표)는 당시 상황을 이렇게 증언했다.
“내가 10살 때인데 대동강이 범람해 둑이 터지면서 아파트 아래층에 잉어가 들어와 잡힐 정도로 온통 물바다가 되었습니다.
이때 6·25전쟁 때부터 20년 가까이 하수도 속에 숨어 있던 ‘악질 반동들’이 나타났는데 햇볕을 못 봐 얼굴은 창백하고 머리도 치렁치렁 길게 늘어진 모습이었습니다. 이들은 지하에 살던 기독교인들로 밝혀졌고 모두 처형되었습니다. 당시 사람들은 그들이 하나님을 저주하며 살려 달라고 당 앞에 빌 줄 알았는데 하늘을 우러러 하나같이 초연하게 죽음을 맞는 것을 보고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평남 120명 처형 ‘박 목사’ 사건

1968년 6월에는 평안남도 온천군 운하리에서 세칭 ‘박 목사 사건’이 발생했다.
이 동네에서는 유언비어가 자주 퍼지고 김일성 초상화가 없어지는 일도 일어났다. 이에 사회안전원들이 밤낮으로 감시한 끝에 이 지역으로 강제 전출된 개성 출신 이주민들을 의심하기에 이르렀다. 하지만 범인으로 단정할 만한 증거를 찾지 못한 가운데 박 씨라는 사람을 이주민들이 존경하고 따르는 사실을 알게 됐다. 당국은 아무 증거도 없이 그에게 반동불순분자라는 누명을 씌워 함경북도의 집단수용소로 보내는 조치가 취했는데 이삿짐을 꾸리는 과정에서 숨겨둔 성경책과 찬송가가 노출됐다고 한다. 땅 속에 묻어 두었던 책을 몰래 파내 짐 속에 넣으려다가 발각된 것이다. 보위부는 이를 단서로 고문을 가했고 결과적으로 그가 목사이며 그의 지도 아래 적어도 10년 이상 운영되어온 비밀 지하교회가 있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그리고 120여명의 성도들도 함께 잡히고 말았다. 그들은 모두 처형을 당하거나 수용소로 끌려갔다.

함흥시 지하교회 사건


탈북민 이영선 씨의 증언에 의하면 1974년 10월 함흥시 만세교에서 처형된 김태용 목사의 이야기가 전해진다.
김 목사는 함흥시 반룡구역 용마동 지역에 해방 전부터 있었던 한 옛날 교회의 지하실에 비밀스럽게 지하교회를 꾸미고 오랫동안 예배를 드렸다. 김 목사 자신의 가족들과 함께 한 사람씩 전도한 성도들이 모여 작은 교회를 형성했다. 이들이 발각되어 체포되었을 때 이 지하교회 교인들은 모두 36명이었고 18세부터 78세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연령층의 사람들이 있었다고 한다. 이들이 모이던 교회건물은 전쟁 중에 폭격에 의해 파괴돼 지하실 입구가 막혀 있어 외부에 드러나지 않았다. 교회가 서 있던 그 자리를 아무도 눈여겨 보지 않았기 때문에 교회건물 구조를 잘 알고 있었던 김태용 목사가 교인들을 동원해 지하실을 수리하여 교회로 꾸몄다고 한다. 이 지하교회는 20년이 넘도록 발견되지 않았다.

그러다가 1972년 7·4 남북공동성명이 발표되고 남북한 대표가 서로 왕래하면서 회담을 갖게 되자 김일성이 주택지 재개발을 시작했고 그때 미처 위장을 하지 못한 지하실 교회가 탄로 난 것이다. 이때 김 목사는 돌보고 있던 36명의 성도들과 함께 모두 사회안전원에 체포됐고 얼마 뒤 함흥시 만세교 다리 아래에서 교수형으로 처형됐다.

1996년 함경남도 기독교 사건

함경도를 중심으로 40년 이상 지하교회를 지켜온 목사도 있었다. 이름은 이윤심 목사. 함경남도 금야군 병원에 양의사로 재직하던 탈북민 최주혁 씨의 증언에 의하면 당시 이 목사는 만성위장염으로 치료를 받으러왔다가 나중에 의사인 자신에게도 복음을 전해 신자가 되었다고 했다. 이 목사의 아버지도 목사였는데 해방 전 세워진 ‘칠골교회’에서 강량욱(1904~1983·북한 국가부주석)과 목사생활을 같이 했다고 한다. 그러나 소련 군정 당시 강량욱은 김일성과 함께 기독교를 배교하고 이 목사의 아버지를 잡아 총살시킨 것으로 전해진다. 이 목사는 일생을 공산주의에 대한 원망을 품고 복음을 전하기 시작했다. 그가 전도하고 지도한 지하교인들은 대부분 북한의 엘리트층에 속한 사람들이었다고 한다. 이 목사는 40년 이상을 은밀히 목회활동을 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결국 1996년 10월 함경남도 금야군 용남리에서 보위부에 의해 체포되고 말았다. 그는 흔히 알려진 ‘1996년 함경남도 기독교사건’의 주모자로 체포되었는데 그때 그와 영향을 미치던 교인의 숫자가 함경남북도, 평안남북도, 황해남도, 자강도까지 약 180명 정도에 이르렀던 것으로 전해졌다. 그가 키워낸 교인들은 현재도 존재하고 있으며 북한교회의 신앙의 맥을 지켜가고 있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김창범 편집위원· 북한구원운동 사무처장 cbkim47@hanmail.net

자료출처 / http://www.futurekorea.co.kr/news/articleView.html?idxno=188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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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통


김길성 명예교수(총신대)가 ‘신앙고백서와 총회신학정체성 연구-통합 교단의 신앙고백서 평가를 중심으로’라는 제목의 발제했다.
그는 “합동과 통합은 1907년 제1회 대한예수교장로회 독노회에서 채택한 12신조,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및 대·소요리문답을 공교회의 신앙고백으로 공유하고 있다”며 “하지만 통합은 12신조에서 ‘최후 심판 때, 신자와 불신자의 상태’를 서술한 제12조의 ‘불신자의 정죄와 형벌’에 관한 부분을 삭제했다”고 했다.

또한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를 채택할 때도 1647년에 제정된 원문이 아닌, 미국 북장로교회(PCUSA)의 ‘1903년 신앙고백서’ 개정안을 채택했다. 이는 원문에 선언문 등이 추가된 것으로, 이중예정에서의 유기 교리를 포기했고 칼빈주의 5개조 중 ‘제한속죄’를 부인했다”며 “통합교단은 여성안수 허용을 위해 이를 골자로 한 대요리문답을 공식문서에서 삭제하기도 했다”고 했다.

이상원 교수(총신대)는 ‘개혁주의 윤리학의 관점에서 본 현대사회의 윤리적인 문제들’이라는 제목으로 발제했다.

“최근 등장한 젠더주의 성윤리는 성별을 주관적 인식에 따라 바꿀 수 있다고 본다.
그러나 성경은 인간의 성별은 하나님이 창조질서로서 정해주신 것으로, 인간의 주관적 인식에 따라 변할 수 없는 것”이라며 “하나님이 정해주신 성별은 남·여뿐이며, 다른 추가적인 성은 없다”고 했다.

이 교수는 “동성 간 성관계는 하나님의 창조질서를 거스르는 행위로 성경은 비도덕적 행위로서 명확하게 금지하고 있다”며 “수정이 이뤄지는 순간부터 영혼을 가진 인간생명이 시작되기에, 수정 이후의 전 과정에서 행해지는 모든 낙태는 살인행위다. 태아의 생명권은 임부의 행복권에 절대적으로 선행하지만, 태아와 임부의 생명권이 서로 충돌할 시 임부의 생명권이 선행한다”고 했다.

이상웅 교수(총신대)는 ‘죽산 박형룡과 예장합동의 신학적 정체성’이라는 제목의 발제에서 “죽산 박형룡 박사는 평양 장로회신학교(1931년)로부터 서울 장로회신학교와 총신대에 이르기까지(1972년) 교수 생활을 이어오며 그를 비판했던 신학자뿐만 아니라 우리 교단의 ‘지로적 신학’으로서의 역할을 은연중에 담당하고 있다”며 “죽산은 정통(orthodox)이란 다수의 우세한 의견이 아니라, 오직 성경을 기초로 한 옳은 의견이라고 강조했다”고 했다.

특히 “그가 저술한 ‘교의 신학’(1964-1973년)은 지금도 합동 강도사 고시 조직신학 과목의 모범 답안으로 사용되고 있다”며 “죽산은 이 책에서 자신만의 새롭고 독창적인 신학 이론을 창작하지 않고, 아브라함 카이퍼나 헤르만 바빙크 같은 서구 정통 신학자들의 신학 사상을 잘 요약해 정리했다”고 했다.

임종구 교수(대신대)는 ‘예장합동의 신학정체성 연구-기장 제6문서의 분석을 중심으로’라는 제목으로 발제했다. 임 교수는 “한국기독교장로회(기장)의 신학과 입장을 표명한 제6문서는 서문에서 WCC(세계교회협의회)의 선교정신인 하나님의 선교(Missio Dei)를 천명했다. 이는 유색인종 해방, 농촌사회 발전, 산업시대 인간화 회복 등 이 땅에서의 샬롬 만들기에 집중하지만 죽음 이후 하나님 나라를 향한 믿음을 상대적으로 약화시켰다는 비판도 있다. 결국 정치·사회·경제적 구조의 모순 해결에 매몰돼 예수 이름으로 얻는 죄 사함, 영혼 구원을 경시한 측면도 있다”고 했다.

그는 “기장 제6문서는 ▲에큐메니칼 ▲사회구원 ▲칼 바르트 신학 ▲하나님의 선교(Missio Dei) 추구 ▲민중신학과 해방신학 ▲성경해석에서 자유주의 신학 등의 입장에 서 있다”며 “조선신학교의 중심이었던 김재준 박사의 성경유오설(聖經有誤說)에서 촉발된 조선장로교단의 분열 등을 미뤄볼 때 교단의 주춧돌은 성경에 대한 바른 계시관”이라고 했다.

김요섭 교수(총신대)는 ‘제네바에서 웨스트민스터까지’라는 제목의 발제에서 “16세기 유럽에서 전개된 종교개혁 이후 개혁파 교회들은 성경의 진리에 기초해 바른 신앙을 고백함으로 교회 개혁에 충실하고자 했다”며 “제네바·프랑스·스코틀랜드·벨기에·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들 모두는 첫째, 하나님의 선택과 은혜를 교회의 기초로 삼아 어떤 박해와 고난 속에서도 교회의 영속성을 고백하고 소망했다. 대부분 신앙고백서들은 로마 가톨릭의 박해 속에서 제정되고 채택됐다”고 했다.

김 교수는 “둘째, 개혁교회의 신앙고백들은 그리스도의 머리이심이라는 성경적 원리를 강조해 교회 개혁의 방향과 목적을 분명히 했다. 즉 지상에 있는 교회의 불완전함과 한계를 인정하고 종말론적 성취를 소망하며 지속적인 개혁의 필요성을 천명했다”며 “이런 개혁을 위해선 스스로의 자격이나 공로 주장을 내려놓는 자기 부인의 겸손이 선행됐어야 했다. 그러면서 교회 안의 모든 인간적 요소들을 상대화했다”고 했다.

이풍인 교수(총신대)는 ‘신약성경에 나타난 신앙 고백들과 총회 신학정체성 연구’라는 제목의 발제를 통해 “예수는 가이사랴 빌립보에서 제자들에게 ‘너희들은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라고 물으셨을 때 베드로는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이 아들입니다’라고 답했다.

우리말 성경에는 ‘주’라고 번역됐지만 실제 헬라어 원문은 ‘주’ 대신 2인칭 대명사 ‘당신’이 사용됐다”며 “야훼를 유일신으로 믿는 유대인의 입장에서 제자들은 예수님을 향해 ‘하나님’으로 고백하는 건 실로 어려운 일이었다.

그러나 예수의 부활을 목도한 도마의 입에서 ‘나의 주시며 나의 하나님이십니다’(요 20:28)라는 고백이 터져 나왔다.
이는 인간적으로 상상도 할 수 없는 부활 후의 고백”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교단 정체성 선언문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기억할 점은 신앙고백이 도서관이나 연구실에서 만들어진 게 아니라는 것”라며 “삶의 정황이 신앙고백을 더욱 생생하게 만들어준 것처럼, 우리의 정체성 선언문도 단순한 신학적 입장이 아니어야 한다.

즉 성도들의 다양한 삶의 자리에서 자신들의 정체성을 확립하고 하나님 백성답게 살 수 있도록 생명력 있고 생동감 넘치는 형태로 표현돼야 한다”고 했다.

김광열 교수(총신대)는 ‘개혁신학의 성화론과 총회 신학정체성 연구’라는 제목의 발제에서 “우리 총회는 죽산 박형룡 등이 가르쳐온 하나님의 주권적 구원역사를 강조하면서 ‘제2축복 신학’ 등 다른 복음주의 신학들의 한계를 극복하면서도 성령의 역사를 사랑하는 개혁신학의 성화론을 계승해야 한다”고 했다.

또한 “이를 위해 미국 개혁신학자 존 머리(John Murry)의 결정적 성화론에 주목해야 한다.

즉 로마서 6장 2절에서 죄의 통치란 과거에 이미 무너졌고, 주님과 함께 죽고 부활한 신자들은 미래가 아닌 현재 도래한 하나님 나라의 통치를 누릴 수 있게 됐다며 이는 교회뿐만이 아닌 삶의 모든 영역에 적용된다고 했다”며 “존 머리의 성화론은 하나님 나라의 현재적 성격과 주권을 드러내, 한국교회가 성화뿐만 아니라 동성애·낙태 등 대사회적 문제에도 적극 싸울 수 있는 동력을 제공해준다”고 했다.

김성태 명예교수(총신대)는 ‘예장 합동총회의 교회 연합과 협력의 성경적, 신학적 원리연구’라는 제목의 발제에서 “예장 합동총회는 역사적 개혁주의 신앙을 사수하기 위한 정당한 분열도 있지만 교권 다툼의 원인으로 분열을 초래한 것도 있었다”며 “WEA 교류 논쟁도 역사적 개혁주의 신학을 지키려는 선제적 시도인지, 아니면 특정 신학 사조에 따른 파벌의 교권 장악 시도인지 그 진위를 분별해야 한다”고 했다.

김 교수는 “세대주의 전천년설에 근거한 환란 이전 교회의 휴거 개념은 개혁주의 신학에 심각한 도전과 왜곡을 가져다줬다.
역사적 전천년설 및 무천년설, 후천년설을 이단시 하는 신근본주의 종말신학을 경계해야 한다”며 “또한, 개혁주의 성령론에 있어서도 기사와 표적 등 기적은사의 중단론을 개혁주의 성령론의 유일무이한 정통인 것처럼 주장하는 것도 분별해야 한다”고 했다.






시간 순서로 재구성한 예수님의 33년 생애 1, 2, 3

시간 순서로 재구성한 예수님의 33년 생애 Ⅰ

4복음서(마태, 마가, 누가, 요한복음)는 예수님께서 이 땅에서 사셨던 사생애 30년과 공생애 3년을 기록하고 있다.
오늘날에는 역사를 시간 순서로 기록하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당시 복음서 저자들은 주제를 중심으로 사건들을 묶어서 기록했다.
따라서 독자들은 4복음서를 읽으면서도 예수님의 생애를 시간 순서로 이해하기가 쉽지 않다.

‘참평안’은 2016년 사순절을 맞아 예수 그리스도의 발자취를 시간 순서로 좇아가 보는 특별기획을 마련했다.
예수님께서 지상에 계셨던 33년은 7번의 예루살렘 방문을 중심으로 나눠볼 수 있다.
모든 사건을 완벽하게 연대기적으로 재구성하기는 어렵다.
다만 7번 예루살렘 방문을 중심으로 주요 사건들의 시기를 대략적으로 파악할 수 있을 뿐이다.
그렇다 하더라도 각 사건의 시기와 흐름을 파악한다면 예수님의 사역을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이 될 것이다.

1차 예루살렘 방문

주전 4년, 태어나신 지 40일 만에 결례를 받으시기 위해(눅 2:22)

역사가 요세푸스 헤롯 대왕의 죽음을 주전 4년 유월절 직전의 일로 기록하고 있다.
예수님께서 탄생하신 것은 헤롯 대왕 죽음 얼마 전의 일이다(마 2장).
당시 유대는 로마 황제 가이사 아구스도의 명으로 주전 8년부터 시작된 인구 조사가 진행 중이었다.1)
당시 인구 조사 방식은 자신이 살고 있는 도시에서 호적을 받는 로마 방식과 자신의 지파 고향으로 돌아가서 호적을 받는 유대 방식 두 가지가 있었는데, 예수님 출생 무렵에는 유대 방식으로 호적을 실행했기에 요셉과 아기 예수를 임신 중인 마리아는 고향 베들레헴으로 돌아가야 했다(눅 2:3-5).

이 베들레헴의 말구유에서 예수님께서 탄생하셨다.
출생의 기쁨과 목동들의 경배, 동방박사들의 경배도 잠시, 하나님께서는 요셉에게 헤롯의 유아 살해 명령을 피해 애굽으로 도망할 것을 명령하셨다(마 2:12-15).

베들레헴에서 애굽까지는 120km 거리로, 산모의 걸음을 생각하면 약 10-15일 거리에 해당한다.
아기 예수님 가정이 애굽에 도착한 지 얼마 되지 않아 갑작스레 헤롯이 죽었고, 하나님께서는 요셉에게 현몽하여 예루살렘으로 돌아오라 말씀하셨다(마 2:19).
이 모든 일은 단 40일 만에 이루어졌으며, 예수님께서는 40일 만에 예루살렘에 올라와 레위기 12:1-8에 기록된 출산 규례를 행하실 수 있었다(눅 2:22-24).
결례를 마치신 예수님은 성전에서 시므온과 안나 선지자를 만나셨고, 그들은 아기 예수님께서 메시아 되심을 알아보고 앞으로 이루어질 일에 대해서 예언했다(눅 2:25-38).

2차 예루살렘 방문

예수님 12세 되던 해 유월절(눅 2:42)

예수님께서는 12세 되셨을 때 부모님과 함께 유월절을 지키기 위해 예루살렘으로 올라오셨다(눅 2:41-42).
육신의 부모 요셉과 마리아는 유월절 절기를 마치고 갈릴리로 돌아갔지만, 예수님은 ‘아버지 집’, 성전에 남아서 랍비들과 대화하셨다(눅 2:43-50).
누가복음 2:52의 아기 예수님께서 ‘지혜와 키가 자라나며 하나님과 사람에게 더 사랑스러워 가셨다’는 표현은 예수님께서 성경에 기록된 대로 성장하시면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사람에게 큰 기쁨이 되셨음을 보여준다.

