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오늘 읽어야 할 말씀 : 열왕기상 22:1∼53 ♦ 묵상을 위한 주제 : 거짓말하는 영(22절) ♦ 성구 : 여호와께서 저에게 이르시되 어떻게 하겠느냐 가로되 내가 나가서 거짓말 하는 영(靈)이 되어 그 모든 선지자(先知者)의 입에 있겠나이다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너는 꾀이겠고 또 이루리라 나가서 그리하라.
“거짓말하는 영(a lying spirit)”이란 ‘거짓말을 하게 하는 영’을 말합니다.
정의가 무너진 사회에서는 거짓말을 잘 하는 사람이 성공하는 것처럼 보여 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건전한 사회는 진실만이 인정을 받습니다.
왕의 권력에 붙잡혀 이득을 얻으려는 사람들 더구나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선지자들마저 왕의 비위를 맞추려는 예언을 하는 세상은 하나님의 징계만 남아 있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성공적인 삶을 원합니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원하는 성공적인 삶을 살아가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왜 이런 현상이 나타날까요?
그 이유는 이미 사람들의 마음이 거짓말하는 영에 사로잡혀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믿음 생활이란 내 안에 있는 거짓 것을 찾아내어 진실한 것으로 교환하는 생활이라고 하겠습니다.
거짓 것을 진실한 것으로 교환할 수 있는 가장 강력한 무기는 “감사하는 마음”입니다.
잘못된 마음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풍요로운 환경에서도 감사할 줄 모릅니다.
그러나 마음의 태도가 올바른 사람은 어려운 환경 가운데서도 감사할 수 있습니다.
감사는 없는 것을 찾는 것이 아니라 있는 것을 찾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감사는 하나님만을 인정합니다. 때로는 어려운 환경도 하나님이 허락하신 것입니다. 때로는 좋은 환경도 하나님이 허락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의 사람은 모든 것이 하나님의 주권에서 나타난 것이므로 감사함으로 받아드릴 수 있습니다.
감사는 하나님을 좋으신 주님으로 찬송하게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독생자를 주시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늘 은혜에 대하여 감사하며 이 기쁨을 이웃에게 전해야만 합니다.
그러나 거짓말하는 영은 지금 너의 환경은 감사할 수 있는 자리가 아니라고 합니다.
네가 감사하는 것은 위선이라고 미혹합니다. 감사하는 것은 지금만이 아니라 장래에도 복을 주실 것이라는 믿음입니다.
속담에 “콩 심은 곳에 콩이 나고, 팥을 심은 곳에 팥이 난다.”는 말처럼 내가 감사를 심으면 반드시 감사할 것이 드러나게 될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감사하는 사람은 창조적 삶을 즐기지만 원망과 불평은 저주와 파멸의 길로 이끌어 갈 것입니다. 그러므로 날마다 감사하며 찬송하는 일에 성공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 찬양 / 지금까지 지내 온 것
예수 내 구주! 예수 내 생명! 예수 내 권세!
우정(友情)
사형수 "피시아스"와 그의 친구 "다몬"의 이야기
기원전 4세기경, 그리스의 피시아스라는 젊은이가 교수형을 당하게 되었습니다. 효자였던 그는 집에 돌아가 연로하신 부모님께 마지막 인사를 하게 해달라고 간청했습니다.
하지만 왕은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좋지 않은 선례를 남길 수는 없었기 때문입니다. 만약 피시아스에게 작별 인사를 허락할 경우 다른 사형수들에게도 공평하게 대해줘야 합니다. 그리고 만일 다른 사형수들도 부모님과 작별인사를 하겠다고 집에 다녀오겠다고 했다가 멀리 도망간다면 국법과 질서가 흔들릴 수도 있었습니다.
왕이 고심하고 있을 때 피시아스의 친구 다몬이 보증을 서겠다면서 나섰습니다.
"폐하, 제가 그의 귀환을 보증합니다. 그를 보내주십시오."
“다몬아, 만일 피시아스가 돌아오지 않는다면 어찌하겠느냐?”
"어쩔 수 없죠, 그렇다면 친구를 잘못 사귄 죄로 제가 대신 교수형을 받겠습니다."
"너는 피스아스를 믿느냐?"
"폐하, 그는 제 친구입니다."
왕은 어이가 없다는 듯이 웃었습니다.
“피시아스는 돌아오면 죽을 운명이다. 그것을 알면서도 돌아올 것 같은가? 만약 돌아오려 해도 그의 부모가 보내주지 않겠지. 너는 지금 만용을 부리고 있다."
"저는 피시아스의 친구가 되길 간절히 원했습니다. 제 목숨을 걸고 부탁드리오니 부디 허락해주십시오 폐하"
왕은 어쩔 수 없이 허락했습니다. 다몬은 기쁜 마음으로 피시아스를 대신해 감옥에 갇혔습니다. 교수형을 집행하는 날이 밝았습니다. 그러나 피시아스는 돌아오지 않았고 사람들은 바보 같은 다몬이 죽게 됐다며 비웃었습니다. 정오가 가까워졌습니다. 다몬이 교수대로 끌려 나왔습니다. 그의 목에 밧줄이 걸리자 다몬의 친척들이 울부짖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은 우정을 저버린 피시아스를 욕하며 저주를 퍼부었습니다. 그러자 목에 밧줄을 건 다몬이 눈을 부릅뜨고 화를 냈습니다.
“나의 친구 피시아스를 욕하지 마라. 당신들이 내 친구를 어찌 알겠는가.”
죽음을 앞둔 다몬이 의연하게 말하자 모두 꿀 먹은 벙어리가 되었습니다. 집행관이 고개를 돌려 왕을 바라보았습니다. 왕은 주먹을 쥐었다가 엄지손가락을 아래로 내렸습니다. 집행하라는 명령이었습니다.
그때 멀리서 누군가가 말을 재촉하여 달려오며 고함을 쳤습니다. 피시아스였습니다. 그는 숨을 헐떡이며 다가와 말했습니다.
“제가 돌아왔습니다. 이제 다몬을 풀어주십시오. 사형수는 접니다.”
두 사람은 서로를 끌어안고 작별을 고했습니다. 피시아스가 말했습니다.
“다몬, 나의 소중한 친구여, 저 세상에 가서도 자네를 잊지 않겠네.”
“피시아스, 자네가 먼저 가는 것뿐일세. 다음 세상에서 다시 만나도 우리는 틀림없이 친구가 될 거야.”
두사람의 우정을 비웃었던 사람들 사이에서 탄식이 흘러나왔습니다. 다몬과 피시아스는 영원한 작별을 눈앞에 두고도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담담하게 서로를 위로할 뿐이었습니다.
이들을 지켜보던 왕이 자리에서 일어나 큰 소리를 외쳤습니다.
"피시아스의 죄를 사면해 주노라!"
왕은 그 같은 명령을 내린 뒤 나직하게 혼잣말을 했습니다. 바로 곁에 서있던 시종만이 그 말을 들을 수 있었습니다.
"내 모든 것을 다 주더라도 이런 친구를 한번 사귀어보고 싶구나!"
아리스토텔레스 친구란 누구인가? 두 개의 몸에 깃든 한 개의 영혼이다.
영혼이 같은 것이 친구라고 하였다. 서로의 생각과 행동과 삶이 같은 것이다.
♦ 3월 24일(목)
♦ 오늘 읽어야 할 말씀 : 열왕기상 18:1∼46 ♦ 묵상을 위한 주제 : 어느 때까지(21절) ♦ 성구 : 엘리야가 모든 백성(百姓)에게 가까이 나아가 이르되 너희가 어느 때까지 둘 사이에서 머뭇머뭇 하려느냐 여호와가 만일(萬一) 하나님이면 그를 따르고 바알이 만일(萬一) 하나님이면 그를 따를지니라 하니 백성(百姓)이 말 한마디도 대답(對答)하지 아니하는지라.
하나님의 사람이란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사람이여 그 말씀대로 순종했던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100% 순종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나의 생각과 하나님의 말씀이 일치하지 않을 때는 속에서 거부 반응이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때로는 나의 생각과 다른 것일지라도 그 말씀대로 순종했을 때 순탄한 길이 열리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 어렵고 힘들고 고통스런 일이 기다리고 있을 수 있기 때문에 순종하기가 어렵습니다. 그런데 역경과 고난이 하나의 은혜의 창구가 되기 때문에 순종의 즐거움이 있습니다.
엘리야는 하나님의 말씀대로 행했습니다. 본문에는 엘리야 이외에도 여러 부류의 사람들이 등장합니다.
이와 같은 사람들을 살펴보면서 오늘 묵상의 주제 “어느 때까지”를 살펴보겠습니다.
첫째, 오바댜(Obadiah, 여호와의 종)
오바댜는 하나님 앞에서 악한 일들을 도모하는 아합 왕의 궁내 대신이었지만 여호와를 지극히 경외하는 사람입니다. 그가 하나님을 경외했다는 것은 왕비 이세벨이 하나님의 선지자들을 죽일 때에 위험을 무릅쓰고 100명의 여호와의 선지자들을 몰래 보호했다는 사실에서 잘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경외한 오바댜도 죽음 앞에서는 두려워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둘째, 아합(Ahab, 부친의 형제)
아합은 하나님께서 세우신 이스라엘의 왕이었지만 권력과 여자에 취하여 하나님을 떠나 우상숭배에 열중했습니다. 왕이 잘못된 신앙의 길에서 방황하므로 백성들은 심각한 가뭄과 기근에 시달려야 했습니다.
셋째, 이스라엘 백성(the People of Israel)
하나님의 선택을 받은 백성들이었지만 하나님과 우상 사이에서 결단하지 못하고 머뭇머뭇하는 신앙에 머물고 있었습니다.
넷째, 바알의 선지자들(the prophets of Baal)
바알의 선지자들은 아침부터 낮까지 제물로 바친 송아지를 바알신이 불로 태워줄 것을 간구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자신들의 기도가 무산되자 저녁이 될 때까지 미친 듯이 큰 소리로 외치며 춤을 추며 그들의 규례에 따라 자신의 몸을 칼과 창으로 자해했건만 아무런 결실도 맺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엘리야는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를 상징하는 열두 개의 돌을 취하여 무너진 여호와의 제단을 수축합니다. 그리고 송아지 제물이 있는 제단에 흥건하게 물을 채운 후에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여 주께서 이스라엘 중에서 하나님이신 것과 내가 주의 종인 것과 내가 주의 말씀대로 이 모든 일을 행하는 것을 알게 하옵소서 여호와여 내게 응답하옵소서 내게 응답하옵소서 이 백성에게 주 여호와는 하나님이신 것과 주는 그들의 마음을 돌이키심을 알게 하옵소서.”
엘리야가 바알 선지자들과 대결을 벌인 것은 결코 자신을 드러내기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과 바알 사이에서 이중생활을 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누구이심을 깨닫게 하므로 하나님의 품으로 돌아오게 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죽은 후 나흘이 지난 나사로를 살리신 것은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보내신 것을 유대인들로 하여금 믿게 하려는 것이었습니다(요 11:42).
이제 우리는 무엇을 위해 기도하며, 무엇을 위해 살고 있었는지 생각해야 합니다.
겉으로는 하나님의 일을 한다고 하면서도 마음속 깊은 곳에서는 아직도 나를 드러내려는 욕망이 있었는지 살펴야 하겠습니다.
엘리야가 무너진 여호와의 제단을 하나님께 간구하며 다시 쌓았듯이 그리고 악의 덩어리인 바알 선지자들을 단호하게 죽인 것처럼 우리 마음속에 감추어진 것들을 회개하며 악한 것을 끊어버리고 무너진 기도의 단을 쌓아야 하겠습니다.
나의 생명이 있을 동안에 믿음의 제단을 수축하여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일에 모두 성공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 찬양 / 어려운 일 당할 때
예수 내 구주! 예수 내 생명! 예수 내 권세!
어느 때까지(시편 13:1-6)
여호와여 어느 때까지니이까 나를 영원히 잊으시나이까 주의 얼굴을 나에게서 어느 때까지 숨기시겠나이까
나의 영혼이 번민하고 종일토록 마음에 근심하기를 어느 때까지 하오며 내 원수가 나를 치며 자랑하기를 어느 때까지 하리이까
여호와 내 하나님이여 나를 생각하사 응답하시고 나의 눈을 밝히소서 두렵건대 내가 사망의 잠을 잘까 하오며
두렵건대 나의 원수가 이르기를 내가 그를 이겼다 할까 하오며 내가 흔들릴 때에 나의 대적들이 기뻐할까 하나이다
다윗은 하나님께 절박한 심정으로 하나님의 임재를 간구하고 있다. 하나님, 언제까지 주의 얼굴을 내게서 숨기시겠나이까? 하나님의
도움이 절실할 때 하나님은 도대체 어디에 계십니까? 나의 이 고통 속에서 하나님은 왜 침묵하고 계십니까? 하나님은 진정 ‘나를
영영히 잊으셨나이까?’라고 절규하고 있다.
우리 삶속에서도 하나님의 임재와 도우심이 절박할 때, 우리가 고통으로 신음할 때 하나님은 마치 우리 자신을 잊으신 분처럼 침묵으로
일관하실 때가 있다. 정말 우리 영혼이 사망의 잠을 잘까 두려운 순간까지 침묵하신다. 이런 상황에 이르면 모든 것을 포기하고
싶은 마음이 든다.
왜 하나님은 우리의 고통 속에 즉각 개입하시지 않는 걸까? 하나님은 나의 상황을 알고 계시는 걸까? 이 때 우리는 어떻게 반응해야
할까?
다윗은 자신의 영혼 속에 맴도는 생각과 번민을 하나님께 부르짖으며 토설하고 있다. "하나님이여 나를 생각하사 나의 눈을
밝히소서!" 하나님은 고통속에서 하나님의 임재를 절실히 갈구하는 인생에게 어는 덧 찾아오셔서 근심. 걱정을 찬양으로 바꾸어
주신다.
사실 하나님이 침묵하시는 것은 우리의 믿음을 시험하고 계신다. 우리의 믿음이 정금 같은 신앙으로 잘 단련되어 성숙되기를 원하신다.
우리 속에 있는 모든 불순물을 제거하고 순수하게 하나님만을 붙잡고 살도록 처절한 상황에까지 이르게 하신다. 하나님의 침묵은
우리를 하나님의 사람으로 변화시키시는 하나님의 메시지이다.
그 하나님을 간절히 찾고 의지할 때 어느 덧 하나님은 우리의 고통 속에 들어오셔서 우리와 함께 아파하시고 하나님이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알게 하신다. 그 크신 사랑 때문에 마침내 고통 속에 있던 하나님의 자녀들은 하나님을 만나고 그 사랑을 의지하고
마음에 구원의 기쁨을 회복하게 하신다.
고통의 연단은 내가 하나님을 깊이 체험할 축복의 기회임을 기억하자! 그 고통 속에서 오히려 하나님을 크게 부르짖으므로 하나님의 사랑이 얼마나 크신지 구원의 감격을 회복하고 하나님을 찬양하는 삶이 되어야겠다.
이세벨(Jezebel) 정숙한, 고상한, 계집아이
열왕기상 16:31-33
느밧의 아들 여로보암의 죄를 따라 행하는 것을 오히려 가볍게 여기며 시돈 사람의 왕 엣바알의 딸 이세벨을 아내로 삼고 가서 바알을 섬겨 예배하고. 사마리아에 건축한 바알의 신전 안에 바알을 위하여 제단을 쌓으며. 또 아세라 상을 만들었으니 그는 그 이전의 이스라엘의 모든 왕보다 심히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를 노하시게 하였더라
이스라엘의 사악한 왕비 : 이세벨
Ⅰ. 이세벨의 인적사항
1. 이세벨의 뜻 : “고상한, 정숙한” 2. 시돈 왕 엣바알의 딸 3. 이스라엘 왕 아합의 아내 4. 베니게 종족 출신
Ⅱ. 시대적 배경
북이스라엘이 베니게와의 조약을 통해 경제적 이득을 누리고, 다메섹에 있는 아람에 대항할 힘을 획득하고자 했던 시기(B.C. 874~853년경)에 아합 왕과 이세벨의 정략결혼으로 북이스라엘 내에는 바알 숭배가 만연하게 됨.
Ⅲ. 이세벨의 특징
이스라엘은
사울 - 다윗 - 솔로몬을 잇는 단일왕국시대로 이어지다가 솔로몬의 아들 르호보암때 르호보암의 악정으로 인해 남유다와 북이스라엘로
분열되게 됩니다.
남유다는 유다지파의 계보를 잇는 왕조가 되지만 북이스라엘은 10개의 지파가 연합을 형성하면서 다양한 왕조를
형성하게 됩니다. 북이스라엘의 초대왕 여로보암의 왕조가 시작되는데 그의 아들 나답 때에 바아사가 모반을 일으키고, 바아사의 아들
엘라 때에 시므리가 모반을 일으킵니다. 그러나 이 모반은 7일천하가 되고 맙니다. 시므리의 모반소식을 듣고 당시 이스라엘 군대는
군대 지휘관이었던 오므리를 이스라엘 왕으로 추대하여 시므리의 모반을 평정하게 됩니다. 그때 또 다른 모반을 꾸며 디브니가 모반을
하나 오므리가 모든 모반을 평정하고 오므리 왕조를 세우게 됩니다. 이렇게 모반에 모반을 반복하면서 세운 왕조이다 보니 오므리는
강력한 중앙 집권을 하지 않으면 안되었습니다. 그래서 수도를 디르사에서 사마리아로 옮기게 됩니다.
사마리아 : 오므리가 세멜에게서 은 두달란트로 산을 사고 성읍을 건축한 후 세멜의 이름을 따서 사마리아라고 하였다.
엣바알 : 엣바알은 본래 바알신의 제사장이었다. 그는 히람 왕가의 펠레스 왕을 암살한 후 왕이 되었다. 엣바알은 바알의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엣바알의 본래 이름은 이도발이었다.)
왕권을
견고히 하기는 했지만 오므리는 악정을 하게 됩니다. 이러한 오므리 밑에서 보고 자란 아들이 아합입니다. 아합이 아버지의 뒤를
이어 왕이 되자 더욱 악한 정치를 하게 됩니다. 그리고 아합은 시돈 사람의 왕 엣바알의 딸 이세벨하고 결혼을 하게 됩니다.
장인(이세벨의
아버지)이 바알을 섬기는 제사장이었으니 바알을 섬기는 우두머리, 바알의 최고 선지자의 딸을 아내로 맞이 한 것이다. 그러니
이세벨이 어떤 여자였는지는 불을 보듯 뻔한 것이다. 이렇게 해서 이세벨이 이스라엘의 왕후가 되어 북이스라엘 역사에 큰 영향력을
행사하는 여자가 되었다.
그렇다면 이세벨은 과연 어떤 여자였을까요?
1. 바알숭배를 이스라엘에 만연하게 했던 여인
아합왕이
다스릴 당시에는 나라가 아직 안정되지 않은 상황이었다. 나라 전체가 모반을 거듭하면서 국력은 많이 약화되었고, 남쪽으로는
남유다가 버티고 있고, 북쪽으로는 아람이 진을 치고 있고, 북서쪽으로는 베니게가 동쪽에는 암몬이 진을 치고 있었기에 아합은
정략적인 결혼을 하기로 작정했던 것이다. 그래서 우선 베니게와 동맹을 위해 베니게의 왕 엣바알의 딸 이세벨을 아내로 맞이한
것이다.
이세벨을
아내로 맞이한 아합왕은 이세벨의 요구를 들어주어야 했다. 그래서 이세벨과 결혼 할 때 바알을 섬겨 거기에 예배하고 이스라엘의
수도인 사마리아에 바알의 신전을 건축해 주었던 것이다. 이에 이세벨은 바알신전에서 예배할 수 있도록 제단을 쌓게 하고, 아세라상을
만들게 했다. 그리고 모든 제사를 집례하고 바알 종교의 포교를 위해 바알 선지자와 아세라 선지자를 불러 들였다. 그 수가 무려
850명이나 되었다.
이세벨은 아합의 마음을 완전히 사로잡은 여인이었다. 그래서 아합으로 하여금 자신의 요구를 다 들어주게한 여인이었던 것이다. 자신의 진짜 목표는 온 이스라엘을 바알을 숭배하는 나라로 물들이는 것이었다.
이세벨은 아합의 마음을 완전히 빼앗아 버리는 매력이 있었다. 이스라엘의 수장인 왕의 마음을 사로잡았으니 이세벨은 이스라엘 전체를 쥐락 펴락하는 권세를 누리게 된 것이다.
적용
이세벨은
하나님을 대적하는 우상의 딸과 다름이 없습니다. 이러한 것과 정략적인 계약을 맺는 다는 것은 참으로 한심스러운 일입니다.
이세벨을 이용하는 것 같지만 결국 이세벨에게 모든 마음을 빼앗겨서 국정을 파국으로 이끌고 나라를 망쳐버리게 됩니다.
우리도 악한 것들과는 타협하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을 대신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어떤 위협이 있어도, 어떤 어려움이 있어도 하나님을 신뢰하고 의지하는 자는 평안을 누리고 회복되는 줄 믿어야 합니다.
2. 이세벨은 여호와의 신앙을 말살하는 정책
이세벨은
단순히 바알종교를 전하는 전도자에 멈추지 않았다. 그녀는 이미 이스라엘 모든 민족에 뿌리내리고 있는 여호와의 신앙을 제거하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었다. 그래서 그녀는 우선 적으로 선지자들을 숙청하는 일을 대대적으로 거행했다.
열왕기상18:4 이세벨이 여호와의 선지자들을 멸할 때에 오바댜가 선지자 백 명을 가지고 오십 명씩 굴에 숨기고 떡과 물을 먹였더라.
이세벨의
권세는 아합을 능가하는 것이었다. 아니 아합의 모든 마음을 사로 잡아 수렴청정(垂簾聽政)하듯 자신의 권력을 마음껏 휘두르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기에 그녀는 여호와의 선지자들을 박해했고, 심지어 색출하여 죽이는 일에 앞자서게 되었다. 이에 당시에 왕궁을
맡은 궁내대신 오바댜는 여호와의 선지자를 몰래 굴에 숨겨 100여명을 돌본 적이 있었다. 어느 누구도 이세벨의 막강한 세력앞에
반기를 들 수 없었던 것이다.
이세벨은 사악한 여인의 대명사였던 것이다. 아합의 눈과, 귀를 다 막은 여인이다. 아합은 이세벨의 꼭두각시가 되어 있었던 것이다.
적용
악이
들어어면 그 악이 얼마나 무섭게 번식하는지를 알아야 합니다. 이세벨은 악의 화신이었습니다. 암세포같은 존재였습니다. 모든 건강한
세포를 공격하여 죽이기를 합니다. 우리 안에 하나님을 멀리하게 하는 요인이 무엇인지 찾아 그것을 제거해야 합니다.
3. 이세벨은 사악한 변신의 귀재
이세벨은 변신의 귀재였다. 자신의 남편 아합에게는 아주 연약한 여인으로 행세했다. 그러나 아합이 없는 곳에서는 자신이 숨겨온 발톱을 드러내고 천하를 호령했다.
● 엘리야을 겁박하는 이세벨.....
아합의
악정을 보고 한 번은 엘리야 선지자가 아합에게 찾아가 말합니다. 내 말이 없으면 수 년 동안 비도 이슬도 내리지 않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러자 정말 이스라엘 땅에 비와 이슬이 그쳐 버렸습니다. 이는 하나님의 경고의 사인이었습니다. 그러나 아합과 이세벨은
깨닫지 못합니다. 그래서 가뭄이 시작 된 지 3년 째 되는 해에 엘리야는 바알과 아세라 선지자를 갈멜산으로 불로 대결을
요청합니다. 그래서 그 유명한 엘리야의 갈멜산 대첩이 시작됩니다. 물론 무기없는 싸움이지요. 바알과 아세라를 섬기는 제사장들과
엘리야와의 대결입니다. 그러나 이는 단순한 대결이 아니라 신의 전쟁과 같은 것이었습니다.
물론
이 대결에서 엘리야가 이깁니다. 그러자 엘리야는 바알선지자를 다 잡아 기손시내로 끌고 가서 다 죽여 버립니다. 그리고 나자
이스라엘에 비가 내리기 시작합니다. 그런데 이 소식을 들은 이세벨은 크게 노합니다. 그래서 엘리야을 협박합니다.
열왕기상19:2 이세벨이 사신을 엘리야에게 보내어 이르되 내가 내일 이맘때에는 반드시 네 생명을 저 사람들 중 한 사람의 생명과 같게 하리라 그렇게 하지 아니하면 신들이 내게 벌 위에 벌을 내림이 마땅하니라 한지라.
그렇습니다.
이세벨은 당장 엘리야 선지자를 잡아 죽일 듯이 혈안이 되어 있습니다. 이 당시 이세벨의 분기와 혈기가 짐작이 가는 내용입니다.
어떤 수단과 방법을 동원해서라도 엘리야를 잡겠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전역을 이 잡듯이 뒤지겠다는 것입니다. 국가적 계엄령을
선포하고 보는 비상망을 총동원하겠다는 것입니다. 이세벨은 허풍을 떠는 여인이 아니었습니다. 한다면 하는 여인이었습니다. 그리고
지금까지 그녀의 모습을 철저히 보여 준 것입니다. 이세벨의 이 선전포고가 얼마나 떨리는 일이고 무서운 일이었으면 금방 놀라운
기적을 행사한 엘리야까지 간담이 서늘해서 도망을 쳤겠습니까? 그래서 엘리야는 북이스라엘을 빠져나와 브엘세바까지 도망을 친
것입니다.
이렇듯 이세벨의 권세는 나는 새도 떨어뜨리고 막강한 권세였습니다.
● 나봇의 포도원을 뺏은 이세벨...
한
번은 아합이 거주 하는 왕궁 근처에 나봇이라는 사람을 농사를 짓는 포도원이 있었다. 아합은 그 포도원이 탐이 나서 나봇에게 그
포도원을 팔라고 한다. 그러나 나봇이 그 포도원을 팔지 않자 아합은 속이 상해 단식하고 침상에 들어가 고민을 합니다. 이 모습을
지켜 보던 이세벨이 아합을 위로합니다.
왕이 지금 이스라엘 나랄르 다스리시나이까 일어나 식사를 하시고 마음을 즐겁게 하소서 내가 이스르엘 사람 나봇의 포도원을 왕께 드리리이다.
이렇게
왕의 마음을 살살 녹입니다. 얼마나 요염합니까? 걱정하지 말고 다 자기에게 맡기라는 것입니다. 자신이 다 알아서 해결하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왕의 이름으로 편지를 쓰고 인을 치고 봉해서 그 성읍에 있는 장로들과 귀족들에게 보냅니다. 그 내용은 그
성읍에 금식을 선포하고 나봇을 백성들 가운데 높이 앉힌 후에 불량자 두 사람을 매수하여 그들로 하여금 나봇이 하나님과 왕을
저주했다고 거짓증언을 하게 한 후에 나봇을 돌러 쳐 죽이라고 합니다. 이 얼마나 사악한 행위입니까? 그러자 모든 장로들과 귀족들이
이세벨의 명대로 합니다. 그러자 이세벨은 나봇의 포도원을 아합에게 진상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이세벨의 악의 극치를 봅니다. 자신들이 원하는 것이 곧 법입니다. 안되는 것이 없습니다. 자신이 곧 걸어다니는 법이고
신입니다. 그러니 당시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얼마나 두려움에 떨었겠습니까? 상상을 초월할 일입니다.
이세벨은 아합의 눈만 가리면 되는 것이었습니다. 아합은 심약한 존재입니다. 이세벨의 꼭두각시 역할만 했던 왕입니다. 참으로 비참한 노릇입니다.
이렇게 이세벨은 사악한 변신의 귀재였습니다. 남편에게는 애교 많고, 연약한 여인처럼 보입니다. 그리고 백성을 위하고 왕을 위하는 척 합니다. 그러나 온 이스라엘 전체를 병들게 만들고 망쳐버리는 여인이었습니다.
적용
이세벨은
사악한 여인이 대명사였습니다. 그녀는 음녀였습니다. 그녀는 요녀였습니다. 괴녀였습니다. 나라의 안정을 위해서 정략적으로 잡은
여인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얼마나 참혹한 결과를 가져오게 되는지를 모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무엇과 타협하고,
무엇과 계약을 맺겠습니까? 하나님을 등지고 하나님을 부인하고 내 마음속에 이세벨을 품는 다면 순간은 좋아보이나 그것이 곧 우리를
죽이고 멸망시키는 것임을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네
결국 이스라엘에 또 다른 모반이 생기게 됩니다. 그는 하나님이 세운 예후라는 사람이었습니다. 예후가 모반을 하여 아합의 아들을
제거하고 온 이스라엘을 악의 구렁텅이로 빠지게 한 이세벨을 잡으러 옵니다. 예후가 온 것을 본 이세벨은 화장을 하고 눈을 그리고
머리를 꾸미고 죽을 준비를 합니다.
아주
악한 여인은 끝까지 자존심을 지키려고 했나 봅니다. 그러자 예후가 내 편이 될 자가 누구냐고 소리치자 두 명의 내시가 창으로
내다봅니다. 예후는 이세벨을 내려 던지라고 하자 두 내시가 이세벨을 창 밖으로 내어 던집니다. 그러자 그 피가 담과 말에
튀었습니다. 예후가 들어가서 먹고 마시고 난 이후에 저주받은 여인을 장사하려고 보니 이세벨의 시체를 찾을 길이 없고, 오직 그녀의
두골과 발과 손 만 있었다고 합니다. 참으로 비참하게 최후를 맞이한 여인이었습니다. 그녀의 육체는 개의 식사가 되었던 것
같습니다.
적용
하나님이
악한 자는 반드시 심판하심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 댓가를 지불하게 합니다. 특히 하나님을 향해 대적하는 자의 악행은 절대
용서하지 않습니다. 혹시 이 땅에서 그 댓가를 받지 못했다면 영원한 형벌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것을 기억하고 우리는 악의 괴수가
되지 말아야 하고 그러한 자와 계약을 맺지도 말아야 합니다. 우리의 삶에서 악을 제거하는 일에 최선을 다하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악은 엄청난 번식력이 있습니다. 악이 우리의 삶의 귀퉁이에서 번식하지 않도록 해야 하겠습니다.
Ⅳ. 결론
1. 하나님 외에 다른 것과 타협하는 어리석은 자가 되지 말자 2. 내 안에 이세벨과 같은 사악함이 없는지 점검하자 3. 악은 엄청난 번식력을 가지고 있음을 깨닫고 제거하자
하나님의 사람
‘하나님의 사람(mam of God)’을 히브리어로 ‘이쉬-하엘로힘’(אִישׁ־הָאֱלֹהִֽים-iysh-hā’ĕlōhîm)이라고 합니다. 여기서 ‘이쉬’(אִישׁ-ʼîysh)는 “남자, 인류, 남편, 위인”이라는 뜻의 남성명사 입니다.
성경에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불렸던 사람들이 여러 명 있습니다. 위대한 믿음의 선진들이 수 없이 많이 있지만, 실제로 ‘하나님의 사람’이라는 명예로운 별명으로 불리운 사람은 의외로 그리 많지 않습니다.
물론, 일반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서 백성들에게 전달하는 역할을 수행했던 선지자들(삼상 9:10; 왕상 13:1; 대하 25:9)을 그렇게 부르기도 했습니다만.
실제로, ‘하나님의 사람’으로 불렸던 사람들은 모세(신 33:1; 수 14:6; 대상 23:14; 대하 30:16; 스 3:2; 시 90:1), 다윗(대하 8:14; 느 12:24, 36), 엘리사(왕하 4:7; 5:8; 7:2; 8:2), 그리고 스마야(왕상 12:22) 정도이고, 신약에서는 사도 바울이 믿음의 아들 디모데(딤전 6:11)를 그렇게 부르 것이 전부입니다.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의 영을 소유한 사람입니다(로마서 8:9) 따라서 하나님의 사람은 하나님의 영을 소유한 사람입니다.
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을 소유하였다는 것은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를 받는 것"을 말합니다(로마서 8:14).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사람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 하나님의 영은 예수께서 육체로 오신 것을 인정하는 것입니다(요한일서 4:12)
하나님의 영은 이것으로 알찌니 곧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오신 것을 시인하는 영마다 하나님께 속한 것이요 .
‘하나님의 사람’으로 지칭된 다윗을 통하여 이 단어가 가지는 몇 가지 의미를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
사도 바울이 비시디아의 안디옥에서 복음을 전할 때(행 13:22), 그렇게 표현했습니다. 이 부분은 더 이상 설명이 필요치 않습니다.
둘째, 조상 아브라함과 맺으신 땅의 언약을 성취한 사람
여호수아의 주도하에 가나안 땅을 정복하고, 분배했습니다만, 그 이전까지는 부분적으로 실현된 것이었습니다. 다윗 시대에 수 많은 전쟁을 통해 해당 지역의 여러 나라들을 정복하고, 실제적인 통치권을 행사함으로 온전하게 땅의 언약을 성취했다는 말입니다.
셋째, 율법의 제사 제도를 완벽하게 구현했기 때문
모세를 통해 제정해 주신 율법에 따라 레위인과 제사장들을 거룩하게 구별하고, 성전과 제사의 직무에만 전담하도록 함으로, 율법의 제사 제도를 완벽하게 구현하였기 때문입니다.
솔로몬도 아버지 다윗의 규례에 따라서 이를 그대로 시행했을 뿐입니다(14절).
넷째, 하나님께서 그에게 ‘영원한 언약’을 주셨기 때문(삼하 7:8-16)
이 언약의 주인공이 바로 다윗의 자손으로 이 땅에 성육신 하여 오신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오히려 주님께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해 주십니다. 사랑하는 아들아! 하나님의 사람이란, 다윗이나 모세처럼 어느 특정한 사람만을 가리키는 말이 아니다. 너를 비롯한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이 사람들이다. 믿음으로 거듭나서 하나님의 자녀가 된 모든 그리스도인은 누구나 하나님의 사람이 것이다. 더구나 내가 다른 보혜사인 성령으로 내주하고 있는 성전(고전 3:16; 6:19)이기에 마땅히 하나님의 사람인 것이다. 문제는 너를 비롯한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이러한 사실을 분명하게 알고, 하나님의 사람 답게 살아가고 있느냐 하는 그것이 문제라고 하겠습니다.
왜 산당을 없애지 못하였을까?
아사가 여호와 하나님 앞에서 다윗과 같이 온전하였다고 하지만 다만 산당을 없애지 못하였다고 합니다. 하나님의 선지자 오뎃의 말을 듣고 용기를 내어 개혁을 하였지만 산당을 제거하지 못한 것은 아사 왕 안에 산당이 들어 있었다고 봐야 합니다. 그 산당이란 결국 자기를 위한 것입니다.
아사 왕은 예루살렘에서 41년을 통치하였습니다. 그는 조상 다윗과 같이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히 행하였습니다. 남색 하는 자를 쫓아내고, 그 열조의 모든 우상을 없앴습니다. 심지어 자신의 모친 마아가가
아세라 우상을 만들었으므로 태후에서 폐하였습니다. 그러나 산당은 없이 하지 못하였습니다.
아사 왕이 엄청난 개혁을 합니다. 그래서 그의 조상 다윗과 같이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하게 행하였다고 합니다. 남색 하는
자를 그 땅에서 쫓아내고 그의 조상들이 지은 모든 우상을 찍어 불살라버렸습니다. 심지어 태후인 마아가가 아세라 상을 만들었다고
폐위시켜 버렸습니다. 그리고 그 우상도 기드론 시냇가에서 불살라 버렸습니다. 아사 왕은 그 마음이 일평생 여호와 앞에서
온전하였습니다. 그는 그 부친이 성별한 것과 자기가 성별한 은과 금과 그릇들을 여호와의 성전에 받들어 드렸습니다. 그런데 이런
그도 다만 산당은 없애지 못하였습니다.
산당이 무엇이기에 그렇게 엄청난 개혁을 한 아사 왕도 산당을 없애지 못한 것입니까?
예루살렘에 성전이 세워지기 까지는
여러 산당에서 여호와께 제사를 드렸습니다. 그런데 예루살렘에 성전이 세워지고 나서도 이스라엘 백성들은 여전히 산당에서 제사를 드린
것입니다. 그런데 산당의 제사도 여호와 하나님께 드린다고 드린 제사였습니다. 성전이 세워지기 전에 사무엘도 솔로몬도 산당에서
제사를 드렸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전국에 산재하여 있는 산당들이 여호와의 제사와 바알과 아세라와 같은 우상의 제사와 혼합이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말로는 여호와께 제사를 드린다고 하지만 그 속 내용을 보면 가나안 원주민들과 주변 나라들의 우상숭배가 되어버린
것입니다. 이러한 산당을 다 제거한다는 것은 민간신앙을 송두리째 흔드는 것이기 때문에 전 국민적 반발이 일어날 수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아사 왕은 개혁을 하면서도 산당만은 남겨둔 것입니다. 그런데 엄청난 개혁을 한 아사가 산당을 남겨둔 것은 자신의 마음에도
산당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16-22절을 보면 “아사와 이스라엘 왕 바아사 사이에 일생 전쟁이 있으니라. 이스라엘 왕 바아사가 유다를 치러 올라와서
라마를 건축하여 사람을 유다 왕 아사에게 왕래하지 못하게 하려한지라. 아사가 여호와의 전 곳간과 왕궁 곳간에 남은 은금을 몰수히
취하여 그 신복의 손에 붙여 다메섹에 거한 아람 왕 헤시온의 손자 다브림몬의 아들 벤하닷에게 보내며 가로되 나와 당신 사이에
약조가 있고 내 부친과 당신의 부친 사이에도 있었느니라. 내가 당신에게 은금 예물을 보내었으니 와서 이스라엘 왕 바아사와 세운
약조를 깨뜨려서 저로 나를 떠나게 하라 하매. 벤하닷이 아사 왕의 말을 듣고 그 군대장관들을 보내어 이스라엘 성들을 치되 이욘과
단과 아벨벧마아가와 긴네렛 온 땅과 납달리 온 땅을 쳤더니. 바아사가 듣고 라마 건축하는 일을 그치고 디르사에 거하니라. 이에
아사 왕이 온 유다에 영을 내려 한 사람도 모면하지 못하게 하여 바아사가 라마를 건축하던 돌과 재목을 가져 오게 하고 그것으로
베냐민의 게바와 미스바를 건축하였더라”
아사와 북 이스라엘의 바아사 사이에 일평생 전쟁이 있었습니다. 북 이스라엘의
바아사 왕이 북쪽 이스라엘 사람들이 남 유다로 가는 길목을 막기 위하여 예루살렘 위의 라마라는 교통의 요충지에 자기들의 요새를
건설한 것입니다. 르호보암 왕 때에도 북 이스라엘의 여로보암이 벧엘과 단에서 금송아지를 섬기게 하자 남으로 내려온 자들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아사 왕 때도 북 이스라엘의 사람들이 남쪽 아사 왕에게로 온 자들이 있습니다. 그래서 바아사가 라마에 요새를
건설한 것입니다.
역대하 15:1-19 “하나님의 신이 오뎃의 아들 아사랴에게
임하시매. 저가 나가서 아사를 맞아 이르되 아사와 및 유다와 베냐민의 무리들아 내 말을 들으라. 너희가 여호와와 함께 하면
여호와께서 너희와 함께 하실지라. 너희가 만일 저를 찾으면 저가 너희의 만난 바 되시려니와 너희가 만일 저를 버리면 저도 너희를
버리시리라. 이스라엘에는 참 신이 없고 가르치는 제사장도 없고 율법도 없은 지가 이제 오래였으나 그 환난 때에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께 돌아가서 찾으매 저가 그들의 만난 바가 되셨나니. 그 때에 열국에 거한 모든 백성이 크게 요란하여 사람의 출입이 평안치
못하며 이 나라가 저 나라와 서로 치고 이 성읍이 저 성읍과 또한 그러하여 피차 상한바 되었나니. 이는 하나님이 모든 고난으로
요란케 하셨음이니라. 그런즉 너희는 강하게 하라 손이 약하지 않게 하라. 너희 행위에는 상급이 있음이니라. 아사가 이 말 곧
선지자 오뎃의 예언을 듣고 마음을 강하게 하여 가증한 물건을 유다와 베냐민 온 땅에서 제하고 또 에브라임 산지에서 빼앗은
성읍들에서 제하고 또 여호와의 낭실 앞 여호와의 단을 중수하고 또 유다와 베냐민의 무리를 모으고 에브라임과 므낫세와 시므온
가운데서 나와서 저희 중에 우거하는 자를 모았으니. 이는 이스라엘 사람들이 아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와 함께 하심을 보고
아사에게로 돌아오는 자가 많았음이더라. 아사 왕 십 오년 삼월에 저희가 예루살렘에 모이고 그 날에 노략하여 온 물건 중에서 소
칠백과 양 칠천으로 여호와께 제사를 드리고 또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여 열조의 하나님 여호와를 찾기로 언약하고 무릇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를 찾지 아니하는 자는 대소 남녀를 무론하고 죽이는 것이 마땅하다 하고 무리가 큰 소리로 부르며 피리와 나팔을 불어
여호와께 맹세하매 온 유다가 이 맹세를 기뻐한지라. 무리가 마음을 다하여 맹세하고 뜻을 다하여 여호와를 찾았으므로 여호와께서도
저희의 만난바가 되시고 그 사방에 평안을 주셨더라. 아사 왕의 모친 마아가가 아세라의 가증한 목상을 만들었으므로 아사가 그 태후의
위를 폐하고 그 우상을 찍고 빻아 기드론 시냇가에서 불살랐으니. 산당은 이스라엘 중에서 제하지 아니하였으나 아사의 마음이 일평생
온전하였더라. 저가 또 그 부친의 구별한 물건과 자기의 구별한 물건 곧 은과 금과 기명들을 하나님의 전에 드렸더니. 이 때부터
아사 왕 삼십 오년까지 다시는 전쟁이 없으니라.”
하나님의
영이 임한 오뎃의 아들 아사랴가 아사에게 여호와의 말씀을 전합니다. 그러자 아사가 선지자 오뎃의 말을 듣고 마음을 강하게 하여
모든 우상들을 제거합니다. 그리고 여호와의 제단을 재건합니다. 북 이스라엘의 사람들 중에 이 소식을 들은 자들이 아사의 하나님
여호와께로 돌아오는 자가 많았습니다. 그러므로 남으로 가는 길목을 막기 위하여 북 이스라엘의 바아사 왕이 라마에 성을 건축합니다.
그런데 이때 아사가 여호와의 도우심을 구한 것이 아니라 아람 왕에게 성전의 은금을 보내서 이스라엘을 공격하게 합니다. 그래서 북
이스라엘을 아람이 공격하니 바아사는 물러가게 되고 아사는 라마를 건설하려던 재료를 가지고 게바와 미스바를 건축합니다. 아사가
이렇게 한 것이 바로 아사의 마음에 있던 산당입니다.
역대하
16:7-10 “때에 선견자 하나니가 유다 왕 아사에게 나아와서 이르되 왕이 아람 왕을 의지하고 왕의 하나님 여호와를
의지하지 아니한 고로 아람 왕의 군대가 왕의 손에서 벗어났나이다. 구스 사람과 룹 사람의 군대가 크지 아니하며 말과 병거가 심히
많지 아니하더이까. 그러나 왕이 여호와를 의지한 고로 여호와께서 왕의 손에 붙이셨나이다. 여호와의 눈은 온 땅을 두루 감찰하사
전심으로 자기에게 향하는 자를 위하여 능력을 베푸시나니. 이 일은 왕이 망령되이 행하였은즉 이 후부터는 왕에게 전쟁이 있으리이다
하매. 아사가 노하여 선견자를 옥에 가두었으니 이는 그의 말에 크게 노하였음이며 그 때에 아사가 또 몇 백성을 학대하였더라”
여호와를 의지하지 않고 아람 왕을 의지한 것을 하나님의 선견자 하나니가 책망을 하자 아사가 노하여 선견자를 옥에 가두어
버립니다. 이 선견자의 편을 든 몇 사람도 함께 학대하였습니다.
왜 이렇게 되었습니까?
오뎃의 말을 듣고 용기를 내었던 아사
왕이 전쟁의 승리로 평안을 얻었습니다. 그런데 그 평안이 계속되자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을 잊어버리고 자신의 힘과 능력으로 된
줄로 착각하고 교만해 진 것입니다. 그래서 북 이스라엘이 공격하자 여호와 하나님을 의지하기보다 아람 왕을 의지한 것입니다. 전에
아사는 구스 사람과 룹 사람의 군대 규모가 북 이스라엘 군대보다 더 큰 대군이었지만 여호와의 도우심으로 승리하였습니다. 그는 그
은혜를 잊어버리고 아람 왕에게 도움을 청한 것입니다. 이것이 아사의 산당입니다.
그러면
구스 사람과 룹 사람의 군대의 규모가 어느 정도였습니까?
역대하 14:8-15 “아사의 군대는 유다 중에서 큰 방패와
창을 잡는 자가 삼십만이요, 베냐민 중에서 작은 방패를 잡으며 활을 당기는 자가 이십 팔만이라. 다 큰 용사더라. 구스 사람
세라가 저희를 치려하여 군사 백만과 병거 삼백승을 거느리고 마레사에 이르매. 아사가 마주 나아가서 마레사의 스바다 골짜기에 진
치고 그 하나님 여호와께 부르짖어 가로되 여호와여 강한 자와 약한자 사이에는 주 밖에 도와줄 이가 없사오니. 우리 하나님 여호와여
우리를 도우소서. 우리가 주를 의지하오며 주의 이름을 의탁하옵고 이 많은 무리를 치러 왔나이다. 여호와여 주는 우리
하나님이시오니 원컨대 사람으로 주를 이기지 못하게 하옵소서 하였더니. 여호와께서 구스 사람을 아사와 유다 사람 앞에서 쳐서 패하게
하시니 구스 사람이 도망하는지라. 아사와 그 좇는 자가 구스 사람을 쫓아 그랄까지 이르매 이에 구스 사람이 엎드러지고 살아 남은
자가 없었으니 이는 여호와 앞에서와 그 군대 앞에서 패망하였음이라. 노략한 물건이 심히 많았더라. 여호와께서 그랄 사면 모든
성읍 백성을 두렵게 하시니 무리가 그 모든 성읍을 치고 그 가운데 있는 많은 물건을 노략하고 또 짐승 지키는 천막을 치고 양과
약대를 많이 이끌고 예루살렘으로 돌아왔더라”
이 말씀에 보면 58만대 100만의 싸움입니다. 그런데 이 싸움에서
여호와의 도우심을 구하여 이긴 사람이 아사 왕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여호와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를 경험을 한 아사 왕이지만 자기
안에 산당을 온전히 제거되지 못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여호와를 의지하기보다 아람 왕을 의지한 것입니다.
열왕기상 15:23-24 “아사의 남은 사적과 모든 권세와 무릇 그 행한 일과 성읍을 건축한 것이 유다 왕 역대지략에 기록되지
아니하였느냐. 그러나 저가 늙을 때에 발에 병이 있었더라. 아사가 그 열조와 함께 자매 그 열조와 함께 그 조상 다윗의 성에
장사되고 그 아들 여호사밧이 대신하여 왕이 되니라”
아사 왕이 늙었을 때에 발에 병이 났습니다. 그런데 그때도 아사
왕은 여호와께 묻지 않고 의원에서 물었습니다.
역대하 16:11-14 “아사의 시종 행적은 유다와 이스라엘 열왕기에
기록되니라. 아사가 왕이 된지 삼십 구년에 그 발이 병들어 심히 중하나 병이 있을 때에 저가 여호와께 구하지 아니하고 의원들에게
구하였더라. 아사가 위에 있은지 사십일 년에 죽어 그 열조와 함께 자매. 다윗성에 자기를 위하여 파 두었던 묘실에 무리가 장사하되
그 시체를 법대로 만든 각양 향재료를 가득히 채운 상에 두고 또 위하여 많이 분향하였더라”
아사가
여호와 하나님 앞에서 다윗과 같이 온전하였다고 하지만 다만 산당을 없애지 못하였다고 합니다. 하나님의 선지자 오뎃의 말을 듣고
용기를 내어 개혁을 하였지만 산당을 제거하지 못한 것은 아사 왕 안에 산당이 들어 있었다고 봐야 합니다. 그 산당이란 결국 자기를
위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호와 하나님의 약속을 신뢰하지 못하고 자기 머리를 의지한 것입니다. 그래서 바아사의 공격 때 여호와를
의지하지 않고 아람 왕의 힘을 빌려 물리쳤습니다. 자신의 발에 병이 들었을 때도 여호와께 구하지 않고 의원에게 구한 것입니다. 이
말씀을 가지고 병원에도 가지 말고 하나님께 기도하라는 사람도 있습니다만 그런 이야기가 아닙니다. 아사 왕에게 들어 있는 산당을
고발하고 있는 것입니다.
에스겔
16:13-16 “이와 같이 네가 금, 은으로 장식하고 가는 베와 명주와 수 놓은 것을 입으며 또 고운 밀가루와 꿀과
기름을 먹음으로 극히 곱고 형통하여 왕후의 지위에 나아갔느니라. 네 화려함을 인하여 네 명성이 이방인 중에 퍼졌음은 내가 네게
입힌 영화로 네 화려함이 온전함이니라. 나 주 여호와의 말이니라. 그러나 네가 네 화려함을 믿고 네 명성을 인하여 행음하되 무릇
지나가는 자면 더불어 음란을 많이 행하므로 네 몸이 그들의 것이 되도다. 네가 네 의복을 취하여 색스러운 산당을 너를 위하여
만들고 거기서 행음하였나니 이런 일은 전무후무하니라”
에스겔 16장은 태어나면서부터 거리낌을 받아 탯줄도 자르지 못한
상태에서 버려진 계집아이를 예루살렘으로 봅니다. 이런 계집아이를 하나님께서 불쌍히 여기셔서 구원하시고 왕후로 만들어 놓았더니
하는 짓이라고는 우상숭배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모든 것으로 자기를 위하여 각색으로 산당을 꾸미고 거기에서 행음하였다고 합니다.
이러한 일들이 이스라엘만의 문제가 아니라 바로 오늘날 우리들의 문제인 것입니다. 아사 왕이 산당을 없애지 못한 것처럼 우리 안에도
산당들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이 산당들은 얼마나 교묘한 방법으로 자리 잡고 있는지 도무지 무너뜨려지지가 않습니다. 이 산당은
끊임없는 자기 합리화로 나갑니다.
미가서
1:1-5 “유다 열왕 요담과 아하스와 히스기야 시대에 모레셋 사람 미가에게 임한 여호와의 말씀 곧 사마리아와
예루살렘에 관한 묵시라. 백성들아 너희는 다 들을지어다. 땅과 거기 있는 모든 것들아 자세히 들을지어다. 주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대하여 증거하시되 곧 주께서 성전에서 그리하실 것이니라. 여호와께서 그 처소에서 나오시고 강림하사 땅의 높은 곳을 밟으실 것이라.
그 아래서 산들이 녹고 골짜기들이 갈라지기를 불 앞의 밀 같고 비탈로 쏟아지는 물 같을 것이니. 이는 다 야곱의 허물을
인함이요, 이스라엘 족속의 죄를 인함이라. 야곱의 허물이 무엇이뇨. 사마리아가 아니뇨. 유다의 산당이 무엇이뇨. 예루살렘이
아니뇨”
야곱의 허물이 사마리아이며, 유다의 산당이 예루살렘이라고 합니다. 즉 북 이스라엘의 수도 사마리아나 남
유다의 수도 예루살렘이 다 산당이 되어버렸습니다. 그러므로 여호와 하나님께서 밝아버리신다고 합니다. 그러면 불 앞의 밀초 같이
녹아져 내리며 비탈로 쏟아지는 물 같이 흘러내리고 말 것입니다. 이 말씀대로 북 이스라엘도 남 유다도 다 멸망하였습니다. 멸망의
이유는 그들 안에 있는 산당 때문입니다.
오늘날
이 땅에 자기를 위한 욕망의 산당들이 가득합니다. 우리 자신 안에도 교회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온갖 세상의 보암직한 것들로
가득합니다. 그런데 이러한 산당에서 우리가 어떻게 스스로 벗어날 수가 있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산당들을 파괴하여 버리심을 이스라엘
역사를 통하여 보여주셨습니다. 오늘날도 여호와 하나님은 자기 백성들 안에 있는 산당들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부수어 내십니다.
성도는 자기 안의 산당들이 무너지는 경험을 역사 속에서 하게 됩니다. 그리하여 빈손 들고 십자가를 붙들게 됩니다. 이것이
은혜입니다.
성령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를 주셔서 식언치 아니하시는 하나님을 믿는 믿음을 허락하여 주시기를 원합니다. 우리 하나님은 식언치
아니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민수기 23:19). 이 하나님에서 우리 속에 있는 산당을 제거하게 하여 주시기를 원합니다. 이를 위하여
우리로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은혜를 굳게 붙잡게 하여 주시기를 원합니다. 그리하여 우리 속에 있는 자기를 위하는 모든
산당이 무너지게 하시고, 오직 여호와 하나님만 의지하며, 여호와 하나님만 섬기는 자들이 되게 하여 주시기를 원합니다.
고대 이스라엘에서 산당은 왜 사라지지 않았을까?
열왕기하 12:3-4 다만 산당들을 제거하지 아니하였으므로 백성이 여전히 산당에서 제사하며 분향하였더라.
위의
구절에 나와 있는 것처럼 왜 산당들만 내버려 두었을까? 이에 대해 다양한 의견들이 있다. 어떤 이들은, 정치적인 이유 때문에
제거하지 못했을 것이라 말한다. 또 다른 이들은 아직 ‘중앙성소화’가 이뤄지지 않은 상황에서 산당들이 제의적 장소로 사용되었을
것이라 추정한다. 또 솔로몬 성전이 떨어져 있는 상황에서 지방에 있는 레위의 도성들에서 산당들이 가동되었을 것으로도 본다. 종교적
중심지는 늘 권력과 정치와 물질이 모이는 곳이기 때문에 지방의 세력들이 이 권력을 쉽게 놓으려고 하지 않았을 것이라고도 말한다.
이와 같은 지방의 세력들의 정치적인 이유나 사회적인 여러 이유들로 인해서 산당들이 다 제거되지 못한 이유들이 될 것이다,
나는
이외에 또 다른 견해를 제시한다. 이스라엘에서 고고학을 전공하신 임미영 교수의 강의를 통해
산당(히: במה bamah)에 대해 자세히 배울 기회가 있었다.
바마에 대한 정의에 대한 견해에 일치된 의견이 없기 때문에
바마를 쉽게 정의내리기는 쉽지 어렵지만, 바마는 단순히 높은 장소만이 아니다. 물론 일반적으로는 바마가 다른 곳보다 높은 곳에
위치해서 제사를 지낼 수 있는 곳인데 바마는 산에도 있고 평지에도 있고 심지어 집에도 있을 수 있다. 길거리나 성문 앞 광장에도
있었고, 솔로몬이 갔던 바마는 산중턱에 있는 넓은 광장에도 있었다. 심지어 때로는 신상이 있기도 하고 신상이 없어도 산당이었다.
산당이
제거되기 힘든 이유는 집안에도 산당이 있었기 때문이다.
산당은 일종의 가정 재단과도 같은 것이었다. 산당은 큰 장소도 산당이지만
중국이나 일본에서 자기 조상들의 위패를 모셔 놓는 것처럼, 우리나라의 신주단지처럼 모셔놓듯이. 다른 장소보다 조금 더 높게
세우면 그 모든 것이 다 산당이었다.
이스라엘 갈릴리 호수 가까운 요단강 근처의 벳세다 유적지에서 발견된 신상은 성문
앞에서 발견되었다. 이것은 성문에 왕래하는 사람들이 상거래가 잘되도록 기도하는 곳으로 사용된 것으로 보여진다.
위의 그림은 벳세다
성문에 있는 바마이다. 이 돌(Matzevah)의 하나에는 바알하닷이 새겨져있고 다른 하나에는 아무 것도 그려져 있지 않다.
우상이 그려져 있지 않는 것도 우상 신상이다. 보통 이 둘이 같이 있을 때 그림이 그려져 있지 않은 돌은 여신상으로 간주한다.
리차드 S. 히스가 펴낸 ‘이스라엘의 종교’(원제, Israelite Religions: An Archaeological
and Biblical Survey, CLC, 2013년)에 이런 내용이 담겨 있다.
주전 750년 하솔의 가정집에서 종교물품이
적게 발견되다 후에 제의 물품의 수가 증가하였다. 가정집에서 발견된 제의 물품의 수가 증가하는 것은 텔 베잇 미르심((Tell
Beit Mirsim/ Debir))에서도 발견된다. 그것도 남왕국 말년에 45퍼센트가 가정주거에서 제의 물품을 포함하고 있다. 이
관찰들은 가정 주거에서 발견된 분향 수발과 석회석 제단에 관한 연구 결과와 일치한다. 북왕국과 남왕국이 멸망할 즈음 가정 제의가
늘어난 것을 보여준다. 이것은 가정에서 다양한 신들에 대한 예배가 드리기 시작했음을 시사한다. 비주류 가정의 성소에서도 많은
수의 등잔과 음식준비, 섭취, 음용을 위한 그릇을 발견했다. 데버는 (2001)산당이 공식 종교에서 소외당한 여성들이 가정종교를
시작했다고 말한다.(pp. 382-384) 공식적인 산당에서 가정 산당까지 깊이 뿌리내리는 모습이라고 리차드 S. 히스는 그의
책에서 말하고 있다.
고대 남왕국 유대와 북왕국 이스라엘의 산당은 어떤 면에서 로마시대의 라레스 숭배와 관련된
라라리움(Lararium)과 비교해볼만 하다.
라레스는 로마시대 때 유명한 주신이 아닌 하급신이지만 일상생활에서는 더 자주
등장한다. 라레스는 일종의 수호신이다. 보통 죽은 조상 중 일부가 살아생전 훌륭한 일을 한 것이 인정되어 정령으로 추앙받은
존재이다. 이 정령들은 보통 후손들이 숭배했는데 집안의 자손들이 가정 안에 설치해놓은 작은 제단인 라라리움(Lararium)에서
매일 제물도 올리고 기도를 하며 숭배하였다. 이 신은 기본적으로는 가족 수호신이지만 장소를 수호하는 라레스도 있고, 심지어 로마
국가를 수호하는 라레스 아우구스티도 있었다. 이 라라리움 같은 것이 산당과도 비교될만하다.
산당이 제거되지 못한
이유는 정치적인 이유도 있었을 것이다. 산에 있거나 큰 장소에 있는 것은 없애기 어렵지 않았을 것이다. 그렇지만 민간신앙으로 뿌리
깊게 파고들어가 각 가정에까지 파고 들어갔기 때문에, 집안에 있는 것을 다 파괴하여 제거하기는 어려웠던 것이다. 텔 아라드의 고대 신전 유적지. 그 안쪽이 성소 지성소가 자리하고 있다.
내가
고고학 수업을 배울 때 흥미로웠던 것 가운데 하나는 아랏(오늘날의 아라드)에 자리한 텔 아라드에서 발견된 제단은 2번에 걸쳐서
제단(바마)이 무너진 흔적이 있었다는 것이다. 이스라엘 최남단에 위치한 텔 아라드의 요새 자체는 586년에 파괴되어 무너졌다.
그런데 이곳에 자리한 신전은 그때 무너진 것이 아니었다. 그 이전에 무너져서 사용되지 않은 것으로 파괴된 시기는 탤 아라드에 있던
성이 무너진 시기와 달랐다.
이곳의 신전이 무너진 시기는 주전 700년경(히스기야 시대)과 주전 650년경(요시야
시대)에 2차례 파괴되었고, 그 이후로는 더 이상 사용되지 않았다. 그 시기가 요시야 시대와 히스기야 시대와 일치한다. 성경의
시대와 아랏의 바마가 무너진 시기가 일치해서 이 아랏을 배울 때 얼마나 가슴이 뛰었는지 모른다. 실제 이스라엘 박물관에서 아랏의
제단을 보았을 때 큰 감동이 있었다.
위의 사진은 텔 아라드(아랏)의 신전 구역이다. 그 안쪽이 성소이다. 아랏의
성소 안에 있는 곳을 보면 두개의 돌이 있다. 이 2개의 돌이 원래는 무너뜨려서 쓰려져 있었는데 그것을 세워보니 신상으로 쓰여
졌던 돌이었다. 돌(Matzevah)은 그림이 새겨져 있든 없든 그 자체로 이미 우상이다. 2번이나 무너졌던 흔적이 보인다.
이처럼
산당이 그대로 남아있던 이유데 대해서는 다양한 견해들이 있다. 이것을 보면 큰 장소나 대중적인 장소는 산당을 제거할 수 있었지만
뿌리 깊게 퍼진 민간 신앙 때문에 각 가정에 모신 산당은 파괴하지 못한 것으로 보는 견해가 가장 타당하게 다가온다.
아히야(Ahiah) : 여호와는 나의 형제이다 - 아히둡의 아들. 그는 사울의 통치 때 대제사장이었다(삼상14:3). 아히야는 에봇을 입고 있었는데 그는 이가봇의 형제인 아히둡의 아들이요, 비느하스의 손자요, 실로에 있던 {주}의 제사장 엘리의 증손이더라.
사울이 죽인 아히멜렉 즉 그의 뒤를 이은 대제사장의 형제였을 것이다(삼상 22:9). 그때에 사울의 신하들을 다스리도록 세워진 에돔 족속 도엑이 응답하여 이르되, 이새의 아들이 놉에 와서 아히둡의 아들 아히멜렉에게 이른 것을 내가 보았는데
◐ 아히야(Ahijah) 솔로몬과 여로보암 시대의 대언자, 역사 기록자(왕상 11:29; 대하 9:29). 왕상 11:29, 여로보암이 예루살렘에서 나가던 그때에 실로 사람 대언자 아히야가 길에서 그를 만났는데 그는 새 의복을 입었고 그들 둘만 들에 있었더라
그는 성전을 지을 때 하나님의 이름으로 솔로몬에게 말을 전하고(왕상6:11) 또 그가 죄를 지었을 때 그에게 말을 전한 것으로 생각된다(왕상 11:11). (왕상 6:11) {주}의 말씀이 솔로몬에게 임하니라. 이르시되, (왕상 11:11) {주}께서 솔로몬에게 이르시되, 네가 이러한 일을 행하였고 또 내가 네게 명령한 내 언약과 내 법규를 네가 지키지 아니하였은즉 내가 반드시 왕국을 네게서 빼앗아 찢어서 네 신하에게 주리라. 그는 여로보암에게 이스라엘이 유다에서 떨어져나갈 것과 그의 집이 세워질 것과 또 그가 몰락할 것에 대해 예언을 했다(왕상14:1-14).
이스라엘이 남 유다와 북 이스라엘로 분단되어 분열왕국 시대로 접어들 무렵 무명에 가까운 한 선지자가 역사의 무대에 등장했다.
솔로몬의 정략결혼은 후궁들과 첩들이 가져온 온갖 이방신들로 왕궁뿐만 아니라 이스라엘 전역을 이교신앙(異敎信仰)으로 물들게 했다.
온갖 건축공사에 드는 비용을 마련하기 위해 솔로몬이 부과한 지나친 과세와 악정(惡政)으로 인하여 백성들의 원성은 고조되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혼탁한 시기에 종교혼합주의를 배척하고 순수한 야훼신앙을 고수한 선지자가 있었으니 그의 이름은 아히야였다.
아히야는 솔로몬의 죄악에 대한 임박한 심판을 예언하였는데 그는 실로의 제사장 가문 출신의 선지자였다. 실로는 이스라엘이
가나안에 정착하던 초기 시대부터 이스라엘 역사와 종교의 센터였고 정치와 군사의 중심지였다. 오래전부터 실로는 법궤가 있던 중앙
성소의 역할을 담당해 왔기에 야훼종교의 중심지였던 셈이다. 철저한 야훼신앙을 고수한 아히야는 솔로몬의 반(反) 야훼적 신앙과
통치로 인해 솔로몬 왕국의 뿌리에 놓인 하나님의 심판의 도끼를 보았다.
솔로몬이 벌인 공사의 감독관이었던 여로보암을 만난 아히야는 자신이 입고 있던 새 옷을 벗어 열 두 조각으로 찢으며
여로보암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너는 열 조각을 가지라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이 내가 이 나라를 솔로몬의 손에서 찢어
빼앗아 열 지파를 네게 주고 오직 내 종 다윗을 위하고 이스라엘 모든 지파 중에서 택한 성읍 예루살렘을 위하여 한 지파만은
솔로몬이 다스리도록 남겨 주겠다."
아히야는 여로보암이 장차 분열 이스라엘 왕국의 초대 왕이 될 것을 예언했다.
여전히 막강한 권력을 행사하고 있던 솔로몬 통치시절에 왕국의 심판과 새로운 왕의 탄생을 예언한 아히야는 대단한 배포를 지닌
선지자라 아니할 수 없다.
"사람의 행위를 따라 갚으사 각각 그의 행위대로 받게 하시는"
하나님의 엄중한 심판의 메시지는 그대로
이루어졌다. 이후 솔로몬까지 3대째 내려온 통일 왕국은 아히야의 예언대로 남 유다와 북 이스라엘로 분열되었으니 야훼를 떠난
지도자의 실정(失政)이 낳은 참담한 결과였다.
솔로몬의 실정으로 왕에 등극한 여로보암은 종교적 정통성을 획득하기 위하여 남 왕국 유다의 예루살렘 성전에 대응할 새 예배
처소를 만들었다.
그 예배 처소에 여로보암은 금송아지를 만들어 세웠다. 여로보암은 북 이스라엘 백성들이 예배를 드리러 예루살렘
성전에 가는 것을 막으려는 정치적 목적 때문에 야훼신앙에 정면으로 배치되는 정책을 시행했다.
우상을 만들지 말고 목상이나 주상을 세우지 말라는 야훼의 명령을 무시한 채 금송아지 상을 만들었고 자기 임의대로 레위인
아닌 자로 제사장까지 삼았으니 솔로몬 실정의 재판(再版)이 아니던가?
오히려 솔로몬보다 더 악행을 자행했으니 아히야는 여로보암과 북
이스라엘 왕국의 역사에 심판을 선언하였다.
"여호와께서 여로보암의 죄로 말미암아 이스라엘을 버리시리니 이는 그도 범죄하고
이스라엘로 범죄하게 하였음이니라"
아히야 선지자는 장차 200년 후에 일어날 이스라엘의 파멸을 예고하고 있으니 야훼 신앙의
'중심/과녁'을 벗어난 죄('죄'는 헬라어로는 '하마르티아'로 그 뜻은 '과녁을 벗어나다'이다.)의 결과는 이스라엘 역사의 탈선과
파멸이었다.
슈펭글러와 토인비는 "역사는 돌고 돈다"고 했다. 죄로 물든 역사의 악순환 속에서 궁극적 희망은 밑둥치 잘리고서 그루터기만 남은 인간 역사에 여전히 새 싹을 틔우시는 하나님의 변함없는 긍휼이 아니던가?
이때는 틀림없이 솔로몬이 경건한 신앙과
번영의 절정기에 있을 때였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스바 여왕을 남방여인이라고 하셨다(마태복음 12:42)
심판 때에 남방 여왕이 일어나 이 세대 사람을 정죄하리니 이는 그가 솔로몬의 지혜로운 말을 들으려고 땅 끝에서 왔음이거니와 솔로몬보다 더 큰 이가 여기 있느니라.
스바가 가나안 남쪽에
위치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에디오피아에서는 그 여인의 후손이 간다게(사도행전 8:27)라고 주장하고 있으나 많은 학자들은 복지국
아라비아 남부(현재 인도)에서 왔다고 합니다. 그러나 역사학자 요세프스는 스바를 이디오피아라고 합니다.
그녀는 물론 정치적 목적이나 경제적인
협력을 얻기 위한 목적도 있었겠지만 무엇보다도 솔로몬 왕에 대한 소문을 듣고 호기심이 발동하여 소문의 진실성을 알아 보고저 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어려운 문제를 시험하고자” 했다는 표현 속에서 우리는 방문 목적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습니다. 또 정치에
대한 금언(金言)을 듣기 위해 왔었습니다. 예수님도 그녀가 지혜로운 말을 듣기 위해 땅 끝에서 왔었다고 했습니다(마12:42,
눅 11:31).
우리가 여기서 주목해야 할 점은 “여호와의 이름으로 말미암은 솔로몬의 지혜”라는 표현입니다. 솔로몬의
지혜의 출처가 하나님으로 부터라는 소문을 듣고 하나님 신앙에 상당히 마음이 끌리고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어떠 했습니까? 예수님께서 그 시대의 유대인들을 경고하면서 그 여인의 방문을 인용했습니다. 스바 여왕은 솔로몬의 지혜를 들으려고 그
먼 곳에서 찾아왔는데 너희는 솔로몬보다 큰 이를 눈앞에 두고도 거절하고 있으니 너희 유대인들은 얼마나 몽매한가? 그에 대한
심판이 지엄할 것을 경고하셨습니다.
그녀는 신분에 어울리게 많은 수행원을
대동하였고 일행의 체재비를 부담하고도 남을 만큼 많은 황금과 보석과 향품을 가지고 왔습니다. 그것은 자기가 얻고저 하는 것에
가치를 알고 있었으니 구걸하는 자로서 온 것이 아니라 지혜라면 어떤 값이라도 치르고 사려 하였던 것입니다. 우리도 영생에 이르는
진리를 너무 값싸게 생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녀는 그가 묻는 말에 대답하지 못한 것이 없는 것(3절)과 건축한 궁과 솔로몬 왕
앞에서 시립(侍立: 윗 사람을 모시고 서 있는 것)하는 신하들과 여호와의 전에 올라가는 층계를 보고 솔로몬의 경건한 신앙에 정신이
어지럽고 황홀하여 스바 여왕은 당신의 행위와 지혜에 대하여 들은 소문이 진실하다고 감탄했습니다.(6-7절) 또 “솔로몬 앞에
서서 당신의 지혜를 듣는 당신의 신하들은 복되다”고 (8절) 거듭 감탄하며 여호와를 송축까지 했습니다.(9절) 그것은 장차 메시야
시대에 이방인들이 주님께로 돌아올 것을 예표하는 것입니다.(계21:24절)
그녀는 헤어지면서 솔로몬에게 금과 향품을 귀한 선물을 바쳤습니다.
동방의 박사들이 그리스도께 선물로 가져
온 황금과 유향은 바로 이 스바 여왕의 선물에서 상징됩니다(마 2:11). 이와 같이 그녀는 자기가 깨우침을 얻은 지혜에 대한
값을 지불하였으며 그것을 비싸게 샀다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 가르침 받은 자들은 마음을 하나님께 바쳐야 합니다.
스바여왕이 선물 한 것은 그녀에게는 비싼 것이었겠지만 실상 솔로몬에게는 이미 넉넉하게 있어 별 것이 아니었을지 모릅니다. 우리가
예수님께 드리는 것도 사실 그 분에게 아무 필요가 없음을 압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우리가 그렇게라도 감사하도록 하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솔로몬의 주요 수입원은 외국과의 무역
거래였습니다.(14-15절) 또 이스라엘에게는 남북을 연결하는 무역로가 있었기에 통행료와 조공물을 많이 받을 수
있었습니다.(15절) 나아가 이스라엘 12지역에서 매월 1회씩 세금을 징수했습니다. 당시의 그의 부와 명성이 얼마나 대단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24-25절) 그는 많은 것을 소유하고 있었지만 이 세상의 재물이 인간을 얼마나 행복하게 해 줄 수 있는지 시험해
보고 싶어서 계속 더 많이 가지려고 탐내었습니다. 딤전 6:9절은 “부하려 하는 자들은 시험과 올무에 떨어진다”고 경고했는데
이와 같은 일이 바로 솔로몬의 생애에 일어났습니다. 그렇게 명성과 행운의 위험이 다가오고 있었으니 10:7절에서 “지혜와 복”
순서가 10:23절에서는 “재산과 지혜”로 순서가 바뀜을 볼 수 있습니다. 솔로몬이 이렇게 물질적인 것에 더 치우치자 영적인 면은
점점 쇠퇴 해 갔던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의지하기 보다는 군대의 병력을 더욱 신뢰하기 때문입니다.
솔로몬은 하나님께서 그에게 주신 축복의
풍성함에 감사치 않고 자기의 욕심을 만족시켜 줄 훌륭한 사치품을 구하려 사람들을 멀리 보냈습니다. 애굽에서 말과 병거를 수입하여
자국의 병력을 보강했고 나머지는 두로와 암몬 등지로 수출했습니다. 사실 왕이 말과 병거를 모으는 일을 모세 율법에 금지된
일이었습니다.(신17:16절) 그러나 1년에 금 666달란트를 받은 일은(14절)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계13:8) 그는
성별된 그릇이면 어떤 것이라도 사용하시는 주님(딤후2:20-31절) 과는 달리 금 그릇만 사용하였고(21절) 진정 영광과 호화로운
속에서 살았습니다. 얼마나 호화로웠으면 예수님께서 하나님이 창조하신 백합꽃의 가치를 말씀하시며 솔로몬의 영화와 비교
하셨겠습니까? (마6:29절) 신명기서 17:16-20절에 보면 왕들에게 어떤 경고를 했습니까?
신명기 17:16-19
16. 그는 병마를 많이 두지 말 것이요 병마를 많이 얻으려고 그 백성을 애굽으로 돌아가게 하지 말 것이니 이는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이르시기를 너희가 이 후에는 그 길로 다시 돌아가지 말 것이라 하셨음이며 17. 그에게 아내를 많이 두어 그의 마음이 미혹되게 하지 말 것이며 자기를 위하여 은금을 많이 쌓지 말 것이니라
18. 그가 왕위에 오르거든 이 율법서의 등사본을 레위 사람 제사장 앞에서 책에 기록하여
19. 평생에 자기 옆에 두고 읽어 그의 하나님 여호와 경외하기를 배우며 이 율법의 모든 말과 이 규례를 지켜 행할 것이라
1. 병마를 많이 두지 말 것 2. 율법 책을 곁에 두고 읽으며 규례를 지켜 행할 것 3. 아내를 많이 두어 그의 마음이 미혹되게 하지 말 것 4. 행위에 교만하지 말 것
그런데 솔로몬은 말들과 병거, 돈
아내들을 늘려 갔습니다. 솔로몬은 영적인 면이 쇠퇴해지자 하나님께서 금하고 경고한 일만 골라서 했습니다. 받은 복을 감사하기커녕
헛된 야망만이 더 불타올랐으니 그렇게 스스로 파괴 되어가고 있었던 것입니다.
세바의 여왕은 누구?
세바는 남쪽에 있는 지명입니다. 성경에 등장하는 ‘세바’는 주로 상인들과 관련이 많습니다. 그러므로 ‘세바‘는 장사에 능한 나라였던 것 같습니다. 학자들에 따라 이 ’세바‘가 정확히 어디인지 의견이 분분합니다. 어떤 학자들은 지금의 예멘을 언급합니다. 다른 학자들은 이디오피아를 언급합니다. 또 어떤 학자들은 이집트의 여왕이라고 합니다. 여러 학설 중에서 이 여왕이 이디오피아와 이집트에 이르는 광대한 영토를 통치한 여왕이라는 학설이 지지를 얻습니다. 그러므로 이 세바의 여왕은 시시한 여왕이 아닙니다. 여왕은 솔로몬에게 백이십 달란트, 심히 많은 향료와 보석을 주었습니다. 시바 여왕이 준 향료는 역대 최고였으며, 그 이후에도 이런 항료를 준 사람은 없었습니다.
세바 여왕이 솔로몬을 찾아온 이유
세바 여왕은 그의 나라로 들어온 상인들로부터 솔로몬의 명성을 들었습니다. 세바 여왕은 이미 경제적으로 부러울 것이 없었습니다. 이런 그녀에게 들려오는 솔로몬의 지혜에 대한 명성은 늘 동경의 대상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녀는 심히 많은 수행원들과 향료와 심히 많은 금과 보석을 실은 낙타들과 함께 예루살렘 이르렀습니다. 그리고 어려운 문제들을 가지고 솔로몬을 시험해 보았습니다. 여왕이 그 어떤 문제를 내더라도 솔로몬은 지혜롭게 답을 했습니다. 우리는 단순히 세바 여왕이 솔로몬의 지혜를 시험해 보고자 이 먼 길을 왔으리라 생각하지 않습니다. 사람은 누구에게나 어려운 문제가 있습니다. 이런 어려운 문제가 있을 때, 그 문제를 해결해 줄 사람을 찾습니다. 인생의 문제가 고통스럽고 풀기 어려울수록, 그 어떤 희생도 마다하지 않습니다. 세바 여인에게 있었던 문제가 어떤 문제인지는 우리는 알 수가 없습니다. 시바 여왕의 왕궁이 이디오피아에 있었다면, 왕궁과 예루살렘의 거리는 족히 4000km가 됩니다. 서울과 부산의 거리가 약 400km 이니까 서울과 부산을 다섯 번 왕복하는 거리를 가서라도 솔로몬에게 물고 싶었던 질문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세바 여왕 감탄
(1) 솔로몬의 지혜에 감탄
세바 여왕은 솔로몬의 지혜에 감탄했습니다. 그녀는 솔로몬과 함께 있는 자들을 부러워하였습니다. 그녀는 솔로몬의 지혜를 듣기 위해 먼 길을 와야 했지만, 솔로몬과 같이 있는 사람들은 늘 가까이서 들을 수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2) 솔로몬의 왕국의 번영에 감탄
세바의 여왕도 심히 강대한 나라를 다스렸을 것이라고 추정합니다. 그런 여왕도 솔로몬이 건축한 집과 그의 상의 음식물과 그의 신하들의 앉는 것과 그의 일꾼들이 섬기는 것과 그들의 의복과 잔 나르는 자들을 보고 감탄했습니다. 이는 극찬입니다. 동종 업계에 그것도 나름 자신이 최고라고 자부하는 자의 입을 통해서 칭찬을 듣는 것은 극찬입니다. 솔로몬 왕국의 번영에 세바 여왕은 너무도 놀랍습니다. 5절에 “정신이 없어서”란 의미는 “압도당하였다” 말입니다. 세바 여왕이 압도당할 만큼 솔로몬 왕궁과 집은 훌륭했습니다.
(3) 성전 건축에 감탄
5절에 “{주}의 집에 올라갈 때 쓰는 오르막 통로를 보고는” 두 가지 의미로 해석이 됩니다. 여러 영어 성경들이 이 구절을 “화목 제물을 드리는 것”으로 해석하고 있습니다. 엄청난 양의 화물 제물이 하나님의 집에서 들여지는 것을 보고 압도당했다고 해석하고 있습니다. 또 다른 해석은 “주의 집으로 올라가는 계단”이라고 해석합니다. 영어 KJV은 후자로 해석하고 있습니다. 세바 여왕은 성전 계단으로 올라가면서 성전의 아름다움에 매료되었을 수 있습니다.
세바 여왕의 소감 및 감사 예물
“6.왕에게 이르되, 내가 내 땅에서 당신의 행적과 당신의 지혜에 관하여 들은 소문이 참되도다. 7.그러나 내가 와서 내 눈으로 그것을 볼 때까지 그 말들을 믿지 아니하였도다. 보라, 그들이 절반도 내게 말하지 아니하였으니 당신의 지혜와 번영이 내가 들은 명성을 능가하는도다. 8.당신의 사람들은 행복하도다. 당신의 이 신하들은 행복하도다. 그들이 항상 당신 앞에 서서 당신의 지혜를 듣는도다. 9.{주} 당신의 [하나님]을 찬송할지로다. 그분께서 당신을 기뻐하사 이스라엘 왕좌에 당신을 앉히시고 {주}께서 영원히 이스라엘을 사랑하셨으므로 당신을 왕으로 삼아 공의와 정의를 행하게 하셨도다, 하고 10.그녀가 금 백이십 달란트와 심히 많은 향료와 보석을 왕에게 주었는데 세바의 여왕이 솔로몬 왕에게 준 이 향료처럼 많은 향료가 다시는 오지 아니하였더라.”
자기를 위해 은금을 많이 쌓지 말지니라(신명기 17:17)
솔로몬은 ‘오빌’에서 많은 금과 백단목과 보석을 가져왔습니다. “백단목”은 매우 귀중한 건축 자재였습니다. 또한 이 나무로 악기를 만들었습니다. 지난 시간에 배운 것과 같이 솔로몬은 “에시온게벨”(열왕기상9:26)에 강력한 해군 함대를 육성하였습니다. 이 해군 함대를 통해 히람의 무역함을 보호해 주었습니다. 그 대가로 히람은 솔로몬에게 금과 각종 보석들과 귀한 건축 자재들을 자유롭게 실어 나를 수 있었습니다. 한 해 솔로몬에게 들어온 금의 무게는 육백육십육 달란트였는데, 이는 솔로몬이 상인들과 향료 상품을 무역하는 상인들과 아라비아의 왕들과 그 나라의 총독들에게 받은 것 외의 것이었습니다. 이런 무역의 융성은 솔로몬 왕국에 은이 하찮은 것으로 여겨질 정도의 부를 가져다주었습니다.
주체 못할 금과 솔로몬의 사치
솔로몬은 이런 금으로 무엇을 했습니까? 그는 금을 쳐서 큰 방패 이백 개와 작은 방패 삼백 개를 만들었습니다. 또 왕좌를 상아로 만들고 가장 좋은 것은 금으로 입혔습니다. 왕이 그릇은 금으로 만들었습니다. 무역을 통해 벌어들인 금과 귀한 자재들은 모두 다 왕의 사치를 위해 사용되었습니다. 다윗도 금을 모았습니다. 그러나 다윗이 모은 금은 그의 아들 솔로몬이 성전 건축을 위해 모든 것이었습니다. 영적인 일을 위해 일을 하는 것은 나쁜 것이 아닙니다. 솔로몬은 자신에게 주어진 지혜와 시간을 사용하여 자신을 위해 사용하고 있습니다. 자신의 사치와 능력을 과시하게 사용하고 있습니다. 이는 하나님 보시기에 죄입니다. 하나님은 분명하게 이스라엘의 왕은 금과 은을 쌓아두지 말도록 가르치셨습니다. 검소한 생활을 통해 백성들에게 본을 보이는 삶을 살도록 율법을 주셨습니다. 그러나 솔로몬은 이런 하나님의 뜻과 다른 삶을 살고 있음을 열왕기 저자는 지적하고 있습니다.
자기를 위해 말을 많이 늘리지 말며 말을 많이 늘리려고 백성을 이집트로 돌아가게 하지 말지니라(신명기 17:16)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왕에게 말들을 늘리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는 이스라엘 왕이 그 백성들에게 하나님만을 의지하도록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을 지키시는 이는 하나님이십니다. 이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믿음으로 믿고 살아가는 것이 이스라엘이 이 땅에서 증시해야 할 모습이었습니다. 그러나 솔로몬은 자신의 능력을 의지했습니다. 자신이 가진 것을 의지했습니다. 이는 하나님에 대한 불신입니다.
아마 솔로몬은 이렇게 변명할 수도 있습니다. 이집트로 말을 사로 보낸 것은 이웃 국가들과의 중계 무역을 위함이라고 변명할 수도 있습니다. 헷족속과 시리아에 되팔아서 높은 수익을 얻기 위해서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는 궁색한 변명입니다. 어떤 이유에서든지 하나님의 명한 것을 자의로 해석해서는 안 됩니다. 자신에게 유리한 쪽으로 해석해서 자신의 행위를 변명해서는 안 됩니다. 영적 타락은 하나님의 말씀을 자의적으로 해석하는데서 출발합니다.
오늘 우리는 이스라엘의 물질적 부흥과 영적 타락을 지적하는 열왕기상 저자의 의도를 배웠습니다. 동종업계에 근무하는 최고의 전문가로부터 칭찬을 받는 것은 극찬입니다. 스바 여왕도 시시한 여왕이 아니었지만, 솔로몬의 지혜와 그 번영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녀는 그녀가 할 수 있는 최고의 찬사를 했습니다. 이는 솔로몬 왕국이 얼마나 그 시대 번영함을 잘 보여주는 대목입니다. 또한 이런 물질적 번영의 시대에 자행된 솔로몬의 영적 타락을 우리는 또한 주의깊게 보아야 합니다.
구약의 이스라엘은 오늘날 신약 교회의 모형입니다. 구약의 이스라엘을 택하시고 율법을 주신 하나님의 목적은 이스라엘의 거룩함에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어떤 모습이며, 어떤 삶을 사는 것인지를 시청각적으로 보여주시기 위함입니다. 이런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 때, 이스라엘을 부강케 하실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이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믿고 살아갈 때, 하나님이 함께 계심을 나타내 보이는 것이 바로 이스라엘의 사명입니다. 그런데 솔로몬의 이런 우선순위가 뒤바뀌었습니다. 자신이 능력이 있으니까, 굳이 하나님을 의지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하나님을 신뢰하는 불편한 삶을 굳이 살 필요가 없었습니다. 이는 영적인 타락입니다.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자신을 의지하는 삶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오늘 저와 여러분을 구별하셔서 교회로 부르셨습니다. 오늘 우리가 이 땅에 나타내 보여야 할 것이 무엇입니까? 큰 교회 건물입니까? 아니면 성도의 수입니까? 아니면 하나님에 대한 광신적인 신앙의 모습입니까? 아닙니다. 하나님 백성으로서의 거룩한 모습을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나타내 보이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 백성의 삶을 보이는 것입니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이 실제로 어떻게 믿는 자에게 역사하는지를 증시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일제 강점기와 6.25 전쟁을 거치면서 한국 기독교는 믿지 않는 사람들로부터 많은 인정을 받았습니다. 비록 믿지는 않았지만, 민족의 독립을 위해서, 가난에 고통당하는 사람들을 위해서 헌신하는 목회자들을 통해 큰 감명을 주었습니다. 교회는 그 어느 때보다도 훌륭한 건물을 가지고 있습니다. 교회마다 헌금으로 풍족한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시대만큼 기독교가 비난 받는 시대도 없을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무엇을 성공으로 보고 달려왔을까요? 혹시 솔로몬과 같은 가치관을 가지고 달려온 것은 아닐까요? 모두가 한국 교회의 부흥을 말하지만, 실상은 영적인 타락이 함께 진행되고 있었음을 우리는 놓치고 있지는 않았을까요? 그리고 오늘 저와 여러분의 가치관도 솔로몬의 것과 같지는 않습니까? 오늘 신자는 이 땅에서 어떤 가치관을 가지고 살아야 합니까? 어떤 모습을 세상에 보여야 합니까?
♦ 3월 15일(화)
♦ 오늘 읽어야 할 말씀 : 열왕기상 10:1∼29 ♦ 묵상을 위한 주제 : 당신의 하나님(9절) ♦ 성구 :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를 송축할찌로다 여호와께서 당신을 기뻐하사 이스라엘 위에 올리셨고 여호와께서 영영히 이스라엘을 사랑하시므로 당신을 세워 왕을 삼아 공과 의를 행하게 하셨도다.
“당신의 하나님(Your God)”
‘스바’는 아라비아 남쪽에 위치한 ‘사베안’ 왕국으로 오늘날의 예멘입니다.
스바의 여왕은 솔로몬의 지혜에 대한 소문을 듣고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인지 확인하고자 솔로몬을 방문했습니다.
스바 여왕은 자신의 어려운 질문에도 솔로몬이 지혜롭게 답하자 놀라움을 금치 못했습니다.
스바 여왕은 솔로몬의 왕궁과 여호와의 성전의 규모에도 감탄합니다. 동시에 이스라엘의 정치, 경제, 종교 등 국정 전반에 걸친 체계적인 통치 체계에도 감탄하며 이 모든 지혜가 하나님에 의한 것임을 깨닫고 비록 이교도였지만 여호와를 찬양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여호와를 송축한 스바 여왕은 솔로몬에게 금 120달란트와 많은 향품과 보석 등을 바쳤고 솔로몬도 그가 원하는 대로 답례했습니다.
솔로몬은 매년 들어오는 금 666달란트로 큰 방패 200개와 작은 방패 300개를 만들어 레바논 나무 궁에 두어 관리하도록 합니다.
솔로몬은 상아로 만든 6층 보좌를 만들고 정금으로 입혔습니다. 이것은 자신의 영화를 만방에 알리고자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이스라엘의 12지파를 상징하는 열두 사자를 보좌에 이르는 층계 양끝에 세웠습니다. 이처럼 솔로몬 왕국은 금과 은이 너무나 풍부하여 그릇들은 모두 금으로 만들었고 은을 귀하게 여기지도 않았습니다.
솔로몬은 부귀영화를 견고히 하기 위해 병거(1,400)와 마병을(12,000) 준비하여 예루살렘에 두었습니다.
병거는 당시의 상황에서 가장 효과적이며 가공할 만한 무기였으므로 주변 국가들에게 공포의 대상이 되었을 것입니다.
솔로몬은 은을 돌같이 흔하게 하고 백향목을 평지의 뽕나무 같이 사용할 수 있었습니다.
솔로몬은 군비 확장을 위해 애급에서 말을 수입했습니다. 그리고 국가적인 이익을 위해 헷 족속과 아람 사람들에게 이 말들을 수출했습니다.
화려한 것도 초라한 것도 모두 영원할 수 없습니다.
믿음으로 약속받은 영원한 생명을 위하여 오늘도 말씀대로 믿고 말씀대로 순종하므로 영원한 것을 잃어버리지 않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부탁합니다.
♪ 찬양 / 달고 오묘한 그 말씀
예수 내 구주! 예수 내 생명! 예수 내 권세!
코람 데오(Coram Deo) / 하나님 앞에서 코람 호미니부스(Coram Hominibus) / 사람 앞에서 코람 문도(Coram Mundo) / 세상 앞에서
우리들의 삶의 특징을 세 가지 양식으로 살펴봅시다. 첫째는 코람 데오 둘째는 코람 호미니부스 셋째는 코람 문도
코람 데오(Coram은 "앞에" Deo는 "하나님") 따라서 "하나님 앞에서"라는 의미 영어로는 ‘in front of God, before the face of
God’ 라고 합니다.
다산 정약용 선생은 18년의 기나긴 유배생활과 극도로 어려운 환경속에서도 끝까지 자신을 지켜냈습니다. 선생이 자신을 지킬 수
있도록 도와준 것은 조선 명종때 문신이었던 임권 선생의 ‘독처무자기-해동소학’ 즉 ‘홀로 있는 곳에서 자신을 속이지 마라’는
인생철학이었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힘든 일중 하나가 ‘아무도 보지 않는 곳에서 나를 속이지 않는 것’이라고 합니다. 남들이 보는
곳에서는 남의 눈에 들기 위하여 온갖 노력을 다하다가 홀로 있을때는 여지없이 양심을 팔고 마음을 무너뜨리는 것이 요즘 세상이기
때문입니다. (박재희, 나를 돌아보는 모멘텀 ‘3분고전’중)
스위스 제네바의 종교개혁가였던 칼빈(Calvin)의 일생을 지배했던 중요한 삶의 좌우명가운데 하나가 ‘코람 데오(Coram
Deo)’라는 말입니다.
코람 데오 = 라틴어로 ‘Coram’ 즉 ‘앞에’라는 뜻 + ‘Deo’ 즉 ‘하나님’ ‘하나님 앞에서’라는 의미가 되었습니다. 영어로는 ‘in front of God, before the face of
God’라는 말입니다.
달리 말하면 ‘사람 앞에서(coram hominibus)” 세상 앞에서(coram mundo)’의 명예보다
오직 ‘하나님 앞에서(Coram Deo)’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을 구하며 분별하며 사는 삶을 의미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라는 이 말은 부패가 극에 달했던 16세기 중세 시대에 종교개혁가들이 그리스도인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권위아래서, 하나님 안에서,
하나님의 이름을 높이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사는 삶의 방식을 요약했던 말입니다.
아울러 이 말은 동시대
개신교(Protestant)를 탄생시킨 마틴 루터를 비롯한 종교개혁가들이 내세웠던 Sola Scriptura(오직 말씀으로만)
Sola Fide(오직 믿음으로만) Sola Gratia(오직 은혜로만) Solus Christus(오직 그리스도) Soli
Deo Gloria(오직 하나님께 영광)
산 속 깊은 곳, 아무도 없는 곳에 홀로 머물더라도 더욱 더 나 자신을 속이지 않는 다산 정약용의 ‘독처무자기’ 평생 가슴에
새겨 잊지 말고 실천해야 할 선현의 말씀입니다. 아울러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코람데오의 신앙생활’ 즉 내 앞에 계시는 하나님을
늘 의식하며 함께하시는 하나님을 온전히 믿고 신뢰하며 겨울에도 피어나는 동백꽃과 같이 끝까지 신앙의 절개를 지켜나가는 모습은
결국 하나님과 사람의 인정을 불러오며 나중까지 잘 사는 모습이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찾으실 때의 기준을 성경은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삼상16:7).”
하나님은 특별히 H.I.G.H.의 기준을 가지고 사람을 찾으십니다.
Holiness(거룩) : 죄에 대해 민감하며 회개하는 심령을 가지고 있는가?
Integrity(정직) : 작은 일에도 성실하며 정직함을 보이는가?
Gratitude(감사) : 부족함의 현실가운데에서도 감사하는가?
Humility(겸손): 섬김을 받는 자인가? 아니면 섬기는 자인가?
지혜란 무엇인가? - 성경에서 강조하는 지혜의 의미
성경에서 지혜에 해당하는 것을 "소금"이라고 하겠습니다. 왜냐하면 소금을 사용할 때 소금은 그 형체가 없어져야 합니다. 만일 소금이 그 형체를 유지하면 소금의 기능은 무용지물이 됩니다. 소금이 왜 지혜와 같을까?
첫째, 변화의 능력 둘째, 무언의 능력 셋째, 헌신의 능력
주원장의 황후
주나라 황제 주원장의 황후는 지혜로운 여인이었다. 주원장이 황제가 된 후, 어느 날 궁에서 왕후와 담소를 나누다가 갑자기 무릎을 탁치며 말했다. “나, 주원장이 황제가 될 줄이야. 나도 상상치 못했단 말야!” 그리고는 기쁜 나머지 뛰어 일어나 춤을 추면서 옛날 변변치 못했던 시절의 모습을 적나라하게 드러냈다. 한 마디로 황제의 체통을 떨어뜨리는 추태를 부린 것이다. 그 때 두 명의 관리가 그것을 지켜보고 있었다. 황제는 그들이 있다는 사실을 깜빡 잊고 있었던 것이다. 잠시 후 주원장이 밖으로 나가자 황후는 두 관리를 불렀다.
“황제가 곧 돌아오실 것이다. 너희들 중 하나는 벙어리 행세를 하고, 하나는 귀머거리 행세를 해라. 그렇지 않으면 너희 둘의 목숨이 붙어 있지 못할 것이다.“
주원장은 밖으로 나가다가 자기가 한 짓을 생각해 보니 대단히 부끄러웠다. 그런 추태가 밖으로 소문이 나면 큰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황제는 급히 궁으로 돌아와 관리를 불러들였다. 주원장이 곧 관리 중 하나는 벙어리이고 하나는 귀머거리라는 사실을 확인하고 안심이 되어 관리는 생명을 건지게 되었다.
지혜를 얻으려는 젊은이를 깨우친 왕의 이야기
어떤 나라에 젊은 재상이 나이 많은 왕에게 말하기를 자기는 아직도 젊은 몸인데 유혹에 들지 않는 좋은 무슨 교훈이 있으면 말씀해 주시면 고맙겠다고 부탁을 했다고 합니다.
왕이 가만히 잠깐 생각하더니 그 옆에 있는 신하를 불러서 얼른 안에 들어가서 금 잔에 기름을 가득 부은 것을 가져오라고
하였습니다, 그것을 젊은 재상에 주면서 "자, 이 금잔에 기름이 가득하지 아니하냐? 이 가득한 기름을 가지고 이 궁전에 나가서
아무 거리, 아무 모퉁이, 다 돌아오되 한 시간 이내로 다 돌아 오라. 돌아올 때 한 방울이라도 흘리면 안 된다. 한 방울이라도
그 기름이 흘러내리게 될 것이면 곧 자네 목을 베겠노라. 그런 줄 알고 한 방울도 흘리지 말고 곧 다녀 오라." 그러면서 그
뒤에는 군인 한 명에게 칼을 뽑아 가지고 뒤를 좇아가게 했습니다.
한 방울을 흘리면 목을 자른다고 하니까 이 젊은 재상이 금 잔에다 기름을 가득 담아 가지고서는 조심스럽게, 그렇지만 한 시간
안에 돌아오라고 하니까 빨리 서둘러 땀을 뻘 뻘 흘려 가면서 그 모퉁이를 돌아서 어느 거리를 돌아서 겨우 한 시간만에 다시 가지고
왔습니다.
한 방울도 흘리지 아니하고 땀을 뻘뻘 흘리면서 숨이 차서 가지고 돌아 왔단 말입니다.
"한 방울도 안 흘렸는가?" "네 안 흘렸습니다."
그
때에 왕이 묻기를 "그 아무 거리에서 아무 상점들을 보았나? 거리를 가다가 아무개를 보았나? 어디쯤 가면 누구가 있는데
보았나?" 물어 보았습니다. "그만 못 보았습니다." "아니 못 보았다니, 지나오면서 못 봐?" "이 기름 잔만 보려고 다른 것을
볼 사이가 있어야지요."
그때 노 왕이 웃으며 하시는 말이 "그러면 자네 유혹에 들지 않는 비결을 배웠나?"
시벌로마(施罰勞馬)
주마가편(走馬加鞭)과 의미 상통하는 고사성어로 이 역시 그 유래를 아는 자가 거의 없다. 열심히 일하는 부하직원을 못 잡아먹어 안달인 직장상사의 뒤통수에 대고 흔히 쏘는 말.
중국 당나라 시대, 한 나그네가 길을 가다가 이상한 장면을 목격하였다. 한 농부가 땀을 뻘뻘 흘리며 밭을 갈고 있는 말에게 연속 무자비한 채찍질을 가하는 광경이었다. 이를 지켜보던 나그네는 매를 맞는 말이 너무 안쓰러워 그 연유를 농부에게 물었다. “열심히 일하는 말에게 왜 채찍인가?” 농부는 심드렁하게 답했다. “자고로 말이란 가혹하게 다루어야 꾀부리지 않고 열심히 일하는 법이지요.”
남의 말을 놓고 가타부타 시시비비를 가릴 수 없어 발걸음을 재촉하던 나그네는 매 맞으며 일하는 말이 못내 불쌍하여 잠시 가던 길을 멈췄다. 그리고는 긴 탄식과 함께 한 마디를 내뱉는다. “아! 시벌로마(施罰勞馬).” 번역하면 “아, 열심히 일하는 말에게 (상 대신) 벌을 주는구나.”
모름지기 직장상사들은 시벌로마의 유래를 각골명심해야 부하직원들의 원성을 사지 않으리라. 씹어 제키는 “시~벌~로마.” 소리가 잦아지는 곳에 노사분규도 녹아내리지 않겠소?
중국 관광을 가서 가이드에게 배운 인사말 “조~따꺼, 쯔발로마?”는 “조 선생, 식사했소?”하는 소리다. 따라서 쯔발로마는 시벌로마와 어원이 상이함을 아울러 밝혀둔다.
우리는 말 안 듣는 말에게 채찍질을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하나님의 방법을 그렇지 않다. 달리는 말을 더 잘 달리도록 해 주라고 하신다.
“지혜 있는 자에게 교훈을 더하라 그가 더욱 지혜로와질 것이요 의로운 사람을 가르치라 그의 학식이 더하리라.”(잠언 9:9) 아무리 말해도 듣지 않고 깨닫지 못하면 하나님께서는 “내버려 두신다”고 하셨다.
믿음의 성격은 언제나 미래적이고 소망적이고 긍정적이다. 똑 같은 장소 똑 같은 시간에 두 사람의 사형수가 감옥 안에서 바깥을 내다보아도 두 사람의 생각이 완전히 다를 수 있다.
한 사람은 창문을 내가 보며 이제 죽으면 저 흙 속에 뭍이겠구나…. 하고 부정적인 생각을 하면서 두려워한다. 다른 한 사람은 이제 죽으면 이 감옥을 벗어나 참자유를 얻고 저 높은 푸른 하늘 저편의 천국으로 올라가겠지…. 긍적적이고 미래적인 소망으로 밝은 미소를 띠며 죽음 건너편의 천국을 기다린다. 부정적인 사람은 인생의 승리자가 될 수 없다.
영국 속담에 “태도가 사실보다 중요하다”는 말이 있다.
주어진 사실에 어떤 태도를 갖느냐가 중요하다. 사람이 어떤 태도를 가지느냐에 따라서 그 사람의 인생관이 달라진다. 나쁜 습관이나 나쁜 태도나 고착된 부정적인 생각은 참으로 고치지 힘들다.
위대한 음악가 모차르트에 관한 이런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모짜르트는 음악을 배우러 오는 사람들에게 항상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예전에 다른 데서 음악을 배운 적이 있습니까? 그렇다면 수업료를 두 배로 내십시오. 그러나 배운 적이 없다면 수업료를 반만 내십시오.” 그러자 사람들과 학부모들이 항의를 했다.
“왜 음악에 대해 모르는 사람에게 수업료를 반만 받고, 이미 잘 아는 사람에게 두 배나 받습니까?”
모차르트가 대답했다.
“음악을 아는 사람은 잘못된 것을 알고 있기에 그것을 고치려면 내가 두배나 애를 먹으니까 두배를 받아야 합니다. 그러나 음악을 모르는 사람은 내가 원하는 대로 가르칠 수 있기에 노력이 적게 듭니다.”
많은 사람들이 지난 한 해를 아픔과 슬픔과 고통 속에서 살았을 것이다.
그런 가운데서 우리가 취해야 할 태도는 무엇일까?
욥처럼 특별한 잘못없이 억울한 좌절과 고통을 당한 사람이 예수님 말고 이 세상에 누가 있을까? 사랑하는 자식들을 하루 아침에 잃고, 동방에서 가장 부자였던 모든 재물을 다 잃고, 동방에서 가장 존경받았던 명예는 땅바닥에 떨어졌고, 사랑하는 아내마저 욥을 버리고 떠나버렸고, 온 몸은 썩어 구더기가 득실거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았다. 그는 입술을 끝까지 지켰다. 욥은 원망과 불평대신 이렇게 고백했다. “내가 가는 길을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순금 같이 되어 나오리라”(욥23:10). 지금은 비록 처절한 고통 가운데 있지만 후에는 정금같이 되어 하나님 앞에 서리라는 소망을 버리지 않았다. 그런 욥에게 하나님께서는 욥을 갑절이나 더 축복해 주셨다.
전도서 7:12 지혜도 보호하는 것이 되고 돈도 보호하는 것이 되나 지식이 더욱 아름다움은 지혜는 지혜 얻은 자의 생명을 보존함이니라.
- 지혜는 생명을 보존하는 것
잠언 3:18 지혜는 그 얻은 자에게 생명 나무라 지혜를 가진 자는 복되도다.
잠언 13:20 지혜로운 자와 동행하면 지혜를 얻고 미련한 자와 사귀면 해를 받느니라.
전도서 7:19 지혜가 지혜자로 성읍 가운데 열 유사보다 능력이 있게 하느니라.
정보 홍수의 시대
대부분의 사람들이 사용하는 휴대전화는 온갖 정보를 얻을 수 있는 매우 편리한 도구라고 하겠습니다. 카톡, 페이스북, 트위터, 인터넷.....
미디어를 통해 어느 하나의 사건을 수 많은 주관적인 생각으로 바라보게 하고 그것을
사회적으로 객관화 시킨다. 이로 말미암아 때로 사실이 아닌 것이 사실로 둔갑이 되어 사람들의 마음을 동요 시켜 사회적으로 혼란을
야기 시키거나 심지어 여론에 휘말려 스스로 목숨을 끊는 일도 있어 댓글에 대한 심각성을 야기합니다.
정보의 홍수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올바른 정보를 인식하는
것은 대단히 중요합니다.
성경은
삶을 통해 무엇이 옳고 그른지를 분별하도록 하는 지혜가 "위에 계신 하나님"으로 부터 주어지는 것이라고 말한다.
"오직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 하나님의 미련한 것이 사람보다 지혜 있고
하나님의 약한 것이 사람보다 강하니라"(고린도전서 1:24-25)
이 말씀을 보면 하나님은 지혜의 근원이시다. 그렇다면 예수 그리스도가
인간의 죄를 사하기시 위해 십자가에 못박히시고 피흘려 돌아가신 것을 자신의 입으로 고백하고, 주님이 나의 구원자라고 믿어 주안에서
새 피조물이 되었다면 그 사람은 하나님의 지혜에 대한 사고력을 늘 지녀야 한다.
♦ 3월 14일(월)
♦ 오늘 읽어야 할 말씀 : 열왕기상 9:1∼28 ♦ 묵상을 위한 주제 : 속담거리(7절) ♦ 성구 : 내가 이스라엘을 나의 준 땅에서 끊어 버릴 것이요 내 이름을 위(爲)하여 내가 거룩하게 구별(區別)한 이 전(殿)이라도 내 앞에서 던져 버리리니 이스라엘은 모든 민족(民族) 가운데 속담(俗談)거리와 이야기 거리가 될 것이며.
“속담(俗談)거리(a byword)”
구약의 언약을 두 가지로 분류합니다.
첫째는 아브라함 언약입니다.
이 언약은 무조건적이며 인간의 공로가 필요 없습니다. 이 언약은 하나님께서 친히 이루어 가시는 구속사적 언약을 말하며 천상의 언약이라고 합니다.
둘째는 모세의 시내산 언약입니다.
이 언약은 땅과 관련 된 언약으로 이스라엘 백성과 관련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으로 바른 자태를 드러내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축복과 저주라는 상과 벌로 이스라엘을 다루시는 언약입니다.
이 언약은 조건적 언약이며 지상의 언약이라고 합니다.
열왕기의 말씀은 '역사서'가 아니라 '선지서'로 분류하므로 하나님의 율법에 순종하면 복을 받고 불순종하면 저주를 받는다는 신명기적 사관에 따라 기록되었습니다.
이와 같은 저자의 의도는 “그가 주의 눈앞에서 올바른 것을 행하였으나” 혹은 “자기 조상 다윗과 같지 아니하여 하나님의 눈앞에서 올바른 것을 행하지 아니하고” 라는 말씀을 통해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들이 율법을 준행하며 살아가도록 돕기 위해 이러한 축복과 심판을 말씀하셨습니다.
솔로몬은 7년 동안 성전을 먼저 건축한 후에 13년 동안 왕궁 건축을 마쳤습니다.
솔로몬은 자기가 이루기를 원하던 모든 것을 20년 동안에 마쳤습니다.
솔로몬은 성전 건축 뿐만 아니라 주위 여러 나라들과 교역이 활발하였고 외교 또한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여 국력이 나날이 신장했습니다.
더구나 성전봉헌식도 마쳤습니다. 그 후 하나님은 솔로몬에게 두 번째로 나타나셔서 주의해야할 것을 경고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솔로몬이 하나님에게 드렸던 기도와 간구를 들으셨다고 하면서 솔로몬의 기도대로 여호와의 눈길과 마음이 항상 성전을 향하여 있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영원히 성전에 두시며, 눈길과 마음을 항상 거기에 두시겠다고 하셨습니다. 다만 네 아버지 다윗처럼 말씀에 순종하며 살아갈 때에만 이루어 주실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관심은 성전보다도 말씀에 순종하는데 있습니다.
성전은 잘 지었지만 여호와를 따르지 않을 수 있었기에 경고하시려고 나타나셨던 것입니다.
여호와께서는 계명과 율례를 지키지 아니하고 다른 신들을 섬길 때에는 이스라엘을 그 땅에서 끊어 버리신다고 하셨습니다.
이렇게 될 때 이스라엘은 모든 민족 가운데 속담거리와 이야기 거리가 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성전 건물에 대한 자부심이 있는 솔로몬에게 이것은 큰 충격이요 무서운 경고가 아닐 수 없습니다.
솔로몬은 훗날 이 말씀을 제대로 실행하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온전히 순종하지 않고 이방 여인들에게 마음을 빼앗겨 우상숭배를 하였습니다.
결국 이스라엘은 남과 북으로 분열되었으며 성전은 파괴되었고 유대 백성들은 바벨론 포로가 되었습니다.
아무리 성전을 잘 지었어도 우상을 섬기면 망하게 됩니다.
역사적으로 기독교의 전성기를 맞아 교회를 아름답게 건축했던 유럽의 여러 나라들의 교회가 지금은 이슬람 사원으로 바뀌고 있습니다.
