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 새벽묵상 느헤미야








느헤미야 10장 요약 / 언약에 인친 자들

느헤미야를 비롯한 지도자들과 백성들은 언약문서에 서명하고, 하나님의 율법을 철저히 지킬 것을 맹세합니다 (10:1-29). 이방인과의 혼인을 금하고, 안식일과 안식년을 성실히 지키기로 약속합니다 (10:30-31). 성전 유지와 제사를 위한 십일조와 헌물을 정기적으로 드리기로 서약합니다 (10:32-39). 이는 말씀 중심의 공동체를 세우기 위한 실천적 다짐이었습니다.

느헤미야 11장 요약 / 귀향민들이 자리를 잡다

예루살렘에 거주할 사람을 제비 뽑아 10분의 1을 정하고, 나머지는 다른 성읍에 거주하게 합니다(11:1-2).
예루살렘에 거주한 자들의 명단이 자세히 기록되며, 유다 자손과 베냐민 자손, 제사장, 레위인, 문지기 등의 수가 제시됩니다(11:3-24). 그 외 유다 성읍들에 거주한 사람들의 목록도 정리되어 공동체 전체의 조직이 드러납니다(11:25-36).
이는 하나님의 도성을 실제로 재건하는 일의 일환이었습니다.

느헤미야 12장 요약 / 제사장과 레위인들의 기록

스룹바벨 때의 제사장과 레위인 명단이 기록되고, 에스라와 느헤미야 시대의 족보도 정리됩니다(12:1-26).
성벽 봉헌식이 열리며, 백성은 노래와 악기로 하나님을 찬양하고 감사하며 성을 돌며 기쁨을 표현합니다(12:27-43).
레위인들과 제사장들은 예물을 정리하고 성전을 위한 직무를 정돈합니다(12:44-47).
하나님의 일에 질서와 기쁨으로 참여하는 모습이 강조됩니다.

느헤미야 13장 요약 / 느헤미야가 다시 돌아오다

느헤미야는 잠시 바사 왕에게 돌아갔다가 예루살렘에 다시 와서 성전 내에 도비야가 거처를 차지한 것을 발견하고 그를 쫓아냅니다 (13:4-9).
레위인들이 생계를 보장받지 못해 흩어진 것을 바로 잡고, 십일조 제도를 회복합니다(13:10-14).
또 안식일을 범하는 상인들을 단호히 막고, 성문을 폐쇄하여 안식을 회복시킵니다(13:15-22).
이방 여성과의 결혼을 다시 책망하고, 제사장의 정결을 회복시킵니다(13:23-30).
느헤미야는 모든 개혁을 행하며 하나님께 기억해 달라고 기도합니다(13:31).


5월 31일(토) 느헤미야 10-13장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저주를 복으로(13:2)

그러나 우리 하나님이 그 저주를 돌이켜 복이 되게 하셨다 하였는지라.
Our God, however, turned the curse into a blessing.

이는 저희가 양식과 로 이스라엘 자손을 영접지 아니하고 도리어 발람에게 뇌물을 주어 저주하게 하였음이라 그러나 우리 하나님이 그 저주를 돌이켜 복이 되게 하셨다 하였는지라.
because they had not met the Israelites with food and water but had hired Balaam to call a curse down on them. (Our God, however, turned the curse into a blessing.)

저주(7043) 카랄(qâlalקָלַל   

1. 가볍게 하다.  2. 감하다. 3. 경멸하다
발음 [ qâlal ]
구약 성경  /  79회 사용
관련 성경  /  줄어들다(창 8:8,11), 빠르다(삼하1:23, 욥9:25, 렘4:13), 비천하다(욥40:4), 멸시하다(창16:4, 삼상2:30, 삼하19:43), 작다(삼상18:23, 사49:6), 낮아지다(삼하6:22), 가볍다(왕상16:31), 쉽다(출18:22, 왕하20:10, 잠14:6), 약하다(렘6:14), 적다(겔8:17), 저주하다(레20:9, 삼하19:21, 사8:21), 진동하다(렘4: 24),갈다(전10:10), 흔들다(겔21:21), 저주받다(욥24:18, 시37:22, 사65:20), 멸시받다(사23:9), 업신여기다(겔22:7). [명] 멸시(사9 : 1).[부] 빨리(합1:8). 가볍게(렘8:11).

저주(詛呪) :  저주할 저, 빌 주
저주(咀呪) : 씹을 저, 빌 주

* 차(且) : 또 차, 버금 차, 도마 저, 경할 저


복(1293) 베라카(Berâkâh) בְּרָכָה  

1. 축복.  2. 앞날에 대한 예언적 축복.  3. 번영의 결과로서의 복
발음 [ Berâkâh ]
어원 / 1288에서 유래
구약 성경  / 69회 사용
관련 성경  /  복(창12:2, 신11:26, 말3:10), 축복(창27:41, 신11:29, 슥8:13), 예물(창33:11, 사36:16), 송축(느9:5).

복(福) : 복 복, 간직할 부
示(보일 시) + 畐(가득할 복)



* 본절은 하나님께서 암몬 사람과 모압 사람을 이스라엘의 공동체에 들어오지 못하게 엄금한 이유를 설명한 것으로서, 신명기 23:4-5의 요약이다.

  • 그들은 너희가 애굽에서 나올 때에 떡과 로 너희를 에서 영접하지 아니하고 메소보다미아의 브돌 사람 브올의 아들 발람에게 뇌물을 주어 너희를 저주케 하려 하였으나.
  •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사랑하시므로 발람의 말을 듣지 아니하시고 그 저주를 변하여 복이 되게 하셨나니.
  • For they did not come to meet you with bread and water on your way when you came out of Egypt, and they hired Balaam son of Beor from Pethor in Aram Naharaim to pronounce a curse on you.
  • However, the LORD your God would not listen to Balaam but turned the curse into a blessing for you, because the LORD your God loves you


  • 저희가...이스라엘 자손을 영접지 아니하고
    - '암몬'과 '모압' 사람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영접해야 했던 이유는, 두 족속이 이스라엘 백성과 혈통적으로 한 뿌리에 속했기 때문이었다. 다시 말해서 그들은 아브라함의 조카 롯의 후손들이었다(창 19-30-38).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그러한 관계를 고려하여 절대로 그들을 공격하지 말라고까지 하셨었다(신 2:9,19).

    양식과 물
    - 광야 생활을 하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절실히 필요했던 두 가지였다(신 2:6,7).

    발람에게...저주하게 하였음이라
    - 이것은 모압 왕 발락이 주동이 되어 메소포타미아의 브올에 살던 복술가(卜術家) '발람'을 초청하여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저주가 임하도록 하라고 요청했던 사실을 가리킨다.
    모압과 암몬 족속이 이처럼 행동했던 까닭은, 막강한 군사력을 소유했던 아모리 족속까지 격파시켰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자신들에게도 그 같은 군사 행동을 취할까 염려해서 였다(민 22:2,3).
    그러나 사실상 이 같은 염려는 어처구니없는 기우(杞憂)였다.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들을 형제로 인식하고 있었다(신 2:9,19).
    이에 따라 그들은 다만
    (1) 이스라엘 백성들이 지날 수 있는 길만 비켜주고(신 2:27,28),
    (2) 먹을 양식과 먹을 물을 돈을 받고 공급해주면 그만이었다(신 2:6).

    뇌물을 주어(사카르)
    - '품삯을주고 고용하다' 혹은 '어떤 일에 대한 대가를 지불하다'의 뜻(창 30:28; 민 18:31; 전 4:9; 9:5).
    이것은 구체적으로, 모압 사람들이 이스라엘 백성을 저주한 대가로 발람에게 많은 은금(銀金)을 주었던 사실을 가리킨다(민 22:18; 24:13).

    뇌물(사카르. sâkar) שָׂכַר 스트롱번호 7936

    1. 고용하다.  2. 뇌물로 매수하다. 3. 니팔형 :고용당하다
    발음 [ sâkar ]
    구약 성경  /  21회 사용
    관련 성경  /  사다(창30:16, 삿9:4), 뇌물을 주다(신23:4, 스4:5, 느13:2, 6:13), 뇌물을 받다(느 6:12), 삯 내다(대상19:6, 대하25:6), 고용하다(삼하10:6, 대하24:12, 잠26:10), 삯을 받다(학1:6). [명] 품(삼상2:5).

    저주를 돌이켜 복이 되게 하셨다
    - 비록 발람이 모압 사람의 요청을 받아들여 이스라엘 백성들을 저주할 마음을 가졌었지만, 하나님의 강권적 역사에 따라 그가 도리어 이스라엘을 축복했던 사실을 가리킨다(민 24장).


    저주 / 177구절

    창세기 3:14 
    여호와 하나님이 뱀에게 이르시되 네가 이렇게 하였으니 네가 모든 육축과 들의 모든 짐승보다 더욱 저주를 받아 배로 다니고 종신토록 흙을 먹을지니라.

    창세기 3:17
    아담에게 이르시되 네가 네 아내의 말을 듣고 내가 너더러 먹지 말라한 나무 실과를 먹었은즉 땅은 너로 인하여 저주를 받고 너는 종신토록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

    창세기 4:11
    땅이 그 입을 벌려 네 손에서부터 네 아우의 피를 받았은즉 네가 땅에서 저주를 받으리니


    복 / 1037구절

    창세기 1:22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어 가라사대 생육하고 번성하여 여러 바다 물에 충만하라 새들도 땅에 번성하라 하시니라.

    창세기 1:28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

    창세기 2:3
    하나님이 일곱째 날을 복 주사 거룩하게 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그 창조하시며 만드시던 모든 일을 마치시고 이 날에 안식하셨음이더라.

    창세기 5:2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셨고 그들이 창조되던 날에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고 그들의 이름을 사람이라 일컬으셨더라.




    복과 저주

    성경에서 말씀하는 복이란 무엇인가?
    성경에서는 어떤 것을 복이라고 말씀하고 있는가?
    일반적으로 사전적 의미는 “삶에서 누리는 좋고 만족할 만한 행운. 또는 거기서 얻는 행복”이라고 정의하고 있다.
    이런 복을 예로부터 좋아하다보니 우리는 복이라는 말을 많이 써왔다.
    옷, 베개, 숟가락 등에 ‘복’(福)자를 새겨 넣었다.
    이처럼 복을 좋아하고 복 받는 것을 동경하기 때문에 성경에서 말씀하고 있는 복과 혼동하게 되었다.

    복과 반대적 의미의 말이라면 ‘저주’이다.
    사전적 의미로는 “남에게 재앙이나 불행이 일어나도록 빌고 바람. 또는 그렇게 하여서 일어난 재앙이나 불행”이라고 정의한다.
    우리는 저주라는 말만큼 싫어하고 두려워하는 말이 없는 것 같다.
    그래서 많은 교회들에서 신명기 28장의 복과 저주가 오늘날 우리들에게 바로 적용되는 것처럼 말한다.
    오늘날 목회자가 혹시 저주하면 마치 그 저주가 그대로 자신에게 임하는 것처럼 생각하는 교인들이 많다.
    그러나 결코 그렇지 않다.
    우리는 복이 무엇인지 또는 복의 계통이 어떤 것인지를 말씀을 통해 분명히 확인하지 않으면 안 된다.

    사무엘하 16장에 보면 다윗이 아들 압살롬의 반역으로 말미암아 광야로 도망하게 되는 장면이 나온다.
    이 때 사울의 집 족속인 시므이가 돌을 던지며 다윗을 저주한다.
    그러나 다윗은 결코 이 일로 인해 시므이에게 보복하려고 하지 않았다.
    오히려 시므이를 죽이려고 흥분하는 아비새를 말렸다.
    다윗은 아들 압살롬의 반역으로 인해 광야에 쫓겨 다니는 신세가 되었다고 할지라도 그것 자체가 저주가 아님을 알았기 때문이다.

    다윗은 시므이의 저주에 대해 이렇게 말하고 있다.
    “저가 저주하는 것은 여호와께서 저에게 다윗을 저주하라 하심이니…여호와께서 저에게 명하신 것이니 저로 저주하게 버려두라”(삼하 16:10,11).
    오히려 다윗은 시므이의 저주가 복으로 바뀌는 것을 기대하였다.
    “혹시 여호와께서 나의 원통함을 감찰하시리니 오늘날 그 저주 까닭에 선(善)으로 내게 갚아 주시리라”(삼하 16:12).
    이는 다윗의 만용이나 객기가 아니었다.

    다윗은 하나님의 언약을 받은 자이다.
    즉 다윗은 언약의 씨(후손)를 이어가도록 선택받은 자이다.
    이것은 아브라함의 언약 속에 있는 내용이다.
    창세기 12:1-3을 보면 이런 말씀이 기록되어 있다.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케 하리니 너는 복의 근원이 될지라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를 인하여 복을 얻을 것이니라 하신지라.”

    그 약속이 지금 다윗에게 담겨져 있다(삼하 7장).

    그러면 성경에서 말씀하는 ‘언약의 복’이란 무엇인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언약을 주실 때에 복을 말씀하셨는데 그것이 물질적인 복을 말씀하신 것이 될 수 있는가?
    만약 그렇다면 아브라함 이후로 이스라엘 백성 중에는 가난한 자가 없어야 하지 않겠는가?
    뿐만 아니라 야곱이 하란까지 가서 고생해서 얻는 재물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거저 채워주셔야 하는 것 아닌가?
    이렇게 본다면 언약의 복이란 단순히 물질적인 복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후손에 대한 약속을 복으로 말씀하고 있는 것으로 이해하여야 한다.

    그런데 그 후손에 대한 약속을 갈라디아서에서 이렇게 말씀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이 약속들은 아브라함과 그 자손에게 말씀하신 것인데 여럿을 가리켜 그 자손들이라 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하나를 가리켜 네 자손이라 하셨으니 곧 그리스도라”(갈 3:16). 후손에 대한 약속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성취되었다고 선언한다. 그러므로 구약에서 말씀하고 있는 언약의 복은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찬송하리로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으로 우리에게 복주시되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엡 1:3-4)라고 하였다.

    여기서 “신령한 복”이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신 하나님의 선택이다. 즉 예수 그리스도 안으로 부름 받은 그것이 신령한 복이라고 말씀하고 있다. 이런 점에서 예수님께서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마 4:17)라고 선포하시고 팔복을 말씀하시며 그 복이 곧 천국임을 밝히셨다(마 5:3-10). 시편 속에서도 이미 복을 영생이라고 언급하였다. “헐몬의 이슬이 시온의 산들에 내림 같도다 거기서 여호와께서 복을 명령하셨나니 곧 영생이로다”(시 133:3).

    결국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신 복이란 언약 안에 거하게 된 것이고 그것은 후에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게 될 상태를 말씀하신 것이며 그것이 곧 천국이다. 언약의 관점에서 복이 그러하다면 저주에 대한 이해도 언약과 관련하여 이해하여야 한다. 따라서 저주란 하나님께서 특별히 더 핍박을 하고 나쁘게 만든다는 표현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 안으로 부름 받지(선택받지) 않은 상태를 말씀한다. 곧 죄 아래 버려져 있는 상태가 저주이다.

    아브라함과 다윗의 후손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는 십자가의 희생을 통해 새 언약을 세우신 분이다(눅 22:20). 새 언약을 세우셨다는 것은 또 다른 언약을 새롭게 세우셨다는 것이 아니라 구약에서 하나님께서 언약을 주셨던 것을 새로운 차원으로 완성하셨다는 뜻이다. 이런 점에서 다윗은 새 언약을 이루실 예수 그리스도의 씨를 품고 있었다. 다윗의 후손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신다는 것이 하나님께서 하신 약속이었다. 거꾸로 말하자면 다윗도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이 복을 누리고 있었다. 한마디로 복이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누리는 구원이고 천국이며 영생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다윗이 깨달은 하나님은 바로 이런 하나님이었다. 이미 언약의 복을 허락하셨기에 시므이의 저주가 결코 저주로 돌려질 수 없는 것임을 알았던 것이다.

    이제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는 자는 그 언약 때문에 구원의 복을 누리는 자이다. 이런 자에게는 사람이 저주한다고 해서 저주가 되는 것이 아니다. 죄 아래에서 죄의 권세에 매여 사는 세상의 삶이 저주의 상태에 있는 것이다. 오히려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으로 덮어 저주를 복으로 바꾸신다. 예수 그리스도가 믿어진 우리는 이미 복을 받은 자로서 다른 사람을 저주하는 자가 아니라 복을 비는 자로 살아가야 한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파송하시면서 하신 말씀 중에 상대에게 평안을 빌라 만일 그 사람에게 빌었던 평안이 합당치 않다면 오히려 그 평안을 빌었던 자에게로 돌아오게 될 것이라고 하셨다(마 10:12-13). 오늘 우리는 삶의 초점을 어디에 맞추고 있는가? 우리는 이제까지 다른 사람들이 내게 한 말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있지 않았는가? 다른 사람이 내게 하는 비난의 말, 저주에 대해 신경쓰지 말자. 오히려 저주한다면 그 저주를 기뻐하여야 할 것이다. 분명 그것이 복으로 바뀌어서 계속적으로 우리에게 임할 것이기 때문이다.

    사람들의 저주가 우리에게 저주가 될 수 없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당하신 저주 때문에 우리에게는 그 저주가 오히려 복으로 임하게 되는 것이다. 사람에 의해서가 아니라 복과 저주는 그리스도로부터 오는 것임을 알아야 할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성경에서 말씀하는 복이 무엇이냐?”라고 물을 것이 아니라 “성경에서 말씀하는 복이 누구신가?”라고 물어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 그분이 언약의 성취자로서 언약의 복 그 자체이시다.

    최근 가계에 흐르는 저주를 끊어야 한다는 책이 출판되는 것을 계기로 복과 저주에 대한 관심이 많은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과 상관없이 샤마니즘적인 관점을 가지고 성경에 대입하여 이해하려고 한다면 그것 자체가 죄의 권세에 매여 저주 아래 있는 모습에 불과하다.

    이제 성도는 복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부름을 받아 복을 누리는 자가 되었다. 그러므로 우리는 사람들이 비는 복이나 혹은 비난, 저주에 신경 쓸 것이 아니라 복의 근원이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에게 관심을 가지고 그분과 깊은 교제를 계속적으로 이어가는 복을 누려야 할 것이다. 그것은 곧 주님과 더불어 십자가의 길을 가는 것이다.

    복의 목록(신명기 28:1-14)

      • 토지와 소출이 풍성함 (28:4).
      • 곡간과 창고가 가득 찰 것 (28:8).
      • 가축의 번성 (28:4, 11).
      • 자손의 번성 (28:4).
      • 질병과 재앙으로부터 보호받음 (출 15:26).
      • 원수들에게 승리를 얻음 (28:7).
      • 하나님이 보호하심으로 안전함 (28:10).
      • 열국 위에 뛰어나게 높여짐 (28:1).
      • 이웃 민족들이 하나님의 백성을 두려워함 (28:10).
      • 하나님과의 친밀한 관계 (민 6:24-26).
      • 하나님이 항상 함께하심 (수 1:9).

    저주의 목록(특히 신명기 28:15-68에서 경고된 내용)

      • 토지와 가축이 열매를 맺지 못함 (28:18).
      • 비가 내리지 않음으로 흉년이 듦 (28:23-24).
      • 온갖 질병과 재앙에 걸림 (28:22, 27-28, 60-61).
      • 건강이 나빠지고 수명이 짧아짐 (28:35).
      • 원수들에게 정복당하고 쫓겨남 (28:25).
      • 외국 땅으로 끌려가 노예가 됨 (28:36, 64).
      • 다른 민족들에게 비웃음과 멸시를 당함 (28:37).
      • 나라가 멸망하고 지도자가 부재함 (28:43-44).
      • 하나님을 떠나 우상을 섬김으로 영적 파멸에 빠짐 (28:20).
      •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기고 은혜를 잃음 (28:15).

    신약에서의 복과 저주

      • 심령의 복: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라" (마태복음 5:3-12).
      • 영원한 생명: 하나님을 믿고 예수님을 따르는 자들에게 주어지는 영생 (요한복음 3:16).
      • 불신앙의 결과: 예수를 거부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진노 아래 있음 (요한복음 3:36).
      • 악한 자의 운명: 영원한 심판과 불못(지옥)에 떨어짐 (마태복음 25:41).

    성경은 다양한 복(blessings)

    1. 영적인 복

    • 하나님과의 관계 안에서 얻는 복으로, 신약과 구약 모두에서 강조돼.
      •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에게 주어지는 가장 큰 복.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요한복음 3:16).
      • 성령이 우리 안에 거하심으로 주어지는 평안과 인도.
        "평강의 하나님께서 모든 은혜를 넘치게 하시나니..." (로마서 15:13).
      • 예수 안에서 주어지는 영적 유산.
        "찬송하리로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을 우리에게 주셨다" (에베소서 1:3).

    2. 물질적 복

    • 순종과 충성을 통해 주어지는 현실적인 복들.
      • 농작물의 풍성함, 가축의 번성 등.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복을 주신 대로 네 소득에 따라 여호와께 즐거이 드릴 것이니라" (신명기 16:17).
      • 하나님의 백성에게 질병에서 벗어나게 하시고, 보호하시는 약속.
        "너희 중에 병든 자가 없게 하리니" (출애굽기 15:26).
      • 적들로부터의 보호와 전쟁에서의 승리.
        "여호와께서 너를 너의 원수들 앞에서 이기게 하시리라" (신명기 28:7).

    3. 관계에서의 복

    • 하나님께서 인간의 관계 속에서도 복을 주심.
      • 자녀의 번성과 가정의 평안.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에게 복을 주실 것이니 네 몸의 소생과 네 땅의 소산과 네 가축의 새끼가 번성할 것이며" (신명기 28:4).
      • 하나님이 함께하실 때 사람들과의 관계에서도 복을 누림.
        "원수가 너를 공격할지라도 너는 승리하리라" (잠언 16:7).

    4. 천국에서의 복

    • 신약에서는 이 땅의 복뿐 아니라 천국에서의 영원한 복이 강조돼.
      • 마음이 가난한 자,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 평화를 이루는 자 등이 받는 복들.
        예: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
      • 눈물과 고통이 없는 영원한 안식처.
        "하나님의 장막이 사람들과 함께 있으매...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닦아 주시니..." (요한계시록 21:3-4).

    신명기에서 말하는 복의 목록    

     

    1. 신명기에서 말하는 복의 목록

    (신명기 28:1-14)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할 때 주어지는 복들:

    ① 개인적 복

      • "네가 성읍에서도 복을 받고 들에서도 복을 받을 것이며" (28:3).
      • "네 몸의 소생과 네 땅의 소산과 네 가축의 새끼와 소와 양의 새끼가 복을 받을 것이며" (28:4).
      • "네 광주리와 떡 반죽 그릇이 복을 받을 것이며" (28:5).
      • "네가 들어와도 복을 받고 나가도 복을 받을 것이라" (28:6).

    ② 공동체적 복

      • "너를 치러 오는 적군들이 네 앞에서 패할 것이라" (28:7).
      • "네 창고와 네 손으로 하는 모든 일에 복을 내리시며" (28:8).
      • "여호와께서 하늘의 아름다운 보고를 열어 네 땅에 비를 내리시며" (28:12).
      • "네가 많은 민족들에게 꾸어 주고 너는 꾸지 아니할 것이며" (28:12).
      • "네가 머리가 되고 꼬리가 되지 아니하며 위에만 있고 아래에 있지 아니하리라" (28:13).  

    2. 신명기에서 말하는 저주의 목록

    (신명기 28:15-68)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할 때 주어지는 저주들:

    ① 개인적 저주

      • "네가 성읍에서도 저주를 받으며 들에서도 저주를 받을 것이며" (28:16).
      • "네 몸의 소생과 네 땅의 소산과 네 소와 양의 새끼가 저주를 받을 것이며" (28:18).
      • "네 광주리와 떡 반죽 그릇이 저주를 받을 것이며" (28:17).
      • "네가 들어와도 저주를 받고 나가도 저주를 받으리라" (28:19).

    ② 건강과 환경의 저주

      • "여호와께서 온갖 질병과 재앙을 내리시리니..." (28:21-22).
      • "하늘은 놋과 같고 땅은 철과 같을 것이며" (28:23).

    ③ 적들로 인한 저주

      • "여호와께서 너로 네 원수들 앞에서 패하게 하시리라" (28:25).
      • "너는 많은 민족들 가운데 흩어질 것이며" (28:64).

    ④ 사회적 혼란과 경제적 저주

      • "너는 많은 민족들에게 꾸어 주지 못하고 그들은 네게 꾸어 줄 것이며" (28:44).
    1.  
    • "너는 두려움과 조롱과 조롱거리가 되리라" (28:37).

    ⑤ 영적 저주

    1. 하나님과의 단절
    • "네가 다른 신들을 섬기므로 여호와께서 너를 미워하시리라" (28:20).

     

     

     "복 있는 자"

     

    1. 팔복 (마태복음 5:3-12)

    예수님이 산상수훈에서 말씀하신 팔복은 하나님 나라에서 누리는 복을 보여줘.

    1. 심령이 가난한 자
      •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라. (마 5:3)
    2. 애통하는 자
      •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임이라. (마 5:4)
    3. 온유한 자
      • 그들이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라. (마 5:5)
    4.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
      • 그들이 배부를 것임이라. (마 5:6)
    5. 긍휼히 여기는 자
      • 그들이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라. (마 5:7)
    6. 마음이 청결한 자
      • 그들이 하나님을 볼 것임이라. (마 5:8)
    7. 화평하게 하는 자
      •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라. (마 5:9)
    8.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자
      •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라. (마 5:10) 

    2. 기타 복의 종류

    구약과 신약 곳곳에서 "복 있는 자"에 대한 묘사가 있어.

      • 하나님 말씀을 따르는 자:
        "복 있는 사람은 악인의 꾀를 따르지 아니하며..." (시편 1:1).
      •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
        "여호와를 경외하며 그의 길을 걷는 자마다 복이 있도다." (시편 128:1).
      • 지혜와 명철을 얻는 자:
        "지혜를 얻는 자와 명철을 얻는 자는 복이 있나니." (잠언 3:13).
      • 주는 자: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 (사도행전 20:35).
      • 보지 않고 믿는 자:
        "보지 않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 (요한복음 20:29). 

    3. 요한계시록에서 말하는 복 있는 자들

    요한계시록은 총 7번 "복 있는 자"를 언급해. 각각 하나님과의 관계와 순종에 따른 복을 보여줘.

      • "이 예언의 말씀을 읽는 자와 듣는 자들과 그 가운데 기록한 것을 지키는 자는 복이 있나니..." (계 1:3).
      • "지금 이후로 주 안에서 죽는 자들은 복이 있나니..." (계 14:13).
      • "보라, 내가 도둑같이 오리니 깨어 있어 자기 옷을 지켜 벌거벗고 다니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느니라." (계 16:15).
      • "어린양의 혼인 잔치에 청함을 받은 자들은 복이 있도다." (계 19:9).
      • "첫째 부활에 참여하는 자들은 복이 있고 거룩하도다..." (계 20:6).
      • "이 두루마리의 예언의 말씀을 지키는 자는 복이 있나니..." (계 22:7).
      • "그 두루마기를 빠는 자들은 복이 있으니, 이는 그들이 생명나무에 나아가며..." (계 22:14).

    요약

    • 팔복 : 영적 성품과 삶의 태도에서 오는 복.
    • 성경 전반 :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고 지혜를 추구하며 의를 행하는 자에게 복이 약속됨.
    • 요한계시록 : 종말론적 맥락에서 믿음을 지키고 순종하며 예언의 말씀을 따르는 자에게 영원한 복을 약속함.


    저주로부터의 자유(갈라디아서 3:13-14, 5:1)

    누가 만든 것인지 모르지만 이런 우화가 있다.
    어느 부자집 뜰에 난초가 자라고 있었는데 그 난초 사이에 두꺼비가 와서 앉았다.
    마침 그 때 주인이 나와서 난초에게 물을 주면서 아주 난초를 애지중지 하는 표현을 했다.
    그것을 지켜본 두꺼비는 그것이 부러운 나머지 난초를 향해서 이런 말을 했다고 한다.
    “나는 목이 말라도 누가 물 한 모금 주는 이가 없고 뱀은 날마다 나를 잡아먹으려고 좇아 다니고 어디를 가나 천대만 받는 천덕 구러기인데 너는 무슨 팔자가 좋아서 주인이 그렇게 곱게 길러주고 사랑해 주느냐.
    너는 참 행복하겠다.”

    이런 말을 들은 난초가 이렇게 말했다.
    “그것은 잘 몰라서 하는 이야기야!
    발이 없으니 목이 타도 주인이 물을 줄 때까지 기다려야 하고 누가 와서 나를 뜯어 먹어도 도망가지도 못하고 꼼짝없이 당해야 하는데 너는 발이 있지 않니.
    그래서 너는 자유스럽게 목이 마르면 가서 물도 마시고 도망가고 싶을 때 도망도 갈 수 있지 않니.”

    이 말을 들은 두꺼비가 비로소 자기는 난초가 갖고 있지 않는 ‘자유가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고 한다.
    우화에 지나지 않는 말이지만 그 가운데 교훈을 주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죄가 자유를 억압한다

    많은 사람들은 자기가 소유하고 있는 자유를 향유하지 못하고 오히려 자유가 없는 사람처럼 세상을 사는 경우가 많다. 더욱 하나님의 자녀들의 경우를 보면 예수 그리스도가 주신 자유가 분명히 있는데도 마치 자유를 얻지 못한 사람처럼 살고 있는 모습을 우리가 자주 본다.

    성경 말씀을 보면 하나님은 우리들에게 이렇게 가르친다. 죄가 인간을 노예로 만들었다. 죄가 사람을 쇠사슬로 묶어서 지금까지 구속하고 그 쇠사슬에서 벗어나지 못하도록 죄가 억압하고 있다고 하나님께서 가르쳐 주고 있다.

    죄는 율법을 무기로 사용하여 인간을 다스린다. 폭정을 행사한다. 사탄은 죄와 그 악한 영들을 자기의 졸개로 사용하여 인간을 부린다. 사탄은 죄와 죽음을 가지고 인간을 공갈치며 협박한다.

    그래서 갈3:23절 말씀에는 이런 내용이 있다.

    “믿음이 오기 전에 우리가 율법 아래 매인바 되고 계시될 믿음의 때까지 갇혔느니라.”

    좀 쉽게 풀면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발견하고 그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구원을 얻기 전까지는 너나 할 것 없이 모두 율법 아래 매여서 갇혀 있었다는 말이다. 사탄은, 아니 죄는 이 율법을 사용해서 우리를 이렇게 억압하고 구속했다. 이것이 인류의 운명이다. 지금도 사탄은 죄로 사람들을 자기 수하에 거느리고 공포의 도가니에 몰아 넣으면서 그들을 다스리고 있다.

    죄로부터의 자유

    한편 예수 그리스도는 죄의 멍에로부터 우리들을 자유케 하셨다. 그가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우리의 모든 죄를 다 속량하시고 죄의 손아귀에서 우리들을 해방시키셨다. 이제 우리는 더 이상 죄의 종이 아니다.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고 그분을 마음에 모신 사람은 더 이상 죄가 부리는 악령에 우리가 놀아나지 아니하며 죄가 사용하는 율법의 무기에 우리가 상처를 입지 않는다. 우리는 죽음 앞에서도 공포를 느끼지 않는다. 왜냐하면 우리는 자유인이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자유를 주셨다.
    요한복음 8:36절에 주님이 이렇게 선언했다.

    “그러므로 아들이 너희를 자유케 하면 너희가 참으로 자유하리라.”

    아들이 누구인가? 십자가에서 인류의 죄를 짊어지고 죽으신 분이시다.
    아들이 누구인가? 죄와 사망의 권세를 발로 짓밟고 사흘만에 부활하신 분이시다.
    아들이 누구인가?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다 소유하신 만왕의 왕이시다.

    그분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죄 속에 속박 당하고 노예생활을 하는 모든 인류를 구원하고 계시는 이 세상에 유일한 소망이다. 그분이 말씀하시기를 ‘내가 너희를 자유케 한다. 그러므로 너희가 참으로 자유하리라.’ 이 말씀대로 오늘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자유를 얻은 몸이 되었다.

    예수님이 주신 이 영적 자유는 우리 스스로가 독립을 하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주인이 바뀐 것을 의미한다. 죄가 주인이었을 때 우리는 노예였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의 주인이 되었을 때에 우리는 비로소 자유인이 된 것이다. 똑똑히 알아두어야 한다.

    인간은 홀로 진정한 자유인이 될 수 없다. 아무 제재도 받지 않고 지도도 받지 않고, 자기 홀로 스스로 독립해서 자유인이 될 수 있는가? 인간은 그럴 자격이 없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셨다. 인간은 죄에게 속하든지 하나님께 속하든지 둘 중에 하나이다. 어느 쪽에든지 소속이 되어야지 독립된 자유인으로서는 인간은 존재하지 못한다. 인간이 스스로 자유스러워지기에는 너무나 사악하다는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지 않는가?

    어느 신학자의 말처럼 “사람에게 자유를 준다는 것은 마음속에 악마를 풀어놓은 것이나 마찬가지다”라고 했다.

    우리가 역사를 보나 현실을 보나 사람에게 자유가 주어지면 주어질수록 그 속에 있는 악마가 기승을 부리는 것을 우리가 얼마나 많이 보는가? 그러므로 인간은 스스로 자유할 수 없다.

    오직 우리를 자유케 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주인으로 모실 때만이 우리는 자유할 수 있다. 그래서 어느 시인은 이런 시를 썼다.

    “나 자신이 자유로워졌다고 생각할 때에 자유는 도리어 짐이 되고 말았도다. 자유가 새로운 감옥으로 변해 버리기에 나는 주님이 묶어 놓은 밧줄 속에서만 자유를 발견할 수 있도다. 나를 예수 그리스도에게 묶어 놓는 밧줄 속에서만 나는 진정 자유인이로다.”

    이것이 진정 자유이다. 이 가운데서 아직도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못하고 계신 형제 자매들, 이 시간 성령께서 여러분들의 마음을 여시고 이 말씀을 꼭 깨닫도록 해 주시기를 바란다.

    여러분, 하나님을 믿는가? 예수님을 믿는가? 기독교, 혹은 교회에 매이지 않고 있는 자기 자신의 모습을 보고 자유인이라고 말할지 모른다. 그러나 여러분은 자유인이 아니다. 여러분은 죄에 매여 있다. 죄가 여러분들을 다스리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를 죄로부터 해방시켜 자유케 하신 예수 그리스도 품 안에 돌아올 수 있기를 바란다. 예수 믿는 우리들은 정말 감사해야 한다.

    갈라디아 5:1절 오늘 우리가 읽었다. 함께 읽어보자.

    “그리스도께서 우리로 자유케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세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

    그러나 불행하게도 주님이 자유를 주셨음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마치 죄의 종이나 된 것처럼 허덕이는 그리스도인들을 자주 본다. 그들은 심령에 자유함을 얻지 못하고 항상 무엇인가 눌려 사는 것 같은 모습을 우리는 읽을 수 있다. 죄책감일까. 아니면 예견된 어떤 불안일까. 아니면 이유 없이 찾아오는 공포일까. 아니면 누구로부터 들은 이상한 말 한마디에 내가 끌려 다니는 것은 아닐까?

    가만히 보면 분명히 예수 그리스도의 자유함을 누리고 자유하고 있는 사람인데도 불구하고 마음이 짓눌려 있다. 영적으로 해방이 안 되고 있다. 이런 분들을 많이 본다. 한국 교회에 이런 사람들이 너무나 많다. 아마 옛날에 무속 신앙에 젖어 있었던 어떤 전통적인 흐름이 있어서 그런지 모르지만 예수를 믿고도 자유함을 얻지 못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답게 살지 못하고 무엇인가 늘 끌려 다니고 있다. 그리고 억눌리고 어떤 면에서는 고문을 당하는 것 같은 심령을 가진 자들이 너무나 많다.

    가계에 흐르는 저주를 주장하는 자들의 이론

    이런 심기를 이용하여 최근에 이상한 책들이 시중에 많이 돌고 있다. 이렇게 말할 수 있을까. “저주 시리즈”라고 할까. 이 저주에 관한 책이 십여권 나와 있는데. 교회를 다니는 사람들이 이상하게 그런 책을 사서 잘 본다. 그 가운데 대표적인 책은 이런 것이다.

    가계에 흐르는 저주를 끊어야 산다.” 집안에 저주가 흐르니까 저주를 끊어야 산다는 것이다. 또 “뜻 모르게 당하는 고통 풀리지 않는 저주 때문이다.”

    “당신 이유 없는 고통을 당하고 있느냐 거기에는 저주가 있다.”

    이런 이야기이다. 이런 등등의 제목을 단 책들이 시중에 나와 있다. 이런 책들이 예수 안 믿은 사람들을 대상으로 쓴 책이면 좋다. 그러나 이런 책들이 예수를 믿는 사람들을 상대로 쓰여지고 팔리고 있다는데 문제가 있다. 내용을 보면 이런 소리를 하고 있다.

    예수를 믿는 가정일지라도 조상의 죄로 인해서 저주가 대물림 되고 있다는 것이다. 왜 예수를 잘 믿은 집안에 할아버지가 심장병으로 세상을 떠났는데 그 아들이 심장병으로 고생을 하고 그 다음에는 손자까지 심장이 약해서 애를 먹는가? 그것은 그 집안에 대대로 저주의 대물림이 있기 때문에 그렇다고 한다.

    왜 어떤 가정에 이해할 수 없는 어떤 우환이 끊어지지 않고 계속되고 있는가? 그 가정에는 분명히 무슨 저주가 지금 떠나지 않고 머물러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집안에 악한 영들이 자리를 잡고 있어서 저주를 하기 때문에 이런 저런 불행이 생긴다는 것이다. 심지어 밭에 이상한 잡초가 무성하여 농사를 망치는 것도 나중에 알고 보면 그 땅에서 한 때 몰살당했던 원혼들이 서려 있어서 저주받았기 때문에 그렇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기도를 해라. 특별히 하나님께 금식기도하고 매달려서 저주를 끊어야 한다는 것이다. 아니면 능력 있는 목사를 찾아가서 기도를 받아야 된다는 것이다.

    여러분, 이런 소리를 들으면 어떻게 느껴지는가? 마치 굿을 해야 액운을 물리칠 수 있다는 점쟁이 소리 듣는 것 같지 않는가? 그런데 이상하게 사람들이 이런 말에 약하다. 우리 교회 서점에 한 때 이런 책이 들어 와서 제가 전부 다 반송시켰다.

    여러분, 이것은 성경 말씀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아무리 무슨 소리를 갖다 붙여도 근본이 잘못되어 있는 것이다. 여러분들이 만약에 이런 제목을 보고 “아! 이게 뭔가 진리가 있구나” 하고 사서 보셨다면 여러분들의 수준을 이제 내가 평가를 해야 될 판이다.

    미국에 이민을 간 어떤 형제가 어느 목사님을 만나서 자기 아버지가 불행하게 세상을 떠난 이야기를 했다고 한다. 어떤 사건으로 세상을 떠난 것은 모르지만 그 이야기를 했더니 그 목사가 대뜸 이런 말을 했다고 한다.

    “당신의 아버지는 저주를 받은 것이요. 하나님이 저주를 하신 것이요. 그러니 내 앞에 엎드리시오. 같이 기도합시다.”

    이렇게 했다고 한다. 그러나 이 젊은이는 무릎을 꿇고 엎드린 대신 이런 말을 했다고 한다.“그런 하나님이면 나는 믿지 않겠소.”

    이 청년 똑똑한 청년이다. 보통 청년 같으면 “옳소이다”하고 머리를 내밀고 기도를 받았을 것이다.

    예수를 바르게 믿어야 한다.
    여러분, 정신 바짝 차려야 한다. 여러분, 기독교가 이런 정도의 저질종교인가? 예수님께서 우리들을 자유케 하셨다는 것이 고작해야 대물림을 하는 집안의 저주 하나 쫓아내지 못한 그런 정도의 자유인가?

    조상이 무슨 죄를 범했든지 간에 심지어 과거에 내가 어떤 죄를 범했고 어떻게 살았을지라도 일단 예수 믿고 십자가를 붙들면 그 모든 과거로부터 자유케 하시는 능력을 가진 복음이라는 것을 우리는 믿는다. 아멘.

    그런데 도대체 이게 뭔가? 대물림을 한다니 그게 무엇인가? 우리가 잘 외우고 사랑하는 성경 구절이 있다.

    고린도후서 5:17절 말씀이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

    이전 것은 다 지나 갔다. 조상 때 모든 것도 다 지나 갔다. 내가 과거 예수 모르고 있을 때 행하던 일 다 지나 갔다. 그 모든 것 십자가에 다 못박아서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장사지낸바 되었다. 이제는 저주가 나에게 더 이상 영향을 미칠 수가 없다. 그래서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다.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 그 새것 안에 무슨 저주가 있는가?

    만약에 새것이 되었다고 하는 그 말씀 안에 아직도 저주가 흐르고 있다고 한다면 도대체 그 예수를 왜 믿어야 하는가? 그렇지 않다. 우리가 또 사랑하는 성경 말씀이 있다.

    갈라디아 2:20절이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과거에 예수를 모르고 살았던 내가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실 때 나도 완전히 죽었다. 이제 내가 산 것이 아니다.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다. 여러분, 내 안에 살아 계신 예수 그리스도가 아직도 저주 때문에 벌벌 떠는 분이신가?

    우리가 좀 똑바로 예수 믿고 살아야 한다.

    오늘 우리가 읽은 갈라디아 3:13절에 보면 우리가 받을 저주는 예수님이 이미 다 받으셨다. 예수님이 다 담당하셨다. 뭐 예수님이 죄 없이 십자가에서 우리가 받을 저주 다 담당하셨는데 뭐가 부족해서 하나님이 우리를 저주하시고 마귀가 우리를 저주하도록 내버려두고, 조상의 죄가 우리를 저주하도록 내버려두겠는가?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 하셨으니 기록된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저주는 우리를 떠났다. 예수 그리스도가 나무에 달리셔서 저주를 받으신 것은 우리가 받아야 될 저주였다. 나무에 달리는 것은 저주를 받기 위해서 달리신 것이다. 십자가가 이렇게 우리를 완전히 저주로부터 자유케 하셨는데 왜 우리가 저주를 받는 사람처럼 이말 저말에 끌려 다니면서 가슴에 짐을 지고 허덕여야 하는가?

    오늘 이 가운데서 예수 그리스도가 주신 이 자유, 곧 저주로부터 해방, 이 복음을 깨닫지 못해서 지금까지 남 모르게 점쟁이한테도 가보고 또 이런 소리, 저런 소리하는 곳에 가서 귀를 기울였던 전과자 경력이 있는 사람들은 예배 마치고 나가기 전에 무릎 꿇고 회개하고 나가야 한다. 그것은 예수님의 십자가 피를 모독하는 행위이다. 나를 대신해서 저주를 짊어지신 예수님을 모독하는 행위이다.

    예수 믿는 가정의 불행은 무엇인가?

    그러면 여러분은 이렇게 질문할 것이다. “목사님 좋은 말씀입니다. 그런데 예수를 그렇게 잘 믿는 집안에 이해할 수 없는 불행들이 닥치는 것을 보는데 그것은 어떻게 해석하는 것입니까?”

    대답해 드리면 이렇다. 우리가 먼저 전제해야 될 사실은 우리가 지금 천국에 살고 있는 것이 아니고 세상에 살고 있다는 것이다. 세상에 살고 있어도 주님께서 아주 높은 성벽을 우리 주변에 쌓아 놓고 세상에 그 어떤 악한 영향이 들어오지 않는 어떤 피난처에다 우리를 두고 살게 하는 것이 아니다. 세상 속에 들어가서 안 믿는 사람들과 섞여 살게 하시고 많은 악한 영들이 활동하는 그 무대 속에서 우리를 하루하루 살아가게 하셨다.

    우리는 세상에 살고 있다. 세상은 죄악의 소굴이다. 악령이 활동하는 무대이다. 자연의 위험이 도사리고 있는 현장이다. 부패한 육신을 가진 인간들의 거처이다. 이것이 세상이다. 그러므로 주님이 뭐라고 말씀하셨는가?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요16:33)

    주님이 우리보고 세상에 살면 환난을 당할 수 있다고 한다. 환난 당하지 않는다고 말씀하신 법이 없다. 우리가 세상에 살면서 환난도 당한다고 하신다. 그러므로 담대 하라고 한다.“자녀이면 또한 후사 곧 하나님의 후사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후사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될 것이니라.”(롬 8:17)

    “그리스도를 위하여 너희에게 은혜를 주신 것은 다만 그를 믿을 뿐 아니라 또한 그를 위하여 고난도 받게 하심이라.”(빌 1:29)


    아무 일도 없는데 담대 하라고 하는가? 예수 믿으면 무조건 복 받고 예수 믿으면 아무 어려운 재난이 우리 가정에 오지 않는다고 하면 무엇 때문에 담대할 필요가 있는가?

    그러나 예수님은 세상을 살다 보면 이런 일, 저런 일 당할 수 있다고 하시면서 담대 하라고 하신다. 믿음 좋다고 해서 안 당하는 것 아니다. 당할 수 있다고 하신다.

    우리가 이런 말씀은 주목해 듣지 않고 예수 믿으면 기도 열심히 하면 하나님이 그저 우리를 완전히 지켜 주셔서 남이 다 병이 들어서 죽어도 우리 가정은 안 죽는다는 생각에 집착한다. 다른 사람이 다 실패해도 나만은 절대 실패하지 않고, 나만큼은 기도하는 것 백배로 주신다고 하는 이런 약간의 미신적인 생각을 하고 있는 자들이 많다. 이것 때문에 우리가 약해지는 것이다. 이런 순진한 생각을 갖고 있으니까 우리가 자꾸 약해지고 겁이 많다. 그래서 조금만 무슨 문제만 있어도 벌벌 떨고 어쩔 줄을 모른다.

    여러분 이것이 신앙 생활인 줄 아는가? 주님이 가르쳐 주신 신앙 생활은 그런 것이 아니다. 우리는 세상에 살고 있다. 세상에 살고 있기 때문에 항상 어떤 사실들을 예측하고 있어야 한다. 예측하고 있어야 할 몇 가지를 말씀드리려고 한다.

    일반은총의 보편적 법칙

    첫째, 선인과 악인을 가리지 않고 적용되는 보편적인 법칙이 있다. 이것을 우리가 인정해야 한다.

    신명기 20장에 보면 참 재미있는 내용이 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제 나라를 세우고 떳떳하게 독립국가를 세우고 다른 나라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며 살게 되었다. 그런데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신다. 가끔은 적군이 너희 나라를 침범할 것이다. 그럴 때마다 군인들은 싸워야 하느니라. 그러나 너희가 적군과 싸우러 나갈 때에 절대 두려워하지 말라. 너희 군사가 약해 보여도 절대로 두려워하지 말라. 왜냐하면 애굽에서 너희를 인도해 낸 나 하나님 여호와가 싸우는 너희들과 함께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절대 두려워 하지 말라는 이런 말씀을 하고 계신다.

    그러면 우리 생각에는 그 정도로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고 약속했으니 부상자가 생겨야 하는가 안 생겨야 하는가? 절대로 안 생겨야 한다. 전사하는 사람이 있어야 하는가 없어야 하는가? 한 사람도 있으면 안 된다.

    우리는 이런 생각을 한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면 어떻게 부상자가 생기고 전사자가 생길 수 있는가? 그 전쟁은 백 번 싸워서 백 번 이기는 전쟁이여야 하지 않겠는가?

    그런데 우리 하나님은 현실론자이시다. 계속해서 하나님이 하시는 말씀이 있는데 전선에 나갈 군인들 중에서 새 집을 지어 놓고 한 번도 들어가 살아보지 못한 군사가 있는지 찾아보아라. 만약에 이사를 가지 못한 자가 있으면 돌려보내라. 그 이유는 전쟁에 나가서 전사하면 그 집에 한 번도 살아보지 못하고 다른 사람이 차지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돌려 보내라.

    또 포도원을 만들어 놓고 한 번도 수확해 보지 못한 사람들도 돌려 보내라. 싸우다가 전사하면 그 포도원은 다른 사람이 차지 하느니라.

    또한 병사들 중에 약혼만 하고 결혼을 하지 못하고 나온 자가 있으면 돌려보내라. 만약에 전쟁에 나가서 전사하면 그 여자는 다른 남자가 차지할 것이다.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신다. 하나님은 얼마나 현실적인지 모른다. 이게 무슨 뜻인가? 전쟁터에서 부상을 당할 수도 있고 죽을 수도 있다는 것을 하나님은 다 인정하신 것이다. 이게 세상이다.

    믿음이 좋다고 해서 부상 안 당하는 것도 아니고 우리가 우리 자녀들을 위해서 열심히 기도한다고 해서 총알이 곧바로 오다가 휘어져서 옆으로 빗나가는 것도 아니다. 하나님이 설명하지 아니하는 어떤 깊은 섭리에 의해서 믿음이 좋은 사람도 전사하고 다치기도 하는 것이다. 이것이 세상이다.

    우리가 현실을 인정해야 한다.

    한동안 우리 나라에 다이옥신 파동이 있었다. 우리들은 다이옥신이 있는지 없는지도 모르고 각종 음식물을 섭취했다. 외국에서 있다고 하니까 비로소 자다가 날벼락 맞듯이 갑자가 일어나 다이옥신 아우성을 쳤던 것이 아닌가? 청산가리 1만 배의 독성이라고 하니까 얼마나 대단한가? 남성 호르몬을 감소시키고 면역체계의 기능을 저하시키고 암을 일으킨다고 한다.

    그런데 98%의 다이옥신이 전부 음식물을 통해서 섭취한다고 한다. 그러니 우리가 얼마나 먹었는지 알 수가 없다. 그렇다고 음식물을 안 먹고 금식을 할 수도 없지 않는가? 고기를 안 먹고 어떻게 사는가? 고기를 먹기는 먹어야 되는데 누가 책임을 지고 다이옥신을 다 검출해서 아무 문제 없도록 해서 먹게 해 주는가? 우리 나라에서 해 줄 사람 아무도 없다.

    그저 다른 나라에서 호들갑을 떨면 우리들도 같이 호들갑을 떨고 조용해지면 우리들도 조용해진다. 우리가 그것을 얼마나 먹었는지 알 수가 없다.

    그런데 예수를 잘 믿는 사람도 다이옥신이 든 음식을 먹을 수밖에 없다. 다 먹는다. 다 먹는데 이렇게 말할 수 있는가?

    “예수를 잘 믿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다이옥신이 든 음식을 입에 넣자 마자 성령께서 그 다이옥신을 다 녹여주신다.”

    여러분, 그런 생각을 할 수 있는가? 몸 안에 축적 되지 않도록 특별한 능력을 주셔서 온 장(腸)안을 깨끗이 청소해 주신다고 그렇게 말할 수 있겠는가? 아무도 그렇게 말 못한다. 그저 먹을 뿐이다. 그것 먹다가 병이 들 수도 있다. 어쩌다가 하나님은 불쌍히 여기셔서 그 병을 고쳐 주시기도 한다. 그러나 한가지 분명한 것은 세상을 살면 이런 일 저런 일을 당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런 질병이 오면 저주라고 한다. 너무 미신적으로 생각하며 신앙 생활하지 말아야 한다. 그러니까 사람이 자꾸 약해지는 것 아닌가? 저주와 징계(시험)를 구분하라

    둘째로, 우리가 세상에 살고 있기 때문에 자연 법칙을 역행하면 믿는 사람이라도 다친다.

    비가 와서 고속도로가 미끄러운데 160킬로미터 이상을 운전하면서 “하나님 정말 잘 나가네요. 아멘” 하고 해 보라. 그러다가 부상 당하면 할 수 없다. 예수 잘 믿는다고 해서 그저 그런 피해를 다 비켜 갈 수 없다.

    또 자기가 범한 죄로 인해서 뿌려진 어떤 불행은 평생 짊어지고 살아가야 하는 경우도 있다. 아무리 믿음이 좋아도 할 수 없다. 예수 믿기 전에 깡패 노릇을 하다가 칼을 맞아서 다리를 절게 되었다고 하자. 그런데 예수 믿고 중생 받고 난 다음 하나님이 그 다리를 고쳐 주셨다고 말할 수 있는가? 그 사람은 평생 절고 다니는 것 아닌가?

    그러나 여러분, 우리가 한 가지 아는 것은 속도 위반을 해서 사고를 내도 그것은 사고이지 저주가 아니다. 하나님의 자녀에게는 저주가 아니다. 또한 깡패 짓을 하다가 다리가 절게 되었는데 예수를 믿고 난 다음에도 여전히 다리는 절게 된다. 그러나 그것은 저주가 아니다. 오히려 절고 있는 다리를 볼 때마다 누구의 은혜를 감사 하겠는가? 나 같은 것을 구원해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감사하는 감사의 간증거리는 되어도 저주는 아니다.

    그리고 우리가 세상에서 사탄의 공격을 받을 수는 있다. 목격자에 의하면 지금도 북한에서는 예수를 믿는다는 그 조건 하나 때문에 끌려가서 용광로의 쇳물을 부어 죽이는 데 그런 비참한 고통을 당하면서도 믿음을 지키는 자들이 있다. 이것은 완전히 사탄의 공격이다.

    사탄에게 공격을 받아서 저주받은 사람처럼 사는 것도 하나님은 무엇이라고 말씀하시는가?

    “기뻐하고 감사하라 하늘에서 너희 상이 큼이니라.”

    저주가 아니라 핍박이다. 그리고 어떤 사람은 시험을 받아 어려움을 겪은 사람이 있다. 세상에 살다 보면 아무리 믿음이 좋은 사람이라도 시험을 당할 수가 있다. 집안이 갑자가 잘 살게 되었다든지, 남편의 지위가 올라간다든지, 모든 것이 너무나 형통해서 어찌할 줄 모를 만큼 흥분한다든지 해서 나도 모르게 기도를 덜하게 된다. 신앙 생활을 등한히 하다가 나도 모르게 시험에 빠진다. 그래서 엄청난 일을 당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시험이지 저주는 아니다.

    고급 옷 로비 사건에 여러 명의 권사님, 집사님이 연루되는 것 우리가 다 알고 있다. 그분들 믿음이 참 좋은 분들이다. 그들의 믿음을 의심하면 안 된다. 저도 그분들을 잘 안다. 같이 옷 가게는 안 다녔지만….(웃음) 믿음이 참으로 좋은 분들이다. 그런데 그런 분들이 왜 모든 사람들로부터 손가락질을 받는 처지에 놓였는가? 시험받았기 때문이다.

    또 불순종하여 화를 자초하는 경우도 있다. 하나님의 자녀로 부름 받고 거룩한 하나님의 자녀답게 살아가야 할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잘 순종하지 않으므로 인해서 하나님을 거역하는 일이 있지 않는가? 

    구약 성경을 바르게 이해하라

    그러면 한 가지 꼭 알아두어야 한다. 신명기 28장 구약에 가서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선민으로 살아야 하고 이스라엘 나라가 하나님이 직접 통치하는 신정 국가가 되어 있을 때에는 하나님의 법을 계속 지키지 않고 거역하는 것은 저주였다. 그래서 하나님이 이렇게 명령하셨다.

    “네가 만일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순종하지 아니하여 내가 오늘날 네게 명하는 그 모든 명령과 규례를 지켜 행하지 아니하면 이 모든 저주가 네게 임하고 네게 미칠 것이니.”(신 28:15)

    이 모든 저주가 네게 임할 것이라고 했다. 불순종은 곧 저주를 끌어 들이는 무서운 행동이 되는 것이었다. 그러나 여러분 예수 믿고 새로운 피조물이 된 우리들에게 ‘너희들 내 말씀대로 순종하지 않으면 저주가 임할 지어다’하는 말씀이 신약에 있는가? 없다.

    우리는 신구약 성경에 대한 계시의 발전에 대해서 어느 정도 정확히 알고 있는 사람이 성경을 가르쳐야 한다. 그래야만 구약의 저주가 신약에는 저주가 아니라는 것도 우리가 배우게 된다. 신약에서 하나님의 자녀들이 말씀대로 살지 못할 때에는 하나님이 저주하지 않으신다. 왜 무엇 때문에 자기 자식을 저주하는가?

    그러면 하나님은 어떻게 하는가? 징계한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에게는 말씀을 순종하지 아니할 때에는 징계는 하셔도 저주는 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떤 목회자들은 저주한다고 하는 구약 성경을 가지고 교인들로 하여금 숨을 못 쉬게 협박하는 것을 가끔 보게 된다.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다. 그것은 안 좋게 말하면 조금 공갈 끼가 있는 말씀이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지도자를 잘 만나야 한다. 여러분이 어떻게 알겠는가? 구약과 신약이 어떻게 다른지, 구약의 말씀이 신약에 의해서 어떻게 조명되고 해석되어야 하는지 여러분들이 어떻게 아는가? 그래서 교회에는 지도자가 필요하다. 전문적인 지도자가 필요하다. 그래서 전문적인 그 지도자가 인도하는 대로 여러분들은 말씀을 이해하면 되는 것이다.

    그런데 이 말씀을 이해하지 못한 지도자가 이 말씀을 가르치고 설교할 때에는 구약에 있는 말씀을 그대로 적용하려고 드니까 문제가 발생하는 것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복음이 아닌 율법 속에서 헤매고 있는 것을 자주 본다.

    이해할 수 없는 고통의 참뜻

    여러분, 기억하시기를 바란다. 우리는 세상을 살다가 하나님 앞에 불순종할 때가 있다. 그럴 때마다 회개하면 그를 용서하지만 끝까지 회개하지 않고 버티면 하나님이 징계하신다고 했다. 또 하나 우리가 세상에 살다가 보면 정말로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 예수 믿는 사람들에게 일어난다.

    저렇게 믿음이 좋은 집안이 어떻게 저런 일이 일어날 수 있을까? 누구나 다 고개를 갸우뚱하고 이상하게 여길 정도의 일이 일어난다. 욥의 가정에 갑자기 재난이 닥쳐오는 것처럼 말이다. 저렇게 기도 많이 하는 사람에게 어떻게 저런 불행한 일이 일어날 수 있을까? 하나님이 살아계신다면 어떻게 저런 일이 일어날 수 있을까?

    이렇게 모두가 답답하게 생각되어 질 때가 있다.

    제가 알고 있는 어떤 목사님이 계신다. 그 목사님은 참 가문이 좋은 집안이다. 세상적으로 양반 집안이라기 보다는 기독교가 처음으로 한국에 들어왔을 때부터 복음을 받아들이는 너무나 거룩한 가정이다. 그래서 증조할아버지 때부터 복음을 받아들였다. 이후 할아버지는 목사님이 되셨고 제가 알고 있는 그 아들도 목사님이 되었다. 참 훌륭한 목사님이시다.

    그 목사님에게 자녀 중에 아들이 있다. 그 아들이 서울 상대를 다니고 있었다. 그런데 그 아들이 친구들하고 캠핑 가서 물에 빠져서 죽고 말았다.

    여러분 설명할 수 있는 불행인가? 그렇게 기도 많이 하고 대대손손이 믿음이 좋은 집안에 어떻게 그런 끔직한 비극이 일어난다는 말인가? 아버지 목사님도 그 충격을 이기지 못해서 원래 갖고 있던 지병이 악화된 후 3년 만에 세상을 떠났다. 여러분 이런 일이 어떻게 일어날 수 있는가?

    터키에 복음을 전하고 싶어서 직장을 그만 두고 처자를 이끌고 터키까지 가서 복음을 전하다가 40대 초반에 그 선교사가 암에 걸려 죽었다. 이제 부인이 아이들을 데리고 한국에 돌아왔는데 병원에 가서 진찰을 받으니 안구에 암이 걸렸다. 얼마 전에 수술을 했다. 우리 교인도 아닌데 우리 교인들이 매달려서 기도하고 헌금을 모아서 수술을 깨끗이 끝냈다.

    여러분, 어떻게 하나님의 복음을 위해서 생명을 걸고 살겠다는 이런 사람에게 불행이 닥칠 수 있는가? 설명할 수 있는가? 그러나 여러분, 분명히 알아야 한다. 이것은 저주가 아니다.

    하나님이 설명하지 않는 이유 속에는, 아니 하나님이 설명하지 아니하는 불행 속에는 더 큰 하나님의 선하신 뜻이 작용하고 있다는 것을 믿어야 한다. 그리고 그 속에는 하나님이 감추어 놓은 특별한 축복이 있다는 것을 저는 믿고 있다. 당장은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이다.

    그러나 분명히 거기에는 하나님의 선하신 섭리가 역사 한다. 우리가 믿음의 눈으로 볼 때 예수 잘 믿는 사람에게 닥치는 어떤 불행도 우리는 축복을 위한 씨앗으로 보는 것이지 그것을 저주로 보지 않는다. 왜 그런가?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서 자유인이 되었기 때문이다. 이런 우리들을 왜 저주하겠는가?

    우리가 이런 시각을 가지고 이 세상에서 당할 수 있는 모든 문제를 해석해야 된다. 그 다음에 대처해야 된다. 그런데 많은 사람이 이와 같이 자유인으로서 페러다임을 가지고 보지 않고 꼭 세상 사람들처럼 날마다 벌벌 떨면서 굿이나 하고 점쟁이나 찾는 것 같은 그런 나약한 심정으로 살아가고 있다는 데 문제가 있는 것이다. 믿음까지 송두리째 흔들리는 잘못된 짓을 범하지 않는가?

    교회 안에 못된 사람들 많다. 왜 못되었는지 아는가?

    “아이구 저렇게 기도 많이 하는 저 가정에 저런 일이 생겼을까? 어떻게 저런 가정에 저런 애가 나올까?”

    당사자 앞에서 아무 말하지 않지만 돌아서면 자기들끼리 입을 삐쭉삐쭉 하면서 이런 말 저런 말들을 한다. 그래서 쉽게 말해서 “남이 모르는 일이 저 가정이 있다”고 하면서 수군거린다. 그런데 우리 가정에는 그런 불행한 일이 없는 것은 내 믿음이 좋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하나님은 우리 가정을 사랑하신다는 것이다. 그래서 은근히 기분이 좋아한다.

    예수를 믿으면서 교회 안에서 형제들의 그 어려움을 보는 눈을 믿음의 시각으로 보아야 한다. 그런데 순전히 점쟁이들, 굿쟁이들, 무속 신앙에 끌려 다니는 사람들의 눈으로 본다. 그러니 예수 안에 자유함을 받았다는 것이 거짓말이다. 모두가 다 무엇인가에 눌려 있고 질질 끌려 다닌다. 그러니까 이상한 설교도 나오고 이상한 가르침이 사람들을 지배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가 세상에서 당할 수 있는 여러 가지 어려움과 고통을 볼 때마다 믿음의 눈으로 보아야 한다. 자유인 답게 무장해야 한다.

    이렇게 살라

    첫째로 믿음을 강하게 가지라.

    우리가 어떤 일을 당해도 그것은 저주가 아니다. 민수기 23:8에 발람이 이런 말을 했다.“하나님이 저주치 않으신 자를 내 어찌 저주하며 여호와께서 꾸짖지 않으신 자를 내 어찌 꾸짖을꼬.”

    하나님께서 우리를 저주하지 않으시는데 누가 우리를 저주하겠는가? 우리들이 이 믿음을 꼭 갖고 현실을 보아야 한다. 둘째는 쉬지 말고 기도하라.

    기도는 시험을 예방할 수 있는 가장 확실한 길이다. 깨어 있어 시험에 들지 않게 기도하라고 했다. 시험에 들지 않도록 기도하는 사람은 하나님이 지켜 주신다. 그러나 이 세상에서 기도를 게을리 하면 안 당해도 될 어려움을 더 많이 당할 수도 있다는 것을 여러분들이 아셔야만 한다.

    세 번째로는 말씀에 꼭 순종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

    순종하는 것은 저주를 복으로 바꾸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마음껏 누릴 수 있는 지름길이다. 하나님의 자녀는 하나님의 뜻대로 살 자유는 있어도 내 뜻대로 살 자유는 없는 것이다. 먼저 하나님을 사랑하라. 그 다음에 내가 원하는 것을 하라. 이것이 예수 믿는 사람의 생활 태도이다.

    주님은 마태복음 7:24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는 자는 그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지혜로운 사람 같으리니.”

    하나님의 말씀을 잘 순종하면서 살면 집을 반석 위에 세웠으므로 그 집이 무너질까 불안해 할 이유가 없다. 그리고 그 집이 기울어질까 불길한 생각을 가질 필요도 없다. 왜냐하면 집을 반석 위에 지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지 않는 사람은 집을 모래 위에 세운 사람과 같다. 집을 모래 위에 세워 놓고 날마다 집이 기울어지지 않을까 벌벌 떠는 것이 얼마나 바보짓인가?

    내가 순종하고 하나님의 뜻대로 살면 불길한 생각을 갖지 않아도 된다. 어떤 불행한 일, 이해할 수 없는 불행한 일을 만나도 떳떳하다. 우리 아버지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해 주실 것이라는 믿음이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아무리 환난이 쉴 사이 없이 찾아오는 세상이지만 그 가운데 사는 자기 자녀가 심적으로 짓눌려 우울해 하고 있는 것을 보기를 원치 않으신다. 서로 원하지 않는 일을 당해도 그 앞에서 위축되지 아니하는 당당한 모습, 자유인의 모습, 하나님의 자녀다운 모습을 가지고 대처해야 한다.

    다시 말씀드리면, 우리에게는 저주가 없다. 그리스도 안에 우리들에게 하나님도 저주하지 않는다. 마귀도 저주할 수 없다. 율법도 우리를 저주하지 못한다. 오직 우리에게는 은혜가 있을 뿐이다.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사랑이 있을 뿐이다. 오직 우리에게는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영원한 축복이 있을 뿐이다. 어떤 일을 당해도 내가 저주를 받고 있다는 생각을 추호도 용납하지 말아야 한다. 좋은 일이든 나쁜 일이든 믿음을 가지고 대처하라. 그곳에 하나님의 도우심이 따라 온다. 그곳에 하나님의 역사가 일어난다. 그곳에 기적이 일어난다.


    저주를 축복으로 바꾸시는 하나님 (발락과 발람)



    민수기는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을 나와서 광야를 돌고 돌아 수많은 사건과 세월을 보내고 약속의 땅에 들어가는 과정에서 진행된 인구조사와 각종 숫자들을 이용한 규칙들이 적혀 있는 성경입니다. 출애굽 당시 애굽의 왕 바로는 마음이 강퍅해져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약속한 대로 내보내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10가지 재앙으로 바로와 애굽 사람들에게 그들의 잘못을 깨닫게 하셨고, 바로는 항복하고 말았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신이 났습니다. 노예의 삶을 살던 백성들이 탈출을 막았던 바로를 하나님이 직접 간섭하셔서 항복하게 만드신 후 비로소 탈출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광야에서 3일을 지나면서 불만이 생기고 불평하기 시작했습니다. 출발은 희망차게 시작했지만 광야에 들어서자 여러 가지 문제들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40년간 광야에서 시험과 전염병, 배신과 반역, 굶주림, 전쟁을 겪었지만 하나님이 인도하셔서 결국 약속의 가나안 땅이 보이는 모압 평지에 다다랐습니다. 거의 다 왔다고 생각했을 때, 예상치 못했던 발락 왕을 만나고 말았습니다. 

    여호와께서 발람의 입에 말씀을 주시며 이르시되 발락에게 돌아가서 이렇게 말할지니라
    그가 발락에게로 돌아간즉 발락과 모압의 모든 고관이 번제물 곁에 함께 섰더라
    발람이 예언을 전하여 말하되 발락이 나를 아람에서, 모압 왕이 동쪽 산에서 데려다가 이르기를 와서 나를 위하여 야곱을 저주하라, 와서 이스라엘을 꾸짖으라 하도다
    하나님이 저주하지 않으신 자를 내가 어찌 저주하며 여호와께서 꾸짖지 않으신 자를 내가 어찌 꾸짖으랴
    내가 바위 위에서 그들을 보며 작은 산에서 그들을 바라보니 이 백성은 홀로 살 것이라 그를 여러 민족 중의 하나로 여기지 않으리로다
    야곱의 티끌을 누가 능히 세며 이스라엘 사분의 일을 누가 능히 셀고 나는 의인의 죽음을 죽기 원하며 나의 종말이 그와 같기를 바라노라 하매
    발락이 발람에게 이르되 그대가 어찌 내게 이같이 행하느냐 나의 원수를 저주하라고 그대를 데려왔거늘 그대가 오히려 축복하였도다
    발람이 대답하여 이르되 여호와께서 내 입에 주신 말씀을 내가 어찌 말하지 아니할 수 있으리이까
    민수기 23:5-12

    마지막 걸림돌 발락

    발락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두려워했습니다. 광야를 지내면서 이스라엘이 어떻게 지냈는지 들어서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는 이스라엘 백성을 약화시키고 방해하고자 했으며, 당시 유명인이자 술수를 가지고 이름이 높았던 발람을 이용하여 그 목적을 이루려고 노력했습니다. 술수로 유명했던 발람을 이용한다는 것은 자신의 역량과 힘을 통한 정당한 방식이 아닌 꼼수를 통해 목적을 이루려고 했음을 의미합니다.

    애굽에서 이스라엘 백성의 삶은 마귀와 죄 속에서 그들의 종으로 사는 삶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이 시대에 쾌락과 돈과 권력의 힘에 눌려 그들의 종으로 살고 있는 사람들의 모습과 다르지 않습니다.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의 삶은 이 땅에서 살면서 뜻하지 않은 어려움을 만나는 우리의 일생과 다르지 않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수많은 불평과 불만, 반역, 우상숭배, 전쟁, 굶주림을 겪었던 광야의 삶은 우리가 일생동안 만나는 여러 가지 어려움과 고난, 방해와 유혹들, 우리의 잘못으로 인한 결과들과 같습니다. 막힘이 찾아왔을 때 신앙을 떠나는 수많은 사람들과 코로나 같은 질병에 의해 교회를 멀리하게 된 수백만의 그리스도인들이 광야의 이스라엘 백성과 같습니다. 이 모든 과정을 다 극복하고 거의 이루었다고 생각할 시점에도 발락과 같이 막아서는 세력이 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마귀의 방해 활동

    마귀는 공중 권세 잡은 존재입니다. 이 세상의 인간들은 그들의 상대가 되지 않습니다. 신학을 연구하는 어느 학회에서는  마귀의 IQ를 2000 정도로 추정한다고 합니다. 아무리 뛰어난 사람이라도 160을 넘는 사람이 거의 없으므로 인간이 마귀를 대적해서 수 싸움으로 이기기는 거의 불가능하다고 보면 됩니다.

    마귀를 이길 수 있는 단 한 가지 방법은 바로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입니다. 마귀는 하나님 외 다른 무언가를 이용해 하나님의 일을 방해하며, 이 세상이 끝날 때까지 계속 그럴 것입니다. 악한 영의 세력, 권력과 죄를 이용하여 하나님의 일을 하려는 사람들을 방해합니다. 그리고 상대적으로 뛰어난 존재들이 하는 방해이기 때문에 늘 성공할 것 같아 보입니다. 하지만, 발락과 발람의 콜라보를 무마하신 것처럼 하나님이 개입하시면 성공처럼 보이는 활동도 모두 수포로 돌아가게 됩니다. 

    저주를 축복으로 전환

    발락 왕의 이름은 파괴자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발람의 이름은 삼키는 자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파괴자와 삼키는 자의 콜라보로 하나님의 백성을 약화시키고 방해하고자 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간섭으로 발람이 하려던 저주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한 축복으로 변화됩니다. 

    발람은 당시 유명한 인사라고 앞서 말씀드렸습니다. 발락 왕과는 다른 국가의 사람이었음에도 발락 왕이 청해서 저주를 하려고 했었습니다. 마귀의 세력에 의해 복수와 저주를 하려고 하는 노력들은 하나님의 축복하고자 하는 바에 비교하면 소위 쨉이 되지 않습니다. 마귀가 아무리 똑똑하고 따르는 세력들이 많아도 전능하진 못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전능하신 분입니다. 발람이 따르는 바알 신 따위와는 비교하기 힘든 역량의 차이입니다. 

    우리가 살면서 주변에 혹은 유명한 사람들의 행동이 이해되지 않을 때, 어떻게 저 사람이 저런 행동을 할까 생각이 들면, 이는 영적인 현상으로 보시는 게 맞습니다. 악한 영에 의한 행동임을 깨닫고, 그 사람과 행동에 휘둘리지 말고, 하나님을 바라보셔야 합니다. 발락 왕과 발람의 콜라보, 즉 파괴자와 삼키는 자의 콜라보는 삼킬자를 찾아 두루 다니는 마귀의 본모습을  이름으로 보여줍니다. 하지만 그들의 능력과 힘은 하나님의 능력과 힘에 비할바가 안됩니다. 하나님을 바라보시며 악한 영의 방해를 넘어가시길 바랍니다.

    발락의 부탁을 받은 발람은 이스라엘을 향한 저주를 여러 번 시도하지만 계속 실패합니다. 발락 왕은 혹여 이스라엘 백성의 규모에 눌려 발람이 저주하지 못한다 생각에 이스라엘 백성들의 끄트머리만 보이는 곳에 가서 그들을 보고 저주해 달라 요청합니다. 하지만 결국 하나님의 개입으로 도리어 축복을 하는 결과를 얻게 되고 하나님의 영에 사로잡힌 발람은 선지자가 하는 고백과 같은 영적인 말들을 쏟아내게 됩니다.

    모르게 고난 받는 뒤에 처진 백성들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이 복 주기로 작정한 백성들이었습니다. 그들이 광야생활에서 허물이 많고 반역함과 수많은 잘못을 했지만, 허물과 반역을 보지 않겠다고 선언하십니다. 비록 약하고 어리석은 우리들이지만, 우리의 생각과 마음, 입술에서 나오는 말과 행동이 하나님께 사로잡히길 축원합니다. 복 주기로 작정한 백성들이기에 하나님은 결국 약속한 가나안 땅으로 인도하셨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개입이 없었다면 발락과 발람의 저주에 그대로 당할 뻔한 사람들은 맨 뒤에 쳐져있는 백성들이었습니다. 다행히도 하나님께서 저주를 축복으로 돌리셨지만, 뒤에 쳐져있던 백성들은 발락과 발람이 그들을 저주하려고 했던 일조차 알 수 없었습니다. 오늘날 우리도 악한 영의 세력들이 우리를 방해하고 넘어뜨리려 하는 활동들을 모르고 당하기 십상입니다. 뒤처지지 말고, 앞장서서 달려가시길 바랍니다. 뒤쳐지면 삼키려고 혈안이 되어있는 세력들의 먹잇감이 되어 고난을 겪게 되기 십상입니다. 

    마치며

    발락 왕과 술사였던 발람은 약속의 백성들을 저주하고자 집요하게 노력했지만, 결국 하나님의 개입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을 축복하게 되었고 이스라엘 백성들은 약속의 가나안 땅에 들어와 40년간의 광야 생활을 마쳤습니다. 항상 뒤처진 자들, 심령이 약화되어 있는 자들을 노리는 악한 영의 습성을 깨닫고, 평상시에도 하나님을 바라보고 말씀을 가까이하며 충성된 주의 종으로 헌신하여 주의 일을 방해하는 세력의 노력을 이겨내는 승리의 삶을 사시길 축원합니다.





    저주를 복으로 바꾸는 복음(열왕기상 2:21)

    “엘리사가 물 근원으로 나아가서 소금을 그 가운데에 던지며 이르되 여호와의 말씀이 내가 이 물을 고쳤으니 이로부터 다시는 죽음이나 열매 맺지 못함이 없을지니라 하셨느니라”

    엘리사 선지자가 여리고성에 갔을때 성읍 사람들이 엘리사 선지자에게 찾아와서 “우리 주께서 보시는 바와 같이 이 성읍의 터는 아름다우나 물이 좋지 못하므로 토산이 익지 못하고 떨어지나이다” 라고 말하며 하나님의 능력으로 자신들의 땅을 어떻게 해줄것을 간구했습니다. 여리고성은 여호수아가 저주를 선포한 성이었습니다 (여호수아 6:26, “이 여리고성을 누구든지 일어나서 건축하는 자는 여호와 앞에서 저주를 받을 것이라 그 기초를 쌓을 때에 장자를 잃을 것이요 문을 세울 때에 계자를 잃으리라”). 그래서 그 말씀을 무시하고 히엘이라는 사람이 여리고를 재건하다가 그 저주의 말씀대로 맡아들과 말째 아들을 잃습니다 (열왕기상 16:34).

    그러나 엘리사 선지자가 새 그릇에 소금을 닮아 물의 근원에 뿌리니 그 저주받은 물로인해 소산의 열매가 맺다가 떨어지고 아이를 낳다가 유산하는 그러한 여리고성이 고침을 받습니다. 새 그릇의 소금은 복음과 하나님 말씀을 상징합니다. 하나님의 선지자가 전한 복음과 하나님 말씀이 저주받은 성에 하나님의 은혜와 생명을 다시 가져다 주었습니다. 놀라운 사실은 여리고성의 저주는 “여호수아”(“여호와가 구원이시다”는 뜻)에의해 선포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저주를 거두어 들이고 은혜와 생명으로 바꾸는 일을 또 다른 여호수아인 “엘리사”(“하나님이 구원이시다”는 뜻)가 합니다. 그리고 마지막이자 영원한 여호수아인 “예수”(히브리어 “여호수아”의 헬라어는 “예수”입니다)께서는 사람의 죄로인한 죽음의 삶을 은혜와 생명의 삶으로 바꾸어줍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갈라디아서 3:13).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란 이런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말하는 기구한 팔자와 찌질하게도 운이 없는 삶도 하나님의 은혜가 머물고 생명이 펄떡거리는 삶으로 바꾸어지게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리라 하시니”(요한복음 7:38). 우리의 죄로인한 독이 있는 물이 흐르는 삶도 하나님의 복음의 말씀으로 치유해서 생수의 강이 흐르게하십니다. 저주를 복이되게하십니다. “…도리어 발람에게 뇌물을 주어 저주하게 하였음이라. 그러나 우리 하나님이 그 저주를 돌이켜 복이 되게 하셨다 하였는지라…” (느혜미아 13:2).

    그러므로 복음을 믿고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고 사는 삶에는 저주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생명만 있을뿐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해방하였음이라”(로마서 8:1,2). 아멘!








    크누트 대왕(Canute the Great)

    하랄드 블라톤의 손자이며, 스베인 튜구스게그의 차남이다. 

    1016년에 잉글랜드 왕위에 올랐고 1018년에는 덴마크 왕을 겸하였으며, 1028년에는 노르웨이 왕으로 추대되어 '북해제국(앵글로 스칸디나비아 제국)'을 구축하기에 이르렀다. 

    그는 재위 기간 동안 잉글랜드 인과 덴마크 인 사이의 갈등을 봉합하고 서로의 문화가 융화되도록 많은 노력을 했다.
    잉글랜드 인을 관리로 임명해 정책을 일임했고, 덴마크 문자와 앵글로 색슨 문자가 혼용되어 사용될 수 있도록 했다.

    또한 교회와 수도원의 지지를 얻기 위해 십일조 세금 징수를 시행했는데, 이는 교회와 잉글랜드 국민들의 지지를 받는 계기가 되었다.
    처음이자 마지막인 덴마크 출신 잉글랜드 국왕이었다.


    크누트 대왕이 통치했던 북해제국(North Sea Empire), 1030년 경.

    덴마크 대왕 스벤 1세슬라브 레프족 족장의 딸 사이에서 태어났다.
    크누트에게 폴란드 국왕 보레스와프 1세는 삼촌이다.
    크누트는 아버지 스벤 1세와 보레스와프 1세의 제후와 함께 잉글랜드를 정벌했다.

    1014년 아버지가 전사한 뒤에도 계속 싸우고 세력을 떨쳤다.
    우선 크누트는 덴마크로가 하랄을 왕으로 인정하고 잉글랜드 정복을 위한 대규모 군대를 지원받게 됐다.
    1015년 여름 크누트는 1만 명의 바이킹 대군과 200여 척의 함선을 잉글랜드 정복에 동원했다.
    1016년, 앵글로 색슨 가신단 회의에서 영국의 왕으로 추대되어 즉위되었다.
    1018년에 형 하랄 2세의 죽음으로 덴마크 왕위를 계승했다.
    그 뒤, 노르웨이와 스웨덴등 스칸디나비아 지역을 공략했다.
    1028년에는 노르웨이 왕위도 겸하게 되어, 3국의 왕위를 겸한 '대왕'이라고 불렸다.
    강력한 북해 제국을 손에 넣었다.
    1035년 40세의 나이로 사망한다.
    사후 후계자 다툼이 일어나고, 북해 제국은 크누트의 사후 불과 7년 만에 무너졌다.


    영국인에게 권력관 심어준 크누트 대왕의 교훈

    영국 역사에는 두 명의 위대한 대왕(大王)이 있다.
    우선 잉글랜드 7국을 통일한 앨프레드 대왕(재위 871~899년)이다.
    이 왕은 통일 후 라틴어 문헌들을 고대 영어로 번역 출간해 영어를 영어답게 만들면서 잉글랜드의 정체성을 확립했다.
    바이킹들의 침입을 막아내기도 했다.
    많은 사람이 영국의 대왕은 앨프레드만 있다고 알고 있지만 사실 크누트 대왕(990?~1035년· 잉글랜드 왕 재위 1016~1035년)도 앨프레드와 함께 영국인에게 대왕으로 존경받는 인물이다.

    정복자 크누트의 업적

    그러나 크누트는 정복자이다.
    덴마크의 왕자이던 26살의 크누트는 1016년 당시로는 엄청난 대군인 1만명의 병력을 ‘긴 배(long ship)’라고 불리던 바이킹 선박 200척에 싣고 쳐들어와 잉글랜드 왕위를 쟁취했다.
    그리고는 잉글랜드를 19년간 강권 통치했다.
    자신에게 반항하는 토착지주들을 무자비하게 탄압하고 빼앗은 토지를 자신을 수행하고 온 덴마크인들에게 넘겨주었다.
    전국에 중세(重稅)를 매겨 왕국을 유지하면서 재화의 대부분을 덴마크로 보냈다.
    그런 뒤 잉글랜드가 자신의 손에 잡혔다는 판단이 내려지자 강권통치를 누그러뜨려 잉글랜드인들에게도 귀족 작위와 봉토를 나누어 주고 잉글랜드인을 관리로 등용해 충성을 바치게 하고 자신의 수하로 만들었다.

    그리고는 당시 잉글랜드를 수시로 침공하던 덴마크를 비롯한 스칸디나비아 바이킹의 침공을 막아냈다.
    당시 또 하나의 권력인 교회와도 좋은 관계를 유지하며 십일조를 확실하게 제도화했다.
    바이킹 침공으로 무너진 교회와 수도원 건물을 모두 수리하고 교회가 없는 지역에는 교회를 신축해 주어 교계와 국민들로부터 칭송을 받았다.

    크누트제국이 햄릿의 배경

    그렇게 해서 28살의 크누트는 덴마크 왕(1018~1935년)과 노르웨이 왕(1028~1035년)을 겸하고 스웨덴 일부까지 통치해 명실공히 ‘북해제국(앵글로- 스칸디나비아제국)’을 건설했다.
    당시 지도를 보면 북해가 바로 크누트제국의 내해(內海)였음을 알 수 있다.
    이때가 바로 윌리엄 셰익스피어의 희대의 걸작 ‘햄릿’의 배경 시기이다.
    ‘햄릿’의 정식 제목이 바로 ‘덴마크 왕자 햄릿의 비극(The Tragedy of Hamlet, Prince of Denmark)’인 이유이다.
    덴마크의 수도 코펜하겐에서 44㎞ 떨어진 북해 해변 크론보르성이 바로 햄릿의 무대인 ‘엘리노어성’이다.
    덴마크는 물론 해외에 한 번도 나가 보지 못한 셰익스피어가 북해 바닷가 성을 주 무대로 삼아 극본을 쓸 수 있었던 배경도 이런 잉글랜드와 덴마크의 역사적 관계 때문이다.

    이런 업적 외에 크누트는 ‘왕의 힘의 한계(the limits of royal power)’라는 금과옥조 같은 가르침을 남겨 후세 영국의 사회제도와 영국인의 사고방식에 엄청난 영향을 끼치기도 했다.
    현재의 영국을 만든 말들 중 하나가 ‘너희들이 지금 보았지 않느냐? 이제 왕의 힘이 얼마나 허망한지를 모든 사람이 알게 하라(Now let all men know how empty is the power of kings)’라는 크누트의 말이라는 평가가 나올 정도다.
    거의 모든 영국인이 이 말과 함께 여기에 얽힌 일화를 알고 있다.

    이야기는 이렇게 시작한다.
    크누트 왕이 방에 들어올 때마다 신하들은 칭송을 멈추지 않았다.
    당신은 지금까지 그 어느 분보다도 더 최고로 위대한 분이십니다”라고 누군가 말하면 다른 신하가 “왕이시여! 당신 같은 전지전능한 분은 없습니다”라고 외쳤다.
    그러나 현명한 왕은 그런 바보 같은 칭송에 지쳐 싫증이 나고 짜증이 나기 시작했다.
    해변가를 신하들과 같이 걷던 중 신하들이 평소와 같이 또 칭송을 시작하자 크누트는 그들에게 교훈을 주기로 결심했다.

    어느날 크누트는 “내 의자를 가지고 와라. 우리 모두 바닷가로 나가자”라고신하들에게 명했다. 신하들은 즉시 왕좌를 바닷가 모래로 가지고 왔다.
    크누트는 “내가 보기에는 파도가 밀려 들기 시작한다.
    너희들은 내가 파도에게 정지하라고 하면 정지할 거라고 생각하느냐?”라고 신하들에게 물었다.
    신하들은 혼돈에 빠졌다.
    자기네들이 지금까지 수도 없이 해 온 말이 있기에 감히 “아니요”라고 말할 수는 없었다.
    동시에 자신들이 믿고 따르는 위대한 왕이 정말 신탁(神託)의 힘을 소지하고 있었으면 하는 간절한 갈망도 있었다.
    왕이 신력(神力)을 발휘해 물결을 세워 주기를 바라기도 했다.

    "나는 그런 힘이 없다”

    그런 모든 희망과 갈망과 염원을 합쳐 신하들은 “위대한 왕이시여! 명령만 내리소서! 파도는 폐하의 말을 들을 겁니다”라고 소리 높여 외쳤다.
    왕은 “그렇다면 좋다. 바다야! 나는 너에게 더 이상 앞으로 오지 말 것을 명한다.
    더 이상 밀려들어 오지 마라! 파도야! 더 이상 밀려들어 와 내 발을 건드리려 하지 마라!”라고 소리쳤다.
    말을 마치고는 왕은 조용히 기다렸다.
    이윽고 조그만 물결이 왕의 발끝을 건드리기 시작했고, “바다야! 지금 당장 뒤로 물러서라!”는 왕의 명령에도 불구하고 파도는 더 밀려와 왕의 발을 건드렸다.
    바닷물은 점점 더 차올라 왔다.
    급기야는 왕좌까지 차올라 왕의 발은 물론 어의까지 적시기 시작했다.

    신하들은 왕의 옆에 서서 왕이 미치지는 않았는가 하고 걱정하기 시작했다.
    왕의 신력을 바라기도 하고 믿기도 했지만 결국 현실을 보고는 당황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자 마침내 왕은 왕좌에서 일어서면서 주위의 신하들에게 말했다.
    “친구들이여! 봐라! 너희들이 가지기를 바랄 정도의 힘은 내가 갖고 있지 않은 듯하다.
    아마도 너희들은 오늘 무언가 하나를 배웠을 것이다.
    이 세상에는 단 하나의 강력한 왕이 있어 그만이 바다를 지배할 수 있다는 걸 너희가 기억하리라 믿는다.
    바다를 비롯한 온 세상을 자신의 손 안에 거머쥔 단 하나의 왕, 우리들의 신 말이다.
    나는 너희들이 그에게만 칭송을 바쳤으면 한다.”
    그러자 신하들은 고개를 숙이고 부끄러워했다.
    그러고 난 뒤 크누트는 왕좌에서 일어나 왕관을 벗어 십자가에 건 다음 절대자에 대한 존경의 표시로 다시는 왕관을 쓰지 않았다.

    크누트 왕의 이야기는 이렇게 끝난다.
    크누트는 ‘왕이 신적 존재가 아님(the King was not divine)’을 신하들과 국민들에게 가르치려고 했다.
    비록 왕이라 할지라도 자연현상을 막을 신탁의 힘(divine power)이 있지 않다는 걸 증명해 보여 신하들과 국민들로 하여금 허망한 미망(未忘)에서 깨어나게 했다.
    지금은 너무나 당연한 말로 들리지만 이는 당시로서는 엄청난 일이었다.
    왕 자신이 손수 흔들리지 않던 신앙을 깨버렸다는 사실이 주는 함의는 엄청나게 크게 받아들여졌다.
    그래서 지금도 크누트 왕은 영국인의 존경을 받는다.
    영국인들은 자신들의 왕이 그 옛날에 앞장서서 왕의 권위를 직접 파괴함으로써 후세 왕들에게 교훈을 준 사실을 아주 중요하게 여긴다.

    신 앞에서 보인 겸손이 존경의 근원

    당시 기독교 왕국의 신민들은 ‘왕은 신의 가호로 왕위를 받아 행복한 왕국의 지배자 자리를 누려도 된다’고 믿었다.
    이 왕권신수설은 누구도 감히 이론을 제기할 수 없는 너무나 당연한 이론이었다.
    왕은 신의 신탁을 받은 자라는 불가침의 믿음이 있던 시절이었다.
    그러나 크누트는 그런 힘이 왕에게 있지 않다고 증명하면서 신 앞에서 자신의 겸손(humility)을 내보였다.

    크누트가 보인 겸손의 일화는 세 가지 측면에서 살펴볼 수 있다.
    왕정 국가에서 왕에게 무조건 충성하고 따르는 신하들과 국민들은 자기네들의 왕은 무오류라고 믿는다.
    그가 하는 일은 모두 옳고 전지전능하다고 진심으로 믿고 싶어 한다.
    왕이 신에게 임무를 받고 세상을 구하는 구세주라고 믿고 그를 따르는 일도 당연하다고 믿는다.

    크누트의 신민들은 크누트가 그런 힘을 가지고 있을 거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는 점이 이 일화를 보는 첫 주안점이다.
    신의 대리인인 군주를 위해 기꺼이 목숨을 바치겠다는 신민들의 믿음을 누리고 즐겨야 할 크누트가 오히려 신민들이 믿는 것이 잘못되었다는 점을 깨우쳐준 것이다.
    여기에 크누트의 위대함이 있다고 영국인들은 여긴다.
    세상의 모든 일은 왕이 아니라 신만이 할 수 있다는 진정한 신앙인으로서의 겸손한 자세가 영국인들이 크누트에게 갖는 존경심의 근원이다. 그 겸손함을 영국인들은 존경한다.

    크누트 이후 영국 역사에는 절대권력을 누린 왕도 많지 않고, 왕권신수설을 주장하면서 왕의 무오류성을 주장하는 횡포를 부린 왕도 많지 않다.
    이는 균형과 견제(check and balance)를 잘 겸비한 영국 왕정제도와 사회구조 덕분이다.
    영국 왕은 프랑스 왕처럼 절대권력을 갖지 않았다.
    그렇다고 왕이 거의 힘이 없던 독일처럼 철저하게 지방분권국가도 아니었다.
    독일의 지방분권과 프랑스의 중앙집권을 적절하게 조합한 왕국이었다.
    과하지 않아서 독재를 휘두를 수도 없고, 그렇다고 귀족들에게 휘둘리지도 않을 적당한 왕권, 그와 함께 왕권의 횡포를 막을 수 없을 정도는 아니나 왕의 권위에 도전할 정도의 힘은 가지지 않던 귀족들의 나라가 영국이었다.
    영국 대다수의 왕과 귀족들이 서로 견제하면서 균형을 이룬 덕분에 독재나 혼란을 겪지 않았다.

    물론 전횡을 시도한 왕도 있었다.
    의회를 무시하고 전비 마련을 위한 증세를 시도하다가 결국 시민군에 져서 마그나카르타에 서명한 인물, 유럽 왕으로서는 처음으로 자신의 권리를 이양해 영국 왕 중 가장 굴욕적이라고 평가받는 존 왕(재위 1199~1216년)도 그중 하나다.
    의회 없이 증세를 하려다가 시민전쟁에 패배해 결국 올리버 크롬웰에 의해 참수된 왕권신수설의 신봉자 찰스1세(재위 1625~1649년)도 그렇다. 하지만 이들을 제외한 영국 역대 왕들은 자신의 자리와 권한을 알고 의회와 귀족들과 적당하게 협상, 타협하면서 통치를 했다.

    영국인들의 독재에 대한 반감

    찰스1세를 참수하고 호국경(Lord Protector)이 되어 영국 역사상 처음으로 공화국을 만든 크롬웰(통치 1653~1668년)도 역설적인 교훈을 남긴 인물이다.
    그가 정권을 잡자 처음에 영국인들은 희망에 부풀었다.
    왕이 지배하지 않고 자신들이 선출한 의회가 지배하는 ‘선출된 권력’의 나라,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나라’인 공화국에 대한 기대가 컸다. 그러나 약속과는 달리 의회가 갈라져 큰 혼란을 겪는 사이 크롬웰의 실정과 원두당(圓頭黨·Roundhead)의 극심한 횡포로 국민들은 넌더리를 냈다. 결국 크롬웰의 공화정 실험은 16년 만에 끝났다.
    공화정 실험은 크롬웰의 아들인 리처드 크롬웰이 찰스1세의 아들인 찰스2세에게 자발적으로 권력을 이양하면서 끝났다.

    시민혁명 기간 동안 영국인들이 겪은 독재의 공포는 이후 영국의 권력구조와 사회구조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집권 초기 신민들이 모두 왕으로 즉위하라고 권했으나 크롬웰은 사양하고 왕권보다 더 큰 절대권력의 호국경으로 남았다.
    영국인의 권위에 대한 반감과 혐오를 잘 파악한 탓이다.
    그 이후 영국인들은 왕국이든 공화국이든 절대권력을 가진 정치제도에 원초적 반감을 가지게 되었다.
    프랑스와 달리 대통령제가 아닌 입헌군주제와 내각책임제를 택하게 된 것도 이런 역사적 배경 때문이다.

    영국인들은 아무리 역사적으로 위대한 인물이라도 결코 영웅시하지 않는다.
    한 개인의 공헌이 아무리 위대해도 영웅으로 만들지 않는다.
    그래서 영국의 각종 공항 이름이나 길, 혹은 광장 이름 어디에도 개인의 이름을 발견하기 어렵다.
    영국을 보나파르트 나폴레옹 프랑스 황제의 지배하에 들어갈 위기에서 구한 호레이쇼 넬슨의 승전을 기념한 트라팔가 광장도 넬슨 동상이 비록 52m 높이의 탑 위에 있지만 넬슨 광장이라고 부르지 않는다. 영국 최대의 히드로공항도 영국인들이 가장 존경한다는 윈스턴 처칠의 이름을 따서 윈스턴 처칠 공항이라고 불러도 될 듯한데 그냥 지역 이름을 따서 히드로공항이라고만 부른다. 프랑스의 관문 파리 공항을 샤를 드골 공항이라고 부르는 프랑스인과는 다르다. 물론 런던 시내 각 골목 이름이나 광장에는 개인 이름이 들어간 곳이 많지만 이는 일대를 개발한 귀족이나 부자들의 이름이다. 개인 재산에 대한 존중은 있어도 국가적 영웅에 대한 명명에는 인색한 것이 영국인이다. 개인을 영웅시하면 또 언제 크롬웰 같은 비극이 되풀이될지 모른다는 우려를 하는 듯하다.

    영국은 의회가 거의 전권을 가진 의원내각제 국가이다. 말이 의원내각제이지 사실 따지고 보면 의원 독재국가 같다. 하원의원 650명이 모든 국정을 좌지우지한다. 특히 하원 의석 과반수인 325석 이상을 차지한 여당 의원은 의회와 내각의 장관은 물론 행정부 차관, 심지어는 국장급까지 꿰찬다. 정말 선출된 권력이 지배하는 국가이다. 그런데 여기서 하나 주의해야 할 사항은 영국 같은 의원내각제에서는 정부 수반인 총리를 국민들이 직선으로 뽑지 않는다는 점이다. 여당의 당수가 바로 총리가 되는 것이다.

    영웅을 백안시하는 전통

    과거에는 의원들의 총회에서 당수를 바꾸면 바로 총리가 바뀌었다. 지금은 당원과 의원들이 투표해서 당수를 바꾸면 총리가 총선 없이 바뀐다. 3번의 총선을 승리로 이끌어 영국 역사상 가장 장기간인 11년을 총리로 지낸 철의 여인 마거릿 대처(재임 1979~1990년)도 그렇게 물러났다. 인두세 비슷한 주민세 도입으로 인기가 떨어져 당내 반란으로 임기도 못 채우고 중도에 눈물을 흘리면서 밀려 나갔다. 그래서 영국 총리는 문자 그대로 장관(minister) 중 수석(prime)이라는 뜻의 ‘prime minister’이지 전권을 휘두르는 ‘president’, 즉 대통령이 아니다. 절대적 권력자를 절대 용납하지 않는 영국인들에게 이런 내각책임제는 정말 안성맞춤의 정치제도이다.

    영국인들은 모든 일에 냉소적이긴 하지만 특히 권력에 대해서는 거의 본능적인 반감을 나타낸다. 정치인이 ‘애국심’ 어쩌고 하면 사기꾼으로 볼 정도다. 지나친 사명감을 입에 올리고 독선으로 일관하면 덜떨어진 저능 인간 취급을 한다. 그래서 영국에서는 미국 정치인처럼 애국심을 강조하면서 열변을 토하는 정치인을 잘 볼 수가 없다. 영국인들은 웬만해서는 공식모임에서 국가(國歌)도 잘 안 부른다. 그래서인지 18세에서 24세 영국 젊은이 중 43%가 영국 국가 첫 구절 ‘신이여! 우리의 자애로운 여왕을 구하소서(God save our gracious Queen)’를 모른다고 한다. 13%는 국가의 음을 전혀 모르고 28%는 한 번도 국가를 불러 본 적이 없다는 기막힌 통계도 있다. 그렇다고 영국인들이 국기와 국가에 감정을 대입하는 미국인들보다 애국심이 없다는 말은 아니다. 단지 영국인들은 남들에게 보여 주려는 애국심을 표현하지 않을 뿐이다. 영국인들은 애국심도 얼굴 표정 변화 없이 조용하게 표한다.

    모든 권력과 권위에 대한 영국인의 초연한 자세는 어쩌면 크누트 대왕의 냉소와 같은 영국인 특유의 기질 때문이 아닌가 싶다. 정치인 누군가가 자신의 불순한 목적을 위해 영국인을 선동하려고 미사여구와 교언영색(巧言令色)을 늘어놓아도 영국인들은 잘 따라가지 않는다. 영웅을 영웅시하지 않은 그들에게는 권력자 누구도 크누트가 가르쳐 준 대로 영웅이 아니다. 정치인을 항상 의심의 눈초리로 바라보기에 영국에서는 독재가 자리 잡을 방법이 없다는 말도 나온다.





    저주를 복으로 바꾸는 법(역대하 34:22-28)

    성경을 읽으시면서 ‘사람의 마음 중에서 하나님께서 가장 기뻐하시는 요소’가 무엇인지 생각해 보셨습니까? 그리고 또 하나, 역시 ‘사람의 마음에서 하나님이 가장 미워하시는 요소’는 무엇입니까?

    영국에서 실제로 있었던 일입니다. 왕이면서도 왕관을 쓰지 않은 괴짜 황제가 있었습니다. ‘카누트’ 황제 (King Canute 1014-1035) 입니다. 카누트 황제는 신하들이 지나치게 자기를 찬양하는 것이 싫어서, 어느 날 왕좌를 해변에 옮기게 했습니다. 시간이 흐르면서 밀물이 해변으로 밀려들어 왔습니다. 왕이 분연히 일어서서 그 밀려오는 바닷물을 향하여 “바다여, 멈추어라!” 하고 명령했습니다. 하지만 밀물은 계속 왕좌를 향하여 밀려왔습니다. 여러 번 같은 명령을 했지만 물결은 사정없이 밀려들어 왕좌의 절반이 물에 잠겼습니다. 결국 황제는 파도에 밀려 왕좌에서 떨어졌습니다.

    이때, 카누트 황제는 대신들을 둘러보며, “보았느냐? 나는 아무것도 아니다. 권능은 하나님께 있으므로 너희가 의지할 자는 오직 하나님이시다.”라고 분명하게 가르쳤습니다. 그리고 그날 왕관을 십자가에 달린 예수 상에 걸어 놓고, 다시는 왕관을 쓰지 않았다고 합니다.

    창세 이래로 수많은 민족과 나라들에 왕들이 있었지만 아마 이런 왕은 전무후무하지 않나 싶습니다. 이것은 세력이 큰 나라의 권세 있는 황제로서의 ‘겸손’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사야57:15절에서 말씀하시기를, “지존무상하며 영원히 거하며 거룩하다 이름 하는 자가 이같이 말씀하시되, 내가 높고 거룩한 곳에 거하며 또한 통회하고 마음이 겸손한 자의 영을 소성케 하려 함이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영을 살리시고 번성케 하시는 사람은 ‘마음이 겸손한 사람’입니다. 예수님께서도 팔복 중에 첫 번째로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은 행복하다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다.”라고 하셨습니다. 마음이 가난한 것, 즉 겸손한 사람은 하나님의 나라를 차지한다고 하셨습니다.

    야고보서4:6절은 함께 찾아봅시다. “그러나 더욱 큰 은혜를 주시나니 그러므로 일렀으되 ‘하나님이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신다.’ 하였느니라.”
    우리는 본문을 통하여 이 말씀이 진실하다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본문에는 남 유다의 16대 왕인 ‘요시야’에 대한 하나님의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요시야 왕이 통치할 때의 유다는 이미 나라의 운명이 기울고 있었습니다. 북 이스라엘이 하나님께 대한 죄악으로 B.C721년에 앗수르에게 망한 후, 남 유다도 거듭되는 죄악으로 하나님의 징계가 다가오고 있었습니다. 14대 왕인 ‘므낫세’와 15대 왕인 ‘아몬’과 백성들의 큰 죄악으로 하나님께서 유다를 징계하시기로 결정하셨습니다.

    요시야는 왕이 된 이후 우상들을 제거하고, 성전을 수리하고, 성직을 회복시켰습니다. 그리고 성전을 수리하다가 율법 책을 발견하게 되고, 하나님의 율법을 듣는 순간 왕은 자신의 옷을 찢었습니다. 통회의 표현이었습니다. 왕은 즉시 제사장과 서기관과 왕의 시신을 당신의 여선지자인 ‘훌다’에게로 보냈습니다. 곧 발견한 하나님의 말씀에 대하여 선지자를 통하여 하나님께 어떻게 행할 것을 묻게 한 것입니다.

    읽은 본문인 24-28절에 하나님의 답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답변을 요약하면, ‘ꊉ남 유다의 죄악으로 인하여 하나님께서 율법에 기록된 모든 저주대로 남 유다에 내릴 것이다. ꊊ그러나 유다의 징계에 대한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옷을 찢으며 통곡하며 겸손을 보인 요시야 왕에게는 은혜를 베풀어 모든 재앙을 보지 않게 하겠다.’는 것입니다. 즉 요시야의 겸손함이 저주의 재앙을 복으로 바뀌게 한 것입니다.

    남 유다의 깊은 죄악으로 인한 하나님의 징계의 뜻은 사람의 어떤 행위로도 바꿀 수가 없었습니다. 하나님의 뜻은 확고부동했습니다. 비록 요시야 왕이 우상을 없애고 성전을 수리하고 성직을 회복시켰으며, 하나님의 말씀을 두려워하여 겸손함으로 통회했지만 하나님의 뜻은 변하지 않았습니다. 다만 겸손함으로 하나님을 경외한 요시야에게는 특별한 은혜를 베푸신 것입니다.

    이것이 겸손한 마음의 위력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낮추고 하나님의 뜻을 두렵게 여기며 경외하는 사람에게 하나님께서는 저주의 징계마저 복으로 바꾸어 주신 것입니다.

    여러분도 많이 느껴 보셨겠지만 항상 자신을 낮추고 겸손해진다는 것이 그리 쉽지만은 않습니다. 특히 자신보다 못하다고 생각되는 사람이나, 별 것 아닌 것처럼 여겨지는 일에 있어서 겸손하기란 더욱 어렵습니다. 그래서 겸손한 마음을 하나님께서 높이 평가하시며, 특별한 은혜를 베푸시는 것입니다.

    이탈리아 출신의 유명한 테너 가수 중에 ‘엔리코 카루소(1873-1921)’라는 분이 있습니다.
    감미로운 목소리를 가진 그는 많은 노력과 폭넓은 음성영역으로, 뉴욕의 메트로폴리탄 극장에서만 607회나 출연하는 진기록을 보유하는 등 세계적인 명성을 얻었습니다.
    그런데도 그는 장소를 가리지 않고 아무 곳에서나 거리낌 없이 노래를 불러서 사람들에게 ‘자존심 없는 사람’이라고 놀림 받기도 했습니다.

    어느 날, 그가 시내를 걷다가 옛 친구를 만났습니다.
    두 사람은 어느 음식점으로 들어갔는데, 그곳에는 이미 많은 손님들이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두 사람이 음식을 청할 때 종업원이 그를 알아보고 주방을 향해 소리쳤습니다. “요리사 아저씨! 테너 가수 카루소 선생님이 오셨어요.” 종업원의 말이 떨어지자 요리사가 즉시 달려왔습니다. 그리고는 아주 정중한 태도로 인사를 했습니다. “선생님을 이곳에서 뵈올 줄은 몰랐습니다. 저는 평소에 선생님의 노래를 직접 듣는 것이 소원이었습니다.”하고 요리사가 말했습니다. 카루소는 “그렇다면 지금 당장 이곳에서 들려드리지요.”하고 아주 쉽게 말했습니다. “정말요? 선생님과 같은 세계적인 가수의 노래를 이렇게 쉽게 들을 수 있다고요? 그런데 저는 지금 요리 복을 입고 있는데 어쩌지요?” 그가 매우 미안해하며 말했습니다. “그것도 괜찮습니다. 조금도 염려하지 마십시오.”하고는 즉시 노래를 시작했습니다.
    그의 아름다운 목소리가 식당 홀 안에 가득히 울려 퍼졌습니다. 노래가 끝났을 때, 모든 손님들은 그가 카루소라는 사실을 알았고 그의 아름다운 선율에 아낌없는 박수를 보냈습니다. 요리사는 더욱 감격해 했습니다. 잠시 후, 식사가 시작되어 친구가 카루소에게 왜 아무 곳에서나 그렇게 노래를 부르냐고 묻자 그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그는 나의 노래를 듣는 것이 소원이라고 했네. 더욱이 저 요리사도 요리를 맛있게 해서 남들을 기쁘게 해주는 예술가가 아닌가. 예술가를 위해 노래하나 하는데 그렇게 인색할 필요가 무엇이겠는가.”

    뜻밖이라고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겸손을 쓸데없는 것으로 여겨서 바라지도 않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사람들은 겸손을 연약한 것으로 간주합니다. 그래서 자신들의 실수를 인정하거나 용서를 구하는 것을 원하지 않습니다. 우리 아이들에게 ‘기죽지 말라.’고 가르치는 것도 겸손을 무시하는 위험한 가르침입니다.

    마태복음11:28-30절에서 겸손은 예수님의 성품임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

    우리는 예수님을 통하여 겸손의 의미를 배울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모든 일을 성부 하나님의 뜻에 그 초점을 맞추었습니다. 가르치는 말씀 한 마디, 베푸시는 이적 등 모든 삶이 성부 하나님께 의지하고 있습니다. 요한복음8:28절에서, “이에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는 인자를 든 후에 내가 그인 줄을 알고 또 내가 스스로 아무 것도 하지 아니하고 오직 아버지께서 가르치신 대로 이런 것을 말하는 줄도 알리라.”고 하셨습니다. 곧 겸손은 모든 일에 하나님을 인정하고 하나님 뜻에 자신을 맞추는 것입니다.

    또 한 가지는, 빌립보서2:5-8절입니다.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 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고 하셨습니다. 이는 자신을 낮추며, 생명을 다하는 충성심입니다.

    겸손에 대한 하나님의 보상은 ‘높임’입니다. 우리가 진정으로 높아질 수 있는 것은 하나님께서 높여주실 때입니다. 지금은 겸손이 미덕인 시대는 지났다고 합니다. 지금은 적극적으로 자신을 드러내고 선전해야 하는 시대라고 합니다. 그러나 시대가 아무리 바뀌어도 하나님의 관점에는 변함이 없습니다. 우리 모두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겸손한 마음이 되어서 환경을 초월하는 하나님의 은혜를 입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느헤미야 6장 요약 / 대적들의 음모를 물리치다

    산발랏과 도비야 등 대적들은 성벽 재건이 거의 완성되어 가자, 느헤미야를 유인하여 해치려는 음모를 꾸밉니다 (6:1-2).
    거짓 예언자들을 동원하여 느헤미야를 두렵게 하려 하지만, 그는 지혜롭게 대처하며 기도에 힘씁니다(6:10-14).
    결국 대적들이 두려워할 만큼 성벽 공사는 52일 만에 완공됩니다(6:15-16).
    그러나 도비야와 유다 귀족들 사이의 비밀 연대가 있었고, 그의 영향력은 여전히 문제로 남아 있었습니다(6:17-19).

    느헤미야 7장 요약 / 이스라엘 백성들의 수효

    성벽이 완공되자 느헤미야는 예루살렘의 안전을 위해 문지기, 찬양대, 레위 사람을 세웁니다(7:1-3).
    그는 유다 귀족들과 백성의 계보를 조사하여, 포로에서 돌아온 자들의 명단을 기록합니다(7:5-7).
    이 명단은 스룹바벨과 함께 귀환한 사람들과 그 수, 가축, 헌금 등을 자세히 보여줍니다(7:6-73).
    백성은 자신의 뿌리를 확인하며 공동체의 정체성과 연합을 다시 확인합니다.

    느헤미야 8장 요약 / 초막절을 지키다

    이스라엘 백성은 수문 앞 광장에 모여 학사 에스라가 낭독하는 율법을 듣습니다(8:1-3).
    레위인들은 백성이 율법을 이해할 수 있도록 해석해 주며, 백성은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울기 시작합니다(8:7-9).
    그러나 느헤미야와 에스라는 기쁨으로 여호와를 경배하라고 격려하며 초막절을 회복합니다(8:10-17).
    말씀의 회복과 절기의 실천은 공동체를 새롭게 세워갑니다.

    느헤미야 9장 요약 / 금식하고 회개하다

    이스라엘 백성은 금식하고 회개하며 죄를 자백하고 조상들의 역사를 되새깁니다(9:1-3).
    레위인들이 인도하는 기도에서는 하나님의 인도와 은혜, 백성의 반역과 하나님의 인내가 반복적으로 언급됩니다(9:5-31).
    백성은 하나님이 정의롭고 자비로우시며 언약을 지키시는 분임을 고백합니다(9:32-33).
    마지막으로 그들은 하나님의 율법을 지키기로 언약하며 문서로 기록합니다(9:38).


    5월 30일(금) 느헤미야 6-9장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주는 여호와시라(9:6)

    오직 주는 여호와시라 하늘하늘들의 하늘과 일월 성신과 위의 만물과 바다와 그 가운데 모든 것을 지으시고 다 보존하시오니 모든 천군이 주께 경배하나이다.
    You alone are the LORD. You made the heavens, even the highest heavens, and all their starry host, the earth and all that is on it, the seas and all that is in them. You give life to everything, and the multitudes of heaven worship you.

    오직 주는 여호와시라(You alone are the LORD.)



    역사는 디딤돌입니다.

    오직 주는 여호와시라 하늘과 하늘들의 하늘과 일월성신과 땅과 땅위의 만물과 바다와 그 가운데 모든 것을 지으시고 다 보존 하시오니 모든 천군이 주께 경배하나이다.(느9:6) Thou, even thou, art LORD alone; thou hast made heaven, the of heaven of heavens, with all their host, the earth, and all things that are therein, the seas, and all that is therein, and thou preservest them all; and the host of heaven worship peth thee.(Neh9:6)

    하나님은 역사를 주관하시는 분입니다.
    1945년 8월 15일 일제 치하에서 해방된 날입니다.
    2025년은 해방 80주년 되는 해입니다.

    우리나라가 힘이 있어 해방된 것이 아니고, 미국이 일본에 원자폭탄을 떨어뜨리니 무조건 항복을 해서, 해방을 맞이한 것입니다.
    이는 금세기 최고 행복한 날이었습니다.

    1. 흙 다시 만져 보자 바닷물도 춤을 춘다.
       기어히 보시려던 어른님 벗님 어찌하랴
       이날이 사 십년 뜨거운 피 엉긴 자취니
       길이길이 지키세 길이길이 지키세.

    2. 꿈엔들 잊을건가 지난날을 잊을건가..

    반만년의 역사가운데 960여 회의 전쟁이 있었다고 합니다.
    5년마다 한 번의 전쟁이 있었다는 증거입니다.
    힘이 없으면 외세의 침략을 받습니다.
    그런데 70여년간 전쟁이 없었다는 것은 동시대가 받은 큰 축복입니다.
    6.25사변 후 우리나라에 70년간 전쟁이 없었던 것은, 우방인 미국이 지켜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베트남은 1973년 3월 29일 미군부대가 철수하면서 망했습니다.
    베트남이 패망하기 2년 전에 평화협정을 맺고, 1975년 망했습니다.
    그런데 지금도 미군을 철수하라고 외치는 자들이 있습니다.

    누가 좋아하겠습니까?
    누구의 지령을 받고 있습니까?  속지 마세요.
    역사란 굉장히 중요합니다.
    역사는 디딤돌과 같습니다.
    역사를 딛고 미래를 지향해 나아가게 됩니다.
    또한, 역사는 거울과 같습니다.
    역사의 거울을 통해 현재를 설계하고, 미래를 준비해야 합니다.
    역사를 회고한다는 말은, 자신을 돌아본다는 뜻입니다.
    역사의식이 없는 백성, 역사를 모르는 민족은 우매한 민족입니다.
    역사를 왜곡하는 민족은, 역사의 심판을 받습니다. 

    젊은이도 어른들도 역사의식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정치하는 사람들도 역사의식이 있어야 합니다.
    역사의식 없이 남의 말만 듣고 살면 지탄을 받습니다.
    자신을 위해 수없는 사람을 희생한다든지, 나라를 망쳐 놓는다면 반드시 역사의 심판을 받게 됩니다. 

    성경에 아합 왕이 그러했고, 웃시야 왕이 그러했습니다.
    성경은 정확한 역사를 거울로 보여 주고 있습니다.
    다윗왕의 가문을 마1:6에 다윗은 우리아의 아내에게서 솔로몬을 낳았다고 했습니다. 
    우리아의 아내를 통해 다윗이 자식을 낳았다는 부끄러운 가정 사를 그대로 기록하고 있는 것이 성경입니다.
    특히 그리스도인은 역사의 소리를 잘 들어야 합니다. 

    본문은 이스라엘은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와 느헤미야가 무너진 성벽을 재건하면서 하나님이 함께 하셨던 많은 일들이 있었습니다.
    바벨론 포로에서 복귀하여 성벽재건에 놀라운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무너진 성벽을 52일 만에 기적적으로 재건을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이 필요하면 사람을 붙여주셨고, 자재가 필요하면 이웃나라 왕의 마음을 움직여서 공급해 주셨고, 적들마저 하나님의 손이 끌어다가 돕도록 해 주셨습니다. 

    느헤미야는 오늘까지 하나님이 함께 하셨던 역사를 회고하면서, 이제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알려주었습니다.
    이때 수문 앞 광장에 모였던 백성들은 이 말을 듣고 세 가지 신앙개혁 운동이 일어났습니다. 

    1. 회개운동(9:1, 3)

  • 이십 사일에 이스라엘 자손이 다 모여 금식하며 굵은 베를 입고 티끌을 무릅쓰며.
  • 사분지 일은 그 처소에 서서 그 하나님 여호와의 율법책을 낭독하고 사분지 일은 를 자복하며 그 하나님 여호와께 경배하는데.
  • 굵은 베옷을 입고 죄를 자복했습니다.

    2. 말씀운동(9:3)

    사분지 일은 그 처소에 서서 그 하나님 여호와의 율법책을 낭독하고 사분지 일은 를 자복하며 그 하나님 여호와께 경배하는데.

    낮 사분의 일은 여호와 하나님의 율법 책을 낭독했습니다.

    3. 기도운동(9:4)

    레위 사람 예수아바니갓미엘과 스바냐와 분니세레뱌바니그나니는 대에 올라서서 큰 소리로 그 하나님 여호와께 부르짖고 .

    그들의 하나님 여호와께 부르짖으며 기도했습니다.

    놀라운 은혜(9:9)

    주께서 우리 열조가 애굽에서 고난 받는 것을 감찰하시며 홍해에서 부르짖음을 들으시고.

    하나님께서 그들의 부르짖는 소리를 들으셨습니다.

    지금 한국 교회도 이런 운동이 일어나야 삽니다.
    오늘 말씀은 느헤미야가 이스라엘 백성들을 수문 앞 광장에 모아놓고, 과거 하나님이 함께 하셨던 역사를 회고하면서, 신앙개혁운동을 실시하면서 세 가지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회개 운동이 일어났습니다(9:1-2)

    1. 모든 이방인과 절교하였습니다(2절)

    모든 이방인들과 절교하고..
    구별되게 살겠다는 결단입니다.
    금식하며 굵은 베옷을 입고 죄를 회개하면서 이방인들과 절교를 선포했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회복은 회개로부터 시작됩니다.
    진정한 회개를 통해 은혜의 통로가 열립니다. 

    2. 영이 맑아지고 지혜가 임합니다. 

    3. 막힌 혈관이 뚫리듯 하나님과의 교제가 회복되고 평안이 옵니다. 

    4. 기도의 응답이 열립니다. 

    그동안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을 섬기면서도 이방인들과 혼합되어 간음을 하며 거룩함을 상실했습니다. 
    이럴 때마다 하나님은 불레셋을 통해, 아말렉을 통해, 바벨론을 통해, 채찍의 몽둥이로 사용하셨습니다.
    바벨론의 포로에서 70년간 갖은 고난을 당한 것도 우연이 아니라, 하나님의 징계였습니다.
    느헤미야가 역사를 회고해 줄때, 백성들은 이방인들과 절교하겠다는 결단을 선포했습니다.

    1. 진정한 회개는 마음만 돌이키는 것이 아니라, 생활이 구별되어지는 것입니다.

    애굽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길갈을 정리하고 떠나야 합니다. 

    2. 이방인들과 절교하는 행동까지 구별되게 살아야 합니다. 

    3. 진정한 은혜는 회개운동에서 시작됩니다.

    이것이 느헤미야가 수문 앞 광장에서 역사를 회고할 때, 일어난 회개 운동입니다.
    우리도 버릴 것을 정리하고, 세상과 종교의 다원(혼합)주의에서 성별해야 합니다.
    매여 있는 줄을 끊어야 합니다.
    걸터앉은 생활을 정리해야 합니다.
    사무엘도 미스바에서 백성들에게 하나님께로 온전히 돌아오려거든 이방신들을 버리라, 그리하면 너희를 불레셋 손에서 건져내시리라. (삼상7:3)

    조상들의 죄까지 회개했습니다(2절)

    서서 자기의 죄와 조상들의 허물을 자복하고..
    자기 죄만이 아닙니다.
    조상들이 잘못했던 과거 역사까지 자복하면서 회개했습니다.
    비록 우리가 지은 죄가 아니더라도 조상들의 죄까지 회개하는 백성들에게 하나님은 성벽을 다시 재건하는 축복을 주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역사를 회고하며 자기 죄만 뉘우치는 것이 아니고, 조상들의 허물까지 후손들이 자복하면서 회개했습니다.
    이런 이스라엘 백성들을 하나님은 축복해 주셨습니다.
    오늘 이 시대에 우리도 수문 앞 광장의 회개운동이 다시 일어나길 축복합니다.

    말씀운동이 일어났습니다. 

    이 날에 낮 사분의 일은 그 제자리에서서 그들의 하나님 여호와의 율법책을 낭독하고...(3절 상) 

    1. 낮 4분의 1은 일어서서 율법 책을 낭독했습니다.

    모든 백성들이 일어서서 율법 책을 낭독했습니다.
    낮 4분의 1은 3시간 동안입니다.
    오랜 시간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했습니다.

    진정한 개혁운동은 말씀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말씀운동이 일어날 때 영혼이 삽니다.
    말씀으로 돌아갈 때 해답을 얻습니다.
    말씀운동이 일어날 때 나라가 흥했고, 적들을 막아 주셨고, 재앙이 없었습니다.
    말씀 운동이 일어날 때, 우리영혼이 살고 민족은 흥하게 됩니다.
    율법 책을 읽을 때 다 일어서서 백성들이 귀를 기울였습니다.(8:3)
    너희는 내게 나와 귀를 기울이라 그리하면 너희영혼이 살리라.(사 55:3)
    엠마오로 내려가던 제자들이 부활의 주님이 성경을 풀어줄 때, 우리 마음이 뜨겁지 않더냐고 했습니다.(눅 24;32)
    말씀이 열릴 때 은혜의 불이 나왔습니다.
    주의 말씀은 내발에 등이요, 내 길에 빛이니이다.(시 119:105)

    말씀이 생명이요, 영의 양식이요, 빛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검과 같아서 심령과 관절과 골수를 질러 쪼갠다고 했습니다.(히 4:12)

    말씀을 듣고 완악한 사람도 변화됩니다.
    사람의 근본은 지식이 변화시키는 것 아닙니다.
    윤리 도덕으로 변화되는 것도 아닙니다.
    생명의 말씀이 속에서 역사할 때,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그러므로 살리는 것은 영이라고 했습니다.(요 6:63)

    백성들은 말씀을 들을 때 다 울었습니다(8:9)

    백성들이 율법의 말씀을 듣고 다 우는지라.
    눈물은 진실을 말합니다.
    신앙생활에는 눈물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의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 복음입니다.
    주님의 십자가 사건이 내 대신 죽음으로 다가와야 합니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요,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는 나음을 입었도다.(사 53:5)

    하나님 앞에서 흘리는 눈물입니다. 

    회개하며 흘리는 눈물, 감사해서 흘리는 눈물, 기도하며 흘리는 눈물, 사명을 깨닫고 흘리는 눈물. 그 후에는 놀라운 은혜를 경험합니다.

    하나님 앞에 눈물이 있는 신앙은, 은혜를 체험한 사람입니다. 

    히스기야의 눈물은 죽을 생명이 15년 연장되었습니다.(왕하 20:6)

    예레미아의 눈물은 민족정신을 깨우고, 멸망을 멈추게 했습니다.(렘 9:1)

    한나의 소리 없이 흘린 기도의 눈물은, 한 시대를 살리는 민족의 지도자 사무엘을 주셨습니다.(삼상 2:1-10)

    주님도 감람산 벧바게 언덕에서 장차 멸망할 예루살렘을 바라보며 우셨습니다.(눅 19:41)

    이스라엘 백성들이 포로생활에서 예배할 곳을 잃고, 예루살렘으로 돌아가 예배드릴 날을 사모하며 바벨론 강가에서 울 때 포로에서 자유케 하셨습니다.

    우리도 민족의 미래를 바라보며, 하나님 앞에 울어야 할 때입니다.

    은혜를 경험한 사람은, 눈물이 마를 때가 영혼이 곤고한 때입니다. 

    현대는 IQ가 높은 지성적인 사람보다, EQ가 높은 감성적인 사람이 성공한답니다.
    두뇌는 명석한데 인간미가 말라버린 사람보다, 가슴이 뜨거운 사람, 감성이 풍성한 사람이 인간관계를 잘 맺기 때문입니다.
    신앙도 은혜의 감성이 메마르지 않아야 합니다.
    감동 감격이 있는 신앙이 좋은 신앙입니다. 

    역사를 회고할 때, 세 가지 은혜를 주셨습니다. (느헤미야  9:8-10)

    1. 하나님은 마음의 충성됨을 보셨습니다. 

    그의 마음이 주 앞에서 충성됨을 보시고...(8절 상)
    마음의 충성을 보셨습니다.
    충성이란 말씀이 성경에 110번이나 나옵니다.
    신실하다. 믿을만하다. 맡길만하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회개하며 말씀을 사모하는 백성들을 충성되다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충성된 마음을 하나님은 다 보고 계셨습니다.
    충성하다가 낙심하지 마세요. 
    하나님은 모르는 것 같으나 다 알고 계시고, 안보는 것 같으나 다 보고 계십니다.
    반드시 일한대로 갚아 주십니다.

    2. 하나님은 부르짖음을 들으셨습니다.

    주께서 우리 조상들이 애굽에서 고난 받는 것을 감찰하시며 홍해에서 그들의 부르짖음을 들으시고. (9절)
    하나님은 여러분의 작은 신음소리까지도 다 듣고 계십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기도를 들으신 하나님은 여러분의 부르짖음도 듣고 계십니다.
    다윗도 내가 고통 중에 여호와께 부르짖었더니 여호와께서 응답하시고 나를 광활한 곳에 세우셨다고 했습니다. (시118:5)

    3. 하나님이 길을 인도하셨습니다.

    낮에는 구름기둥으로 인도하시고 밤에는 불기둥으로 그들이 행할 길을 그들에게 비추셨사오며(12절)
    우리는 광야 같은 인생길을 살아가는 동안 무슨 일을 만날는지 아무도 모릅니다.
    가나안 축복의 땅을 들어가려면 반드시 광야를 통과해야 합니다.
    광야는 고달프고 힘든 길입니다.
    그러나 염려하고 두려워 할 필요가 없습니다. 

    광야에서도 구름기둥과 불기둥으로 인도해 주셨고, 홍해가 앞을 막을 때 동풍을 일으켜 길을 만드셨고, 만나와 메추라기를 내려 하나님이 먹이셨습니다.

    믿음으로 살면 여러분의 길도 하나님이 인도해 주시고 책임져 주십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느헤미야는 과거 역사를 회고하면서 신앙을 회복하는 백성들의 모습을 보았습니다.
    이스라엘은 회개하면서 이방인과 절교하며, 끊을 것은 끊고, 버릴 것을 버렸습니다.
    또한,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다 울며 하나님께로 돌아왔습니다.
    이것이 바로 변화요, 은혜요, 성령의 역사입니다.
    하나님은 이런 백성들을 축복하셨습니다.
    2025년 광복 80주년에 우리의 고국 대한민국에도, 우리의 신앙도 이와 같으시길 축복합니다.


    오직 주는 여호와시라




    주님, 감사합니다.
    새날을 허락하여 주시고, 주님의 은혜 아래 거하게 하여 주심을 감사드립니다.
    주님, 부디 긍휼을 베풀어 주시옵소서.
    저희들이 걷는 길을 선하게 인도하여 주시고, 주님의 은혜 아래 거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주님의 뜻을 따라 행하게 하여 주시고, 온전히 주님과 주님의 영광을 위해 살아갈 수 있도록 도와 주시옵소서.
    부디 긍휼을 잊지 마시옵소서.
    주님, 오늘도 주님의 말씀 앞에 섭니다.
    말씀하여 주시고, 말씀의 의미들을 깨닫고, 그 말씀을 살아가는 오늘 하루가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렸습니다. 아멘.

    1. Lectio Divina(거룩한 읽기)

    <새번역>

    1. 그 달 이십사일에, 이스라엘 자손이 다 모여서 금식하면서, 굵은 베 옷을 입고, 먼지를 뒤집어썼다.
    2. 이스라엘 자손은 모든 이방 사람과 관계를 끊었다. 그들은 제자리에 선 채로 자신들의 허물과 조상의 죄를 자백하였다.
    3. 모두들 제자리에서 일어나서, 낮의 사분의 일은 주 하나님의 율법책을 읽고, 또 낮의 사분의 일은 자기들의 죄를 자백하고, 주 하나님께 경배하였다.
    4. 단 위에는 레위 사람인 예수아와 바니와 갓미엘과 스바냐와 분니와 세레뱌와 바니와 그나니가 올라서서, 주 하나님께 큰소리로 부르짖었다.
    5. 레위 사람인 예수아와 갓미엘과 바니와 하삽느야와 세레뱌와 호디야와 스바냐와 브다히야가 외쳤다."모두 일어나서, 주 너희의 하나님을 찬양하여라." 영원 전부터 영원까지, 주님의 영화로운 이름은 찬양을 받아 마땅합니다. 어떠한 찬양이나 송축으로도, 주님의 이름을 다 기릴 수가 없습니다.
    6. 주님만이 홀로 우리의 주님이십니다. 주님께서는 하늘과, 하늘 위의 하늘과, 거기에 딸린 별들을 지으셨습니다. 땅과 그 위에 있는 온갖 것, 바다와 그 안에 있는 온갖 것들을 지으셨습니다. 주님께서는 이 모든 것에게 생명을 주십니다. 하늘의 별들이 주님께 경배합니다.
    7. 주 하나님께서는, 아브람을 택하시어 바빌로니아의 우르에서 이끌어 내시고, 그의 이름을 아브라함이라고 고쳐서 부르셨습니다.
    8. 아브라함의 마음이 주님 앞에서 진실함을 아시고, 가나안 사람과 헷 사람과 아모리 사람과 브리스 사람과 여부스 사람과 기르가스 사람의 땅을 그 자손에게 주시겠다고, 그와 언약을 세우셨습니다. 주님께서는 의로우셔서, 말씀하신 것을 지키셨습니다.

    초막절이 끝난 지 이틀 후에 백성들이 대대적으로 모여 성회를 갖는다.
    모인 시간의 절반은 율법을 읽고, 절반은 엎드려 자복한다.
    지금까지 율법을 깨닫도록 도움을 준 레위인들도 이 대열에 합류한다.
    그리고 그들은 소리 높여 여호와를 송축한 후, 역사 속에서 하나님께서 행하신 일을 회고한다.
    이를 통해 백성들은 한편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돌아보며, 다른 한편으로 그 크신 은혜를 저버린 조상들과 자신들의 잘못을 회개한다.

    단락 구분

    1~5a절 24일의 금식 성회

    A. 회개(1~2절)
      B. 율법 낭독(3절)
         C. 레위인들의 기도(4~5a절)

    5b~8절 고백의 기도

    A. 송축(5b절)
      B. 창조주 하나님에 대한 고백(6절)
        C. 하나님의 선택과 언약(7~8절)

    배경이해

    5b절부터 시작되는 레위인들의 기도는 '이스라엘 역사를 회고하며 그 안에 나타난 하나님이 역사를 확인하는 고백
    -기도'의 성격을 지닌다.
    이 안에 담긴 신학적인 주제들은
    (1) 창조주 하나님에 대한 찬양(6절),
    (2) 하나님게서 아브라함을 선택하시고 그와 맺은 언약(7~8절),
    (3) 애굽에서의 구원(9~12절),
    (4) 모세의 중재를 통한 시내산 계시(13~14절),
    (5) 하나님의 은혜, 자비, 사랑에 대한 성품과 백성들의 참회(27~28절) 등이다.

    시갈(P. Sigal)에 의하면, 이러한 형식의 기도는 주전 587년 예루살렘 멸망 직후에 쓰이기 시작했으며, 장르상으로는 애가(Lamentations)와 유사하다.
    이러한 유형의 기도는 포로기나 포로 이후 예언이나 공동체 고백의 목적으로 기록된 것으로 역사회고를 통해 하나님의 은혜와 이스라엘의 신실치 못한 행동을 돌아보아 회보그이 기회로 삼고자 한 것으로 보인다.

    2. 본문 묵상하기

    본문의 구조(흐름 문장/본문의 명제)

    * 흐름 문장 *

    1. 이스라엘 자손이 금식하면서 죄를 자백하고, 하나님을 경배함(1~5a절)

    2. 찬양 받기 합당하신 주님의 영화로운 이름을 찬양하고, 창조주 하나님을 경배해야 함(5b~6절)

    3. 아브라함을 선택하시고, 그와 언약을 맺으신 하나님(7~8절)

    * 본문의 명제: 너희 가운데 행하신 모든 일들을 기억하면서 주님을 찬양하고 경배해야 한다.

    메시지

    명제 : 우리는 주님만을 찬양하고 경배해야 합니다.

    Keyword: Why?

    대지와 소지:

    1. 먼저, 우리의 죄를 용서하여 주시고, 구원하여 주셨기 때문입니다.

    a. 금식하며 자신들의 죄를 자복하고, 여호와 하나님을 경배한 이스라엘 백성들

    b. 우리의 죄를 도말하여 주시고, 구원으로 인도하여 주신 주님을 찬양하고 경배해야 함

    2. 둘째로, 우리를 택하시고, 우리의 자녀로 삼아 주셨기 때문입니다.

    a. 아브라함을 택하시고, 갈대라 우르에서 인도하여 내시고, 아브라함이라는 이름을 주신 하나님

    b. 우리를 택하여 주시고, 우리를 당신의 자녀로 삼아 주신 주님을 찬양하고 경배해야 함

    3. 마지막으로, 우리에게 주신 약속을 다 이루어 주셨기 때문입니다.

    a. 아브라함과 언약을 맺으시고, 그 말씀대로 이루어 주신 하나님

    b. 우리와 언약을 맺으시고, 약속의 말씀을 이루어 가시는 주님을 찬양하고 경배해야 함

    3. 기도하기

    오늘의 기도 : 이스라엘 백성들과 맺은 언약을 이루시고, 존귀와 찬양을 받으시기에 합당하신 하나님
    하나님은 우리의 죄를 구속하여 주시고, 당신의 자녀로 삼아 주시고, 당신의 언약 안에 거하게 하여 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오늘의 기도제목>

    ① 주님께서 내 삶 가운데 행하신 그 크고 놀라운 일들을 늘 기억하면서, 온 맘과 정성을 다해 주님을 찬양하고 경배하는 오늘 하루가 될 수 있길…

    ② 우리가 섬기던 그 땅의 사람들을 택하여 주시고, 그들에게 당신의 살아계심과 당신이 어떤 분이신지를 보여 주시고, 그들을 구속하여 주시고, 그들을 복음을 전하는 주님의 일꾼으로 세워 주시고, 그들이 직접 그 땅 가운데 복음의 씨앗을 뿌리는 자가 될 수 있도록 도와 주시길…

    ③ 가족들의 건강과 안전을 늘 책임져 주시고, 다른 사람들의 시선이나 말에 주눅들지 말고, 지혜롭게 홈스쿨링을 진행시켜 나가고, 아이를 주님의 자녀로, 주님의 일꾼으로 잘 세워나갈 수 있길…

    4. 실천하기 / ‘나’에게 말씀하신 것을 적용함

    ① 주님께 나아가 죄를 자복하고, 주님의 용서를 구하면서, 항상 거룩하고 정결한 삶의 모습을 지켜 나가기 위해 노력하고, 주님과의 친밀한 관계를 유지해 나가도록 노력하자!!!

    ② 주님께서 내 삶 가운데 행하신 일들을 다시 한 번 기억하고, 그 크고 놀라운 일들 가운데 주님께서 베풀어 주신 은혜에 감사하면서 그분을 찬양하고, 그분을 경배하도록 하자!!!

    ③ 우리에게 주신 약속의 말씀들을 이루어 가시기 위해 오늘도 우리를 일하고 계시고, 우리를 위해 길을 열어 주시는 주님을 믿고, 때를 기다리면서, 믿음의 발걸음을 내딛도록 하자!!!

    5. 묵상과 기도

    주님, 감사합니다.
    오늘도 말씀하여 주시고, 말씀의 의미들을 되새길 수 있는 시간을 허락하여 주심을 감사드립니다.
    주님께서 저를 택하여 주시고, 저에게 말씀하여 주시고, 당신의 사랑을 깨닫게 하여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리고 주님을 풍성히 경험할 수 있게 하여 주시고, 주님의 뜻과 계획을 따라 움직일 수 있게 하여 주심을 감사드립니다.
    주님, 앞으로 우리의 삶 가운데 어떻게 행하실 것인지를 살피면서 주님의 때를 기다리고, 그 때를 준비하는 마음으로 하루하루를 살아갈 수 있길 간절히 소망합니다.
    제 마음의 소원을 들어 주시고, 다시금 새로운 믿음의 발걸음을 내딛을 수 있도록 도와 주시옵소서.
    부디 긍휼을 잊지 마시옵소서.
    감사드리며,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렸습니다. 아멘.







    느헤미야 3장 요약

    예루살렘 성벽 재건이 본격적으로 시작되며, 제사장 엘리아십을 비롯한 여러 지파와 가족들이 맡은 구간별로 성벽을 건축합니다(3:1-32).
    각 문과 성벽의 일부가 공동체적으로 나뉘어 맡겨지고, 각자 자신의 집 근처를 중심으로 수고합니다.
    "그 다음은" 이라는 문구가 자주 반복되어 성곽을 재건하는 일에 참여한 가족들과 지파와 직분자들을 소개합니다.
    귀족 중 일부는 참여하지 않았지만, 대다수 백성은 헌신적으로 참여하였습니다(3:5).
    느헤미야는 기록을 통해 각 작업자와 맡은 구역을 세세히 언급하며 공동체의 협력과 연합을 보여줍니다.
    이 장은 성벽 재건이 단순한 건축이 아닌, 민족 회복의 상징임을 강조합니다.

    느헤미야 4장 요약

    성벽 재건이 진척되자 산발랏도비야는 조롱과 비웃음으로 방해합니다(4:1-3).
    산발랏과 도비야와 함께 훼방한 아라비아 사람들, 암몬 사람들, 아스돗 사람들.
    느헤미야는 하나님께 간구하며 백성의 마음을 격려하고, 공사에 계속 집중하게 합니다(4:4-6).
    적들의 공격 위협이 커지자 느헤미야는 낮에는 절반은 공사하고 절반은 무장하여 경계하게 하며, 밤에는 모두 무기를 들고 경비하게 합니다(4:16-23).
    그는 "하나님을 기억하고, 가족과 집을 위해 싸우라"고 외치며 백성의 사기를 북돋웁니다(4:14).
    이러한 위기 속에서도 공동체는 하나로 뭉쳐 성벽을 계속 재건합니다.

    느헤미야 5장 요약

    성벽 재건 중 백성들은 무거운 세금과 기근으로 인해 고통을 겪으며, 부유한 유대인들에게 자녀를 종으로 팔기까지 합니다(5:1-5).
    느헤미야는 이를 크게 분노하며, 귀족들과 관리들을 책망하고 이자 받는 것을 중지시키며 토지와 자녀를 돌려주게 합니다(5:6-13).
    그는 자신은 총독으로서 백성에게 부담을 주지 않았고, 오히려 자신의 재산으로 백성을 섬겼다고 고백합니다(5:14-18).
    이 모든 것은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행한 것이라 밝히며, 자신을 기억해달라고 기도합니다(5:15, 19).
    느헤미야는 공동체 내의 정의를 세우는 일에도 헌신했습니다.

    5월 29일(목) 느헤미야 3-5장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내게 은혜를 베푸시옵소서(5:19)

    내 하나님이여 내가 이 백성을 위하여 행한 모든 일을 생각하시고 내게 은혜를 베푸시옵소서.
    Remember me with favor, O my God, for all I have done for these people.

    2142. 자카르(zâkar)  זָכַר  

    1. 기억하다.  2. 잊지 않다. 3. 명심하다
    발음 [ zâkar ]
    구약 성경  / 222회 사용
    관련 성경 /  기억하다(창 9:15, 시 9:12, 겔 21:23), 생각하다(창 40:14, 겔 23:19, 렘 31:20), 기념하다(시 136:23, 출 13:3, 삼하 18:18),
    마음에 두다(사 17:10), 선포하다(렘 20:9), 부르다(사 12:4), 생각나게 하다(왕상 17:18), 칭송하다(대상 16:4), 전하다(렘 4:16),
    자랑하다(시 20:7), 진하다(아 1:4), 분향하다(사 66:3).
    [명] 소문(사 19:17), 사관(삼하 8:16, 왕상 4:3, 대상 18:15), 서기관(대하 34:8).


    제3차 포로 귀환으로 예루살렘에 도착한 민족의 지도자 느헤미야는 마지막으로 이렇게 기도합니다.
    "내게 은혜를 베푸시옵소서."
    느헤미야의 기도를 생각하며 이런 기도를 합니다.

    "주여, 한민족에게 은혜를 베푸시옵소서!"
    "주여, 한반도 땅에 은혜를 베푸시옵소서!"

    신앙생활을 하며 자주 사용하는 용어가 "은혜(恩惠)"라고 하겠습니다.
    왜 민족의 지도자 느헤미야는 '내게 은혜를 베푸시옵소서'라고 기도하였을까?

    느헤미야는 바사(페르시아) 왕으로부터 예루살렘의 총독으로 임명을 받고 제3차 포로귀환의 지도자가 되어 예루살렘에 도착했습니다.
    느헤미야가 총독으로 재임했던 기간은 12년이었습니다.
    이제까지 다른 총독들은 백성들로부터 총독의 임금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느헤미야는 백성들의 어려운 삶을 고려하여 총독의 임금을 받지 않고 무보수(無報酬)로 총독의 임무를 감당했습니다.
    그런데 백성들 중에 부유한 사람들은 고달픈 백성들에게 돈을 빌려주었으며 그 돈을 갚지 못하면 그들의 자녀들을 종으로 데려갔습니다.
    그리고 여유 자금으로 땅을 구입하고 그들의 부를 계속적으로 축적(蓄積)하고 있었습니다.
    총독 느헤미야는 백성들 중에서 이러한 무례(無禮)한  행위를 꾸짖고 책망하였습니다.
    그리고 내가 총독의 임금을 받지 않는 것은 백성들의 삶이 고달프기 때문이라고 강조합니다.
    그러므로 나의 이와 같은 삶을 본받아 귀족들은 그들의 삶의 방식을 포기하고 나눔의 삶을 살아야 한다고 깨우쳤습니다.
    그리고 느헤미야는 "내게 은혜를 베푸시옵소서" 하며 기도한 것입니다.

    은혜하는 헬라단어는 "카리스"라고 합니다.
    '카리스'의 어원은 기쁨이라는 "카라"에서 파생한 것입니다.
    이어서 은혜라는 카리스에서 은사라고 하는 카리스마라는 단어가 파생합니다.

    카라(기쁨. 樂)
    카리스(은혜. 恩惠)
    카리스마(은사. 恩賜)

    따라서 은혜는 내 만족을 위하여 채우는 것이 아닙니다.
    다른 사람의 부족한 것을 나눠주며 채워가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이런 기도를 하면 참 좋겠습니다.
    "주여, 내게 은혜를 베푸시옵소서!"
    "주여, 한민족에게 은혜를 베푸시옵소서!"
    "주여, 한반도 땅에 은혜를 베푸시옵소서!"

    그리하여 우리가 받은 은혜를 한반도를 중심으로 동남아를 거쳐 유럽대륙으로 더 나아가 아메리카 대륙으로 골고루 나눠주어 마지막에는 예루살렘에서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도록 인도하여 주옵소서.



    무엇을 위해서 살아가는가?
    어렵고 힘들고 치열한 삶.
    빚지지 않고는 살 수 없는 이 세상을 무엇을 위해서 살아가는가?
    단순히 먹고 사는 것에 가장 큰 관심이 있는가?
    돈을 벌어 먹고 사는 것에 가장 큰 관심이 있는가?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살아야 한다.
    그리고 날마다 하나님의 은혜를 갈망하며 살아가야 한다.


    내게 은혜를 베푸소서
     
    1. 총독의 녹을 먹지 아니함(14)

    또한 유다 땅 총독으로 세움을 받은 때 곧 아닥사스다 왕 제이십년부터 제삼십이년까지 십이 년 동안은 나와 내 형제들이 총독의 녹을 먹지 아니하였느니라

    12년 동안이나 총독의 녹을 먹지 않은 이유는 하나님의 은혜만을 간구하는 차별화이다. 이전의 총독들은 압제와 고리대금 등으로 백성들을 힘들게 했지만 느헤미야는 달랐다.

    그리스도인들에게는 필요에 따라 공급하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있기 때문이다.
    광야의 만나를 내려주신 하나님, 일용할 양식을 구하라 하신 예수님.

    2. 하나님을 경외함(15)

    나보다 먼저 있었던 총독들은 백성에게서, 양식과 포도주와 또 은 사십 세겔을 그들에게서 빼앗았고 또한 그들의 종자들도 백성을 압제하였으나 나는 하나님을 경외하므로 이같이 행하지 아니하고

    총독의 녹을 먹지 않고, 그 이전의 총독들처럼 재산을 모으기 위해 악한 일들을 행하지 않은 이유는 바로 ‘하나님을 경외’하기 때문이었다.
    요셉이 보디발의 아내가 유혹해 와도 이겨냈던 것은 ‘하나님 앞에서’(코람데오) 신앙과 하나님 경외하는 신앙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3. 내게 은혜를 베푸소서(19)

    내 하나님이여 내가 이 백성을 위하여 행한 모든 일을 기억하사 내게 은혜를 베푸시옵소서

    느헤미야는 오직 하나님께서 은혜 베풀어 주시기만을 간절히 구하였다. 하나님의 은혜를 구할 때 하나님께서 사람도 움직이시고, 길도 여시고, 필요를 채워주신다.

    적용
      1. 오직 하나님께서 우리의 필요를 채워주시는 분임을 알자!
      2. 하나님의 은혜로 살게 하소서!(솔라 그라티아.  Sola gratia)

    우리에게 날마다 일용할 양식을 주시는 하나님, 오늘도 여전히 주님의 은혜를 사모합니다.
    채워주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오직 은혜(Sola gratia. By grace alone)
    프로테스탄트 종교개혁 동안에 종교개혁가들이 주장한 다섯 솔라 가운데 하나이다.
    오직 은혜 교리는 로마 카톨릭 교회의 교리와 충돌한다.

  • Barber, John (2008). 《The Road from Eden: Studies in Christianity and Culture》 (영어). Academica Press. 233쪽. ISBN 9781933146348. The message of the Lutheran and Reformed theologians has been codified into a simple set of five Latin phrases: Sola Scriptura (Scripture alone), Solus Christus (Christ alone), Sola Fide (faith alone), Sola Gratia (by grace alone) and Soli Deo Gloria (glory to God alone).

  • 오직 은혜란 구원에서 인간의 공로가 아닌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을 받는다는 것인데 행위로 인한 구원이 아니고,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만 구원이 완성된다는 가르침이다.

    오직 은혜(Sola Gratia)

    "오직 은혜로"의 외침

    16세기 종교개혁은 타락한 교회의 오류를 바로잡고 성경적 복음을 회복하기 위한 운동이었습니다. 그중에서도 Sola Gratia, "오직 은혜로"는 인간의 구원이 전적으로 하나님의 주권적인 은혜에 달려 있음을 선언하며, 인간의 공로나 행위가 아닌 하나님의 선물임을 강조한 핵심 진리였습니다.

    종교개혁 당시 로마 가톨릭교회는 구원이 하나님의 은혜와 인간의 협력, 즉 선행과 공로의 결합으로 이루어진다고 가르쳤습니다. 이로 인해 사람들은 스스로의 행위를 통해 구원을 얻으려 노력했고, 면죄부를 구매하거나 의식을 통해 은혜를 얻으려 했습니다. 그러나 종교개혁자들은 성경을 통해 구원은 오직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로 말미암아 주어진다는 진리를 다시 세상에 선포했습니다. 오늘 우리는 "오직 은혜로"의 진리를 묵상하며, 이 은혜가 우리의 삶에 어떤 의미를 주는지 돌아보아야 합니다.

    Sola Gratia의 성경적 기초

    1. 구원은 하나님의 은혜로 주어진 선물이다

    에베소서 2:8-9은 이 진리를 가장 잘 요약합니다: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하지 못하게 함이라"(개역개정).


    이 말씀은 구원이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임을 명확히 선언합니다. 인간의 행위는 구원에 아무런 기여를 할 수 없으며,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은혜로 구원을 주셨기에 우리가 그 구원을 누릴 수 있는 것입니다.

    2. 우리는 전적으로 타락한 죄인이다

    로마서 3:23은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라고 말씀합니다. 이 구절은 인간이 본질적으로 죄인이며, 자신의 힘으로 하나님께 나아갈 수 없는 상태에 있음을 보여줍니다. 구원은 우리의 어떠함이나 노력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에 의한 것입니다.

    3. 하나님의 은혜로 의롭게 된다

    로마서 3:24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라고 선언합니다. 여기서 "값없이"라는 단어는 우리가 아무런 대가를 지불하지 않았음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우리는 의롭다 하심을 얻었고, 이는 전적으로 하나님께서 값없이 베푸신 선물입니다.

    종교개혁 시대에서의 의미: "오직 은혜로"

    1.  인간의 공로를 부정하다

    종교개혁 이전, 교회는 인간의 공로를 통해 구원이 이루어진다고 가르쳤습니다. 선행, 성례전, 면죄부, 고해성사 등은 인간이 하나님의 은혜를 "얻기 위해" 해야 하는 조건으로 여겨졌습니다. 그러나 종교개혁자들은 성경을 통해 구원이 인간의 행위에 달려 있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주어진 선물임을 확신했습니다.

    마르틴 루터는 자신의 종교개혁 여정을 시작하며 로마서 1:17—"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를 통해 인간의 행위나 노력 없이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이 주어진다는 성경적 진리를 깨달았습니다. 이러한 깨달음은 당시 교회의 교리적 오류를 바로잡고, 복음의 핵심 진리를 회복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2.  은혜의 주권성과 하나님의 사랑

    "Sola Gratia"는 구원이 하나님의 주권적인 사랑과 선택에 달려 있음을 강조합니다. 요한복음 6:44는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지 아니하면 아무도 내게 올 수 없으니"라고 말합니다. 우리는 스스로 하나님을 찾거나 선택할 수 없으며, 하나님께서 우리를 먼저 사랑하시고 그의 은혜로 우리를 부르셨기 때문에 구원에 이를 수 있습니다.

    현대적 의미 : "오직 은혜"를 묵상하며

    오늘날 우리는 "오직 은혜로"라는 진리를 어떻게 우리의 삶에 적용하고 묵상해야 할까요?

    1.  은혜는 우리의 겸손한 고백을 요구한다

    "Sola Gratia"는 우리로 하여금 구원의 공로가 우리의 것이 아님을 깨닫게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철저히 겸손해야 합니다. 디도서 3:5는 "우리를 구원하시되 우리가 행한 바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지 아니하고 오직 그의 긍휼하심을 따라" 구원하셨다고 말씀합니다. 우리는 자랑할 것이 전혀 없으며, 오직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해야 합니다.

    2. 은혜는 감사와 헌신의 삶을 요구한다

    구원이 은혜의 선물임을 깨닫는다면, 우리는 감사와 헌신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로마서 12:1은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고 권면합니다. 은혜로 구원받은 우리는 우리의 삶을 하나님께 드리며, 그의 영광을 위해 살아야 합니다.

    3. 은혜는 우리의 이웃을 향한 사랑으로 나타난다

    은혜를 받은 사람은 다른 사람에게도 은혜를 베푸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에베소서 4:32은 "서로 친절하게 하며 불쌍히 여기며 서로 용서하기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심과 같이 하라"고 말씀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를 본받아 이웃에게 사랑과 친절로 은혜를 나누어야 합니다.

    결론 : 하나님의 은혜에 의존하는 삶

    Sola Gratia, "오직 은혜로"는 우리의 구원이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에 달려 있음을 가르칩니다. 인간의 타락한 본성과 죄악된 상태를 생각할 때, 우리의 구원은 우리가 얻거나 받을 자격이 없는 하나님의 선물임을 깨닫게 됩니다.

    마지막으로 고린도후서 12:9의 말씀을 기억합시다.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개역개정).

    우리의 약함과 무력함 속에서도 하나님의 은혜는 충분합니다. 우리는 그 은혜에 의지하여 구원받았으며, 은혜로 살아가야 합니다.

    오늘도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며, 그 은혜의 진리를 세상에 증거하고 나누는 삶을 살아가길 소망합니다.


    느헤미야는 본장 결론을 기도로 마감하였는데 "내게 은혜를 베푸시옵소서"라는 간절한 기도다.
    기도란 과거에 대한 감사, 현재에 대한 사례, 미래에 대한 간구이다.

    느헤미야의 기도

    1. 하나님의 백성과 자기를 위하여 솔직하게 범죄를 시인하고 자복하 며 긍휼을 베풀어 달라고 하였다(1:5-11)
    2. 왕 앞에서 묻는 말에 대답하기 전에 대담하게 하늘의 하나님께 묵도(默禱)하고 답하였다(2:4)
    3. 멸시를 받으면서 낙심하기 쉬운 때에 낙심을 이기도록 끝까지 참아 승리할 수 있도록 기도하였다(4:4-5)
    4. 대적자들이 연합하여 위협을 가해오자 특별하신 보호가 필요하다고 보아 안전보장을 호소하였다(4:9)
    5. 자기가 이룬 일로 인하여 생각하시고 은혜를 베풀어 주시고 상 주 시기를 간구하였다(5:19)
    6. 대적자들이 선전하기를 손이 피곤하여 역사를 정지할 것이라고 하 니 조용하게 "내 손을 힘있게 하옵소서"하였다(6:9)
    7. 자기를 두렵게 하고자 한 자들(도비야, 산발랏 등...)의 행위를 기억하시고 막아주소서 하였다(6:14)
    8. 자기가 하나님의 전과 그 모든 직무이행을 위하여 최선을 다한 일을 기억해 달라고 호소하였다(13:14)
    9. 하나님의 긍휼하심이 자기에게 임하여 큰 은혜를 바라왔다(13:22)
    10. 영적 지도자(제사장, 레위인)들의 책임 감당을 위해 기도함(13:29)
    11. 최후로 자신에게 하나님의 은총이 있기를 기도하였다(13:31)

    계속적인 은혜를 간구

    "내가 이 백성을 위하여 행한 모든 일을 생각하시고..."라고 함은 오늘날까지 이스라엘 백성의 지나온 역사를 하나님께서 주관하셨으며, 비록 포로생활이나 본토에 잔류된 생활 등이 모두 하나님의 보호해 주신 은혜임을 감사하면서 또한 현재 대적자들이 온갖 방해를 다해가며 성 복구공사를 중단시키려고 발광을 하나 하나님이 살아계신 것을 믿 는 마음이 든든하였다.
    그런고로 앞으로의 모든 일도 은혜 베풀어 주시어 만사가 형통하리라고 간구하였다.
    그는 기도의 사람이니 기도하는 대로 성취될 것을 믿었다.

    하나님께서 미리 앞서서 필요한 것을 주시나 구하고 바라는 자에게는 더욱 더 좋은 것으로 주시는 하나님이시다.

    보수를 받지 않은 느헤미야(5:14~16)

    예루살렘 성벽 재건에 참여한 사람들의 경제적 어려움을 생각해, 느헤미야는 총독에게 지급되는 양식을 포기합니다.
    세상의 소금과 빛으로 부름받은 성도는 진리와 윤리의 관점에서 모범이 되어야 합니다.
    진리의 관점에서는 탁월한 지식과 확신을 가져야 하고, 윤리의 관점에서는 정직하고 순결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공동체를 위해 불편함을 감수하려는 마음이 필요한 시대입니다.
    그 마음이 이웃 사랑의 계명을 실현합니다.

    느헤미야는 12년간 유다 총독으로 일했습니다.
    그 기간에 그는 총독의 보수를 받지 않았습니다.
    총독의 보수는 바사에서 주는 것이 아니라 유다 지역의 세금에서 충당했습니다.
    이전의 유다 총독들은 백성으로부터 매년 양식과 포도주와 은 40세겔을 거두었습니다.
    이를 걷기 위해 총독의 신하들이 유다 백성을 압제했습니다.
    그들과 달리 느헤미야는 형편이 어려운 유다 백성을 생각해 총독의 보수를 위한 세금을 걷지 않았습니다.
    그가 유다 총독으로 부임한 목적은 예루살렘 공동체의 회복을 위함이지 부나 권력을 얻기 위함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느헤미야는 하나님을 경외하고 백성을 배려하는 지도자의 모범입니다.

    느헤미야는 왜 총독의 보수를 받지 않았나요?
    – 하나님 나라를 위해, 공동체의 유익을 위해 내가 포기할 수 있는 권리는 무엇인가요?

    자기 재산으로 헌신한 느헤미야(5:17~19)

    느헤미야는 총독으로서 자신의 삶에 대해 고백합니다.
    그는 필요한 모든 경비를 자비로 충당했습니다.
    바사의 고위 관리로 있을 때 축적했던 부와 재산을 유다 공동체의 재건에 아낌없이 쏟아부었습니다.
    그의 상에서 먹은 사람만 150명 이상인데, 그는 그들을 위해 매일 엄청난 양의 고기와 음식과 포도주를 준비했다고 말합니다(17~18절). 유다 백성의 사정이 어렵다는 것을 알기에 손해를 감수하면서까지 기꺼이 자신의 재산으로 헌신한 것입니다.
    그는 다만 하나님께 이 모든 일을 기억해 달라고 기도하며 하나님의 은혜를 구합니다.
    하나님의 공동체를 세우기 위해 힘쓰며 자기 것을 기꺼이 내놓는 사람을 하나님은 기억해 주십니다.

    * 매일 많은 사람의 식사를 자비로 제공한 느헤미야의 헌신은 어떠했나요?
    * 재물을 선하게 사용하기 위해 내가 실천할 일은 무엇인가요?

    이전 총독들은 유다 백성을 압제해 양식과 돈을 빼앗았으나, 하나님을 경외하는 느헤미야는 총독 재임 12년간 녹을 받지 않았습니다.
    종자들과 함께 힘을 다해 일했고, 일부 백성과 민장들과 이방인들을 자기 상에서 대접 했음에도, 그는 부역이 중한 백성을 생각해 녹을 요구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 제 마음과 우선순위를 하나님 마음이 있는 곳에 두길 원합니다.
    제 권리를 누리는 데 마음을 쏟기보다, 하나님이 맡겨 주신 사람들과 일을 위해 더 마음을 쏟게 하소서.
    제게 주신 물질을 하나님을 위해 즐겁게 사용하며, 매사에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으로 행동하게 하소서.


    기쁨(카라. chara) χαρά, ᾶς, ἡ 스트롱번호 5479

    1. 기쁨.   2. 고후 2:3. 3. 기쁨을 주는 사람
    발음 [ chara ]
    어원  / 5463에서 유래
    • I.  기쁨, 즐거움.
      • 1.  [문자적으로] 고후 2:3, 갈 5:22, 히 12:11.
      • 2. [환유적으로]
        • a.  기쁨을 주는 사람, 또는 사물, 기쁨의 대상, 눅2:10, 빌4:1, 살전2:19,20.
        • b.  기쁨의 상태, 마25:21,23, 히12:2.
        • c.  즐거운 잔치, 마25:21,23, 요17:13.
    • 련 성경 /  기쁨(마13:20, 요15:11, 고후7:13), 즐거움 (마25:21, 히12:2, 벧전1:8), 희락(롬14:17, 갈5:22).


    은혜(카리스. charis ) χάρις, ιτος, ἡ 스트롱번호 5485

    1. 우아함.  2. 은총. 3. 은혜로운 행위
    발음 [ charis ]
    어원 / 5463에서 유래
    • 1.  우아함, 매력, 끄는 힘, 눅4:22, 골4:6.
    • 2. 은총, 총애, 덕택, 호의, 은사, 선의, 눅2:40, 롬4:4, 히4:16, 계22:21.
    • 3. 은혜로운 행위, 선행, 선물, 자선, 기특한 행동, 행24:27, 고후1:15, 벧전5:10, 유1:4.

    • 4. 감사, 눅17:9, 딤전1:12, 히12:28.

    • 관련 성경 / 은혜(눅1:30, 행4:33, 몬1:3), 칭찬(눅6:32, 34), 칭송(행2:47), 은총(행7:10), 호의(행25: 3), 은사(고후9:15), 기쁨(몬1:7), 아름다움 (벧전2:19,20), 사랑스러움(눅2:52), 감사 (눅17:9, 롬6:17, 고후8:16, 골3:16).

    은사(카리스마. ) χάρισμα, ατος, τό 스트롱번호 5486

    1. 선물.   2. 은사. 3. 부여된 은총
    발음 [ charisma ]
    어원  / 5483에서 유래
    • 1. 선물, 은사, 부여된 은총, 롬11:29, 고전1:7, 딤전4:14, 벧전4:10.
    • 관련 성경  /  은사(롬1:11, 고전7:7, 딤전4:14), 선물(롬5:16).



    5월 28일(수) 느헤미야 1-2장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묵도(默禱)하고(2:4)

    왕이 내게 이르시되 그러면 네가 무엇을 원하느냐 하시기로 내가 곧 하늘의 하나님께 묵도하고.
    The king said to me, "What is it you want?" Then I prayed to the God of heaven,

    묵도(默禱) : 잠잠할 묵, 빌도 /  눈을 감고 말없이 마음속으로 빎. 또는 그런 기도(祈禱).
    영어 a silent prayer
    히브리어 파랄( pâlal ) פָּלַל 

    묵도는 찰나의 기도

    찰나(刹那) : 절 찰, 어찌나 

    • 1.  어떤 일이나 사물(事物) 현상(現象)이 일어나는 바로 그때.
    • 2. 매우 짧은 시간(時間).
          탄지경(彈指頃)보다는 짧은 시간(時間)이나, 염(念)ㆍ탄지(彈指) 따위와의 관계(關係)는 해석(解釋)에 따라 다르다.
    • 3. 탄지(彈指)의 10분의 1이 되는 수(數). 즉, 10⁻¹⁸을 이른다.
    • 4. 예전에, 탄지(彈指)의 억분의 1이 되는 수를 이르던 말. 즉, 10⁻⁸⁸을 이른다.
    • 5. 탄지(彈指)의 10분의 1이 되는 수(數)의. 즉, 10⁻¹⁸을 이른다.

    묵도는 집중(集中)의 기도

    집중(集中) : 모을 집, 가운데 중 
    • 1. 한곳을 중심(中心)으로 하여 모임. 또는 그렇게 모음.
    • 2. 한 가지 일에 모든 힘을 쏟아부음.




    네가 무엇을 원하느냐
    - 이것은 느헤미야에게 간청할 기회를 주기 위한 질문이다. 이때 아닥사스다 왕은 이미 느헤미야를 위해 어떤 배려라도 할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었던 것 갈다.

    내가 곧 하늘의 하나님께 묵도(黙禱)하고(6419)
    - 여기서 '묵도하고'(에트팔렐.  וָאֶתְפַּלֵּל)는 '간청하다' 혹은 '기도하다'의 뜻을 갖는 동사 '팔랄'(פָּלַל)의 재귀적 강의형으로서, 간절한 소원을 품고서 적극적으로 하나님께 기도로써 매어 달리는 것을 가리킨다(삼상 1:17; 왕상 8:33; 왕하 19:20; 20:2).
    느헤미야의 이 같은 기도는
    1. 자신의 소원이 아닥사스다 왕에게 정확하게 전달되며,
    2. 전달된 자신의 소원이 왕에 의해서 호의적으로 가납될 수 있기를 바래서 드려졌음이 분명하다.

    6419. 파랄( pâlal ) פָּלַל 

    1. 심판하다.  2. 피엘형
    발음 [ pâlal ]
    구약 성경  / 84회 사용
    • 1. 동사 심판하다.
      • a. 동사 피엘형
      • b. 동사 심판하다, 처형하다, 삼상2:25, 시106:30
      • c. 동사 생각하다, 가정하다, 창48:11.
      • d. 동사 힛파엘형
      • e. 동사 간섭하다, 중재하다, 신9:20, 삼상2:25,7:5, 욥42:8
      • f. 동사 간구하다, 기도하다. ㉠ [특히 하나님께] 시5:3(2), 단9:4. ㉡ [사람에게] 느1:4. ㉢ [단순한 사용] 삼상2:1, 대하7:14.
    • 관련 성경 /  뜻하다(창48:11), 판결하다(삼상2:25), 유리하게 판단하다(겔16:52), 처벌하다(시106:30), 기도하다(민 21:7, 신 11:2, 삼상1:27), 간구하다(왕상 8:33, 대하 6:24, 사 45:14), 빌다(왕상8:35, 대하6:26, 욥42:10), 묵도하다(느 2:4).
      [명] 기도(삼하 7:27, 왕상 8:29, 대상 17:25), 간구(왕상 8:54, 대하 33:13).

    묵도와 묵상의 차이점

    여기서 묵도라는 뜻과 유래를 알면 대 예배의 맨틀로는 부적합하다는 것을 알 수가 있을 것입니다.
    우리들의 너무 익숙하여 별 뜻 없이 사용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대부분 묵도라는 뜻을 [묵상기도]의 줄임말로 알고 계신 분들이 많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며 조용히 드리는 기도로 저도 알고 있었습니다.
    어떻게 보면 묵상기도의 줄임말로 사용해도 문법상 하자가 없을 것 같기도 합니다.

    그런데 묵도라는 말은 일제 잔재로서 일본인들이 신사참배를 하거나 다른 잡신을 섬길 때 잠시 묵념하는 것을 묵도라고 한답니다.

    우리 교회에서도 묵도라는 단어를 사용한 것은 일제강점기 이후입니다.
    일제강점기 이전에 서양 선교사들이 한국교회의 전통과 예식을 세워 갈 때도 묵도라는 단어는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다가 1938년 한국 기독교가 공식적으로 신사참배를 인정하고 묵도라는 단어가 예배 순서에 들어갔습니다.
    우리나라 교회가 공식적으로 신사참배를 인정하여 일본의 신사에 먼저 참배하는 묵도가 예배 순서에 들어오게 된 것입니다.
    묵도라는 단어가 우리 예배에 고착화된 것은 묵상기도와 비슷한 어감으로 준말처럼 사용했기 때문입니다.

    요즘은 많은 교회들이 [묵도]라는 단어를 주려가고 있으며 멘트 없이 바로 찬양대의 찬양을 드리는 교회들도 많습니다.
    습관화로 허전하시면 성경적인 언어 시편 1장 2절에 나오는 [묵상]으로 대체하여도 좋을 것 같습니다.
    또는 [조용히 기도하심으로]라고 풀어서 하셔도 좋을 것 같습니다.

    예배를 시작할 때 “다같이 묵도(默禱)하심으로 예배를 드리겠습니다”라는 사회자의 말은 너무나 귀에 익숙하다.
    이 말이 아닌 다른 어떤 표현으로 예배의 시작을 알릴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이 참담한 역사의 산물은 예배의 순서로 굳어지고 정형화됐다. 이렇게 오랜 세월 동안 묵도가 예배의 한 순서가 될 수 있었던 것은 묵상기도와 비슷한 어감을 가지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묵상기도는 단순히 소리를 내지 않고 드리는 기도가 아니다.
    묵상기도는 하나님의 말씀을 깊이 묵상하며 깨닫는 지적인 노력과 하나님의 말씀을 삶에 적용하고자 하는 의지적인 결단이 바탕이 돼야 한다. 감정에 치우치기보다는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자기를 되돌아보고 말씀으로 영적·내적인 성숙을 이끌어내는 것이 묵상기도이다.

    많은 교회들이 이 문제의 심각성을 공감하고 ‘묵도하심으로’라는 말의 사용을 점차 줄여가고 있다. 멘트 없이 예배의 부름을 찬양대의 찬양이나 악기의 연주로 시작하는 교회들도 있다. 하지만 습관에 의해 신사참배의 잔재인 ‘묵도’로 예배를 시작하는 교회들이 아직 많이 있다. 예배를 시작할 때 ‘묵도하심으로’라는 말 대신 성경적인 언어인 ‘묵상’(시 1:2)을 사용하거나 ‘조용히 기도하심으로’라는 말을 사용하는 게 바람직하다.




    느헤미야서는 예루살렘 성벽 재건과 유대인의 신앙 회복을 다룬 책입니다. 각 장별 주제는 다음과 같습니다:

    • 1장 : 느헤미야가 예루살렘의 파괴된 상태를 듣고 기도하며, 왕의 허락을 받아 성벽 재건을 준비합니다.
    • 2장 : 느헤미야가 예루살렘에 도착하여 성벽 상태를 조사하고, 백성들에게 재건의 필요성을 강조합니다.
    • 3장 : 성벽 재건 작업에 참여한 사람들의 명단과 그들이 수행한 작업이 기록됩니다.
    • 4장 : 외부의 방해를 극복하고, 백성들이 무장을 준비하여 성벽을 지키며 공사를 계속합니다.
    • 5장 : 가난한 백성들이 착취당하는 문제를 해결하고, 백성들에게 공의를 실천합니다.
    • 6장 : 적들의 협박에도 불구하고 성벽이 완공되며, 느헤미야는 성벽을 지킬 수비대를 조직합니다.
    • 7장 : 느헤미야는 성벽 재건이 완료된 후, 성전 봉사와 안식일 준수, 이방인과의 결혼 문제를 바로잡습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며 백성들을 바른 길로 인도하는 리더쉽의 중요성을 강조합니다.



    느헤미야 전체 요약

    느헤미야서는 바벨론 포로기 이후 예루살렘 성벽을 재건하고 공동체를 회복한 역사적 기록입니다.
    느헤미야는 제3차 포로귀환 때에 예루살렘으로 돌아왔습니다.
    느헤미야의 저자는 느헤미야 자신으로 추정되며, 기원전 5세기경 아닥사스다 왕 시대에 쓰였습니다.
    이 책은 느헤미야의 지도 아래 성벽을 재건하는 과정(1-7장)과 에스라와 함께한 율법 낭독과 신앙 개혁(8-13장)을 담고 있습니다.
    기도, 리더십, 회개, 언약 갱신 등 영적 부흥의 핵심 주제가 강조됩니다.
    느헤미야를 읽을 때는 포로 후라는 개념과 페르시아의 식민지 상태임을 전제하고 읽어야 합니다. 

    느헤미야 1장 요약

    느헤미야는 바사 왕 아닥사스다의 술 맡은 관원으로, 예루살렘에서 돌아온 형제 하나니에게 소식을 듣습니다.
    그로부터 성이 허물어지고 백성이 큰 환난과 능욕 가운데 있다는 말을 듣고 슬퍼하며 금식과 기도로 하나님께 나아갑니다(1:2-4).
    그는 민족의 죄를 자백하고, 모세에게 주신 언약을 기억해달라고 간구합니다(1:5-10).
    또한 왕 앞에서 은혜를 입게 해주시기를 기도하며, 자신의 소명을 준비합니다(1:11).

    느헤미야 2장 요약

    느헤미야는 근심한 얼굴로 왕 앞에 나아가 예루살렘의 폐허 상태를 말하며 성벽 재건을 위한 허락과 지원을 요청합니다(2:1-8).
    왕은 그의 요청을 기쁘게 허락하고, 조서를 써주며 군사 호위도 붙여줍니다.
    느헤미야는 예루살렘에 도착한 후 밤에 조용히 성벽을 둘러보며 재건 계획을 세웁니다(2:11-15).
    그는 유다 백성에게 하나님의 손이 함께 하심과 왕의 허락을 전하며 재건을 독려합니다(2:17-18).
    그러나 산발랏과 도비야는 이를 듣고 크게 분노하며 방해를 시작합니다(2:19-20).

    느헤미야 3장 요약

    예루살렘 성벽 재건이 본격적으로 시작되며, 제사장 엘리아십을 비롯한 여러 지파와 가족들이 맡은 구간별로 성벽을 건축합니다 (3:1-32). 각 문과 성벽의 일부가 공동체적으로 나뉘어 맡겨지고, 각자 자신의 집 근처를 중심으로 수고합니다. 귀족 중 일부는 참여하지 않았지만, 대다수 백성은 헌신적으로 참여하였습니다 (3:5). 느헤미야는 기록을 통해 각 작업자와 맡은 구역을 세세히 언급하며 공동체의 협력과 연합을 보여줍니다. 이 장은 성벽 재건이 단순한 건축이 아닌, 민족 회복의 상징임을 강조합니다.

    느헤미야 4장 요약

    성벽 재건이 진척되자 산발랏과 도비야는 조롱과 비웃음으로 방해합니다 (4:1-3). 느헤미야는 하나님께 간구하며 백성의 마음을 격려하고, 공사에 계속 집중하게 합니다 (4:4-6). 적들의 공격 위협이 커지자 느헤미야는 낮에는 절반은 공사하고 절반은 무장하여 경계하게 하며, 밤에는 모두 무기를 들고 경비하게 합니다 (4:16-23). 그는 "하나님을 기억하고, 가족과 집을 위해 싸우라"고 외치며 백성의 사기를 북돋웁니다 (4:14). 이러한 위기 속에서도 공동체는 하나로 뭉쳐 성벽을 계속 재건합니다.

    느헤미야 5장 요약

    성벽 재건 중 백성들은 무거운 세금과 기근으로 인해 고통을 겪으며, 부유한 유대인들에게 자녀를 종으로 팔기까지 합니다 (5:1-5). 느헤미야는 이를 크게 분노하며, 귀족들과 관리들을 책망하고 이자 받는 것을 중지시키며 토지와 자녀를 돌려주게 합니다 (5:6-13). 그는 자신은 총독으로서 백성에게 부담을 주지 않았고, 오히려 자신의 재산으로 백성을 섬겼다고 고백합니다 (5:14-18). 이 모든 것은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행한 것이라 밝히며, 자신을 기억해달라고 기도합니다 (5:15, 19). 느헤미야는 공동체 내의 정의를 세우는 일에도 헌신했습니다.

    느헤미야 6장 요약

    산발랏과 도비야 등 대적들은 성벽 재건이 거의 완성되어 가자, 느헤미야를 유인하여 해치려는 음모를 꾸밉니다 (6:1-2). 거짓 예언자들을 동원하여 느헤미야를 두렵게 하려 하지만, 그는 지혜롭게 대처하며 기도에 힘씁니다 (6:10-14). 결국 대적들이 두려워할 만큼 성벽 공사는 52일 만에 완공됩니다 (6:15-16). 그러나 도비야와 유다 귀족들 사이의 비밀 연대가 있었고, 그의 영향력은 여전히 문제로 남아 있었습니다 (6:17-19).

    느헤미야 7장 요약

    성벽이 완공되자 느헤미야는 예루살렘의 안전을 위해 문지기, 찬양대, 레위 사람을 세웁니다 (7:1-3). 그는 유다 귀족들과 백성의 계보를 조사하여, 포로에서 돌아온 자들의 명단을 기록합니다 (7:5-7). 이 명단은 스룹바벨과 함께 귀환한 사람들과 그 수, 가축, 헌금 등을 자세히 보여줍니다 (7:6-73). 백성은 자신의 뿌리를 확인하며 공동체의 정체성과 연합을 다시 확인합니다.

    느헤미야 8장 요약

    이스라엘 백성은 수문 앞 광장에 모여 학사 에스라가 낭독하는 율법을 듣습니다 (8:1-3). 레위인들은 백성이 율법을 이해할 수 있도록 해석해 주며, 백성은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울기 시작합니다 (8:7-9). 그러나 느헤미야와 에스라는 기쁨으로 여호와를 경배하라고 격려하며 초막절을 회복합니다 (8:10-17). 말씀의 회복과 절기의 실천은 공동체를 새롭게 세워갑니다.

    느헤미야 9장 요약

    이스라엘 백성은 금식하고 회개하며 죄를 자백하고 조상들의 역사를 되새깁니다 (9:1-3). 레위인들이 인도하는 기도에서는 하나님의 인도와 은혜, 백성의 반역과 하나님의 인내가 반복적으로 언급됩니다 (9:5-31). 백성은 하나님이 정의롭고 자비로우시며 언약을 지키시는 분임을 고백합니다 (9:32-33). 마지막으로 그들은 하나님의 율법을 지키기로 언약하며 문서로 기록합니다 (9:38).

    느헤미야 10장 요약

    느헤미야를 비롯한 지도자들과 백성들은 언약문서에 서명하고, 하나님의 율법을 철저히 지킬 것을 맹세합니다 (10:1-29). 이방인과의 혼인을 금하고, 안식일과 안식년을 성실히 지키기로 약속합니다 (10:30-31). 성전 유지와 제사를 위한 십일조와 헌물을 정기적으로 드리기로 서약합니다 (10:32-39). 이는 말씀 중심의 공동체를 세우기 위한 실천적 다짐이었습니다.

    느헤미야 11장 요약

    예루살렘에 거주할 사람을 제비 뽑아 10분의 1을 정하고, 나머지는 다른 성읍에 거주하게 합니다 (11:1-2). 예루살렘에 거주한 자들의 명단이 자세히 기록되며, 유다 자손과 베냐민 자손, 제사장, 레위인, 문지기 등의 수가 제시됩니다 (11:3-24). 그 외 유다 성읍들에 거주한 사람들의 목록도 정리되어 공동체 전체의 조직이 드러납니다 (11:25-36). 이는 하나님의 도성을 실제로 재건하는 일의 일환이었습니다.

    느헤미야 12장 요약

    스룹바벨 때의 제사장과 레위인 명단이 기록되고, 에스라와 느헤미야 시대의 족보도 정리됩니다 (12:1-26). 성벽 봉헌식이 열리며, 백성은 노래와 악기로 하나님을 찬양하고 감사하며 성을 돌며 기쁨을 표현합니다 (12:27-43). 레위인들과 제사장들은 예물을 정리하고 성전을 위한 직무를 정돈합니다 (12:44-47). 하나님의 일에 질서와 기쁨으로 참여하는 모습이 강조됩니다.

    느헤미야 13장 요약

    느헤미야는 잠시 바사 왕에게 돌아갔다가 예루살렘에 다시 와서 성전 내에 도비야가 거처를 차지한 것을 발견하고 그를 쫓아냅니다 (13:4-9). 레위인들이 생계를 보장받지 못해 흩어진 것을 바로잡고, 십일조 제도를 회복합니다 (13:10-14). 또 안식일을 범하는 상인들을 단호히 막고, 성문을 폐쇄하여 안식을 회복시킵니다 (13:15-22). 마지막으로 이방 여성과의 결혼을 다시 책망하고, 제사장의 정결을 회복시킵니다 (13:23-30). 느헤미야는 모든 개혁을 행하며 하나님께 기억해 달라고 기도합니다 (13:31).




    느헤미야 장별 요약

    3차 포로교환

    1장 : 유다의 범죄에 대한 느헤미야의 기도, 이 때 술관원이 됨

    2장 : 성전을 지으러 느헤미야가 유다로 감

    3장 : 유다의 예루살렘 성 중수 (낡은 건물 고침)

    4장 : 주변국의 침략대비 하면서 성을 중수

    5장 : 유다 백성의 빈곤 퇴치를 위해 이자를 낮춤

    6장 : 성벽완성

    7장 : 예루살렘에 거주하는 자손의 계수

    8장 : 에스라의 율법낭독

    9장 : 단에 올라 여호와께 부르짖으며 회개함.

    10장 : 이스라엘 자손이 모여 율법을 지키기로 맹세함

    11장 : 예루살렘성과 그 밖에 거주하게된 자손 목록

    12장 : 예루살렘으로 돌아온 레위사람들과 제사장들

    13장 : 삶을 전반적으로 정리.

    1. 제사장 직 정리 

    2.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키게 함

    3. 이방인을 떠나게 함



    느헤미야, 에스라, 포로귀환 시대, 도표와 연대를 한 눈에 바라보기


    포로 귀환 시대


    전체 관찰

    연대: B.C. 538-404

    본문: 1:1-10:44; (에스더); 1:1-13:31

    주제: 유대인들의 예루살렘 귀환

     개요

    남 유다를 정복한 신 바벨론은 느부갓네살이 통치하던 시대만 반짝 힘을 발했고, 그 이후 급격히 쇄락하여갔다. 페르시아 만 동편의 작은 나라 페르시아(바사)는 고레스 왕의 재위 중에 종주국인 메대와 바벨론까지 정복하여, 고대 근동의 새 주인이 된 고레스는 속 국민들에게 관용정책을 펼쳤다. 고레스의 칙령(스 1:2-4)으로 유다 인들이 자국으로 귀환할 수 있었다.

    유다 인들은 세 번에 걸쳐 귀환하는데, 먼저 BC 538년에 스룹바벨총독의 지도하에 4만 2천 여명의 유다 인들이 예루살렘으로 귀환했다. 유다 인들은 대적들의 조직적인 반대에도 불구하고 예루살렘성전을 재건축하여, BC 516년에 봉헌했다.

    BC 480년(스 6-7장 사이) 바사의 왕비였던 에스더는 적의 위협으로부터 유대인들을 구했다.

    1차 귀환 80년 후인 BC 458년에 아닥사스다 왕의 도움을 받은 율법 학사 에스라는 1,500명이 넘는 유다 인을 이끌고 예루살렘으로 귀환하였고, 율법 재건과 신앙 부흥에 힘썼다.

    2차 귀환 13년 후인 BC 444년에 왕의 술 관원 느헤미야는 아닥사스다 왕의 도움으로 이스라엘의 임시 총독이 되어 귀환하여 성벽 재건을 시작하여 반대 세력의 완강한 방해에도 불구하고 BC 425년 성벽을 봉헌하였다.




















    포로 귀환 시대 연대표

    구분

    연대

    성경 본문

    사건

    페르시아

    (바사)



    고레스의 통치(539-529)

    539-538

    단 5:31

    분봉왕 다리오 바벨론 통치

    538

    스 1:1,2

    고레스의 1차 귀환 조서

    538

    단 9:20-27

    다니엘의 70이레

    538

    단 6:1-28

    다니엘의 사자굴

    538

    스 2:1-70

    1차 귀환(스룹바벨)

    536

    스 3:8-13

    성전 재건 작업 1차 시작

    536

    스 4:4

    성전 재건 1차 방해

    536

    스 4:23

    성전 재건 작업 중단

    530


    다니엘사망

     

     

    캄비세스의 통치(529-523)

    526


    애굽 정복

     

     

    스메르디스의 통치(523-522)

     

     

    다리오 1세의 통치(522-485)

    520

    학 1:1; 슥 1:1

    학개, 스가랴의 사역

    520

    스 5:1

    성전 재건 작업 재개

    520

    스 5:3-17

    성전 재건 2차 방해

    520

    스 6:6-12

    다리오 왕의 성전 재건 승인 조서

     


    아하수에로의 통치(485-464)

    ?

    스 4:6

    성전 재건 3차 방해

    483

    에 1:3

    아하수에로의 잔치

    (480-479)

     

    그리스의 바사 침공(살라미스 해전)

    479

    에 2:12-18

    왕후로 간택된 에스더

    478

    에 2:21

    아하수에로 암살 음모

    474

    에 3:1-15

    하만의 책략

    473

    에 9:20-32

    부림일 제정

     


    아닥사스다 1세의 통치(464-424)

    458

    스 7:11-26

    2차 귀환 조서

    458

    스 7:1-10

    2차 귀환(에스라)

    ?

    스 4:7

    성곽 재건 1차 방해

    ?

    스 4:8-22

    성곽 재건 2차 방해

    ?

    스 4:23

    성곽 재건 중단 조서

    ?

    느 1:1-3

    성곽 재건 작업 중단

    445

    느 1:4-11

    느헤미야의 탄원

    445

    느 2:1-8

    3차 귀환 조서

    445

    느 2:9-11

    3차 귀환(느헤미야)

    444

    느 2:17,18

    성곽 재건 작업 재개

    444

    느 2:19,20

    신발랏, 도비야, 게셈의 성곽 수리 1차 방해

    444

    느 4:7,8

    성곽 수리 2차 방해

    444

    느 6:2-4

    성곽 수리 3차 방해

    444

    느 6:5-7

    성곽 수리 4차 방해

    444

    느 6:10-14

    성곽 수리 5차 방해

    444

    느 6:15

    성곽 수리 필역

    444

    느 7:5-69

    느헤미야의 1차 인구 조사

    444

    느 12:27-47

    성곽 낙성

    433

    느 2:6; 13:6

    바벨론으로 돌아간 느헤미야

    432

    느 13:6,7

    느헤미야의 2차 귀국

    435-425


    말라기의 활동

    ?


    그리심 산 성전 건립

     


    다리오 2세의 통치(423-405)

    404

     

    아테네 함락



    아닥사스다 2세의 통치(404-359)



    아닥사스다 3세의 통치(359-338)

    343


    애굽 정복



    아르소의 통치(338-335)



    다리오 3세의 통치(335-331)

    331


    바사(페르시아) 멸망




    1. 포로에서의 귀환



    귀 환

    제1차

    제2차

    제3차

    성경 언급

    에스라 1-6장

    에스라7-10장

    느헤미야1-13장

    연 대

    B.C.538

    B.C.458

    B.C.444

    지 도 자

    스룹바벨, 여호수아

    에스라

    느헤미야

    바 사 왕

    고레스(키로스)

    아닥사스다 왕

    (아르탁세륵세스,

    롱기마누스)

    아닥사스다 왕

    (아르탁세륵세스,

    롱기마누스)

    칙령의

    내 용

    돌아가기를 원하는 사람만큼 돌아갈 수 있고 성전이 재건될 수 있으며 부분적으로는 국고의 지원을 받았다. 그릇들이 돌려졌다.

    돌아갈 수 있을 만큼 돌아갈 수 있고 국고 지원이 마련되었다. 자신들이 문관을 갖도록 허용되었다.

    성벽 재건이 허용되었다.

    귀환자 수

    42,360명과 종7,337명 등 총 49,697명

    남자 1,500명과 레위인 38명, 조력자 220명

    알 수 없다.

    사 건

    업 적

    문 제

    성전 공사가 시작되고 제사를 드렸으며 장막절을 지켰다. 사마리아인의 방해로 작업이 19년간 중단되었으며, 성전은 B.C.516년에 완공되었다.

    통혼의 문제

    산발랏, 도비야 및 게셈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성벽이 52일만에 재건되었다. 성벽이 봉헌되고, 율법이 낭독되었다.














































     

    2. 에스라-느헤미야-에스더의 역사적 배경


     




    3. 남 북


    이스라엘의 포로 및 귀환 경로

    포로귀환 결론

    �� 연 대

    B. C. 538-404

    A. 본 문

    성경 읽기

    스, 느

    스1:1-10:44, 느1:1-13:31(에스더)

    B. 주 제

    본문 관찰

    유다인 들의

    귀환

    1. 1차 귀환과 스룹바벨 (스1:1-6:22)

    2. 2차 귀환과 에스라 (스7:1-10:44)

    3. 3차 귀환과 느헤미야 (느1:1-13:31)

    C. 의 미

    신학적 해석

    •성전 재건

    •신앙 개혁

    •성벽 재건

    1) 1차 귀환하여 스룹바벨에 의해 성전재건

    *학개와 스가랴 선지자와의 협력사역(스1:1-6:22)

    2) 2차 귀환하여 에스라에의해 신앙이 개혁되었다.

    *에스라는 느헤미야와 같은 시대(스7:1-10:44)

    3) 3차 귀환하여, 느헤미야에 의해 성벽재건

    *느헤미야는 말라기 선지자와 같은 연대(느1:1-13:31)

    D. 복 음

    구속사적 해석

    예수님의 초림과

    성령님의 강림

     

    1) 완전한 성전으로 살고가신 예수님

    2) 성령강림으로 복음이 믿어지게 하셨다.

    3) 구원의 조건을 보혈언약으로 세우셨다.

    E. 교 훈

    복음적 적용

    주님 만날

    준비하는 성도

    1) 희생과 헌신과 봉사로 사는 신앙

    2) 등과 기름을 준비하는 신앙

    3) 바른 교리로 무장하는 신앙





















































    중간 시대











































































































































    2025 새벽묵상 에스라

    남유다 멸망과 포로시기

    □ 주요 내용 요약

    구 분

    주 요 내 용

    앗수루 멸망

    BC 1,200년~BC609년까지 지속. 국력 쇠퇴기에 애굽과 바벨론이 앗수르 영토 패권을 놓고 다툼

    바벨론vs애굽 전쟁


    1차 갈그미스 전투

    BC 609년. 무승부. 무깃도에서 요시야 전사 → 여호아하스 즉위 → 바로느고가 폐위시킴 → 여호야김 즉위(애굽 섬김)

    2차 갈그미스 전투

    (1차 예루살렘 침공)

    BC 605년. 바벨론 승리. 느브갓네살 침공 → 여호야김 충성 맹세 → 다니엘 등 1차 포로

    주변국가의 공격

    BC 601년. 여호야김, 바벨론 배반 → 느브갓네살, 주변국가를 통해 유다 공격 → 여호야김 죽음→ 여호야긴 즉위

    2차 예루살렘 침공

    BC 597년. 여호야긴 배반 → 느브갓네살 침공 → 여호야긴 항복 → 시드기야 즉위 → 에스겔 포로(여호야긴의 온 집안 등 1만명 포함)

    3차 예루살렘 침공

    BC 588~586년. 시드기야 배반 → 느브갓네살 침공 → 시드기야 포로, 유다 멸망(BC 586년)

    포로시기

    70년(BC 605~538), 다니엘, 느브갓네살왕 및 벨사살 왕 꿈 해석

    바사, 바벨론 점령

    BC 539년. 고레스가 점령. 벨사살 죽음

    1차 포로귀환

    BC 538년. 고레스왕, 포로귀환 칙령. 스룹바벨․예수아 귀환, 성정재건 → 사마리아인 방해로 지연(16년) → 학개, 스가랴 격려로 재개 → 성전 완공(BC 516년)

    에스더 사건

    BC 483~474년. 아하수에로왕 때. 모르드개와 하만

    2차 포로귀환

    BC 458년. 아닥사스다왕, 포로귀환 조서. 에스라 귀환. 백성들을 말씀으로 회복시킴

    3차 포로귀환

    BC 445년(에스라 귀환뒤 13년후) 총독으로 귀환. 성벽 재건 → 바사 귀환뒤 다시 귀환

    말라기

    BC 430년. 성벽재건후 10년뒤. 메시아 왕국 도래하지 않음 → 레위인 타락 → 백성들 타락 → 여호와의 날 & 엘리야가 다시 옴 → 400년 침묵

    □ 상세 내용

    o 앗수르 제국 : BC 1200년~BC 609년 (약 600년) → 국력 쇠퇴기에 애굽과 신흥 바벨론은 앗수르 영토 패권을 놓고 전쟁을 벌임

    o 1차 갈그미스 전투(BC.609년)

    - 앗수르 쇠퇴 →신흥 바벨론 vs 이집트, 구 앗수르 영토 패권 다툼 → 애굽 군대(바로느고)가 갈그미스로 진격중 므깃도에서 유다와 전쟁(요시야왕 전사) → 유다 백성들, 여호아하스를 왕으로 세움 → 1차 갈그미스 전투(BC.609년) → 무승부 → 돌아가는 길에 바로느고(애굽)가 여호아하스를 폐위시키고 여호야김(여호아하스의 형)을 왕위에 세움 → 유다, 애굽의 지배하에 놓임

    o 2차 갈그미스 전투(BC 605년, 바벨론의 예루살렘 1차 침공)

    - 바로느고(애굽)와 느부갓네살(바벨론)의 격돌에서 느부갓네살 승리 → 바벨론, 예루살렘 침공, 점령 → 유다, 바벨론에 조공(여호야김, 충성 맹세) → 느브갓네살, 아버지 죽음 소식으로 귀국(다니엘과 친구 등 쓸만한 사람들을 포로로 잡아감)

    - 여호야김의 딜레마 : 이집트와 바벨론중 어느 편에 서야 하는가? (왕궁은 친 애굽파, 친 바벨론파로 나뉘어 다툼. 예레미야는 하나님이 유다 징계를 위해 바벨론을 사용하고 있으니 바벨론에 저항 말 것을 권고) → 애굽에 붙음

    o BC 601년(여호야김 사망?)

    - 여호야김은 3년간 바벨론 섬김후 배반하여 애굽 섬김(바벨론의 이집트 침공 실패 & 애굽의 지원 약속) → 바벨론은 주변 외인부대(갈대아, 아람, 모압, 암몬)를 시켜서 유다를 괴롭힘(게릴라전)

    - 이 전투중에 여호야김 사망?(BC 601년 혹은 2차 침공때 여호야긴 사망?) → 백성들은 여호야긴을 왕으로 세움

    o BC.597년(바벨론의 예루살렘 2차 침공)

    - 느부갓네살이 직접 침공 → 여호야긴 항복 → 느브갓네살이 여호야긴의 작은 아버지 시드기야(요시야의 아들)를 왕으로 세우고 여호야긴의 온 집안, 고급인력, 병력, 기능공 등 1만명(에스겔 포함)을 포로로 잡아 바벨론으로 돌아감

    * 포로시대 선지자 다니엘, 에스겔은 남유다 멸망(BC.587년) 전에 바벨론에 끌려감

    o BC 597~586년(바벨론의 예루살렘 3차 침공)

    - 시드기야, 예레미야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애굽 바로와 내통 & 바벨론 배반 → 느브갓네살, 예루살렘 침공(BC 588~586) → 시드기야, 아들들 처형당함 & 자기 두 눈이 뽑혀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감 & 유다 멸망(렘 39:2)

    o 느브갓네살 왕

    - 하나님이 ‘내 종’이라고 표현(렘 25:9). 패역한 유다를 징계하는 도구로 사용.

    - 첫째 꿈에 세계 열강의 미래를 보여주시고(포로인 다니엘이 꿈 해석)

    - 두번째 꿈(통치 기간중 34년)에 '하나님의 징계의 꿈'(순찰자가 나무를 자름)을 꾼 뒤 1년 후 정신병으로 7년을 고생 → 하나님의 긍휼로 건강 회복, 마지막 통치 기간에 하나님을 높이는 조서를 씀 → 2년간 살다가 죽음(재위 45년) → 세상 나라의 ‘니므롯’과 같았으나, 결국 하나님의 통치 아래 있음을 보여줌(느브갓네살아, 왕은 바로 나다!)

    * 바벨론 : BC 625년(나보폴라살) ~ BC539년(벨사살)(약 90년)

    o 바벨론 멸망과 바사(페르시아)의 고레스왕

    - BC 539, 바벨론 멸망, 고레스 입성

    - BC 538, 유대 포로귀환 칙령 내림

    - 기름부음 받은 자(사 45:1)

    o 포로귀환 : 1차(BC 538년) → 2차(BC458년) → 3차(BC 445년)

    o 에스라서 읽기

    - 1차 포로귀환과 성전 재건(스 1~2장, BC 538년)

    - 성전재건과 예배 회복(스 3~6장, BC 516년) - 에스더, 학개, 스가랴 포함

    ․ 스룹바벨과 예수아가 중심이 되어 성전 재건 추진 → 사마리아인들 협력 거부당하자 오히려 방해(아닥사스다 왕 재건 중단명령은 이 때 아님) → 이스라엘 백성들, 중심을 잃고 자기 농경지 돌보는데 몰두 → 성전 재건 지연(16년간 방치) → 다리오 왕, 성전 건축 재개 칙령 & 학개, 스가랴의 격려로 성전 완성(BC 516년)바사 땅에서 에스더 사건 발생(아하수에로왕, BC483~474년)

    * 페르시아 역대 왕들은 첨부 참조

    - 2차 포로귀환과 에스라 사역(7~10장) : BC 458년

    ․ 아닥사스다왕, 포로귀환 조서 → 2차 귀환

    cf. 시오니즘 : 에스라를 중심으로, 포로시기때 예루살렘(시온)의 회복을 꿈꾸며 자손을 교육시키면서 형성된 유대 공동체의식(구약 역사 전체를 의미하지 않음)

    o 에스라

    - 다니엘, 에스겔은 BC 605년경 인물들이며 에스라, 느헤미야는 BC 440년경 인물들로서, 약 160년간의 시차가 존재

    - 스룹바벨 등 1차 포로귀환자들이 예루살렘에 도착(BC 538년경)한 뒤 약 80년 후(성전 재건후 60년후)에 예루살렘에 도착)

    - 포로시대때 바사 땅에서 출생. 고레스대왕 칙령으로 이미 동포중 상당수가 예루살렘으로 떠나있는 상태. 성전은 재건되어 있으나, 율법에 능한 지도자가 없어서 백성을 말씀으로 세우지 못하고 있음. 율법에 정통한 학사인 자신이 백성을 바로 세워야 하겠다는 사명감을 가지고 예루살렘으로 떠남.

    - 예루살렘에 도착하여 귀환한 백성들을 중심으로 족장들의 계보를 조사 → 역대상하 및 에스라서 집필 → 말씀을 가르치며 사회 개혁을 주도

    - 이방인들과의 혼혈에 매우 민감하여(이스라엘의 멸망이 거기서부터 시작) 결혼한 아내까지도 방출시킴

    o 느헤미야서 읽기

    - 원전에는 에스라서와 함께 한권의 책으로 되어 있음(→느헤미야서도 에스라가 기록한 것으로 알려짐)

    - 3차 귀환과 성벽재건(느 1~7장, BC 445년)

    · 느헤미야는 에스라 귀환뒤 13년후(예루살렘 성전 재건후 약 100년뒤)에 귀환(아닥사스다 왕의 명을 받아 유다 총독으로 12년간 근무) → 예루살렘 성벽 재건 및 개혁운동후 바사로 돌아갔다가 다시 옴

    - 에스라와 느헤미야의 공동사역(종교개혁, 8~13장)

    · 율법책 낭독, 회개, 개혁을 위한 백성들의 서약, 귀환자 거주지 배정, 영적 회복 주도, 통치를 위한 인구조사, 초막절 준수, 레위인 정비 및 제사제도 확립

    <바벨론 포로 70년 계산>

    포로 70년을 신학자들 간에 다르게 계산함.

    ① 1차포로~1차포로 귀환까지(BC 605~538)

    예루살렘 1차 침공과 1차포로 시점 ~ 유대인의 귀환과 예루살렘 성전재건 명령한 고레스 왕 제1칙령까지

    ② 성전중심의 종교적 계산으로 포로 70년 나옴(루터 교)(BC 587 ~ 516)

    성전파괴 ~ 성전재건 중심의 종교적 계산으로 포로 70년 나옴

    o 말라기 : 느헤미야의 성벽 재건후 약 10년 뒤(BC 430년경)

    - 성전 재건뒤 시간이 가도 바라던 메시야 왕국(단, 겔, 학, 슥 예언)이 도래하지 않음 → 하나님 사랑과 약속 의심(말 1:2), 하나님의 공의로운 통치 의심(말 2:17) → 제사장들의 타락(제사 소홀, 계약 파기, 율법 범함) → 백성들 타락(십일조, 헌물 소홀, 잡혼과 이혼)

    - 하나님의 약속으로 끝남 (말 4~5장) : 여호와의 날에 선지자 엘리야를 보내리라(→ 신약 세례 요한) : 여호와의 날과 엘리야를 기다리며 끝남.

    역대 바사(페르시아) 왕들 계보

    o 아케메네스

    o 테이스페스

    o 고레스 1세 + 아리아람네스(고레스1세의 동생, 공동통치자)

    o 캄비세스 1세 + 아르사메스( 캄비세스1세의 사촌동생, 아리아람네스의 아들, 공동통치자)

    o 고레스 2세(고레스 대왕, BC 559~530) : 유대백성들 귀환 허락. 예루살렘 성전 재건 후원. 기름부음 받은 자(사 45:1)

    o 캄비세스 2세 : 성경언급 없음

    o 다리오 1세 (기원전 522-486) - 일명 다리우스 대왕. 다니엘에서 말하는 메대 사람 다리오와는 전혀 다른 인물. 학개, 스가랴가 다리오 1세 통치 2년에 설교 시작. 스룹바벨 성전이 이 시기에 건립

    cf. 메대 사람 다리오는 다니엘 시대의 인물로서 요세푸스의 기록에서 " 페르샤 왕 고레스와 메대 왕 다리오(Darius)는 그(나보니더스)에 대항하여 전쟁을 일으켰다. 다리오와 그의 친척인 고레스와 함께 바벨론을 함락시켜 바벨론의 통치를 끝냈을 때 그의 나이는 62세였다. 그는 아스티아게스(Astyages)의 아들이었으며, 희랍 사람들 가운데서 그는 다른 이름을 가졌다." 라고 되어있음.

    o 아하수에로 1세(크세르크세스, BC 486-465) - 에스더를 왕비로 맞은 왕.

    o 아닥사스다 1세(BC 465-425) - 에스라와 느헤미야(술관원장)를 예루살렘으로 보낸 왕. 일반적으로 에스라 임무가 아닥사스다 통치 7년째 주어졌다고 함.

    o 아하수에로 2세(BC 423) - 2개월만에 죽음(성경 언급 없음)

    o 다리오 2세(BC 423-404) - 성경언급 없음

    o 아닥사스다 2세(BC 404-359) - 학자에 따라 에스라 임무가 아닥사스다 2세 통치 7년째 주어졌다고 함.

    o 아닥사스다 3세(BC 359-338) - 성경언급 없음

    o 아르세스(BC 338-336) - 성경언급 없음

    o 다리오 3세(BC 336-330) - BC 330년 알렉산더에게 져서 죽음. 바사 멸망

    [참고]

    문제는 페르시아 고유의 기록은 거의 남아 있지 않고 그리스의 기록을 의지해야 하는 것이죠. 최근에 악메다 궁에 대한 발굴에서 고레스의 칙령과 더불어 에스더와 모르드개의 무덤이 발견되어 역사에서 찾기 어려웠던 에스더에 관한 실마리를 찾기는 했으나 어떤 이유에서인지 그 기록들을 찾기가 어렵습니다. 아마도 다니엘 때로부터 유대인들에 대한 견제가 많았고 기록을 담당했던 사람들이 다른 신을 모시던 신관들이었던 관계로 고의적인 누락이 되지 않았을까 추측 됩니다. 사실 아하수에로 1세가 에스더의 남편이었을 가능성이 가장 많기는 하지만 그것도 100% 확신 할 수는 없습니다. 실제로 가우마타의 경우처럼 신관들은 영향력이 컷고 특히나 여호와를 모시는 유대인들에게는 적대적이었습니다.

    에스라서의 기록에서 보면 왕의 연대기가 헷갈리게 기록되어 있는데 그것은 성전이 건립되기 이전 부터 이후까지의 성전 제건 방해 및 예루살램 성을 건축하는 것에 대한 방해 그리고 정확한 이유를 알 수 없는 일에 대한 방해까지를 열거해 놓아서 마치 그 방해 공작이 모두 성전에 국한 된 것처럼 오해하기 쉽게 기록되었다는 데서 문제가 생깁니다. 아닥사스다 때의 방해는 성전 건축과 상관없이 예루살렘성을 건축하는 것에 대한 방해를 말하고 있습니다.

    이제 왕은 아시옵소서 만일 이 성읍을 건축하며 그 성곽을 마치면 저 무리가 다시는 조공과 잡세와 부세를 바치지 아니하리니 필경 왕들에게 손해가 되리이다 (4 : 13)

    또한 그 당시 유대를 포함 지역의 총독이 반역을 하여 아닥사스다에 의한 예루살렘 재건이 중단되었지요. 아하수에로 왕때의 방해는 그 이유조차 불분명하게 기록되어있죠.

    이런 여러 시대(성전이 완성된 이후의 시대를 포함)에 걸친 방해를 나열 한 다음에 갑자기 다리오 2년에 성전 건축이 중단된 문장이 나오므로 오해가 생긴 것입니다.

    또 다른 가설에서 캄비세스의 동생을 사칭한 가우마타를 에스라서의 4장에서 건축을 방해한 아닥사스다로 보는 견해도 있습니다.

    바벨론 왕조

    * 함무라비시대 : 고대바벨론

    * 나보폴라살(느부갓네살)시대 : 신바빌로니아로 부른다(BC 625-538).

    Ⅰ. 나보폴라살과 느부갓네살

    나보폴라살은 BC625년에 바벨론 왕이 되면서 갈데아 왕조를 세운다. 앗수르 군대를 패배시킴으로(BC609년) 대제국의 주인이 된다. 그는 일찍이 통치 초기에 왕궁수리와 더불어 아들 느부갓네살에게 왕권을 선포. 이 둘은 앗수르 왕이 하란에서 항복하던 시기에 함께 있었고 여기서 나보폴라살은 바벨론으로 갔고 느부갓네살은 3개월 동안 성을 약탈, 불 지르면서 전쟁의 선봉에 섰다.

    이때 앗수르 멸망과 더불어 이집트 왕 바로느고는 자기의 세력을 위해 갈그미스로 올라와 느부갓네살과 전쟁을 하게 되는데 이 과정에서 유다 왕 요시아가 바로느고와 싸우러 나갔다가 므깃도에서 죽게 된다.(대하35:20-24) 이로 인해, 유다는 잠시 이집트의 영향 아래 들어가게 되며 바로느고는 요시아 뒤를 이은 여호아하스를 3개월 만에 폐위시켜 이집트로 잡아가고 그의 형제 여호야김(=엘리야김)을 왕위에 앉힌다.(대하36:1-4)

    Ⅱ. 바벨론의 왕성 (BC 605-562년)

    초대 왕 나보폴라살의 뒤를 이은 그 아들 느부갓네살은 다니엘이 예언한 금 머리처럼 그의 43년간의 통치기간은 황금시기를 이루었다. 그리고 이집트의 세력을 시리아와 팔레스틴에서 일소해 버리고 오리엔트 상업의 이권을 차지하였다. 이때의 유다도 이집트의 영향 아래 있다가 바벨론으로 넘어가 마침내 느부갓네살에게 멸망하여 수많은 백성들이 세 차례에 걸쳐 유배되었다.

    이에 이집트는 두로 시돈 등 유다 주위의 여러 나라를 원조하여 동맹을 맺게 하고 바벨론에 대항케 했으나 바벨론으로 하여금 이집트의 국경선까지 세력을 확정시켜 주는 결과를 초래했다. BC 568년 이집트를 침략하고 그리고 대항한 여러 약소국들은 점령되어 엄벌을 받았으며 지형적으로 견딜 수 있었던 두로만이 포위 13년 만에 종주권을 인정받았을 뿐 이집트조차도 나일 강까지 후퇴할 수밖에 없었다.

    1) BC585년 : 메데인과 리디아인 사이에 휴전을 중재함

    2) 두로 13년간 포위

    3) BC 568년 이집트 침략

    바벨론을 1세기도 못되어 당시 세계 제일의 강대국으로 성장시킨 느부갓네살은 군소국가의 정복과 상업독점으로부터 들어오는 막강한 재정으로 제국을 번영으로 이끌었다. 당시 느부갓네살은 수도인 바벨론에 신전과 제단을 쌓았는데 신들의 여왕인 이시타르를 위한 제단을 180곳에 세웠으며 고대의 7대 불가사의의 하나인 공중정원을 세우기도 했다.

    Ⅲ. 느부갓네살과 예루살렘 파괴(BC 605-562년, 43년간 통치)

    갈그미스 전투는 느부갓네살이 이집트 세력을 꺽고 제국의 영토를 확장하는 중요한 전쟁이었다. 이 대규모 전쟁에서 이집트는 크게 패배(BC 605). 이 과정에서 느부갓네살은 예루살렘으로 진군해 여호야김을 굴복시키고 백성중 일부를 포로로 잡아간다. 이때 선지자 다니엘도 잡혀간다.

    느부갓네살은 이집트까지 진군해 가기 원하지만 나보폴라살의 죽음으로 회군하여 바벨론으로 돌아갔다. 이미 느부갓네살은 바벨론 제국의 서편에 통치권을 쥐고 있었으며 아버지 죽음으로 제국 전체의 주인이 된다. 그 후 팔레스타인 지역에서 일어난 반란을 진압했는데 여호야김도 바벨론에 반역하였기에 느부갓네살에 의해 비참한 죽음을 맞게 된다. 느부갓네살은 고대 바벨론을 위대하게 제건했으며 43년간 통치하다가 BC562년에 생을 마감하였다.

    Ⅳ. 느부갓네살 이후의 왕들과 바벨론 멸망

    (1) 에윌므로닥(렘 52:31-34, 왕하 25:27-30)

    ① 유다 왕 여호야긴을 석방시켜준 왕

    ② 2년을 치리한 후 느부갓네살 사위 네리그릿살의 주축이 된 모반자들에게 죽임 당함.

    (2) 네리그릿살 : 4년을 치리한 후 BC 556년 전쟁에서 죽음

    (3) 라보로소 알코드 : 네리그릿살 아들(저능아) 1년도 못되어 맞아 죽는다.

    (4) 나보니두스

    ① 느부갓네살의 또 다른 사위로서 왕위 찬탈

    ② 네리그릿살의 아내와 결혼하여 바벨론 멸망(BC 555-538)까지 치리한다.

    (5) 벨사살왕(바벨론 마지막 왕)

    나보니두스의 아들이자 섭정왕. 주의 성전에서 가져온 기명들로 술잔치를 벌일 때 하나님의 손이 나와 멸망을 기록했으며 그날 밤 벨사살은 살해당했고 바벨론은 멸망했다(단5장, BC 538년 멸망)

    나보니두스는 전쟁터(페르시아와 전쟁)에 나가 있었고 벨사살은 왕궁에 있으면서 대규모 연회를 가진 그날 밤 바벨론 도성은 이미 포위된 상태. 고레스는 바벨론 성읍으로 들어가는 물줄기를 차단함으로 그 성을 무너뜨렸다. 세속 역사 속에는 나보니두스가 마지막 왕으로 되어 있고 벨사살은 제시되어 있지 않다. 아버지 나보니두스와 공동통치









    하나님께서는 바벨론 포로
    제 1차 귀환 때 /
    성전을 건축하게 하심으로써 유다 백성을 구속사의 주역으로 다시 회복시켜 주셨습니다.
    제 2차 귀환 때 / 에스라 선지자의 개혁을 통하여 내면적인 신앙 회복을 이룩하게 해 주셨습니다.
    제 3차 귀환 때 / 성벽 재건을 통하여 외부로부터의 공격을 차단하고, 개혁과 부흥 운동을 통하여 선민의 성결함을 회복시켜 주셨습니다.


    바벨론 포로 1차 귀환

    이스라엘 백성은 주전 605년, 597년, 586년 세 차례에 걸쳐서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갔으나, 하나님께서는 무조건적인 은총을 베푸사 약속하신 대로 이스라엘 백성이 다시 예루살렘으로 돌아오도록 허락하셨습니다(렘 29:14). 이스라엘 백성의 귀환은 이사야 선지자의 예언(사44:28, 45:1-3)과 예레미야 선지자의 예언(렘 25:11-12, 29:10, 14)대로, 바사(페르시아)왕 고레스가 귀환을 허락하는 칙령을 발표함으로 시작되었습니다(대하 36:22-23, 스 1:1-4). 이때부터 바사(페르시아) 제국 각처에 흩어져 있던 유다 포로들은 포로생활을 청산하고 3차에 걸쳐 돌아오게 됩니다. 제 1차 귀환은 주전 537년에 이루어졌습니다.

    1. 귀환 목적과 시기
    (1) 목적
    바사 왕 고레스는 주전 538년에 귀환 조서를 내려 “하늘의 신 여호와께서 세상 만국으로 내게 주셨고 나를 명하사 유다 예루살렘에 전을 건축하라 하셨나니 ... 너희 중에 무릇 그 백성 된 자는 다 유다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서 거기 있는 여호와의 전을 건축하라”라고 공포했습니다(스 1:2-3, 참고-대하 36:22-23). 이에 유다와 베냐민 족장들과 제사장과 레위 사람들을 비롯하여 하나님의 감동을 받아 성전을 건축하고자 하는 자들이 다 일어났습니다(스 1:5).


    하나님께서 고레스의 마음을 감동시키시어 성전 건축을 명하게 하신 것은 “여호와께서 예레미야의 입으로 하신 말씀을 응하게 하시기 위한” 것이었습니다(스 1:1). 바벨론 포로 귀환에 대하여 예레미야는 성전 회복과 그것을 통한 예배의 회복을 자세히 예언하였습니다. 이방인에게 성전이 짓밟히는 수치를 당한 것(렘 51:51)을 하나님께서 보수하시고(렘 50:28, 51:11), 다시 성전에서 제사를 드리게 될 것이라고 예언하였습니다(렘 33:10-11, 18). 바벨론에서 돌아온 귀환민들의 최우선 과제는, 성전을 재건하고 성전을 중심하여 하나님께 예배드림으로써 선민으로서의 정체성을 회복하는 것이었습니다.

    (2) 시기
    하나님께서는 예레미야 선지자를 통해 바벨론 포로 생활이 70년이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는데(렘 25:11-12, 29:10), 이에 대해 역대하 36:21에서는 “이에 토지가 황무하여 안식년을 누림같이 안식하여 칠십 년을 지내었으니 여호와께서 예레미야의 입으로 하신 말씀이 응하였더라”라고 말씀하였습니다. 이스라엘의 불순종으로 안식하지 못했던 토지가 안식년을 누림같이 안식하게 된 것입니다.
    바벨론 포로 기간 ‘70년’은 실제 포로로 잡혀 간 때와 귀환하여 성전 건축을 시작한 때를 중심으로 볼 때 말씀대로 정확히 성취되었습니다. 제 1차 포로는 여호야김 3(혹은 4)년(느부갓네살 원년), 곧 주전 605년입니다(왕하 24:1, 렘 25:1, 참고-단 1:1-2). 제 1차 포로 귀환령이 내려진 것은 고레스 원년인 주전 538년으로,  귀환조서를 내린 다음(스 1:2-3), 이 명령을 따라 얼마 동안 귀환준비를 한 유대 민족은 1년 뒤인 주전 537년 마침내 예루살렘으로 돌아오게 되었습니다(스 1:5, 11, 3:1). 그리고 성전 건축을 시작한 것은 주전 536년 2월(시브월)입니다(스 3:1, 8). 그러므로 제 1차로 바벨론에 끄렬간 주전 605년에서 성전을 짓기 시작한 주전 536년까지 햇수로 70년이 정확히 성취된 것입니다.

    2. 귀환자와 귀환 당시 상황
    (1) 귀환자
    제 1차로 귀환할 때의 지도자는 스룹바벨과 예수아(여호수아)였으며, 총 49,897명이 귀환했습니다(스2:64-66).

    귀환자
    총인원
      49,897명  

     회중 42,360명 (스 2:1-64, 느 7:5-66)
     지도자 11명, 평민 15,604명(가계별), 평민 8,540명(지역별), 제사장 4,289명,
     느디님 사람과 솔로몬 신복의 자손 392명, 레위인 341명,

     종족과 계보가 불명확한 자 652명,  
     계수에 포함되지 않은 사람 12,531명 

     노비 7,337명 (스 2:65, 느 7:67)

     노래하는 남녀 200명 (스 2:65, 느 7:67. 245명으로 기록)

    또한 에스라와 느헤미야는 제 1차 귀환자 명단을 기록하면서, 귀환할 때 가지고 온 짐승들의 숫자까지 자세히 기록하였는데, 말 736마리, 노새 245마리, 약대 435마리, 나귀 6,720마리로 모두 8,136마리였습니다(스 2:66-67, 느 7:68-69). 이 짐승들의 수치를 귀환자 중 ‘온 회중’의 숫자(42,360명. 스 2:64, 느 7:66)와 비교해 보면, 대략 다섯 사람에 짐승이 한 마리 정도입니다(5인 기준 한 가족 당 1마리).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할 때에도 “양과 소와 심히 많은 생축”이 함께하였습니다(출 12:38). 하나님께서는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올 때도 짐승들과 같이 오게 하심으로 하나님께 제물을 드릴 뿐만 아니라 일상생활에서도 어려움이 없도록 지극한 사랑으로 돌보아 주셨습니다. 이렇게 귀환민들 뿐 아니라 각 생축들의 숫자까지도 정확하게 기록된 것은 귀환의 모든 과정에 하나님의 손길이 구석구석 미치지 않은 곳이 없으며, 하나님께서 만물을 하나하나 빠짐없이 주관하시고 섭리하셨음을 나타냅니다(롬 11:36).

    (2) 귀환 때 가지고 나온 재물
    유다인들이 귀환할 때, 그들이 거하는 주변의 이웃들이 은 그릇, 황금, 기타 물건, 짐승, 보물로 도와주었으며, 그 외에도 그곳 주민들이 하나님께 자원하는 예물을 드리기까지 하였습니다(스 1:4, 6).


    또 고레스 왕은 옛적에 느부갓네살 왕이 예루살렘에서 옮겨다가 자기 신들의 당에 두었던 여호와의 전 기명을 돌려보냈는데, 유다 목백(牧伯) 세스바살이 그 기명들을 가지고 돌아올 때 금반 30, 은반 1,000, 칼 29, 금대접 30, 그보다 차(次)한 은대접 410, 기타 기명 1,000으로 도합 5,400이었습니다(스 1:7-11). 이는 제 1차 귀환자들이 신분에 관계없이 최선을 다해 하나님의 선전 건축 역사를 위해 몸과 마음을 다해 헌신하였음을 말해 줍니다.

    (3) 귀환 계기
    다니엘 선지자는 당시 세계의 패권을 쥐고 있던 강대국 바사의 총리로 있으면서 메대 왕 다리오 시대뿐만 아니라 바사 왕 고레스의 시대까지 형통하였습니다(단 6:28). 이 말씀을 볼 때, 다니엘이 정치적으로 바사 제국의 기틀 확립에 영향을 끼쳤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다니엘은 메대의 다리오 통치 원년에 “예루살렘의 황무함이 칠십년 만에 마치리라”라고 했던 예레미야 선지자의 예언의 말씀을 깨달았으므로(단 9:2), 귀환 1년 전(주전538년) 고레스가 유다인의 해방을 공포한 일에 간접적으로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추정됩니다(대하 36:22, 스 1:1, 5:13).


    한편 다니엘 선지자는 고레스 왕 3년에도 바사 제국에 남아 활동하고 있었습니다(단 10:1). 그런데 다니엘 1:21에서는 다니엘의 최종활동 시기를 고레스 3년이라고 하지 않고 “다니엘은 고레스 왕 원년까지 있으니라”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 기록 또한, 고레스가 귀환 조서를 발표(스 1:1-4)하는데 다니엘이 어떤 영향력을 행사한 것임을 능히 추정케 합니다.

    (4) 성전 건축의 과정
    출애굽 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우선적으로 성막을 완성한 것처럼, 바벨론에서 귀환한 백성도 오직 성전 건축을 열망하였습니다.


    주전 537년 귀환한 백성들은 옛 성전이 있던 터 위에 단을 세우고(스 2:68, 3:3) 아침 저녁으로 번제를 드리고 초막절을 지키고 성전 지을 준비를 하였습니다(스 3:1-7).


    주전 536년 2월에 마침내 성전의 지대를 놓고 성전 건축 역사를 시작하였습니다(스 3:8-13). 그러나 사마리아인들이 집요하게 성전 재건을 방해했기 때문에 성전 건축은 중단되고 말았습니다. 왕에게 조언을 하던 자들(모사)이 사마리아 사람들에게 뇌물을 받고 유다인들을 참소했던 것입니다(스 4:5).


    그 후 성전 건축은 약 16년 동안 중단되었다가(주전 536-520년), 주전 520년 하나님께서 학개 선지자와 스가랴 선지자를 통해, 스룹바벨과 여호수아를 비롯한 백성들의 마음을 감화하여 흥분시키므로, 다리오 왕 제 2년 6월 24일에 재개되었습니다(스 5:1-2, 학 1:14-15, 참고-슥 4:6-10). 이 시기에 스가랴 선지자는 성전 건축의 진정한 의미가 ‘메시아의 도래와 그의 왕국을 맞이하는 데 있음’을 밝히면서(슥 9-14장) 유다 백성의 바른 신앙 회복을 촉구하였습니다.


    성전은 주전 516년(다리오 왕 제 6년) 아달월(12월) 3일, 약 4년 5개월 만에 마침내 완성되었습니다(스 6:15). 이것은 주전 586년에 예루살렘 성전이 파괴된 후 무려 70년만의 일로, ‘70년’만에 귀환한다는 예언이 어김없이 성취된 것입니다(렘 25:11-12, 29:10).



    바벨론 포로 2차 귀환

    제 1차 바벨론 포로 귀환이 있은 지 79년 후인 주전 458년에 학사 겸 제사장 에스라의 지도하에 제 2차 귀환이 있었습니다. 예루살렘 성전이 건축되었음에도 거룩한 선민 공동체로서 합당한 모습을 갖추지 못하고 있었던 유다인들에게, 2차 귀환을 통해 인적·물적으로 큰 지원이 이루어지고, 에스라의 대대적인 개혁 운동으로 유다인들 내부의 영적 문제들을 해결해 나가면서 신앙을 회복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1. 귀환 목적과 시기
    (1) 목적
    ① 성전을 중심으로 한 언약 신앙의 공동체를 온전히 회복하기 위함입니다.
    바벨론을 출발한 에스라는 귀환자들을 조사한 결과, 그 가운데 성전 제사에서 중추적 역할을 감당해야 할 레위인이 귀환에 전혀 응하지 않았음을 알고(스 8:15), 성전 봉사자들을 모았습니다. 하나님의 선한 도우심으로 38명의 레위인이 확보되었고 레위 사람을 수종들게 한 느디님 사람 중에 220명을 데려왔으며 그들의 이름을 다 기록하였습니다. 에스라 8:16-20에서 보듯이 제 2차 귀환에 동참할 레위인들과 느디님 사람들을 모은 사실을 중점적으로 기록한 것은, 제 2차 귀환의 궁극적인 목적이 성전을 중심하여 하나님을 섬기는 언약 신앙의 공동체가 온전히 회복되게 하려는 데 있었음을 가르쳐 줍니다.

    ② 성전 제사의 회복에 필요한 큰 물질을 보충하기 위함입니다.
    에스라는 바사의 왕과 모사들이 하나님께 드리는 은금과 바벨론 온 도에서 은금을 얻었고, 또 바사에 있는 이스라엘 무리와 제사장들이 드린 예물을 받았습니다(스 7:15-16, 8:25-27). 그 예물로는 각종 제사에 쓰이는 제물과 전제의 물품을 구입하도록 했습니다(스 7:17). 또한 성전에서 하나님을 섬기는 데 필요한 기명을 받았고, 그 외에도 성전에서 필요한 무엇이든지 왕의 내탕고에서 가져가라는 파격적인 허락과 함께 하나님의 전에서 일하는 자들에게는 조공과 잡세와 부세를 받지 않도록 하라는 명을 받았습니다(스 7:18-20, 23-24). 이러한 조치들로 귀환자들의 공동체가 성전을 중심으로 하나님을 섬기는 데 필요한 재정적인 뒷받침이 이루어지게 되었습니다.

    ③ 에스라로 하여금 하나님의 율법을 가르치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에스라는 아닥사스다 왕으로부터 종교 지도자로서 율법을 가르치라는 명령과, 행정 지도자로서 왕이나 유사와 같은 역할을 할 수 있는 큰 권세까지 부여받았습니다(스 7:25-26).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로 왕의 적극적인 지원에 힘입어(스 7:27-28), 에스라는 제 2차 귀환의 지도자로서 하나님의 말씀으로 개혁 운동에 박차를 가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2) 시기
    이스라엘 백성은 주전 458년 바사(페르시아) 왕 아닥사스다 1세(주전 464-423년) 때 제 2차 귀환을 하였습니다(스 7:7-9). 이때는 제 1차 귀환 후 79년이 지났을 때이고, 예루살렘 성전이 재건(주전 516년)되고 58년이 지난 때였습니다.

    (3) 귀환 계기
    아하수에로 왕(주전 486-465/464년)이 통치하던 시기에 발생한 ‘에스더 사건’은 제 2차 바벨론 포로 귀환을 준비케 하시는 하나님의 절대적인 섭리의 결과였습니다.


    당시 아하수에로 왕이 가장 높은 지위에 올렸던 아각 사람 함므다다의 아들 ‘하만’은, 자신에게 절하지 않는 유다인 ‘모르드개’와 그의 민족인 ‘유다 민족’을 말살할 계획을 세웠습니다. 에스더의 사촌 모르드개는 이 모든 일을 알고 굵은 베옷을 입고 성중에 나가서 대성통곡을 하고 각 지방의 유다인도 애통하여 금식하며 부르짖었습니다(에 4:1-3). 자초지종을 알게 된 왕후 에스더에게 모르드개는 “네가 왕후의 위를 얻은 것이 이때를 위함이 아닌지 누가 아느냐”(에 4:13-14)라고 전했습니다. 에스더는 3일 동안 금식의 기한을 정해놓고 수산에 있는 모든 유다인들도 금식하도록 부탁하였습니다(에 4:15-16).


    에스더는 누구든지 왕의 부름 없이 안뜰에 들어가면 죽는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죽으면 죽으리이다’ 하는 일사각오로 왕께 나아갔습니다(에 4:16). 왕과 하만을 초대한 잔치 자리에서 에스더는 유다인들이 하만에 의해 진멸될 위기에 있음을 왕에게 알렸고, 왕이 심히 노하여 하만과 그 일가를 완전히 진멸하게 되었습니다.  결국 하만이 모르드개를 죽이기 위해 만든 50규빗(약 22.8m) 되는 나무에 하만 자신이 달려 죽었고, 하만이 유다인들을 말살할 날로 정한 12월 13일과 14일은 유다인 대적의 최후의 날이 되고 말았습니다(에 7-9장). 그리하여 해마다 12월 14일과 15일을 명절로 지키도록 하였는데, 유다인들을 없애기 위해 뽑았던 제비를 뜻하는 ‘부르’라는 말을 따라, 이 두 날을 ‘부림’이라 부르게 되었습니다(에 9:20-28). 


    바사 제국 127도에 흩어져 있던 유다 전 민족이 몰살당할 뻔했다가 하나님의 절대 주권 섭리 가운데 기적적으로 구원을 받은 이 사건이, 제 2차 포로 귀환의 중요한 계기가 되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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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귀환자와 귀환 당시 상황
    (1) 귀환자
    에스라는 ‘왕에게 구하는 것은 다 받는 자’로서(스 7:6), 아닥사스다 왕은 조서를 통해 “우리나라에 있는 이스라엘 백성과 저희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 중에 예루살렘으로 올라갈 뜻이 있는 자는 누구든지 너와 함께 갈지어다”(스 7:13)라고 공포하고, 에스라를 ‘왕과 일곱 모사의 보냄을 받은’ 사람이라고 기록하여 에스라의 권한을 강하게 해 주었습니다(스 7:14).

    (2) 귀환 때 가지고 나온 재물
    바사의 왕과 모사들과 방백들과 또 바사에 있는 이스라엘 무리가 하나님의 전을 위하여 드린 은과 금과 기명들을 에스라가 제사장 12인에게 달아 준 것은, 은 650달란트(22,100kg), 은 기명 100달란트(3,400kg), 금 100달란트(3,400kg), 금잔 20개(1천 다릭, 8.4kg: 금잔 1개당 420g), 아름답고 빛나 금같이 보배로운 놋그릇 2개였습니다(스 8:25-27, 참고-스 7:15-16).


    제 2차 귀환자들은 아하와 강가에서 금식하며 평탄한 길을 하나님께 간구하였습니다(스 8:21). 그리고 1월 12일에 아하와 강을 떠나 마침내 예루살렘에 도착하였습니다(스 8:31). 아닥사스다 왕 제 7년 1월 1일 바벨론에서 출발하여 5월 1일에 도착했으므로 약 4개월이 걸린 것입니다(스 7:9). 실제 여행 거리는 약 1,500km가 넘는 험한 노정이었지만, 하나님의 선하신 손이 귀환하는 자들을 도우셔서, 대적과 길에 매복한 자의 손에서 건져주셨습니다(스 8:31).

    (3) 에스라의 개혁 운동
    ① 학사 겸 제사장 에스라
    제 2차 귀환의 지도자 에스라(뜻:여호와께서 도우신다)는 대제사장 아론의 후손으로(스 7:1-6, 참고-대상 6:3-15, 49-53) 제사장이었으며 학사(서기관)를 겸한 지도자였습니다(스 7:6, 11, 12, 21, 10:10, 16). 에스라는 바사 왕 아닥사스다가 즉위한 해인 주전 464년에 활동을 시작한 것으로 보이며(스 7:1, 6), 1차 귀환 시기의 대제사장 여호수아의 아들 요야다(느 12:10, 26), 3차 귀환의 지도자 느헤미야의 활동 시기에도 함께 사역을 하였습니다.


    에스라는 바벨론에서 출생하였지만 모든 기득권을 버리고 귀환하여 “여호와의 율법을 연구하여 준행하며 율례와 규례를 이스라엘에게” 가르치기로 결심한 율법에 익숙한 학사 겸 제사장(스 7:6, 10)으로, 국가적 대혼란 시기에 유다 역사에 변화의 첫 물꼬를 튼 위대한 개척자였습니다.

    ② 에스라의 개혁 운동
    바벨론에서 귀환한 에스라는, 백성과 제사장과 레위인이 이방과 결혼하고 방백과 두목이 앞장서서 이스라엘 백성을 이방과 혼잡시키는 것을 알고, 그 죄를 걸머지고 자복했습니다. 그때 많은 백성이 심히 통곡하며, 이방 여인과 그 소생을 내어 보내기로 결단하고 하나님과 언약을 세우며 하나님의 진노가 떠나기를 바랐습니다(스 9:1-15, 10:1-14).


    10월 1일부터 1월 1일까지 석 달간 대제사장, 제사장, 레위인, 노래하는 자, 이스라엘 중에서 이방 여인과 통혼한 자들에 대한 조사를 마치고 그 명단을 낱낱이 공개하였습니다(스 10:16-44). 이 명단을 보면, 백성보다 지도자들 가운데 죄가 더 크게 만연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스 9:2). 또 에스라 10:44에는 “... 그 중에 자녀를 낳은 여인도 있었더라”라고 했으니, 이 개혁으로 인해 많은 사람이 아내뿐만 아니라 자녀와도 생이별해야 하는 쓰라린 아픔을 감수해야 했습니다. 하나님의 구속 경륜을 이루기 위해 말씀의 뜻대로 하는 개혁은, 육정을 끊는 아픔까지도 능히 참고 견디며 이겨 내야 하는 것입니다(마 10:37).

    제 1차 귀환 이후 어렵게 성전 건축을 마치고도 타락의 길을 걷고 있던 자기 백성을 위해, 하나님께서는 제 2차 귀환과 함께 학사 겸 제사장 에스라를 바벨론에서 예루살렘으로 불러 올리셨습니다(스 7:6-9). 하나님께서는 에스라를 통해 온 백성이 회개하고 각성하여 믿음의 순수성을 회복할 수 있도록, 크신 긍휼과 사랑을 베풀어 주셨던 것입니다.



    바벨론 포로 3차 귀환

    하나님께서는 바벨론 포로 제 1차 귀환 때 성전을 건축하게 하심으로써 유다 백성을 구속사의 주역으로 다시 회복시켜 주셨습니다.
    제 2차 귀환 때는 에스라 선지자의 개혁을 통하여 내면적인 신앙 회복을 이룩하게 해 주셨습니다.
    이제 제 3차 귀환 때는 성벽 재건을 통하여 외부로부터의 공격을 차단하고, 개혁과 부흥 운동을 통하여 선민의 성결함을 회복시켜 주셨습니다.

    1. 귀환 목적과 시기
    (1) 목적
    제 3차 귀환은 느헤미야를 유다 땅의 총독으로 세워, 예루살렘 성벽을 중건케 하고 유다 공동체의 질서를 세우기 위함이었습니다(느 2:5-8, 5:14, 13:6). 제 1차 귀환과 제 2차 귀환은, 제 3차 귀환 때 이루어진 성벽 재건과 개혁 운동으로 결실을 맺게 되었으며, 유다는 다시 구속사를 이끌어 갈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면모를 갖추게 되었던 것입니다.

    (2) 시기
    아닥사스다 왕 20년(주전 444년. 느 1:1, 2:1), 제 2차 귀환(주전 458년) 이후 14년째에 제 3차 귀환이 이루어졌습니다.


    아닥사스다 왕의 술 맡은 관원장이었던 느헤미야(느 1:11)가 형제 하나니를 통해 예루살렘 성이 훼파되고 성문들이 소화되었다는 소식을 들은 것은 아닥사스다 왕 제 20년 기슬르월(9월)이었고(느 1:1-3), 느헤미야가 왕에게 예루살렘 성벽 중건을 허락해 달라고 호소한 것은 아닥사스다 왕 제 20년 니산월(1월)이었습니다(느 2:1). 시간 순서상 9월 다음에 10월~12월이 지나 다음해 1월이 오기 때문에 1월은 아닥사스다 왕 제 21년이 되어야 하지만 느헤미야서에서는 티쉬리(7월) 기준 달력을 사용했기 때문에 ‘아닥사스다 왕 20년 니산월’이라고 표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구속사 자료 ‘통치 연대 계산에 필요한 이해 2’ 참조)


    또 한 가지, 에스라 7:7에서 2차 귀환년도를 ‘아닥사스다 왕 7년’으로 표기해 2차 귀환년도가 마치 주전 457년인 것처럼 보이나, 이것은 느헤미야서가 티쉬리월 기준 달력을 쓰고 에스라서가 니산월 기준 달력을 쓰기 때문에 생긴 연도 차이입니다(느 1:1, 2:1, 학 1:15, 2:10, 스 4:24).