그 말씀과 같이, 갈릴리로 돌아온 이후 하나님이신 예수님께서는 사생애(私生涯) 동안 육신의 아버지 요셉이 하던 목수 일을 하시면서(마 13:55, 막 6:3), 십계명의 제 5계명, 부모 공경의 명령대로 육신의 부모에게 효도를 행하시며 순종하고 받드셨다(눅 2:51).

 

3차 예루살렘 방문

공생애 시작 후 첫 입성, 성전 정화(요 2:13-22).

예수님은 서른 살이 되실 때 사역을 시작하셨다(눅 3:23).
사역을 시작하시면서 세례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셨으며(마 3:13-17, 막 1:9-11, 눅 3:21-22),
광야에서 40일간 금식하시고 시험을 받으셨다(마 4:1-11, 막 1:12-13, 눅 4:1-13).
그 후 세례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셨던 요단강 건너편 베다니(요단 동편의 베다니, 마르다와 마리아, 나사로가 살던 예루살렘 인근 베다니와는 다른 곳)로 돌아가셔서 세례 요한의 제자였던 요한과 안드레를 만나 하루 함께 거하며 말씀을 가르치시고 제자를 삼으셨다(요 1:19-40).

안드레는 자기 형제 베드로를 전도하고, 예수님을 만나 전도받은 빌립은 나다나엘을 전도했다(요 1:40-51).
이후 예수님께서는 갈릴리로 돌아가 가나에서 물로 포도주를 만드시는 첫 번째 이적을 보이셨다(요 2:1-11).
갈릴리 지역 회당들을 순회하면서 말씀을 선포하던 예수님께서는(눅 4:14-15),
하나님의 정확한 시간표에 따라 나사렛 회당에서 희년을 선포하셨다(눅 4:16-30).
정확한 날짜에 희년을 선포하셨다면 이 날은 아마도 유대력 7월 10일이었을 것이다(레 25:9-11).

이후 유월절 가까이에 예수님께서는 공생애 시작 후 처음으로 예루살렘을 방문하신다.
장사하는 집으로 타락한 성전을 정화(淨化)하시고 이 성전을 헐어버리면 3일 만에 일으키리라 말씀하셨다(요 2:13-25).
이는 보이는 성전이 아니라, 십자가에 달리신 후 3일 만에 부활하심으로써 영원한 성전이 완성되는 것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었다.

성전 청결을 마친 후, 예수님은 예루살렘에서 니고데모를 만나 거듭남에 대해서 가르치셨으며(요 3:1-21),
유대 땅에서 제자들을 통해 사람들에게 세례를 베푸셨다(요 3:22, 4:1-2).

당시 세례 요한은 살렘 가까운 애논 땅에서 세례를 주고 있었는데, 그는 요한의 제자들이 예수의 소식을 듣고 예수님께로 가는 모습을 보며 중매자의 기쁨을 고백했다(요 3:23-36).

그런데 이 시점에 상황이 급변한다.
예수님을 소개하고 예수님께로 사람들을 인도해야 할 세례 요한이 헤롯의 부도덕함을 지적하다가 투옥되고 만 것이다(마 14:3, 막 6:17-18, 눅 3:19-20).
이에 예수님께서는 유대 땅에서 갈릴리로 물러가셨다(마 4:12, 막 1:14).
당시 유대인들은 유대 땅에서 갈릴리에 가려면 부정하다고 생각한 사마리아를 피해서 요단강을 건너 베레아 지방으로 우회했지만 예수님은 수가 성의 한 여인을 전도하시고 사마리아 사람들을 구원하시기 위해 거리낌 없이 사마리아를 통과하셨다(요 4:5-42).
‘넉 달이 지나야 추수할 때’라는 말씀을 볼 때, 이때는 보리가 익기 전인 유대력 9월에 해당했을 것이다(요 4:35).

사마리아를 지나 갈릴리에 도착하신 예수님께서 두 번째로 행하신 이적은 가나에 사는 왕의 신하의 죽어가는 아들을 말씀 한 마디로 고치신 것이었다(요 4:43-54).

이후 예수님께서는 갈릴리 가버나움을 본부 삼아 갈릴리 방방곡곡을 다니시면서 안식일마다 가르치시고 병자와 귀신들린 자들을 고치셨다(마 4:13-17, 막 1:14-15, 눅 4:31-32).

그리고 갈릴리에서 어부로 일하고 있던 베드로와 안드레, 야고보와 요한을 제자로 부르셨다(마 4:18-22, 막 1:16-20, 눅 5:1-11).2)

4차 예루살렘 방문

38년 된 병자를 고치시다(요 5:1-9)

요한복음 5:1-9에서는 예수님께서 유대인의 명절에 예루살렘에 올라가셔서 38년 된 병자를 고치신 사건을 기록하고 있다.
여기 ‘유대인의 명절’은 요한복음 6:4에서 “마침 유대인의 명절인 유월절이 가까운지라”라는 말씀을 볼 때, 유월절 바로 전 절기인 부림절을 가리킨다.

따라서 이때는 유대력으로 12월경이다.
예수님께서 부림절 전에 38년 된 병자를 고치신 날은 안식일이었는데, 종교지도자들은 예수님이 안식일을 지키지 않는다는 이유로 핍박을 시작했다(요 5:16).

이후 예수님께서는 다시 갈릴리로 올라가셔서 열두 제자를 부르신다(마 9:9-13, 10:24, 막 2:13-17, 3:13-19, 눅 5:27-32, 6:12-19).
그리고 안식일에 일하심으로 안식일의 주인되심을 나타내시고(마 12:1-13, 막 2:23-28, 3:1-5, 눅 6:1-10) 병자들을 치유하시다가, 한 산에 오르셔서 산상수훈을 통하여 팔복(八福)을 선포하셨다(마 5-7장).
그 뒤 가버나움으로 돌아오셔서 종을 고치셨으며(마 8:1, 5-15, 막 3:20-21, 눅 7:110), 나인 성 과부의 죽은 아들을 살리셨다(눅 7:11-17).

또 많은 병자들을 고치시고 다양한 비유를 통해 복음을 증거하시며 갈릴리의 많은 사람들을 전도하셨지만(마 13:1-52, 막 4:1-34, 눅 8:4-18), 정작 종교지도자들은 예수님의 인기를 시기했고 모친과 형제들은 예수님이 미쳤다며 배척했다(마 12:46-50, 막 3:21, 31-35).
실로 예수님께는 머리 두실 곳조차 없었다(마 8:19-20).
예수님과 제자들은 가버나움 지방에서 거라사(가다라) 지역으로 갈릴리 바다를 건너 배를 타고 이동하다 큰 풍랑을 만났다.
이때 예수님께서는 말씀 한 마디로 폭풍을 잠잠케 하심으로 만물을 다스리시는 창조주 되심을 분명히 보이셨다(마 8:18, 23-27, 막 4:35-41, 눅 8:22-25).

그리고 거라사 지방에서 군대 귀신을 쫓아내시고(마 8:28-34, 막 5:1-20, 눅 8:26-39) 다시 가버나움으로 친히 찾아가셔서 혈루병 걸린 여인을 치료하시고 회당장 야이로의 딸을 살리셨다(마 9:18-26, 막 5:21-43, 눅 8:40-56).

그러나 예수님께서 고향 나사렛으로 돌아오셨을 때, 나사렛 사람들은 “우리가 잘 아는 목수의 아들이 아니냐”며 예수님을 배척했다(마 13:54-58, 막 6:1-6).
이후 예수님께서는 열두 제자에게 전도의 능력을 주시며 둘씩 곳곳으로 파송하신다(마 10:1, 5-42, 11:1, 막 6:7-13, 눅 9:1-6).

이 시기에 옥에 갇혀 있었던 세례 요한은 예수님의 소식을 듣고 의심이 생기기 시작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이 메시아로 소개했던 예수님께 제자들을 보내어 “오실 그 이가 당신입니까? 아니면 우리가 다른 이를 기다려야 합니까?”라고 물었다(마 11:1-2, 눅 7:18-28).

이에 예수님께서는 세례 요한의 실족을 안타까워하시며 그를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로 비유하셨다(마 11:7).
세례 요한은 결국 엘리야로서의 사명을 다하지 못하고 헤로디아의 궤계로 인해 죽임을 당하게 된다(마 14:3-12, 막 6:21-29)

세례 요한의 죽음을 들으신 예수님은 침통한 마음으로 배를 타고 벳새다의 빈 들로 향하셨다(마 14:13, 막 6:32, 눅 9:10, 요 6:1).
요한복음 6장 4절을 볼 때, 이때는 유월절이 가까운 때였다.
빈들에 모여있는 큰 무리를 보고 불쌍히 여기신 예수님께서는 오병이어의 이적을 통하여 남자만 오천이나 되는 큰 무리를 배불리 먹이셨다(마 14:13-21, 막 6:30-44, 눅 9:10-17, 요 6:1-14).

몰려든 무리가 예수님을 영적 양식을 채워주시는 분이 아닌, 단순히 식량을 배부르게 주시는 분으로 오해할 것을 우려하신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배를 타고 갈릴리 바다를 건너 게네사렛 땅으로 가도록 하시고 홀로 산에 올라가 밤이 맞도록 기도하신다(마 14:22, 막 6:45-46, 요 6:15).

밤중에 풍랑을 만나 두려움에 떨고 있는 제자들을 향해 예수님께서는 물 위를 걸어가 그들을 구원하시고 믿음 없음을 꾸중하신 뒤, 게네사렛 사람들의 병을 고치시고 말씀을 전하셨다(마 14:23-36, 막 6:47-56, 요 6:16-21).

이때 종교지도자들은 예루살렘에서부터 게네세렛까지 올라와 장로들의 유전을 지키는 문제에 대해 트집을 잡았고,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말씀을 사람의 유전으로 폐하는 그들을 책망하셨다(마 15:1-20, 막 7:1-23).

오병이어 사건을 목도했던 무리는 배를 타고 예수님을 쫓아왔다.
그들은 게네사렛 인근을 찾다가 결국 가버나움에서 예수님을 찾아냈다.
그러나 그들이 그토록 예수님을 따라온 것은 영혼의 양식이 아니라 보이는 떡을 먹기 위해서였다(요 6:26).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가버나움에서 보이는 떡이 아닌 생명의 떡으로 오신 자신에 대해서 가르치셨지만, 수많은 제자들은 “이 말씀은 어렵도다”라고 하면서 다 예수의 곁을 떠나버리고 열두 제자만이 남았다(요 6:22-71).

이후 예수님께서는 두로와 시돈 지방으로 올라가셔서 이방 수로보니게 여인을 만나 그녀의 믿음을 인정하시고 귀신들린 딸을 치유하신다(마 15:21-28, 막 7:24-30). 이를 시작으로 이방 지역과 갈릴리에서 천대받는 사람들을 전도하시다가 데가볼리에서 칠병이어로 이방인 사천 명을 먹이시고(마 15:32-39, 막 8:1-10), 막달라 지방에서 ‘요나의 표적’에 대한 가르침과 건너편 벳새다에서 ‘종교지도자들의 누룩을 주의하라’는 가르침을 주셨다(마 16:1-12, 막 8:11-21). 이후 가이사랴 빌립보에서 ‘나를 누구라 하느냐’는 예수님의 질문에 베드로는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고백했으며, 예수님은 그 고백 위에 교회를 세우리라 말씀하셨다(마 16:13-20, 막 8:27-30, 눅 9:18-21). 그리고 이때부터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서 죽임을 당하시고 3일 만에 부활하실 것을 말씀하시기 시작했다(마 16:21-28, 막 8:31-38, 눅 9:22-27).

약 팔일 후(눅 9:28),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와 요한, 야고보 세 제자를 데리고 기도하시기 위해 변화산에 올라가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변화하신 중에, 모세와 엘리야와 함께 예루살렘에서 별세하실 일에 대해서 논의하셨다(마 17:1-21, 막 9:2-29, 눅 9:28-43). 다음날 산에서 내려오신 예수님께서는 갈릴리에서 다시 십자가에서 죽으실 것에 대해서 예고하셨으며(마 17:22-23, 막 9:30-32, 눅 9:44-45), 조용히 가버나움을 지나가면서 통행료 반 세겔을 내시고(마 17:24-27) 예루살렘으로 향하셨다. 그러나 제자들은 십자가의 죽음을 향해 나아가시는 예수님의 마음을 헤아리기는커녕, 믿음이 없어 귀신 들린 아이를 고치지도 못했고(막 9:14-29, 눅 9:38-43) 길 위에서 계속 누가 크냐며 쟁론을 벌였던(마 18:1-22, 막 9:33-50, 눅 9:44-62) 철부지들이었다.

5차 예루살렘 방문

초막절(요 7:1-10)

예수님께서 주로 갈릴리에서 활동하셨던 것은 유대 지역에 예수님을 죽이려는 종교 지도자들이 칼을 갈고 있었기 때문이었다(요 7:1). 그런데 예수님의 형제들은 도리어 예수님께 “자신을 세상에 나타내라”면서 유대로 가라고 종용했다.
이는 예수님의 형제들이 예수를 믿지 않고 미쳤다고 생각하여 빨리 잡히기를 바랐기 때문이었다(요 7:5, 참고-막 3:21).
예수님께서는 비통한 마음 가운데, 형제들의 눈을 피해 몰래 숨어서 초막절에 맞춰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셨다(요 7:10).
이는 고난주간 약 6개월 전으로, 승천하실 때를 맞추시기 위함이었다(눅 9:51).

이때 예수님께서는 사마리아를 통과해서 지나가기를 원하셨지만, 사마리아 사람들은 예루살렘을 향해 간다는 이유로 예수님의 통행을 거부했다(눅 9:52-53).

길 가실 때 찾아온 한 서기관은 의로운 척 “어디로 가시든 나는 좇겠습니다”라고 말했지만 그의 속을 아시는 예수님께서는 “인자에겐 머리 둘 곳이 없다”며 한탄하셨다(눅 9:5758, 참고-마 8:19-20).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에 들어가기 전, 70명의 전도특공대를 세우시고 그들을 앞세워 보내셨다(눅 10:1-16).
이들은 나가서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고 증거하며 귀신들을 쫓아냈다.
이들이 기뻐 보고할 때, 예수님의 눈은 사단의 총 두목이 하늘로서 번개같이 떨어지는 것을 보고 계셨다(눅 10:17-18).
사단이 땅으로 떨어진 뒤, 더욱 극심한 박해가 시작되었다.
아마도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들어가기 위해 베다니를 지나가실 때, 처음으로 마리아의 집에 거하시며 마리아와 마르다의 봉사를 받으셨을 것이다(눅 10:38-42).

예수님께서 명절에 예루살렘에 오시는지는 초미의 관심사였다.
당시 유대인들 사이에는 예수님이 좋은 사람인지, 아니면 무리를 미혹하는 자인지에 대해서 논쟁이 뜨거운 상태였기 때문이다(요 7:12, 43).

예수님께서는 장막절 중간이 되어 성전에서 가르침을 시작하셨다(요 7:11-36).
이후 장막절 끝날, 곧 큰 날에 예수님께서는 “누구든지 목마른 자는 내게 와서 마시라”고 말씀하셨고, 이 말씀을 들은 무리들의 혹자는 예수가 구약에 예언된 참 선지자라, 또 다른 혹자는 그리스도가 어찌 갈릴리에서 나올 수 있겠냐며 논쟁했다(요 7:37-53).

이러한 와중에도 예수님은 감람산에서 기도하시고 백성들을 가르치시며(요 8:1-2), 돌에 맞아 죽을 위기에 처한 간음한 여인을 용서하셨다(요 8:3-11).

그리고 성전에서 유대인들을 가르치시며 ‘아브라함이 있기 전에 내가 있었다’는 것을 말씀하셨으나(요 8:57-58), 유대인들은 그 말씀에 격분하여 돌로 예수님을 치려고 했다(요 8:59).

이들에게 쫓겨 나가시는 긴급한 와중에 예수님께서는 날 때부터 소경된 이를 진흙을 이겨 눈에 바르고 실로암에 가서 씻으라는 말씀으로 고쳐주셨고, 이 소경의 증거는 많은 유대인들에게 예수가 메시아인지, 귀신의 힘을 입은 것인지 논란을 만들었다(요 9:1-41, 10:1-21).

6차 예루살렘 방문

수전절(요 10:22)

겨울이 되어 수전절(修殿節)이 되었다.
수전절은 유대력 9월 25일부터 8일간으로, 고난주간 약 4개월 전이다.
솔로몬 행각에 다니시던 예수님께서는 유대인들이 찾아와 그리스도인지 아닌지를 밝히 드러내라고 종용하자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고 밝혀주셨다(요 10:22-30).

그러나 깨닫지 못한 유대인들은 예수를 다시 돌로 치려 했고(요 10:31-39),
이 사건 이후 종교지도자들은 공개수배령을 내려 예수님을 체포하고자 했다(참고-요 11:57).
당시 교인들 가운데 어떤 자들은 도리어 바리새인들에게 찾아가 예수님을 밀고하기까지 했다(참고-요 11:46).
이에 예수님은 요단을 건너 베레아 지방으로 물러나셨다(요 10:40-42).

예수님께서는 베레아 지역에서 3개월 가량을 머무셨다.
이 시기에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주기도문을 가르치시고(눅 11:1-4),
주로 비유를 통해 서 천국에 대한 말씀들을 집중적으로 선포하셨다(눅 11:5-16:31).

겨울 무렵, 예수님께서는 나사로가 병들었다는 소식을 들으시고는 이틀 뒤 나사로를 찾아가신다.
베다니가 위치한 유대 지역은 예수님을 이단이라며 돌로 쳐 죽이려는 가장 위험한 지역이었다(요 11:8).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사랑하는 나사로를 다시 살리시기 위해 기꺼이 베다니로 향하셨고, “나사로야 나오라”말씀 한 마디로 나사로를 살리셨다(요 11:1-44).

이 사건은 유대 지역 종교지도자들을 경악하게 했다.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나사로의 소식으로 인해 예수를 믿는 유대인들이 날로 늘어간 것이다(참고-요 12:9-11).
이에 종교지도자들은 예수님을 죽이기로 결의하고 눈에 불을 켜고 찾기 시작했으며 (요 11:47-53),
예수님께서는 이들을 피해 약 5km 떨어진 에브라임 광야로 피하셨다(요 11:54-55).