한국도 예외가 될 수 없습니다.
여호와 하나님 중심의 신앙을 지킬 때는 언약의 약속이 유지될 수 있지만 말씀에서 벗어난 신앙으로 타락할 때는 솔로몬 왕에게 나타나셨던 그 하나님의 저주와 유럽 교회들의 현상을 보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한국교회는 지난날 부흥과 성장의 축복을 자랑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믿고 순종하는 신앙으로 자리를 잡아야 하겠습니다.
♪ 찬양 / 큰 은혜로 묶어 주신
예수 내 구주! 예수 내 생명! 예수 내 권세!
오늘은 사순절 제8일입니다. 사람들의 평가는 어떤 결과물에 의해서 좌우되는 경향이 강합니다. 이러한 사회적 풍토 때문에 더 크고 더 화려하고 더 아름다운 것을 추구합니다. 심지어 세계에서 가장 큰 것이라고 자랑합니다. 과연 이러한 것이 "하나님의 뜻인가?" 아니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인가?" 한번쯤은 생각해 볼 이유가 있습니다.
예를 들면 솔로몬의 성전은 그 당시 가장 아름답고 화려한 것이었습니다. 이스라엘서 구하기 어려운 백향목이라는 나무를 사용했습니다. 유명한 석수를 동원하여 돌을 다듬었습니다. 겉모양은 누구든지 부러워할 수 있고 자랑할만 합니다. 그런데 성경이 말하려는 것은 그 외양 때문에 묻히고 말았습니다. 오늘은 그 묻힌 것을 들추어보려고 합니다.
성막(聖幕)과 성전(聖殿)의 차이가 무엇일까요?
첫째는 성막은 이동하기 쉽지만 성전은 이동할 수 없습니다. 둘째는 성막은 하나님이 직접 계시하신 설계도에 의해서 제작된 것이지만 성전은 사람의 욕망과 의도에 의해서 시작된 것입니다.
백향목 궁에 거주하던 다윗이 언약궤를 생각할 때 나는 이렇게 화려한 궁에 거하면서 언약궤를 천막속에 두어야 하는가 생각할 때 다소 미안한 마음이 일어났습니다. 선지자 나단도 처음에는 성전 건축에 대해서 동의하였으나 하나님의 계시를 받고 성전 건축을 멈추라고 했습니다. 차라리 다음에 태어날 자손을 통하여 그 일을 이루실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출애급 후 480년 솔로몬이 왕이 된 후 4년 만에 드디어 성전 건축을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얼마나 자랑스런 사역입니까? 그렇기 때문에 480년 만에 왕이 된 후에 4년 만에 이라고 그 숫자를 정확하게 열거한 것입니다. 사람은 무엇을 자랑하고자 할 때 숫자를 사용하는 경향이 강합니다.
성막은 하나님이 그의 백성들과 함께 거주한다는 상징입니다(출 25:8, 겔 37:27). 이와 같은 상징이 언제 완성됩니까? 말씀이 육신이 되어 이 세상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완성됩니다(요 1:14).
그렇다면 솔로몬의 성전은 하나님의 뜻이 아닙니다. 오늘날도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교회를 건축한다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 사람의 욕망을 하나님의 뜻으로 포장하여 자랑하려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오래 전 수정교회를 방문했을 때 그 규모와 웅장함에 놀랐던 적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런 교회가 지금은 가톨릭교회에 팔렸습니다. 긍정적인 사고를 자랑하며 그와 사고에 의해서 무엇이든지 할 수 있다는 것이 마치 신앙이라고 깨우쳤던 것이 무너져 버린 것을 깨닫게 합니다.
♦ 3월 10일(목)
♦ 오늘 읽어야 할 말씀 : 열왕기상 6:1∼38 ♦ 묵상을 위한 주제 : 전 건축(1절) ♦ 성구 : 이스라엘 자손(子孫)이 애급 땅에서 나온지 사백(四百) 팔십년(八十年)이요 솔로몬이 이스라엘 왕(王)이 된지 사년(四年) 시브월 곧 이월(二月)에 솔로몬이 여호와를 위하여 전(殿) 건축(建築)하기를 시작(始作)하였더라.
“전 건축(build the temple)”
열왕기상은 22장으로 구성되었습니다. 1장부터 11장까지는 ‘솔로몬’에 대한 말씀으로 5장부터 9장까지는 성전 건축과 낙성식에 관한 말씀입니다. 따라서 열왕기상에서 솔로몬에 관한 말씀은 거의 절반이 성전에 관한 말씀이라고 하겠습니다. 5장에서는 성전 건축을 위한 준비를 소개하며 6장에서는 성전 건축을 시작하는 것에 관한 말씀입니다.
솔로몬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급 나온 지 480년이 되는 때 왕위에 오르고 4년 만에 성전 건축을 시작합니다(B.C. 966년). 솔로몬이 건축한 성전의 규모는 길이가 육십 규빗(약 27m), 너비가 이십 규빗(약 9m), 그리고 높이가 삼십 규빗(약 13.5m)입니다. 또한 건평은 대략 2,700 평방피트라고 합니다.
성전을 건축하는 동안 성전 안에서 소리가 들리지 않았습니다. 모든 사람이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조심하여 성전을 건축하였는지를 알려주는 말씀입니다. 성전 돌은 이미 밖에서 다듬어 가지고 들어왔기에 성전 내부에서 돌을 깎거나 다시 다듬을 필요가 없었고 오직 끼워 넣기만 했습니다.
이러한 건축 방식에 대한 영적 의미를 존 길(John Gill)은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영과 은혜와 말씀으로 먼저 잘라내고 맞추어진 것 외에는 아무 것도 교회의 영적인 건물에 놓여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암시합니다. 혹은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한 사람들은 믿음이 바르고 그에 합당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교회에서 직분을 맡은 사람들은 소란이나 논쟁이나 귀에 거슬리는 소리와 소동 없이 조용하고 평화로운 방식으로 교회의 교화를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합니다.”
교회가 거룩하신 하나님의 성전임을 인식하는 거듭난 자들은 교회에서 어떻게 행해야 하는지도 본능적으로 알기에 교회는 소란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이와 달리 시끄럽게 소리를 내는 자들이 교회 안에 많다는 것은 성전과 교회의 본질을 알지 못하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성전을 건축하는데 7년 6개월의 시간이 소요되었습니다.
건축 하던 기간 중에 하나님께서는 솔로몬과 이스라엘 백성들이 후일에 빠지게 될 위험은 성전 자체가 목적이 되거나 우상이 되면 안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외적 건축물인 성전이 그들 중에 있다고 해서 그들의 삶이 하나님 앞에서 바른 것은 아닙니다. 성전이 그들의 믿음의 행위와 삶을 대신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훗날 이스라엘 백성은 성전을 자기들의 안전의 보장으로 생각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가는 것을 대신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성전을 건축한 것도 솔로몬의 삶을 보장해주는 것은 아닙니다.
교회는 거듭난 사람들이 함께 하나님을 섬기는 신자 공동체를 말합니다. 그러나 오늘날 성장을 추구하는 교회들의 상호 경쟁은 교회를 거듭나지 않은 사람들도 자원하기만 하면 가입할 수 있는 단체로 만들어버렸습니다. 그래서 한시도 바람 잘 날이 없었고 그 안에서 돌깨는 소리와 나무를 자르고 패는 소리가 그치지 않는 곳이 되었습니다.
교회는 안으로부터 소리가 들리지 않는 곳이라는 사실을 깊이 묵상해야 합니다.
본문이 주는 또 한 가지 교훈은, ‘하나님을 위해서’ 무엇을 하는 것보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사는 삶이 더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자신이 하나님을 위해서 무엇을 했다는 사실을 기념하고 그것에 붙잡혀 살아가고 있는 것은 아니었는지요?
중요한 것은 언제나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순종하며 살아가는 것 이외에 그 어느 것도 대치할 수 없습니다.
사랑하는 교우들이여! 나는 교회 공동체의 한 사람으로 정말 주님이 기뻐하는 믿음으로 바르게 성장하고 있는지 점검하며 올바르지 못한 부분을 다듬어 바르게 세워가는 일에 성공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부탁합니다.
♪ 찬양 / 시온 성과 같은 교회
예수 내 구주! 예수 내 생명! 예수 내 권세!
열왕기상(列王記上)
하나님이 선택한 백성들이 그토록 원하여 세웠던 왕들이었지만 하나님 보시기에 선한 왕은 거의 없었다. 그렇다면 오늘의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은 하나님 보시기에 과연 어떠할까? 우리들의 모습도 열왕기에 소개된 역대 왕들과 다를바가 없는 신앙이 아니겠는가!
목사·부흥사. 황해도 안악(安岳) 출생. 청년시절에는 방탕한 생활을 하였으나 1900년 미국인 선교사 W. L. 스왈렌의 감화를 받고
기독교에 입교 평양장로회 신학교를 졸업하고 목사가 되어 신천교회(信川敎會)에서 근무하였다.
그 후 전국을 순회하면서
신앙운동을 위해 전력하여 한국 최초의 부흥목사(復興牧師)가 되고 황해노회장(黃海老會長) 장로교 총회장(總會長)를 역임하였다.
신사참배 했느냐? 안했느냐?
장로교 총회는 1938년 제27회 총회시, 불법적으로라도 일단 신사참배는 우상숭배가 아니요, 국민의 의무라고 핑계대며 가결했다.
개별적으로 보면 주기철 목사는 전후 5차례나 구속되고, 전후 7년간 옥중 고초를 치르다가 끝내 옥중 순교했다.
김익두 목사는 어떠했는가? 그 당시 서울 승동교회를 8년째 시무하던 때이다. 종로경찰서에서는 김형사를 보내 김목사에게 신사참배를
하도록 강요하며, 협작하며, 때로는 애원까지 했으나 끝내 거절하자, 드디어 강제로 체포 연행하여 극심한 고문을 가했다.
몽둥이로
개패듯 두드려 때리고, 시멘트 바닥에 눕히고 구두발길로 차고 밟는 등 잔인한 방법을 계속하기를 1개월, 이제는 김목사가 빈사상태가
되어 아무런 반응이 없자 목사를 데려가라고 가족에게 연락이 왔다. 그러나 조건을 붙이기를 ‘승동교회에서 설교를 못한다. 목사직은
파면이다. 서울을 떠나라’는 조건부였다.
그러던 1941년 신의주 제일교회에 부흥회를 인도하러 갔는데 집회를 마치고 나오는 김목사를 일본인 경찰들이 강제로 신의주신사당으로
끌고 갔는데 교인도 몇 사람 함께 끌려갔다.
일본 형사들이 “고개를 숙이게 하고 최경례”라고 고함을 지르며 강제로 김목사의
머리를 눌렀으나, 김목사는 반사적으로 머리를 하늘로 뻗치며 속으로 하나님을 찾았다. 일본 형사들은 김목사와 한참동안 승강이를
했지만, 결국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경찰은 본서에 돌아와서 서장에게 “김목사가 신사에 참배를 했다”라고 거짓 보고를 했으므로 그들의 기록에는 그렇게 기록이 되었을는지
모르겠다. 그리고 경찰 서장은 친일파 목사들을 불러 놓고 “김익두 목사가 신사참배를 했다”라고 유언비어를 만들어 퍼뜨렸다.
김목사가 그렇게 쉽게 굽힐 것이면 어째서 종로경찰서에서 한 달 동안 모진 고역을 당하면서 투쟁했겠는가?
기독교도연맹 총회장 문제
김익두 목사는 8.15 해방 직후, 이제는 자유의 몸이 되었으니 목회를 해야 되겠다는 생각으로 그동안 적을 두고 있던 직전리교회를
담당했다. 또 얼마 안되어 재령 해창교회에서 청빙해 갔다. 그러자 신천서부교회에서 예전의 인연을 들고나와 자기네가 모시겠다고 나서
김 목사는 이 교회에 정착해서 목회에 전념하게 되었다.
조국이 해방되었으나 불행하게도 남북이 분리되었다. 그리고 더욱 불행하게도 북한 지역에는 무신론의 종주국인 소련이 진주하여 군정을
폈다. 그리고 김성주라는 청년을 만주에서 한국독립군을 통솔하던 김일성 장군으로 사칭하여 그를 중심으로 공산주의 정권을 수립했다.
그런데 공산정권이 북한을 통치하는데 제일 걸림돌이 기독교였다. 당시 북한에 기독교는 3, 4십만의 교인이 있었고, 교인들은 이미
민주주의 생활 훈련이 잘 되어 있고 또 단체적 행동이 수월했다.
더구나 공산주의는 무신론에 근거하고, 기독교는 절대 유신론이라
쉽게 공산 정체에 순응하지 않았다. 교회지도자들은 감언이설로 유혹하고, 무력으로 위협 공갈해도 불응하니, 김일성은 자기 친척 중에
목사 출신이요, 외조부 격이 되는 강양욱을 내세워 소위 ‘기독교도연맹’을 만들어 기독교의 이름으로 기독교를 박해하는데
이용하였다. 목사는 되었어도 목회를 하지 못하게 되는 일이 빈번히 이뤄졌다.
1946년 11월 3일 북한에서는 첫 대의원 선거에 고의적으로 주일을 투표일로 정하고 강행함으로, 기독교가 전면 반대 불참하여
실패하자, 북한 오도연합노회 간부격인 지도자 목사들을 여러 가지 구실을 잡아 모조리 체포 구금함으로, 실제로 교회를 지도체계를
공백상태로 만들었다. 이렇게 상황을 만들어놓고 기독교도연맹은 자기네가 교회의 최고 지도자라고 나서서 총회를 구성했다.
여기에 총회장으로 추대된 분이 곧 김익두 목사이다. 회원들이 총회로 모여서 투표하여 당선된 것도 아니고, 또 총회장이 되었으니
취임식을 한 것도 아니다. 한 번은 강양욱이 신천으로 김익두 목사를 찾아왔다. 강양욱과 김목사는 사제지간이라고 한다.(근거는
미상이다)
강양욱은 선천서부교회 교인들 앞에서 “김목사님은 우리 중앙 정부에서 가장 존경하는 어른이시다. 그래서 이번에 총회장으로
추대되었다”라고 자랑스럽게 광고했다.
교인들도 어리둥절하고 김목사는 “총회장이란 무슨 소리냐?” 라고 따져 물었더니, “이것은
다만 명예직이니 아무런 부담을 가지지 마시고 그저 가만히 앉아 계시기만 하면 됩니다. 그렇게 알고 계십시오”라고 대답했다.
김목사가 계속 추궁하자, “오늘은 중앙에 중요한 일이 있어 시간이 없으니 후일 다시 찾아와서 상세히 말씀드리겠습니다”고 뺑소니치듯
달아나고 다시 나타나지 않았다.
강양욱은 평양에 돌아가서 김익두 목사가 총회장 취임을 승낙했다고 널리 선전했다. 그렇다고 김목사가 어느 방송국에 가서 총회장이
아니라고 거부방송을 할 수 있었겠는가? 또는 신문지상을 통해서 해명 성명서를 낼 수 있었겠는가? 결국 꼼짝없이 당하고 말았다.
강양욱과 기독교도연맹 간부들은 권위있는 총회장 김익두의 이름을 팔아 산하 목사들과 교인들에게 기독교도연맹에 가맹을 강요했고,
가맹을 거부하면 목회를 못하도록 추방하거나 불법 검거에 나섰다. 그러기에 이런 실정을 모르는 사람들은 김목사를 오해하여 비난하고
심지어 욕까지 했다.
김익두 목사의 가짜 연설문제
6.25전쟁이 나던 전해 1949년 5월 1일은 북한에서 가장 성대하게 지키는 <노동절>이다. 강양욱은 김익두 목사를
찾아가서 이번 노동절에 김일성 수상께서 특별 초청을 하니 반드시 참석하시라는 간곡한 전달을 하고 돌아갔다. 김목사는 입장이
난처했다. 가서 마음에 없는 연설을 하기도 난처하고, 그렇다고 핑계대고 불참할 수도 없었다. 드디어 7일간의 금식기도 끝에 비장한
결의를 하고 당일 평양에 갔다.
김목사는 정중하게 성경을 펴더니 야고보서 5장 1~6절을 장중하게 봉독하고 “이 성경 말씀은 노동자들의 노임은 주지 않고 부자들이
떼여 먹은 그 노임이 소리 지른다는 뜻으로 하나님께서 부자들에 대한 경고의 말씀입니다‘라고 간단히 설명하고 ”북조선에 김일성씨를
정치하게 하신 것도 하나님이 하신 것이요, 남조선의 이승만씨를 정치하게 하신 것도 하나님이 하세 하신 것입니다”라며 내가
말하려는 것을 내 앞에 여러분이 다 하였으니 지루하게 할 것 없고, 만세나 부릅시다“라고 하며 느닷없이 ”김일성 장군 만세“가
아닌 ”노동절 만세“라고 고함쳤다.
그리고 만세를 마치고 돌아가면서 김일성에게 ”예수를 믿으시오“라고 전도했더니 김일성은 ”예
믿겠습니다“라고 약속하고 헤어졌다.
노동절 행사는 김목사의 권위있는 행사로 끝난 줄 알았는데 노동절 행사가 끝난 2일부터 평양 방송은 김익두 목사의 연설이 며칠동안
되풀이 되어 방송되었다.
그런데 그 내용이 전혀 달랐다. 만세부분이 “노동절 만세”가 아니라 “김일성 장군 만세”가 우렁차게
흘러나왔고, 뒤이어 인민공화국의 정치를 찬양하는 반면에 남조선의 이승만 도당을 비난하고 성토하는 내용으로 일관해 나왔으니
어찌하랴? 내용인즉 김목사의 음성을 채취하고, 그 음성을 닮은 서우를 시켜서 김목사의 연설인양 꾸민 것이었다. 김목사는 사실과
다르다고 방송을 할 수도 없고, 신문을 통하여 해명을 할 수 없었기 때문에, 억울해도 할 수 없이 일방적으로 당하고 말았다.
결국 북한의 모든 인민들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고난받으며 견디고 살던 수많은 기독교인들조차 아연실색했다. 그리고 남한의 모든
국민들은 김목사를 의심하기도 하고 비난도 했으며, 일부에서는 무엇인가 잘못되었다고 생각한 사람들도 많이 있었다.
순교에 대한 곡해와 해명
세월이 흘러 6.25전쟁이 일어난 지도 벌써 석달이 지났다. 일방적으로 불법 남침했던 괴뢰군들이 3일만에 서울을 함락하고 한 달
만에 남한 전역을 휩쓰는 것 같았으나, 국군이 정비를 갖추고 유엔군이 참전하여 반격을 개시하자 전세는 바뀌었다. 낙동강변에서
괴뢰군 주력부대가 전멸하자, 나머지는 북으로 후퇴하기에 바빴다. 아군이 9월 28일에 서울을 탈환하고, 38선을 돌파하여 북으로
진격해 갈 무렵이었다. 때를 맞추어 북한에 잠재해 있던 반공 청년들이 궐기하기에 이르렀다.
김익두 목사가 거주하는 신천지구는 북한에서도 반공세력이 가장 강력한 지역이었다. 국군이 38선을 넘어 북진해온다는 정보에 발
맞추어 궐기하기로 내정되어 있었는데, 국군이 들어온다는 과잉 정보로 인해 10월 13일에 너무 이르게 의거하게 되었다. 13일
하루 종일 의거한 아군과 패주하는 괴뢰 잔당들과의 전투가 종일 벌어졌다.
김목사는 반가운 이 소식을 듣고, 너무 감격하여 14일 새벽종을 오래쳐서 교인들이 모여들어 새벽예배를 마치고, 국군이 곧 입성할
것이니 환영회를 하자는 광고까지 마치고, 교인들은 일단 돌아가고, 김목사와 20여명이 교인들이 계속 남아서 기도를 하고 있었다. 그
때 패잔해가던 괴뢰군 일단이 교회당 담 밖에 숨어서 김목사의 광고 소리를 모두 듣고 교회로 습격해 들어왔다.
그리고 강단에서 기도하는 김목사에게 총격을 가하고 다른 교인들에게도 사격하여 현장에서 6명이 숨을 거두고 몇 사람은 중경상을 입고
생명을 유지했다.
김목사는 6.25전에도 월남하기를 강권했으나, “죽어도 양떼와 같이 죽어야지 목자만 살겠다고 월남하겠나?”
라며 언젠가는 순교하리하고 각오하고 있었던 것이다.
김목사의 시신은 교회 뜰에 가매장하였다가 국군과 유엔군이 평양을 탈환하고,
치안이 유지될 때인 11월 29일 정식 장례를 치뤘다.
북의
인민공화국 정부는 신천지역에서의 은밀한 반공우익 행적을 보인 김익두 목사를 제거한 것은 자신들의 활동무대인 프롤레타리아 계층을
기독교 측에 몽땅 넘겨주었다는 초조감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아무튼 좌익은 절박한 상황에서도 그 동안 자신들에게 물심양면으로
충성했던 김익두 목사를 과감히 처단했다.
그 후 오랜 세월이 흘러 김익두 목사에 대한 평가는 엇갈리고 있다.
현직에
있을 때 조기련 총회장으로 사역한 경력 때문에 사후부터 지금까지 남한에서는 좌경인물로 낙인 받아 왔으며 반면 북에서는 그곳대로
미제의 고용간첩으로 낙인찍힌 불운한 인물이 되었다.
마치 박헌영처럼 남과 북으로부터 동시에 버림받는 듯한 처지가 되어 보였다.
인생 말년의 김익두가 신천 지역에서 은밀히 행했던 친미 반공행각은 북측 입장에서 볼 때는 단죄할 수밖에 없는 변절자이며 배신자에
해당됐다.
그의 인생은 ‘역사의 악’과 ‘개인사의 불행’이 서로 뒤엉켜 있는 듯한 구조를 지니며 좌우의 이념 대립을 떠나 어떤
의미에서 볼 때 당시 사회와 교회를 구원한 걸출한 시대적 인물이었다고 본다.
역사의 정량론(定量論)으로 보아서 김익두 목사만이 그
시대에 좋은 것을 모두 다 갖출 수는 없기 때문이다.
최근까지 한국교회에서는 김 목사를 순교자로 규정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고 결국에는 순교자의 반열에 올려놓고 말았다. 그가 과연 순교자로서 적합한 자격을 지녔는가의 문제는 나의 관심 밖의
일이다. 그러나 그가 북조선기독교도 연맹의 총회장으로서 활동하던 시기에 연맹가입에 한사코 반대하다가 죽임을 당한 목회자와
신자들이 상당수가 있었음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김익두 목사는 당시 부총회장이던 김응순 목사와 함께 이북교회 목회자들을 일일이
찾아다니며 “교회를 살리는 길은 연맹에 가입하는 길뿐이 없다”며 의도적으로 목사들을 연맹에 가입시켰으며 거부하는 목사들에게는
협박도 주저하지 않았다.
평양신학교 교장이던 김인준 목사나 이성휘 목사, 산정현교회의 방계성 전도사, 이기선 목사 등은 끝내
가입을 거부하고 죽음에 이르기까지 했다.
이처럼 김 목사에게 실제로 피해를 입은 당사자들과 그의 후손들이 아직도
생존해 있는 가운데 굳이 한국교회가 순교자 반열에 올려놓는 것은 아직은 시기적으로 적절하지 않다고 보여진다.
김 목사를 죽음에
이르게 했던 과정도 ‘하나님의 이름’ 때문에 죽음이 가해진 것이 아니라 신천 반공무력 사태에 대한 북측과 좌익계열의 보복 살인
때문이었다.
그의 죽음이 반공 때문이라고 해석하는 사람들도 있으나 반공 그 자체로는 순교의 근거가 될 수는 없다. 이처럼 그의
사역 전반에 대한 과학적 자료와 김일성 정부에 협력했던 과거 행적에 대한 신빙성 있는 자료들이 더 많이 수집되어 철저한 고증과
절차를 거친 후, 객관적 평가를 통해 순교자 규정 문제를 논의했어야 했다.
북측의 주장대로 겉으로는 김일성 정부에게
협력자로 일하면서 동시에 은밀히 미군과 국군 그리고 남한 정부와 내통했을 뿐 아니라 신천지역 기독교 청년들을 한데 묶어
반공연대세력을 꾀했던 김익두 목사는 중국 길림에서 선교목회를 하던 손정도 목사와는 또 다른 유형의 사회주의 목회를 시도한 것은
자명한 사실이었다.
‘13일의 금요일’에 반공우익 청년들을 규합한 김익두
강양욱
목사와 함께 김일성 수상을 협력하던 김익두 목사는 언제나 마음 한켠에는 자신의 과오와 행적에 대한 뉘우침과 갈등이 자리 잡고
있었다.
해방되기 전에는 우리나라 최초의 부흥목사가 되어 전국을 순회하면서 신앙운동을 위해 전력해 왔고 교단의 황해노회장과 장로교
총회장를 역임했던 자신이 아니었던가?
해방 전에는 순수한 부흥목회에만 주력했는데 해방이후 이북의 교회가 사회주의 교회로
변모해가는 과정에 자신이 그 일에 주역이 되어 있다는 사실을 돌이켜 보았을 것이다.
전쟁 중이라 해도 남아 있던 500명 정도의
신자들을 거느리며 신천 서부교회에서 목회하던 김 목사는 라디오를 들으며 남쪽소식을 접하거나 날이 갈수록 우익 세력들과의 접촉을
갖는다. 특히 남북을 오가며 우익 지하운동하는 사람들과 빈번하게 접촉하고 있었다.
김익두 목사가 거주하는 신천지구는
이북에서도 가장 기독교 세력이 왕성한 지역이다 보니 반면에 반공세력이 가장 강력한 지역이었다. 이에 국군과 미군을 비롯한 UN군이
38선을 넘어 북진해 온다는 정보에 맞춰 반격을 하기로 예정되어 있었는데, 국군이 진격한다는 과잉 정보로 인해 너무 서둘러
10월 13일이라는 날짜에 반격을 한 것이 가장 큰 비극의 원인이 되었다.
전쟁이 시작된 지 3개월 만에 연합군의 대대적인 공습이
감행됐고 9월 15일, 맥아더의 인천 상륙작전은 낙동강까지 내려온 인민군들의 허리를 끊는데 성공했다. 갑작스런 연합군의 기습으로
허를 찔린 인민군은 당황했고 전세는 순식간에 역전됐다. 서울 점령 사흘 만에 국군은 38선을 넘었고 뒤 이어 미군과 UN군도
북진에 가세했다. UN군이 38선을 돌파해서 북진을 하니까 그 소문이 재령과 신천지역에 퍼지면서 김익두 목사의 주변에는 아주
커다란 동요가 일어났다.
당시 신천지역에는 남과 북을 오고가며 음성적으로 우익운동을 하는 사람들 중에는 백색테러로
유명한 한독당 당원, 백의사, 서북청년단 요원을 비롯해 김구 노선에 있는 인물 등 다양한 우익 조직들이 암암리에 활동하고 있었으며
심지어 이승만 정부에서 파견된 권총을 소지한 첩자들도 남북을 오가며 몰래 활동하고 있었다. 이때 김익두는 절호의 기회가 왔다고
생각하고 신천 서부교회 청년들과 읍내에 소재한 교회 청년조직들을 규합하여 국군과 UN군의 전황을 알려주며 반공궐기와 반격의 토대를
마련해 주었다.
한편 국군과 UN군의 북진 소식과 함께 황해도 구월산에서는 은밀한 거사가 계획됐다. 구월산에서
봉화를 피우면 신천, 재령, 나무리벌, 북율, 남율, 소호 할 것 없이 한꺼번에 거사가 시작되는 것이며 교회의 반공 우익청년들의
계획은 연합군이 들어오기 전에 황해도 일대에서 반공 봉기를 일으켜서 미리 주도권을 잡는 것이 목표였다. 목표물은 신천군의 행정을
주관해 온 노동당 인민위원회 청사, 그날은 이른바 ‘13일의 금요일’이었다. 이날은 김익두 목사가 죽기 하루 전날이었다.
10월
13일 저녁 5시경이 되자 드디어 우익들의 반공 봉기가 일어났고 교회 청년들로 구성된 다양한 자체 치안대원들 한 사람이
아카보총을 대 여섯 정씩 메고 나타났다. “대한민국만세!. 국군만세!” 하면서 신천읍과 각 마을에는 청년들이 삽시간에 떼를 지어
나타나서 흥분한 상태로 좌익들을 체포하러 다니기 시작했다. 현재 신천박물관으로 사용되고 있는 당시 신천군 노동당 인민위원회 청사를
접수하고 봉기에 성공한 우익은 대대적인 좌익 색출에 돌입했고 끔찍한 학살은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이 모든 사건은
김익두 목사가 죽기 하루 전날인 10월 13일에 도화선이 되어 터진 것이다. 마침 UN군의 인천상륙작전으로 퇴각하던 좌익계열
청년들이 우익반공계열 수백 명을 대상으로 예비 검속하는 사건이 발생하자 지하에서 우익반공 조직 운동을 하고 있던 신천 서부교회와
동부교회 청년학생들을 비롯한 온천교회, 구당교회, 석당교회, 간성리교회, 은천교회, 지봉교회 등에 다니던 교회의 청년학생들 수백
명이 반발하면서 무장봉기를 일으키며 닥치는 대로 학살을 감행한 것이다. 13일 이후, 신천군 인민위원회 청사와 관공서를 장악한
우익청년들은 닷새간의 전투 끝에 신천군 전역을 장악하여 평양탈환을 목표로 북진하던 미군 제1기갑 사단의 통로를 열어주는 계기를
마련해 줬다
새벽기도를 드리던 중에 총격을 당한 김익두 목사
광란의
살육전이 계속되던 13일 밤이 지나고 어느덧 14일 새벽 4시가 되었다. 이제 신천지역은 우익 반공세력과 미군이 주도하는 것으로
모든 전세가 끝났다고 판단한 김익두 목사는 교회의 종탑으로 가서 그동안 전혀 하지 않았던 새벽종을 치고 교인들에게 새벽예배가
있음을 알렸다.
당시는 교회의 종을 칠 수 없을 시기였다. 종소리를 들은 교인들이 여기저기서 50명 정도가 모였다. 김 목사와
교인들은 긴장감과 안도감이 교차하는 심정으로 감격적인 예배를 드리게 된 것이다. 그때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 합시다”라고 선언하며
“만입이 내게 있으면 그 입 다 가지고 내 구주 주신 은총을 늘 찬송하겠네”를 찬송하는 것으로 새벽예배를 드리기 시작했다.
설교를 모두 마치고 이윽고 광고시간이 되었다.
“나는 그 동안 하나님께 서너 가지 기도 제목을 두고 기도해 왔는데
하나님이 내 기도를 들어주셨어요. 첫째는 우리 교인들이 자유롭게 예배를 드릴 수 있는 날을 속히 주옵소서. 둘째는 신천읍내
5일장을 다시 열 수 있게 해 달라는 기도였는데 이제는 5일장이 서게 되어 우리 성도들과 자유롭게 만날 수 있게 되었어요. 셋째는
하루 속히 인민군대가 무너지고 성도들이 자유롭게 예배를 드리게 하옵소서. 넷째는 신앙고백을 자유롭게 할 수 있는 날을 달라는
것이었는데 마침내 하나님은 나의 기도를 들어주셨습니다. 이제는 우리가 마음 놓고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는 때가 되었으니, ‘하나님
만세! 예수 만세!’를 부릅시다.”
김 목사는 광고시간을 이용해 교인들과 함께 신앙적인 만세삼창을 우렁차게 했다.
그는 이어서 ‘국군이 곧 입성할 것이니 우리 교회가 환영회를 개최하자’는 말로 모든 광고를 마치고 예배를 끝냈다. 예배를 끝내자
참석한 신자들의 절반 정도는 집으로 돌아가고 나머지 20명 정도가 김 목사와 함께 예배당에 계속 남아 기도를 하고 있었다. 김익두
목사는 강대상 옆 방석 위에서 무릎을 꿇고 기도하기 시작했는데 이때까지도 예배당 밖에서는 좌익세력과 우익반공세력이 밤이 맞도록
서로 쫒고 쫒기는 살육전을 벌이고 있었던 살벌한 시간이었다. 때마침 전세가 불리해진 좌익세력들이 간혹 교회 뒷산 길목을 이용하여
간간히 도주를 거듭하는 중이었다.
김익두 목사에 대한 정보를 입수한 좌익과 인민위원회 대원들은 김 목사를 제거하기
위해 교회당 담 밖에 몰래 숨어서 예배를 마칠 때까지 기다렸다. 예배를 마치자 어둑어둑한 예배당 안에 구둣발로 진입한 그들은 강단
위에서 기도하던 김익두 목사를 찾아냈다. 그리고 깜짝 놀라 기도를 멈추고 말리려던 교인들을 향하여 총격을 가했다. 이어서 총구는
김 목사를 향하여 발사되어 현장에서 모두 6명이 즉사를 하고 몇 사람은 중경상을 입는 비극이 벌어진 것이다. 순간적으로 발생한
일이었다. 교회의 기둥이었던 채 장로와 임성근, 김채호 전도사, 그리고 맨 주먹으로 대항하던 청년 두 명, 이렇게 모두 6명이
절명했으며 당시 주일학교 교사와 성가대 대원으로 봉사하던 21살의 처녀 이순일은 창문을 넘어 밖으로 도망치다가 죽창에 뒷 어깨가
찔려 실신하였으나 구사일생으로 살아났다.
“천사가 예루살렘을 향하여 그 손을 들어 멸하려 하더니 여호와께서 이 재앙 내림을 뉘우치사
백성을 멸하는 천사에게 이르시되 족하다 이제는 네 손을 거두라 하시니 때에 여호와의 사자가 여부스 사람 아라우나의 타작마당 곁에
있는지라”(삼하 24:16).
“하나님이 예루살렘을 멸하러 사자를 보내셨더니 사자가 멸하려 할 때에 여호와께서 보시고 이 재앙 내림을 뉘우치사 멸하는
사자에게 이르시되 족하다 이제는 네 손을 거두라 하시니 때에 여호와의 사자가 여부스 사람 오르난의 타작마당 곁에 선지라”(대상
21:15).
다윗이 인구를 조사함으로써 죄를 지었을 때 하나님께서 그것을 불쾌히 여겨 염병을 보내시므로 70,000명이 죽었다. 파멸하는
천사가 예루살렘에 와서 하나님의 진노는 누그러지고 그 천사가 여부스 사람의 타작마당에 섰다. 그러나 사무엘하와 역대상은 이
타작마당의 주인의 이름을 각각 다르게 기록하기 때문에 질문이 생긴다. 그 천사가 누구의 타작마당에 섰는가? 그 여부스 사람은
아라우나인가 아니면 오르난인가?
두 이름을 갖는 관습
여호와의 천사가 누구의 타작마당에 나타났는지를 알기 위해선 분석이 조금 필요하다. 이 두
기사에는 “여부스 사람 아라우나”와 “여부스 사람 오르난”이라는 두 이름이 언급된다. 구약에서 두 개의 다른 이름을 가진 사람을
많이 볼 수 있다(예컨대, 아브람/아브라함, 야곱/이스라엘, 이드로/르우엘, 요람/여호람, 요아스/여호아스, 여호야긴/여고니야
등등).
이런 관습은 고대 애굽과 메소포타미아에서도 볼 수 있다. 예컨대, 앗수르 왕 디글랏빌레셀(왕하 15:29)은
불(Pul)로도 불렸다(대상 5:26). 한 사람의 개성, 기능, 경험, 혹은 삶의 정황 등이 바뀌면 제2의 이름이 주어지기도
했다. 야곱(“빼앗는 자”)이 얍복강 가에서 하나님을 만난 후 이스라엘(하나님과 겨뤄 이김“)이 된 것이 그런 예에 속한다(창
32:28). 그러므로 아라우나가 오르난과 동일인이라고 해서 놀랄 필요는 없다. 아라우나라는 이름이 왕의 공식적 칭호였다고
제안하는 자들도 있다.
아라우나라는
이름이 “자유인” 또는 “귀족”을 뜻하는 힛타이트어라고 설명되어 왔다. 다른 학자들은 이 말이 “주인”을 의미하는 후르어에서
파생했다고 여긴다.
삼하 24:16에서 이 이름은 정관사와 함께 나오고, 따라서 23절은 “아라우나 왕”을 가리키는 말로 번역될 수
있다. 그러므로 아라우나는 여부스 족의 예루살렘의 마지막 왕이었다고 추정할 수 있다. (J. D. Douglas, ed.,
The Illustrated Bible Dictionary, 3 vols. [Leicester, England:
Inter-Varsity Press, 1980], s.v.“Araunah”).
또한 원래 히브리어 본문은 자음으로만 기록돼 있었고, 따라서 자음만 보면 이 두 이름은 거의
똑같다. 모음 부호는 구약의 마지막 책 말라기가 기록된 후 거의 1,000년이 지나서야 본문에 붙여졌다. 모음과 어미는 이
기사들이 기록되던 시기에 동일한 자음을 다르게 발음한 것에 따라 붙여졌을 것이다. 그러므로 이 두 이름은 언어학적으로 관련돼
있고, 따라서 동일한 히브리어 어근에서 나왔다고 볼 수 있다.
요압(Joab) 여호와는 아버지가 되신다
요압은 다윗의 누이 스루야(Zeraiah)의 아들로 아비새(Abishai), 아사헬(Asahel)와 형제(삼하 2:13). 스루야의 아들 요압과 다윗의 신복들도 나와 기브온 못 가에서 그들을 만나 함께 앉으니 이는 못 이쪽이요 그는 못 저쪽이라
여부스족을 이기고 다윗의 지휘관이 되었다(역대상 11:6). 다윗이 이르되 먼저 여부스 사람을 치는 자는 우두머리와 지휘관으로 삼으리라 하였더니 스루야의 아들 요압이 먼저 올라갔으므로 우두머리가 되었고.
요압은 다윗을 도와 여러 업적을 이루지만 반면, 다윗의 아들 압살롬을 비롯 다윗의 친인척을 죽이며 다윗의 마음을 가장 아프게 한 인물 중이 하나입니다. 요압은 결국 다윗의 아들 솔로몬에 의해 처형당합니다.
요압(?~기원전 965년) '여호와는 아버지 이십니다.' '여호와는 하나님 이십니다.'
다윗 왕 시기 때 활약하며 여러 이민족들을 무찔렀으나 다윗의 허락없이 두 장군을 죽인 죄로 솔로몬 왕 원년에 숙청당했다.
1. 요압은 생명의 소중함을 모르는 잔인한 사람이다
(삼하 3:27-30) 세상에는 폭력적이고 잔인한 사람들이 있다.
하나님을 떠난 인간들의 모습 중 하나가 무정함과 무자비함이다(롬 1:31). 바울도 말세에 하나님을 떠난 악한 인간들에게 나타나는 특징은 ‘무정함’, ‘원통함을 풀지 않음’, ‘사나움’이라고 말하였습니다(딤후 3장). 하나님을 떠난 사람은 사납고 폭력적이고, 망각적인 모습이 있다. 원래 하나님께서 만드신 에덴동산에서 인간은 죄가 없었고 양과 같이 폭력성과 공격성이 없었다. 그러나 죄를 짓고 나서 아담의 DNA가 후손들에게 전달되면서 폭력성, 잔악성, 잔인함, 생명을 소중히 여길 줄 모르는 속성들이 인간 안에 들어와 인간 세계를 망쳐버리고만 것이다. 가인과 아벨을 보면, 형이 동생을 쳐 죽였다(창4:8). 배워서 죽인 것이 아니고 그 안에 살인의 피가 흐르고 있었던 것이다. 또한 라멕은 가인의 후예로 전쟁에 나가서 자기 몸에 입은 상처에 대하여 보복하기 위해 젊은 소년까지도 죽였다는 기록이 나옵니다(창4:23-24). 출애굽기 1장을 보면, 이집트의 바로가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은혜로 숫자가 늘어나고 점점 더 강성해지자 모든 히브리 남자 아이들이 태어나면 모두 하숫가에 던져버리라는 대학살 명령을 내린다.
마태복음 2장에도 보면, 동방박사들에게 속은 줄 알고 분노했던 유대의 분봉왕 헤롯이 베들레헴 지경의 두 살 아래 아기들을 다 죽여 버리라는 집단학살을 명령한다. 이런 것들이 인간의 공격성, 야수성, 잔악함, 포악함을 보여주는 모습입니다. 정도는 다르지만 사람은 모두 어느 정도 포악성을 가지고 살아간다. 요압이 바로 그런 사람이었다.
(1) 요압의 아브넬 살인사건(삼하 3:27-30)
다윗 왕은 적들을 품어주는 포용과 융화정책을 썼다. 그런데 요압은 그렇지 않았다. 사울이 죽고 그의 아들 이스보셋이 젊은 나이에 왕이 되자 아브넬이 2년 동안 섭정을 했다. 왕이 이스보셋이라도 정치적인 힘은 아무것도 없고 아브넬이라는 군대 장관이 정권을 장악하고 있을 때, 다윗이 남쪽의 유다와 베냐민 지파의 왕으로 등극하게 됩니다. 다윗은 대세가 자신에게 이미 기울어졌지만 사울의 군대장관인 아브넬을 끌어안기 위하여 그를 위하여 큰 잔치를 베풀고 축복한 후 그를 다시 돌려보냅니다. 그런데 요압은 이 같은 다윗의 결정에 대하여 불복하고 사람을 보내서 다시 아브넬을 헤브론에 유인해 온 뒤에 칼로 그를 죽였다. 자신의 동생 아사헬을 죽인 것에 대한 보복이라고 했습니다. 이것 때문에 다윗이 국가 통일에 방해를 받고 많은 피를 흘리게 됩니다. 사실 아사헬이 아브넬에게 죽임을 당한 사건은 아브넬 입장에서는 정당방위였습니다. 아브넬을 죽이려고 쫓아간 아사헬에게 아브넬은 돌아가라고 했습니다. 그런데도 끝까지 추격하다가 창에 찔려 죽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요압은 그 일에 대하여 책임이 동생에게 있음을 자각하고 아브넬에 대하여 복수심을 갖지 않았어야 합니다. 네 원수를 사랑하라 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 일진데 전쟁에서 동생의 경솔한 행동으로 죽임 당한 것을 모두 원수로 적대시하고 보복하고자 하는 것은 하나님 뜻이 아니라고 할 수 있다.
(2) 요압의 아마사 살인사건(삼상 20:4-6)
압살롬이 쿠데타를 일으키자 다윗은 예루살렘을 버리고 피난을 갑니다. 그런데 다윗은 하나님의 은혜로 다시 예루살렘으로 돌아와서 왕권을 장악하게 됩니다. 그때 다윗이 압살롬에게 붙어서 군대 장관을 하던 변절자 아마사의 지위를 다시 회복시켜준다. 다윗의 융화정책입니다
그러나 요압 대신 아마사가 군대 사령관이 되었을 때, 요압의동생 아비새는 세바의 반역을 진압할 때 자신의 형인 요압을 불러들였고 요압은 아마사에게 조용히 인사하는 척하다가 갑자기 그의 배를 찔러 죽여 버린다. 이 사건은 다윗의 융화정책을 또한번 지체시키는 원인이 되었다. 이번에도 요압은 자기가 다윗 왕국을 장악하기 위해 경쟁대상을 제거한 것입니다.
요압은 그 소식을 듣고 아마사에게 조용히 인사하는 척하다가 갑자기 그의 배를 찔러 죽여 버린다. 자기가 다윗 왕국을 장악하기 위해 경쟁대상을 제거한 것입니다. 자기 지위에 걸림돌이 된다면 친인척도 마다하지 않고 죽이는 그런 잔인한 사람이다. 아마사는 요압과 사촌 관계입니다(이모의 아들: 삼하17:25).
요압은 무죄한 두 사람을 살인하므로써 다윗의 국가통일에 큰 어려움을 주었습니다.
(3) 에돔 땅의 남자를 전멸시킵니다(왕상 11:15-16)
열왕기상 11장에 보면, 다윗 왕이 에돔 지역에 전쟁을 하러 나가서 그 백성들을 통치하려고 했는데 에돔 사람들이 대적하게 되어 전쟁을 하면서 많은 유대의 군대들이 피해를 입게 됩니다. 군대 장관이었던 요압은 이에 대한 보복으로 6개월 동안 에돔 땅에 주둔하면서 에돔 땅의 모든 남자들을 전멸시킵니다. 이것이 바로 요압의 잔인성입니다.
이처럼 우리도 무정한, 무자비한, 사나운, 동물적인 폭력성과 공격성을 갖고 살아갑니다. 이 잔인함, 포악함은 하나님의 성품이 아닙니다.
우리는 맹수가 아니라 공격성이 없는 양입니다. 잔인하고 폭력적인 그런 DNA를 우리는 버려야 됩니다. 성령님의 능력으로, 말씀의 능력으로, 십자가의 힘으로 양처럼 변하는 역사가 있는 하나님의 사람이 다 되시기를 바랍니다.
2. 요압은 제어가 안 되는 교만한 사람입니다(삼하 3:30, 39)
요압은 통제 불능의 교만한 사람이었습니다. 다윗은 이들이 너무 힘이 강하여 제어하기가 힘드니 주께서 그 악한 일을 행한 대로 갚아주기를 바란다고 말합니다(30절). 즉, 요압은 누구의 말도 듣지 않는 통제 불능이 된 것입니다. 디모데후서 4장 14-15절에 보면, 사도 바울이 죽기 전에 쓴 편지가 나옵니다. 사도 바울이 에베소교회를 개척하고 목회하면서 부흥시켜 놓은 다음에 자신의 후임자였던 디모데에게 교회를 맡기고 떠나게 됩니다. 그리고 노파심에서 젊은 목사 디모데에게 목회를 잘 하라는 의미에서 편지 두 편, 즉 디모데전서와 디모데후서를 씁니다. 그는 죽기 전까지 썼던 디모데후서 4장에서 "구리 장색 알렉산더가 내게 해를 많이 입혔으니 그를 주의하고"라고 합니다. 바울에게 사법권이 없으나 자신이 할 수 있는 말은 딱 한 마디 합니다. "주께서 그에게 행한 대로 갚으시리라"는 것이었습니다. 그 사랑과 온유의 하나님의 사람, 바울도 그렇게 말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알렉산더는 교회는 들어왔지만 거듭나지 못하고, 옛 사람이 살아 있는 통제 불능의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요압이나 알렉산더처럼 누구의 말을 안듣는 사람이 있습니다. 제어가 안됩니다. 그는 저주스러운 인간입니다. 이 정도까지 가면 갈 데까지 다간 사람들입니다.
존 오웬(John Owen)
그가 존경했던 인물이 바로 시골사람, 땜장이였던 존 번연(John Bunyan)목사입니다. 가끔 존 번연이 런던에 와서 설교할 때마다 그의 설교를 들으러 갔다고 합니다. 찰스 왕이 존 오웬을 불러 물었습니다. 당신은 학식과 지위와 권위 있는 사람인데 왜 시골에서 온 땜장이 설교자, 존 번연의 설교를 들으러 가냐고 말입니다. 그랬더니 존 오웬은 할 수 있거든 제 학식, 학위, 모든 지식, 신학을 모두 팔아버리고 존 번연이 가지고 있는 그 영성을 사고 싶다고 답했습니다.
이 존 번연이 『천로역정』을 쓴 사람입니다. 존 오웬은 들을 귀가 있었습니다. 사람은 들을 귀가 있어야 됩니다. 요한계시록에는 귀있는 자는 들으라고 하는 말이 있습니다. 안 듣고, 제어가 안 되는 요압과 알렉산더와 같은 인물들을 통하여 그렇게 살면 안 된다는 주님의 메시지를 들을 수 있습니다. 율법도, 권면도 안 통하는 교만한 사람은 갈데까지 간 통제 불능의 저주받은 인간입니다. 바로 요압이 이런 부류의 사람이었다.
3. 요압은 어리석은 판단으로 비참한 죽음을 맞이하게 됩니다(왕상 1:7-8, 2:5-6)
에스키모인과 늑대 사냥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일단 칼을 늑대를 유인하는데 쓰일 동물의 몸에 쩔러 넣습니다. 그 칼에 피와 기름이 엉겨 붙으면 끄집어내서 밖에 내놓으면 추운 영하 날씨의 모두 얼어붙습니다. 그 후에 동물에 두 번째로 집어넣습니다. 이렇게 30번, 40번 해서 피와 기름이 엉겨 붙어 이것이 칼인지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두꺼워지면 칼을 세우고 손잡이를 땅에 묻습니다. 늑대가 피냄새를 맡고 다가와서 칼을 계속 핥으면서 얼음이 녹아 칼날이 드러나게 되는데, 그래도 늑대는 멈추지 않고 계속 칼을 빨게 됩니다. 자기가 마시는 피가 자기 피인데도 착각하고 계속 빱니다. 그렇게 몇 시간 뒤에 나가보면, 늑대가 죽어 있습니다. 에스키모 선조들의 지혜입니다.
사람에게 있는 탐심, 권력의 냄새를 쫓아가다가는 자기를 파괴시킨 늑대 같은 인생이 요압이었습니다. 다윗이 늙어서 죽을 때가 되었지만 후임자를 결정하지 않았습니다. 그 와중에 다윗의 넷째 아들인 아도니야가 다시 반역을 일으킵니다. 그는 용모가 준수하였고 아버지 다윗이 섭섭하게 한 적이 없는 인물이었습니다. 그때 아도니야와 함께 공모하여 쿠데타를 일으켰던 자가 바로 요압입니다(왕상 1:5-8). 그동안 어떤 일이 있었어도 요압은 다윗 왕을 떠나지 않았지만 결정적으로 아도니야의 편에 서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은 다윗의 뒤를 이어서 막내아들 솔로몬이 왕이 되는 것이었습니다. 결국 요압은 자신의 권력욕망 때문에 정치적인 줄서기를 잘못하여 아도니야를 옹립하려다가 비참한 죽음을 맞이하게 됩니다(왕상 2:5-6, 28-35). 어리석은 판단으로 비참하게 죽습니다.
요압의 인생은 이렇게 살지 말라는 거울로 우리에게 주어진 것입니다. 오늘 요압의 인생에서 부정적이고, 파괴적이며 결정적 실수에 대한 말씀을 보았습니다. 여러분 맹수처럼 잔인하게 살지 말고 양처럼 온순하게 살아야 합니다. 통제불능의 교만함을 버리고, 겸비하게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어야 됩니다. 욕심에 이끌려 죽는 자리에 줄서기 하지 말고, 하나님의 음성을 잘 듣고, 바르고 성경적으로 판단 할 때에 주님께서 우리 인생길을 열어주십니다. 요압을 거울삼아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바른 인생을 살아가는 하나님의 사람, 믿음의 성도, 성령 충만하여 승리하는 그리스도인들이 다 되시기를 바랍니다.
♦ 3월 3일(목)
♦ 오늘 읽어야 할 말씀 : 사무엘하 24:1∼25 ♦ 묵상을 위한 주제 : 인구를 조사하라(1절) ♦ 성구 : 여호와께서 다시 이스라엘을 향(向)하여 진노(震怒)하사 저희를 치시려고 다윗을 감동(感動)시키사 가서 이스라엘과 유다의 인구(人口)를 조사(調査)하라 하신지라.
“인구를 조사하라(take a census)”
다윗이 인구 조사를 명령한 목적은 이스라엘의 힘을 과시하고 스스로 위로를 얻고 자만하려는 것이었습니다.
다윗은 전쟁 욕구와 승전에 대한 과신으로 인하여 마음이 교만해지고 다른 민족들을 경멸하기에 이르렀습니다.
다윗에게 인구 조사의 명을 받은 군대장관 요압은 하나님께서 강하게 하실 터인데 왜 이런 일을 하느냐고 충고했습니다. 요압의 충고는 올바른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이를 무시하고 악을 강행하였습니다.
인구 조사 후 다윗은 인구 조사의 동기가 교만과 자기 과시욕에서 나온 것임을 깨달았습니다. 그러나 다윗이 잘못을 깨달은 것은
290일 간의 인구 조사가 끝난 다음이었습니다. 이 기간은 다윗에게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절된 어둠의 시기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선지자 갓을 다윗에게 보내셔서 하나님께서 계시하신 세 가지 재앙을 제시합니다.
첫째는 칠 년의 기근 둘째는 삼 개월의 전쟁 셋째는 삼일의 온역 이었습니다.
인구조사를 실시한 범죄의 대가로 세 가지의 징벌 중에서 하나를 선택해야 할 때 다윗은 삼 일 동안의 온역을 선택했습니다.
그러나 죄에 대한 결과는 극심하여 칠만 명이 온역으로 죽어갔습니다. 칠만 명이나 되는 인구의 감소는 인구 조사를 통해 만족을 얻으려 했던 다윗 왕의 생각이 얼마나 어리석었는지를 분명하게 보여준 사건이었습니다.
백성들이 온역으로 죽어 가는 모습을 보고 다윗이 하나님께 회개하며 탄식하자 하나님께서는 갓 선지자를 다윗에게 다시 보내셨습니다. 갓 선지자는 다윗에게 “여호와를 위하여 단을 쌓으라”고 제안했습니다.
이는
구원의 기쁜 소식이었습니다. 갓 선지자는 다윗에게 여부스 사람 아라우나의 타작마당에서 여호와를 위하여 단을 쌓으라고 했습니다.
그리하여 다윗은 아라우나에게 값을 지불하고 그 땅을 사서 그 곳에서 번제와 화목제를 드리자 재앙이 그쳤습니다.
새벽마다 도우시는 하나님의 은총을 힘입어 하늘의 뜻을 이루어가는 진실한 삶을 회복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 오늘 읽어야 할 말씀 : 사무엘하 23:1∼39 ♦ 묵상을 위한 주제 : 다윗의 마지막 말(1절) ♦ 성구 : 이는 다윗의 마지막 말이라 이새의 아들 다윗이 말함이여 높이 올리운 자(者), 야곱의 하나님에게 기름 부음 받은 자(者), 이스라엘의 노래 잘 하는 자(者)가 말하도다.
“다윗의 마지막 말(the last words of David)”
다윗은 지난 세월을 돌아보며 지난 삶을 회고합니다. 22장은 구원의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23장은 언약의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다윗은 아들 솔로몬에게 마지막 유언의 글을 남겼습니다(열왕기상 2장).
사무엘하 23장은 다윗이 지난 삶을 돌아보며 자신의 백성과 이스라엘 민족과 하나님을 믿는 모든 사람에게 전하는 마지막 말씀이라고 하겠습니다.
다윗은 자신을 이렇게 소개합니다(1절). “이새의 아들 다윗이 말함이여 높이 세워진 자, 야곱의 하나님께로 부터 기름부음 받은 자, 이스라엘의 노래 잘 하는 자가 말하노라.”
다윗은 이새의 아들이라고 소개합니다.
다윗은 왕이 아니라 이새의 아들이라고 소개하는 것은 자신을 낮출 때 사용하는 표현입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왕이 아니라 이새의 아들이었으며 기름부음을 통하여 그 능력이 자신에게서가 아닌 오직 하나님께로 부터 내려 온 것이라고 고백합니다.
다윗은 이스라엘의 노래 잘하는 자라고 소개합니다.
다윗은 내가 가장 잘 하는 것은 하나님을 찬양하는 일이며 낮고 천한 자에게 기름을 부어 하나님의 능력을 힘입어 하나님을 찬양하는 사람으로 세워주셨다고 고백합니다.
“여호와의 영이 나를 통하여 말씀하심이여 그의 말씀이 내 혀에 있도다.”라고 고백함은 노래 잘하고 찬양 잘하는 그의 입술을 통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 합니다.
다윗의 마지막 인생에서의 깨달음은 무엇입니까?
하나님 앞에 축복받는 자의 삶과 저주받는 자의 모습을 비교하는 것이었습니다.
축복의 삶과 저주의 삶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우리를 향한 마음과 뜻을 헤아릴 수 있었던 것입니다.
축복 받은 자들은 위로는 하나님을 경외하고 아래로는 사람을 공의로 다스리는 자가 될 것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할 때 가정에서, 일터에서 하나님의 속성인 공의를 실현할 수 있습니다.
다윗은 그의 마지막 삶의 여정 속에서 마지막 깨달음을 고백하였고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관계가 가장 중요함을 강조합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최우선으로 삼아야 하는 것은 주님과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며 주님과 동행하는 삶이라고 하겠습니다. 후손들에게 물려줄 가장 위대한 유산은 우리들이 세속에 물들지 않고 오직 주님과 동행하는 삶의 흔적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이러한 사람들이 다윗과 함께 전쟁터에 나가 싸웠던 용사들이라며 그들의 이름을 소개합니다(23:8∼39).
우리는 모두 주님의 군사요, 주님의 용사들입니다. 다윗은 그의 마지막에 자신을 위하여 싸운 37명의 용사들을 한 명, 한 명 이름을 소개한 것처럼 우리 주님께서도 자신을 위하여 동행하며 매일같이 주님의 이름으로 싸웠던 그의 용사들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사랑하는 믿음의 동지들이여, 오늘도 능력의 말씀으로 영적 싸움에 승리하는 십자가 군병으로 힘차게 일어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 찬양 / 예수이름으로 승리를 얻었네
예수 내 구주! 예수 내 생명! 예수 내 권세!
♦ 3월 1일(화)
♦ 오늘 읽어야 할 말씀 : 사무엘하 22:1∼51 ♦ 묵상을 위한 주제 : 큰 구원(51절) ♦ 성구 : 여호와께서 그 왕(王)에게 큰 구원(救援)을 주시며 기름 부음 받은 자(者)에게 인자(仁慈)를 베푸심이여 영원(永遠)토록 다윗과 그 후손(後孫)에게로다 하였더라.
“큰 구원(great victories)”
사무엘하 21장, 22장, 23장, 24장을 학자들은 "부록" "후기" "삽입" 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성경 기자는 부록과 같은 말씀으로 소개한 것이 아니라 다윗의 생애에서 가장 중요한 하나님의 헤세드(자비, 은혜)에 대한 깊은 신앙적 교훈을 마지막으로 소개하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시편 18편의 표제는 “여호와의 종 다윗의 시, 영장으로 한 노래, 여호와께서 다윗을 그 모든 원수와 사울의 손에서 구원하신 날에 다윗이 이 노래의 말로 여호와께 아뢰어 가로되” 라고 소개합니다.
한편 사무엘하 22장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여호와께서 다윗을 모든 대적의 손과 사울의 손에서 구원하신 그 날에 다윗이 이 노래의 말씀으로 여호와께 아뢰어 가로되”
시편 18편의 표제와 사무엘하 21장 1절의 내용은 같습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그 다음의 내용은 모두 같습니다.
그러므로 시편 18편과 사무엘하 22장의 말씀은 같은 내용이라고 하겠습니다.
내용이 같다는 것은 역사적 사건이 분명하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다윗은 환난의 때를 여호와께 간구하므로 벗어날 수 있었습니다.
다윗은 능력 있는 왕이었지만 자기의 힘과 군사력을 의지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께 기도하며 하나님의 팔 즉 하나님의 능력을 절대적으로 의지했습니다.
다윗은 사망의 문턱과 극심한 환난 중에서도 여호와 하나님께 부르짖으므로 여호와께서 들으셨으며 응답하셨다고 찬양합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악인들에게는 분노를 터뜨리시며 그들을 멸하십니다.
다윗은 강한 원수와 많은 물에서 건지시고 구원하셔서 넓은 곳으로 인도하신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하나님께서 다윗을 구원하신 까닭은 다윗이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자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순종의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의롭고 깨끗한 심령을 결코 간과하지 않고 상을 내려주십니다.
구원은 공로가 아니라 은혜로 말미암은 것입니다.
따라서 그리스도인의 삶은 선한 양심에 기초한 경건함을 항상 유지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말씀은 완전하고 정미하여 그것을 의지하는 자에게 방패가 되시기 때문입니다. 정미하다는 것은 일체의 흠도 없이 완전함을 말합니다.
다윗은 자신이 이룬 많은 성공과 업적을 열거하며 이 모든 일들을 하나님의 능력에 의하여 얻은 것이며 모든 영광을 오직 하나님께 돌립니다.
다윗은 하나님을 생존하시며 찬양을 받으실 구원자로 고백합니다.
그러므로 다윗의 입에서는 항상 감사와 찬양이 흘러넘칩니다.
복잡하고 어려운 현실에서 믿음의 사람들이 날마다 주님을 찬양할 수 있는 비결은 능력의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합력하여 좋은 방향으로 인도하시며 선한 결과를 이루어주실 것을 약속하셨기 때문입니다.
오늘도 주님을 향한 감사와 찬양에 새롭게 경험하는 은혜가 풍성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 찬양 / 내가 매일 기쁘게
예수 내 구주! 예수 내 생명! 예수 내 권세!
♦ 2월 28일(월)
♦ 오늘 읽어야 할 말씀 : 사무엘하 21:1∼22 ♦ 묵상을 위한 주제 : 그 후에야(14절) ♦ 성구 : 사울과 그 아들 요나단의 뼈와 함께 베냐민 땅 셀라에서 그 아비 기스의 묘(墓)에 장사(葬事)하되 모두 왕(王)의 명(命)대로 좇아 행(行)하니라 그 후(後)에야 하나님이 그 땅을 위(爲)하여 기도(祈禱)를 들으시니라.
“그 후에야(After that)”
사무엘하 21장의 표제는 “다윗이 기브온 사람의 말을 들어주다”이며 이렇게 시작합니다.
“다윗의 시대에 해를 거듭하여 삼 년 기근이 있으므로 다윗이 여호와 앞에 간구하매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이는 사울과 피를 흘린 그의 집으로 말미암음이니 그가 기브온 사람을 죽였음이니라 하시니라.”
'그 후에야'라는 말씀은 다윗의 기도에 응답하셨던 하나님의 가르침을 실천한 후를 말합니다.
과연 무엇을 실천한 후를 의미할까요?
다윗이 이스라엘을 통치하던 시기에 3년간 기근이 계속되므로 백성들은 먹을 양식이 없어 굶주렸습니다.
다윗은 이 문제를 해결하려고 여호와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그 이유를 알려주셨습니다.
예전에는 가뭄으로 인한 기근이 심각할 때는 “기우제(祈雨祭)”를 드렸습니다.
다른 용어로는 “무우(舞雩), 무우제(舞雩祭), 우제(雩祭), 한제(旱祭), 수제사(水祭祀)”라고도 합니다.
반면에 “기청제(祈晴祭)”는 비를 멈추게 해 달라는 제사를 말합니다.
기우제보다 빈도는 낮지만 조선왕조실록에서도 몇 번 등장한다고 합니다.
또 겨울 가뭄 때는 “기설제(祈雪祭)”를 지냈다고 합니다.
그러나 다윗은 기근의 원인을 해결하려고 여호와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다윗의 기도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은 죄의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나라의 지도자는 나라를 잘 다스리고 지키며 백성들의 의식주를 책임져야 합니다. 따라서 백성의 지도자가 된다는 것은 그 책임이 막중한 것이기 때문에 어려운 일입니다. 그러므로 인격적인 사람만이 지도자로 나서야 합니다.
이스라엘에 기근이 임하게 된 원인은 “사울과 그 집안사람들이 기브온 사람들을 죽인 것 때문”이라고 하셨습니다.
여호수아가 가나안 정복 시 기브온 사람들은 여리고와 아이 성에 대한 소문을 듣고 꾀를 내어 사신들에게 해어진 전대와 찢어져 기운 가죽 포도주 부대를 나귀에 싣고 낡은 신과 옷을 입고 다 마른 곰팡이가 난 떡을 예비한 후 여호수아를 찾아와 아주 먼 곳에서 왔으니 우리와 약조하자고 제안하므로 여호수아는 그들과 화친하여 그들을 살릴 것이라고 언약을 맺었습니다(수 9:1-15).
그런데 사울 왕과 그 무리들이 그 약속을 무시하고 기브온 사람들을 죽인 것입니다.
생명에 대한 약속은 어떤 경우에든지 반드시 지켜야 합니다.
왜냐하면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죄인을 향한 영원한 생명을 약속하신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인정하고 시인하는 자에게 하나님은 하나님의 생명을 보장하시고, 하나님의 구원에 들어오게 하십니다.
영원한 생명이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만 이루어질 하나님의 약속과 은혜이며 비밀입니다.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받으리라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로마서10:9∼10)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요한복음 1:12)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생명의 약속에 대한 경험이 내 생각을 바꾸며 내 삶을 바꾸도록 역사하므로 새로운 피조물의 삶을 회복하게 될 것입니다.
이스라엘과 블레셋의 싸움은 죽느냐 사느냐의 치열한 싸움인 것처럼 그리스도인들의 매일의 삶은 생명을 지키려는 선한 싸움과 같습니다.
블레셋의 거인들과 같은 공중의 권세를 잡은 세력들은 예수 안에서 약속된 생명을 빼앗으려고 마치 굶주린 사자가 먹이를 찾는 것처럼 달려들고 있습니다.
세상을 지배하려는 힘과 생명을 보존하려는 신앙은 매일같이 영적 전투 현장에서 치열한 싸움을 싸워야 합니다. 그러므로 이 싸움에서 승리하여 최후의 영광을 얻기까지 영적 긴장과 강한 영적 야성을 갖춰야 합니다.
이와 같은 환경을 조성하려면 나라의 지도자를 세워야 할 때 올바른 선택과 결정이 매우 중요합니다. 만일 지도자를 잘못 세우면 그만큼 영적 싸움의 현장은 더 치열해지고 어려워지기 때문입니다.
오늘도 이 땅위에 하나님의 나라가 세워지는 은혜를 경험하며 그 나라를 확장하는 일에 협력하고 노력하여 승리의 기쁨을 함께 나눠야 하겠습니다.
♪ 찬양 / 마귀들과 싸울지라
예수 내 구주! 예수 내 생명! 예수 내 권세!
♦ 2월 26일(토)
♦ 오늘 읽어야 할 말씀 : 사무엘하 20:1∼26 ♦ 묵상을 위한 주제 : 여호와의 기업(19절) ♦
성구 : 나는 이스라엘의 화평(和平)하고 충성(忠誠)된 자(者) 중(中) 하나이어늘 당신(當身)이 이스라엘 가운데 어미 같은
성(城)을 멸(滅)하고자 하시는도다 어찌하여 당신(當身)이 여호와의 기업(基業)을 삼키고자 하시나이까.
“여호와의 기업(the LORD's inheritance)”
'여호와의 기업'이란 반란을 일으켰던 '세바'가 도망한 성 "아벨"을 말합니다.
19장에서 북쪽 이스라엘 사람들은 그들이 기름을 부어 왕으로 세웠던 압살롬이 에브라임 수풀 전투에서 전사한 후에 다윗을 왕으로
모셔오자고 결의합니다. 이때 베냐민 사람 비그리의 아들 "세바"는 다윗을 왕으로 모실 수 없다며 이스라엘 사람들을 충동하여 반역을
일으켰습니다.
북쪽 이스라엘 사람들이 동조하지 않았으나 다윗은 유다 사람들과 더불어 예루살렘으로 복귀합니다. 이때 압살롬의 반역에 의해 예루살렘 궁에 남아있던 후궁 열 명을 별실에 가두고 죽는 날까지 동침하지 않으므로 생과부로 지낼 수밖에 없었습니다.
다윗은 "아마사"를 군장으로 임명하고 유다 사람을 동원하여 지키라고 하였으나 왕이 정한 기한에 지체 되므로 "아비새"에게 '세바'가 더 위험한 인물이므로 그를 쫓으라고 명령합니다.
요압의
일행이 예루살렘을 떠나 기브온 큰 바위 근처에서 아마사가 맞이하러 나오므로 요압은 아마사에게 "형은 평안하뇨?" 하며 문안하는
것처럼 말하며 아마사의 배를 칼로 찔러 살해합니다. 그리고 반란군을 진압하기 위한 군사들이 아마사의 시체를 보고 동요할까봐 시체를
밭으로 옮기고 옷을 그 위에 덮었습니다.
요압과 그의 군사들이 세바를 잡으려고 아벨 성벽을 쳐서 헐고자 할 때에 그 성에서 지혜로운 여인 하나가 크게 외쳤습니다. 아벨 성의 여인은 반역자 세바만 내어주면 아벨 성을 무너트리지 않을 것이라는 약속을 받은 후에 세바의 머리를 베어 요압에게 던졌습니다.
요압은 무리들을 이끌고 예루살렘으로 돌아와서 왕에게로 나갔습니다.
요압은 이스라엘 군대 장관으로, 브나야는 그렛 사람과 블렛 사람의 장관으로 임명되었습니다. 아도니람은 감역관으로, 여호사밧은 사관이 되었으며 스와는 서기관, 사독과 아비아달은 제사장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라는 다윗의 대신이 되었습니다.
아벨 성의 지혜로운 여인처럼 한 사람으로 인하여 성이 초토화되려 할 때 지혜를 발휘하여 아벨 성을 지킬 수 있었던 것처럼 오늘날도 나라의 위기가 닥쳐왔을 때 지혜로운 여인을 요구합니다.
믿음의 사람들은 지혜로운 여인처럼 시대의 흐름과 궤도가 어디로 가고 있는지 정확하게 꿰뚫고 올바른 분별력으로 나라와 민족의 위기를 지켜낼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 오늘 읽어야 할 말씀 : 사무엘하 19:1∼43 ♦ 묵상을 위한 주제 : 왕은 돌아오소서(14절) ♦ 성구 : 모든 유다 사람들로 마음을 일제(一齊)히 돌리게 하매 저희가 왕(王)께 보내어 가로되 왕(王)은 모든 신복(信服)으로 더불어 돌아오소서 한지라.
“왕은 돌아오소서(Return YOU)”
다윗 왕의 백성들은 압살롬의 반란군을 쳐부수고 승리의 기쁨에 넘쳐 있었습니다. 다윗을 따르던 사람들은 이 기쁨을 다윗에게 알려 함께 기뻐하기를 바랐습니다. 그러나 다윗 왕은 압살롬의 죽음에 대해 매우 슬퍼한다는 소식을 듣고 기뻐하던 사람들의 마음은 다윗의 슬픔으로 인해 조용히 성으로 들어올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때
요압은 반역자 압살롬의 죽음을 슬퍼하는 다윗 왕에게 만일 왕이 반란군을 쳐부수고 기뻐하는 사람들을 맞이하지 않는다면 한 사람도
왕과 함께 머물지 않을 것이며 왕이 젊었을 때부터 당한 모든 화보다 더 심한 화를 당할 것이라고 경고합니다. 그제서야 다윗은 성문에 앉아 백성들을 맞이했습니다.
지도자 앞에는 두 종류의 사람이 있습니다. 첫째는 왕의 눈치만 살피는 사람입니다. 둘째는 왕에게 아뢸 것을 아뢰고 바른 길을 선택하도록 하는사람입니다.
요압은 다윗 왕에게 왕이 왕으로서 해야 할 것이 무엇인가를 정확하고 냉정하게 말할 수 있는 충신과 같은 사람이었습니다.
오늘의 시대에도 요압과 같은 일군이 필요합니다. 요압과 같은 일군이 없기 때문에 나라가 흔들리고 어지럽습니다.
예루살렘 궁으로 돌아오는 다윗 앞에 여러 사람들이 등장합니다.
특히 바후림에 있는 베냐민 사람 시므이는 반란군에 쫓겨 피난가던 다윗에게 돌을 던지며 욕을 하며 저주하던 사람이었습니다. 시므이를 처단해야 한다는 말에 다윗은 오늘 같은 날 어찌하여 사람을 죽이겠느냐 하며 시므이에게 너는 죽지 않을 것이라고 자비를 베풀었습니다.
사울의
손자 므비보섹에게는 전후 사정을 모두 듣고 거짓으로 보고하여 사울의 기업을 얻었던 것을 시바와 기업을 절반씩 나누라고 합니다.
이때 므비보셋은 왕이 살아서 돌아온 것으로 만족하니 시바에게 모든 것을 갖도록 하라고 말합니다. 억울한 누명을 뒤집어 쓴
므비보셋의 너그러움을 배워야 하겠습니다.
길르앗 사람 바르실래에게 다윗은 함께 요단을 건너 예루살렘으로 돌아가서 함께 지내자고 합니다. 그러자 바르실래는 나는 나이가 많아 늙었으므로 내 고향 땅에서 머무는 것이 좋다며 나를 대신하여 김함을 데려가 달라고 합니다. 바르실래와 같이 내가 누릴 부귀영화를 오히려 다른 사람을 추천하여 그 자리를 얻게하는 부드러움을 배워야 하겠습니다.
아들 압살롬의 반역으로 잠시 다윗은 고통스런 시간을 보냈지만 모든 것이 순조롭게 정리된 후에 용서할 사람은 용서하고 은혜를 베풀 사람에게는 은혜를 베풀어주며 더불어 함께 살아가는 멋진 삶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하루속히 잘못된 사상과 이념에 사로잡혀 질서를 어지럽히고 파괴하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헤세드를 경험하므로 모두가 함께 평화롭게 공존할 수 있는 그 날을 기대하며 기도할 뿐입니다.
오 주여 이곳에 오셔서 자비를 베풀어 주옵소서 서로 다른 것 때문에 빼앗고 속이는 전쟁과 같은 삶이 아니라 협력하며 나누는 마음으로 손에 손을 잡고 다 함께 평화의 나라를 세우게 하옵소서.
- 정치(政治)와 신앙(信仰)을 혼돈하지 말아야 한다! 정치는 반대 세력을 이겨야만 가능하다. 신앙은 반대 세력을 용서해야 승리한다. 정치와 신앙을 혼돈하면 세상을 점점 더 어지러워질 수밖에 없다.
다윗의 셋째 아들 압살롬은 정말 아름답고 흠이 없는 아들이었다. 이스라엘 가운데 가장 아름답다고도
전해진다(삼하 14:25). 그리고, 지혜가 있었다. 압살롬이 다윗에게 죄를 저질러서 일단 용서를 받았던 적이 있었다. 하지만
다윗이 압살롬을 계속 만나주지 않자 다윗 왕의 총애를 받는 요압의 밭에 불을 질러서 요압을 집으로 찾아오게 만들었다. 그리고,
요압을 설득해서 왕에게 나아간 사례도 있다. 그러니 아비의 입장에서 얼마나 마음에 품고 싶고 사랑하는 존재였겠는가? 다윗은
압살롬에게 여러 특권을 베푼다.
압살롬에게는 다말이라는 예쁜 누이가 있었다. 그런데, 자기의 형 즉 다윗의 맏아들인 암논이 자신의 누이를 좋아해서 겁탈하였다. 암논에게 올무를 놓고 자신의 집으로 불러서 하인들을 시켜서 죽여 복수를 한다.
여러 자식의 부모의 입장이 되면, 그 자식들이 서로 사이 좋게 지내는 것을
보면 저절로 입가에 미소가 진다고 한다. 자식들이 갈라져 싸울 때에는 이마에 기러기가 한마리씩 그려 진다고 한다. 더구나
압살롬이 암논을 살해하는 것을 들은 다윗은 심히 통곡하고 마음에 안타까움이 가득해진다. 이대로 부자 사이가 멀어지나 했었다.
그러나, 압살롬이 다윗의 눈을 피해서 3년간 다른 곳에서 지냈기에, 다윗은 압살롬을 더 이상 미워하지 않고, 오히려 보고 싶은 마음이 점점 생기게 되었다(삼하 13장). 다윗은 결국 아버지의 사랑하는 마음으로 압살롬을 용서한다.
압살롬이 자신의 아버지를 향해 반기를 들다
압살롬은 점차 야심을 드러낸다. 자신을 위해서 병거와 말을 준비하고,
백성들의 인심을 얻기 위해서 왕의 이름을 팔아서 행동하게 된다. 이미 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끌어 모았기 때문에 인심은 압살롬에게로
흐르게 되고, 자신이 왕이 되기 위해서 아비 다윗을 죽이려는 압살롬의 계획은 점진적으로 진행 되었다. 압살롬은 계교를 써서
헤브론으로 아버지 다윗왕의 부하들을 데려가서 제사를 지내는 척 하면서 왕 즉위식을 한다. 헤브론은 다윗이 기름부음을 받고 왕이
된 장소이기도 하며, 아브라함이 하나님께 제단을 쌓은 장소이기도 하다. 이렇게 준비를 거의 마친 압살롬은 다윗의 고문이요, 지혜가
충만한 아히도벨을 자신의 조력자로 만들어 내서 다윗을 몰아내고 자신이 예루살렘에 입성하는데 큰 원동력으로 삼았다.
다윗이 예루살렘성에서 도망하다
다윗은 압살롬의 반란에 손 쓸 겨를도 없이 예루살렘 성에서 도망하게 된다.
사람이 위기를 당하게 되면 그 사람의 깊이를 알게 된다고 했다. 다윗은 자식에게 쫓겨 나서 죽음에 이를 수도 있는 상황에서조차
자신에게 큰 도움이 될 수 있는 제사장에게 다시 돌아가 있기를 명하였고, 밀정이 될 수 있는 자신의 절친한 친구 후새를
압살롬쪽으로 잠입시켜서 자신의 밀정으로 삼는다. 어려운 상황에서 믿기 어려운 이방사람이 함께 있기를 청했을 때에도 믿음으로 그를
거두었던 것이다. 하지만, 아무리 사람의 깊이가 깊어도 어려움을 바로 피할 수는 없는 바 다윗은 자신의 낳은 자식에게 생사를
넘나드는 쫓김을 당하게 된다.
전열을 정비한 다윗. 다윗과 압살롬의 최후의 전투와 압살롬의 죽음
마하나임에서 전열을 정비한 다윗은 군사들을 정비하고 최고의 장수 요압에게
압살롬과 싸우도록 지시한다. 다윗도 출전하고자 하나 사람들이 출전하지 못하도록 말린다. 다윗은 그 말을 들으면서 모든 장군들과
백성에게 다음 내용을 명령한다.
왕이 요압과 아비새와 잇대에게 명령하여 이르되 나를 위하여 젊은 압살롬을 너그러이 대우하라 하니 왕이 압살롬을 위하여 모든 군지휘관에게 명령할 때에 백성들이 다 들으니라(사무엘하 18:5)
부모의 입장이 되지 않고서는 이해할 수 없는 대목이다. 자신을 죽이기
위해서 칼날을 들었던 자식에게 전쟁을 하러 나가면서 너그러이 대우하라(살려주라)는 것은 다른 사람들이 들었을 때 이해할 수도,
행할 수도 없는 대목인이다. 다윗의 대장군 요압은 압살롬의 머리가 나무에 걸려 매달려 있는 것을 보고 다윗의 명을 어기고 결국
죽이고 만다.
내 아들 압살롬아 내 아들 압살롬아 차라리 내가 너를 대신하여 죽었더면
다윗은 싸움을 전하는 전령이 도착하면 다른 것은 묻지 않고 오직 압살롬의 안부만 물었다.
삼하 18:28 아히마아스가 외쳐 왕께 아뢰되 평강하옵소서 하고 왕 앞에서
얼굴을 땅에 대고 절하며 이르되 왕의 하나님 여호와를 찬양하리로소이다 그의 손을 들어 내 주 왕을 대적하는 자들을 넘겨
주셨나이다 하니 왕이 이르되 젊은 압살롬은 잘 있느냐 하니라 …
삼하 18:32 … 젊은 압살롬은 잘 있느냐 …
다윗은 전쟁에는 관심이 없었다. 이 시점 만큼은 다윗의 관심의 전부는 다윗의 아들 압살롬이었던 것이다.
삼하 18:33 왕의 마음이 심히 아파 문 위층으로 올라가서 우니라 그가 올라갈 때에 말하기를 내 아들 압살롬아 내 아들 내 아들 압살롬아 차라리 내가 너를 대신하여 죽었더면, 압살롬 내 아들아 내 아들아 하였더라
다른 설명이 더 필요할까. 다윗의 마음을 너무도 자세히 나타낸 이 성경 구절에서 우리는 다윗과 압살롬에 대하여 그 다윗의 내리
사랑을 마음 속에서부터 깊이 새길 수 있다. 얼마나 사랑하였으면, 자신에게 칼을 겨눠 죽일려고 했던 자녀의 죽음을 애통해 하며
“차라리 내가 너를 대신하여 죽었으면 좋았을 것을…” 하고 대성통곡을 했던 것이다. 이 이야기를 볼 때마다 마음이 저리고 아프고
쓰려 온다. 온 왕국의 미래가 걸린 싸움에서도 오직 다윗의 관심은 압살롬이었고, 압살롬은 다윗의 전부였던 것이다. 이것이 부모의
사랑이고, 하늘에서 우리를 낳으신 하나님의 사랑이라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 2월 24일(목)
♦ 오늘 읽어야 할 말씀 : 사무엘하 18:1∼33 ♦ 묵상을 위한 주제 : 왕은 나가지 마소서(3절) ♦ 성구 : 백성(百姓)들이 가로되 왕(王)은 나가지 마소서 우리가 도망(逃亡)할찌라도 저희는 우리에게 주의(注意)하지 아니할 터이요 우리가 절반(折半)이나 죽을지라도 우리에게 주의(注意)하지 아니할 터이라 왕(王)은 우리 만명(萬名)보다 중(重)하시오니 왕(王)은 성(城)에 계시다가 우리를 도우심이 좋으니이다.
“왕은 나가지 마소서(You must not go out)”
‘왕은 나가지 마소서’ 이 말은 다윗에 대한 백성들의 마음을 가늠케 하는 말씀이라고 하겠습니다.
사랑하는 아들 압살롬의 반란으로 다윗 왕은 큰 충격을 받고 좌절해 있었습니다. 그러나 다윗을 따르는 사람들의 헌신적인 협력과 도움에 인해 용기를 회복했습니다.
다윗을 지지하는 사람들과 압살롬의 반역에 가담한 사람들의 전쟁이 시작됩니다.
압살롬의 반란군은 다윗을 죽이려고 다윗이 피난해 있는 곳까지 쫓아왔습니다.
뛰어난 전략가인 다윗은 자신에게 속한 군사들을 재편하여 군대를 정비한 후 군을 삼 대로 나눠 각각 요압과 아비새와 잇대가 통솔하도록 합니다.
군대를 재편하여 적극적인 공세 작전을 명령한 다윗이 전투에 참여하려고 할 때 백성들은 왕은 전쟁에 참여하지 말고 후방에서 지켜보는 것이 바람직한 작전이라고 제안한 것이 "왕은 나가지 마소서!" 라고 하겠습니다.
모든 백성들과 군장관들이 다윗의 생명을 소중히 여겼던 현상이라고 하겠습니다.
다윗은 세 장수들에게 비록 반란을 일으켰던 아들이지만 압살롬을 너그러이 대할 것을 부탁합니다.
다윗의 군대가 출정하여 에브라임 수풀에서 싸웠습니다.
이 전투에서 압살롬의 반란군은 2만 명 가까운 희생자를 내면서 패하고 말았습니다.
압살롬이 큰 상수리나무에 걸린 것을 본 다윗의 군사가 요압 장군에게 보고했을 때 요압은 그 군사에게 왜 압살롬을 죽이지 않았느냐고 꾸짖었습니다.
그 군사는 압살롬을 죽이지 말라는 다윗의 분부를 상기시키면서 요압의 명을 거절하였습니다.
이에 요압은 손에 작은 창 셋을 가지고 가서 아직 살아 있는 압살롬의 심장을 찔렀습니다. 그리고 요압의 병기를 맡은 소년 열 명이 압살롬을 에워싸 쳐 죽였습니다.
압살롬은 생전에 자식이 일찍 죽어 자기 이름을 남길 방법이 없었으므로 스스로 자기를 위하여 비석을 세웠습니다.
아히마아스는 요압에게 승전 소식을 다윗에게 전하겠다고 자청했습니다. 그는 제사장 사독의 아들로서 평안과 승리의 소식을 전하는 아름다운 발의 역할을 자청한 것입니다.
그러나 요압은 아히마아스 대신 구스 사람을 전령으로 보냅니다. 그 이유는 압살롬의 전사 소식을 듣고 다윗이 그 전령에게 화를 내릴 수도 있을 것을 염려했기 때문입니다.
요압은 아히마아스를 귀하게 여겼으므로 혹시 당할지도 모르는 화에서 그를 피하도록 하기 위해 구스 사람을 대신 보냈습니다.
구스 사람의 뒤를 이어 아히마아스가 소식을 전하려고 달려갔습니다.
다윗이 두 전령에게 압살롬의 안부에 대하여 물었습니다.
다윗은 압살롬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마음 아파하며 슬퍼했습니다.
오늘의 시대를 바라보는 그리스도인들의 마음이 다윗이 압살롬의 죽음을 슬퍼하는 것처럼 비통함을 느끼게 합니다.
왜냐하면 자유민주주의 국가에서 어떻게 무너진 공산주의 사상을 신봉하는 사람들이 권력을 잡고 후퇴하는 역사를 따라가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역사의 주인이 되신 여호와 하나님께서 무에서 유를 창조하셨던 것처럼 어지러움과 혼돈과 거짓된 사상과 이념에 사로잡힌 사람들을 무너트리고 자유민주주의를 위한 질서를 반드시 세워주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믿음과 소망을 갖고 자유대한민국을 사랑하는 마음에 흔들림이 없어야 하겠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교회를 사랑하는 믿음으로 나라와 민족을 사랑하는 일에 모두가 함께 일어나야 하겠습니다.
♪ 찬양 / 어느 민족 누구게나
예수 내 구주! 예수 내 생명! 예수 내 권세!
유명한 역사가 찰스 베어드(Charles a. Beard 1874-1948)는 역사를 연구한 끝에 다음 네 가지 교훈을 말했다.
첫째, 개인이나 국가가 권세욕에 날뛰면 반드시 망한다.
하나님과 백성이 무서운 줄 모르고 권세욕에 사로잡혀 날뛰는 지도자가 나타날 때면 이미 역사는 망조로 접어든 것이다
둘째,하나님의 공의의 맷돌은 천천히 도는 것 같지만 모든 악을 빠짐없이 분쇄한다.
역사의 맷돌이 너무 천천히 돌아 하나님이 계신지 의심하기도 하지만 결국 의는 의로, 불의는 불의로 나뉜다 시간이 지나면 어느 순간에 정의와 불의가 반드시 드러난다.
셋째, 벌이 꽃에서 꿀을 도둑질해 가지만 오히려 그것이 열매를 맺게 하는 것처럼, 인류 역사에는 언제나 강탈하는 자가 나타나 악을 행하지만 그로 말미암아 행하시는 하나님의 섭리가 전개된다.
넷째, 날이 어두워질수록 별이 선명하게 보이듯이 세상에 암흑과 혼란이 깊어 갈수록 진리의 가치와 희망의 깃발이 선명하게 드러난다.
이 모두를 역사가 증명하고 있다.
하나님은 안 계신 것이 아니다 인간이 죄악으로
눈이 어두워져 하나님을 보지 못할뿐이다. 인간과 역사의 위기는 자원이
바닥나 굶주리거나 전쟁이 발발하는데 있지않다. 인간과 역사의 주인이신 하나님을 잊어버린 데 있다 세상만물을 창조하신 분,
인간의 삶과 죽음을 주관하시는 분, 의와 불의를 판단하시는 공의의 신이 누구인지 아는사람에게는 위기는 위기가 아니다
미국의 역사가 찰스 베어드(Charles A. Beard, 1874~1948)에게 기자들이 와서 물었다.
"박사님, 인류 역사를 연구하면서 깨달은 것을 핵심적으로 요약하면 무엇입니까?"
그러자 찰스 베어드 박사는 확신에 찬 목소리로 대답했다.
"나는 역사를 연구하면서 네 가지 진리를 깨달았습니다.
이 네 가지가 그 많은 시간, 세계 역사를 연구하면서내가 얻은 것의 전부입니다."
그가 깨달은 네 가지 진리는
첫째는 하나님의 계획에는 차질이 없다
벌은 꽃이 만들어 놓은 꿀을 탈취한다.
하지만 벌이 꿀을 빼앗아가면서 동시에 꽃가루를 옮겨 수정이 되게 하고 열매를 맺게 한다.
인류의 역사를 살펴보면 벌과 같은 강도가 항상 악을 행하지만, 그들을 통해서도 합력해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의 계획은 차분히 이루어진다.
하나님이 주관하시는 역사에는 실패가 없다.
둘째는 하나님의 맷돌은 천천히 돌아간다
하나님의 맷돌이 너무나 천천히 돌아가서 사람들은 과연 하나님의 심판이 있는지를 의심하게 된다.
그러나 하나님의 맷돌은 보드랍게 갈아 결국은 의는 의로, 불의는 불의로 골라내고야 만다는 것이다.
인생에 있어서 100년이라고 하면, 굉장히 긴 시간이지만 인류의 역사로 보면 그것은 순간이다.
역사를 배우면 50년, 100년, 200년이 흘러가면서 하나님께서 어떻게 심판하셨는지를 살펴볼 수 있다.
셋째는 어두움이 깊을수록 별이 또렷하게 보인다
어두워야 별이 보인다.
어두움은 끝이 아닌 새로운 시작이다.
따라서 "이제 모든 게 끝났다.""우리는 망했다.""소망이 없다"는 비관할 필요가 없다.
암흑과 혼란이 깊어 갈수록 소망의 별이 나타날 때가 된 것을 역사가 증명하기 때문이다.
넷째는 하나님이 망하게 하실 때는 교만하게 하신다
역사의 입장에서 본 하나님이 어떠한 것을 멸하려 하실 때는 개인이건 국가이건 막론하고 교만하게 하신다는 것이다.
자기 자랑, 자기 의, 자기 교만에 빠질 때 반드시 망하게 된다.
교만에 날뛰는 개인이나 국가나 단체나 민족을 보면 망할 때가 가까운 것이다.
어떤 나라나 개인이 교만한 모습을 보이면,"곧 망할 때가 됐군!"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정답이다.
지팡이는 험한 길을 갈 때 필요한 것이고,
로프는 높은 산 오를 때 필요한 것입니다.
빛은 어두운 땅에 필요한 것이고,
믿음과 소망은 시대가 암울할 때일수록 더욱 필요한 것입니다.
역사는 절망하는 사람에게는 기회를 주이 않는다. 절대 희망이 이 시대를 살아가는 주어라고 하겠다. 희망은 곧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다가 올 것이다.
♦ 2월 23일(수)
♦ 오늘 읽어야 할 말씀 : 사무엘하 17:1∼29 ♦ 묵상을 위한 주제 : 여호와께서(14절) ♦ 성구 : 압살롬과 온 이스라엘 사람들이 이르되 아렉 사람 후새의 모략(謀略)은 아히도벨의 모략(謀略)보다 낫다 하니 이는 여호와께서 압살롬에게 화(禍)를 압살롬에게 화(禍)를 내리려 하사 아히도벨의 좋은 모략(謀略)을 파(破)하기로 작정(作定)하셨음이더라.
“여호와께서(For the Lord)”
다윗은 아들 압살롬의 반란으로 예루살렘 궁을 떠나 피난길에 올랐습니다.
심지어 다윗의 전략가 아히도벨이 압살롬을 지지하므로 압살롬의 반역은 성공하는 것 같았습니다.
왜냐하면 아히도벨의 전략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명령과 같은 것으로 인정되었기 때문입니다(16:23).
아히도벨은 시대를 읽을 수 있는 눈과 통찰력을 갖춘 아주 유능한 전략가 이었습니다.
아히도벨이 다윗을 버리고 압살롬을 지지하였다는 것은 사람의 계획이 아니라 하나님이 다윗을 깨우치기 위한 섭리라고 하겠습니다.
아히도벨은 압살롬에게 일만 이천 명의 용사들을 동원하여 다윗을 죽이겠다는 전략을 제안했습니다.
이때 압살롬은 후새를 찾았습니다.
후새는 다윗 왕이 압살롬의 진영에 머물며 압살롬의 전략을 사전에 알기 위하여 심어놓은 사람이었습니다.
오늘의 말씀은 압살롬의 반역과 다윗의 도망이라는 극과극으로 치달은 급박한 상황속에서 압살롬에게 유리했던 전세가 급속하게 다윗에게 유리하도록 전개되는 계기가 되었던 매우 중요한 사건을 소개합니다.
압살롬은 아히도벨의 전략보다는 오히려 후새의 계획을 선택했습니다.
아히도벨의 제안은 다윗 왕만 제거하면 민심이 압살롬에게 돌아온다는 것이었습니다.
최소한의 피만 흘리고 반역을 성공으로 이끌 수 있는 아주 좋은 계책이었습니다.
이와 같은 아히도벨의 계략을 압살롬을 비롯하여 이스라엘 장로들이 모두 옳다고 했습니다.
아히도벨의 전략을 모두가 찬성하였기 때문에 행동으로 옮기면 반역은 성공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압살롬은 아렉 사람 후새를 불러 후새의 전략을 들어보자고 합니다.
후새는 다윗의 친구로 예루살렘을 떠날 때 함께 동행하지 말고 압살롬의 진영에 머물면서 압살롬 진영의 전략을 파악기 위하여 보냈던 심복이었습니다(15:37).
압살롬이 후새를 불러 그의 의견을 물은 것은 다윗 왕을 죽이려는 계획을 신중하게 진행하려는 것이었지만 그 배후에는 압살롬의 반역을 실패로 돌리게 하기 위한 하나님의 섭리라고 하겠습니다.
“압살롬과 온 이스라엘 사람들이 이르되 아렉 사람 후새의 계략은 아히도벨의 계략보다 낫다 하니 이는 여호와께서 압살롬에게 화를 내리려 하사 아히도벨의 좋은 계략을 물리치라고 명령하셨음이더라”(14절)
후새는 압살롬에게 ‘단에서 브엘세바까지 바닷가의 모래같이 왕께로 모으라’고 합니다.
‘단에서 브엘세바까지’는 이스라엘 전역을 가리키는 관용적인 표현입니다.
후새는 이와 같은 표현으로 압살롬의 왕권이 이미 이스라엘 전역에서 인정되고 있으며, 압살롬의 말 한마디면 온 백성이 따를 것이라는 사실을 암시하면서 압살롬을 추켜세웠습니다.
뿐만아니라 후새는 계속해서 ‘친히 전장에 나가라’고 합니다.
이것은 압살롬을 위한 것이 아니라 압살롬을 전장으로 유인하여 죽이려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압살롬은 후새의 제안을 받아들였습니다.
왜냐하면 예전에 다윗이 블레셋과의 전투에서 승리한 후에 이스라엘 백성들로부터 열렬한 환영을 받았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압살롬은 다윗 보다 더 큰 공을 세워 왕위를 더욱 견고히 하려는 공명심에 사로잡혀 있었습니다.
사랑하는 형제와 자매들이여,
사람은 누구나 헛된 영광을 쫓아 자기 이름을 드러내려는 욕심에 사로잡혀 압살롬과 같이 패망의 길을 좋아하는 타락한 본성을 갖고 있습니다.
타락한 본성 보다는 겸손히 주님을 닮아가는 신앙생활에 성공하는 소금과 빛의 비밀을 간직한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하나님이 대답하셨습니다. '그래, 좋다. 일년동안 너희 원하는대로 날씨를 변화시켜 주마.'
그래서 농부들은 자기들의 경험에 의해서 하나님께 요구했습니다. '하나님, 지금은 비를 주세요.' '하나님, 지금은 햇빛을 주세요.' '하나님, 지금은 바람을 주세요.'
가을이 되어 들판에 곡식이 잘되어 추수하기에 이르렀습니다. 농부들은 신이 나서 추수를 하고 탈곡을 하였습니다. 그런데
이게 웬 일입니까? 막상 탈곡기에 넣어 탈곡을 해보니 알곡이 없습니다.
'아니, 하나님, 왜 알곡이 하나도 없습니까?' 농부들은
의아해서 물었습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대답하셨습니다. '나는 너희들이 원하는대로 다 주었다. 비를 원할 때는 비를, 햇빛을
원할 때는 햇빛을, 바람을 원할 때는 바람을 주었다. 그런데 너희가 언제 나에게 알곡을 달라고 하였느냐? 너희들은 알곡 달라는
말은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그제서야 농부들은 자신들의 경험에 의해서 하나님께 주문하는 것보다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기고
하나님의 선하신 뜻대로 구하는 것이 가장 좋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 2월 22일(화)
♦ 오늘 읽어야 할 말씀 : 사무엘하 16:1∼23 ♦ 묵상을 위한 주제 : 나의 원통함을 감찰하시리니(12절) ♦ 성구 : 혹시(或時) 여호와께서 나의 원통(冤痛)함을 감찰(監察)하시리니 오늘날 그 저주(詛呪) 까닭에 선(善)으로 내게 갚아주시리라.
“나의 원통함을 감찰하시리니(The LORD will see my distress.)”
시바(Ziba)는 므비보셋의 사환입니다. 특별히 다윗 왕이 친구 요나단의 아들 므비보셋을 위하여 사울 왕의 기업을 모두 므비브셋에게 상속하도록 배려하고 시바를 사환으로 임명했습니다.
시바는 많은 음식을 나귀에 싣고 다윗을 찾았습니다.
실은 그 많음 음식은 므비보셋의 소유물입니다. 주인의 허락도 받지 않고 시바는 다윗의 환심을 얻으려고 이와 같은 것을 준비한 것입니다.
후에 알게 되지만 시바는 므비보셋을 배반하고 다윗을 찾아온 것이었습니다.
다윗은 므비보셋이 함께 오지 않고 시바만 온 것을 이상하게 생각하여 "네 주인(사울 왕)의 아들이 어디있느냐?" 하고 물었습니다.
시바는 므비보셋을 속였지만 다윗이 위기에 처했을 때 다윗을 따라나섰으므로 므비보셋의 기업을 넘겨받았습니다.
므비보셋은 다윗을 배신한 것이 아니라 다리가 불편하여 시바의 숨은 의도를 알면서도 쫓아오지 못한 것이었습니다.
다윗이 예루살렘을 떠나 피신할 때 마침 사울의 집 족속 시므이가 다윗을 향하여 "피를 흘린 자여 비루한 자여 가거라 가거라" 하며 돌을 던졌습니다.
그러자 아비새가 다윗에게 저 사람의 머리를 자르겠다고 단호하게 말할 때 다윗은 "여호와께서 저 사람을 통하여 다윗을 저주하라" 하신 것이므로 저주하게 내버려 두라고 합니다.
이와 같은 모습에서 다윗의 위대함을 엿볼 수 있습니다.
다윗은 아들 압살롬의 반역과 시므이의 저주를 들으며 자신의 잘못을 깨닫게 하는 하나님의 섭리를 깊이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자신의 잘못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 압살롬의 반역과 시므이의 저주로 나타났다는 분명한 믿음과 생각이 다윗으로 하여금 더욱 겸손하게 다듬었습니다.
나의 고통과 아픔을 해결해주고 나를 높여야만 하나님을 인정하겠다는 것이 아니라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나를 이끄실지라도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믿고 영광을 돌리겠다는 믿음이 다윗의 위대함이라고 하겠습니다.
"혹시 여호와께서 나의 원통함을 감찰하시리니"
자신의 죄를 알고 겸손하게 자기를 낮출 줄 아는 사람만이 이런 고백을 할 수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반드시 나의 원수를 갚아주실것이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혹시 그렇게 하실지도 모른다는 고백입니다.
하나님이 그리하지 아니하실지라도 다윗은 하나님께 영광돌리는 일을 멈추지 않을 것입니다.
만사형통하기 때문에 믿는 것이 아니라 만사불통할지라도 하나님은 항상 함께 하신다는 믿음을 회복해야 합니다.
어려운 일을 당할지라도 하나님께서 더 좋은 길로 이끌어 주실 것이라는 확신을 갖고 그 날을 기다리는 변함없는 믿음을 회복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오 주여 믿음의 지도자 소망의 지도자 사랑의 지도자를 세워주셔서 남과 북을 하나로 묶어 세계 선교를 위한 복음의 나라가 되어 하나님이 주인되는 세상 이루게 하옵소서.
♪ 찬양 / 나 어느 곳에 있든지
예수 내 구주! 예수 내 생명! 예수 내 생명!
텍사스 낙태금지법, 악마는 디테일에 숨어있다
트럼프 대통령이 2020년 에이미 코니 배럿 대법관을 임명하면서 미국 대법원은 보수 6 대 진보 3의 구도로 재편됐습니다.
보수가 절대 다수를 차지하는 대법원이 올해 뒤집을 것으로 예상되는 판결 중 하나가 여성이 임신을 중절할 권리를 인정한 로(Roe) 대
웨이드(Wade) 판결입니다.
* 로대 웨이드 판결이란? 임신 중절 여부를 선택할 권리는 아이를 밴 여성에게 있으며, 임신부의 선택을 정부가 강제하거나 제약할 수 없다.
태아의 심장 박동이 감지되기 시작하는 임신 6주 이후의 낙태를 사실상 전면 금지한 미국 텍사스주의 낙태금지법이 지난 1일 예고한 대로 발효됐습니다. 미국 대법원은 법의 시행을 막아달라며 낙태 클리닉과 시민단체가 제출한 긴급 청원을 기각했습니다.
임신 중절 여부를 선택할 권리는 아이를 밴 여성에게 있으며, 임신부의 선택을 정부가 강제하거나 제약할 수 없다고 명시한 대법원의 로(Roe) 대
웨이드(Wade) 판결 이
나온 게 지난 1973년의 일입니다.
이후 공화당과 종교 단체를 비롯한 보수 세력은 줄기차게 낙태를 금지하거나 제약하려고
노력해왔습니다. 텍사스주의 새 낙태금지법은 보수 진영에는 지난 반세기에 걸친 노력이 결실을 볼 수 있는 획기적인 법입니다. 반대로
진보 진영은 상당한 타격을 입었습니다.
그동안은 1992년에 있었던 가족계획연맹(Planned Parenthood) 대 케이시(Casey) 판결에
따라 아이가 태어났을 때 스스로 연명할 수 있는 시기로 간주하는 임신 22~24주가 낙태를 허용하는 기준이었습니다. 24주
이후의 낙태는 아이는 물론 산모도 위험할 우려가 크기 때문에 대체로 금지돼 있거나 엄격한 제약이 따릅니다. 하지만 그전에는
임신부가 임신을 중단하기로 할 때 국가가 과도하게 개입할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이 기준이 텍사스 낙태금지법과 함께 임신 6주로
앞당겨진 겁니다. 임신 6주에는 임신 사실도 잘 모르는 경우가 많습니다.
텍사스주는
어떻게 법과 다름없는 대법원 판례를 정면으로 거스르는 법안을 제정할 수 있던 걸까요? 여기에는 보수가 절대 우위를 차지하고 있는
대법원의 대법관 구도도 한몫했지만, 기존의 낙태 금지 시도와 달리 새로운 전략을 반영한 법조문도 결정적인 역할을 했습니다.
텍사스주 낙태금지법의 디테일을 찬찬히 뜯어보면, 보수 진영은 진보 진영이 그동안 써온 전략을 훌륭히 벤치마킹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텍사스주의
법을 살펴보기 전에 먼저 미국 대법원과 대법관의 구성을 잠깐 생각해 봅시다. 트럼프 전 대통령은 재선에 실패했지만, 4년 임기
동안 무려 3명의 대법관을 지명했고, 지명한 대법관은 모두 논란 끝에 의회의 비준을 받았습니다. 특히 지난해 (진보 성향인) 루스 베이더 긴즈버그 대법관이 사망하며 생긴 공백을 (보수 성향인) 에이미 코니 배럿 대법관으로 메우면서 대법원은 보수 6대 진보 3의 구도로 재편됩니다.
특히
독실한 가톨릭 신자로 여성의 임신 중절을 금지하거나 제약하는 판결을 여러 차례 내린 코니 배럿 판사가 대법관이 되면서 6:3의
구도가 확립되자, 가족계획연맹을 비롯한 시민단체들은 대법원이 로 대 웨이드 판결을 뒤엎는 건 시간 문제라며 우려했습니다. 반대로
대법원은 어디까지나 헌법을 해석하고 법을 제정, 집행한 절차가 적법했느냐를 따지는, 기본적으로 보수적이고 의사결정 과정이 느릴
수밖에 없는 기관이므로, 벌써 반세기 가까이 이어지며 자리를 잡은 로 대 웨이드 판례를 대법원이 앞장서서 번복하는 일은 없을
거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공화당이
다수인 텍사스주 의회와 그렉 애봇 주지사가 효과적으로 공략한 점이 바로 이 점입니다. 즉, 지난 5월에 애봇 주지사가 서명했고,
지난 1일 발효된 낙태금지법은 로 대 웨이드 판례를 비롯해 여성의 낙태를 국가가 금지하고 제약해선 안 된다는 미국의 현행법을
실질적으로 어긴 법입니다. 그러나 이 법 자체에 관한 소송이 벌어져 지방법원, 항소법원을 거쳐 대법원까지 가려면 상당히 긴 시간이
걸립니다. 앞서 말했듯이 대법원이 판결을 내리는 과정은 빠르지 않으니까요. 또 매년 7천여 건의 사건이 대법원에 접수되지만, 이
가운데 대법원이 판결을 내리는 사건은 100여 건에 불과합니다.
안전한
임신 중절은 여성의 권리라고 주장하는 가족계획연맹 등 시민단체들은 대법원에 (시간이 오래 걸리는 정식 재판 대신) 긴급 청원을
넣었습니다. 헌법을 명백히 어긴 법을 텍사스주가 제정했으니, 대법원이 이 법을 무효로 되돌려달라고 요청한 겁니다. 그러나 바로
여기서 6:3이라는 보수 우위의 구도가 위력을 발휘합니다. 존 로버츠 대법원장은 텍사스주의 낙태금지법의 효력을 대법원이 당분간
정지해야 한다며 진보 성향 대법관들과 같은 의견을 냈지만, 로버츠 대법원장이 없어도 여전히 다수인 보수 성향 대법관 다섯 명이 이
사안은 대법원이 아직 판단할 사안이 아니라며, 아무것도 하지 않았습니다. 물론 이 법과 관련해 하급 법원을 거친 정식 재판이
있던 것도 아니며, 구체적으로 텍사스주 낙태금지법이 헌법의 어떤 점을 어떻게 어긴 건지 따져보고 다퉈봐야 하는지도 아직 분명하지
않지만, 어쨌든 대법원은 아무것도 하지 않음으로써 위헌 소지가 다분한 법을 주가 제정, 집행하는 걸 방관한 셈이 됐습니다.
소수
의견 편에 선 대법관 4명은 이례적으로 각자 서면으로 의견을 제출했습니다. (원래는 한 명이 대표로 의견을 내는 게 보통) 소냐 소토마요르 대법관이 헌법을 명백히 위반한 법이 버젓이 시행된 걸 모른 척하고 넘어가는 상황을 개탄하며, 좀처럼 쓰지 않는 격정적인 표현을 썼습니다.
텍사스주의 법은 헌법이 보장한 여성의 기본권을 제한하는 충격적인 법이다. 이런 법을 막지 않고 있다니,
다수 의견에 선 대법관들은 지금 모래에 머리를 처박고 있다. (The majority of the courts are
burying their heads in the sand.) – 소토마요르 대법관
우리말로는 ‘눈 가리고 아웅’ 한다는 표현과 비슷합니다.
보수
진영은 오랫동안 낙태를 금지하거나 최소한 국가가 개입할 수 있는 주 수를 앞당기려는 시도를 멈추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여성의
임신 중절 권리를 제약하는 법은 그 자체로 로 대 웨이드 판례를 어기는 셈이 돼 연방법원에서 효력이 취소되곤 했습니다. 주 의회를
공화당이 장악하고 있어 법이 통과되더라도 거기까지였던 겁니다. 그렇다면 왜 연방 법원은 텍사스주가 제정한 이번 낙태금지법을 막지
못했을까요? 법조문을 자세히 뜯어보면 답을 찾을 수 있습니다.
우선
텍사스 낙태금지법에는 임신 중절을 못 하게 하는 주체가 명시돼 있지 않습니다. 지금까지 낙태금지법들은 주지사나 주 법무부장관 등
임신 몇 주 이후의 낙태를 금지하는 주체를 명시했습니다. 명시된 주체는 곧바로 로 대 웨이드 판례를 비롯해 연방법, 나아가
헌법을 어긴 주체로 특정돼 소송 대상이 됐죠. 그러면 연방 법원이 나서서 법을 무효로 한 겁니다.
그런데
텍사스 낙태금지법은 임신 중절을 금지하는 주체가 주지사나 법무부장관이 아니라고 오히려 명확히 제외하고 있습니다. 정부는 직접
낙태를 못 하게 막는 법을 집행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소송 대상이 될 수도 없는 거죠. 그렇다면 누가 낙태를 막죠? 텍사스주
의회는 그 권한을 주 정부를 제외한 이 세상의 모든 사람에게 위임(deputize)했습니다. 누구나 임신 6주 이후에 낙태하려는
사람, 임신 중절 수술을 해주는 클리닉 등 낙태에 도움을 주는 사람을 찾아 신고하면 포상금을 주겠다고 한 겁니다.