    2. 귀환자와 귀환 당시 상황
    (1) 귀환자 
    제 3차 귀환 시에 몇 명이 돌아왔는지 정확한 기록은 없고, 느헤미야 한 사람이 바사 왕 아닥사스다에 의해 유다 총독으로 임명되어 예루살렘에 보내진 것으로 기록하고 있습니다(느 2:5-8, 5:14). 아닥사스다 제 20년부터 32년까지 12년 동안 유다 총독으로 이스라엘 백성과 함께하면서(느 2:1, 5:14, 13:6), 그들의 정착과 신앙개혁을 힘있게 이끌었습니다.

    (2) 귀환 계기
    당시 유다는 바사 제국에서 파견된 총독의 관할 지역에 속해 있었던 관계로, 성벽을 짓는다는 것은 곧 반란이나 폭동을 계획하고 있는 것으로 오인될 수도 있는 일이었습니다. 아닥사스다 왕은 방백 르훔(사마리아 총독)과 서기관 심새를 중심한 강 서편의 아닥사스다의 신하들의 고소장을 받고(스 4:6-16) 예루살렘 성곽 공사를 중단시켰습니다(스 4:17-23). 이 때 대적들은 부분적으로 세워졌던 성벽을 무너뜨리고 분명히 불을 질렀을 것입니다.


    아닥사스다 20년 기슬르월에 느헤미야가 예루살렘 성이 훼파되고 성문들이 불타 버렸다는 소식을 듣고(느 1:1-3) 아닥사스다 20년 니산월까지 4개월이나 나라와 민족을 위해 슬퍼하며 금식하며 기도하였습니다(느 1:4-2:2). 마침내 하나님의 선한 손의 도우심으로(느 2:8, 18), 아닥사스다 왕에 의해 유다의 총독으로 임명되어 예루살렘에 이르러 성벽을 중건하게 되었습니다. 성벽 재건을 심하게 방해했던 왕은 느헤미야의 간청을 듣고 귀환을 허락했을 뿐 아니라 적극적으로 예루살렘 성벽 중건을 도와주었습니다(느 2:3-8). 왕이 자기가 내렸던 조서를 번복해서 다시 조서를 내리는 일은 하나님의 크신 섭리가 아니고서는 불가능한 것입니다.

    (3) 성벽 재건의 끊임없는 방해 공작
    귀환한 느헤미야는 성벽 재건 공사를 시작하였지만, 끊이지 않는 대적들의 심각한 훼방과 위협으로, 성벽 공사는 결코 쉽지 않은 과제였습니다.


    ① 내부 귀환자들 중의 방해 세력
    ▸ 담부(擔負. 등에 지고 어깨에 멤)치 않은 드고아 귀족들(느 3:5) - 드고아에 거주하던 유대인 귀족들은 성벽을 쌓는 데 있어서 무거운 짐을 나르지 않았습니다. 구속 사역의 가장 중대한 때에, 주의 일보다 자신들의 체면을 앞세운 것입니다.
    ▸ 예루살렘 근처에 있으면서 성벽 재건에 협조하지 않은 귀환자들(느 4:12) - 성벽 재건은 지역을 초월해서 이루어졌는데(느 3:2-18), 예루살렘 근처에 살면서도 자기 신변의 안전만 먼저 생각한 자들이 있었습니다.


    ② 대적들의 방해 공작 – 성벽 재건 초기
    느헤미야가 치밀하게 성벽 전체를 42구역으로 나누어 조직적으로 공사를 진행하자(느 3:1-32), 산발랏과 도비야 등의 대적들은 “저들의 건축하는 성벽은 여우가 올라가도 곧 무너지리라”라며(느 4:3) 유다 민족을 조롱하고 노골적으로 방해했습니다(느 4:1-4).


    ③ 대적들의 방해 공작 – 성벽 공사 절반 진행
    공사가 빠르게 진행되자(느 4:6), 대적들이 군사적 방법까지 동원하려 했습니다(느 4:8, 11). 큰 위기에 직면하자 유다 백성들은 심리적으로 크게 위축되어 사기가 떨어지고 말았습니다(느 4:10).


    ④ 느헤미야의 빈틈없는 작전(성벽 건축과 병행한 철통 수비태세)
    대적들의 위협이 더욱 구체적이고 직접적으로 다가오자 느헤미야는 치밀한 계획을 세우고 신속하게 실행에 옮겼습니다.


    ▸ 건축 공사와 함께 전쟁 무기 준비를 병행(느 4:16-17)
    ▸ 전쟁 시 신호와 군사 집결을 위해 나팔 부는 자가 느헤미야 곁에 섬(느 4:18-21)
    ▸ 각 사람이 공사하는 동안 그 종자(노비)와 함께 예루살렘 안에서 자도록 함(느 4:22)
    ▸ 느헤미야와 그 곁에서 파수하는 자들은 잘 때도 옷을 벗지 않고 병기를 손에 잡음(느 4:23)


    ⑤ 대적들의 막판 방해 공작(느헤미야를 살해하려는 음모)
    성벽 공사가 마무리되어가자 대적들은 급기야 느헤미야를 살해하려는 음모를 꾸몄습니다(느 6:2). 산발랏 제사장 스마야를 매수하여 거짓 예언을 통해 느헤미야를 해치려 하였으나, 느헤미야가 요동치 않으므로 모든 시도가 실패로 돌아갔습니다(스 10-14).
     






    남유다의 멸망과 바벨론의 1차 2차 3차 4차 포로의 역사

    이스라엘은 북방 강대국 앗수르바벨론, 남방 강대국 애굽 사이에 낀 약소 국가였습니다.
    남 유다의 제 16대 왕 요시야 당시는 세계 최강국이던 앗수르가 쇠퇴기에 접어들었고, 바벨론이 신흥 세력으로 부상하고 있었습니다.

    1. 므깃도 전투와 갈그미스 전투(주전 605년)

    애굽은 앗수르를 도와 바벨론의 남하를 막기 위하여 갈그미스에서 바벨론과 싸우려고 하였습니다.
    애굽 왕 느고는 갈그미스로 가기 위해 팔레스타인 지역을 통과해야 했는데, 이때 반 앗수르 입장이었던 요시야 왕은 북진하는 애굽과 전쟁을 하게 되었습니다.

    애굽 왕 느고는 사자를 보내어 화친을 요청하며, 이 일은 하나님의 명령이고 자신이 싸우려는 대상은 요시야 왕이 아님을 분명히 했습니다(대하 35:21).
    그러나 요시야 왕은 듣지 않고 변장까지 하면서 전쟁터에 남기를 고집하였습니다(대하 35:21-22).
    전쟁터에서 애굽의 궁수가 쏜 화살에 중상을 입은 요시야는 예루살렘에 돌아와 죽고 말았습니다(대하 35:23).

    요시야는 종교 개혁을 통해 영적 내리막길로 곤두박질하던 남 유다에 일시적으로나마 제동을 걸었지만, 요시야가 죽은 이후 남 유다의 국운이 갑자기 쇠약해지고 순식간에 멸망의 길로 치닫게 되었습니다.

    ​이후 애굽과 바벨론이 맞서는데, 이것이 갈그미스 전투(주전 605년)입니다.
    이 전투에서 승리한 바벨론은 당시 근동 지방을 장악하였고, 애굽은 다시 일어나지 못했습니다(왕하 24:7).

    바벨론의 느부갓네살 왕은 갈그미스 전투에서 승리한 후, 아프리카 대륙과 근동 아시아 지역을 잇는 전략적 요충지인 남 유다 왕국마저 정복하기 위하여 예루살렘을 공격하였고, 3차에 걸쳐 유다 왕과 백성들을 바벨론으로 끌고 갔습니다.

    3차에 걸친 바벨론 포로의 과정은 성전 파괴의 과정과 다름없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바벨론을 들어서 가장 아끼는 성전을 파괴하심으로써 이스라엘을 철저하게 징계하셨습니다(왕상 9:7-9).

    바벨론 제 1차 포로

    1. 포로 시기 – 주전 605년 / 여호야김 제 3(혹은 4)년, 느부갓네살 원년

    이때는 여호야김 왕 제 3년(단 1:1)이었습니다.
    그런데 예레미야 46:2은 이때를 여호야김 4년이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두 기록에 1년 차이가 나는 이유는 열왕기하 23:34을 통해 해명할 수 있습니다.
    열왕기 기자는 여호야김이 그의 동생 여호아하스를 대신하여 왕이 되었다고 기록하지 않고, 여호야김이 그의 아버지 요시야를 대신하여 왕이 되었다고 기록하였습니다.
    역사적으로는 요시야(주전 640-609b년), 여호아하스(주전 609b-608년), 여호야김(주전 608-597년) 순으로 왕이 되었지만(왕하 23:3-0, 34, 대하 36:1-4), 요시야 다음에 바로 여호야김이 왕이 된 것처럼 기술한 것은, 3개월의 짧은 통치 기간 동안 악을 일삼았던 여호아하스를 왕으로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왕하 23:31-32).
    이러한 관점에 따르면 제 1차 바벨론 포로로 끌려간 주전 605년은 여호야김 제 4년이 되는 것입니다.

    2. 포로 대상과 당시 상황

    제 1차 바벨론 포로 때에는 다니엘을 포함한 왕족과 귀족들이 끌려갔습니다(단 1:3).
    여호야김은 처음 3년은 바벨론을 섬기다가 다시 애굽과 동맹하여 반(反)바벨론 정책을 펼쳤고(왕하 24:1), 주전 602년 쇠사슬로 결박당하여 바벨론으로 끌려갔으며 성전 기구들을 약탈당하였습니다(왕하 24:2, 단 1:1-2, 5:2).

    바벨론 제 2차 포로

    1. 포로 시기 – 주전 597년 / 여호야긴 즉위년, 느부갓네살 8년

    여호야긴은 주전 597년에 즉위하여 3개월 10일을 통치하고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갔습니다(왕하 24:8-12, 대하 36:9-10).
    바벨론 역대기에 따르면, 티쉬리월(7월)로 시작되는 달력을 기준할 때 여호야긴이 왕이 딘 것은 주전 597년 불월(8월)이며, 3개월 10일이 지나 왕위에서 쫓겨난 것은 주전 597년 아달월(12월) 2일입니다.
    바벨론이 예루살렘을 포위한 후 얼마 동안의 시간이 경과한 다음에(왕하 24:10-11) 느부갓네살 왕이 예루살렘 성에 이르러 주전 597년 아달월(12월) 2일에 마침내 예루살렘 성을 점령한 것입니다.
    이때 왕위에서 쫓겨난 여호야긴은 주전 597년* 니산월(1월) 10일에 바벨론으로 끌려가게 됩니다(대하 36:10).
    * 남유다 통치 연도는 티쉬리월 기준이므로 해가 바뀌지 않음.

    2. 포로 대상과 당시 상황

    바벨론은 여호와 전의 모든 보물과 왕궁 보물을 집어내었으며 또 이스라엘 왕 솔로몬이 만든 것 곧 여호와의 전의 금기명을 다 훼파하였습니다(왕하 24:10-13, 대하 36:10).

    그리고 여호야긴 왕과 왕의 모친과 왕의 아내들과 내시와 나라의 권세 있는 자들이 포로로 끌려갔습니다(왕하 24:12, 15).
    이때 용사 7천 명을 포함하여 방백과 백성 총 1만명, 그리고 공장과 대장장이 1천 명이 끌려갔는데, 그들은 모두 강장하여 싸움에 능한 자였습니다(왕하 24:14-16).
    반란의 구심점이 될 소지가 있는 최고 지도자들과 탁월한 인물들을 모두 뽑아서 끌고 감으로 ‘빈천한 자’ 외에는 그 땅에 남은 자가 없도록 하여 남 유다를 철저히 무력화 시킨 것입니다.
    여기에는 에스겔 선지자와 에스더의 사촌 모르드개의 조상도 포함되어 있었습니다(겔 1:1-3, 에 2:5-6).

    바벨론 제 3차 포로

    1. 포로 시기 – 주전 586년 / 시드기야 11년, 느부갓네살 19년

    시드기야는 바벨론에게 항복하라는 예레미야 선지자의 권면(렘 27:12)을 듣지 않고 반(反)바벨론 정책을 고집하였고(왕하 24:20, 렘 27:12-13, 37:2), 바벨론은 시드기야 제 9년 10월 10일부터 예루살렘을 포위하였습니다(왕하 25:1, 렘 39:1, 52:4).
    시드기야가 애굽에 원군을 요청하여 바벨론 군대가 떠났다가 애굽 군대가 즉각 퇴각하자 다시 바벨론 군대가 예루살렘을 침공하여(렘 37:5, 11, 겔 17:15) 시드기야 11년까지 약 30개월 동안(티쉬리 기준 달력) 예루살렘 성을 에워쌌습니다(왕하 25:1-2, 대하 36:11-20, 렘 37:7-10, 겔 17:12-21).
    마침내 주전 586년 시드기야 제 11년 4월 9일에 예루살렘 성이 함락되고 말았습니다(왕하 25:1-3, 렘 39:1-2, 52:4-6).

    2. 포로 대상과 당시 상황

    예루살렘이 포위되어 있는 동안 기근이 극심하여 자녀를 잡아먹을 정도로 비극적 참상이 빚어졌는데(애 2:20, 4:10, 사 9:20, 겔 5:10), 이는 모세의 예언대로(레 26:28-29, 신 28:53-57)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한 결과였습니다.
    결국 BC 586년, 남 유다는 바벨론에 의해 완전히 멸망하였고, 예루살렘 성이 함락된 4월 9일은 유다인들에게 바벨론 유수 기간 내내 금식과 애통의 날로 지켜졌습니다(슥 7:5, 8:19).

    성이 함락되던 때 시드기야는 밤에 도망하다가 갈대아 군대에게 잡혀 하맛 땅 립나로 끌려가 바벨론 왕에게 신문을 당하였습니다.
    바벨론 왕은 시드기야의 목전에서 그 아들들을 죽이고, 시드기야의 두 눈을 빼고 사슬로 결박하여 바벨론으로 끌어다가 죽는 날까지 옥에 가두었습니다(왕하 25:4-7, 렘 39:4-7, 52:7-11).

    ​예루살렘이 함락된 지 한 달 만인 5월 10일에 바벨론 시위대장관 느부사라단이 와서 여호와의 전과 왕궁과 예루살렘의 모든 집을 귀인의 집까지 불사르고 사면 성벽을 헐었습니다(왕하 25:8-12, 대하 36:18-19, 렘 39:8-10, 52:12-16).
    그리고 성전의 두 놋기둥(야긴과 보아스)과 받침들과 놋바다를 깨뜨려 그 놋을 바벨론으로 가져갔고, 또 가마들, 부삽들, 불집게들, 숟가락들과 섬길 때에 쓰는 모든 놋그릇을 다 가져갔으며, 또 금물의 금과 은물의 은을 가져갔고, 솔로몬이 여호와의 전을 위하여 만든 두 기둥과 한 바다와 그 받침들을 취하였습니다(왕하 25:13-17, 대하 36:18-19, 렘 52:17-23).

    그리고 대제사장 스라야와 부제사장 스바냐와 전 문지기 세 사람을 잡고, 군사를 거느린 장관(내시) 하나와 왕의 시종 칠 인(혹은 다섯 사람)과 군대장관의 서기관 하나와 국민 육십 명을 잡아갔으며, 립나에서 그들을 쳐 죽였습니다(왕하 25:18-21, 렘 52:24-27).

    한편, 예레미야 52:28-30에는 바벨론에 항복하지 않고 끝까지 항거하다 소규모로 잡혀간 자들이 총 4,600명이 있음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제 이스라엘 민족은 포로로 끌려간 자와 고국 땅에 남겨진 자, 그리고 재난을 피하여 주변국으로 도망친 자 등으로 나뉘어, 민족 전체가 갈기갈기 찢기고 그 존재가 점점 사라지는 최악의 비극적 상황에 처하게 되었습니다.

    선민 유다 백성이 하나님 없는 이방 나라 바벨론으로 포로 되어 끌려간 것은 하나님의 진노로 말미암은 최대의 비극이요 수치였습니다. 이는 우상을 숭배하고 안식일과 안식년을 지키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고 그 거룩하신 뜻을 멸시한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징계와 진노의 표현이었습니다(대하 36:21, 참고-렘 34:8-16).

    그러나 절대로 망하지 않을 것만 같던 바벨론이 하나님의 주권 역사로 메대와 바사의 연합군에 의해 멸망하게 하시고(참고-렘 50:3, 9, 41-46장, 51장) 이스라엘 백성이 귀환하도록 하셨습니다(대하 36:22-23, 스 1:1-4).



    이스라엘의 바벨론 포로와 회복

    바빌론 포로(기원전 586–538년)는 유대 민족의 역사에서 가장 비극적인 장 중 하나가 되었습니다.
    이 사건은 독립의 상실과 예루살렘 성전의 파괴를 상징할 뿐만 아니라 신앙의 힘과 회복에 대한 열망이 드러나는 새로운 단계의 시작을 의미했습니다.
    포로에서의 귀환과 예루살렘 및 성전의 재건은 유대 민족의 종교적, 문화적 삶에서 중요한 순간이 되었습니다.

    역사적 맥락

    바빌론 포로는 기원전 7세기 말과 6세기 초에 걸쳐 이 지역에서 발생한 정치적 및 군사적 갈등의 결과로 일어났습니다. 북 이스라엘 왕국이 기원전 722년에 멸망하고 남 유다 왕국이 약해지자, 아시리아 제국과 이어서 바빌론 제국이 정치 무대에 등장했습니다. 유다의 왕들은 독립을 유지하려고 했지만, 매년 바빌론 사람들의 압박이 증가했습니다.

    예루살렘의 몰락

    기원전 586년, 바빌론은 네부카드네자르 2세의 지도 아래 예루살렘을 침공하고 도시를 포위했습니다. 긴 포위 이후 도시는 함락되었고, 바빌론 사람들은 유대 민족의 예배 중심지였던 솔로몬의 성전을 파괴했습니다. 이 사건은 유다에게 재앙이 되어 대규모로 사람들이 도망치거나 포로로 잡히게 되었습니다. 남은 사람들 중 많은 이들이 죽임을 당했고, 생존자들은 바빌론으로 끌려갔습니다.

    포로 생활

    바빌론 포로는 유대 민족에게 힘든 시련이 되었습니다. 바빌론 사람들은 포로들을 동화시키고자 했지만, 많은 유대인들은 자신의 정체성과 종교적 전통을 지키고자 했습니다. 그들은 계속해서 기도하고 성경을 공부하며 고국으로 돌아갈 희망을 간직했습니다.

    귀환에 대한 예언

    포로 생활 동안 예레미야와 에스겔 같은 예언자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며 이스라엘 백성에게 고국으로의 귀환을 약속했습니다. 예레미야는 회개와 하나님이 백성을 회복할 것에 대한 믿음을 촉구했습니다. 이러한 지지와 희망의 말씀이 이스라엘 백성이 어려움을 극복하고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잃지 않는데 도움을 주었습니다.

    포로에서의 귀환

    기원전 539년 바빌론이 멸망하고 페르시아 왕 키루스 대제가 즉위하면서 유대 민족에게 새로운 시대가 열렸습니다. 키루스는 이스라엘 백성이 고국으로 돌아가 고칠 성전들을 재건할 수 있도록 허락하는 칙령을 발표했습니다. 이 결정은 포로의 끝과 회복의 새로운 단계의 시작을 상징하는 역사적 순간이 되었습니다.

    귀환의 첫 단계

    첫 번째 귀환 행렬은 스루피벨의 지도 아래 538년에 시작되었습니다. 처음에는 귀환이 쉽지 않았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현지 주민의 불만과 자원의 부족 등 여러 가지 어려움에 직면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예루살렘과 성전을 재건하기 시작했으며, 이 성전은 기원전 516년에 완공되었습니다. 이 성전은 두 번째 성전으로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영적 부흥

    포로에서의 귀환은 단순한 물리적 재건이 아니라 민족의 영적 갱신이었습니다. 예언자 느헤미야는 법과 관습을 회복하기 위한 개혁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그는 백성을 모아 계명을 지킬 것을 촉구하였고, 이것은 유대 민족의 종교적 삶과 정체성을 회복하는 데 도움이 되었습니다.

    에스라의 역할

    바빌론에서 돌아온 에스라 예언자는 영적 삶의 회복에서 핵심적인 인물이 되었습니다. 그는 백성을 모아 법을 낭독하였고, 이것은 하나님에 대한 신앙과 계명을 지키는 데 있어 중요한 순간이 되었습니다. 이 사건은 종교적 정체성을 강화하고 다시 영적 기반을 찾은 단일 민족으로서의 결속을 다졌습니다.

    바빌론 포로의 유산

    바빌론 포로와 그에 따른 귀환은 유대의 역사와 문화에 깊은 영향을 미쳤습니다. 이 사건은 유대 전통 속에서 오늘날까지 이어지는 시련, 신앙, 희망의 상징이 되었습니다. 포로 중에 이루어진 예언은 메시아에 대한 기대와 이스라엘 왕국의 회복을 위한 기초가 되었습니다.

    전통과 기억

    바빌론 포로를 기리기 위해 유대인들은 성전 파괴와 민족의 추방을 기념하는 티샤 베아브와 같은 축제를 제정했습니다. 고통과 회복의 희망에 대한 이 기억은 수세기 동안 유대인의 마음속에 간직되어 있으며, 신앙과 단결의 중요성을 일깨우는 역할을 합니다.

    결론

    바빌론 포로와 이스라엘의 귀환은 역사뿐 아니라 유대 민족의 영적 정체성을 형성하는 중요한 사건이었습니다. 그들은 고통에서 희망과 회복으로 가는 길을 상징하며, 신앙의 힘과 전통에 대한 헌신을 보여줍니다. 이러한 사건은 미래 세대에게 영감을 주며 하나님과 자신의 민족 역사와의 관계의 중요성을 일깨워 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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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에스라 8장 요약 / 바벨론에서 온 족장들의 계보

    아닥사스다 왕 때에 에스라와 함께 돌아온 족장들과 그 계보에 대해 기록, 에스라가 레위 사람들을 찾았다고 기록.
    귀향 중에 아하와 강가에서 에스라가 금식을 선포하고서 기도하였고, 제사장과 레위 사람들에게 그릇을 맡겨서 보관하게 하고 예루살렘으로 돌아와서 번제를 드렸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에스라 9장 요약 / 에스라의 회개 기도

    방백들이 에스라에게 이방족과 통혼에 대하여 알려주었고, 통혼 소식을 듣고서 에스라가 하나님께 회개 기도를하였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에스라 10장 요약 / 회개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죄를 고백하였고, 이방 족속과 통혼한 아내와 자식들을 내쫓기로 하였으며, 이방 여자들과 결혼한 죄를 지은 사람들의 명단에 대해서 기록하고 있습니다.

    에스라서 장별연구(10장) : 에스라의 종교개혁

    마지막 10장은 유다의 통혼에 대한 문제 해결, 즉 종교개혁의 과정과 함께 그 결과물인 이방 여인을 내보내기로 서약한 사람들의 명단이 구체적으로 소개되고 있다. 엎드려 통곡하며 죄를 자백한 에스라의 모습은, 그곳에 모인 모든 이들의 통곡을 이끌어냈다. 그리고 그 통곡은 이방 아내와 그 소생을 모두 내보내자는 맹세로 이어졌다. 이에 에스라는 모든 백성을 예루살렘으로 소집하여 그 맹세를 구체적으로 실행하였다.

      에스라는 지명된 족장들 몇 사람을 선임하여 조사 위원회를 발족시켰고, 그 위원회가 주체가 되어 3개월 동안 이방 아내와 그 소생을 내보내겠다고 맹세한 통혼자들의 명단을 조사, 완료하였다. 명단에 기록된 사람들은 총 113명이었는데, 그 가운데 대제사장들을 비롯한 종교 지도자들이 전체의 24%인 27명이나 되었다.​

    I. 본문 이해와 질문

    1. 회개가 촉발한 종교개혁(1-5절)

    9장에는 이스라엘 백성의 통혼 소식을 들은 에스라가 무릎을 꿇고 손을 들어 기도하는 장면으로 끝을 맺고 있다. 거기에는 그의 기도 내용도 구체적으로 소개하고 있다. 10장은 그때로부터 시작되고 있다. 그때 에스라는 하나님의 성전 앞에 엎드려 울며 기도면서 죄를 자복하였다(1절). 이것을 통해 다음 세 가지 사실을 알 수 있다. 첫째, 에스라가 기도한 장소는 ‘성전 앞’이었다. ‘성전 앞’은 성전의 바깥뜰 가운데 어느 한 곳을 가리킨다. 만약 에스라가 성전 앞이 아닌 성전 안에서 기도하였다면, 백성들은 그의 그러한 모습을 제대로 목격하지 못하였을 수도 있다. 둘째, 그는 바로 그곳에서 엎드려 울면서 기도하였다. 이러한 모습은, 9장에서 제시한 ‘무릎을 꿇고 손을 들어 기도하는 모습’과 비교해 볼 때, 그의 기도가 더욱 간절해졌다는 의미를 제공해 준다. ‘엎드려’라는 말은 극도의 슬픔으로 인하여 자신의 몸을 던지듯 납작 엎드리는 행위를 가리킨다(NIV, throwing himself down). 또한 ‘울면서’는 비극적인 일로 인하여 통곡하는 것을 가리킨다(창 23:2;삼상 1;10;삼하 1:24;렘 22:10). 따라서 ‘엎드려 울며’는 극도의 슬픈 감정을 표현하기 위한 암시적 행동이라 할 수 있다. 셋째, 죄를 자복하는 기도를 하였다. 이는 앞선 9장에서 드린 기도 내용을 한마디로 요약하면 ‘자복’이었다는 것을 가리킨다.

      에스라가 울면서 기도하고 있을 때, 그 앞에 모인 많은 백성도 크게 통곡하였다. 그러자 매우 큰 무리의 이스라엘 백성들, 곧 남녀와 어린아이가 그 앞에 모여들었다. 이 장면은 에스라의 기도가 점차 전파·확대되고 있는 모습을 보여 준다. 즉 에스라가 울며 기도하자 그 앞에 모인 많은 백성도 심히 통곡하였고, 그것은 다시 더욱 많은 사람이 모여드는 계기가 되었다. 이런 상황은 간절히 드리는 한 사람의 기도가 지닌 파괴력이 얼마나 대단하지를 보여 주는 단적인 사례이기도 한다. ‘이스라엘 백성, 곧 남녀와 어린아이가 그 앞에 모였다’에서 ‘남녀’와 ‘어린아이’는 ‘이스라엘 백성’에 포함된다. 하지만 그것을 이스라엘 백성 뒤에 따로 제시한 것은, 죄를 자복하는 일에 제한된 사람만 참여한 것이 아니라 남녀노소 구분 없이 모두가 동참하였다는 사실을 강조하기 위한 것이다.

      모든 사람이 이스라엘의 범죄로 절망과 통곡에 빠져 있을 때, 스가냐가 에스라에게 소망에 대하여 말하였다(2-4절). 그는 엘람 자손 가운데 여히엘의 아들이다. ‘스가냐’라는 이름은 에스라서와 느헤미야서에 6번 소개되고 있지만(8:3,5;느 3:29;6:18;12:3), 그중에 어떤 사람도 본 절의 스가냐와 동일인이라는 증거를 발견하기 어렵다. 그는 아마도 1차 귀환 때 함께하였던 백성의 지도자로, 통혼에 대해 에스라와 같은 생각을 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엘람 자손’은 1차 귀환자들의 가문 가운데 하나이다(2;7). ‘여히엘’이 누구인지 알기 어렵지만, 이방 여인을 아내로 맞이하였던 것만은 분명하다(26절). 따라서 스가냐는 여히엘과 이방 여인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일 수도 있다.

      스가냐는 비록 자신들이 이방 여자를 아내로 삼은 죄를 하나님께 범하였지만, 아직 이스라엘에 소망이 있다고 역설하였다. 그는 모든 이방 아내와 그들의 소생을 모두 내보내기로 하나님과 언약을 세우고 율법대로 행하자고 제안하였다. 그렇게 행하는 것이 에스라 당신이 주장할 일이기 때문에 주저앉아 있지 말고 일어나서 힘써 행할 것을 촉구하였다. 그와 동시에 우리도 당신을 돕겠다고 약속하였다. ‘소망’은 최악의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의 구원을 끈질기게 기대하는 것이고(창 49:18;사 40:31), 그에 대한 확신을 저버리지 않는 마음이다. 그가 이런 소망을 가질 수 있었던 이유는, 두 가지에서 비롯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첫째, 에스라와 백성의 기도에서 얻을 수 있는 논리적 결과 때문이다. 하나님은 의로우실 뿐만 아니라 은혜가 풍성하신 분이시기도 하다. 따라서 만약 그들이 자신들이 범한 죄를 진정으로 회개하면 하나님은 그들을 용서해 주실 것이다(시 103:8;애 3:22;요일 1;9). 그는 이것을 바라보는 눈이 있었다. 둘째, 현재 상황을 전화위복의 기회로 삼아 대대적인 종교개혁을 단행할 수 있겠다는 기대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에스라에게 이렇게 촉구하였다. “이것은 바로 당신이 주장할 일입니다. 일어나 힘써 행하십시오.”(4절) 스가냐의 주장대로 에스라가 귀환한 가장 중요한 목적도 바로 이와 같은 소명을 이루는 데 있었다. 그는 귀환할 때 아닥사스다 왕으로부터 (1) 율법에 따라 유다와 예루살렘의 형편을 살피고, (2) 하나님의 성전을 위해 하나님이 명령하신 것을 삼가 행하고, (3) 하나님의 지혜를 따라 행정과 사법 등의 부분에서 사회정의를 실현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그런데 그 일은 방백들의 고발로 시작되었고, 에스라와 백성들의 회개에 이어 스가냐의 제안으로 불이 붙었던 것이다.

      그 불길을 딛고 에스라가 일어났다. 그는 제사장들과 레위인들과 온 이스라엘에게 스가냐의 말대로 실행할 것을 맹세하게 하였고, 그 자리에 모인 무리는 맹세로 화답하였다(5절). 여기에서 에스라의 행동은 두 단계로 제시되어 있다. 첫 번째 단계는, ‘일어나는’ 것이었다. ‘일어나다’는 말은 문자적으로 기도하는 중에 스가냐의 격려와 촉구로 즉시 그 자리에서 일어나는 것을 가리키기도 하지만, 여기서는 중대한 결심과 실행에 옮기고자 하는 그의 의지를 강조하는 측면이 강하다. 두 번째는, 그 자리에 모인 모든 사람에게 ‘스가냐의 말대로 실행할 것을 맹세하도록 한’ 것이었다. 이것을 통해 에스라는 모든 백성이 이전 상황으로 돌아가는 것을 방지함과 동시에 이어지는 개혁에 그들의 동참을 자연스럽게 유도하였다.

    [질문] 위 내용을 통해 회개와 종교개혁에는 어떠한 상관관계가 있다고 생각하는가?

    ‘제도나 기구(機構) 따위를 새롭게 뜯어고치는 것’이 ‘개혁’이다. 따라서 전에 구축된 제도나 기구에 대해 그것이 잘못되었다는 인식에서부터 개혁이 시작된다. 이스라엘은 그 인식이 방백들의 고발로 전면 노출되었다(9:1-2). 이 말은 그 고발 이전에 통혼 문제에 대하여 백성들이 잘못되었다는 사실을 인식하지 못하였다는 의미가 아니다. 알고는 있었지만 쉬쉬하였다. 즉 뒤에서 은밀하게 말하고 있었지만 드러내지 않았다. 그것이 일부 방백들의 고발로 적나라하게 공개되었다. 그 소식을 접한 에스라는 하나님께 나아가 그 죄를 통곡하면서 자복하고 하나님의 용서와 자비를 간구하였다. 그 회개 운동에 백성이 동참하였고, 그 운동이 종교개혁의 불길이 되었다. 이것은 문제 인식과 종교개혁 사이에 ‘회개’가 반드시 수반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제공해 준다.

      문제에 대한 명확한 인식을 지지고 있더라도 회개가 없다면 종교개혁은 있을 수 없다. 인식은 객관성에 대한 ‘인지’이기 때문에, 그 안에는 문제를 개선하여야겠다는 ‘의지’까지 담고 있지는 않다. 그래서 인식은 개혁의 출발점이지만 반드시 개혁으로 연결되지는 않는다. 그것이 개혁으로 연결되기 위해서는 강한 의지가 반영된 회개가 반드시 수반되어야 한다. 회개에는 죄를 미워하는 마음과 죄에서 떠나 의로운 삶을 살겠다는 의지가 담겨 있다. 그리고 그러한 의지는 삶의 변화를 통하여 객관적으로 표출된다(욥 42:6;고후 7:9;히 6:1). 그래서 그것이 개혁으로 이어지는 것이다.

      회개에 있어서 우리가 결코 간과해서는 안 될 사안이 있다. 그것은 바로 회개의 ‘진정성’이다. 만약 회개에 진정성이 들어 있지 않고 있다 하더라도 그 강도가 약하다면, 개혁은 공염불이 되어 버리고 설사 개혁되더라도 제대로 탄력을 받지 못하기 때문에 불완전한 개혁이 되어 버린다. ‘개혁’(改革)은 ‘고치다’는 말과 ‘가죽’이라는 말이 합해진 단어이다. 그래서 문자적으로 보면, 기존에 덮고 있던 가죽을 벗겨내고 새로운 가죽으로 교체한다는 뜻이다. 가죽을 벗겨내면 그 사람은 고통으로 자지러질 것이 빤하다. 개혁은 쉽게 이루어지지 않는다. 쉽게 이루어진다면 한자어를 그렇게 쓰지 않았을 것이다. 개혁은 그와 같은 고통 속에서 이루어지기 때문에, 개혁을 완수하기 위해서는 그와 같은 고통도 감내하겠다는 의지가 필요하다. 우리는 수많은 개혁 속에 무수히 많은 사람의 피(목숨)가 들어 있다는 것을 역사에서 배웠다. 그 가운데 종교개혁도 포함되어 있다. 따라서 회개의 진정성 문제는 종교개혁의 핵심 중에서도 핵심이라 할 수 있다.

    2. 본궤도에 오른 종교개혁(6-17절)

    ​본문은 본궤도에 오른 종교개혁을 소개하고 있다. 비록 그 자리에 있는 모든 사람이 스가냐의 제안대로 모든 이방 아내와 그들의 소생을 내보내고 율법대로 행할 것이라고 맹세하였지만, 에스라에게는 여전히 그것이 성에 차지 않았다. 역사적으로 볼 때 이스라엘 민족은 맹세에도 불구하고 그와 다른 선택을 종종 하였기 때문에 좀 더 구체적인 실행이 필요하였다. 또 그 맹세는 그 자리에 모여 있는 사람들만 하였기 때문에, 그것을 이스라엘 전체로 확대, 적용할 필요도 있었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의 성전 앞에서 일어나 여호하난의 방으로 들어가서도 기뻐하는 대신 백성의 죄로 근심하면서 음식을 먹거나 물을 마시지도 않았다(6절). ‘여호하난’은 대제사장으로, 엘리아십의 아들이다. 성전에는 여러 개의 방이 있었는데, 어떤 방은 성물들을 보관하는 창고로 사용되었고, 또 어떤 방은 제사장이나 레위인들이 제사를 위해 준비하던 공간으로 사용되었다. 따라서 에스라가 들어간 여호하난의 방은 그 방들 가운데 하나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윽고 방에 있던 에스라는, 백성들에게 예루살렘으로 모일 것을 공포하였다(7절). 에스라의 공포는 백성들 앞에서 그가 직접 내린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에 의하여 전달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7절을 원문대로 번역하면, “그들은 모든 자손에게 목소리가 지나가게 하였다”이다. ‘목소리가 지나가게 하는 것’은 ‘공포’를 의미한다. 그리고 공포한 주어는 3인칭 대명사 복수형인 ‘그들’이다. 따라서 그들이 에스라의 명령을 받아 백성들에게 공포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들’은 에스라를 돕기로 약속한 사람들 가운데 지도급에 해당하는 사람이었을 것이다. 그들은 방백들과 장로들에게 에스라가 명한 내용을 공포하고, 후자에 해당하는 그들은 다시 자신들이 속한 자손들에게 훈시를 내렸던 것으로 여겨진다. 그렇게 전달된 공포 속에는 3일 내로 모이지 않으면 재산을 적몰하고 사로잡혔던 자의 모임에서 쫓아내겠다는 경고 내용이 담겨 있었다(8절). ‘적몰’은 ‘중죄인(重罪人)의 재산을 몰수하고 가족까지도 처벌하는 일’을 의미한다. 하지만 본문 속에서의 ‘적물’은 철저하게 종교적인 의미로 사용되었다. 이 단어는 어떤 것에 대한 세속적인 사용을 금지하는 ‘신성한 금지’(the holy ban)를 나타냈다. 예를 들면 성전(聖戰)에서 빼앗은 물건이나 포로를 다른 사람이 사용하는 것을 금지하는 것을, 즉 그 성전에서 승리의 주역인 하나님께 전적으로 바치는 것을 의미하였다. 이때 하나님께 바쳐진 것들이 거룩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금속으로 만든 것들은 성소에서 사용한 데 비해 다른 모든 물건은 불로 태워지거나 다른 방법으로 파괴되었고, 심지어 사람이나 동물은 죽임까지 당하였다(수 6:17-21,24). 한마디로 이 단어는 적출(excision), 파멸(perdition), 죽음(death) 등을 의미한다. 에스라가 이렇게 막강한 권한을 행사할 수 있었던 이유는, 아닥사스다 왕이 그에게 부여하였던 사법권에 기초하고 있다(7:26).

      에스라의 공포에 유다와 베냐민의 모든 사람이 예루살렘에 3일 내로 모였다(9절). 총회(總會)가 소집된 것이다. 여기에서 모든 사람 앞에 ‘유다와 베냐민’으로 한정하고 있는 것은 눈여겨볼 대목이다. 에스라서에는 이 같은 표현이 총 3회 사용되고 있는데(1:5;4:1;10:9), 모두 어떤 상징이나 속성을 배제하고 있다. 단순히 북쪽의 이스라엘을 제외한 남쪽 유다만의 백성들을 가리키기 위해 사용되었다. 하지만 ‘이스라엘’이라는 단어를 사용할 때는 어김없이 공동체가 지닌 하나님 앞에서의 속성이나 상징을 내포하고 있다. 총회가 소집된 때는 아홉째 달 20일이었다. 바벨론을 떠난 에스라가 예루살렘에 도착한 때가 다섯째 달 1일이기 때문에, 그로부터 4개월 20일, 즉 140일이 지난 때이다. 성전 앞 광장에 모여 앉은 무리는 그 일과 큰비 때문에 떨고 있었다. ‘그 일’이란 그들이 지켜야 할 맹세, 즉 결혼한 이방 여인과 그 자녀들을 내보내는 일을 가리킨다. 비록 이방인이라 할지라도 부인과 자녀는 그들에게 귀한 존재가 아닐 수 없다. 그래서 그들을 내치는 행위는 그들에게 떨리는 일이었을 것이다. 설상가상 ‘큰비’까지 내려 그들의 온몸을 떨게 하였다. 아홉째 달은 히브리 달력으로 ‘기슬르’ 월인데, 이는 현대의 12월 초순 정도에 해당하는 시기이다. 유대 지방은 10월부터 12월까지 춥고 비가 많이 우기(雨期)이다. 그때 내린 큰비로 백성들은 추위에 떨고 있었지만, 큰비는 하나님의 심판을 상징하기 때문에(삼상 12:17-18;겔 13:11,13) 그 심판이 무서워서 떨었다는 의미도 담겨 있다.

      그렇게 떨면서 앉아 있던 무리를 향하여 제사장 에스라가 일어나 말하기 시작하였다(10-11절). 그의 말은 단호하였다. 그는 먼저 무리의 죄부터 지적하였다. “너희가 죄를 범하여 이방 여자를 아내로 삼아 이스라엘의 죄를 더하게 하였다.” 그가 지적한 무리의 죄는 하나님을 향한 반역의 죄이다. 그들은 하나님의 은혜로 남겨진 자들이 되고 또 예루살렘으로 귀환하게 되었지만, 그 은혜를 저버리고 앞선 조상들의 죄를 답습함으로써 이스라엘에 죄를 더하였다. 그는 계속해서 무리의 회개를 촉구하였다. ‘회개’는 죄를 뉘우치고 돌이키는 것을 말한다. 따라서 이방 여인을 아내와 며느리로 삼은 통혼 죄를 자복하고, 이방 사람들과 이방 여인을 끊고 새로운 삶으로 나아가야 한다. 그것이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일이다. 한편 에스라는 회개 대상인 하나님을 ‘너희 조상들의 하나님’으로 소개하고 있는데, 이는 그분이 이스라엘의 조상들과 맺은 바로 그분이라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다. 따라서 그 조상들의 후손인 ‘무리’도 당연히 하나님과 언약 관계에 놓여 있고, 이는 그들이 여전히 하나님과 맺은 언약을 지켜야 한다는 사실이 되기도 한다. 이것은 역으로 그 언약을 저버리면 이스라엘 공동체에서 제명되는 것을 의미한다. 에스라의 단호한 촉구에 모든 회중이 그의 말대로 마땅히 행하겠다고 소리 높여 대답하였다(12절). ‘당신의 말씀대로 우리가 마땅히 행할 것입니다’라는 말은, ‘옳습니다! 당신이 말씀하신 대로 실행하는 것이 우리의 의무입니다’라는 뜻이다(NASB, That’s right! As you have said, so it is our duty to do).

      13-14절은 그곳에 모인 모든 무리가 크게 외친 말은 아닌 것으로 보인다. 아마도 무리를 대표하는 몇몇 지도자가 하였던 것으로 여겨진다. 그들은 지금 당장 그 일을 하려고 서두르지 말고 시간을 두고 체계적으로 하자고 제안하였다. 그들은 그 이유로 세 가지를 제시하였다. 첫째, 백성이 너무 많이 모여 있었기 때문이다. 즉 그 자리에서 그 많은 백성을 조직적으로 편성하고, 일일이 후속 작업을 행하기에는 큰 무리가 있다는 이야기이다. 또한, 그 일은 조용하게 처리해야 할 개인적인 문제이기 때문에 그렇게 공개된 상황에서 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는 의미도 담겨 있었을 것이다. 둘째, 지금은 큰비가 내리는 시기였기 때문이다. 따라서 수많은 사람이 비를 피할 만한 수용 시설이 부족하였고, 건강 문제가 발생할 수도 있었다. 셋째, 그들이 그 일로 크게 죄를 범하였기 때문이다. ‘크다’는 말은 죄의 성격이 심각하다는 뜻도 있지만, 그 문제의 기저에는 복잡한 문제가 얽혀 있다는 의미도 담고 있다. 따라서 그 일은 하루 이틀에 처리할 수 있는 성격이 아니었다. 그들은 이러한 이유를 들어 지금 당장 서두르지 말 것을 제안하였을 뿐만 아니라, 동시에 합리적인 방안을 제시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그들이 제시한 문제 해결 방안은 다음과 같다. 첫째, 온 회중을 위하여 방백들을 세우자. 이는 통혼 문제를 조사하기 위해 지도자들로 구성된 조사 위원회(최고 심의회, 최고 종교 법원)를 세우자는 말이다. 그렇게 하면 신속하고 체계적으로 조사가 이루어질 것이다. 둘째, 통혼한 자는 모두 정해진 기한 내에 방백들에게 오게 하자. 이 조치는 약속된 시간 내에 통혼한 자들에게 방백들 앞에서 이방 여인과 그 소생을 내보내겠다는 서약을 받기 위한 것이다. 셋째, 각자 소속된 고을의 장로들과 재판장과 함께 오게 하자. 여기에서 장로들과 재판장은 서약에 대한 공증인 역할뿐만 아니라 실제 이행 여부를 감찰할 역할까지 맡게 되는 것이다. 이스라엘은 전통적으로 마을마다 나이 많고 인품과 덕망이 높은 장로들로 구성된 자치 단체가 있어 치리를 담당하였다(레 19:32;삼상 26-30). 숙곳에는 무려 장로가 77명이나 있었다(삿 8:14). ‘재판장’은 지방(읍내)의 재판관을 가리킨다. 한편 ‘우리 하나님의 진노가 우리에게서 떠나게 하소서’라는 말은, 문자적으로 ‘우리 하나님의 진노가 우리에게서 돌려질 때까지’라는 뜻이다. 즉 그렇게 될 때까지 그 일을 멈추지 말고 계속하자는 말이다.

      그렇지만 요나단과 야스야는 일어나 그 일을 반대하였다(15a절). ‘그 일을 반대한’ 것이 무엇을 가리키는가에 대해서는 해석이 두 가지로 갈린다. (1) 무리 가운데 대표자들이 제시하였던 방법(13-14절)에 대한 반대이다, (2) 이방 여인들을 축출하라는 에스라의 의견 자체에 대한 반대이다. 이 중에 다음과 같은 이유로 (1)을 더 타당한 것으로 본다. 첫째, 요나단과 야스야는 이방 여인을 취한 죄와 무관하다(18-44절). 둘째, 이방 여인들을 끊어 버리라는 에스라의 명에 무리가 맹세한 일과 대표자들의 제안 사이가 아닌 대표자들의 제안 뒤에 두 사람이 반대하고 일어났다. 셋째, 그들이 악천후에도 에스라의 명에 순종하여 모였다. 넷째, 사법권에 대한 전권을 쥐고 있는 에스라에게 그렇게 반대하기란 쉽지 않았을 것이다. 다섯째, 에스라의 명령에 맹세로 화답한 무리 속에서 그렇게 반대하기는 쉽지 않았을 것이다. 여섯째, 에스라와 방백들이 아무런 저항이나 문제없이 조사를 진행하였다(16-17절). 그렇다면 그들은 왜 대표들의 방법에 반대하였던 것일까? 아마도 그들은 방백들이 얼마간의 기간을 갖고 문제를 해결하기보다 지금 즉시 그 자리에서 해결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하였던 것 같다. 만약 그렇다면 그들은 베드로처럼 매우 다혈질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므술람과 레위 사람 삽브대가 그들을 도왔다(15b절). 여기서도 앞서와 마찬가지로 ‘그들을 도왔다’는 것에 대해 두 가지 해석으로 갈린다. (1) 그들이 요나단과 삽브대의 의견을 반박하고 재차 회중 대표자들의 의견을 지지하였다. (2) 한글개역개정성경의 표면적인 내용대로 요나단과 삽브대의 의견을 지지하였다. 전자는 이어지는 16절 내용과 관련해서 자연스럽다. 즉 요나단과 야스야가 개혁의 시기와 방법에 대해 회중의 의견과 다른 견해를 제시하며 반대의 뜻을 표명하였지만, 므술람과 삽브대가 이들의 의견에 반박하고 회중 전체의 의견에 재청함으로써 그 일이 본래 계획대로 진행되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한글개역개정성경의 번역은 ‘반대하고’(and)를 ‘반대하였지만’(but)으로 번역해야 옳다. 후자는 표준새번역성경과 NIV 등에서 채택하고 있는 해석이다. 표준새번역성경은 “오직, ~만 이 의견에 반대하였으며, ~가 그들에게 동조하였을 뿐이다.”고 번역하고 있고, NIV는 “Only Jonathan and Jahzeiah, supported by Meshullam and Shabbethai, opposed this.”로 번역하고 있다. 이 두 번역에 따르면, ‘요나단과 야스야가 회중의 의견에 반대하는 입장을 피력하였지만, 그들을 지지하는 자들은 오직 므슬람과 삽브내 두 사람뿐이어서 그들의 의견이 채택되지 못하였다’는 의미가 된다. 개인적으로 후자를 더 지지하지만, 두 해석 가운데 어떤 것을 선택하더라도 본문 흐름에 방해가 되지 않을 것 같다.

      16-17절은 조사 위원회의 설립과 그들에 의해 주도된 사역을 소개하고 있다. 사로잡혔던 자들의 자손, 즉 귀환한 백성이 그대로 하였다(16절). ‘그대로 하였다’는 말은 무리의 대표들이 제안한 방안대로 실행에 옮겼다는 의미이다. 에스라는 가문(가족)에 따라 각각 지명된 몇 명의 족장을 선임하고, 열째 달 1일에 앉아서 그 일을 조사하기 시작하여 마침내 첫째 달 1일에 이방 여인을 아내로 맞이한 자들의 일에 대한 모든 조사를 마쳤다. 따라서 조사는 만 3개월(90일) 동안 진행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한편 조사는 유다 백성이 예루살렘에 모인 날(아홉째 달 20일)로부터 10일 후에 시작되었는데, 이 열흘 동안 심사 위원회를 조직하는 등 조사를 위한 제반 사항을 준비하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앉아’는 직무 수행과 관련하여 자신의 자리에 임하는 것을 가리킬 때 주로 사용되는 단어이다(삼상 1:9;왕상 1;35,46).

    [질문] 본 단락은 유다 사회에 종교개혁이 이루어진 과정과 상황을 소개하고 있다. 그 과정을 사건 진행 순서에 따라 간략하게 정리해 보시오.

    유다의 통혼 문제에 대한 개혁은 방백들의 고발과 에스라의 회개 기도로 촉발되었고, 그 진행 과정은 다음과 같다.

    (1) 에스라의 총회 소집(6-8절) :
    ① 소집 배경(6절),
    ② 소집 대상(7절),
    ③ 소집 공포령의 권위(8a절),
    ④ 공포에 대한 즉각적인 순종 요구(8b절),
    ⑤ 공포의 강제권 : 불순종할 때 재산을 적몰하고 공동체에서 추방(8c절).

    (2) 모인 총회의 광경과 에스라의 권고(10-11절) :
    ① 분명하게 밝힌 범죄 내용(10절),
    ② 해결 방안 제시 : 죄를 자복하고 이방 여인을 끊어 버리라(11절).

    (3) 백성들의 반응과 구체적인 방안 제시(12-15절) :
    ① 긍정적인 반응 : 에스라의 권고대로 실행하되 시간을 두고 차근차근 진행하자는 의견(13-14절),
    ② 적극적인 반응: 즉각 시행하자는 의견(추정)(15절).

    (4) 진상 조사(16-17절) : 조사 위원회가 주관하여 3개월에 걸쳐 조사.

    3. 통혼한 자들의 명단(18-44절)

    ​이방 여인과 결혼한 자들 가운데, 먼저 제사장들은 예수아 자손 중 요사닥의 아들과 그의 형제 마아세야, 엘리에셀, 야립, 그달랴였다(18절). ‘예수아 자손 중 요사닥의 아들과’는 ‘요사닥의 아들과 예수아의 자손들로부터’라는 뜻이다. ‘예수아’가 ‘요사닥’의 아들이기 때문에(3:2;학 1:1), 이 부분은 ‘요사닥의 자손들 가운데 예수아의 아들과’로 번역하는 것이 맞다(NIV, 표준새번역성경). 이렇게 볼 때 본문은 예수아와 그 형제의 가문, 즉 대제사장 가문에 속한 인물 가운데 이방 여인을 아내로 맞이한 자들을 밝히고 있는 명단의 도입도로 이해될 수 있다. 이처럼 대제사장의 가문마저 이방 여인과 통혼에 빠졌다는 것은 성전을 재건한 후의 이스라엘 공동체가 빠졌던 영적 타락과 부패가 얼마나 심각하였는지를 극명하게 보여 주는 증거이기도 하다.

      그들은 두 가지 행동을 취하였다. (1) 모두 손을 잡아 그들의 아내를 내보내기로 맹세하고, (2) 그 죄로 말미암아 숫양 한 마리를 속건제로 드렸다(18절). 이런 절차는 18절에서만 나오는데, 이는 아마도 나머지 모든 사람이 치렀던 표준 절차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그들이 다 손을 잡아’라는 말은, ‘그들이 그들의 손을 주어(내밀어)’라는 뜻이다. 이처럼 손을 주는(내미는) 행위는 증인이 맹약에 서명할 때 하는 일반적인 풍습을 묘사한 것이다(왕하 10:15;겔 17;18). ‘속건제’는 고의적이 아닌 죄를 속하기 위해 드려졌던 제사이다(레 5:14-19). 그들이 이 제사를 드렸다는 것을 통해 당시의 상황을 세 가지로 이해해 볼 수 있다. 첫째, 유다 자손이 그 죄의 심각성을 깨닫지 못하고 이방인과 통혼하였다가 에스라의 지적으로 그 사실을 심각하게 받아들였다. 둘째, 속죄제를 드려야 하지만 오랜 이방 생활로 율법에 무지하였기 때문에 속건제를 드렸다. 실제로 속건제는 주로 이웃과 관련한 범죄를 속하는 성격이 강하였던 반면, 속죄제는 하나님과 직접 관련된 죄를 대속하기 위한 성격이 강하였다. 셋째, 그들이 회개한 죄가 이방 여인과 통혼한 것뿐 아니라 부인과 자녀들을 돌려보내는 문제까지 포함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즉 비록 그들이 이방인이라 할지라도 결혼까지 파기하는 것은 그들에 대한 허물을 지는 것이기 때문에 속건제를 드렸다는 것이다. 만약 이런 이해가 맞다면 에스라가 단행한 종교개혁은 매우 조심스럽게 진행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18-19절에 소개된 명단이 대제사장들이라면, 20-23절에서 소개하고 있는 명단은 제사장들이다. 임멜 자손 하나니와 스바댜, 하림 자손 마아세야와 엘리야와 스마야와 여히엘과 웃시야, 바스훌 자손 엘료에내와 마아세야와 이스마엘과 느다넬과 요사밧과 엘라사였다. 이들에 대해서는 구체적으로 알기 어렵다. 제사장들은 13명으로, 4명의 대제사장들까지 포함하면 총 17명이다.

      레위 사람은 요사밧, 시므이, 글라야라 하는 글리다, 브다히야, 유다, 엘리에셀로, 6명이다. 노래하는 자는 엘리아십, 문지기는 살룸과 델렘과 우리였다. 이들은 모두 성전 봉사자로 총 10명이다(23-24절).

      다음은 백성들이다(25-43절). 바로스 자손은 라먀와 잇시야와 말기야와 미야민과 엘르아살과 말기야와 브나야(7명), 엘람 자손은 맛다냐와 스가랴와 여히엘과 압디와 여레못과 엘리야(6명), 삿두 자손은 엘료에내와 엘리아십과 맛다냐와 여레못과 사밧과 아시사(6명), 베배 자손은 여호하난과 하나냐와 삽배와 아들래(4명), 바니 자손은 므술람과 말룩과 아다야와 야숩과 스알과 여레못(6명), 바핫모압 자손은 앗나와 글랄과 브나야와 마아세야와 맛다냐와 브살렐과 빈누이와 므낫세(8명), 하림 자손은 엘리에셀과 잇시야와 말기야와 스마야와 시므온과 베냐민과 말룩과 스마랴(8명), 하숨 자손은 맛드내와 맛닷다와 사밧과 엘리벨렛과 여레매와 므낫세와 시므이(7명), 바니 자손은 마아대와 아므람과 우엘과 브나야와 베드야와 글루히와 와냐와 므레못과 에랴십과 맛다냐와 맛드내와 야아수와 바니와 빈누이와 시므이와 셀레먀와 나단과 아다야와 막나드배와 사새와 사래와 아사렐과 셀레먀와 스마랴와 살룸과 아마랴와 요셉(27명), 느보 자손은 여이엘과 맛디디야와 사밧과 스비내와 잇도와 요엘과 브나야더이었다(7명). 백성들은 총 86명으로, 그 가운데 베배 자손이 4명으로 가장 적고, 바니 자손은 27명으로 가장 많다.

      이상은 모두 이방 여인을 아내로 맞이한 자들의 명단으로, 총 113명이다. 그중에는 자녀를 낳은 여인도 있었다(44절). 이는 자녀가 없는 이방인 아내들뿐 아니라 자녀가 있는 이방인 아내들도 자녀들과 함께 내보냈다는 의미이다. 또한, 종교개혁에 따른 이혼이 너무나 큰 인간적인 고통을 안겨 주었다는 사실도 암시해 준다. 한편 통혼한 자들의 숫자인 113명은 1차 귀환자들의 인원수(42,360명, 7,337명의 남종과 여종은 제외)와 비교하면 극소수(0.0027%)에 불과하다. 그때부터 에스라가 귀환한 시점까지 인구가 100,000명 정도로 증가하였다고 가정하면 그 비율은 절반 이상 더 줄어든다. 그렇다면 방백들의 고발과 에스라의 반응은 어떤 면에서 과도하다 할 수 있다. 이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추측해 볼 수 있다. 첫째, 극소수였지만 통혼 문제가 너무나 심각한 죄에 해당하기 때문에, 특히 에스라는 옷을 찢고 머리털과 수염을 뜯으면서 넋을 잃고 주저앉을 수밖에 없었다. 둘째, 통혼한 자들을 모두 기록하기에는 지면상 무리가 따르기 때문에, 에스라가 제시한 명단에는 종교 지도자와 각 가문의 대표에 해당하는 사람들만 기록하였다. 셋째, 막상 명단을 작성하는 과정에서 생각을 바꿔 참여하지 않은 사람들이 의외로 많았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이와 같은 추측에는 그 어떤 근거도 제시하기 어렵다.

    [질문] 통혼한 자들의 명단에 나타난 특징과 그 의미는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구체적인 명단이 하향식 순서대로 작성되어 있다. 즉 종교 지도자들로부터 시작하여 일반 백성이 기록되어 있고, 종교 지도자들도 대제사장, 제사장, 레위인, 노래하는 자, 문지기의 순서대로 제시되어 있다. 이는 2장에서 제시하고 있는 1차 귀환자들의 명단 제시법과 상반되는 방법이다. 그곳에는 백성들을 먼저, 제사장들은 맨 나중에 소개하고 있다.

      2장과 달리 여기에서 종교 지도자들을 먼저 제시한 이유는, 그들이 지닌 책임성을 강조하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그것을 강조한 목적은 종교 지도자들의 잘못을 더욱 심각한 것으로 보고 먼저 추궁하려는 의도에서 비롯되었을 것이다. 종교 지도자들은 총 27명으로, 통혼자들 가운데 24%의 비율을 차지하고 있다. 이는 1차 귀환할 때의 백성들 대비 종교 지도자들이 차지하였던 16%보다 더 높은 비율이다(평민들은 24,144명이, 종교 지도자들은 4,630명이 귀환). 이것은 결과적으로 제사장들이 백성들보다 통혼에 더욱 적극적이었다는 중요한 단서가 된다. 그들은 백성들을 지도해야 할 위치에 있었지만, 그 역할을 제대로 수행하지 않고 자신들이 먼저 앞장섬으로써 백성들이 통혼의 죄에 가담할 수 있도록 가교역할까지 해 버렸던 것이다.

    ​II. 메시지  / 종교개혁의 필수 조건(10:1-5)

    1. 종교개혁에 담긴 의미

    ​오늘 본문은 본궤도에 오른 유다 공동체의 종교개혁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종교개혁’이라는 말 속에는 두 가지 의미가 들어 있습니다. 첫째는, 개혁의 대상이 종교 문제, 즉 신앙 문제라는 것입니다. 유다는 바벨론에서 돌아온 포로들로 이루어진 공동체였습니다. 그들은 바벨론에서 구축한 삶의 터전을 버리고 성전을 재건하기 위하여 귀환하였기 때문에, 하나님을 향한 신앙이 남달랐다고 평가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성전 재건 이후에 그들의 신앙은 급격히 무너졌습니다. 그래서 에스라가 귀환할 당시에는 이방인과의 통혼이 보편화되어 있었습니다. 일반 백성들뿐만 아니라 종교 지도자인 제사장들과 레위인들도 그 일에 가담하고 있었고, 심지어 방백들과 고관들은 그 일에 으뜸이 되었습니다. 에스라는 그 소식을 듣자마자 그 충격과 슬픔에 빠져, 옷을 찢고 머리털과 수염을 뜯으면서 넋을 잃고 주저앉아 버렸습니다. 그에게는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숙제로 주어졌습니다. 즉 하나님 앞에서 가증한 그 일이 개혁의 대상이 되었던 것입니다.

      종교개혁이 지닌 두 번째 의미는, 그 개혁이 쉽지 않다는 것입니다. ‘개혁’(改革)은 문자적으로 몸을 덮고 있는 가죽을 벗겨내고 새 가죽으로 바꾸는 것을 의미합니다. 가죽을 벗기는 일은 고문 중에서도 상고문입니다. 그래서 수많은 사람이 개혁이 중요하기 때문에 반드시 개혁해야 한다는 사실도 알고 있지만, 막상 개혁 단계에 이르면 주저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유다 사회에 만연한 통혼의 문제는 해결 방법이 간단해 보이지만, 실상은 그렇게 단순하지 않습니다. 비록 이방인이지만 그들이 맞은 아내와 그 사이에서 태어난 자녀들은 그 당사자들에게 너무도 소중하고 사랑스러운 존재입니다. 그들은 칼로 무를 베듯이 싹둑 자를 수 있는 대상이 아닙니다. 자신의 살을 베고 뼈를 꺾는 아픔이 수반됩니다. 그래서 에스라 앞에 놓인 종교개혁은 난제 중의 난제가 아닐 수 없었습니다.

    2. 종교개혁의 필수 조건

    ​1) 죄를 자복하기

    그러한 상황 속에서 종교개혁이 본궤도에 오르게 되었는데, 그 일은 죄를 자복하는 것으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에스라가 하나님의 성전 앞에 엎드려 울며 기도하여 죄를 자복할 때에 많은 백성이 크게 통곡하매 이스라엘 중에서 백성의 남녀와 어린아이의 큰 무리가 그 앞에 모인지라”(1절). 에스라가 성전 앞에서 엎드려 울면서 죄를 자복하자, 그 자리에 모인 수많은 백성도 크게 통곡하였습니다. 에스라에서 시작된 자복이 영향을 미쳐 유다 공동체에 큰 통곡으로 이어졌습니다. 여기에서 ‘엎드리다’는 말은 극도의 슬픔을 이기지 못하고 자신의 몸을 던지듯 납작 엎드리는 행위를 가리킵니다. 또한 ‘울다’는 말은 비극적인 일로 인하여 통곡하는 것을 가리킵니다. 따라서 ‘엎드려 울고 있는’ 에스라의 모습 속에는, 극도의 슬픈 감정이 내재되어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 가운데 그가 기도하였던 내용이 무엇입니까? 죄를 자복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죄를 자복하는 그의 진정성은 다시 엎드려 울고 있는 모습에 오롯이 담겨 있습니다.

      만약에 에스라가 자복할 때, “하나님, 미안해요”라는 식으로 가볍게 자복하였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그 죄에 대해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고 별로 가슴 아파하지도 않았다는 증거가 됩니다. 문제를 대수롭지 않게 여기거나 그로 인해 고통도 미미하다면, 그 문제에서 돌이키려는 의지, 즉 개혁에 대한 의지도 약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이것은 종교개혁에 대한 동력을 상실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결국에는 현실과 적당히 타협하면서 대충 개혁할 것이 빤합니다. 상처 나거나 병에 걸린 사람이 그것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면 병원에 가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그것이 심각하다고 생각하면 그 사람은 병원에 반드시 가게 되어 있습니다. 또 그로 인해 심한 고통을 느끼는 사람도 병원에 가지 않을 수 없습니다. 죄 문제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죄를 심각하지 보지 않으면 단순히 미안하다는 반응만 보입니다. 하지만 그 죄가 심각하다고 느낀 사람은 엎드려 통곡할 수밖에 없고, 그 통곡은 그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방향으로 발걸음을 옮기는 의지의 원동력이 됩니다. 그래서 에스라처럼 죄를 자복하되 진정성 있게 자복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유다 백성들이 범한 통혼의 죄는 별거 아닌 것처럼 보이지만, 그 안에는 하나님의 주권에 대한 반역, 하나님의 명령에 대한 불순종, 그리고 거룩함과 반대되는 부정한 삶이 문제의 핵심으로 자리 잡고 있습니다. 이는 모두 하나님 앞에서 ‘가증한 일’이 되기 때문에, 진노와 멸망에 이르게 됩니다. 성경은 각 사람이 자기 행위대로 심판을 받는다고 경고하고 있습니다(계 20:13). 예수님은 그 심판의 참혹함에 대하여, 이렇게 소개하셨습니다. “거기에서는 구더기도 죽지 않고 불도 꺼지지 아니하느니라 사람마다 불로써 소금 치듯 함을 맏으리라”(막 9:48-49). 죄악의 결과가 이토록 참혹하기 때문에, 우리 눈에 그 죄가 아무리 사소하게 보인다 할지라도 그 죄는 심각하고 또 심각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에스라는 유다의 죄 앞에서 대충 넘어갈 수 없었고, 그것을 심각한 문제로 받아들이고 그렇게 엎드려 통곡하면서 자백하였던 것입니다.

      그가 자복하고 있는 모습은, 우리에게도 동일한 반응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삶이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은 모습으로 바뀌기 위해서는, 그래서 진노와 멸망이 아닌 축복과 소망 가득한 삶이 되기 위해서는, 먼저 우리 안에 있는 죄 문제를 심각하게 직시하고, 하나님 앞에서 에스라처럼 엎드려 통곡하면서 우리 죄를 자복해야 합니다. 그렇게 할 때 우리의 삶에 대한 개혁의 첫 단추를 제대로 끼울 수 있습니다.

    2) 돕는 사람과 함께하기

    ​종교개혁에 있어서 두 번째 필수 조건은, 함께하는 것입니다. 사자성어 가운데 ‘독불장군’(獨不將軍)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혼자서는 장군이 될 수 없다는 뜻으로, 남과 의논하고 협조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이르는 말입니다. 종교개혁도 이와 마찬가지입니다. 혼자서는 그 일을 할 수 없습니다. 함께하되 충성을 다하는 사람들과 함께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것을 무시하였던 대표적인 사람이 ‘르호보암’입니다. 그는 솔로몬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른 인물입니다. 그때 북쪽 지파 사람들은 그에게 이런 제안을 하였습니다. “왕의 아버지가 우리의 멍에를 무겁게 하였으나 왕은 이제 왕의 아버지가 우리에게 시킨 고역과 메운 무거운 멍에를 가볍게 하소서 그리하시면 우리가 왕을 섬기겠나이다”(왕상 12:4). 르호보암은 그 문제를 먼저 솔로몬 왕을 섬겼던 노인들과 상의하였고, 그들은 그에게 ‘그 백성을 섬기는 자가 되어 그들을 섬기고 좋은 말로 대답하면 그들이 영원히 왕이 종이 될 것’이라고 일러 주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노인들의 말을 듣지 않고 자기와 함께 자란 어린 사람들의 말, 즉 노인들의 말과 반대되는 의견을 따랐습니다. 그 결과 어떻게 되었을까요? 이스라엘 왕국은 남과 북으로 갈라지고, 두 왕국이 모두 멸망할 때까지 싸움질하였습니다. 이 사건은 우리에게 누구와 함께하느냐는 문제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시사해 줍니다.

      다행히도 에스라에게는 함께할 충성스러운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사가냐와 그의 동료들이었습니다. “스가냐가 에스라에게 이르되 우리가 우리 하나님께 범죄하여 이 땅 이방 여자를 맞이하여 아내로 삼았으나 이스라엘에게 아직도 소망이 있나니 곧 내 주의 교훈을 따르며 우리 하나님의 명령을 떨며 준행하는 자의 가르침을 따라 이 모든 아내와 그들의 소생을 다 내보내기로 우리 하나님과 언약을 세우고 율법대로 행할 것이라 이는 당신이 주장할 일이니 일어나소서 우리가 도우리니 힘써 행하소서 하니라”(2-4절). 스가냐는 통혼으로 인한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소망을 잃지 않았습니다. 율법대로 이방 아내와 그들의 소생을 다 내보내자는 개혁의 방법(방향)을 제안하였고, 우리가 돕겠다는 약속도 하였습니다. 또 일어나 힘써 행하라고 에스라를 격려까지 하였습니다. 그의 제안과 동참이 에스라를 일으켜 세웠고, 힘써서 행할 수 있는 용기도 주었습니다.

      이런 모습은 우리의 신앙생활에도 그대로 적용할 수 있습니다. 우리 안에 도사리고 있는 수많은 문제는 우리 혼자 힘으로 해결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교회로 부르셨고, 그 안에서 한 몸을 이루도록 하셨습니다. 주님은 이를 통해 서로 분쟁하는 것이 아니라, 여러 지체가 서로 같이 돌보게 하셨습니다(고전 12:25). 주님이 이렇게 하신 이유는 우리가 혼자 설 수 없기 때문이고, 교회 안에서 서로가 서로를 돌볼 때 상처가 치유되고 문제가 해결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그 안에서 우리 죄를 서로 고백하고, 병 낫기를 위해 서로 기도해야 합니다. 그렇게 할 때 강력하고 효과적인(powerful and effective, NIV) 열매를 볼 수 있습니다(약 5:16). 함께하되 특별히 스가냐와 같이 우리의 신앙이 올바르게 설 수 있도록 도움을 주는 사람들과 함께해야 합니다.

    3) 철저하고 구체적으로 실행하기

    ​종교개혁을 완성하기 위한 세 번째 필수 조건은, 그 일을 구체적으로 실행하는 것입니다. 스가냐의 말을 듣고 에스라는 일어났습니다. 그리고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과 온 이스라엘에게 그의 말대로 행하기를 맹세하게 하였고, 무리는 맹세로 그에게 화답하였습니다(6절). 이는 에스라가 그 문제를 대충 넘어가지 않았다는 의미입니다. 그는 먼저 백성들의 마음을 맹세로 다잡았습니다. 맹세로 마음을 다잡게 하는 행위는 두 가지 측면에서 중요합니다. 첫째, 두말할 수 없게 함으로써 마음이 이전 상태로 돌아가는 것을 방지할 수 있습니다. 둘째, 그것은 다음에 이어질 행동에 강력한 동력(에너지)을 제공해 줍니다.

      에스라는 그 맹세에 기초하여 개혁을 구체적으로 실행에 옮겼습니다. 그가 실행한 내용은 오늘 본문 뒤에 소개되어 있습니다. 그는 모든 백성을 예루살렘으로 모이게 한 후, 그들에게 다시 한번 스가냐의 제안대로 할 것을 맹세하게 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맹세를 지키겠다는 사람들의 명단을 조사하여, 첫째 달 초하루에 그 작업을 모두 마쳤습니다(16-17절). 이방 여인과 결혼한 이들의 명단을 작성하였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합니까? 그들이 맹세한 대로 실행에 옮겼는지 한 사람 한 사람 구체적으로 확인하겠다는 뜻입니다. 에스라는 유다의 종교개혁을 그렇게 철저하고 구체적으로 실행에 옮겼던 것입니다.

      그의 이러한 모습은 우리에게 너희도 너희 안에 있는 죄 문제를 그렇게 철저하고 구체적으로 해결해야 한다는 메시지를 던져 줍니다. 이렇게 하지 않으면 우리의 죄 문제는 교묘한 자기합리화에 빠져 더욱 깊은 곳으로 숨어 버립니다. 그러므로 우리 안에 도사리고 있는 죄와 그로 인해 무너진 신앙 목록을 하나하나 구체적으로 작성해야 합니다. 그리고 만약 이방 여인들을 내보낸 것같이 내쫓은 죄가 있다면 ‘Yes’로 표시하고, 해결하지 못한 죄는 ‘No’로 표시하고 주님께 도움을 요청해야 합니다.

    ​3. 종교개혁과 예수 그리스도

    ​유다 공동체에 만연되어 있던 통혼 문제는, 그 모양과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 모르겠지만, 오늘 우리 안에도 교묘하게 도사리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것을 은밀하게 즐길 때도 종종 있습니다. 그와 다르게 그것이 제거되기를 원하지만, 그런 우리의 마음과 다른 행동을 함으로써 괴로워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과 같은 사람도 이렇게 한탄하였습니다.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하지 아니하는 바 악을 행하는도다...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롬 7:23-24). 사도 바울과 같은 사람이 이렇다면 우리의 실체는 더 말할 필요도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여전히 종교개혁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바울의 한탄 속에는 그런 상태에서 해방되기를 바라는 마음이 간절히 들어 있습니다. 우리의 마음도 그와 동일하다고 믿습니다. 바울의 한탄 끝에 그 답이 제시되어 있는데, 그 답이 무엇일까요?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롬 7:25).

      오늘 우리가 살펴본 종교개혁의 필수 조건은 모두 그분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죄를 자복하고, 죄 문제를 철저하고 구체적으로 지워나가는 일은 그분 안으로 들어와 함께하면 저절로 해결됩니다. 그분의 몸인 교회에 참여해서 서로 섬기기만 하면 함께할 사람들이 생깁니다. 이 일은 모두 우리 삶의 주인을 내가 아닌 예수님으로 바꾸기만 하면 저절로 이루어집니다. 이러한 사실은 우리에게 종교개혁의 본질이 예수 그리스도를 향하는 것이고, 개혁의 필수 조건들도 예수 그리스도 안으로 들어오면 모두 충족된다는 의미를 제공해 줍니다. 이 말씀을 찾아 함께 읽고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마 11:28-30). 이 말씀이 우리의 경험이 되고, 그 경험이 다시 신앙의 개혁으로 이어지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바랍니다.​ 

    회개(悔改) : 죄를 고백하고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것
                        행동으로 하는 고백

    자복(自服) : 죄를 인정하고 동의하는 것.
                        입으로 하는 고백

    자백(自白) : 스스로의 죄(罪)를 고백(告白)함              
                        소송상 자기에게 불리한 사실(事實)을 자기(自己)가 시인(是認)함.
                        사실(事實)이 진실(眞實)하다는 표시(表示). 권리(權利) 자백(自白)과 보통(普通) 자백(自白)으로 나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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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성경에 기록된 자백의 의미

    로마서 14:11
    기록되었으되 주께서 가라사대 내가 살았노니 모든 무릎이 내게 꿇을 것이요 모든 혀가 하나님께 자백하리라 하였느니라

    자백 - ἐξομολογήσεται

    본문의 자백은 요한 1서의 자백과는 다른 단어로 엑소몰로게오로

    ' 에크 '라는 밖으로의 의미를 가진 단어와

    '호모로게오'라는 동의하다는 뜻의 단어의 합성어 입니다.

    즉, 동의하는 내용을 공개적으로 겉으로 표현하는 고백행위를 말하는 것 입니다.

    요한1서 1:9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케 하실 것이요

    자백 - ὁμολογῶμεν

    본문의 자백은 로마서와 다른 단어로서

    호몰로게오 입니다.

    ' 호모'라는 함께라는 의미의 단어와

    ' 레고 '라는 동의하다는 의미의 단어의 합성어 입니다.

    자신의 죄를 인정하며 낱낱이 고백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전체적으로 자백의 의미는 죄를 고백하는 것으로서 단순히 " 내가 죄를 지었습니다. " 라는 고백이나 " 내가 죄인입니다. " 라는 표출되는 표현을 의미하는 것 입니다.

    2. 성경에 기록된 회개의 의미

    회개는 자백과 엄밀하게 다른 의미로 사용 됩니다.

    마태복음 3:2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왔느니라 하였으니

    회개 - Μετανοεῖτε· / 메타노에오

    '메타'라는 바꾸다는 의미의 단어와

    '노에오' 라는 마음을 단련하다는 의미의 단어의 합성어 입니다.

    이것은 죄악을 버리고 하나님께 마음을 돌이키는 것을 의미합니다.

    3. 회개와 자백의 차이

    성경에 기록된 자백과 회개의 엄밀한 차이는

    " 자백 "은 죄를 단순히 고백하는 것에서 멈추는 것이며,

    " 회개 "는 죄를 고백하고 이것을 떠나 다시 하나님께로 방향을 전환하는 것이 포함됩니다.

    즉, 죄를 떠나 하나님께 방향을 전환하는 개념이 회개라는 것 입니다.

    4. 성경에 기록된 요한 일서의 자백은 회개인가? (단회적 회개와 반복적 회개)

    성경은 회심으로 인도하는 단회적인 회개, 즉 믿음으로 나오기 위해 단회적 회개를 요구하는 동시에 믿음 이후의 죄에 대한 속죄와 관련 없이 성화를 위한 회개를 요구하고 있습니다.

     마가복음 1:15
    가라사대 때가 찼고 하나님 나라가 가까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하시더라

    사도행전 19:4
    바울이 가로되 요한이 회개의 세례를 베풀며 백성에게 말하되 내 뒤에 오시는 이를 믿으라 하였으니 이는 곧 예수라 하거늘

    사도행전 3:19
    그러므로 너희가 회개하고 돌이켜 너희 죄 없이 함을 받으라 이같이 하면 유쾌하게 되는 날이 주 앞으로부터 이를 것이요

    본문의 회개는 단회적인 회개로 믿음으로 나오기 위해 자신의 죄를 고백하고 방향을 전환하여 하나님께 나와 그리스도를 통한 놀라우신 하나님의 은혜를 믿어 죄 사함을 받고 믿음을 가지기 위한 회개를 요구하는 것으로 단회적 회개 입니다.

    이것을 또다른 말로 " 회심 " 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믿음 이후에도 회개는 반복됩니다.

    고린도후서 7:10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후회할 것이 없는 구원에 이르게 하는 회개를 이루는 것이요 세상 근심은 사망을 이루는 것이니라

    본문의 회개는 성도들에게 주어진 회개로  의롭다 함을 얻고 양자 삼으심을 받은 성도들이 후회할 것 없는 구원이라 표현된 성화와 영화를 위해 필요한 회개를 명령하신 것 입니다.

    일반적으로 오해하는 부분 중에 한가지가 반복적 회개를 통해 죄를 용서 받아 이것을 통해 구원을 유지한다는 것인데, 회개 기도를 통해 죄를 씻는 것은 아닙니다.

    "성화란 성령께서 죄인을 죄의 부패에서 깨끗하게 하시며 그의 전 본성을 하나님의 형상으로 갱신하시며, 그의 전 본성을 하나님의 형상으로 갱신하여 죄인으로 하여금 선한 일을 할 수 있게 하시는 성령의 은혜로우시며 계속적인 사역이라 할 수 있다" (기독교 신학개론, 283쪽) 

    (루이스 벌콥 / 기독교 신학 개론 256쪽)

    새 생명을 심어주는 것으로 해석되는 중생은 결코 반복 될 수 없다.' 엄밀한 의미에 있어서의 회심도 또한 반복될 수 없다 이것은 중생의 변화가 인간의 의식 생활에서 처음 밖으로 나타나는 것이기 때문이다. 동시에 반복되는 회심에 대하여도 말할 수 있다

    감리교 조직 신학 (웨슬레 조직 신학 199-200쪽)

    이 회개는 칭의에 헌생하는 회개와는 아주 다른 것 입니다. 여기서 회개는 죄책이라든가 정죄라든가 하나님의 진노에 대한 의식이라든가 하는 것들과는 연관되지 않습니다. 또 하나님의 사랑을 조금도 의심하지 않습니다. 이것은 성령의 역사로 일어나는 깨달음이니 곧 우리 마음 속에 아직 남아있는 죄를 깨닫는 것 입니다. 곧 육에 속한 마음 입니다. 중생한 사람들 속에서도 그것이 남이 있으나 지배하지는 못합니다.

    - 출처 : 네이버 카페  " 무엇이든 물어보세요 (평이협) "

    단회적 회개를 통해 " 믿음 " 을 가질 때 중생과 칭의가 이뤄지는데 " 칭의 "는 법적 신분의 변화로 죄로 말미암아 심판 받아 죽을 수 밖에 없는 사람에게 그리스도가 대신 심판을 받아 죄의 삯을 지불하셨으니 그의 의를 입혀 신분상 죄인이 의인으로 변화되는 것, 즉 법적 신분의 변화가 이뤄지게 되는 것으로 그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죄를 단번에 영원히 용서 받기 때문에 회개 기도를 통해 죄를 씻을 필요가 없습니다.

    뿐만 아니라 죄의 삯은 사망으로 피흘림이 없이는 죄를 용서 받을 수 없기 때문에 원죄는 보혈로 씻고 자범죄는 회개 기도를 통해 날마다 죄를 씻는다는 개념이나 믿기 전의 죄만 보혈로 용서 받고, 믿은 뒤의 죄는 회개 기도로 용서 받는다는 개념도 틀린 것 입니다.

    믿음 뒤의 회개는 죄를 용서 받아 심판을 피하기 위해서 하는 것이 아니라 성화를 이루기 위한 것으로 용서 받은 자 답게 거룩하게 살아감으로서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과정에서 죄와 멀어지고 점차 하나님의 자녀답게 변화되는 과정에서 이뤄지는 당연한 것 입니다.

    믿음 뒤에 회개 기도를 하지 않는다고 해서 지옥에 가는 것은 아니나, 진실로 믿음으로 중생과 칭의가 이뤄졌다면 믿음 뒤에 죄에 대하여 민감한 변화가 일어나고 회개 기도를 하지 않을 수가 없게 되는 것이 당연한 것 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요한 일서의 " 자백 " 부분이 이해가 안 될 수 있습니다.

    요한1서 1:9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케 하실 것이요

    본문은 자백, 즉 죄를 고하는 것으로 끝나는 것처럼 보일 수 있기 때문 입니다. 그러나 본문은 죄를 단순히 자백하라고 말씀하신 것이 아닙니다.

    요한1서 본문을 보면  6절에 하나님과 사귐, 즉 죄인이 죄를 용서 받고, 하나님과 화평이 이뤄진 상태를 의미하는 것으로 (마5:9/ 롬5:1/ 엡2:14 참고) 용서 받은 죄인들, 즉 거듭나 자녀가 된 성도가 죄 가운데 있으면서 아무런 걸림도 없이 하나님과 진실한 소통이 이뤄지고 있다고 말한다면 이것은 거짓말이라는 것 입니다. 5절 말씀대로 하나님께는 악이 조금도 없으시기 때문 입니다. 빛과 어둠이 같은 공간에 있을 수가 없습니다.

    아담이 최초에 범죄하였을 때 하나님의 부르심에 숨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죄를 가지고 하나님 앞에 사람이 아무런 두려움이나 걸림 없이 선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성도가 죄를 용서 받은 것은 신분적 변화지 상태의 변화가 아니기 때문에 성도는 죄를 지을 수 있으나 죄를 가지고 있을 때는 하나님과 걸림 없는 화평이 이뤄지기 어렵다는 것 입니다.

    그래서 죄를 가지고 있으면서 하나님과 사귐, 즉 3절과 같은 " 코이노니아 " 라는 단어가 의미하는 신령한 교제가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말한다면 거짓말이라는 것 입니다.

    그러니 죄를 가지고 있으면 7절과 같이 빛 가운데 행해야 하는데, 만약 우리가 죄를 짓게 되면 6절이나 8절과 같이 죄가 없다고 숨기고 거짓말하지 말고 9절과 같이 죄를 솔직하게 인정하고 고백하고 하나님 앞에 죄에 대한 용서를 구하면서 돌이키는 태도를 가지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즉, 본문은 단순한 자백을 하라는 의미가 아니라 죄를 가지고 하나님과 동행하면서 아무런 걸림이 없다고 말하지 말고 죄를 7절과 같이 떠나면서 살던지 죄를 지으면 솔직하게 고백하고 돌이키는 태도를 가져야 한다는 것 입니다. 

    그러나 10절과 같이 죄를 범하였으면서 자신과 하나님 앞에 죄를 고백하지 않고 숨기고 아무런 문제나 걸림이 없다고 말하는 것은 그 안에 진리가 없는 거짓말하는 사람이라는 것 입니다. 진실로 거듭난 사람이라면 죄를 품고 있으면 고통이 있고 죄애 대하여 끊임없이 거부반응이 일어나 견딜수가 없어야 합니다. 그 정도가 상이할 수는 있으나 반드시 이런 것이 있다는 것 입니다.

    결론적으로 요한 일서는 죄를 단순히 고백하라는 것이 아니라 죄를 고백하고 돌이키는 것, 즉 회개를 명령한 것 입니다.


    회개와 자백은 어떻게 다른가?


    복음을 전하러 다니다 보면 회개와 자백을 구분하지 못해 구원받지 못한 사람들을 많이 만난다. 비슷하게 들리는 이 두 단어를 혼동되게 사용함으로써 많은 사람들이 구원 계획을 명확하게 알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교회 다니는 사람에게 구원을 받았는가, 모든 죄를 다 용서받고 하늘나라에 갈 확신이 있는가 물으면, 많은 사람들이 자신은 매일 매일 죄를 “회개”한다고 답한다. 그러면 회개하지 않는 죄들은 어떻게 하는가, 기억나지 않는 죄들을 어떻게 하는가 물으면 대답을 못한다.

      결론부터 말하면 회개(repent)는 구원에 필수적인 것이요, 자백(confess)은 구원의 조건이 아니라 구원받은 사람이 매일 해야 하는 것이다. 하나님께 죄를 낱낱이 고하는 것은 복음적인 의미의 회개가 아니라 “자백”이다. 어떤 사람은 성령님께서 갓 난 아깃적 죄부터 지금까지 지은 모든 죄들을 다 기억나게 해 주셔서 자백한다고 한다. 그러나 그것은 거짓말이거나 그 사람 자신이 마귀에게 속은 것이다. 사람의 마음을 살피시는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서 지은 죄가 얼마나 많겠는가? 수십 년 동안 겉으로 드러난 죄뿐 아니라 순간순간 마음으로 지은 죄들, 미움과 시기, 교만, 자기 사랑, 온갖 거짓말, 험담, 탐욕등 수만 가지 죄악을 다 기억할 수 있단 말인가? 게다가 성경이 제시하는 죄의 기준은 인간의 기준보다 훨씬 높다. "그러므로 선을 행할 줄 알면서도 행치 아니하는 자에게는 그것이 그 사람에게 죄가 되느니라"(약 4:17). "...믿음으로 아니하는 모든 것이 죄니라"(롬 14:23). 이 구절에 따르면 우리의 죄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수만 배로 늘어날 것이다. 그런데 어떻게 그것을 다 자백하고 용서를 받는단 말인가? 불가능하다. 따라서 죄를 일일이 고함으로써 용서받는다는 것은 가능하지도 않을 뿐 아니라, 그것은 하나님의 방법이 아니다.

      구원에 필요한 “회개”는 죄로부터 돌아서서 하나님께로 향하는 것을 말한다. "유대인과 또한 헬라인에게도 하나님께 대한 회개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증거하였노라"(행 20:21). 회개란 단순히 악을 멀리하는 것이 아니라, 악에서 돌아서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영생을 얻는 것이다. 또 회개는 단순히 자신이 지은 죄에 대한 인정과 슬픔에서 멈추는 것이 아니다. 그러한 회개는 구원을 가져다주지 못하기 때문이다. 사울(삼상 15:23,24, 28:16), 유다 이스카리옷(행 1:20,25), 파라오(출 9:27) 모두 “내가 범죄했다”고 인정했지만 죽어서 지옥에 가지 않았는가? 따라서 복음에 있어서의 회개는 자신이 행한 일이 아니라 바로 죄인 된 자기 “존재”에 대한 탄식을 요구한다.

      이런 회개는 베드로, 욥, 이사야에게서 확실히 나타난다. 이사야가 하나님께 다가갔을 때 그 자신이 행한 잘못에 대해 말하지 않았다. 그는 "...“내게 화로다! 내가 끊어졌도다. 이는 내가 불결한 입술을 가진 사람이며 내가 불결한 입술을 가진 백성 가운데 거하면서..."(사 6:5)라고 했다. 즉 자기가 불결한 행위를 해서 죄인이 된 것이 아니라 원래 불결한 자임을 고백한 것이다. 욥도 하나님의 신성을 마주대했을 때 “내가 실수하고 잘못 말해서 죄송합니다.”라고 하지 않았다. 그는 "그러므로 내가 나를 미워하고 티끌과 재속에서 회개하나이다"(욥 42:6)라고 했다. 베드로 역시 "나를 떠나가소서. 오 주여, 나는 죄인이로소이다"(눅 5:8)라고 말했다. 회개는 믿음 이전에 온다. "너희는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막 1:15). 회개는 죄 용서 이전에 온다. "모든 민족 가운데 그의 이름으로 회개와 죄 사함이 선포되어야 하리라"(눅 24:47).

      복음적인 회개는 죄인 된 자기 존재에 대한 깊은 탄식과 함께 의인이시며 육신으로 오신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을 반드시 수반한다. 성경은 "...이제는 어디에 살고 있는 어떤 사람에게도 회개하라고 명령하고 계시니라"(행 17:30)고 말씀한다. 무엇을 회개하라는 것인가? 하나님의 형상이신 예수 그리스도(고후 4:4) 대신 우상을 섬기는 죄를 회개하라는 말씀이다.

      이렇게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은 사람의 마음 안에는 성령께서 오셔서 거하시고(갈 3:2) 그 사람은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요 1:12). 그러나 죄 사함은 완전히 받았고 영원한 생명은 얻었어도 이 땅에서 육신을 입고 사는 동안은 누구도 죄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워질 수 없기에 날마다 원치 않아도 죄를 짓게 된다. 이 때문에 죄의 자백이 필요한 것이다. 일단 구원을 받았으면 어떠한 죄를 짓더라도 지옥에는 가지 않는다. 구원받는 순간 성령께서 그 사람 안에 들어오셔서 혼을 “죄의 몸”으로부터 분리시키는 영적 할례를 행하시기 때문이다(골 2:11). 또한 구원은 우리 자신의 행위에 기초한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이루어 놓으신 일에 근거하기 때문에 결코 잃어버리지 않는다. 그러나 죄는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교제의 단절을 가져옴으로써 기도의 응답을 막는다. "오직 너희 죄악들이 너희와 너희 하나님 사이를 나누었고 너희 죄들이 그의 얼굴을 너희로부터 가렸기에 그가 듣지 아니하심이라"(사 59:2). 따라서 구원받은 사람은 요한일서 1:9에 따라 자신이 지은 죄를 스스로 판단하고 자백함으로써 깨끗하게 되어야 한다. "우리가 우리 죄들을 자백하면 그는 신실하시고 의로우셔서 우리 죄들을 용서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하게 하시느니라." 자신의 생활 속에서 하나님께서 죄라고 깨닫게 해 주신 것은 정당화하려 들지 말고 그대로 시인하고 자백해야 한다. (그러나 자백만 하고 동일한 죄에 계속 머물러 있다가는 히브리서 12:6-10에 따라 징계를 받으며, 육신의 생명을 일찍 취해가시기도 한다.)

      요약하면 회개는 구원을 위하여 죄로부터 돌이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이요, 자백은 이미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가 매일 지은 죄를 고백하는 것이다. 이 글을 읽는 독자들은 이 둘을 정확히 구분하여 하나님의 구원 계획을 혼동하지 않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회개와 자복의 차이점

     ‘자복하다’ 헬라어로(엑소몰로게오)라고 하는데 이 뜻은 ‘고백하다’입니다. “제가 이러저러한 잘못을 범했습니다"라고 한다면 그것이 고백입니다. 둘째는 자복하다는 말은 ‘동의하다’입니다. ‘저를 향해 지적하신 제 잘못들을 인정합니다‘ 라고 하면 이것은 동의입니다. 셋째 자복한다는 것은 ’약속하다‘입니다. ’앞으로 잘못을 범치 않고 바르게 살겠습니다‘.라고 하면 이것은 약속입니다. 이 세 가지의 공통점은, 고백이든 동의든 약속이든 모두 입으로,말로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회개하다’는 헬라어(메타노에오)라는 말은 아예 돌아서거나 길을 바꾼다는 의미입니다. 이를테면 동쪽으로 가던 사람이 자신의 방향이 틀렸음을 아는 즉시 180도로 돌아서는 것입니다. 회개는 또 움켜쥐고 있던 것을 놓아 버리는 것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군대 용어로 “뒤로 돌아 앞으로 가” 가던길에서 반대로 오라는 의미입니다.
     
     이처럼 자복은 입으로 하는 것이고 회개는 말이 아니라, 철저하게 행동으로 이루어집니다.따라서 자복이 회개의 시작일수는 있지만, 그 자체가 회개인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 제가 이런 잘못을 범했습니다, 다시는 그 짓을 하지 않겠습니다”라는 것은 자복입니다. 그리고 이 자복이 행동으로 드러나는 것이 회개입니다.
     
     전도를 하다가 보면 “교회에는 가고 싶은데 죄가 많아서 못 가겠습니다.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것은 내 몸에 때가 많아서 목욕탕에 갈 수 없다는 것과 같습니다. 그런 사람들은 자기가 죄인이라는 것에 대해 동의는 하지만, 죄의 삶에서 벗어나고 싶은 생각은 없습니다. 다시 말해서 자기 자신이 죄인임을 자복은 하면서도 회개할 마음은 없는 것입니다
     
     도둑이 가게에서 물건을 훔치다가 주인에게 들켰습니다. 그는 주인에게 자신의 잘못을 고백하고 다음부터는 절대로 훔치지 않겠다고 눈물을 흘리면서 약속했습니다. 주인이 그 말을 듣고 용서해 주었습니다. 그런데 그 좀도둑이 다음에 같은 가계에서 또 도둑질을 했다면, 그는 그 전에 주인 앞에서 자복만 하였을 뿐 회개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우리의 회개가 이와같습니다. 우리의 회개는 대부분 경우 자복으로만 끝나 버립니다. 그러면서 자기가 회개한 것으로 생각하는 분들이 많습니다.
     
     나의 잘못을 지적하는 하나님의 말씀에 동의하고, 나의 잘못을 고백하고, 바른 삶을 약속하는 것은 대단히 잘하는데, 그것이 자기 삶으로 드러나지 않기 때문에 회개로 이어지지 않는 것입니다. 자복은 하는데 회개로 이어지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신앙의 진보가 없고 성령의 충만한 삶을 살지 못하는 성도가 의외로 많습니다.
     
     자복은 점(點)입니다. 자신이 잘못한 것을 깨닫는 즉시 하나님께 입으로(마음으로)자복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의 점입니다. 그러나 회개는 선(線)입니다. 회개는 지속적인 삶을 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점이 선의 시작일 수는 있지만 점자체가 선일 수는 없는 것처럼, 자복이 회개의 출발점일 수 있으나 자복 그 자체가 회개일 수는 없습니다


    회개와 자백의 차이점

    1. 자백(自白)과 회개(悔改)의 어원

    1) 자백(自白)

    ① 자백하다 (롬14:11; 요일1:9) 고백하다  동의하다  약속하다

    ② 고백하다  시인하다 (마10:32; 행24:14)

     

    2) 회개(悔改)

    ① 슈브( 히브리어) : 회개하다. 회복시키다

       구원하다(스스로)돌이키게 하다(말4:6)

    ② 그 마음을 부수고 다시 세운다 (마3:2, 4:17)

     

    2. 용어의 차이점

     1) 자백(自白)

    자기의 허물이나 죄 따위를 스스로 고백함(겔12:16;요일1:9;롬14:11)

     

    2) 회개

    옛 삶의 상태로부터 나와 하나님 쪽으로

    마음의 상태를 바꾸는 것으로(롬3:20; 막1:15),

    죄 사함을 얻고(행2:38). 구원에 이르게 한다(고후7:10).

    ① 단회적 회개 : 목욕한 자와 같이 한 번에 이루어진다(요13:10)

     예 : 내시(행8:36-38). 사울(행9:17-19)

    ② 반복적 회개 : 생활과 함께 하며, 발을 씻는 것과 같다(요13:10)

     예 : 다윗 왕(삼하12:7-14). 요나(욘1-3장) 베드로(마26:75)

     

    성경이 가르치는 회개는 두 가지 종류가 있음을 알 수 있다.

    하나는 복음을 믿고 구원을 얻게 하는 단 한 번으로 이루어지는 회개이며,

    또 하나는 그 이루어진 구원을 유지하기 위해 삶을 통해 계속해야 하는 회개가 있다.

     

     3. 회개의 의미

    성령의 인도하심으로(요16:13;롬2:4,8:14,26;빌1:19;살후3:5;딛3:5)

    1) 반성하고 - 죄를 지었다는 깨달음에서(눅15:21;롬3;20;고전11:29;요일3;4;약1:15,4;17)

    2) 후회하며 - 죄를 슬퍼하며(시38:18;행2:37;고전15:34;고후7:9-11)

    3) 자백하고 - 죄를 자백하고(요일1:9;수7:19;시32:5;잠28:13;스10;1;마3:6;막1:5)

    모든 죄악을 버리고 죄에게서 해방되는 것이다(겔18;30,31;롬6;18)

     

    회개의 의미에서 보는 것처럼 '자백'은 '회개'의 한 과정입니다. 

    회개는 단지 후회하거나 일시적으로 반성하는 차원이 아니라, 죄악과의 철저한 결별을 뜻합니다.

    하나님에 대한 무조건적인 신뢰와 하나님의 뜻에 반하는 모든 악으로부터 떠나는 삶을 뜻합니다.

     

     4. 결론

    '자백'이 '회개'의 시작이나 출발점이 될 수는 있지만 

    '자백' 자체가 '회개'가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대부분의 신자들이 자신의 잘못을 깨닫고

    잘못을 고백하고, 바른 삶을 약속하는 것은 대단히 잘하는데 

    그것이 '회개'로 이어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자백'의 단계에서 멈추고  

    '회개'하지 않는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되 마음은 내게서 멀도다"(마15:8)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마7:21) 

     

    입술로 아무리 열심히 ‘자백’한다고 하더라도

    마음 상태가 바뀌지 않는다면, 행동이 바뀌지 않는다면

    삶으로 연결되지 않는다면 ‘회개’라고 할 수 없습니다

     

    성경적인 회개(悔改)란

    회심(回心 : 회개와 믿음) 이전의 상태로 돌아가지 않는 것을 말합니다

    죄를 자백(自白)하고 용서를 구하는 행위를 뜻하는 것이 절대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회개와 자백(고백)의 뜻을 바르게 구별하고 있는가?

    마태복음 4장 17절에는 예수님이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고 하셨고 요한1서 1장 9절에는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그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라고 하셨다.

    이 두 말씀에서 '회개'와 '자백'이란 말이 있다. 성경은 이 두 단어를 각각 다르게 쓰고 있다.

    '회개'란 메타노에오(μετανο?ω), 메타(μετα)는 '달리'란 뜻이고 '노에오(νο?ω)는 '생각함'이란 뜻이다. 즉 '생각을 달리(고치다)하다'는 말이다. 메시야에 대한 잘못된 생각을 고치고 그를 구주로 받아 들이는 것을 뜻한다. 그러므로 회개는 단순히 죄에 대하여 후회나 슬픔이나 자백(고백)만은 아니다. 이런 일은 회개의 원인일 수는 있으나 회개의 근본 뜻은 아니다. 회개는 그것보다 더 근본적인 마음의 결단을 말한다. 엄격한 의미에서 일생에 한번만 할 수 있는 사건이다.

    그러나 '자백(고백)'은 호몰로게오(?μολογ?ω), '호모스'는 '꼭 같이'란 뜻이고 '레고'는 '말하다'는 뜻이다. 즉 자기의 행한대로 직고하라는 뜻이다. 자백은 가다가 탈선(이탈)했을 때 다시 되돌아가던 길(방향)을 바로 찾아 가는 궤도 수정이라 할 수 있다.

    회개는 이제까지 살아온 것이 잘못된 것임을 깨닫고 방향을 바꾸어 새로운 삶을 사는 것이다. 즉, 방향 전환이다. 성경은 회개를 통해 '거듭남'의 체험을 하므로 천국에 들어가게 된다고 말씀하고 있다. 그래서 예수님은 회개하므로 천국에 들어갈 수 있음을 강조하시면서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고 하신 것이다.

    회개는 죄인이 의인으로 바꿔지게 하므로 새로 지음받게 하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 회개는 그리스도 밖에 있던 자가 그리스도 안으로 들어오게 한다.

    그래서 바울은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고후 5:17)고 했다. 죄의 옛 사람은 죽고 의의 새 사람이 태어나는 것이 거듭나는 것이요, 이것은 회개를 통해 이루어지는 것이다. 다시 태어나는 것이다. 밤에 찾아온 니고데모에게 요한복음 3장에서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 "내가 네게 거듭나야 하겠다 하는 말을 놀랍게 여기지 말라"고 하시면서 거듭나는 것은 니고데모의 어리석은 질문처럼 사람이.... 두 번째 모태에 들어갔다가 나는 것이 아니라 '영으로' 태어나는 것이며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영으로 난 것은 영이라"고 분명히 말씀하셨다.

    다시 한 번 요약한다면 회개를 통한 중생(거듭남)은 한 번밖에 못하는 1회적인 것이다.

    그러나 '자백'은 회개하므로 거듭난 자가 범죄했을 때마다 하는 것이다. 성경에는 같은 뜻으로 자복, 고백, 시인이란 용어를 쓰고 있다(마 3:6, 행 19:18, 행 24:14, 마 10:32, 33). 영어로는 모두 confession, admit로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회개는 Repentance로 번역하고 있다.

    자백은 반복이지만 회개는 일생에 한번으로 족하다.

    회개와 자백의 구별은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최후의 만찬을 나눈 자리에서 하신 말씀에서 배울 수 있을 것이다. 주님께서 그들과 만찬을 나누신 자리에서 일어나 겉옷을 벗고 수건을 허리에 두르시고 대야에 물을 담아 제자들의 발을 씻기기 시작하셨다.

    이때 베드로가 "주님께서 내 발을 씻기십니까 절대로 씻기지 못하십니다"라고 했을 때 예수님은 "내가 너를 씻기지 아니하면 네가 나와 상관이 없느니라"고 하셨다. 이때 베드로는 "그렇다면 내 발뿐 아니라 손과 머리도 씻겨 주옵소서"라고 했다(요 13:4-11).

    '목욕' '루오'는 몸 전체를, '씻음' '빕토'는 몸 부분을 씻는 것이다. 목욕은 회개를 통해 거듭남을 의미하고 씻음은 일상 생활 중에 심령이 더러워진 것을 주님께 자백함으로 씻음을 받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회개하는 것과 고백하는 것을 혼동해서는 안 될 것이다. 그럼에도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면서 자백(고백)대신 회개라고 할 때가 많다. 아니 많다기보다는 거의 전부라 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이것이 큰 문제가 되지는 않으나 가능하면 원 뜻을 살려 용어를 선택하는 것이 어떨는지....

    바울은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신이 도리어 버림을 당할까 두려워 함이로다"(고전 9:27), "나는 날마다 죽노라"(고전 15:31)고 고백하였다.

    그는 매일 자신을 살펴 입으로 실언(失言)한 것, 손으로 실수(失手)한 것, 발로 실족(失足)한 것을 하나님께 자복하며 자신을 쳐 주님께 복종하였다. 그는 날마다 자기 자신과 싸워 옛 사람을 죽이고 새 사람을 살리는 일에 최선을 다하고 있음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회개를 통해 죄인이 의인으로 인정받는 의인화(義認化)는 한번으로 족하다. 그 다음에는 말씀과 기도로 날마다 성도로서 거룩하게 변화를 받는 성화(聖化)는 세상 떠날 때까지 계속해야 한다. 이것은 매순간 자백을 통해 이루어진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자수란?
       어떤 범죄를 저지른 범인이 수사기간에 스스로 자기 범죄사실을 신고하여 인정하는 것

    자백이란?
       수사기관의 조사에서 자신이 행한 범죄사실의 일부나 전부를 진술하고 인정한 것

    ​▶자복이란?
       피해자에게 범인이 스스로 범죄사실을 알리는 것

    자백과 자복은 무엇이 다른가요?

    요한일서 1:9
    ”만일 우리가 우리의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케 하실 것이요“

    자백하다와 자복하다에서
    국어사전 /
    자복은 자신의 죄를 자백하고 복종한다
    자백은 자신의 죄를 고한다

    형법적 의미 /
    자잭은 수사기관의 조사에 응하여 범죄사실을 진술하는 것
    자복은 고소권을 가진 자에게 자발적으로 자기의 범죄 사실을 고하여 그 고소에 맡기는 것

    자복이 헬라어로 ”엑소몰로게오“라고 고백하다. 자복하다. 혹은 동의하다 등으로 번역되는 단어라고 이야기 합니다.
    성경에서 나오는 자백과 자복은 위처럼 같은 헬라어의 ”엑소몰로게오“ 라는 것에서 나온건가요?
    아니면 우리나라의 사전처럼 자백과 자복을 근본은 같지만 약간은 다른 뜻으로 풀이 하나요? 인터넷에도 자복과 회개에 대한 다른 뜻이라며 풀이한 것은 많이 보이는데 자백과 자복이 같은거라 그런건지 그이야기는 안나오네요 혹시 아시나요"

    1. 자백(自白)과 자복(自服)은 무엇이 다른가요?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그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自白(자백)과 고백(告白)에서 "白"(백)은 "말한다, 아뢴다"라는 뜻
    자신의 잘못이나 죄를 인정하거나 죄 자체를 말하는 것을 의미

    자복(自服. confession)에서 "服"(복)은 "服從(복종) 또는 屈服(굴복)"의 뜻이 들어 있어 自白(자백)보다는 더 나아가서 상대방에게 굴복한다는 의미가 덧붙어 있는 단어입니다.

    그러나 自白(자백)과 自服(자복)이 한자를 사용한 우리말에서는 그 뉘앙스가 다르고 세부적인 의미의 차이가 있고, 법률적으로도 구분이 되지만, 헬라어 exomologeõ(엑소몰로게오)는 오늘날과 같이 자백과 자복이 구분되기 전인 고대의 단어이므로 두 가지 모두를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하나의 단어로써 여러 경우에 사용되었거나 하나의 단어가 여러 의미를 가지고 있을 때는 문맥에 따라서 번역어를 선택해야 합니다.

    이런 사정은 헬라어뿐만 아니라 현대의 다른 언어, 예컨대, 영어의 단어를 한국어로 번역할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비근한 예로 영어 present 라는 동사를 봅시다. 사전을 펴보면 다음과 같이 여러 가지로 번역됩니다.

    1. 선물하다, 바치다, 증정하다.
    2. (메달, 상장을) 수여하다.
    3. (기회, 가능성을) 제공하다.
    4. (서류를) 제출하다.
    5. (계회, 案을) 제안하다.
    6. (사람을)소개하다, 인사시키다.
    7. (새 영화를) 공개/상영하다.
    8. (배우가 役을) 맡아 하다.

    이와 마찬가지로 헬라어 homologeõ(호몰로게오) 또는 exomologeõ(엑소몰로게오)는 "자백하다, 고백하다, 자복하다, 승복하다, 죄를 인정하다, 등등" 의 의미를 다 가지고 있는 단어였습니다.
    이것이 어떤 문맥에서 사용되었느냐에 따라서 현대의 우리말로 가장 적합한 번역어를 찾아서 번역하는 것은 우리의 몫이라고 생각합니다.

    2. 회개란 무엇인가요?

    사도행전 2:38 (개정) 
    『베드로가 이르되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침례를 받고 죄 사함을 받으라 그리하면 성령의 선물을 받으리니』

    (행 5:31, 개정) 『이스라엘에게 회개함과 죄 사함을 주시려고 그를 오른손으로 높이사 임금과 구주로 삼으셨느니라』

    (행 11:18, 개정) 『그들이 이 말을 듣고 잠잠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 이르되 그러면 하나님께서 이방인에게도 생명 얻는 회개를 주셨도다 하니라』

    (계 2:5, 개정) 『그러므로 어디서 떨어졌는지를 생각하고 회개하여 처음 행위를 가지라 만일 그리하지 아니하고 회개하지 아니하면 내가 네게 가서 네 촛대를 그 자리에서 옮기리라』

    회개(悔改) :  뉘우칠 회, 고칠 개

    회개란 잘못을 뉘우치고 고치는 것을 의미합니다.
    “회개라는 것은 죄를 슬퍼하고 죄에서 떠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정로, 23)

    우리가 죄가 얼마나 악한 것인지 깨닫지 못하면 죄를 버리지 않게 될 것이요, 또한 진심으로 죄에서 떠나지 아니하면 우리 생애에 진정한 변화가 있을 수 없을 것입니다.

    “갈보리” 십자가에 달리신 하나님의 어린양을 바라볼 때에 구속의 오묘한 이치가 우리의 마음을 깨우치기 시작하고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우리를 회개로 이끄십니다. 그리스도께서 죄인들을 위하여 죽으심으로써 측량할 수 없는 사랑을 나타내셨으므로, 죄인이 이 사랑을 주목할 때에 이 사랑이 심정을 부드럽게 하고 마음에 감명을 주고 심령에 통회하는 생각을 일으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기도하는 마음으로 연구하면 이 말씀이 우리의 죄를 깨닫게 하고 구원의 길을 분명히 드러내 보여줍니다. 이 말씀을 우리에게 친히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으로 듣게 되면 죄가 가져올 결과 때문에 죄를 자복하는 것이 아니라 죄 자체를 미워하게 되어 죄를 자복하게 됩니다.

    “진정한 자복은 언제든지 명백하게 하고 또한 지은 죄를 꼭 지적하여 자백한다. 죄 가운데는 오직 하나님께만 자복하여야 할 성질의 죄도 있을 것이고 또는 해를 입은 당자에게 자복하여야 할 허물도 있다. 또 어떤 죄는 공중에 대한 죄이므로 공중 앞에 자복하여야 할 것이 있다. 그러나 어떤 자복이든지 그대가 범한 죄를 꼭 지적해서 명확하고도 요령 있게 하여야 한다.”(정로, 38)

    우리의 구원은 예수님의 영원한 속죄로 단번에 이루어진 것이지만, 우리의 회개와 자백, 고백이란 평생 해야만 하는 것입니다.

    “마리아는 용서받은 죄인인 반면에 시몬은 용서받지 못한 죄인이었다.”(소망, 567)

    우리의 죄를 예수님께 솔직하게 고백(告白-알릴 고, 흰 백) 하면 마리아처럼 우리도 “용서 받은 죄인”으로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3. 성경에서 자백과 자복에 관해 몇 번이나 사용되었나요?

    자백 - 3구절
    에스겔 12:16, 로마서 14:11, 요한일서 1:9 

    자복 - 17구절
    레위기 5:5, 26:40. 민수기 5:7, 여호수아 7:19. 에스라 10:1, 11. 느헤미야 1:6, 9:2, 3. 시편 32:5. 잠언 28:13, 예레미야 28:13,
    다니엘 9:4, 20, 마태복음 3:6, 마가복음 1:5, 사도행전 19:18.


    (겔 12:16, 개정) 『그러나 내가 그 중 몇 사람을 남겨 칼과 기근과 전염병에서 벗어나게 하여 그들이 이르는 이방인 가운데에서 자기의 모든 가증한 일을 자백하게 하리니 내가 여호와인 줄을 그들이 알리라』

    (롬 14:11, 개정) 『기록되었으되 주께서 이르시되 내가 살았노니 모든 무릎이 내게 꿇을 것이요 모든 혀가 하나님께 자백하리라 하였느니라』

    (요일 1:9, 개정)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그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요일 1:9 호몰로게오 homologeo-

    약속하다, 고백하다, 시인하다, 선포하다, 선언하다, 찬미하다, 칭찬하다.

    1. 고전 헬라어 문헌

    1) '그 말에 동의하다'(Hdt.,Ⅰ,142,4), '같은 언어를 말하다, 그의 확언을 받아들이다, 책임을 인정하다, 죄를 고백하다'(Soph.Phil.에서부터).

    2) '영수증을 확인하다'(pap에서 때때로).

    3) '제안에 동의하다'(Hdt.,Thuc.), '제안에 따르다'.

    4) '소원에 동의하다, 약속하다'.(참조: O.Michel).

    이 단어들의 종교적 용법은 이 단어들을 협정(조약)이나 법정 언어로 사용한 용법에서 파생되었을 것이다. 어떤 맹세(호몰로게오)로서 자신을 구속하는 사람은 신(神)과의 조약 관계에 들어간다. 그래서 이 개념은 법정에서의 과실에 대한 엄숙한 고백을 뜻하는 개념에서 신께 대한 죄의 고백을 뜻하는 개념으로 변형되었다.

    2. 신약에서의 용법

    1) 호몰로게오는 '언명하다, 약속하다, 시인(인정)하다, (엄숙히)공언하다, 증거하다'라는 의미를 나타낸다.

    예 : 마 14:7에서 헤롯은 의붓 딸에게 그녀의 소원을 들어 주겠다는 맹세의 약속을 했다.

    행 7:17에도 비슷한 용법이 나온다. 곧 아브라함에게 한 공언 또는 약속은 의무적인 것이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때가 가까우매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번성하여 많아졌더니".

    히 11:13은 아마 고백(confessing)과 공언(avowing)에 대한 일반 헬라어 용법을 가장 잘 이해한 것 같다. 약속의 땅 입구에서 족장들은 죽음이라는 현실 앞에서 자신들이 땅에서는 이방인에 불과하다는 고백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이 말은 하나의 선언 및 증거, 곧 공개적으로 한 고백으로 이해해야 할 것이다.

    2) 히 13:15의 호몰로게오는 '찬미하다'라는 의미를 나타낸다: "이러므로 우리가 예수로 말미암아 항상 찬미의 제사를 하나님께 드리자 이는 그 이름을 [증거하는] 입술의 열매니라". 이 문맥은 교회에게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이름을 찬미할 것을 요구한다.

    3) 호몰로게오는 '고백하다, 공개적으로 고백하다, 공적으로 진술하다'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요일 1:9에서 호몰로게오는 죄를 고백하고 인정하는 것을 의미하고 있다: 언명 또는 공언을 하는 자는 어떤 사실과 직면한다. 그는 그 사실을 감추지도 부인하지도 않는다. 그는 죄인이다는 것을 인정하고 공개적으로 특정한 죄들을 고백한다. 어떤 사람이 이와 같이 정직하게 자신의 과실을 깨닫고 공언할 때 그는 죄를 용서해 주시는 하나님의 신실하심과 의로우심을 경험하게 된다.

    4) 호몰로게오는 법적인 의미에서 '진술하다', '증언하다'라는 의미를 나타낸다. 호몰로게오의 법적인 용법은 아마도 신약성경에서 가장 중요하며, 특별한 의미를 가진다.

    마 10:32 "내가 또한 너희에게 말하노니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시인하]면 인자도 하나님의 사자들 앞에서 저를 [시인할 것이요]". 예수님은 자기를 시인 곧 고백할 것을 요구하고 있으며, 누구든지 자기를 고백하면 자기도 종말론적인 증인으로서 아버지 앞에서 그것을 확증할 것이다고 하셨다.

    2) 자복(自服) : 17구절 (구약 - 14회, 신약 - 3회)  

    (시 32:5, 개정) 『내가 이르기를 내 허물을 여호와께 자복하리라 하고 주께 내 죄를 아뢰고 내 죄악을 숨기지 아니하였더니 곧 주께서 내 죄악을 사하셨나이다 (셀라)』

    시 32:5 야다 yadah

    던지다, 쏘다, 감사하다, 찬양하다, 고백하다

    죄에 대한 양심적 가책이나 인정만을 의미하는 말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죄를 자백했음을 의미한다. 혹자는 자백에 대해 설명하기를 ‘자백은 댐의 수문을 여는 것과 같다. 자백하지 않을 때 댐 뒤에 많은 물이 쌓여서 엄청난 압력을 느끼게 되지만 일단 수문이 열리기만 하면 물이 빠지고 압력이 감해진다’라고 하였다.

    (단 9:20, 개정) 『내가 이같이 말하여 기도하며 내 죄와 내 백성 이스라엘의 죄를 자복하고 내 하나님의 거룩한 산을 위하여 내 하나님 여호와 앞에 간구할 때』

    단 9:20 야다 yadah

    던지다, 쏘다, 감사하다, 찬양하다, 고백하다

    (마 3:6, 개정) 『자기들의 죄를 자복하고 요단 강에서 그에게 침례를 받더니』

    마 3:6 엑소몰로게오는 엑스(∼부터)와 호몰로게오(동일한 것을 말하다. 말에 동의하다)의 합성어이며, '약속하다, 고백하다, 시인하다, 찬미하다, 칭찬하다'를 의미한다. 현대 헬라어에서 이 단어의 개념은 제사장에게 하는 신성한 고백을 의미하게 되었다. 곧 엑소몰로게오마이는 '나는 고백을 한다'는 뜻.

    고백은 회개의 표적이며(회심 conversion), 따라서 믿음의 새 생활의 표시이기도 하다.
    이것은 막 1:5의 병행 구절들에서 특히 분명하게 나타난다.
    "온 유대 지방과 예루살렘 사람이 다 나아가 자기 죄를 [자복하고] 요단 강에서 그에게 침례를 받더라". 이곳에서 시편에 나오는 바와 같이 죄에 대한 공적 고백은 죄로부터 자유(해방)하는 것을 의미한다.

    Yadah 동사에 대한 3가지 용법

    첫째, 이 단어는 개인적으로든 국가적으로든 죄의 시인 혹은 고백을 나타내기 위해 사용되었다. 기본적인 개념은 시 32:5에 묘사되어 있는 다윗의 개인적인 고백에서 분명하게 관찰되었다. 여기에서 시적인 병행구는 고백이 죄를 감추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하나님께 알리는 것이었음을 설명해 준다. 죄에 대한 고백이 하나님께 행해져야 한다는 사실을 주목하는 것은 중요하다.

    둘째, 야다는 하나님의 속성과 그의 일에 대한 인간의 공적인 선포나 선언(고백)을 나타내기 위해 주로 사용되었다.
    이 개념은 찬양의 의미의 핵심에 있다. 찬양은 하나님이 누구이신가 그리고 그가 무엇을 행하는가에 대한 고백이거나 선언이다.

    셋째, 야다는 또한 어떤 사람에 관한 어떤 진실을 고백하는, 즉 사람에 대한 사람의 칭찬을 나타내기 위해서 사용되었다.

    성경전체 17번 사용된 자복

    (레 5:5, 개정) 『이 중 하나에 허물이 있을 때에는 아무 일에 잘못하였노라 자복하고』

    (레 26:40, 개정) 『그들이 나를 거스른 잘못으로 자기의 죄악과 그들의 조상의 죄악을 자복하고 또 그들이 내게 대항하므로』

    (민 5:7, 개정) 『그 지은 죄를 자복하고 그 죄 값을 온전히 갚되 오분의 일을 더하여 그가 죄를 지었던 그 사람에게 돌려줄 것이요』

    (수 7:19, 개정) 『그러므로 여호수아가 아간에게 이르되 내 아들아 청하노니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 영광을 돌려 그 앞에 자복하고 네가 행한 일을 내게 알게 하라 그 일을 내게 숨기지 말라 하니』

    (라 10:1, 개정) 『에스라가 하나님의 성전 앞에 엎드려 울며 기도하여 죄를 자복할 때에 많은 백성이 크게 통곡하매 이스라엘 중에서 백성의 남녀와 어린 아이의 큰 무리가 그 앞에 모인지라』

    (라 10:11, 개정) 『이제 너희 조상들의 하나님 앞에서 죄를 자복하고 그의 뜻대로 행하여 그 지방 사람들과 이방 여인을 끊어 버리라 하니』

    (느 1:6, 개정) 『이제 종이 주의 종들인 이스라엘 자손을 위하여 주야로 기도하오며 우리 이스라엘 자손이 주께 범죄한 죄들을 자복하오니 주는 귀를 기울이시며 눈을 여시사 종의 기도를 들으시옵소서 나와 내 아버지의 집이 범죄하여』

    (느 9:2, 개정) 『모든 이방 사람들과 절교하고 서서 자기의 죄와 조상들의 허물을 자복하고』

    (느 9:3, 개정) 『이 날에 낮 사분의 일은 그 제자리에 서서 그들의 하나님 여호와의 율법책을 낭독하고 낮 사분의 일은 죄를 자복하며 그들의 하나님 여호와께 경배하는데』

    (시 32:5, 개정) 『내가 이르기를 내 허물을 여호와께 자복하리라 하고 주께 내 죄를 아뢰고 내 죄악을 숨기지 아니하였더니 곧 주께서 내 죄악을 사하셨나이다 (셀라)』

    (잠 28:13, 개정) 『자기의 죄를 숨기는 자는 형통하지 못하나 죄를 자복하고 버리는 자는 불쌍히 여김을 받으리라』

    (렘 3:13, 개정) 『너는 오직 네 죄를 자복하라 이는 네 하나님 여호와를 배반하고 네 길로 달려 이방인들에게로 나아가 모든 푸른 나무 아래로 가서 내 목소리를 듣지 아니하였음이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단 9:4, 개정) 『내 하나님 여호와께 기도하며 자복하여 이르기를 크시고 두려워할 주 하나님, 주를 사랑하고 주의 계명을 지키는 자를 위하여 언약을 지키시고 그에게 인자를 베푸시는 이시여』

    (단 9:20, 개정) 『내가 이같이 말하여 기도하며 내 죄와 내 백성 이스라엘의 죄를 자복하고 내 하나님의 거룩한 산을 위하여 내 하나님 여호와 앞에 간구할 때』

    (마 3:6, 개정) 『자기들의 죄를 자복하고 요단 강에서 그에게 침례를 받더니』

    (막 1:5, 개정) 『온 유대 지방과 예루살렘 사람이 다 나아가 자기 죄를 자복하고 요단 강에서 그에게 침례를 받더라』

    (행 19:18, 개정) 『믿은 사람들이 많이 와서 자복하여 행한 일을 알리며』




    5월 27일(화) 에스라 8-10장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죄를 자복할 때(10:1)

    에스라가 하나님의 전 앞에 엎드려 울며 기도하여 를 자복할 때에 많은 백성이 심히 통곡하매 이스라엘 중에서 백성의 남녀와 어린 아이의 큰 무리가 그 앞에 모인지라.
    While Ezra was praying and confessing, weeping and throwing himself down before the house of God, a large crowd of Israelites--men, women and children--gathered around him. They too wept bitterly.

    새한글성경 / 에스라가 기도하며 잘못을 털어놓고 있었다. 하나님의 집 앞에서 울면서 엎드려 있었다. 그때 이스라엘 사람 가운데 남자, 여자, 아이들의 수많은 무리가 그에게 몰려들었다. 백성이 많이 울었다.

    새번역 / 에스라가 하나님의 성전 앞에 엎드려 울면서 기도하며 를 자백하자, 이스라엘 사람도 남자, 여자, 어린아이 할 것 없이, 많은 무리가 에스라 주변에 모여서, 큰소리로 슬피 울었다.

    현대인 / 에스라가 성전 앞에 엎드려 고백하며 울고 기도하자 이스라엘의 많은 남녀 백성들과 아이들이 그의 주위에 모여 통곡하였다.

    공동번역 / 에즈라가 하느님의 전 앞에 쓰러져 고백하고 울며 기도하는데, 이스라엘 사람들이 남자 여자 어린이 할 것 없이 울며불며 구름처럼 모여들었다.


    죄를 자복할 때에(우케히트와도토.  וּכְהִתְוַדֹּתֹו) when he confessed

    자복(自服) : 스스로 자(自), 옷 복(服)

    1. 저지른 죄(罪)를 자백(自白)하고 복종(服從)함.
    2. 친고죄(親告罪)에서, 범인(犯人)이 피해자(被害者)에게 자기(自己)의 범죄(犯罪) 사실(事實)을 알리는 일. 형(刑)의 임의적(任意的) 감면(減免) 사유(事由)가 되며, 자수(自首)와 같은 효력(效力)을 갖는다.

    3034. 야다(yâdâh) יָדָה     스트롱번호3034

    1. 던지다.  2. 피엘형 : 미완료형 וַיַדּוּ
    3. 히필형 미완료형 יְהוֹדֶה
    발음 [ yâdâh ]
    구약 성경  / 117회 사용
    관련 성경 /  쏘다(렘50:14), 떨어지다(슥1:21), 던지다(애3:53), 인정하다(왕상8:33, 대하6:24), 감사하다(시75:1, 대상16:4, 23:30, 느12:24), 찬송하다(창29:35, 대하7:6, 시45:17), 자복하다(민 5:7, 시 32:5, 단 9:4), 찬양하다(시43:4,71:22, 사38:18), 칭찬을 받다(시49:18), 아뢰다(레16:21).
    자복하다(민 5:7, 시 32:5, 단 9:4),

    민수기 5:7
    그 지은 를 자복하고 그 값을 온전히 갚되 오분지 일을 더하여 그가 를 얻었던 그 본주에게 돌려 줄 것이요.

    시편 32:5
    내가 이르기를 내 허물을 여호와께 자복하리라 하고 주께 내 를 아뢰고 내 죄악을 숨기지 아니하였더니 곧 주께서 내 의 악을 사하셨나이다(셀라)

    다니엘 9:4
    내 하나님 여호와께 기도하며 자복하여 이르기를 크시고 두려워할 주 하나님, 주를 사랑하고 주의 계명을 지키는 자를 위하여 언약을 지키시고 그에게 인자를 베푸시는 자시여

    하나님의 전 앞
    - 이것은 '성전 마당'을 가리킴이 분명하다(Schultz).
    만일 에스라가 '성소' 안에서 기도를 했다면 백성들이 에스라의 기도 모습을 목도하지 못했을 것이다.

    엎드려 울며
    - '엎드려'(*, 미트나펠)는 '쓰러지다' 혹은 '넘어지다' 등의 뜻을 지닌 동사 '나팔'(*)의 재귀형으로서 극도의 슬픔 때문에(Davidson) 스스로 자신의 몸을 던지듯 납작하게 엎드리는 행동을 가리킨다(NIV).
    또한 '울며'(*, 바카)는 어떤 비극적 사실로 인하여 '통곡' 혹은 '애곡'하는 것을 가리킨다(창 23:2 ; 삼상 1:10 ; 삼하 1:24 ; 렘 22:10).
    따라서 '엎드려 울며'는 극도의 슬픈 감정을 표현하기 위한 암시적 행동임이 분명하다.
    에스라는 자신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죄악임에도 불구하고 마치 자신의 죄인 양 하나님께 백성들의 죄를 고백한 바 있거니와(9:6-15) 여기서도 백성들의 죄를 자신의 것인 양 괴로워하며 통회 자복하고 있다.

    많은 백성이 심히 통곡하매
    - 이것은 일차적으로 (1) 에스라의 죄에 대한 외적 태도(9:3).
    (2) 에스라의 백성들에 대한 연대 의식 및 그의 간절한 기도 내용 때문이었을 것이다.
    바로 이 같은 효과를 극대화시킨 요소 중 하나는, 에스라가 페르시아왕의 정치적 사법권을 소유한(7:25) 신분의 소유자였다는 사실이었을 것이다(Fensham).
    한편, '통곡하매'는 본절의 '울며'와 동일한 단어이다.
    이같이 에스라에게 적용된 단어가 백성들에게도 적용됐다는 사실은, 여기의 백성들의 통곡이 에스라의 신앙적 태도에 대한 적극적 반응임을 암시해 준다.


    3045. 야다( yâdaʽ)  יָדַע   

    1. 보다.  2. 지각하다. 3. 삿13:21
    발음 [ yâdaʽ ]
    구약 성경  / 940회 사용
    관련 성경 / 동침하다(창 4:1, 왕상 1:4), 알다(창 4:9, 신 9:6), 가까이 하다(창 19:8, 24:16), 깨닫다(창19:33,전2:14), 간섭하다(창39:6), 허락하다(출3:19), 알게 하다(출14:4, 삼하24:2), 분별하다(신1:39, 전8:5), 생각하다(신8:5, 삼하23:13), 기억하다(신11:2), 알리다(삼상22:17), 살피다(욥35:15, 잠27:23), 아뢰다(시56:9), 측량하다(시71:15), 보다(잠14:7), 모르다(전4:13), 무식하다(사29:12), 몰지각하다(사56:11), 알다(렘1:5), 부끄럽다(렘6:15), 인정하다(렘14:20), 알리다(겔6:13), 알고자하다(전7:25), 알아보다(삼상23:22), 정탐하다(삼상23:23), 자복하다(렘3:13), 상관하다(창19:5, 삿19:22), 기억하다(출2:25), 행음하다(삿19:25), 분간하다(삼하19:35), 헤아리다(욥37:5, 사47:11), 알아주다(사58:3), 자다(삿21:11), 익숙하다(창25:27,왕상9:27), 잘하다(대하2:8), 풍부하다(대하2:12), 돌보다(잠12:10), 인정받다(신1:15), 먹다(창41:21), 탄로되다(출2:14), 나타나다(삼상22:6, 사66:14), 교훈을 받다(렘31:19), 기억하다(창41:31), 보이다(룻3:3), 예고하다(사47:13), 드러나다(잠10:9), 나타내다(욥26:3, 잠12:16), 지시하다(출33:12), 가르치다(삼상10:8, 욥37:19), 배우다(삼상28:15), 대답하다(욥38:2, 40:7), 선포하다(사12:4), 징벌하다(삿8:16), 보여주다(사40:14), 분별하다(겔44:23),인도하다(대하23:13). [명] 총명한 자(단2:21), 감각(잠23:35), 지식(느10:28), 지식인(전9:11),친구(왕하10:11, 시31:11), 친족(룻2 : 1), 친우(시55:13). [부] 능히(대하2:14), 부지중(아6:12), 반드시(창15:13), 밝히(삼상20:3), 분명히(왕상2:37, 렘28:15), 순식간에(시35:8), 부지런히(잠27:23).


    에스라의 개혁(에스라 10:1-17)

    예루살렘으로 귀환한 이스라엘 백성들은 1차 귀환 후 약 60년 간 영적인 지도자가 없는 공백기를 지내면서 도덕적, 종교적으로 타락해 있었습니다.
    2차 귀환을 통해 예루살렘으로 돌아 온 에스라는 그들이 이방 여인과 통혼하며 범죄하는 모습을 보고 단호한 개혁을 시행하였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신앙의 개혁을 통한 몇 가지 교훈을 살펴보기로 하겠습니다.


    첫째, 에스라는 먼저 하나님 앞에 엎드려 울며 백성들의 죄를 대신 통회 자복했습니다 (1절). 에스라는 백성들이 죄를 범하자 마치 그것이 자신의 죄인 양 울며 회개했습니다. 백성들의 과오를 대신 지고자 하는 참목자의 심령으로 그들의 불순종과 패역을 토로하는 철저한 참회의 기도를 드렸던 것입니다. 그러자 백성들이 같이 통곡하며 죄를 회개하기 시작하는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둘째, 에스라는 백성들이 회개의 역사를 끝마칠 때까지 금식했습니다(6절). 이것은 철저한 회개의 역사를 촉구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도 한번 죄를 범한 후에 철저한 회개가 이루어지지 않으면 다시 그 죄를 범하기 쉬운데, 그 때에는 금식하며 회개해야 하는 것입니다. 에스라처럼 다른 사람의 죄를 위해서 금식하고 또한 우리 자신의 고범죄를 위해서 금식하며 회개할 때, 우리는 죄의 고리를 철저히 끊어 버릴 수 있게 됩니다.


    셋째, 백성들은 이방 여인들을 단호히 끊어버렸습니다(11-17절). 다말과 룻은 이방 여인이지만 언약의 계보에 들어온 여인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여기 나온 이방 여인들은 가증한 이방 우상을 숭배하며 이스라엘내에 불신앙을 퍼뜨리는 자들이었기 때문에 에스라는 혼인을 금하고 끊어버릴 것을 명한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도 전도가 가능한 불신자와는 교제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도리어 나를 세속주의로 빠져들게 하는 친구 및 불신자와는 그 관계를 단호히 끊어 버려야 합니다.

    에스라의 인도를 따른 이스라엘 백성들과 같이 우리 신앙 생활 중에도 내적인 신앙 개혁은 계속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금식하고 회개하며 단호한 결단을 통해 새로운 신앙의 부흥을 이루어야 하겠습니다.






    회개운동의 기폭제(에스라 10:1-17)

    1.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은 회개로부터

    회개란 다른 곳을 향해 제멋대로 달려가던 인생이 말씀과 성령의 깨우침을 받고, 하나님을 향하여 방향을 바꾸어 돌아서는 것입니다. 이것을 회개운동(悔改運動. Repent Movement)이라고 합니다.


    본문은 제사장이면서 학사였으며 포로로 끌려간 바벨론에서 태어난 에스라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는 바벨론에서 자기 민족의 불행과 비극이 하나님을 능멸하고, 하나님 말씀의 본질과 권위를 무시하며, 제멋대로 육체의 입장에서 살아가느라 영적인 소망을 버렸기 때문에, 하나님으로부터 영육간에 버림을 받았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는 하나님과의 관계회복을 서두르기 위해 자신이 먼저 철저히 회개하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준행하며 사는 생활로 바꿨습니다.



    페르시아(바사)가 바벨론을 점령하고, 다시 페르시아가 세계를 지배하는 과정에 아닥사스다 왕에 이르면서 에스라는 그 시대에 서기관 노릇을 하게 됩니다. 그는 비록 포로의 자식으로 태어났지만 유식하고 촉망 받는 출세한 자였습니다.

    그는 자기 민족 이스라엘의 영적인 상태가 하나님 앞에 잘못되면, 더 심한 채찍과 시련 가운데 멸망당하게 될 것이 불안하고 두려웠습니다. 이것은 사명자의 발로(發露. 숨은 것이 겉으로 드러나거나 숨은 것을 겉으로 드러냄)이기도 하고, 마땅히 가져야 할 본질적 자세이기도 했습니다.

    2. 불순종으로 하나님을 거스르는 백성

    B.C. 538년 제1차 포로귀환(스 1-6)은 스룹바벨의 인도로 예루살렘에 돌아갔고, 그들이 24년 만에 예루살렘 성전을 짓고 봉헌식을 했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을 외면하고 사는 육에 속한 모습들뿐이었습니다. 그리고 유대교의 종교적 지도층 인물이었던 제사장과 레위인들, 성전에서 예배하던 찬양대원들, 성전을 지키던 경비들 같이 성전에서 먹고 살고, 대접받고, 봉사해야하는 사람들까지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는 죄를 지었습니다.

    출애굽기 34장 15-16절을 보면 “너는 삼가 그 땅의 거민과 언약을 세우지 말찌니 이는 그들이 모든 신을 음란히 섬기며 그 신들에게 희생을 드리고 너를 청하면 네가 그 희생을 먹을까 함이며 또 네가 그들의 딸들로 네 아들들의 아내를 삼음으로 그들의 딸들이 그 신들을 음란히 섬기며 네 아들로 그들의 신들을 음란히 섬기게 할까 함이니라”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오랫동안 미신, 우상에 물들어 악령에 사로잡혀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 속에서 하나님의 선민(選民. 하나님이 거룩한 백성으로 택한 민족이라는 뜻)인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 중심으로 온전히 구별된 삶을 살기를 원하셨던 것입니다.

    그렇게 보면 요셉이 애굽의 국무총리가 되어 애굽 여자인 아스낫과 혼인하게 된 것은 잘못된 것이 아닐까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아스낫은 에브라임과 므낫세라는 두 아들을 낳고 이방인이었지만, 남편인 요셉의 하나님 여호와를 섬기는 일에 적극적으로 믿음을 같이했습니다.

    약 400년 후에 있었던 모세도 애굽 공주의 양자로 살면서 많은 애굽 문물을 습득했습니다. 그 후에 광야로 도망쳐 이스라엘을 오랫동안 괴롭혀 왔던 미디안의 사제 이드로의 일곱 딸 가운데 하나인 십보라와 혼인했습니다. 십보라도 마찬가지로 모세와 그 믿음을 같이 했습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이 가나안 땅 원주민의 딸들과 혼인하지 말라고 금기령을 내리신 이유는, 그들의 심지가 견고하지 못한 연유로 이방 여인들을 따르게 되고, 결국 하나님의 진노의 대상으로 멸망을 당할 것이기 때문이었습니다.

    3. 순종하고자 하는 착한 마음이 깃든 회개

    하나님이 에스라를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신실하고 충성스러운 일꾼으로 여기심으로, 아닥사스다 왕을 성령으로 사로잡아 많은 재물과 함께 1,754명이 예루살렘으로 돌아갈 수 있도록 하셨습니다. 또한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을 지키심으로 무사히 귀환할 수 있도록 하셨습니다. 1차 귀환으로 먼저 와 있던 자들은 하나님을 두려워 할 줄도 몰랐고, 하나님이 금하신 일들을 행하며 살고 있었습니다. 심지어 제사장들까지도 이방 여인들을 아내와 며느리로 삼았습니다. 이것은 이방 여인들과 왜 혼인했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의 명령을 거역한 것이 죄가 되는 것입니다.

    구약과 신약을 통해 성경은 기록하기를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여 지켜 살면 그 말씀이 너를 살릴 것이라고 했습니다. 다른 한 쪽은 그 말씀을 지켜 살지 않으면 멸망하여 지옥으로 갈 것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이 두 가지 “하라”와 “하지 말라” 뿐입니다.

    “하지 말라”하셨는데 했으니 죄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원칙이고 법칙입니다. 하나님이 창조주이시며 주관자이시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의 목자로 세움 받은 에스라는 죄를 짓지 않은 자였습니다. 지금 에스라가 하나님 앞에 회개하려는 죄는 이스라엘이 지은 죄인 것입니다. 그러나 에스라는 자기 백성의 죄를 애통하며 기도했습니다. 이 죄 값으로 이스라엘이 또 다시 하나님의 징계로 멸망이 임하지 않도록 하나님 앞에 용서를 빌며 부르짖고 매달렸습니다.

    에스라가 죄를 자복할 때에 많은 백성이 심히 통곡하면서 이스라엘 중에서 백성의 남녀와 어린 아이의 큰 무리가 그 앞에 모였다고 했습니다. 이것은 소망적인 것입니다. 에스라의 회개에 동참하는 회개운동이 시작된 것입니다.

    2절에서 스가냐가 에스라에게 “우리가 우리 하나님께 범죄하여 이 땅 이방 여자를 취하여 아내를 삼았으나 이스라엘에게 오히려 소망이 있나니”라고 한 말은, 하나님이 에스라를 어떻게 보내오셨는지, 그 에스라가 왜 그토록 애통하며 회개를 하고 있는지 잘 알고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 백성이 하나님의 명령을 따르지 않고, 저주받은 이방 여인들과 가정을 이루었기 때문이며, 이러한 죄를 에스라를 통해 지적하시며 책망하시면서 서둘러 회개하기를 촉구하시는 하나님을 생각할 때, 오히려 그 하나님을 향하여 소망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온전한 회개만 이루어지면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어질 것에 대한 기대 때문이었습니다.

    스가냐는 솔선하여 함께 살던 이방 여인을 그 자식과 함께 내보냈습니다. 그리고 에스라를 찾아가 “곧 내 주의 교훈을 좇으며 우리 하나님의 명령을 떨며 준행하는 자의 의논을 좇아 이 모든 아내와 그 소생을 다 내어 보내기로 우리 하나님과 언약을 세우고 율법대로 행할 것이라 이는 당신의 주장할 일이니 일어나소서 우리가 도우리니 힘써 행하소서”하며 의욕을 북돋워 주었습니다. 이것이 회개운동의 기폭제가 되었습니다.

    4. 진실성을 인정받는 회개

    하나님 마음에 드는 교회, 인정받는 교회가 되게 하기 위해 바른 목회를 하자고 애써오는 과정에서 야단도 치고 징계도 하지만, 온전한 회개와 변화가 없다면 불행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에스라는 총회를 열어 누구든지 3일 안에 다 모이도록 했고“ 누구든지 방백들과 장로들의 훈시를 좇아 삼 일 내에 오지 아니하면 그 재산을 적몰하고 사로잡혔던 자의 회에서 쫓아내리라(스 10:8)”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아닥사스다 왕을 통해 에스라에게 준 특권이었습니다. 에스라 7장 26절 “무릇 네 하나님의 명령과 왕의 명령을 준행치 아니하는 자는 속히 그 죄를 정하여 혹 죽이거나 정배하거나 가산을 적몰하거나 옥에 가둘찌니라”고 에스라에게 특권을 주었습니다.

    유다와 베냐민 모든 사람이 삼 일 안에 모두 모였고 에스라는 그들에게 “너희가 범죄하여 이방 여자로 아내를 삼아 이스라엘의 죄를 더하게 하였으니 이제 너희 열조의 하나님 앞에서 죄를 자복하고 그 뜻대로 행하여 이 땅 족속들과 이방 여인을 끊어 버리라”(스 10:10-11)고 명합니다. 입으로만 죄를 고백하는 것이 아니라 행동으로 실천하여 진정한 회개의 진실성을 인정받아 그 죄를 온전히 용서받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신앙은 영적인 소망을 가꾸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하나님의 법을 어겼을 땐 그 죄를 정리하는 결단의 믿음을 보여드려야 합니다. 이들이 함께 살던 이방 여인들과 그 자식들을 돌려보내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과의 관계회복을 위해 죄악의 끈을 끊어낼 필요가 있었습니다.

    12절에 “회 무리가 큰 소리로 대답하여 가로되 당신의 말씀대로 우리가 마땅히 행할 것이니이다”고 힘써 이 일을 행하기로 답하고 석 달 동안 이방 여인들과 결혼한 자들을 파악했습니다. 그런데 112명 중 “오직 아사헬의 아들 요나단과 디과의 아들 야스야가 일어나 그 일을 반대하고 므술람과 레위 사람 삽브대가 저희를 돕더라”했습니다. 결국 그들은 에스라에게 주어진 특권대로 조치가 취해졌습니다. 이것은 에스라의 명령을 거역하는 것은 그를 보낸 아닥사스다 왕을 거역하는 것이고, 결국 아닥사스다 왕을 움직이신 하나님을 거역하는 것이 되기 때문입니다.


    ‘에스라의 회개 기도, 에스라가 주는 역사적 교훈(에스라 9:1~15)

    고대 그리스의 역사학자 투키디데스는 “역사는 영원히 되풀이된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영국의 극작가 조지 버나드 쇼는 “역사는 되풀이되는데 이를 항상 예측하지 못한다면 인간은 얼마나 경험에서 배울 줄 모르는 존재인가.”라고 말했습니다.

    이처럼 분명 역사는 되풀이되기 때문에 지나간 역사 속에서 경험과 지식을 배워 똑같은 역사를 되풀이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인간은 여전히 죄 가운데 있고 그 죄가 죄를 낳기 때문에 똑같은 역사를 되풀이 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민족은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출애굽 하게 됩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은혜로 출애굽 하였지만, 그 은혜를 잊어버리고 광야 생활 가운데 원망과 불평만 늘어놓았다가 그만 약속에 땅에 이르지도 못하였습니다. 오직 믿음의 사람 여호수아와 갈렙 두 사람만 약속에 땅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이스라엘 믿음의 2세대 즉 새롭게 가나안 땅에 들어갈 젊은 세대에게 모세를 통해 하나님의 말씀을 재차 강조하면서 설교한 것이 신명기서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신명기를 통해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 살아갈 때 지켜야 할 하나님의 말씀을 전해 주었습니다.

    신명기의 주제는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고 말씀을 지키라는 것이었습니다. 과거 불순종했던 그들의 선조들처럼 살아가지 말고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며 말씀에 순종하면서 살아가라는 것이었습니다.

    신명기 7장에서는 약속의 땅인 가나안을 정복하고 일곱 족속을 쫓아내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들과 언약도 하지 말고 불쌍히 여기지도 말라는 것이었습니다. 이어지는 3~4절 말씀에 보면, “또 그들과 혼인하지도 말지니 네 딸을 그들의 아들에게 주지 말 것이요 그들의 딸도 네 며느리로 삼지 말 것은 그가 네 아들을 유혹하여 그가 여호와를 떠나고 다른 신들을 섬기게 하므로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진노하사 갑자기 너희를 멸하실 것임이니라” 이 말씀을 통해 이스라엘 백성들은 가나안 땅에 들어가 살 때 이방 족속과 결혼하지 말라고 명하신 것입니다. 이방 족속과의 결혼은 하나님을 섬기는 신앙에서 떠나 이방 신들을 섬기게 되기 때문이라는 것이었습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준엄한 명령이 있었음에도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방 족속과 결혼하였고 하나님께서 예언했던 것처럼 하나님을 떠나 우상을 섬기기 시작한 것이었습니다. 대표적인 사람이 다윗의 아들 솔로몬이었습니다. 솔로몬은 결혼동맹으로 나라와 국방을 튼튼히 하였지만 이방 여인들과의 결혼으로 이방의 신들이 걷잡을 수 없이 들어왔던 것이었습니다.

    열왕기하 11장 2~5절 말씀을 읽어 드리겠습니다. “여호와께서 일찍이 이 여러 백성에 대하여 이스라엘 자손에게 말씀하시기를 너희는 그들과 서로 통혼하지 말며 그들도 너희와 서로 통혼하게 하지 말라 그들이 반드시 너희의 마음을 돌려 그들의 신들을 따르게 하리라 하셨으나 솔로몬이 그들을 사랑하였더라 왕은 후궁이 칠백 명이요 첩이 삼백 명이라 그의 여인들이 왕의 마음을 돌아서게 하였더라 솔로몬의 나이가 많을 때에 그의 여인들이 그의 마음을 돌려 다른 신들을 따르게 하였으므로 왕의 마음이 그의 아버지 다윗의 마음과 같지 아니하여 그의 하나님 여호와 앞에 온전하지 못하였으니 이는 시돈 사람의 여신 아스다롯을 따르고 암몬 사람의 가증한 밀곰을 따름이라.”

    우리는 하나님께서 미리 경고하신 이방 족속과의 결혼하면 안 된다는 이유를 분명 솔로몬왕에게서 잘 찾게 된 것입니다. 이방 족속과의 결혼 하면 안 되는 이유를 발견한 것입니다. 그것은 이스라엘 민족의 정체성을 지키는 것의 의미와 함께 신앙의 정체성을 지키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계명이었던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한 이스라엘은 주전 586년 나라는 바벨론에게 망하게 되었고 바벨론으로 606년부터 포로로 잡혀가게 됩니다.

    그러나 긍휼에 풍성하신 하나님, 약속을 신실하게 지키시는 하나님께서는 포로 70년이 지나면 다시 고국 땅으로 돌아오게 해 주시겠다는 약속을 지키십니다. 정확히 포로로 잡혀갔던 70년 만에 주전 536년에 바벨론에서 돌아오게 된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 읽었던 에스라서는 포로귀환 역사를 기술하고 있습니다. 에스라서 1장 1절에서 하나님께서는 바사왕 고레스의 마음을 감동시키어 이스라엘 백성들을 고국으로 돌아갈 수 있는 조서를 내리게 됩니다. 스룹바벨의 인도로 주전 536년에 1차로 고국 땅으로 돌아오게 됩니다. 돌아온 그들은 첫 번째 일로 허물어졌던 성전을 짓게 됩니다. 6장 13절 이하에서 스룹바벨 성전이 완공되어 봉헌식과 유월절 절기를 지키게 됩니다.

    에스라서 7장과 8장에서는 2차로 에스라의 인도로 예루살렘에 귀환하게 됩니다. 1차 포로귀환 후 80년 만에 2차로 고국 땅으로 되돌아오게 된 것입니다. 에스라 8장에서는 돌아온 사람들의 명단이 기록되고 있습니다. 함께 에스라서 8장 31절 말씀을 찾아 읽어 보겠습니다. “첫째 달 십이 일에 우리가 아하와 강을 떠나 예루살렘으로 갈새 우리 하나님의 손이 우리를 도우사 대적과 길에 매복한 자의 손에서 건지신지라.” 이 모든 것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손이 도우셨다고 에스라는 말하고 있습니다.

    에스라는 예루살렘으로 돌아온 후에, 그것이 9장 1절 말씀에 나와 있습니다. 1절의 ‘이 일 후에’라는 말은 에스라와 이스라엘 백성들이 고국 땅에 도착한 이후의 사건에 대한 기록입니다.

    7장 9절에 보면 에스라 일행에 이스라엘 도착한 것은 5월이었습니다. 그리고 본문에서 이스라엘 백성을 모으는 사건은 그해 9월 20일에 일어났습니다. 이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예루살렘에 도착한 후 4개월을 넘지 않은 시점의 일이었습니다.

    9장 1절에서 ‘이스라엘 백성과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이’라는 말을 통해 보면 이스라엘 지도자와 종교지도자 그리고 일반 백성들을 포함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들 모두는 1절에서 ‘가증한 일’을 행하였다고 말합니다. 그 가증한 일은 2절에 나와 있습니다. 2절 말씀을 함께 읽어 보겠습니다. “그들의 딸을 맞이하여 아내와 며느리로 삼아 거룩한 자손이 그 지방 사람들과 서로 섞이게 하는데 방백들과 고관들이 이 죄에 더욱 으뜸이 되었다 하는지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에스라서에서 발견하던 죄악 된 모습은 어딘가 익숙하지 않습니다. 그들의 선조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고 가나안 땅에 들어가 이방인들과 결혼하고 그들의 신을 따랐던 모습과 똑같은 죄를 저지르고 있는 것입니다.

    더욱 지금의 이스라엘 백성들은 나라는 망하였다가 하나님의 은혜로 다시 약속의 땅에 돌아온 지도 얼마 되지 않은 시점에서 과거 이스라엘 선조들과 똑같은 죄를 저지르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이스라엘 백성들의 죄악 된 모습을 보고 에스라는 모든 백성을 모아놓고 하나님 앞에 나가 기도하기를 작정한 것입니다. 우리는 에스라의 기도를 통해 진정한 우리의 정체성을 되찾고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삶을 살아가시기를 부탁을 드립니다.

    첫째, 자신의 죄로 받아들이고 기도하였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이방 족속과의 통혼을 듣고 에스라는 5절 말씀에 보면, ‘근심 중에 일어나서 속옷과 겉옷을 찢은 채 무릎을 꿇고’ 하나님께 기도로 나갔던 것입니다.

    에스라의 기도의 특징 중에서 지난번 다니엘의 기도에서처럼 ‘우리’라는 단어가 무려 27번이나 나오게 됩니다. 이는 죄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저지르게 되었지만, 그 죄를 자신의 죄로 인정하고 하나님 앞에 인정하고 자복하며 기도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는 소돔과 고모라를 위해 기도했던 아브라함의 중보기도에서, 그리고 우상을 만들어 다시 애굽으로 되돌아가자고 했던 이스라엘 백성들을 위해 중보기도 했던 모세와 하나님의 약속을 붙잡고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위해 기도했던 다니엘의 기도 모습과 동일한 것이었습니다. 이는 로마서 9장 3절에서 “나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을 위하여 나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원하는 바로라.”라고 기도했던 바울의 모습을 보게 됩니다.

    우리가 이 땅을 위해, 그리고 나라와 민족을 위해 기도해야 하는 이유는 이 땅, 이 나라와 민족은 우리가 살아가야 할 땅이며 함께 살아가야 할 이 땅의 백성들이기 때문입니다. 단순히 혈육 적인 가족을 넘어 함께 살아가야 할 백성들이기에 우리는 이 땅과 이민족을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우리가 비록 죄악이 넘치는 이 땅과 우상 숭배하며 하나님을 떠난 이 백성을 위해 기도할 때 하나님께서 반드시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고 이 땅과 이 백성을 치유해 주실 것입니다.

    둘째, 구체적으로 회개하며 기도하였습니다.

    에스라는 본문 6절부터 15절까지 하나님 앞에 구체적으로 이스라엘의 죄악에 대해 구체적으로 회개하며 기도하고 있습니다. 6절과 7절에서는 과거 이스라엘의 지속적인 죄악에 대해 회개하였습니다. 8절과 10절에서는 이스라엘에게 베푸신 하나님의 은혜를 배신한 것에 대해 회개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에게 은혜를 베푸사 아주 망하게 하지 않으시며 소수의 믿음의 남은 자를 남겨 두셨습니다. 또한, 종 노릇 가운데서도 소성하게 하여주셨으며 긍휼히 여기사 다시 회복해 주셨습니다. 또한, 폐허가 된 이스라엘을 다시 세우시고 살 수 있는 삶을 터전을 주셨습니다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이어지는 11절부터 15절까지에 서는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했던 죄를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14절부터 15절에서는 에스라의 결단의 고백이 담겨 있습니다.

    함께 14~15절 말씀을 읽어 보겠습니다. “우리가 어찌 다시 주의 계명을 거역하고 이 가증한 백성들과 통혼하오리이까 그리하면 주께서 어찌 우리를 멸하시고 남아 피할 자가 없도록 진노하시지 아니하시리이까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여 주는 의로우시니 우리가 남아 피한 것이 오늘날과 같사옵거늘 도리어 주께 범죄하였사오니 이로 말미암아 주 앞에 한 사람도 감히 서지 못하겠나이다 하니라”

    에스라는 이처럼 회개하고 결단하면서 기도한 것입니다. 그러한 회개의 결단은 10장에서 보면, 이스라엘의 죄를 자복한 결과가 나옵니다. 그들은 통회 자복하고 이방 여인들을 되돌려 보내게 됩니다.

    이처럼 이스라엘 백성들은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거두게 된 것입니다. 오직 말씀을 붙잡고 회개할 뿐만 아니라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거둘 때만이 그것이 진정한 회개한 자의 모습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도 우리가 기도한 것에 결단이 되 따라야 하며, 그 결과를 통해 하나님께는 영광을 돌리며 하나님 나라가 확장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부탁을 드립니다.

    셋째, 오직 하나님의 긍휼을 바라며 기도하였습니다.

    에스라의 기도의 특징과 다른 믿음의 선조들처럼 하나님의 긍휼을 의지하여 기도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의지해야 할 것은 8절 말씀에 ‘은혜를 베푸사’ 그리고 9절 말씀에 ‘불쌍히 여김을 입고’ 두 가지입니다.

    오늘 본문에서처럼 정치 종교지도자뿐만 아니라 일반 모든 백성이 하나님께 죄악을 저지를 모습을 보게 됩니다. 에스라서 마지막 절인 10장 44절의 ‘모두’라는 말에서 보듯이 우리는 모두 하나님 앞에 죄밖에 지은 것이 없는 존재입니다. 누구도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 인정을 받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런 이유로 우리는 오직 은혜를 베풀어 주시고 불쌍히 여기시는 하나님께 기도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의롭게 되고 다시 하나님의 긍휼을 입게 되는 것은 오직 예수님의 십자가 아래서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만이 우리를 하나님 앞에서 죄로부터 의롭다 인정함을 받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영원하신 긍휼과 사랑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모두 예수님의 십자가만을 의지하여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가야 합니다. 히브리서 4장 16절 말씀에 “그러므로 우리는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 이 말씀처럼 예수님 때문에 긍휼하심을 받은 존재 되었습니다. 또한,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갈 수 있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그런 까닭에 우리는 우리의 죄악 된 모습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와 예수님의 사랑을 힘입어 오늘도 그 용서와 회복의 보좌 앞으로 나가야 합니다. 믿음으로 구하는 기도에 반드시 응답해 주실 것입니다.

    프랑스 소설가 앙드레 지드는 “모든 것은 이미 일컬어졌으나 아무도 듣지 않기 때문에 언제나 다시 시작해야만 한다.”라고 말하였습니다. 우리는 조상들의 실수를 되풀이해서는 안 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이미 말씀하신 하나님의 말씀을 잘 들어야 합니다. 들은 말씀을 힘써 순종해야 합니다. 그럴 때 다시 죄악 된 역사를 되풀이하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 오늘도 나에게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잘 들으시고 힘써서 순종함을 통해 하나님께는 영광이며 이 땅에서는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가는 복된 인생들임을 증거하는 우리가 모두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부탁을 드립니다. 할렐루야~~

    에스라의 회개 기도(에스라 9:1~10)

    1. 서론

    예전에 ‘여배우들’이라는 영화를 본 적이 있습니다. 한 때 인기 있었던 여배우들 6명이 나와 솔직한 얘기를 나누는 영화였습니다. 그 중에 한 명이 이런 얘기를 하더군요. “우리가 EBS야? 항상 좋은 얘기만 하게?”

    보통 사람들 의식 속에 EBS는 교육방송이기 때문에 항상 좋은 얘기, 바른 소리만 전하는 방송입니다. 그런데 이 말 속에는, 좋은 말은 항상 하기는 어렵다. 진부하다. 지루하다 이런 의미도 포함되어 있는 것 같습니다.

    친구들끼리 얘기를 하다가도 상대방이 바른 소리를 하면 “야야, 설교하지 마” 이렇게 말합니다. 예나 지금이나 누군가 나에게 바른 소리를 하는 것은 듣기 싫습니다.

    2. 바른 소리를 하는 에스라

    오늘 본문 9장 1절과 2절에서 에스라는 패역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바른 소리를 합니다. 그들의 죄악을 지적합니다.

    “가나안 사람과 헷 사람과 브리스 사람과 여부스 사람과 암몬 사람과 모압 사람과 애굽 사람과 아모리 사람의 가증한 일을 행하며, 그들의 딸의 취하여 아내와 며느리를 삼아”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방인과의 결혼이라는 문제를 지적하고 있습니다. 사실 이방인과 결혼한 것 자체가 무조건 잘못이라는 것은 아닙니다. 다윗의 신실한 부하 장수 중에서 우리야는 헷 사람이었습니다. 가나안 정탐꾼을 숨겨주었던 라합도 가나안 여인이었습니다.

    문제는 이방인과의 결혼이, 그들이 섬기던 신, 즉 우상숭배와 관련이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의 종교행위는 악하고 타락했습니다. 자녀를 불 가운데로 지나게 했고, 불법적인 성행위가 만연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여호수아가 가나안 땅에 들어갈 때 가나안 일곱 족속을 멸하라고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하지만 사사시대와, 왕정시대, 포로기를 지나고 다시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에 돌아온 후에도, 가나안 족속들은 여전히 그 땅에 있었고, 이스라엘 사람들은 하나님의 명령을 잊은 채 그들과 결혼해 살았습니다.

    그들에게 성벽 재건은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그저 그렇게 살면 되는 것이었습니다. 가나안 여인이 아름다우면 그냥 결혼하면 되고, 그들의 종교와 하나님을 섬기는 일이 서로 충돌하면, 적당히 타협해 나가면 될 뿐이었습니다. 바사에서 귀환한 이스라엘 사람들 자신들이 보기에 자기들은 그럭저럭 살아갈 뿐 큰 죄가 없었습니다.

    하나님을 잊은지 오래 되었고, 신앙이 무기력해진지 오래되었습니다. 이 때 에스라가 그들에게 바른 소리, 쓴 소리를 한 것입니다. ‘너희들이 이방인들과 결혼한 것은 큰 죄악이다. 이 죄악을 방백들과 두목들이 앞장서고 있다’ 지적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백성들에게 바른 말을 한 에스라는 자신이 먼저 회개 기도를 해야만 했습니다.

    2. 회개 기도하는 에스라

    에스라의 심정이 얼마나 비통했는지 3절에 잘 표현되어 있습니다. “속옷과 겉옷을 찢고 머리털과 수염을 뜯으며”라고 했습니다.

    백성들의 죄악을 지적하고 바로잡아야만 했는데, 백성의 지도자들이라는 사람들이 이 죄에 으뜸이라는 사실은 그들 더욱 힘들게 만들었을 것입니다.

    에스라가 비통한 심정으로 옷을 찢고 머리털을 뜯으며 앉아 있는 모습을 보고, 하나님을 아는 자들이 주변에 모여 들었습니다(4절). 그들은 함께 회개했습니다.

    5절부터는 에스라가 하나님께 기도하는 모습이 나옵니다.

    그는 속옷과 겉옷을 찢은 채로 무릎을 꿇고 기도했습니다.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부끄러워 낯이 뜨뜻하여 감히 나의 하나님을 향하여 얼굴을 들지 못하오니 이는 우리 죄악이 많아 정수리에 넘치고, 우리 허물이 커서 하늘에 미침이니이다” 이렇게 기도하고 있습니다.

    에스라는 백성들의 죄를 자신의 죄로 여기면서 기도하고 있습니다. 죄 많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대신해서 기도하고 있습니다. 마치 예수님이 이 땅의 죄 많은 백성들을 죄를 담당하고 대신 죽은 것처럼 말입니다. 순교자 스데반 집사도 자기를 돌로 친 백성들의 죄를 용서해 달라고 간구했습니다.

    죄를 지은 백성들이 먼저 회개 기도를 드린 것이 아니라, 죄를 지적한 에스라가 하나님 앞에 꿇어 엎드려 먼저 회개 기도를 했습니다.

    회개하던 에스라의 기도는 이제 소원을 말하며 하나님께 간구하는 기도로 바뀝니다.

    3. 하나님의 은혜를 되새겨 보는 에스라

    8절부터 에스라의 기도는 여호와께서 그동안 베푸신 은혜를 말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을, 거룩한 처소에 박힌 못과 같게 해 주셨고, 눈을 밝혀 주셨고, 소성케 해주신 것입니다. 또한 노예생활에서 건져 주셨고, 하나님 전을 세우게 하셨고, 그 퇴락한 것을 수리하게 하셨고, 유다와 예루살렘에서 울타리를 주셨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주님의 은혜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이 다시 주의 계명을 배반하였다는 것을 말합니다. 회개 기도의 연장선상에서 잠시 주님의 은혜를 돌아보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렇게 주님의 은혜가 큰데도 불구하고 이스라엘이 주의 은혜를 또다시 잊고 배반했다는 것입니다.

    참으로 가증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나, 사실 우리 자신을 돌이켜 보면, 우리 자신도 저 패역한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주님의 은혜를 망각할 때가 많고, 예전에 지었던 죄악을 반복할 때가 많습니다. 날마다 성화되고 점점 더 예수님을 닮아가야 하는데, 현실은 그렇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4. 결론

    성경에 기록된 이스라엘 백성들의 행적을 보면, 안타까울 때가 참 많이 있습니다. 저들은 왜 이렇게 하나님을 배반할까, 왜 변화되지 않을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하나님은 저들을 사랑하실까 생각해 봅니다.

    다시 한번 생각해 보면, 패역한 이스라엘은 우리 자신의 모습과 같습니다.

    너무 쉽게 하나님의 은혜를 잊어버립니다. 죄악의 유혹에 쉽게 넘어집니다. 죄를 범하면서도, 많은 사람들이 나와 같은 죄를 저지른다는 사실에 안심하고 죄책감을 갖지도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우리를 버리지 아니하시고, 우리에게 다시 회개할 기회를 주십니다. 주님의 인애하심 덕분입니다.

    우리가 회복되는 길은, 에스라와 같이 회개 기도를 하는 것입니다. 내 잘못이든, 내 가족과 이웃의 잘못이든 내 죄로 여기고 회개하는 것입니다. 또 한가지, 말씀을 읽고 묵상하며 하나님 말씀이 인도하는 대로 순종하는 것입니다. 느헤미야 8장을 보면, 에스라가 모세의 율법책을 펴서 낭독하는 모습이 나옵니다. 말씀을 들을 때 백성들이 울었다고 했습니다. 하나님 말씀은 살아 있고, 운동력이 있습니다. 우리 마음 속의 죄악을 찌르는 성령의 검입니다. 그리고 말씀을 들을 때 우리의 반응은 회개와 순종과 회복으로 나타나야만 합니다. 아멘.









    에스라 5장 요약 / 성전을 재건

    성전 건축을 다시 시작하였으며, 닷드내와 스갈보스내가 성전 짓는 것을 방해하지만 막지 못하였고, 다라오왕에게 성전 건축의 조사여부를 요정하였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에스라 6장 요약 / 성전을 다시 세우다

    다라오왕이 고레스의 조서를 발견하였고 조서를 강 서편의 지도자들에게 내립니다.
    이는 성전건축을 방해하지 말라고 조서를 내린 것이며 다라오왕 6년째에 성전을 완성하였고 유월절을 지켰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에스라 7장 요약 / 에스라 일행이 돌아가다

    에스라가 예루살렘으로 돌아왔고 백성들에게 율례와 규례를 가르치게 됩니다.
    아닥사스다가 에스라에게 내린 조서의 내용, 아닥사스다왕이 강 서편의 관리에게 조서를 내였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에스라서 장별연구(7장): 에스라의 귀환과 아닥사스다 왕의 조서

    1-6장은 유다 백성들의 1차 포로 귀환
    7-10장은 2차 포로 귀환을 다루고 있다.
    그 가운데 7장은 2차 포로 귀환의 배경과 과정을 소개하고 있다.
    학자이자 제사장인 에스라는 바벨론에 있던 백성들과 함께 예루살렘으로 돌아왔다.
    아닥사스다 왕 7년(기원전 458년) 첫째 달 초하루에 바벨론에서 길을 떠나, 하나님의 선한 손의 도우심을 입어 다섯째 달 초하루에 예루살렘에 도착하였다.
    그가 돌아온 목적은 그 땅의 형편을 살피고, 하나님과 왕의 명령에 따라 성전을 위하여 섬기고, 정의를 실현하고,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율법을 가르치기 위해서였다.
    그가 이렇게 할 수 있었던 근거는 아닥사스다 왕의 조서에 기초하고 있다.
    그 조서에는 에스라의 귀환, 에스라에게 주어진 임무와 권한, 재정 지원 등에 관한 내용이 담겨 있었다.
    이 모든 일을 인도하신 분은 하나님이셨기 때문에, 에스라는 바로 그분을 송축하였다.

    I. 본문 이해와 질문

    1. 에스라의 귀환과 결심(1-10절)

    ​1-6장은 바사의 고레스와 다리오 왕 때 있었던 사건을 소개하고 있다.
    이때 유다 백성들은 바벨론에서 예루살렘으로 돌아와 성전을 재건하였다.
    비록 그 중간에 대적들의 방해와 백성들의 나태함 때문에 성전 재건이 중단되기도 하였지만, 여호와 하나님의 도움으로 그 소임을 성공적으로 완수할 수 있었다. 7장부터는 아닥사스다 왕 때 있었던 사건을 소개하고 있다. 주제도 ‘성전 재건’에서 ‘종교개혁’(혹은 ‘신앙 부흥 운동’)으로 바뀌고 있다. 그 일은 학사 에스라의 귀환으로 시작되었다. 앞선 1-6장이 하나님의 집에 대한 첫 번째 부분인 ‘성전 재건’을 다루고 있다면, 7-10장이 다루고 있는 것은 하나님의 집에 대한 두 번째 부분인 ‘거룩한 자손의 재건’이다. 즉 어떤 사람이 하나님의 집을 구성하였는가(7-8장), 그들이 어떻게 하나님의 집을 형성하였는가(9-10장)에 관한 내용을 다루고 있다. 한편 1-6장이 스룹바벨의 인도 아래 이루어진 1차 귀환 이후의 사건을 다루고 있다면, 7장부터는 2차 귀환 후의 사건을 소개하고 있다. 그리고 3차 귀환에 얽힌 사건은 느헤미야서에 소개되고 있다. 성전 재건 이후, 에스라는 모세 율법의 회복과 재정비, 이방인과의 통혼 금지 등을 주도하였다. 그에 비해 느헤미야는 예루살렘 성벽 재건, 국가 살림 재정비 등 행정 부분의 문제 해결에 집중하였다.

      바사 왕 ‘아닥사스다’(Artaxerxes)는 아하수에로(크세르크세스) 왕의 셋째 아들로, 부친을 암살한 아르파타나를 죽이고 왕위에 오른 아닥사스다 1세를 말한다(기원전 464-424년). 아닥사스다가 죽은 후에 페르시아 제국은 쇠락을 길을 걷게 된다. 느헤미야는 그의 술 관원으로 섬겼으며(느 1:1;2:1), 말라기 선지자는 그의 통치 말기에 활동하였다. 그가 통치할 때 에스라가 있었다(1절). 그는 스라야의 아들로, 대제사장 아론의 16대 후손이다. 그의 족보(상향식으로 제시)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1-5절). 에스라-스라야-아사랴-힐기야-살룸-사독-아히둡-아마랴-아사랴-므라욧-스라히야-웃시엘-북기-아비수아-비느하스-엘르아살-아론. 여기에서 소개된 족보는 완전한 것이 아니다(대상 6:3-15 참조). 마태복음 1장에서 소개한 예수님의 족보가 그분이 다윗의 자손이라는 점에 강조점을 두었듯이, 에스라의 족보도 그가 아론의 직계 후손인 스라야의 직계로서 대제사장의 혈통임을 강조하는 데 주안점을 두고 있다. (자세한 인물 정보는 아래 표 참조)

    인물

            소 개

    스라야

    바벨론에 끌려갔던 여호사닥의 아버지이다(대상 6:14-15). 그는 바벨론이 예루살렘을 함락할 당시 대제사장이었고, 바벨론으로 끌려갈 때 하맛 땅 립나에서 죽임을 당하였다(왕하 25:18-21). 따라서 에스라와 스라야 사이에는 130년의 간격이 있고, 그 사이에는 적어도 한 세대 이상이 생략되어 있다. 그러므로 ‘스라야의 아들’에서 ‘아들’은 문자적 의미의 아들(son)이 아니라 자손(descendant)이라는 의미로 사용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스라야가 에스라의 아버지가 아님에도 그 족보의 맨 처음에 놓은 이유는, 그가 바벨론 포로 전에 예루살렘의 마지막 대제사장이었기 때문이다(대상 6:14). 포로기 이후에는 대제사장의 사역이 불가능하였기 때문에, 본서 기자는 스라야부터 에스라 사이에 있는 서너 세대를 생략하여 에스라가 여호사닥의 직계로서 대제사장의 혈통임을 강조하고자 하였다.

    아사랴

    스라야의 아버지이다(대상 6:13).

    힐기야

    아사랴의 아버지로, 유다 왕 요시야 때 성전을 정화하다가 율법책을 발견하였던 대제사장이다(왕하 22:4-14;대하 34:14-22). 이 사건으로 요시야 왕 때 종교개혁이 이루어졌다.

    살룸

    힐기야의 아버지이다(대상 6:12-13). 므슬람과 동일 인물로 추정된다(대상 9:11).

    사독

    살룸의 아버지로(대상 6:12), 다윗과 솔로몬 당대에 활약하였던 대제사장 사독과는 다른 인물이다.

    아히둡

    사독의 아버지이다(대상 6:8).

    아마랴

    아히둡의 아버지이다(대상 6:11).

    아사랴

    솔로몬 시대에 활약한 대제사장 사독의 4대손으로, 솔로몬 성전에서 제사장으로 활동하였다(대상 6:8-10).

    므라욧

    솔로몬 시대의 대제사장 사독의 조상이다. 따라서 므라욧과 아사랴는 부자 관계가 아니다. 그 사이에는 6명의 이름이 생략되어 있다(대상 6:6-11).

    스라히야

    므라욧의 아버지이다(대상 6:6,51).

    웃시엘

    스라히야의 아버지로, ‘웃시’로도 불린다(대상 6:6,51).

    북기

    웃시엘의 아버지이다(대상 6:5,51).

    아비수아

    북기의 아버지이다(대상 6:5).

    비느하스

    아비수아의 아버지이다(대상 6:4). 출애굽 이후 이스라엘 백성들이 요단 동편 싯딤에서 거짓 선지자 발람의 꾀에 빠져 바알브올을 숭배하고 이방인들과 정을 통하였을 때 하나님을 향한 거룩한 열정으로 그 사태를 진정시켰고, 그 결과 하나님으로부터 영원한 대제사장의 직분을 약속받았다(민 25:7-13). 미디안과의 전투에 최선봉에 섰고, 가나안 정복 때 동쪽 지파들이 세운 제단 문제로 갈등이 생겼을 때 훌륭하게 중재하여 동서 지파들 사이의 분쟁을 방지하였다(민 31:6;수 22:10-14).

    엘르아살

    비느하스의 아버지이다. 아론의 네 아들 가운데 한 사람으로, 그의 형인 나답과 아비후가 잘못된 제사를 드림으로써 하나님께 진노를 받아 아들 없이 죽임을 당하자, 아론의 뒤를 이어 대제사장이 되었다(레 10:1-2;민 20:25-28).

    아론

    레위 지파 출신으로, 이스라엘의 첫 번째 대제사장이다(레 6:20-22). 아므람과 요게벳의 맏아들이고, 모세의 형이자 누이 미리암의 동생이다(출 6:20;7:7;민 26:69). 하나님은 말이 능숙하지 못하다는 모세의 변명에 아론을 그의 대변인으로 세우셨다(출 4:14-16). 역대상 6장의 족보가 레위로 끝나는 데 비해, 에스라의 족보가 아론으로 끝을 맺은 이유는, 그것이 단순히 가계의 흐름도를 제시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에스라가 바로 대제사장 아론의 직계 자손임을 강조하기 위해서이다.

      이 에스라가 바벨론에서 예루살렘으로 올라왔다(6절). ‘이 에스라’는 ‘바로 그 에스라’라는 뜻이다. 이는 앞서 제시된 족보를 통하여 그가 제사장 가문에 속한 탁월한 인물일 뿐만 아니라 뒤에 이어질 어떤 중대한 일의 중심인물이라는 사실을 알리는 신호이다. 족보가 그의 출신 정보를 제공하는 것이라면, 6절 후반부는 그의 인물됨에 대한 정보를 제공하고 있다. 첫째, 그는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가 주신 모세의 율법에 익숙한 학자였다. ‘익숙한’은 ‘어떠한 일에 능숙하고 준비되어서 아주 신속하고 정확하게 시행하는 사실’을 묘사하는 단어로서, ‘정통한, 능통한’(NIV, well versed), ‘숙련된’(NASB, skilled), ‘준비된’(KJV, ready) 등과 같은 뜻이다(잠 22:29;사 16:5). ‘학자’는 ‘서기관’(왕하 25:19;렘 36:26), ‘서기’(왕하 12:10)를 말하는데, 이 단어는 원래 ‘국가의 서기관’(state secretary, 삼하 20:25)이나 ‘왕의 개인 서기관’(royal private secretary, 삼하 8:17;왕하 22:3-13)을 언급할 때 사용되었다. 다윗, 솔로몬, 히스기야, 요시야, 여호야김 등 때에 서기관은 정부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삼하 8:17;20:25;왕상 4:3;사 36;1-3;왕하 22:3;렘 36;20-21). 둘째, 그는 하나님의 손이 그의 위에 있었기 때문에, 왕에게 구하는 것을 모두 받는 사람이었다. 하나님 여호와의 도우심을 받았다는 것은, 그가 하나님과 동행하면서 그분을 의지하였다는 전제가 암시되어 있다. 또 왕에게 구하는 것을 모두 받았다는 것은, 그런 일이 일어나도록 하나님이 돕기도 하셨지만, 그의 행실 또한 왕의 마음을 흡족하게 한 데 따른 결과였다는 것을 짐작해 볼 수 있다.

      에스라는 아닥사스다 왕 7년(기원전 458년) 첫째 달 초하루에 바벨론을 출발하여 다섯째 달 초하루에 예루살렘에 도착하였다(7-9절). 만 4개월이 걸렸다. 그와 함께 올라온 이들은 이스라엘 자손들, 제사장들, 레위 사람들, 노래하는 자들, 문지기들, 그리고 느디님 사람들이었다. ‘이스라엘 자손들’은 뒤에 나열된 사람들처럼 특정직에 속하지 않은 일반 백성들을 가리키는데, 그들 중에 1차 귀환 때처럼 북쪽 지파 사람들이 포함되었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노래하는 자들’과 ‘문지기들’은 성전에서 각각 그런 일을 담당하였던 레위 지파 사람들이다(2:41-42). ‘느디님 사람들’은 원래 혈통적으로 이스라엘 출신이 아니지만, 이스라엘 공동체에 들어와서 비천한 일에 종사하였던 이들이다(2:43). 바벨론을 떠난 에스라와 그 일행이 예루살렘에 무사히 도착할 수 있었던 것은 전적으로 여호와 하나님의 선하신 손이 그들을 도우셨기 때문이다. 바벨론에서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은 직선으로 800km에 이르는 먼 거리이다. 또한, 그 여정이 봄에서 여름으로 이어지는 가장 더울 때 이루어졌기 때문에, 아마 그들은 사막을 피하기 위해 유프라테스강을 따라 북쪽 수리아로 이동하다가 다시 남쪽으로 내려가는 길을 택하였을 것이다. 그 길은 잘 닦여져 있었지만, 강도나 대적들이 자주 출몰하는 위험한 길이기도 하였다(8:22). 그래서 에스라는 이러한 위험을 내다보고 왕에게 자신들을 보호해 줄 보병과 기병을 요청하려고도 하였지만, 차마 그 말만은 입 밖으로 꺼내지 못하였다. 대신에 그는 일행들과 함께 금식하며 하나님께 평탄한 길을 내달라고 간절히 기도하였다. 그 결과 하나님은 선한 손으로 그들을 도우셨고, 그들은 평탄하게 예루살렘에 도착할 수 있었다(8:21-23).

      예루살렘에 도착한 에스라는 세 가지를 결심하였다(10절). 첫째, 여호와의 율법을 연구한다. 둘째, 연구한 율법대로 준행한다. 셋째, 연구하고 준행한 율례와 규례를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가르친다. ‘연구하다’는 말은 ‘조사하다’, ‘찾다’는 뜻을 가진 동사에서 파생된 단어로서, 어떤 사물에 대한 지식을 얻기 위하여 온갖 노력을 기울이는 행동을 가리킨다(벧전 1:10-11, Rawlinson). ‘준행하다’는 말은 자신의 사상이나 견해를 실제 행동으로 옮기는 것을 말한다(창 6:22;신 5:27;23:23). 율법 연구를 통해 알게 된 하나님의 뜻을 삶에서 실천하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다. 그것은 불순종을 의미하기도 한다. 그와 같은 부류의 대표적인 이들이 바로 바리새인들인데, 예수님은 그런 그들을 신랄히 비판하셨다(눅 12:1). ‘율례와 규례’는 외형상 차이가 있어 보이지만, 실제로는 두 단어가 항상 동시에 또는 교대로 사용된다는 점을 고려해 볼 때 거의 같은 의미로 볼 수 있다. 이 단어들은 ‘율법’의 보다 본질적인 특성을 드러내는 역할을 하는데, ‘율례’는 율법의 기초적인 규정들에, ‘규례’는 보다 구체적인 용례들에 각각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Joseph Blenkinsopp). 세 가지 결심 중에 가장 중요한 것은 백성들에게 율례와 규례를 가르치는 일이었다. 그가 율법을 연구하고 준행하는 목적도 최종적으로 이를 이루기 위한 것이었다. 에스라가 이 같은 결심을 한 이유는, 그가 예루살렘으로 귀환한 목적이 바로 여기에 있었기 때문이다. 이 목적은 하나님이 그에게 주신 것으로, 하나님은 그 목적을 왕에게 알리셨고, 왕은 하나님의 뜻에 따라 에스라에게 조서를 내려 예루살렘에서 그 목적을 이루도록 명하였다(7:11-28). 그러므로 그의 결심은 주관적인 동기에서 비롯된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하나님과 왕, 그리고 이스라엘 공동체를 위한 객관적인 동기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질문] 에스라의 족보에 나타난 특징들은 무엇인가?

    첫째, 아론에서부터 에스라에 이르기까지 모든 제사장을 싣고 있지 않다는 점이다. 이는 마태복음 1장에서 소개한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가 그분이 다윗의 자손이라는 점을 강조하고 있듯이, 에스라의 족보도 그가 아론의 직계 후손인 스라야의 직계로서 대제사장 혈통임을 강조하는 데 주안점을 두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연유로 인해 에스라부터 스라야 사이에 있는 서너 명이 생략되어 있고(이들이 누구였는지는 구체적으로 알 수 없다), 아사랴와 므라욧 사이에도 여섯 사람이 생략되어 있다. 이는 그들이 소개된 사람들과 비교할 때 부정적인 평가를 받거나 영향력 측면에서 비중이 크지 않았기 때문에 배제되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둘째, 족보에 등장하는 인물들이 시간의 역순에 따라 상향식으로 소개되고 있다는 점이다. 이러한 방식은 사복음서 가운데 누가복음에서 취하고 있다(3장). 저자는 이런 방식을 통해 수신자인 로마의 고위 관리로 추정되는 데오빌로의 이해를 배려하였고, 더 나아가 유대 공동체 밖에 있는 모든 이방인의 이해도 배려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그에 반해 마태복음에서는 하향식으로 소개되고 있다. 이는 유대인으로 구성된 마태 공동체의 유대 전통을 감안하였기 때문이다. 이러한 점을 고려하여 볼 때, 에스라의 족보는 유대 전통의 주관성보다 유다 밖의 객관성을 더욱 의미 있게 보았던 것 같다.

      셋째, 아론이 족보의 끝을 장식하고 있다는 점이다. 아론의 위로는 아므람, 고핫, 그리고 레위가 있다. 특히 ‘레위’는 이스라엘의 지파를 가르는 기준점이 되는 야곱의 아들들 가운데 한 사람이다. 그런 의미에서 에스라의 족보를 레위까지 제시할 수도 있었지만, 그를 비롯하여 아론 이전의 사람들은 대제사장 제도가 생기기 전의 인물들이기 때문에 본문에 제시된 족보의 성격에 어울리지 않았다. 저자는 에스라의 족보를 아론까지만 제시함으로써, 족보의 성격을 명확히 하고자 하였던 것이다.

    2. 아닥사스다 왕의 조서 내용(11-26절)

    ​본문은 아닥사스다 왕이 에스라에게 내린 조서의 초본 내용을 소개하고 있다(11절). 따라서 히브리어가 아닌 아람어로 기록되어 있다. 에스라는 여호와의 계명과 이스라엘에게 주신 율례에 관한 학자이자 제사장이었다. ‘학자’는 율법을 연구, 해석, 필사, 가르치는 ‘서기관’을 말한다. 그래서 KJV, RSV, NASB 등은 ‘scribe’로, NIV는 ‘teacher’로 각각 번역하고 있다. ‘학자’는 페르시아 정부에 의해 부여된 이름이고, ‘제사장’은 에스라의 유대인 직책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 ‘계명’은 ‘명령’, ‘주장’ 등을 지칭하는 말인데, 이는 율법의 말씀들을 총체적으로 지칭하는 성문법으로서의 ‘율례’나 불문법으로서의 ‘규례’와 같은 법령의 의미보다는 백성들이 실제 이행해야 하는 법령의 구체적인 실상을 나타내는 말이다. 이 대목에서 이러한 표현이 사용된 이유는,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중요한 사실 중 하나가 단지 성전 재건 자체에만 있지 않고 그분의 명령에 대한 구체적인 순종에 있다는 사실을 명확하게 전달하고자 하였기 때문이다. 아닥사스다 왕이 율법에 완전한(완벽한) 학자이자 제사장인 에스라에게 내린 조서의 내용은 다음과 같이 다섯 가지의 명령을 담고 있었다. (1) 에스라와 유다 백성들을 이끌고 바벨론에서 예루살렘으로 귀환하라(13절), (2) 그곳에서 유다와 예루살렘의 형편을 살피라(14절), (3) 성전을 위해 필요한 모든 것을 가져가라(15-20절), (4) 유프라테스강 건너편의 모든 창고지기는 에스라가 요청하는 것을 신속히 도우라(21-24절), (5) 에스라는 법관과 재판관을 세워 재판하고(다스리고) 가르치라(25-26절).

      조서의 첫 번째 내용은, 바사에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제사장들과 레위인들 포함) 가운데 뜻이 있는 자들은 누구든지 에스라와 함께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라는 것이다. 이는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것이 강압이 아닌 자원과 자발성에 기초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말해 준다. 이와 같은 원칙은 1차 포로 귀환을 허락한 고레스 칙령에도 적용되었다. 그때 하나님께 감동을 받은 사람들이 성전을 건축하기 위해 올라갔다(1:5). 하지만 당시에 올라가지 않았던 이들도 많이 있었다. 한편 귀환 대상자들을 언급하는 과정에 나오는 ‘이스라엘’이라는 단어는 에스라서에 총 36회 사용되었다. 그 가운데 이스라엘 자손들을 직접적으로 가리키는 객관적인 용어로 모두 6회 사용되었다(2:2,70;3:11;7:13;9;1;10:1). 그 외에는 대부분 언약 백성으로서의 신앙적, 혈통적인 동질성을 의도적으로 강조하기 위하여 사용되었다. 반면에 본서에 총 22회 사용된 ‘유다’는, 백성들을 가리키는 의미로 단 한 번밖에 사용되지 않았고(4:4), 대부분 바사 제국에서 다스리는 속국의 한 지방으로서의 지역적, 지리적인 명칭으로 사용되었다. 이것은 본서가 ‘이스라엘’이라는 단어를 사용할 때 ‘하나님의 주권적 선택으로 언약을 맺은 백성’이라는 의미를 부각시키고, 하나님이 처음 선택한 열두 지파의 총체성을 강조하기 위한 의도에서 비롯되었다는 점을 짐작하게 해 준다.

      두 번째 내용에는, 왕과 일곱 자문관이 에스라를 예루살렘으로 보낸 이유가 들어 있다(14절). ‘일곱 자문관’은 왕의 측근에서 국정 전반에 관하여 자문과 조언을 하는 일종의 ‘왕실 자문 기구’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들은 왕실에서 가장 신뢰받는 자문관들로, 그들에게는 왕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 허락되었다. 이들에 대해 에스더서(1:14)에서는 “왕에게 가까이하여 왕의 기색을 살피며 나라 첫 자리에 앉은 자는 바사와 메대의 일곱 지방관...”으로 묘사하고 있다. 왕과 일곱 자문관이 에스라를 보낸 목적은, 유다와 예루살렘의 형편을 살피기 위한 것이었고, 살핌의 기준은 에스라의 손에 있는 하나님의 율법이었다. 이는 ‘유다와 예루살렘에 있는 백성들이 하나님의 율법에 따라 살고 있는지를 조사하고, 그 율법에 어긋난 이들을 벌하거나 가르치기 위하여’라는 뜻이다. 이를 통해 왕이 에스라를 보낸 일차적인 목적이 종교적 성격을 띠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짐작하건대, 에스라는 유다 땅에서 벌어지고 있는 심상치 않은 소식을 들었던 것 같다. 백성들이 하나님의 율법에서 어긋난 삶을 살거나 성전에서 드려지는 제사가 모세 율법에 어긋나 있다는 소식 등을 들었을 수도 있다. 이에 따라 에스라는 왕에게 예루살렘행을 요청하였고, 왕은 그의 요청에 흔쾌히 응하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왕이 에스라를 보낸 데에는 정치적 성격의 이차적인 목적도 담겨 있었을 것이다. 아닥사스다 1세는 왕이 된 이후 곧바로 10년 동안 이집트에서 일어난 커다란 반란에 직면하였다. 이 반란은 이나로스(Inaros)와 아미르테우스(Amyrtaeus)가 주도하였다. 삼각주 지역의 지배권을 차지하고 있던 그들은, 파프레미스(Papremis)에서 페르시아 군대를 크게 물리치고 아닥사스다 1세의 삼촌이자 그 지역 총독이었던 아케메네스의 시체를 페르시아로 보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페르시아 정부군은 여전히 멤피스와 이집트 상부 지역을 차지하고 있었고, 이집트 남부에 있는 와디 함마마트와 홍해를 통해 본국과 연락도 유지하고 있었다. 그 와중에 아테네인들이 이끄는 헬라의 델로스 동맹군도 지중해 서쪽 지역에 대한 이익을 추구할 목적으로 이나로스와 힘을 합쳤다. 이와 같은 상황은 아닥사스다에게 인근 지역의 민족들과 더욱 긴밀하게 우호 관계를 다지는 계기로 작용하였을 것이다. 만약 그들과의 우호에 금이라도 간다면 이집트의 반란은 인접한 다른 민족들에게도 반란의 실마리를 제공해 줄 수 있고, 또 향후 페르시아가 이집트의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머나먼 원정길에 오를 때에도 그들의 도움을 받을 수 없으므로 그들과의 우호를 더욱 깊게 다지는 정책은 필수적이었다. 이러한 민족들 가운데는 베니게, 수리아, 팔레스타인에 있는 여러 민족 등이 속해 있었다.

      세 번째 내용에는, 왕이 유다와 예루살렘의 형편을 살피기 위하여 에스라를 보낼 때 그가 가져갈 것들이 무엇이었는지를 소개하고 있다. 그것들은 모두 성전의 필요를 충당하기 위한 것들로, 다음과 같다. (1) 왕과 자문관들이 여호와 하나님께 성심으로 드린 은금(15절), (2) 바벨론 온 지방(도)에서 얻은 은금(16a절), (3) 백성들과 제사장들이 성전을 위하여 기쁘게 드릴 예물(16b절). (4) 왕이 에스라에게 준 그릇들(19절), (5) 궁중 창고에서 성전에 쓰일 곳이 있다고 여겨지는 것들(20절).

      왕과 자문관들이 하나님께 은금을 성심으로 드렸다는 것은, 왕이 에스라의 귀환을 명령한 직접적인 원인이 어디에 있었는가를 알 수 있는 배경이 된다. 왕은 하나님을 ‘예루살렘에 거하시는 이스라엘의 하나님’으로 고백함으로써 그분의 실재와 정체성에 대하여 명확한 인식을 소유하고 있었다. 왕은 이러한 인식 아래 에스라를 환대하여 보냈는데, 이는 그가 성전에서 제사를 드릴 때 그분의 축복을 구하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동시에 그 목적 이면에는 정치적인 이해도 맞물려 있었을 수도 있다. 즉 정복 지역의 신들을 존중하는 마음을 보여줌으로써 정복지 백성들의 마음을 얻어 제국을 안정적으로 통치하려는 의도가 들어 있었을 것이라는 추측도 해 볼 수 있다. ‘성심으로’는 ‘자원하여’, ‘자발적으로’라는 의미이다. 그래서 표준새번역성경은 이 단어를 ‘기쁜 마음으로’로, NIV와 KJV은 ‘freely’로 번역하고 있다. 따라서 왕과 자문관들이 하나님께 은금을 드릴 때의 기본 동기는 후자보다는 전자의 색채가 더욱 강하였다는 것이라고 쉽게 짐작할 수 있다. 이런 짐작은 23절에서 소개하고 있는 하나님에 대한 왕의 마음(두려움), 즉 ‘어찌하여 진노가 왕과 왕자의 나라에 임하게 하랴’는 고백을 고려할 때 더욱 신빙성을 담보하고 있다. 왕과 자문관들이 성심으로 드린 은금 이외에도, 바벨론의 모든 지방에서 얻은 모든 은금, 백성들과 제사장들이 성전을 위하여 기쁘게 드린 예물도 에스라에게 주어졌다(16절). 바벨론의 모든 지방에서 얻은 모든 은금은 정황상 고레스 왕 때에 있었던 1차 귀환 때와 유사하게 자발적으로 주어졌을 것으로 추정된다(1:4,6). 백성과 제사장들도 1차 귀환 때와 마찬가지로 기쁘게 예물을 드렸다(2:68).

      왕은 에스라에게 주어진 은금과 예물의 사용처를 다음과 같이 구체적으로 밝히고 있다(17-18절). 첫째, 그 돈으로 제물과 물품을 신속하게 사서 하나님의 성전 제단 위에 드리라. 그 가운데 제물은 수송아지와 숫양과 어린 양을, 물품은 소제와 전제를 드릴 때 필요한 것들을 사라. ‘신속히’는 문자적으로 ‘정확하게’라는 뜻으로, 그 돈을 틀림없이 지정된 목적에 사용하고 그 외의 용도로 사용되어서는 안 된다는 의미이다. ‘소제’(素祭, grain offering)는 구약의 5대 제사 가운데 하나로, 곡물로 드리는 제사이다. 성결한 생애를 하나님께 약속하는 표시로 정한 밀가루와 기름과 유향을 불로 태우고 떡을 구워 놓고 드렸다(레 7:12-13). 번제가 헌신을 의미한다면, 소제는 노동(일)의 결과물을 드린다는 점에서 행위의 성별을 상징하였다(시 20:3). ‘전제’(奠祭, drink offering)는 포도주나 독주를 하나님의 제단에 부어 드리는 제사이다(출 29:40-41;민 15:5). 단독으로 드려질 수 없고, 항상 다른 제사에 곁들여 드려졌다. 하나님을 섬기는 자들의 헌신적인 봉사, 주를 위해 생명까지 기꺼이 내놓을 수 있는 거룩한 희생을 상징한다. 개역한글성경에서는 ‘관제’(灌祭)로 표현하기도 하였다(빌 2:17;딤후 4:6). 왕이 이처럼 제사의 종류와 제물에 대한 정보를 구체적으로 알고 있었다는 점은, 에스라가 왕에게 필요한 것들을 요청하는 과정에서 그 정보를 알려 주었거나 왕궁에서 일하는 익명의 유대인이 그 정보를 알려 주었을 것이라는 추측을 낳게 한다. 둘째, 그 나머지 은금은 너와 네 형제가 좋게 여기는 일에 하나님의 뜻에 따라 쓰라. 이는 ‘하나님의 뜻에 따라 너와 네 형제인 제사장들이 가장 잘 알고 있는 대로 사용하라’는 뜻이다.

      에스라에게 성전에서 섬기는 일을 할 때 사용될 그릇들도 주어졌다(19절). 그 그릇들은 느부갓네살이 바벨론으로 가져왔던 것을 가리키는 것 같지 않다. 그것들은 이미 오래전에 고레스 왕에 의해 반환되었다(1:7-11). 그때 반환되지 않고 남아 있던 그릇들일 수도 있지만, 그 가능성은 희박하다. 오히려 왕과 귀환하지 않은 유다 백성들이 자발적으로 새롭게 마련해 준 것들로 보는 편이 더 가능성이 있어 보인다. 그 밖에도 왕은 에스라에게 하나님의 성전에서 써야 할 것이 더 있다면 궁중 창고에서 가져갈 수 있도록 배려하였다(20절). ‘궁중 창고’는 일종의 왕실 창고(NASB, NIV, the royal treasury)로, 왕실의 사유 재산을 보관하는 곳간을 가리킨다. 그것이 ‘강 서편에서 징수되는 세금을 보관하는 금고 또는 그 관리 기관을 가리킨다’는 견해도 있다.

      왕의 조서에 담긴 네 번째 내용에는, 유프라테스강 서쪽 지방의 모든 창고지기에게 내린 명령이 담겨 있다(21-24절). ‘창고지기’는 바벨론에서 유다로 향하는 에스라가 거쳐 가게 될 지역과 팔레스타인 지역의 재정 관리들을 말한다. 이들은 각 지역에서 거두어들인 세금을 용도에 따라서 출납하거나 왕실에 상납하는 역할을 담당하였다. 왕은 그들에게 율법의 서기관이자 제사장인 에스라가 요구하는 것을 신속히 시행하도록 명령하였다. 왕은 에스라가 구하는 것에 대하여 은은 100달란트까지, 밀은 100고르까지, 포도주와 기름은 각각 100밧까지 제한하였지만(소금은 무제한), 그 수량은 놀랄 만큼 많았다. ‘은 100달란트’는 현재 시세로 25억 원 정도에 해당하는 금액이다(1달란트는 34kg, 1kg은 35.27온스, 1온스는 17.2달러, 1달러는 1,203원, 19.10.02. 기준). ‘고르’는 10밧에 해당하고(겔 45:17), 1고르는 230리터 정도이다. ‘은’은 희생 제물을 구입하는 데 필요하고, ‘밀’과 ‘포도주’는 소제와 전제를 드리기 위해서 각각 필요하였다. 또 ‘소금’은 소제와 전제의 제물에 뿌려질 용도로 필요하였다(겔 43:24). 23절에는 왕이 모든 창고지기에게 그와 같이 명령한 이유가 무엇인지를 밝히고 있다. 첫째는, 그것을 통해 에스라가 성전을 위하여 하나님이 명령하신 것을 삼가 행하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삼가’는 ‘집중해서’, ‘부지런히’, ‘열의를 가지고’라는 뜻이다. 이는 원래 고대 셈족어에서 전쟁터에서 적이나 목표물을 대상으로 집중적으로 공략하는 것을 지칭하는 단어에서 파생된 것이다. 둘째는, 그것을 통해 바사 왕과 그의 나라에 영원토록 하나님의 진노가 내리지 않게 하기 위해서였다. 다시 말해서 그렇게 하지 않을 경우, 그것이 하나님의 명령에 불순종하는 것이 되어 왕과 바사 제국에 재앙이 임하기 때문에, 신속히, 그리고 철저하게 이행하도록 명한 것이다. 왕의 이런 인식을 통해 그의 신앙이 전적으로 미신적인 것만은 아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스라엘 역사를 보면 하나님이 자기 백성 이스라엘의 죄악에 대해 진노를 내리셨는데, 그러한 진노는 이방 나라들도 피해 가지 못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따라서 그런 역사적 배경에 근거해서 아닥사스다 왕도 하나님을 향한 두려움을 가지고 있었을 것이고, 그 두려움은 자신과 자신의 왕국의 안녕을 위하여 이스라엘 백성들의 2차 귀환과 귀환 후의 일들을 적극적으로 돕는 계기가 되었을 것이다.

      모든 창고지기에게 이어진 왕의 명령에는, 제사장이나 레위인과 같은 성직자들을 비롯하여 성전 봉사자들에게 조공, 관세, 통행세 등의 세금을 부과하는 것을 금하고 있다(24절). 이는 구약의 율법과도 일치하는 것이지만, 당시 페르시아를 포함한 고대 중근동 국가에서는 신전 제사와 관련된 일을 하는 사람들에게 세금을 거두지 않는 것이 일반적인 관행이었다. 심지어 다리오 왕의 가다타스(Gadatas) 비문에는 아폴로 신을 섬기는 제사장들에게 세금을 받는 자들은 저주를 받을 것이라는 경고문이 기록되어 있을 정도였다. 한편 면세 대상자로 지목된 사람들은 여섯 부류로 분류되어 있다. 이들 가운데 앞에 소개되고 있는 다섯 부류의 사람들, 즉 제사장들, 레위인들, 노래하는 자들, 문지기들, 느디님 사람들은 앞서 2장에서도 언급된 바 있다(2:36-54). 그에 비해 마지막에 소개된 ‘성전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본 절에서만 언급되고 있다. 이들은 아마도 성전에서 육체노동을 하였던 사람들로, ‘느디님 사람’보다 신분이 더 낮았던 ‘솔로몬의 신하의 자손들’로 추정된다(2:55).

      조서에 담긴 마지막 내용에는, 왕이 에스라에게 부여한 두 가지의 권한과 사명이 소개되고 있다(25-26절). 첫째 사명은, 모든 백성에게 공의를 펴기 위하여 하나님의 율법을 잘 알고 있는 이를 법관과 재판관을 세워 재판하게 하는 일이었다. ‘법관’은 ‘공의를 시행하다’, ‘재판하다’는 뜻을 가진 아람어 ‘쉐파트’에서 파생된 단어로, 개역한글성경에서는 ‘유사’(有司, official, ruler)로 번역하기도 하였다. ‘유사’는 다음과 같은 의미를 지니고 있다. (1) (행정이나 군사적인 능력을 갖춘) 장관, 관리, 서기관(대상 23:4;27:1), (2) 백성을 지도하는 지도자, 감독자(렘 29:26), (3) 족장과 집안의 우두머리(출 22:28). NIV와 KJV은 ‘법관’을 ‘magistrates’(치안 판사)로 번역하여, 뒤에 나오는 ‘judges’(재판관)와 구분하고 있다. 한편 페르시아 제국에서 행해진 두 가지의 사법 활동을 통하여 법관과 재판관을 구분하기도 한다. 즉 당시 페르시아에는 일반 관례법에 따라 시민들 상호 간의 문제나 갈등을 해결하는 ‘사회 법정’과 국가나 정부의 이해와 관련된 사건을 맡은 ‘왕궁 법정’이 있었는데, 이에 근거해서 ‘법관’은 종교나 사회 문제 등에 관한 관습법을 다루는 사람이고, ‘재판관’은 왕에 관한 정치 문제를 취급하는 사람이었을 것이라는 견해이다. 이런 견해는 이어지는 26절에서 하나님의 명령과 왕의 명령을 구분하여 명시하였다는 점에서 타당성을 더하고 있다. 만약 이와 같은 견해를 따른다면, 왕은 에스라에게 법관과 재판관을 세워 이스라엘 내부의 종교 문제와 백성들의 일반 소송 문제뿐만 아니라, 왕과 정부에 관한 정치적 문제를 해결하는 사명까지 부여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에스라에게 주어진 둘째 사명은, 율법을 제대로 알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그 율법을 가르치는 일이었다. 왕이 에스라에게 이와 같은 두 가지 사명을 주었다는 것은, 역으로 이스라엘 내부에 이 두 문제와 함께 앞서 제시한 성전 제사와 관련된 문제들이 동시에 노출되어 있었다는 증거가 되기도 한다. 왕은 에스라에게 하나님의 명령과 왕의 명령을 지키지 아니하는 자는 속히 그 죄를 정하고, 그에 맞춰서 사형, 귀양, 가산 몰수, 옥살이 등의 형벌을 내리도록 지시하였다(26절).

    [질문] 아닥사스다 왕의 조서에 들어 있는 내용상의 특징은 무엇인가?

    첫째, 왕이 에스라에게 부여한 권한이 구체적으로 명시되어 있다는 점이다. 에스라의 귀환을 허락한 왕은, 그를 그냥 보내지 않고 조서 속에 그에게 부여된 권한까지 구체적으로 명시함으로써 하나님의 일을 원활하게 진행할 수 있도록 도왔다. 왕이 그에게 부여한 권한은 다음과 같다. (1) 유다에 정착한 백성들의 상황 감찰 권한(14절), (2) 주어진 은금과 예물을 용도에 맞게 분배, 사용할 수 있는 권한(15-20절), (3) 창고지기에게 필요한 것을 공급받을 수 있는 권한(21-23절), (4) 종교, 사법, 교육에 대한 전적인 권한(25-26절). 만약 에스라가 이러한 권한이 명기된 왕의 조서 없이 귀환하였다면, 그가 비록 율법에 익숙한 학자이자 제사장이라 할지라도 이스라엘 백성들로부터 그의 권위를 쉽게 인정받지 못하였을 것이다. 더구나 당시 백성들은 이미 이방 문화에 상당히 깊이 동화되어 있는 상황이었다. 따라서 그의 권한이 구체적으로 적혀 있는 왕의 조서는 그 무엇보다 중요하였다.

      둘째, 하나님에 대한 아닥사스다 왕의 인식과 태도를 알 수 있다는 점이다. 그는 비록 이방 나라 페르시아의 왕이었지만, 하나님과 그분의 율법, 그리고 성전과 제사 등에 대해 구체적으로 알고 있었다. 그는 아는 선에서 그치지 않고 그분께 순종하여 그분의 뜻과 일이 이루어지도록 전심으로 도왔다. 그 배경에는 제국의 안정을 바라는 정치적인 목적, 자신과 자기 사람들의 안녕을 비는 기복적인 신앙 등도 전혀 배제할 수 없지만, 하나님을 향한 그의 순수성만큼은 높이 평가할 만하다.

      셋째, 조서 이면에 숨어 있는 하나님의 섭리를 발견할 수 있다는 점이다. 표면적으로는 아닥사스다 왕이 모든 일을 주관한 것처럼 보이지만, 그 이면에는 역사를 주관하시는 하나님의 손길이 진하게 묻어 있다. 이러한 사실은 에스라가 하나님 여호와를 송축하는 내용 속에 고스란히 담겨 있다(27-28절). 그는 (1) 하나님이 왕의 마음에 성전을 아름답게 할 뜻을 두셨고, (2) 하나님이 자신에게 왕으로부터 은혜를 얻게 하셨고, (3) 또 하나님의 도움으로 자신이 힘을 얻어 백성들과 함께 올라오게 하셨다고 찬양하였다.

    3. 에스라의 송축(27-28절)

    본문은 아닥사스다 왕의 조서에 대한 에스라의 반응을 보여 주는 부분으로, 하나님 여호와를 향한 송축으로 채워져 있다. ‘송축하다’는 ‘축복을 받으소서’(KJV, Blessed be), ‘찬양하다’(NIV, Praise be)는 뜻이다. 에스라는 그분을 ‘우리 조상들의 하나님’으로 소개함으로써, 이스라엘과 하나님의 언약 관계를 강조함과 동시에 포로 귀환이나 성전 재건과 관련된 상황 등이 모두 이스라엘의 조상들과 하나님의 약속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일임을 천명하고 있다.

      에스라는 세 가지 이유를 들어 하나님을 송축하였다. 첫째 이유는, 하나님이 왕의 마음에 성전을 아름답게 할 뜻을 두셨기 때문이다. 이는 아닥사스다 왕이 이스라엘 백성에게 내린 2차 귀환 명령이 근원적으로 하나님께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왕의 마음을 움직이시는 하나님의 손에 대해 잠언서 기자는 이렇게 표현하고 있다. “왕의 마음이 여호와의 손에 있음이 마치 봇물과 같아서 그가 임의로 인도하시느니라”(잠 21:1). 하나님이 왕의 마음을 움직이신 이유는 성전을 아름답게 하기 위해서였다. 두 번째 이유는, 하나님이 에스라를 왕과 보좌관들과 모든 방백 앞에서 은혜를 얻도록 하셨기 때문이다. ‘은혜’(헤세드)는 주로 언약 백성인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베푸시는 변함 없는 사랑과 자비를 의미한다. 하나님은 그와 같은 은혜가 에스라에게 주어질 수 있도록 이방 나라의 왕과 관리들의 마음을 만지셨다. 마지막 이유는, 에스라 위에 있었던 하나님의 손으로 인해 그가 힘을 얻고 이스라엘의 족장들을 모아 함께 올라올 수 있었기 때문이다. 앞선 두 가지 이유는 하나님의 손이 왕(보좌관들, 방백 포함)에게 있었기 때문이다. 그로 인해 에스라는 수많은 권한과 지원을 얻을 수 있었다. 하지만 정작 그 일을 수행할 에스라가 동기가 없거나 마음이 약해져 버리면 아무런 소용도 없게 된다. 그런 점에서 세 번째 이유는 매우 중요하다. 동기를 새롭게 하고 마음을 강하게 하는 것은 에스라 스스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인간은 그 본질이 약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돕는 손길이 주어지지 않으면 혼자 일어설 수 없다. 심지어 주님은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단언까지 하셨다(요 15:5).

    [질문] 에스라가 하나님을 송축하고 있는 내용을 통해서, 에스라가 소유하고 있었던 신앙의 특징은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첫째, 역사를 주관하시는 하나님에 대한 명확한 인식에 기초한 신앙이라는 점이다. 허구에 기초한 신앙은 신앙이 아니라 미신이다. ‘미신’은 역사적, 합리적 근거가 없는 것을 맹목적으로 믿는 것이다. 그래서 미신은 모래 위에 지은 집과 같다. 그에 반해 ‘참된 신앙’은 그 뿌리가 실재에 있고, 그 실재는 역사 속에서 실제로 드러나는 것을 특징으로 하고 있다. 에스라는 하나님이 역사 속에서 실재하실 뿐 아니라 그 역사를 이끌어가시는 분으로 명확하게 인식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이 왕의 마음을 움직여 귀환과 은혜(재정적 지원)가 주어졌다고 송축할 수 있었다.

      둘째, 경험적인 신앙이라는 점이다. 이는 앞선 특징에서 비롯된 것이다. 하나님이 역사를 주관하시기 때문에, 그 역사 현장에 있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역사를 경험할 수 있다. 에스라는 그때 그 장소에서 역사하고 계신 하나님을 경험하였다. 그는 왕의 마음을 움직이시는 그분의 손을 경험하였고, 그로부터 주어지는 은혜도 경험하였다. 무엇보다 그는 자신에게 힘을 주시고, 백성들과 함께 예루살렘으로 무사히 돌아갈 수 있도록 인도하신 하나님을 경험하였다.

      셋째, 겸손한 신앙이라는 점이다. ‘겸손’은 자기 정체성을 가감 없이 명확히 인식할 때 그러한 태도를 견지할 수 있다. 그에 반하여 ‘교만’은 자기기만에 뿌리를 내리고 있다. 국어사전은 교만에 대해 이렇게 정의하고 있다. “잘난 체하며 뽐내고 건방짐.” 이러한 정의 이면에는 잘난 체할 뿐 정작 잘나지 않았다는 사실이 들어 있다. 그런 사실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잘났다고 뽐내기 때문에 자기를 기만하는 것이다. 이러한 사람은 자기 주인인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고 의지하지도 않는다. 그래서 교만이 죄가 되는 것이다.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예수님의 말씀은 구원받은 사람이나 그 반대의 사람 모두에게 적용되는 진리이다. 에스라는 이러한 사실을 명확히 알고 있었기 때문에 겸손하게 하나님께 기도로 간절히 매달릴 수밖에 없었다(8:21-23). 그 결과 ‘하나님의 손’이 에스라 위에 있었고, 그로 인해 그는 다시 힘을 얻어 백성들과 함께 예루살렘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II. 메시지 / 에스라의 결심(7:6-10)

    1. 에스라의 귀환 배경

    ​1-6장은 포로가 되어 바벨론으로 끌려갔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예루살렘으로 돌아온 사건, 즉 1차 포로 귀환 사건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이때 스룹바벨의 주도로 올라온 백성들은 예루살렘에 2차 성전을 지었습니다. 7-10장은 2차 귀환 내용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2차 귀환을 주도한 사람은 학자이자 제사장인 에스라였는데, 그는 아닥사스다 왕의 허락과 도움으로 돌아올 수 있었는데, 그가 예루살렘으로 올라온 목적은 어디에 있었을까요? 에스라의 귀환을 허락한 왕의 조서에 보면 그가 돌아오게 된 배경을 알 수 있습니다. 왕은 에스라를 예루살렘으로 보내면서 그에게 다음과 같은 임무를 맡겼습니다. 첫째, 유다와 예루살렘의 형편을 살피라(14절). 둘째, 하나님의 전(성전)을 위하여 (제사로) 섬기라(17-20절). 셋째, 법관과 재판관을 세워 공정한 재판이 이루어지게 하고, 하나님의 율법을 알지 못하는 자들을 가르치라(25절).

      에스라에게 이와 같은 임무를 맡겨졌다는 것은, 역으로 당시 그곳에 그와 같은 문제가 산적해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백성들은 성전에서 드리는 제사를 소홀히 하였고, 그나마 드리는 제사도 하나님이 정하신 법도를 정확하게 지키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율법을 제대로 알지 못하는 사람이 법관과 재판관으로 세워졌고, 그들에 의해 공정한 재판도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이런 현상이 왜 벌어졌을까요? 백성과 지도자들(특히 종교와 사법 분야)이 하나님의 율법을 알지 못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왕은 그곳의 형편을 살펴서 정상화할 필요가 있었던 것입니다. 에스라는 이 임무를 수행하기 위하여 아닥사스다 왕 7년(기원전 458년) 다섯째 달 초하루에 예루살렘에 도착하였습니다. 그는 도착하자마자 다음과 같이 결심하였습니다. “여호와의 율법을 연구하여 준행하며 율례와 규례를 이스라엘에게 가르치겠다”(10절). 오늘 우리는 에스라가 결심한 내용을 살펴보면서, 그것이 우리에게 어떤 교훈을 주는지 나누어 보도록 하겠습니다.

    2. 에스라의 결심 세 가지

    ​1) 하나님의 율법을 연구하기

    에스라가 결심한 첫 번째 내용이 무엇입니까?
    그는 먼저 하나님의 율법을 연구하기로 결심하였습니다.
    여기에서 ‘여호와의 율법’은 기본적으로 ‘모세 오경’을 가리킵니다(6절).
    하지만 그는 이것뿐만 아니라 ‘시가서’를 비롯하여, 에스라 이전에 쓰여진 ‘역사서’와 ‘예언서’ 일부까지 연구 대상으로 삼았을 것입니다. 그리고 ‘연구하다’는 말은 어떤 것에 대한 지식을 완전하게 얻기 위하여 온갖 노력을 기울이는 것을 말합니다.

    에스라는 모세의 율법에 익숙한 학자였습니다(6절).
    여기에서 ‘익숙하다’는 말은 ‘숙련되다’(RSV, NASB, skilled), ‘박식하다’(NEB, learned), ‘정통하다’(NIV, well versed)는 뜻입니다.
    그렇지만 그는 자신의 익숙함에 대해 여전히 부족하다고 생각하였고, 그 부족함을 채우기 위해 연구를 결심하였던 것입니다.
    우리는 이런 에스라와 비교할 때 하나님의 율법에 대해 잘 알고 있다고 자부할 수 있을까요?
    많은 경우, 그보다 못할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하나님의 율법을 연구하는 데 얼마나 게으른지 모릅니다.
    연구는커녕 읽는 것도 소홀히 합니다.
    이것이 현재 우리가 처하고 있는 가장 근본적이고 가장 큰 문제입니다.
    우리는 이런 태도에서 돌이켜 에스라처럼 연구하겠다고 결심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이렇게 하나님의 율법을 연구하는 것이 왜 중요할까요?
    연구하여 제대로 알지 못하면 에스라가 결심한 그다음 내용인, 준행하고 가르치는 일을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갈릴리에서 제자들에게 이렇게 명령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침례를 베풀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마 28:19-20).
    그런데 우리는 이 명령에 제대로 순종하지 않고 있습니다.
    아니 순종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순종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이 명령의 전제가 되는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이 어떤 것인지 모르기 때문에 그렇게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분부하신 모든 것’과 ‘여호와의 율법’이 다른가요?
    아닙니다. 똑같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구약의 말씀과 단절되어 있지 않습니다.
    그분은 그것을 단절시키기 위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것을 완전하게 하게 하려고 이 땅에 오셨습니다.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를 폐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온전하게 하려 함이라”(마 5:17).

    하나님의 율법을 연구하는 것이 중요한 또 다른 이유는, 그렇게 하는 것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증거가 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그분의 모든 것을 담고 있는 말씀을 소홀히 할 수 없습니다.
    그렇게 하는 것은 거짓이고 자기기만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이 보낸 편지를 받은 사람이, 그 편지를 소홀히 다룰 수 있을까요?
    곁에 두고 시간 날 때마다 읽고 또 읽을 것입니다.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어떤 일을 하고 있는지, 건강하게 잘 지내고 있는지, 여전히 나를 사랑하고 있는지 확인하고 싶고, 또 그가 당부하는 말도 열심히 지키려고 할 것입니다.
    왜 그렇게 합니까? 그 사람을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도 이와 다르지 않습니다.

    만약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묵상하고 연구하고 있지 않다면, 먼저 이 문제부터 자가 진단해 보아야 합니다.
    “나는 정말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있는가?” 그리고 그 척도는 하나님의 말씀을 얼마나 연구하고 있는지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만약 그 척도가 낮다면, 하나님이 원하시는 수준으로 돌아와야 합니다.
    날마다 시간을 정해 놓고 말씀을 읽고 상고해야 하고, 필요하다면 다른 사람과 함께 성경 공부도 해야 합니다.
    그렇게 하면 다윗의 고백이 우리의 고백이 될 수 있습니다.
    “주의 말씀의 맛이 내게 어찌 그리 단지요 내 입에 꿀보다 더 다니이다”(시 119:103).

    2) 준행하기

    에스라가 결심한 두 번째 내용이 무엇입니까?
    연구한 말씀의 내용대로 준행하는 것입니다.
    ‘준행하다’는 말은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실제로 행동에 옮기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이 율법을 주신 궁극적인 목적은, 우리가 그 율법대로 실천하는 것에 있습니다.
    그렇게 하는 것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우리에게도 축복이 되기 때문에, 그 율법을 통해 우리의 실천을 요구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연구한 말씀대로 준행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말씀대로 준행하는 것이 중요한 또 다른 이유는, 그 준행을 통해서 우리의 믿음이 드러날 뿐만 아니라 그것이 우리의 믿음을 온전하게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행함이 없는 믿음은 아무 유익이 없습니다.
    야고보는 믿음과 행함의 관계에 대해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내 형제들아 만일 사람이 믿음이 있노라 하고 행함이 없으면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 그 믿음이 능히 자기를 구원하겠느냐...이와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너는 믿음이 있고 나는 행함이 있으니 행함이 없는 네 믿음을 내게 보이라 나는 행함으로 내 믿음을 네게 보이리라 하리라 네가 하나님은 한 분이신 줄을 믿느냐 잘하는도다 귀신들도 믿고 떠느니라 아아 허탄한 사람아 행함이 없는 믿음이 헛것인 줄을 알고자 하느냐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그 아들 이삭을 제단에 바칠 때에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이 아니냐 네가 보거니와 믿음이 그의 행함과 함께 일하고 행함으로 믿음이 온전하게 되었느니라”(약 2:14,17-22).

    하나님의 말씀을 준행하는 것이 중요한 이유가 또 있습니다.
    그것이 사람 앞에서 비치는 빛이 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같이 너희 빛이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마 5:16).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말씀대로 준행하는 그 모습이 우리의 이웃을 하나님께로 인도하는 전도가 되고, 그것을 통해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기 때문에 준행이 중요하고 또 중요한 것입니다.

    3) 가르치기

    ​에스라가 결심한 마지막 내용은 율례와 규례를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가르치는 것입니다.
    이것이 중요한 이유는 그 당시 그곳에서 발생한 모든 문제가 여기에서 비롯되었기 때문입니다.
    가르치는 일, 즉 교육의 목적은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모르는 것을 알게 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알게 한 것을 실생활에 적용하도록 도와주는 것입니다.
    실생활에 적용하도록 도와주는 일은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게 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정상적인 교육이 이루어졌다면, 그들은 하나님이 어떤 분이시고 그분의 뜻이 무엇이었는지를 알았을 것이고, 그분이 명령하신 대로 순종하였을 것입니다.
    하지만 가르치지 않았기 때문에 하나님께 제사도 제대로 드리지 않았고, 하나님을 모르는 재판관들이 사회 정의를 왜곡시켰던 것입니다.

    가르치는 일이 이렇게 중요하기 때문에, 가르치되 잘 가르쳐야 합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는 것이 잘 가르치는 것일까요?
    그것에 대한 정답을 사도 바울이 제시하고 있습니다.
    그는 밀레도에서 에베소 교회 장로들을 만나 이렇게 고백하였습니다.
    “아시아에 들어온 첫날부터 지금까지 내가 항상 여러분 가운데서 어떻게 행하였는지를 여러분도 아는 바니 곧 모든 겸손과 눈물이며 유대인의 간계로 말미암아 당한 시험을 참고 주를 섬긴 것과 유익한 것은 무엇이든지 공중 앞에서나 각 집에서나 거리낌이 없이 여러분에게 전하여 가르치고...여러분이 아는 바와 같이 이 손으로 나와 내 동행들이 쓰는 것을 충당하여 범사에 여러분에게 모본을 보여준 바와 같이...”(행 20:18-20, 34-35).
    바울은 유익한 것은 무엇이든지 언제 어디서나 거리낌 없이 그들에게 전하여 가르쳤습니다.
    그와 동시에 범사에(항상) ‘모본’을 보여주었습니다.
    장로들은 그 모든 모습을 보았고 또 알았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이 위대하고, 그래서 그를 통해 교회가 세워졌던 것입니다.
    ‘아이들은 선생님(부모)의 뒷모습을 보고 배운다’는 말이 있습니다.
    ‘백문이불여일견’이라는 말도 있습니다.
    이 말들은 교육에 있어 모본의 파괴력과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입을 열어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쳐야 하지만, 그와 동시에 우리의 모본을 보고 배울 수 있도록 도와야 합니다.

    3. 작심삼일(作心三日)이 되지 않도록

    ​에스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연구하고 준행하고 백성들을 가르치겠다고 결심하였습니다.
    그것을 보면서 우리도 그와 똑같은 결심을 하게 됩니다.
    그렇게 결심하는 것은 정말 잘하신 것입니다.
    주님이 기뻐하실 일입니다.
    하지만 그것이 ‘작심삼일’(作心三日)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의 결심이 작심삼일이 되면 실패에 대한 실망으로 자괴감에 빠지기 때문에 이전보다 못한 결과를 맛볼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의 결심이 작심삼일이 되지 않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주님께 그렇게 할 수 있도록 도움을 요청해야 합니다.
    결심한 것을 주님과 함께하면 됩니다.
    많은 사람은 내가 결심하였기 때문에, 그것을 이루기 위한 행동도 내가 주체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그것은 착각에 불과합니다.
    우리의 생각과 달리 성경은 우리에게 소원을 주시고 그 소원을 이루시는 분이, 우리 자신이 아니라 하나님이시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에게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빌 2:13).
    “또 여호와를 기뻐하라 그가 네 마음의 소원을 네게 이루어 주시리로다”(시 37:4).
    “좋은 것으로 네 소원을 만족하게 하사 네 청춘을 독수리같이 새롭게 하시는도다”(시 103:5).
    “손을 펴사 모든 생물의 소원을 만족하게 하시나이다”(시 145:16).

    우리의 결심이 작심삼일에서 벗어나 지속 성장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주님 안에 거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거하면 사람이 열매를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이라”(요 15:5).
    에스라의 결심이 우리 모두의 결심이 되기를 바랍니다.
    그와 동시에 우리 모두 주님 안에 거하면서 그 결심에 많은 열매가 맺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바랍니다.​








    5월 26일(월) 에스라 5-7장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에스라의 행적(7:10)

    에스라가 여호와의 율법을 연구하여 준행하며 율례와 규례를 이스라엘에게 가르치기로 결심하였었더라.
    For Ezra had devoted himself to the study and observance of the Law of the LORD, and to teaching its decrees and laws in Israel.

    에스라의 행적(行跡)에서 세 가지를 배워야 합니다.
    행적(行跡)이란 한자는 다닐 행(行)과 발자취 적(跡) 또는 쌓을 적(積)이란 문자로 "평생동안 한 일이나 업적"을 말합니다.
    에스라는 바벨론의 포로 생활을 마치고 예루살렘으로 귀환한 유대 백성들에게 율법을 가르치는 일에 헌신했습니다.
    에스라의 헌신에서 세 가지 과정을 찾을 수 있습니다.

    에스라의 개혁 운동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벨론에서 포로로 잡혀간 후 70년 동안의 종살이를 끝내고 예루살렘으로 귀환 후
    그들의 신앙과 율법 준수를 회복하기 위한 운동입니다.
    에스라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방 여인들과 통혼하며 범죄하는 모습을 보고 단호한 개혁을 시행하였다.
    그의 개혁은 하나님 앞에 엎드려 울며 백성들의 죄를 대신 통회 자복하고 백성들이 회개의 역사를 끝마칠 때까지 금식하며 이방 여인들을 단호이 끊어버리는 등 신앙의 개혁을 통한 몇 가지 교훈을 제공합니다.
    에스라의 개혁은
    1. 율법 준수 운동
    2. 인습배제운동
    3. 혼합주의 금지 운동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족속들과 동화되어 신앙적 정체성을 잃어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한 것입니다.

    첫째, 연구(硏究)하는 자세(Study)


    1875. 다라쉬( dârash) דָּרַשׁ

    1. 문지르다.  2. 어떤 장소를 가다. 3. 구하다


    그때는 구약 성경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에스라는 구약의 율법을 깊이 연구했습니다.
    결국 그는 아주 익숙한 학사가 되고, 완전한 학사가 되었습니다.
    율법에 관한 한 그 누구도 그를 따를 사람이 없었습니다.
    요즘으로 말하면 '성경 공부를 열심히 했다.'는 말입니다.
    남을 뜯어고치겠다고 하기 전에 에스라는 자기 개혁을 먼저 하였습니다.
    에스라는 자신을 먼저 개혁하기 위하여 성경 말씀을 철저히 공부했습니다.

    둘째,  준수(遵守)하는 자세(observance)

    6213. 아사( ʽâsâh) עָשָׂה

    1. 노동하다.  2. 만들다. 3. 생산하다

    지키지 않는 공부가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에스라는 율법을 철저히 지켰습니다.
    개혁자는 자신이 먼저 법을 지켜야 합니다.

    셋째, 교육(敎育)하는 자세(Teaching)
     

    3925. 라마드( lâmad)  לָמַד   

    1. 응징하다.  2. 훈련받다. 3. 렘 10:2.

    예레미야 10:2 /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열방의 을 배우지 말라 열방인은 하늘의 징조를 두려워하거니와 너희는 그것을 두려워 말라.

    그럴 때에 사회 변화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백성을 깨우치고 법을 지키게 해야 합니다.
    그래서 에스라는 율법을 가르치고 나 자신이 지키면서 이방 혼인한 사람들을 전부 정리하고 사회를 완전히 뒤바꾸어 놓았습니다.
    즉 구체적이고 실제적인 개혁을 하였습니다.
    개혁이 그들을 살아남게 하였습니다.
    여러분과 여러분 가정이 먼저 바뀌고 새로워지는 개혁이 이루어지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그리하면 사회와 나라가 개혁될 수 있습니다.
    우리도 잘 될 수 있습니다.

    에스라는 믿음의 뿌리가 깊은 사람입니다.
    포로 생활의 쓰라린 고난도 뿌리깊은 신앙을 꺾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무수한 역경 중에서도 믿음은 더욱 뿌리를 깊이 내렸습니다.
    그리고 에스라는 하나님의 도움을 받았습니다.
    사람의 도움은 부분적이요, 상대적이지만 하나님의 도우심은 전체적이요, 절대적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도우심을 받는 자가 승리합니다.
    그런가하면 에스라는 철저히 개혁하는 개혁자였습니다.
    먼저 자신을 개혁하고 사회를 개혁하고 종교계를 개혁했습니다.
    그래서 선민은 혼탁한 와중에서 살아남을 수 있었습니다.
    우리도 오늘날에 개혁만이 살길입니다.
    에스라의 삶을 본받아 승리하는 여러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인도의 교육자 케리여사의 현대인은 세 가지의 정신적 죄악

    첫째, 모르면서 배우려 하지 않는 것
    둘째, 알면서 가르치려고 하지 않는 것
    셋째, 할 수 있으면서 하려고 하지 않는 것

    * 자료출처 / 안병욱 전집 좌우명 365일중에서


    준수(遵守) : 좇을 준(遵), 지킬 수(守)

    1. 전례(前例)나 규칙(規則), 명령(命令) 따위를 그대로 좇아서 지킴.


    불치하문(不恥下問)의 뜻

    불치하문(不恥下問)은 '아랫사람에게 묻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는 뜻으로, 자신의 지위나 연령에 관계없이 지식이 부족한 부분에 대해 다른 사람에게 배우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는 의미입니다. 이는 겸손한 태도와 끝없는 배움의 중요성을 강조합니다.

    • 겉뜻: 아랫사람에게 묻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 속뜻: 지위나 나이에 상관없이 배우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음.



    공자는 불치하문(不恥下問) 즉 자기보다도 아랫 사람에게 묻는다 해도 그걸 부끄러워하지 않아야 한다고 말했다.
    우리는 알면 남에게 가르쳐야 한다.
    앞선 사람은 뒤진 사람을 가르쳐야 그것이 먼저 안 사람의 의무여, 책임이다.
    알면서 가르치지 않고 나만 혼자 알고 있는 것은 지식의 이기주의이다.
    할 수 있는 것을 하지 않는 것이야 말로 인생의 큰 죄악이다.
    그것은 행동에 있어서 무책임한 사람이요, 방관하는 사람이며, 정의와 정열이 없는 사람이다.
    안 하는 것과 못하는 것은 분명히 다르다. 
    못하는 것은 능력이 없는 것이지만 안 하는 것은 태만이요, 책임의 포기인 것이다






    에스라(Esra)의 의미, 성장 배경, 성격 및 역사적 의미

    1. 에스라(Esra)의 이름 뜻

    에스라는 히브리어로 "도움을 받은 자" 혹은 "야훼가 돕는다" 라는 의미를 가진다.
    히브리어 원어는 ‘עֶזְרָא’(Ezra)이며, 이는 ‘에제르’(עֵזֶר, ezer)라는 단어에서 유래했는데, 이 단어는 "돕다" 혹은 "지원하다"라는 뜻을 지닌다.
    성경에서 에스라는 바벨론 포로기 이후 유대 민족의 신앙 회복과 율법 준수를 강조한 인물로 등장한다.
    그는 종교적 개혁자로서의 역할을 수행했으며, 포로에서 귀환한 유대인들에게 율법을 가르치고, 그들의 신앙과 생활을 정비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

    2. 에스라의 성장 배경과 성격
    1) 성장 배경
    에스라는 바벨론 포로기(BC 597~538년) 동안 태어난 유대인 학자이자 서기관이었다. 그는 대제사장 아론의 후손으로, 제사장 계열에서 태어났다. 당시 유대 민족은 바벨론에 의해 예루살렘 성전이 파괴되고 포로로 끌려간 상태였으며, 이들은 바벨론과 페르시아 제국 아래에서 생활하고 있었다.
    에스라는 바벨론에서 성장하면서 유대 율법을 깊이 연구했고, 이를 체계적으로 정리하는 데 집중했다. 그는 뛰어난 학문적 자질을 갖추었으며, 유대 율법과 전통을 보존하는 데 헌신적인 인물이었다. 페르시아 시대에 그는 왕궁에서도 인정받는 학자가 되었으며, 후에 페르시아 왕 아르타크세르크세스 1세(BC 465~424년)의 허락을 받아 유대로 돌아가 신앙개혁을 주도하게 된다.

    2) 성격
    에스라는 율법을 철저히 준수하고, 종교적 개혁에 강한 의지를 가진 인물이었다. 그의 성격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① 경건함: 에스라는 하나님의 율법을 깊이 연구하며, 이를 백성들에게 전파하는 것을 사명으로 여겼다.
    ② 지도력: 바벨론에서 유대로 귀환한 유대인들이 신앙적으로 무너져 있는 상황에서, 그들을 다시 신앙 공동체로 조직하고 율법을 강조하는 지도력을 발휘했다.
    ③ 결단력: 유대 민족이 이방인들과 혼합된 문화를 받아들이는 것을 강하게 반대하며, 신앙 순수성을 지키기 위해 단호한 개혁을 진행했다.
    ④ 겸손함: 그는 지도자로서 백성을 훈계하고 가르쳤지만, 늘 하나님 앞에서 기도하며 자신의 역할을 수행했다.

    3. 가족관계
    에스라는 제사장 계열로, 대제사장 아론의 후손이었다.

    성경에서 그의 부모에 대한 직접적인 언급은 없지만, 그의 족보는 다음과 같이 정리된다.
    • 에스라는 사라야의 아들로 기록되며(에스라 7:1), 사라야는 바벨론 침공 당시 대제사장이었다.
    • 사라야는 바벨론에 의해 처형되었고, 그의 후손인 에스라가 페르시아 시대에 등장하면서 유대 율법 부흥운동을 주도했다.
    • 에스라의 개인적인 결혼이나 자녀에 대한 기록은 성경에 남아 있지 않다.

     

     

     

     

     

    역사적 사실과 주요 사건
    에스라가 활동한 시기는 페르시아 제국(아케메네스 왕조) 시대이며, 그가 이끄는 개혁은 주로 아르타크세르크세스 1세(Artaxerxes I) 통치 기간 동안 이루어졌다. 그의 생애에서 가장 중요한 사건들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1. 바벨론 포로에서의 성장과 서기관 활동

    에스라는 바벨론에서 태어나 유대 율법을 연구하며 성장했다. 당시 유대 민족은 포로 생활을 하고 있었고, 성전은 파괴된 상태였다. 바벨론 제국이 페르시아에 의해 멸망한 후(BC 539년), 페르시아 왕 고레스 2세가 유대인들의 귀환을 허용하면서 점진적인 귀환이 이루어졌다.

    2.  제2차 귀환 지도(BC 458년)
    BC 458년경, 페르시아 왕 아르타크세르크세스 1세의 칙령을 받고 유대 땅으로 귀환했다.
    • 이때 에스라는 약 1,500명의 유대인과 함께 바벨론을 떠나 예루살렘으로 향했다.
    • 왕은 에스라에게 유대 율법을 연구하고 가르치며, 예루살렘의 종교적 질서를 확립할 권한을 주었다(에스라 7:25-26).

    3. 율법 개혁과 종교적 순수성 회복
    귀환 후, 에스라는 유대 사회가 하나님의 율법을 따르지 않는 모습을 보고 개혁을 단행했다.
    • 당시 유대인들은 이방인들과 결혼하고, 그들의 풍습을 받아들이는 등 신앙적 타락이 심각했다.
    • 에스라는 백성들에게 이방인과의 결혼을 끊고, 율법을 철저히 준수할 것을 요구했다(에스라 9-10장).
    • 그는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율법을 가르치고, 다시 한 번 신앙 공동체를 회복하도록 이끌었다.