에브라임 광야로 피하시는 긴급한 와중에도 예수님께서는 전도하시기를 쉬지 않으셨다.
예수님은 갈릴리와 사마리아를 빙 돌아 경유하시면서 열 명의 나병 환자를 고치시고(눅 17:12-19) 하나님 나라와 재림에 대해 가르치시며(눅 17:20-37), 기도의 자세(눅 18:1-14)와 율법의 참 의미(마 19:3-12, 16-30, 막 10:2-12, 17-31, 눅 18:18-30) 등을 말씀하셨다.

이 시기를 신학자들은 예수님의 최후 순회전도라고 표현한다.
유대력 12월경,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으로 다시 발걸음을 옮기시면서 무거운 마음으로 십자가의 죽음에 대해서 세 번째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으나, 제자들은 예수님이 정치적인 메시아가 되어 세상적인 정권을 차지할 것만 생각하고 있었다(마 20:17-28, 막 10:32-45, 눅 18:31-34).

예루살렘으로 향하는 길에서 여리고에 도착했을 때, 예수님은 소경 바디매오를 고쳐주시고(마 20:29-34, 막 10:46-52, 눅 18:35-43), 세리장 삭개오의 집에 유하시며 그를 구원하시고 열 므나의 비유를 가르치셨다(눅 19:1-28).

그리고 마침내 주전 29년 유월절 엿새 전, 예루살렘으로 들어가는 초입의 빈민촌 베다니에 예수님께서 도착하셨다(요 12:1).

1) 구레뇨는 주후 6년에 수리아 총독으로 임명 받았다. 그러나 그는 실질적으로 주전 12년부터 수리아 지방에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다. 원어적으로 누가복음 2:2의 ‘수리아 총독 되었을 때’는 ‘수리아 총독으로 있을 때’라는 의미이며, 당시 구레뇨가 실질적으로 총독과 같이 영향력을 행했음을 보여준다.

2) 이전에 세례 요한의 제자였던 요한과 안드레, 그리고 그들이 예수 앞으로 데리고 나온 베드로는 요한복음 1:19-51을 볼 때, 예수님께서 공생애를 시작하실 때 예수님을 처음 만난 자들이었다. 신학자들은 이들 이 가나의 혼인잔치에서 예수님을 수발했던 자들이었을 것이라고 말한다. 이들은 공생애 초기에 예수님을 돕다가(참고- 요 4:2, 8), 모종의 이유로 갈릴리로 돌아가 어부로 일하고 있었다.

3) 마태복음 8:19-20에서 서기관이 나아와 “예수님이 어디로 가든 나는 좇겠습니다”라고 말하자, 예수님께서 그의 허례허식을 보시고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고 탄식하신 사건은 병행구절인 누가복음 9:57-58의 묘사를 볼 때 다섯 번째 예루살렘을 방문하시는 길에 있었던 사건일 것이다. 마태가 이 사건의 위치를 바꿔서 배치한 것은, 예수님의 형제들까지도 예수가 미쳤다며 배척하는 상황을 전달하기 위함으로 보인다.

4) ‘베레아’는 요단강 동편 유대 건너 지역으로서, 헬라에 위치한 사도행전 17:10-14의 ‘베뢰아’와는 다른 지역이다.

 


시간 순서로 재구성한 예수님의 33년 생애 Ⅱ

 

7차 예루살렘 방문

> 주후 29년

 

종려주일

(마 21:1-11, 막 11:1-11, 눅 19:29-40, 요 12:12-19)

갈릴리와 데가볼리 지역에서 예루살렘에 들어오기 위해서는 요단강을 따라 남하하다가 여리고를 지나 벳바게와 베다니를 지나야 한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보다 앞서 예루살렘을 향하시며 두 제자를 불러 벳바게에 가서 나귀새끼를 끌고 오라고 말씀하셨다. 나귀는 말과 비교하면 초라할 정도로 덩치가 작다. 더구나 나귀 새끼는 어린애 하나 태우기도 벅찰 정도다. 예수님께서 그런 나귀 새끼를 타셨으니 땅에 발이 닿을 듯 말 듯, 보는 사람마다 이해하기 어려운 광경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스가랴 9장 9절의 예언을 성취하시기 위해서 나귀새끼 위에 오르셨고, 나귀 새끼는 주저앉지 않고 자신의 등에 만왕의 왕을 태운 채 예루살렘으로 입성했다.

당시 예루살렘에는 유대인 약 270만 명이 모여 있었다. 이들은 예수님의 입성을 기뻐하면서 종려나무를 흔들면서 ‘호산나’라고 외쳤다. ‘호산나’는 ‘이제 구원하소서’라는 뜻 의 히브리어 ‘호쉬안나’(הוֹ ִשיָעה ָנא, 시 118:25)의 음역으로서, 예수님을 정치적인 메시아로 생각하고 로마의 압제 속에 신음하는 이스라엘을 구원해달라는 외침이었다. 그러나 사람의 마음과 생각을 아시는 예수님께서는 많은 군중의 환호성 속에서도 저들이 돌변하여 “십자가에 못박으라!” 외칠 것을 미리 보시면서 고독하게 입성하셨다.

 

백성들의 환영을 받으며 입성하신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 성을 보시고 우셨다(눅 19:41-44). 여기 ‘우시며’는 헬라어 ‘클라이오’로, ‘격렬한 괴로움, 비통함, 대성통곡’을 의미한다. 즉, 사람들의 열렬한 환호를 받으며 들어오신 예수님께서 사람들이 이상하게 생각할 정도로 통곡하고 격렬하게 괴로워하신 것이다. 예수님께서 통곡하신 이유는 약 40년 뒤, 주후 70년 8월 10일에 로마의 디도 장군이 예루살렘을 공격하여 약 110만 명의 유대인들이 학살당할 것을 보셨기 때문이었다. 실제로 예루살렘의 멸망 당시, 흰 돌로 세워져 해가 높이 뜨면 황금색으로 빛을 반사해 ‘황금의 성’이라고 불리던 예루살렘의 별명 때문에 로마군 사이에 ‘예루살렘은 돌과 돌 사이에 황금을 넣고 지었다’는 소문이 퍼졌고, 로마군은 예수님의 말씀대로 ‘돌 하나도 돌 위에 남기지않고’ 성벽과 성전을 파괴하였다.

예수님께서 체포되신 후 유대인들은 빌라도에게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으라며 ‘그 피를 우리와 우리의 자손에게 돌리라’고 소리쳤다(마 27:25). 그 소리친 대로 성취되어 예루살렘의 멸망 때 수많은 유대인들이 학살당했고 이후 세계 각지로 흩어져 오랜 기간 동안 천대받고 배척받게 된 것이다.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예수님께서는 제일 먼저 성전에 가셔서 성전을 둘러보셨고, 해가 저물자 베다니로 가셔서 유하셨다(막 11:11).

 

월요일: 권위의 날

(마 21:12-22, 막 11:29-19, 눅 19:45-48, 요한복음에는 월요일에 대한 기사가 없다)

고난주간 월요일은 열매 없는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시고 성전을 깨끗이 하심으로써 예수님의 권위를 나타내신 날이다.

종려주일 다음날인 월요일, 예수님께서는 다시 예루살렘에 들어오시며 성전으로 향하셨다. 베다니에서 나와 사랑하는 제자들과 예루살렘 성전으로 가시던 예수님께서는, ‘무화과의 집’이라는 지명의 ‘벳바게’를 지나실 때쯤 시장함을 느끼시고 잎이 무성한 무화과나무를 찾으셨으나 열매가 하나도 없음을 보시고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셨다. 팔레스타인 지방의 무화과나무는 3-4월경에 아직 먹을 수 없는 초록색 열매가 먼저 열리고, 뒤이어 잎이 나기 시작하여 6월경에 열매가 노랗게 익어 먹을 수 있게 된다. 따라서 아직 무화과의 때는 아니었다 (막 11:13). 그러나 이 나무는 잎이 무성했지만 초록색 열매조차 보이지 않았다. 여기 처음 맺혀지는 초록색 열매는 먼저 언약 백성이 된 장자 이스라엘을 상징한다. 이스라엘은 무화과나무의 무성한 잎같이 권위적인 종교의식들은 가득했지만, 정작 신앙의 열매를 맺지 못함으로 예수님께 저주를 듣게 되었다.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신 것은, 깨닫지 못하고 열매 없는 이스라엘 백성들에 대한 책망, 그리고 믿지 못하는 제자들을 향한 믿음의 요구였다.

이후 예수님께서는 성전에 들어가셔서 성전을 깨끗이 하셨다. 이 성전 정화사건은 예수님께서 공생애를 시작하실 때 있었던 사건(요 2:13-22)에 이어 두 번째이다. 성전에는 ‘돈 바꾸는 자들’이 가득했는데 이는 당시 유대 사회에서는 ‘렙돈’, ‘드라크마’과 같은 헬라 돈과 ‘데나리온’ 같은 로마 돈을 사용했지만 절기마다 속전의 값으로 드리는 성전세 반 세겔(노동자 2일 품삯에 해당)을 내기 위해서는 유대 돈인 ‘세겔’로 환전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이들은 환전하면서 약 12.5%의 커미션을 떼었고, 제사장들은 상인들과 결탁하여 백성들이 가지고 온 제물을 트집잡아 돌려보내고 상인들이 폭리를 취하며 팔고 있는 제물을 사도록 유도했다. 그래서 당시 하나님의 기도하는 성전은 장사하는 곳, 강도의 굴혈이 되어 있었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분노하여 성전의 매매하는 자들에게 강도라고 소리지르시고 내쫓으셨다. 유대 백성들에게 가장 대접받던 종교지도자들을 강도라고 부르며 쫓아내신 예수님의 폭탄선언은 삽시간에 예루살렘 전역으로 퍼져나갔다.

 

화요일: 변론의 날

(마 21:23-26, 막 11:20-14:11, 눅 20:1-22:6, 요 12:20-50)

고난주간 화요일은 예수님의 생애에서 공개 전도 최후의 날로 하루 종일 종교지도자들과 변론하시며 시달림을 당하셨던 날이다.

화요일 아침, 베다니를 떠나 벳바게를 지나면서 예수님과 제자들은 저주받았던 무화과나무가 뿌리까지 말라 있는 것을 보았다(막 11:20-21, 마태는 이 사건을 즉시 일어난 것으로 강조하여 기록하고 있다 – 마 21:19-20). 뿌리까지 마른 것은 무화과나무의 생존권까지도 박탈당했다는 것을 보여준다. 말씀으로 권고 받을 때가 바로 열매를 맺어야 하는 때임을 가르쳐 주는 것이다.

당시 종교지도자들은 종려주일에 백성들이 예수님을 열광적으로 맞이한 일 때문에 시기와 질투가 극에 달해 있었다. 이들은 어떻게든 대중 앞에서 예수를 망신시키고자 갖은 변론과 질문을 준비하였다. 이들은 예수님의 권위에 대해서 질문하면서 자신들이 가진 종교지도자로서의 권위를 과시하고자 했지만 도리어 요한의 세례에 대한 역질문을 답하지 못하고 망신만 당했으며(마 21:23-27, 막 11:27-33, 눅 20:1-8), 예수님께서는 세 가지 비유(두 아들의 비유:마 21:28-32, 악한 농부의 비유: 막 12:1-12, 혼인잔치 비유:마 22:1-14, 눅 14:15-24)를 통하여 종교지도자들을 책망하셨다. 이들은 예수님의 비유가 자신들을 책망하신다는 것을 분명히 알았다. 그러나 이들은 회개하기는커녕 예수님을 잡고 백성들 앞에서 다시 자신들의 권위를 세우고자 했다(마 21:45-46).

예수님 당시 유대교는 외적인 율법 준수에 대해서만 토론하는 사변(思辨)의 종교로 빠져가고 있었다. 이를테면 ‘식사를 하기 전에 손을 씻고 정결해져야 한다면 손은 몇 분 동안 어떻게 씻어야 하는가?’와 같은 허례허식이 가득 차 있었다. 따라서 종교지도자들은 그중 난해한 사변들, 즉 납세의 대상에 대한 문제나 부활의문제, 계명 중 가장 큰 계명의 문제 등 어려운 질문을 통하여 예수님을 공격하려고 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이들의 질문을 명쾌히 해결하시고, ‘그리스도가 다윗의 자손이라면,어찌 다윗이 그리스도를 주라고 칭하셨는가?’(마 22:41-46, 막 12:35-37, 눅 20:39-44, 시 110:1)라는 질문을 통하여 그리스도가 신성과 인성을 동시에 가지신 분임을 선포하셨다. 이외에도 예수님께서는 바리새인들에 대한 일곱 가지 화를 말씀하시고(마 23:1-36, 막 12:38-40, 눅 20:45-47), 예루살렘의 멸망을 미리 보시며 탄식하셨다(마 23:37-39).

 

예수님께서 가르치시던 중, 한 과부가 연보궤(헌금통)에 두 렙돈, 즉 한 고드란트를 헌금하는 것을 보셨다. 렙돈은 1/128 데나리온으로(1데나리온은 하루 노동자 임금으로 약 10만 원의 가치), 두 렙돈이면 오늘날 약 1,500원 정도에 해당한다. 예수님께서는 그녀가 구차한 중에서도 자기 모든 소유를 드릴 만큼 아낌없이 헌금했음을 칭찬하셨다(막 12:43-44).

그 후 헬라인들이 빌립에게 찾아와 예수님을 만나게 해달라고 부탁했다. 사도행전 17:21을 볼 때 이들은 ‘새 것을 좋아하는 사람’으로 당시 대단한 이슈의 주인공이었던 예수님을 직접 만나고 싶어했던 것이다. 이 소식을 들은 예수님은 ‘인자가 영광을 얻을 때가 왔다’고 말씀하시며 십자가의 시간이 다가옴을 말씀하셨고(요 12:24-26), 예수님께서 고난의 십자가 길을 놓고 번민하며 기도하시자 하늘에서 ‘내가 이미 영광스럽게 하였고 다시 영광스럽게 하리라’ 약속하는 음성이 들렸다(요 12:27-33). 웅성대는 군중들에게 예수님께서는 다시 한 번 이 땅에서의 ‘들림’과 그 들림으로 말미암은 ‘이끎’에 대해서 가르치셨고(요 12:32-33), 믿지 않는 군중들을 떠나가 숨으셨다(요 12:36, 37-50).

예수님께서는 성전에서 나오시는 길에 제자들에게 예루살렘의 멸망과 종말에 대해서 가르치셨다 (마 24-25장, 막 13장, 눅 17, 21장). 예수님께서는 가까운 미래에 예루살렘 성전이 완전히 파괴될 것을 예언하시고(마 24:1-2) 종말의 징조와 종말을 깨어 예비하고 기도하며 준비할 것을 가르치셨다. 그리고 열 처녀의 비유(마 25:1-13)와 달란트에 대한 비유(마 25:14-30, 눅 19:11-27),양과 염소의 비유(마 25:31-46)를 통해 늘 깨어 종말을 준비하는 신앙의 중요성을 가르치셨다.

예수님께서 하루 종일 식사도 제대로 못하시고 변론과 가르침으로 분주히 다니시는 동안 악한 종교지도자들 역시 분주한 하루를 보냈다. 그들은 가야바의 집에 모여 예수를 죽일 방책을 연구하고 언제 죽일지 회의를 벌였다(마 26:1-5, 막 14:1-2, 눅 22:1-2). 회의 끝에 백성들의 반응이 두려우니 명절이 지나서 예수를 죽이자고 합의를 보았다.

 

예수님께서는 고난주간 동안 저녁마다 예루살렘에서 베다니로 돌아가 문둥이 시몬의 집에서 묵으셨다. 이날 마리아는 값비싼 향유 한 옥합을 가지고 나와 예수님의 머리에 부음으로 예수님의 장사를 준비했다(마 26:6-13, 막 14:3-9, 요 12:3-8). 이 향유는 300데나리온, 오늘날 수천만원에 해당하는 값비싼 것이었다. 그러나 제자들은 마리아의 행동이 예수님의 장사를 준비한 것인지를 깨닫지 못했고(마 26:12) 도리어 가룟 유다의 선동에 휘말려 마리아를 질책했다(요 12:4-5).그러나 가룟 유다의 질책은 선한 사업을 위해서가 아니라 마리아의 헌금을 몰래 빼돌려 도둑질할 생각 때문이었다(요 12:6).이 마음을 꿰뚫어보신 예수님은 공개적으로 가룟 유다를 도적으로 지적하셨고 예수님의 장례를 예비한 마리아를 기념하라며 칭찬하셨다(마 26:10-13, 막 14:6-9).

 

수요일: 침묵의 날, 기도의 날

(마 26:1-5, 막 14:1-2, 눅 22:1-6)

4복음서에서는 예수님께서 수요일에 행하신 일에 대한 기록을 찾을 수 없다. 그래서 신학자들은 이 날 예수님께서 화요일에 행하신 일이 많아 베다니의 집에서 편안히 쉬셨다고 설명하면서 ‘은퇴의 날’이라고 표현한다. 그러나 인류의 죄를 걸머지고 십자가에 달리시는 일이 1분 1초가 가까워지고 있음을 아시는 예수님께서 편안히 쉬실 리가 없다. 이날예수님께서는 내적으로 깊이 침묵하시며 공생애 3년 동안의 모든 행적을 마음 속에 기도하심으로 정리하셨다. 그리고 나사로까지 죽이려는 종교지도자들을 생각하시고 나사로에게 피할 것을 통지하셨다(요 12:9-11).

시몬의 집에서 망신을 당한 가룟 유다는 한밤 중에 빠져나갔다. 그리고 예수님이 베다니에서 기도하시는 동안 대제사장들을 찾아가서 예수님을 팔겠노라 약속하고 은 30냥을 받았다(마 26:14-16, 막 14:10-11). 본래 종교지도자들은 명절이 끝나고 예수님을 죽이려고 했지만 가룟 유다의 배신 덕분에 명절 전에 예수님을 죽이는 것으로 계획을 수정했다.

가룟 유다의 ‘가룟’은 ‘열성적인 유대주의자’, 혹은 ‘그리옷 출신의 남자’라는 뜻으로 추측된다. 만약 가룟 유다가 그리옷 출신이라면 12제자 가운데 가룟 유다만이 잘 사는 남쪽 유다 지역 출신이고 나머지는 천한 북쪽 갈릴리 출신이라는 의미이다. 그는 지역적인 역차별을 느꼈을 수도 있으며 평소 유다 지역의 사람들이 갈릴리 지역의 사람들을 은근히 무시하는 경향을 가졌을지도 모른다. 그런 가운데 가룟 유다는 회계라는 중책을 맡으면서 야망도 가지고 제자들을 선동하는 역할을 해왔다. 처음에는 귀히 쓰였지만 결국 하나님의 섭리를 이루는 데 악인으로 쓰여지게 되었다(잠 16:3).