정확히
말하면 정부가 직접 포상금을 주는 건 아니고, 낙태를 시도하는 사람이나 임신 중절 수술을 하는 클리닉 등 낙태금지법을 위반하는
사람이 있으면, 누구나 이들에게 민사 소송을 제기할 수 있고, 소송에서 이기면 최소 1만 달러의 배상금과 소송 비용을 받을 수
있게 했습니다. (피고는 재판에서 이기더라도 소송 비용을 원고에게 청구할 수 없습니다.) 임신 중절을 돕는 사람의 범주도 매우
넓은데, 낙태 클리닉을 소개해주거나 클리닉까지 우버를 타고 갈 때 우버 기사도 피고가 될 수 있습니다.
법의
목적은 명확합니다. 임신 중절에 관여하는 모든 이들에게 막대한 비용 부담을 질 수 있다는 공포를 심어(terrorize) 낙태를
막겠다는 거죠. 법이 발효된 뒤 실제로 텍사스주에서는 임신 중절 수술이 자취를 감췄습니다. 낙태 클리닉과 시민단체들은 법이
위헌이라며 연방 법원에 소를 제기했지만 잇따라 기각됐습니다. 주지사나 주 법무장관이 법을 집행하지 않는다고 명시됐기 때문에
이들에게 소를 제기할 수 없다고 판단한 거죠. 이들에게 남은 선택지는 대법원에 긴급 청원을 제기하는 것밖에 없었고, 그 결과는
앞서 설명한 대로입니다.
텍사스
낙태금지법이 성공을 거두면서 공화당이 주 의회 다수당인 다른 주들에서도 비슷한 법이 잇달아 제정될 것으로 보입니다. 진보
진영에는 악몽의 시작이 될지도 모르죠. 흥미로운 건 정부가 직접 나서서 법을 집행하는 주체가 되는 대신 특정하기 어려운 개인들에게
법을 집행할 권한을 위임한 보수 진영의 전략이 실은 진보 진영에서 오랫동안 써온 전략이라는 점입니다.
덴버대학교 조슈아 윌슨 교수가 워싱턴포스트 멍키 케이지에
한 분석을 보면, 특히 인종 차별을 금지한 민권법(civil rights laws)을 정착시키는 데 진보 진영은 개인 차원에서
줄기차게 소송을 제기하는 전략을 세워 효과적으로 활용했습니다. 당시 보수 진영은 민권법을 어겼다며 소송을 제기할 유색인종이나 여성
등 소수자들이 소송 비용을 마련하기 어려워할 거로 생각했지만, 오히려 진보 성향의 젊은 인권 변호사들이 인종 차별 사례들을
적극적으로 모아 소송을 대리하고 나서면서 민권법은 꾸준히 판례를 쌓을 수 있었습니다. 그렇게 경험을 쌓고 성장한 대표적인 법조인이
고 긴즈버그 대법관일 겁니다.
법조계가 진보 성향 일색으로 바뀌는 데 두려움을 느낀 보수 진영은
1980년대부터 보수적인 변호사, 법조인을 양성하려는 장기적인 전략을 세우고 로스쿨을 지원하기 시작합니다. 이런 노력이 낳은
대표적인 법조인이 코니 배럿 대법관입니다. 텍사스주 낙태금지법을 고안하고 제정하는 데는 이런 보수적인 로스쿨 출신의 변호사들이
많은 역할을 했습니다.
임신
중절 권리를 옹호하는 시민단체들은 텍사스주의 낙태금지법을 무너뜨리기 위해 다양한 시도를 할 겁니다. 먼저 대법원에 긴급 청원이
올라갔던 사안이 여전히 연방 항소법원에 계류 중이므로, 해당 판결이 나면 이 문제를 법원에서 다툴 수 있습니다. 또한, 텍사스주의
낙태 클리닉이 소송당할 것을 각오하고 임신 중절 수술을 해줄 수 있습니다. 그럼 보수 단체들이 해당 클리닉을 고발할 테고, 법정
공방이 시작되겠죠.
♦ 2월 21일(월)
♦ 오늘 읽어야 할 말씀 : 사무엘하 15:1∼37 ♦ 묵상을 위한 주제 : 사람의 마음을 도적하니라(6절) ♦ 성구 : 무릇 이스라엘 무리 중에 왕께 재판을 청하러 오는 자들에게 압살롬의 행함이 이 같아서 이스라엘 사람의 마음을 도적하니라.
“사람의 마음을 도적하니라(He stole the hearts of the men.)”
압살롬은 다윗 왕에게 백성들이 송사하려고 재판을 청하러 올 때에 그 사람을 불러 “너는 어느 성 사람이냐?” 묻고 난 후에 “네 일이 옳고 바르지만은 네 송사를 들을 사람을 왕께서 세우지 않으셨다” 하고 송사하는 사람의 마음을 사로잡았습니다.
대한민국 20대 대통령 선거일이 앞으로 17일 남았습니다.
그동안 주사파 세력들에 의해서 사회 여러 분야가 마음을 빼앗겼습니다.
심지어 '무상복지'라는 슬로건에 의해서 국가부체가 1인당 약 1,800만원 이라고 합니다. 이러한 상태가 계속되면 머지않아 국가는 파산될 것입니다.
이러한 때에 오늘의 말씀은 믿음의 사람들에게 시사하는 바가 매우 의미심장하다고 하겠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마음을 도적질한 압살롬은 4년 후에 헤브론에서 반역을 일으켰습니다.
‘이스라엘의 인심이 모두 압살롬에게 돌아갔다’는 소식을 듣고 다윗은 압살롬을 피하여 예루살렘을 떠나야 했습니다.
압살롬을 따라 예루살렘에서 헤브론으로 간 사람은 모두 이백 명이었습니다.
헤브론에 입성한 압살롬은 이스라엘 모든 지파에 정탐꾼들을 보내고 나팔 소리와 함께 압살롬이 왕이 되었다고 외치게 합니다.
압살롬의 계획대로 반역은 시작되었습니다. 아히도벨을 비롯한 많은 사람들이 압살롬의 반역에 합류하였습니다.
아히도벨은 다윗의 절친한 친구입니다. 그가 다윗을 배반한 이유는 개인적인 원한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밧세바의 아버지 엘리암은 아히도벨의 아들입니다. 다윗이 밧세바와 간음한 후 그녀의 남편 우리아를 최선전으로 보내어 전사하게 했던 사건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아마 그때부터 다윗에 대하여 몹시 분개했을 것입니다.
한편 다윗이 예루살렘 성을 떠날 때 블레셋에서 귀화한 “잇대”는 다윗과의 신의를 소중히 생각하고 함께 동행했으며 언약궤를 가지고 따라온 사독과 아비아달에게 언약궤를 다시 예루살렘으로 가져가라고 합니다.
왜냐하면 압살롬의 동태를 파악하여 보고하는 중대한 임무를 맡기려는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사독은 선견자이기 때문에 압살롬에게 피해를 입지 않을 수 있었고 또 성 안에 있으면서 압살롬의 정황을 살펴 다윗에게 알려줄 수 있도록 부탁한 것입니다.
다윗은 어려운 시기에 “후새” 라는 귀한 충신을 만나게 됩니다. 후새는 다윗과 함께하겠다고 했지만 다윗은 이를 만류하고 새로운 도움을 요청하게 됩니다. 즉 예루살렘으로 돌아가서 압살롬의 신하로 머물면서 압살롬과 아히도벨의 음모를 살펴서 알려달라고 부탁했습니다.
진실이 무너져버린 세상에서 진리를 위하여 힘과 지혜를 모아 함께 할 수 있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은 아직 소망이 있다는 증거라고 하겠습니다.
다윗에게 후새와 같은 충신과 사독과 같은 선견자가 있었다는 것은 흔들리는 이스라엘 왕국을 다시 바로 잡을 수 있는 희망의 등불과 같습니다.
자유민주주의 대한민국이라는 나라가 주체사상을 신봉하는 사람들에 의해서 몹시 흔들릴 때 자유와 평화를 지키려는 후새와 사독과 같은 믿음의 성도들이 남아 있다는 것은 곧 우리의 소망이될 것입니다.
사랑하는 믿음의 동지들이여! 나의 귀중한 한 표가 하나님을 부정하는 교회를 지킬뿐만 아니라 자유민주주의를 지킬 수 있는 소중한 권리가 된다는 것을 잊지마라야 하겠습니다.
믿음의 기도와 더불어 행동하는 신앙으로 올바른 주권을 행사하여 반드시 자유민주주의를 지켜내야 할 것입니다.
복음통일을 이루어 자유대한민국이 세계만방에 복음을 전하는 선교국가로 세워질 수 있도록 오늘도 삶의 현장에서 소금과 빛의 사명을 감당하는 일에 성공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20대 대통령 선거일 D-17일
♪ 찬양 / 나 주를 멀리 떠났다
예수 내 구주! 예수 내 생명! 예수 내 권세!
십계명의 제8계명은 도적질 하지 말라(출애굽기 20:15, 신명기 5:19)
본문은 마음을 도적질하는 압살롬에 관한 말씀을 소개합니다. 압살롬은 아버지 다윗이 왕으로 있을 때 반역을 일으켜 왕의 자리를 빼앗으려고 먼저 사람들의 마음을 도적질합니다.
요한계시록 9:21 여섯째 천사의 나팔 심판에 이어 "살인 , 복술, 음행, 도적질" 이란 죄를 말씀합니다. 마귀는 사람의 마음에 도적질의 유전인자를 집어 넣어 죄를 짓게 합니다.
마음의 주인은 누구인가?
요압을 이용하여 다윗과 거짓으로 화친한 척 한 압살롬은 반역을 위해 준비를 합니다. 그런데
압살롬이 준비한 것은 군사를 모으는 것이 아니라 백성들을 자신의 편으로 만드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을 보면 압살롬은 정치가
무엇인가를 알고 있었던 사람으로 여겨집니다. 백성들을 자신의 편으로 만들지 않고서는 아무리 반역을 하여 왕이 된들 진정한 왕이 될
수 없음을 생각한 것으로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압살롬은 백성들을 자기편으로 만들기 위해서 한 일은 백성들의 마음을 얻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백성들의 마음을 얻기 위해 한 것이 본문의 내용인데, 그것은 송사가 있어서 다윗에게 재판을 청하러 오는 사람들로 하여금
왕에 대해 불만을 갖게 한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압살롬 자신은 백성들을 위해 있는 것처럼 자신을 부각시킴으로써 마음을 얻었던
것입니다.
압살롬의 수완은 참으로 대단하다 할 수 있습니다.
3절의 “압살롬이 저에게 이르기를 네
일이 옳고 바르다마는 네 송사 들을 사람을 왕께서 세우지 아니하셨다”는 말을 보면 먼저 압살롬은 송사를 하고자 하는 사람에게
‘네가 바르다’는 말을 함으로써 그의 편을 들어주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사람은 자신의 말을 옳다고 해주는 사람을 좋아하지 않습니까? 아무리 친한 사람이라
할지라도 자신의 말을 틀렸다고 반박을 하면 기분이 상하고 마치 그가 내 편이 아닌 것 같은 생각을 하게 될 것입니다. 즉 나를
옳다고 해주는 사람을 내 편으로 인정하고자 하는 것이 사람의 습성인 것입니다.
이런 면에서 압살롬은 먼저 송사를 하고자 하는 사람의 행한 것이 옳고 바르다고 함으로써
압살롬이 그의 편이라고 생각하게 한 것입니다. 그리고 압살롬은 ‘네 일이 옳고 바르지만 네 송사 들을 사람을 왕께서 세우지
아니하셨다’는 말을 함으로써 현재 다윗의 정치에 대해 불만을 갖게 합니다. 다시 말해서 비록 네가 옳다고 해도 지금의 왕은 너의
옳음을 들어주지를 않을 것이라는 말로써 다윗에 대해 불신을 갖게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압살롬은 “또 이르기를 내가 이 땅에서 재판관이 되고 누구든지 송사나 재판할 일이
있어 내게로 오는 자에게 내가 공의 베풀기를 원하노라”(4절)는 말을 함으로써 마치 자신만이 백성들 편에 서서 모든 송사를
공정하고 바르게 판결해 줄 수 있는 사람으로 부각 시킨 것입니다.
이같은 압살롬의 수완은 백성들의 마음을 사로잡을 수 있는 것이 무엇인가를 제대로 알고
있음에서 나오는 것이었고, 백성들의 마음을 더욱 확고하게 자신에게 돌려놓기 위해 그는 백성들 앞에서 지극히 겸손한 자로 행세하기도
했던 것입니다. 이것은 5절의 “사람이 가까이 와서 절하려 하면 압살롬이 손을 펴서 그 사람을 붙들고 입을 맞추니”라는 말씀처럼
압살롬은 사람들 앞에서 왕자라는 권세를 내세우지 않기 위해 사람들이 절하는 것을 막음으로써 백성들로 하여금 압살롬을 신뢰하도록
했던 것입니다.
현대 사회에서도 사람들의 정서는 도덕적이고 권력을 내세우지 않고 겸손한 정치인을
신뢰합니다. 하지만 겸손이라는 것이 압살롬처럼 얼마든지 가장할 수 있는 것임을 생각한다면 겸손의 행위에 대해 속을 수도 있음을
생각해야 할 것입니다.
겸손은 하나님 앞에서 굴복함을 뜻합니다. ‘하나님이 일하시니 나는 하나님의 뜻에 북종 할
뿐입니다’는 마음이 겸손인 것입니다. 또한 자신의 죄를 보면서 감히 자신은 하나님께 나올 수 없는 존재임을 아는 것이
겸손입니다. 그러니 하나님께 복종하는 것만이 자신의 할 일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압살롬은 자신의 죄를 보지 않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다윗 앞에 나올 수 없는
죄를 범한 처지면서도 왕의 얼굴을 보기 위해 요압을 동원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백성들이 절을 하는 것을 막으며 그들의 입을
맞추는 것은 백성을 자신의 편으로 만들기 위해 겸손을 가장하고 있을 뿐이라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백성들이 볼 때에는 자신들의 절을 받지 않고 오히려 왕자의 신분으로 자신들의 손을
잡아주며 입을 맞춰 환대하는 압살롬이 지극히 겸손한 사람으로 여겨지고 또 그것이 압살롬을 신뢰하게 하는 것으로 다가올 수
있습니다. 어쩌면 다윗보다는 그러한 압살롬이 왕이 되었으면 하는 소원을 가질 수도 있을 것입니다. 저렇게 겸손한 압살롬이 왕이
되어 자신들을 다스린다면 지금보다는 더 나아질 것이라는 기대를 가질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6절을 보면 “무릇 이스라엘 무리 중에 왕께 재판을 청하러 오는 자들에게 압살롬의 행함이
이 같아서 이스라엘 사람의 마음을 도적하니라”고 말합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압살롬의 겸손과 자신들을 옳다고 인정해주는 것으로
인해 압살롬에게 마음을 빼앗겨 버렸습니다. 이는 전적으로 압살롬을 신뢰하고 의지하게 되었음을 의미합니다.
이 내용에서 우리는 압살롬이 무엇에서 크게 잘못되어 있는가를 알 수가 있습니다. 압살롬이
겸손을 가장한 것보다 백성들로 하여금 다윗에 대해 불만을 갖게 한 것보다 더 크게 잘못된 것은 백성들의 마음을 도적한 것입니다.
이것은 오늘 우리에게 매우 중요한 내용이 아닐 수 없습니다. 어떤 면에서 그러한지 깊이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이스라엘 사람의 마음을 도적했다고 말하는데, 왜 마음을 도적했다는 표현을 하는 것일까요?
도적했다는 것은 남의 것을 훔친 것을 뜻합니다. 즉 이스라엘 사람들의 마음의 주인은 따로 있다는 것입니다. 그 주인이
누구입니까? 이스라엘 사람들 자신입니까? 여러분에게 있어서 여러분의 마음은 여러분 자신의 것입니까?
마음의 주인이 누구인가의 여부는 결국 나의 주인이 누구인가로 나아가게 됩니다. 나의
주인이 내 마음의 주인이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이스라엘의 주인은 누구일까요? 두말할 것 없이 여호와 하나님이십니다.
무작정 우리의 상식으로 하나님이 주인이라는 답을 내릴 것이 아니라 왜 하나님이 나의 주인일 수밖에 없는가를 알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여호와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주인일 수밖에 없는 것은, 이스라엘이 여호와로 말미암아 살아난
민족이기 때문입니다. 애굽의 장자 재앙에서 이스라엘도 죽어야 할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어린양의 피를 바른 사람들은
살았습니다. 피로 말미암아 살아난 것입니다. 또한 홍해라고 하는 죽음에서도 이스라엘은 살았습니다. 이것을 안 이스라엘은 홍해를
건넌 후 구원을 노래하면서 “놀람과 두려움이 그들에게 미치매 주의 팔이 큼을 인하여 그들이 돌같이 고요하였사오되 여호와여 주의
백성이 통과하기까지 곧 주의 사신 백성이 통과하기 까지였나이다”(출 15:16)라는 노래를 불렀던 것입니다. 자신들이 홍해에서
살아난 것은 여호와 하나님이 자신들을 사셨기 때문임을 안 것입니다. 이처럼 이스라엘은 하나님이 피로써 살려낸 민족이라는 특성이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도 다를 바 없습니다. 고전 7:23절에서 “너희는 값으로 사신 것이니
사람들의 종이 되지 말라”고 말씀한 것처럼 우리는 그리스도의 피를 값으로 산 하나님의 사람들인 것입니다. 즉 이스라엘이든 우리이든
마음은 나도 그 누구도 주인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만이 주인일 뿐이라는 것입니다.
바로 이점에서 이스라엘의 왕의 역할이 어떤 것인가를 알 수 있습니다. 왕은 이스라엘
사람들의 주인이 하나님이심을 분명히 알아야 했습니다. 따라서 모든 사람들의 마음이 주인이신 하나님을 향하도록 그들을 다스리고
권면하는 것이 왕의 역할이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만약 왕이 백성들의 마음을 자신의 것으로 뺏고자 한다면 결국 이스라엘 사람들을
자신을 섬기는 자신의 종으로 삼고자 하는 것에 불과할 뿐인 것입니다. 이 경우 이스라엘은 하나님과 멀어지는 잘못된 신앙의 길을
가게 되었던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압살롬이 잘못됨입니다. 백성들의 마음을 도적한 것입니다. 이는 백성들의
주인이 누구인가를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이고, 백성들의 주인이 누구인가를 생각지 않는다는 것은 압살롬 자신의 주인이 누구인지에
대해서도 전혀 생각지 않고 살았음을 뜻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다만 하나님을 주인으로 여기고 그 마음을 하나님께 둔 채 하나님을 섬길
뿐입니다. 이것을 돕기 위해 왕이 존재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압살롬은 백성들을 자기편으로 만들기 위해, 그리고 자신을 신뢰하고
의지하도록 하기 위해 그들의 마음을 도적하기 위한 수단을 부린 것입니다. 백성들의 주인이 하나님이심을 간과한 것, 이것이야 말로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런 압살롬의 모습이 교회 내에서도 존재함을 부인할 수 없을 것입니다. 특히 압살롬과
같은 수완은 목사들에게서 많이 보이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교회에서 자신의 입지를 구축하고 힘있는 목사로 군림하기 위해
교인들의 마음을 얻기 위해 자신이 마치 교인들의 편인 것처럼 행세하고, 또한 겸손을 가장하여 행동하는 것도 많이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신자의 주인이 하나님이심을 보지 못하고, 신자의 마음이 하나님을 향하도록 돕는 것이 목사의 본분임을 생각하지 못하고,
다만 자신을 위해 사람들의 마음을 얻고자 하고 자신을 신뢰하도록 하기 위해 일한다면 그는 압살롬과 같은 존재일 수밖에 없음을
알아야 합니다.
여러분은 마음은 하나님의 것입니다. 주인이신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을 섬기며 하나님께만
복종해야 할 마음으로 새롭게 창조된 것이 신자입니다. 그 마음을 다른 사람에게 빼앗기지 않도록 하십시오. 즉 어떤 사람도 신뢰의
대상으로 삼지 말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만약 누군가가 여러분의 마음을 얻고자 한다면 오히려 그를 크게 경계해야 할 것입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사람을 전혀 신뢰하지 말라는 것이 아닙니다. 신자가 신뢰할 사람은
자신의 마음이 하나님을 향하도록 돕는 자라는 것입니다. 그를 의지하라는 것이 아니라 그의 말이 자신의 마음을 돕는 것이라면
신뢰하는 것이 마땅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 자체를 신뢰하는 것이 아니라 그 말을 신뢰하는 것뿐입니다. 사람이 언제 어떻게
변할지 아무도 모를 일이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의 마음은 어린양의 피를 향해야 하는 것처럼, 신자의 마음은 우리를 살리신 예수님의 피를 향해야 합니다. 이 일을 돕는 자가 곧 여러분의 형제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압살롬에게 마음을 빼앗기게 된 것은 그들은 자신들의 억울함을 풀어줄
왕을 원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안 압살롬이 백성들의 마음에 맞게 행동한 것입니다. 결국 그들은 왕이 어떤 존재인가를
몰랐던 것입니다. 무엇이 자신들을 돕는 것인가를 모른 것입니다. 신자라면 나에게 오직 그리스도만 전해지기를 원해야 할 것이고
그것으로 감사해야 합니다. 그럴 때 마음을 다른 사람에게 빼앗기지 않게 될 것입니다.
마음을 도적맞지 말라!
조선 말기 거상 임상옥의 일대기를 그린 소설 「상도」를 보면 한 대감이 수수께끼를 내는 장면이 나온다.
“이 성에 있는 사람들을 어떻게 둘로 나누는 것이 가장 지혜로운 방법이냐?” 아무도 선뜻 대답을 하지 못하는데, 곁에 있던 시중드는 여인이 말한다. “이롭게 하는 ‘이자’(利資)와 해롭게 하는 ‘해자’(害者)로 나눌 수 있습니다.”
사람들이 슬렁거리고, 자기에게 꼭 필요한 얘기를 들었다고 생각한 대감은 여인에게 상을 내린다.
영적 세계에서도 이와 비슷한 적용을 할 수 있다. ‘이자’는 예수님이고 ‘해자’는 마귀다. 마귀가 도적보다 무섭다.
재물은 도적맞아도 그리 큰 문제가 되지 않지만. 믿음과 평안을 잃어버리면 절망이 들어오고 급기야 생명까지 잃게 되기 때문이다.
멀쩡히 회사 잘 다니던 가장이 도박에 빠져 이혼하고 살인까지 했다는 뉴스를 본 적이 있다. 얼마나 허탈하고 어이없는 일인가 싶지만, 깨어 있지 않으면 누구나 그처럼 마음을 도적맞을 수 있다.
그리스도인 역시 며칠만 말씀을 묵상하지 않고 기도를 쉬면, 마귀는 믿음과 평안을 도적질해 간다.
우리가 방심하면 마귀는 끊임없이 파고 들어와 우리 것을 도적질하고 결국 우리를 죽이려 한다.
예수님은 선한 목자시고 마귀는 도적이다. 우리 영혼을 도적맞지 않기 위해 끊임없이 옛사람을 십자가에 처리하고 새사람으로 살아야 한다. 우리 영혼과 삶을 지켜 줄 말씀을 붙들어야 한다.
성경에 나타난 인물중 대표적인 도적놈을 보면, 구약에는 여리고 성을 점령한 후에 "바친 물건"을 개인이 취하지 말 것을 경고(수6:18-19)했는데, 유다 지파에 속한 아간은 이 명령을 어기고 그 물건을 도적질하므로 결국 아골 골짜기에서 돌로 쳐죽임을 당했으며, 신약에는 가룟 유다로서 그는 돈궤를 맡은 자로(요 13:29), 돈궤에 넣은 것을 훔치다가(요 12:6) 그에게 사탄이 들어가므로 스승인 예수님을 배반하고 은 30냥에 팔아 넘긴 후 괴로워하다 결국 자살하고 말았습니다.
중국 송나라 때 숭양현이라는 지방에, 장괴애라는 현지사(도지사)가 있었습니다. 그는 부하에게 매우 엄격했습니다. 한 번은 관리 한 사람이 돈 1전(오늘날 화폐가치로 1천 원 미만)을 모자 속에 감춘 것이 발각되었습니다. 그 관리는 그로 인하여 벌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벌이 대단한 것이었으므로, 그 관리는 놀란 나머지 "불과 1전의 돈으로 천황의 관리에게 지독한 벌을 준다는 것은 심하지 않습니까?"하고 반항했습니다. 그리고 말을 이어 "현지사께서 내린 형벌은 참으로 가혹합니다. 그러나 아무리 당신이 벌한 대도 나의 목숨까지는 뺏지 못 하리이다."하고 원망만 했습니다. 잘못을 뉘우치는 일 없이 원망만을 하는 것을 본 장 지사는, 곧 붓을 들고 다음과 같이 판결문을 썼습니다. "하루에 일전이면 천 날이면 천 전, 새끼줄을 톱 삼아 나무를 자를 수도 있고, 물방울이 계속 떨어짐으로써 돌을 구멍나게도 할 수도 있다. 더구나 반성의 빛이 전혀 보이지 않으므로 사형에 처한다는 것이었다." 결국 1전을 훔친 관리는 목을 잘리는 형을 받게 되었다는 이야기입니다. 언제나 생각하여야 할 일은 작고 큰 것에 상관없이 도적질이란 무거운 죄(중죄)에 해당된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회개할 줄 모르는 일 역시 큰 죄입니다.
미국의 일반 도서관에서는 한 해에 200내지 500권의 책을 도적 맞는데 국가적인 통계로 본다면 연간 2,500만 불이나 된다는 것입니다. 낙망한 사서들이 붉은 손을 가진 도적들을 잡기 위해 새롭게 고안해 낸 것이 (센트로 책 탐지기)였습니다. 이는 자석의 원리를 이용한 것으로서 자기(磁氣)를 넣은 금속조각을 책 등의 내부에 살짝 넣고 그 책이 정당한 방법으로 반출이 되는 경우에는 도서관 사서가 전자 코일의 전류가 흐르는 위를 슬쩍 통과 시켜서 그 책 등에 있는 자석의 자기를 없애 버립니다. 그러나 부당하게 반출되는 책은 자기를 없애지 않았으므로 출구를 이용할 때 비밀장치에 의한 회전문이 자동적으로 잠기며 사서가 앉은 곳에 붉은 불이 켜집니다. 그러면 사서가 즉각 도서대출계에 통고하고 도서 대여장을 가지고 나와 확인하여 그를 잡게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인간에게 양심이라는 자석을 부착해 놓으셨습니다. 우리가 죄를 지으면 하나님께 낱낱이 보고되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의의 전자코일을 통하여 그 죄를 씻음 받지 않는 한 언제까지나 그대로 남아 있다가 심판의 문을 통과할 때 양심이 그대로 송사하여서 모조리 드러나게 됩니다. 하나님의 천사들이 우리의 죄의 기록을 확인하여 형벌을 줄 것이므로 우리는 결국 하나님 앞에 벌거벗은 자와 같게 될 것입니다.
살아계신 하나님 아버지, 우리 마음 가운데의 탐욕을 버리고 온전히 하나님과 말씀으로만 채울 수 있도록 도와주셔서 우리가 참 그리스도인임을 만민이 알게 하옵소서. 작은 탐심이라도 제 마음 안에 머물지 않기를 원합니다. 내면의 작은 싸움에서부터 주님을 의지함으로 승리할 수 있도록 붙들어 주소서. 이스라엘 백성들의 역사를 거울로 삼아 우리 자신을 그 거울에 비추어보면서 우리도 탐욕에 끌려 다니는 노예가 아닌가를 다시금 살필 수 있게 해주시옵소서. 주님의 말씀을 듣고 마음에 가책을 받는 자가 있으면 성령께서 그 마음에 있는 나쁜 것을 제거해주시고 하나님의 은혜로 가득가득 채워주시기를 원합니다. 우리 중 한 사람이라도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탐욕에 젖어 하나님을 진노케 하는 자가 없게 해 주시옵소서. 항상 하나님의 은혜에 감격하면서 살게 해주시고, 오직 하나님만 전적으로 믿으면서 살게 해주시고, 세상 사람들의 말이 아닌 주님의 말씀에 귀 기울이면서 살 수 있도록 축복해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 드리옵나이다. 아멘.
♦ 2월 19일(토)
♦ 오늘 읽어야 할 말씀 : 사무엘하 14:1∼33 ♦ 묵상을 위한 주제 : 우리는 필경 죽으리니(14절) ♦ 성구 : 우리는 필경(畢竟) 죽으리니 땅에 쏟아진 물을 다시 모으지 못함 같을 것이오나 하나님은 생명(生命)을 빼앗지 아니하시고 방책(方策)을 베푸사 내어 쫓긴 자(者)로 하나님께 버린 자(者)가 되지 않게 하시나이다.
“우리는 필경 죽으리니(we must die)”
다윗은 훌륭한 인물이 아니고 그도 하나님 앞에 죄인 중의 한 사람에 불과합니다. 왜냐하면 필경은 죽었기 때문입니다. 죽음은 죄의 결과라고 성경은 이미 선언했습니다.
우리가 왜 다윗의 거짓된 모습을 들추어야 합니까?
다윗을 무시하려는 것이 아니라 그의 죄악 된 모습을 거울삼아 자신의 모습을 살필 줄 아는 믿음과 지혜를 갖추려는 믿음의 거울로 받아들이려는 것입니다.
성경이 강조하는 것은 믿음의 조상이라고 일컫는 아브라함이 아닙니다.
성경이 강조하는 것은 세상에서 가장 온유하다고 강조한 모세가 아닙니다.
성경이 강조하는 것은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다윗도 아닙니다.
아브라함과 모세와 다윗을 통하여 일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이라고 하겠습니다.
사무엘하 14장의 말씀은 다윗을 아주 초라하고 부끄럽게 소개합니다.
다윗과 요압, 압살롬의 실상을 낱낱이 공개하면서 하나님의 일하심을 드러내고 오직 하나님의 언약만 강조하려는 것이 성경을 기록한 의도라고 하겠습니다.
그러므로 성경을 읽거나 묵상할 때 사람의 성품이 얼마나 훌륭하며 그 사람의 믿음이 얼마나 대단한가 하는 측면에서 볼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자신의 언약을 어떻게 드러내고 계시는가를 살펴야 할 것입니다.
이스라엘 역사에서 최고라고 손꼽는 다윗의 통치 이면에서 벌어지는 사건은 그의 자녀들이 서로를 겁탈하고 죽였으며 이로 인해 틀어진 다윗과 아들 압살롬의 마음은 맞닿을 기미가 보이지 않습니다.
예루살렘에서 서로를 외면하고 보낸 2년 동안 다윗과 압살롬의 갈등은 오히려 깊어졌습니다. 이 시간을 지내며 압살롬은 아버지를 향한 분노를 반역을 일으켜 다윗의 가문을 흔들었습니다.
다윗의 왕권을 흔드는 불씨가 된 압살롬의 분노는 다윗의 통치 아래서 사랑하는 누이 다말이 당한 성폭력 사건이 정의롭게 해결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정의가 사라지고 억울한 자의 울음을 외면하는 나라에서 눈물 흘리는 자는 스스로 복수를 생각할 수밖에 없습니다.
형제 암논을 죽인 압살롬의 행위는 무엇으로도 정당화될 수 없습니다. 조금 더 거슬러 올라가면 다윗이 불의를 바로잡지 못하고 외면한 지점에서부터 이 불씨가 시작되었습니다.
우리는 날마다 불러주신 내 자리에서 살아가야 합니다.
혹시 내가 다윗과 같이 외면하고 있는 사람이 있는지 덮어두고 있는 갈등은 없는지 살펴야 하겠습니다.
우리 공동체와 가정과 이웃들 중에 불의와 억울함 속에 괴로워하는 사람들이 있는지도 살펴야하겠습니다.
무엇보다 불의와 억울함으로 고통 받는 사람이 있다면 그 마음의 분노와 아픔을 하나님께서 어루만져주시기를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억울하게 눈물 흘리는 그곳에 정의를 세워 주실 것입니다.
불의한 재판으로 마음 아파하는 그곳에 공의를 이루어 주실 것입니다.
낙심하여 주저앉은 그 자리에서 일어나도록 붙잡아 주실 것입니다.
사랑하는 믿음의 사람들이여! 이제는 모두 한 마음과 한 뜻으로 나라와 민족을 덮고 있는 어둠의 장막을 벗겨버리고 밝은 미래를 바라볼 수 있도록 힘을 모아 기도합시다. 그리고 응답의 열매를 기다립시다.
자유대한민국이여 영원하라! 예수 한국 복음 통일을 이루어 선교의 깃발을 온 세계에 휘날리며 젊은 아들과 딸들이 마음껏 뛰어다닐 수 있는 그 날을 위하여 한 알의 밀알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 찬양 / 나 이제 주님의 새 생명 얻은 몸
예수 내 구주! 예수 내 생명! 예수 내 권세!
2월 18일(금)
오늘 읽어야 할 말씀 : 사무엘하 13:1∼39
묵상을 위한 주제 : 미움과 연애(15절)
성구 : 그리하고 암논이 저를 심(甚)히 미워하니 이제 미워하는 미움이 이왕 연애(戀愛)하던 연애(戀愛)보다 더한지라 곧 저에게 이르되 일어나 가라.
“미움과 연애(hated and loved)”
“암논(Amnon, 충성스럽다)”은 이스르엘 사람 “아히노암”에게서 난 다윗의 맏아들이었는데(삼하 3:2) 이복누이였던 “다말(Tamar, 종려나무)”을 사랑하였으나 만날 수 없어 속으로 앓고 있을 때 친구였던 “요나답(Jonadab, 여호와는 관대하심)”으로부터 간교한 꾀를 얻어 다윗을 속이고 다말과 강제로 동침한 후 마음이 변하여 다말을 심히 미워하여 내쫓아냈습니다.
이 사실을 알게 된 ‘다말’의 친 오빠 “압살롬(Absalom, 내 부친은 화평) ”에 의해 양털 깎는 날 성대한 잔치 자리에 초대되어 압살롬의 부하의 손에 살해되었습니다.
이와 같은 가족간의 불화는 성적인 범죄를 저지른 다윗 왕가의 몰락의 시작이었습니다.
근친상간으로 시작된 이 비극적인 역사는 다윗이 밧세바와 더불어 지은 범죄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었습니다.
아비의 죄가 삼사 대까지 간다는 말씀처럼 다윗의 죄악은 그의 가정과 자손들에게 치명적인 악영향을 끼쳤던 것입니다.
암논에게 버림받은 다말은 머리에 재를 무릅쓰고 옷을 찢고 손을 머리 위에 얹고 크게 울었지만 다윗은 암논의 근친상간 소식을 듣고도 심히 노할 뿐 암논을 징계하지 않았습니다.
다윗이 암논을 법대로 처형하지 않은 것은 장자로서 왕위 계승의 일을 생각했기 때문이겠지만 인간의 생각을 앞세운 이런 그릇된 태도야말로 더 큰 죄악을 부르는 것입니다.
암논을 살해한 압살롬은 아버지 다윗의 노여움을 피해 외가인 그술 왕 달매에게로 피신합니다.
다윗은 압살롬이 암논을 살해했다는 소식을 들은 후 처음에는 암논의 죽음을 슬퍼했으나 삼 년 후에는 압살롬을 몹시 그리워했습니다.
다윗 왕의 가문에 나타난 가족들의 불화의 씨앗은 다윗이 저지른 죄에서부터 시작된 것입니다.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
인간의 욕망은 끊임없이 죄를 생산하고 생산된 죄는 더 많은 사람들을 미혹하여 죄를 낳게 합니다. 그러므로 죄는 그 모양이라도 버려야 합니다. 따라서 믿음이란 죄를 미워하여 멀리하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오늘이란 죄를 멀리 할 수 있는 특별한 은총의 날입니다.
하늘 은총을 땅에서 죄를 멀리하고 버림으로 세상 모든 사람들이 그 은총을 함께 누릴 수 있는 그 날을 위하여 기도해야 하겠습니다.
“우리아(Uriah)”라는 이름의 뜻은 “빛”입니다. “밧세바(Bathsheba)”라는 이름의 뜻은 “맹약의 여자”라고 합니다.
우리아는 헷 사람입니다 헷이란 히타이트 사람 즉 가나안 족속에 속하므로 유대인이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아는 다윗의 용사 중 한 사람이었습니다. 충실하고 경건한 다윗은 그의 아내 유다의 밧세바와 사랑에 빠졌고 그를 제거하기로 결정하여 그를 전쟁터로 보냈지만 그곳에서 죽었습니다.
사무엘하 9장 : "헤세드"에 대한 믿음 "므비보셋"과 같이 죽은 개와 같은 나에게 은혜를 베풀어주십니까? 하며 겸손한 모습
사무엘하 10장 : "헤세드"에 대한 믿음 암몬 왕 "하눈"과 같이 조문객을 정탐군으로 판단하고 무례하게 행동하는 오만한 모습
사무엘하 11장 : "헤세드"에 대한 믿음 다윗은 하나님의 은혜보다 왕의 지위를 사용하여 어둠에 갇히는 모습 왜냐하면 "우리아"는 헷 사람 즉 이방인으로 다윗의 용사되었는데 '우리아'라는 이름은 "빛"이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다윗이 어둠에 갇혀 있을 때 이방인 헷 사람 우리아를 통하여 그 실체를 드러나게 합니다. 세상의 빛이 되어야 할 이 시대의 그리스도인들이 다윗과 같이 어둠에 갇혀있기 때문에 세상이 더욱 혼돈하게 되었습니다.
역사
속에서 성경을 연구하는 신학자들이나 설교자들은 신약 성경과 바울이 기록한 서실들에 대하여, 그 내용이 이해하기 어렵고 또한 그의
문장 표현력이 당시 전통적인 헬레니즘의 수사학적인 관점에서 보면 때로는 중복되는 것이 많고 조잡스럽기까지 하다고 혹독한 비평을 해
왔던 것이 사실이다.
그렇지만 그것은 성경을 기록한 언어의 독특한 히브리 문장구조를 모르는 무지한 이방인의 시각을 가진 사람들의
편가에 불과하다. 만약 그들이 바울 서신에 나타난 이해하기 어려운 내용들과 중복 표현된 부분들이 대부분 ‘교차 병행 구조’ 라고
부르는 히브리 문장구조의 형식인 히브리 사고방식을 가지고 기록된 것이라는 사실을 알았다면, 자신들의 무지에 대하여 인정하지 결코
그런 혹평을 가할 수 없었을 것이다.
따라서 우리가 성경을 제대로 이해하고 분석하여 해석하기 위해서는 성경을 기록한 히브리
사고를 가진 성경의 기자들이 사용한 히브리 문장구조의 틀을 먼저 배운 다음에 접근해야 한다.
앞에서도 언급한 것처럼 사도 바울
이후에 유대인들이 더 이상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상황에서, 헬라 사고의 문화권에 속해 있는 이방인의 신학자들이 자신들의
전통적인 헬레니즘의 사고방식인 수사학적 접근으로 바울 서신을 해석하여 왔기 때문에 본문의 의도를 정확히 파악할 수 없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러다가
이백여 년 전부터 예수를 믿기 시작한 유대인들에 의해서 자신들의 문학적인 시각을 회복하기 위하여 히브리 문장구조의 새로운
시각으로 성경에 접근하여 연구하기 시작했다. 그들이 히브리 사고로 성경을 다시 해석하기 시작하면서 지금까지 불분명하고 이해하기
어려웠던 많은 문제적이 해결되는 경험을 갖게 되었다. 이처럼 저자는 히브리 사고에 입각한 히브리 문장구조의 성경해석을 이 책에서
처음으로 설명하고 있다. 이제까지 성경해석의 본문의 개념을 도출하는 작업은 극히 일부분의 전문적인 학자들에게 해당되는 것으로
인식되어 왔다. 하지만 저자는 이 책을 통해 신약 성경에 나타난 대표적인 히브리 문장구조의 틀로 성경을 해석하는 과정을 체계화하고
시각화하여 성경의 원어를 모르는 사람들까지 쉽게 하나님의 말씀을 접할 수 있도록 도움을 주고자 한다. 특별히 저자는 히브리
사고가 무엇인지를 누구나 알 수 있도록 정리하고 이를 토대로 히브리 문장구조로 성경을 해석하는 방법까지 쉽게 설명할 것을
약속한다. 저자의 이러한 의도를 따라 이 책을 읽는 모든 사람들도 히브리 문장구조의 설교를 활용하는 계기가 될 것을 기대하고 이
책을 쓴다.
히브리
사람들에 의해 기록된 신구약 성경이 갖고 있는 다양한 문학적인 운율과 구조의 독특성은 오래 전부터 학자들에 의해 연구되었다.
이렇게 정리된 히브리 문장구조의 성경 해석할 수 있는 보편적인 원리들이 이 책을 읽는 목회자들에 의해서 신구약 성경 적용하여
설교로 선포될 것이다. 이제 이 책을 통해서 이방인들의 사고를 가지고 있는 우리도 히브리 사고에 입각해서 하나님이 말씀을 기록하실
때의 본래의 의도와 사상을 전체적으로 조감해 볼 수 있게 되었다. 이와 같이 히브리 문장구조의 성경해석의 원리는 성경 해석학에
있어서 새로운 지평을 열게 될 것이 틀림없다. 우리는 신약 성경의 바울 서신뿐만 아니라 계시록과 사복음서 및 공동 서신들을 넘어
구약의 모든 내용을 포함하여 특히 시문학의 범주에 속한 말씀을 가지고 히브리 문장구조로 적용하는 설교를 할 수 있을 것이다.
풀러 신학대학원의 김세윤 교수는 “주기도문 강해”에서 히브리 문장 구조의 중요성을 다음과 같이 언급하였다. | “마태복음의
주기도문은 매우 치밀한 히브리 문학 구조 속에 담겨 있습니다. 특별히 마태는 히브리 문장 구조의 특성을 좇아 본문을 문장의 가장
핵심이 되는 중앙에 해당하는 위치에 구성하고 있습니다. 왜 마태는 주기도문을 산상 수훈의 핵심 중의 핵심에 위치하도록 구조하고
있는 것일까요? 마태는 이러한 문학적 구조를 통해서 무엇을 말하려는 것일까요? 마태가 히브리 문장 구조의 틀을 통해서 예수님이
가르치신 기도를 기록한 것은 우리로 하여금 주기도문의 중요한 내용이 무엇인지를 정확하게 이해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즉 마태복음의 문장 구조 자체가 우리에게 이 주기도문의 의미를 이해하는 데 모종의 암시를 미리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우리가 주기도문의 내용을 살펴보면 청원과 마지막 송영이 짝을 이루고 있는데, 우리는 이것을 인클루지오(Inclusio)
- 앞과 뒤의 문장의 일치(짝) - 라고 합니다. 마태가 기록한 주기도문은 이러한 히브리 문장 구조를 우리에게 보여 줍니다.”
김세윤
교수가 주기도문을 강해하는 처음 부분에 히브리 문장구조의 틀을 자세히 설명한 것은, 그것이 우리가 예수님이 가르쳐 주신 기도를
바로 이해하고 해석하기 위해서 가장 중요한 요소라고 보았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이러한 히브리 문장 구조의 원리를 이해하지
못한다면, 우리는 성경을 정확히 해석할 수 없을 것이다. 저자가 이 책에서 정의한 ‘히브리 문장구조’ (Chiasm)라는 용어는
이 부분을 연구한 많은 학자들은 ‘교차 병행 구조’라고 언급하고 있다는 것을 먼저 밝힌다.
1. 히브리 사고의 시작, 히브리 문장구조
히브리
사고를 전혀 모르는 사람들에게 히브리 문장구조를 설명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님을 저자는 알고 있다. 그렇지만 우리가 성경에
나타난 예를 들어 설명하면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저자는 먼저 히브리 문장구조의 특징을 설명하고 난 다음에 성경의 구체적인 예를
들어 쉽게 설명하는 방법으로 이 글을 진행할 것이다. 히브리 문장구조는 히브리 문학에서 나타나는 문장의 기본적인 형태로 성경의 한
문장 안에서 각 단어가 교차적으로 배열되어진 것을 지칭하는 용어이다.
이
분야에 많은 연구를 한 일랜드(Yelland)는 그의 책에서 “히브리 문장구조란 글의 후반부가 전반부에 관해서 도치되고 평형을
이루는 구정을 말한다. 따라서 우리는 이것을 교차 병행 구조라고 부르는 병행적인 형태나, 혹은 반의적인 형태로 기록된 것으로
정의할 수 있다”라고 말하고 있다. 한편 히브리 문장의 원리인 교차 구조는 기본적으로 두 가지 요소가 나타나는데 이는 역(반의)과
편행이다. 하지만 모든 문장마다 역에 해당하는 반의가 나타나는 것은 아니다. 후반부는 전반부에 관해 서로 반의적일 수도 있고,
또는 서로 보충적인 수도 있다. 이는 히브리 문장이 기본적으로 구절, 문장 또는 문장 구조의 전체 내용 중에서 단어나 혹은
생각들이 도치되어 나타나는 병행 구조이기 때문이다.
히브리
문장구조의 가장 간단한 예는 아래에 나타난 구조에서 찾아볼 수 있다. 구약 성경에는 이런 교차 구조의 요소가 풍부하게
존재한다,. 이 구조는 첫 줄과 마지막 줄이 서로 대응되고, 둘째와 마지막 전의 요소가 대응한다. 이러한 형태는 히브리 문장에서
짧은 길이에서부터 몇 문장, 그리고 심지어 성경의 각 권의 전체의 시작부터 끝ㄲ지 나타나기도 한다. 이런 복잡한 구조는 문법적인
면에서 뿐만 아니라 구조나 성경을 기록한 저자의 의도에서도 조직적으로 언제나 심미적 표현에 집중하게 한다. 히브리 문장의 교차
구조를 이루는 평가 기준은 도치 순서, 병행, 그리고 중심부이다.
히브리
문장구조가 점점 연구되고 발전되면서 다양한 형태의 교차구조를 언급하고 있다. 교차 구조의 종류는 형태에 따라 다음과 같이 연구한
학자가 붙인 이름을 따라 다르다. 그 구체적인 이름을 살펴보면 에파노도스(epanodos), 또한 내향적
병행구조(introverted parallelism) 확대된 내향구조(extended introversion), 집중
구조(concentrism), 키 구조 (the chi-form), 페리스트로페(palistrophe), 봉투구조(envelope
conetruction), 델타구조(the delta-form), 반복구조(recursion) 등의 여러 가지 으름으로 불리고
있다. 이 모든 형태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특징은 교차구조가 두 부분으로 구성되고 후반부가 전반부의 거울상을 가지는 것이다.
그리고 교차구조는 강조하려는 내용을 중심부에 위치시키며, 다른 부분은 병행적인 틀로 배치되어 이를 보충 설명하는 문장의 구조라고 볼
수 있다. 그러므로 히브리 문장구조는 이렇게 다양한 방법으로 발전하여 왔다.
지금까지 설명한 내용을 간단한 것부터 성경을 통하여 예를 들어 보자.
예) 마가복은 2장 27절
A 안식일은
B 사람을 위하여 있는 것이요
B` 사람이
A` 안식일을 위하여 있는 것이 아니다
예) 마태복은 7장 6절
A 거룩한 것을 게에게 주지 말며
B 너희 진주를 돼지 앞에 던지지 말라
B` 돼지들이 진주를 발로 밟고
A` 개들이 돌이켜 너희를 찢어 상할까 염려하라
이
글에서 마태복음의 기자는 히브리 문장구조를 기록하면서 마지막 요소와 문장의 중앙으로부터 처음이 서로 내용상 그것이 설명되어
있고, 마찬가지로 중간은 중간끼리 서로 같은 내용이 설명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한편 마가복음에서는 동일한 단어가 교차적으로
나타나지만, 마태복음에서는 유사한 단어가 역으로 나타난다.
아래의 시편에서 히브리 문장구조는 조금 독특하게 병행되어 있다.
그는 너를 도와 주시고 / 성소에서 도와주시고 / 붙드시며
시온에서 / 그는 너를 붙드시며 시온에서 / 성소에서
그는 기억하시며 / 네 모든 소제를 기억하시며 / 원하노라
너의 번제를 / 받으시기를 원하노라 번제를 / 소제를
그는 너를 주시고 / 너의 마음대로 주시고 / 이루시고
너의 모든 도모를 / 그는 이루고 도모를 / 마음대로
우리가 개가를 부르며 / 당신의 구원 안에서 부르며 / 세우리니
우리 하나님의 이름으로 / 우리 기를 세우리니 이름으로 / 구원 안에서
위
문장의 시편 20편 2-5절에서 보면 명사와 동사가 쌍으로 도치되어 히브리 문장구조로 병행되고 있다. 시편의 저자는 히브리
문장에서 두 문단끼리 서로 쌍을 이루어 명사와 명사가 서로 병행되어 있고, 동사와 동사가 서로 도치되어 교차하고 있다. 만약
이러한 교차와 도치 구조로 배치된 것을 모르고 해석하게 되면 엉뚱한 방행으로 설교할 가능성이 높다.
예) 시편 135편 15-18절
A 열방의 우상은 은금이요
B 사람의 수공물이라
C 입이 있어도 말하지 못하며
D 눈이 있어도 듣지 못하며
D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며
C` 그 입에는 아무 기식도 없나니
B` 그것들을 만든 그들은 그것들과 같고
A` 그들의 신뢰를 그것들에 두는 그들과 같도다
예) 골로새서 3장 3-4절
A : 이는 너희가 죽었고
B : 너희 생명이
C : 감추어져 있음이니라
D : 그리스도와 함께
E : 하나님 안에서
D` : 그리스도께서
C` : 나타나실 때
B` : 너의 생명이
A` : 너희도 그와 함께 영광 중에 나타나리라
이
구절은 A B C D-E-D` C` B` A`의 대칭적 구조로 병행을 이루고 있다. 바울은 이 문장의 중앙으로부터 시작하여
밖으로 확산되면서 서로의 관계를 보완하는 대칭적 히브리 문장구조를 사용하였다. 우리가 이 문장을 가지고 짧은 메시지를 만든다고
한다면 다음과 같이 구성할 수 있을 것이다. 먼저 이 문장 구조의 중심 주제를 제목으로 할 수 있다. 우리가 ‘하나님 안에서’
(E)라고 말하는 것은 본문의 교차대친 구조를 적용해 보면, ‘그리스도와 함께’ (D-D`)라고 선언하고 있다. 이런 신비한
영적인 연합은 복음 안에서 ‘감추어진 것으로’ (C) 이것은 그리스도계서 ‘나타나실 때’ (C`)에 ‘우리의 생명’ (B-B`)도
함께 나타날 수 있다고 말씀하고 있다. 결론적으로 이런 일은 ‘우리가 죄로 인해 죽었고’ (A) 다시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영광스러운 주인공으로 나타날 때 (A`)만 가능하게 된다. 이상에서 히브리 문장의 교차 구조를 따라 본문 그대로 간단하게 저자는
설교로 적용해 보았다.
예) 로마서 2장 12-15절
A(12) 무릇 율법 없이 범죄한 자는
또한 율법 없이 망하고
B 무릇 율법이 있고 범죄한 자는
율법으로 말미암아 심판을 받으리라
B`(13) 하나님 앞에서는 율법을 듣는 자가 의인이 아니요
오직 율법을 행하는 자라야 의롭다 하심을 얻으리니
A`(14) 율법 없는 이방인이
본성으로 율법의 일을 행할 때는
이 사람은 율법이 없어도
자기가 자기에게 율법이 되나니
(15) 그 마음에 새긴 율법의 행위를 나타내느니라
그 양심이 증거가 되어
그 생각들이 서로 혹은 송사하며, 혹은 변병하며
이
구절은 A B-B` A` 의 교차 병행 구조를 가지고 있으며, 12절에서 두 개의 하나님의 율법에 대한 전체가 언급되어 있고,
이것은 대칭적인 교차 구조를 가지고 13-15절에서 각각 율법에 관해 변증하는 내용을 볼 수 있다.
예) 디모데전서 1장 19절
A 믿음과
B 착한 양심을 가지라
B` 어떤 이들이 이 양심을 버렸고
A` 그 믿음에 관하여는 파선 하였느니라
예) 갈라디아서 2장 7–8절
A 도리어 내가 무할례자에게 복음 전함을 맡기고
B 베드로가 할례자에게 맡음과 같이 한 것을 보고
B` 베드로에게 역사하사 그를 할례자의 사도로 삼으신 이가
A` 또한 내게 역사하사 나를 이방인에게 사도로 삼으셨느니라
예) 고린도후서 1장 3절
A 찬송하리로다 하나님을
B 그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시오
B` 자비의 아버지시오
A` 모든 위로의 하나님이시오
예) 로마서 11장 21-23절
A 하나님이 원 가지들도 아끼지 아니하셨은 즉
B 너도 아끼지 아니하시리라
C 그러므로 하나님의 인자와
D 엄위를 보라
D` 넘어지는 자들에게는 엄위가 있으니
C` 너희가 만일 하나님의 인자에 거하면 그 인자가 너희에게 있으리라
B` 그렇지 않으면 너도 찍히는 바 되리라
A` 저희도 믿지 아니하는데 거하지 아니하면 접붙임을 얻으리니 이는 저희를 접붙이실
능력이 하나님께 있음이라
이상의 성경의 예들은 모두 교차 구조에 대해서 분명히 보여주고 있다
2. 히브리어, 히브리 문장구조
히브리
문장구조란 용어는 고대의 수사학적인 용어로 일부 사용되다가 르네상스 이후에 널리 퍼지기 시작하였다. 히브리 문장구조는 특히 구약
성경에 많이 나타나며, 다른 히브리어(셈어) 문서들에서도 같은 패턴의 히브리 문장구조로 언급되어지고 있다. 이 분야를 연구한
독일 신학자 룬드(Lund)에 의해서 신약 성경에도 히브리 문장구조가 나타난다고 발표하였다. 이때부터 시작하여 히브리 문장구조의
연구는 활발하게 진행되어 현재까지 왔다고 볼 수 있다. 한편 히브리 문장구조의 형태는 나름대로 연구한 신학자들에 의해 다른 이름의
용어로 사용하고 있다. 이런 일은 아직까지 히브리 문장구조의 형태가 발전하고 있기 때문에 일어나는 일시적인 현상이라고 저자는
보고 있다. 하지만 이제부터 저자가 모든 용어를 통일하여 히브리 문장구조 즉 키아즘이라고 부를 것이다. 비록 서로 다른 이름으로
부르지만 그 내용적인 의미는 거의 같기 때문이다.
히브리
문장구조는 몇 가지 특징적인 형태를 가지고 있다. 예를 들어 성경에 가장 많이 나타나는 교차구조라고 부르는 A B – B` A`
의 현태를 가지고 있다. 이것은 시편 8편 3-4절에 잘 나타나 있다. 이 형태는 신구약 성경에 가장 많이 나타나는 형태로,
앞에 나와 있는 내용이 다시 뒤에서 대칭적 구조를 가지고 같은 의미를 반복할 뿐 아니라 부연 설명을 하고 있는 것을 말한다. 이런
대칭 구조는 히브리 문장의 대표적인 형태로 우리가 이런 구조를 모르면, 문장의 내용이 단순히 긴 것으로만 이해할 수 있고 복잡한
문장 구조로만 받아들여 서로 연관성이 없이 해석하고 설교할 수 있는 위험성이 내포되어 있다. 이처럼 우리가 신구약 성경의 히브리
문장구조의 핵심이 되는 교차 병행구조를 모르면 말씀을 바르게 해속하는 데 많은 어려움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히브리어 문장구조의 틀
키아즘(Chiasm)
즉 히브리 문장 구조한 용어는 고대의 수사학적인 용어로 일부 사용되다가 르네상스 이후에 널리 퍼지기 시작하였다. 키아즘에
해당하는 병행 구조는 많은 구약성경과 다른 히브리어(셈어) 문서들에서 언급되어지고 있다. 이는 독일신학자 룬드(Lund)에 의해서
신약성경에 나타난 것이 제시되었으며 히브리 민족(셈어족)으로부터 서장으로 문화적인 유산으로 이어지게 되었다. 독일 신학자
바레이는 히브리 별행 구조로부터 자신의 병행 구조를 세웠으며, 그는 신약성경에 있는 문학적인 구조의 형태를 분류하였다. 그는
키아즘을 연구하고 결론 내리기를 도치구조(Inversion)형태야 말로 성경에서 발견되는 가장 일반적이고 보편적인 구조라고
말했다. 초기 키아즘을 연구하는 학자들은 ‘히브리 문장 병행 구조’가 학자들에 따라 약간씩 의미가 다른 여러 가지의 용어로 다음과
같이 사용되고 있다. 일반적으로 히브리 병행 구조를 연구한 신학자들의 분류에 의하면 다음과 같다. 그들이 연구한 이름은
대침구조, 도치 병행구조(Inverted parallelism), 내향적 병행구조(Introverted parallelism),
회귀구조(regression), 원격 병행구조(봉투 구조, envelope figure), 대응구조(correspondence)등
여러 가지로 연구한 학자들마다 다른 이름으로 자신의 책에 붙였다.
한편
‘히브리 문장구조’는 그 이름에 따라 다음과 같은 형태를 갖는다. 예를 들어 우리가 키아즘의 ‘대칭구조’라고 말하는 것은 가장
기초적인 AB-A`B`의 구조의 현태를 가지고 있다. 이는 신구약 성경에 가장 많이 나타나는 형태로 앞에 나와 있는 내용이 다시
뒤에서 대칭적 구조를 가지고 같은 의미를 반복할 뿐 만 아니라 부연 설명을 하고 있는 것을 말한다. 이런 ‘대칭병행구조’는 히브리
문장의 대표적인 형태로 우리가 이런 구조를 모르면 문장의 내용이 단순히 긴 것으로만 이해할 수 있고, 복잡한 문장 구조로만
받아들이는 관계로 서로의 연관성이 없이 해석되고 설교될 수 있는 위험성이 내포되어 있다.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가 신구약 성경의
히브리 문장구조의 핵심이 되는 히브리 문장구조인 ‘병행 구조’를 모르면 말씀을 바르게 해석하는데 많은 어려움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이 책은 키아즘의 기본적인 형태부터 시작해서 복잡한 내용들조차 히브리 문장구조로 인해 하나님의 의도를 정확히 파악할 수
있게 해줄 것이다. 처음부터 차근 차근 쉬운 구조부터 복잡한 구조까지 하나씩 배우면 여러분도 성경의 전문가가 될 것을 기대해도
좋다.
시편을 예로 들어 설명하면 다음과 같다.
예) 시편 8편 3-4절
3절 A 주의 손가락으로 만드신 B 주의 하늘과
A` 주의 베풀어 두신 B` 달과 별들을 내가 보오니
4절 A 사람이 무엇이관대 B 주께서 저를 생각하시며
A` 인자가 무엇이관대 B` 주께서 저를 권고하시나이까
시편
기자는 독특한 히브리 문장구조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만드신 우주와 사람이 어떤 존재가 가치가 있는지를 설명하고 있다. 다시 말하면
A의 주의 손가락으로 만드셨다는 것에 대하여 A`는 주께서 이 땅에 베푸신 하늘과 별들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그리고 4절에 가면
사람과 인자가 병행되고 있고 주께서 생각하고 권고하는 것이 키아즘이 되어 반복적인 설명을 하고 있는 히브리 문장구조를 살펴볼 수
있다.
3. 히브리 문장구조 – 키아즘의 역사
17세기부터
산발적이기는 하지만 몇 명의 신학자들에 의해서 히브리 문장구조의 현태에 관한 연구는 간간이 있었다. 하지만 그런 연구는 대개
성경의 원어에 관심이 있는 몇 사람으로 그들은 히브리 문장구조의 현태 정도 찾는 것에 불과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에 관련된
학자들은 대부분 히브리 문장구조의 형태를 찾는데 있어서 바울 서신과 복음서에 집중하는 정도였다.
그들의 문제점은 자신들이
히브리인이 아니기 때문에 히브리어와 헬라어를 배워서 문장의 구조를 연구하는 수준에 있어 아주 초보적인 단계로 접근한 한계가
분명하였다. 그들의 접근방법도 대부분 전통적 방법을 히브리 문장구조에 익숙한 유대인들의 책을 통해서 적용하는 정도였다. 그러므로
히브리 문장구조의 형태 연구는 역사적으로 세 시기로 분류하고 있는 실정이다. 이는 초기 교부시대, 종교 개혁시대, 그리고 근대와
현대에 이르는 연구로 구분한다.
키아즘에
대한 관심이 17세기가 되면서 증폭되어 독일과 영국 신학자들에 의해서 히브리 문장구조에 대한 과학적 연구가 시작되었다. 초대교회
역사가인 요세푸스(Josephus)는 구약 성경에 대해서 나름대로 구분하여 춥애굽기 15장, 신명기 32장의 모세의 노래가
“운문 절”의 형태로 기록되어 있고, 다윗의 시편들이 “여러 종류의 운문”이라고 지적했다. 이에 대하여 어거스틴과 동시대를 살았던
제롬(Jerome)도 유사한 말을 했다. 그렇지만 히브리 문장구조에 대하여 연구한 학자들은 이것들이 단순히 히브리 문학의 시
형태라고만 보면서, 이런 키아즘은 그리스와 로마의 사람들에게 잘 알려져 있지 않은 히브리인들만이 가지고 있는 독특한 문장 구조라고
말했다.
어거스틴(Augustine)도
수사학의 교사로서 성경의 문체에 대해 연구하였다. 그는 특별히 구약의 예언서들과 바울 서신에 관심을 가졌다. 한편 제롬도
히브리적인 문장 구조에 많은 관심을 가졌으며, 그는 특히 바울 서신 중에서 디도서 1장 12절, 고린도전서 15잘 33절,
사도행전 17장 28절 등을 깊이 연구했다. 그렇지만 초대교부들은 주로 성경 안에서 이러한 히브리적인 문장구조를 찾으려는 노력을
부정적인 시각으로 보았다. 그 가운데 오리겐(Origen), 크리소스톰(Chrysosto)과 락탄티우스(Lactantius)도
같은 입장을 취하였다. 이런 현상은 초대 교부들이 주로 우리와 같은 이방인의 시각으로 성경을 처음으로 설교하는 입장에서 당연한
결과로 보여 진다. 그 이유는 그들 스스로가 히브리인이 아니었기 때문에 히브리적인 문장 구조에 무지한 결과로 부정적인 입장을
가지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흥미로운 사실은 교부인 오리겐이 이방인의 시각으로 설교하면서 최초로 영해라고 알려진 알레고리로 해석을
시도한 것에 대하여, 우리는 쉽게 그 당시 사람들이 얼마나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서 무지했던가를 유추할 수 있다.
콘스탄틴(Constantine)시대에
교회는 만개한 그리스 문화에 동화되어 점차 수사적 방법론의 사조에 밀려 히브리 문장구조의 연구가 점점 더 사라지게 되었다.
이러한 경향은 르네상스 시대 전까지 지속되었다. 그러다가 르네상스에 의해 성경에 기록된 히브리 문장구조의 연구가 주로 독일
신학자들에 의해서 관심을 가졌다. 특별히 독일의 로이흐린(Reuchlin)과 종교 개혁자인 루터(Luther)가 히브리 문장구조에
깊은 관심을 두고 연구했다. 하지만 그들이 관심을 갖는 것과 히브리 문장구조를 아는 것에는 많은 제약이 있었다. 그 이유는
그들에게 히브리 문장구조가 무엇인지 가르쳐 주는 사람도 없었거니와 그 어떤 책에도 소개되고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런 사운데도
에라스무스(Erasmus)는 신약 성경을 히브리 문장구조를 연구하여 다른 사람들에게 새로운 흥미를 불러 일으켰다.
근대에
와서 블래스(Blass)는 신약 성경에서 바울 서신은 다른 성경들과 구분되어 문장의 구조에서 독특한 히브리 리듬이 존재한다고
주장하였다. 한편 광범위한 형태의 바울 서신의 히브리 문장구조 연구는 요하네스 바이스(Johannes Weiss)에 의해서이다.
그는 히브리 문장구조를 연구한 결과 바울 서신들이 눈이 위함이 아니라 귀를 위하는 문체임을 발견하였다. 특히 바이스의 공헌은
바울의 설교가 병행요소를 많이 나타나는 것으로 보았다. 그리고 복음서의 연구에 있어서 저스틴마티(Justin Marty)는 히브리
성경과 헬라의 그리스 회상록을 비교하여 많은 차이점이 있음을 발견하였다. 그 후 마틴 알버츠(Martin Albertz)는
성경은 문학 작품의 일반적인 역사 즉 양식사에 포함 될 수 없다고 했다.
한편
그때까지 만해도 그들이 신약성경에서 헬라어의 수사학 양식의 관점을 가지고 관찰해도 히브리 문장구조(chiasmus)라고 알려진
문학 양식에 관한 연구가 발견되지 않았다. 이 특수한 문학적 양식은 성경 사전에 의하여 “내향적 병행구조”라고 불리 운다. 이것은
브리그(Briggs)와 몰튼(Moulton)의 작품에서 언급되었다. 그러나 본격적인 체계화 작업은 정통 유대인으로 신학자였던
로우스(Lowth)에 의해서 히브리 문장구조의 비약적인 발전과 함께 설교에 적용하게 되었다. 로우스는 신약성경이 전총적인 헬라
문화뿐만 아니라 히브리어의 유산이 함께 융화되어 있다고 했다. 이때부터 우리는 지금까지 전통적인 해석 방법의 헬라의 수사학을
배제하고 히브리어 즉 유대인의 문학 양식인 병행 구조를 현대까지 발전시킴으로 성경 이해에 대한 진일보하게 되었다. 따라서 우리가
성경에 나타나는 병행 구조는 그것이 산문이던 운문이던 간에 히브리 문장 구조의 핵심임을 알아야 한다.
계속해서
히브리 문장구조인 키아즘에 관해서 유대인으로 16세기의 드로시(De Rossi)의 작품 ‘눈의 빛’(Meor Enajim)에서
최초로 성경에 나타난 내용을 중심으로 발표되었다. 그는 이 책에서 과거 교부들에 의해 간헐적으로 히브리 문장구조에 대하여 언급
되어왔던 것들과 비교하여 볼 때 획기적인 적용으로 볼 수 있다. 한편 벵겔(J.A.Bengel)dl 1742년에 저술한 주석에서 이
구조에 대해 언급 및 활용되고, 그가 처음으로 병행 구조(chiasmus)라는 용어를 사용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또한 벵겔은
사상이나 용어의 ‘병행 구조’뿐만 아니라, 아직까지 아무도 발견하지 않은 ‘교대 병행 구조’(alternating
parallelism)에 대해서도 언급하였다. 그는 구체적인 예로 로마서 3장 9절 – 4장 12절을 7개의 부분으로 병행 구조로
배열하고 중심에 3장 22절의 믿음이라는 단어를 배치하였다.
키아즘의
비약적인 발전은 1752년 영국에서 유대인으로 기독교 신학자였던 로버트 로우스(Robert Loeth)는 옥스퍼드 대학에서
“히브리인의 거룩한 시”라는 제목으로 일련의 강의를 시작했다. 이것이 현대적 히브리 문장구조라고 불리는 병행구조 연구의 본격적인
장이 마련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로우스는 구약성경과 신약성경의 많은 부분이 히브리 문장 병행구조라는 히브리 시의 리듬의 본질을
발견한 공로가 있다. 그는 히브리 문장구조를 다음과 같이 “각 주기 안의 구성 요소간의 어떤 동일성, 닮음, 관계성으로, 같은
주기의 구성 요소들이나 줄 들 안에서, 어떠한 규칙들에 의해서 상호 간에 일 들이나 단어들이 대답되어지는 것이다”라고 정의했다.
그는 더 발전시킨 히브리 문장 병행구조를 동의적(synonymous, gradational : 눅 1:46-47),
반의적(antithetic, opposite : 잠 27:6), 종합적(synthetic, construction: 시
19:7-9)으로 세분화한 신학자로 기록된다. 이러한 많은 예들이 로우스(Robert Lowth)의 저작인 “이사야서의 새로운
번역”에 아주 자세히 기록하고 있다. 물론 이러한 일련의 일들은 그가 히브리 문장 구조에 익숙한 유대인이기 때문에 되어졌다고 볼 수
있다. 이때부터 히브리 문장구조는 본격적으로 연구되기 시작했다. 정작 로우스의 책이 세상에 나온 것은 독일 학자인
믹카엘리스(J. D. Michaelis)에 의해 수정 보완되어 1758년과 1761년에 각각 출판되었다.
그들의
공로로 인해 우리는 히브리 문장 병행구조의 분야에 기초적인 토대가 마련되었다. 여기서 우리가 어떻게 로우스에 의하여 키아즘이
비약적인 발전을 이루었는가에 대해서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그 이유는 로우스가 유대인 신학자이기 때문에 가능했다는 점이다.
우리는 로우스의 절대적인 도움으로 히브리 문장구조에 대한 비약적인 발전과 아울러 더 많은 연구에 획기적인 계기가 되었던 점을
주목해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유대인 신학자들인 랍비들이 성경을 해석하고 적용하는 원리에 주목해야 하는 이유를 찾을 수 있게
되었다. 그런 그의 유대적인 배경이 이방인 신학자들의 책상에서 성경을 연구한 것과는 엄청난 차이가 있을 수 밖에 없었다. 그가
자기 민족이 구약성경을 해석하던 원리들을 가지고 신구약 성경을 히브리적인 문장구조에 관심을 가지고 적용했기 때문에 키아즘의
비약적인 방전이 가능했다고 보면 틀림없는 사실이다. 그런 면에서 보면 유대인인 로우스가 기독교 신학자로 히브리 문장 구조의 핵심을
알게 된 것은 아주 우리에게 무척 다행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이때부터 그의 유대적인 배경에 입각한 해석학의 적용으로 다른
신학자들이 히브리 문장구조인 ‘교차 병행구조’에 대한 연구의 꽃을 피우는 계기가 되었다.
한편
로우스의 연구를 이어 받은 영국의 존 제브(John Jebb)는 1820년에 발표된 “거룩한 문학”(Sacred
Literature)에서 로우스가 말한 동의적 병행을 “같은 어원의 병행구조”(coganate parallelism)로 대치할
것을 주장했다. 또한 그는 로우스에 의해 제안된 세 가지 종류 외에 한 가지를 추가하여 이것을 “내향적 병행
구조”(introversion, introverted parallelism)라고 명명한 것이 그의 중요한 공헌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의 종의에 의하면 키아즘은 “시의 문장 가운데에 그 줄이 얼마이든 간에 처음이 끝과 병행하고, 두 번째가 마지막 전
것과, 이런 식으로 계속되어져서, 밖에서 안 쪽 중심으로 들어가는 모양”이라고 말했다. 그는 시편 135편 15-18절을 예를
들어 설명하였다. 그는 이 원리를 더욱 발전시켜 병행원리를 구약에서 신약으로 확대 적용하여 많은 문장들을 문단이나 연으로 집단화
하였다.
한편
로우스는 줄 만으로의 병행 구조를 다룬 반면, 독일신학자 제브는 병행조를 긴 본문 부분에도 적용한 것이 공헌이라 하겠다.
계속해서 제브는 “앞에서 열거한 각 형태는 많은 부속 변형과 상호 결합이 존재하며, 여러 절들이 여러 가지 형태로 상호 결합되며,
분위기가 상호 문장에 생기를 띠게도 하며, 사고의 흐름을 특수하게 부각시키기도 한다”라고 말했다. 그는 이 외에도 병행 구조에는
여러 가지의 변형 형태가 존재하며 각 줄들은 2행 배열, 3행 배열, 4행 배영 또는 그 이상의 형태를 가진다고 하였다. 그는 이
구조를 취급하는데 있어서 American Standard Bible을 사용하였다. 따라서 제브는 실로 키아즘을 대중화시키는 일에
선구자로 간주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또한
영국의 토마스 보이스(Thomas Boys) 목사는 1824년 그의 저서 “Tactica Sacra”와 1825년의 “Key
to the Book of Psalms”에서 도치 순서(inverted order)에 관하여 연구한 것을 발표하였다. 보이스는
이러한 형태인 도치 순서 병행은 히브리인의 문학작품, 대화, 토의 등에서 두루 발견된다고 하였다. 보이스는 제브의 ‘내향적
병행구조’란 용어를 버리고 “대응(correspondence)”란 용어를 사용하였는데, 그 이유는 이러한 현상들이 줄들에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 문장이나 책 전체에도 적용되고 있기 때문이었다. 즉 병행 구조의 한계를 더욱 확장시켜 같은 문단에서 각
대응되는 줄들 간, 뿐만 아니라, 전체 문단 간에서도 이와 같은 상호 대응이 있음을 지적한 것이다. 그는 모든 구조를 분류하면서
1) 교대적인 2)내향적인 3) ‘교대적인 + 내향적인’ 결합형의 형태로 분류하였다.
스코틀랜드의
신학자인 존 포비스(John Forbes)는 1854년에 “성경의 대칭적 구조”(The Symmetrical Structure
of Scripture)를 출판하여 신구약에 나타난 도치 구조를 찾아냈으며, 그의 책에는 로우스와 벵겔과 보이스 및 제브를 자주
인용하였다. 또 다른 스코틀랜드 학자인 윌리엄 밀리간(William Milligan)은 요한계시록을 연구하여 그의 저술에서 도치
순서 구조에 많은 관심을 가졌다. 그렇지만 그는 제브나 포비스가 사용한 용어들은 사용하지 않고, 단지 “도치 병행 구조”라는
단어만 사용했으며 이러한 구조에 관해 확실한 개념을 가지고 있었다. 1908년에 룬드(Nils Wilhelm Lund)가
1942년에 그의 박사학위 논문인 “Chiasmus in the New Testament”를 시작으로 이에 관련된 여러 눈문들을
다수 발표하였다. 그는 1922년에 옥스퍼드 대학 출판부에서 벌린저(E.W.Bulliger)의 감수 아래 “동료성경(The
Companion Bible)”을 출간하여 성경 전체에 걸쳐 ‘도치 구조’를 많이 적용해서 발전시켰다. 하지만 이 책은 세대주의
입장에서 편집되어 많은 오류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참고로 할 때 세심한 주의가 필요하다. 또한 1978년에 웰치(John W.
Welch)가 “Chiasmus in Antiquity”라는 책을 통하여 그 간의 동 분야에서 이룩한 업적들을 전체를 종합해서
모았으며 여기에 자신의 연구를 포함시켜 편집 발표하였다.
4. 단문, 히브리 문장구조의 종류
아래의
분류는 단문의 경우 나타나는 키아즘 병행구조에 적용된 기본적인 분류이다. 정말 히브리 문장구조에는 확실히 절과 간 사이에
병행구조가 있다. 여기서 각 문장의 단락들은 그 글의 중심 문단으로부터 서로 병행하고 대칭되는 구조를 가지고 있다. 신학자들은
이러한 대칭에 대해서 병행이라고 부른다. 이러한 문장 구조의 병행은 많은 다양성과 등급이 있다. 그렇지만 히브리 문장구조는 여러
가지의 기본적인 형태로 분류할 수 있다. 그러므로 히브리 문장 구조는 아래의 여러 가지 구조들이 교차 병행되어 하나님의 말씀으로
생생하게 구성되어 있다. 히브리 문장구조는 이 몇 가지 기본적인 병행에서 파생되어 다른 여러 가지의 다양한 병행 구조가 포함된다.
우리가 히브리 문장 구조의 기본적인 형태를 알고 있으면 성경에 나와 있는 다른 형태의 것들은 어렵지 않게 적용할 수 있다. 이제
우리가 병행에 어떤 의미가 있는지를 알아보고자 한다. 이는 병행되고 있는 내용과 단어 사이에 어떤 관계로 설명하는 가에 대한
문제이다.
동의적 병행
근대의
최초로 유대인 신학자가 된 로우스는 정의하기를 히브리 문장 병행 구조로 대응하는 곳에 묘사된 단어는 서로 차이가 있어도 실제로 그
의미는 같은 것으로 보아야 한다고 말했다. 좀 더 쉽게 설명하면 문장의 서로 대응되는 병행구조는 같은 의미를 가지나 반복을
피하고 좀 더 이해를 돕기 위하여 동일한 의미를 가진 다른 용어를 사용해서 구체적인 뜻을 설명한다. 따라서 어떤 문장에서 한
주제가 정해지면 그 전체 또는 일부가 같은 의미로 이해할 수 있는 다른 용어로 계속해서 반복되고 있다. 그러므로 그는 단어는 서로
다르지만 그 뜻은 동일한 어원(cognate)이라는 용어가 더 적합하다고 제시했다. 하지만 후대의 이 분야를 깊이 연구한
신학자들은 같은 개념이 점진적으로 상승 또는 하강한다는 의미에서 동의적 병행을 점진적 병행(gradational)이라는 단어가 더
적합하다고 하였다.
동의적 병행이 되는 시편에서 그 예를 살펴보자.
예) 시편 8편 4절
사람이 무엇이관대 주께서 저를 생각하시며
인자가 무엇이관대 주께서 저를 권고하시니이까
사람과 인자 그리고 생각과 권고가 서로 동의적으로 병행되고 있다. 시편이나 잠언은 이런 동의적 병행이 많이 나타나는데 그 이유는
같은 문장을 단순히 반복하는 것보다 그 뜻을 더 분명하고 강조하는데 동의적 문장이나 단어를 통해서 표현하는 것이 가장 효과적이기
때문이다. 히브리 문장구조에서 동의적인 병행은 단순한 반복을 피하고 하나님께서 그 사실을 강조하고 각인시키기 위한 방법으로 가장
많이 쓰이는 형태의 문장이다. 특히 어떤 사실을 말하고 우리로 하여금 그 의미를 잘못 이해하지 않도록 다시 한 번 동의적인
표현을 써서 그 뜻을 분명히 하기 위한 히브리 문장구조가 가지고 있는 특징이라 말할 수 있다.
가장 단순한 히브리 문장구조를 통해서 다시 한 번 동의적 병행을 살펴보자.
시편 19편 2절
날은 날에게 말하고
밤은 밤에게 말한다
본문은
내용적으로 볼 때 병행되는 단어들이 서로 동의적이다. 다른 예로는 시 21:1-2; 24:3-4; 107:1, 사 55:6-7
등을 예시하였다. 동의적 병행은 성경에서 가장 많이 나타나는 히브리 문장구조의 형태로 보면 된다. 우리가 동의적 병행의 구조를
보면 하나님께서 좀 더 구체적으로 그 단어와 의미를 설명하기 위해 비슷한 단어나 같은 의미의 단어를 통해서 강조하고 반복할 때
많이 쓰이는 히브리 문장구조의 가장 일반적인 패턴이다.
반의적 병행
반의적
병행은 문장 구조 안에서 서로 두 줄이 병행이 되고 있으나 서로 간에 단어나 감정이 반대로 되는 경우를 말한다. 한편 히브리
문장구조에서 반의적 병행 구조를 자주 사용하는 덧은 바로 반대적인 개념을 언급하기 때문에 다른 해석이 없어도 성경을 읽는 사람이
쉽게 그 의미를 파악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마치 흰색과 검은색을 대조하여 그 차이를 설명하기 위하는 것과 같다. 아래의
잠언에 나타난 반의적 병행은 서로 반대적인 의미로 설명하기 때문에 보통 사람들은 쉽게 그 의도를 파악할 수 있게 해주는 것이 그
특징이라고 말할 수 있다. 주로 잠언에서 하나님께서 자주 쓰는 방법으로 동의적 병행과 아울러 반의적 병행은 매우 중요한 히브리
문장구조의 형태이다.
잠언에 나타난 반의적 병행의 형태의 예를 살펴보자.
예) 잠언 27장 6 - 7절
친구의 통책은 충성에서 말미암은 것이나
원수의 자주 입맞춤은 거짓에서 난 것이니라
배부른 자는 꿀이라도 싫어하고
주린 자에게는 쓴 것이라도 다니라
본문은
서로 대칭되는 단어와 내용이 서로 반대가 되는 단어를 통해서 히브리 문장구조의 반의적 병행의 패턴을 잘 보여준다고 볼 수 있다.
좀 더 구체적으로 설명을 하면 친구와 원수가 서로 반의적으로 병행이 되고 있고, 더 발전하여 친구는 충고할 때 충성된 마음으로
시작하지만, 원수의 가식적인 사랑의 행동은 거짓에서 출발하는 것이라고 반의적으로 설명하고 있다. 계속해서 배부른 자와 주린 자가
반의적으로 병행이 되고 있고, 꿀과 쓴 것이 반의적으로 병행되어 그 의미가 너무도 선명하게 드러나고 있다. 이런 예들은 잠언에
주로 많이 나타나고 있는데 더 연구하고 싶으면 잠언 10장 1, 7절과 29장 26절 그리고 시편 20장 7 - 8절에서 찾아보기
바란다.
종합적 병행
키아즘은
근대에 와서 유대인 신학자 로우스에 의하면 히브리 문장구조인 병행 구조가 건축물의 형태와 유사하다고 하였다. 그 이유는 단어와
단어, 문장과 문장사이에 동의적 병행이나 반의적 병행이 직접 존재하지 않지만, 본문의 전체 문장과 각 부분들의 주제를 더 분명하게
보여주기 위해서 구조의 형태에서 서로 대칭 및 동질적으로 종합적인 내용으로 병행의 구조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명사는
명사에게, 동사는 동사로, 의문사는 의문사로, 구성 요소들은 구성 요소들에게, 반대는 반대로, 질문은 질문으로 등 유사성이나
동일성이 상호간에 종합적인 형태로 병행이 되는 형태를 말한다. 히브리 문장 구조에서 종합적 병행을 통해서 성경을 쉽게 이해하도록
배려하기 위함이다. 우리가 아래의 예를 보면 좀 더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종합적 병행에 대한 예를 시편에서 살펴보자.
예) 시편 1편1절
복 있는 사람은 악인의 죄를 좇지 아니하며
죄인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않지 아니하고
본문은
단어나 동사가 직접 대칭은 되지 아니하나 비유적이거나 은유적인 같은 사상을 가지고 전개됨을 알 수 있다. 여기서 시편 기자는
어떤 점진적인 병행과 종합적인 병행을 동시에 히브리 문장 구조를 사용하여 좀 더 쉽게 이해할 구 있도록 돕고 있다.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복 있는 사람이 어떤 상태에서 살아야 하는지를 실제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복 있는 사람은 악인의 꾀를 좇지 아니하고 더
나아가 죄인의 길에 서지도 아니하고 오만한 자리에 앉지 않는다는 행동의 동사를 통해서 복 있는 자가 어떤 자리에 있는 것인가를
구체적으로 설명하고 있다.
시편
기자는 복 있는 사람은 어떤 자리에 있는가에 따라 그곳이 복된 자리가 될 수도 있지만, 어떤 자리는 죄와 악인들이 있는 복 없는
자리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복 있는 자는 악인과 죄인 오만한 자들이 아닌 의인들의 자리에 있을 때 하나님의 축복을
받을 수 있다는 설명을 히브리 문장구조에서 종합적인 병행을 통해서 설명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정말 술 먹는 자리는 복 있는
자리라고 할 수 없고 은혜 받는 자리가 복 있는 가리라는 사실을 시편기자는 너무도 경험적으로 알고 있기에 고백하고 있다. 물론
시편 1편은 복 있는 사람과 복 없는 사람 즉 의인과 악인에 대한 종합적인 병행을 통해서 설명하고 있다.
교차적 병행
교차적
병행은 제브에 의해 내향적 병행구조(introverted parallelism)로 제시된 4번째 구조이다. 교차적 병행은 대칭적
병행구조라고도 말하는데 이는 문장에서 줄이 아무리 길더라도 글의 중심에서부터 시작하여 첫 줄이 마지막 줄과 병행이 되고 둘째
줄은 마지막 전 줄과 병행이 되고 그런 식으로 전체가 배열되는 형태를 말한다. 키아즘은 신구약 성경을 기록하고 있는 이러한
‘히브리 문장 병행구조’를 CHIASMUS(키아스무스, synchysis, epanodos)라고 히브리 문장구조를 연구한
신학자들이 불러왔다. 저자는 히브리 문장구조에 해당하는 이러한 형태를 ‘히브리 문장구조’ 즉 키아즘(chiasm)란 용어로
통일한다. 주님께서 저자에게 키아즘이라는 한 가지 형태의 히브리 문장구조만 배운 것이 아니라 히브리 사고의 전반적인 내용을 배웠기
때문에 이렇게 종합해서 키아즘 프리칭이라는 책을 쓸 수 있는 큰 축북을 받았다는 사실이다.
히브리
문장구조는 문장에 나타나는 글의 형태를 통해서 저자의 의도를 쉽게 파악할 수 있다. 키아즘 병행구조는 신구약 성경에 적용할 수
있는 히브리 문장구조의 핵심적인 원리가 된다. 따라서 히브리 문장구조의 원리는 성경의 모든 문장에 망라해서 적용되고 있다. 실제로
우리가 이상의 히브리 문장 병행구조를 모르면 성경을 정확히 해석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고 말할 수 있다. 물론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한글 성경은 번역에 문제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병행구조의 원리는 충실하게 따르고 있다. 교차적 병행구조는 우리가 몇 가지
예를 들어보면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예) 마태복음 6장 24절
A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B 혹 이를 미워하며 저를 사랑하거나
B` 혹 이를 중히 여기며 저를 경히 여김이라
A`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
본문은
A에서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한다고 언급하면서 A`는 구체적인 설명의 형태로 한 사람은 우리로 적용하고 두 주인은
하나님과 재물이라고 정확한 해석을 하고 있는 형태가 교차적 병행구조의 키아즘이다. 실제로 우리가 키아즘을 모르면 두 주인이 정확히
무엇인가를 고민할 수 밖에 없다고 선언하고 있다는 점이다. 결국 사람은 하나님을 섬기든지 재물을 섬기든지 하는 존재이지 둘 다
섬길 수 없도록 지음 받았다고 설명하고 있다. 따라서 우리는 어떤 존재를 섬길 것인지를 선택해야 하는데 주님은 하나님을 섬길 것을
암시적으로 압박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렇듯 키아즘의 형태인 교차적 병행은 가장 많이 나오는 형태로 긴 문장이 아닌 짧은 문장에서
즐겨 쓰는 방법이다.
마태복음에서 우리는 또 다른 예를 살펴보자.
예) 마태복음 10장 16절
A 보라 내가 너희를 보냄이 양을
B 이리 가운데 보냄과 같고다
B` 그러므로 너희는 뱀같이 지혜롭고
A` 비둘기 같이 순결하라
위에
나타난 예를 보면 AB-B`A`로 기록하고 있는 교차적 병행구조를 볼 수 있다. 이러한 현태는 성경에 가장 많이 나타나는 히브리
문장 구조 형태에서 찾을 수 있다. 또한 이러한 병행 구조는 성경해석의 가장 기본적인 원리에 해당한다.
교대적(alternating) 병행
교대적
병행은 전반부의 내용이 그대로 후반부에서 같은 순서로 전개되는 것을 말한다. 이런 히브리 문장 병행구조 형태의 문장이 반복되면서
성경의 저자가 자신의 의도를 자연스럽게 그 뜻을 밝힘으로 이 본문을 해석하는 사람으로 하여금 다르게 해석하는 실수를 막고자
함이다. 예를 들어 성경의 저자는 교대적 병행의 구조를 통해서 자신이 A라고 말한 것은 A`라는 의도의 뜻이기 때문에 다른 의미로
해석하지 말라는 적용된 설교의 문장구조이다. 그러므로 히브리 문장구조에서 교대적 병행의 짝을 찾으면 무엇을 설교할 것인지를 저자
자신이 분명하게 말하고 있기 때문에 우리가 엉뚱한 내용으로 설교할 수 없게 해준다.
이제 우리는 교대적 병행구조의 예를 살펴보자.
예) 마태복음 6장 34절
A 그러므로 내일 일을
B 염려하지 말라
A` 내일 일은 내일
B` 염려할 것이요
교대적
문장구조는 병행이 나타날 때 같은 순서로 반복되어 설명하는 수순을 따라 기록된다. 본문은 짧지만 AB-A`B` 교대적 병행구조로
되어있다. 다시 말해 내일 일은 내일 염려할 일이기에 내일 것까지 오늘 가져다가 염려하는 어리석은 일을 반복하지 말라는 교훈을
강조하고 있다.
또 다른 예를 계속해서 살펴보자.
예) 에베소서 1장 15절
A 주 예수 안에서
B 너희의 믿음과
A` 모든 성도를
B` 향한 사랑을
본문은 아주 단순한 문장이기는 하지만 AB-A`B` 교대적 병행구조를 볼 수 있다. 이제 우리는 누가복음에 나타난 교대적 병행구조의 예를 살펴보자.
예) 마태복음 7장 7 - 11절 [기도의 명령]
A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B 찾으라 그러면 찾을 것이요
C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요
A` 구하는 이마다 받을 것이요
B` 찾은 이가 찾을 것이요
C` 두드리는 이에게 열릴 것이라
이
문장의 예는 우리가 너무 잘 알고 있는 내용으로 ABC-A`B`C`의 순서로 교대적 병행구조로 본문이 구성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먼저 저자는 몇 가지 질문을 던지고자 한다. 첫째로 이 본문은 앞에 등장하는 ABC의 문장과 A`B`C`의 교대적
병행구조가 단순히 강조하기 위한 서술인가 아니면 그 이상의 다른 의미의 설명인가 하는 문제이다. 둘째로 이 본문이 기도에 대한
약속인데 같은 내용을 다른 내용으로 설명하는 것인가 아니면 전혀 다르게 표현한 기도의 점층적 표현인가 하는 문제이다. 실제로 이
본문은 히브리 문장구조의 키아즘의 진수를 알려주는 기법으로 우리가 이 패턴을 잘 이해하면 다른 성경도 어렵지 않게 이해할 수 있을
것으로 확신한다.
먼저
ABC는 기도에 대한 하나님의 불변적인 약속임과 동시에 히브리 문장구조에서 명령형 동사로 기록되어 있다. 여기서 “구하라,
찾으라, 두드리라”는 명령형 동사는 히브리 문장구조에서 아주 독특한 특성을 가지고 있다. 그것은 명령형 동사가 하나님께서 약속한
말씀이라고 할지라도 그 명령의 약속대로 순종할 것을 전제함과 동시에 순종할 때 그 말씀이 실행이 되도록 결정해 놓았다는 점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아무리 ‘구하라, 찾으라, 두드리라’는 말씀을 백번 천 번 암송하고 가슴에 품고 있어도 이 말씀은 아무런 일을 할
수 없다. 그 이유는 히브리 사고에서 명령형 동사는 순종할 때 일하도록 했기 때문이다. 우리가 직접 그 기도하라는 약속을 붙잡고
기도하는 그 시간이 바로 하나님께서 직접 그 기도를 응답하시는 타이밍이다. 하나님은 기도에 대해서 순종에 대해서 믿음에 대해서
아는 것에는 아무런 반응을 하지 않으신다. 도리어 우리가 기도할 때, 순종할 때, 믿음의 반응을 할 때 일을 시작하신다. 그것이
명령형 동사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의 실행 원칙이다. 하나님은 지금도 기도하는 자를 찾으시고 그 사람과 세상을 변화시키는 사역을
진행하신다. 이 원칙은 히브리 사고의 명령형 동사가 가지고 있는 전제이며 원칙이다. 이 원칙은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변할 수 없는
진리이다.
우리가
먼저 알아야 하는 사실은 ABC가 주님께서 보편적인 모든 사람들에게 약속하는 명령형 약속이라는 사실이다. 실제로 ABC 단계는
기도와 응답에 대해서 약속하는 명령일 뿐 응답 자체는 A`B`C`의 단계에서 우리 자신이 기도할 때 성취되는 응답임을 분명히
알아야 한다. 히브리 문장구조에서 ABC가 보편적인 기도하라는 명령의 약속일 뿐이다. 이 단계에서는 기도의 능력이나 응답이 있을 수
없다. 기도의 응답은 A`B`C`의 단계에서 그 약속의 말씀을 믿고 실천하는 자들이 경험하는 세계임을 분명히 알아야 한다.
이것이 본문의 히브리 문장 교대구조를 통해서 주님께서 가르쳐 주고자 하는 분명한 목적이다. 이 본문은 성경 각권을 다룰 때
마태복은 키아즘 편에서 아주 자세히 언급할 것이다.
교대적 병행구조의 예를 하나 더 살펴보자.
예) 고린도전서 3장 6-7절
A 나는 심었고
B 아폴로는 물을 주었으되
C 오직 하나님은 자라나게 하셨느리라
A` 그런즉 심는 이나
B` 물주는 이는 아무 것도 아니로되
C` 오직 자라나게 하시는 이는 하나님뿐이니라
바울은
고린도교회의 분쟁은 언급하고 해결하려는 과정에서 일어난 분쟁의 원인을 근본적으로 접근하는 것이 본문의 핵심 키아즘 구조이다.
고린도 교회에 일어난 분쟁의 원인은 제일 먼저 지도자들에 대한 왜곡에서 시작된 것을 바울은 잘 알고 있었다. 이 교회를 개척한
바울을 지지하는 바울파가 득세했고, 그 다음은 초대교회의 정신적 지주인 베드로를 지지하는 베드로파가 도전했고, 바울을 이어 목회학
아볼로를 지지하는 아볼로파가 만만치 않았고, 마지막으로는 예수를 믿기 때문에 자신은 누구의 파도 아닌 그리스도파라고 만날 때마다
큰 파벌 싸움이 있었던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바울은 이 분쟁의 원인을 제거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여기고
히브리 문장구조인 교대적 병행구조를 가지고 한 방에 분쟁을 해결하기 위한 관점에서 출발하고 있다.
바울은
A에서 나무로 고린도 교회의 개척을 비유하면서 자신은 심었을 뿐인데 그 심었다는 의미를 A`에서 심은 자는 아무 것도 아니라고
설명하고 있다. 바울이 자신을 지지하고 따르는 사람들에게 교회의 지도자인 목회자의 위치가 어떤 존재인지를 스스로가 아무 것도 아닌
존재로 선언하고 있다는 점이다. 많은 교회가 지도자의 문제로 심각한 어려움을 겪고 있는 현 시대의 상황에서 본문에서 바울 자신이
자신의 존재의 위치를 부정하는 것은 목회자의 현재의 위치가 어떤 모습인지를 깨닫고 적용하는데 큰 도움이 될 것이라고 확신한다.
이것은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중복적인 관계를 설명하는데 완벽한 샘플이 되고 있다. 그러므로 지도자란 자리의 문제가 아니고 역할의
문제만 있다는 인식이 고착화된다면 많은 교회의 자리의 갈등이 해결될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
바울은
계속해서 B에서 아볼로를 지지하는 성도들을 향해 아볼로는 물을 주었으나, B`에서 설명하기를 물주는 이도 고린도 교회의 성도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대단한 존재가 결코 아니라 바울 자신처럼 아볼로도 아무 것도 아니라고 선언하는 키아즘 구조인 것이다. 지도자가의
자기 부인은 오늘날 메가톤급 교회의 목회자가 하나님의 위치처럼 높아진 상황에서 많은 것들을 생각하게 하고 깨닫게 하는 고백이
아닐 수 없다. 교회의 지도자는 단지 심는 일과 물주는 일의 역할만 존재하고 결국 모든 일은 하나님께서 하신다는 설명은 오늘날
우리 교회의 모순을 단번에 해결할 수 있는 원리가 아닌가 여겨진다.
마지막으로 바울은 고린도 교회의 모든 갈등과 분쟁을 해결할 수 있는 결정문을 선언하는 히브리 문장 교대적 병행구조를 보여준다.
바울은 C에서 ‘오진 하나님께서 자라나게 하였으니’라는 선전포고 같은 말씀으로 결론을 내리고 있다. 바울은 여기서 오직이라는
유일무의한 단어를 선포하고 있는데 이 단에서 반발하거나 거부할 자가 없어야 한다는 경고적인 말씀이다. 오직 고린도 교회가 성장하고
자라는 것은 하나님만 하실 수 있는 일이고, 또한 교회는 하나님의 교회이지 그 어떤 개인의 교회가 될 수 없다는 말씀이다.
그리고 바울은 C`에서 오직 고린도 교회를 자라게 하신 이는 하나님뿐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이 말씀은 교회의 주인은 하나님뿐 그
누구도 교회의 주인이 될 수 없다는 의미이다. 교회의 성도인 양떼도 주님의 양이지 그 어떤 지도자나 목회자의 양이 될 수 없고,
교회 자체도 하나님만이 주인이라는 선언적인 병행구조의 설명이다. 이런 사실을 망각하고 그 어떤 사람이라도 하나님의 자리에 앉은
것은 사탄적인 발상이라고 주님은 말씀하고 계신다. 결국 바울은 심는 자나 물을 준 자는 하나님께 그 행한대로 상급을 받을 뿐, 이
땅의 그 어떤 목회자라고 할지라고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라고 설명하였다.(고전3:8)
5. 장문, 히브리 문장구조의 형태
순차적 병행
순차적
병행은 저자가 신구약 성경에서 제일 먼저 발견한 히브리 문장구조의 형태이다. 또한 저자는 히브리 문장구조의 전체를
키아즘(Chiasm)이라는 새로운 이름으로 통일시켜 신학적으로 처음으로 붙여 말하는 것이다. 저자가 보기에 순차적 병행구조는 헬라
사고에 익숙한 사람들이 가장 쉽게 접근할 수 있는 문장구조임에 틀림없다. 지금까지는 그 어떤 사람도 성경이 히브리 문장구조로
병행된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기 때문에 가장 쉬운 구조조차 설교로 발전시키지 못했던 것이다. 저자도 키아즘을 배우고 설교에 적용하고
가르치면서 마지막까지 풀리지 않았던 것이 바로 순차적 병행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키아즘을 연구하면 할수록 지금까지의 병행적
분류로 해결할 수 없는 본문이 많다는 것에 대한 문제에 봉착했다. 그러다가 순차적 병행 문장으로 설명한 본문이 있다는 것을
하나님의 은혜로 발견했다. 그 후 신구약 성경 가운데 순차적 병행이 많이 있을 뿐만 아니라, 거의 모든 본문의 병행구조들을 설명할
수 있게 되었다. 이런 발견은 저자가 우직스럽게 성경 본문만을 붙잡고 한길만을 걸어온 것에 대한 하나님의 축복의 결과라고 고백할
수밖에 없다.
히브리
문장구조에서 순차적 병행은 긴 본문 안에서 각 절 별로 병행적 구조가 같은 패턴으로 계속되는 것을 말한다. 예를 들면 A 와
A`가 순서적으로 설명되어지고 계속해서 B 와 B`의 패턴으로 C C`, D D`로 연속적으로 설명되어지는 구조이다. 이런 구조는
헬라 사고에 익숙한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해 만들어진 특별한 구조임을 저자가 찾아낸 원리이다. 순차적 병행구조는 이야기
형태의 글에서 많이 나타나고 있다. 우리는 지금까지 짧은 본문만 가지고 키아즘의 형태를 찾았다면, 긴 본문에서 순차적 병행구조로
접근할 때 전체적 내용이 한눈에 들어오는 병행구조라는 사실이다. 앞으로 이런 예들은 이 책에서 많이 접하겠지만 이렇게 글로
설명하는 것은 한계가 있다는 점을 인식해 주면 좋겠다.
히브리
문장구조의 순차적 병행은 지금까지 획일적인 형태만을 고집한 사람들의 선입관을 깨고 새롭게 성경을 접근하고 해석할 수 있는
획기적인 틀을 마련해주었다는 점이다. 저자는 이런 히브리 문장구조의 형태를 새롭게 분류하여 키 구조와 브이 구조로 구분해서
언급하고자 한다. 성경이 히브리 문장구조로 되어 있다는 사실은 우리에게 무엇을 가르치고 있는가의 문제를 알아야 한다. 이는 성경이
지금까지 우리가 알고 있는 것처럼 하나님의 말씀이면서 한 걸음 더 나아가 하나님께서 그 시대에 주신 설교의 현태를 가진 문장의
형태로 우리에게 주어져 있다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성경을 볼 때 하나님의 말씀이 설교라는 문장으로 우리에게 주어졌기 때문에
이미 성경 자체가 하나님에 의해서 해석되어진 말씀으로 받아야 한다. 그러면 지금까지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은 무조건 해석하고
주석해서 오늘날의 환경에 적용을 덧붙여 설교한 모든 행위에 대하여 다시 한 번 되물어 보아야 마땅하다. 지금까지 수천 년간 설교해
온 것을 정당화하는 것이 마땅한가 말이다. 저자는 이제부터 히브리 문장구조를 이해한 목회자는 자신의 의지를 따라 해석한 설교를
내려놓고 하나님의 설교한 문장구조를 가지고 선포하는 자리로 돌아와야 한다는 믿는다.
히브리 문장의 키(X, Chi) 구조
히브리
문장구조의 가장 기본적인 형태는 교차병행구조라는 부르는 키 구조이다. 이 형태는 신구약 성경의 많은 분량이 키 구조의 형태라고
보면 틀림없다. 이것은 히브리 문장에서만 나타나는 형태로 다른 언어에서는 그 유래를 찾아보기가 어렵다. 만약 우리가 이런 히브리
문장구조로 글을 쓰는 것은 불가능하지만, 성경을 번역해보면 이런 구조로만 번역이 가능하게 되어 히브리 문장의 형태로 글이
구성된다. 성경이 이런 형태로 기록될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바로 하나님의 말씀이 설교의 형태로 듣는 사람의 입장에서 기록된 글이기
때문에 필연적인 결과였다. 결국 이런 히브리 문장구조의 형태는 하나님의 사고로만 기록할 수 있는 유일한 형태라고 볼 수 있다.
설교 형식의 문장에서는 반복과 점층적인 상승과 설명이 필수적인 것이기 때문에 이런 히브리 사고의 문장 구조가 당연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키
구조의 예들은 앞에서 많이 언급했고 앞으로도 성경의 각권에 나타나는 예들을 구체적으로 제시할 것이기 때문에 여기서는 생략하기도
한다. 하지만 이런 히브리 사고의 문장의 현태가 나올 때 해석자가 가장 주의를 해야 한다는 사실을 망각하면 그는 설교자의 자격이
없다. 키 구조의 해석은 이미 성경 자체가 해석적인 문장의 구조로 설명을 하고 있기 때문에, 해석자는 그 구조의 분석만 잘해도
이미 설교의 내용은 다 준비된 것이라고 보아도 무방하다. 이렇듯 키 구조의 형태는 우리가 많은 실습을 통해 습관적으로 찾을 수
있는 준비가 되어야 한다. 저자는 이 책을 읽는 모든 분들이 히브리 문장구조의 키 구조에 전문적인 안목의 사람이 될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
히브리 문장의 순차적 구조(V구조)
브이
구조의 히브리 문장구조는 저자가 새롭게 찾아낸 히브리 문장구조의 틀이다. 저자는 브이 구조를 키 구조에 넣기 보다는 너무 다른
형태이기 때문에 새로운 히브리 문장구조 안에 배치하였다. 특히 브이 구조는 순차적 병행이라는 이름으로 저자가 분류하였다. 물론
브이 구조는 키 구조의 형태에서 변형된 것으로 헬라 사고에 익숙한 사람들에게 친숙한 히브리 문장구조이다. 이는 저자가 십년동안
키아즘 즉 히브리 문장구조를 연구하면서 찾은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의 결과하고 고백하고 싶다. 이런 형태는 앞으로 설교자가 앞 뒤
문장의 형태를 잘 보면 찾을 수 있는 원리이다. 정말 좋은 설교자가 되길 원하면 이런 브이 형태의 키아즘을 찾으면 된다. 한편
브이 구조의 설교의 형태는 실제로 헬라 사고의 문장에 길들여진 우리에게 익숙한 문장의 구조이기 때문에 우리가 더욱더 쉽게 친숙할 수
있다.
브이 구조의 형태의 문장은 아주 단순하게 성경의 기록자가 한 문장을 설교하고 바로 다음 문장에 연속해서 자신의 해석을 달아 놓은
형태이기 때문에 찾기도 쉽고 접근하기도 쉬운 글이 분명하다. 이방인의 문장의 사고에도 아주 숙달된 문장으로 우리가 좀 더 찾기
쉬운 것이 특징이다. 브이 구조의 문장 형태는 특별히 논리성이 강한 서신서에 가장 두드러진 현상이라고 보면 된다. 그 이유는
서신서가 주로 내러티브 문장이 아닌 서술적인 문장으로 된 설교의 형태이기 때문에 이런 구조로 작성할 때 좀 더 쉽게 이 편지를
읽어주고 들려주고 이해하는데 훨씬 더 효과적인 문장의 형태이기 때문이다.
브이
구조의 키아즘의 해석은 키 구조의 해석보다는 우리에게 좀 더 친숙하고 익숙한 형태로 접근할 수 있다. 성경의 기록자가 이미
설교로 해석해서 적어 놓았기 때문에, 설교자가 억지로 해석하려고 애쓰지 않고도 쉽게 설교할 수 있는 형태이다. 성경을 연구하는
사람은 브이 구조만 찾으면 이미 성경의 원저자가 기록해 놓은 순서대로 설교의 뼈대가 완전하게 있기에 우리가 억지로 해석하려고 힘쓸
필요가 없이, 설교자는 그 내용의 순서를 따라 잘 적용하여 설교하면 될 수 있다. 이번에 저자는 이 책에서 성경 전체를 통해
브이 구조의 형태의 설교를 많이 접하게 되고 익숙하게 될 것이라고 확신한다. 정말 특이한 점은 브이 구조가 다시 키 구조의 문장
형태로도 도치된다는 사실이다.
이제 브이구조의 본문을 가지고 그 예를 살펴보자.
예) 눅 16장 17-31정
A(19절) 한 부자 A`(20절) 한 거지 나사로
B(22절) 그 부자의 죽음 B`(22절) 그 거지도 죽음
C(23절) 그 부자가 음부에서 고통 C`(23절) 그 거지는 아브라함의 품에 있음
D(24절) 아버지에게 처음으로 간구 D`(25절) 하늘 아버지의 대답
E(27절) 또 다른 간구(영혼구원) E`(29절) 하늘 아버지의 또 다른 대답
F(29,31절) 모세와 선지자들에게 들으라
본문은
히브리 문장의 순차적 구조를 가장 명확하게 보여 준다. 비록 히브리 문장의 순차적 구조를 전혀 모르는 사람조차 저자가 작성한
본문의 구조만 보아도 하나님께서 이 본문을 통해서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를 알 수 있을 것이라 확신한다. 특히 본문은 처음에는 두
사람의 대칭적 관계를 대비하면서 말씀하고자 하는 의도를 드러내고 있다면, 중반부에 가면서 천국과 지옥의 병행을 통해서 하나님의
의도를 분명하게 드러내고 후반부에서는 한 부자와 주님의 대화를 통해서 이 땅의 사람들을 구원하는 방법에 대한 이여기로 마무리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이렇듯 히브리 문장의 순차적인 구조는 도표로 표현되고 그 주제나 제목을 언급하는 것만으로도 하나님께서
무엇을 의도하고 말씀하고자 하는 내용이 무엇인지를 이것을 보는 사람들은 누구든지 알 수 있도록 구성되어 있는 것이 그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이런 순차적 병행구조를 모르고 읽거나 설교하면 그 내용이 명확히 드러나지 않을 가능성이 너무 크다는 사실이다.
결국 히브리 문장구조의 원리를 알고 어떤 구조인가를 아는 것은 하나님의 의도하신 말씀의 핵심을 한 눈에 파악하는 것이 키아즘의
특징이라 말할 수 있다. 이 본문은 누가복음 키아즘 편에서 아주 자세히 다룰 것이다.
6. 히브리 문장구조의 성경 해석 및 적용
히브리
문장구조의 ‘키아즘의 병행구조’는 현 시대에서 보면 비효율적이고 문장이 너무 복잡하게 보일 수 있다. 그렇지만 우리가 이것을
가볍게 취급하고 간단히 넘길 문제가 아니다. 특별히 히브리 문장구조가 이렇게 독특한 양식을 갖고 있는 것은, 성경을 읽는 사람들의
입장에서 기억하기 쉽고 강렬한 인상을 심어 줄 수 있기 때문이다. 현대는 문서가 발달하였으나 그 당시는 구전 문화로 모든 것이
구전에서 구전으로 전해진 점을 감안하면 더욱 그렇다. 이런 당시 문화적인 역점을 보완하기 위해서 히브리 문장 구조는 아주 독특한
특성을 가질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히브리 문장구조는 그 특성상 한번 들으면 쉽게 잊어버릴 수 없는 구조로 형태를
갖추게 되었다. 그 이유는 당시 히브리인들에게 성경은 모든 사람등의 필수적인 법과 질서를 가진 경전이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가
히브리 문장 구조를 모르면 본문을 정확히 해석할 수 없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하나님께서 직접 해석해 놓은 책 성경
하나님께서는
각 시대의 형편을 따라 시대에 맞게 적용해서 히브리 기록자들을 통해서 직접 설교한 본문을 기록한 것이 우리가 가지고 있는
성경이다.