    4. 느헤미야와의 협력
    에스라 이후, **느헤미야가 총독으로 부임(BC 445년경)**하며 예루살렘 성벽을 재건하는 사역을 감당했다.
    • 에스라는 느헤미야와 협력하여 유대 민족에게 율법을 낭독하며 신앙 부흥을 이끌었다(느헤미야 8장).
    • 그는 성경을 공개적으로 낭독하며, 백성들이 율법을 따를 것을 다짐하도록 지도했다.

    에스라의 성격적 의미와 신학적 중요성
    에스라는 유대인의 신앙적 정체성을 회복하고, 하나님의 율법을 중심으로 공동체를 재구성한 중요한 인물이다. 그의 역할은 단순한 지도자를 넘어 유대교의 형성과 발전에 핵심적인 기여를 했다.

     

    1) 율법의 중요성 강조
    그의 개혁은 유대교의 근본적인 특징인 율법 중심주의를 확립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후 유대교는 성전 중심에서 율법 중심으로 변화했으며, 바리새인과 서기관과 같은 학파의 기원이 되었다.

     

    2) 종교적 개혁과 민족적 정체성 회복
    에스라는 유대 민족의 신앙과 전통을 지키는 데 집중했다. 이는 이후 유대 민족이 여러 차례 박해와 흩어짐 속에서도 신앙을 유지할 수 있었던 기반이 되었다.

     

    3) 기독교적 해석
    기독교에서는 에스라를 율법의 교사로서, 신앙을 개혁하는 모범적인 인물로 본다. 또한, 신약에서 율법과 은혜의 관계를 이해하는 중요한 배경이 된다.

    6. 결론

    에스라는 바벨론 포로기 이후 유대 민족의 신앙적 회복을 이끌며, 율법을 강조하고 신앙 공동체를 재건한 인물이다.
    그의 개혁은 유대교의 정체성을 확립하는 데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으며, 기독교에서도 그의 역할을 중요한 신앙적 본보기로 삼는다.




    에스라(Ezra)
    라틴어 번역 성경인 벌게잇에서는 "에스라서"를 "제1에스드라스" 라고 하고 "느헤미야서"를 "제2에스드라스" 라고 부르고 있다.
    또 이 두책은 정경상의 위치도 다르다.
    즉 한글 성경에는 역대하 다음에 있는데 히브리 원전에는 성문서집 중에서 다니엘 다음에 있다(히브리 원전 중에도 팔레스틴 계통의 원전).
    전통적으로 우리는 에스라가 느헤미야보다 앞서 예루살렘에 돌아왔다고 믿고 있는데 최근의 어떤 학자들은 사실은 그 반대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에즈라(Ezra[ עזרא, 기원전 480~440년) 또는 에스라구약성경 에즈라기에 나오는 율법학자이자 제사장이고, 서기관이다.
    그리스어라틴어로는 에스드라스(고대 그리스어: Ἔσδρας)라고 불린다.

    구약성경에 따르면 그는 제1성전에서 봉사한 마지막 대제사장인 스라야의 후손이고,[2][3] 예루살렘 귀환 이후 제2성전의 제사장이었던 예수아의 먼 친척이었다.[4][5]

    바빌론 유배지에서 돌아와 예루살렘에서 모세의 율법을 다시 소개했다.[6][7]
    동방 정교회
    에서 사용 중인 에즈라기의 헬라어 번역본 에스드라스 1서에서는 에즈라를 대제사장으로 소개한다.
    하지만 유대교 랍비 전승에서는 단지 일반 제사장 중 하나였다고 전한다.[8]

    에즈라의 무덤에 관해서 여러 전해 오는 이야기들이 있다.
    한 전설에 따르면 그는 이라크 바스라 근처 알 우자이(al-Uzayr)에 안장되었다고 하며, 또 다른 전설은 시리아 북부 알레포 근처의 타디프(Tadif)에 묻혀 있다고 한다.[9]

    에즈라라는 이름은 하나님이 돕는다는 뜻인 '아자르야후(עזריהו)'의 약어일 수 있다.
    코이네 그리스어로 쓰여진 70인역 성경에서 '에스드라스(Ἔσδρας)'로 적혔다.

    에즈라기에는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와서 살고있던 유대인 일부를 고향인 예루살렘으로 인도하는 과정이 나온다 (에즈라 8.2-14).
    에즈라는 모세 5경에 대한 준수를 강요했다고 전해진다.
    그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율법에 따라 확신을 갖고 특정 종교의 사람들과 결혼하지 않도록 권고했는데, 이 가르침은 모세 오경에 기록되어있다.[10][11]

    구약성경의 에즈라기와 느헤미야기는 에즈라의 활동에 관한 가장 오래된 기록이다.
    반면 에즈라에 관한 다른 책들인 에스드라스 1서, 에스드라스 2서 등은 에즈라느헤미야에 기초해 창작된 저작물로 본다.

    에즈라-느헤미야는 원래 두루마리로 엮어진 한 개의 문서였다.[12]
    후에 유대인들은이 두루마리를 나누어 각각 첫 번째와 두 번째 에즈라라고 불렀다.
    현대에는 유대인들 역시 기독교와 마찬가지로 이 두 권의 책을 에즈라와 느헤미야로 부른다.
    에즈라기 몇 부분(4:8~6:18과 7:12~26)은 아람어로 기록되었고, 대부분은 히브리어인데, 에즈라 본인은 이 두 언어에 능숙했다.[13]

    에즈라는 바벨론에 살고 있었다.
    페르시아아르타크세르크세스 1세 칠년 (기원전 457년), 아르타크세르크세스 1세는 야훼 율법을 모르는 사람들에게 야훼의 율법을 가르치라고 에즈라를 예루살렘으로 보냈다.
    많은 포로된 유대인들과 함께 예루살렘으로 돌아갔던 에즈라는 그곳의 유대인들이 유대인이 아닌 여자와 결혼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는절망 속에서 자신의 옷을 찢고, 야훼 앞에서 이스라엘의 죄를 고백하며, 동족 몇 사람의 반대를 무릅쓰고 죄 많은 결혼 생활을 해소함으로써 공동체를 정화하려고 했다.
    몇 년 후 아르타크세르크세스 1세는 도시 벽을 재건하는 임무를 지닌 총독으로 예루살렘에 느헤미야(유대인 귀족 집안이면서 왕의 측근이었다)를 보냈다.
    성벽이 완성되자, 느헤미야는 에즈라에게 모세 율법 (토라)을 모은 책을 이스라엘 사람들 앞에서 읽게했고, 백성과 제사장은 율법을 지키고 모든 다른 민족들과 섞이지 않겠다는 언약을 맺었다.

    1. "God helps") -"Jewish Encyclopedia", Emil G. Hirsch, Isaac Broydé, "Ezra the Scribe", Jewish Encyclopedia (Online)
    2. 에스라 7:1
    3. 열왕기하 25:18
    4. 역대상 5:40-41
    5. 에스라 3:2
    6. 에스라 7-10장
    7. 느헤미야 8장
    8. Emil G. Hirsch, Isaac Broydé, "Ezra the Scribe", Jewish Encyclopedia (Online)
    9. Tawil, Hayim & Schneider, Bernard 2010, Crown of Aleppo: The Mystery of the Oldest Hebrew Bible Codex, Philadelphia, Jewish Publication Society 2010, p. 63 ISBN 9780827608955; Laniado, David, Li-Qedošim ašer ba-areṣ, Jerusalem 1980, p. 26 (Hebrew); Frenkel, Miriam, article: Atare pulḥan yehudiyyim be-ḥalab bi-yme ha-benayim ha-tikhoniyyim, published in: Harel (הראל‎), Yaron, Assis, Yom Ṭov & Frenkel, Miriam (eds.), Ereṣ u-mlo’ah: meḥqarim be-toledot qehillat aram ṣova (ḥalab) ve-tarbutah, vol. I, Ben-Zvi Institute: Jerusalem 2009, pp. 174–75 (Hebrew); Khatib, Muḥammad Zuhair, Rabṭ al-Sabāba al-yamanī.
    10. Liwak, Rüdiger; Schwemer, Anna Maria. "Ezra". Brill's New Pauly.
    11. "Ezra". Encyclopædia Britannica. 2007. Encyclopædia Britannica Online
    12. Hugh G. M. Williamson, Ezra, Nehemiah, Word Biblical Commentary Vol. 16 (Dallas:Word, 1985), pp. xxi–lii.
    13. James H. Charlesworth – "Announcing a Dead Sea Scrolls Fragment of Nehemiah"The Institute for Judaism and Christian Origins – Retrieved 20 August 2011.

    본문 1절을 보면 '이 일 후 바사 왕 아닥사스다가 위에 있을 때에 에스라라 하는 자가 있으니라.'라는 말씀 그대로 제목을 '에스라라 하는 자'라고 하였습니다.

    에스라에 대해서 우리 성경에는 없는 얘기가 외경에는 있습니다. 그것은 에스라를 가리켜 '선지자'라고 기록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유대인의 전설에 의하면 이스라엘에는 포로 이후에 동네마다 회당이 세워졌습니다. 즉 성전은 예루살렘에 한 곳이 있었을 뿐이요, 동네마다 회당이 있었습니다. 안식일이면 동네 회당에 가서 안식을 지키곤 하였습니다. 이 동네마다 있는 회당을 전체로 총괄하는 '대회당'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에스라라 하는 사람이 이 '대회당'을 창설하고 대회당장이었다는 것이 전설의 내용입니다. 그리고 성경에 의하면 에스라는 제사장입니다. 대제사장 아론의 십 육대손입니다. 그래서 자동적으로 제사장이 됩니다. 그러고는 율법을 얼마나 많이 연구하고, 또 연구했는지 '율법에 관해서는 완전한 학자라.'고 하였습니다. 즉 어느 누구도 따라갈 자가 없었던 학사였습니다. 바벨론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포로생활 중에서 귀환할 때 모두 함께 돌아온 것이 아닙니다. 처음에 돌아온 사람들이 예루살렘의 성전을 세웠고, 2차로 돌아온 사람들이 예루살렘 성을 쌓았습니다. 에스라는 2차로 돌아옵니다. 그래서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율법을 잘 가르치고, 회개운동을 일으키고, 이방인과 혼인한 것을 다 정리하도록 합니다. 마지막에는 다시 바벨론으로 돌아가서 100살이 넘도록 장수하다가 세상을 떠났다고 합니다. 이 '에스라라 하는 자'가 어떤 사람이며, 무엇을 한 사람인가를 본문의 가르침을 따라 생각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I. 믿음의 뿌리가 깊은 에스라 (1-5)

    뿌리가 깊은 나무는 옆으로도 퍼지고 위로도 크게 자랍니다. 뿌리가 얕은 나무는 이렇게 자랄 수가 없습니다. 또한 뿌리가 깊은 나무는 아무리 비바람이 몰아쳐도 절대로 쓰러지지를 않습니다. 그런데 뿌리가 얕거나, 혹은 뿌리가 옆으로 뻗었다면 잘 넘어집니다. 우리 믿음 생활에도 뿌리가 깊어야 합니다. 할아버지의 할아버지가 믿고, 할아버지의 아버지가 믿고, 할아버지가 믿고, 아버지가 믿고, 내가 믿고, 내 자식이 믿듯이 뿌리가 깊은 가정의 믿음은 특별히 뜨거움이나 갑자기 변화가 일어나는 일은 많지가 않습니다. 특별히 뜨거움이나 성령체험을 하는 경우는 당대에 믿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러다 보니 뿌리깊은 믿음은 있는 듯 없는 듯 미지근한 것이 단점입니다. 이러한 단점이 있지만 이런 사람들은 좀처럼 교회를 떠나지 않는 다는 장점, 즉 끈질김이 있습니다. 디모데를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이 사람은 위장병이 들어 나중에는 물밖에 마시지를 못할 정도로 쇠약해졌습니다. 이때 바울 사도가 디모데에게 "위장병에는 포도주가 좋다고 하니 포도주 한잔씩을 마셔보라." 고 권면하는 것이 디모데전서에서 나옵니다(딤전 5:23). 바울 사도가 한참 은혜를 받고 기도할 때에는 손수건만 가져다 놓아도 병자들이 일어났는데 심복이요, 동역자인 디모데의 병은 끝내 고쳐주지 못하고 말았습니다. 여기에는 하나님의 뜻이 있을 겁니다. 위장병에 걸렸음에도 불구하고 디모데는 죽을 각오를 하고 바울 사도를 따라다녔습니다. 전도하는 일에는 최선의 동역자였습니다. 나중에는 에베소 교회의 담임도 잠시 하였습니다. '디모데가 없었으면 바울이 바울이 못되었다.'할 정도로 정말 훌륭한 동역자가 됩니다. 그것도 병들어 약한 중에도 말입니다. 진정 거짓이 없는 믿음입니다. 이 믿음은 외할머니 로이스와 어머니 유니게를 통하여 디모데에게 이어진 믿음입니다. 디모데의 믿음을 가리켜 바울은 '거짓이 없는 네 믿음'이라고 한 까닭이 여기에 있습니다. 바울이 디모데와 헤어져 있을 때에는 거짓 없는 네 믿음을 옆에 놓고 보고싶다.'고 할 정도였습니다. 이렇게 대를 이은 뿌리깊은 디모데의 믿음은 "죽어. 죽어."하는 병마도 꺾어버리거나 빼앗지 못합니다. 끈질기게 끝까지 주님의 일에 온갖 충성을 다 바칩니다. 이것이 바로 '뿌리깊은 믿음'입니다. 본문에 나오는 에스라가 바로 '뿌리 깊은 믿음'의 소유자입니다.

    본문 1절에서 5절을 보면 '이 일 후 바사 왕 아닥사스다가 위에 있을 때에 에스라라 하는 자가 있으니라 저는 스라야의 아들이요 아사랴의 손자요 힐기야의 증손이요 살룸의 현손이요 사독의 오대손이요 아히둡의 육대손이요 아마랴의 칠대손이요 아사랴의 팔대손이요 므라욧의 구대손이요 스라히야의 십대손이요 웃시엘의 십일대 손이요 북기의 십이대손이요 아비수아의 십삼 대손이요 비느하스의 십사대손이요 엘르아살의 십오대손이요 대제사장 아론의 십육대손이라.'고 하였습니다. 대제사장 아론이라고 하게 되면 모세와 견줄만한 사람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에서 이끌어 낼 때 모세는 정치적으로 지도자가 되었고, 종교적으로는 아론이 지도자입니다. 이런 대제사장의 십육대손이요, 사독이라고 하는 유명한 제사장의 오대손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유다가 망할 때 이 제사장의 가족들 모두 바벨론으로 잡혀갔습니다. 이런 중에서 살아남은 에스라는 성전이 없어서 제사는 드릴 수 없지만 제사장의 직분은 그대로 가지고 내려옵니다. 율법을 열심히 연구해서 가르칩니다. 율법에 대해서는 에스라를 따를 자가 없을 정도로 뛰어났습니다. 율법의 완전한 학사였습니다. 이런 사람이 예루살렘으로 돌아와서 포로생활에서 돌아온 백성들에게 율법을 가르치고, '하나님의 법에 저촉되는 것을 모두 정리하자.'고 하여 이방인들과 결혼한 사람들을 불러 가르치고, 설득하여 이방혼인을 전부 정리합니다. 이런 의미에서 에스라는 굉장한 개혁자 중에 하나입니다. 요즘 우리가 "개혁, 개혁"하고 있지 않습니까? 이 사람이 진정으로 '신앙개혁', '종교개혁', '생활갱신'을 이룩하고 성공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가 이렇게 할 수 있었던 것은 믿음의 뿌리가 깊었기 때문입니다. 뿌리깊은 믿음이 역사 하는 힘이 많습니다.

    렐프 존슨 번치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이 사람은 뉴멕시코에서 태어났는데 아주 가난한 흑인의 집안에서 태어난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오랜 투병 중에 있던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게 되었습니다. 이때 그의 나이 12살이었습니다. 1년도 체 못된 때에 아버지 마저 잃게되었습니다. 그래서 13살에 완전한 고아가 되어 버렸습니다. 우리 자식들의 13살을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남의 이야기이기 까닭에 특별하게 와 닿지 않지만 우리 자식들의 이야기라고 상상해 보면 가슴에 닿을 겁니다. 그래서 로스앤젤레스에 사는 할머니에게 가서 얹혀 살게 됩니다. 그냥 얻어먹을 수는 없지 않습니까? 밖에 나가 노동을 하고, 열심히 일을 해서 먹는 문제, 입는 문제를 해결합니다. 그런데 공부가 너무 하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돈이 생기면 생기는 대로 모으고, 대학교 총장님을 찾아가서 자신이 고학할 수밖에 없는 사정을 얘기하고, 입학과 동시에 일자리를 얻습니다. 그러면서 그가 캘리포니아 대학을 졸업하고 하버드 대학을 졸업합니다. 하버드 대학이라고 하게 되면 세계가 알아주는 대학이 아닙니까? 그리고 그가 가정을 이룩하는데 아들이 소아마비가 되는 불행을 또 겪습니다. 지금까지도 불행하게 살아왔는데 아들까지도 불행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불행을 딛고 일어나 'UN'에 취직하여 UN 본부의 부 사무총장까지 승진하게 됩니다. 그러다가 아랍족속들과 유대족속들간의 팔레스타인 제 1차 전쟁이 발발하는 때였습니다. 번치가 이 전쟁을 휴전시키는데 절대적인 공로를 세웁니다. 이것이 인정이 되어 '노벨 평화상'까지 타게 됩니다. 이렇게되기까지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나 온갖 고생 다하고 자기 집안도 불행한 상황에 있는 이 사람이 이런 세계적인 큰 업적을 남긴 까닭은 무엇입니까? 그가 12살 때 어머니가 죽으면서 불러놓고 얘기합니다. "번치야. 나는 너에게 주고 갈 것이 아무 것도 없다. 그런데 너는 이 세상을 살아갈 때 이런 일, 저런 일 많은 어려운 일을 당할 것이다. 그러나 그때에 다른 것은 모두 잊을지라도 믿음만큼은 결코 잊어서는 안 된다. 어떤 경우에도 믿음만큼은 꼭 지켜야 한다."라고 하는 것이 어머니의 마지막 유언이었습니다. 그래서 번치는 아무리 괴로워도 믿음을 굳게 붙잡고, 철저하게 믿음으로 살아간 사람입니다. 어머니에게서부터 오는 믿음이 그에게 심어졌고, 뿌리가 내리고 깊어졌습니다. 어떤 고난 중에서도 그는 믿음으로 이겨낼 수 있었습니다. 남들이 괄시하는 흑인임에도 불구하고 세계적인 인물이 되었습니다. 뿌리깊은 믿음 때문이라는 것을 아시기 바랍니다. 여러분들도 이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에 좋은 일만 있는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좋은 일이 있을 때에는 혼자서 예수를 다 믿는 것 같아도, 고난이 있고, 환난이 있고, 풍파가 있을 때 뿌리깊은 믿음은 고난과 환난과 풍파를 모두 이겨내고 남들이 부러워할 만한 승리하는 사람, 성공하는 사람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에스라는 믿음의 뿌리가 깊은 사람이었습니다.

    II. 하나님의 도우심을 받은 에스라 (6-9)

    하나님의 도우심은 받을 수록 좋고 복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도우심을 받지 못하고 사람의 도움만을 받으면 이 도움은 며칠을 가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사람의 도움은 부분적이요, 상대적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도우심은 전체적이요, 절대적입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도우신다고 하게되면 사람을 통해서 도와주실 수도 있고, 하나님께서 직접 도와주실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돕지 않으실 때 사람은 나를 도울 수 있으나 이 도움은 몇 푼의 가치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사람의 도움을 받으면 괴롭습니다. 사람들은 도와주었다고 얼마나 유세를 부리는 지 모릅니다. 차라리 그 도움을 받지 않는 것이 좋을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도와주시면 모든 사람들이 부러워합니다. 그 사람은 바로 복 받은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사람의 도움이 아닌 하나님의 도우심을 받으시기 바랍니다. 에스라는 바로 하나님의 도우심을 받은 사람입니다. 다윗이 압살롬의 난을 당했을 때 요단강 건너편까지 쫓겨갔습니다. 그 땅이 바로 마하나임입니다. 이곳에 갔더니 소비, 마길, 바실래라는 큰 갑부 셋이 있었습니다. 이 사람들이 힘을 합하여 다윗을 아무 조건 없이 돕지 않습니까? '다윗이 나중에 압살롬의 난을 진정시키고 예루살렘으로 돌아가면 어떤 대가를 줄 건가? 우리가 무엇인가를 받지 않겠나?'하는 생각은 전혀 하지 않고 도와 준 것입니다. 어떤 의미에서는 그들의 도움은 매우 위험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압살롬이 난을 일으켜서 예루살렘을 다 점령하고 요단강까지 점령했는데 요단강 건너편으로 쫓겨온 다윗과 다윗을 따르는 사람들이 도대체 얼마이었습니까? 다윗을 도와주었다가 나중에 어떻게 되겠습니까? 답은 뻔하지 않습니까? 그렇지만 '자기들 지역으로 쫓겨와서 죽게 된 사람들을 우리는 편히 있으면서 어떻게 가만히 있겠나?' 라는 생각으로 세 사람이 힘을 합하여 열심히 도왔습니다. 결국은 다윗이 그 사람들의 도움을 받은 것은 사실이요, 도움이 필요했던 것도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 사람들의 도움 까닭에 압살롬의 난을 진정시키고 예루살렘으로 다시 돌아온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도우셨기 때문에 승리한 것입니다. 마하나임에서 몇 푼의 도움을 받았다는 것은 사람의 도움일 뿐입니다. 또 하나님이 그 사람을 시켜서 도와주어 도운 도움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근본적인 문제는 이 난을 평정하는 것입니다. 예루살렘으로 환궁을 하는 것은 하나님이 도우실 때만 가능했지 마하나임의 세 사람은 그런 일에는 전혀 도움이 못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사람의 도움이라는 것은 지극히 제한된 상대적인 도움이지만 하나님의 도우심은 무한하고 절대적인 도움입니다. 그러기 까닭에 하나님이 직접 도울 수도 있고 사람을 통해 도울 수도 있는 것입니다. 다윗처럼 꼭 하나님의 도우심을 받으면 영광이요, 복되다 할진대 여러분들도 하나님의 도움을 받고 살아가시길 바랍니다.

    본문으로 돌아가서 6절에서 9절을 보면 '이 에스라가 바벨론에서 올라왔으니 저는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께서 주신 바 모세의 율법에 익숙한 학사로서 그 하나님 여호와의 도우심을 입으므로 왕에게 구하는 것은 다 받는 자더니 아닥사스다 왕 칠 년에 이스라엘 자손과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과 노래하는 자들과 문지기들과 느디님 사람들 중에 몇 사람이 예루살렘으로 올라올 때에 이 에스라가 올라왔으니 왕의 칠 년 오 월이라 정월 초하루에 바벨론에서 길을 떠났고 하나님의 선한 손의 도우심을 입어 오 월 초하루에 예루살렘에 이르니라.'고 하였습니다. 에스라가 하나님의 도움을 받기 까닭에 아닥사스다 왕에게 필요한 것을 말하면 알아서 다 충당해 줍니다. 하나님께서 아닥사스다 왕을 통해 '에스라가 구하는 것은 다 주더라.'는 뜻입니다. 왕의 도움 이전에 하나님의 도우심입니다. 또 하나님의 선한 손의 도움을 얻었습니다. 정월 초하루에 떠나 오월 초하루에 예루살렘에 도착했습니다. 즉 4개월이 걸린 것입니다. 바벨론에서 예루살렘까지 돌아오는 길은 넉달이 걸리는 거리라는 것입니다. 그것도 2000명에 가까운 큰 무리를 거느리고 오는 것입니다. 무장되어 있지도 않습니다. 오는 길에 이스라엘의 대적들이 많지 않습니까? 그런데도 대적들의 괴롭힘이 전혀 없었다는 것입니다. 넉달 동안의 긴 여행을 끝내고 무사히 예루살렘에 도착했습니다. 사람의 도움은 별로 받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도우심을 받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우리 한국에서 장로의 직분을 가졌고, 수술하는 외과계통에서는 늘 제 일인자로 자타가 공인하는 장기려 박사님이 계십니다. 장박사님은 김일성의 맹장수술을 해 주고 6.25사변이 나자 남쪽으로 넘어 온 사람입니다. 남쪽으로 내려와서 부산에 복음병원을 세우고 복음병원 원장을 지낸 훌륭한 분입니다. 이 분은 김일성의 맹장 수술을 할 때에도 기도하고 수술을 시작한 분입니다. 기도하고 수술하자는 데 하지 않을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그런데 한번은 아주 위독한 환자가 수술을 받으러 왔습니다. '성공할까? 실패할까?'하는 것은 반반이었습니다. 장기려 박사의 의료 기술을 배우기 위해서 많은 문하생들이 둘러서서 견학을 합니다. 장기려 박사님은 수술을 시작하기 전에 기도를 하는데 믿지 않는 사람이 봐도 간절하게 기도하는 것을 알아볼 정도였습니다. 좀처럼 보기 어려운 기도였습니다. 그리고 몇 시간을 땀을 흘려가며 수술하는데 여러 사람들은 지켜보고 배웁니다. 어렵다고 하던 수술이 깨끗이 끝나고 성공해서 살아났습니다. 이때 문하생 중에서 지켜보았던 한 사람이 "박사님, 수술에 성공하고 이 사람이 살아나는 것이 기도 때문입니까? 박사님의 의술 때문입니까?"라고 물을 때 "기도를 통해 받는 하나님의 도우심이 50%이고, 우리가 하는 노력이 50%입니다."라고 대답하였습니다. 이 말이 맞습니다. 그 사람의 병 나은 결과가 전적으로 기도에 있다면 의술이 무슨 필요가 있습니까? 또 의술로 사람을 죽이고 살린다면 하나님은 무엇 하는 분입니까? 그런데 다른 사람들이 하지 못하겠다고 하는 수술도 기도한 후에 자신의 의술로 최선을 다했더니 죽어 가는 사람이 살아난 것입니다. 노력이 50%입니다. 자기 자신이 할 일은 하지 않고 하나님께 100% 다 해달라고 하면 안됩니다. 이것은 믿음이 아닙니다. 자기가 할 일은 자기가 다하고 이제는 "하나님이 일할 차례입니다."라고 하나님께 기도하고 맡겨야 합니다. 아무 노력 없이 하나님께만 전적으로 맡기지 마시기 바랍니다. 자신이 할 일을 해야 합니다. 이때 하나님의 도우심이 나타나면 되지 않을 일도 되고 죽어 가는 사람이 살아나는 역사도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에스라도 자신이 최선을 다하는 중에 하나님의 도우심을 받아 성공했습니다. 하나님의 도우심을 받아 승리하기를 바랍니다.

    III. 철저히 개혁하는 에스라 (10-)

    우리나라가 지금 "개혁 개혁"하면서 야단인데 개혁을 해야만 살아남기 때문입니다. 개혁을 하지 않으면 살아 남기 힘이 듭니다. 이 나라 곳곳에 개혁 운동이 일어나야 합니다. 사법부, 언론계, 정치계, 문화계, 종교계, 교육계, 경제계 모두 다 개혁을 해야 하는데 개혁을 잘못하면 오히려 역효과가 나타납니다. 개혁을 하려면 법적으로 개혁하고 제도로 개혁하기 이전에 사람이 먼저 개혁, 갱신이 되어야 합니다. 이번에 인천 '호프집 사건' 때문에 55명이 죽었습니다. 꽃다운 청춘들이 죽었습니다. 법이 없어서 죽었습니까? '문을 닫아라'는 폐쇄 명령을 내렸는데도 관련 기관에 돈을 갖다 바침으로 눈감아주었기 때문에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습니까? 법을 아무리 만들어 놓아도 운영하는 사람이 달라지지 않으면 그런 법과 제도는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사람이 먼저 개혁되어야 합니다. 우리의 의식이 먼저 변화되어야 합니다. 우리의 믿음도 먼저 바뀌어야 합니다. 에스라는 이 모든 것을 뒤바꾸어 놓은 개혁의 모델입니다.

    본문 10절을 보면 '에스라가 여호와의 율법을 연구하여 준행하며 율례와 규례를 이스라엘에게 가르치기로 결심하였더라'라고 하셨습니다.

    에스라의 행적에서 세 가지를 배워야 합니다.

    첫째는 연구하는 자세

    그때는 구약 성경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에스라는 구약의 율법을 깊이 연구했습니다.
    결국 그는 아주 익숙한 학사가 되고, 완전한 학사가 되었습니다.
    율법에 관한 한 그 누구도 그를 따를 사람이 없었습니다.
    요즘으로 말하면 '성경 공부를 열심히 했다.'는 말입니다.
    남을 뜯어고치겠다고 하기 전에 에스라는 자기 개혁을 먼저 하였습니다.
    에스라는 자신을 먼저 개혁하기 위하여 성경 말씀을 철저히 공부했습니다.

    두 번째로 '준수했다.'는 것입니다.
    지키지 않는 공부가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에스라는 율법을 철저히 지켰습니다.
    개혁자는 자신이 먼저 법을 지켜야 합니다.

    세 번째로 다른 사람에게 가르치기로 결심했습니다.
    그럴 때에 사회 변화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백성을 깨우치고 법을 지키게 해야 합니다.
    그래서 에스라는 율법을 가르치고 나 자신이 지키면서 이방 혼인한 사람들을 전부 정리하고 사회를 완전히 뒤바꾸어 놓았습니다.
    즉 구체적이고 실제적인 개혁을 하였습니다.
    개혁이 그들을 살아남게 하였습니다.
    여러분과 여러분 가정이 먼저 바뀌고 새로워지는 개혁이 이루어지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그리하면 사회와 나라가 개혁될 수 있습니다.
    우리도 잘 될 수 있습니다.

    에스라는 믿음의 뿌리가 깊은 사람입니다.
    포로 생활의 쓰라린 고난도 뿌리깊은 신앙을 꺾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무수한 역경 중에서도 믿음은 더욱 뿌리를 깊이 내렸습니다.
    그리고 에스라는 하나님의 도움을 받았습니다.
    사람의 도움은 부분적이요, 상대적이지만 하나님의 도우심은 전체적이요, 절대적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도우심을 받는 자가 승리합니다.
    그런가하면 에스라는 철저히 개혁하는 개혁자였습니다.
    먼저 자신을 개혁하고 사회를 개혁하고 종교계를 개혁했습니다.
    그래서 선민은 혼탁한 와중에서 살아남을 수 있었습니다.
    우리도 오늘날에 개혁만이 살길입니다.
    에스라의 삶을 본받아 승리하는 여러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본절의 초두에는, 우리말 성경에는 번역되어 있지 않은 '키'(*)라는 접속사가 있다. 이것은 '왜냐하면'의 의미로서 에스라가 하나님으로부터 도움을 받을 수 있었던 중요한 원인을 말해준다. 그렇다면 본절의 맨 끝부분의 '결심하였더라'는 '결심하였기 때문이다'로 번역함이 보다 적절하다. 그렇지만 본절이 또한 에스라가 팔레스틴으로 귀환했던 중요한 이유 혹은 목적을 말해주는 것도 사실이다.

    여호와의 율법 - 6절 주석을 참조하라. 모세의 율법에 익숙한
    - 여기의 '모세의 율법'은 그 앞에 하나님의 언약적 속성을 강조하는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라는 호칭이 나왔음을 볼 때, 언약 백성들이 반드시 이행해야할 규범으로서의 율법을 뜻한다(출 19:5-8).
    한편, '익숙한'(마히르)은 '서두르다' 혹은 '빠르다'의 의미를 갖는 동사 '마하르'(*)에서 파생된 형용사로서, 어떤 특정한 사물에 대해서 충분한 준비와 경험이 있는 상태를 가리킨다.
    따라서 여기의 '익숙한'은 '능통한'으로 번역해도 괜찮을 것이다


    연구하여(리드로쉬. לִדְרֹושׁ )
    - '조사하다' 혹은 '찾다'의 의미를 갖는 동사 '다라쉬'(dârash) דָּרַשׁ)에서 파생된 단어로서, 어떤 사물에 대한 완전한 지식을 얻기 위해서 온갖 노력을 기울이는 행동을 가리킨다(Rawlinson, 벧전 1:10, 11).

    1875. 다라쉬( dârash) דָּרַשׁ

    1. 문지르다.  2. 어떤 장소를 가다. 3. 구하다
    발음 [ dârash ]
    구약 성경  / 164회 사용

  • 관련 성경  /  찾다(레10:16, 시77:2, 신22:2), 묻다(신13:14, 왕상14:5, 겔14:3), 조사하다(신19:18), 구하다(대하16:12, 미6:8, 대상26:31), 거두다(대하24:6), 구걸하다(시109:10), 청하다(대상10:13), 간구하다(대하20:3, 렘21:2), 연구하다(스7:10, 시111:2, 전1:13), 조사하다(스10:16), 용납하다(겔14:3), 힘쓰다(렘29:7),탐구하다(신12:30), 받다(신18:19), 요구하다(신23:21, 겔20:40), 알아보다(삼하11:3), 나아가다(대하1:5), 신원하다(대하24:22), 감찰하다(시10:4,13), 도모하다(에10:3), 심문하다(시9:12), 돌보다(시142:4),
    [부] 자세히(사 34:16), 청하건대(왕상 22:5).

  • 준행하며(라아소트. וְלַעֲשֹׂת)
    - 이것은 '행하다', '만들다' 등의 의미가 있는 동사 '아사'(*)에서 파생된 단어로서, 자신의 사상 및 견해를 실제로 행동에 옮기는 것을 가리킨다(창 1:31 ; 6:22 ; 신 5:27 ; 23:23).

    6213. 아사( ʽâsâh) עָשָׂה

    1. 노동하다.  2. 만들다. 3. 생산하다
    발음 [ ʽâsâh ]
    구약 성경  / 2627회 사용



    율례와 규례
    - 여기서 '율례'(*, 호크)는 '새기다' 혹은 '초상화를 그리다' 등의 의미를 갖는(Davidson) 동사 '하카크'(*)에서 파생된 명사로서, '번복될 수 없을 만큼 단단히 규정된 것' 혹은 '명령된 것'을 뜻한다(레 10:13 ; 욥23:12 ; 렘 5:22).
    한편 '규례'(*, 미쉬파트)는 '재판하다'나 '공의를 실행하다'의 뜻이 있는 동사 '쉬파트'(*)의 파생형이다.
    이것은 마땅히 따라야 할 행동의 규범 혹은 선악의 분별을 가능하게 해주는 기준(레 18:4 ; 시 103:6)등을 가리킨다.
    그런데 위의 두 단어는 외형상으로는 차이가 있는 듯하지만, 실제로는 두 단어가 항상 동시에 혹은 교대로 사용된다는 점에서 볼 때, 거의 같은 의미로 봐야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 두 단어가 '여호와의 율법'의 보다 본질적 특성들을 두 가지로 드러내주는 단어들이라고 말할 수 있다.
    즉, '율례'는 율법의 기초적인 규정들에, '규례'는 보다 구체적인 적용례들에 각각 중심을 둔 표현이라 할 수 있다(JosephBlenkinsopp).

    가르치기로(레라메드.  וּלְלַמֵּד )
    - 이것은 '습관들이다'(Davidson) 혹은 '효율적으로 가르치다'(Meyer)는 의미이다.
    에스라가 실행하기를 결심한 여러 일 중 가장 중요시되던 것은 바로 여기의 이 '가르침'이었다(Fensham).

    3925. 라마드( lâmad)  לָמַד   

    1. 응징하다.  2. 훈련받다. 3. 렘 10:2.
    발음 [ lâmad ]
    구약 성경  / 197회 사용
    관련 성경  /  배우다(신 5:1, 시 106:35, 렘 12:16), 본받다(신 18:9), 연습하다(사 2:4, 미 4:3), 교훈을 받다(사 29:24), 익숙하다(대상 5:18, 아3:8), 가르치다(신 4:5, 렘 2:33, 시 25:4), 교훈하다(시 71:17), 명령하다(신 4:14), 길들이다(호 10:11).
    [명] 배움(사 26:9), 스승(시 119:99).








  • 성경의 5대 제국

    성경과 5대제국”은 앗수르, 바벨론, 페르시아, 헬라, 로마라는 이스라엘에 영향을 끼친 강대국을 인문학적인 배경 안에서 역사, 지리, 인물, 문화 등으로 인간의 역사를 주관하시는 하나님을 조명하고 있다.
    서로 경쟁관계에 있는 5대제국의 왕을 들어 하나님은 북이스라엘과 유다왕국을 심판하셨다.
    앗수르는 북이스라엘을, 바벨론의 느부갓네살은 유다를, 페르시아의 고레스는 바벨론을 점령하고 바벨론의 포로를 귀환시키는 역사적 사건 등을 통해 인간의 역사를 주관하시는 하나님을 나타내고 있다.

    성경과 5대제국(앗수르, 바벨론, 페르시아. 헬라, 로마)

    산업혁명 전까지 500년간 상 아시아의 대주였던 앗수르가 천박한 땅에서 비록 관개수로를 이용한 농사를 했다고는 하지만 어떻게 강대국이 되었는지는 미스터리 하지만 요나서에서 언급하고 있는 ‘니느웨(니네배)’를 통해 앗수르가 근동지역의 패권을 쥐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로마의 지성 키케로가 극찬한 역사의 아버지 ‘헤로로토스’는 페르시아와 그리스의 전쟁을 기록한 “역사”라는 책에서 앗수르의 존재를 희미하게 언급하고 있는데 앗수르는 처음은 작은 소도시였으나 동으로는 인도, 서로는 애급, 북으로 러시아, 남으로 아라비아 펠릭스까지 3,200km에 달하는 소아시아와 초원의 사막을 장악한 제국주의로 발전했지만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말았지만 1846년 영국의 고고학자 ‘레이어드’에 의해 세상에 모습이 나타나게 되었고 발굴된 앗수르의 유적들은 프랑스 루브르 박물관에 성경 내용 그 자체로 전시되어있다.

    1. 요나(B. C. 8c)와 앗수르와의 관계

    4장밖에 안 돼는 요나서에 언급된 니느웨는 모든 민족을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계획을 나타내고 있는데 우상에 빠진 북이스라엘에게 제국주의라는 거대한 앗수르를 통해 북이스라엘을 교훈하고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계획을 알지 못하는 요나는 하나님을 원망하고 불순종(욘 1:2; 3:1~2)하지만 하나님은 죄 많은 인간의 회개를 받으시고 구원(욘 3:9,10)하시며 하나님을 아시는 지식을 모르는 불쌍한 사람과 가축들까지 아끼신다는 것을 요나서는 기록(욘 4:11)하고 있고 바울의 사도됨과 예수그리스도의 대위임령(마 12:41)을 거룩한 제사장나라의 시민이 가야할 길과 회개를 통한 구원의 메시지를 담고 있다.

    앗수르라는 제국은 구원의 메시지를 순종하지 않음으로 야망으로 인해 150년 후 나홈 선지자가 선포한 것과 같이 멸망의 길에 들어갔다.

    열왕기는 북이스라엘과 남 유다의 분열, 역대기는 다윗과 남 유다의 역사와 북이스라엘이 200년간 7번의 쿠데타로 19명의 왕이 난립하는 피 비린내 나는 역사를 기록하며 다윗의 혈통들은 여보라함 같은 악한 왕들로 하나님의 계획과는 무관한 삶을 살았다고 기록하고 있다(왕하 13:1~2; 13: 10~11; 14:23~24).

    열왕기는 이렇게 선민이라고 자부한 북이스라엘은 15째 왕 ‘살룸(B. C.752)'을 죽이고 16번째 왕이된 ’므나헴(B. C. 752~742)'이 앗수르에 조공을 바치기 위해 백성의 돈을 강탈(왕하 15: 19~20)했지만 그러함에도 북이스라엘의 온 땅을 점령한 앗수르는 백성을 잡아갔고 마지막 19대 왕인 호세아(B. C. 732~722) 때 앗수르에 의해 이스라엘은 멸망하고 만다.

    예언서는 19명의 왕들에 의해 쿠데타를 일으키며 마지막을 향해 달리는 북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진노와 선지자인 엘리야, 엘리사, 아모스, 호세아를 통한 구원의 계획을 기록하고 있다. 엘리야의 능력을 두 배나 간구한 엘리사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지만 북이스라엘은 죄악의 길에서 나오지 않자 아모스 선지자를 하나님께서 보내시어 요아스의 아들 여로보암에게 회개를 촉구(암 1:1)하셨고 우상을 섬기며 하나님을 멀리하는 북이스라엘에는 호세아(호1:1)를 보내시고 남 유다에는 이사야와 미가 선지자를 보내시는 사랑에도 불구하고 북이스라엘과 남 유다는 돌아오지 않았다.

    그 결과는 앗수르가 아닌 바벨론에게 남 유다는 멸망당했다. 나훔서와 이사야서에는 B. C.609년경에 앗수르가 멸망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왕하 19:35~37; 사 37:36~38; 나 1:12; 나 3: 18~19). 앗수르는 수도 니느웨가 B. C. 612년 바벨론에 함락되어 제국주의를 표방하며 주변 국가를 탄압하던 죄의 대가를 받고 흔적 없이 사라져 버린 국가가 되었다. 다윗이 민족국가를 유지하며 하나님께서 주신 경계를 넘지 않은 것은 이미 하나님께서 태초부터 거주의 경계를 만드시고 고유한 민족들을 만드신 분이라는 사실을 앗수르 제국의 멸망을 통해 알 수 있었다.

    <3> 이데올로기 경영의 바벨론 제국과 율법 경영의 하나님 (예레미야, 예레미야 애가, 다니엘서, 에스겔, 하박국, 스바냐, 열왕기하, 역대하)

    하나님의 사자에 의해 18만 5 천명이 죽어 위기를 맞은 앗수르와 남유다 히스기야왕의 기도를 들으시고 생명을 15년 연장한 사건(사 38: 3~5)은 동일선상에서 바벨론과 남 유다의 관계를 나타내고 있다(사 39:1,2).

    앗수르에 보낼 공물이 없어 성전과 왕궁의 금을 긁어모았던 초라해진 남 유다가 하나님께서 보내신 사자에 의해 앗수르가 폐했다는 소식은 제국을 꿈꾸고 있던 바벨론에게는 충격이었기 때문에 히스기야의 생명연장 소식을 들은 바벨론은 인사를 핑계로 특사를 보내 염탐을 계획했는데 히스기야는 하나님의 은혜를 간증한 것이 아니라 무기고와 곳간을 보여주는 실수를 저지르게 되는데 그런 히스기야의 어리석음을 보고 바벨론은 위기의 앗수르를 치고 남유다와 애급을 점령할 계획을 세운다.

    히기스기야 자신은 15년의 생명을 연장 받았지만 자손들 중 몇은 치욕스럽게 바벨론의 환관이 될 것이라는 이사야의 고뇌(사 39:3~8)에도 불구하고 히스기야의 뒤를 이은 므낫세가 55년간의 통치 기간 동안 산당을 세우고 우상 섬기는 악행을 저질러 요시야 왕이 이룬 치적에도 불구하고 므낫세로 인해 남 유다를 멸망을 하시겠다고 하나님은 이사야에게 말씀하신다(왕하 23:25~26; 대하 33: 11~13).

    요시야는 다윗의 길을 따른 순종의 왕이었지만 애급과의 전투에서 사망하자 애급은 여호야김을 왕으로 세우고 왕의 자리에 있던 여호아 하스를 애굽으로 끌고 가 죽이고 만다.

    앗수르에 조공을 하던 요시야의 아들 여호야김이 바벨론에 붙었다 앗수르에 붙었다를 반복하자 바벨론은 아람과 모압과 암몬과 동맹을 결성하여 먼저 애급을 치고 므낫세에게 멸망을 예언한 것처럼 유다는 점령( 왕하 24: 1~4, 7)당하는데 다니엘과 세 친구의 이야기를 ‘애급’과 ‘바벨론’이 벌인 “갈그미스 전투”를 모티브로 하여 바벨론과 유다의 역사를 다니엘서는 언급하고 있다.

    바벨론의 왕 ‘느브갓네살(대하 36:6~7, 10)’이 등장하는 “1 차 바벨론 포로” 이야기(단 1:3~4)는 남 유다를 경영하고자 하는 제국주의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2 차 바벨론 포로” 이야기에 등장하는 에스겔을 통해 학개, 스가랴, 에스라, 느헤미야 같은 인물을 등장 시킨 이유는 혼혈주의로 인해 멸망한 앗수르와 다르게 바벨론은 이데올로기 교육을 위해 귀족과 인재를 포로로 하여 대영제국이나 일제가 행한 제국경영의 모델이 되었다.

    성경을 통한 다니엘의 꿈 해몽(단 2:19~23; 2:31~35)은 요셉이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지혜와 연결(창 40:8)되어 왕 중에 왕이신 하나님의 주권을 나타내고 있다(단 2:47; 6:26~27).

    국가가 환란 중에 있을 때 예레미야처럼 같이 고통을 받으며 눈물로 국가를 위해 기도하는 사람(렘 18:20, 20:2, 7~9, 37:15~16, 38:6)과 거짓 예언자 하나냐의 등장(렘 28:1~4)은 지금의 우리나라 현실에 교훈을 주고 있는 상황 같다.

    하나님께 거역하는 선지자는 하나냐 처럼 죽음을 당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렘 28:16~17).

    바벨론의 제국경영은 인간을 대상으로 하는 이데올로기 교육이지만 하나님의 세계 경영은 율법 교육으로 인간을 인간답게 하기 위해 노력하시는 하나님의 계호기 앞에서 인간의 욕심은 멸망을 당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깨달아 우리는 도전 받아야 한다.

    <4> 페르시아 제국 (다니엘, 학개, 스가랴, 에스더, 에스라, 느헤미야, 말라기, 역대하 등)과 인간이 개수한 병사의 숫자

    바벨론으로 1~3차에 걸쳐 포로로 잡혀갔던 남유다 백성들이 페르시아에 의해 강대국 바벨론이 망하는 것과 페르시아에 의해 1~3차에 걸쳐 이스라엘로 귀환하는 것을 성경은 기록하고 있다.

    바벨론의 이데올로기 경영에 굴하지 않고 하나님의 율법 경영의 큰 뜻을 펼친 행정가이며 선지자 다니엘을 기록한 다니엘서, 1차 귀환 때 성전 건축을 방해하는 세력에 의해 16년간 성전 건축이 중단되었을 때 학개(학 1:2)와 스가랴(슥 1:1)를 기록한 3권의 성경은 페르시아와 관련되어 있고 1,2차 포로 귀환 사이에 벌어진 이스라엘 말살 정책에서 민족을 구한 페르시아 왕비 에스더를 등장 시킨 에스더서(에 1:1), 2차 포로 귀환을 지도한 학사 에스라(스 1:1), 3차 포로 귀환의 지도자 총독 느헤미야 이야기(느 1:1), 페르시아에서 파견된 총독 이야기(말 1:8)를 다룬 말라기까지 주변 강대국 사이에서 신음하는 백성을 선지자를 세워 경영하시는 하나님의 놀라운 계획 앞에선 전율할 수밖에 없다.

    남유다 백성을 포로로 잡고 이데올로기 경영을 한 애굽의 바로 왕과 남유다 백성을 귀환 시킨 페르시아의 첫 번째 왕 고레스(키루스 2세)는 구약의 두 수레바퀴와 같이 사건의 중심이 되고 있는 왕이다.

    하나님께서 바로 왕의 마음은 강퍅(출 9:12)하게 하셨고 페르시아 왕 고레스의 마음은 감동시키셨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다(스 1:1).

    창세기에 나오는 바로왕은 요셉과 요셉이 믿는 하나님의 영에 감동된 왕으로 요셉을 총리로 세우고 애굽의 백성과 이스라엘 백성이 요셉을 칭송하게 명령하고 자기의 인장 반지를 요셉의 손가락에 끼우고 애굽의 총리로 세운 왕(창 41: 38~43)이지만 출애굽기에 나오는 바로왕은 모세에게 하나님을 알지 못한다고 기록(출 5:2)되어 있는 것과 같이 서로 다른 왕인 것을 알 수 있다.

    페르시아의 왕 고레스는 모든 세계를 경영하시는 분이 하나님이시라고 찬양하며 유다 예루살렘에 성전을 건축하라고 조서를 내리고 하나님의 성전을 위해 예물을 드리고 남유다 포로들을 귀환 시킨다(스 1:1~4).

    이렇듯 구약의 성경에 주변 강대국의 왕들을 등장 시키고 있는 성경의 의도를 우리는 환란 중에 하나님을 잊지 않고 예배드린 선지자들의 믿음을 우리는 기억해야 할 것이다.

    다니엘서( 6:7~8)와 에스더서( 1:17~18)에서 메대(메디아)와 바사(페르시아)라는 페르시아의 두 도시 국가가 등장하고 있는 데 통일 전 페르시아는 여러 개의 도시 국가로 구성되어져 있었는데 그리스에게 최초로 조공을 받고 있던 리디아(터키)의 크로이소스 왕을 2주 만에 굴복시켜 페르시아가 동방의 부를 대표하게 만든 왕 고레스는 탄생과 성장, 왕이 되기까지의 신화를 간직한 왕으로 페르시아 역사에 기록되어 있다.

    리디아의 왕 크로이소스는 많은 이야기를 간직하고 있는데 정복자와 패배자의 관계를 우호 관계로 발전하기까지 아테네의 솔론이라는 현자를 등장 시켜 페르시아의 고레스 왕이 부를 축적한 과정을 알게 되었을 땐 성경을 읽는 재미와 다른 지혜를 얻게 된다.

    페르시아는 리디아라는 도시 국가를 통해 그리스의 철학과 학문을 접하게 되어 앗수르의 혼혈주의나 바벨론의 인질 교육 정책과는 다른 관용의 정책을 펼치게 되는 계기를 만들었다.

      1. 예레미야와 고레스 왕 (스 1;1)

    하나님께서 예레미야의 입을 통하여 고레스 왕의 마음을 감동시키셨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다(스 1:1).

    고레스의 칙령에도 불구하고 자발적으로 고국 이스라엘로 돌아가지 않고 남은 자들은 후에 디아스포라 유대인이 되어 매년 예루살렘을 방문하여 성전에 십일조를 바치고 30일 동안 예루살렘에 머물며 소비를 촉진 시켜 예루살렘을 세계적인 도시로 만드는 데 일조를 하고 있는데 유다지파와 베냐민 지파였던 남유다 백성은 다른 이방인과 구별되어 유대인으로 불리고 있는데 애굽에서 아브라함의 자손으로 히브리인으로 불린 이스라엘은 북이스라엘과 남유다로 나뉘며 북이스라엘은 혼혈족 사마리아인으로 바벨론의 남유다 백성은 유대인으로 명칭까지 바뀌게 된 역사를 페르시아와 이스라엘 관계 속에서 알게 되었다.

    페르시아의 왕 로레스가 29년간 통치하고 8년간 페르시아를 통치하던 캄비세스는 이집트를 점령한 왕이며 폭군으로 기록되어 있고 3대 왕 디리오는 장사꾼으로 기록되어 있다.

    1차포로 귀환 때 사마리아인의 방해로 기초 공사 도중 중단 되었던 성전 건축은 페르시아 2대 왕 다리오 때 비로소 완공 되는 데 이때 등장하는 사람이 다리오 왕과 어릴 적 친구인 유대인 총독 스룹바벨인데 그의 하나님을 향한 믿음과 세상에서 믿음의 빛을 낸 결과였다.

    성전 방해를 하던 사마리아인들의 적극적인 도움으로 마침 솔로몬의 성전은 작지만 본 모습을 드러내는데 신약의 헤롯 왕 때 건축된 성전과 다른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

    2. 에스더 이야기

    페르시아를 이야기 할 때 4대왕 아하 수에로의 왕비 에스더(에 1:1, 10~12, 15~16)를 빼 놀 수 없는데 술에 취한 왕은 왕비 와스디의 나체를 잔치에 참석한 자들에게 보여주려 했기 때문에 왕후 와스디는 거절했다고 유대 고대사 “요세푸스 Ⅱ”에 기록되었다고 한다.

    이일로 인해 왕궁에서 쫓겨 난 왕비를 그리워하다 아리따운 처녀를 후궁으로 맞이하는 데 바로 에스더였다.

    유대에 의해 몰살당한 아멜렉의 후손 하만의 원한과 모르드개의 암투(에 3:13~15)에서 “죽으면 죽으리라”는 말로 왕 앞에서 지혜로 민족을 구한 에스더의 사건은 12월 14~15일 이틀간의 부림 절이라는 유대인의 명절이 생기게 된 계기가 되었다(에 9:20~22).

      3. 에스라 선지자와 2차 포로 귀환(B. C.458)

    아론의 16대 후손인 에스라는 1차 포로 귀환(B. C.537년) 79년 뒤 2차 포로 귀환(B.C.458) 때의 제사장(스 7:1)으로 여호와의 율법을 연구하고 준행하며 율례와 규례를 이스라엘에게 가르쳤으며 페르시아의 학자로 존경 받았다(스 7:6,10).

    그렇기 때문에 예루살렘으로 귀환하겠다는 계획에 페르시아왕 아닥스는 직접 공문을 여호와를 신실하게 믿는 에스라에게 내리고 많은 원조를 아끼지 않았던 것이었다(스 7:12~26).

    애굽의 바로 왕이 애굽의 총리 요셉에게 전권을 준 것과 같이 페르시아 궁중 창고의 모든 재물을 예루살렘 성전 건축을 위해 마음껏 쓰라고 공문을 주었고 재판권의 시작이 된 산헤드린 공회의 재판권까지 아닥스는 에스라에게 허락하였다.

    4. 페르시아 총독 느헤미야와 3차 포로 귀환 (B. C.445)

    에스라에 조서를 내려 예루살렘 성전을 재건한 아닥사스 왕 20년 후 페르시아의 총독 느헤미야는 등장한다(느 1:1~3).

    페르시아의 높은 관직에 올라 환란과 능욕 속에 있는 이스라엘을 구하기 위해 무너진 성벽을 재건하겠다는 느헤미야의 꿈은 아닥스다 왕에게 충성과 큰 제국을 통솔한 행정력이라는 신뢰로 페르시아 왕 앞에서 ‘수심’이라는 패(느 2:1,5~8)를 내고 52일 만에 예루살렘 성벽 재건을 마치게 되었다(느 6:15).

    느헤미야는 70년이라는 생활을 포로 생활이 아닌 훈련이라고 가르쳤고 귀환해서 그 하나하나의 능력을 바탕으로 하나님께 쓰임 받기를 이스라엘 백성에 가르쳤기 때문에 유대 백성은 귀환한 후 한 동안 우상에 빠지지 않고 살 수 있었다.

    페르시아는 군인들의 숫자에 자신감을 보였지만 하나님은 레위기를 통해 숫자가 아닌 하나님의 율법을 다 지켜 행하면 각 나라와 민족의 경제적 안정을 주신다고 약속하셨다. 페르시아의 멸망은 경제 수치보다는 한 사람, 한 사람의 능력과 한 영혼이 천하보다 귀하다는 사실을 일깨워주는 이야기이다.

    <4> 헬라 제국(아모스, 이사야, 예레미야, 에스겔, 다니엘, 신구약 중간사)과 로마 제국(신약 전체)

    구약의 끝인 말라기(말 4:4~6)와 신약의 처음인 마태복음(마 1:1) 사이에는 400년이라는 세월이 숨어 있는 것은 70년의 포로 생활을 마치고 돌아온 유대 백성이 하나님과의 관계가 냉소적으로 변했기 때문에 하나님은 침묵하셨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늘 하나님은 사랑하신다고 하시지만 우리는 어떻게 우리를 사랑하시는지를 묻고 확인하려한다(말 1:2).

    아브라함부터 1,600년이라는 긴 세월을 늘 사랑하셨는데도.. 하나님은 믿음에 대한 불순종이라는 반응에도 불구하고 드디어 400년 만에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믿는 자는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시려고 독생자 예수로 오시기로 결심하신다(요 3:16).

    이러한 신구약 중간 사에 다니엘의 예언(단 7:6; 8: 3~8; 21~22: 11:3)처럼 알렉산더라는 헬라 제국의 영웅이 나타나 그리스 철학과 동방 오리엔트 문명을 합친 헬라 문화를 꽃 피우는데 헬라 문화의 주인인 마케도니아는 아테나와 스파르타라는 강력한 군사력 이전에는 페르시아의 속국이었지만 알렉산더 왕의 아버지 필립포스 2세가 마케도니아를 강력한 군가로 세울 수 있었던 결정적인 요인은 크레니데스라는 곳에서 금광을 발견했기 때문인데 그곳을 “필립포스”라고 명명한 것이 결코 우연이 아닌 것은 바울이 제 2차 전도 여행 중 “마게도냐로 건너와서 우리를 도우라.”는 환상을 듣고 아시아의 경계를 넘어 유럽의 첫 교회를 그곳에 세웠기 때문이다(행 16:6~12).

    이 때 그 유명한 성경의 구절 “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받으리라”(행 16:31)는 말씀을 기록하는 데 바울이 옥에 갇힌 것도 옥문이 열려 바울이 탈출한 줄 알고 자결하려한 간수장의 이야기와 귀신 들렸다가 나은 여종, 자주 장수 루디아의 이야기가 우연일 수 없는 것은 어쩜 “빌립보 도시”가 세워진 것에서 찾을 수 있을 지도 모르겠다.

    1. 알렉산더와 두로의 멸망을 예언한 성경

    “플루타르크 영웅전”을 쓴 스승 아리스토텔레스와 알렉산더와는 많은 우화가 있는데 이 영웅전이 집필되어 세상에 나오는 것을 알렉산더가 두려워했던 것은 심오한 철학과 지식의 힘을 믿고 국가를 통치하려는 자신의 야욕에 많은 사람들이 그 책을 보고 저항할 것을 두려워했기 때문일 것이다.

    에스겔 28장 2절에 예언되어 있는 것 같이 강력한 해양 도시 두로 왕이 아무리 신같이 굴어도 사람일 뿐이라는 것(겔 26:4; 27:2~8)이 예언되어 있는 데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 있던 당시의 유대인들은 에스겔의 예언을 믿을 수 없었는데 배를 만들고 자색 염색 산업으로 엄청난 부를 누리며 사치스럽던 두로가 쉽게 망할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을 것이지만 바벨론과 페르시아를 들어 쓰셨던 하나님께서 알렉산더를 들어 두로 성을 불타게 하여 그 교만이 땅에 떨어지게 만들었다(암 1:9~10; 사 23: 1~3).

    두로가 멸망한 이유는 이스라엘 사람들을 잡아다가 에돔에 노예로 팔아버렸기 때문에 하나님은 진노하셨고 무역으로 큰 부자가 된 두로의 교만은 결국 황무해지고 슬퍼하며 울게 될 것이라는 이사야 선지자의 예언처럼 되고 말았다.

    예수께서 이곳에 들려 귀신들린 여인의 딸을 고쳐주셨고 이후 두로는 로마의 속국이 되었고 1984년 세계문화유산에 등록되었다(마 15:21~28).

    페르시아의 다리오 왕이 알렉산더를 피해 도망가다 부하들에 의해 살해당하며 페르시아는 멸망하고 알렉산더는 파죽지세로 동방으로 원정을 떠났고 정복한 지역에 그리스 문화와 헬라문화를 합하여 오리엔트 문화를 퍼트렸지만 인도의 인더스 지역에서 원인 모를 병에 걸려 고국으로 돌아오던 중 B.C.323년에 32세의 나이로 요절했다.

    2. 하나님의 세계경영을 실천할 때

    헬라 제국 경영의 키워드는 알렉산더가 그리스의 철학과 동방의 문화를 융합해 오리엔트 문화를 만들어 보급하며 제국을 유지하려 했기 때문에 ‘융합’이라고 할 수 있다.

    앗수르의 계급을 전제로 한 강제 혼혈 방식이나 헬라의 페르시아 여인과 마케도니아 군인들을 결혼 시켜 민족과 문화를 융합하려는 수평적 세계동포주의(cosmopolitanism)라는 인간의 시도는 성공하지 못했지만 각 민족의 균형과 조화는 모든 만물을 종류대고 창조하시고 개인과 민족에게 각각 거주의 경계를 지정해주신 제사장 나라 적 융합으로 완성될 수 있는데 ‘각기 종류대로’‘수평적으로’, ‘하나님 앞으로’ 동질적 연대를 형성할 때 가능할 것이다.

    이러한 하나님의 세계 경영 방식은 바울이 헬라인은 헬라인에게 유대인은 유대인에 맞게 복음을 전한 것과 일치되는 것이다. 천하보다 귀중한 한 개인과 모든 민족에게 속하되 섞일 수 없는 유일한 한 민족이라고 정의할 수 있는데 각 민족은 독특한 하나님의 창조적 작품이라는 것을 인식할 때 독특함을 인정하고 서로 존중하며 함께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을 순혈 주의가 무너지고 있는 지금이 하나님의 세계경영으로 돌아설 때라는 것을 헬레 문화의 멸망을 보며 알게 되었다.

    <5> 로마 제국 (마태복음~요한계시록)

    신약 성경의 근간은 로마 제국과 연관성 속에 있는데 예수가 태어나시기 전에 로마 황제의 명령에 의해 마리아와 요셉이 베들레헴으로 호적 하러 간 것과 스데반이 돌에 맞아 죽은 것 같이 유대의 사형 법은 돌로 쳐 죽이는 것이지만 예수님께서 죽으신 십자가 처형도 로마의 사형 법이었다(마 27:27~31).

    이러한 예수께서 로마의 속국인 유대의 왕으로 오신다는 소식은 온 예루살렘에 소동을 일으킬 사건 중의 사건이 되었고 예루살렘에 파견된 분봉 왕 헤롯과 로마 제국의 총독에 앞서 동방에서 온 박사들이 유대왕의 탄생을 알고 찾고 있다는 사건은 헤롯과 예루살렘이 긴장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1. 로마 제국의 출현과 가이사(카이사르)

    아모스, 호세아, 이사야, 미가와 같은 선지자들이 왕성하게 유대 땅에서 활동할 때 로마의 시조 로물루스와 레무스 쌍둥이 형제는 늑대의 젖을 먹고 자랐다는 신화가 있다. 왕정과 공화정을 거친 로마는 카르타고와 3차에 걸친 120년의 포에니 전쟁을 치르며 급부상한 나라로 율리우스 카이사르(쥴리어스 시저)는 오랜 전통의 애굽이나 고대 근동을 모두 점령하고 지중해의 패권을 잡았다.

    종신 독재 관이었던 가이사르는 황제의 길을 열고 그의 양아들 옥타비아누스는 로마의 초대 황제로 등극하는데 로마의 세금을 누구에게 바쳐야 하느냐는 바리새인의 질문(마 22:15~22)에 동전에 그려져 있는 가이사를 보시며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에게”라고 말씀하시며 미묘한 정치적, 종교적 문제를 해결했는데 가이사는 자신의 얼굴을 동전에 새겨 로마 제국 전체에 자신을 알렸다.

    거대한 로마 제국을 경영하기 위해 공화정에 반대하고 황제 체제로 국가를 경영하려는 계획에 반기를 든 원로원이 가이사를 암살했지만 더 이상 거대해진 제국을 시민과 원로원의 협의체인 공화정의 힘으로 다스릴 수 없게 되자 자신들이 암살한 가이사가 마련한 계획에 따라 가이사의 양자로 삼은 옥타비아누스를 황제로 등극 시켰는데 그만큼 가이사는 로마 제국에 중요한 인물인 것이다.

    2. 성경에 등장하는 헤롯왕은 누구인가?

    성경에 등장하는 중요한 또한 사람은 헤롯으로 재위 15년째에 46년 동안 예루살렘 성전을 건축하고 주변을 성벽으로 둘러쌓는 어마어마한 공사를 벌이고 A. D.70년 로마군에 의해 흔적도 없이 사라질 때까지 성전 장식에 공을 들인 로마의 분봉 왕 헤롯을 빼 놓을 수 없는데 헤롯의 아버지 “안티파터”는 유대의 하스몬 왕조를 B. C.63년에 로마에 넘기고 율리우스 카이사르와 폼페이우스가 내전을 할 때 카이사르 편에 서서 승리하고 유대 총독으로 부임했고 그의 아들 헤롯에게 유대를 다스리게 했다(B. C.37~4년까지).

    신약 성경에 나오는 헤롯은 한 사람이 아니라 헤롯 가문의 왕들을 지칭하는 것이다.

    아기의 목숨을 찾던 자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도 이스라엘 땅에 가기를 두려워하는 요셉의 이야기(마 2:20)에 등장하는 헤롯은 유대 예루살렘과 사마리아와 에돔 지역을 분할 받은 헤롯 아켈라오 왕이 등장하는데 요셉은 아켈라오의 눈을 피해 유대가 아닌 나사렛으로 갔다고 마태복음 2장 22절은 기록하고 있는 데 그만큼 아켈라오가 폭력적인 정치를 했기 때문인데 A. D.6년에 유대와 사마리아 귀족들이 로마 황제에게 숙청해달라고 요청해서 왕위에서 쫓겨났고 이 후 유대 지역은 로마 총독에 의해 통치를 받게 되었다.

    예수님께서 “저 여우”(눅 13:32)라고 부른 헤롯은 헤롯 빌립 1세의 형인 헤롯 안티파스로 자신의 동생의 아내 헤로디아와 결혼하였고 세례 요한이 안티파스에게 “그 여자를 차지한 것은 옳지 않다”라고 하자 세례 요한을 죽였다(마 14:3~4)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다.

    예수님께서 여우라고 말씀하신 헤롯 안티파스는 예수님의 공생애 3년에 등장하는데 갈릴리와 베뢰아 지방의 분봉 왕으로 세례 요한을 죽이고 빌라도와는 원수지간이었지만 예수를 갈릴리 사람이라고 심문할 때는 서로 친구가 되었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다(눅 23:12).

    예수님께서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 하느냐?”라고 물으신 곳은 헤롯 빌립 2세가 로마 황제와 자신의 이름을 따서 건립한 지역인 가이사랴 빌립보(마 16:13) 였고 사도행전 12장에 등장하는 헤롯 아그리파 1세는 사도 야고보를 처형한 왕으로 하나님께 대항하다 벌레에 먹혀 죽는 벌을 받았다(행 12:21~23).

    헤롯 가문의 마지막 왕인 아그리파 1세의 아들 아그리파 2세는 사도행전 26장 24절로 32절에 등장하는데 로마 군사에 의해 처참하게 무너지는 예루살렘을 뒤로하고 로마에서 죽었다.

    3. 로마의 2대 황제 디베료(티베리우스)와 총독 본디오 빌라도(폰티우스 필라투스)

    성경에 나오는 디베료는 A. D.14년 예수님의 청소년 시기부터 십자가 처형과 사도행전의 초기까지 37년 간 폭정을 한 왕이며 빌라도는 디베료가 황제가 된 지 15년째에 유대의 총독으로 부임하였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다(눅 3;1).

    디베뇨는 가이사르의 양아들 옥타비아누스가 혈연에 연연했는데 유부녀인 리비아와 결혼하기 전 이미 3세였던 디베뇨는 어머니가 옥타비아누스와 결혼하자 친부 드루수스도 밑에서 성장했고 생부가 죽자 의붓아버지인 옥타비아누스와 황궁에서 살았다.

    혈연을 중시하는 옥타비우스는 황제의 자리를 친족에게 물려주기 위해 첫 번째 부인과의 사이에서 난 유일한 혈육인 딸을 친구이자 동료인 아그리파와 결혼 시키고 외손자를 후계자로 삼으려 했지만 모두 죽자 디베료에게 황제의 자리를 물려 줄 수밖에 없었는데 이미 가정을 이루고 행복하게 살고 있던 디베료에게 아그리파와 살고 있던 자신의 딸과 결혼하는 조건을 달았고 디베뇨가 황제에 오르자 옥타비아누스는 딸 율리아를 간통죄를 빌미로 유배형을 내렸다.

    디베뇨는 황제가 되었지만 강제 이혼한 첫 부인을 평생 잊지 못하고 다시는 결혼하지 않으며 의붓아버지 밑에서 외로운 삶을 살았기 때문에 아마 “테러블 티베이우스”라는 폭군으로 성장했는지 모르겠다.

    디베뇨는 카프리 섬에서 운둔하며 문서 정치를 10년간 했고 이때 유대로 파견한 총독이 바로 “본디오 빌라도”였는데 헤롯이라는 유대 분봉 왕과 예루살렘 성전을 장악하고 있는 대제사장, 바리새파, 사두개파, 유대의 고위급인 서기관들 틈에서 빌라도는 카프리 섬에 있는 폭군 디베뇨에게 민란이 발생했다는 소식이 들어갈 것이라는 강박감으로 두려워했는데 이러한 상황을 잘 아는 대제사장 세력은 민란을 빌미로 교묘하게 예수의 처형을 빌라도에게 요구한 것이다.

    유대인의 유월절에 죄수 한 명 씩을 놓아주는 전례는 소동이 빈번했기 때문이라고 요세푸스의 신화는 기록하고 있다. 유대의 정치범을 한 명 놓아줌으로 로마 제국에 대한 불만을 감소시키려는 의도였는데 유대의 명절이 로마 제국에는 비상 사태였던 것이다.

    빌라도가 노련한 정치가이며 행정가는 것을 알 수 있는데 빌라도는 이러한 유대의 풍습을 이용해 예수를 특사로 풀어주려 했지만 오히려 대제사장들은 유월절을 이용해 민란이 날것이라고 겁박하고 예수를 처형하라고 요구한다(마 27:15~17, 21).

    분명 돌로 쳐서 죽이는 유대의 전통 처형 방식이 있는데도 대제사장과 무리들은 로마의 처형 방식인 십자가 처형을 고집한 것은 예수님의 죽음을 로마에 전가시키려는 아론 대제사장의 후손인 유대 족속의 비겁한 자기 부인이었다(마 27:24~26).

    비로소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마태복음 5장 17절로 20절에서 말씀하신 천국의 가르침처럼 율법이나 선지자를 폐하러 오심이 아니라 완성 시키셨다(마 26:56) 예언자 미가의 예언을 이루시기 위해 마구간에서 탄생(마 2:5~6)하셨고 호세아 선지자의 예언을 이루시기 위해 애굽에서 돌아오셨다(마 2;15).

    예레미야의 예언처럼 헤롯이 2살 아래 남자 아이들을 죽였는데 율법과 선지자를 통해 말씀하신 것은 과거, 현재, 미래에도 중요한 하나님의 말씀인 것이다. 로마와 예수님과 바울과 같은 사도의 행적에는 로마 제국과 다신교를 믿는 디아스포라 유대인 등과 같이 예수님과 연관된 단어들이 자주 등장한다.

    페르시아에서 유대로 귀환한 후 출범한 산헤드린 공회는 A. D.6년 로마로부터 유대의 최고 대표기구로 공식적으로 인정받는다. 예수님의 시신을 총독 빌라도에게 요구한 아리마대 사람 요셉이 유대인의 재판권을 담당한 권력 기관인 산헤드린 공회의 공회원이었다는 사실도 결코 우연은 아닐 것이다(마 27:1~2).

    성경과 5대 제국이라는 거대한 파노라마의 끝은 로마 제국이 A. D.313년에 기독교를 공인하고 A. D.392년 로마 황제 테오도시우스에 의해 기독교가 국교 화되었고 A. D.476년 로마의 멸망으로 끝을 맺는다.

    로마가 모든 분야에서 부르짖은 것은 “관용”이었지만 노예들을 철저하게 배제한 귀족 중심의 관용이었지만 “하나님의 세계경영은 십자가의 관용”이며 우리의 죄를 대속하시기 위해 400년의 침묵을 깨고 이 땅에 오신 것이 바로 관용을 완성하신 하나님의 사역인 것이다.

    결코 기독교의 십자가의 관용은 국가에서 이념으로 내세우는 종교가 아니며 자신들의 영달을 위해 하나님의 이름을 거론하는 그런 값없는 이름이 아니다.

    우리는 자신을 천하보다 소중한 존재라는 것을 망각하고 애굽의 바로, 앗수르의 산헤립, 바벨론의 느부갓네살, 페르시아의 고레스, 헬라의 알렉산더, 로마의 옥타비아누스를 꿈꾸고 있는 것은 아닐 까 ?

    다윗이 그랬던 것처럼, 예수님이 그랬던 것처럼 한 사람이 천하보다 소중하다는 사실과 모든 민족이 제사장 나라의 사명을 감당해야 된다는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기 위해 나의 정체성을 찾고 가정과 민족과 조국을 통해 타인과 타민족, 내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기를 염원하며 “무릇 나는 내 죄과를 아오니 내 죄가 항상 내 앞에 있나이다.(시 51:3)라는 말씀을 기억하며 주님이 가신 십자가 길을 걸어 갈수 있는 권능을 달라고 간구해 본다.


    1. 앗수르 제국 / BC 900 - BC 612


    BC 900년경, 앗수르(아시리아)제국이 고대 근동의 패권을 장악했다.
    앗수르는 BC 722년에 북이스라엘 왕국을 정복하여 백성들을 곳곳에 흩어버리는 한편,
    인종 혼합 정책을 써서 팔레스타인에 남아 있던 유대인들과 이방인들을 통혼시켜 ‘사마리아인’이라는 혼혈족을 만들었다.
    그래서 예수님 당시 순수 혈통을 지녔던 유대인들이 사마리아 사람들을 몹시도 경멸했던 것이다.
    근동의 패자로서 앗수르의 세력은 BC 612년까지만 지속되었다.

    2. 바벨론 제국 / BC 612 - BC 536


    신흥 제국 바벨론이 BC 612년에서 BC 536년까지 새로운 패자로 세상을 지배했기 때문이다.
    바벨론의 느부갓네살 왕은 BC 606년에 남유다 왕국을 정복했고,
    BC 586년에 예루살렘 성전과 성벽을 완전히 파괴했다.
    그 후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간 다니엘이 느부갓네살 왕이 꾼 꿈을 해석했는데,
    왕이 본 거대한 신상의 금 머리는 바벨론제국의 느부갓네살 왕 자신이며, 가슴과 팔은 은이며(페르시아제국), 배와 넓적다리는 놋이요(그리스제국), 종아리는 철(로마제국)이었다(단 2:31-45).

    3. 페르시아 제국 / BC 536 -  BC 332


    다니엘이 예언한 대로 이후 바벨론은 BC 536년에 페르시아(바사)제국에 왕좌를 내어주게 되었다.
    페르시아는 BC 536년에서 BC 332년까지 존속했는데, 페르시아의 초대 왕 고레스는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갔던 유대인들을 놓아주어 고향으로 돌려보냈다.
    이에 유대인들은 고국으로 귀환하여 성전을 재건했고(이전보다는 작은 규모였다),
    서기관들이 하나님의 율법을 가르치고 해석하는 공식적인 집단으로서 직무를 수행하기 시작했다.
    구약이 끝날 무렵, 그들은 페르시아의 통치 아래 있었다.
    그러나 페르시아제국은 알렉산더가 이끄는 그리스(헬라) 군대에 의해 역사의 저편으로 사라지고 만다

    4. 헬라(그리스) 제국 /  BC 332 - BC 176


    그리스제국은 BC 332년에서 BC 176년까지 존속했는데, 알렉산더 대왕은 피정복 국가들에 그리스(헬라) 문명을 확산시켰다.​
    그래서 그리스도 당시에는 헬라어가 거의 세계적인 언어가 되었다(신약이 헬라어로 기록되었다는 사실은 잘 알고 있을 것이다).
    헬라어는 복음의 내용을 더욱 간결하고 정교하게 표현하는 데 일조했다.​
    그런데 그리스제국이 멸망할 무렵, 정확히 BC 176년에 레위 지파의 마카비(Maccabee) 일가가 봉기를 일으켜 유대인의 독립 시대를 수립했다.
    이때 하스모니안(Hasmonean)이라 불리는 일가친척들이 팔레스타인의 자치(自治)를 구현했지만, BC 63년 로마의 팔레스타인 정복으로 중단되었다.
    바로 이 독립 시기 동안 침묵기 대부분의 영적인 활동이 활발히 일어났다.

    5. 로마제국 / BC 63 - AD 500


    BC 63년에 폼페이 장군의 예루살렘 점령으로 시작된 로마의 팔레스타인 지배는 AD 500년까지 지속되었다.
    그리스도께서는 로마의 아우구스투스 황제가 치세할 당시에 태어나셨다.
    그리고 이때 아우구스투스 황제에게 팔레스타인의 통치권을 위임 받은 헤롯 대왕은 메시아가 탄생했다는 소식을 듣고 베들레헴의 남아(男兒)들을 무참히 학살했다.
    또한 그는 유대인들의 환심을 사기 위해, 그 옛날 스룹바벨 당시에 재건했던 예루살렘 성전을 확장하고 미화하는 프로젝트를 시행하기도 했다.
    로마제국은 여러 면에서 기독교 확장에 실질적인 도움을 주었다.
    로마가 강력한 군사력으로 이룩한 ‘로마의 평화’(Pax Romana)는 세상을 하나의 거대한 이웃으로 만들었다.
    만약 사도들이 1세기 정도 더 일찍 사역을 시작했더라면 국수주의의 장벽에 막혀 멀리 가지 못했을 것이다.
    로마의 도로 역시 사도들이 전도여행을 하는 데 용이하게 사용되었다.
    덕분에 예수님 당시 사람들은 하루 평균 50킬로미터에서 80킬로미터까지(이전에는 15킬로미터에서 30킬로미터가 고작이었는데) 걸어다닐 수 있게 되었다.​
    이 시기 동안에도 사람들은 보편적인 세계 언어로 헬라어를 사용했다.그러나 로마는 극심한 경제 불황에 시달렸다.
    백성들은 어림잡아 세 명에 두 명 꼴로 노예였고, 6천만에 달하는 노예들로 인해 사회 불안과 빈곤이 조장되었다.
    조세 관리들은 일자리를 보전하기 위해 가혹한 세금을 부과했을 뿐 아니라
    사욕을 채우기 위해 백성들을 쥐어짜 돈을 우려낼 대로 우려냈다.
    그런 식으로 백성들의 것을 갈취하기는 사제들도 마찬가지였다.
    바울이 로마서 1장에서 지적한 것처럼 로마 사회는 도덕적으로 타락의 가장 깊은 곳까지 내려가 있었고, 영적으로는 잡신(雜神) 숭배로 완전히 죽어 있었다.
    철학자들은 올림포스산이 거기 사는 모든 신들 때문에 너무 북적거린다고 비아냥거릴 정도였으니까.
    로마는 새로운 지역을 정복할 때마다 새로운 우상들을 들여왔고, 그나마 로마의 정신을 지탱하던 헬라 철학을 자기모순에 빠진 빈혈증 환자로 여겼다.
    한편 유대인들의 신앙은 유대인 반대파들의 틈바구니에 끼여 겉치레와 내분으로 변질되어 갔다.




    신관(神觀)

    신관에는 크게 두 가지로 말할 수 있는데 자연신관(自然神觀)초월신관(超越神觀)이 있다.
    자연신관은 우주 자연을 신으로 보는 견해이며 초월 신관은 우주를 초월하여 창조하고 지배하는 유일의 절대자로 보는 견해이다.

    ​기독교의 신관(神觀)

    ​1. 삼위일체 한분 하나님

    기독교가 믿는 하나님은 삼위 일체 한분 하나님이시다.
    성부 성자 성령 삼위 한분 하나님이시다.

    마태복음 3:16-17
    예수께서 세례를 받으시고 곧 물에서 올라오실 새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성령이 비둘기 같이 내려 자기 위에 임하심을 보시더니.
    하늘로부터 소리가 있어 말씀하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하시니라.

    위의 말씀에 성자 하나님은 세례를 받으시고 요단강에 계신다.
    그리고 성령은 비둘기 같이 임하신다.
    그리고 성부는 하늘에서 소리가 있어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고 하신다.

    삼위 일체란 말은 하나님은 셋 안에 하나이며 하나 안에 셋인 신비의 실체로 존대한다.
    그러기에 성부 하나님 성자 하나님 성령의 하나님 한분으로 계시면서 성자의 사역으로 성령의 사역으로 성부의 사역으로 역사 하셨다.

    삼위 일체라는 말은 신비의 수이기 때문에 초대 시대에 큰 논쟁이 되었다.
    초대 교회시대 신학자 데오도시어스는 성자와 성령은 하나님이 아니다.
    그리스도는 원래 하나님이 아니었다.
    그가 세례를 받을 때에 성령이 임하므로 하나님의 큰 아들로 삼았다.
    이유는 하나님은 시작이 없어야 하는데 그리스도는 시작이 있기에 하나님일 수 없다고 단일신 론을 주장하다가 교황 빅토리우스(VictoriusA.D.189년-199년)에게 이단으로 규명되고 추방되었다.
    그 이후 아르테몬(Artemon)은 성령을 받을 때 무한한 능력을 받았기 때문에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되었다고 주장했다가 아르테몬도 교황 제피리우스(Zephyrius A.D.199년-A.D.217년)에게 이단으로 규명되고 추방되었다.
    또한 사벨리우스는 삼위 일체를 태양으로 비유하여 성부는 태양과 같고 성자는 빛과 같으며 성령은 열과 같은 것처럼 삼위일체란 단일성을 가지는 것으로 역할에 따라 삼위로 나눈다고 말했다.
    성부 성자 성령의 하나님은 한 하나님의 다른 형체로 나타난 것이다고 주장했다가 역시 이단자로 규정되었다.

    아리어스(Arius)는 그리스도는 영원전부터 존재하지 않았다. 성자는 성부의 첫 피조물로 하나님이 아니며 성령은 성자의 첫 피조물이며 비 인격적인 활동력이다. 당시 니케이아 종교 회에서 정의된 삼우 일체 하나님은 상부 상자 성령 모두 자존하신 하나님이시고 본성도 동질이시고 권위도 동등하시고 구속 역사에 항상 동역하신 하나님이심을 증명했다. 아리우스는 A. D. 325년에 콘스탄틴 황제 때 교황 실베스테르(Sylvester A.D. 312년-A.D 335년)에 의하여 성경에 없는 하나님을 주장하다가 이단자로 규명되어 추방당되었다. 당시에 삼위일체를 규명한 대표적인 성경은 마테복음 3장 16절-17절이었다. 당시에 니케야 종교 회에서 규명된 삼위 하나님은 성부 하나님 성자 하나님 성령 하나님이었다.

    (1) 삼위 하나님은 성부 하나님이시다.

    성부 하나님은 만사 만물을 계획하신 분이시며 만사 만물을 창조하신 분이시다. 그리고 창조하신 우주를 섭리 하시는 분이시다.

    또한 인간을 창조하신 분이시다. 그리고 타락한 인간 중에서 자기 백성을 형성 하시고 택한 백성을 구속하시고 다스리시는 창조물의 주인이시고 생명의 근원이신 아버지이시다.

    (2) 삼위 하나님은 성자의 하나님이시다.

    성자 하나님은 창조사역을 성부 하나님과 함께 하신 분이시고 하나님과 동존 하신 분이시다. 그리고 육신을 입으시고 이 세상에 오셔서 자기 백성을 십자가의 죽으심으로 대속을 이루신 분이시다. 그리고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하여 새 생명을 보이시고 원래 계시던 곳으로 승천 하신 분이시다. 그리고 다시 강림하시어 산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시고 구원 받은 자들과 영원히 함께 사실 분이시다.

    (3) 삼위 하나님은 성령의 하나님이시다.

    성령의 하나님은 모든 역사하심에 성부 성자와 함께 하신다. 인간에게 생명을 주셨고 선지자들을 감동하여 말씀으로 가르치시고 인도하셨다. 주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오순절 날을 기점으로 교회를 세우셨다. 그의 백성들을 거듭나게(中生)시키시고 그들을 감동하셔서 회개에 이르게 하시며 하나님의 자녀로 성화시켜 영원한 나라에 이르게 하신다.

    2) 창조의 신 여호와.

    기독교의 신관은 자연과 우주를 초월하여 존재하는 유일한 신(하나님 여호와) 을 믿는다. 사람이 상상하고 추상하여 인간이 더듬어 찾은 신이 아니라. 창조자로서 창조된 인간에게 자신을 알려준 신이다. 그리고 영이기 때문에 형상이 없는 신이다. 왜냐 하면 영이기 때문에 눈에 보이는 지상의 것들과 전혀 다르기 때문이다.

    기독교 하나님은 한분 하나님인데 천지 만물을 창조한 창조자이며 우주를 통치하는 통치자이며 역사를 주관하는 주관자이다. 그리고 인간에게 생명을 부여해준 생명의 근원이며 인간의 생명을 무엇보다도 사랑하는 사랑의 신이다.

    하나님은 한 분 하나님이신데 그의 성품에 따라 여러 말로 표현되었다.

    (1) 엘(לאֵ). 하나님[엘]이란 이름의 뜻은 능력자, 권능 자란 뜻을 가진다. 그러므로 능

                                 력의 하나님이시며. 전능하신 신이다.

    (2) 엘루앟( חוֹלאֵ )하나님. [엘루앟]라는 이름의 뜻은 존경스러운 자. 두려운 자, 존

    ​         엄하신 자, 라는 뜻이다. 하나님은 거룩하심과 자비하시고 존경스러우 면서도 죄

            를  엄하게 다스리시는 신이다

    (3) 엘로힘( םחילּאֵ )하나님. [엘로힘]이란 이름의 뜻은 통치자, 재판 자라는 뜻이 있

             다. 우주를 통치하고 모든 것을 판단하시는 심판자 신이다.

    (4) 여호와(הוׂהיְ)하나님 [여호와]란 이름의 뜻은 자존 자, 언약자라는 뜻이 있다. 하

             나님은 스스로 계신 분이기에 영원하신 분이시기에 헤아리는 분이 아 니며 믿어야 하

             는 분으로 나타냈다. 스스로 계시기에 만물의 근원이 시고 생명의 근원이시며 영생의

             원천의 신이다.

    (5) 엘솨다이(ידשׁלאֵ)하나님 [엘솨다이]란 이름의 뜻은 복의 근원이신 자, 부요하신 자

             라는 뜻이다. 하나님은 복의 근원인 신이다.

    (6) 쯔바오츠 (תוׂאבָצְ)하나님 [쯔바오스]라는 이름의 뜻은 만군의 여호와, 대신 싸우

             는 자 란 뜻이다 연약할 때에 대신 싸우시고 환난을 당할 때에 전적으로 도우시는 보호

            자 인 신이다.

    (7) 엘룐(ןרׂילאֱ)하나님 [엘룐]이란 이름의 뜻은 높이 계신 자, 전지하신 자라는 뜻이

            있다. 경배의 대상이 되는 하나님이심을 나타낸다. 엘룐 하나님의 이름을 주신 뜻은

           높이 계셔서 경배를 받으시기 합당하신 이름이다. 그리고 높은데서 내려다보시고 세

          상을 모두 감찰하고 인간의 모든 언행을 보고 계시고 모 두 감찰하는 신으로 생사화복​

       (生死禍福) 상벌(賞罰)하는 신이다.

    (8) 아도나이(ינדׂאָ )하나님 [아도나이]란 이름의 뜻은? 소유자, 통치자라는 뜻이 있

             다. 나의 주(主)가 되고 모든 것의 소유자(所有者)인 신이다.

    (9) 테오스 (θεοs)이신 하나님 헬라어적 하나님의 이름인데 구약의 8가지 이름을 함

            유한 이름으로 한분 하나님을 나타낸 이름이다.

    생명의 근원이신 하나님이기에 아버지로 섬긴다. 인간이 탄생하면 그 탄생한 날을 부모가 알려준다. 태어난 인간은 자신의 태어난 사실과 날자와 신간을 모른다. 왜냐 하면 보지도 못했고 지각 할 수도 없기 때문이다. 다만 부모가 알려준 대로 믿을 뿐이다. 부모가 자녀에게 알려준 것 외애 어떤 증거가 필요가 없다.

    이와 마찬 가지로 인간을 창조한 신이 내가 너를 창조 했다고 말하면 그 말을 믿을 것이다. 기독교는 창조자로서 자신이 창조자이심을 알려준 말씀을 그대로 믿고 섬기는 것이다. 다만 자녀가 부모의 아들임을 알 수 있는 것은 부모를 닮았다는 사실과 자신에게 베풀어준 사랑으로 알게 된다. 창조주 하나님도 믿는 신앙생활 가운데 자신이 신을 닮았다는 것을 알게 되고 그리고 그 신의 사랑을 알 때에 창조자 신 아버지 하나님을 알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기독교인들은 창조주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며 그 다스리시는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이며 생명의근본인 아버지를 섬기며 영원한 생명의 근본을 찾아가는 것이다. 우주를 창조하신 절대자이신 하나님은 창조한 우주를 내버려 두지 않으시고 다스리시며 주관하시며 보전하신다.

    (창1:26-28)하나님이 가라사대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로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육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

    (요3:16)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 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사43:1)야곱아 너를 창조하신 여호와께서 이제 말씀 하시느니라 이스라엘아 너를 조성 하신 자가 이제 말씀하시느니라 너는 두려워말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내가 너 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

    (사49:15)여인이 어찌 그 젖 먹는 자식을 잊겠으며 자기 태에서 난 아들을 긍휼히 여기 지 않겠느냐 그들은 혹시 잊을지라도 나는 너를 잊지 아니할 것이라

    하나님은 인간을 자신의 형상대로 창조하셨기에 인간의 생명을 천하보다 귀하게 여기신다. 그리고 인간을 사랑하신다. 인간을 사랑하시기에 인간이 죄로 타락하여 죽음에 이르자 그를 살리시려고 독생자로 오셔서 인간의 죄를 대속하시기 위하여 희생의제물이 되셨다. 그 대속하신 역사가 새로운 역사의 기점이 되는 것이다. 이유는 그 대속 자 그리스도가 역사의 중심이 되기 때문이다.

    그 절대자의 하나님은 성부 하나님 성자 하나님 성령의 하나님이고 역사의 시작하신 분이시며 역사의 끝을 맺으시는 하나님이시다. 그래서 성경은 알파와 오메가라 했다. 알파와 오메가라는 말은 신약 성경을 기록한 헬라 언어인 알파벳 처음 알파(α) 끝 오메가(ω)라는 뜻이다.

    (계1:8)주 하나님이 가라사대 나는 알파와 오메가라 이제도 있고 전에도 있었고 장차 올 자요 전능한 자라 하시더라.

    삼위일체란 말은 한분 하나님이시면서 삼위가 계신다는 말인데 셋이시면서 하나이시고 하나이시면서 셋이신 신비의 실체라는 말이다. 보이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실체이므로 이성으로 헤아릴 수 없고 표현하기 어려운 실체라는 말이다.

    (마3:16-17)예수께서 세례를 받으시고 곧 물에서 올라오실 새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성령이 비둘기 같이 내려 자기 위에 임하심을 보시더니 하늘로서 소리가 있 어 말씀하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하시니라

    그 삼위 하나님은 두 가지 성품을 가자신 분이신데 자신만이 가지는 성품 자존하시고 자유하신 분이시고 무한하시고 편재하신 분이시고 공의하시고 유일하시고 단순(석이지 않고 깨끗함)하신 분이시고 우리 인간들에게 나누어준 성품으로 영적이시며 생적(生的=생명자체) 이기에 살아계신 분이시고 인격적(人格的=인간과 같은 품성)이신 분이시며 공의(公義)하시고 사랑이신 분이시며 주권적(主權的)이신 분이시다.

    이 하나님은 인간이 상상해서 만들거나 더듬어 찾은 신이 아니라 자신이 인간 아담에게와 그의 백성들에게 자신 스스로 또는 그의 사자들을 보내어 알려주셨다. 그 보여주신

    하나님 알려주신 하나님을 그대로 기록한 말씀이 성경이다. 기독교의 하나님은 자신이 알려주신 유일하신 하나님이시다.

    2) 구원의 신 그리스도.

    그리스도는 구원의 신 구주이다. 그리스도는 여호와의 신이다 창조때에도 계신 신이고 최초 인간 아담 때에도 계신 신이다. 여호와의 신은 인간이 타락하여 영원한 죽음에 이르데 되자 장차 여인의 후손으로 이 땅에 보내실 것을 약속했다.

    (창 3:15)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너의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하시고

    (요 1:1-3)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2)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3)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요일 1:1-2)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에 관하여는 우리가 들은 바요 눈으로 본 바요 주목하고 우리 손으로 만진 바라 2)이 생명이 나타내신바 된지라 이 영원한 생명을 우리가 보았고 증거하여 너희에게 전하노니 이는 아버지와 함께 계시다가 우리에게 나타내신 바 된 자니라

    인간을 구원하여야 하기에 인간으로 오셨고 죄인이 죄인을 구원할 수 없기에 죄 없는 인간으로 태어나야 했다. 그리스도는 자신이 하나님이신 것을 친히 가르쳤고 또한 자신이 하나님이신 것을 증명해 보여 믿게 하려고 신만이 행할 수 있는 기적을 행하여 인간이 증명해 보였다.

    그리스도는 쩨자 빌립에게 자신이 하나님이라 했다.

    (요 14:8-11)빌립이 가로되 주여 아버지를 우리에게 보여 주옵소서 그리하면 족하겠나이다 9)예수께서 가라사대 빌립아 내가 이렇게 오래 너희와 함께 있으되 네가 나를 알지 못하느냐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 10)나는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는 내 안에 계신 것을 네가 믿지 아니하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는 말이 스스로 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셔 그의 일을 하시는 것이라 11)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심을 믿으라 그렇지 못하겠거든 행하는 그 일을 인하여 나를 믿으라

    하나님만이 행하실 수 있는 능력을 많이 행하였다.

    (요 2:11)예수께서 이 처음 표적을 갈릴리 가나에서 행하여 그 영광을 나타내시매 제자들이 그를 믿으니라

    (요 11:42-44)항상 내 말을 들으시는 줄을 내가 알았나이다 그러나 이 말씀 하옵는 것은 둘러선 무리를 위함이니 곧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저희로 믿게 하려 함이니이다 43)이 말씀을 하시고 큰 소리로 나사로야 나오라 부르시니 44)죽은 자가 수족을 베로 동인 채로 나오는데 그 얼굴은 수건에 싸였더라 예수께서 가라사대 풀어 놓아 다니게 하라 하시니라

    (눅 7:12-16)성문에 가까이 오실 때에 사람들이 한 죽은 자를 메고 나오니 이는 그 어미의 독자요 어미는 과부라 그 성의 많은 사람도 그와 함께 나오거늘 13)주께서 과부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사 울지 말라 하시고 14)가까이 오사 그 관에 손을 대시니 멘 자들이 서는지라 예수께서 가라사대 청년아 내가 네게 말하노니 일어나라 하시매 15)죽었던 자가 일어 앉고 말도 하거늘 예수께서 그를 어미에게 주신대 16)모든 사람이 두려워하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 가로되 큰 선지자가 우리 가운데 일어나셨다 하고 또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돌아보셨다 하더라

    그리스도는 하나님으로서 사람이 되어 구원자로 온 것이다. 그리스도는 인간으로와서 인간 대신 죽었고 그리고 그 구원을 증명하여 믿게 하려고 부활했고 그리고 다시 하늘로 오르셨다.

    그고 태어날 때 까지의 인간은 하나님의 백성의 계획한 수가 아니기에 장래 태어날 인간들이 대속하신 하나님의 사랑을 믿고 그리스도를 구원자로 믿는 자들을 모두 구원하겠다고 약속하였다. 그 약속을 기록하고 또 전한 사실을 기록한 책이 신약 성경이다. 성경은 그리스도가 오기전 영인의 후손으로 보내실 약속을 기록한 말씀이 구약 성경이고 그 약속된 그리스도가 와서 장차 다시와서 모든 하나님의 백성으로 선택한 자들을 살려 하나님 나라로 데려가신다는 약속을 기록한 것이 신약 성경이다.

    3) 교회와 성령의 하나님.

    성령의 하나님은 구약 시대에 창조시에도 함께 역사 하셨고 그리스도가 오시 전에는 선지자들을 통하여 말씀을 계시하시고 기록하게 하였고 제사장들이나 왕들에게 임재하여 하나님의 백성을 형성하고 이루게 하였다.

    성령의 하나님은 자존의 하나님으로서 그리스도 대속후 교회에 강림하여 그리스도의 구원을 이루어 가신다. 그리스도께서 승천하시면서 그리스도 뒤를 이어 성령의 하나님을 보내신다고 했다.

    (요 15:26)내가 아버지께로서 너희에게 보낼 보혜사 곧 아버지께로서 나오시는 진리의 성령이 오실 때에 그가 나를 증거하실 것이요

    (요 16:7-8)그러하나 내가 너희에게 실상을 말하노니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이라 내가 떠나가지 아니하면 보혜사가 너희에게로 오시지 아니할 것이요 가면 내가 그를 너희에게로 보내리니 8)그가 와서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시리라

    십자가에 죽음으로 대속을 이루고 부활한 그리스도께서 승천 하시고 난 후 마가 다락방교회에 성령이 임하여 역사하기 시작했고 지금도 교회에 함께 하시면서 택한 자들을 불러내고 또한 거듭나게 하고 회개에 이르게 하여 심판을 이루고 성도들을 거룩한 하나님의 백성으로 구비하게 하신다. 그리고 사도들을 감동하여 성경을 기록하게 하였고 그 말씀을 온 천하에 증거하도록 역사했다.

    2. 불교의 신관(神觀)

    불교의 신관은 힌두교의 뿌리인 베다종교의 신관이다. 베다 종교는 자연신이며 범신관(梵神觀)이다. 자연 신관은 우주 안에 있는 모든 생명을 가진 모든 것을 신으로 보는 견해이다.

    불교의 신관은 베다종교 힌두교 신관을 배경으로 한 범신관(梵神觀)이다. 그러기에 불교의 신관을 알려면 고대 베다 종교의 신관을 알아야 한다.

    1) 베다 종교의 신관

    베다 종교는 33신을 헤아린다. 인도에서 가장 오래된 문한(文獻 모아진 글)과 제신(諸神-모든 신)에 대한 찬가(讚歌=신을 숭배하는 노래)에 기록된 신의 종류는 33종의 신을 헤아린다. 우주를 3계(三界=3계의 세계)로 나누는데 하늘의 세계, 공중의 세계, 지상 세계로 나눈다.

    (1) 우사스 신. 

    천상세계, 중공세계, 지상세계, 3계(界)로 나누어 그들은 제각기 좌(座)를 가진다. 다시 말하면 33신은 제각이 존재하면서 3 세계에 각각 자기의 영역을 가지는데 이 33종의 신이 각각 이 3계에 좌(座=왕권)를 갖는다.

     (2) 아그니 신.

    천상 세계(天上世界-하늘세계)는 서광(曙光=빛)을 다스리는 신, 우사스(Ushas)신, 태양을 다스리는 수리아(Surya)신, 이다. 공중 세계(空中世界)를 다스리는 폭풍의 신 인드라 신(Indra 神)과 그 부하 신이 다스린다고 믿는다.

    (3) 수리아 신. 

    지상 세계(地上世界)는 불의 신 아그니 신 (Agni 神)신과 술 신(酒神)인 소마 신(Soma 神)이 지배한다고 믿는다. 그리고 그 밖에 동물(動物)과 식물(植物) 기구(器具)등을 신격화 하여 섬긴다.

    (4) 인드라 신.

    베다 종교는 자연숭배와 민간 신앙이 바탕이 되어 형성된 종교로서 자연을 모두 신격화 한다. 여러 가지 많은 인격의 신(人格의 사람과 성격이 같은 신), 그 배우의 신(配偶=인간 위에 초월해 있는 신), 잔연화신(自然化神=자연을 신으로 높인 신),을 대상으로 숭배한다. 소, 원숭이, 뱀, 등 동물 신, 거목(巨木=큰 나무) 거암(巨巖=큰 바위) 산정(山頂-산꼭대기), 물가, 그리고 천체(天體=우주에 존재하는 모든 물체) 그리고 성력(性力=정력)을 신으로 숭배했다.

    2) 힌두(Hindu=모든 신은 하니)교의 신관(諸神)

    힌두교는 우주를 모두 신으로 보면서 계보가 있는 종교로서 단일 종교가 아니라 다신종교(多神宗敎 =많은 신)이며 범신종교(梵神宗敎=모든 것이 신)이다.

    베다 종교의 자연신(自然神), 또는 다신(多神)의 기반을 둔 힌두교는 자연을 신격화 하여 소(于), 원숭이, 뱀, 등의 동물이나 기암(奇巖), 산정(山頂), 물가, 천체(天體) 그리고 성력(性力)도 신격화하여 숭배한다. 그 외에도 정령숭배(精靈崇拜) 주력숭배(呪力崇拜)등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신을 숭배한다.

    이 모든 신들 가운데 주신(主神)이 브라라마 신(Brahma 神), 비슈스 신(Bisus 神) 시바 신(Siba 神), 3신(三神)이다.

    (1) 창조의 신 브라마(Brahma 神)

    브라마(Brahma)는 고대 중국인들에 의해 범(梵)으로 음력된 것으로 우주의 근본(宇宙 의 根本)으로 중성(中性)의 범(梵=합하여 모두)으로 인도의 민중숭배(民衆崇拜) 중심이 되되다가 남성(男性)적이며 인격(人格=사람의 성품과 같은)의 신으로 최고(最高)의 브라마(Brahma) 범천(梵天)으로 확립되었다.

    이 브라마 (梵 범)는 세계를 창조하고 세계를 유지(유지= 머물게 하고 관리함)한다고 믿는다. 브라마 신은 공평무사(公平無死=공평하고 죽지 않음)한 신으로 믿으며 믿는 자에게는 자비나 은혜를 주지 않는 신으로 인정하기에 숭배자가 적었다.

    (2) 아트만(Atman)

    아트만이란 호흡을 말하는데 호흡은 생명을 유지하는 근본 요건이기에 생기(生氣), 신체(身體), 본체(本體)가 된다. 그리고 사람의 본성인 정수(精髓=영혼)로서 개체 통일의 원리로 생각한다. 우파니샤드 베난타 철학에서는 자아(自我) 또는 개아(個我)로 아타난다. 아트만은 우주를 창조하고 지배하여 보편일체화(普遍一體化)로 생각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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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유지의 신 비슈누(Bius 神)

    비슈누 신은 제 2의 신인데 신인양성(神人兩性=신이면서 인간인 성품)을 가진 신으로 세계를 유지하고 악마를 멸망시키며 여러 가지 화신(化神)의 능력을 가진 신이기에 멧돼지 형상, 거북이 형상, 물고기 형상을 가진다.

    비슈스 신의 배우(配偶=아내)의 신으로 미의 여신(女神 )라크수미라(Raksumira 여자 신) 슈리(suri 여자 신)가 있다.

    원래(原來)는 태양을 편조작용(編造作用=태양 일부작용)했는데 차차 숭배의 대상이 되었다. 인도의 제 2 서사시 마하바라타(Mahabaratha)와 라마야나(Ramayana)의 영웅 크리슈나(Krishuna)와 라마(Rama)를 신격화(神格化)한 것이다.

    (4) 파괴의 신(破壞의 神) 시바( Siba 神)

    시바신은 폭풍의 신 루드라(Rudra)를 형용한 신이다. 시바신은 파괴의 신이며 거친 신이다. 시바신의 형상은 남성의 생식기(生殖器)를 숭배한다. 시바의 신에게도 배우(配偶)의 신이 있는데 설산(雪山=눈 덮인 산)의 처녀 신(處女 神)신으로 성격이 광폭(狂暴=미친 성격 과격)한 신 두르가 여자 신(Duruga )과 칼리(Kali) 여자 신(女神) 두 여자신이 있다. 이 신의 숭배로 성력 숭배가 자행되었다.

    (5) 성력 숭배(性力 崇拜)

    성력숭배(性力崇拜)란 성애(性愛) 성력(性力) 중시하여 남성의 성기(性器=남자 생식기) 링가(Linga)와 여자의 성기 요니(Yoni)를 성적인 표상으로 숭배했다. 남성의 생식기는 여성의 생식능력을 신비롭게 한다고 생각하여 숭배했다.

    성력 숭배를 해탈의 방편으로 오륜좌 수행(五輪座 修行=원형으로 앉아서 행하는 수행 이 있는데 이를 5M 수행이라고 한다.

    근친(近親=같은 혈통)과 상관없이 같은 깊은 밤에 남녀의 수가 둘러 앉아 만드리(眞言=주문)를 외우며 5단계로 수행한다.

    ① 수행 마디아 (Madiha 술(酒)을 마신다.

    ② 수행 만사 (Mansha 고기(肉)를 먹는다.

    ③ 수행 맛야 (Matyha 생선(魚)을 먿는다.

    ④ 수행 무드라 (Mudrha 과자(菓子)를 먹는다.

    ⑤ 수행 마이투나(Maitunha 성교(性交)한다.

    이 5M 수행은 성적인 관계를 가짐으로 수행이 끝난다. 이 5M 수행을 통하여 해탈한다고 한다.

    힌두교에서는 브라만 비슈누 시바 3신을 꼽는데 브라마 신이 높은 위치에 있고 비슈느 신과 시바 신은 하위에 있으면서 서로 하나로 공존한다고 믿는다.

    (6) 방신 숭배(仿神 거느리는 여러 神 崇拜)

    힌두교는 바라마, 비누슈, 시바, 이 3 신의 배우자 신과 수많은 화신(化神) 등 여러 신의 계보와 그 외의 잡다(雜多)한 통일성이 없는 것들이 숭배의 대상이었다. 화신(火神)으로 태양신(太陽神) 수리아 신(Surya 신)과 우신(雨神)인 인드라(Indra)신 과 새벽의 여신(女神) 유샤스(Ushas)신, 술신(酒神)인 소마(Soma)신, 명부(冥府)의 신 야마(Yama)를 숭배했다.

    그리고 조령숭배(祖靈崇拜), 악령(惡靈) 아수라(阿修羅), 아잇샤(夜叉-야차), 라크샤스(羅刹=라찰), 그리고 악마 암소, 원숭이, 산양, 거북이, 그리고 성수(聖河), 성수(聖樹), 성석(聖石) 등을 숭배했다.

    3). 소승불교 불신관(佛神觀)

    승불교는 베다종교나 힌두교의 범신이다. 윤회 사상을 을 믿는 소승 불교에서는 인간이 이 세상에서 깨달음의 경지에 이르러 수행하여 보살이 되어 해탈하거나 아니면 다시 윤회환생한다고 한다. 해탈이란 원래의 인간이 된 오온(五蘊)의 법(法, 結合)이 헤체되어 이 세상 고해(苦海)에 황생하지 아니하고 원래의 무(無)로 돌아 가는 것이고 해탈하지 못한 인간은 다시 윤회 환생한다

    그러기에 소승 불교는 신을 믿는 종교가 아니라 깨달음의 철학이다. 그러기에 이 세상에서 수행을 완성하여 보살이 되는 것이다. 그 보살을 불신(佛神)으로 믿는다.

    (1) 아라한(阿羅漢)이 된 석가.

    아라한이란 아라하트(Arahat)란 말인데 완성한 자라는 말이다. 일체의 번뇌를 끊고 해야 할 일을 완성하고 더 배울 바가 없으며 세인들에게 공양을 받을 가치가 있는 경지에 도달한 사람을 말한다. 석가를 추앙하는 자들이 석가는 수백천생(數百天生 )에 걸쳐 이타(利他=다른 세계(世界)의 사람을 구제해온 행위)의 선행(善行)을 해온 유일한 존재로 석가를 아라한(佛神)이라 한다.

    (2) 불신과 불타관(佛神 과 佛陀觀)

    불신(佛信)은 석가의 유래 없는 위대성은 많은 사람의 귀의심(歸依心=돌아가 예속함)이 일어나고 그가 죽은 후 염(念-사모하는 마음)이 일어나 그를 초인화(超人化=인간 이상의 인간), 절대화(絶對化), 완전화(完全化),가 행해지게 되었다. 그는 전세(前歲=인간으로 태어나기 전 생애)에 뛰어난 선근공덕(善根功德=선행과 공덕을 쌓음)에 연유한 것

    이라고 생각하고 그를 보살이라 불리게 되었다. 불신은 석가처럼 깨달음을 구하여 정하는 표상이다.

    불타(佛陀)는 석가가 80세의 나이로 죽었지만 제자들은 그의 죽음은 모습을 감춘 것에 불과하고 그의 생명은 영원히 심재(心在=마음 안에 존재)한다고 생각하고 불멸의 진리 자체라고 생각한다.

    (3) 구원의 법신불

    35세에 도를 깨달아 80세에 죽은 석가를 신격화(神格化) 했는데 인간들에게서는 찾아 볼 수 없는 32상((相=상상) 에 8가지 호(好 좋은 모습)의 특수한 모습을 갖춘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대승불교에서는 이러한 불타를 초월한 것으로 주장한다.

    석가는 일시적으로 인간의 모습을 하고 세상에 출현한 것이다. 석가는 이 세상 이전 과거 세상에서 성불을 완성하고 무한한 시간에 걸쳐서 인간들을 교화(敎化=가르침)해 온 구원실성(久遠實成=옛 먼 실제적인 성취)의 부처가 있었음을 말하고 이 부처가 법신불(法身佛)인데 법은 영원불변하고 그 법을 깨달은 부처로 일체되어 실체(身体)로의 법신(法身) 영원불변(永遠不變=영원히 변하지 않은 )의 존재라고 생각한다.

    4) 대승 불교의 불신관.

    소승 불교에 반하여 창설된 대승 불교는 보살이 석가 하나인 반면 깨달음의 경지에 이르러 온전히 수행한 인간은 누구나 보살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하고 석가 외에 4 보살을 신앙한다. 소승 불교는 윤회 환생하지 아니하고 해탈하면 무로 돌아 간다고 믿지만 대승 불교에서는 긍락이 있어 보살들은 그 긍락을 통치한다고 믿는다. 그래서 해탈하면 육도 환생 하지 않고 긍락으로 간다고 믿는다.

    (1) 아미타불 (阿彌陀佛-서방극락정토)

    아미타불이란 아미타바(Amitabha)란 말인데 헤아릴 수 없는 광명(光明=밝은 빛)과 아미타유스(Amaitaus)란 말 헤아릴 수 없는 수명(壽命)을 가진 두 가지 덕성을 가진 불타라는 의미이다.

    아미타불은 서방 극락정토에 머무는 구제불의 신앙으로 출현한 부처로서 과거 구원겁(久遠劫=옛 헤아릴 수 없는 세월)의 세자 제왕(世自在王=스스로 존재했던 왕)때에 왕위를 버리고 출가하여 법장보살(法藏菩薩 법을 갖춘 보살)이 되어 부처 밑에서 수행하고 제불(諸佛=모든 불)의 정토를 견학하고 5겁(五劫=헤아릴 수 없는 세월)의 긴 세월을 생각 끝에 48서원(四八誓願)을 일으키고 덕을 쌓았기 때문에 지금부터 10겁(十劫) 전에 원행(願行=멀고 먼 수행)을 완성하고 성취하여 아미타불이 되고 10만 억 토(十萬億土 )나 떨어진 서쪽 극락(極樂)을 세워 설법하고 있다고 말한다.

    (2) 약사불(동방 정유리세계)

    방 정유리 세계에 머물고 있는 보살로 의료의 신이다. 약사여래(藥師如來, bhaiṣajyaguru)는 불교에서 중생의 모든 병을 고쳐주는 부처(여래) 즉, 약사 부처(Medicine Buddha)를 말한다. 아미타불의 48 서원과 함께 약사여래의 12대 서원이 유명하다.

    약사불은 중생을 구제하기 위한 열두 가지 큰 서원(十二大願)을 세웠다. 질병을 치유하고 수명을 연장해 고통에서 벗어나게 해주겠다는 원이 그 중 하나다. 그래서 약사불은 대의왕불(大醫王佛)이라고도 부른다. 중생의 아픔을 치료해주는 의사 부처님이란 뜻이다. 나아가 어리석음을 뜻하는 무지(無知)의 병까지 고쳐준다고 했다. 때문에 약사불은 치유와 염원의 상징이 되었다. 병을 낫게 하고 소원을 이루어준다는 약사불에 대한 신앙은 널리 퍼졌다. 그리고 수많은 약사불들이 다양한 모습으로 오늘날까지 전해오고 있다.

    (3) 미륵불 (彌勒佛=Maitrea 도솔천 兜率天)

    석가는 현세에서 진리에 눈을 뜬 현세 불(現世佛)인데 미래영겁(未來永劫= 미래의 헤아릴 수 없는 세월)에 이르기까지 변하지 않는 불멸의 진리이기에 과거에 있어서도 석가와 같이 진리에 눈을 뜬 사람이 있었음이 확실하다고 생각하고 만든 것이 미륵불이다. 다시 말하면 현제의 구제불이 있다면 미래에도 존재해야 한다는 전재아래 생긴 것이다.

    미륵은 현재는 보살인데 정토인 도솔천(道率天=육욕천의 넷째 하늘, 미륵보살이 사는 곳)에서 천인(天人)을 위해 설법하고 있지만 마지막으로 석가의 예언으로 4천세(四天世 =인간의 나이 56억 7천만년 이 되면 인간계에 화생되어 석가의 자리를 대신한다고 생각함) 불이다. 그래서 미륵보살 미륵불 두 상을 만들었다.

    (4) 관세음보살(Avalokitesvara 菩薩 보타락산 補陀落山 )

    관음이란 산스크리트 어인데 아박로지제바라(Avalokitesvara)라는 의미 인데 무한자비의 불(佛)이다. 어머니니 같은 자비를 보였기에 여성의 모습으로 대비성자(大悲星者 자비가 무한한 자) 어떤 보살의 자비보다 넓고 깊다. 관음보살은 천개(千個=1000개)의 손과 천개(千個)의 눈을 가졌다. 실제로는 42개의 손을 자졌는데 합장한 두 손은 본래의 손이고 40개의 손 하나 하나에 손이 25개의 손을 소유하고 있어 중생을 제도하므로 40x25=1000.이 되는 것이다.

    관음보살은 감로수(甘露水 =달고 맑은 물)정병(淨甁=투명한 유리병)을 손에 쥐고 흰 옷을 입고 연꽃 위에서서 세상에 다양한 모습으로 인간을 (敎化)교화 한다. 관세음보살은 32신(三十二神), 또는 33신으로 제도(制度= 진리, 법을 가르칠)할 대상에 따라서 가지가지 형상으로 나타나는데 인간의 모든 원한(怨恨)을 들어주는 보살인데 33신 32신으로 한정되어 있는 것은 아니다.

    관세음보살은 구호난자(救護苦難者=고난에서 벗어나게 해주는 자). 시무외자(施無畏者=두려움을 없애 주는 자). 원통대사(圓通大士=원만하여 통하지 않는 것이 없는 자).이다 시간과 장소에 제한 없이 어느 곳에나 긴간이 원하는 모습으로 나타내고 입으로 관세음보살을 부르면 큰 불에 들에 들어갈지라도 불에 타지 않으며 큰 물에 빠질지라도 죽는 일이 없으며 바다에 감은 바람을 만나 죽음에 임박해도 해탈하며 죽음의 칼이 목전에 왔을 지라도 저절로 칼이 부러지며 아무리 사나운 마귀일지라도 해치지 못하며 죄가 있거나 없거나 감옥에 고통을 맞게 된 자들이 자유로워지고 원수다 도적을 만나도 스스로 사라지는 일곱 가지 재앙을 면한다.

    마음으로 관세음보살을 생각하면 음욕이 많은 자는 청량(淸亮=푸르고 밝은)을 얻고 분노 대신 기쁨을 누릴 수 있고 어리석음 대신 제혜를 얻으며 몸으로 예배하고 공양하면 훌륭한 자녀를 얻게 되며 관세음보살의 이름을 외우면 굶주려 죽는 등의 15가지 나쁜 일을 면케 해주며 항상 좋은 친구를 만나며 15가지 좋은 일을 함께한다고 한다.

    대승 불교는 수행을 온전히 행하면 누구나 보살이 될 수 있기 때문에 위의 4 부처외에 많은 부처가 있다.









    하늘의 신 우라노스(Uranus)

    우라노스의 기원과 의미

    우라노스(Uranus)는 그리스 로마 신화에서 하늘의 신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의 이름은 그리스어로 '하늘'을 의미하며, 그는 땅의 신인 가이아(Gaia)와 결합하여 다양한 신들과 거인들, 몬스터들을 낳았습니다.
    이를 통해 그리스 로마 신화의 세계가 창조되었습니다.
    우라노스는 원시 신 중 하나로, 그의 존재는 코스모스의 기원과 세계의 창조를 상징합니다.
    그는 또한 신들과 인간들 사이의 갈등과 투쟁을 예고하며, 그리스 로마 신화의 중요한 주제 중 하나인 권력과 통치의 문제를 제기합니다.

    우라노스의 이야기

    우라노스는 자신과 가이아의 자식들을 두려워하며, 그들을 지하 세계인 타르타로스(Tartarus)로 가두었습니다.
    그러나 가이아는 이에 분노하여 그들 중 가장 강력한 크로노스(Cronus)에게 도움을 요청합니다.
    크로노스는 가이아의 도움으로 우라노스를 무력화하고 그의 지배를 끝냅니다.
    우라노스의 패배로 인해 그의 피가 바다에 떨어져 아프로디테(Aphrodite)가 탄생하게 됩니다.
    또한 그의 생식기를 바다에 던지자 거센 파도와 거품이 일어나 아름다운 사랑의 여신이 탄생하게 되었습니다.

    우라노스와 그의 유산

    우라노스의 존재와 이야기는 그리스 로마 신화에서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그의 이야기를 통해 코스모스의 기원과 창조를 이해할 수 있으며, 신들의 세계와 인간 세상의 관계와 갈등을 살펴볼 수 있습니다.
    또한 권력과 통치에 대한 문제를 다루며, 이러한 문제가 신화의 주요 주제 중 하나임을 보여줍니다.
    우라노스의 후손들은 그리스 로마 신화의 중심 인물들로, 여러 신들과 영웅들의 이야기를 이어갑니다.
    그의 아들 크로노스는 결국 자신의 아들 제우스(Zeus)에게 패배하게 되며, 이로 인해 올림포스 신들의 시대가 시작됩니다.
    우라노스의 유산은 그의 후손들을 통해 지속되며, 그리스 로마 신화의 중심 이야기와 주제를 구성합니다.
    이를 통해 신화 속 세계의 복잡한 역사와 신들의 투쟁, 인간들의 운명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결론

    그리스 로마 신화에서 하늘의 신 우라노스는 코스모스의 기원과 세계 창조를 상징하는 중요한 인물입니다.
    그의 이야기와 업적을 통해 그리스 로마 신화의 세계를 더 깊이 이해할 수 있으며, 이로 인해 신화의 주요 주제와 인간들의 삶에 대한 통찰을 얻을 수 있습니다.
    우라노스와 그의 이야기를 통해 그리스 로마 신화의 세계를 더 깊이 탐구해 보시고, 그것이 현대 사회와 어떻게 관련되어 있는지를 살펴보세요.


    우라노스(Οὐρανός Ouranos[*])는 그리스 신화의 1세대 하늘의 남신이다.
    로마 신화
    카일루스(Caelus)에 해당한다.
    카오스
    가이아의 아들이며 크로노스의 아버지이자 제우스의 할아버지이다.

    가이아가 스스로 낳은 첫 번째 자식으로, 이후 가이아가 장남인 우라노스를 남편으로 맞이하며 가이아의 남편이 된다.
    우라노스는 어머니인 가이아와 결혼한 후부터 그녀에게 매우 집착하였으며, 가이아는 계속 임신하고 자식들을 낳았지만 그럼에도 우라노스는 계속해서 가이아의 곁에 붙어서 떨어지려 하지 않았고 끈질기게 집착하였다. 가이아가 자식들을 출산할 때마다 우라노스는 사랑을 표하며 하늘에 올라가 황금빛 비를 쏟아 땅을 촉촉히 적셔주며 사랑을 표현하면, 가이아는 땅에 만물이 샘솟게 도와주면서 우라노스에게 보답하였다. 이 시기의 우라노스와 가이아는 부부 금슬이 좋았고, 점점 더 서로에 대한 사랑이 깊어졌다.

    하지만 가이아가 키클롭스, 헤카톤케이르를 비롯한 괴물들을 낳으면서 우라노스와 가이아는 점차 반목하기 시작하고, 이렇게 흉측한 괴물들이 자신의 자식이라는 걸 수치스럽게 여긴 우라노스는 그들을 모두 타르타로스에 감금한다. 그리고는 아무 일도 없는 듯 예전처럼 가이아에게 끊임없이 집착하였다. 아무리 괴물이지만 자신의 자식들을 지하에 가두고 그러면서도 자신을 임신시키려는 우라노스에게 분노한 가이아는 복수를 다짐하고, 자신의 몸 속을 흐르는 광맥에서 낫을 만들어 우라노스를 거세할 계획을 세운다.

    낫을 만든 가이아는 자식들을 불러 자신을 도와 아버지 우라노스에게 반란을 일으킨다면 1인자의 자리를 약속하였지만, 가이아의 말을 들은 자식들은 우라노스에 대한 두려움으로 선뜻 나서지 못하였다. 이렇게 아무도 나서지 않으려 할 때 막내인 크로노스가 가이아를 돕겠다고 나서고, 가이아는 기뻐하며 크로노스에게 자신의 낫을 넘겨주었다.

    이제 크로노스는 어머니 가이아와 말을 맞춘 뒤 낫을 품고 침실에 숨어 아버지 우라노스가 가이아에게 다가오기만을 기다렸다. 밤이 되자 마침내 우라노스가 가이아를 향해 다가오더니 이내 그녀를 덮쳤다. 숨어있던 크로노스는 서둘러 뛰쳐나와 왼손으로 우라노스의 성기를 쥐고 오른손으로 낫을 휘둘러 자른 뒤 바다로 던져버렸다. 우라노스는 성기가 잘리자 고통을 참지 못하고 큰 비명을 지르면서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아들인 크로노스에게 거세당하면서 1인자에서 쫓겨나고 더 이상 가이아와 사랑을 나눌 수 없게 된 우라노스는 고통 속에서 많은 피를 흘리며 도망가서는 다신 가이아를 찾지 않았다.

    우라노스가 흘린 피가 땅에 떨어지면서 기가스, 에리니에스, 멜리아데스가 탄생하였다. 한편 바다에 떨어진 우라노스의 성기에서 흘러나온 정액이 바닷물과 섞이면서 흰 거품이 일더니 그 자리에서 아프로디테가 태어났다. 이렇게 우라노스가 생식력을 잃으면서 그의 집권기도 끝나게 되고, 더 이상 하늘과 땅이 붙어있지 못하면서 하늘과 땅 사이엔 경계가 생겼다.

    한편 가이아는 우라노스와 헤어진 후에도 그와 맺었던 성관계에 중독되어 한동안 외로움을 심하게 탔다고 한다. 이후 자신이 스스로 낳은 또 다른 아들인 폰토스에게 빠져들게 되고, 결국 욕망을 이기지 못한 채 폰토스를 유혹한 뒤 사랑을 나누어 자식들을 낳으면서 재혼한다.

    이후 자식들을 낳을 때마다 계속 삼키는 남편 크로노스의 악행에 분노한 레아제우스를 출산할 때가 임박하자 우라노스를 찾아와 계책을 짜내 줄 것을 간청한다. 우라노스는 레아의 말을 기꺼이 들어주고 크로노스에게 일어나기로 예정된 모든 일들을 그녀에게 말해준 뒤로는 전혀 등장하지 않는다.

    제우스의 탄생 이후 전혀 언급이 없지만 죽은 건 아니다. 비록 크로노스에게 거세당해 지배자의 자리에서 쫓겨났지만 그 후로도 전혀 죽지 않았으며, 단지 가이아와 멀리 떨어져 분리되었을 뿐이다. 다시 말하자면 고대 그리스인들은 우라노스와 가이아는 멀리 떨어져 별거하는 중이지 그들은 절대 이혼해서 남남인 사이가 아니하고 생각하였다


    가이아(Γαῖα) 또는 (Γῆ)는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대지여신이기도 하고 세상을 모두 지배하는 지배여왕이라는 애칭도 있다.
    대지와 만물의 여신이며 창조의 여신으로 태초의 모든것들을 낳은 태초의 어머니이다.
    로마 신화텔루스(라틴어: Tellus) 영어 이름 테라와 동일시된다.
    지모신의 형태로 보면 된다. 옛날, 세상이 혼란의 덩어리 카오스이던 시절. 카오스에서 태어난 최초의 여신이라고 전해진다.

    헤시오도스가 쓴 《신통기》에 따르면, 카오스타르타로스 등과 더불어 태초부터 존재해왔던 태초신이라고 하며, 또한 카오스의 유일한 아내이자 딸이라는 설도 있다.

    우라노스폰토스의 어머니이자, 또한 에레보스닉스아이테르 등 많은 남매들을 낳은 어머니신이다. 아버지 카오스를 남편으로 최초로 맞이하고 에레보스, 닉스 등 낳았다고도 한다. 또 아들 우라노스를 남편으로 맞이하여 크로노스를 포함한 티탄 족키클롭스, 피톤 등의 괴물을 낳았다. 우라노스가 크로노스에게 거세를 당한 후에는 또 한 명의 아들 폰토스를 남편으로 삼았다고 한다. 가이아의 또 다른 남편들 중에서는 티탄족의 왕이자 아들인 오케아노스와 손자인 포세이돈 그리고 하데스, 제우스가 있으며 그들을 통해서 많은 자식들을 낳았다.

    기독교 신관

    신은 절대적으로 존재하지 않는다고 믿는 사람은 사실 우리가 생각하는 것만큼 많지 않습니다.
    인류 역사를 통틀어보면 지금도 대다수의 사람들은 비록 막연하게나마 어떤 신적 존재를 믿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신은 절대적으로 존재하지 않는다고 믿는 사람은 이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문제에 대해 인류의 대다수가 완전히 잘못된 생각을 했다고 믿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신을 믿더라도 더 중요한 것은 그 신이 어떤 존재인가, 어떤 존재를 신으로 믿는가 하는 것입니다.

    인류 역사를 통틀어보면 신을 어떤 존재로 생각하느냐에 따라 크게 두 가지 관점이 있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첫 번째는 신이 선악을 초월한 존재라는 것입니다. 
    즉, 신은 선한 존재라고도, 악한 존재라고도 할 수 없는 무시무시하고 신비로운 존재라는 것입니다. 
    '선하다', '악하다'라는 판단은 인간의 생각이고, 인간적인 구분일 뿐이라는 것이죠. 
    신은 이러한 인간적인 생각, 인간적인 판단, 인간적인 구분을 초월한 신비로운 존재라는 것입니다.
    범신론적 신관이 바로 이러한 관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범신론이란 신과 이 세상을 거의 동일시하는 사상입니다. 
    이 세상의 모든 것이 신의 표현이자 신의 일부라고 생각하는 것이죠. 
    이런 신관은 상당히 매력적입니다. 
    현대인들이 좋아할 만한 신관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범신론은 인류 역사상 가장 오래된, 가장 원초적이고 가장 종교적인 신관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러한 신관과 대조되는 신관이 바로 유대교, 이슬람교, 그리고 기독교의 유일신 사상입니다.

    기독교의 신은 절대적으로 의로우신 분이며, 절대적으로 선하신 분이십니다. 
    신은 선악을 초월한 신비롭기만 한 존재가 아니라, 입장이 분명하신 분입니다. 
    선을 사랑하고, 악을 미워하시는 분
    이시죠. 
    이러한 신을 믿는 것은 때로 불편할 수 있습니다. 단지 신비롭기만 한 존재라면, 선과 악을 따지지 않는 신이라면 믿기가 편하고 좋겠지만, 기독교의 신은 그렇게 단순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선을 사랑하고, 악을 미워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런데 우리는 어떻습니까? 우리에게는 악이 있잖아요. 성경이 말하듯이 하나님은 빛이시고, 그 안에 어둠이 없으신 분이시지만, 우리는 어둠 속에 있습니다. 그래서 루이스는 기독교를 '전투적인 종교'라고 표현합니다. 이 말은 기독교가 선악의 문제를 매우 진지하게 여기는 종교라는 뜻입니다.

    범신론에서의 신은 마치 거대한 바다 같은 존재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 안에서 선과 악이 모두 용해되어 사라지는, 그런 거대한 바다 같은 존재이죠. 하지만 기독교의 신, 하나님은 그런 바다 같은 존재가 아니라 불칼 같은 존재입니다. 불처럼 선을 사랑하시고, 칼처럼 악을 미워하시는 분입니다. 하나님은 이 세상의 모든 악과 우리 인간 안에 숨겨진 모든 악을 반드시 도려내고야 말겠다는 작정을 하고 계신 분입니다. 이 칼은 사실 사랑의 칼입니다. 의사의 칼과도 같습니다. 정말 환자를 사랑하는 의사라면 그 환자가 아무리 고통스러워하고 비명을 지르더라도, 그 암을 도려내기 위해 칼을 들이댈 것입니다. 그래야 환자를 살릴 수 있기 때문이죠. 기독교의 하나님은 만사 오케이, 모든 것이 다 좋다는 그런 존재가 아니라, 우리에게 회개하라고 명령하시는 분이십니다. 세상을 바로잡으라고 명령하시고, 너희는 이 세상에서 악의 편이 아니라 선의 편에 서라고 명령하시는 분이십니다. 바로 이것이 기독교가 믿는 하나님이십니다.

    선과 악 - 이원론

    "선한 신이 만든 세상이 왜 이렇게 나빠졌을까요?" 라고 생각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이에 대해 기독교의 전통적인 대답을 하기 전에, 루이스는 먼저 이런 질문을 던집니다. 이 세상에 악이 있다는 것은 우리가 이 세상에 악이 있다는 것을 알고, 악이 무엇인지 안다는 것 아닙니까? 그런데 우리가 악이라는 것이 무엇인지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그래서 루이스는 이런 예를 듭니다. 물고기는 축축하다는 것이 무엇인지 알까요? 모르겠죠. 물고기는 원래 물속에서 살아가는 존재이기 때문에 축축하다는 개념이 없을 겁니다. 물 바깥에 사는 생명체들이라야 축축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물 바깥의 세계를 알고 있으니까요. 마찬가지로, 만약 이 세상이 원래부터 악하기만 한 곳이었다면, 인간은 악이 무엇인지 몰랐을 것입니다. '악하다'라는 말은 다시 말해 '선하지 않다'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선이 무엇인지 아는 존재라야 악이 무엇인지 알 수 있는 것이죠. 인간이 악이 무엇인지 안다는 것은, 말하자면 인간은 악의 바깥 세계를 알고 있는 존재이고, 사실은 원래 그 바깥 세계에서 살도록 지음받은 존재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러니까 인간이 악을 자기 자신에게 느낀다는 것, 심지어 이 세상에 악이 있다고 해서 하나님을 향해 "신이 과연 존재하는가?"라는 질문을 한다는 것 자체가 역설적으로 이 세상은 선하신 하나님이 창조하신 선한 세상이고, 모든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받은 존재라는 기독교의 교리를 뒷받침해주는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 세상에 악이 존재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아까 말했던 범신론에서는 이러한 질문, 즉 "세상에 왜 악이 존재하는가?"라는 질문 자체가 제기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악이니 선이니 하는 것들은 인간의 생각일 뿐이지, 신의 관점에서는 진짜 악이라고 할 만한 것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니까 이 세상에 왜 악이 존재하는가, 이런 심각한 질문이 제기되지 않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범신론은 선악의 문제를 그렇게 진지하게 다루지 않는 사상입니다.

    하지만 이 문제에 대해 아주 간단한 대답을 제기하는 사상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이원론입니다. 이원론은 선한 신과 악한 신이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선한 신이 있고, 그와 대등한 악한 신이 있어서 이 세상은 이러한 선한 신과 악한 신이 서로 전쟁을 벌이는 영원한 전쟁터라는 종교 사상, 철학 사상입니다. 이렇게 생각하면 이 세상에 왜 악이 존재하는지 명확하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세상에 있는 모든 좋은 것들은 선한 신으로부터 오고, 나쁜 것들은 악한 신으로부터 온다는 것이죠. 그러니까 악은 원래 있는 것입니다. 악이 없을 수가 없는 것이죠. 그냥 존재하는 것입니다. 문제는 쉽게 해결됩니다.

    하지만 기독교는 이원론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기독교는 선한 신, 즉 하나님과 대등한 악한 신이 따로 존재한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원래 하나님이 천사들을 창조했는데, 그 천사들 중 일부가 타락해서 악이 생겨난 것입니다. 악은 원래부터 있던 것이 아니라 나중에 생겨난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직 기독교적인 세계관에서만 이 세상에 왜 악이 존재하는가 하는 철학적, 신학적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전능하시고 선하신 분인데 왜 이 세상에 악이 존재하는가? 하는 문제가 떠오르고, 거기에 대한 답이 요청되는 것이죠. 왜 이 세상에 악이 존재하는지에 대한 아까 얘기했던 이원론은 따지고 보면 너무 단순한 생각입니다. 한번 생각해볼까요? 우리가 둘 중 하나를 선한 신이라 부르고, 다른 하나를 악한 신이라 부르는 것 자체가, 그 두 신 위에 어떤 절대적인 기준이 있다는 것을 상정하는 것입니다. 즉 기독교에서 말하는 절대 신의 절대적인 표준을 상정해서 그 표준에 비추어 어떤 신을 선한 신이라 하고, 또 다른 신을 악한 신이라 부를 수 있게 되는 것이죠. 선과 악은 깊이 생각해보면 대등한 원리가 아니라, 악은 선에 기생하는 무엇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기독교 철학에서는 선악을 이야기할 때, 악이라는 것은 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선의 부재라고 생각합니다.

    가령 어둠이 있습니다. 어둠은 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죠. 어둠은 빛이 없는 상태를 일컫는 말일 뿐입니다. 마찬가지로 악도 있지만, 그것이 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선이 없고, 선이 결여된 상태를 악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악은 있지만 선이 존재하기 때문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기독교에서는 악은 궁극적으로 선의 상대가 되지 못한다고 가르칩니다. 이원론은 이 세상을 선과 악이 싸우는 영원한 전쟁터라고 생각하지만, 기독교는 이 세상에 합법적인 왕이 계신다고 말합니다. 그 왕이신 하나님이 다스리시는 이 세상의 일부 지역에서 말하자면 반란이 일어난 것입니다. 그러나 그 반란은 반드시 언젠가 진압될 것이라고 믿는 것이 기독교 신앙입니다.

    루이스는 이렇게 말합니다. 기독교는 우리가 살고 있는 우주가 반역자들에게 일부 점령당했다고 생각합니다. 적들의 점령 지역, 이것이 현재 이 세상의 모습입니다. 그리고 기독교가 말하는 것은 합법적인 온 우주의 왕이 이 세상에 반란 지역으로 변장을 해서 사람의 모습으로, 어린 아기의 모습으로 변장을 한 채 침투해서 지금 이 세상에서 거대한 반란 진압작전, 수복작전을 펼치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 모두에게 하나님의 이 거대한 수복 작전에 동참하라고 촉구하고 있습니다. 본래는 좋았던 세상이 지금은 비록 나빠졌지만, 언젠가는 다시 좋아질 것이라고 믿고 소망하는 종교가 바로 기독교 신앙입니다.

    왜 이 세상에 악이 존재하게 되었을까? - 인간의 자유의지 - 사랑과 기쁨과 행복을 위해

    그렇다면 다시 중심 질문으로 돌아가서, 왜 이 세상에 악이 존재하게 된 걸까요? 기독교의 대표적인 답변은 우리가 잘 알고 있습니다. 바로 인간의 자유의지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에게 자유의지를 주셨고, 인간은 그 자유의지를 남용하여 하나님께 등을 돌렸기 때문에 이 세상에 악이 들어오게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왜 하나님은 인간에게 자유의지를 주셨을까요? 자유의지 때문에 인간이 죄를 지을 수 있게 되었고, 그래서 세상이 이렇게 나빠졌잖아요? 인간에게 자유의지를 주셨다는 것은 하나님이 인간을 자신에게 순종할 수도 있고, 불순종할 수도 있는 존재로 창조하셨다는 말입니다. 루이스는 이렇게 말합니다. "악이 가능한 것도 자유의지 때문이지만, 사랑이나 기쁨이 가능한 것도 자유의지 때문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주인을 위해 기계적으로 프로그래밍된 컴퓨터가 있다면, 그 컴퓨터의 사랑은 진정한 사랑일 수 없을 것입니다. 우리가 사랑을 받는 것이 왜 감격스럽고 기쁜 일일까요? 상대방이 나를 사랑하지 않을 수도 있고, 나를 사랑해주지 않을 수도 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나를 사랑하기로 선택해 주었다는 사실 때문에 사랑의 기쁨이 있고, 감격이 있는 것입니다. 사랑을 받는 것뿐만 아니라, 사랑을 줄 때도 그렇습니다. 우리가 사랑을 준다는 것은 사랑을 주지 않을 수도 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을 주기로 선택했다는 것에 의미가 있습니다.

    자연 만물은 자유의지가 없는 존재이지만, 오직 인간은 하나님께서 자유의지를 가진 존재로 만드셨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인간이 오직 하나님만이 누리고 있는 이러한 인격적인 사랑과, 인격적인 사랑에서 오는 충만한 기쁨을 맛볼 수 있도록 하시기 위해서였습니다. 루이스는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이 가장 고귀한 피조물인 인간에게 주고자 하신 행복은 사랑과 기쁨의 철저한 자유와 자발적인 하나님과의 연합, 그리고 이웃과의 연합에서 생겨나는 행복입니다. 그리고 그 행복에 비하면 지상에서 남녀가 나누는 가장 평온한 사랑조차 물 탄 우유처럼 싱거울 것입니다. 바로 이러한 행복을 누리도록 하기 위해 인간은 자유로워야 합니다. 네, 하나님이 인간에게 자유의지를 주신 것은 일종의 모험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이러한 모험을 하신 것이 무모하다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잘 알지 못해서 하는 생각입니다. 사랑 그 자체이신 하나님은 우리 인간이 하나님만이 누릴 수 있는 이러한 충만한 사랑과 기쁨을 알도록 하시기 위해서 이러한 모험을 감수할 가치가 있다고 여기셨고, 또한 우리가 이후에 보겠지만, 이 모험에 따른 대가를 스스로 감당해 주셨습니다.

    인간이 부족해서 죄를 지었을까?

    또 다른 질문으로 "하나님이 인간을 지금보다 더 탁월한 존재로 만드셨다면, 인간이 죄를 짓고 타락하지 않을 수도 있었을까?"라고 묻는 분들도 있을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더 탁월한 존재일수록, 타락하지 않으면 더 찬란한 존재가 되지만, 타락하면 더 끔찍한 존재가 됩니다. 인간보다 더 탁월한 존재로 창조된 것이 천사입니다. 천사는 영적 존재니까요. 하지만 천사가 타락하면 마귀가 됩니다. 인간의 타락 이전에 우리는 천사의 타락이 먼저 있었다고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천사는 왜, 어떻게 타락하게 되었을까요? 우리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루이스는 인간이 타락하는 이유를 미루어 짐작하여 우리가 추측할 수 있다고 말합니다.

    인간에게 아까 얘기했던 자유의지가 있다는 것은, 달리 표현하면 인간에게 자아가 있다는 것입니다. 인간은 자아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자기중심적인 존재가 될 수 있습니다. 기독교에서 말하는 죄의 본질은 자기 중심성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세상 모든 만물이 자기를 중심으로 도는 거죠. 내가 중심이고, 나를 제외한 모든 것, 모든 너, 모든 상대, 심지어 하나님까지도 나를 중심으로 도는 위성으로 여기고 취급하는 것이 바로 죄의 본질입니다. 내가 중심이고, 내가 주인이고, 내가 왕이 되는 것입니다. 이런 죄의 본질을 다르게 표현하면 "하나님처럼 되겠다"는 것입니다.

    아담과 하와를 유혹할 때, 악마가 "너희가 하나님처럼 될 수 있다"고 유혹했죠. 루이스는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처럼 되려 하지 마라." 이것이 바로 사탄이 지은 죄였고, 사탄이 인류에게 가르친 죄입니다. 하나님처럼 되겠다는 말은, 다시 말해 내가 중심이 되고, 내가 왕이 되고, 내가 주인이 되겠다는 자세를 말하는 것입니다. 진정한 중심, 진정한 주인, 진정한 왕이신 하나님을 제쳐놓고, 하나님과 상관없이, 하나님 바깥에서 행복을 추구하려는 것입니다. 루이스는 이러한 시도를 "가망 없는 시도"라고 부릅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합니다. "바로 그러한 가망 없는 시도로부터 인간의 역사, 즉 돈, 가난, 야망, 전쟁, 매춘, 계급, 제국, 노예제도 등 하나님 외에 무언가 다른 것에서 행복을 찾으려 했던 인간들의 길고 무서운 이야기가 시작되었습니다."

    하나님 바깥에서 행복을 찾으려는 인간의 시도가 가망 없고 부질없는 시도인 것은, 인간이 그렇게 만들어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하실 때 그렇게 만들지 않으셨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루이스는 아주 적절한 비유를 듭니다. "자동차는 기름을 넣어야 달릴 수 있도록 만들어졌기 때문에, 다른 것을 넣으면 달릴 수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은 그분 자신을 넣어야 달릴 수 있도록 인간을 만드셨습니다. 스스로 우리 영혼이 연소시킬 연료가 되시고, 우리 영혼이 먹을 음식이 되신 것입니다. 다른 연료나 음식은 없습니다." 마침내 이 말은 이렇게 해석됩니다. "하나님과 무관한 행복이나 기쁨이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인간은 하나님을 떠났고, 그래서 세상과 인생은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이러한 모습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해 무엇을 하실까?

    하지만 이런 세상, 이런 인간을 하나님이 그냥 두고 보시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우리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해 무언가를 하셨습니다. 바로 기독교가 가르치는 복음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러한 세상, 이러한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인간을 다시 부르시기 위해 무엇을 하셨는지를 루이스는 네 가지 단계로 설명합니다. 

    양심

    첫 번째는 하나님께서 모든 인간에게 양심을 주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든 믿지 않는 사람이든, 인간이라면 누구나 기본적으로 옳고 그름에 대한 기본적인 분별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하나님을 믿고 성령을 받게 되면 이 양심이 더 예리해집니다. 불칼 같은 하나님의 영을 받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어느 시대에나 자신의 양심의 소리대로 살고자 노력했던 인간들이 있었고, 그러나 자기 양심의 목소리에 100% 순종했던 인간은 아무도 없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좋은 꿈 - 신화

    하나님이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해 하신 두 번째 일은 루이스가 이야기한 것인데, 이는 우리가 교회에서 잘 들어보지 못한 아주 흥미로운 이야기입니다. 루이스는 이것을 "좋은 꿈"이라고 부릅니다. 세계 여러 민족에 공통적으로 퍼져 있는 아주 특별한 종류의 신화가 있습니다. 어떤 신적인 존재가 있는데, 그 신적인 존재가 어떤 죽음과 부활을 겪고, 그 죽음과 부활을 통해 그 민족이나 나라, 부족에 하늘의 축복이 임하게 되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이 이야기는 기독교의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 이야기에 매우 유사합니다. 세계 도처에, 기독교 이전 시대부터 예수님 이야기와 유사한 신화들이 있었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는 분들도 계시겠지만, 루이스는 오히려 이러한 이야기들이 없었다면 더 이상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신화는 일종의 꿈이라는 것입니다. 인류의 꿈, 인류가 집단적으로 꾼 꿈이 바로 신화입니다. 칼 융이라는 심리학자는 '집단 무의식'이라는 개념을 이야기했습니다. 그러니까 인류의 신화는 집단 무의식을 공유하는 인류가 집단적으로 꾼 꿈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 이야기를 닮은 그러한 신화들은 바로 그런 꿈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알고 있듯이 이 세상에 예수님을 보내시기 전에 유대인들에게는 먼저 율법을 주셨습니다. 율법은 장차 오실 예수님을 미리 가리켜 주는 손가락과 같은 것이었습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은 이방인들에게 신화를 보내주셔서, 특히 죽음과 부활을 모티브로 한 이야기를 꿈꾸게 만드셔서 장차 오실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켜 주는 손가락 역할을 하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장차 실제로 일어날 사건에 대한 일종의 전주곡, 암시 같은 역할을 하게 한 것입니다. 루이스는 이렇게 말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 사건은 말하자면 신화가 사실이 된 사건이다." 요한복음 1장에서 말씀이 육신이 되었다고 하듯이, 신화가 사실이 되고 꿈이 현실이 된 사건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과 죽음과 부활 사건이라고 설명합니다. 그러니까 기독교가 말하는 복음을 다시 말해 보면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꿈같은 것들이 참말로 현실이 되었다." 인류가 꿈꾸었던 일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현실이 된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여러 나라들의 홍수 신화 등을 이야기하며, 성서의 내용들도 그냥 여러 신화들의 영향을 받았을 뿐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여기에서는 성서의 내용과 유사성을 보이는 신화의 내용들이 성서의 내용을 미리 '꿈'꾸게 한 것이었기에 유사함이 당연하다고 합니다. 이 점이 재미있습니다.

    이스라엘을 선택하심 - 참된 신

    하나님은 우리 인간들을 하나님께 돌아오게 하기 위해서 세 번째로 하신 일은, 많은 민족 가운데 이스라엘을 택하셔서 그들에게 진정한 신, 참된 신이 무엇인지를 심어주셨다는 것입니다. 앞서 말했듯이 인류 대다수는 어떤 신을 믿기는 했지만, 그 신은 무시무시하고 신비로운 존재로만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선지자들, 예언자들을 통해 진정한 하나님은 무시무시할 정도로 의로우신 분이며, 무시무시할 정도로 선하신 분이라는 사실을 각인시켜주셨습니다.

    이방 종교의 신들은 단지 성전에서 인간들이 제사를 드리고 예배를 드리면 만족하는 신들이 많았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예언자들이 선포한 신은 이 땅에서 사회 정의와 이웃 사랑을 실천하는 것을 종교적 행위보다 더 중요하게 여기시는 하나님이셨습니다. 이스라엘은 이러한 예언자들의 메시지를 거부하다가 나라가 망하고 성전이 무너지는 혹독한 심판을 겪고 나서야 비로소 이러한 신관을 받아들이게 됩니다.

    성육신

    네 번째로 하나님이 인류를 구원하시기 위해 하신 일은 하나님이 사람이 되어 이 땅에 오신 사건, 즉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 사건입니다.
    루이스가 살던 당시에도, 그리고 지금도 많은 유럽의 지성인들, 혹은 일부 신학자들은 "예수님은 자신이 하나님이라고 명시적으로 말한 적이 없다"면서, 예수님을 인류의 위대한 스승으로만 여기고, 하나님이 사람이 되어 이 땅에 오신 분으로는 여기지 않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루이스는 예수님이 이 땅에 계실 때 하신 말씀 중 "내가 너희 죄를 사하노라"라는 말씀에 주목합니다. 루이스는 "이 말씀은 오직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말씀"이라고 말합니다. 왜 그럴까요? 가령 제가 누군가에게 잘못을 했는데, 어떤 제3자가 저에게 와서 "내가 너희 죄를 사하노라"라고 말할 수는 없는 것이죠. 그러나 예수님은 모든 사람에게 그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왜냐하면 인간들이 서로에게 짓는 모든 죄는 동시에 하나님께 짓는 죄이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서로 사랑하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어겼기 때문이죠.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사람들에게 "너희 죄를 사하노라"라고 하신 것은 오직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루이스는 예수님을 단지 위인이나 훌륭한 교사 정도로만 여기는 이들에게 다음과 같은 유명한 논리를 들이대며 그들을 코너로 몰아넣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신이라고 주장하셨다. 이 주장은 참이거나 거짓일 수밖에 없다. 만약 거짓이라면, 예수님은 자신이 하나님이 아니라는 것을 알면서도 그렇게 주장했거나, 아니면 자신을 잘못 생각했거나 둘 중 하나일 것이다. 전자의 경우라면 예수님은 최고의 사기꾼이고, 후자의 경우라면 과대망상증 환자일 것이다. 그러나 나머지 하나의 선택지는 예수님이 진정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뿐이다." 당신이 보기엔 예수님이 사기꾼 같습니까? 아니죠? 그렇다면 과대망상증 환자처럼 보이나요? 그것도 아니죠. 그러면 남아 있는 선택지는 오직 하나입니다. 당신은 예수 그리스도 앞에 무릎을 꿇고 그를 나의 주, 나의 하나님으로 영접하고 그 앞에 경배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생각해 보십시오. 어떤 사람이 나타났는데, 좋은 점도 있고 훌륭한 말씀도 하셨지만, 그가 자신을 신이라고 주장한다면, 우리가 그 사람을 단지 훌륭한 사람으로만 여길 수 있을까요? 없죠? 그렇죠? 그러니 루이스는 당대의 유럽 지성인들에게 "예수님을 그저 훌륭한 사람 정도로만 생각하는 어정쩡한 태도는 역사적 기독교가 생각하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입장과 부합하지 않는다"고 이야기합니다.

    여러분, 이 논리가 어떻습니까? 루이스를 좋아하는 사람들 중에서도 이 논리를 우악스럽다고 느끼는 분들도 많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이 논리를 좋아하든 좋아하지 않든, 분명한 것은 역사적 기독교, 정통 기독교는 예수 그리스도를 단순한 예언자 이상의 분으로, 인류의 위대한 스승 이상의 분으로, 하나님의 유일한 독생자이자 우리의 주님으로 고백하는 신앙 위에 서 있다는 사실입니다.

    예수님을 단지 위대한 스승 정도로 생각하는 것은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목적이 인류에게 좋은 가르침을 주기 위해서라고 생각하는 것이죠. 그러나 루이스는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목적은 단지 좋은 어드바이스를 주기 위해서가 아니라,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 사건을 통해 굿 뉴스, 복음 사건을 일으키기 위해서라고 강조합니다.

    복음 - Good News

    그럼 굿 뉴스란 무엇일까요? 가령 서로 사이좋게 지내면 좋다는 것은 좋은 어드바이스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가 그런 좋은 말을 알고 있지만, 그렇게 살지 못하는 것입니다. 서로 사이좋게 지내면 좋다는 것을 알지만, 인류는 서로 미워하며 싸우고 있고, 그로 인해 구덩이에 빠져가고 있습니다. 그 구덩이에서 건져내기 위해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를 위해 죽으시고, 부활하시기 위해 이 땅에 오셨다는 것입니다. 단지 좋은 말을 전해주기 위해 오신 것이 아니라, 엄청난 일을 행하시기 위해 이 땅에 오신 것입니다. 말하자면 사건을 일으키기 위해 이 땅에 오셨다는 것입니다.

    기독교의 핵심 메시지를 복음이라고 합니다. 복음을 영어로 굿 뉴스라고 합니다. 기독교가 말하는 뉴스는 믿을 수 없는 엄청난 사건이 이 땅에 벌어졌다는 것입니다. 그 사건이란 바로 하나님이 사람이 되어 이 땅에 오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사람이 되어 이 땅에 오셨다니, 믿기 어렵죠? 하나님이 의로우신 하나님께서 의롭지 못한 죄인을 위해 죽으시기 위해 사람이 되셨다니, 있을 수 없는 일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기독교는 이러한 있을 수 없는 일이 있어야만 이 세상이 구원받을 수 있다고 가르칩니다. 루이스는 "이것이 기독교입니다"라고 이야기하며,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죽임을 당하셨고, 그 죽음이 우리의 죄를 씻어 주셨으며, 그가 죽음으로써 죽음의 세력이 힘을 잃었다고 말합니다. 죽음은 인간의 죄로 인해 이 땅에 들어왔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이 사망 권세를 무력화시켰다는 것입니다.

    기독교 신앙의 핵심을 한마디로 말하면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죽음 덕분에 우리가 다시 하나님께로 돌아갈 수 있게 되었다." 모든 기독교인은 이 기독교의 핵심을 믿지만, 더 나아가 이것을 한번 이해해보고 싶어합니다. 예수님의 죽음이 왜 이런 특별한 능력을 가졌을까? 어떻게 해서 그렇게 된 걸까? 그 사실을 이해해보고 싶은 것이죠. 여러 가지 설명과 이론이 존재합니다. 가장 대표적인 것은 이것입니다. 하나님이 정하신 법이 있는데, 죄를 지으면 인간은 죽어야 합니다. 그러나 인간이 죄에 대한 벌로 죽어 지옥에 가는 것을 안타깝게 여기신 하나님께서, 인간이 마땅히 받아야 할 벌을 예수님이 대신 받게 하심으로써 이제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인간은 지옥에 가지 않아도 되게끔 만들어 주셨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실 이 설명은 예수님의 죽음이 왜 그런 특별한 능력을 가졌는지에 대한 여러 이론들 중 하나일 뿐입니다. 루이스는 이 시점에서 한 가지 논리를 소개합니다. 교회에서 잘 듣지 못하는 흥미로운 이야기입니다. 루이스는 "예수님의 죽음이 왜 특별한 능력을 가졌는가?"라는 것을 설명해주는 이론들은 기독교의 본질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기독교는 예수님의 죽음이 그런 능력을 가졌다는 그 사실 자체가 본질이라는 것입니다. 그 사실이 왜 그런지 설명해주는 이론이나 설명은 부차적인 것입니다. 가령 인간은 밥을 먹으면 힘이 납니다. 이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왜 그런지 설명해주는 여러 이론들이 있지만, 그 이론들은 계속 업데이트되며, 완벽한 이론은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에 대한 완벽한 이론은 있을 수 없으며, 이론보다 중요한 것은 예수님의 죽음 자체가 엄청난 사건이었다는 그 사실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말합니다. "그리스도의 죽음은 인류 역사상 어느 지점에서 인류가 상상도 하지 못했던 무언가가 이 세상 바깥에서 이 세상 안으로 뚫고 들어온 사건이다. 눈에 보이지 않지만, 영적인 세계에서 천지개벽이 일어난 것이다. 혁명이 일어난 것이다. 천지창조보다 더 엄청난 사건이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 일어났다." 이 사건 자체가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루이스는 예수님의 죽음이 우리를 구원하는 능력이 있다는 그 사실이 중요하다고 강조하며, 이론은 부차적이라고 이야기한 다음, 자신이 선호하는 다른 이론을 소개합니다. 

    구원 = 하나님께로 돌아감 = 회개 = 항복

    그 이론은 다음과 같습니다. "구원"이라고 하면 다시 말해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돌아가는 것이 구원입니다. 하나님을 등지고 떠났던 인간이 하나님께 다시 돌아가는 것이 구원받는다는 말의 의미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 돌아간다는 말을 달리 표현하면 그것이 바로 회개입니다.

    여러분이 "회개"라는 말을 들으면, 눈물 콧물 흘리며 기도하는 장면이 떠오르실 것입니다. 하지만 회개는 단지 그런 모습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회개라는 말의 의미는 우리가 마음을 바꾸어 하나님께 돌아간다는 뜻입니다. 사실 회개하지 않고 하나님께 돌아간다는 말은 하나님께 돌아가지 않고 돌아간다는 말처럼 모순된 표현입니다. 회개한다는 것은 곧 하나님께 돌아간다는 의미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회개의 본질이 무엇일까요? 중요한 것은 회개의 본질이 사실 항복이라는 것입니다. 항복. 왜냐하면 인간은 단순히 개선이 필요한 불완전한 존재가 아니라, 무기를 내려놓아야 하는 반역자이기 때문입니다. 인간이 여기까지가 기독교 신앙에 입문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인이시고 왕이시며 중심이신데, 내가 그 자리를 차지하려 했다는 것입니다. 내가 주인이며, 내가 왕이며, 내가 중심이었습니다. 이런 죄의 본질을 깨달을 때, 인간은 내 안에 반역의 피가 흐르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이러한 인식을 가질 때 진정한 기독교적 인간관과 죄에 대한 사상을 가졌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회개는 단지 내가 지었던 죄에 대해 후회하거나 슬퍼하는 것 이상의 의미를 가집니다. 회개는 반역자라고 할 수 있는 인간이 내 몸과 영혼 안에 깊이 새겨진 고집과 자만과 죄를 도려내는 것입니다. 이는 마치 죽는 것 같은 경험입니다. 내가 죽어야 합니다. 내 뜻을 꺾고 내가 죽어야 합니다.





    에스라 1장 요약 / 포로들의 귀환길

    고레스가 이스라엘 민족이 고향으로 돌아가는 것을 허락하였고 사로잡혀간 백성들이 돌아옵니다.고레스가 여호와의 성전에 있는 그릇을 세스바살에게 주엇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에스라서 장별연구(1장) : 고레스 칙령

    ​I. 본문 이해와 질문

    1. ​고레스 왕이 내린 칙령(1-4절)

    바사 왕 고레스 원년에 온 나라에 칙령이 내려졌다(기원전 539년).
    '바사'(페르시아, Persia)는 바벨론에 이어 등장한 제국이다.
    바벨론 제국은 초대 왕인 느브갓네살이 기원전 562년에 죽은 뒤에 그를 이은 여러 왕들, 즉 에윌므로닥, 네르갈사레셀, 나보니두스 등이 즉위하지만, 급속하게 몰락하였다.
    특히 마지막 왕인 나보니두스는 우르와 하란의 달 신을 섬겼기 때문에, 그 당시 바벨론의 수호신인 마르두크(Marduk, 렘 50:2)를 섬기고 있던 백성들에게 원성을 사 멸망의 단초를 제공하였다.
    그는 또한 치세 후반기에 아들인 벨사살을 왕으로 세우고 자신은 섭정을 통해 바벨론을 통치하기도 하였다.

    이런 상황 속에서 등장한 인물이 고레스이다.
    '고레스'는 그의 할아버지 고레스 1세와 구분되는 고레스 2세로서, 부친인 캄비세스 1세를 이어 바사의 왕이 되었다.
    그는 서쪽으로 리디아까지, 동쪽으로 멀리 인도까지 영토를 확장하였다.
    이러한 바사의 팽창으로 위협을 느낀 바벨론은 고레스의 침략을 막기 위해 군사력을 정비하였지만, 기원전 539년 티그리스 강을 따라 진격한 고레스에 의해 멸망하였다.
    당시 상황에 대해 다니엘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그 날 밤에 갈대아 왕 벨사살이 죽임을 당하였고 메대 사람 다리오가 나라를 얻었는데 그때에 다리오는 육십이 세였더라"(단 5:30-31). 한편, 바사의 전성기 때에는 동쪽으로 인더스 강, 서쪽으로 이집트와 그리스 반도, 남쪽으로 티그리스 강, 북쪽으로 아르메니아 산맥과 카스피 해까지 거대 제국을 형성하였다.

    '태양'이라는 뜻을 가진 고레스(Cyrus)는 62세에 왕위에 올라 기원전 539년부터 529년까지 11년 동안 바사 제국을 통치하였다.
    따라서 고레스 원년은 기원전 539년을 가리킨다.

    그때 고레스 왕은 자신이 통치하는 온 나라에 칙령을 내렸는데, 그것은 공포와 조서의 두 가지 형태로 내려졌다.
    '공포'는 사자들의 음성을 통해 온 나라에 울려 퍼지는 것을, '조서'는 사자들이 전달한 문서화된 왕의 명령을 말한다.
    그가 내린 칙령에는 세 가지 내용이 담겨 있었다.

    첫째, 여호와께서 나에게 유다 예루살렘에 성전을 건축하라 명령하셨다(2절).
    둘째, 이스라엘 백성들은 유다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서 여호와의 성전을 건축하라(3절).
    셋째, 이스라엘 백성이 머물러 사는 지역의 사람들은 그들을 도와주고, 예루살렘에 세울 성전을 위해 예물을 기쁘게 드려라(4절).

    첫째 내용은, 칙령이 내려진 근원적인 배경을 담고 있다.
    그 칙령이 내려진 이유는 고레스 왕의 자발전인 의도에 의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명령에 따른 것이었다.
    여기에는 역사의 주인공이 제국의 왕이 아니라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이 담겨 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왜 그와 같은 명령을 내리셨던 것일까?
    그것은 바로 '예레미야의 입을 통하여 하신 말씀'을 이루게 하시기 위해서였다(1절).
    하나님은 이 일이 있기 전에 예레미야를 통해 이렇게 말씀(약속)하셨다. "이 민족들은 칠십 년 동안 바벨론의 왕을 섬기리라...칠십 년이 끝나면 내가 바벨론의 왕과 그의 나라와 갈대아인의 땅을 그 죄악으로 말미암아 벌하여 영원히 폐허가 되게 하되...바벨론에서 칠십 년이 차면 내가 너희를 돌보고 나의 선한 말을 너희에게 성취하여 너희를 이곳으로 돌아오게 하리라"(렘 25:11-12; 29:10).

    둘째 내용에는, 하나님의 명령에 대한 고레스의 순종이 들어 있다.
    그는 하나님의 명령을 무시하지 않고 순종함으로써, 이스라엘 백성들이 예루살렘으로 올라가 성전을 건축할 수 있는 길을 열어 주었다. 그가 이렇게 순종할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에 대한 올바른 인식과 그분의 음성 앞에서 겸손한 태도를 견지하였기 때문이다. 바로 이런 점 때문에 선지자 이사야는 그를 '기름 부음을 받은 자'라 하였다(사 44:27-28;45:1-5).

    셋째 내용에는, 앞선 둘째 내용을 구체적으로 실행에 옮길 수 있도록 하는 방안이 제시되어 있다.
    '남아 있는 백성'은 포로로 잡혀간 이스라엘 백성들을 가리키는데, 그들은 대부분 유프라테스 강 하류의 메소포타미아 평야 지대에 거주하고 있었고 더러는 페르시아 곳곳에 흩어져 살기도 하였다.
    왕은 그들과 함께 거주하는 곳 사람들에게 이스라엘 백성들이 예루살렘으로 돌아갈 때, 그리고 그곳에서 성전을 건축할 때 필요한 것들을 도와주라고 명령하였다.
    금과 은, 물건, 짐승, 예물 등과 같은 것이 없이 돌아가게 될 경우, 그들에게 예루살렘 귀환과 그 이후의 성전 건축은 그림의 떡이 아닐 수 없었다. 한편 자신들이 거주하는 곳 사람들로부터 금, 은, 물건, 짐승, 예물 등을 가지고 나오게 될 모습은, 아브라함이 애굽에서 나올 때의 상황(창 13;1-2), 이스라엘 백성들의 출애굽 상황(출 12:35-36), 블레셋에서 하나님의 언약궤가 수레에 실려 나올 때의 상황(삼상 6:4,8)과 유사하다.

    하나님은 왜 역사의 주인공이 되시는가?

    그 이유가 고레스 왕의 고백 속에 들어 있다.
    즉 그분이 하늘의 하나님, 참 신이시고, 또 세상 모든 나라를 자신이 지정한 왕에게 주고 명령하실 뿐만 아니라, 예루살렘에 계신 존재이시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하늘의 하나님'은 '하늘'이 상징하는 우주와 그 가운데 있는 만물을 창조하신 주인이 바로 하나님이라는 뜻이다.
    '참 신'은 '거짓된 신'과 대조되는 말이다.
    거짓은 그 안에 공허한 부재와 나쁨이라는 뜻을 내포하고 있기 때문에, 반대로 참은 그분의 실재하심과 선하심을 의미한다.
    '나라를 주신다'는 말은 그것에 대한 주도권이 세상의 왕들에게 있지 않고 하나님께 있다는 뜻으로, 역사에 주권적으로 개입하시는 그분의 속성을 들어 있다. 하나님의 이러한 속성은 모든 회중 앞에서 송축하였던 다윗의 고백 속에 들어 있기도 하다. "여호와여 위대하심과 권능과 영광과 승리와 위엄이 다 주께 속하였사오니 천지에 있는 것이 다 주의 것이로소이다 여호와여 주권도 주께 속하였사오니 주는 높으사 만물의 머리이심이니이다 부와 귀가 주께로 말미암고 또 주는 만물의 주재가 되사 손에 권세와 능력이 있사오니 모든 사람을 크게 하심과 강하게 하심이 주의 손에 있나이다"(대상 29:11-12). 또한 '예루살렘에 계신다"는 말은 그분이 하늘에 앉아 팔짱을 끼고 계시는 분이 아니라, 구체적으로 예루살렘에 거하면서 이스라엘 백성들과 함께하신다는 뜻이다. 그 계심을 직접적으로 나타내 보이신 증거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아들이시기도 하지만 친히 그분 자체이시기도 하다(눅 5:17-26;요 1:1,14;14:9).

    2. 이스라엘 백성들의 예루살렘 귀환(5-11절)

    고레스 왕의 칙령이 내려지자 그 칙령에 따라 먼저 이스라엘 백성들이 일어났다.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서 성전을 건축하기 위하여 일어난 사람들은, 유다와 베냐민, 즉 남 유다의 지도자 그룹인 족장들, 성직자 그룹인 제사장들과 레위인들, 그리고 하나님께 감동을 받은 모든 이들이다. 하나님께 감동을 받은 사람들이 지도자와 성직자 그룹 이외의 별도의 사람들을 가리키는 것처럼 보이지만, 원문에는 이들을 포함한 모든 사람을 가리키고 있다. 즉 성전을 건축하기 위해 일어난 사람들은 모두 하나님께 감동을 받고 자원하였다는 의미이다. 이것은 역으로 하나님께 감동을 받지 못한 사람들은 성전 건축을 위해 일어나지 않았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당시 유대인들은 메소포타미아에서 정착하면서 많은 재산도 축적하고 있었기 때문에, 자신들이 이미 구축한 삶의 터전을 떠나 황폐한 땅 예루살렘으로 돌아가지 않으려는 이들도 상당수 있었다(렘 29;4-7;겔 33:30-33). 그 결과 많은 유대인이 귀환을 거부하고, 오직 하나님께 감동을 받은 소수의 사람들인 49,897명만 1차로 예루살렘으로 되돌아갔다(2:64-65).

      성전 재건을 위하여 일어난 이스라엘 백성들과 함께 거주하던 사람들은, 고레스 왕이 내린 칙령의 내용을 그대로 이행하였다. 즉 그들은 은그릇과 금과 물품들과 짐승과 보물로 돕고 그 외에도 예물을 기쁘게 드렸는데, 이는 그 내용을 지시하고 있는 4절의 내용과 일치하고 있다. 여기에서 주목해야 할 내용은 그들이 모든 것을 '기쁘게' 드렸다는 점이다. 비록 왕의 명령에 따라 이행할 수밖에 없었지만 자신들이 그것을 원하지 않았다면 자원해서 드리지 않고 강압에 의해 어쩔 수 없이 드렸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기쁘게, 즉 자원해서 드렸다. 그들의 이런 태도에는 두 가지가 원인이 되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첫째,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들과 좋은 관계를 형성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성전 재건을 위해 일어났던 이들은 모두 하나님께 감동을 받았던 사람들이다. 따라서 하나님과의 좋은 관계는 이웃들과의 관계에도 긍정적으로 작용하였을 것이다. 둘째, 그 일이 하나님의 개입과 인도하심에 의해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고레스의 마음을 감동시켜 칙령을 내리게 하신 하나님은(1절), 동일한 방법으로 이스라엘 백성들과 함께 거주하던 사람들의 마음도 감동시키셨을 것이라고 쉽게 추측해 볼 수 있다. 그런 점에서 하나님은 후히 주시고 또 그것을 받아 누리게 하시는 일의 주체가 되시는 분이다(딤전 6:17).

      이스라엘 백성들을 돕는 일에 고레스 왕도 동참하였다. 그는 당시 창고지기인 미드르닷에게 명령하여 느부갓네살이 예루살렘에서 옮겨 자기 신들의 신당에 두었던 여호와의 성전 기명, 즉 성전에서 제사를 드릴 때 사용하였던 기구와 그릇을 꺼내어 유다 총독 세스바살에게 넘겨주었다. 이에 세스바살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예루살렘으로 데리고 갈 때 그것들을 다 가지고 갔다. 왕이 넘겨 준 그릇의 수효는 금 접시 30개, 은 접시 1,000개, 칼 29개, 금 대접 30개, 금 대접보다 못한 은 대접 410개, 그 밖의 그릇 1,000개였는데, 금과 은으로 된 그릇이 모두  5,400개였다. 여기에서 '접시'는 음식을 담거나 물품을 제공할 때 사용하던 그릇인데, 영역본에서는 이를 '큰 접시'(KJV, charger), '타원형의 큰 접시'(NKJV, platter), '쟁반'(NLT, tray) 등으로, 또 공동번역에서는 '대야'로 번역하고 있다. '대접'은 성전에서 사용하던 덮개가 있는 잔을 가리키는데, 영역본에는 '사발'(NIV, bowl), '물 대접'(NKJV, basin)으로 번역하고 있다. '칼'은 문자적으로 칼(knife)를 가리키지만, 70인역(LXX)에는 '기구'로, 영역본에는 '냄비'(NIV, pan), '향로'(RSV, censer), '복제품'(NASB, duplicate)으로 번역하고 있다. '칼'을 그릇으로 볼 경우 그릇은 도합 2,509개가 되는데, 이는 마지막에 제시한 합계 숫자 5,400개와 차이가 있다. 이런 차이 때문에 일부 주석가들은 당시 필사자들이 그 숫자를 잘못 계산하여 기록하였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하지만 2,509개라는 숫자는 당시 고레스 왕의 명령에 따라 가치 있는 것들만 특별히 계수한 것으로, 실제로 그것을 포함한 모든 그릇의 숫자가 5,400개였다고 보는 것이 더욱 타당해 보인다.

      한편 '창고지기'는 당시 고대 근동에서 국가의 중요한 물품을 관리하는 사람을 지칭할 때 사용하였던 용어로 보인다. 그래서 KJV, NIV 등의 영역본에는 이를 '보물 관리인'(treasurer)으로 번역하고 있다. 유다 총독인 '세스바살'은 문자적으로 '불의 숭배자'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는 이름이다. 이 사람이 누구였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일부 사람들은 그를 스룹바벨과 동일 인물로 보는가 하면(3:2), 또 다른 일부에서는 스룹바벨이 아닌 다른 인물로 추정하기도 한다. 그 가운데 전자로 보는 견해가 우세한데, 이는 이후부터 세스바살이라는 이름이 거의 등장하지 않고, 또 그토록 중요한 성전 기명들은 포로들을 인솔하는 총책임자에게 인계되었을 것이라는 추측에서 비롯된 것이다(1차로 포로 귀환을 인솔하였던 인물은 스룹바벨이다). 

    [질문] 7-11절에는 성전에서 사용되던 기명들이 바벨론의 신당에 있게 된 배경(7절), 그것이 세스바살에게 넘겨진 과정(8절), 그리고 기명들의 정확한 숫자를 기술하고 있다(9-11절). 이와 같은 내용을 에스라가 이토록 구체적으로 기록한 의도는 어디에 있었다고 생각하는가?

    특히 기명들의 종류와 숫자를 구체적으로 적고 있는 9-11절은 어떤 면에서 기명들의 합계만 기록하고 생략해도 되는 부분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세세하게 소개하고 있는 이유는 그것이 주는 의미가 심대하기 때문이다. 이웃 나라를 정복하고 그곳 신당에서 사용하던 물품들을 자신들이 섬기는 신당에 보관하는 일은 고대 중근동의 일반적 관습이었다. 이를 통하여 자신들이 섬기는 신들의 우월성을 천하에 과시하고 피정복민들에게는 수치심을 안겨 주었다. 따라서 여호와의 성전에 있던 기명들이 바벨론의 신당에 있게 되었다는 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열등감과 수치심을 동시에 안겨주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 상황 속에서 기명들이 다시 예루살렘으로 옮겨진다는 사실은 열등감을 우월감으로, 수치심을 자부심으로 회복하는 전환점이 된다. 에스라는 기명들의 종류와 숫자를 구체적으로 밝힘으로써 바로 그런 사실을 강조하였던 것이다.

      상징적인 면에서 이처럼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던 기명들은, 실제적인 면에서도 간과할 수 없는 중요성을 지니고 있었다. 만약 이스라엘 백성들이 예루살렘으로 돌아와 성전을 재건하더라도 기명들이 없다면 하나님께 제사를 드릴 수 없다. 그 많은 것을 새롭게 만들기 위해서는 막대한 비용과 시간이 소요되는데, 느브갓네살의 침략으로 폐허가 되어 버린 예루살렘의 상황을 고려해 볼 때 그것을 모두를 다시 제작한다는 일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므로 기명들을 귀환할 때 반드시 가져가야 할 물품이었다. 에스라는 이를 놓치지 않고 구체적으로 밝힘으로써 성전 재건 이후에 새로운 기명들을 제작하지 않고 곧바로 하나님께 제사드릴 수 있다는 사실의 중요성 강조하였던 것이다.



    II. 메시지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가(에스라 1:1-11)

    ​1. 에스라서 개관

    에스라서는 학사 겸 제사장인 '에스라'가 기록한 책입니다. 바사(Persia)의 초대 왕 '고레스'가 즉위 원년에 내린 칙령(고레스 칙령)에 따라, 느브갓네살 왕 때 바벨론으로 잡혀 온 남 유다의 백성들이 예루살렘으로 다시 돌아오게 됩니다. 이와 같은 포로 귀환은 총 세 차례 이루어지는데, 1차는 기원전 537년 '스룹바벨'의 인솔 아래 5만 명 정도(종들까지 포함)가 돌아와 온갖 방해를 극복하고 마침내 기원전 515년 제2의 성전(스룹바벨 성전)을 완성합니다. 제2의 성전 건축은 586년 남 유다가 멸망한 이후 만 70년 만에 이루어진 것입니다. 2차 포로 귀환은 1차 포로 귀한 이후 80년이 지난 기원전 458년에 이루어지는데, 이때 '에스라'가 1,754명을 인솔하여 돌아옵니다. 그리고 3차 포로 귀환은 기원전 444년 선지자 '느헤미야'의 인솔 아래 이루어집니다.

      ​오늘 우리가 보고 있는 에스라서는 1, 2차 포로 귀환 때 있었던 사건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총 10장으로 이루어진 에스라서는, 1-6장에서 1차 포로 귀환 과정과 성전 건축에 대한 이야기를 담고 있고, 7-10장에서 2차로 귀환한 에스라에 의해 종교개혁과 대부흥 운동을 소개하고 있습니다(아래 도표 참조).

    2. 약속을 지키시는 하나님

    ​오늘 본문 말씀은 고레스 왕이 내린 조서, 즉 '고레스 칙령'으로부터 시작되고 있습니다. "바사 왕 고레스 원년에 여호와께서 예레미야의 입을 통하여 하신 말씀을 이루게 하시려고 바사 왕 고레스의 마음을 감동시키시매 그가 온 나라에 공포도 하고 조서도 내려 이르되"(1절). 바사, 즉 페르시아의 왕 고레스가 원년에 온 나라에 칙령을 내리게 된 배경 속에는, 역사를 주관하시는 하나님의 섭리가 들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섭리'란 하나님께서 지혜와 사랑으로 우주에서 발생하는 모든 일들을 돌보고 이끄시는 통치를 말합니다. 다시 말해서, 고레스 왕이 칙령을 내리게 된 것은 그의 의지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그의 마음을 감동시켜서 내린 것으로, 여기에는 특별히 예레미야의 입을 통하여 하신 약속을 지키시기 위한 하나님의 의지가 반영되어 있습니다.

      ​​유다의 마지막 왕인 시드기야 왕 때, 하나님은 예레미야를 통해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간 유다 백성들에게 이렇게 약속하신 적이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바벨론에서 칠십 년이 차면 내가 너희를 돌보고 나의 선한 말을 너희에게 성취하여 너희를 이곳으로 돌아오게 하리라"(렘 29:10). 하나님은 이 약속을 잊지 않으시고 또 약속한 것을 성취하시기 위하여, 고레스 왕이 칙령을 내려 유다 백성들이 예루살렘으로 돌아갈 길을 열어 주신 것입니다(3절).

      ​바벨론에 의해 멸망한 남 유다가, 더구나 바벨론에서 70년 동안 포로 생활을 하던 그들이, 다시 예루살렘으로 돌아오게 된 사건은 인류 역사에서 보기 드문 사건입니다. 우리나라가 일제에 의해 주권을 빼앗긴 후 해방이 되기까지, 또 수많은 강제 노동자들이 다시 조국으로 돌아오기까지 36년이라는 시간이 걸렸습니다. 불가능할 것처럼 보였던 그 일도 36년이나 걸렸는데, 바벨론에 의해 예루살렘이 완전히 파괴되고 또 포로로 끌려간 백성들이 다시 예루살렘으로 돌아온 사건은 그것의 두 배나 되는 긴 시간대입니다. 이 사건은 약속을 잊지 않으시고 성취하시는 하나님의 역사가 아니고서는 결코 이루어질 수 없는 일입니다.

      ​이 사건을 통해 우리는 역사의 주인이신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를 분명하게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약속하시고 그 약속을 반드시 이루시는 분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에는 거짓말이나 후회가 들어 있지 않을 뿐만 아니라, 자신이 하신 약속의 말씀에 대해서는 잊지 않고 반드시 실행하는 분이십니다. 그래서 유프라테스 강가의 술사인 '발람'도 하나님에 대해 이렇게 선언하였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사람이 아니시니 거짓말을 하지 않으시고 인생이 아니시니 후회가 없으시도다 어찌 그 말씀하신 바를 행하지 않으시며 하신 말씀을 실행하지 않으시랴"(민 23:19).

      ​그러므로 우리는 이 세상 그 어떤 것보다 하나님의 약속을 굳게 믿어야 하고, 그 약속에 아멘 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합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얼마든지 그리스도 안에서 예가 되니 그런즉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아멘 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되느니라"(고후 1:20). 우리가 이렇게 하나님의 약속에 대해 믿음으로 '아멘'하고 반응할 때, 70년 동안의 포로 생활에서 돌아온 유다 백성들처럼, 우리의 삶 가운데 불가능한 것처럼 보이는 일들을 가능한 것으로 바꾸시는 하나님의 역사와 섭리를 생생하게 경험할 수 있습니다.

    ​​3. 사명을 주시는 하나님

    ​오늘 본문에서 첫 번째로 볼 수 있는 하나님의 성품이 이렇게 '약속을 지키시는 분'이라면, 두 번째로 볼 수 있는 그분의 성품은 '우리에게 사명을 주시는 분'이라는 사실입니다. '고레스 칙령'으로 바벨론에서 예루살렘으로 돌아가게 될 사람들은, 포로의 신분에서 자유인의 신분으로 바뀌게 됩니다. 그렇게 자유인이 되어 에루살렘으로 돌아가게 될 그들에게 하나님이 주신 것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사명'입니다.

      ​​2-3절 말씀을 다시 읽어 보겠습니다. "바사 왕 고레스는 말하노니 하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세상 모든 나라를 내게 주셨고 나에게 명령하사 유다 예루살렘에 성전을 건축하라 하셨나니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참 신이시라 너희 중에 그의 백성 된 자는 다 유다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서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의 성전을 건축하라 그는 예루살렘에 계신 하나님이시라". 하나님이 왕에게 명령하신 것이 무엇입니까? 첫째는, 하나님의 백성 된 자는 다 유다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라는 것입니다. 둘째는, 그곳으로 올라가 놀고먹지 말고 하나님 여호와의 성전을 건축하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남아 있는 백성들'로 하여금, 유다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여호와의 성전을 건축하게 하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이전처럼 하나님을 버리고 자신들이 자기 인생의 주인이 되어 살던 삶에서 돌이켜서, 이제부터 하나님을 그들 삶의 한가운데에 주인으로 모시고 하나님을 위해 살고 또 그분과 함께 살라고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그러한 삶이 하나님께 영광이 되고 그들에게도 크나큰 축복이 되기 때문에, 자신들에게 주어진 자유를 자신을 위해 자기 마음대로 사는 데에 쓰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초점을 맞춘 삶을 살도록 하기 위하여 성전 재건의 사명을 주신 것입니다.

      ​약속하시고 그것을 지키시는 하나님은, 유다의 남은 자들에게 예루살렘으로 올라가 성전을 건축하라는 사명을 주신 분입니다. 그 하나님은 지금 우리 시대에 와서도 변치 않고 동일하신 분입니다. 하나님은 태초부터 유다가 멸망한 이후까지 수도 없이 메시아(그리스도)를 약속해 주셨고, 그 약속대로 메시아이신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서 십자가에서 우리 죄를 대속하게 하시고 죽은 자 가운데서 그분을 다시 살리셨습니다(고전 15:3-4). 하나님은 이것을 통해 예수님을 산 자와 죽은 자의 주가 되게 하셨습니다(롬 14:9), 이제 예수님을 주님으로 믿는 우리에게 유다의 남은 자들처럼 사명을 주셨습니다. 그 사명이 무엇입니까? 바로 교회를 세우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사명인 교회를 건강하게 세우기 위해서는 그 전제가 되는 두 가지 조건이 갖추어져 있어야 합니다. 오늘 본문 속에 두 가지 조건이 모두 제시되어 있는데, 그것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성전 건축을 위해 몇몇 사람들만 올라가라고 하셨습니까? 아닙니다. "그의 백성 된 자는 다 유다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라"고 하셨습니다(3절). 만약 성전 건축을 위해 몇몇 사람들만 예루살렘으로 올라갔다면, 성전은 결코 예루살렘 한가운데에 세워지지 못하였을 것입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는 몇몇 사람만 참여하여 세울 수 있는 구조물이 아닙니다. 머리 되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유기적으로 한 몸을 이룬 것이 교회이기 때문에, 교회를 건강하고 온전하게 세우기 위해서는 한 사람도 빠짐없이 모두 다 참여해야 합니다. 나 혼자 빠져도 괜찮겠지 하고 생각하는 순간 교회는 병들고 망가지기 시작합니다.

      ​교회를 세우기 위해 모든 사람이 다 참여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 일에 참여하는 사람들의 마음자세에 따라 교회의 모습이 좌우되기 때문에, 우리는 이것도 결코 놓쳐서는 안 됩니다. 5절에 보면 하나님이 고레스 왕을 통해 남은 자들에게 성전 건축의 사명을 주셨을 때, "그 마음이 하나님께 감동을 받고 올라가서 예루살렘에 여호와의 성전을 건축하고자 하는 자가 다 일어났다"고 에스라는 기록하고 있습니다. 성전 재건은 이렇게 하나님께 감동을 받고 자원하는 사람들에 의해서 이루어졌던 것입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 감동을 받고 자원하는 마음으로 모든 사람이 교회를 세워나갈 때, 교회는 그때서야 비로소 교회다운 교회의 모습을 띨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감동도 받지 않고 또 억지로 교회 세우는 일에 참여한다면, 그것은 그 자체로 교회를 건강하게 세우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교회를 허물고 병들게 할 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사명인 교회를 건강하게 세우기 위하여 모든 사람이 다 일어나야 하고, 또 하나님의 감동을 받아 자원하는 마음으로 임해야 합니다. 이 두 가지 조건이 우리 안에 충족될 때, 우리 교회는 비로소 주님이 기뻐하는 건강한 교회로 세워질 수 있습니다. 이 조건이 우리 안에서 온전히 갖추어지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4. 자원까지 주시는 하나님

    ​하나님은 약속을 지키시고 그 약속 안에 소명을 주실 뿐만 아니라, 그 소명을 이룰 수 있는 '자원까지 주시는 분'입니다. 이것이 오늘 본문이 보여 주는 하나님의 세 번째 성품입니다. 하나님은 유다의 남은 백성들이 유다 예루살렘으로 올라가 성전을 건축하게 하실 때, 그들을 빈손으로 보내시지 않았습니다. 성전 건축과 생활에 필요한 모든 자원을 그들의 손에 쥐어 주셨습니다. 6절 말씀을 다같이 읽어 보도록 하겠습니다. "그 사면 사람들이 은그릇과 금과 물품들과 짐승과 보물로 돕고 그 외에도 예물을 기쁘게 드렸더라'. 하나님께서는 유다 백성들이 예루살렘으로 돌아가 살게 될 때, 생활에 필요한 모든 것을 채워 주시되 이웃의 물품을 강탈해서 취하게 하지 않고, 그 이웃들이 자발적으로 기쁘게 돕고 드리도록 하셨습니다. 또한 7-11절에 보면, 옛적에 느부갓네살이 예루살렘에서 옮겨다가 자기 신들의 신당에 두었던 성전 그릇을 고레스 왕이 창고지기인 미드르닷을 통해 유다 백성들에게 내 주는데, 그 수효가 5,400개라고 구체적으로 적고 있습니다. 우리 하나님은 바로 이런 분이십니다. 소명만 달랑 넘겨주면서 그 뒷일을 책임지지 않는 분이 아니라, 소명을 주실 때 그 소명을 이루는 데 필요한 모든 자원을 구체적으로 그 수효까지 세어 가면서 채워 주시는 분이 바로 우리 하나님이십니다.

    ​  ​그 하나님은 오늘날 우리에게도 동일하게 함께하시는 분일까요? 그분은 지금도 그때와 동일하게 우리와 함께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아니 오히려 그때보다 소명을 이루는 데 필요한 자원을 더욱 차고 넘치도록 주시는 분입니다. 하나님이시기도 한 예수님이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으라"는 사명을 주실 때, 우리에게 약속하신 것이 무엇입니까?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받으신 예수님께서 세상 끝 날까지 우리와 항상 함께하시겠고 약속하셨습니다(마 28:19-20). 다시 말해서 그 사명을 받은 우리는 세상 끝 날까지 함께하시는 예수님을 통해 그 사명을 이룰 수 있는 자원까지 통째로 받은 것입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우리들에게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는 소명을 주실 때, 우리의 일상생활에 필요한 모든 것, 즉 먹고 마시고 입는 모든 것도 함께 채워 주신다고 약속하셨습니다(마 6:33).

    ​5.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우리

    ​이제 우리는 오늘 본문 말씀을 통해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알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후회 없는 약속을 하시고 그 약속을 반드시 지키시는 분입니다. 약속을 지키실 때 소명과 함께 그 소명을 이룰 수 있는 모든 자원까지 구체적으로 주시는 분이 바로 우리의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이 이것을 우리에게 알게 하신 이유가 어디에 있을까요? 그 이유는 바로 약속을 반드시 성취하시는 하나님을 믿고, 그분이 손수 우리 손에 쥐어 주신 자원이신 예수님을, 부활하셔서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받으신 예수님을 주님(주인)으로 굳게 붙잡고, 우리에게 맡겨 주신 소명인 교회를 세우는 일에 모두 다 자원하여 힘쓰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선하신 하나님의 뜻이 오늘 우리 가운데 온전히 이루어지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바랍니다.


    에스라 2장 요약 / 귀환 포로들의 명단

    포로생활을 마치고 돌아온 사람들에 대해서 기록,포로로 잡혀서 돌아온 사람들의 이름과 가문과 숫자에 대해,돌아온 무리의 수는 42,360명이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회중 : 42,360명
    노비 : 7,337명

    에스라 3장 요약 / 성전 기초를 놓다

    귀향 7개월만에 제단을 쌓고서 번제를 드렸으며 초막절을 지켰으며 귀향 2년 2개월부터 성전을 짓기 시작하였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에스라 4장 요약 / 사마리아인들의 훼방

    유다의 대적들이 성너전의 건축을 함께하자고 제안하지만 스룹바겔이 거절합니다.
    대적들이 성전의 건축을 방해, 페르시아 왕에게 성전 건축의 부당합을 고발합니다.
    페르시아 왕의 명령으로 성전 건축이 중단되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5월 24일(토) 에스라 1-4장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하늘의 신(1:2)

    바사고레스는 말하노니 하늘의 신 여호와께서 세상 만국으로 내게 주셨고 나를 명하사 유다 예루살렘에 전을 건축하라.
    This is what Cyrus king of Persia says: " 'The LORD, the God of heaven, has given me all the kingdoms of the earth and he has appointed me to build a temple for him at Jerusalem in Judah.

    바사(페르시아) 왕 고레스는 포로가 된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하여 "하늘의 신 여호와께서" 라고 선포합니다.

    당시 바사의 종교는 이원론적 신관(神觀)을 갖고 있었습니다.

    첫째는 아리만(Ahriman)
    흑암을 다스리는 신

    둘째는 오르무즈(Ormuzed)
    광명을 다스리는 신
     
    그런데 바사 왕 고레스는 하늘의 신 여호와께서 세상 만국으로 내게 주셨고 나를 명하사 유다 예루살렘에 전을 건축하라고 하셨다고 합니다.

    고레스 왕의 이와 같은 선포의 배경에는 두 가지 이유가 있다고 하겠습니다.

    첫째는 선지자 이사야의 예언 때문(사 45:1. 44:28).

    "나 여호와는 나의 기름 받은 고레스의 오른손을 잡고 열국으로 그 앞에 항복하게 하며 열왕의 허리를 풀며 성 문을 그 앞에 열어서 닫지 못하게 하리라 내가 고레스에게 이르기를."

    "고레스에 대하여는 이르기를 그는 나의 목자라 나의 모든 기쁨을 성취하리라 하며 예루살렘에 대하여는 이르기를 중건되리라 하며 성전에 대하여는 이르기를 네 기초가 세움이 되리라 하는 자니라."

    둘째는 포로가 된 유대 백성들의 환심을 얻기 위하여

    포로가 된 유대인들은 고향 예루살렘 성전에서 제사를 하던 그 시절이 매우 그리웠습니다.
    고레스 왕은 유대인들의 이와 같은 마음을 잘 알았기에 그들을 예루살렘으로 보내며 가서 성전을 재건하라고 선포한 것입니다.

    이러한 역사적인 배경을 생각할 때 21대 대통령 선거는 매우 중요합니다.
    누가 대통령이 되느냐 하는 문제가 아니라 자유대한민국이란 체제를 계속 유지하느냐?
    아니면 조선인민민주의 체제로 전환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내가 선택한 것에 의해서 미래가 결정될 것입니다.
    따라서 선택에 대한 책임은 내가 감당해야 합니다.
    나이가 많은 사람들은 더러운 꼴을 못 볼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다음 세대들은 한번도 경험하지 못한 이상한 세상에서 절망적인 삶을 살아야 할 것입니다.

    내가 좋아하는 사람을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싫어할지라도 자유대한민국의 미래를 생각한다면 주조건 김문수를 선택해야 합니다.
    나라를 사랑하고 지키는데 무슨 조건이 필요합니까?
    만일 나라가 무너지면 그 모든 조건은 버려야 할 더러운 휴지조각과 같습니다.

    지금은 이재명이냐?
    무조건 김문수이냐?

    믿음의 사람들은 정신을 차리고 분별의 영을 기도해야 합니다.
    나라와 민족을 위한 올바른 사람을 선택합시다.
    후손들을 위하여 우리가 지금껏 누렸던 것보다 더 좋은 것을 누릴 수 있도록 희생합시다.
    내 마음에는 드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 마음에 드는 사람을 세워야 하겠습니다.

     

    유대인들의 마음을 사로잡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고레스는 오르무즈드 대신 여호와라고 함으로써, 피정복민이었던 이스라엘 백성들을 회유하려고 했습니다.
    세상 만국으로 내게 주셨다고 말한 것은 분명치는 않으나 고레스는 다니엘의 영향을 받아 자신에게 엄청난 승리가 주어진 것을 이사야 45:1 의 예언을 성취시키기 위한 여호와의 섭리로 이해했을 것입니다. (Rawlinson).
    이 같은 고레스의 생각은, 그 당시의 페르시아인들이 공통적으로 지녔던 신관(神觀)과 결코 무관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하늘의 신' 오르무즈드는 세상의 왕들에게 권세를 주는 존재로 인식되고 있었습니다.

     따라서 그 당시 고레스는 여호와에 대한 참 지식을 소유하지는 못했으며 다만 자신의 민족이 공통적으로 갖고 있던 신관에 따라 여호와를 이해했을 뿐입니다.
    또 유다에 있는 예루살렘에 그의 성전을 지으라고 명하셨다고 말합니다.
    개역 성경에는 생략되어 있으나, 히브리 원문에는 나를 명하사 앞에 대명사 `그가'에 해당되는 `후'(*)가 있다는 점에서 이 구절은 매우 강조적인 표현입니다(요 10:1).
    한편 `명하사'(파카드)는 `위임하다' 혹은 `임명하다'의 의미로 이해됩니다(창 39:4; 41:34; 레 6:4; 렘 40:11).
    따라서 본 구절은 고레스가 스스로를 여호와의 대리자로 임명받은 자라고 인식하고 있었음을 보여줍니다.
    그가 이러한 인식을 갖게 된 것은 다니엘의 영향이 일조(日照)를 했다고 볼 수 있으나, 궁극적으로는 하나님이 그를 강권적으로 감동시키신 결과였습니다(1절 주석 참조).
    `유다'는 고레스 당시에 페르시아의 여러 `도'(Province) 중의 하나로서 회복되지 않았습니다.
    따라서 여기의 `유다'는 옛적에 일개 국가로 존립했던 지역으로서의 유다로 이해함이 무난합니다(Williamson).
    그렇다고 본다면 고레스가 굳이 `유다' 라는 호칭을 여기서 사용한 것은 그 지역이 대적에게 멸망되었던 슬픈 역사를 상기시키려는 의도에 따른 것입니다.
    `예루살렘'도 그 당시에는 여전히 폐허로 남아 있었습니다.

    고레스에게 있어서 다른 민족들의 성전이나 제단 등을 복구시켜 주는 일은 주된 통치 정책 중의 하나였습니다(Kidner).
    그의 다신론 사상은 근래에 발견된 한 비문을 통해서 밝혀졌습니다.
    이에 따르면 그는 바벨론의 주신(主神)이 그 백성들에 의하여 섬겨질 수 있도록 여러 가지 배려를 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는 말둑(Marduk) 이외의 다른 신들, 즉 `벨'과 `느보'에 대해서도 그렇게 했으며, 백성들로 하여금 그 신들에게 자신을 위하여 기도하도록 부탁했다고 합니다(Kidner).
    그러나 우리는 고레스가 여호와의 전을 재건할 필요성을 가졌던 사실을 다만 그의 일관된 통치 정책의 결과로서만 보아서는 안 될 것입니다.
    즉, 여기에는 하나님의 주도적인 섭리가 개재되어 있었고 고레스는 적어도 이사야 44:28의 예언이 자신에 대한 것으로 알고 그것에 대해 순종했을 수 있습니다(Schultz).

    "고레스에 대하여는 이르기를 그는 나의 목자라 나의 모든 기쁨을 성취하리라 하며 예루살렘에 대하여는 이르기를 중건되리라 하며 성전에 대하여는 이르기를 네 기초가 세움이 되리라 하는 자니라."




    바사왕국

    포로회복기
    (페르시아 제국)

    1. 페르시아의 영광과 쇠퇴

    바사는 인더스 티그리스 강 사이의 이란 고원에 본거지를 두었다. BC1500년경 아리안 족이라 하는 인도, 유럽 족이 이곳에 살고 있었다. 이 아리안 족은 두 갈래로 나누어지는데 하나는 인도 쪽으로 다른 하나는 서쪽의 비옥한 초생 달 지역에 이르렀는데 이곳에서 메대와 바사의 두 왕국이 일어났다. 메데인은 그 땅의 북서부를 차지하고 바사는 남부지역을 차지하였다. 메대는 BC700년경에 대국을 이루고 BC 612년 시악사레스 왕은 바벨론의 느부갓네살과 연합하여 앗수르의 수도 니느웨를 멸망시켰다.

    바사 족은 남하하여 엘람과 동쪽 지대를 점령하였으나 BC65O년경에는 앗수르의 앗수르바니팔에 의해 파멸되었다. 처음에는 메데의 세력이 더 강해서 바사를 지배했지만 고레스 왕 이후로는 페르시아가 패권을 잡게 되었다.

    고레스는 BC550년에 반란 중에 있던 메데를 제압하고 부친과 궁중정략 결혼으로 속국이 아닌 연합국의 성격을 갖게 되었다(에1:19, 단6:8) 소아시아 리디아왕국(BC546). 바벨론(BC539)을 정복함으로써 바사 최대 세계 최강대국으로 세웠다.

    바벨론 무너뜨릴 당시에는 메디아인 세력이 더 컸다. 다니엘 5:31에는 바벨론 접수한 왕을“메디아인 다리오(고레스의 삼촌)”라 말하고 있다. 이때 바벨론을 무너뜨린 실질적인 우두머리는 고레스였다. 또 바벨론의 포로가 되었던 유다민족과 다른 민족들에게 해방령을 내렸다.(BC536년 스1:1-5)

    페르시아 제국이 절정에 이르렀을 때에는(다리오1세 때부터) 인도에서 그리스 카스피 해에서 홍해와 아라비아 바다에 이르는 거대한 제국이 되었다. 다리오1세(다리오대왕)는 페르시아의 지경을 넓혔을 뿐 아니라 광활한 영토를 능숙하게 다스리는 행정가로도 유명하다. 그는 수산과 페르세폴리스를 건설했는데 이 두 도시에 세워진 궁전들은 고대 페르시아의 웅대함을 잘 나타낸다. 수산은 에스더서의 배경도시이다. 이곳의 궁전은 베벨론 양식을 따랐다. 페르세폴리스는 알렉산더 대왕에 의해 파괴되었으며 수산은 더 오랫동안 존속하다가 몽골군에 의해 파괴되었다.

    2. 성경에 등장하는 페르시아 왕들

    1. 다리오(BC539-537)

    메데인이며 고레스 외삼촌이다. 고레스가 바벨론 정복당시 정복 왕국의 초대 왕이 되었 다(BC539). 성경에서 다리오에 대한 기사는 단 6장에 나옴.

    2. 고레스(BC536-529)

    고레스는 다리오 다음에 왕이 되어(BC538) 그의 왕조를 이어나간다(아케메네스왕조).

    바벨론 정복하기 전 BC559년 바사의 왕이었으며 다리오가 죽은 후 BC536년에 새롭게 왕으로 등장한다. 성경에서는 이때를 고레스 원년으로 말한다(스1:1). 고레스는 왕이 되자 바벨론에 사로잡혀갔던 유다의 포로들에게 귀환하라는 칙령을 내렸는데 이는 예레미아에게 임한 하나님의 말씀을 이루기 위함이었다.(렘29:10, 스1:2-3)

    •유다포로들 귀환

    •바벨론 정복 후에는 바벨론 제국의 계승자로 자신을 제시함(스5:13)

    •세계사에는 고레스 2세 또는 고레스대왕으로 알려져 있다.

    3. 아하수에로(BC529-521) - 캄비세스

    유대에 1차로 귀환한 여호수아와 스룹바벨 인도 하에 진행되던 성전 공사를 그 땅의 이방인들이 방해 했을 당시의 페르시아 왕이다(스4:6)

    •세계사에서 캄비세스로 나옴.

    * 애굽까지 정복하고 귀국길에 죽는다(BC525년)

    4. 아닥사스다(BC521)= 아닥세스세스

    세계사에서 가짜 스메르데스로 나옴(마기승 가우마타). 캄비세스의 동생 스메르데스를 사칭하여 반란으로 왕이 되었다. 유대성전공사의 방해자들은 이 왕 때에도 방해 편지 보냄(스4:7-23) 스메르데스는 2개월 만에 귀족들에게 암살당한다.

    5. 다리오(BC521-485)=다리오 1세=다리우스1세=다리오대왕=다리우스 히스타페스

    다리오가 귀족들의 추대로 왕이 되었다. 다리오1세는 페르시아의 영광의 극치를 보여주기도 하였으나 동시에 페르시아의 쇠퇴의 길을 걸었다.

    •고레스 칙령에 따라 성전 건축 승인

    •다리오 때에 성전이 완공된다(스6:1-15). (다리오, 크세르크세스 1세 → 505년에 공동 통치)

    •인도북서부까지 정벌, 소아시아 정벌 - 소아시아에서 살고 있던 이오니아인들을 일으킨 발란을 진압(BC499-493)

    •그리스 본토 침략하려다 마라톤 전쟁에서 패함(BC491년)

    6. 아하수에로(BC485-465) - 단독통치

    •크세르크세스 1세

    •그리스 침략하려다 즉위 7년 째 되던 해 살라미스 해전에서 패한다.

    •이 왕이 에스더서의 아하수에로 왕이다.

    7. 아닥사스다 = 아닥세르세스(BC465-423)

    •세계사에서 아닥세르세스1세로 불림 = 롱기마누스라고도 불림

    •에스라, 느헤미야 귀환시킨 왕(스7장, 느2장)

    어머니 : 폐위 당한 와스디, 나중에 에스더가 어머니 역할 함.

    8. 크세르크세스 2세(423)

    9.다리오2세(423-404)

    10.아닥사스다2세(404-358)

    11.아닥사스다3세(358-338)

    12.다리오3세(338-330)

    330년 다리오 3세가 마케도니아 알렉산더 대왕에게 알벨라에서 대패한 후 그의 부하에게 죽임을 당해 아케메네스 왕조인 페르시아 역사 끝나고 헬라 제국시대 시작


    바벨론, 메대- 바사(페르시아)의 주요 왕들

    바벨론제국의 주요 왕들

    1. 나보폴라살과 느부갓네살

    신바벨론 제국의 왕들

    나보폴라살은 BC625년에 바벨론 왕이 되면서 갈데아 왕조를 세운다. 그는 앗수르 군대를 패배시킴으 로(BC609년) 대제국의 주인이 된다. 그는 일찍이 통치 초기에 왕궁수리와 더불어 아들 느부갓네 살에게 왕권을 선포. 이 둘은 앗수르 왕이 하란에서 항복하던 시기에 함께 있었고, 여기서 나보폴 라살은 바벨론으로 갔고, 느부갓네살은 3개월 동안 성을 약탈, 불 지르면서 전쟁의 선봉에 섰다.

    이때 앗수르 멸망과 더불어 이집트 왕 바로 느고는 자기의 세력을 위해 갈그미스로 올라와 느부갓 네살과 전쟁을 하게 되는데, 이 과정에서 유다 왕 요시아가 바로 느고와 싸우러 나갔다가 므깃도에 서 죽게 된다.(대하 35:20-24) 이로 인해, 유다는 잠시 이집트의 영향아래 들어가게 되며, 바로 느고는 요시아 뒤를 이은 여호아하스를 3개월 만에 폐위시켜 이집트로 잡아가고, 그의 형제 여호야 김(=엘리야김)을 왕위에 앉힌다.(대하 36:1-4)

    2. 바벨론의 왕성(BC605-562년)

    초대 왕 나보폴라살의 뒤를 이은 그 아들 느부갓네살은 다니엘이 예언한 금 머리처럼 그의 43년 간의 통치기간은 황금시기를 이루었다. 그리고 이집트의 세력을 시리아와 팔레스틴에서 일소해 버리고 오리엔트 상업의 이권을 차지하였다. 이때의 유다도 이집트의 영향 아래 있다가 바벨론으로 넘어가, 마침내 느부갓네살에게 멸망하여 수많은 백성들이 세 차례에 걸쳐 유배되었다.

    포로[예루살렘에서 바벨론으로]

    북이스라엘과 남유다의 포로생활

    1) BC. 585년 : 메데인과 리디아인 사이에 휴전을 중재함

    2) 두로 13년간 포위

    3) BC. 568년 이집트 침략

    바벨론을 1세기도 못되어 당시 세계 제일의 강대국으로 성장시킨 느부갓네살은, 군소국가의 정복과 상업독점으로부터 들어오는 막강한 재정으로 제국을 번영으로 이끌었다. 당시 느부갓네살은 수도인 바벨론에 신전과 제단을 쌓았는데, 신들의 여왕인 이시타르를 위한 제단을 180곳에 세웠으며, 고대의 7대 불가사의의 하나인 공중정원을 세우기도 했다.

    3. 느부갓네살과 예루살렘 파괴(BC605-262년, 43년간 통치)

    갈그미스 전투는 느부갓네살이 이집트 세력을 꺾고 제국의 영토를 확장하는 중요한 전쟁이었다. 이 대규모적인 전쟁에서 이집트는 크게 패배.(BC. 605) 이 과정에서 느부갓네살은 예루살렘으로 진군해 여호야김을 굴복시키고 백성 중 일부를 포로로 잡아간다. 이때 선지자 다니엘도 잡혀간다. 이때부터 공식적인 유대인들의 국가는 더 이상 없게 되며, 이것이 예레미야 예언에 따른 “황폐함” 이다(렘 25:11). 느부갓네살은 고대 바벨론을 위대하게 재건했으며, 43년간 통치하다가 BC562년에 생을 마감하였다.

    4. 느부갓네살 이후의 왕들과 바벨론 멸망

    (1) 에윌므로닥(렘 52:31-34, 왕하 25:27-30)

    ① 유다 왕 여호야긴을 석방시켜준 왕

    ② 2년을 치리한 후 느부갓네살 사위 네리그릿살의 주축이 된 모반자들에게 죽임당함.

    (2) 네리그릿살

    4년을 치리한 후 BC. 556년 전쟁에서 죽음

    (3) 라보로소 알코드

    네리그릿살 아들(저능아) 1년도 못되어 맞아 죽는다.

    (4) 나보니두스

    ① 느부갓네살의 또 다른 사위로서 왕위 찬탈

    ② 네리그릿살의 아내와 결혼하여 바벨론 멸망(BC. 555-538)까지 치리한다.

    (5) 벨사살왕(바벨론 마지막 왕)

    주의 성전에서 가져온 기명들로 술잔치를 벌일 때 하나님의 손이 나와 멸망을 기록 했으며 그날 밤 벨사살은 살해당했고, 바벨론은 멸망했다.(단5장)(BC. 539년 멸망)

    벨사살왕의 연회

    나보니두스는 전쟁터(페르시아와 전쟁)에 나가 있었고, 벨사살은 왕궁에 있으면서 대규모 연회를 가진 그날 밤 바벨론 도성은 이미 포위된 상태, 고레스는 바벨론 성읍으로 들어가는 물줄기를 차단함으로 그 성을 무너뜨렸다.

    *세속 역사 속에는 나보니두스가 마지막 왕으로 되어 있고 벨사살은 제시되어 있지 않다. (아버지 나보니두스 와 공동통치)

    ■ 메대-바사(페르시아)의 역대 왕들

    메대 - 바사(페르시아제국)

    0. 키루스 1세 [Cyrus I]

    - 고레스의 아버지 , BC 7세기말에 활동한 페르시아의 아케메네스 왕조의 왕.

    1. 고레스 (키루스 2세) (BC. 539-530 치리기간 : 30년)

    - 페르시아 제국의 건설자.

    - 캄비세스 1세의 아들. 키루스 대왕(Cyrus the Great) 또는 고레스왕이라 고도 한다.

    - 이때에 1차 포로귀환. 세스바살을 포함한 유대인의 예루살렘 귀환 한다.

    유다의 포로 귀환

    2. 캄비세스 2세(BC. 529-522 치리기간 : 7년)

    - 고레스의 아들 이집트를 정복함..

    3. 바르디야(6개월),

    - 고레스의 동생이자 캄비세스2세의 동생으로, 실질적으로는 가우마타가 통치함.

    4. 다리우스 1세[대왕] 히스타페스(BC. 522-486 35년)

    - 흔히 다리우스 대왕(성경에는 다리오)이라고 함,

    - 스룹바벨과 예수아에 의한 성전재건 BC520~515(<다리우스 2년~6년 아달월>

    스 5:2~6:18)]의 배경 (학개와 스가랴의 예언 스 5:1)

    5. 크세르크세스[아하수에로] 1세(BC. 485-465; 20년),

    - 에스더에 나오는 페르시아 왕 약 BC 477년도에 일어난 일, 에스더 왕후 책봉

    6. 아닥사스다[아르타크세르크세스] 1세(BC. 464-424; 40년)

    - 2차 에스라 포로귀환 , 3차 느헤미야 포로귀환을 시킨 왕.

    7. 다리우스 2세(BC. 423-405; 18년)

    8. 아닥사스다[아르타크세르크세스] 2세 므네몬 (BC. 404-359; 45년)

    9. 아닥사스다[아르타크세르크세스] 3세 오쿠스 (BC. 358-338; 20년)

    10. 아르세스(BC. 337-336; 1년)

    11. 다리우스 3세(BC. 335-331; 4년)

    리디아의 족보와 고레스의 족보

    페르시아의 최대 전성기

    ※ 참고 문헌

    - 「 성경과 5대 제국 」 조병호 지음, 통독원.

    - 「 성경과 고대전쟁 」 조병호 지음, 통독원.

    - 「 성서 그리고 역사 」 장 피에르 이즈부츠 지음, 황소자리.(내셔널지오그래픽)

    - 「 성서의 역사와 지리 」 김흔중 지음, 엘맨.

    - 「 다니엘서 강해 」 조용기 지음, 서울서적.

    - 「 지구의 운명을 지배하는 손 」 강병국 지음, 생애의 빛.

    - 고대사와 구약사, 인류의 기원과 역사,- 블로그 외







    하나님의 감동(에스라 1:1~11)

    에스라서는 바벨론 70년 포로 이후 예루살렘으로 귀환하여 하나님의 성전을 재건하는 일이 기록된 책이다.
    당시 포로생활에서 돌아오는 것만으로도 하나님의 은혜였는데 돌아올 때 빈손으로 돌아오지 않도록 하나님께서 고레스의 마음과 그 나라 백성들의 마음을 감동시키시고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은혜를 베푸셨다.

    에스라, 느헤미야, 에스더서는 포로생활의 어려운 환경가운데 하나님께서 보이지 않는 손으로 도우시고 성전재건이라는 어려운 역사를 이루시게 하신 놀라온 일들이 기록되어 있다.

    1. 고레스의 마음을 감동시키시다(1절)

    바사 왕 고레스 원년에 여호와께서 예레미야의 입을 통하여 하신 말씀을 이루게 하시려고 바사 왕 고레스의 마음을 감동시키시매 그가 온 나라에 공포도 하고 조서도 내려 이르되

    1.1. 하나님께서 예레미야 선지자를 통해 말씀하신 예언을 이루심(대하 36:21~23)
     
    이에 토지가 황폐하여 땅이 안식년을 누림 같이 안식하여 칠십 년을 지냈으니 여호와께서 예레미야의 입으로 하신 말씀이 이루어졌더라.바사의 고레스 왕 원년에 여호와께서 예레미야의 입으로 하신 말씀을 이루시려고 여호와께서 바사의 고레스 왕의 마음을 감동시키시매 그가 온 나라에 공포도 하고 조서도 내려 이르되.
    바사 왕 고레스가 이같이 말하노니 하늘의 신 여호와께서 세상 만국을 내게 주셨고 나에게 명령하여 유다 예루살렘에 성전을 건축하라 하셨나니 너희 중에 그의 백성된 자는 다 올라갈지어다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함께 하시기를 원하노라 하였더라.

    1.2. 고레스 왕의 마음을 감동시킴(1)
    하나님께서 한 나라의 왕의 마음을 감동시키셔서 일하셨다.

    1.3. 고레스가 공포하고 조서를 내림

    2. 고레스의 선포(2,3)
    2.1. 성전을 건축하라(2)
    【스1:2】 바사 왕 고레스는 말하노니 하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세상 모든 나라를 내게 주셨고 나에게 명령하사 유다 예루살렘에 성전을 건축하라 하셨나니

    2.2.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참 신이시다(3)
    【스1:3】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참 신이시라 너희 중에 그의 백성 된 자는 다 유다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서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의 성전을 건축하라 그는 예루살렘에 계신 하나님이시라

    3. 성전건축을 위한 예물(4~6)
    【스1:4】 그 남아 있는 백성이 어느 곳에 머물러 살든지 그 곳 사람들이 마땅히 은과 금과 그 밖의 물건과 짐승으로 도와주고 그 외에도 예루살렘에 세울 하나님의 성전을 위하여 예물을 기쁘게 드릴지니라 하였더라

    3.1. 물질로 도우라(4)

    3.2. 성전건축을 위해 예물을 기쁘게 드리라(4)

    3.3. 사면 사람들의 도움을 얻음(6)
    【스1:6】 그 사면 사람들이 은 그릇과 금과 물품들과 짐승과 보물로 돕고 그 외에도 예물을 기쁘게 드렸더라

    포로에서 돌아오는 것만으로도 기쁘고 감사할 일인데 하나님께서 사람들의 마음을 감동시키사 은, 금, 보물과 짐승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주게 하셨다. 그런데 더 놀라운 것은 주는 사람들이 ‘기쁘게 드렸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이 아니면 도저히 사람의 머리로는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

    출애굽기에도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이 나온다.

    1) 너희가 빈손으로 나가지 않을 것이다.
    【출 3:21】 내가 애굽 사람으로 이 백성에게 은혜를 입히게 할지라 너희가 나갈 때에 빈손으로 가지 아니하리니

    2) 애굽 사람들에게 구하게 함.
    【출 11:2】 백성에게 말하여 사람들에게 각기 이웃들에게 은금 패물을 구하게 하라 하시더니

    【출 11:3】 여호와께서 그 백성으로 애굽 사람의 은혜를 받게 하셨고 또 그 사람 모세는 애굽 땅에 있는 바로의 신하와 백성의 눈에 아주 위대하게 보였더라

    3) 구하매 그대로 이루어지게 하심.
    【출 12:35】 이스라엘 자손이 모세의 말대로 하여 애굽 사람에게 은금 패물과 의복을 구하매

    【출 12:36】 여호와께서 애굽 사람들에게 이스라엘 백성에게 은혜를 입히게 하사 그들이 구하는 대로 주게 하시므로 그들이 애굽 사람의 물품을 취하였더라

    하나님께서 출애굽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물질을 주시기 위해 애굽 사람들의 마음을 감동시키셨다. 주인공(이스라엘 백성들)은 따로 있었다.

    하나님은 물질의 주관자이시다. 주시고자 할 때 어떤 장애물도 없다.

    3.4. 유다사람, 베냐민, 제사장, 레위 사람들의 마음을 감동시키심(5)
    【스1:5】 이에 유다와 베냐민 족장들과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과 그 마음이 하나님께 감동을 받고 올라가서 예루살렘에 여호와의 성전을 건축하고자 하는 자가 다 일어나니

    하나님께서 포로생활70년이 되매 사람들의 마음까지도 감동하셔서 믿음의 사람들을 준비하시고 일어나게 하셨다.

    3.5. 빼앗긴 성전의 보물들을 돌려받음(7~11)
    예루살렘 성전의 빼앗긴 은, 금 그릇 등 많은 것들을 돌려받았다. 이는 분명 하나님께서 하시지 않으면 도저히 이룰 수 없는 일들이었다.

    적용
    1. 하나님의 주시는 감동을 무시하지 말자!
    2. 하나님께서 물질의 주관자이심을 분명히 알자!
    3. 하나님께서 주시고자 하는 사람에게 주심도 알자!

    하나님, 고레스 왕의 마음을 감동시키신 것처럼 이 나라의 대통령과 국무총리, 국회의원들과 국가인권위원장, 각 부의 장관들, 각 시의 시장들, 각 도의 도지사들, 각 도, 시, 구의 의원들 각계각층의 지도자들의 마음을 감동시키셔서 이 나라에 차별금지법, 동성애법이 제정되지 못하게 하시고 모든 악법들이 철저히 무효화되어 하나님의 공의가 올바로 세워져 가는 나라가 되게 하소서. 아멘!






    오늘 소개할 구약 성경의 열다섯번째 장인 에스라 장별 요약 핵심정리입니다..

    성경을 어려워하시는 분이나 읽을려는 엄두가 나지 않으시는 분들을 위하여 앞으로 성경요약을 해볼까합니다.또한 성경을 읽을 때에는 전체적인 내용을 이해하고 전체 내용에 담겨진 하나님의 뜻을 알아야만 합니다.

    구약성경 열다섯번째 에스라 배경

    포로귀환은 70년만에 귀환하리라는 예례미야 예언의 성취입니다.
    포로귀환자들의 인원이 적다고해도 이들이 자원자였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습니다.

    에스라서는 하나님께서 선택하신 백성을 향한 사람이 얼마나 위대한가를 생생하게 느낄 수 있습니다.



    에스라 1장 요약

    고레스가 이스라엘 민족이 고향으로 돌아가는 것을 허락하였고 사로잡혀간 백성들이 돌아옵니다.고레스가 여호와의 성전에 있는 그릇을 세스바살에게 주엇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바사 왕 고레스 원년에 온 나라에 칙령이 내려졌다. '바사'(페르시아, Persia)는 바벨론에 이어 등장한 제국이다. 바벨론 제국은 초대 왕인 느브갓네살이 기원전 562년에 죽은 뒤에 그를 이은 여러 왕들, 즉 에윌므로닥, 네르갈사레셀, 나보니두스 등이 즉위하지만, 급속하게 몰락하였다. 특히 마지막 왕인 나보니두스는 우르와 하란의 달 신을 섬겼기 때문에, 그 당시 바벨론의 수호신인 마르두크(Marduk, 렘 50:2)를 섬기고 있던 백성들에게 원성을 사 멸망의 단초를 제공하였다. 그는 또한 치세 후반기에 아들인 벨사살을 왕으로 세우고 자신은 섭정을 통해 바벨론을 통치하기도 하였다.

      이런 상황 속에서 등장한 인물이 고레스이다. '고레스'는 그의 할아버지 고레스 1세와 구분되는 고레스 2세로서, 부친인 캄비세스 1세를 이어 바사의 왕이 되었다. 그는 서쪽으로 리디아까지, 동쪽으로 멀리 인도까지 영토를 확장하였다. 이러한 바사의 팽창으로 위협을 느낀 바벨론은 고레스의 침략을 막기 위해 군사력을 정비하였지만, 기원전 539년 티그리스 강을 따라 진격한 고레스에 의해 멸망하였다. 당시 상황에 대해 다니엘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그 날 밤에 갈대아 왕 벨사살이 죽임을 당하였고 메대 사람 다리오가 나라를 얻었는데 그때에 다리오는 육십이 세였더라"(단 5:30-31). 한편, 바사의 전성기 때에는 동쪽으로 인더스 강, 서쪽으로 이집트와 그리스 반도, 남쪽으로 티그리스 강, 북쪽으로 아르메니아 산맥과 카스피 해까지 거대 제국을 형성하였다.

      '태양'이라는 뜻을 가진 고레스(Cyrus)는 62세에 왕위에 올라 기원전 539년부터 529년까지 11년 동안 바사 제국을 통치하였다. 따라서 고레스 원년은 기원전 539년을 가리킨다. 그때 고레스 왕은 자신이 통치하는 온 나라에 칙령을 내렸는데, 그것은 공포와 조서의 두 가지 형태로 내려졌다. '공포'는 사자들의 음성을 통해 온 나라에 울려 퍼지는 것을, '조서'는 사자들이 전달한 문서화된 왕의 명령을 말한다. 그가 내린 칙령에는 세 가지 내용이 담겨 있었다. 첫째, 여호와께서 나에게 유다 예루살렘에 성전을 건축하라 명령하셨다(2절). 둘째, 따라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유다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서 여호와의 성전을 건축하라(3절). 셋째, 이스라엘 백성이 머물러 사는 지역의 사람들은 그들을 도와주고, 예루살렘에 세울 성전을 위해 예물을 기쁘게 드려라(4절).

      첫째 내용은, 칙령이 내려진 근원적인 배경을 담고 있다. 그 칙령이 내려진 이유는 고레스 왕의 자발전인 의도에 의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명령에 따른 것이었다. 여기에는 역사의 주인공이 제국의 왕이 아니라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이 담겨 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왜 그와 같은 명령을 내리셨던 것일까? 그것은 바로 '예레미야의 입을 통하여 하신 말씀'을 이루게 하시기 위해서였다(1절). 하나님은 이 일이 있기 전에 예레미야를 통해 이렇게 말씀(약속)하셨다. "이 민족들은 칠십 년 동안 바벨론의 왕을 섬기리라...칠십 년이 끝나면 내가 바벨론의 왕과 그의 나라와 갈대아인의 땅을 그 죄악으로 말미암아 벌하여 영원히 폐허가 되게 하되...바벨론에서 칠십 년이 차면 내가 너희를 돌보고 나의 선한 말을 너희에게 성취하여 너희를 이곳으로 돌아오게 하리라"(렘 25:11-12;29:10). 둘째 내용에는, 하나님의 명령에 대한 고레스의 순종이 들어 있다. 그는 하나님의 명령을 무시하지 않고 순종함으로써, 이스라엘 백성들이 예루살렘으로 올라가 성전을 건축할 수 있는 길을 열어 주었다. 그가 이렇게 순종할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에 대한 올바른 인식과 그분의 음성 앞에서 겸손한 태도를 견지하였기 때문이다. 바로 이런 점 때문에 선지자 이사야는 그를 '기름 부음을 받은 자'라 하였다(사 44:27-28;45:1-5). 셋째 내용에는, 앞선 둘째 내용을 구체적으로 실행에 옮길 수 있도록 하는 방안이 제시되어 있다. '남아 있는 백성'은 포로로 잡혀간 이스라엘 백성들을 가리키는데, 그들은 대부분 유프라테스 강 하류의 메소포타미아 평야 지대에 거주하고 있었고 더러는 페르시아 곳곳에 흩어져 살기도 하였다. 왕은 그들과 함께 거주하는 곳 사람들에게 이스라엘 백성들이 예루살렘으로 돌아갈 때, 그리고 그곳에서 성전을 건축할 때 필요한 것들을 도와주라고 명령하였다. 금과 은, 물건, 짐승, 예물 등과 같은 것이 없이 돌아가게 될 경우, 그들에게 예루살렘 귀환과 그 이후의 성전 건축은 그림의 떡이 아닐 수 없었다. 한편 자신들이 거주하는 곳 사람들로부터 금, 은, 물건, 짐승, 예물 등을 가지고 나오게 될 모습은, 아브라함이 애굽에서 나올 때의 상황(창 13;1-2), 이스라엘 백성들의 출애굽 상황(출 12:35-36), 블레셋에서 하나님의 언약궤가 수레에 실려 나올 때의 상황(삼상 6:4,8)과 유사하다.

    [질문] 하나님은 왜(어떤 점에서) 역사의 엑스트라가 아니라 주인공이 되시는가?

    그 이유가 고레스 왕의 고백 속에 들어 있다. 즉 그분이 하늘의 하나님, 참 신이시고, 또 세상 모든 나라를 자신이 지정한 왕에게 주고 명령하실 뿐만 아니라, 예루살렘에 계신 존재이시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하늘의 하나님'은 '하늘'이 상징하는 우주와 그 가운데 있는 만물을 창조하신 주인이 바로 하나님이라는 뜻이다. '참 신'은 '거짓된 신'과 대조되는 말이다. 거짓은 그 안에 공허한 부재와 나쁨이라는 뜻을 내포하고 있기 때문에, 반대로 참은 그분의 실재하심과 선하심을 의미한다. '나라를 주신다'는 말은 그것에 대한 주도권이 세상의 왕들에게 있지 않고 하나님께 있다는 뜻으로, 역사에 주권적으로 개입하시는 그분의 속성을 들어 있다. 하나님의 이러한 속성은 모든 회중 앞에서 송축하였던 다윗의 고백 속에 들어 있기도 하다. "여호와여 위대하심과 권능과 영광과 승리와 위엄이 다 주께 속하였사오니 천지에 있는 것이 다 주의 것이로소이다 여호와여 주권도 주께 속하였사오니 주는 높으사 만물의 머리이심이니이다 부와 귀가 주께로 말미암고 또 주는 만물의 주재가 되사 손에 권세와 능력이 있사오니 모든 사람을 크게 하심과 강하게 하심이 주의 손에 있나이다"(대상 29:11-12). 또한 '예루살렘에 계신다"는 말은 그분이 하늘에 앉아 팔짱을 끼고 계시는 분이 아니라, 구체적으로 예루살렘에 거하면서 이스라엘 백성들과 함께하신다는 뜻이다. 그 계심을 직접적으로 나타내 보이신 증거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아들이시기도 하지만 친히 그분 자체이시기도 하다(눅 5:17-26;요 1:1,14;14:9).

    2. 이스라엘 백성들의 예루살렘 귀환(5-11절)

    [본문] 5 이에 유다와 베냐민 족장들과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과 그 마음이 하나님께 감동을 받고 올라가서 예루살렘에 여호와의 성전을 건축하고자 하는 자가 다 일어나니 6 그 사면 사람들이 은그릇과 금과 물품들과 짐승과 보물로 돕고 그 외에도 예물을 기쁘게 드렸더라 7 고레스 왕이 또 여호와의 성전 그릇을 꺼내니 옛적에 느부갓네살이 예루살렘에서 옮겨다가 자기 신들의 신당에 두었던 것이라 8 바사 왕 고레스가 창고지기 미드르닷에게 명령하여 그 그릇들을 꺼내어 세어서 유다 총독 세스바살에게 넘겨주니 9 그 수는 금 접시가 서른 개요 은 접시가 천 개요 칼이 스물아홉 개요 10 금 대접이 서른 개요 그보다 못한 은 대접이 사백열 개요 그 밖의 그릇이 천 개이니 11 금, 은그릇이 모두 오천사백 개라 사로잡힌 자를 바벨론에서 예루살렘으로 데리고 갈 때에 세스바살이 그 그릇들을 다 가지고 갔더라

    [이해] 고레스 왕의 칙령이 내려지자 그 칙령에 따라 먼저 이스라엘 백성들이 일어났다.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서 성전을 건축하기 위하여 일어난 사람들은, 유다와 베냐민, 즉 남 유다의 지도자 그룹인 족장들, 성직자 그룹인 제사장들과 레위인들, 그리고 하나님께 감동을 받은 모든 이들이다. 하나님께 감동을 받은 사람들이 지도자와 성직자 그룹 이외의 별도의 사람들을 가리키는 것처럼 보이지만, 원문에는 이들을 포함한 모든 사람을 가리키고 있다. 즉 성전을 건축하기 위해 일어난 사람들은 모두 하나님께 감동을 받고 자원하였다는 의미이다. 이것은 역으로 하나님께 감동을 받지 못한 사람들은 성전 건축을 위해 일어나지 않았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당시 유대인들은 메소포타미아에서 정착하면서 많은 재산도 축적하고 있었기 때문에, 자신들이 이미 구축한 삶의 터전을 떠나 황폐한 땅 예루살렘으로 돌아가지 않으려는 이들도 상당수 있었다(렘 29;4-7;겔 33:30-33). 그 결과 많은 유대인이 귀환을 거부하고, 오직 하나님께 감동을 받은 소수의 사람들인 49,897명만 1차로 예루살렘으로 되돌아갔다(2:64-65).

      성전 재건을 위하여 일어난 이스라엘 백성들과 함께 거주하던 사람들은, 고레스 왕이 내린 칙령의 내용을 그대로 이행하였다. 즉 그들은 은그릇과 금과 물품들과 짐승과 보물로 돕고 그 외에도 예물을 기쁘게 드렸는데, 이는 그 내용을 지시하고 있는 4절의 내용과 일치하고 있다. 여기에서 주목해야 할 내용은 그들이 모든 것을 '기쁘게' 드렸다는 점이다. 비록 왕의 명령에 따라 이행할 수밖에 없었지만 자신들이 그것을 원하지 않았다면 자원해서 드리지 않고 강압에 의해 어쩔 수 없이 드렸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기쁘게, 즉 자원해서 드렸다. 그들의 이런 태도에는 두 가지가 원인이 되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첫째,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들과 좋은 관계를 형성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성전 재건을 위해 일어났던 이들은 모두 하나님께 감동을 받았던 사람들이다. 따라서 하나님과의 좋은 관계는 이웃들과의 관계에도 긍정적으로 작용하였을 것이다. 둘째, 그 일이 하나님의 개입과 인도하심에 의해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고레스의 마음을 감동시켜 칙령을 내리게 하신 하나님은(1절), 동일한 방법으로 이스라엘 백성들과 함께 거주하던 사람들의 마음도 감동시키셨을 것이라고 쉽게 추측해 볼 수 있다. 그런 점에서 하나님은 후히 주시고 또 그것을 받아 누리게 하시는 일의 주체가 되시는 분이다(딤전 6:17).

      이스라엘 백성들을 돕는 일에 고레스 왕도 동참하였다. 그는 당시 창고지기인 미드르닷에게 명령하여 느부갓네살이 예루살렘에서 옮겨 자기 신들의 신당에 두었던 여호와의 성전 기명, 즉 성전에서 제사를 드릴 때 사용하였던 기구와 그릇을 꺼내어 유다 총독 세스바살에게 넘겨주었다. 이에 세스바살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예루살렘으로 데리고 갈 때 그것들을 다 가지고 갔다. 왕이 넘겨 준 그릇의 수효는 금 접시 30개, 은 접시 1,000개, 칼 29개, 금 대접 30개, 금 대접보다 못한 은 대접 410개, 그 밖의 그릇 1,000개였는데, 금과 은으로 된 그릇이 모두  5,400개였다. 여기에서 '접시'는 음식을 담거나 물품을 제공할 때 사용하던 그릇인데, 영역본에서는 이를 '큰 접시'(KJV, charger), '타원형의 큰 접시'(NKJV, platter), '쟁반'(NLT, tray) 등으로, 또 공동번역에서는 '대야'로 번역하고 있다. '대접'은 성전에서 사용하던 덮개가 있는 잔을 가리키는데, 영역본에는 '사발'(NIV, bowl), '물 대접'(NKJV, basin)으로 번역하고 있다. '칼'은 문자적으로 칼(knife)를 가리키지만, 70인역(LXX)에는 '기구'로, 영역본에는 '냄비'(NIV, pan), '향로'(RSV, censer), '복제품'(NASB, duplicate)으로 번역하고 있다. '칼'을 그릇으로 볼 경우 그릇은 도합 2,509개가 되는데, 이는 마지막에 제시한 합계 숫자 5,400개와 차이가 있다. 이런 차이 때문에 일부 주석가들은 당시 필사자들이 그 숫자를 잘못 계산하여 기록하였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하지만 2,509개라는 숫자는 당시 고레스 왕의 명령에 따라 가치 있는 것들만 특별히 계수한 것으로, 실제로 그것을 포함한 모든 그릇의 숫자가 5,400개였다고 보는 것이 더욱 타당해 보인다.

      한편 '창고지기'는 당시 고대 근동에서 국가의 중요한 물품을 관리하는 사람을 지칭할 때 사용하였던 용어로 보인다. 그래서 KJV, NIV 등의 영역본에는 이를 '보물 관리인'(treasurer)으로 번역하고 있다. 유다 총독인 '세스바살'은 문자적으로 '불의 숭배자'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는 이름이다. 이 사람이 누구였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일부 사람들은 그를 스룹바벨과 동일 인물로 보는가 하면(3:2), 또 다른 일부에서는 스룹바벨이 아닌 다른 인물로 추정하기도 한다. 그 가운데 전자로 보는 견해가 우세한데, 이는 이후부터 세스바살이라는 이름이 거의 등장하지 않고, 또 그토록 중요한 성전 기명들은 포로들을 인솔하는 총책임자에게 인계되었을 것이라는 추측에서 비롯된 것이다(1차로 포로 귀환을 인솔하였던 인물은 스룹바벨이다). 

    [질문] 7-11절에는 성전에서 사용되던 기명들이 바벨론의 신당에 있게 된 배경(7절), 그것이 세스바살에게 넘겨진 과정(8절), 그리고 기명들의 정확한 숫자를 기술하고 있다(9-11절). 이와 같은 내용을 에스라가 이토록 구체적으로 기록한 의도는 어디에 있었다고 생각하는가?

    특히 기명들의 종류와 숫자를 구체적으로 적고 있는 9-11절은 어떤 면에서 기명들의 합계만 기록하고 생략해도 되는 부분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세세하게 소개하고 있는 이유는 그것이 주는 의미가 심대하기 때문이다. 이웃 나라를 정복하고 그곳 신당에서 사용하던 물품들을 자신들이 섬기는 신당에 보관하는 일은 고대 중근동의 일반적 관습이었다. 이를 통하여 자신들이 섬기는 신들의 우월성을 천하에 과시하고 피정복민들에게는 수치심을 안겨 주었다. 따라서 여호와의 성전에 있던 기명들이 바벨론의 신당에 있게 되었다는 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열등감과 수치심을 동시에 안겨주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 상황 속에서 기명들이 다시 예루살렘으로 옮겨진다는 사실은 열등감을 우월감으로, 수치심을 자부심으로 회복하는 전환점이 된다. 에스라는 기명들의 종류와 숫자를 구체적으로 밝힘으로써 바로 그런 사실을 강조하였던 것이다.

      상징적인 면에서 이처럼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던 기명들은, 실제적인 면에서도 간과할 수 없는 중요성을 지니고 있었다. 만약 이스라엘 백성들이 예루살렘으로 돌아와 성전을 재건하더라도 기명들이 없다면 하나님께 제사를 드릴 수 없다. 그 많은 것을 새롭게 만들기 위해서는 막대한 비용과 시간이 소요되는데, 느브갓네살의 침략으로 폐허가 되어 버린 예루살렘의 상황을 고려해 볼 때 그것을 모두를 다시 제작한다는 일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므로 기명들을 귀환할 때 반드시 가져가야 할 물품이었다. 에스라는 이를 놓치지 않고 구체적으로 밝힘으로써 성전 재건 이후에 새로운 기명들을 제작하지 않고 곧바로 하나님께 제사드릴 수 있다는 사실의 중요성 강조하였던 것이다.