 

목요일: 고민의 날, 비애의 날

(마 26:17-35, 막 14:12-31, 눅 22:7-38, 요 13:1-17:26)

목요일은 인류를 구원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달리시기 전 고민하신 날이다. 이날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고 최후의 만찬을 마치신 후 겟세마네 동산에서 땀이 피가 될 정도로 기도하시며 십자가를 예비하셨다.

이날 저녁을 가리켜 성경은 ‘무교절의 첫날, 양 잡는 날’이라고 표현하고 있다(마 26:17, 막 14:12, 눅 22:7). 본래 무교절은 유월절 다음날부터 칠일을 지키게 되는데 ‘무교절의 첫날’은 유월절을 포함하여 무교절 전(全) 기간의 첫날을 가리키는 표현이다.

그런데 주후 29년의 ‘무교절의 첫날, 양 잡는 날’은 하루 앞당겨져야 했다. 주후 29년의 안식일은 ‘큰 날’이이기 때문이다(요 19:31). 여기 ‘큰 날’(μεγάληἡἡμέρα ἐκείνουτοῦ σαββάτο)은 안식일 이면서 유월절이 겹치는 날으로, ‘큰 날’에는 유월절을 하루 앞당겨서 전 날 지키고 다음 날을 안식일로 지켰다. 즉 본래 유월절인 1월 14일은 토요일로 ‘큰 날인 안식일’로 지키고, 유월절을 하루 앞당겨 13일

금요일에 지킨 것이다. 따라서 12일 목요일은 유월절을 예비하기 위해 집에 누룩을 제거하고 유월절 만찬으로 무교병과 어린 양을 준비하는 날이었다. 예수님께서는 이날 제자들과 유월절 식사 하시기를 간절히 바라셨다(눅 22:14-15). 그러나 마태복음 26:26, 누가복음 22:19를 볼 때 제자들은 무교 병(헬라어:ἄζυμος아쥐모스)을 전혀 준비하지 않 았고 예수님께서는 유월절 식사 대신 유교병(헬라어:ἄρτος아르토스)을 드셔야 했다.

예수님께서는 유월절 식사 중에 제자들의 발을 씻기셨다(요 13:1-11). 그리고 제자들에게 다시 한 번 십자가의 수난이 있을 것을 가르치시면서, 서로 섬길 것을 종용하셨다(요 13:12-20). 이 말씀을 마치신 예수님은 심령에 민망하여 “너희 중에 하나가 나를 판다” 말씀하시며 “떡 한 조각을 찍어서 주는 자가 바로 그 자”라고 하셨다(요 13:21).이것은 가룟 유다에게 마지막 회개의 기회를 주신 것이다. 다른 제자들은 무지하여 예수님께서 가룟 유다에 대해서 말씀하신 것인지 깨닫지 못했지만 누구보다 가룟 유다 자신만큼은 그 떡이 어떤 의미인지 잘 알고 있었다. 만약 이때라도 가룟 유다가 그 떡을 받지 않고 눈물로 회개했다면 그는 예수님을 파는 자리에서 벗어날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때 곧 사단이 가룟 유다 속에 들어갔고(요 13:27), 유다는 그 떡을 받고 예수님을 팔기 위해 나가고 말았다. 이후 예수님께서는 나머지 제자들에게 떡을 떼어 축사하시고 나누어지고 잔을 사례하고 주시면서 최후의 성만찬을 행하셨다(마 26:26-30, 막 14:22-26, 눅 22:14-23, 요 13:21-30).

성만찬이 끝난 후, 예수님께서는 마지막 최후의 고별설교를 하셨다. 이 설교는 요한복음 13:31-16:33에 걸쳐 길게 기록되어 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서로 사랑할 것을 새 계명으로 주셨으며 예수님께서 아버지께로 가셨을 때 ‘다른 보혜사’를 주셔서 영원토록 제자들과 함께 있게 하시고 전에 가르쳤던 모든 일을 기억하여 생각나게 하실 것을 약속하셨다. 예수님의 열두 제자 중 유일하게 가룟 유다만이 예수를 팔러 떠나 이 마지막 설교의 자리에서 빠져있었다.

식사와 고별설교를 마치신 예수님께서는 찬미하며 감람산으로 기도하기 위해 나아가셨다. 예수님께서는 감람산으로 가시던 중 베드로가 예수님을 부인할 것을 예고하셨다(마 26:31-35, 막 14:27-31, 눅 22-31-34). 특별히 누가복음 22:31-32을 볼 때, 사단이 밀 까부르듯 하려고 제자들을 청구하였으나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위하여 믿음이 떨어지지 않기를 기도하셨다.예수님의 체포와 십자가 앞에서 다 도망갔던 제자들이 다시 회개하고 돌아올 수 있었던 것은,주님의 중보기도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예수님께서는 약 오후 11시 정도에 겟세마네 동산에 도착하셨다. 감람산 중턱에 있는 겟세마네 동산은 예수님께서 평소에 습관을 좇아 기도하시던 곳이었다. 예수님께서는 여덟 제자에게는 산 아래에 앉아 있으라고 말씀하시고 베드로,야고보,요한 세 제자만 데리고 동산으로 올라가셨다. 동산에 이르신 후 세 제자들에게 “내 마음이 심히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 너희는 여기 머물러 깨어 있으라”고 말씀하시고는 돌 던질 만큼의 거리에서 기도하기 시작하셨다. ‘겟세마네’는 ‘기름 짜는 틀’(‘기름을 짜 는 기계’라는 뜻의 아람어 ‘가트셰마네’(ַגת ְשָמֵני)에 서 유래)이라는 뜻이다. 이 지명의 의미처럼 예수님께서는 육체와 마음, 몸과 영혼까지 참기름 짜듯이 인류의 죄를 위해서 쥐어짜내며 ‘하나님께 바싹 붙어 앞으로 조금 더 나아가는 기도’(막 14:32-44, 눅 22:44)를 드리셨다. 누가복음 22:44에서는 예수님의 기도를 ‘힘쓰고’, ‘애써’, ‘더욱’, ‘간절히’ 기도하셨다고 4중으로 강조하면서, 그 결과 예수님의 땀이 핏방울같이 되었다고 말씀하고 있다. 마태복음 26:39을 볼 때, 예수님께서는 얼굴을 땅에 비벼가면서 이마 가죽이 다 벗겨져 피가 날 정도로 간절히 기도하셨다. 그런 눈물 어린 기도 속에서, 주님과 함께 기도의 방벽을 세워야 할 세 제자는 잠들어 있었다.

결국 예수님께서는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라고 세번째 동일한 말씀으로 기도하신 후 자정쯤 기도를 마치셨다. 그리고 제자들에게 오셔서 “이제는 자고 쉬라 보라 때가 가까웠느니 인자가 죄인의 팔에 팔리우느니라. 일어나라 함께 가자. 보라 나를 파는 자가 가까이 왔느니라”고 말씀하시고 사람들에게 붙잡히셨다.

 

금요일: 수난의 날

(마 26:36-27:61, 막 14:32-15:47, 눅 22:39-23:56, 요 18:1-40)

고난주간 금요일은 영원한 우리의 구주이시며 창조자 되시는 영광의 주님께서 제자들뿐 아니라 만인간에게 외면당하시고 버림 당하시며 수난 당하신 날이다.

오전 1시경 예수님께서는 안나스의 집으로 결박 당해 끌려가셨다. 안나스는 본래 주후 6년부터 9년간 대제사장직을 맡았다가 주후 15년에 임기를 마쳤지만(59대) 당시 대제사장이었던 사위 요셉 가야바(63대)의 임기 동안에도 영향력을 행사하며 대제사장이라고 불리웠다. 이때 체포의 현장에서 도망갔다가 멀찌감치 뒤를 따라 온 베드로는 첫 번째로 예수님의 제자임을 부인했다(요 18:15-18).

약 한 시간 가량 지나 오전 2시경 예수님께서는 대 제사장 가야바의 집으로 끌려가셨다. 다시 멀찌감치 예수님을 따라간 베드로는 가야바의 집에서 두 번째로 욕하며 예수님을 부인하였고(눅 22:58, 요 18:25), 약 한 시간이 지나서는 세 번째로 욕하고 저주하며 예수님을 부인하였다(눅 22:59-62, 요 18:26-27). 그런데 세 번째 부인할 때 닭이 두 번 우는 소리와 함께 예수님의 눈과 베드로의 눈이 마주쳤고 베드로는 예수님의 경고에도 기도하지 않고 있다가 주님을 부인한 자신을 보고는 대성통곡했다(막 14:72, 눅 22:61). 베드로의 부인(否認)은 사단이 청구한 것이었다(참고-욥1:9-12). 그러나 예수님의 중보기도가 있었기에 베드로는 지난 날을 회개하고 주 앞에 돌아올 수 있었다(눅 22:31-32). 오전 3시경 산헤드린 공회가 소집되었다. 누가복음 22:66에서는 산헤드린 공회가 시작된 상황을 ‘날이 새매’라고 말씀하고 있는데 이는 유대인들의 시간개념으로 새벽이 시작되는 오전 3시를 가리킨다. 당시 유다는 로마의 속주였으나 산헤드린 공회는 로마와 무관한 종교적 분쟁에 대해 결정권을 가지고 있었다. 예수님께서는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냐”라는 공회의 질문에 “너희 말과 같이 내가 그니라” 대답하셨고(눅 22:66-71), 산헤드린 공회는 오전 4시 40분경 예수님께 사형을 선고했다(마 27:1, 막 15:1, 눅 22:66, 71).

오전 5시경, 예수님께서는 빌라도에게 끌려가서 1차 심문을 받으셨다(마 27:11-14 막 15:1-5, 눅 23:1-5, 요 18:28-38). 빌라도는 예수님의 죄가 없음을 알고는 종교적인 문제에 휘말리지 않고자 오전 5시 30분경에 갈릴리를 관할하는 헤롯 왕에게 예수님을 보냈다. 헤롯 왕은 예수님의 이적을 마치 요술처럼 생각하며 보여주기를 바랐지만 예수님께서 거절하시자 오전 6시경 군병들과 함께 예수님을 희롱하고 빛나는 옷을 입혀 빌라도에게 돌려보냈다(눅 23:8-11). 이때 로마 군병들은 수건으로 예수님의 얼굴을 가리고 주먹질하며 누가 때렸는지를 맞춰보라고 희롱하고는(눅 22:64), 수건을 벗겨 수염을 붙잡고 흔들어댔다(사 50:6-9).

새벽 6시 30분경 “예수에게 십자가형을 부과하지 않으면 당신은 가이사의 충신이 아니오!”라는 군중의 말에 가슴이 내려앉은 빌라도는 결국 유대인들에게 만족을 주고자 예수님께 십자가형을 선고했고(마 27:26, 막 15:15, 눅 23:24-25, 요 19:12-16), 로마 군인들은 십자가 선고 전에 쇠붙이가 붙어 있는 채찍으로 예수님의 온몸을 때렸다(마 27:26). 예수님의 등에는 골이 패여 이미 죽을 지경이 되셨다(시 129:3).

본디오 빌라도에게 재판을 받으신 곳부터 골고다 언덕까지는 약 800m 정도의 길이다. 전승에 따르면 예수님께서는 골고다를 오르시면서 14번이나 넘어지셨다. 오늘날 그 길은 ‘비아 돌로로사’(Via Dolorosa)라는 이름으로 전해지고 있다.

오전 9시 예수님께서는 인류의 죄를 사하시기 위해서 골고다 십자가 위에 달리셨다(마 27:33-38, 막 15:20-27, 눅 23:33, 요 19:17-29). 십자가 나무를 적신 피가 지구의 중앙이라고 할 수 있는 골고다 언덕을 적셨다. 바로 그 순간 그 핏속에 들어 있는 참 생명이 사망 권세를 깨뜨리고 사망으로 사망을 삼키고 승리한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상에서 오전 9시부터 정오까지 세 말씀(눅 23:34, 43, 26-27)을 하셨으며, 정오에 해가 빛을 잃어버린 뒤 오후 3시 직전에 다시 네 말씀을 하셨다(마 27:46, 15:34, 요 19:28, 30, 눅 23:46). 십자가상의 일곱 말씀은 실로 예수님 전 생애의 압축이요, 인류 구속을 완성시키는 말씀이었다.

구약에 예언된 유월절 어린 양을 잡는 ‘두 저녁의 사 이’(출 12:6 – ‘해질 때’: 벤 하아르바임, ), ֵבין ָהַעְרָבִים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아리마대 요셉의 새 무덤에 장사되셨다(마 27:57-61, 막 15:42-43, 눅 23:50-54, 요 19:38).

그러나 사망은 절대로 예수님을 잡아둘 수 없다. 3일 뒤 주일 새벽 미명 영광의 시간에 주님은 부활하셨다.



시간 순서로 재구성한 예수님의 33년 생애 Ⅲ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뒤, 아리마대 요셉은 빌라도를 찾아가 예수의 시신을 요구했다.
그리고 피범벅이 되어 있는 예수님의 시신을 정성스레 내리고 세마포로 감싸 자신을 위해 예비했던 새 무덤에 예수님을 장사했다(마 27:57-61, 막 15:42-47, 눅 23:50-54, 요 19:38-42, 참고-사 53:9). 니고데모 역시 몰약과 침향 섞은 것을 백 근쯤 가지고 와서 장사에 함께했다(요 19:39).

반면,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세 차례에 걸쳐 십자가의 죽으심과 부활에 대해 말씀하셨던 것을 기억하지 못하고 낙담한 채 자리를 떠나버렸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기억하고 빌라도를 찾아가 3일간 무덤을 굳게 지켜달라고 부탁했다(마 27:62-66).

예수님의 무덤에서의 3일은 결코 사람들처럼 쉬는 기간이 아니었다. 도리어 온전한 신성과 온전한 인성으로 오신 예수님께서는 무덤에 계셨던 3일 동안에도 쉬지 않으시고 노아 때 수장되었던 영혼들에게 영으로 찾아가셔서 전도하시며 일하셨다(벧전 3:18-20).

 

1. 막달라 마리아에게 나타나심(막 16:9, 요 20:11-18)

주일 새벽, 예루살렘

안식 후 첫날 이른 아침. 해가 뜨기 전 이른 시간에 막달라 마리아와 요안나, 야고보의 모친 마리아와 다른 한 여인은(눅 24:10) 예비한 향품을 가지고 예수님의 무덤을 찾았다. 그런데 무덤의 돌문은 굴러 옮겨져 있었고, 무덤 안에는 예수의 시체가 보이지 않았다. 이들이 근심하고 있을 때, 흰옷 입은 두 천사가 나타나 ‘어찌하여 산 자를 죽은 자 가운데서 찾느냐 여기 계시지 않고 살아나셨으며, 갈릴리에 계실 때 십자가에 못 박히고 3일 만에 부활하심에 대해 말씀하신 것을 기억하라’고 일렀다(눅 24:5-7). 이에 여인들은 사도들에게 이 소식을 전하기 위해 달려갔다.

여자들은 베드로와 요한을 찾아가 이 사실을 이야기했다(요 20:1-2, 눅 24:9-10). 다른 제자들은 여자들의 말을 허탄하게 여겨서 믿지 않았지만(눅 24:11), 베드로와 요한은 달려가 무덤 문이 열리고 세마포가 개어져 있는 것을 발견했다. 그러나 그들 역시 기이한 일로 여길 뿐, 예수님의 부활은 전혀 생각지 못하고 발걸음을 돌렸다(눅 24:12, 요 20:9).

막달라 마리아는 예수님의 시신이 없어진 것으로 생각하여 무덤 밖에서 울고 있었다. 그때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막달라 마리아를 찾아오셔서 “어찌하여 우느냐”라고 물으셨다. 그러나 막달라 마리아는 예수님을 동산지기로 오해했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막달라 마리아에게 “마리아야”라며 그녀를 부르셨고, 그때서야 예수님인 줄 알아본 마리아는 “랍오니여”라고 대답했다.1) 예수님께서는 “나를 만지지 말라 내가 아직 아버지께로 올라가지 못하였노라 너는 내 형제들에게 가서 이르되 내가 내 아버지 곧 너희 아버지, 내 하나님 곧 너희 하나님께로 올라간다 하라” 말씀하셨으며, 막달라 마리아는 제자들에게 그 말씀을 전했으나 제자들은 믿지 못했다.

2. 세 여인들에게 나타나심(마 28:8-10)

주일 아침, 예루살렘

요안나와 야고보의 모친 마리아, 그리고 다른 한 여인은 부활에 대한 말씀을 믿지 못했던 무서움과 그 말씀대로 예수님이 부활하셨다는 큰 기쁨 가운데 다른 제자들에게 예수님의 부활을 알리기 위해 달려갔다. 그때 예수님께서 다시 나타나셔서 그들에게 “평안하뇨” 인사하시자, 여자들은 그분이 바로 주님임을 깨닫고 그 발을 붙잡고 경배를 올렸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무서워 말라 가서 내 형제들에게 갈릴리로 가라 거기서 나를 보리라”라고 전할 것을 말씀하셨다.

새벽 미명에 큰 지진과 함께 천사가 예수님의 무덤을 막고 있던 돌을 굴리는 것을 보고 소스라치게놀라 도망갔던 파수꾼들은 대제사장들을 찾아가 예수님의 부활 소식을 전했다(마 28:11). 이에 종교지도자들은 회의를 열어 파수꾼들에게 큰 돈을 주면서 “예수가 부활한 것이 아니라, 예수의 제자들이 예수의 시신을 도적질한 것이다”라고 거짓말할 것을 가르쳤다(마 28:12-15).

 3.  시몬 베드로에게 나타나심(눅 24:34, 고전 15:5)

주일 오전, 예루살렘

베드로는 막달라 마리아의 말을 듣고 무덤까지 달려와 무덤 문이 열리고 세마포만 남아있는 것을 보았지만, 부활을 믿지 못하고 집에 돌아갔다. 예수님께서는 그런 베드로를 친히 찾아가셔서 부활하심을 가르치시고 앞으로 될 일에 대해서 가르치셨다.