따라서 성경은 하나님이 직접 말씀하신 설교의 기록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내 의지를 따라 단어와 문장을 잘못 해석하는
일은 더 이상하면 안된다. 물론 목회자 자신도 이런 설교를 하는 것을 조심하고 또한 설교를 듣는 청중들도 인위적인 설교를 더 이상
용납해서는 안 된다. 그렇다면 우리가 이제부터 지향해야 할 설교를 더 이상 용납해서는 안 된다. 그렇다면 우리가 이제부터
지행해야 할 설교는 하나님께서 직접 작성하는 히브리 문장구조를 따라 충실히 전달하는 역할을 해야 마땅하다. 만약 우리가 하나님의
직접 말씀하신 설교를 제쳐두고, 자기의 신학의 틀을 가지고 전통적인 방법으로 설교하는 것은 자신도 괴롭고 듣는 사람도 괴로운
일이기 때문에 더욱 곤란하다. 그러면 하나님이 직접 말씀하신 설교의 원고를 가지고 설교자인 우리가 현 시대의 쉬운 언어로 적당한
예화를 삽입하여 잘 전달하는 순간, 성령의 강력한 역사가 설교 가운데 자신도 느끼고 듣는 사람들도 공통적으로 경험할 것이다
사무엘 11장과 12장의 키아즘(Chiasm) 구조 분석
장
장절
내용
묵상
11장
11:1
다윗의 군사 파병(랍바)
11:2∼5
다윗과 밧세바 동침(죽음)
11:6∼17
다윗의 우리아에 대한 음모
11:18∼25
요압이 다윗에게 심부름꾼 보냄
11:26∼27
다윗을 악하게 보신 하나님
12장
12:1∼14
여호와께서 다윗에게 나단을 보냄
헷사람 우리아(이방인 우리아)
12:15∼23
다윗의 아이를 치심
죄 없는 아이를 치셨나? 죄 없는 예수의 죽음
12:24∼25
다윗과 밧세바 동침(솔로몬)
여디디야 하나님이 사랑하는 자
12:26∼31
다윗의 랍바 점령(요압의 요청)
♦ 2월 17일(목)
♦ 오늘 읽어야 할 말씀 : 사무엘하 12:1∼31 ♦ 묵상을 위한 주제 : 여디디야(25절) ♦ 성구 : 선지자(先知者) 나단을 보내사 그 이름을 여디디야라 하시니 이는 여호와께서 사랑하심을 인(因)함이더라.
“여디디야(Jedidiah)”
‘여디디야’라는 이름의 뜻은 “여호와께 사랑을 입음” 이라고 합니다.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가 다윗에게 낳은 아이를 여호와께서 치시므로 심히 앓다가 이레만에 죽었습니다.
다윗이 밧세바를 위로하고 그와 동침한 후 낳은 아들은 “솔로몬”입니다. 여호와께서 선지자 나단을 보내어 그 이름을 ‘여디디야’라고 불렀습니다.
하나님은 당신 보시기에 악하게 행동했던 다윗에게 당신의 대언자인 나단을 보내셨습니다. 나단이 다윗 왕 앞에서 전한 이야기는 많은 양과 소를 가진 부자가 손님을 대접하기 위해 이웃의 가난한 한 마리밖에 없는 양을 빼앗았다는 비유였습니다.
나단이 비유를 들어 말한 이유는 간음과 살인죄로 인해 하나님과 단절된 다윗에게 회개할 기회를 주려는 것이었습니다.
나단의 비유를 듣고 다윗은 크게 노하여 그 부자를 죽이고 사 배나 갚아주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때 나단 선지자는 엄한 목소리로 “바로 당신이 그 사람”이라고 책망했습니다.
나단 선지자는 하나님께서 다윗의 죄는 사하셨으나 아이는 죽을 것이며 후손들에게 비극이 임할 것이라고 경고했습니다.
나단의 말을 듣고 다윗은 회개했습니다. 다윗의 회개는 진심에서 우러나온 것으로 아무런 변명이나 핑계도 없었습니다.
밧세바가 낳은 아이가 앓자 다윗은 금식하고 밤새도록 엎드려 칠일 동안 여호와께 간구했습니다.
자신의 죄로 인해 아이가 앓자 밤새도록 울며 간구하던 다윗은 아이가 죽자 몸을 씻고 여호와께 경배하고 일상생활로 돌아왔을 때 신하들은 다윗이 크게 실망하고 슬퍼할 줄 알았으나 그렇지 않았습니다.
다윗은 돌이킬 수 없는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 이를 겸허히 수용한 것입니다.
다윗의 후계자요 그리스도의 조상이 될 솔로몬이 바로 밧세바의 소생으로 여호와께서는 나단을 보내어 솔로몬에게 “여디디야 - 여호와께 사랑을 입음”라는 이름을 친히 붙여 주셨습니다.
다윗이 암몬의 수도 랍바를 공략한 것은 죄의 문제가 해결되어야 형통한 길이 열림을 보여줍니다. 이전에 간음과 살인을 계획할 때에는 암몬을 공략하는 데 실패했지만, 죄를 회개하고 하나님의 용서를 받고서야 비로소 암몬을 공략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 오늘 읽어야 할 말씀 : 사무엘하 11:1∼27 ♦ 묵상을 위한 주제 :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3절) ♦ 성구 : 다윗이 보내어 그 여인(女人)을 알아보게 하였더니 고(告)하되 그는 엘리암의 딸이요 헷사람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가 아니니이까.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the wife of Uriah)”
“우리아(Uriah)”라는 이름의 뜻은 “빛”입니다. “밧세바(Bathsheba)”라는 이름의 뜻은 “맹약의 여자”라고 합니다.
이스라엘과 암몬은 전쟁 중이었을 때 다윗은 전쟁에 참여하지 않고 왕궁에 머물고 있었습니다.
다윗은 저녁때에 침상에서 일어나 왕궁 지붕을 거닐다가 목욕하는 한 여인을 보고 안목의 정욕에 사로잡혀 우리아의 아내라는 사실을 알고도 그 여인을 불러 들여 동침합니다. 그 여인 즉 밧세바가 잉태하자 다윗은 이를 은폐하기 위해 급히 밧세바의 남편 우리아를 전쟁터에서 소환하여 아내와 동침하도록 시도합니다.
다윗은 전쟁터에서 돌아온 우리아가 집으로 돌아가 그의 아내 밧세바와 잠자리를 갖게 하므로 자신의 죄악을 은폐하려고 하였으나 우리아는 다윗의 명을 따르지 않고 왕궁 문에서 다른 신복들과 함께 지냈습니다.
이러한 소식을 들은 다윗은 더욱 간교한 계획으로 우리아를 술에 취하게 한 후 집에 들어가도록 유도하였지만 우리아는 술에 취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왕궁 문 앞에서 밤을 보냈습니다.
다윗은 자신의 죄를 은폐시키려는 계획이 실현되지 못하자 요압에게 편지를 보내어 적군의 공격에 의해 우리아가 살해당하도록 합니다. 우리아는 자신을 살해하라는 명령을 담은 편지를 요압에게 전달했고 결국 우리아는 전사하고 말았습니다.
다윗의 죄악을 알아차린 사람은 아무도 없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여호와께서는 이 모든 일을 꿰뚫고 계셨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전진전능 무소부재하신 영원하신 하나님입니다. 우리는 아무 것도 감출 수 없는 아주 미약한 존재입니다. 드러나지 않는 것을 드러나게 하시는 하나님 앞에 모든 잘못된 것을 고백하므로 심판의 날을 준비하는 지혜로운 믿음의 사람의 반열에 참여하시기 바랍니다.
은혜의 복음이 전파 될 때 영생 얻기로 작정된 자는 므비보셋과 같이 복음을 받아드릴 것이다. 반면에 영생 얻기로 작정되지 않은 자는 하눈처럼 은총을 모독할 것이다. 그런데 다윗은 은총을 거스리는 반역 행위를 스스로 선택하였다.
히브리서 10:28-29 모세의 법을 폐한 자도 두 세 증인을 인하여 불쌍히 여김을 받지 못하고 죽었거든. 하물며 하나님 아들을 밟고 자기를 거룩하게 한 언약의 피를 부정한 것으로 여기고 은혜의 성령을 욕되게 하는 자의 당연히 받을 형벌이 얼마나 더 중하겠느냐 너희는 생각하라.
세상의 심판 기준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무시하고, 자기를 거룩하게 한 언약의 피를 부정한 것으로 여기고, 은혜의 성령을 욕되게 하는 것입니다.
곧 예수 그리스도가 심판의 기준입니다. 성령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를 주셔서 우리로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의 복음을 굳게 붙잡게 하여 주시기를 원합니다. 그 은혜 위에 굳게 서게 서서 오직 우리 주님의 은혜를 감사하며 찬양하는 자들이 되게 하여 주시기를 원합니다. 그리하여 우리로 멸망의 자식이 되지 않게 하시고 하나님의 은혜에 참여 하는 복된 자들이 되게 하여 주시기를 원합니다.
다윗으로부터 은혜를 입은 므비보셋이나, 오늘 등장하는 하눈이나, 자격없는 자들이긴 마찬가지이다. 하눈은 암몬의 왕이었는데, 다윗이 하눈의 아버지로부터 받은 은혜를 기억하고 조문하러 신하들을 보냈다. 므비보셋이나 하눈이나, 자신의 공이 아니라 그 아버지의 선행으로 은혜받을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 그런데 므비보셋은 겸손과 감사로 다윗의 은혜를 수용했고 암몬은 교만과 의심으로 다윗의 은혜를 발로 걷어차버렸다.
믿음이라는 은혜를 선물로 받았을 때 성도의 태도가 어떠해야 하는지를 잘 보여주는 본문이다. 우리는 값었이 예수님 보혈의 피로 죄를 씻는 은혜를 입었다. 천국 백성이 될수 있는 자격도 얻었다. 이것은 나의 공이 전혀 아니고, 순전히 하나님의 은혜다. 이 은혜를 받아들이는 나의 마음의 자세는 어떠한가? 기쁨과 감사함, 겸손함으로 은혜에 참여한 자가 되었는가? 교만함과 의심으로 은혜가 은혜인 줄을 모르고 복을 발로 차내고 있지는 않은가?
우리는 모두 하나님으로부터 똑같은 은혜를 받았지만, 받아들이는 마음밭에 따라 은혜를 삶속에서 경험하기도 하고, 오히려 믿음을 속박과 굴레로 여기며 은혜를 경험하지 못하기도 한다.
은혜를 온전히 내몫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비결은 오직 겸손이다. 내가 죄인이고 죽을 수 밖에 없는 존재라는 사실을 인정할 때만 은혜를 감사함으로 받을 수 있다. 하나님 없이도, 믿음없이도 잘살 수 있다고 생각하면 은혜가 고맙지 않다. 귀찮고 나를 간섭하는 굴레로 느껴질 뿐이다.
믿는자들을 핍박하는 시대가 오고 있다. 교회는 점점 세상으로부터 배척 당하고, 예수를 증거하는 것 만으로도 핍박받을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받은 은혜는 감히 세상이 줄수 없는 무한한 사랑이고 축복이다. 그 사실을 믿고, 은혜에 감사하며 하루를 살아내야 한다. 주님으로부터 받은 이 은혜를 기쁨과 감사로 내 삶에 녹여내는 내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구합니다.
'홍제천'의 이름은 조선시대 중국의 사신들이 숙식을 하던 최초의 국립여관이던 홍제원이 있어 홍제원천이라고 불렸고, 지금의 명칭도 이런 연유에서 붙여졌다고 한다. 고려시대에는 '홍제(洪濟)'로 쓰다가 조선 세종 이후부터 홍제(弘濟)와 함께 쓰였다고 한다.
홍제천에는 환향녀에 대한 아픈 사연이 전해진다.
병자호란당시
청나라로 끌려갔다가 다행히 돌아온 여성들이 고국땅을 밟았지만 끝내 고향에는 돌아가지 못한 <환향녀>에 관한 이야기가
그것이다.
17세기 중반 중국의 주도권은 북쪽에서 다시 일어난 여진의 후예 후금의 세력에게 넘어가 마침내 명나라가 망하고 청나라가
세워지기에 이른다.
청나라는 조선을 침공하여 사대(事大)를 표할 것을 요구했다. 완강히 버티던 조선은 결국 1637년 2월
인조임금이 청나라 태종앞에서 무릎을 꿇고 항복하는 삼전도의 굴욕으로 끝이났다. 치욕적 결말이었지만 이보다 더한 것은 청나라 군사가
철수하면서 조선의 백성들을 포로로 끌고 간 것이었다. 그 수는 50만명에 이른다고 한다. 볼모로는 소현세자와 세자빈 강씨,
봉림대군과 부인,그리고 관리들의자제들까지 포함되었다. 자동차도, 비행기도 없었던 시절 만주벌판을 지나 심양까지는 2천리길, 육로로
70일이 넘게 걸리는 길이었다. 추운겨울 만주벌판의 칼바람은 건강한 사람도 버티기 어려운 날씨였다. 그래서 포로의 대부분은 너무
어리거나 늙지 않은 청장년층이었으며, 절반 이상이 여성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여성은 혼인 유무를 가리지 않았는데, 청나라 병사들의
첩이나 노예로 삼기 위함이었다.
끌려간
여성들은 나이와 신분에따라 값이 매겨저 그 값을 충당해야만 돌려보냈다. 큰돈을 치르고 속환하여 겨우 돌아온 여성들을 '환향녀'라
불렀는데, 고국으로 돌아온 그녀들을 기다린 현실은 그리 녹록치 않았다. 유부녀들이 남편과 아이들이 그리워 돌아왔지만 시집에서는
그녀들을 받아주지 않았던 것이다. 이미 정절을 잃었다 하여 양반가정에서는 이혼을 요구하는 소송이 계속 제기되었다.
당시
사대부가의 이혼은 왕의 허락을 받아야만 했는데, 인조는 고민에 빠진다. 자신의무능함으로 백성을 곤경에 처하게 하더니 이제는
포로에서 풀려나온 여성들이 시댁에서 핍박받고 있는 꼴이었다. 인조는 한양으로 들어오는 길목인 "홍제천에서몸을 씻고 들어오면 모든
것을 없었던 일로 해주겠다"며 그녀들의 정절을 문제 삼는 이혼을 금지 시켰다.
♦ 2월 15일(화)
♦ 오늘 읽어야 할 말씀 : 사무엘하 10:1∼19 ♦ 묵상을 위한 주제 : 너는 담대하라(12절) ♦ 성구 : 너는 담대(膽大)하라 우리가 우리 백성(百姓)과 우리 하나님의 성읍(城邑)들을 위(爲)하여 담대(膽大)히 하자 여호와께서 선(善)히 여기시는대로 행(行)하시기를 원(願)하노라.
“너는 담대하라(Be strong)”
다윗이 조문객을 암몬에 보낸 것과 조문객이 조롱을 받은 것은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신 것이며 예수님께서 유대인에게 조롱과 조소를 받은 사건과 같은 의미라고 이해할 수 있어야 합니다.
암몬 왕 하눈은 다윗의 조문객을 조롱하였으나 그 결과는 참담한 실패로 끝나는 것을 볼 때 복을 저주로, 승리를 패배로, 생명을 죽음이 되게 한 것입니다.
언약의 사람들은 저주를 복으로, 패배를 승리로, 죽음을 생명으로 변화시키는 것을 보면서 언약으로 인하여 세상에서의 고통은 일시적인 어려움이지만 결과는 고통과 비교할 수 없는 상급이기에 항상 감사하며 끝까지 책임을 다해야 합니다.
비록 그 과정은 어렵고 힘들지만 그 결과는 약속된 복이 있기에 마지막까지 최선을 다하여 승리해야 할 것입니다.
어떻게 승리해야 할까요? 정신을 차리고 깨어서 일어나야 합니다. 은혜를 입은 성도는 언약의 말씀을 믿기 때문에 “오직 성경으로!” 라는 개혁자들의 슬로건을 마음에 새기고 말씀대로 믿고 말씀대로 순종하는 일에 최선을 다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어느 누구도 마지막 날의 심판은 피할 수 없습니다. 마지막 날의 심판을 피할 수 있는 길은 감사와 은혜와 믿음만이 아니라 다윗처럼 언약으로 인한 공과 의를 행한 삶이 심판의 기준이 됩니다.
믿음은 내가 할 수 있다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도움이 없으면 나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고백이 있어야만 합니다. 날마다 주님과 동행하는 삶을 회복할 때 무슨 일을 만나든지 담대할 수 있습니다.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로마서 10:17)
믿음의 사람들이여! 이제는 믿음을 입으로 강조하는 것이 아니라 몸으로 보여주고 설명할 수 있어야 합니다.
무너지는 사회 질서를 믿음으로 세워 내일의 소망이 오직 믿음에 있다는 것을 증거 하는 일에 동참하므로 세상의 소금과 빛의 사명을 감당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 찬양 / 내 주는 강한 성이요
예수 내 구주! 예수 내 생명! 예수 내 권세!
구약에서 246번 언급이 되고 있는 ‘헤세드’는 절반 이상이 시편에 나온다. ‘헤세드’의 용례는 세 가지 영역으로 구분된다.
1. 일상적 용례 / 인간이 인간을 향한 태도 2. 신앙적 용례 / 하나님을 향한 인간의 태도 3. 천상적 용례 / 인간을 다루시는 하나님의
태도
이런 용례 가운데 언약 이해와 가장 밀접하게 관련된 것은 이스라엘을 다루시는 하나님의 태도로서의 ‘헤세드’이다.
‘헤세드’는 언약 당사자들 상호 간의 의무 사항을 지적한다는 점에서 언약과 긴밀하게 연관되어 있다(느 1:5). 그것은
언약의 당사자로서 이스라엘이 언약 유지를 위하여 전심으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께 충성을 다하는 것과는 대조적이다. 하나님과의
언약관계에서 이스라엘은 언제나 실패할 가능성을 지니고 있다. 그만큼 이스라엘은 연약한 존재이다. 그런 이유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언약과 관련하여 상벌 규정을 명확하게 제시하셨다. 그 대표적인 본문은 레위기 26장과 신명기 28장이다.
‘헤세드’는 이스라엘의 언약 준수 여부와 상관없이 언약관계를 이끌어 가시겠다는 하나님의 결정이면서 이스라엘을 위한 배려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헤세드’가 어떤 경우에도 변함없이 적용되기 때문이다. 이스라엘이 언약을 성실히 준수한다면, 그들은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복을 누리게 된다. 그러나 그렇지 못할 경우,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저주로 심판을 받는 상황이 된다. 성경은 그에 대한
실제 증거들의 기록이다.
이스라엘에게 약속된 상으로서의 복과 저주로서의 심판은 모두 하나님의 ‘헤세드’에 의한 결과이다. 이스라엘이 언약을 잘
지키는데도 복을 받지 못하거나 이스라엘이 언약을 제대로 지키지 못하는데도 하나님의 심판이 없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사랑과 공의가
실종된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하나님의 사랑이 긍정적 차원의 ‘헤세드’라면, 하나님의 심판은 부정적 차원의 ‘헤세드’이다.
전자는 하나님과의 언약을 더욱 강화시키는 효과가 있다면, 후자는 본래의 위치로 돌이키는 회개의 기회가 된다. 두 경우 모두
하나님의 사랑이라는 긍정적인 ‘헤세드’가 최종 목표인 셈이다. 언약의 상벌 규정은 하나님의 ‘헤세드’가 시행되는 통로이자
수단이다. 그 때문에 ‘의’가 ‘헤세드’와 나란히 사용되는 동의어로 등장하기도 한다(잠 21:21).
‘헤세드’의 또 다른 동의어는 ‘성실’이다. ‘성실’은 히브리어는 ‘에메트’인데, ‘떠받치다’를 의미하는 히브리어 동사
‘아만’의 명사형이다. 기본적으로 확실성이나 신뢰성을 의미하는 ‘에메트’는 대체적으로 ‘성실’로 번역되지만, 그 외에도 ‘견고함’
‘진실’ ‘진리’ 등의 번역이 있다. ‘에메트’의 부사형은 ‘아멘’인데, ‘참으로’ ‘진실로’ 등으로 번역할 수 있다.
일반적으로 기도와 찬송의 말미에서 화답으로 나오는 ‘아멘’은 ‘그렇게 되기를 바란다’는 뜻으로서, 기도나 찬송의 대상이신 하나님께
대한 확신을 표현한다.
‘헤세드’와 ‘에메트’가 한 단어처럼 밀접하게 결합되는 용례가 성경에 자주 나온다(창 24:27, 49; 32:11;
47:29; 출 34:6; 민 14:18; 수 2:14; 삼하 2:6; 15:20; 시 25:10; 40:11, 12; 57:4;
61:8; 85:11; 86:15; 89:15; 115:1; 잠 3:3; 14:22; 16:5; 20:28).
잠언 3:3 인자와 진리가 네게서 떠나지 말게 하고 그것을 네 목에 매며 네 마음판에 새기라.
출애굽기 34:6 여호와께서 그의 앞으로 지나시며 선포하시되 여호와라 여호와라 자비롭고 은혜롭고 노하기를 더디하고 인자와 진실이 많은 하나님이라.
시편 115:1 여호와여 영광을 우리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우리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오직 주는 인자하시고 진실하시므로 주의 이름에만 영광을 돌리소서.
그것은 신뢰에
바탕을 둔 성실함이 ‘헤세드’의 기본적 의미임을 강조하기 위해서이다. 이스라엘을 언약의 동반자로 삼으신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의
언약 준수 여부와 상관없이 자신이 세우신 언약을 끝까지 책임지시는 분이시다. 성경은 그런 하나님을 ‘눈동자처럼 지키시는 분’(신
32:10; 시 17:8; 잠 7:2) ‘졸지도 아니하고 주무시지도 아니하시는 분’(시 121:4)으로 표현한다.
♦ 2월 14일(월)
♦ 오늘 읽어야 할 말씀 : 사무엘하 9:1∼13 ♦ 묵상을 위한 주제 : 은총을 베풀리라(1절) ♦ 성구 : 다윗이 가로되 사울의 집에 오히려 남은 사람이 있느냐 내가 요나단을 인(因)하여 그 사람에게 은총(恩寵)을 베풀리라 하니라.
“은총을 베풀리라(I can show kindness)”
“므비보셋(Mephibosheth, 부끄러움을 해치는 자)”은 “요나단”의 아들이며 “사울”의 손자입니다. 두 다리를 절뚝이는 장애인으로 “미가(Mica)”라는 아들이 있었습니다.
다윗은 ‘므비보셋’에게 은총을 베풀었습니다. 왜 므비보셋에게 은총을 베풀었을까? 받은 은혜를 잊지 않고 기억하기 때문입니다.
다윗은 전쟁을 치루면서 지난 날 받은 은혜를 생각할 겨를이 없었습니다.
이제는 부족한 것이 없는 평화의 시대를 맞이했습니다.
평화를 누리면서 먼저 하나님의 궤를 위한 전을 건축하려고 하였으나 그 계획은 다음 세대가 맡게 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이번에는 예전에 신세졌던 사람들을 생각하며 은혜를 갚으려고 합니다.
가장 많은 은혜를 준 사람은 “요나단” 이었습니다.
그래서 사울의 집에 남은 가족이 누구인가를 찾게 됩니다.
사울의 집에 남은 가족은 요나단의 아들 “므비보셋”이 있었습니다. ‘므비보셋’은 두 다리를 저는 아들이었습니다. 므비보셋은 다섯 살 때 유모가 안고 도망하다가 아이가 떨어져 절게 되었습니다(삼하 4:4).
은혜를 갚는 것은 철저히 성경적입니다. 세상에서는 이러한 것을 “인간의 도리” 라고 합니다.
신세를 졌으면 신세를 갚는 것이 정상입니다. 물질로만 갚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으로라도 고마움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고마움을 잊지 않는 사람이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은혜도 잊어버리지 않기 때문입니다.
인간적인 도리와 고마움을 모르는 사람이 어떻게 하나님의 은혜를 알겠습니까?
인간적인 고마움을 아는 사람이 하나님의 은혜도 알게 될 것입니다.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예수님의 사랑과 그 은혜를 잊어서는 안 됩니다.
그 은혜를 모른다면 예수님을 믿지 않을 것입니다.
그 은혜를 알면 예수님을 믿을 수밖에 없습니다. 다윗은 그 은혜를 잊지 않고 므비보셋을 찾아내어 함께 살자고 합니다.
그리고 왕의 식탁에서 함께 식사를 하자고 합니다.
죄 많은 나를 위하여 죽으신 주님의 은혜를 잊지 말고 매일의 삶을 즐기시기 바랍니다. 이러한 마음과 생각으로 평생을 살아갈 때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천국으로 불러 주셔서 그곳에서 영원히 살자고 하실 것입니다.
오늘도 그날을 기다리며 은혜를 잊지 않고 살아가는 복된 하루가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 찬양 / 나의 기쁨 나의 소망 되시며
예수 내 구주! 예수 내 생명! 예수 내 권세!
구약성경에서 가장 많이 사용된 “사랑”이라는 뜻의 히브리어는 “헤세드”입니다. “자비” “인자” “선대(善待)” “은총”이라고 번역되곤 하는데, 헬라어로 본다면 “아가페”입니다.
구약성경에 나오는 이 “헤세드”의 사랑은 크게 세 가지 용례를 갖고 있습니다.
첫째,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사랑 둘째,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사랑 셋째, 이웃을 향한 우리의 사랑
성경은
이 세 용례들을 각각 보여 주는데, 시편 136편 1절에서 26절까지의 경우에는 매절마다 “그는 선하시며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라고 기록합니다. 여기서 “인자”로 번역된 단어가 “헤세드”입니다.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인자(헤세드)가 얼마나
큰지를 강조하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시편 52:8, 역대상 16:34, 역대하 5:13, 에스라 3:11, 느헤미야
9:17, 예레미야 33:11 등 곳곳에서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자비”와 “사랑”을 “헤세드”로 표현합니다.
호세아
6장 6절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요청하시는 “헤세드”의 사랑을 기록합니다: “나는 인애(헤세드)를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며
번제보다 하나님 아는 것을 원하노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베풀어 주신 “헤세드”의 사랑을 다시 우리에게 요청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사랑이 헤세드의 사랑이기를 하나님은 원하신다는 뜻입니다.
또 다른 한편으로 성경은 우리가 다른
사람들에게 베풀어야 하는 “헤세드”의 사랑을 기록합니다: “나오미가 자기 며느리에게 이르되 그가 여호와로부터 복 받기를 원하노라
그가 살아 있는 자와 죽은 자에게 은혜(헤세드) 베풀기를 그치지 아니하도다”(룻 2:20). “다윗이 이르되 사울의 집에 아직도
남은 사람이 있느냐 내가 요나단으로 말미암아 그 사람에게 은총(헤세드)을 베풀리라”(삼하 9:1). 성경에 등장하는 많은 인물들은
자신들과 관계된 사람들에게 “헤세드”의 사랑을 베풀었습니다.
“헤세드”의 대상이 누구이며, 방법이
무엇이든지 공통점은 “자기 희생”입니다. 제니 레이크가 뱃속에 있는 아이를 살리기 위해 죽음을 불사했던 희생의 사랑처럼, 이 글을
읽으시는 당신과 저를 위해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것이 바로 “희생의 사랑”입니다.
이 글을 읽으시는 당신은 하나님께서 주신 헤세드의 사랑을 체험했습니까? 그렇다면, 당신도 그 헤세드의 사랑을 하나님께 드리고 있습니까? 뿐만 아니라, 당신 주위에 있는 사람들에게도 그 사랑을 전달하고 있습니까?
구약에서 246번 언급이 되고 있는 ‘헤세드’는 절반 이상이 시편에 나온다. ‘헤세드’의 용례는 세 가지 영역으로 구분된다.
곧 일상적 생활 속에서 인간이 인간을 향한 태도, 신앙의 영역에서 하나님을 향한 인간의 태도, 그리고 인간을 다루시는 하나님의
태도 등이다. 이런 용례 가운데 언약 이해와 가장 밀접하게 관련된 것은 이스라엘을 다루시는 하나님의 태도로서의 ‘헤세드’이다.
‘헤세드’는 언약 당사자들 상호 간의 의무 사항을 지적한다는 점에서 언약과 긴밀하게 연관되어 있다(느 1:5). 그것은
언약의 당사자로서 이스라엘이 언약 유지를 위하여 전심으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께 충성을 다하는 것과는 대조적이다. 하나님과의
언약관계에서 이스라엘은 언제나 실패할 가능성을 지니고 있다. 그만큼 이스라엘은 연약한 존재이다. 그런 이유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언약과 관련하여 상벌 규정을 명확하게 제시하셨다. 그 대표적인 본문은 레위기 26장과 신명기 28장이다.
‘헤세드’는 이스라엘의 언약 준수 여부와 상관없이 언약관계를 이끌어 가시겠다는 하나님의 결정이면서 이스라엘을 위한 배려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헤세드’가 어떤 경우에도 변함없이 적용되기 때문이다. 이스라엘이 언약을 성실히 준수한다면, 그들은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복을 누리게 된다. 그러나 그렇지 못할 경우,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저주로 심판을 받는 상황이 된다. 성경은 그에 대한
실제 증거들의 기록이다.
이스라엘에게 약속된 상으로서의 복과 저주로서의 심판은 모두 하나님의 ‘헤세드’에 의한 결과이다. 이스라엘이 언약을 잘
지키는데도 복을 받지 못하거나 이스라엘이 언약을 제대로 지키지 못하는데도 하나님의 심판이 없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사랑과 공의가
실종된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하나님의 사랑이 긍정적 차원의 ‘헤세드’라면, 하나님의 심판은 부정적 차원의 ‘헤세드’이다.
전자는 하나님과의 언약을 더욱 강화시키는 효과가 있다면, 후자는 본래의 위치로 돌이키는 회개의 기회가 된다. 두 경우 모두
하나님의 사랑이라는 긍정적인 ‘헤세드’가 최종 목표인 셈이다. 언약의 상벌 규정은 하나님의 ‘헤세드’가 시행되는 통로이자
수단이다. 그 때문에 ‘의’가 ‘헤세드’와 나란히 사용되는 동의어로 등장하기도 한다(잠 21:21).
‘헤세드’의 또 다른 동의어는 ‘성실’이다. ‘성실’은 히브리어는 ‘에메트’인데, ‘떠받치다’를 의미하는 히브리어 동사
‘아만’의 명사형이다. 기본적으로 확실성이나 신뢰성을 의미하는 ‘에메트’는 대체적으로 ‘성실’로 번역되지만, 그 외에도 ‘견고함’
‘진실’ ‘진리’ 등의 번역이 있다. ‘에메트’의 부사형은 ‘아멘’인데, ‘참으로’ ‘진실로’ 등으로 번역할 수 있다.
일반적으로 기도와 찬송의 말미에서 화답으로 나오는 ‘아멘’은 ‘그렇게 되기를 바란다’는 뜻으로서, 기도나 찬송의 대상이신 하나님께
대한 확신을 표현한다.
‘헤세드’와 ‘에메트’가 한 단어처럼 밀접하게 결합되는 용례가 성경에 자주 나온다(창 24:27, 49; 32:11;
47:29; 출 34:6; 민 14:18; 수 2:14; 삼하 2:6; 15:20; 시 25:10; 40:11, 12; 57:4;
61:8; 85:11; 86:15; 89:15; 115:1; 잠 3:3; 14:22; 16:5; 20:28). 그것은 신뢰에
바탕을 둔 성실함이 ‘헤세드’의 기본적 의미임을 강조하기 위해서이다. 이스라엘을 언약의 동반자로 삼으신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의
언약 준수 여부와 상관없이 자신이 세우신 언약을 끝까지 책임지시는 분이시다. 성경은 그런 하나님을 ‘눈동자처럼 지키시는 분’(신
32:10; 시 17:8; 잠 7:2) ‘졸지도 아니하고 주무시지도 아니하시는 분’(시 121:4)으로 표현한다.
♦ 2월 12일(토)
♦ 오늘 읽어야 할 말씀 : 사무엘하 8:1∼18 ♦ 묵상을 위한 주제 : 이기게 하시니라(6절) ♦ 성구 : 다메섹 아람에 수비대(守備隊)를 두매 아람 사람이 다윗의 종이 되어 조공(租貢)을 바치니라 다윗이 어디를 가든지 여호와께서 이기게 하시니라.
“이기게 하시니라(The LORD gave David victory wherever he went)”
다윗이 주변 국가들을 정벌할 수 있었던 것은 어디를 가든지 여호와께서 이기게 하셨기 때문입니다.
다윗은 블레셋과 모압과 소바 그리고 다메섹 아람을 쳐서 이스라엘의 속국으로 만들었습니다.
다윗은 전리품으로 취한 수많은 말과 병거를 무용지물로 여겼습니다. 이러한 결정은 말이나 병거의 힘을 의지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만 의지하려는 다윗의 신앙을 드러낸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다윗이 소바를 정복했다는 소식을 들은 하맛 왕 도이는 자기의 적을 정벌해 준 다윗에게 그 보답으로 패물을 바쳤는데 다윗은 하맛의 패물뿐 아니라 모든 전리품을 남김없이 여호와 하나님께 드렸습니다.
또한 다윗은 하나님 앞에서 모든 백성에게 공과 의를 행하였습니다.
요압은 군대 장관으로, 아히멜렉은 제사장으로, 스라야는 서기관으로, 브나야는 그렛 사람과 블렛 사람을 관할하는 총독으로 임명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모두 세상에서 영적 싸움을 위하여 선택받은 십자가 군병입니다. 오늘도 삶의 현장에 흩어져서 영적 싸움의 승리자가 되어 승리의 깃발을 흔드는 삶의 주인공으로 우뚝 세워지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 오늘 읽어야 할 말씀 : 사무엘하 7:1∼29 ♦ 묵상을 위한 주제 : 집을 세우리라(27절) ♦ 성구 : 만군(萬軍)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여 주(主)의 종에게 알게 하여 이르시기를 내가 너를 위(爲)하여 집을 세우리라 하신고(故)로 주(主)의 종이 이 기도(祈禱)로 구(求)할 마음이 생겼나이다.
“집을 세우리라(I will build a house for you.)”
‘집을 세우리라’는 것은 하나님의 궤를 안치할 집을 짓겠다는 다윗의 간절한 마음을 표현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다윗이 이스라엘의 왕으로 기름부음을 받고 법궤를 수도 예루살렘으로 옮긴 후 하나님은 그에게 평화를 주셨습니다.
모든 어려운 날들을 보내고 평안히 왕궁에 거하던 다윗은 하나님의 법궤가 왕궁과는 비교할 수 없는 초라한 장막에 있는 것을 안타깝게 생각했습니다.
다윗은 성전을 건축하고 싶은 자신의 뜻을 나단 선지자에게 알렸습니다. 다윗은 나단 선지자에게 나는 백향목 궁에 거하고 있는데 하나님의 궤는 휘장 가운데 있어야 되겠느냐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허락하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성전을 건축하고자 하는 다윗의 의사를 거절하신 이유는 하나님의 임재가 본질이기 때문입니다.
본질보다 형식이 더 앞설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다윗에게 성전 건축을 명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러므로 성전 건축이 곧 하나님의 뜻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에서 어긋난 것일 수 있습니다. 그것보다 더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뜻을 바로 깨닫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다윗을 이스라엘의 주권자로 삼으시고 모든 대적을 물리쳐 주셨으며 그의 후손을 통해 나라를 영원히 견고케 하실 것이라고 약속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왕국을 견고케 하시고 다윗이 건축하지 못한 성전을 솔로몬 때에 건축하게 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죄에 대한 징벌은 받아도 은총은 영원할 것이라는 복을 주셨습니다.
다윗은 나단 선지자를 통해 하나님의 놀랍고 엄청난 축복의 약속을 받고 감격하였습니다. 다윗은 “주 여호와여 나는 누구오며 내 집은 무엇이관대 나로 이에 이르게 하셨나이까!” 하며 감사했습니다.
다윗은 하나님을 자신에게로 부르지 않고 자신이 하나님 앞에 겸손하게 나아갔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자신을 철저히 낮추어 계시를 밝히신 것을 감격스럽게 고백했습니다.
다윗이 하나님께 기도할 수 있는 근거는 하나님께서 다윗의 집을 견고케 하겠다는 은혜로운 약속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또한 그는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믿었기에 하나님께 구하는 바를 받을 줄 확신했습니다.
자유롭게 주 예수를 믿을 수 있는 환경가운데 거하게 하신 하나님의 은혜를 깊이 묵상하며 이 은혜를 영원토록 누릴 수 있는 길을 예비하고 준비하는 일에 성공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다윗은 블레셋을 정복하고 정치적으로 안정을 되찾게 되자 하나님의 임재의 상징인 법궤를 예루살렘으로 옮기려고 합니다.
당시
법궤는 “바알레유다” 즉 “기럇여아림”의 산 가운데 “아비나답”의 집에 있었습니다. 다윗은 법궤를 옮겨오기 위해 삼만 명의
무리와 새 수레 그리고 악단을 준비하여 기럇여아림으로 갔습니다. 그리고 아비나답의 집에 있는 법궤를 새 수레에 싣고 예루살렘으로
출발했습니다.
법궤를 옮기는 일은 정성만으로는 될 수 없습니다. 반드시 하나님의 말씀에 따른 순종이 따라야 합니다. 그러나 다윗은 그것을 깨닫지 못했습니다.
아비나답의 집에 있는 법궤를 예루살렘으로 운반하는 데 쓰인 도구는 소가 끄는 새 수레로 아비나답의 두 아들인 “웃사”와 “아효”가 끌었습니다.
하나님의 법궤는 성소의 모든 기구를 운반하고 보관하는 책임을 맡은 레위 지파의 고핫 자손에게 맡겨야 하며(민 3:27∼32), 어깨에 메어 운반해야 합니다.
다윗은 이러한 규례를 어겼습니다.
웃사와 아효는 다윗의 명에 따라 수레를 몰았습니다. 그런데 나곤의 타작마당에 이르렀을 때에 소들이 놀라서 갑자기 뛰는 바람에
수레에 실린 법궤가 심하게 흔들렸습니다. 그러자 법궤가 땅에 떨어질 것을 염려한 웃사가 법궤를 손으로 잡았고 그는 하나님의 징계로
즉시 죽게 되었습니다.
웃사의 죽음으로 법궤 이동은 중단되었습니다. 그리고 이내 자신의 잘못을 깨달은 다윗은 하나님을 향한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법궤를 가드 사람인 오벧에돔에게 맡기었습니다. 오벧에돔은 웃사의 죽음을 목도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법궤를 자기 집에 두는
것에 대해 주저하지 않았습니다.
오벧에돔이 법궤로 인하여 하나님께 복을 받았음으로 다윗이 다시 법궤를 자신의 처소로 옮기려고 계획합니다. 다윗은 여호와의 법에
따라 먼저 순종과 기쁨의 제사를 드린 다음 법궤를 옮겼는데 수레를 사용하지 않고, 레위인들이 어깨에 메도록 했습니다(대상
15:11∼15).
미갈이 법궤를 모셔오는 다윗을 업신여긴 이유는 다윗의 환희와 기쁨을 이해하지 못하고 인간의 수치로 여겼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향한 기쁨의 표현을 사람의 생각으로 판단하므로 실수하는 일이 없도록 모든 일에 신중해야 하겠습니다.
다윗은 “나를 이스라엘의 주권자로 삼으셨으니 내가 여호와 앞에서 뛰놀리라”고 하나님은 찬양했습니다.
팬데믹의 지루한 삶이 때로는 힘들고 어렵더라도 다윗과 같이 여호와 하나님을 찬양하는 즐거움으로 지루한 삶의 자리가 기쁨으로 채워지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시너지(synergy) 또는 협력작용(協力作用) 혹은 상승효과(相乘效果)는 일반적으로 두 개 이상의 것이 하나가 되어, 독립적으로만 얻을 수 있는 것 이상의 결과를 내는 작용이다.
1+1=2 가 되는게 아니라 1+1=3 도 되고 그 이상도 될 수 있다는 이론입니다. 그런데 이 이론에도
적용되는 원칙이 있습니다. 투입(input)이 0이면 산출(output)도 0 이외에는 다른 결론이 도출되지 않습니다. 즉 투입이 전무하면 시너지 효과는 어떤 경우에도 발생하지 않습니다.
성경에도 이 시너지 효과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로마서 8:28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여기선 선(good)은 최고, 최선, 최대를 의미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로, 부르심에 순종하여 나가는 자들에겐 모든 것이 합력하여 최고, 최선, 최대를 이루게 하십니다.
성경에 계속 나오는 말씀이
30배, 60배, 100배의 결실을 맺으리라 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삼십 배, 육십 배, 백 배의 열매 맺는 것을 즐겨
말씀하셨습니다. 이 놀라운 시너지 효과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능력으로, 성령님의 도우심으로만 맺을 수 있는
결과입니다. 이 세상 어디서도 100배의 시너지 효과를 얻지는 못합니다.
다만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들만, 아버지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만이 맛볼 수 있는 복입니다.
교회가 어렵고 성도들도 많이 어렵습니다. 교회가 너무 많아서 교회들마다 빈 자리가 많을까요? 아니라고 봅니다. 큰 교회 탓만 하지 말고 전도하는 흉내라도 내야 합니다. 익은 곡식이 널려 있는 현실에 놀라게 됩니다. 나가서 전도 해봐야 ‘요나’
선지자의 마음이 어땠을지도 알게 됩니다. 10 만큼이라도 투입을 해야 합니다-물론 상황에 따라 더 많은 투입은 반드시
필요합니다-. 기도 말씀 전도에 10 을 투입하면 100 이라는 놀라운 결과를 주시기도 하시는 분이 신실하신 하나님이십니다. 분명
투입한 10 보다는 더 많이 산출물을 주실 것입니다.투입이 0 이면 아무 것도 하나님께 얻기 힘들 것입니다.
링겔만효과(Ringelmann effect)
원래 회사나 조직은 개인들이 각자 자기 일을 할 때 보다 더 큰 힘을 발휘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만든 인위적 집단이다. 대체로 많은 기업들은 조직이 방대해지고 직원의 수가 늘어날수록 전체의 성과가 개인의 성과의 합보다 적어져 버린다. 다시말하면 능률과 생산성이 역으로 떨어지는 현상을 맞게 된다.
조직이라는 집단 속에 포함된 개인의 수가 늘어날수록 그 성과에 대한 1인당 공헌도가 비례적으로 늘어나지 않고 오히려 떨어지는 현상을 "링겔만효과(Ringelmann Effect)"라고 한다.
즉 1+1=2가 되지 못하고 오히려 1.3이나 1.7처럼 2보다 적게되는 현상인데, 이것은 개인이 혼자 일할 때 100%의 역할을 하는 구성원이 남들과 함께 집단 속에서 일할 때는 이에 미치지 못하는 성과를 내는 조직 심리학 측면의 현상이라고 할 수 있다.
깨진 유리창 이론(Broken Windows Theory)
주변의 깨진 유리창을 그대로 방치하면 그로부터 범죄가 확산된다는 이론이다. 실제로 1994년 미국 뉴욕에서 이에 어울리는 사례가 발생했다.
뉴욕시장으로 선출된 루돌프 줄리아니와 윌리엄 브래턴 신임 검찰국장은 뉴욕의 지하철 범죄를 줄이기 위해 고심했다. 당시 뉴욕은 연 60만건 이상의 중범죄가 발생하는 지역이었으며 이들 중범죄의 90% 이상이 지하철 범죄였다. 여행자들도 “뉴욕 지하철은 절대로 타지 말라”고 말할 만큼 악명 높았다.
신임 시장과 검찰국장은 범죄와의 전쟁을 선포했다.
그러나 전쟁의 주요 대상은 살인·강도 등 강력범죄가 아니었다. 우선 지하철역의 낙서부터 지웠다. 무단횡단·신호위반 등 교통질서를
바로잡았고, 쓰레기 무단투기를 근절했다. 그러기를 5년. 언론과 시민들은 “강력범죄와 싸울 자신이 없어 경범죄를 택했다.”며
시장과 검찰국장을 조롱했다. 그러나 결과는 놀라웠다. 연 2200건에 이르던 살인범죄는 1000건 이상 줄었으며, 지하철 범죄율도
75%나 급감했다.
‘주일 근무 거부로 해고→소송 제기’ 아마존 배달기사 통해 본 기독인 딜레마 ‘24시간 경제’ 시대, 기독인은 반문화적?
미국 아마존이 최근 빠른 배송 서비스를 시작하면서 배달원들은 일요일인
주일에도 배달에 나서게 됐다. 크리스채너티투데이(CT)는 4일(현지시간) 아마존이 ‘프라임’ 서비스를 위해 주7일 근무제를
시행하면서 주일에 일하지 않았다가 해고된 배달기사 사연을 소개하고 ‘24시간 경제’ 시대에 주일을 지키려는 기독교인들이 반문화적
시선을 받게 됐다고 전했다.
플로리다의 아마존 배달기사는 일요일에 근무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실직했다. 펜실베이니아에서
일하는 제럴드 그로프씨도 일요일 근무를 다른 요일로 조정하려 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2017년과 2018년 총 24일간
일요일 결근을 했다는 이유로 2019년 해고됐다. 해고된 두 사람은 회사가 다른 요일에 일할 수 있는 ‘합리적 편의’를 제공하지
않았다며 인권법 제7장을 근거로 종교적 차별을 주장하며 소송을 제기했다.
결과는 상반되게 나왔다.
미국평등고용기회위원회(EEOC)는 플로리다의 배달기사를 대신해 소송을 제기했고 최근 5만 달러의 합의금을 받기로 했다. 이에 반해
그로프씨가 제기한 소송에선 지난해 지방법원이 회사 측에 유리한 판결을 내놨다. 그는 법원에 항소한 상태다.
CT는
그로프씨처럼 예배를 위해 모든 일을 제쳐두고 주일을 엄수하는 사람들은 생산성을 앞세우며 24시간 경제로 전환한 21세기엔
반문화적으로 인식되고 있다고 지적했다.
그로프씨의 소송 담당 변호사는 “이번 사건은 인권법 7장을 통해 ‘합리적 조정’이
무엇인지를 질문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퍼스트리버티 히람 사서 법률고문도 “고용주가 종교를 근거로 직원을 차별하는 것은
불법”이라며 “주일을 지켜야 한다는 믿음을 인정하고 그에게 종교적 면제를 부여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 2월 9일(수)
♦ 오늘 읽어야 할 말씀 : 사무엘하 5:1∼25 ♦ 묵상을 위한 주제 : 이스라엘의 주권자(2절) ♦ 성구 : 전일(前日) 곧 사울이 우리의 왕(王)이 되었을 때에도 이스라엘을 거느려 출입(出入)하게 한 자(者)는 왕(王)이시었고 여호와께서도 왕(王)에게 말씀하시기를 네가 내 백성(百姓) 이스라엘의 목자(牧者)가 되며 이스라엘의 주권자(主權者)가 되리라 하셨나이다 하니라.
“이스라엘의 주권자(you will become their ruler)”
이스보셋이 죽자 이스라엘 모든 지파의 용사들과 장관들이 헤브론에 있는 다윗을 찾아와서 이스라엘의 왕이 되어 줄 것을 요청합니다.
다윗이 이스라엘 모든 지파의 왕이 될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의 계획에 따른 것이며 다윗의 신실함에 온 백성이 복종했기 때문이었습니다(1∼3절).
다윗은 이스라엘 전체를 다스리는 왕위에 오른 후에 이스라엘의 새 도읍지로 예루살렘을 내정하고 이곳을 정복할 계획을 세웠습니다.
다윗이 예루살렘을 정복하려고 할 때 여부스 사람들은 “네가 이리로 들어오지 못하리라. 소경과 절뚝발이라도 너를 물리치리라” 하며 조롱합니다.
그러나 다윗은 그 성을 빼앗은 후에 “다윗 성” 이라 불렀습니다.
다윗이 통일 이스라엘 왕국을 강성하게 만들자 두로 왕 히람은 백향목과 건축 기술자들을 보내 다윗 궁을 건축하는 일을 도왔습니다.
다윗이 점차 강성해질 수 있었던 것은 힘의 근원이 무력이나 우수한 장비와 무기에 있는 것이 아니라 여호와께 있다는 것을 깨닫고 철저히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자로 살기 위해 애썼기 때문입니다.
그 결과 비록 완전무결하지는 못했으나 다윗의 중심을 하나님께서 인정하셨습니다.
다윗은 하나님께서 자신을 붙들고 계심을 깨닫고 그 믿음을 지켰습니다.
블레셋은 다윗이 통일 이스라엘의 왕이 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곧 이스라엘을 침략하였습니다.
블레셋이 침입했다는 소식을 들은 다윗은 하나님께 블레셋 사람을 내 손에 붙이시겠습니까? 하고 기도했습니다.
하나님은 다윗에게 “올라가라 블레셋 사람을 네 손에 붙이리라”고 말씀하셨지요.
다윗이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믿음의 사람으로 인정받을 수 있었던 비결이라고 하겠습니다.
사람들은 문제가 닥쳐온 후에 그 문제 해결을 위하여 기도합니다.
그러나 다윗은 블레셋과 싸움을 시작하기 전에 먼저 하나님께 기도하였고 하나님의 응답을 듣고 블레셋과의 전투에 임하므로 승리할 수 있었습니다.
“기도가 없는 곳에는 사람만 일하고, 기도 있는 곳에는 하나님이 일하신다.”
주님께서 허락하신 오늘 먼저 기도로 일을 시작하고 일을 한 후에 하나님이 함께 하신 은혜에 감사하는 하루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 찬양 / 내 기도하는 그 시간
예수 내 구주! 예수 내 생명! 예수 내 권세!
이스라엘의 목자와 이스라엘의 주권자가 되는 다윗
- 목자(라아) רָעָה , 주권자(나기드) נָגִיד
첫째, 모든 지파(5:1) 둘째, 모든 장로(5:3)
왜 가룟 유다는 실패한 제자가 되었나?
가룟 유다는 어쩌다가 예수님을 팔아 먹은 저주 받은 인생이 되었을까요? 마가복음은 14장 10절에서 “가룟 유다가 예수를 넘겨 주려고 대제사장들에게 가매” 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행위한데 대한 설명이 없습니다. 그는 3년씩이나 예수님을 따라 다니며 훈련을 받은 사람이었기에 그에 대해 여러 의문을 품게 만든 장본인입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마귀가 벌써 시몬의 아들 가룟 유다의 마음에 예수를 팔려는 생각을 넣었더니”(요 13:2) 라고만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왜 마귀가 그를 지배하게 되었을까? 궁금증이 더해만 갑니다.
필자는 결정적인 한 가지를 잘하고 못하느냐에 따라 신앙 여정의 승패가 갈린다고 보는 입장입니다. 그것 때문에 하나님께 인정을 받기도 하고 버림을 받기도 합니다. 대표적인 인물이 사울 왕과 다윗 왕입니다.
사울은 삼상 15:9의 범죄로 인해 여호와께 버림을 받게 됩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다윗 왕이 하나님을 모욕하는 골리앗을 향해 자신의 마음을 드러내고 행동함으로써 하나님 마음에 합한 사람이 됐다고 봅니다.
4복음서에 모두 기록된(마 26:6~13, 막 14:3~9, 눅 7:36~50, 요 12:1~8) -누가복음도 동일한 사건으로 보는 입장-
마리아 향유 사건에서 드러난 가룟 유다의 행위 때문에 그는 돌아오지 못할 강을 건너게 됩니다. 향유를 부은 마리아를 향해 분을
내고 그녀를 책망한 사람들은 다름 아닌 예수님의 제자들이었습니다(마 26:8). 그런데 그 제자들 중에서도 유다가 핵심 인물이었음을
성경은 말씀합니다(요 12:4~6). 그는 예수님의 사역에 쓸 공금을 횡령한 도적이었습니다. 그런 그에게 마리아의 마음이
읽혀질리가 없었습니다. 그의 마리아를 향한 분노와 비난과 책망은 다름 아닌 예수님에 대한 그것이 되었습니다.
우리도 예수님을 향한 헌신에 대해 제자들 특히 가룟 유다와 같은 처신을 해서는 안됩니다. 이는 예수님과 교회를 위해 헌신하는 자 속에서 역사하시고 일하시는 성령님을 훼방하는 일이 될 것입니다. 예수님의 사역을 훼방한(모독한) 서기관들이 성령님을 훼방한(모독한) 자들이 되었습니다. 성령님을 훼방하는 죄는 사하심을 영원히
얻지 못한다고 하십니다(막 3:29). 마리아의 헌신에 대한 방해는 결국 유다가 예수님을 팔아먹는 불행한 인생이 되게 만든 직접적인
계기가 되었다고 생각됩니다.
반면에 마리아는 향유 사건으로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의 십자가 희생을 준비하고 기념하게 되었습니다. 그녀는 자신의 이름이 온 천하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서 기념되는 복을 받는 여인이 되었습니다.
다윗의 과거를 한 번 돌아봅시다. 어린 시절에 사무엘이 찾아와서 기름 부어서 왕을 삼겠다고 약속을 했고 얼마 후에 골리앗과의 싸움에서 이름을 날리고 그런 일을 계기로 해서 군대장관까지는 못됐지만 사울의 밑에 있으면서 출세 가도를 달렸습니다. 그 후에 사울에게 쫓기고 친구와 부인의 도움으로 간신히 탈출해서 도망을 다녔는데 이 세월이 적은 세월이 아니었습니다.
5장까지 오는 동안 다윗이 겪었던 험난한 세월을 말하자면 파란만장한 일생이었다고 할 수 있죠. 그 생이 다 끝나고 새로운 단계로 넘어갑니다. 다윗이 어려운 시기를 다 지나고 하나님께서 어떻게 복을 주셨는지를 요약한 이야기라고 보면 됩니다.
본문에서 다윗이 받은 축복이 뭐가 있는지 찾아 봅시다.
다윗의 가정생활은 결코
행복하다고 말할 수 없을 정도로, 형제들끼리 죽이고 싸우는가 하면 아들이 반란을 일으키기도 하고 집안으로 보면
고통스럽고 가슴 아픈 일들이 많아요. 부인이 많았기 때문에 생겨나는 문제, 바로 이 뒤에 나오는 밧세바와의 관계. . . . .
. . , 다윗은 어떤 면에서 감히 흉내내기 어려울 정도로 위대한 신앙인입니다만 우리가, 어떻게 이럴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위대한 면들이 굉장히 많은 반면에 다윗이 자기의 명성을 다 깎아 먹었다면 바로 여자 문제이었어요. 가장 대표적인 것이 밧세바의
관계 사이에서 있죠. 그것말고도 다윗이 정말 수치스러운 일을 겪게 된 것,
후궁 열 명을 자기 아들에게 공개적으로 겁탈을 당하는 이런 사건이 뒤에 벌어집니다. 결국은 처첩들이 많았던 그것이 다윗으로
하여금 위대한 신앙인의 점수를 많이 깎아 먹는 일이 되게 하는 거죠. 복이라면 복이겠지만 그로 인한 고통 역시 상당히 많았습니다.
솔로몬도 여전히 후궁들이 아주 많았었지만 그로 인해서 솔로몬 시대에 우상들이 많이 범람하고 자기 스스로도 어려움을 겪게 되는,
결과가 결코 좋지는 않았더라는 얘깁니다. 여기에 처첩보다는 그것 말고 다른 것에 관심을 더 두는 것이 좋은데...
전쟁의 승패를 미리 알고 싸운다? 큰 복이네 그죠? 전에 누가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세상에 전쟁 놀이만큼 재미있는 것이 없대요. 그 대신에 조건이 하나 있어요. 자기만 안 죽으면......
안 죽는다는 보장만 있으면 총알이 쏟아지고 대포알이 터지는 그 가운데를 총을 양손에 들고 뛰어다니면 세상 천지에 그것보다 더 재미있는 것이 없을 거예요. 전쟁의 승패를 이길 것 알고 싸우니까. . . . . . . .
코메디언들은 소망이 하나 있죠? 자기가 만든 유행어를 하나 띄우는 것, 그것 하나 뜨면 큰 돈 됩니다. 그런데 다윗이 그런
속담을 하나 남겼단 말이죠. 그것보다 정말 좋아 보이는 것이 하나 있는데요.
예를 들면 이런 비유를 하나 들어 봅시다.
연애하다 차였어요. '나중에 한번 보자 내가 네 억울한 꼴을 보여 줄거다' 이러면서 자기를 버린 그 장본인이 살고 있는 바로
앞에 으리으리한 집을 하나 짓고 거기서 보란 듯이 잘 살면요? 날 버린 그 사람은 어렵게 어렵게 살고
나는 그 앞에 으리으리한 집 지어 놓고 폼 잡고 살면 기분이 어떨 것 같아요? 비유가 제대로 될는지 모르겠지만, 느낌이 어떨 것
같아요?
이스라엘의 모든 지파가 다윗에게 와서 다윗을 보고 당신이 우리의 왕이 되어야 합니다라고 이야기 하죠. 왕이 되어야 하는 이유가 몇 가지 있어요?
신명기 17장에 보면 '이스라엘의 왕은 반드시 이스라엘 사람이어야 한다'.
'우리는 왕의 골육이니이다' 그랬죠. 이것도 그 항목에 들어갈 겁니다.
이스라엘 모든 지파, 이스라엘의 모든 장로,
아, 1·2절은 여론 이었고,, 3절은?
왜 예루살렘을 수도로 할려고 했을까요?
예루살렘이 지리적으로 봤을 때도 중심지이고, 헤브론은 유다 남쪽이고 예루살렘이 조금 올라오죠. 완전 중심지는 아니지만 어느 정도 중간에 있고 또 하나는 수도가 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조건은 수도가 강가에 잘 있긴 하지만 그러나 옛날 같으면 가장 중요한 것이 수비하기 좋은 천혜의 요새라는 곳이어야 합니다.
그런 점에 있어서 예루살렘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400년동안 그 땅을 점령해있는 그 한 가운데 있으면서도 점령을 안 당했다 말이죠.
오팔의 유래
한 젊은 남자가 사랑하는 연인에게 줄 보석을 사려고 귀금속 상인을 찾아갔다. 상인이 여러 보석을 보여줬다. 하지만 남자는 사랑하는 연인을 위한 아주 특별한 보석을 원했다. 잠시
고민하던 상인은 “마침 그런 보석이 있다”며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금고에서 보석을 가지고 나왔다. 그러나 보석은 아주 평범해
보였다. “별다른 광택도 없고 세공도 별로인 것 같은데 왜 그 보석이 특별하다는 말씀입니까?” “특별한 것에는 다 이유가
있지요. 잠시만 기다려보세요.” 상인은 손안에 보석을 쥐고 있다가 몇 분 후에 펴서 보여주었다. 그러자 평범했던 보석에서 영롱한
무지갯빛이 나기 시작했다. “아니, 어떻게 된 것입니까.” “이 보석은 오팔입니다. 그냥 보면 평범한 보석 같지만 사람 체온이 닿으면 이런 빛이 납니다. 사람이 있어야 빛이 나기 때문에 사랑하는 연인을 위해 이보다 더 특별한 보석은 없을 것입니다.”
정채봉
작가에 따르면 5종류의 만남이 있다고 한다.
첫째, 생선 같은 만남
처음엔 싱싱하지만 금방 상하고 비린내가 나는 만남이다.
생선처럼 시기 질투하고 싸우며 원한만 남기는 만남이다.
둘째, 지우개 같은 만남
아무 의미 없이 곧 기억에서 지워지는,
시간만 아까운 만남이다.
셋째, 건전지 같은 만남
쓸모 있을 때는 들고 있다가 필요가 없어지면 멀어지는 수지
타산적인 만남이다.
넷째, 꽃송이 같은 만남
화려하게 피지만 금방 지고 마는 끝이 안 좋은 만남이다.
다섯째, 손수건 같은
만남
슬플 땐 눈물 닦아주고 힘이 들 땐 땀을 닦아주며 서로 의지하는 아름다운 만남이다.
오팔이 사람 체온을 만나야 빛이 나는 것처럼 사람도 하나님을 만나야 특별해진다. 하나님은 만남으로 일하시고, 만남 가운데 역사하신다. 그래서 우리가 만나야 할 만남 중 가장 중요한 만남은 하나님을 만나는 것이다.
“하나님은 벧엘에서 그를 만나셨고 거기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셨나니.”(호 12:4) 야곱은 벧엘에서 하나님을 만나 승리자의 복을 받고 이스라엘 민족의 조상이 되었다.
“내가 이새의 아들 다윗을 만나니 내 마음에 맞는 사람이라 내 뜻을 다 이루리라.”(행 13:22) 하나님이 다윗을 만나니 그 마음에 맞는 사람이라고 하셨다. 그래서 다윗은 왕이 되었다.
“두아디라
시에 있는 자색 옷감 장사로서 하나님을 섬기는 루디아라 하는 한 여자가 말을 듣고 있을 때 주께서 그 마음을 열어 바울의 말을
따르게 하신지라.”(행 16:14) 바울은 마게도냐에서 루디아를 만남으로 유럽이 복음화되는 기회가 열리게 되었다.
이처럼 우리는 좋은 만남을 위해서 기도해야 한다. 무엇보다 예수를 구원자로 영접하고 하나님을 만나야 한다.
♦ 2월 8일(화)
♦ 오늘 읽어야 할 말씀 : 사무엘하 4:1∼12 ♦ 묵상을 위한 주제 : 레갑과 바아나(5절) ♦ 성구 : 브에롯 사람 림몬의 아들 레갑과 바아나가 행(行)하여 볕이 쬘 때 즈음에 이스보셋의 집에 이르니 마침 저가 낮잠을 자는지라.
“레갑(Recab, 약대를 타는 자)과 바아나(Baanah, 슬픔의 아들)”
세상에는 점점 강하여 지는 가문과 점점 약하여 지는 가문이 있는 것처럼 세상에는 두 종류의 사람이 있습니다.
하나는 점점 강하여 지는 사람입니다. 다른 하나는 점점 약하여 지는 사람입니다.
레갑과 바아나는 림몬의 아들들입니다. 브에룻 사람 림몬의 아들인 레갑과 바아나는 길을 떠나 한낮에 해가 쨍쨍할 때 이스보네셋의 집에 도착했습니다.
그때 이스보셋은 낮잠을 자고 있었습니다.
레갑과 바아나 형제는 마치 밀을 얻으러 온 체하고 곧장 집안으로 들어와서 이스보넷의 배를 칼로 찌르고 그 길로 도망쳐 버렸습니다(5∼6절).
이들은 베냐민 족속 림몬이 낳은 형제로서 사울의 아들 이스보셋이 지휘하는 기습부대의 군장들이었습니다.
그들이 집안에 들어갔을 때 이스보셋은 침실의 침대에 누워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이스보셋을 칼로 쳐 죽여 목을 베었고 그것을 들고 밤새 아라바로 도망친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헤브론에 있는 다윗에게 이스보셋의 머리를 바치며 말했습니다.
왕의 목숨을 빼앗으려던 왕의 원수인 사울의 아들 이스보셋의 머리가 여기에 있습니다. 오늘 여호와께서 사울과 그 자손에 대해 내 주 왕의 원수를 갚아주셨습니다(7∼8절).
아주 자랑스럽게 자신들의 업적을 보고했습니다.
그러나 상상외로 다윗의 반응은 칭찬이 아니라 질책이었으며 그리고 그들을 역적으로 몰아붙였습니다.
좋은 소식이라는 생각에 사울을 죽였다고 말했던 아말렉 소년병을 죽였다. 그것이 바로 그가 전한 소식에 대한 보상이었다.
왜냐하면 기름부음을 받은 왕을 함부로 손을 들어 쳤다는 것은 하나님의 법을 지키지 않았기 때문이었습니다.
하물며 죄 없는 사람을 자기 집 침대 위에서 죽게 한 악한 사람들은 어떻겠느냐? 내가 너희 손에서 그의 피 값을 구해 너희를 이 땅에서 없애 버려야 하지 않겠느냐(10∼11절).
다윗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결국 레갑과 바아나형제는 다윗의 군졸들에 의하여 처형되고 말았습니다.
이 사건의 교훈은 무엇일까요?
하나님의 명령을 저버리고 자신들의 단순한 공명심 때문에 직속상관을 살해하는 것은 거룩한 전쟁(성전) 원칙에도 어긋날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의 의리에 어긋난다는 것입니다.
다윗은 동족이나 혈육 간의 투쟁에 있어선 절대 칼을 쓰지 아니하고 믿음과 관용으로 대한 경력이 있습니다.
엔게디 황무지 토굴에서 사울의 옷자락만 베고 그를 죽이지 않았던 일, 압살놈의 죽음을 슬퍼한 일은 그 좋은 실례입니다.
사건의 동기도 악하고 결과도 범죄이었기에 의로운 왕 다윗에게는 결코 용납될 수 없었습니다.
의로우신 하나님 앞에서 나를 온전히 드러내어 작은 부정한 것까지도 털어버릴 수 있는 은혜를 기도합시다.
♪ 찬양 / 내 평생 소원 이것뿐
예수 내 구주! 예수 내 생명! 예수 내 권세!
의인(義人)과 악인(惡人)
예수님이 세상에 계셨을 때 놀랍게도 세리와 창녀같은 죄인,악인들은 예수님께 환영을 받았다.
그러나 유명한 종교인들 곧 서기관이나 바리새인들은 전혀 환영받지 못했다.
무엇 때문인가? 세리와 창녀같은 죄인들은 예수님께 자신들의 영혼이 병들었음을 알고 도움을 요청했다.
하지만 자칭 의인이라고 자처하는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건강한 영혼을 가진양 스스로 의로운체 하기 위해서 무거운 짐을 지고 있었다.
그들은 자신들의 영혼이 병들었기 때문에 예수님께 치료를 받아야한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는 죄와 고통과는 상관없는 듯 말하고 행동하는 그들에게 아무것도 해주실 수가 없었다.
성경에서 말하는 의인이란
단순히 도덕적으로나 윤리적으로 완벽한 사람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의인과 악인의 차이점은 무엇인가?
단순히 선한 일을 하는 사람을 의인이라고 하고
악한 일을 하는 사람을 악인이라고 하는 개념적인 차원이 아니다.
성경에서 의인이란 마음에 예수님을 영접하므로
하나님께서 값없이 의롭다고 인정해 주시는 사람을 말한다.
그러므로 의인이란 온전히 성화에 이른 사람을 뜻하지 않는다.
즉 우리는 의롭다고 의인이라고 인정은 받았지만
아직도 우리 모습은 죄인이요 죄를 행하는 악인의 모습일 수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성경은 의인은 하나도 없다고 (전 7:20 선을 행하고 죄를 범치 아니하는 의인은 세상에 아주 없느니라, 롬 3:10 기록한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정의를 내리고 있는 것이다.
또한 우리 눈에 의인으로 보이는 신자일찌라도
그가 외식하는 바리새인일 수도 있다는 것이다.
마음은 우리 눈에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마음을 우리 눈으로 볼 수 없기 때문이다.
예수님 당시에 사회적인 시각으로만 보면
서기관이나 바리새인들은 분명코 의인이었다.
그리고 그 당시에 문둥병자나 세리나 창기를 시각적으로만 본다면
그들은 모두가 죄인이고 악인이었다.
그러나 예수님의 판단은 전혀 다르셨다.
그러면 어떤 사람이 진정코 의인이고 어떤 자가 악인인가?
의인이란 예수님을 영접한 가운데
죄와 피 흘리기까지 싸우는 사람이라고 단순하게 정의를 내릴 수 있다 (히 12:4 너희가 죄와 싸우되 아직 피흘리기까지는 대항치 아니하고 )
그리고 악인이란 예수님을 전심으로 영접하지 않은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다.
성경 말씀에는 먼저 된 자가 나중되고 나중 된 자가 먼저 될 수 있다고 말씀하신다. (마 19:30 그러나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고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될 자가 많으니라)
또한 의인도 타락할 수 있고 그 죄로 인해 심판과 사망이 온다고 말씀한다.
(겔 18:24,26 만일 의인이 돌이켜 그 의에서 떠나서 범죄하고 악인의 행하는 모든 가증한 일대로 행하면 살겠느냐 그 행한 의로운 일은 하나도 기억함이 되지 아니하리니 그가 그 범한 허물과 그 지은 죄로 인하여 죽으리라)
(겔 33:12~13 인자야 너는 네 민족에게 이르기를 의인이 범죄하는 날에는 그 의가 구원치 못할 것이요 악인이 돌이켜 그 악에서 떠나는 날에는 그 악이 그를 엎드러뜨리지 못할 것인즉 의인이 범죄하는 날에는 그 의로 인하여는 살지 못하리라 가령 내가 의인에게 말하기를 너는 살리라 하였다 하자 그가 그 의를 스스로 믿고 죄악을 행하면 그 모든 의로운 행위가 하나도 기억되지 아니하리니 그가 그 지은 죄악 중 곧 그 중에서 죽으리라)
(히 6:4~6
한번 비췸을 얻고 하늘의 은사를 맛보고 성령에 참예한바 되고 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내세의 능력을 맛보고 타락한 자들은 다시 새롭게
하여 회개케 할 수 없나니 이는 자기가 하나님의 아들을 다시 십자가에 못 박아 현저히 욕을 보임이라) (히
10:26~29 우리가 진리를 아는 지식을 받은 후 짐짓 죄를 범한즉 다시 속죄하는 제사가 없고 오직 무서운 마음으로 심판을
기다리는 것과 대적하는 자를 소멸할 맹렬한 불만 있으리라 모세의 법을 폐한 자도 두 세 증인을 인하여 불쌍히 여김을 받지 못하고
죽었거든 하물며 하나님 아들을 밟고 자기를 거룩하게 한 언약의 피를 부정한 것으로 여기고 은혜의 성령을 욕되게 하는 자의 당연히
받을 형벌이 얼마나 더 중하겠느냐 너희는 생각하라)
(벧전4:18~19 또 의인이 겨우 구원을 얻으면 경건치 아니한 자와 죄인이 어디 서리요 그러므로 하나님의 뜻대로 고난을 받는 자들은 또한 선을 행하는 가운데 그 영혼을 미쁘신 조물주께 부탁할찌어다)
나는 의인인가?... 아니면 의인인 체 하는 악인인가...
아니면 의인에서 악인의 길로 접어든 사람인가?
아니면 악인인데 새롭게 의인의 길로 가고자 하는 사람인가?
할렐루야
창세기 18:23~26
가까이 나아가 가로되 주께서 의인을 악인과 함께 멸하시려나이까
그 성중에 의인 오십이 있을찌라도 주께서 그 곳을 멸하시고 그 오십 의인을 위하여 용서치 아니하시리이까
주께서 이같이 하사 의인을 악인과 함께 죽이심은 불가하오며 의인과 악인을 균등히하심도 불가하니이다 세상을 심판하시는 이가 공의를 행하실 것이 아니니이까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내가 만일 소돔 성중에서 의인 오십을 찾으면 그들을 위하여 온 지경을 용서하리라
신명기 25:1
사람과 사람 사이에 시비가 생겨서 재판을 청하거든 재판장은 그들을 재판하여 의인은 의롭다 하고 악인은 정죄할 것이며
사무엘하 4:11
하물며 악인이 의인을 그 집 침상 위에서 죽인 것이겠느냐 그런즉 내가 저의 피흘린 죄를 너희에게 갚아서 너희를 이 땅에서 없이 하지 아니하겠느냐 하고
시편 1:1,5~6
복 있는 사람은 악인의 꾀를 좇지 아니하며 죄인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그러므로 악인이 심판을 견디지 못하며 죄인이 의인의 회중에 들지 못하리로다
대저 의인의 길은 여호와께서 인정하시나 악인의 길은 망하리로다
시편 7:9
악인의 악을 끊고 의인을 세우소서 의로우신 하나님이 사람의 심장을 감찰하시나이다
시편 11:5
여호와는 의인을 감찰하시고 악인과 강포함을 좋아하는 자를 마음에 미워하시도다
시편 34:21
악이 악인을 죽일 것이라 의인을 미워하는 자는 죄를 받으리로다
시편 37:12,16~17
악인이 의인 치기를 꾀하고 향하여 그 이를 가는도다
의인의 적은 소유가 많은 악인의 풍부함보다 승하도다
악인의 팔은 부러지나 의인은 여호와께서 붙드시는도다
시편 37:21
악인은 꾸고 갚지 아니하나 의인은 은혜를 베풀고 주는도다
시편 37:32
악인이 의인을 엿보아 살해할 기회를 찾으나
시편 75:10
또 악인의 뿔을 다 베고 의인의 뿔은 높이 들리로다
시편 125:3
악인의 권세가 의인의 업에 미치지 못하리니 이는 의인으로 죄악에 손을 대지 않게 함이로다
잠언 3:33
악인의 집에는 여호와의 저주가 있거니와 의인의 집에는 복이 있느니라
잠언 10:3
여호와께서 의인의 영혼은 주리지 않게 하시나 악인의 소욕은 물리치시느니라
잠언 10:6
의인의 머리에는 복이 임하거늘 악인의 입은 독을 머금었느니라
잠언 10:7
의인을 기념할 때에는 칭찬하거니와 악인의 이름은 썩으리라
잠언 10:11
의인의 입은 생명의 샘이라도 악인의 입은 독을 머금었느니라
잠언 10:16
의인의 수고는 생명에 이르고 악인의 소득은 죄에 이르느니라
잠언 10:20
의인의 혀는 천은과 같거니와 악인의 마음은 가치가 적으니라
잠언 10:24
악인에게는 그의 두려워하는 것이 임하거니와 의인은 그 원하는 것이 이루어지느니라
잠언 10:25
회리바람이 지나가면 악인은 없어져도 의인은 영원한 기초 같으니라
잠언 10:28
의인의 소망은 즐거움을 이루어도 악인의 소망은 끊어지느니라
잠언 10:30
의인은 영영히 이동되지 아니하여도 악인은 땅에 거하지 못하게 되느니라
잠언 10:32
의인의 입술은 기쁘게 할 것을 알거늘 악인의 입은 패역을 말하느니라
잠언 11:8
의인은 환난에서 구원을 얻고 악인은 와서 그를 대신하느니라
잠언 11:10
의인이 형통하면 성읍이 즐거워하고 악인이 패망하면 기뻐 외치느니라
잠언 11:21
악인은 피차 손을 잡을찌라도 벌을 면치 못할 것이나 의인의 자손은 구원을 얻으리라
잠언 11:23
의인의 소원은 오직 선하나 악인의 소망은 진노를 이루느니라
잠언 11:31
보라 의인이라도 이 세상에서 보응을 받겠거든 하물며 악인과 죄인이리요
잠언 12:5
의인의 생각은 공직하여도 악인의 도모는 궤휼이니라
잠언 12:7
악인은 엎드러져서 소멸되려니와 의인의 집은 서 있으리라
잠언 12:10
의인은 그 육축의 생명을 돌아보나 악인의 긍휼은 잔인이니라
잠언 12:12
악인은 불의의 이를 탐하나 의인은 그 뿌리로 말미암아 결실하느니라
잠언 12:13
악인은 입술의 허물로 인하여 그물에 걸려도 의인은 환난에서 벗어나느니라
잠언 12:21
의인에게는 아무 재앙도 임하지 아니하려니와 악인에게는 앙화가 가득하리라
잠언 12:26
의인은 그 이웃의 인도자가 되나 악인의 소행은 자기를 미혹하게 하느니라
잠언 13:5
의인은 거짓말을 미워하나 악인은 행위가 흉악하여 부끄러운데 이르느니라
잠언 13:9
의인의 빛은 환하게 빛나고 악인의 등불은 꺼지느니라
잠언 14:19
악인은 선인 앞에 엎드리고 불의자는 의인의 문에 엎드리느니라
잠언 14:32
악인은 그 환난에 엎드러져도 의인은 그 죽음에도 소망이 있느니라
잠언 15:6
의인의 집에는 많은 보물이 있어도 악인의 소득은 고통이 되느니라
잠언 15:28
의인의 마음은 대답할 말을 깊이 생각하여도 악인의 입은 악을 쏟느니라
잠언 15:29
여호와는 악인을 멀리 하시고 의인의 기도를 들으시느니라
잠언 17:15
악인을 의롭다 하며 의인을 악하다 하는 이 두 자는 다 여호와의 미워하심을 입느니라
잠언 18:5
악인을 두호하는 것과 재판할 때에 의인을 억울하게 하는 것이 선하지 아니하니라
잠언 21:18
악인은 의인의 대속이 되고 궤사한 자는 정직한 자의 대신이 되느니라
잠언 24:16
대저 의인은 일곱번 넘어질찌라도 다시 일어나려니와 악인은 재앙으로 인하여 엎드러지느니라
잠언 25:26
의인이 악인 앞에 굴복하는 것은 우물의 흐리어짐과 샘의 더러워짐 같으니라
잠언 28:1
악인은 쫓아 오는 자가 없어도 도망하나 의인은 사자 같이 담대하니라
잠언 28:12
의인이 득의하면 큰 영화가 있고 악인이 일어나면 사람이 숨느니라
잠언 28:28
악인이 일어나면 사람이 숨고 그가 멸망하면 의인이 많아지느니라
잠언 29:2
의인이 많아지면 백성이 즐거워하고 악인이 권세를 잡으면 백성이 탄식하느니라
잠언 29:6
악인의 범죄하는 것은 스스로 올무가 되게 하는 것이나 의인은 노래하고 기뻐하느니라
잠언 29:7
의인은 가난한 자의 사정을 알아 주나 악인은 알아 줄 지식이 없느니라
잠언 29:16
악인이 많아지면 죄도 많아지나니 의인은 그들의 망함을 보리라
잠언 29:27
불의한 자는 의인에게 미움을 받고 정직한 자는 악인에게 미움을 받느니라
전도서 3:17
내가 심중에 이르기를 의인과 악인을 하나님이 심판하시리니 이는 모든 목적과 모든 일이 이룰 때가 있음이라 하였으며
전도서 7:15
내가 내 헛된 날에 이 모든 일을 본즉 자기의 의로운 중에서 멸망하는 의인이 있고 자기의 악행 중에서 장수하는 악인이 있으니
전도서 8:14
세상에 행하는 헛된 일이 있나니 곧 악인의 행위대로 받는 의인도 있고 의인의 행위대로 받는 악인도 있는 것이라 내가 이르노니 이것도 헛되도다
이사야 5:23
그들은 뇌물로 인하여 악인을 의롭다 하고 의인에게서 그 의를 빼앗는도다
에스겔 18:20
범죄하는 그 영혼은 죽을찌라 아들은 아비의 죄악을 담당치 아니할 것이요 아비는 아들의 죄악을 담당치 아니하리니 의인의 의도 자기에게로 돌아 가고 악인의 악도 자기에게로 돌아가리라
에스겔 18:24
만일 의인이 돌이켜 그 의에서 떠나서 범죄하고 악인의 행하는 모든 가증한 일대로 행하면 살겠느냐 그 행한 의로운 일은 하나도 기억함이 되지 아니하리니 그가 그 범한 허물과 그 지은 죄로 인하여 죽으리라
에스겔 21:3
이스라엘 땅에게 이르기를 여호와의 말씀에 내가 너를 대적하여 내 칼을 집에서 빼어 의인과 악인을 네게서 끊을찌라
에스겔 21:4
내가 의인과 악인을 네게서 끊을터이므로 내 칼을 집에서 빼어 무릇 혈기 있는 자를 남에서 북까지 치리니
에스겔 33:12
인자야 너는 네 민족에게 이르기를 의인이 범죄하는 날에는 그 의가 구원치 못할 것이요 악인이 돌이켜 그 악에서 떠나는 날에는 그 악이 그를 엎드러뜨리지 못할 것인즉 의인이 범죄하는 날에는 그 의로 인하여는 살지 못하리라
하박국 1:4
이러므로 율법이 해이하고 공의가 아주 시행되지 못하오니 이는 악인이 의인을 에워쌌으므로 공의가 굽게 행함이니이다
말라기 3:18
그 때에 너희가 돌아와서 의인과 악인이며 하나님을 섬기는 자와 섬기지 아니하는 자를 분별하리라
마태복음 13:49
세상 끝에도 이러하리라 천사들이 와서 의인 중에서 악인을 갈라 내어
풀무 불에 던져 넣으리니 거기서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
사도행전 24:15
저희의 기다리는바 하나님께 향한 소망을 나도 가졌으니 곧 의인과 악인의 부활이 있으리라 함이라
시편 1편 1절에 따르면, 복된(blessed) 사람과 그 반대편 사람 곧 악인(cursed)을 뚜렷하게 대조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여기에서 복된 사람이라면, 결코 함께할 수 없는 부류의 사람을 가리켜서 “악인”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우리가 보통
악인이라고 하면, 품행이 못된 자로서 남에게 해악을 끼치는 그런 사람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악인’이라는 이 단어를 조금
특별한 뜻으로 사용합니다. [히브리어] 라샤(rasha’)의 기본적인 뜻은 godless(=경건치 않은, 불경건한)로써,
‘하나님 없이 사는 자’를 말합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악인이란 세상 윤리나 도덕규범에 비추어서 그것에 역행하거나 미치지 못하는
자를 악인이라고 말하는 것과는 전혀 다른 것입니다.
성경이 선과 악을 구별하는 기준은 근본적으로 하나님에
대한 자세와 관계가 있으며, 일반 세상의 판단과는 차원이 다릅니다. 성경은 ‘악’을 근본적으로 ‘하나님 없이 사는 것’,
‘하나님을 떠나서 그분과 상관없이 사는 자세’로 규정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없이, 하나님을 염두에 두지 않고 자기자신의 뜻을
따라서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는 모든 것이 악인 것입니다. 쉽게 말한다면 ‘악인’은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인정하지 않는 세상에
속한 자를 가리키며 바로 불신자를 뜻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에서 악인이라고 할 때, 성품이나 행실에서 이런저런 잘못이 있는
사람을 뜻한다기 보다는, 근본적으로 하나님을 떠나 있으며 그분과 상관없이 사는 자(=불신자)를 가리킵니다.
또
다른 한편으로 ‘의인’으로 규정하는 것도 이와 마찬가지입니다. 단순히 어떤 선하고 의로운 일을 행하느냐가 그 판단
기준이라기보다, 그 전에(=행동 전에) 그가 하나님과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가, 하나님에 대한 그의 내적 자세가 어떠한가, 여기에
따라서 판단하는 것입니다. 성경적으로(biblically) ‘의’ 또는 ‘악’이라고 부르는 행위나 성품도 이런 내적
자세(=하나님에 대한 그 사람의 자세)에서 파생하는 것입니다.
잠언이 말하는 ‘의인과 악인’ 세 가지 차이
잠언 28장은 대조법이 특이합니다. 악인과 의인의 성격과 행위, 그리고 그들의 행위에 대한 결과의 차이를 서로 대조하면서 여러
가지 교훈을 주고 있습니다. 여기서 의인과 악인은 율법, 즉 하나님 말씀을 지키는 것을 기준으로 합니다.
의인은 여호와를 찾는 자, 명철과 지식이 있는 사람, 성실한 자, 지혜롭게 행하는 자, 여호와를
의지하는 자 등 여러 호칭으로 나옵니다. 이 호칭들은 모두 하나님을 향한 믿음의 사람이라는 말로 요약됩니다. 이 말씀을 배경으로
하면서 ‘믿음의 담력으로’라는 제목으로 묵상합시다.
1. 사람을 두려워하지 말라
1절에서 “악인은 쫓아오는 자가 없어도 도망하나 의인은 사자같이 담대하느니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악인은 하나님을 향한 믿음이 없는 사람입니다. 믿음이 없는 사람은 하나님을 두려워하기보다는 사람을 두려워하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두려움은 지나치게 사람의 눈치를 본다, 지나치게 사람을 의식한다 등의 뜻으로, 오늘날에는 일종의 ‘대인공포증’으로 볼
수 있습니다. 이처럼 사람의 눈치를 지나치게 보는 사람은 어떤 일을 올바로 해 나갈 수 없다는 말입니다. 잠언 29장 25절에
“사람을 두려워하면 올무에 걸리거니와 여호와를 의지하는 자는 안전하니라”고 했습니다.
아론은 사람을 두려워하다, 백성들이 금송아지를 만드는 것을 막지 못했습니다. 베드로도 사람을 두려워하다, 주님을 부인하고
저주까지 했습니다(마 26:69-75). 그러면 이 말씀은 ”사람을 두려워하지 말고 하나님을 두려워하라“는 의미입니다.
2. 담대한 마음을 가지라
‘담대하다’를 사전으로 보면 ‘배짱이 두둑하고 용감하다’는 뜻입니다. 이는 요즘 말로 ‘BGR 정신과 MH 정신’이 합쳐진
것입니다. BGR은 ‘배째라’는 배짱을, MH는 ‘맨땅에 헤딩한다’는 용기를 말합니다. 요즘 우리 교회에게 주는 교훈입니다.
성경에 보면 “마음을 강하게 하고 담대히 하라”는 말씀이 여러 곳에 나옵니다. 주님께서는 사랑하는 제자들을 전도하러
내보내시면서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고 힘을 주셨습니다. 특히 “마음을 강하게 하고 담대히 하라”는 말씀은 모세의
후계자가 되는 여호수아에게 “마음을 강하게 하고 담대하라!”고 한 것으로, 너무 유명합니다.
흥미롭게도, 세상에서 이른바 성공했다고 하는 사람들의 공통점은 모두 배짱과 용기로 가득찬 사람들입니다. 독일 문호 괴테는
“돈을 잃는 것은 가벼운 손실이고, 명예를 잃는 것은 중대한 손실이지만, 용기를 잃는 것은 보상받을 수 없는 손실이다”고
말했습니다. 우리도 두둑한 배짱의 믿음과 담대한 용기를 갖고 살아야 하겠습니다.
3. 믿음의 능력을 가지라
믿음의 능력은 믿음의 힘, 즉 위력을 말합니다. 사도 요한은 “대저 하나님께로 난자마다 세상을 이기느니라 세상을 이긴 이김은
이것이니 우리의 믿음이니라(요일 5:4)”며 믿음의 위력을 강조했습니다. 이는 그리스도인들이 갖추어야 할 것이 많지만, 무엇보다
믿음의 능력, 즉 영적 능력을 가져야 한다는 말입니다. 지식에만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영적 능력을 가져야 힘든 인생을 잘
살아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에 걸맞는 엔진을 장착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조금만 힘들어도 뒤로 미끄러지거나 낙심하고 좌절하여 곤두박질을 칠 것이기 때문입니다.
믿음의 능력과 관련해, 스코틀랜드의 종교개혁의 기수인 존 녹스의 예를 들고자 합니다. 존 녹스는 프랑스군에게 붙잡혀
1년 7개월 동안 배에 억류되어 고생을 했고, 영국왕 메어리 1세에게 박해를 받아 프랑스에 망명하는 등 고난을 당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끝내 스코틀랜드의 종교개혁을 위해 전 생애를 바친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가 세상을 떠났을 때, 장례식에 참석한 많은 사람들은 “어떤 사람도 두려워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만을 두려워한 사람이 이곳에 잠들어 있다”고 그를 추모했다고 합니다. 진정한 믿음의 능력을 가진 사람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인생의 길에 믿음의 담력으로 승리하는 축복을 체험하여 간증하는 자리에 이르시기를 바랍니다.
“‘악인은 쫓아오는 자가 없어도 도망하나 의인은 사자같이 담대하느니라(잠 28:1)’.
단락구분
1~3절 : 이스보셋의 근황
4절 : 요나단 아들의 근황
5~7절 : 자신의 신복에게 죽임을 당한 이스보셋
8~12절 : 이스보셋을 죽인 자들을 처형하는 다윗
이스보셋은 아브넬이
방자하게 행동한 것에 대해서 비판했지만 아브넬의 비열한 반박을 듣고서도 아브넬이 두려워서 감히 한 마디도 대답하지 못했습니다(3:11).
이스보셋은 왕이라고 하지만 군대장관 아브넬의 위엄에 눌려서 기를 펴지 못하고 살았습니다. 그런데 막상
아브넬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서 손맥이 풀렸다고 합니다(4:1). 또한 온 이스라엘 백성들도 놀랐습니다. 그
이유는 아브넬이 이스라엘을 지켜주는 마지막 보루(堡壘)였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아브넬이 죽자 나라는 혼란스러워졌습니다. 이럴 때
이스보셋을 지키는 임무를 맡았던 “바아나”와 “레갑”이 이스보셋을 죽였던 것입니다.
다윗은 이 죽음에 전혀 연루되지 않았고, 4장
11절에서 “그런즉 내가 저의 피 흘린 죄를 너희에게 갚아서 너희를 이 땅에서 없이 하지 아니하겠느냐”고 하면서 이스보셋의
죽음에 대해서 그 피를 흘리게 한 자에게 그 피를 갚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첫째, 아브넬 죽음의 여파(4:1~3)
아브넬이 헤브론에서 죽었다는 소식에 대한 여파가 나옵니다. 1. 이스보셋이 손에 맥이 풀렸다는 것 2. 온
이스라엘이 놀랐다는 것
이스라엘의 왕 이스보셋과 아브넬의 관계를 잘 알 수 있습니다. 이스보셋은 아브넬에 의해서
세워진 왕이기에 아브넬이 없으면 그의 정권도 흔들릴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3. 이스보셋은 아브넬의 죽음으로 권력 장악력을
잃었다
아브넬의 죽음은 온 이스라엘을 놀라게 했습니다. 북쪽 이스라엘의 정권이 붕괴에 이르렀다는 것 이제 다윗의 처분만을 기다리는 신세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2~3절에서 이스보셋의 군대장군 두 사람의 이름 “바아나”와 “레갑”이 나옵니다. 두 사람은 브에롯 출신의 베냐민 지파 사람으로
림몬(Rimmon)의 아들들이었습니다. 그리고 이 두 사람은 기회주의자들이어서 북이스라엘이 붕괴될 지점에 오자 자기들이 모셨던
이스보셋을 죽이고 그 목을 베어 헤브론에 있는 다윗에게로 갔습니다(4:5~7).
이
두 사람의 출신 지역인 “브에롯”은 예루살렘에서 동북쪽으로 14km 떨어진 곳입니다. 이곳은 원래 히위족의 네 성읍(기브온,
그비라, 브에롯, 기럇여아림) 가운데 하나였습니다(수 9:17). 그런데 사울 왕은 이곳에 있던 히위 사람들을 내쫓고 그곳에
림몬과 그 가족들이 살게 한 것입니다. 이처럼 자신들에게 새로운 정착지를 선사해 준 사울 왕을 림몬의 두 아들이 배신한 것입니다.
둘째, 요나단의 아들 므비보셋(4:4)
4절의 말씀은 이스보셋에 대한 이야기를 하다가 갑자기 중간에 끊고서 “므비보셋”의 이야기를 삽입시킨 것입니다. 왜 갑자기 “므비보셋”의 이야기를 삽입시켰을까 하는 것입니다.
이스보셋은 죽을 운명인 반면에 요나단의 아들 므비보셋(Mephibosheth)은 자비를 받을 운명이라는 것입니다.
삼하 4:4의 말씀은, 다윗이 요나단과 약속한 부분(삼상 20:14~17)과 또한 그 약속을 성취한 삼하 9:1~8 중간 지점에
있습니다. 즉 다윗이 요나단을 향한 “자비”가 어떻게 이루어지는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즉 므비보셋은 다윗과 요나단 사이에 맺은
그 약속을 성취해 가는 통로인 것입니다. 이것을 통해서 다윗은 약속을 지키는 사람이요, 자비(hesed)를 베푸는 사람임을
부각시키고 있습니다.
삼하 4:4에서는 어떻게 므비보셋이 다리를 절게 되었는가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사울과 요나단이 죽은 소식이 이즈르엘에서 올
때에, 즉 그의 나이 다섯 살 때 그의 유모가 그를 안고 급히 도망하다가 아이가 떨어져 절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두 다리를 절었다는 것은 사울의 아들 이스보셋 후에 이스라엘의 왕위를 계승할 사람은 “므비보셋”인데 그 당시 왕은 전쟁의 영도자가 되어야 하고, 야전 사령관이 되어야 하는데 당대의 기준으로 볼 때 미흡하다는 것입니다.
셋째, 이스보셋의 죽음(4:5~12)
①
5절에서 “바아나와 레갑이 한낮에 이스보셋의 집에 이르니 이스보셋이 낮잠을 자는지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아는대로 이스라엘의
대낮은 매우 해가 뜨겁게 내리쬐므로 대개 집안에서 낮잠을 잡니다. 이스보셋은 낮잠을 자고 있었습니다.
② 6~7절에서 “바아나”와 “레갑”은 이스보셋을 쳐서 죽이고 목을 베었습니다. 삼상 17:46에서 다윗이 골리앗과 전쟁하러 나설 때 세 개의 동사가 사용되었습니다. 그것은 쳐서, 죽이고, 목을 베었다는 것입니다.
③ 7절에서 이스보셋의 머리는 전리품이 되었습니다.
ⅰ) 이것은 사울 세력의 마지막을 뜻하는 것이며
ⅱ) 림몬의 아들들이 다윗에게 호의를 살 수 있는 근거처럼 보이며, 또한 자신들이 다윗에게 헌신하는 것을 보여주는 증거가 되는 것이었습니다.
ⅲ) 그리고 동시에 아버지를 잃고, 군대장관 아브넬을 잃고 가련하게 된이스보셋의 비참한 최후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④ 8절에서 “바아나”와 “레갑”은 헤브론에 있는 다윗에게로 가서 “여호와께서 오늘 우리 주 되신 왕의 원수를 사울과 그 자손에게 갚으셨나이다.”라고 했습니다.
ⅰ) 여기서 이 두 사람은 하나님과 다윗을 잘못 이해하였습니다.
ⅱ) 하나님은 인간이 복수하게 하지 않습니다.
ⅲ) 이스보셋의 죽음은 다윗에게 기쁨이 아니라 경악스러운 일이었습니다(10절).
ⅳ) 이 일은 두 사람에게 진보를 가져온 것으로 생각했지만 그와는 반대로 자신들의 마지막을 가져왔습니다.
⑤
9절에서 다윗은 분명하게 말하기를 “... 내 생명을 여러 환난 가운데서 건지신 여호와 ...”에서 자기가 오늘 존재하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와 도우심이지 이렇게 기름부음 받은 자를 죽임으로, 무죄한 자를 죽임으로 자기가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즉
다윗은 언제나 하나님의 은혜에 의지하고 있지 인간의 불법에 의지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⑥ 10절에서 다윗은 사울 왕을 죽였다는 아말렉 소년에게 “네가 좋은 소식을 전하는 줄로 생각하지만 그것이 좋은 소식이 아니라 슬픈 소식이고, 네가 한 일이 악한 일이라.”고 해서 시글락에서 처형한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⑦ 11~12절에서 악인이 의인을 그 집 침상에서 죽인 것에 대해서 심판을 내리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스보셋의 머리를 이미 죽어 장사된 아브넬 곁에 묻은 것을 알 수 있습니다.
ⅰ) 다윗은 이스보셋을 의인, 그를 죽인 두 자객을 악인으로 부릅니다.
ⅱ) 또한 다윗은 기회주의적인 배신자들이 생각하는 권모술수적이고 반역적인 사람이 아님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ⅲ)
이처럼 림몬의 자손들과 브에롯 사람들은 사무엘서가 쓰여지던 시대까지 깃다임(gittaim)으로 도망가서 거기서 외지인 취급을
받으며 살았습니다. 즉 불의한 자들은 자신의 고향을 빼앗기고 타향살이를 할 수 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⑧ 1~4장에서 사울, 아브넬, 그리고 이스보셋의 죽음을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다윗의 마음도 볼 수 있습니다.
죽음 대리인 다윗의 마음
사울과 요나단 아말렉 사람 애통함(1:7)
아브넬 요압 슬픔과 금식(3:31~35)
이스보셋 레갑과 바아나 처형(4:11~12)
다윗이 통일이스라엘의 왕이 되는데에 있어서 전쟁의 길보다는 화해 통합으로 나아간 것을 보게 됩니다. 그러나 기회주의자들인
아말렉 사람, 요압, 그리고 바아나와 레갑 등은 칼로 출세하려고 했습니다. 이러한 사람들은 이스라엘의 통일을 가져온 것이 아니라
칼부림을 가져왔습니다. 이에 반해 사울 왕과 요나단의 죽음에 애절해하고, 아브넬의 죽음에 슬퍼하고, 이스보셋의 죽음에 대해 심판한
다윗은 남북이스라엘의 통일을 이룰 수가 있었습니다. 성도 여러분! 하나님이 명령하신 평화의 대로를 여는 삶을 사시기 바랍니다.
그것은 기회주의도 아니고, 칼도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화해가 이루어졌듯이 바로 각자의 십자가를 지는 삶입니다. 즉
서로 용서하고 사랑하는 삶입니다. 마 5:8 “평화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
이스보셋을 지키는 임무를 맡았던 '바아나'와 '레갑'은 북이스라엘이 붕괴될 지점에 오자 모셨던 이스보셋의 목을 베어 헤브론에 있는 다윗에게로 갔습니다(5-7절). 이 두 사람의 출신 지역인 '브에롯'은 예루살렘에서 동북쪽으로 14km 떨어진 곳으로 원래 히위족의 네 성읍(기브온, 그비라, 브에롯, 기럇여아림) 가운데 하나였습니다(수 9:17). 그런데 사울 왕은 이곳에 있던 히위 사람들을 내쫓고 그곳에 림몬과 그 가족들이 살게 한 것입니다. 이처럼 자신들에게 새로운 정착지를 선사해 준 사울 왕을 림몬의 두 아들이 배신한 것입니다.
“헤브론에 이르러 다윗 왕에게 이스보셋의 머리를 드리며 고하되 왕의 생명을 해하려 하던 원수 사울의 아들 이스보셋의 머리가 여기 있나이다... 다윗이 브에롯 사람 림몬의 아들 레갑과 그 형제 바아나에게 대답하여 가로되 내 생명을 여러 환난 가운데서 건지신 여호와의 사심을 가리켜 맹세하노니"(4:5-9) 다윗은 그들에게 “여호와는 내 생명을 여러 환난 가운데서 건져내셨나니.....” 자기가 오늘 존재하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와 도우심이지 이렇게 기름부음 받은 자를 죽임으로, 무죄한 자를 죽임으로 자기가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다윗은 언제나 하나님의 은혜에 의지하고 있지 인간의 불법에 의지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다윗은 이들에게 사람의 도움은 필요없다는 자신의 입장을 당당하게 내 세울 수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이 두 사람은 다윗의 정적이라고 저들이 믿었던 이스보셋의 목을 베어 옴으로써 다윗이 자기들에게 큰 상을 내리고 다윗 군대의 장군쯤으로 임명해 줄 것을 기대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4절에는 이스보셋에 대한 이야기를 하다가 갑자기 중간에 끊고서 '므비보셋'의 이야기를 삽입시킵니다. 왜 갑자기
'므비보셋'의 이야기를 삽입시켰을까? 이스보셋은 죽을 운명인 반면에 요나단의 아들 므비보셋(Mephibosheth)은 다윗이
요나단과 약속한 대로(삼상20:14-17) 약속을 성취할 때가 된 것입니다. 어떻게 므비보셋이 다리를 절게 되었는가 하면 사울과 요나단이 죽은 소식이 이즈르엘에서 올 때에, 즉 그의 나이 다섯 살 때 그의 유모가 그를 안고 급히 도망하다가 아이가 떨어져 절게 되었다고 밝힙니다.
"전에 사람이 내게 고하기를 사울이 죽었다 하며 좋은 소식을 전하는 줄로 생각하였어도 내가 저를 잡아 시글락에서 죽여서 그것으로 그 기별의 갚음을 삼았거든..."(4:10) 전에 사울이 죽었다는 소식을 알렸던 사람도 그 소식을 전함으로써 상을 받을 줄 알았지만 그가 기대했던 상과는 정반대의 상을 받아 죽임을 당하는 꼴이되고 말았었습니다. 좋은 소식이라고 생각하여 사울의 죽음을 알리려 했던 그가 그 기별에 대한 상으로 받은 것이 죽음이었거늘 이제 사울의 아들을 제 손으로 죽이고 찾아온 이 두 사람에 대한 상이야 오죽하였겠는가? ".. 그런즉 내가 저의 피 흘린 죄를 너희에게 갚아서 너희를 이 땅에서 없이 하지 아니하겠느냐 하고.. 저희를 죽이고 수족을 베어 헤브론 못 가에 매어달고... 헤브론에서 아브넬의 무덤에 장사하였더라"(4:11-12) 다윗은 이스보셋을 죽인 두 자객을 악인으로 부르며 그들을 기회주의적인 배신자들로 낙인을 찍습니다.
오늘은 사울왕의 아들인 이스보셋이 살해를 당합니다. 인간적으로 보면 사울 집안도 참 안됐습니다. 사울왕을 비롯해 그 아들들 모두 비참한 죽음을 맞게 됩니다.
1절에 보면 이스보셋이 ‘아브넬’이 죽었다는 소식 듣고 ‘손의 맥’이 풀렸다고 합니다. 지금까지 의지하던 사람인데 자신을 배신하러 갔다가 허무하게 죽어 버리니 겁도 나고, 인생무상, 권력무상을 느끼며 낙심천만하게 된 것이겠지요.
사람 의지하는 사람은 ‘의지하는 사람’이 무너지면 같이 무너집니다. 하나님 없이 살게 되면 충분히 이렇게 될 수 있습니다. 친박, 친노하면서 정치하는 사람들이 우리 나라에는 많은데 친박하고,
친노하는 이유가 뭐겠습니까? 힘이 있고, 힘이 생기니까 모이는 거지만 의지하는 사람 무너지면 의지하던 사람들도 무너지게 되
있습니다.
이스보셋이 아브넬 심하게 의지하지 않았으면 맥까지 풀릴 이유가 없었을 겁니다. 자신이 왕인데 전열 정비해서 대처해 나가면 되는 거 아니겠습니까?
어려운 일 당하면 그 사람이 무엇을 의지하고 사는지가 드러나게 됩니다. 이스보셋도 다윗처럼 하나님의지하고 살았다면 이렇게까지 되지는 않았을 겁니다.
다윗보십시오. 이스보셋을 죽인 두 사람의 장교 바아나와 레갑이 이스보셋
머리 들고 찾아 옵니다. 대적의 왕을 대신 죽여주면 다윗이 좋아할 줄 알았던 거고, 그런 자신들에게 대단한 보상을 해 줄 것을
기대했던 건데, 다윗은 이 두 사람을 처형합니다. 다윗도 사람 의지하고 그랬으면 얼씨구나 하면서 이 사람들을 환영했을 겁니다.
사람 의지하는 사람, 돈 의지하는 사람, 힘 의지하는
사람은 그런 것들이 무너지면 같이 무너지기 쉽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을 의존하며 사는 사람은 어려움이 와도 쉽게 무너지지 않고 이겨
낼 수가 있습니다. 왜 그렇지요. 하나님은 무너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한번 살펴 보세요. 하나님을 의지하면서 살고 있나, 아니면 다른 것을 의지하면서 살고 있나? 우리 교우들 모두 하나님 더 많이 의지해서 웬만한 어려움에는 손에 맥이 풀리지 않는 강함을 가지고 살면 좋겠습니다.
사람 의지하고, 물질 의지하고, 등등 의지하다 무너지면 브레이크 없는
차처럼 정말 걷잡을 수 없이 무너지게 됩니다. 이게 참 무섭습니다. 어떤 사람은 자살하고, 어떤 사람은 술에 빠져 살고. 악해
지고. 몰락하게 되는 겁니다. 그리고 주변에 있던 사람들마저 다 떠납니다.
이스보셋도 보십시오. 의지하던 사람이 죽어 버리니까
무주공산(無主空山), 힘 못쓴다는 것을 아니까 당장에 공격이 들어 오지 않습니까? 이스보셋 집에 드나들 정도의 장교들이면
신복들일텐데 신복 두 사람이 대낮에 들어와서 암살을 하는 겁니다.
이 장면을 상상해 보십시오. 한 때 자신의 주군을 대낮에
암살하고, 목을 자른 다음, 그 자른 목을 들고 밤새 달려가는 모습을. 이럴 수 있는 겁니까? 여기 붙었다. 저기 붙었다. 세상
힘에 의지하면서 사는 인간의 처량하고 악하고 비참한 모습입니다.
힘든 일 있어도 무너지면 안됩니다. 하나님 의지하고 정신 바짝 차리고
헤쳐 나가야 사람들도 함부로 못하지, 무너져 있으면 사람들은 더 배신 때리고 달려 드는 겁니다. 하나님 없는 세계는 약육강식의
법칙이 지배하는 동물의 세계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진리의 허리 띠 띠고, 믿음의 방패 가지고, 구원의 투구 쓰고, 성령의 검인 하나님의 말씀 가지고 기도하면서 깨어 있어야 됩니다.(엡 6장)
그리스도인의 삶은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님 의존하는 삶입니다. 하나님의
방법대로 살다 좀 늦어지고, 실패하고, 부족하게 산다해서 조급할 필요도 없고, 낙심할 필요도 없습니다. 하나님 깊게 의지하고
하나님 방식대로 사는 삶만이 진정한 승리와 기쁨과 평안을 가져다 준다는 것, 한치도 의심하지 말고 믿고 나가야 합니다.
무너지는 사울 왕가의 모습을 보면서 하나님 의지하면서 사는 삶에 더 매진하는 오늘 아침이 되기를 바라겠습니다.
하나님, 부족하지만 새벽을 깨워 하나님만 의지하는 자의 모습으로 불러
주시니 감사합니다. 더 깊게 의지하며 소망하며 살기를 원합니다. 오늘 분명히 보여주시지 않았습니까? 사람만 의지하며 살던 사람은
의지하던 그 사람이 무너지면 손에 맥이 풀려 삶의 의미를 잃어 버리는 그 모습을 보여 주셨습니다. 하나님, 내 손에는 맥이 풀이지
않기를 바랍니다. 아버지 계시니 담대하고 힘있게 살아가는 인생으로 우리 모두를 인도하여 주시옵소서.
세속적인 방법으로 세워진 나라는 자멸하고 맙니다. 내
장래와 계획도 마찬가지입니다. 더뎌도 주님의 뜻과 방법을 붙잡을 때 속히 갈 수 있습니다. 사실 전 인생을 통틀어볼 때 지연된
얼마간의 세월은 인생을 망칠 만큼 위협적이지도, 늦지도 않습니다.
♦ 2월 7일(월)
♦ 오늘 읽어야 할 말씀 : 사무엘하 3:1∼39 ♦ 묵상을 위한 주제 : 점점 강하여 가고(1절) ♦ 성구 : 사울의 집과 다윗의 집 사이에 전쟁(戰爭)이 오래매 다윗은 점점 강(强)하여가고 사울의 집은 점점 약(弱)하여 가니라.
“다윗의 집은 점점 강하여 가고(David grew stronger and stronger)”
본문에서 집이라고 부른 것은 “가문(家門, family)”을 말합니다.
다윗의 집은 다윗의 가문으로 이스라엘 나라의 “왕(王, king)”이 된 가문을 말합니다.
세상에는 두 종류의 집이 있습니다. 하나의 집은 다윗의 집과 같이 점점 강하여 가는 집입니다. 다른 하나의 집은 사울의 집과 같이 점점 약하여 가는 집입니다.
여러분의 집은 강하여 가는 집입니까? 아니면 점점 약하여 가는 집입니까?
누구나 점점 강하여 가는 집이 되기를 원합니다. 점점 강하여 가는 집이 되는 비결을 살펴보겠습니다.
이스라엘은 모두 열 두 지파입니다. 다윗의 집은 오직 유다 지파로부터 지원을 받았습니다.
반면에 사울의 집은 열한 지파의 후원을 받았습니다.
수적으로 계산하면 사울의 집은 훨씬 더 많은 사람들이 모였지만 사울의 아들 “이스보셋”이 점점 약해진 것은 하나님이 함께하시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함께하신다는 것을 하나님이 내 편에서 나를 위하여 일하시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이러한 생각은 비성경적인 사고라고 하겠습니다.