    II. 메시지

    본문: 스 1:1-11

    제목: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가 

    ​01. 바사 왕 고레스 원년에 여호와께서 예레미야의 입을 통하여 하신 말씀을 이루게 하시려고 바사 왕 고레스의 마음을 감동시키시매 그가 온 나라에 공포도 하고 조서도 내려 이르되 02. 바사 왕 고레스는 말하노니 하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세상 모든 나라를 내게 주셨고 나에게 명령하사 유다 예루살렘에 성전을 건축하라 하셨나니 03.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참 신이시라 너희 중에 그의 백성 된 자는 다 유다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서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의 성전을 건축하라 그는 예루살렘에 계신 하나님이시라 04. 그 남아 있는 백성이 어느 곳에 머물러 살든지 그곳 사람들이 마땅히 은과 금과 그 밖의 물건과 짐승으로 도와주고 그 외에도 예루살렘에 세울 하나님의 성전을 위하여 예물을 기쁘게 드릴지니라 하였더라 05. 이에 유다와 베냐민 족장들과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과 그 마음이 하나님께 감동을 받고 올라가서 예루살렘에 여호와의 성전을 건축하고자 하는 자가 다 일어나니 06. 그 사면 사람들이 은그릇과 금과 물품들과 짐승과 보물로 돕고 그 외에도 예물을 기쁘게 드렸더라 07. 고레스 왕이 또 여호와의 성전 그릇을 꺼내니 옛적에 느부갓네살이 예루살렘에서 옮겨다가 자기 신들의 신당에 두었던 것이라 08. 바사 왕 고레스가 창고지기 미드르닷에게 명령하여 그 그릇들을 꺼내어 세어서 유다 총독 세스바살에게 넘겨주니 09. 그 수는 금 접시가 서른 개요 은 접시가 천 개요 칼이 스물아홉 개요 10. 금 대접이 서른 개요 그보다 못한 은 대접이 사백열 개요 그 밖의 그릇이 천 개이니 11. 금, 은그릇이 모두 오천사백 개라 사로잡힌 자를 바벨론에서 예루살렘으로 데리고 갈 때에 세스바살이 그 그릇들을 다 가지고 갔더라

    ​1. 에스라서 개관

    에스라서는 학사 겸 제사장인 '에스라'가 기록한 책입니다. 바사(Persia)의 초대 왕 '고레스'가 즉위 원년에 내린 칙령(고레스 칙령)에 따라, 느브갓네살 왕 때 바벨론으로 잡혀 온 남 유다의 백성들이 예루살렘으로 다시 돌아오게 됩니다. 이와 같은 포로 귀환은 총 세 차례 이루어지는데, 1차는 기원전 537년 '스룹바벨'의 인솔 아래 5만 명 정도(종들까지 포함)가 돌아와 온갖 방해를 극복하고 마침내 기원전 515년 제2의 성전(스룹바벨 성전)을 완성합니다. 제2의 성전 건축은 586년 남 유다가 멸망한 이후 만 70년 만에 이루어진 것입니다. 2차 포로 귀환은 1차 포로 귀한 이후 80년이 지난 기원전 458년에 이루어지는데, 이때 '에스라'가 1,754명을 인솔하여 돌아옵니다. 그리고 3차 포로 귀환은 기원전 444년 선지자 '느헤미야'의 인솔 아래 이루어집니다.

      ​오늘 우리가 보고 있는 에스라서는 1, 2차 포로 귀환 때 있었던 사건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총 10장으로 이루어진 에스라서는, 1-6장에서 1차 포로 귀환 과정과 성전 건축에 대한 이야기를 담고 있고, 7-10장에서 2차로 귀환한 에스라에 의해 종교개혁과 대부흥 운동을 소개하고 있습니다(아래 도표 참조).

    2. 약속을 지키시는 하나님

    ​오늘 본문 말씀은 고레스 왕이 내린 조서, 즉 '고레스 칙령'으로부터 시작되고 있습니다. "바사 왕 고레스 원년에 여호와께서 예레미야의 입을 통하여 하신 말씀을 이루게 하시려고 바사 왕 고레스의 마음을 감동시키시매 그가 온 나라에 공포도 하고 조서도 내려 이르되"(1절). 바사, 즉 페르시아의 왕 고레스가 원년에 온 나라에 칙령을 내리게 된 배경 속에는, 역사를 주관하시는 하나님의 섭리가 들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섭리'란 하나님께서 지혜와 사랑으로 우주에서 발생하는 모든 일들을 돌보고 이끄시는 통치를 말합니다. 다시 말해서, 고레스 왕이 칙령을 내리게 된 것은 그의 의지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그의 마음을 감동시켜서 내린 것으로, 여기에는 특별히 예레미야의 입을 통하여 하신 약속을 지키시기 위한 하나님의 의지가 반영되어 있습니다.

      ​​유다의 마지막 왕인 시드기야 왕 때, 하나님은 예레미야를 통해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간 유다 백성들에게 이렇게 약속하신 적이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바벨론에서 칠십 년이 차면 내가 너희를 돌보고 나의 선한 말을 너희에게 성취하여 너희를 이곳으로 돌아오게 하리라"(렘 29:10). 하나님은 이 약속을 잊지 않으시고 또 약속한 것을 성취하시기 위하여, 고레스 왕이 칙령을 내려 유다 백성들이 예루살렘으로 돌아갈 길을 열어 주신 것입니다(3절).

      ​바벨론에 의해 멸망한 남 유다가, 더구나 바벨론에서 70년 동안 포로 생활을 하던 그들이, 다시 예루살렘으로 돌아오게 된 사건은 인류 역사에서 보기 드문 사건입니다. 우리나라가 일제에 의해 주권을 빼앗긴 후 해방이 되기까지, 또 수많은 강제 노동자들이 다시 조국으로 돌아오기까지 36년이라는 시간이 걸렸습니다. 불가능할 것처럼 보였던 그 일도 36년이나 걸렸는데, 바벨론에 의해 예루살렘이 완전히 파괴되고 또 포로로 끌려간 백성들이 다시 예루살렘으로 돌아온 사건은 그것의 두 배나 되는 긴 시간대입니다. 이 사건은 약속을 잊지 않으시고 성취하시는 하나님의 역사가 아니고서는 결코 이루어질 수 없는 일입니다.

      ​이 사건을 통해 우리는 역사의 주인이신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를 분명하게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약속하시고 그 약속을 반드시 이루시는 분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에는 거짓말이나 후회가 들어 있지 않을 뿐만 아니라, 자신이 하신 약속의 말씀에 대해서는 잊지 않고 반드시 실행하는 분이십니다. 그래서 유프라테스 강가의 술사인 '발람'도 하나님에 대해 이렇게 선언하였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사람이 아니시니 거짓말을 하지 않으시고 인생이 아니시니 후회가 없으시도다 어찌 그 말씀하신 바를 행하지 않으시며 하신 말씀을 실행하지 않으시랴"(민 23:19).

      ​그러므로 우리는 이 세상 그 어떤 것보다 하나님의 약속을 굳게 믿어야 하고, 그 약속에 아멘 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합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얼마든지 그리스도 안에서 예가 되니 그런즉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아멘 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되느니라"(고후 1:20). 우리가 이렇게 하나님의 약속에 대해 믿음으로 '아멘'하고 반응할 때, 70년 동안의 포로 생활에서 돌아온 유다 백성들처럼, 우리의 삶 가운데 불가능한 것처럼 보이는 일들을 가능한 것으로 바꾸시는 하나님의 역사와 섭리를 생생하게 경험할 수 있습니다.

    ​​3. 사명을 주시는 하나님

    ​오늘 본문에서 첫 번째로 볼 수 있는 하나님의 성품이 이렇게 '약속을 지키시는 분'이라면, 두 번째로 볼 수 있는 그분의 성품은 '우리에게 사명을 주시는 분'이라는 사실입니다. '고레스 칙령'으로 바벨론에서 예루살렘으로 돌아가게 될 사람들은, 포로의 신분에서 자유인의 신분으로 바뀌게 됩니다. 그렇게 자유인이 되어 에루살렘으로 돌아가게 될 그들에게 하나님이 주신 것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사명'입니다.

      ​​2-3절 말씀을 다시 읽어 보겠습니다. "바사 왕 고레스는 말하노니 하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세상 모든 나라를 내게 주셨고 나에게 명령하사 유다 예루살렘에 성전을 건축하라 하셨나니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참 신이시라 너희 중에 그의 백성 된 자는 다 유다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서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의 성전을 건축하라 그는 예루살렘에 계신 하나님이시라". 하나님이 왕에게 명령하신 것이 무엇입니까? 첫째는, 하나님의 백성 된 자는 다 유다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라는 것입니다. 둘째는, 그곳으로 올라가 놀고먹지 말고 하나님 여호와의 성전을 건축하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남아 있는 백성들'로 하여금, 유다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여호와의 성전을 건축하게 하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이전처럼 하나님을 버리고 자신들이 자기 인생의 주인이 되어 살던 삶에서 돌이켜서, 이제부터 하나님을 그들 삶의 한가운데에 주인으로 모시고 하나님을 위해 살고 또 그분과 함께 살라고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그러한 삶이 하나님께 영광이 되고 그들에게도 크나큰 축복이 되기 때문에, 자신들에게 주어진 자유를 자신을 위해 자기 마음대로 사는 데에 쓰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초점을 맞춘 삶을 살도록 하기 위하여 성전 재건의 사명을 주신 것입니다.

      ​약속하시고 그것을 지키시는 하나님은, 유다의 남은 자들에게 예루살렘으로 올라가 성전을 건축하라는 사명을 주신 분입니다. 그 하나님은 지금 우리 시대에 와서도 변치 않고 동일하신 분입니다. 하나님은 태초부터 유다가 멸망한 이후까지 수도 없이 메시아(그리스도)를 약속해 주셨고, 그 약속대로 메시아이신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서 십자가에서 우리 죄를 대속하게 하시고 죽은 자 가운데서 그분을 다시 살리셨습니다(고전 15:3-4). 하나님은 이것을 통해 예수님을 산 자와 죽은 자의 주가 되게 하셨습니다(롬 14:9), 이제 예수님을 주님으로 믿는 우리에게 유다의 남은 자들처럼 사명을 주셨습니다. 그 사명이 무엇입니까? 바로 교회를 세우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사명인 교회를 건강하게 세우기 위해서는 그 전제가 되는 두 가지 조건이 갖추어져 있어야 합니다. 오늘 본문 속에 두 가지 조건이 모두 제시되어 있는데, 그것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성전 건축을 위해 몇몇 사람들만 올라가라고 하셨습니까? 아닙니다. "그의 백성 된 자는 다 유다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라"고 하셨습니다(3절). 만약 성전 건축을 위해 몇몇 사람들만 예루살렘으로 올라갔다면, 성전은 결코 예루살렘 한가운데에 세워지지 못하였을 것입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는 몇몇 사람만 참여하여 세울 수 있는 구조물이 아닙니다. 머리 되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유기적으로 한 몸을 이룬 것이 교회이기 때문에, 교회를 건강하고 온전하게 세우기 위해서는 한 사람도 빠짐없이 모두 다 참여해야 합니다. 나 혼자 빠져도 괜찮겠지 하고 생각하는 순간 교회는 병들고 망가지기 시작합니다.

      ​교회를 세우기 위해 모든 사람이 다 참여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 일에 참여하는 사람들의 마음자세에 따라 교회의 모습이 좌우되기 때문에, 우리는 이것도 결코 놓쳐서는 안 됩니다. 5절에 보면 하나님이 고레스 왕을 통해 남은 자들에게 성전 건축의 사명을 주셨을 때, "그 마음이 하나님께 감동을 받고 올라가서 예루살렘에 여호와의 성전을 건축하고자 하는 자가 다 일어났다"고 에스라는 기록하고 있습니다. 성전 재건은 이렇게 하나님께 감동을 받고 자원하는 사람들에 의해서 이루어졌던 것입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 감동을 받고 자원하는 마음으로 모든 사람이 교회를 세워나갈 때, 교회는 그때서야 비로소 교회다운 교회의 모습을 띨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감동도 받지 않고 또 억지로 교회 세우는 일에 참여한다면, 그것은 그 자체로 교회를 건강하게 세우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교회를 허물고 병들게 할 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사명인 교회를 건강하게 세우기 위하여 모든 사람이 다 일어나야 하고, 또 하나님의 감동을 받아 자원하는 마음으로 임해야 합니다. 이 두 가지 조건이 우리 안에 충족될 때, 우리 교회는 비로소 주님이 기뻐하는 건강한 교회로 세워질 수 있습니다. 이 조건이 우리 안에서 온전히 갖추어지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4. 자원까지 주시는 하나님

    ​하나님은 약속을 지키시고 그 약속 안에 소명을 주실 뿐만 아니라, 그 소명을 이룰 수 있는 '자원까지 주시는 분'입니다. 이것이 오늘 본문이 보여 주는 하나님의 세 번째 성품입니다. 하나님은 유다의 남은 백성들이 유다 예루살렘으로 올라가 성전을 건축하게 하실 때, 그들을 빈손으로 보내시지 않았습니다. 성전 건축과 생활에 필요한 모든 자원을 그들의 손에 쥐어 주셨습니다. 6절 말씀을 다같이 읽어 보도록 하겠습니다. "그 사면 사람들이 은그릇과 금과 물품들과 짐승과 보물로 돕고 그 외에도 예물을 기쁘게 드렸더라'. 하나님께서는 유다 백성들이 예루살렘으로 돌아가 살게 될 때, 생활에 필요한 모든 것을 채워 주시되 이웃의 물품을 강탈해서 취하게 하지 않고, 그 이웃들이 자발적으로 기쁘게 돕고 드리도록 하셨습니다. 또한 7-11절에 보면, 옛적에 느부갓네살이 예루살렘에서 옮겨다가 자기 신들의 신당에 두었던 성전 그릇을 고레스 왕이 창고지기인 미드르닷을 통해 유다 백성들에게 내 주는데, 그 수효가 5,400개라고 구체적으로 적고 있습니다. 우리 하나님은 바로 이런 분이십니다. 소명만 달랑 넘겨주면서 그 뒷일을 책임지지 않는 분이 아니라, 소명을 주실 때 그 소명을 이루는 데 필요한 모든 자원을 구체적으로 그 수효까지 세어 가면서 채워 주시는 분이 바로 우리 하나님이십니다.

    ​  ​그 하나님은 오늘날 우리에게도 동일하게 함께하시는 분일까요? 그분은 지금도 그때와 동일하게 우리와 함께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아니 오히려 그때보다 소명을 이루는 데 필요한 자원을 더욱 차고 넘치도록 주시는 분입니다. 하나님이시기도 한 예수님이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으라"는 사명을 주실 때, 우리에게 약속하신 것이 무엇입니까?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받으신 예수님께서 세상 끝 날까지 우리와 항상 함께하시겠고 약속하셨습니다(마 28:19-20). 다시 말해서 그 사명을 받은 우리는 세상 끝 날까지 함께하시는 예수님을 통해 그 사명을 이룰 수 있는 자원까지 통째로 받은 것입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우리들에게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는 소명을 주실 때, 우리의 일상생활에 필요한 모든 것, 즉 먹고 마시고 입는 모든 것도 함께 채워 주신다고 약속하셨습니다(마 6:33).

    ​5.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우리

    ​이제 우리는 오늘 본문 말씀을 통해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알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후회 없는 약속을 하시고 그 약속을 반드시 지키시는 분입니다. 약속을 지키실 때 소명과 함께 그 소명을 이룰 수 있는 모든 자원까지 구체적으로 주시는 분이 바로 우리의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이 이것을 우리에게 알게 하신 이유가 어디에 있을까요? 그 이유는 바로 약속을 반드시 성취하시는 하나님을 믿고, 그분이 손수 우리 손에 쥐어 주신 자원이신 예수님을, 부활하셔서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받으신 예수님을 주님(주인)으로 굳게 붙잡고, 우리에게 맡겨 주신 소명인 교회를 세우는 일에 모두 다 자원하여 힘쓰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선하신 하나님의 뜻이 오늘 우리 가운데 온전히 이루어지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바랍니다.




    에스라 2장 요약

    포로생활을 마치고 돌아온 사람들에 대해서 기록,포로로 잡혀서 돌아온 사람들의 이름과 가문과 숫자에 대해,돌아온 무리의 수는 42,360명이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2장은 ‘고레스 칙령’에 따라 예루살렘과 유다 도(province, 지방)로 돌아온 사람들의 명단과 인원수, 그리고 성전 재건을 위해 그들이 드린 예물에 대해 소개하고 있다. 명단은 크게 ‘가계’(족보)를 증명할 수 있는 사람들과 그것을 증명할 수 없는 이들로 나누어 소개되고 있다. 스룹바벨의 인도에 따라 1차로 귀환한 사람들은 총 42,360명이었다.

      ​에스라는 귀환자들의 명단을 가계와 지역, 신분(지도자, 제사장, 레위인들, 성전 봉사자, 평민, 노예 등)에 따라 소개하고 있는데, 이를 통해 성전을 재건하고 새로운 공동체를 이룬 사람들이 구체적으로 누구였는지, 그리고 그 일은 특정 계층의 사람들이 아닌 다양한 계층의 사람들에 의해 이루어졌다는 사실을 밝히고 있다.

    II. 본문 이해와 질문

    1. 돌아온 사람들의 명단: 가계 증명 가능(1-58절)

    [본문] 1 옛적에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에게 사로잡혀 바벨론으로 갔던 자들의 자손들 중에서 놓임을 받고 예루살렘과 유다 도로 돌아와 각기 각자의 성읍으로 돌아간 자 2 곧 스룹바벨과 예수아와 느헤미야와 스라야와 르엘라야와 모르드개와 빌산과 미스발과 비그왜와 르훔과 바아나 등과 함께 나온 이스라엘 백성의 명수가 이러하니 3 바로스 자손이 이천백칠십이 명이요 4 스바댜 자손이 삼백칠십이 명이요 5 아라 자손이 칠백칠십오 명이요 6 바핫모압 자손 곧 예수아와 요압 자손이 이천팔백십이 명이요 7 엘람 자손이 천이백오십사 명이요 8 삿두 자손이 구백사십오 명이요 9 삭개 자손이 칠백육십 명이요 10 바니 자손이 육백사십이 명이요 11 브배 자손이 육백이십삼 명이요 12 아스갓 자손이 천이백이십이 명이요 13 아도니감 자손이 육백육십육 명이요 14 비그왜 자손이 이천오십육 명이요 15 아딘 자손이 사백오십사 명이요 16 아델 자손 곧 히스기야 자손이 구십팔 명이요 17 베새 자손이 삼백이십삼 명이요 18 요라 자손이 백십이 명이요 19 하숨 자손이 이백이십삼 명이요 20 깁발 자손이 구십오 명이요 21 베들레헴 사람이 백이십삼 명이요 22 느도바 사람이 오십육 명이요 23 아나돗 사람이 백이십팔 명이요 24 아스마웻 자손이 사십이 명이요 25 기랴다림과 그비라와 브에롯 자손이 칠백사십삼 명이요 26 라마와 게바 자손이 육백이십일 명이요 27 믹마스 사람이 백이십이 명이요 28 벧엘과 아이 사람이 이백이십삼 명이요 29 느보 자손이 오십이 명이요 30 막비스 자손이 백오십육 명이요 31 다른 엘람 자손이 천이백오십사 명이요 32 하림 자손이 삼백이십 명이요 33 로드와 하딧과 오노 자손이 칠백이십오 명이요 34 여리고 자손이 삼백사십오 명이요 35 스나아 자손이 삼천육백삼십 명이었더라 36 제사장들은 예수아의 집 여다야 자손이 구백칠십삼 명이요 37 임멜 자손이 천오십이 명이요 38 바스훌 자손이 천이백사십칠 명이요 39 하림 자손이 천십칠 명이었더라 40 레위 사람은 호다위야 자손 곧 예수아와 갓미엘 자손이 칠십사 명이요 41 노래하는 자들은 아삽 자손이 백이십팔 명이요 42 문지기의 자손들은 살룸과 아델과 달문과 악굽과 하디다와 소배 자손이 모두 백삼십구 명이었더라 43 느디님 사람들은 시하 자손과 하수바 자손과 답바옷 자손과 44 게로스 자손과 시아하 자손과 바돈 자손과 45 르바나 자손과 하가바 자손과 악굽 자손과 46 하갑 자손과 사믈래 자손과 하난 자손과 47 깃델 자손과 가할 자손과 르아야 자손과 48 르신 자손과 느고다 자손과 갓삼 자손과 49 웃사 자손과 바세아 자손과 베새 자손과 50 아스나 자손과 므우님 자손과 느부심 자손과 51 박북 자손과 하그바 자손과 할훌 자손과 52 바슬룻 자손과 므히다 자손과 하르사 자손과 53 바르고스 자손과 시스라 자손과 데마 자손과 54 느시야 자손과 하디바 자손이었더라 55 솔로몬의 신하의 자손은 소대 자손과 하소베렛 자손과 브루다 자손과 56 야알라 자손과 다르곤 자손과 깃델 자손과 57 스바댜 자손과 하딜 자손과 보게렛하스바임 자손과 아미 자손이니 58 모든 느디님 사람과 솔로몬의 신하의 자손이 삼백구십이 명이었더라

    [이해] 예루살렘과 유다 도(province)로 돌아온 사람들은,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에게 사로잡혀 바벨론으로 갔던 자들의 자손 중에서 놓임을 받은 이들이었다. 그들은 돌아와서 자신들의 성읍으로 각자 돌아갔다. '도'는 페르시아 제국의 거대 행정 구역에 속한 여러 작은 지방을 말한다. 다리오 왕 때에는 광대한 제국을 빈틈없는 체제로 조직하였는데, 그는 전체 영토를 20개의 거대 행정 구역으로 나누어 총독에게 다스리게 하였다. 따라서 당시 유다가 독립 국가가 아닌 페르시아의 일개 피정복지였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그렇게 돌아온 사람들은 예루살렘뿐만 아니라 유다의 여러 지역에 흩어져 살게 되었다.

      유다 백성들이 돌아올 때 그들을 인도한 지도자들이 있었다. 스룹바벨, 예수아, 느헤미야, 스라야, 르엘라야, 모르드개, 빌산, 미스발, 비그왜, 르훔, 바아나 등 모두 11명의 지도자가 그들을 이끌었다. 그 가운데 제일 먼저 소개되고 있는 인물이 '스룹바벨'이다. 그 이름의 뜻은 '바벨론의 자손', '바벨론에서 태어난'이다. 그는 유다의 왕 여호야긴의 장남인 '스알디알'의 아들로(3:2;학 1;1;마 1;12;눅 3:27), 다윗의 후손이다. 역대상 3장 19절에서 스알디엘의 형제인 '브다야'의 아들로도 언급되고 있는데, 이는 스알디엘이 후사 없이 죽자 그의 동생 브다야가 고대 유대인의 수혼 제도(신 25:5-10)에 따라 형의 아내와 결혼하여 '스룹바벨'을 낳았기 때문에 그렇게 기록한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스룹바벨은 실제적으로는 브다야의 아들이지만, 법적으로는 스알디엘의 상속인으로 간주되었다. 한편 맛소라 본문에는 '스룹바벨과...함께 나온'에 해당하는 말씀이 서두에 나오는데, 거기에는 '스룹바벨'과 '...와 함께'가 연결 부호로 이어져 있다. 이는 스룹바벨이 이어지는 다른 모든 지도자보다 가장 우위에 있는 지도자라는 점을 보여 주는 것으로, 그가 이스라엘의 1차 포로 귀환에서 가장 주도적인 역할을 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스룹바벨에 이어 소개되고 있는 인물이 '예수아'이다. 그는 느브갓네살에게 살해된 스라야의 손자이자(왕하 25:18-21;대상 6;14) 바벨론으로 끌려간 요사닥(여호사닥)의 아들로(3:2;대상 6:15;학 1;1), 예루살렘 귀환 후 첫 번째 제사장이 되었고, 스룹바벨과 함께 성전 재건 운동에 주도적인 역할을 하였다(5:2; 슥 3장). 한편 느헤미야는 여기에 '나하마니'를 추가하여 12명의 지도자를 제시하고 있다. 그 가운데 9명은 두 곳에서 모두 동일한 이름으로 소개되고 있고, 에스라서의 '스라야'와 '르엘라야'는 르헤미야서에는 각각 '아사랴', '라야마'로 소개되고 있다.

      3-63절에는 귀환한 백성들의 명단과 인원수가 구체적으로 소개되고 있다. 제시한 명단에서 가장 큰 특징은 크게 두 부류의 집단으로 나누고 있다는 점이다. 앞에 제시한 집단은 가계를 증명할 수 있는 사람들로, 이들은 다시 평민(3-35절)과 다양한 제의적 공직자(36-58절)로 나누어 소개되고 있다. 이들은 모두 29,166명이 돌아왔다. 뒤에 제시한 집단은 가계를 증명할 수 없는 사람들로, 다시 평민(59-60절)과 제사장(61-63절)으로 나누어 소개되고 있다.

      가계를 증명할 수 있는 평민들의 명단과 인원수는 '가계와 '지역''에 따라 나누어 소개하고 있는데, 먼저 '가계'에 따른 평민들은 다음과 같다(3-20절). 바로스 자손 2,172명, 스바댜 자손 372명, 아라 자손 775명, 바핫모압 자손(예수아와 요압 자손) 2,812명, 엘람 자손 1,254명, 삿두 자손 945명, 삭개 자손 760명, 바니 자손 642명, 브배 자손 623명, 아스갓 자손 1,222명, 아도니감 자손 666명, 비그왜 자손 2,056명, 아딘 자손 454명, 아델 자손(히스기야 자손) 98명, 베새 자손 323명, 요라 자손 112명, 하숨 자손 223명, 깁발 자손 95명으로, 총 15,604명이다.

      평민들 가운데 '지역'에 따른 명단과 인원수는 다음과 같다(21-35절). 베들레헴 사람 123명, 느도바 사람 56명, 아나돗 사람 128명, 아스마웻 자손 42명, 기랴다림과 그비라와 브에롯 자손 743명, 라마와 게바 자손 621명, 믹마스 사람 122명, 벧엘과 아이 사람 223명, 느보 자손 52명, 막비스 자손 156명, 다른 엘람 자손 1,254명, 하림 자손 320명, 로드와 하딧과 오노 자손 725명, 여리고 자손 345명, 스나아 자손 3,630명으로, 총 8,540명이다. ‘가계’와 ‘지역’을 합한 평민들은 모두 24,144명이 유다로 귀환하였다.

    지역명

    위 치

    베들레헴

    예수님의 고향. 예루살렘 남쪽 10km 지점에 있는 성읍.

    느도바

    베들레헴 남쪽 6km 지점에 있는 산악 지대 성읍. 유다 지파의 땅.

    아나돗

    예루살렘 북동쪽 4km 지점에 있는 성읍.

    아스마웻

    예루살렘 북동쪽 8km 지점에 있는 성읍.

    기랴다림

    예루살렘 북서쪽 15km 지점에 있는 성읍.

    그비라

    기브온 서쪽 5km 지점에 있는 성읍. 베냐민 지파의 땅.

    브에롯

    예루살렘 북쪽 20km, 기브온 남쪽 2.5km 지점에 있는 성읍.

    라마

    예루살렘 북쪽 10km 지점에 있는 성읍. 사무엘의 주요 활동 지역.

    게바

    예루살렘 북쪽 13km 지점에 있는 성읍. 유다 왕국의 북쪽 경계.

    믹마스

    예루살렘 북동쪽 13km 지점에 있는, 베냐민 지파의 고원 도시.

    벧엘

    예루살렘 북쪽 19km 지점에 있는, 야곱이 돌베개를 베고 잤던 곳.

    아이

    여리고 북서쪽 16km 지점에 있는 고지대. 베냐민 지파 거주.

    느보

    요단 동편 헤스본 남서쪽 8km 지점에 있는 성읍. 유다 지파 거주.

    막비스

    베냐민 지파에 속한 성읍으로, 위치 불분명.

    엘람

    위치 불분명. ‘다른 엘람’은 엘람이라는 나라와 구분하기 위해 사용.

    하림

    위치 불분명.

    로드

    샤론 평야에 있는 성읍으로, 욥바 동남쪽 18km 지점에 위치.

    하딧

    팔레스타인의 해안 평야와 중앙 고원 지대의 세펠라에 있던 성읍.

    오노

    욥바 남동쪽 11km 지점에 있는, 베냐민 지파의 성읍.

    여리고

    요단강 서쪽 8km, 사해 북쪽 11km 지점에 있는 성읍.

    스나아

    여리고 북쪽 8km 지점에 있는 막달센나와 동일한 곳으로 추정.

      제자장들의 명단과 인원수는 다음과 같다(36-39절). 예수아의 집 여다야 자손 973명, 임멜 자손 1,052명, 바스훌 자손 1,247명, 하림 자손 1,017명으로, 총 4,289명이다. 또 레위 사람들은 호다위야 자손(예수아와 갓미엘 자손) 74명(40절), 노래하는 자들은 아삽 자손 128명(41절), 문지기의 자손들(살룸, 아델, 달문, 악굽, 하디다, 소배 자손) 139명으로(42절), 성전 봉사자들은 총 341명이다. 따라서 제사장을 포함하여 성전의 봉사자들은 모두 4,630명이 귀환하였다. 여기에서 '아삽'은 다윗과 솔로몬 왕대에 찬양의 제사를 주관하였던 사람으로(대상 16:4,5,7,37), 여러 편의 시편을 쓰는 등 이스라엘의 음악 발전에 지대한 공을 세웠다. 다윗은 제사장의 24반차에 상응하여 노래하는 자들도 24반차로 조직하였다(대상 15:16-24). 당시에 노래하는 것이 레위인들의 직무 중의 하나였기 때문에(대상 25:1-7), 아삽과 그의 자손들도 레위인이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삽 자손을 레위 사람들의 명단에 넣지 않고 따로 분류한 것은 그 직분의 특수성을 반영한 것으로 보인다. '문지기'는 성전의 문들을 닫고 여는 독특한 직분의 소유자들로(대상 9:17-27;시 84:10), 이들 역시 레위인들이었다. 이들의 다른 임무 중의 하나는 성전의 보물을 관리하는 것도 들어 있었다(대상 9:28-29).

      느디님 사람들은 다음과 같은 사람의 자손들이다(43-54절). 시하, 하수바, 답바, 게로스, 시아하, 바돈, 르바나, 하가바, 악굽, 하갑, 사믈래, 하난, 깃델, 가할, 르아야, 르신, 느고다, 갓삼, 웃사, 바세아, 베새, 아스나, 므우님, 느부심, 박북, 하그바, 할훌, 바슬룻, 므히다, 하르사, 바르고스, 시스라, 데마, 느시야, 하디바. '느디님'은 '주어진 사람들', '바쳐진 사람들'이라는 뜻으로, 영역본에는 '성전 하인들'(The temple servants)로 번역하고 있다(RSV, NASB, NIV). 이들에 대한 기원은 분명하지 않다. 구약에는 전쟁 포로들이 성전에서 봉사하도록 바쳐졌다는 흔적이 발견되기도 하는데(민 31:25-47), 아마도 느디님 사람들은 이들의 후손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한편 여호수아서에는 기브온 족속들이 이스라엘에 의하여 멸망당할 것이 두려워 여호수아를 속이고 그 결과 죽임을 당하지 않지만, 나무를 패고 물을 긷는 자들이 되는 기사가 나온다(수 9:23-27). 유대 랍비 전승은 성전 종들과 기브온 족속을 동일하게 간주하고 있기 때문에, 느디님 사람들을 기브온 출신으로 보기도 한다. 그 이름이 의미하는 바와 같이 그들은 성전에서 레위인을 돕거나 희생 제물을 태울 나무를 패고 물을 나르도록 할 목적으로 성전에 바쳐졌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들은 주로 성전에서 막일이나 천한 일을 하였다.

      솔로몬 신하의 자손은 다음과 같은 사람의 자손들이다(55-57절). 소대, 하소베렛, 브루다, 야알라, 다르곤, 깃델, 스바댜, 하딜, 보게렛하스바임, 아미. 모든 느디님 사람과 솔로몬 신하의 자손은 모두 392명이다. '솔로몬 신하의 자손'에서 '신하'는 문자적으로 '종', '노예'를 뜻한다. 그래서 NIV에서도 이를 '솔로몬의 종들'(the servants of Solomon)로 번역하고 있다. 여호수아가 기브온 족속을 성전 일꾼으로 삼았듯이, 솔로몬도 가나안 원주민들을 자신의 역군으로 삼은 적이 있기 때문에(왕상 9:20-21), '솔로몬 신하의 자손'은 이들과 동일 사람들로 보인다.

    [질문] 2장에는 예루살렘과 유다 도로 돌아온 사람들의 명단과 인원수가 구체적으로 제시되어 있다. 이 부분을 요약하여 한두 구절로 제시하지 않고 구체적으로 그것도 긴 지면을 할애하여 제시한 이유는 무엇이라 생각하는가?

    본 장은 70절로 이루어져 있고, 그 가운데 1절과 68-70절을 제외한 66개 구절(전체의 95%)이 모두 귀환자들의 명단과 인원수를 구체적으로 소개하는 데 할애되고 있다. 저자가 이 내용을 한두 구절로 요약할 수 없었던 이유는 다음과 같이 그것이 지닌 가치(중요성) 때문이다.

    첫째, 구체적인 명단을 제시함으로써 1차 귀환 사건의 역사적 객관성을 확보하고 있다. 지도자들이 누구였는지, 평민들은 어느 가계와 지역 출신이었는지, 그리고 성전 봉사자들도 맡은 역할에 따라 누가 얼마나 귀환하였는지를 이름과 숫자로 낱낱이 밝힘으로써 역사적 사건에 대한 구체적인 진실성을 더해 주고 있다.

      둘째, 구체적인 정보를 통해 귀환자들에 대한 구체적인 정황을 파악할 수 있다. 그 정보를 통해 어느 가계 어느 지역 자손들이, 또 어떤 계층 사람들이 성전 재건과 신앙 공동체 재건에 얼마만큼 참여하였는지를 알 수 있다. '가계'를 알 수 있는 자손들 가운데 예수아와 요압 자손은 가장 많은 2,812명이, 두 번째로 많은 바로스 자손은 2,172명이 돌아왔다. 이 두 가문의 합계가 4,984명인데, 이는 전체 24,144명 가운데 21%를 차지하는 인원이다. 또 '지역'에 따라 나눈 귀환자 가운데 여리고 근방으로 추정되는 스나아의 자손은 3,630명으로 전체(8,540명)의 과반수에 육박하는 43%를 차지하고 있다. 그들은 예루살렘 성전의 '어문'(fish gate) 공사에 참여하였던 사람들이다(느 3:3). '어문'은 '중문'(middle gate)이라고도 하는데(렘 39:3), 예루살렘 둘째 구역(대하 34:22), 즉 예루살렘의 확대된 신도시 북쪽 벽에 있었던 문이다. 갈릴리나 두로 등지의 생선들이 주로 이 문으로 반입되어 이런 이름이 붙여졌다고 한다. 이런 정보 등은 앞서 제시한 구체적인 명단과 인원수에 기초해서 나온 것들이다. 즉 본문에서 일차로 제시한 구체적인 정보는 이와 같은 이삼 차 정보를 알아가는 데 없어서는 안 될 귀중한 자료가 된다.

      셋째, 둘째 내용과 관련하여 귀환자들이 이루고 있는 공동체의 성격을 알 수 있다. 고레스 칙령으로 귀환한 공동체는 엄밀한 의미에서 이전 왕국(국가)의 회복을 추구할 수는 없었다. 그들은 여전히 바사 제국의 지방 백성으로 간주되었고(1절), 따라서 국가와 국민이라는 이름 대신 오로지 성전 재건을 위한 종교적인 실체, 즉 회중으로만 존재할 뿐이었다. 이러한 점은 명단 속에서도 구체적으로 드러나 있다. 그들은 비록 예전의 이스라엘 공동체와 연속성을 지니고 있었지만, 명단의 내용에는 왕가의 직계 후손이자 다윗 왕의 상속자에 대한 언급이 거의 보이지 않는다. 명단이 지닌 이러한 특징을 통해, 이들에 의해 형성된 공동체가 이전에 가졌던 왕국 개념이 아닌, 새롭고 영원한 공동체인 하나님의 나라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그 공동체는 일부 영향력 있는 한두 사람이나 특정 계층에 의해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유다 사회의 다양한 계층들의 참여에 의해 이루어졌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넷째, 이 사건을 주관하신 하나님의 관심이 어디에 있으셨는지를 알 수 있다. 하나님의 관심은 성전을 재건하고 새로운 사회를 건설할 공동체를 향하고 있지만, 그 공동체를 이루고 있는 각 사람, 즉 개인을 향해서도 잊지 않고 집중되어 있다. 그러한 관심은 계층, 가문, 지역 등을 세분해서 또 그 숫자를 하나하나 구체적으로 꿰는 데까지 이르고 있다. 그래서 누가는 각 사람을 귀하게 보시는 하나님을 우리의 머리털까지도 다 세시는 분으로 소개하였던 것이다(눅 12:7).

    2. 돌아온 사람들의 명단: 가계 증명 불가능(59-63절)

    [본문] 59 델멜라와 델하르사와 그룹과 앗단과 임멜에서 올라온 자가 있으나 그들의 조상의 가문과 선조가 이스라엘에 속하였는지 밝힐 수 없었더라 60 그들은 들라야 자손과 도비야 자손과 느고다 자손이라 모두 육백오십이 명이요 61 제사장 중에는 하바야 자손과 학고스 자손과 바르실래 자손이니 바르실래는 길르앗 사람 바르실래의 딸 중의 한 사람을 아내로 삼고 바르실래의 이름을 따른 자라 62 이 사람들은 계보 중에서 자기 이름을 찾아도 얻지 못하므로 그들을 부정하게 여겨 제사장의 직분을 행하지 못하게 하고 63 방백이 그들에게 명령하여 우림과 둠밈을 가진 제사장이 일어나기 전에는 지성물을 먹지 말라 하였느니라

    [이해] 예루살렘으로 돌아온 사람들 가운데, '가계'를 증명할 수 없는 이들은 평민과 제사장으로 나누어 소개되고 있다. 먼저 '평민들'은 델멜라, 델하르사, 그룹, 앗단, 임멜에서 올라온 사람들로, 그들은 들라야, 도비야, 느고다의 자손들이다. 모두 652명이 귀환하였다(59-60절). 이들의 가문과 선조가 이스라엘에 속하였는지를 밝힐 수 없었던 이유에 대해서는 두 가지로 추정해 볼 수 있다. 첫째, 이스라엘 백성들과 함께 살았지만 실제로는 이방인과 결혼하여 이방인 혈통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둘째, 실제로 이스라엘 백성이지만 전쟁과 포로로 끌려가는 어수선한 상황 속에서 족보를 잃어버렸기 때문이다. '델멜라'(Tel Melah)와 '델하르사'(Tel Harsha)는 각각 '소금의 도시', '조각의 도시'라는 뜻으로, '델'(Tel, 텔)이라는 단어가 첨가되어 있다. '델'은 고대 우가리트 어로 사람들이 모여 살던 성읍을 지칭하는데, 대부분 주요 전쟁터로 현재는 폐허로 남아 있는 곳이다. 이 두 도시는 페르시아 만 근처에 있었던 성읍으로 추정된다. '앗단'은 '앗돈'과 동일 지역으로 추정된다(느 7:61). 그래서 NIV에서는 두 지명을 'Addon'으로 동일하게 적고 있다. '앗단', '그룹', '임멜'의 위치는 아직 정확하게 밝혀지지 않았다. '들라야, '도비야', '느고다'라는 인물들도 밝혀지지 않았다.

      제사장 중에는 하바야 자손, 학고스 자손, 바르실래 자손이 돌아왔다. 이들 중 '바르실래'는 길르앗 사람 바르실래의 딸 가운데 한 사람을 아내로 삼고 그 이름을 따른 사람이다. 그들은 비록 제사장이었지만, 계보에서 자기 이름을 찾아도 얻지 못하였고 그 결과 사람들이 그것을 부정하게 여겼기 때문에 제사장 직분을 행하지 못하였다. 여기에서 '계보'는 문서화된 족보로, '연대기적 족보'를 의미한다(NLT, genealogical records). 세 자손들이 족보에서 자기 이름을 찾지 못한 것은 다른 이유, 즉 부정이 개입되었다는 여지를 열어 준다. 따라서 그들은 이에 근거하여 제사장 직분을 행하는 데에서 배제되었다. 이에 방백이 그들에게 우림과 둠밈을 가진 제사장이 일어나기 전에는 지성물을 먹지 말라는 명령을 내렸다. '방백'은 총독과 같은 의미로 사용된 페르시아식 호칭으로(느 7:70), 스룹바벨 혹은 세스바살로 추정된다. '광채'라는 의미의 '우림'과 '완전함'이라는 의미의 '둠밈'은 흉패에 넣는 것이다. 흉패는 제사장이 입는 에봇에 부착되어 있다(출 28:30;레 8:8). 우림과 둠밈은 모호하거나 의심이 드는 사건(문제)이 있을 때 그에 대한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묻거나 하나님이 그 질문에 응답하는 데 사용된 수단이었다(출 28;30;민 27:21;삼상 23:6,9,10;30:7). '그것들을 가진 대제사장이 일어나기 전'이라는 말 속에는 아직 그때까지 우림과 둠밈이 없었고, 방백을 비롯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것들을 찾기 위해 노력하고 있었다는 전제가 들어 있다. '지성물을 먹지 말라'는 것은 제사장들만이 먹을 수 있었던 지성물 분배에서 그들이 제외되었다는 의미를 담고 있는데, 이는 비단 거기에만 한정되지 않고 제사장 역할 전체를 수행하지 말라는 의미까지 들어 있다. 제사장에 대한 기록 부분에서 특이한 것은, 귀환한 사람들 가운데 그들의 인원수만 적지 않고 있다는 점이다.

    [질문] 가계를 증명할 수 없는 사람들도 귀환하였다는 것을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

    유대인들처럼 족보를 따지는 그룹에, 그 내용을 증명할 수 없는 사람들도 함께 귀환하였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그에 대한 증명 불가는 혈통의 순수성을 강조하는 유대 사회에서 여러 가지 불이익으로 작용할 수 있다. 특히 제사장은 그로 인해 '부정하다'는 모욕적인 평가를 받아야만 하였고, 제사장 직임을 수행하거나 제사장의 특권인 지성물을 먹는 일에도 배제되었다. 이러한 불이익은 귀환하기 전부터 예상되는 일이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귀환 길에 올랐다는 것은 그러한 대우보다도 하나님과 그분의 성전 재건에 참여하는 것을 더욱 가치 있게 여겼기 때문이다. 이것은 역으로 하나님을 향한 그들의 사랑과 열정이 얼마나 대단하였는지를 대변해 주고 있다. 두 번째로 알 수 있는 사실은, 바로 그들도 성전을 재건하는 일에 참여하여 자신들의 이름을 남기고 있다는 것이다. 이를 통해 혈통의 순수성을 증명하는 족보도 중요하지만, 그보다 더욱 중요한 것은 하나님을 향한 믿음과 그분의 명령에 순종하여 기꺼이 그 일에 함께하고자 하는 마음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하나님 나라는 바로 이런 사람들에 의해 세워진다.

    3. 회중의 합계와 기타 사항(64-67절)

    [본문] 64 온 회중의 합계가 사만 이천삼백육십 명이요 65 그 외에 남종과 여종이 칠천삼백삼십칠 명이요 노래하는 남녀가 이백 명이요 66 말이 칠백삼십육이요 노새가 이백사십오요 67 낙타가 사백삼십오요 나귀가 육천칠백이십이었더라

    ​[이해] 유다로 귀환한 모든 회중의 합계는 42,360명이다. 이에 대해 느헤미야도 동일하게 밝히고 있다(느 7:66). 하지만 여기에는 앞서 제시한 백성의 인원수와 차이가 있다. 앞서 구체적인 명단과 함께 제시한 숫자는 총 29,818명이다(가계를 증명할 수 있는 사람들 29,166명, 가계를 증명할 수 없는 사람들 652명, 가계를 증명할 수 없는 제사장들은 산정 제외). 따라서 13,194명의 차이가 있다. 이러한 차이를 규명하기 위해 다음과 같이 많은 견해가 제시되고 있다. (1) 3-60절에는 유다와 베냐민 지파 사람들만 다루었지만, 합계는 그들과 함께 귀환한 북쪽의 열 지파 사람들도 포함되어 있다. (2) 3-60절에는 20세 이상의 남자만 다루었지만, 합계는 12세 이상의 남자까지 포함되어 있다. (3) 3-80절에는 20세 이상의 남자만 다루었지만, 합계는 여자와 어린이도 포함되어 있다. (4) 3-50절의 내용 가운데 필사자의 오류가 있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정치, 군사적 왕정 국가를 재건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성전 재건을 통하여 예배 공동체를 이루기 위하여 귀환하였다. 따라서 그러한 공동체를 표현하는 용어인 '회중'은 어린이와 여자를 포함하고 있다는 점에서 (3)의 견해를 가장 무난한 것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42,360명의 백성들 외에도 7,337명의 남종과 여종, 200명의 노래하는 남녀도 귀환하였다. 또 그들이 데리고 온 짐승은 말 736마리, 노새 245마리, 낙타 435마리, 나귀 6,720마리가 되었다. 남종과 여종, 그리고 노래하는 남녀가 짐승과 함께 소개되고 있다는 점에서, 귀환한 사람들의 합계에 포함되지 않은 것은 분명하다. 종들의 수가 귀환자들 대비 1/6에 해당한다는 것은 대단히 높은 비율이다. '노래하는 남녀'에 대해서는 다양한 견해가 제시되고 있다. 아삽 자손의 수가 부족해서 그것을 메우기 위해 고용하였다는 견해, 부자들이 그들의 여흥을 위해 고용하였다는 견해 등이 그것이다. 귀환자들이 성전 재건과 제의를 위해 구성되었고 노래하는 자들이 그 수에 포함되지 않았다는 점에서, 또 노래하는 자들을 고용하는 것이 당시 중근동의 일반적인 관습이었다는 점에서(삼하 19:35;전 2:8) 후자의 견해가 좀 더 일리 있어 보인다. 짐승들은 노약자와 어린이 등을 태우거나 짐을 싣고 운반하는 데 이용하였을 것으로 여겨진다.

    ​[질문]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벨론에서 예루살렘으로 돌아갈 때 희생하였던 것들은 무엇인가? 반대로 그들이 얻은 것들은 또 무엇인가? 서로 나누어 보시오.

    ​그들이 희생한 것들은 먼저 바벨론에 구축해 놓은 삶의 터전이었다. 귀환하지 않고 그곳에서 계속 살게 될 경우 그들이 닦아 놓은 생활 기반으로 상당히 윤택한 생활을 할 수 있었을 것이다. 둘째는, 안락한 생활을 희생하였다. 바벨론에서 예루살렘까지의 거리는 2,400km가 넘는다. 그 여정은 4개월이나 걸렸기 때문에(7:9), 무척 힘들고 고단한 과정이 기다리고 있었다. 설령 그 여정을 마치더라도 편안한 생활이 보장되어 있지 않았다. 이미 황폐된 예루살렘에서 새로운 삶의 터전을 일구어야 하고, 그들의 귀환 목적인 성전 건축 일에도 참여해야만 하였다. 셋째는, 가족 친지들과 이별해야 하는 희생을 감수하였다. 물론 가족 모두가 돌아간다면 아무 문제가 되지 않겠지만, 그곳 원주민들과 결혼하거나 그곳에서 이룬 기반을 포기할 수 없었던 가족들에게는 이 문제가 결코 쉽지 않았을 것이다. 성전 재건을 위하여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야만 하는 사람들은 그 이별을 결코 피할 수 없었다.

      ​그들이 얻은 것은 첫째, 분명한 삶의 목적이었다. 바벨론에서의 삶도 분명 목적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겠지만, 새롭게 부여된 목적은 여호와 하나님의 성전을 재건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그 목적은 이전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더욱 분명하고 영광스러운 것이 아닐 수 없었다. 둘째, 성전 재건과 그곳을 중심으로 구축하게 될 공동체에 그들의 이름을 올렸다는 것이다. 성전은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는 곳이다. 따라서 그 임재 속에서 이룰 공동체는 오늘날의 교회를 의미한다. 그들은 하나님의 나라라 할 수 있는 교회를 세우는 영광스러운 일에 자신들의 이름을 올림으로써 그들의 이름이 지금까지도 밤하늘의 별처럼 반짝이고 있다. 가계를 증명할 수 있는 사람이나 그렇지 못한 사람, 지도자와 귀족뿐만 아니라 평민과 하층민들도 모두 하나같이 그곳에 자신들의 이름을 새길 수 있었다. 셋째, 그 결과 하나님이 그들 자신의 기업이 되었다. 이 세상에서는 자신들과 함께하면서 인도하시는 하나님을 경험하였고, 저세상에서는 하나님 나라의 잔치에도 참여하여 그분과 영원토록 함께하면서 영화를 누릴 수 있게 되었다.

    ​4. 귀환 후에 한 일(68-70절)

    ​[본문] 68 어떤 족장들이 예루살렘에 있는 여호와의 성전 터에 이르러 하나님의 전을 그곳에 다시 건축하려고 예물을 기쁘게 드리되 69 힘자라는 대로 공사하는 금고에 들이니 금이 육만 천 다릭이요 은이 오천 마네요 제사장의 옷이 백 벌이었더라 70 이에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과 백성 몇과 노래하는 자들과 문지기들과 느디님 사람들이 각자의 성읍에 살았고 이스라엘 무리도 각자의 성읍에 살았더라

    ​[이해] 이스라엘 백성들이 예루살렘으로 돌아와서 한 일은 두 가지였다. 첫째, 어떤 족장들이 여호와의 성전 터에 이르러 그곳에 하나님의 전을 다시 건축하는 데 사용될 예물을 드렸다는 것이다. '어떤 족장들'은 모든 족장이 아닌 일부 특정 족장들만 가리키는 것이다. 그들이 드린 예물을 금고에 들였는데, 금 61,000다릭, 은 5,000마네, 제사장의 옷 100벌이나 되었다. '다릭'은 바사 제국의 금화로, 다리오 왕의 초상이 새겨져 있다. 무게는 약 8.41g으로, 은화 20배의 가치가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따라서 금 61,000다릭은 513,010g으로, 현재 금액으로 환산하면 300억 원 정도 된다(1g에 58,474원 적용, 2019년 7월 12일 기준). '마네'는 유대의 화폐 단위인 '므나'를 말한다. 1마네는 은 570g이다. 따라서 은 5,000마네는 2,850,000g으로, 현재 금액으로 환산하면 18억 원 정도 된다(1g에 645원 적용, 2019년 7월 12일 기준). 어떤 족장들은 그 예물을 드릴 때 '기쁘게', '힘자라는 대로' 드렸다. '기쁘게'는 '기꺼이...하다'(to do willing), '자유롭게 행하거나 아낌없이 주다'(to do or give freely)는 뜻이다. '힘자라는 대로'는 '그들의 능력에 따라(맞게)'라는 뜻이다. 따라서 이는 포로 귀환자들의 지도자들이 그 예물을 드릴 때 인색함이나 강요에 의해서 드린 것이 아니라 자신들의 형편에 따라 기꺼이 드렸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런 모습은 애굽에서 나온 이스라엘 백성들이 성막을 세우기 위해 많은 재물을 자원하여 드렸던 장면을 연상케 한다(출 35:5,21-29).

      ​둘째, 모든 사람이 각자 자신들의 성읍에서 살았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눈여겨볼 것은 제사장들, 레위인들, 몇 명의 백성, 노래하는 자들, 문지기들, 느디님 사람들을 이스라엘 무리와 구분하여 기록하였다는 점이다. 이것은 다음과 같은 사항을 반영하기 위한 것으로 여겨진다. 전자는 성전에서 봉사하는 사람들이다. 따라서 그들은 그 일을 위해 성전 인근의 예루살렘에 거하였다. 본 거주지가 예루살렘이었던 몇몇 백성들도 당연히 그곳에서 거하였다. 그렇지만 이들을 제외한 '무리'는 예루살렘 성읍에서 떨어진 유다 전역에 있는 자신들의 거주지에 정착하였다.

    ​[질문] 성전 건축을 위하여 예물을 드렸던 '어떤 족장들'에게 볼 수 있는 태도는 무엇인가?

    ​첫째, 지도자들이 솔선수범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지도자들은 백성들에게 말로 지시만 하고 자신들은 행동으로 옮기지 않는 경우가 종종 있다. 바리새인과 같은 종교 지도자들이 대표적인 경우이다. 그들은 하나님과 그분의 율법에 대해 연구하고 가르쳤지만, 정작 자신들은 그 내용을 실천에 옮기지 않았다. 심지어는 정반대로 행동하기도 하였다. 그 결과 그들이 추구한 삶의 양식은 교만과 허례허식이었고, 가난하고 불쌍한 과부들의 가산을 삼키는 일도 서슴지 않았다(눅 20:46-47). 그들의 악영향은 당시 유대 사회를 병들게 하였다. 그래서 예수님도 제자들에게 바리새인들의 누룩을 주의하라고 말씀해 주셨다(눅 12;1). 그들과 달리 어떤 족장들은 귀환한 백성들에게 예물을 드리라고 말하기 전에 자신들이 먼저 예물을 드림으로써 새로 이루어진 공동체에 선한 영향을 주었다. 둘째, 그 예물을 기쁘게, 힘자라는 대로 드리는 모습을 볼 수 있다. '기쁘게'는 강압에 의해 행동으로 옮겨지는 '어쩔 수 없이'와 반대되는 개념이다. 또 '힘자라는 대로'는 '적당히', '인색하게'와 반대되는 개념이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제사는 반대되는 개념을 포함하고 있지 않다. 기쁘게, 힘자라는 대로 드린 것을 기뻐하시는 분이 하나님이시다. 따라서 어떤 족장들은 그렇게 행함으로써 하나님을 기쁘시게, 즉 그분을 영광스럽게 하였고, 자신들과 함께한 공동체도 그 영광 가운데 머물도록 하였다.

    ​[참조] 에스라서와 느헤미야서의 귀환자 인원수 차이 비교(단위:명)

    ​다음과 같이 둘 사이의 인원수에 차이가 생긴 이유는, 에스라서의 필사자와 느헤미야서의 필사자가 숫자를 기록할 때 생긴 오류에서 비롯되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명 단

    에스라

    느헤미야

    비고(차이)

    아라 자손

    775

    652

    123

    바핫모압 자손

    2,812

    2,818

    6

    삿두 자손

    945

    845

    100

    바니(빈누이) 자손

    642

    648

    6

    브배 자손

    623

    628

    5

    아스갓 자손

    1,222

    2,322

    100

    아도니감 자손

    666

    667

    1

    비그왜 자손

    2,056

    2,067

    10

    아딘 자손

    454

    655

    201

    베새 자손

    323

    324

    1

    하숨 자손

    223

    328

    105

    베들레헴과 느도바 자손

    179

    188

    9

    벧엘과 아이 사람

    223

    123

    100

    스나아 자손

    3,630

    3,930

    300

    아삽 자손

    128

    148

    20

    문지기의 자손

    139

    138

    1

    노래하는 남녀

    200

    245

    45

    인원수 합계

    42,360

    42,360

    동일

    II. 메시지

    ​본문: 스2:1-70

    ​제목: 성전 재건 참여자의 명단

    ​1. 돌아온 사람들의 명단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접할 때, 우리는 종종 난처한 상황에 처할 때가 있습니다. 신약성경은 그런 경우가 거의 없는데, 구약성경은 우리에게 마치 '늪'과 같은 느낌을 주는 부분이 몇 군데 있습니다. 레위기나 이사야서를 비롯한 예언서들을 읽을 때면, 도대체 알 수 없는 의미들로 인해 계속 읽어야 하는지 아니면 그냥 건너뛰어야 하는지 갈등에 빠지곤 합니다. 더러 용기를 내서 몇 장을 넘겨보기도 하지만, 얼마 가지 못해 수면제가 우리의 온몸에 퍼져 나른해지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오늘 우리 앞에 놓여 있는 본문 말씀도 그 가운데 하나입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바벨론에서 예루살렘과 유다로 돌아온 사람들의 이름과 숫자만 우리의 눈을 흔들리게 합니다. 그렇지만 놀라운 사실은 바로 그런 '늪'과 같은 말씀 속에 천지와도 바꿀 수 없는 값진 보화가 숨겨져 있다는 점입니다. 조금만 인내를 가지고 그 의미를 곰곰이 되씹어보면 허약한 심령에 보약이 되는 '진액'이 끊임없이 배어 나오는 것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이 소개하고 있는, 예루살렘과 유다 땅으로 돌아온 사람들의 명단은 아래 도표와 같이 정리해 볼 수 있습니다. 먼저 명단은 크게 두 부류로 나누어져 있는데, 2-58절은 족보(가계)나 본적지 증명이 가능한 사람들이고, 59-63절은 그것이 불가능한 사람들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족보나 본적지 증명이 가능한 사람들은 다시 11명의 지도자를 비롯하여(2절, 느헤미야는 12명으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평민들, 성전 봉사자들, 막일이나 천한 일을 하는 사람들을, 그리고 족보나 본적지 증명이 불가능한 사람들은 평민들과 제사장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것을 통해 성전 재건을 위해 돌아온 사람들이 다양한 계층으로 이루어져 있고, 하나님의 성전을 재건한 사람들이 누구였는지 구체적으로 알 수 있습니다. 또 그 사람들이 바로 그 이후의 '참(진정한) 이스라엘'을 구성하였다는 것도 알 수 있습니다. '참 이스라엘'은 오늘날 '교회'로 볼 수 있는데, 이를 통해 우리는 교회가 바로 이런 사람들로 이루어져야 한다는 사실을 배울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 명단 속에 들어 있는 그들의 어떤 점이, 향후 전개될 유다 사회를 '참 이스라엘'로 만드는 데 원동력이 되었을까요?

    ​2. 그들이 바라본 곳

    ​고레스 왕이 내린 칙령(고레스 칙령)은, 구속력이 있는 '강제 명령'이라기보다는 그들의 예루살렘 귀환에 대한 '허락'의 성격이 더 강하였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자신들의 자유로운 의사 결정에 따라 예루살렘으로 돌아갈 수도 있었고 아니면 그대로 그곳에 머물러 있을 수도 있었습니다. 만약 돌아가기로 결정하게 되면 그들이 치러야 할 대가와 희생이 결코 만만치 않았기 때문에, 벅찬 기쁨과 동시에 엄청난 심리적 갈등에 사로잡히게 되었을 것입니다. 비록 포로 신분이었지만 그들의 생활 기반은 고레스의 이방인 포용 정책에 따라 대체적으로 긍정적인 모습으로 뿌리를 내리고 있었습니다. 집도 생기고, 농지도 생기고, 그로 인해 그들 나름의 기득권도 확장되어 갔습니다. 그런 그들이 예루살렘으로 돌아간다는 것은 이 모든 것을 포기해야 합니다. 그러니 갈등이 생길 수밖에 없습니다.

      ​그들이 치러야 할 희생은 거기에서 끝나지 않습니다. 가족과 이별하는 상황도 발생할 수 있습니다. 다행히 모든 가족이 예루살렘으로 돌아간다면 문제가 되지 않겠지만, 그곳 원주민과 결혼하여 새로운 가정을 형성한 사람들은 문제가 그리 간단하지 않습니다. 가족과 그 문제로 의사 결정을 하면서 고통스러운 갈등에 빠질 것이 빤하였고, 심지어 그 갈등이 해결되지 않으면 가족들끼리 헤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설사 돌아가는 쪽으로 결정되었다고 하더라도 그들이 치러야 할 대가는 거기에서 끝나지 않습니다. 이제 그 앞에는 그들이 치러야 할 실제적이고 구체적인 대가가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들은 바벨론에서 예루살렘까지 2,400km 이상의 광야 길을 통과해야만 합니다. 비행기나 자동차를 타고 가는 것이 아니라 걸어서, 그것도 양손에 무거운 짐을 들고 노모와 어린아이까지 함께 가야만 하는 그 길이 그들 앞에 놓여 있습니다. 또 그렇게 해서 예루살렘에 도착한들 그들을 반겨줄 친척이나 안락한 집, 배부르게 먹을 풍성한 음식이 기다리고 있는 것도 아닙니다. 그들을 기다리고 있는 것은 이미 오래전 바벨론에 의해 완전히 폐허가 된 땅덩어리뿐입니다. 새로 집을 짓고 황무지를 옥토가 되도록 일구기 위해서는 뼈가 빠지도록 일해야 하고, 그 와중에 성전을 건축하는 일에도 동원되어야 합니다.

      ​만약 여러분이 이런 상황 가운데 처하게 된다면 그때도 바벨론에 있는 모든 것을 버리고, 아무것도 없는, 아니 오히려 고통만 예상되는 예루살렘으로 발걸음을 옮길 수 있겠습니까? 저는 못할 것 같습니다. 저 같으면 그냥 바벨론에 눌러앉으려고 할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 말씀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루살렘으로 올라간 사람들이 있다고, 그것도 구체적으로 이름과 사람의 수까지 적어가면서 우리 앞에 제시하고 있습니다. 이들의 모습을 보면서 우리의 머릿속에 오버랩(overlap) 되는 인물이 한 명 있습니다. 누구입니까? 바로 아브라함입니다. 그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는 하나님의 말씀이 주어졌을 때(창 12:1), 정말 그곳을 떠나 그 말씀을 따라가 버렸습니다.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너는 복이 될지라"는 약속 하나만 달랑 믿고 그렇게 떠나갔습니다. 이런 아브라함과 똑같이, 지금 바벨론에 남아 있던 유다 백성들도 예루살렘으로 올라가 성전을 재건하라는 하나님의 소명을 받자마자 그 마음이 하나님께 감동을 받고 다 일어나 올라갔던 것입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주셨던 약속이 그들의 기억 속에도 똑같이 살아 있었기 때문에, 그들의 정작 중요한 관심은 바벨론의 편안한 삶보다 성전 재건에 있었고, 재건된 성전 앞에서 여호와 하나님을 섬기면서 축복받는 데에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이 '참다운 이스라엘'의 자격이 있고, 바로 그런 점이 하나님이 그들에게 주신 소명, 즉 성전을 재건하라는 사명을 온전하게 이룰 수 있는 원동력이 되었던 것입니다.

      ​에스라가 공개한 명단을 보면서, 그리고 그 구체적인 명단 이면에 힘 있게 내딛는 그들의 믿음을 보면서, 우리도 지금 우리 교회를 믿음의 눈으로 돌아보아야 합니다. 약속 있는 소명 앞에서 자신들이 딛고 있는 모든 것으로부터 떠나 오직 성전 재건을 위해 흔쾌히 예루살렘으로 올라갔던 그들처럼, 얽매이기 쉬운 모든 무거운 죄와 짐을 벗어버리고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을 통해 우리도 우리에게 주신 약속 있는 소명인 교회를 온전하게 세워나가야 합니다. 이것이 오늘 말씀이 우리에게 주는 핵심 메시지입니다.

    ​3. 그들도 바라본 곳

    ​오늘 본문이 제공하고 있는 명단 속에는 '이상한 사람들'의 이름도 적혀 있습니다. 43-54절에서 느디님 사람들의 자손들의 이름을 소개하고 있는데, 여기에서 '느디님 사람들'은 성전에서 막일을 하던 종들입니다. 느디님 자손들이 성전에서 막일을 하던 종들이었다면, 55-58절에서 소개한, 솔로몬의 신하의 자손들은 왕궁에서 천한 일을 하던 사람들입니다. 이들의 공통점은 이들 모두 혈통적으로 이스라엘의 백성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그들은 이스라엘과의 전쟁에서 포로로 끌려온 후에 종이 되어, 이스라엘 사회의 온갖 허드렛일을 도맡아 하면서도 정당한 대우가 아닌 푸대접을 받았던 사람들입니다. 그들의 입장에서 보면 바벨론에 머무는 것이 더 좋을 것 같은데, 이상하게 그들의 명단도 예루살렘 귀환과 성전 재건 명단의 한가운데 새겨져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59-63절에서 소개하고 있는, 족보나 본적지 증명이 불가능한 사람들도 이상하기는 마찬가지입니다. 족보나 본적지를 그 무엇보다 중요시하였던 이스라엘 사회의 관습에서 볼 때, 그것을 밝힐 수 없다는 것은 이전에 그들이나 그들의 조상이 하나님 중심의 신앙생활에서 뭔가 문제가 있었다는 증거가 되기도 합니다. 그래서 그들의 존재는 이스라엘 공동체에서 이방인 취급받던 사마리아인들과 또 앞서 소개한 느디님 자손이나 솔로몬의 신하의 자손과 똑같은 모습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그들도 느디님이나 솔로몬 신하의 자손들처럼, 예루살렘으로 올라오지 않고 바벨론에 남아 있는 것이 더 나을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이름이 그 명단에 버젓이 올라와 있습니다.

      ​그렇다면 앞서 제시한 두 부류 사람들은 왜 바벨론이 아닌 예루살렘을 선택하였던 것일까요? 우리는 본문이 그 이유를 구체적으로 제시하고 있지 않기 때문에 그들의 선택 동기를 정확하게 알 수 없습니다. 그렇지만 정황상 하나님의 소명과 약속이 바벨론에서의 삶보다 더 가치 있고 소중하다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에 그들이 그러한 선택을 하였다고 쉽게 추측해 볼 수 있습니다. 그렇지 않고서야 인간적인 관점에서 나을 게 하나도 없는 예루살렘을 왜 선택합니까? 그들이 바보가 아닌 이상 그러한 선택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바로 이런 점에서 그들의 믿음은 기생 라합과 동일한 모습을 하고 있고, 이런 점 때문에 향후 전개된 이스라엘 공동체가 '참 이스라엘'이 되는 데에 그들의 동참이 강력한 원동력이 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느디님 사람의 자손들, 솔로몬 신하의 자손들, 그리고 족보도 본적지도 없는 부랑자와 같은 사람들이 예루살렘에 올라가 성전을 재건하는 사람들의 명단 속에 들어 있다는 것은, 이스라엘 역사에서 매우 중요한 전환점이 됩니다. 이전의 역사는 몇몇 사사들과 몇몇 왕들이 주인공이 되어 역사를 좌우하였습니다. 하지만 포로기 이후의 역사는 스룹바벨과 같은 지도자나 제사장들, 족보나 본적지가 있는 정통 평민들뿐만 아니라 종이나 하층민, 그리고 족보나 본적지도 없는 부랑자까지 모두 '하나의 순수한 신앙 공동체'를 이루면서 이스라엘 역사를 이끌어 갑니다. 그리고 이러한 흐름은 500년 뒤의 예수님의 지상 사역과 교회에 그대로 이어지게 됩니다. 주님의 복음에 몇몇 주도적인 사람이 등장하나요? 아닙니다. 주님의 복음은 포로기 이후의 '참 이스라엘' 사회처럼, 그 어떤 사람들에 의해 좌우되지 않습니다.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면 구원을 받을 수 있고(행 2:21), 하나님 아버지의 뜻대로 하는 자는 누구든지 주님의 가족이 되어(마 12:50), 신약시대의 ‘참 이스라엘’인 ‘교회’를 세우는 주인공이 될 수 있습니다. 이것이 주님의 복음이고, 그래서 그 복음이 이끌어가는 역사가 '참 역사'가 되는 것입니다.

      ​자기 자신이 허드렛일이나 하는 존재로 느껴질 때가 있습니까? 족보나 본적지와 같은 든든한 배경이 없어 맨날 루저(looser)와 같은 인생을 살고 있다고 푸념하거나 불평할 때가 있습니까? 만약 그 일로 인해 우리가 자꾸만 작아진다면, 그때는 우리 인생에서 '위기'가 아니라 주님 안에서 귀중한 '기회'가 됩니다. 그 옛날 그 모습 그대로 믿음 하나 붙들고 성전 재건을 위해 바벨론에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갔던 유다 백성들처럼, 우리도 지금 그 모습 그대로 겨자씨 같은 믿음 하나 붙들고 주님께 나아간다면 그들의 이름이 '참 이스라엘'의 명단에, '그 위대한 명단'에 올라갔던 것처럼, 우리의 이름도 '참 교회'의 명단에 새겨지고 역사의 주인공이 될 수 있습니다. 이것은 복음이 우리에게 열어 준 기회입니다. 그 기회를 놓치지 말고 굳게 붙잡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바랍니다.

    ​4. 우리가 바라볼 곳

    ​오늘 말씀을 정리하도록 하겠습니다. 에스라는 바벨론에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 성전 재건에 참여하였던 사람들의 명단을 하나하나 구체적으로 제시하고 있습니다. 그 안에는 스룹바벨과 같은 지도자와 제사장이나 레위인 같은 성직자가 들어 있고 족보와 본적지가 분명한 보통 사람들도 많이 들어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종이나 막일하는 노동자의 이름도 들어 있습니다. 게다가 그들은 이스라엘 족속이 아니라 이방인들입니다. 뿐만 아니라 족보나 본적지도 없는 부랑자들도 끼어 있습니다. '참 이스라엘'은 이런 사람들에 의해 하나의 순수한 신앙 공동체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이 '참 이스라엘'을 이루게 된 원동력은 이런 배경에 있지 않았습니다. 그 원동력은 성전 재건을 위하여 그 어떤 희생도 마다하지 않는 헌신에 있었습니다. 만약 그들이 눈앞에 있는 희생만 바라보았다면 애초 발걸음을 떼지도 못하였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소명 뒤에 있는 찬란한 약속을 바라보았기 때문에, 그와 같이 어려운 발걸음을 기쁜 마음으로 옮길 수 있었던 것입니다. 신약시대의 '참 이스라엘'인 우리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무너진 교회를 재건하는 소명은 어쩌면 성전 재건 작업보다 더 어려운 일인지 모르겠습니다. 그 길에는 희생할 것이 너무도 많고 핍박(박해)도 무수히 널려 있습니다. 그렇지만 우리가 하나님의 약속인 상급을 바라보게 된다면, 우리도 그들처럼 온전한 교회를 세우는 일에 뛰어들 수 있습니다. 그렇게 뛰어드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바랍니다. 그래서 우리 이름이 구원받은 자들의 명단뿐만 아니라, 참 교회를 세우는 데에 원동력이 된 명단 속에도 생생하게 새겨지게 되기를 바랍니다.




    에스라 3장 요약

    귀향 7개월만에 제단을 쌓고서 번제를 드렸으며 초막절을 지켰으며 귀향 2년 2개월부터 성전을 짓기 시작하였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3장은 크게 두 가지 내용을 소개하고 있다. 첫째, 바벨론에서 본토로 귀환한 백성들은 그 해 일곱째 달에 성전 터에 제단을 세우고 번제를 드렸다. 그들이 제단을 세우고 번제를 드린 일은 매우 위험한 행동이었다. 주변 민족의 입장에서 볼 때 그것은 이스라엘의 회복을 의미하고 그 회복이 큰 위협이 될 수밖에 없기 때문에, 결코 좌시할 수 없는 사안이었다. 그들은 그것을 빌미삼아 이스라엘에 온갖 방해와 위협을 가할 수 있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에 대한 두려움이 있었지만, 그 두려움에 굴복하지 않고 제단을 세우고 번제를 드림으로써 하나님을 향한 자신들의 신앙을 표현하였다.

      ​둘째, 성전 재건을 위하여 반년 동안 준비한 백성들은, 귀환한 그다음 해 둘째 달에 성전 재건을 위한 기초를 놓았다. 모든 백성은 그 일을 허락하신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을 찬양하면서 기쁨으로 큰 함성을 질렀다. 1차 성전(솔로몬 성전)을 보았던 노인들은 그 감격을 이기지 못하고 대성통곡을 하기도 하였다.

    ​I. 본문 이해와 질문

    ​1. 제사 회복과 성전 재건 준비(1-7절)

    ​[본문] 1 이스라엘 자손이 각자의 성읍에 살았더니 일곱째 달에 이르러 일제히 예루살렘에 모인지라 2 요사닥의 아들 예수아와 그의 형제 제사장들과 스알디엘의 아들 스룹바벨과 그의 형제들이 다 일어나 이스라엘 하나님의 제단을 만들고 하나님의 사람 모세의 율법에 기록한 대로 번제를 그 위에서 드리려 할새 3 무리가 모든 나라 백성을 두려워하여 제단을 그 터에 세우고 그 위에서 아침저녁으로 여호와께 번제를 드리며 4 기록된 규례대로 초막절을 지켜 번제를 매일 정수대로 날마다 드리고 5 그 후에는 항상 드리는 번제와 초하루와 여호와의 모든 거룩한 절기의 번제와 사람이 여호와께 기쁘게 드리는 예물을 드리되 6 일곱째 달 초하루부터 비로소 여호와께 번제를 드렸으나 그때에 여호와의 성전 지대는 미처 놓지 못한지라 7 이에 석수와 목수에게 돈을 주고 또 시돈 사람과 두로 사람에게 먹을 것과 마실 것과 기름을 주고 바사 왕 고레스의 명령대로 백향목을 레바논에서 욥바 해변까지 운송하게 하였더라

    ​[이해] 예루살렘과 유다 도로 돌아온 이스라엘 자손은 각자의 성읍에 정착하며 살았다. 그들은 일곱째 달이 되었을 때 일제히 예루살렘에 모였다. '일곱째 달'은 유대력으로 '디스리월'로, 태양력, 즉 현대의 달력에 따르면 9, 10월에 해당한다. 아마도 그들이 바벨론으로부터 돌아온 그 해의 일곱째 달이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그 달에는 나팔절(1일), 속죄일(10일), 초막절(15일) 등이 모두 포함되어 있기 때문에,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가장 거룩한 달 가운데 하나이다. 그들이 일곱째 달에 일제히 모인 이유는, 하나님의 제단을 만들고 그 위에서 모세의 율법에서 기록한 대로 번제를 드리기 위해서였다(2절). 그들은 성전 재건에 앞서 모세 율법의 규정대로 초막절을 준수함으로써(레 23:41), 먼저 하나님과의 온전한 관계를 회복하려고 힘썼던 것이다. 더구나 솔로몬 왕이 성전을 건축하고 낙헌제를 드렸던 때도 칠월이었기 때문에(대하 5:3), 그 의미는 남달랐을 것이다.

      ​그런데 문제가 하나 있었다. 유다의 주변국 사람들이 그것을 싫어하였기 때문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제단을 세우고 번제를 드리는 것이 두려웠다. 3절의 '모든 나라 백성'은 당시 팔레스타인 땅과 그 주변에 거주하고 있던 여러 민족을 가리킨다. 여호와 하나님을 향한 신앙의 회복은 이스라엘의 회복을 의미하기 때문에, '모든 나라 백성'에게는 그것이 정치적인 위협으로 비칠 수 있다. 따라서 그들은 그것을 기를 쓰고 막을 필요가 있었다. 이러한 상황은 모종의 위협, 즉 전쟁이나 여타 방해 공작을 야기할 수 있기 때문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것이 두려웠던 것이다. 4-5장에는 그와 같은 일이 실제로 일어난 사건을 구체적으로 기록하고 있다. 그들은 성전 재건을 지속적으로 방해하였고, 그로 인해 성전 재건 작업이 중단되기도 하였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바로 그 일이 두려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despite, NIV) 그 터 위에 재단을 세웠다. 따라서 그 터에 재단을 세웠던 그들의 행동 속에서 두 가지의 의미를 유추해 볼 수 있다. 첫째, 두려움보다 제단을 세우고자 하는 열망이 더 컸다. 이것을 통해 하나님을 향한 그들의 신앙이 얼마나 간절하였는지를 알 수 있다. 둘째, 하나님을 향한 열망으로 두려움을 극복하려고 하였다. 즉 그들은 재단을 세우고 제사를 드림으로써 대적들의 위협으로부터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그들이 처음부터 올바른 기초 위에서 예배를 드리려고 하였다는 것을 증명해 준다. 이러한 행동은 요사닥의 아들 예수아와 그의 형제 제사장들, 스알디엘의 아들 스룹바벨과 그의 형제들이 주축이 되어 이루어졌다. 한편, '그 터'는 성전이 세워졌던 곳이고, 또 다시 성전이 세워질 장소를 가리킨다. 그 터는 하나님이 다윗에게 구체적으로 지정해 주셨던 곳이고, 그 지정에 따라 솔로몬이 성전을 세웠던 곳인, 예루살렘의 모리아 산 위에 있는 여부스 사람 아라우나(오르난)의 타작마당이다(삼하 24:18-25; 대하 3:1). 따라서 새로운 제단은 파괴된 원래 제단이 있었던 곳에 복구되었던 것이다.

      ​솔로몬 성전 터 위에 제단을 세운 백성들은, 그 위에서 아침저녁으로 여호와께 번제를 드렸다(3절). 아침저녁으로 여호와께 드린 번제는 '상번제'를 의미한다. '상번제'는 매일 드리는 번제로(출 29:42;단 8:11-13;11:31;12:11), 아침과 저녁 두 번에 걸쳐 어린 양을 한 마리씩 번제로 드렸고, 고운 가루 1/10 에바에 기른 1/4 힌을 섞어 소제와 전제를 곁들여 드렸다(출 29:40-41;민 28:5-8;29:6-38;스 3:5;느 10:33;겔 46:15). 또 안식일에는 제물이 두 배로 드려졌다(민 28:9-10).

      ​또한 그들은 모세의 율법에 기록된 규례대로 초막절을 지켜 번제를 매일 정수대로 날마다 드렸다(4절). '초막절'은 출애굽 당시 40년 동안 광야 생활을 하면서 그들을 지켜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기념하기 위해 지켜졌던 절기로, 유월절, 칠칠절(오순절)과 함께 이스라엘의 3대 절기 중의 하나이다. 히브리 달력으로 7월 15일부터 7일 동안 지켜졌다(민 29:12). 초막을 짓고 모든 가족이 함께 거하면서 절기를 지켰는데, 그 기간 동안에는 노동이 금지되었으며, 첫날과 마지막 날에 성회가 열렸고 매일 화제를 드렸다(레 23:34-43). 이때는 농사가 끝나고 곡식을 저장하는 때이기 때문에, 풍성한 수확을 허락하신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는 추수 감사절 성격도 지니고 있었다. 그런 점에서 초막절을 '수장절'로 부르기도 한다(출 23:16). '번제를 매일 정수대로 드렸다'는 말은, 기록된 율법의 규례를 따랐다는 것을 의미한다. 즉 수송아지의 경우 첫째 날에는 13마리를, 둘째 날에는 12마리를, 그리고 그렇게 계속 한 마리씩 줄이다가 일곱째 날에는 7마리를 드렸다. 이렇게 해서 이 절기 동안 바쳐진 제물은 총 215마리였다(민 29:13-38). 이렇게 다른 어느 경우보다 많이 바쳐진 제물로 인해 초막절은 종종 '잔치', '축제'로 불리기도 하였다. 이를 통해 당시 백성들이 율법을 바로 인식하고 철저하게 지켰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상번제와 초막절 이후에도 항상 드리는 번제(상번제), 초하루에 드리는 번제, 여호와의 모든 거룩한 절기의 번제를 드렸다. 또 사람이 여호와께 기쁘게 드리는 예물도 드렸다(5절). '초하루에 드리는 번제'는 매월 초에 드리는 번제를 말하는데, '월삭'이라고도 한다(민 10:10;28:11-15;시 81:3). '여호와의 모든 거룩한 절기'는 '무교절'(유월절, 레 23:5-80), '맥추절'(레 23:15-21), '나팔절'(레 23:23-25), '초막절'(4절;레 23:33-36), '속죄일'(레 23:27-34) 등의 절기를 말한다. 또 '사람이 여호와께 기쁘게 드리는 예물'은 특정 절기와 관계없이 그때그때 필요에 따라 기쁘게(자발적으로)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 즉 '자원제'(free will-offering)를 말한다(출 35:21,29;36:3;레 22:18,21;대하 35:8).

      ​이처럼 성전 터 위에 제단을 세운 일곱째 달 초하루부터 비로소 여호와께 번제를 드렸지만, 그때 여호와의 성전 지대는 미처 놓지 못하였다(6절). '번제'(burnt offering)는 제물을 불에 태워 그 향기로 하나님을 기쁘게 해 드리는 제사로, 번제단 위에서 희생 제물이 되는 짐승의 가죽을 제외한(가죽은 제사장의 몫이었음, 레 7:8) 모든 것을 거룩한 불에 완전히 태워 그 향기(연기)로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를 말한다(레 1:2-9). 성전 마당의 번제단에서 드려졌다 하여 ‘번제’라고 한다. 이스라엘의 5대 제사(번제, 소제, 화목제, 속죄제, 속건제, 레 1:1-7:38) 중의 하나인 번제는,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회복하고 예배자의 전 인격이 하나님께 바쳐짐을 상징하는 제사 방법 중의 하나이다. 이렇게 번제를 통해 하나님과 바른 관계가 회복되었지만, 그때까지 성전 지대는 놓지 못하였다. '지대'는 '기초'라는 뜻으로, 성전의 기초도 미처 놓지 못하였다는 것은 그때까지 성전 재건 작업이 착수되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상황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귀환한 목적을 아직도 이행하지 못하고 있다는 정보 제공과 함께, 그들이 성전 재건 현장으로 자연스럽게 나아가는 역할을 하고 있다.

      ​백성들은 성전 재건을 위해 귀환하였기 때문에, 그 목적을 이루기 위해 먼저 건축에 필요한 것들을 준비하였다(7절). 석수와 목수에게 돈을 주었고, 시돈과 두로 사람에게 음식과 음료와 기름을 주었다. '석수'는 '돌을 뜨는 사람'(왕상 5;15), '벽돌공'(왕하 12;12) 등과 같이 돌을 다루는 기술자들을 말한다. '목수'는 '목공'(사 44:12), '철공'(사 44;12), '장인'(사 40:19) 등을 말한다. 석수와 목수는 이스라엘 백성들 중에서 선발한 것으로 추정되는데, 돈을 주고 고용하였다. 시돈과 두로 사람들에게 음식, 음료, 기름을 준 이유는, 그 지역, 즉 레바논의 백향목과 교환하기 위해서였다. 시돈과 두로 지역은 경작에 적합한 농지 부족으로 식량 사정이 열약하였기 때문에(행 12:20), 음식(곡식), 음료(포도주), 기름(올리브유) 등의 생필품을 백향목과 교환하는 방식으로 얻었다. 물물교환을 통해 구한 백향목은 레바논에서 욥바 해변까지 운송되었는데, 그 방법은 백향목을 뗏목으로 엮어서 해안을 따라 옮기는 '수운'(water traffic)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러한 운송 방법은 최초의 성전을 건축한 솔로몬에 의해서도 이용되었다(왕상 5:9). 백향목을 가져오는 대목에서 눈에 띄는 것은, 그것이 '바사 왕 고레스의 조서대로' 하였다는 점이다. 이것을 통해 고레스 왕이 성전 건축에 얼마나 관심을 기울이고 있었고 얼마나 구체적으로 돕고 있었는지를 알 수 있다.

      ​한편 '시돈'(Sidon)은 베이루트 남쪽 48km 지점에 있었던 도시 국가이다. 지중해 연안의 해상 교통, 무역, 상업의 중심지로, 페니키아(베니게) 사람들이 세운 항구 도시이다. 가구, 건축, 장신구 제작, 상아 가공 기술이 매우 발달하였다. 12-13세기에는 십자군 원정의 주요 격전장이 되었고, 그래서 지금도 그곳에는 십자군들이 세웠던 요새와 성터가 남아 있다. 오늘날은 레바논 공화국에 속한 인구 5만의 소도시 '사이다'(Saida)이다. '두로'(Tyre)는 시돈 남쪽 40km 지점에 있는 지중해 연안 도시 국가로, 이스라엘 아셀 지파의 북쪽 접경지대에 위치해 있다. 시돈과 두로는 페니키아의 도시 국가들 중에서 가장 유명한 도시였다.

    ​[질문] 최초로 세운 성전은 솔로몬이 주도하였기 때문에 '솔로몬 성전'이라 하고, 2차 성전은 스룹바벨이 주도하여 '스룹바벨 성전'이라 부른다. 이 두 성전 건축의 준비 과정을 비교하고 공통점과 차이점을 찾아보시오. 참고로 솔로몬 성전 건축 준비 과정은 역대상 22장 2-4절과 역대하 2장 15-16절에 소개되어 있다.

    ​'솔로몬 성전'은 다윗 왕 때부터 준비되었다. 다윗은 석수들을 시켜 성전 건축에 필요한 돌을 다듬게 하였고, 못을 만들 철과 용기를 만들 놋을 심히 많이 준비하였다. 후자는 철공, 장인을 포함한 목수들이 담당한 몫이었다. 또 시돈과 두로 사람들을 통해 수운으로 무수한 백향목을 준비하였다(대상 22:2-4). 솔로몬은 밀과 보리와 기름과 포도주를 두로 왕 후람에게 보냈고, 그 대가로 레바논에서 벌목한 백향목을 받았다. 그때 후람은 백향목 떼를 엮어 바다에 띄워 욥바로 보냈다(대하 2:15-16). 이런 과정은 2차 성전 건축을 준비할 때에도 동일하게 이루어졌다.

      ​차이점은 크게 네 가지로 생각해 볼 수 있다. 첫째, 1차 때는 이스라엘 땅에 거류하는 이방 사람들을 활용하였지만(대상 22:2), 2차 때는 이방인이 참여하였다는 정보가 없다는 점이다. 둘째, 1차 때는 용기를 만들 재료들을 무게를 달 수 없을 만큼 심히 많이 준비하였지만, 2차 때는 그것을 준비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2차 때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벨론에서 귀환할 때 느부갓네살에 의해 옮겨진 용기들이 고레스 왕에 의해 다시 주어졌기 때문에, 그것을 준비할 필요가 없었다. 셋째, 1차 때는 다윗과 솔로몬 왕이 다스리던, 이스라엘 역사상 가장 부유하고 강성할 때 준비하였지만, 2차 때는 가장 빈곤하고 약할 때 준비하였다는 점이다. 이로 인해 다시 세워진 성전은 1차 성전에 비해 그 규모가 작고 초라하였지만, 그 성전이 세워지기까지 이루 헤아릴 수 없는 피와 땀이 깃들여 있다는 점에서, 2차 성전의 가치와 의의는 높고도 크다 할 수 있다. 넷째, 1차 때는 성전 건축의 주체가 어디에도 이스라엘 왕국의 자유민이었지만, 2차 때는 그들의 신분이 여전히 포로 신분이었다는 점이다(8절).

    ​2. 성전 기초 작업(8-13절)

    ​[본문] 8 예루살렘에 있는 하나님의 성전에 이른 지 이 년 둘째 달에 스알디엘의 아들 스룹바벨과 요사닥의 아들 예수아와 다른 형제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과 무릇 사로잡혔다가 예루살렘에 돌아온 자들이 공사를 시작하고 이십 세 이상의 레위 사람들을 세워 여호와의 성전 공사를 감독하게 하매 9 이에 예수아와 그의 아들들과 그의 형제들과 갓미엘과 그의 아들들과 유다 자손과 헤나닷 자손과 그의 형제 레위 사람들이 일제히 일어나 하나님의 성전 일꾼들을 감독하니라 10 건축자가 여호와의 성전의 기초를 놓을 때에 제사장들은 예복을 입고 나팔을 들고 아삽 자손 레위 사람들은 제금을 들고 서서 이스라엘 왕 다윗의 규례대로 여호와를 찬송하되 11 찬양으로 화답하며 여호와께 감사하여 이르되 주는 지극히 선하시므로 그의 인자하심이 이스라엘에게 영원하시도다 하니 모든 백성이 여호와의 성전 기초가 놓임을 보고 여호와를 찬송하며 큰 소리로 즐거이 부르며 12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과 나이 많은 족장들은 첫 성전을 보았으므로 이제 이 성전의 기초가 놓임을 보고 대성통곡하였으나 여러 사람은 기쁨으로 크게 함성을 지르니 13 백성이 크게 외치는 소리가 멀리 들리므로 즐거이 부르는 소리와 통곡하는 소리를 백성들이 분간하지 못하였더라

    ​[이해] 이스라엘 백성들은 예루살렘으로 귀환한 이후 이 년(기원전 536년) 둘째 달에 이르러 성전 건축 공사를 시작하였다. 앞서 귀환한 첫해의 일곱째 달에 성전 터전에 제단을 세우고 번제를 드렸던 백성들은, 초막절이 끝나는 일곱째 달 22일 이후부터 성전 재건을 준비하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따라서 그들이 그때부터 다음 해 둘째 달 이전까지 약 6개월 동안 그것을 준비하였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둘째 달'은 유대 달력으로 '시브월'인데, 태양력으로는 건조기가 시작되는 4, 5월경에 해당된다. 솔로몬 왕이 성전 공사를 시작한 시점도 바로 이때였다(왕상 6;1,37;대하 3:2). 시브월은 다음과 같은 이유 때문에 성전 건축을 시작하기에 적절한 시기였다. 첫째, 그때는 추수가 끝나기 때문에 농사 일손을 건축으로 돌릴 수 있다. 둘째, 이때부터 비가 오지 않는 건조기가 반년 정도 이어진다. 비가 오면 건축 공사를 하기 어렵다. 셋째, 주요 절기인 유월절과 오순절을 이미 지냈기 때문에 이때부터는 건축 공사에 전념할 수 있다.

      ​성전 공사에 참여한 사람들은 스룹바벨, 예수아, 다른 형제 제사장들, 레위 사람들, 그리고 사로잡혔다가 예루살렘으로 돌아온 자들이었다(8절). '다른 형제 제사장들'은 예수아의 친형제라고 보기 어렵다. 아마도 모든 제사장들이 레위 지파 중에서도 아론의 후손들이라는 점에서 '형제'라는 말을 사용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예루살렘으로 돌아온 자들' 앞에 있는 '사로잡혔다가'라는 말은 돌아온 자들의 신분이 어떤 상태에 있었는지를 나타내고 있다. '사로잡혔다가'는 원문을 직역하면 '포로 상태로부터'라는 뜻이다. 즉 돌아온 자들의 신분이 자유민이 아닌 포로 신분이었다는 것을 말한다.

      ​성전 건축을 시작할 때 그 일을 감독하는 책무가 20세 이상의 레위 사람들에게 주어졌는데(8절), 예수아와 그의 아들들과 그의 형제들, 갓미엘과 그의 아들들, 유다 자손, 헤나닷 자손과 그의 형제들이 바로 그들이다(9절). 이처럼 레위 사람들이 성전 건축 일에 감독 역할을 하였던 것은 1차 성전을 건축할 때와 동일하다(대상 23:4-5). 레위 사람들이 성전 봉사에 참여하기 위해서는 원래 25세 이상이 되어야만 하였다(민 8:24). 하지만 그 제한을 20세 이상으로 낮춘 것은 후대에 들어와서 레위인들의 인구가 감소하였기 때문으로 추정된다. 여기에서 '예수아'는 대제사장인 예수아(2, 8절)가 아닌, '호다위야 자손'(2:40)의 대표 가운데 하나인 레위인 예수아를 가리킨다. '갓미엘'도 '호다위야 자손'의 대표 가운데 한 사람이다(2:40). '헤나닷 자손'은 2장에서 소개한 레위인 족보에는 나오지 않지만(2:40), 느헤미야는 그를 레위 사람이라 밝히고 있다(느 10:9). 한편 '유다 자손'의 '유다'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예후다'는, '호다위야'(2:40) 또는 '호드야'(느 7:43)로도 불리는 특별한 사람의 이름으로 추정된다. 그래서 NIV에서는 '유다 자손'을 괄호 속에 넣어 '(descendants of Hodaviah)'로 번역하고 있다.

      ​드디어 성전의 기초 공사가 시작되었다(10절). 건축자가 성전 기초를 놓을 때, 제사장들은 예복을 입고 나팔을 들고 섰다. 여기에서 '나팔'은 금속으로 만든 관악기인데, 숫양의 뿔로 만든 나팔(출 19:13)이나 야생 염소의 뿔로 만든 나팔(삼상 13:3;왕하 9;13;호 8:1)과 다른 것이다. 하나님은 모세에게 은 나팔 둘을 만들되 두들겨 만들어서 그것으로 회중을 소집하고 진영을 출발하게 할 때 사용하도록 하였다(민 10:2). 또 대적을 치러 나가거나 희락의 날에, 그리고 정한 절기와 초하루에 번제물을 드리고 화목제물을 드리면서 그 나팔을 불게 하였다. 그러면 그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기억하시겠다고 약속하셨다(민 10:9-10). 제사장들이 나팔을 들었다면, 아삽 자손의 레위 사람들은 제금을 들고 섰다. '제금'은 두 개의 금속 원반이 한 쌍을 이룬 타악기로, 서로 부딪쳐 소리를 낸다(대상 15:16,19;16:5;25:1,6). 오늘날의 심벌즈와 비슷하게 생겼던 것으로 보인다. 그들이 이스라엘의 왕 '다윗의 규례대로' 찬양하였다는 것은, 성전 예배에 음악을 도입한 다윗이 규정한 내용대로 하였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제사장들이 그 나팔을 들고 선 것이 모세의 규례에 따른 것이라면, 아삽 자손이 제금을 들고 선 것은 '다윗의 규례'에 따른 것이다. 그들이 이런 규례를 따랐다는 것은, 그들이 비록 포로의 신분일 뿐만 아니라 2차 성전이 1차 성전에 비해 비록 규모가 작고 덜 화려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 찬양을 드린 형태에 있어서는 아무 변화가 없었다는 점을 말해 준다. 이로써 그들이 소유하고 있었던 신앙 전통이 1차 때와 일치하였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그들은 서로 화답하면서 여호와 하나님께 찬양과 감사를 드렸는데, 그들이 그렇게 하나님께 찬양과 감사를 드렸던 이유는, 그분이 선하시고 그분의 인자하심이 이스라엘 위에 영원하시기 때문이었다. 외형적으로 볼 때 그들은 찬양과 감사를 드릴 처지가 아니었다. 그들의 신분은 여전히 식민지 포로 상태였고, 주변의 적대국들로부터 위협이 상존하였다. 황폐화된 땅에서 힘겨운 노동으로 가산을 일으켜야 하였고, 그에 더하여 성전을 재건해야 하는 일이 이제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되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하나님께 찬양과 감사를 드렸던 이유는, 그분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이스라엘, 즉 자신들에게 영원히 함께하신다는 인식과 믿음이 있었기 때문이다. 바로 이런 점에서 그들의 신앙은 하박국의 고백과 일치한다.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하지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먹을 것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나는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리로다 주 여호와는 나의 힘이시라 나의 발을 사슴과 같게 하사 나를 나의 높은 곳으로 다니게 하시리로다"(합 3:17-19).

      ​제사장들과 아삽 자손 레위 사람들만 하나님을 찬송한 것이 아니다. 그 찬양에 모든 백성이 함께하였다(11절). 그들은 성전 기초가 놓이는 것을 보고 즐거워서 목청껏 소리를 높여 여호와를 찬양하였다. '큰 소리'는 전쟁에서 상대방을 제압하려고 지르는 '함성'을 말하는데, 주로 승리하였을 때 즐거워하면서 이렇게 지르곤 하였다(삼상 4:5). 그들 가운데 특히 1차 성전을 보았던 사람들(제사장들, 레위 사람들, 나이 많은 족장들)은 성전 기초가 놓인 것을 보고 대성통곡까지 하였다(12절). '대성통곡'은 지속적으로 크게 울며 흐느끼는 것을 말한다. 그렇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 소리가 멀리까지 들릴 정도로 크게 기뻐하면서 함성을 질렀다.

    ​[질문] 성전 기초가 놓일 때, 1차 성전을 보았던 사람들은 대성통곡하였는데, 그 이유는 무엇 때문이었다고 생각하는가?

    ​크게 세 가지 정도로 추측해 볼 수 있다. 첫째, 기쁨으로도 표현할 수 없는 큰 감격이 넘쳤기 때문이다. 제사장들과 레위인들은 1차 성전에서 제사로 섬겼고, 지도자인 족장들은 백성들의 맨 앞에서 그 제사에 참여하였던 사람들이다. 하지만 바벨론의 침공으로 성전이 완전히 파괴됨으로써 더 이상 그것을 경험할 수 없게 되었다(왕하 25:13;대하 36;19). 그들에게 그 사건은 크나큰 상실이었고, 그 자체로 감당하기 어려운 아픔이었다. 그와 같은 성전을 두 번 다시 볼 수 없을 것으로 생각하였던 그들은, 자신들의 눈앞에서 성전 재건의 기초가 놓인 것을 보면서 더할 나위 없는 감동을 받았던 것이다.

      ​둘째, 1차 성전과 비교할 때 자신들 앞에서 세워지고 있는 2차 성전의 기초는 너무 초라하게 보였기 때문이다. 2차 성전은 1차 성전에 비해 규모나 질적인 면에서 차이가 있었다. 그래서 학개서에는 이렇게 적고 있다. "너희 가운데에 남아 있는 자 중에서 이 성전의 이전 영광을 본 자가 누구냐 이제 이것이 너희에게 어떻게 보이느냐 이것이 너희 눈에 보잘것없지 아니하냐"(학 2:3). 보잘것없어 보이는 성전의 기초가 그들에게 큰 아픔이 되었고, 그 아픔을 이기지 못하고 대성통곡하였던 것이다. 그들이 이런 반응을 보인 원인은 2차 성전의 외형만 보았을 뿐 그 존재의 참된 의미를 충분히 파악하지 못한 데에서 비롯되었다. 그래서 후에 학개 선지자는 예수 그리스도가 자신의 몸을 예표하는 2차 성전에 오셔서 그 성전의 나중 영광을 솔로몬 성전의 이전 영광보다 더 크게 하고 평강을 주실 것이라고 예언함으로써 백성들을 위로하였다(학 2:6-9).

      ​셋째, 슬픈 과거가 생각났기 때문이다. 그들은 성전 기초가 놓이는 것을 보면서 역으로 자신들과 자신들의 조상이 지은 범죄 때문에 하나님의 백성이 이방 민족에게 철저히 유린당하였던 슬픈 과거를 생각하면서 뉘우치고 한탄하는 '회한의 통곡'을 하였던 것이다. 이 세 가지 중에서 어떤 사람은 한 가지로 인해서, 또 어떤 사람은 이것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하여 대성통곡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II. 메시지

    ​본문: 스 3:1-13

    ​제목: 우리도 그들처럼

    ​01. 이스라엘 자손이 각자의 성읍에 살았더니 일곱째 달에 이르러 일제히 예루살렘에 모인지라 02. 요사닥의 아들 예수아와 그의 형제 제사장들과 스알디엘의 아들 스룹바벨과 그의 형제들이 다 일어나 이스라엘 하나님의 제단을 만들고 하나님의 사람 모세의 율법에 기록한 대로 번제를 그 위에서 드리려 할새 03. 무리가 모든 나라 백성을 두려워하여 제단을 그 터에 세우고 그 위에서 아침저녁으로 여호와께 번제를 드리며 04. 기록된 규례대로 초막절을 지켜 번제를 매일 정수대로 날마다 드리고 05. 그 후에는 항상 드리는 번제와 초하루와 여호와의 모든 거룩한 절기의 번제와 사람이 여호와께 기쁘게 드리는 예물을 드리되 06. 일곱째 달 초하루부터 비로소 여호와께 번제를 드렸으나 그때에 여호와의 성전 지대는 미처 놓지 못한지라 07. 이에 석수와 목수에게 돈을 주고 또 시돈 사람과 두로 사람에게 먹을 것과 마실 것과 기름을 주고 바사 왕 고레스의 명령대로 백향목을 레바논에서 욥바 해변까지 운송하게 하였더라 08. 예루살렘에 있는 하나님의 성전에 이른 지 이 년 둘째 달에 스알디엘의 아들 스룹바벨과 요사닥의 아들 예수아와 다른 형제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과 무릇 사로잡혔다가 예루살렘에 돌아온 자들이 공사를 시작하고 이십 세 이상의 레위 사람들을 세워 여호와의 성전 공사를 감독하게 하매 09. 이에 예수아와 그의 아들들과 그의 형제들과 갓미엘과 그의 아들들과 유다 자손과 헤나닷 자손과 그의 형제 레위 사람들이 일제히 일어나 하나님의 성전 일꾼들을 감독하니라 10. 건축자가 여호와의 성전의 기초를 놓을 때에 제사장들은 예복을 입고 나팔을 들고 아삽 자손 레위 사람들은 제금을 들고 서서 이스라엘 왕 다윗의 규례대로 여호와를 찬송하되 11. 찬양으로 화답하며 여호와께 감사하여 이르되 주는 지극히 선하시므로 그의 인자하심이 이스라엘에게 영원하시도다 하니 모든 백성이 여호와의 성전 기초가 놓임을 보고 여호와를 찬송하며 큰 소리로 즐거이 부르며 12.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과 나이 많은 족장들은 첫 성전을 보았으므로 이제 이 성전의 기초가 놓임을 보고 대성통곡하였으나 여러 사람은 기쁨으로 크게 함성을 지르니 13. 백성이 크게 외치는 소리가 멀리 들리므로 즐거이 부르는 소리와 통곡하는 소리를 백성들이 분간하지 못하였더라

    ​1. 일제히 예루살렘에 모인 그들

    ​에스라서 1장은 고레스 왕의 칙령으로 바벨론에 남아 있던 유다 백성들이 성전을 재건하기 위하여 기쁜 마음으로 유대 땅으로 돌아온 사건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과정을 주도하신 분이 약속을 지키시는 신실하신 하나님, 이 세상을 창조하시고 그 역사를 섭리 가운데 주관하시는 하나님이시라는 것도 잊지 않고 밝히고 있습니다. 2장에서는 그들의 명단과 인원수를 하나하나 구체적으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인 3장은 그들이 유대 땅에 거주한 이후의 행적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유대 땅에 무사히 안착하여 각자의 성읍에 살고 있던 그들은, 일곱째 달이 되자 일제히 예루살렘으로 모였습니다. 유대인들에게 일곱째 달은 굉장히 중요한 달입니다. 일곱째 달의 1일에는 '나팔절'이, 10일에는 '대속죄일'이 있고, 15일에는 유대인의 3대 명절 가운데 하나인 '초막절'이 있기 때문에, 일곱째 달에는 거의 한 달 내내 예루살렘에 모여 하나님께 제사를 드립니다. '귀환자들'인 그들도 그 전례에 따라 그 기간 동안 한 마음으로 번제를 드렸습니다(1-6). 그렇지만 여호와의 성전 기초는 그때까지도 놓지 못하였습니다. 이에 그들은 성전 재건을 준비하기 위하여 석수와 목수를 고용하는 한편, 솔로몬 왕이 그랬던 것처럼 시돈과 두로 사람들을 시켜 레바논 산지의 백향목을 이스라엘의 서부 해안 지역인 욥바 해변까지 운송하게 하였습니다. 그렇게 반년 동안 성전 재건에 필요한 모든 준비를 마친 후에, 그들의 귀환 두 번째 해의 둘째 달에 마침내 성전 재건의 초석이 되는 기초를 놓았습니다(6-13절).

    ​2. 두려움에도 불구하고 세워진 제단

    ​그들의 이런 모습 속에는 우리가 유심히 들여다보아야 할 대목들이 있습니다. 그들의 그러한 모습은 우리에게 주어진 소명인 교회를 세우는 일과 우리의 개인적인 삶에 귀중한 지침이 되는 것들입니다. 먼저 3절 말씀부터 보도록 하겠습니다. "무리가 모든 나라 백성을 두려워하여 제단을 그 터에 세우고 그 위에서 아침저녁으로 여호와께 번제를 드리며". 이 말씀의 의미가 무엇인지 가늠하기 쉽지 않습니다. 무리가 다른 터에 세워야 할 제단을 두려움 때문에 그 터에 세웠다는 말인지, 아니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터에 세웠다는 말인지, 그리고 제단을 세우는 것과 두려움 사이에는 어떤 상관관계가 있는지 그 의미를 정확하게 파악하는 데 어려움이 있습니다. 전자가 맞는 것일까요, 아니면 후자가 맞는 것일까요? 또 그 상관관계는 무엇일까요?

      ​히브리 원어와 여러 번역본들을 종합해 보면, 거기에는 두 가지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첫 번째는 "그 땅 주변에 있는 사람들에 대한 두려움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마땅히 세워져야 할 곳인 바로 그 터 위에 (번)제단을 세우고, 그 위에서 아침저녁으로 여호와께 번제를 드렸다"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그 땅 주변에 있는 사람들에 대한 두려움이 있었기 때문에, 그들은 마땅히 세워져야 할 곳인 바로 그 터 위에 (번)제단을 세우고, 아침저녁으로 그 위에서 여호와께 번제를 드림으로써 (그 두려움을 물리치려고 하였다)"는 것입니다. 두 번째 의미 속에는 첫 번째 의미 속에 담겨 있는 그들의 심리가 반영되어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첫 번째는 '두려움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터는 양보할 수 없었다'는 뜻이고, 두 번째는 '그 터에 제단을 설치한 이유가 두려움을 물리치기 위한 것이었다'는 뜻입니다.

      ​여기에서 '그 터'는 솔로몬이 1차로 성전을 세웠던 자리를 말하는데, 그렇다면 그 터 위에 제단을 세우는 것과 두려움 사이에는 어떤 상관관계가 있는 것일까요? 그들에게 두려움이 되었던 '모든 나라 백성'은, 그 당시 팔레스타인 땅과 그 주변에 살던 여러 민족을 가리킵니다. 그런 민족 가운데 아시리아에 의해 강제로 끌려와서 사마리아 주변에 정착하고 있던 사마리아인들이 가장 위협적인 존재였습니다. 만약 옛 영화의 상징인 솔로몬 성전이 있던 곳에 성전이 재건된다면, 그래서 하나님에 대한 신앙이 회복되고 다시 이스라엘이 강성한 민족이 된다면, 이는 그 당시 팔레스타인의 기득권(헤게모니)를 쥐고 있던 주변 민족들에게 커다란 위협이 아닐 수 없습니다. 따라서 그 터에 제단을 세운다는 것은 주변 민족들에게 그런 의미로 비칠 수 있기 때문에, 그것이 빌미가 되어 핍박이나 보복, 심지어 전쟁까지도 불러올 수 있습니다. 바로 그런 점 때문에 유다 백성들은 그 터에 제단을 세우면서 동시에 두려움을 느꼈던 것입니다.

      ​그렇지만 그런 두려움에도 불구하고 유다 백성들은 바로 그 터에 제단을 세웠습니다. '역대기서' 기자는 그 터의 의미에 대해 이렇게 규정하고 있습니다. "솔로몬이 예루살렘 모리아 산에 여호와의 전 건축하기를 시작하니 그곳은 전에 여호와께서 그의 아버지 다윗에게 나타나신 곳이요 여부스 사람 오르난의 타작마당에 다윗이 정한 곳이라"(대하 3:1). 그 터는 하나님이 다윗에게 나타나신 곳이고 또 다윗이 정한 곳이기 때문에, 제단을 세울 장소로서의 그 터는 유다 백성들에게도 결코 양보할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에게 그것은 그 어떤 두려움과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한 가치였습니다. 그들의 이러한 행동 이면에는 또 이런 믿음도 들어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하나님이 아닌 사람을 두려워할 때 오히려 올무에 빠진다. 바로 그곳에 제단을 세워 하나님만 의지하고 섬기자. 그러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외면하지 않고 구원해 주실 것이다.' 이런 믿음이 두려움을 물리치고 평안을 선물해 줍니다.

      ​하나님 앞에서 결코 양보할 수 없는 것을 사수하는 태도와 하나님만 의지하고자 하였던 그들의 믿음은, 오늘 우리에게 귀중한 울림이 됩니다. 우리에게도 그들과 동일하게 결코 양보할 수 없는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그것이고, 이 땅에 굳건하게 세워야 할 교회가 바로 그것입니다. 우리가 이것을 사수할 때 그들에게 임하였던 두려움이 우리에게도 밀려올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이 소중한 것들을 결코 포기해서는 안 됩니다. 만약 우리에게 두려움이 밀려온다면, 아니 우리를 위협하면서 두렵게 하는 것들이 분명히 밀려오게 되어 있지만, 그렇더라도 우리는 걱정할 필요 없습니다. 우리를 지키시고 평안 가운데로 인도해 주시는 주님이 우리와 항상 함께하시기 때문에 그분만 믿고 의지하면 됩니다. 바로 이런 사람이 우리 모두가 되기를 바랍니다.

    ​3. '~대로' 하는 태도

    ​유다 백성들의 모습 속에서 우리가 유심히 들여다볼 또 다른 대목은, 바로 '~대로 하는 태도'입니다. 오늘 본문 속에는 '~대로 하는' 그들의 모습이 자주 보입니다. 그들은 번제를 드릴 때 "하나님의 사람 모세의 율법에 기록한 대로" 하였습니다(2절). 초막절을 지킬 때에도 "기록된 규례대로" 초막절을 지켰습니다(4절). 그런가 하면 성전 기초를 놓으면서 여호와를 찬양할 때에도 "이스라엘의 왕 다윗의 규례대로" 하였습니다(10절). 심지어는 백향목을 레바논에서 욥바 해변까지 운송하게 할 때에도 "바사 왕 고레스의 명령대로" 하였다고 에스라는 기록하고 있습니다(7절).

      ​이들의 이런 태도는 이전 사사시대와 왕정시대 사람들의 태도와 비교할 때 완전히 다른 모습을 하고 있습니다. 사사시대를 마감하면서 기자는 당시 사람들의 상태를 이렇게 정리하고 있습니다. "그때에 이스라엘에 왕이 없으므로 사람이 각기 자기의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더라"(삿 21:25). 여기에서 중의법으로 사용된 '왕'은 세상 '왕'과 왕이신 '하나님'을 의미합니다. 절대적인 기준이신 하나님 없이 각기 자기의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는 사회는 통제 불능에 빠져 무너질 수밖에 없습니다. 왕정 시대의 이스라엘은 왜 망하게 되었습니까? 백성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순종하지 않고 제멋대로 살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사야와 예레미야는 그들을 이렇게 비판하였습니다. "너희 중에 여호와를 경외하며 그의 종의 목소리를 청종하는 자가 누구냐"(사 50:10). "네가 평안할 때에 내가 네게 말하였으나 네 말이 나는 듣지 아니하리라 하였나니 네가 어려서부터 내 목소리를 청종하지 아니함이 네 습관이라"(렘 22:21).

      ​그렇지만 70년이 지나서 지금 유대 땅으로 돌아온 이스라엘의 ‘남은 자들’은 이런 모습이 거짓말처럼 완벽하게 지워져 있었습니다. 마치 꼭두각시나 죽은 사람처럼 아무런 자기 소견도 없어 보이고, 순한 양이 되어 율법과 규례, 심지어는 고레스 왕의 명령에 따라 그대로 움직이고 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이런 모습을 통해 우리에게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절대 순종이란 바로 이렇게 하는 것이다"라고 말입니다. 하나님이 어떻게 이런 사람들을 쓰시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하나님은 바로 이런 백성들에게 성전 재건의 소명을 맡겨 주셨고, 또 이들을 통하여 '참 이스라엘' 공동체를 형성하도록 허락하셨던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그들에게서 옮겨 심어야 할 태도도 바로 이런 것입니다.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님은 그것을 통해 우리의 주님과 우리의 하나님이 되어 주셨습니다. 이제부터 우리 소견의 옳은 대로 하지 말고 주님의 소견대로 살도록 하기 위해서 기꺼이 그렇게 해 주신 것입니다. 주님의 이런 뜻에 올바르게 반응하는 길은 바로 '~대로 하는 것'입니다. 즉 주님의 말씀대로 온전하게 순종하는 것이 바로 그것입니다. 이 시간에 바로 그렇게 반응하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바랍니다.

    ​4. 그 기쁨이 우리의 기쁨으로

    ​12-13절은 성전 기초가 놓임을 본 백성들의 반응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과 나이 많은 족장들은 첫 성전을 보았으므로 이제 이 성전의 기초가 놓임을 보고 대성통곡하였으나 여러 사람은 기쁨으로 크게 함성을 지르니 백성이 크게 외치는 소리가 멀리 들리므로 즐거이 부르는 소리와 통곡하는 소리를 백성들이 분간하지 못하였더라". 그들의 커다란 기쁨이 우리의 심장에 생생하게 전달되는 것 같지 않습니까?

      ​저는 이 장면이 우리 교회에서도 재현되었으면 하는 바람이 있습니다. 여러분의 바람도 저의 바람과 동일하다고 믿습니다. 그들은 어떻게 해서 이런 장면을 맞이할 수 있었을까요? 하나님을 위하여 결코 포기할 수 없는 그 일을 하였기 때문입니다. 온갖 두려움도 그들의 열정 가득한 믿음을 꺾지 못하였습니다. 오히려 그들의 그런 믿음이 그들을 두르고 있던 두려움을 말끔하게 지워 버렸습니다. 그들은 또 어떻게 해서 이런 장면을 맞이할 수 있었을까요? 자기의 소견을 완전히 지우고 하나님의 뜻대로 순종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듣지도 보지도 못한 사람들이었지만,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으라'는 주님의 말씀을 완벽하게 재현하고 있습니다.

      ​만약 우리가 그들처럼 결코 포기할 수 없는 복음과 교회를 위해 주님의 뜻대로 순종하는 삶을 산다면, 멀리까지 들렸던 그들의 기쁨 소리가 우리 교회 안에서도 재현될 수 있습니다. 그 바람이 단순하게 바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오늘 우리를 통해 실제로 이루어지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바랍니다.







    에스라 4장 요약

    유다의 대적들이 성너전의 건축을 함께하자고 제안하지만 스룹바겔이 거절합니다.대적들이 성전의 건축을 방해,페르시아 왕에게 성전 건축의 부당합을 고발합니다.페르시아 왕의 명령으로 성전 건축이 중단되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4장은 성전 건축을 방해하는 대적들(유다 주변의 민족들)의 행위를 소개하고 있다. 그들은 회유책, 위협, 모함(뇌물로 관리들을 매수) 등의 방법을 사용하여 방해하였고, 그 결과 다리오 왕 2년까지 성전 재건 공사가 중단되었다(1-5,24절).

    본문에는 대적들이 성전 건축 이후의 일, 즉 예루살렘 성읍과 성곽 재건 공사 등을 지속적으로 방해한 사건들도 소개하고 있다. 그 내용이 성전 재건 방해 기사인 1-5절과 24절 사이에 삽입되어 있다. 특히 그들은 아닥사스다 왕 때 그 일을 모함하는 고발장을 왕에게 보내 성전 중단을 명하는 왕의 조서를 받아냈고, 그것에 근거하여 권력으로 예루살렘 성읍과 성곽 공사를 중단시키기도 하였다. 에스라는 이것을 통해 대적들이 유다 백성들의 정착을 얼마나 오랫동안 집요하게 방해하였는지, 그리고 그 가운데 유다 백성들이 어떤 어려움 가운데 처해 있었는지를 구체적이고 객관적으로 보여 주고 있다.

    I. 본문 이해와 질문

    1. 대적들의 성전 재건 방해(1-5절)

    [본문] 1 사로잡혔던 자들의 자손이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의 성전을 건축한다 함을 유다와 베냐민의 대적이 듣고 2 스룹바벨과 족장들에게 나아와 이르되 우리도 너희와 함께 건축하게 하라 우리도 너희 같이 너희 하나님을 찾노라 앗수르 왕 에살핫돈이 우리를 이리로 오게 한 날부터 우리가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노라 하니 3 스룹바벨과 예수아와 기타 이스라엘 족장들이 이르되 우리 하나님의 성전을 건축하는 데 너희는 우리와 상관이 없느니라 바사 왕 고레스가 우리에게 명령하신 대로 우리가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를 위하여 홀로 건축하리라 하였더니 4 이로부터 그 땅 백성이 유다 백성의 손을 약하게 하여 그 건축을 방해하되 5 바사 왕 고레스의 시대부터 바사 왕 다리오가 즉위할 때까지 관리들에게 뇌물을 주어 그 계획을 막았으며

    [이해] 유다와 베냐민의 대적들은 사로잡혔던 자들의 자손이 하나님 여호와의 성전을 건축한다는 소식을 들었다. '사로잡혔던 자들의 자손'은 '포로의 자손들', '추방되어 이주한 자의 아들들'이라는 뜻으로, 바벨론에서 귀환한 이스라엘 백성들을 가리킨다. '유다와 베냐민'은 귀환한 이스라엘 백성들 전체를 가리킨다. 에스라가 이스라엘 백성들이라고 하지 않고 굳이 그렇게 표현한 이유는 그 지파 사람들이 귀환자의 대부분을 이루고 있었고, 또 귀환자들이 거주하던 곳이 원래 유다와 베냐민 지파에게 기업으로 주었던 땅이기 때문이다. '대적들'은 구체적으로 밝혀져 있지 않지만, '그 땅 백성'(4절), '모든 나라 백성'(3:3)으로 볼 수 있고, 이들 가운데 이스라엘 백성들과 이방인들 사이에서 태어난 혼혈족인 '사마리아 사람들'이 대부분을 차지하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그들이 유다와 베냐민의 대적이라는 말은, 역으로 유다와 베냐민이 그들의 대적이라는 말도 된다. 그렇다면 그들에게 유다와 베냐민이 왜 대적이 되는 것일까? 그곳에 정착하고 있던 그들 입장에서 보면 유다와 베냐민은 '굴러온 돌'이다. 굴러온 돌인 귀환자들이 성전을 재건한다는 것은 옛 이스라엘의 영광이 재현되는 것을 상징할 뿐만 아니라 그로 인해 팔레스타인 지역의 실질적인 힘의 균형도 유다와 베냐민 쪽으로 기울기 때문에, 다시 말해서 굴러온 돌이 박힌 돌을 뺄 수 있기 때문에, 그들에게 그것은 커다란 위협이 아닐 수 없다. 그래서 유다와 베냐민이 그들에게 대적이 될 수밖에 없고, 반대로 그들도 유다와 베냐민의 대적이 되는 것이다.

      한편 팔레스타인 땅에는 이스라엘 족속의 순수성이 잘 보존되어 있었다. 하지만 아시리아 왕 살만에셀(기원전 727-722년)이 북이스라엘의 사마리아 성을 함락한 후에(기원전 722년), 그곳에 있던 이스라엘 백성들을 아시리아 땅으로 끌고 갔다. 그리고 그의 후계자 사르곤 2세(기원전 722-705)는 기원전 720년에 하맛의 영향 아래 있던 아람과 팔레스타인 연합군을 공격하여 다메섹과 사마리아를 다시 점령하였다. 그때 그는 그곳 백성들을 추방하고, 대신 바벨론, 구다, 아와, 하맛, 스발와임 등지의 사람들을 사마리아 땅으로 강제 이주시켰다(왕하 17:24). 그 결과 그 지역은 민족뿐만 아니라 언어, 관습, 종교의식 등도 혼합되는 현상이 초래되었다. 이것이 원인이 되어 하나님으로부터 여호와를 경외하지 않는 사람들이 죽는 심판이 내려졌고, 이런 일의 재발을 막기 위해 아시리아 왕은 제사장을 벧엘로 보내 그곳 거주민들에게 여호와 경외하는 법을 가르쳤다(왕하 17:25). 그러나 각각의 민족들은 여호와를 경외하면서 동시에 자신들의 신상들도 만들어 섬김으로써 종교 혼합주가 뿌리를 내리게 되었다(왕하 17:29-34). 바로 이런 점과 그들이 성전 재건과 예루살렘 성 복원 작업에 지속적으로 방해하였다는 점 때문에, 예수님 당시 유대인들은 사마리아인들을 이방인으로 간주하고 개 취급하면서 그들과 상종하지 않았다(요 4:9;8:48).

      성전 재건 소식을 들은 대적들은, '상생'이라는 호의적인 전략 대신 '충돌'이라는 호전적인 전략을 선택하였다. 그들은 먼저 도움을 주는 척하면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자신들과 같은 종교 혼합주의로 편입시키기 위해 회유책을 폈다. 그들은 스룹바벨과 족장들에게 찾아와서 이렇게 제안하였다. "우리도 너희와 함께 건축하게 하라. 우리도 너희처럼 너희 하나님을 찾는다. 아시리아 왕 에살핫돈이 우리를 이곳으로 오게 한 날부터 우리가 하나님께 제사를 드린다."(2절) '너희처럼'은 우리가 너희와 동일하다는 말이다. 따라서 그들은 이스라엘과 자신들의 '신앙 동질성'을 근거(이유)로 들면서 건축에 함께하자고 제안하였던 것이다. '너희처럼'이라는 그들의 말에는 일면 맞는 측면도 있지만, 틀린(거짓된) 면도 들어 있었다. 유다와 베냐민은 오직 여호와 한 분만 찾지만, 그들은 그 외에도 다른 신, 즉 자신의 신들도 섬기고 있었다. 후자를 숨기고 전자만 전면에 내세움으로써 공사를 함께하려고 하였던 그들의 숨은 의도는 어디에 있었을까? 첫째는, '물타기 전략'이다. 우리나라 속담에 '술에 물 탄 것 같다'는 말이 있다. 이것은 사람의 성격이 분명하지 않고 미지근함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이다. 그들은 명확한 성전 재건의 성격(의미)을 미지근하게(혼탁하게) 하기 위해 이 전략을 썼던 것이다. 혼합 종교를 믿는 그들이 성전 재건에 참여하게 되면, 상징적인 면에서 순수성이 훼손될 뿐만 아니라 실제적인 면에서도 완성될 성전과 그 성전에서 드리게 될 제사가 혼합 종교의 영향으로 변질될 수밖에 없다. 따라서 그들은 그 과정을 통해 오히려 유다와 베냐민을 자신들의 종교에 동화시킬 수 있다. 둘째는, '공사 지연 전략'이다. 그들의 힘이 더해지면 공사를 훨씬 수월하게 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그 의도 속에 불순물이 들어 있다면 더해진 힘에 반비례해서 공사는 난관에 직면하게 된다. 함께하면서 이런저런 이유로 의사 결정을 왜곡시키고 현장 일을 방해한다면 성전 건축은 물 건너갈 수밖에 없다. 함께하자는 그들의 제안 속에는 이런 노림수가 숨어 있었다.

      스룹바벨, 예수아, 그리고 이스라엘 족장들은 그들의 제안을 일언지하(一言之下)에 거절하였다(3절). 그들이 거절한 이유는 두 가지였다. 첫째, 그들이 자신들과 상관이 없었기 때문이다. 대적들은 상관이 있다는 이유로 제안하였지만, 스룹바벨을 비롯한 지도자들은 상관이 없다는 이유로 거절하였다. '상관이 없다'는 말은 그들이 혼합주의 신앙을 가지고 있다는 점에서 오직 하나님만 섬기는 자신들과 종교적으로 연관성이 없다는 말이다. 또 그들이 고레스 왕으로부터 성전 재건에 함께하라는 조서를 받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그들이 이방인(혼혈족)이기 때문에 정치적으로나 혈통적으로도 연관이 없었다. 둘째, 바사 왕 고레스가 자신들에게 그것을 명령하였기 때문이다. '고레스 칙령'에는 두 가지 내용이 들어 있었다. 하나는 이스라엘 백성들은 모두 본토로 돌아가서 하나님의 성전을 건축하라는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바벨론 백성들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물질적으로) 도우라는 것이었다. 그 조서에는 제안하고 있는 대적들을 포함하고 있지 않았다. 따라서 첫째가 주로 신앙적인 측면에서의 거절이었다면, 두 번째 이유는 조서 내용을 지키기 위한 법적, 외교적인 노력에 근거하고 있다.

      회유책이 무산되자 그 땅 백성(대적들)은 그때부터 유다 백성의 손을 약하게 하여 건축을 방해하고, 관리들에게 뇌물을 주어 건축 계획을 막았다(4-5절). '손을 약하게 하다'는 말은 '능력', '의욕' 등을 비유하고 있는 '손'(6:22;왕상 18;16;대상 18:3;렘 38:4)을 감하거나 나태하게 하는 것으로, 유다 백성이 성전 재건에 대한 의욕을 상실하고 무기력한 상태에 빠지도록 온갖 교활한 방법을 동원한 방해 공작을 가리킨다. 특히 이 말은 전쟁과 같은 때에 느끼는 두려움을 묘사할 때 자주 사용되었다(느 6:9;렘 38:4;49;24;50:43;습 3:16). 본문에는 그 방법이 무엇이었는지 밝히고 있지 않지만 아마도 그들은 위협, 훼방과 같은 방법으로 건축을 방해하였고, 그 결과 유다 백성의 건축 의지는 상당 부분 약화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두 번째 방해 공작은 관리들에게 뇌물을 주어 그 계획을 막는 것이었다. '관리들'은 페르시아의 고위 공직자들을 가리킨다. 그들은 사마리아에 거주하던 페르시아 왕실의 관리로, 법정의 민원 담당자나 고문관들이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대적들이 그들에게 뇌물을 주었다는 것은, 자신들의 목적 달성을 위하여 부정한 방법을 사용하였다는 것을 의미한다. 뇌물은 공의를 어그러지게 하는 부정적인 결과를 초래하기 때문에 성경에서는 이를 엄격히 금하고 있다(출 23:8;삼상 12:3;잠 17;23). 따라서 그들이 이러한 방법을 사용하였다는 것은, "우리도 너희같이 너희 하나님을 찾노라"는 그들의 진술(2절)이 거짓이었다는 반증이 되기도 한다. 그들은 이와 같은 방법으로 고레스 왕 때부터 다리오가 즉위할 때까지 유다 백성의 성전 건축을 지속적으로 방해하였다(5절). 그리고 그들의 방해 공작은 다리오 왕 즉위 2년(기원전 521년)까지 공사가 중단됨으로써 실효를 거두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였다(24절).

    [질문] 성전은 하나님의 임재와 그분의 통치가 가시적으로 이루어지는 곳이다. 그런 점에서 신약에서 교회가 성전의 바통을 이어받았다고 할 수 있다. 대적들의 방해 공작과 그에 대한 유다의 대응을 보면서 교회를 세우는 데 교훈으로 삼아야 할 점은 무엇이라 생각하는가?

    ​'교회'는 머리 되신 예수님의 몸이다. 따라서 그분을 주님으로 믿는 사람들로 구성된 공동체가 그 몸을 이루고 있다(엡 1;22;4:15-16;골 1;8). 교회의 이와 같은 정체성은 교회를 세우는 데에도 중요한 기준이 된다. 예수님은 하나님이시도 하다(요 1:1,14). 그분의 본질은 하나님과 동동하게 '거룩'과 '순결'에 있기 때문에, 그분의 몸 된 교회 역시 그것으로 세워지고 그것으로 유지되어야 한다. 이는 역으로 성전과 성전을 중심으로 이룰 공동체의 정체성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함께 건축하자는 대적들의 제안에 스룹바벨을 위시한 유다 지도자들의 거절은 올바른 대응이었다. 만약 함께 건축하게 될 경우 종교 혼합주의로 인하여 건축 과정의 순수성뿐만 아니라 건축 이후의 제사 행위에도 그 순수성은 훼손될 수밖에 없다. 이러한 훼손은 죄와의 타협을 의미한다. 현대 교회는 많은 경우 교회를 세우는 과정에서 유다의 대응 모습을 교훈으로 삼지 않는다.

      두 번째로 삼을 교훈은, 교회를 세우는 과정에도 대적들의 방해가 동일하게 주어진다는 것이다. 때로는 회유책으로, 때로는 물리적인 공격인 핍박으로 교회가 세워지는 것을 방해한다. 교회가 세워지고 성장한다는 것은, 성전의 재건이 의미하는 것처럼, 반대편에 있는 세력의 약화를 의미한다. 따라서 반대편 세력, 즉 사탄은 그것을 필사적으로 막을 수밖에 없다. 그래서 베드로는 사탄의 필사적인 몸부림을 이렇게 묘사하기도 하였다.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벧전 5:8). 먹이를 찾기 위하여 '우는 사자'에게 자비가 있을 리 만무하다. 먹이를 발견한 사자는 먹이에게 가까이 접근하기 위하여 수풀 속에 몸을 잔뜩 낮춘다. 이윽고 사정거리 안에 들어오면 잔인한 발톱과 이를 드러낸다. 유다의 대적들이 회유책을 쓰고, 유다의 손을 약하게 하고, 뇌물로 계획을 막았던 행동 속에는 바로 이런 모습이 들어 있었다. 그로 인해 성전 공사가 중단되기도 하였다. 이와 맞물려 성전 공사가 중단된 데에는 내부적인 문제도 심각하게 자리 잡고 있었다. 그들은 자신들의 집을 건축하고 이런저런 일상적인 문제에 시선을 빼앗긴 탓에, 성전 건축에 대한 태도는 무관심과 나태함에 빠져 버렸다(5:1;학 1:4). 대적들의 방해 공작에 그런 태도로 맞설 수 없다. 그래서 베드로는 '우는 사자'에게 맞설 수 있는 태도로 '정신을 바짝 차리고 깨어 있을 것'(To be self-controlled and alert)을 주문하였다.

    2. 계속되는 대적들의 방해(6-16절)

    [본문] 6 또 아하수에로가 즉위할 때에 그들이 글을 올려 유다와 예루살렘 주민을 고발하니라 7 아닥사스다 때에 비슬람과 미드르닷과 다브엘과 그의 동료들이 바사 왕 아닥사스다에게 글을 올렸으니 그 글은 아람 문자와 아람 방언으로 써서 진술하였더라 8 방백 르훔과 서기관 심새가 아닥사스다 왕에게 올려 예루살렘 백성을 고발한 그 글에 9 방백 르훔과 서기관 심새와 그의 동료 디나 사람과 아바삿 사람과 다블래 사람과 아바새 사람과 아렉 사람과 바벨론 사람과 수산 사람과 데해 사람과 엘람 사람과 10 그 밖에 백성 곧 존귀한 오스납발이 사마리아 성과 유브라데 강 건너편 다른 땅에 옮겨 둔 자들과 함께 고발한다 하였더라 11 아닥사스다 왕에게 올린 그 글의 초본은 이러하니 강 건너편에 있는 신하들은 12 왕에게 아뢰나이다 당신에게서 우리에게로 올라온 유다 사람들이 예루살렘에 이르러 이 패역하고 악한 성읍을 건축하는데 이미 그 기초를 수축하고 성곽을 건축하오니 13 이제 왕은 아시옵소서 만일 이 성읍을 건축하고 그 성곽을 완공하면 저 무리가 다시는 조공과 관세와 통행세를 바치지 아니하리니 결국 왕들에게 손해가 되리이다 14 우리가 이제 왕궁의 소금을 먹으므로 왕이 수치 당함을 차마 보지 못하여 사람을 보내어 왕에게 아뢰오니 15 왕은 조상들의 사기를 살펴보시면 그 사기에서 이 성읍은 패역한 성읍이라 예로부터 그 중에서 항상 반역하는 일을 행하여 왕들과 각 도에 손해가 된 것을 보시고 아실지라 이 성읍이 무너짐도 이 때문이니이다 16 이제 감히 왕에게 아뢰오니 이 성읍이 중건되어 성곽이 준공되면 이로 말미암아 왕의 강 건너편 영지가 없어지리이다 하였더라

    [이해] 앞서 1-5절과 맨 뒤의 24절은 유다 백성들이 귀환한 이후부터 있었던 일, 즉 대적들이 성전 재건을 방해하고 그로 인해 건축이 중단된 사건을 소개하고 있는데, 이는 기원전 536-520년에 있었던 일이다. 그해 비해 6-23절은 그 일 이후에 있었던 사건을 기록하고 있다. 바사의 아하수에로와 아닥사스다 왕은 성전이 완성된 이후, 즉 다리오 왕 이후 역사에 등장하는 인물들이다. '아하수에로'(Ahasuerus)는 헬라식 명칭으로 '크세르크세스'(Xerexes I)로 불리는 인물로, 다리오 1세의 뒤를 이어 인도부터 에티오피아까지의 광활한 바사 제국을 통치하였다(기원전 486-464년, 에 1:1). 구약 성경에는 왕후 와스디를 폐위시키고 유다 출신 에스더를 왕비로 삼은 인물로 소개되고 있다(에 1:17;2:17). 그는 살리미스 해전(기원전 480년)과 플라티아 전투(기원전 479년)에서 그리스군에게 연패하였고, 귀국 후 방탕한 생활을 하다 암살되었다. '아닥사스다'(Artaxerxes)는 아하수에로의 셋째 아들로, 부친을 암살한 아르파타나를 죽이고 왕위에 오른 인물이다(기원전 464-424년). 그는 유대인의 2차 귀환(재위 7년, 에스라가 주도, 7:7-9)과 3차 귀환(재위 20년, 느헤미야가 주도, 느 2:1-8)을 허락하였지만, 예루살렘 성벽 재건을 잠시 중단시키기도 하였다(4:7-23). 그가 죽은 후에 바사는 쇠락의 길을 걸었다.

      고레스 왕 때부터 다리오 왕이 즉위할 때까지 성전 재건을 방해하였던 대적들은, 그 뒤 아하수에로 왕이 즉위할 때에도 글을 올려 유다와 예루살렘 주민들을 고발하였다(6절). 그들이 고발한 내용이 무엇이었는지는 본문에 기록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알기 어렵다. 아하수에로 왕 때에는 성전이 이미 완성된 후였고, 또 아닥사스다 왕의 조서로 예루살렘 성벽을 재건하기 위해 3차 귀환이 이루어지기 전이다. 따라서 성전과 성벽 재건의 일로 고발하였던 것으로 보이지 않는다. 다른 일로 사사건건 유다와 대적들 사이에는 갈등이 있었는데, 그와 관련된 내용을 고발하였던 것으로 여겨진다. '고발하다'는 말은 '참소하다', '비방하다'는 뜻으로, 바로 여기에서 '대적하는 자', '참소하는 자'라는 의미를 지닌 '사탄'이 나왔다(욥 1:6). 따라서 그들이 그 고발(모함)을 통해 얻고자 하였던 것은, 유다가 왕의 미움을 사서 더이상 기를 펴지 못하도록 압제하는 데 있었을 것이다.

      대적들은 아닥사스다 때에도 왕에게 글을 올려 유다를 고발하였다(7-10절). 이번에는 두 건이었다. 하나는 비슬람, 미드르닷, 다브엘과 그의 동료들이 올린 글(고발장)이다(7절). 그들은 팔레스타인에 주재하였던 바사 관리로 추정될 뿐이다. 그들은 아람 문자와 아람 방언으로 글을 진술하였다. '아람 문자와 아람 방언으로 썼다'는 말은 아람어로 기록하고 아람어로 번역하였다는 뜻으로, 이는 처음에는 아람어로 기록된 문서가 이후 다른 언어로 번역되었고, 그것을 다시 아람어로 번역하였다는 의미이다. 이와 같은 번거로운 일이 일어난 이유는, 그 당시 페르시아가 근동 지역을 지배하였지만 실제 일상 공용어로 아람어를 사용하였기 때문이다. 이것은 로마 제국이 패권국이었음에도 불구하고 헬라어가 일상 공용어로 사용되었던 경우와 같다. 구약 성경은 모두 히브리어로 기록되어 있다. 구약 어디에도 다른 나라의 언어로 말한 내용을 그 나라의 언어로 기록하고 있지 않다. 하지만 에스라는 7절부터 16절까지 아람어로 된 공식 문서를 히브리어가 아닌 아람어로 그대로 기록하고 있다. 에스라가 이렇게 한 이유는 유대인들이 아람어를 잘 이해하고 있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이를 통해 본문 내용의 신빙성을 높이려고 하였던 것으로 여겨진다. 고소장에 어떤 내용이 기록되어 있는지 알 수 없지만, 기원전 458년 2차로 귀환한 에스라가 주도한 종교개혁과 신앙 부흥 운동을 방해하거나, 기원전 444년 3차로 귀환한 느헤미야가 주도한 예루살렘 성벽 재건을 방해하는 내용과 관련이 있었을 것이라고 추측해 볼 수는 있다. 성전을 재건한 후 60년 정도가 지났을 때 유다 공동체의 신앙은 다시 우상을 섬기고 이방 여인과 결혼할 정도로 허물어져 있었다(9:1-2). 이때 귀환한 에스라가 개혁과 부흥 운동을 통해 유다 공동체를 정상적으로 회복하는 모습을 보면서 대적들은 마음이 편치 않았을 것이다. 또 그로부터 14년 후에 돌아온 느헤미야가 주도한, 무너진 성벽을 재건하는 모습도 못마땅하기는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사회 기강이 바로잡히고 성곽이 온전하게 회복되면 자신들에게 해가 될 것이 빤하다고 생각한 이웃 나라의 대적들은 모함을 통해 그 작업을 방해하였으리라 여겨진다.

      글을 올려 아닥사스다 왕에게 유다를 고발한 세 번째 사건은, 방백 르훔과 서기관 심새가 주도하였다. 그 고발에 그들의 동료 디나 사람, 아바삿 사람, 다블래 사람, 아바새 사람, 아렉 사람, 바벨론 사람, 수산 사람, 데해 사람, 엘람 사람, 그 밖에 백성 곧 존귀한 자 오스납발이 사마리아 성과 강 건너편 다른 땅에 옮겨 둔 자들도 동참하였다(8-10절). '방백'은 사마리아에 거주하던 바사의 지방 행정관을 가리킨다. 페르시아 제국은 각 지역을 독자적으로 감찰하기도 하였지만, 지방 지도자들을 감시하기 위하여 일정 지역 관할 구역 내에서는 지방 장관이 직접 왕에게 서신을 보내 상황을 보고하고 왕의 명령을 하달받기도 하였다. '서기관'은 공식 서류의 사본을 만들고 그것을 아람어나 다른 언어로 번역하거나, 세금 명부 보고서를 만들던 왕의 직속 관리이다. 방백인 르훔이 명령하고, 서기관 심새가 받아 적어 고발장을 만들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들의 동료'는 '지방 관리들'과 '이전에 바벨론의 여러 지방에서 사마리아로 추방되었던 사람들의 자손들 가운데 대표적인 사람들'의 조합으로 여겨진다. '디나 사람'은 단순히 사람이나 지역 이름을 지칭한 것이 아니라, '사사'나 '재판관'을 말한다. '아바삿 사람'과 '다블래 사람'도 각각 '정부 관리', '영사, 집정관, 감독'을 지칭한다. 그래서 NIV에서는 이들 세 사람을 그냥 'the judges and officials'(재판관들과 관리들)로 번역하고 있고, 이들이 아바새, 아렉, 바벨론, 수산, 데해, 엘람 등지에서 강제 이주해 온 사람들을 다스렸다(over the men from)고 적고 있다. '아바새'는 '페르시아'나 '유프라테스강 동쪽 지역'라는 주장이 엇갈리는데, NIV와 RSV는 '페르시아'로 번역하고 있다. '아렉'(Erech)은 고대 바벨론의 도시로, 니므롯이 시날 땅에서 시작한 4대 도시 중 제2의 성읍이다(창 10:10). 바벨론 성의 남동쪽 160km 지점에 있는 유프라테스강 동쪽 기슭의 습지대로, 바벨론과 우르의 중간에 위치해 있었다. 압살롬이 반역할 때 아히도벨의 계략을 물리친 다윗의 친구이자 고문이었던 '후새'가 아렉 출신이다(삼하 15:37;16:16-18;17:5-15;대상 27:33). '수산 사람과 데헤 사람과 엘람 사람'에서 '데헤'는 역본에 따라 인명이나 지명으로 보기도 하고(ASV, KJV), 히브리어의 관계 대상사로 보기도 한다(NIV, NASV, RSV). 후자를 적용할 경우 '수산 사람 곧 엘람 사람'(the Elamites of Susa)으로 번역된다. 'Susa'는 이란 남서부에 위치한 후제스탄 주의 주도인 아바즈 북쪽으로 110km 지점에 있는 고대 도시이다. 아하수에로 왕과 에스더 왕후 이야기의 주요 무대가 이곳 수산 궁이다. '오스납발'은 아시리아 제국 말기의 왕으로, 제국의 후기를 화려하게 장식하였던 '앗수르바니팔'(기원전 669-626년)을 가리킨다. 므낫세를 쇠사슬로 채워 바벨론으로 데려갔던 인물이기도 하다(대하 33;11). 바벨론이 반역을 일으킬 때 엘람이 그 반역을 도왔고 또 엘람의 꼭두각시 왕이 반란을 일으키기도 하였는데, 앗수르바니팔은 그 반란을 모두 진압한 후 엘람을 유린하고 수사의 거주민들을 국외로 추방하였다. 그렇게 추방된 사람들은 '사마리아 성과 강 건너편 다른 땅'에 거주하게 되었다. '강 건너편'은 유프라테스강 서쪽 지역을 말한다. 이는 페르시아 제국의 유프라테스강 서안에 있는 거대한 속국을 일컫는 공식적인 이름이었다. 그 당시의 페르시아나 메소포타미아 사람들은 '강 건너편'을 시리아, 팔레스타인, 페니키아(두로와 시돈) 등에 대한 총칭으로 이해하였다(왕상 4:24). 그 지역들 가운데 특히 '사마리아 성'이 구체적으로 언급되고 있다는 점은, 다른 지역들보다 사마리아 성에 거주하는 사람들이 방해하는 일에 가장 적극적이었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앞선 고발과 달리 세 번째 고발에는 그 글의 초본 내용이 소개되고 있다(11-16절). 대적들의 고발장에는 첫 번째로, 귀환한 유다 사람들이 패역하고 악한 예루살렘 성읍의 기초를 수축하고 성곽을 건축하고 있다는 내용이 들어 있었다(12절). 이 보고에 따르면 바로 그 이전까지 예루살렘 성읍의 기초가 건축되지 않았고, 성곽은 허물어진 채 그대로 방치되어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사건은 아닥사스다 왕 때 일어난 일이다. 따라서 예루살렘 성벽과 성읍 재건 작업은 1차 귀환(기원전 537년) 이후부터 아닥사스다가 왕으로 즉위한 기원전 464년까지 최소한 73년 이상 제대로 착수되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또 예루살렘 성벽 재건이 느헤미야가 주도한 3차 귀환(기원전 444년) 이후부터 시작되었다는 점을 감안하면, 그 기간을 최대 90년까지 잡을 수도 있다. 이것을 통해 예루살렘이 바벨론에 의해 얼마나 심각하게 파괴되었는지를 짐작해 볼 수 있다. 이와 같은 참상은 아닥사스다 왕의 술 관원이었던 느헤미야가 예루살렘으로부터 온 형제(동생) 하나니를 통해 접한 소식 속에 구체적으로 묘사되고 있다. "그들이 내게 이르되 사로잡힘을 면하고 남아 있는 자들이 그 지방 거기에서 큰 환난을 당하고 능욕을 받으며 예루살렘 성은 허물어지고 성문들은 불탔다 하는지라"(느 1:3). '패역한 성읍'이라는 말은 '반란을 일으키는 성읍'이라는 뜻이다. 따라서 유다가 예루살렘 성읍의 기초를 수축하고 성곽을 건축한 일은 반란과 악한 행위라는 것이 대적들의 주장이었다. 두 번째는 첫 번째 내용의 결과론을 연장한 것으로, 만약 성읍과 성관 건축이 완공되면 유다 백성들이 다시는 조공과 세금(관세와 통행세)을 바치지 않을 것이고, 이는 결국 왕에게 손해가 될 것이라는 내용이었다(13절). 조공과 세금을 바치지 않는 것은 페르시아 제국에 대한 반역을 의미한다. 만약 그런 반역이 일어나면 페르시아 국고가 타격을 받기 때문에 결코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다. 대적들은 이렇게 왕의 민감한 노출 신경을 건드려서 왕으로 하여금 그에 합당한 조치를 취하도록 유도하였다. 세 번째 내용은, 예루살렘 성읍이 왜 패역하고 악한지, 그래서 성읍과 성곽이 중건되면 왜 안 되는지에 대한 근거가 제시되어 있었다. 그들은 왕의 조상들의 사기에 기록되어 있는 내용을 제시하면서 결과적으로 강 건너편의 영지를 잃을 것이라고 주장하면서 왕의 주의를 환기시켰다(14-16절). '조상들의 사기'는 '열조의 사기'를 말한다. 페르시아는 스스로 바벨론의 합법적인 계승국으로 자처하였기 때문에, 열조 사기에는 바벨론 제국 때부터의 역사 기록이 포함되어 있었을 것이고, 심지어 아시리아 제국의 것도 포함되어 있었을 것이다. 이것을 통해 왕은 히스기야와 시드기야 등의 반역에 대해 알 수 있었을 것이다. 대적들은 사기에서 민감한 내용만 추려 다음과 같이 구체적으로 적었다. (1) 이 성읍은 패역한 성읍이다. (2) 예로부터 그 성읍에서 항상 반역하는 일을 행하여 왕들과 각 도에 손해가 되었다. 그리고 예루살렘 성읍이 무너진 것도 이 때문이라고 덧붙였다. 사기의 내용을 환기시킬 때에는 그들이 왕궁의 소금을 먹기 때문에 왕이 수치 당하는 것을 차마 보지 못하여 왕에게 아뢴다고 적고 있는데, 이는 자신들이 글을 올린 이유가 시기에 의한 모함이 아니라 왕에 대한 충성심에서 비롯되었다는 점을 강조하기 위한 것으로 여겨진다. '소금'은 보통 언약을 보증할 때 사용되기 때문에 '충성'을 의미한다(레 2;13;민 18:19;대하 13:5). 또 '소금을 먹는다'는 말은 나라의 '봉직에 종사하다', 나라로부터 '봉급을 받다'는 뜻을 나타내는 관용적인 표현이다. 이것을 통해 대적들은 자신들과 왕 사이에 밀접한 관계가 있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다.

    [질문] 6-16절은 성전 재건 이후 대적들이 행한 방해 내용을 소개하고 있다. 이것을 성전 재건 기사 중간에 삽입하고 있는 이유는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대적들은 함께 건축하자는 제안이 무산되자, 유다 백성의 손을 약하게 하여 건축을 방해하였는데, 주된 방법이 관리들에게 뇌물을 줘서 계획을 막는 것이었다(4-5절). 관리들은 왕과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그들을 활용하는 방법은 가장 강력한 최선책이 될 수 있다. 뇌물을 받은 관리들은 유다의 성전 재건 과정에 행정적, 사법적으로 사사건건 개입하였을 것이고, 그런 방법이 효과를 거두지 못하였을 경우 6-16절에서 소개하고 있는 방법, 즉 글을 써서 왕에게 모함하는 방법을 활용하였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6-16절은 그들이 어떤 식으로 성전 재건을 방해하였는지를 구체적으로 추론하고 이해하는 데 중요한 정보가 된다.

      두 번째 이유는, 대적들의 방해가 집요할 뿐만 아니라 구체적, 지속적으로 이루어졌다는 정보를 접할 수 있기 때문이다. 방백 르훔과 서기관 심새가 아닥사스다 왕에게 고발한 글을 보낼 때에는 강 건너편의 모든 족속이 함께하였고, 그 내용도 열조의 사기를 인용할 정도로 치밀하게 구성되어 있었다. 이는 그들의 방해가 한두 사람에 의해 추상적이거나 엉성하게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증거가 된다. 그들의 방해 공작은 모두가 힘을 합쳐 필사적으로 달려드는 것이었다. 이러한 정보는 역으로 그들이 성전 재건을 방해할 때에도 어떤 태도로 덤볐는지를 추측해 볼 수 있게 한다. 이 정보를 신약에 적용하면 교회를 세우는 일을 방해하는 사탄의 접근 태도나 방법도 이들의 것과 다르지 않다는 힌트를 준다.

      세 번째 이유는, 아하수에로와 아닥사스다 왕 때 대적들이 행한 방해 공작이 앞선 성전 재건 과정에서 행한 방해와 무관치 않기 때문이다. 비록 성전이 재건되었다고 하더라도 그곳으로 나아가 제사를 드릴 백성들의 삶의 터전이 파괴되어 있다면, 그 제사는 부정적인 방향으로 흐를 가능성이 높고, 또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는 하나님의 백성들은 이방 민족으로부터 조롱거리가 될 수도 있다. 따라서 성전 재건과 백성들의 삶의 터전은 아주 밀접한 상관관계를 가지고 있다. 성전 재건 이후 60년(최대 80년) 동안이나 성읍과 성곽이 무너진 채로 회복되지 못한 데에는 유다의 나태함도 원인이 되었겠지만, 대적들의 방해 공작이 주를 이루었을 것이 분명하다.

    3. 아닥사스다 왕의 조서(17-24절)

    [본문] 17 왕이 방백 르훔과 서기관 심새와 사마리아에 거주하는 그들 동관들과 강 건너편 다른 땅 백성에게 조서를 내리니 일렀으되 너희는 평안할지어다 18 너희가 올린 글을 내 앞에서 낭독시키고 19 명령하여 살펴보니 과연 이 성읍이 예로부터 왕들을 거역하며 그중에서 항상 패역하고 반역하는 일을 행하였으며 20 옛적에는 예루살렘을 다스리는 큰 군왕들이 있어서 강 건너편 모든 땅이 그들에게 조공과 관세와 통행세를 다 바쳤도다 21 이제 너희는 명령을 전하여 그 사람들에게 공사를 그치게 하여 그 성을 건축하지 못하게 하고 내가 다시 조서 내리기를 기다리라 22 너희는 삼가서 이 일에 게으르지 말라 어찌하여 화를 더하여 왕들에게 손해가 되게 하랴 하였더라 23 아닥사스다 왕의 조서 초본이 르훔과 서기관 심새와 그의 동료 앞에서 낭독되매 그들이 예루살렘으로 급히 가서 유다 사람들을 보고 권력으로 억제하여 그 공사를 그치게 하니 24 이에 예루살렘에서 하나님의 성전 공사가 바사 왕 다리오 제이 년까지 중단되니라

    [이해] 고발장을 접하고 그 내용을 살핀 아닥사스다 왕은 조서를 내렸다. 수신자는 방백 르훔과 서기관 심새, 사마리아에 거주하는 그들의 동관들, 강 건너편 다른 땅 백성들이었다. '그들의 동관들'은 '그들(르훔과 심새)의 동료들'을 말한다.

      조서 내용에는 앞서 르훔과 심새가 보낸 고발장에 대한 긍정적인 답변이 담겨 있었다. 첫째 내용은, 그들이 고발한 내용대로 왕이 사서를 살펴보니 예루살렘 성읍이 옛날부터 왕들을 거역하고 반역한 일을 발견하였다는 것이다. '왕들'은 아시리아 제국부터 바벨론을 거쳐 페르시아까지의 열조 왕들을 가리킨다. 거기에는 이러한 왕들에 대한 반역, 특히 아시리아와 바벨론에 반발하였던 히스기야, 여호와김, 시드기야 왕 등의 사건이 기록되었던 것으로 보인다(왕하 18;7;24:1,20).

      두 번째 내용은, 옛적에 예루살렘을 다스리는 큰 군왕들에게 강 건너편 모든 땅이 그들에게 조공과 관세와 통행세를 다 바쳤다는 것이다. 이는 '큰 군왕들'을 누구로 보느냐에 따라 두 가지의 해석이 가능하다. 첫째는, 다윗과 솔로몬, 북 이스라엘의 여로보암 2세, 남 유다의 웃시야나 히스기야 등을 가리킨다는 견해이다. 이들은 유프라테스강 서쪽의 상당 부분을 점령할 정도로 강력한 군사력을 보유하고 있었다. 그 가운데 솔로몬은 왕국의 북동쪽 지역인 딥사(유프라테스강 서쪽)에서부터 이집트의 국경에 이르기까지 모든 왕국을 다스리고 조공을 받았는데(왕상 4;21), 특히 시리아 사막 내의 중요 오아시스 지역인 '다드몰'을 건축하여 유프라테스강 서쪽 일대를 장악하기 위한 거점 요새로 삼기도 하였다(왕상 9;18). '다드몰'은 시리아의 수도 다마스쿠스(다메섹)에서 북동쪽으로 190km 지점에 있는 교통 요충지이기도 하다. 솔로몬 사후에 신-아시리아가 팽창하면서 이스라엘이 점차 밀리기 시작하고 결국 북 왕국은 아시리아에 패망하였지만, 아닥사스다 왕이 볼 때 예루살렘 성읍과 성곽 재건은 솔론몬 당대와 같은 확장 가능성까지 열어둔다는 점에서 근심거리로 작용하였을 것이다. 둘째는, '큰 군왕들'이 아닥사스다 이전의 아시리아, 바벨론, 페르시아 왕들을 가리킨다는 견해이다. 이 경우 아닥사스다는 이전 왕들에 비해 자신이 뒤떨어지지 않는다는 점을 강조할 필요를 느꼈을 것이고, 따라서 예루살렘의 팽창 소지를 제거하여 최소한 이전 왕들과 같은 조건의 조공과 각종 세금을 거두고자 하였을 것이다.

      세 번째 내용은, 이제 너희(조서의 수신자들)는 그 사람들(유다)에게 나(왕)의 명령을 전하여 공사를 그치게 하여 그 성을 건축하지 못하게 하라는 것이다. 왕은 조서 말미에 '너희는 삼가서 이 일에 게으르지 말라'는 말로 자신이 내린 명령의 중대함과 함께 엄중한 실행을 강조하였다. 또 '어찌하여 화를 더하여 왕들에게 손해가 되게 하랴'는 경고의 메시지까지 담았다. 한편 아닥사스다 왕은 세 번째 내용 가운데 "내가 다시 조서 내리기를 기다리라"는 명령을 남김으로써, 비록 지금은 공사 중지를 명령하였지만 나중에 이에 대한 변화가 있을 수도 있다는 여지를 남겼다. 여기에는 왕의 신중함이 묻어 있기도 하는데, 이런 여지는 실제 자신의 재위 20년인 기원전 444년 느헤미야에게 성곽 재건을 허락함으로써 바뀌기도 하였다.

      아닥사스다 왕의 조서 초본이 르훔과 심새, 그리고 그의 동료들 앞에서 낭독되었을 때, 그들은 자신들이 올린 고발장과 조서의 내용이 일치한 것을 확인하고 무척 기뻐하였을 것이다. 이에 그들은 예루살렘으로 급히 가서 유다 사람들에게 권력으로 억제하여 그 공사를 그치게 하였다(23절). '급히 가서'라는 표현 속에는 왕이 내린 조서에 그들이 얼마나 흡족해하였는지, 또 그들이 그것을 얼마나 빨리 실행에 옮겼는지 등에 대한 정보가 들어 있다. '권력으로 억제하다'는 말은 '군대를 동원하여 막다'는 뜻이다. 외경인 에스드라상 2장 30절에 따르면 대적들은 기병대를 이끌고 예루살렘으로 갔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들은 군대를 동원하여 공사를 그치게 하였을 뿐 아니라, 그 태도로 미루어 볼 때 이미 공사가 진척되어 있던 부분까지 모두 허물거나 불태웠고, 그 결과 그것이 유다 백성들에게는 큰 환난과 능욕으로 여겨졌던 것 같다(느 1:3).

      고대에는 어떤 글에 삽입구를 넣은 후 그 삽입구 바로 뒤에 원래의 기사를 다시 시작할 때 삽입구 이전의 마지막 내용을 다시 한 번 반복해서 기록하는 관습이 있다. 24절에는 이 같은 '반복 재개'의 기능이 적용되어 있다. 즉 삽입구 이전의 원래 기사 마지막 내용인 '바사 왕 고레스가 즉위할 때'(5절)는, 24절에 와서 '바사 왕 다리오 제이 년까지'로 요약 반복함으로써 6-23절로 중단되었던 연대기적 순서를 되돌리고 있다. 이를 통해 새로운 역사를 확대 전개하지 않고 다시금 다리오 왕 시대로 되돌린 것이다. 고레스 왕 3년(기원전 536년) 경에 시작된 성전 재건 공사는 뒤이은 다리오 왕 2년(기원전 520년)까지 중단되었다.

    [질문] 대적들이 예루살렘 성읍과 성곽 건축의 부당함을 고발하였을 때 아닥사스다 왕은 그들의 손을 들어 주었다. 이 사건을 통해 알 수 있는 사실(교훈)은 무엇인가?

    ​첫 번째는, 대적들의 전략이 성공을 거두기도 한다는 사실이다. 유다 백성들이 자신들의 삶의 터전인 성읍을 건축하고 주변국들의 무력 위협에 대비하기 위해 성곽을 건축한 일은 객관적으로 정당한 일이었다. 비록 그들이 식민지의 포로 신분이었다 할지라도 부당한 일이 아니었다. 대적에 해당하는 주변 민족들도 유다가 하고 있었던 일, 즉 자신들의 성읍과 성곽 건축을 정당하게 생각하고 유다 귀환 이전에 이미 그 작업을 마쳤을 것이다. 하지만 대적들은 유다의 정당하고 순수한 일에 대해서는 이중 잣대를 적용하여 건축의 동기를 왜곡시켜 버렸다. 그리고 그 왜곡은 모함으로 이어졌고, 그 결과 그들은 제국의 왕이 내린 조서를 등에 업고 '권력으로' 억제하여 공사를 그치게 하였다. 이와 같은 일은 현대에 와서도 유사하게 벌어지고 있다. 그리스도인들은 성전이라 할 수 있는 유무형의 교회를 세우고, 또 자신들의 삶의 터전인 사업을 일구고 직장 등에서 열심히 수고하기도 한다. 하지만 세상 사람들과 생각이나 삶의 방식이 '다르다'는 이유로 부당한 처우를 받고 때로는 모함을 당하기도 한다. 그런 상황에서 그리스도인들을 당황하게 하는 것은 그렇게 부당한 처우나 모함이 성공을 거두기도 한다는 사실이다. 심지어 그 수위가 국가 권력에 의한 억제로 높아지기도 한다. 대적들의 승리는 유다 백성들에게 패배, 즉 고통과 수치를 의미하기 때문에, 현대 그리스도인들도 삶의 현장에서 그와 똑같은 아픔을 경험하게 된다.

      두 번째는, 대적들의 행동이 당장은 승리로 보일지 모르지만, 하나님이 섭리하시는 역사는 정직한 결과를 낳는다는 사실이다. 대적들의 방해로 성전 건축은 중단되었고, 예루살렘 성읍과 성곽 공사도 멈추게 되었다. 그 시점에서 대적들의 방해가 성공을 거두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역사에 개입하시는 하나님의 손길은 다리오 왕 2년에 성전 건축을 재개시켰고, 예루살렘 성읍과 성곽도 아닥사스다 왕 20년(기원전 444년) 느헤미야의 귀환으로 다시 시작되었다. 성전 건축 재개, 예루살렘 성읍과 성곽 공사 재개는 모두 하나님이 개입하신 결과이다. 하나님의 개입은 현대에도 똑같이 이루어지고 있다.

      세 번째는, 이 사실을 통해 그리스도인들이 그런 상황 가운데 반응해야 할 올바른 태도가 무엇인지를 되새기게 한다는 것이다. 교회를 중심으로 한 삶의 현장에서 대적인 사탄의 방해가 주어지고 그로 인해 패배하는 것처럼 보이는 상황이 벌어지더라도 실망하거나 낙담에 빠져서는 안 된다. 실망과 낙담은 하나님에 대한 원망과 불신으로 이어지기 때문에, 그러한 반응은 사탄이 노리는 최종 결과물이다. 그와 같은 상황이 벌어지더라도 그것을 승리로 돌리시는 하나님을 믿음으로 바라보아야 한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일시적으로 패배처럼 보이는 그런 상황을 허락하시는 이유는, 그 과정에서 살아 역사하시는 자신의 모습과 능력을 계시하시기 위해서이다. 하나님은 이를 통해 우리에게 영광 받기 원하시는 분이다. 따라서 그런 상황 속에서 우리가 취할 태도는 바울의 권면대로 하는 것이다.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살전 5:16-18).

    II. 메시지

    본문: 4:1-5,24

    제목: 성전 건축 방해와 유다의 대처

    1 사로잡혔던 자들의 자손이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의 성전을 건축한다 함을 유다와 베냐민의 대적이 듣고 2 스룹바벨과 족장들에게 나아와 이르되 우리도 너희와 함께 건축하게 하라 우리도 너희같이 너희 하나님을 찾노라 앗수르 왕 에살핫돈이 우리를 이리로 오게 한 날부터 우리가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노라 하니 3 스룹바벨과 예수아와 기타 이스라엘 족장들이 이르되 우리 하나님의 성전을 건축하는 데 너희는 우리와 상관이 없느니라 바사 왕 고레스가 우리에게 명령하신 대로 우리가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를 위하여 홀로 건축하리라 하였더니 4 이로부터 그 땅 백성이 유다 백성의 손을 약하게 하여 그 건축을 방해하되 5 바사 왕 고레스의 시대부터 바사 왕 다리오가 즉위할 때까지 관리들에게 뇌물을 주어 그 계획을 막았으며...24 이에 예루살렘에서 하나님의 성전 공사가 바사 왕 다리오 제이년까지 중단되니라

    1. 대적들이 방해한 이유

    지금의 세계정세를 살펴보면, 상생보다는 자국의 이익을 우선하는 정책이 대세를 이루고 있습니다. 그 결과 자국의 이익을 극대화하기 위해 이해 관련 국가들을 압박합니다. 미국은 중국에 대해 수입 관세를 상향 조정하여 미국 내에서의 중국 제품의 가격 경쟁력을 약화시키고 있고, 중국도 밀리지 않기 위해 동일한 정책을 펴서 맞불을 놓고 있습니다. 한반도를 둘러싼 주변 상황은 이와 성격이 다르지만, 그 기저에는 역시 자국 이익 우선 정책이 깔려 있습니다. 일본은 한국을 화이트 리스트에서 배제함으로써 우리나라의 경제 발전을 저해할 수 있는 민감한 소재와 부품을 가지고 양국 간의 역사, 정치, 외교 등의 분야에서 주도권을 잡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습니다. 우리나라도 이에 밀리지 않기 위해 그에 상응하는 조치를 취하고 있고, 국민들은 불매 운동을 통해 일본 경제에 피해를 주면서 아베 정권을 압박하고 있습니다. 한때 북한은 남북 정상 회담, 북미 정상 회담 등으로 화해 국면을 조성하여 그것을 국내 경제 문제 해결을 위한 돌파구로 모색하였습니다. 하지만 미국과 협상 과정에서 갈등이 생기자 여려 차례의 미사일 발사를 통해 한미를 압박하면서 한반도 정세에 대한 주도권을 자기 쪽으로 자져오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습니다. 중동 지역도 상황은 다르지 않습니다. 이스라엘과 주변국들의 갈등은 이스라엘의 건국 이후부터 계속되고 있고, 최근에는 이란과 군사 문제로 첨예하게 갈등하고 있습니다. 이들 지역뿐만이 아닙니다. 지구촌 곳곳에서 얽히고 얽힌 온갖 이해 문제로 갈등과 분쟁이 난무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 내용도 시대만 다를 뿐 똑같은 양상을 띠고 있었습니다. 팔레스타인 남쪽 지역인 유다에 바벨론에서 돌아온 포로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유다와 베냐민 지파 사람들로 종들까지 포함하여 5만 명 가까이 되었는데, 그들이 돌아온 이유는 고레스 왕의 칙령에 따라 성전을 건축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들은 고레스 왕 즉위 둘째 해에 성전 재건을 위한 모든 준비를 마치고(3:7), 그 다음해인 기원전 536년부터 성전 기초를 놓기 시작하였습니다(3:8-13). 그 소식이 유다와 베냐민의 대적들 귀에 들려왔습니다(1절). 유다 백성들이 다시 돌아와 정착한 것도 마뜩치 않은 판에, 성전을 재건한다는 소식은 이제 그들에게 커다란 위협으로 다가왔습니다. 1차 성전은 다윗이 준비하고 솔로몬이 건축한 것입니다. 따라서 그와 같은 성전이 재건된다는 것은, 대적들의 입장에서 볼 때, 유다가 다윗이나 솔로몬 왕조 때와 같이 부활하는 것으로 비칠 수 있습니다. 국제 역학 관계를 볼 때 한 쪽이 강성해지면 다른 쪽은 그쪽에 편입되어 버립니다. 따라서 대적들은 유다의 성전 재건을 곱게 볼 수 없었습니다. 자신들의 기득권이나 생존과 관련이 있기 때문에, 그들은 그것을 보호하기 위해 성전 재건을 필사적으로 막았습니다. 대적들은 두 가지 방법을 사용하여 성전 재건을 방해하였는데, 먼저는 회유책을, 나중에는 그것이 여의치 않자 강공책을 썼습니다.

    ​2. 대적들이 방해한 방법

    1) 회유책

    그들이 사용한 회유책이 무엇이었습니까? 그 내용이 2-3절에 소개되어 있습니다. "우리도 너희와 함께 건축하게 하라 우리도 너희같이 너희 하나님을 찾노라 앗수르 왕 에살핫돈이 우리를 이리로 오게 한 날부터 우리가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노라'. 그들은 자신들도 성전 건축을 돕겠다고 제안하였습니다. 또 자신들이 그 일을 돕는 합당한 이유도 제시하였습니다. '우리도 너희처럼 하나님을 찾는다. 우리가 이곳에 오게 된 날부터 계속해서 하나님께 제사를 드렸다. 그래서 함께 돕는 것이 당연하다.'는 것이 그들의 논리였습니다.

      그들의 말은 한편으로는 맞는 말이었습니다. 그들은 아시리아의 에살핫돈 왕에 의해 바벨론 등지에서 강제로 이주된 사람들입니다. '에살핫돈'은 아시리아 왕 산헤립의 셋째 아들로, 그 뒤를 이어 기원전 681년부터 669년까지 12년 동안 아시리아를 통치한 왕입니다. 따라서 대적들은 그때 강제로 이주되어 성전 기초를 놓았던 기원전 536년까지, 최소 130년 이상을 그곳에서 거주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아시리아의 이와 같은 이주 정책은 반란을 막기 위해 취해졌는데, 실상은 사르곤 2세가 사마리아를 멸망시킨 기원전 722년부터 시작되었습니다. 그는 그때 그곳 백성들을 추방하고, 대신 바벨론, 구다, 아와, 하맛, 스발와임 사람들을 사마리아 땅에 강제 이주시켰습니다(왕하 17:24). 그 결과 그 지역은 민족, 언어, 관습, 종교 의식 등도 혼합되는 현상이 초래되었고, 이것이 원인이 되어 여호와를 경외하지 않는 사람들이 죽는 심판이 내려졌습니다. 이런 일의 재발을 막기 위해 아시리아 왕은 제사장을 벧엘로 보내 그곳 거주민에게 여호와 경외하는 법을 가르쳤습니다(왕하 17:25). 그래서 대적들이 하나님을 찾고 하나님께 제사를 드린다는 말은 사실이었고, 함께 건축하자는 그들의 제안은 성전 재건에 큰 힘이 될 것으로 보였습니다.

    2) 강공책

    하지만 그 제안은 거절당하였습니다. 그러자 이번에는 강공책을 선택하여 성전 건축을 방해하였습니다. 그 내용이 4-5절에 소개되어 있습니다. "이로부터 그 땅 백성이 유다 백성의 손을 약하게 하여 그 건축을 방해하되 바사 왕 고레스의 시대부터 바사 왕 다리오가 즉위할 때까지 관리들에게 뇌물을 주어 그 계획을 막았으며". 여기에서 '손을 약하게 하다'는 말은 '손'이 의미하는 '능력', '의욕' 등을 감하거나 나태하게 한다는 뜻입니다. 즉 유다 백성이 성전 재건에 대한 의욕을 상실하고 무기력한 상태에 빠지도록 하기 위하여 온갖 교활한 방법을 동원하는 방해 공작을 폈다는 의미입니다. 느헤미야서를 보면 그들은 그러한 방법을 통해 유다를 두려움에 빠지도록 하였습니다(느 6:9). 본문에는 그 방법이 무엇이었는지를 구체적으로 밝히고 있지 않지만 아마도 그들은 위협, 훼방 등과 같은 여러 가지 방법으로 건축을 방해하였고, 그 결과 유다 백성의 건축 의지는 상당 부분 약화되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심지어 대적들은 관리들에게 뇌물을 주어 그 계획을 막기도 하였습니다. '관리들'은 페르시아의 고위 공직자들을 가리킵니다. 그들은 사마리아에 거주하던 페르시아 왕실의 관리로, 법정의 민원 담당자들이나 고문관들이었던 것으로 추정됩니다. 관리들은 행정, 사법 등에서 막강한 힘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성전 공사를 방해하는 데 결정적인 영향을 주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이 관리들에게 뇌물을 주었다는 것은, 자신들의 목적 달성을 위하여 부정한 방법을 사용하였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뇌물은 공의를 무너뜨리기 때문에 성경에서는 엄격히 금지하고 있습니다(출 23:8). 따라서 그들이 이러한 방법을 사용하였다는 것은, "우리도 너희같이 너희 하나님을 찾노라"는 그들의 진술(2절)이 거짓이었다는 반증이 됩니다. 그들은 이와 같은 방법으로 고레스 왕 때부터 다리오가 즉위할 때까지 유다 백성의 성전 건축을 지속적으로 방해하였고, 그 결과 다리오 왕 2년(기원전 521년)까지 성전 공사가 중단되는 실효를 거두었습니다(24절).

    3. 유다와 베냐민의 대처

    1) 회유책에 대한 대처

    그렇다면 이번에는 대적들의 방해에 유다 백성들이 어떻게 대처하였는지 살펴보겠습니다. 먼저 함께 건축하자는 제안, 즉 대적들의 회유책에 유다 백성들은 단호하게 거절하였습니다. "스룹바벨과 예수아와 기타 이스라엘 족장들이 이르되 우리 하나님의 성전을 건축하는 데 너희는 우리와 상관이 없느니라 바사 왕 고레스가 우리에게 명령하신 대로 우리가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를 위하여 홀로 건축하리라 하였더니"(3절). 이스라엘 백성들이 거절한 이유는, 한 마디로 그들이 자신들과 상관이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왜 둘 사이에 상관이 없습니까? 첫째는, 신앙적인 부분에서 상관이 없었습니다. 대적들은 비록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고 있었지만, 동시에 자신들이 섬기던 신들의 상도 만들어 섬기고 있었습니다. 따라서 그들은 종교 혼합주의자들이었던 것입니다. 그와 같은 행태에 대해 열왕기서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에 사마리아에서 사로잡혀 간 제사장 중 한 사람이 와서 벧엘에 살며 백성에게 어떻게 여호와 경외할지를 가르쳤더라 그러나 각 민족이 각기 자기의 신상들을 만들어 사마리아 사람이 지은 여러 산당들에 두되 각 민족이 자기들이 거주한 성읍에서 그렇게 하여"(왕하 17:28-29). 하나님은 우상을 부정하고 있고(사 41:29), 하나님과 우상을 겸하여 섬길 수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마 6:24;눅 16;13;고전 10;21). 그러므로 대적들은 비록 형식적으로는 하나님을 섬기고 있었지만, 본질적으로는 그분과 관계없는 우상만 섬겼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유다 백성들은 그들이 함께하겠다는 제안을 거절하였던 것입니다. 만약 그들과 함께한다면 무슨 일이 벌어질까요? 유다 백성들은 대적들의 종교 혼합주의를 인정할 수밖에 없게 되고, 그로 인해 유다 사회도 그들의 영향에 의해 종교 혼합주의에 물들게 되어 있습니다. 또 회유책을 쓴 목적이 성전 건축을 방해하는 데 있었기 때문에, 대적들은 이런저런 이유를 들어 공사를 지연시킬 게 빤합니다. 그래서 그들은 이와 같은 문제가 발생하지 않도록 대적들의 제안을 거절하였던 것입니다.

      둘째는, 그 일이 행정적으로 둘 사이에 상관이 없었습니다. 고레스 왕이 내린 칙령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성전을 건축하도록 명령하고 있습니다. 그 일은 대적들과 전혀 상관없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유다 백성들은 하나님을 위하여 홀로 건축하겠다고 못을 박았습니다.

    2) 강공책에 대한 대처

    대적들의 강공책에 대해 유다 백성들이 어떻게 대처하였는지에 대해서는 본문에 그 내용이 기록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알 수 없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다음과 같이 추측해 볼 수는 있습니다. 대적들은 유다 백성들이 두려움을 가지도록 온갖 위협을 가하는가 하면, 뇌물로 관리들을 매수하여 성전 건축 계획을 막았습니다. 만약 유다 백성들이 동일한 방법으로 대처하였다면, 다시 말해서 그들도 대적들을 위협하고 뇌물로 관리들을 매수하였다면, 저자인 에스라는 성경에 그 내용을 밝혔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런 기록은 없습니다. 따라서 유다 백성들은 그런 방식으로 대처하지 않았고, 침묵으로, 그렇지만 그 일을 하나님께 맡김으로써 결과를 조용히 기다리는 방식으로 대처하였을 것이라고 추측해 볼 수 있습니다.

      만약 이 추측이 맞다면, 그들은 가장 현명한 방법을 선택한 것입니다. 구약 성경은 원수를 갚지 말고 원수에게 선하게 대할 것을 명령하고 있습니다. "네가 만일 네 원수의 길 잃은 소나 나귀를 보거든 반드시 그 사람에게로 돌릴지며"(출 23:4). "원수를 갚지 말며...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레 19:18). 또 율법을 완전하게 하려고 오신 예수님은(마 5:17), 산상수훈을 통해 원수에게 이렇게 대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마 5:44). 그들이 이런 태도로 대하지 않고 대적들과 똑같이 대하였다면, 그래서 성전이 중단되지 않고 완공되었다면 그 성전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성전을 건축하는 이유는 그곳에서 하나님께 제사를 드림으로써 그분과 화합하는 데 있습니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하나님의 뜻과 배치되는 행동을 한다면, 원수들은 오히려 완공된 성전을 보면서 이렇게 비난할 것입니다. '너희 하나님은 사랑도 없는 그런 분이냐? 목적을 이루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라고 가르치는 분이냐? 하지만 오늘 본문 속에서는 그들이 이렇게 하였다는 기록이 없습니다. 그들은 대적들의 방해 공작에 가타부타 하지 않고, 침묵으로 그들의 신앙을 드러냈고, 그 신앙을 통해 하나님의 사랑과 선을 드러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 침묵이 위대한 것입니다.

    ​4. 교회의 순수성과 선한 행실

    대적들의 방해에 대처하였던 유다 백성들의 태도는 오늘 우리에게 중요한 교훈을 줍니다. 유다 백성들의 소임은 성전을 건축하는 일이었습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오늘 우리의 소명은 교회를 세우는 일입니다. 성전 건축이 종교 혼합주의자들과 함께할 수 있는 일이 아니듯이, 교회를 세우는 일도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과 함께할 수 없습니다. 만약 함께한다면 교회는 그 순수성을 잃고 사교 집단이 되어 버릴 것입니다. 안타깝게도 현대 교회는 많은 부분 세상과 타협하면서 이것을 잃어 버렸습니다. 세상은 타협의 대상이 아니라, 교회가 지닌 순수성으로 빛과 소금의 역할을 하여 변화시켜야 할 대상입니다.

      타협하지 않고 순수성을 지킬 때, 대적들은 거기에서 행동을 멈출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오히려 더욱 기를 쓰고 달려듭니다. 온갖 위협으로 두려움에 빠뜨리고, 심지어 뇌물로 관리들을 매수하여, 즉 공권력까지 동원하여 박해를 가합니다. 성전을 건축하던 유다 백성들에게 그랬고, 오늘 우리에게도 동일한 방법으로 교회를 세우지 못하도록 방해합니다. 이런 일들이 몰아칠 때, 우리는 유다 백성들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들은 악을 악으로 갚지 않고 침묵하였습니다. 그들은 침묵하면서 하나님을 바라보았고, 그것을 통해 그들은 악을 선으로 바꾸려고 노력하였습니다.

      하지만 이 모든 노력에도 불구하고 성전 건축은 중단되어 버렸습니다. 그러한 결과는 우리에게 실망과 낙담을 줄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그런 감정에 빠져서는 안 됩니다. 실망과 낙담은 하나님에 대한 원망과 불평을 낳기 때문에, 그런 감정에서 빠져나와 이와 같은 태도를 유지해야 합니다.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살전 5:16-18). 우리가 이런 태도를 유지해야 하는 이유가 어디에 있습니까? 우리는 성전 건축이 일시적으로 중단되었을 뿐이지, 파괴되거나 영원히 멈추지 않았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합니다. 일시 중단되었던 성전 건축은 다리오 왕 2년에 재개되었고, 마침내 4년 후인 다리오 왕 6년에 완공되었습니다(6;13-15). 이것을 통해 우리는 대적들의 방해와 그로 인한 중단에는 하나님의 뜻이 있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그것을 통해 살아 계시고 역사를 주관하시는 분이시라는 사실을 분명하게 계시하셨던 것입니다. 우리는 바로 그런 분을 우리 하나님으로 믿기 때문에, 낙담과 실망 대신, 항상 기뻐하고 쉬지 않고 기도하고 범사에 감사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 교회가 순수성을 지켜서 세상 가운데 빛과 소금이 되기를 원하십니까? 우리 모두가 원수를 사랑하여 선으로 악을 이기는 사람이 되기를 원하십니까? 또 우리 앞에 지금은 실망스러운 상황이 벌어지더라도 그 상황을 영광스러운 장면으로 바꾸실 하나님을 바라보면서, 항상 기뻐하고 쉬지 않고 기도하고 범사에 감사하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원하십니까? 그 소원이 우리 모두에게 있다고 믿습니다. 그 소원이 우리 모두에게 온전히 이루어지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바랍니다.







    에스라 5장 요약

    성전 건축을 다시 시작하엿으며 닷드내가 성전 짓을 것을 방해하지마 막지 못하였고,다라오왕에게 성전 건축의 조사여부를 요정하였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5장은 중단되었던 성전 건축이 다시 시작된 내용을 소개하고 있다. 선지자들(학개와 스가랴)은 유다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이름으로 다음과 같은 예언의 말씀을 전하였다. 첫째, 성전 건축을 뒤로한 채 자신들의 집안 꾸미기에만 열중한 백성들에 대한 책망. 둘째, 하나님이 함께하시니 두려워하지 말고 성전 건축에 매진하라는 촉구. 셋째, 성전은 건축되고 성읍은 넘치도록 풍성하게 될 것이라는 약속.

      성전 건축이 재개되자 총독 닷드내 일행은 그 현장을 방문하여 진상 조사에 나섰다. 그들은 장로들의 진술 내용에 기초하여 왕에게 보고서를 보냈다. 보고서의 초본에는 장로들이 진술한 내용이 다음과 같이 소개되고 있다. (1) 솔로몬 성전이 세워지고 파괴된 경위, (2) 2차 성전의 건축이 재개된 경위(고레스 왕의 칙령에 따라 세스바살이 주도). (3) 왕은 보물 전각에 있는 그 조서를 확인한 후에 성전 건축 재개 여부에 대한 뜻을 내려달라는 요청.

    I. 본문 이해와 질문

    1. 성전 건축 재개와 총독의 진상 조사(1-5절)

    [본문] 1 선지자들 곧 선지자 학개와 잇도의 손자 스가랴가 이스라엘의 하나님의 이름으로 유다와 예루살렘에 거주하는 유다 사람들에게 예언하였더니 2 이에 스알디엘의 아들 스룹바벨과 요사닥의 아들 예수아가 일어나 예루살렘에 있던 하나님의 성전을 다시 건축하기 시작하매 하나님의 선지자들이 함께 있어 그들을 돕더니 3 그때에 유브라데 강 건너편 총독 닷드내와 스달보스내와 그들의 동관들이 다 나아와 그들에게 이르되 누가 너희에게 명령하여 이 성전을 건축하고 이 성곽을 마치게 하였느냐 하기로 4 우리가 이 건축하는 자의 이름을 아뢰었으나 5 하나님이 유다 장로들을 돌보셨으므로 그들이 능히 공사를 막지 못하고 이 일을 다리오에게 아뢰고 그 답장이 오기를 기다렸더라

    [이해] 방백 르훔과 서기관 심새가 주동한 모함으로, 성전의 기초를 놓은 이후(기원전 536년 둘째 달)부터 다리오 왕 2년(기원전 520년 여섯째 달 23일)까지 16년간 성전 건축이 중단되었다. 그결과 유다 백성들은 큰 실망과 낙담에 빠졌던 것으로 보인다. 에스라서에는 이 기간 동안 그들이 어떤 모습을 하고 있었는지 기록하고 있지 않다. 그에 대한 정보는 학개서에서 볼 수 있는데, 거기에는 다음과 같은 모습이 소개되고 있다. (1) 그들은 그동안 성전을 건축할 시기가 아직 이르지 않았다고 생각하였다(1:2). (2) 그들은 판벽한 집에 살고 있었고, 제집 일에 매달리느라 바빴다(1:4,9). '판벽한 집'은 여러 개의 칸막이로 방을 갖추고 넓고 화려하게 장식하는 것을 의미한다. 선지자 학개는 대적들의 방해로 성전 건축이 중단되자 그렇게 살고 있던 백성들을 신랄하게 책망하면서 성전 건축에 다시 매진할 것을 촉구하였다. (3) 하지만 그들의 생활은 그리 윤택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그 이유는, 성전이 황폐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제집 일에만 매달렸던 행위를 하나님이 심판하셨기 때문이다(1:6,8-11).

      선지자들, 즉 학개와 스가랴(잇도의 손자)가 하나님의 이름으로 유다와 예루살렘에 거주하는 유다 사람들에게 예언하였다(1절). 학개서와 스가랴서에 그 예언의 내용이 실려 있다. 하나님은 '학개'를 통하여 다리오 왕 제2년 여섯째 달 1일에 성전을 건축하지 않고 판벽한 집에 살고 있던 백성들을 책망하신 후에, 성전 건축을 명하심과 동시에 그 가운데 친히 함께하실 것을 약속하셨다(1:1-13). 또 그해 일곱째 달 21일에 '내가 함께하니 두려워하지 말고 굳세게 일하라'고 명하셨다(2:4-5). 그리고 아홉째 달 24일에는 자신이 택하신 백성들에게 축복을 약속해 주셨다(2:19-23). 그런가 하면 하나님은 '스가랴'를 통해서도 예언의 말씀을 주셨는데, 다리오 왕 제2년 여덟째 달에 '너희는 나에게 돌아오라'고 촉구하셨고(1:3), 그해 열한째 달 24일에 성전이 건축되고 성읍들이 넘치도록 다시 풍부하게 될 것을 예언(약속)해 주셨다(1:7-17). 따라서 예언의 내용을 정리하면 두 가지로 분류할 수 있다. 첫째는, 성전을 건축하고 있지 않은 백성들에 대한 책망이다. 둘째는, 하나님의 함께하심으로 성전은 다시 건축되고 성읍은 넘치도록 풍성하게 될 것이라는 예언(약속)이다. 그 가운데 첫 번째 내용은 성전 건축이 중단된 것이 대적들의 방해에서 비롯되었기도 하지만, 그보다 더 심각한 문제는 내부에서 비롯되었다는 정보를 제공해 주고 있다. 그들의 손에는 성전 건축을 명하고 있는 고레스 왕의 칙령이 들려 있었고, 그들 모두는 하나같이 하나님께 감동받고 성전 건축을 위해 분연히 일어났다(1:5). 대적들의 방해가 아무리 위협적이었다 하더라도, 또한 뇌물을 받은 관리들의 횡포가 도를 넘는 것이었다고 하더라도 그것 모두는 바사 제국의 왕인 고레스의 칙령 앞에 맞설 수 없는 것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전 건축이 중단되었다는 것은 그에 대한 그들의 의지(동기)가 무디어졌다는 단서(이유) 외에 설명할 길이 없다. 대적들의 방해 공작은 주로 그들의 손을 약하게 하는 데 집중되었고, 그 과정에서 뇌물로 매수된 관리들이 앞장섰던 것으로 보인다. 한 번 맞은 이슬비로 옷은 젖지 않는다. 하지만 누적된 이슬비는 결국 옷을 흥건히 젖게 한다. 그로 인해 손이 약해졌다면, 그 약해진 손이 향할 곳은 자명하다. 그들은 성전이 아닌 자신들의 삶의 터전, 즉 자신들의 집으로 시선을 돌렸고, 그곳을 판벽한 집으로 바꾸거나 제집의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 바쁜 시간을 보냈다. 그래서 학개는 성전 건축에 관심을 끊고 자신들의 안락만 추구하고 있던 백성들의 태도를 신랄하게 책망하고, 스가랴는 그런 그들에게 돌이켜 하나님께 돌아오라고 촉구하였던 것이다. 한편 저자는 스가랴를 '잇도의 손자'로 밝히고 있는데, 이는 잇도(가 스가랴의 할아버지라는 말이 아니라 스가랴가 잇도의 '자손'(후손, a descendant)이라는 뜻이다(느 12:16, NIV). '잇도'는 분열 왕국 시대 초기의 선지자이었거나(대하 9:29;12:15;13:2), 제사장 가문의 족장이었던 것으로 추정된다(느 12:4,16).

      예언의 말씀이 주어지자 성전 건축이 다시 시작되었다. 이번에도 스룹바벨과 예수아가 그 일을 주도하였고, 하나님의 선지자들이 함께하면서 그들을 도왔다(2절). 성전 건축은 다리오 왕 2년(기원전 520년 여섯째 달 24일)에 재개되었다(학 1:15). 성전 건축은 학개를 통해 주어진 첫 번째 예언(여섯째 달 1일)에 따라 재개되었던 것으로 추정되고, 그 이후 열한째 달까지 6개월 동안 선지자 학개와 스가랴를 통해 예언의 말씀이 네 차례 더 주어졌다(학개서와 스가랴서 기준). 선지자들, 즉 학개와 스가랴는 하나님이 전해 주신 '네 차례의 예언'을 통해, '함께하시는 하나님이 반드시 성전이 건축되고 성읍들이 다시 넘치도록 풍부하게 하실 것을 약속하셨기 때문에, 두려워하지 말고 굳세게 일하라'고 독려하는 것으로 그들을 도왔던 것으로 보인다.

      공사가 다시 시작되자 유프라테스강 건너편, 즉 강의 서쪽 지역을 담당하는 총독 일행이 나아와서 이의(문제)를 제기하였다(3절). '총독'은 구약 성경에서 '장관'(왕상 20:24), '방백'(8:8;9:3) 등으로 번역되는 단어로, 스룹바벨의 직함과 동일하기도 하다(6:7;학 1:1,14). 라이프성경사전에서는 '닷드내'가 다리오 1세 때 유프라테스강 서쪽 식민 국가의 총독을 지낸 인물로 소개하고 있지만, 카리스종합주석에는 '닷드내'를 강 서쪽 지역 총독 '우쉬타니' 휘하의 고위 관리(governor, NIV)로 시리아의 다마스커스에서 통치하였을 것이라고 소개하고 있다. '스달보스내'는 서기관이나 조사관으로서 '닷드내'를 보좌하였던 인물로 추정된다. '그들의 동관들'은 '닷드내'의 부하들(감찰관)로 추정된다. 그들이 제기한 문제는 '누가 너희에게 명령하여 성전을 건축하고 성곽을 마치게 하였느냐'는 것이었다. 여기에서 '성곽'은 원래 건축 구조물 자체를 지칭하는 것으로, 건축물의 기초 구조물일 수도 있고 성전의 외벽일 수도 있다. 그래서 NIV와 NRSV는 그것을 '구조물'(structure)로, KJV은 '외벽'(wall)으로 번역하고 있다. 그 질문을 통해 다음과 같은 사실들을 추정해 볼 수 있다. 첫째, 총독 일행은 유다의 대적들과 달리 성전 건축에 대해 부정적인 시각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그들의 임무는 관할 지역에서 벌어지는 중요한 일들을 왕에게 보고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예루살렘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 즉 성전 건축이 어떤 근거(연유)로 재개되었는지에 대해 객관적으로 알고자 하였다. 이러한 사실은 3절을 비롯하여 유다의 진술 내용을 확인하기 위해 왕에게 보낸 보고서 초본의 내용에도 드러나는데, 그 속에는 유다에 대한 적대적인 의도나 대적들의 악의적인 부추김에 따른 모함 등이 보이지 않는다(6-17절). 둘째, 총독 일행은 고레스 칙령의 내용을 알지 못하였다. 이는 역으로 유다 백성들이 그 조서의 내용을 외부에 적극적으로 밝히지 않았다는 추정도 낳게 한다. 따라서 총독 일행은 유다 백성들이 성전을 건축한다는 소식을 듣고 찾아와서 질문을 통해 성전 재건 여부의 합법성 여부를 객관적으로 조사하였던 것이다.

      4절은 '아뢰다'(말하다)의 주체가 되는 '우리'를 누구로 보느냐에 따라 해석이 둘로 갈린다. 개역개정성경과 KJV은 '우리'를 총독 닷드내 일행의 질문에 유다 백성들이 대답한 것으로 보고, 그들이 성전 건축을 지시한 사람의 이름(고레스 왕)을 총독에게 아뢰었다고 적고 있다. 그에 비해 표준새번역, 공동번역, NIV, RSV 등은 '우리'를 1인칭 복수가 아닌 3인칭 복수로 보고, 그들, 즉 총독 일행이 유다 백성들에게 성전 건축을 명령한 사람의 이름이 무엇이냐고 질문하였던 것으로 적고 있다(They also asked). 두 번째 견해는 70인역(70LXX)의 '그들이 물었다'는 번역을 수용한 것으로, 닷드내 총독 일행이 앞서 질문에 이어 재차 질문한 것으로 간주하였다. 총독이 다리오 왕에게 보낸 글에 보면, 그들이 장로들에게 "누가 너희에게 명령하여 이 성전을 건축하고 이 성곽을 마치라고 하였느냐"고 질문하고(9절), 그 대표자들의 이름을 적어 왕에게 아뢰기 위해 그들의 이름을 재차 물었다(10절)는 내용이 나온다. 이에 비추어 볼 때, 두 번째 견해가 더 타당성이 있어 보인다. 어쨌든 성전을 건축하게 한 자의 이름이 그들에게 전해졌던 것만큼은 확실하다. 총독이 다리오 왕에게 전한 보고에는 고레스 왕이 조서를 내려 성전을 건축하라고 명령하였고, 세스바살(스룹바벨)이 돌아와서 지금까지 건축하고 있다는 내용이 적혀 있다(5:12-16). 총독은 그 같은 내용을 왕에게 보내 확인을 요청하였다(5:17).

      총독 일행은 유다 백성들의 성전 건축 공사를 막지 못하였다(5절). 에스라는 그들이 그것을 막지 못한 이유를 두 가지로 제시하였다. 첫째는, 하나님이 유다 장로들을 돌보셨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유다 장로들을 돌보셨다'는 말은 문자적으로 '하나님의 눈이 유다 장로들 위에 있었다'는 뜻이다. 선하신 하나님의 눈길이 누군가에게 주어졌다는 것은 그분의 특별한 배려가 그에게 주어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특별히 저자가 이러한 이미지를 제시한 것은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돌보신다는 사실을 심화시켜서 나타내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욥 36:7;시 33:18;34:15). 두 번째 이유는, 그 내용을 다리오 왕에게 보고하고 답장이 오기를 기다려야 했기 때문이다. 다리오 왕의 대답을 기다리는 상황에서 총독이 작업 중단을 명령해도 문제가 되지만, 이는 역으로 왕의 답장이 도착하기 전에 유다 백성들이 공사를 계속할 수 있다는 논리도 제공해 주지 못한다. 따라서 엄밀히 말하면 총독은 그 답장이 오기 전에도 성전 공사를 중단시킬 수 있었다. 하지만 총독은 막지 않았다. 이는 유다 장로들 위에 함께하신 하나님의 눈이 근본적인 원인이 되었겠지만, 장로들의 입에서 나온 고레스 칙령에 대한 위엄도 적지 않은 부담으로 작용하였기 때문이다. 아무튼, 이것을 통해 총독이 객관적이고 매우 신중한 인물이었다는 것을 추측해 볼 수 있다.

    [질문] 성전 건축이 중단된 상황에서 유다 백성들의 모습은 여러 가지 면에서 문제가 있었다. 그 문제는 무엇이었고, 그것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무엇인가?

    첫 번째 문제는, 그들이 손을 약하게 한 대적들의 방해에 속수무책이었다는 점이다. 대적들의 방해를 막을 수는 없다. 그렇다고 그것이 속수무책의 원인으로 작용해서는 안 된다. 아무리 대적들의 방해가 거센 것이었다 할지라도 성전 재건에 대한 초심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었다면 그것은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 더구나 그들은 두 장의 히든카드를 손에 쥐고 있었다. 한 장은 고레스 칙령이고, 다른 한 장은 기도였다. 그들은 항상 함께하시는 하나님께 기도로 도움을 청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들은 두 장의 히든카드를 끝내 사용하지 않았다. 두 번째 문제는, 대적들의 방해를 자신들의 다른 관심으로 돌리는 데 활용하였다는 점이다. 그들은 성전 건축 시기가 아직 오지 않았다고 자위하면서, 눈을 돌려 자신들의 집을 꾸미는 데 집중하였고 제집 일을 매달리느라 바빴다. 그들은 이런 행동을 통해 하나님에 대한 불신과 함께 재물이라고 하는 우상을 섬기는 죄를 범하였던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학개와 스가랴로부터 엄한 책망을 받고 돌이키라는 촉구까지 받았다.

      사도 베드로는 대적 마귀를 우는 사자에 비유하면서 그의 먹이가 되지 않기 위해 이렇게 할 것을 주문하였다. '근신하라', '깨어라', '믿음을 굳게 하여 그를 대적하라'(벧전 5:8-9). '근신하라 깨어라'는 '정신을 바짝 차리고 항상 깨어 있으라'는 뜻이다. 정신을 놓고 나태하거나 게으름을 피우면 마귀의 먹잇감이 되기 때문에, 쉬지 말고 기도해야 한다. 그들의 모습을 보면서 삼아야 할 두 번째 교훈은, 두 주인을 섬길 수 있다는 착각에 빠져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예수님은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다고 단정하셨다. "집 하인이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나니 혹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히 여길 것임이니라 너희는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느니라"(눅 16:13). 세 번째 교훈은, 삶의 우선순위를 바르게 해야 한다는 것이다. 성전 재건을 삶의 최고 가치(이상)로 삼았던 그들은, 대적들의 방해를 빌미 삼아 그 자리를 자신들의 집 문제로 대체시켜 버렸다. 그들은 자기 집을 일으켜 세운 후에 하나님의 성전도 건축하면 된다고 생각하였던 것 같다. 하지만 그로 인해 그들은 둘 다 잃어버리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집안은 그들의 생각만큼 일어나지 않았다. 오히려 빈궁이 밀려왔고, 그 빈궁에 허덕이면서 하나님도 잃어버렸다. 삶의 우선순위를 바르게 하면 두 마리 토끼를 모두 잡을 수 있다.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 6:33). 학개와 스가랴를 통해 하신 예언에도 이러한 원리는 똑같이 녹아 있었다. 하나님은 두 선지자를 통해 잘못된 태도에서 돌이켜 하나님께 돌아오면 성전 재건뿐만 아니라 성읍도 넘치도록 풍성하게 될 것이라고 약속하셨다.

    2. 총독이 올린 보고서(초본)의 내용(6-17절)

    [본문] 6 유브라데 강 건너편 총독 닷드내와 스달보스내와 그들의 동관인 유브라데 강 건너편 아바삭 사람이 다리오 왕에게 올린 글의 초본은 이러하니라 7 그 글에 일렀으되 다리오 왕은 평안하옵소서 8 왕께 아뢰옵나이다 우리가 유다 도에 가서 지극히 크신 하나님의 성전에 나아가 본즉 성전을 큰 돌로 세우며 벽에 나무를 얹고 부지런히 일하므로 공사가 그 손에서 형통하옵기에 9 우리가 그 장로들에게 물어보기를 누가 너희에게 명령하여 이 성전을 건축하고 이 성곽을 마치라고 하였느냐 하고 10 우리가 또 그 우두머리들의 이름을 적어 왕에게 아뢰고자 하여 그들의 이름을 물은즉 11 그들이 우리에게 대답하여 이르기를 우리는 천지의 하나님의 종이라 예전에 건축되었던 성전을 우리가 다시 건축하노라 이는 본래 이스라엘의 큰 왕이 건축하여 완공한 것이었으나 12 우리 조상들이 하늘에 계신 하나님을 노엽게 하였으므로 하나님이 그들을 갈대아 사람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의 손에 넘기시매 그가 이 성전을 헐며 이 백성을 사로잡아 바벨론으로 옮겼더니 13 바벨론 왕 고레스 원년에 고레스 왕이 조서를 내려 하나님의 이 성전을 다시 건축하게 하고 14 또 느부갓네살이 예루살렘 하나님의 성전 안에서 금, 은 그릇을 옮겨다가 바벨론 신당에 두었던 것을 고레스 왕이 그 신당에서 꺼내어 그가 세운 총독 세스바살이라고 부르는 자에게 내주고 15 일러 말하되 너는 이 그릇들을 가지고 가서 예루살렘 성전에 두고 하나님의 전을 제자리에 건축하라 하매 16 이에 이 세스바살이 이르러 예루살렘 하나님의 성전 지대를 놓았고 그때로부터 지금까지 건축하여 오나 아직도 마치지 못하였다 하였사오니 17 이제 왕께서 좋게 여기시거든 바벨론에서 왕의 보물 전각에서 조사하사 과연 고레스 왕이 조서를 내려 하나님의 이 성전을 예루살렘에 다시 건축하라 하셨는지 보시고 왕은 이 일에 대하여 왕의 기쁘신 뜻을 우리에게 보이소서 하였더라

    [이해] 유프라테스강 건너편의 총독 닷드내는, 다리오 왕에게 글을 올렸다. 그 글에는 스달보스내, 그들의 동료인 유브라데 아바삭 사람이 함께하였다. '아바삭'은 '고하는 자', '조사하는 자'라는 의미로, 어떤 부족의 이름이 아니라 페르시아 관원들의 구체적인 직함으로 보인다. 그 글의 초본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수록되어 있었다. (1) 성전 건축 상황(8절), (2) 성전 건축의 경위에 대한 조사(9-10절), (3) 유다 장로들의 답변(11-16절), (4) 고레스 칙령의 내용 확인 의뢰.

      성전 공사 상황은 형통하게 진행되고 있었다. 백성들은 큰 돌로 성전을 세우고 나무를 벽에 얹는 공사를 하되, 부지런히 그 일을 하였다. '벽에 나무를 얹다'는 것은, 건물을 하나로 붙이고 연결시키기 위하여 또는 지진 등으로부터 건물을 보호할 목적으로, 벽과 벽 사이에 대들보를 세우는 것을 말한다. 한편 총독이 표현한 '지극히 크신 하나님의 성전'은 두 가지로 해석해 볼 수 있다. 첫째, 성전 규모가 지극히 크다. 둘째, 하나님을 '지극히 크신 분'으로 높이고 있다. 다음과 같은 이유로 인해 두 번째 해석을 더 타당한 것으로 본다. (1) 정복한 지역의 종교를 존중하는 것이 페르시아의 일관적인 식민지 정책이었다. (2) 건축 중이던 성전은 그 규모 면에서 그렇게 크지 않았다(3;12). (3) 원문에는 '지극히 크다'는 말이 '성전'이 아닌 '하나님' 뒤에 나온다. 그래서 NIV와 KJV도 그 부분을 'the temple(house) of great God'로 번역하고 있다.

      총독 일행은 성전 건축이 다시 시작된 연유를 조사하기 위하여 유다 장로들에게 질문하였다. 그들은 두 번에 걸쳐 질문하였다. 첫 번째 질문은, "누가 너희에게 명령하여 이 성전을 건축하고 이 성곽을 마치라고 하였느냐"는 것이었다. 이는 '누가 너희에게 이 전을 건축하고 이 구조물을 보완하도록 법령(조서)을 주었느냐'는 뜻으로, 총독 일행은 그 질문을 통해 성전 건축 재개의 전후 사정을 살피려고 하였을 것이다. 장로들은 그에 대한 질문으로 고레스 왕이 조서를 내려 다시 건축하라고 명하였다고 대답하였던 것으로 보인다(11-16절). 전후 사정을 파악한 그들은 이에 장로들에게 재차 물었다. "그렇다면 공사 책임자들(우두머리들)의 이름이 무엇이냐?" 두 번째 질문은 공사 책임자들의 이름을 적어 왕에게 보고하기 위해 주어졌고, 따라서 그 내용도 보다 구체적이었다. 이에 장로들은 '세스바살'이라고 답하였던 것으로 보인다(16절).

      장로들의 대답에는 공사 재개의 당위성과 책임자가 누구인가에 대한 내용이 들어 있었는데, 내용을 세분하면 다음과 같다. (1) 우리가 다시 건축하고 있는 이 성전은 본래 이스라엘의 큰 왕이 건축하여 완공하였다(11절), (2) 조상들의 범죄로 하나님의 노여움을 사서 성전이 파괴되고 백성들은 바벨론으로 끌려갔다(12절), (3) 고레스 왕 원년에 왕이 조서를 내려 성전을 다시 건축하라고 명령하였을 뿐 아니라, 그가 세운 총독 세스바살에게 느부갓네살에 의하여 바벨론으로 옮겨진 성전 기구들까지 다시 내 주었다(13-15절). (4) 총독 세스바살이 백성들을 이끌고 돌아와서 성전의 지대를 놓고 지금까지 건축하고 있지만, 아직도 마치지 못하였다(16절). (1)과 (2)에는 장로들이 그들의 정체성이 무엇인지, 자신들이 왜 멸망 당하였는지에 대한 인식이 정확히 들어 있다. 그들은 자신들을 '천지의 하나님의 종'으로 인식하고 있었다. 여기에는 그들이 '다리오 왕의 종'이 아니라 그보다 위대하신 하나님의 종이라는 신앙고백과 함께 하나님 앞에서의 겸손함이 묻어 있다. 그들은 자신들이 멸망한 이유, 즉 성전이 파괴되고 포로로 끌려간 이유가 조상들의 죄와 그로 인한 하나님의 진노에 있었다고 밝힘으로써 그 사건을 주관하신 하나님의 역사에도 정확한 인식을 지니고 있었다. '이스라엘의 큰 왕'은 '솔로몬'을 가리킨다. 솔로몬은 기원전 966년에 공사를 시작하여(왕상 6:1) 7년 뒤인 기원전 959년 가을에 성전 건축을 모두 마쳤다(왕상 6:38). 제2차 성전이 재건을 위해 기원전 536년에 기초를 놓았기 때문에 솔로몬 성전은 그로부터 420년 정도가 되는 것이다. '백성을 사로잡아 바벨론으로 옮겼던 사건'은 모두 네 차례에 걸쳐 이루어졌다. 첫 번째는, 기원전 605년 느부갓네살 왕이 예루살렘을 포위, 공격한 후 유다의 왕족과 귀족 일부를 사로잡아 갔다(단 1:1-5). 두 번째는, 여호야긴 왕의 배신이 발단이 되었는데, 이때 느부갓네살은 요호야긴을 포함하여 용사 7,000명, 기술자 1,000명, 다수의 귀인들을 잡아갔다(왕하 24:10-17). 세 번째는, 시드기야 왕의 배신이 발단이 되어 예루살렘이 완전히 함락되었는데, 이때 비천한 자들을 제외한 백성들 대부분이 포로가 되어 끌려갔다(왕하 25:8). 마지막은, 이스마엘이 바벨론의 유다 총독 그달라야를 살해하였을 때(기원전 582년), 또다시 백성들이 포로로 끌려갔다(렘52:30). (3)에는 성전을 재건하게 된 경위가 소개되고 있다. 그 일은 고레스 왕의 명령에 따라 시작되었고, 고레스 왕이 총독으로 임명한 세스바살이 주도하였다. '세스바살'은 '스룹바벨'을 가리킨다. '총독'의 지위가 무엇이었는지는 정확하게 알기 어렵다. 재건되어 분리, 독립된 유다 지방의 총독이었는지, 사마리아 총독의 관할 아래 있던 유다 지구의 대리 총독이었는지, 아니면 단지 어떤 특정 일의 지휘 감독을 맡은 왕의 변무관이었는지 명확하지 않다. 선지자 학개가 스룹바벨을 '유다의 총독'이라 불렀고(학 1:1,14), 스룹바벨이 실제적으로 정치적 특권을 가지고 있었다는 점을 고려해 볼 때, '총독'은 유다에서 제반 업무를 반독자적으로 처리할 수 있는 권한이 부여된 직책이었다고 추정해 볼 수는 있다. 13절에서 장로들이 고레스를 바사 왕으로 칭하지 않고 '바벨론 왕'으로 칭한 것은, 페르시아가 바벨론의 합법적이고 정통적인 계승자로 자처하였다는 점을 고려하면 자연스럽다. 그들은 이러한 표현을 통해서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에 의해 성전이 파괴된 역사적 사실과 고레스 왕이 내린 칙령으로 성전 재건이 시작된 역사적 사실을 연결시켜 설명하려고 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총독은 장로들의 대답에 근거하여 글로 써서 왕에게 보내되, 특별히 그 끝에 왕의 보물 전각에 있는 고레스 왕의 조서를 통해 장로들이 한 말이 정말 맞는지 확인하고 그 일에 대한 왕의 뜻을 알려 달라고 요청하였다(17절).

    [질문] 총독의 질문에 대한 장로들의 대답은 어떤 특징들을 담고 있었는지 살펴보고, 그것을 통해 우리가 삼을 교훈은 무엇인지 나누어 보시오.

    ​장로들은 자신들이 '하나님의 종'이고, 그 신분에 따라 예전에 건축한 성전을 다시 건축하는 사명을 지닌 존재라는 사실을 명확히 알고 있었다. 이는 자신들의 정체성이 순전히 신앙에 기초하고 있다는 신앙고백에서 비롯된 것이다. 이것을 통해서 그들은 '다리오 왕의 종'에 담긴 정치적인 의도를 배제하였다. 또한, 그들은 성전이 파괴되고 백성들이 바벨론으로 사로잡혀 간 것이 조상들의 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진노하신 결과라는 역사 인식을 지니고 있었다. 그 인식 속에는 조상들이 밟은 전철을 되풀이하지 않겠다는 굳센 의지가 심층적으로 담겨 있었고, 그 의지는 다시 성전 건축으로 표출되었다. 그들의 대답에서 볼 수 있는 세 번째 특징은, 성전 재건에 대한 경위를 밝히는 모습 속에 들어 있다. 그들은 고레스 왕이 내린 칙령으로부터 귀환 후에 세스바살의 주도 아래 이루어진 건축 과정에 대해 구체적으로, 그렇지만 가감 없이 총독에게 밝혔다. 그리고 그 진술은 총독이 왕에게 글을 올릴 때 그대로 반영되었다.

      장로들의 태도는 예수님이 제자들을 세상으로 파송하실 때 하셨던 말씀을 상기케 한다. "보라 내가 너희를 보냄이 양을 이리 가운데로 보냄과 같도다 그러므로 너희는 뱀같이 지혜롭고 비둘기같이 순결하라"(마 10:16). 예수님은 제자들의 정체성을 이리 가운데 보내진 양으로 보셨고, 그런 그들이 뱀같이 지혜롭고 비둘기같이 순결하기를 바라셨다. '순결'은 죄를 멀리하고 하나님을 가까이하면 저절로 이루어지는 성품이다. 따라서 그 성품은 자신의 신분(정체성)에 대한 명확한 인식, 즉 자신이 하나님의 종(자녀, 백성, 제자)이라는 인식에서 시작되고, 자신에게 주어진 소명, 즉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세우는 일에 집중할 때 완성된다. '지혜'는 여호와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성품이다(욥 28:12-28). 잠언서 기자는 그 지혜를 하나님이 주시는데, 그것이 정직, 온전한 행실과 관련되어 있다고 말하고 있다. "대저 여호와는 지혜를 주시며 지식과 명철을 그 입에서 내심이며 그는 정직한 자를 위하여 완전한 지혜를 예비하시며 행실이 온전한 자에게 방패가 되시나니"(잠 2:6-7). 따라서 하나님을 경외한 장로들은 하나님이 주시는 지혜로 거짓 없이 성전 재건 경위에 대해 구체적으로 대답할 수 있었다. 바로 이런 모습이 우리가 교훈으로 삼아야 할 장로들의 태도이다.

    II. 메시지

    본문: 스 5:1-5

    제목: 중단된 성전 건축 재개

    1 선지자들 곧 선지자 학개와 잇도의 손자 스가랴가 이스라엘의 하나님의 이름으로 유다와 예루살렘에 거주하는 유다 사람들에게 예언하였더니 2 이에 스알디엘의 아들 스룹바벨과 요사닥의 아들 예수아가 일어나 예루살렘에 있던 하나님의 성전을 다시 건축하기 시작하매 하나님의 선지자들이 함께 있어 그들을 돕더니 3 그때에 유브라데 강 건너편 총독 닷드내와 스달보스내와 그들의 동관들이 다 나아와 그들에게 이르되 누가 너희에게 명령하여 이 성전을 건축하고 이 성곽을 마치게 하였느냐 하기로 4 우리가 이 건축하는 자의 이름을 아뢰었으나 5 하나님이 유다 장로들을 돌보셨으므로 그들이 능히 공사를 막지 못하고 이 일을 다리오에게 아뢰고 그 답장이 오기를 기다렸더라

    1. 성전 건축이 중단된 원인

    시간은 기본적으로 중립적인 속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 시간을 누가 어떻게 사용하느냐에 따라 그 결과는 긍정적으로 돌아오기도 하지만, 돌이킬 수 없는 결과를 낳기도 합니다. 본문이 소개한 이스라엘 백성들의 이전 모습은 후자에 속합니다. 유다의 대적들은 온갖 수단을 동원하여 성전 재건을 방해하였습니다. 때로는 위협으로, 때로는 돈으로 관리들을 매수하여 필사적으로 막았습니다. 그 결과 성전 건축은 중단되어 버렸습니다(4:24). 다리오 왕 2년(기원전 520년)까지 중단되었기 때문에, 성전 기초를 놓았던 기원전 536년을 기점으로 하면 최대 16년 동안 중단되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공사가 중단된 원인을 대적들의 방해로만 돌리기에는 석연치 않은 점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감동을 받고 일어난 유다 백성들이(1:5), 그렇게 쉽게 대적들의 방해에 굴복할 수 있을까요? 그들은 대적들의 방해를 무력화시킬 수 있는 고레스 왕의 칙령을 가지고 있었고, 또 성전 재건에 대한 하나님의 명령이 그들 마음속에 굳건히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전 건축은 16년 동안이나 중단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전 건축이 중단된 원인이 대적들의 방해보다 더 근원적인 데 있었다는 것을 쉽게 추측해 볼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근원적인 원인이 무엇이었을까요? 그 원인이 1절과 2절에 제시되어 있습니다. 거기에는 선지자들의 예언이 주어지자 성전이 다시 건축되기 시작하였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선지자들이 어떤 예언의 말씀을 전했는지 알 필요가 있습니다. 선지자 학개는 유다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이렇게 전하였습니다. “이 백성이 말하기를 여호와의 전을 건축할 시기가 이르지 아니하였다 하느니라...이 성전이 황폐하였거늘 너희가 이때에 판벽한 집에 거주하는 것이 옳으냐...내 집은 황폐하였으되 너희는 각각 자기의 집을 짓기 위하여 빨랐음이라”(학 1:2,49). 우리는 이 말씀을 통해 다음과 같은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대적들의 방해로 손이 점차 약해지자, 즉 성전 건축의 의지가 꺾이자(4:4), 그들은 하나님의 성전을 건축할 시기가 아직 오지 않았다고 자기 합리화해 버렸습니다. 자기 합리화는 그들의 관심을 성전 건축보다 자신들의 집으로 옮기게 하였고, 그 결과 그들은 잘 꾸민 집에서 안주하거나 자기 집을 짓는 일에 몰두하면서 황폐된 성전을 그대로 방치해 버렸습니다. 이런 그들을 향해 하나님은 학개를 통해 책망하셨고, 또 스가랴를 통해 그러한 죄에서 돌이켜 ‘내게로 돌아오라’고 촉구하셨던 것입니다(슥 1:3).

    2. 두 가지 교훈

    성전 건축이 중단된 근본적인 원인이 유다 백성들의 태도에 있었다는 것을 보면서, 우리는 두 가지를 교훈으로 삼아야 합니다. 1) 첫째, 부정적인 상황 앞에서 자기 합리화에 빠져서는 안 된다는 점입니다. 유다를 둘러싼 주변 나라들은 성전이 재건되는 것을 곱게 보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자신들이 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을 동원하여 방해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대적들의 행동은 분명 유다 백성들에게 부정적인 영향을 끼쳤지만, 그렇다고 그것이 성전 재건을 중단해도 된다는 자기 합리화의 구실이 될 수는 없습니다. 앞서 말씀드렸듯이 유다 백성들에게는 두 가지의 히든카드가 손에 들려 있었습니다. ‘고레스 칙령’과 ‘하나님의 명령’이 바로 그것입니다. 고레스 칙령은 대적들의 모든 시도를 발아래 굴복시킬 수 있는 강력한 무기였고, 그들이 믿는 하나님은 그보다 더 강력한 무기였습니다. 만약 그들이 만군의 하나님, 능력의 하나님을 확고하게 믿고 있었다면, 대적들의 위협은 바람에 날려가는 티끌처럼 사라질 것입니다. 하지만 그들은 계속되는 대적들의 방해 앞에서 두 장의 히든카드를 모두 버리고 자기 합리화의 길을 선택해 버렸습니다.

      ‘자기 합리화’가 무엇입니까? 국어사전은 '합리화'를 이렇게 정의하고 있습니다. “이론이나 이치에 합당하게 함”, “낭비적 요소나 비능률적 요소를 없애 더 능률적으로 체제를 개선함”. 따라서 합리화는 그 기준이 객관성에 있습니다. 그에 비해 ‘자기 합리화’는 그 기준이 주관성, 즉 자기 자신에 맞추어져 있습니다. 그래서 자기 합리화를 할 경우, 부정적인 상황에서 생긴 감정적인 상처나 실망을 부정적인 방법으로 회피해 버립니다. 유다 백성들이 바로 이런 자기 합리화의 함정에 빠져 있었습니다. 대적들의 방해는 부정적인 상황을 만들었지만, 역사를 주관하시는 하나님의 손길은 여전히 그 상황을 떠나지 않고 있었기 때문에, 그 상황은 여전히 긍정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그들에게는 그것을 보는 눈(믿음)이 없었습니다.

      그렇다면 자기 합리화의 함정에 빠졌던 유다 백성들이 긍정적인 의미의 객관적인 합리화로 돌아오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자신들의 생각을 접고 역사를 주관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비록 지금은 대적들의 방해로 괴롭고 힘들지만, 하나님이 함께하시고 또 함께하시는 하나님이 성전을 건축하게 하실 것으로 믿고 묵묵히 그렇지만 부지런히 성전 건축에 매진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대적들의 방해를 묵인하신 것도 바로 이런 모습을 통해 영광 받기 원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세우기 위해 힘쓰다 보면, 유다 백성들이 직면하였던 것과 같은 부정적인 상황이 올 수 있습니다. 사탄이 바보가 아닌 이상 분명 부정적인 상황은 피해갈 수 없습니다. 그때 우리는 유다 백성들처럼 자기 합리화의 모순에 빠져서는 안 됩니다.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진 주님이 우리와 항상 함께하신다는 약속을 굳게 믿고 우리 앞에 주어진 소명에 매진해야 합니다.

    2) 두 번째 교훈은, 우선순위를 혼동해서는 안 된다는 점입니다. 유다 백성들이 성전 건축을 뒤로하고 자신들의 집을 세우는 일에 빨랐던 이유는, 그들이 일의 우선순위를 혼동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왜 바벨론에서 예루살렘으로 돌아왔습니까? 자신들의 집을 짓기 위해서였습니까? 아닙니다. 하나님도, 고레스 왕도 그렇게 명령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분명히 성전을 건축하라는 명령을 받고 그 명령을 수행하기 위해 돌아왔습니다. 하지만 거듭되는 대적들의 방해와 자기 합리화의 결과 그들의 우선순위가 바뀌어 버렸습니다.

      그들이 우선순위를 바꾼 이유는 자명합니다. 성전보다 자신들의 집이 더욱더 크게 보였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집을 먼저 짓고 경제력도 튼튼히 세워 안락한 생활을 누린 후에 성전은 나중에 지어도 늦지 않다고 생각하였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의 생활 형편이 나아졌을까요? 결과는 그들의 생각과 정반대로 이루어졌습니다. “너희가 많은 것을 바랐으나 도리어 적었고 너희가 그것을 집으로 가져갔으나 내가 불어 버렸느니라...이것이 무슨 까닭이냐 내 집은 황폐하였으되 너희는 각각 자기의 집을 짓기 위하여 빨랐음이라 그러므로 너희로 말미암아 하늘은 이슬을 그쳤고 땅은 산물을 그쳤으며 내가 이 땅과 산과 곡물과 새 포도주와 기름과 땅의 모든 소산과 사람과 가축과 손으로 수고하는 모든 일에 한재를 들게 하였느니라”(학 1:9-11).

      그들은 왜 이런 결과를 맞이할 수밖에 없었을까요? 우선순위를 혼동하여 첫 단추를 잘못 끼웠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우선순위는 예수님이 제시한 말씀과도 배치됩니다. 예수님은 산에서 제자들에게 이렇게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 6:31-33). 이 말씀에 비추어 보면, 유다 백성들은 이방인들과 같은 모습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자신들의 바람과 달리 하나님의 심판을 받고 가난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이런 사람들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현재 주어진 삶이 힘들고 어렵다고 해서 다른 곳으로 눈을 돌려서는 안 됩니다. 그럴 때일수록 더욱더 하나님을 바라보고 먼저 그분의 나라를 구해야 합니다. 이렇게 우선순위를 바르게 할 때, 우리가 염려하는 모든 것들은 우리의 모든 필요를 살피시는 하나님에 의해 충족될 것입니다.

    3. 하나님의 약속

    자기 합리화와 잘못된 우선순위에 빠졌던 유다 백성들은, 선지자들의 책망과 촉구에 마음을 돌이켜 성전을 다시 건축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선지자들의 책망과 촉구는 분명 그들의 마음을 각성시켰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지속적으로 성전을 건축하기에는 동력이 부족합니다. 책망과 촉구는 백성들의 마음을 움직일 수는 있지만, 여전히 소극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따라서 그들의 마음을 적극적으로 움직이게 할 수 있는 또 다른 동력이 필요합니다. 하나님은 선지자들을 통해 그것도 제시해 주셨습니다. 그것이 무엇이었을까요? 그것은 바로 ‘약속’입니다.

      하나님은 선지자 학개를 통해 친히 함께하실 것을 약속하시면서, ‘내가 함께하니 두려워하지 말고 굳세게 일하라’고 말씀해 주셨습니다(학 1:1-13;2:4-5). 또 자신이 택하신 백성들에게 축복하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학 2:19-23). 그런가 하면 '스가랴' 선지자를 통해서도 이렇게 약속해 주셨습니다. “내가 불쌍히 여기므로 (그들이, 너희가) 예루살렘에 돌아왔은즉 내 집이 그 가운데 건축되리니 예루살렘 위에 먹줄이 쳐지리라...나의 성읍들이 넘치도록 다시 풍부할 것이라 여호와가 다시 시온을 위로하며 다시 예루살렘을 택하리라”(슥 1:16-17). 택하신 백성들과 함께하신다는 약속, 그들을 불쌍히 여기시고 다시 위로하시겠다는 약속, 성전이 건축되고 성읍이 다시 넘치도록 풍부하게 될 것이라는 약속. 그 약속은 유다 백성들의 마음을 기대와 흥분 속에서 뛰놀게 했습니다. 성전이 다시 건축되고 성읍도 넘치도록 풍부하게 될 것이라는 소망은, 그들의 팔뚝에 힘을 주고 소매를 걷어붙이게 했습니다. “이에 스알디엘의 아들 스룹바벨과 요사닥의 아들 예수아가 일어나 예루살렘에 있던 하나님의 성전을 다시 건축하기 시작하매”(2절).

      그들의 모습을 보면서 하나님의 약속이 얼마나 중요한지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교회를 세울 때 책망과 촉구 앞에서 의무감으로 임하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물론 그러한 마음은 좋은 것입니다. 하지만 그러한 마음만 있다면 교회를 세우는 우리의 노력은 오래가지 못합니다. 그 마음을 지속시키고 더욱 적극적으로 활활 타오르게 할 수 있는 동력이 필요한데, 그것이 바로 유다 백성들에게 하셨던 것과 같은 약속입니다. 교회를 세울 때 하나님이 함께하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까? 함께하시는 하나님이 친히 교회를 세우실 뿐만 아니라 우리의 모든 필요를 풍부하게 채우시겠다고 약속해 주셨습니까? 우리는 그것을 다시 한번 더 하나님께 여쭈어야 합니다. 만약 그 약속이 틀림없다면 우리 앞에 거칠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그 약속을 믿고, 두려워하지 말고 굳세게 일하기만 하면 됩니다.

      유다 백성들이 예언의 말씀으로 힘을 얻고 공사를 재개하였을 때 어떤 일이 일어났습니까? 유프라테스강 서쪽 지역을 관할하는 총독 닷드내와 그의 일행이 찾아와서 장로들에게 이렇게 따져 물었습니다(3-4절). “누가 너희에게 명령하여 이 성전을 건축하고 이 성곽을 마치게 하였느냐?”, “건축하는 자들의 이름이 무엇이냐?” 하지만 함께하시는 하나님이 유다의 장로들을 돌보셨기 때문에 그들도 능히 공사를 막을 수 없었습니다(5절). 고레스 칙령을 검토한 다리오 왕에 의해 성전 건축을 신속히 행하라는 명령이 내려졌고, 마침내 다리오 왕 6년에 성전은 완공되었습니다(6:12-15).

    4. 초심으로 돌아가자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은 공평합니다. 남녀노소, 빈부귀천을 막론하고 그 시간을 올바르게 사용하면 결과는 긍정적으로 돌아옵니다. 그 시간을 자신의 사리사욕을 위해 사용하면 부정적인 결과를 맞이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 앞에 주어진 상황은 그 시간 속에서 흘러갑니다. 그 상황이 우리가 볼 때 부정적이든 긍정적이든 그와 관계없이 속절없이 흘러갑니다. 그런 모든 상황 속에서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함께하시는 하나님과 그분의 약속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만약 그분이 함께하신다면, 그래서 그분의 약속이 여전히 유효하다면, 그 상황이 최악이라고 할지라도 하나님 앞에서 여전히 긍정적인 시간입니다. 자신들에게 주어진 상황을 부정적으로 보고 자기 합리화에 빠졌던 유다 백성들은, 그 긴 시간 동안 올바르지 못한 곳에 사용해 버렸습니다. 그 결과 성전은 방치되었고 자신들의 생활도 궁핍에서 벗어나지 못하였습니다.

      유다 백성들은 맨 처음 대적들의 방해가 주어졌을 때 단호하게 대처하였습니다(4:3). 하지만 계속되는 방해 공작에 그들의 손은 약해졌고, 그런 시간이 계속되자 그들의 관심도 점차 성전보다 자신들의 집으로 옮겨졌습니다. 한 번 맞은 이슬은 옷을 젖게 할 수 없지만, 이슬비를 계속 맞게 되면 결국 옷이 흠뻑 젖게 됩니다. 그들은 결국 이런 지경에까지 이르렀던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유다 백성들의 이런 모습을 상기시켜 주신 이유가 무엇일까요? ‘초심을 잃지 말라’는 것입니다. 유다 백성들의 초심은 오직 여호와 하나님을 향한 믿음으로 불붙어 있었고, 그 믿음을 성전 건축에 모두 쏟아부었습니다. 그와 같은 초심을 잃지 않는다면 우리 앞에 놓인 상황이 아무리 힘들고 어렵더라도 그 모든 상황 속에서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은 긍정적인 방향으로 돌아갈 것입니다. 그 모습이 바로 우리 모두의 것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바랍니다.






    에스라 6장 요약

    다라오왕이 고레스의 조서를 발견하였고 조서를 강 서편의 지도자들에게 내립니다.이는 성전건축을 방해하지 말라고 조서를 내린것이며 다라오왕 6년째에 성전을 완성하였고 유월절을 지켰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6장은 다리오 왕이 유프라테스강 서쪽을 관리하던 총독 닷드내가 보낸 보고서의 요청에 따라 두루마리(고레스 칙령)를 찾아 확인하는 내용부터 소개되고 있다. 거기에는 성전 재건과 재정 지원을 명하는 내용이 들어 있었다. 내용을 확인한 다리오 왕은, 그에 근거해서 중단된 성전의 재건과 함께 공사에 필요한 모든 경비까지 지원해 줄 것을 총독에게 명하였다. 그 명에 따라 성전 재건 공사가 다시 시작되었고, 마침내 다리오 왕 6년(기원전 516년)에 완공되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즐거이 성전 봉헌식을 행하였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성전 봉헌식을 행한 한 달 후에 유월절과 무교절을 지켰다. 바벨론에서 예루살렘으로 돌아온 일은 제2의 출애굽과 비견할 만한 사건이었기 때문에, 귀환 후 처음으로 지킨 유월절은 남다른 의미가 있었다. 유월절 다음날부터 시작되는 무교절도 일주일 내내 즐거움으로 지켰다.

    I. 본문 이해와 질문

    1. 고레스 칙령의 내용(1-5절)

    [본문] 1 이에 다리오 왕이 조서를 내려 문서 창고 곧 바벨론의 보물을 쌓아둔 보물 전각에서 조사하게 하여 2 메대도 악메다 궁성에서 한 두루마리를 찾았으니 거기에 기록하였으되 3 고레스 왕 원년에 조서를 내려 이르기를 예루살렘에 있는 하나님의 성전에 대하여 이르노니 이 성전 곧 제사 드리는 처소를 건축하되 지대를 견고히 쌓고 그 성전의 높이는 육십 규빗으로, 너비도 육십 규빗으로 하고 4 큰 돌 세 켜에 새 나무 한 켜를 놓으라 그 경비는 다 왕실에서 내리라 5 또 느부갓네살이 예루살렘 성전에서 탈취하여 바벨론으로 옮겼던 하나님의 성전 금, 은 그릇들을 돌려보내어 예루살렘 성전에 가져다가 하나님의 성전 안 각기 제자리에 둘지니라 하였더라

    [이해] 총독 닷드내가 보낸 글(보고서)을 받은 다리오 왕은, 그 내막을 확인하기 위해 조서를 내려 문서 창고(바벨론의 보물을 쌓아둔 보물 전각)에서 조사하게 하였고, 메대도 악메다 궁성에서 한 두루마리를 찾았다(1-2절). '조서'는 '임금의 명령을 (일반에게 알릴 목적으로) 적은 문서'라는 뜻이다. 그러므로 문자로 보내진 일련의 공식 문서라는 의미가 강하다. 그렇지만 원래 이 단어는 아람어에서 '명령'(order), '포고령'(decree)을 의미하는 명사이다. 그래서 대부분의 영역본에서도 '(행정) 명령'(NIV, NLT, NJB, 'order')이나 왕실의 공식적인 '포고령'(KJV, NASB, ASV, 'decree')으로 번역하고 있다. 또 한글 번역본인 표준새번역성경과 공동번역성경에서도 각각 '명령', '어명'으로 번역하고 있다. '메데도 악메다 궁성'은 메데 지방(province of Media)의 엑바타나 궁(palace of Ecbatana)을 말한다. '메데'는 이란 북서부에 자리했던 고대 국가로, 기원전 11세기에 역사에 출현하여 기원전 8세기경에 왕국을 건립하였지만, 기원전 6세기에 페르시아의 키루스 2세(성경에서는 바사 왕 고레스로 소개)에 의해 멸망하였다. 수도는 금은보화가 가득한 엑바타나(지금의 Hamadan)였다. 그 종족은 페르시아인과 더불어 아리아인의 후예들로, 전성기 때는 영토가 흑해 남부 연안에서 오늘의 이란과 아프가니스탄에 이르기까지 광활한 지역을 아우르는 대제국이었다. 바사 제국의 왕이 고레스 칙령을 찾기 위해 명령을 내린 것과 메데 지방의 악메다 궁까지 샅샅이 뒤지게 한 것은, 당시 상황에서 매우 이례적인 조치였다. 사실 고대 근동에서 통치 사료를 찾아보는 일은 국가 중대사와 관련된 일에만 가능하였다. 게다가 127도(province)로 이루어진 거대 제국 페르시아의 서쪽 변방에 위치한 팔레스타인에서 발생한 종교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그렇게 했다는 것은 더욱더 유례를 찾기 어렵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일이 생긴 것은, 그 일의 배후에 성전을 재건하시고자 하신, 역사의 주관자이신 하나님의 섭리가 들어 있었음을 엿보게 한다.

      악메다 궁에서 발견한 '두루마리'는 동물 가죽으로 만든 '양피지'를 말하는데, 고레스 왕 원년에 내린 조서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기록되어 있었다. (1) 성전 건축에 대한 명령(3a절), (2) 성전 규모와 건축 방식(3b-4a절), (3) 경비 출처(4b절), (4) 느부갓네살이 탈취한 성전 그릇들의 반환(5절). 이 중에 (2)와 (3)은 앞선 1장에서 고레스 왕의 조서를 소개할 때 들어 있지 않았던 내용이다.

      고레스 왕이 정한 성전의 규모는 높이와 너비가 각각 60규빗이고, 길이는 정하고 있지 않다. 그에 비해 솔로몬 성전은 높이가 30규빗, 너비가 20규빗, 길이가 60규빗이었다(왕상 6:2). 따라서 다시 지어질 성전은 솔로몬 성전보다 높이는 2배, 너비는 3배나 컸다. 조서에 기록된 성전의 규모가 솔로몬 성전보다 더 큰 이유에 대해 다음과 같은 견해들이 있다. 첫째, 포로기 이후의 규빗이 모세 시대의 규빗보다 절대 길이가 더 작았다는 것이다. 그래서 고레스는 모세 때의 규빗에 따라 지어진 솔로몬 성전과 동일한 규모로 짓기 위해 페르시아 규빗을 더 높게 잡았다는 것이다. 둘째, 고레스가 솔로몬 성전의 성소와 지성소 외에도 성전 뜰을 포함한 길이로 지시했다는 견해이다. 셋째, 고레스가 유다 백성들의 환심을 사기 위해 이전보다 더욱 크게 짓도록 명령하였지만, 그에 따른 후속 조치가 따르지 않았고 유다 백성들의 역량도 솔로몬 당대에 미치지 못하여 오히려 솔로몬 성전보다 더 작은 성전을 지었다는 견해이다. 앞선 두 견해는 재건된 성전이 솔로몬 성전과 규모가 같았다면 타당할 수 있다. 하지만 실제 재건된 2차 성전은 규모 면에서 솔로몬 성전보다 작았을 것으로 추정되기 때문에(3:12;학 2;3), 두 견해는 수용하기 어렵다. 고레스가 유다의 성전 재건뿐만 아니라 자신이 정복한 여러 나라에 대해서도 종교적 관용을 베풀어 민심을 사려 하였다는 점과 고레스 당대에 성전 재건이 중단되기도 하였다는 점을 고려해 볼 때, 세 번째 견해가 비교적 타당성이 있어 보인다. 그렇지만 세 번째 견해를 수용하되, 고레스가 하나님을 세상의 모든 나라를 자신에게 주신 분으로 또 참된 신으로 고백하였다는 사실에 비추어볼 때(1:2), 그가 유다 백성들의 환심보다 여호와를 기쁘게 해 드리기 위해 이전보다 더 크게 재건하도록 명령하였다고 보는 편이 더 타당해 보인다. 높이와 너비를 각각 60규빗으로 짓되, 건축 방식은 '큰 돌 세 켜에 새 나무 한 켜를 놓으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이는 솔로몬 성전 안뜰의 건축 방식과 일치하고 있다(왕상 6:36). '켜'는 학자들에 따라 '벽'(wall), '줄'(row), '겹'(layer), '층'(floor) 등과 같이 다양하게 해석되고 있다. 표준새번역성경은 '벽'으로, 공동번역성경은 '겹'으로, KJV는 '줄'로 제각기 다르게 번역하고 있다. 70인역(LXX)에 의하면, 이 성전은 4층으로 되어 있었는데, 3층까지는 돌로 마지막 층은 나무로 되어 있었다고 한다.