4. 엠마오로 돌아가는 두 제자에게 나타나심(눅 24:13-35, 막 16:12-13)

주일 오후-저녁, 엠마오 도상

예수님을 따르던 제자들 중 글로바와 다른 한 제자는 예수 일당으로 몰려 체포될 것을 두려워하여 안식일이 지나기만을 간절히 기다리고 있었다. 이 두 제자는 여인들의 증거를 받았지만 믿지 못하고 안식일이 끝나자 무교절을 지키지 않고 엠마오로 향했다. 이때 엠마오로 향하던 두 제자에게 예수님께서 찾아가셔서 모세로부터 선지자의 모든 글로 시작하여 성경에 쓴 바 예수님에 대한 말씀을 자세히 밝혀주셨다. 두 제자는 처음에는 ‘저분이 말씀을 참 은혜롭게 하는구나’ 생각했지만, 예수님께서 함께 음식 잡수시며 떡에 축사하여 주실 때 눈이 밝아져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음을 깨달았고 성경을 풀어주실 때 속에서 마음이 뜨거워졌음을 느꼈다. 이들은 그 시로 다시 예루살렘으로 달려가 예수님의 부활 소식을 다른 제자들에게 고하였지만, 나머지 제자들은 여전히 믿지 않았다.

5. 도마를 제외한 열 사도와 따르던 제자들에게 나타나심(눅 24:36-49, 요 20:19-25)

주일 저녁, 예루살렘

아직 예수님을 만나지 못한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부활하셨다는 증언들을 믿지 않고 공포에 사로잡혀 한 곳에 모여 숨어 있었다(요 20:19). 이에 예수님께서는 닫힌 문을 열고 나타나셔서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말씀하셨다. 제자들이 여전히 두려움에 사로잡혀 지금 나타나신 주님은 영으로 나타나신 것이라고 생각하자, 예수님께서는 친히 못 자국 난 손과 발, 창에 찔린 옆구리를 보여주시며 부활은 영만 사는 것이 아니라 영육간에 온전한 부활임을 보여주셨다.

제자들은 예상을 훌쩍 뛰어넘는 큰 기쁨 앞에서 ‘이건 꿈이다’ 생각하며 오히려 믿지 못했다(눅 24:41).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구운 생선 한 토막을 드시면서 다시 한 번 주님의 부활이 영육간의 온전한 부활임을 보여주시고 구약 성경에 기록된 모든 것이 이루어졌음을 가르치시며 성경을 깨닫게 하셨고, 숨을 내쉬며 성령을 주시며 죄 사함의 권세를 주셨다.

6. 도마를 포함한 열한 제자들에게 나타나심(막 16:14-18, 요 20:26-29)

부활 후 8일째, 예루살렘

열 제자가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고 성령을 받았을 때 도마는 그 자리에 없었다(요 20:24). 그는 다른 제자들의 증거를 믿지 않고 “내가 그 손의 못 자국을 보며 내 손가락을 그 못 자국에 넣으며 내 손을 그 옆구리에 넣어 보지 않고는 믿지 아니하겠노라”라며 장담했다.

요한복음 20:26의 ‘여드레를 지나서’는 무교절 기간이 끝났음을 보여준다. 여전히 제자들이 모인 집의 문은 굳게 닫혀 있었다. 이날 도마는 열 제자와 함께 있었는데, 예수님께서는 다시 한 번 닫힌 문을 열고 들어오셔서 의심 많은 도마에게 손가락을 내밀어 손을 만져보고 옆구리를 만져보라고 말씀하셨다. 이에 도마는 “나의 주시며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라고 고백했고, 예수님께서는 “너는 나를 본 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라고 가르치셨다.

7.  갈릴리 바다에서 고기 잡던 일곱 제자들에게 보이심(요 21:1-14)

새벽, 갈릴리 호수

부활하신 예수님은 만났지만 여전히 제자들은 무엇을 해야 할지 알지 못했다. 심지어 이들은 예수님께서 누누이 말씀하셨던 갈릴리로 가라는 말씀을 기억하지도 못했다. 이에 금새 목표를 상실해버린 제자들은 뿔뿔이 흩어졌다. 베드로와 세베대의 아들들은 본업인 어부로 돌아갔고, 도마와 나다나엘, 다른 제자 둘이 동참했다.

이들은 다 같이 고기를 잡기 위해 밤에 배를 타고 나갔다. 당시 갈릴리의 어부들이 배를 타고 사용했던 그물은 세마포를 엮어 만들었기에, 물고기가 그물을 볼 수 없을 만큼 어두워져야지만 어업 활동이 가능했다. 그런데 그날 따라 날이 새어가기 시작하기까지 한 마리의 물고기도 잡을 수 없었다. 이때 바닷가에 서 있던 한 분이 “그물을 오른편에 던지라” 말씀했고, 그 말씀에 그대로 순종하자 그물이 찢어지기 직전까지 153마리나 되는 많은 물고기를 잡을 수 있었다.2) 그제서야 예수님이심을 깨달은 요한은 베드로에게 “주님이시다!” 이야기했고, 베드로는 그 말을 듣자마자 겉옷을 두르고 바다로 뛰어내렸다. 제자들이 뭍에 도착했을 때 예수님께서는 숯불을 피우시고 그 위에 생선과 떡을 두셨다.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주신 생선과 떡을 먹으면서 오병이어와 칠병이어 이적을 회상했을 것이다. 더 나아가 공생애 기간 동안 예수님께서 행하신 기사와 가르치신 말씀을 기억하며 깨달았을 것이다.

8.  갈릴리에서 열한 제자들에게 나타나심(마 28:16-20, 막 16:15-17)

갈릴리의 한 산

아마 예수님을 만난 일곱 제자는 나머지 네 제자를 찾아 불러모았을 것이다. 열한 제자는 드디어 이전에 명령하셨던 갈릴리의 한 산으로 모여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 경배했다. 그러나 그중에는 여전히 의심하는 자도 있었다. 예수님께서는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의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며 사명을 주셨다.

9.  오백여 형제에게 보이심(고전 15:6)

부활하신 주님께서는 40일 동안 이 땅에 계시면서 여러 사람에게 보이시고 표적도 보이셨다. 그리고 오백여 형제가 모여있을 때 그 자리에 찾아가셨다.

사도 바울은 이들이 태반이나(공동번역, 바른번역, 표준새번역에서는 ‘대다수는’으로 번역) 살아 있다고 말하면서 예수님의 부활이 수많은 증인들 가운데 이루어진 역사적인 진실임을 논증했다. 안타까운 사실은, 불과 얼마 지나지 않아 오순절에 끝까지 그 자리에 남아 약속하신 성령을 받은 것은 120명이었다는 것이다(행 1:12-15). 아마도 나머지는 끝까지 믿음에 서지 못하고 의심하거나 박해가 두려워서 자리를 떠나고 말았을 것이다. 그들은 부활 사건의 역사적인 증인은 되었지만, 그 역사의 주인공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증인은 되지 못한 것이다.

10.  예수님의 친동생 야고보에게 보이심(고전 15:7)

예수님의 친동생이었던 야고보는 예수님 생전에는 예수님을 믿지 못하는 유대주의자였다. 그러나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후 개종하여 제자가 되었고(행 1:14), 마침내 예루살렘 교회의 수장이 되었다. 그 후 야고보는 율법에 충실한 생활, 행함 있는 믿음을 행하며 주의 재림을 기다리는 성도들의 신앙생활에 대해서 가르쳤다.

11.  40일 후 제자들에게 보이시며 승천(행 1:4-11, 눅 24:50)

안식일, 베다니 앞(감람산)

예수님께서는 승천하시기 전 따르는 무리에게 예루살렘에서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내게 들은 바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 요한은 물로 세례를 베풀었으나 너희는 몇 날이 못되어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고 말씀하셨다(눅 24:46-49, 행 1:4-5). 사람들은 예수님께 “주께서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하심이 이때이니까” 라고 물었고 예수님께서는 “때와 기한은 아버지께서 자기의 권한에 두셨으니 너희의 알 바 아니요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고 말씀하셨다.

이후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 가까운 베다니 앞까지 무리들을 데리고 나가셔서 손을 들어 축복하신 후, 무리들이 보는 데서 하늘로 올리우셨다.

 

후에 예수님께서는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 믿는 성도들을 살기등등하게 잡아가던 사울에게 열두 번째로 보이셨다(행 9:1-9). 바울은 고린도전서 15:1-12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수많은 사람이 목격한 역사적인 진실이며 성경대로 죽으시고 살아나신 사건임을 선포한다. 주님의 부활은 거짓과 악은 지고 의롭고 선한 것이 이긴다는 확실한 증거가 되었다.

예수님께서 사셨기에 오늘날 그를 믿는 성도들도 부활에 동참한다(요 14:19, 롬 8:11). 부활의 진리는 실로 명확하고 확실하다. 예수의 부활은 우리의 믿음과 소망의 근거요, 교회의 근거로서 사망의 무덤을 철폐하고 무덤이 없는 생명의 세계를 여는 언약 성취의 순간이었다. 예수님께서는 죽으심과 다시 사심으로 죽은 자와 산 자의 주가 되셨다(롬 14:9). 예수 믿고 무덤에서 잠자는 자들에게나, 오늘 살아 있는 우리에게나 예수님만이 오직 주가 되신다. 재림하시는 주님께서 천군천사와 함께 이 땅에 오실 때, 죽은 자는 주 안에서 부활하고 산 자는 변화 승천하여 구속사가 완성되고 주와 재회하는 영광의 날이 올 것이다(살전 4:16-17, 고전 15:51-54).

 

* ‘랍오니’(ῥαββονἰ)는 히브리어 ‘라부니’(ַרבּוִּני)로 ‘나의 주인, 나의 선생님’을 의미한다.
마가복음 10:51에서 바디메오가 예수님을 ‘선생님이여’라고 부를 때 이 단어가 사용되었다.

* ‘153’이라는 숫자는 7번째 소수인 17의 9배수이다.
17은 성경에서 ‘충만’을 의미하는 만수(滿數) ‘10’과 ‘완전함’을 의미하는 ‘7’이 더 해진 수로서 완전한 최후 승리를 상징하는 수로 나타난다.


유월절(踰月節)


유월절(踰月節)


유월절이란 한마디로 ‘재앙이 넘어간다’라는 뜻으로 정의할 수 있다.
영어로는 Passover(패스오버),
히브리어로는 פֶּסַח(페사흐),
헬라어로는 πασχα(파스카)라고 하며 모두 동일한 뜻을 가지고 있다.

출애굽기 12:11
~13

이것이 여호와의 유월절이니라 ∙∙∙
내가 애굽 땅을 칠 때에 그 피가 너희의 거하는 집에 있어서 너희를 위하여 표적이 될지라
내가 피를 볼 때에 너희를 넘어가리니 재앙이 너희에게 내려 멸하지 아니하리라.


유월절이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빼놓을 수 없는 매우 중요한 절기다.
430년 동안 애굽의 종살이를 하며 비참한 삶을 보냈던 이스라엘 백성이 유월절을 통해 ‘해방’의 빛을 보게 되었다.
이스라엘 백성에게 유월절이란 희망 그 자체이자 구원의 절기인 것이다.

유월절이란 단어는 구약과 신약성경에 수차례 등장한다. 특히 출애굽기 12장 13절에서 “내가 피를 볼 때에 너희를 넘어가리니 재앙이 너희에게 내려 멸하지 아니하리라”고 기록된 말씀을 통해 유월절이 가진 뜻을 이해할 수 있다. 공동번역에는 “내가 (유월절 어린양의) 피를 보면 너희를 넘어가겠다. 내가 이집트를 벌할 때에 너희에게는 아무 해가 미치지 않을 것이다”고 기록되어 있다.


주전 1498년경 애굽 전역에 통곡과 비명소리가 가득했던 날, 오직 유월절을 지킨 이스라엘 백성에게만 무서운 재앙이 넘어갔다. 그날 이스라엘 백성들은 ‘재앙에서 넘김’을 받는 유월절의 참뜻을 체감하며 그 중요성을 마음 깊이 새겼을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유월절’을 지키도록 명령하셨다. 이스라엘 모든 백성들은 1년 된 어린양의 고기를 구워먹고 그 피를 문설주와 인방에 발라 유월절을 지켰다. 유월절 어린양의 피는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표시였기 때문에 재앙을 내리는 천사들이 보고서 그 집을 넘어간 것이다.

열 번째 재앙이 내리던 날, 애굽의 온 나라는 통곡과 애곡으로 가득했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은 재앙에서 보호받았고 애굽에서의 완전한 해방을 누릴 수 있었다.

유월절을 통해 여호와 하나님의 권능을 체험한 것이다.
이 역사는 이스라엘이 최초로 지켰던 유월절이었으며, 성경이 증거하는 유월절의 유래가 되었다.
이스라엘 백성에게 유월절이란 기쁨의 절기이자 희망의 절기인 것이다.

세계 고대역사를 살펴보면, 강국이 약국을 지배하여 포로로 삼은 후 온갖 학대와 노동력을 착취하는 일은 비일비재하게 일어났다.
이스라엘도 예외는 아니었다.
지금으로부터 3500년 전 이스라엘은 애굽의 식민지가 되어 무려 430년이라는 기나긴 시간 동안 박해와 서러움을 당했다.
하나님께서는 고통에 허덕이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해방시켜주시기 위해 모세를 택하셨다.
당시 모세의 나이는 80세였다.

모세는 하나님의 명을 받고 애굽 왕 바로에게 이스라엘 백성들을 풀어달라고 요청했다.
바로는 모세의 요구를 거절했고, 오히려 마음이 강퍅해져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더욱 고된 노동을 시켰다.
이에 진노하신 하나님께서는 애굽에 갖가지 재앙을 내리셨다.

첫 번째 재앙은 모든 물을 피로 변하게 한 재앙이었다.

이어서 개구리, 이, 파리, 가축 돌림병, 악성종기, 우박, 메뚜기, 흑암에 이르기까지 아홉 가지 재앙을 애굽에 내리셨다. 애
굽은 순식간에 사람이 살기 힘든 땅이 되었다.
그러나 바로의 마음은 여전히 강퍅하여 이스라엘의 해방을 허락하지 않았다.

열 번째 재앙이 애굽에 내렸다.

모든 장자들과 가축의 초태생이 일시에 죽음을 당했다.
애굽 왕 바로의 첫째 아들도 예외는 아니었다. 강퍅했던 바로의 마음이 맥없이 무너져내렸다(출애굽기 12:29~30 참조).
하나님의 능력에 놀란 그는 실성한 듯 패물과 의복까지 내어주며 모세에게 애굽을 떠나라고 재촉했다.

신기한 것은 이스라엘 백성만큼은 장자를 멸하는 재앙에서 모두 구원을 받았다는 것이다.
열 번째 재앙이 내리기 전, 특별한 하나님의 명령을 지켰기 때문이다.


유월절과 부활절은 관련이 깊다.

실제로 많은 포털사이트에서는 유월절의 연관 검색어로 ‘부활절’을 추천한다.
많은 교회에서 유월절과 부활절을 구별하지 않는 탓이다.
유월절과 부활절은 정말 같은 절기일까?
성경을 통해 이 두 절기를 어떻게 지키는 것이 옳은지 살펴보자.

유월절과 부활절 예식

유월절 예식

유월절은 성력 1월 14일 저녁에 지킨다.
구약의 유월절에는 양이나 염소를 제물로 드렸다.
예수님께서는 이 유월절을 떡과 포도주로 예배를 드리는 새 언약으로 변역시켜 주셨다.
또한 운명하시기 전날 밤, 유월절 예식을 친히 본보이시며 제자들에게 그대로 지킬 것을 명하셨다.

제자들이 예수의 시키신 대로 하여 유월절을 예비하였더라 … 예수께서 떡을 가지사 축복하시고 … 이것이 내 몸이니라 하시고 … 잔을 가지사 사례하시고 … 이것은 죄 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
(마태복음 26:19~28)

이제는 예수님의 약속을 믿고 유월절의 떡과 포도주에 참예하면 하늘에서 지은 죄를 용서받게 된다.
그래서 제자들은 예수님의 승천 이후에도 새 언약  유월절을 소중히 지켰다.
그뿐 아니라 이 기쁜 소식을 세상에도 부지런히 전파했다(고린도전서 11:23~26).

부활절 예식

유월절과 부활절은 그 날짜부터 다르다.
유월절은 성력 1월 14일이며 그 다음날인 15일은 무교절이다.

그렇다면 부활절은 언제일까?
부활절은 ‘무교절 후 첫 안식일의 다음날’이다.

2021년 유월절
2021년 3월 27일 ~ 4월 4일

2022년 4월15일 - 23일

2023년 4월 5일 ~ 13일

2024년 4월 22일-30일

2025년 4월 12일-20일




흔히 부활절을 ‘춘분 후 첫 만월 뒤의 첫 번째 일요일’로 알고 있다.
하지만 이는 니케아 공의회에서 황제에 의해 결정된 내용으로 성경과는 거리가 멀다.

부활절에는 축사한 떡을 먹는 의식을 진행한다.
이는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날에 있었던 사건에서 유래했다.
2천 년 전, 예수님의 부활 소식을 들은 두 제자가 엠마오로 가고 있었다.
그들은 길을 가던 중 예수님을 만났다.
그러나 예수님과 동행하면서도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했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그들과 함께 식사하시는 자리에서 친히 축복하신 떡을 떼어 주셨다.
이 떡을 먹은 제자들은 그제야 눈이 밝아져 예수님을 알아보게 되었다(누가복음 24:13~35).

이후 제자들은 매년 부활절에 모여 떡을 떼며 이날을 기념했다.
부활절에 계란을 먹는 의식 등은 성경에 근거하지 않은 이교의 풍습이다.

우리는 무교절 후에 빌립보에서 배로 떠나 닷새 만에 드로아에 있는 그들에게 가서 이레를 머무니라 안식 후 첫날(일요일)에 우리가 떡을 떼려 하여 모였더니 … (사도행전 20:6~7)

유월절과 부활절의 의미
유월절의 의미

성경에 따르면, 피를 흘리지 않고는 죄를 용서받을 수 없다(히브리서 9:22).
죄 사함에는 희생이 따른다는 이야기다.
모세 시대부터 1,500년 동안은 짐승이 그 역할을 감당했다.
짐승의 피로 죄 사함을 받았던 역사는 장차 예수님께서 희생하실 것에 대한 예언이다.

유월절은 예수님의 죽으심을 기념하는 절기다.
예수님께서는 온 인류를 살리시려 당신의 살과 피를 기꺼이 내어주셨다.
죄 사함의 길인 유월절을 꼭 기억하여 지키는 것은 성도의 당연한 의무이다.

부활절의 의미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인류가 감당해야 할 죗값을 대신 치르셨다.
하지만 그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로 부활하셔서 인류에게 부활의 소망까지 주셨다(고린도전서 15:20).
부활은 초대교회 성도들이 수모와 핍박을 견딜 수 있었던 힘의 원천이었다.

부활절은 사망의 권세를 깨뜨리신 예수님의 부활을 기념하는 절기다.
우리도 부활절을 기억하여 지키면 부활의 소망을 가지게 된다.