하나님이 함께하신다는 성경적 사고는 “하나님이 신자 편에 서서 일하시는 것이 아니라 신자가 하나님 편에 서 있어야 하는 것”을 말합니다.
남북전쟁 당시 링컨은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내가 염려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내 편인가 아닌가 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과연 하나님 편인가?” 하나님께서 내 편이 되기를 원하지 말고 내가 하나님 편에 서야 합니다.
내가 하나님 편에 설 때 세상의 온갖 환난 풍파를 이길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믿음의 동지들이여! 날마다 매 순간마다 내가 하나님 편에 있다는 믿음으로 우환질고 많은 세상에서 주님께서 부르시는 그 날까지 늘 강건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 찬양 / 너 주의 사람아
예수 내 구주! 예수 내 생명! 예수 내 권세!
♦ 2월 5일(토)
♦ 오늘 읽어야 할 말씀 : 사무엘하 2:1∼32 ♦ 묵상을 위한 주제 : 헤브론으로 갈찌니라(1절) ♦ 성구 : 후(後)에 다윗이 여호와께 물어 가로되 내가 유다 한 성(城)으로 올라가리이까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올라가라 다윗이 가로되 어디로 가리이까 가라사대 헤브론으로 갈찌니라.
“헤브론으로 갈찌니라(To Hebron)” ‘헤브론’이란 지명의 뜻은 “연합(聯合, union)”이라고 합니다.
다윗은 이제까지 정처 없이 도망다녀야 했습니다. 그러나 새로운 시대를 위하여 '헤브론'으로 가서 모든 사람들과 연합해야 할 사명을 갖게 됩니다.
사울이 죽었습니다. 사울을 피해 시글락에 와 있었던 다윗은 이제 사울을 피하여 도망다닐 필요가 없습니다.
그때 다윗은 임의대로 행하지 않고 먼저 하나님께 기도하였으며 "헤브론으로 가라"는 음성을 들었습니다(1절).
다윗은 시글락에서 자기의 부하들과 모든 가족을 데리고 헤브론으로 갔습니다.
다윗이 돌아왔다는 소식을 들은 유다 사람들이 몰려와 다윗을 자기 지파의 왕으로 삼았습니다.
다윗은 사무엘을 통해 이스라엘 왕으로 기름 부음을 받았었지만(삼상 16장) 공식적인 행사가 아니었기 때문에 많은 사람이 이 사실을 모르고 있었습니다.
비록 한정적인 유다 땅이지만 다윗은 백성 앞에서 공식적인 왕위에 오르게 되었습니다.
사울이 죽었기 때문에 당연히 다윗이 이스라엘의 다음 왕으로 등극할 수 있겠지만 문제는 사울의 사람들이었습니다.
먼저 다윗은 길르앗 야베스 사람들을 끌어안아야 했습니다.
길르앗 야베스 사람들은 암몬 족속에게 위협과 큰 모욕을 당할 때 사울이 구해준 적이 있었습니다.
이를 계기로 길르앗 야베스 사람들은 사울를 지지하는 중심 세력이 되었습니다.
따라서 사울이 죽자 길르앗 애베스 사람들은 사울의 장례식을 정성껏 치러주었습니다. 이 소식이 다윗에게 전해졌습니다.
그 소식을 듣고 다윗은 그들을 호의로 대했습니다.
강압적으로 그들의 마음을 돌려 자신의 세력으로 만들 수도 있었지만 다윗은 강제적으로 그들의 마음을 돌리려 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사울에 대한 그들의 충성에 대해 칭찬하며 축복했고 그들의 마음이 어떠하든 다윗 자신은 그들에게 선을 베풀 것을 약속했습니다(5~7절).
또 한 가지 다윗이 해결해야 할 사람은 "아브넬"이었습니다.
그는 사울 군대 총사령관이었는데, 사울밑에서 막강한 권력을 행사하던 사람이었습니다.
사울이 죽은 후에 권력에 눈이 먼 그는 자신의 세력을 구축하기 위해 발빠르게 움직였습니다(8-10절).
"아브넬"은 사울의 아들인 "이스보셋"을 왕으로 세웠습니다.
유다 지파는 다윗을 왕으로 세웠기에 그 지파를 제외한 모든 지파의 왕이 된 것입니다.
하지만 이스보셋은 아브넬에 의해 세워진 무기력한 왕이었습니다. 재위기간도 2년밖에 되지 않았습니다.
아브넬을 중심으로 한 이스보셋의 세력과 다윗의 세력은 결국 전쟁을 초래했습니다(12-32절).
다윗은 이미 사무엘을 통해 이스라엘의 왕으로 기름 부음을 받았지만, 참 오랫동안 사울의 핍박을 피해 도망 다녀야 했고, 또 사울이 죽어서도 7년 6개월 동안 유다 지파의 왕으로서 다른 지파를 통합해야 하는 어려운 시간을 보내야 했습니다.
무한한 인내가 요구되는 시간이었습니다.
우리 또한 다윗과 비슷한 상황을 마주할 때가 있습니다.
다윗은 쉽게 결정할 수 있는 일에도 여호와께 물었습니다.
내가 유다 한 성으로 올라가리이까? 어디로 가리이까?
먼저 하나님께 가야 할 방향을 묻고 하나님의 음답에 따라 가야 할 방향을 찾아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내 생각대로 말씀하시지 않는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뜻에 따라 순종하며 행하겠다는 다윗의 결연한 의지를 본받아야 합니다.
기도하면서 믿음으로 어떤 일을, 어떤 길을 선택했다고 말한다면 그 말은 어떤 난관이 있다 해도 끝까지 하나님께 맡기고 그 길을 걷는 것을 의미합니다.
길을 걷는 중에 난관을 만난다면 그 난관은 필요한 시점에 필요한 일을 위해 만들어 놓으신 하나님의 훈련 과정입니다.
하나님은 그 난관을 통해서도 우리에게 무너지지 않을 영적 용사로 무장시키시고 또 타인을 살리기 위한 통로로 삼으실 것이 분명하기 때문입니다.
오늘도 뜻하지 않는 난관을 만난다 하더라도, 시간이 멈춘 어두운 한밤중 같이 느껴지는 시간이 있어도, 어떤 특별한 일이 일어나지 않을지라도 하루의 길을 먼저 주님께 묻고 주님의 지혜를 구하며 주님을 믿고 따라가는 은총의 하루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 찬양 / 나는 갈 길 모르니
예수 내 구주! 예수 내 생명! 예수 내 권세!
♦ 2월 4일(금)
♦ 오늘 읽어야 할 말씀 : 사무엘하 1:1∼27 ♦ 묵상을 위한 주제 : 활 노래(18절) ♦ 성구 : 명(命)하여 그것을 유다 족속(族屬)에게 가르치라 하였으니 곧 활 노래라 야살의 책(冊)에 기록(記錄)되었으되.
“활 노래(lament of the bow)”
히브리어 성경에는 사무엘서가 상하로 나뉘어진 것이 아니라 한권입니다. 한글 성경은 사무엘 상하 두 권으로 구분하여 사용합니다. 사무엘상은 이스라엘 초대 왕 사울의 죽음으로 막을 내립니다(31장). 사무엘상은 다윗의 생애 일부를 포함하고 있지만 사무엘과 사울의 생애에 일어났던 역사라고 하겠습니다. 사무엘하는 다윗의 왕위 등극과 통치 업적 및 다윗의 범죄 그리고
반역자들의 반란과 다윗의 피난 등의 역사라고 하겠습니다.
사무엘하 1장은 길보아 전투에서 사울의 죽음과 장사를 기록한 사무엘상 31장과 다윗의 유다 왕 등극인 사무엘하 2장 사이에 사울이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던 다윗의 반응에 관한 기록입니다.
사울이 블레셋과의 전투에서 죽었던 길보아 산과 다윗이 아말렉 사람들로부터 빼앗겼던 시글락과의 거리는 대략 80km 라고 합니다. 다윗은 사울의 죽음에 대한 소식을 사흘 째 되던 날 듣게 됩니다(1:2).
다윗은 그 소년에게 "사울과 그 아들 요나단의 죽은 것을 네가 어떻게 아느냐?"고 묻습니다.
소년은 우연히 길보아 산에 올라갔다가 사울이 내게 이르기를 내 목숨이 아직 내게 있으므로 내가 고통에 시달리니 나를 죽이라고 하므로 더 이상 살 수 없는 줄 알고 죽이고 면류관과 팔고리를 가져왔다고 합니다(1:10).
다윗은 그 소년의 말을 듣고 네가 어찌하여 여호와의 기름부음을 받은 자 죽이기를 두려워하지 않았느냐 하며 저를 죽이라고 명령합니다.
다윗은 사울과 그의 아들이자 절친한 요나단의 죽음에 관한 소식을 듣고 매우
슬퍼했습니다. 그래서 슬픈 노래를 만들어 이들의 죽음을 애도하였습니다. 다윗은 여기에 그치지 않았고 애가를(활노래) 지어 유다 족속들에게
가르치라 명령하였고 또한 그 애가를 책에(야살의 책) 기록하라고 명령하였습니다(1:17-27).
다윗이 그의 절친한 친구 요나단의 죽음에 대한 애도는 우리가 이해할 수 있다고 하더라도 자신을 심하게 괴롭히고 죽이려고 했던 사울에게도 왜 이같이 애도를 하였을까요?
다윗은 하나님께서 기름 부은 사람은 그가 비록 죄를 범하였을지라도 인간이 심판할 수 없다는 신앙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의 왕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통치하기 위하여 선택한 하나님의 종이라고 믿었기에 하나님만이 그를 벌하실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하나님이 선택한 사람을 하나님께 맡기려는 믿음을 본받아 오늘날도 믿음의 사람을 존중하고 사랑하는 일에 기쁨이 넘쳐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 찬양 / 저 하늘 나라는
예수 내 구주! 예수 내 생명! 예수 내 권세!
다윗의 눈물
다윗이 위대한 신앙의 인물이 되었던 중요한 비결 중의 하나는 다윗이 눈물의 사람이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다윗이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이 되었던 중요한 비결 중의 하나도 다윗이 눈물의 사람이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다윗이 예수 그리스도의 조상이
될 수 있었던 중요한 비결 중에 하나도 다윗이 눈물의 사람이었던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눈물이 진실의 상징이고 소박함의 상징이고
순수함의 상징이기 때문입니다. 눈물은 곧 하나님의 마음이기 때문입니다. 다윗은 세 가지 일 때문에 눈물을 흘리면서 울었습니다.
첫째, 다윗은 자기가 범한 죄 때문에 회개하며 눈물을 흘리면서 울었습니다.
“내가 탄식하므로 곤핍하여 밤마다 눈물로 내 침상을 띄우며 내 요를 적시나이다”(시 6:6).
대부분의 사람들은 간음죄와 살인죄를
짓고서도 눈물을 흘리기는커녕 태연한 모습을 보입니다.
기독교 신자라고 하는 사람들이 간음죄를 짓고서도 눈물을 흘리며 회개를
하기는커녕 태연한 모습으로 위선을 떨기도 합니다. 그런데 다윗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나단이라는 선지자가 다윗에게 와서 다윗의 죄를
지적했을 때 다윗은 태연하게 위선을 떨지 않았습니다. “내가 여호와께 죄를 범하였나이다”라고 솔직하게 자기의 죄를 고백했습니다.
나단 선지의 말과 다윗의 고백을 들어보시기를 바랍니다.
“나단이 다윗에게 이르되 당신이 그 사람이라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처럼 이르시기를 내가 너로 이스라엘 왕을 삼기 위하여
네게 기름을 붓고 너를 사울의 손에서 구원하고 네 주인의 집을 네게 주고 이스라엘과 유다 족속을 네게 맡겼느니라 그러한데 어찌하여
네가 여호와의 말씀을 업신여기고 나 보기에 악을 행하였느뇨 네가 칼로 헷 사람 우리아를 죽이되 암몬 자손의 칼로 죽이고 그 처를
빼앗아 네 처를 삼았도다 이제 네가 나를 업신여기고 헷 사람 우리아의 처를 빼앗아 네 처를 삼았은즉 칼이 네 집에 영영히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셨고 여호와께서 또 이처럼 이르시기를 내가 네 집에 재화를 일으키리라 너는 은밀히 행하였으나 나는 이스라엘 무리 앞
백주에 이 일을 행하리라 하셨나이다 다윗이 나단에게 이르되 내가 여호와께 죄를 범하였노라”(삼상 12:7-13).
다윗은 그 후 평생토록 죄를 회개하며 눈물을 흘리면서 울었습니다. “내가 탄식하므로 곤핍하여 밤마다 눈물로 내 침상을 띄우며 내
요를 적시나이다 내 눈이 근심을 인하여 쇠하며 어두웠나이다 여호와께서 내 곡성을 들으셨도다”(시 6:6-8). 다윗은 자기가 범한
죄 때문에 그리고 죄 값으로 당하는 환난 때문에 평생 눈물을 흘리면서 울었습니다. 그래서 다윗의 대부분의 시에는 슬픔과 탄식과
울음이 나타나 있었습니다. “여호와여 어느때까지니이까 나를 영영히 잊으시나이까 주의 얼굴을 나에게서 언제까지 숨기시겠나이까”(시
13:1).
“내 하나님이여 내 하나님이여 어찌 나를 버리셨나이까 어찌 나를 멀리하여 돕지 아니하옵시며 내 신음하는 소리를 듣지
아니하시나이까 내 하나님이여 내가 낮에도 부르짖고 밤에도 잠잠치 아니하오나 응답지 아니하시나이다 나는 벌레요 사람이 아니라 사람의
훼방거리요 백성의 조롱거리니이다 나는 물같이 쏟아졌으며 내 모든 뼈는 어그러졌으며 내 마음은 촛밀 같아서 내 속에서 녹았으며 내
힘이 말라 질그릇 조각 같고 내 혀가 잇틀에 붙었나이다”(시 22:1-15). “내 죄악이 내 머리에 넘쳐서 무거운 짐 같으니
감당할 수 없나이다 내 상처가 썩어 악취가 나오니 나의 우매한 연고로소이다 내가 아프고 심히 구부러졌으며 종일토록 슬픈 중에
다니나이다”(시 38:4-6).
다윗은 한 평생을 다음과 같은 참회의 시를 읊으면서 살다가 죽었습니다. 후에 어거스틴이 그 시를 읊으면서 살다가 죽었고, 김치선
목사님이 그랬습니다. 저도 부족하지만 그 분들의 흉내를 내면서 그 참회의 시를 읊으면서 살다가 죽기를 바랍니다. 그 참회의 시는
시편 51편입니다. “하나님이여 주의 인자를 좇아 나를 긍휼히 여기시며 주의 많은 자비를 좇아 내 죄과를 도말하소서 나의 죄악을
말갛게 씻기시며 나의 죄를 깨끗이 제하소서 대저 나는 내 죄과를 아오니 내 죄가 항상 내 앞에 있나이다 내가 주께만 범죄하여 주의
목전에 악을 행하였사오니 주께서 말씀하실 때에 의로우시다 하고 판단하실 때에 순전하시다 하리이다 내가 죄악 중에 출생하였음이여
모친이 죄 중에 나를 잉태하였나이다 중심에 진실함을 주께서 원하시오니 내 속에 지혜를 알게 하시리이다 우슬초로 나를 정결케 하소서
내가 정하리이다 나를 씻기소서 내가 눈보다 희리이다 나로 즐겁고 기쁜 소리를 듣게 하사 주께서 꺾으신 뼈로 즐거워하게 하소서
주의 얼굴을 내 죄에서 돌이키시고 내 모든 죄악을 도말하소서 하나님이여 내 속에 정한 마음을 창조하시고 내 안에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하소서”(시 51:1-10). 다윗은 울다가 또 울다가 하나님께 이렇게 호소하기도 했습니다. “하나님이여 나의 눈물을 주의
병에 담으소서”(시 56:8) 다윗은 한 평생 자기가 범한 죄 때문에 회개하며 눈물을 흘리면서 울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것이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 가장 귀하게 여기시고 가장 기뻐하시는 것이 바로 회개의 눈물이기 때문입니다.
둘째, 다윗은 다른 사람들의 불행을 슬퍼하며 눈물을 흘리면서 울었습니다.
“다윗과 그와 함께 한 백성이 울 기력이 없도록 소리를 높여 울었더라”(삼상 30:4).
다윗은 시글락에 살던 자기의 동족이
아말렉 사람들에게 침략을 당하여 사람들이 붙잡혀 가고 온 성이 불 탄 것을 보고 울 기력이 없도록 소리를 내어 울었다고 했습니다.
“다윗과 그의 사람들이 성에 이르러 본즉 성이 불탔고 자기들의 아내와 자녀들이 사로잡혔는지라 다윗과 그와 함께 한 백성이 울
기력이 없도록 소리를 높여 울었더라”(삼상 30:3,4). 자기의 동족이 불행을 당했을 때 울 수 있는 사람은 착한 사람입니다.
사도 바울도 “우는 자들로 함께 울라”(롬 12:15)고 권면했습니다.
박윤선 목사님은 다윗의 울음의 귀중함을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사람들은 흔히 생각하기를 어려운 때에 우는 것은 약자들의 하는 일이라고 한다. 더욱이 시글락에서 다윗이 통곡한
것은 일국의 대왕이 될 사람으로서 체통을 지키지 못한 것같이 보인다고 한다. 그러나 사실은 그렇지 않다. 울 수 있는 사람은 울지
않는 사람보다 용이하게 신앙으로 들어간다. 사람이 울 때에는 그 심령이 부드러워져서 하나님께로 돌아가기 때문이다. 울음이 없는
자는 대부분 심령이 마비되어 있는 자로 판단된다.”
다윗은 시글락 사건 바로 후에는 자기를 죽이려고 하던 사울 왕이 전쟁터에서 죽임을 당했다는 소식을 듣고 또 슬퍼하며 울었습니다.
사무엘하 1장 1절 이하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사울의 죽은 후라 다윗이 아말렉 사람을 도륙하고 돌아와서 시글락에서 이틀을
유하더니 제 삼일에 한 사람이 사울의 진에서 나왔는데 그 옷은 찢어졌고 머리에는 흙이 있더라 저가 다윗에게 나아와 땅에 엎드려
절하매 다윗이 저에게 묻되 너는 어디서 왔느냐 대답하되 이스라엘 진에서 도망하여 왔나이다 다윗이 가로되 일이 어떻게 되었느뇨 너는
내게 고하라 저가 대답하되 군사가 전쟁 중에서 도망하기도 하였고 무리 중에 엎드러져 죽은 자도 많았고 사울과 그 아들 요나단도
죽었나이다 이에 다윗이 자기 옷을 잡아 찢으매 함께 있는 모든 사람도 그리하고 사울과 그 아들 요나단과 여호와의 백성과 이스라엘
족속이 칼에 죽음을 인하여 저녁때까지 슬퍼하여 울며 금식하니라”(삼상 1:1-4,11,12). 다윗은 자기를 죽이려 하던 사울
왕이 죽었다고 하는 소식을 듣고 기뻐하는 대신에 슬퍼하며 울었다고 했습니다. 다윗이 슬퍼한 이유 중의 하나는 사울 왕이 하나님의
기름 부음을 받은 자였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다윗은 근본적으로 인정이 많은 사람이었고 마음이 착한 사람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 착한 마음이 하나님의 마음에 들었다고 생각합니다. 그 착한 마음이 바로 하나님의 마음이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죄인들이 죄를
범해서 하나님의 심판을 받게 된 것을 바라보시면서 슬퍼서 우신다고 말씀했습니다. “하늘이여 들으라 땅이여 귀를 기울이라
여호와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자식을 양육하였거늘 그들이 나를 거역하였도다 소는 그 임자를 알고 나귀는 주인의 구유를 알건마는
이스라엘은 알지 못하고 나의 백성은 깨닫지 못하는도다 하셨도다 슬프다 범죄한 나라요 허물 진 백성이요 행악의 종자요 행위가 부패한
자식이로다 그들이 여호와를 버리며 이스라엘의 거룩한 자를 만홀히 여겨 멀리하고 물러갔도다.”(사 1:2-4) 예수님도 하나님의
심판을 받게 될 예루살렘 성을 바라보시면서 좋아서 기뻐하시지 않았고 슬퍼서 우셨다고 했습니다. “가까이 오사 성을 보시고 우시며
가라사대 너도 오늘날 평화에 관한 일을 알았더면 좋을 뻔하였거니와 지금 네 눈에 숨기웠도다 날이 이를찌라 네 원수들이 토성을 쌓고
너를 둘러 사면으로 가두고 또 너와 및 그 가운데 있는 네 자식들을 땅에 메어치며 돌 하나도 돌 위에 남기지 아니하리니 이는
권고 받는 날을 네가 알지 못함을 인함이니라 하시니라”(눅 19:41-44).
지금 우리들의 가슴에는 원수들에 대한 분노만이 있고 슬픔과 눈물은 없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마음은 아닙니다. 니느웨
성을 바라보시면서도 하나님은 우셨습니다. 물론 요나는 분노했습니다. 지금 우리는 북한을 바라보면서 우는 마음보다는 분노의 마음을
지니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것도 하나님의 마음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사울 왕이 하나님으로부터 버림을 당하고 비극적인 죽음을
당한 것을 바라보면서 다윗은 좋아서 기뻐하지 않았고 슬퍼서 울었습니다. 이것이 곧 하나님의 마음이요 예수님의 마음이었습니다.
심판을 받는 사람들을 바라보면서 슬퍼서 우는 다윗이 하나님의 마음에 꼭 들었다고 생각합니다.
셋째, 다윗은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 때문에 감격하며 눈물을 흘리면서 울었습니다.
다윗의 시편들 중에는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에 감격하고 감탄하는 시들이 너무너무 많습니다. 감탄사들을 계속해서 발합니다. “사람이
무엇이관대 주께서 저를 생각하시며 인자가 무엇이관대 저를 권고하시나이까 저를 천사보다 조금 못하게 하시고 영화와 존귀로 관을
씌우셨나이다.”(시 8:4-5) “하나님이여 주의 생각이 내게 어찌 그리 보배로운지요 그 수가 어찌 그리 많은지요 내가 세려고
할찌라도 그 수가 모래보다 많도소이다 내가 깰 때에도 오히려 주와 함께 있나이다”(시 139:17,18). 마음이 부드럽고 감성이
풍부한 다윗이 이와 같은 고백을 할 때 그의 눈에서는 뜨거운 눈물이 흐르고 있었을 것입니다. 마음이 무디고 강퍅한 저 같은
사람도 이 고백들을 읽으면서 뜨거운 눈물을 흘렸다면 이 시의 원 저자인 다윗은 얼마나 뜨거운 감격의 눈물을 흘렸을 것입니까?
다윗은 자기에게 베푸신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고백하며 너무 감격하여 뜨거운 눈물을 흘리면서 울었을 것입니다. 다윗의 감격의 시들
중에서 하나만 여기 옮깁니다. “여호와는 자비로우시며 은혜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 하시며 인자하심이 풍부하시도다 항상 경책지
아니하시며 노를 영원히 품지 아니하시리로다 우리의 죄를 따라 처치하지 아니하시며 우리의 죄악을 따라 갚지 아니하셨으니 이는 하늘이
땅에서 높음 같이 그를 경외하는 자에게 그 인자하심이 크심이로다 동이 서에서 먼 것 같이 우리 죄과를 우리에게서 멀리 옮기셨으며
아비가 자식을 불쌍히 여김 같이 여호와께서 자기를 경외하는 자를 불쌍히 여기시나니 이는 저가 우리의 체질을 아시며 우리가
진토임을 기억하심이로다”(시 103:8-14). “내 영혼아 여호와를 송축하라 내 속에 있는 것들아 다 그 성호를 송축하라 내
영혼아 여호와를 송축하며 그 모든 은택을 잊지 말찌어다 저가 네 모든 죄악을 사하시며 네 모든 병을 고치시며 네 생명을 파멸에서
구속하시고 인자와 긍휼로 관을 씌우시며 좋은 것으로 네 소원을 만족케 하사 네 청춘으로 독수리 같이 새롭게 하시는도다”(시
103:1-5).
다윗은 자기의 죄를 바라보며 눈물을 흘리면서 울었습니다. 다윗은 다른 사람들의 불행을 바라보며 눈물을
흘리면서 울었습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바라보며 눈물을 흘리면서 울었습니다. 저의 금년도 기도 제목 중의 하나는 저의
가슴에 주님의 눈물을 품는 것입니다. “성령의 도우심으로 예수님의 마음과 생각과 눈물을 품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제물 되는 삶을
살게 하시고 제물 되는 죽음을 죽게 하시옵소서.” 저의 소원대로 하나님께서 메마르고 강퍅한 저의 가슴에 눈물을 조금씩 채워주시고
계십니다. 저의 허물을 바라보면 가슴에 눈물이 흐릅니다. 아프가니스탄의 어린이들이나 캄보디아의 어린이들을 생각하면 저의 가슴에
눈물이 흐릅니다. 어제 캄보디아에 같이 갔던 목사님 한 분이 캄보디아에서 찍은 사진들을 보내왔습니다. 그 사진들 중의 하나는 버스
고장으로 시골 길에서 한 시간을 기다리는 중 지나가는 어린이 세 명에게 제가 스티커를 나누어 주었는데 그 세 어린이들이 스티커를
손목이 붙이고 저와 함께 찍은 사진입니다. 어린이들이 귀엽게 보였는데 그 어린이들을 바라보면서 제 눈에 눈물이 맺히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너무너무 감사한 일입니다. 저도 다윗처럼 울 수 있기를 바랍니다. 통곡하며 울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울 기력이
없도록 울 수 있기를 바랍니다. 뜨거운 눈물을 흘리면서 울 수 있기를 바랍니다.
겟세마네 동산에서 피땀을 흘리며 기도하실 때 눈물을 흘리셨던 예수님의 눈물을 내게도 주옵소서 십자가에서 저희들의 죄를 용서하여 주시옵소서 하며 우시던 주님의 눈물을 제게도 주옵소서 예루살렘 성을 바라보며 눈물을 흘리시던 그 눈물도 제 마음에 품게 하옵소서
본문에서 다윗은 큰 슬픔에 빠진다. 사울 왕이 죽었기 때문이다. 이상하게 느껴지지 않습니까? 다윗은 자기를 죽이려던 원수 사울이 죽었는데
슬퍼했다는 것이 이상하게 생각되지 않습니까?
다윗 개인적으로는 춤이라도 춰야 할만큼 기쁜 소식입니다. 사울이 죽음으로 그의 오랜 피난 생활이
끝나고 이제 왕이 되는 길이 열렸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슬퍼합니다. 어떻게 다윗은 원수의 죽음을 슬퍼할 수 있었을까? 그 이유를 생각하며 은혜를 살펴보려고 합니다.
사무엘상 28:4 블레셋 사람들이 모여 수넴에 이르러 진 치매 사울이 온 이스라엘을 모아 길보아에 진 쳤더니.
사울이 마주한 것은 블레셋과의 전쟁이었다. 가나안 해변에 머물러 있던 블레셋 족속들이 이스라엘의 중심으로 그 세력을 확장하기
위해 공격해 온 것이다. 사울은 다급했던 것 같다. 하나님께도 기도했지만 하나님은 꿈으로도, 우림으로도, 선지자로도 그에게
대답하지 않으셨다. 그래서 그는 엔돌의 신접한 여인을 찾아간다. 사울은 신접한 여인을 통해 죽은 사무엘을 불러 대화한다. 사무엘은
이렇게 답해주었다.
사무엘상 28:19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너와 함께 블레셋 사람들의 손에 넘기시리니 내일 너와 네 아들들이 나와 함께 있으리라 여호와께서 또 이스라엘 군대를 블레셋 사람들의 손에 넘기시리라 하는지라.
내일 너와 네 아들 요나단이 죽게 된다는 내용이었다. 사울의 죽음은 예고된 죽음이었다.
사무엘상 31:1 블레셋 사람들이 이스라엘을 치매 이스라엘 사람들이 블레셋 사람들 앞에서 도망하여 길보아 산에서 엎드러져 죽으니라.
성경은 전투의 과정은 언급하지 않고 이스라엘 사람들이 죽었다는 내용만 기록하고 있다. 사울과 요나단의 죽음이 예고된 전쟁이었기 때문이다.
당시 시글락에 있었던 다윗은 한 아말렉 청년으로부터 사울과 요나단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게 된다. 그 청년은 죽어가는 사울의
요청으로 사울을 죽이고 그의 머리에 있던 왕관과 팔에 있는 고리를 벗겨서 다윗에게로 가져온 것이다. 절대 권력을 상징하는 빈
왕관이 다윗 앞에 있었다. 아말렉 청년은 아마도 다윗이 좋아하며 자신에게 상이라도 줄 것을 기대했을지 모른다. 그러나 다윗은
사울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자신의 옷을 잡아 찢는다. 옷을 찢는 행동은 히브리어로 ‘크리야’다. 유대인들은 슬픔이나 분노 같은
감정이 있을 때 그것을 가장 격렬하게 표현하는 행위로 옷을 찢는다. 다윗만 옷을 찢은 게 아니었다. 다윗과 함께 했던 약
600명의 사람들도 다 옷을 찢었다. 쫓겨 다니느라 옷도 많지 않았을 텐데 온 공동체가 옷을 찢으며 사울을 잃은 슬픔에 동참한
것이다.
사무엘하 1:11-12 이에 다윗이 자기 옷을 잡아 찢으매 함께 있는 모든 사람도 그리하고 사울과 그의 아들 요나단과 여호와의 백성과 이스라엘 족속이 칼에 죽음으로 말미암아 저녁 때까지 슬퍼하여 울며 금식하니라.
다윗과
그의 공동체는 사울과 요나단의 죽음 뿐만이 아니라 여호와의 백성인 이스라엘 족속이 블레셋에 패배하며 많은 사람이 죽은 것
때문에도 슬퍼했다. 여기서 다윗의 눈물이 조금은 이해된다. 그는 사울과의 개인적인 애증을 넘어 국가적인 상실을 슬퍼하고 있는
것이다.
다윗은 이어서 그 아말렉 청년을 꾸짖는다.
사무엘하 1:14 다윗이 그에게 이르되 네가 어찌하여 손을 들어 여호와의 기름 부음 받은 자 죽이기를 두려워하지 아니하였느냐 하고.
다윗에게 사울은 여전히 하나님이 기름부어 세우신 왕이었다. 사울 때문에 다윗은 정말 힘든 시간을 보냈다. 그러나 그는 여호와께서
기름부어 세우신 자를 죽이는 것은 여호와께서 금지하신 것이라는 사실을 명심했다. 사울이 자신에게 저질렀던 모든 악행보다 하나님이
그를 기름부어 세웠다는 사실이 더 중요했던 것이다. 그는 사울이 죽고 나서 이런 시편을 남긴다.
시편 18:1-3 [여호와의 종 다윗의 시, 인도자를 따라 부르는 노래, 여호와께서 다윗을 그 모든 원수들의
손에서와 사울의 손에서 건져 주신 날에 다윗이 이 노래의 말로 여호와께 아뢰어 이르되] 나의 힘이신 여호와여 내가 주를
사랑하나이다 여호와는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요새시요 나를 건지시는 이시요 나의 하나님이시요 내가 그 안에 피할 나의 바위시요 나의
방패시요 나의 구원의 뿔이시요 나의 산성이시로다 내가 찬송 받으실 여호와께 아뢰리니 내 원수들에게서 구원을 얻으리로다.
다윗은 절대주권이 하나님게 있음을 노래했다. 그는 원수가 아무리 강할지라도 원수의 손에서 자신을 건지실 분이 하나님임을 신뢰했다. 그는 자신의 하나님을 신뢰하며 자신은 하나님 앞에 죄를 범하지 않고 완전히 행하고자 결심했다.
시편 18:23-24 또한 나는 그의 앞에 완전하여 나의 죄악에서 스스로 자신을 지켰나니 그러므로 여호와께서 내 의를 따라 갚으시되 그의 목전에서 내 손이 깨끗한 만큼 내게 갚으셨도다.
다윗은
어쩌면 죽음의 위협 속에서도 힘들게 지켜왔던 자신의 원칙과 그로 인하여 고통스러웠던 시간들을 돌아보며 눈물 흘렸을지 모른다.
그런데 그는 사울 때문에 결과적으로 하나님께만 피하는 사람이 되었다. 하나님만 그의 방패와 요새가 되시는 견고한 영혼이 되었다.
그는 아둘람 굴에서 하나님께 억울함을 토하며 숱한 눈물의 기도를 드렸을 것이다. 그러나 결국 하나님을 신뢰하며 믿음의 기도를
심었던 것이다.
신약 성경에서도 바울은 이런 권면을 한다.
로마서 12:14, 17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축복하라 축복하고
저주하지 말라. 아무에게도 악을 악으로 갚지 말고 모든 사람 앞에서 선한 일을 도모하라.
로마서 12:19-21 내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하나님의 진노하심에 맡기라 기록되었으되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고
주께서 말씀하시니라. 네 원수가 주리거든 먹이고 목마르거든 마시게 하라 그리함으로 네가 숯불을 그 머리에 쌓아 놓으리라 .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
다윗은 자신의 삶에 원수를 허락하신 하나님의 마음을 알아가는 시간을 보냈다. 그는 하나님께 모든 것을 맡기고 자신은 악을
악으로 갚지 않기로 결심했을 것이다. 그리고 자신을 박해했던 사울왕을 위해 기도하며 축복했을 것이다. 자신이 오랜 시간 축복했던
사울이 죽었을 때 그의 마음이 어땠을까? 슬펐을 것이다. 그래서 그는 옷을 찢고 눈물 흘리며 그의 죽음을 애도하며 금식했던
것이다.
원수를 위해 슬퍼하며 눈물을 흘릴 수 있는 영혼은 자유로운 영혼이다. 사람의 반응 때문에 흔들리지 않는 견고한 영혼이다.
그의 앞 길은 아무도 막을 수 없다. 이어지는 사무엘하 2장에서 다윗은 드디어 유대의 왕이 된다. 그는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시간에
하나님의 마음을 배우며 자신을 준비시킨 것이다.
우리 역시 살면서 나를 괴롭히는 원수들을 만난다. 그럴 때 ‘복수는 나의 것’이 나의 삶의 목표가 되어선 안된다. 원수가
망하도록 저주하는 것도 나의 기도가 되어선 안된다. 하나님을 신뢰하며, 오히려 원수를 위해서는 눈물을 흘릴 수 있는 견고한
영혼으로 빚어지는 것, 그것이 우리의 삶이 되야 할 것이다.
사무엘하 1:17-18 다윗이 이 슬픈 노래로 사울과 그의 아들 요나단을 조상하고 명령하여 그것을 유다 족속에게 가르치라 하였으니 곧 활 노래라 야살의 책에 기록되었으되.
다윗은
슬픈 노래를 지어 자신과 함께한 공동체뿐만이 아니라 전체 유다 족속에게 그 노래를 가르치도록 명령한다. 다윗은 이 노래에서
사울과 요나단을 칭송한다. 두 용사의 죽음을 애도한다. 그들이 생전에 사랑스럽고 아름다운 자였음을 기념한다. 다윗은 그들을
잃어버린 것이 우리 모두의 상실임을 노래했다. 상실을 슬퍼하는 시간을 통해 해결되지 않았던 묵은 상처들이 치유된다. 다윗
개인적으로도 슬픔을 노래함으로 사울을 통해 고통받았던 시간들이 치유되는 경험을 하게 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공동체가 함께 왕을
잃은 슬픔을 공유하면서 이스라엘은 이제 서로를 격려하며 새로운 다윗 왕조를 향해 일어설 준비를 하게 되는 것이다.
슬픔은 숨겨야 하는 감정이 아니다. 눈물은 빨리 닦아야 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애통할 때 위로하시기 원하신다. 이
하나님의 마음을 따라 함께 애통하며 함께 슬퍼할 수 있는 우리 공동체가 되길 원한다. 우리 사회와 민족과 열방에 벌어지는 분쟁과
상실의 순간을 슬퍼하며 기도할 수 있는 우리가 되길 바란다. 모든 눈물을 닦아 주실 주님이 오시기까지 이 땅에서 하나님의 눈물이
있는 곳에서 우리가 함께 울 수 있는 우리 모두가 될 수 있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한다.
* 야살의 책
야살의 책'은 창세기부터 사사기 1장까지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으며 성경에 짧게 나오거나 성경에는 나오지 않는 사건들 사이의 이야기들을 기록했다.
특히 창세기의 내용은 성경보다 약 두 배 정도 더 많은 정보를 담고 있다.
랍비들이
야살의 책을 연구 자료로 활용했다는 증거도 있다.
'세데르 올람(Seder Olam)'은 히브리어 역사서로 기원후 169년경에
기록되었다. 이 책에 랍비 엘리에셀이 그의 연대기를 기록할 때 야살의 책을 사용했다는 내용이 여러 번 나온다. 이 책은 또한 그가
계산한 날짜와 절기가 가장 정확했는데 그것은 그가 야살의 책을 최고의 자료로 사용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이것은 야살의 책이
기원후 2세기에 이미 사용되고 있었고 잘 알려진 책이었다는 것을 말해준다.
'야살의 책'은 한글이나 영어 성경으로는 알 수 없는 성경 원문의 히브리적 개념을 설명하고 있다.
예를 들면 성경은 야곱이 '조용한 사람'이고 '장막에 거주한다'고 말한다.
그 아이들이 장성하매 에서는 익숙한 사냥꾼이었으므로 들사람이 되고 야곱은 조용한 사람이었으므로 장막에 거주하니. 창세기 25:27
이
두 가지 표현은 성경의 히브리적 개념을 말하는 것이지만 번역된 성경으로는 그 뜻을 알 수 없다. 여기서 '조용한'은 히브리어로
'톰'인데 '흠이 없는, 완전한'이라는 뜻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행하여 하나님이 보시기에 흠이 없고 완전한 자'를
의미한다(창 17:1, 욥 1:1).
우스 땅에 욥이라 불리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 사람은 온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더라. 욥기 1:1
또한 '장막에 거한다'는 것은 '장막 안에서 그의 부모나 조부모로부터 하나님의 말씀을 배운다'는 것을 의미한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부모가 집에서 자녀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도록 명령하셨기 때문이다(신 6:7).
네 자녀에게 부지런히 가르치며 집에 앉았을 때에든지 길을 갈 때에든지 누워 있을 때에든지 일어날 때에든지 이 말씀을 강론할 것이며. 신명기 6:7
야살의 책은 이 히브리적 개념을 정확하게 설명하고 있다.
야곱은 온전하고 지혜로운 자로 장막 안에 거하며 양 떼를 먹이고 주의 교훈과 그의 아버지와 어머니의 명령을 배웠다 야살의 책 26:17
이 외에도 이 책은 우리가 성경에서 읽지 못하고 놓치고 있는 중요한 히브리적 개념들을 담고 있다. 그러므로 말씀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이 책 안에서 하나님께서 성경을 통하여 이스라엘 백성과 우리에게 가르쳐 주시려는 중요한 가르침들을 발굴해 낼
수 있을 것이다.
신정국가(神政國家)에서 왕정국가(王政國家)를 원했던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한 하나님의 의도가 무엇인가를 계시하셨다.
성서조선은 1927년 7월 일본의 무교회주의자 우치무라 간조의 영향을 받은 김교신과 송두용유석동양인성 정상훈 함석헌 6명이
발행한 동인지 형태의 신앙잡지다.
1930년 5월호부터는 김교신이 발행인을 맡아 원고 집필과 편집, 인쇄, 발송사무와 수금까지
전담했다. 한국인이 쓴 성경 주석서가 없던 당시 김교신이 써 내려간 신구약 성서 개요와 성서연구 등은 목회자와 일반 성도들에게 큰
도움을 줬다. 김교신은 일제의 끝없는 검열 때문에 항상 매 호가 마지막 호가 될 수 있다는 생각으로 작업했다고 한다.
일제는 1942년 3월 1일자로 간행된 제158호의 권두언 ‘조와(弔蛙)’를 문제삼아 김교신은 물론 구독자들까지 일제히
검거했다. 김교신이 추위에 얼어 죽은 개구리들 사이에서 끝내 살아남은 두세 마리를 보고 “전멸은 면했나 보다”며 희망을 노래했다는
게 그 이유였다. 이로 인해 김교신 등 13명은 1년간 서대문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당시 일본 경찰은 이들에게
“너희들은 우리가 지금까지 잡은 조선놈들 가운데 가장 악질적인 부류”라며 “종교의 허울을 쓰고 조선민족의 정신을 깊이 심어서
100년 후에라도, 아니 500년 후에라도 독립이 될 수 있게 할 터전을 마련해두려는 고약한 놈들이다”고 퍼부었다고 한다.
독립운동의 방향을 주장하는 것은 사람마다 그 견해가 다르다.
예를 들면 이승만박사는 외교정책 강화 김구선생은 무력투쟁 조만식선생은 산업발전 도산 안창호선생은 민족교육을 통한 건강한 인격론 김교신선생은 신앙입국론 - 성서를 조선에, 조선을 성서 위에
1942년 3월호(통권 제158호)에 실렸던 권두언 "조와(弔蛙)"(얼어죽은 개구리를 애도한다)에서 일본의 억압으로 고통받는 조선을 개구리에 빗대었다. 조선통독부는 성서조선을 강제폐간하였다. 이때 그동안 발간된 성서조선의 전편을 압수 폐기하는 조치의 성서조선사건을 일으켜 전국의 《성서조선》독자 수십인이 검속되었으며, 김교신은 1년여의 옥고를 치루었다.
좌편향으로 기우러진 시대에 교회는 성경을 바르게 가르쳐야 하겠다. 성경을 바르게 가르치기 위한 목표를 성서 조선이란 슬로건에서 예수 한국 복음 통일 세계 선교 라고 하겠다.
♦ 2월 3일(목)
♦ 오늘 읽어야 할 말씀 : 사무엘상 31:1∼13 ♦ 묵상을 위한 주제 : 사울의 패전(3절) ♦ 성구 : 사울이 패전(敗戰)하매 활 쏘는 자(者)가 따라 미치니 사울이 그 활 쏘는 자(者)를 인(因)하여 중상(重傷)한지라.
“사울의 패전(Saul's defeat)”
오늘의 말씀은 사울 왕과 그의 아들이며 다윗의 친구이었던 요나단이 블레셋 전투에서 죽은 비극적인 이야기 입니다.
전쟁이 시작되기 전 사울은 신접한 여인을 찾아가서 하나님의 뜻을 알려고 하였으나 전쟁에 패배할 것이라는 나쁜 소식을 들었습니다.
사울은 타락한 왕이었지만 그의 아들 요나단은 정말 신실한 사람이었습니다.
요나단은 따뜻한 마음과 의리가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친구를 택할 것인가? 아버지를 택할 것인가? 고민을 많이 했던 사람이었습니다. 아버지가 친구를 죽이려고 쫓아다닐 때 얼마나 힘들었겠습니까? 그러면서도 한 나라의 왕자로서 직분을 성실하게 수행하다가 죽음을 맞이했습니다.
사무엘상을 마치면서 우리가 찾아야 할 교훈은 무엇일까요?
첫째는 교만하지 말라
하나님의 택함을 얻고 기름 부음을 받았다는 것으로 만족하지 말아야 합니다. 선택은 그만큼 책임이 크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사울은 처음부터 부족한 것이 없던 사람이었습니다. 다른 사람들보다 외모도 출중했으며 기름부음을 받고 모든 사람이 존경하여 왕이 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다윗에 대한 질투 때문에 무너지고 말았습니다.
하나님께 받은 은혜가 크면 클수록 더욱 겸손해야 합니다. 그래야만 그 은혜를 오래도록 유지할 수 있습니다.
둘째는 회개의 기회를 잃지 말라
누구나 잘못할 수 있습니다. 잘못했을 때 잘못을 깨닫고 회개할 수 있는 사람만이 은혜의 자리를 지킬 수 있습니다.
죄가 많은 곳에 은혜가 크다는 것은 죄를 많이 짓는 사람이 은혜를 많이 받는다는 것이 아닙니다. 죄를 크게 깨닫는 사람이 은혜를 크게 받는다는 교훈입니다.
사도 바울은 나는 죄인 중의 괴수라고 고백했습니다. 가장 죄를 많이 지은 괴물과 같은 존재라고 고백한 것입니다. 이와 같은 고백 때문에 위대한 사도로 쓰임받았습니다.
회개를 통해서 순종의 사람으로 돌아서게 합니다.
사울 왕은 여러 차례 회개할 기회가 있었지만 그때마다 느끼기만 하고 지나쳐버렸습니다.
그 결과 비참하게 블레셋과의 전투에서 스스로 자결하고 말았습니다.
회개할 수 있는 기회를 잃어버린 인생은 비참한 최후를 맞이할 수밖에 없습니다.
지금 이 시간 주님 앞에 엎드려 내게 회개할 수 있는 날을 허락하신 은혜에 감사하며 회개의 문을 열어보시기 바랍니다.
♪ 찬양 / 내 갈길 멀고 밤은 깊은데
예수 내 구주! 예수 내 생명! 예수 내 권세!
사무엘상 29장에서 다윗은 블레셋 방백들의 사울 왕과의 전투에 참여 할 수 없다는 반대에 부딪쳐 시글락으로 돌아오게 됩니다. 다윗과 그의 일행들이 시글락으로 돌아왔을 때 시글락은 아말렉에 의해서 불에 타버렸고 모든 여자들과 아이들을 포로가 되어 끌려 갔습니다.
다윗을 돌로 치려고 할 때 다윗은 하나님께 "아말렉을 추격해야 합니까?" 하고 묻습니다. 하나님은 다윗에게 아말렉을 추격하라고 합니다.
다윗과 그의 용사들 600명이 아말렉을 추격하던 중 애급인으로 아말렉으로부터 버림을 받은 소년병을 만나 그에게 먹을 것을 주고 아말렉의 위치를 알아내고 추격한 후 그들이 즐거이 잔치를 베풀고 즐기고 있을 때 습격하여 빼앗겼던 모든 것을 다시 찾은 후에 모드 전리품을 갖고 돌아옵니다.
전리품을 갖고 돌아왔을 때 끝까지 아말렉을 추격한 400명의 용사들은 전리품을 마지막까지 전투에 참여했던 사람들끼리 나누어 갖는 것이 옳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다윗은 전투에 참여한 사람들과 남아서 소유물을 지킨 사람들도 모두 같은 동족이며 전투에 승리하게 하신 것도 하나님이므로 서로 균등하게 나누는 것이 옳바른 방법이라고 깨우칩니다.
다윗의 이러한 분배 정신은 장차 이스라엘의 왕으로서 갖추어야 할 지도자의 덕목을 보여주는 한 사례라고 하겠습니다.
요한일서 4:7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으로부터 나서 하나님을 알고.
헬라어에는 사랑을 나타내는 네 단어가 있다. 1. 육체적인 사랑을 나타내는 에로스(eros) 2. 친구와의 사랑을 나타내는
필레오(phileo) 3. 혈통적인 사랑을 표시하는 스톨게(stolge) 4. 무조건적인 사랑을 나타내는 아가페(agape)
기독교의 사랑은 아가페의 사랑이다. 아가페의 사랑이란 타자본위의 순수한 사랑으로 자기 부정적이고 자기 희생적인
사랑이다(눅 6:32-34). 아가페의 사랑의 본은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이다. 따라서 기독교는 사랑의 종교라 일컬어진다.
기독교에 있어 사랑은 하나님의 속성이요(요 1:8), 가장 큰 계명이며(마 22:37-40), 율법의 완성이고(롬 13:10), 예수가
주신 새계명이며(요 13:34), 믿음이나 소망보다 우위에 있는 것이다(고전 13:13).
하나님에 대한 사랑은 그의 인격적 성격과
상관 관계가 있다. 따라서 하나님에 대한 사랑은 무엇보다도 먼저 그의 인격에 대한 사랑이고 그리고 나서 말씀이나 율법에 대한
사랑이다. 따라서 예수님은 하나님을 사랑하라, 이웃을 사랑하라,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남을 대접하라 등의 전인적인
헌신과 신뢰를 말씀하셨다(마 5:29-30, 6:24). 이는 하나님을 믿고, 사랑하는 마음이 없이는 불가능한 명령이다.
♦ 2월 2일(수)
♦ 오늘 읽어야 할 말씀 : 사무엘상 30:1∼30 ♦ 묵상을 위한 주제 : 분배의 원칙(24절) ♦ 성구 : 이 일에 누가 너희를 듣겠느냐 전장(戰場)에 내려갔던 자(者)의 분깃이나 소유물(所有物) 곁에 머물렀던 자(者)의 분깃이 일반일찌니 같이 분배(分配)할 것이니라.
“분배의 원칙(Principle of distribution. Principle of share)”
블레셋 왕 아기스가 이스라엘과의 전쟁을 준비하면서 사울을 피해 블레셋으로 망명한 다윗과 그의 사병 600명도 그 전쟁에
참전시켰습니다. 아기스 왕은 다윗에게 이번 전쟁에 참여함으로 위장 망명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라고 했습니다. 다윗은 잠시
사울의 추격을 따돌리려고 블레셋 진영을 선택했던 것입니다. 다윗이 얼마나 난처하고 당황스러웠겠습니까? 다윗은 어쩔 수 없이 전쟁에 나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블레셋의 다른 방백들이 다윗은 전쟁에 참전시킬 수 없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다윗이 전쟁 중에 배신할 수 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결국 아기스는 다윗에게 시글락으로 평안히 돌아가라고 합니다.
다윗이 시글락으로 돌아왔을 때 아말렉 군대가 시글락과 그 인근의 네겝을 초토화시켰습니다. 그들은 가족을 다 잃었으며 심지어 다윗의 두 아내들도
아말렉이 포로로 잡아갔습니다. 이런 상황에 이르자 다윗의 사병 가운데 질 나쁜 사람들이 그 책임을 다윗에게 물어 그를 죽이려고
합니다. 다윗은 다급하게 하나님께 묻습니다(8절).
“다윗이 여호와께 묻자와 이르되 내가 이 군대를 추격하면
따라잡겠나이까 하니 여호와께서 그에게 대답하시되 그를 쫓아가라 네가 반드시 따라잡고 도로 찾으리라.”
다윗은 문제가 닥쳐오면 먼저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응답을 받은 후에 아말렉을 쫓았습니다.
문제가 일어났을 때 대다수의 사람들은 그 문제를 일으킨 원인과 사람들이 누구인가를 찾아내려고 합니다. 그러나 먼저 문제의 해결을 위한 하나님의 방법을 구해야 할 것입니다. 이것이 다윗으로부터 본 받아야 할 신앙의 자세라고 하겠습니다.
다른 사람을 탓하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문제의 해결을 위하여 무릎을 꿇는 것은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은 아닙니다.
심한 풍랑이 일어났을 때 요나는 배 밑창에 내려가 깊은 잠에 빠졌습니다. 선장이 요나를 깨웠습니다.
세상이 풍랑처럼 흔들리는 것은 믿음의 사람을 깨우는 요란한 소리와 같습니다. 좌파들의 아우성이 들립니까? 사회가 이상한 방향으로 흘러가는 소리가 들립니까? 곳곳에서 비명과 통곡의 부르짖음이 들려오고 있습니까?
그 소리는 믿음의 사람을 깨우는 소리로 들려야 합니다.
구약 시대와 복음 시대에는 응답하는 방식이 다르다고 하겠습니다. 그러나 변함 없는 진실은 우리가 하나님께 물으면 하나님은
반드시 응답하신다는 것입니다. 비록 실패한 삶을 살았을지라도 하나님 앞에 나와 묻는다면 하나님은 길을 열어 주실 것입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응답을 듣고 아말렉을 뒤쫓아 갔습니다. 마침 뒤쫓다가 애굽 출신으로 아말렉 사람의 종이 되었지만 병들었다고 버림
받은 소년병을 만났습니다. 다윗은 그에게서 자세한 정보를 얻었습니다.
아말렉이 자신들의 승리에 도취하여 자축하고 있었을 때 다윗이 그들을
공격하여 아말렉의 가축까지도 다 전리품으로 얻었습니다. 전리품을 분배하려고 할 때 전쟁에 참여했던 용사들끼리만 나눌 것인가? 아니면 남아 있는 사람들에게도 전리품을 나눠줄 것인가? 엇갈린 의견으로 서로 논쟁할 때 다윗은 전쟁에 참여한 용사들과 용사들을 격려하고 승리하여 돌아오기를 기원하며 기다린 사람들과 함께 나누는 것이 더 큰 기쁨인 것을 가르칩니다.
전쟁에서 승리하게 하신 것도 하나님이 주신 것입니다. 전리품 또한 하나님이 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주신 것을 더 많은 사람들과 나누는 것은 더 큰 기쁨이 될 것입니다.
망명지에서조차 전리품을 아낌없이 베풀며 사는 다윗의 인품과 넉넉한 마음이 드러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사람에게 복을 베푸십니다. 그래서 은혜는 받는 것이 아니라 주는 것입니다.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되다고 하셨습니다.
난처한 상황에 처했지만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을 빼도 박도 못한다고 말하는데 사자성어로는 진퇴양난[進退兩難] 또는 진퇴유곡[進退維谷]이라고 한다.
진(進) : 나아갈 진 퇴(退) : 물러설 퇴 양(兩) : 두 량 난(難) : 어려울 난
앞에는 큰 호랑이가 있고 뒤에는 벼랑이 존재하니 진퇴양난이다.
출소하고 새롭게 시작 하고 싶지만 일을 구하기 어려워 진퇴양난이다.
인간의 욕심으로 인한 환경오염 때문에 이제는 진퇴양난에 처해있다.
손님이 없어서 매출은 없지만 가게를 열어야 하는 진퇴양난에 빠져있다.
아빠가 좋아? 엄마가 좋아? 어린아이들은 진퇴양난을 자주 겪는다.
엄마와 아내 누구 편을 들어야 할지 모르는 진퇴양난의 상황이 발생한다.
몰래 음식을 먹다 걸려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진퇴양난에 빠졌다.
대출을 대출로 막다 보니 돈을 갚지도 빌릴 수도 없는 진퇴양난에 처했다.
친구의 험담을 하다가 걸렸는데 더 해보라는 말에 진퇴양난에 빠졌다.
진퇴양난으로 물을 등지고 적과 맞서는 형태의 군진을 배수진이라 한다.
♦ 2월 1일(화)
♦ 오늘 읽어야 할 말씀 : 사무엘상 29:1∼11 ♦ 묵상을 위한 주제 : 아벡과 이스르엘(1절) ♦ 성구 : 블레셋 사람들은 그들의 모든 군대(軍隊)를 아벡에 모았고 이스라엘 사람들은 이스르엘에 있는 샘 곁에 진(陳) 쳤더라.
“아벡(Aphek. 강바닥)과 이스르엘(Jezree. 하나님이 뿌려주심)”
블레셋의 아기스 왕은 다윗이 완전히 블레셋을 위한 용사가 되었다고 믿고 있었습니다. 선지자 사무엘이 죽은 후에 블레셋은 이스라엘을 참략하려고 “아벡”에 진을 쳤고, 사울의 군대는 “이스르엘”에 진을 쳤습니다.
블레셋 방백들은 아기스 왕에게 다윗과 함께 싸움에 임할 수 없다고 합니다. 그러자 아기스 왕은 다윗이 여러 해 동안 망명하여 온 날부터 지금까지 그에게서 허물을 볼 수 없었다고 변명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블레셋 방백들의 완강한 반대로 인하여 다윗은 아벡의 진에서 떠나 시글락으로 돌아올 수 있었습니다.
다윗은 사울 왕의 다음에 왕위에 오를 기름부음을 받은 후계자가 되었지만 유다 땅에 머물지 못하고 블레셋 가드 왕 아기스의 도움을 받아 지내고 있었습니다.
이스라엘과 블레셋은 천적과 같은 원수지간입니다. 다윗과 같은 용사가 블레셋으로 도피하여 지내면서 아말렉을 공격하였으나 다윗은 아기스 왕에게 남유다 지역을 공격하였다고 거짓으로 보고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다윗의 거짓 보고를 믿었던 아기스 왕은 이스라엘을 공격하려고 블레셋 군사들을 집결시켰습니다. 마지못하여 전쟁에 참여했던 다윗은 블레셋 방백들의 반대에 의해서 전투에 참여하지 못하고 시글락으로 돌아오게 된 것입니다.
성도들이 이 세상에서 살아가는 것은 치열한 영적 전쟁을 치루는 것과 같습니다. 왜냐하면 성경의 가르침과 세상의 이치가 전혀 다르기 때문입니다. 성경의 가르침대로 살려면 수도 없이 많은 갈등을 경험하게 됩니다. 그래서 날마다 고민하며 실패하기도 하고 다시 일어나기도 합니다.
세상은 끊임없이 화려하고 자극적인 것으로 주님 안에서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을 유혹하고, 공격하고, 타협하도록 유도합니다. 잠간 눈만 감으면 몸도 마음도 편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방법이 옳은 길이 아니기 때문에 고민하게 됩니다.
이와 같은 세상에서 끝까지 진리편에 설 수 있는 비결은 무엇일까요?
첫째는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기도하는 것입니다(마 26:41).
기도하는 사람은 시험이 닥쳐와도 능히 이길 수 있습니다.
둘째는 근신하는 것입니다(벧전 5:8)
근신하는 것은 정신을 차리고 경계하는 것을 말합니다.
문제는 기도하는 것과 근신하는 것이 현대생활에 어울리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오늘의 시대는 영적 싸움에 대한 중요성과 필요성을 강조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눈으로 볼 수 없는 영적인 것보다는 당장 즐길 수 있는 말초신경을 자극하여 삶의 기쁨을 찾도록 유혹하는 어둠의 시대요 암흑의 시대이기 때문입니다.
깨어 기도하며 근신하려면 말씀으로 무장해야 합니다. 말씀의 하나님은 말씀을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며 말씀의 사람을 세상 끝날까지 보호하시고 지켜주시기 때문입니다.
“오직 성경으로(sola scriptura)”라는 종교개혁자의 외침처럼 철저하게 말씀으로 돌아가 말씀에 충성하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육체의 건강을 위하여 하루 세 끼 식사를 하는 것처럼 영혼의 건강을 위하여 영의 양식을 규칙적으로 읽고 듣고 묵상하며 기도할 때 약속하신 은혜를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특별히 3월 9일 대한민국 제20대 대통령 선거를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이번 대통령 선거는 누가 대통령이 되느냐 하는 문제가 아니라 대한민국 헌법을 지킬 수 있느냐 하는 체재의 문제이기에 매우 중요하다고 하겠습니다.
진리를 따라 살아가려면 세상은 법을 잘 지켜야 합니다. 법을 무시하는 세상에서는 진리가 바르게 세워질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누가 법을 준수하고 진리를 사랑하는 사람인가를 분별하여 옳바른 지도자를 세워야 하겠습니다.
우리들이 유라굴로와 같은 광풍 속에 있을지라도 우리를 구원하시고, 우리를 통해 일하시며, 우리를 아름다운 소망의 항구에 이르게 하시는 진리의 하나님을 따라갈 때 말씀이 가져오는 큰 능력과 깊은 비밀을 깨닫는 축복이 임하게 될 것입니다.
대표적인 예로 "내로남불"이란 사자성어에서 찾는다. 내가 하는 것은 로맨스, 다른 사람이 하는 것은 불륜이라고 한다. 이러한 사고가 오늘의 시대를 살아가는 현대인들이 갖는 사고방식의 특징이다.
어느 가톨릭 신자가 개인 사업을 운영하면서 야간에 일을 맡아야 할 사람을 찾는 중에 여러 명의 지원자들을 만났다. 나이도 젊고 영어도 유창하게 하며 더구너 운영하는 동일한 사업체에서 일을 했던 경험을 갖고 있었다. 그런데 이주한지 한 달도 안 되었고 나이도 제일 많고 영어도 할 줄 모르는 사람을 고용하는 것이었다. 왜 그 사람을 고용하느냐? 라고 물었더니 이 사람은 당장 일자리를 얻지 못하면 내일이 염려되는 사람이기 때문이라고 대답하였다.
이러한 정신을 가졌던 고용주는 가톨릭 교회에서 신앙을 철저하게 훈련받은 일군이었다.
둘째는 복(福)
AD. 90년경 두아디라교회의 이세벨선지자는 그리스도인들은
우상숭배해도 상관없다고 가르쳤다. 수많은 사람들이 그녀의 가르침에 미혹되었고 그녀의 가르침에 따라 우상을 숭배하고 우상의 제물까지
먹게 되었다. 왜냐하면 그렇게 하지 않으면 그리스도인들이 당시 이방인들과 상업활동을 펼칠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과연 그녀의
가르침은 바른 것이었을까? 오늘을 살고 있는 그리스도인들도 이세벨의 가르침처럼 우상의 제물을 먹거나 우상을 숭배해도 진짜
상관없다는 가르침이 맞는 것일까?
우상과 우상숭배란 무엇인가?
우상숭배란 사람이 복을 받기 위해 어떤 유형 무형의 대상을 숭배하는 행위를 가리킨다.
그러한 행위들에는 우상에게 절을 하거나(렘 1:16, 겔 8:16), 우상에게 자식을 제물로 바치거나(렘 32:33), 우상에게
분향하거나(대하 28:25, 렘 7:8, 44:5, 8,17), 술과 음식을 바치는 행위들(렘 7:9, 44:17~18)
더불어
우상에게 바쳐진 제물을 먹는 것도 동일한 우상숭배에 해당한다(고전 10:18~19).
우상이란 어떤 것을 가리키는 것일까? 성경에서 우상은 크게 세 가지로 나타난다.
첫째, 보이는 물건이나 물체
이런 것들에는 해와 달과 별들이 있으며(신 4:19), 사람이
부어만들거나 조각해서 만든 것들이 있다(신 4:16, 출 32:8)
둘째, 보이지 않는 것
사람들에 의해 신이라 불리움을
받지만 사실은 타락한 천사들인 영물들이 있다(시 82:1, 6, 86:8, 89:5~7).
셋째, 추상적인 것
사람들의 끝없는
탐욕과 탐심도 일종의 우상에 해당한다(골 3:5). 그런데 사람이 부어만들거나 조각해 만든 것들이 사람에게
신적인 대상이 되고 있다는 것은 참으로 우습기만하다. 자기가 만들어놓은 것고는 그것을 신이라고 절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오늘날에 기독교인들에 있어서 우상은 무엇일까?
우상을 숭배하면 어떻게 되는가?
하나님의 진노와 격노를 불러일으킨다(삿 2:12, 시 106:28~29, 고전 10:22).
하나님의 진노는 크게 두 가지로 나타난다. 하나는 살아생전에 나타나고 다른 하나는 죽은 다음에 나타난다.
우상을 숭배하면 살아생전에 자기와 자기의 후손에게 재앙과 저주를 받게 된다(삿 2:11~15, 시 106:28~29). 자손 3~4대까지 말이다(출 20:5). 그렇다면 대체로 어떤 재앙과 저주를 받게 되는 것일까?
첫째, 질병(계 2:22)
본인이 침상에 던져지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이 되었어도 중한 질병에 시달린다거나 지속적이거나 반복적인 질병이 있는 자는 반드시 자신에게 끊지 못한
우상숭배행위가 있는지 살펴보아야 한다. 아니 없다면 자기의 3~4대 조상대에 있었는지 확인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있다면 즉시
그것을 끊어버려야 한다.
둘째, 자기와 함께 하는 자들에게 나타나는 환난과 고통(계 2:22)
셋째, 자기의 자식들이 죽게 되는 재앙이다(계 2:23)
급작스런 교통사고나 자살 같은 경우가 여기에 해당한다. 하지만 우상을 숭배하는 자가 받는 재앙과 저주는 이런 것으로 끝을 맺는 것은 아니다.
우상숭배자는 아무리 수고해도 수고한 것의 댓가를 얻지를 못하게 되며(신 11:16~17), 기도해도 응답을 받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렘7:16~18, 겔 8:16~18).
그러므로 기도해도 응답이 없는 사람은 자신이 믿음이 없거나 기도가
부족해서 기도응답을 못받는 것이 아니라, 자기와 자기의 조상들이 행하고 있는 우상숭배행위 때문인지 살펴보아야 한다
우상숭배자는 죽어서 그 죄값을 받는다.
죽은 다음에 그의 영혼이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하는 것이다. 이것은 곧 그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한다는 것을 의미한다(고전 6:9, 엡 5:5, 갈 5:19~21).
죽은 다음에 그의 영혼이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 곧 불못인 지옥에 던져져 영원히 고통을 받는 것이다(계 21:8, 14:9~11)
우상숭배의 죄값은 영혼도 지불해야 하는 것이다.
우상숭배행위가 믿는 자에게는 용서되고 믿지 않는 자에게는 용서되지 않는다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사도바울은 우상숭배자는 믿는
자나 믿지 않는 자 예외없이, 그리고 이 세상과 저 세상에서 합당한 벌을 받는다고 경고하고 있다.
사도바울은 "그런즉 내 사랑하는 자들아 우상숭배하는 일을 피하라(고전 10:14)"고 강력히 촉구했으며, 사도요한도 "자녀들아 너희 자신을 지켜 우상에게서 멀리하라."(요일 5:21)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이 행하고 있는 우상숭배행위에는 어떤 것이 있을까?
그리스도인들의 우상숭배행위는 두 가지라고 하겠다.
하나, 자신이 지금 행하고 있는 것이 우상숭배행위인지도 모른 채 행하고 있는 우상숭배행위 둘, 끝없이 치고 올라오는 육신의 탐욕을 제어하지 못하는 우상숭배행위(골 3:5).
그리스도인들 중에는 모르고 있지만 우상숭배를 하고 있는 이들이 적지 않다. 그것의 하나가 바로 추도예배(기일에 드리는 예배) 장례예배(임종예배, 입관예배, 발인예배, 하관예배)
그리스도인들 중에는 추도예배와 장례예배를 다 하나님께
드리는데, 어쩌 이러한 예배가 우상숭배에 해당하느냐고 반문할 것이다
고린도전서 10:20 무릇 이방인들이 죽은 시체를 놓고 혹은 이미 죽은 자를 생각하면서 제사드리는 것은 전부다 귀신에게 하는 것.
그러나 이방인들은 자신은 지금 자신의 죽은 조상들에게 제사드리고 있는 것이라고 주장할 것이다. 하지만 아니다. 왜냐하면 사람이 죽으면 죽는 죽시 영혼이 육체에서 분리되어 천국이나 지옥으로 가버리고 없기 때문이다. 영혼이 빠져나간 사람의 육체를 우리는 시체라고 부른다.
시체는 사람 영혼의 감옥이자 집인 것이다. 그런데 영혼이 빠져나간 시체는 흙덩이에 불과하다. 그렇지만 영혼이 빠져버린 흙덩이는 타락이후 이미 마귀의 소유가 되어버렸다.
왜냐하면 아담이 선악과를 따먹고 난 후에 하나님은 뱀에게 흙을 먹고 살라고 명했다(창 3:14). 그런데 그 흙이라는 단어가 곧
사람의 몸을 빚었던 흙과 동일한 단어다(창 2:7). 그렇지만 사람이 살아 있을 때에는 사탄도 사람을 온전히 차지할 수는 없다. 그
사람 안에 영혼이 들어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사람이 죽는 순간 그 영혼이 그 사람에게서 빠져나간다. 그러면 즉시 사람의 시체는
100% 마귀의 소유가 되어버린다. 그래서 마 12:43 이하에 보면, 더러운 귀신이 사람에게서 나갔다가 다시 들어오려 할 때 그가
무슨 말을 했는지 아닌가? "내가 나온 내 집으로 돌아가리라(마 12:33)"라고 말했다.
사람의 몸은 귀신에게 있어서 자신의 집이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모세가 죽었을 때, 하나님께서는 미가엘 천사장을 시켜 모세의 시체를 숨겨버리게 한다. 왜 그랬을까? 모세의
시체는 이제 하나님의 것이 아니라 그가 죽음을 맞이하는 순간 공식적으로 마귀의 소유가 되어버리기 때문이다. 그렇게 되면 그 시체를
놓고 사람들이 떠받들거나 예배의 행위를 하게 되면 그것이 우상숭배행위가 될 것이었기 때문이다.
영혼이 빠져나간 사람은 시체만 남는데, 이 시체의 소유자는 이제 마귀가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망이 임한 사람의 시체는 부정한 것이 된다(민 19:11,16). 부정하다는 말은 깨끗하지 않다는 말이다. 곧 더럽다는 말이다. 그렇다. 마귀의 소유가 되어버리는 시체는 더럽다. 그런데 그 시체를 교회 안에까지 가져다놓고 예배를 드리면 되겠는가? 오늘날 교회장이나 노회장, 총회장 장례식 때에는 시체를 예배당 안에까지 가지고 들어와 예배를 드린다. 거룩한 하나님 앞에 더러운 시체를 갔다 놓고 예배를 드리는 것이다. 그러므로 아무리 찬양을 멋있게 부르고 거룩하게 기도를 드리고, 은혜스러운 설교를 해도 그 예배는 하나님이 받지 아니하신다. 시체를 붙잡고 있는 귀신들이 다 받아버리기 때문이다
구약시대에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시체에 접촉하는 것에 주의하라고 했다.
만약 부득이하게 접촉한 경우에는 반드시 정결례를 행하여 부정을 씻어내고 했다. 그렇지 아니하면 여호와의 회중에서 끊어질
것이라고까지 경고했다. 왜냐하면 시체로 인하여 여호와의 성막이 더럽혀질 수 있고, 다른 하나님의 백성들이 더럽혀질 수 있었기
때문이다(민 19,1 3, 20, 레21:11, 22:8, 겔 43:7~9).
추도예배와 장례예배가 우상숭배행위인가?
추도예배와 장례예배는 명백한 우상숭배행위다. 추도예배란 죽은 고인을 추억하며 고인이 죽은 날에 가족이
함께 모여 드리는 예배를 가리킨다. 하지만 그것은 하나님 때문에 예배를 드리는 것이 아니라 죽은 고인 때문에 만나서 예배를
드리는 것이므로 하나님이 받으시는 예배가 될 수 없다. 뿐만 아니라 장례예배는 죽은 시체를 놓고 예배를 드리는 것이기 때문에 100% 하나님이 받으시는 예배가 안 된다. 사망이 임하여 더러운 귀신들이 우글거리는 시체를 놓고 예배를 드리게 되면, 그 예배를 하나님께 드렸다고 하더라도 하나님께서 받으시는 예배가 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죽은 시체를 붙잡고 있는 귀신에게 드리는 예배(고전 10:20)가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사람이 죽었을 때에 예수님께서는 어떻게 하라고 지시했는가? 그것은 마 8:22에 나와 있다. "(영이) 죽은 자들로 (육체가) 죽은 자들을 장사하게 하고 너는 나를 따르라"
시체는 이미 사망이 임한 부정한 것이 되고 말았다. 그 시체는 귀신의 것이 되고 말았다. 그러므로 빨리 땅 속에 묻어서 그것과 접촉하지 않도록 해야 한다. 그러므로 유대인들은 지금도 사람이 죽으면 당일날에 시체를 장사지내버린다. 오래 놔둘수록 부정에 접촉할 확률이 높아지기 때문이다.
초대교회를 보라. 과연 사람이 죽었을 때 장례예배를 드렸는지 말이다. 스데반이
죽었을 때에도, 야고보 사도가 죽었을 때에도, 세례요한이 죽었을 때에도 장례예배같은 것 안 드렸다.
행 5장의 아나니와 삽비라가
죽었을 때에도 마찬가지였다. 행 15장에 보면, 이방인들 중에서 주께 돌아온 자들에게 주의시킬 4 가지를 결의하는 대목이 나오는데,
거기에 보면 피와 목메어 죽인 것과 음행과 우상의 제물을 멀리하라고 하고 있다.
우상의 제물을 먹는 것도 우상숭배행위에 해당하기 때문에, 죽은 자들에 대한 어떤 예배도 드리지 말 것은 언급하고 있는 것이다(행15:28~29, 21:25).
예수께서는 요한계시록에 등장하는 일곱교회에게 당신이 부활하신 지 벌써 60년이 지난 싯점에 무엇에 주의하라고
명하고 있는가? 그것은 발람의 교훈(가르침)과 니골라당의 교훈(가르침)과 이세벨의 교훈(가르침)이다(계2:14~16, 20).
그런데 이 3가지 교훈의 공통사항은 무엇인지 아는가? 그것은 이미 그리스도인이 된 자는 우상의 제물을 먹어도 상관없다는
가르침이다. 속지 말라. 우상의 제물을 먹어도 좋다는 가르침은 믿는 자들은 우상을 숭배해도 상관없다는
연장선상에 있는 것이다. 그렇지 않다. 믿는 자라도 우상을 숭배하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고,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이 기다리고 있을 뿐이다.
추도예배, 장례예배는 명백한 우상숭배행위다
그
예배가 죽은 자 때문에 그리고 죽은 시체를 놓고 예배하기 때문이다. 사실 우리나라에 복음을 전해주었던 선교사들은 추도식이나
장례식을 우상숭배행위로 규정했다. 하지만 핍박을 모면해보기 위해 한국 그리스도인들이 만들어낸 것이 바로 추도예배요 장례예배다.
특히 추도예배는 정동감리교회 이무영씨가 자기 어머니의 기일을 맞아 제사 대신 고안해낸 것이다.
1934년에는 감리교가
정식적으로 이 일을 허락했으며, 1950년대말에는 성결교와 구세군이 정식으로 허락했고, 1970년대 말에 가서는 장로교도
정식으로 인정하여 예배모범 안으로 들어가게 되었다.
결론
오늘날에
그리스도인들은 두 가지 방식으로 우상숭배를 하고 있다.
첫째는 추도예배와 장례에배와 같은 것으로 죽은 자를 위한 예배와 죽은
시체를 놓고 드리는 예배를 드리고 있는데 이것이 바로 우상숭배행위다.
둘째는 끓어오르는 육신의 탐욕을 따라가는 것이다.
지위에 대한 탐심, 돈과 성공에 대한 탐심, 이성에 대한 탐심이 지금 도를 넘어가고 있다. 큰
일이다. 이것 회개 안하면 그 댓가를 자기와 자기의 3~4대 후손까지 받게 될 것이고, 죽어서는 자기도 불못에 떨어질텐데
말이다. 이제는 우상숭배로부터 자기를 지키고 우상숭배를 멀리하자. 함부로 절하지 말고, 꽃도 바치지 말자. 예배라고 해서 다
예배가 아니다. 죽은 자나 죽은 시체를 놓고 예배해서는 아니 된다. 그래서 우상숭배 때문에 자기와 후손까지 고통에 처하게 하지
말라. 우리가 알게 된 이후로는 모든 저주와 재앙을 끝내야 하지 않겠는가! 건투를 빈다.
♦ 1월 31일(월)
♦ 오늘 읽어야 할 말씀 : 사무엘상 28:1∼25 ♦ 묵상을 위한 주제 : 신접한 여인(7절) ♦ 성구 : 사울이 그 신하(臣下)들에게 이르되 나를 위(爲)하여 신접(神接)한 여인(女人)을 찾으라 내가 그리로 가서 그에게 물으리라 그 신하(臣下) 그에게 이르되 보소서 엔돌에 신접(神接)한 여인(女人)이 있나이다.
“신접한 여인(a woman who is a medium)” 사무엘이 죽은 후에 사울 왕은 신접한 자와 박수를 모두 쫓아냈습니다(3절). 수넴에 진을 친 블레셋 군대와 길보아에 진을 쳤던 사울 왕의 군대가 서로 대치하고 있었을 때 사울은 블레셋의 군대를 보고 두려워서 크게 떨고 있었습니다. 사울 왕은 답답한 마음에 신접한 여인을 찾으라고 명령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계시를 받을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사무엘상 28장은 다윗과 사울 왕에게 심각한 위기가 닥쳐왔다는 것을 암시합니다. 다윗은 블레셋으로 도피하여 아기스 왕의 도움을 받고 있었기 때문에 이스라엘과의 싸움에 참여해야 하는 난처한 상황에 처했습니다.
사울 왕은 블레셋의 침입으로 왕권이 흔들리는 위험에 직면하였으므로 답답한 마음에 신접한 여인으로부터 무엇인가 해결책을 얻고자 하는 신앙적인 위기를 맞게 된 것입니다.
다윗은 블레셋 방백들에 의해서 전투에 참여할 수 없다는 반대 의견에 따라 이스라엘과의 싸움에서 벗어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사울 왕은 블레셋과의 전투에서 패배하므로 위기가운데서 파멸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신앙생활을 하면서 다윗과 사울처럼 어떤 위기를 경험하게 됩니다. 위기를 맞이할 때에 회개하면 위기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사울은 영적 멘토 사무엘 선지자가 없었기 때문에 신접한 여인을 찾았기 때문에 실패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신앙생활을 위한 영적 멘토를 찾아야 합니다. 그리고 신앙의 위기가 다가왔을 때 그 멘토로부터 진리의 길을 찾아 확인하므로 다윗과 같이 위기 가운데서 승리할 수 있는 길을 찾아야 합니다.
사울은 끝까지 교만하여 회개하지 않았으나 다윗은 회개하고 하나님을 의지한 결과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회개조차도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만 가능하다는 점에서 볼 때 다윗의 구원은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의 결과였습니다.
하나님께 버림받은 사울은 하나님의 뜻을 분별할 수 있는 능력을 상실하게 되었습니다. 사울은 하나님과의 대화가 끊어지므로 악신에 들려 괴롭힘을 당하고 항상 두려움에 떨게 되었습니다.
레위기 19:31 “너희는 신접한 자와 박수를 믿지 말며 그들을 추종하여 스스로 더럽히지 말라 나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니라.”
요즈음 재미있는 책 세권을 구입했다. 첫 번째의 책은 정신치료 전문가 쓴 “감사의 힘”이라는 책이다. 감사는 마치 전기와 같다.
전기는 단순히 어둠을 물리치는 데만 이용되는 것이 아니라 여러 용도에서 힘의 원동력이 될 수 있다. 감사도 마찬가지다. 감사한
마음, 감사한 생각이 막강한 에너지가 된다. 힘의 원천이 된다.
두 번째의 책은 하바드의과대학 교수가 쓴 “희망의 힘”이라는 책이다. 이 의사는 많은 환자들을 치료하면서 얻은 결과를 책으로
썼다. 병이 회복될 거라 스스로 믿는 환자들에게 실제로 기적적인 치유가 일어나는 것을 우리는 종종 보게 된다. 희망이라는 감정,
희망의 생각이 갖는 치유력의 진정한 의미와 효능을 알게 된다.
세 번째의 책은 조엘 오스틴 목사님이 쓴 책인데 미국에서 급부상하고 있는 교회의 젊은 담임목사이다. 40대 초반의 젊은 목사이다.
“긍정의 힘”이라는 책이다. 긍정적인 생각과 긍정적인 관점이 인생을 어떻게 변화시키는 가에 대해서 다루고 있다. 베스트셀러 중에
하나이다.
감사의 힘, 희망의 힘, 긍정의 힘. 이 세 권의 공통점이 있다면 책 제목에 힘이라는 단어가 들어가 있고, 우리의 생각과 연관된
말이다. 감사하는 마음, 감사한 생각. 희망을 갖는 마음, 희망의 생각. 긍정하는 마음 긍정적인 생각. 감사하는 마음이 전기와
같이 단순히 불을 밝혀줄 뿐만 아니라 에너지의 원천이 된다. 이것은 희망도 마찬가지이고, 긍정적인 생각도 마찬가지이다.
이같이 생각이 얼마나 중요한지 모른다. 모든 일의 시작은 작은 생각에서부터 시작한다. 아담과 하와가 에덴동산에 있을 때에 뱀이
유혹한다.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져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 이 선악과를
먹으면 하나님과 같아진다는 생각이 결국에는 선악과를 따 먹게 되었고, 그 결과 에덴동산에서부터 쫓겨나는 아픔을 경험하게 된다.
예레미야를 통해서 말씀하신다. “땅이여 들으라. 내가 이 백성에게 재앙을 내리리니 이것이 그들의 생각의 결과라.” 이스라엘 백성이
망하게 되었다. 그 이유가 무엇인가? “그들의 생각의 결과라”고 분명히 말씀하셨다. 가룟 유다가 예수님을 팔아넘긴다. 이렇게
엄청난 일이 벌어졌는데 그 시작이 가룟 유다의 생각에서부터 시작된다.
우리가 성공적인 삶, 승리의 삶, 축복된 삶을 살려면 먼저 생각의 축복부터 받아야 한다. 왜냐면 생각은 운명의 씨앗이기 때문이다.
생각은 행동을 낳고, 행동은 습관을 낳고, 습관은 인격을 낳고, 인격은 결국 운명을 낳는다. 사람의 운명이 어떻게 결정되는가?
작은 생각에서부터 시작된다. 생각은 운명의 씨앗이다. 교만의 씨앗을 심어 놓았기에 선악과를 따 먹고 결국에는 에덴동산에서 쫓겨나게
되었다. 탕자가 아버지의 품으로 돌아가게 된 것도, 아버지에게로 돌아가면 내가 쉴 방이 있고, 아버지에게로 돌아가면 먹을 음식이
있는데 왜 내가 여기에서 주려 죽는가? 생각의 씨앗 때문에 아버지의 곁을 떠날 수도 있고, 아버지에게로 돌아올 수도 있다.
사랑하는 성도여! 생각의 축복을 받기 바란다. 본문의 말씀을 보라. 육신의 생각과 영의 생각이 있음을 가르쳐 준다. 우리 속에
있는 육신의 생각은 악한 생각, 살인, 간음, 음란, 도둑질 거짓 증언과 남을 미워하는 생각. 이러한 육신의 생각이 있다. 그러나
영의 생각은 사랑 희락 회평 오래 참음, 자비와 양선과 충성 온유와 절제이다.
우리의 마음에는 천사와 같은 생각도 있고 악마와 같은 생각도 있다. 살인자로 사형을 당하는 사람에게도 천사와 같은 생각이 있고,
성자로 인정받은 사람에게도 악마와 같은 생각이 있다. 우리 속에는 두 가지 종류의 생각이 있다. 즉 육신의 생각과 영의 생각이다.
바울은 솔찍하게 고백한다. “그러므로 내가 한 법을 깨달았노니 곧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이로다. 내
속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으로 나를
사로잡는 것을 보는도다.” 내 속에 두 마음이 있음을 바울이 고백한다. 이 마음은 곧 우리 모두의 같은 마음이다.
육신의 생각과 영의 생각에는 분명한 차이가 있다.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라. 육신의 생각과 영의 생각은
마치 버섯과도 같다. 중고등학교에서 배울 때에 먹어도 되는 버섯과 독버섯의 차이점을 배웠다. 대체로 독버섯은 보기에 예쁘게
생겼다. 아름답게 생겼다. 먹음직스럽게 생겼다. 그러나 그 독버섯을 먹으면 죽는다. 먹어도 되는 버섯은 화려하지 않다. 아름답게
생기지도 않다. 그냥 그렇게 생겼다. 그것은 먹어도 된다.
대개 육신의 생각은 우리를 유혹하는 마력이 있다. 우리를 끌어 당기는 힘이 있다. 라스베가스에 가보라. 그렇게 화려할 수가 없다.
정말로 별난 세상이다. 멋진 조명으로 사람들을 끌어 당긴다. 그러나 투기하는 노름에 인생을 망친 사람이 얼마나 많은지 모른다.
예수님께서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말씀하셨다.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자가 적음이라. 육신의 생각은 찾는 자가 많다. 문도 크다. 그러나 육신의 생각은 그 결과
죽음이다. 영의 생각은 문도 좁다. 힘이 든다. 사람들이 찾으려 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 결과는 생명과 평안이다. 다음 말씀에
보면,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육신에 있는 자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느니라.”
이같이 육의 생각은 죽음을 가져다 주고, 하나님과 원수가 되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릴 수 없다. 사람들끼리는 자기의 생각을 감출 수 있다. 그리고 서로의 생각을 모를 때가 얼마나 많은지 모른다.
한 농부가 산속에서 거대한 곰을 만났다. 그는 공포에 질려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고 말았다. 그리고 간절히 기도를 올렸다.
“하나님,이 곰의 마음을 순하게 변화시켜 주세요” 농부가 한참 기도를 하고 눈을 떴다. 그런데 곰도 마주앉아서 기도를 하고
있었다. 농부는 자신의 기도가 응답된 것에 크게 감동을 받았다. “이렇게 빨리 기도응답을 하시다니….내 기도가 곰의 마음을
감동시켰구나.” 그때 곰이 기도를 마치고 농부를 그윽한 표정으로 바라보며 말했다.“네가 지금 무슨 기도를 했는지 전혀 모른다.
나는 다만 음식을 앞에 놓고 식사기도를 했을 뿐이다.” 농부는 곰의 속마음을 전혀 모르고 있었다. 사람들은 가끔 모두가 자신과
똑같은 마음을 갖고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같이 우리는 서로의 생각을 모르고 살 때가 많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신다. “예수께서 그 생각을 아시고 이르시되 너희가 어찌하여 마음에 악한 생각을 하느냐?” 주님은 우리의 생각을 알고
계신다.
우리는 어떤가? 영의 생각을 할 때보다는 육신의 생각을 할 때가 훨씬 더 많다. 하나님과 원수되는 생각을 할 때가 훨씬 더 많을
것이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리지 못하는 생각을 할 때가 훨씬 더 많다. 내 자신의 육신의 생각 때문에 후회하고, 후회하고,
이제는 똑같은 죄를 범하지 않으리라 생각하면서도 후회하고, 후회하면서 시간은 자꾸 흘러간다.
내가 스스로 결심한다고 육신의 생각에서부터 영의 생각으로 바뀔 수 있는가? 그렇지 못하다. 본문은 우리에게 분명히 말씀하고 있다.
“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 이 말씀이 얼마나 소중한 말씀인가? 내가 결심한다고 육의 생각을 죽이고 영의 생각을 할 수 있다? 천만에
말씀이다.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셔야 육의 생각을 제어할 수 있다.”
사랑하는 성도여! 이 시대에 하나님을 믿고 사는 일이 얼마나 힘이든가? 경쟁에서 이기기 위해서 때로는 사람을 속이고 싶은 마음이 들
때도 있을 것이다. 세상이 주는 다양한 유혹 때문에 우리의 생각이 흔들릴 때도 많이 있을 것이다. 나의 의지로 내 영의 생각을 할
수 있는가? 어림도 없는 말이다. 바울이 이렇게 고백한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바울은 목숨걸고 예수를 전한 사람이다. 순교한 사람이다. 예수에 완전히 미쳐서 살던 바울도 “누가 나를 사망의 몸에서
건져낼 수 있으랴?” 그렇다면 우리 같은 사람은 어떻겠는가? 내가 결심한다고 육신의 생각에서 영의 생각으로 바꿀 수 있겠는가?
잠깐은 될지 몰라도 나도 모르게 육신의 생각으로 치우치게 된다.
바울은 우리에게 분명히 말씀하신다. “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느니라.” 여기에
중요한 기도의 제목이 있다. “내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옵소서.” “내 속에 그리스도의 영이 거하시옵소서.” “내 속에
성령님이 거하시옵소서.” 본문의 말씀은 이렇게 이어진다.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의 영이 너희 안에 거하시면 그리스도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가 너희 안에 거하시는 그의 영으로 말미암아 너희 죽을 몸도 살리시리라.”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지만, 주의 영이 내 속에 임하셔서 영의 생각을 하면 생명과 평안을 우리에게 주신다. 얼마나 감사한가? 얼마나 감격적인 말씀인가?
한 늙은 인디언 추장이 자기 손자에게 자신의 내면에 일어나고 있는 ‘큰 싸움’에 관하여 이야기하고 있었다. 이 싸움은 또한 나이
어린 손자의 마음속에도 일어나고 있다고 하였다. 추장은 궁금해 하는 손자에게 설명했다.
“얘야, 우리 모두의 속에서 이 싸움이
일어나고 있단다. 두 늑대간의 싸움이란다.” “한 마리는 악한 늑대로서 그 놈이 가진 것은 화, 질투. 슬픔, 후회, 탐욕,
거만, 자기 동정, 죄의식, 회한, 열등감, 거짓, 자만심, 우월감, 그리고 이기심이란다. 다른 한 마리는 좋은 늑대인데 그가
가진 것들은 기쁨, 평안,. 사랑, 소망, 인내심, 평온함, 겸손, 친절, 동정심, 아량, 진실, 그리고 믿음이란다.” 손자가
추장 할아버지에게 물었다. “어떤 늑대가 이기나요?” 추장은 간단하게 대답했다. “네가 먹이를 주는 놈이 이기지.”
우리 속에 육신의 생각과 영의 생각이 날마다 내 속에서 싸움이 일어난다. 내 스스로 해결할 수 있는가? 그렇지 못하다.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우리는 영의 생각을 유지할 수 있다.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기에 합당한 환경을 만들자. 왜 우리가 기도해야
하는가? 왜 우리가 말씀을 묵상해야 하는가? 왜 우리가 긍정적인 생각을 하고, 감사하는 생각을 하고, 희망의 생각을 해야
하는가? 그것은 마치 내 속에서 싸우고 있는 늑대에게 먹이를 주는 것과 같다. 그리스도의 영이 내 속에 임하셔서 영의 생각으로
생명과 평안이 있게 하옵소서.
데카르트(Rene Descartes, 1596-1650)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 (I think, therefore I am. cogito, ergo
sum)
사람은 생각이라는 관념을 통해 존재의 유무, 살아 있는 자인가 죽은 자인가를
판단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생각은 인간이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큰 축복입니다. 하지만 생각이라고 다 좋은 것이 아니라 우리의
생각이 어디에 소속되어 있느냐에 따라 생각의 가치가 엄청나게 달라진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로마서 8:5) 생각은 생각인데 육신의 생각이 있고 영의
생각이 있다. 그 생각의 소속이 어디에 있느냐에 따라 하나는 사망이고 하나는 생명과 평안의 결과를 가져다
준다.
육신의 생각은 무엇이며 영의 생각은 무엇일까요?
데살로니가 5:23 평강의 하나님이 친히 너희를 온전히 거룩하게 하시고 또 너희의 온
영(spirit)과 혼(soul)과 몸(body)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강림하실 때에 흠 없게 보전되기를 원하노라.
육(body)은 눈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영(spirit)과 혼(soul)은 눈으로 볼 수 없다.
이솝우화에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배가 고픈 호랑이가 산중에서 여우를 만났습니다. 호랑이는 배고 푼 김에 잘 되었다고 생각하고 그 여우를 잡아먹고자 덮치려고 합니다. 여우는 큰일이 났습니다. 그래서 한 꾀를 생각해 냈습니다. "호랑이 형님! 잠깐 기다리시오! 내가 이 산중에 제왕으로 있는데 나를 잡아먹으면 아마 큰 소동이 일어날 것입니다."
호랑이가 생각하기를 자기가 이 산중에 제왕으로 알았는데 이 여우가 제왕이라니 약간 혼란이 왔습니다. 그래서
"그것을 어떻게 믿을 수 있느냐?"고 묻자, 여우는 "그것은 어렵지 않습니다. 내 뒤를 바짝 붙어서 따라오십시오! 산 속에 있는
짐승들이 벌벌 떨 것입니다."
호랑이는 그렇게 하기로 하고 여우의 뒤를 따라 산 속을 따라 다녀보았더니 아닌 게 아니라 모든 짐승들이 다리야 날 살려라 도망을 칩니다.
이때 여우가 "보셨지요! 형님 제 체면도 있으니 한번만 봐 주십시오!" 호랑이는 여우의 말을 듣고 여우를 놓아주었다고 합니다.
짐승들이 누구를 보고 도망갔을까요? 여우를 보고 도망간 것이 아니라 여우의 뒤를 바짝 따라온 호랑이를 보고 도망갔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약하지만 우리 안에 있는 예수님의 권세가 크고 무섭습니다.
존 오웬(John Owen, 1616-1683)
1616년 영국 옥스퍼드 주 스타드햄에서 목사의 아들로 태어남. 12살에 옥스퍼드 대학에 입학하여 19세에 석사학위를 받은 수재. 옥스퍼드 그리스도 교회의 감독과 옥스퍼드 대학교 부총장을 지냄. ‘최후의 청교도 신학자’, 존 칼빈과 조나단 에드워즈와 함께 개혁주의 3대 신학자로 불림. 말년에는 담석증과 천식으로 고생. ‘죄 죽이기’(롬 8:13), ‘영의 생각, 육신의 생각’(롬 8:6)
하나님께서는 묵상 중에 있던 저의 힘을 회복시켜 주셨고, 저의 영혼은 한없는 유익과 만족을 얻게 되었습니다. 이후 저는 이러한 묵상이 모든 신앙고백자들의 마음과 양심에 적용되어야 한다는 확신 아래, 많은 회중들에게 이 묵상의 주제를 강론하게 되었습니다(1676년에 완성).
성도 개개인이 하늘을 묵상함으로 누리는 은혜를 체험하게 하고, 세상에서 만나는 여러 가지 시험의 때에 그들에게 특별하게 요청되는 영적인 도리들을 강권하는 것입니다.
목회 사역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교회의 구원에 관한 하나님의 뜻 전체를 선언하는 것이 핵심이 되어야 합니다. 성도들이 허공을 치는 것과 같이 불분명하게 싸우게 하지 말아야 하는 것입니다. 어떤 계획이나 목적도 없이 그저 막연히 그들을 방치해서는 안 됩니다. 시험의 때에 연약한 그들 성도들이 필요로 하는 은혜가 무엇인지를 바로 알게 해야 합니다. 그들이 당하는 시험이 무엇인지, 시험 가운데에 있는 그들에게 요구되는 빛이 무엇인지에 대한 예리한 통찰력이 목회 사역에 반드시 필요한 것입니다.
말씀은 언제나 그러한 원리 아래 하나님의 영광에 대한 열심과 성도들의 영혼에 대한 긍휼어린 심정으로 준비되어야 합니다. 말씀을 듣는 이 뿐만 아니라 말씀을 전하는 이들 역시 머지않아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서게 될 것입니다. 말씀을 전파하는 자들은 두려운 경외심을 가져야 합니다. 그 말씀이 누구의 말씀이며, 그 말씀을 받아 전하는 일이 가지는 거룩한 사명과 권위가 무엇인지 잊지 말고 모든 사역이 복된 열매로 거두어지기를 겸손히 바라야 하는 것입니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영적으로 생각하는 것과 그에 대한 놀라운 은혜’가 무엇인지를 알고 그것을 가지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이 시대를 살아가는 성도들에게 반드시 필요한 것입니다. 사람들의 마음을 빼앗으려 안달하고 있는 세상을 보십시오. 사람들의 마음을 온전히 자기의 정신으로 채우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습니다. 만약 세상이 사람들의 마음과 정서를 온전히 자기 방식대로 장악하여 마음속에 굳건한 요새를 구축하는데 성공한다면, 어느 누구도 하나님께 대한 믿음과 순종을 가질 수가 없습니다. 그러한 마음의 열매는 오직 영원한 파멸뿐인 것입니다.
갈수록 흉흉한 상태에 빠져가는 세상을 보십시오. 견고했던 수많은 기초들이 무너져 내리고 있습니다. 사람들의 마음은 온통 세상의 일들로 분주합니다. 물론 우리의 마음이 세상의 다양하고 풍부한 세력에도 불구하고 그것에 마음을 빼앗기지만 않는다면, 그것이 아무리 강력한 세력을 가지고 있다 할지라도 마음에 아무런 영향도 주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나 어떠한 방식으로든 조금이라도 그러한 것들에 마음을 빼앗겨버린다면, 영적인 일들을 하기 위한 마음의 힘은 순식간에 사라지고 말 것입니다.
세상의 세력에 우리의 마음이 장악되지 않기 위해서 우리가 세심한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 한, 생명과 평안에 이르는 영적인 생각의 은혜는 누구도 보장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하늘에 속한 모든 영적인 것들에 대한 우월한 애정을 가지고 부단하게 묵상함으로 마음을 지키려고 애를 써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서는 누구도 세상의 덫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지금이야말로 모든 믿는 자들에게 나타나는 세상의 모습들이 얼마나 합당하지 않는 지를 바르게 깨닫는 일이 긴박하게 필요한 시기입니다.
저는 본 강론을 통해 신자라고 고백하는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이러한 세상적인 마음과 사고의 구조에서 그들의 영혼이 하루 속히 벗어날 것을 촉구할 것입니다. 그들로 하여금 그러한 것들이 가진 죄악성과 영적인 위험이 얼마나 심각한 것인지를 알게 할 것입니다. 또 이 악한 마음의 성향이 심령을 장악하는 여러 가지의 과정과 방편들을 숙고해봄으로써 우리가 무엇을 경계해야할 지 생각해 볼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이 세상에 사는 동안 영의 생각을 통해 누릴 수 있는 생명과 평안을 위해 우리에게 요구되는 일들을 강권할 것입니다. 이것이 본 강론이 가지는 목적과 의도입니다.
Ⅰ. ‘영의 생각’의 정체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롬 8:6)
이 본문은 서로 대칭 되는 두 가지 전제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주어부에 ‘육신’과 ‘영’, 술어부에 ‘사망’과 ‘생명과 평안’을 서로 대칭시키고 있습니다. 사도는 먼저 주어부인 ‘육신의 생각’과 ‘영의 생각’으로 인류를 크게 두 부류로 나누고 있습니다. 이 세상에 있는 사람 모두는 예외 없이 그 둘 중 하나에 해당될 것입니다. 그런데 그러한 두 가지의 속성을 모두 가지고 있는 이들도 있습니다. 곧 한 사람 속에 ‘육신의 생각’과 ‘영의 생각’이 동시에 거하는 경우입니다. 이는 거듭난 사람들 중 많은 이들에게서 흔히 발견되는 현상입니다. 하지만 그렇게 한 사람 속에 서로 대립되는 정반대의 성향이 동시에 존재할 수는 있지만, 그 성향이 각각 구별되는 별개의 상태를 따로 구성하지는 않습니다. 그 둘 중 어느 것이든지 영혼 속에서 더 우세하게 되면 영혼의 상태를 그 우세한 세력이 주장하여 이전과는 다른 상태로 만들어 냅니다.
사도는 서로 다른 두 성향이 만들어 내는 상태들을 이렇게 표현합니다. 어떤 이들은 육신에 있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습니다(8절). 그들은 “육신을 따르는 자들”이며(5절), “육신대로 사는”자들이며(13절), “육신을 따라 행하는”자들입니다. 그와 다른 이들은 “영 안에 있는 자들”이며(9절), “영을 좇는 자들”이며(5절), “영을 따라 행하는 자들”입니다.
전자(前者)가 바로 ‘육신적으로 생각이 돌아가는 자들’이며, 후자가 ‘영적으로 생각이 돌아가는 자들’입니다. 우리는 모두 이 둘 중 하나의 상태에 속해 있기 마련입니다. 육체의 지배를 받는 사람이든지, 영의 지배를 받는 사람이든지 둘 중 하나인 것입니다. 지금 현재로는 이 다른 두가지 상태를 가져오는 원리들과 그 작용의 결과로 열리는 열매들과 효과들을 통하여 그 차이가 드러납니다. 사도는 그 열매들과 효과들을 그 두 전제의 술어부(述語部)를 통해 표현합니다. ‘사망’과 ‘생명과 평안’이 그것입니다.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절대적인 형벌로서의 이 사망은 영적이고 영원한 것입니다. ‘영적인 사망’은 공식적(formal) 죽음이요, ‘영원한 사망’은 ‘응분에 합당한 대가적’(meritorious)죽음입니다. ‘공식적인 영적 사망’이라 함은 육신적으로 생각이 돌아가는 이들이 죄와 허물로 죽어 있다는 말입니다(엡2:1). 육적인 사고방식을 가진 자들이 바로 그러합니다. 그 영이 죽어 있는 상태로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인 것입니다(엡2:3). 그들은 형벌적으로 영적 죽음의 세력 아래 있습니다. 그 사망은 응분에 합당한 영원한 대가를 치르는 죽음입니다(영원한 사망). “죄의 삯은 사망이요”(롬6:23)
그리고 사도는 다음 구절(7절)에서 육신의 생각이 당하는 끔찍한 선고에 대한 근거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하지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 이것이 육신의 생각이 결국 사망에 이를 수밖에 없는 분명한 이유입니다. 이것 외에 어떤 다른 것도 기대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 문맥에서 ‘영’(Spirit)이 이중적 측면을 가지고 있습니다. 성령 자신을 가리키기도 하고, ‘사람의 영혼에 작용하시는 성령의 역사(役事)’를 가리키기도 합니다. “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롬8:9)과 11절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의 영이 너희 안에 거하시면....”에서 ‘영’은 ‘하나님의 성령의 인격 자체’를 지칭합니다.
그런데 ‘영’이라는 표현은 성령으로 말미암아 거듭난 모든 자들 속에서 작용하는 ‘영적 생명의 원리’(principal of spiritual life)를 나타내기 위해서 사용되기도 합니다.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영으로 난 것은 영이니”(요3:6).
이 로마서 8:6에서는 ‘영’이라는 명사가 후자의 의미로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것은 곧 하나님께로 난 자들 속에 있는 ‘영적 생명의 원리’를 말합니다. 신자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위하여 살도록 하시려는 성령께서 신자들의 영혼 속에 일으키시는 새로운 ‘순종의 거룩하고 생명 있는 원리’가 그것입니다.
그에 반해 ‘육신’은 그것이 가진 본성과 활동과 작용의 차원에서 ‘영’과는 정반대입니다. 모든 악한 행동들을 유발시키는 타락한 본성이 가지는 부패의 원리를 가리켜 ‘육신’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롬8:1,4,5). 육신을 따라 사는 자들의 부패한 정서를 ‘육신’으로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영’의 의미를 함축하고 있는 ‘프로네마’에서 파생된 ‘프로네시스’라는 말은 이지(mind:理智)의 활동과 작용을 말합니다. 곧 이지가 가진 지혜와 지식과 총명과 분별력을 의미하는 것으로서, 습관적인 마음의 행로나 정서의 성향을 움직이는 이지의 작용을 의미하고 있는 것입니다.
골로새서 3장 2절을 보면, ‘마음에 깊이 두다’, ‘애착을 갖다’의 의미로 그 단어가 사용되었습니다. 곧 어떤 것들에 우리의 정성을 모아서 집요하게 달라붙을 정도의 애착을 가진다는 의미로 말입니다.
따라서 ‘영의 생각’ 또는 ‘영적으로 생각하기’를 성령으로 새롭게 된 이지와 정서의 모든 실천적 행사로 보아야 합니다. 영적인 일들을 생각하고 그 영적인 일들에게 애착을 가지고, 그 영적인 일들에서 맛과 풍미를 느끼며, 거기서 즐거움과 만족을 찾기까지 나아가려는 모든 작용, 바로 그것이 ‘영의 생각’입니다. 다시 설명하면, 이지가 영적 생명과 빛으로 말미암아 변화되고 새로워져 영적인 것들을 생각하고 묵상합니다. 그로 인하여 그 이지가 부단하게 작용하고 감화를 받아 영적인 것들에 깊은 애착을 갖게 됩니다. 그렇게 됨으로써 영적인 것들 안에서 즐거움과 만족을 발견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영의 생각’입니다.
우리는 영적인 생각이 이지의 작용에 미치는 영향을 세 가지로 나누어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1) 이지의 실제적인 행사
영적으로 생각한다는 것은 하늘에 속한 신령한 것들을 생각하고 묵상하고 소원하는 이지의 실제적인 활동입니다.
(2) 이지의 성향과 구조
영적으로 생각한다는 것은 이지가 모든 정서를 동원하여 영적인 일들을 고집하고 애착을 가지는 성향입니다.
(3) 이지의 만족
이것은 이지가 영적인 것들 속에서 달콤한 맛과 풍미를 발견하고, 체질이나 성향에 그 영적인 것들이 아주 잘 들어맞는 데에서 오는 만족을 말합니다.
이 모든 일들이 ‘영의 생각’ 속에서 일어납니다. ‘영의 생각’ 속에 함축되어 있는 모든 도리의 초석(礎石)은 정서, 곧 신령한 것들에 즉각적인 애착을 가지는 정서 속에 있습니다. 이지가 영적인 것들을 생각하고 묵상하는 일이 바로 그 정서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 강론의 기초 본문이 되는 말씀이 함축하고 있는 중요한 진리들을 지적하는 것이 합당하다고 봅니다.
첫째, ‘영적으로 생각이 돌아가는 것은 모든 거듭나지 않은 이들과 참 신자들을 구별하는 큰 특성이다’. 사도가 역설하고 있는 것처럼, “육신에 속하여 육신적으로 생각이 돌아가는” 모든 자들은 거듭나지 못한 이들, 곧 하나님께로부터 나지 않은 이들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습니다. 그들은 결국 영원히 멸망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영적으로 생각이 돌아가는 자들’은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위하여 살고, 하나님을 즐거워하는 경지에 이를 것입니다.
둘째, ‘영적으로 생각하는 곳에서만 생명과 평안이 있다’.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라는 진리의 권능에 순복하여 우리 영혼이나 양심이 늘 감화를 받게 된다면 결코 적지 않은 유익을 얻을 것입니다. 생명과 평안은 영적으로 생각하는 자들만이 누릴 수 있는 유익입니다.
오늘날 정말로 많은 이들이 자신을 속이고 있습니다. 들려지는 말씀에 대해 그저 지적으로만 인정하고 찬동할 뿐, 정작 그들의 양심은 그 진리의 세력 안으로 들어가지 않습니다. 진리들을 통하여 자신들의 영적인 실상과 조건을 돌아보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러면서도 자기들이 생명과 평안을 누리고 있는 것처럼 착각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진리를 믿고 있다고 느낄지 모르겠습니다만 사실 단 한 음절의 말씀도 믿지 않습니다. 만약 그들이 말씀의 진리를 진정으로 믿는다면, 그 진리에 비추어 자신들을 돌아보지 않을 리가 없습니다. 정말 믿는 자라면 마지막 날에 그 진리가 자기들에게 어떻게 작용하며 찾아올 것인지를 생각해보지 않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야고보는 그들의 처한 영적인 상태와 조건을 이렇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누구든지 말씀을 듣고 행하지 아니하면 그는 거울로 자기의 생긴 얼굴을 보는 사람과 같아서 제 자신을 보고 가서 그 모습이 어떠했는지를 곧 잊어버리거니와”(약1:23-24). 사람들은 이 말씀을 주목하면서 자기들의 상태를 아주 잘 묘사하고 있다는 것을 인정하곤 합니다. 그러나 거기까지입니다. 이내 마음의 생각은 엉뚱한 일들에 다시금 사로잡히고, 말씀으로 알게 되었던 자기들의 영적인 실상에 대한 각성은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맙니다.
견고한 확신을 가지고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는 진리의 말씀의 세력 아래 순종하지 않는 사람이라면, 누구도 이 진리를 통해 유익을 얻을 수 없습니다. 여러분 모두가 잊지 말아야 하는 분명한 사실은, ‘영적으로 생각하는 것’은 ‘육신적으로 생각하는 것’과 정반대 된다는 것입니다. ‘육신의 생각’은 사망입니다. 그러나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입니다. 영적으로 생각하지 않는 사람은 분명 육신적으로 생각하는 사람일 수밖에 없습니다.
사람들이 생각을 세상적으로 가지는 모습을 둘로 나누어 볼 수 있습니다. 그 중 하나는 세상에 속한 것들을 사랑하는 생각이 그 마음을 ‘완전히 장악하고’ 있는 경우입니다. 이 경우는 육신적인 생각이 부분적으로 작용하는 경우가 아닙니다. 모든 생각의 ‘원리와 뿌리’가 육신에 있습니다. 육신적인 이지가 작용한 결과입니다. 그런 상태에 있는 사람은 결코 ‘생명과 평안’에 이를 수 없습니다(빌3:19, 요일2:15-16).
이것은 영적인 생각 체계와는 완전히 정반대의 상태입니다. 어느 누구든지 땅의 것들을 사랑하는 마음이 우세하면, 그 사람을 가리켜서 ‘육신적으로 생각이 돌아가는 사람’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영적으로 생각하려 하지 않을 뿐 아니라 할 수도 없습니다. 이들은 영적으로 생각이 돌아감으로 말미암아 얻어지는 유익과 아무런 관련이 없는 사람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본다면 ‘영적으로 생각하는 것’은 확실히 세상에서 그리스도인들로 불리는 자들의 가장 큰 특징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하지만 그리스도인들도 그 정반대의 세상적인 생각에 사로잡힌 모습을 보일 때가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들도 ‘불규칙적으로’ 이따금씩 땅의 일들에 애착을 가지는 방식으로 마음을 쓰곤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세상적인 생각이 존재하는 또 다른 모습입니다.