      성전 건축에 소요되는 경비는 '다 왕실에서 내리라'는 말은, 국고에서 비용을 대주라는 뜻이다. 개역개정성경에 번역된 '다'(all)라는 부사어는 원문에 없는 단어이다. 다리오 왕은 그 내용을 왕실에서 직접 주는 것이 아니라, 유프라테스강 건너편에서 거둔 세금 가운데 일부를 그들에게 끊임없이 주는 것으로 이해하였다(8절). 하지만 이 같은 경비 지원 약속도 제대로 지켜지지 않았고, 그 가운데 상당 부분을 백성들이 자원하여 드린 재물로 충당하였던 것으로 추측된다(2:68-69).

      고레스 칙령의 마지막 부분은 성전 그릇들의 반환을 명령하고 있다(5절). 성전에서 사용될 금그릇과 은그릇은 이전에 느부갓네살 왕이 예루살렘 성전에서 탈취한 후에 바벨론으로 옮겼던 것으로, 고레스는 그것들을 돌려보내 예루살렘 성전 안의 제자리에 둘 것을 명령하였다. 왕은 이 임무를 세스바살(스룹바벨)에게 맡겼다(1:8-11).

    [질문] 다리오 왕이 고레스 칙령을 알지 못하였고, 또 그것을 찾기 위해 제국 내에 있는 모든 궁을 뒤지게 하였다는 점을 통해 알 수 있는 사실은 무엇인가?

    ​유다 백성들이 바벨론에서 예루살렘으로 귀환하여 성전을 재건하였을 때 대적들의 지속적인 방해가 있었다. 또 그것이 한 요인이 되어 성전 공사가 중단되기도 하였다. 그렇지만 유다 백성들은 그 과정에서 고레스 왕이 내린 칙령을 적극적으로 밝히지 않았던 것으로 추측된다. 만약 그들이 그것을 적극적으로 밝혔다면 대적들의 방해도 없었을 것이고, 또 중단된 성전 건축을 재개하였을 때에도 총독 닷드내 일행이 와서 그 경위를 따져 묻지 않았을 것이다.

      두 번째로 알 수 있는 사실은 다리오 왕의 정황이다. 그는 선왕(先王)인 고레스가 펼쳤던 정책들을 꼼꼼히 들여다보지 못하였던 것 같다. 이는 그가 그 부분에 대하여 관심이 없었다기보다 그것을 챙길 만한 여유가 없었던 데에 기인한 것으로 여겨진다. 다리오 왕(Darius 1세)은 캄비세스 2세(기원전 529-523년)의 최측근 장교이자 페르시아의 태수였던 휘스타스페스의 아들로서 고레스 왕가 출신이다. 고레스의 아들인 캄비세스 2세가 에티오피아 원정길에 올랐을 때, 조로아스터교의 사제인 가우마타가 반란을 일으켜 스스로 왕이 되었다. 그러자 페르시아 제국에 억눌려 있던 피정복국의 포로들이 사방에서 조직적으로 봉기하였다. 수년 동안 계속되었던 반란은 메데, 엘람, 파르사(Parsa) 등지에서 시작되어 아르메니아와 이란 전역으로 번졌다. 심지어 서쪽으로 이집트와 소아시아까지 반란이 일어났다. 이때 다리오가 일어나서 가우마타를 제거하고 왕위에 올랐다. 왕위에 오른 그는 도화선처럼 일어나는 반란을 효과적으로 제압하였다. 다리오 왕 2년까지 중단되었던 성전 공사가 바로 그 시점에서 재개되었기 때문에, 반란 진압으로 인해 선왕들의 정책들을 들여다볼 겨를이 없었던 그로서는 통독 닷드내가 보낸 보고서 내용이 낯설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와 동시에 팔레스타인 지역에서도 반란이 일어난 것이 아닌가 하고 염려하였을 수도 있다. 그러므로 그에게 고레스 칙령이 담긴 두루마리를 찾는 일은 매우 중요한 일이었다. 한편 모든 반란을 진압한 다리오 왕은 그 여세를 몰아 주변 국가들을 정복하기 시작하였고, 그 결과 페르시아의 영토는 최대로 확장되었다.

    2. 다리오 조서와 그 내용(6-12절)

    [본문] 6 이제 유브라데 강 건너편 총독 닷드내와 스달보스내와 너희 동관 유브라데 강 건너편 아바삭 사람들은 그곳을 멀리하여 7 하나님의 성전 공사를 막지 말고 유다 총독과 장로들이 하나님의 이 성전을 제자리에 건축하게 하라 8 내가 또 조서를 내려서 하나님의 이 성전을 건축함에 대하여 너희가 유다 사람의 장로들에게 행할 것을 알리노니 왕의 재산 곧 유브라데 강 건너편에서 거둔 세금 중에서 그 경비를 이 사람들에게 끊임없이 주어 그들로 멈추지 않게 하라 9 또 그들이 필요로 하는 것 곧 하늘의 하나님께 드릴 번제의 수송아지와 숫양과 어린 양과 또 밀과 소금과 포도주와 기름을 예루살렘 제사장의 요구대로 어김없이 날마다 주어 10 그들이 하늘의 하나님께 향기로운 제물을 드려 왕과 왕자들의 생명을 위하여 기도하게 하라 11 내가 또 명령을 내리노니 누구를 막론하고 이 명령을 변조하면 그의 집에서 들보를 빼내고 그를 그 위에 매어달게 하고 그의 집은 이로 말미암아 거름더미가 되게 하라 12 만일 왕들이나 백성이 이 명령을 변조하고 손을 들어 예루살렘 하나님의 성전을 헐진대 그곳에 이름을 두신 하나님이 그들을 멸하시기를 원하노라 나 다리오가 조서를 내렸노니 신속히 행할지어다 하였더라

    [이해] 고레스 칙령을 확인한 다리오 왕은 유프라테스강 건너편 총독 닷드내과 스달보스내와 동료 관리들에게 명령을 내려, 그곳을 멀리하여 하나님의 성전 공사를 막지 말고 유다 총독과 장로들이 성전을 제자리에 건축하도록 명하였다(6-7절). '그곳을 멀리하라'는 말은 '그곳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으라'는 뜻이다. 표면적으로 지역적인 접근을 금지하고 있지만, 이면에는 관계적인 접근 금지가 강조되어 있다. 즉 다리오 왕은 페르시아 관리들이 성전을 재건하는 일에 관여하지 못하게 하였을 뿐만 아니라 그 일을 유다 총독과 장로들이 책임자가 되어 유다 백성들 스스로 처리하도록 하였다는 것이다. 이러한 이면적인 의미 속에는 '어떤 사람이나 어떤 것에 대한 주장을 포기하라'는 의미(고소 거부, 기각)의 전문적이고 법적인 판결이 들어 있다.

      성전 공사를 막지 말고 건축하도록 명한 다리오 왕은, 계속해서 총독에게 다음과 같이 지원할 것을 명하였다. (1) 공사가 중단되지 않도록 경비를 끊임없이 지원하되, 그 경비는 왕의 재산 즉 유프라테스강 건너편에서 거둔 세금으로 충당하라(8절). (2) 제사에 필요한 것들도 제사장의 요구대로 어김없이 매일 제공하고, 그들이 하나님께 제물을 드려 왕자 왕자들의 생명을 위하여 기도하게 하라. 제공할 것들은 수송아지, 숫양, 어린 양, 밀, 소금, 포도주, 기름 등이다(9-10절). '경비를 끊임없이 주다'라는 구절에서 '끊임없이'는 고대 페르시아어에서 차용된 단어인데, '철저하게'라는 의미가 강하다. 그래서 표준새번역성경에서는 '어김없이'로 번역하고 있다. 번제물로 드릴 짐승 중에서 '수송아지'는 속죄제 등과 같이 특별한 때에 드려지는 제물이고(레 9:2-3), '숫양'은 속건제를 드릴 때의 제물이다(레 5:15;6:6). '어린 양'은 상번제의 제물인데, 아침저녁으로 각기 한 마리씩 드려지는 등 가장 많이 소용되던 짐승이다. 이는 당시 중근동에서 말이나 심지어 돼지 등으로 제물을 삼던 민족들이 있었던 것을 감안할 때, 다리오 왕이 이스라엘 제사법의 세세한 부분까지 고려하였다는 증거가 된다. '밀'은 소제의 예물을 드릴 때 소용되고(레 2:1-3), 때로는 속죄제의 제물로 소용되기도 하였다(레 5:11-13). '소금'은 소제를 드릴 때 그 제물 위에 치는 용도로 사용되고(레 2;13), 언약을 맺을 때 사용하기도 하였다(레 2:13;민 18:19;대하 13:5). '포도주'는 다른 제사에 수반된 전제(the drinking offering)에 소용되었다(출 29:40;레 23;13). '기름'은 상번제, 소제, 그리고 제사장의 위임식에 소용되었다(출 29;21). 이런 항목에 대한 지원은 다리오 왕이 조서를 작성할 때 유대인 서기관의 도움을 받았던 것으로 추측된다. 다리오 왕은 이러한 지원의 대가로 자신과 자신의 아들들의 생명을 위하여 기도를 부탁하였다. 이와 같이 왕실의 안녕을 위하여 왕이 자기를 섬기는 신과 다른 신을 섬기는 사람에게 기도를 요청하는 것은 고대 중근동의 보편적인 관행이었다.

      조서 말미에는 왕의 명령을 변조한 자에 대한 경고와 저주, 그리고 신속한 시행에 대한 명령이 들어 있다. '변조'는 조서의 내용을 바꾸거나 위반하는 것을 의미한다. 여기에는 명령에 대한 불이행, 명령의 부분적인 이행, 명령의 왜곡된 이행 등이 모두 포함된다. '경고'는 변조한 자들의 집 들보를 빼내고 그 위에 그를 매달게 하고, 그 결과 그의 집은 거름더미가 되게 하라는 것이었다(11절). '거름더미'는 들보를 빼냄으로써 나타날 수밖에 없는 필연적인 결과로, 불명예와 함께 엄한 형벌이 주어진다는 의미가 들어 있다. '저주'는 왕의 명령을 변조하거나 성전을 허는(파괴하는) 자들을 하나님이 멸하시기를 바란다는 것이었다(12절). 여기에서 왕은 하나님을 '그곳에 이름을 두신' 분으로 소개하고 있는데, 이는 중앙 성소의 지정에 대한 하나님의 명령이 언급된 신명기 12장 21절의 내용과 일치한다. 따라서 이 부분에서도 다리오 왕이 그 사실에 대해 잘 알고 있는 유대인의 도움을 받았을 것이라는 사실을 짐작해 볼 수 있다. 왕은 이 모든 일을 신속하게 시행하라고 명령하였는데, '신속하게'는 문자적으로 '정확하게', '완전히'를 의미한다. 여기서는 '매우 부지런히'(RSV, NASB, with all diligence), '부지런히'(NIV, with diligence), '신속하게'(GB, KJV, with speed)의 의미도 담겨 있다. 표준새번역성경은 '지체 없이'로 번역하여 시간의 속도를 강도하고 있고, 공동번역성경은 원문에 충실하게 '어김없이'로 번역하여 그 일의 성격(정확성, 완전성)을 강조하고 있다.

    ​[질문] 다리오 왕이 고레스 칙령을 발견하고 그 내용을 확인한 후에 중단되었던 성전 공사를 재개시킨 과정을 보면서, 우리가 교훈으로 삼을 점은 무엇인가?

    첫째, 진리와 거짓, 선과 악은 반드시 만천하에 드러나게 된다는 점이다. 성전 재건 공사가 중단된 것은 두 가지가 주요 원인이 되었다. 대적들의 방해가 첫 번째이고, 그로 인해 손이 약해진 유다 백성의 자기 합리화와 잘못된 우선순위가 두 번째이다. 그 가운데 대적들의 방해는 위협과 돈으로 관리들을 매수하는 술수에 기대고 있었다. 이는 명백한 거짓이고 악이다. 거짓과 악은 성전 공사를 재개하는 과정에서 서서히 드러났다. 총독의 입장에서 볼 때, 자신이 통치하고 있는 지역에서 중단되었던 대규모의 공사가 재개된 사건은 상당히 민감한 사안이 아닐 수 없다. 그 경위를 조사하여 그에 상응하는 조치를 내리는 것이 총독의 임무이다. 그는 사건의 경위를 조사하는 과정에서 장로들의 말을 들었고, 그 말 속에 들어 있는 '고레스 왕의 명령'을 간과할 수 없었다. 총독은 그것을 확인하기 위해 왕에게 보고서를 보냈고, 다리오는 발견한 두루마리를 통해 장로들의 말이 사실인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둘째, 감추어진 것들을 반드시 드러내시는 분이 하나님이시라는 점이다. 하나님은 유다 백성들과 함께하실 것과 성전이 다시 세워지게 될 것을 약속하셨다(학 1:13;슥 1:16-17). 하나님은 그 약속을 지키시기 위해 총독 닷드내로 하여금 장로들을 찾아와 질문하고 그들의 대답을 듣게 하셨다. 또 총독의 보고서를 받은 다리오 왕이 제국의 모든 궁을 뒤져 두루마리를 찾고, 그 내용을 확인하도록 인도하셨다. 이 모든 과정은 하나님의 섭리에 따른 것이었다(마 10;29). 그래서 욥은 그분을 이렇게 소개하기도 하였다. "어두운 가운데에서 은밀한 것을 드러내시며 죽음의 그늘을 광명한 데로 나오게 하시며"(욥 12:22).

      셋째, 따라서 우리가 진리와 선에 머물러 있다면, 현재 처하고 있는 상황이 아무리 힘들고 괴롭더라도 낙담이나 절망이 아닌 기쁨과 감사, 그리고 소망을 가질 수 있다는 점이다(살전 5:16-18). 진리와 선에 머문다는 것은 하나님 안에 거하는 삶을 의미한다(요 15:1-4). 그분과 동행하는 것을 말한다. 우리가 이렇게 할 수 있는 이유는, 하나님이 진리(선)와 거짓(악)을 반드시 드러내실 뿐만 아니라, 그분 안에 동거하고 동행하는 사람들에게 가장 극적이고 합당한 때에 가장 좋은 것을 주시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다리오 왕이 내린 조서를 통해 그것을 증명해 보이셨다.

    3. 성전 완공과 봉헌식(13-18절)

    [본문] 13 다리오 왕의 조서가 내리매 유브라데 강 건너편 총독 닷드내와 스달보스내와 그들의 동관들이 신속히 준행하니라 14 유다 사람의 장로들이 선지자 학개와 잇도의 손자 스가랴의 권면을 따랐으므로 성전 건축하는 일이 형통한지라 이스라엘 하나님의 명령과 바사 왕 고레스와 다리오와 아닥사스다의 조서를 따라 성전을 건축하며 일을 끝내되 15 다리오 왕 제육년 아달월 삼일에 성전 일을 끝내니라 16 이스라엘 자손과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과 기타 사로잡혔던 자의 자손이 즐거이 하나님의 성전 봉헌식을 행하니 17 하나님의 성전 봉헌식을 행할 때에 수소 백 마리와 숫양 이백 마리와 어린 양 사백 마리를 드리고 또 이스라엘 지파의 수를 따라 숫염소 열두 마리로 이스라엘 전체를 위하여 속죄제를 드리고 18 제사장을 그 분반대로, 레위 사람을 그 순차대로 세워 예루살렘에서 하나님을 섬기게 하되 모세의 책에 기록된 대로 하게 하니라

    [이해] 성전을 재건하고 그들의 모든 필요를 도우라는 다리오 왕의 조서가 내려지자, 유프라테스강 건너편 총독 일행은 그 조서에 적힌 내용대로 신속하게(철저하게) 이행하였다(13절). 유다 장로들도 선지자인 학개와 스가랴의 권면을 따랐기 때문에, 성전 건축하는 일이 형통하였다(14절). 그에 따라 마침내 다리오 왕 제6년 아달월 3일에 성전이 완공되었다(15절). 유다의 장로들이 선지자들의 권면을 따랐다는 것은, 그들을 비롯한 모든 백성이 이전처럼 다른 곳을 기웃거리지 않고 선지자들의 격려를 받아 성전 건축 일에 전념하였다는 사실을 가리킨다. 성전 건축 일과 마무리는, 그 모든 것이 1차적으로는 하나님의 명령, 2차적으로는 고레스와 다리오와 아닥사스다 왕의 조서에 따라 이루어졌다. 이는 성전 건축이 역사의 주관자이신 하나님에 의해 시작되었고, 그분이 사용하신 고레스와 다리오와 아닥사스다 왕의 조서에 따라 이루어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성경에는 성전 재건에 대한 하나님의 직접적인 명령이 발견되지 않지만, 저자인 에스라는 이사야 선지자의 고레스에 대한 예언(사 44;28), 고레스의 마음을 감동시키신 하나님의 강권적인 개입(1:1-2), 선지자들(학개와 스가랴)을 통한 성전 건축에 대한 예언 등을 하나님의 명령으로 간주하였던 것으로 여겨진다. 한편 여기에서 '아닥사스다 왕'(기원전 464-424년)은, 다리오 왕(기원전 522-485) 당대에 이루어진 성전 건축과 아무런 관련이 없다. 그는 이 사건보다 훨씬 후대(최소 64년 이상)의 인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본서 기자가 그를 언급한 이유는, 여기에서 얻었던 동일한 승리가 그 이후 에스라와 느헤미야 시대에도 있었다는 사실을 말하기 위해서, 즉 아닥사스다 왕에게 권한을 위임받은 느헤미야가 성벽을 재건하게 될 것을 우리로 하여금 바라보게 하기 위해서였던 것으로 여겨진다. 성전 공사가 형통하게 이루어졌다는 것은, 그 기간 동안 그토록 집요하였던 대적들의 방해도 없었다는 것을 암시해 준다.

      성전을 완공한 때는 다리오 왕 6년(기원전 516년) 아달월(히브리 월력으로 12월, 현대 월력으로는 3월경) 3일이다. 그러므로 2차 성전은 1차 성전이 파괴된 때(기원전 586년, 왕하 25:8-17;대하 36:19)로부터 만 70년 후에 재건된 것이다. 또 다리오 왕 2년에 공사가 중단되었기 때문에, 만 4년에 걸쳐 완공된 것이다. 앞서 성전 지대를 놓고 중단되기까지의 기간이 얼마나 소요되었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1년 미만으로 추정된다. 그렇다면 성전 재건에 소요된 기간은 총 5년 미만이라 할 수 있다. 솔로몬 성전은 공사 기간이 7년이었다(왕상 6:38). 그런가 하면 성전 재건을 위하여 귀환한 백성들은 5만 명도 채 되지 않았다(회중 42,360명, 종 7,337명, 노래하는 자 200명, 2:64-65). 그에 비해 솔로몬 성전을 건축할 때는 역군 3만 명, 짐꾼 7만 명, 석공 8만 명에 이르렀다(왕상 5:13-16). 솔로몬 성전을 지을 때보다 인력이 적은데도 불구하고 공사 기간이 더 짧았다는 사실은, 역으로 완공된 2차 성전의 규모가 솔로몬 성전보다 작았고, 또 완성도 면에서도 상대적으로 조잡하였을 것이라는 사실을 쉽게 짐작해 볼 수 있다.

      성전이 완공된 후에, 이스라엘 자손들은 하나님의 성전 봉헌식을 즐겁게 행하였다(16절). 맨 처음 나오는 '이스라엘 자손과'에서 '과'는 원문에 없는 조사이므로 생략되어야 맞다. '이스라엘 자손'은 그 뒤에 나오는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과 사로잡혔던 자의 자손들'과 동격이다. 그 자손들을 '유다의 자손'이라 하지 않고 '이스라엘의 자손'으로 적은 이유는, 완공된 성전이 유다와 베냐민 두 지파만의 성전이 아니라 전체 이스라엘의 성전이었기 때문이다. 비록 이 두 지파 외에 다른 열 지파는 성전 공사에 참여하지 않았지만(참여하였더라도 소수였겠지만), 하나님의 언약은 열두 지파와 맺어졌기 때문에(출 19:1-6;수 4;1-4;왕상 18:31), 여기에서는 특별히 '이스라엘의 자손'으로 사용하였다. '봉헌식'에 해당하는 아람어 '하누카'는 '헌신하다'는 뜻의 '하나크'에서 파생된 단어이다. 시리아의 안티오쿠스 에피파네스가 더럽힌 성전을 이스라엘 백성들이 다시 청결하게 한 후에 성전 봉헌식을 다시 하였는데, 이때부터 '하누카'는 이것을 기념한 축제의 이름(수전절, 요 10;22)이 되었다.

      성전 봉헌식을 행할 때, 수소 100마리, 숫양 200마리, 어린 양 400마리를 드렸고, 또 이스라엘 지파의 수에 따라 숫염소 12마리로 이스라엘 전체를 위하여 속죄제를 드렸다(17절). 솔로몬 성전을 봉헌할 때에는 화목제물로 소 22,000마리, 양 120,000마리를 드렸다(왕상 8:63;대하 7:5). 따라서 2차 성전을 봉헌할 때 드렸던 제물의 수는 1차 성전 때와 비교할 때 1대 200의 비율로 매우 초라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렇지만 인구수로 대조하면 1인당 제물의 수는 얼추 비슷한 비율이 나온다. 다윗이 인구를 조사하였을 때, 칼을 빼는 담대한 자만 북이스라엘과 남유다를 모두 합해 130만 명이나 되었다(삼하 24:9). 그에 비해 귀환한 백성들은 종들까지 합하여 5만 명도 채 되지 않았다(2:64-65). 따라서 양적 면에서는 2차 성전을 봉헌할 때 드려진 제물의 수는 1차 때와 비교할 때 매우 초라하였지만, 질적인 면에서는 대등한 수준을 갖추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속죄제'로 드린 숫염소 12마리는 이스라엘 전체를 위한 것이었다. 이번에도 그것은 '유다만'으로 한정하지 않고 '이스라엘 전체'를 포함하고 있었다. '속죄제'는 대속죄일에 드려지던 '속죄제'와 구별되는 것으로(레 16장), 여기에서는 성전을 봉헌하기 이전에 죄 사함을 받는 일반적인 절차로서의 속죄제를 말한다(민 7장).

      18절은 새 성전을 운영할 사람들의 조직과 운영 방안이 소개하고 있다. 제사장을 그 분반대로, 레위 사람을 그 순차대로 세워 하나님을 섬기게 하되, 모세의 책에 기록된 대로 하게 하였다. 포로기 이전 왕정 시대에도 제사장들은 24분반으로 나누어 성전 봉사를 하였다(대상 24:1-19). 각 분반은 차례대로 돌아가면서 일주일씩 희생 제사의 직무를 담당하였다(왕하 11;9;대하 23:4;눅 1:5,8). 레위 사람들도 제사장처럼 24반차에 따라 성전 봉사를 하였던 것으로 여겨진다(대상 25:9-31). 이러한 순서는 다윗에 의해 조직되었다(대상 23-24장). 다윗은 대제사장 아론의 아들인 엘리아살과 이다말의 자손을 24반열로 나누어 안식일에서 다음 안식일까지 두 차례씩 성전에서 봉사하게 하였다. '모세의 책에 기록된 대로 하였다'는 것은, 제사장들과 레위인들이 각기 정해진 순서대로 성전에서 제사를 드릴 때 모세의 책, 즉 모세오경에 기록하고 있는 내용대로 준수하였다는 것을 의미한다(출 29장;레 8장;민 3:5 이하;8:5 이하).

    [질문] 본문 저자는 유다 백성들이 성전 봉헌식을 할 때 '즐거이' 행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 '즐거움'의 의미를 구체적으로 생각하고 나누어 보시오.

    첫째, 솔로몬 성전을 봉헌할 때와 비교할 때 그 즐거움은 그보다 결코 작지 않았을 것이라는 점이다. 물론 크고 화려한 성전에서 많은 제물을 드리면서 봉헌식이 이루어지면 즐거움이 더욱 클 수 있다. 그렇다고 그 점이 즐거움의 양과 질을 담보해 주지 못한다. 문제는 봉헌식에 참석한 사람들이 누구였는지, 그들이 어떤 마음으로 임하였는지가 더 중요하다. 성전은 이전보다 작고 드리는 제물도 비교가 안 될 정도로 적었지만, 그들은 자신들이 드릴 수 있는 최선의 것을 드렸다. 그래서 인구 1인당 제물의 비율은 1차 때나 별반 차이가 없었다. 그들은 2차 성전의 기초가 놓인 것을 보면서 여호와를 찬송하며 큰 소리로 즐거이 불렀고, 기쁨으로 큰 함성을 질렀다. 나이 많은 족장들은 심지어 대성통곡까지 하였다. 멀리까지 들릴 정도로 외치는 소리는 컸다(3:11-13). 그렇다면 완공된 성전을 봉헌할 때 그들이 질렀던 기쁨의 소리는 그 이상이었을 것이다.

      둘째, 감격으로 인하여 오히려 그 즐거움은 1차 성전 때보다 더욱 컸을 것이라는 점이다. 그들은 성전을 재건하기 위하여 바벨론의 모든 기득권을 버리고 4개월이나 예루살렘 여정에 올랐다. 성전 기초를 놓았지만 대적들의 집요하고 지속적인 방해가 있었고, 그로 인하여 도중에 공사가 중단되기도 하였다. 솔로몬 성전을 공사할 때와 비교할 때 일손도 턱없이 부족하였다. 또한, 그들의 신분은 여전히 식민지 포로였다. 그런 악조건 속에서 완공된 성전이었기 때문에 그 감격은 솔로몬 성전을 봉헌할 때와는 사뭇 달랐을 것이다. 그 감격이 이런 극적인 상황 속에서 주어졌기 때문에 그에 비례해서 즐거움의 질과 양도 더욱 커질 수밖에 없다. '고진감래'가 바로 그들에게 주어졌던 것이다.

    4. 첫 번째 유월절과 무교절(19-22절)

    [본문] 19 사로잡혔던 자의 자손이 첫째 달 십사일에 유월절을 지키되 20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이 일제히 몸을 정결하게 하여 다 정결하매 사로잡혔던 자들의 모든 자손과 자기 형제 제사장들과 자기를 위하여 유월절 양을 잡으니 21 사로잡혔다가 돌아온 이스라엘 자손과 자기 땅에 사는 이방 사람의 더러운 것으로부터 스스로를 구별한 모든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속하여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를 찾는 자들이 다 먹고 22 즐거움으로 이레 동안 무교절을 지켰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그들을 즐겁게 하시고 또 앗수르 왕의 마음을 그들에게로 돌려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신 하나님의 성전 건축하는 손을 힘 있게 하도록 하셨음이었더라

    [이해] 4:8~6:18은 아람어로 기록되어 있지만, 여기부터 다시 히브리어로 기록되고 있다. 전자가 성전 건축과 관련하여 주로 지방 장관과 왕이 문서를 교환하는 내용을 담고 있기 때문에 그 역사적 사실성과 생동감을 강조하기 위하여 아람어를 사용하였다면, 여기부터는 주제가 다시 종교적인 문제로 돌아왔기 때문에 원래 교훈을 받을 때의 언어인 히브리어로 기록한 것으로 여겨진다. 사로잡혔던 자의 자손들이 첫째 달 14일에 유월절을 지켰다(19절). '첫째 달'은 현재 월력에 따르면 4월이다. 그러므로 기원전 516년 3월에 완공된 성전 봉헌식을 행하고, 한 달 후인 동년 4월에 유월절을 지켰던 것이다.

      유월절을 지키기 위하여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은 일제히 몸을 정결하게 하였다. 정결하게 한 후에, 사로잡혔던 자들의 모든 자손과 동료 제사장들과 자신들이 먹기 위하여 유월절 양을 잡았다(20절). 그리고 사로잡혔다가 돌아온 이스라엘 자손들이 그것을 먹었고, 그 땅에 사는 이방인들로부터 부정을 탔다가 그런 부정을 떨어내고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를 찾는 자들도 그들과 함께 모두 유월절 양고기를 먹었다(21절). '유월절'은 애굽에서 탈출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 사건을 기념하기 위하여 지키는 절기이다(출 12:1-14,24-27;레 23:5-6;민 9:10-14). 따라서 성전 봉헌식 이후 처음으로 드려진 유월절은, 바벨론에서 예루살렘으로 돌아온 유다 백성들이 드렸다는 점에서 제2의 출애굽에 비견할 만한 의미가 있었다. 유월절에 양을 잡는 일은 원래 한 가정의 가장이 하였다(대하 30:17). 그렇지만 히스기야 왕 때 백성들의 부정으로 레위인들이 그들을 대신하여 잡게 한 이후부터(대하 30:16-17), 레위인들이 유월절 어린 양을 잡는 것이 하나의 관례가 되었던 것 같다(대하 35:10-12). 유월절 음식을 먹은 대상으로 두 부류의 사람들이 소개되고 있는데, 하나는 돌아온 이스라엘 자손들이고, 다른 하나는 그 땅에 사는 이방인들에게 부정을 탄 후에 그 부정을 떨어내고 하나님을 찾는 사람들이다. 후자는 다음과 같은 사람들이라는 견해가 있다. (1) 유다 자손과 함께 귀환한 북이스라엘의 열 지파 백성들, (2) 남쪽의 유다와 베냐민 지파에 속하지만 바벨론으로 끌려가지 않고 남아 있던 백성들, (3) 원래 이방 민족이었지만 유다 백성들이 귀환한 후에 개종한 사람들. 그 가운데 다음과 같은 이유로 세 번째 견해를 가장 타당성이 있는 것으로 받아들인다. 이스라엘 공동체는 기본적으로 이방인이 할례를 받고 개종하면 자신들과 같이 된 것으로 인정하였다(출 12:43-49). 옛 언약에서 육체에 새긴 '할례'는, 새 언약에서는 그리스도의 할례인 침례에 해당된다(골 2:11-12). 따라서 할례는 하나님을 찾는 마음(하나님을 향한 믿음)이 그 전제로 들어 있다.

      이스라엘 자손들은 유월절에 이어 무교절을 7일 동안 즐겁게 지켰다(22절). '무교절'은 유월절 다음날부터 7일 동안, 즉 첫째 달 15일부터 21일까지 유월절의 일부로 지켜졌다(출 12:15-20;레 23:6-8;민 28:17). 이때에는 누룩을 제거한 빵을 먹었는데, 이는 유월절 저녁에 빵에 누룩을 넣을 여유가 없을 만큼 신속하게 애굽을 탈출해야 하였던 상황을 기념하기 위해서이다(출 12;39;13:6-8;23:15). 가나안 땅으로 들어간 후 농사를 지어 거둔 첫 곡식단을 바치라고 하신 하나님의 명에 따라(레 23:10-14), 절기가 시작되는 안식일 첫날에 거두어들인 첫 보리 이삭을 하나님께 바쳤다. 그들이 무교절을 특별히 '즐거움으로' 지켰던 이유는 두 가지이다. 첫째는, 여호와 하나님이 그들을 즐겁게 하셨기 때문이다. 이는 그들이 즐거워한 근원(원천)이 바로 하나님께 있었다는 의미이다. 둘째는, 아시리아 왕의 마음을 그들에게로 돌려 하나님의 성전 건축하는 손을 힘 있게 하도록 하셨기 때문이다. 이는 하나님이 왕의 마음을 돌려서 대적들의 방해를 물리치시고, 성전 건축하는 그들의 손을 강하게 하여 무사히 완공할 수 있도록 도우셨기 때문에 즐거워하였다는 의미이다. 여기에서 바사의 왕이라 하지 않고 '아시리아 왕'이라고 기록한 것은, 페르시아 왕들이 아시리아와 바벨론 왕들의 후계자임을 자처하였기 때문이다(5:13;느 13:6).

    [질문] 유월절과 무교절을 지키는 유다 백성들의 모습(행위)에서 볼 수 있는 특징은 무엇이고, 그것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 절기를 지키기 위해 먼저 자신들의 몸을 정결하게 하였다는 것이다. 유월절은 애굽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끌어내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 위해 지키는 절기이다. 그러한 절기에 부정한 몸으로 참여하여 그 사건을 기념하거나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는 없다. 이는 신앙의 출발점이 정결에 있다는 점을 시사해 준다. 유다 백성들이 자신들의 몸을 정결하게 한 후 절기를 지켰던 것처럼, 우리도 신앙생활을 하기 위해서는 먼저 우리 자신부터 정결히 해야 한다. 만약 아직도 구원을 받지 않았다면 그 문제부터 해결해야 한다. 구원은 죄로부터 해방을 의미하기 때문에, 구원을 받지 않았다는 것은 여전히 죄 가운데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죄를 범한 사람은 하나님의 영광에 이를 수 없다(롬 3;23). 만약 이미 구원을 받았다면 구원받은 자, 즉 하나님의 자녀라는 신분(요 1;12)에 맞게 자기 자신을 거룩하게 해야 한다. 우리가 거룩해야 하는 이유는 그분이 거룩하시기 때문이다(벧전 1:16). 이것 없이는 우리가 하나님께 나아갈 수 없고, 그분이 하신 일을 기념하거나 영광을 돌릴 수도 없다.

      둘째, 그들은 절기를 즐겁게 지켰다는 것이다. 그들이 절기를 즐겁게 지킬 수 있는 근원은 하나님께 있었고, 그 구체적인 이유는 그분이 아시리아 왕의 마음을 돌려서 성전을 완공할 수 있도록 인도하셨기 때문이다. 이는 우리에게 두 가지 교훈을 준다. 하나는 그분이 바로 우리의 하나님이라는 사실에 즐거워해야 한다는 것이다. 하나님으로 인하여 즐거워하는 것은 믿음의 또 다른 표현이다. 그렇게 할 때 그분께 영광이 되고 우리에게도 힘이 된다(느 8:10). 믿음이 없는 사람은 하나님 앞에서 즐거워할 수 없고 슬픔으로 힘을 잃게 된다. 그래서 바울은 이렇게 강조하기도 하였다.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빌 4:4). 두 번째 교훈은, 즐거워하되 구체적으로 즐거워하라는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들이 즐거워하는 이유를 구체적으로 알고 있었다. 그들은 자신들을 도와 성전을 완공시키신 하나님의 손길을 잊을 수 없었다. 우리도 마찬가지이다. 하나님이 살아계시고 그분이 바로 우리 하나님이시라면, 그분이 우리에게 해 주신 일들은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을 것이다. 그것들을 구체적으로 떠올리고 기록하면서 그것들 하나하나로 인해서 종일 감사하고 기뻐할 수 있다. 하나님의 뜻은 그것을 통해 영광을 받으시는 데 있다. 만약 우리의 즐거움이 피상적이라면,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신앙은 '수박 겉 핥기'만 하고 있는 것이다.

    II. 메시지

    제목: 유월절을 지킨 백성들

    본문: 스 6:19-22

    19 사로잡혔던 자의 자손이 첫째 달 십사일에 유월절을 지키되 20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이 일제히 몸을 정결하게 하여 다 정결하매 사로잡혔던 자들의 모든 자손과 자기 형제 제사장들과 자기를 위하여 유월절 양을 잡으니 21 사로잡혔다가 돌아온 이스라엘 자손과 자기 땅에 사는 이방 사람의 더러운 것으로부터 스스로를 구별한 모든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속하여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를 찾는 자들이 다 먹고 22 즐거움으로 이레 동안 무교절을 지켰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그들을 즐겁게 하시고 또 앗수르 왕의 마음을 그들에게로 돌려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신 하나님의 성전 건축하는 손을 힘 있게 하도록 하셨음이었더라

    1. 유월절을 지킨 백성들

    성전 건축은 대적들의 방해와 유다 백성들의 잘못된 우선순위로 중단되었습니다. 하지만 학개와 스가랴 선지자가 전한 하나님의 예언(말씀)과 다리오 왕이 내린 조서로 성전 건축은 다시 시작되었고, 마침내 다리오 왕 6년(기원전 516년) 아달월(3월)에 완공되었습니다(6:15). 솔로몬 성전이 바벨론에 의해 기원전 586년에 파괴되었기 때문에, 이로부터 만 70년이 지나 2차 성전인 스룹바벨 성전이 완성되었던 것입니다. 유다 백성들은 완공된 성전을 하나님께 바치는 봉헌식을 거행하였습니다. 그리고 한 달 후인 첫째 달 14일에 유월절을 지켰습니다(19-21절). 여기에서 ‘첫째 달’은 ‘아빕월’로, 현대 달력으로는 4월경에 해당합니다.

      유월절이 어떤 절기입니까? ‘유월절’은 칠칠절(오순절), 초막절(수장절)과 함께 이스라엘의 3대 절기 중의 하나입니다. 영어로 ‘Passover’인 유월절은 ‘넘어가다’, ‘지나가다’, ‘~을 뛰어넘다’는 뜻으로, 출애굽 전날 밤 하나님이 보내신 죽음의 사자가 애굽 장자들을 죽일 때 어린 양의 피를 문설주에 바른 이스라엘 백성들의 집은 넘어감으로써 이스라엘 백성들이 구원받은 사건을 기념하는 절기입니다(출 12;11-14). 이 사건은 아빕월, 즉 첫째 달 14일 저녁에 일어났기 때문에, 유월절 절기도 이날 저녁에 지키게 된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 절기를 지킴으로써, 자신들에게 그 큰 구원과 은혜를 베푸신 하나님을 기억하고, 언약 백성으로서의 자기 정체성을 확인하였습니다. 더구나 지금 이스라엘 백성들이 지금 지키고 있는 유월절은, 포로로 잡혀간 바벨론에서 예루살렘으로 돌아온 후에 처음으로 지켰다는 점에서, 그리고 완공된 성전을 봉헌한 지 얼마 지나지 않은 시점에서 지켰다는 점에서, 그들에게 매우 중요한 의미가 있었습니다. 바벨론에서 예루살렘으로 돌아온 사건은 제2의 출애굽에 견줄 만한 사건이었기 때문에, 그들이 지킨 유월절의 의미는 남다를 수밖에 없었습니다.

      유다 백성들은 유월절에 이어 무교절을 지켰습니다(22절). ‘무교절’은 유월절 다음날부터 7일 동안, 즉 첫째 달 15일부터 21일까지 유월절의 일부로 드려집니다(출 12:15-20). 이때 누룩을 제거한 빵을 먹는데, 이는 유월절 저녁에 빵에 누룩을 넣을 여유가 없을 정도로 신속하게 애굽을 빠져나와야 했던 당시의 상황을 기념하기 위해서입니다(출 12:39).

    2. 두 가지 교훈

    1) 먼저 정결하게 해야

    오늘 본문은 유다 백성들이 유월절과 무교절 절기를 지킨 모습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 모습을 통해 두 가지 내용을 교훈으로 삼을 수 있습니다. 그들에게 볼 수 있는 첫 번째 모습은, 유월절을 지키기 위해 먼저 자신들의 몸을 정결하게 하였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한 후에 어린 양을 잡고 모든 백성이 함께 먹었습니다.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이 일제히 몸을 정결하게 하여 다 정결하매 사로잡혔던 자들의 모든 자손과 자기 형제 제사장들과 자기를 위하여 유월절 양을 잡으니 사로잡혔다가 돌아온 이스라엘 자손과 자기 땅에 사는 이방 사람의 더러운 것으로부터 스스로를 구별한 모든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속하여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를 찾는 자들이 다 먹고”(20-21절).

      유월절은 출애굽 사건의 주인공이신 하나님의 능력과 은혜를 기념하는 절기입니다. 그것을 기념하는 이유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 위해서입니다. 또 유월절을 지킴으로써 바로 그분이 여전히 자신들과 함께하실 뿐만 아니라, 자신들도 그분과 영원히 함께하겠다는 신앙고백을 하게 됩니다. 그와 같은 절기에 부정한 몸으로 참여하여, 그 사건을 기념하거나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을까요? 더구나 하나님은 거룩하신 분이기 때문에 애초에 함께할 수조차 없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유월절 절기를 지키기 전에 자신들의 몸을 정결하게 하였던 것입니다. 이는 신앙의 출발점이 정결에 있다는 점을 시사해 줍니다.

      a) 유다 백성들이 자신들의 몸을 정결하게 한 후에 절기를 지켰던 것처럼, 우리도 신앙생활을 하기 위해서는 먼저 우리 스스로를 정결하게 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정결의 반대 개념인 부정의 원인이 되는 죄 문제부터 해결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제자들과 유월절 최후의 만찬을 나누시는 자리에서 죄를 이렇게 정의하셨습니다. “죄에 대하여라 함은 그들이 나를 믿지 아니함이요”(요 16:9). 예수님을 믿지 않는다는 것은 하나님이신 예수님을 믿지 않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분을 믿지 않기 때문에 그분과 함께하지 않습니다. 그분과 함께하지 않기 때문에 믿을 존재는 오직 자신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자기 스스로 자기 인생의 주인이 되어 자기 뜻대로 살아갑니다.

      이렇게 사는 사람들이 의로운 삶을 살 수 있을까요? 성경은 결코 그런 일이 있을 수 없다고 전면 부정하고 있습니다. 성경은 모든 사람이 죄인이고 의인은 한 명도 없다고 규정하고 있습니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롬 3:23).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다 치우쳐 함께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 그들의 목구멍은 열린 무덤이요 그 혀로는 속임을 일삼으며 그 입술에는 독사의 독이 있고 그 입에는 저주와 악독이 가득하고 그 발은 피 흘리는 데 빠른지라 파멸과 고생이 그 길에 있어 평강의 길을 알지 못하였고 그들의 눈앞에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느니라 함과 같으니라”(롬 3:10-18). 더 나아가 성경은 죄인들, 즉 부정한 사람들에 대해 심판을 예고하고 있습니다. “죄의 삯은 사망이요”(롬 6:23a). “한 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해진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히 9:27). “그러나 두려워하는 자들과 믿지 아니하는 자들과 흉악한 자들과 살인자들과 음행하는 자들과 점술가들과 우상 숭배자들과 거짓말하는 모든 자들은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에 던져지리니 이것이 둘째 사망이라”(계 21:8).

      창조주 하나님을 주인으로 믿지 않고 자신이 주인이 되어 제멋대로 살아가는 사람은, 그 본질이 죄인이기 때문에 자기 인생을 죄로 얼룩지게 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 결과 죽음과 심판을 피해갈 수 없습니다. 이와 같은 결과를 피하기 위해서는 잘못 끼운 첫 단추를 다시 올바르게 끼워야 합니다. 다시 말해서 자신이 자기 인생의 주인이라는 착각에서 벗어나, 십자가에서 우리 죄를 대속하시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주님으로 영접해야 합니다. 그럴 때 죄인에서 의인이 되고, 마귀의 새끼에서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있습니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요 1:12).

      b) 이미 하나님의 자녀가 된 사람들에게도 정결은 매우 중요한 덕목입니다. 사도 베드로는 우리에게 이렇게 권면하고 있습니다. “오직 너희를 부르신 거룩한 이처럼 너희도 모든 행실에 거룩한 자가 되라 기록되었으되(레 11:45)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 하셨느니라”(벧전 1:15-16). 우리가 모든 행실에 거룩해야 하는 이유는 그분이 거룩하시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가 거룩하지 못하면 하나님께 나아가서 그분과 교제할 수 없기 때문에, 모든 행실에 거룩해야 합니다.

      우리가 거룩해야 하는 또 다른 이유는, 그것이 우리 인생의 열매와 직결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그분과 동행하지 않으면 우리 스스로 거룩한 삶을 살 수 없습니다. 우리가 거룩해야 하는 또 다른 이유는 바로 여기에서부터 출발합니다. 우리가 거룩하기 위하여 주님 안에 거할 때 무슨 일이 벌어질까요? 많은 열매를 맺게 됩니다. 반대의 경우에는 버려져 말라비틀어질 뿐만 아니라 불쏘시개가 되는 운명에 처하게 됩니다. “너희는 내가 일러준 말로 이미 깨끗하여졌으니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아니하면 스스로 열매를 맺을 수 없음같이 너희도 내 안에 있지 아니하면 그러하리라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거하면 사람이 열매를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이라 사람이 내 안에 거하지 아니하면 가지처럼 밖에 버려져 마르나니 사람들이 그것을 모아다가 불에 던져 사르느니라”(요 15:3-6).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우리 몸을 정결하게 하는 일, 즉 모든 행실에 거룩하게 하는 일은, 그 중요성을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습니다.

    2) 즐거움으로 지켜야

    이스라엘 백성들의 모습에서 볼 수 있는 두 번째 교훈은, 그들이 ‘즐거움으로’ 그 절기를 지켰다는 것입니다. 그들이 즐거움으로 절기를 지켰던 원인이 어디에 있었습니까? “이는 여호와께서 그들을 즐겁게 하시고 또 앗수르 왕의 마음을 그들에게로 돌려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신 하나님의 성전 건축하는 손을 힘 있게 하도록 하셨음이었더라”(22절). 그들이 즐거웠던 이유는 하나님이 그들을 즐겁게 하셨기 때문입니다. 이는 기쁨의 근원이 하나님께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들이 즐거웠던 두 번째 이유는, 하나님이 아시리아 왕의 마음을 돌려 성전 건축하는 손을 힘 있게 하셨기 때문입니다. 이것 역시 기쁨의 근원이 역사를 주관하시는 하나님께 있다는 사실을 의미하고, 동시에 그들이 구체적인 사건에 근거해서 즐거워하였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것을 통해 우리도 하나님으로 인하여 즐거워하고, 그분이 우리에게 베푸신 구체적인 은혜로 인해 즐거워해야 한다는 교훈을 얻을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왜 이렇게 즐거워해야 할까요? 그것이 하나님과 우리에게 왜 중요할까요? 첫 번째 이유는, 그렇게 즐거워하는 것이 믿음의 또 다른 표현이기 때문입니다. 믿음은 추상적이거나 멀리 있는 것이 아닙니다. 어린아이들이 가정 안에서 왜 즐거워합니까? 함께하고 있는 아빠와 엄마가 바로 자기의 부모라는 사실을 믿고 있기 때문입니다. 아빠 엄마가 최선을 다해서 자신을 돌봐주었고, 지금도 그리고 앞으로도 그렇게 돌봐줄 것을 믿기 때문에 기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아이는 즐거워하는 모습을 통해 자신도 모르게 부모에게 영광을 돌리게 되고, 그것은 부모에게도 기쁨이 됩니다. 하나님 앞에서 즐거워하는 것도 이와 똑같습니다. 하나님으로 인해서 즐거워해야 하는 이유가 또 있습니다. 바로 그것이 우리의 힘이 되고, 우리의 소원을 이룰 수 있는 길이 되기 때문입니다. “여호와로 인하여 기뻐하는 것이 너희의 힘이니라”(느 8:10). “여호와를 기뻐하라 그가 네 마음의 소원을 네게 이루어 주시리로다”(시 37:4). 믿음이 없는 사람은 하나님 앞에서 즐거워할 수 없고 슬픔으로 힘을 잃게 됩니다. 그런 사람은 하나님을 향해 그 어떤 기대도 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자기의 소원을 아뢰지도 않고 소원도 이룰 수 없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을 믿는 사람은, 그분이 우리에게 힘을 주시고 또 우리의 소원을 이루어 주신다는 사실을 믿기 때문에 즐겁게 그분께 의지하고 아뢸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빌립보 교인들에게 이렇게 강조하기도 하였습니다.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빌 4:4).

      이스라엘 백성들이 즐거워하는 모습에서 특히 인상적인 부분은 그 기쁨이 매우 구체적이라는 점입니다. 그들은 성전을 완공하게 하신 하나님의 손길을 구체적으로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이 살아계시고 그분이 바로 우리 하나님이시라면, 그분이 우리에게 해 주신 일들은 이루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을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것들을 하나하나 구체적으로 떠올리면서 종일 감사하고 기뻐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의 기쁨이 마냥 피상적이라면,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신앙은 '수박 겉 핥기'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3. 그들의 촉구

    과학기술과 물질문명으로 현대 사회는 엄청난 풍요를 누리고 있습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그 풍요를 허락하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대신 밀어내거나 부정합니다. 현대 문화는 모더니즘과 포스트모더니즘 이후 그 성격을 딱히 무엇이라 규정하기 어려울 정도로 복잡다단해졌고, 그 결과 순결과 감사(기쁨)라는 단어도 그 정체성을 잃어버렸습니다. 이런 상황 속에서 오늘 본문이 소개하고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모습은, 우리가 무엇을 회복하고 어디로 돌아가야 하는가에 대한 모범 답안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유월절을 지키기 위해 먼저 자신들의 몸을 정결하게 하였고, 그것을 시작으로 출애굽 사건의 주인공이신 하나님을 기념하였습니다. 또 무교절을 지키는 내내 즐거워하였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이 함께하신다는 사실이 즐거웠고, 그분이 성전을 완공할 수 있도록 도우셨다는 사실이 즐거웠습니다. 그것을 통해 하나님께 모든 영광을 돌렸습니다.

      그들의 모습은 오늘 우리에게 우리도 그렇게 하라는 촉구의 메시지를 던져주고 있습니다. 그렇게 하는 것이 하나님께 영광이 되고, 그렇게 할 때 우리에게 힘이 되고 많은 열매를 맺는 소원도 이룰 수 있다고 힘주어 말하고 있습니다. 그 촉구대로 우리의 신앙이 하나님과 함께하는 거룩함을 회복하고, 그분이 우리에게 베푸신 모든 은혜를 구체적으로 돌아보면서 즐거워하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바랍니다.





    에스라 7장 요약

    에스라가 예루셀람으로 돌아오였고 백성들에게 율례와 규례를 가르치게 됩니다.아닥사스다가 에스라에게 내린 조서의 내용,아닥사스다왕이 강 서편의 관리에게 조서를 내렷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1-6장은 유다 백성들의 1차 포로 귀환을, 7-10장은 2차 포로 귀환을 다루고 있다. 그 가운데 7장은 2차 포로 귀환의 배경과 과정을 소개하고 있다. 학자이자 제사장인 에스라는 바벨론에 있던 백성들과 함께 예루살렘으로 돌아왔다. 아닥사스다 왕 7년(기원전 458년) 첫째 달 초하루에 바벨론에서 길을 떠나, 하나님의 선한 손의 도우심을 입어 다섯째 달 초하루에 예루살렘에 도착하였다. 그가 돌아온 목적은 그 땅의 형편을 살피고, 하나님과 왕의 명령에 따라 성전을 위하여 섬기고, 정의를 실현하고,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율법을 가르치기 위해서였다.

      그가 이렇게 할 수 있었던 근거는 아닥사스다 왕의 조서에 기초하고 있다. 그 조서에는 에스라의 귀환, 에스라에게 주어진 임무와 권한, 재정 지원 등에 관한 내용이 담겨 있었다. 이 모든 일을 인도하신 분은 하나님이셨기 때문에, 에스라는 바로 그분을 송축하였다.

    I. 본문 이해와 질문

    1. 에스라의 귀환과 결심(1-10절)

    [본문] 1 이 일 후에 바사 왕 아닥사스다가 왕위에 있을 때에 에스라라 하는 자가 있으니라 그는 스라야의 아들이요 아사랴의 손자요 힐기야의 증손이요 2 살룸의 현손이요 사독의 오대 손이요 아히둡의 육대 손이요 3 아마랴의 칠대 손이요 아사랴의 팔대 손이요 므라욧의 구대 손이요 4 스라히야의 십대 손이요 웃시엘의 십일대 손이요 북기의 십이대 손이요 5 아비수아의 십삼대 손이요 비느하스의 십사대 손이요 엘르아살의 십오대 손이요 대제사장 아론의 십육대 손이라 6 이 에스라가 바벨론에서 올라왔으니 그는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주신 모세의 율법에 익숙한 학자로서 그의 하나님 여호와의 도우심을 입음으로 왕에게 구하는 것은 다 받는 자이더니 7 아닥사스다 왕 제칠 년에 이스라엘 자손과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과 노래하는 자들과 문지기들과 느디님 사람들 중에 몇 사람이 예루살렘으로 올라올 때에 8 이 에스라가 올라왔으니 왕의 제칠 년 다섯째 달이라 9 첫째 달 초하루에 바벨론에서 길을 떠났고 하나님의 선한 손의 도우심을 입어 다섯째 달 초하루에 예루살렘에 이르니라 10 에스라가 여호와의 율법을 연구하여 준행하며 율례와 규례를 이스라엘에게 가르치기로 결심하였었더라​

    [이해] 1-6장은 바사의 고레스와 다리오 왕 때 있었던 사건을 소개하고 있다. 이때 유다 백성들은 바벨론에서 예루살렘으로 돌아와 성전을 재건하였다. 비록 그 중간에 대적들의 방해와 백성들의 나태함 때문에 성전 재건이 중단되기도 하였지만, 여호와 하나님의 도움으로 그 소임을 성공적으로 완수할 수 있었다. 7장부터는 아닥사스다 왕 때 있었던 사건을 소개하고 있다. 주제도 ‘성전 재건’에서 ‘종교개혁’(혹은 ‘신앙 부흥 운동’)으로 바뀌고 있다. 그 일은 학사 에스라의 귀환으로 시작되었다. 앞선 1-6장이 하나님의 집에 대한 첫 번째 부분인 ‘성전 재건’을 다루고 있다면, 7-10장이 다루고 있는 것은 하나님의 집에 대한 두 번째 부분인 ‘거룩한 자손의 재건’이다. 즉 어떤 사람이 하나님의 집을 구성하였는가(7-8장), 그들이 어떻게 하나님의 집을 형성하였는가(9-10장)에 관한 내용을 다루고 있다. 한편 1-6장이 스룹바벨의 인도 아래 이루어진 1차 귀환 이후의 사건을 다루고 있다면, 7장부터는 2차 귀환 후의 사건을 소개하고 있다. 그리고 3차 귀환에 얽힌 사건은 느헤미야서에 소개되고 있다. 성전 재건 이후, 에스라는 모세 율법의 회복과 재정비, 이방인과의 통혼 금지 등을 주도하였다. 그에 비해 느헤미야는 예루살렘 성벽 재건, 국가 살림 재정비 등 행정 부분의 문제 해결에 집중하였다.

      바사 왕 ‘아닥사스다’(Artaxerxes)는 아하수에로(크세르크세스) 왕의 셋째 아들로, 부친을 암살한 아르파타나를 죽이고 왕위에 오른 아닥사스다 1세를 말한다(기원전 464-424년). 아닥사스다가 죽은 후에 페르시아 제국은 쇠락을 길을 걷게 된다. 느헤미야는 그의 술 관원으로 섬겼으며(느 1:1;2:1), 말라기 선지자는 그의 통치 말기에 활동하였다. 그가 통치할 때 에스라가 있었다(1절). 그는 스라야의 아들로, 대제사장 아론의 16대 후손이다. 그의 족보(상향식으로 제시)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1-5절). 에스라-스라야-아사랴-힐기야-살룸-사독-아히둡-아마랴-아사랴-므라욧-스라히야-웃시엘-북기-아비수아-비느하스-엘르아살-아론. 여기에서 소개된 족보는 완전한 것이 아니다(대상 6:3-15 참조). 마태복음 1장에서 소개한 예수님의 족보가 그분이 다윗의 자손이라는 점에 강조점을 두었듯이, 에스라의 족보도 그가 아론의 직계 후손인 스라야의 직계로서 대제사장의 혈통임을 강조하는 데 주안점을 두고 있다. (자세한 인물 정보는 아래 표 참조)

    인 물

    소 개

    스라야

    바벨론에 끌려갔던 여호사닥의 아버지이다(대상 6:14-15). 그는 바벨론이 예루살렘을 함락할 당시 대제사장이었고, 바벨론으로 끌려갈 때 하맛 땅 립나에서 죽임을 당하였다(왕하 25:18-21). 따라서 에스라와 스라야 사이에는 130년의 간격이 있고, 그 사이에는 적어도 한 세대 이상이 생략되어 있다. 그러므로 ‘스라야의 아들’에서 ‘아들’은 문자적 의미의 아들(son)이 아니라 자손(descendant)이라는 의미로 사용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스라야가 에스라의 아버지가 아님에도 그 족보의 맨 처음에 놓은 이유는, 그가 바벨론 포로 전에 예루살렘의 마지막 대제사장이었기 때문이다(대상 6:14). 포로기 이후에는 대제사장의 사역이 불가능하였기 때문에, 본서 기자는 스라야부터 에스라 사이에 있는 서너 세대를 생략하여 에스라가 여호사닥의 직계로서 대제사장의 혈통임을 강조하고자 하였다.

    아사랴

    스라야의 아버지이다(대상 6:13).

    힐기야

    아사랴의 아버지로, 유다 왕 요시야 때 성전을 정화하다가 율법책을 발견하였던 대제사장이다(왕하 22:4-14;대하 34:14-22). 이 사건으로 요시야 왕 때 종교개혁이 이루어졌다.

    살룸

    힐기야의 아버지이다(대상 6:12-13). 므슬람과 동일 인물로 추정된다(대상 9:11).

    사독

    살룸의 아버지로(대상 6:12), 다윗과 솔로몬 당대에 활약하였던 대제사장 사독과는 다른 인물이다.

    아히둡

    사독의 아버지이다(대상 6:8).

    아마랴

    아히둡의 아버지이다(대상 6:11).

    아사랴

    솔로몬 시대에 활약한 대제사장 사독의 4대손으로, 솔로몬 성전에서 제사장으로 활동하였다(대상 6:8-10).

    므라욧

    솔로몬 시대의 대제사장 사독의 조상이다. 따라서 므라욧과 아사랴는 부자 관계가 아니다. 그 사이에는 6명의 이름이 생략되어 있다(대상 6:6-11).

    스라히야

    므라욧의 아버지이다(대상 6:6,51).

    웃시엘

    스라히야의 아버지로, ‘웃시’로도 불린다(대상 6:6,51).

    북기

    웃시엘의 아버지이다(대상 6:5,51).

    아비수아

    북기의 아버지이다(대상 6:5).

    비느하스

    아비수아의 아버지이다(대상 6:4). 출애굽 이후 이스라엘 백성들이 요단 동편 싯딤에서 거짓 선지자 발람의 꾀에 빠져 바알브올을 숭배하고 이방인들과 정을 통하였을 때 하나님을 향한 거룩한 열정으로 그 사태를 진정시켰고, 그 결과 하나님으로부터 영원한 대제사장의 직분을 약속받았다(민 25:7-13). 미디안과의 전투에 최선봉에 섰고, 가나안 정복 때 동쪽 지파들이 세운 제단 문제로 갈등이 생겼을 때 훌륭하게 중재하여 동서 지파들 사이의 분쟁을 방지하였다(민 31:6;수 22:10-14).

    엘르아살

    비느하스의 아버지이다. 아론의 네 아들 가운데 한 사람으로, 그의 형인 나답과 아비후가 잘못된 제사를 드림으로써 하나님께 진노를 받아 아들 없이 죽임을 당하자, 아론의 뒤를 이어 대제사장이 되었다(레 10:1-2;민 20:25-28).

    아론

    레위 지파 출신으로, 이스라엘의 첫 번째 대제사장이다(레 6:20-22). 아므람과 요게벳의 맏아들이고, 모세의 형이자 누이 미리암의 동생이다(출 6:20;7:7;민 26:69). 하나님은 말이 능숙하지 못하다는 모세의 변명에 아론을 그의 대변인으로 세우셨다(출 4:14-16). 역대상 6장의 족보가 레위로 끝나는 데 비해, 에스라의 족보가 아론으로 끝을 맺은 이유는, 그것이 단순히 가계의 흐름도를 제시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에스라가 바로 대제사장 아론의 직계 자손임을 강조하기 위해서이다.

      이 에스라가 바벨론에서 예루살렘으로 올라왔다(6절). ‘이 에스라’는 ‘바로 그 에스라’라는 뜻이다. 이는 앞서 제시된 족보를 통하여 그가 제사장 가문에 속한 탁월한 인물일 뿐만 아니라 뒤에 이어질 어떤 중대한 일의 중심인물이라는 사실을 알리는 신호이다. 족보가 그의 출신 정보를 제공하는 것이라면, 6절 후반부는 그의 인물됨에 대한 정보를 제공하고 있다. 첫째, 그는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가 주신 모세의 율법에 익숙한 학자였다. ‘익숙한’은 ‘어떠한 일에 능숙하고 준비되어서 아주 신속하고 정확하게 시행하는 사실’을 묘사하는 단어로서, ‘정통한, 능통한’(NIV, well versed), ‘숙련된’(NASB, skilled), ‘준비된’(KJV, ready) 등과 같은 뜻이다(잠 22:29;사 16:5). ‘학자’는 ‘서기관’(왕하 25:19;렘 36:26), ‘서기’(왕하 12:10)를 말하는데, 이 단어는 원래 ‘국가의 서기관’(state secretary, 삼하 20:25)이나 ‘왕의 개인 서기관’(royal private secretary, 삼하 8:17;왕하 22:3-13)을 언급할 때 사용되었다. 다윗, 솔로몬, 히스기야, 요시야, 여호야김 등 때에 서기관은 정부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삼하 8:17;20:25;왕상 4:3;사 36;1-3;왕하 22:3;렘 36;20-21). 둘째, 그는 하나님의 손이 그의 위에 있었기 때문에, 왕에게 구하는 것을 모두 받는 사람이었다. 하나님 여호와의 도우심을 받았다는 것은, 그가 하나님과 동행하면서 그분을 의지하였다는 전제가 암시되어 있다. 또 왕에게 구하는 것을 모두 받았다는 것은, 그런 일이 일어나도록 하나님이 돕기도 하셨지만, 그의 행실 또한 왕의 마음을 흡족하게 한 데 따른 결과였다는 것을 짐작해 볼 수 있다.

      에스라는 아닥사스다 왕 7년(기원전 458년) 첫째 달 초하루에 바벨론을 출발하여 다섯째 달 초하루에 예루살렘에 도착하였다(7-9절). 만 4개월이 걸렸다. 그와 함께 올라온 이들은 이스라엘 자손들, 제사장들, 레위 사람들, 노래하는 자들, 문지기들, 그리고 느디님 사람들이었다. ‘이스라엘 자손들’은 뒤에 나열된 사람들처럼 특정직에 속하지 않은 일반 백성들을 가리키는데, 그들 중에 1차 귀환 때처럼 북쪽 지파 사람들이 포함되었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노래하는 자들’과 ‘문지기들’은 성전에서 각각 그런 일을 담당하였던 레위 지파 사람들이다(2:41-42). ‘느디님 사람들’은 원래 혈통적으로 이스라엘 출신이 아니지만, 이스라엘 공동체에 들어와서 비천한 일에 종사하였던 이들이다(2:43). 바벨론을 떠난 에스라와 그 일행이 예루살렘에 무사히 도착할 수 있었던 것은 전적으로 여호와 하나님의 선하신 손이 그들을 도우셨기 때문이다. 바벨론에서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은 직선으로 800km에 이르는 먼 거리이다. 또한, 그 여정이 봄에서 여름으로 이어지는 가장 더울 때 이루어졌기 때문에, 아마 그들은 사막을 피하기 위해 유프라테스강을 따라 북쪽 수리아로 이동하다가 다시 남쪽으로 내려가는 길을 택하였을 것이다. 그 길은 잘 닦여져 있었지만, 강도나 대적들이 자주 출몰하는 위험한 길이기도 하였다(8:22). 그래서 에스라는 이러한 위험을 내다보고 왕에게 자신들을 보호해 줄 보병과 기병을 요청하려고도 하였지만, 차마 그 말만은 입 밖으로 꺼내지 못하였다. 대신에 그는 일행들과 함께 금식하며 하나님께 평탄한 길을 내달라고 간절히 기도하였다. 그 결과 하나님은 선한 손으로 그들을 도우셨고, 그들은 평탄하게 예루살렘에 도착할 수 있었다(8:21-23).

      예루살렘에 도착한 에스라는 세 가지를 결심하였다(10절). 첫째, 여호와의 율법을 연구한다. 둘째, 연구한 율법대로 준행한다. 셋째, 연구하고 준행한 율례와 규례를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가르친다. ‘연구하다’는 말은 ‘조사하다’, ‘찾다’는 뜻을 가진 동사에서 파생된 단어로서, 어떤 사물에 대한 지식을 얻기 위하여 온갖 노력을 기울이는 행동을 가리킨다(벧전 1:10-11, Rawlinson). ‘준행하다’는 말은 자신의 사상이나 견해를 실제 행동으로 옮기는 것을 말한다(창 6:22;신 5:27;23:23). 율법 연구를 통해 알게 된 하나님의 뜻을 삶에서 실천하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다. 그것은 불순종을 의미하기도 한다. 그와 같은 부류의 대표적인 이들이 바로 바리새인들인데, 예수님은 그런 그들을 신랄히 비판하셨다(눅 12:1). ‘율례와 규례’는 외형상 차이가 있어 보이지만, 실제로는 두 단어가 항상 동시에 또는 교대로 사용된다는 점을 고려해 볼 때 거의 같은 의미로 볼 수 있다. 이 단어들은 ‘율법’의 보다 본질적인 특성을 드러내는 역할을 하는데, ‘율례’는 율법의 기초적인 규정들에, ‘규례’는 보다 구체적인 용례들에 각각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Joseph Blenkinsopp). 세 가지 결심 중에 가장 중요한 것은 백성들에게 율례와 규례를 가르치는 일이었다. 그가 율법을 연구하고 준행하는 목적도 최종적으로 이를 이루기 위한 것이었다. 에스라가 이 같은 결심을 한 이유는, 그가 예루살렘으로 귀환한 목적이 바로 여기에 있었기 때문이다. 이 목적은 하나님이 그에게 주신 것으로, 하나님은 그 목적을 왕에게 알리셨고, 왕은 하나님의 뜻에 따라 에스라에게 조서를 내려 예루살렘에서 그 목적을 이루도록 명하였다(7:11-28). 그러므로 그의 결심은 주관적인 동기에서 비롯된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하나님과 왕, 그리고 이스라엘 공동체를 위한 객관적인 동기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질문] 에스라의 족보에 나타난 특징들은 무엇인가?

    첫째, 아론에서부터 에스라에 이르기까지 모든 제사장을 싣고 있지 않다는 점이다. 이는 마태복음 1장에서 소개한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가 그분이 다윗의 자손이라는 점을 강조하고 있듯이, 에스라의 족보도 그가 아론의 직계 후손인 스라야의 직계로서 대제사장 혈통임을 강조하는 데 주안점을 두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연유로 인해 에스라부터 스라야 사이에 있는 서너 명이 생략되어 있고(이들이 누구였는지는 구체적으로 알 수 없다), 아사랴와 므라욧 사이에도 여섯 사람이 생략되어 있다. 이는 그들이 소개된 사람들과 비교할 때 부정적인 평가를 받거나 영향력 측면에서 비중이 크지 않았기 때문에 배제되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둘째, 족보에 등장하는 인물들이 시간의 역순에 따라 상향식으로 소개되고 있다는 점이다. 이러한 방식은 사복음서 가운데 누가복음에서 취하고 있다(3장). 저자는 이런 방식을 통해 수신자인 로마의 고위 관리로 추정되는 데오빌로의 이해를 배려하였고, 더 나아가 유대 공동체 밖에 있는 모든 이방인의 이해도 배려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그에 반해 마태복음에서는 하향식으로 소개되고 있다. 이는 유대인으로 구성된 마태 공동체의 유대 전통을 감안하였기 때문이다. 이러한 점을 고려하여 볼 때, 에스라의 족보는 유대 전통의 주관성보다 유다 밖의 객관성을 더욱 의미 있게 보았던 것 같다.

      셋째, 아론이 족보의 끝을 장식하고 있다는 점이다. 아론의 위로는 아므람, 고핫, 그리고 레위가 있다. 특히 ‘레위’는 이스라엘의 지파를 가르는 기준점이 되는 야곱의 아들들 가운데 한 사람이다. 그런 의미에서 에스라의 족보를 레위까지 제시할 수도 있었지만, 그를 비롯하여 아론 이전의 사람들은 대제사장 제도가 생기기 전의 인물들이기 때문에 본문에 제시된 족보의 성격에 어울리지 않았다. 저자는 에스라의 족보를 아론까지만 제시함으로써, 족보의 성격을 명확히 하고자 하였던 것이다.

    2. 아닥사스다 왕의 조서 내용(11-26절)

    [본문] 11 여호와의 계명의 말씀과 이스라엘에게 주신 율례 학자요 학자 겸 제사장인 에스라에게 아닥사스다 왕이 내린 조서의 초본은 아래와 같으니라 12 모든 왕의 왕 아닥사스다는 하늘의 하나님의 율법에 완전한 학자 겸 제사장 에스라에게 13 조서를 내리노니 우리 나라에 있는 이스라엘 백성과 그들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 중에 예루살렘으로 올라갈 뜻이 있는 자는 누구든지 너와 함께 갈지어다 14 너는 네 손에 있는 네 하나님의 율법을 따라 유다와 예루살렘의 형편을 살피기 위하여 왕과 일곱 자문관의 보냄을 받았으니 15 왕과 자문관들이 예루살렘에 거하시는 이스라엘 하나님께 성심으로 드리는 은금을 가져가고 16 또 네가 바벨론 온 도에서 얻을 모든 은금과 및 백성과 제사장들이 예루살렘에 있는 그들의 하나님의 성전을 위하여 기쁘게 드릴 예물을 가져다가 17 그들의 돈으로 수송아지와 숫양과 어린 양과 그 소제와 그 전제의 물품을 신속히 사서 예루살렘 네 하나님의 성전 제단 위에 드리고 18 그 나머지 은금은 너와 너의 형제가 좋게 여기는 일에 너희 하나님의 뜻을 따라 쓸지며 19 네 하나님의 성전에서 섬기는 일을 위하여 네게 준 그릇은 예루살렘 하나님 앞에 드리고 20 그 외에도 네 하나님의 성전에 쓰일 것이 있어서 네가 드리고자 하거든 무엇이든지 궁중 창고에서 내다가 드릴지니라 21 나 곧 아닥사스다 왕이 유브라데 강 건너편 모든 창고지기에게 조서를 내려 이르기를 하늘의 하나님의 율법 학자 겸 제사장 에스라가 무릇 너희에게 구하는 것을 신속히 시행하되 22 은은 백 달란트까지, 밀은 백 고르까지, 포도주는 백 밧까지, 기름도 백 밧까지 하고 소금은 정량 없이 하라 23 무릇 하늘의 하나님의 전을 위하여 하늘의 하나님이 명령하신 것은 삼가 행하라 어찌하여 진노가 왕과 왕자의 나라에 임하게 하랴 24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제사장들이나 레위 사람들이나 노래하는 자들이나 문지기들이나 느디님 사람들이나 혹 하나님의 성전에서 일하는 자들에게 조공과 관세와 통행세를 받는 것이 옳지 않으니라 하였노라 25 에스라여 너는 네 손에 있는 네 하나님의 지혜를 따라 네 하나님의 율법을 아는 자를 법관과 재판관을 삼아 강 건너편 모든 백성을 재판하게 하고 그 중 알지 못하는 자는 너희가 가르치라 26 무릇 네 하나님의 명령과 왕의 명령을 준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속히 그 죄를 정하여 혹 죽이거나 귀양 보내거나 가산을 몰수하거나 옥에 가둘지니라 하였더라

    [이해] 본문은 아닥사스다 왕이 에스라에게 내린 조서의 초본 내용을 소개하고 있다(11절). 따라서 히브리어가 아닌 아람어로 기록되어 있다. 에스라는 여호와의 계명과 이스라엘에게 주신 율례에 관한 학자이자 제사장이었다. ‘학자’는 율법을 연구, 해석, 필사, 가르치는 ‘서기관’을 말한다. 그래서 KJV, RSV, NASB 등은 ‘scribe’로, NIV는 ‘teacher’로 각각 번역하고 있다. ‘학자’는 페르시아 정부에 의해 부여된 이름이고, ‘제사장’은 에스라의 유대인 직책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 ‘계명’은 ‘명령’, ‘주장’ 등을 지칭하는 말인데, 이는 율법의 말씀들을 총체적으로 지칭하는 성문법으로서의 ‘율례’나 불문법으로서의 ‘규례’와 같은 법령의 의미보다는 백성들이 실제 이행해야 하는 법령의 구체적인 실상을 나타내는 말이다. 이 대목에서 이러한 표현이 사용된 이유는,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중요한 사실 중 하나가 단지 성전 재건 자체에만 있지 않고 그분의 명령에 대한 구체적인 순종에 있다는 사실을 명확하게 전달하고자 하였기 때문이다. 아닥사스다 왕이 율법에 완전한(완벽한) 학자이자 제사장인 에스라에게 내린 조서의 내용은 다음과 같이 다섯 가지의 명령을 담고 있었다. (1) 에스라와 유다 백성들을 이끌고 바벨론에서 예루살렘으로 귀환하라(13절), (2) 그곳에서 유다와 예루살렘의 형편을 살피라(14절), (3) 성전을 위해 필요한 모든 것을 가져가라(15-20절), (4) 유프라테스강 건너편의 모든 창고지기는 에스라가 요청하는 것을 신속히 도우라(21-24절), (5) 에스라는 법관과 재판관을 세워 재판하고(다스리고) 가르치라(25-26절).

      조서의 첫 번째 내용은, 바사에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제사장들과 레위인들 포함) 가운데 뜻이 있는 자들은 누구든지 에스라와 함께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라는 것이다. 이는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것이 강압이 아닌 자원과 자발성에 기초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말해 준다. 이와 같은 원칙은 1차 포로 귀환을 허락한 고레스 칙령에도 적용되었다. 그때 하나님께 감동을 받은 사람들이 성전을 건축하기 위해 올라갔다(1:5). 하지만 당시에 올라가지 않았던 이들도 많이 있었다. 한편 귀환 대상자들을 언급하는 과정에 나오는 ‘이스라엘’이라는 단어는 에스라서에 총 36회 사용되었다. 그 가운데 이스라엘 자손들을 직접적으로 가리키는 객관적인 용어로 모두 6회 사용되었다(2:2,70;3:11;7:13;9;1;10:1). 그 외에는 대부분 언약 백성으로서의 신앙적, 혈통적인 동질성을 의도적으로 강조하기 위하여 사용되었다. 반면에 본서에 총 22회 사용된 ‘유다’는, 백성들을 가리키는 의미로 단 한 번밖에 사용되지 않았고(4:4), 대부분 바사 제국에서 다스리는 속국의 한 지방으로서의 지역적, 지리적인 명칭으로 사용되었다. 이것은 본서가 ‘이스라엘’이라는 단어를 사용할 때 ‘하나님의 주권적 선택으로 언약을 맺은 백성’이라는 의미를 부각시키고, 하나님이 처음 선택한 열두 지파의 총체성을 강조하기 위한 의도에서 비롯되었다는 점을 짐작하게 해 준다.

      두 번째 내용에는, 왕과 일곱 자문관이 에스라를 예루살렘으로 보낸 이유가 들어 있다(14절). ‘일곱 자문관’은 왕의 측근에서 국정 전반에 관하여 자문과 조언을 하는 일종의 ‘왕실 자문 기구’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들은 왕실에서 가장 신뢰받는 자문관들로, 그들에게는 왕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 허락되었다. 이들에 대해 에스더서(1:14)에서는 “왕에게 가까이하여 왕의 기색을 살피며 나라 첫 자리에 앉은 자는 바사와 메대의 일곱 지방관...”으로 묘사하고 있다. 왕과 일곱 자문관이 에스라를 보낸 목적은, 유다와 예루살렘의 형편을 살피기 위한 것이었고, 살핌의 기준은 에스라의 손에 있는 하나님의 율법이었다. 이는 ‘유다와 예루살렘에 있는 백성들이 하나님의 율법에 따라 살고 있는지를 조사하고, 그 율법에 어긋난 이들을 벌하거나 가르치기 위하여’라는 뜻이다. 이를 통해 왕이 에스라를 보낸 일차적인 목적이 종교적 성격을 띠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짐작하건대, 에스라는 유다 땅에서 벌어지고 있는 심상치 않은 소식을 들었던 것 같다. 백성들이 하나님의 율법에서 어긋난 삶을 살거나 성전에서 드려지는 제사가 모세 율법에 어긋나 있다는 소식 등을 들었을 수도 있다. 이에 따라 에스라는 왕에게 예루살렘행을 요청하였고, 왕은 그의 요청에 흔쾌히 응하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왕이 에스라를 보낸 데에는 정치적 성격의 이차적인 목적도 담겨 있었을 것이다. 아닥사스다 1세는 왕이 된 이후 곧바로 10년 동안 이집트에서 일어난 커다란 반란에 직면하였다. 이 반란은 이나로스(Inaros)와 아미르테우스(Amyrtaeus)가 주도하였다. 삼각주 지역의 지배권을 차지하고 있던 그들은, 파프레미스(Papremis)에서 페르시아 군대를 크게 물리치고 아닥사스다 1세의 삼촌이자 그 지역 총독이었던 아케메네스의 시체를 페르시아로 보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페르시아 정부군은 여전히 멤피스와 이집트 상부 지역을 차지하고 있었고, 이집트 남부에 있는 와디 함마마트와 홍해를 통해 본국과 연락도 유지하고 있었다. 그 와중에 아테네인들이 이끄는 헬라의 델로스 동맹군도 지중해 서쪽 지역에 대한 이익을 추구할 목적으로 이나로스와 힘을 합쳤다. 이와 같은 상황은 아닥사스다에게 인근 지역의 민족들과 더욱 긴밀하게 우호 관계를 다지는 계기로 작용하였을 것이다. 만약 그들과의 우호에 금이라도 간다면 이집트의 반란은 인접한 다른 민족들에게도 반란의 실마리를 제공해 줄 수 있고, 또 향후 페르시아가 이집트의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머나먼 원정길에 오를 때에도 그들의 도움을 받을 수 없으므로 그들과의 우호를 더욱 깊게 다지는 정책은 필수적이었다. 이러한 민족들 가운데는 베니게, 수리아, 팔레스타인에 있는 여러 민족 등이 속해 있었다.

      세 번째 내용에는, 왕이 유다와 예루살렘의 형편을 살피기 위하여 에스라를 보낼 때 그가 가져갈 것들이 무엇이었는지를 소개하고 있다. 그것들은 모두 성전의 필요를 충당하기 위한 것들로, 다음과 같다. (1) 왕과 자문관들이 여호와 하나님께 성심으로 드린 은금(15절), (2) 바벨론 온 지방(도)에서 얻은 은금(16a절), (3) 백성들과 제사장들이 성전을 위하여 기쁘게 드릴 예물(16b절). (4) 왕이 에스라에게 준 그릇들(19절), (5) 궁중 창고에서 성전에 쓰일 곳이 있다고 여겨지는 것들(20절).

      왕과 자문관들이 하나님께 은금을 성심으로 드렸다는 것은, 왕이 에스라의 귀환을 명령한 직접적인 원인이 어디에 있었는가를 알 수 있는 배경이 된다. 왕은 하나님을 ‘예루살렘에 거하시는 이스라엘의 하나님’으로 고백함으로써 그분의 실재와 정체성에 대하여 명확한 인식을 소유하고 있었다. 왕은 이러한 인식 아래 에스라를 환대하여 보냈는데, 이는 그가 성전에서 제사를 드릴 때 그분의 축복을 구하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동시에 그 목적 이면에는 정치적인 이해도 맞물려 있었을 수도 있다. 즉 정복 지역의 신들을 존중하는 마음을 보여줌으로써 정복지 백성들의 마음을 얻어 제국을 안정적으로 통치하려는 의도가 들어 있었을 것이라는 추측도 해 볼 수 있다. ‘성심으로’는 ‘자원하여’, ‘자발적으로’라는 의미이다. 그래서 표준새번역성경은 이 단어를 ‘기쁜 마음으로’로, NIV와 KJV은 ‘freely’로 번역하고 있다. 따라서 왕과 자문관들이 하나님께 은금을 드릴 때의 기본 동기는 후자보다는 전자의 색채가 더욱 강하였다는 것이라고 쉽게 짐작할 수 있다. 이런 짐작은 23절에서 소개하고 있는 하나님에 대한 왕의 마음(두려움), 즉 ‘어찌하여 진노가 왕과 왕자의 나라에 임하게 하랴’는 고백을 고려할 때 더욱 신빙성을 담보하고 있다. 왕과 자문관들이 성심으로 드린 은금 이외에도, 바벨론의 모든 지방에서 얻은 모든 은금, 백성들과 제사장들이 성전을 위하여 기쁘게 드린 예물도 에스라에게 주어졌다(16절). 바벨론의 모든 지방에서 얻은 모든 은금은 정황상 고레스 왕 때에 있었던 1차 귀환 때와 유사하게 자발적으로 주어졌을 것으로 추정된다(1:4,6). 백성과 제사장들도 1차 귀환 때와 마찬가지로 기쁘게 예물을 드렸다(2:68).

      왕은 에스라에게 주어진 은금과 예물의 사용처를 다음과 같이 구체적으로 밝히고 있다(17-18절). 첫째, 그 돈으로 제물과 물품을 신속하게 사서 하나님의 성전 제단 위에 드리라. 그 가운데 제물은 수송아지와 숫양과 어린 양을, 물품은 소제와 전제를 드릴 때 필요한 것들을 사라. ‘신속히’는 문자적으로 ‘정확하게’라는 뜻으로, 그 돈을 틀림없이 지정된 목적에 사용하고 그 외의 용도로 사용되어서는 안 된다는 의미이다. ‘소제’(素祭, grain offering)는 구약의 5대 제사 가운데 하나로, 곡물로 드리는 제사이다. 성결한 생애를 하나님께 약속하는 표시로 정한 밀가루와 기름과 유향을 불로 태우고 떡을 구워 놓고 드렸다(레 7:12-13). 번제가 헌신을 의미한다면, 소제는 노동(일)의 결과물을 드린다는 점에서 행위의 성별을 상징하였다(시 20:3). ‘전제’(奠祭, drink offering)는 포도주나 독주를 하나님의 제단에 부어 드리는 제사이다(출 29:40-41;민 15:5). 단독으로 드려질 수 없고, 항상 다른 제사에 곁들여 드려졌다. 하나님을 섬기는 자들의 헌신적인 봉사, 주를 위해 생명까지 기꺼이 내놓을 수 있는 거룩한 희생을 상징한다. 개역한글성경에서는 ‘관제’(灌祭)로 표현하기도 하였다(빌 2:17;딤후 4:6). 왕이 이처럼 제사의 종류와 제물에 대한 정보를 구체적으로 알고 있었다는 점은, 에스라가 왕에게 필요한 것들을 요청하는 과정에서 그 정보를 알려 주었거나 왕궁에서 일하는 익명의 유대인이 그 정보를 알려 주었을 것이라는 추측을 낳게 한다. 둘째, 그 나머지 은금은 너와 네 형제가 좋게 여기는 일에 하나님의 뜻에 따라 쓰라. 이는 ‘하나님의 뜻에 따라 너와 네 형제인 제사장들이 가장 잘 알고 있는 대로 사용하라’는 뜻이다.

      에스라에게 성전에서 섬기는 일을 할 때 사용될 그릇들도 주어졌다(19절). 그 그릇들은 느부갓네살이 바벨론으로 가져왔던 것을 가리키는 것 같지 않다. 그것들은 이미 오래전에 고레스 왕에 의해 반환되었다(1:7-11). 그때 반환되지 않고 남아 있던 그릇들일 수도 있지만, 그 가능성은 희박하다. 오히려 왕과 귀환하지 않은 유다 백성들이 자발적으로 새롭게 마련해 준 것들로 보는 편이 더 가능성이 있어 보인다. 그 밖에도 왕은 에스라에게 하나님의 성전에서 써야 할 것이 더 있다면 궁중 창고에서 가져갈 수 있도록 배려하였다(20절). ‘궁중 창고’는 일종의 왕실 창고(NASB, NIV, the royal treasury)로, 왕실의 사유 재산을 보관하는 곳간을 가리킨다. 그것이 ‘강 서편에서 징수되는 세금을 보관하는 금고 또는 그 관리 기관을 가리킨다’는 견해도 있다.

      왕의 조서에 담긴 네 번째 내용에는, 유프라테스강 서쪽 지방의 모든 창고지기에게 내린 명령이 담겨 있다(21-24절). ‘창고지기’는 바벨론에서 유다로 향하는 에스라가 거쳐 가게 될 지역과 팔레스타인 지역의 재정 관리들을 말한다. 이들은 각 지역에서 거두어들인 세금을 용도에 따라서 출납하거나 왕실에 상납하는 역할을 담당하였다. 왕은 그들에게 율법의 서기관이자 제사장인 에스라가 요구하는 것을 신속히 시행하도록 명령하였다. 왕은 에스라가 구하는 것에 대하여 은은 100달란트까지, 밀은 100고르까지, 포도주와 기름은 각각 100밧까지 제한하였지만(소금은 무제한), 그 수량은 놀랄 만큼 많았다. ‘은 100달란트’는 현재 시세로 25억 원 정도에 해당하는 금액이다(1달란트는 34kg, 1kg은 35.27온스, 1온스는 17.2달러, 1달러는 1,203원, 19.10.02. 기준). ‘고르’는 10밧에 해당하고(겔 45:17), 1고르는 230리터 정도이다. ‘은’은 희생 제물을 구입하는 데 필요하고, ‘밀’과 ‘포도주’는 소제와 전제를 드리기 위해서 각각 필요하였다. 또 ‘소금’은 소제와 전제의 제물에 뿌려질 용도로 필요하였다(겔 43:24). 23절에는 왕이 모든 창고지기에게 그와 같이 명령한 이유가 무엇인지를 밝히고 있다. 첫째는, 그것을 통해 에스라가 성전을 위하여 하나님이 명령하신 것을 삼가 행하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삼가’는 ‘집중해서’, ‘부지런히’, ‘열의를 가지고’라는 뜻이다. 이는 원래 고대 셈족어에서 전쟁터에서 적이나 목표물을 대상으로 집중적으로 공략하는 것을 지칭하는 단어에서 파생된 것이다. 둘째는, 그것을 통해 바사 왕과 그의 나라에 영원토록 하나님의 진노가 내리지 않게 하기 위해서였다. 다시 말해서 그렇게 하지 않을 경우, 그것이 하나님의 명령에 불순종하는 것이 되어 왕과 바사 제국에 재앙이 임하기 때문에, 신속히, 그리고 철저하게 이행하도록 명한 것이다. 왕의 이런 인식을 통해 그의 신앙이 전적으로 미신적인 것만은 아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스라엘 역사를 보면 하나님이 자기 백성 이스라엘의 죄악에 대해 진노를 내리셨는데, 그러한 진노는 이방 나라들도 피해 가지 못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따라서 그런 역사적 배경에 근거해서 아닥사스다 왕도 하나님을 향한 두려움을 가지고 있었을 것이고, 그 두려움은 자신과 자신의 왕국의 안녕을 위하여 이스라엘 백성들의 2차 귀환과 귀환 후의 일들을 적극적으로 돕는 계기가 되었을 것이다.

      모든 창고지기에게 이어진 왕의 명령에는, 제사장이나 레위인과 같은 성직자들을 비롯하여 성전 봉사자들에게 조공, 관세, 통행세 등의 세금을 부과하는 것을 금하고 있다(24절). 이는 구약의 율법과도 일치하는 것이지만, 당시 페르시아를 포함한 고대 중근동 국가에서는 신전 제사와 관련된 일을 하는 사람들에게 세금을 거두지 않는 것이 일반적인 관행이었다. 심지어 다리오 왕의 가다타스(Gadatas) 비문에는 아폴로 신을 섬기는 제사장들에게 세금을 받는 자들은 저주를 받을 것이라는 경고문이 기록되어 있을 정도였다. 한편 면세 대상자로 지목된 사람들은 여섯 부류로 분류되어 있다. 이들 가운데 앞에 소개되고 있는 다섯 부류의 사람들, 즉 제사장들, 레위인들, 노래하는 자들, 문지기들, 느디님 사람들은 앞서 2장에서도 언급된 바 있다(2:36-54). 그에 비해 마지막에 소개된 ‘성전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본 절에서만 언급되고 있다. 이들은 아마도 성전에서 육체노동을 하였던 사람들로, ‘느디님 사람’보다 신분이 더 낮았던 ‘솔로몬의 신하의 자손들’로 추정된다(2:55).

      조서에 담긴 마지막 내용에는, 왕이 에스라에게 부여한 두 가지의 권한과 사명이 소개되고 있다(25-26절). 첫째 사명은, 모든 백성에게 공의를 펴기 위하여 하나님의 율법을 잘 알고 있는 이를 법관과 재판관을 세워 재판하게 하는 일이었다. ‘법관’은 ‘공의를 시행하다’, ‘재판하다’는 뜻을 가진 아람어 ‘쉐파트’에서 파생된 단어로, 개역한글성경에서는 ‘유사’(有司, official, ruler)로 번역하기도 하였다. ‘유사’는 다음과 같은 의미를 지니고 있다. (1) (행정이나 군사적인 능력을 갖춘) 장관, 관리, 서기관(대상 23:4;27:1), (2) 백성을 지도하는 지도자, 감독자(렘 29:26), (3) 족장과 집안의 우두머리(출 22:28). NIV와 KJV은 ‘법관’을 ‘magistrates’(치안 판사)로 번역하여, 뒤에 나오는 ‘judges’(재판관)와 구분하고 있다. 한편 페르시아 제국에서 행해진 두 가지의 사법 활동을 통하여 법관과 재판관을 구분하기도 한다. 즉 당시 페르시아에는 일반 관례법에 따라 시민들 상호 간의 문제나 갈등을 해결하는 ‘사회 법정’과 국가나 정부의 이해와 관련된 사건을 맡은 ‘왕궁 법정’이 있었는데, 이에 근거해서 ‘법관’은 종교나 사회 문제 등에 관한 관습법을 다루는 사람이고, ‘재판관’은 왕에 관한 정치 문제를 취급하는 사람이었을 것이라는 견해이다. 이런 견해는 이어지는 26절에서 하나님의 명령과 왕의 명령을 구분하여 명시하였다는 점에서 타당성을 더하고 있다. 만약 이와 같은 견해를 따른다면, 왕은 에스라에게 법관과 재판관을 세워 이스라엘 내부의 종교 문제와 백성들의 일반 소송 문제뿐만 아니라, 왕과 정부에 관한 정치적 문제를 해결하는 사명까지 부여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에스라에게 주어진 둘째 사명은, 율법을 제대로 알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그 율법을 가르치는 일이었다. 왕이 에스라에게 이와 같은 두 가지 사명을 주었다는 것은, 역으로 이스라엘 내부에 이 두 문제와 함께 앞서 제시한 성전 제사와 관련된 문제들이 동시에 노출되어 있었다는 증거가 되기도 한다. 왕은 에스라에게 하나님의 명령과 왕의 명령을 지키지 아니하는 자는 속히 그 죄를 정하고, 그에 맞춰서 사형, 귀양, 가산 몰수, 옥살이 등의 형벌을 내리도록 지시하였다(26절).

    [질문] 아닥사스다 왕의 조서에 들어 있는 내용상의 특징은 무엇인가?

    첫째, 왕이 에스라에게 부여한 권한이 구체적으로 명시되어 있다는 점이다. 에스라의 귀환을 허락한 왕은, 그를 그냥 보내지 않고 조서 속에 그에게 부여된 권한까지 구체적으로 명시함으로써 하나님의 일을 원활하게 진행할 수 있도록 도왔다. 왕이 그에게 부여한 권한은 다음과 같다. (1) 유다에 정착한 백성들의 상황 감찰 권한(14절), (2) 주어진 은금과 예물을 용도에 맞게 분배, 사용할 수 있는 권한(15-20절), (3) 창고지기에게 필요한 것을 공급받을 수 있는 권한(21-23절), (4) 종교, 사법, 교육에 대한 전적인 권한(25-26절). 만약 에스라가 이러한 권한이 명기된 왕의 조서 없이 귀환하였다면, 그가 비록 율법에 익숙한 학자이자 제사장이라 할지라도 이스라엘 백성들로부터 그의 권위를 쉽게 인정받지 못하였을 것이다. 더구나 당시 백성들은 이미 이방 문화에 상당히 깊이 동화되어 있는 상황이었다. 따라서 그의 권한이 구체적으로 적혀 있는 왕의 조서는 그 무엇보다 중요하였다.

      둘째, 하나님에 대한 아닥사스다 왕의 인식과 태도를 알 수 있다는 점이다. 그는 비록 이방 나라 페르시아의 왕이었지만, 하나님과 그분의 율법, 그리고 성전과 제사 등에 대해 구체적으로 알고 있었다. 그는 아는 선에서 그치지 않고 그분께 순종하여 그분의 뜻과 일이 이루어지도록 전심으로 도왔다. 그 배경에는 제국의 안정을 바라는 정치적인 목적, 자신과 자기 사람들의 안녕을 비는 기복적인 신앙 등도 전혀 배제할 수 없지만, 하나님을 향한 그의 순수성만큼은 높이 평가할 만하다.

      셋째, 조서 이면에 숨어 있는 하나님의 섭리를 발견할 수 있다는 점이다. 표면적으로는 아닥사스다 왕이 모든 일을 주관한 것처럼 보이지만, 그 이면에는 역사를 주관하시는 하나님의 손길이 진하게 묻어 있다. 이러한 사실은 에스라가 하나님 여호와를 송축하는 내용 속에 고스란히 담겨 있다(27-28절). 그는 (1) 하나님이 왕의 마음에 성전을 아름답게 할 뜻을 두셨고, (2) 하나님이 자신에게 왕으로부터 은혜를 얻게 하셨고, (3) 또 하나님의 도움으로 자신이 힘을 얻어 백성들과 함께 올라오게 하셨다고 찬양하였다.

    3. 에스라의 송축(27-28절)

    [본문] 27 우리 조상들의 하나님 여호와를 송축할지로다 그가 왕의 마음에 예루살렘 여호와의 성전을 아름답게 할 뜻을 두시고 28 또 나로 왕과 그의 보좌관들 앞과 왕의 권세 있는 모든 방백의 앞에서 은혜를 얻게 하셨도다 내 하나님 여호와의 손이 내 위에 있으므로 내가 힘을 얻어 이스라엘 중에 우두머리들을 모아 나와 함께 올라오게 하였노라

    [이해] 본문은 아닥사스다 왕의 조서에 대한 에스라의 반응을 보여 주는 부분으로, 하나님 여호와를 향한 송축으로 채워져 있다. ‘송축하다’는 ‘축복을 받으소서’(KJV, Blessed be), ‘찬양하다’(NIV, Praise be)는 뜻이다. 에스라는 그분을 ‘우리 조상들의 하나님’으로 소개함으로써, 이스라엘과 하나님의 언약 관계를 강조함과 동시에 포로 귀환이나 성전 재건과 관련된 상황 등이 모두 이스라엘의 조상들과 하나님의 약속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일임을 천명하고 있다.

      에스라는 세 가지 이유를 들어 하나님을 송축하였다. 첫째 이유는, 하나님이 왕의 마음에 성전을 아름답게 할 뜻을 두셨기 때문이다. 이는 아닥사스다 왕이 이스라엘 백성에게 내린 2차 귀환 명령이 근원적으로 하나님께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왕의 마음을 움직이시는 하나님의 손에 대해 잠언서 기자는 이렇게 표현하고 있다. “왕의 마음이 여호와의 손에 있음이 마치 봇물과 같아서 그가 임의로 인도하시느니라”(잠 21:1). 하나님이 왕의 마음을 움직이신 이유는 성전을 아름답게 하기 위해서였다. 두 번째 이유는, 하나님이 에스라를 왕과 보좌관들과 모든 방백 앞에서 은혜를 얻도록 하셨기 때문이다. ‘은혜’(헤세드)는 주로 언약 백성인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베푸시는 변함 없는 사랑과 자비를 의미한다. 하나님은 그와 같은 은혜가 에스라에게 주어질 수 있도록 이방 나라의 왕과 관리들의 마음을 만지셨다. 마지막 이유는, 에스라 위에 있었던 하나님의 손으로 인해 그가 힘을 얻고 이스라엘의 족장들을 모아 함께 올라올 수 있었기 때문이다. 앞선 두 가지 이유는 하나님의 손이 왕(보좌관들, 방백 포함)에게 있었기 때문이다. 그로 인해 에스라는 수많은 권한과 지원을 얻을 수 있었다. 하지만 정작 그 일을 수행할 에스라가 동기가 없거나 마음이 약해져 버리면 아무런 소용도 없게 된다. 그런 점에서 세 번째 이유는 매우 중요하다. 동기를 새롭게 하고 마음을 강하게 하는 것은 에스라 스스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인간은 그 본질이 약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돕는 손길이 주어지지 않으면 혼자 일어설 수 없다. 심지어 주님은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단언까지 하셨다(요 15:5).

    [질문] 에스라가 하나님을 송축하고 있는 내용을 통해서, 에스라가 소유하고 있었던 신앙의 특징은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첫째, 역사를 주관하시는 하나님에 대한 명확한 인식에 기초한 신앙이라는 점이다. 허구에 기초한 신앙은 신앙이 아니라 미신이다. ‘미신’은 역사적, 합리적 근거가 없는 것을 맹목적으로 믿는 것이다. 그래서 미신은 모래 위에 지은 집과 같다. 그에 반해 ‘참된 신앙’은 그 뿌리가 실재에 있고, 그 실재는 역사 속에서 실제로 드러나는 것을 특징으로 하고 있다. 에스라는 하나님이 역사 속에서 실재하실 뿐 아니라 그 역사를 이끌어가시는 분으로 명확하게 인식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이 왕의 마음을 움직여 귀환과 은혜(재정적 지원)가 주어졌다고 송축할 수 있었다.

      둘째, 경험적인 신앙이라는 점이다. 이는 앞선 특징에서 비롯된 것이다. 하나님이 역사를 주관하시기 때문에, 그 역사 현장에 있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역사를 경험할 수 있다. 에스라는 그때 그 장소에서 역사하고 계신 하나님을 경험하였다. 그는 왕의 마음을 움직이시는 그분의 손을 경험하였고, 그로부터 주어지는 은혜도 경험하였다. 무엇보다 그는 자신에게 힘을 주시고, 백성들과 함께 예루살렘으로 무사히 돌아갈 수 있도록 인도하신 하나님을 경험하였다.

      셋째, 겸손한 신앙이라는 점이다. ‘겸손’은 자기 정체성을 가감 없이 명확히 인식할 때 그러한 태도를 견지할 수 있다. 그에 반하여 ‘교만’은 자기기만에 뿌리를 내리고 있다. 국어사전은 교만에 대해 이렇게 정의하고 있다. “잘난 체하며 뽐내고 건방짐.” 이러한 정의 이면에는 잘난 체할 뿐 정작 잘나지 않았다는 사실이 들어 있다. 그런 사실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잘났다고 뽐내기 때문에 자기를 기만하는 것이다. 이러한 사람은 자기 주인인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고 의지하지도 않는다. 그래서 교만이 죄가 되는 것이다.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예수님의 말씀은 구원받은 사람이나 그 반대의 사람 모두에게 적용되는 진리이다. 에스라는 이러한 사실을 명확히 알고 있었기 때문에 겸손하게 하나님께 기도로 간절히 매달릴 수밖에 없었다(8:21-23). 그 결과 ‘하나님의 손’이 에스라 위에 있었고, 그로 인해 그는 다시 힘을 얻어 백성들과 함께 예루살렘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II. 메시지

    본문: 스 7:6-10

    제목: 에스라의 결심

    06 이 에스라가 바벨론에서 올라왔으니 그는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주신 모세의 율법에 익숙한 학자로서 그의 하나님 여호와의 도우심을 입음으로 왕에게 구하는 것은 다 받는 자이더니 07 아닥사스다 왕 제칠 년에 이스라엘 자손과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과 노래하는 자들과 문지기들과 느디님 사람들 중에 몇 사람이 예루살렘으로 올라올 때에 08 이 에스라가 올라왔으니 왕의 제칠 년 다섯째 달이라 09 첫째 달 초하루에 바벨론에서 길을 떠났고 하나님의 선한 손의 도우심을 입어 다섯째 달 초하루에 예루살렘에 이르니라 10 에스라가 여호와의 율법을 연구하여 준행하며 율례와 규례를 이스라엘에게 가르치기로 결심하였었더라

    1. 에스라의 귀환 배경

    1-6장은 포로가 되어 바벨론으로 끌려갔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예루살렘으로 돌아온 사건, 즉 1차 포로 귀환 사건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이때 스룹바벨의 주도로 올라온 백성들은 예루살렘에 2차 성전을 지었습니다. 7-10장은 2차 귀환 내용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2차 귀환을 주도한 사람은 학자이자 제사장인 에스라였는데, 그는 아닥사스다 왕의 허락과 도움으로 돌아올 수 있었는데, 그가 예루살렘으로 올라온 목적은 어디에 있었을까요? 에스라의 귀환을 허락한 왕의 조서에 보면 그가 돌아오게 된 배경을 알 수 있습니다. 왕은 에스라를 예루살렘으로 보내면서 그에게 다음과 같은 임무를 맡겼습니다. 첫째, 유다와 예루살렘의 형편을 살피라(14절). 둘째, 하나님의 전(성전)을 위하여 (제사로) 섬기라(17-20절). 셋째, 법관과 재판관을 세워 공정한 재판이 이루어지게 하고, 하나님의 율법을 알지 못하는 자들을 가르치라(25절).

      에스라에게 이와 같은 임무를 맡겨졌다는 것은, 역으로 당시 그곳에 그와 같은 문제가 산적해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백성들은 성전에서 드리는 제사를 소홀히 하였고, 그나마 드리는 제사도 하나님이 정하신 법도를 정확하게 지키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율법을 제대로 알지 못하는 사람이 법관과 재판관으로 세워졌고, 그들에 의해 공정한 재판도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이런 현상이 왜 벌어졌을까요? 백성과 지도자들(특히 종교와 사법 분야)이 하나님의 율법을 알지 못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왕은 그곳의 형편을 살펴서 정상화할 필요가 있었던 것입니다. 에스라는 이 임무를 수행하기 위하여 아닥사스다 왕 7년(기원전 458년) 다섯째 달 초하루에 예루살렘에 도착하였습니다. 그는 도착하자마자 다음과 같이 결심하였습니다. “여호와의 율법을 연구하여 준행하며 율례와 규례를 이스라엘에게 가르치겠다”(10절). 오늘 우리는 에스라가 결심한 내용을 살펴보면서, 그것이 우리에게 어떤 교훈을 주는지 나누어 보도록 하겠습니다.

    2. 에스라의 결심 세 가지

    1) 하나님의 율법을 연구하기

    에스라가 결심한 첫 번째 내용이 무엇입니까? 그는 먼저 하나님의 율법을 연구하기로 결심하였습니다. 여기에서 ‘여호와의 율법’은 기본적으로 ‘모세 오경’을 가리킵니다(6절). 하지만 그는 이것뿐만 아니라 ‘시가서’를 비롯하여, 에스라 이전에 쓰여진 ‘역사서’와 ‘예언서’ 일부까지 연구 대상으로 삼았을 것입니다. 그리고 ‘연구하다’는 말은 어떤 것에 대한 지식을 완전하게 얻기 위하여 온갖 노력을 기울이는 것을 말합니다.

      에스라는 모세의 율법에 익숙한 학자였습니다(6절). 여기에서 ‘익숙하다’는 말은 ‘숙련되다’(RSV, NASB, skilled), ‘박식하다’(NEB, learned), ‘정통하다’(NIV, well versed)는 뜻입니다. 그렇지만 그는 자신의 익숙함에 대해 여전히 부족하다고 생각하였고, 그 부족함을 채우기 위해 연구를 결심하였던 것입니다. 우리는 이런 에스라와 비교할 때 하나님의 율법에 대해 잘 알고 있다고 자부할 수 있을까요? 많은 경우, 그보다 못할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하나님의 율법을 연구하는 데 얼마나 게으른지 모릅니다. 연구는커녕 읽는 것도 소홀히 합니다. 이것이 현재 우리가 처하고 있는 가장 근본적이고 가장 큰 문제입니다. 우리는 이런 태도에서 돌이켜 에스라처럼 연구하겠다고 결심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이렇게 하나님의 율법을 연구하는 것이 왜 중요할까요? 연구하여 제대로 알지 못하면 에스라가 결심한 그다음 내용인, 준행하고 가르치는 일을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갈릴리에서 제자들에게 이렇게 명령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침례를 베풀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마 28:19-20). 그런데 우리는 이 명령에 제대로 순종하지 않고 있습니다. 아니 순종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순종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이 명령의 전제가 되는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이 어떤 것인지 모르기 때문에 그렇게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분부하신 모든 것’과 ‘여호와의 율법’이 다른가요? 아닙니다. 똑같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구약의 말씀과 단절되어 있지 않습니다. 그분은 그것을 단절시키기 위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것을 완전하게 하게 하려고 이 땅에 오셨습니다.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를 폐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온전하게 하려 함이라”(마 5:17).

      하나님의 율법을 연구하는 것이 중요한 또 다른 이유는, 그렇게 하는 것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증거가 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그분의 모든 것을 담고 있는 말씀을 소홀히 할 수 없습니다. 그렇게 하는 것은 거짓이고 자기기만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이 보낸 편지를 받은 사람이, 그 편지를 소홀히 다룰 수 있을까요? 곁에 두고 시간 날 때마다 읽고 또 읽을 것입니다.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어떤 일을 하고 있는지, 건강하게 잘 지내고 있는지, 여전히 나를 사랑하고 있는지 확인하고 싶고, 또 그가 당부하는 말도 열심히 지키려고 할 것입니다. 왜 그렇게 합니까? 그 사람을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도 이와 다르지 않습니다.

      만약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묵상하고 연구하고 있지 않다면, 먼저 이 문제부터 자가 진단해 보아야 합니다. “나는 정말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있는가?” 그리고 그 척도는 하나님의 말씀을 얼마나 연구하고 있는지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만약 그 척도가 낮다면, 하나님이 원하시는 수준으로 돌아와야 합니다. 날마다 시간을 정해 놓고 말씀을 읽고 상고해야 하고, 필요하다면 다른 사람과 함께 성경 공부도 해야 합니다. 그렇게 하면 다윗의 고백이 우리의 고백이 될 수 있습니다. “주의 말씀의 맛이 내게 어찌 그리 단지요 내 입에 꿀보다 더 다니이다”(시 119:103).

    2) 준행하기

    에스라가 결심한 두 번째 내용이 무엇입니까? 연구한 말씀의 내용대로 준행하는 것입니다. ‘준행하다’는 말은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실제로 행동에 옮기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이 율법을 주신 궁극적인 목적은, 우리가 그 율법대로 실천하는 것에 있습니다. 그렇게 하는 것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우리에게도 축복이 되기 때문에, 그 율법을 통해 우리의 실천을 요구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연구한 말씀대로 준행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말씀대로 준행하는 것이 중요한 또 다른 이유는, 그 준행을 통해서 우리의 믿음이 드러날 뿐만 아니라 그것이 우리의 믿음을 온전하게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행함이 없는 믿음은 아무 유익이 없습니다. 야고보는 믿음과 행함의 관계에 대해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내 형제들아 만일 사람이 믿음이 있노라 하고 행함이 없으면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 그 믿음이 능히 자기를 구원하겠느냐...이와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너는 믿음이 있고 나는 행함이 있으니 행함이 없는 네 믿음을 내게 보이라 나는 행함으로 내 믿음을 네게 보이리라 하리라 네가 하나님은 한 분이신 줄을 믿느냐 잘하는도다 귀신들도 믿고 떠느니라 아아 허탄한 사람아 행함이 없는 믿음이 헛것인 줄을 알고자 하느냐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그 아들 이삭을 제단에 바칠 때에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이 아니냐 네가 보거니와 믿음이 그의 행함과 함께 일하고 행함으로 믿음이 온전하게 되었느니라”(약 2:14,17-22).

      하나님의 말씀을 준행하는 것이 중요한 이유가 또 있습니다. 그것이 사람 앞에서 비치는 빛이 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같이 너희 빛이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마 5:16).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말씀대로 준행하는 그 모습이 우리의 이웃을 하나님께로 인도하는 전도가 되고, 그것을 통해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기 때문에 준행이 중요하고 또 중요한 것입니다.

    3) 가르치기

    에스라가 결심한 마지막 내용은 율례와 규례를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가르치는 것입니다. 이것이 중요한 이유는 그 당시 그곳에서 발생한 모든 문제가 여기에서 비롯되었기 때문입니다. 가르치는 일, 즉 교육의 목적은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모르는 것을 알게 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알게 한 것을 실생활에 적용하도록 도와주는 것입니다. 실생활에 적용하도록 도와주는 일은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게 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정상적인 교육이 이루어졌다면, 그들은 하나님이 어떤 분이시고 그분의 뜻이 무엇이었는지를 알았을 것이고, 그분이 명령하신 대로 순종하였을 것입니다. 하지만 가르치지 않았기 때문에 하나님께 제사도 제대로 드리지 않았고, 하나님을 모르는 재판관들이 사회 정의를 왜곡시켰던 것입니다.

      가르치는 일이 이렇게 중요하기 때문에, 가르치되 잘 가르쳐야 합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는 것이 잘 가르치는 것일까요? 그것에 대한 정답을 사도 바울이 제시하고 있습니다. 그는 밀레도에서 에베소 교회 장로들을 만나 이렇게 고백하였습니다. “아시아에 들어온 첫날부터 지금까지 내가 항상 여러분 가운데서 어떻게 행하였는지를 여러분도 아는 바니 곧 모든 겸손과 눈물이며 유대인의 간계로 말미암아 당한 시험을 참고 주를 섬긴 것과 유익한 것은 무엇이든지 공중 앞에서나 각 집에서나 거리낌이 없이 여러분에게 전하여 가르치고...여러분이 아는 바와 같이 이 손으로 나와 내 동행들이 쓰는 것을 충당하여 범사에 여러분에게 모본을 보여준 바와 같이...”(행 20:18-20,34-35). 바울은 유익한 것은 무엇이든지 언제 어디서나 거리낌 없이 그들에게 전하여 가르쳤습니다. 그와 동시에 범사에(항상) ‘모본’을 보여주었습니다. 장로들은 그 모든 모습을 보았고 또 알았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이 위대하고, 그래서 그를 통해 교회가 세워졌던 것입니다. ‘아이들은 선생님(부모)의 뒷모습을 보고 배운다’는 말이 있습니다. ‘백문이불여일견’이라는 말도 있습니다. 이 말들은 교육에 있어 모본의 파괴력과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입을 열어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쳐야 하지만, 그와 동시에 우리의 모본을 보고 배울 수 있도록 도와야 합니다.

    3. 작심삼일이 되지 않도록

    에스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연구하고 준행하고 백성들을 가르치겠다고 결심하였습니다. 그것을 보면서 우리도 그와 똑같은 결심을 하게 됩니다. 그렇게 결심하는 것은 정말 잘하신 것입니다. 주님이 기뻐하실 일입니다. 하지만 그것이 ‘작심삼일’(作心三日)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의 결심이 작심삼일이 되면 실패에 대한 실망으로 자괴감에 빠지기 때문에 이전보다 못한 결과를 맛볼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의 결심이 작심삼일이 되지 않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주님께 그렇게 할 수 있도록 도움을 요청해야 합니다. 결심한 것을 주님과 함께하면 됩니다. 많은 사람은 내가 결심하였기 때문에, 그것을 이루기 위한 행동도 내가 주체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그것은 착각에 불과합니다. 우리의 생각과 달리 성경은 우리에게 소원을 주시고 그 소원을 이루시는 분이, 우리 자신이 아니라 하나님이시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에게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빌 2:13). “또 여호와를 기뻐하라 그가 네 마음의 소원을 네게 이루어 주시리로다”(시 37:4). “좋은 것으로 네 소원을 만족하게 하사 네 청춘을 독수리같이 새롭게 하시는도다”(시 103:5). “손을 펴사 모든 생물의 소원을 만족하게 하시나이다”(시 145:16).

      우리의 결심이 작심삼일에서 벗어나 지속 성장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주님 안에 거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거하면 사람이 열매를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이라”(요 15:5). 에스라의 결심이 우리 모두의 결심이 되기를 바랍니다. 그와 동시에 우리 모두 주님 안에 거하면서 그 결심에 많은 열매가 맺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바랍니다.​






    에스라 8장 요약

    아닥사스다 왕때에 에스라와 함게 돌아온 족장들과 그 계보에 대해 기록,에스라가 레위사람들을 찾았다고 기록.귀향중에 아하와 강가에서 에스라가 금식을 선포하고서 기도하였고,제사장과 레위 사람들에게 그릇을 맡겨서 보관하게 하고 예루살렘으로 돌아와서 번제를 드렸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8장은 에스라가 주도한 2차 포로 귀환의 전후에 있었던 내용을 소개하고 있다. 아닥사스다 왕 7년(기원전 458년) 첫째 달 초하루에 바벨론을 떠난 에스라는, 아하와 강가에 모인 백성들을 살피던 도중 레위 자손들이 한 명도 없다는 사실을 발견하였다. 이에 그는 가시뱌 지방의 족장 잇도에게 사람들을 보내 40명의 레위인들과 성전 일꾼인 느디님 사람 220명을 데려왔다. 또한, 그는 따로 세운 제사장들과 레위인들에게 하나님께 드릴 예물을 맡겨 삼가 지키도록 하였다.

      첫째 달 12일에 아하와 강을 떠난 에스라 일행(남자만 1,500명, 총인원은 5,000명 정도)은,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다섯째 달 초하루에 무사히 예루살렘에 도착하였다. 그곳에서 에스라와 그 일행은 3일 동안 머물렀고, 제4일에 성전 예물을 그곳 성전 관리자들에게 인수인계하였다. 그 후 하나님께 번제와 속죄제를 드리고, 왕의 조서를 총독들에게 넘겨 주었다. 조서를 받은 총독들은 백성과 하나님의 성전을 도왔다.

    I. 본문 이해와 질문

    1. 에스라와 함께 올라온 사람들의 계보(1-14절)

    [본문] 1 아닥사스다 왕이 왕위에 있을 때에 나와 함께 바벨론에서 올라온 족장들과 그들의 계보는 이러하니라 2 비느하스 자손 중에서는 게르솜이요 이다말 자손 중에서는 다니엘이요 다윗 자손 중에서는 핫두스요 3 스가냐 자손 곧 바로스 자손 중에서는 스가랴니 그와 함께 족보에 기록된 남자가 백오십 명이요 4 바핫모압 자손 중에서는 스라히야의 아들 엘여호에내니 그와 함께 있는 남자가 이백 명이요 5 스가냐 자손 중에서는 야하시엘의 아들이니 그와 함께 있는 남자가 삼백 명이요 6 아딘 자손 중에서는 요나단의 아들 에벳이니 그와 함께 있는 남자가 오십 명이요 7 엘람 자손 중에서는 아달리야의 아들 여사야니 그와 함께 있는 남자가 칠십 명이요 8 스바댜 자손 중에서는 미가엘의 아들 스바댜니 그와 함께 있는 남자가 팔십 명이요 9 요압 자손 중에서는 여히엘의 아들 오바댜니 그와 함께 있는 남자가 이백십팔 명이요 10 슬로밋 자손 중에서는 요시뱌의 아들이니 그와 함께 있는 남자가 백육십 명이요 11 베배 자손 중에서는 베배의 아들 스가랴니 그와 함께 있는 남자가 이십팔 명이요 12 아스갓 자손 중에서는 학가단의 아들 요하난이니 그와 함께 있는 남자가 백십 명이요 13 아도니감 자손 중에 나중된 자의 이름은 엘리벨렛과 여우엘과 스마야니 그와 함께 있는 남자가 육십 명이요 14 비그왜 자손 중에서는 우대와 사붓이니 그와 함께 있는 남자가 칠십 명이었느니라

    [이해] 본문은 2차 포로 귀환자들의 명단을 소개하고 있다. 명단은 “~ 자손 중에서는 ~이니, 그와 함께 있는 남자가 ~명이요”라는 일정한 문장 형식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이를 통해 가계별 대표자들과 그에 속한 사람들의 수효를 일목요연하게 보여 줌과 동시에 에스라와 함께한 그들이 회복될 이스라엘 공동체의 시발점이 된다는 사실을 드러내고 있다. 아닥사스다 왕 때, 에스라와 함께 바벨론에서 예루살렘으로 올라온 족장들과 그들의 계보(족보)는 다음과 같다.

      비느하스 자손 중에서는 게르솜, 이다말 자손 중에서는 다니엘, 다윗 자손 중에서는 핫두스이다. 스가냐 자손 곧 바로스 자손 중에서는 스가랴로, 그와 함께한 남자가 150명이고(이하 ‘그와 함께 있는 남자’는 생략, 인원수는 괄호 안에 제시), 바핫모압 자손 중에서는 스라히야의 아들 엘여호에내(200명)이다. 스가냐 자손 중에는 야하시엘의 아들(300명), 아딘 자손 중에서는 요나단의 아들 에벳(50), 엘람 자손 중에서는 아달리야의 아들 여사야(70명), 스바댜 자손 중에서는 미가엘의 아들 스바댜(80명), 요압 자손 중에서는 여히엘의 아들 오바댜(218명), 슬로밋 자손 중에서는 요시뱌의 아들(160명), 베배 자손 중에서는 베배의 아들 스가랴(28명), 아스갓 자손 중에서는 학가단의 아들 요하난(110명), 아도니감 자손 중에 나중 된 자의 이름은 엘리벨렛과 여우엘과 스마야(60명), 비그왜 자손 중에서는 우대와 사붓(70명)이었다.

      자손별로 나타난 남자들의 인원수는, 에스라, 게르솜, 다니엘, 핫두스를 포함하면 총 1,500명이다. 70인역(LXX)에는 네 지도자를 포함하여 1,518명으로, 에스드라1서 8장에는 1,794명으로 되어 있다. 부녀들과 어린아이들(21절)까지 합하면 약 5,000명으로 추정된다. 이 숫자에는 40명의 레위인, 220명의 느디님 사람도 포함되어 있다(18-19절). 1차 포로 귀환 때의 1/10에 해당하는 규모이다(2:64-65).

      족장들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이 름

    특 징

    게르솜

    아론에게는 4명의 아들이 있었다(출 6:23;대상 6:3;24:1). 이들 중에 제사장 직분을 행한 아들은 셋째인 엘르아살과 넷째인 이다말이다. ‘비느하스’는 엘르아살의 아들이다. 비느하스는 아론의 대사장직을 아버지로부터 인계받았기 때문에, 정통 제사장 가문으로 자처할 수 있었다. ‘게르솜’은 모세의 맏아들이다(출 2:22). 본문의 ‘게르솜’은 이와 다른 인물로, 제사장 가문의 우두머리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다니엘

    ‘이다말’은 아론의 넷째 아들이다. 제사장직에 임명되었고(출 28:1), 성막 제작을 감독하였다(출 38;21). 게르손과 므라리 자손의 직무를 감독하기도 하였다(민 4:28,33). 하지만 정통성에 있어서 비느하스 가문보다는 못하였다. 하지만 그의 후손인 ‘엘리’는 대제사장과 사사로서 명성을 날렸다(삼상 1:3). 이다말의 후손인 ‘다니엘’은 다니엘서의 저자와 다른 인물이다.

    핫두스

    ‘다윗’은 이스라엘의 왕인 ‘다윗’으로 추정된다. 따라서 ‘다윗 자손’(‘핫두스’ 포함)은 유다 왕가를 형성하였던 사람들로 보인다. ‘핫두스’는 다윗의 직계 자손으로, 아버지는 ‘스마야’, 할아버지는 ‘스가냐’이고, 스룹바벨의 4대손이다(대상 3:17-22).

    스가랴

    성경에는 ‘스가랴’가 선지자 스가랴, 침례 요한의 아버지 스가랴를 포함하여 30명 정도가 소개되고 있다. 스가랴와 함께한 이들은 150명이었는데, 모두 바벨론 생활을 청산하고 유다로 자원하여 귀환한 이들이다. 이 인원수에는 딸들이 결혼하여 맺은 친척들은 포함되어 있지 않다(이하 인원수 소개는 동일 내용 적용).

    엘여호에내

    ‘바핫모압’은 ‘모압의 통치자’라는 뜻이다. 이 이름은 모압이 유다 지파의 통치 아래 있었던 통일 왕조에서 유래한 것으로 추정된다. 아마도 그는 모압의 일부를 관리하였던 통치자로 여겨진다. ‘엘여호에내’는 그의 후손이다.

    야하시엘의 아들

    ‘스가냐’는 다윗 왕가의 자손이다. 스가냐의 아들이 ‘스마야’이고, 스마야의 아들이 ‘핫두스’이다(대상 3:22). ‘야하시엘’은 스가냐 가문 가운데 한 족장의 아버지이다. 가계 중에서 야하시엘의 아들만 그 이름이 소개되어 있지 않다.

    요나단

    구약 성경에는 ‘요나단’이라는 이름을 가진 사람이 16명이다. 여기에 소개된 ‘요나단’은 ‘아딘 자손’으로, 아딘 자손은 후에 에스라가 제창한 율법 준수 운동에 인을 침으로써 참여하였다(느 7:20;10:16).

    여사야

    ‘여사야’의 조상인 ‘엘람’은 역대상 8장 24절에 언급된 인물로, 그의 자손은 고라 자손(레위인)이었던 것 같다(대상 26:3;느 12:42).

    스바댜

    추측하기 어렵다.

    오바댜

    오바댜의 선조인 ‘요압 자손’은 1차 포로 귀환에 참여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요시뱌

    요시뱌의 선조인 ‘슬로밋’은 ‘바니의 자손인 슬로밋’으로 추정된다(2:10).

    스가랴

    ‘베베 자손’으로, ‘브배 자손’과 동일하다(2:11).

    요하난

    추측하기 어렵다.

    엘리벨렛, 여우엘, 스마야

    이들의 선조인 ‘아도니감 자손’은 그 일부가 이미 1차 포로 귀환 때 스룹바벨과 함께 유다로 귀환하였다(2:13). ‘나중 된 자’는 1차 때 귀환하지 못하고 2차 때 에스라와 함께 올라왔다는 것을 가리킨다.

    우대, 사붓

    이들의 선조인 ‘비그왜’는 엘레판틴 파피루스 사본에서 느헤미야의 뒤를 이은 유다 총독으로 나온 페르시아식 이름이다. 그는 1차 포로 귀환 때 2천여 명을 데리고 왔다(2:14;느 7:19).

      2차 포로 귀환자들의 계보는 1차 때와 비교할 때, 다음과 같은 공통점과 차이점을 보인다(2장과 8장 내용 비교).

    구 분

    특 징

    공통점

    1) 2차 때 열두 가문(요압 제외, 9절)의 이름이 1차 때에도 모두 나온다.

    2) 이것은 다음 두 가지 사실을 가리킨다.

    - 이들 열두 가문은 결국 나중에 재결합한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를

    대표하고 있음을 시사한다.

    - 고레스 왕 때 있었던 최초의 귀환 명령에 유다 백성들이 다양하게

    반응하였고, 결국 개별 가문들이 둘로, 즉 귀환한 자들과 남아 있는

    자들로 나누어졌다는 것을 나타낸다. 귀환한 가문에서 계속 귀환이

    이루어짐으로써 이들이 하나님의 ‘남은 자’를 형성하였다.

    차이점

    1) 1차 때는 일반인들로부터 시작하여, 그 뒤로 제사장들, 레위인들,

    성전 봉사자들과 솔로몬의 종들의 자손이 언급된다.

    2차 때는 제사장들로부터 시작하여, 그 뒤로 핫두스를 비롯하여

    열두 가문의 일반인 출신 지원자들이 언급된다.

    2) 1차 때는 제사장들이 사독의 혈통을 따르고 있지만,

    2차 때는 아론의 혈통을 따르고 있다.

    3) 2차 때는 바핫모압 가문이 예수아의 혈통만 대표하고 요압의 혈통은

    독립적인 가문으로 간주하고 있지만(8:4,9),

    1차 때는 두 혈통 모두 바핫모압에 속한 것으로 간주되고 있다(2:6).

    4) 2차 때는 명단에 남자들만 실려 있지만,

    1차 때는 여자들도 귀환자들의 인원수에 포함되어 있다.

    5) 1차 때는 신분 증명의 수단으로 귀환자들이 속해 있던 가계의 이름을

    사용하여, 회복된 공동체가 이스라엘과 연속성이 있음을 강조하였다.

    2차 때는 귀환자들의 신분을 강조하기 위해 가계 지도자들의 이름을

    첨가하였는데, 이는 1차 때 강조한 연속성의 표현을 현재의 믿음

    상태로 확대하기 위해서였다.

    [질문] 2차 포로 귀환자들의 인원수가 1차 때의 1/10에 불과하였다는 것을 통하여 알 수 있는 사실은 무엇인?

    ​첫째, 귀환의 성격(목적)이 달랐기 때문에 인원수가 적었다고 추측해 볼 수 있다. 1차 때는 성전을 재건하기 위해 귀환하였기 때문에 많은 인원이 필요하였다. 하지만 2차 때는 그 성격이 달랐다. 에스라의 귀환 목적은 앞선 7장에서 밝히고 있는 바와 같이, 유다와 예루살렘의 형편을 살펴서 바로 세우는 데 있었다. 따라서 에스라의 임무는 그 땅의 형편을 살펴 성전 제사를 올바르게 회복하고, 무너진 행정, 사법, 교육 등을 정상화하는 것이었다. 이와 같은 임무는 1차 때와 비교할 때 상대적으로 적은 수로도 가능하다.

      둘째, 1차 때와 비교할 때 신앙의 열정이 많이 식어 있었다는 것을 추측해 볼 수 있다. 1차 때는 성전이 파괴되고 포로로 끌려온 이후 50년이 채 되지 않아 귀환이 이루어졌다(기원전 586년 예루살렘 멸망, 기원전 538년 1차 귀환). 그러므로 그때는 개척 정신이나 예루살렘과 성전 재건에 대한 강한 집념을 소유한 사람들이 상당수 있었을 것이다. 심지어 그들 중에는 포로 1세대들도 있었다. 하지만 2차 때는 성전 파괴와 포로로 끌려온 때로부터 거의 130년이 지나 있었다. 성전이 재건된 시기로만 환산해도 40년 가까이 된다(기원전 516년 성전 재건). 한 세대를 30년으로 잡는다면, 성전 파괴 이후 3-4세대가 사회의 주축을 이루고 있었다. 따라서 1차 포로 귀환 때 돌아간 1-2세대와 달리, 그들에게서 개척 정신이나 예루살렘을 향한 열망 등을 기대하기란 어려웠다. 더구나 그들은 본격적으로 바벨론에서 뿌리를 내리고 있었던 반면, 그들의 눈에 비친 유다와 예루살렘은 아직도 손볼 곳이 많은 변두리 깡촌에 불과하였을 것이다. 이는 역으로 그 와중에도 예루살렘으로 돌아간 사람들이 신앙과 예루살렘에 대한 열정 측면에서 ‘대단하였다’는 반증이 되기도 한다. 그래서 인원수가 적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가치(의미)는 남다를 수밖에 없다.

    2. 레위 자손을 찾은 에스라(15-20절)

    [본문] 15 내가 무리를 아하와로 흐르는 강가에 모으고 거기서 삼 일 동안 장막에 머물며 백성과 제사장들을 살핀즉 그중에 레위 자손이 한 사람도 없는지라 16 이에 모든 족장 곧 엘리에셀과 아리엘과 스마야와 엘라단과 야립과 엘라단과 나단과 스가랴와 므술람을 부르고 또 명철한 사람 요야립과 엘라단을 불러 17 가시뱌 지방으로 보내어 그곳 족장 잇도에게 나아가게 하고 잇도와 그의 형제 곧 가시뱌 지방에 사는 느디님 사람들에게 할 말을 일러 주고 우리 하나님의 성전을 위하여 섬길 자를 데리고 오라 하였더니 18 우리 하나님의 선한 손의 도우심을 입고 그들이 이스라엘의 손자 레위의 아들 말리의 자손 중에서 한 명철한 사람을 데려오고 또 세레뱌와 그의 아들들과 형제 십팔 명과 19 하사뱌와 므라리 자손 중 여사야와 그의 형제와 그의 아들들 이십 명을 데려오고 20 다윗과 방백들이 레위 사람들을 섬기라고 준 느디님 사람 중 성전 일꾼은 이백이십 명이었는데 그들은 모두 지명받은 이들이었더라

    [이해] 아닥사스다 왕 7년(기원전 458년) 첫째 달 초하루에 바벨론을 떠난 에스라는, 아하와로 흐르는 강가로 백성들을 불러모았다(15절). ‘아하와로 흐르는 강가’는 ‘아하와 쪽으로 흐르는 수로’(NIV, at the canal that flows toward Ahava)라는 뜻이다. 이 수로는 적어도 반경 144km 안의 바벨론 근처 유프라테스강에서 사방으로 뻗어 있는 많은 수로 가운데 하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아하와 강’은 그 당시 유대인의 거주 중심지였던 바벨론 북서쪽에 위치한 아하와 성을 가로지르던 유프라테스강의 지류인 ‘이스 강’을 말한다. 에스라가 백성들을 그곳으로 모은 이유는, 백성과 제사장들을 살피기 위해서였다. 본문에는 나와 있지 않지만, 그곳이 유대인이 많이 살고 있던 ‘닙볼’과 가까웠거나 예루살렘으로 향할 때 그 지점을 지나가야 하였기 때문에 그곳으로 모았을 수도 있다. 그는 3일 동안 장막에 머물면서 출발하기 전에 백성들의 인원수, 구성, 상태 등을 점검하고, 또 세밀한 여행 계획을 짰을 것이다. 그는 그렇게 살피는 도중에 레위 자손이 한 사람도 없는 것을 발견하였다. 레위인들은 제사장은 아니지만, 성전 제사를 수행하는 데 중요한 임무를 맡은 성전 관리인들이다. 따라서 그들이 한 명도 없었다는 것은 ‘성전을 위하는’ 귀환 목적을 이루는 데에도 합치하지 않았다. 에스라에게 그 사실은 낭패가 아닐 수 없었다.

      이에 에스라는 모든 족장과 명철한 사람들을 불러 그들을 가시뱌 지방으로 보냈다(16절). 원문에는 ‘모든’이라는 말이 없다. ‘족장’도 적절하지 못한 번역이다. ‘족장’은 원래 ‘머리’를 지칭하는 명사에서 파생된 것으로, 이곳에서는 비유적으로 사용되어 ‘지도자들’(NASB, leading men;NIV, who were leaders), ‘주요 인물들’(KJV, chief men), ‘지도급 인사들’(표준새번역성경)을 가리킨다. 지도자들인 엘리에셀, 아리엘, 스마야, 엘라단, 야립, 엘라단, 나단, 스가랴, 므술람이 누구인지는 알기 어렵다. 다만 그들이 가족들의 대표가 아니었던 것은 분명하다(2-14절). 그들은 아마도 레위인들을 데려오는 데 어떤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위치에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명철한 사람들’은 분별력이나 이해력을 가진 ‘율법 교사’를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 명철한 사람인 요야립과 엘라단도 누구인지 알기 어렵다. ‘가시뱌 지방’의 정확한 위치는 알 수 없지만, 에스라 일행이 첫째 달 12일에 아하와 강을 떠났다는 점을 고려해 볼 때 그곳으로부터 2~3일이면 왕복할 수 있는 가까운 곳에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그곳에는 족장 잇도와 그의 형제 즉 느디님 사람들이 살고 있었다(17절). ‘잇도’는 유대인 행정 관리나 페르시아 왕에 의해 가시뱌 지방에서 자기 동족들을 통솔하는 권한을 가지고 있었던 인물로 추정된다.

      가시뱌 지방으로 간 사람들은, 잇도와 느디님 사람들에게 에스라가 일러 준 대로 이야기하여 하나님의 성전을 위하여 섬길 자를 데리고 왔다(17-20절). 그들이 데려온 사람들은 다음과 같다. 먼저 레위 자손들은 말리의 자손으로 명철한 세레뱌와 그의 아들들 및 형제들(친족들) 18명, 하사뱌와 므라리 자손 가운데 여사야와 그의 형제들 및 아들들 20명으로 총 40명이다. ‘말리’는 레위의 셋째 아들인 ‘므라리’의 맏아들로, 성막 기구를 책임지던 가족의 조상이다(민 3:33-37;4;29-33). 다른 곳에서는 ‘마흘리’라는 이름으로 나온다(출 6:19;대상 23;21;24:26). 저자는 말리를 ‘이스라엘의 손자 레위의 아들’로 소개하고 있는데, 이는 (1) 본서와 함께 에스라가 기록한 역대기서의 족보와 조화를 이루고(대상 2:1), (2) 그 이름이 갖는 특별한 의미(창 32:24-29)를 상기함으로써 본문에서의 성과가 철저히 하나님의 축복에 의해 이루어졌음을 강조하기 위해서이다. ‘레위의 아들’은 실제로는 ‘레위의 손자’이다(민 3:20). 한편 여기에서 ‘므라리 자손’은 ‘말리’의 후손을 뺀, 말리의 동생 ‘무시’의 후손을 말한다(대상 6:19).

      가시뱌 지방으로 간 사람들은 느디님 사람 가운데 성전 일꾼 220명도 함께 데리고 왔다(20절). ‘느디님 사람들’은 다윗과 방백들이 레위인들을 섬기라고 준 이들이다. 성경에는 다윗과 방백들이 느디님 사람들을 레위인들에게 주었다는 직접적인 기록이 없다. 다윗 왕이 성전 봉사를 담당할 레위인들의 직무를 배정하면서 느디님 사람들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하고 있지 않지만(대상 23-26장), 레위인들에게 느디님 사람들을 배정하였던 것으로 추측된다. 레위인들의 인원수가 매우 적었기 때문에, 성전 일을 제대로 수행하기 위해서 이들 느디님 사람들의 존재는 필수적이었다. ‘그들은 모두 지명받은 이들이었다’는 말은, ‘그들의 이름이 모두 기록되었다’는 의미이다.

      한편 레위 자손들과 느디님 사람들을 데려올 수 있었던 이유로, 저자는 ‘하나님의 선한 손의 도우심’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밝히고 있다(18절). 이는 고레스 왕과 아닥사스다 왕의 마음을 감동하게 하신 분이 하나님이셨듯이(1:1;7:6), 이번 가비샤 지방의 족장 잇도와 느디님 사람들을 설득하여 그들을 데려올 수 있었던 것도 그분의 도움에서 비롯되었다는 점을 강조한 것이다.

    [질문] 레위 자손은 처음에는 아하와 강가로 모이지 않았다. 그 이유는 무엇이었다고 생각하는가?

    레위인들이 모이지 않았던 사건의 전조는, 스룹바벨의 인도 아래 이루어진 1차 귀환 때부터 발견할 수 있다. 그때 제사장들은 4,289명이었지만 레위인들은 341명에 불과하였다. 그런데 2차 때에는 아예 한 명도 모이지 않았다. 이는 성전 중심의 이스라엘 공동체를 재건하려는 그들에게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 없었다. 이러한 일이 발생한 이유는 그들이 바벨론에 정착하면서 다른 직군(일)으로 전환하였기 때문으로 보인다. 어쩌면 바벨론에서 금융업으로 부유하게 된 유대인들에 속하였을지도 모른다. 더구나 땅 소유가 금지되었던 그들에게 그런 제한도 주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한 조건은 예루살렘에 귀환하여 맡게 될 성전 봉사 직무와 비교 대상이 될 수 없었다. 과중한 업무와 낮은 보상은 전혀 매력적이지 않았다. 그들의 낮은 신앙의 열정 또한 모이지 않은 이유에 한몫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3. 에스라의 금식 선포와 간구(21-23절)

    [본문] 21 그때에 내가 아하와 강가에서 금식을 선포하고 우리 하나님 앞에서 스스로 겸비하여 우리와 우리 어린아이와 모든 소유를 위하여 평탄한 길을 그에게 간구하였으니 22 이는 우리가 전에 왕에게 아뢰기를 우리 하나님의 손은 자기를 찾는 모든 자에게 선을 베푸시고 자기를 배반하는 모든 자에게는 권능과 진노를 내리신다 하였으므로 길에서 적군을 막고 우리를 도울 보병과 마병을 왕에게 구하기를 부끄러워 하였음이라 23 그러므로 우리가 이를 위하여 금식하며 우리 하나님께 간구하였더니 그의 응낙하심을 입었느니라

    [이해] 에스라는 3일 동안 아하와 강가에 마련된 진중에 머물면서 출발 준비를 모두 마쳤다. 이제 발걸음을 옮기기만 하면 된다. 그렇지만 그들 앞에는 또 다른 위험이 도사리고 있었다. 그것은 바로 대적들의 위협이었다(22절). 여기에서 ‘대적’은 ‘도적’, ‘노상강도’를 가리킨다. 에스라에게는 이미 왕과 방백들, 그리고 바벨론의 모든 지방에서 얻은 수많은 금은과 귀한 그릇들이 주어져 있었다. 그것들은 대적의 먹잇감으로 너무 매력적이었다. 또 군대의 호위를 받지 못한 민간인들은 붙잡아 자신들의 노예로 삼거나 다른 사람에게 노예로 팔 수도 있는 손쉬운 먹잇감이었다. 더구나 그 여정이 하루 이틀도 아니고 4개월이나 되는 머나먼 길이었기 때문에, 더욱더 위험하기 짝이 없었다.

      ​에스라는 이것을 비롯하여 백성들의 안전을 보장하기 위하여 왕에게 호위병(보병과 마병)을 요청할 수도 있었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 이유는 그가 이전에 왕에게 이렇게 아뢰었기 때문이다. “우리 하나님의 손은 자기를 찾는 모든 자에게 선을 베푸시고 자기를 배반하는 모든 자에게는 권능과 진노를 내리십니다.” 그 상황에서 만약 에스라가 왕에게 호위병을 요청한다면 이는 하나님의 얼굴에 먹칠하게 되는 꼴이 될 수밖에 없다. 그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더구나 에스라는 종교적인 사명을 띠고 가는 제사장이기 때문에, 돌보시는 하나님을 믿지 않고 인간의 손에 의지하였다는 오해를 받을 수도 있다. 바로 이런 점 때문에 에스라는 호위병을 요청하는 통상적인 방법을 선택하여 다른 사람들에게 자신이 하나님의 능력을 의심하였다는 오해를 남기기보다 하나님의 보호하심에 전적으로 의지하는 것이 훨씬 낫다고 생각하였다. 그래서 그는 금식을 선포하고 하나님 앞에서 겸손하게, 그렇지만 간절하게 백성들의 안전과 모든 소유의 보존을 위하여 평탄한 길을 내달라고 구하였다(21절). 그 일은 에스라 혼자 하지 않고 우리, 즉 모두가 함께하였다. 그 결과 하나님이 응답하셨다(23절). 응답에 대한 구체적인 내용이 31절에 소개되고 있다.

    [질문] 에스라는 귀환 때 왕에게 호위병을 요청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도우심만을 의지하였다. 하지만 3차 귀환을 주도한 느헤미야는 페르시아 군대의 호위를 받으면서 돌아왔다(느 2:9). 이런 사실은 두 사람 사이에 믿음의 경중이 달랐다는 문제 제기도 해 볼 수 있다. 어떻게 생각하는가?

    ​어떻게 보면 에스라의 믿음이 더 우월하였다고 오해할 수도 있다. 그렇지만 우리가 간과해서는 안 될 점이 있다. 느헤미야는 왕에게 호위병을 요청하지 않았다. 느헤미야와 함께한 백성들에게 호위병이 붙여진 것은 순수하게 왕의 호의에서 비롯되었다. 느헤미야가 왕의 호의를 거절하지 않았던 이유는, 하나님의 도우심을 믿지 못하였기 때문이 아니다. 그는 그 호의를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간주하였다. 더구나 그는 정치적인 권한을 가진 총독의 신분으로 예루살렘으로 돌아갔기 때문에 왕이 아끼는 신하에게 군사적 호의를 베푸는 것은 당연한 일이기도 하였다.

      하나님의 역사는 다양하다. 그분은 이적과 같은 비상한 방법뿐만 아니라 정상적인 방법을 통해서도 자기 백성들을 돌보신다. 그분은 일반적인 섭리 가운데 여러 방법을 사용하시지만(사 55:10-11;호 2:21-22;행 27:31,44), 또한 그분의 기쁘신 뜻에 따라 자유롭게 그러한 수단들 없이(욥 34:10;호 1:7;마 4:4), 그것을 초월하여(롬 4:19-21), 그리고 그것들을 역행하여(왕하 6:6;단 3:27) 역사하시기도 한다. 그런데도 많은 그리스도인은 이적과 같은 방법을 체험하는 것만이 영적이고, 일반적인 체험을 세속적인 것으로 단정해 버리는 이원론에 빠지곤 한다. 그렇지만 하나님이 우리의 삶 전체를 주관하시는 분이라는 사실을 결코 잊어서는 안 된다. 우리가 하나님의 비상한 방법과 일반적인 방법을 구분하는 순간, 우리의 삶에서 일어나는 대부분의 일에서 하나님을 배제하는 결과를 낳게 된다. 그러한 태도는 불신에 대한 또 다른 표현이다.

    4. 선택한 제사장들에게 성전 예물 전달(24-절)

    [본문] 24 그때에 내가 제사장의 우두머리들 중 열두 명 곧 세레뱌와 하사뱌와 그의 형제 열 명을 따로 세우고 25 그들에게 왕과 모사들과 방백들과 또 그곳에 있는 이스라엘 무리가 우리 하나님의 성전을 위하여 드린 은과 금과 그릇들을 달아서 주었으니 26 내가 달아서 그들 손에 준 것은 은이 육백오십 달란트요 은그릇이 백 달란트요 금이 백 달란트며 27 또 금잔이 스무 개라 그 무게는 천 다릭이요 또 아름답고 빛나 금같이 보배로운 놋그릇이 두 개라 28 내가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는 여호와께 거룩한 자요 이 그릇들도 거룩하고 그 은과 금은 너희 조상들의 하나님 여호와께 즐거이 드린 예물이니 29 너희는 예루살렘 여호와의 성전 골방에 이르러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의 우두머리들과 이스라엘의 족장들 앞에서 이 그릇을 달기까지 삼가 지키라 30 이에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이 은과 금과 그릇을 예루살렘 우리 하나님의 성전으로 가져가려 하여 그 무게대로 받으니라

    [이해] 성전 봉사자인 레위인들과 느디님 사람들을 데려오고 하나님께 금식 기도를 드렸던 에스라는, 제사장의 지도자들 가운데 열두 명 즉 세레뱌와 하사뱌와 그들의 형제 열 명을 따로 세우고 그들에게 성전을 위하여 드린 은과 금과 그릇들을 달아서 주었다(24-25절). ‘세레뱌’는 레위의 아들인 말리의 자손이다. ‘하사뱌’도 레위인이다. 그들 모두 에스라가 가비샤 지방에서 데려온 레위인이다. 따라서 그들을 ‘제사장의 우두머리 중 따로 세운 열두 명’과 동격으로 처리한 개역개정성경의 번역에는 문제가 있다. 그에 비해 KJV에서는 그 내용을 이렇게 번역하고 있다. “Then I separated twelve of chief of the priests, Sherebiah, Hashabiah and ten of their brethren with them,”(나는 제사장들 가운데 열두 명과 세레뱌와 하사뱌와 그들의 형제 열 명을 그들과 구분하고,). NIV도 동일한 내용으로 번역하고 있다. 공동번역성경은 더욱 직접적으로 둘을 구분하여 번역하고 있다. “나는 제사장들 가운데서 으뜸가는 사람 열둘을 뽑고 세레비야와 하사비야와 그들의 일가 십 명을 뽑아 세우고는”. 이와 같은 번역에 비추어 볼 때, 열두 명의 레위인들이 열두 명의 제사장들에게 배속되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에스라는 그들을 따로 세웠는데, 여기에서 ‘따로 세우다’는 말은 ‘나누어 따로 떼어놓다’, ‘구별하여 선발하다’는 뜻이다. 이는 합해져 있는 둘을 완전히 갈라 구분하는 것을 가리킨다(창 1;14;레 10;10;신 10:8;대상 25:1). 특히 이 말은 제의적(祭儀的)인 맥락에서 주로 사용되었다. 에스라가 제사장들과 레위인들을 따로 세운 이유는, 하나님의 성전을 위하여 드린 은과 금과 그릇들을 맡기기 위해서였다. 제사장들은 거룩한 물건을 취급하는 책임자이고, 레위인들은 그것을 운반하는 등 부수적인 업무를 담당하는 책임자이다. 에스라는 학자이자 제사장이었기 때문에, 이러한 일들을 익히 알고 있었고, 또한 그대로 시행하고 있었다(7:10). 25절에는 그들에게 맡겨진 은과 금과 그릇들이 왕과 모사들과 방백들뿐만 아니라 ‘이스라엘 무리’에 의해서도 드려졌다는 정보가 들어 있다. 이 정보는 7장에서 소개한 아닥사스다 왕의 조서에는 들어 있지 않은 내용이다. 하지만 이들이 구체적으로 누구였고, 또 예물을 얼마만큼 드렸는지는 알 수 없다.

      에스라가 그들에게 무게를 달아 넘겨 준 것은 은 650달란트, 은그릇 100달란트, 금 100달란트, 금잔 20개(1,000다릭의 무게), 그리고 아름답고 빛나 금같이 보배로운 놋그릇이 2개였다. ‘은 650달란트’는 현재 시세로 약 160억 원에 해당하는 금액이다(1달란트는 34kg, 1kg은 35.27온스, 1온스는 17.2달러, 1달러는 1,203원, 19.10.02. 기준). ‘금 100달란트’는 현재 시세로 약 1,944억 원에 해당한다(1달란트는 34kg, 1kg은 57,172,200원, 19.10.02. 기준). 1,000다릭 무게의 ‘금잔 20개’는 8.6kg에 해당한다. 시대마다 달란트의 무게가 다르고 은과 금의 가치도 제각각이었기 때문에, 그 가치를 이처럼 현재 가치로 환산하는 것은 무리가 있지만, 설령 그렇더라도 2차 귀환 때 예루살렘으로 가지고 갔던 예물들이 실로 막대하였다는 점만큼은 분명하다. 그런데 앞선 ‘은그릇’과 ‘금잔’에 대해서는 간략하게 서술한 데 비해, ‘놋그릇’에 대해서는 ‘아름답고 빛나 금같이 보배로운’이라는 수식어를 붙여 소상하게 소개하고 있다. 은그릇이나 금잔보다 못한 놋그릇을 이렇게 화려하게 소개하는 것은 대단히 특이한 점이다. 한글개역개정성경은 이 그릇의 재료를 단순하게 ‘놋’으로 번역하고 있는데, 이는 지금의 놋이나 구리와는 다른 특별한 성분의 합금으로 보인다. 이 합금은 로마 시대에 ‘오리찰쿰’(orichalcum)으로 불리던 청동의 일종으로 추정되는데, 당시 사람들에게는 매우 특이한 금속의 한 종류였던 것으로 여겨진다. 따라서 이것은 그 당시 금보다 희소가치가 더 컸을 것이다. 이들 그릇의 모양이나 용도에 대해서는 본문에서 구체적인 정보를 밝히고 있지 않아 알 길이 없다. 다만 제사장이 관리한 은그릇이나 금잔처럼 성전 예배와 관련하여 사용되었거나 아니면 하나님께 드려진 예물로 성전 보물 보관소에 보관되었던 것으로 추정해 볼 수는 있다.

      ​여호와께 즐거이 드려진 예물을 따로 세운 제사장들과 레위인들에게 넘겨 준 에스라는, 그들에게 성전 골방에 이르러 제사장들과 레위인의 우두머리들과 이스라엘의 족장들 앞에서 그것의 무게를 다시 달기까지 삼가 지키라고 당부하였다(28-29절). ‘성전 골방’은 성전의 건물 양편에 있는 방들이다. 한쪽에는 제사장들이 쓰는 방이, 그 반대편에는 창고가 있었다(느 13:5). 여기에서는 성전 창고를 말한다. ‘삼가 지키라’는 말은, 문자적으로 ‘깨어라, 그리고 지키라’는 의미이다. 이러한 명령은 도둑질을 당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도둑질은 여행하는 도중 노상강도들에 의해 일어날 수도 있고, 내부적으로는 탐심에 사로잡힌 백성에 의해 발생할 수도 있었다. 그들에게 이러한 명령을 내린 이유는, 그것을 지키는 그들이 여호와 앞에서 구분된 거룩한 사람들이고, 그 예물들도 여호와께 즐거이 드린, 거룩한 것들이기 때문이었다. 여기에서 ‘거룩한’의 수식 대상인 제사장들, 레위인들, 예물은 본래 다른 사람들이나 사물들과 질적으로 다르거나 본질적인 차이가 있어서 거룩한 것이 아니다. 그것들이 거룩한 이유는 특별한 목적을 위해 따로 구별되어 사용되거나 준비되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특별한 목적은 여호와를 향한 것이다. 아울러 이러한 거룩의 개념은 거룩하신 하나님이 거룩하게 하셨다는 의미까지 함축하고 있다. 에스라는 그들에게 자신들이 이처럼 거룩한 일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상기시킴으로써, 긴장감을 가지고 맡은 바 직무를 잘 감당하도록 독려하였던 것이다. 제사장들과 레위인들은 에스라의 명령에 따라 은과 금과 그릇을 성전으로 가져가기 위하여 그 무게대로 받았다(30절). ‘무게대로 받았다’는 말은, 무게를 단 후에 그 무게를 서로 확인하고 받았다는 뜻이다.

    [질문] 에스라가 성전 예물을 관리할 때 보인 방법상의 특징은 무엇인가?

    첫째, 자신이 직접 관리하지 않고 다른 사람들에게 위임하였다는 점이다. 에스라는 제사장이었기 때문에 직접 관리하여도 문제가 되지 않는다. 직접 관리하면 이를 통해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도 있었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다. 따라서 이는 에스라가 이런 방법으로 자신의 권위(권력)를 행사하지 않았다는 증거가 된다. 에스라는 그것을 다른 사람들에게 위임함으로써 그보다 중요한 일, 즉 백성들의 형편을 살피거나 안전하게 인도하는 일에만 집중할 수 있는 효율성을 극대화하였다.

      둘째, 예물을 맡을 만한 사람들에게 위임하였다는 점이다. 이는 당연한 일이지만, 당연한 일이 어그러지는 경우가 많았던 역사를 고려해 볼 때 매우 중요한 일이기도 하였다. 예물은 그 목적이 하나님을 향하고 있으므로, 거룩한 것이다. 따라서 그것을 맡아야 하는 사람들도 거룩하게 구분된 사람들이 선발되어야 하는 것이 마땅하다.

      셋째, 예물을 대충 맡기지 않고 무게를 단 후에 맡기고, 또 예루살렘에 도착하여 그것들을 다시 성전 골방에 보관할 때에도 모든 것을 세고 달아 보고 무게의 총량을 기록하였다는 점이다(30, 34절). 이것을 통하여 에스라가 예물을 얼마나 철저히 관리하였는가를 알 수 있다. 이러한 관리 방법(원칙)은 현대 교회가 재정을 어떻게 관리해야 하는가에 대한 답을 제시하고 있다.

    5. 예루살렘에 도착하여 한 일(31-36절)

    [본문] 31 첫째 달 십이 일에 우리가 아하와 강을 떠나 예루살렘으로 갈새 우리 하나님의 손이 우리를 도우사 대적과 길에 매복한 자의 손에서 건지신지라 32 이에 예루살렘에 이르러 거기서 3일 동안 머물고 33 제4일에 우리 하나님의 성전에서 은과 금과 그릇을 달아서 제사장 우리아의 아들 므레못의 손에 넘기니 비느하스의 아들 엘르아살과 레위 사람 예수아의 아들 요사밧과 빈누이의 아들 노아댜가 함께 있어 34 모든 것을 다 세고 달아 보고 그 무게의 총량을 그때에 기록하였느니라 35 사로잡혔던 자의 자손 곧 이방에서 돌아온 자들이 이스라엘의 하나님께 번제를 드렸는데 이스라엘 전체를 위한 수송아지가 열두 마리요 또 숫양이 아흔여섯 마리요 어린 양이 일흔일곱 마리요 또 속죄제의 숫염소가 열두 마리니 모두 여호와께 드린 번제물이라 36 무리가 또 왕의 조서를 왕의 총독들과 유브라데 강 건너편 총독들에게 넘겨 주매 그들이 백성과 하나님의 성전을 도왔느니라

    [이해] 아하와 강가에서 레위인들의 부재 문제를 해결하고 예물을 제사장들과 레위인들에게 위임한 에스라는, 동참한 백성들과 함께 첫째 달 12일에 아하와 강을 떠나 예루살렘으로 갔다. 그 여정에 하나님의 손길이 그들을 도와 대적들과 길에 매복한 자들의 손에서 건지셨다(31절). 그들을 안전하게 지키신 하나님의 손은, 앞서 금식을 선포하고 간절히 기도하였던 에스라와 백성들에 대한 하나님의 응낙과 직접적으로 관련되어 있다(21-23절). 또한 ‘하나님은 기도와 간구에 귀를 기울이실 뿐만 아니라 진실과 의로 응답하시는 분’이라는 증거이기도 하다(시 143:1).

      예루살렘에 도착한 에스라 일행은 그곳에서 3일 동안 머문 후에, (1) 제4일에 성전에서 은과 금과 그릇들을 달아서 우리아의 아들 므레못에게 넘겨주고(33-34절), (2) 번제를 드렸다(35절). 또 (3) 왕의 조서를 왕의 총독들과 유프라테스강 건너편 총독들에게 넘겨 주었고, 그들은 백성과 하나님의 성전을 도왔다(36절). 그들이 세 가지의 일을 하기 전에 3일 동안 머문 이유는, 휴식을 취하거나 거주할 곳을 찾기 위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머물다’는 단어가 ‘안식하다’(NIV, rest), ‘거주하다“(KJV, adobe)는 뜻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안식일을 지키기 위해 3일 동안 기다렸다는 견해도 있다. 즉 희년 달력(Jubilee calendar)에 따르면 그들이 도착한 때가 금요일이었고 그날 저녁부터 안식일이 이어지기 때문에, 위 세 가지 일을 하기 위하여 3일 동안 머물렀다는 것이다.

      가져온 예물을 우리아의 아들 므레못에게 넘겨줄 때 비느하스의 아들 엘르아살과 레위 사람 예수아의 아들 요사밧과 빈누이의 아들 노아댜가 함께 있었다는 사실은, 그 일이 여러 사람의 공증(公證)에 따라, 즉 므레못은 물품 인수의 실질적 책임자로, 엘르아살과 요사밧과 노아댜는 입회인으로 참여하여 객관적으로 이루어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므레못’은 성벽의 두 번째 구간을 중수하였고 언약 준수를 서약하고 인을 쳤던 학고스의 손자로, 우리아의 아들이다. 그는 대제사장어거나 성전 보고의 관리인이었을 것이다. ‘학고스 자손’은 1차 귀환 때 자신들의 혈통을 증명하지 못해 제사장 업무 수행이 유보되었던 사람들이다(2:61). 그런데 학고스의 손자인 므레못이 물품 인수를 책임지고 있는 모습을 볼 때, 그들이 그 후에 자신들의 혈통을 증명하였다는 것을 추정해 볼 수 있다. ‘엘르아살’은 본 구절 바로 앞에 ‘그와 함께’라는 말이 있는 것을 보아 므레못처럼 제사장이었던 것으로 추정된다(느 12:41-42). ‘요사밧’은 느헤미야에서 율법책의 뜻을 해석하여 백성을 깨닫게 하는 역할을 하였고(느 8:7), 성전 바깥일을 맡았던 자로(느 11:16), 에스라서에서는 이방 여인을 아내로 맞이하였다가 하나님의 교훈에 따라 다시 아내와 소생을 모두 내보내기로 언약하였던 자들 가운데 한 사람으로 소개되고 있다(10:3,5,23). ‘노아댜’는 어떤 인물인지 알 수 없다. 그의 아버지 ‘빈누이’는 예루살렘 성벽의 한 부분을 중수한 책임자였다(느 3:24). 본문은 예물을 가져온 사람들과 그것을 받은 사람들이 인수인계하는 모습을 매우 상세하게 소개하고 있다. 숫자를 세고 저울로 그 무게를 달았고, 또 그것들을 모두 기록으로 남겼다. ‘기록으로 모두 남긴’ 목적은, 성전 재산의 도난이나 횡령을 방지하기 위한 것이다. 어쩌면 에스라는 기록 내용을 아닥사스다 왕에게 보내 모든 물품이 제대로 인계되었음을 증명하였을 수도 있다. 이것을 통해 예물을 인수인계하는 과정이 대충 하지 않고 철저하면서도 구체적으로 이루어졌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사로잡혔던 자들의 자손 곧 이방 바벨론에서 돌아온 자들은, 예물을 인계한 후에 하나님께 번제를 드렸다(35절). 에스라 일행이 예루살렘에 무사히 도착하여 번제를 드린 행위는, 그 여행을 안전하게 마칠 수 있도록 인도해 주신 하나님께 대한 감사의 표현이기 때문에 올바른 일이었다. 그와 동시에 그 행위는 하나님의 백성으로 구성된 그들이 새로운 출발을 다짐하는 표현이기도 하였다. 어쩌면 몇몇 제물들을 하나님께 바치라는 아닥사스다 왕의 명령(7:17)을 온전하게 수행하였다는 표현일 수도 있다. 그들이 이스라엘 전체를 위해 드린 번제물은 수송아지 12마리, 숫양 96마리, 어린 양 77마리, 그리고 속죄제의 숫염소 12마리였다. ‘수송아지 12마리’는 열두 지파를 상징하는 숫자이다(6:17). ‘숫양 96마리’는 개별 지파당 6마리씩에 해당하는 숫자이다. ‘속죄제의 숫염소 12마리’는 불결함을 깨끗하게 하기 위한 것으로, 성전 봉헌식 때 이스라엘 백성들이 드렸던 속죄제 제물과 똑같은 종류와 숫자이다(6:17). 속죄제를 통해 그들은 먼저 바벨론에서의 신실하지 못한 삶을 회개하고 그 죄 사함을 받았을 것이다. 또 기나긴 여정에서 필연적으로 불결하게 된 것들도 정결하게 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에스라 일행이 예루살렘에 도착한 후 세 번째로 한 일은 왕의 조서를 총독들에게 넘겨 주는 것이었다(36절). ‘왕의 조서’는 에스라와 그 일행을 도우라는 명령이 담겨 있었다(7:20-26). ‘왕의 총독들’은 상당히 광활한 정복지를 왕을 대신하여 다스리는 관리를 말한다. 당시 유프라테스강 서쪽을 다스리는 총독은 한 명이었는데, 본문에는 ‘총독들’이라고 복수로 표현되어 있어 문제시될 수 있다. 이것은 아마도 그 지역을 애굽까지 확장하였기 때문으로 보인다. 당시 팔레스타인과 지리적으로 매우 가까운 애굽에는 두 명이 총독이 있었다. ‘유프라테스강 건너편 총독들’은 앞에 소개한 ‘왕의 총독들’ 수하에 있던, 비교적 작은 지역을 다스리던 지방 관리로 보인다(6:6). 왕의 조서를 받은 그들은, 백성과 하나님의 성전을 도왔다. 그들은 물질 공급 등을 통하여 성전 예배가 권위를 회복하고 원활하게 지속될 수 있도록 도왔을 것이다. 요세푸스는 이 사실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언급하고 있다. “그들(총독들)은 그(왕)가 명령한 것을 이행하지 않을 수 없었으므로 우리 민족을 존중하였고, 그들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도와주었다.”(Antiquities XI, v. 2. 138)

    [질문] 예루살렘으로 돌아온 에스라 일행이 행한 모습을 통해 우리가 배울 점은 무엇인가?

    첫째, 3일 동안 머물렀다는 점이다. 그들에게 있어서 3일은 먼 여정으로 쌓인 피로를 해소하는 시간이었고, 희년 달력(Jubilee calendar)에 따르면 그들이 도착한 때가 금요일이었기 때문에 안식일을 지키는 시간이었을 수도 있다. 그들은 이어지는 일들을 처리하기 위해 서두르지 않고, 3일 동안의 시간을 통해 휴식을 충분히 취하고 안식일도 지켰다. 현대 사회의 특징 중의 하나는 ‘서두름’에 있고, 유독 한국인들은 그러한 특징에 노출되어 있다. 그러한 우리에게 3일 동안 머무르는 시간은 매우 중요하다.

      둘째, 성전을 위한 예물을 정확하고 철저하게 인수인계하였다는 점이다. 그릇들의 숫자를 하나하나 세고, 은과 금의 무게도 저울에 달았다. 또 그렇게 세고 저울질한 내용을 기록으로 남겼다. 그 과정은 비밀스럽게 이루어지지 않았고, 여러 명이 함께함으로써 공증도 획득하였다. 그들의 이런 모습은 우리에게 교회를 운영할 때, 특히 재정 문제를 처리할 때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대한 답이 된다.

      셋째, 번제와 속죄제를 드렸다는 점이다. ‘번제’는 제물을 불에 태워서 그 향기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리는 제사이다. 또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회복하고 우리의 전 인격을 하나님께 바치는 것이 번제이다. ‘속죄제’는 죄를 없애기 위하여 하나님께 드리는 희생 제사이다. 에스라 일행은 여정을 안전하게 마칠 수 있도록 도우신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기 위해 번제를 드렸고, 여정 가운데 생긴 부정을 없애기 위해 속죄제를 드렸다. 그들과 마찬가지로 현대의 우리도 신앙의 여정 가운데 있다. 그 가운데 하나님의 선하신 인도가 있고, 반대로 우리의 부정도 묻어 있다. 그 부정을 예수님이 이미 대속해 주셨지만, 그렇다고 그 부정에 대한 우리의 회개까지 다 걷어가신 것은 아니다. 따라서 하나님을 향한 감사와 회개는 계속 표현되어야 한다.

      넷째, 왕의 조서를 총독들에게 넘겨 주고 그들의 도움을 받았다는 점이다. 그들의 이런 점은 우리의 대인 관계에 중요한 시사점을 준다. 1차 귀환 때에는 고레스 왕이 내린 조서(칙령)를 총독들에게 넘겨 주었다는 기록이 없다. 그로 인해 주변 민족들의 방해가 있었고, 그들의 뇌물을 받은 관리들도 성전 건축을 방해하였다. 하지만 2차 귀환 때에는 아닥사스다 왕의 조서를 총독들에게 전달함으로써 그들의 도움을 받을 수 있었다. 우리는 이적만 하나님의 응답으로 해석하려는 경향이 있다. 그런 경향은 이적이 아닌 다른 도움에 대해서는 하나님의 응답으로 해석하지 않는 오류를 낳는다. 그 결과 우리가 지닌 믿음의 영역은 상당히 축소되고 세상 사람과의 관계도 소홀히 하는 경향이 있다. 에스라는 왕의 조서를 하나님의 손길과 단절시키지 않았다. 그는 그것을 하나님의 선하신 손이 적극적으로 도우신 결과로 보았다. 그래서 그 조서를 적극적으로 활용하였다. 교회 공동체 밖의 사람들에게 도움을 받는 것은 나쁜 것이 아니다. 그것을 통하여 하나님의 선을 이룰 수 있으므로, 오히려 바람직하기도 하다. 1차 귀환 때 이스라엘 백성들을 도운 이들이 이방인들이었다. 2차 귀환 때에도 왕과 방백들의 도움이 있었고, 귀환한 후에도 총독들의 도움이 있었다. 하나님은 그것을 통해 자신의 선을 이루셨고, 지금도 우리를 통해 그 선을 이루고 계신다.

    II. 메시지

    본문: 스 8:15-23

    제목: 에스라의 귀환 준비

    15 내가 무리를 아하와로 흐르는 강가에 모으고 거기서 삼 일 동안 장막에 머물며 백성과 제사장들을 살핀즉 그중에 레위 자손이 한 사람도 없는지라 16 이에 모든 족장 곧 엘리에셀과 아리엘과 스마야와 엘라단과 야립과 엘라단과 나단과 스가랴와 므술람을 부르고 또 명철한 사람 요야립과 엘라단을 불러 17 가시뱌 지방으로 보내어 그곳 족장 잇도에게 나아가게 하고 잇도와 그의 형제 곧 가시뱌 지방에 사는 느디님 사람들에게 할 말을 일러 주고 우리 하나님의 성전을 위하여 섬길 자를 데리고 오라 하였더니 18 우리 하나님의 선한 손의 도우심을 입고 그들이 이스라엘의 손자 레위의 아들 말리의 자손 중에서 한 명철한 사람을 데려오고 또 세레뱌와 그의 아들들과 형제 십팔 명과 19 하사뱌와 므라리 자손 중 여사야와 그의 형제와 그의 아들들 이십 명을 데려오고 20 다윗과 방백들이 레위 사람들을 섬기라고 준 느디님 사람 중 성전 일꾼은 이백이십 명이었는데 그들은 모두 지명받은 이들이었더라 21 그때에 내가 아하와 강가에서 금식을 선포하고 우리 하나님 앞에서 스스로 겸비하여 우리와 우리 어린아이와 모든 소유를 위하여 평탄한 길을 그에게 간구하였으니 22 이는 우리가 전에 왕에게 아뢰기를 우리 하나님의 손은 자기를 찾는 모든 자에게 선을 베푸시고 자기를 배반하는 모든 자에게는 권능과 진노를 내리신다 하였으므로 길에서 적군을 막고 우리를 도울 보병과 마병을 왕에게 구하기를 부끄러워 하였음이라 23 그러므로 우리가 이를 위하여 금식하며 우리 하나님께 간구하였더니 그의 응낙하심을 입었느니라

    1. 출발 전에 모인 백성들

    페르시아 제국의 아닥사스다 왕 7년(기원전 458년) 첫째 달 초하루에 바벨론을 떠난 에스라는, 다섯째 달 초하루에 예루살렘에 도착합니다. 에스라와 함께한 여정에는 남자만 1,500명이 되었습니다. 부녀자와 어린아이까지 포함하면 5,000명 정도 되었을 것입니다. 이 사건이 바로 이스라엘의 2차 포로 귀환입니다. 그 숫자는 1차 포로 귀환 때와 비교할 때 1/10에 불과하였지만, 그들의 임무는 막중하였습니다. 아닥사스다 왕은 에스라에게 다음과 같은 세 가지 사명을 주었습니다. 첫째, 유다와 예루살렘의 형편을 살피라. 둘째, 성전을 위하여 섬기라. 셋째, 올바른 법관과 재판관을 세워서 사회 정의를 실현하라. 따라서 그들은 에스라에게 주어진 사명을 함께 이루어갈 사람들이었습니다.

      에스라는 예루살렘으로 출발하기 전에 사람들을 아하와 강가로 모았습니다. 그런데 이상한 점은 함께 가기로 한 백성들이 다 모였으면 곧바로 출발해야 하는데, 그렇게 하지 않고 거기에서 3일 동안이나 머물렀다는 것입니다. 에스라는 왜 3일 동안이나 그곳에서 머물렀던 것일까요? 이 질문에 대한 정답이 오늘 우리가 나눌 내용입니다. 정답부터 말씀드리자면, 에스라는 그동안 여행에 필요한 모든 사항을 준비하기 위해 즉시 출발하지 않고 머물렀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는 무엇을 준비하였던 것일까요? 그가 그곳에 머물면서 준비하였던 것들을 살펴보면서, 그 내용을 오늘 우리의 신앙생활에 적용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2. 사람들을 살피기

    에스라가 장막에 머물면서 가장 먼저 한 일은 백성과 제사장들을 살폈다는 것입니다(15절). ‘살피다’는 ‘아주 세밀하게 관찰하다’는 뜻입니다. 살핀 대상은 ‘백성과 제사장들’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냥 백성이라고 하면 제사장도 포함되는데, 굳이 이 둘을 구분하여 제시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표면적으로 보면 ‘아주 세밀하게 관찰하였다’는 뜻을 강조한 것일 수도 있습니다. 거기에서 좀 더 들어가 보면, 백성과 제사장들의 ‘살필 내용이 달랐다’는 의미도 보입니다. ‘백성’은 이스라엘 공동체의 근간(根幹)을 이루는 사람들입니다. 다시 말해서 그들이 공동체의 뿌리와 줄기를 이루고, 공동체의 바탕과 중심이 되기 때문에, 어떤 가문에서 누가 참여하였는지, 그들의 건강 상태는 양호한지, 여행 준비는 잘 되어 있는지 등에 대해 살피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그런가 하면 ‘제사장들’은 백성들을 하나님 앞으로 인도할 지도자입니다. 에스라가 귀환하게 된 1차 목적이 ‘성전을 위한 것’에 있었기 때문에, 성전 제사를 담당할 제사장들이 누가 얼마나 모였는지 살피는 것은 필수적입니다. 만약 제사장들이 오지 않았다면, 오더라도 극소수만 왔다면, 귀환 목적을 이룰 수 없고, 따라서 귀환은 애초 하지 않는 편이 더 낫습니다.

      백성과 제사장들을 살피는 것이 일차적으로 여행을 제대로 준비하기 위한 것이었지만, 그것은 동시에 귀환 후에 이루게 될 공동체의 밑그림이 되기도 합니다. 그림은 재료에 따라 다르게 표현됩니다. 연필로 그리면 스케치가 되고, 목탄으로 그리면 목탄화가 됩니다. 물감을 기름에 개어 그리면 유화가 되고, 물감을 물에 풀어서 그리면 수채화가 됩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모인 백성과 제사장들이 누구냐에 따라 공동체의 성격도 달라집니다. 에스라는 왕으로부터 유다 지역의 행정, 사법, 교육 등에 대한 권한을 위임받았습니다. 따라서 에스라는 함께 돌아갈 사람들을 파악해서 각 지역의 통솔자와 재판관과 교육자들을 누구로 세울지, 또 어떻게 운용하게 해야 할지 등에 대해 고민하고 결정해야 합니다. 그래서 에스라가 제일 먼저 하였던 ‘살피는 일’은 매우 중요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에스라의 이런 태도는 우리의 신앙생활에 귀한 교훈이 됩니다. 교회와 가정과 직장에서 사역할 때, 우리도 에스라처럼 제반 사항을 살피지 않으면, 즉 아주 세밀하게 관찰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우리의 목적을 상기하면서, 에스라처럼 함께한 사람들의 상태를 살펴야만 사전에 문제를 발견하고 이에 대처할 수 있습니다.

    3. 발견한 문제를 해결하기

    에스라가 두 번째로 하였던 일은, 발견한 문제를 신속하게 해결하였다는 것입니다. 백성과 제사장들을 살피던 에스라는, 레위 자손이 한 사람도 없는 것을 발견하였습니다. ‘레위인들’은 제사장은 아니지만, 제사장들이 성전 제사를 드릴 수 있도록 돕는 임무를 맡았던, 중요한 성전 관리인들입니다. 따라서 그들이 한 명도 없었다는 것은, 성전 제사를 비롯하여 성전의 여타 업무도 마비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낭패도 이런 낭패가 없습니다. 에스라는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모든 지도자와 명철한 사람을 불렀습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할 말을 일러준 뒤에, 그들을 가시뱌 지방에 있는 족장 잇도와 그의 형제 느디님 사람들에게 보내, 하나님의 성전을 위하여 섬길 자를 데려오라고 하였습니다. 이에 그들은 에스라에 명령에 따라 레위의 아들 말리의 자손인 명철한 사람을 비롯하여 40명의 레위인들과 느디님 사람 가운데 성전 일꾼 220명을 데려왔습니다(16-20절). 에스라 일행이 장막을 쳤던 아하와 강은, 바벨론 북서쪽의 아하와 성을 가로지르던 유프라테스강 지류인 ‘이스 강’을 말합니다. ‘가시뱌 지방’은 그곳으로부터 왕복 3일 이내의 매우 가까운 거리에 있었고, 유대인을 비롯한 레위인들과 느디님 사람들이 많이 거주하였던 것으로 추정됩니다.

      발견한 문제를 처리하는 에스라의 모습을 보면서, 우리도 우리 안에 있는 문제를 신속하게 처리해야 한다는 교훈을 얻게 됩니다. 만약 에스라가 그 문제를 곧바로 해결하지 않고 미루어 두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미룬 시간만큼 예루살렘을 향한 출발 시간은 지연될 수밖에 없습니다. 만약 그 문제를 외면해 버렸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성전 제사를 비롯한 성전의 모든 업무가 마비되었을 것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만약 우리 안에 문제가 있다면 애써 외면해서는 안 됩니다. 문제 해결을 미루어서도 안 됩니다. 그것이 자원의 부족 문제라면 채워 넣어야 하고, 그것이 죄 문제라면 과감하게 도려내야 합니다.

      그 과정에서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점이 한 가지 더 있는데, 그것은 바로 그 일을 도우신 하나님의 선한 손입니다. 에스라의 문제 해결 방법은 그 방법의 최선 여부를 떠나, 하나님의 도우심이 없었다면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왜 그럴까요? 그 이유는 애당초 이스라엘 백성들이 아하와 강가에 모일 때 그들이 단 한 명도 오지 않았던 사실에 있습니다. 그들이 애초 오지 않았던 이유에 대해서는 성경에서 밝히고 있지 않지만, 정황을 통하여 추측해 볼 수는 있습니다. 레위인들이 모이지 않았던 사건의 전조는 1차 귀환 때부터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때 제사장들은 4,289명이 함께하였지만, 레위인들은 341명에 불과하였습니다. 돕는 자들이 도움을 받는 자들의 8퍼센트밖에 안 된다는 사실은 기형적인 상황입니다. 그리고 마침내 2차 귀환 때는 한 명도 오지 않았습니다. 이런 일이 발생한 원인은, 그들이 바벨론에 정착하면서 다른 직업(일)으로 전환하였기 때문으로 추측됩니다. 어쩌면 그곳에서 금융업으로 부유하게 된 유대인들에 속하였을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땅에 대한 소유권도 없던 그들에게 그곳에서는 그런 제한도 없었습니다. 그에 비해 예루살렘에 귀환하여 담당하게 될 성전 봉사는, 그 업무가 과중할 뿐만 아니라 보상도 지금의 좋은 형편과 비교 대상이 되지 못하였습니다. 더구나 그들은 이민 삼사 세대이기 때문에 도전 정신이나 신앙에 대한 열정도 희박합니다. 그런 그들이 마음을 돌이켜 2차 귀환 대열에 참여하였다는 것은, 하나님의 선한 손길 없이는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들과 함께한 220명의 느디님 사람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들은 혈통 상 이스라엘 족속이 아닙니다. 더더구나 그들의 신분은 평민도 아닌 종입니다. 그들이 돌아가서 맡게 될 업무도 존재감도 없는 성전 막일에 불과합니다. 그래서 자신들이 새롭게 일군 삶의 터전을 버리고 예루살렘으로 돌아가야 할 동기는 너무도 희박합니다. 하지만 그들도 귀환 대열에 동참하였습니다. 이러한 일은 하나님의 도우심 없이는 설명이 불가합니다.

      이러한 사실은 우리가 문제를 해결할 때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이 무엇인가를 알려 줍니다.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여 신속하게 임해야 하지만, 그와 동시에 그 문제를 우리가 주체가 되어 해결하려고 달려들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가 그렇게 해야만 하는 이유가 성경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사람이 마음으로 자기의 길을 계획할지라도 그의 걸음을 인도하시는 이는 여호와시니라”(잠 16:9). “여호와여 내가 알거니와 사람의 길이 자신에게 있지 아니하니 걸음을 지도함이 걷는 자에게 있지 아니하니이다”(렘 10:23). “일을 행하는 여호와, 그것을 만들며 성취하시는 여호와...”(렘 33:2). 이렇게 일의 주체가 하나님께 있고 그 일을 성취할 수 있는 능력도 하나님께 있으므로, 우리는 그 문제를 하나님과 함께하면서 그분께 의뢰해야만 합니다.

    4. 금식을 선포하고 함께 간구하기

    성전 일을 도울 레위 사람들과 함께 느디님 사람들까지 구한 에스라에게, 풀어야 할 과제가 하나 더 남아 있었습니다. 5,000여 명에 이르는 일행이 귀환하는 길은 직선으로 800km 정도 됩니다. 무더위를 최대한 피하고 도중에 물도 보충할 수 있는 좋은 길로 가려면 그 거리는 두 배로 늘어납니다. 이것만도 난관인데, 언제 어디서 도적 떼나 노상강도들을 만날지도 모릅니다. 에스라 일행이 가지고 가는 수많은 예물, 즉 수많은 금과 은과 그릇들은, 도적 떼와 노상강도들에게 너무도 탐나는 먹잇감이었습니다. 백성들도 그에 버금가는 먹잇감이었습니다. 그들을 붙잡아 노예로 팔면 곧바로 현금으로 바꿀 수 있습니다. 에스라 일행이 예루살렘으로 돌아간다는 정보는, 이미 그들의 귀에 접수되었을 것입니다.

      에스라는 이러한 상황을 모두 파악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왕에게 자신들을 보호해 줄 호위병을 요청하려고도 생각해 보았지만, 차마 입 밖으로 꺼내지 못하였습니다. 그는 이전에 왕에게 이렇게 아뢴 적이 있습니다. “우리 하나님의 손은 자기를 찾는 모든 자에게 선을 베푸시고 자기를 배반하는 모든 자에게는 권능과 진노를 내리십니다.”(22절) 그러므로 만약 그가 왕에게 호위병을 요청하게 되면, 정작 자신은 그러한 하나님을 믿지 않는다는 오해를 받을 수 있으므로, 왕에게 호위병을 요청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에스라는 하나님께 매달리는 정공법을 선택하였습니다. 그는 아하와 강가에서 금식을 선포하였습니다. 그가 금식을 선포한 이유는 두 가지입니다. 첫 번째는, 하나님 앞에서 스스로 겸비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겸비하다’는 ‘낮아지다’, ‘굴복하다’는 말로, 자기 자신을 낮추고(버리고) 온전히 하나님 앞에 엎드리는 것을 의미합니다. 두 번째는, 간구하기 위해서, 즉 기도하되 간절히 기도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이것을 통해 ‘금식’이 ‘겸비’와 ‘간구’의 전제 조건이 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금식이 중요합니다. 금식을 통해 스스로 겸비하여 간절히 기도하되, 그 일을 에스라 혼자 한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우리)이 그 일에 동참하여 하나님께 모든 백성과 모든 소유의 안전을 위하여 평탄한 길을 구하였습니다. 그 결과 그들은 하나님의 응답을 받았습니다(23절).

    5. 에스라의 모습이 우리의 모습으로

    오늘 말씀을 정리하도록 하겠습니다. 에스라는 아하와 강가에서 3일 동안 머물면서 백성과 제사장들을 살폈습니다. 그 과정에서 레위 자손들이 한 명도 없다는 사실을 발견하고, 신속하게 문제를 해결하였습니다. 또 예루살렘으로 돌아갈 때 예상되는 대적들의 위협으로부터 모든 백성과 모든 소유의 안전을 위하여 하나님께 금식하면서 스스로 겸비하여 간절히 구하였습니다. 에스라의 이런 모습은 바로 오늘 우리의 모습이 되어야 합니다. 특별히 에스라가 금식하면서 기도하는 모습은, 우리에게 금식 기도의 중요성과 그것에 대한 새로운 동기를 제공해 줍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금식하면서 기도해야 하는 이유는 간단합니다. 그분이 자신의 귀를 우리에게 기울이시기 때문입니다. “그의 귀를 내게 기울이셨으므로 내가 평생에 기도하리이다”(시 116:2). 하나님은 귀를 기울이실 뿐만 아니라 에스라가 왕에게 말한 대로 자기를 찾는 모든 사람에게 선을 베푸시기 때문에 우리는 그렇게 기도해야 합니다.

      신약 성경에는 직접적으로 금식하는 모습이 딱 두 번 소개되고 있습니다. 한 번은 안디옥 교회가 선교를 위하여 바나나와 사울을 따로 세울 때이고(행 13:2-3), 또 한 번은 소아시아에서 각 교회 장로들을 택하여 그들을 주님께 위탁할 때입니다(행 14:23). 그래서 현대 교회는 금식 기도를 소홀히 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렇지만 그로 인해 현대 교회는 스스로 겸비하는 모습과 간절하게 매달리는 모습이 동시에 사라져 버렸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이러한 모습을 에스라의 모습에 비추어 보면서, 우리가 회복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를 곰곰이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그 생각 끝에서 우리의 모습이 에스라의 모습으로 바뀔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바랍니다.






    에스라 9장 요약

    방백들이 에스라에게 이방족과 통혼에 대하여 알려주었고,통혼 소식을 듣고서 에스라가 하나님께 회개 기도를하였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9장은 이스라엘 백성이 이방인과 결혼하여 살고 있다는 소식을 들은 에스라의 반응이 소개되고 있다. 방백들이 에스라에게 전한 내용은 이방인과의 결혼, 즉 통혼에 백성들뿐만 아니라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도 가담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더구나 방백들과 고관들이 그 가증한 일에 으뜸이 되고 있다는 소식은 에스라에게 충격이었다. 그래서 그는 옷을 찢고 머리털과 수염을 뜯으면서 넋을 잃고 주저앉아 버렸다.

      저녁 제사를 드릴 때까지 주저앉아 있던 에스라는, 무릎을 꿇고 하나님을 향하여 손을 들고 기도를 드렸다. 그는 그 죄와 무관하였지만, ‘우리’라는 단어를 31회나 사용하면서 그들의 죄를 자신을 포함한 유대 공동체의 것으로 받아들였다. 그는 우리의 죄를 하나님 앞에서 회개하고 그분의 자비하심에 기대어 용서를 구하였다.

    I. 본문 이해와 질문

    1. 이스라엘의 가증한 일을 들은 에스라(1-4절)

    [본문] 1 이 일 후에 방백들이 내게 나아와 이르되 이스라엘 백성과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이 이 땅 백성들에게서 떠나지 아니하고 가나안 사람들과 헷 사람들과 브리스 사람들과 여부스 사람들과 암몬 사람들과 모압 사람들과 애굽 사람들과 아모리 사람들의 가증한 일을 행하여 2 그들의 딸을 맞이하여 아내와 며느리로 삼아 거룩한 자손이 그 지방 사람들과 서로 섞이게 하는데 방백들과 고관들이 이 죄에 더욱 으뜸이 되었다 하는지라 3 내가 이 일을 듣고 속옷과 겉옷을 찢고 머리털과 수염을 뜯으며 기가 막혀 앉으니 4 이에 이스라엘의 하나님의 말씀으로 말미암아 떠는 자가 사로잡혔던 이 사람들의 죄 때문에 다 내게로 모여오더라 내가 저녁 제사 드릴 때까지 기가 막혀 앉았더니

    [이해] 이 일 후에 방백들이 에스라에게 와서 이스라엘의 가증한 일의 실상을 알렸다(1-2절). 에스라 일행은 아닥사스다 왕 7년 다섯째 달 1일에 예루살렘에 도착하였다. 그곳에서 3일 동안 머물면서 휴식을 취한 후 제4일에 하나님의 성전을 위한 예물을 인수인계하고 번제를 드렸다(8:33-35). 또 왕의 조서를 총독들에게 전달하였다(8:36). 조서를 전달하는 과정에서 얼마간의 시간이 필요하였을 것이다. 그 이후 아홉째 달 20일에 이스라엘의 가증한 일을 해결하기 위해 백성들을 예루살렘에 모이게 하였다. 따라서 예루살렘 도착과 백성들을 모이게 한 사건 사이의 기간은 4개월 15일 정도의 시간이 된다. 에스라는 그동안에 왕의 조서를 유다 원근의 총독들에게 알리기 위하여 광범위하게 여행하였을 것이다. 따라서 ‘이 일 후’는 에스라가 그런 일들을 마치고 예루살렘으로 돌아온 뒤를 가리킨다고 할 수 있다. ‘방백들’(‘하사림’, 히)이 어떠한 신분을 가진 사람이었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이들은 에스라가 귀환하기 전에 귀환한 백성들의 지도자였거나(10:14,16), 에스라와 함께 돌아온 백성들의 지도자 그룹으로 추정된다. 아무튼, 이스라엘의 가증한 일에 대한 개혁이 이들이 전한 소식에 의해서 시작되었다는 점만큼은 분명하다.

      방백들이 에스라에게 알린 내용은 이스라엘 백성(제사장들과 레위인들도 포함)이 그곳 사람들의 가증한 일을 행하여 그 땅의 딸들을 아내와 며느리로 맞이함으로써 서로 섞이게 하는 일(통혼)을 하고 있는데, 방백들과 고관들이 그 죄에 더욱 으뜸이 되고 있다는 것이었다. ‘사람들의 가증한 일을 행하여’라는 말은, ‘그들의 가증함을 따라서’(KJV, according to their abominations), ‘그들의 혐오스러운 행위를 따라서’(NIV, with their detestable practices)라는 뜻이다. 중요한 것은 ‘가증한 일’이라는 말이 원래 고대 우가리트어(Ugaritic語)에서 ‘성전에서 일어난 잘못된 행위나 말’을 칭하는 말에서 유래한 것으로, ‘금기되는 사실’(taboo)을 지칭한다는 것이다. 방백들은 가증한 일의 표본이 된 지역 사람들로 가나안, 헷, 브리스, 여부스, 암몬, 모압, 애굽, 아모리 사람들을 제시하였다. ‘가나안, 헷, 브리스, 여부스, 아모리 사람들’은 가나안 지역의 원주민을 총칭하는 말이다. 따라서 여기에는 ‘히위 족속’, ‘기르가스 족속’ 들도 당연히 포함된다(신 7:1). 그들이 악하였기 때문에(신 9:4-5),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가나안을 정복할 때 불쌍히 여기지 말고 진멸하라고 명령하셨다. 또 그들과 언약하고 통혼하는 것도 금하셨다. 특별히 하나님이 통혼을 금하신 이유는, 그들이 이스라엘의 아들들을 유혹하여 여호와를 떠나고 다른 신들을 섬기게 할 뿐만 아니라, 결국에는 여호와의 진노를 사서 멸망할 것이기 때문이다(신 7:1-4). 따라서 방백들의 고발 속에는 이스라엘이 지금 통혼으로 여호와를 떠나 다른 신들을 섬기고 있고, 그 결과 하나님으로부터 진노와 멸망의 길을 자초하고 있다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 ‘암몬, 모압, 애굽 사람들’은 가나안 밖 인근 족속들이다. ‘암몬 족속’은 롯이 그의 작은딸과 근친상간으로 낳은 아들의 후예들이고(창 19:38), ‘모압 족속’은 롯이 그의 큰딸과 근친상간으로 낳은 아들의 후예들이다(창 19:37). 이들 두 족속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 이후 광야를 지날 때 도움 대신 박해를 하였던 족속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들이 여호와의 총회에 들어오는 것을 금지하셨다(신 23:3-6). 하나님은 ‘애굽 사람들’을 미워하지 말라고 말씀하셨지만(신 23:7), 동시에 애굽 땅의 풍속을 따르지 말라고 명령하셨다. 그 이유는 애굽의 풍속을 따르는 것이 가나안의 풍속이나 규례를 따르는 것과 똑같이 여기셨기 때문이다(레 18:3).

      방백들이 에스라에게 고발한 대상은, 이스라엘 백성과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이고 그 가운데 방백들과 고관들이 그 죄에 더욱 으뜸이 되었다. ‘백성과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은 이스라엘 백성 전체를 구성하였던 세 계층이다. 여기에서 ‘이스라엘 백성’이라고 하지 않고 모든 계층을 언급한 이유는, 두 가지로 추측해 볼 수 있다. 첫째, 가증스러운 일이 각계각층에 보편적으로 퍼져 있었다는 사실을 드러내기 위함이다. 둘째, 그 일에 제사장들과 레위인들도 가담하였다는 사실을 강조해서 드러내기 위함이다. 특히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은 성전에서 봉사하는 일을 담당하고 율법 교육을 통해 통혼하지 못하도록 가르쳐야 하는 종교 지도자들이기 때문에, 그들의 가증함은 더욱 심각한 문제가 될 수 있다. ‘방백들과 고관들’은 더욱 경악스러운 모습을 하고 있었다. 그들이 ‘이 죄에 더욱 으뜸이 되었다’라는 말은, 바로 그들이 그 죄의 우두머리가 되어 이방 여인들과의 통혼을 주도하였다는 뜻이다. 다시 말해서 그들이 이교도 여인들과의 통혼에 앞장섬으로써 여호와를 향한 신앙의 순수성이 탈선하도록 가장 큰 역할을 하였다는 것이다. 한편 ‘방백들’은 앞서 에스라에게 이 문제를 고발하였던 ‘방백들’과 같은 단어이다. 다른 점이 있다면, 전자가 통혼에 앞장섰다면, 후자는 그 탈선에서 벗어나서 고발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이는 모든 방백이 그 일에 가담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려 준다. ‘고관들’은 그들이 방백들 뒤에 소개되고 있다는 점에서 방백보다 한 단계 아래의 지도자였던 것으로 보인다.

      3-4절은 방백들의 말은 들은 에스라의 반응을 소개하고 있다. 이 모든 일을 들은 에스라는, 속옷과 겉옷을 찢고, 머리털과 수염을 뜯으면서, 기가 막혀 앉았다(3절). 자신의 ‘옷을 찢는’ 행위는 크게 분낼 만한 일이 일어나거나 마음이 괴롭고 아플 때 취하는 행동이다(창 37:29,34;삼하 13:19;욥 1:20). 더구나 겉옷뿐만 아니라 속옷까지 찢었다는 것을 통해, 이스라엘의 가증한 일이 에스라에게 얼마나 큰 슬픔과 고통을 주었는지 짐작할 수 있다. 그는 옷을 찢는 것과 동시에 머리털과 수염도 뜯었는데, 이는 옷을 찢는 행동과 함께 하나님의 뜻을 자기의 뜻으로 생각하는 사람이 그 뜻이 비웃음의 대상이 되었을 때 보이는 증상이다. ‘기가 막혀 앉았다’에서 ‘기가 막히다’라는 말은, ‘소스라쳐 놀라다’, ‘넋을 잃다’, ‘몸서리치다’는 뜻인데, ‘압도를 당하다’, ‘섬뜩하다’로 번역되기도 한다. 이는 충격적인 사실에 넋을 잃어버리는 심리적 상태에 빠지는 것을 말한다. 또한 ‘앉았다’라는 말은 그냥 편안하게 앉은 것이 아니라 받은 충격으로 폭삭 주저앉는 상태를 의미한다. 즉 에스라는 그 소식을 듣자마자 감당할 수 없는 놀람과 괴로움으로 인하여 참담하게 주저앉아 버린 것이다. 어찌 보면 그와 같은 일은 에스라가 예루살렘에 도착하기 전부터 있었기 때문에 그와 상관없는 일이기도 하다. 하지만 그는 나 몰라라 하지 않았다. 그것을 자기 일로 받아들임으로써 그와 같은 반응을 보였다. 에스라의 이러한 반응은 역으로 그가 이스라엘 백성들에 대해 철저한 연대 의식을 지니고 있었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에스라의 반응에 사람들이 움직이기 시작하였다. 에스라에게 모여든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말미암아 떠는 이들이었고, 이들이 모두 모여든 이유는 사로잡혔던 그 사람들의 죄 때문이었다. 이들이 모여올 때 에스라는 저녁 제사를 드릴 때까지 기가 막혀 주저앉아 있었다(4절). 모인 이들이 두려움에 떨었던 이유는, 이스라엘 백성과 언약 관계에 있는 하나님의 말씀 가운데 신상필벌(信賞必罰)의 교훈을 잊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 교훈은 가장 가깝게는 이스라엘 왕국의 멸망과 그로 인한 포로 생활이 백성들의 죄악에 대한 하나님의 징계였다는 사실이다(대하 36:12-16). ‘그 사람들의 죄’, 즉 일반 백성뿐만 아니라 종교 지도자인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까지 하나님이 금지하신 통혼의 죄를 범하고, 심지어는 그러한 행위를 말리거나 모본을 보여야 할 방백들과 고관들이 앞장서서 그러한 죄를 저질렀기 때문에, 에스라에게 모여든 사람들은 그 일로 인해 하나님의 심판이 재현될까 두려움에 떨었던 것이다. 그렇게 모인 이들은 에스라의 조치를 기다렸다. 하지만 에스라는 저녁 제사를 드릴 때까지 기가 막힌 채 주저앉아 있었다. 여기에서 ‘저녁 제사 드릴 때’는 해가 질 무렵(민 28;4), 즉 제9시(오후 3시)의 기도하는 시간을 가리킨다(출 12:6;행 3:1). 이때는 죄를 고백하는 시간으로 정해져 있었다.

    [질문] 이스라엘 백성이 이방인과 통혼하는 것이 왜 가증한 일이 되는가?

    거룩한 자손이 부정한 사람과 서로 섞이게 되기 때문이다. 깨끗한 물과 더러운 물을 혼합하면 그냥 더러워지는 것처럼, 거룩한 자손은 부정하게 될 수밖에 없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통혼을 금지하셨다. “또 그들과 혼인하지도 말지니 네 딸을 그들의 아들에게 주지 말 것이요 그들의 딸도 네 며느리로 삼지 말 것은 그가 네 아들을 유혹하여 그가 여호와를 떠나고 다른 신들을 섬기게 하므로 너희에게 진노하사 갑자기 너희를 멸하실 것임이니라”(신 7:3-4). 결혼은 단순하게 당사자인 두 사람이 결정하는 문제로만 보이지만, 그 이면에는 결혼 이후에 전개될 삶의 방향, 즉 신앙 문제와 직결되어 있다. 그래서 하나님의 뜻에서 어긋난 결혼은, 하나님을 떠나 우상을 섬기게 되는 치명적인 결과를 낳을 수밖에 없고, 결국에는 가증한 일이 되어 버리는 것이다.

      두 번째 이유는, 그것이 그분의 주재권과 순종에 반대되는 일이기 때문이다. 많은 사람은 결혼에 대한 결정권이 결혼 당사자들에게 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자기 눈에 좋게(매력적으로) 보이는 사람을 배우자로 선택한다. 이런 생각과 선택에 어떤 문제가 도사리고 있을까? 두 가지의 문제가 도사리고 있다. 첫째는, 결혼에 대한 하나님의 주재권을 인정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하나님은 이 세상 만물을 만드신 창조주이시고, 자신이 만든 모든 것을 다스리시는 주관자가 되신다. 따라서 결혼에 대한 주재권도 하나님께 있다. 이러한 사실을 무시하고 인간들이 그 주재권을 빼앗아 자기 스스로 결혼에 대한 주재권을 행사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눈에 가증하게 비치는 것이다. 두 번째 문제는, 하나님의 눈이 아닌 자기 눈에 좋아 보이는 것을 선택하였다는 점이다. 자기 눈이 보기에 좋은 대로 배우자를 결정하는 문제 속에는, 하나님의 뜻을 의도적으로 외면하고 배척하는 행위가 들어 있다. 그래서 가증한 일이 되는 것이다.

      사람들은 결혼 문제를 단편적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통혼이 지닌 파괴적인 성격을 우리의 전인격적인 삶과 연결하여 총체적으로 규명하지 못한다. 하지만 에스라는 통혼을 우리의 모든 삶이 거룩한 것과 부정한 것이 서로 섞이는 통합적인 것으로 보았다. 즉 결혼에는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모든 신앙이 농축되어 있는데, 그 결혼이 통혼이 됨으로써 그 사람의 삶은 하나님을 불신하고 자신만 믿는 죄를 선택한다는 것이다. 그 결과 통혼은 하나님의 축복이 아닌 진노와 멸망을 향하여 치닫게 되는 것이다. 그러한 파국을 피하기 위해서는 이 말씀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 이를 위하여 그리스도께서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셨으니 곧 죽은 자와 산 자의 주가 되려 하심이라”(롬 14:8-9). 삶과 죽음에 관한 문제는 단순하게 우리 자신을 위한 것이 아니다. 우리의 주인이신 하나님과 그분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위한 것이다. 그러한 문제들 가운데 결혼도 예외가 될 수 없다. 따라서 결혼을 비롯하여 삶의 모든 문제에서 주재권을 하나님께 내드리고 그분의 뜻대로 순종해야 한다.

    2. 에스라의 기도(5-15절)

    [본문] 5 저녁 제사를 드릴 때에 내가 근심 중에 일어나서 속옷과 겉옷을 찢은 채 무릎을 꿇고 나의 하나님 여호와를 향하여 손을 들고 6 말하기를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부끄럽고 낯이 뜨거워서 감히 나의 하나님을 향하여 얼굴을 들지 못하오니 이는 우리 죄악이 많아 정수리에 넘치고 우리 허물이 커서 하늘에 미침이니이다 7 우리 조상들의 때로부터 오늘까지 우리의 죄가 심하매 우리의 죄악으로 말미암아 우리와 우리 왕들과 우리 제사장들을 여러 나라 왕들의 손에 넘기사 칼에 죽으며 사로잡히며 노략을 당하며 얼굴을 부끄럽게 하심이 오늘날과 같으니이다 8 이제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서 우리에게 잠시 동안 은혜를 베푸사 얼마를 남겨 두어 피하게 하신 우리를 그 거룩한 처소에 박힌 못과 같게 하시고 우리 하나님이 우리 눈을 밝히사 우리가 종노릇하는 중에서 조금 소생하게 하셨나이다 9 우리가 비록 노예가 되었사오나 우리 하나님이 우리를 그 종살이하는 중에 버려두지 아니하시고 바사 왕들 앞에서 우리가 불쌍히 여김을 입고 소생하여 우리 하나님의 성전을 세우게 하시며 그 무너진 것을 수리하게 하시며 유다와 예루살렘에서 우리에게 울타리를 주셨나이다 10 우리 하나님이여 이렇게 하신 후에도 우리가 주의 계명을 저버렸사오니 이제 무슨 말씀을 하오리이까 11 전에 주께서 주의 종 선지자들에게 명령하여 이르시되 너희가 가서 얻으려 하는 땅은 더러운 땅이니 이는 이방 백성들이 더럽고 가증한 일을 행하여 이 끝에서 저 끝까지 그 더러움으로 채웠음이라 12 그런즉 너희 여자들을 그들의 아들들에게 주지 말고 그들의 딸들을 너희 아들들을 위하여 데려오지 말며 그들을 위하여 평화와 행복을 영원히 구하지 말라 그리하면 너희가 왕성하여 그 땅의 아름다운 것을 먹으며 그 땅을 자손에게 물려주어 영원한 유산으로 물려주게 되리라 하셨나이다 13 우리의 악한 행실과 큰 죄로 말미암아 이 모든 일을 당하였사오나 우리 하나님이 우리 죄악보다 형벌을 가볍게 하시고 이만큼 백성을 남겨 주셨사오니 14 우리가 어찌 다시 주의 계명을 거역하고 이 가증한 백성들과 통혼하오리이까 그리하면 주께서 어찌 우리를 멸하시고 남아 피할 자가 없도록 진노하시지 아니하시리이까 15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여 주는 의로우시니 우리가 남아 피한 것이 오늘날과 같사옵거늘 도리어 주께 범죄하였사오니 이로 말미암아 주 앞에 한 사람도 감히 서지 못하겠나이다 하니라

    [이해] 저녁 제사를 드릴 때 에스라는 근심 중에 일어났다(5절). ‘근심 중에’는 치욕과 고통을 받는 가운데라는 뜻으로, 이는 어떤 외적인 사건에 대해 연대감을 느끼면서 깊이 고민하는 것을 가리킨다(레 16:29-31;시 119:107;사 53:7). 후기 유대교 문헌에서는 이 단어를 금식을 뜻하는 말로도 사용하였다. 한편 ‘일어나서’는 문자적 의미 그대로 앉았다가 일어서는 것을 가리키기보다 어떤 행동을 하기에 앞서 이루어지는 의지적 결단을 강조하는 단어이다(1:5). 그렇게 일어난 에스라는 속옷과 겉옷이 찢긴 채 무릎을 꿇고 그의 하나님 여호와를 향하여 손을 들고 기도하였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보통 서서 기도를 하지만, 하나님 앞에서 철저한 겸손과 간절함을 나타낼 때는 무릎을 꿇고 기도하였다(눅 22:41;행 20;36). ‘손을 들고’는 양팔을 넓게 들고 양쪽 손바닥을 펴서 하늘로 향하게 하는 유대인의 전형적인 동작으로, 하나님의 도우심을 필요로 한다는 것을 상징적으로 나타낸다. 에스라가 무릎을 꿇고 손을 들어 하나님께 기도한 내용은 다음과 같다; (1) 에스라의 일반적인 죄에 대한 고백(6-7절), (2) 특정 죄(통혼을 금지한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에 대한 인식과 고백(10-12절), (3) 미래의 진술인, 하나님의 자비 요청(13-14절), (4) 결론적인 고백(15절). 한편 에스라는 이 기도에서 일인칭 복수인 ‘우리’를 31회나 사용하고 있다. 그는 비록 이스라엘 백성의 통혼에 가담하지 않았지만, 그 안에 자신을 포함시켜 그들과의 연대감을 형성하면서 중보하였던 것이다.

      먼저 에스라는 일반적인 죄에 대해 고백하였다(6-7절). 하나님 앞에서 범한 크고 많은 죄와 허물이 정수리에 넘치고 하늘에 미쳤기 때문에, 그는 심히 부끄럽고 낯이 뜨거웠다. 그래서 하나님을 향하여 감히 얼굴을 들지 못하였다. ‘허물’은 ‘잘못하여 저지른 실수’, ‘흉, 즉 남에게 비웃음을 살 만한 거리’를 말한다. 또 ‘정수리’는 ‘머리 위의 숫구멍이 있는 자리로, 사물의 제일 꼭대기 부분을 비유하여 이르는 말이다. ‘정수리에 넘치고 하늘에 미치다’는 말은 죄와 허물이 크고 많다는 것을 비유적으로 강조한 표현이다. 에스라가 우리의 죄에 대해 인정한 부분은 바벨론에서 돌아온 이후 발견한 통혼의 죄뿐만 아니라 포로로 끌려가기 전부터 자기 조상들이 저질렀던 모든 죄까지를 포함하고 있다(7절). 죄에 대한 이러한 인식은 현재 범하고 있는 죄가 앞선 세대의 죄로 인한 것은 아니지만, 그 뿌리를 조상들이 범한 죄와 연결함으로써 현재 범하고 있는 죄가 그 원인과 양상 면에서 이전과 다르지 않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이와 같은 인식은 향후 주어질 심판의 내용도 이전과 같을 것이라는 결론에 이르게 한다. 따라서 그는 자기 조상들이 받았던 심판의 내용이 오늘에 와서도 마찬가지가 될 것이라고 한탄하였다. 조상들은 그들의 죄로 인하여 백성과 왕들과 제사장들까지 여러 나라 왕들의 손에 넘겨져서 죽거나 사로잡혀 갔고, 재산을 노략질당하고, 온갖 수모를 겪어야만 하였다.

      하지만 에스라는 죄를 범한 이스라엘을 향해 베푸신 하나님의 은혜를 잊지 않고 찬양하였다(8-9절). 그 은혜는 잠시 주어진 것으로, 하나님은 그들 가운데 몇을 남겨 두어 피하게 하셨고 종노릇하는 중에 조금 소생하게 하셨다. 여기에서 ‘잠시’는 하나님이 페르시아의 왕들을 감동하게 하여 이스라엘 백성들을 돌아오게 하신 일을 가리킨다. 그 잠시 속에는 에스라의 귀환까지도 포함하고 있다. ‘조금 소생하였다’에서 ‘조금’은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간 이스라엘 백성이나 그 후손 가운데 소수의 사람이 다시 본토로 돌아온 사건을 가리킨다. ‘소생하다’라는 말은 하나님이 그들을 거룩한 처소에 박힌 못같이 되게 하시고 그들의 눈도 밝히신 일을 말한다. ‘거룩한 처소’는 성전 혹은 팔레스타인 땅을 의미한다. 그곳에 박힌 못이 되었다는 것은 견고하면서도 안전하게 정착하였다는 뜻이다. 그리고 ‘눈을 밝힌다’는 말은 히브리어에서 호흡을 불어넣는다는 말과 의미가 같다(삼상 14:27-29;시 13;3;잠 15:30;29;13). 따라서 이는 ‘하나님이 우리의 기운을 회복하셨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소생이 더욱 의미가 있는 이유는 종노릇하는 가운데 주어졌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불가능한 상황에서 그와 같은 일이 주어졌기 때문에 하나님을 찬양하였던 것이다.

      9절의 찬양은 앞선 8절 내용을 반복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 내용을 보다 구체적으로 심화하고 있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9절 내용은 두 부분으로 나누어져 있다. 전반부는 소생의 성격에 대해, 후반부는 소생의 결과에 대해 찬양하고 있다. ‘소생의 성격’은 노예가 되어 종살이하는 중에 하나님이 그들을 버리지 않고 페르시아의 왕들 앞에서 불쌍히 여김을 받게 하셨다는 것이다. 이러한 소생은 ‘비록’이라는 부사어와 어울리면서 그 소생이 극적이었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머나먼 곳에서 노예가 되어 종살이하는 것은 버림받은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그러한 삶은 죄로 인해 주어진 형벌이기 때문에 계속해서 버림받는 것이 마땅하다. 그렇지만 하나님은 그들을 버려두지 않으셨다. 또 그런 삶 가운데 처하였다 하더라도 그들 위에 있는 왕들로부터 불쌍히 여김을 기대할 수도 없다. 만약 불쌍히 여겼다면 애초 그들을 포로로 삼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래서 그들 위에 바사 왕들의 긍휼함이 주어졌다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를 떠나서는 생각할 수 없다. 그 은혜에서 비롯된 ‘소생의 결과’는, 하나님이 그들에게 성전을 재건하고, 무너진 것을 수리하고, 유다와 예루살렘에서 울타리를 주신 것이다. ‘울타리’는 두 가지 의미가 있다. 하나는 그들의 삶을 보호하는 문자적인 울타리이고, 다른 하나는 상징적인 의미에서의 ‘하나님의 보호’이다. 여기에서는 후자의 성격이 더 강하다. 따라서 하나님의 은혜로 주어진 소생은, 하나님께 ‘영광’이 되고 귀환한 백성에게는 ‘평안’이 되는 셈이다(눅 2:14).

      이어진 에스라의 기도에는 하나님의 은혜를 저버린 이스라엘 백성들의 배은망덕한 처사를 지적하고 탄식하는 내용이 들어 있다(10-12절). 그는 이렇게 하나님이 은혜를 베푸셨는데도 우리가 주님의 계명을 어겨 이제 하나님께 할 말이 하나도 없게 되었다고 한탄하였다. ‘주님의 계명’은 주님의 종인 선지자들을 통해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어진 말씀인데, 거기에는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서 지켜야 할 내용이 들어 있었다. 하나님은 그곳을 ‘더러운 땅’으로 규정하셨다. 그 이유는 그곳을 차지하고 있는 이방 백성들이 더럽고 가증한 일을 행하여 그 땅의 모든 곳이 더러움으로 채워졌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곳 원주민들은 진멸의 대상이었고, 상종하지 말아야 할 대상이었다. 이런 이유로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그들과의 통혼을 금지하셨을 뿐만 아니라 그들을 위해서 평화와 행복도 영원토록 구하지 말라고 경고하셨다. 그와 동시에 그 계명에 순종하게 될 경우, 다음과 같은 축복을 약속하셨다. “너희가 왕성해져서(강해져서, 신 11:8), 그 땅에서 나오는 아름다운(좋은) 것을 먹고(창 45:18;사 1:19), 그 땅을 자손에게 영원한 유산으로 물려줄 것이다(겔 37:25).” 하지만 그들은 이 계명에 불순종하였고, 그 결과 약속된 축복 대신 진노와 멸망을 받았다. 한편 ‘너희가 가서 얻으려 하는 땅은 더러운 땅’이라는 말씀에서, ‘너희가 가서 얻으려 하는 땅’은 신명기 4장 5절 이하에서, ‘더러운 땅’은 예레미야 18장 25절과 예레미야애가 1장 17절에서 빌려 온 표현들의 집합체이다. 또한 ‘더럽다’는 말은 ‘불결하다’, ‘혐오스럽다’는 뜻으로, 구약 성경에서는 월경하는 여인과의 접촉(레 12:2)이나 성적 타락(레 20:21) 등으로 인한 의식적(儀式的)인 부정의 상태를 가리킬 때 사용된다. 여기에서는 가나안의 우상 숭배나 그와 관련된 부도덕한 행위들을 의미한다(대하 29:5;애 1:17;겔 7:20;36:17).

      13-15절에서는 앞선 8-12절 내용을 반복하여 요약하면서, 하나님께 회개와 함께 용서를 구하고 있다. 에스라는 우리의 죄악과 하나님의 은혜를 대조하여 진술하면서, 우리의 죄악을 회개하면서 다시 한번 더 하나님의 긍휼을 구하였다. ‘우리’의 처지는 악한 행실과 큰 죄로 이 모든 일, 즉 진노와 멸망 가운데 이르렀다. 왕국은 망하고 성전을 파괴되었으며 백성들은 죽임을 당하거나 포로로 끌려갔다. 그렇지만 그러한 와중에도 ‘하나님’은 그들의 죄악보다 형벌을 가볍게 하셔서 이만큼의 백성을 남겨 주셨다. 하나님이 이런 은혜를 베푸신 이유는, 그분이 다른 사람들이 아닌 ‘우리의 하나님’이셨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 이유는 이어지는 회개와 용서에 대한 근거이자 거기에 기댈 수 있는 의지처가 된다. 에스라는 두 가지의 질문을 통해 그 의지처에 회개와 용서를 기대고 있다. 첫 번째 질문은, “우리가 어떻게 다시 주의 계명을 거역하고 이 가증한 백성들과 통혼하오리이까?”이다. 이에 대답은 당연히 ‘아니오’이다. 이러한 질문과 대답 속에는 ‘회개’가 들어 있다. 두 번째 질문은, “그렇게 하면 주께서 어찌 우리를 멸하시고 남아 피할 자가 없도록 진노하시지 아니하시리이까?”이다. 대답은 당연히 ‘예’이다. 만약 하나님이 죄를 심판하지 않으신다면 그분의 의와 어긋나기 때문에 진노와 멸망은 피할 수 없다. 에스라가 하나님의 의로운 심판을 인정하였다고 해서 그분의 심판을 바랐던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런 이유 때문에 하나님의 용서를 더욱더 간절한 마음으로 구하였던 것이다.

      15절은 에스라의 기도에 담긴 내용의 결론에 해당한다. 그는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 즉 주님을 ‘의로우신 분’으로 인정하였다. ‘의’는 하나님의 본성(nature)이자 의지(will)이다(시 145:17). 의로우신 하나님의 속성은 특별히 언약과 관련 있다. 즉 그분의 의로우심은 언약 백성이 언약을 어겼을 때 그들에게 징벌을 내리시는 데에서 나타난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징벌에 처한 사람들로부터 가혹한 대우를 받고 있다고 불평과 반발을 살 만한 이유가 전혀 없으신 분이다. 오히려 정의를 실천하시는 분으로 종일토록 찬양을 돌려야 한다(시 35:28). 에스라는 이러한 사실을 인정함으로써 그것을 남아 있는 자들을 향한 경고의 메시지로 활용하고 있다. 한편 하나님의 의는 그분의 자비와 상반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분노는 그분의 자비와 대조되지만, 그분의 의는 그분의 자비와 언제나 함께한다(시 33:5;40:10;89:14;145:7;사 45:21). 하나님은 우리에게 베푸신 은혜 가운데 그분의 의를 나타내신다. 이는 역으로 그분이 의로우신 분이기 때문에 은혜를 베푸신다는 말이기도 하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이런 모습이 완벽하게 구현되어 있다.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이 세상에 보내심으로 그 속성을 구체적으로 계시하셨다(슥 9:9). 에스라는 이 사실을 놓치지 않았다. 하나님의 의를 찬양하면서 동시에 그 안에 공존하고 있는 그분의 ‘자비’에 기대어 현재 주어진 문제, 즉 백성의 통혼 죄를 상정하고 그분의 용서를 기대하였다. 그래서 ‘남아 피한 것이 오늘날과 같은 것’도, 동시에 ‘하지만 주님께 죄를 범하여 그분 앞에 한 사람도 감히 서지 못하게 된 것’도 그분의 의로우심 앞에 고스란히 드러냄으로써 하나님의 선하신 손길을 기다렸던 것이다.

    [질문] 에스라의 기도에서 우리가 배울 점은 무엇인가?

    첫째, 죄악을 인정하였다는 점이다. 그는 이스라엘이 범한 ‘통혼의 죄’를 인정하되, 철저하고 구체적으로 인정하였다. 그것을 인정하는 가운데 (1) 하나님의 은혜와 대조하고, (2) 그 주체를 ‘그들’이 아닌 ‘우리’로 상정한 것은 특별히 눈여겨볼 대목이다. 죄는 하나님의 은혜에 비추어볼 때 비로소 선명하게 드러난다. 하나님의 은혜는 의와 동전의 양면을 이루기 때문에 죄악을 가늠할 수 있는 핵심 기준이 된다. 이는 마치 어둠의 정도를 명확하게 알기 위해서는 그것을 빛에 비추어보아야 하는 것과 같다. 그는 통혼 죄를 하나님의 은혜에도 불구하고 범한 것으로 인정함으로써 죄의 실상을 선명하면서도 적나라하게 노출시켰다. 하지만 그 죄는 자신이 범한 것이 아니었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자신을 포함한 ‘우리’로 상정한 것은 그 문제를 자신의 것으로 인정한 데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자신과 공동체를 연대하고 그 안에 있는 문제를 외면하지 않고 함께 풀고자 하였다.

      둘째, 죄를 회개하였다는 점이다. ‘회개’는 ‘잘못을 뉘우치고 고치는 것’을 말한다. 죄를 명확하게 인식하였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회개로 이어지지 않으면 소용이 없다. 귀신들이 계속 귀신으로 머물 수밖에 없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그들은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이 세상 그 누구보다 분명하게 인지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들은 그분과 관계 맺기를 원하지 않았다(눅 4:41;8:28). 만약 죄를 인정하되 회개하지 않으면 우리도 이런 꼴이 되고 만다. 에스라는 두 가지 질문 속에 회개의 마음을 담아 그것을 하나님께 드리면서 그분의 자비를 구하였다.

      셋째, 기도의 대상이 되신 분에 대한 명확한 인식에 기초하여 자비를 구하였다는 점이다. 기도는 대상에 따라 또 그분이 누구인가에 따라 그 내용이 달라진다. 그래서 그것을 올바르게 인식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에스라는 그분을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로 인식하고 있었고, 의로우시고 자비(은혜)로우신 분으로 명확하게 인식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우리의 통혼 문제를 들고 그분께 나아갔고, 그분 앞에서 회개와 용서를 구하였다. 이것이 당연한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 우리의 기도 모습 속에서는 이것이 종종 왜곡되기도 한다. 종교 다원주의의 영향은 여호와 하나님을 왜곡, 변질시키고 있다. 그 결과 우리의 기도 내용도 하나님의 뜻과 무관한 방향으로 나아간다. 이런 문제에 대한 해결책은 에스라의 인식을 우리 안에 내리는 것이다.

    II. 메시지

    본문: 스 9:1-4

    제목: 통혼에 대한 에스라의 반응

    1 이 일 후에 방백들이 내게 나아와 이르되 이스라엘 백성과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이 이 땅 백성들에게서 떠나지 아니하고 가나안 사람들과 헷 사람들과 브리스 사람들과 여부스 사람들과 암몬 사람들과 모압 사람들과 애굽 사람들과 아모리 사람들의 가증한 일을 행하여 2 그들의 딸을 맞이하여 아내와 며느리로 삼아 거룩한 자손이 그 지방 사람들과 서로 섞이게 하는데 방백들과 고관들이 이 죄에 더욱 으뜸이 되었다 하는지라 3 내가 이 일을 듣고 속옷과 겉옷을 찢고 머리털과 수염을 뜯으며 기가 막혀 앉으니 4 이에 이스라엘의 하나님의 말씀으로 말미암아 떠는 자가 사로잡혔던 이 사람들의 죄 때문에 다 내게로 모여오더라 내가 저녁 제사 드릴 때까지 기가 막혀 앉았더니

    1. 이스라엘의 가증한 일을 들은 에스라

    그리스도인이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과 결혼하는 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절대 안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또는 그 문제가 너무 어렵다고 답을 회피하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이렇게 그리스도인들의 생각이 다양하게 또는 극단적으로 나누어지는 현상은, 아마도 두 가지가 원인이 되어서 생기는 것 같습니다. 하나는 현대 산업 정보화 사회가 지닌 복잡다단한 양상이 결혼에도 영향을 미쳤기 때문이고, 다른 하나는 결혼 문제에 대한 가치관이 제대로 정립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 가운데 후자가 더욱 근본적인 문제로 작용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오늘 우리가 나눌 내용은 바로 이 문제에 관한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는 에스라가 주저앉아 있는 모습이 소개되고 있습니다. “내가 이 일을 듣고 속옷과 겉옷을 찢고 머리털과 수염을 뜯으며 기가 막혀 앉으니”(3절). 이렇게 자신의 ‘옷을 찢는 행위’는 크게 분낼 만한 일이 생기거나 마음이 심히 괴롭고 아플 때 취하는 행동입니다. 구약 성경에는 이런 장면이 종종 나타납니다. 형들이 동생 요셉을 미워하여 미디안 상인들에게 팔았을 때, 그 사실을 나중에 안 르우벤은 슬픈 나머지 자신의 옷을 찢었고, 요셉의 아버지 야곱도 사랑하는 아들을 잃은 슬픔으로 자신의 옷을 찢었습니다(창 37-29,34). 또한, 다윗의 맏아들인 암논은 자기 누이인 다말을 너무 사랑한 나머지 부정한 방법으로 누이를 범해 버렸습니다. 하지만 강제로 욕을 보이는 사랑은 오래가지 않고 다른 모습으로 변질됩니다. 다말을 범함으로써 욕구를 채운 암논의 마음은 급속하게 얼어버렸고, 급기야는 그녀를 미워하여 쫓아내기까지 하였습니다. 다말은 암논의 행위에 대해 이렇게 항의하였습니다. “다말이 그에게 이르되 옳지 아니하다. 나를 쫓아 보내는 이 큰 악은 아까 네가 행한 그 악보다 더하다.” 다말의 항의에도 불구하고 암논은 종을 불러 문 밖으로 내쫓고 문빗장을 질러 버렸습니다. 이에 다말은 재를 자기 머리에 덮어쓰고 ‘채색옷을 찢고’ 크게 울부짖었습니다(창 13:.1-19). 에스라가 옷을 찢은 행위 속에는 바로 이와 같은 충격이 담겨 있었습니다. 더구나 옷을 찢은 것뿐만 아니라 자신의 머리털과 수염도 뜯었다는 것은, 그가 받은 충격과 그에 따른 슬픔과 분노가 형언할 수 없었다는 것을 나타냅니다. 그래서 넋을 잃고 주저앉을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에스라로 하여금 그런 충격과 슬픔과 분노에 빠지게 하였던 것일까요? 그것은 바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방인과 통혼하여, 거룩한 자손이 부정한 사람들과 서로 섞여 버렸기 때문입니다. 더구나 그 일에 종교 지도자인 제사장들과 레위인들도 포함되어 있었고, 심지어 백성들의 리더인 방백들과 고관들이 그 일에 더욱 앞장섰기 때문에, 그 충격은 더욱 클 수밖에 없었습니다(1-2절). 이러한 사실을 통해 우리는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과 결혼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것이 왜 하나님이 뜻이 아닌지, 그리고 믿지 않는 사람과 결혼하는 것이 왜 바람직하지 않은지에 대해 조금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겠습니다.

    2. 가증한 결혼

    믿지 않는 사람과 결혼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 아닌 이유는, 그 일이 하나님 앞에서 가증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가증하다’라는 말은 하나님이 보실 때 ‘혐오스럽다’라는 뜻입니다. ‘가증한 일’이라는 것은 원래 고대 우가리트어(Ugaritic語)에서 ‘성전에서 일어난 잘못된 행위나 말’에서 유래한 것으로, ‘금기시되는 사실’(taboo)을 지칭할 때 사용하는 말입니다.

    1) 섞이는 문제

    그렇다면 이방인과 통혼하는 것이 왜 가증한 일일까요? 거룩한 자손이 부정한 사람들과 서로 섞이게 되기 때문입니다. 서로 섞이게 되면 거룩한 자손은 부정하게 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통혼을 금하셨던 것입니다. “또 그들과 혼인하지도 말지니 네 딸을 그들의 아들에게 주지 말 것이요 그들의 딸도 네 며느리로 삼지 말 것은 그가 네 아들을 유혹하여 그가 여호와를 떠나고 다른 신들을 섬기게 하므로 너희에게 진노하사 갑자기 너희를 멸하실 것임이니라”(신 7:3-4).

      결혼은 당사자인 두 사람이 결정하는 문제로만 보이지만, 그 이면에는 향후에 전개될 삶의 방향, 즉 신앙 문제와 직결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뜻에서 어긋난 결혼은, 하나님을 떠나 우상을 섬기게 되는 치명적인 결과를 낳을 수밖에 없고, 결국에는 가증한 일이 되어 버리는 것입니다. 혹자는 결혼하고 나서 배우자를 하나님께 인도하면 된다는 생각을 할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이는 결혼과 동시에 거룩한 사람과 부정한 사람이 서로 섞이게 된다는 사실을 꿰뚫어 보지 못한 착각에 불과합니다. 결혼은 배우자가 될 사람이 하나님을 믿게 된 후에 해도 늦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렇게 하는 것이 더 빠르고 모든 문제도 해결할 수 있습니다.

    2) 주재권의 문제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과 결혼하는 것이, 가증한 이유가 하나 더 있습니다. 많은 사람은 결혼에 대한 결정권이 결혼 당사자들에게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 결과 자기 눈에 좋게 보이는 사람을 배우자로 선택합니다. 이러한 생각과 선택에 어떤 문제가 도사리고 있을까요? 두 가지 문제가 도사리고 있습니다. 첫째는, 결혼에 대한 하나님의 주재권을 인정하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둘째는, 하나님의 눈이 아닌 자기 눈에 좋아 보이는 것을 선택하였다는 점입니다.

      하나님은 이 세상 만물을 만드신 창조주이시고, 자신이 만든 모든 것을 다스리시는 주관자가 되십니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느니라“(창 1;1). “부와 귀가 주께로 말미암고 또 주는 만물의 주재가 되사 손에 권세와 능력이 있사오니 모든 사람을 크게 하심과 강하게 하심이 주의 손에 있나이다”(대상 29:12). 그러므로 결혼에 대한 주재권도 하나님께 있습니다. 이것에 대한 결정적인 증거가 창세기에 소개되어 있습니다. 최초의 인간인 아담이 하와를 배우자로 삼을 때 그가 그 일을 주관하였습니까? 아닙니다. 철저하게 하나님이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아담이 혼자 사는 것이 좋지 않자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을 지을 결심을 하셨습니다. 그래서 아담을 깊이 잠들게 한 후에 그 갈빗대 하나를 취하여 여자를 만드시고, 그녀를 아담에게로 이끌어 오셨습니다(창 2:18-25). 아담이 그 일에 관여한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그는 다만 하와를 보고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고 감탄만 하였을 뿐입니다. 그래서 결혼에 대한 주재권도 하나님께 있는 것입니다. 그 주재권을 빼앗아 인간 스스로가 결혼의 주재권을 행사하려고 하기 때문에, 그 일이 하나님 보시기에 가증한 일이 되는 것입니다.

      또 자기 눈에 보기 좋은 대로 배우자를 결정하는 문제 속에는, 하나님의 뜻을 의도적으로 외면하는 행위가 들어 있습니다. 그래서 그렇게 하는 결혼이 가증한 일이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모습을 잘 보여주는 것이 사사 시대의 이스라엘 백성들입니다. “그때 이스라엘에 왕이 없으므로 사람이 각기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더라(삿 21:25). 여기에서 ’왕이 없다‘라는 말은 이중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문자적으로 다윗과 같은 왕이 없다는 뜻도 있고, 왕이신 하나님이 없다는 뜻도 있습니다. 즉 사사 시대에 백성들은 하나님을 자신들의 왕으로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에, 하나님의 뜻이 아닌 각자 자기 소견대로 행하였던 것입니다. 그래서 레위인이 첩을 거느리는가 하면, 그 첩은 남편이 아닌 다른 사람들과 몸을 섞는 일이 일어났습니다. 또 그 첩을 기브아 불량배들이 능욕한 후에 죽게 버려둔 일도 일어났습니다. 그런가 하면 그 일로 베냐민 지파와 나머지 지파 사이에 동족상잔의 비극도 일어났습니다.

      하나님의 뜻이 아닌 자기 뜻대로 사는 사람들의 모습이 바로 이렇습니다. 결혼은 이런 문제와 다르다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오히려 결혼은 두 당사자가 매일 한 집에서 함께 산다는 측면에서 더욱 큰 문제가 될 수 있습니다. 이런 이유로 하나님은 결혼 문제에 있어서 통혼을 금지하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사도 바울이 한 말씀을 결혼 문제에도 적용해야 합니다.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 이를 위하여 그리스도께서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셨으니 곧 죽은 자와 산 자의 주가 되려 하심이라”(롬 14:8-9). 삶과 죽음에 대한 문제는 우리를 위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주인이신 하나님과 그분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위한 것입니다. 그 문제들 가운데 결혼도 예외가 아닙니다. 따라서 결혼에 대한 주재권을 하나님께 내어드리고 그분의 뜻대로 배우자를 선택할 때, 우리는 사사 시대의 문제들에서 벗어나 축복 가득한 결혼 생활을 할 수 있습니다.

    3. 진노와 멸망을 향한 결혼

    믿지 않는 사람과 결혼하는 것이 바람직하지 못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 결과가 참혹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그 결과를 앞서 사사 시대의 예를 통해 보았습니다. 그렇게 하는 결혼 속에는 기준이 되시는 하나님이 계시지 않기 때문에, 반인륜적인 범죄가 도사리고 있습니다. 그 결과 결혼 생활은 황폐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끝이 아닙니다. 더 무서운 것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믿지 않는 사람과 결혼하게 되면 여호와를 떠나 우상을 섬기게 되어 있습니다. 그 모습은 하나님 앞에서 가증하기 때문에, 하나님은 그 모습을 결코 좌시하실 수 없습니다. 진노하시고 갑자기 멸하실 것이라고 약속하셨습니다(신 7:4). 따라서 우리는 무슨 일이 있어도 그러한 결혼만큼은 피해야 합니다.

      결혼을 왜 합니까? 저주받고 싶어서, 멸망 당하기 원해서 결혼을 합니까? 그것을 원해서 결혼하는 사람은 이 세상에 단 한 명도 없습니다. 두 사람이 한 몸이 되면 더 행복해질 것이라 믿고 결혼합니다. 그런데 그러한 소망과 달리 저주와 멸망이 결혼 끝에 기다리고 있다면 이 얼마나 어처구니없는 낭패일까요. 하지만 그 어처구니없는 낭패가 우리 주변에는 비일비재합니다. 이런 일들이 계속해서 일어나는 이유는, 그렇게 하는 것이 하나님이 아닌 자기 눈에 좋아 보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우리는 그렇게 보는 것을 ’착시‘라 합니다. 오아시스를 보고 달려갔는데, 그곳에 도착해 보니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것은 자기 눈에 좋게 보였을 뿐이지, 실상은 신기루였던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신기루만 보는 우리의 눈이 아니라, 실상을 정확하게 꿰뚫어 보시는 하나님의 눈이 필요하고, 그 눈에 의지해서 결혼 문제를 결정해야 하는 것입니다.

    4. 올바른 결혼

    우리는 오늘 본문에서 통혼 문제에 각기 다르게 반응하는 두 부류의 사람들을 볼 수 있습니다. 한쪽은 그 문제를 아무렇지도 않게 받아들이는 사람들입니다. 다른 한쪽은 그 문제를 지적하고 있는 방백들과 또 그 말을 듣고 망연자실하고 있는 에스라입니다. 우리는 그 문제 앞에서 어떤 반응을 보이고 있을까요? 저는 우리의 모습이 후자가 되기를 원하고 또 원합니다.

      성경은 믿지 않는 자와 멍에를 함께 메지 말라고 충고하고 있습니다. “너희는 믿지 않는 자와 멍에를 함께 메지 말라 의와 불법이 어찌 함께하며 빛과 어둠이 어찌 사귀랴”(고후 6:14). 그렇다고 이 말씀을 믿지 않는 자와 관계를 끊어야 한다는 의미로 확대 해석하면 안 됩니다. 성경은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고 말씀하고 있고(레 19:18), 예수님은 더 나아가 새 계명을 주시면서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요 15:12). 믿지 않는 자와 함께 멍에를 메지 말라는 말씀은 우리의 ’거룩‘과 직결되어 있고, 동시에 믿지 않는 자와 함께해야 하는 이유는 ’사랑‘에 기초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결혼은 거룩의 관점에서 바라보아야 하고, 결혼해서 이룬 가정이 맺게 될 이웃과의 관계는 사랑의 관점에서 바라보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만드신 제도인 결혼은, 우리의 모든 삶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은 그 결혼이 거룩하게 유지되기를 원하십니다. 동시에 결혼을 통해 두 사람이 사랑을 나눔으로써 함께 하나님께 나아가고, 또 그 사랑을 가지고 이웃에게 나아가는 축복을 누리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거룩함을 파괴하는 통혼 앞에서 거룩한 분노가 일어야 하고, 하나님이 원하시는 거룩한 결혼이 이루어지도록 전심전력해야 합니다. 그 모습이 바로 오늘 우리 모두의 모습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바랍니다.








    에스라 10장 요약

    백성들이 죄를 고백하엿고,이방 족속과 통혼한 아내와 자식들을 내쫓기로 하였으며,이방 여자들과 결혼한 죄를 지은 사람들의 명단에 대해서 기록하고 있습니다.

    마지막 10장은 유다의 통혼에 대한 문제 해결, 즉 종교개혁의 과정과 함께 그 결과물인 이방 여인을 내보내기로 서약한 사람들의 명단이 구체적으로 소개되고 있다. 엎드려 통곡하며 죄를 자백한 에스라의 모습은, 그곳에 모인 모든 이들의 통곡을 이끌어냈다. 그리고 그 통곡은 이방 아내와 그 소생을 모두 내보내자는 맹세로 이어졌다. 이에 에스라는 모든 백성을 예루살렘으로 소집하여 그 맹세를 구체적으로 실행하였다.

      에스라는 지명된 족장들 몇 사람을 선임하여 조사 위원회를 발족시켰고, 그 위원회가 주체가 되어 3개월 동안 이방 아내와 그 소생을 내보내겠다고 맹세한 통혼자들의 명단을 조사, 완료하였다. 명단에 기록된 사람들은 총 113명이었는데, 그 가운데 대제사장들을 비롯한 종교 지도자들이 전체의 24%인 27명이나 되었다.

    I. 본문 이해와 질문

    1. 회개가 촉발한 종교개혁(1-5절)

    [본문] 1 에스라가 하나님의 성전 앞에 엎드려 울며 기도하여 죄를 자복할 때에 많은 백성이 크게 통곡하매 이스라엘 중에서 백성의 남녀와 어린아이의 큰 무리가 그 앞에 모인지라 2 엘람 자손 중 여히엘의 아들 스가냐가 에스라에게 이르되 우리가 우리 하나님께 범죄하여 이 땅 이방 여자를 맞이하여 아내로 삼았으나 이스라엘에게 아직도 소망이 있나니 3 곧 내 주의 교훈을 따르며 우리 하나님의 명령을 떨며 준행하는 자의 가르침을 따라 이 모든 아내와 그들의 소생을 다 내보내기로 우리 하나님과 언약을 세우고 율법대로 행할 것이라 4 이는 당신이 주장할 일이니 일어나소서 우리가 도우리니 힘써 행하소서 하니라 5 이에 에스라가 일어나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과 온 이스라엘에게 이 말대로 행하기를 맹세하게 하매 무리가 맹세하는지라

    [이해] 9장에는 이스라엘 백성의 통혼 소식을 들은 에스라가 무릎을 꿇고 손을 들어 기도하는 장면으로 끝을 맺고 있다. 거기에는 그의 기도 내용도 구체적으로 소개하고 있다. 10장은 그때로부터 시작되고 있다. 그때 에스라는 하나님의 성전 앞에 엎드려 울며 기도면서 죄를 자복하였다(1절). 이것을 통해 다음 세 가지 사실을 알 수 있다. 첫째, 에스라가 기도한 장소는 ‘성전 앞’이었다. ‘성전 앞’은 성전의 바깥뜰 가운데 어느 한 곳을 가리킨다. 만약 에스라가 성전 앞이 아닌 성전 안에서 기도하였다면, 백성들은 그의 그러한 모습을 제대로 목격하지 못하였을 수도 있다. 둘째, 그는 바로 그곳에서 엎드려 울면서 기도하였다. 이러한 모습은, 9장에서 제시한 ‘무릎을 꿇고 손을 들어 기도하는 모습’과 비교해 볼 때, 그의 기도가 더욱 간절해졌다는 의미를 제공해 준다. ‘엎드려’라는 말은 극도의 슬픔으로 인하여 자신의 몸을 던지듯 납작 엎드리는 행위를 가리킨다(NIV, throwing himself down). 또한 ‘울면서’는 비극적인 일로 인하여 통곡하는 것을 가리킨다(창 23:2;삼상 1;10;삼하 1:24;렘 22:10). 따라서 ‘엎드려 울며’는 극도의 슬픈 감정을 표현하기 위한 암시적 행동이라 할 수 있다. 셋째, 죄를 자복하는 기도를 하였다. 이는 앞선 9장에서 드린 기도 내용을 한마디로 요약하면 ‘자복’이었다는 것을 가리킨다.