유월절과 부활절은 다른 절기
부활절은 유월절을 대신할 수 없다

‘죽음’과 ‘부활’은 서로 상반된 개념을 지닌 단어이다.
부모님이 돌아가신 날을 생신으로 대신할 수는 없다.
이 두 날은 서로 구별하여 기념하는 것이 상식이다.
우리 죄로 인해 죽임을 당하신 예수님께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어떤 이유로도 부활절은 유월절을 대체할 수 없다.
유월절과 부활절은 각각 다른 예수님의 명령을 담고 있는 절기들이다.
하나님을 사랑한다면 하나님의 계명을 올바로 지켜야 함을 기억해야 한다.




유대인의 유월절

오늘날 유대인의 유월절에도 3,500년 전처럼 어린 양을 잡고 그 피를 문설주와 인방에 바를까. 아니다. AD 70년, 로마에 의해 예루살렘 성전이 파괴되고 유대인들이 전 세계 각지로 흩어지면서 양을 잡는 풍습은 사라졌다. 대신 가족 단위로 각 가정마다 유월절을 기념하는 음식을 먹도록 바뀌었다. 다만, 일부 사마리아 공동체에서는 그리심(Gerizim)산에서 여전히 양을 잡는 전통을 고수하고 있다.

히브리어로 유월절은 페사흐(פֶּסַח)라고 부른다. 페사흐의 또 다른 이름은 ‘무교병의 절기’다. 그래서인지 유대인들은 유월절과 무교절을 하나의 절기로 여긴다.

유월절은 니산월(유대력 1월) 14일 저녁에 시작된다. 이스라엘에 사는 유대인들은 7일, 그 외 디아스포라(세계 각지에 흩어져 살면서 유대교의 규범과 생활 관습을 유지하는 유대인)들은 8일간 유월절을 지킨다. 디아스포라 유대인의 유월절이 8일인 이유는, 그들이 정확한 유대력을 알지 못해 니산월 14일을 잘못 계산할 가능성을 염두에 둔 탓이다. 유월절 기간의 첫째날과 마지막 날은 신성한 휴식의 날이다.

이 시기에 거의 모든 이스라엘 가게들은 문을 닫는다. 많은 사무실과 사업체는 주로 오전에만 근무한다. 이 기간은 휴교 기간이기 때문에 많은 여행지가 당일 여행을 하는 유대인 가족들로 붐빈다. 대부분의 이스라엘 레스토랑은 평상시 음식을 대신하여 유월절을 위한 코셔(כָּשֵׁר‎, 정결한 음식)를 제공한다. 외국인 관광객들에게까지 엄격하게 요구되었던 유월절 엄수는 최근 완화되어, 빵이나 케이크 혹은 파스타를 파는 음식점들도 있다.

유대인의 유월절 준비

하메츠(חָמֵץ) 태우기

유대인의 유월절은 하메츠를 태우는 의식으로부터 시작된다. 하메츠란 일상적인 음식을 가리킨다. 즉 유월절을 앞두고 인공적 또는 자연적으로 발효된 밀, 호밀, 맥아, 보리, 귀리 등으로 만든 음식을 모두 제거하는 것이다. 이 의식은 유대인들이 애굽을 급히 떠나느라 누룩 넣은 빵을 만들 시간조차 없었던 역사를 기억하기 위함이다.

누룩을 제거하는 행위는 부정을 제거하고 악을 말살하는 것을 뜻하기도 한다. 각 가정에서는 누룩 성분이 든 음식이 집에 남아 있지 않도록 깨끗이 청소한다. 어린이들도 빵 부스러기, 과자 부스러기들을 치운다. 유월절 몇 주 전부터 유월절 정오까지, 이스라엘의 유대인들은 동네 공터마다 모여서 빵이나 비스킷을 태운다. 절기 기간 동안에 유월절 음식이 아닌 것은 집에 둘 수 없다.

하메츠(일상적인 음식)를 불태우는 유대인들

누룩이 제거되면 유월절에만 사용하는 특별한 접시들과 그릇, 포크, 나이프, 요리 도구들을 창고에서 꺼낸다. 일상에 쓰던 그릇들과 요리 도구들은 모두 자취를 감춘다. 가정에 따라서는 유월절에만 사용하도록 가장 좋은 그릇들을 가보로 남겨 대대로 물려준다.

하메츠를 불태우지 않고 파는 경우도 있다. 랍비들은 멀쩡한 음식을 버리지 않기 위해 새로운 법을 만들었다. 유대인 가정이 이웃의 이방인들에게 하메츠를 팔도록 허용한 것이다. 이스라엘 정부 역시 이방인에게 하메츠를 상징적인 가격에 판 적이 있다. 몇 해 전 재무장관 베냐민 네타야후와 최고 랍비 2명의 입회하에, 이스라엘 안의 모든 하메츠를 2만 세겔(약 550만 원)에 팔았다. 이렇게 판 하메츠들은 절기가 끝나면 곧바로 다시 구입할 수 있다.

맛짜(מַצָּה) 만들기

유대인의 유월절, 무교절에는 물과 밀가루로만 만든 맛짜(무교병)를 쓴나물과 함께 먹는다. 맛짜를 만들기 전에는 곡식을 완전히 삶는다. 곡식에서 효모를 완전히 제거하기 위함이다. 이렇게 만든 곡식으로 가루를 내서 물과 함께 반죽한다. 반죽을 불에 넣고 구워 내면 맛짜가 완성된다.

고대의 맛짜는 직경 30센티미터의 원형이었다. 하지만 오늘날에는 길이 25센티미터 정도인 정사각형 모양으로 바뀌었다. 맛짜를 굽는 풍경도 제각각이다. 원래는 성인 남성들이 즐겁게 노래를 부르면서 맛짜를 구웠다. 현대에는 맛짜를 기계로 굽기도 한다. 일부 율법학자들은 기계로 맛짜 굽기를 반대하기도 한다. 일부 정통파 집단에는 1년에 한 번 맛짜 굽는 것 외에는 문을 열지 않는 빵집도 있다.

유대인의 유월절 만찬, 세데르(סֵדֶר)

맛짜를 굽는 유대인 남성. ChameleonsEye / Shutterstock.com

유대인의 유월절 만찬은 히브리어로 세데르(סֵדֶר)라 한다. 세데르는 질서, 장치라는 뜻이다. 그 말대로 유대인들은 유월절 축제를 철저히 지키기 위해 규칙과 관습을 중요시한다.

세데르에 참여하는 이들은 흰색 계열의 옷을 입어야 한다. 또한 유월절 만찬상에는 여섯 가지의 특별한 음식들이 올라온다. 각 음식들은 출애굽 당시의 긴박한 상황과 430년간 종살이하던 애굽에서의 고통을 상기시킨다. 과거 조상들의 고통을 기억하며 현재 누리는 자유의 소중함에 감사하고, 나아가 장차 다가올 미래를 준비하는 마음으로 유대인들은 쓰고 맛없는 거친 음식들을 먹는다.

세데르 음식들

일 년 된 숫양의 고기와 정강이뼈 – 고대의 성전 예배 시 유대인들이 희생 제물로 드린 유월절 양을 나타낸다.

구운 달걀 – 고대의 축제 희생물을 나타내는 것이며 1, 2차 예루살렘 성전이 파괴된 것을 기억하고 애도한다

세 장의 맛초트(맛짜의 복수형) – 출애굽의 긴박성을 상징한다. 또한 유대인의 세 종교적 집단인 제사장, 레위인, 이스라엘인을 나타낸다.

마로르(מָרוֹר‎‎) – 서양 고추냉이처럼 맵고 쓴맛이 나는 허브다. 조상들이 애굽에서 겪은 노예 생활을 상기시킨다. 또한 유대인들이 신앙에 따라 사는 것을 존중받지 못했던 경험을 떠올리게 한다.

하로셋(חֲרֽוֹסֶת‎) – 사과, 호두, 잣 등을 으깬 것에 꿀, 포도주를 붓고 계피 등을 섞어 만든 일종의 잼. 유대인들이 애굽인을 위해 빚었던 회반죽을 나타낸다. 앞서 소개한 마로르를 찍어 먹는다. 잼은 단 맛을 내므로 한편으로는 자유의 달콤함을 의미한다.

카르파스(כַּרְפַּס‎‎) – 보통 파슬리나 샐러리 또는 양상추를 가리킨다. 애굽에서 포로 생활을 할 때의 빈약한 식단을 나타낸다.

소금과 소금물 – 카르파스 조각을 담가 먹기 위해 준비한다. 노예로 지배를 받을 때 유대인들이 흘렸던 눈물을 나타낸다.

세데르 음식들

유월절 만찬은 율법서인 하가다(הַגָּדָה)에 적힌 단계별로 진행한다. 위의 음식 가운데 구운 달걀, 마로르, 하로셋, 카르파스, 소금물은 성경에 등장하지 않는다. 탈무드에 기록된 유대인의 전승이다. 음식을 먹을 때는 비스듬히 기대어 먹는다. 이 자세는 더 이상 노예가 아니라 자유인임을 나타내는 표현이다. 무교병과 쓴 나물은 유월절 양의 고기를 먹기 전에 먹는다. 딱딱한 무교병과 쓴 나물은 아주 곤혹스러운 맛이다. 그러나 이 경험이 과거 못 먹고 못 살았던 쓰디쓴 노예 생활을 잊지 않게끔 한다.

그 외의 준비물

페사흐 하가다(Pesach Haggadah) – 유월절에 대한 모든 이야기를 담고있는 율법서

시편이 들어있는 성경책

찬송가나 페사흐 노래집

포도주와 포도주 잔

축제용 촛대

꽃과 꽃병

손 씻을 물과 물잔

출애굽 그림이 그려진 어린이용 색칠하기 책

크레용이나 색연필

유대인의 유월절 만찬은 어떻게 진행되는가

유대인의 유월절 만찬(페사흐 세데르)는 각 가정의 가장이 주관한다. 이 중 가장 중요한 순서는 어린 자녀들과 함께 출애굽 사건을 재연하는 시간이다. 성경에는 총 네 번에 걸쳐 반드시 자녀에게 출애굽에 관한 이야기를 해주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 후에 너희 자녀가 묻기를 이 예식이 무슨 뜻이냐 하거든 너희는 이르기를 이는 여호와의 유월절 제사라 (출애굽기 12:26~27)

너는 그 날에 네 아들에게 뵈어 이르기를 이 예식은 내가 애굽에서 나올 때에 여호와께서 나를 위하여 행하신 일을 인함이라 하고 (출애굽기 13:8)

장래에 네 아들이 네게 묻기를 이것이 어찜이냐 하거든 너는 그에게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그 손의 권능으로 우리를 애굽에서 곧 종이 되었던 집에서 인도하여 내실새 (출애굽기 13:14)

후일에 네 아들이 네게 묻기를 우리 하나님 여호와의 명하신 증거와 말씀과 규례와 법도가 무슨 뜻이뇨 하거든 (신명기 6:20)

전통에 따라 가장 어린 자녀에게 네 개의 질문을 던진다. 이 질문들은 이스라엘의 과거를 기억하도록 고안되었다. 이를 통해 민족의 정체성을 확인하고 계승한다.

왜 이 밤에 우리는 맛짜를 먹습니까?

왜 이 밤에 우리는 쓴 나물을 먹습니까?

왜 우리는 이 밤에 파슬리를 소금물에 두 번 찍어 먹습니까? 또 쓴 나물을 왜 하로셋에 찍어 먹습니까?

왜 우리는 유월절 음식을 비스듬히 기대어 먹습니까?

이 질문들에 아버지들은 선조들이 애굽에서 겪었던 노예 생활을 시작으로 답변한다.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해 행하신 기적들과 이스라엘 민족이 고향으로 돌아오게 된 과정 또한 질문 순서에 따라 하가다를 읽음으로 답한다.

유월절을 지키는 유대인 가정. ChameleonsEye / Shutterstock.com

3,500년 전의 출애굽 사건은 유월절 만찬을 지키는 유대인들에 의해 해마다 재연되고 있다. 그들은 고통스러웠던 조상들의 과거를 잊지 않고 그 날을 기억하고 있다. 더욱이 자녀들에게 적극적으로 전승하고 있다. 유대인들은 온 인류에게 평화와 자유를 가져다 줄 메시아가 올 때까지 유월절을 지키려 할 것이다.



유월절. 이스라엘 민족에게 중대한 규례이자 영원한 절기다. 하나님께서 최초로 유월절을 제정해주실 때 “영원한 규례로 대대히 지켜야 하는 절기”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애굽에서 해방되기 직전부터 약속의 땅 가나안에 도착하기까지 세 번의 유월절을 지킨 역사가 있다.

첫 번째 유월절 지킨 이스라엘 백성들

지금으로부터 3500년 전,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1월 14일 저녁에 유월절을 지켰다. 집집마다 어린양의 피를 문지방에 바르고 신을 신고 손에 지팡이를 쥔 채 서둘러 고기를 불에 구워 먹었다.

여호와의 유월절 제사라 여호와께서 애굽 사람을 치실 때에 애굽에 있는 이스라엘 자손의 집을 넘으사 우리의 집을 구원하셨느니라 하라 하매 백성이 머리 숙여 경배하니라 (출애굽기 12:27)

유월절 밤, 이스라엘 백성은 장자를 멸하는 재앙에서 보호하심을 얻었다. 반면 유월절을 지키지 않은 애굽의 모든 장자들은 죽음을 당했다. 심지어 애굽 소유의 가축의 첫 새끼까지 죽음을 당했다. 하나님의 권능에 놀란 애굽 왕은 그제야 모세의 요구대로 이스라엘 백성들을 해방시켜주었다. 패물과 의복까지 내어주면서 애굽을 떠나라고 재촉했다. 단 한 명의 이스라엘 백성들의 희생 없이 절대권력자의 무릎을 끓게 만든 역사였다.

두 번째 유월절 지킨 이스라엘 백성들

니콜라 푸생 作 홍해 건너기

애굽을 탈출한 이스라엘 백성 앞에는 광활한 바다가 가로막고 있었다. 최대 수심이 3,040m에 달하는 홍해바다가 떡하니 이스라엘 백성 앞에 펼쳐진 것이다. 다행히도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홍해바다가 양쪽으로 갈라지는 기적을 체험했고, 깊은 바다 한가운데를 안전하게 건널 수 있었다.

애굽 땅에서 나온 다음 해 정월에 여호와께서 시내 광야에서 모세에게 일러 가라사대 이스라엘 자손으로 유월절을 그 정기에 지키게 하라 ··· 정월 십사일 해 질 때에 시내 광야에서 유월절을 지켰으되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하신 것을 다 좇아 행하였더라 (민수기 9:1~5)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을 떠나온 지 2년째 되는 해, 그들은 시내 광야에 도착했다. 1월 14일이 다가오자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불러 유월절 지킬 것을 당부하셨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께서 명하신 대로 1월 14일 저녁에 시내광야에서 유월절을 지켰다. 유월절을 지킨 이스라엘 백성들은 정결함과 죄 사함을 받을 수 있었다(역대하 30:17~18 참조).

유월절은 이스라엘 백성들과 하나님 사이에 무척 중요한 위치에 있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유월절을 영원한 규례로 명하시고 출애굽 이듬해에도 지키라고 거듭 말씀하신 것이다.

세 번째 유월절 지킨 이스라엘 백성들

니콜라 푸생 作 가나안의 포도

40년 동안의 광야생활을 이어갔던 이스라엘 백성들은 여리고 평야에서 세 번째 유월절을 지켰다. 가나안 입성을 코앞에 두고 지킨 유월절이었다.

여호와께서 여호수아에게 이르시되 너는 부싯돌로 칼을 만들어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다시 할례를 행하라 ··· 이스라엘 자손들이 길갈에 진 쳤고 그 달 십사일 저녁에는 여리고 평지에서 유월절을 지켰고 ··· 그 해에 가나안 땅의 열매를 먹었더라 (여호수아 5:2~12)

할례를 행하라는 의미는 유월절을 지키라는 의미와 상통된다. 유월절은 할례를 행하지 않고서는 지킬 수 없었기 때문이다(출애굽기 12:48 참조). 이스라엘 백성들 중 광야에서 태어난 사람들은 할례를 받지 못했다. 이는 곧 유월절을 지키지 못했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유월절을 지키기에 앞서 할례부터 행하라고 명하셨던 것이다.

하나님의 명령대로 이스라엘 백성들은 여리고 평야의 ‘길갈’이라는 곳에서 유월절을 지켰다. 그리고 다음날 드디어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땅 가나안에 들어가게 되었다. 이처럼 이스라엘 백성들은 가나안에 도착하기까지 세 번의 유월절을 지킨 역사를 가지고 있다.







고레스(Cyrus, 太陽. 神殿)



성경(聖經)의 역사(歷史) 요약(要約)


하나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신 후에 인간은 스스로 타락하고 말았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큰 홍수를 일으켜 인간을 심판하셨고 또 교만해진 인간들을 바벨탑에서 온 땅으로 흩으셨다.

이후에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은 히브리 민족의 조상이 되었다.
애굽에서 큰 집단을 이룬 히브리 민족은 모세의 영도(領導) 아래 그곳을 빠져나왔다.
그들은 40년 동안 광야를 유랑하며 배우고, 시험을 당하고, 벌을 받고, 다시 배우다가 마침내 여호수아를 따라 약속의 땅으로 들어갔다.

원래 히브리 민족에게는 왕이 없었다.
간헐적으로 사사(士師)들이 일어나 그들을 이끌었다.

그러다가 사무엘을 마지막으로 14명의 사사 시대가 막을 내리고 마침내 왕정이 시작되어 사울, 다윗, 솔로몬이 차례로 왕위에 올랐다. 솔로몬이 죽은 뒤, 히브리 민족은 남쪽 왕국(유다)과 북쪽 왕국(이스라엘)으로 분열되었다.
북이스라엘은 19명의 사악한 왕들의 통치를 받은 뒤에 앗수르(아시리아)에 의해 멸망당하여(BC 722년) 백성들이 뿔뿔이 흩어졌다.

남유다는 20명의 왕들의 통치를 받은 다음에 바벨론에 의해 멸망당하여(BC 586년) 수많은 백성들이 바벨론 땅으로 잡혀갔다.
그런데 바사(페르시아)가 바벨론을 정복하면서 남유다 백성들은 70년간의 바벨론 포로생활을 끝내고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이때 에스라와 느헤미야가 백성들을 이끌고 고향으로 귀환했고, 바사의 왕비가 된 에스더는 적의 위협으로부터 동포를 구했다.
그리고 이때부터 ‘침묵기’(신구약 중간기)라 불리는 400년의 시간이 흐른 뒤, 마침내 세례 요한과 예수님이 등장했다.