다시금 영적인 것에 마음을 온전히 돌리려면 분명 그러한 죄악적인 일들을 바로 잡아야 합니다. 모든 그리스도인은 영적인 것에 온전히 마음을 기울여야 할 영적 목표와 의무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본다면 잠시나마 가지는 그러한 생각을 ‘세상적’이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한 상태에서 영적인 은혜는 넘칠 수 없습니다.
여러분들이 설령 은혜의 빛이 요구하는 최상의 영적 수준에 이르는 일 자체를 아무리 좋은 것으로 인정한다 할지라도 여러분 자신이 그 일을 위해 부단히 애쓰려는 마음이 없다면, 여러분이야말로 ‘생각이 육신적으로 돌아가는 사람이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바울은 8장으로 넘어와서 제일 먼저 선포한 말씀이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다"고 했습니다. '예수 안에 있는 자', '부부와 같이 몸이 둘이지만 마음이 하나인 것'을 의미합니다.
하루는 아버지가 두 아들과 함께 공원을 한가롭게 산책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벌 한 마리가 날아와서 큰 아이의 얼굴 주변을
맴돌면서 윙윙거리기 시작하자 큰 아이는 무심결에 벌을 쫓는다고 손을 내저었더니 깜짝 놀란 벌이 갑자기 큰 아이의 눈덩어리에
따끔하게 침을 쏘았습니다.
그러니 얼마나 아팠겠습니까? 큰 아이는 퉁퉁 부어오른 눈언저리를 손으로 쥐고서 아파 죽겠다고 땅바닥에 털썩 주저앉았습니다. 그런데도 벌은 이번에는 작은 아이의 얼굴 주변을 어른거리기 시작하자 아이는 겁을 먹고 아버지 뒤에 숨으면서 "아빠! 벌이 나를
쏘려고 해요" 그러자 아버지는 "얘야, 겁먹지 말아라. 이미 저 벌은 네 형을 쏘았기 때문에 그 벌에는 더 이상 침이 없단다.
너를 쏘려고 해도 쏠 수가 없단다." 그러면서 아버지는 큰 아이의 얼굴에 박혀있는 벌의 침을 뽑아내어 작은 아이에게 보여주면서
"보아라. 여기 벌의 침이 있잖니! 저 벌이 너를 위협할 수는 있지만 더 이상 침으로서 너를 해치지는 못한단다."
죄의 침은 사망, 곧 죽음입니다. 그러나 죄는 무서운 침을 이미 쏘아버렸습니다. 죄는 십자가에 달린 예수 그리스도를
향해서 침을 쏘았습니다. 죄는 예수 그리스도를 죽게 만들었습니다. 그러나 죄는 사망의 침을 이미 쏘았기 때문에 더 이상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우리를 사망의 침으로 쏠 수가 없습니다.
고린도전서 15:55 "사망아 너의 이기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너의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인간학은 대체로 세 가지로 설명합니다.
인간을 완전히 육으로 보는 견해
이 사상을
학자들은 '유물사관'이라고 합니다. 이 사상은 사람들에게 정신이 있는 것을 인정하지만 그 정신의 가치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고
오직 육체가 살아있는 동안만 육체에 매여 있는 하나의 기능의 발로라고 생각하는 학설입니다. 즉 정신을 육체의 기능 중에 하나로 보는 것, 인간의 모든 것은 육체 중심의 세계관으로 보는 것입니다.
이원론적인 세계관
이 사상은 헬라를 중심으로 해서 많은 철학자들이 동의해 왔습니다. 불교사상이 이와 비슷합니다. 여기서는 육체와 정신, 몸과 영혼을 따로따로 분리해서 이원론적인 생각으로 인간을 봅니다. 그런데 표면적으로는 이원론적인 입장이지만 실제로는 육체적인 가치를 정신적인 가치에 비해 아주 낮추어 생각하고 있습니다. 즉
육체적인 것은 속되고, 더럽고, 추하다하여 입산수도를 하고 정죄하며 육체적인 욕망을 확대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먹고
싶은 욕망은 나쁜 것이요, 생식본능은 아주 더러운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형식적으로는 이원론적으로 말하고 있지만 내용적으로는
정신만이 본질이요, 육체는 가치가 없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철학이다, 종교다' 하는 것은 모아 놓으면 이상 둘로
나누어 볼 수 있습니다.
기독교에서 말하는 인간학
앙적인 인간학은 무엇입니까?
기독교는 인간을 <정신이다, 물질이다> 나누어 보는 것이 아닙니다. 간단하게 말해서 인간은 하나님이 창조하신 하나님의
형상입니다. 기독교의 인간학은 육과 영을 나누어서 생각하지 않고 합하여 생각합니다. 그러니까 육신도, 영혼도 종합적으로 보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을 보면 분명히 사도 바울이 이원론적 방법으로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그래서 많은 학자들도 사도 바울이 인간을 이원론적 입장에서 혹은 헬라의 철학을 반영한 것이 아니냐는 반론을 제기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오해입니다. 오히려 참 생명, 진정한 생의 실제를 말하고 있습니다. 근본적으로 사람은 완전히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았습니다. 그런데 아담의 타락 후 죄악에 물들어 있고, 타락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형상으로써의 인간과 타락되어진
인간을 놓고 볼 때는 둘로 보이기도 합니다.
생의 원리를 실제적으로 소개하는데 의미가 있습니다. 본문에서는 "육에 속한 사람과 영에 속한 사람"으로 나누어 놓았습니다.
"육신을 좇는 자는 육신의 일을 영을 좇는 자는 영의 일을 생각하나니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
한 사람에게 영에 속한 부분과 육에 속한 부분이 동시에 있다고 하는 의미가 아닙니다. 사람들 중에는 영에 속한 사람과 육에 속한 사람이 따로 있다는 말입니다. 소속의 문제를 말하는 것입니다.
한 집에서 두 사람이 살고 있는데 한 사람은 이것을 생각하고 다른 사람은 저것을 생각하며 산다고 합시다. 동상이몽(同床異夢)이란 한 이부자리에서 서로 다른 꿈을 꾸고 있다는 것입니다. 생각이 다르고 꿈이 다르고 관심이 다르면 운명까지 달라집니다.
우리 모두는 그리스도의 사람입니다. 우리는 육의 사람이 아니고 영의 사람입니다. 육신을 좇아 살지 않고 영을 좇아 사는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엄청난 사랑과 은혜를 받고 그리스도의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더 이상 육신을 좇아서
살지 말고, 영의 사람이 되어서 성령 님의 인도하심을 받아서 사는 삶이 되어야 마땅할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나는 날마다
죽노라!"고 고백했습니다. 영으로 자기의 육을 쳐서 복종시키면서, 육의 사람이 아닌 영의 사람답게 살기 위해서 몸부림을 쳤다는 것입니다.
5절 "육신을 좇는 자는 육신의 일을 영을 좇는 자는 영의 일을 생각하나니" 인간의 속 사람은 마음에 따라 생각이 달라집니다.
▶여행 도중 버스가 아름다운 산을 지난다고 합시다. 이 산은 관광객들이 다 봅니다. 그런데 그들이 느끼는 감정은 다 다릅니다.
광산업자는 저 산에 석탄이 얼마나 있을까? 미술가는 한 폭의 그림으로, 음악가는 전원음악을, 역사가는 그곳에 일어난 역사적
사건을, 군인은 군사적인 지형을, 신혼부부는 달콤한 사랑의 보금자리로 생각할 것입니다. 잠23;7절 "대저 그 마음의 생각이 어떠하면 그 위인도 그러한즉" 여기 "육신을 좇는 자"란 육신의 부패성을 좇아 사는 사람을 말합니다. 즉 타락한 성품대로 사는 사람, 죄(사탄)의 지배를 받는 사람, 삶의 중심을 자기중심으로 사는 자를 여기서 말하는 육신을 좇는 자라고 합니다. 이런 사람을 6절에서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라고 했고, 7절에서는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된다"고 했고, 8절에서는 "육신에 있는 자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가 없다"고 했습니다. 갈5;19절 이하에서 육의 생각은 "음행, 더러운 것, 호색, 우상 숭배, 술수, 원수를 맺는 것, 분쟁, 시기, 분 냄, 당 짓는 것, 분리함, 이단, 투기, 술 취함, 방탕"이라고 했습니다.
"영을 좇는 자"란 예수 믿고 중생한 자로써 성령을 좇아 사는 사람입니다. 그러니까 예수 안에 있는 자입니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다"는 새 사람을 의미합니다. "육신을 좇는 자는 육신의 일을" 우리의 과거의 모습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사람이 되기 전에는 육신을 좇아서 살았습니다. 육신의 일들을 생각하며 살았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달라졌습니다.
"영을 좇는 자는 영의 일을 생각하나니" 우리는 그리스도의 사람입니다. 영을 좇아서 사는 사람들입니다. 영의 일을 생각하면서
살아야 할 사람들입니다. 그리스도의 사람들이 육신의 일을 생각하면 잘될 것 같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6절을 보세요!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 육신의 생각은 사망입니다. 그러나 영의 생각 속에 생명이 있고 평안히
있습니다. 여기서 '생각'은 원어 적인 해석에 보면 '마음'을 의미합니다. 생각은 곧 마음입니다. 생각은 마음의 흐름이요,
표현입니다. 생각이 가면 마음이 따라가기 마련입니다. '선물'이란 그 사람의 마음이 담겨져 있는 것입니다. 마음이
담겨졌다는 것은 그 사람이 자신을 생각해 준다는 의미입니다. 하나님과 우리와의 관계도 마찬가지입니다. 영을 좇는 자는 그 마음이
항상 하나님께 가 있어야 합니다. 어떻게 하면 그분의 말씀대로 거룩한 삶을 살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릴
수 있을까? 영을 좇는 자는 생명과 평안히 온다고 합니다. 생명은 하나님과의 교재를 의미합니다. 또 평안은 하나님과 하나가 되는 즉 화해의 결과로써 얻은 마음의 평안과 위로를 말합니다.
하나님과 원수 되면 평안히 없습니다. 성령을 좇아 살면 평안히 찾아옵니다. 집에 있는 자녀가 마음의 평안을 누리려면 부모와
충돌이 없어야 합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자녀가 마음의 평안을 누리려면 하나님의 뜻에 어긋나지 않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러니까 마음의 평안을 얻으려면 우리가 얼마나 '하나님을 기쁘시게 했는가? 우리가 얼마나 성경을 따라 살았는가?'에 좌우합니다.
교회에 다닌다고 하면서도 마음에 평안히 없는 이유는 성령을 좇아 살지 않고 육신을 좇아 살기 때문입니다.
▶7절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치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이 아닙니다. 하나님과 원수가 된다고 했습니다. 그 이유는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치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기 때문"입니다.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의 법에 굴복할 의사가 없습니다. 할 수 있는 능력도 없습니다.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의 법과는 상반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대로 우리는 두 주인을 동시에 섬길 수 없습니다. 우리의 마음이 육신의 생각에 이끌리게 되면 자동적으로
하나님의 법에서 멀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6절에서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라고 말한 바울은 7절에서는 왜 육신의 생각이 사망인가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육신의 생각이 하나님과 원수 됨으로 하나님의 법에 굴복하지 않을 뿐 아니라 또 굴복할 수도 없게 된다고 말합니다.
하나님과 원수가 된다는 것은 죄 가운데 있는 인간이 전적 부패되어 있다는 증거입니다. 육에 속에 있는 사람들은 하나님을 미워할 뿐
아니라 하나님의 법에도 복종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법을 따르려고 마음먹지도 못하며 먹을 수도 없으며 전적으로 영적인
노력을 기울일 수도 없는 무능한 상태입니다. 왜? 그들은 하나님과 단절되어 있는 원수 된 자리에 있기 때문입니다.
'칼뱅'은 인간은 전적 부패한 속성을 가지고는 하나님을 찾을 수 없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므로 인간 스스로 하나님 앞에 나설 수
없으며 하나님께서 일방적으로 은혜의 손길을 베푸셔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의 길을 제시해 주었습니다.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 예수 밖에 구원은 절대로 없습니다. 오직 예수로만 구원을 얻을 수 있습니다. /믿/
▶한 교회에 남자 집사님 한 분이 계셨습니다. 아버지는 그 교회 장로님이고 어머니는 권사님이셨습니다. 그는 사업을 잘해서 돈도
많이 벌었습니다. 그런데 그의 신앙생활은 시원치 못했습니다. 그는 영의 일보다는 육의 일에 치중했습니다. 그는 주일이 되면 교회에
와서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일보다도 거래처 사람들과 어울려 골프장에 가서 골프 치는 것을 더 좋아했습니다. 하루는 그
교회에서 안수집사 선거가 있었는데 교인들은 그의 신앙은 별 볼일이 없었지만 그의 부모님을 생각해서 그를 안수집사로 뽑아
주었습니다. 그랬으면 열심을 내야 되는데 그는 정신 차리지 못하고 그저 육신의 일에만 늘 분주했습니다. 결국 하나님은
그를 너무 사랑하시니까 그를 깨우치게 하기 위해서 손을 드셨는데 어느 날 갑자기 몸 져 누어 병원에 가서 정밀진단을 받았는데 위암
3기였습니다. 의사는 그의 배를 갈라보고 더 이상 손을 쓸 수가 없어서 다시금 덮어버리고 말았습니다. ▶결국 그의 생명이
까물까물 꺼져갑니다. 그는 마지막 순간에 흐느끼면서 이런 유언을 남겼답니다. "내 사랑하는 아내, 사랑하는 자녀들아!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셔서 내게 장로님, 권사님의 부모님을 주셨고 나로 하여금 어릴 때부터 예수님을 믿게 하셨건만 내가 하나님의
크신 사랑과 은혜를 깨닫지 못했구나! 이 형편없는 나를 그래도 하나님은 쓰시겠다고 안수집사로 뽑아주셨건만 그래도 내가 깨닫지
못하고 정신 차리지 못했구나. 나를 그대로 내버려두면 내 육신, 내 영혼이 둘 다 지옥에 떨어질까 봐 하나님은 내 육신은 불러
가시고 내 영혼은 구원해 주셨구나! 얘들아, 너희들은 어찌 하든지 예수님을 잘 믿고 늘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을 살아라. 그럼
우리 모두 이 다음에 천국에 가서 다시 만나자!" 그의 장례식 때 그의 육성이 녹음기를 통해서 그곳에 모인 사람들의 귀에 전해졌습니다. 모두가 그 소리를 듣고 함께 흐느꼈다고 합니다.
여러분!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됩니다. 이는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의 법에 굴복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육신에 있는 자들은
하나님을 결코 기쁘시게 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너무 사랑하시기 때문에 우리가 육신의 사람처럼 육신의 생각에 골똘할
때, 우리를 쳐서라도 영의 사람으로 바꾸어버리고 마시는 것입니다.
본 절의 말씀은 '7절의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 된다는 논리에 의해 필연적으로 초래되는 결과'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육신을 좇는 자는 육신의 생각을 하며 이에 따라 육신의 일을 하게 됩니다. 즉 육신에 속한 자는 하나님의 뜻에 전혀 관심이
없으며 그에게 나오는 모든 행동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습니다. ▶이것이 죄의 법 아래 있는 자들의 실상입니다. ▶약4;4절 "세상과 벗된 것이 하나님의 원수임을 알지 못하느뇨 그런즉 누구든지 세상과 벗이 되고자 하는 자는 스스로 하나님과 원수 되게 하는 것이니라"
하나님과 원수 된 자들이 어떻게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습니까? 육신의 부모님에게도 말을 안 듣고 사고만 치고 다니며 애를
태우면 어떤 부모가 그 자식으로 인해 기쁨을 누릴 수가 있습니까? 부모님의 말씀을 잘 듣고 순종할 때, 부모는 그 자식으로부터
기쁨을 얻을 수가 있습니다. ▶소요리 문답 제 1문에 "사람이 제일 되는 목적이 무엇인가?" 그 답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과 영원토록 그를 즐겁게(기쁘게) 하는 것"입니다. 사람에게는 목적이 있습니다. 목적이 바로 서야 축복도 받습니다.
바울은 고전10;31절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 했고, 전12;13절
"일의 결국을 다 들었으니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 명령을 지킬지어다 이것이 사람의 본분이니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기뻐하는 생활은 무엇입니까? ①하나님께 예배드리는 삶입니다. 시29;2절 "여호와의 이름에 합당한 영광을 돌리며 거룩한 옷을 입고 여호와께 경배할지어다" ②감사함으로 영광을 돌려야 합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감사하는 백성들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며 일상생활에 주어진 모든 것에 대하여 감사하는 백성입니다.
감사를 모르는 사람은 그리스도인이 아닙니다. 바울 사도의 말과 같이 '범사에 감사하고 기뻐하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감사하는
자는 불평이 없습니다. ③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야 합니다. 롬7;22절에 "내 속 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한다"고 했고, 렘15;16절 "내가 주의 말씀을 얻어먹었사오니 주의 말씀은 내게 기쁨과 내 마음의 즐거움입니다"고 했습니다. 육신에 있는 자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영에 속한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리십시다. 시37;4절 "또 여호와를 기뻐하라 저가 네 마음의 소원을 이루어 주시리로다"
▶9절 "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
누가 그리스도의 사람입니까? 그리스도의 영이 있는 자가 그리스도의 사람입니다. 아무리 윤리적으로 완벽하게 살고 도덕적으로 착하게
산다 할지라도 그 속에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는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닙니다. 비록 부족하고 연약할지라도 성령께서 우리
마음속에 거하시기 때문에 우리가 바로 그리스도의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요3장에 나오는 니고데모는 완벽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바리새인이었고 하나님의 말씀인 율법을 철저하게 지키려고 애썼던 사람이었고 유대인의 관원이었습니다. 사회적으로 지위가 높고 명망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또 이스라엘의 선생이라고 했습니다. '랍비'였습니다. 백성들에게 삶을 가르쳤습니다. 종교를 가르쳤습니다. 도덕과 윤리를
가르쳤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니고데모를 향해서 거듭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도 없고 볼 수도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왜 예수님이 니고데모에게 그 말씀을 하셨겠습니까? 만일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붙들린 여자나 일곱 귀신이 들렸던 막달라 마리아에게 예수님이 그 말씀을 하였더라면 우리는 쉽게 이해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니고데모를 향해서 거듭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왜 그렇겠습니까? 니고데모는 아직도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영에 속한 사람이 아니고 육에 속한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물론 우리는 니고데모처럼
도덕적으로나 윤리적으로 완벽한 사람이 못될는지 모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리스도의 사람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 거하고 그리스도 예수께서 우리 안에 계시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는 그리스도의 영이 있기 때문입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다"는 말씀은 굉장히 중요한 말씀입니다. 이 말씀을 더 깊이 음미해 보면 '모든 그리스도인에게는 성령이 함께 한다는 뜻'입니다. 오늘 저와 여러분의 심령 속에 그리스도의 영이 내주하고 있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믿/ 성령의 도우심으로 우리는 그리스도를 구주로 고백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찬양하며 엎드려 기도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이란 명칭은 안디옥 교회에서 처음으로 불리어졌습니다. 안디옥 교회 교인들이 너무나 열심히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그를
찬양하고 모든 사람들에게 그를 선포하고 가르쳤기 때문에 사도들이 그들에게 그리스도인이라고 불렀습니다. 행11;26절에
"제자들이 안디옥에서 비로소 그리스도인이라 일컬음을 받게 되었더라" 처음에 그리스도인이라는 말은 '예수 믿고 따르는 사람들'이란
명칭으로 교회 밖에 사람들에게 불리 움을 받게 된 것인데 지금은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보편적인 명칭이 되어 버렸습니다.
종교개혁시대에 천주교의 권위에 도전하고 항의하는 종교개혁의 무리들에게 '항의하는 자'란 뜻으로 '프로테스탄트'라고 부르게 된 것이 지금의 개신교(기독교)의 일반적인 명칭을 얻은 것과 같습니다.
'그리스도의 영'은 성령을 의미합니다. 성경에 나타난 성령의 명칭을 살펴보면 1. 거룩한 영 2. 하나님의 영 3. 진리의 영 4. 그리스도의 영 5. 중재자, 위로자, 약속의 영
그리스도인이란 무엇인가? 1. 그리스도의 영이 거하는 사람입니다. 2. 그리스도 안에 사는 사람을 의미합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 다고 할 때, 헬라 원문이나 영어 성경에는 꼭 '안에'라는
전치사가 들어갑니다. 그런데 우리 성경에는 그 말이 빠져 있습니다. 그리스도를 믿는다,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그 안에서 믿는
것을' 뜻합니다.
요한복음 15:5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저가 내 안에 내가 저 안에 있으면 이 사람은
과실을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은 그리스도의 형상을 닮아갑니다.
성품이 온유해지고 겸손해집니다.
3. 그리스도를 위해 사는 사람입니다.
예수님을 믿으면서도 자신의 유익만을 구하는
자는 아직도 육에 머무는 잡니다. 진정한 그리스도인은 예수님을 위해 사는 잡니다. 수없이 많은 우리의 신앙 선배들은 예수님을
위해 살다가 핍박을 받고 또 순교까지 했습니다.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걸작품 중 <최후의 만찬>은 오랜 세월에 걸쳐서 그린 그림입니다. 다빈치는 예수님의 모델을
오랫동안 찾았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로마의 어느 교회에서 성가대원으로 활약하고 있는 '삐에뜨로 반디엘'이라는 청년을 만났습니다.
이 청년은 모든 면에서 예수님의 모델로 제격이었습니다. 그래서 그 청년을 모델로 해서 예수님의 모습을 완성시켰습니다.
그러나 10년이 지나도록 이 그림을 완성시키지 못했습니다. 모든 제자들을 다 그렸는데 예수님을 판 가롯 유다만 못 그렸기
때문입니다. 다빈치는 죄로 마음이 무디고 찌들어진 얼굴을 찾아 나서기 10년 되는 날 로마의 뒷골목에서 아주 보기 만해도 역겨운
사람을 찾았습니다. 그리고 그 사람을 가롯 유다의 모델로 그렸습니다. 작업이 끝나고 돈을 지불하면서 이름을 물었습니다. 그러자 "몇 년 전에 당신이 나를 예수의 모델로 그린 '삐에뜨로 반디엘'입니다." 성령이 거한 사람과 성령이 떠난 사람의 차이가 이렇게 엄청납니다.
10절 "또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시면 몸은 죄로 인하여 죽은 것이나 영은 의를 인하여 산 것이니라"
두 가지가 서로 예리한 대조를 이루고 있습니다. '몸'은 '영'과 대조를 이루고 있습니다. '죄'는 '의'와 대조를 이루고 있습니다. '죽은 것'은 '산 것'과 대조를 이루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사람으로서 이 두 가지 가운데서 무엇을 택해야 마땅하겠습니까? 몸이 아니라 영을 택해야 할 것입니다. 죄가
아니라 의를 택해야 할 것입니다. 죽은 것이 아니라 산 것을 택해야 할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그리스도의 사람은 죄로 인하여 죽은
것, 곧 부패한 육신의 행실을 좇아서 살아서는 안 된다는 말씀입니다. 의를 인하여 산 것, 곧 영의 인도하심을 따라서 영의 일을
생각하면서 사는 사람이 되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진리는 죽는 것과 산 것입니다. 죽을 것이 아니고 죽은 것이고, 살 것이 아닌 산 것입니다. 완벽한 구원을 우리에게 주셨다는 것입니다. 또 다른 학자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실 때에 예수 믿는 사람은 그때 벌써 죽었다는 것이요, 부활하실 때, 곧 하나님의 법대로 산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시면" 마28;20절에서 주님은 세상 끝 날까지 성도들과 같이 계시겠다고 하셨습니다.
"몸은 죄로 인하여 죽은 것이나" 성도의 몸은 아직도 죄 아래 있고, 사망 아래 있다는 뜻입니다. "영은 의로 인하여 산
것이니라" 여기 영은 성도들의 중생의 영을 의미합니다. 중생이란 죽었던 영이 살아난 것을 말합니다. 성도의 영은 의로 인하여 중생
하여 살아났으나 육은 아직도 죄와 사망아래 있다는 것입니다. 물론 우리의 부패한 육신도 주님 다시 오시는 그 날에 홀연히 변화가 될 것입니다. 그것이 11절 말씀입니다.
11절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의 영이 너희 안에 거하시면 그리스도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가 너희 안에 거하시는 그의 영으로 말미암아 너희 죽을 몸도 살리시리라"
'살리시리라' 이 말은 '살리다'라는 동사의 미래형입니다. 즉 부활 승천하신 예수께서 이 세상을 심판하러 다시 오시는 날에 하나님께서 성령을 통하여 '죽은 몸을 다시 살게 하시겠다'는 뜻입니다.
10절의 영혼을 살리신 하나님께서 11절에서는 우리 육신을 살리시겠다는 말씀입니다. 앞으로 우리의 몸은 죽어 이 땅에 묻히기는
하지만 우리 주님 오시는 날 홀연히 변화되어 우리 육신이 부활되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이것이 바로 구원의 완성입니다.
주님 다시 오시는 그 날에 우리의 부패한 육신도 변화가 될 것입니다. 썩을 것이 썩지 않을 것으로 바뀔 것입니다. 육의 몸은
신령한 몸으로 바뀔 것입니다. 그러나 그때까지는 우리는 육을 쳐서 복종시키며 영의 인도하심을 받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을 기록한 사도 바울은 육신에 속한 모든 일들을 더럽고 냄새나는 배설물처럼 여겨버렸습니다. 그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 바라보면서 성령의 인도하심에 따라서 살아가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우리도 살아가다 보면 우리의 부패한 육신
때문에 영과 육의 갈등 속에 살아갈 때가 많이 있습니다. 그럴 때는 육의 사람처럼 육신의 일에 치중하지 말고, 그리스도의 사람답게
우리의 육신을 쳐서 복종시키며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르는 삶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여러분! 몸은 죄로 인하여 죽은
것입니다. 그러나 영은 의로 인하여 산 것입니다. 잠시 잠깐의 세상입니다. 죄로 인하여 죽은 몸의 행실에 따라서 살려고 하지
맙시다. 날마다 우리의 몸을 쳐서 복종시키며 영을 좇아서 영의 일을 생각하며 살아가는 우리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그것이 곧
생명이요, 평안입니다.
♦ 1월 29일(토)
♦ 오늘 읽어야 할 말씀 : 사무엘상 27:1∼12 ♦ 묵상을 위한 주제 : 내 사역자가 되리라(12절) ♦ 성구 : 아기스가 다윗을 믿고 말하기를 다윗이 자기(自己) 백성(百姓) 이스라엘에게 심히 미움을 받게 하였으니 그는 영영(永永)히 내 사역자(使役者)가 되리라 하니라.
블레셋 왕 아기스의 군대는 아벡에 진을 쳤고, 사울 왕의 이스라엘 군대는 이스르엘 샘 곁에 진을 쳤습니다. 블레셋 진영에는 아기스 왕의 요구에 의해 다윗과 그의 용사들도 참여했습니다. 다윗이 블레셋과 이스라엘의 전투에서 블레셋 진영에 참여하게 된 것은 블레셋 아기스 왕은 다윗에게 이 전쟁에 참여하여 위장 망명이 아닌 것을 증명하라고 했기 때문입니다.
다윗은 이스라엘이 싫어서 망명한 것이 아니라 사울 왕의 추적을 따돌리기 위해 잠시 망명한 것뿐입니다. 다윗은 아기스 왕의 요구를 거절하지 못하고 그 전쟁터까지 나올 수밖에 없었습니다.
블레셋 방백(사르)들은 어떻게 다윗을 믿을 수 있느냐 하며 다윗의 참전을 문제 삼고 나왔습니다. 그러자 아기스 왕은 “다윗이 나와 함께 있은 지 여러 날 여러 해로되 그가 망명하여 온 날부터 오늘까지 내가 그의 허물을 보지 못하였노라.”고 말합니다. 방백들은 아기스 왕에게 노를 발하며 다윗을 이 전장에서 돌아가게 하라고 요구했습니다.
이스라엘과 맞서 싸워야 할 다윗에게는 이 전쟁터에서 쫓겨나는 것이 다행스런 일이라고 하겠습니다.
하나님은 다윗을 이스라엘과의 교전 직전에 구원하셨습니다.
다윗은 시편 40편에서 이렇게 노래합니다.
“내가 여호와를 기다리고 기다렸더니 귀를 기울이사 나의 부르짖음을 들으셨도다. 나를 기가 막힐 웅덩이와 수렁에서 끌어올리시고 내 발을 반석 위에 두사 내 걸음을 견고하게 하셨도다.”
다윗은 지금까지 이러한 극적인 하나님의 은혜를 수도 없이 경험했습니다. 다윗은 난감하고 절망적이던 상황에서 결국은 놀라운 반전의 은혜를 입고 거기서 살아나온 경험을 많이 했습니다.
하나님은 그 기가 막힌 웅덩이에서 확실히 구원해 주시고 든든한 반석 위에 세워주십니다.
아기스 왕이 다윗에게 이 전쟁에 참전해 너의 진심을 증명해 보이라고 했을 때 다윗은 얼마나 난감했습니까? 아기스 왕은 다윗에게 참전을 하지 말라고 합니다.
다윗을 깊은 수렁에서 구원하신 하나님은 오늘날도 그의 백성들을 반드시 험한 수렁에서 건져내어 광활한 곳으로 인도하실 것입니다.
♦ 오늘 읽어야 할 말씀 : 사무엘상 26:1∼25 ♦ 묵상을 위한 주제 : 창과 물병(11절) ♦ 성구 : 내가 손을 들어 여호와의 기름 부음을 받은 자(者)를 치는 것을 여호와께서 금(禁)하시나니 너는 그의 머리 곁에 있는 창(槍)과 물병(甁)만 가지고 가자.
“창과 물병(the spear and water jug)”
‘창과 물병’은 “생명을 사랑하는 징표(徵表)”와 같습니다. 다윗은 자기의 생명을 빼앗으려는 사울을 은밀하게 죽일 수 있는 기회가 있었습니다. 엔게디 황무지 동굴에서 발을 가리던 때는 첫 번째 기회이었습니다(24장). 두 번째 기회는 십 황무지 하길라 산 길가 야영지에서 깊은 잠에 빠졌던 때입니다(26장).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윗은 첫 번째는 사울의 옷자락을 잘라 징표로 보여주었습니다. 두 번째는 사울이 사용하던 창과 물병을 징표로 제시합니다.
사울이 군사 3천 명을 거느리고 다윗이 숨어 있는 십 황무지 하길라 산 길가에 진을 쳤습니다.
다윗은 정탐꾼을 보내 사울의 군대를 정찰하게 합니다.
다윗은 그날 밤 “아비새”를 데리고 사울의 진영으로 잠입했습니다.
사울의 진영 한가운데 사울의 막사가 있었고 사울은 깊이 잠들어 있었습니다.
이런 현장을 본 ‘아비새’는 다윗에게 “하나님이 오늘 당신의 원수를 당신의 손에 넘기셨나이다. 그러므로 청하오니 내가 창으로 그를 찔러서 단번에 땅에 꽂게 하소서 내가 그를 두 번 찌를 것이 없으리이다.”
아비새의 말은 사울을 죽일 수 있는 하나님이 주신 기회라는 것입니다.
다윗은 힘겨운 도망자와 같은 피난살이를 끝낼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된 것입니다.
이미 다윗은 이스라엘의 제2대 왕으로 기름부음도 받았습니다.
사울만 죽이면 당장 왕의 지위에 오를 수 있었습니다.
곤하게 자고 있는 사울을 죽이면 모든 일이 끝납니다. 그런데 다윗은 아비새에게 사울을 죽이지 말고 “창과 물병만 가지고 가자.”고 합니다.
누구든지 이 말씀을 읽을 때 하나님이 다윗에게 원수를 죽일 수 있는 기회를 주셨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그러나 다윗은 아니라고 합니다. 다윗의 이와 같은 모습에서 그의 위대함을 엿볼 수 있습니다. 예수께서 다윗의 계보를 통하여 이 세상에 오셨는지 깨닫게 합니다.
다윗은 사울 왕의 창과 물병을 돌려주며 “오늘 왕의 생명을 내가 중히 여긴 것 같이 내 생명을 여호와께서 중히 여기셔서 모든 환난에서 나를 구하여 내시기를 바라나이다.” 라고 고백합니다.
그러자 사울은 “내 아들 다윗아 네게 복이 있을지어다. 네가 큰일을 행하겠고 반드시 승리를 얻으리라.”고 화답합니다.
사울이 얼마나 진정성이 있어 보입니까?
그런데도 사울은 이런 말을 언제 했냐는 듯 돌아서서 다시 다윗을 죽이려고 합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하나님은 사울에게 응분의 보복을 하십니다.
사울의 얄팍한 생각과 다윗의 태산과 같은 믿음을 생각해 봅니다. 나는 어떤 사람이었을까?
하나님은 다윗이 그동안 받았던 상처와 아픔을 치유해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다윗을 “내 마음에 드는 자”라고 칭찬하셨습니다.
다윗에게도 인간적인 실수가 있었지만 그의 인품과 신앙은 남달랐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다윗의 후손으로 오신 것이 절대 우연이 아닐 것입니다.
오 주여, 태산과 같은 믿음으로 오늘을 쌓고 내일의 높이가 오늘 보다 더 높여가도록 인도하여 주옵소서.
사울 왕은 다윗이 숨어있다는 하길라 산이 있는 십 황무지로 내려옵니다. 사울 왕이 진을 치고 있던 곳을 다윗은 아비새와 더불어 한밤중에 들어가서 사울이 잠을 자던 숙소에서 사울의 창과 물병만을 들고 나옵니다. 이떼 아비새는 사울에게 단칼에 사울을 찔러 죽이자고 하지만 다윗은 기름 부음을 받은 자를 치는 것은 여호와께서 금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다윗은 사울 왕을 죽일 수 있는 기회를 오히려 역이용합니다. 사울은 다윗의 생명을 위협하는 인물이었지만 나발은 먹을 것을 요구했을 때 먹을 것을 주지 않고 무시한 것입니다. 생명이 위협이 더 두렵습니까? 아니면 먹을 것 없는 것이 더 두렵습니까?
신앙생활을 하면서 아주 크고 무서운 시련에는 잘 견디면서도 아주 사소한 작은 것에 무너지기 쉬운 것이 연약한 인간의 모습이라고 하겠습니다.
예를 들면 남편이 바람을 피우고 방종한 삶을 살아갈 때는 울부짖으며 남편의 구원을 위하여 희생과 헌신하던 부인이었지만 남편이 회개하고 돌아온 후에 어느 주일에 사업차 골프 모임을 위하여 예배에 불참할 때는 매우 심각한 모습으로 남편을 외면합니다.
아비가일의 지혜는 다윗으로 하여금 이스라엘의 지도자가 될 왕으로서 나발과 같은 사람의 피를 흘려 오점을 남기는 것을 막아냈던 것입니다.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에게는 보혜사 성령의 도움이 절실하게 필요합니다. 성령의 도우심이 없이는 이미 이루어주신 구원의 은혜를 아름답게 유지하기가 어렵기 때문입니다.
칼로 살해하려고 했던 사울을 피해 다윗은 사무엘이 살고 있던 라마 나욧에서 사무엘과 함께 잠시 살았습니다(삼상 18:18). 어떤
사람이 이 사실을 사울에게 알렸기에 다윗은 사무엘이 살던 곳으로부터 도망하여 제사장 아히멜렉을 찾아갔습니다. 다윗은 제사장
아히멜렉으로부터 제단 앞 진설병 상 위에 놓여 있었던 물려낸 진설병과 보관 중이었던 골리앗의 칼을 받아서 가드왕 아기스에게 피하려
했습니다. 다윗은 이곳이 사울의 지배 영역이 아니어서 안전할 것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하지만 다윗을 본 아기스의 신하들이 다윗을
찬양하는 노래를 불렀었고 다윗은 이 노래가 아기스를 자극하여 자신에게 화가 미치게 될 것이라는 두려움으로 그 곳을 떠나 아굴람
굴로 도망하였습니다(삼상 21장). 이 때에 다윗에게는 환난 당한 자, 빚진 자, 그리고 마음이 원통한 자들이 모여 약 400명의
무리를 이루게 되었습니다. 이후 다윗은 무리를 이끌고 모압 왕에게 피신하러 갔었지만 선지자 갓이 다윗에게 여기에 머물지 말고 유다
땅으로 들어가라는 명령을 받았습니다(삼상 22:4-5). 당시 모압 땅은 사해 동남쪽에 위치한 지역이었습니다. 이곳을 떠나 다윗과
그의 무리는 사해의 서쪽인 ‘유다 광야’로 가서 머물게 되었습니다. 사무엘상 27장에는 다윗이 피신을 위해 블레셋 땅으로 갔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다윗이 블레셋 땅으로 가기 전까지 피신했던 장소는 주로 사해 서쪽에 위치한 유다 광야였습니다. 이 유다 광야
중에 한 성읍이었던 그일라에서 블레셋 사람들과 싸워 그일라 사람들을 구원해 주었습니다. 이 때에도 어떤 사람이 다윗이 그일라에
있다는 것을 사울에게 알렸고(삼상 23:7) 사울은 군사를 이끌고 그일라로 가려고 했었습니다. 다윗은 기도하여 하나님으로부터 사울이
그일라에 올 것임을 응답을 받은 후 광야 요새 또는 십 광야 산골에 머물며 사울을 피해 다녔습니다.
십 광야 수풀과 엔게디 요새에 머물면서 다윗과 그의 무리는 사울의 추적을 피할 때 한 사건이 발생하였습니다. 사울이 볼 일을 보러
굴에 들어갔었는데 그 굴 안에는 마침 다윗과 그의 사람들이 숨어있었습니다. 이러한 사실을 몰랐던 사울은 은밀하게 다윗의
사람들로부터 죽임을 당할 수 있었지만 다윗은 자신의 사람들에게 하나님께서 기름 부은 자를 치는 것은 금하였고 대신 사울의 옷자락만
베고 사울을 살려주었습니다.
이 사실을 뒤늦게 알게 되었던 사울은 멀리 서 있던 다윗을 향하여 “내 아들 다윗아 이것이 네
목소리냐”라고 말하며 울었습니다. 그리고 다윗을 축복하고 돌아갔습니다. 그러나 사울의 이러한 감정은 오래가지 않았습니다.
사무엘상 26장은 또다시 사울이 다윗을 죽이려고 십 광야로 돌아와서 발생했던 일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사해 서쪽 지역인 ‘십’에
거주하는 사람이 사울이 머물고 있었던 당시 이스라엘의 정치적 수도였던 기브아까지 찾아가 사울에게 다윗이 하길라 산에 숨어있다고
밀고를 했습니다. 이 소식을 들은 사울은 군사 3천 명을 거느리고 다윗을 죽이려 십 광야로 갔습니다.
이 거리는 사해 남북길이
만큼에 해당하는 약 80km정도 떨어진 거리였습니다. 사울과 3천 명의 군사들은 십 광야에 도착하여 하길라 산 가에서 진을 쳤습니다.
다윗은 정탐꾼을 보내어 사울의 진영의 위치를 파악하였고 자신의 부하 아비새를 데리고 밤에 사울의 진영에 들어갔습니다. 아비새는
곤히 자고 있던 사울을 죽이고자 했으나 다윗이 말렸습니다(9절).
아비새가 다윗에게 이르되 하나님이 오늘 당신의 원수를 당신의 손에 넘기셨나이다 그러므로 청하오니 내가 창으로 그를 찔러서 단번에 땅에 꽂게 하소서 내가 그를 두 번 찌를 것이 없으리이다.
다윗은 사울의 첫 번째 살해 기회가 있었을 때와 마찬가지로 자신의 손으로 여호와의 기름부음을 받은 사울을 죽이거나 죽이도록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다윗은 사울의 악행을 하나님께서 심판하시도록 맡겼습니다(10절).
다윗이 또 이르되 여호와께서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노니 여호와께서 그를 치시리니 혹은 죽을 날이 이르거나 또는 전장에 나가서 망하리라.
다윗이 사울에 의해 직면했던 죽음의 위기가 여러 차례 있었습니다. 사울을 죽일 수 있는 완벽한 기회가 두 번씩이나 찾아왔지만 다윗은 원수
갚는 일을 하나님께 맡겼습니다. 이는 다윗이 하나님께 속한 자로서 하나님을 섬기는 자였기에 가능하였습니다. 행악자에 대한 심판을
하나님께 맡겼습니다. 다윗은 자기 손으로 이스라엘의 왕이자 장인어른인 사울을 보복하거나 심판하지 않습니다. 다윗은 사울이 악행을
저질렀어도 자신의 감정 문제로 사울에게 상해를 입히거나 살해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생각했습니다.
우리 각자에게도 나를 괴롭게 하는
사울과 같은 자가 있습니다. 그 사람이 나의 가족이나 친인척일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그들에 대한 미움과 증오가 있더라도 그들
역시 하나님의 사랑의 대상입니다. 나에게 어려움을 주는 사람들도 하나님의 사랑의 대상이라면 그들을 섬길 수 있어야 합니다. 나를
좋아하고 나에게 잘 해주는 사람을 섬기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습니다.
섬김이란 나에게 잘 해주는 사람에 대한 호의를 베푸는 것이
아니라 나를 힘들게 하는 사람에게도 호의를 베푸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예배하고 섬기는 사람은 비상식적 언행과 아집이라는 절망
속에 빠져 있는 사람을 섬길 수 있어야 합니다. 다윗은 자신을 죽이려 했던 사울을 불쌍히 여기고 섬기는 마음으로 사울에게 호소를
하였습니다(18절).
또 이르되 내 주는 어찌하여 주의 종을 쫓으시나이까 내가 무엇을 하였으며 내 손에 무슨 악이 있나이까?
이어서 다윗은 하나님의 뜻에 의해 자신이 추격을 받고 죽어야 한다면 기꺼이 죽겠지만 무고한 자신을 죽을 자라며 모함한 자들에 의한
것이라면 그들이 벌을 받아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러자 사울은 예전처럼 다윗에게 자신의 잘못을 시인합니다(21절).
사울이 이르되 내가 범죄하였도다 내 아들 다윗아 돌아오라 네가 오늘 내 생명을 귀하게 여겼은즉 내가 다시는 너를 해하려 하지 아니하리라 내가 어리석은 일을 하였으니 대단히 잘못되었도다 하는지라.
사울은 자신의 범죄, 어리석음, 잘못을 고백하였습니다. 그리고 사울은 예전처럼 다윗을 축복하고 돌아갔습니다. 이후 사울은 더 이상
다윗을 추격하지 않았고 나중에는 하나님의 심판을 통해 전쟁에서 죽고 말았습니다. 사울이 시인한 자신의 범죄, 어리석음, 잘못은
무고한 다윗을 죽이려고 했던 것입니다. 사울이 다윗을 추격하여 죽이려고 했던 이유는 사람들의 모함과 밀고를 듣고 비이성적이고
경솔한 판단을 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속한 자로서 예배와 섬김을 행하는 사람이라면 근거 없이 말하는 사람들의 말에
대한 신중한 사리분별과 그에 따른 대처를 해야 합니다. 이렇게 하지 않으면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사람을 제대로 섬길 수 없습니다.
하나님을 섬기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을 섬기려면 사람의 말을 무분별하게 듣고 행하는 자가 아니라 다윗처럼 하나님을 경외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삶의 표준으로 삼고 살아가는 사람이어야 가능합니다. 오늘의 삶 가운데 사람들에게 범죄하거나 어리석은 일을 하거나
잘못된 행동을 하지 않으며, 또한 이러한 일을 당하여도 오직 하나님께서 사랑하시고 절망 속에 있는 사람을 섬기는 자가 되어 세상을
새롭게 하는 주체가 되시기 바랍니다.
악을 행하는 자에게 악을
악으로 갚지 않았던 다윗처럼 나에게 범죄하거나 어리석은 일을 가하거나 잘못을 행하는 자가 있다고 할지라도 악으로 갚지 않고
하나님께 심판을 맡기는 자가 되게 하시옵소서. 나아가 그들도 하나님의 사랑의 대상임을 생각하며 하나님을 섬기는 자로서 그들도 섬길
수 있는 자가 되어 오염되고 허물어지는 이 세상을 새롭게 만드는 주체가 되게 하시옵소서.
실패와 후회의 연속적인 삶을 살아가는 인생
우리의 삶을 돌아보면 실패와 후회의 연속이라고 하겠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에 대해서도, 사람들과의 관계에 대해서도, 일에 대해서도, 물질에 대해서도 그렇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열심히 산
사람이라면 나는 별로 후회할 것이 없다고 자부할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성경적 기준으로 하나님의 평가를 우리에게 한다면 과연
‘나는 그렇지 않다’고 자부할 수 있는 사람이 있을까요? 그러면 왜 그렇다고 보시나요?
에녹처럼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지
못했기 때문이지요. 역사의 주관자이신 하나님 아버지의 뜻에 명중하는 하나님과 동행, 순종하는 삶만 살았다면 예수님처럼 실패와 후회
할 것이 없이 하나님과 사람들에게 인정과 사랑과 존경을 받으면서 살아왔을 것이며, 살아 갈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어떻게 하면 실패와 후회를 막을 수 있을까요? 오늘 본문을 통해서 그 해답을 찾고자 합니다.
사울의 후회와 회개
도움이 되지 못하는 군대 장관 아브넬
사울은
자기의 사위이자 나라를 구해준 은인이며, 나라의 왕으로 세울 다윗을 시기하여 아브넬을 중심으로 군사 3000을 거느리고 죽이기
위해서 추적 중이었다. 그들은 십황무지 하길라산 길가에 진을 치고 피곤해서 잠을 청하고 있었다. 그때 다윗과 스루야의 아들
아비새가 그 군사 틈 한 가운데서 잠을 자고 있었다. 그 상황은 아비새가 말한 것처럼(26:8) 한 칼에 사울을 죽일 수 있는
상황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윗은 원수 갚는 것은 하나님께 맡기고 사울의 칼과 물병만 들고 나왔다. 그리고 다윗이 멀리서
사울의 군대장관 아브넬에게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네가 용사가 아니냐 이스라엘 중에 너 같은 자가 누구냐 그러한데 네가
어찌하여 네 주 왕을 보호하지 아니하느냐 백성 중 한 사람이 네 주 왕을 죽이려고 들어갔었느니라 네 행한 이 일이 선치 못하도다
여호와께서 사시거니와 여호와의 기름 부음받은 너희 주를 보호하지 아니하였으니 너희는 마땅히 죽을 자니라 이제 왕의 창과 왕의 머리
곁에 있던 물병이 어디 있나 보라’(삼상 26:15-16) 다윗의 아브넬에 대한 이 질문을 통하여 자기중심적으로 행동할 때
하나님이 은혜를 주지 않으면 자기 주변의 사람은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한다는 사실을 교훈 해 준다. 아브넬은 직무유기를 한
사람으로 볼 수 있다. 이것도 하나님이 하신 것이다.
대단히 후회한 사울
사울은 다윗이 아브넬과 대화하는 대화를 들었다. 그리고 사울이 다윗에게 다음과 같은 말을 들었다. ‘내
주 왕이여 내 음성이니이다 또 가로되 내 주는 어찌하여 주의 종을 쫓으시나이까 내가 무엇을 하였으며 내 손에 무슨 악이 있나이까
청컨대 내 주 왕은 이제 종의 말을 들으소서 만일 왕을 격동시켜 나를 해하려 하는 이가 여호와시면 여호와께서는 제물을 받으시기를
원하나이다마는 만일 인자들이면 그들이 여호와 앞에 저주를 받으리니 이는 그들이 이르기를 너는 가서 다른 신들을 섬기라 하고
오늘날 나를 쫓아내어 여호와의 기업에 붙지 못하게 함이니이다 그런즉 청컨대 여호와 앞에서 먼 이 곳에서 이제 나의 피로 땅에
흐르지 말게 하옵소서 이는 산에서 메추라기를 사냥하는 자와 같이 이스라엘 왕이 한 벼룩을 수색하러 나오셨음이니이다’(삼상
26:18-20) 이 다윗의 말을 요약하면 다윗을 추격케 한 이가 하나님이시면 자신이 기꺼이 희생제물과 같이 죽겠지만,
사람들이 부추겨서 한 일이면 그들의 저주를 받을 것이라는 것이었다. 이것은 성도들이 하나님이 기뻐하시지 않는 일을 할 때 믿는
자들을 실족케 할 뿐 아니라 믿지 않는 자들이 하나님께로 나오오지 못하도록 가로 막는 일을 하게 될 뿐이라는 의미도 내포 되어
있다. 이 말을 들은 사울은 ‘사울이 가로되 내가 범죄하였도다 내 아들 다윗아 돌아오라 네가 오늘 내 생명을 귀중히
여겼은즉 내가 다시는 너를 해하려 하지 아니하리라 내가 어리석은 일을 하였으니 대단히 잘못되었도다’(삼상 26:21)고 그의
계획이 실패로 돌아 간 것을 깨달음과 동시의 자신의 잘못에 대해서 대단한 후회를 하였다. 사울은 무의미한 일에 목숨을 걸었던
열심이 참으로 후회로웠던 것입니다.
다윗의 사랑과 승리
다윗은 여호와께서 기름 부어 세운 왕 사울에 대한 원수 갚는 일을 자기 손으로 하지 않고 하나님께 맡겼다. 그리고 오직 하나님만 신뢰하였다.
‘다윗이
대답하여 가로되 왕은 창을 보소서 한 소년을 보내어 가져가게 하소서 여호와께서 각 사람에게 그 의와 신실을 갚으시리니 이는
여호와께서 오늘날 왕을 내 손에 붙이셨으되 나는 손을 들어 여호와의 기름 부음을 받은 자 치기를 원치 아니하였음이니이다 오늘날
왕의 생명을 내가 중히 여긴 것같이 내 생명을 여호와께서 중히 여기셔서 모든 환난에서 나를 구하여 내시기를
바라나이다’(삼상26:22~24)
따라서 결국 자기를 죽이려고 했던 사울의 입을 통해서도 자신의 승리를 비는 축복의 말을 들을 수 있었다.
‘사울이 다윗에게 이르되 내 아들 다윗아 네게 복이 있을지로다’(삼상 26:25)
이것은
자신을 지독히 미워하고 힘들게 하는 사람에게서까지 진심어린 축복의 말을 듣도록 하나님께서 하신 것이다. 이것이 가능 할 수
있었던 것은 다윗이 오직 생사화복의 주관자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그에게 모든 것을 맡겼기 때문이었다. 우리도 우리 힘으로 사랑하고
용서 할 수 없을 때, 미워하고 복수하려 하지 말고 하나님께 온전히 맡깁시다. 그럴 때에 주님의 원수의 목전에서 우리에게 승리의
잔치상을 베풀어 주실 것입니다.
‘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베푸시고 기름으로 내 머리에 바르셨으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시 23:5) 생사화복의 주관자 하나님께 모든 것을 맡기고 순종으로만 살아라
하나님
우리 아버지는 하나님의 뜻을 따르지 않고 자기 성질, 욕심, 고집에 사로잡혀 자신 뿐아니라 다른 사람들까지 동원하여 자기의
목적을 성취하려 하였지만 결국은 실패와 후회로 끝나게 하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하나님께 모든 것을 맡기고 성령의 인도와 말씀을
따라서 신실히 실천하는 자의 생명을 보호하시고, 모든 환난에서 구원해 주시고 은혜로 갚아 주십니다. 따라서
무의미한 일에 목숨 걸지 말고 생사화복의 주관자이신 하나님께 모든 것을 맡기고 순종으로만 나아가도록 합시다. 사울과 같은 후회와
실패를 막을 수 있습니다. 아울러 아비새와 같은 충신도 붙여 주실 것입니다. 사울과 같은 원수도 회개하도록 만들 것입니다.
원수들은 부끄러워질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함께하심의 놀라운 역사를 경험하는 주인공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생명싸개를 다른 번역에서는 생명 보자기라고 합니다. 한국의 전통 문화는 보자기 문화라고 합니다.
반면에 서구의 문화는 가방 문화라고 합니다.
가방은 부피가 있기 때문에 공간을 차지합니다. 그러나 보자기는 사용 후 접어서 보관하므로 공간을 아주 적게 차지합니다. 가방과 보자기를 비교할 때 두 가지 특징을 생각합니다.
첫째는 보자기는 어떤 모양이든지 감쌀 수 있습니다. 그러나 가방은 서류 또는 책과 같은 일정한 모양과 규격만 넣을 수 있습니다. 예를 들면 잔치집에서 얻는 떡과 음식은 보자기에 싸서 들고가는 것이 편리합니다. 만일 가방에 넣는다면 가방의 모양이 틀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둘째는 보자기는 밥상을 덮어 놓습니다. 그러나 가방으로 밥상을 덮을 수 없습니다.
생명싸개는 악인과 선인 모두의 생명을 용서하신 십자가라고 하겠습니다. 생명싸개는 모든 죄를 덮어주신 용서라고 하겠습니다.
♦ 1월 27일(목)
♦ 오늘 읽어야 할 말씀 : 사무엘상 25:1∼44 ♦ 묵상을 위한 주제 : 생명싸개(29절) ♦ 성구 : 사람이 일어나서 내 주(主)를 쫓아 내 주의 생명(生命)을 찾을찌라도 내 주(主)의 생명(生命)은 내 주(主)의 하나님 여호와와 함께 생명(生命)싸개 속에 싸였을 것이요 내 주(主)의 원수(怨讐)들의 생명(生命)은 물매로 던지듯 여호와께서 그것을 던지시리이다.
“생명싸개(the bundle of the living)” - 체로르 하하임
“나발”은 갈멜 족속 마온 사람이며 부자였으며 완고하고 행실이 악한 사람이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의 부인 “아비가일”은 총명하고 아름다웠다고 합니다.
다윗이 사울에게 쫓겨 고생할 때에 다윗이 보낸 용사들이 나발에게 은혜를 입게 해달라고 부탁하였을 때 나발은 “다윗이 누구기에 나에게 달라고 하는가?” 하며 다윗의 청을 거절했습니다.
다윗은 분노하여 용사들을 거느리고 나발을 습격하려고 합니다.
이때 나발의 아내 아비가일은 다윗을 접대하며 남편의 잘못에 대해 용서를 구했습니다.
다윗은 아비가일의 지혜와 피를 흘릴 것과 복수하는 것을 막아 해하지 않게 하신 것을 칭찬하며 네 집으로 평안히 올라가라고 합니다.
아비가일은 다윗에게 “내 주의 생명은 여호와와 함께 생명싸개 속에 있다.”고 말합니다.
“싸개”를 다른 말로 “보자기”라고 합니다. 따라서 ‘생명싸개’는 ‘생명보자기’라고 하겠습니다.
보자기는 두 가지 용도로 사용합니다.
첫째는 어떤 물건을 감싸는 것입니다. 둘째는 무엇을 덮어놓는 것입니다.
한국의 전통 문화를 “보자기문화”라고 합니다. 서구의 문화는 “가방문화”라고 합니다.
보자기에는 어떤 모양이든지 담을 수 있지만 가방에 담을 수 있는 것은 제한됩니다.
오늘의 말씀에서 생명싸개가 되신 하나님을 만나야 하며 그 의미를 소개합니다.
첫째, 생명싸개의 주인은 하나님
지혜로운 여인 아비가일은 분노한 다윗과 그의 추종자들이 남편 나발을 죽이려고 달려올 때 급하게 음식을 준비하고 다윗을 찾아가서 여호와의 싸움을 싸워야 할 위대한 왕께서 하찮은 사람 나발을 분노의 칼로 죽이면 악한 일을 될 뿐이라며 다윗의 화를 진정시킵니다.
남편의 생명을 지켰으며 다윗의 분노를 진정시킬 수 있는 용기를 갖춘 지혜로운 여인 아비가일처럼 지혜와 용기를 갖춘 믿음을 본 받아야 하겠습니다.
둘째, 생명싸개는 하나님의 보호
사울 왕에게 쫓겨 다니면서도 많은 추종자들이 다윗을 따르는 모습에서 아비가일은 다윗의 생명을 하나님이 지켜주신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전염병과 사고와 사건이 즐비한 세상에서도 항상 건강하게 평안을 누리며 살아가게 하시는 하나님의 보호하심을 깨닫는 일에 집중하시기 바랍니다.
생명싸개 안에 들어가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양의 문이 되신 예수님에게 더 가까이 나가야 합니다(요 10:9).
예수님은 광야에서 살아가는 우리들의 문이 되셔서 생명싸개 안으로 들어오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생명싸개는 모든 나라와 백성들을 감싸기도 하며 더럽고 흉악한 죄를 덮어주기도 합니다.
따라서 모든 교회와 성도들은 그 생명싸개 안에 들어가서 보호를 받으므로 건강한 생명을 유지하는 복된 그리스도인으로 세상의 이정표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 찬양 / 나의 생명 되신 주
예수 내 구주! 예수 내 생명! 예수 내 권세!
다윗의 성숙한 믿음
성숙한 믿음은 어떤 믿음입니까
성숙한 믿음이란 자신의 믿음을 생활에 옮기는 믿음입니다. 단순히 입술의 고백이 아니라 삶의 고백입 니다. 그러므로 믿음을 실천하는 사람이 성숙한 신앙인 입니다.
그래서 야고보 사도는 이렇게 말씀합니다(야고보서 2:22).
"믿음이 그의 행함과 함께 일하고 행함으로 믿음이 온전케 되었느니라."
이렇게 믿음과 일치되는 삶을 사는 것이 성숙한 믿음이라는 말씀입니다.
어떻게 믿고 사는 믿음이 성숙한 믿음입니까
첫째, 하나님의 약속을 굳게 믿는 믿음 둘째, 하나님의 능력을 굳게 믿는 믿음 셋째, 하나님의 섭리를 귿게 믿은 믿음
첫째, 하나님의 약속을 굳게 믿는 믿음
어떤 사람들은 확율을 믿음으로 오해하기도 합니다.
예를 들면 비행기가 떨어지지 않을 것을 믿기 때문에 비행기를 탄다고 합니다. 이들은 비행기를 타는 그 마음의 결심과 그 행동을 믿음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믿음이 아닙니다. 단지 확률일 뿐입니다. 비행기가 떨어지지 않을 것이라는 믿음은 자기 확신이며 자기 생각일 뿐 비행기 자체와는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내가 아무리 큰 믿음을 가지고 비행기를 타도 그 비행기는 떨어질 가능성이 있기 때문입니다. 비행기를 탄 사람의 믿음과 비행기와는 전혀 상관이 없기 때문입니다.
또한 비행기를 조종하는 사람과도 상관이 없습니다. 단지 안전 점검을 하고 비행사의 경험과 조종 실력이 있을 뿐, 비행기가 떨어지고 안떨어지고는 비행기 자체의 성능에 달려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으로 비행기를 탄다는 말은 우리들이 말하고 있는 믿음이 아닙니다. 그것은 단지 확율일 뿐 입니다. 비행기가 떨어지지 않을 것이라는 확율을 믿을 뿐입니다.
그러나 진정한 믿음은 인격적인 신뢰입니다.
절대자 하나님의 완전하시고 무오한 존재에 대한 신뢰가 믿음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은 오직 하나님에게만 드릴 수 있습니다.
따라서 믿음은 오직 하나님과 그 말씀을 믿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신격과 그 무오성에 자신을 전적으로 맡기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경이 말씀하는 믿음입니다.
아브라함이 믿음의 조상이라 불리워진 이유가 바로 이것입니다.
그는 하나님과 그분의 말씀을 굳게 믿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굳게 신뢰했습니다. 그래서 의롭다하는 칭찬을 들었습니다.
바울 사도는 이 사실을 이렇게 말씀합니다.
(롬4:17) 기록된바 내가 너를 많은 민족의 조상으로 세웠다 하심과 같으니 그의 믿은바 하나님은 죽은 자를 살리시며 없는
것을 있는 것 같이 부르시는 이시니라 (롬4:18) 아브라함이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 믿었으니 이는 네 후손이 이같으리라
하신 말씀대로 많은 민족의 조상이 되게 하려 하심을 인함이라 (롬4:19) 그가 백세나 되어 자기 몸의 죽은 것 같음과 사라의
태의 죽은 것 같음을 알고도 믿음이 약하여지지 아니하고 (롬4:20) 믿음이 없어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치 않고 믿음에 견고하여져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성숙한 믿음은 하나님과 그 분의 약속을 믿는 믿음입니다. 삶의 현 상황이 어렵게 보여도 하나님을 신뢰하고 그 말씀으로 평안을 갖는 것입니다.
“(사41:10) 두려워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니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니라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참으로 너를 도와 주리라 참으로 나의 의로운 오른손으로 너를 붙들리라”
이런 하나님의 약속을 신뢰하고 끝까지 의심하지 않는 것입니다.
여러분 모두가 이런 믿음으로 충만하시기를 바랍니다.
둘째, 하나님의 능력을 굳게 믿는 믿음
하나님은 말씀만 하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약속을 능히 이루실 수 있는 전능하신 분입니다.
바로 성숙한 믿음이란 이런 하나님의 능력을 신뢰하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바로 이런 믿음을 가졌습니다.
바울 사도는 아브라함에 대하여 이렇게 말씀합니다.
(롬4:21) 약속하신 그것을 또한 능히 이루실 줄을 확신하였으니 (롬4:22) 그러므로 이것을 저에게 의로 여기셨느니라
이삭을 통해 하늘의 별과 같이 자손을 주시겠다는 약속을 믿었습니다. 그리고 그 일을 이루어 주실 것을 의심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약속대로 얻은 아들, “독자 이삭을 제물로 바치라”는 말씀에도 순종했던 것입니다.
이렇게 성숙한 믿음은 하나님의 능력을 믿는 믿음입니다.
또한 오늘 야고보 사도의 말씀도 그것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믿는 자는 하나님의 능력을 믿고 신뢰하는 자라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믿는 자는 믿음의 행동을 한다”는 말씀입니다.
여러분
마음의 믿음은 구원을 이루고 행함은 반드시 축복을 이룸니다.
기도의 행함은 응답을 이루고
감사를 하면 감사의 조건이 많이 생기고
십일조를 드리면-물질의 복을 받고
교회의 봉사를 많이 하면 건강의 복을 받고
하나님에게 서원한 것과 약속한 것을 값아드리면 반드시 하나님의 보상이 나타납니다.
(충남 당진군:이장로의 경험담, 박집사의 경험담)
야고보 사도는 기생 라합을 두고 예를 삼습니다.
또 이와 같이 기생 라합이 사자를 접대하여 다른 길로 나가게 할 때에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이 아니냐
이 라합은 하나님의 크신 은혜를 받은 여자입니다.
여호수아가 여리고성을 점령할 때의 일입니다.
정탐군 둘이 여리고 성을 점탐하러 들어갔습니다. 여리고 성은 굳게 닫혀있었습니다. 당시의 최 강대국 애굽을 탈출한 백성이 그의 신 여호와와 함께 여리고로 쳐들어 온다는 소식을 들었기 때문입니다.
여리고 성 사람들은 이 소식을 듣고 간담이 녹았습니다, 그래서 성문을 굳게 닫아 걸고 있었습니다.
이때 정탐군이 성벽 위에 살던 라합의 집에 들어간 것입니다.
이때 라합은 이들에게 이렇게 자기의 믿음을 고백했습니다.
여호수아(2:8-15)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수2:8) 두 사람이 눕기 전에 라합이 지붕에 올라가서 그들에게 이르러 (수2:9) 말하되 여호와께서 이 땅을 너희에게
주신 줄을 내가 아노라 우리가 너희를 심히 두려워하고 이 땅 백성이 다 너희 앞에 간담이 녹나니 (수2:10) 이는 너희가
애굽에서 나올 때에 여호와께서 너희 앞에서 홍해 물을 마르게 하신 일과 너희가 요단 저편에 있는 아모리 사람의 두 왕 시혼과
옥에게 행한 일 곧 그들을 전멸시킨 일을 우리가 들었음이라 (수2:11) 우리가 듣자 곧 마음이 녹았고 너희의 연고로 사람이
정신을 잃었나니 너희 하나님 여호와는 상천 하지에 하나님이시니라 (수2:12-13) 그러므로 청하노니 내가 너희를 선대하였은즉
너희도 내 아버지의 집을 선대하여 나의 부모와 남녀 형제와 무릇 그들에게 있는 모든 자를 살려주어 우리 생명을 죽는데서 건져내기로
이제 여호와로 맹세하고 내게 진실한 표를 내라”
라합은 여호와 하나님을 상천하지(上天下地)의 하나님으로 믿었습니다. 하늘과 땅의 하나님이시며 전적 으로 능하신 하나님이심을 믿었습니다.
애굽의 장자를 멸하시고 홍해를 가르신 하나님, 아모리 족속의 힘센 왕 시혼과 옥을 쳐서 멸하신 하나 님이심을 믿었습니다. 그리고 가나안 땅을 이스라엘에게 주신 것도 믿었습니다.
그결과 그는 믿음의 행동을 했습니다.
정탐군을 숨겨 주고 자기의 보호를 요청했습니다. 그리고 여호와 하나님으로 맹세할 것을 요구했습니다.
결국 라합은 이스라엘의 하나님께로 돌아서서 하나님의 편이 된 것입니다.
이렇게 믿음은 하나님의 능력을 신뢰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약속 뿐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을 믿어 자신의 삶을 하나님께 전적으로 내어 맡기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성숙한 믿음입니다.
셋째, 성숙한 믿음는 모든 인생의 역경과 고난 속에서도 하나님의 섭리를 굳게 믿는 믿음이 성숙한 믿음입니다.
시편 116편을 쓴 믿음의 사람은 이렇게 고백하고 있습니다.
(시116:3) 사망의 줄이 나를 두르고 음부의 고통이 내게 미치므로 내가 환난과 슬픔을 만났을 때에 (시116:4) 내가 여호와의 이름으로 기도하기를 여호와여 주께 구하오니 내 영혼을 건지소서 하였도다
이 시인은 큰 고난과 슬픔에 잠겨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 고난이 이 시인을 어떻게 할 수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이 시인은 성숙한 믿음의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하나님께 대항하지 않았습니다.
도리어 그는 하나님께 더욱 나아가 부르짖었습니다. “여호와여 내 영혼을 건지소서”
그 결과 이 시인은 하나님의 구원을 받았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를 도우셨습니다.
그래서 이젠 이렇게 노래합니다.
(시116:5) 여호와는 은혜로우시며 의로우시며 우리 하나님은 자비하시도다 (시116:6) 여호와께서는 어리석은 자를
보존하시나니 내가 낮게 될 때에 나를 구원하셨도다 (시116:7) 내 영혼아 네 평안함에 돌아갈지어다 여호와께서 너를
후대하심이로다 (시116:8) 주께서 내 영혼을 사망에서,내 눈을 눈물에서,내 발을 넘어짐에서 건지셨나이다
그리고 이렇게 힘 주어 말합니다.
(시116:10) 내가 믿는고로 말하리라 내가 큰 곤란을 당하였도다
그는 이제 여유가 생겼습니다. 그래서 “내가 믿기 때문에 말한다. 내가 큰 곤난을 겪었었도다” 그는 하 나님의 섭리를 믿었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을 믿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도움을 간청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하나님의 섭리 안에서 노래하게 되었습니다.
믿음의 사람들이 고난의 때를 넘긴 후 기쁨의 간증을 하듯, 이 시인이 바로 그런 심정으로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요한 웨슬리 늦 결혼 부인이 악처 원고를 서놓으면 불에 태우기 일수, 한번은 어떤 교인이 목사님 댁을 방문했는데 부인
로잘린 여사가 머리채를 끌고 이리저리 내동댕이치고 폭언을 하더란다. 결국 나중에 보따리 싸가지고 집을 나가버렸는데 나중에 객사하고
말았단다. 그러나 웨슬리는 불행한 가정환경속에서도 굴하지 않고 그 위대한 사역을 88세까지 혼자 살면서 영국 을 복음화
하기위하여 헌신한 훌륭한 인물이 되었단다.
찬송가 “338장 인애하신 구세주여”를 작시한 fanny crosby 라는 사람은 소경, 벙어리 귀머거리 였다. 그러나 그는 좌절하지 않고 영혼을 찬양하는 시를
3.000곡이나 작시 한 사람 이다. 어려운 역경속에서도 좌절하지 않고 분투 노력한 결과 위대한 역사덕 인물이 되였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슬픔이 있습니까 고난 중에 있습니까 하나님의 섭리를 믿으십시요. 그리고 하나님께 부르짖으십시요. “내 영혼을 구하소서” 간구하여 보십시요.
곧 기쁨의 간증을 하시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도움을 말하지 않고는 못 배기게 될 것입니다.
성숙한 믿음의 사람들은 이렇게 고난 속에서도 하나님을 섭리를 신뢰하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결론: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우리는 성숙한 믿음의 삶을 위해 믿음이 자라야 함을 들었습니다.
성숙한 믿음이란 하나님의 약속을 굳게 신뢰하는 믿음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자신의 약속을 능히 이루실 것을 확신하는 믿음입니다.
또한 이런 믿음은 어떠한 역경 속에서도 하나님을 의지하는 믿음입니다.
오늘 우리 모두가 이런 성숙한 믿음의 사람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사랑”은 반드시 “거룩함”이라는 궤도 위에서
움직여야 합니다. 모든 “사랑”은 기준이 있어야 바른 사랑이 될 수 있는데 그 기준이 바로 “거룩함”입니다.
사랑이란 단어가 사용된 구절 수 517 거룩이란 단어가 사용된 구절 수 447
(성경에 “거룩하다”는
말은 611회, “사랑”은 488회)
“사랑”이라는 엔진이 아무데나 굴러가면 무절제의 도구가 되는데 하나님의
“거룩하심”이 “사랑”의 엔진을 조절하여 바른 곳으로 인도하시므로 그것은 “사랑”보다 높은 것입니다.’
동성애 문제와 주님의 결혼관을 성경
말씀에서 찾아보는 것도 좋을 것 같습니다.
동성애에 대한 것입니다. “이러한 까닭에 하나님께서 그들을 수치스런 애정에 내
주셨으니 심지어 그들의 여자들도 본래대로 쓸 것을 본성에 어긋나는 것으로 바꾸었으며 남자들은 이와 같이 본래대로 여자 쓰기를
버리고 서로를 향해 욕정이 불 일 듯하여 남자가 남자와 더불어 보기 흉한 짓을 행함으로 자기 잘못에 합당한 보응을 자기 속에
받았느니라. 또한 그들이 자기 지식 속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매 하나님께서도 그들을 버림받은 생각에 내주사 합당하지 못한 일들을
행하게 하셨으니”(로마서 1:26-28).
결혼에 대하여 복음서에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응답하여 이르시되, 너희 마음이 강퍅하므로 그가 너희에게 이 훈계를 기록하였거니와 창조의 시작부터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남성과 여성으로 만드셨으니 이런 까닭에 남자가 자기 아버지와 어머니를 떠나 자기 아내와 연합하여 그들 둘이 한 육체가 될지니라.
그런즉 이와 같이 그들이 더 이상 둘이 아니요, 한 육체이니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할지니라
하시니라”(마가복음 10:5-9).
우리는 지금 복잡한 사회에 살고 있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는 복음의 한 획도 바꿀 수
없으며 바꾸어서도 안 됩니다. 인간의 유전자나 교단의 헌법이 복음을 바꿀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가장 바라시는 것은 영혼을
구원하시는 일입니다. 아주 조그마한 바늘구멍으로도 물이 스며들 수 있으며 곧 수습할 수 없는 커다란 출입구가 될 것은 자명한
일입니다. 미리 수습해야만 합니다.
‘로스앤젤리스
근교 롤랜드 하이츠에 있는 선한목자장로교회(고태형 목사)가 미국장로교단(PCUSA)에서 탈퇴한다고 공식 발표했다.
선한목자장로교회는 PCUSA에 속해 있던 대표적인 한인교회 중 하나다. 샌 가브리엘 노회 소속인 선한목자장로교회는 고난주간 첫날인
3월 30일, 공동회의를 열고 교회원 745명이 참석한 가운데 교단 탈퇴 안건을 찬성 709명, 반대 33명, 무효 3명의
압도적인 표차로 통과시켰다. 이에 선한목자장로교회측은 “더 이상 선한목자장로교회 당회와 이사회는 PCUSA가 아니다”라고
선언했으며, “복음주의장로교단(ECO, Covenant Order of Evangelical Presbyterians)에 가입하길
희망한다”고 밝혔다.
선한목자장로교회측은 탈퇴를 결정하게 된 이유로 1. 교단이 신학적으로 진보성을 띠며 성경을
왜곡하고 있다 2. 공동회의 91% 이상이 교단 탈퇴를 찬성한다 3. 노회가 재산권 문제로 정책을 개정해 탈퇴를 어렵게 만든다.
선한목자장로교회는 3년 전부터 PCUSA의 동성결혼 수용에 대한 정책에 이견을 보이며 교단 탈퇴 절차를 진행해 왔다. 이
과정에서 교회는 건물과 재산권 등을 두고 노회 및 노회 탈퇴 반대측과 갈등을 빚어왔다.
이 교회의 PCUSA 교단
탈퇴는 공식화되었지만, 건물을 지키려는 교회와 교단 헌법에 따라 재산권을 주장하는 노회의 분쟁이 다시 뜨거운 쟁점이 되고 있는
가운데, 또 다른 PCUSA 소속 한인 교회들의 교단 탈퇴가 이어질지 주목된다.‘ 사무엘상 24장 내용 요약
다윗은 하나님의 섭리적 사건을 통해 사울의 추격으로부터 극적으로 벗어났다. 그리고 곧이어 다윗에게 사울을 죽일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오게 되었다. 하지만 다윗은 사울의 겉옷자락만 베었다. 이는 다윗이 기름부음받은 왕을 자기 손으로 살해하는 것을 원치
않았기 때문이며, 또한 굳이 그렇게 하지 않아도 하나님의 섭리로 인해 사울이 제거되리라고 확신했기 때문이다. 조금 후에 이 사실을
알게 된 사울은 양심의 가책을 받아 울었고, 다윗에게 왕권이 넘겨지리라는 것을 인정하였다. 사울은 다윗 앞에서 실질적인 패배자가
된 것이다.
23장 27절에서 블레셋 침공 소식을 전령에게 듣고 돌이켰던 사울이 다시 다윗을 찾습니다(1절). 일반적인 전쟁 언급에는 승리
혹은 패배의 기록이 등장하는데, 본문은 말하지 않습니다. 사울에게는 블레셋이 전혀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질투와 복수에 눈이 멀었기
때문입니다. 다윗은 그가 싸워야 할 대상이 아닌, 함께 힘을 모아 블레셋과 싸워야 하는 동료였습니다.
가족 간에, 교회 안에서,
그리고 사회생활을 하며, 비교하고 경쟁하지 말아야 할 대상을 이기기 위해 노력하다 진이 빠질 때가 있습니다.
사울을 반면교사
삼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잘못된 경쟁의식을 갖는다면 결국 가장 지고 싶지 않은 사람에게 치부, 사울의 경우는 대변을 보는
장면, 를 보이게 될 것이라 말씀하십니다.
다윗은 사람을 사랑하고, 사람들의 사랑을 받고 있습니다. 사람들의 지지를 받고 있으면 기분이 좋아집니다. 무엇이든지 잘할 수 있을
것 같고, 해도 될 것 같습니다. 하지만 다윗은 지지율에 취하지 않았습니다. 다윗의 사람들은 4절에서 ‘여호와께서 당신에게
이르시기를 내가 원수를 네 손에 넘기리니 네 생각에 좋은 대로 그에게 행하라 하시더니 이것이 그 날이니이다’ 라고 설득합니다.
사실 성경에는 이런 구절이 나오지 않습니다. 설령 비공식적인 루트를 통해 이러한 예언이 사적으로 전달되었다고 해도, 다윗은 상황에
쫓겨 충동적인 결정을 내리지 않고 지겨울 정도로 ‘원칙과 정당성’을 따짐을 보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삶은
일상에 휩쓸리지 않고, 매순간 ‘하나님 백성으로서의 원칙과 정당성’을 따지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다윗이 사울을 대하는 방식을 주목해야 합니다(9-15절).
그는 사울을 ‘내 주 왕’이라고 부르고 엎드려 절합니다(8절).
문제의 원인을 사울이 아닌 다른 사람들로 돌립니다(9절). 자신이 사울을 죽일 수 있었음을 자랑하지 않습니다. 어떤 상황이
있었는지 담담하게 사실을 전합니다(10절). 11절에서 사울을 ‘아버지’라고 부릅니다. 12절에서는 ‘내 손으로는 왕을 해하지
않겠나이다’라고 약속합니다.
13-15절은 당시 속담을 인용해 자신을 죽은 개나 벼룩이라고 표현할 뿐 아니라, 그런 자신을 죽이러
나오는 사울이 악인이 아닌지 묻습니다. 마지막으로 ‘당신은 여호와께서 세우신 왕이니 여호와께 의견을 물어보기를’ 권합니다.
겸손과 인내와 용서와 사랑이 담긴 메시지입니다.
그리고 사울은 ‘베어진 옷자락’을 봅니다. 그는 전에 길갈에서 사무엘의 겉옷 자락을 찢은 적이 있습니다. 사무엘상 15장 27-28절입니다.
“27 사무엘이 가려고 돌아설 때에 사울이 그의 겉옷자락을 붙잡으매 찢어진지라 28 사무엘이 그에게 이르되 여호와께서 오늘 이스라엘 나라를 왕에게서 떼어 왕보다 나은 왕의 이웃에게 주셨나이다 ”
하나님 말씀을 무겁게 여기지 않고 명령을 어겼던 사울이 사무엘을 억지로 붙잡다가 옷이 찢어졌습니다. 찢어진 옷자락은 자신이
왕으로서의 수명을 끝냈다는 사형선고였습니다. 그리고 지금 찢어진 옷자락을 통해 그때 느꼈던 후회와 비통함을 떠올립니다. 자신은
욕심과 집착으로 옷을 찢었지만, 다윗은 용서와 인내로 옷을 베었습니다. 둘 사이의 간극이 절대적입니다. 돌이키기엔 너무
늦었습니다. 이제 자리를 내주어야 할 시간입니다. 시선이 베어진 옷자락에서 다윗의 입으로 향합니다. 듣기 시작합니다. 다윗의 말은
사무엘의 말을 떠올리게 합니다. 둘 다 하나님의 메시지를 전했던 것입니다. 사울은 속내를 드러냅니다. 자신이 죄인임을
고백합니다. 다윗을 ‘아들’이라고 부릅니다(16절). 다윗이 자신을 선대했고, 의로우며, 원수로 여기지 않음을 알았다고
고백합니다(18절). 특별히 20절에서 이런 고백을 합니다.
“20 보라 나는 네가 반드시 왕이 될 것을 알고 이스라엘 나라가 네 손에 견고히 설 것을 아노니”
아이러니한 것은 이토록 감동적인 장면이 이루어졌으면 사울이 다윗을 얼싸안고 왕궁으로 향했어야 하는데, 22절에서 ‘사울은 집으로 돌아가고 다윗과 그의 사람들은 요새로 올라갔다’는
것입니다. 이토록 허탈한 엔딩은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사무엘상 24장은 그렇게 끝납니다. 인간은 여전히 죄인이고, 문제는
해결되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긴장과 갈등을 지나며 서로의 속내가 드러납니다. 무엇이 옳은지 각자의 말과 행동으로
증언합니다. 그렇게 천천히 하나님 나라가 임합니다.
본문을 적용하며 가정을 기준으로, 구역이나 봉사팀이나 교회를 기준으로, 나아가 사회생활을 하며 겪는 직장이나 국가를 기준으로 삼을
수 있습니다. 우리는 사울인지, 다윗인지, 생각 없이 끌려 다니는 무능력한 사울의 사람들인지, 실력은 있지만 분노에 정신을 맡긴
다윗의 사람들인지 항상 스스로를 점검해야 합니다.
조금 더 깊게 들어간다면 나라는 사람 가운데 ‘사울’이 있음을 깨달아야 합니다. 그는 다윗에게 왕위를
넘겨야 했습니다. 하지만 죄로 가득한 사울의 본성은 싸워야 할 대상이 아닌, 예수 그리스도를 죽이러 쫓습니다. 양심을 제거하고,
그리스도의 자리를 지우기 위해 애씁니다. ‘내 마음대로 살려고 하는’ 욕구입니다. 하지만 우리 속에 있는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분노와 폭력과 복수로 갚으시는 것이 아니라, 인내와 용서와 사랑으로 우리를 설득하십니다. 내 속에서 사울의 모습과 다윗의 모습이
뒤엉켜 있습니다. 그 긴장과 갈등이 여전히 반복된다고 해도 좌절하며 포기하지 말아야 합니다. 비록 24장 마지막처럼 아무것 변하지
않는 하루라도, 하나님 나라가 결국 이러한 긴장과 갈등을 지나며 우리 속에서 반드시 이루어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 1월 26일(수)
♦ 오늘 읽어야 할 말씀 : 사무엘상 24:1∼22 ♦ 묵상을 위한 주제 : 왕의 옷자락(1절)
“왕의 옷자락(this piece of your robe)”
사울 왕의 추격으로 인하여 다윗은 엔게디 황무지로 도피했습니다. 사울은 3천여 명의 병력을 조직하여 다윗을 쫓습니다. 사울이 들염소 바위에 이르렀을 때에 용변을 보려고 부근의 동굴로 들어갔을 때 그 굴 깊숙한 곳에는 다윗과 그의 용사들이 숨어 있었습니다. 사울을 죽이거나 체포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찾아왔습니다.
다윗의 용사들은 그 기회를 결코 놓치지 말 것을 종용하여 이르기를 “오늘이 바로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날입니다. 여호와께서는 ‘내가 네 적을 너에게 넘겨 줄 테니 네 마음대로 하여라’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내가 네 적을 너에게 넘겨 줄 테니 네 마음대로 하라”고 말씀하신 적이 없었습니다.
다윗의 용사들은 사울이 다윗을 핍박하는 상황과 다윗이 기름 부음 받은 사실에서 자기들의 생각을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말했습니다.
다윗의 부하들은 사울이 죽으면 기약 없는 방랑 생활을 끝내고 다윗이 왕으로 등극하는 시기를 상당히 앞당길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사울을 죽이지 않고 그의 겉옷 자락의 일부를 칼로 잘랐습니다. 사울 왕을 죽일 수 있었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사울에게 보여주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다윗은 사울 왕의 겉옷 일부를 자른 것조차 마음에 찔렸다고 합니다. 다윗이 사울을 죽인 것도 아닌데 왜 겉옷 자락을 벤 것만으로도 마음에 찔려 괴로워했을까요?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겉옷이란 옷과 이불을 겸한 것이었으며 그 사람의 종교적 및 사회적 권위와 정체성을 대변하는 것이었기에 아주 중요한 것이었습니다(출애굽기 22:26∼27).
당시
사람들은 겉옷만 보아도 누구인지 알 수 있는 특징적인 것이었다고 하겠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다윗이 사울의 몸을 해치지 않았지만
겉옷을 벤 것으로 사울 왕의 권위에 치명적인 손상을 준 것이라고 생각했으며, 이와 같은 상징적인 행동으로 흥분한 부하들을
진정시킬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이 사건을 계기로 사울을 죽일 수 있었지만 죽이지 않았다는 증거를 제시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자기 사람들에게 “내가 손을 들어 여호와의 기름 부음을 받은 내 주를 치는 것은 여호와께서 금하시는 것이니 그는 여호와의 기름 부음을 받은 자”라고 말을 한 것에서 다윗의 신앙을 엿볼 수 있습니다.
기름 부음이란 하나님께서 거룩하게 구별하셨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다윗이 사울을 기름 부음 받은 자라고 생각하고 죽이지 않은 것은 하나님께서 사울을 구별하여 세우셨다는 것을 강조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세우셨다면 하나님께서 그 목적을 이루시기까지 사람이 함부로 해할 수 없다는 것이 다윗의 신앙이었다고 하겠습니다.
사울이 뛰어난 신분이거나 귀한 존재이기 때문이 아닙니다. 이미 사울은 하나님에 의해 버림을 받았습니다. 그러므로 언젠가 하나님의 때가 되면 하나님께서 친히 사울을 왕의 자리에서 내리시고 그의 삶을 마무리 지으실 것입니다.
우리가 이와 같은 사례에서 깨달아야 하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에 나를 적용시켜야지 나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적용시켜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말씀이 나를 따라오게 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말씀을 따라가야 합니다.
내가 생각할 때 좋은 기회가 오면 그것이 곧 하나님의 뜻이라고 생각합니다. 아무리 좋은 기회와 유리한 상황 그 자체가 내게 닥쳐올지라도 그것은 하나님의 뜻에 대한 증거가 될 수 없습니다. 좋은 기회이므로 하나님의 뜻이라는 생각은 자기 입장에만 갇혀 이기적인 삶을 살아가는 삶이라고 하겠습니다. 어떤 상황도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에 계시되어 있는 원리를 대신 할 수 없습니다.
성경에서 강조하는 의인이란 “하나님과의 관계 안에 있는 사람”을 말합니다. 의인은 희생하는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의인을 죽이려고 하거나 핍박하는 자를 악인이라고 합니다.
다윗의 관심은 사울 왕에 대한 승리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세우는 제사장 나라입니다. 제사장 나라가 되면 그곳에 메시아가 오실 것입니다. 다윗 왕국은 메시아 왕국을 미리 보여 주는 언약의 나라로 세워질 것입니다.
오늘도 내 안에 주님이 거하시므로 천국으로 이루어 천국이 내 안에 내가 천국 안에서 행복한 삶을 누리며 살아가는 은총의 삶을 자랑하는 복된 하루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다윗은
자신의 피신처가 사울에게 노출되는 위험 부담을 무릅쓰고서, 블레셋 사람의 군대와 싸워 그일라 사람들을 구출했다. 그러나 그일라
사람들은 은혜를 저버리고 다윗의 피신처를 사울에게 밀고하였다. 아마 놉 성읍에 대한 사울의 잔인한 행위가 그들에게도 알려졌을
것이다. 그래서 다윗이 피신하는 곳마다 그곳 사람들은 사울을 두려워하여 소극적이든지 적극적이든지 다윗의 피신처를 알려주었던 것
같다. 십 사람들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19절). 하지만 일반 백성들의 그러한 태도와는 달리, 요나단은 다윗을 이스라엘의 왕으로
세우시려는 하나님의 뜻을 확신하고 다윗을 격려하였다.
♦ 1월 25일(화)
♦ 오늘 읽어야 할 말씀 : 사무엘상 23:1∼29 ♦ 묵상을 위한 주제 : 그일라를 구원하라(2절) ♦ 성구 : 이에 다윗이 여호와께 묻자와 가로되 내가 가서 이 블레셋 사람을 치리이까 여호와께서 다윗에게 이르시되 가서 블레셋 사람을 치고 그일라를 구원(救援)하라 하시니.
“그일라를 구원하라(save Keilah)”
다윗이 십 광야에 숨어 있을 때 십 사람들이 사울에게 나아와서 다윗이 숨어 있다는 것을 알려줍니다. 사실 그들은 다윗과 같은 유다지파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도 다윗을 고발합니다. 그 이유는 다윗을 고발함으로써 보상을 받겠다는 속셈일 수도 있지만 사울이 두려워서 어쩔 수 없이 고발했을 수도 있습니다.
사울은 그들에게서 첩보를 받고 다윗을 붙잡기 위해 출동합니다. 이제 사울과 다윗의 쫓고 쫓기는 추격전이 시작됩니다. 사울이 잡으러 오면 다윗은 도망가는 일이 반복됩니다. 사울은 지역을 포위하려고 합니다. 이제는 도망갈 곳이 없습니다.
그런데 그 순간 블레셋 사람들이 이스라엘을 공격했다는 소식이 사울에게 들려옵니다. 사울은 다윗 추격을 멈추고 전쟁터로 달려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역설적으로 블레셋 덕분에 다윗과 그 일행들은 위기에서 벗어날 수 있었습니다.
블레셋의 개입은 하나님의 섭리로 이루어진 일이었습니다. 전혀 생각지도 못한 방법으로 하나님은 다윗을 구해내셨습니다. 다윗을 광야에서 훈련과 연단의 과정을 경험하게 하지만 끝까지 철저하게 보호하십니다.
때로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도 광야를 지나도록 허락하실 때가 있습니다. 하지만 그 곳에서도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보호하십니다.
감당할 시험만 허락하시고 능히 피할 길을 보장하십니다(고전 10:13).
"사람이 감당할 시험 밖에는 너희가 당한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하지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하지 아니하시고 시험 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
이와 같은 연단과 시련의 과정은 우리의 믿음을 강하게 합니다.
지금 광야를 지나고 있습니까? 하나님을 더욱 의지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광야에서 우리가 하나님을 더욱 의지하도록 양육합니다. 우리의 생각을 뛰어넘는 방법으로 우리를 보호하시고 인도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만이 우리의 구원자이시라는 것을 확실하게 배워야 합니다.
우리의 구원자이신 하나님 거센 비바람과 풍랑 가운데서 견고한 바위가 되어 안전의 항구로 인도하옵소서.
♪ 찬양 / 주 없이 살 수 없네
예수 내 구주! 예수 내 생명! 예수 내 권세!
사무엘상 22장 흐름정리
다윗은 아둘람 굴과 모압 미스베로 도피하였고, 선지자 갓의 조언에 따라 유다 땅(헤렛 수풀)으로 들어갔다. 이 약속의 땅과
이스라엘 백성에게서 떨어져 있어서는 안된다는 사실과, 다윗의 유일한 은신처와 요새가 여호와시라는 사실을 주지시키는 메시지였다.
한편, 6절 이하는 도엑의 밀고로 인해 놉에 있는 제사장들과 그 가족들이 살육당한 끔찍한 사건을 보도한다. 사울은 오직 다윗을
죽여야 한다는 일념으로 가득했기 때문에, 그에게 조금이라도 도움을 준 사람들이면 모두 처단하는 살인마로 변해 있었다.
♦ 1월 24일(월)
♦ 오늘 읽어야 할 말씀 : 사무엘상 22:1∼23 ♦ 묵상을 위한 주제 : 환난 당한 모든 자(2절) ♦ 성구 : 환난(患難) 당(當)한 모든 자(者)와 빚진 자(者)와 마음이 원통(寃痛)한 자(者)가 다 그에게로 모였고 그는 그 장관(將官)이 되었는데 그와 함께한 자가 사백 명(名) 가량(假量)이었더라.
“환난 당한 모든 자(All those who were in distress)”
블레셋 가드 지역으로 피신했던 다윗이 이스라엘의 아둘람 굴로 돌아왔을 때 환난 당한 많은 사람들이 다윗에게로 돌아왔습니다.
이 사람들은 사울의 통치하에서 정치적으로 또는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었던 사람들이었습니다(1∼2절).
다윗은 이렇게 모인 사람들을 모두 자신의 보호 아래 두었고 다윗은 그들의 장관이 되었습니다.
이스라엘로 돌아온 다윗은 부모의 방문을 받고 부모를 안전한 곳으로 피신시키기로 결심하고 모압 왕에게 의탁하도록 부탁합니다(3∼4절).
다윗이 이스라엘로 돌아오자 여러 곳에 다윗의 소문이 퍼졌습니다.
이 소식을 들은 사울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다윗이 숨어 있는 곳을 알려달라고 명령합니다.
이때 도엑이라는 에돔 사람이 제사장 아히멜렉이 다윗에게 먹을 것과 골리앗의 칼을 주었다고 사울 왕에게 고발합니다(9∼10절).
사울은 제사장 아히멜렉을 비롯하여 그 일가 85명을 학살합니다.
이때 아히멜렉의 아들 아비아달은 구사일생으로 다윗에게로 도피하여 모든 사정을 알리고 다윗의 보호를 받게 됩니다.
훗날 아비아달은 다윗의 도움으로 아버지의 뒤를 이어 이스라엘의 대제사장 직분을 감당하게 되었습니다.
성경은 분명하게 증언합니다(이사야 43:1b).
“너는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
세상의 신은 평강을 위장한 두려움을 주려고 하지만 전능하신 여호와 하나님은 참 평강을 약속하셨습니다.
두려움에 감추어진 평강을 원합니까? 아니면 평강에 싸여진 두려움을 원합니까?
믿음이란 두려움 가운데서 평강을 바라 볼 수 있는 힘을 말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코로나에 의한 두려움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위기를 극복할 수 있는 방법을 알고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너희가 시험을 당할 때에 이길 수 있는 힘도 주실 것이라는 약속의 말씀을 믿고 위기를 극복하면 코로나 시련을 극복한 최초의 인물이 될 수 있습니다.
믿음으로 위기를 극복하는 건강한 승리자로 살아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 찬양 / 환난과 핍박 중에도
예수 내 구주! 예수 내 생명! 예수 내 권세!
♦ 1월 22일(토)
♦ 오늘 읽어야 할 말씀 : 사무엘상 21:1∼15 ♦ 묵상을 위한 주제 : 거룩한 떡(4절) ♦ 성구 : 제사장(祭司長)이 다윗에게 대답(對答)하여 가로되 항용 떡은 내 수중(手中)에 없으나 거룩한 떡은 있나니 그 소년(少年)들이 부녀(父女)를 가까이만 아니하였으면 주리라.
“거룩한 떡(consecrated bread)”
사람은 일생동안 세 번의 중요한 만남을 갖고 살아갑니다.
첫째는 부모와의 만남 둘째는 친구와의 만남 셋째는 배우자의 만남
그리스도인들에게는 한 가지 더 중요한 만남이 있습니다. 그것은 목회자와의 만남이라고 하겠습니다. 어떤 목회자를 만나느냐에 따라 나의 신앙생활이 성경적인 삶이 될 수도 있고 비성경적인 삶이 될 수도 있습니다.
다윗과 요나단의 만남을 성경에서 가장 아름다운 친구의 우정이라고 합니다.
한편 사무엘상 21장에서 다윗과 제사장 아히멜렉의 관계를 엿볼 수 있습니다. 사울 왕이 다윗을 죽이려고 하므로 다윗은 놉 땅으로 도망쳤습니다. 놉 땅에서 다윗은 제사장 아히멜렉에게 함께 하는 일행들에게 먹을 것을 달라고 합니다. 아히멜렉은 제사 때에 떡상에 올려진 거룩한 떡을 다윗에게 주었습니다. 이것 때문에 아히멜렉과 에봇을 입은 제사장들이 사울에게 죽임을 당합니다(22:18).
사랑하는 믿음의 사람들이여 나는 어떤 만남의 관계를 갖고 살아가고 있습니까? 부모님의 은혜를 잊지 말아야 합니다. 친구와의 우정을 깊이 새겨야 합니다. 배우자와의 사랑을 넓고 높고 깊게 다져야 합니다. 이러한 삶을 위하여 여호와가 나의 목자가 되심을 고백했던 다윗과 같이 목회자와의 관계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할 수 있는 은총의 신앙을 확인할 수 있는 은혜를 기도해야 하겠습니다.
다윗에게는 다윗을 도와주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사울에게는 도엑과 같이 고자질하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나는 어떤 사람으로 살아왔는지 생각하며 도와주는 사람으로 오래도록 기억되어야 하겠습니다.
믿음의 사람들이 이 세상 사람들로부터 별의 별 소리를 들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세상 사람들의 소리에 민감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만을 바라보며 하늘의 음성을 듣는 일에 민첩한 신앙의 사람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부탁합니다.
♦ 오늘 읽어야 할 말씀 : 사무엘상 20:1∼42 ♦ 묵상을 위한 주제 : 한 걸음(3절) ♦ 성구 : 다윗이 또 맹서(盟誓)하여 가로되 내가 네게 은혜(恩惠) 받은 줄을 네 부친(父親)이 밝히 알고 스스로 이르기를 요나단이 슬퍼할까 두려운즉 그로 이를 알게 하지 아니하리라 함이니라 그러나 진실(眞實)로 여호와의 사심과 네 생명(生命)으로 맹서(盟誓)하노니 나와 사망(死亡)의 사이는 한 걸음 뿐이니라.
오늘의 말씀은 사울 왕의 시기와 질투로 다윗을 죽이려고 수단과 방법과 때를 가리지 않을 때에 일어났던 사건을 소개하는 말씀입니다.
사울과 다윗의 육신적 관계는 장인과 사위가 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권력에 대한 야망은 사위를 죽여야만 그 지위를 계속 누릴 수 있기 때문에 다윗을 죽이려고 합니다.
다윗은 사무엘을 찾아가서 잠시 사울의 음모로부터 피하려고 합니다. 그렇지만 다윗이 피한다고 해서 해결될 문제가 아님을 깨닫고 다윗은 요나단을 찾아왔습니다. 다윗과 요나단은 사울 왕이 여전히 다윗을 죽이려는 계획을 확인합니다. 그리고 두 사람은 영원히 배신하지 말자고 약속한 후에 다윗은 떠났습니다.
다윗은 누구입니까?
첫째는 육신적으로는 사울 왕의 사위가 됩니다. 둘째는 블레셋으로부터 이스라엘을 구한 애국자입니다. 셋째는 장차 왕위에 오르기 위하여 기름부음을 받은 사람입니다.
그러나 현실은 다윗이 라마 나욧으로 도망할 수밖에 없는 초라한 인생이 되고 말았습니다. 다윗으로 하여금 위대한 성군이 될 수 있도록 연단하시는 하나님의 놀라운 계획과 섭리를 깨달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사울의 아들 요나단은 다윗을 사랑하였기 때문에 다윗과 약속하기를 여호와께서는 다윗의 대적들을 치실지어다 하고 말할 수 있었습니다(16절).
사울은 처음에는 겸손하고 순수했습니다. 그러나 왕위에 오른 후에 권력의 맛을 본 후에는 무자비한 사람으로 변했습니다. 나라를 위해 큰 일을 많이 한 다윗조차도 권력 세습에 방해가 된다고 생각하여 다윗을 제거하려고 합니다. 사울은 권력의 속성에 의하여 완전히 무너져버렸습니다.
오늘날도 권력에 미쳐버린 사람은 사울과 같은 모습으로 등장합니다. 그러나 불의한 권력은 영원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공의로우신 하나님은 악한 권력을 무너트리고 정의가 넘쳐나는 세상을 세우려고 하시기 때문입니다(로마서 13:1).
“권세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지 않음이 없나니 모든 권세는 다 하나님께서 정하신 바라.”
오 전능하신 주여 공의가 넘쳐나는 세상 진리가 흘러 흘러 온 세상을 뒤덮어 새로운 세상으로 다듬어 주옵소서.
♪ 찬양 / 나의 영원하신 기업
예수 내 구주! 예수 내 생명! 예수 내 권세!
하나님께서는 왜 사울 왕을 괴롭히는 악신을 보내셨나요?
“여호와의 신이 사울에게서 떠나고 여호와의 부리신 악신이 그를 번뇌케 한지라” (사무엘상 16:14). 이 말씀은 또한 사무엘상
16:15-16, 23, 18:10, 19:9에서도 언급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사울에게 고통을 주는 마귀의 “악신”을 보내셨습니다.
사울은 하나님께 직접적으로 두 번 불순종했습니다(사무엘상 13:1-14; 15:1-35).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사울에게서
당신의 영을 거두시고 악신을 허락하셔서 고통을 주었습니다. 아마도 사탄과 귀신들은 늘 사울을 공격하기 원했을 것이고, 하나님께서는
이제 간단히 사탄과 귀신들에게 그렇게 하도록 허락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오늘날 우리에게도 고통을 주기 위해 악신을 보내실까요?
신약성경에는 형벌로써 사탄이나
귀신들에게 넘겨진 사람들의 예가 나옵니다. 하나님께서는 초대 교회에 대한 경고와 본보기로써, 아나니아와 삽비라로 하여금 사탄의
영으로 채워지게 허락하셨습니다 (사도행전 5:1-11). 고린도 교회의 한 남성은 근친상간과 간통을 저질렀는데, 하나님께서는
지도자들에게 그의 죄 된 본성을 멸하고 영혼을 구하기 위해 “이런 자를 사단에게 내어주[라]”고 명하셨습니다 (고린도전서
5:1-5). 예수님께서는 성령에 의해 인도되어 마귀에게 시험받으려 광야로 가셨습니다 (마태복음 4:1-11). 하나님께서는 또한
사도 바울에게 그가 받은 엄청나게 풍부한 영적 진리로 인해 자만하게 되지 말고,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에 의지하는 것을 가르치시기
위해 사탄의 사자를 허락하셔서 그를 고통스럽게 하셨습니다 (고린도후서 12:7).
만약 하나님께서 오늘날 사람들에게도 고통을 주시기 위해 악신을 허락하신다면,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유익과 당신의 영광을 위한
목적으로 그렇게 하시는 것입니다 (로마서 8:28). 귀신들은 사악하지만, 여전히 하나님의 주권적인 통제 하에 있습니다. 욥의
경우와 같이, 사탄과 그의 종들은 오직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허락하신 일만 할 수 있습니다 (욥기 1:12; 2:6). 이들은
절대로 하나님의 주권적이시고 완전하신 뜻과 목적으로부터 독립적으로 행동할 수 없습니다. 만약 믿는 자들이 마귀의 세력에 의해
고통받고 있다고 의심된다면, 첫 번째 대응은 알고 있는 모든 죄를 회개하는 것입니다. 그리고나서 그 상황으로부터 무엇을 배워야
하는지 알 수 있는 지혜를 구해야 합니다. 그 후에,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 속에 허락하신 모든 것에 복종하고, 그러한 복종이
믿음을 강하게 하고 하나님의 영광으로 이어진다는 것을 신뢰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택한 사울왕에게도 악신이 빙의되어 사울왕의 생각(번뇌)과 신체적 행동(야뇨)을 주관할 수 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도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고 하신 말씀. 예수님을 판 유다처럼 제자들에게도 사탄이 직, 간접적으로
개입되어 하나님의 일을 방해할 수 있다는 사실을 주지해야 할 것이다.
사실 지금까지 하나님의 인간들에 대한 사역을 보면 하나님이 보낸 중심자들에게 있어서 가장 측근이라고 할 수
있는-이브를 유혹한 뱀으로 상징되는-루시퍼같은 천사장이나 유다같은 제자 그리고 모세 앞의 아론이나 노아 앞의 함처럼 형제,
자식들에 의해서 사역을 망치는 일들이 진행되어 왔던 것이다.
가장 큰 빙의는 사탄이 하나님이 이 세상에 보낸 중심자들이나 인간들을 지배함으로써 하나님의 일을 방해함으로써 흑암의 세계에 가둬두는 것이다.
이러한 빙의를 해결할 수 있는 근본적인 해답은 다윗처럼 수금을 탐으로써 진정한 음악치유, 신령한 노래와 새 노래, 즉 진리로서만이 물리칠 수가 있는 것이다.
사무엘상 16장 14절의"여호와의 신"과 "여호와의 부리신 악신"은 무엇을 말합니까? 하나님이 어떻게 악신을 부리시는 가를 설명해 주십시오.
구약에는"여호와의 신"이 수없이 많이 언급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흔히 사람들은 이를 성령이라고 잘못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여호와의 부리신 악신"은 악한 성령이란 말입니까?
여기서
"여호와의 신"은 성령이 아니라 천사입니다. 사울은 도와주던 여호와의 신인 천사가 떠나고 여호와의 부리시는 악신이 그를
번뇌케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사무엘상 18장 8절~10절에도 사울이 "다윗에게는 만만을 돌리고 내게는 천천만 돌리니 그의 더 얻을
것이 나라 밖에 무엇이냐 하고 그 날 후로는 사울이 다윗을 주목하였더라 그 이튿날 하나님의 부리신 악신이 사울에게 힘있게 내리매
그가 집 가운데서 야료하는 고로 다윗이 평일과 같이 손으로 수금을 타는데 사울의 손에 창이 있는지라"고 했습니다.
19장 22~23절에도 "사울도 라마로 가서 세구에 있는 큰 우물에 이르러 물어 가로되 사무엘과 다윗이 어디 있느냐 혹이 가로되
라마 나욧에 있나이다 사울이 라마 나욧에 가니라 하나님의 신이 그에게도 임하시니"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신"은 천사를
뜻합니다. 그가 라마 나욧에 이르기까지 예언을 하며 종일 종야에 벌거벗은 몸으로 누웠더라 했습니다. 입신하는 사람들은 이 장면을
근거를 두고 자신들의 입신을 성서적인 행위라고 강변하려 합니다. 그러나 이는 하나님이 보시기에 사울왕이 가증함으로 하나님이
부리시는 천사로 사울왕이 유혹을 받도록 역사하신 장면입니다.
에스겔 14장9~10절에 "만일 선지자가 유혹을 받고 말을 하면 나
여호와가 그 선지자로 유혹을 받게 하였음이어니와 내가 손을 펴서 내 백성 이스라엘 가운데서 그를 멸할 것이라 선지자의 죄악과
그에게 묻는 자와 죄악이 같은즉 각각 자기의 죄악을 담당하리니"하는데 이것도 선지자라도 그가 미혹되었으면 하나님의 유혹을 받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이사야서 66장 3~4절에도"그들의 마음은 가증한 것을 기뻐한즉 나도 그들에게 유혹을 택하여 주며 그
무서워하는 것들을 그들에게 임하게 하리니 내가 불러도 대답하는 자 없으며 내가 말하여도 그들이 청종치 않고 오직 나의 목전에서
악을 행하며 나의 기뻐하지 아니하는 것을 택하였음이니라"했습니다.
열왕기상 22장 19~28절에서는 여호와 하나님이
"누가 아합을 꾀어 죽게 할꼬?"하시자 21~22절에서 "한 영" 곧 한 천사가 나아와 "내가 나가서 거짓말하는 영이 되어 그
모든 선지자의 입에 있겠나이다"고 말합니다.
이상에서 우리는 분명히 선지자의 입에 있으면서 하나님으로부터 나온 "거짓말 하는 영"
곧 "하나님이 부리시는 악신"이 역사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24절에서 거짓 선지자 시드기야는 참 선지자 미가야의 뺨을
치면서 "여호와의 영(신)이 나를 떠나서 어디로 말미암아 가서 네게 말씀하더냐"고 말합니다.
설사 시드기야는 그 말을 하면서
천사를 두고 "여호와의 영" 곧 성령이라고 생각했을지 몰라도 여기서"여호와의 영(신)"은 성령이 아니라 천사라고 성경이 말씀하고
있음이 분명합니다.
♦ 1월 20일(목)
♦ 오늘 읽어야 할 말씀 : 사무엘상 19:1∼24 ♦ 묵상을 위한 주제 : 여호와의 부리신 악신(9절) ♦ 성구 : 사울이 손에 단창(短槍)을 가지고 그 집에 앉았을 때에 여호와의 부리신 악신(惡神)이 사울에게 접(接)하였으므로 다윗이 손으로 수금(竪琴)을 탈 때에.
“여호와의 부리신 악신(an evil spirit from the LORD)”
사울 왕은 믿음의 다윗을 두려워하여 블레셋의 손에 의해 죽이려고 하였으나 계획대로 이룰 수 없었습니다. 그러자 사울 왕은 공개적으로 다윗을 죽이려고 합니다(1절).
다윗은 사울 왕이 악신에 의하여 시달릴 때 수금을 연주하며 사울을 위로할 때 다윗에게 창을 던져 죽이려고 하였습니다(9절).
결국 다윗은 사울 왕을 피하여 자기 집으로 돌아왔지만 사울 왕은 사람들을 다윗의 집으로 보내어 죽이려 할 때 미갈의 도움을 받아 위기를 모면했습니다(11절). 그리고 다윗은 선지자 사무엘이 있는 라마로 떠납니다. 사울의 사람들은 다윗이 라마에 머물고 있다는 것을 알려주자 다시 죽이려고 심복들을 여러 차례 보내어 죽이려고 합니다(18∼21절).
만일 사울 왕과 다윗이 협력하여 나라와 민족을 위하여 함께 협력하였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생각해 봅니다.
하나님의 사람은 나의 유익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과 계획이 무엇인지를 깨닫고 그 뜻이 이루어지기를 위하여 맡은 역할을 잘 감당해야 하겠습니다.
왜냐하면 잘못된 생각을 갖게 되면 반드시 악한 영의 지배를 받기 때문입니다.
전쟁에 승리하여 나라를 구하고 사울 왕에게도 충성했던 다윗이 도피생활을 할 수밖에 없었던 것처럼 선으로 악을 이기는 믿음의 사람으로 인정받아야 하겠습니다.
사람을 판단하고 비판하는 것을 어리석은 짓입니다. 심지어 사람을 죽이려는 것은 더더욱 잘못된 일입니다.
다윗과 같이 나라와 민족을 위하여 놀라운 일을 하였어도 명예와 권력을 유지하려고 죽이려는 것은 죄악 중의 죄악으로 부끄러운 일입니다.