      에스라가 울면서 기도하고 있을 때, 그 앞에 모인 많은 백성도 크게 통곡하였다. 그러자 매우 큰 무리의 이스라엘 백성들, 곧 남녀와 어린아이가 그 앞에 모여들었다. 이 장면은 에스라의 기도가 점차 전파·확대되고 있는 모습을 보여 준다. 즉 에스라가 울며 기도하자 그 앞에 모인 많은 백성도 심히 통곡하였고, 그것은 다시 더욱 많은 사람이 모여드는 계기가 되었다. 이런 상황은 간절히 드리는 한 사람의 기도가 지닌 파괴력이 얼마나 대단하지를 보여 주는 단적인 사례이기도 한다. ‘이스라엘 백성, 곧 남녀와 어린아이가 그 앞에 모였다’에서 ‘남녀’와 ‘어린아이’는 ‘이스라엘 백성’에 포함된다. 하지만 그것을 이스라엘 백성 뒤에 따로 제시한 것은, 죄를 자복하는 일에 제한된 사람만 참여한 것이 아니라 남녀노소 구분 없이 모두가 동참하였다는 사실을 강조하기 위한 것이다.

      모든 사람이 이스라엘의 범죄로 절망과 통곡에 빠져 있을 때, 스가냐가 에스라에게 소망에 대하여 말하였다(2-4절). 그는 엘람 자손 가운데 여히엘의 아들이다. ‘스가냐’라는 이름은 에스라서와 느헤미야서에 6번 소개되고 있지만(8:3,5;느 3:29;6:18;12:3), 그중에 어떤 사람도 본 절의 스가냐와 동일인이라는 증거를 발견하기 어렵다. 그는 아마도 1차 귀환 때 함께하였던 백성의 지도자로, 통혼에 대해 에스라와 같은 생각을 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엘람 자손’은 1차 귀환자들의 가문 가운데 하나이다(2;7). ‘여히엘’이 누구인지 알기 어렵지만, 이방 여인을 아내로 맞이하였던 것만은 분명하다(26절). 따라서 스가냐는 여히엘과 이방 여인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일 수도 있다.

      스가냐는 비록 자신들이 이방 여자를 아내로 삼은 죄를 하나님께 범하였지만, 아직 이스라엘에 소망이 있다고 역설하였다. 그는 모든 이방 아내와 그들의 소생을 모두 내보내기로 하나님과 언약을 세우고 율법대로 행하자고 제안하였다. 그렇게 행하는 것이 에스라 당신이 주장할 일이기 때문에 주저앉아 있지 말고 일어나서 힘써 행할 것을 촉구하였다. 그와 동시에 우리도 당신을 돕겠다고 약속하였다. ‘소망’은 최악의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의 구원을 끈질기게 기대하는 것이고(창 49:18;사 40:31), 그에 대한 확신을 저버리지 않는 마음이다. 그가 이런 소망을 가질 수 있었던 이유는, 두 가지에서 비롯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첫째, 에스라와 백성의 기도에서 얻을 수 있는 논리적 결과 때문이다. 하나님은 의로우실 뿐만 아니라 은혜가 풍성하신 분이시기도 하다. 따라서 만약 그들이 자신들이 범한 죄를 진정으로 회개하면 하나님은 그들을 용서해 주실 것이다(시 103:8;애 3:22;요일 1;9). 그는 이것을 바라보는 눈이 있었다. 둘째, 현재 상황을 전화위복의 기회로 삼아 대대적인 종교개혁을 단행할 수 있겠다는 기대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에스라에게 이렇게 촉구하였다. “이것은 바로 당신이 주장할 일입니다. 일어나 힘써 행하십시오.”(4절) 스가냐의 주장대로 에스라가 귀환한 가장 중요한 목적도 바로 이와 같은 소명을 이루는 데 있었다. 그는 귀환할 때 아닥사스다 왕으로부터 (1) 율법에 따라 유다와 예루살렘의 형편을 살피고, (2) 하나님의 성전을 위해 하나님이 명령하신 것을 삼가 행하고, (3) 하나님의 지혜를 따라 행정과 사법 등의 부분에서 사회정의를 실현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그런데 그 일은 방백들의 고발로 시작되었고, 에스라와 백성들의 회개에 이어 스가냐의 제안으로 불이 붙었던 것이다.

      그 불길을 딛고 에스라가 일어났다. 그는 제사장들과 레위인들과 온 이스라엘에게 스가냐의 말대로 실행할 것을 맹세하게 하였고, 그 자리에 모인 무리는 맹세로 화답하였다(5절). 여기에서 에스라의 행동은 두 단계로 제시되어 있다. 첫 번째 단계는, ‘일어나는’ 것이었다. ‘일어나다’는 말은 문자적으로 기도하는 중에 스가냐의 격려와 촉구로 즉시 그 자리에서 일어나는 것을 가리키기도 하지만, 여기서는 중대한 결심과 실행에 옮기고자 하는 그의 의지를 강조하는 측면이 강하다. 두 번째는, 그 자리에 모인 모든 사람에게 ‘스가냐의 말대로 실행할 것을 맹세하도록 한’ 것이었다. 이것을 통해 에스라는 모든 백성이 이전 상황으로 돌아가는 것을 방지함과 동시에 이어지는 개혁에 그들의 동참을 자연스럽게 유도하였다.

    [질문] 위 내용을 통해 회개와 종교개혁에는 어떠한 상관관계가 있다고 생각하는가?

    ‘제도나 기구(機構) 따위를 새롭게 뜯어고치는 것’이 ‘개혁’이다. 따라서 전에 구축된 제도나 기구에 대해 그것이 잘못되었다는 인식에서부터 개혁이 시작된다. 이스라엘은 그 인식이 방백들의 고발로 전면 노출되었다(9:1-2). 이 말은 그 고발 이전에 통혼 문제에 대하여 백성들이 잘못되었다는 사실을 인식하지 못하였다는 의미가 아니다. 알고는 있었지만 쉬쉬하였다. 즉 뒤에서 은밀하게 말하고 있었지만 드러내지 않았다. 그것이 일부 방백들의 고발로 적나라하게 공개되었다. 그 소식을 접한 에스라는 하나님께 나아가 그 죄를 통곡하면서 자복하고 하나님의 용서와 자비를 간구하였다. 그 회개 운동에 백성이 동참하였고, 그 운동이 종교개혁의 불길이 되었다. 이것은 문제 인식과 종교개혁 사이에 ‘회개’가 반드시 수반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제공해 준다.

      문제에 대한 명확한 인식을 지지고 있더라도 회개가 없다면 종교개혁은 있을 수 없다. 인식은 객관성에 대한 ‘인지’이기 때문에, 그 안에는 문제를 개선하여야겠다는 ‘의지’까지 담고 있지는 않다. 그래서 인식은 개혁의 출발점이지만 반드시 개혁으로 연결되지는 않는다. 그것이 개혁으로 연결되기 위해서는 강한 의지가 반영된 회개가 반드시 수반되어야 한다. 회개에는 죄를 미워하는 마음과 죄에서 떠나 의로운 삶을 살겠다는 의지가 담겨 있다. 그리고 그러한 의지는 삶의 변화를 통하여 객관적으로 표출된다(욥 42:6;고후 7:9;히 6:1). 그래서 그것이 개혁으로 이어지는 것이다.

      회개에 있어서 우리가 결코 간과해서는 안 될 사안이 있다. 그것은 바로 회개의 ‘진정성’이다. 만약 회개에 진정성이 들어 있지 않고 있다 하더라도 그 강도가 약하다면, 개혁은 공염불이 되어 버리고 설사 개혁되더라도 제대로 탄력을 받지 못하기 때문에 불완전한 개혁이 되어 버린다. ‘개혁’(改革)은 ‘고치다’는 말과 ‘가죽’이라는 말이 합해진 단어이다. 그래서 문자적으로 보면, 기존에 덮고 있던 가죽을 벗겨내고 새로운 가죽으로 교체한다는 뜻이다. 가죽을 벗겨내면 그 사람은 고통으로 자지러질 것이 빤하다. 개혁은 쉽게 이루어지지 않는다. 쉽게 이루어진다면 한자어를 그렇게 쓰지 않았을 것이다. 개혁은 그와 같은 고통 속에서 이루어지기 때문에, 개혁을 완수하기 위해서는 그와 같은 고통도 감내하겠다는 의지가 필요하다. 우리는 수많은 개혁 속에 무수히 많은 사람의 피(목숨)가 들어 있다는 것을 역사에서 배웠다. 그 가운데 종교개혁도 포함되어 있다. 따라서 회개의 진정성 문제는 종교개혁의 핵심 중에서도 핵심이라 할 수 있다.

    2. 본궤도에 오른 종교개혁(6-17절)

    [본문] 6 이에 에스라가 하나님의 성전 앞에서 일어나 엘리아십의 아들 여호하난의 방으로 들어가니라 그가 들어가서 사로잡혔던 자들의 죄를 근심하여 음식도 먹지 아니하며 물도 마시지 아니하더니 7 유다와 예루살렘에 사로잡혔던 자들의 자손들에게 공포하기를 너희는 예루살렘으로 모이라 8 누구든지 방백들과 장로들의 훈시를 따라 삼 일 내에 오지 아니하면 그의 재산을 적몰하고 사로잡혔던 자의 모임에서 쫓아내리라 하매 9 유다와 베냐민 모든 사람이 삼 일 내에 예루살렘에 모이니 때는 아홉째 달 이십 일이라 무리가 하나님의 성전 앞 광장에 앉아서 이 일과 큰비 때문에 떨고 있더니 10 제사장 에스라가 일어나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가 범죄하여 이방 여자를 아내로 삼아 이스라엘의 죄를 더하게 하였으니 11 이제 너희 조상들의 하나님 앞에서 죄를 자복하고 그의 뜻대로 행하여 그 지방 사람들과 이방 여인을 끊어 버리라 하니 12 모든 회중이 큰 소리로 대답하여 이르되 당신의 말씀대로 우리가 마땅히 행할 것이니이다 13 그러나 백성이 많고 또 큰비가 내리는 때니 능히 밖에 서지 못할 것이요 우리가 이 일로 크게 범죄하였은즉 하루 이틀에 할 일이 아니오니 14 이제 온 회중을 위하여 우리의 방백들을 세우고 우리 모든 성읍에 이방 여자에게 장가든 자는 다 기한에 각 고을의 장로들과 재판장과 함께 오게 하여 이 일로 인한 우리 하나님의 진노가 우리에게서 떠나게 하소서 하나 15 오직 아사헬의 아들 요나단과 디과의 아들 야스야가 일어나 그 일을 반대하고 므술람과 레위 사람 삽브대가 그들을 돕더라 16 사로잡혔던 자들의 자손이 그대로 한지라 제사장 에스라가 그 종족을 따라 각각 지명된 족장들 몇 사람을 선임하고 열째 달 초하루에 앉아 그 일을 조사하여 17 첫째 달 초하루에 이르러 이방 여인을 아내로 맞이한 자의 일 조사하기를 마치니라

    [이해] 본문은 본궤도에 오른 종교개혁을 소개하고 있다. 비록 그 자리에 있는 모든 사람이 스가냐의 제안대로 모든 이방 아내와 그들의 소생을 내보내고 율법대로 행할 것이라고 맹세하였지만, 에스라에게는 여전히 그것이 성에 차지 않았다. 역사적으로 볼 때 이스라엘 민족은 맹세에도 불구하고 그와 다른 선택을 종종 하였기 때문에 좀 더 구체적인 실행이 필요하였다. 또 그 맹세는 그 자리에 모여 있는 사람들만 하였기 때문에, 그것을 이스라엘 전체로 확대, 적용할 필요도 있었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의 성전 앞에서 일어나 여호하난의 방으로 들어가서도 기뻐하는 대신 백성의 죄로 근심하면서 음식을 먹거나 물을 마시지도 않았다(6절). ‘여호하난’은 대제사장으로, 엘리아십의 아들이다. 성전에는 여러 개의 방이 있었는데, 어떤 방은 성물들을 보관하는 창고로 사용되었고, 또 어떤 방은 제사장이나 레위인들이 제사를 위해 준비하던 공간으로 사용되었다. 따라서 에스라가 들어간 여호하난의 방은 그 방들 가운데 하나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윽고 방에 있던 에스라는, 백성들에게 예루살렘으로 모일 것을 공포하였다(7절). 에스라의 공포는 백성들 앞에서 그가 직접 내린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에 의하여 전달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7절을 원문대로 번역하면, “그들은 모든 자손에게 목소리가 지나가게 하였다”이다. ‘목소리가 지나가게 하는 것’은 ‘공포’를 의미한다. 그리고 공포한 주어는 3인칭 대명사 복수형인 ‘그들’이다. 따라서 그들이 에스라의 명령을 받아 백성들에게 공포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들’은 에스라를 돕기로 약속한 사람들 가운데 지도급에 해당하는 사람이었을 것이다. 그들은 방백들과 장로들에게 에스라가 명한 내용을 공포하고, 후자에 해당하는 그들은 다시 자신들이 속한 자손들에게 훈시를 내렸던 것으로 여겨진다. 그렇게 전달된 공포 속에는 3일 내로 모이지 않으면 재산을 적몰하고 사로잡혔던 자의 모임에서 쫓아내겠다는 경고 내용이 담겨 있었다(8절). ‘적몰’은 ‘중죄인(重罪人)의 재산을 몰수하고 가족까지도 처벌하는 일’을 의미한다. 하지만 본문 속에서의 ‘적물’은 철저하게 종교적인 의미로 사용되었다. 이 단어는 어떤 것에 대한 세속적인 사용을 금지하는 ‘신성한 금지’(the holy ban)를 나타냈다. 예를 들면 성전(聖戰)에서 빼앗은 물건이나 포로를 다른 사람이 사용하는 것을 금지하는 것을, 즉 그 성전에서 승리의 주역인 하나님께 전적으로 바치는 것을 의미하였다. 이때 하나님께 바쳐진 것들이 거룩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금속으로 만든 것들은 성소에서 사용한 데 비해 다른 모든 물건은 불로 태워지거나 다른 방법으로 파괴되었고, 심지어 사람이나 동물은 죽임까지 당하였다(수 6:17-21,24). 한마디로 이 단어는 적출(excision), 파멸(perdition), 죽음(death) 등을 의미한다. 에스라가 이렇게 막강한 권한을 행사할 수 있었던 이유는, 아닥사스다 왕이 그에게 부여하였던 사법권에 기초하고 있다(7:26).

      에스라의 공포에 유다와 베냐민의 모든 사람이 예루살렘에 3일 내로 모였다(9절). 총회(總會)가 소집된 것이다. 여기에서 모든 사람 앞에 ‘유다와 베냐민’으로 한정하고 있는 것은 눈여겨볼 대목이다. 에스라서에는 이 같은 표현이 총 3회 사용되고 있는데(1:5;4:1;10:9), 모두 어떤 상징이나 속성을 배제하고 있다. 단순히 북쪽의 이스라엘을 제외한 남쪽 유다만의 백성들을 가리키기 위해 사용되었다. 하지만 ‘이스라엘’이라는 단어를 사용할 때는 어김없이 공동체가 지닌 하나님 앞에서의 속성이나 상징을 내포하고 있다. 총회가 소집된 때는 아홉째 달 20일이었다. 바벨론을 떠난 에스라가 예루살렘에 도착한 때가 다섯째 달 1일이기 때문에, 그로부터 4개월 20일, 즉 140일이 지난 때이다. 성전 앞 광장에 모여 앉은 무리는 그 일과 큰비 때문에 떨고 있었다. ‘그 일’이란 그들이 지켜야 할 맹세, 즉 결혼한 이방 여인과 그 자녀들을 내보내는 일을 가리킨다. 비록 이방인이라 할지라도 부인과 자녀는 그들에게 귀한 존재가 아닐 수 없다. 그래서 그들을 내치는 행위는 그들에게 떨리는 일이었을 것이다. 설상가상 ‘큰비’까지 내려 그들의 온몸을 떨게 하였다. 아홉째 달은 히브리 달력으로 ‘기슬르’ 월인데, 이는 현대의 12월 초순 정도에 해당하는 시기이다. 유대 지방은 10월부터 12월까지 춥고 비가 많이 우기(雨期)이다. 그때 내린 큰비로 백성들은 추위에 떨고 있었지만, 큰비는 하나님의 심판을 상징하기 때문에(삼상 12:17-18;겔 13:11,13) 그 심판이 무서워서 떨었다는 의미도 담겨 있다.

      그렇게 떨면서 앉아 있던 무리를 향하여 제사장 에스라가 일어나 말하기 시작하였다(10-11절). 그의 말은 단호하였다. 그는 먼저 무리의 죄부터 지적하였다. “너희가 죄를 범하여 이방 여자를 아내로 삼아 이스라엘의 죄를 더하게 하였다.” 그가 지적한 무리의 죄는 하나님을 향한 반역의 죄이다. 그들은 하나님의 은혜로 남겨진 자들이 되고 또 예루살렘으로 귀환하게 되었지만, 그 은혜를 저버리고 앞선 조상들의 죄를 답습함으로써 이스라엘에 죄를 더하였다. 그는 계속해서 무리의 회개를 촉구하였다. ‘회개’는 죄를 뉘우치고 돌이키는 것을 말한다. 따라서 이방 여인을 아내와 며느리로 삼은 통혼 죄를 자복하고, 이방 사람들과 이방 여인을 끊고 새로운 삶으로 나아가야 한다. 그것이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일이다. 한편 에스라는 회개 대상인 하나님을 ‘너희 조상들의 하나님’으로 소개하고 있는데, 이는 그분이 이스라엘의 조상들과 맺은 바로 그분이라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다. 따라서 그 조상들의 후손인 ‘무리’도 당연히 하나님과 언약 관계에 놓여 있고, 이는 그들이 여전히 하나님과 맺은 언약을 지켜야 한다는 사실이 되기도 한다. 이것은 역으로 그 언약을 저버리면 이스라엘 공동체에서 제명되는 것을 의미한다. 에스라의 단호한 촉구에 모든 회중이 그의 말대로 마땅히 행하겠다고 소리 높여 대답하였다(12절). ‘당신의 말씀대로 우리가 마땅히 행할 것입니다’라는 말은, ‘옳습니다! 당신이 말씀하신 대로 실행하는 것이 우리의 의무입니다’라는 뜻이다(NASB, That’s right! As you have said, so it is our duty to do).

      13-14절은 그곳에 모인 모든 무리가 크게 외친 말은 아닌 것으로 보인다. 아마도 무리를 대표하는 몇몇 지도자가 하였던 것으로 여겨진다. 그들은 지금 당장 그 일을 하려고 서두르지 말고 시간을 두고 체계적으로 하자고 제안하였다. 그들은 그 이유로 세 가지를 제시하였다. 첫째, 백성이 너무 많이 모여 있었기 때문이다. 즉 그 자리에서 그 많은 백성을 조직적으로 편성하고, 일일이 후속 작업을 행하기에는 큰 무리가 있다는 이야기이다. 또한, 그 일은 조용하게 처리해야 할 개인적인 문제이기 때문에 그렇게 공개된 상황에서 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는 의미도 담겨 있었을 것이다. 둘째, 지금은 큰비가 내리는 시기였기 때문이다. 따라서 수많은 사람이 비를 피할 만한 수용 시설이 부족하였고, 건강 문제가 발생할 수도 있었다. 셋째, 그들이 그 일로 크게 죄를 범하였기 때문이다. ‘크다’는 말은 죄의 성격이 심각하다는 뜻도 있지만, 그 문제의 기저에는 복잡한 문제가 얽혀 있다는 의미도 담고 있다. 따라서 그 일은 하루 이틀에 처리할 수 있는 성격이 아니었다. 그들은 이러한 이유를 들어 지금 당장 서두르지 말 것을 제안하였을 뿐만 아니라, 동시에 합리적인 방안을 제시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그들이 제시한 문제 해결 방안은 다음과 같다. 첫째, 온 회중을 위하여 방백들을 세우자. 이는 통혼 문제를 조사하기 위해 지도자들로 구성된 조사 위원회(최고 심의회, 최고 종교 법원)를 세우자는 말이다. 그렇게 하면 신속하고 체계적으로 조사가 이루어질 것이다. 둘째, 통혼한 자는 모두 정해진 기한 내에 방백들에게 오게 하자. 이 조치는 약속된 시간 내에 통혼한 자들에게 방백들 앞에서 이방 여인과 그 소생을 내보내겠다는 서약을 받기 위한 것이다. 셋째, 각자 소속된 고을의 장로들과 재판장과 함께 오게 하자. 여기에서 장로들과 재판장은 서약에 대한 공증인 역할뿐만 아니라 실제 이행 여부를 감찰할 역할까지 맡게 되는 것이다. 이스라엘은 전통적으로 마을마다 나이 많고 인품과 덕망이 높은 장로들로 구성된 자치 단체가 있어 치리를 담당하였다(레 19:32;삼상 26-30). 숙곳에는 무려 장로가 77명이나 있었다(삿 8:14). ‘재판장’은 지방(읍내)의 재판관을 가리킨다. 한편 ‘우리 하나님의 진노가 우리에게서 떠나게 하소서’라는 말은, 문자적으로 ‘우리 하나님의 진노가 우리에게서 돌려질 때까지’라는 뜻이다. 즉 그렇게 될 때까지 그 일을 멈추지 말고 계속하자는 말이다.

      그렇지만 요나단과 야스야는 일어나 그 일을 반대하였다(15a절). ‘그 일을 반대한’ 것이 무엇을 가리키는가에 대해서는 해석이 두 가지로 갈린다. (1) 무리 가운데 대표자들이 제시하였던 방법(13-14절)에 대한 반대이다, (2) 이방 여인들을 축출하라는 에스라의 의견 자체에 대한 반대이다. 이 중에 다음과 같은 이유로 (1)을 더 타당한 것으로 본다. 첫째, 요나단과 야스야는 이방 여인을 취한 죄와 무관하다(18-44절). 둘째, 이방 여인들을 끊어 버리라는 에스라의 명에 무리가 맹세한 일과 대표자들의 제안 사이가 아닌 대표자들의 제안 뒤에 두 사람이 반대하고 일어났다. 셋째, 그들이 악천후에도 에스라의 명에 순종하여 모였다. 넷째, 사법권에 대한 전권을 쥐고 있는 에스라에게 그렇게 반대하기란 쉽지 않았을 것이다. 다섯째, 에스라의 명령에 맹세로 화답한 무리 속에서 그렇게 반대하기는 쉽지 않았을 것이다. 여섯째, 에스라와 방백들이 아무런 저항이나 문제없이 조사를 진행하였다(16-17절). 그렇다면 그들은 왜 대표들의 방법에 반대하였던 것일까? 아마도 그들은 방백들이 얼마간의 기간을 갖고 문제를 해결하기보다 지금 즉시 그 자리에서 해결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하였던 것 같다. 만약 그렇다면 그들은 베드로처럼 매우 다혈질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므술람과 레위 사람 삽브대가 그들을 도왔다(15b절). 여기서도 앞서와 마찬가지로 ‘그들을 도왔다’는 것에 대해 두 가지 해석으로 갈린다. (1) 그들이 요나단과 삽브대의 의견을 반박하고 재차 회중 대표자들의 의견을 지지하였다. (2) 한글개역개정성경의 표면적인 내용대로 요나단과 삽브대의 의견을 지지하였다. 전자는 이어지는 16절 내용과 관련해서 자연스럽다. 즉 요나단과 야스야가 개혁의 시기와 방법에 대해 회중의 의견과 다른 견해를 제시하며 반대의 뜻을 표명하였지만, 므술람과 삽브대가 이들의 의견에 반박하고 회중 전체의 의견에 재청함으로써 그 일이 본래 계획대로 진행되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한글개역개정성경의 번역은 ‘반대하고’(and)를 ‘반대하였지만’(but)으로 번역해야 옳다. 후자는 표준새번역성경과 NIV 등에서 채택하고 있는 해석이다. 표준새번역성경은 “오직, ~만 이 의견에 반대하였으며, ~가 그들에게 동조하였을 뿐이다.”고 번역하고 있고, NIV는 “Only Jonathan and Jahzeiah, supported by Meshullam and Shabbethai, opposed this.”로 번역하고 있다. 이 두 번역에 따르면, ‘요나단과 야스야가 회중의 의견에 반대하는 입장을 피력하였지만, 그들을 지지하는 자들은 오직 므슬람과 삽브내 두 사람뿐이어서 그들의 의견이 채택되지 못하였다’는 의미가 된다. 개인적으로 후자를 더 지지하지만, 두 해석 가운데 어떤 것을 선택하더라도 본문 흐름에 방해가 되지 않을 것 같다.

      16-17절은 조사 위원회의 설립과 그들에 의해 주도된 사역을 소개하고 있다. 사로잡혔던 자들의 자손, 즉 귀환한 백성이 그대로 하였다(16절). ‘그대로 하였다’는 말은 무리의 대표들이 제안한 방안대로 실행에 옮겼다는 의미이다. 에스라는 가문(가족)에 따라 각각 지명된 몇 명의 족장을 선임하고, 열째 달 1일에 앉아서 그 일을 조사하기 시작하여 마침내 첫째 달 1일에 이방 여인을 아내로 맞이한 자들의 일에 대한 모든 조사를 마쳤다. 따라서 조사는 만 3개월(90일) 동안 진행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한편 조사는 유다 백성이 예루살렘에 모인 날(아홉째 달 20일)로부터 10일 후에 시작되었는데, 이 열흘 동안 심사 위원회를 조직하는 등 조사를 위한 제반 사항을 준비하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앉아’는 직무 수행과 관련하여 자신의 자리에 임하는 것을 가리킬 때 주로 사용되는 단어이다(삼상 1:9;왕상 1;35,46).

    [질문] 본 단락은 유다 사회에 종교개혁이 이루어진 과정과 상황을 소개하고 있다. 그 과정을 사건 진행 순서에 따라 간략하게 정리해 보시오.

    유다의 통혼 문제에 대한 개혁은 방백들의 고발과 에스라의 회개 기도로 촉발되었고, 그 진행 과정은 다음과 같다.

    (1) 에스라의 총회 소집(6-8절): ① 소집 배경(6절), ② 소집 대상(7절), ③ 소집 공포령의 권위(8a절), ④ 공포에 대한 즉각적인 순종 요구(8b절), ⑤ 공포의 강제권: 불순종할 때 재산을 적몰하고 공동체에서 추방(8c절).

    (2) 모인 총회의 광경과 에스라의 권고(10-11절): ① 분명하게 밝힌 범죄 내용(10절), ② 해결 방안 제시: 죄를 자복하고 이방 여인을 끊어 버리라(11절).

    (3) 백성들의 반응과 구체적인 방안 제시(12-15절): ① 긍정적인 반응: 에스라의 권고대로 실행하되 시간을 두고 차근차근 진행하자는 의견(13-14절), ② 적극적인 반응: 즉각 시행하자는 의견(추정)(15절).

    (4) 진상 조사(16-17절): 조사 위원회가 주관하여 3개월에 걸쳐 조사.

    3. 통혼한 자들의 명단(18-44절)

    [본문] 18 제사장의 무리 중에 이방 여인을 아내로 맞이한 자는 예수아 자손 중 요사닥의 아들과 그의 형제 마아세야와 엘리에셀과 야립과 그달랴라 19 그들이 다 손을 잡아 맹세하여 그들의 아내를 내보내기로 하고 또 그 죄로 말미암아 숫양 한 마리를 속건제로 드렸으며 20 또 임멜 자손 중에서는 하나니와 스바댜요 21 하림 자손 중에서는 마아세야와 엘리야와 스마야와 여히엘과 웃시야요 22 바스훌 자손 중에서는 엘료에내와 마아세야와 이스마엘과 느다넬과 요사밧과 엘라사였더라 23 레위 사람 중에서는 요사밧과 시므이와 글라야라 하는 글리다와 브다히야와 유다와 엘리에셀이었더라 24 노래하는 자 중에서는 엘리아십이요 문지기 중에서는 살룸과 델렘과 우리였더라 25 이스라엘 중에서는 바로스 자손 중에서는 라먀와 잇시야와 말기야와 미야민과 엘르아살과 말기야와 브나야요 26 엘람 자손 중에서는 맛다냐와 스가랴와 여히엘과 압디와 여레못과 엘리야요 27 삿두 자손 중에서는 엘료에내와 엘리아십과 맛다냐와 여레못과 사밧과 아시사요 28 베배 자손 중에서는 여호하난과 하나냐와 삽배와 아들래요 29 바니 자손 중에서는 므술람과 말룩과 아다야와 야숩과 스알과 여레못이요 30 바핫모압 자손 중에서는 앗나와 글랄과 브나야와 마아세야와 맛다냐와 브살렐과 빈누이와 므낫세요 31 하림 자손 중에서는 엘리에셀과 잇시야와 말기야와 스마야와 시므온과 32 베냐민과 말룩과 스마랴요 33 하숨 자손 중에서는 맛드내와 맛닷다와 사밧과 엘리벨렛과 여레매와 므낫세와 시므이요 34 바니 자손 중에서는 마아대와 아므람과 우엘과 35 브나야와 베드야와 글루히와 36 와냐와 므레못과 에랴십과 37 맛다냐와 맛드내와 야아수와 38 바니와 빈누이와 시므이와 39 셀레먀와 나단과 아다야와 40 막나드배와 사새와 사래와 41 아사렐과 셀레먀와 스마랴와 42 살룸과 아마랴와 요셉이요 43 느보 자손 중에서는 여이엘과 맛디디야와 사밧과 스비내와 잇도와 요엘과 브나야더라 44 이상은 모두 이방 여인을 아내로 맞이한 자라 그중에는 자녀를 낳은 여인도 있었더라

    [이해] 이방 여인과 결혼한 자들 가운데, 먼저 제사장들은 예수아 자손 중 요사닥의 아들과 그의 형제 마아세야, 엘리에셀, 야립, 그달랴였다(18절). ‘예수아 자손 중 요사닥의 아들과’는 ‘요사닥의 아들과 예수아의 자손들로부터’라는 뜻이다. ‘예수아’가 ‘요사닥’의 아들이기 때문에(3:2;학 1:1), 이 부분은 ‘요사닥의 자손들 가운데 예수아의 아들과’로 번역하는 것이 맞다(NIV, 표준새번역성경). 이렇게 볼 때 본문은 예수아와 그 형제의 가문, 즉 대제사장 가문에 속한 인물 가운데 이방 여인을 아내로 맞이한 자들을 밝히고 있는 명단의 도입도로 이해될 수 있다. 이처럼 대제사장의 가문마저 이방 여인과 통혼에 빠졌다는 것은 성전을 재건한 후의 이스라엘 공동체가 빠졌던 영적 타락과 부패가 얼마나 심각하였는지를 극명하게 보여 주는 증거이기도 하다.

      그들은 두 가지 행동을 취하였다. (1) 모두 손을 잡아 그들의 아내를 내보내기로 맹세하고, (2) 그 죄로 말미암아 숫양 한 마리를 속건제로 드렸다(18절). 이런 절차는 18절에서만 나오는데, 이는 아마도 나머지 모든 사람이 치렀던 표준 절차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그들이 다 손을 잡아’라는 말은, ‘그들이 그들의 손을 주어(내밀어)’라는 뜻이다. 이처럼 손을 주는(내미는) 행위는 증인이 맹약에 서명할 때 하는 일반적인 풍습을 묘사한 것이다(왕하 10:15;겔 17;18). ‘속건제’는 고의적이 아닌 죄를 속하기 위해 드려졌던 제사이다(레 5:14-19). 그들이 이 제사를 드렸다는 것을 통해 당시의 상황을 세 가지로 이해해 볼 수 있다. 첫째, 유다 자손이 그 죄의 심각성을 깨닫지 못하고 이방인과 통혼하였다가 에스라의 지적으로 그 사실을 심각하게 받아들였다. 둘째, 속죄제를 드려야 하지만 오랜 이방 생활로 율법에 무지하였기 때문에 속건제를 드렸다. 실제로 속건제는 주로 이웃과 관련한 범죄를 속하는 성격이 강하였던 반면, 속죄제는 하나님과 직접 관련된 죄를 대속하기 위한 성격이 강하였다. 셋째, 그들이 회개한 죄가 이방 여인과 통혼한 것뿐 아니라 부인과 자녀들을 돌려보내는 문제까지 포함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즉 비록 그들이 이방인이라 할지라도 결혼까지 파기하는 것은 그들에 대한 허물을 지는 것이기 때문에 속건제를 드렸다는 것이다. 만약 이런 이해가 맞다면 에스라가 단행한 종교개혁은 매우 조심스럽게 진행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18-19절에 소개된 명단이 대제사장들이라면, 20-23절에서 소개하고 있는 명단은 제사장들이다. 임멜 자손 하나니와 스바댜, 하림 자손 마아세야와 엘리야와 스마야와 여히엘과 웃시야, 바스훌 자손 엘료에내와 마아세야와 이스마엘과 느다넬과 요사밧과 엘라사였다. 이들에 대해서는 구체적으로 알기 어렵다. 제사장들은 13명으로, 4명의 대제사장들까지 포함하면 총 17명이다.

      레위 사람은 요사밧, 시므이, 글라야라 하는 글리다, 브다히야, 유다, 엘리에셀로, 6명이다. 노래하는 자는 엘리아십, 문지기는 살룸과 델렘과 우리였다. 이들은 모두 성전 봉사자로 총 10명이다(23-24절).

      다음은 백성들이다(25-43절). 바로스 자손은 라먀와 잇시야와 말기야와 미야민과 엘르아살과 말기야와 브나야(7명), 엘람 자손은 맛다냐와 스가랴와 여히엘과 압디와 여레못과 엘리야(6명), 삿두 자손은 엘료에내와 엘리아십과 맛다냐와 여레못과 사밧과 아시사(6명), 베배 자손은 여호하난과 하나냐와 삽배와 아들래(4명), 바니 자손은 므술람과 말룩과 아다야와 야숩과 스알과 여레못(6명), 바핫모압 자손은 앗나와 글랄과 브나야와 마아세야와 맛다냐와 브살렐과 빈누이와 므낫세(8명), 하림 자손은 엘리에셀과 잇시야와 말기야와 스마야와 시므온과 베냐민과 말룩과 스마랴(8명), 하숨 자손은 맛드내와 맛닷다와 사밧과 엘리벨렛과 여레매와 므낫세와 시므이(7명), 바니 자손은 마아대와 아므람과 우엘과 브나야와 베드야와 글루히와 와냐와 므레못과 에랴십과 맛다냐와 맛드내와 야아수와 바니와 빈누이와 시므이와 셀레먀와 나단과 아다야와 막나드배와 사새와 사래와 아사렐과 셀레먀와 스마랴와 살룸과 아마랴와 요셉(27명), 느보 자손은 여이엘과 맛디디야와 사밧과 스비내와 잇도와 요엘과 브나야더이었다(7명). 백성들은 총 86명으로, 그 가운데 베배 자손이 4명으로 가장 적고, 바니 자손은 27명으로 가장 많다.

      이상은 모두 이방 여인을 아내로 맞이한 자들의 명단으로, 총 113명이다. 그중에는 자녀를 낳은 여인도 있었다(44절). 이는 자녀가 없는 이방인 아내들뿐 아니라 자녀가 있는 이방인 아내들도 자녀들과 함께 내보냈다는 의미이다. 또한, 종교개혁에 따른 이혼이 너무나 큰 인간적인 고통을 안겨 주었다는 사실도 암시해 준다. 한편 통혼한 자들의 숫자인 113명은 1차 귀환자들의 인원수(42,360명, 7,337명의 남종과 여종은 제외)와 비교하면 극소수(0.0027%)에 불과하다. 그때부터 에스라가 귀환한 시점까지 인구가 100,000명 정도로 증가하였다고 가정하면 그 비율은 절반 이상 더 줄어든다. 그렇다면 방백들의 고발과 에스라의 반응은 어떤 면에서 과도하다 할 수 있다. 이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추측해 볼 수 있다. 첫째, 극소수였지만 통혼 문제가 너무나 심각한 죄에 해당하기 때문에, 특히 에스라는 옷을 찢고 머리털과 수염을 뜯으면서 넋을 잃고 주저앉을 수밖에 없었다. 둘째, 통혼한 자들을 모두 기록하기에는 지면상 무리가 따르기 때문에, 에스라가 제시한 명단에는 종교 지도자와 각 가문의 대표에 해당하는 사람들만 기록하였다. 셋째, 막상 명단을 작성하는 과정에서 생각을 바꿔 참여하지 않은 사람들이 의외로 많았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이와 같은 추측에는 그 어떤 근거도 제시하기 어렵다.

    [질문] 통혼한 자들의 명단에 나타난 특징과 그 의미는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구체적인 명단이 하향식 순서대로 작성되어 있다. 즉 종교 지도자들로부터 시작하여 일반 백성이 기록되어 있고, 종교 지도자들도 대제사장, 제사장, 레위인, 노래하는 자, 문지기의 순서대로 제시되어 있다. 이는 2장에서 제시하고 있는 1차 귀환자들의 명단 제시법과 상반되는 방법이다. 그곳에는 백성들을 먼저, 제사장들은 맨 나중에 소개하고 있다.

      2장과 달리 여기에서 종교 지도자들을 먼저 제시한 이유는, 그들이 지닌 책임성을 강조하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그것을 강조한 목적은 종교 지도자들의 잘못을 더욱 심각한 것으로 보고 먼저 추궁하려는 의도에서 비롯되었을 것이다. 종교 지도자들은 총 27명으로, 통혼자들 가운데 24%의 비율을 차지하고 있다. 이는 1차 귀환할 때의 백성들 대비 종교 지도자들이 차지하였던 16%보다 더 높은 비율이다(평민들은 24,144명이, 종교 지도자들은 4,630명이 귀환). 이것은 결과적으로 제사장들이 백성들보다 통혼에 더욱 적극적이었다는 중요한 단서가 된다. 그들은 백성들을 지도해야 할 위치에 있었지만, 그 역할을 제대로 수행하지 않고 자신들이 먼저 앞장섬으로써 백성들이 통혼의 죄에 가담할 수 있도록 가교역할까지 해 버렸던 것이다.

    ​II. 메시지

    본문: 스 10:1-5

    제목: 종교개혁의 필수 조건

    1 에스라가 하나님의 성전 앞에 엎드려 울며 기도하여 죄를 자복할 때에 많은 백성이 크게 통곡하매 이스라엘 중에서 백성의 남녀와 어린아이의 큰 무리가 그 앞에 모인지라 2 엘람 자손 중 여히엘의 아들 스가냐가 에스라에게 이르되 우리가 우리 하나님께 범죄하여 이 땅 이방 여자를 맞이하여 아내로 삼았으나 이스라엘에게 아직도 소망이 있나니 3 곧 내 주의 교훈을 따르며 우리 하나님의 명령을 떨며 준행하는 자의 가르침을 따라 이 모든 아내와 그들의 소생을 다 내보내기로 우리 하나님과 언약을 세우고 율법대로 행할 것이라 4 이는 당신이 주장할 일이니 일어나소서 우리가 도우리니 힘써 행하소서 하니라 5 이에 에스라가 일어나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과 온 이스라엘에게 이 말대로 행하기를 맹세하게 하매 무리가 맹세하는지라

    1. 종교개혁에 담긴 의미

    오늘 본문은 본궤도에 오른 유다 공동체의 종교개혁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종교개혁’이라는 말 속에는 두 가지 의미가 들어 있습니다. 첫째는, 개혁의 대상이 종교 문제, 즉 신앙 문제라는 것입니다. 유다는 바벨론에서 돌아온 포로들로 이루어진 공동체였습니다. 그들은 바벨론에서 구축한 삶의 터전을 버리고 성전을 재건하기 위하여 귀환하였기 때문에, 하나님을 향한 신앙이 남달랐다고 평가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성전 재건 이후에 그들의 신앙은 급격히 무너졌습니다. 그래서 에스라가 귀환할 당시에는 이방인과의 통혼이 보편화되어 있었습니다. 일반 백성들뿐만 아니라 종교 지도자인 제사장들과 레위인들도 그 일에 가담하고 있었고, 심지어 방백들과 고관들은 그 일에 으뜸이 되었습니다. 에스라는 그 소식을 듣자마자 그 충격과 슬픔에 빠져, 옷을 찢고 머리털과 수염을 뜯으면서 넋을 잃고 주저앉아 버렸습니다. 그에게는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숙제로 주어졌습니다. 즉 하나님 앞에서 가증한 그 일이 개혁의 대상이 되었던 것입니다.

      종교개혁이 지닌 두 번째 의미는, 그 개혁이 쉽지 않다는 것입니다. ‘개혁’(改革)은 문자적으로 몸을 덮고 있는 가죽을 벗겨내고 새 가죽으로 바꾸는 것을 의미합니다. 가죽을 벗기는 일은 고문 중에서도 상고문입니다. 그래서 수많은 사람이 개혁이 중요하기 때문에 반드시 개혁해야 한다는 사실도 알고 있지만, 막상 개혁 단계에 이르면 주저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유다 사회에 만연한 통혼의 문제는 해결 방법이 간단해 보이지만, 실상은 그렇게 단순하지 않습니다. 비록 이방인이지만 그들이 맞은 아내와 그 사이에서 태어난 자녀들은 그 당사자들에게 너무도 소중하고 사랑스러운 존재입니다. 그들은 칼로 무를 베듯이 싹둑 자를 수 있는 대상이 아닙니다. 자신의 살을 베고 뼈를 꺾는 아픔이 수반됩니다. 그래서 에스라 앞에 놓인 종교개혁은 난제 중의 난제가 아닐 수 없었습니다.

    2. 종교개혁의 필수 조건

    1) 죄를 자복하기

    그러한 상황 속에서 종교개혁이 본궤도에 오르게 되었는데, 그 일은 죄를 자복하는 것으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에스라가 하나님의 성전 앞에 엎드려 울며 기도하여 죄를 자복할 때에 많은 백성이 크게 통곡하매 이스라엘 중에서 백성의 남녀와 어린아이의 큰 무리가 그 앞에 모인지라”(1절). 에스라가 성전 앞에서 엎드려 울면서 죄를 자복하자, 그 자리에 모인 수많은 백성도 크게 통곡하였습니다. 에스라에서 시작된 자복이 영향을 미쳐 유다 공동체에 큰 통곡으로 이어졌습니다. 여기에서 ‘엎드리다’는 말은 극도의 슬픔을 이기지 못하고 자신의 몸을 던지듯 납작 엎드리는 행위를 가리킵니다. 또한 ‘울다’는 말은 비극적인 일로 인하여 통곡하는 것을 가리킵니다. 따라서 ‘엎드려 울고 있는’ 에스라의 모습 속에는, 극도의 슬픈 감정이 내재되어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 가운데 그가 기도하였던 내용이 무엇입니까? 죄를 자복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죄를 자복하는 그의 진정성은 다시 엎드려 울고 있는 모습에 오롯이 담겨 있습니다.

      만약에 에스라가 자복할 때, “하나님, 미안해요”라는 식으로 가볍게 자복하였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그 죄에 대해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고 별로 가슴 아파하지도 않았다는 증거가 됩니다. 문제를 대수롭지 않게 여기거나 그로 인해 고통도 미미하다면, 그 문제에서 돌이키려는 의지, 즉 개혁에 대한 의지도 약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이것은 종교개혁에 대한 동력을 상실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결국에는 현실과 적당히 타협하면서 대충 개혁할 것이 빤합니다. 상처 나거나 병에 걸린 사람이 그것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면 병원에 가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그것이 심각하다고 생각하면 그 사람은 병원에 반드시 가게 되어 있습니다. 또 그로 인해 심한 고통을 느끼는 사람도 병원에 가지 않을 수 없습니다. 죄 문제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죄를 심각하지 보지 않으면 단순히 미안하다는 반응만 보입니다. 하지만 그 죄가 심각하다고 느낀 사람은 엎드려 통곡할 수밖에 없고, 그 통곡은 그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방향으로 발걸음을 옮기는 의지의 원동력이 됩니다. 그래서 에스라처럼 죄를 자복하되 진정성 있게 자복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유다 백성들이 범한 통혼의 죄는 별거 아닌 것처럼 보이지만, 그 안에는 하나님의 주권에 대한 반역, 하나님의 명령에 대한 불순종, 그리고 거룩함과 반대되는 부정한 삶이 문제의 핵심으로 자리 잡고 있습니다. 이는 모두 하나님 앞에서 ‘가증한 일’이 되기 때문에, 진노와 멸망에 이르게 됩니다. 성경은 각 사람이 자기 행위대로 심판을 받는다고 경고하고 있습니다(계 20:13). 예수님은 그 심판의 참혹함에 대하여, 이렇게 소개하셨습니다. “거기에서는 구더기도 죽지 않고 불도 꺼지지 아니하느니라 사람마다 불로써 소금 치듯 함을 맏으리라”(막 9:48-49). 죄악의 결과가 이토록 참혹하기 때문에, 우리 눈에 그 죄가 아무리 사소하게 보인다 할지라도 그 죄는 심각하고 또 심각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에스라는 유다의 죄 앞에서 대충 넘어갈 수 없었고, 그것을 심각한 문제로 받아들이고 그렇게 엎드려 통곡하면서 자백하였던 것입니다.

      그가 자복하고 있는 모습은, 우리에게도 동일한 반응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삶이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은 모습으로 바뀌기 위해서는, 그래서 진노와 멸망이 아닌 축복과 소망 가득한 삶이 되기 위해서는, 먼저 우리 안에 있는 죄 문제를 심각하게 직시하고, 하나님 앞에서 에스라처럼 엎드려 통곡하면서 우리 죄를 자복해야 합니다. 그렇게 할 때 우리의 삶에 대한 개혁의 첫 단추를 제대로 끼울 수 있습니다.

    2) 돕는 사람과 함께하기

    종교개혁에 있어서 두 번째 필수 조건은, 함께하는 것입니다. 사자성어 가운데 ‘독불장군’(獨不將軍)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혼자서는 장군이 될 수 없다는 뜻으로, 남과 의논하고 협조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이르는 말입니다. 종교개혁도 이와 마찬가지입니다. 혼자서는 그 일을 할 수 없습니다. 함께하되 충성을 다하는 사람들과 함께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것을 무시하였던 대표적인 사람이 ‘르호보암’입니다. 그는 솔로몬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른 인물입니다. 그때 북쪽 지파 사람들은 그에게 이런 제안을 하였습니다. “왕의 아버지가 우리의 멍에를 무겁게 하였으나 왕은 이제 왕의 아버지가 우리에게 시킨 고역과 메운 무거운 멍에를 가볍게 하소서 그리하시면 우리가 왕을 섬기겠나이다”(왕상 12:4). 르호보암은 그 문제를 먼저 솔로몬 왕을 섬겼던 노인들과 상의하였고, 그들은 그에게 ‘그 백성을 섬기는 자가 되어 그들을 섬기고 좋은 말로 대답하면 그들이 영원히 왕이 종이 될 것’이라고 일러 주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노인들의 말을 듣지 않고 자기와 함께 자란 어린 사람들의 말, 즉 노인들의 말과 반대되는 의견을 따랐습니다. 그 결과 어떻게 되었을까요? 이스라엘 왕국은 남과 북으로 갈라지고, 두 왕국이 모두 멸망할 때까지 싸움질하였습니다. 이 사건은 우리에게 누구와 함께하느냐는 문제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시사해 줍니다.

      다행히도 에스라에게는 함께할 충성스러운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사가냐와 그의 동료들이었습니다. “스가냐가 에스라에게 이르되 우리가 우리 하나님께 범죄하여 이 땅 이방 여자를 맞이하여 아내로 삼았으나 이스라엘에게 아직도 소망이 있나니 곧 내 주의 교훈을 따르며 우리 하나님의 명령을 떨며 준행하는 자의 가르침을 따라 이 모든 아내와 그들의 소생을 다 내보내기로 우리 하나님과 언약을 세우고 율법대로 행할 것이라 이는 당신이 주장할 일이니 일어나소서 우리가 도우리니 힘써 행하소서 하니라”(2-4절). 스가냐는 통혼으로 인한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소망을 잃지 않았습니다. 율법대로 이방 아내와 그들의 소생을 다 내보내자는 개혁의 방법(방향)을 제안하였고, 우리가 돕겠다는 약속도 하였습니다. 또 일어나 힘써 행하라고 에스라를 격려까지 하였습니다. 그의 제안과 동참이 에스라를 일으켜 세웠고, 힘써서 행할 수 있는 용기도 주었습니다.

      이런 모습은 우리의 신앙생활에도 그대로 적용할 수 있습니다. 우리 안에 도사리고 있는 수많은 문제는 우리 혼자 힘으로 해결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교회로 부르셨고, 그 안에서 한 몸을 이루도록 하셨습니다. 주님은 이를 통해 서로 분쟁하는 것이 아니라, 여러 지체가 서로 같이 돌보게 하셨습니다(고전 12:25). 주님이 이렇게 하신 이유는 우리가 혼자 설 수 없기 때문이고, 교회 안에서 서로가 서로를 돌볼 때 상처가 치유되고 문제가 해결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그 안에서 우리 죄를 서로 고백하고, 병 낫기를 위해 서로 기도해야 합니다. 그렇게 할 때 강력하고 효과적인(powerful and effective, NIV) 열매를 볼 수 있습니다(약 5:16). 함께하되 특별히 스가냐와 같이 우리의 신앙이 올바르게 설 수 있도록 도움을 주는 사람들과 함께해야 합니다.

    3) 철저하고 구체적으로 실행하기

    종교개혁을 완성하기 위한 세 번째 필수 조건은, 그 일을 구체적으로 실행하는 것입니다. 스가냐의 말을 듣고 에스라는 일어났습니다. 그리고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과 온 이스라엘에게 그의 말대로 행하기를 맹세하게 하였고, 무리는 맹세로 그에게 화답하였습니다(6절). 이는 에스라가 그 문제를 대충 넘어가지 않았다는 의미입니다. 그는 먼저 백성들의 마음을 맹세로 다잡았습니다. 맹세로 마음을 다잡게 하는 행위는 두 가지 측면에서 중요합니다. 첫째, 두말할 수 없게 함으로써 마음이 이전 상태로 돌아가는 것을 방지할 수 있습니다. 둘째, 그것은 다음에 이어질 행동에 강력한 동력(에너지)을 제공해 줍니다.

      에스라는 그 맹세에 기초하여 개혁을 구체적으로 실행에 옮겼습니다. 그가 실행한 내용은 오늘 본문 뒤에 소개되어 있습니다. 그는 모든 백성을 예루살렘으로 모이게 한 후, 그들에게 다시 한번 스가냐의 제안대로 할 것을 맹세하게 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맹세를 지키겠다는 사람들의 명단을 조사하여, 첫째 달 초하루에 그 작업을 모두 마쳤습니다(16-17절). 이방 여인과 결혼한 이들의 명단을 작성하였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합니까? 그들이 맹세한 대로 실행에 옮겼는지 한 사람 한 사람 구체적으로 확인하겠다는 뜻입니다. 에스라는 유다의 종교개혁을 그렇게 철저하고 구체적으로 실행에 옮겼던 것입니다.

      그의 이러한 모습은 우리에게 너희도 너희 안에 있는 죄 문제를 그렇게 철저하고 구체적으로 해결해야 한다는 메시지를 던져 줍니다. 이렇게 하지 않으면 우리의 죄 문제는 교묘한 자기합리화에 빠져 더욱 깊은 곳으로 숨어 버립니다. 그러므로 우리 안에 도사리고 있는 죄와 그로 인해 무너진 신앙 목록을 하나하나 구체적으로 작성해야 합니다. 그리고 만약 이방 여인들을 내보낸 것같이 내쫓은 죄가 있다면 ‘Yes’로 표시하고, 해결하지 못한 죄는 ‘No’로 표시하고 주님께 도움을 요청해야 합니다.

    ​3. 종교개혁과 예수 그리스도

    유다 공동체에 만연되어 있던 통혼 문제는, 그 모양과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 모르겠지만, 오늘 우리 안에도 교묘하게 도사리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것을 은밀하게 즐길 때도 종종 있습니다. 그와 다르게 그것이 제거되기를 원하지만, 그런 우리의 마음과 다른 행동을 함으로써 괴로워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과 같은 사람도 이렇게 한탄하였습니다.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하지 아니하는 바 악을 행하는도다...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롬 7:23-24). 사도 바울과 같은 사람이 이렇다면 우리의 실체는 더 말할 필요도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여전히 종교개혁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바울의 한탄 속에는 그런 상태에서 해방되기를 바라는 마음이 간절히 들어 있습니다. 우리의 마음도 그와 동일하다고 믿습니다. 바울의 한탄 끝에 그 답이 제시되어 있는데, 그 답이 무엇일까요?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롬 7:25).

      오늘 우리가 살펴본 종교개혁의 필수 조건은 모두 그분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죄를 자복하고, 죄 문제를 철저하고 구체적으로 지워나가는 일은 그분 안으로 들어와 함께하면 저절로 해결됩니다. 그분의 몸인 교회에 참여해서 서로 섬기기만 하면 함께할 사람들이 생깁니다. 이 일은 모두 우리 삶의 주인을 내가 아닌 예수님으로 바꾸기만 하면 저절로 이루어집니다. 이러한 사실은 우리에게 종교개혁의 본질이 예수 그리스도를 향하는 것이고, 개혁의 필수 조건들도 예수 그리스도 안으로 들어오면 모두 충족된다는 의미를 제공해 줍니다. 이 말씀을 찾아 함께 읽고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마 11:28-30). 이 말씀이 우리의 경험이 되고, 그 경험이 다시 신앙의 개혁으로 이어지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바랍니다.






















































































    2025 새벽묵상 역대하





    깨닫는 것이 은혜다

    이솝 우화에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사자와 나귀와 여우가 함께 사냥을 나갔습니다.
    그들은 많은 먹이를 사냥하여 셋이 나누게 되었습니다.
    먼저 나귀가 제안했습니다.
    “이 사냥감은 우리 셋이서 잡은 것이니 똑같이 세 등분하자.”
    그 소리를 듣고 사자가 매우 화가 나서 나귀를 꽉- 물어 죽였습니다.
    그리고 사자가 여우에게 물었습니다.
    “이 사냥감을 어떻게 나눌까?”
    그러자 여우가 9대 1로 나누자고 제안했습니다.
    사자가 9이고, 여우인 자신은 1이라는 겁니다.
    이에 사자는 여우가 너무 마음에 들어서 “여우야, 너는 어떻게 그런 기특한 생각을 했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때 여우가 대답합니다. “바로 전에 나귀가 죽는 것을 보고 즉시 깨달았습니다.”

    여러분, 깨닫는 것이 은혜고, 깨닫는 것이 생명입니다.
    어떤 사람은 그렇게 많이 보고 들어도 도무지 깨닫지 못합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은 한번 보고 들으면 즉시 깨닫습니다.
    어떤 사람은 몇 대 매를 맞아야만 깨닫습니다.
    어떤 사람은 아주 중요한 것을 잃고 난 다음에야 깨닫습니다.
    어떤 사람은 죽을 때가 되어서야 깨닫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죽기까지 깨닫지 못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 사람은 지옥 문 앞에 가서야 비로소 “아차, 이게 아니었구나!” 하고 깨닫고 후회할 겁니다.
    그러나 그때는 이미 늦었습니다.
    그런 사람 중에 가장 대표적인 사람이 성경에 나옵니다.
    누구지요? 애급의 바로 왕입니다.
    그 사람은 자기가 절대 왕이다 보니 자기가 가장 잘나고 똑똑한 줄 알았습니다.
    그래서 마음이 딱딱해지고 강퍅해졌습니다.

    하나님이 모세를 통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노예에서 놓아주라고 몇 번이고 이야기했지만 깨닫지 못하다보니 전혀 말을 듣지 않습니다. 그러다 보니 하나님께 열 가지 재앙을 두드려 맞았습니다.
    나라가 초토화 되었습니다.
    자기의 장자를 비롯해 애급의 모든 장자가 다 죽었습니다.
    그래도 그는 깨닫지 못하고 계속 이스라엘 백성들을 잡으려고 군대를 이끌고 용감하게 홍해까지 달려왔습니다.
    결국 그들은 모두 물에 수장되어 죽고 말았습니다.

    여러분의 경우는 어떻습니까?
    인간으로서 보편적으로 깨달아야 할 것들을 대체로 잘 깨닫는 편입니까? 아니면 그런 보편적인 것에 대한 깨달음이 둔한 편입니까? 만약 그런 보편적인 깨달음이 매우 둔하면 다른 사람들로부터 “상식이 없다, 경우가 없다. 전혀 통하지 않는다. 같이 일하지 못하겠다. 못 말린다.“라는 말을 듣게 됩니다. 오늘의 본문은 그런 사람에 대해 이렇게까지 말씀합니다. “존귀에 처하나 깨닫지 못하는 사람은 멸망하는 짐승 같도다.”(시49:20)

    물론 사람들은 각자의 깨닫는 영역이 따로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이것을 잘 깨닫고, 어떤 사람은 저것을 잘 깨닫습니다.
    여성은 대체적으로 감성적인 것을 잘 깨닫고, 남성은 대체로 이성적인 것을 잘 깨닫습니다.
    그리고 어떤 사람은 운동과 예술 분야에 잘 깨닫는 사람이 있고, 어떤 사람은 학문의 분야에 잘 깨닫는 사람이 있습니다.

    여러분의 경우는 어떤 쪽에 잘 깨닫습니까? 사람들은 살아가면서 ‘아하’ 하고 깨닫는 체험을 누구나 다 해보았을 것입니다. 뇌 과학에서는 이런 순간을 ‘아하 체험’이라고 부릅니다. 순간 내 머릿속에 전구불이 번쩍 켜지는 겁니다. 신앙생활에서도 이런 ‘하아 체험’이 중요합니다. 믿음이 좋은 사람을 보면 말씀을 들을 때에 ‘아하, 그렇구나!’ 하고 잘 깨닫는 사람입니다.

    물론 타종교인 불교(엄격히 말하면 불교는 철학)에서도 깨달음을 중요시합니다. 불교에서 말하는 ‘부처’는 산스크리트어로 ‘깨달은 사람’이란 뜻입니다. 그러나 인간의 깨달음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인간의 깨달음으로는 구원에 이르지 못합니다. 불교나 기독교 모두 깨달음을 말하지만, 불교는 인간 스스로 깨닫고자 하는 것이고, 기독교는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를 통해서 깨닫는 것입니다.

    그래서 불교는 자력 종교이고, 기독교는 타력 종교 즉 은혜의 종교입니다. 즉 하나님이 은혜를 주셔야만 비로소 깨닫고 예수님을 믿고 구원을 받을 수 있고, 성도로서의 바른 삶을 살 수 있습니다. 고로 오늘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깨닫는 은혜가 임하기를 갈망합니다. 특히 성령님을 통해서 주어지는 영적인 깨달음이 임하시기를 축원합니다.

    일단 인생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에 대해 깨달음이 있는지 몇 가지 질문을 통해서 체크해 봅시다. “2000년 전에 죽으신 예수님이 나의 죄를 위해 죽으시고 다시 사신 것을 분명히 깨닫고 믿습니까?” “예수님을 구세주로 믿은 나는 죽어서 천국에 갈 것을 확실히 깨닫고 믿습니까?” 모두들 아멘 하시는데 아니 그걸 어떻게 깨달았습니까?

    예수님이 베드로에게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마16:17) 즉 하나님이 저와 여러분들에게 깨닫고 믿는 은혜를 주셨다는 겁니다. 또한 이런 깨달음이 있으므로 우리는 하나님께 진정으로 감사하고 찬양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깨달음이 없으면 예수님께서 나를 위해 돌아가셨다고 해도 그냥 무덤덤해집니다. 따라서 신앙생활의 감사와 감격과 활력이 없게 됩니다. 그런 깨달음이 없으면 자연히 신앙생활의 흥미를 잃고, 믿음이 후퇴하고 맙니다. 제자들이 그랬습니다. 예수님이 3년간 그토록 제자들에게 겸손을 가르치고 모범을 보였지만 그들은 잘 깨닫지 못했습니다. 그러다보니 서로 높아지려고만 했습니다.

    즉 깨달으면 겸손해지고, 깨달음이 바른 신앙인의 토대가 됩니다. 깨달음이 있어야 예수님의 십자가가 내 삶에 소망이 되고 감격이 될 수 있습니다. 또한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보아도 그 말씀이 깨달아져야 합니다. 그래야 진리 가운데 즐거워하며, 날마다 감사하며 은혜 가운데 살아갈 수 있습니다. 또한 깨달아져야만 주님을 위해 바르게 헌신할 수도 있습니다.

    제가 깨달음에 관한 성경 구절을 찾으면서 “아- 성경에는 깨달음에 대해 강조하는 구절이 상당히 많이 있구나!” 하고 깨달았습니다. 이에 대해 몇 구절을 소개하겠습니다. 먼저 사람들이 깨닫지 못하는 것에 대한 안타까움의 말씀입니다. “소는 그 임자를 알고 나귀는 주인의 구유를 알건마는 이스라엘은 알지 못하고 나의 백성은 깨닫지 못하는도다.”(사1:3)

    “빛이 어두움에 비취되 어두움이 깨닫지 못하더라.”(요1:5) “기록된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깨닫는 자도 없도다.”(롬3:10-11) “너희가 백발이 얼룩얼룩 할지라도 깨닫지 못하는도다.”(호7:9) “홍수가 나서 저희를 다 멸하기까지 깨닫지 못하였으니 인자의 임함도 이와 같으리라.”(마24:39) “깨닫지 못하는 백성은 패망하리라.”(호4:14)

    특히 악인의 특징 중 하나는 그들에게는 하나님이 주시는 선과 악에 대한 깨닫는 마음이 없다는 겁니다. 그러니 용감하고 무식하게 죄와 악을 계속 짓고 결국 멸망을 당하고 맙니다. 이에 대한 성경 말씀입니다. “악인의 길은 어둠 같아서 그가 거쳐 넘어져도 그것이 무엇인지 깨닫지 못하느니라.”(잠4:19)

    예수님도 제자들이 잘 깨닫지 못하자 너무 답답해하시면서 말씀합니다. “어찌하여 내 말을 깨닫지 못하느냐? 이는 내 말을 들을 줄 알지 못함이로다.”(요8:43) “너희가 아직도 깨닫지 못하느냐? 떡 다섯 개로 오천 명을 먹이고 주운 것이 몇 바구니며, 떡 일곱 개로 사천 명을 먹이고 주운 것이 몇 광주리이던 것을 기억치 못하느냐? 어찌 내 말한 것이 떡에 관함이 아닌 줄을 깨닫지 못하느냐?”(마16:9-11)

    심지어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자신이 십자가에서 죽으실 것을 자주 말씀하셨지만 “제자들이 이것을 하나도 깨닫지 못하였으니 그 말씀이 감취였으므로 저희가 그 이르신 바를 알지 못하였더라.”(눅18:34)고 성경은 말씀합니다. 그러나 그렇게 깨닫지 못하던 제자들이 나중에는 깨닫게 되었습니다.

    이에 대해 성경은 말씀합니다. “제자들이 처음에 이 일을 깨닫지 못하였다가 예수께서 영광을 얻으신 후에야 이것이 예수께 대하여 기록된 것임과 사람들이 예수께 이같이 한 것인 줄 생각났더라.”(요12:16) 특히 예수님은 제자들을 비롯해 저와 여러분들이 제대로 깨닫지 못하면 결국 전도도 못하고, 하나님의 뜻을 분별도 못하고, 실천도 못하게 되니까 이에 대한 대책을 세우셨습니다.

    그게 뭐지요? 다름 아닌 진리의 성령님을 각자의 마음속에 보내주시는 겁니다. 예수님이 보내주신 성령님은 삼위일체 하나님의 한 분이시요. 깨닫게 하시는 영이십니다. 고로 성령님이 내 마음 속에 오시면 무엇이 옳은지 틀린지, 무엇이 죄이고 무엇이 의인지를 깨닫게 만들어 줍니다. 이에 대해 성경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그가 와서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시리라.”(요16:8)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시리라.“(요14:26) ”내가 너희에게 이를 것이 많으나 지금은 너희가 감당치 못하리라. 그러하나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 그가 자의로 말하지 않고 오직 듣는 것을 말하시며 장래 일을 너희에게 알리시리라.“(요16:12-13)

    다시 말해 성령님이 내 안에 오시면 마치 장님이 눈을 뜨게 되고, 귀머거리의 귀가 열리는 것처럼 진리에 대하여 바르게 깨닫게 만들어 준다는 것입니다. 고로 성령님이 오시면 이런 깨달음의 고백을 하게 됩니다. “아하, 예수님이 나를 위해 십자가에서 매달려 죽으셨구나!” “아하, 하나님은 바로 나의 친아버지가 되시는구나!” “아하, 하나님의 뜻은 바로 이것이구나!”

    이렇게 깨달음이 오니 그 사람은 자연히 교회에서 착하고 충성된 일꾼이 됩니다. 그러나 마귀의 영, 교만의 영에 사로잡히면 깨달음이 전혀 없습니다. 도대체 무엇이 선이고 무엇이 악인지 깨닫지 못합니다. 그래서 옳은 것을 틀리다고 하고, 악한 것을 선하다고 하며, 스스로 하나님을 저버리는 길로 용감하게 나아가게 되고 맙니다. 그러고도 자신은 옳다고 계속 착각을 합니다.

    어떻게 깨닫느냐에 따라 우리의 장래가 결정 될 것입니다.
    만약 당신에게 바르게 깨닫게 해주는 성령님이 있다면 당신의 행위도 바르게 될 것이요, 그 결과는 당연히 하나님의 칭찬과 보답으로 나타날 것입니다.
    그러나 깨달음이 없으면 그 행위가 자신이 보기에 바른 것 같으나 실제는 하나님 보시기에 옳지 않은 것이요, 그 행위에 대한 쓰디쓴 열매를 결국 자신이 먹고 말 것입니다.

    고로 보다 나은 장래를 원한다면 이렇게 기도하십시오.
    “주여, 저에게 바르게 깨닫는 영을 주시옵소서!” 성경은 말씀합니다.
    “악인은 공의를 깨닫지 못하나 여호와를 찾는 자는 모든 것을 깨닫느니라.”(잠 28:5)
    “악한 자는 아무도 깨닫지 못하되 오직 지혜 있는 자는 깨달으리라.”(단 12:10)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을 받지 못하고 깨닫지도 못하나니 이런 일은 영적으로야 분변함이니라.”(고전 2:14)

    여러분, 아무리 생각을 해보아도 인간의 지식, 인간의 지혜, 인간의 아이큐로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 나아가기에는 역부족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까?
    다시 말해 우리를 깨닫게 해주는 성령님의 도움이 있어야 하나님의 사람, 하나님이 사용하시는 착하고 충성된 일꾼이 됩니다.

    “주여, 나의 깨닫지 못하는 것을 내게 가르치소서. 내가 악을 행하였으면 다시는 아니하겠나이다.”(욥 34:32)
    “주여, 나로 깨닫게 하소서. 내가 주의 법을 준행하여 전심으로 지키리이다.”(시 119:34)
    “나는 주의 종이오니 깨닫게 하사 주의 증거를 알게 하소서.”(시 119:125)

    깨닫는 것이 은혜입니다.


    깨달음에 대한 예화 모음

    ▣ 깨달음

    두 은둔자가 한 번도 다투지 않고 오랜 세월을 함께 살았다.
    어느 날, 한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말했다.
    “우리도 세상 사람들처럼 다퉈보세!”
    그러자 다른 사람이 대답했다.
    “나는 다툴 줄을 모르네.”
    다시 첫 번째 사람이 말했다.
    “내가 자네와 나 사이에 벽돌을 하나 놓고 ‘이건 내 거야!’라고 말하면
    자네는 ‘아냐, 그건 내 거야!’라고 말하는 거야. 그럼 싸움이 시작될 걸세.”
    그래서 둘 사이에 벽돌을 하나 놓았고,
    첫 번째 사람이 “이건 내 거야!”라고 말했다.
    그러자 두 번째 사람이 “아냐, 그건 내 거야”라고 말한 뒤에
    이내 마음이 편치 않아 “맞아, 그건 자네 거야. 어서 가져가게”라고 대답했다. 결국 두 사람은 도무지 싸울 수가 없게 되었다.

    * 출처 / 사막 교부들, 《깨달음》 중에서

    ▣ 35세에 깨달은 것

    "인생에서 제가 깨달은 한 가지 사실은,  삶이란 무엇인가를 깨닫기 전에 우리는 35세를 넘어버린다는 겁니다.
    처음에 나는 빠른 차가 있으면 행복할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포르셰를 샀죠.
    그 다음엔 집이 있었으면 했습니다.
    그래서 집을 샀죠.
    그런데 그 다음에 비행기가 한 대 있으면 행복할 수 있겠다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비행기를 한 대 샀지요.
    그러고 난 다음에 나는 깨달은 것입니다. 행복은 결코 돈을 주고 살 수 없다는 것을..."
    괴테의 말대로 "가진 것이 많다는 것은 그 뜻을 깨닫지 못하는 사람에게는 무거운 짐일 뿐"이었던 것이다.

    * 자료 출처 : 공지영《수도원 기행》 중에서

    ▣ 깨달음은 큰 복입니다.

    길거리 호떡장수에서 1,200여 개 가맹점의 대표가 된 사람이 있습니다.
    죽 전문점 '본죽'의 CEO가 된 김철호씨입니다.
    그는 자신의 사업 경험담을 [정성]이라는 책으로 내 놓았습니다.
    본죽을 시작하기 전 운영하던 회사를 부도처리로 은행에 넘기고 집에 돌아왔다고 합니다.
    부도난 회사를 처리하고 남은 것은 승합차 한 대였다고 합니다.
    너무 힘들고 피곤해 문간방에 쓰러져 잠이 들어는데 잠에서 깨어난 순간, 불현듯 어릴 적 모습이 눈앞에 떠올랐답니다.
    어머니가 늘 하시던 말씀입니다.

    몇 십 년 동안 여자 혼자 몸으로 포목점을 하며 다섯 자녀를 기르신 어머니는 집안에 일이 생길 때마다 늘 그렇게 말씀하셨답니다. '장에 가면 소도 보고 말도 본다.'

    평범한 말이지만 그에게 깨달음이 왔다고 합니다.
    장에 가면 자신의 뜻과 상관없이 이것저것 보게 되는 것처럼, 살다 보면 좋은 일도 생기고 나쁜 일도 생기니, 모든 일에 일희일비하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그에게 그 말은 세상 그 어떤 말보다 더 큰 힘이 되었답니다. 그는 그 후 재기하여 오늘의 기업을 이루었다고 합니다.

    깨달음은 복입니다.
    깨달음은 힘입니다.
    깨달음은 유익을 줍니다.
    깨달음이 행동화되면 새로운 것을 창조합니다.
    사업가의 깨달음은 회사를 살리게 하고 좋은 제품을 만들어내게 합니다.

    이동현 교수는 그의 책 [깨달음이 있는 경영]에서 “백 가지 거창한 기법보다 한 가지 소박한 깨달음이 위기에 빠진 기업을 살린다.”라고 말합니다.

    과학자들의 깨달음은 발명품으로 형상화되어 인류에게 편안함을 제공합니다.
    미술가들의 깨달음은 작품으로 형상화되어 보는 이의 사고를 자극하고 정서를 순화시켜줍니다.
    음악가의 깨달음은 선율이 되어 귀를 호강하게 하고, 종교인의 깨달음은 보이지 않는 세계를 보게 하고 영혼의 만족함을 누리게 합니다. 깨닫는 것은 우연의 산물처럼 보이지만 그렇지만은 않습니다.

    사전에서 ‘깨달음’을 “생각하고 궁리하다 알게 되는 것”이라고 정의하였듯이 깨달음은 생각하고 궁리하다 발견하게 되는 진리입니다.

    시라쿠사왕 히에론 왕이 어느 날 갓 만든 금관을 구했는데, 그것이 위조물로 순금이 아니고 은이 섞였다는 소문을 퍼졌습니다.
    왕은 아르키메데스에게 명하여 그것을 감정하라고 하였습니다.
    왕에게 금관과 금의 부피를 납득시키기 위해 아르키메데스는 고민을 했습니다.

    생각에 골몰한 그가 우연히 공중 목욕탕의 욕조에 들어갔는데 욕조의 물이 넘치는 것을 보고 문득, 자신의 체중과 같은 부피의 물이 욕조 밖으로 넘친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그는 너무 기쁜 나머지 "유레카, 유레카!(알아냈다. 알아냈다.)" 라고 외치며 알몸으로 뛰쳐나왔는데 이것이 바로 오랜 세월이 흘러도 변하지 않는 진리가 된 '아르키메데스의 원리'라는 것입니다.
    액체 속의 물체는 그 물체가 밀어낸 액체의 무게만큼의 부력을 받는다는 원리입니다.

    "달팽이는 어떻게 고정관념의 틀을 깼을까?"라는 책에서 데이비드 퍼킨스은 이런 것을 쿠데타적 사고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인생을 바꾸는 깨달음입니다.
    몇 마디 말로는 쉽게 설명될 수 없는 영감에 의해 이뤄진 쿠데타적인 사고가 문명을 형성하고 진보시켰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아르키메데스가 욕조에 들어가는 순간 깨달은 '아르키메데스의 원리'에서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까지, 그리고 브루넬레스키의 원근법에서 인상주의까지, 불의 사용에서 레이저까지, 고정관념의 벽을 허무는 쿠데타적인 사고, 사고의 혁신의 소산물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런 깨달음은 다섯 단계를 거친다고 말합니다.

    제 1단계로 오랜 탐색을 필요로 한다는 것입니다.

    두 번째 단계는 눈에 띄는 변화가 없다가 어느 날 갑자기 이뤄진다는 것입니다.

    제 3단계는 일반적으로 예기치 못한 사건으로 시작된다는 것입니다.

    네 번째로 갑자기 모든 것을 이해하면서 이뤄진다고 합니다.

    제 5단계는 혁신은 결국 우주의 정신이나 물질세계를 변형시킨다고 합니다.

    신앙도 마찬가집니다.
    어느 날 갑자기 죄인임을 깨닫고, 겸손해지며, 하나님의 존재를 깨닫고 보이는 세계만 전부가 아니라 또 다른 세계가 있음을 깨닫게 되는 것처럼 보이나 데이비드 퍼킨스가 말한 것처럼 신앙을 갖기까지는 신앙적 환경, 누군가의 기도, 오랜 방황 등의 과정들이 있습니다. 눈에 띄는 변화가 없다가 어느 날 갑자기 새로 태어남을 체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생각의 쿠데타는 예기치 못한 사건으로 시작된 것처럼 신앙 역시 예기치 못한 사건으로 가지게 되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생각의 쿠데타는 갑자기 모든 것을 이해하면서 이뤄지는 것처럼 신앙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깨달음은 결국 우주의 정신이나 물질세계를 변형시키는 것처럼 신앙 역시 이제 세상이 달라지고 가정이 달라지며 삶이 달라지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영적 깨달음은 하나님을 알 수 있는 힘이며 최상의 복입니다(마 16:17).
    모든 은혜는 깨달음으로 시작되기 때문에 최상의 은혜는 깨달음의 은혜입니다.
    성경은 “존귀하나 깨닫지 못하는 사람은 멸망하는 짐승 같도다(시 49:20)”라고 말씀합니다.

    예수님은 “귀있는 자는 들으라”고 말씀합니다. 깨달음을 통해 영안이 열립니다. 영적 깨달음도 힘인데 겸손해야 깨닫는 마음이 열립니다(단10:12). 말씀을 들을 때 깨닫습니다(마13:23).

    깨닫기 위해서는 성령님의 도우심을 받아야 합니다(고전2:10). 깨닫기 위해서는 기도해야 합니다(사50:4)

    * 자료출처 / 열린편지/김필곤 목사

    ▣ 진리를 깨닫게 하시는 하나님

    제가 진지하게 교회를 다니기 시작한 것은 1962년 부터였지만, 처음3년 동안은 ‘도대체 이 기독교 신앙이라는 것이 무엇인가?’를 고민하여 헤맸습니다. 그러다가 드디어 1965년에서야 진정한 복음을 찾았습니다. 그때까지는 풀리지 않는 인생의 수수께끼를 끌어안고 답답해하면서 진리가 무엇인지 알기 위해 여러 교회들을 찾아다녔습니다. 그런데 그 수많은 교회를 다녀보았지만 별 차이가 없고 결국 기독교라는 것이 도덕의 추구가 아닌가 하는 생각까지 들었습니다. 다른 종교와는 전혀 다른 기독교의 독특성과 왜 꼭 예수를 믿어야만 구원을 얻는지에 대해 알수가 없었습니다. 나중에는 야간 신학교를 기웃거리면서 그 문제를 풀어보려고 했습니다. 그러다가 우연히 캐나다의 오스월드J. 스미스 목사님이 쓴 [구원의 길]이라는 작은 책자를 읽게 되었습니다. 그 책에는 구원의 진정한 길이 아닌 것 여러 가지를 열거해 놓았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모든 종교적인 노력과 도덕적인 선행을 통해서는 결코 구원받을 수 없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셨다고 쓰여 있었습니다. 나아가 책의 마지막 부분에는 갈라디아서 2장 21절이 적혀있었습니다.

    “내가 하나님의 은혜를 폐하지 아니하노니 만일 의롭게 되는 것이 율법으로 말미암으면 그리스도께서 헛되이 죽으셨느니라.” 그 말씀을 읽는 순간, 저는 저의 노력을 통해서는 의롭다 함을 받을 수 없을 정도로 지독한 죄인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나의 죄 문제를 해결하시고자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셔서 그분이 십자가에 내 대신 죄 값을 치루셨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저는 즉시 무릎을 꿇고 하나님께 깊이 고백했습니다.

    “나의 오만했던 지성을 십자가에 못 박고 예수 그리스도 앞에서 예수님을 나의 구주와 주님으로 인정하겠습니다, 내 마음에 들어와 주십시오. 당신은 나의 구주이십니다.”

    그날 밤의 깨달음은 저에게 형언할 수 없는 큰 감격을 주었습니다. 그 때부터 복음과 십자가가 참으로 제 눈앞에 다가오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이전에는 재미없고 지루하게 느껴졌던 성경의 말씀이 한 구절 한 구절 저를 지배하고 감격하게 했습니다. 그날부터 저는 성경을 들고 나가 만나는 사람마다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 이 영광스러운 구원의 복음을 증거하기 시작했습니다.

    "내가 하나님의 은혜를 폐하지 아니하노니 만일 의롭게 되는 것이 율법으로 말미암으면 그리스도께서 헛되이 죽으셨느니라"(갈라디아서 2:21)

    ▣ 깨달음의 보물 창고

    얼마 전에 거북 두 마리가 우리 가족이 되었다. 큰딸의 성화에 못 이겨 사주었지만, 여러 가지로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어느 날 한 마리가 먹지도 못하고 꼼짝도 하지 않았다. 게다가 다른 강한 녀석이 등에 올라타 짓누르며 괴롭히는 게 아닌가? 나는 원인을 몰라 어항 뚜껑을 열어 아픈 녀석만 계속 관찰했다. 그 결과, 눈병이었다. 하얀 막이 덮여 있어 앞을 못 보고 이리저리 부딪히며 불안해하고 있었다. 나는 너무 애처로워 강한 녀석을 피해 먹이 하나라도 더 넣어 주려고 애를 썼다. 그 순간에 아픈 거북을 향한 나의 애타는 마음이 영적, 육적으로 치유 받아야 할 사람을 향한 ‘하나님의 마음’과 통함을 깨달았다. 앞을 보지 못해 시련을 겪는 거북이 나의 지난 모습이자 지금의 모습이었다. 말씀을 봐도 깨닫지 못하고 세상과 타협하려 했던 나의 어리석은 행동들….

    우리는 육적으로 필요한 영양소를 음식으로 공급받는다. 우리의 영적 에너지도 마찬가지다.

    우리의 삶이 고단하고 주님을 향한 열정이 식을 때, 질병으로 고통을 당해 소망이 사라질 때, 하나님은 우리를 버려두시지 않고 ‘깨달음’이라는 영적 영양소를 공급하시며 은혜를 주신다. 그 보화를 찾는 것은 우리의 몫이다. 세상의 시각이 아닌 하나님의 사랑의 시각으로 주위를 살펴보라. 곧 마음을 변화시키고 감동을 주는 ‘깨달음’의 보물 창고를 반드시 발견하게 되리라.

    「생명의 삶 독자 에세이」/ 한유진

    * 기도: 지난날 하나님이 아닌 허탄한 것을 의지했던 저를 용서하소서. 하나님의 능력으로 저의 건강을 회복시키시고, 제 삶의 모든 어그러진 부분을 회복시켜 주소서.

    /생명의 삶

    ▣ 루터의 깨달음

    성경: 롬7:24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 내랴

    마르틴 루터의 고민은 마음속에서 끊임없이 솟아오르는 근본적인 죄의 문제였습니다. 지금까지 범한 죄도 중요하지만 그보다 더 큰 문제는 하나님의 뜻을 따라 정결하게 충성하려는 그에게 끊임없이 찾아와 그의 정결을 깨뜨리며 주님께 충성하기보다는 썩어질 정욕을 만족시키고 싶어하는 끊임없는 죄의 도전이었습니다. 과연 이렇게 본질적으로 썩어버린 인간에게도 소망이 있을까? 이러한 인간도 하나님 앞에 의롭다함을 받을 수있을까? 마르틴 루터는 죄의 도전을 물리치기 위해서 기도도 많이 했으며 말씀 묵상 연구도 많이 했으며 저 유명한 28계단 성당의 계단을 무릎으로 올라가는 것도 시도했습니다. 그러나 그 속에서 샘솟는 죄의 정욕은 결코 이러한 루터의 노력으로 해결될 수 있는 어떤 것이 아니였습니다.

    마르틴 루터는 로마서를 연구하다가 드디어 이러한 죄인에게 비추는 하나님의 빛을 발견하였습니다. 우리 하나님은 이러한 정욕의 사람, 죄악의 사람, 더러운 인간을 있는 그대로 받으시고 그들의 죄를 예수님의 몸에 담당시켰습니다. 불꽃 같은 눈으로 인간을 살피시고 인간의 죄악을 미워하며 불로 심판하시는 하나님은 차라리 그 모든 심판을하나님의 외아들 예수님께 내리시고 그대신 심판받아 멸망받았어야 할 인간도 용서하시고, 받아들여 자녀로 삼으시려는 놀라운 결단을 내리시고 그 일을 행하셨음을 몸으로 깨달아 알았을 때에 루터는 하나님께 무릎을 꿇지 않을수가 없었습니다. 인간의 죄는 인간의 공로나 힘, 능력으로 어쩔 수 없습니다. 교황청이 죄의 용서를 빙자해서 죄를 용서받을 수 있는 면죄부를 판매한다는 것은 도무지 용납할 수 없었습니루터는 드디어 1517년 95개조 반박문을 비텐베르크 설교회의 정문 앞에 걸어 놓았으며 종교개혁의 불씨를 당기게 된 것입니다. 이것은 그의 삶을 통하여 얻은 몸의 진리요 말씀에서 발견한 것입니다. 어느 누가 이 진리를 취소하라고 할 수가 있겠습니까? 이때 루터는 담대히 외쳤습니다. 나는 지금 여기 왔소. 이외에 더 이상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소. 하나님께서 나를 도울 것이요. 루터는 힘있게 거절을 하고 종교개혁을 위해서 생명을 다하여 열심히 주님의 일을 하였습니다.

    ▣ 깨달음에 이르는 지혜

    깨닫는 것이 지혜이다. 영적 안내자는 선각자가 되어야 한다. 선각자란 앞서 깨달은 사람이다. 깨닫지 못한 사람은 깨우칠 수 없다. 깨우치기 위해서는 먼저 깨달아야 한다. 성경에서 말하는 최상의 복은 깨달음의 복이다(마 16:17). 최상의 은혜는 깨달음의 은혜다. 모든 은혜는 깨달음에서 시작된다. 하나님은 존귀에 처하는 것보다 깨달음을 더욱 귀히 여기신다. 존귀에 처하나 깨닫지 못하는 사람은 멸망하는 짐승과 같다(시 49:20).

    깨달음은 열림이다. 깨달음이란 영안이 열리는 것이다. 깨달음이란 귀가 열리는 것이다. 눈이 있다고 다 보는 것이 아니다. 귀가 있다고 다 듣는 것이 아니다. 깨닫지 못하면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고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한다.

    깨달음이란 지각이 열리는 것이다. 깨달음이란 영적 감각이 열리는 것이다. 영적 감각이란 거룩한 사랑의 감각이다. 우리가 누군가를 사랑하면 그 사람이 한순간에 우리의 가슴에 들어온다. 우리는 사랑하는 것만큼 이해하게 된다. 사랑하는 것만큼 깨닫게 된다. 사랑하면 모든 감각이 새롭게 태어난다. 그래서 사랑하면 온몸으로 사랑하는 대상을 깨닫게 된다. 깨달음의 신비는 사랑의 신비이다.

    깨달음의 운동은 사랑의 운동이다. 사랑하면 모든 감각이 새롭게 태어나는 것처럼 깨닫게 되면 모든 영적 감각이 소생케 된다. 깨달음의 극치는 하나님을 알고 자신을 아는 데 있다. 그때 우리는 인생을 알게 된다. 인생의 사계절을 알게 된다. 철이 들었다는 것은 인생의 사계절을 아는 사람이 되었다는 것이다. 철이 들었다는 것은 성숙한 인간이 되었다는 것이다.

    우리는 깨닫기를 사모해야 한다. 깨닫기 위해서는 사랑해야 한다. 우리는 사랑하는 것만큼 깨닫게 된다. 깨닫기 위해서는 겸손해야 한다. 겸손은 열린 마음이다. 다니엘이 깨닫기를 사모하여 자신을 겸비케 할 때 하나님은 깨달음의 은혜를 베푸셨다(단 10:12).

    깨닫기 위해서는 말씀을 들어야 한다. 말씀을 들을 때 우리는 깨닫게 된다(마 13:23). 깨닫기 위해서는 성령님의 도우심을 받아야 한다. 성령님은 하나님의 깊은 것이라도 통달하신다(고전 2:10). 깨닫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기도해야 한다. 그래서 나는 자주 이사야 50장 4절의 말씀을 붙잡고 기도드린다. “주 여호와께서 학자의 혀를 내게 주사 나로 곤핍한 자를 말로 어떻게 도와줄 줄을 알게 하시고 아침마다 깨우치시되 나의 귀를 깨우치사 학자같이 알아듣게 하시도다”

    ▣ 귀중한 것은 그것을 잃을 때 깨닫습니다

    세계적인 성악가 호세 카레라스가 있습니다. 클래식 음악계 전체를 통틀어 '최고의 아티스트'로 선정된 사람입니다. 레코딩 역사가 시작된 이래 천만장이 넘는 클래식 음반은 단 두장 밖에 없는데 카레라스가 바로 그 두 장의 주인공입니다. 전 세계를 통틀어 가장 위대한 음악인이라고 칭송을 받는 그가 그의 명성이 절정에 이르렀을 때 나이 41세로 백혈병으로 쓰려졌습니다.

    아직 포기하기에는 아까운 나이, 이 세상을 하직하기에는 억울한 나이였습니다. 오페라 '라보엠'의 주인공을 맡아 열정을 다하여 연습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쓰러져 병원에 갔습니다. 그리고 아무런 예고도 사전 연락도 없이 다가온 것은 죽음의 선고였습니다. 그러나 호세 카레라스는 절망하며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그 때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극한 상황에서 예수님의 손길을 붙들었습니다. 하나님께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나의 생명을 연장해 주시면, 남은 평생 주를 위해 충성하겠다"라는 기도를 드렸습니다. 기도만 하고 앉아 있었던 것은 물론 아닙니다. 골수 이식 수술과 힘든 화학치료를 받았습니다. 힘겹고 어려운 것이었습니다. 머리카락은 빠지고 손톱과 발톱도 떨어져 나갔습니다. 그러나 그는 찬송과 기도를 멈추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그의 기도를 들어 주었습니다. 이제 그의 삶은 자신의 것이 아니었습니다. 기적같이 새 생명을 얻게 되었습니다. 그는 전 재산을 팔아 바르셀로나에 "호세 카레라스 백혈병 재단"을 세웠습니다. 그의 공연 수익금은 모두 이곳으로 보내어 졌습니다. 그는 고백합니다. "때로는 질병도 은혜가 될 때가 있다. 나는 백혈병과의 싸움을 통해서 나보다 남을 아는 사람이 되었다. 이제 나는 단순히 노래만 부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증거하고, 절망에 빠진 사람에게 소망을 주는 인생을 살기를 원한다."

    귀중한 것은 그것을 잃을 때 깨닫습니다. 평소 건강할 때는 건강의 귀중함을 깨닫지 못합니다. 물이나 공기도 마찬가지입니다. 물이 많을 때, 공기가 풍부할 때 그것들의 고마움을 깨닫지 못합니다. 그러나 홍수로 먹을 물이 없을 때 물이 얼마나 귀중한가를 깨닫습니다. 고난은 하나님을 볼 수 있게 하는 눈입니다. 눈으로 보이는 세계만 존재하는 것이 아닙니다. 형태가 없는 것은 눈으로 볼 수 없고 마음으로 봅니다. 그 마음의 문은 고난을 통해 하나님을 향해 열립니다. 이솝우화에 하루살이 메뚜기 개구리 이야기가 나옵니다. 하루살이가 놀다가 내일 만나자고 합니다. 메뚜기와 개구리가 웃습니다. 메뚜기가 가을 지나 봄에 만나자고 합니다. 개구리가 웃습니다. 내일이 없는 것이 아닙니다. 봄이 없는 것이 아닙니다. 진리 문제가 아닙니다. 존재의 한계, 인식의 한계 문제입니다. 사람은 고난을 통해 마음이 깨끗해집니다.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마5:8)”

    ▣ 하나님의 사랑을 깨달은 그리스도인

    독실한 그리스도인이 중병에 걸렸습니다.
    그런데 그는 자기 마음속에 하나님에 대한 사랑이 점점 없어지는 것을 느끼고 고민하게 되었습니다.
    그의 고민을 들은 친구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자, 예를 들어 생각해 보게나.

    여기서 집으로 돌아가면 나는 내 귀여운 아기를 품에 안을걸세.
    내가 비록 지친 상태에서 피곤해도 어린 천사가 내 곁에 있다는 사실만으로 나는 편안함을 느끼게 된다네.
    왜냐하면 아기를 사랑하고 있기 때문이지.
    그러나 그 아기가 나를 얼마나 사랑할 거라고 생각하나?
    아마도 거의 사랑하지 않을 거야.
    내가 병이 들어 잠을 못 이루고 고통스러워할 때도 아기는 그냥 잠만 쿨쿨 잘 걸세.
    혹 마음 아픈 일이 있어서 괴로워할 때도 아기는 혼자서 즐겁게 떠들며 놀 걸세. 그뿐인가?

    우리집 꼬마는 나에게 10원도 가져다주지 않으면서 앞으로

    끊임없이 돈을 요구할 걸세. 그래도 나는 그것이 고통스럽게 여겨지지 않을 걸세. 생각해 보게. 아기가 나를 사랑하는 것이 옳은가? 아니면 내가 아기를 사랑하는 것이 옳은가?

    내가 사랑하기 전에 내가 주는 사랑의 값어치 만큼 무언가를

    우리 아기가 내게 해줄때까지 기다려야 하는가?"

    친구의 말을 들은 그리스도인은 눈물을 흘리면서 말했습니다.

    "이제는 하나님의 사랑을 이해할 것 같네."

    ▣ 동태 두 마리

    장성한 아들 형제가 있는 김 권사는 주의 종과 성도들을 섬기는 기쁨으로 신앙생활을 했다.
    하루는 그녀가 동태 다섯 마리를 사서 목사님 가족은 둘이니 두 마리, 자기 식구는 셋이니 세 마리로 나눴다.
    이것이 김 권사의 주의 종 섬기는 자세였다.
    그날 김 권사는 강도를 만나 머리에 각목을 맞고 쓰러졌다.
    강도가 심방 가방을 일숫돈 가방으로 착각한 것이다.
    김 권사는 사흘 만에 깨어났다.
    한 아들이 말했다.
    “예수를 대충 믿으세요. 돈만 생기면 교회에 바치고, 불쌍한 사람 도와줘도 하나님이 지켜준 것 뭐가 있어요?
    강도가 휘두른 각목에 어머니만 죽을 뻔했잖아요.”
    그때 김 권사의 대답. “얘야 그렇게도 깨닫지 못하겠니?
    내 머리에 이고 있는 동태가 강도의 각목을 대신 맞아줬기에 죽지 않고 산 거란다.
    깨달으면 천국이요, 못 깨달으면 지옥인 게야.”

    * 자료출처 /고훈 목사(안산제일교회)

    ▣ 큰 깨달음

    한 젊은이가 큰 스승을 찾아와 물었습니다.
    “가장 큰 깨달음이란 무엇입니까?”
    “인간이 삶의 그 시종을 다 알 수 없음을 아는 것이지.”
    “그 깨달음에 이르면 어떻게 되는 것입니까?”
    “하나님은 하나님이 되고 인간은 인간이 되는 것이네!”

    ▣ 진정한 깨달음

    어느 날 토레이 목사님에게 어떤 부인이 찾아와서 상담을 하였습니다.
    “목사님, 저는 집회에 많이 참석하고 기도도 많이 하는데 하나님의 은혜가 실감나지 않습니다.
    구원받았다는 사실도 실감나지 않는데 왜 그럴까요?”
    이 말을 듣고 있던 토레이 목사님은 고민하는 이 부인에게 기도하는 법을 가르쳐 주었습니다.
    “부인, 오늘부터 집에 가서 다른 기도는 하지 말고 이 한 가지 기도만 계속하십시오.
    하나님께 부인 자신의 모습을 보여 달라고 한 주간만 계속 기도하십시오.”

    그래서 목사님의 충고에 따라 이 부인은 집에 돌아가 이 기도만을 계속해서 했습니다.

    “하나님, 제 자신의 모습을 보여 주십시오. 내가 하나님 앞에서 어떤 사람인가를 보여 주십시오.”

    이 기도를 계속 하던 그녀는 마침내 자신의 모습을 깨닫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추하고 불결하고 머리부터 발끝까지 더러운 자신의 모습을 발견했습니다.
    마침내 부인은 자기의 죄악을 보며 절망한 채 일 주일만에 토레이 목사님을 다시 찾아왔습니다.

    “목사님, 이제는 죽어버리고 싶습니다”라고 고백하는 그녀에게 토레이 목사님은 “이제부터는 주님의 십자가를 보여 달라고 기도하십시오”라고 말했습니다. 이 부인은 집에 다시 돌아가 두 번째의 기도를 시작했습니다.

    “주님, 주님께서 지신 십자가를 보여 주십시오.” 그때 이 부인은 십자가의 의미를 진정으로 깨닫기 시작했습니다. 내 자신이 나의 죄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고 완전히 포기하고 절망을 선언했을 때,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셔서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셨고 그 분을 통해 십자가에서 피흘려 돌아가심으로써 나의 죄에 대한 대가를 치르셨으며 그로 인해 깨끗하게 용서받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로마서 5: 8)



    깨닫지 못하는 이유 

    깨닫지 못하는 가장 큰 이유는?

     

    빵이 없다고 수군거리는 제자들의 모습을 묵상할 때 마다 아스라이 옛생각이 떠오릅니다. 젊은 형제들의 선생 노릇을 할 때였습니다. 매일 수업만 하면 지루해하지 월 한번 씩 야외로 소풍을 다녔습니다.

     

    보통 라면을 챙겨가 끓여먹고 오는데, 그날은 대축일인지라 삼겹살을 구워먹기로 했습니다. 형제들이 다들 잘 준비하는 것 같아 안심하고 소풍 장소에 도착했습니다. 그러나 웬걸, 가장 중요한 준비물인 가스버너를 안 챙겨왔더군요. 쫄쫄 굶고 돌아왔습니다.

     

    다음번 갈 때였습니다. 이번에는 각별히 당부도 했습니다. 다들 대답들은 시원시원했습니다. 그런데 막상 도착해보니, 이번에는 현관 앞에 둔 고기를 또 깜빡하고 안 가져왔더군요. 이번에는 라면만 잘 끓여 먹고 왔습니다.

     

    오늘 제자들도 비슷한 체험을 했습니다. 배를 저어 호수 한 가운데로 나오고 나서야 빵을 안 가져온 것을 알았습니다. 제자들은 자신들의 ‘수련장’인 예수님으로부터 야단맞을까봐 지레 겁부터 먹고 자기들끼리 이걸 어쩌지 하고 수군거렸습니다. 그런데 하필 그때 예수님께서는 이런 말씀을 던지셨습니다.

     

    “너희는 바리사이들의 누룩과 헤로데의 누룩을 조심하여라.”

     

    그 순간 제자들은 ‘누룩이라! 스승님께서 빵 안 챙겨 온 것을 아셨구나. 이제 혼 좀 나게 생겼구나.’며 혼 날 마음의 준비를 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자기들끼리 “빵 담당자, 넌 도대체 정신을 어디다 두고 다니냐? 이게 벌써 몇 번째냐? 정신 좀 차려라.”며 웅성거리고 있었습니다.

     

    참으로 코믹한 상황이 아닐 수 없습니다. 사실 예수님께서 하신 누룩과 관련된 말씀은 전혀 다른 차원의 말씀이었기 때문입니다. 제자들은 완벽하게 오해하고 있는 것입니다.

     

    누룩은 반죽을 부풀리게 만드는 역할을 하지요. 이 문맥상 ‘바리사이의 누룩’ ‘헤로데의 누룩’이란 말의 의미는 다분히 부정적인 의미입니다. 여기서 누룩은 ‘악한 기운’ ‘악한 세력’ ‘부정적 영향력’등을 의미합니다. 빵과 관련된 말도 전혀 아니었던 것입니다.

     

    바리사이들과 헤로데가 지니고 있는 악한 기운, 악한 세력, 부정적 영향력을 조심하라는 말씀인 것입니다. 사실 그들은 속 빈 강정 같은 사람들이었습니다. 겉은 그럴듯하게 꾸미고 다녔지만 내면은 형편없었습니다. 실제로는 ‘쥐뿔도 아닌’ 사람들이었는데, 엄청 자신들을 부풀린 사람들이었습니다.

     

    겉으로는 하느님의 율법을 외치고 다녔지만 실제 삶은 하느님 사랑과 반대되는 율법지상주의, 사악, 교만, 거짓, 죄로 얼룩져있었던 것입니다.

     

    남은 빵조각을 모은 광주리 숫자처럼 일곱 광주리, 열두 광주리, 예수님의 가르침은 더할나위 없이 완전하고 완벽합니다. 그분의 가르침은 틀림없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의 깨우침의 길은 멀고도 먼 길이었습니다. 일곱입니다, 열둘입니다, 대답은 시원시원하게 잘 합니다만, 가르침의 핵심, 진수는 전혀 깨닫지 못하고 있습니다.

     

    깨닫지 못하는 가장 큰 이유는 무엇이겠습니까? 완고함 때문입니다. 수용성 부족 때문입니다. 경청하는 능력의 부족 때문입니다. 자신을 낮추고 낮춰, 갈고 또 갈아, 마음의 문을 열고 또 열어, 최선을 다해 하느님 말씀에 귀 기울이는 하루가 되면 좋겠습니다.








    깨닫는 사람(마태복음 13:23)

    깨닫는 것이 은혜중의 은혜

    1. 은혜는 깨닫는 것이 은혜이다.
    복을 복으로 깨닫고 잘못을 잘못으로 깨닫고 부족을 부족으로 깨닫고 어리석음을 어리석음으로 깨닫고 은혜를 은혜로 깨닫 는 것이 복이요 은혜 중의 은혜이다.

    2. 깨닫지 못하는 사람은 주님으로 부터 책망을 받을 수 밖에 없다.
    어찌하여 깨닫지 못하느냐는 책망을 받지 않고 항상 깨닫는 사람은 복된 사람이다.

    3. 한 가지를 들으면 열가지를 깨달을 수 있는 은혜가 함께하시기 바란다.

    4. 내가 죄인임을 깨닫고 용서받았음을 깨닫고 천국백성이 된 것을 깨닫는 은혜 는 가장 귀한 은혜를 받은 것이다.

    깨닫는 유형

    1. 보아도 못 깨닫는 사람이 있는가하면 보기만 해도 깨닫는 사람이 있다.

    2. 듣고도 못 깨닫는 사람이 있는가하면 듣기만 해도 깨닫는 사람이 있다.

    3. 매맞아도 못 깨닫는 사람이 있는가하면 매맞고 나서 깨닫는 사람이 있다.

    4. 잃어버리고도 못 깨닫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잃어버리고 나서 깨닫는 사람이 있다.
    소잃고 외양간 고치는 사람은 잃고도 고치지 않는 것 보다 낫다.

    5. 죽을지경이 되어도 못깨닫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죽을 지경이 되어서야 겨우 깨닫는 사람이 있다.

    6. 끝까지 못깨닫는 사람은 가장 불쌍한 사람이다.
    홍수가 나서 저희를 다 멸하 기 까지 깨닫지 못하였으니 인자의 임함도 이와 같으리라(마 24:39)

    7. 부자와 같이 지옥가서 깨닫는 사람도 있으나 가장 어리석은 깨달음이요 소용 없는 깨달음이다.
    버스 지나가고 나서 손을 드는 것은 바보이다(눅 16:24-)

    8. 나중에 깨닫는 사람이 있다.
    제자들은 처음에 이 일을 깨닫지 못하다가 예수 께서 영광을 얻으신 후에야 이것이 예수께 대하여 기록된 것임과 사람들이 예 수께 이같이 한 것인 줄 생각났더라(요 12:16)

    9. 말씀을 들을 때 마다 깨닫고 주의 은혜를 받을 때 마다 깨닫고 순간 순간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는 성도가 되자.
    매맞고 잃어버리고 손해보고 낭패 당하고 실망당하고 난 뒤에 깨닫는 어리섞은 자가 되지 말자.

    깨닫지 못하는 이유

    1.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지 못한다.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 의 성령의 일을 받지 아니하나니 저희에게는 미련하게 보임이요 또 깨닫지 도 못하나니 이런 일은 영적으로라야 분변함이니라(고전2:14)

    2. 자아가 살아있으면 깨닫지 못한다.
    전에 죄를 깨닫지 못할 때에는 내가 살았 더니 계명이 이르매 죄는 살아나고 나는 죽었도다(롬 7:9)

    3. 믿음이 어리기 때문에 깨닫지 못한다.
    내가 어렸을 때에는 말하는 것이 어린 어린아이와 같고 깨닫고 생각하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다가 장성한 사람이 되 어서는 어린 아이의 일을 버렸노라.

    4. 교만한 마음이 깨닫지 못하게 한다.
    율법의 선생이 되려하나 자기의 말하는 것이나 자기의 확증하는 것도 깨닫지 못하는도다(딤전1:7)

    5. 성령의 도움이 없기 때문이다.
    에디오피아 여왕의 내시는 성경을 읽어도 깨닫 지 못한 것은 성령의 도움을 받지 않았기 때문이다(행8:30-31)

    무엇을 깨달아야 하는가?

    1. 나의 나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임을 깨닫자

    2. 환란과 질병과 어려움이 회개의 기회라는 것을 깨닫자.

    3. 내가 약할 그 때가 곧 강한 때임을 깨닫자(고후 12:10)

    4. 나의 부족을 깨닫고 어리석음을 깨닫고 내 눈속의 들보를 깨닫자.

    5. 죽을 죄에세 용서받고 구원 받았음을 깨닫자.

    은혜를 깨달은 사람

    1. 참 마음과 온전한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기를 즐거워 한다(히 10:22)
    모이기를 기뻐한다. 억지로 모이지 않는다. 기쁨으로 주의 전에 모이자.

    2. 기도하게 된다.
    기도는 아무나 하는 것이 아니다.
    은혜를 아는 사람, 은혜를 사모하는 사람이 기도하게 된다.
    깨닫고 마가라 하는 요한의 어머니 마리아의 집에 가니 여러 사람이 모여 기도하더라(행 12:12)

    3. 마음을 열어 성경을 깨닫게 된다(눅 24:45)

    4. 30배 60배 100배의 열매를 맺게 된다.
    하나님의 축복은 은혜를 깨닫는 사람에 게 주시는 결과이다.
    은혜를 깨닫는 만큼 충성하고, 믿고, 복받고 은혜받는다



    마음공부는 지식 쌓듯이 않고 기존에 있는 것 덜어내는 공부
    추구심에 탐심으로 접근 말고 부처성품 구족 믿고 쉬어보라
    처음 마음공부에 뜻이 있어 구도의 길에 들어서게 되면
    어떤 이는 경전이나 법문집, 명상 서적과 같은 책을 찾아 읽기도 하고,
    어떤 이는 살아있는 스승을 찾아다니면서 그분들의 가르침대로 수행하기도 하고,
    어떤 이는 출가를 결심하고 절에 들어가기도 한다.
    즉, 우리는 구도의 종착지에 도착하기 위해서는 무언가를 하지 않으면 안된다고 믿으면서
    본인이 찾은 것을 열심히 하면 할수록 깨달음에 가까워질 것이라고 여긴다.

    그런데 만약 내가 아직 깨닫지 못하는 이유가 무언가를 자꾸 하려고 하기 때문이라면 어떻게 할 것인가?
    자꾸 무언가를 해서 본인이 상상하는 어떤 높은 단계에 도달하려는
    그 욕구 때문에 깨달음을 아직 얻지 못한 것이라면 어떻게 하겠는가?

    마음공부는 지식을 쌓듯 무언가를 더하는 공부가 아니고,
    기존에 있는 것들을 덜어내는 공부이기 때문에,

    무언가를 자꾸 하려는 의도를 멈추는 것이
    진짜 공부라고 이야기를 해 준다면 그 사람 말을 믿겠는가?

    이미 종착지에 도착해 있는데 본인이 그 진실을 믿지 못하기 때문에
    아직 깨닫지 못한 것이라고 말해 준다면 이 말을 받아들일 수 있겠는가?

    부처님께서 설하신 12연기법을 가만히 살펴보면 정말로 놀라운 점을 발견하게 되는데

    바로 첫 번째 무명(無明)으로 인해 행(行)이 발생된다는 점이다.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가 하면 자기 성품에 스스로가 밝지 못하게 되면
    그 무명으로 인해 마음이 멈추어 있지 못하고
    어디론가 자꾸 움직이고자 하는 성질이 연기되어 일어난다는 것이다.
    즉, 부처와는 달리 중생은 지금 이대로 가만히 쉬면서 스스로를 살피지 못하고
    자꾸 지금 상태보다 더 좋아 보이는 다른 상태로 움직여(行) 변화하고 싶어한다.
    더 쉽게 말하면, 중생의 병은 마음이 가만히 멈추어 있지 못하는 것에 있다.
    움직여서 무언가를 자꾸 하고 싶어하는 마음을 다른 말로 ‘추구심’이라고도 하고 ‘탐심’이라고도 한다.

    주어진 지금보다 더 좋은 것을 탐하면서  마음이 움직이기 때문에 우리는 늘 불만족인 것이다.

    왜냐면 문제는 더 좋은 상태에 도달하지 못해서가 아니고,

    도달하려고 노력을 하는 동안 느끼게 되는 주어진 현실에 대한 저항감과

    비교에서 오는 결핍감이 번뇌를 일으켜 불만족스러운 상태가 되는 것이다.

    이것은 아무리 좋은 상태에 도달하더라도 더 좋은 것을 추구하는

    무명의 관성이 멈추어지지 않는 한 이내 곧 다시 불만족을 느끼게 한다.


    그런데 문제는 대부분의 구도자들이

    깨달음에 대한 추구심을 가지고 탐심으로 접근한다는 점이다.

    추구심이 멈추고 탐심이 사라지는 것이 핵심인데,

    움직이려는 마음을 멈추고 돌아보려 하지 않고,

    주어진 현재를 떠나 어떤 이상적인 상태를

    경험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시간을 낭비하는 것이다.

    여기까지 설명을 듣고 보면 혹자는 이렇게 또 질문을 할 것이다.

    “그렇다면 도대체 깨닫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한다는 말입니까?”

    지금까지 할 것이 없다고 내내 이야기했지만

    아직도 말을 못 알아듣고 그래도 무언가를 해야되지 않을까 묻는 것이다.

    ‘깨닫기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말을 들으면 답답해 질 수 있다.

    왜냐면 마음이 평소 관성대로 어디론가 움직여서 가고 싶은데

    갈 길을 막아 버렸기 때문이다.

    심행처(心行處)를 이처럼 끊어 놓으면,

    처음에는 사량분별의 습관 때문에 할 것이 없어 답답해 할 수는 있으나

    그 자리에서 시간을 좀 보내다 보면 밝아지는 것이 있다.

    모든 중생은 이미 부처 성품을 구족하고 있다는 그 말씀을 믿고

    답답한 그 자리에서 쉬어 보자.

    생각을 일으키면서 계속 움직이려던 마음이 멈추니 어떠한가?

    생각이 완전히 멈추니 어떤 번뇌나 불만족, 이야기나 질문이 남아 있는가?

    나 혹은 너라는 분별이 있는가?

    텅 빈 이 마음에 어떤 한계가 있는가?

    텅 빈 이 마음은 항상 있었나 아니면 새로 생긴 것인가?

    새로 생긴 것이 아니라면 이 마음이 사라질 일이 있겠는가?

    경허 스님께서 참구하신 화두가

    “나귀의 일이 끝나기도 전에 말의 일이 다가왔다(驢事未去 馬事到來)”이다.
    깨달음은 그런 것이다.
    처음엔 나귀처럼 자기가 열심히 일을 해서 깨달음에 도달하려고 하지만,
    문득 말이 찾아오듯, 원래부터 가지고 있던 본성이 문득 눈에 들어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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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홍수 이전에는 우리가 오늘날 대하는 것과 같은 뚜렷하고 독립적인 민족 집단이 없었던 듯하다. 그러나 바벨에서 반역의 탑을 쌓은 이후로 각자의 언어와(아마도 그 후기에 이르러서야 발생된 것이지만) 독특한 문화 및 인종적 특수성을 지닌 민족들이 존재하게 되었다.

    수십 개의 민족들 중에서도 아홉개의 민족이 하나님께서 선택한 백성인 이스라엘의 역사적 영적 발전에 중요한 작용을 한 것 같다.

    그 아홉 개의 민족이란 이렇다. 가나안 수메르, 블레셋, 애굽, 앗수르, 바벨로니아, 바사, 헬라및 로마. 위 민족들 중에서 마지막 로마를 제외한 여덟 나라가 이미 역사적 역할을 담당하였다. 위의 아홉번째 나라인 로마는 아마도 예언적 부분을 떠맡을 것이다(물론 이전에 이미 로마는 역사적 역할도 떠맡은 바 있다). 왜냐하면 로마의 옛 제국은 다시 소생하고 무서운 적그리스도에 의해 지배를 받을 것이기 때문이다.

    구약과 신약의 아홉나라

    가나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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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가나안 족속이란 말을 여호수아의 인도로 이스라엘이 약속의 땅으로 들어갈 때에 그곳에 살고 있던 족속들을 가리키는 일반적인 용어이다. 이들 족속 가운데는 베니게, 블레셋, 암몬, 헷, 여부스, 아모리 및 히위 족속이 포함될 것이다.

    2)이들 족속 대부분은 함의 4대손인 가나안의 후예였다(창 9:22-27창10:6,15-20). 가나안 족속이란 이름은 아마도 그에게서 유래한듯 한다. 그렇지만 어떤 사람들은 그 땅이 베니게인들에 의해 가나안이라 일컬어졌다고 믿는다. 베니게인들은 뿔고둥(murex)이라는 조개에서 추출된 자주색 염료를 얻기 위해 그곳을 왕래했던 것이다. 이러한 교역은 헬라인들이 그 지역 전체를 가나안이라고 명명하리만치 유명해졌는데, 헬라어로 가나안이란 '피처럼 붉다'는 뜻이다.

    3) 가나안 족속들이 세운 몇몇 도시들이 있는데, 그 이름을 열거하자면, 게셀, 므깃도, 여리고, 소돔, 고모라 및 예루살렘이다.

    4) 이 땅이 비옥하다는 것은 기원전 1950년경에 가나안으로 도망했던 시누헤(Sinuhe)라는 한 애굽난민의 증언으로 미루어 보아도 알 수 있다. 그의 증언을 들어 보기로하자.

      "정말 좋은 땅이었다. 그곳에는 무화과와 포도 나무가 있었다. 물보다는 포도주가 흔했으며, 꿀과 올리브유가 무진장 흔했다. 갖가지 열매가 나무에 주렁주렁 열려 있었으며, 끝없는 보리밭이 펼쳐져 있었고, 온갖 종류의 양떼와 소떼들이 있었다."

    이와 같은 진술은 출애굽기 3:8및 신명기 8:8과 비교할만 하다.

    5) 아마도 가나안 족속들은 알파벳을 창안해낸 것 같은데, 그 글자들은 모두 31자로 이루어져 있었다.

    6) 성서의 역사서 기록된 맨 처음 전쟁은 네명의 메소보다미아 왕들과 다섯 명의 가나안 왕들 사이에 일어난 것이었다(참조, 창14장).

    2.가나안족속들의 종교

    1) 가나안의 종교는 고대 역사를 통털어 성적으로 가장 변태적이며, 도덕적으로 가장 부패하고 잔혹했다고 해도 지나친 말은 아닐 것이다. 하나님께서 여호수아에게 명하여 그들의 바로 그러한 문화와 주민과 도시를 멸절하도록 하신 것은 이와 같은 이유 때문이다(참조, 신 7:1-5;신20:10-15;수 9:24).

    2) 가나안 족속들의 명백한 방탕을 입증하는 주요한 것 세 가지가 있다.

    (1) 하나님의 말씀(참조, 창 13:13;창15:16;창18:20;창19:1-11 ; 민 25:1-3;삿19:14-25;왕상 14:24;왕상15:12;왕상22:46;왕하 23:7). 이들 구절은 무엇보다 우선 그들의 성적 죄를 언급하고 있다.

    (2) 비블로스의 필로(Philo of Byblos)의 증언. 이 사람은 기원전 100년경의 시대 상황을 기록한 베니게의 학자인데, 고국에서 고대의 종교적 자료를 수집했다.

    (3) 옛 우가리트의 라스 샤므라 문헌. 1927년에 발견됨.

    3) 가나안 종교의 으뜸 가는 신은 엘(El)이었다. 엘의 처는 아세라(Asherah)이다. 그는 또한 자기의 세 누이와 결혼했는데, 그 세 누이 중의 하나가 바로 아스다롯(Astarte)이다(삿 10:6참조). 엘에게는 70인의 자녀가 있었으며, 그 중에 가장 유명한 이가 바알(Baal)이다. 엘은 자기의 형제를 죽였을 뿐 아니라 자기의 아들까지도 몇 명을 살해하였다. 그리고 그는 자기 딸의 목을 치고, 그의 아버지를 거세했으며, 자기 자신도 거세하고 또 한 그의 일당들에게도 그것을 강요했다.

    4) 바알의 누이(엘의 딸)는 아낫(Anat)이었다. 그녀는 격정과 전쟁과 폭력의 비열하고 악의에 찬 여신이 되었다. 그녀는 바알의 원수들과 싸웠다. 우가리트의 바알 서사시는 그녀를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다.

    "그녀가 막강한 권세로 도시 주민들을 쓰러뜨리고, 해안 거주자들을 때려눕혔으며, 동쪽의 사람들을 멸하였도다. 그녀는 사람들을 그녀의 신전에 몰아넣고 아무도 달아날 수 없도록 문을 닫았도다. 그리고 젊은이들한테는 의자를 집어던지고, 전사들에게는 탁상을, 강한 자들에게는 발등상을 집어던졌느니라, 그녀의 무릎에까지, 목에까지 피가 찼구나. 사람의 머리가 그녀의 발아래 나딩굴고, 인간의 손들이 메뚜기처럼 그녀 위로 날았도다. 그녀는 그 희생자들의 머리를 장식물처럼 그녀의 등에 매달았고, 그들의 손을 그녀의 허리 띠에 달았나니라. 그녀의 오장은 웃음으로, 그녀의 육부는 기쁨으로 가득 찼노라. 이윽고 성에 차면 피의 강에서 손을 씻고, 다시 새로운 것을 찾아 몸을 돌렸노라."

    5) 가나안 암몬 족속의 민족 신은 몰렉이었다(참조, 왕하 11:5,7), 몰렉 숭배에 있어서 중요한 의식은 아이를 번제의 제물로 드리는 것이었다. 유다의 두 왕 아하스와 므낫세는 이스라엘의 참 하나님을 섬기지 않고, 자기들의 아이를 이 살인귀몰렉에게 희생의 제물로 바쳤다(왕하 16:3;왕하21:6). 이리하여 어린아이를 살해하여 희생으로 삼는 일이 가나안 종교의 흔한 관습이 되어갔다(참조, 겔 16:20-21;겔33:37). 마갈리스터라는 이름의 한 고고학자는 게셀 지역의 발굴 당시에 폐허가 된 가나안의 한 신전을 발견했다.

    그는 그 안에서 어린아이의 뼈가 담긴 수백개의 항아리를 찾아냈는데, 그 뼈의 주인공들은 네 살에서 열 두 살에 이르는 아이들이었으며, 산 채로 불에 태움을 당해 죽은 것임에 틀림없었다. 이와 같은 유형의 다른 끔찍한 관습은 "터를 위한 제물"이라는 것이었다. 이는 집을 지을 때 드리는 희생제물을 가리킨다. 그 아이의 시체는 남아있는 가족들에게 "행운"을 가져다 주기 위해 벽밑에 매장되곤 했다.

    6) 우리는 앞에서 가나안 족속들의 성적 변태를 약간 언급한바 있다. 가나안의 제사장들은 흔히 악명높은 동성애를 자행하는 자들이고, 여사제는 보통 매춘부였다. 이들 비교의 크고 작은 우상 및 다른 숭배의 대상물들이 하나하나 발굴되고 있는데, 그 중의 약간은 인간의 성기를 돌이나 나무에 새긴 것들이다.

    수메르 족속

    1. 메소보다미아의 도시들 및 민족들의 기원

    1) 창세기 11장에 기록된 사건들이 발생한 것은 기원전 3000년 이전으로 추측된다. 함의 자손 니므롯은 바벨 탑을 쌓음으로써 하나님에 대한 반역을 주도하였다.

    2) 갈래갈래의 언어로 갈라지고 난 후에 갖가지 집단들이 중동 각지에 정착했다.

    3) 기원전 3000년경에 두 집단의 족속들이 메소보다미아에 정착했다. 메소보다미아란 "두 강 사이의 땅"이란 뜻인데, 두 강은 티그리스와 유브라데 강이다. 이 강들은 모두 남으로 흘러 페르시아만으로 들어간다.

    4) 한 족속은 아카드인들로 윗 계곡에 살았으며, 다른 족속은 수메르인들로 아랫 계곡에 살았다. 이것은 수메르의 땅으로 알려졌다.

    2. 두 계곡의 정치적 역사

    1) 수메르인들이 살았던 남부의 중요한 도시들을 들어보자면 다음과 같다. 에?, 기스, 라가쉬, 라르사, 닙푸르, 움마, 우르 및 우륵.

    2) 기원전 2500-2300년 사이에 우르의 왕들은 전 수메르를 지배하는 도시를 건설했으며, 그들은 북부의 아카드인들을 침략했다.

    3) 기원전 2300년 직후, 이야기는 뒤바뀌어 오히려 수메르인들이 아카드인의 강력한 지배자 사르곤에게 정복당했다.

    4) 전승에 따르면 사르곤은 유아기에 바구니에 담겨 유브라데 강에 죽도록 버려졌다. 그러나 한 정원사의 눈에 띄어, 그의 보호를 받아 군사가 되었다.

    5) 사르곤은 뛰어난 군사적 지도자요, 조직가이자 행정가였다. 그는 유사 이래 최초의 제국을 건설하였고, 메소보다미아의 전 지역을 통일하였다.

    6) 그의 사령부는 바벨론에 있었다. 그는 56년 간 지배하였다. 사르곤은 위대한 입법가였다.

    7) 그러나 그가 죽은 후에 그의 아들들은 그의 강력한 지배체제를 유지할 수 없었다. 이리하여 수메르는 북쪽 산지의 야만인들(구티 족속)의 침입을 받아 그들에게 복속당했다. 그들은 백년 가량 지배하였다(기원전 2170-2079년).

    8) 이번에는 수메르인들이 세력을 회복하여 구티인들을 쫓아냈다. 새로운 수도는 페르시아만 연안에 있는 번영 일로의 항구도시 우르였다. 이 시기의 가장 위대한 지배자는 덩기(Dungi)라는 사람이다. 그는 유명한 행정가로 덩기법전을 편찬하였는데, 이 법전은 함무라비 법전보다 300년 가량 앞선 것이다.

    9) 이 수메르인의 국가는 엘람 족속이라는 동방의 유랑민족으로부터 침입을 받아 기원전 2000년 경에 멸망했다.

    3. 메소보다미아인들의 업적

    1) 수메르인들은 훌륭한 건축가들이자 건설자들이었다. 예를 들어, 우르 시에는 거대한 계단과 기둥과 패널을 댄 벽으로 치장된 웅대한 왕궁이 있었다. 이들 벽에는 인간과 동물을 그린 아름다운 그림이 있었다. 귀족들은 왕궁 주위에 세워진 2층 집에 거주했다. 그들은 둥근 천장(vault)과 아아치와 돔(dome)을 어떻게 만드는가를 알고 있었다. 건용한 방법으로, 후에 애굽인들이 피라미슬 만들때 이것을 모방했다. 지구랏 신전은 탑 모양의 신전으로 한 단층 위에 그보다 작은 단층을 계속 포개는 건축 방식으로 세워진 것이었다. 아마도 이것은 바벨탑의 모양을 흉내낸 것 같다.

    2) 그들은 금과 은을 사용했으며, 합금, 주물, 성형에 관한 지식을 갖고 있었고, 이 덕분에 훌륭한 금속세공과 보석류가 나올 수 있었다.

    3) 각 학교에서는 천문학, 수학, 점성술, 지도 제작 및 외과수술을 교과목으로 가르쳐졌다.

    4) 수메르인들에게는 무수한 시가 와 전설이 있다. 그 중에서도 가장 유명한 것은 '천지창조'와 '길가메쉬의 서사시'이다.

    5) 수메르인들은 육진법에 토대를 둔 숫자체계를 창안하는 등, 수학에 있어서 괄목할만한 진전을 이룩했다. 그들은 곱셈, 나눗셈 및 분수를 활용하고, 1년이 354일로 이루어진 태음력을 사용했다.

    6) 고대 수메르의 왕들은 전차를 이용했다. 그들의 군대는 잘 조직되어 있었고, 밀집대형을 이루어 행진했다. 그들은 구리로 만든 투구를 쓰고, 역시 구리로 만든 창을 사용했다.

    7) 그들은 농업에 아주 익숙했으며, 곡물, 채소, 대추 야자를 엄청나게 수확하곤 했다. 또한 소, 양, 염소와 같은 가축을 길렀다. 밭을 가는 데는 황소를 이용하는 한편, 짐수레와 전차를 끈 데는 당나귀를 이용했다. 그리고 낙농없이 번성했다.

    8) 수메르인들은 문자를 사용했다는 기록을 갖고 있는 최초의 족속들이다. 그들은 상형문자를 사용했지만, 나중에는 이러한 문자를 간편한 기호로 단순화하여 부드러운 점토판에 끝이 날카로운 철필로 썼다. 이 철필은 삼각형의 촉을 지니고 있었는데, 그것으로 점토판을 긁으면 쐐기 꼴이 새겨졌다. 이 글자는 후에 설형문자, 즉 "쐐기 꼴"의 문자로 일컬어지게 된다.

    4. 메소보다미아의 종교

    1) 고대의 다른 문명권에서도 그러하였듯이, 종교가 사람들의 생활을 지배했다.

    2) 각 도시와 마을에는 각각의 신들이 있었으며, 그 신들의 성격은 각각 달랐다. 얽히고 설킨 복잡한 신화가 발전하였다.

    (1) 어머니 신 이스타르는 사랑과 다산의 여신이었다.

    (2) 사랑하는 아들 신 담무스는 봄의 신이자 꽃과 곡물을 주관하는 신이었다. 그는 또한 저승의 신이었으며, 일년 중 반년 기간 동안 저승에 살다가 매년 봄마다 이승으로 돌아오곤 했다.

    (3) 바벨론 왕조가 통치하던 기간 중에, 담무스는 그와 비슷한 신 아모리 족속의 마르둑으로 대치되었다.

    3) 바벨론인들은 천체를 숭상했는데, 이 결과 천문학과 점성술이 성하게 되었다.

    4) 그들은 인간을 포함한 모든 종류를 희생제물로 바쳤다.

    5) 사제들이 주관하는 성전, 제단 및 학교가 있었다.

    6) 징조, 신탁, 마법이 종교에서 중요한 역항을 수행했다.

    (1) 꿈이 중요시되었으며, 해석의 대상이 되었다.

    (2) 희생제물로 구입한 양의 간장 위에 나타난 핏줄을 읽음으로써 미래를 예언하곤 했다.

    블레셋

    1. 소개

    1) 이 해안 족속은 그레데 섬에서부터 이동하기 시작하여, 기원전 1200년경에 팔레스틴에 정착하였다(참조, 신 2:23;렘 47:4;암 9:7). 그들은 함의 계보에서 나온 족속이었으며, 그의 둘째 아들 미스라임의 후손이었다(대하 1:12). 이 때문에 그들은 애굽인들과 먼 친척이 되었다.

    2) 아마도 그들은 팔레스틴으로 가는 도중에 헷 족속과 거대한 옛 수리아 도시 우가리트를 멸망시킨 것 같다. 기원전 1190년에 그들은 애굽을 침략하려 했으나 애굽의 바로인 람세스 3세에 의해 격퇴 당했다. 이 후에 그들은 연안 상류에 정착하였으며 팔레스틴에 자기네 족속의 이름을 붙였다.

    3) 블레셋인들은 5개 도시 연맹을 결성했다. 이 다섯 도시는 가사, 아스돗, 아스글론, 에그론 및 갓이다. 각 도시는 방백이 다스렸다.

    4) 블레셋인들은 아주 종교적이었으며, 다곤(곡물의 신), 아스다롯(번식의 신) 및 바알세붑(주거의 신)을 섬겼다(참조, 삼상 5:4;삼상31:10;왕하 1:2). 바알세붑은 후에 "귀신의 왕"이란 뜻의 바알 세불로 알려지게 되었다(마 12:24). 블레셋인들은 자기네들이 섬기는 신당에서 승리를 축하했으며(삼상 31:9), 곧잘 자기네들의 우상을 전장으로 모시고 다녔다(삼하 5:21).

    5) 처음에 그들이 이스라엘을 이길 수 있었던 주요 이유는 당시의 "원자탄"이라 할 수 있는 철기를 소유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아마도 이들은 철기제작을 헷 족속(힛타이트)으로부터 배운듯 한데, 헷 족속은 노아의 대홍수 이후에 맨 처음 이 기술을 발견한 족속이다(참조, 삼상 13:5,19-22).

    6) 블레셋인들은 엄청난 양의 맥주를 소비하는 "폭주가"들이었다.

    2. 성서와 블레셋

    1) 삼갈과 삼손은 블레셋 족속과 싸웠다(삿 3:31;삿13:1;삿15:20).

    2) 사울의 아들 요나단이 그들을 격파했다(삼상 14:1-47).

    3) 그들은 결국 사무엘에 의하여 바닷가로 밀려났다(삼상 7:12-14).

    4) 사울은 그들에게 패하여 전장에서 죽었다(삼상 31장).

    5)다윗은그들과 싸웠다(삼상 17장;삼하5장).

    6)그들은 솔로몬 치세 때에 완전히 복속당했다(왕상 4:21).

    애굽인들

    1. 소개

    1) 메소보다미아와 마찬가지로 애굽인들은 인류 역사상 가장 오랜 민족이다. 애굽은 주위를 둘러싼 천연 방벽의 보호를 받았다. 북쪽에는 바다, 남쪽, 동쪽, 서쪽에는 사막이 있었기 때문에 애굽은 침략해 들어가기가 어려웠다.

    2) 애굽 문명은 진실로 나일강의 선물이었다. 세상에서 가장 긴 이 강(4037마일)은 남아프리카의 빅토리아호에서 시작하여 북으로 흘러 지중해로 들어간다.

    3) 또한 바람 때문에 강의 왕복 항해가 용이하였다. 북쪽으로 가려는 배들은 흐르는 물을 타고 쉽게 항해할 수 있었고, 남쪽으로 가려는 배들은 바람을 이용하여 쉽게 상류로 거슬러 올라 갈 수 있었다.

    4) 지리적 위치 때문에 나일강 상류의 애굽은 남쪽에 위치한 반면 나일강 하류의 애굽은 북쪽 나일 강의 삼각주에 위치했다. 삼각주에 이르러 나일 강은 7개의 지류로 나뉘어 지중해로 들어갔다.

    5) 윗 애굽(Upper Egypt: 남쪽 애굽)의 지배자들은 흰 왕관을 썼고, 아래 애굽(북쪽 애굽)의 지배자들은 붉은 왕관을 썼다.

    2. 애굽의 왕조들

    기원전 3300년에서 시작하여 알렉산더 대왕의 치세(기원전 330년)에 이르는 시기는-기원전 3세기경의 역사가 마네토(Manetho)의 분류에 따르자면- 정치적으로 30개의 왕조로 나뉜다.

    3. 애굽 역사의 기본적 윤곽

    1) 기초 왕조의 시대-기원전 3000-2700년. 제 1,2왕조, 수도는 멤피스(성서적 표현을 따르자면 '놉' ; 참조, 사 19:13;렘 2:16;렘46:14,19;겔 30:13,16).

    주 : 메네라는 이름의 지배자가 30개 왕조의 초대왕이었으며, 아마도 이 사람은 창세기  10:6에 나오는 미스라임이었던듯 하다. 미스라임은 함의 둘째 아들이었다.

    2) 고 왕국 - 기원전 2700-2200년, 제 3왕조부터 제 6왕조까지임. 이 시기에 거대한 피라밋이 건축되었다.

    3) 제 1 중간기 - 기원전 2200-2000년, 제 7왕조부터 제 10왕조까지임.

    4) 중 왕국-기원전 2000-1800년, 제 11왕조부터 제 12왕조까지임. 수도를 더베(성서적 표현을 따르자면 '노'  ; 참조, 렘 46:25;겔 30:14-16)로 옮김, 이 시대는 무덤을 예술적으로 꾸미던 때였다.

    5) 제 2 중간기- 기원전 1800-1600년. 제 13왕조부터 제 17왕조까지임. 힉소스왕조(아시아의 방백들)가 기원전 1674년에서 1567년까지(제15-17조) 통치함.

    6) 신 왕국 - 기원전 1600-1100년. 제 18왕조부터 제 20왕조까지임. 애굽의 국력과 부가 절정에 이른 시대. 이 때 이스라엘 족속이 애굽에 있었으며 출애굽 사건이 일어났다.

    7) 제국 이후의 시기 - 기원전 1100-300년. 제 21왕조부터 제 30왕조까지임. 이 기간 중에 22명의 시삭이 지배했다(왕상 11:40;렘14:25-27;대하 12:2-12). 제 26왕조때에 느고가 통치하였다(왕하 23:28-30,33-35;대상 35:20-24;대상36:4;렘 46:2).

    바사의 지배 - 기원전 525-332년, 프톨레미의 시기-기원전 300-30년, 알렉산더 대왕- 기원전 332-323년, 프톨레미 1-12세-기원전 304-51년. 클레오파트라-기원전 51-30년, 이들 일곱시기 중에서 가장 중요한 사건들이 고왕국, 중왕국, 신왕국 시기에 일어난다.

    4. 중요한 사건들의 간략한 역사

    1) 고 왕국(기원전 2700-2200년). 제 3왕조부터 제 6왕조까지의 왕국.

    (1) 맨 처음의 피라밋이 바로 조세르에 의해서 건축되었다. 아마도 이 건축물은 메소보다미아의 지구랏을 모방하여 개량한 것이라 생각된다. 조세르는 제 3왕조의 왕이었다.

    (2) 제 4왕조의 쿠프(Khufu 혹 Cheops)는 대피라밋의 건설을 명령했다. 헬라인들은 이 피라밋을 세계 불가사이 중의 하나라고 생각했다. 그것을 완성하는데는 20년에 걸쳐 10만 명이 동원되었다. 피라밋의 저변은 755피트이다. 하나에 2.5톤이나 되는 석회석을 쌓아 지은 것이다.

    (3) 같은 제 4왕조의 바로인 카프르(쿠프 왕의 아들)를 위해서 거대한 스핑크스가 건축되었다. 그것의 모양을 보자면, 몸은 사자이고 머리는 바로였다. 그 몸의 길이는 240피트, 높이는 66피트, 얼굴의 너비는 13피트이다.

    (4) 제 6왕조의 페피 2세는 고왕국의 바로 중 최후로 가장 강력한 왕이었다. 그는 90년 이상 동안 권좌에 있었다. 그가 죽은 직후에 고 왕국은 멸망했다.

      이후 200년간(기원전2200-2000년) 애굽에는 정치적 혼란이 거듭되었다. 줄곧 침략자들이 사막을 건너 쳐들어왔으며, 나라의 존립을 위협하였다. 야심을 품고 있는 세 일가가 정권을 잡으려고 혈안이 되어있는 통에 수리 계획 및 건축 계획이 수포로 돌아가고 내란이 발생하였다. 이것은 때때로 봉건시대라는 이름으로 불리며, 제 7왕조부터 제 10왕조까지가 이에 해당된다. 족장 아브라함은 이 시기에, 즉 기원전 2084년경에 애굽을 방문하였다(창 12:10-20).

    2) 중왕국(기원전 2000-1800년). 제 11,12 왕조가 이에 해당한다.

    (1) 제 11왕조의 아멘호텝 1세는 다시 애굽을 통일했다. 그와 후계자들은 국가를 재건하고 세계 무역을 활성화시켰다.

    (2) 요셉이 애굽의 노예로 팔려간 것도 중왕국의 마지막 때인 기원전 1897년경이었으며(창 37장)그의아버지야곱이 애굽으로 옮겨간 것도 대략이 시기에 해당하는 기원전 1875년경이었다(창 46장).

    고왕국말기를점철하였던 바와 같은 격동과 전쟁의 상황이 다시 중왕국 말기에 만연하였다. 기원전 1700년 직후 힉소스 왕조로 불리는 일단의 침입자들이 수리아와 아시아에서 나일강 델타 지역으로 옮겨와 북 애굽(아랫 애굽)을 정복하였다.

    힉소스 족은 말이 끄는 전차를 타고 있었다. 그들은 양쪽날이 있는 단검과 칼을 사용했다. 활의 몸체는 두 겹으로 되어 있어 강력하고 화살촉은 놋이었다. 훈련 및 무장이 제대로 되어 있지 않은 애굽인들로서는 그들의 대적이 될 수 없었다. 힉소스 족은 피라밋과 관계된 모든 일을 중지시키고, 새로운 신들을 소개했으며, 애굽어를 단순화시키려고 했다.

    이 두번째 중간기 전체는 제 13부터 제17왕조까지 기원전 1800-1600년 간의 시대이다. 전체는 아니지만 약간의 사람들은 이 시기, 즉 기원전 1730년경에 히브리인들의 탄압이 애굽에서 시작되었다고 믿는다(출 1장).기원전1580년에애굽의 한 병사 아모스(Ahmose) 1세가 반란을 일으켜 가증스런 힉소스의 침입자들을 모아 내는데 성공했다.

    3) 신 왕국(기원전 1600-1100년). 제 18-22왕조가 이에 해당한다.

    (1) 아모스 1세와 후계자들은 애굽을 재건하는데 많은 시간을 들였다. 격렬한 민족주의 정신이 곳곳에 충만했다. 애굽의 히브리인 탄압이 시작된 것은 이 시기며, 바로 이와 같은 이유(값싼 노동력과 모든 외국인들에 대한 의심) 때문이라고 많은 사람들은 믿는다. 따라서 출애굽기에 언급된 모든 바로는 이 유명한 제 18왕조로부터 기인한다. 다음 구절을 생각해 보자.

    ① 출애굽기 1:8의 "요셉을 알지 못했다"는 "새왕"은 아마도 투트모스(Thutmose) 1세인듯 하다(기원전 1539-1520년 경) 모세는 기원전 1525년에 태어났다.

    ② 출애굽기 2:5의 "바로의 딸"이란 핫셉수트를 가리킨다. 그녀는 모세를 길러 그녀의 남편 투트모스 2세가 죽가 애굽의 왕위를 모세에게 넘겨주었다.

    ③ 출애굽기 2:15의 모세를 죽이려 했던 바로는 핫셉수트의 의붓아들 투트모스 3세였으며, 그는 왕후를 지독히도 미워한 나머지 그녀를 폐위시켰다. 그는 왕위에 오르자 핫셉수트의 한 친구였던 모세는 또한 투트모스 3세는 노여움을 자연히 받게 되었다.

    ④ 출애굽기 5:1의 열 가지 재앙이 기세를 떨치던 시기의 바로는 아멘호텝 2세이다. 이 바로의 무덤은 결코 완성되지 않았다. 그 이유는 출애굽기 14:8-13에서 설명하고 있는 듯한데, 여기서 우리는 바로와 그의 군대가 홍해를 건너려다 그 중간에서 수장되고 말았다는 기록을 보게 된다. 게다가 그의 아들조차 애굽을 다스리지 못했다. 아마도 출애굽기 12:29은 이 이유를 설명하고 있는 것 같으며, 여기서 우리는 바로가 유월절에 내린 죽음의 재앙에서 아들을 잃었다는 기록을 대하게 된다.

    (2) 이 시기의 더욱 중요한 지배자들은 유명한 제 18왕조에 속한다. 얼마쯤은 앞에서도 언급한 바 있다. 신 왕국 시대의 몇몇 왕들은 다음과 같다.

    ① 아모스 1세. 제 18왕조의 첫번째 지도자. 힉소스 왕조를 쫓아내는데 힘썼으며, 다시 애굽을 통일했다.

    ② 핫셉수트. 모세를 기른 장본인이자 애굽의 왕위와 더불어 여신의 지위에 오른 최초의 여왕. 그녀는 두개의 면류관을 썼으며, 거짓 수염을 길렀다.

    ③ 투트모스 3세. 핫셉수트의 의붓아들로 그녀를 격렬히 증오한 나머지 폐위시켰다. 투트모스 3세는 애굽의 모든 바로 중에서도 가장 위대한 바로들 중의 한 사람이다. 그는 애굽의 알렉산더 대왕, 혹은 애굽의 나폴레옹이라 불리웠다. 그의 제국은 수단에서부터 북부 수리아에 뻗쳐 있었다. 그는 모세가 40세에 애굽을 탈출했을 때 애굽을 다스리던 왕이었다. 그는 나라를 지극히 안정되게 하고 죽었기 때문에 애굽은 당시 수십년동안 여전히 매우 강대한 채로 남아있었다.

    ④ 아멘호텝 2세. 열 가지 재앙 당시의 애굽 왕.

    ⑤ 아멘호텝 3세. 그의 치세 때에 애굽 제국은 절정에 이르렀다. 그는 대제 아멘호텝 3세라고 불리기도 한다.

    ⑥ 아멘호텝 4세. 그는 아크나혼이란 이름으로 더욱 더 잘 알려져 있는데, 애굽의 다신교를 태양신 아톤만을 섬기는 유일신교로 뜯어 고치려고 했다. 아마도 그는 열 가지 재앙 당시에 나타나신 하나님의 참된 권세에 영향을 입은 듯하다.

    아멘 호텝 4세는 네페르티티라는 아름다운 여인과 결혼했다. 이 한쌍의 부부를 대상으로 하여 옛날부터 허다한 그림과 조각이 제작되었다. 아래 내용의 고대 기록들이 발견되었다는 사실은 매우 흥미있는 일이다(엘 아마르나 서판이 발견된 것은 기원후 1880년이다). 여기에는 하비루라고 하는 침략 족속을 내쫓기 위해 애굽의 도움을 구하는 팔레스틴의 가나안 왕들로부터 애굽 왕 아멘호텝 4세에게 보내는 메시지가 포함되어 있다. 어떤 사람들은 하비루 족속아 사실상 여호수아가 이끄는 히브리인이라고 생각한다(그렇지만 이 설은 다수의 주장은 아니다).

    ⑦ 투탄카톤. 그는 아멘호텝 4세이 양자였다. 기원후 1922년에 그의 무덤이 금만 해도 10만달러어치 이상을 소장하고 있었다. 투탄카톤의 미이라는 세개의 금곽 안쪽에 안치되어 있었으며, 카다란 석관에 누워 있었다. 시체는 또한 네개의 나무입힌 외곽에 둘러쌓여 있었다. 그는 기원전 1361년, 열 살에 등극하여 19세에 사망했다.

    ⑧ 람세스 2세. 그는 최후의 강력한 바로 였으며, 67년간 재위한 가장 자부심 강한 왕들 중의 한사람이었다. 그는 역사기록상 가장 오래된 협정을 헷 족속과 맺은 사람이기도 했다(기원전 1250년 경).

    ⑨ 람세스 3세. 그는 기원전 1190년에 일어난 유명한 해전에서 블레셋을 격파한 것으로 기억되는 왕이다.

    이 후부터 애굽은 줄곧 내리막길로 치달린다. 이외의 성서 역사에 나오는 중요한 바로를 들자면, 제 26 왕조의 느고 2세 즉 느고왕을 들 수 있다. 그는 경건한 유다 왕 요시야를 살해했으며(왕하 23:29), 기원전 605년에 일어난 갈그미스 전투에서 바벨로니아인들에게 참패당했다(참조, 렘46:2).

    바빌로니아인들

    1. 소개

    1) 기원전 2000-1800년 사이에 메소보다미아는 엘람 족속이라 불리는 일단의 동방인들에게 지배를 받았다(참조, 창 10:22;창14:1,9). 엘람 족속이란 오늘날 흔히 페르시아(바사)인들로 일컬어 지는 사람들이다.

    2) 기원전 1760년에 엘람 족속들은 유브라데 강 서쪽에 살고 있는 아모리 족속들에 의해 메소보다미아에서 쫓겨났다. 이 침입을 주도한 승승장구의 아모리 장군을 함무라비였다. 이 인물로 더불어 고 바빌로니아 왕국이 시작했다. 그가 죽자 그의 제국을 분열하며 근 100년 동안이나 지리멸렬한 상태로 있다가 느부갓네살이란 이름의 갈대아 군인에 의해 신(즉 두번째)바벨론 왕국이 수립된다.

    2. 고 바벨로니아 왕국

    1) 기원전 1760년 함무라비는 티그리스-유브라데 계곡을 점령하고, 유브라데 강가에 수도 바벨론을 세웠다.

    2) 바벨론의 대신은 마르둑이었다. 함무라비는 마르둑의 지상 사자임을 주장하여 통치권의 신성성을 수립하였다.

    3) 그는 바벨론 제국의 창설자일 뿐 아니라 함무라비 법전의 편찬자라고도 알려져 있다. 이 법전은 바빌로니아의 생활 중 사회적 정치적 경제적 부면을 규제하는 약 300조항의법률집이다.그러나 함무라비가 이 법률을 입안한 것은 아니며 그보다 약 300년전의입법자였던수메르의 덩기가 이미 입안했던 것을 함무라비가 법률화하여 요약한 것이다.

    4) 고 바빌로니아 제국은 그의 치세 기간 중에 번성일로를 걸었다. 결국 그는 42년 동안의 치세를 끝으로 죽었다. 기원전 1708년 그가 죽은 직후에 소아시아에서 건너온 일단의 전사들인 헷족속이 메소보아미아를 점령하자 고 바빌로니아 왕국은 멸망했다. 헷 족속은 헷의 후예이다(참조, 창 10:15;창23:3-20;창27:46).

    5) 대략 170년 동안 헷 족속이 바빌로니아 영토를 지배했으나, 기원전 1530년 메소보다미아 북부에 살고 있던 캇사이트 족에게 복속당했다(참조, 창 2:13;창10:8). 그들은 이 지역을 근 400년 동안 지배했으며, 앗수르와 엘람인들에게 결국 쫓겨나고 말았다.


















    역대하 33장 요약

    므낫세의 패악으로 인해 이방 제단을 쌓았으며 아들들을 제물로 바치게 됩니다.무당과 점쟁이를 믿었으며 우상을 성전에 두었으나 므낫세가 기도함으로 회개하였습니다.므넷세는 죽고 아몬이 왕이 되었다 기록하고 있습니다.

    역대하 34장 요약

    요시야가 왕이 된 후 종교 개혁을 시도하여서 산당과 우상을 없애게 됩니다.성전을 수리하였고 힐기야가 율법책을 발견하게 됩니다.왕과 백성이 율범의 언약을 지키기로 약속하엿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역대하 35장 요약

    요시야가 예루살렘에서 유월절을 지켯고 제사장과 레위의 임무를 알려주었습니다.번제를 드리고 무교절을 지켰으며 애굽의 느고와 요시야가 싸우다가 전사하였다 기록하고 있습니다.

    역대하 36장 요약

    여호아하스,여호야김이 왕이 되었고 바벨론 느부갓네살이 여호야김을 잡아간후 여호야긴이 왕이 됩니다.시드기야가 왕이 되고 느부갓네살을 배반,예루살렘은 멸망하게 되고 고레스가 귀국 명령을 내리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5월 23일(금) 역대하 33-36장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느고의 말(35:22)

    요시야가 몸을 돌이켜 떠나기를 싫어하고 변장하고 싸우고자 하여 하나님의 입에서 나온 느고의 말을 듣지 아니하고 므깃도 골짜기에 이르러 싸울 때에.
    Josiah, however, would not turn away from him, but disguised himself to engage him in battle. He would not listen to what Neco had said at God's command but went to fight him on the plain of Megiddo.

    요시야는 남 유다 왕국의 제16대 왕입니다.
    느고는 애굽 왕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을 섬기는 유대의 왕이 우상을 숭상하는 애급의 왕 느고의 말을 들어야 합니까?
    아니면 듣지 말아야 합니까?
    당연히 듣지 말아야 합니다.
    그런데 느고의 말은 "하나님의 입에서 나온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요시야 왕은 느고의 입에서 나온 말을 반드시 들어야 할 것입니다.

    애급 왕 느고가 '갈그미스'를 치러올라왔습니다.
    이 싸움은 앗수르와 애급의 세력 다툼이었습니다.
    그런데 요시야는 두 강대국 앗수르와 애급의 싸움에 관여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요시야 왕은 변장을 하고 싸움에 임하였다가 결국에는 므깃도 골짜기에서 전사하고 말았습니다.

    하나님께서 때로는 애급 왕 느고의 입을 통하여 말하게 하듯 이렇게 말합니다.
    "요즈음 교회가 왜 저래!"
    "요즈음 목사들이 왜 저래!"
    "요즈음 예수 믿는 사람들이 왜 저래!"

    이러한 비난의 화살이 지금 정치판에서 어지럽게 난무하고 있습니다.

    국민의 힘 정당인가?
    더불어 민주당인가?

    김문수인가?
    이재명인가?

    누가 들어도 자유대한민국의 대통령은 김문수 후보가 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아직도 범법자이며 자유민주주의를 파괴하려는 이재명을 옹호하는 사람들이 국민의 절반 이상이라고 합니다.
    정말 어처구니가 없는 현상이 전개되고 있습니다.

    이러한 현실을 바라보며 이렇게 기도할 수밖에 없습니다.
    때닫지 못하는 백성들을 깨닫게 하는 유일한 길은 당해봐야 합니다.
    그래서 이런 기도를 하는 안타까운 마음을 헤아려보시기 바랍니다.

    주여,
    자유대한민국이 망하는 것이
    주님의 뜻이라면
    철저하게 망하게 하시옵소서!

    그러나
    자유대한민국이 바로 설 수 있는
    소망이 있다면
    불쌍히 여겨 주시옵소서.

    오 주여,
    자유대한민국이 흥하는 것이
    주님의 뜻이라면
    속히 흥하도록 역사하시옵소서.








    왜 선한 왕 요시야는 하나님의 입에서 나온 느고의 을 듣지 아니하였을까?

    “요시야가 몸을 돌이켜 떠나기를 싫어하고 변장하고 싸우고자 하여 하나님의 입에서 나온 느고의 말을 듣지 아니하고 므깃도 골짜기에 이르러 싸울 때에 활 쏘는 자가 요시야 왕을 쏜지라 왕이 그 신복에게 이르되 내가 중상하였으니 나를 도와 나가게 하라”(대하35:22,23)


     요시야는 쇠락해 가는 남방 유다 왕국의 마지막 등불이었다. 그는 불과 8살에 왕위에 올라 부친 아몬과 조부 므낫세와는 달리 다윗의 길로 행하였다. 그는 재위 18년인 BC 621년에 율법서인 신명기 서를 발견한 후 대대적인 부흥 운동을 전개하였다. 그는 여호와의 전을 수리하고 우상을 일소하고 실지를 회복하고 군사력을 증강시켰다.

     특히 신명기를 낭독하는 것을 듣고는 그 자신이 옷을 찢으며 회개하였으며 가나안 정착 이후로 가장 큰 유월절 절기를 지키게 하였다. 그래서 성경은 “요시야와 같이 마음을 다하며 성품을 다하며 힘을 다하여 여호와를 향하여 모세의 모든 율법을 온전히 준행한 임금은 요사야 전에도 없었고 후에도 그와 같은 자가 없었더라”(왕하23:25)고 하였다.

     그런 그가 아직도 젊은 39세인 BC 609년에 쓸데없는 외교 분쟁에 휘말려 전사하고 말았다. 물론 이러한 비극의 원인은 조부 므낫세의 엄청난 죄악 때문이었다(왕하23:26~27). 그러나 역대하 35장의 본문에서는 그의 죽음이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않고” 잘못된 판단으로 전쟁에 참여한 결과라고 설명하고 있다. 어찌 요시야 같은 이가 그렇게 하였을까? 그는 왜 그런 어리석은 결정으로 죽음을 맞게 되었을까?

     그것이 아마도 이방 왕인 느고의 입을 통해 하나님께서 말씀하셨기 때문이었는가? 여하튼 역대개의 본문은 그의 죽음을 전하는 므깃도 전쟁 기사를 시작하면서까지 “이 모든 일 후 곧 요시야가 전을 정돈하기를 마친 후에”(대하35:20)라고 하여 요시야가 마지막 순간까지 하나님께 헌신하였음을 보여준다.

     요시야가 최후를 맡은 소위 므깃도 전쟁을 바르게 이해하기 이해서는 당시의 역사적 배경을 자세히 알 필요가 있다. 요시야가 유다를 통치하고 있던 그 시대에는 바벨론이 고대 근동의 신흥 패권 국가로 급부상하고 있었다. 바벨론인 이미 앗수르의 수도인 니느웨와 하란을 정복하였다.

     그 후 앗시리아의 잔 군들이 앗슈르-우발릿(Ashur-uballit)의 지휘 아래 갈그미스를 수도로 삼았다. 이에 애굽은 근동 아시아의 세력 균형을 깨뜨리는 바벨론의 등장을 억제할 목적으로 앗수르 왕국을 돕고자 갈그미스로 올라갔다. 그리하여 BC 609년 여름에 애굽의 바로느고는 대군을 이끌고 팔레스틴의 므깃도까지 이르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한글 개역성경의 “애굽왕 바로느고가 앗수르 왕을 치고자(agianst)하여”(왕하23:29)0라는 번역은 잘못된 번역이다. 히브리어 전치사 알(ל󰘽)은 그 역사적 배경을 고려할 때 “치고자”(ahainst)가 아니라 “위하여”(on behalf)로 번역되어야 한다.그래서 표준새번역과 공동번역은 무두 “애굽왕 느고가 앗수르 왕을 도우려고”라고 번역하였다.

     여하튼 이런 역사적 배경 속에서 요시야는 앗수르를 도우려고 올라오는 바로느고와 므깃도에서 맞섰다. 이는 애굽이 앗수르와 동맹하여 바벨론을 물리치면 팔례스틴에 대한 애굽의 지배권이 부활되고 결국 통일 히브리 왕국의 꿈이 위협을 받을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인 것 같다. 이때 바로느고는 요시야에게 이렇게 말했다. “유다 왕이여 내가 오늘날 그대와 무슨 관계가 잇느뇨. 내가 오늘날 그대를 치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나를 명하사 속히 하라 하였은즉 g 하나님이 나와 함께 계시니 그대는 하나님을 거스르지 말라 그대를 멸하실까 하노라”(대하35:21)고 하였다.

     그러나 요시야는 이 말을 귀담아 듣지 않았다. 아니 어쩌면 그 말을 무시했는지도 모른다. 그것도 아니라면 여호와에 대한 열망이 너무 큰 나머지 여호와의 제지하시는 음성을 무시했는지도 모르겠다. 동기가 무엇 이였든지 간에 요시야는 “몸을 돌이켜 떠나기를 싫어하고 변장하고 싸우고자 하여 하나님의 입에서 나온 느고의 말을 듣지 아니하”(대하35:22)였다.

     이때 요시야가 느고의 말을 듣지 않은 이유는 아마도 선민 국가의 왕이라는 자부심 때문이었을 가능성이 가장 높다. 이것은, 마치 큰 부흥과 개혁 사업을 주도하고 있는 경견하고 영감적인 목사에게 어떤 세속적인 사람이 영적인 문제에 대해 충고를 할때 받아들이기가 쉽지 않은 것과 k같다 .그러나 요시야는 바로느고의 입을 통해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야 했다. 사실 하나님은 전에도 이방의 왕들에게 기별을 주신 것이 있었다.(창12:17-20;20:3~7; 단4:1~3) 뿐만 아니라 심지어 나귀를 이용하시어 개별을 주시기도 하셨다.(민22:28~31).

     요시야가 비록 바로느고의 말을 듣지 않고 애통하게 전사하였지만 성경은 여전히 그를 의로운 하나님의 사람이라고 부른다. 심지어 그의 죽음을 일찍이 하나님께서 여선지자 훌다의 입을 통해 예언한바 “내가 너로 너의 열조에게 돌아가서 평안히 묘실로 들어가게 하리니 내가 이곳 거민에게 내리는 모든 재앙을 네가 눈으로 보지 못하리라”(대하34:28)는 말씀을 성취하는 것이었다. 더군다나 성경은 요시야 왕의 삶에 대해 심지어 이 므깃도 사건 이후에도 그가 “행한 모든 선한 일과 그 시종 행적이”(대하 35:26) 기록되었다. 는 말로 마무리하고 있다.








    애굽왕 느고가 받은 하나님의 말씀

    교회의 본질적 기능을 말하라고 한다면, 우리는 여러 가지를 말할 수 있다고 생각됩니다.
    오늘은 그 여러 기능들 중에서 “말씀 선포의 기능”을 이야기 해 보고자 합니다. 
    말씀선포는 “하나님의 말씀”을 대신(代身) 전한다는 권위(권위)를 갖고는 있지만, 그럼에도 거기에는 말씀 선포자의 성서해석적 기능이 매우 중요한 역할을 담당한다는 이중적 특징이 있다고 하겠습니다.
    이러한 이중적 기능은 영감을 받아 성서를 기록하던 성서 기자들의 성서기록 활동을 통하여서도 감지할 수 있는 점이라고 하겠습니다.

    유다 왕 요시야의 전사(戰死) 사건에 대한 두 성서 역사가 즉 열왕기를 쓴 신명기적 역사가역대기를 쓴 역대기 역사가의 서로 다른 역사해석이 통일된 하나의 역사해석으로 귀결되는 것을 통하여 그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즉 하나님께서 역사를 통하여 활동하신 어떤 한 역사적 사건을 성서 기자가 해석할 때, 그 해석은 영원불변하게 고착된 의미를 가지는 것이 아니라 그 동일한 하나님의 사건은 시대에 따라서 새로운 의미를 가지고 재 해석될 수도 있다는 점입니다. 

    구약성서의 두 본문은 동일한 사건을 매우  다른 관점에서 해석하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즉 기원 전 609년경, 팔레스틴 서북부, 갈멜산에서부터 동쪽으로 이스르엘 평원에 이르는 길의 중간 지점 쯤에 “므깃도”라고 이름하는 도시가 있었는데, 이 곳에서 앗수르 제국을 도와 신흥 바벨론의 세력을 저지하기 위하여 유프라테스 강 가의 갈그미스라는 곳으로 올라가는 애굽 왕 바로 느고를 막으려고 하다가 유다가 낳은 전대미문의 선한 왕으로 존경받든 요시야 왕이 전사(戰死)한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요시야 왕은 이스라엘 역사 최대의 “신명기적 종교개혁”을 단행한 왕으로서 남 왕국 다윗 왕조의 유일한 희망의 등불이었던 그런 왕이었습니다. 아마, 다윗 이래 가장 존경받았던 왕이었고 기울고 있는 유다 왕국을 새롭게 일으켜 세워서 다윗의 후손에서 나올 메시아 왕국을 세워 북방에서 일고 있는 앗수르-바벨론 제국 사이의 힘겨루기 갈등에서부터 유다 왕국을 확고하게 지켜 줄 바로 그 장차 올 메시아로서 유다 백성의 마음 속에 깊이 자리잡고 있었던 그런 성군이었습니다. 그런 그 성군 요시야가 나이 만 38세의 젊은 나이로, 즉 나이 만 여덟 살의 어린 나이로 왕위에 오른 지 만 30년 간의 통치생활을 끝내고 므깃도에서 전사(戰死)를 하고 말았던 것입니다. 이것은 분명 역사의 유일한 주인이신 야훼 하나님께서 개입하신 역사적 사건이었고 그 사건에 담긴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반드시 물어야 할 그런 사건이었습니다.

        함석헌 선생은 “뜻으로 본 한국역사”라는 책에서 8.15의 역사적 사건을 종교적으로 해석하기를 “8.15는 조선민족에게 도둑같이 찾아 온 하늘의 사건이요 하나님의 은총의 사건”이라고 해석한 바가 있었습니다만, 요시야의 므깃도 전사 사건도 이스라엘에게 있어서는 출애굽 해방 사건이나 출 바벨론 해방 사건이나 한국민에게 있었던 8.15 해방 사건과 같은 그런 “반드시 해석되어야 할 하나의 역사적 사건이요 새롭게 증언되어야 할 신(神)의 사건”이었던 것입니다. 제가 여기서 “반드시 해석 되어야 할 역사적 사건”이라는 말을 사용하였는데, 이 말은 우리 안에 일어나는 역사의 사건들은 모두가 하나님의 사건이고 그 사건에 대한 해석학적 증언을 통하여 하나님의 뜻을 전달 받는 것이 우리들 인간에게는 그 무엇보다 중요한 일이고 이 일은 교회의 기능 중에서 가장 중요한 기능이라는 저의 확신 에서부터 나온 말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요시야왕의 므깃도 전사 사건은 이스라엘인들에게 있어서는 그 어떤 사건보다도 꼭 해석하고 그 속에 담긴 하나님의 뜻을 물어야 할 사건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 “요시야” 왕의 갑작스러운 죽음은 앗수르 제국의 몰락과 신 바벨론 제국의 등장에 의한 중동세계의 판도변화에 따라 꺼져 가던 유다 왕국도 이 틈에 재기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희망을 갖고 있었던 유다 백성의 희망으로 달아오른 그 뜨거운 가슴에 찬 물을 끼얹는 사건이었습니다. 즉 이러한 국제 정세의 판도를 재편하는 과정에서 유다 왕 성군 요시야가 그리고 그의 그 위대한 신명기 개혁정신이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기대로 가득 차 있었던 유다인들의 그 가슴 벅찬 희망에 결정적인 찬물을 끼얹는 매우 절망적이고도 비극적인 사건이었습니다.

        분명, “요시야” 왕은, 모세 이래로, 하나님의 율법에 가장 충성한 전무후무(前無後無)한 최대의 종교적 위인으로서 성서 역사가들이 한결 같이 입이 마르게 찬양한 인물이었습니다.  심지어는, 장차 올 새 메시아 대망 신앙의 중심부에도 이 “요시야” 왕이 자리잡고 있었을 정도의 그런 성군(聖君)이었습니다. 그런데 바로 이런 요시야 왕이 만 38세의 젊은 나이로 므깃도에서 어이없는 비운의 전사(戰死)를 하였기 때문에 그 충격은 이루 말할 수 없이 큰 것이었던 것입니다.

        그것도, 이스라엘의 불공대천지수(不共戴天之讎)의 원수인 앗수르 제국의 몰락이 눈 앞에 다가와 있다는 이 사실은! 이스라엘 민족이 학수고대한 희망이 곧 이루어 질지도 모를 그런 가슴벅찬 희망의 사건이었는데, 바로 이러한 때에, 이 희망을 성취시킬 수 있는 유일한 민족 지도자인 요시야가 어이없게도 앗수르를 지원하러 가는 애굽 원정군의 길을 막다가 그토록 어이없이 비명에 죽게 되었다는 것은 역사의 유일한 주이신 야훼 하나님을 확고히 믿고 있든 이스라엘인들로서는 그 어느 누구도 납득하기 어려운 역사의 수수께기였습니다.

        그렇습니다. 앗수르에 의한 북 왕국 이스라엘의 멸망 이래, 남아 있는 왕국인 유다 왕국의 유일한 희망이란 오직 요시야의 반 앗수르 개혁정치가 성공을 거두는 그것이었는데, 또 정말 때맞추어!! 저 원수의 앗수르 제국이 신흥 바벨론 제국의 힘에 밀려 몰락의 위기에 몰린 이런 다시 없는 천재일우의 기회가 왔는데, 그런데, 바로 이러한 역사의 흐름을 감히 거슬러서 반드시 망하여야 할 저 원수의 나라 앗수르를 도우려고 북진하는 애굽 왕 “느고”의 행위란 누가 보아도 유다인의 눈에는 하나님의 뜻을 거스리는 반(反) 역사적 반역행위였음이 분명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요시야”는 분명 역사의 주(主이)신 야훼 하나님의 역사섭리란 앗수르를 멸망케 하고 바벨론을 일으키는 그 일이라고 하는 확신을 가지고서 이 “느고”의 원정길을 막으려고 하였던 것이 확실합니다.  왜냐하면, 야훼 하나님이 이미 중동세계의 패권을 앗수르로부터 빼앗아 바벨론으로 옮기시고 계신다는 것은 당시 사람으로서는 삼척동자라도 다 알 수 있는 그런 상황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너무도 어이없게도 “요시야”가 바로 이 바로 느고의 반 역사적 북방 원정길을 막다가 죽었다는 점입니다.

        유다는 놀랐습니다.  유다 역사가들은 정말 당황하였습니다. 당시 신앙심있는 유다 엘리뜨들은 모두 이 충격으로 인하여 깊은 좌절에 빠질 수 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요시야가 죽음을 당하다니, 그것도 악명 높은 저 꺼져 가는 앗수르 제국을 도우려는 애굽 왕 느고의 북방 원정길이 하나님의 역사섭리를 거스르는 잘못임을 알려 주려한 그 요시야가 도리혀 그 일로 인하여 죽임을 당하다니 믿을 수 없는 “역사의 모순”이라고 생각지 않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모두들 이렇게 물었습니다:  “성군 요시야가 이 때에 죽음을 당한 것은 무슨 이유인가?” “요시야의 죽음의 그 역사적 의미는 무엇이냐?”  “왜 야훼 하나님은 성군 요시야가 이 곳에서 죽게하신 것일까?” 

        이렇게 하여, 요시야의 죽음이 말하는 역사적 의미가 무엇인지를 해명하려는 성서해석학적 노력은 유다 역사가들의 연구실 곳곳에서 강도 높게 진행되었던 것입니다.  왜냐하면, 야훼 하나님의 구원사에 나타난 이 돌연변이적인 요시야 왕의 급서(急逝)는 신학적으로 해명되지 않고는 결코 넘어 갈 수 없는 문제였기 때문입니다.

        이 때의 상황을 기록하였던 가장 대표적인 사료(史料)는 “신명기적 역사서”로 널리 알려진 열왕기 하 23: 24-30과 그리고 “역대기적 역사서로 널리 알려진 역대하 35: 20-25”, 즉 우리가 오늘 읽은 두 곳의 본문 말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물론, 구약성서의 역사가들은 요시야 왕의 전사(戰死)와 같은 이러한 역사적 사건을 보도할 때, 그들은 결코 그것을 ”우연한 해프닝“으로 이해하거나, 아니면, 엄격한 인과(因果)의 객관적 법칙이 낳은 한 결과로 이해하거나 하지는 않았습니다. 단지, 그들은 그 사건으로부터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찾으려고만 하였던 것입니다.  이것이 구약 역사가들이 역사를 이해하는 기본 태도였습니다. 그러므로, 일반 세계사를 해석하는 역사 해석가들의 경우와 성서의 역사해석가들 사이에는 상당한 차이가 있다고 하겠습니다. 그래서, 존 맥머리(John Macmurray)라는 역사가는 다음과 같은 말을 남겨 놓았습니다.

        유대인의 사상은 역사를 하나님의 행동으로 본다. 우리의 역사가들은 “시이저가 루비콘(Rubicon)을 건넜다” 또는 “넬손(Nelson)이 트라팔갈(Trafalgar) 전투에서 승리했다”라고 말하는 대신 유대인 역사가는 “하나님이 그의 백성을 애굽으로부터 건져냈다”라고 말한다.... 이것은 히브리 [역사가들]이 연속적으로 취하는 [역사해석의] 형식이다.

    그렇습니다. 이 세계의 역사 안에서 일어나는 일이면 그 어떤 것이든 반드시 하나님의 뜻의 지배를 받는다고 구약의 히브리 사가(史家)들은 철저히 믿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것이 성서적 역사신앙의 기초요 기반이었습니다. 거기에는 결코 “우연”이라는 것은 없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거기에는 또한 하나님의 자유로운 뜻과 무관한 그 어떤 엄격한 합리적 원리가 따로 있어서 “토정비결(土亭秘訣)”과 같은 그 어떤 주역(周易) 원리로 짜여진 “숙명적 틀”이라는 것이 있는 것은 더더욱 아니었습니다. 오직 거기에는 하나님의 자유로우신 뜻 만이 작용하고 있었을 뿐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이 난데 없는 “요시야 왕의 전사” 사건에는 어떤 하나님의 뜻이 개재되어 있었는가 하는 것이 문제였습니다.

        그런데, 주목할만한 점은 이 요시야의 죽음에 대한 신명기 역사가의 해석인 열왕기의 해석과 그리고 역대기 역사가의 해석인 역대기의 해석이 매우 “다른!” 관점에서 이루어졌다는 점입니다!!

        신명기적 역사가는, 열왕기 하 23장을 통하여, 이 사건을 철저히 요시야 왕의 할아버지 므낫세 왕이 약 50년의 장기 집권기 동안에 저질른 그 극악무도한 폭력과 노략과 겁탈의 악한 정치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와 그리고 그의 할아버지 므낫세 왕이 앗수르의 신성모독적인 종교정책을 이스라엘로 이끌어 들인 그 종교적 배신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가 너무 너무 컸기 때문에!!, 요시야 왕의 의(義)로움으로서도! 즉 저 전대미문의 성군 요시야 왕의 의(義)와 선(善)을 가지고서도 이 진노를 막을 수는 없었다라고 하는 관점에서 요시야 왕의 전사(戰死) 사건을 해석하고 설명하였던 것입니다.

        즉 북 이스라엘과 남 유다의 왕들이 저질러 온 죄, 그 중에서도 약 50년 이라는 반세기 이상의 통치기간 동안에 범한 므낫세 왕의 범죄는 이미 야훼 하나님께서 신흥 바벨론 제국을 등장시켜 유다 왕조를 징계하여 멸망시킬 수밖에 없도록 만들었다는 것입니다. 간단히 줄여서 말한다면, 할아버지 므낫세 왕의 죄(罪)가 요시야 왕의 의(義)를 압도하였다는 논리입니다. 이미 하나님께서는, 므낫세 왕을 통하여 저질러 온 이스라엘의 그 극악한 죄 때문에 앗수르를 통하여서는 북왕국 이스라엘을 치시고 그리고 신흥 제국 바벨론을 통하여서는 남왕국 유다를 치도록 벌써부터 확고하게 작정하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진노의 물결이 이미 그 한계선을 넘어 버렸다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이 진노는 이미 역사의 대세(大勢)가 되어 전대미문의 성군인 요시야 왕의 선(善)과 의(義)로서도 막을 수 없는 것이 되어 버렸다는 말입니다.

        이러한 점에서 보면, 신명기 역사가의 관점은 이스라엘 전(全) 역사를 를 단지 범죄의 역사로만 보는 철저히 참회적 관점에서 역사 반성을 하고 있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죄는 요시야의 “의”로서도 막을 수 없었다는 것입니다. 즉, 요시야가 비록 전대미문의 성군이라고는 할찌라도 이스라엘의 죄가 너무 커서 하나님의 이스라엘 심판의 의지를 막는데에는 역부족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동일 사건에 대하여 이와는 다른 역사해석을 하고 또 이 사건을 통하여 이와는 다른 하나님의 메시지를 이끌어 낸 역사가가 있었습니다. 그가 바로 오늘 우리가 읽은 두 번 째 본문인 역대기 하 35장 20-25절을 기록한 역대기 역사가입니다. 이 역사가는 요시야 왕의 므깃도 전사 사건의 역사적 내막과 그 사실의 정확성 여부 등 보다는 단지! 요시야 왕의 전사 그 자체의 신학적 의미가 무엇인지에 대해서만 관심하였습니다. 말하자면, 전대미문의 성군인 요시야가, 그리고 이스라엘 역사가 대대로 기다린 메시아인 그 대망의 요시야 왕이 왜 이 중요한 시기에 죽어야만 했나 라고 하는 것에 만 관심하였던 것입니다. 요시야 왕이 이 때, 여기서 전사할 수 밖에 없었던 것에는 과연 어떤 하나님의 뜻이 작용하였느냐 하는 것을 밝히는 것이 그의 주요 관심사이었다는 그런 말입니다.

        그리하여 역대기 역사가는 여기서 이 중대한 물음에 대답하기 위하여 이방 왕, 즉 애굽 왕 바로 느고를 등장시켰고 그가 요시야 왕에게 특사를 보내어 그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말씀 즉 야훼 하나님의 “신탁”(神託: oracle)을 알려 준 그 사실에만 전적으로 초점을 맞추어 요시야 왕의 이 므깃도 전사사건을 기록하고 있었습니다.  애굽 왕 바로 느고는 앗수르를 도우러 가는 자신의 북방 원정길을 막는 요시야 왕에게 특사를 보내어 이렇게 말을 하였습니다: “유다 왕이여, 내가 그대와 무슨 관계가 있느뇨? 내가 [오늘날 여기에 나온 것은] 그대를 치려는 것이 아니요 나에게 대적하여 싸우는 그 족속을 치려는 것이라. 하나님께서 내게 명하여 ‘속히 치라’ 하셨은즉, 하나님이 나와 함께 계시니 그대는 하나님을 거스리지 말아라.  [하나님께서] 그대를 멸하실까 염려하노라.”

        이 신탁(神託)의 의미는 이것이었습니다.  애굽 왕 바로 느고가 유프라테스 강 유역의 갈그미스 전쟁에 참여하여 앗수르를 도와 바벨론을 치는 것은 비록 “바로 느고”가 이방 나라의 왕이고 또 앗수르를 도우는 것이 비록 선민 이스라엘의 원수를 도우는 일이라고는 하더라도 그 일은 하나님의 명령을 받아서 하는 일이라는 것과, 이 “바로 느고”가 비록 이방 나라 애굽 왕일지라도 그의 입에서 선포된 그 말씀은 하나님께서 그의 입에 담아 준 신탁(神託)의 말씀이라는 것, 그리고 비록 앗수르가 망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는 하여도 바벨론을 일으켜 이 앗수르를 치는 일은 전적으로 하나님께서 하실 일이지 요사야가 나서서 개입할 일은 아니라는 것이었습니다.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애굽 왕 바로 느고의 길을 막는 일, 그것은 분명 이스라엘로서는 마땅한 일임이 확실한데, 그리고 악명 높은 민족 앗수르와 그 종교를 돕는 일을 막는 일은 매우 의로운 혁명적인 일임도 확실한데, 사실이 그러함에도, 하나님은 왜, 무엇 때문에, 애굽 왕 바로 느고에게 앗수르를 도우러 가는 그 일을 서둘러 하라고 명령하셨으며 또 앗수르를 도우러 가는 이 잘못된 길을 막는 요시야 왕을 왜 죽이시기까지 하신 것일까 하는 것입니다.

        신명기 역사가는 이 문제에 대하여, 요시야 왕 이전의 왕인 므낫세 왕의 죄에 대한 하나님의 분노가 너무 확고하여 요시야의 의로움을 가지고서도 유다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를 막을 수는 없었다고 대답하였습니다만, 그러나, 역대기 역사가는 여기서 그러한 메시지를 전혀 일축해 버리고, 이 와는 매우 다르게, 바로 느고가 가는 이 원정 길이 이스라엘로서는 아무리 이해할 수 없는 모순된 일이라 할찌라도 하나님께서 “급히 하라”라고 명하신 하나님의 일이기 때문에, 아무리 올바르고 명석한 판단과 지혜를 가진 요시야 성군이라고 할찌라도 하나님의 뜻하시는 이 일을 막아서는 안된다고 보았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분명 신흥 바벨론 제국이 유다 예루살렘을 침략할 때, 이스라엘은 이 바벨론의 침략에 대항하지 말고 항복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역설하다가 매국노(賣國奴)라는 오해를 받고 그로 인해 심한 박해를 받았던 예언자 예레미야의 예언이 가진 의미와도 같은 맥락을 갖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말하자면, 이전 왕의 악한 통치에 대한 하나님의 윤리적 비판이 중요한 문제가 되는 것이 아니라, 그게 그런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계획하신 일에 대하여서는, 즉 유다의 죄를 치시려고 신흥 바벨론을 중동 역사의 지평 위로 등장시키시는 하나님의 역사계획에 대해서는 무조건 복종하는 것이 그 무엇보다 중요한 문제라고 역대기 역사가는 보았던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한 사건에 대한 두 역사가의 역사해석적 접근방법에 나타난 극명한 차이를 봄과 동시에 하나님의 역사계시에 대한 해석이 서로 다른 두 시대에 따라 전혀 서로 다르게는 나타나지만, 그러나, 역사를 보는 신앙적 시각은 즉 역사의 주권자는 하나님이시다는 역사신앙에 있어서는 동일하다는 것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현상을 통하여 우리는 비로소 성서의 진리가 지닌 진정한 역동성(力動性) 같은 것을 봅니다. 그렇습니다. 역대기 역사가는 이방인 바로 느고의 입에서 나온 이 말을 통하여 역사의 주권은 인간의 이념적 판단 아래에 있는 것이 아니라 전적으로 하나님의 역사계획의 지배 아래에 있다고 증언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역대기 역사가가 오늘 본문 말씀을 통하여 주는 메시지는 <요시야와 같은 전무후무의 성군이라고 할찌라도! 역사의 주도권을 하나님에게 돌리지 아니하고 인간 자신이, 인간의 이념이, 인간의 도덕적 잣대가 그것을 장악하려 하는 것은 그 어떠한 경우에 있어서도 수용할 수 없다>는 것을 증언하려는데 있었다고 하겠습니다. 말하자면, 야훼 하나님은 남쪽에 있는 대국 이집트라 할지라도 이미 하나님께서 계획하신 바, 중동지역의 패권을 앗수르로부터 신흥 바벨론 제국에게 넘겨 주셔서 그 바벨론 제국으로 하여금 유다의 죄를 치게 하시려 하시는 그 하나님의 계획을 막지는 못하리라는 것, 즉 갈그미스 전쟁에서 애굽이 바벨론에게 패배하리라는 것을 왜 요시야가 깨닫지 못하고 이 거대한 하나님의 중동 역사 재편의 섭리에 간섭하려 들려고 하느냐는 것이 역대기 역사가의 역사해석의 초점이었던 것입니다. 달리 말하자면, 요시야 대왕 조차도 앗수제국은 여하튼 망하게 되어 있다는 것, 애굽제국이 나서서 앗수르를 도운다 할지라도 바벨론으로부터 앗수르를 건질 수는 없다는 것에 대한 믿음을 가지지 못하였다는 말이 되기도 한다 하겠습니다.

        이 신앙을 증언하기 위하여 역대기 역사가는 이방인 애굽 왕 바로 느고의 입에서 나온 말을 통해서도 하나님은 말씀하신다는 특이한 증언을 끌어 들였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선하신 뜻을 이루기 위하여서는 “악”(惡)을 임시방편적인 도구로 사용하신다는 것입니다. 요셉 이야기는 그것을 말해 주는 가장 드라마적인 예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요셉 이야기의 역사신앙에 관해서는 이미 이 강단을 통하여 이미 증언해 드린 바가 있었습니다. 즉 “나를 이곳 애굽으로 팔아 넘긴 것은 실제로는 형님들이 한 일이 아닙니다. 우리 가문을 살려 주시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오래 전에 미리 계획하셔서 나를 형님들보다 먼저 이리로 보내신 행위에 불과할 뿐입니다”라는 말씀으로 증언해 드린 바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역사 주권은 그 어떤 인간 이념에 의해서도 간섭받을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역사의 주인은 하나님이실 뿐이라는 것입니다.  성군 요시야도 역사의 주인이 될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물론, 세계사적으로 볼 때, 종교개혁, 인문주의, 계몽주의, 등등, 그리고 현대에 이르러서는 제3세계가 내어 놓은 “해방의 신학”이나 한국의 민중신학 등이 “인간의 존엄성”을 교권으로부터 지키는 데에는 크게 공헌한 것도 사실입니다.  그러나, 21세기에 접어들면서 이 지구 상의 인류는 <점차적으로!> “인간 중심적 세계관”의 오류를 발견하기 시작한 것 같습니다. 즉 인간이 우주의 중심이 아니라는 것, 인간은 단지 우주의 한 일부분이요 자연의 한 일부일 뿐, 연약하고 허무한 존재에 불과할 뿐이라고 하는 것을 발견하기 시작한 것 같습니다.  자연과학의 발달과 인간지식의 급진적 성장과 더불어 인간은 오히려 더욱 더 인간 중심주의적 사고가 지닌 위험성과 어리석음을 더욱 더 현실적으로 실감하기 시작한 것 같습니다.

        인간 생명이 아무리 존엄하다고 하여도, 인간이 우주의 중심이라는 생각들은 진리가 아니!라는 것을 인간들은 오히려 과학의 발달과 더불어서는 더욱 더 뚜렷하게 인식하기 시작한 것 같습니다.

        이방 나라 애굽 왕의 입에서 나온 말은 하나님의 말씀일 수는 없다는 잘못된 확신과 그리고 악명 높은 제국 앗수르를 돕는 일이 역사를 거스러는 일이라는 확신이 너무나 지니치게 확고하고 뚜렷하여 성군 요시야 왕은 그만 하나님께서 계획하신 그 일에 대하여 순종하기를 싫어 하게 되고 오만스럽게도!! 자기의 이념에 따라 역사의 방향을 하나님이 아닌, 자기 자신이 직접 바꾸어 보려고 하였을 때, 비록 성군 요시야라고 할찌라도 불행스러운 심판의 죽음을 경험할 수 밖에 없었다는 것입니다. 역사는 오직 하나님께서 정하신 방향으로만! 움직여 갈 뿐이라는 것입니다. 참으로 무서운 메시지입니다. 다소 놀라실른지는 몰라도, 함석헌 선생님은 그의 책, “뜻으로 본 한국역사”에서 이런 무서운 말을 한 적이 있었습니다. “왜 원자탄이며, 왜 일본의 급작스러운 항복인가?.... 그것은 적어도 우리의 자리에서 보면, 해방을 하루 아침에 [조선] 땅에 떨어뜨리기 위한 것이라고 밖에 설명할 수 없다. 객관적 사실은 우리는 모른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렇습니다. 인간의 이념과 사상 만을 잣대로 하여 하나님 위에 군림하여 인간의 이념으로만 역사를 평가하는 것은 그 어떤 것도 진리일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이 점이 신명기 역사가의 역사신앙에서부터 역대기 역사가의 역사신앙에로 넘어가는 한 전환점이라고 하겠습니다.

        세계는 분명 젊어지고 있고 동시에 성년화를 추구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어떠한 경우에도 역사는 단지 하나님의 뜻에 따라서만 진행되어 가는 것일 뿐입니다.

        성군 요시야의 죽음은 애석하기 짝이 없는 불행스러운 일이라고는 하더라도 그리고 예레미야 예언자가 그를 위하여 애가를 짓고 그 애가를 노래하는 남녀 성가대들이 슬픈 곡조로 노래하며 그 곡조와 가사를 애가집 중에 수록하여 오래 오래 역사 속에 전승시켜 간다고 하여도 하나님의 역사운영은 요시야의 죽음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하나님께서 가시고자 하는 대로만 움직여 갈 뿐이라는 것입니다. 이 얼마나 무서운 신의 계시입니까?

        “언어도 없고 들리는 소리도 없으나 그 소리가 온 땅에 통하고 그 말씀이 세계 끝까지 이르도다”(시 19:3-4a) 라고 시편 시인이 노래 하였듯이, 하나님의 뜻은 도도하게 온 하늘과 온 땅에 통하고 역사의 주님이신 하나님의 뜻은 세계 끝까지 이를 뿐이라는 것입니다.그런 의미에서 저는 8.15 해방 사건에 대한 함석헌 선생님의 해석은 정확하였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오직 요구되는 것은 단지 창조주이시고 역사의 주이신 하나님의 평화의지, 구원의지, 사랑의지를 믿는 것 뿐이라고 하겠습니다. 우리 인간이 노력하고 애쓰서 우리 인간의 힘으로 역사의 방향을 바꿀 수 있는 길은 그 어디에도 없다는 것이 확실합니다. 부조리하기 짝이 없는 이 인간역사의 의미에 대한 정답을 인간은 갖고 있지 않음이 확실합니다. 단지 우리는 그리스도처럼, 하나님께서 주신 “자기 십자가”를 지고 하나님이 지시하시는 그 길을 걸어가기만 할 뿐이라고 하겠습니다. “요시야”와 같은 그런 전대미문의 성군이라고 할찌라도 그가 역사의 방향을 바꿀 수는 없었다는 것입니다. 요시야의 오만이 요시야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의 자리였다는 것, 이 사실이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부조리의 역사현실이 안고 있는 근본적 물음에 대한 성서의 일관된 답변이라고 저는 믿고 있습니다. 

        물론, 우리는 그렇다고 하여 불운한 운명론자로서 이 세상을 살아야 한다는 말은 결코 아닙니다. 왜냐하면, 성서의 모든 증언과 그리고 성서역사의 그 결론부에 자리잡고 있는 저 하나님의 십자가 사건에 관한 증언이 웅변적으로 확고하게 증언하고 있듯이, 하나님의 평화의지, 하나님의 구원의지, 그리고 하나님의 사랑의지가 역사의 유일한 주인이라는 것, 그것을 우리는 확신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한 때, 한국의 민중신학이 강변하였듯이, 그렇게, “민중”이 역사를 이끌어 가는 주인인 것은 결코 아닙니다. 그러므로, 대선을 승리로 이끈 한국의 많은 젊은 이들이 기쁨에 들떠서 <민족주의적 주체사상이 한국의 미래에 대한 희망적인 유일한 대안이다>라고 성급히 판단한다는 것은 매우 위험한 발상이라고 봅니다. 단지, 우리는 하나님이 유일한 역사의 주인이시라는 확신 위에만 서서 오직 하나님의 말씀에만 귀를 기우리려 할 때, 비로소 우리는 이방인 바로 느고의 입에서 나온 말 조차도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진정한 신탁(神託)이요 진정한 의미의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것을 비로소 깨닫게 되고 그것을 겸손하게 받아 들일 수 있을 것입니다.


    종교인의 오만(傲慢)과 오산(誤算)

    "느고가 요시야에게 사신을 보내어 이르되 유다 왕이여 내가 그대와 무슨 관계가 있느냐 내가 오늘 그대를 치려는 것이 아니요 나와 더불어 싸우는 족속을 치려는 것이라 하나님이 나에게 명령하사 속히 하라 하셨은즉 하나님이 나와 함께 계시니 그대는 하나님을 거스르지 말라 그대를 멸하실까 하노라 하나"(대하 35:21)




    오만
    거만할 오
    거만할 만
    장단음
    오ː만 
    • 1.
      태도(態度)나 행동(行動)이 건방지거나 거만(倨慢)함. 또는 그 태도(態度)나 행동(行動).
    오산
    그르칠 오
    셈 산
    장단음
    오ː산 
    • 1.
      잘못 셈함. 또는 그 셈.
    • 2.
      추측(推測)이나 예상(豫想)을 잘못함. 또는 그런 추측(推測)이나 예상(豫想).



    느고(Necho[h])

    유다 왕 요시야와 동시대에 살던 이집트 파라오. 그리스 역사가 헤로도토스(II, 158, 159; IV, 42)에 따르면, 네코스(느고)는 프삼메티쿠스(프삼메티코스, 프삼티크 1세)의 아들로서 아버지를 계승하여 이집트의 통치자가 되었다. 나일 강과 홍해를 연결하는 운하 건설 공사를 시작하였지만 끝내지는 못하였다. 그러나 느고는 페니키아 선단을 보내어 아프리카 일주 항해를 하게 하였다. 이 항해는 3년 만에 성공적으로 완수되었다.

    31년간의 요시야 재위 기간(기원전 659-629년)이 끝날 무렵, 파라오 느고는 유프라테스 강가에 있던 아시리아군을 돕기 위해 나아가고 있었다. 그때에 요시야는 “하느님의 입에서 나오는 느고의 말”을 무시하고 므깃도에서 이집트군을 격퇴하려다가 치명상을 입었다. 석 달쯤 후에, 파라오 느고는 요시야의 왕위를 계승한 여호아하스를 붙잡아 갔으며 25세인 엘리아김을 예속된 왕으로 삼고 이 새로운 통치자의 이름을 여호야김으로 바꾸었다. 또한 느고는 유다 왕국에 무거운 벌금을 부과하였다. (대둘 35:20–36:4; 왕둘 23:29-35) 삼사 년 후(기원전 625년) 갈그미스에서, 느고의 군대는 느부갓네살(네부카드네자르) 휘하에 있는 바빌로니아군의 손에 패배를 당하였다.—렘 46:2.




    하나님이 나에게 명령하셨다고 얘기하는 느고의 말이 요시야에게는 어떻게 들렸을까요? 기분이 상당히 언짢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요시야가 하나님을 더 잘 알겠습니까? 애굽의 느고 왕이 하나님을 더 잘 알겠습니까? 상식적으로도 요시야가 하나님의 뜻을 더 잘 분별할 수 있다고 여기는게 당연합니다.

    요시야는 탁월한 영적 리더였습니다. 그는 철저하게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한 거의 완벽에 가까운 종교개혁을 이루었습니다. 열왕기하에 의하면 그 스케일과 디테일이 전무후무한 개혁이었습니다. 느고는 애굽의 왕입니다. 하나님과는 상관 없이 사는 사람입니다. 어떻게 이방인 따위가 하나님의 뜻을 알고 있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요시야로서는 코웃음을 칠 얘기입니다. 

    “요시야가 몸을 돌이켜 떠나기를 싫어하고 오히려 변장하고 그와 싸우고자 하여 하나님의 입에서 나온 느고의 말을 듣지 아니하고“(대하 35:22)

    성경은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을 통해서도 하나님께서는 말씀하시고 역사하실 수 있다고 증언합니다. 역대하는 하나님께서 페르시아 고레스 왕의 마음을 감동시키셨다는 메시지로 마무리가 됩니다.

    율법책을 발견하고 종교개혁을 이루고 유월절을 성대하게 치른 요시야조차도 알아차리기가 쉽지 않은 하나님의 뜻이 있었습니다. 어쩌면 그가 세운 업적이 자신의 눈과 귀를 가렸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내가 더 잘 알고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내가 모르는 줄 모르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어떤 방법으로든 누구를 통해서든 그 섭리를 이루어 가십니다. 불신자 사장님을 통해서도 하나님께서는 일하시고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정치인들을 통해서도 하나님의 섭리는 이루어져 갑니다. 이 사실을 인정하는 것이 역사의 주관자에 대한 신앙 고백입니다.

    성경 좀 읽었다고, 교회 좀 다녔다고, 설교 좀 했다고, 기도 좀 더 많이 한다고 하나님의 뜻을 더 잘 알거라는 생각은 어쩌면 오만이고 오산일 수 있습니다. 더 알아갈수록 다 알 수 없는 하나님의 뜻 앞에서 잠잠할 뿐입니다.

    요시야 왕은 하나님의 입에서 나온 느고의 말을 무시했다가 므깃도에서 죽고 맙니다.



    역대하 29장 요약 / 히스기야의 개혁

    히스기야가 왕이 되었으며 레위 사람들에게 충고합니다.
    히스기야와 백성들, 제사장들은 성전을 깨끗하게 하였고, 백성들과 함께 예배를 드리고 예물을 드렸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역대하 30장 요약 / 유월절 준비

    히스기야가 유월절을 지키라고 명하였고, 백성들은 유월절을 성대하게 지키고 제사를 지냈으며 두 번째 절기인 무교절을 지켰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역대하 31장 요약 / 종교의식 개혁

    히스기야의 개혁으로 우상들을 무너뜨리고 번제와 십일조를 드렸으며 저성물을 백성들에게 나누어주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역대하 32장 요약 / 앗수르의 산헤립이 쫓겨나다

    앗수르의 산헤립이 히스기야를 괴롭히면서 예루살렘을 위협하였고 이에 히스기야는 성벽을 보수하였습니다.
    산헤립의 신하들은 하나님을 비방하였으며 이에 하나님께서 앗수르를 물리치십니다.
    히스기야의 병, 교만, 부, 영광에 대해 기록 이후 히스기야의 죽음도 기록하고 있습니다.


    5월 22일(목) 역대하 29-32장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거룩한 처소(30:27)

    그 때에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이 일어나서 백성을 위하여 축복하였으니 그 소리가 들으신바 되고 그 기도가 여호와의 거룩한 처소 하늘에 상달하였더라.
    The priests and the Levites stood to bless the people, and God heard them, for their prayer reached heaven, his holy dwelling place.

    처소(處所) : 곳 처, 바 소
    사람이 살거나 임시로 머물러 있는 곳
    어떤 일이 벌어진 곳이나 물건이 있는 곳

    처소(4583) 마온( mâʽôwn) מָעוֹן 스트롱번호 4583

    1. 집.   2. ㉠ 성전.  3. 굴
    발음 [ mâʽôwn ]
    어원  / 5772와 같은 어원에서 유래
    구약 성경  / 18회 사용
    • 1. 명사, 남성 집, 주거, 거처, 거주.
      • a. 명사, 남성 [하나님에 대해 사용]㉠ 성전, 시26:8.㉡ 하늘, 신26:15, 시68:6(5).
      • b. 명사, 남성 [들짐승에 대해 사용] 굴, 동굴, 렘9:10(11), 10:22, 51:37, 나2:12(11). 

      • c명사, 남성 도피처, 은신처, 시90:1. 

    • 문법설명
      복수 מְעוּנִים, 대상4:41
      관련 성경
      ☞처소(신26:15, 삼상2:29, 시68:5), 거처(시90:1, 렘51:37, 습3:7), 굴(렘9:11, 나2:11), 거하시는 곳(대하36:15), 숨을 바위(시71:3),계신 (집)(시26:8).

    에베소서 2:22 / 처소 2732

    κατοικητήριον, ου, τό 스트롱번호2732

    1. 거처.  2. 집. 3. 엡 2:22
    발음 [ katŏikē- tēriŏn ]
    어원 / 2730의 3717의 파생어에서 유래
    • 1. 거처, 집, 엡 2:22, 계 18:2.
    • 관련 성경 /  처소(엡2:22, 계18:2).




    하나님의 거하실 처소(A dwelling in which God lives)
    에베소서(Ephesians) 2:20~22

    20. 너희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우심을 입은 자라. 그리스도 예수께서 친히 모퉁이 돌이 되셨느니라.
    (Built on the foundation of the apostles and prophets, with Christ Jesus Himself as the chief cornerstone.)
    21. 그의 안에 건물마다 서로 연결하여 주 안에서 성전이 되어가고,
    (In Him the whole building is joined together and rises to become a holy temple in the Lord.)
    22. 너희도 성령 안에서 하나님의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느니라
    (And in Him you too are being built together to become a dwelling in which God lives by His Spirit.)

    신앙의 공동체, 즉 ‘교회’에 대해 함께 살펴보고자 합니다.
    본문에서 사도 바울은 교회가 하나님이 거하시는 성전이라고 정의하고 있습니다.
    즉 <예수 그리스도께서 친히 모퉁이 돌 되시는 ‘하나님의 성전’>이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사도가 에베소 2장에서 교회를 ‘하나님의 성전’으로 정의하고 묘사함을 통해 우리가 이해할 수 있는 중요한 점은 무엇일까요? “” (What means ‘Church’ as ‘a holy temple’?) 하는 것입니다.

    첫째, ‘무엇이 성전된 교회가 의미하는 것일까요?

    성장한다는 것

    사도 바울은 교회가 성전으로서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서 세워질 뿐 아니라 함께 지어져 간다고 말합니다 (v.20,22). 그 성장은 외적으로는 무엇보다도 ‘구원받는 자’가 늘어나는 것 (행. 2:46~47)이요, 내적으로는 성도 개인과 공동체 전체의 ‘영적 성숙’인 것입니다.

    둘째, ‘연결되어 진다는 것’ 입니다 (It means to be joined together) :

    우리가 좀더 사도가 ‘교회’를 해석하는 방식을 살펴볼 때, 성전인 교회는 “완성된 존재가 아니라, 지어져 가는 존재”라는 사실을 이해하게 됩니다. “그의 안에서 건물마다 서로 연결하여 주 안에서 성전이 되어가고” (v. 21) 라고 그는 말합니다. 연결된다는 것은 믿음의 실천이요, 기쁨과 아픔을 함께 나누는 공동체가 되어 간다는 뜻입니다 (고전. 12:26~27).

    셋째, ‘성령께서 지으신다는 것’ 입니다 (It means to be built by the Holy Spirit) :

    교회의 머리되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께서 성전된 교회를 지어 가신다는 것이 우리가 감사와 확신가운데서 성장할 수 있는 이유인 것입니다. “너희도 성령 안에서 하나님의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느니라” (v. 22) 오직 성령의 다스리심과 그로 말미암아 변화된 심령 (갈. 5:22~23) 가운데 우리는 함께 연결될 수 있고 함께 지어져 갈 수 있는 것입니다.

    바라기는 거룩하신 하나님이 거하시는 영광스러운 성전으로 함께 자라감으로, 우리 가운데 구원받는 자가 날로 늘어나는 아포슬 공동체 되길 소망합니다.


    "너희도 성령 안에서 하나님의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느니라"(에베소서 2:22). 처소란 거주하는 곳입니다. 헬라어로 "처소"는 지속적으로 거주하는 곳을 뜻합니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이 사람들이 만든 성전이나 건물에 계시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오히려 우리 주님은 사람들 가운데, 즉 자기 백성들의 심령과 몸 안에 거하기로 선택하셨습니다. 주안에 있는 사람들은 모두 다 예수님의 성전 곧, 그분의 거하실 처소가 됩니다. 모든 성도들은 다 이렇게 자신 있게 자랑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내 안에 거하십니다."

    하나님은 어떠한 물리적 장소에 국한해서 머물지 않습니다. 어떤 나라나, 수도도(심지어 예루살렘도 아닙니다) 아니며 산꼭대기도 아닙니다. 구름이나 공중도 아니며, 어두움과 빛, 해와 달 그리고 별들도 그 분의 처소가 될 수 없습니다. 물론, 주님은 어느 곳에나 계십니다. 그 분의 존재는 모든 만물을 채우고 있습니다. 주님의 말씀에 따르면 하나님은 그의 백성 안에 사실 집을 만드십니다. 예수님의 보혈로 정결케 된 마음이 그분이 항상 거하실 처소입니다.

    언제부터 하나님은 우리 안에 살기 시작했을까요? 우리가 처음 우리의 마음을 예수님께 드렸을 때부터 입니다. 그 순간부터 그리스도의 임재가 우리 안에 채워졌습니다. 더욱이 예수님은 우리를 성부, 성자, 성령 즉 완전한 거룩함으로 이르게 하셨습니다;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내가 아버지 안에,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너희가 알리라… 사람이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키리니 내 아버지께서 저를 사랑하실 것이요. 우리가 저에게 와서 거처를 저와 함께 하리라"(요한 14:20,23).

    잠언서 8장에 하나님과 그의 아들이 거하실 사람에 대한 언약이 영광스럽게 증거 되어 있습니다.

    세상이 창조되기 오래 전, 이미 하늘에 계신 아버지와 아들은 인간들이 그분들의 거하실 처소가 될 것임을 계획하셨습니다. 그 분들은 예수님께서 택한 백성들의 심령과 몸 안에 거하시기 위해 땅으로 오실 것에 대한 언약을 세우셨습니다.

    사도 바울은 지혜로써의 그리스도에 대해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하나님께로부터 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고 예수는 하나님께로 나와서 우리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속함이 되셨으니"(고린도전서 1:30).

    잠언 8장에는, 예수님이 지혜라고 말씀하십니다. "내가 그 곁에 있어서 창조자가 되어 날마다 그 기뻐하신 바가 되었으며 항상 그 앞에서 즐거워하였으며"(잠언 8:30). 이 절이 어떻게 예수님에 대한 것인지 알 수 있을까요? 그분만이 아버지의 기쁨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지혜를 기뻐하신 것이 아니라 그의 아들을 기뻐하셨던 것입니다.

    세상이 창조되기 전에, 그리스도는 하나님과 함께 계셨습니다: "여호와께서 그 조화의 시작 곧 태초에 일하시기 전에 나를 가지셨으며, 만세전부터, 상고부터 땅이 생기기 전부터 내가 세움을 입었나니"(잠언8:22-23). 그때 하나님과 그의 아들이 서로 누렸던 그 기쁨을 상상할 수 있겠습니까? 그분들은 천상의 놀라운 기쁨과 영광가운데 함께 계셨습니다.

    기억하십시오. 이것은 예수님께서 인간적인 어떠한 슬픔에 대해서도 아시기 전이었습니다. 아직 육체로 계시지도 않았으며 그로 인한 어떠한 짐이나 시험도 경험하시기 전이었습니다. 인간의 죄를 짊어지시고 육체의 연약함으로 거절과 비웃음과 조롱과 침 뱉음과 십자가의 고통을 당하시기도 전이었습니다. 그리고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얼굴이 가리워짐도 경험 못했으며 죽음에 대해서도 결코 경험하시기전 이었습니다.

    그때 새 언약의 계획이 세워졌습니다. 이 계획에서, 자유의지를 가지도록 창조된 인간의 주인이신 하나님은 인간들이 타락하게 될 것과 구속자가 필요하실 것이라는 것을 보셨습니다. 그리고 아버지는 아들에게 새 언약의 중재자가 되실 것을 요청하셨습니다. "육체를 입고 타락한 인간을 대속하는 제물이 되겠느냐? 그들의 죄를 담당하고 악으로부터 그들을 건져내겠느냐?"

    예수님은 이미 채찍과 가시면류관, 그리고 자신의 백성들로부터 오는 미움과 거절의 그 무시무시한 일들에 대해 충분히 알고 계셨습니다. 그리고 그분 앞에 다가올 십자가도 보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우리를 위해 자신의 생명 주시기를 기뻐하셨다고 성경은 말씀하십니다. 그 분은 앞날의 고통에 대해 미리 예견하시고 대답하셨습니다.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주의 뜻 행하기를 즐기오니 주의 법이 나의 심중에 있나이다 하였나이다"(시편40:8).

    아들은 또한 다음과 같은 믿기지 않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사람이 거처할 땅에서 즐거워하며 인자들을 기뻐하였었느니라"(잠언 8:31). 이 말씀이 무엇을 의미하고 있는지 아십니까? 사람들에 의해 발견되지 않은 무수한 은하계들, 그리고 헤아릴 수 없는 혹성들 가운데 하나님은 이 자그마한 행성을 지구라 부르시며 살기로 선택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분은 이 곳에서 거처할 장소로 인간을 선택하셨습니다. 우리는 이 지구 위에서 그분이 사실 처소가 된 것입니다.

    이 메시지의 핵심이 여기에 있습니다. 예수님은 더 이상 아버지와 더불어 대면하며 교통 하는 천상의 기쁨을 누리지 못함을 아셨습니다. 하지만 그분은 우리 안에 거하실 기대감으로 오심을 기뻐하셨습니다. "인자들을 기뻐하였었느니라"(잠언 8:31). 그분은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사람들을 내 안으로 이르게 하고 그들과 하나가 되어 교제할 것이다." 그분은 우리와 더불어 나누는 아름다운 교제의 기쁨을 선택하셨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왜 사람이 그의 거하실 성전이 될 것임을 보시고 기뻐하셨을까요?

    저는 하나님의 절대 예지를 믿습니다. 우리가 존재하기 이전부터 사람들이 그의 복음에 대해 어떻게 반응할지 주님은 아셨다고 저는 믿습니다. 저는 속죄의 제한성에 대해 믿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저주할 사람과 구원할 사람을 정해두지 않으셨습니다. 주님은 만민을 위해 죽으셨으며 누구든지 그에게로 오면 구원 받습니다. 우리 주님은 누구의 멸망도 원하시지 않습니다(요한복음 3:15-17, 베드로후서 3:9). 하지만 그가 우리의 이름을 이미 아셨다면 자신의 희생에 대해 우리가 받아들일지 혹은 거절할지도 역시 아셨습니다.

    하나님 자신이신 그리스도께서는 이 예지를 공유하셨습니다. 그래서 마음에 자신을 왕과 구주로서 영접하고자 하는 모든 사람들을 그분은 이미 보았다고 저는 믿습니다. 그분은 우리가 중국, 러시아, 아메리카, 아프리카 혹은 어느 나라에 있건 우리 모두에 대해 알고 계셨습니다. 그리고 우리 안에 거하시기 위해 오실 것에 대한 기대감으로 기뻐하셨습니다.

    당신은 구원 받은 날을 기억하십니까? 예수님께 했던 서약, 모든 사람들을 용서하고 그분을 따르겠다는 약속, 당신이 경험했던 이런 그 때의 감정들을 기억하십니까? 예수님은 영겁전부터 그 사건을 보았으며 당신으로 인해 기뻐하셨습니다. 당신이 태중에 존재하기 전부터 당신이 그를 영접하리라는 것을 아셨던 것입니다.

    다윗이 노래합니다. "오직 주께서 나를 모태에서 나오게 하시고 내 모친의 젖을 먹을 때에 의지하게 하셨나이다. 내가 날 때부터 주께 맡긴 바 되었고 모태에서 나올 때부터 주는 내 하나님이 되셨사오니 나를 멀리 하지 마옵소서 환난이 가깝고 도울자 없나이다"(시편 22:9~10). "내 형질이 이루기 전에 주의 눈이 보셨으며 나를 위하여 정한 날이 하나도 되기 전에 주의 책에 다 기록이 되었나이다"(시편 139:16).

    당신이 심기어 지기도 전에 하나님은 그의 책에 당신 몸의 모든 구성 요성에 대해 기록하셨습니다. 그분은 당신에 대해 모든 것을 알고 계셨습니다. 그리고 그의 아들 예수님도 당신이 자신의 처소로 자랄 것을 아시고 기뻐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여러분이 그의 처소가 될 것임을 보시고 기뻐하신 세가지 이유를 대겠습니다.

    1. 예수님은 당신의 신랑으로서 당신을 기뻐하셨습니다. 그는 그의 신부와 더불어 친교하며 이룰 연합을 예견하셨습니다.

    성경은 그리스도안에서의 우리의 다양한 역할과 위치에 대해 설명합니다. 우리는 그의 몸 혹은 그의 양 떼 그리고 처녀, 아들, 종, 친구 등으로도 불리어 집니다. 하지만 이러한 호칭들 중 가장 친밀감을 느끼게 하는 것은 우리가 그리스도의 신부로 불리어 질 때 입니다. "신랑이 신부를 기뻐함과 같이 네 하나님이 너를 기뻐하시리라"(이사야 62:5).

    만약 당신이 기혼자라면 여러분의 사랑하는 배우자와의 약혼한 날을 기억하실 겁니다. 서로 사랑에 빠져서 상대와 완전한 하나가 될 수 있는 날을 손꼽아 기다렸을 것입니다.

    주님도 마찬가지셨습니다. 그분도 역시 당신을 간절히 기다리셨기 때문에 아버지와의 절대 연합에서 떠나시기로 동의하셨던 것입니다. 주님은 당신이 신부가 되는 그 날을 이미 예상하셨습니다. 그분의 눈에 당신은 사랑스러운 짝이었습니다. 그분은 당신의 소중한 존재가 되실 것이고 당신은 그에게 속할 것입니다. 그의 기쁨의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당신의 신랑은 당신이 매일 밀실로 와서 그와 함께하는 시간을 기대하셨습니다. 그곳에서 당신은 세상을 잊고 그와 더불어 서로 사랑을 나누는 달콤한 교제를 위해 몇 시간을 보내겠지요. 그리고 그분은 당신을 취하시고 당신으로 인해 기뻐하실 것입니다. "그가 너로 인하여 기쁨을 이기지 못하여 하시며 너를 잠잠히 사랑하시며 너로 인하여 즐거이 부르며 기뻐하시리라 하리라"(스바냐 3:17).

    이제 예수님과의 첫 사랑에 대해 회상해 보십시오. 당신은 전심으로 그분을 갈망했습니다. 순전한 기쁨으로 그의 말씀을 읽었습니다. 그에 대한 사랑과 예배를 위해 하나님의 집으로 흥분되어 향하였습니다.

    주님이 보시기에 당신과 함께하는 날들은 언제나 결혼 잔칫날과 같았을 것입니다. 그분이 고백하셨습니다. "여기는 내가 있을 곳이다. 이곳에서 이 세상 무엇 보다도 나를 더 원하는 이와 함께 하리라."

    아내 그웬과 저는 이러한 사랑을 우리의 결혼 생활 내내 향유했습니다. 불과 24시간 떨어져 있는 동안에도 우리는 하루에 3차례씩 서로 전화를 걸고 맙니다. 지난 50년 간의 결혼 생활 내내 이와 같았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단지 인간에 불과합니다. 그렇다면 당신을 기대하시는 예수님의 사랑이 어떠한지 상상이 가십니까?

    2. 주님은 당신과 그의 가장 비밀한 것들을 나눌 것을 생각하시고 기뻐하셨습니다.

    진정한 사랑의 표현에서 가장 중요한 것 중 하나가 당신의 배우자와 아무도 모르는 은밀한 것들을 나누는 것입니다. 다른 신랑들과 마찬가지로 예수님도 당신에게 그의 비밀한 것들을 나누실 기대를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분은 당신도 그분과 함께 당신의 마음속에 있는 비밀을 나누기를 바라셨습니다.

    이것은 심지어 세속적 연인들 간에도 이루어지는 일입니다. 비록 데릴라에 대한 삼손의 즐거움이 육체적이었지만, 그는 그녀에게 아무것도 감추지 않았습니다(사사기 16:4). 데릴라에 대한 그의 사랑이 그의 힘의 비밀을 발설하게 하였고, 그로 인해 그는 그의 생명으로 대가지불 하게 되었습니다.

    당신에 대한 즐거움으로 인해, 주님은 당신이 그의 신부일 뿐만 아니라 그의 절친한 친구가 되기를 바랬습니다. 그분은 기도의 골방에서 전적으로 자신에게 마음을 쏟고 있는 당신을 선견 하셨습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이 결코 보거나 듣지 못한 것들을 당신에게 계시할 것에 대한 기대가 컸습니다. "이제부터는 너희를 종이라 하지 아니하리니 종은 주인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라. 너희를 친구라 하였노니, 내가 내 아버지께 들은 것을 다 너희에게 알게 하였음이니라"(요한복음 15:15).

    그분은 당신과 더불어 하나님의 가장 은밀한 비밀들을 나누시기를 기다렸습니다. "정직한 자에게는 그의 교통하심이 있으며"(잠언 3:32). 실로 주님은 그분을 사랑하는 자들에게 미리 말씀하시지 않으시고는 어떠한 중요한 변화도 일으키시지 않습니다. "주 여호와께서는 자기의 비밀을 그 종 선지자들에게 보이지 아니하시고는 결코 행하심이 없으시리라"(아모스 3:7).

    주님은 이 세상과 당신의 삶 가운데 이루시기 원하셨던 것들, 새 언약과 그의 거룩한 이름의 영광, 십자가 희생의 위대함, 이 모든 하나님의 심중의 비밀들을 당신과 나누시기 원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분은 당신도 당신이 필요로 하는 모든 것과 문제, 아픔과 실패, 기대와 소망, 꿈과 두려움까지 듣고 싶어하십니다. 그분은 당신이 마음의 짐을 내려놓을 수 있는 분으로 다가가시기 원하십니다.

    3. 예수님은 그의 신부가 주의 말씀으로 인해 즐거워함을 기뻐하셨습니다.

    "누구든지 내게 들으며 날마다 내 문 곁에서 기다리며 문설주 옆에서 기다리는 자는 복이 있나니"(잠언 8:34).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나의 모든 말을 청종하는 자, 매일 아침 나의 문에서 나의 말을 듣기 위해 기다리는 사랑스러운 자, 간절히 나의 목소리를 바라는 자, 내가 그에게 한 나의 모든 말에 기뻐하는 자, 그들 안에 내가 거하리라."

    그의 신부로써 우리는 이렇게 화답합니다. "바위 틈 낭떠러지 은밀한 곳에 있는 나의 비둘기야 나로 네 얼굴을 보게 하라 네 소리를 듣게 하라 네 소리는 부드럽고 네 얼굴은 아름답구나" (아가 2:14).

    다윗은 매일 하나님의 말씀 듣기를 사모한 신앙인이었습니다. "주의 율례를 즐거워하며 주의 말씀을 잊지 아니하리이다"(시편119:16). "나의 사랑하는 바 주의 계명을 스스로 즐거워하며"(시편119:47). "주의 법은 나의 즐거움이니이다"(시편119:77). 이 마지막 절에 대한 히브리원문을 직역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나는 당신의 말씀을 즐깁니다."

    위에서 언급한 말씀(잠언 8:34) 가운데 다음의 두 문구 즉, "날마다 내 문 곁에서 기다리며" 그리고 "문설주 옆에서 기다리는"에 집중하고자 합니다. 첫번째, 여기서 언급한 문이란 무엇입니까?

    시편기자는 그 해답을 우리에게 말합니다. "내게 의의 문을 열찌어다 내가 들어가서 여호와께 감사하리로다"(시편118:19). 저는 이 "의의 문"이 예수님이 말씀하신 "좁은 문"이라 믿습니다. 그들은 의를 배우기 위해 매일 하나님의 말씀으로 돌이키는 자들입니다.

    이러한 신앙인은 주님 앞에서 올바르게 살아가기로 결심했습니다. 거룩한 삶 가운데로 인도하는 모든 계시의 말씀으로 인해 그는 기뻐합니다. 그는 자신에게 말합니다. "나는 진실한 사람이기를 원해. 단지 설교 테이프를 듣거나 책을 읽는 것으로는 부족해. 나는 주님을 인내함으로 기다려야 해. 그러면 그분은 나에게 그의 문을 열어 주실거야."

    신실하신 하나님의 성령은 매일 아침 그를 만나시기 위해 오십니다. 그리고 속삭입니다. "환영하네 친구여. 오늘도 하나님의 의에 대해 새로운 것을 가르쳐 주려네."

    두 번째, "문설주 옆에서 기다리는"이 의미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이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해 떠는 모든 신앙인들을 지칭합니다. 이 구절은 하나님의 말씀을 갈망하는 선지자가 성전 문설주 옆에서 기다렸던 이사야 6장에 나옵니다.

    이사야는 거기서 천사들이 노래 부르는 것을 들었습니다. "거룩, 거룩" 그들의 찬송이 하늘에 울려 퍼집니다. 그때 갑자기 하늘로부터 압도하는 음성이 울렸습니다. 그 음성이 얼마나 크고 분명했던지 모든 것들을 흔들었습니다. "이 같이 창화하는 자의 소리로 인하여 문지방의 터가 요동하며 집에 연기가 충만한지라"(이사야 6:4).

    이 강력한 음성은 이사야를 뼈속까지 떨게 했습니다. 너무나 죄에 대해 그를 각성케 한 나머지 그는 울었습니다.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이사야 6:5). 하나님의 음성을 들은 선지자는 떨 수 밖에 없었습니다.

    이사야는 "문설주 옆에서 기다리는" 사람의 한 예입니다. 이 신앙인은 하나님의 말씀 듣기를 갈망하였습니다. 그리고 말씀이 임하면 그의 영혼은 죄로 인해 각성합니다. "마음이 가난하고 심령에 통회하며 나의 말을 인하여 떠는 자 그 사람은 내가 권고하려니와"(이사야 66:2).

    세상이 창조되기 전 예수님이 우리로 인해 어떻게 기뻐하셨는지 보았습니다. 그 분은 우리에게 임재 하시고, 우리로 그의 처소가 되기를 바라셨습니다. 그리고 주님은 우리가 다른 모든 것에서 떠나 오직 그 분께 매달리는 것을 즐거워하셨습니다. 우리는 매일 그를 찾고 그와 더불어 소중한 시간을 함께 보내게 될 것입니다. 그는 우리에게 자신의 비밀을 나누실 것이고, 우리는 그에게 우리의 짐을 내려놓을 것입니다. 우리는 그의 의로움을 드러내는 말씀을 찾으며 그의 길에서 즐거워 할 것입니다. 그래서 그가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계시의 순간 우리는 떨게 될 것입니다.

    이 말씀에 비추어 당신의 삶은 어떻습니까?

    성경은 주님이 그의 처소인 우리에게서 무었을 기대하셨는지 말씀하십니다. 그렇다면, 당신은 그의 기대를 성취해 나가십니까? 그는 당신과 더불어 일생을 함께하시기를 바라셨습니다. 주님과의 관계가 계속 가까워지고 있습니까? 아니면 매일 멀어지고 있습니까?

    당신의 신랑은 당신을 더 가까이 두시기로 작정하셨습니다. 날마다 당신과 더불어 달콤한 교제를 원하시기에 주님은 당신에게 마음을 열기 원하셨습니다. 또한 아무도 보지 못했던 많을 일들을 보여주기를 고대하셨습니다. 당신 안에 영적인 열매를 맺도록 당신의 삶에 영향을 끼치기를 바랬습니다. 그리고 당신의 연약함과 두려움과 결핍에 대한 마음까지 제거하기를 원하셨습니다.

    이제는 당신의 눈물과 친밀함 그리고 전폭적 헌신으로 당신은 그의 마음의 기쁨이 될 수 있습니다. 그를 향한 신부의 노래입니다. "그 그늘에 앉아서 심히 기뻐하였고 그 실과는 내 입에 달았구나"(아가 2:3). "얼굴을 보게 하라 네 소리를 듣게 하라"(아가 2:14).

    아주 오랜 옛날 세상이 창조되기 전, 바로 이와 같은 당신과의 관계가 그리스도를 기쁘게 한 것입니다. 하지만 이제 그러한 관계를 가지게 된 때가 이르렀지만 당신은 주님을 거절하고 무관심하게 됩니다. 당신에게 TV 시청, 쇼핑, 인터넷 서핑, 정원을 가꿀 시간은 있지만 주님을 위한 시간은 없습니다. 묻겠습니다. 신부의 마음이 신랑에 대해 지루함을 느낀다면 그가 신부의 마음 가운데 계시리라 믿습니까? 그와 함께 지낼 시간도 대화할 시간도 들을 시간도 없는 사람에게 왜 계속 머무시겠습니까?

    엄중히 권고합니다. 주님은 절대 자신을 무시하고 거절하는 자에게 거하시지 않습니다. 당신은 이렇게 항변하겠지요. "하지만 저는 주님을 사랑합니다. 결코 주님께 냉담한적이 없습니다." 만약 당신이 지난 수주 동안 말씀과 기도에 태만하였고 주님과 더불어 친밀히 교제하는 개인적 시간을 갖지 못했다면, 사실은 당신은 이렇게 선언하는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나의 행동은 내가 예수님에 대한 열정적 사랑을 가지 못함을 증명합니다. 나의 가족, 직장 그리고 개인적 욕망이 가장 우선 순위에 있습니다."

    Beware of Being Given Over to Salt.

    하나님의 말씀은 분명히 경고합니다. "우리가 이같이 큰 구원을 등한히 여기면 어찌 피하리요"(히브리서 2:3). 그리스도께 무관심하게 되면 커다란 대가지불을 해야 한다. 성경은 우리가 그의 구원의 선물을 망각하게 되면 소금으로 변하게 된다고 경고합니다. 이것에 대해 설명하겠습니다.

    에스겔 47장은 여호와의 보좌로부터 발원하는 생명의 강에 대한 말씀입니다. 이 강은 거룩하며 치료하는 물입니다. 그래서 황폐한 땅을 흘러 들어가 닿는 모든 것을 소성 시킵니다. 이 강은 점점 넓어지고 깊어져 헤엄할 물이 됩니다.

    "그가 내게 이르시되 이 물이… 아라바로 내려가서 바다에 이르리니 이 흘러 내리는 물로 그 바다의 물이 소성함을 얻을지라, 이 강물이 이르는 곳마다 번성하는 모든 생물이 살고"(에스겔 47:8~9).

    이 생명의 강은 선포된 복음입니다. 그리스도의 복음은 처음에는 그의 12 제자들의 전도를 통해 단지 조그마한 물방울로 시작해 말씀이 선포되었습니다. 그리고 바울과 그의 개종자들에 의해 더 넓게 전파되었고 얼마되지 않아 전세계로 확산되었습니다. 오늘날에는 수 많은 하나님의 종들이 전세계 곳곳에서 복음을 선포합니다. 그래서 이제는 헤엄할 큰 강이 되었습니다. "이 강이 이르는 각처에 모든 것이 살 것이며"(47:9).

    이 강은 갈보리로부터 흘러오고 있습니다. 오늘날에도 수 백만 명의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영접하므로 고침을 받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진리는 그들의 무관심과 나태와 무감각을 깨우고 있습니다. 이제 그들의 눈이 크게 떠져 주안에서 기뻐하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날마다 주님을 구하며 그의 말씀을 사모하며 그와 긴밀히 교제합니다. 그들은 이전에 알지 못했던 것들을 성령 안에서 배우고 있습니다. 그들에게는 하나님의 심중의 비밀이 주어졌고 그것은 그들을 치료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당신에게는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습니까? 당신은 하나님의 치료의 물에서 헤엄하고 있습니까? 아니면 이 강이 당신을 지나 그냥 흘러가도록 내버려 두십니까? 이 물이 흐르지 않는 사막에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주목하십시오. "그 진펄과 개펄은 소성되지 못하고 소금 땅이 될 것이며"(에스겔 47:11).

    아마도 당신은 예수님께 무관심한 죄를 범했을지 모릅니다. 당신에겐 기도도 없었고 순종도 없었고 말씀도 태만해 왔습니다. 당신은 죄를 각성케 하는 설교를 듣고 마음도 움직였지만 언제나 다시 자족감의 자리에 되돌아 왔습니다. 이제 무관심은 당신의 삶의 한 방편이 되어버렸습니다. 참으로 당신은 주님의 당신에게 가졌던 모든 기대를 져버리고 말았습니다.

    에스겔이 언급한 "소금 땅"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그것은 완전한 불모지이며, 열매 없는 공허함이며, 메마름과 고립입니다. 이스라엘의 사해를 보십시오. 완전히 소금 땅이 되어버린 물입니다. 그곳에는 심지어 그 주변에도 고기가 살지 못하며 식물도 자라지 못합니다. 완전한 황폐함입니다.

    당신이 이와 같이 고립되고 메마른 개펄과 진펄이 되었습니까? 당신의 삶이 하나님께 열매가 없는 불모지가 되었습니까? 당신의 하루하루가 이처럼 공허하고 메마르고 고립되었습니까? 아마 당신은 소금 땅이 되었을지 모릅니다. 당신의 주위에 있는 다른 사람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열매 맺고 성장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거룩한 물로 치료를 받았습니다. 하지만 당신은 그들이 갖고 있는 어떤 자원도 소유하지 못했습니다. 당신은 명목상의 그리스도인이 된 것입니다.

    만약 이 메시지가 당신을 흔들어 각성케 한다면 당신을 위한 복음이 여기 있습니다.

    다시 시작하기에 결코 늦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치료의 강이 흐를 때면 모든 죽은 것들이 다시 소성합니다.

    새 언약이 세워졌을 때, 하늘에 계신 아버지와 그의 아들은 그리스도께 무관심한 많은 사람들을 이미 보셨습니다. 이러한 사람들은 미온적으로 혹은 냉담한 사람들로 발전해 결국은 파멸하고 맙니다. 그래서 아버지와 아들은 다음과 같이 합의하셨습니다. 만약 한마라의 양이 길을 잃고 벗어난다면 예수께서 쫓아가 그를 무리 가운데로 다시 돌아오게 하실 것입니다.

    치료의 강이 흘러 죽은 인류를 생명가운데로 다시 회복시킬 수 있다고 진리는 말합니다. "이 흘러 내리는 물로 그 바다의 물이 소성함을 얻을지라"(에스겔 47:8). 하나님의 치료의 강이 흐르면, 여기저기 푸른 풀과 나무들이 사방에서 싹트기 시작해 곧 온 들판에 생물이 번성하게 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은 여전히 여러분을 기다리십니다. 뿐만 아니라 여러분을 위한 계획도 여전히 가지고 계십니다. 진정 바로 오늘 여러분의 삶을 다시 시작할 수 있습니다. 그분은 당신의 삶 속에서 아무리 오래되었더라도 소진되고 침해된 모든 것들을 다시 회복시키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내가 전에 너희에게 보낸 큰 군데 곧 메뚜기와 늣과 황충과 팟종이의 먹은 햇수대로 너희에게 갚아 주리나"(요엘 2:25).

    여러분은 여전히 하나님의 비밀을 듣고 계시를 받을 수 있는 그의 처소가 될 수 있습니다. 비결은 이러합니다. 주님께 태만했던 자신의 모습을 인정하십시오. 주님을 제외한 다른 모든 일에 분주했던 것을 시인하십시오. 주님이 당신을 불렀을 때 귀 기울이지 않았던 것을 회개하십시오. "그러므로 이르시기를 잠자는 자여 깨어서 죽은자들 가운데서 일어나라. 그리스도께서 네게 비취시리라 하셨느니라"(에베소서 5:14).

    이제 그 분께 부르짖으십시오. "오 하나님, 나를 고치소서. 나의 영혼을 깨우소서. 나로 잠에서 깨어나게 하소서. 변화되기 원합니다. 당신이 내 안에서 하실 일이 있음을 내가 아나이다. 주여 당신의 강한 손길로 나를 만지소서."

    예레미야는 하나님을 저버리고 무관심했던 사람들을 향한 하나님의 마음을 우리에게 보여줍니다.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패역한 이스라엘아 돌아오라. 나의 노한 얼굴을 너희에게로 향하지 아니하리라, 나는 긍휼이 있는 자라, … 오직 네 죄를 자복하라….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패역한 자식들아 돌아오라, 나는 너희 남편임이니라… 너희의 패역함을 고치리라"(예레미야 3:12~14,22)

    예레미야는 다음과 같은 말씀으로 재확인시켜 줍니다. "지존 무상하며 영원히 거하며 거룩하다 이름하는 자가 이같이 말씀하시되 내가 높고 거룩한 곳에 거하며 또한 통회하고 마음이 겸손한 자와 함께 거하나니 이는 겸손한 자의 영을 소성케하며 통회하는 자의 마음을 소성케 하려 함이라. 내가 영원히는 다투지 아니하며 내가 장구히는 노하지 아니할 것은… 입술의 열매를 짓는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먼데 있는 자에게든지 가까운데 있는 자에게든지 평강이 있을지어다, 평강이 있을지어다, 내가 그를 고치리라 하셨느니라"(이사야 57:15~19).

    하나님은 당신에게 말씀하십니다. "나의 아들아 잠시동안 너에게 화가 났구나. 너에게 공허함과 외로움이 있었다. 하지만 이제 사탄이 파괴했던 너의 모든 것을 회복시켜 주리라."

    당신의 삶은 푸른 숲으로 다시 회복될 수 있습니다. 다시 시작하기에 결코 늦지 않습니다. 오늘이 주님께서 당신을 위해 새로 시작하는 첫날이 되게 하십시오.









    저는 오늘 우리 신앙의 공동체, 즉 ‘교회’에 대해 함께 살펴보고자 합니다. ‘교회는 건물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모인 성도의 공동체이다’ 즉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다’ 라는 교회의 정의를 여러분은 잘 알고 있을 것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에서 사도 바울은 에베소 성도에게 무엇이 교회인지를 잘 밝혀 주고 있습니다.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우심을 입은 영적 건물, 곧 <예수 그리스도께서 친히 모퉁이 돌 되시는 ‘하나님의 성전’>이 바로 ‘교회’라고 선언하고 있는 것입니다. 더욱이 이 성전은 하나님의 거하시는 처소이기에 성령 안에서 함께 연결되고 거룩하게 지어져 간다고 설명하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하나님의 거하실 거룩한 성전이 되기 위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머릿돌로 하여 성령 안에서 함께 아름답고 사랑스럽게 함께 지음 받기를 결단하고 성령께 순종하는 성도 여러분 모두 되시기를 기대합니다.

    사도가 에베소 성도들에게 편지한 서신서, <에베소서>의 주제는 “교회의 연합” (the unity of the Church)라고 할수 있습니다. 그 연합은 그 당시 특별히 2 그룹간의 연합을 의미합니다. 그것은 그 당시 초대교회를 구성하고 있던 유대종교에서 개종한 <유대인 크리스챤들>과 <이방인 크리스챤들>간의 연합인 것입니다. 물론 그 뿐 아니라 부자와 가난한 자, 배운 자와 배우지 못한 자, 그리고 주인과 종의 관계까지 이 교회라는 공동체 안에는 실로 다양한 그룹의 사람들이 존재하며, 이 모든 성도들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로 연합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이 포함된 <엡. 2장>은 ‘교회는 어떻게 구성되어 있는지?’ 그리고 ‘교회는 어떻게 자라날 수 있는지?’ 하는 성경적인 <교회론> (Ecclesiology)의 중요한 영적 가르침을 밝히고 있습니다. 그리고 <엡. 2장> 마지막 부분에 해당하는 오늘 말씀에서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는 무엇인지? 그리고 이 교회는 어떻게 자라날 수 있는지? 하는 것을 본질적으로 잘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우리가 이해하고 기억해야하는 것은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몸>은 단순히 <조직>이나 <기관>이 아니며 더욱이 <건물>이 아닙니다. <몸>은 <유기체> (organism/ organic body) 입니다. 그럼으로, 우리가 잘 알듯이 유기체는 살아 있는 조직임으로 그것은 자라게 되었습니다. 살아 있는 유기체가 성장하지 않는 것을 상상할 수 없듯이 살아 있는 우리 인간의 몸이 자라지 않는 것은 상상할 수 없는 것입니다. 아기가 태어나서 전혀 자라지 않는다면, 매우 심각한 성장의 문제가 아닐수 없듯이 말입니다.

    한가지, 흥미로운 사실은 이와 같이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여 몸된 교회 공동체를 사도 바울은 지금 ‘건물’로 묘사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건물은 단순한 건물이 아니라, 하나님을 예배하고 하나님께서 친히 거하시는 ‘성전’ (an holy temple) 이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몸된 공동체가 이렇게 거룩하신 하나님께서 친히 거하시는 성전이라는 사실은 실로 놀랍고 영광스러운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성전으로 정의되어지는 교회의 본질과 특성을 통해 우리는 몇 가지 중요한 사실을 이해할 수 있는 것입니다.
    “무엇이 성전된 교회가 의미하는 것일까요?” (What means ‘Church’ as ‘a holy temple’?) 하는 것입니다.

    첫째, ‘성장한다는 것’ 입니다 (It means to be grow up) :
    사도 바울은 오늘 본문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너희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우심을 입은 자라 ~ 하나님의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느니라” (v. 20,22). 하나님의 거하실 성전인 교회는 계속해서 지어져 간다는 것입니다. 사도는 마치 건축가가 어떻게 건물을 짓기 시작하여 완성해 나가는지를 설명하듯이, 교회라는 <성전>이 어떻게 지어져 가는지를 잘 설명해 나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먼저 건물을 건축하기 위해 가장 우선적으로 기초공사를 하는 것입니다. 튼튼한 건축물을 짓기 위해선 무엇보다도 건물이 세워질 땅을 깊이 파고 기초공사를 견고하게 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럼으로, 하나님의 성전인 교회가 그 위에 세워질 터는 바로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믿음과 그들이 흘린 순교의 피’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런 믿음의 선진들이 순종과 순교로 다진 견고한 터 위에 성전인 교회가 지어지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성전이 지어진다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 것입니까? 말 그대로 그것은 성전 건물이 점점 더 지어져 나가고 완성 되 간다는 뜻입니다. 이것을 <그리스도의 몸>으로 비유한다면, 몸이 성장한다는 뜻일 것입니다. 그러면, 무엇이 교회가 성장한다는 의미일까요? 이것은 무엇보다도 성도들이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여 그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함으로써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하는 것입니다. 그럼으로 교회 안에 계속해서 구원받는 성도가 늘어나는 것입니다. 이것이 교회가 성장한다는 뜻입니다. 사도행전에 보면, “날마다 마음을 같이 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 하나님을 찬미하며 또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으니 주께서 구원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니라” (행. 2:46~47)라고 증거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사도들이 나사렛 예수가 그리스도이심을 증거할 뿐 아니라, 성도들이 함께 떡을 떼고 한마음으로 하나님을 찬미했을 때, 많은 불신자들이 주께로 돌아오는 놀라운 역사가 일어났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복음이 올바로 선포될 때, 불신자가 회개하고 구원받아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성도가 늘어나는 역사가 자연스럽게 일어나는 것입니다. 이것이 곧 교회가 성장한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또 한가지는 이 성장은 성도 개인과 교회 공동체의 <믿음의 성숙>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영적으로 성숙함으로 복음과 주의 사랑 안에서 그리스도의 장성한 성품으로 자라나는 것입니다. 이것 또한 성전된 교회가 자라난다는 뜻인 것입니다.

    둘째, ‘연결되어 진다는 것’ 입니다 (It means to be joined together) :
    우리가 좀더 사도가 ‘교회’를 영적으로 해석하는 방식을 주의 깊게 따라가 본다면 한가지 중요한 교회의 본질을 깨닫게 됩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는 본질적으로 영광스러운 하나님이 거하시는 성전으로 출발하는데, 이것이 “완성된 존재가 아니라, 지어져 가는 존재”라는 사실입니다. 계속해서 하나님께서 거하시기에 합당한 거룩한 성전으로 <지어져가는> (=진행형) 존재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서로 연결되어 짐으로서 가능한 것입니다.

    사도는 <20절>에서 성전인 교회가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믿음과 순교의 터 위에서 지어지게 되었다고 말하고 나서, “그의 안에서 건물마다 서로 연결하여 주 안에서 성전이 되어가고” (v. 21) 라면서 설명을 이어 나갑니다. 교회를 ‘그리스도의 몸’ 혹은 ‘성전’이라는 영광스러운 이름으로 불리어 질 수 있는 이유는 ‘서로 연결되었기 때문’ 일 것입니다. <로마서 12장>에서 보면 “이와 같이 우리 많은 사람이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이 되어 서로 지체가 되었느니라” (롬. 12:5) 말합니다. 서로 연결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이 되어 서로 지체가 되었다는 것은 머리를 통하여 서로 연결되었다는 뜻입니다. 만약 몸이 서로 연결되지 않는다면 결코 머리의 통제를 받지 못하여 통일된 행동을 할 수 없는 것입니다.