당신은 구약의 역사서 17권(창세기에서 에스더서까지)이 이 이야기 중 각각 어디에 해당하는지 아는가?
그러면 이제 신약의 역사를 한 단락으로 요약해보자.

하늘이 다시 열리고 천사들이 세례 요한과 예수님의 출생을 준비했다.
그로부터 30년쯤 후에 세례 요한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해 회개의 세례를 받으라고 촉구했다.
육신을 입고 세상에 오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는 3년 동안 사역하면서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보이셨고 또 하나님의 길을 가르치셨다. 예수님은 열두 제자들을 세워 땅에서 자신의 일을 지속하도록 준비시키신 다음, 모든 인간의 죄를 위해 자발적으로 십자가의 죽음을 택하셨고, 죽은 자 가운데서 일어나 하늘로 올라가셨다.

이후에 제자들은 오순절 성령 강림 사건을 체험하여 성령의 권능을 힘입었다.
그들은 주로 유대인들을 대상으로 예수님의 구원에 관한 좋은 소식을 전했으며, 사도 바울은 광범위하게 전도여행을 하면서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파했다.

바울은 신약성경 가운데 적어도 13권의 서신서를 기록했다.
사도 요한은 종말까지의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계획을 기록한 책 ‘요한계시록’을 썼다.

성경은 시작할 때와 똑같이 끝난다.
성경은 하나님의 완전한 창조로 시작한 것과 같이 어떠한 악(惡)도 하나님을 대적하지 못하는 새 하늘과 새 땅으로 끝을 맺는다.





고레스 대왕(大王)


아버지 : 캄비세스 Ⅰ세(Cumbyses Ⅰ)
어머니 :  메대 왕 아스디아게스(Astyages)의 딸 만다네

파사제국의 초대 왕(B.C 546-529)
바벨론을 정복한 사람.
유대 백성의 귀국을 허락한 사람으로 B.C 549년 메대의 속박을 벗어나 BC 546년 리디아를 물리치고 동시에 그리스의 이오니아 제도시를 정복, 동으로 옮겨 인도 지경에까지 확장했다.
이사야는 고레스를 “기름부음 받은 자”로 보았다(사 44:27, 28. 45:1-5).
고레스 B.C 539년 10월 29일에 바벨론에 입성했으며, 자신을 백성들의 해방자로 자처했다.
바벨론에 남겨 두었던 신상들을 원래 있던 성읍들로 되돌려 보냈으며, 포로된 사람들을 귀향시키는 인정어린 정책을 시행했다.
온건한 정치는 자연히 히브리인에게도 파급되었다.
이스라엘민족에게 유다로 돌아가서 성전을 재건하라고 권면했다(대하 36:22, 23. 스 1:1-6).
아들 캄비세스에게 왕위를 물려준(BC 530) 후 원정을 나갔다가 그 해 가을 전투에서 전사했다.(사 44:28, 45:1, 대하 36:22, 스 1:1-8, 4:4, 단 1:21, 6:28, 10:1).


고레스 왕에 대한 예언 (Prophecy about King Cyrus)

이방의 왕인 바사왕 고레스는 아무 대가도 없이 오히려 보호까지 해 주면서 유대백성들을 예루살렘으로 돌아가게 했을까요?
자기들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신을 믿는 유대백성들이 언제 다시 반란을 일으킬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말입니다.

다니엘의 영향력 때문이었을까요?

다음의 성경구절들을 정독하며 그 내용을 정리하여 보십시오.

이 온 땅이 황폐하여 놀램이 될 것이며 이 나라들은 칠십 년 동안 바벨론 왕을 섬기리라. (예레미야 25:11)

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바벨론에서 칠십 년이 차면 내가 너희를 권고하고 나의 선한 말을 너희에게 실행하여 너희를 이곳으로 돌아오게 하리라. (예레미야 29:10)

내 종의 말을 응하게 하며 내 사자의 모략을 성취하게 하며 예루살렘에 대하여는 이르기를 거기 사람이 살리라 하며 유다 성읍들에 대하여는 이르기를 중건될 것이라 내가 그 황폐한 곳들을 복구시키리라 하며 깊음에 대하여는 이르기를 마르라 내가 네 강물들을 마르게 하리라 하며 고레스에 대하여는 이르기를 그는 나의 목자라 나의 모든 기쁨을 성취하리라 하며 예루살렘에 대하여는 이르기를 중건되리라 하며 성전에 대하여는 이르기를 네 기초가 세움이 되리라 하는 자니라. (이사야 44:26-28)

나 여호와는 나의 기름 받은 고레스의 오른손을 잡고 열국으로 그 앞에 항복하게 하며 열왕의 허리를 풀며 성 문을 그 앞에 열어서 닫지 못하게 하리라 내가 고레스에게 이르기를 내가 네 앞서 가서 험한 곳을 평탄케 하며 놋문을 쳐서 부수며 쇠빗장을 꺾고 내가 의로 그를 일으킨지라 그의 모든 길을 곧게 하리니 그가 나의 성읍을 건축할 것이며 나의 사로잡힌 자들을 값이나 갚음 없이 놓으리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하셨느니라. (이사야 45:1,2,13)

만약 고레스 왕이 위와 같은 이사야의 예언들을 보았다면 소스라치게 놀라지 않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바벨론 성은 사방이 물로 둘러싸인 난공불락의 성이었습니다. 그는 이사야 말씀으로부터 바벨론 성을 공략할 때 성 주위의 물을 마르게 하신 것(이사야 44:27)과 놋쇠 문을 열어놓아(이사야 45:2) 그 난공불락의 성을 정복케 하신 이가 하나님이심을 알았을 것입니다. 그리고 친히 하나님께서 그의 이름까지 정확히 부르시며 “그(고레스)가 나의 사로잡힌 자들을 값이나 갚음 없이 놓으리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이사야 45:13).” 하시는 예언을 보고는 기겁을 하며 경악했을 것입니다. 고레스 왕 때로부터 약 200년 전에 이미 하나님께서 자기 이름을 부르시며 자기가 이루었던 일들과 해야 할 일들을 예언하셨음을 보고 그 하나님 앞에 무릎꿇지 않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 완성된 계시인 성경을 통하여, 고레스가 그 때에 보았던 것보다 훨씬 더 많은 예언들과 그것들의 성취를 보고 있습니다. 당신은 아직도 그러한 하나님 앞에 무릎꿇기를 거부하십니까?

역대하 36:22-23와 에스라 1:1-11에 고레스에 관한 그 예언들이 어떻게 성취됩니까?

바사 왕 고레스 원년에 여호와께서 예레미야의 입으로 하신 말씀을 응하게 하시려고 바사 왕 고레스의 마음을 감동시키시매 저가 온 나라에 공포도 하고 조서도 내려 가로되, 바사 왕 고레스는 말하노니 하늘의 신 여호와께서 세상 만국으로 내게 주셨고 나를 명하사 유다 예루살렘에 전을 건축하라 하셨나니,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참 신이시라 너희 중에 무릇 그 백성 된 자는 다 유다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서 거기 있는 여호와의 전을 건축하라 너희 하나님이 함께 하시기를 원하노라. 고레스 왕이 또 여호와의 전 기명을 꺼내니 옛적에 느부갓네살이 예루살렘에서 옮겨다가 자기 신들의 당에 두었던 것이라. (에스라 1:1-3,7)

유대 사람들을 포로에서 해방시키고 돌려보내는데 무슨 대가나 조건이 있었습니까? 위의 예언들의 이중적 조명을 고려할 때, 고레스는 결국, 죄의 권세아래 종 되었던 우리들을 아무런 대가 없이 그 피로 구속하시고, 그 결과로 우리를 사단의 결박에서 구원하신 예수님을 상징합니다.

여호와여 주는 하늘에 계신 하나님이 아니시니이까. 이방사람의 모든 나라를 다스리지 아니하시니이까. 주의 손에 권세와 능력이 있사오니 능히 막을 사람이 없나이다. (역대하 20:6)

이것은 지어낸 이야기가 아닙니다. 실재로, 고레스 왕의 치정과 예루살렘의 성전을 재건축하라는 칙령(decree)이 새겨진 돌기둥이 고고학자들에 의해 발견되었습니다. 아직도 세상 만물을 창조하시고 그 뜻대로 역사를 주관하시는 하나님의 그 크고 놀라우신 능력을 한치라도 의심하는 분이 있습니까?

만군의 여호와께서 맹세하여 가라사대 나의 생각한 것이 반드시 되며 나의 경영한 것이 반드시 이루리라. (이사야 14:24)

만군의 여호와께서 경영하셨은즉 누가 능히 그것을 폐하며 그 손을 펴셨은즉 누가 능히 그것을 돌이키랴. (이사야 14:27)


전설 같은 이야기기 있다.
그리스의 정복자 알렉산더가 헬라제국을 확장시키면서 당시 페르시아의 고도(古都), 파사르가대(Pasargadae)로 진격하였다. 알렉산더는 페르시아 제국을 멸망시키며, 부수고 불사르며, 닥치는 대로 파괴하였다. 파사르가대에서도 궁궐을 파괴하고, 페르시아제국의 창시자인 고레스왕(Cyrus II, 재위 BC. 550-530)의 무덤가에 당도하였다. 제국의 건설자 고레스의 묘지는 궁궐처럼 파괴와 노략 및 도굴의 위험에 직면하게 되었다.

그러나 고레스의 무덤은 지금까지도 남아있다.
알렉산더는 고레스의 묘지를 파괴하기에 앞서 묘지 앞에 있는 비문을 해독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 비문에는 이와 같은 말이 적혀있었다. “나 고레스는 한 때 세계를 지배했었다. 그러나 언젠가는 이 땅이 다른 왕에 의해서 점령될 것을 나는 안다. 그러나 점령자여, 그대도 언젠가는 누구에겐가 점령을 당할 것이다. 그러므로 내 묘를 건드리지 말아주시오.” 알렉산더는 무덤을 파헤치러 왔다가, 오히려 자신이 입고 있던 겉옷을 벗어 고레스왕의 묘실을 덮어주었다고 한다. 그 묘지의 외형은 아직도 그대로 존재한다.

바벨론에 이어 당시의 세계를 제패했던 페르시아제국의 황제 고레스가 남긴 사적은 특별한 점이 있다. 앗시리아와 바벨론은 하나님의 백성인 북조 이스라엘과 남조 유다를 각각 멸망시켰다. 앗시리아는 북조를 혼혈정책으로 민족적 정체성을 상실시켰다. 바벨론은 예루살렘 성전을 파괴하고 유대민족의 중심인 지도자를 제국의 도시로 흩어 국가의 명맥을 단절시켰다. 그러나 페르시아제국의 건설자 고레스는 유대인을 고국으로 보내어 다시 민족을 형성하게 하고, 유대인 스룹바벨 총독을 보내어 성전을 짓도록 한다. 느브갓네살이 가져온 수많은 금 그릇을 보내서 다시 사용하게 한 것은 놀라운 배려가 아닐 수 없다.

고레스의 유물 가운데서 성경과 맞닿아있는 가장 유명한 것 중의 하나는 “고레스의 원통”(Cyrus Cylinder)이다. 진흙으로 만들어져서 그의 업적을 기록한 9인치 길이의 원통에는 성경에 있는 고레스의 역사와 일치하는 내용이 들어있다. 전쟁의 승리자로서 자신의 업적에 대한 기록, 자신이 베푼 관대한 일에 대한 공로가 기록된 것이다. “나는 노동자들에게 임금을 안 주는 것과, 사회적 신분을 안 주는 [바벨론의] 제도를 폐지한다.” “나는 그들의 무질서한 주거 생활에 안녕을 주었고, 티그리스 다른 편에 있는 헌납됐던 도시들을 돌려주었다.” “그 땅은 오랫동안 폐허가 되어온 거룩한 땅으로... 나는 역시 이전의 원주민들을 모아서 그리로 돌려보냈다.”

고레스 원통의 내용은 고레스가 다스리던 제국의 정책을 반영한다. 역대하 36장 22-23절에는 유대인에게 성전을 건축하라고 명하는 고레스의 명령이 등장한다: “하늘의 신 여호와께서 세상 만국을 내게 주셨고 나에게 명령하여 유다 예루살렘에 성전을 건축하라 하셨나니 너희 중에 그의 백성된 자는 다 올라갈지어다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함께 하시기를 원하노라” 고레스는 놀랍게도 즉위 원년에 원통의 내용처럼 유대민족의 귀환과 신앙의 회복을 명령하고 있다.

고레스의 종교는 유대교가 아니다. 그가 믿음이 독실한 왕으로서 평생 다윗과 같은 인생을 살았다고 단언하기도 힘들다. 그러나 거의 신앙고백에 가까운 칙령을 내리고 물심양면으로 유대인을 배려하는 것을 보면, 유대인에 대한 문화적인 행정적인 연결고리가 있으리라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그것은 다니엘이라는 인물이었을 것이다.

다니엘은 539년 바벨론이 망하던 그 밤에 바벨론의 멸망을 예언한 선지자이다. 그리고 그는 제국이 바뀌었음에도 불구하고 고레스에 의하여 왕이 된 다리오 왕의 총리가 되었다.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잘 알고 있는 총리로서 고레스왕에 대한 예언, 이사야 44-45장의 내용을 전하였을 것이다. 놀랍게도 이사야는 바벨론의 멸망을 선명하게 예언하고 있다. “깊음에 대하여는 이르기를 마르라 내가 네 강물들을 마르게 하리라 하며”(사 44:27). 제국을 멸하고 세우는 일을 하는 고레스왕이 여호와 하나님의 “목자”요 “기름부음 받은 자” 메시야가 될 것을 이사야는 예언하고 있다(사 44:28-45:1). 다니엘은 고레스왕을 섬기면서 그가 150년 전에 예언된 운명적인 하나님의 일꾼임을 전하였을 것이다.

지금 세계는 큰 변곡점에 서있다. 미국과 중국의 무역전쟁은 경제적 타협을 지났다. 코로나19 팬데믹을 기회로 하여, 이제는 미국과 중국만 아니라 다른 나라까지 참여하여 정치, 군사의 영역까지 확장되는 상황에 있다. 중국과 인도의 국경분쟁, 남북관계의 갈등과 미군사력의 한반도 집결, 그리고 친미 서방국의 연대가 국제질서의 변동을 가져오는 징조처럼 느껴진다. 이 어려운 때에 이사야나 다니엘과 같은 선지자들이 더욱 그립고 고레스와 같은 강하나 약한 민족을 돌아보는 걸출한 정치가를 더욱 바라게 된다.


열왕기상 13:2를 보시면 어느 예언자가  요시야라는 아이가 왕으로(다윗의 집에) 태어날 것이라는 예언을 합니다.

그가 제단을 향하여 주의 말씀으로 외쳐 이르되,  오 제단아, 제단아, 주가 이같이 말하노라. 보라, 다윗의 집에 요시야라는 이름의 아이가 태어나리니 그가 네 위에 분향하는 산당들의 제사장들을 네 위에 헌물로 드릴 것이요, 또 사람들의 뼈를 네 위에서 태우리라, 하고

이 예언은 열왕기하  21:24에 성취 되어  요시야가 왕이 됩니다.

그 땅의 백성이 아몬왕을 대적하여 음모를 꾸민 자들을 다 죽이고 그를 대신하여 그의 아들 요시야를 왕으로 삼았더라. <열왕기하 21:24>

다만 이건 예언이 성취가 된 후에 쓴 글로써 성경을 진리로 생각하지 않는 분들이 봤을때는 하지도 않은 예언을 했다고 한 후 나중에 예언이 성취가 되었다고 할수 있지 않나 의심할 수 있는 예언입니다.

하지만 성경에는 위와 비슷한 즉 어떤 사람이 태어나기 전에 그 사람의 이름과 할 일을 예언하고 그 이후에 성취된 사례가 더 있습니다.

이사야서는 BC 7세기 쯤 쓰여진 책으로 구약의 예언서 중 가장 위대한 예언이 많이 있는 으로 여겨집니다. 이사야서는 예수님에 대한 가장 적나라하고 문자적인 예언을 많이 한 책으로써 신약에서도 많은구절이 인용되어있습니다.

하나님이 참 신임을 입증하는 예언서 이사야!

이사야서 43:9는모든 민족들아, 다 모여라. 그들의 신 가운데 누가 이 일이 일어날 것을 말하였느냐? 어떤 신이 옛날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우리에게 말할 수 있겠느냐? 그 신들은 증인을 데려다가 자기들이 옳음을 증명해야한다. 다른 사람들 이듣고 ‘그 말이 옳다’라고 말하게 해야한다. (쉬운성경) 

즉 어떤 신이 앞으로 일어 날일을 얘기할 수 있는가? 라며 여호와 하나님만이 참 신이며 구원자임을 드러내십니다.

그리고 44장 말미와 45장 초반에 하나님은 고레스가 왕이 되게하여 세상을 다스릴 통치권을 줄 것이며 13절에 그가 아무 조건없이 포로로 잡혀간 이스라엘(유다)백성을 풀어줄 것임을 예언하고 있습니다.

고레스가 이스라엘을 해방할 것임을 예언한 이사야서

고레스에 대하여는 이르기를, 그는 내 목자라. 그가 나의 기뻐하는 것을 다 행하리라, 하고 예루살렘에게는 이르기를, 너는 세워지리라, 하며 성전에게는 이르기를, 네 기초가 놓이리라, 하는 자니라. 주가 자신의 기름 부음 받은 자 고레스에게 이같이 말하노라.

내가 그의 오른손을 붙들고 민족들을 그 앞에 항복하게 하며 또 왕들의 허리를 풀어 문짝이 두 개인 성문들을 그 앞에 열게 하고 그 성문들을 닫지 못하게 하리라. 내가 너보다 앞서 가서 구부러진 곳들을 곧게 하고 놋 문들을 쳐서 산산조각 내며 쇠 빗장을 꺾고네게 어둠의 보화와 은밀한 곳의 감추어진 재물을 주어 네 이름으로 너를 부르는 나 곧 주가 이스라엘의 하나님인 줄을 네가 알게 하리라.