믿음의 사람들은 날마다 진리이신 하나님과 더불어 매일의 삶을 시작하고 하나님이 원하시는 방법으로 한걸음씩 앞으로 나가야 합니다.
하루의 일과를 마감할 때에도 항상 하나님 안에서 마무리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믿음은 진리이신 하나님을 우리들의 삶을 통하여 보여주고 증거 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주의 여종의 허물을 용서하여 주옵소서 여호와께서 반드시 내 주를 위하여 든든한 집을 세우시리니 이는 내 주께서 여호와의 싸움을 싸우심이요 내 주의 일생에 내 주에게서 악한 일을 찾을 수 없음이니이다.
♦ 1월 19일(수)
♦ 오늘 읽어야 할 말씀 : 사무엘상 18:1∼30 ♦ 묵상을 위한 주제 : 여호와의 싸움을 싸우라(17절) ♦ 성구 : 사울이 다윗에게 이르되 내 맏딸 메랍을 네게 아내로 주리니 오직 너는 나를 위(爲)하여 용맹(勇猛)을 내어 여호와의 싸움을 싸우라 하니 이는 그가 생각하기를 내 손을 그에게 대지 말고 블레셋 사람의 손으로 그에게 대게 하리라 함이라.
“여호와의 싸움을 싸우라(the battles of the LORD)” 사울 왕은 다윗을 두려워합니다. 그 이유는 골리앗을 무너트린 다윗을 칭송하는 백성들의 노래 때문입니다. “다윗은 만만이요, 사울은 천천이라”
내 마음이 시기와 질투에 붙잡히면 내 눈에 보이는 것과 내 귀로 듣는 것들이 나를 무시하는 것처럼 보이고 들리게 됩니다.
악한 영의 지배를 받는 사울은 다윗을 블레셋 사람의 손에 의해서 죽게 하려는 음모를 드러내어 마치 블레셋 사람들과의 싸움을 ‘여호와의 싸움’이라고 그럴듯한 구실을 제안합니다.
그러나 다윗은 지혜롭게 행하므로 모든 사람들에게 더욱 더 신임을 얻게 됩니다. 더구나 사울 왕의 아들 요나단은 다윗의 마음과 연결되어 다윗을 자기 생명처럼 사랑합니다.
거짓된 세상은 믿음의 사람을 조롱하려고 달려옵니다. 진실이 거짓과 싸워 이기려면 거짓의 방법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 진실하게 더 성실하게 나갈 때 반드시 승리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여호와 하나님이 이 세상을 다스리시기 때문입니다.
진리의 하나님 사랑의 하나님이 이 세상을 다스리고 있는데 왜 세상은 점점 더 잘못된 방향으로 가고 있을까요?
어느 유대 랍비가 제자들에게 “이 세상에는 진리가 가득하다” 이렇게 가르쳤다고 합니다. 그러자 제자들은 “세상에 진리가 가득한데 왜 사람들은 점점 더 악해져 가느냐?” 라고 질문하였을 때 랍비의 대답은 “사람들이 머리를 숙이지 못하기 때문” 이라고 깨우쳤다고 합니다.
랍비의 가르침은 사람들이 교만하기 때문에 세상에 가득한 진리를 찾지 못한다는 교훈입니다.
사울은 겸손할 때 기름부음을 받아 이스라엘 초대 왕이 될 수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왕의 자리가 하나님의 은혜에 의한 것을 잊어버리고 자기 힘으로 그 자리를 지키려고 할 때 교만의 영이 사울을 왕의 자리에서 쫓아냈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세상의 가치에 물러서는 것이 아니라 세상의 가치를 헤집고 하늘의 질서를 따라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오늘도 주님과 더불어 진리의 깃발 흔들며 믿음의 길을 걸어갈 때 위로부터 내려오는 기쁨에 감사하는 하루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 찬양 / 주와 같이 길 가는 것
예수 내 구주! 예수 내 생명! 예수 내 권세!
여호와의 선민(選民)은 지금도 이 세상에서 싸우고 있습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는 그들의 구원의 대장입니다.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 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마 28:20)
전쟁의 고함들을 경청하십시오. 하나님의 백성들로 하여금 그들의 자리에 굳건히 서게 하십시오. 그리고 어떤 사람의 마음도 두려워하지 말게 하십시오.
주님께서 그의 칼을 드시지 않는 한, 그 교회의 결과를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담대합시다. 기독교가 지금보다 더 전전긍긍한 날이
결코 없었습니다. 적 그리스도를 지배자로 앉히려는 맹렬한 노력이 진행되고 있습니다. (즉 적 그리스도를 그의 능력의 자리에
앉히려는 지독한 노력이 만들어지고 있습니다.)
우리는 순교자들이 피를 흘리고 고백 자들(박해에 굴치 않고 신앙을 지킨 사람들)이 위하여 죽었던 옛 복음을 설교하고, 출판하기
위하여 대담한 목소리와 강한 손이 필요합니다. 그의 성령에 의하여, 구세주는 지금도 여전히 지상에 계십니다.
주님은 싸움가운데에 계십니다. 그러므로 전투의 결과는 확실합니다. 싸움이 거세질 때 주님은 그의 백성을 위하여 간구하시면서 우리의 위대한 중보자로서의 그의 직분을 다하고 계십니다.
아래(이 세상)의 싸움을 너무 크게 바라보지 마십시오. 왜냐하면 여기에서(이 세상에서) 그대는 자욱한 연기에 둘러싸이고 피로 뒹굴린 옷에 의하여 압도될(질리게)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대의 눈은 그대의 구세주가 살고 계시고 간구하시는 곳을 쳐다보십시오. 주님이 중보를 하시는 한 하나님의 일(사역)은 안전합니다.(승리가 확실합니다.)
마치 그 싸움이 모두 우리에게 의존한 것처럼 싸웁시다.(즉 우리의 전력을 다하여 싸웁시다.) 그러나 위를 쳐다 보며 모든 것이 주님께 의존한다는 것을 압시다.(즉 만사는 다 하나님이 주관하신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의 순결의 백합에 의하여, 그리고 구세주의 속죄의 장미꽃에 의하여, 예수님을 사랑하는 그대는 그 거룩한 성전(聖戰)에서 용맹스럽게 싸워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왕국과 그대의 주님의 왕관을 위하여 싸우십시오.
"이 전쟁이 너희에게 속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께 속한 것이라."(대하20:15)
다윗이 골리앗을 죽인 후, 이스라엘의 군대 대장 아브넬이 다윗을 사울에게 데려가자, 사울은 다윗을 보고 매우 기뻐했습니다. 그는 다윗을 자기 군대의 한 장군으로 삼고 왕궁에 살게 했습니다. 후에,
군대가 블레셋 사람들과 싸우고 돌아올 때, 여자들은 ‘사울은 수천 명을 죽였지만, 다윗은 수만 명을
죽였다네.’ 하고 노래를 불렀습니다. 이 말을 듣고 사울은 다윗에 대해 질투심을 품었습니다. 다윗이 자기보다 더 큰
영예를 받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사울의 아들 요나단은 질투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다윗을 매우 사랑했으며, 다윗도
요나단을 사랑했습니다. 두 사람은 언제까지나 서로 친구가 되기로 약속했습니다.
다윗은
수금을 매우 잘 연주했습니다. 그래서 사울은 다윗이 연주하는 음악을 좋아했습니다. 그러나 어느 날 질투심에 불타던
사울은 끔찍한 일을 저질렀습니다. 사울은 수금을 연주하고 있는 다윗에게 장창을 던지며 ‘다윗을 벽에 박아
버리겠다’ 하고 외쳤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재빨리 몸을 피했고 창은 빗나갔습니다. 후에 사울은 다윗에게 또 장창을
던졌으나 그것도 빗나갔습니다. 그래서 다윗은 조심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사울이
한 약속을 기억합니까? 그는 골리앗을 죽이는 사람에게 자기 딸을 아내로 주겠다고 약속했습니다. 사울은 결국 자기
딸 미갈을 다윗에게 주겠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먼저 블레셋 사람 100명을 죽여야 한다고 다윗에게 말했습니다.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요구였습니다! 사실 블레셋 사람들의 손에 다윗이 죽기를 바라는 것이 사울의 본심이었습니다.
그러나 뜻대로 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사울은 자기 딸을 다윗의 아내로 주었습니다.
어느
날 사울은 요나단과 자기의 모든 종들에게 다윗을 죽이고 싶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요나단은 사울에게
말했습니다. ‘다윗을 해치지 마십시오. 그는 아버지께 아무 잘못도 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가 한 일은 전부
아버지께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그는 목숨을 걸고 골리앗을 죽였고 아버지께선 그것을 보고 기뻐하셨습니다.’
사울은
아들의 말을 듣고 다윗을 죽이지 않겠다고 약속했습니다. 다윗은 돌아와 이전처럼 왕궁에서 다시 사울을 섬겼습니다.
그러나 어느 날, 다윗이 음악을 연주하고 있을 때, 사울은 또 다윗에게 장창을 던졌습니다. 다윗은 날쌔게 몸을
피했고, 그 장창은 벽에 꽂혔습니다. 이번이 세 번째 일이었습니다! 다윗은 이제 도망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날
밤 다윗은 집으로 갔으나, 사울은 그를 죽이도록 사람들을 보냈습니다. 미갈은 이 계획을 알고 남편에게 ‘오늘 밤
도망치지 않으면 내일 죽게 돼요’ 하고 말했습니다. 다윗은 그날 밤 미갈의 도움을 받아 창문으로 도망했습니다. 그 후
약 7년 동안 다윗은 사울의 눈을 피해 이곳저곳으로 숨어 다녀야 했습니다.
♦ 오늘 읽어야 할 말씀 : 사무엘상 17:1∼58 ♦ 묵상을 위한 주제 : 전쟁은 여호와께 속한 것(47절) ♦ 성구 : 또 여호와의 구원(救援)하심이 칼과 창에 있지 아니함을 이 무리로 알게 하리라 전쟁(戰爭)은 여호와께 속(屬)한 것인즉 그가 너희를 우리 손에 붙이시리라.
“전쟁은 여호와께 속한 것(the battle is the LORD's)”
블레셋 진영에서는 골리앗이 버티고 서서 이스라엘 진영을 향하여 나와 싸울 사람을 데려오라고 외칩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진영에서는 아무도 나설 수 있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이때 다윗이 블레셋 사람에게 너는 칼과 창과 단창으로 내게 나아오거니와 나는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 곧 네가 모욕하는 이스라엘 군대의 하나님의 이름으로 네게 가노라 하고 당당하게 나섰습니다.
골리앗은 다윗의 무기가 막대기와 물매라고 착각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다윗의 무기는 살아계신 하나님이셨습니다.
그러므로 다윗은 승리를 확신할 수 있었습니다(46∼47절).
왜냐하면 이스라엘에는 하나님이 계신 것과 하나님의 구원은 칼과 창에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이스라엘 진영과 불레셋 진영에 나타내실 것을 확신하였기 때문입니다.
다윗은 자기의 이름을 드러내기 위한 것이 아니라 오직 땅에 떨어진 하나님의 이름을 바로잡기 위해서 싸우겠다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전투는 순식간에 끝났습니다. 다윗이 던진 돌이 골리앗의 이마에 박히고 골리앗은 쓰러졌습니다.
다윗은 골리앗의 칼로 그의 머리를 잘랐고 싸움이 끝납니다.
하나님께서 이 놀라운 이야기를 기록하신 목적은 다윗에게 주목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온 땅으로 이스라엘에 하나님이 계신 줄 알게 하려는 것과 또 여호와의 구원하심이 칼과 창에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우치려는 것입니다.
골리앗의 신은 구원할 수 있는 신이 아니지만 다윗의 하나님은 구원할 수 있는 신이라는 것을 분명하게 증거하며 어떤 신을 믿어야 하는가를 말씀하신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골리앗과 다윗은 모두 전쟁에서 이길 것이라는 확신을 갖고 나왔습니다.
그러나 다윗의 확신만이 현실이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다윗이 믿는 하나님이 참된 신이었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하나님 외에는 신이 없다고 말합니다. 다윗의 이야기도 이것을 증명합니다. 하나님은 다른 신과 경쟁하지 않으십니다. 경쟁할 신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여전히 하나님과 다른 신을 경쟁시키려고 합니다.
다윗은 오직 하나님만이 참된 신이라고 말합니다.
오직 한 분이신 하나님을 믿고 살아계심을 믿는다면 우리가 스스로 만들어놓은 거짓에 속지 말아야 합니다.
사울과 이스라엘 사람들은 하나님이 참 하나님이라고 고백했지만 눈에 보이는 골리앗 때문에 두려워하고 있었습니다.
무엇을 두려워하고 있습니까? 두려움의 자리에 놓여 있는 것이 우상입니다. 다윗과 같이 우상을 무너트리기 위하여 살아계신 여호와 하나님만을 온전하게 믿고 따라갈 수 있는 믿음으로 무장하여 승리의 깃발을 흔들 수 있는 그 날을 기다려야 하겠습니다.
♪ 찬양 / 구원으로 인도하는
예수 내 구주! 예수 내 생명! 예수 내 권세!
북한이 최고 마하10의 극초음속 미사일을 발사 *마하 / 소리의 속도 단위 초당 340m, 시속 1224km
미 연방항공청은 북한의 미사일 발사 직후 15분간 서부지역 항공기 이착륙을 금지시켰는데 이는 9·11사태 이후로 없던 조치다. 북한이 지난해 9월 이후 유엔 안보리 결의를 위반해 탄도미사일을 발사한 것만 6차례나 된다. 그때마다 바이든 정부는 외교적
해법을 강조하며 대화의 문은 열려 있다고 강조했다. 하지만 토니 블링컨 국무장관도 이날 성명에서 대화 기조를 강조하는 동시에
“미국은 북한의 WMD와 탄도미사일 프로그램에 대처하기 위해 모든 적절한 수단을 사용하겠다”고 언급했다. 북한 도발에 대해
필요한 대응을 하겠다는 뜻이자 앞으로 달라질 미국을 사실상 예고한 것이다. 주유엔 미국대사가 북한의 탄도미사일 발사에 따른 추가
제재를 유엔 안보리에 제안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물론
미국 단독 제재가 북한에 미칠 영향이 크지 않고, 유엔 안보리의 추가 제재 논의 역시 중국과 러시아의 반대로 성사되기는 어렵다.
하지만 북미가 '강 대 강' 대치로 치달을 우려가 커진 만큼 정부는 한반도 정세의 안정적 관리에 주력하기 바란다.
성경의 사무엘상17장 47절은 소년 다윗이 블레셋의
거인 골리앗과 마주 대하여 싸움을 시작할 때 담대하게 외친 말씀이다. 여호와의 구원하심이 칼과 창에 있지 아니함을 이 무리로
알게 하리라 전쟁은 여호와께 속한 것인즉 그가 너희를 우리 손에 붙이시리라.
어떠한 형태의 전쟁이라도 하나님의 허락없이 시작되거나 진행되는 전쟁은 없다. 그리고 그 결과까지도 하나님의 손안에 있는 것이다.
성경에는
130여회의 크고 작은 전쟁사건이 기록되어 있다. 전쟁은 이스라엘 역사에 있어 피할 수 없는 사실이었는 바, 이는 그 지리적인
여건때문이었다. 이스라엘은 애굽과 메소포타미아를 잇는 가교 역할을 하는 위치(그래서 사이의 땅)에 있었기에 상업적으로나 군사적으로
매우 중요한 요충지였다. 더구나 서쪽으로는 지중해, 동쪽으로는 사막사이에 위치했기 때문에 애굽과 메소포타미아 제국사이에 끼어
전쟁의 무대였던 것이다.
이러한 지리적인 여건보다도 더 중요하게 보아야 할 것은 영적인 관점에서이다.
에베소서 6장 12절에 나오는 말씀은 영적전쟁에 대해 말해주고 있다. 우리의 싸움은 혈과 육에 대한 것이 아니요 정사와 권세와 이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에게 대함이라
이렇듯이
성경의 전쟁들을 고찰하면서, 그 내면에 숨겨져 있는 영적전쟁의 실체를 동시에 발견하지 않으면 안된다. 눈으로 보이는 세상적인
혈(血)과 육(肉)의 전쟁은 단순한 무력충돌이 아니라 그속에 사단과 하나님의 세력간의 영적전쟁이 진행된다는 것이다.
아담과
하와의 범죄로 인해 죽을 수 밖에 없었던 인류를 위해 하나님은 여자의 후손을 통해 인류를 구원시킬 메시아를 보내주실 것을
약속하셨고, 이 여자의 후손이 사단의 머리를 상하게 한다고 했다(창 3:15). 그래서 사단은 어떻게 해서라도 여자의 후손에게서
인류를 구원시킬 메시아가 탄생되는 것을 막아야만 했던 것이다.
사단은 수많은 전쟁을 동원하여 이스라엘을 쳤지만 결국 메시아의 탄생을 막지 못했던 것이다. 구속사적인 관점에서 구약성경에 나오는 약 130회의 전쟁은 이렇게 정리할 수 있다.
그렇다면
성경에서 말하고 있는 전쟁의 본질은 무엇일까? 성경은 비단 전쟁뿐만 아니라 인간사 모든 불화와 불행의 원인을 인간이 스스로 범한
죄의 결과로 받는 징계라고 말한다. 너희 중에 싸움이 어디로 다툼이 어디로 좇아 나느뇨 너희 지체 중에서 싸우는 정욕으로 좇아난
것이 아니냐(약 4:1)
싸움과 다툼의 근본원인이 되는 정욕을 다스리지 못해 야기된 결과 하나님께 범죄한
인간들에 대해 하나님은 어김없이 그 죄를 다스리는 수단으로 전쟁을 사용하시는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그의 형상대로 만드신
인간을 지극히 사랑하시기 때문에 죄를 지은 인간들이 지옥에 떨어지는 것을 보실 수 없기 때문이다.
20대 대통령 선거가 51일 남았다. 이번 선거는 누가 대통령이 되느냐 하는 문제가 아니다. 대한민국의 건국 정신과 기초가 무너지느냐 아니면 이어갈 수 있느냐 하는 체재를 위한 선거라고 하겠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깨어나야 한다. 먼저 깨어서 회개하고 하나님앞에 바로 서도록 해야할 것이다. 참으로 이것만이 우리가 전쟁을
막고 국난의 위기를 극복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 될것이다.
사무엘상 17장
다윗(David, 사랑하는 자)은
블레셋의 거인 장군인 골리앗(Goliath, 방랑자)을 물리침으로써 이스라엘의 영웅이 되었습니다. 골리앗을 보고서 이스라엘 군사들이 모두 겁에
질리고 만 것은 그들을 향하신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믿음을 상실했기 때문입니다. 반면에 다윗이 당당하게 골리앗과 맞서 싸웠던 것은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한 어떤 대적도 물리칠 수 있다는 믿음을 가졌기 때문이었습니다. 다윗은 목동으로 지낼 때 사나운 짐승들이 양떼를 공격할 때마다 짐승을 물리칠 수 있는 기술을 갖고 있었습니다. 이와 같은 기술은 하나님의 구원의 방법이 될 수 있다는 확신을 갖고 골리앗 앞에 나갈 수 있었습니다.
골리앗은 자신의 힘과 자신을 과대평가하는 교만,
대중의 환호에 따른 자만심, 억제할 수 없이 격렬한 인간의 정욕 등 세상이 의지하는 것을 나타낸다.
다윗은 조용히 하나님의 힘에
의지하며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그분에게 영광을 돌리려는 의지를 나타낸다.
여기서, 그리고 이후 생애에 나타난 다윗의 동기는 자신의
뜻대로 하거나 동료 인간들의 인기를 얻으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온 땅으로 이스라엘에 하나님이 계신 줄 알게 하려는”(46절)
것이었다.
17:50 다윗이…이기고.
시험이
얼마나 빨리 잇따라 일어났는가! 이것은 다윗이 그날 하루 동안 이룬 세 번째 승리였다. 첫 번째 승리는 엘리압이 다윗을 보고
양치는 것 외에는 아무 쓸모도 없다고 모욕할 때 찾아왔다. 그는 친절히 대답하지 않고 당연히 신랄한 말로 되받아 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침착하게 이렇게 말했을 뿐이다. “내가 무엇을 하였나이까 어찌 이유가 없으리이까”(29절). 이러한 성격이
한순간에 이루어지지는 않는다. 양을 치면서 인내심을 기르지 않았다면 질투하는 형들을 참아내지 못했을 것이다. 사소한 말다툼을
피함으로써, 다윗은 자신의 영을 다스리고 있다는 것을 보여 주었다. 그러므로 화를 돋우는 최악의 상황에서도 참을성을 보여 주시고,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마 11:29)라고 말씀하신
예수께서 함께했던 것이다. 이렇게 함으로써만 누구라도 진정한 지도자요 다른 이들의 인도자가 될 수 있다.
다윗은 왕의 앞으로 인도되었을 때 두 번째 승리를 거두었다. 왕은 혈기 넘치는 젊은이를 보자, 어리고 분별력 없으며 군사훈련도
받지 못한 다윗과 오랫동안 전쟁이라는 경기를 하면서 영악해질 대로 영악해진 골리앗과 비교하지 않을 수 없었다. 만약 명령하기
좋아하는 사울이 골리앗과 전투를 못하게 했다면, 다윗과 같은 애송이가 어떻게 싸울 시도를 할 수 있을까?(삼상 17:33).
사울은 하나님이 개입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한 채 다윗의 마음에 의심의 씨앗을 심고는 왕인 자신의 갑옷을 입으라고 유혹했다.
그러나 다윗은 다시 한 번 하나님께 정중히 복종하여, 하늘의 뜻을 받들어 여호와를 향한 믿음을 버리지 않고 전적으로 그분께
의지하겠다는 결의를 고수함으로써 의심을 극복했다.
이 모든 일로, 다윗은 세 번째 승리 즉 신성모독의 화신(化身)인 블레셋 사람에게서 거둔 승리를 잘 준비할 수 있었다. 이는
영적인 힘이 물질적이고 야만적인 힘에게서 거둔 승리였다. 이전 몇 달 동안 벌어진 사건들을 고려해 볼 때, 이스라엘은 반드시 이번
교훈을 배울 필요가 있었다. 골리앗이 퍼부은 저주에 대한 응답으로 다윗은 의기양양하게 소리쳤다. “나는…이스라엘 군대의 하나님의
이름으로 네게 가노라”(45절). 한 소년이 자신의 기술과 영원하신 하나님에 대한 신뢰를 가지고 단순히 시내에서 주운 돌로
승리를 거둠으로써 이스라엘 사람들은, 실제 행동으로 옮기는 경우는 드물었지만 절대로 잊지 못할 교훈을 얻었다.
♦ 오늘 읽어야 할 말씀 : 사무엘상 16:1∼23 ♦ 묵상을 위한 주제 : 외모와 중심(7절) ♦ 성구 : 여호와께서 사무엘에게 이르시되 그 용모(容貌)와 신장(身長)을 보지 말라 내가 이미 그를 버렸노라 나의 보는 것은 사람과 같지 아니하니 사람은 외모(外貌)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中心)을 보느니라.
“외모와 중심(the outward appearance and the heart)”
사울이 이스라엘 초대 왕위에 올랐던 때를 주전 1050년이라고 합니다.
사무엘이 베들레헴 이새의 집을 찾아가서 왕위를 이어갈 아들을 찾는 때는 주전 1025년입니다.
사울 왕은 25년이 지난 후에 기름 부음을 받던 때의 겸손을 버렸기 때문에 더 이상 이스라엘의 왕이 될 수 없을 것이라고 합니다.
신앙이란 변함이 없어야 합니다.
에베소교회를 향하여 주님께서는 처음 사랑을 회복하라고 하셨습니다.
사랑을 잃어버린 교회가 아닙니까? 사랑을 잃어버린 신앙이 아닙니까?
사무엘상 16장을 읽으면서 하나님으로부터 버림을 받아야 할 신앙은 아닌지를 살펴야 하겠습니다.
사무엘이 이새의 집을 방문하여 첫 아들 엘리압과 둘째 아들 아비나답 그리고 셋째 아들 삼마를 만났으나 여호와께서 선택한 아들이 아니라고 하셨습니다.
이렇게 일곱 번째 아들까지 만났을 때 마지막 아들 다윗은 들에서 양을 지키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집 밖에서 양을 지키던 다윗을 선택하신 이유를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하나님은 중심을 보신다.
다윗은 가족들에게도 관심을 받지 못했던 아들이었습니다.
사람들에게 관심을 받지 못한 다윗이었지만 하나님은 다윗의 중심을 보셨고 기름을 붓게 하셨습니다.
반면에 사울 왕은 악신에 붙잡혀 시달리고 있습니다.
세속도시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은 화려한 가운데서 행복과 평강을 찾으려고 몸부림칩니다.
그러나 거룩한 도성을 사모하는 사람들은 위로부터 임하는 하나님의 평강을 찾습니다.
날마다 위로부터 임하는 거룩한 영의 지배를 받는 행복과 평강의 은혜를 누리며 살아가는 참 행복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 찬양 / 나 어느 곳에 있든지
예수 내 구주! 예수 내 생명! 예수 내 권세!
프란시스 킨스만 (Francis Kinsman)
<헝그리 정신>이라는 책에서 인간의 세 가지 심리적 유형을 생계유지형, 외부지향형, 내부지향형으로 나눈다.
생계유지형 금전적 욕구와 사회적 안전이 목적 의식주, 곧 물질적 풍요가
인생목적입니다. 오늘의 필요에 관심을 두고 소유와 안정을 구하며 삽니다.
외부지향형 성공의 외적인 상징인 존경과 지위가 목적 성공추구형으로 명예와 지위가 우선 가치입니다. 사회적 성공에 관심을 두고 인기와 업적, 지위를 얻기 위해 애씁니다.
내부지향형 개인적인 성숙과 자아실현에 높은 관심을 두고 사는 사람 성숙과 자아실현, 삶의 질에
가치를 둡니다. 소유나 성공보다는 자기 성숙과 자아실현에 우선 가치를 둡니다.
인간 목적의 최후 단계는 "내부지향형"이라고 하겠다. 인간
목적의 최후 단계는 그가 자신을 잃어버림으로써 찾아온다. 그가 얻기 위해 노력한 경제적 안정과 개인의 발전, 그리고 친구와
가족의 행복을 넘어 세상 전체를 따뜻한 시각으로 바라보게 되는 때가 이때이다. 이제 개인의 욕구는 사라지고 세상의 발전을 위한
작은 밑거름이 되고자 한다. 자기 삶이 세상에 의해 주어졌으므로 삶의 의미 또한 세상에게 다시 돌려주어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들에게는 소멸이 두려운 것이 아니라 ‘의미 없는’ 소멸이 두려운 것이다. (...) 책 읽는 사람들은 자신의 자아발전과 세상을
아름답게 만들 수 있는 가치관이 스며 있는 것들을 즐겨 읽어야 한다. 그리하여 삶의 최후 목적을 위해 노력할 수 있는 마음의
여유와 시간을 충분히 가져야 한다. (168쪽)”
오늘 당신은 어떤 유형으로 살고 있습니까?
“지난 인생을 돌아보니 실패한 인생이다. 나는 출세를 위해 진실을 외면했고 명예를 위해 사랑을 잃었고 성공을 위해 하나님을 잃었다. 마지막 순간 이것들이 나에게 아무 도움이 되질 않는구나.
아들아! 너는 진실을, 사랑을, 그리고 믿음을 구하며 살려무나.”
‘소유’보다는 ‘존재’에, ‘무엇’보다는 ‘어떻게’에 삶의 우선 가치를 두고 살아야 합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성숙을 위해, 사랑을 위해, 그리스도를 위해 오늘 하루를 불살라야 하겠습니다.
“모든 인간은 죽을 때 못다 이룬 업적을 후회하면서 죽지 않는다. 바르게 살지 못한 것을 후회하면서 죽는다.”(토니 캄폴로)
카지노에 없는 것 세 가지 창문과 거울과 시계
창문을
열어 신선한 바람이 들어오면, 거울 보면서 도박에 미친 자기 모습을 보면, “내가 뭐 하고 있는 거지”라며 자신을 돌아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또 시계를 보면 “아! 약속 시간이지”라면서 카지노를 나설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악한 마귀는 이처럼 우리가
세상에 파묻혀 주님의 비전을 잊어가도록 유혹합니다. 이때 성경은 창문과 거울, 시계의 역할을 하면서 우리를 일깨워 줍니다. 성경은 성령의 바람을 통해 우릴 영적으로 깨어나게 하고 자신을 보게 하며 주님을 위한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알려줍니다.
♦ 1월 15일(토)
♦ 오늘 읽어야 할 말씀 : 사무엘상 15:1∼35 ♦ 묵상을 위한 주제 : 후회(11절) ♦ 성구 : 내가 사울을 세워 왕(王) 삼은 것을 후회(後悔)하노니 그가 돌이켜서 나를 좇지 아니하며 내 명령(命令)을 이루지 아니하였음이니라 하신지라 사무엘이 근심하여 온 밤을 여호와께 부르짖으니라.
“후회(regret)”
사울은 자기 욕심을 교묘하게 신앙으로 포장하여 왕의 지위를 유지하려고 합니다. 자기 욕심을 채우기 위해 전쟁에 나가는 백성들에게 금식을 선포했습니다. 그 결과 전쟁터에서 싸우던 병사들은 빼앗은 짐승들 소와 양과 송아지를 급하게 잡아 피를 빼지 않고 먹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스라엘의 지도자로 하나님의 백성을 거룩하게 이끌고 지도해야 할 텐데 사울은 오히려 백성들을 더욱 범죄 하게 하였습니다. 심지어 금식을 선포하므로 전쟁터에서 기진해서 죽게 만들 뻔 했습니다.
이와 같은 사울에게 하나님은 아말렉을 진멸하라고 하셨습니다(15:3). 그러나 사울은 아말렉을 공격한 후 좋은 가축들을 진멸하지 않고 남겨놓았습니다(9절).
사무엘이 사울 왕을 찾아와 왜 남겼느냐? 하고 묻습니다. 그러자 사울 왕은 하나님께 제물로 드리기 위해서 남겼다며 자신의 욕심을 신앙으로 포장했습니다.
욕심을 신앙으로 포장하는 이 고질병을 어떻게 고칠 수 있을까요?
“사무엘이 이르되 여호와께서 번제와 다른 제사를 그의 목소리를 청종하는 것을 좋아하심 같이 좋아하시겠나이까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숫양의 기름보다 나으니.”(22절)
욕심을 다스리는 비결은 순종하는 것입니다. 말씀대로 행하는 것입니다. 말씀을 읽은 것으로 욕심을 포장하면 안 됩니다. 예배드리는 것으로 욕심을 포장해서도 안 됩니다. 예배와 기도와 성경을 읽는 것이 욕심이 되지 않기 위해서는 순종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오늘 우리에게 새 날을 허락하신 것은 욕심대로 살다가 죽게 하려는 것이 아니라 기회를 주신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기회를 헛되게 사용할 것이 아니라 순종합시다. 말씀대로 살아봅시다. 말씀대로 실천해 봅시다. 하나님은 오늘이란 새로운 기회를 주시고 순종하는 믿음의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깨우칩니다.
하나님은 후회하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것은 곧 하나님을 후회하게 하는 것입니다. 오늘의 기회를 감사함으로 맞이하여 새로운 피조물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부탁합니다.
♦ 오늘 읽어야 할 말씀 : 사무엘상 14:1∼52 ♦ 묵상을 위한 주제 : 여호와의 구원(6절) ♦ 성구 : 요나단이 자기(自己) 병기(兵器) 든 소년(少年)에게 이르되 우리가 이 할례(割禮) 없는 자(者)들의 부대(部隊)에게로 건너가자 여호와께서 우리를 위(爲)하여 일하실까 하노라 여호와의 구원(救援)은 사람의 많고 적음에 달리지 아니하였느니라.
“여호와의 구원(The salvation of Jehovah)”
하버드 대학에서 75년 동안 “사람들이 어떻게 하면 행복할 수 있는가?” 라는 주제로 연구한 결과는 “인간관계”라고 결정했다고 합니다.
인간관계가 좋으면 행복합니다. 반면에 인간관계가 원활하지 못하면 환경이 아무리 좋아도 행복을 느끼지 못한다고 합니다.
인간관계를 좋게 유지하려면 “동질감(同質感)”을 갖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사무엘상 14장은 13장에 이어서 블레셋과의 전쟁에 대한 이야기를 소개합니다.
블레셋과의 전쟁에서 이스라엘이 매우 불리한 상황에 놓였습니다. 왜냐하면 이스라엘 진영에서는 병사들의 사기가 떨어졌기 때문에 요나단이 병사 한 사람을 데리고 홀로 블레셋 진영으로 들어갑니다.
마치 백제와의 전쟁에서 신라군이 사기가 저하되었을 때 관창이 홀로 적진에 들어가 싸우므로 신라군이 전의를 불타오르게 하여 신라가 승리한 이야기와 비슷합니다.
화랑 관창과 다른 점은 요나단은 하나님을 의지하고 적진에 뛰어든 것이라고 하겠습니다(16절).
사울 왕은 사기가 오른 이스라엘 군대를 이끌고 총공격을 시작하며 모든 백성에게 금식을 명령합니다.
전투에 임하는 병사들에게 금식하라는 것은 납득하기 어려운 명령입니다.
사울이 금식을 명령한 것은 요나단이 믿음으로 나가 싸우자 기적처럼 하나님이 역사하신 것을 보고서 하나님을 감동시켜 승리해야겠다고 생각했던 것같습니다.
사울은 이렇게 금식하면 하나님이 더 감동하셔서 더 큰 기적을 주시리라고 생각했습니다. 자기의 욕심을 신앙으로 포장했던 것입니다.
금식은 자신을 내려놓고 하나님의 뜻에 순종한다는 의미를 가져야 합니다. 그러나 사울은 자기 욕심을 관철시키기 위한 수단으로 삼았던 것입니다.
전쟁에 나간 군인들에게 금식을 명하므로 그들이 너무 힘들고 지쳐 송아지를 익히지도 않고 피채 먹었습니다. 생고기를 먹는 것은 율법을 거역하는 죄라고 하겠습니다.
사울의 욕심이 백성들로 하여금 죄를 범하게 했습니다. 사울은 하나님께 백성들이 죄를 범하면 하나님이 승리를 주시지 않을 것이 겁이 나서 하나님께 제단을 쌓고 회개합니다(35절).
전쟁에 나가기 전에 먼저 제단을 쌓고 하나님의 뜻을 찾아야 합니다. 그러나 사울 왕은 하나님이 노하실까봐 걱정이 되어 급하게 제단을 쌓았습니다. 이런 행동을 통해 사울의 신앙 행위가 거짓된 것임을 보여줍니다.
사울은 제단을 쌓고 예배를 드린 후에 또 다시 밤새도록 군인들에게 싸울 것을 명령합니다. 승리하기 위한 욕심에 가득차 있었던 것입니다.
백성들의 죄를 회개하는 제단이 아니라 자기 욕심대로 승리하기 위한 제단이었습니다.
사울의 금식 선언과 제단을 쌓은 것은 거짓된 신앙이었다고 증거합니다(52절).
우리의 기도와 예배 그리고 믿음의 행위가 나의 욕심을 관철시키려는 것이 아니었는지 살펴야 합니다.
나의 욕망을 신앙으로 포장한 것이라면 빨리 버려야 합니다. 우리의 욕심을 내려놓고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지한다면 요나단이 경험한 기적과도 같은 승리를 우리도 경험할 수 있을 것입니다.
♪ 찬양 / 구원으로 인도하는
예수 내 구주! 예수 내 생명! 예수 내 권세!
가장부유한 사람은
인간은 배우는 동물이다. 호모 에루디티오(Homo Eruditio) 인간은 평생 학습하는 존재이다.
요람에서 무덤에 갈 때까지 인간은 배워야 한다. 특별히 인간은 감사의 철학을 배워야 한다.
"행복은 감사 속에 있고 감사는 만족 속에 있으며, 만족의 나무에 감사의 꽃이 피고, 감사의 꽃에 행복의 열매가 열린다"는 말이 있다.
행복이란 무엇인가? 흐믓한 정신적인 만족감이다. 그래서 인간이 행복하기를 원하시는 주님께서는 사도 바울을 통하여 항상 기뻐하고 범사에 감사하라고 가르치신 것이다.
우리는 유대인의 다음 명언을 마음에 새길 필요가 있다.
1. 이 세상에서 가장 현명한 사람은 누구인가? - 모든 사람에게 항상 배우는 사람이다.
2. 이 세상에서 가장 강한 사람은 누구인가? - 자기 자신을 이기는 사람이다.
3. 이 세상에서 가장 부유한 사람은 누구인가? - 자기가 가진 것으로 만족하는 사람이다. 우리는 자기의 가진 것에 대하여 감사할 줄 알아야 한다.
4. 이 세상에서 가장 신령한 사람은 누구인가? - 어제보다 오늘 더 사랑할 줄 아는 사람이다. 왜냐하면 가장 신령한 은사는 사랑이기 때문이다.
고린도전서 12:31. 너희는 더욱 큰 은사를 사모하라 내가 또한 제일 좋은 길을 너희에게 보이리라.
신령하다는 것은 사랑으로 성숙해지는 것이다!
♦ 1월 13일(목)
♦ 오늘 읽어야 할 말씀 : 사무엘상 13:1∼23 ♦ 묵상을 위한 주제 : 부득이하여(12절) ♦ 성구 : 이에 내가 이르기를 블레셋 사람은 나를 치러 길갈로 내려오겠거늘 내가 여호와께 은혜(恩惠)를 간구(懇求)치 못하였다 하고 부득이(不得已)하여 번제(燔祭)를 드렸나이다.
“부득이하여(I forced myself, It's inevitable)” ‘부득이하여’라는 사전적 의미는 “마지못하여” 또는 “하는 수 없이”라고 합니다.
“자리가 사람을 만든다.”는 속담은 “사람이 어떤 직위에 있게 되면 그에 어울리는 모습으로 변하게 마련이라는 말.”입니다.
자리에 어울리게 변하는 모습을 모든 사람이 보기에 좋습니다. 반면에 자리에 어울리지 않게 변하면 모두가 등을 돌리게 됩니다.
왕으로 기름부음을 받을 때와 왕으로 지명할 때의 사울의 모습은 겸손했습니다. 그런데 본문에 소개된 사울 왕은 처음의 겸손은 없고 왕의 자리를 악용하는 교만함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블레셋 진영에서는 병거가 3만이며 마병이 6천을 갖추고 백성은 해변의 모래같이 많았습니다. 이러한 블레셋과 전쟁에서 이기려면 하나님의 도움을 구하는 것뿐 이었습니다.출정을 위한 제사를 드릴 사무엘은 약속한 기일에 도착하지 않았습니다. 다급한 사울 왕은 부득이하여 번제를 드리고 말았습니다. 번제의 제사를 마친 후에 도착한 사무엘은 사울 왕에게 “무엇을 행하였느냐?”고 묻습니다.
이 일로 인하여 사울의 왕위는 영원히 이어지지 못하게 되는 결과를 가져오게 되었습니다.
사울이 스스로 제사를 드린 것에는 충분한 이유가 있었습니다.
첫째, 사무엘이 약속된 기한 내에 도착하지 않았습니다.
둘째, 이스라엘 군사들은 흩어지기 시작했습니다.
셋째, 이 때 제사를 드리지 않으면 전투가 시작되기 전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할 수 없었습니다.
넷째, 사울은 제사를 드림으로 하나님의 도우심을 요청했습니다.
그런데 사울의 행동에 대한 하나님의 메시지는 “망령되다!”고 하시며 왕권을 다른 사람에게 옮길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왜 사울 왕의 행동이 하나님의 준엄한 평가를 받게 되었을까요?
기다림에 대한 언약을 지키지 못했기 때문입니다(10:8)
“너는 나보다 앞서 길갈로 내려가라 내가 네게로 내려가서 번제와 화목제를 드리리니 내가 네게 가서 네가 행할 것을 가르칠 때까지 칠 일 동안 기다리라.”
“기다리라”고 하신 것은 단순히 제사를 위해 기다리라고 하신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이제 왕이 된 사울이 어떻게 왕으로서의 삶을 살아가야 할지를 하나님께서 가르치고 말씀하시겠다는 것입니다.
사울은 제사 행위를 통해서 하나님을 최고 권위자로 인정하지 않고 스스로가 하나님의 자리를 차지한 것입니다. 모든 결정의 최종 권위는 하나님이 아니라 상황과 환경의 판단에 따른 자신이 된 것입니다.
심각한 전투는 외부에서 벌어지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서 일어나고 있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내면의 전투에서 승리하려면 먼저 하나님의 의도하신 것이 무엇인지 잊지 말아야 합니다. 하루를 시작하기 전에 먼저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묵상하며 기도하면서 내면의 적을 물리칠 수 있는 신령한 십자가 군병으로 거듭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가혹한 정치는 호랑이보다 더 사납다는 뜻으로, 가혹한 정치는 백성들에게 있어 호랑이에게 잡혀 먹히는 고통보다 더 무섭다는 말.
춘추 시대(春秋時代) 말엽, 공자(孔子:B.C 551~479)의 고국인 노(魯)나라에서는 조정의 실세(實勢)인 대부(大夫) 계손씨(季孫氏)의 가렴 주구(苛斂誅求)로 백성들이 몹시 시달리고 있었다.
어느 날, 공자가 수레를 타고 제자들과 태산(泰山) 기슭을 지나가고
있을 때 부인의 애절한 울음소리가 들려 왔다. 일행이 발길을 멈추고 살펴보니 길가의 풀숲에 무덤 셋이 보였고, 부인은 그 앞에서
울고 있었다. 자비심이 많은 공자는 제자인 자로(子路)에게 그 연유를 알아보라고 했다. 자로가 부인에게 다가가서 물었다.
“부인, 어인 일로 그렇듯 슬피 우십니까?”
부인은 깜짝 놀라 고개를 들더니 이윽고 이렇게 대답했다.
“여기는 아주 무서운 곳이랍니다. 수년 전에 저희 시아버님이 호환(虎患)을 당하시더니 작년에는 남편이, 그리고 이번에는 자식까지 호랑이한테 잡아 먹혔답니다.”
“그러면, 왜 이곳을 떠나지 않으십니까?”
“하지만, 여기서 살면 세금을 혹독하게 징수 당하거나 못된 벼슬아치에게 재물을 빼앗기는 일은 없지요.”
자로에게 이 말을 전해들은 공자는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잘 들 기억해 두어라. ‘가혹한 정치는 호랑이보다 더 무섭다[苛政猛於虎]’는 것을…‥.”
♦ 1월 12일(수)
♦ 오늘 읽어야 할 말씀 : 사무엘상 12:1∼25 ♦ 묵상을 위한 주제 : 이 큰 일을 보라(16절) ♦ 성구 : 너희는 이제 가만히 서서 여호와께서 너희 목전(目前)에 행(行)하시는 이 큰 일을 보라.
“이 큰일을 보라(See this great thing)”
사무엘상 12장은 사무엘의 마지막 설교라는 말씀으로 그 의미를 살펴보겠습니다.
첫째, 청렴성(淸廉性, Integrity)(3절)
내가 여기 있나니 여호와 앞과 그의 기름 부음을 받은 자 앞에서 내게 대하여 증언하라 내가 누구의 소를 빼앗았느냐 누구의 나귀를 빼앗았느냐 누구를 속였느냐 누구를 압제하였느냐 내 눈을 흐리게 하는 뇌물을 누구의 손에서 받았느냐 그리하였으면 내가 그것을 너희에게 갚으리라.
사무엘은 눈을 흐리게 하는 뇌물을 받지 않았다며 자신의 청렴성을 강조합니다. 사사라는 권력을 이용하여 자신이 타인의 재산을 강탈하거나 속인 적은 없었는지, 사사라는 지위를 남용하여 남을 압제하거나 뇌물을 수령한 일이 없었는지 등을 확인하는 것이었습니다.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뜻을 전하기 전에 먼저 삶의 청렴성 여부를 평가 받고자 한 것은 자신의 삶이 하나님의 메시지를 담는 그릇임을 알았기 때문이었습니다.
많은 그리스도인이 삶의 현장에서 하나님과 하나님을 뜻을 전하려 노력합니다. 그렇지만 진실을 말하기도 전에 부딪치는 장벽은 세상 사람들의 비난이라고 하겠습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인들의 삶에서 진실을 찾아보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둘째, 강직(剛直, Honesty)(15절)
너희가 만일 여호와의 목소리를 듣지 아니하고 여호와의 명령을 거역하면 여호와의 손이 너희의 조상들을 치신 것 같이 너희를 치실 것이라.
사무엘서는 사사시대에서 왕정시대로 바뀌는 격변기에 해당하는 시대입니다. 격변기에는 가치 기준이 흔들릴 수 있습니다. 성경적 가치가 세속의 가치를 억제할 수 없다면 세상은 절망의 늪으로 빠져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사랑과 공의를 바탕으로 성경적 가치를 바르게 실현함으로 세상의 질서를 유지해야 할 것입니다.
복음은 세상 사람들의 귀를 즐겁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세상의 즐거움에 익숙한 귀에 진리의 외침으로 진리에 익숙한 귀로 전환시키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셋째, 이타적 기도(利他的 祈禱, selfless prayer)(23절)
나는 너희를 위하여 기도하기를 쉬는 죄를 여호와 앞에 결단코 범하지 아니하고 선하고 의로운 길을 너희에게 가르칠 것인즉.
사무엘은 하나님의 뜻을 전하는 것으로 자신의 임무가 끝난 것이 아니라 이제부터는 백성들을 위하여 쉬지 않고 기도하므로 하나님의 뜻을 지속적으로 듣고 깨닫도록 하는 것이 임무라고 합니다. 이러한 임무를 민족을 위한 끊임없는 기도 즉 이타적 기도라고 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자신만을 위해 기도하라고 부름 받은 사람이 아닙니다. 나를 넘어 주님의 나라와 의를 세워 나가는 일을 위해 기도하도록 선택받은 사람입니다.
성도들은 그들의 삶의 자리에서 죄와 사망이라는 풍랑가운데서 허덕이는 사람들에게 구원의 길을 전할 뿐만 아니라 또한 그들을 위해 기도해야 하는 사명을 받은 하나님의 자녀라고 하겠습니다.
오늘도 구원의 복음을 담을 수 있는 정결한 그릇이 되어 청렴하고 강직한 삶을 통하여 구원받을 사람들을 위하여 기도하는 일에 성공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사무엘의 모습을 통해 우리는 진정 하나님의 손을 붙잡고 일어나 하나님의 뜻을 전하는 사람의 세가지 모습을 살펴 볼 수 있습니다.
첫째, 청렴성(3절)
“내가 여기 있나니 여호와 앞과 그의 기름
부음을 받은 자 앞에서 내게 대하여 증언하라 내가 누구의 소를 빼앗았느냐 누구의 나귀를 빼앗았느냐 누구를 속였느냐 누구를
압제하였느냐 내 눈을 흐리게 하는 뇌물을 누구의 손에서 받았느냐 그리하였으면 내가 그것을 너희에게 갚으리라 하니”
진정한 왕이신 하나님을 등 뒤로 하고 유한한 인간을 왕으로 삼은 무지한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해 하나님의 뜻을 전하기 위해 사무엘이
먼저 한 행동은 자신의 청렴성을 사람들에게 묻는 것이었습니다. 사사라는 권력을 이용해 자신이 타인의 재산을 강탈하거나 속인 적은
없는지, 사사라는 지위를 남용하여 남을 압제하거나 뇌물을 수령한 일이 없는지 등을 확인하는 것이었습니다.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뜻을 전하기 전에 먼저 삶의 청렴성 여부를 평가 받고자 한 것입니다. 자신의 삶이 곧 하나님의 메세지를 담는 그릇임을 알았기
때문이었습니다.
사실 많은 그리스도인이 삶의 현장에서 하나님과 하나님을 뜻을 전하려 노력합니다. 하지만 본론을 말하기도 전에 부딪치는 장벽이
있습니다. 바로 세상 사람들의 질타의 목소리입니다. 오히려 우리를 보면 하나님을 더 못 믿겠다는 아우성입니다. 복음을 담고
있어야할 우리 삶이 청렴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에 따라 우리의 외침은 단순한 공기의 진동에 그치게 됩니다. 오늘 하나님의 손을
붙잡고 일어났던 사무엘은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뜻을 전하기에 앞서 자신의 행실에 대한 사람들의 평가를 요청합니다. 하나님의 뜻이
담긴 메세지의 순도가 자칫 자신으로 인해 훼손될 것을 염려한 까닭입니다.
우리가 원하던 원하지 않던 간에 우리 삶은 세상을 향한 메세지입니다. 더 나아가 우리의 삶은 하나님의 메세지를 담고 있는
그릇입니다. 우리가 진정 하나님의 손을 붙잡고 일어나 하나님의 뜻을 전하는 주님의 사람으로 살아가기를 원한다면 먼저 우리 자신의
삶을 청렴하게 가꾸어야 합니다. 그럴 때에 비로소 우리가 전하는 복음은 단순한 공기의 진동이 아니라 절망 속 신음하고 있는
영혼들에게 생명을 불어넣은 소망의 물줄기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둘째, 강직함(15절)
“너희가 만일 여호와의 목소리를 듣지 아니하고 여호와의 명령을 거역하면 여호와의 손이 너희의 조상들을 치신 것 같이 너희를 치실 것이라”
오늘 상황은 사사시대에서 왕정시대로 바뀌는 일종의 전환기에 일어난 일이었습니다 사무엘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주는 이 권면의
메세지는 당시 사사였던 사무엘의 고별사였던 것입니다. 그에 따라 인간적인 면을 고려한다면 사무엘은 14절의 축복의 말로 마무리해도
별반 무리가 없었을 것입니다. 어차피 나머지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요청한 왕과 이스라엘 백성 자신의 몫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무엘은 끝까지 하나님의 뜻을 소신껏 전하는 강직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복음은 세상 사람들의 귀를 즐겁게 하기 힘듭니다. 왜냐면 세속적인 가치관과는 충돌할 수 밖에 없는 영원의 진리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그 영원한 진리를 삶의 중심의 놓고 주님의 손을 잡고 일어나 세상에 그 진리를 전하기 위해 선택받은
사람들입니다. 비록 사람들의 귀에는 거슬릴지라도 사람들의 삶을 이롭게하기 위해 더 나아가 그들의 영혼을 영원한 생명의 자리로
인도하기 위해서는 복음을 복음답게 소신껏 전하는 강직한 모습이 요청 됩니다. ‘복음선포에 대한 강직함’... 진정 하나님의
손을 붙잡고 일어나 하나님의 뜻을 전하는 사람이 지녀야할 두번째 모습입니다.
셋째, 이타적 기도(23절)
“나는 너희를 위하여 기도하기를 쉬는 죄를 여호와 앞에 결단코 범하지 아니하고 선하고 의로운 길을 너희에게 가르칠 것인즉”
사무엘은 단순히 하나님의 뜻을 전하는 것으로 자신의 임무가 끝났다고 여기지 않았습니다. 자신을 통해 하나님의 뜻을 다시금 듣게
되었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뜻대로 선하고 의로운 길로 걸어갈 수 있기를 위한 이타적인 기도를 다짐했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전하는 일은 어쩌면 기도하는 일에 비하면 쉬운 일일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타인을 위한 기도는 나의 문제는 주님께 맡길 줄 아는
자기 확장의 사람만이 가능한 기도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나만을 위해 기도하라고 부름받은 사람들이 결코 아닙니다. 나를 넘어 주님의 나라와 의를 세워 나가는 일을 위해
기도하도록 선택받은 사람들입니다. 나의 삶의 자리에서 주님의 손을 붙들고 일어나 내 이웃이, 우리 사회가, 이 나라와 이
민족이, 지구촌의 모든 나라가 죄와 사망이라는 영적 유라굴로 광풍속 절망가운데 일어설 수 있도록 복음을 전하고 그들을 위해
기도하는 사명과 책무를 지니고 있는 사람들이 바로 우리 그리스도인들입니다.
오늘 하루, 우리의 삶이 복음을 담는 그릇이 될 수 있도록 삶을 온전하고 청렴하게 가꾸어 나가시는 사랑하는 우리 교우님들 되시기를
기도합니다. 주님께서 맡겨주신 복음전파의 사명을 주님의 손을 붙잡고 강직하게 담당하시되 나를 넘어서는 이타적인 기도를 통해
이웃을, 사회를, 이 나라를, 이 세계를 주님의 뜻 가운데 바르게 일으켜 세워나가는 주님의 사람들로 살아가시는 자랑스런 우리
교우님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길갈로 가서 나라를 새롭게 하자!(사무엘상 11:14)
암몬 왕 나하스와 전투는 길르앗 야베스에서 싸워서 승리한 후 사무엘은 "길갈"로 가서 나라를 새롭게 하자고 외쳤습니다. 왜 길갈로 가야 할까요? 길갈이란 지명은 "수치가 굴러갔다"는 뜻입니다.
어떤 수치가 굴러갔습니까?
1. 애급의 수치
애급의 수치란 노예생활에서 자유를 얻게 된 것입니다.
2. 자급자족
노예 생활 떄는 자급자족이 아니라 죽도록 일하고 목숨만 유지할 수 있는 먹을 것을 얻어 먹었습니다. 그러나 자유를 보장받은 후에는 스스로 일하고 스스로 만족할 수 있는 만큼 소유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영적 의미를 덧붙인다면 다음과 같습니다.
3. 질고에서 자유(이사야 53:4-6)
메시아가 되신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셨을 때에 모든 질병과 고통에서 자유케 한다는 예언을 성취하셨습니다. 예를 들면 베데스다 연못가에서 38년 된 중풍병 환자를 자유하게 하셨습니다.
4. 약속의 땅
가나안 땅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예언돤 약속의 땅입니다.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장차 도래 할 새 하늘과 새 땅을 의미합니다(계 22:1-2).
길르앗 야베스 주민들이 왜 기브아로 도움을 요구하였을까요?
사사기 19장에서 레위인이 그의 첩과 기브아에서 하룻밤 유숙할 때 기브아 불량배들이 그의 첩을 농락한 후 첩이 죽었을 때 레위인은 첩의 시신을 12조각으로 나누어 각 지파의 땅으로 보냈습니다.
이런 끔찍한 사건의 동기가 기브아 거민들의 소행이라는 것을 알고 베냐민 지파를 제외한 11지파가 동맹을 맺고 베냐민을 공격하여 모든 남자들이 죽고 겨우 600명만 살아남았습니다. 12지파 중에서 베냐민 지파가 사라질 위기에 살아남은 남자들의 후손을 이어주려고 여자들을 얻게 하려고 전투에 참여하지 않았던 길르앗 야베스의 처녀들 400명을 기브온의 생존 남자들의 아내가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길르앗 야베스는 사울 왕의 외가라고 하겠습니다.
사사기 21장에 보면 베냐민 지파의 기브아 사람들이 참 부끄러운 일을 행함으로 이스라엘 전체가 일어나서 베냐민을 공격합니다. 이
과정에서 600명만 살아남습니다. 한 지파가 사라질 뻔한 위기 속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야베스 길르앗 사람들이 전쟁에 참여하지
않았음을 알게 됩니다. 자신들은 베냐민 지파와 다시는 교류하지 않겠다는 맹세를 했기 때문에 당시에 자리에 없었던 길르앗 백성중
남자와 결혼한 여자는 죽이고 처녀들만 데려오게 합니다. 그렇게 해서 베냐민 지파 600명으로 지파가 다시 형성되는데 사울도 그
후손이엇던 것입니다.
사무엘상 31장에서 사울이 블레셋 전투에서 전사했을 때 길르앗 야베스 사람이 밤새 달려가 그들의 시체를 거두어 장사지내주었습니다. 오래 전에 그들이 암몬 사람 나하스에게 큰 모욕을 당할 처지에 놓였을 때 사울이 자신들을 구출해 주었기 때문입니다.
전령들을 통해서 길르앗 사람들은 내일 해가 더울 때에 너희가 구원을 받으리라 는 사울의 대답을 듣고 이제 길르앗 사람들은
소망이 생겼습니다. 암몬에게 내일 너희에게 갈테니 너희 생각에 좋을 대로 우리에게 행하라고 전갈을 보냈습니다.
암몬은 이제 자신의 뜻대로 야베스를 지역을 시작으로 이스라엘을 점령하게 되었구나 하는 생각에 들떠 있었을 것입니다.
사울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충만한 것으로 멈춘 것이 아니라 그 감동을 즉각적인 행동으로 옮겼습니다. 베섹에서 길르앗 야베스
까지는 30km 정도의 거리였습니다. 그 거리를 밤에 신속하게 이동하여 새벽에 기습을 가했습니다. 본진을 삼대로 나누어
공격했습니다. 사울의 용기와 아주 치밀한 전술에 전혀 이스라엘의 반격을 생각지도 못하고 있는 암몬 군대는 크게 당황했고 힘 한 번
제대로 써보지 못하고 패하고 말았습니다.
결국 사울과 백성들이 승리한 것입니다. 모든 백성들은 큰 기쁨과 감격을 누렸습니다. 우리가 이겼다. 우리가 이겼다! 하면서
사울을 존경의 눈으로 쳐다보았습니다. 사람들은 “사울은 대단하구나. 정말 왕이 될 자격이 있는 사람이구나” 하는 생각을 갖게
되었습니다.
사울과 그의 군대는 승전가를 부르면서 내려왔습니다. 그리고 사무엘이 사는 곳으로 가서 승전보를 전하고 그의 말을 기다렸습니다.
12절에서 15절까지인데 전쟁의 승리를 통한 두 가지의 반응을 볼 수 있습니다.
먼저는 승리의 감격과 사울에 대한 존경심으로 가득한 백성들은 사무엘에게 “사울이 어찌 우리를 다스리겠느냐고 한 불량자들이
누구냐 그들을 끌어내어 죽이겠다고 열을 올립니다. 항상 이런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 동안은 잠잠하다가 분위기가 살아나자 반대했던
사람들을 찾아내서 해를 가하려고 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사울은 이 날은 사람을 죽이지 못한다고 하면서 못을 박았습니다.
이스라엘이 하나로 뭉쳐야 할 때입니다. 기습으로 암몬은 물리쳤지만
그들이 언제 반격해올 지 모릅니다. 블레셋의 존재는 아직도 위협적입니다.
여태까지 사울이 잘 해오고 있었지만 승리 뒤에 안 좋은 감정을 내세우지 않고 관대하게 여러 사람을 품은 것은 매우 잘한 일입니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오늘의 승리가 여호와께서 베푸신 승리라고 고백한 것입니다.
자신이 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승리했으니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 마땅한 일 아니겠습니까? 이겼지만 그들이 다시 연합할 때입니다. 관대함을 베풀어야 합니다.
잠언 20:28 왕은 인자와 진리로 스스로 보호하고 그의 왕위도 인자함으로 말미암아 견고하니라.
왕이 인자함을 잃게 되면 백성들은 고통을 받게 되고 결국은 왕도 고통을 받게 됩니다.
열왕기상 11장과 12장은 다윗의 아들 솔로몬이 죽고 그의 아들 르호보암이 이스라엘의 왕위에 오르는 장면을 그리고
있습니다. 르호보암은 이스라엘의 왕으로 세워지기 위해서 세겜으로 갔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의 백성들이 왕에게 나와 간청을 합니다.
그들은 왕의 아버지가 우리의 멍에를 무겁게 하였으나 왕은 이제 왕의 아버지가 우리에게 시킨 고역과 멍에를 가볍게 해주시면 왕을
섬기겠습니다. 라고 했습니다.
르호보함은 삼일 있다가 다시 오라 아주 지혜롭게 대답을 했습니다.
그는 먼저 솔로몬의 원로들에게 상의를 했습니다. 왕이 섬기는 자가 되어 이들을 섬기고 좋은 말로 대답을 하면 영원히 왕의
종이 될 것입니다. 라고 대답을 했습니다. 자신과 함께 자라난 어린 사람들과 상의를 했습니다. 왕께 아뢰기를 “왕의 부친이 우리의
멍에를 무겁게 하였으나 왕은 우리를 위하여 가볍게 하라 하였으즉 내 새끼 손가락이 내 아버지의 허리보다 굵으니 이제는 더욱
무겁게 하고 나는 전갈 채찍으로 너희를 징계하리라” 하소서 라고 대답했습니다. 그 어린 신하들의 말을 듣고 삼일 만에 다시 찾아 온
백성들에게 포악한 말로 대답을 했고 우리가 다윗과 무슨 관계가 있느냐 이새의 아들에게서 받을 유산이 없도다 이스라엘은 그
장막으로 돌아가고 유다 지파를 제외하고는 여로보함을 왕으로 세우게 됩니다. 인자를 잃어버렸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차후 다윗을 죽이기 위해 혈안이 되어 쫓아 다니는 사울의 모습을 보면서 사람이 욕심을 버리고 초심을 갖는 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것인가를 가늠해 볼 수 있습니다.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 약 1:15
성령의 감동을 계속해서 이어가는 것이 성령충만한 것입니다.
사무엘은 백성들에게 오라 우리가 길갈로 가서 나라를 새롭게 하자고 선포했습니다.
길갈은 이스라엘 백성이 요단을 건넌 후 처음으로 진 친 곳으로 이곳에서 다시 할례를 행한 곳입니다. 할례를 행했다는 것은 하나님과의 언약을 갱신했다는 의미가 있으며 가나안 땅에서의 처음 성소로 삼은 곳입니다.
그 동안 사울이 왕이 되고서도 변변한 처소도 없었고 왕으로서의 권위를 내세울 만한 기회가 없었는데 암몬을 격퇴한 것을 계기로 왕국을 세우고자 하는 것이 사무엘의 의중이었습니다.
비록 사울이 이스라엘 백성들 앞에서 왕으로 선출되기는 했지만 왕으로서 지도력을 입증하지 못했고 그런 기회도 없었습니다.
하지만 암몬 족속과의 전쟁을 승리로 이끌어 명실공히 왕으로서의 대관식을 치를 수 있게 된 것입니다. 당시 사울의 나이는
40세였습니다.
이로 인해서 이스라엘 12지파는 중앙 정부하에 하나의 국가로 연합하게 하는 계기가 되었고 사울은 이스라엘의 초대 왕으로서의 왕권을 공고히 확립하게 됩니다.
자 길갈로 가서 거기서 새롭게 왕국을 선포합시다.
새롭게 왕국을 세우는 중요한 두 가지 원리가 있습니다.
첫째는, 여호와 앞에서 하는 것입니다. 비록 왕을 세워달라고 한 것이 하나님의 뜻은 아니었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이 왕을
통해서 하나님의 통치를 깨닫게 되고 왕도 하나님의 뜻 안에서 나라를 다스린다면 하나님은 은혜와 복을 내리실 것입니다. 그래서 모든
나라의 시작 왕의 대관식도 하나님 앞에서 하는 것입니다.
둘째로, 하나님께 화목제를 드린 것입니다.
길갈에서 여호와 앞에 화목제를 드리고
사울을 왕으로 세우는 모든 과정에 하나님께서 축복하시고 그의 은혜를 구하는 것입니다. 자신의 공로가 아니라 모든 것이 하나님의 공로임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구원도 하나님의 은혜이며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의 공로입니다. 나 대신에 피를 흘려주신 예수님의 공로로 우리가 사함을 받습니다.
피흘림이 없은즉 사하심이 없는니라 했습니다. 피는 생명을 상징하는 것으로 예수님의 피는 우리의 새로운 생명을 상징합니다. 여호와 앞에서 나라를 세우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새롭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죄인 된 우리들이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받게 됩니다.
예수님은 광야에서 높이 들린 놋 뱀과 같습니다. 불순종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불 뱀에 물려 죽게 되었을 때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놋
뱀을 만들어 장대에 높이 매달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그 뱀을 본 사람은 산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을 믿어서 구원 받는 다는 것은
증명해 내는 것이 아닙니다. 믿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것이 의롭다고 정하셨습니다. 헬라인은 지혜를 찾고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지만 우리들은 미련한 것 같은 방법이지만 십자가의 도를 전하는 것입니다.
한 자리에 모입시다. 하나님께서 승리케 하셨음을 인도해 주셨음을 고백합시다.
십자가의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를 의지하며 그 분 앞에서 먹고 마시기를 바랍니다.
그것이 나라의 시작입니다. 그것이 교회의 시작입니다. 그것이 여러분 신앙의 시작입니다. 아멘.
♦ 1월 11일(화)
♦ 오늘 읽어야 할 말씀 : 사무엘상 11:1∼15 ♦ 묵상을 위한 주제 : 나라를 새롭게 하자(14절) ♦ 성구 : 사무엘이 백성(百姓)에게 이르되 오라 우리가 길갈로 가서 나라를 새롭게 하자.
“나라를 새롭게 하자(Let's make a new country)” “renew the kingdom there.”(KJV)(NASB) 왕국을 재건하라 “There reaffirm the kingship.”(NIV) 왕권을 재확인하라
어느 나라든지 처음 출발이 중요합니다. 애급의 노예로 살았던 백성들이 독립 국가를 건설하는 것은 시작부터 어렵지만 매우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국가 조직이나 기구에 대한 매뉴얼(manual, handbook)이 없기 때문입니다.
사울을 왕으로 세운 후에 암몬 사람 나하스가 길르앗 야베스에 대하여 진을 치므로 야베스 모든 사람들이 나하스에게 “우리와 언약하자 그리하면 우리가 너를 섬기리라”하고 타협을 위한 조건을 제안합니다.
이때 나하스는 “내가 너희 오른 눈을 다 빼어야 너희와 언약을 맺을 것”이라며 온 이스라엘을 모욕합니다.
그러자 이스라엘 장로들은 나하스에게 이레의 유예를 요구하며 이스라엘을 구원할 자를 찾되 없으면 나하스에게 나갈 것이라고 합니다.
사울은 이스라엘의 왕으로 뽑혔지만 실제적인 권한을 얻은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러던 중에 사울은 길르앗 야베스 사람들이 암몬 족의 침입으로 어려움에 처해 있다는 소식을 듣고 하나님의 신에 크게 감동되어 군사를 이끌고 나아가 암몬 족을 진멸했습니다(6∼11절).
암몬 족을 진멸하는 일을 통해서 사울의 능력이 입증됩니다. 사울은 이스라엘 자손 30만과 유다 사람 3만을 지휘하여 온 이스라엘을 모욕하던 암몬의 나하스와 싸워 승리합니다.
사울의 전략은 군대를 삼대로 나누고(11절)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재빠르게 적진으로 쳐들어갑니다. 사울은 내일 해가 더울 때에(9절) 돕겠다고 약속했으나 새벽에 적진을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용감하게 쳐들어갔습니다.
사울은 야베스 사람들의 고통을 곧 자신의 고통으로 생각하고 그들을 암몬 족속의 손아귀에서 구원하였습니다. 암몬과의 전쟁에서의 승리는 사울에게 왕이 될 수 있다는 확신을 주었고 이 기회를 잘 선용하므로 왕권을 확실히 수행할 수 있었습니다(14∼15절).
오늘이란 어제의 연장이 아니라 주께서 주신 특별한 날입니다. 어제의 실패를 묻어버리고 지극히 작은 것부터 하나님의 뜻을 좇아 행하므로 성공적인 삶을 살아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 찬양 / 예수가 함께 계시니
예수 내 구주! 예수 내 생명! 예수 내 구주!
사사시대 : 왕국이 세워지기 전 400년 동안 종교, 사법, 사회생활에 사사(judge· 師士)가 중심에
있었는데 사무엘은 그중 마지막 사사였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사무엘을 찾아와 왕을 세워 달라고 했습니다. 사무엘은 백성들을
‘미스바’로 불러 모으고 ‘길갈로 가서 나라를 새롭게 하자’고 외쳤습니다.
길갈은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 땅에 들어올
때 요단강 바닥에서 주운 돌 12개로 기념비를 세웠던 곳입니다. 그 당시 요단강물은 언덕에 넘칠 때였습니다. 그러나 백성들은
강을 건너기 위해 다리를 만들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 흐르는 물을 멈춰 세워 마른 땅이 되게 했습니다. 백성들은 전에 지나보지
못했던 길을 걸으며 하나님의 기적을 경험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강을 건넌 후 길갈에 기념비를 세워 하나님의 은혜를 대대로
기억하려고 했습니다.
또한 길갈은 할례를 행한 곳입니다. 출애굽 후 태어난 이들은 40년 동안 광야에서 할례를 받지
못했습니다. 이들은 강을 건넌 후 길갈에서 할례를 받았습니다. 할례는 태어난 지 8일 될 때 남자 아이들에게 포경 수술 같은 것을
해서 몸에 흔적을 남기는 것인데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표입니다. 이제부터 ‘하나님의 백성답게 살겠습니다’는 서원과 맹세가 담겨있는
뜻 깊은 의식입니다. 이들은 길갈에서 할례를 받음으로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 것을 다짐했습니다.
마지막으로 길갈은
왕국의 첫 도읍지입니다. 사무엘은 미스바로 이스라엘 백성들을 불러 모았습니다. 미스바는 사무엘 사사시대 지난 세월 하나님 앞에서
잘못 살아온 죄를 금식하면서 회개했던 장소였습니다. 또한 여기까지 도와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고 기념비돌(에벤에셀)을 세운
장소였습니다.
사무엘은 여기서 길갈로 가자고 합니다. 길갈은 왕국의 첫 도읍지(수도)가 됐습니다. 그리고 나라를 새롭게 하자고
합니다. ‘새롭게 한다(renew)’는 말은 ‘회복(재생)하다’는 뜻입니다.
성도들은 나라를 위해 염려합니다.
대한민국은 하나님의 은혜로 세워진 나라입니다. 광복 후 1948년 제헌 국회가 시작될 때 이승만 의장이 목사 이운영 의원에게
기도를 부탁했고 의원들은 함께 기도함으로 개회했습니다. 애국가는 당시 찬송가 곡에 ‘하나님이 보우하사 우리나라 만세’라는 가사를
붙여 불렀습니다. 작사자는 미상이지만 개화기 기독청년들인 윤치호나 안창호로 생각하는 분들이 많습니다. 북한의 남침으로 시작된
6·25 사변은 처음으로 유엔이 연합군을 파견해 오늘 대한민국이 존재케 됐는데,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였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간직할 수 있는 나라가 될 수 있도록 성도들은 기도해야 합니다.
지금 한국은 포괄적 차별금지법으로 하나님께 죄를
지으려 합니다. 현재 법으로도 소수자의 인권을 침해하지 않으나 새 법을 만들어 동성애를 조장하려는 죄를 지으려고 합니다. 잘못된
죄를 지적하는 교회의 외침을 나라가 경청해야 합니다. 교회는 ‘산위의 동네’입니다. 성도는 거룩함과 화평함을 좇아야 합니다. 그럴
때 선지자의 소리를 사람들이 경청하게 됩니다. 남에게 잘못을 지적하고 개건을 요구하기 전에 성도들이 먼저 하나님의 백성답게
살겠다는 길갈의 서원(다짐)이 있을 때 나라가 새롭게 됩니다.
성경적 가치관을 회복하는 교회를 세우자!
교회는 성경적 가치관을 작은 곳에서 부터 실천하는 곳입니다. 그런데 교회 안에서 세상의 가치관이 그대로 유입되어 세상을 따라가거나 세상의 부패한 현상을 볼 수 있어 안타깝습니다.
예를 들면 추도예배는 유교적인 제사 문화에서 도입된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또 다른 예는 교회 안에서 경쟁 구도를 만들어 순위를 결정하는 것입니다. (예) 성경읽기, 전도대왕,.....
교회 안에서의 등수는 영향력도 없고 하늘나라 상과도 무관하기에 별 의미가 없습니다. 하지만 그런 작은 일에서부터 교회가 성경적 가치관을 실천하지 못하면서 성도들에게 성경적인 삶을 어떻게 가르칠 수 있을까?
"2등은
기억나지 않습니다!" "마케팅 불변의 법칙"이라는 책에 나오는 말입니다.
한마디로 더 좋은 것보다는 맨 처음이
낫고, 마케팅 싸움은 '인식의 싸움'이기 때문에 더 좋은 제품을 만들기보다는 더 빠른 제품이 낫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첫 번째
제품만을 기억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최초로 대서양을 횡단한 사람은 <찰스 린드 버거>라고 기억하는데, 두 번째로
대서양을 횡단한 <버트 힝클리>는 찰스보다 더 빨리 비행했고, 연료도 더 적게 들었지만 기억하는 사람은 없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2등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2등은 기억나지 않습니다!> 이것이 마케팅 법칙의 하나라는 것이다.
그런데 마케팅 법칙이 지금 교회 안에 얼마나 깊이 침투해 있는지 모른다. 성도들이 성실하게 인생을 살기보다는 약삭 빠르게 사는 것을 지혜라고 배우며, 성경적인 지혜를 배우기보다는 세속적인 지혜가 판을 치고 있는 것이다.
"내 아들아 너는 듣고 지혜를 얻어 네 마음을
정로로 인도할지니라"(잠언 23:19)
자기 인생을 정로로 행하면서 등수에 들지 않는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사람들이야말로 이
세상에 맑은 공기를 유입시켜주는 숲과 같은 존재인 것이다.
세종=뉴시스] 오종택 기자 = 지난해 북한의 경제 성장률이 3년 만에 플러스(+) 전환했지만 남한과의 경제력 격차는 더욱 벌어진
것으로 나타났다. 북한 주민 1인당 총소득(GNI·명목)은 오히려 줄어 남한의 27분의 1 수준에 불과했다.
통계청이 28일 발표한 ‘2020 북한의 통계지표’에 따르면 지난해 북한의 국민총생산(GDP)은 35조3000억원으로 남한(1919조원)의 1.8% 수준이다.
북한의 실질 GDP 성장률은 전년대비 0.4% 증가하며, 2017년 이후 2년 연속 마이너스에서 3년 만에 상승 전환했다. 북한은
2016년 경제성장률 3.9%를 기록했으나 국제사회의 강력한 대북제재로 2017년(-3.5%)과 2018년(–4.1%) 연속해서
크게 뒷걸음했다.
북한의 국민총소득(35조6000억원)을 인구수로 나눈 1인당 국민총소득은 141만원으로 1년 전(143만원)보다 줄었다. 남한(3744만원)과 북한의 1인당 GNI는 27배나 차이를 보였다.
5년 전과 비교해 북한은 2만원 증가한 반면, 남한은 649만원 늘어나는 등 최근 들어 격차가 점점 벌어지는 모습이다.
[세종=뉴시스] 통계청이 28일 발표한 '2020 북한의 통계지표'에 담긴 2019년 북한 경제성장률 및 국내총생산 규모. (자료=통계청 제공)
북한의 주요 산업 비중은 서비스업(34.1%)이 가장 높고, 이어 농립어업(21.2%), 제조업(18.7%), 광업(11.0%)이
뒤를 이었다. 남한의 산업 비중은 서비스업(62.4%), 제조업(27.7%), 건설업(6.0%) 순으로 북한과는 산업 구조적으로
차이를 보였다.
북한의 대외 무역 총액은 32억4000만 달러로 전년(28억4000만 달러)보다 14.1% 상승했지만 여전히 남한(1조456억 달러)의 0.3%에 불과하다.
통계청은 "UN 대북 제재 영향으로 2018년도 교역액이 대폭 감소(-48.8%)했던 기저효과 등이 반영된 것"이라고 설명했다.
북한의 최대 교역국은 중국(95.4%)이 압도적이며, 러시아(1.5%), 베트남(0.9%), 인도(0.4%) 등이다. 최대 수출 품목은 전년대비 57.9% 증가한 '시계 및 부분품'으로 전체 수출액의 17.8%를 차지했다.
북한 인구는 2525만명으로 남한(5171만명)의 절반 수준으로 추정된다. 북한 주민들의 기대수명은 남성 66.7세, 여성 73.5세로 남한(남성 80세, 여성 85.9세)보다 각각 13.3세, 12.4세 낮았다.
UN에서 추계한 북한의 2015~2020년 합계출산율은 1.91명으로 남한 1.11명 대비 0.8명 높았으나 북한 역시 출산율이 지속적으로 줄고 있는 상황이다.
[세종=뉴시스] 통계청이 28일 발표한 '2020 북한의 통계지표'에 담긴 2019년 북한 인구 및 기대수명. (자료=통계청 제공)
북한의 쌀, 보리 등 식량작물 생산량은 464만t으로 남한(438만t)대비 26만t 많았다. 다만, 쌀 생산은 224만t으로
남한(374만t)의 60% 수준이다.육류는 토끼고기(16만7000t)를 가장 많이 생산하고, 돼지고기(11만5000t),
닭고기(3만t), 소고기(2만1000t) 순이다.
북한이 남한을 크게 앞서는 영역은 광업으로 석탄 생산량 2021만t은 남한(108만t)의 19배, 철광석 생산량 283만t은 8배 수준이다. 북한의 철도총연장 길이는 5295㎞로 남한(4087㎞)보다 길다.
《국부의 본질과 원인에 관한 연구》 (國富의 本質과 原因에 關한 硏究, An Inquiry into the Nature and Causes of the Wealth of Nations) 《국부론》(國富論, The Wealth of Nations)
계몽주의 시대인 1776년 3월 9일에 출판된 영국의 경제학자 애덤 스미스의 작품 국가의 부를 형성하는가에 대한 세계 최초의 성경을 기초로한 작품이다. 고전경제학의 기초적인 저작으로 평가한다. 산업혁명 태동기의 경제를 반영하여 노동 분업, 생산성, 자유시장 등 광범위한 주제를 다루고 있다.
《자본: 정치경제학 비판》 ( Das Kapital : Kritik der politischen Ökonomie) (Capital : Critique of Political Economy) 자본론(資本論, Das Kapital)
칼 막스가 독일어로 집필하고 프리데렉 엥겔수가 편집한 방대한 정치경제학 논문으로 1867년에 제1권이 출간되었다. 《자본론》은 주로 영국의 고전파 경제학 및 자본주의와 영국 사회에 대한 비판을 담고 있다. 내용은 1859년 발간된 마르크스의 저서 《정치 경제학 비판을 위하여》의 연장선상에 놓여있다. 총 3권으로 구성되어 있고, 1권은 자본의 생산과정, 2권은 자본의 유통과정, 3권은 자본주의적 생산의 총과정이 부제로 붙어 있다. 1권은 1867년, 2, 3권은 프레데릭 엥겔스가 마르크스의 유고를 모아 집필하여 1885년과 1894년에 발간되었다.
한국과 북한을 비교할 때 남한은 아담 스미스의 국부론을 정치 사회 경제의 기본으로 출발하였다. 북한은 칼 막스의 자본론을 정치 사회 경제의 기본으로 출발하였다. 그 결과는 오늘날 북한과 남한의 현실에 의해서 드러났다.
북한은 망하는 나라가 되었으나 남한은 부흥하는 나라로 세계 모든 나라의 관심을 갖게 되었다. 그런데 지금 혼란의 시기를 겪고 있다. 남한의 주사파와 민노총에 의해 정치 권력을 비롯하여 사회 전반에 주도권을 잡은 주사파와 민노총의 사상으로 무장한 사람들이 사회를 흔들고 있기 때문이다.
만일 2022년 3월 9일 대통령 선거에서 현 정권의 연장이 계속된다면 머지않아 한국의 정치 경제 사회는 망하는 길로 달려갈 수밖에 없기 때문에 교회는 마지막 보루가 되어 자유대한민국을 다시 일으켜 세워야 할 시대적 사명을 께달아야 한다.
지난해 북한의국민총생산(GDP)은 34 조7000억원으로 추정됐다. 남한(1933조 2000억원)의 56분의 1 수준이다. 1980년 남한의 GDP(39조 7000억원)에도 못 미친다. 1인당 GNI는 137만 9000원으로 남한(3762만1000원)의 27분의 1 수준이다.
1919년헤르만 헤세가 쓴 <데미안>은 자신의 길을 걷는 삶이 무엇인지 보여주는 소설이다. 작가는 소설 서문에서 이렇게 말한다.
“모든 인간의 삶은 저마다 자기 자신에게로 이르는 길이고, 그 길을 가려는 시도다. 누구도 완벽하게 자기 자신이 되지는 못하지만 누구나 자기 자신이 되려고 한다.”
삶이란 자기 자신이 가야 할 길을 찾고 그 길을 걷는 과정이라는 말이다.
소설 주인공 ‘싱클레어’의 삶이 그렇다. 남들이 강요하는 삶이 아니라, 자신이 진짜 원하는 삶을 찾아가기 위해 몸부림친다. 결코 쉽지 않은 여정이다. 아픔과 좌절, 방황과 고민이 있다.
세계 깨트리는 일, 노력과 좌절, 방황과 절망 이전 가치관 완전히 깨트린 후에야 새로운 삶 질서의 세계, 가정에 무질서의 세계 시작되다
소설에 등장하는 유명한 말이 있다. “새는 알을 깨고 나오려 힘겹게 싸운다. 알은 세계다. 태어나려고 하는 자는 세계를 깨뜨려야 한다.”
나를 둘러싸고 있는 세계를 깨트리는 것은 노력만으로 되지 않는다. 그 속에는 좌절도 있어야 한다. 방황도 있어야 한다. 철저한 절망도 있어야 한다.
예수 믿는 사람들을 잡으러 다메섹으로 가던 사울. 그 길에서 예수를 만났다. 내가 옳다고 생각한 모든 것이 무너졌다.
눈이 멀어 앞을 보지 못하게 된 사울은, 육신의 눈만 먼 것이 아니었다. 내 생각이 무너지는 캄캄함을 경험했다. 마음은 절망이고, 이전 삶은 멸망이다. 이전 가치관, 전 세계를 완전히 깨트린 후에, 새로운 삶을 산다.
“이전 것은 지났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다.” 세계가 무너지는 절망을 딛고, 새로운 하나님 나라를 살게 된다. 나를 둘러싼 알을 깨트려야 새로운 살을 살 수 있다.
싱클레어가 10살 무렵. 자신을 둘러쌓고 있는 가정이라는 알에 작은 균열이 생긴다. 그는 그때를 회상하며 이렇게 말한다. “그 곳에는 두 세계가 뒤섞여 있다.”
한 세계는 아버지의 집이다. 사랑과 근엄함, 모범과 질서가 있는 곳이다. 착한 어린이로 행동하면 칭찬 받는 세계다.
또 다른 세계는 하녀들의 대화 속에 있는 세계다. 도살장과 감옥에 대한 이야기. 술주정뱅이와 주먹다짐. 안정된 가정과 다른 모험의 세계다. 호기심의 세계다.
싱클레어가 10살 무렵, 자신보다 3살이 많은 프란츠 크로머를 만난다. 그는 힘이 세고 거칠었다. 크로머의 세계는 하녀들의 대화 속에 있는 세계였다.
크로머와 함께 모인 아이들은 자신들의 짓궂은 장난을 영웅적인 행동인 양 이야기했다. 지금까지 그런 행동을 한 번도 한 적이 없는 싱클레어는 거짓으로 꾸며낸 이야기를 한다. ‘방앗간 옆의 과수원에서 친구들과 함께 사과를 훔쳤다.’
크로머는 그 이야기를 꼬투리 잡아, 싱클레어에게 돈을 요구하기 시작한다.
“과수원 주인이 과일을 훔쳐간 놈을 알려 주는 사람에게 2마르크(200페니, 당시 10살이던 싱클레어가 가끔 받는 용돈이 5페니였다)를 준다고 했어. 그러니 나는 네가 사과를 훔쳐갔다고 말할 거야.”
겁에 질린 싱클레어는 그때부터 프란츠 크로머의 손아귀에 붙들리게 된다. 어떻게든 돈을 마련하려고 저금통을 털고, 하인들의 장바구니에서 5페니 10페니를 슬쩍 훔치기 시작했다.
더 이상 가정에서도 ‘착한 어린이 싱클레어’가 아니었다. 질서의 세계인 가정에 무질서의 세계가 들어오기 시작한다. 가정이라는 알에 균열이 생기기 시작했다.
두 번째 삶의 균열, ‘데미안’ 만나고 나서 생겨 가인과 아벨에 대한 전혀 다른 성경 해석 접해 당연하게 생각하던 가치관과 생각에 균열 시작
두 번째 그의 삶의 균열은 ‘데미안’을 만나고 나서 생긴다. 크로머에게 시달리던 무렵, ‘데미안’은 싱클레어가 다니는 학교로 전학온다. 그는 싱클레어에게 전혀 다른 성경 해석을 말해준다. 가인과 아벨에 대한 이야기다.
그는 ‘가인의 표는 죄인의 낙인이 아니라 용기와 개성의 표시’라고 말한다. 기존 생각과 질서에 대한 ‘비판적 사고’가 생기기 시작한다. 자신이 알던 세상에 새로운 균열이 생겼다.
이후 싱클레어는 데미안과 성경 수업을 함께 듣는다. 그 과정에서 데미안에게 정통 기독교 교리와 다른 생각을 듣게 된다. 지금까지 당연하게 생각하던 가치관과 생각에 균열이 생기기 시작했다.
신학대학원 수업 때 교수님이 해주신 말씀이 떠오른다. “목회자가 진리의 수호자라는 생각을 버려라. 우리가 진리를 지키는 것이
아니다. 진리가 우리를 지켜준다”, “지금까지 성경을 읽으면서 당연하다고 생각했던 모든 것을 내려놓고, 성경 그 자체로 읽으라.
선입견을 내려놓고 성경을 보라. 그러면 더 많은 것이 보이게 될 것이다.”
내가 알고 있는 성경 이야기, 내가 알고 있는 신학을 내려놓고,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라는 말이었다. 선입견을 내려 놓아야, 진짜가 보인다. 당연하게 생각하던 내 생각을 내려놓아야 성경의 가치관이 정립된다.
세 번째 균열, 기숙학교에서 ‘알폰스 베크’ 기존 질서와 완전한 결별, 더 외로워졌지만 이상형 여성 발견하면서 방탕한 삶 정리해
세 번째 균열은 라틴어 학교를 졸업하고 진학한 김나지움에서 생긴다. 그곳은 집과 떨어진 기숙학교였다. 그곳에서 ‘알폰스 베크’를 만나면서부터다.
베크는 싱클레어에게 술을 마시러 가자고 제안한다. 이후 싱클레어는 무절제한 삶으로 빠져든다. 마지 못해 술집에 끌려가는 꼬마가 아니다. 주동자가 되어 대담하게 술집을 드나든다.
어린 시절로부터 독립하고자 하는 반항심이다. 이제 완전히 기존 질서와 완전한 결별을 선언한 것이다. 정작 해방감을 느끼는
것은 잠시, 점점 더 외로움에 빠져들게 된다. 자신을 찾기 위해 시작한 반항은 오히려 자신을 잃어버리게 만들었다.
기존 질서와 결별을 선언한 싱클레어. 그러면서 점점 자신의 길을 찾아간다. 방탕한 삶을 살아가던 싱클레어는 우연히 이상형의 소녀를 보게 된다. 그 소녀를 베아트리체(단테가 사랑했던 여인, 신곡에도 등장함)라고 부르며 빠져든다.
그녀만을 생각하고 그녀의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다. 누구의 강요가 아닌, 자신의 결정으로 시작된 사랑. 몰두할 무엇인가를 발견한 그는 방탕한 삶을 차츰 정리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오르간 연주자 피스토리우스를 만나, 자신의 길을 찾아간다. 이후 다시 데미안을 만나고, 데미안의 어머니 ‘에바
부인’을 만난다. 그러면서 더 이상 다른 사람을 따라 사는 삶을 살지 않겠다고 결정한다. 비록 외롭지만 자신의 길을 걸어가는 삶을
살기로 한다.
그 결정을 에바 부인에게 격려 받고, 지속적으로 자신의 길을 걸어간다. 남들이 강요한 삶, 다수결이 강요한 삶이 아니라, 자신이 선택한 삶을 살아간다.
싱클레어는 자신의 길을 찾는 과정에서, 도덕적 삶에 대해서도 도전한다. 피스토리우스의 오르간 연주를 들은 싱클레어는 이렇게 말한다. “당신 음악은 도덕적이지 않아서 좋습니다. 도덕적인 것 때문에 늘 괴로움만 겪었거든요.”
자신의 길을 가기 위해서는, 당연시 되는 도덕적인 삶에도 질문을 던지라는 말이다.
기독교적 입장에서 충분히 불편한 이야기 생각 없이 끌려다니는 도덕은 폭력일 뿐 하나님 성품과 사랑 안에서 도덕적 삶을
기독교 입장에서는 충분히 불편한 말일 수 있다. 이 말은 도덕적으로 살지 말라는 뜻이 아니다. 자기 생각 없이 맹목적으로 도덕에 끌려 다니지 말라는 말이다. 끌려 다니는 도덕은 폭력이다.
간음하다 현장에서 붙들린 여인. 그녀를 대하는 사람들. 도덕적 기준으로 손에 돌을 들었다. 그들이 들고 있는 돌은 맹목적인 도덕이었다. 예수님은 맹목적인 도덕을 거절하셨다. 대신 도덕을 넘어선 사랑을 말씀하셨다.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 맹목적인 도덕은 거절하셨지만, 도덕을 패기하지는 않으셨다.
하나님 안에서 자신의 길을 가는 성도는 결코 맹목적으로 도덕을 추종하지 않는다.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하나님의 성품 안에서 도덕적 삶을 산다. 말씀이라는 뚜렷한 주관을 가지고 살아간다.
소설 <데미안> 이 던져주는 화두는 두 가지다. 먼저, ‘사람은 누구나 자신에게 주어진 길을 발견하고, 그 길을
따라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기독교에서 말하는 소명이 그것이고, 구별된 삶, 좁은 길이 그런 삶이 될 것이다.
또 하나는 ‘그 길이 결코 쉽지 않다’는 것이다. 남들이 말하는 길을 거절하는 것은 알을 깨고 나오는 것과 같다. 그러나 그 아픔의 과정을 거쳐야 한다.
“알을 내가 깨고 나오면 병아리가 되지만, 남이 알을 깨는 순간 달걀 후라이가 될 뿐이다.” 생명력이 사라진다.
성도, 인생 길 하나님 안에서 발견한 사람들 이전 삶 깨지고 새로운 소명 따라 살아가야 거룩이란 개성으로, 말씀이란 지도를 따라
싱클레어는 데미안을 만나면서 자기 세계를 깨는 법을 배운다. 성도는 예수님을 만나면서 이전 삶의 알이 깨진다. 어부 베드로.
예수님을 만나고 이렇게 고백한다. “주여 저는 죄인입니다.” 자신만만하던 어부의 껍질이 깨지고, 제자의 삶이 시작되었다.
헤르만 헤세의 말처럼, 삶은 자기 자신의 길을 가는 여행이다. 그 길은 각자 다르다. 인생 지도 같은 것은 없다.
성도는 그 길을 하나님 안에서 발견한 사람들이다. 그것이 소명이다. 예수님을 만나 이전 삶의 알이 깨지고, 새로운 삶, 소명을 가지고 이 땅을 살아가는 사람이 성도다.
그러니 성도는 세상이라는 유행을 따라 살지 않는다. 거룩이라는 개성을 가지고, 말씀이라는 지도를 따라 하나님과 동행하며 내게 주어진 길을 간다, 소명을 따라 산다.
♦ 1월 10일(월)
♦ 오늘 읽어야 할 말씀 : 사무엘상 10:1∼27 ♦ 묵상을 위한 주제 : 새 사람이 되리라(6절) ♦ 성구 : 네게는 여호와의 신(神)이 크게 임(臨)하리니 너도 그들과 함께 예언(豫言)을 하고 변(變)하여 새 사람이 되리라.
“새 사람이 되리라(You will be changed into a different person)”
사무엘 10장은 이스라엘 역사에서 사사시대가 끝나고 이제부터 왕정시대가 시작된다는 것을 알려주는 말씀입니다.
사무엘은 사울에게 하나님의 의도를 알려주려고 그의 머리에 기름을 부었습니다. 본문에서 사울이 왕이 될 징표를 소개합니다.
첫째, 라헬의 묘실 곁에서 만난 두 사람으로부터 암나귀를 찾았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2절).
라헬은 베냐민 지파의 어미가 됩니다. 베냐민 지파에 속한 사울의 근원이 되는 라헬의 무덤에서 시작된다는 것을 깨우치며 세상의 역사는 철저하게 하나님이 주관한다는 것을 잃어버린 암나귀를 통하여 알려주머 모든 걸음을 하나님께서 친히 지도하신다는 것을 말씀합니다.
둘째, 다볼 상수리나무에서 만난 세 명의 벧엘 순례자로부터 떡 두 덩이를 받았습니다(3절).
이것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우선되어야 하고 제사의 중요함을 깨우쳐 준 것을 말씀합니다.
셋째, 블레셋 영문에서 선지자들의 무리를 만나 여호와의 신이 임하여 예언을 시작했습니다(6절).
이것은 하나님의 지혜와 용기가 사울에게 임하므로 왕의 직분을 감당하기 전에 먼저 여호와의 신을 받아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집으로 돌아온 사울은 그 동안의 행적을 숙부로부터 질문을 받았으나 사무엘의 지시대로 기름부음 받은 것에 대해서는 일체 언급하지 않았습니다(14∼16절).
사울은 하나님의 절대적인 주권으로 미리 택정함을 입었고 사무엘에 의해 기름 부음을 받은 후 제비뽑기를 통해 공개적인 왕으로 선출되었습니다(17∼27절).
인간의 모든 역사는 하나님이 주관하시며 개개인의 삶 까지도 간섭하십니다.
주님께서 주신 오늘 신령한 눈을 열어 주의 뜻을 찾게 하시고 그 뜻을 실현하는 즐거움을 누리며 살아가게 하소서
♪ 찬양 / 예수 따라 가며
예수 내 구주! 예수 내 생명! 예수 내 권세!
♦ 1월 8일(토)
♦ 오늘 읽어야 할 말씀 : 사무엘상 9:1∼27 ♦ 묵상을 위한 주제 : 이스라엘의 지도자를 삼으라(16절) ♦ 성구 : 내일 이맘때에 내가 베냐민 땅에서 한 사람을 네게 보내리니 너는 그에게 기름을 부어 내 백성 이스라엘의 지도자(指導者)를 삼으라 그가 내 백성(百姓)을 블레셋 사람의 손에서 구원(救援)하리라 내 백성(百姓)의 부르짖음이 내게 상달(上達)하였으므로 내가 그들을 돌아보았노라.
“이스라엘의 지도자를 삼으라(Anoint him leader over my people Israel)”
왕을 요구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여호와 하나님은 사무엘에게 주저하지 말고 왕을 세우라고 합니다. 왜냐하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여호와 하나님을 왕으로 인정하지 않는 것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사무엘에게 베냐민 지파 사람이 찾아올 것을 미리 알려주셨습니다.
사울의 아버지 기스는 잃어버린 암나귀를 찾아오라고 아들 사울을 사환과 함께 내보냅니다.
사울은 베냐민 지파의 유족한 가정에서 태어났고, 체격이 월등했으며, 준수한 용모의 소유자였고, 아버지의 명령에 순종하여 에브라임 땅을 다닐 정도로 효성이 지극한 사람이었습니다(1-3절).
사울은 아버지 기스의 분부에 따라 잃어버린 나귀를 찾아 나섰습니다. 사울은 에브라임 산지와 살리사 땅, 그리고 베냐민 전 지역을 두루 다니며 한 마리의 잃어버린 나귀를 찾아 헤맸습니다(4∼5절).
사울은 아버지의 말씀에 철저하게 순종하는 신실한 아들이었습니다.
사울은 나귀를 아무리 찾아도 찾지 못했을 때 사환의 말에 따라 선견자를 찾아가기로 합니다(6∼10절).
사울은 인간적인 노력과 수단을 다 사용한 후에 이제는 하나님의 도우심을 의지하려고 했습니다.
사울은 사무엘을 찾아가던 도중 산당에서 나오던 사무엘과 만나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사울이 사무엘과 마주치게 되었던 것은 하나님께서 사울의 발걸음을 사무엘에게로 인도하여 사울을 왕으로 삼고 기름을 붓도록 하시려는 계획이었습니다.
사울과 사무엘의 만남은 온전히 하나님의 섭리와 간섭으로 이루어졌습니다(14절).
하나님께서는 평범한 사건들을 통해서도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갑니다.
그러므로 신앙의 길에는 우연이란 있을 수 없습니다.
설령 이해할 수 없는 어떤 사건이 일어났을지라도 그 배후에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뜻을 찾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사울을 세우신 이유는 사울이 하나님 마음에 합당해서가 아니라 블레셋 지배하에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부르짖음 때문이었다고 하셨습니다(16∼17절).
오늘이란 하나님이 내게 맡겨주신 사명을 감당할 마지막 날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대로 순종하므로 맡겨주신 사명을 바르게 감당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 찬양 / 나 맡은 본분은
예수 내 구주! 예수 내 생명!
♦ 1월 7일(금)
♦ 오늘 읽어야 할 말씀 : 사무엘상 8:1∼22 ♦ 묵상을 위한 주제 : 왕을 주어 다스리게 하라(6절) ♦ 성구 : 우리에게 왕을 주어 우리를 다스리게 하라.
“우리에게 왕을 주어 다스리게 하소서(Give us a king to lead us)”
사무엘이 늙어 두 아들을 이스라엘 사사로 세웠으나 두 아들은 사무엘의 행위를 따르지 않고 뇌물을 받고 판결을 굽게 하므로 이스라엘 모든 장로들이 라마에 있는 사무엘을 찾아와서 우리를 다스릴 왕을 세워달라고 요구합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의 왕으로서 그들을 다스려 왔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 백성들은 눈에 보이지 않는 왕이 아니라 다른 나라들처럼 눈에 보이는 왕을 요구합니다.
왜 왕을 원했을까요?
이스라엘 백성들은 가나안 땅에 정착하면서 다른 민족과 전쟁을 치룰 때마다 왕의 명령에 의해 일사불란하게 군사들이 동원되는 것을 보았을 것입니다.
왕의 빠른 판단과 명령에 따라 군사들을 통솔하는 위엄에 의해 전쟁을 유리하게 이끌어가는 것에 매력을 느꼈을 것입니다.
만일 이스라엘에게도 왕이 있다면 가나안 족속들처럼 체계적인 체재를 갖추고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했을 것입니다.
더구나 사무엘의 아들들의 악행을 보면서 사사를 통한 하나님의 다스림에 의구심을 가졌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세운 지도자가 바른 길을 걷지 않는다면 우리의 미래는 기대할 수 없다고 판단하였기 때문입니다.
나라와 민족의 미래를 위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택할 수 있는 최선의 길이 왕을 구하는 것이 었다고 하겠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전쟁에서 패배하는 원인이 무엇인가를 깨닫고 그 원인을 해결할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은 왕을 세우는 것이라고 확신했습니다.
오늘날도 그리스도인들이 문제가 무엇인지를 알고 문제의 답을 하나님께 구하는 것이 아니라 먼저 문제의 답을 결정한 후에 그 답을 위하여 기도하며 부르짖고 있는 것은 아닐까 생각합니다.
우리들의 삶을 다스리고 주장하는 왕이 되신 하나님께 먼저 그 문제를 아뢰고 그 문제에 대한 하나님의 말씀을 청종하고 순종함으로 문제를 해결하는 정답을 찾아야 하겠습니다.
하나님은 지금 이 순간에도 모든 만물을 다스리시는 왕이십니다.
쉬운 방법에 따라 세상을 쉽고 편리하게 살아갈 것이 아니라 어려울지라도 다소 늦어질지라도 오직 하나님의 뜻대로 하나님의 방법대로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오 전능하신 아버지 오직 주님의 뜻에 따라 순종하는 믿음으로 하나님 나라를 확장하게 하소서.
♪ 찬양 / 내 주여 뜻대로
예수 내 구주! 예수 내 생명! 예수 내 권세!
♦ 1월 6일(목)
♦ 오늘 읽어야 할 말씀 : 사무엘상 7:1∼17 ♦ 묵상을 위한 주제 : 미스바로 모이라(5절) ♦ 성구 : 사무엘이 가로되 온 이스라엘은 미스바로 모이라 내가 너희를 위(爲)하여 여호와께 기도(祈禱)하리라.
“미스바로 모이라(Assemble all Israel at Mizpah)”
블레셋 진영에서 일곱 달을 머물던 여호와의 궤가 이스라엘 벧세메스로 돌아온 후 기럇여아림 거민에게 보내어 아비나답의 집에 모시고 엘르아살을 거룩히 구별하여 지키게 하였습니다.
여호와의 궤가 기럇여아림에서 20년 동안 머물렀습니다. 사무엘은 이스라엘 모든 백성에게 여호와께 전심으로 돌아오려면 이방 신들과 아스다롯을 제하고 너희 마음을 여호와께 향하여 그만 섬기면 블레셋 사람의 손에서 건져 낼 것이라고 하며 미스바로 모이라고 합니다.
어린 사무엘에게 임했던 하나님의 말씀은(3, 4장) 법궤에 관한 사례가 소개될 때에는 전혀 언급이 없었습니다(5, 6장).
사무엘에게 임한 하나님의 말씀은 드디어 빛을 드러내고 있었습니다. 그 이유는 이스라엘 족속이 여호와를 사모하게 되었기 때문이며(7:2) 사무엘은 모든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합니다(7:3).
제사장의 타락으로 인하여 백성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못하여 방황할 수밖에 없었을 때 예비하신 지도자 사무엘을 일어나게 하셨습니다.
블레셋이 이스라엘을 침략하려고 할 때 백성들은 사무엘에게 우리를 위하여 기도하여 달라고 부탁합니다. 사무엘이 이스라엘을 위하여 기도할 때 블레셋 진영에서는 큰 우레를 일으켜 어지럽게 하므로 패배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통치하는 방법이 참으로 놀랍지 않습니까?
인간을 “호모 페카토르”라고 정의합니다. ‘호모 페카토르’는 “인간은 기도하는 존재”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기도하는 것에 관심을 갖고 사무엘에게 기도를 부탁하였을 때 블레셋의 침략을 싸움터에서 물리친 것이 아니라 천지를 주관하시는 하나님의 방법에 의하여 승리할 수 있다는 증거를 보여주었습니다.
기도하는 믿음 그 믿음으로 세상길을 하나님 뜻 이루며 살아가게 하옵소서.
♪ 찬양 / 너 예수께 조용히 나가
예수 내 구주! 예수 내 생명! 예수 내 권세!
블레셋에게 빼앗겼던 언약궤가 7개월 만에 두 마리의 암소가 끄는 새 수레에 실려 벧세메스로 돌아왔습니다. 이스라엘 진영에서 언약궤를 되찾기 위하여 아무 것도 행한 것이 없었습니다. 살아계신 여호와를 언약궤로 믿었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살아계신 하나님을 믿으라고 교훈하셨습니다. 다곤을 섬기는 블레셋 사람들에게는 너희들이 섬겨야 할 신은 여호와 하나님이심을 보여주셨습니다. 언약궤를 통하여 믿음이 무엇인가를 교훈하셨던 하나님은 드디어 사무엘을 세워 믿음이 무엇인가를 깨우치십니다.
언약궤가 기럇여아림 아비나답의 집에 들여 놓고 아비나답의 아들 엘리아살을 거룩히 구별하여 여호와의 궤를 지키게 합니다. 언약궤가 아비나답의 집에서 20년 동안 머물렀습니다. 그동안 이스라엘 모든 백성들이 여호와를 사모하였습니다.
♦ 1월 5일(수)
♦ 오늘 읽어야 할 말씀 : 사무엘상 6:1∼21 ♦ 묵상을 위한 주제 : 벧세메스 길(12절) ♦ 성구 : 암소가 벧세메스 길로 바로 행(行)하여 대로(大路)로 가며 갈 때에 울고 좌우(左右)로 치우치지 아니하였고 블레셋 방백(方伯)들은 벧세메스 경계(境界)까지 따라 가니라.
첫 새끼를 낳은 두 마리 암소에게 새 멍에를 메우고 새 수레를 끌게 하여 수레 위에 블레셋 다섯 방백을 상징하는 금 독종 다섯 개와 땅을 해롭게 하는 금쥐 형상을 만들어 여호와의 궤 곁에 놓은 후 새끼는 어미 소와 떼어놓고 암소 두 마리가 새 수레를 끌며 좌우로 치우치지 않고 곧장 “벧세메스 길”로 가면 블레셋 진영에 내렸던 재앙은 이스라엘의 신이 내린 것이지만 만일 암소가 되돌아오면 그 재앙은 우연히 임한 것이라는 인간적인 각본에 따라 두 마리 암소를 벧세메스로 보냈습니다.
그런데 두 마리 암소는 좌우로 치우치지 않고 곧바로 벧세메스로 향했습니다.
교활한 인간들은 하나님의 섭리와 주권을 인정하지 않으려고 몸부림을 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여전히 이 세상을 지배하고 있다는 것을 “여호와의 언약궤”를 돌려보내는 블레셋 사람들의 전략을 여지없이 흔들어버렸습니다.
새끼를 낳은 암소는 본능적으로 새끼를 찾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세상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은 동물의 본능까지도 통제하십니다.
“치우치다(수르)”는 단어는 “빗나가다” “기울다” “떠나가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성경에서는 “철저한 순종”을 말합니다(신 5:32, 17:11, 수 1:7).
언약궤를 실은 두 마리의 암소는 방금 낳은 새끼가 있는 곳은 쳐다보지도 않고 벧세메스로 묵묵히 걸어갑니다.
동물적 본능으로 움직이는 짐승도 블레셋 사람들이 기대하는 방향으로 향하지 않고 오히려 이스라엘 진영으로 걸어갑니다. 하나님께서 암소의 본능을 통제하신 것처럼 성도의 발걸음을 통제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통제 안으로 들어가야만 합니다.
하나님을 위하여 무엇을 행하므로 마치 하나님을 잘 섬기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어리석음도 버려야 하겠습니다.
하나님이 내 삶의 주인이라고 고백하면서도 내 고집과 내 뜻을 버리지 않는 미련한 삶을 버려야 하겠습니다.
오직 믿음의 일꾼으로 헌신하며 섬길 수 있는 은혜만을 간구하며 벧세메스 길로 향한 두 암소와 같이 좌우로 치우침이 없는 믿음의 사람으로 거듭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 찬양 / 이 세상에 근심된 일이 많고
예수 내 구주! 예수 내 생명! 예수 내 권세!
사무엘상 5장과 6장은 블레셋에게 빼앗겼던 언약 궤가 이스라엘 진영으로 돌아오는 과정에 대한 말씀입니다. 본문에서 강조하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 어떻게 가능한가를 이스라엘 사람들과 블레셋 사람들에게 깨우치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불가능한 일이란 처음 새끼를 낳은 두 마리의 암소에게 새 수레와 새 멍에를 짊어지고 새 수레를 끌고 블레셋 진영 에그론에서 이스라엘 진영 벧세메스로 곧장 가라고 합니다. 이때 갓 태어난 송아지는 어미 소에게 젖을 달라고 울어댑니다. 동물적 본능에 의해서 어미소는 새끼가 있는 곳으로 찾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두 마리 암소는 언약궤를 싣고 벧세메스로 향하여 좌우로 치우치지 않고 곧장 달려갔다고 합니다. 두 마리 암소에게 벧세메스로 좌우로 치우지지 않고 앞으로 나갈 수 있도록 역사하신 하나님의 능력이 강조되어야 합니다.
벧세메스로 갔다는 암소를 강조하면서 신앙생활도 암소와 같이 좌우로 치우치지 않아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암소가 벧세메스로 간다는 것은 100% 불가능합니다. 불가능한 것을 가능하게 한 것을 강조하는 것은 연약한 인간에게 너무 무거운 짐을 짊어지우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러므로 사무엘 5장과 6장에서 강조하는 것은 하나님의 능력이라고 하겠습니다. 따라서 암소가 촛점이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이 촛점이 되어야 합니다.
신앙생활 하면서 두 마리 암소와 같이 도저히 불가능한 일을 감당해야 할 기회가 있었습니까? 만일 그와 같은 기회를 갖게 된다면 시작도 하기 전에 나는 못합니다 하고 포기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암소가 갖는 고통이 너무 무겁기 때문입니다.
첫째는 육체적 고통
수레를 끌어보지 않은 소에게 멍에를 짊어지우고 새 수레를 끌게하는 것은 육체적으로 매우 어려운 고통입니다.
둘째는 정신적 고통
방금 새끼를 낳았기 때문에 새끼는 어미를 찾습니다. 송아지가 어미소를 찾을 때 새끼를 찾아가는 것이 당연합니다. 그런데 암소는 좌우로 치우치지 않고 벧세메스를 향했습니다.