    바울은 <에베소 4장>에서도 교회를 그리스도의 몸으로 이렇게 잘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가 머리이시므로, 온몸은 여러 부분이 결합되고 서로 연결되어서, 각 부분이 그 맡은 분량대로 활동함을 따라 각 마디로 영양을 공급받고, 그 몸을 자라게 하여, 사랑 안에서 스스로를 세우게 합니다” (엡. 4:16)라고. 여기서 본다면, <연결되었다>는 것은 ‘영양분을 잘 공급받고, 몸이 잘 자라서 사랑 안에서 서로를 세워준다’는 뜻입니다. 저는 특별히 우리 아포슬교회에 속한 우리 성도들이 각자를 돌아보며, 우리는 서로 연결되어 있는가를 살펴보는 시간되기 원합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은 우리가 서로 연결되어 있는지를 판단하는 근거가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사도는 고린도교회 성도에게 편지하면서 “만일 한 지체가 고통을 받으면 모든 지체도 함께 고통을 받고 한 지체가 영광을 얻으면 모든 지체도 함께 즐거워하나니, 너희는 그리스도의 몸이요 지체의 각 부분이라” (고전. 12:26~27) 라고 도전합니다. 사도는 한 형제가 고통받을 때 함께 힘들어 하고, 한 자매가 영광을 얻을 때 함께 즐거워한다면 ‘이 공동체는 그리스도를 머리로 해서 하나로 연결된 한 몸이다’ 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한 지체가 고통받을 때 함께 아파하고, 한 지체가 영광을 받을 때 함께 즐거워하는 공동체 입니까? 아니면 서로 시기하고 질투하고 판단하거나, 아니면 아예 관심이 없는 관계입니까?

    셋째, ‘성령께서 지으신다는 것’ 입니다 (It means to be built by the Holy Spirit) :

    지금까지 우리는 하나님의 성전된 교회는 완성된 존재가 아니요, 계속해서 서로 연결됨을 통하여 지어져 가는 존재임을 확인했습니다. 이제 그렇다면 한가지 마지막 중요한 질문이 있습니다. 그것은 누가 이 성전된 건물을 짓는가 하는 것입니다. 누가 이 성전건축의 주관자인가? 하는 것입니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 이십니다. 예수님은 성전의 ‘머릿돌’ (The Coner Stone) 되실 뿐 아니라, 성전건축을 책임지시는 주관자 되시는 것입니다. 바로 약속하신 성령님의 권능을 통해서 아름답게 완성시켜 가시는 주권자인 것입니다. 이것은 한마디로 ‘그리스도께서 성령을 통해’ 성전된 교회를 저어 가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성전된 교회는 앞서 말씀 드린대로 단순한 건물이 아니라, <생명체>로서 성장하고 자란다는 사실을 우리는 한시도 잊지 말아야 하는 것입니다. “너희도 성령 안에서 하나님의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느니라” (v. 22) (And in Him you too are being built together to become a dwelling in which God lives by His Spirit.) 사실 교회성도들을 한사람 한사람 살펴본다면, 서로 자란 환경이 다르고 성격과 기질, 하는 공부와 앞으로 추구하는 삶의 방식은 매우 다양함을 우리는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다름이 서로를 멀어지게 하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다양성을 추구하는 하나님의 성품과 더욱 가까움을 우리는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간혹 비성경적인 이단들에게서 보게 되듯이, 한가지 색깔과 한가지 가르침만 인정하면서 획일적인 집단을 강요하는 것은 결코 성경적 가르침이 아니요,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는 성전된 교회 공동체의 모습이 아니라고 저는 확신합니다.

    그와 반대로 진정한 영적 공동체 안에는 자유함이 있고 다양성을 인정하고 추구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울이 “주는 영이시니 주의 영이 계신 곳에는 자유함이 있느니라” (고후. 3:17) 고 선포한 ‘주님의 자유하신 영’이 의미하는 핵심일 것입니다. 그러나 감사하게도 주님의 자유하신 영은 우리 믿음의 공동체를 분열과 혼란으로 빠트리는 것이 아니라,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도리어 서로 다른 다양성을 인정하면서도 하나로 연결시킴으로써 하나님의 거룩하신 성전으로 자라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바로 성령님의 통치하심과 도우심을 통해 가능한 것입니다. 앞서 살펴봤듯이, 한 지체가 고통받을 때 함께 아파하고, 영광 받을 때 함께 즐거워할 수 있는 것은 육신에 속한 우리 자신의 노력 만으로는 안타깝게도 행할 수 없는 것입니다. 오직 성령의 열매를 통해서만 가능한 것입니다. “그러나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기쁨과 평화와 인내와 친절과 선함과 신실과 온유와 절제입니다. 이런 것들을 금할 법은 없습니다” (갈. 5:22~23) 오직 성령님께 순종하고, 성령님의 충만함으로 심령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은 자들은 서로의 모든 다름을 극복하고 하나되게 하시는 성령님의 풍성한 열매를 맺어 나가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성령님을 신뢰합니까? 성령님께 순종합니까? 성령의 열매를 맺어가고 있습니까? 그럼으로 우리 상호간에 있는 장벽을 허무시고, 하나로 연결하시는 성령님의 은혜를 경험하고 있습니까?

    우리 함께 예수 그리스도의 몸으로 함께 자라가는 지체가 될 수 있기를 기대합니다. 그리하여 거룩하신 하나님께서 영원히 거하시는 영광된 성전된 교회의 구성원이 되었음에 대한 감격과 감사가 넘치시기를 소망합니다. 바라기는 거룩하신 하나님이 거하시는 영광스러운 성전된 교회 안에서 함께 자라 나가시는 성도 여러분 모두 되시길 소망합니다. 우리 가운데 날마다 구원받는 자들을 더하게 하시고, 성령의 은혜로 서로를 품어주고 사랑으로 종 노릇함으로 견고하게 연결되어 아름다운 성전으로 지어져 가는 우리 믿음의 공동체 될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그로 말미암아 하나님 아버지께서 주일 하루뿐 아니라, 매일 매일 매 순간마다 하나된 우리 공동체의 산제사의 예배를 기뻐 받으시고 우리와 함께 거하시는 성전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5월 21일(수) 역대하 25-28장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정도(正道)(27:6)

    요담이 그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정도를 행하였으므로 점점 강하여졌더라.
    Jotham grew powerful because he walked steadfastly before the LORD his God.

    요담(Jotham) : 여호와는 바르심

    유대왕 웃시야의 아들로 부왕이 문둥병으로 정무를 살피지 못하여 대리로 얼마동안 섭정하다가 죽은후 25세때(758)계승 즉위하여 16년간의 치세를 공의롭게 하고 만년에 다메섹왕 베가에게 위협을 받았다.
    이 시대의 선지자는 이사야이다(왕하 15:, 대하 27:, 마 1:9)


    정도(正道) : 바를 정, 길도 right way 

    1. 올바른 길
    2. 정당한 도리

    사도(邪道)
    / 간사할 사, 길 도 out of the right way

  • 1. 올바르지 못한 길이나 사악(邪惡)한 도리(道理).
  • 2. 건전(健全)하지 못하고 요사(妖邪)스러운 종교(宗敎).
        흔히 그 사회(社會)의 도덕(道德)이나 제도(制度)에 나쁜 영향(影響)을 끼친다.

    오도(誤導) : 그르칠 오, 길 도 / misleading

  • 1. 어떤 대상(對象)을 그릇된 길로 이끄는 것.

    9대 / 조부 아마샤 - 10대 / 부 웃시야 - 11대 / 요담 

    아마샤(Amaziah) : 여호와께서 강하게 하신다


    1. 남쪽 유다왕국의 제 9대 왕으로 B. C. 800-783년까지 통치하였다.
    2. 아버지 요아스 왕이 신하들에 의해 피살당하자(왕하 12:20-21) 25세의 나이로 즉위하여 왕권을 확립하고,아버지를 살해한 신하들을 처형하였다.
    3. 그러나 모세의 율법에 따라(신 24:16 그 자녀들은 죽이지 않았다(왕하 14:1-6).
    4. 그는 에돔 정복을 계획하고 북 이스라엘군 십만 명을 보충 고용하였다가 한 선지자의 충고를듣고 그들을 다시 돌려보낸 후 유다의 군대만으로 에돔을 정복하였다(대하 25:5-11).
    5. 전쟁에 승리한 아마샤는 에돔의 신들을 예루살렘에 가지고 들어왔고, 이 일로 하나님의 진노를 사서 멸망을 선고받았다(대하25:1416).
    6. 에돔에 대한 승리로 고무된 아마샤는 북 이스라엘의 요아스에게 도전하였다가 크게 실패하였고,전 쟁 도중 벧세메스에서 요아스에게 생포되었다가 왕궁과 성전의 보물을 전리품으로 빼앗기고 석방되었다.
    7. 그 후 아마샤는 요아스보다 15년을 더 살았으나 내란에 의해 라기스로 도망쳤다.
    그러나 반역 음모를꾸민 신하들에 의해 살해되었고 예루살렘에서 장사되었다(왕하 14:8-14,17-20; 대하 25:1-27),
    8. 역대기 기자는 그의 비운이 여호와를 떠난 것과 회개할 기회가 여러 번주어졌음에도 불구하고 회개하지 않은 죄악 때문인것으로 설명하고 있다(대하25:1-27).

    웃시야(Uzziah) : 나의 힘은 여호와

    아사랴라고도 불린 유다 왕.
    아마샤가 아내 여골리야를 통해 얻은 아들인 웃시야는 52년 동안(기원전 829-778년) 통치한 것으로 여겨진다.
    이 기간 동안 여로보암(2세), 스가랴, 살룸, 므나헴, 브가히야, 베가가 연이어 북쪽 왕국을 통치하였다.
    (왕하 15:1, 2, 8, 10, 13, 14, 17, 23, 25, 27; 대둘 26:3)
    예언자 이사야(1:1; 6:1), 호세아(1:1), 아모스(1:1)가 웃시야와 동시대 사람들이었으며, 아마 요엘도 그러했을 것이다.
    이 왕의 통치 기간에 대단히 큰 지진이 있었다.—슥 14:5.

    그의 아버지가 죽은 뒤에, 16세 된 웃시야는 유다 백성에 의해 왕이 되었다. (왕둘 14:21; 대둘 26:1) 하지만 열왕기 둘째 15:1에 의하면 웃시야는 이스라엘 왕 여로보암(2세) 제27년에 왕이 되었다. 그렇다면 웃시야의 아버지가 죽고 나서 대략 12년이 지난 후에 웃시야의 통치가 시작된 것이 되므로, 이것은 그가 특별한 의미에서 ‘왕이 된’ 것을 가리키는 것임에 틀림없다. 여로보암 왕 제27년에 두 지파 유다 왕국이 북쪽 왕국에 복종하던 상태에서 벗어났을 가능성이 있다. 아마 그 복종하던 상태는 이스라엘 왕 여호아스가 웃시야의 아버지 아마샤를 쳐부수었을 때 시작되었을 것이다. (대둘 25:22-24) 따라서 웃시야가 이스라엘 왕 여로보암(2세)의 지배에서 벗어났다는 의미에서 두 번째로 왕이 된 것일 가능성이 있다.

    웃시야는 “여호와의 눈에 올바른” 일을 행하였다. 이것은 주로 그가 스가랴(더 후기에 살았던 같은 이름을 지닌 예언자가 아님)라는 사람의 훌륭한 교훈에 청종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의 신민들은 계속 산당에서 부당한 희생을 바치고 있었다.—왕둘 15:3, 4; 대둘 26:4, 5.

    웃시야는 여호와의 도움으로 얻은 군사적 성공 때문에 유명해졌다. 그는 엘랏(엘롯)을 유다 왕국에 회복시키고 아카바 만의 맨 끝에 위치해 있는 그 도시를 재건했다. 그는 블레셋 사람들과의 전쟁에서 승리하여 가드와 야브네와 아스돗의 성벽을 허물었으며, 그다음에 아스돗 지방에 도시들을 세웠다. 웃시야는 아라비아 사람들과 므우님 사람들에게 승리를 거두었으며, 암몬 사람들이 유다에 조공을 바치게 만들었다. 그의 막강한 중무장 군대는 부계 가문들의 우두머리들 2600명의 지휘 아래 있는 30만 7500명의 병사로 이루어지게 되었다. 웃시야는 예루살렘의 방비를 한층 더 강화하고 그곳에 전쟁 장비들을 세웠다.—왕둘 14:22; 대둘 26:2, 6-9, 11-15.

    이 왕은 또한 농사와 목축에도 관심이 많았다. 웃시야는 가축 떼에게 물을 충분히 공급하기 위해 많은 저수조를 깎아 팠으며, 광야에 망대들을 세웠는데, 이것은 풀을 뜯는 가축 떼와 양 떼를 약탈자들로부터 보호하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농사와 포도 재배 작업이 그의 지시 아래 산지와 갈멜에서 수행되었다.—대둘 26:10.

    웃시야는 여러 차례 눈부신 성공을 거둔 결과 거만해져서 성전의 ‘성소’를 침범하여 분향하려고 할 정도까지 이른 것 같다. 대제사장 아사랴는 80명의 보조 제사장들을 거느리고 즉시 왕을 따라 성전에 들어가서 이 불법적인 행동에 대해 그를 질책하며 신성한 곳에서 떠나라고 촉구하였다. 웃시야가 분향용 향로를 손에 들고 제사장들에게 격노할 때, 기적에 의해 그의 이마에 나병이 생겼다. 그래서 제사장들은 황급히 그를 성전 밖으로 인도했다. 웃시야는 부정한 나병 환자가 되었으므로, 신성한 곳에서 그 어떤 숭배도 드릴 수 없게 되었으며, 왕의 직무도 수행할 수 없었다. 그래서 웃시야는 죽는 날까지 한 집에 머물렀으며, 그동안 그의 아들 요담이 국사를 처리했다.—대둘 26:16-21.

    그의 죽음과 장사와 관련하여, 역대기 둘째 26:23은 이렇게 알려 준다. “마침내 웃시야가 그 조상들과 함께 눕자, 사람들이 그를 그의 조상들과 함께 장사지냈으나, 왕들에게 속한 매장지의 땅에 장사지냈으니, 사람들이 말하기를 ‘그는 나병 환자이다’라고 하였던 것이다.” 이것은  웃시야가 나병 때문에 바위를 깎아 판 무덤에 안치된 것이 아니라 왕실 묘지에 인접한 들판에 장사되었음을 의미할 가능성이 있다.

    예루살렘에서 발견되었고 기원 1세기의 것으로 여겨지는, 석회암으로 된 한 판에는 다음과 같은 글이 새겨져 있다. “유다 왕 웃시야의 뼈가 이곳으로 운반되었다. 열어서는 안 된다.”—1권, 960면 사진.



    요담(Jotham) : 여호와는 완전하시다, 여호와는 정직하시다 

    유다의 제11대 왕(BC 740년경
    ~ BC 736 년)

    요탐이라고도 한다.
    요담(יותם,  Ιωθάμ) 
    하나님의 눈에 드는 옳은 일만 한 왕이었다.

    웃시야 + 여루사<사독의 딸> = 요담

    아버지 웃시야가 하는 그대로 하나님을 섬겼으나 아버지와는 달리 성전에는 들어가지 않았다.
    그리고 백성들은 여전히 타락해 있었다.

    요담은 성전에 '윗대문'을 세웠고 오펠의 성벽 위에 많은 것을 지었으며 유다의 산악 지방에도 성읍들을 세우고 산림 지대에 성채들과 탑들을 세웠다.
    또한 암몬군과도 싸워 승리해 암몬에게서 은 100달란트와 밀 10000코르, 보리 10000코르를 바쳤다.
    암몬은 두 번째 해에도 세 번째 해에도 같은 양을 가져왔다.
    이렇게 요담은 하나님을 굳건하게 섬겨 강해졌다.


    여담으로 상당히 늦둥이 아들이다.
    아버지인 웃시야가 16세에 즉위해 52년간 재위했다고 하는데 그럼 68세에 사망한 것이다.
    그런데 이 때 요담은 25세였으니 웃시야가 43세일 때 요담이 태어난거다.
    요즘 기준으로도 늦둥이에 속하지만 당시로 치면 거의 할아버지와 손자뻘 나이 차이다.


    열왕기하 15:32-33
  • 이스라엘 왕 르말랴의 아들 베가 이년에 유다 왕 웃시야의 아들 요담이 왕이 되니.
  • 위에 나아갈 때에 나이 이십 오세라 예루살렘에서 십 륙년을 치리하니라 그 모친의 이름은 여루사라 사독의 딸이더라.

    아버지 웃시야가 율법을 어기고 성전에서 분향하려다 하나님의 징계를 받아 나병을 얻게되었는데, 그 이후 왕자 요담이 아버지 대신 왕의 역할을 수행했고, 웃시야가 죽고 난 뒤 25세부터 나라를 본격적으로 다스렸다.
  • 요담이 그 부친 웃시야의 모든 행위대로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히 행하였으나 여호와의 전에는 들어가지 아니하였고 백성은 오히려 사악을 행하였더라
  • 저가 여호와의 전 윗문을 건축하고 또 오벨성을 많이 증축하고
  • 유다 산중에 성읍을 건축하며 수풀 가운데 견고한 영채와 망대를 건축하고
  • 암몬 자손의 왕으로 더불어 싸워 이기었더니 그 해에 암몬 자손이 은 일백 달란트와 일만석과 보리 일만석을 드렸고 제 이년과 제 삼년에도 암몬 자손이 그와 같이 드렸더라


  • 요담이 그 부친 웃시야의 모든 행위대로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히 행하였으나 여호와의 전에는 들어가지 아니하였고 백성은 오히려 사악을 행하였더라
  • 저가 여호와의 전 윗문을 건축하고 또 오벨성을 많이 증축하고
  • 유다 산중에 성읍을 건축하며 수풀 가운데 견고한 영채와 망대를 건축하고
  • 암몬 자손의 왕으로 더불어 싸워 이기었더니 그 해에 암몬 자손이 은 일백 달란트와 일만석과 보리 일만석을 드렸고 제 이년과 제 삼년에도 암몬 자손이 그와 같이 드렸더라

  • 역대하 26:16-23

    저가 강성하여지매 그 마음이 교만하여 악을 행하여 그 하나님 여호와께 범죄하되 곧 여호와의 전에 들어가서 향단에 분향하려 한지라
    제사장 아사랴가 여호와의 제사장 용맹한 자 팔십인을 데리고 그 뒤를 따라 들어가서
    웃시야왕을 막아 가로되 웃시야여 여호와께 분향하는 일이 왕의 할바가 아니요 오직 분향하기 위하여 구별함을 받은 아론의 자손 제사장의 할바니 성소에서 나가소서 왕이 범죄하였으니 하나님 여호와께 영광을 얻지 못하리이다
    웃시야가 으로 향로를 잡고 분향하려 하다가 노를 발하니 저가 제사장에게 노할 때에 여호와의 전 안 향단 곁 제사장 앞에서 그 이마에 문둥병이 발한지라
    대제사장 아사랴와 모든 제사장이 왕의 이마에 문둥병이 발하였음을 보고 전에서 급히 쫓아내고 여호와께서 치시므로 왕도 속히 나가니라
    웃시야왕이 죽는 까지 문둥이가 되었고 문둥이가 되매 여호와의 전에서 끊어졌고 별궁에 홀로 거하였으므로 그 아들 요담이 왕궁을 관리하며 국민을 치리하였더라
    이 외에 웃시야의 시종 행적은 아모스의 아들 선지자 이사야가 기록하였더라
    웃시야가 그 열조와 함께 자매 저는 문둥이라 하여 열왕의 묘실에 접한 땅 곧 그 열조의 곁에 장사하니라 그 아들 요담이 대신하여 왕이 되니라.

    역대하 27:2-9

  • 요담이 그 부친 웃시야의 모든 행위대로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히 행하였으나 여호와의 전에는 들어가지 아니하였고 백성은 오히려 사악을 행하였더라
  • 저가 여호와의 전 윗문을 건축하고 또 오벨성을 많이 증축하고
  • 유다 산중에 성읍을 건축하며 수풀 가운데 견고한 영채와 망대를 건축하고
  • 암몬 자손의 왕으로 더불어 싸워 이기었더니 그 해에 암몬 자손이 은 일백 달란트와 일만석과 보리 일만석을 드렸고 제 이년과 제 삼년에도 암몬 자손이 그와 같이 드렸더라.
    요담이 그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정도를 행하였으므로 점점 강하여졌더라
    요담의 남은 사적과 그 모든 전쟁과 행위는 이스라엘과 유다 열왕기에 기록되니라
    요담이 위에 나아갈 때에 나이 이십 오세요 예루살렘에서 치리한지 십 륙년이라
    저가 그 열조와 함께 자매 다윗성에 장사되고 그 아들 아하스가 대신하여 왕이 되니라

  • 그는 성전 윗문을 세우고,
    오벨의 성벽을 세우고 많은 도시와 망대를 세우는 등 건축 공사를 일으켰다.
    또한 암몬 족속과 싸워이겨 그들로부터 조공을 받기도 하였다.
    그리고 그는 하나님 보시기에 선한 일을 행하였지만, 백성들이 우상숭배하는 것을 완전히 막지는 못했다.

    이 무렵에 아람왕과 북 이스라엘 왕국의 베가 왕이 공격해 왔다.

    열왕기하 15:37
    그 때에 여호와께서 비로소 아람르신르말랴의 아들 베가를 보내어 유다를 치게 하셨더라.

    그는 죽어서 다윗성에 장사되었고, 그의 아들 아하스가 왕위를 계승했다.

    이 시기에 활약한 선지자들 /  이사야, 호세가, 미가

    이사야 1:1
    유다 왕 웃시야와 요담아하스와 히스기야 시대에 아모스의 아들 이사야가 유다와 예루살렘에 대하여 본 이상이라.

    호세아 1:1웃시야와 요담아하스와 히스기야가 이어 유다 왕이 된 시대 곧 요아스의 아들 여로보암이 이스라엘 왕이 된 시대에 브에리의 아들 호세아에게 임한 여호와의 말씀이라.

    미가 1:1
    유다 열왕 요담아하스와 히스기야 시대에 모레셋 사람 미가에게 임한 여호와의 말씀 곧 사마리아와 예루살렘에 관한 묵시라.

    종교개혁의 5대 슬로건

    1. 오직 성경(Sola Scriptura) :
      성경은 하나님의 영감으로 기록된 권위 있는 말씀이며 기독교 교리의 유일한 원천이다.
    2. 오직 은혜(Sola Gratia) :
      구원은 오직 은혜로, 값없이 주어지는 하나님의 선물이다.
    3. 오직 믿음(Sola Fide) :
      사람의 행위나 선행이 아닌,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는다.
    4. 오직 예수(Solus Christus) :
      세상 모든 죄인들이 죄 사함을 받고 구원을 받아 천국에 이르는 길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밖에 없다.
    5. 오직 하나님께만 영광(Soli Deo Gloria) :
      하나님의 영광만이 최고의 권위를 지니며 우리의 신앙과 삶의 유일한 표준이다.












    요담은 성전에 들어가지 않았다.
    그 이유는 아버지 웃시야가 제사장만이 들어갈 수 있는 성전에 분향하려다가 하나님의 진노하심으로 웃시야를 나병으로 징계하셨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요담은 성전에 함부로 들어가지 않았다는 의미라고 하겠습니다.



    경건하다고 인정을 받는 어떤 교인이 카톡의 메시지를 받고 이런 말을 합니다.
    "왜 갑자기 목사님께서 정치적인 발언을 합니까?"

    목사는 정치적인 발언을 하면 안된다는 성경의 교훈이 있는지 확인해보셨나요?
    구약의 선지자들은 왕과 제사장이 잘못할 때는 엄하게 꾸짖기도 하고 심지어 하나님의 징계를 받을 것이라고 선포했습니다.
    문제는 국민소득이 점점 더 높아지면서 설교자들의 메시지는 번영, 축복, 건강을 강조하므로 신앙의 본질에서 벗어났습니다.
    이러한 설교에 길들어져 있으므로 꾸짖거나 죄에 대한 설교는 부작용을 일으키고 있습니다.

    요담(요람)은 남 유다 왕국의 11대 왕이었습니다.
    16년 동안 통치할 때 그 시기를 역사가들은 "좋았다" 라고 평가합니다.


    요담(Jotham)

    출생과 배경 :
    요담은 유다 왕 웃시야(아사랴)의 아들로 태어났다(열왕기하 15:32).
    그의 어머니는 사독의 딸 여루사(열왕기하 15:33)

    웃시야 + 여루사(사독의 딸) = 요담

    왕위 계승 :

    요담은 그의 아버지 웃시야가 문둥병에 걸려 격리된 후, 실질적으로 유다 왕국을 다스리기 시작했다(열왕기하 15:5, 2)
    그는 공식적으로 왕위에 올라 유다를 통치했습니다(역대하 26:21)

    통치와 업적(열왕기하 15장, 역대하 27장)

    즉위와 통치:

    요담은 25세에 왕위에 올라 16년 동안 유다를 통치했다(열왕기하 15:33)
    그는 아버지 웃시야처럼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하게 행하며, 하나님을 신실하게 섬겼습니다(열왕기하 15:34, 역대하 27:2)

    성전 수리와 건축

    요담은 성전 윗문을 건축하고, 오벨 성벽을 크게 수리했다(역대하 27:3)
    그는 유다 전역에 여러 성읍과 요새를 건축하여 유다 왕국의 방어력을 강화했다(역대하 27:4)

    군사적 업적 :

    요담은 암몬 자손들과 전쟁을 벌여 승리하였다.
    그는 암몬 자손들에게 조공을 받아 유다의 부를 증가시켰다(역대하 27:5)
    그의 통치 기간 동안 유다는 상대적으로 평화롭고 번영한 시기를 경험했다.

    신앙과 순종 :

    요담은 하나님 앞에서 정직하게 행하며, 그의 모든 길에서 하나님을 따랐다(역대하 27:6)
    그의 신앙과 순종은 유다 왕국의 안정과 번영을 가져왔다.

    요담의 죽음과 후계자(열왕기하 15장, 역대하 27장)

    요담의 죽음 :

    요담은 16년간의 통치를 마치고 죽었으며, 다윗 성에 묻혔다(열왕기하 15:38, 역대하 27:9)
    그의 아들 아하스가 왕위를 계승했다(열왕기하 15:38, 역대하 27:9)

    교훈과 적용

    순종과 신실함의 중요성:

    요담의 생애를 통해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신실하게 행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배울 수 있습니다.
    그의 순종과 신실함은 유다 왕국의 안정과 번영을 가져왔습니다.
    이는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신실하게 행할 때, 하나님의 축복과 인도를 받을 수 있음을 일깨워줍니다.

    지도자의 책임과 영향력 :

    요담의 이야기는 지도자가 백성들에게 미치는 영향을 보여줍니다.
    그의 정직하고 신실한 통치는 유다 백성들에게 긍정적인 영향을 미쳤습니다.
    이는 지도자가 올바른 신앙과 도덕적 기준을 지켜야 함을 가르쳐줍니다.

    건축과 군사력 강화의 중요성 :

    요담은 성전과 성읍을 건축하고, 유다 왕국의 방어력을 강화했습니다.
    이는 국가의 안정과 번영을 위한 중요한 요소였습니다.
    이는 우리가 우리의 삶에서 안정과 번영을 위해 기초를 다지고, 하나님의 인도를 따라야 함을 가르쳐줍니다.

    평화와 번영의 시기:

    요담의 통치 기간 동안 유다는 상대적으로 평화롭고 번영한 시기를 경험했습니다.
    이는 하나님의 축복과 인도로 인한 결과였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축복과 인도를 신뢰하고, 평화와 번영을 위해 기도하며 노력해야 합니다.

    요담의 생애와 통치는 유다 왕국의 역사에서 중요한 교훈을 남깁니다.
    그의 순종과 신실함은 유다 왕국의 안정과 번영을 가져왔으며, 그의 정직한 통치는 백성들에게 긍정적인 영향을 미쳤습니다.
    우리는 그의 이야기를 통해 순종과 신앙의 중요성, 지도자의 책임과 영향력, 건축과 군사력 강화의 중요성, 그리고 평화와 번영의 시기에 대해 배울 수 있습니다.







    정도(正道) 헤킨 데라카우(הֵכִין דְּרָכָיו)

    헤킨 1879 / 다쉔(dâshên) דָּשֵׁן
    스트롱번호 1879

    1. 살진.  2. 즙이 많은. 3. 부유한
    발음 [ dâshên ]
    어원 / 1878에서 유래
    구약 성경  /  3회 사용

    • 1. 형용사 살진, 기름진, 비옥한[흙에 대해 사용],사30:23
    • 2. 형용사 즙이 많은, 수액이 많은[나무에 대해 사용], 시92:15(14).
    • 3. 형용사 부유한, 넉넉한[사람에 대해 사용], 시22:30(29).
    • 문법설명  / 복수 דָּשֵׁן, 복수 연계형 דִּשְׁנֵי
    • 관련 성경 /  풍성한(시22:29, 사30:23), 풍족한(시92:14).
    1878.    

    דָּשֵׁן 스트롱번호1878

    1. 살찌다.  2. 피엘형  3. 살찌게 하다
    발음 [ dâshên ]
    구약 성경  /  11회 사용



    데라카우 3559 / 쿤(kûwn) כּוּן
    스트롱번호 3559

    1. 똑바로서다.  2. 세우다  3. 필렐형 כּוֹנֵן
    발음 [ kûwn ]
    구약 성경 / 217회 사용




    요담(Jotham)왕은 25세에 왕이 되어 16년 동안 다스렸다고 했습니다. 실은 요담왕은 15세에 왕이 되어 20년 동안 다스렸고 35세에 죽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부왕 웃시야왕이 성전에서 분향을 하다가 하나님의 징계로 문둥병(나병)이 걸려 별궁에 거했습니다. 그래서 아들 요담을 왕으로 세우고 섭정을 하다가 10년 후에 죽게 되었습니다. 그 다음에 요담왕이 25세에 왕이 되어 혼자서 6년 동안 나라를 다스렸습니다. 그러다가 아들 아하스를 왕으로 세워 4년 동안 섭정을 하다가 죽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요담왕이 왕으로 있었던 전체 년 수는 20년이었고 왕위에 오른 때로부터 아들을 왕으로 세운 때까지는 16년이었고 부왕과 아들을 배제하고 순수하게 혼자 나라를 다스린 기간은 6년에 해당된 셈입니다.   

     

      한편 요담왕은 부왕 웃시야왕의 모든 행위대로 행하지 않았고 하나님 보시기에 정직하게 행했으나 하나님의 성전에는 들어가지 않았다고 했습니다 (2절). 하나님 보시기에 정직하게 행했으나 하나님의 성전에는 들어가지 않았다는 '정직히 행하였으나~'라는 한글 표현이 마치 뒤에 이어지는 하나님 성전에 들어가지 않은 것이 잘못된 것처럼 느껴집니다. 하지만 사실은 하나님 성전에 들어가지 않은 것을 잘한 것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히브리어 '라크'(רק)라는 부사는 '단지' '오직' '조차'의 뜻을 가지고 있는데 여기에서는 '조차'의 의미로 이해해야 합니다. 

    רַק 스트롱번호7535
    1.

    오직

    2.

    단지 ~조차

    3.

    ~뿐

    발음 [ raq ]
    구약 성경
    108회 사용
    • 1.
      부사 오직, 단지, 창47:22,삿14:16, 삼상1:13, 대하28:10, 욥1:15, 암3:2.
      • a.
        부사 단지 ~조차, ~제외하고, 수11:22, 왕하17:18, 대하5:10.
      • b.
        부사 ~뿐, 신4:6, 왕상14:8.
      • c.
        부사 확실히, 분명히, 창20:11.
    רַק 스트롱번호7534
    1.

    여윈

    2.

    마른

    3.

    창41:19

    발음 [ raq ]
    어원
    7556에서 유래
    구약 성경
    3회 사용
    • 1.
      형용사, 여성 여윈, 마른, 창41:19, 20,27.

    연관 단어

    • 관련 성경
      ☞파리한(창41:19,20,27).


    신앙생활의 정도(正道) 

    시편 119:97-105, 로마서 13:11, 고린도전서 10:31, 이사야 45:22, 마가복음 16:15

    모든 삶에는 바를 정(正), 길 도(道) : 정도(正道)바른 길, 의(義)의 길이 있고,
    그릇 오(誤), 길 도(道) : 오도(誤道)잘못된 길, 죄악의 길이 있다.

    예수를 믿고 신앙생활 정도(正道)의 삶을 살면서 하나님을 믿는 신앙이 우리 자신후손에게 위대한 축복과 영향을 가져다준다.

    미국의 두 사람의 예를 들어보겠다.

    그 시대에 한번 날까, 말까한 하나님의 귀한 종 조나단 에드워즈 목사님후손 1,394명
    또 다른 사람, 불신자, 형편없는 사람, 깡패, 불량배 맥스 주크(Max Juke)의 후손 두 사람이 일생을 살다가 죽었다.903명.

    그 후에 사회학자가 조나단 에드워즈 목사님의 후손 1,394명을 조사했다.

    부통령 1명, 상원의원 3명, 국회의원 다수, 외교관 다수, 주지사 3명, 시장 3명, 군대장교 75명,

    대학 총장 13명, 대학 교수 54명, 의사 90명, 변호사 60명, 판사 39명, 책을 쓰는 저자 32명,

    목사와 선교사 200명, 성공적인 농부 300명이 되었다.

    불량자 맥스 주크의 후손 903명도 조사했다.

    310명의 거지, 300명의 범법자, 145명의 술주정뱅이, 70명의 살인자, 285명 매독 보균자,

    90명의 창녀, 100명의 교도소 재소자. 단 20명만이 직업기술을 배웠는데, 그 중 10명은 교도소에서 배웠다.

    이와 같이 오늘 우리가 신앙을 가졌다고 하는 것이 당대(當代)뿐만 아니라 후손들에게도 지대한 영향을 준다는 사실을 명심(銘心)하며 믿음 생활을 바르게 해야 할 것이다.

    기독교는 예수님의 재림을 믿는다.

    세상의 마지막종말이라고 한다.
    예수님 재림의 를 세상의 마지막이라고 말한다.
    두 가지 종말이 있다.
    개인의 종말세상의 종말이 있다.
    세상의 마지막 때말세라고 한다.

    디모데후서 3:1
    네가 이것을 알라 말세에 고통하는 때가 이르리니.
    But mark this: There will be terrible times in the last days.

    말세에는 여러 가지 사건이 일어난다고 하며, 우리가 말세에 굳건한 신앙을 소유하지 못한다면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우리는 신앙을 잃어버릴 수도 있다는 말이다.

    누가복음 18:8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속히 그 원한을 풀어 주시리라 그러나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 하시니라.
    I tell you, he will see that they get justice, and quickly. However, when the Son of Man comes, will he find faith on the earth?


    (눅 18:1) 예수님도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 고 염려하셨다.

    그리고, 말세에는 적그리스도가 나타난다고 했다.

    (마 24:24) 거짓 그리스도들거짓 선지자들이 일어나 큰 표적기사를 보이어

    할 수만 있으면 택하신 자들도 미혹하게 하리라

    (딤후 3:5)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부인하는 자니,

    이같은 자들에게서 네가 돌아서라.

    (롬 13:11) 너희가 이 시기를 알거니와 자다가 깰 때가 벌써 되었으니

    이는 이제 우리의 구원이 처음 믿을 때보다 가까왔음이니라.

    이 시간 우리가 천국 장막을 제치고 3사람을 이 강단에 모시고 와서

    신앙이 무엇이냐?고 질문한다면 :

    1) 첫째로 모세를 모시고 싶다.

    당신은 신앙의 정의를 어떻게 내리겠습니까? 라고 질문한다면 :

    모세는 이렇게 대답하 것이다.

    (히 11:24-26) 믿음으로 모세는 장성하여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 칭함을 거절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받기를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더 좋아하고,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능욕을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겼으니 이는 상주심을 바라봄이라

    2) 둘째로 세례요한을 모시고 싶다.

    당신은 신앙의 정의를 어떻게 내리겠습니까? 라고 질문한다면 :

    (요 3:30) 예수님, 그는 하여야 하겠고 나는 하여야 하리라

    셋째로 사도 바울을 모시고 싶다.

    그가 전에는 예수를 핍박하던 사람이었으나, 예수님을 만나고 180도 변화된 다음에 순교하여 죽기까지 복음을 전한 분이시다.
    사도 바울에게 당신이 생각하는 [신앙이 무엇이냐?] 고 묻는다면 :

    빌립보서 1:21
    이는 내게 사는 것그리스도죽는 것유익함이니라.
    For to me, to live is Christ and to die is gain.

    로마서 14:8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라.
    If we live, we live to the Lord; and if we die, we die to the Lord. So, whether we live or die, we belong to the Lord

    고린도전서 10:31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
    So whether you eat or drink or whatever you do, do it all for the glory of God.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


    정말, 우리가 가져야 할 올바른 신앙은 어떤 신앙(信仰) 인가요?

    물론,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말미암아 값없이 구원을 받으므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

    구원은 우리의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주신 하나님의 선물이다.

    구원은 하나님이 주시는 선물이지만, 신앙생활은 성령님의 도우심을 받아서

    내가 해야 되는 것이다. 가만히 앉아서 신앙이 성장할 수 없다.

    이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 우리가 신앙생활바르게 해 나가기 무엇보다도 시간 관리를 잘해야 한다.

    시간을 드리지 않고, 하나님을 올바르게 섬길 수 없다.

    시간을 내서 하나님을 섬기는 신앙을 가져야만 올바른 신앙생활을 할 수 있다.

    그렇지 않으면, 사탄은 세속주의를 이용해서 우리의 눈과 귀를 흐리게 해서

    신앙을 흔들어 놓고, 신앙생활을 올바르게 하지 못하게 만들 것이다.

    하루 하루의 삶이 매우 바쁘게 지나가고 있다.

    예수 믿는다는 것은 나에게 주신 평생의 시간을 하나님을 위하여 올바르게 사용하는 것이다.

    하나님께 시간 드리는 것이 정말 중요한 헌신이다.

    ★ 그래서 올바른 신앙생활을 위해서는 먼저, 주님께 우리의 시간을 드려야 한다.

    1) 시간을 내서 성경 말씀 보는 신앙생활을 해야 한다.

    (계 1:3) 이 예언의 말씀읽는 자듣는 자와 그 가운데 기록한 것을 지키는 자들이 이 있다

    (시 119:98-105) 하나님의 말씀은 나를 원수보다도, 스승보다도, 노인보다도 지혜롭고,

    명철하게 하고, 주의 말씀은 어두운 세상의 이요, 내 발의 이 된다고 했다.

    (히 4:12) 하나님의 말씀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죄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하나니...

    (롬 10:17) 믿음들음에서 나며 들음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

    (벧전 2:2) 갓난아이들같이 순전하고 신령한 사모하라

    이는 이로 말미암아 너희로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게 하려 함이라

    (시 119:105) 주의 말씀이요 이니이다 고 했는데,

    시간 내서 하나님 말씀을 보지 않고 신앙생활을 한다는 것은 새빨간 거짓말이다.

    우리 아이들 초등학교 학생일 때, 어떻게 하면 성경을 보게 할까?

    궁리한 끝에 성경 1장 보는데 1불 줄게 그랬더니,

    하루 지나 20장 읽었다고 20불 내놓으랍니다.

    2틀 지나 30장 읽었다고 30불 내놓으랍니다. 1장 보는데 1불이다.

    내가 Bank of America 은행의 돈을 다 빌려오고, 생명 보험의 돈을 다 빌려와도

    너희들이 성경을 읽는다면 성경 1장 볼 때마다 1불씩 주겠다.

    (단, 중학교 3학년까지만) 그래서 아이들이 1불씩 얻는 재미에 성경 읽었다.

    목사 아버지가 아이들에게 돈 1불씩 주면서 성경을 읽게 한 것은 적어도:

    성경을 읽는 동안에 예수님발견하고,

    성경을 읽는 동안에 예수님성품을 발견하고,

    성경을 읽는 동안에 겸손마음이 되고,

    성경을 읽는 동안에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성경을 읽는 동안에 하나님의 을 발견하고,

    성경을 읽는 동안에 지혜를 얻고,

    성경을 읽는 동안에 거룩해지고,

    성경을 읽는 동안에 하나님의 자녀로서 성장하기를 바래서

    목사 아버지의 심정으로 1불씩 주면서 읽게 한 것은 잘 한 일이라고 생각된다.

    (시 119:72) 주의 입의 이 내게는 천천 금은보다 하니이다.

    (시 19:11) 주의 종이 이로 경계를 받고 이를 지킴으로 이 크니이다

    성경이 얼마나 많은 사람들에게 큰 영향력을 주었습니까?

    영국의 시인 죤 밀톤은 창세기에 감동을 받아 실낙원 12권을 썼다.

    이태리 시인 탄테는 성경의 영향을 받고 불후의 대작 신곡을 썼다.

    영국의 세익스피어, 불란서의 위고, 러시아의 톨스토이... 등등

    그들의 사상과 문장에 이르기까지 성경의 지대한 영향을 받았다는 것을 잘 안다.

    인류 구원의 역사도 성경에 있다.

    불란서의 종교 개혁가 요한 칼빈이사야 53:5을 읽으면서 :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그가 이 말씀을 통해 예수님영접하고 구원받았다.

    영국의 대 설교가 스펄쳔 목사님 :

    (사 45:22) 땅 끝의 모든 백성들아 나를 앙망하라 그리하면 구원을 얻으리라.

    나는 하나님이라. 다른 이가 없음이라

    리빙스턴 선교사는 :

    (행 16:31) 주 예수믿으라 그리하면 네 집구원을 얻으리라

    종교 개혁가 마르틴 루터는 :

    (갈 3:11) 하나님 앞에서 아무나 율법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되지 못할 것이 분명하니

    이는 의인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하였음이니라

    나의 경우는 (요 5:24) 말씀으로 구원의 확신을 갖게 되었다.

    (요 5:24)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빅토리아 여왕은 영국을 발전시킨 비결은 성경에 들어 있다고 하면서

    아프리카 추장에게 성경을 선물로 주었다.

    엘리자베스 여왕은 대 영국 제국의 영토는 버려고 성경은 버릴 수 없다.

    미국 초대 대통령 죠지 워싱턴성경 없이 백성을 올바로 다스릴 수 없다.

    맥아더 장군은 내가 잠자리에 들기 전에 성경 1장을 읽지 않고는 잠자지 않는다고 했다.

    이럴 때 이런 성경을 보시기 바랍니다.

    낙심되면 시편 23편을 보세요,

    고난이 닥치면 시 103편을 보시고,

    질병고통이 있으면 시 91편을 읽으시고,

    소망이 사라지면 롬 8장을 보시고,

    들 때 이사야 40장을 묵상하시고,

    을 당했을 때 고전 15장을 읽으시고,

    사업에 실패했을 때는 시 37편,

    믿음이 식어질 때는 계시록 3장,

    남에게 공격을 당할 때 시 27편

    를 지었을 때는 요일 1장,

    궁핍할 때는 빌 4장을 읽으시기 바랍니다.

    ⑫ 지혜가 부족하면 잠언을 읽어보세요.

    말세에 우리가 바른 신앙생활을 할 수 있는 것은 시간을 내서 말씀을 읽고,

    말씀 안에 거할 때 우리들은 신앙생활정도(正道) 바른 길을 가게 된다.

    2) 시간을 내서 기도하는 신앙생활을 해야 한다.

    시간 내서 기도 생활을 하지 않으면 올바른 신앙생활을 할 수 없다.

    기도 없는 신앙생활은 껍데기 신앙생활이요, 힘없는 신앙이다.

    기도는 아침의 열쇠요 저녁의 잠을 쇠이다.

    (약 5:16) 의인간구는 역사하는 많으니라

    (살전 5:17) 쉬지 말고 기도하라

    우리는 기도할 때 하나님역사경험할 수 있다.

    기도는 모든 어려운 문제를 해결하는 마스터 열쇠와 같다.

    문제는 우리가 시간을 내서 기도하는 신앙생활을 해야 한다.

    기도에는 위대한 이 있다.

    6.25 전쟁 당시, 38선에서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다.

    철원 근처에서 산등성 하나 놓고 UN 군은 이쪽에서, 공산군은 저쪽에서 미군 사병이

    에 맞아 쓰러져 흘리고 있다.

    Help me, Help me...도와 주세요, 살려달라고 외치고 있었다.

    적탄이 비오듯이 날아오니 누구 하나가서 구조해 줄 사람이 없다.

    그런데 어떤 사병 하나가 시계를 보고 있다가 9시 정각이 되니까 갑자기 달려가서

    그를 데리고 와서 응급 치료하고 살려냈다.

    최고 선임자가 물었다.

    자네는 어떻게 가만히 있다가 시계를 보고 있다가 9시가 되니까,

    담대히 가서 죽어가는 병사를 데리고 왔느냐?고 물었다.

    상사님 ! 제가 고향을 떠나 올 때 어머니가 제 손목을 붙잡고 하시는 말씀이

    매일 아침 9시가 되면 기도해 줄 테니 안심하고 전쟁터에 다녀오너라는 어머님의 말씀을

    믿고 다녀 왔습니다. 9시에 기도 해주시는 어머니의 기도를 믿고 데리고 왔습니다.

    기도가 이렇게 위력이 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

    ① 마르틴 루터의 기도가 종교 개혁을 이루었고,

    ② 요한 웨슬레의 기도가 감리교를 창설했고,

    ③ 모세의 기도가 홍해 바다를 갈라 놓았고,

    ④ 여호수아의 기도가 여리고 성을 무너뜨렸고,

    ⑤ 다윗의 기도가 항상 하나님도우심을 받게 했고,

    ⑥ 엘리야의 기도가 하늘에서 이 떨어지게 했고,

    ⑦ 다니엘의 기도가 사자의 입을 봉했고,

    ⑧ 바울의 기도가 옥문을 흔들었고,

    ⑨ 존 낙슨의 기도가 메리 여왕을 떨게 했고,

    ⑩ 죠지 뮬러의 기도가 고아원을 세웠고,

    ⑪ 한나의 기도가 사무엘을 얻었고,

    ⑫ 히스기야의 기도가 15년의 생명을 연장했고,

    ⑬ 마가 다락방120문도의 기도가 성령강림을 맞이했다.

    무디 목사님17세에 구두 수선공으로 일했다.

    누가 예수 믿으라고 전도해서 예수 믿고 교회 나가게 되었다.

    예수 믿고 나니, 너무 기쁘고 즐거워서 주일학교 교사 하겠다니까 성경학교 안 나왔다고

    해서 시키지 않았다. 웬만한 사람 같으면 실망하고 그만두었을 텐데 무디는 실망하지 않고

    에 올라가 기도했다. 소나무 붙잡고 기도했다. 바위가 흔들렸다.

    얼마나 성령이 강하게 역사하는지 기도하고 내려와 동네 아이들을 모아 놓고

    성경을 가르치기 시작한지 1년만에 7,000명, 2년 지나 2만명이 되었답니다.

    국민학교 6개월 밖에 못 다닌 무디기도함으로 하나님의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능력의 종으로 일평생 쓰임 받은 것은 이것이 기도의 능력이다.

    미시시피 강에 홍수가 나서 어린 소녀가 발을 동동구르면서 서서 울고 있었다.

    신문 기자가 왜 우느냐?고 물었다.

    늘 아끼고 사랑하던 인형이 떠내려가서 운다.

    그러면? 이번 크리스마스 때 산타 할아버지가 무엇을 갖다 주면 좋겠니?

    집이나, 자동차가 아니다. 자기가 데리고 놀던 인형 하나 보내 주면 좋겠다

    그래서 이 신문기자는 우는 아이의 사진을 찍었다가 크리스마스 임박해서 그 사연을 쓰고

    주소를 적어 신문에 내면서 어느 산타 할아버지가 이 어린 소녀에게 인형 하나 보내 줄

    [산타 크로스]는 없는지요?

    크리스마스가 되니까, 산타 할아버지가 보낸 인형이 무려 8,000개나 되었다.

    산타 할아버지가 8,000개를 보내 줄 수 있었다면 우주를 창조하신 하나님께서

    여러분과 제게 필요한 것을 기도할 때 주실 줄 믿습니다.

    (마 7:7, 11)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

    문제는 시간 내서, 기도해야 한다. 시간 내는 것이 중요하다.

    새벽 미명에 일찍 일어나 경건의 시간(QT)을 갖는 것이 좋다.

    그렇지 않으면 하루 종일 바뻐서 말씀도, 기도도 할 시간 내기가 어렵다.

    그래서, 기도하는 신앙생활 하시기 바랍니다.

    3) 시간을 내서 전도하는 신앙 생활을 해야 한다.

    영혼구원하는 전도는 우리 성도의 지상 최대 과업이다.

    예수님께서 세계 전도(복음화)를 위해서 승천 직전에 유언처럼 부탁하셨다.

    (마 28:18, 막 16:15, 눅 24:47, 요 20:21 행 1:8)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전파하라. (막 16:15)

    이것이 주님의 마지막 유언이요, 마지막 부탁이며, 마지막 명령이며, 마지막 말씀이다.

    얼마나 중요했으면 마지막에 이 말씀을 하셨을까요?

    (딤후 4:2)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말씀을 전파하고, 전도해야 한다.

    (시 126:5-6) 눈물로 씨를 뿌리러 나간 자는 기쁨으로 그 단을 가지고 돌아오리라.

    1963년 11월 22일 텍사스 달라스 어느 거리에서 죤 F. 케네디가 총에 맞어 저격당해 죽었다.

    그런데 불과 2시간만에 전 세계 국민은 죤 F. 케네디, 그가 언제 어디서 어떻게 죽은 사실을

    다 알게 되었다.

    그런데, 여러분 !

    예수님은 2,000년 전에 갈보리 십자가 위에서 인류의 담당하시고, 죽으셨는데,

    아직도 이 소식을 듣지 못한 사람들이 있다는 말인가?

    주님의 재림이 가까웠습니다.

    말세에 우리는 열심히 전도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나팔 소리가 천지를 진동하여 들릴 때, 그 누군가 아직도 믿지 못하고 있는

    사랑하는 남편이나, 자녀, 부모님이나 친척이 있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영원한 지옥 불에 떨어지게 될 것이 아닌가?

    가장 안타깝고 불쌍하고 불행한 일이다.

    지체 말고 눈물호소하고 그 분들을 주님 앞으로 인도해야 할 것이다.

    결론 /
    인도의 지도자 깐디가 이런 말을 했다.
    인도를 망친 것은 영어를 할 줄 아는 인도 사람이 망쳤다고 했다.
    오늘날 기독교를 망친 것은 성경과 찬송가를 끼고 교회에 나오는 사람들이 기독교를 망치고 있다는 것이다.

    구원은 하나님이 거저 주시는 은혜의 선물이다.
    그러나 신앙 생활은 성령님의 도우심을 받아서 내가 해야 되는 것이다.
    특별히 시간을 드려야 한다.시간 내서 성경 읽고,시간 내서 기도 하고,시간 내서 복음을 전하는 신앙생활을 해야 한다.

    ​이것이 신앙 생활의 가장 기본적인 정도(正道) 이다.
    그래서 승리하는 신앙 생활을 하며 살다가 어느 좋은 그 날에 주님이 부르시면 저 좋은 천국에 들어가서 주님과 함께 영생 복락 누리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신앙생활의 정도(正道)  요한복음 6:66~71, 사도행전 20:28 

    항성인 태양의 주위를 도는 행성들은 정확하게 궤도를 따라 운행합니다. 
    바다의 선박이나 하늘의 항공기는 그것들이 통행하는 해로와 공로인 항로를 따라 운항합니다. 
    기차가 철길로만 달리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각종경기엔 경기규칙이 있듯이 정치인에겐 정치철학, 경영자에겐 경영철학, 목회자에겐 목회철학이 있어야 합니다. 
    더욱이 인생에겐 인생살이의 법도가 있는 법이며 성도에겐 신앙생활의 정도가 있는 것이므로 이 궤도를 벗어나지 않도록 항상 주의를 요합니다. 

    나의 생애는 한 번만 전개되므로 회한이 쌓인 실패한 인생이 되지 않겠금 살아야 하고 종교는 지고지선한 것이로되 자칫 중심을 잃고 궤도를 벗어나면 최악의 궁지에 빠질 수 있기에 더욱 정도를 걸음이 중요합니다. 
    현모양처가 무개성하나 남편과 자녀들에겐 최고의 여성, 최선의 주부이며 그 가정으로선 가장 안정성 있는 이상적 주부상이듯이 정도를 걸음은 인생살이나 신앙생활에서 너무 일상적이므로 지극히 단조롭고 무미건조한 것처럼 여겨지나 사실은 개성적이며 파격적인 경우보다 훨씬 안정감 있고 덕성스러운 법입니다. 

    그러므로 저는 어떤 면에서 고지식하다 할 정도로 인생의 삶에서나 신앙생활, 목회생활에서 정도를 걸으며 정석을 놓으려는 입장입니다. 
    순리와 상식, 논리성과 합리성, 신앙면과 윤리면에서 일탈하는 행위란 옳지 않으며 양심에 어긋나며 신앙에 맞지 않고 무책임하므로 할 수 없게 됩니다. 
    그러면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는데 정도를 걸음이란 어떤 입장에 서는 경우를 말함인지 몇 가지로 새겨보고자 합니다. 

    하나님 중심

    우리 기독교는 유일신 하나님을 믿고 경외하며 숭앙하는 종교입니다. 
    십계명 중 제일계명은 하나님 외에 다른 신을 있게 말라는 것입니다. 
    영적 존재이신 하나님의 유형적 표현이 인성을 취하여 세상에 오신 성자(聖子) 예수님이며 누구든지 신인(神人)이신 그를 나의 구주요 하나님의 아들로서 고백하고 영접하면 구원받습니다. 
    이런 확신과 감동과 희열은 보혜사 성령님이 내 안에 임하사 거하시며 항상 나와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신앙생활이란 하나님을 내 안에 영접한 그 순간부터 자아가 왕 노릇하던 자리에 하나님을 나의 왕, 나의 주로 모시고 나는 그 수하의 신민이요 하인으로 자처하며 사는 삶을 말합니다. 
    바울 사도가 롬 14:7, 8에서 “우리 중에 누구든지 자기를 위하여 사는 자가 없고 자기를 위하여 죽는 자도 없도다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한 것처럼 주님이 내 삶의 중심에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삶엔 오로지 하나님께 영광 돌리고 하나님을 찬양함만 있을 뿐입니다. 
    고전 10:31에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 했으며 
    엡 1장에선 성부의 예정과 성자의 구속과 성령의 인침이 모두 성삼위를 찬미케 하려 함이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바울 선생은 항상 하나님의 영광을 인생의 행복보다 우선시 했고 사람을 기쁘게 함보다 하나님을 기쁘게 해 드리려고 했습니다. 

    그는 빌 1:20, 21에서 “나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을 따라 아무 일에든지 부끄럽지 아니하고 오직 전과 같이 이제도 온전히 담대하여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히 되게 하려 하나니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니라”고 했습니다. 

    또 살전 2:4에서 “오직 하나님의 옳게 여기심을 입어 복음 전할 부탁을 받았으니 우리가 이와 같이 말함은 사람을 기쁘게 하려 함이 아니요 오직 우리 마음을 감찰하시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 함이라”했고 

    갈 1:10에서는 “이제 내가 사람들에게 좋게 하랴 하나님께 좋게 하랴 사람들에게 기쁨을 구하랴 내가 지금까지 사람의 기쁨을 구하는 것이었더면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니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신앙생활이란 절대 주권자이신 하나님을 존귀케 하고 그 분을 기쁘시게 해 드리고자 하는 하나님께 영광돌림이 자신의 행복 추구나 사람들의 기호에 맞추려는 입장에 앞서는 것입니다. 마치 지구가 우주의 중심에 있고 태양이 지구를 돈다는 중세의 지구중심 세계관에서 지구가 태양의 둘레를 돌아간다는 태양 중심의 세계관으로 사고의 전환을 가져 왔듯이 코펠닉스적 삶의 전환을 가지는 게 신앙생활의 출발점인줄 인식해야 합니다. 

    성경중심 

    종교개혁은 성경으로 돌아가자는 입장입니다. 중세의 암흑과 미몽으로부터 벗어나는 두 가지 흐름 중 르네상스는 인문주의 운동으로서 이성의 자유, 개성의 해방 등을 추구했다면 종교개혁은 ‘오직 성경’(sola scriptura)을 주장하므로 제도 우선, 전통 우선에서 성경 우선, 말씀 우선으로 전이하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개혁신앙이란 교회도 신학도 오류를 범할 수 있으나 성경은 무오하므로 ‘성경이 무엇을 말하느뇨’라고 성경의 권위에 호소하여 항상 성경대로 바로 잡아져야 한다는 입장입니다. 그러므로 출애굽 때의 이스라엘 백성이 구름기둥 불기둥의 인도를 받았듯이 우리의 신앙생활도 성경이 가는 만큼 나도 가고 성경이 멈추면 나도 멈추어야 합니다. 주경 신학자 박윤선 목사가 강조했듯이 계시의존사색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진보주의자가 되는 것은 성경보다 이성을 앞세우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진화론과 창조론이 마주칠 때 교육받은 자기지성을 성경보다 우위에 두면 진보주의, 자유주의자가 되고 맙니다. 사람들이 신비주의자가 되는 것은 성경보다 체험을 앞세우기 때문입니다. 주관적 체험은 객관적이며 보편타당한 진리로서 성경의 검증을 통해서만 인정되며 그 사실의 공인은 교회가 하게 됩니다. 성경에 부합되지 않는 체험은 탈선이며 성경에 있는 체험은 새 계시가 아니므로 새 계시를 받았다 함은 거짓입니다. 사람들이 세속주의자가 되는 것은 성경보다 정욕을 앞세우기 때문입니다.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는다’는 약 1:15의 말씀처럼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은 말씀의 통제를 받아야 함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명령과 금령을 벗어나 자행자지 하게 됨이 세속주의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앙생활은 반드시 성경의 원칙에 따라야 하고 성경의 권위에 순응해야 합니다. 사도행전에 나타난 교회의 성장과 부흥도 하나님의 말씀이 왕성했다(행 6:7), 흥왕했다(12:24), 흥왕하여 세력을 얻었다(19:20)하므로 말씀으로 이루어진 말씀의 부흥을 말했습니다. 신앙생활에서 말씀의 원칙을 벗어날 때 이는 궤도 이탈입니다. 교의 신학자요 변증학자인 박형룡 목사가 성경원전의 축자영감설에 그렇게 집착했던 까닭도 이것만이 교회의 신앙을 바로 지키는 첩경이었기 때문입니다. 신학은 성경위에 서 있고 교회는 신학체계가 그 성격과 승패를 가름하는 법입니다. 그러므로 항상 성경에 비추어 내가 얼마나 틀렸고 얼마나 빗나갔는지를 바로 알아 교정하므로 원위치를 회복해 나가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하지만 벧후 3:15, 16의 말씀대로 성경을 자의대로 무리하게 풀다가 스스로 멸망에 이르지 않도록 주의할 것이며 그보다는 교회의 도움과 지도를 받아 성경을 이해토록 해야 할 것입니다. 

    성경은 캐논(canon)이란 말 그대로 척도로서 대한예수교장로회 신조 제1조의 표현대로 신앙과 행위의 유일한 법칙인 것입니다. 버나드 램의 표현대로 하면 성경은 카돌릭의 경우 신앙의 제일 기준이지만 보수적 개신교의 입장에선 신앙의 유일기준입니다. 그러므로 어떤 경우에서도 성경의 권위에 호소해야 하고 성경이란 이정표(guide post)를 따라가야 합니다. 

    교회중심  

    우리 기독교는 교회공동체를 통해 그 실체가 인정되고 모든 것이 표현됩니다. 교회는 행 20:28 말씀대로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기관이며 엡 4:15, 16과 고전 12:27 말씀대로 머리되신 그리스도의 몸이요 지체이며 딤전 3:15 말씀대로 진리의 기둥과 터입니다. 그러므로 이 교회를 세우고자 성자 예수께서 속죄 피를 흘리셨고 그 일 때문에 구원받은 성도들로 이루어졌고 세상 끝 날까지 교회가 할 일은 예배와 교육과 친교와 봉사와 선교입니다. 만유 주 하나님께 최선의 예배를 드리고 말씀의 교육을 통해 훈련받고 형제자매로서 성도의 교제를 강화하고 주님 정신 받들어 힘써 봉사하고 하늘나라 확장을 위해 열심히 전도함인 것입니다. 

    부름 받은 성도의 공동체로서 교회가 아직은 불완전하고 흠과 결함이 많을지라도 주님께서는 이 교회를 그의 몸이요 신부로서 끔찍히 사랑하시며 또한 이 교회를 통하여 당신의 뜻을 이루려 하신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구약의 창 1장과 2장에서 남녀를 창조하사 복을 주시므로 가정을 직접 만드셨고 신약의 행 1장과 2장에서 사도들을 통하여 교회를 직접 세우사 복음 선교의 사명을 맡기셨습니다. 

    그러므로 기독교를 표방하는 어떤 단체도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주님의 몸된 교회에 비교되거나 버금가는 권위를 가질 수 없습니다. 성도들의 신앙생활이란 교회를 중심해야 하고 교회 안에서 교회를 통해 이루어져야 합니다. 그 교회를 이탈하여 새로운 교회가 세워지는 경우는 - 선교적 차원에서 정상적으로 분리하여 주는 경우가 아니면 - 성경에 대한 기본입장과 주요해석이 다른 경우일 때입니다. 

    하지만 이단(αιקεσις)은 당파(sect)란 뜻을 가지며 이는 교회의 가르침과 달리 잘못된 교훈을 따르며 그 교회의 지도를 벗어나 당을 짓는 경우이기에 우리 교단의 헌법에는 이단과 불법 분리시 면직할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권징조례 제6장 42조). 특히 그 행위가 교리를 방해하려하여 전력으로 다른 사람을 권유하려 했을 때라고 했습니다. 

    교회는 목사의 교회도 장로의 교회도 아닌 주님의 교회요 성도들의 교회이기에 공교회입니다. 그러므로 특정한 사람을 중심한 집단은 사설단체이며 심지어 교회를 표방한다 해도 사교회(私敎會)로서 교회의 성격이 매우 약합니다. 교회는 특정개인에 따라 세워지고 폐쇄되는 그런 단체가 아닙니다. 그런 점에서 여기 서 있는 장목사도 일정한 기간 지 교회를 섬기라고 보냄 받은 사환에 불과합니다. 그러므로 공교회(共敎會)의 성격이 분명하고 성경의 가르침이 바르며 신본주의가 확실하면 가장 신앙생활의 안정성이 확보되어 정도를 걸음이 됩니다. 

    하지만 교회의 지도를 벗어나 특정집단의 다른 복음이나 특정개인의 은사 집회 등에 심취한 나머지 서로 권유하고 무리를 지을 때 이는 정상적 궤도를 이탈하여 빗나가는 행위가 되는 것입니다. 교회 안에 이견과 벽을 만들므로 교회의 확대며 연장인 복음 선교에 의한 천국확장의 전열을 혼란케 하며 교제를 가로막는 애찬의 암초가 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나와 우리 가정이 지극히 정상적이며 안정적인 신앙생활을 함에 교회의 지도를 벗어나지 않음이 얼마나 중요한지 모릅니다. 

    청교도들의 세 가지 생활 신조
    예배의 순결
    교리의 순결
    생활의 순결

    과연 우리들도 하나님께 향하여 예배의 순결, 말씀에 입각하여 교리의 순결, 교회의 지체로서 생활의 순결을 주장할 수 있어야겠습니다. 
    하나님 중심의 신앙생활은 인본주의를 극복한 신본주의 신앙생활
    말씀 중심의 신앙생활은 주관주의를 극복한 성경주의 신앙생활
    교회 중심의 신앙생활은 당파중심을 극복한 공회중심 신앙생활

    웨스터민스터 대소요리문답은 둘 다 제1문답이 사람의 제일 목적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과 영원토록 그를 즐거워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영광만 위함(Soli Deo Gloria)은 개혁교회 신앙과 신학의 중심사상입니다. 
    곧 신본주의 신앙인 것입니다. 

    요한복음 6:68-69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되 주여 영생의 말씀이 여기 계시매 우리가 뉘게로 가오리까 우리가 주는 하나님의 거룩한 자신줄 믿고 알았삽나이다.

    표적 때문에(요 6:2), 떡 때문에(요 6:26) 예수를 좇던 무리들이 장시간 말씀만 강론하시니 어렵다고 투덜대면서 다 돌아갔을 때(요 6:60, 66) 주님이 물으셨고 베드로가 답한 것으로 말씀이 있고 주님이 계시면 떠날 이유가 없다는 것입니다. 
    곧 말씀중심, 주님중심의 신앙인 것입니다. 
    이 신앙이야말로 하나님 중심, 성경 중심, 교회 중심의 신앙입니다. 
    여기서 사회생활은 6일 동안 가정과 직업전선 등 세상에서 천국확장에 직접 간접으로 기여하는 삶을 뜻합니다. 

    목사로서 개인적 욕구가 이것저것 있어도 하나님과 성경과 교회에 맞는가 생각하여 늘 자제합니다. 
    나의 작은 실수가 하나님의 영광을 훼손할까. 성경을 잘못 해석하고 적용함이 될까, 교회에 손상을 주고 성도를 실족케 할까 하여서입니다. 
    만일 사람들 기분과 감정에 맞추고 인기에 영합하여 원칙과 기준이 없는 채 행동, 처신하고 교인들 삶의 균형과 조화를 깨뜨려 가정, 교회, 사회에서의 정상적 신앙생활을 저해한다면 진리가 자유케 함이 무엇이며 복음의 효용성이 무엇인가 의심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능률만을 위주한 장사꾼이 아니며 여론만을 따르는 정치꾼도 아닙니다. 
    오로지 하나님 중심, 성경 중심, 교회 중심으로 교회를 지도하고 말씀을 외치고 천국을 확장해야 할 입장이므로 지금까지 그런 자세로 일해오고 있습니다. 
    가정이 정말 중요하지만 하나님보다 우선하지 않습니다. 
    성경보다, 교회보다 우선하지 않습니다. 
    그만큼 하나님과 성경과 교회에 매인 몸이라는 말입니다. 
    나의 할 일은 성도를 온전케 하며 봉사의 일을 하게하며 주의 몸 된 교회를 세우는 일입니다(엡 4:11~12). 

    그러므로 우리가 섬기는 교회는 세상 끝 날까지 하나님 중심으로, 성경 중심으로, 교회 중심으로 신앙생활을 하여 신앙생활의 정도를 유지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역대하 27:6에 “요담이 그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정도를 행하였으므로 점점 강하여졌더라”고 한 말씀대로 정도를 행하는 자는 하나님이 그의 편이 되사 계속 강화시켜 주시며 결국 승리케 해 주십니다.




    부왕 웃시야왕은 처음에는 하나님 앞에 정직히 행했으나 신앙적으로 지도를 해 주던 스가랴 선지자가 죽은 후에는 마음이 교만해져서 율법에서 제사장 외에는 분향할 수 없는 분향을 하다가 하나님의 징계로 분둥병에 걸려 10년 동안 별궁에 거하다가 죽었습니다. 그의 아들되는 요담왕은 부왕 웃시야왕이 처음에 하나님 보시기에 정직히 행한 것처럼 하나님 앞에 정직히 행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부왕 웃시야왕이 성전에 들어가 분향하다가 징계받은 사실을 염두에 두고 자신은 그같은 실수를 범하기 않기 위해 성전에는 아예 들어가지 않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요담왕이 성전에 들어가지 않았다는 것은 하나님을 찾지 않았다는 의미로 한 말이 아니고 하나님 앞에 범죄하지 않기 위해 철저한 주의를 기울였다는 의미로 한 말입니다. 요담왕은 아버지의 잘못을 전감 삼아 철저히 성전 규례를 지킨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요담왕과는 달리 백성들은 여전히 부패했다고 했습니다 (2절). 병행구절인 열왕기하15:35에는 "오직 산당을 제거하지 아니하였으므로 백성이 여전히 그 산당에서 제사를 드리며 분향하였더라 요담이 여호와의 성전의 윗문을 건축하니라"고 했습니다. 요담왕은 하나님 앞에 바로 하려 했지만 산당은 미쳐 제거하지 못했고 백성들은 산당에서 우상숭배를 한 것입니다 (사5:7, 미1:5, 2:1).

     

         2. 요담왕의 번영 (3-9절)

     

      3-9절에 "그가 여호와의 전 윗문을 건축하고 또 오벨 성벽을 많이 증축하고, 유다 산중에 성읍들을 건축하며 수풀 가운데에 견고한 진영들과 망대를 건축하고, 암몬 자손의 왕과 더불어 싸워 그들을 이겼더니 그 해에 암몬 자손이 은 백 달란트와 밀 만 고르와 보리 만 고르를 바쳤고 제이년과 제삼년에도 암몬 자손이 그와 같이 바쳤더라. 요담이 그의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바른 길을 걸었으므로 점점 강하여졌더라. 요담의 남은 사적과 그의 모든 전쟁과 행위는 이스라엘과 유다 열왕기에 기록되니라. 요담이 왕위에 오를 때에 나이가 이십오 세요 예루살렘에서 다스린 지 십육 년이라. 그가 그의 조상들과 함께 누우매 다윗 성에 장사되고 그의 아들 아하스가 대신하여 왕이 되니라"고 했습니다.

     

      요담왕이 하나님 앞에서 바른 길로 행했기 때문에 점점 강성하게 되었습니다. 첫째, 성전 수리를 마쳤습니다. 하나님의 전 윗문을 건축했습니다 (3절). 이 문은 성전 마당의 북편 성벽에 있는 문으로서 (겔9:2) 제물로 바쳐질 것들을 잡는 곳입니다. 이 문은 왕궁에서 성전 바깥 뜰로 통할 때 사용되는 문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아마샤왕 때 북이스라엘군이 성벽 400규빗(약 180m)를 헐었는데 그 때 이 문도 헐렸을 것입니다 (25:23, 왕하14:13). 그리고 웃시야왕이 이 문을 보수했습니다 (26:9). 요담왕은 부왕 웃시야왕의 정책을 이어받아 공사를 계속한 것입니다.

     

      둘째, 성을 견고하게 했습니다. 오벨 성벽을 많이 증축했습니다 (3절). 오벨(Ophel)은 예루살렘의 모리아산 남쪽 경사지를 말합니다 (33:14, 느3:26-27, 11:21). 요담왕은 그 곳에 있는 성채의 외곽 벽을 증축하여 전보다 더 강화된 요새지역으로 만든 것입니다. 또 유다 산중의 성읍들을 건축하고 수풀 가운데 견고한 진영들과 망대를 건축했습니다 (4절). 유다의 여러 성읍들을 요새화하기 위해 높은 지대에 건축을 하고 숲 속에 진영(영채)를 짓고 망대(초소)들을 지었습니다. 앗수르와 아람과 북이스라엘의 침략을 대비하여 요새화 한 것입니다. 

     

      셋째, 주변국을 압제했습니다. 암몬(Ammon) 족속과 전쟁하여 승리를 하고 은 100달란트와 밀 10,000고르와 보리 10,000고르를 3년 동안이나 조공으로 받았습니다 (5절). 100달란트는 1달란트가 약 34kg이므로 3,400kg 정도 됩니다. 밀과 보리가 각가 10,000고르라고 했는데 10,000고르는 1고르가 약 230ℓ이므로 2,300t 정도 됩니다. 암몬 지역은 땅이 비옥하여 밀과 보리가 잘되는 곳이었습니다. 웃시야왕 때 암몬 족속이 자진해서 조공을 바쳤는데 요담왕 때 배반을 했는지 요담왕이 그들을 쳐서 응징하고 조공을 받았습니다. 아니면 웃시야왕이 일부 점령했으나 요담왕이 전 지역을 점령해서 조공을 더 많이 바쳤는지도 모릅니다. 웃시야왕은 남쪽 블레셋과 아라비아와 마온 사람들을 쳐서 복종시켰는데 요담왕은 동쪽에 암몬 족속까지 복속시킨 것입니다.

     

    <結言>

      요담왕은 아버지 웃시야왕의 좋은 점은 본받았습니다. 웃시야왕을 본받아 하나님 앞에 정직히 행했습니다. 성전수리 사업을 완공했습니다. 그러면서도 웃시야왕이 나쁜 점은 본받지 않았습니다. 웃시야왕은 교만해져 하나님의 성전에서 율법에서 금한 분향을 하므로 징계를 받아 문둥병이 걸려 10년동안 별궁에서 거하다가 죽었습니다. 요담왕은 그런 잘못을 다시 하지 않기 위해 아예 성전에는 들어가지도 않았습니다. 보통 아버지의 좋은 점은 본받지 않고 나쁜 점을 본받기 쉬운데 요담왕은 좋은 점을 본받고 나쁜 점은 본받지 않았습니다. 그 결과 하나님이 그에게 복을 내려 점점 강성해져 갔습니다. 웃시야왕은 남쪽 블레셋과 아라비아와 마온 사람들을 쳐서 복종시켰는데 요담왕은 동쪽에 암몬 족속까지 복속시킨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부모나 스승에 대해 장점은 본받고 단점은 본받지 말아야 합니다. 보통 다른 사람의 잘못을 비판하면서도 스스로 그 잘못을 답습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우리는 모든 번영과 쇠퇴가 하나님의 주권에 달린 것을 알고 다른 사람이 잘해서 복을 받은 것은 본받고 다른 사람이 잘못해서 저주를 받은 것은 전감을 삼아 바로 서야 합니다.

     


    남 유다 요담 왕의 통치와 죽음(대하 27:1-9)

    기혼샘
    5~6분

    역대하 27장에서는 요담의 통치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다. 요담은 예루살렘에서 16년 동안 통치했다. 그의 어머니의 이름은 여루사이다. 요담이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하게 행하였다고 했다. 요담이 하나님이 원하는 길을 걸었더니 점점 강성하여졌다. 성도도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서 살 때 하나님의 복을 받게 된다.

    =====27:1

    나이 이십 오 세라 - 그가 약 10년 정도를 그의 부친 웃시야와 함께 통치했다는 사실로 미루어, 그는 35세 때부터 비로소 독자적인 통치를 시작했던 것으로 보인다.

    십 육 년을 치리하니라 - 여기서 16년은 웃시야가 섭정한 기간도 포함하고 있다.

    여루사 - 이 이름의 히브리어 표기는 '예루솨'인데 왕하 15:33에는 끝 자음이 알렙이어서, '예루솨'로 되어 있고(BHS), 몇몇 사본들에서는 역대기 본문과 일치한다(BHS Appartus).

    사독의 딸이더라 - 이 사독이 대상 6:12에 기록된 대제사장 사독일 가능성이 있는데(Curtis), 요담의 부친 웃시야가 제사장의 역할을 하기 위해(26:16-19) 정책적으로 사독의 딸과 결혼하였을 수도 있고, 반면에 제사장들의 간섭에 의해 제사장의 딸과 결혼하였을 수도 있다(24:3).

    =====27:2

    웃시야의 모든 행위대로...정직히 행하였으나 - 요담이 통치하던 기간 중 상당히 오랫동안 웃시야가 살아 있었다. 요담의 부친 웃시야는 비록 문둥병에 걸려 별궁에 거하였지만(26:21),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했을 것이다(Leon Wood). 따라서 요담은 웃시야의 많은 정책을 그대로 수용하였을 것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웃시야는 자신이 당한 징계로 인하여 하나님을 두려워하게 되었을 것이고, 요담은 아버지의 모습을 접하면서 하나님께 대해 더욱 정직하게 행하였을 것이다.

    여호와의 전에는 들어가지 아니하였고 - 맛소라 본문(MT)에는 본 구절 앞에 '단지'(only)라는 뜻을 가진 부사, '라크'(* )가 있다. 한글 개역 성경에서는 '(행하였)으나'로 번역된 이 접속사가 앞 문장과 대조를 이루게 하여 요담이 웃시야의 모든 행위를 본받아 행하였지만, 예외적으로 여호와의 전에 들어가 범죄 하는 일만큼은 삼가했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백성은 오히려 사악(邪惡)을 행하였더라 - 병행 구절인 왕하 15:35에서는 "백성이 오히려 그 산당에서 제사를 드리며 분향하였더라"고 기록하고 있다. 산당 제사를 '사악을 행하였다'라고 표현한 것으로 미루어 역대기 저자가 이에 대해 얼마나 엄격했는지 발견하게 된다.

    =====27:3

    전 윗문 - 이 문은 성전 마당의 북편 성벽에 있는 문으로서 '베냐민의 윗문'(렘 20:2)이라고도 불리워진다(Benzinger). 그리고 또 23:20에서 묘사한 것을 보면 이 문은 왕궁에서 성전 바깥뜰로 통할 때 사용되었다. 그런데, 이 문은 아마샤 왕 때 헐린 것으로 보여진다. 북이스라엘 왕 요아스와 전쟁하던 아마샤가 사로잡히고, 예루살렘 성벽이 '에브라임 문에서부터 성 모퉁이 문까지 사백 규빗'이 헐렸는데, 이때에 윗문도 무너졌을 것이다(25:23;왕하 14:13). 그리고 이때 무너진 성벽의 많은 부분은 요담의 부친 웃시야에 의해 거의 보수되었고(26:9), 요담도 웃시야의 건설 정책(26:9f.)을 이어받아 공사를 계속하였을 것이다.

    오벨성 - 이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오펠'의 원뜻은 언덕, 낮은 야산을 가리키는데, 일반적으로 성전이 있는 예루살렘의 모리아산(3:1) 남쪽 경사지를 그렇게 불렀다(33:14;느 3:26,27;11:21). 어떤 학자들은 이 성을 다윗성과 동일시하지만(G.A. Smith), 오벳성은 다윗성과는 분명히 다르며, 다윗성이 있는 언덕의 북동쪽 지점에 위치해 있는 것으로 추측된다. 이곳은 후기 유다 왕들이 요새화하려 했던 곳이다.

    =====27:4

    유다 산중에 - 여기서 '산'은 평지 또는 저지대를 바라보고 있는 곳으로써 요새화하기에 적합하기 때문에 성읍들은 산지나 산지의 숲 속에 세워졌다(사 2:15;호 8:14).

    영채(營寨) - 이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비라니요트'는 '성'(castle) 또는 '궁'(palace)을 의미한다. 하지만 대상 11:16의 '영채'(네치브)나 삼하 11:11의 '영채'(숙코트)와는 달리 여기서는 '요새'라는 의미에 더욱 가깝다(Lange, Keil & Delitzsch). 따라서 이는, 상당히 큰 규모의 군대가 숙영(宿營)할 수 있는 요새를 가리킨다. 수풀 가운데 견고하게 세워진 요새는 그만큼 위장이 잘 되어 있어서, 적의 공격이 있을 때는 언제라도 기습적으로 반격을 가할 수 있는 역할을 했을 것이다.

    망대 - 이것은 적의 침공을 사전에 발견하여 대비하기 위해 세워졌는데, 적의 동태를 감시하여 대비하는 데 용이했다(14:7;26:9;삿 8:9). 이와 같이 웃시야 때로부터 계속되어 온 건축 사업은 당시 북쪽에서 세력을 확장시키고 있던 앗수르의 위협과, 북이스라엘과 아람의 침략에 대비하기 위해 매우 활발하게 진행되었다.

    =====27:5

    암몬 자손의 왕으로 더불어 싸워 이기었더니 - 이 기록이 열왕기에는 없다. 부친 웃시야가 이루어 놓은 군사력과 명예를 배경으로 하여, 요담은 정복 사업을 계속 추진했다. 웃시야는 블레셋과 아라비아와 마온 등 요단 서편 지역을 주로 정복한 반면, 요담은 반대편인 요단 동편 지역의 땅을 차지했다(Kittel). 한편 혹자는 요담이 암몬과 싸운 이유를 암몬 자손이 웃시야 때부터 바쳐오던 조공을 거부했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Barker, Keil). 그러나, 이러한 견해는 명백한 근거가 없기 때문에 추측에 지나지 않는다. 오히려 요담이 분명한 계획과 목적을 가지고 추진한 정복 사업의 결과로, 암몬과 싸우게 되었다고 보는 것이 자연스럽다.

    밀 일만 석과 보리 일만 석 - 요담이 암몬으로부터 이렇게 많은 양의 밀과 보리를 조공으로 받을 수 있었다는 것은 암몬 족속의 주산물의 밀과 보리였으며 그 땅이 매우 비옥하였음을 입증해 준다(Barker). 3년 동안 계속해서 바쳐진 이 밀과 보리는 아마 군량미로 많이 사용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3년 뒤에는 더 이상 암몬 족속이 조공을 바치지 않은 것으로 보이는데, 이는 그들이 독립하였거나, 아니면 요담 말년에, 유다의 세력이 약해진 틈을 타 암몬 족속이 조공 바치기를 거부하였기 때문일 것이다(Keil). 이 시기에 아람 왕 르신과 이스라엘 왕 베가가 동맹하여 유다를 공격한 사실(왕하 15:37)에 비추어 볼 때, 이미 조공에 대해 거부하는 움직임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사 7:1-8:8). 한편 역대기 저자가 르신과 베가의 침략에 대해 전혀 언급지 않는 것에 대해 많은 학자들이 의아해한다. 그 이유는 베가와 르신의 침략이 요담과 아하스 때 두 번 있었던 것처럼 열왕기에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다(왕하 15:37;16:5). 그러나 왕하 15:37의 기록과 16:5의 기록이 각각 다른 사건을 가리키지 않으며 그 사건은 아하스 때에 있었음이 분명하다(사 8:6ff.). 그래서 역대기 저자는 아람. 이스라엘 동맹군의 침략과 요담과는 아무런 연관성이 없기 때문에, 이것을 기록하지 않은 것이 분명하다. 참고로 열왕기 저자가 같은 사건을 두 번에 걸쳐 반복하여 기록한 것은 요담과 아하스가 섭정 통치를 했다는 간접적인 증거가 된다. 더욱이 왕하 15:30에서는 '요담 이십년'이라고 기록되어 있는 데 반해 본장에서는 '16년을 치리했다'(1절)고 기록되어 있음을 볼 때, 섭정을 했다는 증거는 더욱 확실해진다. 따라서, 아람. 이스라엘 동맹군이 공격했던 시기는 요담과 아하스가 섭정을 하고 있던 기간이라고 볼 수 있다. 다만 이러한 전쟁이 발발한 원인은 아하스의 범죄 때문일 것이다. 이에 대한 내용은 왕하 15:30 주석을 참조하라.

    =====27:6

    요담이...점점 강하여졌더라 - 본절은 역대기 저자가 특징적으로 보여 주는 구절 가운데 하나이다. 한편 실제적으로도 요담의 왕국이 강하여졌다는 것을 뒷받침해 주는 고고학적 증거가 발견되었다. 즉, 요담이 통치하던 시기에 유다의 관할 아래 있던 에시온게벨에서 그의 공식적인 인장(印章)이 계속해서 발견되고 있다(Payne).

    =====27:7

    모든 전쟁 - 역대기 저자는 본장에서 요담의 사적을 긍정적으로 제시하고 있다. 한편 웃시야가 말년에 문둥병으로 격리되어 있었으므로, 그가 만든 동맹군(26:11ff.)을 요담이 맡았을 것이다(26:21). 이는 요담이 그때부터 전쟁에 참여했다는 것을 뒷받침해 주고 있다. 딜리(Thiele)는 앗수르의 연대기를 근거로 하여 B.C.743년경에 디글랏빌레셋 3세에 의해 유다가 패퇴되었다고 제안하는데(Payne), 역대기 기자는 이러한 패전 사실뿐만 아니라, 전쟁에 대한 어떠한 사실도 언급하지 않는다.

    이스라엘과 유다 열왕기 - 왕하 15:36에는 '유다 왕 역대 지략'이라고 기록되어 '이스라엘'이 생략되어 있으나, 본문은 역대기 기자의 규칙적인 관습에 의한 것이며(16:11, Williamson), 열왕기서의 내용을 요약해 놓은 것에 해당한다(Curtis).

    =====27:8

    본절은 1절의 되풀이이긴 하지만 글의 형식상 이러한 반복이 생긴 것 같다. 즉, 1절은 통치 서론으로서, 8절은 통치의 결론으로서 기록된 것이다. 또한 28:1의 표현과 명확하게 대조하기 위해 반복한 것 같다.

    예루살렘에서 치리한 지 십 육 년이라 - 딜리(Thiele)는 베가 17년(B.C. 743)부터 요담이 그의 아들 아하스와 섭정하였고, 따라서 그의 통치 기간이 실제로는 20년 간이라고 한다. 이는 왕하 15:30에서 '요담 이십 년'이라고 언급한 것에 근거한 것이다. 요담 20년은 그의 아들 아하스가 24세 되던 때이다. 뿐만 아니라, 혹자는 웃시야 - 요담 - 아하스 시대 가운데 4년 동안은 그들이 모두 살아 있어서, 3대에 걸친 섭정이 이루어졌다고 주장하기도 한다(Wood).

    =====27:9

    아하스가 대신하여 왕이 되니라 - 8절의 논의가 타당한 것으로 볼 때, 본문은 아하스가 웃시야와 요담의 섭정을 함께 받았다가(Wood), 요담의 섭정을 거치고 난 뒤에야 비로소 독자적인 통치를 시작했다고 보는 것이 맞다.


    역대하 27장 짧은 설교는 요담 왕에 대해서 하나님이 말씀하고 있습니다. 요담 왕이 25세에 왕위에 올라 16년 동안 통치했습니다. 요담은 여호와 하나님 앞에서 바르게 행동하여 여호와 하나님의 길을 걸었습니다. 악한 자가 되지 않고 선한 자의 길을 걸었습니다. 그랬더니 하나님께서 그의 삶에 점점 강하에 해 주셨습니다. 우리도 예수님의 길을 걸어가면 하나님이 축복해 주십니다. 우리의 길을 강하게 하셔서 세상에서 하나님의 능력을 나타내면서 살아가는 성도가 되게 해 주십니다. 우리는 복음을 따라서 선한 하나님의 길을 걸어가야 합니다.

    요담이 정직히 행하며 성전 문과 여러 성을 건축함 (1-4)

    • 27:1 요담이 위에 나아갈 때에 나이 이십오 세라 예루살렘에서 십륙 년을 치리하니라 그 모친의 이름은 여루사라 사독의 딸이더라

    요담은 웃시야왕의 아들로서 25세에 유다 왕으로 즉위하여 16년 동안 통치하였다. 사독 다윗 때의 제사장 사독보다 8,9대 후의 사람으로 그 후손인 것 같다(대상 6:8-12 참조).

    • 27:2 요담이 그 부친 웃시야의 모든 행위대로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히 행하였으나 여호와의 전에는 들어가지 아니하였고 백성은 오히려 사악을 행하였더라

    요담은 선한 부왕(父王) 웃시야에게서 좋은 신앙을 물려받아 하나님 보시기에 정직하게 행하였다. 여호와의 전(殿)에는 들어가지 아니하였고 요담왕은 아버지 웃시야의 모든 좋은 행위를 본받아 정직하게 행하였으나 아버지가 잘못한 것, 즉 웃시야왕이 여호와의 전에 들어가 분향한 것은 본받지. 않았다. 아버지의 잘한 점만 본받고 잘못한 것은 본받지 않은 것은 잘한 일이다.

    백성은 오히려 사악(邪惡)을 행하였더라 요담왕은 정직한 길을 걸어갔으나 백성들은 사악을 행하였다. 열왕기하 15:35에 "오직 산당을 제하지 아니하였으므로 백성이 오히려 그 산당에서 제사를 드리며 분향하였더라 요담이 여호와의 전의 원문을 건축하니라"고 하였다. 요담왕이 좋은 왕이지만 산당들을 제하지 않았기 때문에 백성들이 그곳에서 하나님을 섬기다가 우상까지 섬긴 것 같다. 산당을 전부 제해 버리고 예루살렘에 와서 제사하라고 했더라면 백성들이 악을 행하지 않았을 것인데 산당을 그냥 두었기 때문에 백성들이 하나님을 쉽게 섬기려고 예루살렘까지 오지 않고 산당에서 제사하다가 우상까지 섬기게 된 것이다.

    그러므로 백성들로 하여금 죄 지을 기회를 주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 지금도 말씀대로 믿기가 힘들다고 쉬운 방법으로 하나님을 섬기려고 하면 타락하게 된다.

    • 27:3-4 저가 여호와의 전 윗문을 건축하고 또 오벨 성을 많이 증축하고 유다 산중에 성읍을 건축하며 수풀 가운데 견고한 영채와 망대를 건축하고

    요담왕은 왕위에 있는 동안 여호와의 성전 윗문을 건설하고, 오벨 성을 증축하고, 유다 산중의 성읍과 수풀 가운데 견고한 영채와 망대를 건설하였다.

    여호와의 전(殿) 윗문은 성전 북쪽에 있는 문이다. 요담왕이 아버지 웃시야가 성전에서 잘못한 것을 전감(前鑑) 삼아서 성전을 존중히 여기는 마음으로 전 윗문을 건축한 것이다. 오벨 성(城)은 예루살렘의 한 지역으로서 성전의 남동쪽에 위치한 비탈진 요새지이다. 그곳은 다윗의 옛 도성 일부로서 원수들이 쳐들어 올 우려가 있으므로 이 성을 많이 증축하여 예루살렘을 안전케 했다.

    유다 산중은 예루살렘에서 헤브론으로 가는 데 있는 산들을 가리키고, 영채(營寨)는 요새를 가리킨다. 망대는 원수들이 침입해 오는 것을 발견하기 위해 세운 탑같은 시설물이다. 요담왕이 이렇게 국방을 튼튼히 하였다(27:3-6). 오늘날 우리도 영적 방패와 요새를 견고하게 하여 원수 마귀의 침략을 잘 막아야 한다.

    요담이 암몬 사람을 승리하고 강성하여짐 (5-6)

    • 27:5 암몬 자손의 왕으로 더불어 싸워 이기었더니 그 해에 암몬 자손이 은 일백 달란트와 밀 일만 석과 보리 일만 석을 드렸고 제이년과 제삼년에도 암몬 자손이 그와 같이 드렸더라

    요담왕이 국방을 튼튼히 한 후 원수 암몬 자손과 싸워 이겼다. 그러므로 암몬 자손이 3년 동안 요담왕에게 조공(朝貢)으로 매년 은(銀) 100달란트(3,400kg)와 밀과 보리를 각각 1만 석(2,200㎘)씩 바쳤다. 이것은 요담왕이 하나님 앞에서 정직하게 행했으므로 하나님께서 함께 해주시고 대신 싸워 주셨기 때문이다(2절).

    • 27:6 요담이 그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정도를 행하였으므로 점점 강하여졌더라

    “정도(正道)”는 하나님의 길이므로 그리로 행하는 자는 하나님이 기뻐하시고 하나님께서 점점 강성(强盛)하게 해 주신다. 요담왕이 역대왕들보다 뛰어나게 큰 일을 행한 것은 없으나 아버지의 좋은 신앙을 본받아 정직하게 행하고 신앙 양심을 써서 하나님 말씀대로 바른길로만 걸어갔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강성하게 해 주셨다. 그러나 열왕기하 15:37에 “그때에 여호와께서 비로소 아람 왕 르신과 르말랴의 아들 베가를 보내어 유다를 치게 하셨더라”고 하였다. 요담왕이 하나님 앞에 정도를 행하고 국방을 튼튼히 하고 암몬과 더불어 싸워서 승리한 것은 잘하였으나 유다 각 지방에 있는 산당을 제하지 않았으므로 백성들이 사악을 행했기 때문에(2절), 하나님께서 아람 왕 르신과 북 이스라엘 왕 베가를 보내어 한번 징계하신 것 같다.

    요담의 사적(事蹟)과 후계자 (7-9)

    • 27:7-9 요담의 남은 사적과 그 모든 전쟁과 행위는 이스라엘과 유다 열왕기에 기록되니라 요담이 위에 나아갈 때에 나이 이십 오 세요 예루살렘에서 치리한 지 십륙 년이라 저가 그 열조와 함께 자매 다윗 성에 장사되고 그 아들 아하스가 대신하여 왕이 되니라

    선한 요담왕은 41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그 뒤를 이어 그 아들 아하스가 왕이 되었다.

















    역대하 22장 요약

    아달랴의 아들인 아하시야가 유다왕이 됨, 아하시야는 아합왕의 길을 따라갔으며 예후가 아하시야와 그 신하들을 죽였다, 아달랴가 유다의 여왕이 되었으며 요아스가 살아남았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역대하 23장 요약

    여호야다가 백부장을들 모아서 요아스를 왕으로 추대하였고, 아달랴는 살해당하였고 여호야다는 개혁 정치를하였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역대하 24장 요약

    요아스가 왕이 된 후에 여호야다와 함께 성전을 수리하였고 여호야다가 죽게 됩니다.
    요아스와 백성들이 악하게 되는데...요아스는 여호야다의 아들인 스가랴를 죽였으며 아람이 처들어왔고 요아스를 반역자들이 죽였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5월 20일(화) 역대하 22-24장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아달랴(22:10)

    아하시야의 모친 아달랴가 그 아들의 죽은 것을 보고 일어나 유다 집의 왕의 를 진멸하였으나.
    When Athaliah the mother of Ahaziah saw that her son was dead, she proceeded to destroy the whole royal family of the house of Judah.

    여호사밧 + 아달랴 <오므리 왕조, 아합왕과 이세벨의 딸>
                  ㅣ
              여호람,  아사랴, 스가랴, 아사랴, 미가엘, 스바댜(대하 21:2)
              왕위에 오른 후에 동생들을 모두 살해하였다(대하 21:4)   


    "아달랴"의 뜻은 "여호와는 위대하시다" "여호와께서 높이신다"

    근본(根本) : 뿌리 근, 근본 본

  • 1. 초목(草木)의 뿌리.
  • 2. 사물(事物)의 본질(本質)이나 본바탕(本--).
  • 3. 자라 온 환경(環境)이나 혈통(血統).
  • 4. 처음부터 애당초(-當初).


  • 아하시야

    남 유다 왕국의 6대 왕
    천주교회에서는 아하즈야

    북 이스라엘의 아하시야와 동명 이인.
    여호사밧 왕의 아들인 여호람의 후임
    이스라엘 아합 왕의 딸 아달려와 여호람 사이에서 태어난 막내 아들

     
    이스라엘의 요람(여호람) 왕의 제안으로 동맹을 결성하여 라못에서 아람(시리아)의 하사엘을 쳤으나 원정은 실패하고, 요람 왕은 부상을 입었으며 본인은 목숨만 건져 돌아왔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예후의 역성혁명이 일어나, 요람 왕은 그 자리에서 도망치려다 화살을 맞고 사망, 아하시야 본인은 도주하다 결국 체포되어 사망했다.

    이 부분에서 열왕기하와 역대하의 기록이 약간 나뉜다.
    열왕기하에서는 아하시야가 도망치자 예후가 쫓아 공격해 부상을 입히고, 아하시야는 부상을 입고도 끝까지 도망치다가 결국 므깃도에서 죽었다고 기록하는데, 역대하에서는 혁명이 일어나자 사마리아에 숨었다가 발각되어 예후에게 끌려가 죽었다고 기록한다.

    두 기록은 서로 일치하는 기록이다.
    시리아 원정에 실패해 이스르엘에서 요양 중이던 요람에게 아하시야가 문병을 왔고, 그 때 예후가 요람을 찾아가 살해하였는데, 거기서 아하시야가 근처의 므깃도로 도주하여 숨어있다가 예후의 반란군에게 검거된 것.
    '이스르엘'이라는 명칭이 당시 근처 성이었던 '이스르엘 성' 뿐 아니라 북이스라엘 전체를 아우르는 명칭으로도 병용되었기 때문에 발생한 혼란이다.

    이후 유다의 왕위는 아하시야의 어머니이자 아합의 딸 아달리야가 차지한다.


    아합과 이세벨의 딸 아달랴
    열왕기하 11:1-21

    북 이스라엘 왕국의 역대 왕들 가운데서 가장 악한 와이었던 아합과 왕후 이세벨의 딸 아달랴는 남 유다 왕국으로 시집을 온 후에 남편 여호람이 죽고 유다 왕 아하시야가 북 이스라엘에서 일어난 예후의 반정 과정에서 목숨을 잃자, 아하시야의 어미요 이세벨의 딸이기도 했던 황후 ‘아달랴’가 왕권을 장악하고 다윗의 후손들을 진멸하려고 합니다.

    마치 북한의 김일성주의에 정신을 빼앗긴 좌편향된 사람들이 통치권을 잡으려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자유민주주의를 무너트리려고 하는 것과 흡사합니다.

    그러나 남 유다 왕국의 메시아 혈통을 지키려고 하나님은 아하시야의 누이 여호세바를 통해 왕자들 가운데 요시야를 숨겨 두게 하셨습니다.
    훗날 남편인 제사장 여호야다와 함께 요시야를 왕으로 세우고 아달랴를 처단함으로 다윗 왕조의 계보가 이어지도록 역사하셨습니다.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지키도록 한때는 노동조합의 선봉자로 으뜸이었던 사람을 동구의 공산주의가 무너지는 과정을 지켜본 후에 공산주의가 잘못된 사상이라는 것을 깨닫고 우편향으로 돌아와서 역사의 흐름을 바르게 인식한 후에 경기도 도지사 2회 역임, 국회의원 3회 역임, 최근에는 고용노동부장관으로 재직 중 사직을 하고 대통령 후보로 출마한 김문수 후보를 보면 이 시대에 자유민주주의를 지키도록 예비한 인물이라고 하겠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초기 기독교의 전파를 위하여 기독교를 탄압하던 바울을 회개케 한 후에 지도자로 사용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일은 이와 같은 반대파에 속했던 사람을 회개시킨 후에 복음을 위하여 헌신하게 하십니다.
    어거스틴도 마니교에 심취하여 방종한 삶을 즐겼던 과거의 흔적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기독교로 개종한 후에는 초기 기독교의 발전과 성장을 위한 초석으로 삼았습니다.

    아달랴의 왕의 혈통을 끊어버리려고 하였던 것도 결국에는 그 뜻을 이루지 못하도록 역사하셨던 하나님은 분명히 한반도 땅에 새로운 역사를 펼쳐나가도록 인도하실 것입니다.

    근본(根本)이 중요합니다.
    근본이란 자라온 환경이나 혈통을 의미합니다.

    거짓과 변명과 술수로 다져진 사람과 정직과 겸손과 청빈으로 훈련된 사람 중 누구를 지도자로 세워야 하겠습니까?
    나의 선택의 결과에 의해서 역사의 장은 어워질 수도 있고 새벽의 동트는 희망을 바리볼 수도 있습니다.
    믿음이란 절망이 아니라 희망을 선택하는 것입니다.

    확실한 희망을 찾아 모두 함께 일어나서 자유민주주의와 자유시장경제의 근본을 든든하게 지켜야 하겠습니다.
    이제는 그 어미 이세벨과 같이 잔혹한 방법으로 권세를 잡고 남유다를 우상숭배의 길로 이끌었다가 심판을 받은 아달랴의 행적을 통해 주시는 몇 가지 교훈들을 생각해봅니다. 

    I. 아달랴

    아달랴가 다윗의 씨를 진멸하려 하였습니다(1)

    열왕기하 11:1
    아하시야의 모친 아달랴가 그 아들의 죽은 것을 보고 일어나 왕의 를 진멸하였으나.

    황후인 아달랴는 그의 아들인 유다 왕 아하시야가 이스라엘 왕 요람을 문병 갔다가 그 곳에서 예후의 손에 뜻하지 않은 죽임을 당합니다.
    이를 기회로 다윗의 후손들을 진멸하고 스스로 왕이 되려 했습니다.
    그래서 개인적으로는 친손자들인 아하시야의 아들들을 모두 진멸하려 한 것입니다.
    자신의 야망을 위해 자신의 친손자들까지 모두 죽이려 한 아달랴는 그의 어미 이세벨 못지않은 사악한 여자였던 것입니다.

    특별히 메시야의 계보를 이어가야 할 다윗의 씨를 진멸하려한 아달랴의 행위는 단순히 권력을 찬탈하기 위한 과정이라기보다는 하나님의 섭리를 막으려는 사탄 마귀의 계략이라 할 수 있습니다.
    사탄 마귀는 예수님이 탄생하셨을 때도 헤롯왕을 통해 예수님을 죽이려는 시도를 했었기 때문입니다.

    오늘도 어둠의 권세들은 아달랴와 같은 사악한 자들을 내세워 하나님의 섭리를 방해하려고 애쓰고 있습니다.
    하지만, 다윗의 후손을 진멸하려던 아달랴의 계획과 예수님을 죽이려 했던 헤롯왕의 계략이 실패로 돌아간 것처럼 하나님의 계획을 막아보려는 어둠의 세력들의 궤계는 결코 성공할 수 없음을 알아야 합니다.

    권세를 잡은 아달랴는 유다 땅을 바알의 우상으로 가득차게 했습니다(3, 18).

    열왕기하 11:3. 18
    요아스가 저와 함께 여호와의 전에 육년을 숨어 있는 동안에 아달랴나라를 다스렸더라.

    온 국민이 바알의 당으로 가서 그 당을 훼파하고 그 단들과 우상들을 깨뜨리고 그 단 앞에서 바알의 제사장 맛단을 죽이니라 제사장이 관리들을 세워 여호와의 전을 수직하게 하고.

    엣바알의 딸 이세벨과 같이 바알 숭배에 열심을 가졌던 아달랴는 손자들을 죽이고 권세를 잡은 6년의 기간 동안 남 유다 땅에 바알 신앙을 전파하는 일에 힘을 쏟았습니다.
    불의한 자가 권세를 잡으면 온 나라가 죄의 길로 갈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II. 제사장 여호야다의 반정

    요아스를 숨겨두었습니다(2-3)

    열왕기하 11:2-3
    요람왕의 딸 아하시야의 누이 여호세바아하시야의 아들 요아스를 왕자들의 죽임을 당하는 중에서 도적하여 내고 저와 그 유모를 침실에 숨겨 아달랴를 피하여 죽임을 당치 않게 한지라.
    요아스가 저와 함께 여호와의 전에 육년을 숨어 있는 동안에 아달랴나라를 다스렸더라.

    아달랴가 다윗의 씨를 진멸하던 당시 아하시야 왕의 누이요 제사장 여호야다의 아내이기도 한 여호세바가 아하시야의 아들 요아스를 구해내 성전에 숨겨두었습니다.
    그리고 6년 뒤 극적으로 살아남은 요아스를 왕으로 세움으로 사악한 아달랴를 제거하고 다윗의 왕조를 복원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요아스가 왕이 될 당시 7세였다는 것을 보면(21), 아달랴가 다윗의 후손들을 죽일 당시 요아스가 돌도 지나지 않은 갓난 아이였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처럼 어린 요아스가 자라 왕의 자리에 앉음으로 아달랴를 몰아내고 다윗 왕조를 다시 세울 수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역사는 겨자씨나 누룩처럼 작은 것으로부터 시작되는 겁니다.
    겨자씨는 모든 씨앗들 중에 가장 작은 것이지만 그 안에 생명이 있기에 큰 나무로 자라 새들에게 먹이와 안식처를 제공하는 겁니다.
    주는 교회도 작은 교회이지만 그 안에 예수의 생명을 품으면 세상을 변화시키는 큰일을 감당하게 될 것입니다.

    때가 차매 제사장 여호야다가 나섰습니다(4-5)
    제 칠년에 여호야다가 보내어 가리 사람의 백부장들과 호위병의 백부장들을 불러 데리고 여호와의 전으로 들어가서 저희와 언약을 세우고 저희로 여호와의 전에서 맹세케 한 후에 왕자를 보이고.
    명하여 가로되 너희의 행할 것이 이러하니 안식일에 입번한 너희 중 삼분 일은 왕궁을 주의하여 지키고.

    여호세바의 남편이기도 한 제사장 여호야다는 아달랴의 손에서 요아스를 구한 뒤 6년 동안 성전에 숨겨두고 모든 준비가 되었다 여길 때 요아스를 유다 왕으로 세우고 아달랴를 심판했습니다.

    ​모든 일에는 때가 있는 것입니다.
    악인이 득세할 때도 있지만, 반드시 하나님이 악인들을 심판하시고 의를 드러내실 때가 온다는 겁니다.
    그 때를 바라보며 제사장 여호야다처럼 철저히 준비하고 기다려야 합니다.

    아달랴에게는 6년 동안 유다 땅을 다스릴 권세가 주어졌지만, 7년 째 되는 해에 홀연히 심판의 날이 임한 것처럼(4), 적그리스도의 세력들도 교회의 휴거 사건이후 7년 동안 세상을 다스리는 권세가 주어질 것이지만, 7년의 시간이 지나면 주님이 재림하셔서 이 악한 자들을 심판하시고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실 것입니다.

    아달랴의 죽음은 온 국민에게 평안과 기쁨을 가져왔습니다(20)

    열왕기하 11:20
    온 국민이 즐거워하고 성중이 평온하더라 아달랴를 무리가 왕궁에서 칼로 죽였었더라.

    제사장 여호야다가 아달랴를 심판하고 다윗의 왕조를 복원하고 유다 땅에서 바알의 당을 무너뜨리고 바알의 제사장을 죽이는 개혁을 단행하자 “온 국민이 즐거워하고 성중이 평온하였다”했습니다.

    잠언 11:10
    의인이 형통하면 성읍이 즐거워하고 악인이 패망하면 기뻐 외치느니라.

    이세벨, 아달랴와 같은 불의하고 사악한 자들이 공의의 심판을 받을 때 비로소 나라의 평안과 기쁨이 찾아오는 것입니다.

    III. 결론

    다윗의 후손을 진멸하고 스스로 왕이 되려했던 아달랴가 결국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그 어미 이세벨처럼 처참한 종말을 맞이했습니다. 아달랴 이세벨처럼 불의한 자가 잠시 잠깐 권세를 얻을 수는 있지만, 반드시 하나님이 심판하실 때가 온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유대 역사 상 유일한 여왕인 제 7대 아달랴는 권력에 굶주린 여인, 음모와 살인의 화신이 된 악녀로서 참으로 악독한 왕이었다.
    아버지가 아합이고 어머니가 그 악명 높은 이세벨이니 아달랴는 이 둘의 악한 것만 뽑아서 모아 놓은 것 같은 여자였다.
    이세벨은 악녀였다.
    하나님의 사람 엘리야를 죽이지 못해 화병이 난 여자이다.
    궁중에 바알과 아세라 신을 섬기는 학교를 만들어 놓고 850명의 무당들을 양성할 정도로 철저히 바알과 아세라 신을 섬겼다.
    아달랴는 그런 어머니가 섬기는 신을 똑같이 섬기면서 자랐다.
    그런데 아버지 아합은 자신의 집안과 전혀 신앙적 배경이 다른 집이었지만 사돈을 맺음으로 이익을 보기 위해 딸 아달랴를 정략적으로 남쪽의 왕 여호사밧의 아들 여호람과 결혼을 시켰다.
    아달랴가 시집에 와보니 시아버지가 바알과 아세라 신상을 다 제거해 버리고 오직 하나님만 섬기는 것이었다.
    사실은 자신의 의지와는 별 상관없이 지옥에 갈 인생이 천국 갈 인생으로 바꾸어질 절호의 기회가 주어진 것이다.
    그런데 아달랴는 어릴 때 잘못된 환경 속에서 주어진 바알과 아세라 신의 손아귀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아달랴는 어릴 때부터 주인공이 되고자 하는 욕구가 강한 여인이었기 때문에 자신이 권력을 차지하고 싶었던 것 같다.
    그리하여 남편도 죽고  시숙들도 없고 장성한 아들도 없고 나이 어린 아들까지 타지에서 죽임을 당하자 왕의 정책에 반대하는 신하들까지 모조리 죽여 버렸다.
    왕이 될 만한 손자들까지 다 죽여버리고 스스로 여왕이 된다.
    그렇게 다윗 가문의 씨를 말리고 피를 뿌리며 왕이 되어 영원히 집권할 것 같던 아달랴는 6년 만에 혁명군의 칼에 제명대로 살지 못하고 거리에서 비참하게 죽임을 당한다.
    참으로 비극적인 인생이 아닐 수 없다.
    어릴 적에 무엇을 보고 자랐는가?
    어떤 환경에서 인격과 인성이 형성되었는지가 그래서 중요한 것이다.




    아달랴는 누구인가?

    여호람 왕 : 아버지 여호사밧, 아내 아달랴 : 오므리왕조. 아합 왕과 이세벨의 딸.

    * 이세벨 : 아버지-시돈 왕 엣바알, 이스라엘 7대 왕 아합의 왕비,

    * 아달랴 : 아합과 이세벨의 딸, 여호람 왕의 아내

    여호람(Jehoram) 뜻 : 여호와는 존귀하심

    -성경의 인물- 여호람의 아내 이세벨의 딸 아달랴

    아달랴(재위 기원전 841년경-835년경)는 남유다와 북이스라엘 역대 왕들 가운데 유일한 여왕이다.

    북이스라엘 왕 아합과 이세벨의 딸로서 남유다 왕국의 5대 왕이었던 여호람과 결혼하여 왕비가 되었다.
    이렇듯 분단된 북이스라엘과 남유다는 서로의 정치적 필요에 따라 왕가끼리 정략결혼을 하게 되었다.
    이스라엘 역사에 있어서 가장 간교하고 잔인한 왕비였던 이세벨의 딸인 아달랴는 그 어머니의 냉혈한 성격을 그대로 빼다 박은 여자였다.
    그녀는 여호와 하나님께 반기를 들었고 가나안의 신 바알을 섬기는 열렬한 우상 숭배자로 왕가를 이교신앙으로 물들였다. 여호람이 삼십이 세에 즉위하고 예루살렘에서 팔 년 동안 다스리다가 아끼는 자 없이 세상을 떠났으며 무리가 그를 다윗 성에 장사하였으나 열왕의 묘실에는 두지 아니하였다(역대하21:20).

    여호람이 왕위에 오르자 여섯 형제를 살해하는 등 악행을 자행하다가 결국 선지자 엘리야의 예언대로 병들어 죽게 된 것이었다. 아달랴의 아들들은 아라비아 사람들에게 모두 살해당하였고, 오직 막내아들인 아하시야만이 간신히 목숨을 부지하였다.

    여호람이 병들어 죽자 아하시야가 42세에 즉위하여 남유다의 6대 왕이 되었고 아달랴의 섭정을 받던 아하시야는 왕위에 오른 지 1년이 채 되지도 않아 북 이스라엘 왕 요람과 동맹하여 아람(지금의 시리아 지역)과 전쟁하였으며, 요람이 상처를 입고 병을 치료하는데 아하시야가 병문안을 갔다가 쿠데타를 일으킨 예후를 피해 도망하다가 살해당하였다.

    예후가 아합의 아들 왕자 칠십명을 처형하고, 유다의 왕 아하시야의 형제들을 만나 묻되 너희는 누구냐 하니 대답하되 우리는 아하시야의 형제라 이제 왕자들과 태후의 아들들에게 문안하러 내려가노라 하는지라 이르되 사로잡으라 하매 곧 사로잡아 목자가 양털 깎는 집 웅덩이 곁에서 죽이니 사십이 명이 하나도 남지 아니하였으니 여호와께서 그의 종 엘리야를 통하여 하신 말씀을 이제 이루셨도다(왕하10:7, 13~14).

    아달랴는 아들 아하시야가 죽었다는 소식(왕하 8:29, 9:16, 27-28, 대하 22:5-12)을 접하자마자 권력에 한껏 굶주린 야수가 되어 요아스를 제외한 유다 집의 왕국의 씨를 모두 진멸하고 무참히 도륙하였다. 이세벨의 핏빛 광기가 유다 역사에 되살아난 듯 아달랴는 자신의 피붙이까지도 자신의 권력욕을 채우기 위해 살해한 것이다. 손자들이 행여 왕위를 차지할까봐 살해한 아달랴의 이러한 잔학한 행위의 이면에는 남유다 왕국의 정통 계보인 다윗 가문의 씨를 진멸하기 위한 정략적인 의도 또한 있었으리라. 예후의 반역으로 아달랴의 친정인 아합 가문이 몰락하였고 주변 국가인 아람이 세력을 확장하고 있던 혼란한 국내외 정세에도 불구하고 아달랴는 6년 동안 다스렸으니 정치적 역량이 있는 여인으로 판단하고 있다.

    그러나 아달랴 재위 7년째 되던 해, 제사장 여호야다의 아내가 성전에서 숨겨 키우던 아하시야의 아들 곧 아달랴의 손자 요아스를 성전에서 기름붓고 면류관을 씌워 왕으로 세우는데 성공하였다.

    백성의 무리가 즐거이 환호하며 왕의 만세를 부르자 그 소리를 듣고서 온 아달랴는 "반역이로다."고 소리쳤지만 대세는 이미 기울었다. 결국 아달랴는 성전 바깥으로 끌려가 왕궁에서 죽임을 당하였다.

    민심과 천심이 떠난 권력은 오래갈 수 없는 법이다.

    토마스 홉스(영국의 철학자)의 말처럼 "죽음에 이르러서야 멈추는 끝없고 쉼 없는 인간의 권력욕"의 덧없음을 아달랴의 인생 종말이 보여준 셈이다.

    예수 그리스도 족보(마 1:6-10)에서 생략된 인물 중 ‘아달랴’를 들 수 있다. 남유다 제7대 왕인 아달랴는 유다 왕들 중 유일한 ‘여왕’이었으며, 북 이스라엘의 악한 왕을 대표하는 ‘아합’과 왕비 ‘이세벨’의 딸로서(왕하 8:18, 대하 21:6), 여호사밧(남유다 4대 왕)의 며느리(대하18:1)로 유다에 들어와, 남편 여호람과 그 자손들이 아합의 집처럼 우상을 숭배하고 악을 행하도록 절대적인 영향력을 끼친 인물이다. 더 나아가 아들 아하시야가 죽은 후에는 아들을 대신하여 자신이 왕위에 오르기 위해 유다 집의 왕의 씨를 진멸하였으나 손자 요아스는 구원사의 그루터기가 되었다.

    요아스 왕자를 즉위 하기 위해(대하 23:3) 목숨을 걸고 혁명을 결단한 제사장 여호야다는 다윗의 자손으로 유일하게 숨겨놓았던 요아스(7세)왕자를 왕으로 등극하게 하고 성중이 평온을 찾게 하였다(왕하 11:4-16, 대하 23:1-15).

    아달랴와 결혼한 여호람의 통치 8년, 그 아들 아하시야의 통치 1년, 여왕 아달랴의 통치 6년 등 무려 13년 동안이나 아달랴의 악행은 온 나라를 우상숭배로 만들었다.

    다윗의 등불을 끄고 하나님의 구속역사를 방해하려 한 아달랴의 계획은, 제사장 여호야다의 개혁을 통해 무너졌고, 다윗의 후손 요아스를 통해 구원의 등불이 이어지게 되었다. 만왕의 왕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실 때 거짓과 권모술수로 무수한 영혼을 사망의 길로 인도한 사탄 마귀와 악한 영들이 멸망을 받게 될 것이다(계 20:10).

    ▶한 가지 짚고 넘어갈 부분 : 여호사밧은 다윗의 길로 행한 선한 왕 중의 한 명으로 꼽힌다.
    35세에 4대왕으로 등극,  25년간 통치했고 북이스라엘 아합과 정략 결혼을 하였다.
    여호사밧 왕은 아들 여호람이 조상 다윗의 길을 가도록 배려하고 교육하지 않은 것일까?
    자식 교육이 얼마나 철저했겠는가마는 결론은 처참하고 말았다.

    여호사밧은 며느리가 될 아달랴의 부모가 누구인지 몰랐단 말인가?
    아합과 이세벨의 딸이 누구를 닮겠는가?
    남유다의 미래를 생각하고 혼인을 시켰는지... 참 모를 일이다.
    인간의 역사는 풍랑에 흔들리는 배처럼 또는 순환의 계절처럼 흘러가는것인가?


    악녀의 상징 이세벨의 딸, 악녀의 대명사 아달랴(Athaliah) 여왕

    아달랴(Athaliah 재위 : BC 841~BC 835)는 북 이스라엘 아합 왕과 이세벨의 딸이며, 남유다 5대 왕 여호람(Jehoram)의 왕비이자 남유다 6대 왕 아하시야(Ahaziah)의 어머니다.
    아들 아하시야 왕이 북이스라엘 예후에게 살해당한 후 왕위에 올라 7년 동안 다스린 남유다 왕국 유일한 여왕이다.
    아달랴란 이름의 뜻은 '여호와는 위대하시다'

    ​북 이스라엘과 남유다의 결혼 동맹

    아버지 아사(Asa) 왕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른 여호사밧(Jehoshaphat)은 군사 제도를 정비하여 강력한 군대를 만들고 대량의 식량을 비축하였다. 한편으로 전국적으로 율법 교육을 시키며 전국에 남아 있는 이방 신들과 아세라 목상들을 모두 없애는 등 왕국을 바르고 튼튼하게 세워 놓았다. 이에 인근 나라들이 두려워하며 조공까지 바치는 등 여호사밧 왕은 이미 부귀와 영화를 크게 누리고 있었으나 북 이스라엘 왕 아합의 딸을 며느리로 맞아 북 이스라엘과 결혼 동맹까지 맺게 되었다.


    아달랴(Athalliah.   עתליה,   Γοθολία, 재위 BC 841경~BC 835경)

    남유다 왕국의 왕비가 된 북 이스라엘 왕국 공주 아달랴
    남과 북의 정략적 결혼 동맹으로 북 이스라엘 왕국의 아합과 이세벨의 딸 아달랴는 남유다 왕국 여호사밧의 아들 여호람과 결혼하게 되었고 부왕 여호사밧의 뒤를 이어 여호람이 왕이 되자 왕비가 되었다.

    여호사밧의 장자였던 여호람은 왕위에 오른 후, 여섯 명의 아우들과 자기를 비판하는 세력들을 모두 살해하였다. 또한 모든 산에다 이방 신들을 섬기는 제사처를 두고 유다 백성들이 우상을 섬기도록 하였다.

    이는 어머니인 이세벨의 냉혈한 성격을 그대로 물려받은 아달랴의 사주로 인한 것이었다.

    북 이스라엘 왕가 출신의 아달랴가 남유다 왕국의 왕비가 되어 여호와 하나님께 반기를 들었고 가나안의 신 바알을 섬기는 열렬한 우상 숭배자로 유대 왕국을 이교 신앙으로 물들였다.

    ​아달랴의 세상이 된 유다 왕국

    부왕 여호람의 뒤를 이어 아하시야(Ahaziah)가 왕위를 잇자 아하시야의 어머니 아달랴는 아하시야를 마음대로 조종해 마치 악마와도 같이 자기의 부모 아합과 이세벨의 추악한 행실을 따르도록 하였다.
    22세의 나이로 왕위에 오른 지 1년 만에 아하시야가 북 이스라엘의 예후에게 살해당하자 아달랴는 자기가 직접 왕위에 오르겠다고 선포했다.
    그러고는 유다 왕국 내의 다윗 왕가의 씨를 말려버리겠다 선언하고 오므리 왕조의 잔재를 포함하여 왕위에 오를 가능성이 있는 모든 청구인(all possible claimants to the throne)을 처형하였으며, 왕족 혈통(royal lineage)의 아이들을 72명이나 살해하는 전대미문의 학살을 저질렀다.

    ​이로 인해 유다 왕국에서 다윗 왕가는 멸족될 위기를 맞았으나, 피바람이 몰아치는 다윗 왕가의 멸절 위기 속에서 여호람의 딸 여호사브앗(Jesheba. Jehosahabeath)이 다급히 갓난아기였던 왕자 요아스를 빼내 유모와 함께 대피시켜 당시 남편이자 대제사장이었던 여호야다에게 위탁하는데 성공했다.
    여호사브앗은 여호람 왕의 딸이요, 아하시야의 누이요, 제사장 여호야다(Jehoiada)의 아내였다.


    어린 요아스 왕자를 숨기는 여호사브앗

    요아스는 아달랴가 유다를 통치하는 6년 동안 성전에 숨어 제사장인 고모부 여호야다의 보호를 받으며 살았고 여호야다는 어린 조카의 보호자로서 장모 아달리야의 서슬 퍼런 집착에서 요아스를 보호하였다.

    요아스(Joash)의 등극과 아달랴의 최후

    아달랴의 폭정이 시작된 지 6년 후인 아달랴 재위 7년 차에 제사장 여호야다가 유다의 다섯 장군들과 손을 잡고 요아스를 왕으로 모셔 유다왕국을 바로잡기로 결의하고 치밀한 계획을 세웠다. 그러고는 이에 동조한 레위 사람들과 이스라엘 족장들 앞에서 여호야다가 선포하였다.

    " ~~~~~ 아하시야 왕의 아드님이 여기에 계십니다. 이제는 이분이 왕위를 이어받을 때입니다. 다윗의 후손이 언제까지나 이 나라를 다스리게 하시겠다고 하신 여호와의 말씀에 따라야 합니다(역대하 23 : 3)"


    D-day를 안식일로 잡은 여호야다는 성전에 모인 레위인들과 백성들 앞에서 자기 아들들을 거느리고 요 아스 왕자를 모셔다가 요아스에게 기름을 부었다. 백성들은 '임금님 만세!"를 크게 외쳤다. 또한 수많은 백성들이 성전으로 몰려가 새왕을 축하하며 환호성을 질렀으며 성전의 가수들이 새왕을 축하는 노래를 연주하였고 온 백성들은 기쁜 환호성을 올렸다.

    성전에서 울려 퍼지는 환호성을 들은 성전에 들어가 군중 속에서 이 광경을 바라보던 아달랴가 입고 있던 옷을 찢으며 " 반역이다! 반역이다!" 하고 절규했다. 여호야다는 백부장을 불러 그녀의 체포를 명령했고, 결국 아달랴는 그 자리에서 끌려나가 말들이 출입하는 대문 앞에서 칼로 살해당했다.

    아달랴가 처형당하고 요아스가 새왕으로 등극하자, 유다의 온 백성들이 기뻐하고 온 유다 왕국은 평안해졌다.


    7세에 유다 왕이 된 요아스는 40년 동안 예루살렘에서 다스렸으며 여호와의 마음에 드는 일만을 하였다. 여호야다 제사장은 아달랴에게 몰살당한 왕족의 번성을 위해 요아스에게 두 아내를 골라주었고, 하나님의 축복을 받은 요아스왕은 많은 자손을 두었다.


    여호야다(Jehoiada) 대제사장,아달랴로부터 요아스를 구해 왕위에 오르게하고 예배 회복,성전 수리, 바알 우상 파괴 등등 종교개혁을 하는 등의 공적을 인정받아 130세로 죽었을 때 다윗성 열왕의 묘실에 안장되었다

    아달랴의 행실 기록

    열왕기하와 역대하 등 성경에서, 요아스가 성전에서 숨어 성장하는 동안의 아달랴의 행적은 기록되지 않았다. 이는 다윗의 혈통이 아닌 여호와 신앙을 철저하게 거부한 오므리 왕조의 혈통이어서였을 지도 모른다.

    북 이스라엘에서 남유다 왕국으로 시집와 여호람 왕의 왕비, 아들 아하시야 왕의 대비로 살다가 자기의 양친인 아합과 이세벨의 못된 행실을 그대로 따라 하며 권력을 휘둘렀던 아달랴는 남편 여호람이 죽고 또한 아들 아하시야가 죽자 신변의 위협을 뼈저리게 느꼈을 것이고 자신의 안전을 위해 할 수 있었던 것은 자신이 정권을 잡는 것이었을 것이며 이를 지켜내기 위한 아주 심한 폭정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출생과 배경 대표적 사건

    • 오므리의 손녀(대하 22:2)
    • 아합의 딸(왕하 8:16-18)
    • 여호람과 결혼하여 낳은 아들 아사랴 왕(왕하 8:25-26)
    • 손자는 요아스(왕하 11:2)

    대표적 사건 

          아들 아사랴가 죽자 손자 요아스를 제외하고 왕의 씨를 진면한 후 자신이 왕위에 올라 6년간 통치(왕하 11:1-3)
          7년째에 여호야다에 의해 왕궁에서 칼로 죽임을 당했다(왕하 11:4-20)

    관련 인물

    • 아합(북 이스라엘 왕)
    • 여호람(남 유다 왕)
    • 아사랴(아하시야 왕)
    • 여호야다(대제사장)
    • 요아스(남 유다 8대 왕)








    남 유다의 20명 왕

    남유다의 왕은 크게 두 시기로 나눌 수 있는데요.
    바로 북이스라엘의 멸망 전과 후입니다.

    먼저 북이스라엘의 멸망 전에 남유다를 다스린 왕들을 살펴보겠습니다.

    1. 르호보암(왕상 14장 / 대하 11-12장)

    유다의 첫 번째 왕인 르호보암입니다. 솔로몬의 아들인 르호보암은 남유다의 초대 왕이 됩니다. 르호보암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해 다윗과 솔로몬의 길로 행했던 기간은 고직 3년뿐이었습니다.(대하 11:17) 3년이 지나고 나라가 견고해지고 튼튼해지자 르호보암은 여호와의 율법을 저버립니다.(역대하 12 :1) 르호보암이 즉위한 지 5년째 되던 해, 예루살렘은 애굽 왕 시삭의 공격을 받게 되죠.(왕상 14:25) 하나님께서는 선지자 스마야를 통해 유다가 행한 죄악을 심판하시기 위해 예루살렘을 시삭의 손에 넘겼다고 말씀하시죠.(대하 12:5) 결과는 참담했습니다. 성전과 왕궁에 있는 모든 보물과 솔로몬이 만들었던 금 방패를 빼앗겨(대하 12:9), 간신히 놋 방패로만 궁문을 지키게 했죠.(대하 12:10) 르호보암은 그렇게 17년 간 남유다를 다스립니다.(대하 12:13)

    2. 아비얌(아비야)(왕상15장 / 대하 13장)

    유다의 두 번째 왕인 아비야라고도 불리는 아비얌입니다. 르호보암의 뒤를 이어 그의 아들 아비얌이 왕이 되고, 총 3년 동안 남유다를 다스립니다. 아비얌 역시 다윗의 길을 따르지 않고, 아버지 르호보암의 모든 죄를 그대로 행합니다.(왕상 15:3) 당시 북이스라엘의 왕이었던 여로보암과 전쟁만 하다가(왕상 15:6) 병을 얻어 죽음을 맞이합니다.

    3. 아사(왕상 15장 / 대하 14-16장)

    유다의 세 번째 왕인 아사입니다. 아비야의 뒤를 이어 그의 아들 아사가 왕이 되고, 총 41년 동안 남유다를 다스립니다. 아사는 할아버지와 아버지와는 달리 다윗의 길로 행했고, 여러 종교 개혁들을 단행합니다.(왕상 15:11) 먼저 남자 창기들을 밖으로 몰아내고, 조상들이 만든 모든 우상을 없애 버립니다.(왕상 15:12, 새번역) 그리고 우상을 섬기던 할머니 마아가도 과감히 쫓아냅니다.(왕상 15:13, 새번역) 또 오뎃의 아들 아사랴를 통해 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여(대하 15:1) 우상 제거와 여호와의 제단을 재건하는 일에 박차를 가하죠.(대하 15:8) 모든 것이 완벽해 보였던 아사였지만 북이스라엘 바아사와의 전쟁 중, 여호와 하나님이 아닌 아람 나라를 의지하였는데요. 이를 꾸짖는 예언자 하나니의 말에 몹시 화를 내며 그를 감옥에 가둡니다. (대하 16:10) 아사 왕은 통치 말년에 발에 병을 얻어 죽음을 맞이합니다.

    4. 여호사밧(왕상 22장/대하 17-20장)

    유다의 네 번째 왕인 여호사밧입니다. 아사의 뒤를 이어 그의 아들 여호사밧이 왕이 되고, 25년 동안 남유다를 다스립니다. 여호사밧은 아버지 아사를 따라 여호와 앞에서 정직히 행하는데요.(대하 17:4) 여호사밧 왕 때 남유다는 굉장한 부와 영광을 떨치게 됩니다.(대하 17:5) 여호사밧 역대 종교 개혁을 단행하는데요. 아버지 아사 왕의 개혁 후에도 남아있던 남자 창기들을 모두 쫓아내고(왕상 22:46), 재위 3년 차에 신하들과 제사장 그리고 레위 사람들을 뽑아 여호와의 율법책을 백성들에게 가르치게 합니다.(대하 17:9) 유다는 점점 더 강성해져 갔고(대하 17:10), 북이스라엘의 아합 가문과 혼인함으로 동맹을 맺게 됩니다.(대하 18:1) 하지만 그것이 여호사밧의 발목을 잡게 되었고, 하나니의 아들 예언자 예후를 통해 따끔한 질책을 받게 되죠.(대하 19:2) 여호사밧은 다시 정신을 차리고 2차 종교개혁을 단행합니다. 유다 곳곳을 직접 다니며 백성들을 살피고 재판관을 세우며, 공정한 재판을 할 것을 강조합니다. 얼마 후, 모압과 암몬, 그리고 마온 사람들이 힘을 합쳐 남유다를 공격 했고, 이에 여호사밧은 유다 온 백성과 함께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합니다.(대하 20:5-6) 결과는 유다의 대승이었습니다. 하지만 이런 여호사밧도 산당을 철거하지 않아서 온전한 개혁을 이루지는 못했습니다.(대하 20:33)

    5. 여호람(왕하8장/대하 21장)

    유다의 다섯 번째 왕인 여호람입니다. 여호사밧의 뒤를 이어 그의 아들 여호람이 왕이 되고, 8년 동안 남유다를 다스립니다. 여호람은 왕권을 잡은 후, 형제들을 죽이는 끔찍한 일을 벌이는데요.(역대하 21:4) 그는 아합의 딸 아달랴와 결혼해 아합의 길을 따릅니다.(대하 21:6) 엘리야 선지자는 여호람에게 악한 길에서 돌이키지 않으면 창자가 빠져나와 죽게 될 것이라는 하나님의 경고를 전합니다.(대하 21:15) 그리고 말씀 그대로 창자가 빠져나와 죽게 됩니다.(대하 21:19)

    6 .아하시야(왕하8-9장/대하 22장)

    유다의 여섯 번째 왕인 아하시야입니다. 여호람의 뒤를 이어 막내아들인 아하시야가 왕이 되고, 1년 동안 남유다를 다스립니다. 아하시야 역시 아버지 여호람을 따라 아합의 집의 길을 따르죠.(대하 22:3) 아하시야는 당시 북이스라엘의 왕인 요람과 왕의 자리를 빼앗으려 했던 예후와의 싸움에 휘말려 예후에게 죽임을 당합니다.(대하 22:9)

    7. 아달랴(왕하 11장/대하 22-23장)

    유다의 일곱 번째 왕인 아달랴입니다. 아하시야의 죽음 뒤, 그의 어머니 아달랴는 유다의 왕족을 죽이기 시작합니다.(대하 22:10) 그때 아하시야의 누이인 여호세바(여호사브앗)가 아하시야의 아들 요아스를 유모와 함께 빼내었고, 그렇게 요아스는 여호와의 성전에서 6년 동안 숨어 지냅니다.(왕하 11:2) 아달랴가 남유다의 왕이 된 지 7년째 되던 해, 제사장 여호야다는 아달랴를 몰아내고 요아스를 왕으로 세우기 위한 작전을 벌입니다. 작전은 성공했고, 아달랴는 죽임을 당하게 되죠. 이렇게 아달랴의 6년 간의 통치가 끝나게 됩니다.

    8.요아스(왕하 12장/대하 24장)

    유다의 여덟 번째 왕인 요아스입니다. 할머니 아달랴의 죽음 뒤에 왕이 된 요아스는 40년 동안 남유다를 다스립니다. 요아스는 아달랴 시대에 방치되었던 성전을 보수하고, 날마다 하나님의 성전에서 번제를 드리는 등 선한 왕의 면모를 보입니다. 그러나 어릴 때부터 자신을 돌봐주고, 왕위에 오르게 한 여호야다가 죽자 요아스는 돌변합니다. 하나님의 성전을 버리고 아세라 목상과 우상을 섬기게 된 건데요. 이에 하나님은 여호야다의 아들 스가랴를 통해 무섭게 경고하시지만, 요아스는 그 경고를 무시하고 스가랴를 돌로 쳐 죽입니다. 얼만 지나지 않아 아람 왕 하사엘이 예루살렘을 공격해 왔고, 전쟁에서 부상을 당한 요아스는 신하들에 의해 죽임을 당하게 됩니다.

    9.아마샤(왕하 14장/대하 25장)

    유다의 아홉 번째 왕인 아마샤입니다. 요아스의 뒤를 이어 그의 아들 아마샤가 왕이 되고, 남유다를 29년간 다스립니다. 아마샤을 왕권을 잡은 후, 아버지 요아스를 죽인 신하들을 먼저 처형합니다. 에돔과의 전쟁에서 승리한 아마샤는 에돔 사람들이 섬기던 우상들을 가져와 섬기기 시작하는데요. 이를 지적하는 선지자를 무시하고, 자신의 힘을 과신한 나머지 북이스라엘과 전쟁을 일으킵니다. 전쟁에 크게 패배한 후에, 아마샤는 백성들에 의해 죽임을 당하게 됩니다.

    10.아사랴(웃시야)(왕하 15장 / 대하 26장)

    유다의 열 번째 왕인 웃시야라고도 불리는 아사랴입니다. 아마샤의 뒤를 이어 그의 아들 아사랴(웃시야)가 왕이 되고, 남유다를 52년간 다스립니다. 아사랴는 블레셋과의 전쟁으로 영토를 확장하고, 성을 튼튼히 하는 등 힘을 키워갔는데요. 유다의 힘이 커지는 만큼 아사랴의 교만도 커져갔고, 어느 날 제사장에게만 허용된 향을 피우는 일이 자신이 직접 행하려고 합니다. 제사장들의 만류에도 향을 피우려던 아사랴의 이마에 나병이 생기게 되었고, 죽을 때까지 격리되어 별궁에서 지내게 됩니다.

    11.요담 (왕하 15장 / 대하 27장)

    유다의 열한 번째 왕인 요담입니다. 아사랴의 뒤를 이어 그의 아들 요담이 왕이 되고, 남유다를 16년 동안 다스립니다. 요담은 성전을 증축하고, 암몬과의 전쟁에서도 승리합니다. 하나님은 승리에도 겸손을 잃지 않은 요담을 점점 더 강하게 하시죠. 요담은 그렇게 다윗 성에 장사됩니다.

    12.아하스(왕하 16장/ 대하 28장)

    유다의 열두 번째 왕인 아하스입니다. 요담의 뒤를 이어 그의 아들 아하스가 왕이 되고, 남유다를 16년간 다스립니다. 아하스는 유다의 왕 중에서 가장 악한 왕으로 꼽히는데요. 바알의 우상을 부어 만들고 심지어 자기 자녀를 제물로 바치는 끔찍한 일을 벌이죠. 그는 산당과 모든 푸른 나무 아래에서 우상에게 제사를 드립니다. 아람과 이스라엘 연합군의 침입으로 엄청난 피해를 입게 되고, 하나님이 아닌 앗시리아 왕 디글랏 빌레셀에게 도움을 청하죠. 급기야 앗시리아의 다메섹 제단을 그대로 유다로 가져오기까지 합니다. 아람과 이스라엘 연합군이 물러간 뒤 에돔 사람이 다시 유다를 공격 해 왔고, 블레셋 사람들의 공격까지 받게 됩니다. 이런 상황 속에서도 아하스 왕은 여전히 하나님이 아닌 앗시리아 왕과 다메섹 신들을 의지합니다. 마침내 아하스는 성전 안에 있는 기구들을 부수고 성전 문을 닫기까지 합니다. 또 유다 각 성읍에 산당을 세워 하나님의 진노를 사게 됩니다.

    북이스라엘의 멸망 후에 남유다를 다스린 왕들

    13. 히스기야(왕하 18-20장, 역대하 29-32장)

    유다의 열세 번째 왕인 히스기야입니다. 아하스의 뒤를 이어 그의 아들 히스기야가 왕이 되고, 남유다를 29년간 다스립니다. 히스기야의 아버지 아하스는 유다의 왕 중에서도 가장 악한 왕으로 꼽히는 왕이었죠. 하지만 다행스럽게도 히스기야는 아버지 아하스와는 달랐습니다. 다윗의 길을 따른 건데요. 히스기야는 혼신의 힘을 다해 종교 개혁을 단행하는데요. 먼저 아버지 아하스가 닫아 놓았던 성전의 문을 열고 수리하는 성전 정화 운동을 벌였고, 다음으로는 오랫동안 멈춰있던 제사와 유월절을 다시 지키기 시작했습니다. 또 유다 온 땅에 펴진 우상과 산당 등을 제거하고, 유명무실했던 제사장과 레위 사람들을 다시 불러 모아 제 역할을 하도록 도왔죠. 성경은 히스기야를 유다 모든 왕들 중에 이처럼 하나님을 의지한 왕은 없었다고 평가하는데요. 그런 히스기에게도 어려움은 찾아왔습니다. 히스기야가 유다를 다스린 지 육 년째 되던 해, 북이스라엘이 앗수르에 의해 멸망을 당하게 됩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히스기야 왕 제14년에 앗수르 왕 산헤립이 두 번에 걸쳐 유다를 침공 합니다. 히스기야는 이사야 선지자의 경고에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했고, 하나님은 그 기도에 응답하셔서 앗수르 군대를 물리쳐 주십니다. 그 무렵 히스기야는 병에 들어 거의 죽게 되었는데요. 이때 히스기야는 벽을 바라보며 간절히 기도했고, 하나님은 역시 그 기도에 응답하셔서 히스기야의 생명을 15년 연장시켜 주셨습니다. 이렇게 많은 기적을 경험한 히스기야였지만, 병문안 차 방문했던 바벨론 왕의 사절들에게 자신의 힘을 과시하는 교만의 덫에 걸려 넘어지게 됩니다. 하나님은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 교만했던 히스기야에게 네 자손들이 후에 바벨론의 포로로 끌려가게 될 것이라고 경고하시죠. 히스기야는 다윗 자손의 묘실 중 높은 곳에 장사됩니다.

    14. 므낫세(왕하 21장, 역대하 33장)

    유다의 열네 번째 왕인 므낫세입니다. 히스기야의 뒤를 이어 그의 아들 므낫세가 왕이 되고, 55년 동안 남유다를 다스립니다. 므낫세는 아버지 히스기야의 길이 아닌, 할아버지 아하스의 길을 따랐는데요. 심지어 여호와의 성전 두 마당에 우상의 제단을 쌓고, 손수 아세라 목상을 만들어 성전에 세우기까지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앗수르 군대를 일으키셔서 므낫세를 사로잡아 바벨론으로 끌려가게 하시죠. 포로가 된 므낫세는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했고, 하나님은 므낫세를 다시 예루살렘으로 돌려보내십니다. 그제야 정신을 차리게 된 므낫세는 우상과 이방신들의 제단을 헐고, 여호와의 제단을 다시 보수하여 하나님께 제사를 드립니다. 그는 웃사의 동산에 장사됩니다.

    15. 아몬(왕하 21장, 역대하 33장)

    유다의 열다섯 번째 왕인 아몬입니다. 므낫세의 뒤를 이어 그의 아들 아몬이 왕이 되고, 2년간 남유다를 다스립니다. 아몬은 아버지 므낫세를 따라 우상을 섬기며, 하나님을 잊어버립니다. 결국 그는 신하들에 의해 왕궁에서 죽임을 당하게 됩니다.

    16. 요시야(왕하 22-23장, 역대하 34-35장)

    유다의 열여섯 번째 왕인 요시야입니다. 아몬의 갑작스러운 죽음 후에, 유다 백성들이 반역을 일으킨 신하들을 죽이고, 아몬의 아들 요시야가 왕위에 올라 31년간 남유다를 다스립니다. 요시야는 아버지 아몬이 아닌 다윗의 길을 따르는데요. 성전 수리를 지시했고, 대제사장 힐기야가 성전에서 여호와의 율법책을 발견하게 됩니다. 요시야는 율법책의 말씀을 듣고 크게 슬퍼하여 옷을 찢었고, 백성들에게도 언약책의 말씀을 읽어 주며 다시 여호와의 언약을 세울 것을 백성들과 함께 맹세하죠. 이러한 맹세는 우상과 산당의 제거 그리고 유월절의 부활로 이어졌는데요. 이후 애굽과의 전쟁에서 화살에 맞은 요시야는 예루살렘에 돌아와 숨을 거두게 됩니다. 요시야의 죽음에 유다의 백성들은 슬퍼했고, 예레미야 선지자는 애가를 지어 요시야의 죽음을 슬퍼했습니다.

    17. 여호아하스(왕하 23장, 역대하 36장)

    유다의 열일곱 번째 왕인 여호아하스입니다. 요시야의 뒤를 이어 그의 넷째 아들 여호아하스가 왕이 되고, 3개월간 남유다를 다스립니다. 여호아하스는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하였고, 애굽에 끌려가 그곳에서 죽음을 맞이합니다.

    18. 여호야김(엘리야김)(왕하 23-24장, 역대하 36장)

    유다의 열여덟 번째 왕인 여호야김입니다. 동생 여호아하스의 뒤를 이어 요시야의 둘째 아들 여호야김(엘리야김)이 왕이 되고 11년간 남유다를 다스립니다. 여호야김은 애굽 왕 느고에 의해 왕이 되는데요.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한 여호야김은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 왕에 의해 쇠사슬에 묶여 바벨론으로 끌려가는 수모를 당합니다.

    19. 여호야긴(고니야,여고냐) (왕하24-25장, 대하 36장)

    유다의 열아홉 번째 왕인 여호야긴입니다. 여호야김의 뒤를 이어 그의 아들 여호야긴이 왕이 되고, 석 달 열흘 동안 남유다를 다스립니다. 역시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했고, 바벨론의 공격으로 아버지와 같이 바벨론의 포로로 끌려갑니다. 이때 성전과 왕궁에 있는 보물과 그릇들도 빼앗기게 되죠. 바벨론에서 37년 간 포로생활을 하던 여호야긴은 후에 느부갓네살의 아들 에윌므로닥이 다스릴 때, 감옥에서 풀려나 남은 여생을 에윌므로닥 왕의 지원을 받으며 살게 됩니다.

    20. 시드기야(맛다니야)(왕하 24-25장, 대하 36장)

    유다의 스무 번째 왕이자 마지막 왕인 시드기야입니다. 시드기야는 요시야의 셋째 아들로 바벨론 느부갓네살 왕에 의해 세워진 왕입니다. 11년간 남유다를 다스리는데, 역시나 돌이킬 줄 모르고 여호와 앞에서 악행을 저지릅니다. 하나님은 마지막 순간까지 예레미야와 에스겔, 그리고 하박국 선지자를 통해 경고하시지만, 시드기야는 끝까지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했고 결국 주전 586년 바벨론에 의해 남유다는 멸망하게 됩니다.



    사울, 다윗, 솔로몬 세 왕에 의해 120년 동안 계속되어 오던 통일왕국은 남북으로 나뉘어 남유다와 북이스라엘로 나뉘어졌습니다. 북이스라엘은 253년이나 계속되니 B.C 722년 호세아 9년에 앗수르의 살만에셀에게 멸망당하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그후에도 남왕국 유다는 136년간 독존하여 오다가 B.C 586년에 바벨론에게 망합니다. 그때까지 20명의 왕이 한 왕조 (참조 : 북이스라엘 9왕조)에서 활동을 합니다.


     제1대  르호보암 (왕상 11 : 43, 14 : 21-31)
    솔로몬과 암몬여인 나아마의 아들로서 아버지때부터 분열되기, 시작한 나라를 완전히 분열시키고 말았습니다. 그는 솥로몬 때의 학정으로 인해 불만으로 가득찬 백성들의 요구(왕상12:4)를 악한 고문관들의 의견을 받아들여 거절함으로써 반란의 도화선이 되게 했습니다. 그리하여 고집세고 어리석은 르호보암은 12지파중 유다와 베냐민 2지파의 지지를 받아 남왕국을 세우게 되었습니다. 

    그는 아내가18명, 첩60명, 아들28명, 딸60명이였고, 제위5년에 애굽왕 시삭의 침입을 받아 성전과 왕국을 노략질 당하게 되었습니다. 금방패를 빼앗기고 놋방패로 대치합니다.(왕상 14:25-28) 영적으로는 처음 통치3년(대하11장)까지는 다윗과 솔로몬의 길로 행했지만 제위5년에 율법과 하나님을 버립니다.(대하12장)

     제2대  아비야 (왕상 15:1-8, 대하 13장)
    아비야는 3년동안 유다를 통치했는데 그는 북이스라엘의 잘못된 제사를 지적하고 남유다의 규례대로 직무를 수행했으나 그는 하나님의 도우심에도 불구하고 타락하여 사악한 왕이 됩니다. 

    북왕국의 왕 여로보암을 전장에서 패배시키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는 그 아버지와 같이 악을 행하였고 우상 섬기는 것을 허락하므로 백성들은 회개치 못하고 더 악해졌습니다. 

     제3대  아사 (왕상 15:9-24, 대하 14-16)
    아비야의 아들인 아사는 위한한 건축자이고, 최초로 구원받은 유다왕이고,유다의 중흥을 이끈왕입니다. 그러나 유다의 선한 왕 가운데 하나였으나 슬프게 끝을 맺었습니다. 

    그의 첫 10년은 평화로왔고 우상숭배를 금하여 아세라 목상을 만든 할머니(마아가)를 폐위시키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자신의 죄를 지적한 예언자 하나니를 옥에 가둡니다. 그래서 마지막 2년 동안은 발에 병이나자 이방인 마술사를 불러 마법을 행하였습니다.(대하 16장) 

    여기서 재미있는 것은 유다의 선한 왕들이 말년에 가서는 악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예외가 있다면 므낫세가 처음에는 악했으나 후에 선하게 된 일입니다.(대하 33장) 이 시기의 남왕국 예언자들은 스마야, 오뎃, 아사랴. 하나니등입니다.

     제4대  여호사밧 (왕상 22:41-50)
    25년동안 유다를 통치했고 유다의 선한 왕중의 한 사람입니다. 그는 우상숭배를 없애고 전 국가에 율법교사를 파송하여 종교교육을 실시했습니다. 또한 종교관리와 민정관리를 임명하여 종교와 정치를 분리했습니다. 

    외적이 주는 두려움이 기도와 금식을 하게했고 유대의 큰 영적인 부흥을 가져왔습니다. 그레서 주변의 나라들이 그를 무서워했으며 환심을 사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의 통치 13년에 이스라엘 왕 아합과 동맹관계를 맺기 위하여 아들 여호람을 아합의 딸 아달랴와 결혼 시켰고(대하18:1) 이에 대하여 예후의 책망을 받았습니다.

    그는 통치 초기에는 율법을 유다의 여러 성읍에서 가르치며 부흥운동으로 왕권이 점점 강해졌으나 통치 말기에 여호와하나님을 미워하는 자들(아합,아하시아,요람)과 연합함으로 씁쓸한 인생말년이 됐습니다.


     제5대  여호람 (왕하 18:16-24. 대하 21:1-20)
    유다의 12명의 악한 왕 중의 세번째 사람입니다. 그는 아합의 딸 아달랴와 결혼한 후에 그들의 악한 길을 따랐습니다. 그는 우상을 만들었고 그는 왕위에 오른뒤에 그의 여섯형제을 죽였습니다.

    선한아우를 죽이고 포악한 정치 때문에 선지자 엘리야의 심판예언을 들었습니다. 결국에는 창자가 빠져나오는 병에 걸려서 죽였습니다. 그는 열왕의 묘실에도 못들어 갑니다.


     제6대  아하시야 (왕하 8:25-9:29)
    여호람과 아달랴의 아들인 아하시야는 아버지 아합의 길로 행한 유다의 네번재 악한 왕이었습니다. 그는 우상숭배를 계속했으며 이스라엘의 왕인 여호람과 동맹을 맺었습니다. 예후가 여호람을 죽이기 위하여 이스라엘로 갔을때 아하시야는 함께 있다가 죽음을 당했으며 또한 그의 42명의 형제 친척들이 죽임을 당하였습니다.


     제7대  아달랴 (왕하 11장. 대하 22:10-23:21)
    아합과 이세벨의 딸로서 유다 왕 여호람의 아내이며 아하시아의 어머니입니다. 이세벨과 아달랴는 이스라엘 역사상 5대 악한 여성중의 포함됩니다. (이세벨,아달랴,들릴라, 세레스(하만의 아내 에스더 5:14, 6:13),헤로디아)

    그녀는 아들인 아하시야가 죽자 도망한 왕자 요아스를 제외한 모든 왕족을 죽였고 6년 통치 후에 참수형을 당하고 말았습니다. 그녀는 여호람의 미망인으로 왕비8년, 아하시야의 어머니로 황후1년, 왕위를 찬탈하고 왕으로 6년을 정권을 가졌으나 제사장 여호야다의 명령으로 백부장들이 여호와의 전 밖으로 길을 열어주어 왕궁 말문 어귀에 일를때에 군대의 의해서 죽임을 당합니다. 

     제8대  요아스 (여호아스) (왕하 11-12장, 대하 22:10-24:27)
    요아스는 선하게 시작했다가 악하게 끝난 왕입니다. 그는 아달랴가 훼손한 성전을 수리하고 이를 위해 모금을 했습니다. 그러나 그의 선행은 여호야다 대제사장이 살아있는 동안 계속되었을 뿐입니다. 

    제사장 여호야다가 죽자 요이스는 우상숭배에 빠져 선지자들의 충고에 마이동풍이었습니다. 또 여호야다의 아들인 당시의 대제사장 스가랴를 왕의 죄를 백성에게 담대하게 알리자 돌로 쳐 죽이도록 허락합니다. (대하 24:20-21) 

    후에 수리아(아람)왕 하사엘이 유다로 진격해 오자 요아스는 성전의 보물들을 뇌물로 주었습니다. 말년에 심복들에 의해 암살당했다. (대하 24:23-25)

    그는 다윗의 씨로 7세에 제사장 여호야다의 도움으로 왕에 등극하여 성전을 수리하고 번제를 드렸습니다. 그러나 여호야다의 죽음을 분깃점으로 기생식물적 신앙을 보입니다. 여호야다가 죽자 우상을 세우고 여호야다의 아들 스가랴를 죽이고 불신앙 외교를 하는등, 의를 위하여 자신의 발로 스스로 서지 못했던 사람의 불행한 종말을 보여줍니다.

     제9대  아마샤 (왕하 14:1-22. 대하 25장)
    아마샤는 살해당한 요아스의 아들로서 그 아버지의 살해자들을 죽임으로써 그의 통치를 시작하였습니다. 전쟁준비를 위해서 이스라엘의 용병을 은100달란트에 10만명을 사왔으나 선지자의 질책으로 돌려보냅니다. 그 용병들이 돌아가면서 성을 엄습하고 3천명을 죽이고 물건을 노략해 갑니다. 

    그는 통치기간중 에돔을 격파했는데 돌아올 때에 그들의 신들을 가져와서 그 에돔의 신들을 섬겼습니다. 그때 선지자의 책망이 있었는데 그것을 무시하고 선지자의 입을 막으므로 멸망을 자초합니다. 

    또 승리에 대해 교만하여 이스라엘의 요아스에게 전쟁을 일으켜  패하고 왕궁의 보물과 사람들을 볼모로 잡혀가게 합니다. 그리고 80년을 계속해온 남북간의 동맹이 무너지고 말았습니다. 아마샤는 반역자들에 의해 살해 당했고 아마샤 이후 유다는 다시 이스라엘과 대립관계를 가지게 됩니다.


     제10대  웃시야 (왕하 15: 1-7, 대하 26장)
    웃시야란 말은 "여호와의 힘"이란 뜻이나, 웃시야는 선하기 보다는 위대한 왕으로서 그의 후반기 생애는 악으로 물들어져 있습니다. 그는 에돔, 블레셋, 아람, 암몬등을 점령했고 예루살렘의 성벽을 튼튼하게 했고, 탑들을 쌓
    았고 강력한 전쟁무기를 발명하며 군대의 수를 증가시켰고 예루살렘의 관기시설을 개선함으로 큰 명성을 날렸습니다. 

    그는 스가랴가 살아있는 동안에 하나님을 찾았고 그가 하나님의 뜻을 찾는 동안에는 하나님께서 그가 하는 일마다 형통하게 했습니다. 형통할때의 업적을 보면 엘롯성을 재건, 블레셋의 강한 성들 정복, 아라비아인들 물리침, 암몬족속으로 조공을 바치게함, 명성이 원방에 퍼집니다. 

    그러나 그는 교만하여 성전에 들어가 제사장이 하는 분향을 대신 하려다가 만류하는 제사장들에게 화를 내므로 이마에 문둥병이 들어서 죽는 날까지 문둥병자로 별궁에서 외로운 삶을 보냈습니다. 그가 살아있는 동안에 스가랴, 아모스, 호세아가 예언하고 있었으며, 그가 죽던 해에 이사야가 예언하기 시작했습니다. (암 11:1, 호1:1. 사6:1)

     제11대  요담 (왕하15:32-38, 대하26:1-9)

    요담은 25세때 왕위에 올라 성전의 윗문을 건축하고 산간지방에 성읍건축하고 수풀사이에 진영과 망대를 세우고 암몬을 쳐부수고 매년 엄청난 조공을 거두워드립니다. (은100달란트, 밀 1만석, 보리 1만석) 요담은 하나님앞에 정도를 행하였으므로 점점 강하여 졌습니다. 그는 선한왕이였습니다. 


     제12대  아하스 (왕하 16장, 대하 28장)
    아하스는 이버지와는 달리 악한 왕이었습니다. 유다의 왕중 가장 악한 사람으로서 대표적인 배교자였습니다. 그는 바알과 다른 거짓 신들을 섬겼습니다. 

    그는 아들을 우상의 제물로 바치고, 동정녀 탄생에 대해 최초로 들은 왕이고, 성전모독, 유다 각 성읍에 산당을 세웠습니다. 이스라엘 왕이란 불명예스런 칭호가 붙습니다. 아하스의 죄에 대하여 하나님의 징벌이 있었지만 그의 태도는 회개하지 않고 더욱 하나님께 범죄합니다. 아하스 왕을 끝으로 분열왕국 시대의 종말을 오게 하고 유다만의 시대가 136년 동안 계속됩니다.


     제13대  히스기야 (왕하 16:20, 18:20장, 대하 28:27-32장)
    히스기야는 아하스의 아들로서 유다가 대단히 어려울때 왕이 됩니다. 히스기야는 유다왕 중 가장 선한 왕이자 가장 부유했습니다. 그는 여호와의 전을 성결케하고 더러운 것들을 성소에서 제거합니다. (대하 29:2) 

    그리고 여호수아 이후 지키지 않았던 유월절을 지켰습니다. 히스기야의 목적은 두 가지였습니다. 속된 것은 뿌리채 케어내고 거룩한 것은 새로 심어야 한다는 목적으로 종교개혁을 일으켰습니다. 히스기야는 교만으로 중병이 생겼을 때 그의 간절한 기도로 인하여 15년동안 생명을 연장시킬 수 있었습니다.(왕하 20장, 대하 32:24-31) 

    그는 말년에 궁중에 있는 많은 보물을 자랑하다가 이사야 선지자의 혹독한 책망을 받았고 이사야는 그 모든 것이 바벨론으로 옮긴바 된다고 예언했습니다. 이는 128년 후에 성취됩니다.


     제14대  므낫세 (왕하 20장, 21:1-20, 대하 33장)
    므낫세는 남,북 전체왕중에 가장 장기집권한 왕입니다. 55년동안 유다를 통치했습니다. 처음에 그는 아버지가 없애버린 신당을 다시 세우고 하나님 공경하는 일을 폐하고 자기의 아들까지 사신에게 불살라 제사 지낸 일이 있으며 하나님을 공경하는 사람을 심히 핍박하였습니다. 

    후에 앗수르왕이 예루살렘을 점령하고 므낫세를 잡아갔으나, 감옥에서 깊이 회개함으로 다시 왕노릇 할 수 있었으며 하나님을 공경하는 일을 열심히 시작하였습니다. 


     제15대  아몬 (왕하 21:18-26, 대하 33:20-25)
    아몬이란 이름은 애굽 신의 이름을 사용한 것입니다. 그는 2년 동안 아버지가 만든 아로새긴 모든 우상에게 제사하여 섬겼으며 악한 왕으로 군림했고, 그는 부친 므낫세의 나중에 스스로 뉘우치고 겸비함 같이 여호와앞에서 스스로 겸비치 않고 더욱 범죄하더니 신복들의 반역하여 그를 죽입니다. 


     제16대  요시야 (왕하 21:24,26, 22-23장)
    이름의 뜻은 "여호아께서 치료하신다"는 뜻입니다. 그는 31 년 동안 왕위에 있었으며 선한 왕중의 하나입니다. 성전을 수리하고 율법을 가르치며 신당을 다 없애고 유월절을 지켰습니다. 그는 율법책을 발견하여 가르칠뿐만 아니라 여러 방면에서 종교개혁을 실시하였습니다.

    그는 다윗 이래 가장 경건한 왕이고, 치리를 시작할때 우연히 성전에서 모세의 율법책을 발견하고, 유다 온 땅에 율법이 읽히도록 합니다. 그리고 증조부 히스기야 때보다 더 큰 유월절 축제 행사를 주관합니다.

    그의 신앙은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히 행하였고, 그 조상 다윗의 길로 행했으며, 좌우로 치우치지 아니했습니다. 

    그의 종교개혁은 바알의 모든 산당을 부수고, 부어 만든 우상들을 빻아 가루로 만들어 제사하던 자들의 무덤에 뿌리고, 이방 제사장들의 뼈를 섬기던 제단에서 불살랐습니다.

    요시아는 8세에 즉위하여 16세에 하나님을 찾고, 20세에 예루살렘의 성결작업을 시작하여 26세때 성전정결완료하고 성전수리하고, 유월절을 지킵니다. 그리고 39세때 애굽과의 전투에서 전사합니다.


     제17대  여호아하스 (살룸) (왕하 23:30-34 대하36:1-4)
    이름의 뜻은 "하나님께서 붙드신다는 뜻입니다. 그는 요시아의 둘째 아들로서 히스기야나 요시야를 본받지 않고 므낫세와 아몬의 행위대로 악을 행하였습니다. 애굽을 반대한 그는 부왕을 죽인 바로느고에 의해 3개월만에 폐위되고 불잡혀 가서 죽고 말았습니다.

    여호야김 (엘리야김) (왕하 23:34-24:7, 대하 34:4-8)
    여호야김은 요시아의 맏아들이고, 애굽의 바로느고의 의해서 왕위에 오르고, 죄없는 자를 죽이고 예레미야를 핍박한 왕입니다. 

    11년 동안 왕위에 있었으며 악한 왕중의 하나입니다. 처음 4년은 애굽의 속국이 되었으나, 그후 바벨론의 느부갓네살에 의해 다시 바벨론의 속국이 되었고, 쇠사슬로 결박해서 바벨론으로 데려갑니다. 이때 많은 학살이 있었고 지위가 높은 사람을 잡아 갔는데 다니엘,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도 그 중의 한 사람입니다. 그는 죽어 시체가 나귀처럼 취급받아서 예레미야의 예언이 성취됩니다. 


     여호야긴 (고니아,여고니아) (왕하 24:6-16, 25:27-30)
    여호야김의 아들로 3개월간 통치했습니다. 그는 부친의 모든 행위를 본받아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하였습니다.(왕하24:9) 그가 통치한지 100일째 되는 날, 느브갓네살이 예루살렘을 포위하고 왕과 주요인물 1만명을 잡아 갔습니다.(왕하 24:14) 이때 에스겔도 같이 잡혀갑니다.

     시드기야  (왕하 24:17-25:21. 대하 36-10-21)
    시드기야는 요시야의 네째 아들로서 그의 형제들과 같이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하였습니다. 시드기야는 애굽과 동맹하여 느부갓네살을 대항하려고 하였습니다. 이때 느부갓네살이 다시 쳐들어 와서 도망하는 시드기야를
    잡아 눈을 빼고 바벨론으로 끌어갔습니다. 이때 많은 사람이 바벨론 포로로 잡혀 갔습니다. 예루살렘 성전은 파괴되었고 모든 기물들을 빼앗겼습니다.

    그는 반 바벨론 정책으로 유다의 멸망을 재촉했으며, 악을 행하며 자신의 행위가 옳은가 그른가에 관심이 없었고, 예레미야를 통해서 의를 알았지만 그것을 실천할 용기를 지니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그의 잘못으로 인하여 모든 유다 백성이 바벨론 포로가 되는 고통을 겪게 됩니다.

    시드기야왕을 끝으로 20명의 왕이 활동했던 남유다왕국도 끝나버리고 맙니다.




    북이스라엘 왕

    솔로몬왕이후에 이스라엘은 남쪽 유다와 북쪽 이스라엘로 나라가 분단됩니다. 그 당시의 왕들을 간단하게 알아보려고 합니다.


    제1대  여로보암  (왕상 11 : 26 - 14 : 19)

    반란의 지도자 여로보암(느밧의 아들)은 솔로몬 밑에서 행정관리로 일하였던 자입니다. 솔로몬은 여로보암이 10지파의 통치자가 될 것이라는 예언을 들었을 때 그를 죽이려 했으나 그는 애굽으로 도망하여 애굽 왕 시삭의 보호를 받았습니다.

    솔로몬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자 여로보암은 곧 세겜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는 르호보암에게 양보를 요청하는 대표단을 인솔하였으며 르호보암이 이를 거절하자 북쪽 지파들에게 반역할 것을 충동하였습니다. 북족 지파(10지파)들은 여로보암을 그들의 지도자로 삼았습니다. 

    여로보암은 북쪽 지파들이 유대 땅에 있는 예루살렘에 가서 제사를 드리는 것을 막기 위해서 벧엘과 단에 금송아지를 둔 신당을 세워 경배하게 했습니다. 여로보암은 22년간 이스라엘을 지배하였습니다.


    제2대  나답  (왕상 15 : 25 - 32)


    여로보암은 아들 나답에게 왕권을 물려주었습니다. 성경에는 나답에 대해서는 자세한 기록이 없습니다. 그는 아버지를 쫓아 악한 행실을 자행했으며 겨우 2년을 통치한 후, 그가 블레셋의 한 성읍을 포위하고 있을 당시 잇사갈 사람 바아사에게 살해 되었습니다.


     제3대  바아사 (왕상 15 : 26 - 16 : 7)
    바아사는 이스라엘의 장군으로서 약탈과 살륙으로 권력을 잡고 나답과 온 집안을 쳐서 죽이고 왕이 되어 24년동안 통치하였으나 여전히 여로보암의 집을 본받아 악을 행하였습니다. 

    유다의 아사왕에게 전쟁을 포고하고 유다로 통하는 길을 막기위해 라마에 성벽요새를 축성하고 나답을 죽여 선지자 아히야의 예언을 성취하였습니다. 

     제4대  엘라 (왕상 16 : 6 - 14)
    바아사의 아들인 엘라는 정신이 혼란한 바보였습니다. 그가 디르사에 있는 그의 궁내대신 아르사의 집에서 술을 마시고 취해 있을 때에 병거 절반을 통솔하던 군대장관인 시므리가 그를 암살함으로써 2년 동안의 그의 통치시대가 끝났습니다.


     제5대  시므리 (왕상 16 : 9 - 20) 

    시므리 왕은 새 조정을 시작하고 7일동안 왕노릇 하였습니다. 살륙과 약탈로 왕이 되었지만 백성들에게 배척을 당했습니다. 그때에 오므리가 시므리 왕이 있는 궁을 둘러싸고 죽이려고 하자 스스로 왕궁에 불을 놓고 그 가운데서 타 죽었습니다.


     제6대  오므리 (왕상 16 : 15 - 28)

    오므리는 12년동안 왕노릇 했고 이때까지 왕중에서 가장 강력한 군주였고 사마리아를 이스라엘의 수도로 정하고 전왕인 시므리 보다도 더 악한 왕이 되었습니다. 아들 아합을 이세벨과 결혼을 시켰습니다.


     제7대  아합 (왕상 16 : 29 - 22 : 40)

    아합은 22년동안 왕위에 있었습니다. 오므리의 아들인 아합은 이스라엘의 모든 왕중에서 가장 악한 왕이었습니다. 우상을 섬기며 바알신을 섬겼고 하나님을 공경하는 선지자와 제사장을 죽이고 바알을 위해 신당을 세우고 백성을 심히 악하게 다스렸으며 그의 아내 이세벨은 베니게 왕의 딸로서 바알신을 이스라엘에 가지고 들어 왔으며 중심으로 바알을 섬기는 자였습니다. 

    그의 바알 숭배가 나라의 큰 기근을 초래하였으며 유다왕 여호사밧과 사돈을 맺어 군사동맹을 맺고 이득을 얻어 몇번의 전쟁에서 승리합니다. 그리고 일시적이고 순간적인 회개(왕상21:29)가 있었지만 결국은 수리아와의 전투에서 전사합니다. 이 때에 유명한 선지자가 엘리야이고 갈멜산에서의 대결은 유명합니다.

     제8대 아하시야  (왕상 22 : 51 - 왕하 1 : 18)
    아하시아는 아합와 이세벨의 첫째 아들로 2년동안 왕위에 있었으며 힘은 아합 왕에 미치지 못했으나 악한 일은 아버지 못지 않게 많이 행하였습니다. 하나님을 무시한 왕으로 유명합니다. 그는 궁전에서 떨어져 병들었을때 치유를 위해 바알세붑에게 물어봅니다. 하나님을 배반하고 우상을 숭배하므로 엘리야가 와서 책망하자 아하시야는 두번이나 엘리야를 죽이려 했으나 하늘에서 불이 내려와 그 군대들을 다 죽이고 그는 여호와의 말씀대로 죽었습니다.


     제9대  여호람(요람)  (왕하 3 : 1 - 9 : 29, 대하 22 : 7 - 9)
    여호람은 아합과 이세벨의 막내아들로 형인 아하시야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올랐습니다. 이때 엘리야가 승천했습니다. 여호람은 바알을 섬겼으며 모압이 이스라엘을 반역하여 일어나자 유다왕 여호사밧과 에돔의 도움을 구하여 모압을 치려고 했습니다. 엘리사의 도움으로 이 싸움에서 승리했습니다. 

    벤하닷 2세가 다시 사마리아를 포위하자 그는 도망했습니다. 엘리사의 명을 따라 엘리사의 생도 중 한 사람이 예후에게 기름을 부어 왕으로 삼자 예후는 이스라엘로 가서 여호람의 염통을 활로 쏘아 죽여 나봇의 밭에 던지었습니다.


     제10대  예후 (왕상 19:15-18, 왕하 9-10장)
    예후는 엘리사가 보낸 생도중에 한사람으로 부터 기름부음을 받고 여호람왕을 죽이고 왕이 된 자로서 잔인함에 있어 전무후무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수많은 사람을 죽였습니다. 예를 들면 여호람. 아하시아, 이세벨. 아합의 70명의 아들들 이스라엘에 있는 아합의 추종자들. 아하시야의 42명의 가족들 사마리아에 있는 아합의 추종자들, 선지자들과 바알의 추종자 모두를 색출하여 죽였습니다. 

    예후는 바알을 섬기는 자들을 멸하고 그들의 신당을 공중 화장실로 만들며(왕하 10:19-28) 하나님께 칭찬을 받았으나 그는 또다른 우상인 금송아지를 섬기는 죄에서 떠나지 못합니다. (왕하 10:29)


     제11대  여호아하스  (왕하 13 : 1 - 9)
    여호아하스는 예후의 아들로 수리아의 하사엘과 벤하닷의 손에 붙여져 겨우 명맥만 유지하였습니다. 그는 여로보암의 범죄를 그대로 실행했던 자였으며 17년 동안 이스라엘을 통치하고 맥없이 죽습니다.


     제12대  요아스 (왕하 13 : 10 - 25)
    여호아하스와 같이 여로보암의 죄를 따랐으나 몇 가지 잘한 점도 있었습니다. 예를 들면, 엘리사의 죽어가는 자리에 방문하여 그를 위해 슬퍼한 일(왕하 13:14), 수리아 군대를 3번이나 물리친 일(왕하13:18-19), 하사엘이 그의 부친에게서 빼앗은 요단 서편의 모든 도시를 회복한 일, 유다의 어리석은 왕 아마사에게 관용을 베푼일등이 있습니다.


     제13대  여로보암 2세 (왕하 14 : 28 - 29)
    여로보암 2세는 가장 호전적인 왕이었으며 이스라엘 왕 가운데서 가장 성공적인 행정가였습니다. 정치적으로 볼 때에는 위대한 왕이었습니다. 수리아를 안전히 격퇴했을 뿐 아니라 그의 아버지 때 잃어버린 모든 지역을 회복했기 때문입니다.(왕하14:25) 

    그러나 종교적으로는 한탄할 만한 사람이였습니다. 그는 사치와 방탕을 일삼았고 도덕적으로도 부패한 사람이었다.(호2:8) 이 시대에 중요한 사건은 예언 문화이 나타나기 시작한 것입니다. 문서 예언자 아모스 호세아 요나가 이때 활동했습니다.


     제14대  스가랴 (왕하 15 : 8 - 12)
    여로보암2세의 아들로서 6개월간 보좌에 앉아 있다가 살룸이라는 폭도에게 암살되고 말았습니다. 그는 예후왕의 4대손이고 그가 죽으므로 예언이 성취되어 예후왕조가 4대로 막을 내립니다. 그는 열조의 행위대로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하였습니다. (왕하 15:9)


     제15대  살룸 (왕하 15 : 18 - 15)
    살룸은 왕위의 찬탈자로서 제 6대 이스라엘 왕조의 창설자입니다. 그는 백성 앞에서 스가랴를 쳐죽입니다. 그러나 그의 왕조는 1개월후 므나헴이라는 잔인한 병사에게 암살 되므로 끝나고 맙니다.

     제16대  므나헴 (왕하 15 : 16 - 22)
    므나헴은 세 조정을 이룬 후에 10년 동안 왕노릇 했는데 이스라엘터 의 지독한 독재자 중에 한사람이고 그때에 앗수르 사람에게 정복당했으나 앗수르왕 디글랏빌레셀에게 은 1천 달란트로 조공을 바쳐 벗어 났습니다. 이때 부터 앗수르의 이스라엘 정복이 시작됩니다. 영적으로는 여로보암의 죄에서 평생 떠나지 않았습니다.

     제17대  브가히야 (왕하 15 : 23 - 26)
    브가히야에 대해서는 므나헴의 아들이란 것과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하였다는 것과 그의 호위대장인 베가의 손에 죽었다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성경에 기록이 없습니다.


     제18대  베가 (왕하 15 : 27 - 31, 16장)
    베가는 그의 선조들과 같이 금송아지를 섬겼습니다. 그의 통치기간 중 유명한 것은 수리아의 왕 르신과 동맹을 맺어 유다에 대항한 일입니다. 그는 유다에 많은 손실을 주었고 12만명을 죽었고 20만명의 여인들과 자녀들을 사마리아로 잡아왔으며 많은 재물을 노략하였습니다. 그러나 선지자 오뎃의 권면으로 그들을 다시 돌려 보냈습니다.


     제19대  호세아 (왕하 16:30, 17장)
    이스라엘이 마지막 왕조인 9대 왕조의 창설자로서 북이스라엘의 마지막왕으로 앗수르에 대항하여 애굽과 연합하지만 앗수르 왕 살만에셀에 의해 잡혀감으로 감금당합니다.  B.C 722년에 이스라엘 왕조는 끝을 맺습니다.

    북왕국 이스라엘의 253년 역사의 종지부를 찍었습니다. 열왕기 기자는 그이유를 " 저희가 하나님의 말씀을 준행치 아니하고, 그언약을 배반하고, 여호와의 종 모세의 모든 명한 것을 듣지도 아니하며 지키지도 아니함" 이라고 말합니다. 살펴본 북왕국 이스라엘의 모든 왕조는 한결같이 하나님을 떠났습니다. 

    북왕국 이스라엘은 모두 19명의 왕이 통치했으며 그중 7명의 왕만 자연사 하였고 나머지는 모두 불운한 죽음을 당했습니다. 북왕국에서 활동한 예언자로는 아히야, 엘리야, 엘리사, 잇도, 오뎃, 예후, 미가야, 오바댜, 요나, 아모스, 호세아 등입니다.









    유다 집의 왕의 씨를 진멸한 여왕 아달랴

    예수 그리스도 족보 제 2기(마 1:6-10)에서 생략된 인물 중 독특한 프로필의 소유자를 뽑자면 바로 ‘아달랴’를 들 수 있습니다.
    남 유다 제 7대 왕인 아달랴는 유다 왕들 중 유일한 ‘여왕’이었으며, 북 이스라엘의 악한 왕을 대표하는 ‘아합’과 왕비 ‘이세벨’의 딸로서(왕하 8:18, 대하 21:6), 여호사밧(남 유다 4대 왕)의 며느리(대하 18:1)로 유다에 들어와, 남편 여호람과 그 자손들이 아합의 집처럼 우상을 숭배하고 악을 행하도록 절대적인 영향력을 끼친 인물입니다.
    더 나아가 아들 아하시야가 죽은 후에는 아들을 대신하여 자신이 왕위에 오르기 위해 유다 집의 ‘왕의 씨’를 진멸하였습니다.

    1. 아달랴의 다윗왕조 진멸사건

    (1) 유다 집의 모든 ‘왕의 씨’를 진멸
    아달랴는 아들 아하시야가 북 이스라엘에 가서 갑자기 피살되자(왕하 8:29, 9:16, 27-28, 대하 22:5-9), 남 유다 왕권의 공백기를 이용하여 자신이 왕이 되기 위해 유다 집의 ‘왕의 씨’를 진멸하였습니다(왕하 11:1, 대하 22:10). ‘왕의 씨’는 ‘왕위를 계승할 자격이 있는 아하시야의 모든 아들과 친척’을 가리키는 것으로, 아달랴는 이들만 제거하면 다윗왕조의 모든 씨 전체가 진멸될 것이라고 생각하고 자기의 친손자들까지도 무자비하게 샅샅이 제거한 것입니다. 여기서 ‘자손 계승’의 의미를 갖는 ‘씨’(히. 제라)라는 단어가 사용된 것은 다윗 왕가를 완전히 멸망시켜 아합 왕가를 이루고자 했던 아달랴의 사악한 의도를 드러냅니다. 이는 왕이 되고자 하는 개인적 욕심에서 더 나아가 다윗왕조를 통해 여자의 후손(창 3:15)을 보내시려는 하나님의 크신 뜻을 가로막는 사악한 행위였습니다.

    (2) 아달랴의 손에서 요아스를 도적하여 살리심

    아달랴가 모든 왕손들을 죽이고 하나님의 섭리에 도전하는 상황 속에서, 여호람의 딸이자 아하시야의 누이요 제사장 여호야다의 아내인 여호사브앗(여호세바)이 한 살 된 아하시야의 아들 요아스를 몰래 ‘도적하여’ 자신의 침실에 숨겨 죽이지 못하게 하였습니다(왕하 11:2, 대하 22:11). 이는 다윗의 왕손이 보존되어 여자의 후손이 오실 길을 예비하시는 하나님의 놀라운 섭리의 역사였습니다.


    2. 아달랴의 비참한 최후

    (1) 제사장 여호야다의 개혁

    아달랴의 손에서 도적해낸 요아스를 6년 동안 성전에 숨겨 노심초사 보호해오던 제사장 여호야다는 “여호와께서 다윗의 자손에게 대하여 말씀하신 대로 왕자가 즉위”하게 하기 위해(대하 23:3) 목숨을 걸고 혁명을 결단함으로, 다윗의 자손으로 유일하게 남아 있던 한 씨 요아스를 마침내 왕위에 올렸습니다(왕하 11:4-12, 대하 23:1-11).

    (2) 극악한 여왕 아달랴의 최후

    6년 전 모조리 진멸된 줄 알았던 다윗의 씨가 하나님의 섭리가운데 보존되고 있었음을 목격한 이스라엘은 큰 감사와 기쁨으로 만세를 부르고 나팔을 불고 찬양을 하였고, 그제야 개혁을 알아챈 아달랴는 옷을 찢으며 “반역이로다, 반역이로다”라고 외치며 최후의 발악을 하였습니다(왕하 11:13-14, 대하 23:12-13).
    그러나 때는 이미 늦었고, 여호와의 전 밖, 왕궁 마문 어귀에 이를 때에 죽임을 당하고 말았습니다(왕하 11:15-16, 대하 23:12-15). 아달랴가 죽었을 때 온 국민이 즐거워하고 성중이 평온하였습니다(왕하 11:10, 대하 23:21).


    아달랴와 결혼한 여호람의 통치 8년, 그 아들 아하시야의 통치 1년, 여왕 아달랴의 통치 6년 등 무려 13년 동안이나 아달랴의 악영향으로 온 나라에 우상숭배가 들끓는 절망상태에 빠져있었습니다.

    남 유다로 시집온 후 평생을 사단의 하수인 노릇을 하면서 남 유다의 거룩한 등불을 꺼뜨려 흑암의 역사로 바꿔 버리려 했던 아달랴의 계획은, 제사장 여호야다의 개혁을 통해 철저히 무너졌고, 유일한 다윗의 후손 요아스를 통하여 새로운 소망이 주어지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는 결국 하나님의 괴롭히심을 받아 비참한 최후를 맞게 됩니다.
    마지막 때도 만왕의 왕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심으로 세상의 거짓 통치자인 마귀와 그 하수인들이 멸망을 받게 될 것입니다(계 20:10).

    또 저희를 미혹하는 마귀가 불과 유황 못에 던지우니 거기는 그 짐승과 거짓 선지자도 있어 세세토록 밤낮 괴로움을 받으리라.





    조우(遭遇) / 만날 조, 만날 우


    1. 신하(臣下)가 뜻에 맞는 임금을 만남.
    2. 우연(偶然)히 서로 만남.

    조봉(遭逢) / 만날 조, 만날 봉

    우연(偶然)히 서로 만남.


    회우(會遇) / 모일 회, 만날 우

    1. 한데 모여 만남.
    2. 오다가다 만나거나 마주침.












    남 유다
    1. 르호보암(17년) - 2. 아비얌(3년) - 3. 아사(41년) - 4. 여호사밧(25년) - 5. 여호람(8년) - 6. 아하시야(1년)

    북 이스라엘
    1. 여로보암(22년) - 2. 나답(2년) - 3. 바아사(24년) - 4. 엘라(2년) - 5. 시므리(7일) - 6. 오므리(12년)




    “만남은 교육에 선행(先行)한다.” 


    실존주의 교육 철학자인 O. 볼노브는 ‘교육이 있기 전에 만남이 있었다’ 고 말한다.  

    어느 날, 그리스 제일의 시인을 꿈꾸며 두툼한 원고 뭉치를 옆구리에 낀 18세의 청년이 여느 때처럼 오가던 그 길에서 한 노인이 길 모퉁이에 쭈그리고 앉아 사람들과 대화를 나누는 모습을 보았다.
    늘 지나던 길에서, 늘 보았던 그 노인이 그날 새롭게 보인 것이다.
    인생에 관해 진지한 노인의 표정과 겸손한 태도와 그 질문에 관해 토론을 하는 사람들의 모습이 이제껏 자기의 삶을 돌이켜 보게 한 것이다.
    겉만 화려하게 온갖 미사여구로 장식되어 알맹이가 결여된 자신의 시 원고가 부끄러워진 것이다.
    청년은 원고를 버리고 그 노인의 제자가 되었다.
    소크라테스라는 노인과 플라톤이라는 젊은이의 만남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이러한 만남을 철학에서는 경천동지(驚天動地)의 해후(邂逅)라고 명명한다.
    이러한 만남은 또 있다.
    바로 기독교의 예수와 베드로의 만남이 바로 그것이다.
    갈릴리에서 고기를 잡던 어부가 예수(Jesus Christ)를 만남으로서 인간의 영혼을 낚아 천국으로 인도하는 사도가 된 것이다. 만남이 인생을 바꾸고 세상을 바꾼 것이다.  얼마나 고귀하고 거룩한 만남인가?


    불교에서는 만남은 수억 겁 년의 인연이 있어야 한다고 했다.
    佛家(불가)에서는 옷깃을 스쳐도 인연이라고 하지 않던가?
    진웅용샘을 만난 용화인들은 행복합니다.
    그 행복은 진정 자유로운 자, 정의로운 자만이 누릴 수 있는 특권입니다
    멋진 샘을 잃어버리는 어리석음을 범하지 않는 살아있는
    용화인이기를 기원합니다.

    cafe.daum.net/18yong/CJM0/702 

    볼노브의 교육이론

     

    교육과 만남: 만남은 교육에 선행한다라고 했으며 진정한 교육은 너와 내가 마음으로 호흡할 때, 인격적 상호작용이 이루어질때 가능하다고 보았다.

     

    볼노브는 인간이 천부적 능력을 타고나지 않았다고 보기 때문에 계발을 통한 점진적 성장을 부정한다. 인간은 위기, 각성, 충고, 상담, 만남, 모험, 좌절 등과 같은 비연속적 요소에 의해 비약적으로 성장 할 수 있다.

     

    실존주의의 기본 입장과 교육적 관점

     

    실존주의의 기본적인 인간관은 인간에게 주어진 본성이 없으며 단지 살아가면서 자유롭게 선택하는 것과 그에 따른 책임을 지는 것이 기본적인 인간의 존재라고 이해한다. 다만 태어날 때는 자신의 의지로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기투되는 존재이므로 과거는 어찌됐든 현재의 선택이 중요한 것이다.


     따라서 인간이 인간으로서 제대로 살기 위해서는 올바른 선택과 책임을 지도록 하는 교육이 필요하겠다. 그것이 올바른 선택과 책임을 질 수 있도록 교육과정, 동기유발, 학습방법, 상담이론에 적용되어야 할 것인데. 특히 상담이론은 실존주의적 입장이 상당히 유효하게 작용할 수 있는 영역이라 생각된다

    . 상담을 요할만큼 문제가 되는 학생들의 특징은 낮은 자존감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들을 감성적인 부분을 충분히 이해하고 공감해 자존감을 높여주어야 상담이 될 것으로 보이고, 이는 실존주의 철학과 일정부분 상통하는 부분이라고 볼 수 있다.

     





    인간은 만남의 존재라고 합니다.

    "인생은 너와 나의 만남이다"
    독일의 의사이며 작가이었던 한스 카로사(Hans Carossa. 1878. 12. 15~1956. 9. 12)가 남긴 말입니다.



    해 지는 땅의 비가

    한스 카로사[독일]

     Hans Carossa 187812251956912              1                                                                         1956

    한스 카로사[Hans Carossa (1878.12.25~1956.9.12) ]
    독일의 시인, 소설가, 번역문학가, 수필가. 내과 의사. 의학박사.『시집』과『뷔르거 박사의 죽음』으로 인정받고, 제 1차 대전시에 군의로서 종군한 때 착상한 자서전 소설(자서전소설)『유년시대』와, 대전 종군의 기록 『루마니와의 일기』는 높은 평가를 받았다.
    그는 괴테에 사사(사사)하고, 특정한 유파에 속함이 없어, 자기의 생활만을 소재로 하여 절도있는 수준 높은 작품을 썼다, 나찌스 시대, 권력을 좋아하는 인간이라면 누구나 부러워하던 유럽 저작자 연맹(著作者聯盟)의 회장 자리에 천거되었으나, 이를 거절하고 권력에 영합됨이 없이, 항상 고고한 정신으로 암흑시대를 성실하게 살아 갔다.
    상가의 작품 외에, 『어느 청춘의 변화』『의사 기온』『지도(指導)와 신종(信從)』『성년의 비밀』『미쳐 버린 세계』『젊은 의사의 하루』 등의 작품이 있다. 1956년에 세상을 떠났다.

    해 지는 땅의 비가

    나는 그대의 숲에서 나이 들고,
    그대의 학교에서 가르치는 것을 배웠다.
    지금 나는 내 기억을 불러내어
    다시 한 번 상기한다.
    초목이 아는 것,
    창밖으로 보이는 해바라기가 아는 것,
    우리가 살고 있는 곳이 하나의 별이라는 것을,
    누가 이것을 잊게 하는가?
    초침이 멈춘다면,
    천년을 계획하는 것,
    그것이 무슨 소용이 있는가.
    이제 불행한 사람들은 무서운 일들에 익숙해진다.
    이제 곧 그들의 사랑의 촛불은 꺼지고
    한 사람이 말하면, 다른 이는 그것이 틀렸다고 한다
    아직도 빛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그 빛을 숨겨야 한다.
    완벽한 사랑의 소리를 깨우기 위하여
    우리가 무엇을 말하리, 무엇을 찬양하리,
    새로운 기적의 이야기를 전할 것인가?
    먼 곳으로 달리고 싶은 편편한 도로를?
    화물선을? 자랑스러운 디자인의 도로,
    세상을 가로질러 가는 비행선을?
    엄청난 기술로 만든 파괴의 도구들을?
    진실이든 허위든 관계치 않고
    공중으로 전파하는 음파의 도구를?
    아, 침묵하라, 이 모든 것은 그대가 아니다.
    밤은 아름다움과 아픔이 가득한 모습으로 침묵하고
    우리는 밤의 여신으로부터 슬픔을 배우고자 한다.
    위로를 멀리하고 오래 견디며 슬퍼하는 것을.
    거기에서 생각은 크게 헤매지 않고 여신을 위하여
    인간의 모든 고뇌보다 오래된 단순한 표지를 남길 것이다.
    그리하여 줄기는 빛을 향하여 꼿꼿이 서고
    죽은 잎사귀로부터 새싹이 하나 싹터 나오고
    또 다른 싹이 쫓아 나온다. 닫혀 있던 장미 꽃받침
    성장을 착실하게 지키며 숨어 있었는데,
    이제 그 조심스러운 꿈에서 태어남을 보라!
    불꽃 찬란한 수레바퀴가 열렸다,
    둥근 씨앗의 바구니에 꽃들의 둘레가 짜여,
    마치 합창하는 목소리들처럼 단단히 하나가 되고,
    잎사귀들 위로는 금빛 꽃가루가 숨쉰다.
    그리하여 열병 앓는 해지는 땅이여, 희망을 가지라!
    생각없이 부수어버린 것을 스스로 버티어낸 영혼이
    또 다시 세우려할 때, 용기를 가져라. 그 때 영혼은
    우리 모두에게 사랑스러운 새 일감을 주리라.
    폐허로부터 새로운 축복의 날이 떠오르리.
    그때는 밝은 빛을 감추지 아니하여도 되고
    우리는 태고로부터의 힘들과 함께 노닐 것이니.
    하루가 아니라, 한 시간만이라도
    순수한 시작에 임하여 서서
    지구의 별 모양을 짤 수 있다면,
    우리는 어둠의 세기도 기꺼이 견디리니.



    별의 노래  / 한스 카로사

    내일이면 숱한 별들이 비치겠지

    내일이면 너는 나를 찾아 울겠지

    잠잠한 창(窓)안을 엿보고 있겠지

    끝내는 아스라이 반짝이는 곳으로

    네 마음은 달아나겠지

    환하게 두 눈에 눈물이 어리면

    수천의 별, 하나같이 고요한 별들

    태양(太陽)들 마냥 커다랗게 떨고 있는 모습

    네 눈에 비치겠지

    강변의 숲 속에서 / 한스 카로사

    강변의 숲 속에
    숨어 있는 아침해
    우리는 강가에 배를 띄웠다.
    아침해는
    물 속으로 뛰어들어 강물 위에서
    반짝이며 우리에게 인사를 하였다.

    오르지 못할 것 같은 산정 / 한스 카로사

    오르지 못할 것만 같은 산정(山頂) 이제는 쉽사리도 지나간다.
    저 멀리 아련한 첫 번째 길, 새로운 하늘에 이르다.
    태고(太古)적 산과 넓은 땅은 하나로 반조(返照)되어
    아물거린다.
    밖에 지나온 도시들은 조촐하고 밝은 한 폭의 그림
    나직이 떠나가는 밝은 구름 달려가는 그림자는 우리를 감싸고
    커다란 파란 나비들이 우리 앞에 책처럼 펼쳐진다.
    사람이 무엇이며 무엇이었던가는 떠날 때 비로소 명백해진다.
    하나님의 노래가 울러 퍼질 때, 우리는 그것을 듣지 못하고
    그 노래가 침묵할 때, 우리는 비로소 전율한다.
    오, 시간을 망각하라 오, 시간을 망각하라
    그대의 모습이 시들지 않고
    그것과 함께 마음이 시들지 않게
    이름일랑은 떨어버려라!
    겨울을 가리어라! 위험에
    자신을 내맡겨라!
    존재 속에 눈짓을 좇아가는 자,
    많은 것을 하나로 짓는 자는 별은 시간마다
    그를 다져간다.
    그리고 정열의 해가 지나고
    우리가 현세에서 눈이 멀 때
    위대한 자연은 성숙 하는 것.

    옛샘 / 한스 카로사

    등불을 끄고 자거라! 줄곧 일어난 채
    언제까지나 울리는 것은 오직 옛샘의 물줄기 소리
    하지만 내 지붕 아래 손님이 된 사람은
    누구든지 곧 이 소리에 익숙해진다.
    네가 꿈에 흠뻑 배어 있을 무렵 어쩌련
    집 근방에서 이상스런 소리가 들릴는지 모른다.
    거친 발소리에 샘 근방 자갈소리가 나며
    기분 좋은 물소리는 딱 그치나니
    그러면 너는 눈을 뜬다하지만 놀라지 마라!
    별이란 별은 모두 땅 위에 퍼지고
    나그네 한 사람이 대리석 샘가로 다가가서
    손바닥을 그릇삼아 솟는 물을 뜨고 있다.
    그 사람은 곧 떠난다. 다시 물줄기 소리가 들리나니
    아아 기뻐하여라, 여기에 너는 혼자 있지 않으니.
    먼 별빛 속에 수많은 나그네가 길을 가고
    그리고 또다시 네게 다가오는 사람이 있다.

    고양이에게 / 한스 카로사

    고양이, 거만한 포로,
    한동안 다가오지 않더니
    이제야, 어스레한 탁자를 넘어
    주뼛주뼛 이리로 오는구나
    하루 일과가 끝났음을 알리는 전령인가
    부지런한 펜에 앙심을 품고는
    내가 막 쓰기 시작한 종이 위에
    살포시 앞발을 올리네
    새로운 상념에 잠기게 하는 너는
    참으로 차분하고 멋지구나!
    너의 은밀한 오르간 소리가
    가르랑 가르랑 나직하게 들리누나
    소리 없이 문이 열린다
    모든 것이 낯설어진다
    네 이마에 손을 대면
    별안간 달이 느껴진다
    그리고 얼마나 여러번/한스 카로사
    그리고 얼나마 여러번 나는
    밤에 잠을 깨었던가
    밝은 달은
    침상과 의장 위에 빛을 던지고
    나는 바깥 골짜기를 바라본다
    꿈속에 서 있는 것은 너의 집
    나는 다시금 더 깊은 꿈에 젖어드나니

    장미는 이제 어디 있는가 / 한스 카로사

    장미는 이제 어디 있는가, 白鳥는 이제 어디 갔는가.
    금붕어떼가 불길을 일으키던 연못은 이제 보이지 않고
    제 몸속으로 갈라 떨어진 噴水
    水盤은 말라 까맣게 수령밭이 되었다.
    앙상한 나무들 안개비를 흘리고
    저기 똑바로 늘어선 탁자들
    손님을 기다리고 있다.
    이제 찾아올 손님이 있을라구, 허사다.
    활짝열린 伽藍, 이끼낀 층계
    비렁뱅이 하나 구차한 밥술이나 신나게 먹어치우고 있다.
    누가 불렀나. 塔쪽으로 날개 파닥이며 한꺼번에 날아오는 것들
    성스러운 비둘기떼다.
    비둘기떼 비렁뱅이 벙거지, 볼을 맴돌다
    마지막 남은 음식 부스러기를 훑어 간다.
    당황한 사내 아이 같고나, 잔잔히 흘리는 微笑
    홀연 흐뭇한 생각이 든다, 궁색한 자기 處地.

    봄 / 한스 카로사

    聖堂 앞 廣場은 이제 다시 해의 보금자리
    옛 분수가는 아이들의 놀이터
    층계에 모여든 비둘기가족 구리빛으로 빛나고 
    온통 빛살에 빨려든 해면일까, 무겁게 맴도는 구름장, 봄이다.
    성당 앞 광장에 이어난 어느 집
    창문을 열어젖힌 채 핏기없는 아가씨 하나 이제 날이 날마다 앉아 있다.
    구름을 뒤쫓고 있는 것은 아니다, 탐스러운 비둘기떼를 바라보고 있는 것도
    아니다
    생판 남남인 女子들 옷을 짓고
    비단 모자를 다듬어야 한다.
    하루 해가 다 가도록, 더러는 초저녁 내내
    아가씨 모습은 언제 보아도 냉엄하고 쌀쌀맞은 것.
    자라가는 어린 것
    들릴 듯 말 듯 심장 아래서 간간히 고동치면
    어렴풋 자그마한 魂이 어느 사이 빛을 잡으려는 듯 꿈틀대면
    이때뿐, 매서운 입술에 불길이 타오른다, 봄이다.


    5월 19일(월) 역대하 19-21장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여호람(21:1)

    여호사밧이 그 열조와 함께 자매 그 열조와 함께 다윗성에 장사되고 그 아들 여호람이 대신하여 왕이 되니라.
    Then Jehoshaphat rested with his fathers and was buried with them in the City of David. And Jehoram his son succeeded him as king.

    여호람(Jehoram)이란 이름의 왕은 북 이스라엘 왕국의 아홉번째 왕 '여호람'과 남유다 왕국의 다섯번째 왕 '여호람' 두 사람입니다.
    같은 이름이므로 잘 구분해야 합니다.

    '호사유피인사유명(虎死留皮人死留名)'

    사람들이 삶을 살아가며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것 중 하나는 바로 '이름'입니다. '이름'이란 단순히 자신을 부르는 명칭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이 가진 인격, 존경받는 품성, 그리고 그가 행한 선행 등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의미에서, 우리는 '호사유피인사유명(虎死留皮人死留名)'이라는 성어를 통해 '이름'의 중요성을 다시 한 번 생각해보려 합니다. '호사유피인사유명'이란 성어는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는 뜻으로, 사람은 죽어서 명예를 남겨야 함을 이르는 말입니다. 

    이 성어는 우리가 살아가는 동안 어떠한 가치를 추구하고,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귀중한 가르침을 줍니다. 더욱이 이 말은 우리가 어떻게 사회에서 인정받고, 후세에 이름을 남길 것인지를 고민하게 합니다. 이러한 '호사유피인사유명'의 의미는 단순히 인생을 살아가는 지침일 뿐만 아니라, 우리가 인간으로서 어떠한 가치를 추구하고, 어떠한 행동을 취해야 하는지에 대한 중요한 지침이기도 합니다. 이를 이해하고 적용하면, 우리는 보다 더 성숙한 인간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본문에서는 '호사유피인사유명'이란 성어의 더욱 깊은 의미와 그 유래, 그리고 이를 현대 생활에 어떻게 적용할 수 있는지에 대해 더욱 자세히 알아볼 예정입니다. 그리고 여러 가지 실제 상황에서의 사용 예시를 통해 이 성어가 어떻게 우리 삶에 활용될 수 있는지를 보여드릴 것입니다. 이제, 함께 '호사유피인사유명'이 가지는 깊은 의미를 찾아보며 우리의 인생에 어떠한 가치를 더해보는 여정을 시작해봅시다.

    호사유피인사유명(虎死留皮人死留名) 이란?

    '호사유피인사유명(虎死留皮人死留名)'이라는 고사성어는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는 뜻으로, 이는 사람이 살아가는 동안 어떠한 가치를 추구하고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중요한 지침입니다. 또한, 이 성어는 사람이 죽어서 명예를 남겨야 함을 가르치며, 그 명예는 그 사람의 이름을 통해 후세에 전해지게 됩니다. 이 성어의 유래는 확실하게 알려진 것은 없지만, 그 의미와 메시지는 수세기 동안 전해져 왔고, 많은 사람들이 이를 인생의 중요한 지침으로 삼고 있습니다.

    한자풀이

    이제, '호사유피인사유명' 이라는 성어를 구성하는 한자의 의미를 살펴봅시다. 

    • 虎: 범 호 
    • 死: 죽을 사 
    • 留: 머무를 류(유) 
    • 皮: 가죽 피 
    • 人: 사람 인 
    • 名: 이름 명 

    각 한자가 가지는 의미를 조합하면, 이 성어의 전체적인 뜻이 '범이 죽어서 가죽을 머무르고, 사람이 죽어서 이름을 머무른다'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이는 사람이 삶을 살아가면서 추구해야 할 가치와, 그 가치가 죽음을 넘어서 후세에 어떻게 전해져야 하는지를 가르치는 말이기도 합니다. 이런 의미에서 '호사유피인사유명'은 우리가 인생을 살아가는 방향성을 제시하며, 우리의 행동과 선택을 이끌어 나가는 중요한 원칙이 될 수 있습니다. 이렇게 성어를 한자로 분해하여 그 의미를 이해하면, 성어가 가진 깊은 의미와 메시지를 더욱 잘 이해할 수 있습니다. 또한, 이를 통해 성어가 우리의 생활에 어떻게 적용될 수 있는지, 그리고 우리가 어떻게 이를 통해 인생의 중요한 가르침을 얻을 수 있는지에 대해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실생활 예시

    1. "그는 세상을 떠나지만, 그의 정신과 정의로운 행동은 우리 모두에게 '호사유피인사유명(虎死留皮人死留名)'처럼 영원히 기억될 것입니다."
    2. "장군님의 무예와 용기는 사후에도 그 이름이 울리는 '호사유피인사유명'의 교훈을 우리에게 전해줍니다."
    3. "도서관에서는 과학자들의 노력과 업적이 '호사유피인사유명'처럼 쌓여 있습니다. 그들은 몸은 물러가지만 그 행적은 영원히 남아 우리에게 가치 있는 지식을 전해주기 때문입니다."
    4. "영화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에서 늙은 할머니는 치히로에게 어려운 시기에도 끈질기게 희망을 잃지 말라며 '호사유피인사유명'을 강조합니다."
    5. "박정희 전 대통령은 '호사유피인사유명'의 교훈을 살아가면서 국가 발전을 위해 노력했고, 그의 성과는 우리 세대에도 큰 영향을 미치고 있습니다."
    6. "법륜스님이 자신의 설교에서 '호사유피인사유명'을 언급하며, 선한 행동과 참된 말로 다른 사람들에게 영향을 끼치는 것의 중요성을 강조했습니다."
    7. "사랑하는 이를 잃은 후에도 영화 '포레스트 검프'의 주인공 포레스트는 '호사유피인사유명'처럼 그의 사랑을 계속해서 기억하며 삶을 살아갔습니다."
    8. "TV 드라마 '대장금'에서는 주인공 대장금이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자신의 열정과 능력을 발휘하며 '호사유피인사유명'의 사례를 보여줍니다."

    끝맺음

    지금까지 성어 '호사유피인사유명(虎死留皮人死留名)'에 대해 자세히 살펴보았습니다.
     이 성어는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라는 의미로, 인간이 살아가며 남기는 흔적, 즉 명예와 덕목을 강조합니다. 
    이러한 의미를 한자 하나하나를 해석하며 더욱 깊이 있게 이해해보았는데요. 
    각 한자는 다음과 같이 해석됩니다. 
    '虎(호)'는 범을, '死(사)'는 죽음을, '留(유)'는 남길을, '皮(피)'는 가죽을, '人(인)'은 사람을, '名(명)'은 이름을 나타냅니다. 
    그래서 이들이 조합되어 '호사유피인사유명(虎死留皮人死留名)'이라는 깊이 있는 성어를 형성합니다. 
    또한 이 성어는 우리 일상생활에도 다양하게 활용되며, 우리가 지향해야 할 인생의 가치를 깨닫게 해줍니다. 
    다양한 예시를 통해 이 성어가 어떻게 우리 생활에 적용될 수 있는지를 살펴보았습니다. 



     
    이름의 뜻은 "여호와는 존귀하심"
    여호람은 남 유다의 다섯번째 왕입니다.
    르호보암(17년), 아비얌(3년), 아사(41년), 여호사밧(25년) 그리고 여호람은 8년을 통치합니다.
    어떤 왕은 오랫동안 통치하였지만 어떤 왕은 1년(6대, 아하시야) 심지어 북 이스라엘의 시므리 왕은 7일 동안만 다스렸다고 합니다.

    성경에서 사람의 수명을 70 또는 80이라고 합니다(시편 90:10).

    "우리의 년수가 칠십이요 강건하면 팔십이라도 그 년수의 자랑은 수고와 슬픔 뿐이요 신속히 가니 우리가 날아가나이다."

    그런데 칠십년도 팔십년도 지나고보면 참 신속하게 날아간 것 같다고 합니다.
     
    여호람은 유대왕 여호사밧의 장자로 왕위를 계승하였다(왕하 8:16).
    아합왕의 딸 아달야를 취하여 아내를 삼았더니 그가 우상을 숭배하는 일과 여러가지 죄악을 법행하게 하고 그 동생들을 죽였다.
    그 모든 죄의 보응으로 립나외 에돔이 배반하였다(왕하 8:20,21, 대하21:8-10)
    블레셋과 아라비아인이 침입하여 왕궁의 재물과 처자를 탈취하므로 여호아하스만 남겨놓고 자신은 불치의 병으로 죽었다.
    백성들은 분향도 하지 아니하고 열왕의 묘실에 장사하지도 않았다(대상21:16-20).

     
    프랜시스 베이컨(Francis Bacon. 1561. 1. 22 ~ 1626. 4. 9)
    잉글랜드의 철학자, 정치가
    제임스 1세 시기 잉글랜드의 법무장관, 대법관(총리를 겸직)을 역임
    근대적 경험론의 시조로 평가되는 베이컨은 자연철학을 연구하고 과학적 방법의 발전을 주도하였고 그의 저작은 훗날 과학적 혁명의 바탕이 되었다. 데카르트와 함께 근대철학의 개척자로 평가받는다.
    아는 것이 힘이다( scientia est potentia)







    남 유다왕 여호람(Jehoram)

    여호람은 남 유다의 왕(BC 853-841)

    [ 선왕: 부친 여호사밧 <-- 여호람 --> 후왕: 아들 아하시야 ]

    여호사밧의 장자로 왕이된 여호람은 그의 형제들을 죽이고 다윗의 길이 아닌 이스라엘 왕들을 길을 행하였는데, 이는 이세벨의 딸 아달랴를 아내로 삼았기 때문입니다. 에돔과 립바가 배반하여 독립할 정도로 나라가 약해졌고 여호람은 여러 산에 산당을 세워 유다 백성까지 미혹하게 했습니다. 이에 선지자 이사야가 그의 행위를 질책하고 하나님의 징계를 예언합니다. 블레셋과 아라비아 사람들이 쳐들어 와 재물을 빼앗고 막내아들 여호아하스(아하시야)를 제외하고 모두 죽였으며 후에 여호람은 중병에 걸려 팔년 간의 통치를 마치고 죽습니다.

    • (대하 21:6-7) 그가 이스라엘 왕들의 길로 행하여 아합의 집과 같이 하였으니 이는 아합의 딸이 그의 아내가 되었음이라 그가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하였으나 여호와께서 다윗의 집을 멸하기를 즐겨하지 아니하셨음은 이전에 다윗과 더불어 언약을 세우시고 또 다윗과 그의 자손에게 항상 등불을 주겠다고 말씀하셨음이더라

    관련 자료


    유다 왕 여호람이 왕이 되고 에돔이 유다를 배반하다(왕하8:16~24).

    16절. 이스라엘의 왕 아합의 아들 요람 제 오년에 여호사밧이 유다의 왕이었을 때에 유다의왕 여호사밧의 아들 여호람이 왕이 되니라

    “이스라엘의 왕 아합의 아들 요람”은 히브리어로“자존자, 영원한자”을 뜻하는“예호바”와“일으키다”을 뜻하는“룸”의 다른 형태로“여호와께서 받쳐주신다”을 뜻한다“여호람”이라고도 한다. 제오년에 여호사밧이 유다의 왕이었을 때에 유다의 왕 여호사밧의 아들 여호람이 왕이 되니라. “유다왕 여호람”은 히브리어로“예호람”인데“자존자, 영원한자”을 뜻하는“예호바”와“일으카다”을 뜻하는“룸”에서 유래한 것으로“여호와께서 일으키신다”을 뜻한다.“요람”이라고도 한다. 여시서 보는 것처럼“여호람”은 동명 이인이다.

    ① 유다왕 여호사밧의 아들이며 아합의 딸 아달랴의 남편이다(왕상22:50, 왕하1:17, 8:16~18). 그는 삼십 이세에 왕이되어 예루살렘에서 팔년을 다스렸다

    ② 아합의 둘째 아들이며 아하시야의 동생이다, 그는 아하시야가 아들이 없이 죽자 그를 대신하여 이스라엘을 사마리아에서 십 이년간 다스렸다(1:17, 3:1). 남왕국 여호사밧의 아들 여호람과 북왕국 아합의 아들 여호람은 처남 매부(妹夫)관계이다.

    17절. 여호람이 왕이 될 때에 나이가 삼십이 세라 예루살렘에서 팔 년 동안 통치하니라

    본문은 유다의 왕 여호사밧의 아들 여호람이 왕으로 등극 할 때 나이가 삼십 이세였으며 그가 예루살렘에서 팔 년간 통치한 것을 뜻한다. 즉“통치하니라”는 히브리어로“말라크”인데“통치하다, 지배하다, 왕이 되다, 보좌에 오르다, 다스리다”을 뜻한다.


    여호람(Jehoram)

    뜻 : 여호와는 존귀하심

    1. "여호사밧"의 장자로 왕위를 계승하였다(왕하 8:16).
    아합왕의 딸 "아달야"를 취하여 아내를 삼았더니 그가 우상을 숭배하는 일과 여러가지 죄악을 범행하게 하고 그 동생들을 죽였다.
    그 모든 죄의 보응으로 립나외 에돔이 배반하였다(왕하 8:20-21, 대하 21:8-10)
    블레셋과 아라비아인이 침입하여 왕궁의 재물과 처자를 탈취하므로 여호아하스만 남겨놓고 자신은 불치의 병으로 죽었다.
    백성들은 분향도 하지 아니하고 열왕의 묘실에 장사하지도 않았다(대상 21:16-20)

    2. 아합의 아들로서 요람이라고도 부른다
    그 형제 아하시아의 왕위를 계승한 후 유대왕 여호사밧과 화친하고 돔돔과 같이 모압을 대항하여 싸우려고 진군할 때 음료수가 없어 고생하다가 선지 엘리사에게 구하여 많은 물을 얻고 모압을 진격하여 승리하였다.
    다시 타락하여 우상을 섬기므로 엘리사가 책망하매 그것을 받아 회개 하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죽이려고 하였다(왕하 6:30-33)
    하나님의 권능과 은혜를 깨닫지 못하고 다시 아람왕과 싸우다가 상하여 이스라엘에서 치료하고 있는중 예후가 여호와의 명령을 따라 그를 죽이고 그 시체를 나봇의 밭에 던지니 여호와의 말씀이 응하였다(왕하 8:28-29, 9:7, 24-26)

    3. 유대왕 여호사밧의 백성을 가르치기 위하여 파견한 선지자 중의 한 사람이다(대하 17:18).


    여호람(유다)

    여호람은 할아버지와 아버지와는 다르게 매우 악하게 행동했는데,[1] 단독 통치를 시작하자마자 형제들을 모조리 숙청해 버렸다.
    그 형제들이 여호람의 왕위를 넘보는 것도 전혀 아니었고, 아버지인 여호사밧이 분명 왕위 쟁탈 전쟁을 미연에 방지하고자 미리 자식들을 교육시켰음에도 불구하고(...).

    당시 남쪽의 에돔은 남유다의 지배를 받고 있었는데, 결국 에돔이 승리하여 남유다에게서 독립하였다. 그리고 여호람의 아들들은 아하시야를 제외하고, 모두 살해당하였다. 그는 엘리야의 예언대로 말년에 창자에 불치병을 앓다가 창자가 튀어나오며 고통스럽게 사망했고, 백성들도 그를 지지하지 않아 역대 왕들의 무덤에도 묻히지 못하는 수치를 겪게 되었다. 그 후 그의 아들인 아하시야가 고작 1년 동안 유다를 통치하게 되었다.

    [1] 그가 악하게 인생을 보낸 건 자신의 선택이었지만, 북이스라엘 역사에서도 포악하기로 소문난 아합 왕의 딸인 아달리야가 그의 아내인 영향도 배제할 수 없다. 그 후 이 아달리야는 자신의 손자들을 모두 없애고 남유다 최초의 여왕이 되었다.







    여호람(Jehoram) - 남유다 여호사밧① 아들, 아합의 사위,  아달랴 남편

    의미 - ‘여호와는 높으시다’
    다른 이름 - 요람②(왕하 11:2)
    제 5대 남유다 왕.(BC 848~BC 841년 재위) - 8년 다스림 (왕하 8:16, 대하 21:1)

                          ※ 왕하 8:16 - 이스라엘의 왕 아합의 아들 요람①(여호람①) - 제 5년에

                                                 여호사밧①이 유다의 왕이었을 때에 -

                                                              ※ 유다의 왕 여호사밧①의 아들 여호람②이 -

                                                                                          ⇒ 왕이 되니라

                          ※ 대하 21:20 - 여호람②이 - 32세에 즉위하고

                                                                      예루살렘에서 8년 동안 다스리다가

                                                              ※ 아끼는 자 없이 - 세상을 떠났으며,

                                                   무리가 - 그를 다윗 성에 장사하였,으나

                                                                              ※ 열왕의 묘실에는 - 두지 아니 하였더라




    여호람 (이스라엘) (JEHORAM OF ISRAEL) 

    북 이스라엘 왕국의 아홉 번째 왕인 여호람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여호람은 아합과 이세벨의 아들로, 그의 통치 기간 동안 여러 중요한 사건들이 일어났습니다.

    1. 여호람의 출생과 초기 생애

    출생과 배경:

    • 여호람은 북이스라엘 왕국의 왕 아합과 왕비 이세벨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열왕기하 1:17)
    • 그는 부모의 영향 아래 자라면서, 이방 신들을 섬기고 우상 숭배를 하는 환경에서 성장했습니다.

    가족 배경:

    • 아합과 이세벨은 북이스라엘 왕국에 바알 숭배를 도입하고, 엘리야 선지자와 갈등을 빚은 인물들입니다.
    • 여호람은 형 아하시야의 죽음 이후 왕위를 계승하게 됩니다.

    2. 여호람의 즉위와 통치 (열왕기하 3장)

    즉위와 초기 통치:

    • 여호람은 형 아하시야가 죽은 후 왕위에 올랐으며, 북이스라엘을 12년 동안 통치했습니다. (열왕기하 3:1)
    • 그는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하였지만, 그의 부모 아합과 이세벨처럼 심각한 우상 숭배를 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바알의 석상을 제거했습니다. (열왕기하 3:2)

    모압과의 전쟁:

    • 모압 왕 메사는 아합이 죽은 후 이스라엘에 반란을 일으켰습니다. (열왕기하 3:4-5)
    • 여호람은 유다 왕 여호사밧과 에돔 왕과 동맹을 맺고 모압과 전쟁을 벌였습니다. (열왕기하 3:6-7)

    엘리사의 예언:

    • 여호람과 그의 동맹군은 물이 부족한 상황에 처하게 되었고, 엘리사 선지자에게 도움을 구했습니다. (열왕기하 3:9-12)
    • 엘리사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며, 그들에게 물을 제공하고 모압을 무찌를 것을 예언했습니다. (열왕기하 3:16-19)

    전쟁의 결과:

    • 하나님의 말씀대로 물이 공급되었고, 이스라엘 군대는 모압을 공격하여 큰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그러나 모압 왕 메사는 절망하여 그의 장자를 번제로 바치는 끔찍한 행위를 했습니다. (열왕기하 3:20-27)

    3. 여호람의 종교적 행보 (열왕기하 3장, 9장)

    우상 숭배와 죄악:

    • 여호람은 그의 부모 아합과 이세벨처럼 우상 숭배를 조장하지는 않았지만, 여전히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했습니다. (열왕기하 3:2)
    • 그는 여로보암의 길을 따랐고, 북이스라엘 백성들을 죄악으로 이끌었습니다.

    엘리사와의 관계:

    • 여호람은 여러 차례 엘리사 선지자의 도움을 구했으며, 엘리사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며 여호람을 도왔습니다. (열왕기하 3:9-19)
    • 그러나 여호람은 끝까지 하나님을 온전히 따르지 않았습니다.

    4. 여호람의 죽음과 후계자 (열왕기하 9장)

    예후의 반란:

    • 하나님은 엘리사를 통해 예후에게 기름을 부어 이스라엘의 새로운 왕으로 세우셨습니다. (열왕기하 9:1-6)
    • 예후는 여호람을 제거하기 위해 반란을 일으켰습니다. (열왕기하 9:11-14)

    여호람의 죽음:

    • 여호람은 예후의 반란 중에 이스르엘에서 예후에게 죽임을 당했습니다. 그는 화살에 맞아 전사하였고, 그의 시체는 나봇의 포도원에 버려졌습니다. 이는 엘리야의 예언이 성취된 것입니다. (열왕기하 9:24-26)

    아하시야의 즉위:

    • 여호람의 죽음 후, 그의 동생 아하시야가 북이스라엘의 왕위에 올랐습니다. (열왕기하 9:29)

    5. 교훈과 적용

    순종과 불순종의 결과:

    • 여호람의 생애를 통해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는 것이 얼마나 심각한 결과를 초래하는지 배울 수 있습니다. 그의 불순종은 결국 그의 죽음과 북이스라엘의 혼란을 초래했습니다.
    • 이는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일깨워줍니다.

    지도자의 책임:

    • 여호람의 이야기는 지도자의 죄악된 행보가 백성들에게 큰 영향을 미치는지를 보여줍니다. 그의 불순종은 북이스라엘 백성들을 영적으로 타락하게 만들었습니다.
    • 이는 지도자가 올바른 신앙과 도덕적 기준을 지켜야 함을 가르쳐줍니다.

    하나님의 경고와 심판:

    • 엘리사 선지자를 통한 하나님의 경고와 여호람의 죽음은 하나님의 경고와 심판이 반드시 이루어짐을 보여줍니다. 하나님은 죄를 그냥 지나치지 않으십니다.
    • 이는 우리가 하나님의 심판을 두려워하며, 경건한 삶을 살아야 함을 일깨워줍니다.

    하나님의 도움과 신실하심:

    • 여호람은 엘리사의 도움을 여러 번 받았지만, 끝까지 하나님을 온전히 따르지 않았습니다. 이는 하나님의 도움과 신실하심을 소중히 여겨야 함을 가르쳐줍니다.
    • 우리는 하나님의 도움을 받을 때, 그분의 말씀에 순종하고 그분을 온전히 따르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6. 결론

    여호람의 생애와 통치는 북이스라엘 왕국의 역사에서 중요한 교훈을 남깁니다.
    그의 불순종과 영적 타락은 하나님의 심판을 초래했으며,
    이는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일깨워줍니다.
    우리는 그의 이야기를 통해 순종과 신앙의 중요성, 지도자의 책임, 하나님의 경고와 심판,
    그리고 하나님의 도움과 신실하심을 배울 수 있습니다.







    통독(通讀) : 통할 통, 읽을 독
    처음부터 끝까지 내리 읽음.

    reading through, reading from cover to cover

    • 그 책을 거침없이 통독(通讀)하다.



    정독(精讀) : 정할 정, 읽을 독
    뜻을 새겨 가며 자세(仔細ㆍ子細)히 읽음.

    • careful[close, intensive] reading, (formal) perusal, read intensively[carefully, with care], (formal) peruse



    환장(換腸) : 바꿀 환, 창자 장

  • .
    마음이나 행동(行動) 따위가 비정상적(非正常的)인 상태(狀態)로 달라짐.
  • 2.
    어떤 것에 지나치게 몰두(沒頭)하여 정신(精神)을 못 차리는 지경(地境)이 됨을 속(俗)되게 이르는 말.
  • 환장 換腸

    • 1.

      명사 going crazy, going mad, being out of one's mind

    • 2.

      명사 obssession, mania, preoccupation




    영적 고향(故鄕) / 파트리스(3968) 요한복음 4:44

    πατρίς, ίδος, ἡ 스트롱번호 3968

    1. 조국.  2. 고향
    발음 [ patris ]
    어원  / 3962에서 유래
    • 1.  조국, 고국, 요 4:44, 히 11:14.
    • 2. 고향, 마 13:54, 막6:1, 눅4:23.
    • 관련 성경  / 고향(마13:54, 눅4:23, 요4:44), 본향(히11:14).
    영적 골방

    ταμεῖον, ου, τό
    스트롱번호 5009

    1. 창고.  2. 숨겨진 골방
    발음 [ tamĕiŏn ]
    어원 / ταμίας ‘조제자’의 파생어의 중성 압축형
    • 1. 창고, 곳간, 눅12:24.
    • 2. 숨겨진 골방, 밀실, 마6:6, 24:26, 눅 12:3.
    • 관련 성경
      골방(마6:6, 24:26, 눅12:24).

    '골방'의 의미
    '골방'이라는 말은 히브리어로 '리쉬카(לִשְׁכָּה)'라고 하며, 헬라어로는 '타마이온'(ταμεῖον)이라고 합니다.
    헬라어 ‘타마이온’은  ‘자르다’라는 뜻의 ‘템노’
    ‘청지기’, '담아두는 용기'라는 뜻의 ‘타미아스’의 합성어
    세상 모든 것을 잘라내고 오직 하나님의 말씀만을 담아두는 곳을 의미합니다.
    이 단어가 저장실, 내실, 침실, 거실 등의 뜻을 갖고 있는 것으로 볼 때, 골방이란 바깥과 대조되는 조용하며 비밀스런 공간을 뜻하는 장소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성전안에는 제사할 때에 사용할 떡이나 분향할 향이나 기름을 만드는 방들이 있었습니다.
    그것을 만드는 방이 '골방'입니다.
    그리고 '골방'에는 다른 사람이 들어갈 수 없었고, 지정된 사람만이 그곳에 들어가서 하나님께서 명령하신대로 그것을 만들어야만 했습니다. 

    그리고 성전 안에는 분향단이 있어서 하나님께서 지시하신대로 향을 만들어서 피워야 했습니다.
    그리고 떡상이 있는데, 그 위에는 12개의 떡을 6개씩 2줄로 놓아야 했습니다.
    떡이 12개인 것은 이스라엘의 12지파를 상징하는 것이며 6개씩 2줄로 놓은 것은 이스라엘의 6지파는 그리심산에서 축복을 선포하고, 나머지 6지파는 에발산에서 저주를 선포했던 것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주신 율법을 법으로 받아서 억지로 하게 되면 저주가 되며, 진리로 받아서 기쁨으로 행하면 복이 된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세상의 법도 억지로 지키려고 하면 자유함을 누릴 수 없고 고통스럽기만 합니다. 그래서 법을 무시하며 자기 멋대로 살면, 법에 의해 벌을 받게 됩니다. 그러나 법을 지키면 그 안에서 자유함을 누리며 법이 주는 혜택을 누리며 살 수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의 생활 속에서 복과 저주를 우리 스스로 선택하며 살아가게 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똑같은 환경 속에서 어떤 사람은 즐겁게 찬송하며 감사하며 살아가지만, 반대로 어떤 사람은 불평하며 원망하며 살아갑니다. 어차피 해야 할 일이라면 불평한들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따라서 힘이 들더라도 노래를 부르며 즐겁게 하는 것이 좋습니다. 그것이 자신에게 복이 되어 돌아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불평하며 비난하며 살아간다면 부정적인 생각과 환경에서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회당에서 잘 차려진 떡상이나 분향단이나 등대를 보게 되면, 이 모든 것들이 금으로 만들어졌기 때문에 멋진 표면적인 것만 눈에 보이므로 골방에 들어가라는 것입니다. 골방에 들어가서 떡상에 떡이 차려지기까지 어떠한 수고가 있었는지, 분향단에서 향을 피우기 위하여 어떠한 노력을 하고 있는지, 등대에 불을 피우기 위하여 어떻게 기름을 만드는 지에 대해 감추인 것, 숨은 것 즉 진리를 보고 들으라는 것입니다.

    골방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곳입니다.
    따라서 골방은 지성소를 말합니다.
    지성소란 성전을 말하며 성전은 참 성전이신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모신 크리스천을 말합니다.
    따라서 골방은 어느 장소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크리스천인 우리 각자가 예수 그리스도를 모시고 있는 그곳 또는 그 상태를 말하는 것입니다.



    영적 본향(本鄕) - 천국(天國)

    παράδεισος

    βασιλεία, ας, ἡ 스트롱번호 932

    1. 왕권.
    2. 마 4:8
    3. 하나님의 왕국
    발음 [ basilĕia ]
    어원
    935에서 유래
    • 1.
      왕권, 왕의 지배, 왕국, 왕의 권위, 눅1:33, 19:12,15, 22:29, 23:42, 고전15:24, 히11:33, 계17:12.
    • 2.
      왕국[즉 왕에 의해 지배되는 영역], 마4:8, 12:25,26, 24:7, 막3:24, 6:23, 13:8, 눅11:17,18, 21:10.
    • 3.
      하나님의 왕국[주로 선지자들에게서 나타나기 시작대하여 묵시적 어귀에 사용 되어지고, 예수에 의해 가르쳐진 종말적 개념]. [주] β. τοῦ θεοῦ와 τῶν οὐρανῶν은 유대인들이 οὐρα- νός를 θεός와 같은 의미로 사용하면서, 본질적으로 같은 의미로 사용되었다.
      • a.
        β. τῶν οὐρανῶν, 마3:2, 4:17, 5:3, 10등 마태복음에만 나옴.
      • b.
        β. τοῦ θεοῦ, 마6:33, 12:28, 21:31, 43, 막1:15, 4:11,26,30, 눅4:43, 6: 20, 7:28, 8:1, 요3:3,5, 행1:3, 8:12, 14:22, 19:8, 28:23,31, 롬14:17, 고전4:20, β. θεοῦ 고전6:10, 갈5:21.
      • c.
        β. τοῦ πατρός, 마13:43, 26:29.
      • d.
        β. αὐτοῦ, 마13:41.
      • e.
        β. τοῦ πατρὸς ἡ- μῶν Δαθίδ, 막11:10.
      • f.
        ἡ β. αὐτοῦ (=κυρίου) ἡἐπουρανιος, 딤후4:18.
      • g.
        αἰώνιος β. τοῦ κυρίου, 벧후1:11.
    • 관련 성경  /  천국(마3:2, 13:31, 18:1), 만국(마4:8, 눅 4:5), 나라(마6:10, 눅1:33, 행1:3), 왕권(마16: 28), 왕위(눅19:15).
      [동] 다스리다(계17:18).

    앤소니 드 멜로우(1931-1987)라는 신부님이 쓴 '종교박람회' 라고 하는 책이 있습니다. 

    인도 봄베이에서 태어난 예수회 신부로 평생토록 영성 지도, 영성지도자 양성으로 헌신하며 인도의 로나불라에 있는 ‘사다나 목회연구소’의 소장을 지냈습니다. 그는 영성과 지혜에 관한 많은 책을 저술했습니다.

    그 책에 나오는 이야기입니 다.




    인도의 로나불라에 있는 ‘사다나 목회연구소’의 소장을 지냈습니다.

    그는 영성과 지혜에 관한 많은 책을 저술했습니다.



    ◑신앙은 정답을 아는 지식이 아닙니다.


    <복음서 속의 대화>

    예수님 :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생각하느냐?

    베드로 :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님 :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너는 정녕 복되구나.

            너에게 그것을 알려주신 분은, 사람이 아니라, 하늘에 계신 아버지이시다.


    오늘날의 대화

    예수님 :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생각하느냐?
    크리스천 :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님 : 훌륭하고 옳은 대답이다.
                  그러나 너는 불행하구나.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 너희에게 그것을 가르쳐준 것이 아니라 사람에게서 배웠기 때문이다.                                        
     「종교박람회」 분도출판사

    드멜로 신부가 쓴 이 짤막한 단상은 깊은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우리 각자가 주님을 개인적으로 깊이 만나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에 대해 체험적인 신앙고백을 얻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 때까지 성실히 구도자의 삶을 살아야 하겠죠.
    드멜로 신부는 다음과 같이 결론을 내렸습니다.
    “누군가가 우리를 대신해서 미리 대답을 다 해주는 바람에 하늘 아버지께서는, 그것을 가르쳐주실 겨를이 없는 것이다.”

    오늘날 우리들 신앙의 위기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보다 미리 답을 주는 사람들의 말에 귀를 기울이는데서 비롯되는 것입니다.

    잘못된 들음과 올바른 들음

    안소니 드 멜로 신부님은, 우리가 남의 말을 듣고 있으면서도 대부분은 이미 자신이 생각한 것을 확인하려 한다는 사실을 지적한다.


    그래서 자신의 생각이 맞았다 싶으면 가슴이 시원하고,

    자신의 생각이 틀렸다 싶으면 가슴이 답답한 것이다.

    그래서는 안 된다. 이것은 ‘잘못된 들음’이다.


    ‘올바른 들음’은

    단순히 남의 말에 찬성과 반대를 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을 열고, 무슨 말이듣지 '듣겠다'는 겸허한 자세로)

    즉  '개방된 태도, 어떤 새로운 것을 발견하려는 의지'이고

    '그렇게 듣고서, 내게서 배움이 깨어나는 것'이다.                            「깨어나십시오」


    그러므로 ‘들을 때’는.. 항상 기도하는 마음으로 들어야 합니다. 

     

     

     

    ◑개구리 울음소리

     

    한 수도자가 밤에 창문을 열고 명상 기도를 드리는데

    바깥 개울에서 들려오는 ‘시끄러운’ 개구리들의 울음소리에 

    도저히 참지 못하고 기도를 잠시 중단하고서 창문 밖을 내다보며 냅다 고함을 질렀다;

    “제발 조용해!”


    화가 치민 수도자의 마음에 즉시 내적 음성이 들려왔다.

    ‘지금 너도 기도하고 있고, 저 개구리들도 창조주를 찬양하고 있는데

    너는 왜...?’


    개구리들이 소음을 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찬양한다는 생각을 하니

    그 후부터 수도자에게 개구리들은 도리어 ‘기도의 동반자’가 되었다.



    ◑너 자신을 바꾸지 않아도 돼! 


    앤소니 드 멜로 신부님의「바다로 간 소금인형」에서 신부님은

    오랫동안 노이로제에 걸려 있었다고 합니다.


    어떤 사람을 만나건 대답은 마찬가지로 ‘네 자신을 바꾸라’는 이야기였다고 합니다.

    그런데 신부님 자신은, 정작 자신을 바꾸고 싶었지만

    아무리 애를 써도 그게 잘 되지 않았다고 합니다.

     

    아무리 자신을 바꾸기 위해서 스스로 몰아붙여보아도, 힘만 더 들었습니다.

    그럴수록 자신은 더 무기력해지고, 옴짝달싹할수 없었다고 이야기 합니다.

     

    그런 어느날 친구에게서 이런 이야길 듣게 됩니다.

    “너 자신을 바꾸지 않아도 돼. 나는 지금 모습 그대로의 너를 사랑하니까!”


    이때부터 마음이 놓이고 생기를 되찾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바꾸지 않아도 된다. 바꾸지 않아도 된다. 있는 그대로의 너를 사랑해.”

    라는 친구의 말에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바라보고 사랑할수 있었다고 합니다.


    하나님께서도 있는 그대로의 우리의 모습을 사랑하실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우리 자신도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하나님께 드리며 살아가야 하지 않겠습니까?

     


    ◑바다 안에서 바다 찾기.


    “실례합니다.” 라면서

    어린 바닷물고기가 말을 걸어 왔다.


    “당신은 저보다 훨씬 어른이시니

    어디에 가면 사람들이 바다라고 부르는 것을

    볼 수 있는지 알려 주실 수 있겠지요?”


    “바다라...?” 나이든 물고기가 말했다.

    “네가 지금 있는 곳이 바다가 아니면

    어디인 것 같으냐?”


    “아, 여기 말이에요?

    여긴 그냥 물이잖아요.

    제가 찾는 건 바다라고요. 바다.”


    실망한 어린 물고기는

    바다를 찾아 다시 헤엄쳐 나갔다.


     

    ◑다른 사람에게 유익을 주는 기적


    옛날에 매우 믿음이 깊은 성자가 있었는데, 천사들도 그를 늘 주목했다.

    그는 대단히 거룩하고 영적으로 살았지만,

    자신 스스로 그렇게 여기지 않고, 늘 보통 사람으로서 순진무구하게 살았다.

    진짜 그는 자신이 그렇게 위대한 성인인지 몰랐다.

     

    (신발이 발에 맞을 때는 발을 의식하지 않는다.

    옷이 허리에 맞을 때는 옷이나 허리를 의식하지 않는다.

    실제로 거룩하고 영적인 사람은, 그것을 크게 의식하지 않는 면이 있다.

    매사에 신경을 써서 거룩하고 영적으로 살려는 사람은

    그런 노력이 물론 필요하지만, 아직 성자의 수준에는 도달하지 못한 것이다.)

     

    어느 날 천사가 그에게 찾아와 말했다.

    "하나님이 나를 당신에게 보냈다. 당신의 소원이 무엇이든 이루리라! 치유의 능력을 받고 싶은가?"

    "아닙니다. 오히려 주님이 직접 치유해 주시기 바랍니다!"

     

    "죄인들을 무수히 돌아오게 만드는 그런 설교자가 되기 원하는가?"

    "아닙니다. 인간의 마음을 돌이키게 만드는 일은 주님의 성령이 하실 일입니다!"

     

    "그러면 덕행의 모범이 되어 모든 사람들이 본받고 싶은 모델이 되기 원하는가?"

    "아닙니다. 주님만 관심의 초점이 되기 원합니다!"

     

    "그렇다면 도대체 너는 무엇을 원하느냐?"

    "정 그러신다면, 제가 한 가지 청하겠습니다.

    저를 통해서 좋은 일들이 이루어지되, 제 자신이 알아차리지 못하게 해 주세요!

    그래서 제가 교만에 빠지지 말게 해 주세요!"

     

    그래서 그 성자의 그림자가 그의 뒤에 생길 때마다

    그 곳은 치유의 역사가 일어나게 되었다.

    그가 지나가는 곳마다, 즉 그의 그림자가 지나가는 곳마다

    병자가 치유되고, 땅이 기름지게 되고, 마른 땅에 샘이 생겼다. 

     

    그러나 그 성자는 이것에 대해 전혀 몰랐다.

    자기가 지나간 후에 항상 기적이 일어났기 때문이며

    또한 사람들의 관심도 온통 그 그림자에게 집중되어 있어서

    그 성인은 잊고 말았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 성자는 교만으로 넘어지지도 않았고

    자기를 통해서 좋은 일들이 이루어지기 바란다는 그 성자의 소원도 충분히 성취되어졌다. 

     


    보석보다 더 귀한 것

    어떤 수도사가 여행 중에, 우연히 빛나는 보석을 하나 발견해서는 지니고 다녔다.
    어느 날 그는 한 여행자와 동행하게 되었는데, 수도사가 음식을 나누기 위해 자기 등짐을 풀자, 거기에 빛나는 보석이 보였다.
    그 동행한 여행자는, 보석을 보고는, 그 보석을 자기에게 달라고 수도사에게 부탁했다.
    수도사는 기꺼이 선뜻 그 보석을 내 주었다.
    두 사람은 서로 헤어져 각자 자기 길을 갔다.
    보석을 얻은 여행자는 뛸 듯이 기뻤다.
    자기 평생 부와 안락을 보장해 줄, 값비싼 보석을 얻은 행운에 기뻐 뛰었다.
    그러나 며칠 후, 그는 수소문 끝에, 보석을 들고 이 수도사를 다시 찾아왔다.
    그는 수도사에게 이렇게 물었다.
    “도대체 당신에게 이 보석보다 더 귀한 어떤 것을 가지고 있길래, 이런 것을 나에게 선뜻 내어줄 수 있었습니까?
    나는 당신으로부터, 이 보석보다 더 귀한 것을 얻고자 다시 찾아왔습니다!”