내가 나의 종 야곱 곧 나의 선택한 자 이스라엘을 위하여 네 이름으로 너를 불렀나니 너는 나를 알지 못하였을지라도 나는 네게 이름을 주었노라. 나는 주니라. 나 외에는 다른 이가 없으며 나 외에는 신이 없느니라. 너는 나를 알지 못하였을지라도 내가 네게 띠를 띠어 주었으니 <이사야 44:28~45:5>

내가 고레스를 보내어 의로운 일을 하게 할 것이고 그의 일을 쉽게 해 주겠다. 고레스가 내 성을 다시 쌓을 것이며, 포로로 잡혀 간 내 백성을 아무런 대가 없이 풀어 줄 것이다.” 만군의 여호와께서 하신 말씀이다. <이사야 45:13>

고레스가 이스라엘을 해방시킬 것이라는 예언의 성취

이 예언은  150년 후인 BC 538년 쯤 성취됩니다에스라 1장을 보시면

이제 페르시아 왕 고레스의 제 일년에 주께서 예레미야의 입으로 하신 주의 말씀을 이루시려고 페르시아 왕 고레스의 영을 움직이시매 그가 자기의 온 왕국에 두루 선포도 하고 또 글로도 기록하여 이르되, 페르시아 왕 고레스가 이같이 말하노라.

주 곧 하늘의 하나님께서 땅의 모든 왕국을 내게 주시고 또 내게 명하사 유다에 있는 예루살렘에 자신을 위해 집을 건축하게 하셨나니 너희 모든 사람 가운데 누가 그분의 백성이냐? 그의 하나님께서 그와 함께 계시기를 원하노니 그는 유다에있는 예루살렘으로 올라가 주 이스라엘의 하나님의 집을 건축하라. (그분은 하나님이시요,) 그분의 집은 예루살렘에 있느니라. 남은자가 누구든지 그가 머물던 모든 곳에서 그의 처소 사람들이 은과 금과 물건과 짐승으로 그를 도와주고 그 외에도 예루살렘에 있는 하나님의 집을 위하여 자원 헌물을 드릴지니라, 하였더라. <에스라 1:1~4>

많은 역사 비평가들은 이런 성경의 주장에 대해 말도 안되는 일이라고 비웃었습니다. 당시에 강대국이 나라를 정복하고 포로된 자들을 풀어주고, 그들의 성전을 짓기 위해 도움을 주었다는 것은 말도 안되는 일이라고 치부해 버렸죠.

고레스 원통의 발견

페르시아 왕 고레스의 원통

하지만 고레스의 원통이 발견된 이후 비평가들은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습니다.

고레스의 칙령으로도  유명한 원통에는 고레스가 어떻게 바벨론의 도시를 저항 없이 취할 수 있었는가에 대한 설명이 있습니다.

주가 자신의 기름 부음 받은 자 고레스에게 이같이 말하노라. 내가 그의 오른손을 붙들고 민족들을 그 앞에 항복하게 하며 또 왕들의 허리를 풀어 문짝이 두 개인 성문들을 그 앞에 열게 하고 그 성문들을 닫지 못하게 하리라. 내가 너보다 앞서 가서 구부러진 곳들을 곧게 하고 놋 문들을 쳐서 산산조각 내며 쇠 빗장을 꺾고네게 어둠의 보화와 은밀한 곳의 감추어진 재물을 주어 네 이름으로 너를 부르는 나 곧 주가 이스라엘의 하나님인 줄을 네가 알게 하리라. <이사야 45:1~3>

또 그와 함께, 외국 포로에 대한 자유와 사회적 신분을 바로 잡아 주고 그들을 고국 땅으로 보냈다는 사실을 기록해 놓았습니다. 그 내용을 간단히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고레스 원통의 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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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고레스 세계의 왕, 위대한 왕, 정정 당당한 왕, 사방의 왕이며 위대한 왕 안샨의 왕이신 캄비세스의 아들이며… 고레스의 손자이며… 

나는 오랫동안 황폐 되어온 성소들과 그 안에 있던 신상들을 티그리스강 저편에 신성한 도성들로 귀한 시켰으며 그들을 위하여 영구적인 성소들을 지어 주었다. 이곳의 주민들은 모두 모아서 저들의 거주지로 귀환 시켰다…

역사적으로 페르시아왕 고레스 (키루스 2세)는 유대인들을 예루살렘으로 되돌려 보내고 그것은 BC 7세기에 이사야가 예언한 그대로입니다.

하나님이 없다면 어떻게 태어나지도 않은 사람의 이름을 예언할 수 있으며 그 사람이 왕이되어 어떤 일을 할지, 특히 그가 당시에 가장 강한 나라를 누르고 지역을 통치하게 될지, 또 자신에게 이득이 되지 않고 손해가 되는 즉 자신의 종으로 삼은 백성을 해방시키는 일을 할것 인지를 알수 있었을까요?

이것은 하나님의 전지함과 함께 이 세상의 통치 주권이 하나님께 있음을 나타내는 하나님의 존재를 증명하는 예언입니다.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에스라 1:1-4

1. 바사 왕 고레스 원년에 여호와께서 예레미야의 입을 통하여 하신 말씀을 이루게 하시려고 바사 왕 고레스의 마음을 감동시키시매 그가 온 나라에 공포도 하고 조서도 내려 이르되
2. 바사 왕 고레스는 말하노니 하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세상 모든 나라를 내게 주셨고 나에게 명령하사 유다 예루살렘에 성전을 건축하라 하셨나니
3.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참 신이시라 너희 중에 그의 백성 된 자는 다 유다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서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의 성전을 건축하라 그는 예루살렘에 계신 하나님이시라
4. 그 남아 있는 백성이 어느 곳에 머물러 살든지 그 곳 사람들이 마땅히 은과 금과 그 밖의 물건과 짐승으로 도와 주고 그 외에도 예루살렘에 세울 하나님의 성전을 위하여 예물을 기쁘게 드릴지니라 하였더라

기원전 586년 남유다가 망한 후 이스라엘 백성은 바벨론의 포로로 끌려갔지만 하나님이 예레미야를 통해 이미 앞서 예언하신 말씀대로 70년이 지난 후 바벨론의 포로생활을 끝내고 다시 예루살렘으로 돌아갈 길이 열리게 되었습니다.

종살이하던 애굽에서 해방되어 가나안을 향해 떠났던 조상들처럼 포로된 이스라엘백성에게 갑작스럽게 날아온 기쁜 소식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갑자기 귀환하게 된 것에 대해 역사적 배경은 참 흥미진진합니다.

우리가 성경 말씀을 이해할 때 중요한 것은 역사적 배경에 대한 사전 이해가 반드시 필요한데 특히 구약을 볼 때는 더욱 그렇습니다. 역사속에서 이스라엘 백성과 함께 하시던 하나님이 어떻게 그 시간속에 또 연대기속에 참여하여 일을 하시고 궁극적으로는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그 언약을 이루어가시는지 그 오묘한 전개과정을 보게되면 하나님은 이스라엘 뿐만이 아니라 당시 이스라엘을 둘러싼 주변의 여러 강대국들 마저도 너무나도 훌륭하게 활용하시면서 언약을 위해 하나님의 뜻대로 이끌어 가신다는 것을 알게 되면서 하나님의 일하심에 대해 감탄을 하지 않을 수가 없게 됩니다.

바사왕 고레스 원년에 여호와께서 예레미야의 입을 통하여 하신 말씀을 이루게 하시려고 바사왕 고레스의 마음을 감동시키시매 그가 온 나라에 공포도 하고 조서도 내려 이스라엘의 귀환을 허락하였다고 합니다. 
 
이 말씀으로만 본다면 바벨론으로 포로로 끌려간 이스라엘 백성이 바벨론의 왕의 의해 귀환명령을 받게 된 것이 아니라 바사라고 하는 나라의 왕으로부터 귀환명령을 받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고레스는 지금의 이란 전 지역을 장악하고 있던 거대한 나라였던 메대의 남동쪽 변방에 조그맣게 달라붙어 있던 안샨라고 하는 나라의 캄비오스왕의 아들으로 태어난 인물인데 기원전 6세기에 활약했던 역사적으로 대제라고 불릴만큼 위대했던 이 고레스 왕의 출생배경을 보면 재미있습니다. 그의 어머니는 메대 왕국의 공주였는데 공주는 결혼전에 두번의 꿈을 꾸게 됩니다. 그 꿈은 공주에게서 태어날 아들이 메대왕의 왕위를 빼앗게 되는 꿈이었고 이 꿈을 알게 된 메대왕 아버지는 이를 두려워해 자기 딸을 저 멀리 변방의 조금만 나라의 왕과 결혼시켜 그럴 힘을 처음부터 배양하지 못하게 하려합니다. 그렇게 해서 태어난 아들이 고레스였는데 고레스는 어릴적에 외할아버지의 눈을 피해 양치는 목동의 아들로 위장되기도 했지만 결국 성장해 외할아버지 왕에게 반란을 일으켜 메대왕국을 멸망시키고 페르시아 바사라고 이름을 바꾼 후 남유다에게는 원수와 같은 바벨론을 멸망시키고 동쪽으로는 인도로부터 서쪽의 터어키까지 이르는 거대한 왕국을 이루게 됩니다.

고레스가 죽은 이후로 역사적으로 위대한 왕으로 칭송을 받은 이유는 정복한 지배지와 융화하기 위해 종교적 관용과 포용정책을 기꺼이 폈고 피정복지 나라에서 배울 것이 있으면 이를 받아들이는 자세를 적극적으로 취했던 인물이었기 때문입니다. 그가 남겨 역사적 유물의 가치는 지금도 참으로 대단하게 인정을 받고 있습니다.
 
1. 고레스를 세워 쓰시는 하나님
 
 오늘 본문을 보면 이런 고레스왕의 마음을 하나님이 감동시키어 이스라엘 백성의 예루살렘 귀환과 예루살렘 성전의 건축을 명령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2절에서 고레스는 하나님 여호와께서 자신에게 세상 모든 나라를 주셨다고 했고 그 하나님이 자신에게 명령하여 예루살렘 성전을 건축하라고 하였다고 했습니다
 
고레스가 어떻게 여호와 하나님을 알게 되었는지는 모르지만 추정을 해보면 고레스의 평소 마음자세로 보아 어느 누군가로부터 이스라엘의 여호와 하나님과 그리고 바벨론의 포로로 오게된 이스라엘 백성에 대한 이야기를 전해 듣게 되었을 것입니다. 그 가운데에는 바벨론의 포로가 되는 과정에 100년전 선지자 예레미야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했던 이야기도 담겨 있었을 것이고 70년이 지나면 다시 돌아오게 될 것이라는 예언의 말씀도 또한 들었을 수있습니다. 더 거슬러 가서는 근 2백년이나 이전에 자신의 이름까지 정확하게 맞춘 이사야 선지자의 예언(이사야 44장 28절, 45장 1절)에 대해서도  어쩌면 들었을 지 모릅니다. 자신에 대해 예언하기를 여호와 하나님의 목자라고 하였고 또 여호와께로 기름을 부음을 받은 자라는 하는 2백년전의 예언의 말씀을 고레스가 접하게 되었을 때 그의 마음은 그 여호와 하나님께 감동이 되지 않을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3절에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참 신이니라고 인정하고 선포하지 않을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는 은과 금 그밖에 물건과 짐승으로 또 바벨론에 의해 빼앗겼던 성전 그릇까지 지원하는 전폭적인 지지로 예루살렘의 귀환과 예루살렘 성전건축을 독려합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포로귀환을 위해 먼 옛날 고레스라는 변두리 변방의 한 나라의 왕을 세우시고 그를 지키시고 보호하셔서 우연곡절끝에 거대한 나라의 왕조를 이끄는 위대한 왕으로 만들어 사용하셨고 그를 통해 바벨론을 하나님의 심판대로 멸망시켜 이스라엘 백성의 예루살렘의 귀환까지 이루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고레스만을 사용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고레스같은 자를 세워 위대한 업적을 이루게도 하시지만 하나님은 저와 여러분을 세우시고 사용하시어 하나님의 이루시고자 하는 씨줄과 날줄같이 그 촘촘하고 세밀하게 엮긴 이 세상의 일을 이루어 가시는 것입니다. 에이 나 같은 사람을 하나님이 어디에 쓰실라고~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미처 우리가 다 깨닫고 헤아리지 못할 뿐이지만 하나님은 이 거대한 세상속에 눈에 보이지도 느껴지지도 않을 아주 작은 한 영역에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가시기 위해, 하나님의 언약을 위해 저와 여러분을 지금도 사용하고 계시는중입니다. 이를 믿으시길 바랍니다. 저와 여러분이 염려하고 경계해야 할 것은 지금 내가 언제나 어느때나 하나님이 사용하시도록 기꺼이 내어드릴 수 있는 상태인지 나를 살피고 점검해야 할 뿐이지 나 같은 사람은 어디에도 쓸모없다라는 부정적인 생각과 태도는 하지도 말고 갖지도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하나님의 일을 위해 저와 여러분을 쓰고 계시다는 사실이 얼마나 우리를 감사하고 기쁘게 합니까? 이렇게 확신하고 믿을 수 있는 것은 그만큼 하나님과 내가 가까이 하고 있음을 잘 보여주는 것이라 할 수있습니다.
하나님께 기꺼어 나를 내어드릴 수만 있다면 하나님은 저와 여러분을 반드시 사용하십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하고 그의 십자가고난의 의미를 잊지않고 내 마음안에 심고 살아가고 있다면 그럴수만 있다면 하나님은 저와 여러분을 기쁘게 사용하십니다. 그래서 그것이 우리에게 얼마나 커다란 기쁨이 되는지 알게 하십니다. 이 기쁨이 저와 여러분의 것이 되시길 간절하게 바랍니다
 
2. 예루살렘으로 돌아가는 자
 
고레스의 귀환 명령을 통해 앞서 하나님의 선지자에 의해 예언된 말씀이 성취되었듯이 이제 예루살렘으로 귀환을 결심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생겨나게 됩니다. 2장까지 읽어보면 유다와 베냐민 족장들 그리고 제사장과 레위 사람들 그리고 그 마음이 하나님께 감동을 받은 자들이 예루살렘으로 돌아가기를 결심하고 그 수가 4만2천3백6십명이라고 2장 64절에서 밝히고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한가지를 생각헤보게 됩니다. 기원전 607 또는 605년 1차 바벨론의 포로가 이루어지고 난 후 586년에 남유다가 멸망하게 될 때까지 3차에 걸쳐 바벨론에 의해 끌려가게 된 포로수는 대략 만여명에 이른다고 합니다..
이런 가운데 70년이 흐른 후 포로로 끌려갔던 이스라엘 백성 4만명이 돌아오게 된 것입니다. 사만명이면 왠지 생각했던 것보다 적은 수가 예루살렘으로 돌아간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게 됩니다.
 
저는 오늘 본문을 보면서 이방인의 왕이었던 고레스마저도 인정할 만큼 참 신이신 그 하나님이 계신 예루살렘으로 돌아오기로 결심하고 실행했던 이스라엘 백성은 생각보다 적었다라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물론 객관적인 수치로 적었다 많았다 그리 평가할만한 자료를 근거로 말씀드린 것은 아닙니다. 다만 1893년에 바벨론의 고대도시였던 니푸르라는 지역을 발굴하다 발견된 당시 5세기 기록인 상업활동문서인 무라슈 문서를 통해 추정해볼 수있는 것은 유대인들은 28개의 집단 공동체를 만들어 바벨론 여기저기에서 정착촌을 이루며 상업과 농업 그리고 은행업에 이르는 경제활동에 종사하며 살았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이런 상황이라면 이스라엘 백성은 예레미야가 이미 예언한바대로 바벨론에 가서 그곳에 집을 짓고 거기 거하며 전원을 만들고 그 열매를 먹으라 (렘 29:5)라고 한 말씀이 그대로 이루어진 것이라 할 수있습니다. 한마디로 포로였던 이스라엘 백성은 자유롭게 여러 경제활동을 하면서 상당한 부를 이루고 잘 정착해 많은 가족을 이루며 잘 살았다라고 할 수있다는 것입니다. 70년이 지난 후에는 그럼 더 많은 수가 예루살렘으로 돌아갈 수있었을 것이라 생각해 볼 수있는데 그러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처음 시작에 제 경우처럼 이제 이곳 미국을 떠나 다시 한국으로 돌아가 사는 것에 엄두를 내지 못하는 것처럼 바벨론에서 이룬 모든 것을 정리해 다시 예루살렘으로 귀환한다라는 것이 쉽지 않은 결정이었을 것입니다.
 
이런 사정 때문에 어쩌면 에스라는 하나님꼐 감동을 받은 자들이 돌아갔다라고 표현하고 있는지 모릅니다.
 
 
모세에 의해 출애굽할 때 이스라엘 민족은 장정 6십만 기준으로 삼아 추정하면 250만에서 300만에 이루는 커다란 민족이었습니다. 이들은 처음에는 하나님이 주시겠다라고 하신 약속의 땅으로 향했지만 결국 1세대는 들어가지도 못하고 40년 광야에서 고생하다 죽고 말았고 광야 2세대만 들어갔을 뿐입니다. 가나안으로 들어간 이후에도 이스라엘은 끊임없이 하나님을 대적하고 반역하다 사사시대를 거쳐 다윗왕조 솔로몬을 이어 결국 북이스라엘과 남유다로 갈라지게 됩니다. 아시다시피 북이스라엘은 앗수르에 의해 멸망당하면서 민족의 순수성을 잃어버리고 이방인과 짬뽕이 되는 혼혈이 되어 하나님의 백성의 자리에서 탈락하였고 남아있던 남유다는 바벨론에 의해 멸망당하기전에 상당수가 애굽으로 도망가 버리고 많은 수는 예루살렘에 그냥 남게 되고 일부는 포로가 되어 끌려가면서 산산히 쪼개져 분열되고 맙니다. 그나마 예루살렘에 남아있게 된 백성은 모든 것이 파괴된 척박하고 버려진 땅속에 마치 죽은 신앙인처럼 살아야 했고 나중에는 귀환해 성전을 건축하는 남유다과 베냐민의 대적이 되어 성전공사를 방해하는 자들이 되고 맙니다. 예레미야의 예언에 따라 바벨론으로 포로가 되어 이끌려갔던 남유다의 백성은 그곳에 정착해 적당하게 잘 살게 되었지만 막상 다시 예루살렘으로 돌아가라고 할때는 그중의 일부만 돌아오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계신 예루살렘의 성전 그곳은 자원하며 기쁨으로 드리는 은과 금과 그밖의 많은 물건과 짐승의 예물로 이루어진 곳이며 이는 거슬러 올라가면. 모세시대 하나님을 만나는 회막 즉 장막이었고 더 거슬로 올라가면 그 원형은 하나님이 이세상을 창조하실 때 만드신 금과 은으로 가득한 에덴과 같은 곳이 바로 예루살렘에 계신 하나님의 성전이었습니다. 그런데 그곳으로 가기로 작정하고 돌아간 수는 수없이 갈때기에 거르고 거른 것처럼 결국 적은 수만 남은 사만이천여명의 백성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