더구나 머드젖을 먹어야 할 ㄸ문에 심각하가 6일을 한 일입니다. 갈 수 있었던 것은 불가능한 사건입니다. 하나님께서 암소에게 동물적 본능을 무시하고 블레셋 사람들이
시험하려는 하나님과 감당할 수 없는 일을 감당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없었다면 이 세상은 벌써 망하고 말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에게 드러나지 않은 하나님의 은혜를 힘입어 세상을 섬기는 사람들 때문에 망하지 않고 벧세메스를 향하여 나가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민족에게 짐승 중에서 소나, 양이나, 비둘기로 예물을 드리도록 말씀하셨다(레 1:2-14). 우리는 양에게서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희생 제물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보게 되고(사 53:7), 비둘기에게서는 하늘로부터 임한
성령님을(마3:16), 그리고 오늘 본문 벧세메스로 가는 소에게서 교회를 사랑하고 헌신하는 충성스런 성도의 모습을 발견하게 된다.
하나님의 법궤가 이스라엘로 다시 돌아오게 된 것은 하나님의 직접적인 간섭이었다. |사실 새끼를 갓 낳은 어미 소와 새끼 송아지를
따로 떼어 둘 경우 본성적 본능으로는 어미 소가 송아지를 향해 발걸음을 옮기는 것이 너무도 당연한 데도 하나님께서는 언약궤를
운반하는 어미 소로 하여금 곧 바로 벧세메스로 향해 올라가도록 역사하신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교훈은 비천한 짐승도 자신의 진정한 주인인 하나님의 뜻을 따르기 위해 자연적 본능도 거스르고 복종했다는 것이다.
하물며 하나님의 형상을 입은 우리가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말씀에 온전히 순종하는 것은 당연하지 않겠는가? 이 암소들은 하나님의
법궤를 싣고 가는 새 수레의 멍에를 메는 소였다. 소가 하나님의 법궤를 메고 간 것은 소로서는 최상의 축복의 멍에인 것처럼 이
세상에 많은 멍에가 있지만 하나님의 거룩한 교회를 위한 성도의 멍에는 참으로 보람된 최상의 축복이다.
이 두 암소는 금방 낳은 새끼를 떼고 울며 가야 했다. 성도들도 하나님의 교회를 바로 섬기기 위하여서는 가정도, 직장도,
사업도 뒤로 두어야 할 때가 없지 않다. 예수님은 “무릇 내게 오는 자는 자기 부모와 처자와 형제와 자녀와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않으면 나의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눅14:26)고 말씀하셨다.
이 두 암소는 서로 보조를 맞추어 갔다. 성도는 위로는 주님의 뜻에 맞추고 아래로는 서로 마음을 같이하고 같은 사랑으로 뜻을
합하여 겸손한 마음으로 봉사해야 된다(빌2:3). 그리고 이 두 암소는 밀을 거두는 추수기에 밀밭을 지나면서도 먹을 것에 좌우로
치우치지 않고 오로지 앞으로만 갔다. 오늘 우리 성도들도 땅의 것, 세속적인 것에 치우치지 말고 신앙생활을 해야 한다.
그리고 이 두 암소는 최종 목적지 벧세메스로 끝까지 그 길을 갔다. 이 두 암소가 끝까지 충성하여 벧세메스로 간 것처럼 성도는
선한 싸움을 싸우고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켜서 천성에 이르러야 한다(딤후4:7). 멍에를 메고 간 그 두 암소는 마지막에
번제물이 되어 불살라진다. 한 알의 밀알이 되어 죽을 때 많은 열매를 맺는 것처럼(요12:24) 자신을 하나님의 제물로 드려질 때
하나님의 아름다운 성도의 봉사가 될 것이다.
1840년
9월 4일 영국 웨일즈 리야드란 곳 어느 목사님의 가정에 한 사내 아이가 태어났습니다. 그는 런던에서 런던대학 뉴 칼리지에서
신학을 공부하고는 1863년 고향인 하노버 교회에서 목사안수를 받습니다. 중국의 선교에 관심이 있었던 젊은 목사는 24세 청년으로
신혼의 신부를 데리고 중국 선교사로 갔다가 본격적인 선교사업도 하기 전에 기후와 식사 생활 형편이 맞지 않아 부인이 그만 죽고
맙니다. 큰 슬픔과 괴로움이 있었지만 기도로 극복하고 있다가 마침 조선 땅 황해도 장연에서 건너온 천주교인 김자평 최선일이란
사람들을 만나 조선으로 가기로 마음을 먹습니다. 스코틀랜드 성공회의 후원을 받아 많은 한문 성경을 공급받고는 조선 땅 백령도를
중심으로 한 서해 도서지방에 성경을 나눠줍니다.
1865년 9월의 일입니다.
다시
중국으로 갔다가 이듬해 1866년 미국 상선이었던 제너럴 셔먼 호를 타고 조선으로 오게 되었는데 강화를 돌아 한강으로 올라가야 할
배가 그만 뱃길을 잘못 알아 북상하며 대동강으로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결국 배가 정박한 곳은 평양의 만경대 일대로 물이 빠지자 그
배는 그만 대동간 모래사장에 박히게 되었습니다.
그
때 평양감사 박규수가 군대를 이끌고 나와 제너럴 셔먼 호를 불태우고 선원을 다 잡아 죽이게 되는데 이 젊은 목사도 체포되어
백사장으로 끌려 나왔습니다. 그러나 그는 끌려 나오는 순간에도 사람들과 군인들에게 성경을 나눠주었다고 전해졌고 결국 그 곳에서
참수형으로 생을 마치게 됩니다.
그의 나이 27세 1866년 9월 2일 저녁에 있었던 일이었습니다. 그 젊은 목사의 이름은
토마스. 선교사 (Robert J Tomas 1840-1866)한국에 온 선교사로 첫 순교자였던 것입니다.
그런데
일은 거기에서 끝나지 않습니다. 그 때 그에게서 성경을 받았던 사람 중 홍신길이란 사람은 후에 강서 교회를 세우게 되고,
최치량이란 사람은 평양교회를 개척하고, 성경을 뜯어 벽지로 발랐던 영문주사 박영식은 후에 신실한 신자가 되어 그 집이 널다리교회가
되었고, 토마스의 목을 자른 장본인인 박춘권이란 사람은 평양교회 장로가 됩니다.
♦ 1월 4일(화)
♦ 오늘 읽어야 할 말씀 : 사무엘상 5:1∼22 ♦ 묵상을 위한 주제 : 여호와의 손(6절) ♦ 성구 : 여호와의 손이 아스돗 사람에게 엄중(嚴重)히 더하사 독종(毒種)의 재앙(災殃)으로 아스돗과 그 지경(地境)을 쳐서 망(亡)하게 하니.
“여호와의 손(The Lord's hand)”이란 하나님의 능력을 상징합니다. 왜냐하면 여호와의 궤를 블레셋 사람에게 빼앗겼을 때 블레셋 진영에서는 그 궤를 에벤에셀에서부터 아스돗, 가드, 에그론으로 옮겼습니다.
당시 전쟁은 나라와 나라의 싸움이 아니라 그 나라가 섬기는 신과 신의 싸움이었습니다. 블레셋의 주신은 다곤(Dagon)이었고 이스라엘의 신은 여호와 하나님입니다. “언약궤(the ark of God)”는 여호와 하나님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블레셋 사람들은 그들의 섬기는 신 다곤이 여호와를 이겼기 때문에 언약궤를 다곤의 신당에 옮겨 놓았습니다. 그런데 여호와의 궤가 블레셋 진영에서 옮길 때마다 그 진영에는 이상한 현상이 나타났습니다.
아스돗에서는 다곤 신당에서 다곤이 엎드러졌습니다. 가드에서는 독종에 시달렸습니다. 여호와의 궤를 에그론 지역으로 옮기려 할 때 에그론 주민들은 이스라엘 신의 궤를 우리 지역에 가져다가 우리들을 죽이려한다며 이스라엘의 궤를 이스라엘로 보내어 죽임을 면하자고 외쳤습니다.
이스라엘 진영에서는 여호와의 궤를 빼앗겼기 때문에 “이가봇” 즉 “하나님의 영광이 떠났다”고 탄식합니다.
그러나 블레셋 진영에서는 여호와의 궤가 블레셋 사람들에게 두려움이 되었습니다. 블레셋 사람들에게 두려움이 된 여호와의 궤를 “하나님의 손”이라고 합니다.
주를 믿는 사람들이 믿음으로 살아가지 못할 때 믿음이 없는 세상 사람들로부터 믿음의 참된 의미를 깨달아야 한다는 교훈입니다.
오, 주여 저희들의 믿음 없음을 용서하여 주시고 겨자씨만한 믿음만이라도 사모하게 하소서
♪ 찬양 / 주 믿는 사람 일어나
예수 내 구주! 예수 내 생명! 예수 내 권세!
♦ 1월 3일(월)
♦ 오늘 읽어야 할 말씀 : 사무엘상 4:1∼22 ♦ 묵상을 위한 주제 : 이가봇(21절) ♦ 성구 : 이르기를 영광(榮光)이 이스라엘에서 떠났다 하고 아이 이름을 이가봇이라 하였으니 하나님의 궤(櫃)가 빼앗겼고 그 시부(媤父)와 남편(男便)이 죽었음을 인(因)함이며.
“이가봇(Ichabod)”이란 “엘리”의 아들 “비느하스”의 부인이 낳은 아들의 이름으로 "이스라엘에서 영광이 떠났다"라는 뜻입니다.
영원하신 하나님의 영광은 떠날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광이 떠났다는 것은 하나님이 이스라엘과 함께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왜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과 함께하지 않는다고 하셨을까요?
"여호와의 궤(법궤)"는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합니다.
블레셋은 '아벡"에 진을 쳤고 이스라엘은 "에벤에셀"에 진을 쳤습니다. 이스라엘이 패하여 4천 명의 군사가 죽었습니다.
이스라엘 진영에서는 "실로"에 있던 "여호와의 궤"를 "에벤에셀"로 옮겨옵니다. 마치 "하나님의 궤"가 전쟁에서 승리하게 하는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또다시 블레셋에게 패하여 하나님의 궤는 빼앗겼고 엘리의 두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는 죽임을 당했으며 군사 3만명이 죽었습니다.
전쟁의 결과를 기다리던 엘리는 참패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의자에서 넘어지며 목이 부러져 죽고 말았습니다.
마침 비느하스의 아내가 아이를 낳던 중 하나님의 궤를 빼앗겼고 엘리와 남편이 죽었다는 소문을 듣고 아들을 낳고 죽었습니다.
비느하스의 아내가 낳은 아들을 "이가봇"이라고 불렀습니다.
하나님의 궤를 전쟁터로 옮기오면 전쟁에서 이길 것이라는 생각은 믿음이 아니라 형식입니다.
하나님을 떠난 형식은 실패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교훈합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알지 못했습니다. 사사시대에 베냐민과의 전투에서 패배했던 이유와(삿 20장) 가나안 땅으로 입성할 때 아이성과의 전투에서 패한 이유는(수 7장) 언약궤가 있었기 때문이 아니라 죄악에 붙잡혀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하나님 앞에 온전한 회개의 제사를 드리며 오직 하나님의 뜻에 순종할 때에만 승리할 수 있었습니다. 여호와의 궤가 승리를 보장하는 것이 아닙니다.
전쟁에서의 승리보다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순종하는 것입니다.
제사장은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말씀과 뜻을 바르게 전해야 할 사명이 있습니다.
언약궤와 같은 하나님 임재의 상징을 옮겨온다고 승리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을 갖고 있습니다. 현대식으로 잘 지은 교회에 다니고 있습니다. 다양한 프로그램에 참여합니다. 이런 교회에 다니는 것이 신앙생활을 잘 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믿음이 아닙니다.
날마다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과 동행하려면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그 말씀대로 살아야 합니다. 듣는 사람은 많습니다. 그런데 들은 것을 삶에 적용하는 사람을 찾기 어렵다고 합니다.
지난 날의 형식적인 신앙생활을 버리고 온전하게 순종하는 생활을 시작하는 것이 새해를 맞이하는 바람직한 신앙적 자세라고 하겠습니다.
행복한 삶을 위하여 하나님을 찾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고 삶을 정돈할 때 너희에게 필요한 것을 미리 아시는 하나님께서 더 좋은 곳으로 인도하실 것입니다.
"작심삼일"이란 말처럼 신앙적 결단이 흔들릴 수 있는 매우 중요한 날입니다. 흩어지는 몸과 마음을 추스려서 목적지를 향하여 바른 길을 따라 걸어가야 하겠습니다.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수양의 기름보다 나으니라”(사무엘상 15:22)
매일의 삶이 순종하는 훈련장이 되어 승리할 수 있는 십자가 군사로 거듭나는 은혜를 누리시기 바랍니다.
♪ 찬양 / 우리는 주님을 늘 배반하나
예수 내 구주! 예수 내 생명! 예수 내 권세!
♦ 2022년 1월 1일(토)
♦ 오늘 읽어야 할 말씀 : 사무엘상 3:1∼21 ♦ 묵상을 위한 주제 : 주의 종이 듣겠나이다(9절) ♦ 성구 : 이에 사무엘에게 이르되 가서 누웠다가 그가 너를 부르시거든 네가 말하기를 여호와여 말씀하옵소서 주의 종이 듣겠나이다 하라 이에 사무엘이 가서 자기 처소에 누우니라.
2022년 새해를 맞아 하늘의 크신 은총이 날마다 넘쳐나시기를 기도합니다.
“주의 종이 듣겠나이다(your servant is listening)”
왜 하나님은 “엘리”의 두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를 회개시켜 제사장으로 세우지 않고 한나로 하여금 기도하게 하신 후에 사무엘을 낳게하여 그를 사용하셨을까?
“여호와께서 그(한나)에게 임신하지 못하게 하시니”(삼상 1:5b) “그들(홉니와 비느하스)이 자기 아버지(엘리)의 말을 듣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그들을 죽이기로 뜻하셨음이더라”(삼상 2:25)
이와 같은 말씀을 어떻게 이해하셨습니까?
한나는 성태하지 못하게 하시고 홉니와 비느하스는 죽이기로 작정하셨는데 그 의미가 무엇이었을까?
하나님은 어떤 사건을 일으킬 때는 반드시 하나님께서 나타내고자 하시는 뜻이 있기 때문에 때로는 복잡하고 시간이 걸리는 방법을 사용하십니다.
하나님은 항상 언약을 중심으로 일하시기 때문에 그 언약을 어떻게 이루어낼까 하는 차원에서 일을 계획합니다.
본문은 사무엘을 부르셨고 그를 통하여 엘리의 집안에 대한 심판을 선언합니다.
사무엘서는 사사시대에 일어났던 역사를 말합니다. 사사시대의 특징은 왕이신 하나님을 왕으로 인정하지 않는 타락한 백성들의 삶이 마치 당연한 것처럼 드러났던 시대라고 하겠습니다.
그러므로 여호와의 말씀이 희귀하여 이상이 보이지 않았다고 합니다.
여호와의 말씀이 희귀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계시에 관심을 갖지 않는 영적으로 매우 어둡던 시대라고 하겠습니다.
제사장은 하나님의 말씀과 가장 가깝던 사람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계시가 주로 제사장을 통해서 나타내셨기 때문입니다.
백성들은 제사장으로부터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그런데 제사장 엘리는 눈이 점점 어두워 잘 볼 수 없었습니다. 육신적으로 노쇄했다는 것보다는 영적인 감각이 어두워졌다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은 나이가 많다고 해서 쓸모없는 사람으로 취급하여 젊은 사람으로 교체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모세의 경우 죽을 때 나이가 120세였지만 눈이 흐리지 않았고 기력이 쇠하지 않았다고 했기 때문입니다(신 34:7).
모세가 죽을 때가 되어 여호수아로 교체하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언약을 드러내는 일에 모세의 할 일이 끝났기 때문입니다.
엘리가 눈이 점점 어두워서 잘 보지 못했다는 것은 단순히 엘리의 건강이 좋지 않았다든가 나이가 들어서 제사장의 일을 할 수 없게 되었음을 설명하기 위함이 아니라 제사장으로서 하나님에 대한 영적인 상태가 어떠했음을 암시하는 것입니다.
엘리를 통해서는 더 이상 하나님의 계시를 기대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무엘을 부르신 것은 하나님이 하시는 일의 변화가 왔다는 것을 암시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무엘에게 엘리 제사장과 그 집안에 관한 심판 예언을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엘리 집안의 심판에 대한 책이이 엘리 제사장에게 있다고 하셨습니다.
“내가 그의 집을 영원토록 심판하겠다고 그에게 말한 것은 그가 아는 죄악 때문이니 이는 그가 자기의 아들들이 저주를 자청하되 금하지 아니하였음이니라”(13절).
제사장으로서 엘리는 아들들의 죄악에 대하여 알면서도 율법으로 다스리지 않았기 때문에 심판을 받게 됩니다.
결국 엘리의 잘못은 제사장으로서 하나님과 잘못된 관계에 있었습니다.
교회에 다니고 기도하며 성경을 읽는다는 것으로 성도의 본문을 감당하는 것이 아닙니다.
거룩한 하나님의 말씀을 나의 삶에 적용하려고 몸부림치며 열매 맺으려고 수고하는 삶에 의해서 결정될 것입니다.
복음의 본질은 예수님과 신령한 관계를 유지하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엘리 가문으로 인해 하나님의 계시가 무시되었던 상태에서 어린 사무엘을 통해 하나님의 계시가 어떻게 이스라엘에게 나타나고 있는지 보여주신 것처럼 2022년 새해를 맞이하여 나와 같은 사람을 통하여 하나님의 구원 은총을 드러내는 매일의 삶에 성공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오 주여 새해를 맞아 저희들을 새롭게 다듬어 주옵소서 주의 거룩한 구원의 뜻 날마다 드러내게 하소서.
♪ 찬양 / 주 예수의 강림이 가까우니
예수 내 구주! 예수 내 생명! 예수 내 권세!
말씀하시는 하나님 엘로힘 미드벨(alohim medver) / אלוהים מדבר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은 한마디로 ‘말씀하시는 분’이다. 말씀으로 우주 만물을 창조하셨고, 말씀을 통해 당신을 계시하실 뿐 아니라 말씀을
통해서 성도들의 삶과 인생의 발걸음을 인도하시기 때문이다. 물론 사람도 ‘말하는 존재’이다. 말을 통해 자신의 생각과 뜻을
드러내고 의사소통이 이루어진다. 이처럼 말은 하나님과 사람의 공통점이긴 하나 중요한 차이점이 있다. 사람은 말로 끝나고, 말이
행동과 삶으로 열매를 맺기 어려운 경우가 많다. 하지만 하나님은 말씀하시는 것이 곧 일하는 것이다. 한번 말씀하시면 반드시 그
내용대로 성취되기 때문이다. 이를 나타내 주는 히브리어가 1)다바르이다.
‘말하다’는
뜻의 히브리어는 크게 두 가지가 있다.
첫째 ‘아마르’는 일반적인 언어행위를 가리킨다. 이의 명사형 ‘이므라’ 역시 ‘말,
말씀’ 등의 뜻을 갖는다.
둘째 ‘다바르’도 말을 하는 행위를 가리킴에 있어서 ‘아마르’와 거의 동의어로 쓰인다. 이 둘의 중요한
차이점은 ‘이므라’에 비해 ‘다바르’가 ‘성취’에 강조점이 있다는 것이다.
“빛이 있으라” 하시면 곧 ‘빛’이 생겨나 말씀하신
바를 이루신다(창 1:4). 그러므로 빛이 ‘있으라’고 말씀하신 하나님의 ‘말씀’과 ‘빛’이라는 실체는 별개가 아니라 하나의
동일한 실체이다.
이사야 55:10-11에서 “비나 눈이 하늘에서 내려 빈손으로 다시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토지를 적시어 싹이
나게 하고 열매가 맺게 하여 파종하는 자에게 종자를 주며 먹는 자에게 양식을 줌과 같이 하나님의 ‘입에서 나가는 말’(다바르)은
결코 헛되어 돌아오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며’ 명하여 보낸 일에 형통하게” 된다. 사람의 말은 공허하지만 하나님의
‘말씀’(다바르)은 뜻을 ‘이루는’ 능력이 있다. 한번 선포된 말씀은 반드시 성취되며, 그 말씀을 기록한 것(규례)는 반드시
사람이 지켜 행해야할 의무이기도 하다.
2)아마르는 말하는 것을 뜻하는 가장 일반적인 단어라면, ‘다바르’는 말하는 것으로 끝나지 않고 말의 내용을 성취하는 행위와 열매까지를 포함하는 단어라는 점이다.
말의 힘
대통령의
말, 회사에서 과장이나 부장 등 상사의 말은 힘이 있다. 그 힘을 ‘권한’, 또는 ‘권위’라 한다. 이러한 권한이나 권위는
어떻게 해서 주어지는가? 왜 대통령의 말이 힘이 있고, 상급자의 지시가 권위가 있는가? 말하는 사람의 인격과 삶, 사람의 됨됨이와
상관 없이 힘이 있다. 이 힘을 우리는 ‘위임된 권위(권한)’라 한다.
대통령은
선거를 통해 국민들의 위임을 받아 ‘대통령의 직’에 걸맞는 권한을 행사한다. 그러므로 같은 내용을 말하지만, 직위가 높을수록,
특별히 행정의 최종 결정권자인 대통령의 말에는 가장 강력한 힘이 있다. 이 모든 힘은 국민들이 투표를 통해 권한을 위임했기
때문이다. 그 힘은 5년의 직을 마치고 물러나면 전혀 힘을 발휘하지 못한다.
과거 전제왕권 시대에는 투표를 통해 공식적인 위임을 절차를 거치지 않았지만, 왕족이 국민들을 통치한다는 합의된 관습이 있었고, 그 관습이 권한을 위임하게 된다. ‘관습적 위임’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이처럼 위임받은 권한은 제약이 있다. 법 위에 군림할 수 없다. 위임받은 자가 권한을 제대로 행사하지 못하고 부당하게 행하면 그
위임을 철회하는 극단적인 경우도 있다. 그 경우에는 곧바로 물러나게 된다. 회사에서도 마찬가지다. 기업을 설립하고, 조직을
정하면 그 직책에 맞는 한계와 권한이 있고, 사람의 입에서 나오는 말의 힘은 그 직급에 비례한 힘을 갖게 된다.
여기서
아마르와 다바르의 차이점이 있다. 아마르는 사람들이 말하는 과정, 입에서 나와 공표되는 내용 자체를 의미한다. 하지만 다바르는
단순히 말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직책에 맞는 권한과 힘을 통해 말로 지시하고, 지시를 받은 상대가 이를 수행하여 어떤 ‘결과물’을
이루어 내게 된다. 따라서 모든 ‘결과물’(일)은 ‘말’을 통해 지시할 때 이를 수행함으로써 이루어지게 된다. 이 경우
‘다바르’는 말하는 행위뿐 아니라 그 말로 인해 실행되고 열매를 맺는 일의 모든 과정과 결과를 지칭하게 된다. 이렇게 [말 =
결과]의 등식이 성립하게 된다. 말이 곧 일이고, 일은 말 혹은 지시를 함으로써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말씀의 능력과 속성
하나님의
권위는 위임된 권위가 아니다. 누구의 위임이나 추인과정을 통해 하나님이 합의된 권한을 획득한 것이 아니다. 하나님은 그 자체로서
힘이 있고 능력이 있으시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말씀하시면 하나님 자신의 권위와 힘으로 그 말씀의 내용이 성취가 된다. 이처럼
말씀이 육신이 되어 오신 분이 바로 예수님이다.
1) 선포된 말씀
말씀을 뜻하는 히브리어 명사 ‘다바르’가 여호와와 결합되어 사용된 3)데바르 아도나이,
곧 ‘여호와의 말씀’(the Word of the Lord)이란 표현이 구약성경에 259회나 사용되었다. 이는 주로 선지서에서
선지자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할 때 하나의 ‘공식’처럼 사용한 말이다. 즉, 선지자가 전하는 말은 자신의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신 말씀’ 임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호 1:1, 욜 1:1, 욘 1:1, 암 1:1, 미 1:1, 습 1:1, 학 1:1,
말 1:1).
시편 119:130 “주의 말씀을 열므로 우둔한 자에게 비취어 깨닫게 하나이다”
‘주의 말씀’(다바르)은 “열어서 우둔한 자를 깨닫게 하는” 말씀이다. 주의 말씀을 연다는 것은 ‘언어/말’ 속에 포장된 하나님의 말씀의 실체를 꺼내어 증거하는 것을 가리킨다.
하나님은
‘언어’를 통해 말씀의 형태로 계시하시는 분이다. 그 과정에서 하나님의 생명, 능력, 지혜, 창조 등의 모든 속성은 ‘말’이라는
언어의 보자기에 싸여서 전달되기에 극히 일부만 그 실체가 보여지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 말씀을 아무리 들어도 우둔하기 때문에
깨닫지 못하고, 그 말씀 속에 있는 진정한 의미와 생명의 능력을 발견하지 못한다. 그래서 하나님은 입을 ‘열어서’ 우리가 알아들을
수 있는 말씀으로 선포하실 뿐만 아니라 다시한번 그 말씀의 보자기를 벗겨내고, 껍질을 벗겨내어 이면의 뜻을 깨닫게 해주신다(롬
2:29). 언어의 형태로 포장된 말씀의 실체를 열 때 그것은 마치 빛이 비취는 것과 같아 우둔한 자도 깨닫게 되는 것이다.
2) 기록된 말씀 - ‘글’, ‘행적’, ‘사적’
‘다바르’는 선지자나 하나님의 종들의 입을 통하여 선포된 말씀일 뿐 아니라 그것을 여러 가지 형태로 기록하여 대대로 지켜야할 규범으로 정하셨다.
① 역대상 29:29 “다윗 왕의 시종 행적이 선견자 사무엘의 글과 선지자 나단의 글과 선견자 갓의 글에 다 기록되고”
“다윗
왕의 시종 행적(다바르)”이 ‘기록된 말씀’이다. 그런데 이 ‘기록된 말씀’이 생겨나게 된 과정을 보면, 가장 먼저 다윗 왕의
‘명령’(말)이 있고, 그 명령(말)을 받아 신하들이 정책을 실행하는 실천이 있게 되고, 실행한 그 일을 기록할 때 ‘다윗 왕의
시종 행적’이 여러 사람의 글에 실리게 된다. 따라서 성취된 모든 ‘일’은 저절로 된 것이 아니라 먼저 ‘말씀’(다바르)이 있고 그
말씀대로 행함으로써 성취된 ‘일’(다바르)이 있게 되고, 그 이후에 그 내용을 책에 기록함으로써 ‘기록된’ 말씀이 된다. 이 세
가지 모두를 포함하는 단어가 히브리어 ‘다바르’이다.
② 역대하 13:22 “아비야의 남은 사적(다바르)과 그 행위와 그 말은(다바르) 선지자 잇도의 주석 책에 기록되니라”
위
구절에서 ‘사적’과 ‘말’이 모두 히브리어 ‘다바르’이다. 아비야가 선포한 ‘말’(다바르)과 ‘행적’(다바르)이 잇도의 주석책에
기록되어 후세에 전해지도록 보존한 것이다. 역대하 9:29 에서 “솔로몬의 행적(다바르)은 ... 선지자 나단의
글(다바르)과...”라고 함으로서 ‘행적’과 ‘글’이 둘 다 ‘다바르’로 쓰였다.
③ 열왕기상 14:29 에서도 “르호보암의 남은 사적(다바르)과 무릇 그 행한 일이 유다 왕 역대지략(다바르')에 기록되지 아니하였느냐”라고 하였다.
3) 성취된 말씀 - ‘일’, ‘기사’
① 창세기 20:8에서 아비멜렉은 “그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모든 신복을 불러 ‘그 일’(다바르)을 다 ‘말하여’(다바르) 들리매 그 사람들이 심히 두려워 하였더라”고 하였다.
아비멜렉이
신복들을 불러 말한 ‘그 일’은 창세기 20:6-7에서 하나님이 꿈에 그에게 이르신 ‘말씀’(다바르)이다. 그 말씀의 내용은
“네가 온전한 마음으로 이렇게 한 줄을 나도 알았으므로 너를 막아 내게 범죄하지 않게 하였나니 여인에게 가까이 못하게 함이 이
까닭이니라 이제 그 사람의 아내를 돌려 보내라 그는 선지자라 그가 너를 위하여 기도하리니 네가 살려니와 네가 돌려 보내지 않으면
너와 네게 속한 자가 다 정녕 죽을 줄 알지니라”는 것이다. 이 구절에서 ‘다바르’는 말하는 것과 말한 것의 성취를 뜻하는
‘일’의 두 가지 의미로 사용되었다. 하나님이 아직 아비멜렉의 가족을 죽이는 ‘일’(다바르)을 행하시지는 않았지만 그렇게
하시겠다고 ‘말씀’(다바르)하신 것 자체(선포)가 이미 말씀의 ‘성취’(다바르)를 포함하고 있기 때문에 그 말을 들은 신복들이
심히 두려워 한 것이다. 이처럼 히브리어 ‘다바르’는 단순히 입에서 선포된 ‘말씀’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그것의 ‘성취’까지를
포함하는 단어이다.
② 출애굽기 4:28에서 “모세가 여호와께서 자기에게 부탁하여4)보내신 모든 말씀과 여호와께서 자기에게 5)명하신 모든 이적을 아론에게 고하니라”라는 말씀에서도 ‘다바르’는 ‘말씀과 이적’이라는 두 가지 뜻을 나타내준다.
이
구절의 특이한 점은 ‘말씀’(다바르)을 보내고, ‘이적’을 ‘명령하셨다’는 것이다. 이 말은 사실 ‘말씀’을 ‘명하고’,
‘이적’을 ‘보내는’ 것으로 표현하는 것이 훨씬 자연스럽다. 그런데도 서로 바꿔서 표현한 것은 이 둘이 하나의 동일한 행위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말씀’하신 것이 곧 ‘이적’이기에 말씀을 ‘보낸’ 것은 곧 이적을 보낸 것과 같다. 따라서 ‘말씀’과
‘이적’은 사실 같은 것의 다른 표현일 뿐이다. 하나님의 말씀이 곧 이적이고, 이적은 곧 하나님의 명령(말씀)하신 바대로 이루어진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성도는 하나님의 ‘말씀’(다바르)이 선포되면 그대로 순종하고, 그 말씀을 의지하는 생활을 하여서 삶 속에서 ‘열매’(다바르)를 맺어야 한다.
③ 시편 119:9에 나오는 ‘청년’은 이와같은 삶을 살아가는 참 성도를 가리킨다.
“청년이 무엇으로 그 행실을 깨끗케 하리이까 주의 말씀(다바르)을 따라 삼갈 것이니이다”
이
구절에서 주의 ‘말씀’이 ‘다바르’이다. 영어성경(NIV)에는 “By living according to your
word”(주의 말씀을 따라 살아감으로서)로 그 의미를 제대로 살려서 번역하였다. 주의 ‘말씀’(다바르)을 ‘지키며’ 살아가는
삶이 거룩한 행실을 유지하는 비결이다. 주의 말씀을 지키는 것은 곧 그 말씀을 내 삶 속에서 성취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4) 성육신 하신 말씀 이는 말씀이 선포나 기록된 언어의 형태가 아니라 우리의 육신과 삶 자체로 체화되어 임하신 가장 강력한 형태의 말씀이다.
요한복음 1:14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이
경우는 단 한 번의 유일무이한 말씀의 형태, 가장 강력한 말씀이다. 말씀이 육신이 되신 분의 모든 언어과정과 행동은 모두
하나님의 말씀이요, 권위가 있으며, 힘이 있는 말씀이다. 따라서 이분의 말씀은 성경을 인용하거나 설교할 때만 말씀이 아니라,
예외적으로 그분의 입을 통해 발화(發話)된 모든 언어는 곧 말씀 그 자체가 된다. 그리고 그 권위는 역시 누구에게 위임된 권한이
아니라 스스로의 권위로 말씀하시기 때문에 창조의 능력, 치유의 능력이 있다.
이상의 내용을 살펴볼 때, 히브리어
‘다바르’는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속성과 능력을 가장 잘 나타내 주는 단어이다. 말만 많고 행함과 열매가 없는 사람의 말과 달리
하나님은 말씀하시면 반드시 성취가 되기 때문에 말씀이 곧 일이다. 하나님의 ‘말씀’(다바르‘)을 받은 성도들 또한 말만 하는
사람이 아니라 말을 하면 곧 성취되는 능력의 사람이 되기를 소망해 본다.
♦ 12월 31일(금)
♦ 오늘 읽어야 할 말씀 : 사무엘상 2:1∼36 ♦ 묵상을 위한 주제 : 지식의 하나님(3절) ♦ 성구 : 심히 교만한 말을 다시 하지 말 것이며 오만한 말을 너희 입에서 내지 말찌어다 여호와는 지식의 하나님이시라 행동을 달아보시느니라.
“지식의 하나님(the LORD is a God who knows)”
하나님은 지식의 하나님입니다. 지식이란 아는 것을 말합니다. 안다는 것은 기억하는 것이 아니라 행동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를 들면 공항에 비행기를 누가 운전합니까? 조종사라는 사람이 운전합니다. 나도 사람입니다. 그러면 나도 비행기를 운전할 수 있을까요? 내가 비행기에 대한 운항 지식이 없기 때문에 비행기를 운전할 수 없는 것처럼 하나님을 알지 못하면 하나님을 믿을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우리가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갖기를 원합니다.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란 곧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지식을 말합니다.
내가 진리의 말씀을 알고 그 말씀을 믿을 때 비로써 그 말씀대로 주님이 역사하십니다.
세상 지식도 많이 가지고 있는 사람이 더 잘 살 수 있는 것처럼 신앙의 세계에서도 하나님을 더 많이 잘 알고 있는 사람이 신앙생활을 더 잘 할 수 있습니다.
세상에서는 공부를 못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아는 지식은 누구든지 배울 수 있고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 믿는 것이 얼마나 놀라운 일인지 아십니까? 우리가 말씀만 믿으면, 그 말씀대로 하나님이 그대로 이루어 주십니다.
내가 말씀에 대한 지식을 갖고 그 지식대로 생각하고 믿으면 그대로 이루어 질 것을 확신하십니까?
성경책은 하나님을 알려주는 말씀입니다. 그 하나님은 지식의 하나님으로 나의 행동을 달아보십니다.
무엇을 평가하실까요?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갖는 사람이 그가 아는 그 말씀대로 생활하는지 생활을 하지 못하는지를 평가하십니다.
바꾸어 말하면 내가 믿음대로 사나 안사나 내가 무엇을 생각하는지 평가하겠다고 합니다.
왜 평가하실까요? 그대로 이루어주시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내가 말씀을 삐딱하게 알면 그 결과는 하와처럼 망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내가 말씀을 정확하게 알고, 그대로 살면, 그대로 이루어집니다.
하나님은 나의 목자라, 내게 부족함이 없다고 믿고 고백하면 그대로 이루어 질 것입니다.
나는 부족함이 없다. 나는 주야로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한다. 나는 시냇가에 심겨진 나무와 같다. 나는 복을 받은 자이다. 나는 늘 깨어서 기도하는 자다. 날마다 이렇게 고백하고 기도하며 믿고 아는대로 행동한다면 반드시 그 믿음대로 이루어 주실 것입니다.
하나님은 지식의 하나님(엘 데오트)이십니다. 내 백성이 지식이 없어서 망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하나님의 말씀을 고백하며 살아갈 때 하나님은 그 말씀대로 반드시 이루어 주실 것을 확신하는 것입니다.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님 사랑하는 일에 성공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 찬양 / 주의 말씀 듣고서
예수 내 구주! 예수 내 생명! 예수 내 권세!
하나님의 명칭
엘 에헤드 : 하나이신 하나님 (말 2:10) 엘 한네 에만 : 신실하신 하나님 (신 7:9) 엘 에메트 : 진리의 하나님 (시 31: 5) 엘 챠디끄 : 정의의 하나님 (사 45:21) 엘 샤다이 : 모든 것에 충만한 하나님 (창 17:1, 28:3, 35:11, 출 6:31, 시 91:1) 엘 엘욘 :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 (창 14.20, 시 9.2) 엘 올람 : 영원의 하나님 (창 21.33, 시 90.1-3, 93.2, 사 26.4) 엘 로이 : 나를 보시는 하나님 (창 16.13) 엘 예슈룬 : 의인의 하나님 (신 32.15, 33.5, 26, 사 44.2) 엘 깁보르 : 전능의 하나님 (사 9.6) 엘 데오트 : 지혜의 하나님, 지식의 하나님(삼상 2:3) 엘 학가돌 : 위대한 하나님 (신 10.7) 엘 학카보드 : 영광의 하나님 (시 29.3) 엘 학까도쉬 : 거룩한 하나님 (사 5.16) 엘 하쉬샤마임 : 하늘의 하나님 (시 136.26) 엘 카히야이 : 나의 생명이신 하나님 (시 42.8) 엘 카눈 : 자비하신 하나님 (욘 4.2) 엘 이스라엘 : 이스라엘의 하나님 (시 68.36) 엘 살리 : 나의 힘되신 하나님 (시 42. 9) 엘 라쿰 : 열정의 하나님 (신 4. 31) 엘 심카트길리 : 나의 기쁨의 하나님 (시 43.4) 엘 예슈아티 : 나의 구원의 하나님 (사 12.2) 엘 예슈아테누 : 우리의 구원의 하나님 (시 68. 19) 엘 깐노 : 질투하시는 하나님 (수 24.19) 임마누엘 : 우리와 함께 계신 하나님(사 7:14)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지 않고 하솀(the name, 그 이름) 또는 아도나이(주님)라고만 불렀습니다.
♦ 12월 30일(목)
♦ 오늘 읽어야 할 말씀 : 사무엘상 1:1∼28 ♦ 묵상을 위한 주제 : 평안히 가라(17절) ♦ 성구 : 엘리가 대답하여 가로되 평안히 가라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너의 기도하여 구한 것을 허락하시기를 원하노라.
“평안히 가라(Go in peace)”
제사장 엘리는 성전에서 오랫동안 기도하던 한나의 모습이 마치 술에 취한 것처럼 보여 “네가 언제까지 취하여 있겠느냐? 포도주를 끊으라”고 말합니다(14절).
그러나 한나는 “내가 포도주에 취한 것이 아니라 마음이 슬픈 여자라 여호와 앞에 나의 심정을 토로한 것” 이라고 대답합니다(15절).
이때 제사장 엘리는 “평안히 가라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너의 기도하여 구한 것을 허락하시기를 원하노라.” 하고 위로했습니다(17절).
한나는 여호와 하나님으로부터 응답을 받은 것이 아니라 엘리 제사장으로부터 “평안히 가라 너의 기도하여 구한 것을 허락하시기를 원한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한나는 제사장 엘리의 말을 마치 여호와 하나님의 음성으로 믿고 다시는 얼굴에 근심하는 것이 없어졌다고 합니다.
사무엘상과 사무엘하는 사사시대의 마지막 사사인 사무엘의 출생부터 시작해서 이스라엘의 왕이 세워지는 왕정 정치시대로 옮겨가는 대략 150년간의 시대적 변화에 대한 말씀입니다.
사사이면서 선지자인 사무엘을 통해서 세워진 사울 왕과 다윗 왕을 통해 이스라엘은 새로운 왕정시대를 맞이하였습니다.
사사시대는 징계와 부르짖음과 구원자 사사 그리고 평화를 유지하는 삶을 반복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삶을 보여주었습니다.
왕정시대는 왕을 세워 새로운 시대를 열어보려고 하였으나 그 결과는 오히려 이스라엘이 남과 북으로 분열되고 말았습니다.
본문의 시대적 배경은 사시시대 말기로 암흑의 시기라고 하겠습니다.
하나님은 “엘가나”라는 레위인의 가정에서 태어날 아기를 통해서 새로운 시대를 준비시키셨습니다.
사무엘상 1장의 시대적 배경과 오늘의 시대는 매우 흡사하다고 하겠습니다.
암흑의 시기에는 새로운 인물이 세워져야 합니다.
오늘의 시대에 필요한 나실인과 같은 새로운 인물은 누구일까요?
한나와 같이 성전에 올라가 간절하게 기도할 때 제사장 엘리로부터 “평안히 가라!”는 말을 듣고 평안히 갈 수 있는 믿음의 사람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기도에 대한 세 가지 응답을 생각해 봅니다.
첫째는 “YES”
기도한 후에 곧 바로 응답 받게 된 것을 말합니다.
둘째는 “NO”
아무리 기도할지라도 어떤 음성도 듣지 못할 때 응답이 없는 것을 말합니다.
셋째는 “WAIT”
기도하였으나 아직은 때가 아니므로 더 기다리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한나와 같은 기도와 믿음을 갖고 문제를 하나님 앞으로 내려놓을 때 새로운 일을 시도할 사무엘과 같은 인물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세상에 흩어지는 성도들은 오늘의 시대가 요구하는 나실인이라고 하겠습니다.
온갖 어려움과 갈등이 가득한 환경에서 이 시대를 바꾸는 하나님의 역사는 헌신된 나실인으로부터 시작될 것입니다.
주님, 오늘 하루의 삶을 주님께 드립니다. 오늘 하루가 내일 그리고 그 다음날로 이어진 믿음의 결단과 고백으로 살아갈 때 하나님의 변화의 도구로 쓰임 받게 하시고 하나님 역사의 산 증인으로 살아가게 하옵소서.
(1) 엘가나의 두 아내중 한 사람으로 사무엘의 어머니.(2) 기도를 드려 사무엘의 얻어 하나님에게 바침 (삼상 1:1).(3) 삼상 2:1-10의 한나의 찬가는 눅 1:46-55의 마리아의 찬가와 비교된다
그림 : 한나의 기도
에브라임 산지 여로암의 아들 엘가나의 두 아내중 한 사람이며 선지자 사무엘의 친모이다. 그녀는 [은총]이라는 이름의 뜻 그대로
남편의 사랑을 독차지했으며 이것때문에 소실인 브닌나로부터 많은 시기와 질투를 받게 되었다. [엘가나가 제사를 드리는 날에는 제물의
분깃을 그 아내 브닌나와 그 모든 자녀에게 주고 한나에게는 갑절을 주니 이는 그를 사랑함이라 그러나 여호와께서 그를 성태치
못하게 하시므로 그 대적 브닌나가 그를 심히 격동하여 번민케 하더라](삼 상1:4-6)
왜 하나님께서는 의도적으로 한나를 성태치 못하게 하셨을까? 왜 한나로 하여금 근심과 고뇌의 함정에 빠지도록 내버려 두셨을까?
이스라엘 고난 신학의 공석에 의하면 하나님께선 자신의 뜻을 이루시기 위하여 의인에게 고 통을 주시며 [어찌 나를 버리셨나이까]라는
탄원을 하게 하신다. 그리고 고난을 통하여 인간의 유한성을 느끼게 하시며, 절망을 통하여 하나님을 더욱 의존케 하시는가 하면,
하나님을 신뢰하는 의지신앙을 통하여 뜨거운 고백과 굳은 언약을 하도록 만드신다.
[한나가 마음이 괴로워서 여호와께 기도하고 통곡하며 서원하여 가로되 만군의 여호와여 만일 주의 여종의 고통을 돌아 보시고 나를
생각하시고 주의 여종을 잊지 아니하사 아들을 주시면 내가 그의 평 생에 그를 여호와께 드리고 삭도를 그 머리에 대지 아니
하겠나이다 ](삼상1:10-11)
이러한 의지신앙과 고백적 탄원과 언약의 서원에 의하여 얻은 아들이 곧 이스라엘의 건국을 위하여 위대한 공헌을 남긴 사무엘 선지자
이다. [이는 성령으로 잉태하사]라는 신앙고백처럼 오직 한나의 신앙과 기도와 그리고 하나님의 깊은 섭리와 은총에 의하여 얻은
아들이라 할 수 있다.
그러므로 한나는 아들을 얻은 후 다음과 같이 기도했다. [내 마음이 여호와를 인하여 즐거워 하며 내 뿔이 여호와를 인하여
높아졌으며 내 입이 내 원수들을 향하여 크게 열렸으니 이는 내가 주의 구 원을 인하여 기뻐함이니이다]](삼상2:1)
[한나] (은총이라는 뜻)는 에브라임 사람 엘가나의 두 아들 중 하나인 선지자 사무엘의 모친이다. 그녀는 남편 엘가나의 사랑을
독차지하였으므로 다른 아내로부터는 미움을 받았다. 즉 브닌나가 한나를 시기한 것은 한나가 갑절이나 사랑을 받고 있는데 대한
반항이었다. 한편 한나는 나이가 넘도록 자식이 없었으므로 매년 실로에 올라가서 하나님께 경배하며 제사드릴 때에 만일주의 여종의
고통을 돌아보시고 나를 생각하시고 주의 여종을 잊지 아니하사 아들을 주시면 내가 그 평생에 그를 야훼께 드리고 삭도를 그머리에
대지 아니하겠다니다라고 서원 기도를 드렸다.
유대인은 무자함을 일종의 저주로 비관했지만 한나는 누구를 원망치않고 하나님께 하소연했던 것이다. 그리고 엘가나는 한나를 내가
그대에게 열 아들보다 낫지 아니하뇨 라고 위로하였다. 엘리 제사장은 한나의 기도하는 것을보고 술에 취한 줄 오해하였지만 한나의
중심 소원을 들은 후 그는 하나님께서 그녀의 기도를 응답하시길 소원하였다.
한나의 간절한 소원은 이루어져 아들을 얻게 되는데 이름을 [사무엘]이라 하였으며 하나님께 약속한대로 아들을 바쳤던
것이다(삼상1장). 사무엘은 후에 이스라엘의 지도자가 되었다. 여기서 몇가지 한나를 통해 나타난 하나님의 교훈을 배울 수 있다.
첫째로 야훼는 우리의 신실하고 간절한 기도를 들으신다는 것이다. 불가능을 가능케 하는 하나님의 위력을 믿었던 한나는 취한 것같은
모습으로 기도했다. 간절한 그녀의 기도는 하나님의 응답을 불러일으켰다. 절박함이 없이는 간절한 기도가 나올 수 없고 간절한 기도가
없이는 하나님의 복을 받을 수 없다. 한나의 애통함이 기도는 모든 이의 기도의 본이 된다.
둘째로 한나의 사건 중에 나타난 교훈은 하나님께서 강한 자를 부끄럽게 하시고 약한 자를 강하게 하신다는 것이다. 한나의 대적
브닌나는 자식이 있었다. 그래서 자식이 없는 한나를 업신여기고 앝보았다. 그러나 야훼는 상황을 뒤바꾸어 놓았다. 즉 한나에게
남편의 사랑과 더불어 자식까지 주셨던 것이다. 언제나 상황을 뜻대로 바꾸시는 하나님의 섭리가 여기서 나타난다. 강하고 있는 것처럼
행동하는 자는 모두 하나님께 거꾸러뜨림을 당하고 만다(고전 1:26-29).
저는 19살 딸과 둘이 살고 있는 싱글 맘입니다. 미국에서 13년 동안 그야말로 모녀가 치열하게 살았고, 둘 다 힘든 일을 해가며 고달픈 가운데서도 서로 의지하며 열심히 살아왔습니다.
새벽에는 도넛 샵에서 낮까지 일하고 저녁에는 레스토랑 웨츄레스를 해가며 하루종일을 일에 시달리고 주일만을 기다리며 지냈습니다. 하나밖에 없는 귀한 딸은 엄마를 돕겠다고 15살부터 학교 다니며 일한
착하고도 착한 딸이었습니다. 그 딸에게 저는 늘 미안한 마음을 가지고 있었고, 잘해주고 싶어도 경제적 여력이 안되어서 늘
안타까워하며 지냈었습니다. 늘 기도해주며 딸아이가 하나님 앞에 올바로 성장하기만을 간절히 기도 하는게 전부였습니다.
저는 일을 너무 많이 해 온몸이 안 아픈데가 없을 정도였는데 그때마다 하나님께 울부짖으며 매달렸습니다. 이 고통의 시간이 언제까지냐고 언제 남들처럼 좀 편안하게 살수 있냐고…
하나님은 침묵 하시는 듯 보였으나 미국생활을 하는 동안 참 신실 하시게도 우리 모녀를 인도하고 보살펴 주셨음을 고백합니다.뒤돌아보면 아.. 정말 하나님은 살아계시구나! 아.. 정말 우리 모녀를 눈동자같이 지켜보고 계시구나 라는 걸 실감할 수 있는 일들이 많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실에서 힘들기만 하면 하나님부터 찾고 울며불며 떼를 쓰곤 했습니다. 누구한테 그러겠습니까. 내 아버지인데…
나를 세밀하게 아시는 내 아버지이니까 내속을 다 드러내 놓을 수 있었지 안 그러면 아마 속이 시커멓게 타버려서 이세상에 살아남지 않았을 거 같습니다.
하나님의 그 은혜로 여태까지 아슬아슬하게 살수 있었고, 그 은혜가 감사해서 울기도 많이 울었고 그 은혜를 갚으며 살아야겠다는 사명감에 불타서 없는 형편에 딸과 나는 해외 중동선교도 몇 차례 다녀오기까지 했습니다.
그곳에서는 살아계신 하나님을 더욱 피부 깊숙이 느낄 수 있었던 귀한 경험이었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기초적인 영성이 다져지지 않은 상태에서 열정에 불타서 했던 사역이라는 점입니다.
선교 가기 전 기도원 목사님께서 안타까운 목소리로 당부를 하셨는데 “영성 회복이 먼저다 영성을 회복하고 선교도 해야지 기도원에 들어와라” 하셨는데 나 정도면 괜찮다고 생각하는 교만하고 오만한 생각을 가지고 그냥 떠나버렸습니다. 그 후 우리 모녀는 선교에 대한 열정도 점점 식었고 그저 먹고 사는 문제로 바쁘게만 살았습니다.
딸은 일하는 곳에서 심하게 스트레스를 받고 있었는데 엄마가 걱정 할까봐 제대로 티도 안내고 일하다가 기어이 올해 4월부터 좀 이상행동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왜 저럴까.. 그냥 애가 스트레스 많아서 그런가 보다 단순하게 넘겼는데 시간이 지날수록 그 도가 지나치게 되었습니다. 엄마인 제게 함부로 대하고 말도 안 듣고 자기 멋대로 돈도 써 버리는 등 이해할 수
없는 행동에 저는 기가 막히고 화도 나고 속이 너무 상했습니다. 어쩜 이렇게까지 변할 수 있을까 선교를 두 차례나 다녀오면서
선교사가 되겠다고 서원까지 한 믿음 좋았던 아이가 교회도 안가고 시간 날 때마다 게임에 빠지는 등 전과는 너무도 다른 모습에 저는
가슴이 아팠습니다.
저는 비상사태다 심각한 영적 전쟁이 시작되었다 싶어서 새벽에 하던 일은 그만두고 새벽예배를 매일 나가며
눈물로 하나님께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아버지… 우리 딸을 사랑하는 아버지… 도대체 왜 이렇게 되었나요. 제 마음이 너무 아파요 제발 이 상황을 어떻게 좀 해주세요 제 말은 듣지도 않으니 하나님이 딸을 어떻게 좀 해주시라고 간절히 기도했는데
매일 기도하다 보니 딸 문제가 아니라 내 문제 부터 돌아보고 회개하라는 마음을 주셨습니다. 자식의 문제는 부모에게 책임이 있고
부모부터 하나님 앞에 온전치 못한 부분을 회개 해야함을 목사님을 통해 또 깨닫고 아이한테 잘못한 점을 하나하나 생각해내어 눈물로
회개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기도원에 잠시 들려 목사님께 이 사태를 설명 드리고 어찌하면 좋겠냐고 여쭈어 보았는데 기도해 보시고는 답을 주셨습니다. 모든 것 다 내려놓고 기도원에 둘 다 들어와서 금식기도 하라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14일, 딸은 7일 금식하라고 하나님이 말씀 하셨다는 겁니다. 2주를 일을 안 하면 생계에도 타격이 있고, 도저히
14일은 엄두도 못 내고 자신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순종해야 한다는 마음을 주셔서 일을 좀 쉬고 나중에 들어와야지 했습니다.
그 후에 집에 돌아와서 며칠 후 아이는 말도 안 되는 말을 하기 시작했고, 급기야는 파격적인 행동까지 하기 시작했습니다.
누군가가 자기한테 속삭이며 엄마를 죽이라고 했는데 도저히 죽일 수가 없어 자신이 죽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떻게 죽을까 생각하며 지낸다는 둥 엄마는 내 엄마가 아니다 나는 누군지 모르겠다 나는 쓸모 없는 존재이니까 죽어야 한다는 둥 들어도 이해가 안가는 상상할 수 없고 소름 끼치는 소리들만 늘어 놓았습니다.
기도원 들어오기 전 주일날 그날도 예배 드리고 집에 오니 경악을 금치 못하는 일이 벌어지고 말았습니다. 옷이란 옷을 다 꺼내
어질러놓고 주방에 그릇은 다 깨놓고 뭔가를 쏟아놓고 자기가 그린 그림들을 다 찢어 놓는 등 정말 집안이 아수라장이 되어
버렸습니다. 그 와중에 아이는 침대에 누워 시끄러운 음악을 태연스럽게 듣고 있었는데, 악한 영이 딸을 지배하고 있음을 감지할 수
있었습니다.
충분히 화가 날 상황인데도 저는 침착하게 아이한테 다가가 울면서 왜 그러는거니 나랑 같이 당장 기도원에 얼른 가자 응? 제발
같이 가자고 어깨를 만졌더니 나를 아주 무서운 눈으로 째려보며 한대 치는 거 였습니다. 그때 얼굴을 맞아서 얼마나 아팠는지 몸이
아픈 것보다 마음이 더 아파 눈물이 났습니다. 이건 애가 때리는 것이 아니라 악한 영이 하는 짓이다 라며 마음을 가라앉히며 또
한번 간절히 얘기했습니다. 그랬더니 또 때리는데 다리에 멍이 들 정도였습니다. 이대로 같이 있다가는 큰일나겠다 싶어 기도원 목사님께 전화 드렸더니 당장 나부터라도 기도원에 들어오라고 하셔서 저는 짐을
챙겨 혼자 기도원에 와서 금식을 시작하며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아이를 그 엉망진창인 집에 혼자 내버려두고 오는 제 심정이
무너지고 너무 아파서 눈물만 났습니다. 아.. 애한테 무슨 일이 있으면 어떡하나 불안과 걱정이 휩싸이다가도 하나님께 제발
지켜달라고 기도하고 또 기도하며 저의 마음을 달랬습니다. 기도원에 와서 목사님은 악한 영과의 전쟁이라며 누가복음 10장 19절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딸에게 뱀과 전갈을 밟으며 원수의 모든 능력을 제어할 권세를 주셨으니 우리 딸을 해할 자가 결단코
없으리라“ 이 말씀을 선포하라고 시키셨습니다. 저는 말씀의 권세를 믿으며 강하고 간절한 마음으로 반복해서 선포했습니다. 딸아이를
잡고 있는 악한 영들을 물리쳐야 한다는 절박한 심정으로… 그러면서도 집에 있는 아이가 너무 걱정이 되었습니다.
빨리 데려오고 싶은데 아이는 전화도 안받고 묵묵부답이었습니다.
기도원에서 이틀째 되는 날 드디어 아이가 자기 좀 데려가라고 전화가 와서 얼른 달려가 데려왔습니다. 집안은 더 어질러져
있어서 또 한번 놀랐습니다. 기도원에 데려와 그날 밤을 자고 그 다음날 새벽예배 드리러 일어났는데 또 나를 무섭게 째려보며 집에
다시 데려다 달라는 것입니다. 아 정말 힘들게 데려왔는데 그 정신 사나운 집에 또 데려다 달라니…
목사님은 애 말을 신경 쓰지 말고 성전에서 무조건 말씀선포만 계속 하라고 시키셨습니다. 저는 더욱 간절한 마음으로 3시간을 쉬지 않고 선포했습니다.
하나님 아버지만이 하실 수 있는 절박한 상황이었습니다. 3시간 후 아이가 성전 안에 들어와 이제 어쩔 수 없다는 걸 깨닫고 앉아 있었습니다. 이제 되었구나 싶었습니다. 한참 후 자기가 이곳을 떠날 수 없다는 걸 알고 순순히 목사님 말씀을 따르기 시작했고 자기도 금식을 하겠노라고 동참했습니다. 얼마나 기뻤는지 모릅니다.
전에는 저 따로 아이 따로 기도원에 들어오려고 했는데 같이 들어오기를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이가 처음 하는 금식인데 7일을 잘 버텨낼 수 있을까 내심 걱정스러웠는데 기특하고 장하게도 하루하루 말씀 보며 잘 견뎌내었습니다. 하나님이 꽉 붙들어 주셨던 은혜입니다. 딸과 엄마가 서로를 보며 힘과 용기를 낼 수 있었던 귀한 시간이었습니다.
그리고 새벽으로 저녁으로 어쩔 수 없이 예배 드리고 말씀 보고 기도할 수 밖에 없는 기도원에서의 분위기가 아이를 서서히
변화시키고 있었음을 느꼈습니다. 목사님이 예배 때마다 주시는 성경구절마다 뇌리에 또 심령에 새겨지는 역사가 있었고 아이는 찬양할 때
따라 부르기 시작했습니다. 전에는 듣기만 하고 전혀 따라 부르지 않았었습니다. 예배 후 엎드려 기도하며 자기 문제를 놓고
기도하는 모습을 보며 얼마나 감사했는지 모릅니다. 수도 없이 선포했던 누가복음 10장 19절 말씀이 우리 안에 살아 움직여
역사했던 것입니다.
드디어 아이가 7일 금식을 끝내는 날 감격스러웠고, 하나님께 너무너무 감사해서 눈물이 날 지경이었습니다. 목사님은 딸에게
성경 필사를 시키셨는데 지금까지 너무도 잘 쓰고 있습니다. 쓰면서 아이가 변화되는 모습을 또 볼 수 있어서 또 감사했습니다.
기도원 떠나기 하루 전날 새벽에 일어나보니 아이가 성경을 쓰고 있었는데 저에게 밝은 모습으로 그럽니다.
“엄마, 말씀이 너무 좋아요. 전에 많이 듣던 말씀인데 이번에는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나가는 이 아니라 머리 속에 박혀버렸어요”하면서 너무 좋아하는 것이었습니다. 말씀을 통해 새 삶을 사는 거 같아요
아….이런 고백이 내 딸 입에서 나오다니…
할렐루야, 하나님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감사가 연발해서 나왔습니다. 정말 하나님이 하셨습니다. 저와 아이의 금식기도를 기뻐 받으시고 하나님께서 역사 하셨습니다. 얼마나 기쁜지 가슴이 벅차 올랐습니다.
이제 저의 간증을 좀 하자면, 아이 문제도 있지만, 제 문제를 놓고도 많이 기도했는데 하나님께서는 저에게 회개기도를 많이
시키셨습니다. 다 회개하지 못한 예전의 죄들, 살아가면서 온전히 하나님만을 의지하지 못했던 연약한 믿음, 생활의 염려, 그리고
남을 용서하지 못한 부분들 등 많은 것을 생각나게 하시며 통곡의 눈물을 흘리게 하셨습니다. 저는 감당하기 힘들게만 생각했던 긴
금식 기간 동안 하나님은 강하게 붙들어 주셨고 저는 이번 기회에 뭔가를 보여주셨으면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어느 날 기도 굴에
오라고 하시는 음성을 듣고 혼자 가서 기도하는데 한없는 눈물이 쏟아지고 회개가 터져 나왔습니다.
우리 가문의 죄악부터 해서 자질구레한 나의 죄까지… 잘못했어요 아버지…용서해 주세요 라며 울고불고 1시간을 그랬던거
같습니다. 그 후 눈물을 휴지로 닦으려고 휴지로 얼굴을 덮었는데 또 눈물이 나면서 어떤 빛 같은 환상이 보였습니다. 작은 빛이
나오는 구멍 속으로 무언가가 날아서 쏙쏙 들어가는 것이었습니다. 좀 크게 보이면 좋으련만 작은 어떤 것들이 날아들어가는데 자세히
보니 박쥐 같기도 하고 새 같은 것들이 날아서 그 속에 빠져버리는 것이었습니다. 근데 그 중 사람모양을 한 것도 있었습니다. 그
순간 아…나의 옛 자아구나 내 옛모습이 저리로 사라지는구나 싶었습니다.
이제 생각해보니 모양이 작은걸 봐서 전체 자아가 다 없어진 것이 아니라 일부분만 죽은 거 같습니다. 완전히 내 자아를 십자가에 못박기 위해 더 기도하고 말씀에 집중해야 함을 깨닫습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갈 2:20)”
그 후 새벽에 눈을 뜨면 말씀 한 구절씩 떠오르는 신기한 경험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제일 먼저 주신 말씀이 “사랑하는 자여 네
영혼이 잘 됨 같이 네가 범사에 잘되고 강건하기를 내가 간구하노라” (요한3서 1:2) 이 말씀은 제가 평상시에도 좋아하는
말씀인데 그때는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나는 하나님 잘 믿고 교회도 잘나가고 찬양도 잘하는데 왜 범사에 잘 안되고 아픈데도 많고
사는 게 힘들까 라고요. 근데 기도원에 있으면서 이유를 확실히 알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영혼부터 잘 되기를 원하셨는데, 저는 앞에는 대충 넘겨버리고 뒷부분만 내게 역사하기만을 바랐던 것입니다. 얼마나
이기적인 마음인지 내 자신이 부끄러울 정도입니다. 기도를 통해 하나님과의 친밀한 교제가 이루어지고 말씀을 더 깊이 아는 것,
그래서 영적 성장이 이루어지며 영적 능력이 생겨 세상을 능히 이기는 믿음의 사람이 되는 것이 먼저인데 얄팍한 인간의 마음으로
형통만을 바랐으니 하나님이 참 기가 막히셨을 거 같습니다. 그 하나님을 속 썩이며 내 멋대로 신앙생활 해왔던 것도 회개하게 되었고
이 말씀이 이제부터는 온전히 내 삶에 역사하실 줄 믿고 또 믿습니다.
매월 초에 있는 기도원에서의 4일간 성회가 끝나고 주일 예배 때 성찬식이 있었는데 금식 끝나는 날 처음 하는 성찬식이어서 참
감격스러웠습니다. 몸과 마음을 정결하게 해야 한다고 강조하시는 목사님 말씀대로 더욱더 회개하며 주님의 몸과 피를 내 안에
모셨습니다. 여태껏 많은 성찬식을 했지만 그 때와는 비교도 안 되는 놀랍고 감사한 시간이었습니다. 모시고 나서 자리에 돌아오는데
성령님 임재가 강하게 느껴지며 눈물이 저절로 흘렀습니다. 나를 위해 죽으신 예수님 몸과 피를 내 안에 모시는 감격이 너무 감사하고
기뻐서 눈물이 계속 났습니다. 그 감격의 순간을 평생 잊지 못할 것입니다.
성찬을 통해 치유와 여러 가지 역사가 일어난다고 목사님께서 말씀하셨는데 이제 그 중요성을 절실히 느끼게 되었습니다. 금식 후 보호식을 하며 하루 종일 딸과 함께 성경을 읽고 쓰는 시간들이 참 복되고 감사하다는 생각에 가슴이 벅차 올랐습니다. 연약하고 부족하기 짝이 없는 저를 사랑하시어 어떻게 하든 고쳐서 쓰시려고 세상에서 훈련 시키시다가 안되니까 이곳 기도원에 부르시어 또 말씀 훈련을 시키시니 하나님은 정말 오래 참으시고 긍휼이 많으신 자비로운 분이십니다.
깨지기 쉬운 질그릇을 귀한 그릇 만들어 가시는 주님을 찬양합니다.
“내가 가는 길을 오직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정금같이 되어 나오리라” (욥 23:10)”
사무엘상 1장
이 시대를 불확실성의 시대라고 말합니다. 사람들은 이 세상에 확실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고 생각하며 살아갑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에게는 불확실한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모든 것이 확실합니다. 하나님이 모든 역사를 주관하고 계시다는 것을 믿기
때문입니다. 일어나는 일들이 불확실해 보여도 모든 것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이 살아계시기에 확실하다고 믿을 수 있습니다. 모든 것이
확실하다고 말할 수 있는 이유가 또 하나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기도에 응답하심으로 세상을 통치하십니다. 그리스도인들의 기도를
통해 이 세상을 다스리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구하면 이뤄주실 거라고 믿기 때문에 불안하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인들에게는
확신이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뜻을 따라 구하면
오늘 본문은 기도응답의 확신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향해 우리가 갖는 확신은 이것입니다. 곧 무엇이든지 우리가 그분의 뜻을 따라 구하면 하나님께서 우리가 구하는 것을
들어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무엇을 구하든지 하나님께서 들어주시는 것을 알면 우리는 우리가 구한 것들을 그분으로부터
받는다는 것도 압니다”(14~15절).
우리가 갖고 있는 확신은 바로 이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따라 구하면 그분이 우리가 구한 것을 들어주신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기도대로 역사를 변화시켜 주신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것을 알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의 확신은 담대함이라는 단어로 바꿔
읽을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하나님을 향한 담대한 확신과 담대한 지식이 있어야합니다.
“그러므로 자비하심을 얻고 필요할 때 도우시는 은혜를 얻기 위해 은혜의 보좌 앞으로 담대히 나아갑시다”(히 4:16).
“그러므로 형제 여러분, 우리는 예수의 피로 인해 지성소에 들어갈 담대한 마음을 갖게 됐습니다”(히 10:19).
참된 그리스도인들은 담대함이 있습니다. 자녀가 부모에게 가지고 있는 담대함과 같습니다. 어린 자녀는 부모가 전능한 줄 압니다.
그래서 무엇이든지 서슴없이 구합니다. 원하는 것을 무엇이든지 구합니다. 그것이 바로 담대함입니다. 기도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자녀가 자라면서 부모가 전능하지 않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부모가 해줄 수 있는 것보다 해줄 수 없는 것이 더 많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여기서 더 자라면 부모가 무엇인가를 해주기를 바라기보다 자신이 무엇을 해드릴지를 고민합니다. 하나님은 내가 기대한
것보다 훨씬 많은 것을 해줄 수 있는 분입니다. 하나님은 불가능한 것이 없는 분이라는 것을 체험하는 것이 인간의 자녀와 하나님의
자녀의 차이점입니다.
우리가 기도해야 하는 이유는 하나님이 몰라서가 아닙니다. 우리에게 정말 있어야 될 것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기도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구하고 또 구하면 기도를 바꿔주시기도 하고, 구해야 할 것을 구하게 하십니다. 우리에게 정말 있어야 될 것을
깨닫는 과정이 바로 기도입니다. 내가 구하고 받는 과정이 없기 때문에 하나님이 채워주셨다는 것을 모르는 것입니다. 자기가 잘
나서 얻었다고 생각하는 인생을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구하기 전에 모든 것을 다 아신다고 말씀하시는 동시에 구하고, 찾고
부르짖으라고 하신 이유가 바로 이것 때문입니다.
한 소녀가 선교사님에게 편지를 썼습니다. 그 소녀가 편지 쓰는 모습을 보고 부모가 권면했습니다.
“애야 선교사님이 너무 바쁘시니까 답장을 요구하지는 마라.”
그 소녀가 편지에 이렇게 적었습니다.
“우리는 선교사님을 위해서 기도하고 있습니다. 저희는 선교사님의 어떤 대답도 기대하고 있지 않습니다. 답장하지 마십시오.”
우리는 이 편지의 내용과 같은 태도를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님께 기도하지만 답장은 필요 없다는 태도로 기도하고 있습니다.
세 가지 유형의 기도응답
세 가지 유형의 기도응답이 있습니다. 첫째는 거절, 둘째는 그대로 이뤄주는 것, 셋째는 기다리라는 응답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들어주신 것만 응답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거절하는 것도 응답입니다. 우리가 구한대로 받지 못한 것은 잘못된 동기로 구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욕심에서 나온 기도는 절대로 응답되지 않습니다. 기도는 욕심을 채우기 위해 하나님의 능력을 이용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CS루이스의 영적멘토였던 조지 맥도날드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아주 미미하고 세세한 것에 귀를 기울여주시는 신이 아니라면 믿을 수 없는 신이다. 그러나 반면에 인간의 요구를 하나도 물리치지 않고 듣는 족족 다 받아주는 신이라면 그것은 악신임이 분명하다.”
우리가 원하는 대로 무엇이든지 다 이루어진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아마 어떤 사람은 심장마비에 걸렸을 것이고, 어떤 사람은 사이비
교주가 되었을 것입니다. 또 어떤 사람은 이상한 사람이 되었을 것입니다. 우리의 욕심대로 하나님이 응답하신다면 문제가 생길
수밖에 없습니다. 자녀가 원하는 대로 해주다 결국 인생을 망가뜨리는 결과와 같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욕심에 절대 응답하지
않습니다.
사도바울이 이런 고백을 했습니다.
“나의 하나님이 영광가운데 그 풍성한대로 나의 모든 필요를 채우시리라”(빌 4:18~19).
우리는 이 고백을 ‘나의 하나님이 영광가운데 그 풍성한대로 나의 욕심을 채우시리라’고 바꿔서 읽고 싶어 합니다. 여러분, 욕심과 필요를 구별할 줄 아는 마음이 없다면 기도응답을 받지 못합니다.
잘못된 태도 때문에 응답받지 못한 ‘모세’
잘못된 태도 때문에 하나님이 기도응답을 하지 않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 대표적인 사례가 모세가 가나안 땅을 들어가게 해달라고
간청한 기도입니다. 우리는 모세의 기도능력을 잘 압니다. 그의 기도를 통해 수많은 민족이 생존했고, 광야에서 하나님과 동행했고,
하나님의 영광을 보았습니다. 출애굽기 32장에서 하나님이 백성들에게 진노했을 때도 그의 중보기도를 통해서 살아날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모세의 중보기도를 듣고 진노를 거두셨습니다. 이 얼마나 놀라운 기도응답입니까.
모세가 오랜 세월 동안 백성들을 인도하느라 얼마나 수고를 많이 했습니까. 하나님이 모세의 수고를 기억하신다면 그 땅을 보게
해달라는 간청을 들어주셔야하지 않을까요. 그러나 하나님은 그 기도에 응답하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이 야속하게 느껴질 정도입니다.
하나님은 모세에게 “그것으로 충분하니 이 문제에 대해서 더는 말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왜 그렇게 말씀하셨을까요. 민수기 10장에 그 이유가 나옵니다.
백성들이 광야를 지나다가 목이 말라 불평할 때 하나님이 모세에게 물을 내라고 하셨습니다. 모세는 흥분해서 바위를 두 번이나
쳤습니다. 하나님이 물을 주셨는데 모세는 자신의 능력으로 백성들에게 물을 공급했다고 생각했습니다. 자기가 하나님인줄 알았습니다.
하나님이 백성들의 필요를 공급하시고, 백성들과 함께하신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 영적 지도자의 책임인데 모세는 자기가 하나님이 된
것처럼 백성들을 향하여 분노를 퍼붓고, 바위를 두 번씩이나 쳤습니다. 감정적인 실수를 했습니다. 인간의 눈으로 볼 때는 그냥
넘어갈 수 있을지 모르지만 하나님은 그냥 넘어가지 않았습니다. 백성들이 모세를 통해 하나님의 모습을 연상하기 때문입니다. 부모의
모습이 자녀가 하나님을 어떻게 생각하는지에 영향을 주는 것과 같습니다. 아버지에 대한 상처가 있는 사람은 하나님과 친밀함을
누리는데 어려움을 겪는 경우가 있는 것처럼 말입니다. 모세의 행동은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행동으로 비춰지기 때문입니다. 모세는
백성들이 하나님을 왜곡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모세의 역할을 가나안 땅에 들어가기 직전까지로 정하셨습니다.
만약 모세가 가나안 땅에 들어갔으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모세가 우상이 되었을 수도 있습니다. 모세가 영웅이 되었을 수도 있습니다.
백성들을 가나안 땅으로 인도해준 모세가 백성들에게서 영광을 받고, 하나님의 자리를 차지할 수 있는 위험이 있었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것을 이미 아시고 모세를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지 못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뜻과 우리의 뜻이 달랐기 때문에 모세의
기도를 거절하셨습니다.
또 다른 방법으로 이뤄주시는 하나님
바울은 육체의 가시를 제거해달라고 간구했습니다. 세 번씩이나 간구했지만 하나님은 그 기도에 응답하지 않으셨습니다. 바울의 질병을 고쳐주시지 않으셨습니다. 바울은 기도가 응답되지 않은 것에 대해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나는 이것이 내게서 떠나도록 주께 세 번이나 간구했습니다. 그러나 그분은 내게 말씀하셨습니다. ‘내 은혜가 네게 족하다.
왜냐하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해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나는 내 약한 것들에 대해 크게 기뻐하며 자랑할 것입니다.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머물게 하기 위함입니다”(고후 12:8~9).
사도바울은 하나님이 자신의 기도에 응답하시지 않은 것을 또 다른 응답으로 해석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뜻과 자신의 뜻이 얼마나
다른지를 체험했습니다. 사도바울이 로마로 가기를 원했을 때 하나님은 바울이 생각하지 못했던 방법으로 가게 했습니다. 사도바울은
금의환향하는 모습이 아니라 죄수의 모습으로 로마에 가게 되었습니다. 사도바울이 섭섭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사도바울이 죄수의
몸으로 로마에 갔기 때문에 아그립바 왕 앞에 설수 있었습니다. 만약 그가 지혜로운 철학자의 모습으로 로마에 갔다면 아그립바 왕을
만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죄수의 몸으로 갔기 때문에 그를 만날 수 있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은 때로 우리의 기도를 거절하시지만 또
다른 방법으로 이뤄주십니다.
미국에서 사역하셨던 크리스웰이라는 목사가 이런 고백을 하셨습니다.
“나는 힘을 달라고 기도했는데 하나님은 내가 하나님을 의지하도록 약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내가 승리할 때 교만해지지 않도록
눈물도 함께 보내셨습니다. 나는 빛을 달라고 기도했는데 하나님은 나에게 믿음을 주셨습니다. 나 비록 멀리 볼 수는 없을지라도
하나님께서 나와 함께 동행하심은 의심하지 않습니다. 나는 성취할 수 있는 힘을 달라고 간구하였는데 하나님은 내가 순종하도록 약하게
만드셨습니다. 나는 더 위대한 일을 할 수 있도록 건강을 달라고 간구했는데 하나님은 더 나은 일을 할 수 있도록 은혜를
주셨습니다. 나는 행복해질 수 있도록 부유함을 간구하였는데 하나님은 내가 지혜로워질 수 있도록 가난을 주셨습니다. 나는 사람들에게
칭찬 받을 수 있는 힘을 달라고 간구하였는데 하나님은 하나님을 필요로 하는 약함을 주셨습니다. 나는 인생을 즐길 수 있는 모든
것을 달라고 간구하였는데, 하나님은 모든 것을 즐길 수 있는 생명을 주셨습니다. 나는 내가 간구한 것은 아무것도 응답 받지
못했지만 내가 소망했던 모든 것들에 대하여 나의 기도는 응답 받았습니다.”
분명히 들어주시는 기도
두 번째 기도응답은 분명히 들어주시는 것입니다. 엘리야 선지자가 바알신을 섬기는 자들과 대결을 했을 때 하나님이 불을 내려
주셨습니다. 엘리야가 강력하게 기도했기 때문이 아니라 엘리야가 기도한 내용이 하나님의 뜻에 합당했기 때문입니다.
느헤미야가 아닥사스다왕을 통해 고국으로 돌아가게 해달라고 기도했을 때 하나님이 응답하셨습니다. 느헤미야가 지위가 높았기 때문이
아니라 그 기도 내용이 하나님의 뜻이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뜻을 구하면 그 뜻대로 이뤄집니다. 기도의 올바른 방향은
우리가 원하는 것을 하나님께 올려서 받는 차원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 그 뜻을 구하는 것입니다. 그 기도가 우리를
통해 이뤄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소원에 귀를 기울이시고, 응답하십니다. 성경에 하나님이 우리의 소원을 이뤄주신다는 말씀이
있는데 그것을 확신이라고 생각하면 안 됩니다. 하나님이 응답하실 수도 있고, 응답하시지 않을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내 소원에
대해서 하나님이 반드시 응답하신다는 확신을 가지면 안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기도는 하나님이 반드시 응답하십니다.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요일 15:7).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면 이룬다고 하셨는데 원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조건이 있습니다. 또 성도의 소원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주님의 소원입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뜻을 의미합니다. 나의 소원이 하나님의 소원이 될 때 기도응답을 받을 수 있습니다. 우리가
기도하는데 많은 시간을 투자해야 하는 이유는 우리의 소원이 하나님의 소원과 거리가 멀어져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한마디
기도로 역사가 일어났는데 우리는 한마디 기도로 역사가 일어나지 않는 이유는 주님 안에 거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뜻을 먼저 듣는 기도가 필요합니다. 기도는 대화입니다. 내 뜻을 말하기 전에 하나님이 원하시는 뜻이 무엇인지를
성령 안에서 먼저 듣고, 그 뜻을 나의 소원으로 받아들여야합니다. 그 뜻을 기도하면 하나님은 반드시 응답하십니다.
최선의 응답을 받는 기도
세 번째 기도응답은 기다리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기다리게 하시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냥 기다라는 것이 아니라 기대하며 기다리는 것입니다.
350년 전 청교도였던 토마스 왓슨은 하나님이 왜 기도응답을 지체하시는지를 네 가지로 정리했습니다.
첫째, 하나님이 우리의 기도하는 소리를 더 듣고 싶어 하시기 때문입니다. 둘째, 우리를 더 겸손하게 하는 것입니다. 셋째, 우리가 아직 준비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넷째, 기도응답이 이뤄질 때 기쁨이 더 충만하게 하려는 것입니다.
사가랴라는 제사장은 자녀가 없어서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하나님이 사가랴에게 “너의 기도를 듣고 너에게 자녀를 준다”고 했을 때
사가랴가 뭐라고 했는지 아십니까. “제가 그것을 어떻게 확신할 수 있습니까?”라고 했습니다. 그는 자신의 기도를 기대하지 않았고,
응답될 것이라고 믿지도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기도에 응답하시기 전에 기도응답 받을 준비가 되어 있는지를 보십니다.
하나님이 기다리라고 하는 것은 거부가 아닙니다.
사보나롤라는 “하나님의 지체를 하나님의 거부라고 생각하지 말라”고 말했습니다. 우리의 기도는 작은 것을 너무 급하게 구합니다.
여러분, 세례요한의 출생이 늦어진 이유는 예수님의 출생의 때와 맞추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기도응답이 지연되면 이 말씀을
떠올리십시오.
“우리 안에서 역사하시는 능력을 따라 우리가 구하고 생각하는 모든 것보다 훨씬 더 넘치도록 하실 수 있는 분에게”(엡 3:20).
하나님이 우리가 구한 것보다 훨씬 더 넘치도록 역사하기 위해서 기다리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옳지 않은 것을 구할 때 하나님은
거절하십니다. 우리가 더 성장하도록 만들기 위해서입니다. 우리가 옳지 않은 타이밍에 구할 때에는 하나님은 기다리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의 뜻 가운데, 하나님의 뜻에 합당할 때 응답하기 위해서입니다.
레너드 레버힐이라는 사람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하나님께 선택권을 넘겨 드리는 사람들에게 그분의 최선을 주신다.”
하나님께 모든 선택권을 넘겨 드리고, 그분의 최선의 응답을 받기를 바랍니다.
♦ 오늘 읽어야 할 말씀 : 룻기 4:1∼22 ♦ 묵상을 위한 주제 : 그 신을 벗는지라(8절) ♦ 성구 : 이에 그 기업 무를 자가 보아스에게 이르되 네가 너를 위하여 사라 하고 그 신을 벗는지라.
“그 신을 벗는지라(he removed his sandal)”
사사시대에 베들레헴의 흉년으로 모압으로 이주하였던 엘리멜렉의 가족들은 십여년의 세월이 지난 후에는 엘리멜렉과 두 아들 말론과 기룐은 죽었고 과부가 된 시어머니 나오미와 두 모압의 며느리 룻과 오르바가 남았습니다.
베들레헴 땅에 먹을 것이 풍성하다는 소문을 듣고 나오미는 두 며느리에게 친정으로 돌아가라고 합니다.
오르바는 친정으로 돌아갔지만 룻은 어머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라며 함께 베들레헴으로 돌아왔습니다.
엘리멜렉 집안의 가장 가까운 친족으로 기업을 무를 자가 그 신을 벗어버림으로 그 다음 기업 무를 자는 보이스로 결정됩니다.
기업을 무를 자가 된다는 것은 상당한 물질적인 손실을 감수해야 합니다.
보아스가 룻의 기업 무를 자가 된 것은 물질적인 가치에 의한 것이 아니라 아직은 드러나지 않은 영적인 가치를 알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인생의 삶을 풍년과 흉년으로 구분할 때 평생을 부자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 음식으로 지냈던 거지 나사로와 같은 흉년의 삶과 매일 풍성한 잔치를 즐겼던 풍년과 같은 부자의 삶에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부자와 같은 삶을 좋아할 것입니다.
그러나 죽음 이후의 삶을 결정하는 것은 세속의 가치가 아니었기에 나사로는 아브라함의 품에서 위로를 받는다고 하셨습니다.
일시적인 즐거움에 붙잡혀 살아가는 인생이 아니라 영원한 기쁨을 누릴 수 있는 복된 자리를 놓치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나는 지금 어떤 인생길을 걷고 있습니까?
모압 여인 룻이 고향 땅을 떠나 베들레헴으로 옮겨와서 풍성한 삶의 주인공이 될 수 있었던 비결이 무엇이었을까요?
룻은 베들레헴 땅에서 보아스를 만났습니다. 보아스를 만났기 때문에 다윗의 증조모가 되었으며 메시아 족보에 그 이름을 새길 수 있었습니다.
룻이 바라본 것은 시어머니 나오미의 하나님이었습니다. 그리고 시어머니의 말씀대로 순종했습니다.
하나님을 따르며 시어머니의 말씀에 순종하므로 흉년의 인생을 풍년의 인생으로 갈아엎을 수 있었습니다.
나오미가 남편과 두 아들을 먼저 잃은 것으로 그녀의 삶이 막을 내린다면 소망이 없습니다. 그런데 나오미의 삶은 슬픔이 기쁨으로 눈물이 웃음으로 뒤집어지는 삶의 주인공이 되어 소망이 무엇인가를 깨우치고 있습니다.
룻기서는 오벳이 이새를 낳고 이새는 다윗을 낳았더라는 말씀으로 막을 내립니다.
이스라엘 역사상 가장 유명한 왕은 다윗 입니다. 다윗 왕은 오벳의 손자 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끝이 나는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온 세상의 구원자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벳과 다윗의 자손으로 이 땅에 오셨기 때문입니다.
사사 시대에 베들레헴으로 돌아온 나오미와 룻과 함께 하셨던 하나님은 오늘도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만일 인생의 흉년을 지나가고 있기 때문에 힘든 시기를 지나고 있습니까?
그렇다면 하나님께로 더 가까이 다가서시기 바랍니다. 그 결단에 의해서 하나님께서는 반드시 새로운 깨달음을 갖게 할 것입니다.
새로운 깨달음 때문에 아직도 방황하는 많은 사람들을 향하여 회복시키는 생명과 나눔의 통로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 찬양 / 나 어느 곳에 있든지
예수 내 구주! 예수 내 생명! 예수 내 권세!
하나님의 섭리의 손길은 기근과 같은 자연에서(1장) 우연으로 보이는 일에서(2장) 그 인간의 계획에서(3장) 작용하고 있음을 보았습니다. 4장에서는 그 손길이 사람들이 함께 어떤 일을 결정함에 있어서도 작용함을 보여줍니다.
당시 성문은 넓은 공터가 있어서 각종 사건들을 처리하고 해결하는 공공장소였으며, 길목이기도 해서 만남의 광장이었습니다. 보아스는 룻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성문”에 올라가 앉았습니다.
그 때 “마침” 보아스보다 더 가까운 친족인 “기업 무를 자”가 지나갔습니다(1).
‘마침’은 ‘보라’는 히브리어 감탄사를 의역한 단어인데, 바로 ‘지금 여기’에 그가 때마침 등장했음을 강조합니다. 보아스는 그를 초청하여 성문에 앉혔고, 기업 무르는 일을 공식적으로 결정하기 위해 “성읍 장로 십 인”을 증인으로 초청했습니다(2).
보아스는 기업 무를 자에게 상황부터 설명합니다.
3절에서 “관할하므로”는 완료형 동사 ‘팔았다’(hr'äk.m', 마케라)의 의역입니다. 히브리어 완료형은 시간 개념보다는 동작의 완료를 의미하기 때문에, 미래의 일일지라도 확실하게 행해질 약속이나 결심을 표현할 때 사용됩니다.
여기서도 ‘팔려고 결심했다’는 의미로 사용되었습니다. 그래서 표준새번역 성경은 “우리의 친족 엘리멕렉이 가지고 있는 밭을 팔려고 내놓았소”라고 번역합니다.
보아스는 이름이 감추어진 ‘아무개’에게 나오미의 친족 권리를 사용하여 고엘의 의무를 수행하려는지 의사를 묻고, 그가 원치 않으면 다음 고엘은 자기뿐임을 밝힙니다.
아무개는 선 듯 “내가 무르리라”고 답합니다(4). 그러자 보아스는 그가 “나오미의 손에서 그 밭을 사는 날에 곧 죽은 자의 아내 모압 여인 룻에게서 사서 그 죽은 자의 기업을 그 이름으로 잇게 하여야”(5)할 의무가 있음을 추가적으로 알려줍니다. 나오미의 기업을 무를 경우 룻을 아내로 맞이해서 고인의 이름으로 기업을 이어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그러자 그는 갑자기 태도를 바꾸어 “나는 내 기업에 손해가 있을까하여 나를 위하여 무르지 못하노니 나의 무를 권리를 네가 취하라 나는 무르지 못하겠노라”(6)고 답합니다.
이스라엘에는 율법에 따라 자식 없이 죽은 형의 아내와 결혼하여 형의 대를 유지시키는 제도가 있었습니다. 형수나 제수와의 결혼이므로 수혼(嫂婚, levirate) 제도라 불렀고, 대를 잇기 위한 결혼이므로 계대결혼(繼代結婚)이라고도 합니다. 수혼 제도는 고인의 ‘형제’에게 부여된 의무였는데, 여기서 보아스가 기업을 무를 고엘에게 계대 결혼의 의무까지 말한 것이 좀 의아합니다. 하지만 아무개나 증인들이 이의를 제기치 않은 것을 보면, 그 시대에는 ‘형제’라는 의미를 친족에게까지 확대해서 해석했던가봅니다. 혹은 룻과 결혼해서 자녀를 낳아야만 엘리멜렉의 기업이 보존 되고, 진정한 의미에서 고엘의 역할을 한 것이므로 이렇게 말했을 수도 있습니다.
매년 밭에서 나오는 소출로 땅 값을 갚아 나가면서 나오미만 챙겨준다면, 몇 년 후에는 상속자 없는 그 땅이 영원히 고엘의 기업이 되니 상당히 득 되는 일입니다. 하지만 이 경우는 룻 때문에 계대결혼의 의무가 추가되었습니다. 그것은 땅 값 지불에 두 과부를 먹여 살리는 수고를 한 후에도 결국 고엘이 그 땅의 실제 소유자가 되지 못함을 의미했습니다. 아무개는 추가된 정보의 의미를 재빨리 파악했습니다. 자기 재산만 축내는 일임을 알고 고엘의 권리를 포기합니다. 보아스에게 “네가 너를 위하여 사라”며 권리를 이양의 관습적 증표로 신을 벗어줍니다(7-8).
반면 보아스는 장로들과 모든 백성들에게 즉시 선언합니다.
“내가 엘리멜렉과 기룐과 말론에게 있던 모든 것을 나오미의 손에서 산 일에 너희가 오늘날 증인이 되었고 또 말론의 아내 모압 여인 룻을 사서 나의 아내로 취하고 그 죽은 자의 기업을 그 이름으로 잇게 하여 그 이름이 그 형제 중과 그곳 성문에서 끊어지지 않게 함에 너희가 오늘날 증인이 되었느니라”(9-10).
드디어 보아스와 룻의 결혼이 율법과 사회 도덕에 아무런 제약 없이 이루어 질 수 있게 되었습니다. 사람들은 저마다 100% 자기 뜻대로 생각하며 결정했지만, 그 가운데서 하나님께서는 100% 당신님의 뜻을 성취해 가셨습니다.
룻기는 눈에 보이는 아무런 기적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기적을 ‘비상 섭리’라 하는데, 룻기의 하나님은 비상 섭리를 사용하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 백성의 황폐한 삶이 풍요로워진 것은 일상의 삶 중의 하나님의 은밀한 섭리 때문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각 사람의 판단과 결정을 주관하셔서 당신님의 뜻이 이루어지게끔 하셨습니다. 그 손길에 의해 귀하게 쓰임 받았던 사람들은 모두 인애의 정신을 가진 사람들이었습니다. 영적 암흑기에 하나님 백성을 풍요롭게 하고 하나님의 나라를 그분 나라답게 만들어간 사람은 신비한 기적을 체험한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눈에 보이는 기적 체험이 없어도 묵묵히 그분 말씀대로 살아가는 사람들을 통해서였습니다. 판단의 기준을 ‘자기 이익’보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고자 하는데 둔 사람들이지요. 실상 그 암흑 같은 시대 속에 그러한 사람들이 남아 있다는 것 자체가 기적입니다.
룻기 저자는 아무개를 비난하지 않습니다. 그의 관심은 상식을 뛰어넘는 결정을 한 보아스에게 있기 때문입니다. 아무개는 ‘자기 이익’이 판단의 중요한 기준이었습니다. 이득이 있으면 권리를 행사하고 손해가 예상되면 미련 없이 의무를 포기했습니다. 그것은 악행이 아니며 상식적인 수준에서 대부분의 사람들처럼 행한 것입니다. 하지만 그의 모습 속에서 하나님 백성다운 인애를 찾아볼 수는 없습니다. 반면 보아스는 ‘하나님 말씀대로’가 판단의 기준이었습니다. 그는 자기가 원하는 대로 결정하거나 판단하지 않고 고엘의 정신과 규례대로 행했습니다. 말씀대로 살기 위해서라면 재산상의 손해도 기꺼이 감수했습니다. 참으로 하나님 백성다운 모습이지요.
“모든 백성과 장로들”은 그들 공동체 속에 룻과 보아스 같은 사람이 있다는 사실이 기뻤던 것 같습니다. 그들은 룻과 보아스를 크게 축복합니다. “여호와께서 네 집에 들어가는 여인으로 이스라엘 집을 세운 라헬, 레아 두 사람과 같게 하시고 너로 에브랏에서 유력하고 베들레헴에서 유명케 하시기를 원하며 여호와께서 이 소년 여자로 네게 후사를 주사 네 집으로 다말이 유다에게 낳아준 베레스의 집과 같게 하시기를 원하노라”(11-12).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님 말씀을 잘 아는 사람을 만날 때 기쁩니다. 그보다 더 기쁠 때는 참으로 하나님 백성답게 사는 사람을 만났을 때입니다. 지속적인 손해에도 불구하고 하나님 말씀대로 사는 사람, 타락한 시대 속에서도 참으로 하나님 백성답게 살아가는 사람을 발견할 때면 성문에 모인 사람들처럼 존경과 축복의 마음을 감추어두고 싶지 않습니다.
축복 속에 언급된 “베레스”는 보아스의 직계 조상입니다. 그는 다말과 그녀의 시아버지 유다 사이에 태어난 사람입니다(창 38장). 감추고 싶은 출생의 비밀을 가진 사람이었지요. 룻은 롯과 그의 큰딸 사이에서 태어난 모압의 후손입니다(창 19:30 이후). 룻 역시 수치스런 집안 내력을 가졌던 셈이지요. 모압 족속은 대대로 우상을 섬기며 이스라엘 백성을 저주하려 했던 족속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베레스에게 은혜를 베푸셨던 것처럼, 백성들과 장로들의 축복대로 룻에게도 은혜를 베푸시고 그리스도의 조상이 되게 하셨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헤세드는 감추고 싶은 과거를 가진 사람들에게도 신앙을 주셔서 귀히 사용하는 것에서도 잘 드러납니다.
보아스가 룻을 취하여 아내를 삼았고 여호와께서는 그들에게 아들 ‘오벳’을 주셨습니다(13). 동네 아낙네들은 아픈 과거를 가진 나오미에게 베풀어진 하나님의 헤세드를 목격하고 찬송하며 축복합니다. “여호와께서 오늘날 네게 기업 무를 자가 없게 아니하셨도다 이 아이의 이름이 이스라엘 중에 유명하게 되기를 원하노라 이는 네 생명의 회복자며 네 노년의 봉양자라 곧 너를 사랑하며 일곱 아들보다 귀한 자부가 낳은 자로다”(14-15). 나오미는 “아기를 취하여 품에 품고” 그의 양육자가 되었습니다(16).
나오미가 아기를 품에 안고 있는 장면은 나오미가 베들레헴에 막 돌아와서 아낙네들에게 둘러싸였을 때의 장면과 극단적으로 대조됩니다. 텅 비었던 나오미가 채워졌습니다. 괴롭게 하는 분인 줄 알았던 여호와께서는 그녀에게 그녀를 지극히 사랑하는 일곱 아들보다 귀한 며느리를 주셨고, 또한 그리스도의 조상이 될 오벳을 양육할 기쁨을 주셨습니다. 누구보다 괴로움을 많이 겪은 것 같았던 그녀가 실상은 누구보다 많은 복을 받은 사람으로 드러나고 있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오해들이 반전되는 순간이지요. 하나님의 은총적 기적이 여기에 나타납니다. 하나님의 헤세드의 승리가 돋보이지요.
룻기에 나타난 하나님의 섭리는 당신님의 백성들을 향한 헤세드의 손길이었습니다. 그 손길은 그 시대 사람들만을 위한 것이 아닙니다. 보아스와 룻과 나오미는 하나님 섭리의 일차적인 수혜자였습니다. 그런데 그들 사이에서 태어난 “오벳”은 통합 이스라엘 왕국을 건설한 “다윗” 조상입니다(22).
텅 빈 사사시대를 살던 이스라엘은 그리스도의 모형인 다윗의 헤세드를 통해서 풍요로움을 경험하게 되므로 이차적인 수혜자기 됩니다.
룻기 저자는 하나님 섭리가 다윗까지 연결됨을 중요한 결론으로 삼습니다. 그런데 신약의 성도는 한 걸음 더 나아가 다윗의 후손 ‘예수 그리스도’로 인해 그분의 백성 모두가 궁극적인 수혜자가 되었음을 압니다.
본문은 하나님께서 먼 옛날 몇몇 사람을 축복하신 이야기가 아니라, 구속사적인 안목에서 봐야할 이야기지요.
룻기를 통해서 하나님의 은밀한 섭리의 손길이 지금 여기까지 미치고 있음을 배웁니다. 그분을 신뢰하는 성도는 ‘자기 유익’을 중심으로 살아가는 평범한 삶을 넘어서서 서로가 서로에게 헤세드를 베푸는 삶을 살아야 할 것입니다. 비록 눈에 뚜렷이 보이는 기적은 없을지라도 은밀한 기적의 역사가 지금 여기서도 하나님의 은밀하신 섭리의 손길을 통해 일어나고 있다는 사실을 잊지 않아야겠습니다. 멀리 돌아가는 길이며 손해 보는 일일지라도 하나님께서 계시하신 말씀대로 사는 것이 참 하나님 백성다운 삶임을 기억해야겠습니다. 우리의 일상적 삶에서도 하나님의 헤세드가 드러나길 바랍니다.
♦ 12월 28일(화)
♦ 오늘 읽어야 할 말씀 : 룻기 3:1∼18 ♦ 묵상을 위한 주제 : 기업을 무를 자(9절) ♦ 성구 : 가로되 네가 누구뇨 대답하되 나는 당신의 시녀 룻이오니 당신의 옷자락으로 시녀를 덮으소서 당신은 우리 기업을 무를 자가 됨이니이다.
“기업을 무를 자(you are a kinsman-redeemer)”
‘기업을 무를 자’를 히브리어로 “키 고엘 앝타”라고 합니다(for thou art a near kinsman).
“룻”은 “ 보아스”가 “엘리멜렉” 가정의 ‘기업무를 자(NIV, a kinsman-redeemer)’이기 때문에 “당신의 옷자락으로 시녀를 덮으소서” 라고 말합니다.
‘당신의 옷자락으로 시녀를 덮으소서’라는 표현은 룻이 보아스의 보호를 받기를 원하는 것으로 해석합니다(Matthew Henry, Hervey, Atkinson).
왜냐하면 여호와께서 하나님의 백성들을 독수리 날개로 보호하셨던 것처럼 룻은 보아스의 날개 아래서 보호받기를 원했기 때문입니다.
보아스의 보호를 받는 길은 보아스와 결혼하므로 가능합니다. 이러한 표현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과 언약 관계를 맺을 때에도 상징적으로 사용되었습니다(겔 16:8).
결혼이란 "사람과 사람 사이의 언약" 이라고 하겠습니다.
따라서 룻이 당신의 옷자락으로 시녀를 덮으소서 라는 말은 구혼(求婚)에 대한 상징적 표현이라고 합니다.
기업을 무를 자가 되는 것은 강제성이 없습니다.
만일 당사자가 기업 무를 자격을 포기할 때는 신을 벗음으로 그 자격을 포기한다고 선언할 수 있습니다.
율법으로 규정된 의무를 득(得)과 실(失)에 의해서 결정하는 것처럼 오늘날도 이 세상이 점점 삭막해져 간다고 탄식(歎息)합니다.
그 이유는 치열한 경쟁과 이기적인 욕망이 지배하는 삶을 살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세상이 요구하는 사람은 보아스와 같이 소리 소문없이 어려운 이웃을 위하여 사랑을 베풀고 보살핌에 민감한 사람입니다. 하나님은 모든 성도들이 하나님께 순종하며 이웃에게 나눔과 베푸는 진실된 삶을 살아가기를 원하십니다.
오늘 이 하루가 서로를 향한 따뜻한 사랑과 나눔 그리고 하나님을 향한 신실한 태도로 세상의 소금과 빛으로 살아갈 수 있는 삶을 실천할 수 있는 은총의 하루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 찬양 / 주께로 나오라
예수 내 구주! 예수 내 생명! 예수 내 권세!
♦ 12월 27일(월)
♦ 오늘 읽어야 할 말씀 : 룻기 2:1∼23 ♦ 묵상을 위한 주제 : 여호와의 복(20절) ♦ 성구 : 나오미가 자부(子婦)에게 이르되 여호와의 복(福)이 그에게 있기를 원(願)하노라 그가 생존(生存)한 자(者)와 사망(死亡)한 자(者)에게 은혜(恩惠) 베풀기를 그치지 아니하도다 나오미가 또 그에게 이르되 그 사람은 우리의 근족(近族)이니 우리 기업(基業)을 무를 자(者) 중(中) 하나이니라.
“여호와의 복(The LORD bless)”을 누가 누구에게 줄 것인가?
‘생존한 자’는 “나오미”와 “룻”을 가리킵니다. ‘사망한 자’는 “엘리멜렉”과 “말론”과 “기룐”을 말합니다. 따라서 살아있는 자와 죽은 자 모두에게 복을 줄 수 있는 존재는 하나님이라고 주장하는 견해가 있습니다(Keil. Goslinga).
이러한 견해에 따라 영어성경(NIV, Living Bible)에서는 은혜를 베풀 수 있는 존재를 “하나님”이라고 합니다.
반면에 은혜를 베풀 자를 “보아스”라고 주장하기도 합니다(Matthew Henry, A. C. Hervey).
이러한 주장에 따라 ‘보아스’는 나오미와 그녀의 남편과 두 아들이 살아 있었을 때에도 호의를 베풀었으며 또한 지금도 여전히 호의를 베풀고 있다고 합니다.
본문의 문맥에서 은혜를 베풀 수 있는 존재는 보아스라고 해석하는 것이 타당하다고 하겠습니다.
왜냐하면 ‘보아스’는 ‘나오미’의 근족이며 기업을 무를 자가 되기 때문입니다.
기업을 무를 자를 히브리어로 “고엘(גֹּאֶל)”이라고 합니다. ‘고엘’이란 “되찾다” “구속하다” “무르다”라는 뜻으로 사용합니다.
이스라엘의 고엘 제도는 하나님께로부터 할당받은 기업을 영구히 보존하고 혈족을 유지하며 부당한 피해를 받았을 경우 이것을 보상할 제도적 장치를 위한 목적에서 생겼다고 합니다.
따라서 고엘(Goel)이 된 사람은 ‘고엘의 의무’를 감당해야 합니다.
고엘의 의무는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는 가난한 혈족의 땅을 도로 사주어야 합니다(레 25:25∼26) 둘째는 부당한 피해를 당한 친족을 위해 복수할 책임을 가져야 합니다(민 35:12, 19, 21) 셋째는 그 친족의 미망인과 결혼하여 대를 이어주어야 하며 죄 값을 대신 받기도 합니다(민 5:8)
고엘의 자격은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는 혈연적 관계(신 25:5∼7) 둘째는 자원해야 할 것(룻 3:13) 셋째는 고엘로서의 능력을 갖출 것(레 25:25)
은혜를 베풀 수 있는 존재는 여호와 하나님입니다. 그러나 본문에서 나오미와 룻에게 은혜를 베풀 수 있는 존재는 당시 베들레헴 성에서 유력한 자이며(2:1), 친족에게 은혜를 베풀 줄 아는 보아스가 엘리멜렉의 가정을 위한 고엘로서 합당하다고 하겠습니다(근족의 의무 참조 / 레 25:8∼55)
베들레헴 성의 유력자 ‘보아스’처럼 이 세상에 흩어진 그리스도인들이 삶의 자리에서 보아스처러 누군가에게 은혜를 베풀 수 있는 마음과 믿음으로 살아갈 때 세상은 살기에 좋은 곳으로 변화될 수 있을 것입니다.
모두 함께 모여 정답게 살아갈만한 세상으로 가꾸는 일에 정성을 쏟아낼 수 있는 은총의 하루를 지내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 찬양 / 나 어느 곳에 있든지
예수 내 구주! 예수 내 생명! 예수 내 권세!
♦ 12월 25일(토)
♦ 오늘 읽어야 할 말씀 : 룻기 1:1∼22 ♦ 묵상을 위한 주제 : 여호와의 손(13절) ♦ 성구 : 너희가 어찌 그것을 인(因)하여 그들의 자라기를 기다리겠느냐 어찌 그것을 인(因)하여 남편(男便) 두기를 멈추겠느냐 내 딸들아 그렇지 아니하니라 여호와의 손이 나를 치셨으므로 나는 너희로 인(因)하여 더욱 마음이 아프도다.
룻기서는 두 가지 특성을 갖습니다.
첫째는 룻이란 주인공이 모압 출신의 이방 여인입니다.
둘째는 사사시대를 배경으로 합니다.
사사시대의 순환 고리를 즉 “징계, 부르짖음과 회개, 구원자 사사, 평화”를 파괴한 내용으로 “사사들이 치리하던 때에 그 땅에 흉년이 드니라” 이렇게 시작합니다(1:1).
사사들이 치리하던 때는 방향감각을 상실한 시대를 말합니다.
종교적으로 도덕적으로 절대 진리를 잃어버리고 ‘사람마다 각각 자기 소견에 옳은대로 행하던’ 시대였습니다.
그러나 룻기는 이처럼 어두운 시대에도 신앙을 지켰던 소수의 경건한 사람들이 있었음을 알려주므로 하나님의 구속사의 손길은 암흑의 순간에도 멈추지 않았음을 말씀합니다.
또한 이 아름다운 신앙과 사랑 이야기의 주인공인 룻이 다윗의 조상이라는 사실은 하나님께서 다윗을 택하시고 그를 이스라엘의 왕으로 삼으신 것이 오래 전부터 하나님의 계획 속에서 이루어진 섭리였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룻기는 하나님의 구속사적 관점에서 중요한 사실을 계시하고 있습니다.
룻이 ‘모압 여인’이라는 것을 본문은 여러 차례 반복해서 소개합니다(1:22, 2:2,21, 4:5,10).
모압 여인 룻이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를 믿음으로 이스라엘 공동체에 편입되었으며 정통 다윗 왕가의 조상이 되었습니다.
여리고의 기생 라합이 믿음으로 구원을 받고 이스라엘 공동체의 일원이 된 경우와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구원은 혈통에 의해 좌우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여호와의 손(the LORD's hand)”이란 남편 “엘리멜렉”과 두 아들 “말론”과 “기룐”이 죽고 “나오미”가 남겨졌다고 표현함으로 이 땅에 비참한 존재로 남았다는 것을 강조합니다.
“나오미”는 자신의 불행을 ‘여호와의 손’이 자신을 친 결과라고 생각합니다. 이것은 약속의 땅을 떠나 이방 땅으로 향한 것에 대한 하나님의 징계라고 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불행을 겪은 “나오미”가 이스라엘 땅으로 귀향하는 것과 더불어 다시 회복되는 것을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나오미는 여호와께서 자신을 괴롭게 하셨음으로 자신을 “나오미” 즉 “감미로움”이라 부르는 것은 합당치 않고 “마라” 즉 “괴로움”으로 부르라고 합니다. 이와 같은 “나오미”의 고백은 자신의 불행한 처지에 대한 탄식과 함께 여호와께서 자신의 삶을 그렇게 만드셨다는 표현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단순한 신세 한탄이나 하나님에 대한 원망과 불평의 표현이 아닙니다. 룻기 전체를 주의 깊게 살펴보면 나오미는 일관되게 여호와에 대한 신앙을 지키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나오미의 탄식 어린 고백은 오히려 불행 속에서도 자신의 삶을 섭리하시는 여호와의 주권에 대한 애가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성도는 이처럼 애가를 불러야 할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을 신뢰하며 살다가도 때론 감당키 어려운 시련을 만날 때가 있기 때문입니다. 또는 사람의 생명보다 이익, 재산, 돈을 중시하다가 유라굴로 광풍 같은 고통을 당할 수도 있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그것이 시련이든 고통이든 그 어떤 순간에도 나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향한 애가를 부르는 사람을 하나님은 절대로 저버리지 않으십니다.
유라굴로와 같은 인생의 광풍을 만났을 때, 우리는 가던 길을 멈추고 걸어온 길을 돌아봅니다. 그때 비로소 바쁘게 걷다가 지나친 소중한 것을 발견합니다. 그래서 인생의 이정표를 다시 세우고 하나님을 향해 우리의 발걸음을 내딛습니다. 그래서 인생의 풍랑은 때때로 우리들에게 유익입니다. 애가를 찬가로 바꾸시는 살아서 역사 하시는 주님을 만나는 복된 하루가 열려지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1:6~18절은 이스라엘에 흉년이 끝났다는 소식을 듣고 베들레헴으로 귀향하면서 나오미는 자신의 두 며느리에게 각자 고향으로 돌아가라고 말합니다. 이에 며느리들은 어머니와 함께 어머니의 백성에게로 돌아가겠다고 응답합니다. 그러나 거듭되는 시어머니의 종용에 결국 오르바는 모압에 잔류하지만, 룻은 끝까지 나오미와 함께 하겠다는 자신의 의지를 굽히지 않습니다.
16절입니다. “룻이 이르되 내게 어머니를 떠나며 어머니를 따르지 말고 돌아가라 강권하지 마옵소서 어머니께서 가시는 곳에 나도 가고 어머니께서 머무시는 곳에서 나도 머물겠나이다 어머니의 백성이 나의 백성이 되고 어머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시리니”
여기서 룻은 시어머니 나오미를 통해 갖게 된 여호와 하나님에 대한 신앙을 지키기 위해, 모압의 신과 민족, 그 땅의 문화, 재혼하여 새 삶을 살 수 있는 기회를 모두 포기한 채 늙은 시어머니를 따라 낮설은 이국 땅 이스라엘로 가겠다고 결심합니다. 이런 룻의 결심은 일차적으로는 시어머니에 대한 애정에서 비롯된 것이지만, 본질적으로는 여호와 하나님에 대한 신앙의 결단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1:19절부터 마지막절까지는 무대가 모압에서 베들레헴으로 바뀝니다. 초라한 모습으로 귀향한 나오미는 고향 사람들에게 자신을 이렇게 이야기 합니다.
20절입니다. “나오미가 그들에게 이르되 나를 나오미라 부르지 말고 나를 마라라 부르라 이는 전능자가 나를 심히 괴롭게 하셨음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