    앨리스터 맥그래스「목마른 내 영혼」The Unknown God에 나오는 앤소니 드 멜로의 글

    소문

    1946년 여름, 기근이 휩쓸 것이라는 소문이 남아프리카 대륙을 휩쓸었다.
    사실 곡식들은 잘 자라고 있었고, 날씨도 추수하기에 정말 좋은 기후였다.
    그런데 소문을 듣고 놀란 2만 명이나 되는 소작농들이 농토를 버리고 모두 도시로 도망가 버렸다.
    결과적으로 농사를 망치게 되었고 남아있던 수 천 명의 사람들은 졸지에 기아에 시달리게 되었다.
    기근이 든다는 소문은 현실이 되고 말았다.





    앤소니 드 멜로우라고 하 는 신부님이 쓴 '종교박람회' 라고 하는 책이 있습니다.
    그 책에 나오는 이야기입니 다.
    어떤 그리스도인이 있었 는데 예수 믿은 지 얼마 되지 않았습니다.
    오랫동안 같이 지낸 친구, 그는 믿지 않는 친구입니다.
    그 친구와 더불 어 대화를 나누는, 뭐 그런 얘기입니다.
    믿지 않는 친구 가 처음 예수 믿는 사람에게 말하기를 "그래, 자네 요새 그리스도인이 되었다며?" 라고 묻습니다.
    "그렇게 됐네"라 고 대답합니다.
    "그럼 그리 스도에 대해서 많이 배우고, 알겠구만."
    "글세.. 뭐 그렇 게 아는 것이 없는데.."
    "그러면 내가 묻겠는데 그리스도께서 어디에서 태어났나?"
    "모르겠는데.."
    "그러면 몇 살 때 죽었지?"
    "그것도 모르겠 는데..."
    "설교를 몇 번이나 하셨나?"
    "그것도 모르겠는 데..."
    대화가 이쯤 되니까 그 믿지 않는 친구가 예수 믿 는다는 친구를 비웃기 위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자네는 그리스도에 관해서 아무것도 아는 것이 없구만. 그래도 예 수 믿는 건가? 한심하게 보 이누만."
    그때에 예수 믿는 친구가 정중하게 대답했습니다.
    "나는 별로 아는 게 없고 배운 것도 없는 것 같으네.
    그러나 내가 예수 믿고 교회 다니면서 달라진게 하나님이 계시고, 하나님이 기 뻐하시는 일이 무엇인지 그걸 알기 시작했고, 더 중요한 것은 내 자신에게 변화가 왔구 만.
    내 자신이 달라지고 있는 것을 내가 보고 나 스스로 놀라고 있네.
    자네도 알다시 피 3년전 까지는 나는 주정뱅 이요 빚도 많았고, 가정은 산 산조각이 나고,
    내가 저녁에 집에 돌아갈 때는 아이와 아 내 할 것 없이 온 집안 식구 가 나를 무서워했네.
    그리고 모두가 나를 반가와 하지 않았고, 또 반가와 하지 않는다는 것을 나도 알고 있기에 늘 골 부리면서 화를 내며 그렇 게 살아왔는데 예수 믿고 달 라진 것은 모든 사람이 나를 반가와 하네.
    또 나도 내 가족들과 아이들과 만나는 것이 이렇게 반갑고 즐거울 수가 없구만.
    그리고 나는 몰랐는데 오래 전부터 하나님은 나를 사랑하고 계시다.. 그 한 가지를 배웠네.
    그러고 보니까 감사하고, 내가 사는 하루 하루의 생이 얼마나 소중한지 삶 자체가 소중해졌네."

    이 긴 이야기를 들으면서 예수 믿지 않는 친구는 아무 할 말이 없었습니다.
    이것이 믿는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예수 믿어서 얼마나 공부를 했습니까?
    가끔 보면 성경공부도 많이 하고, 전도도 많이 하고, 봉사도 많이 하는 것 같은데 그 사람 자신은 하나도 안 달라지는 사람이 있어요.
    어느 젊은 목사님의 설교에 그런 말이 있더라구요.
    지방에 살면서 서울에 와서 공부를 하면서 하숙을 했는데 그 하숙집 주인이 예수 잘 믿는 사람이에요.
    전도도 잘하고, 봉사도 잘하고, 기도도 잘하고, 금식도 잘하고, 전도 많이 해서 전도상도 타고 이런 권사님인 데 좌우간 집에서 부부싸움을 할 때는 온 동네가 알게 시끄 럽게 싸우는 거예요.
    이 청 년이 갈등을 일으켰다는 거예요. '저렇게 잘 믿고 열심히 믿는 사람이 왜 사람은 저 모 양일까? 왜 이럴까?' 이거 고민하다가 그거 해결하겠다고 신학공부를 해서 목사가 되었다고 그러더라고요.
    지금까지도 그 수수께끼는 풀리지 않는데요.
    여러분 이걸 아셔야 됩니다.
    결국은 사랑이라는 것은 혹은 믿음이라는 것은 그 믿음과 사랑으로 인 해서 내가 나도 모르게 달라 지는 것이에요.
    그것이 경건이요, 경건의 능력이요, 경건의 신비요.

    오늘 본문에 보면 이방사람 하나가 경건하게 살았다고 되어 있습니다.
    한 이방인의 경건이 있는데 그건 아주 심 각한 신학적 의미를 가졌습니 다.
    왜냐하면 예수님 말씀하 시기를
    "예루살렘과 유대와 땅 끝까지 이르러 복음이 전 파 되겠다."고 했는데 사도행 전은 그래서 예루살렘에서 된 이야기 사마리아의 전도, 그 다음에 땅 끝으로 가는 하나의 단계가, 가이사랴에 와 있 는 로마 사람 전형적인 로마 백부장이 예수를 믿는 겁니다.
    땅 끝으로 향하는 관문 이요. 이렇게 설명되고 있습 니다.
    그는 군인입니다. 점령지의 군인이요, 부자요, 이방인인데 이 사람이 경건하게 살았습니다.

    얼마전까지만 해도 노골적으로 민족 차별을 하던 남아 공화국을 여러분이 아실겁니 다.
    거기에 있던 실화입니다.
    남아공화국 거기는 흑인, 백인이 따로 따로 예배를 드리는데 흑인 교회에 Holy Church of Zion, '시온성교 회'라고 하는 교회가 있는데 그 교회에서 고난주간을 지내면서 성만찬을 하기 전에 세족예라고 하는 것을 행하게 됩니다.
    서로 발을 씻어 주는 겁니다.
    여기에 그 세족 예가 있는 날 올리버라고 하는 백인이면서 대법원장, 지체높은 대법원장이 이 흑인 교회에 혼자 찾아 왔습니다.
    그리고 세족예를 하는 시간에 자기가 지명해서 마르다라고 하는 여성을 불러서 그 앞에 무릎을 꿇고 정성을 다해서 발을 씻어 줍니다.
    모든 사 람이 깜짝 놀랐습니다.

    "백인이, 그것도 귀족이, 고관이 어떻게 흑인의 발을 씻기느냐?"
    그는 조용히 대답했습니다.
    "이 사람은 내 집에 노예로 있던 사람입 니다.
    한평생 우리집 아이들의 발을 수백 번 씻겨 주었습니다.
    그걸 내가 늘 보면서 마음이 괴로웠는데 오늘 내가 이 거룩한 날 우리집의 아이들을 씻어준 바로 이 사람, 내가 그의 발을 씻겨 주어야 만 내 마음이 편안합니다.
    그래서 오늘 그의 발을 한번 씻겼는데 무슨 대단한 일도 아니라고 이상하게 생각할 것이 없다."고 대답을 합니다.
    결국은 이 대법원장은 이것 때문에 파면이 됐습니다.
    그러나 그는 오히려 하나님께 감사했습니다.
    이제야말로 참으로 하나님께 찬양할 자유로운 그리스도인이 되었다고 기뻐했습니다.

    경건이 뭡니까?
    오늘 이 사람은 로마 사람이요.
    정치적으로는 로마 군인이요.
    당당한 로마 군인 문화적으로는 헬라 철학에 도통한 사람이요.
    그런데 종교적으로는 피지배계급인 점령지 그 나라 사람들이 믿는 하나님을 믿었단 말이요.
    이 자체는 대단히 중요한 의미를 가집니다.
    조그만 한 것, 별 것도 아닌 것을 극복하지 못해서 예수 못 믿는 사람 많습니다.
    어떤 남편은 부인이 집사인데 교회 안 나오는 사람이 "왜 안 나오냐?"

    그러니까  "마누라가 먼저 나가서 예수 믿기 때문에 내가 뒤따라 갈 수 없잖아요."



    도대체 몇 푼 가 졌다고 이렇게 거만한 겁니 까? 사람 이런 것 다 벗어 버리기가 이게 쉬운 게 아닙 니다.

    제2차대전 나찌독일이 덴마크를 점령하고 있을 때 독일 사람들이 이 유대 사람을 전부 죽이기 위해서  "유대 사 람은 전부 가슴에 노란 별을 붙이라."

    그랬어요. 전부 노 란 별을 붙이게 될 때 이래가 지고는 하나씩 하나씩 잡아가 는 거예요.
    잡아다 처형하는 거예요.
    덴마크 크리스찬 10세라고 하는 왕이 있었는데 이 왕은 온 국민에게 "다 노 별을 붙여라. 덴마크 사 람은 다 붙여라."
    모두가 노란 별을 붙였습니다.
    이것으 로 인해서 어떤 불이익이 온 다하더라도 우리는 유대 사람 들이 죄없이 죽어 가는 것을 그냥 볼 수가 없다.
    여러분, 이게 쉬운 일입니까?

    여러분! 우리의 하는 일이 좋은 일이지만은 첫째는 받는 사람이 받을만 해야지요. 받는 사람의 마음에 감동을 주어야 되고요. 그 다음에는 하나님의 마음을 움직여야 돼 요. 하나님의 마음을. 그걸 잊지 말아야 돼요. 이게 얼 마나 귀한 일인지 몰라요. 난 그래서 나 스스로 이렇게 생각합니다.






    역대하 16장 요약

    아사 시대에 일어났던 여러가지 일들에 대해서 기록, 바아사왕이 유다를 공격하였고 아사가 아람왕 벤하닷과 조약을 맺음,
    선견자 하나니를 아사가 가두고 이후 아사가 발에 병이 들어서 죽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역대하 17장 요약

    여호사밧이 유다의 왕이 되었고 점점 강대해지게 되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역대하 18장 요약

    이스라엘의 아합왕과 여호사밧의 동맹,아합이 여호사밧에게 길르앗라못을 공격하기를 제의,선지자들 400명에게 물어보는데 미가야가 아합왕에게 경고하엿지만 이를 무시하고서 아람과 싸우다가 아합은 전사하였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5월 17일(토) 역대하 16-18장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여호와의 눈(16:9)

    여호와의 눈은 온 두루 감찰하사 전심으로 자기에게 향하는 자를 위하여 능력을 베푸시나니 이 일은 왕이 망령되이 행하였은즉 이 후부터는 왕에게 전쟁이 있으리이다.
    For the eyes of the LORD range throughout the earth to strengthen those whose hearts are fully committed to him. You have done a foolish thing, and from now on you will be at war.

    여호와의 눈(the eyes of the LORD)

    신명기 11:12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권고하시는 땅이라 세초부터 세말까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눈이 항상 그 위에 있느니라.

    열왕기상 11:6
    솔로몬이 여호와의 눈앞에서 악을 행하여 그 부친 다윗이 여호와를 온전히 좇음 같이 좇지 아니하고.

    역대하 16:9
    여호와의 눈은 온 땅을 두루 감찰하사 전심으로 자기에게 향하는 자를 위하여 능력을 베푸시나니 이 일은 왕이 망령되이 행하였은즉 이 후부터는 왕에게 전쟁이 있으리이다 하매

    시편 34:15
    여호와의 눈은 의인을 향하시고 그 귀는 저희 부르짖음에 기울이시는도다

    잠언 5:21
    대저 사람의 길은 여호와의 눈 앞에 있나니 그가 그 모든 길을 평탄케 하시느니라

    잠언 15:3
    여호와의 눈은 어디서든지 악인과 선인을 감찰하시느니라

    스가랴 4:10
    작은 일의 날이라고 멸시하는 자가 누구냐 이 일곱은 온 세상에 두루 행하는 여호와의 눈이라 다림줄이 스룹바벨의 손에 있음을 보고 기뻐하리라

    말라기 2:17
    너희가 말로 여호와를 괴로우시게 하고도 이르기를 우리가 어떻게 여호와를 괴로우시게 하였나 하는도다 이는 너희가 말하기를 모든 행악하는 자는 여호와의 눈에 선히 보이며 그에게 기쁨이 된다 하며 또 말하기를 공의의 하나님이 어디 계시냐 함이니라.





     


     
     

     

     

    두 눈을 가졌는가

     “눈은 몸의 등불이니 그러므로 네 눈이 성하면 온 몸이 밝을 것이요 눈이 나쁘면 온 몸이 어두울 것이니 그러므로 네게 있는 빛이 어두우면 그 어둠이 얼마나 더하겠느냐”(마 6:22∼23).

    주님께서는 돈 중심의 세상을 하나님 중심 세상으로 바꾸기 위해 이런 눈 이야기를 하셨다.
    우리 눈은 밝은가. 밝아도 돈에 미친 벌레 눈이 아닌가. 마땅히 돈을 사랑한 벌레의 눈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답게 사는 새의 눈으로 살아야 한다.

    한 해가 가고 새해가 오는데 영어의 정월(January)이라는 말은 로마 신화의 두 얼굴을 가진 신 ‘야누스’에서 온 말이다. 지난 과거의 역사도 보고 창창한 새해 미래를 볼 줄 알아야 새 출발이 된다는 뜻이다.

    한 쪽에 치우치고 한 쪽 눈으로 보는 그 확신만 지닌 채 밀고 나가면 소망이 없다.
    국민총생산지수(GNP)도 보고 국민총행복지수(GNH)도 보며, 세상 나라의 번창도 보고 ‘하나님의 나라와 그 의’의 왕성함도 볼 줄 알아야 희망이 있다. 




    눈동자

    사람이 눈동자는 엄청난 신비를 간직하고 있습니다.
    안과의사들은 우리의 눈동자가 자동으로 조절된다고 말합니다.
    가령 사람의 눈에 먼지나 모래와 같은 이물질이 들어오려고 하면 어느새 눈꺼풀이 검겨 눈동자를보호하는 것입니다.
    이런 작용이 가능한 것은 눈이 가지고 있는 특수한 구조 때문입니다.
    현재까지 밝혀진 바로는 사람의 눈에는 자그마치 30만개의 회로가 있고 1억만 개의 신경세포가 있다고 합니다.
    그래서 아무리 작은 그 무엇이라도 눈에 들어오려고 하면 이것을 눈동자가 감지하고 눈꺼풀에게 지시하여 자동으로 감겨 보호하는 것입니다.




    볼 수 있는 눈

    한 유대 청년이 랍비에게 물었다.
    '선생님, 가난한 사람들은 가진 것은 비록 없어도 서로 돕는데 왜 부자가 되면 남을 돕지 않을까요?'
    '창밖을 내다보게, 무엇이 보이나?'
    '예, 어린애와 그의 엄마가 걸어가고 있네요. 그런데 왜 그러시죠?'
    '자, 그럼 이번엔 벽에 걸린 거울을 들여다보게, 무엇이 보이나'.
    '제 모습밖에는 뭐가 보이겠습니까!'
    '바로 그것이야, 창이나 거울이 모두 유리로 되어 있네만 유리에다 은칠을 하게 되면 자기 모습밖에 보이지 않는다네'.

     

     

     

     
     
     

    안목

    눈으로 본다는 말은 두 가지 뜻이 있겠다.
    겉모습을 본다는 뜻과 사물의 본질과 가치를 알아본다는 뜻이다.
    겉모습은 시력으로 보고 본질과 가치는 안목으로 본다.

    * 최고의 안목은 사람을 보는 눈입니다.
    겉사람이 아닌 속사람을 보는 눈!

    그 눈은 결코 하루 아침에 열리지 않습니다.
    오랜 세월 갈고 닦아야 안목도 자라납니다.
    무엇보다 자기의 '속사람'을 튼실히 잘 키워야 비로소 자랍니다.


     

     

     

     
     
     

     믿음의 눈

    히브리서 12:2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저는 그 앞에 있는 즐거움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어느 외판 사원이 여러 곳을 방문할 때마다 늘 물건을 못 파는 상황을 상상하면서 두려움에 빠졌습니다.
    이 두려움 때문에 그의 판매 실적은 아주 낮아지게 되었습니다.
    그는 자기 힘으로는 이 두려움을 도저히 이길 수 없음을 깨닫고 말씀 카드를 만들어 가지고 다니면서 암기하여 그 말씀을 통해 두려움을 쫓아내기로 했습니다.
    그 카드에는 "너희가 만일 믿음이 한 겨자씨 만큼만 있으면 이 산을 명하여 여기서 저기로 옮기라 하여도 옮길 것이요"(마 17:20)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롬 8:31)

    용기를 북돋아 주는 여러 말씀들이 기록되어 있었습니다.
    결국 그 말씀은 외판원에게서 두려움을 몰아 내고 판매 실적을 올리게 하였습니다. 이처럼 말씀은 어두운 인생길을 가는 사람들에게 빛이 되고 등불이 되고 안내자가 됩니다.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롬 10:17)

    정신의학자 칼 메닝거(Karl Menninger)
    믿음을 가진 태도는 사실보다 더 중요하다.

    이것은 자신감을 잃은 사람들에게 매우 중요한 의학적인 말이자 심리치료에 있어서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말입니다.
    아무리 절망적인 현실, 즉 사실에 부딪힌다 해도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그 사실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느냐, 즉 그 사람의 믿음의 자세에 따라서 결과가 달라진다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어떠한 환난이 닥쳐온다 할지라도 그 환난을 우리가 어떻게 생각하느냐, 믿음의 눈으로 보느냐, 아니면 절망의 눈으로 보느냐에 따라서 그 결과가 달라진다는 것입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 선진들이 이로써 증거를 얻었느니라"(히 11: 1-2)






    믿음의 눈

    미국의 존 맥스웰 목사가 오하이오에서 목회하던 시절의 이야기입니다. 그는 사냥꾼으로 유명한 교우와 함께 100리쯤 쭉 뻗은 고속도로를 갈 기회가 여러 번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때마다 그 교우의 특별한 면을 발견하고 놀랐다고 합니다.

    “목사님, 저기 다람쥐가 있네요.” 그러나 그에게는 보이지 않았습니다. “목사님, 저기를 보십시오. 오리가 두 마리나 있습니다.” 맥스웰 목사는 여전히 보지 못했습니다. “목사님, 사슴을 보십시오.” “토끼가 지나갔습니다.”

    목적지에 이르기까지 사냥꾼 교우는 십여 마리의 짐승을 봤습니다. 그러나 같은 길을 같은 차를 타고 가면서도 사냥꾼은 쉽게 보는 것을 맥스웰 목사는 보지 못했습니다. 그가 본 것은 오직 고속도로뿐이었다고 했습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 보지 못하는 것을 보게 하는 것이 ‘믿음의 눈’입니다. 여호수아와 갈렙 두 사람이 본 것을 열 사람의 정탐꾼은 보지 못하고 있습니다. 신앙인은 ‘믿음의 눈’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믿음의 눈으로

    믿음은 바라보는 것입니다.
    믿음은 다르게 보는 것입니다.
    믿음은 장애물 속에서 기회를,
    장애물 속에서 비전을,
    장애물 속에서 소원이 성취되는 것을 보게 합니다.

    믿음의 눈은 모든 것을 초월하게 됩니다.
    구름이 우리 앞을 막을 때에도
    구름 뒤에 있는 태양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믿음은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사건 속에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 어둠 속에 홀로 서 있는 것 같을 때에도 믿음의 눈을 가진 우리는 절망하지 않습니다. 깊은 어둠 속에도 주님이 우리 손을 놓지 않음을 알기 때문입니다. 믿음의 눈으로 볼 때, 우리는 장애물 너머에 있는 주님의 축복을 발견하고 기뻐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눈

    대학 4년 동안과 대학원 2년 동안 내게 라틴어를 교수해 주시던 파울로스 교수님에게서 배운 것 두 가지를 꼽는다면, 하나는 라틴어이고, 다른 하나는 하나님의 눈을 의식하는 마음이다. 대학을 졸업할 즈음 같은 학과 친구와 함께 교수님 댁을 찾아가 잠깐 만나 뵙고 나왔지만, 그때의 방문이 나에게는 두고두고 기억되는 사건이 되었다. 그분과 나누었던 대화는 한 가지도 기억나는 것이 없었다. 기억나는 것은 오직 그분의 방에 붙어 있던 라틴어로 쓰여진 짧은 문구였다.
    “Me Vidit Deus”(메 비디트 데우스, ‘하나님이 나를 보고 계시다
    ’)
    한참 신앙적으로 살아보겠다고 결심하고 있던 터이라 그 문구는 유별나게 마음에 큰 감명을 주었다.
    나를 바라보고 계신 하나님의 눈을 의식하며 생활한다는 것이 정신적으로 큰 부담이 될 수도 있겠으나, 그 눈을 의식하며 경건하게 ‘하나님 앞에’(Coram Deo, 코람 데오) 산다고 하는 것은 신앙인에게 있어서 얼마나 진지한 삶의 자세일까?

    세상의 많은 사람들이 ‘사람의 눈’을 의식하며 살아가고 있다.
    이 옷을 입으면 다른 사람이 나를 어떻게 보아줄까?
    내가 이렇게 행동하면 다른 사람이 나를 어떻게 보아줄까?
    내가 이렇게 행동하면 다른 사람이 어떻게 볼까?
    이래서 세상 사람들은 흔히 눈치 생활에 익숙해지게 되고 체면에 관심을 갖게 된다.
    ‘사람의 눈’에 잘 보이려고 노력하고, 그래서 다른 사람의 비위를 맞추려고 노력하기도 한다.
    이런 삶의 자세에 비교한다면 ‘하나님의 눈’을 의식하면서 ‘하나님 앞에서’ 사는 생활은 얼마나 귀한가?


    예견의 눈

    알래스카주는 미국 본토의 5분의 1에 해당하는 큰 땅덩어리입니다.
    앤드루 존슨 대통령은 아무데도 쓸모없어 보이는 얼음덩어리인 이 땅을 제정러시아로부터 사들였습니다.
    미 의회는 발칵 뒤집혀 대통령에게 온갖 질책과 공격을 가하였습니다.
    그러나 현재에는 황금과 백금광산, 풍부한 어장, 우거진 삼림, 엄청난 석유 매장량 등으로 황금박스로 불리고 있습니다.
    누구도 보지 못했던 그 땅의 가치를 예견의 눈을 가진 사람은 보았던 것입니다.

    우리 성도에게도 알래스카를 사는 것 같은 축복의 기회가 주어질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축복을 바라보는 예견의 눈이 없는 사람들은 그 기회를 놓치고 맙니다.
    불평하고 원망할 일이 생겨도 생명나무를 선택하며 오히려 더 복받을 말과 행동을 해야 합니다.
    환란과 역경이 닥쳐도 언제나 당신의 각본대로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선하심을 믿어야 합니다.
    어려울수록 더 감사하고 찬양하여 큰 은혜와 복을 받아 누리는 예견의 눈을 가진 성도가 됩시다.


    가능성을 보는 눈

    기억상실증에 걸린 한 남자가 의사를 찾아갔습니다.
    그는 의사에게서 이런 진단을 받았습니다.
    “당신의 기억을 되살리려면 당신의 시력이 손상될지도 모릅니다.
    그렇지 않으면 방법이 없습니다.
    선택은 당신이 하십시오.
    기억을 되찾길 원하십니까?
    아니면 두 눈이 멀쩡하기를 원하십니까?”
    그는 심사숙고한 후 대답했습니다.
    “저는 기억을 되살리기보다는 제 시력을 그대로 유지하겠습니다.
    제가 과거에 어디에 있었느냐를 보기보다는 앞으로 어디로 가게 되는지를 보는 것이 더 낫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과거의 일을 바로잡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과거의 문은 이미 닫혀 있지만 미래는 새로운 가능성으로 열려 있습니 다.
    하지만 과거의 실패나 성공에 계속 얽매여 있다면 앞으로 도 의미있는 삶을 살 수 없습니다.
    우리가 크리스천으로서의 삶을 살면서 기본적으로 요구되는 것이 있는데 바로 과거에 지배받지 않으면서 과거로부터 교훈을 얻는 것입니다.
    그러나 실상 과거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크리스천들이 많습니다.
    그들은 몇 번 노력하다 실패한 후에는 다시 시도하지 않기로 마음 먹습니다.
    그들은 과거의 기억 때문에 미래의 가능성에 대해서는 눈이 멀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용서를 확신한다면,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과거조차도 기꺼이 좋은 결과를 낳게 해주실 것이라고 믿을 수 있습니다.

    코와 눈

    사이좋게 자기 역할을 잘 감당하던 코와 눈이 어느 날부터 서로 비쭉거리더니 싸우게 되었다.
    코 : 너는 쑥 들어가 볼품이 없어. 자랑할 것이 하나도 없구나. 얼굴이 예쁜 것은 내가 오뚝하게 나와 있어서이다.
    눈 : 뭐야? 내 눈이 볼품이 없다고? 그래? 그렇다면 너 한번 당해볼래?
    화가 난 눈은 눈을 감아버렸다.
    그러자 넘어져 코가 깨지고 말았다.
    흐르는 코피를 솜으로 틀어막은 코는 생각할수록 억울해서 그냥 있을 수가 없었다.
    “지금까지 내가 냄새를 맡아 주어서 나쁜 것을 먹지 않아 건강하게 산 것도 모르고…”
    코는 궁리 끝에 대변을 쌈장처럼 만들어 식탁에 올려놓았다.
    볼 줄만 알았지 냄새를 맡지 못하는 눈은 대변으로 상추쌈을 먹었다.

    세 가지 시력

     

    찰스 엘 알렌(Charles L. Allen)
    하나님의 정신의학(God`s psychiatry)

    세 가지의 시력을 들고 있다.
    첫째. 신체적 시력
    둘째. 정신적 시력
    이성(理性)이 밝아야 한다.
    비판하고 추리하고 통합하는 사고능력이다.
    합리적으로 사물을 판단하고 이해할 수 있는 총명이 있어야 한다.
    이러한 이해력이 없이는 진리를 볼 수 없다.
    셋째. 영적 시력
    하나님을 알아볼 수 있는 영의 눈이 있어야 한다.

    토마스 제퍼슨

    미국, 어느 강의 나루터에서 한 노인이 추운 겨울날 벌벌 떨면서 서 있었다.
    누가 자기를 좀 강 저편으로 건너 주기를 청하려는 것이었다.
    마침 말을 탄 사람들이 그 앞을 지나갔다.
    그러나 노인은 선뜻 그들에게 도움을 청하지 않았다.
    말을 탄 사람들이 거의 다 지나가는데 노인은 맨 마지막으로 말을 타고 지나가는 한 청년을 유심히 처다보다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
    "여보게. 나를 좀 강 건너편으로 건너줄 수 있겠소?"
    그 말을 들은 청년은 선뜻 노인을 말에 태워 강을 건너기 시작했다.
    강을 다 건너가서 이 청년은 노인에게 물었다.
    "제 앞으로 많은 군인들이 말을 타고 지나갔는데 왜 하필이면 맨 마지막에 지나가는 제게 부탁을 하셨습니까?"
    그러자 노인은 이렇게 대답했다.
    "나는 그들의 눈을 보고 있었네.
    그러나 자네를 앞선 사람들은 모두가 아주 피곤하고 초조하고 불안하고 무엇인가 가득 차 있어서 남의 말을 들을 것 같지 않았다네.
    그런데 젊은이의 눈을 쳐다보았더니 거기에는 평화가 있고 여유가 있으며, 이리저리 주변 풍경을 살필 줄도 알더구먼.
    그래서 젊은이에게 부탁했던 것이오."
    이 청년은 그후 미국의 제3대 대통령이 된 토머스 제퍼슨이었다.







    여호와의 눈(역대하 16:9)

    여호와의 눈은 온 땅을 두루 감찰하사 전심으로 자기에게 향하는 자를 위하여 능력을 베푸신다고 본문이 말하고 있다. 살아계 신 신이신 여호와께서 그 눈으로 우주 만물과 인간의 심령까지를 살 피신다.

     1. 여호와의 눈은 어떤 눈인가 이 일곱은 온 세상에 두루 행하는 여호와의 눈이라(슥 4:10)이 는 여호와의 눈이 일곱(7)으로써 온 세상을 살피신다는 표현이다.

    여호와의 눈은 어디서든지 악인과 선인을 감찰하신다(잠 15:3) 세초부터 세말까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눈이 항상 그 위에 있느니 라(신 11:12) 여호와여 눈을 떠서 보시옵소서(왕하 19:16).

    여호와의 눈은 살피시는 눈이신데 그 범위는 온 세상을 살피시되 악 인과 선인을 아울러 살피시는 공평한 판단을 하실 수 있는 감찰자 이 시다.

    또 세초부터 세말까지는 시간적으로 볼 때 처음부터 나중까지 언제 나 항상 살피시는 눈이시니 공간적으로나 시간적으로 잠시라도 감찰하 심을 쉬거나 살피심을 못하심이 없아온즉 누가 그 범위에서 벗어날 수 있으리요.

     2. 감찰하시는 여호와의 눈 감찰하신다는 말의 뜻은 이리 저리 움직이면서 바로 살피고 깊이 살 피는 상태를 말한다.
    그런데 여기 선인과 악인을 살피시는 중에 악인 의 범죄상을 색출(索出)하기 위한 탐색(探索)이나 숨겨 둔 죄상을 적 발(摘發)하기 위한 추궁(追窮)적 자세가 아니라 보다 더 선인들이 전 심으로 자기에게 향하는 것을 보시려고 감찰하신다.

    다시 말하면 선량한 백성들이 하나님의 은총을 갈망하여 나오는 모 습을 보시려는 눈이시요, 불쌍하고 가련한 자들에게 긍휼을 베푸시기 위하여 찾아 보시는 눈이시다. 사랑이 담뿍 담겨져 있는 눈이시요, 긍휼하심을 베푸시는 자비하신 눈이시다. 그 눈길을 사람이 피할 수 없다.

    바다 건너 먼 곳에 가도, 골방 속에 홀로 숨어도 어떤 비밀한 장소 에 가서 꼭꼭 숨어도 하나님의 눈은 다 살피시고 나아가자. 자기에게 향하는 자를 위하여 능력을 베푸신다고 하셨기 때문이다.

    여호와의 눈은 우리들의 마음 속을 살펴 보시는 신령한 눈 이심을 깨닫고 바로 살아야 한다.

    여호와의 눈(잠언 15:3)

    여호와의 눈은 어디서든지 악인과 선인을 감찰하시느니라.
    The eyes of the LORD are everywhere, keeping watch on the wicked and the good.

    잠언 5:21
    대저 사람의 은 여호와의 눈 앞에 있나니 그가 그 모든 을 평탄케 하시느니라.
    For a man's ways are in full view of the LORD, and he examines all his paths.

    욥기 34:21
    하나님은 사람의 을 주목하시며 사람의 모든 걸음을 감찰하시나니.
    His eyes are on the ways of men; he sees their every step.

    시편 94:9
    귀를 지으신 자가 듣지 아니하시랴 눈을 만드신 자가 보지 아니하시랴.
    Does he who implanted the ear not hear? Does he who formed the eye not see?

    성경을 읽으면 종종 『여호와께서 보시매 좋았더라』하는 구절과『여호와께서 보시매 악하였더라』하는 구절이 있습니다.
    여호와의 눈이 우리 인간을 보십니다.
    감찰하십니다.
    주목하십니다.
    예레미야 선지자를 통하여 말씀하신 바와 같이『나 여호와는 심장을 살피며 폐부를 시험하고 각각 그 행위와 그 행실대로 보응 하리라.』하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인간은 흔히 자기가 자기 자신을 보기를 좋아합니다.
    그래서 옛날부터 인간은 거울(鏡)을 발명하였습니다.
    옛날 동판이나 철판을 갈아서 거울로 사용하였습니다.
    현대는 유리로 거울을 더 많이 만듭니다.
    문명할수록 거울이 더 커지는 모양입니다.
    미국에 가서 여관에 들어  보면 그저 방마다 문짝 같은 거울을 달아 놓은 것을 우리가 볼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의 말대로 현대 문명은 거울의 문명이라고 합니다.
    아마 그 이유는 사람마다 자기 얼굴을 보기를 좋아하고 또 보통 자기가 잘 생긴 줄 생각합니다.
    그리고 인간은 남이  나를 어떻게 보나, 이런 관심을 가집니다.
    할 수 있는 대로 잘 보이기 위해서 얼굴도 단장하고 좋은 옷도 입으려고 합니다.
    다른 사람이 칭찬을 하면 기뻐하고 다른 사람이 비난하는 말을 듣게 되면 분노합니다.

    정부 당국자들도 여론을 때때로 조사합니다.
    또는 국민들이 우리를 어떻게 보나 알기 위해서 정보원을 각처로 파송 합니다.
    그런데 제일 중요한 것은 내가 나를 어떻게 보는 데 있는 것도 아니요,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보는 데 있는 것도 아니라.
    하나님께서 나를 어떻게 보시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그것이 제일 중요한 문제입니다.
    아무리 나 스스로 잘난 줄 생각하고 아무리 세상 사람들에게 일시 칭찬을 받는다고 할지라도 하나님 보시기에 옳지 않는 사람이면 오래 가지 못합니다.

    바벨론 왕 벨사살은 자기 자신도 자기를 높이 보았고 모든 신하들과 국민들이 그를 역시 높이 보았습니다.
    큰 나라의 제왕이요, 금은 보옥(寶玉)이 많습니다. 지위가 높습니다.

    하루 저녁은 천여 명의 귀객들을 초청하고 큰 연회를 배설하였습니다. 술과 많은 음식을 만들고 예루살렘 선전에서 쓰던 그릇까지 가져다가 술을 마시며 굉장한 잔치를 배설하였습니다. 그러나 그 때에 담 벽에 이상한 손가락이 나타나서 글씨를 쓰는데『메네 메네 데겔 우바르신』이라는 글을 기록하였습니다. 그 뜻은「메네」는「하나님이 이미 왕의 나라의 시대를 세어서 그것을 끝나게 하셨다」함이요,「데겔」은 왕이「저울에 달려서 부족함이 보였다」함입니다. 그 날 저녁으로 메데, 파사 연합군이 들어와서 바벨론 이라고 하는 나라는 멸망을 받았습니다. 자기가 굉장히 크다고 생각하는 것이 문제가 아닙니다. 요컨대는 하나님의 저울에 달아서 얼마나 중량이 잇느냐? 하나님 보시기에 그 사람을 어떻게 보시는가? 그것이 제일 중요합니다.

    여러분이나 저나 누구나 그것이 제일 중요합니다. 사람을 관찰하시는 여호와의 눈은 어떠한 눈입니까? 여호와는 어디서든지 악인과 선인을 감찰하신다고 하였습니다. 역대 하 十六장 九절에는『여호와의 눈은 온 땅을 두루 감찰하사 진심으로 자기에게 향하는 자를 위하여 능력을 베푸시나니…』이렇게 말씀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영이십니다. 하나님은 어디나 계십니다.
    하나님의 눈은 어디나 있습니다. 높은 데가 없고 깊은 데가 없습니다. 먼데가 없고 가까운 곳이 없습니다.
    이 지구, 이 우주, 어디나 어느 거석이나 다 꼭 같이 하나님의 눈앞에 놓여 있습니다.
    여호와의 눈은 어디서나 감찰하시고 언제든지 살피는 눈입니다.
    졸며 쉬지 않는다고 하는 시편의 말씀이 있습니다.
    사람의 눈은 졸 때도 있고 잘 때도 있으나 하나님의 눈은 졸거나 잘 때가 없습니다.
    밤이나 낮이나, 아침이나 저녁이나, 어두우나 밝으나, 흐릴 때나 개일 때나, 우리가 잘 때나 깰 때나, 일할 때나 쉴 때나, 언제든지 계속적으로 우리를 살피시는 분입니다.
    그리고 인간은 현재만 봅니다. 하나님의 눈은 과거도 현재와 같이 보시고 미래도 현재와 같이 보십니다.
    그러기에 시편 139편에 있는 말씀과 같이『모태에서 내 형체가 이루기 전에 주의 눈이  나를 보셨습니다』그 뿐만 아닙니다.
    이 다음에 우리가 죽을 것도 주의 눈은 미리 현재와 같이 보십니다.

    이 주의 눈은 인간 생활의 모든 방면을 살피십니다.
    사적 생활, 공적 생활, 사회 생활, 문화 생활, 직장 생활, 정치 생활, 모든 인간의 활동 상황을 살피십니다.
    인간의 역사와 모든 하는 일을 살피십니다.
    정치도 살피고, 선거도 살피십니다.
    이 눈은 3. 15선거를 살폈습니다.
    이 눈은 외면만 보는 눈은 아닙니다.
    내면까지 꿰뚫어서 엑스광선처럼 보시는 눈입니다.

    사무엘이 이새의 아들 가운데서 기름 부어서 장차 이스라엘 왕을 삼으라고 하는 명을 받고 베들레헴에 갔을 때에 키가 크고 용모가 잘 생긴 이세의 맏아들 엘리압이 왔습니다.
    사무엘이 척 보니 아주 잘 생겼습니다.
    『아! 이 사람이 필연 왕이 될 모양이다.』기름 부을 생각을 하였습니다. 그 때에 하나님께서 사무엘 에게 속삭이는 말씀은『외모와 신장을 보지 말아라. 나는 이미 이 사람을 버렸노라.』하나님이 보는 것은 사람이 보는 것과 다른데, 사람들은 외모를 보지마는 하나님은 중심을 보십니다.

    우리 사람의 행동을 보는 것이 아니고 그 행동의 배후에 숨은 동기를 보십니다. 마음속 깊은 곳에 있는 그 욕망, 그 사람, 그 야심, 그 상상, 그 심리의 증상, 요샛말로「콤플렉스 옵세션」(Complex Obsession)까지, 프로이드의 현대 심리학이 발전되기 전에 하나님께서는 벌써 우리 마음속 깊은 자리를 보고 계십니다.

    에스겔 8장을 보면 하나님께서 에스겔을 어떤 곳으로 인도했는데 보니까 큰 벽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벽에 조그만 구멍이 하나 있습니다.
    그 구멍을 아무리 들여다보아야 잘 안 보입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기를『그 벽을 헐어라!』그 구멍을 크게 만들고 헐었습니다.
    그 다음에 보니까 또 큰문이 닫혔습니다.
    『그 문을 열어라』그 문을 열어 보았습니다.
    보니까 방이 하나 있는데 그 방 속에는 온갖 더러운 벌레와 더러운 짐승들과 그 방의 벽에는 모든 우상을 그려 놓았습니다.
    놀라지 마세요! 이스라엘 장로 70명이 그 우상들에게 분향을 하고 섰습니다.
    하나님께서 에스겔에게 하시는 말씀이 『너는 지금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는 일을 아느냐? 이 사람들이 입술로는 나를 섬기노라 하지마는 실상 자기 마음속 깊은 곳에는 더러운 것들이 많고, 실상은 우상을 섬기며 이 사람들이 내가 이것을 보지 못하는 줄 알지만 그러나 나는 이것을 보노라.』

    사람의 마음을 담으로 쌓아 놓고 문으로 꼭 닫은 다음에 내 속을 누가 알겠는가 합니다.
    사실이지요! 사람은 모르지요! 열 길 물 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의 마음은 모르지요.
    그러나 하나님은 보십니다.
    그러므로 여호와의 눈은 피할 수 없습니다. 숨길 수 없습니다. 여호와 앞에는 비밀이 없습니다.

    시편 39편에 부르짖은 바와 같이 『내가 주의 신을 떠나 어디로 가며 주의 앞에서 어디로 피하리이까. 내가 하늘에 올라갈지라도 거기 계시며 음부에 내 자리를 펼지라도 거기 계시니이다.』
    피할 수 없습니다. 이런 눈으로 하나님께서 악인을 감찰하십니다.
    이런 눈으로 노아 때에 모든 사람들의 악한 생각과 행동을 감찰하시고 꼭 그대로 보응 하였습니다. 이런 눈으로 소돔과 고모라 사람들을 감찰하시고 그대로 보응 했습니다. 이런 눈으로 아합과 이세벨을 감찰하시고 그대로 갚았습니다. 이런 눈으로 압살롬을 보시고 그대로 갚았습니다. 이것은 성경 역사만이 아닙니다.

      세계 역사가 역시 그렇습니다. 이런 눈으로 무솔리니는 보았고, 이런 눈으로 히틀러를 보았고, 하나님께서 감찰하신 대로 보응 했습니다. 이런 눈으로 지금까지도 작은 무솔리니, 작은 히틀러를 감찰하시고, 또 보응 하십니다.
      우리가 깊이 생각할 것이 있습니다. 우리의 일동일행은 하나 하나가 하나님의 안전에서 한다고 하는 이 사실이올시다. 우리가 죄를 지으면 나는 은밀한 가운데 죄를 짓지마는 하나님의 목전에서 짓는 것입니다.

    다윗과 밧세바가 은밀한 방안에서 죄는 지었습니다.
    그러나 다윗이 그 후에 깨달았고 시편 51편에 고백한 대로『주님이 시요, 내가 주님의 목전에서 이 악한 일을 하였나이다.』고백하였습니다.

    우리가 무슨 죄를 짓든지 하나님의 목전에서 짓습니다. 아간이 의복과 금은을 감출 때에 은밀히 감추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목전에서 그 일을 했습니다. 유다가 은 30을 받을 때에 은밀히 대제사장과 단 둘이 그 돈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목전에서 받았습니다. 작은 죄나 큰 죄나 하나님의 목전에서 행하는 악한 일이라고 하는 것을 우리가 기억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분명히 가르치셨습니다. 하나님은 안이나 밖이나 꼭 같이 보시는 하나님인 까닭으로 우리의 악한 생각을 악한 생동과 같이 미워하십니다. 그러기에 주님께서 말씀하시기를『음욕을 품으면 벌써 너희가 마음속에 간음을 행하였느니라』하였습니다.『마음가운데 누구를 미워하면 네 속에 이미 살인을 하였느니라.』
      그러므로 우리 주님께서는 모든 죄를 미워하시지마는 특별히 외식하는 이를 미워했습니다.『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여, 잔과 대접의 겉은 깨끗이 하되 그 안은 탐욕과 방탕으로 가득하게 하는 도다. 너는 먼저 안을 깨끗이 하라. 그리하면 곁도 깨끗하리라.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여, 회칠한 무덤 같으니 겉으로는 아름답게 보이나 그 안에는 죽은 사람의 뼈와 모든 더러운 것이 가득하도다.』모든 죄가 가증하지마는 외식하는 죄는 두 가지 죄가 겸했습니다. 더러운 속에 있는 죄, 그것을 가리우는 거짓 죄… 그러기에 성경은『두 마음을 품은 자들아, 마음을 깨끗이 할지어다.』하였습니다.


      우리 신앙생활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 앞에서 마음을 깨끗하게 하는 그것입니다. 왜? 하나님은 우리의 마음을 목도하십니다. 여호와의 이 눈은 공의의 눈일뿐더러 사람의 눈이요, 자비와 긍휼의 눈이요, 아버지의 눈도 되십니다.
      어린 아기 모세가 나일강 변 갈대밭에 버림을 받고 외롭게 울 때에 하나님의 눈은 그 아기를 보았습니다. 그리고 그 아기를 보호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 땅에서 무고하게 압박을 받으며 말할 수 없는 억울한 일을 당할 때에 하나님의 눈이 이스라엘 백성의 곤고 한 것, 그 슬프고 억울한 것을 내려다보셨습니다. 그 백성을 구원하셨습니다.
      나오미와 룻, 외로운 두 과부가 모압을 떠나서 베들레헴을 향해서 옵니다.
      그 외로운 모습, 도와줄 사람이 없는 그 불쌍한 여인들, 하나님의 눈이 보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을 도우셨습니다.
      엘리야가 이세벨에게 쫓겨서 멀리 광야(曠野)길을 갈 때에 피곤하였습니다. 더 걸을 수 없었습니다. 로뎀 나무 아래서 죽기를 원했습니다. 그러다가는 피곤해서 앉아서 잠이 들었습니다. 외로운 광야 길에 피곤(疲困)히 잠든 하나님의 사자를 하나님께서는 보셨습니다. 다른 이는 볼 사람이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보셨습니다. 먹을 것과 물을 주어서 새로운 원기를 회복하게 만드셨습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시기를『나다나엘아,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 있을 때 이미 보았다.』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아마 나다나엘이 조용하고 은밀한 가운데 무화과나무 아래서 기도하던 모양입니다. 은밀하게 기도하는 모습을 하나님은 보십니다.
      고넬료라고 하는 사람은 군문(軍門)에 있는 백부장 이올시다. 그러나 하나님을 경외합니다. 은밀히 기도를 하고 남모르게 다른 사람을 도와줍니다. 자선사업을 많이 합니다. 하나님의 눈이 고넬료를 보셨습니다. 기도하는 모습과 다른 사람을 도와주는 모습을 하나님의 눈이 보셨습니다. 그래서 베드로를 청해서 온 가정을 처음으로 구원하게 된 것입니다.


      여호와의 눈은 온 땅을 두루 행하며 그를 진심으로 의지하는 이를 찾아서 그를 보호해 주시고 능력을 주시고 필요한 모든 축복을 주시는 하나님이올시다. 이 하나님은 우리의 외로운 사정을 보십니다. 우리의 배고픈 사정도 보십니다. 우리의 억울한 경지도 보십니다. 우리의 눈물을 보십니다. 우리의 간절한 소원을 보십니다. 이 하나님은 우리의 모든 사정을 살펴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낙심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두려워할 필요도 없습니다. 이 하나님의 눈은 선한 사람을 감찰하시고 그에게 능력을 주시는 하나님의 눈이올시다.
      몇 해 전 그리스의 수도 아테네에 갔는데 옛날 천여 년 전에 지은 오랜 예배당이 있어서 구경하러 갔습니다. 거기 헬라 정통교회에 들어가면 천주교와 좀 다른 것은 천주교는 예배당 안에 마리아의 성상과 성화를 만들어 놓았지만 그러나 이 헬라 정통교회에서는 성상은 아주 폐지했습니다. 주후 八세기에 아주 폐지하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성화만 허락했습니다. 그래서 그 예배당에 들어가면 천장과 담으로 여러 가지 옛날의 성화를 그렸습니다. 그런데 예배당에 들어가면 이 강대, 저 아치 맨 위에 무슨 그림이 있는고 하니 큰 눈(眼)을 그렸습니다. 그래서 그 예배당에 문을 열고 들어서면 제일 먼저 보이는 것이 그 눈입니다. 그 눈이 나를 내려다봅니다. 아마 그 뜻은 이 예배당에 들어오면 누구든지 하나님의 눈이 너를 보신다 하는 그 뜻을 알리기 위해서 그려 붙인 모양입니다. 하나님의 눈은 그 예배당에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예배당에도 계십니다.


      하나님의 눈은 지금도 우리의 마음을 살펴보십니다. 이 하나님의 눈은 성전 안에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어디 가든지, 온 세계에 이 하나님의 눈을 피할 데가 없습니다. 우리 동양의 성현들도 옛날 이런 사상을 좀 깨달았던 모양입니다. 그러기에 고서에 무슨 말이 있는고 하니「신목여전」(神目如電)이란 말이 있습니다. 신의 눈이 번갯불과 같다는 말입니다. 제일 밝은 것이 번갯불 아닙니까? 하나님의 눈이 번갯불과 같이 밝게 우리들을 살피십니다.
      하나님의 눈이 우리를 살피시고 나를 보십니다. 내 생각과 내 생활에 있어서 하나님 보시기에 거슬리는 것은 없습니까? 하나님의 눈이 여러분 하나 하나를 지금 보시고 여러분의 양심에 말씀해 주십니까? 사도 요한 은 말씀하셨습니다.『만일 우리가 죄 없다고 하면 스스로 속이는 것이요.』  스스로 속이지 맙시다.『만일 우리가 우리의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고 의로우사 우리의 모든 죄를 사하여 주시고 우리를 모든 불의한 가운데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하나님께서 몰라서 자백하란 말 아닙니다.」우리의 모든 죄를 사하여 주시겠다고 하였습니다.


      『볼지어다 지금은 구원의 때요, 오늘은 구원의 날이로다.』지금 이 시간 구원을 얻어야 하겠습니다. 우리 가운데 한 사람이라도 아직까지 하나님 보시기에 죄를 자백하지 아니하고 자고새가 알을 품고 있듯 그냥 죄를 마음 가운데 품고 있는 이가 있습니까? 하나님께서 그 죄를 보고 계십니다. 이 시간 그 죄를 자백하고 내놓아야 죄 사함을 받을 수 있습니다.
      



    여호와의 눈(the eyes of the Lord, בְּעֵינֵ֥י יְהוָֽה)

    '여호와 보시기'라는 말로도 해석되는데 주로 여호와 하나님이 인간의 선과 악에 대한 행동을 감찰하고 판단하는데 사용된다.
    이 어법은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하게 행하였거나 혹은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하게 행하지 아니하였더라의 문구와 함께 사용된다.
    솔로몬 왕이 이방 여인들의 신들을 따랐는데 이 일을 악으로 표현하고 있다.

    열왕기상 11장 6절에서 여호와 눈앞에서 악을 행하였고 이 악에 대한 결과로 여호가 진노하여 다윗왕국이 분열되는 원인이 되었다고 기록되어있다.
    여호와 하나님은 선과 악을 심판하시는 분이기에 여호와 하나님 앞에서 즉 코람 데오의 사상과 관련된다.
    여호와의 눈은 신약성경에서 하나님의 임재에 해당된다.
    여호와의 눈과 반대되는 '인간의 눈'(역대하 20:12)은 여호와를 바라보는 눈으로 하나님을 의존하는 표현이다.
    유다왕 중에서 눈과 관련된 가장 비참한 기록은 열왕기하 25장 7절에 나온다.
    갈대아 군사가 시드기야 왕의 아들들을 시드기아의 눈앞에서 죽이고 시드기야의 두 눈을 빼고 사슬로 결박하여 바벨론으로 끌어갔다는 내용이다.
    여호와의 눈 앞에서 비극적인 심판의 모습을 보인 유다 왕 시드기야 눈을 대조적으로 보여는 장면이다.

    구약성경

    신명기와 이스라엘의 백성들

    • 신명기 6:18 여호와께서 보시기에 정직하고 선량한 일을 행하라 그리하면 네가 복을 받고 그 땅에 들어가서 여호와께서 모든 대적을 네 앞에서 쫓아내시겠다고 네 조상들에게 맹세하신 아름다운 땅을 차지하리니 여호와의 말씀과 같으니라

    유다와 이스라엘의 왕들

    유다와 이스라엘의 왕들이 여호와 하나님 앞에서 율법과 명령을 바르게 행하였는지를 보여주는 곳이 열왕기 상, 하 그리고 역대상, 하에서 집중적으로 기록되어 있다.

    • 열왕기상 11: 6 솔로몬이 여호와의 눈앞에서 악을 행하여 그의 아버지 다윗이 여호와를 온전히 따름 같이 따르지 아니하고
    • 열왕기상 14:22 유다가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하되 그의 조상들이 행한 모든 일보다 뛰어나게 하여 그 범한 죄로 여호와를 노엽게 하였으니
    • 열왕기상 15:5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하게 행하고 자기에게 명령하신 모든 일을 어기지 아니하였음이라
    • 열왕기상 15:34 바아사가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하되 여로보암의 길로 행하며 그가 이스라엘에게 범하게 한 그 죄 중에 행하였더라
    • 열왕기상 16:7 여호와의 말씀이 하나니의 아들 선지자 예후에게도 임하사 바아사와 그의 집을 꾸짖으심은 그가 여로보암의 집과 같이 여호와 보시기에 모든 악을 행하며 그의 손의 행위로 여호와를 노엽게 하였음이며 또 그의 집을 쳤음이더라
    • 역대하 16:9 여호와의 눈은 온 땅을 두루 감찰하사 전심으로 자기에게 향하는 자들을 위하여 능력을 베푸시나니 이 일은 왕이 망령되이 행하였은즉 이 후부터는 왕에게 전쟁이 있으리이다 하매
    • 역대하 20: 32 여호사밧이 그의 아버지 아사의 길로 행하여 돌이켜 떠나지 아니하고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하게 행하였으나
    • 역대하 25: 2 아마샤가 여호와께서 보시기에 정직하게 행하기는 하였으나 온전한 마음으로 행하지 아니하였더라
    • 역대하 26:4 웃시야가 그의 아버지 아마샤의 모든 행위대로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하게 행하며
    • 역대하 28:1 아하스가 왕위에 오를 때에 나이가 이십 세라 예루살렘에서 십육 년 동안 다스렸으나 그의 조상 다윗과 같지 아니하여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하게 행하지 아니하고
    • 역대하 29:2 히스기야가 그의 조상 다윗의 모든 행실과 같이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하게 행하여
    • 역대하 34:2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하게 행하여 그의 조상 다윗의 길로 걸으며 좌우로 치우치지 아니하고[3]

    성문서(케투빔)

    시편과 잠언서에는 여호와 하나님앞에서 개인들의 삶에 대한 하나님의 감찰을 주로 기록하였다.

    • 시편 15:4 그의 눈은 망령된 자를 멸시하며 여호와를 두려워하는 자들을 존대하며 그의 마음에 서원한 것은 해로울지라도 변하지 아니하며
    • 시편 34:15 여호와의 눈은 의인을 향하시고 그의 귀는 그들의 부르짖음에 기울이시는도다
    • 잠언 5:21 대저 사람의 길은 여호와의 눈 앞에 있나니 그가 그 사람의 모든 길을 평탄하게 하시느니라
    • 잠언 15:3 여호와의 눈은 어디서든지 악인과 선인을 감찰하시느니라

    다른 단어와 함께 사용된 곳

    여호와의 눈은 마음이라는 단어와 함께 사용되어 나온다.

    • 열왕기상 9:3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네 기도와 네가 내 앞에서 간구한 바를 내가 들었은즉 나는 네가 건축한 이 성전을 거룩하게 구별하여 내 이름을 영원히 그 곳에 두며 내 눈길과 내 마음이 항상 거기에 있으리니





    역대하 13장 요약

    유다 아비야여로보암과 전쟁하였으며, 하나님께서 도우심으로 아비야가 이스라엘 군대를 무찔렀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역대하 14장 요약

    아비야가 죽고 이후 아사가 왕이 되었으며, 아사는 올바른 정치를하였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우상을 파괴하였으며 계명을 지키라고 백성들에게 말하였고, 구스유다를 침공하지만 아사가 물리쳤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역대가 15장 요약

    오뎃의 아들인 아사랴가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였고, 아사는 개혁정치를하였고, 자신의 어머니를 태후의 자리에서 물러나게 하였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5월 16일(금) 역대하 13-15장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경고의 나팔(13:12)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사 우리의 머리가 되시고 그 제사장들도 우리와 함께하여 경고의 나팔을 불어 너희를 공격하느니라 이스라엘 자손들아 너희 열조의 하나님 여호와와 싸우지 말라 너희가 형통치 못하리라.
    God is with us; he is our leader. His priests with their trumpets will sound the battle cry against you. Men of Israel, do not fight against the LORD, the God of your fathers, for you will not succeed.

    경고의 나팔(The trumpet of warning)

    남유다 제2대 왕 아비야는 북이스라엘 제1대 왕 여로보암과의 전쟁에서 수적으로 불리했으나, 하나님을 의지함으로 승리를 얻었습니다.

    솔로몬 왕의 손자이자 르호보암의 아들 아비야가 남유다 제2대 왕이 되었습니다.
    그의 통치 3년째, 솔로몬의 신하였던 북이스라엘 제 1대 왕 여로보암과 큰 전투가 벌어졌습니다.
    아비야는 40만 명의 병사를 이끌고 출정했고, 여로보암은 그보다 두 배가 넘는 80만 명의 군사를 동원했습니다.
    양 진영은 에브라임 산지의 스마라임에서 맞서게 되었습니다.

    전투에 앞서 남유다 아비야 왕은 북이스라엘 백성에게 공개적으로 외쳤습니다.
    그는 다윗 언약을 언급하며 여로보암의 반역과 우상 숭배를 지적했습니다.
    아비야는 유다가 하나님을 배반하지 않으며 제사장들과 율법을 지킨다는 점을 강조했습니다.
    그는 백성 앞에서 하나님을 의지하며 싸울 것임을 선언했습니다.

    그러나 여로보암은 몰래 유다의 후방을 포위하였고, 아비야는 앞뒤로 끼인 상황에 놓였습니다.
    그 위기의 순간, 유다 백성은 하나님께 부르짖고 제사장들은 나팔을 불었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유다를 대신하여 싸워주셨고, 북이스라엘 군대는 크게 패배하였습니다.

    유다 군은 북이스라엘을 추격하여 벧엘을 포함해 여러 성읍을 점령하였고, 여로보암은 그 이후 다시 힘을 회복하지 못하였습니다.
    결국 여로보암은 하나님의 치심을 입어 죽음을 맞았고, 아비야는 점차 권세를 더해가며 통치했습니다.
    이 전쟁의 결과는 병력이나 전략이 아니라, 하나님을 전심으로 의지한 유다의 믿음에서 비롯된 것이었습니다.

    믿는 자가 숫자에서 오는 압박을 두려워하지 말고, 하나님께서 주시는 언약과 능력을 바라보라고 말합니다.
    아비야 왕의 군대는 여로보암의 병력 절반밖에 되지 않았지만, 그는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하신다는 믿음으로 담대히 나아갔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수나 외적 조건보다 마음의 정직함과 신실함을 보는 분이라는 것을 역대하 13장은 말해주고 있습니다.

    우리도 종종 자신의 능력이나 자원, 혹은 주변의 환경을 보고 두려움을 느낍니다.
    하지만 남유다 아비야 왕의 이야기는, 숫자의 열세 속에서도 하나님을 의지할 때 승리가 가능하다는 진리를 알려줍니다.
    현재의 문제, 미래에 대한 불안 속에서 어떤 전략보다 하나님께 기도하고 신뢰하는 것을 먼저 해야 함을 다시금 느끼게 됩니다.
    하나님은 단지 위기의 순간을 벗어나게 하실 뿐만 아니라, 그 경험을 통해 더욱 강건하게 하심을 믿습니다.
    오늘도 하나님을 향한 신뢰를 되살리고, 신실하게 그분을 따르는 하루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소금 언약(Covenant of salt)

    • “Ought ye not to know that the LORD God of Israel gave the kingdom over Israel to David for ever, even to him and to his sons by a covenant of salt ?”​(2 Chronicles 13:5, KJV)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나라를 영원히 다윗과 그의 자손에게 주신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이는 소금 언약으로 말미암음이니라.

    • Covenant of salt [ˈkʌvənənt əv sɔːlt]​ :
      ‘Covenant’는 계약이나 언약을 의미하며, ‘salt’는 소금을 뜻합니다.
      고대 근동 문화에서 소금은 부패를 방지하고 영속성을 상징하는 물질로 여겨졌습니다.
      따라서 ‘covenant of salt’는 변하지 않는 영원한 언약을 의미합니다.​

    • ‘소금 언약’은 하나님께서 다윗과 그의 자손에게 이스라엘 왕국을 영원히 주시겠다는 확고하고 변치 않는 약속을 상징합니다.
      소금은 부패를 방지하는 특성 때문에 영속성과 순결함을 나타내며, 이러한 언약은 하나님과 다윗 사이의 특별하고 영원한 관계를 강조합니다.





    성경 속의 나팔

    성경에서 나팔은 다양한 이유로 사용되었습니다.
    가장 일반적인 용도는 다음과 같습니다.

    1. 하나님의 임재를 알리기 위해
    2. 전쟁을 선포하기 위해
    3. 성회로 모이기 위해
    4. 순례를 시작하기 위해
    5. 천재지변을 경고하기 위해
    6.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을 알리기 위해

    나팔은 또한 기쁨, 승리, 심판과 같은 다양한 감정을 표현하는 데 사용되었습니다.

    출애굽기 19장에서는 하나님께서 시내 산에 강림하실 때 나팔 소리가 울렸고, 이스라엘 백성은 두려움과 경외심을 느꼈습니다.

    민수기 10장에서는 나팔 소리가 전쟁을 선포하는 신호였고, 이스라엘 백성은 용기와 결의를 느꼈습니다.

    나팔은 성경에서 중요한 상징물 중 하나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임재, 승리, 심판과 같은 중요한 사건들을 알리는 신호였습니다.
    나팔은 또한 기쁨, 두려움, 용기와 같은 다양한 감정을 표현하는 데 사용되었습니다.

    전쟁과 관련된 나팔

    민수기 10장 :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이스라엘 백성에게 나팔을 부는 법을 가르치셨습니다. 나팔은 전쟁을 선포하는 신호로 사용되었습니다.

    민수기 10:9
    또 너희 땅에서 너희가 자기를 압박하는 대적을 치러 나갈 때에는 나팔을 크게 불지니 그리하면 너희 하나님 여호와가 너희를 기억하고 너희를 너희의 대적에게서 구원하시리라

    신명기 20장 :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이스라엘 백성에게 전쟁에 나가기 전에 나팔을 부는 법을 가르치셨습니다. 나팔 소리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용기와 결의를 불어넣었습니다.


    여호수아 6장 : 여호수아는 여리고성을 정복하기 전에 나팔을 불었습니다. 나팔 소리는 여리고 성벽을 무너뜨렸고, 이스라엘 백성은 여리고성을 정복할 수 있었습니다.

    여호수아 6:5
    제사장들이 양각 나팔을 길게 불어 그 나팔 소리가 너희에게 들릴 때에는 백성은 다 큰 소리로 외쳐 부를 것이라 그리하면 그 성벽이 무너져 내리리니 백성은 각기 앞으로 올라갈지니라 하시매

    나팔은 전쟁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나팔 소리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전쟁을 선포하고, 용기와 결의를 불어넣으며, 적군을 물리쳤습니다.

    단순히 전쟁이 시작되었음을 알리는 경고의 나팔도 있습니다.
    이 때는 전쟁이 일어났으니 빨리 피하라는 뜻입니다.

    예레미야 6:1
    베냐민 자손들아 예루살렘 가운데로부터 피난하라 드고아에서 나팔을 불고 벧학게렘에서 깃발을 들라 재앙과 큰 파멸이 북방에서 엿보아 옴이니라

    성회와 관련된 나팔

    성회는 하나님께서 정하신 절기나 스스로 필요에 따라 만들어진 특별한 날입니다. 나팔을 불어서 모임을 알리고 함께 모이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 레위기 25:9 일곱째 달 열흘날은 속죄일이니 너는 뿔나팔 소리를 내되 전국에서 뿔나팔을 크게 불지며
    • 민수기 29장1절 일곱째 달에 이르러는 그 달 초하루에 성회로 모이고 아무 노동도 하지 말라 이는 너희가 나팔을 불 날이니라

    속죄와 회개를 위한 나팔

    성경에서 나팔은 회개와 속죄를 부르기 위한 신호로 사용됩니다. 민수기서 10장에서는 나팔 소리를 들을 때 백성들이 속죄하고 회개하는 시간이 되었음을 나타냈습니다.

    기쁨의 나팔

    • 역대상 13장8절 다윗과 이스라엘 온 무리는 하나님 앞에서 힘을 다하여 뛰놀며 노래하며 수금과 비파와 소고와 제금과 나팔로 연주하니라

    역대하 5장13절 나팔 부는 자와 노래하는 자들이 일제히 소리를 내어 여호와를 찬송하며 감사하는데 나팔 불고 제금 치고 모든 악기를 울리며 소리를 높여 여호와를 찬송하여 이르되 선하시도다 그의 자비하심이 영원히 있도다 하매 그 때에 여호와의 전에 구름이 가득한지라

    자랑의 상징적 의미

    여기서 나팔을 불다는 진짜 나팔을 부는 것이 아니라 자랑하는 것은 문학적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 마태복음 6장 2절 그러므로 구제할 때에 외식하는 자가 사람에게서 영광을 받으려고 회당과 거리에서 하는 것 같이 너희 앞에 나팔을 불지 말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들은 자기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

    재림 / 심판과 구원의 의미

    재림과 심판은 전쟁의 나팔과 같은 의미입니다. 천사들이 나팔을 불어 종말 또는 심판의 때가 되었음을 온 세상에 알리는 것을 말합니다.

    • 마태복음 24장 31절 그가 큰 나팔소리와 함께 천사들을 보내리니 그들이 그의 택하신 자들을 하늘 이 끝에서 저 끝까지 사방에서 모으리라
    • 고린도전서 15장 51절 보라 내가 너희에게 비밀을 말하노니 우리가 다 잠 잘 것이 아니요 마지막 나팔에 순식간에 홀연히 다 변화되리니
    • 데살로니가전서 4장 16절 주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 소리로 친히 하늘로부터 강림하시리니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고

    불안전한 회개 :
    하나님의 심판과 자비, 그리고 인간의 불순종과 불완전한 회개가 교차하는 신앙의 현실을 보여줍니다.

    12장 줄거리 요약

    르호보암이 왕권을 견고히 한 후, 그와 온 이스라엘은 여호와의 율법을 버리고 타락하기 시작했습니다.
    그 결과, 하나님은 애굽 왕 시삭을 도구로 사용해 이스라엘을 치셨습니다.
    시삭은 1,200대의 병거와 60,000명의 기병, 그리고 리비아, 숙, 구스 사람들과 함께 예루살렘을 향해 진격했습니다.
    그는 유다의 모든 견고한 성읍을 점령하고 예루살렘까지 이르렀습니다.

    이때 선지자 스마야가 르호보암과 유다 방백들에게 와서, 그들의 배교가 이 재앙의 원인임을 전했습니다.
    르호보암과 방백들은 이 말씀 앞에 겸손히 자신들의 죄를 고백하며 하나님께 순복했습니다.
    이에 하나님은 예루살렘을 완전히 멸하지 않기로 하시고, 시삭이 성전과 왕궁의 보물을 빼앗되, 도시는 보존하셨습니다.
    특히 솔로몬이 만든 금방패들도 빼앗겨 르호보암은 이를 대신해 놋방패를 만들었습니다.

    이 사건 이후 르호보암은 부분적으로 회개했지만, 그의 통치는 여전히 온전치 못했습니다.
    그는 예루살렘에 거하며 다스렸고 41세에 왕이 되어 17년 동안 통치했습니다.
    그는 마음을 다해 하나님을 찾지 않았기에 평생 분열의 시대를 살았습니다.
    르호보암이 죽은 후 그의 아들 아비야가 왕위를 계승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그분의 법을 버릴 때 침묵하지 않으십니다.
    르호보암의 경우처럼, 하나님은 때로 우리를 징계하심으로써 길을 돌이키게 하십니다.
    중요한 것은 그 징계 속에서도 우리가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르호보암과 방백들이 겸손해졌을 때, 하나님은 완전한 멸망이 아닌 자비를 선택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심판조차도 우리를 돌이켜 살게 하려는 하나님의 사랑의 표현이라는 것을 다시금 느끼게 됩니다.
    우리 삶에서도 성공이나 안정을 얻은 후 하나님을 잊기 쉬운 때가 있습니다.
    신앙은 위기의 순간뿐 아니라 평안할 때 더욱 의도적으로 유지해야 함을 잊지 말고 하나님 앞에 늘 겸손하게 나아가야겠습니다.

    버리다, 포기하다(Forsake)

    • “he forsook the law of the Lord, and all Israel with him.” (2 Chronicles 12:1, KJV)
      그가 여호와의 율법을 버리니 온 이스라엘도 본받은지라
    • Forsake [ fər|seɪk ]: (의도적으로) 버리다, 포기하다, (사람, 원칙, 신념 등에서) 떠나다 (과거형 forsook)
    • 성경에서 ‘forsook’는 단순한 물리적 이탈 이상의 의미를 가집니다.
      이 단어는 하나님과의 언약을 의도적으로 저버리는 것, 즉 영적 배교(spiritual apostasy)를 나타냅니다.
      역대하 12:1에서 르호보암이 하나님의 율법을 ‘forsook’ 했다는 것은 의도적으로 하나님의 명령을 무시하고, 자신의 통치력을 신뢰하며 자기 길을 선택했다는 의미입니다.
      이는 단순한 실수나 약함이 아니라 의지적이고 지속적인 불순종이라는 점에서 심각한 죄로 간주됩니다.




    경고의 나팔들(요한계시록 8: 6-13)

    6 일곱 나팔을 가진 일곱 천사가 나팔 불기를 준비하더라

    7 첫째 천사가 나팔을 부니 피 섞인 우박과 불이 나와서 땅에 쏟아지매 땅의 삼분의 일이 타 버리고 수목의 삼분의 일도 타 버리고 각종 푸른 풀도 타 버렸더라

    8 둘째 천사가 나팔을 부니 불 붙는 큰 산과 같은 것이 바다에 던져지매 바다의 삼분의 일이 피가 되고

    9 바다 가운데 생명 가진 피조물들의 삼분의 일이 죽고 배들의 삼분의 일이 깨지더라

    10 셋째 천사가 나팔을 부니 횃불 같이 타는 큰 별이 하늘에서 떨어져 강들의 삼분의 일과 여러 물샘에 떨어지니

    11 이 별 이름은 쓴 쑥이라 물의 삼분의 일이 쓴 쑥이 되매 그 물이 쓴 물이 되므로 많은 사람이 죽더라

    12 넷째 천사가 나팔을 부니 해 삼분의 일과 달 삼분의 일과 별들의 삼분의 일이 타격을 받아 그 삼분의 일이 어두워지니 낮 삼분의 일은 비추임이 없고 밤도 그러하더라

    13 내가 또 보고 들으니 공중에 날아가는 독수리가 큰 소리로 이르되 땅에 사는 자들에게 화, 화, 화가 있으리니 이는 세 천사들이 불어야 할 나팔 소리가 남아 있음이로다 하더라.

    그리스도 안에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첫 인상이 까다로워 보이는 사람 중에 사귀어 보면 의외로 수월한 사람이 있습니다.
    만날수록 평안하고 다정한 사람의 모습이 드러나듯이 첫눈에 보면 계시록은 어려운 책입니다만 계속 살펴보면 의외로 단순한 메시지를 전하고 있습니다.
    상징과 환상으로 복잡한 책이라기보다는 의외로 분명한 메시지로 다가오는 책입니다.
    어떤 때는 미래에 대하여 수수께끼 같기도 하나 말세를 사는 성도들에게 분명한 소망과 위로를 주는 책이 요한계시록입니다.

    6장과 8장 초두에는 이 보좌에 앉으신 어린 양이 일곱 인을 떼시는 장면입니다.
    7장은 여섯째 인과 일곱째 인이 떼어지는 막간의 장면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8장 6절부터는 일곱째 인을 떼는 장면에 이어서 일곱 천사가 일곱 나팔을 부는 환상으로 연결됩니다.

    일곱 인을 떼는 사건, 일곱 나팔을 부는 사건, 그리고 일곱 대접을 쏟아 붓는 사건이 계시록의 큰 줄거리를 이루고 있습니다.
    그러면 전체의 문맥 속에서 일곱 경고의 나팔이 차지하는 위치를 먼저 확인하고 난 후, 일곱 경고의 나팔이 주는 메시지를 살펴봅시다.
    본문의 세세한 묘사보다는 전체적인 메시지 위주로 살펴보고자 합니다.

    우선 본문에는 일곱 경고의 나팔 가운데 처음 네 천사의 나팔 소리를 들을 수 있습니다.

    일곱 나팔의 심판 경고는 일곱째 인봉을 떼는 환상에 이어 등장합니다.

    그래서 시간적으로 마치 일곱 인이 다 떼어지고 난후, 일곱 나팔이 울리는 것처럼 보이지만 일곱 인을 떼는 사건, 일곱 나팔이 부는 사건, 그리고 뒤에 살펴 볼 일곱 대접을 쏟아 붓는 사건은 어떤 면에서는 연속적인 사건이라기보다는 동시적인 사건들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나라가 이 땅에 임하기 전에 반드시 일어날 종말의 상황을 삼중으로 기술한 것입니다.

    일곱 인을 떼심으로, 일곱 나팔을 부심으로. 그리고 일곱 대접을 쏟아 부음으로 경고의 말씀을 반복해서 강조하고 있습니다.

    반드시 역사 속에 속히 일어날 종말의 상황을 상징을 달리해서 강조합니다.

     

    그리스도의 나라가 도래하기 직전에 반드시 일어날 사건들을 다른 상징들을 사용해서 묘사합니다.

    세 가지 일련의 심판행위의 묘사를 통해서 요한은 예수 그리스도의 강림을 숨 막히는 절정으로 이끌어 갑니다.

    다시 말하면, 일곱 인봉을 다 뗀 후에 일곱 나팔 소리가 들린다고 해서 일곱 인봉의 경고가 먼저 있고 후에 일곱 나팔의 심판 경고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동일한 사건을 다른 각도에서 묘사한 것이기 때문에 어느 정도 동시적인 사건으로 보아야 합니다.

    같은 재난과 경고를 다른 상징을 사용해서 거듭 강조할 뿐입니다.

    일곱 인봉을 떼는 사건과 일곱 나팔을 부는 사건을 좀 더 대비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인봉과 나팔

    일곱 인봉을 떼는 사건은 어떤 면에서 상당히 요한 고유의 개념입니다.

    유다 지파의 사자 다윗의 뿌리이신 어린 양 예수께서 일곱 인을 떼시는 분으로 등장합니다.

    비록 두 번째 인을 떼실 때부터 어린 양의 이름이 생략되어 있지만 모든 인봉을 떼시는 분은 어린 양 예수임이 분명합니다.

     

    우리가 조간신문이나 저녁뉴스를 통해서 세상에 엄청난 일들이 일어남을 보고 있지만 그 모든 일의 배후에서 역사의 인을 떼시는 분은 어린 양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모든 역사의 배후에는 그 분의 주도적인 역할이 있습니다.

     

    요한은 어린양 예수 그리스도께서 구속의 중보자이심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 분만이 하나님의 나라를 궁극적으로 사람들에게 가져다주실 분임을 인식하고 있었습니다.

    인을 떼시는 일에 비해 시대의 종말을 알리는 나팔의 상징은 이스라엘 역사 깊숙이 뿌리박고 있는 전통적인 개념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나팔소리에 익숙한 민족이었습니다.

    특히 전쟁 시에 그들은 나팔을 불었습니다. 위기를 선포하고 사람들을 소집하기 위해 불었습니다.

     

    나팔의 기능

    이런 역사적 배경을 가진 이스라엘이기에 하나님의 심판이 임박할 때에 경고의 나팔을 부는 것을 당연하게 받아들였습니다.

    파수꾼이 접근하는 적을 발견하고 나팔을 불듯이, 에스겔은 자신을 그 백성에게 경고하는 자로 선택되었음을 알았습니다.

    하나님의 진노의 심판을 알려주는 일을 그의 사명으로 인식했습니다.

    그의 경고를 무시하고 멸망에 이르면 그 책임은 백성 스스로 져야 합니다.

    그러나 파수꾼으로서 선지자가 경고의 나팔을 불지 아니했다면 선지자는 그 백성의 파멸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합니다.

    위기와 전쟁을 알리는 일에만 나팔을 분 것은 아니었습니다.

     

    반대로 해방과 기쁨의 날을 알리는 일에도 사용하였습니다.

    나팔을 불어 알리는 여호와의 날의 도래는 악인에게는 심판의 날이지만 의인에게는 구원의 날입니다.

     

    동일한 여호와의 큰 날이 악인에게는 두려운 날이지만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던 자들에게는 여호와의 큰 날은 해방의 날입니다.

    나팔 소리가 어떤 이들에게는 두려움을 안겨 주지만 다른 이들에게는 기쁨을 가져다줍니다.

     

    많은 이스라엘 인들은 나팔 소리를 들을 때 공포 대신 기쁨을 연상했습니다.

    축제의 날에, 대 속죄일에 그들은 나팔을 불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대 속죄일로 그 절정을 이루는 칠월 첫 날에 이스라엘은 나팔을 불어 회개의 기회가 시작됨과 새해가 시작됨을 선포했습니다.

     

    여호와의 날을 알리는 나팔 소리는 하나님께로 돌아오라는 회개의 요청이요 하나님의 심판대신 하나님의 자비로 돌이키려는 하나님의 마지막 호소입니다.

    그리고 마지막 날에 울리는 나팔 소리는 또한 구원의 새 시대를 알리는 역할을 합니다. 포로에서부터 해방되어 고국으로 돌아올 때 나팔을 불어 평안과 위로를 주는 날을 알렸습니다.

     

    다시금 천군 천사가 나팔을 불 때 새로운 날이 시작될 것입니다.

    흩어진 백성을 고통에서 돌이키시며 구원하시는 일을 알리는 나팔 소리는 더 나아가 죽음에서 그 백성을 깨우는 나팔 소리로 이어집니다.

    먼 흑암의 세계에 있는 사람들을 빛의 나라로 부르시는 소리입니다.

     

    울려 퍼지는 나팔 소리는 이와 같이 다양한 의미로 사용되었습니다.

    심판과 회개, 해방과 구원, 새 시대의 도래를 알리는 일에 사용되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새 왕의 등극 시에도 나팔을 불었습니다.

     

    그러므로 마지막 천사장의 나팔도 예수 그리스도께서 가시적인 통치자로 세상에 나타나실 것을 알리는 나팔 소리입니다.

    나팔 소리는 이 모든 풍성한 기억과 상징으로 다가옵니다. 이런 배경을 가지고 여러분은 천사가 나팔을 부는 본문으로 다가서야 합니다.

     

    경고의 나팔
    무엇보다도 본문의 나팔 소리는 심판과 경고의 나팔 소리입니다.
    네 천사의 나팔 소리는 자연계에 엄청난 재해를 가져오고 그 결과로 많은 사람의 죽음이 초래되었습니다.
    땅과 바다, 강과 하늘, 사람이 사는 생존 환경 모두에 엄청난 재해를 불러일으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 나팔 소리를 여러분은 들어보신 적이 있습니까?
    환경오염은 이 시대를 향한 하나님의 경고의 나팔소리입니다.
    생존 환경을 위협하시므로 하나님께서는 인류를 향한 당신의 진노를 표현하십니다.
    오늘의 인간의 삶을 - 그 목표와 양상을 싫어하시는 하나님의 심판의 경고입니다.
    돌이키지 아니하면 완전히 멸망시키리라는 경고가 환경오염을 통해서 나타납니다. 육지와 바다, 강과 하늘, 모든 인간의 생존 환경은 오염되어 가고 있습니다.
    이것은 전대미문의 사건입니다.
    이전에도 자연재해가 있었지만 그것은 어쩌다가 있는 사건이었습니다.
    일정한 시간, 일정한 지역에 한정되었던 사건이었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에게 닥치고 있는 지구온난화 같은 자연적인 재해나 미세먼지와 오존층 파괴 등은 때와 장소의 구별이 없습니다.
    온 세계에 공히 일어나는 현상입니다.
    지금 우주적, 보편적 재난이 시작되고 있습니다.

    옛날에는 가을이 오면 단풍이 들고 낙엽이 되어 떨어졌지만, 오늘날은 산성비로 인하여 7월 장마 비에도 시커먼 잎이 떨어지는 현상은 선진 공업국은 물론이고 미개발 지역에서도 흔히 볼 수 있는 현상입니다.
    지금까지 일어났던 재해와는 다릅니다.
    환경보전 운동이 하나님의 심판을 막을 수 없습니다.
    이 모든 생태학적인 재난은 인간을 돌이키시려는 하나님의 경고입니다.

    “첫째 천사가 나팔을 부니 피 섞인 우박과 불이 나서 땅에 쏟아지매 땅의 삼분의 일이. . . 둘째 천사가 나팔을 부니 불붙는 큰 산과 같은 것이 바다에 던지우매 바다의 삼분의 일이. . . 세 째 천사가 나팔을 부니 횃불같이 타는 큰 별이 하늘에서 떨어져 강들의 삼분의 일과 여러 물샘에 떨어지니. . . 네 째 천사가 나팔을 부니 해 삼분의 일과 달 삼분의 일과 별들의 삼분의 일이 침을 받아. . .”

    하늘로서 쏟아지는 진노입니다.
    하늘에서 쏟아지는 재난을 사람이 막을 수 없습니다.
    때가 되기 전에는 이런 환상은 수수께끼와 같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저나 여러분은 더 이상 이 계시의 말씀을 수수께끼처럼 들을 이유가 없습니다.
    우리는 땅과 하늘, 강과 바다, 인간 생존 환경의 모든 영역이 오염되는 때에 살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진노요 하늘로서 쏟아지는 진노입니다.
    이 네 천사의 나팔 소리로 인한 재난은 출애굽을 연상시키지만 그 보다 훨씬 심한 재앙임을 보여줍니다.
    ‘우박과 불’이 아니라 이제는 ‘피 섞인 우박과 불’입니다.
    재난의 범위 역시 애굽 한 나라가 아니라 우주적인 재난입니다.
    나일 강만이 아니라 모든 강들의 삼분의 일에 임한 재난입니다.
    그 때는 잠깐 어두워졌으나 이제는 해, 달, 별의 삼분의 일이 어두워졌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특히 삼분의 일이 재난에 빠져든다는 것이 시사하는 바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전체적인 심판이 아니라 국부적이라는 것입니다. 최종적인 심판이 아니라 심판의 시작이라는 것입니다.

    마지막 경고 - 환경오염과 생태학적 재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이미 천사들의 나팔 소리가 울려 퍼지고 있는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어떤 시대에서도 자연적 재해는 늘 있었지만 그것의 피해는 시간과 장소가 제한적이었습니다.
    그러나 우리 시대는 총체적 재난 앞에 처해 있습니다. 자연적 재해가 인류 보편적 현상이 된 시대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19세기 말엽 <산업혁명>이 가속화되기 시작할 때 석탄 사용으로 인한 탄산가스의 증가로 공기오염이 심각해 질것이라는 경고를 하였을 때 사람들은 그를 정신 나간 사람 취급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불과 한 세기만에 그의 예언자적 경고는 누구도 무시할 수 없는 엄연한 현실이 되었습니다.
    환경을 보전하기 위해 우리는 노력해야 합니다.
    이것은 21세기를 살아가는 기독교인의 부름입니다.
    하나밖에 없는 우리의 삶의 터전인 지구를 보존하는 일에 마음을 써야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늘로부터 내리는 재난을 모면할 길은 없습니다.
    이것이 우리의 딜레마입니다.
    환경오염, 생태학적 재난은 마지막 시대를 알리는 하나님의 경고입니다.
    인간들이 그 손으로 행한 잘못된 일에서 부터 회개하도록 요청하시는 경고입니다.
    여러 가지 귀신과 우상을 숭배하는 일에서부터 하나님께로 돌아오라는 호소입니다.
    하나님을 찬양해야 하는 입으로 엉뚱한 것을 노래하는 사람들을 향해 하나님이 경고하시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아는 일에 시간을 쓰지 않고 쓸모없는 일로 시간을 낭비하는 자들을 향해 하나님은 경고하십니다.
    살인과 복술과 음행과 도적질에서부터 돌아서라는 마지막 경고가 네 천사의 나팔 소리와 함께 들립니다.
    삶의 환경 전부를 흔들어 놓음으로써 회개치 아니하면 모두 멸망할 것이라는 경고의 나팔을 불고 있습니다.
    어렸을 때 나무위에 있는 새집을 헐기 위해 올라가면 나뭇가지가 흔들리고 따라서 새집도 흔들리는 것을 본 적이 있습니다.
    새들은 자기의 둥지가 흔들릴 때 무언가 위험한 사태가 곧 일어날 것이라는 것을 알아챘습니다.
    그러면 날카롭게 울어대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인간이 자기가 살고 있는 생태계가 파괴되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위협을 느끼지 못한다면 어리석기 그지없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자연재해를 통해서 우리들의 마지막이 다 되었음을 경고하는 것입니다.
    하늘과 땅, 바다와 강, 모든 샘물의 근원에 까지 나팔 소리의 진동이 느껴집니다.
    생존 환경, 그 모든 영역에 남김없이 나팔 소리의 영향이 미치고 있습니다.
    육지와 바다, 강과 하늘 그 어디에도 죽음의 그늘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하늘의 생명의 빛이 어두워지고 땅에 죽음의 그늘이 길게 드리우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사는 시대는 인류의 마지막 시대입니다.
    시대마다 종말을 알리는, 회개를 촉구하는 자연계의 재난이 있었습니다.
    자연계의 재난들이 시대마다 인생들로 하여금 하나님 앞으로 돌아서라는 경고였습니다.
    그러나 우리 시대의 나팔 소리는 이전의 나팔 소리와는 다릅니다.
    또 한 번의 경고가 아니라 이것은 마지막 경고의 소리입니다.
    보편적이고 총체적인 그리고 우주적인 재난을 맞이하고 있습니다.

    이 시대를 사는 우리의 사명이 무엇입니까?
    환경보전 운동뿐만 아니라 회개 촉구 운동에 그리스도인이 참여해야 합니다.
    네 천사의 나팔 소리로 인해 재난은 이미 우리 생존 환경을 위협하고 있습니다.
    계속되는 천사들의 나팔 소리로 자연계 뿐 마니라 인류 자신에게 직접 재앙이 닥칠 것입니다.
    육체적 고통 뿐 아니라 영적 고통으로 치닫게 될 것입니다.
    ‘말세에 고통 하는 때’가 이미 도래했습니다.
    네 천사의 나팔 소리가 여러분의 생존기반을 흔들 때 여러분은 무엇을 해야 합니까? 두려워 떨고만 있으렵니까?
    이 나팔 소리와 함께 들려올 또 하나의 나팔 소리를 대망하십시오.
    성도들에게 있어서는 두려움의 나팔 소리로 끝날 수는 없습니다.

    경고의 나팔 소리는 마지막 일곱째 나팔 소리를 사모케 하는 계기가 되어야 합니다.
    마지막 나팔이 울려 퍼지면 이 땅에 새 시대가 도래 할 것입니다.
    새 하늘과 새 땅이 올 것입니다. 의가 거하는 바 새 질서의 세상이 될 것입니다.
    그 소망을 가지고 네 천사의 나팔 소리를 들어 봅시다.
    무서움만이 아니라 기쁨과 기대를 가지고 다가올 새 날을 사모케 하는 촉진제가 될 것입니다.
    환경이 오염됨으로써 우리는 이 오염된 환경보다도 좋은 새 하늘과 새 땅을 사모해야 합니다.
    마지막 기회가 사라지기 전에, 이 더러운 하늘과 땅이 불 태워지기 전에 그들로 하여금 돌아서도록 회개를 촉구해야 합니다.
    인생을 돌이키는 일에 쓰임 받도록 최선을 다하십시오.
    새 하늘과 새 땅이 도래하는 그 순간을 간절히 바라보면서 경건한 삶을 사는 성도, 그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더욱 기도하는 성도가 되길 바랍니다. 아멘





    역대하 10장 요약

    애굽의 시삭왕이 예루살렘을 공격하였으며 르호보암이 죽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역대하 11장 요약

    하나님께서 르호보암과 여로보암의 싸움을 말리셨으며, 르호보암은 요새를 쌓게되고 유다를 강력한 왕국으로 만들어갔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역대하 12장 요약

    애굽의 시삭왕이 예루살렘을 공격하였고 르호보암이 죽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고려장(高麗葬)의 오해와 진실

    1. 개요

    1.1. 고려시대에 나이 든 부모를 다른 곳에 버려 두고 오던 풍습이 있었다는 설화.

    1.2. 해당 설화는 수백 년 전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나, 고려장이라는 용어가 해당 설화와 결합한 것은 19세기 말~일제강점기에 이르는 시기이며, 이에 따라 일본제국의 역사 왜곡설이나 단순한 루머가 확산된 것이라는 등 다양한 설이 돌고 있다.

    1.3. 학계에서 주류로 여겨지는 문헌학적 접근에 따른 설은 대체로 불경에 나오는 일화와 중국의 효자전에 나오는 일화가 조선에 들어와 고려시대를 배경으로 현지화 되어 전국에 퍼졌다는 것이다.

    1.4. 고려장과 비슷하다고 알려진 설화로는 일본 에도시대에 퍼진 '우바스테야마(姥捨山)'가 있으며 이러한 설화를 바탕으로 만들어진 영화가 바로 황금종려상수상작으로도 유명한 “나라야마 부시코”이다. 이외에 다른 아프로, 유라시아에 걸친 여러 나라들에도 이런 비슷한 내용의 설화들이 떠돌아다니기 때문에 이런 노인 유기 설화는 아프로, 유라시아전역에 퍼진 공통 설화로 볼 수 있다.

    1.5. 현재에는 여러 조사들을 통해 해당 이야기들을 대부분의 경우 실존하지 않은 풍습을 다룬 아동 교육등을 목적으로 만들어진 민중 설화라고 보고 있다.

    1.6. 특히 한국의 경우 이러한 행위를 풍습처럼 일삼았다는 기록은 전혀 없기 때문에,고려장은 실존하지 않는 풍습을 다룬 설화에 불과하다는 게 현대 한국 사학계의 정설이다.

    때문에 설화로 존재하던 이야기들이 일제강점기 시절 일제의 의해 조선 내 학생들을 가르치기 위해 제작한 조선의 동화를 다룬 동화집에도 실렸고, 이렇게 설화로 여겨지던 이야기가 어느 순간 민중들에게 역사적 사실로 받아들여진 것으로 보고 있다. 즉, 설화이자 동화가 어느 순간 역사적 사실로 둔갑해 민중의 인식 속에 자리를 잡아버린 경우이다.

    1.7. 다만 조선시대 ‘경신대기근’ 시기에 노모를 버리고 달아난 남성에 대한 기록이 있는데, 이는 단발적 사건일 뿐이다. 조선은 웃어른을 버리거나 학대한 자에 대해 강상죄(강상:삼강과 오상 즉 인간이 지켜할 도리)를 물어 처벌하고, 이런 사건이 발생한 지역의 수령을 비롯한 해당 지역을 관할하고 있는 지방관들을 엄히 징계하고 지역의 행정 등급을 강등시키는 등의 강력한 조치를 취하였다.

    2. 설명

    2.1. 중국 <효자전(孝子傳)>의 원곡(原穀) 이야기가 고려장 설화의 원형으로 보이며 불경 <잡보장경(雜寶藏經)>의 '기로국연(棄老國緣)조의 설화'에서 기로국이 고려로 와전된 이야기가 고려장 설화의 원형으로 추정되고 있다.

    2.2. 고려장이라는 단어 자체는 고려의 무덤 등의 뜻으로 쓰인 적이 있으며, 현대 한국인들의 인식과 달리 일본에 의해 창작되고 명명된 것이 아니다. 처음으로 고려장이라는 용어가 '늙은이를 버리는 풍속'을 뜻하는 낱말로 사용되었던 기록은 1882년도에 발간된 그리피스(William Elliot Griffis)의 책, <은자의 나라 한국(Corea : The Hermit Nation)>이다.

    “조선 왕조 이전까지는 일본에서도 오래전부터 유행하여 17세기에 이르기까지 그 흔적을 찾아볼 수 있는 것과 같은 풍속이 한국에 성행하고 있었다. 고려장은 그 자세한 내용은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노인을 산 채로 묻어버리는 풍속이었다.(Heretofore the same rites which were so long in vogue in Japan, traces of which were noticed even down to the seventeenth century, held unchallenged sway in Corea. Ko-rai-chang, though not fully known in its details, was the habit of burying old men alive.)”

    2.3. 이와 유사한 이야기가 한국을 실제로 여행했던 영국의 여류학자 이사벨라 버드 비숍이 쓰고 1897년 출간 된 그녀의 책 <조선과 그 이웃나라들>이 있다. 이사벨라가 원산에서 60리 정도 떨어진 곳에 위치한 고대 무덤들을 방문했을 때 고려장을 연상케 하는 전설을 들은 내용이 실려 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이전 왕조, 즉 5백년 이상 거슬러 올라가면 늙은이나 병자가 가족들에게 짐이 될 경우 이 고분들에 딸린 돌방에 약간의 음식과 물을 남겨둔 채로 유폐시키고는 거기에서 죽게 내버려 두는 일이 관습적으로 행해졌다고 한다.(During the last dynasty, and more than five centuries ago, it was customary, when people from age and infirmity became burdensome to their relations, to incarcerate them in the stone cells which these mounds contain, with a little food and water, and leave them there to die.)”

    2.4. 일제강점기 일본제국 측에서 펴낸 자료를 통해 확인해 보면 고려장 설화와 관련된 것으로 1919년에 발행된 <전설의 조선>이라는 책이 가장 먼저 나온다. 다만 이것이 고려장 설화의 흔적을 확인할 수 있는 최초의 것이라고 단정하기는 어렵다.

    2.5. 하지만 일단 현재까지 드러난 것으로는 그 시기가 제일 빠르다. 이 책의 지은이는 평양고등보통학교 교유인 미와 타마키(三輪環)로 표시되어 있는데 여기에는 그가 조선에서 채집한 설화들을 엮은 조선의 구비전설(口碑傳說) 단원 말미에 동화 파트가 들어 있고, 해당 동화들 가운데 '불효식자(不孝息子)'라는 대목이 보인다. 그 내용은 "늙은 제 아비를 지게에다 지고 산 속에 버리려는 어떤 사내가 산에서 내려오던 길에 아들보고 그 지게가 필요 없으니 버리라고 하자, 그 아들이 하는 말이 나중에 아버지도 늙으면 필요할 텐데 또 써야 하니까 버리지 못한다고 하매 곧 크게 뉘우치고 버린 제 아비를 다시 모셔왔다"는 바로 그 얘기이다. 다만 설화의 내용은 고려장 설화와 동일하나 고려장이라는 단어가 등장하지는 않는다.

    2.6. 같은 내용의 이야기는 1924년에 조선총독부가 발행한 <조선동화집>에도 '부모를 버린 사내'라는 제목으로 등장하며, 곧이어 1926년에는 나카무라 료헤이(中村亮平)가 정리한 <조선동화집>에도 약간 내용을 달리하여 '부모를 버린 사내'라는 제목으로 거듭 수록되어 있다. 즉, 식민통치자들이 고려장 설화를 날조하여 널리 퍼트렸다는 인식과 달리 노인들의 증언이나 서양인 여행자/선교사들의 기록을 본다면 결국 조선 땅에서 실제로 존재하던 설화와 전설을 채집하여 수록한 것이다.

    2.7. 이와 관련해 일제강점기의 자료를 더 보자면 조선총독부에서 <조선동화집>을 출간하여 처음으로 고려장 설화를 다룬 해인 1924년에 고려장에 대한 언급이 나온다. 생계로 인해 부친을 생매장한 사건을 다룬 1924년 9월 13일자 동아일보에서 고려장이라는 용어를 사용하였다. 그리고 그로부터 10년 후, 사위가 장인을 생매장한 사건을 다룬 1934년 6월 9일자 조선중앙일보에서도 고려장을 특정 풍속을 뜻하는 용어로 사용했다. 즉, 조선총독부에서 동화책을 펴냈던 일제강점기 무렵 당시 조선 언론인들 사이에서 고려장이 지금과 같은 의미로 쓰였다.

    2.8. 종합하면 고려장 설화는 이미 일제강점기 이전부터 구전 설화로서 존재했을 것으로 추정되며, 조선총독부에서 처음으로 고려장 설화의 내용이 담긴 동화책을 펴낼 무렵인 1920년대의 조선의 언론인들은 고려장이라는 용어를 지금과 같은 의미로 사용했던 것으로 보인다. 때문에 이를 고려 시대 때 실제 있었던 장례 풍습이라고 일반인들이 두루 믿고 오해하게 된 것은 대략 19세기 말~20세기 초 무렵으로 추정된다.

    2.9. 고려장 설화는 19세기 세도정치 시기의 배경과 연관이 있다고 볼 수 있다. 세도정치 시기 민에 대한 관의 가혹한 수탈이 이뤄지고 여러 재해와 환란이 발생하여 곤궁함과 고통을 이기지 못하여 고향과 가족을 버리고 떠난 이들이 큰 문제가 되었다. 동시에 서당 교육이 좀 더 널리 이뤄지고 여러 공연과 이야기들이 전국적으로 유행하며 민의 문화적 수준이 높아졌고, 서학과 동학을 접하며 민의 자기 정체성 자각이 이뤄짐에 따라 19세기 세도정치 시기에 여러 종류의 창작 설화들이 등장하였다. 따라서 이런 시대적 배경 위에서 불경과 효자전에 나온 이야기를 바탕으로 만들어진 민중 설화로 추정하는 게 가장 합리적인 설명일 것으로 보인다.

    2.10.한국 역사서에서 고려장의 사용례

    2.10.1. 조선시대 후기 기록 중 고려장이라는 표현이 나오는 경우는 대충 아래와 같다. 해석을 보다시피, 고려가, 혹은 고려때에 묻거나 장례를 지냈다는 뜻일 뿐, 늙은 사람을 갖다버리는 악습을 뜻하는 것이 아니다.

    2.10.2. 고려의 무덤이라는 뜻으로 쓰이기도 했으며 그럴 경우 고려총(高麗塚), 고려산(高麗山), 고려곡(高麗谷), 고려분(高麗墳)이라고도 했다. 일제강점기 이후 한국 내에서 쓰이게 된 '늙고 병든 사람을 지게에 지고 산에 가서 버렸다는 고려시대의 풍습'을 뜻하는 고려장과 다른 말이다. 마찬가지로 후술 되는 고려장과 구별해야 한다.

    2.10.3. 1908년 11월 11일 <대한매일신보>의 고려장 굴총이라는 기사에도 용례가 있는데 다음과 같다. '서도에서 온 사람의 말을 들은즉 근일에 일인들이 고려장을 파고 사기를 내어가는 고로 온전한 고총이 없다더라.' 무덤을 칭하는 말로 고려장이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으며 실제로 이때부터 개성 주변의 고려 고분들이 보물 사냥에 혈안이 된 도굴꾼들에 의해 대거 도굴당했다.

    2.10.4. 이런 뜻으로 널리 통용되고 있었다는 사실을 입증할 수 있는 또다른 자료로 조선총독부가 정리한 <조선보물고적 조사자료>가 있다. 발행 연도가 1942년이지만, 그 내용은 1916~17년께 조사한 고적 대장의 자료를 그대로 옮겨놓은 것으로 채워져 있다. 그런데 여기에는 '고려장'을 비롯하여 '고려총', '고려분', '고려산', '고려곡' 등으로 표기된 고분들이 두루 기록되어 있으며 그 수가 전국에 걸쳐 90여곳이나 된다. 그 시절에도 흔히 이름 모를 무덤들을 일컬어 ‘고려장’이라고 불렀던 사실만큼은 분명히 엿볼 수 있다.

    즉, '고려장'이라는 명칭은 그것의 실체가 무엇이었던지 간에 전국 곳곳에 흩어진 '이름 모를' 고분들을 대체하는 이름으로 널리 사용되고 있었던 것이라 짐작할 수 있겠다.

    2.11.잘못 알려진 사실

    조선왕조실록에도 고려장으로 추정할 만한 풍습에 관련된 내용이 수록되어 있다는 내용이 웹상에 퍼져 있는데 이는 '외사(外舍)로 내어 두게 되니'라는 구절을 '밖에 내다버리니'라고 오독한 것을 확대해석한 것으로 외사(外舍)는 '안채'인 내사(內舍)와 대비되어 '바깥 행랑채'를 일컫는 말이다.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의 기록을 참고하면 이해하기 쉽다.

    3.논란

    3.1.그리피스의 방한 여부

    그리피스는 두 차례 방한을 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지만 1차 방문시기는 밝혀지지 않았고 2차 방문 시기는 1926-27년 사이이다. 한때 학계는 그리피스의 1차 방문을 사실로 여겼다. 그러나 그 이후, 그리피스가 1871년에 신미양요가 있을 당시 조선에 방문하였다고 주장했던 정수일교수를 포함한 학계는 최근 여러 가지 연구를 하고 내용을 검토한 결과 그렇지 않다는 쪽에 무게를 싣고 있다.

    이전에도 문일평이 <은자의 나라>에 실린 식탁이나 두발 모습 같은 그림들이 한국적인 것이 아니란 점을 증거로 그가 한국에 오지 않고 일본에 앉아서 쓴 것이라고 지적한 바가 있었다. 특히 <은자의 나라>에는 일본의 주장을 그대로 수용한 경우가 많다는 것도 그 신뢰성을 의심하게 되는 주요 근거다. 대표적인 사례로 그리피스가 고대부터 1868년까지 부산이 대마도주의 영지였다는 잘못된 정보를 기록하기도 했다. 또한 미카도의 제국 같은 저서에서는 칭기즈칸이 일본인이라는 의견을 수용하기도 하는 등, 일본의 주장에 치우친 듯한, 신뢰성에 의문을 가게 만드는 저작들도 존재한다.

    그는조선을 한 번도 방문하지 않은 상태에서 일본의 자료들에만 의존해 한국의 역사와 풍습에 대해 서술했는데, 한국에 대한 편견에 기초하여 일부 설화의 내용을 마치 역사적 사실인 양 왜곡하여 서술했다는 점에서 그의 자료는 방한 여부의 논란과 상관없이 비판적인 검증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볼 수 있다.

    3.2. 일본 제국의 역사왜곡설

    먼저 고려장은 어디까지나 설화의 내용일 뿐이며, 실존하지 않은 풍습임을 확실히 알아야 한다. 그리피스의 책에서도 관련 내용은 겨우 '그런게 있다 카더라'는 짧은 언급 딱 하나뿐이다.

    강인욱 교수(사학과 교수)는 "한국에 부모를 버리는 풍습이 있었다는 내용은 문헌 근거가 희박하다"며 "현재 학계 다수설은 고려장은 실재하지 않았던 풍습이라는 것"'이라고 밝혔다. 부모를 버리는 풍습이 한반도에 있었다는 게 지역 설화와 민담의 형태 외에 명시적인 기록으로 나온 건 19세기 말 이후에 외국인이 쓴 글에서만 집중적으로 나타나고 있으며, 실존하는 현상이라는 대한 문헌학적, 고고학적 증거는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다.

    일제강점기이전까지는 고려장이라는 용어가 노인을 버리는 풍습을 지칭하는 용어로 쓰이지 않았으나, 일제시대에 조선 내 학교에서 교육하기 위한 교재에 등장하면서 해당 용도로 활용되기 시작했다는 주장도 있고, 이런 주장에 근거해 일본 제국이 악의적으로 한국사를 왜곡했다는 인식이 현대 한국에 널리 퍼져있다.

    하지만|고려장이라는 용어 자체가 일본 제국에서 만들어낸 용어가 아니다. 이미 조선 말기 정체와 신원을 알 수 없는 이전 시대의 무덤들과 매장된 시체들을 19세기 말~20세기 초의 조선인들은 고려장이라고 이름 붙여 부른 바 있다. 그리고 고려장 설화의 원전은 불경의 기로국전으로 추정되고 있고, 이 "기로"가 "고려" 혹은 "고리"와 음이 비슷하여 당대의 조선의 언중에게 고려로 잘못 인식됐던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그리고 이것이 당시 언중에게 사용되던 단어인 "고려장"과 합쳐져 현재의 고려장 설화가 탄생한 것으로 추정된다.

    4.비슷한 설화들

    고려장 설화를 비롯한 동아시아 지역 노인 유기 설화의 기원으로 추정되는 중국<효자전孝子傳>의 원곡 이야기에서는 수레만 지게로 바꾼 이야기가 우리나라에는 할아버지를 버리려고 한 아버지가 아들의 재치로 뉘우친 '할아버지의 지게'라는 이야기로 교과서에 실렸을 정도로 유명하다. 은비 까비의 옛날 옛적에에서도 '귀중한 지게'라는 제목으로 나오며, 할아버지가 할머니로 치환된 것만 빼면 내용은 전부 동일 하다. 거기에서는 임금이 이 광경을 우연히 보고 고려장을 전면 금지 시키게 되는 장면이 나온다.그리고 고려장 자체가 실제로는 잘못 전해진 풍습임을 강조한다. 은비 까비에서는 시베리아나 몽골의 못된 풍습이 전해졌다는 뉘앙스로 전했다.

    “어느 날 할아버지가 칠순이 되자 아버지가 할아버지를 지게로 업고 가서 버렸다. 그 곳에 아들이 따라가서 아버지에게 물었다.

    “아버지 왜 지게를 두고 가세요?”

    “할아버지 고려장 다 지냈다. 지게는 버리고 가야지.”

    “아버지, 제가 지게 가져갈게요.”

    “지게는 가져가 무얼 하려고?”

    “할아버지 져다 버린 지게인데 뒀다가 아버지도 여기에 져다 드려야죠.”

    이 이야기를 듣고 아버지는 크게 깨닫고 반성하며 할아버지를 다시 모셔와 잘 봉양했다.

    불교경전인 잡보장경에 실려 있는 '기로국' 이야기가 있으며 위기에 빠졌던 기로국이 노인의 지혜로 위기에서 벗어났다면서 효도를 강조하는 내용이다.

    줄거리는 한 나라에서 나이가 든 노인들에게 밥벌이가 안 된다고 산속으로 내쫓았는데 근처에 있던 강대국이 이 나라를 침략하기위해 재로 새끼줄을 꼬아오라는 말도 안되는 트집을 잡았다. 그러자,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고심하던 왕은 결국 노인들이 버려진 산속으로 들어가 지혜를 구했으며, 노인들은 새끼줄에 소금물을 적신 후 불로 태우면 된다는 간단한 해결책을 내놓아 나라를 구한 뒤 그 나라는 노인을 공경하면서 살았다는 이야기다.

    이 기로국 이야기를 원형으로 한 한국의 전설이 6차 교육과정 초등학교읽기 교과서에도 실린 적이 있으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교과서에는 가지 하나만 가지고 백 가지 나물 만들기 문제가 두께를 똑같이 깎은 나무의 뿌리와 줄기를 구분하기로 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여러 판본이 존재하는 듯. 여기서의 정답은 물에 담그면 뿌리 부분이 더 잠기니 물에 띄워보는 거다.

    옛날에 효성이 지극한 신하가 살았다. 이 당시에는 고려장이 법으로 제정되어 있었는데 그 신하의 어머니도 60이 거의 다 되어 산 속에 내다버려야 할 처지다. 그래서 어머니는 그냥 자신을 산 속에 버려달라고 했지만 효자 신하는 그럴 수 없다며 차라리 무거운 벌을 받겠다고 했다. 궁리 끝에 효자 신하는 어머니를 뒤채에 숨겨놓고는 일부러 어머니를 고려장 보냈다고 소문을 퍼뜨렸다.

    얼마 뒤,
    중국에서 사신이 찾아와 지혜겨룸을 하잡시고 굉장히 어려운 3가지 문제를 냈다.

    1. 구멍이 구불구불한 구슬에 명주실 꿰기
    2. 똑같이 생긴 어미말과 새끼말을 손 안 대고 구분하기
    3. 가지 하나만 가지고 백 가지 나물 만들기

    대단히 어려운 문제들이었다.
    효자 신하가 뒤채에서 어머니에게 이를 얘기했더니, 뭐라뭐라 해법을 제시했다.

    다음날, 효자 신하가 그 해법대로 중국 사신 앞에서 문제를 풀어 보였다.

    1. 개미 허리에 명주실을 맨다.
    그리고 한쪽 구멍 근처에 꿀을 바르고 반대쪽 구멍에 개미를 넣는다.
    개미가 꿀을 향해 기어가면 반대쪽 구멍으로 빠져나오게 되어 명주실이 구슬에 꿰어진다.

    2. 마른 풀더미를 놓고 두 말에게 동시에 먹으라고 해서, 먼저 먹는 말이 새끼말이고 나중에 먹는 말이 어미말이다.

    3. 그냥 가지를 하얗게 깎은 다음 나물로 무친다.
    백(白)가지 나물 완성.

    그러자 중국 사신이 포기하고 돌아갔다.

    임금이 어떻게 그런 지혜를 발휘할 수 있었느냐고 묻자, 효자 신하는 자초지종을 설명하고 고려장을 보내지 않은 자신을 벌해달라고 했다.
    그러자 임금이 노모의 지혜 덕에 위기를 모면했다면서 오히려 상을 내려야 할 일이라고 말했고 그때부터 고려장을 금지했다고 한다.

    위 이야기 이설로 말의 새끼와 어미를 구분하는 것 대신에 호리병 안쪽에 종이를 바르는 문제가 있으며 닥나무 풀을 개어 호리병 안을 적신 뒤 남은 물을 비우고 말리는 해법이 전한다.

    한편 일본에도 시즈오카 현 후지노미야 시에 있는 밤바 구멍(バンバ穴)의 대한 설화가 있다. 이 구멍은 입구의 크기는 1~2m 정도로 별로 크지 않지만 깊이가 20m에 달해 한 번 빠지면 빠져나오는 것이 불가능하다. 먼 옛날 여러 늙은 부모가 이 구멍에 유기당하였고, 자식에게 버림받아 죽은 노파의 영혼은 밤중에 구슬프게 울거나, 근처를 지나가는 사람을 구멍 안으로 끌고 들어간다고 한다. 밤바 구멍에 대한 소문은 무성하지만 공식적으로 '부모를 버렸다'고 확언된 기록은 없고, 탐사 결과 유해 등 해당 이야기가 실존했음을 뒷받침하는 증거 또한 발견되지 않았기에 일본에서는 한국의 고려장 같은 도시 전설로 여긴다.

    우리나라에서 고려장이라 표현하는 것들을 일본에서는 ‘나라야마 부시코’에 비유하여 표현하기도 한다.

    5.인터넷 용어

    인터넷 용어들이 대체로 그렇듯 안 좋은 의미로 많이 쓰이는데, 비유적으로 쓰는 경우 대체로 스포츠팬들이 왕년에 잘 나갔으나 노쇠화하여 팀에 마이너스 요소가 되는 노장 선수를 쳐냈을 때나, 쳐내야 한다고 주장할 때 많이 쓰인다.

    그리고, 막장 부모를 강하게 비판할 때도 "고려장 마렵다", "고려장으로 지게에 태워서 갖다 버리자" 같은 식으로 복수하자는 패드립으로 비유하는 표현으로도 쓰이는데, "뭐하냐? 빨리 지게 태워버려", "지게 어디 있냐?", "지게! 지게 가져와!"라고 말하는 식이다. 그래서 대놓고 "고려장" 같은 표현보다는 "지게 태워 버린다" 같은 드립을 더 많이 쓴다.

    위와 같은 식으로 본래 없었던 현상이지만 유사한 논리로 고려장이라는 개념 자체는 계속 존재한다.

    6. 기타

    6.1. 폴 펠리오와 아우렐 스타인등의 고고학자가 발견한 돈황문서 중 일부에는 고구려로 보이는 나라 Keu-li에 대해 기술되어 있다. 해당 구절에 따르면 "Shan-ton 지방의 대신 Chan-Chun-Chi 관할구인 Keu-li 경내의 주민은 턱을 숙여 가슴에 붙이며 인육을 먹고 연로한 부모와 노인을 발가벗겨 죽였다"라고 적혀있는데 이는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고려장의 모습과 흡사하다.다만 그 문장에 있는 '산동대신의 관할구역'이라는 표현과, 바로 아래 문장인그 아래 주민들은 물 속에서 고기처럼 살고 있다라는 표현 등을 감안하면 신빙성이 높다고 보기는 힘들다.

    6.2. 쓸모 없어지면 제거한다는 점에서 토사구팽과 비슷한 용어이나 토사구팽이 '필요해서 데려왔다가 쓸모 없어져서 내쳤다'는 뉘앙스인 반면 고려장은 '원래 있던 존재였는데 쓸모 없어져서 내쳤다'는 뜻으로 좀 다르다. 그런데 폴아웃 세계관에서의 시저의 군단의 경우 늙고 약해지면 고려장과 동시에 토사구팽을 행한다고 한다.

    6.3. 한국의 좀 오래된 여관에는 이름이 ○○장 식으로 된 여관이 많은데, 그 중에는 충공깽스럽게도 고려장여관도 있다. 물론 이쪽은 高麗莊으로 한자가 다르다. 다음 지도 확인 결과 김해, 양구, 목포에 있으며 로드뷰 확인 결과 김해에 있는 것은 한울 모텔로 개명, 양구는 아직 남아 있으며 목포는 확인 불가.

    6.4. 성리학 중심의 사회라서 효도에 엄격한 것은 물론, 호환이 국가적 문제라서 입산 자체가 쉽지 않던 시대에 어떻게 고려장이 가능했겠냐는 이야기가 나오기도 한다.

    따뜻한 봄날

    어머니, 꽃구경 가요

    제 등에 업히어 꽃구경 가요

    세상이 온통 꽃 핀 봄날 어머니 좋아라고

    아들 등에 업혔네

    마을을 지나고

    들을 지나고

    산자락에 휘감겨

    숲길이 짙어지자

    아이구머니나

    어머니는 그만 말을 잃었네

    봄구경 꽃구경 눈감아 버리더니

    한 움큼 한 움큼 솔잎을 따서

    가는 길바닥에 뿌리며 가네

    어머니 지금 뭐 하시나요

    꽃구경은 안 하시고 뭐 하시나요

    솔잎을 뿌려서 뭐 하시나요

    아들아, 아들아, 내 아들아

    너 혼자 돌아갈 길 걱정이구나

    산 길 잃고 헤맬까 걱정이구나

    - 김형영 -



    고려시대때 고려장이라는 게 있었습니다. 
    김형령씨의 <따뜻한 봄날>이라는 시가 있습니다. 

    그 시에 보면 아들이 어머니에게 봄꽃놀이 가자고 꼬십니다. 
    그리고 어머니를 등에 업고 산속으로 들어갑니다.

    어머니 꽃구경가요. 제 등에 업혀서 꽃구경가요. 
    세상이 온통 꽃핀 봄날 어머니는 좋아라 아들등에 엎혔네. 
    마을을 지나고 들을 지나고 산자락에 휘감겨 숲길이 멀어지자 
    아이구머니나 어머니는 그만 말을 잃었네. 

    봄구경, 꽃구경, 눈감아버리더니 
    한웅큼 한웅큼 솔잎을 따서 가는 길바닥에 부리며 가네. 

    어머니 지금 뭐하시나요. 
    꽃구경은 안하시고 뭐하시나요 
    솔잎은 뿌려서 뭐하시게요. 
    아들아, 아들아, 내 아들아, 
    너혼자 돌아갈 길이 걱정이구나 산길잃고 헤멜까 걱정이구나. 

    그러면서 어머니는 아들 돌아가는 걱정 때문에 솔잎을 길가에 뿌리고 있더라




    5월 15일(목) 역대하 10-12장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노인의 교도(10:13)

    왕이 포학한 말로 대답할쌔 노인의 교도를 버리고.
    The king answered them harshly. Rejecting the advice of the elders.

    노인의 교도(the advice of the elders)란 나이가 지긋한 어르신들의 삶의 경험에서 가르치는 지혜를 말합니다.
    교도(敎導)란 한자는 "가르칠 교"자와 "인도할 도"자가 합성된 단어로 그 뜻은 "가르쳐서 이끄는 것"을 말합니다.
    KJV과 NASB 영어성경에서는 "노인의 교도"를 " the counsel of the old men", "the counsel of the elders"라고 번역합니다.
    삶에 어떤 어려움이 있을 때 그 어려움을 해결하기 위하여 인생의 선배가 되는 노인 또는 장로를 찾아가서 상담하는 것과 같다고 합니다.

    지혜로운 왕 솔로몬이 죽은 후에 솔로몬의 아들 르호보암이 아버지의 대를 이어 왕이 됩니다.
    솔로몬왕이 성전과 궁궐을 짓기 위하여 20년 동안 백성들에게 많은 부담을 주었기 때문에 사람들은 대를 이어 왕이 된 르호보암에게 앞으로 이 백성들을 어떻게 다스릴 것인가? 하고 질문합니다.

    이때 르호보암은 첫번째는 노인들에게 백성들의 질문에 대한 답을 듣습니다.
    이어서 르호보암은 젊은층의 답을 듣습니다.

    노인들은 아버지대에 너무 백성들을 가혹하게 다스렸기 때문에 이번에는 자유롭고 편하게 살아가도록 하는 것이 좋을 듯하다고 깨우쳤습니다.
    젊은층들은 나는 아벚지보다 더 가혹하게 다스릴 것이라고 더 강하게 하는 것이 좋을 듯하다고 제안합니다.

    르호보암은 노인들의 충고보다는 젊은층의 생각에 동의하여 솔로몬 때보다 더 강하게 더 큰 부담으로 다스릴 것이라고 하므로 여로보암을 비롯한 열 지파가 르호보암을 떠나 북으로 올라가서 이스라엘을 세웠습니다.

    자유대한민국에 21대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더불어 민주당의 후보(이재명)의 주장과 자유한국당(김문수)의 주장을 비교할 때 과연 어떤 사람이 지도자의 자격을 갖추었는가를 가늠할 수 있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대책 없는 퍼주기식의 복지국가를 주장하는 후보자의 소리에 상당수의 사람들이 동조한다고 합니다(대략 46%).
    반면에 자유민주주의 정치 제도와 복지국가의 기강을 바르게 세워야 한다는 주장에 동의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과연 바람직한 지도자는 누구일까?
    김문수 후보의 과거 행적을 살펴봅니다.

    첫째, 2차례 경기도지사를 엮임
    도지사 선거 후 남은 선거비용 10억원을 모두 당에 헌납하였다.

    둘째, 민주화 운동에 참여했던 공로에 의해 10억원의 보상금을 거절한 세 사람 중 한 사람입니다(고 김동길교수, 고 장기표, 김문수).
    보상금을 거부한 이유는 경기도 도지사를 2차례 엮임하였고 국회의원과 고용노동부장관을 지내며 국민들로부터 이미 사랑을 받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셋째, 삶의 방향을 돌이킨 것
    젊은 혈기가 왕성 할 때는 오직 민주화에 몰두하였으나 올바른 민주화는 역사를 바르게 인식해야 한다는 뚜렷한 역사관을 갖고 좌파에서 우파로 돌아설 수 있었던 용기.

    넷째, 가족들의 헌신
    부인(설난영)과 외동딸까지도 공과 사를 명확하게 구분하며 살아왔던 흔적.

    다섯째, 그늘진 이웃들에게 대한 관심과 삶의 질을 향상시키려는 노력
    탈북민과 장애인들과 어려운 이웃에 대한 관심과 약속을 철저하게 지키려는 자세와 실천.

    여섯째, 국제적 감각
    주위 여러 나라들(중국, 일본, 미국)과 협력해야 할 것과 거부해야 할 것을 분명하게 밝히고 방향을 제시하는 것.

    이러한 주장과 자세를 지켜보며 이번 대통령 선거는 단순한 지도자를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국가 체제를 결정하는 중요한 기회라고 하는 것을 명심하고 노인들의 교도를 버리고 북이스라엘과 남유다로 분명시킨 르호보암을 생각하며 올바른 지도자를 선택할 수 있는 지혜의 주권을 사용해야 하겠습니다.

    노인의 교도하는 것을 버리고(역대하 10:8)

    르호보암이 왕이 된 후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감세 청원을 하였다.
    왕은 이 일을 어떻게 처리할까 하여 신하들에게 물었다.
    그런데 그는 경험이 많은 노인들의 교도하는 것을 버렸다.

    1. 노인들의 교도(敎導)

    노인들이란 보통으로 나이 많은 년노자(年老者), 다시 말하면 늙은 이를 말하는 것이 아니고, 부왕 솔로몬을 모시고 오랫동안 정치 를 한 경험자들이다.

    년륜(年輪)을 쌓을수록 많은 지식과 경험을 얻게 되며 실지로 경험 이란 무시할 수 없는 힘이 있다.
    저들은 부왕 솔로몬을 보필하였으며, 그 진언(眞言)한 것을 보아서 솔로몬 때에도 백성들에게 선정을 베풀 도록, 즉 다시 말하면 국민의 부담을 경감(輕감)토록 권면하던 사람들 인 것 같다.
    이제 왕의 질문에 노인들은 백성들을 후대(厚待)하기 위 하여 감세 청원을 들어 주는 것이 좋겠다고 교도하였다.

    그렇다면 왕이 왜 듣지 않었을까?
    아마도 자신이 젊었으니 노인들 의 경험위주의 안일한 온건책이 마음에 안 들었으며, 그저 인사적인 입장에서 한번 물어보기나 한 것 같다.

    2. 소년들의 교도

    르호보암은 자기 앞에 모셔 있는 자기와 함께 자라난 소년들에게 다 시 물었다.
    백성들의 요구가 부담이 무거우니 멍에를 가볍게 해 달라 는 것이라고 하였다.
    여기에 소년(少年)들이란 나이 어린 사람들이지 만 주로 경험이 없는 사람들을 가리키고 있다.

    소년의 특성이라면 무경험인데다가 쓸데없는 야심이 불타기 쉽고, 모험과 용기는 있으나 이를 잘못 응용할 때에는 큰 실패를 가져오게 된다.

    소년들은 한결같이 가혹한 정치를 함으로 백성들이 꼼짝 못하게 복 종할 것으로 알고 왕의 부친의 정책보다 더 강경책을 써야 할 터인즉 "채찍보다 더 무서운 전갈로 징치하겠다고 선포하소서"라고 교도하였다.

    백성이란 순진하여 선도(善導)하면 순종하여 충성하나 학정(虐政)할 때면 더욱 반발하여 반역하는 데까지 이른다.
    결국 소년들은 왕으로 하여금 자멸지책(自滅之策)을 쓰도록 일러주었다.
    왕이 실정(失政)하 면 신하된 자신들도 실패인 것은 미처 계산에 넣지 못하였다.

    왕 자신이 무자격한 자이다.
    아니 고집스러운 편견주의자 이다.
    바른 판단을 못하는 우맹자인 것이다.
    그는 비운을 자취했다.


    첫째로, 교만과 포학을 버리고 온유와 겸손으로 단장하자.

    르호보암의 죄는 교만과 포학이었다.
    그는 백성의 무거운 짐에 대한 배려가 없었다.
    그 결과, 왕국은 분열되었다.
    잠언 13:10은, “교만에서는 다툼만 일어날 뿐이라”
    잠언 15:1은, “유순한 대답은 분노를 쉬게 하여도 과격한 말은 노를 격동하느니라”|
    교만하면 멸망한다.
    잠언 16:18,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요 거만한 마음은 넘어짐의 앞잡이니라”
    잠언 18:12, “사람의 마음의 교만은 멸망의 선봉이요 겸손은 존귀의 앞잡이니라”
    그러므로 바울은 겸손과 온유로 교회의 일체성을 지키라고 교훈하였고(엡 4:1-3),
    또 서로 인자하게 하며 불쌍히 여기라고 했다(엡 4:32).

    둘째로, 하나님의 은혜를 간구하며 범죄치 말자.

    솔로몬은 말년에 아내된 이방 여인들로 인해 우상숭배를 허용함으로써 하나님의 진노를 샀다.
    이스라엘 왕국의 분열은 부친 솔로몬의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징벌이었다.
    부모의 죄는, 확실히, 자녀들에게 불행으로 임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십계명에서 분명히 선언하셨었다.
    출애굽기 20:4-5, “너를 위하여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고 . . . 그것들에게 절하지 말며 그것들을 섬기지 말라. 나 여호와 너의 하나님은 질투하는 하나님인즉 나를 미워하는 자의 죄를 갚되 아비로부터 아들에게로 삼사 대까지 이르게 하거니와.”
    또 르호보암은 세상에서 가장 지혜로운 아버지 밑에서 물질적인 풍요로움을 누리며 자랐고 가장 좋은 궁중교육을 받았지만, 그의 인격에는 부족함이 컸다.
    이것은, 사람이 아무리 좋은 환경에서 자라며 생활한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죄를 극복하지 못함을 보인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를 사모하고 간구하며 범죄치 말아야 한다.
    그래야 우리와 우리 자녀들이 복을 얻을 것이다.

    셋째로, 하나님을 배반하지 말고 죽도록 충성하자.

    르호보암도 잘못하였지만, 이스라엘 백성도 잘못하였다.
    이스라엘은 하나님과 왕에게 충성하지 않았다.
    왕에게 어떤 잘못이 있다면, 하나님께서 직접 그를 징벌하실 것이다.
    반역은 나쁜 일이다.
    그러므로 잠언 24:21은, “내 아들아, 여호와와 왕을 경외하고 반역자로 더불어 사귀지 말라”고 교훈한다.
    로마서 13:1-2는, “각 사람은 위에 있는 권세들에게 굴복하라. 권세는 하나님께로 나지 않음이 없나니 모든 권세는 다 하나님의 정하신 바라”고 말했고,
    베드로전서 2:17은,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왕을 공경하라”고 말했다.
    국가에도 교회에도 이치는 비슷하다.
    히브리서 13:17은, “너희를 인도하는 자들에게 순종하고 복종하라. 저희는 너희 영혼을 위하여 경성하기를 자기가 회계할 자인 것같이 하느니라. 저희로 하여금 즐거움으로 이것을 하게 하고 근심으로 하게 말라.” 우리는 하나님을 배반치 말고 국가에 대해서도 바른 교회에 대해서도 죽도록 충성하자.


















    역대하 8장 요약

    솔로몬의 여러 활동과 업적에 대해서 기록하고 있고,여러 성과 요새를 만들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역대하 9장 요약

    스바 여왕이 솔로몬을 찾아왔으며,솔로몬의 재산과 지혜에 대해서 말하며 솔로몬의 죽음도 기록하고 있습니다.

    5월 14일(수) 역대하 8-9장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복되도다(9:7)

    복되도다 당신의 사람들이여, 복되도다 당신의 이 신복들이여, 항상 당신의 앞에 서서 당신의 지혜를 들음이로다.
    How happy your men must be! How happy your officials, who continually stand before you and hear your wisdom!

    복되도다!(835) 에쉐르(’esher) אֶשֶׁר 스트롱번호 835

    1. 행복.   2. 시 1:1.  3. 2:12
    발음 [ ’esher ]
    어원  / 833에서 유래
    구약 성경 / 40회 사용
    관련 성경 /  행복한 사람(신 33:29).
    [동] 복되다(왕상 10:8, 대하 9:7, 잠 28:14), 복이 있다(시 40:4, 단 12:12).


    복되도다...지혜를 들음이로다
    - 본절은 잠언 8:34과 일맥 상통하는 내용이다.
    왜냐하면 잠언 기자는 그곳에서 날마다 지혜의 말씀을 듣는 자들이 복되도다라고 가르치고 있기 때문이다.
    한편 솔로몬의 신복들이 그의 지혜의 말을 듣는 것은 물론 복된 일이나 솔로몬보다 더 큰 이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직접 듣고 보는 오늘날의 성도들은 그보다 더욱 복되다고 하겠다(마 12:42).

    잠언 8:34
    누구든지 내게 들으며 마다 내 문 곁에서 기다리며 문설주 옆에서 기다리는 자는 복이 있나니.

    마태복음 12:42
    심판 때에 방 여왕이 일어나 이 세대 사람을 정죄하리니 이는 그가 솔로몬의 지혜로운 말을 들으려고 끝에서 왔음이어니와 솔로몬보다 더 큰이가 여기 있느니라.

    7절은 전형적인 대구법으로 솔로몬과 함께 한 사람들에게 복이 있음을 노래한다.
    8절은 위와 같이 솔로몬을 왕을 삼으셨다는 것을 두번 반복하면서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사랑하시고 영원히 견고하게 하실 것이라는 언약적 믿음을 표현하고 있다.
    그러므로 7절과 8절은 단지 솔로몬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것이라기 보다는 솔로몬과 관련된 사람들과 넓게는 이스라엘 전체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솔로몬을 통한 사랑을 베풀고 계시다는 사실을 나타낸다고 할 것이다.



    בְּרָכָה 1293 [Berâkâh]
    • 1.

      여성형 명사 축.

    • 2.

      여성형 명사 앞날에 대한 예언적 축, 창27:12,33:11, 잠11:11.

    • 3.

      여성형 명사 번영의 결과로서의 , 창39:5, 시3:8, 사44:3, 19:24, 욜2:14

    O.N.O 스트롱코드 히브리어사전

    בֶּרֶכְיָהוּ 1296 [Berekyâh]
    • 1.

      남성형 고유명사 여호와의무릎[여호와의 ]: 여섯 이스라엘 사람 ‘베레갸’.

    • 2.

      남성형 고유명사 스룹바벨의 아들, 대상3:20.

    • 3.

      남성형 고유명사 대상9:16.

    O.N.O 스트롱코드 히브리어사전

    בְּחוּרוֹת 979 [bechûrôwth]
    • 1.

      남성형 명사 청년, 젊은이들, 민11:28.

    • 2.

      명사 젊음, 청년시대,전11:9, 12:1.

    O.N.O 스트롱코드 히브리어사전

    בָּרַךְ 1288 [bârak]
    • 1. 원형 하나님께 기원하다, 을 구하다, 창 28:6, 수 24:10, 삼상 13:10, 삼하 8:10, 대상 18:10.
    • 2. 원형 축하다, [인간들끼리], 을 기원하다[하나님의 이름으로 어떤 사람에 대해] 창 27:27.
         ㉠ [제사장이 백성을 축하는 경우] 레 9:23, 민 6:23.
        ㉡ [백성이 백성에게 축하는 경우] 신 27:12.
    • 3. 원형 축하다, 번성하게 하다, 창 1:22, 9:1, 12:2.
    נִשַׂג 5381 [nâsag]
    • 1.

      동사 자신이 움직이다. [즉] 도착하다, 이루다, 어느 것에 따라 미치다, 창31:25,삼하15:4. ㉠ [시간에 대하여] 창47:9, 부자가 되다, 레25:47, 사35:10, 51:11. ㉡ [] 신28:2. ㉢ [공포] 욥27:20. ㉣ [죄] 시40:13(12). ㉤ [하나님의 진노] 시69:25(24).

    • 2.

      동사 [칼형에서는 쓰이지 않음].

    • 3.

      동사 히필형 הִשִּׂיג

    O.N.O 스트롱코드 히브리어사전



    바라크의 축복과 아쉐르의 축복


    시편 1편은 시편 전체의 주제가 되는 장이기도합니다.

    흔히 옛말씀 틀린 것 하나 없다고들 하는데 어쩌면 시편 1편의 말씀이야말로 평범해보이지만 인생을 지탱해주는 신앙의 놀라운 은혜를 말하고 있음을 늘 발견하게 됩니다.
    복있는 사람을 말씀하십니다!
    복있는 사람이 되기 원합니다!  
    축복이라는 히브리어 단어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바라크의 축복

    바라크의 축복은 물질적인 것을 포함한 현세적, 가시적 축복
    창세기의 생육(生育)의 축복이 바로 바라크의 축복이었습니다.

    창세기 1:22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바라크)을 주시며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여러 바닷물에 충만하라 새들도 땅에 번성하라 하시니라

    아브라함에게 주신 축복도 바라크의 축복이었습니다.

    창세기 12:2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바라크)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너는 복이 될지라.





    그러나 시편 1편의 축복은 아쉐르의 축복입니다.

    그것은 하나님과 만난 사람의 영혼 깊은 곳의 만족과 기쁨과 행복을 의미하는 영적 축복을 말합니다. 헬라어로는 마카리오스라고 하는데 바로 예수님의 마태복음 5장의 마카리오스의 축복과 같습니다.


    [마5:3]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

    즉 아쉐르의 축복은 내면 깊은 곳의 축복입니다.

    물론 바라크의 축복도 당연히 하나님께서 주시는 선물입니다.

    하나는 에쉐르의 축복

    그런데 오래 가고 영원한 것은 바로 아쉐르의 축복! 내면의 축복입니다.

    바라크의 축복과 함께 결코 다함이 없는 에쉐르- 시편 1편의 축복을 받기 원합니다.


    그런데 그런 축복을 받는 사람- 복있는 사람은 먼저 자기 선을 분명히하는 지혜가 있는 사람입니다.

    [시1:1] 복 있는 사람은 악인들의 꾀를 따르지 아니하며 죄인들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즉 1절에 나타난 '하지 않아야할 것' 대한 이해가 분명한 사람입니다.

    자신의 기질과 경향을 스스로 알아 늘 조심하는 사람들입니다.

    복있는 사람은 그러므로,

    악인들의 꾀를 따르지 않습니다. 따르는 것은 생각이 기울어간다는 뜻입니다.

    죄인들의 길에 서지 않습니다.

    여호와 앞에 서라!고 성경은 수없이 말씀하십니다. 여호와 앞에 설만큼 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여호와 앞에 서야하는 우리들이 죄인의 길에 서는 것은 옳지 않다는 것을 아는 사람들이 복있는 사람입니다.

    복있는 사람은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는 사람입니다. 앉았다는 것은 이미 습관화되고 길들여져지고 익숙해졌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생각이 그 방향으로 끌려갔습니다.

    그리고 행동으로 그 죄인의 길을 선택했습니다.

    결과적으로 그것이 습관이 되었습니다.

    생각이 행동이 되고 행동이 습관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복있는 사람은! 그것이 아니라는 것을 아는 사람들입니다.

    나라는 사람이, 아니 인간이라는 존재가 얼마나 기울어지기 쉬운 존재임을 잘 아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그는 알고 조심합니다. 경계합니다. 내 자신의 마음과 생각을 조심스럽게 다룹니다!



    나는 무엇이 가장 즐거운가!

    무엇보다 복있는 사람은

    그는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는 사람입니다.

    [시편 1:2]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도다


    즐거움의 근원!

    이것이 그의 영성을 좌우할 것입니다.

    여호와의 율법이 즐거우십니까?

    무엇이 즐거우십니까? 나는 무엇이 즐거운 것일까요?

    나는 무엇을 할 때 즐거워하는 성향인가요?

    멋진 연애를 하는 것, 일류 레스토랑을 가는 것, 비싼 가방이나 옷을 입는 것, 멋진 여행지를 구경가는 것은 어쩌면 누구에게나 '즐거운' 본능적으로 '즐거운' 일일 것입니다. 그것 또한 지나치지 않으면 하나님의 축복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늘', '더' 즐거우면 아직 우리는 복있는 사람은 안 된, 아니 되고 있는 과정에 있을지도 모릅니다.

    아이 시절에는 텔레비젼 보는 것이 성경 읽는 것보다 즐거울 수 있습니다. 밖에 나가서 노는 것이 교회다니는 것보다 즐거울 수 있습니다.

    진정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게 될 때까지 얼마나 많은 세월이 걸릴까요?

    지금 성경을 읽을 때 마음의 즐거움이 있다면 나는 이미 복을 받은 사람입니다.


    [시편 1:2]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도다

     

    주야로 그 말씀을 묵상한다는 말은 '말씀'에 사로 잡히도록 스스로를 관리한다는 뜻입니다.

    내 마음을 지배하는 것이 악인들의 꾀가 아니기를, 내가 선택한 것이 죄인들의 길이 아니기를, 내가 앉아 있는 곳이 오만한 자의 자리가 아니기를 기도하는 것입니다.

    나를 다스리는 것입니다.

    나의 영적 습관을 바꾸는 것입니다.


    오직! 이라는 말은 그래서 자세와 태도에 대한 결단을 말합니다.

    [시편 1:2]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도다

    오직!이라는 단어에는 마음이 담겨 있습니다!

    삶의 원리와 방식을 채택하는 단호함을 말합니다.

    내가 살아가는 방법을 택하는 방식입니다!

    묵상하며 그 말씀이 체질화되고 인격화되고 언어화되고 습관화되고 드디어는 자연스러운 즐거움이 되기를 기도하는 것입니다.

    내면의 기쁨이 될 때까지 묵상하는 것입니다.



    [시편 1:2]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도다


    그러면 그의 인생은 시냇가에 심은 나무같이 될 것입니다.

    모든 생명있는 것은 열매를 맺는 것이 중요합니다!

    잘 자라는 것이 중요합니다!

    하나님께서 복있는 사람의 자세와 태도를 기뻐하시고 시냇가에 심은 나무처럼 열매를 맺게하시겠다고 약속합니다!


    [시1:3] 그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철을 따라 열매를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으니 그가 하는 모든 일이 다 형통하리로다 [시1:4] 악인들은 그렇지 아니함이여 오직 바람에 나는 겨와 같도다 [시1:5] 그러므로 악인들은 심판을 견디지 못하며 죄인들이 의인들의 모임에 들지 못하리로다 [시1:6] 무릇 의인들의 길은 여호와께서 인정하시나 악인들의 길은 망하리로다


    의인은 생산적인 삶을 살지만 악인은 생에 대하여 무의미만 남기고 부정적인 기록만 남기게 될 것입니다. 바람에 나는 겨와 같은 악인은 결국 불안정하고 무의미라고 무가치하고 순간성에 머무르고 말 것입니다.


    복있는 사람이 시냇가에 심은 나무같다고 하십니다.

    뿌리는 보이지 않습니다. 그런데 그 뿌리가 지금 시냇가의 수액과 연결되어있는 것입니다.

    내 뿌리가 나아가 닿아있는 방향!

    그것이 중요합니다.

    보이지 않는 내 마음이 늘 닿아있는 곳,

    내 무의식의 심연이 연결되어있는 곳,

    그것이 하나님의 말씀이라면 내 영혼은 늘 아름답게 열매를 맺을 것입니다.


    그 시냇가( 히브리어 페레그)는 운하運河 channel, canal 라는 뜻도 있습니다.

    그냥 자연적으로 흐르는 강물이기도 하지만 운하, 즉 의도적으로 팠다는 뜻도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우리가 어떤 곳에 심겼을지라도 그 뿌리 쪽으로 축복의 운하를 파주시기도 합니다.


    에쉐르의 축복을 먼저 누리면 바라크의 축복도 다가올 줄로 믿습니다.

    말씀을 묵상하면 악인의 길을 따르기 쉬운 우리의 삶의 방향을 그 말씀이 힘있게 바꾸어줄 것을 믿습니다!






    바라크의 복과 아쉐르의 복(시편 1:1-6)

    시편 1편은 평생 읽어도, 다시 읽어도, 세월이 지나서 읽어도 은혜가 되는 귀한 말씀입니다. 시편 전체의 주제가 되는 장이기도합니다.

    흔히 옛말씀 틀린 것 하나 없다고들 하는데 어쩌면 시편 1편의 말씀이야말로 평범해보이지만 인생을 지탱해주는 신앙의 놀라운 은혜를 말하고 있음을 늘 발견하게 됩니다.

    복있는 사람을 말씀하십니다!

    복있는 사람이 되기 원합니다!

    그런데 이 복이라는 히브리어 단어는 두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바라크(ברך)의 복이요 하나는 아쉐르(rva)의 복입니다.

    바라크의 복은 물질적인 것을 포함한 현세적, 가시적 축복입니다.

    창세기의 생육(生育)의 복이 바로 바라크의 복이었습니다.

    [창1:22]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바라크)을 주시며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여러 바닷물에 충만하라

    새들도 땅에 번성하라 하시니라

    아브라함에게 주신 복도 바라크의 복이었습니다.

    [창12:2]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바라크)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너는 복이 될지라

    그러나 시편 1편의 복은 아쉐르(rva)의 복입니다.

    그것은 하나님과 만난 사람의 영혼 깊은 곳의 만족과 기쁨과 행복을 의미하는 영적 복을 말합니다.

    헬라어로는 마타리오스라고 하는데 바로 예수님의 마태복음 5장의 마카리오스의 복과 같습니다.

    [마5:3]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

    즉 아쉐르의 복은 내면 깊은 곳의 복입니다.

    물론 바라크의 복도 당연히 하나님께서 주시는 선물입니다.

    그런데 오래 가고 영원한 것은 바로 아쉐르의 복! 내면의 복입니다.

    바라크의 복과 함께 결코 다함이 없는 에쉐르- 시편 1편의 복을 받기 원합니다.

    그런데 그런 복을 받는 사람- 복있는 사람은 먼저 자기 선을 분명히하는 지혜가 있는 사람입니다.

    [시1:1] 복 있는 사람은 악인들의 꾀를 따르지 아니하며 죄인들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즉 1절에 나타난 '하지 않아야할 것' 대한 이해가 분명한 사람입니다.

    자신의 기질과 경향을 스스로 알아 늘 조심하는 사람들입니다.

    복있는 사람은 그러므로,

    악인들의 꾀를 따르지 않습니다. 따르는 것은 생각이 기울어간다는 뜻입니다.

    죄인들의 길에 서지 않습니다.

    여호와 앞에 서라!고 성경은 수없이 말씀하십니다. 여호와 앞에 설만큼 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여호와 앞에 서야하는 우리들이 죄인의 길에 서는 것은 옳지 않다는 것을 아는 사람들이 복있는 사람입니다.

    복있는 사람은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는 사람입니다. 앉았다는 것은 이미 습관화되고 길들여져지고 익숙해졌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생각이 그 방향으로 끌려갔습니다.

    그리고 행동으로 그 죄인의 길을 선택했습니다.

    결과적으로 그것이 습관이 되었습니다.

    생각이 행동이 되고 행동이 습관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복있는 사람은! 그것이 아니라는 것을 아는 사람들입니다.

    나라는 사람이, 아니 인간이라는 존재가 얼마나 기울어지기 쉬운 존재임을 잘 아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그는 알고 조심합니다. 경계합니다. 내 자신의 마음과 생각을 조심스럽게 다룹니다!

    나는 무엇이 가장 즐거운가!

    무엇보다 복있는 사람은

    그는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는 사람입니다.

    [시편 1:2]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도다

    즐거움의 근원!

    이것이 그의 영성을 좌우할 것입니다.

    여호와의 율법이 즐거우십니까?

    무엇이 즐거우십니까? 나는 무엇이 즐거운 것일까요?

    나는 무엇을 할 때 즐거워하는 성향인가요?

    진정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게 될 때까지 얼마나 많은 세월이 걸릴까요?

    지금 성경을 읽을 때 마음의 즐거움이 있다면 나는 이미 복을 받은 사람입니다.

    [시편 1:2]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도다

    주야로 그 말씀을 묵상한다는 말은 '말씀'에 사로 잡히도록 스스로를 관리한다는 뜻입니다.

    내 마음을 지배하는 것이 악인들의 꾀가 아니기를, 내가 선택한 것이 죄인들의 길이 아니기를,

    내가 앉아 있는 곳이 오만한 자의 자리가 아니기를 기도하는 것입니다.

    나를 다스리는 것입니다.

    나의 영적 습관을 바꾸는 것입니다.

    오직! 이라는 말은 그래서 자세와 태도에 대한 결단을 말합니다.

    [시편 1:2]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도다

    오직!이라는 단어에는 마음이 담겨 있습니다!

    삶의 원리와 방식을 채택하는 단호함을 말합니다.

    내가 살아가는 방법을 택하는 방식입니다!

    묵상하며 그 말씀이 체질화되고 인격화되고 언어화되고 습관화되고 드디어는

    자연스러운 즐거움이 되기를 기도하는 것입니다.

    내면의 기쁨이 될 때까지 묵상하는 것입니다.

    [시편 1:2]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도다

    그러면 그의 인생은 시냇가에 심은 나무같이 될 것입니다.

    모든 생명있는 것은 열매를 맺는 것이 중요합니다!

    잘 자라는 것이 중요합니다!

    하나님께서 복있는 사람의 자세와 태도를 기뻐하시고 시냇가에 심은 나무처럼 열매를 맺게하시겠다고 약속합니다!

    [시1:3] 그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철을 따라 열매를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으니 그가 하는 모든 일이 다 형통하리로다

    [시1:4] 악인들은 그렇지 아니함이여 오직 바람에 나는 겨와 같도다

    [시1:5] 그러므로 악인들은 심판을 견디지 못하며 죄인들이 의인들의 모임에 들지 못하리로다

    [시1:6] 무릇 의인들의 길은 여호와께서 인정하시나 악인들의 길은 망하리로다

    의인은 생산적인 삶을 살지만 악인은 생에 대하여 무의미만 남기고 부정적인 기록만 남기게 될 것입니다.

    바람에 나는 겨와 같은 악인은 결국 불안정하고 무의미라고 무가치하고 순간성에 머무르고 말 것입니다.

    복있는 사람이 시냇가에 심은 나무같다고 하십니다.

    뿌리는 보이지 않습니다. 그런데 그 뿌리가 지금 시냇가의 수액과 연결되어있는 것입니다.

    내 뿌리가 나아가 닿아있는 방향!

    그것이 중요합니다.

    보이지 않는 내 마음이 늘 닿아있는 곳,

    내 무의식의 심연이 연결되어있는 곳,

    그것이 하나님의 말씀이라면 내 영혼은 늘 아름답게 열매를 맺을 것입니다.

    그 시냇가( 히브리어 페레그)는 운하運河 channel, canal 라는 뜻도 있습니다.

    그냥 자연적으로 흐르는 강물이기도 하지만 운하, 즉 의도적으로 팠다는 뜻도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우리가 어떤 곳에 심겼을지라도 그 뿌리 쪽으로 축복의 운하를 파주시기도 합니다.

    에쉐르의 을 먼저 누리면 바라크의 도 다가올 줄로 믿습니다.

    말씀을 묵상하면 악인의 길을 따르기 쉬운 우리의 삶의 방향을 그 말씀이 힘있게 바꾸어줄 것을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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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펄젼의 시편 1편 강해

    [개 요]

    주제

    이 시는 시편의 서론으로 간주될 수 있으며, 시편 전체의 내용을 요약하고 있다. 시편 기자의 관심사는 우리에게 축복받는 길을 가르치는 데, 그리고 죄인들이 반드시 멸망한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경고하고자 하는 데 있다. 이것이 바로 첫번째 시편의 주제이며, 어떤 측면에서 시편 전체는 바로 이 내용을 신성한 교훈으로서 보충해 주는 역할을 한다 하겠다.

    구성

    이 시는 다음과 같이 두 부분으로 구분할 수 있다.

    1-3절 경건한 자가 축복을 받는 비결이 어디에 있는지, 그의 과제가 무엇인지, 그리고 그가 여호와께로부터 어떤 축복을 받는지 등을 설명한다.

    4-6절 불경건한 자의 상태와 특성을 대조해 보이며, 그 장래를 계시하고, 또한 그의 궁극적 운명을 강한 어투로 묘사한다.

    [강 해]

    1 복 있는 사람은 악인의 꾀를 좇지 아니하며 죄인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2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로다

    1절. “복 있는.” 우리 주님의 유명한 산상수훈처럼, 시편 역시 축복으로 시작하고 있음에 유의하자. “복 있는”이라고 번역된 단어는 매우 의미심장하다. 히브리어 원문에는 복수형으로 되어 있으며, 그것이 형용사인지 아니면 명사인지에 대해서는 논쟁의 여지가 많다. 우리는 하나님에 의해 의롭다 하심을 받은 자에게 주어질 축복의 다양성 및 그가 누릴 축복의 온전함과 위대함을 배울 수 있다. 우리는 그 내용을 읽고서 “오, 그 놀라운 축복들!”이라고 감탄하게 되며, 그것을 (에인즈워스가 그렇게 하듯이) 은혜받은 사람이 받을 놀라운 축복에 대한 즐거운 탄성으로 간주해도 무방하다. 동일한 축복이 우리에게도 임하기를 기원한다!

    다윗은 은혜받은 사람에 대해 소극적인 표현(1절)과 적극적인 표현(2절)으로 묘사한다.

    “악인의 꾀를 좇지 아니하며.” 그는 악인의 꾀를 좇지 아니하는 사람이다. 그는 더 지혜로운 조언을 받아들이며, 여호와 하나님의 계명 안에서 행한다. 그에게 있어 경건의 길이란 평안과 즐거움의 길이다. 그의 걸음은 하나님의 말씀의 지시를 받으며, 육욕적인 사람들의 교활하고 악한 계략을 따르지 않는다. 우리의 외적인 삶이 변화되고 불경건한 행동으로부터 멀어진다는 것은 내적인 은혜를 풍성하게 받았음을 보여주는 증거이다.

    “죄인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그는 예전에 비해, 더욱 선별된 사람들과 더불어 동행한다. 비록 그 자신이 죄인이긴 하지만, 이제 그는 보혈로 씻음을 받은 죄인이며, 성령에 의해 소생함을 받았고, 또한 그 심령이 새로워졌다. 하나님의 풍성한 은혜로 의인의 회중 가운데 서 있는 그는 악을 행하는 무리들과 감히 어울리려 하지 않는다.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그는 금욕주의자들의 냉소 안에서 아무런 안식도 발견하지 못한다. 어떤 이들은 죄와 영생, 지옥과 천국, 그리고 영원하신 하나님 등에 대해 비웃는다. 하지만 그는 신앙심이 없는 사람들보다 더 나은 철학을 배웠고, 하나님의 임재를 분명히 자각하고 있는 까닭에 그분의 이름이 모독받는 것을 견딜 수 없다. 오만한 자의 자리는 매우 높아 보일 수도 있지만, 그것은 지옥의 문에 아주 가깝다. 거기로부터 달아나자. 왜냐하면 그곳은 이내 공허해질 것이며, 멸망이 거기 앉는 사람을 삼킬 것이기 때문이다. 1절에서 사용된 점층법에 유의해 보라.

    악인의 꾀를 좇지 아니하며

    죄인의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사람들이 죄 가운데서 살아갈 때 그들은 점점 더 나쁜 길로 들어서게 된다.

    처음에는 단지 부주의하고 악한 자, 곧 하나님을 망각한 자의 꾀를 ‘좇는다’-그 죄악이 상습적이라기보다는 실리적이다. 하지만 후에 그들은 상습적으로 악행을 저지르게 되며, 하나님의 계명들을 의도적으로 어기는 죄인의 길에 ‘서게’ 된다. 또한 이를 그대로 방치하면, 그들은 한 단계 더 나아가 스스로 유해한 선생 혹은 다른 이들을 유혹하는 자들이 되며, 그리하여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게’ 된다. 그들은 죄악 가운데서 학위를 취득하고, 파멸 박사로 임명되며, 다른 이들에 의해 악마의 권위자로 높임을 받는다.

    반면에 복 있는 사람, 곧 하나님의 모든 축복들을 소유한 사람은 그러한 인물들과 더불어 아무런 교제도 나눌 수 없다. 그는 이 문둥병자들로부터 자신을 순결하게 지킨다. 그는 마치 더러워진 의복을 벗어 버리듯이, 자신에게서 악한 것들을 제거한다. 그는 악한 자들에게서 이탈하여 동지도 없이 홀로 걸어가며, 그리스도께 대한 비난을 스스로 짊어진다. 죄인들로부터 그처럼 격리된 자에게 얼마나 놀라운 은혜가 임하겠는가!

    이제 복 있는 자의 적극적인 특성에 대해 알아보자.

    2절.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는 저주와 정죄의 율법 ‘아래’ 있는 것이 아니라 율법 ‘안’에 있으며, 그것을 자신의 삶의 기준으로 삼아 그 안에 있기를 기뻐한다. 더욱이, 그는 ‘날마다’ 그것을 읽고 ‘밤마다’ 그것을 묵상하기를 즐거워한다. 그는 성경 말씀을 취하여 하루 종일 지니고 다니며, 잠 못 이루는 밤에는 그 말씀을 곰곰이 묵상한다. 형통한 날에 그는 하나님의 말씀 중 시편을 노래하며, 역경의 밤에는 성경의 약속들로 스스로를 위로한다. “여호와의 율법”은 진실한 신자에게 매일의 양식이다.

    하지만 다윗 당시에는 영감을 받아 기록한 성경이 모세 오경 외에는 없었다. 그렇다면 우리가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 66권을 모두 소유하고 있다는 사실이 얼마나 소중한 일인가! 우리 모두가 성경을 베뢰아인들처럼 열심히 탐구하고 있는가? 우리들 중 이 시에 제시된 축복을 누리는 자들이 얼마나 되는가? 아마도 우리 중에는, 악한 자의 길로 걷지 않고 있다는 식의 소극적 차원의 정결함을 주장할 수 있는 자들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이렇게 묻고자 한다. “여러분은 하나님의 율법을 즐거워하는가?” “여러분은 하나님의 말씀을 상고하는가?” “여러분은 그것을 자신의 든든한 오른손으로 삼고 있는가?” “하나님의 말씀을 여러분의 최고의 동반자로, 그리고 훌륭한 안내자로 삼고 있는가?” 만일 그렇지 않다면, 이러한 축복은 여러분에게 속한 것이 아니다.

    3 저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시절을 좇아 과실을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으니 그 행사가 다 형통하리로다

    3절. “저는……심은 나무가.” 그는 야생 나무가 아니라 “심은 나무”와 같다. 그것은 선택된, 소유물로 간주된, 재배된, 그리고 마지막에 끔찍스럽게 뽑히는 일을 당하지 않으리라는 보장을 받은 나무이다. 왜냐하면 “심은 것마다 내 천부께서 심으시지 않은 것은 뽑힐 것”(마 15:13)이기 때문이다.

    “시냇가에.” 그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와 같다(“시냇가”라는 단어는 히브리어 원문에 복수형으로 되어 있다-역자 주). 만일 한 시내가 마르면, 다른 시내가 물을 공급한다. 용서의 시내와 은혜의 시내, 약속의 시내와 그리스도와의 교제의 시내 등이 결코 마르지 않고 물을 공급해 준다.

    “시절을 좇아 과실을 맺으며.” 그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시절을 좇아 과실을 맺는 것과 같다. 제 맛을 내지 못하는 때 이른 무화과처럼 시기 적절하지 못한 은혜가 아니다.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기뻐하는 자는 그 말씀의 가르침을 받아 고난의 때에 인내하고, 시련의 날에 믿음을 굳게 잡으며, 또한 번영의 시기에 거룩한 기쁨을 나타낸다. 풍성함은 은혜로운 사람에게서 나타나는 본질적 특성이며, 그 풍성함은 시기 적절해야 한다.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으니.” 그가 가장 나지막하게 한 말도 영원히 기억될 것이며, 그가 베푼 자그마한 사랑도 역시 기억될 것이다. 그의 열매만 보존되는 것이 아니라, 잎사귀 역시 그러할 것이다. 그는 자신의 아름다움이나 풍성함을 결코 잃지 않을 것이다.

    “그 행사가 다 형통하리로다.” 이와 같은 약속을 지닌 사람은 복이 있다. 하지만 우리는 항상 자신의 시각으로 어떤 약속의 성취를 평가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자신의 연약한 감각으로 판단함으로써 “이 모든 일들이 나를 대적한다”고 말한 야곱처럼, 고통스러운 결론에 이르는 경우가 허다하다. 그것은 비록 우리가 약속에 대해 관심을 갖고는 있지만, 지치고 곤고하여 그 약속에 예고된 것과는 정반대의 시각을 갖게 되기 때문이다. 이 말씀은 오직 믿음의 눈으로 바라볼 때에야 확실해지며, 믿음을 통해 우리는 모든 것이 자신을 대적하는 듯하여도 자신의 일이 번창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그리스도인이 가장 바라고 가치 있게 여기는 것은 외적인 번영이 아니다. 그가 갈망하는 것은 영혼의 번영이다. 우리는 종종 유다 왕 여호사밧처럼, 금을 구하러 다시스로 가기 위해 배를 만들지만, 그 배는 에시온게벨에서 파선당하고 만다(대하 20:35-37). 하지만 파선당하는 데에도 유익한 점이 있다. 왜냐하면 종종 우리는 영혼의 건강을 위해 가난해지고, 사랑하는 이를 여의며, 또한 핍박을 받아야 하기 때문이다. 최악의 형편이 곧 최선의 상황인 경우가 종종 있다. 악인의 행운 속에 저주가 들어 있듯이, 의인의 십자가와 상실과 슬픔 속에는 축복이 숨겨져 있다. 성도의 시련은 신성한 농사이며, 이를 통해 그는 성장하며 풍성한 결실을 맺는다.

    4 악인은 그렇지 않음이여 오직 바람에 나는 겨와 같도다

    4절. “악인은 그렇지 않음이여.” 이제 우리는 이 시의 두번째 부분 첫머리에 이르렀다. 이 구절에서는 악인의 열악한 상태와의 대조를 통해 앞에 묘사된 아름답고 유쾌한 장면의 색조를 더욱 강화시키고 있다. 불가타역과 70인역에는 다음과 같이 더욱 강렬한 어투로 번역되었다: “그렇지 않음이여, 악인은 그렇지 않음이여.”

    이를 통해 우리는, 의인에 대해 묘사된 모든 좋은 것이 악인의 경우에는 사실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 약속들에 대해 이중의 부정을 가한다는 것은 그 얼마나 무서운 일인가! 하지만 이것은 단지 악인의 상태일 뿐이다. “악인”이라는 용어를 사용한 사실에 유의하라. 시편 서두에 대한 주해에서 살펴보았듯이, 악인이란 악행을 시작하는 자로서 초보적인 범죄자를 가리킬 뿐이다. 조용히 나름대로의 덕성을 유지하면서 하나님을 부인하는 자들의 상태가 그토록 서글프다면, 공개적으로 죄를 범하는 죄인들과 수치를 모르는 불신자들의 상태는 어떠하겠는가? 첫 문장은 악인에 대한 소극적인 묘사이며, 두번째 문장은 적극적인 묘사이다.

    “바람에 나는 겨.” 악인들의 특성은 “바람에 나는 겨”와 같다. 이는 본질적으로 무가치한, 죽은, 쓸모 없는, 실체가 없는, 그리고 쉽게 옮기는 것을 나타낸다. 그들의 운명도 역시 이와 같다. 죽음은 그들을 곧장 무서운 불 속으로 집어던질 것이며, 그들은 거기서 완전히 소진될 것이다.

    5 그러므로 악인이 심판을 견디지 못하며 죄인이 의인의 회중에 들지 못하리로다

    5절. “악인이 심판을 견디지 못하며.” 그들이 심판대에 서는 것은 인정을 받기 위해서가 아니라 징벌을 받기 위해서일 것이다. 거기서 두려움이 그들을 사로잡을 것이다. 그들은 땅에 서지 못할 것이다. 그들은 멀리 달아날 것이다. 그들은 자신의 방어벽 안에서 견디지 못할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수치를 당하며 영원한 경멸을 뒤집어쓸 것이기 때문이다.

    성도들은 하늘을 사모하는 것이 당연하다. 왜냐하면 거기에는 악인이 한 명도 거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죄인이 의인의 회중에 들지 못하리로다.” 이 땅에서는 의인들의 회중에 죄인들이 뒤섞여 있다. 모든 교회에는 마귀의 자식들도 들어 있다. 같은 경작지 안에 독초가 밀과 함께 자란다. 잡초/가라지가 철저히 제거된 밭은 아직 없다. 불순물이 금과 섞여 있듯이, 죄인들이 성도들과 섞여 있다. 하나님의 귀중한 다이아몬드들은 아직 자갈과 더불어 같은 들판에 놓여 있다. 의로운 롯과 같은 자들이 하늘 이편에서 소돔의 아들들에 의해 계속 괴로움을 당하고 있다. 하늘에 있는 “맏아들의 교회”에는 중생하지 못한 영혼이 단 한 명도 결코 받아들여지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에 대해 기뻐하자. 죄인들은 하늘에서 살 수 없다. 하늘은 그들의 분수에 맞지 않는 곳이다. 악인이 낙원에서 살 수 없다는 것은 물고기가 나무 위에서 살 수 없는 것보다 더 자명한 사실이다. 설령 회개하지 않은 자가 하늘에 들어가도록 허락받는다고 할지라도, 그에게 있어 하늘은 견딜 수 없는 지옥이 될 것이다. 물론 계속 불법을 행하는 자에게는 그러한 특권 자체가 결코 허락되지 않을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의 하늘 궁전들 가운데서 자신의 이름과 처소를 얻게 되기를 기원하는 바이다!

    6 대저 의인의 길은 여호와께서 인정하시나 악인의 길은 망하리로다

    6절. “의인의 길은 여호와께서 인정하시나.” 히브리어 원문에는 “의인의 길은 여호와께서 인정하고 계시나”로 되어 있다. 여호와께서는 의인의 길을 줄곧 보고 계시며, 비록 그것이 때로는 안개와 어둠 속에 싸여 있을지라도, 그분은 그것을 알고 계신다. 설령 그것이 재난의 구름과 폭풍우 가운데 있다 하더라도, 그분은 그것을 이해하고 계신다. 그분은 우리의 머리털까지 세시는 분이다. 그분은 우리에게 닥치는 어떠한 해악도 그대로 놓아 두지 않으실 것이다. “나의 가는 길을 오직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정금같이 나오리라”(욥 23:10).

    “악인의 길은 망하리로다.” 그들 자신이 망할 뿐만 아니라 그들의 길 역시 망할 것이다. 의인은 자기 이름을 반석에 새기지만, 악인은 자신의 기억을 모래 위에다 쓴다. 의인은 땅의 경작지를 갈며 거기서 수확한 것을 씨로 뿌리고서 자신이 영원한 삶을 누리러 들어가기까지 그것을 줄곧 거두어들일 것이다. 하지만 악인은 바다에서 쟁기질을 한다. 그가 타고 지나간 배 뒤로 그 흔적이 반짝이는 듯하지만, 곧 물결이 그 흔적을 덮을 것이며, 그와 친숙했던 곳이 더 이상 그를 알아보지 못할 것이다. 악인의 “길” 자체가 망할 것이다. 설령 그것이 기억 속에 남아 있다 하더라도, 그것은 악한 자의 기억 속에만 있을 것이다. 여호와께서 악인의 이름은 조롱을 당하게 하실 것이며, 선한 자의 코에 악취가 되게 하시고, 또한 그 부패성에 걸맞는 악인에게만 알려지게 하실 것이기 때문이다.

    여호와께서 우리의 마음과 길을 정결케 하사 우리로 하여금 악인의 운명을 피할 수 있게 하시며, 또 의인에게 축복을 누릴 수 있게 하시기를 기원하는 바이다!

    *주해와 설명들

    시 1편 전체. 아가서가 히브리어 원문상 “노래 중의 노래,” 즉 가장 탁월한 노래로 불리는 것과 같이, 이 시는 “시 중의 시”라는 명칭에 부족함이 없다. 이 시 속에는 기독교의 진수와 본질이 포함되어 있다. 제롬이 바울 서신에 대해 언급했던 바가, 이 시를 묘사하기에 가장 적절한 표현이다. “그 구성은 짧지만, 다루는 주제의 범위와 설득력은 넓고 강하다.” 이 시는 축복을 서두에서 언급한다. 그래서 우리 모두가 결론이 되기를 바라는 부분에서 시작하고 있다. 이것은 그리스도인의 길잡이로 지칭되어도 무방하다. 그것은 악인이 빠져들어 가는 파멸의 유사(流沙)와 성도들이 영광을 향해 걸어가는 굳건한 땅을 밝히 보여주기 때문이다. -토머스 왓슨(Thomas Watson, Saints’ Spiritual Delight, 1660).

    시 1편 전체. 이 시는 다음과 같은 두 가지 대조적인 주제들로 요약된다:의인은 복을 받고, 악인은 비참해진다. 이는 선지자들에 의해 제시된 두 가지 도전들을 나타내는 듯하다. 하나는, 모든 이들 중 경건한 자를 존속시켜 축복의 금양털을 얻는 유일한 용사가 되게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불경건한 자들이 세상에서 행복을 과시하려 해도 그들은 모든 이들 중 가장 비참하다는 것이다. -리처드 베이커(Sir Richard Baker, 1640).

    시 1편 전체. 나는 고대의 주경가들(어거스틴, 제롬 등) 중 어떤 이들의 견해를 받아들이라는 설득을 들어 왔다. 그들에 의하면, 시 1편은 단 한 분 예수 그리스도의 성품과 그분이 받은 상을 묘사하기 위한 것이라고 한다. -존 프라이(John Fry, 1842).

    1절. 시편 기자는 이 짧은 시 속에서 참된 행복에 관해 그 어떤 철학자, 혹은 모든 철학자들보다 더욱 정곡을 찌르고 있다. 그들은 새를 잡기 위해 그물을 치지만, 하나님은 우리 손에다 새를 쥐어 주신다. -존 트랩(John Trapp, 1660).

    1절. “복 있는.” 우리가 “복 있는”이라는 푯말이 매달려 있는 곳에 이르면, 그 안에서 경건한 사람들을 발견하게 될 것이라고 확신할 수 있다. -리처드 베이커.

    1절. 주정뱅이의 자리는 오만한 자의 자리이다. -매튜 헨리(Matthew Henry, 1662-1714).

    1절. “좇지 아니하며······서지 아니하며······앉지 아니하고.” 부정적인 표현의 권고들이 어떤 경우에는 긍정적인 표현보다 더욱 절대적이고 단호하다. “경건한 자의 조언을 좇으며”라고 말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못할 수가 있다. 그 이유인즉, 그는 경건한 자의 조언을 좇으면서 또한 악인의 꾀를 좇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사실은 그 둘을 동시에 좇는 것이 아니라 여러 차례에 걸쳐 그 둘을 번갈아 가며 좇는다는 것이다. 이 부정적인 표현을 통해 그가 항상 정결한 상태를 유지한다는 것을 나타낸다. -리처드 베이커.

    1절. “하이쉬”(vyah)는 강조적인 표현으로서 ‘그 사람’을 뜻한다. 즉 수많은 사람들 중, 하나님에 의해 지으심을 받은 목적을 이루기 위해 살아가는 자를 가리킨다. -아담 클라크(Adam Clarke, 1844).

    1절. “악인의 꾀를 좇지 아니하며.” 그들의 서로 다른 성격과 행실을 보여주는 특정한 상황들에 주목해 보라. (1) 불경건한 자는 자기 나름대로의 분별력을 갖고 있다. (2) 죄인은 자신의 길을 걷는다. (3) 오만한 자는 자신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악인은 종교에 관심이 없다. 그는 자신의 구원이나 다른 이들의 구원을 위해 열심을 내지 않는다. 또한 그는 다른 사람들을 권고하고 조언하여 그들로 하여금 자신의 계획을 받아들이도록 설득하며, 기도나 말씀 공부, 회개 등의 일에는 신경을 쓰지 않는다:“그런 일들을 할 필요가 없다. 다만 정직하게 살고, 종교 문제로 법석을 떨지 말라. 그리하면 마침내 잘되어 갈 것이다.” 그러나 이런 사람의 권고를 좇지 않는 자는 복이 있다. 그는 이런 사람들의 방법을 따르지 않으며, 그들의 계획에 따라 행동하지도 않는다.

    죄인이 범죄에 빠지는 구체적인 방식들이 있다. 어떤 사람은 주정뱅이이고, 어떤 사람은 부정직하며, 어떤 사람은 정결하지 못하다. 온갖 종류의 모든 죄악에 빠진 사람은 드물다. 탐욕에 빠져 있으면서도 주정뱅이를 혐오하는 자들이 많으며, 탐욕을 혐오하는 주정뱅이들도 많다. 각자에게는 자신이 쉽게 범하는 죄가 있다. 그러므로 선지자는 “악한 자로 하여금 자신의 길을 버리게 하라”고 말한다. 그런 사람의 길에 서지 않는 자는 복이 있다.

    오만한 자는 모든 종교와 윤리를 자신과는 무관하게 생각하고 자신에게 적용하지 않는다. 그는 불경건함 가운데 자리를 잡고 앉아 나름대로의 확신을 갖고 있으며, 또한 죄를 조롱한다. 그의 양심은 마비되었고, 그는 모든 불신에 대한 신봉자이다. 그러나 그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다. -아담 클라크.

    1절. “복 있는.” 히브리어 원문에 “복”이라는 단어는 복수형 명사 “아쉬레이”(yrva)이다. 이는 모든 축복들이 탈선하지 않은 자의 몫임을 뜻한다. 그것은 마치, “······하는 사람은 범사에 형통한다”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

    당신이 논쟁에 빠지는 이유가 무엇인가? 왜 공허한 결론을 이끌어 내는가? 만일 어떤 사람이 값비싼 진주를 발견했다면, 즉 하나님의 율법을 사랑하고 악한 자로부터 분리되는 길을 발견했다면, 모든 축복들이 그의 것이 된다. 하지만 그가 이 보석을 발견하지 못한다면, 그는 축복들을 찾아 헤맬 것이지만 결코 하나도 발견하지 못할 것이다! 순수한 사람에게는 모든 것이 순수하듯이, 사랑하는 사람에게는 모든 것이 사랑스럽고, 선한 사람에게는 모든 것이 선한 법이다. 하나님이 당신에게 어떤 분이신가 하는 것은 당신 자신의 상태에 달려 있다. 비록 하나님은 피조물이 아니시지만 피조물의 상태에 맞추어 자신을 나타내신다. 그분은 사악한 자에게는 악하게 대하시며, 거룩한 자에게는 거룩하게 대하신다.

    그러므로 악한 자에게는 선하거나 좋은 것이 전혀 없다. 하나님의 율법을 달콤하게 여기지 않는 자에게는 아무것도 달콤하지 않다. 여기서 “꾀”라는 단어는, 법령과 법률에 의해 구성 및 존속되지 않고서 존재할 수 있는 인간 사회란 하나도 없다는 점에서, 법령과 교훈을 나타내는 말로 사용되었음이 분명하다. 그러나 다윗은 이 용어를 통해 악인의 교만을 겨냥하며 그의 만용을 꾸짖는다. 왜냐하면 그들은 여호와의 율법 안에서 행할 정도로 자신을 낮추지 않을 것이며, 자기 자신의 꾀를 좇을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그가 그것을 가리켜 그들의 “꾀”라고 부르는 이유는, 그것이 그들이 사리를 분별하는 방법이며, 그것이 그들에게는 아무런 문제도 없는 듯이 보이는 길이기 때문이다. 악한 자가 멸망당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들은 자신의 눈에, 그리고 자신의 사리 분별에 따라 옳은 길이라고 여기는 옷 속에 자신의 잘못을 감추고 있다. 만일 그들이 자신의 잘못을 공공연하게 노출시킨다면, 우리가 그들과 함께 행하지 않는다는 사실이 그토록 축복받는 일이 되지는 않을 것이다. 다윗은 여기서, “악인의 어리석음” 혹은 “악인의 잘못”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따라서 그는 옳은 듯이 보이는 것에 조심하도록, 즉 광명의 천사로 변장한 마귀가 우리를 간교하게 꾀지 못하도록 최선을 다하라고 우리에게 권고하고 있다. 또한 그는 악인의 꾀를 여호와의 율법과 대조시켜 우리로 하여금 양의 옷을 입은 늑대를 조심하라고 말한다. 악인은, 그 어떤 사람보다도 무자격자이면서도, 모든 사람들에게 조언을 하고 가르치며 도와주겠다고 준비하고 있다. “서지”라는 단어는 그들의 완고함과 완악함을 서술하는 용어이다. 그들은 스스로 매정해지며, 적의를 품은 말로 변명하고, 또한 자신의 불경건함 가운데서 교정 불가능한 상태에 빠져 있다. 성경의 상징적 표현 방식에 있어 ‘선다’는 것은 굳건히 고정됨을 나타낸다:“그 섰는 것이나 넘어지는 것이 제 주인에게 있으매 저가 세움을 받으리니 이는 저를 세우시는 권능이 주께 있음이니라”(롬 14:4).

    그러므로 ‘기둥’이라는 말은 히브리어에 의하면 ‘서다’라는 동사로부터 유래된 것이다.

    라틴어의 ‘상’(像)도 ‘서다’라는 동사에서 유래된 말이다. 하지만 악인이 서는 것은 자기 변명이요, 스스로 완고해지는 것일 뿐이다. 그들은 옳은 삶을 사는 것처럼 보이며, 다른 모든 사람들보다 뛰어난 일을 하여 영원토록 빛나는 듯이 보이고자 한다. “자리”라는 용어와 관련하여서는, 자리에 앉는다는 것은 다른 사람을 가르치며 지도자와 선생으로서 행동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모세의 자리에 앉았으니”(마 23:2)라는 말씀과 같다. 그들은 교회 안에서 해악을 끼치는 자리에 앉아 있으며, 철학자들의 견해들과 사람들의 전승(傳承)들과 그들 자신의 두뇌에서 나온 권면들을 늘어 놓고, 하나님의 말씀과 양심에 따라 살고자 하는 성도들을 억압한다. 반면에, 그들은 영혼을 살리고 살찌우며 보존해 주는 하나님의 말씀은 가까이하려 하지 않는다. -마르틴 루터(Martin Luther, 1483-1546).

    1절. “오만한 자.” 악인은 깊은 죄악 가운데 빠지면 다른 사람들을 경멸하게 된다.

    히브리인들은 “누가 너로 우리의 주재와 법관을 삼았느냐”(출 2:14)라고 모세를 경멸했다.

    아합은, 미가야가 자신에게 유리한 예언을 하지 않는다고 하여 그를 핍박했다(왕상 22:18).

    벧엘의 모든 아이들은 엘리사를 비웃으며 “대머리여” 하고 함부로 조롱했다(왕하 2:23).

    조그만 독 한 방울이 증가되어 거대한 독의 바다를 이룬다.

    독사의 독 한 방울이 손에 묻어 혈관 속으로 들어가서 온 몸에 퍼지고...





    하나님의 손

    1. [사무엘상 5:11]
    이에 보내어 블레셋 모든 방백을 모으고 가로되 이스라엘 신의 궤를 보내어 본처로 돌아가게 하고 우리와 우리 백성 죽임을 면케 하자 하니 이는 온 성이 사망의 환난을 당함이라 거기서 하나님의 손이 엄중하시므로

    2. [에스라 8:22]
    이는 우리가 전에 왕에게 고하기를 우리 하나님의 손은 자기를 찾는 모든 자에게 선을 베푸시고 자기를 배반하는 모든 자에게는 권능과 진노를 베푸신다 하였으므로 길에서 적군을 막고 우리를 도울 보병과 마병을 왕에게 구하기를 부끄러워 하였음이라

    3. [에스라 8:31]
    정월 십 이일에 우리가 아하와강을 떠나 예루살렘으로 갈쌔 우리 하나님의 손이 우리를 도우사 대적과 길에 매복한 자의 손에서 건지신지라

    4. [욥기 19:21]
    나의 친구야 너희는 나를 불쌍히 여기라 나를 불쌍히 여기라 하나님의 손이 나를 치셨구나

    5. [전도서 2:24]
    사람이 먹고 마시며 수고하는 가운데서 심령으로 낙을 누리게 하는 것보다 나은 것이 없나니 내가 이것도 본즉 하나님의 손에서 나는 것이로다

    6. [전도서 9:1]
    내가 마음을 다하여 이 모든 일을 궁구하며 살펴 본즉 의인과 지혜자나 그들의 행하는 일이나 다 하나님의 손에 있으니 사랑을 받을는지 미움을 받을는지 사람이 알지 못하는 것은 모두 그 미래임이니라

    7. [이사야 62:3]
    너는 또 여호와의 손의 아름다운 면류관, 네 하나님의 손의 왕관이 될 것이라

    8. [누가복음 11:20]
    그러나 내가 만일 하나님의 손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내는 것이면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임하였느니라

    9. [히브리서 10:31]
    살아계신 하나님의 손에 빠져 들어가는 것이 무서울진저


    하나님의 얼굴

    1. [창세기 33:10]
    야곱이 가로되 그렇지 아니하니이다 형님께 은혜를 얻었사오면 청컨대 내 손에서 이 예물을 받으소서 내가 형님의 얼굴을 뵈온즉 하나님의 얼굴을 본것 같사오며 형님도 나를 기뻐하심이니이다

    2. [시편 24:6]
    이는 여호와를 찾는 족속이요 야곱의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는 자로다(셀라)



    역대하 4장 요약

    성전 안에 있는 여러가지 기구와 물건의 이름과 용도에 대해서, 여러 금으로 만든 물건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역대하 5장 요약

    솔로몬이 성전 건축을 마쳤으며 언약궤를 성전의 지성소로 옮기었으며 백성들은 하나님께 감사 찬양을 드렸다고 기술하고 있습니다.

    역대하 6장 요약

    솔로몬이 이스라엘 백성들의 복을 빌어주었고, 연설하는 것과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역대하 7장 요약

    솔로몬은 성전과 제물을 하나님께 바치고,백성들과 함께 절기를 지키었으며 이로 인해서 하나님께서 솔로몬에게 다시 나타나시어 여러가지 일들을 당부하였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5월 13일(화) 역대하 4-7장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내 얼굴을 구하면(7:14)

    내 이름으로 일컫는 내 백성이 그 악한 에서 떠나 스스로 겸비하고 기도하여 내 얼굴을 구하면 내가 하늘에서 듣고 그 를 사하고 그 땅을 고칠찌라.
    if my people, who are called by my name, will humble themselves and pray and seek my face and turn from their wicked ways, then will I hear from heaven and will forgive their sin and will heal their land.

    스스로 겸비하고(3665) 카나(kânaʽ) כָּנַע 스트롱번호 3665

    1. 무릎을 꿇다.  2. 접다. 3. 낮아지다
    발음 [ kânaʽ ]
    구약 성경  / 36회 사용

    그 악한 길(1870. 7451) 데레크 라아

    기도하여(6419) 파랄(pâlal) פָּלַל 스트롱번호 6419

    1. 심판하다. 2. 피엘형
    발음 [ pâlal ]
    구약 성경  / 84회 사용



    구하면(1245) 바카쉬(bâqash)  בָּקַשׁ 스트롱번호 1245

    1. 찾다. 2. 추구하다.  3. 피엘형 בִּקֵּשׁ
    발음 [ bâqash ]
    구약 성경 / 225회 사용

    사하고(5545) 사라흐(çâlach) סָלַח
    스트롱번호 5545

    1. 용서하다.  2. 니팔형 : 용서받다
    발음 [ çâlach ]
    구약 성경 / 46회 사용
    • 1. 원형 용서하다[여격이 수반되어], 출34:9, 왕상8:34,36,39.
      • a. 원형 니팔형 : 용서받다[죄에 대해 쓰임], 레4:20,26,31, 5:10,13.
    문법설명 / 미완료형 יִסְלַח
    • 관련 성경 /  사하다(출 34:9, 시 103:3, 암 7:2, 왕상 8:39), 사유하다(대하 6:30), 용서하다(왕상 8:50, 왕하 5:18, 사 55:7, 단 9:19), 사하여 주다(왕상 8:30, 대하 6:21), 사함을 얻다(레 4:20, 19:22, 민 15:25).

    고칠찌라(7495) 라파(râphâʼ) רָפָא 스트롱번호 7495

    1. 수선하다.   2. 고치다. 3. 신 32:39
    발음 [ râphâʼ ]
    구약 성경  / 67회 사용
    관련 성경 / 고치다(시107:20, 사19:22, 겔34:4), 고침받다(사6:10), 치료하다(창20:17, 왕하8:29, 렘33:6), 고쳐주다(민12:13, 렘6:14, 8:11), 낫게 하다(왕하20:8), 싸매다(호6:1), 낫다(레13:18, 삼상6:3, 렘51:9), 완전하다(렘9:11),되살아나다(겔47:9), 완치되다(출21:19), 수축(修築)하다(왕상18:30).
    [명] 의원(창50:2),의사(렘8:22).


    기독교인이 세상의 방법으로 전투에서 승리했다면,
    그것은 진정한 패배입니다.
    - 프랜시스 쉐퍼
    If Christians win a battle by using worldly means,
    they have really lost.
    - Francis Scheffer


    그리스도인이 거짓, 탐욕, 폭력 같은 세상의 방식으로 싸워 승리를 거두었다면,
    그것은 외형적인 승리일 뿐 진정한 의미에서는 패배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결과보다 그 과정과 동기를 더 중요하게 여기십니다.

    성경은 악을 악으로 갚지 말고,
    오히려 선으로 악을 이기라고 가르칩니다.

    그러므로 믿음의 사람은 목적을  이루기 위해 비성경적인 수단을 선택해서는 안됩니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승리는 세상의 방식이 아니라,
    사랑과 정의로 이루어진 승리입니다.

    오늘도 우리는 세상의 가치관을 따르는 쉬운 길을 내려놓고,
    때로는 더디고 결과가 보이지 않더라도 하나님의 방식을 선택해야 합니다.

    양반문화

    양반(兩班, 량반)은 고려, 조선 시대 최상급의 사회계급으로 사(士)·농(農)·공(工)·상(商) 중 사족(士族)에 해당한다. 이는 또한 조선에서 정치에 참여할 수 있는 관료와, 관료가 될 수 있는 잠재적 자격을 가진 가문, 그리고 사림(士林)이라 불렸던 학자 계층까지 포함하는 조선 왕조 특유의 사회계급이다. 본디, 문관과 무관을 지칭하는 관료적 의미였으나, 반상제가 확립되어가면서 신분상의 의미로 변화하였다. 양반은 토지와 노비를 많이 소유하고 과거, 음서, 천거 등을 통하여 국가의 고위 관직을 독점하였다. 양반은 경제적으로는 지주층이며 정치적으로는 관료층으로서, 생산에는 종사하지 않고 오직 현직 또는 예비 관료로 활동하거나 유학자로서의 소양과 자질을 닦는 데 힘썼다.

    체면(體面)
    체통(體統)

    유대사회에 바리새인들이 있었다면 조선에는 양반들이 있었다.
    바리새인들은 외형적인 것을 좋아하였다.
    기도를 할 때에도 거리에 나가서 두 손을 쳐들고 기도하기를 좋아하였다.
    사람들에게 내가 이렇게 기도한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한 것이다.
    조선사회에서도 양반은 이런 부류에 속하는 사람들이었다.
    양반 체면에
    양반 체통을 지켜야지 하며 자신이 양반이라는 신분을 자랑스럽게 생각하였다.
    문제는 양반이 양반답게
    신앙인이 신앙인답게 살아가려면 언어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
    왜냐하면 말이 곧 그 사람의 인격이기 때문이다.

    예전에 푸주간을 운영하던 사람이 있었는데 하루는 어느 양반이 야 돌쇠야! 소고기 한 근만 주라 하고 주문을 하였다.
    그러자 곧 이어서 다른 양반이 이보게 돌쇠 아범 소고기 한 근만 주시게나 하고 주문을 하였다.
    먼저 주문한 양반의 소고기의 양과 나중에 주문한 소고기의 영이 눈에 보이도록 차이가 나므로 먼저 주문한 양반이 돌쇠야 똑같은 소고기 한 근이 왜 이렇게 차이가 나느냐 하고 따지듯이 물었다.
    그러자 푸주간 주인이 예 먼저 자른 것은 돌쇠가 자른 것이고요 나중에 자른 것은 돌쇠 아범이 자른 것이라 다르지요 하고 말했다고 합니다.

    체면과 체통은 그 사람이 사용하는 언어에서부터 나타납니다.
    그러므로 신앙인은 신앙인답게 말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얼굴을 구한다는 것은 하나님은 영적인 존재로 사람의 눈으로 볼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에게 구하려면 먼저 언어를 바르게 사용해야 합니다.
    영적인 언어는 일부러 거룩한 척 목소리를 쉰소리 하듯 하는 것이 아닙니다.
    가장 영적인 것은 내 모습을 그대로 드러내는 것입니다.





    내 얼굴을 구하면(seek my face)
    왜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라고 하셨을까요?
    성경에서 하나님의 얼굴은 세 가지 상징으로 말씀합니다.
    세 가지 상징이란 "은혜"와 "평강"과 "영광"입니다.

    첫째, 하나님의 얼굴은 은혜(민수기 6:25)

    구약에서 제사장 아론의 축복기도는 민수기 6:24-26에 소개되었습니다.
    "여호와는 네게 복을 주시고 너를 지키시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그 얼굴로 네게 비취사 은혜 베푸시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그 얼굴을 네게로 향하여 드사 평강 주시기를 원하노라 할찌니라."

    민수기 6장 25절에서 하나님의 얼굴은 은혜라고 하셨습니다.

    둘째, 하나님의 얼굴은 평강(민수기 6:26)

    "여호와는 그 얼굴을 네게로 향하여 드사 평강 주시기를 원하노라 할찌니라."

    하나님의 얼굴은 평강입니다.
    세상에서는 온갖 것들이 뒤섞여 있어서 평강을 얻기가 참 어렵고 힘들다고 합니다.
    그렇지만 믿음의 사람은 마치 유라굴라 광풍 가운데서도 모든 사람들의 생명을 지켜주실 것이라는 주님의 음성을 들었던 바울에 의해서 평강을 누렸던 것처럼 오늘날도 약속의 말씀을 믿고 주장하는 믿음의 사람은 평강을 누리며 살아갈 수 있습니다.

    셋째, 하나님의 얼굴은 영광(고린도후서 4:6)

    "어두운데서 이 비취리라 하시던 그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을 우리 마음에 비취셨느니라."

    주님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이 내 마음에 비추어지고 있는지요?
    십자가의 고통을 피하여 도망하던 베드로에게 환상 가운데 나타나신 예수님께서 로마로 향하여 가시는 것을 보게 됩니다.
    베드로가 버린 순교의 십자가를 예수님께서 대신 짊어지시려고 가신다는 음성을 듣습니다.
    베드로는 즉시 돌이켜 발걸음을 로마로 돌립니다.
    그리고 기꺼이 순교의 길을 선택한 것은 십자가 후에 약속된 하나님의 영광을 확신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는 자의 삶

    요새 언어 폭력적인 세상 돌아가는 것을 보면 그들이 무엇을 추구하고 구하는지 가늠이 가질 않는다.
    그런데 안타까운 것은 잡음(雜音, 시끄러운 소리)을 정음(淨音, 깨끗한 소리)이라고 하는 사람들이 있으니 더욱 할 말이 없어진다.
    이럴 때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구할 것이 무엇인가를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다.
    그리스도인이라는 사람들 중에도 잡음과 정음을 분별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이다.

    먼저 깎아내리려는 의도가 없음을 밝힌다.
    어느 교회가 관광 명소가 될 만한 거대한 교회당을 건축했다고 한다.
    외형만 보아도 압도되어 위압감이 들 만하다는 것이다.
    누려 본 자는 더 누려 보려고 하는 것일까? 세상적으로 말하면 커서 나쁠 것 없고 편리해서 나쁠 것 없다.
    그런데 그 건축물을 놓고 세상 사람들은 물론 교계에서마저 왈가불가하고 있다는 것이다.
    자기네 돈 가지고 자기네 건물 짓는데 무슨 할 말인가 하겠지만은 반그리스도적이라는 비판이 일고 있는 이유들을 생각해 보길 바란다.

    사람들은 서구 기독교의 몰락을 보며 유명세와 편리함이 망하게 하였다고 하는 시각이 있다.
    웅장하고 아름다운 교회당, 그 안에서 추구하는 것이 영적으로 더 아름답고 더 거룩함을 추구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은 것일까마는 그렇게 된다는 것은 하늘의 별따기라는 것이 역사적 진단의 결과이다.
    아름답고 편안함이 나쁘다는 말이 아니라 그것에 붙잡혀 거친 세상과 불편한 환경에 시달리는 사람들을 외면할 수 있다는 걱정이다.
    그래서 복 복 하는 기복 신앙을 비판하는 것이다.
    잘살고 잘 먹고 누리는 기복주의 신앙을 추구하다 보면 하나님도 잊어버리고 그리스도인이 해야 할 본분을 지나쳐 버린다는 이야기다. 그리고 결국에는 교회 밖에서 세속적 행복을 추구하게 되어 버리면서 교회당은 문을 닫게 되어 버린다는 슬픔이다.
    땅에서 출세하고 왕처럼 누리고 군림하기 위해서 예수를 믿는다면 그 말 자체도 불신앙적 언어폭력인 것이다.

    개혁자 칼뱅은 "나의 무덤을 만들지 말라"고 했다던가?
    그래서 제3자가 그의 무덤 자리에 칼뱅의 약자 CV만 표시해 놓았다고 하던가?
    자신이 높아지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보다 낮아지기 때문에 존귀하신 주님을 높이기 위해서 그렇게 했다던가?
    칼뱅이 구한 것은 무엇인가?
    자신의 얼굴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였고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을 구하였던 것이다.

    하나님의 얼굴을 구한다는 말은 무슨 의미일까?
    하나님은 영이시고 육체가 없으시다.
    그분은 항상 빛으로 존재하신다.
    그의 얼굴은 볼 수 없으며 보는 날에는 죽는다(출 33:20).
    죄인 인간이 거룩한 하나님을 볼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야곱은 하나님의 사자를 대면하였고 하나님의 은혜로 생명이 보전되었다. 하나님을 만난 장소를 브니엘(프니엘, 하나님의 얼굴)이라고 명명하기도 하였다(창 32:30).
    이것은 특별 은총이었다.

    성경 시편 105편 4절에서 다윗은 "그(하나님)의 얼굴을 항상 구할지어다(바크슈 파나브 타미드)"라고 하였고
    시편 143편 7절에서도 "주의 얼굴을 내게서 숨기지 마소서(알 타스테르 파네카 밈멤니)"라고 하였다.

    다윗의 삶 속에는 오직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는 것만이 전부였다.
    다윗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얼굴을 구한다는 표현은 하나님을 사모한다는 의미요 앙망한다는 의미이며 명령대로 순종하겠다는 선언이다.
    하나님의 인간을 향한 방향의 여부에 따라 생과 사 그리고 행운과 불행이 교차되기 때문이요 인간이 하나님을 바라보고 바라보지 않는 여부에 따라 같은 흐름이 따르기 때문이다.
    이것은 육신을 넘어 영혼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인간은 권력이나 권위 그리고 존경과 칭찬을 맛보지 못했을 때 그것을 최종 목적으로 추구하게 된다. 그러나 그런 것들을 맛보고 나면 그것이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터득하게 됨을 다윗은 보여 준다. 다윗은 골리앗을 무너뜨리고 백성들로부터 "사울은 천천이요 다윗은 만만이다"라는 극치의 영웅 대접을 받았었다(삼상 18:7). 그러나 권력의 무상함을 통해 그런 것들은 적들의 시기의 대상이 되며, 지나가는 바람 같은 것임을 깨닫게 된 것이다. 그래서 사람의 칭찬이나 추앙에 감사하는 자리에 머무르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얼굴만을 구하게 되는 자리에 이르게 된 것이다.

    "내가 여호와께 청하였던 한 가지 일 곧 그것을 구하리니 곧 나로 내 생전에 여호와의 집에 거하여 여호와의 아름다움을 앙망하며 그 전에서 사모하게 하실 것이라(시 27:4)."

    하나님의 구원을 경험한 자로, 하나님의 기름 부음을 받은 자로서 그가 구하고 사모하고 앙망해야 하는 초점을 발견하게 된 것이다. "내 평생에 여호와의 집에 살면서 그분의 아름다움을 보며 그분의 얼굴을 보기를 원합니다"는 참신앙을 고백한 것이다.

    이것은 곧 하나님의 얼굴을 구한다는 것은 하나님과의 관계성의 회복을 말하는 것이다.
    신약시대의 우리들도 구약시대의 다윗처럼 하나님 아버지의 얼굴을 구하듯이 하나님의 독생 성자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을 구하여야 할 것이다.
    사람의 칭찬이나 세상에서의 유명세에 편승되려고 안절부절못하지 말고 안락한 환경에 안주하려고 하지 말 것이며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가고 싶은 심정으로 예수님의 얼굴을 앙망하면서 피로 얼룩진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전하며 나누어야 할 것이다.
    나만 크고 유명해져서 자랑하고 군림하는 자가 되자가 아니라 우리 모두 하나가 되어 하나님 앞에서 영적으로 행복하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자가 되어야 할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는 자의 삶인 것이다.


    성경 속의 얼굴

    성경에서 얼굴은 다양한 상징적 의미를 담고 있으며, 특히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관계, 내면 상태, 영적 상태를 표현하는 중요한 주제입니다.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에게 자신의 얼굴을 비추신다는 것은 하나님의 축복과 임재를 상징하며, 반대로 얼굴을 숨기신다는 것은 심판이나 단절을 나타냅니다. 여기에서는 얼굴이 상징하는 것에 대한 더 많은 성경 구절과 그 의미에 대해 깊이 있게 살펴보겠습니다.

    1. 하나님의 얼굴 – 축복과 은혜

    민수기 6:24-26  "여호와는 네게 복을 주시고 너를 지키시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그의 얼굴을 네게 비추사 은혜 베푸시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그 얼굴을 네게로 향하여 드사 평강 주시기를 원하노라."

    하나님의 얼굴을 비춘다는 것은 그분의 임재와 은혜가 그 사람에게 임한다는 상징입니다. 이는 하나님의 보호와 인도, 그리고 평강이 함께할 것이라는 약속을 나타냅니다. 하나님의 얼굴을 비추시는 것은 하나님의 축복과 은총을 의미하며, 우리에게 평강을 주시는 하나님의 뜻을 드러냅니다. 여기서 하나님의 얼굴은 그분의 임재와 축복의 상징입니다.

    2. 얼굴을 숨기심 – 죄와 심판

    시편 13:1 "여호와여 어느 때까지니이까 나를 영원히 잊으시나이까? 주의 얼굴을 나에게서 어느 때까지 숨기시겠나이까?"

    하나님이 얼굴을 숨기신다는 것은 그분의 임재가 멀어지거나, 하나님께서 그 사람을 돌보시지 않는 상태를 나타냅니다. 이는 주로 죄로 인해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절된 상태를 상징하며, 하나님의 심판이나 훈련을 의미할 수 있습니다. 이 구절에서 시편 기자는 하나님의 얼굴을 숨기신 것에 대해 괴로워하며 하나님께 다시 돌아오시기를 간구하고 있습니다.

    3. 얼굴을 구함 – 하나님과의 친밀함 추구

    시편 27:8 "너희는 내 얼굴을 찾으라 하실 때에 내 마음이 주께 말하되 여호와여 내가 주의 얼굴을 찾으리이다 하였나이다."

    하나님의 얼굴을 찾는다는 것은 하나님의 임재와 인도하심을 간절히 구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는 하나님의 뜻을 구하고 그분과의 깊은 교제를 갈망하는 신앙인의 마음을 나타냅니다. 얼굴을 찾는다는 것은 단순히 하나님의 축복을 구하는 것이 아니라, 그분과의 친밀한 관계를 추구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4. 얼굴의 빛남 – 하나님의 영광 반영

    출애굽기 34:29 "모세가 그 증거의 두 돌판을 손에 들고 시내 산에서 내려오니 그 산에서 내려올 때에 모세는 자기가 여호와와 마라본 까닭에 얼굴 피부에 광채가 나나 깨닫지 못하였더라."

    모세의 얼굴에 빛이 났다는 것은 하나님의 임재와 영광이 그에게 임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과 깊이 교제한 사람의 얼굴에는 그분의 영광이 반영되며, 이는 하나님과의 친밀한 교제가 가져오는 내면의 변화와 영적인 빛을 상징합니다. 모세는 하나님을 대면한 후 그 영광을 반영하며, 그 얼굴의 광채는 하나님의 임재가 얼마나 강력한지를 보여줍니다.

    5. 부끄러운 얼굴 – 죄와 수치의 상징

    에스라 9:6 "말하기를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부끄러워 낯을 들지 못하오니 우리 죄악이 많아 정수리에 넘치고 우리의 허물이 커서 하늘에 미치나이다."

    여기서 '낯을 들지 못한다'는 것은 죄로 인해 하나님 앞에서 부끄러움을 느끼는 상태를 나타냅니다. 이는 죄의 결과로 인해 하나님과의 관계가 멀어지고, 그로 인해 오는 수치심과 고통을 상징합니다. 죄는 우리를 하나님 앞에서 부끄럽게 하며, 그분을 똑바로 바라보지 못하게 만듭니다.

    6. 하나님의 얼굴을 구함 – 회복과 은혜의 상징

    시편 80:3 "하나님이여 우리를 회복하소서 주의 얼굴 빛을 비추사 우리가 구원을 얻게 하소서."

    하나님의 얼굴이 비춰진다는 것은 회복과 구원을 상징합니다. 이는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을 통해 구원의 은혜를 얻는 것을 의미하며, 그분의 얼굴을 구하는 것은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구원을 갈망하는 자세를 나타냅니다. 이 구절은 하나님께서 그분의 얼굴을 비추어 주실 때 우리가 구원과 회복을 경험할 수 있음을 보여줍니다.

    7. 하나님을 대면함 – 변화의 상징

    고린도후서 3:18 "우리가 다 수건을 벗은 얼굴로 거울을 보는 것 같이 주의 영광을 보매 그와 같은 형상으로 변화하여 영광에서 영광에 이르니 곧 주의 영으로 말미암음이라."

    하나님의 영광을 대면하는 것은 우리의 내면과 외면을 변화시키는 강력한 경험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볼 때 우리는 그분의 형상으로 점점 변화되며, 이는 우리의 신앙과 삶이 성숙해짐을 나타냅니다. 이 구절은 신자들이 하나님의 영광을 반영하는 존재로 변해가는 과정을 상징합니다.

    8. 얼굴을 맞대어 보는 것 – 친밀한 교제의 상징

    고린도전서 13:12 "우리가 지금은 거울로 보는 것 같이 희미하나 그 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 지금은 내가 부분적으로 아나 그 때에는 주께서 나를 아신 것 같이 내가 온전히 알리라."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본다'는 것은 하나님과의 완전한 교제와 친밀함을 의미합니다. 지금 우리는 하나님을 부분적으로 알지만, 궁극적으로 그분을 직접 대면하게 될 날이 올 것입니다. 이 구절은 하나님의 임재 속에서 완전한 교제가 이루어질 것을 예고하며, 그분과의 친밀함을 상징합니다.

    9. 얼굴에 나타나는 기쁨과 평안

    시편 16:11 "주께서 생명의 길을 내게 보이시리니 주의 앞에는 충만한 기쁨이 있고 주의 오른쪽에는 영원한 즐거움이 있나이다."

    하나님의 임재 앞에서 우리는 충만한 기쁨과 평안을 누립니다. 그분과의 교제 속에서 얻게 되는 내적 기쁨은 얼굴에 드러나며, 하나님과의 친밀한 관계는 우리에게 영적인 안정과 평강을 가져옵니다. 얼굴에 나타나는 기쁨은 하나님을 통해 얻는 참된 기쁨과 생명을 상징합니다.

    결론

    얼굴은 성경에서 매우 중요한 상징으로, 하나님과의 관계, 영적 상태, 그리고 내면의 변화를 표현하는 도구로 사용됩니다.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는 것은 그분의 임재를 간구하는 것이며, 그분의 얼굴이 우리에게 비추는 것은 축복과 은혜를 상징합니다. 반대로, 하나님의 얼굴을 숨기신다는 것은 그분의 임재에서 멀어진 상태를 나타냅니다. 또한, 우리의 얼굴은 내면의 상태를 반영하며, 죄로 인한 수치와 회개, 또는 하나님과의 교제에서 오는 기쁨과 평안을 나타냅니다. 이러한 얼굴의 상징은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우리가 어떻게 변화되고 성장하는지를 보여주는 중요한 영적 교훈을 담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라

    신앙생활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서슴없이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는 삶"이라고 하겠습니다.
    인터넷 다국어 성경 사이트에서 "하나님의 얼굴"이란 용어를 검색하면 36구절이라고 나타납니다.
    구약에서는 34구절 신약에서는 4구절입니다.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는 삶"이 무엇인가를 알려면 "하나님의 손을 구하는 삶"과 대조해서 살펴보면 분명하게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손을 구하였다는 용어는 뭔가 얻기를 바라고 그 손을 바라보았다는 뜻입니다.

    성경에 나오는 하나님의 사람들, 모세, 다윗, 바울 그 외 누구든지 하나님과 동행했던 하나님의 사람들은 모두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는 삶’을 살았다.

    반면에 성경에 나오는 ‘하나님의 손을 구하는 삶’을 살았던 대표적 인물들은, 광야 생활하던 이스라엘 백성들이다.
    광야 생활하던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손을 구하는 삶’이었고, 모세는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는 삶’을 살았다.
    출애굽 백성들과, 모세는, 환경적으로 같은 상황(광야)에 처해 있었다.
    그러나 그들의 신앙은 확연히 달랐다.
    모세는 ‘하나님의 얼굴’을 구했지만 즉 하나님의 은혜, 사랑, 임재를 구했지만, 백성들은 ‘하나님의 손’을 구했다. 즉, 하나님의 축복, 음식, 풍요를 구했다.
    똑같은 환경에 처해 있었지만, 구하는 바가 너무 달랐다.

    히브리서 3:7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하나님을 격노케 했다고 했다.

    히3:15, 17

    그리고 하나님을 40년 동안 시험했다고 했다. :9

     

    그들이 하나님은 안 믿은 것이 아니었다.

    하나님을 믿기는 믿었지만, ‘하나님의 얼굴’을 구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손’을 구한 것이었다.

     

     


    고 볼 때

    오늘날 어떠한 훌륭한 하나님의 종이 있다 하더라도,

    오늘날 어떠한 위대한 교회가 있다 하더라도,

     

    내가 그 종을 따라다닌다고,

    내가 그 교회에 이적해서 다닌다고 해서

    내 삶이 저절로 변화되는 것은 아니라고 본다.

     

    내가 한국에서, 아니 세계에서 최고 훌륭한 교회 나간다고 해서

    내가 변화되는 것은 아니다.

    우리 신앙은 환경에 따라 달라지지 않는다는 뜻이다.

    (물론 선한 영향력은 받겠지만, 그보다 더 중요하게 고려할 요소가 있다는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들과 모세는, 똑같은 환경에 있었다.

    그런데 모세는,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는 삶을 살았고,

    광야 생활하던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손을 구하는 삶’을 살았는데,

     

    그들은 똑같은 환경에 처해 있었지만,

    그들 각자가 어떤 삶을 사느냐에 따라서,

    그들의 신앙과 그들의 운명은 완전히 달라졌다.

     

    그들과 하나님과의 관계는 완전히 달라졌다.

    그들에게 주어지는 유업도 완전히 달랐다.

     

    그래서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환경이 아니고,

    우리 각자가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는 삶’을 사느냐, 그렇지 않느냐

    여기에 달려있다.

    즉, 본질적 신앙생활을 하느냐/ 피상적 신앙생활에 그치느냐.. 거기에 달려있다.

     

     

    ▲내게 은사가 나타나도.. 내가 변화되지 않을 수 있다. ← 하이라이트

    예배 시간이나, 집회 시간에

    하나님께서 임재하시면서 운행하시는 곳에 우리가 오래 머물러 있으면

    어떨 때는 우리에게 은사가 임할 수 있다.

     

    예를 들면,

    예언 은사가 임하면,

    다른 사람을 위해 기도할 때, 환상도 보이고 성령의 감동도 주어진다.

     

    그렇기 때문에 본인은, 자기가 하나님과 친밀한 관계에 들어간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아무리 내게 은사가 임해도

    내 스스로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는 삶이 되지 않고,

    그래서 실제로 내 삶이 변화되지 않으면,

    하나님과 친밀한 교제는.. 내게 열리지 않는다.

     

    내가 다른 사람을 위해 기도해줄 때

    환상도 보이고, 감동도 주어지고, 그럴 수 있다.

    내게 은사가 나타나고, 내게 어떤 감동들이 주어지면서,

    환상도 보여서, 그들을 위해 예언도 해 준다.

    그런데 정작 자기 자신은, 하나님 앞에 서면 캄캄해진다.

     

    다른 사람을 위해서는 환상이 보이는데,

    하나님 앞에서 자기 모습은 안 보인다.

     

    그런데 이 경우에, 즉 하나님과 친밀함이 없이도,

    그냥 은사가 나타나서, 내게 그런 감동들이 주어진다는 것이다.

    (그런데, 자기는, 은사가 자기를 통해서 나타나니까

    자기가 하나님과 친밀한 교제관계에 있는 줄로 착각한다. 남다른 은사 때문에!)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면.. 하나님 앞에서 내 모습이 보인다.

    내가 하나님과 친밀함 가운데 있지 않으면,

    나타나는 공통적인 특징 중 하나는

    자기 삶이 변화되지 않는다.

     

    이 경우에는, 아무리 신기한 외적 은사가 나타나도,

    그것들을 다 무시해야 한다.

     

    언제 내 삶이 변화되는가 하면,

    하나님 앞에서 자기 모습이 보여야.. 내 삶이 변화된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친밀함 가운데 있다는 싸인 중 하나는,

    (은사의 나타남보다) 자꾸 내 죄가 보인다는 것이다.

     

    이사야의 예를 들면,

    그가 하나님의 영광의 임재 앞에 섰을 때,

    자기 모습, 자기 죄악이 보였다는 점이다.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입술이 부정한 자로서

    거룩하신 하나님을 뵈었음이니라.’

    그는 이렇게 절망하며 애통했다.

     

    이사야는 정말 한편으로는 거룩한 사람이었다.

    왜냐하면, 그가 하나님의 그 영광의 임재 앞에 갔을 때,

    자기 입술이 부정한 죄 밖에 보이지 않았으니까!

     

    그런데 이사야처럼 이렇게 거룩한 사람도,

    하나님 앞에 나아가니까 (하나님과 친밀한 교제에 들어가니까)

    은사가 나타나기 이전에, 자기 죄가 보이더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자기 죄가 보이지 않고, 자기 본모습이 보이지 않는 가운데

    은사만 계속 나타나는 것은,

    심각한 자기 성찰과 조심을 요한다.

    하나님과 멀어진 상태에서도, 그런 일은 얼마든지 일어나기 때문이다.

     

    ▲지금 이 설교의 주제는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는 삶’이며,

    이것이 신앙생활의 본질 중 하나이다.

     

    하나님의 얼굴을 구한다는 것은 다른 말로, 하나님과 친밀한 관계에 들어가는 것인데..(광야에서 모세가 그렇게 했다)
    그런 상태에 들어간 사람의 증거는 자기의 본 모습이 보인다.
    왜냐하면, 하나님과 친밀한 관계가 있을 때..
    그 분의 영광, 그분의 관점, 그 분의 기준이 보이고 그 앞에 비춰진 자기 모습이 보이기 때문에 진정한 회개가 일어나고, 진정한 회심이 되어진다.
    그런데 하나님과 친밀함 가운데 없으면, 내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
    내 죄악된 모습이!
    다른 사람을 위해 기도해 줄 땐, 이런 환상도 보이고, 저런 감동도 주어질지 몰라도 자기 자신의 실상, 자기 죄에 대한 회개가 안 나오는 것은, 그가 현재는 하나님과 멀어진 관계에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종종 착각한다.
    왜냐하면, 다른 사람에 대한 환상과 예언이 자기를 통해 주어지니까 자기가 꽤 신령한 사람으로 착각한다.
    물론 그가, 이웃에 대해, 환상과 예언을 말하므로, 신령한 사람일 수 있다.
    그리고 그 환상과 예언이 맞을 수도 있다.
    그러나 꼭 그런 은사의 나타남만으로, 그가 증명되는 것은 아니다.
    진짜 하나님과 가까운 사람은,‘자기 자신의 모습’을 보게 된다.

    다시 말하면,‘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는 사람은 반드시 ‘하나님의 얼굴 앞에서, 자기 본 모습을 보게 되고, 회개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것은 일생동안 지속되는 성화(회개)의 과정이다.

    내 모습이 보이지 않으면, 내 삶이 변화되지 않는다.

    그리고 내 모습은..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는 자에게만.. 보인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임재 앞에 갔을 때만.. 보인다.

     

    그래서 많은 사역자들이

    다른 사람에 대해서 성령사역을 하지만,

    정작 자기 삶은 어느 수준에서 멈추어져 버린다.

    이것은 스스로 시정되어져야 한다.

     

    이것은 우리 각자 자신이, 성령의 인도를 받아서, 분투노력해야 한다.
    즉, 경건의 훈련을 치러야 한다.
    이것은 우리가 2천년을 거슬러 올라가서, 예수님을 직접 따르더라도 그냥 자동적으로 되어지지 않는다.

    이 교회를 다니느냐, 저 교회를 다니느냐.. 이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여러분이 우리 교회에 나오지 않고, 다른 교회를 다니신다 하더라도 심지어 그 교회가 아주 연약한 교회라 하더라도)

    내가 거기서 하나님의 얼굴을 집중적으로 구하면  하나님 앞에서 내 모습이 보이게 되고.. 그래서 회개하게 되고 점점 놀랍게 변화된다.
    이런 영적 성장, 신앙 성숙의 과정이 (저는 본격적으로 약 20년 되었는데) 혹시 아직 여러분께 일어나지 않아서, 그저 내가 어느 교회에 다니고, 내 직분이 OO이다’ 라는 사실로 만족하고 계신다면,  그런 허상에서 속히 깨어나서, 진정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는 신앙’이 되도록, 주님께 심각하게 기도로 요청하게 되시기 바란다.
    반드시 주님이 도와주시고, 응답해 주실 것이다.






    역대하 1장 요약

    솔로몬은 일천 번제를 드렸으며 하나님께 지혜와 지식을 구하게 됩니다.
    솔로몬의 부귀영화, 병거와 마병의 규모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역대하 2장 요약

    솔로몬이 성전을 지을 사람을 준비하였으며, 두로 왕에게 성전 지을 기술자들과 준비물을 요청합니다.
    두로왕이 기술자 후람을 솔로몬에게 천거하였고, 이방인의 숫자를 세어보았다고 기술하고 있습니다.

    역대하 3장 요약

    솔로몬이 모리아산에 성전을 짓기 시작하였고, 지은 성전의 규모와 크기에 대해서 기술하고 있습니다.


    5월 12일(월) 역대하 1-3장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모리아산(3:1)

    솔로몬예루살렘 모리아산에 여호와의 전 건축하기를 시작하니 그곳은 전에 여호와께서 그 아비 다윗에게 나타나신 곳이요 여부스 사람 오르난의 타작마당에 다윗이 정한 곳이라.
    Then Solomon began to build the temple of the LORD in Jerusalem on Mount Moriah, where the LORD had appeared to his father David. It was on the threshing floor of Araunah the Jebusite, the place provided by David.

    역대하의 내용은 솔로몬의 치세에서부터 시드기야 치세에 이르기까지의 유다 모든 왕들의 역사를 소개합니다.
    또한 바벨론 포로 귀환민들에게 신정사회 재건을 촉구합니다.

    모리아(Moriah)란 지명의 뜻은 "높은" 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정확한 위치는 알려지지 않다고 합니다.
    성경에서는 모리아산에 대하여 두 차례 언급합니다.
    첫째는 아브라함이 이삭을 제물로 바치려던 곳(창 22:2)
    둘째는 솔로몬이 성전을 세운 곳(대하 3:1)

    모리아 산(Mt. Moriah)
    현재는 성전산(Temple Mount) 이라고 하며 솔로몬의 성전은 없고 황금색 돔 지붕을 한 이슬람의 아크사 모스크(Al Aqsa Mosque)가 세워져 있습니다.

    골방(마태복음 6:6)
    너는 기도할 때에 네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은밀한 중에 계신 네 아버지께 기도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

    * 골방(5009) 타메이온(tamĕiŏn) ταμεῖον

    ταμεῖον, ου, τό 스트롱번호 5009

    1. 창고.  2. 숨겨진 골방
    발음 [ tamĕiŏn ]
    어원  / ταμίας ‘조제자’의 파생어의 중성 압축형
    • 1. 창고, 곳간, 눅 12:24.
    • 2. 숨겨진 골방, 밀실, 마 6:6, 24:26, 눅 12:3.

    • 관련 성경  /  골방(마 6:6, 24:26, 눅 12:24). 

    προσευχή, ῆς, ἡ 스트롱번호 4335

    1. 기도.  2. 기도처
    발음 [ prŏsĕuchē ]
    어원  / 4336에서 유래
    • 1. 기도, 마17:21, 막9:29, 눅22:45, 행3:1.
    • 2. 기도처, 기도소, 교회당, 행16:13,16.
    • 관련 성경  /  기도(막 9:29, 행 3:1, 딤전 2:1), 기도하는 곳, 기도실(행 16:13), 구하는 것(마 21:22), 기도하기(행 2:42).


    골방 기도 - 타메이온 프로슈케

    영적 고향을 생각하라
    골방 기도처를 만들라

    * 모리아산 - 골방 기도(타메이온 기도
    - 옷장 속의 기도 Προσευχή στην ντουλάπα


    네 골방에 들어가
    - 골방은 경건한 유대인들이 조용히 하나님께 기도 드리던 장소였던 것으로 보이며, 이는 엘리사의 침실과 비슷한 곳이었던 것 같다(왕하 4:33). 여기서 골방은 바리새인들이 기도의 장소로 선택하였던 '회당과 큰 거리 어귀'와 뚜렷이 대조되고 있다. 한편 '골방'의 원어 '타메이온'(*)은 '자르다'는 뜻의 '템노'(*)와 '청지기'란 뜻의 '타미아스'(*)의 합성어로서 세상 모든 것과 단절하고 오직 하나님과만 내밀(內密)한 대화를 나눌수 있는 공간을 의미한다. 그리고 이 단어는 저장실(store room), 내실(inner room), 침실(bed room, 사 26:20)등을 가지고 있다.

    문을 닫고
    - 사 26:20에는 '네 밀실에 들어가서 네 문을 닫고 분노가 지나기까지 잠간 숨을지어다'란 말씀이 있는데, 본문은 분명히 이 예언의 말씀을 반영하고 있다.
    그런데 이사야가 이 예언을 베풀 때는 분명 마지막 심판날의 무서운 상황을 바라보고 있었다. 따라서 예수께서는 아마 제자들이 이런 심판날을 두려워하는 심정으로 기도하되, 이를 관습화하기 원하셨던 것같다. 여하튼 자신의 방문을 닫는다는 것은 잠시나마, 오직 자신과 하나님 이외에는 어떠한 제 3자의 개입을 불허(不許)한다는 뜻인 동시에 순결한 영혼의 교제만이 있을 뿐임을 시사한다.

    은밀한 중에...기도하라...갚으시리라
    - 오직 하나님만을 바라보고 그분 앞에 아무런 숨김없이 간구하는 자에게 그 기도의 자리에 함께 하셔서, 모든 것을 듣고 계셨던 그 하나님께서 모두 '갚으실'(4절) 것이다.
    이는 하나님의 신실하신 품성을 온전히 반영한 약속이다.




    성경에서 모리아 산은 믿음의 조상으로 불리는 아브라함이 100세에 얻은 아들을 하나님의 지시로 번제물로 드리려고 했던 산이었습니다.
    그 당시 아브라함은 예루살렘에서 남쪽으로 약 120km 정도 떨어진 그랄과 브엘세바(현재 지명 Beer Sheva) 근처에 거주했다(창세기 20, 21장).
    아들을 번제(burnt offering, 사람을 불에 태우는 제사)로 바치라는 명령을 받고 아브라함은 사흘 길(창 22:4)을 걸어 모리아 산에 도착한다.

    모리아 산에 대한 또 다른 기록은 구약성경 역대하에 나온다.
    솔로몬이 모리아 산에 여호와의 성전을 건축했다는 기록이다.
    그래서 모리아 산을 지금은 성전산(Temple Mount)이라고 부른다.

    현재 모리아 산은 솔로몬의 성전은 오간데 없고 황금색 돔 지붕을 한 이슬람의 알 아크사 모스크(Al Aqsa Mosque)가 자리 잡고 있다.
    가까이 가서 보면 모리아 산(성전산)이 예루살렘 성벽으로 둘러싸여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Al-Aqsa Mosque - Jerusalem

         Rundreisende - Israel - Felsendom


    당시 예루살렘 언덕에 붙여졌던 이름이 모리아산이었는데 이곳은 아브라함이 그의 제단을 쌓았던 곳으로서 솔로몬 성전의 유적이기도 하다(대하 3:1)
    이 성전 언덕의 정상 바위는 오늘날 이곳에 세워진 오마르 모스크에 안치되어 있다.
    현재 모리아 산이라고 추정하는 이스라엘 성지에는 바위 사원 실내에는 폭 12야드 길이 15야드 높이 2야드의 넓직한 바위가 있다.
    이 바위는 아브라함이 이삭을 번제물로 바치던 제단이라고 전해진다.
    표면에는 골이 패어 있어서 제물의 피가 흘러내리도록 되어 있다.
    이슬람들은 이 바위를 딛고 마호메트가 하늘로 승천하였다고 믿는다.
    이 때문에 예루살렘은 사우디아라비아의 메카메디나에 이어 이슬람 세계의 3대 성지가 되는 것이다.

    모리아산의 대속 제물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100세에 겨우 생긴 외아들 이삭을 모리아산으로 데리고 가서 번제를 드리라는 청천벽력과도 같은 시험을 하시게 됩니다.
    그러나 `불과 나무는 있거니와 번제할 어린 양은 어디 있나이까'라고 묻는 이삭의 질문에, 아브라함의 마음속에는 지금까지 자신의 인생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의 섭리로 인하여 전능하시고 신실하신 하나님께서 자기를 위하여 친히 준비하시리라는 `여호와 이레'의 신앙이 이미 자리를 잡고 있었습니다.(창 22:8)

    이 사건에 대하여 히브리 기자는 아브라함의 신앙 상태를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시험을 받을 때에 믿음으로 이삭을 드렸으니 저는 약속을 받은 자로되 그 독생자를 드렸느니라 저에게 이미 말씀하시기를 네 자손이라 칭할 자는 이삭으로 말미암으리라 하셨으나 저가 하나님이 능히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실 줄로 생각한지라 비유컨대 죽은 자 가운데서 도로 받은 것이니라'(히 11:17-19)라는 기록대로, 아브라함은 이삭이 여호와 하나님의 약속을 받은 자임을 확신하여, 혹 자신이 번제로 죽여 하나님께 드린다 할지라도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다시 부활시키실 줄로 생각하였던 것이었습니다. 이미 아브라함에게 부활의 신앙이 있었기에, 그는 조금도 주저함 없이 이삭을 묶어 번제로 드리려 했던 것이었습니다.

    이 모리아산은 지금의 골고다 언덕입니다. 아브라함의 외아들 이삭이 번제로 바쳐 지려 했던 바로 그 같은 장소에서 2000년후에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가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 양으로 희생 제물이 되셨던 것입니다. `그가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 때에도 그 입을 열지 아니하였음이여 마치 도수장으로 끌려가는 어린양과 털 깎는 자 앞에 잠잠한 양같이 그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사 53:7)라는 말씀과 같이, 십자가의 수욕 앞에서 아무 입도 열지 아니하셨던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과 모리아산에서 아브라함의 무서운 칼날 앞에서도 잠잠하였던 이삭의 모습이 너무도 흡사하지 아니합니까?

    솔로몬 성전이 모리아 산에 세워진 이유는 무엇일까?
    역대기 저저는 솔로몬 성전 건축에 대해 두 가지 역사적인 사건을 언급합니다.
    첫째는 아브라함이 이삭을 번제로 바치려고 했던 모리아산입니다.
    둘째는 다윗이 여부스 사람 오르난으로부터 구입한 타작마당으로 다윗 때에 이미 성전이 들어설 자리로 예비된 곳입니다.

    성경에서 역대하 본문이외에 모리아산이 언급된곳은 창세기 22장이 유일하다(창세기 22:2).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땅으로 가서 내가 네게 일러 준 한 산 거기서 그를 번제로 드리라"

    하나님의 구속사적 관점에서 아브라함이 독자 이삭을 바치는 사건의 중요성을 이해할 때 모리아산에  성전이 세워진 것은 단순한 우연의 일치가 아니다. 독생자 예수그리스도를 통해 아루어질 하나님의 구원 계획은 모리아 산에서 드려질 뻔 했던 독자 이삭을 통해 잘 드러났고 이러한 역사적인 장소에 하나님의 자신의 임재의 상징인 성전의 기초를 놓으신 것이다.

    유대인들의 성서 주석인 <미드라위>는 아브라함이 이삭을 바치려는 본문에 주석을 달면서 성전과 관련된 보다 구체적인 설명을 덧붙이고 있다.
    바로, 아브라함이 이삭을 번제로 바치려고 할 때 수백년 후 그곳에 세워질 성전에 대한 환상을 보았다는 것이다.
    이뿐 아니라 성전이 세워질 모리아 산에 대한 유대인들의 특별한 해석은 천지창조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미드라쉬>는 하나님이 천지창조 여섯째날 흙으로 아담을 만들때도 훗날 세워질 모리아산에서 흙을 취해 아담을 창조했다고 말한다.
    방주에서 나온 노아 역시 가장 먼저 제단을 쌓고 제사를 드렸는데 <미드라쉬>는 이곳 역시 모리아 산이라고 한다.
    모리아산과 관련된 유대인들의 이같은 독특한 해석은 예루살렘성전이 예루살렘의 모리아산에 세워질 수 밖에 없는

    설득력 있는 이유를 제시한다고 할 수 있다
    다윗은 왜? 오르난의 타작마당에 성전을 지으려고 했을까?
    솔로몬이 성전을 세운 장소는 아브라함이 이삭을 바친 모리아산인 동시에 그의 아버지 여부스사람 오르난한테서 은 50세겔을 주고 산 곳이기도 하다.
    다윗은 통치 말년 요압과 중신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인구조사를 강행하다가 하나님의 징계를 받아 온 이스라엘에 역병이 돌아 7만명이 죽는 불행을 겪에 되었다. 이때 다윗은 갓 선지자의 충고를 좆아 여부스 사람 오르난의 타작마당을 사서 번제를 드렸고 이로소 역병은 멈추었다.
    바로 그러한 역사적 장소에 다윗은 성전을 짓고자 했고 그 임무를 완수한 사람이 솔로몬이다.

    이스라엘의 중심부에 위치한 여부스는 다윗때까지 이스라엘에 정복되지 않는 가나안 성읍이었다.
    이 여부스성을 정복해 다윗성으로 이름을 바꾸고 이스라엘의 수도로 바꾼 사람이 다윗왕이다.
    다윗은 20년동안 가럇여아림에 안치되었던 법궤를 다윗성으로 옮겨왔고 이로서 다윗성은 명실상부한 정치적 종교적 수도인 '예루살렘'으로 위치하게 되었다. 

    다윗이 타작마당 자리에 성전을 세운 이유는?

    가나안 원주민들이 섬기던 바알신과 관련이 있다 농경문화의 가나안 원주민들은 도시를 세울 때  가장 높은 곳에 타작마당을 만들었다. 그리고 타작마당 옆에 바알 신전을 만들어 풍성한 수확을 가져다 준 바알신을 숭배했다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에 들어오기전에 가나안 땅 최고의 신은 바알이었다.
    그리고 바알이 숭배받던 신전이 있던 곳이 타작마당이었다.
    그러므로 이러한 장소에 여호와의 성전이 들어선것이다. 당연히 바알신전은 파괴었을 것이고 그 자리를 성전이 대체한 것이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번제로 드리려했고 다윗이 가나안 우상인 바알 신전을 부수고 번제를 드린 그자리에 솔로몬 왕이 7년의 공사 끝에 성전을 완성했다(기원전 960년).
    그러나 바벨론의 느부갓네살 왕에 의해 유다가 멸망할때 솔로몬 성전은 완전히 파괴되었다(기원전 586년).

    1차 성전시대(기원전 586년)
    유대인들은 성전을 중심으로 역사를 나누는데 이 때를 1차 성전시대라고 한다.
    바벨론 포로생활을 거쳐 페르시아 통치로 넘어가면서 유대인들은 본토귀환하였고 결국 똑같은 모리아산에 스룹바벨 성전이 세워지게 되었다(기원전 515년).
    초라한 스룹바벨 성전을 이전의 솔로몬 성전보다 더 화려하게 리노베이션한 사람이 바로 헤롯대왕이다.
    로마를 등에 업고 유대인의 왕이 된 헤롯은 유대인의 환심을 사기 위해 기원전 18년전부터  46년간 스룹바벨 성전을 증축했다.
    이 성전이 바로 예수님이 유월절 명절 때마다 출입하시고 타락한 모습에 분개해서 깨끗하게 하신 헤롯성전이다.
    혹자는 골고다 언덕 곳 예수님의 구원사역을 이룬 곳이 모리아산이라고 하나 이는 확실치 않다.
    그러나 헤롯성전도 결국 70년 로마장군 티도에 의해 완전히 파괴되고 만다.

    2차 성전시대(기원전 515년부터)
    스룹바벨 성전이 세워진 기원전 515년부터 이때까지를 제 2차 성전시대라고 부른다.

    헤롯 성전이 무너진 모리아산은 수백년간 페허 상태로 있었다.
    그러다가 이슬람 전사들이 예루살렘을 점령하면서(638년) 7세기말에 이슬람 사원이 세워졌다.

    3차 성전시대(기원 후 638년)
    이것이 바로 황금 돔 사원으로 불리는 이슬람교의  3대 성지중 하나이다.
    기독교, 유대교, 이슬람 교도의 관심이 집중된 이곳은 유대인들이 "지구의 배꼽"으로 표현하기도한다.


    예루살렘과 시온산, 모리아 산, 성전산, 감람산

    성경에는 시온산, 시온성, 성전산, 모리아 산, 예루살렘 성전, 겟세마네 동산 등 많은 산과 지명이 나온다.
    이들 지명의 위치를 정확하게 알면 성경을 좀 더 구체적이고 입체적으로 이해할 수 있다.
    위에 언급되어 있는 것은 모두 예루살렘에 있다.
    예루살렘은 구약의 다윗과 솔로몬 시대부터 신약의 예수님 시대, 그리고 현재까지 이스라엘의 중심도시이다.

    ​유대인에게 예루살렘이 얼마나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가를 알기 위해선 유대인의 역사를 간략하게 알 필요가 있다.

    출애굽(Exodus, 이집트에서 탈출)

    창세기를 보면 가나안 지역(지금의 이스라엘)에 살던 유대인들이 당시 가뭄에 의한 기근과 이집트 총리를 하고있던 동족인 요셉 때문에 이집트로 이주하게 된다(BC1,847년 경). 이집트에서 400여 년을 노예로 살던 유대인들은 지도자 모세를 따라 이집트에서 탈출한다(Exodus, 출애굽, BC1,447년 경).

    시나이반도의 광야 사막을 40년 동안 돌고 돌아 유대인들은 지금의 요르단 쪽에서 요단강을 건너서 가나안 땅(지금의 이스라엘 위치)으로 진입해서 가나안 원주민을 몰아내고 정착하였다(BC1,440년 경). 이집트 이주 400년 만에 성경에서 말하는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인 가나안 땅으로 돌아온 것이다.

    이스라엘 왕조와 남북 분열과 멸망

    가나안에 정착한 후 사사(士師, Judges, 재판관)라는 지도자가 나라를 통치하였는데, 사사의 통치가 350년 정도(BC1,400-1,050년) 이어졌다.​

    마지막 사사인 사무엘에 의해 이스라엘 초대 왕 사울이 즉위(BC 1050년) 하면서 이스라엘 왕조가 시작되었다.
    1대 왕 사울부터 2대 왕인 다윗을 거쳐 3대 왕인 솔로몬까지 각 40년씩 120년 동안은 한 나라를 유지했다.
    이때의 수도가 지금의 예루살렘이며 솔로몬의 성전이 있었던 곳도 이곳이다.

    ​하지만 솔로몬이 죽은 후 정치적으로 분열되어 남북으로 나누어져 남왕국 유다와 북왕국 이스라엘 두 나라 체제가 되었다(BC 930).
    그 후 북왕국 이스라엘은 BC 722년에 이스라엘 북동쪽에서 세력을 확장하던 앗수르에게 멸망했다.
    북왕국의 멸망 후 남왕국 유다도 BC 586년에 바벨론(지금의 이라크 위치)에 의해 멸망을 당했다.

    ​남왕국 유다가 바벨론의 느부갓네살 왕에 의해 의해 멸망을 당했을 때, 바벨론 왕이 많은 유대인을 포로로 잡아 바벨론으로 데려갔다.
    이 사건을 역사적으로 바벨론 유수(Babylonian Captivity, BC 597-BC 538)라고 한다.
    유수(幽囚)는 잡아 가둔다는 뜻인데 유대인을 포로로 잡아간 것을 말한다.
    이 바벨론 유수가 유대인의 디아스포라의 시작이었다.

    바벨론에서 귀환 후 성전, 성벽 재건

    당대의 강국 바벨론은 남왕국 유다를 정복한 후 북왕국 이스라엘을 멸망시켰던 앗수르까지 멸망시켰다.
    하지만 바벨론의 승승장구는 신흥 강국 페르시아(지금의 이란, 성경에서는 '바사'로 번역, Persia)에 의해 막을 내리게 된다(BC 539년).

    ​바벨론을 멸망시킨 페르시아 왕 고레스는 BC 539년 고레스 칙령을 선포한다.
    포로가 되어 바벨론으로 끌려온 유대인들의 본국 귀환을 허락하고, 파괴된 예루살렘 성벽과 성전의 재건을 허락한 것이다(에스라 1:2~4, 6:3~5).
    물론 유대인들에게 가나안 땅을 돌려준 것은 아니다. 식민지에 대한 유화정책의 일환이었다.

    신약 시대 이스라엘의 역사

    페르시아의 지배를 받았던 유대인들은 페르시아를 정복한 알렉산더 대왕의 그리스의 지배를 받게 된다.
    그리스의 지배를 받을 때 잠시 마카비에 의해 독립을 했으나, 곧 로마제국의 지배(BC 63년 - AD 313년) 하에 놓이게 된다.
    이 시기에 예수님이 탄생하신 것이다.

    AD 66년 유대인이 정복자 로마에게 항거하다 예루살렘 성벽과 성전이 완전히 파괴된다.
    전쟁에 진 유대인들은 사해 근처 마사다로 도망하여 그곳에서 최후의 항전을 벌였지만 역부족으로 마사다로 간 유대인 전부가 자결하므로 지배자 로마에 대한 유대인의 항전은 끝이 났다.
    유대인들이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마사다 항전(Battle of Masada, AD 73)이다.

    ​로마의 식민지로 있으면서 여러 번 로마에 대해 독립을 시도했지만 실패로 끝나고, 유대인은 로마에 이어 동로마 제국인 비잔틴 제국(수도가 지금의 이스탄불)의 지배를 받게 된다.
    그 후 여러 나라의 지배를 받다 마침내 아랍의 지배를 받아 이슬람이 가나안 땅을 차지하기에 이르렀다.

    디아스포라(Diaspora)

    이집트에서 나온(출애굽) 유대인이 가나안에 자신의 나라를 건국(BC 1440년) 한 지 860여 년 만인 BC 586년에 남왕국이 멸망하므로 유대인의 나라는 지구상에서 완전히 사라졌다.

    ​이때부터 유대인의 디아스포라(Diaspora) 생활이 시작되었다.
    디아스포라는 디아(Dia- 건너서)와 스포라(spora, 흩어지다)가 결합된 단어로 '뿔뿔이 흩어지다'라는 뜻이다.
    나라 잃은 유대인은 세계 곳곳으로 뿔뿔이 흩어져 나라 없는 서러움을 감내하며 2500년 정도를 떠돌이 신세로 살았다.

    ​물론 지금의 이스라엘 자리에서 유대인은 여전히 팔레스타인 사람들과 섞여서 살고 있었지만 자신의 나라를 갖지 못했다.

    2500년 만의 건국

    19세기에 들어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을 되찾아 나라를 세우자는 운동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시온산이 있는 예루살렘으로 돌아가자는 시오니즘(Zionism) 이 머리를 들기 시작했고, 마침내 20세기 2차 세계대전 후 1947년 UN은 지금의 이스라엘 영토에 유대인의 나라 건국을 승인하였다.

    ​이로 인해 지금의 이스라엘 땅에서 거의 2,500여 년 동안 살았던 팔레스타인( Philistine, 성경에서는 블레셋으로 번역)은 갈 곳이 없게 되었다.
    미국을 포함한 강대국의 결정에 의해 가나안 땅은 하루아침에 이스라엘 땅이 되었다.
    그리고 그 땅에 살던 팔레스타인 주민은 가나안 땅 남서쪽 한 모퉁이인 가자 지구(Gaza Strip)에 살도록 하였다.

    중동 전쟁

    그래서 2,000년 이상 조상들부터 가나안 땅에 살았던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졸지에 땅을 빼앗겼다고 생각하고, 주변 아랍 국가들의 도움을 받아 이스라엘의 건국을 반대하여 전쟁을 일으켰는데, 그 전쟁이 1948년 일어난 1차 중동전쟁이다.
    그 후 1967년 6일 만에 끝난 3차 중동전쟁(6일 전쟁)에서 이스라엘은 현재의 영토를 확보했다.

    ​3차 전쟁에서 이스라엘은 영토를 확장했는데, 요르단이 차지하고 있던 이스라엘 동쪽의 요단강 서안(West bank)과 시리아가 차지하고 있던 이스라엘 북쪽의 골란 고원, 그리고 이스라엘 남쪽에 있는 이집트의 영토인 시나이반도였다.
    시나이반도에는 모세가 하나님으로부터 십계명을 받은 시내산이 있는 곳이다.
    시나이반도는 1973년 벌어진 4차 중동 전쟁 후 이집트로 반환되었다.

    ​이런 역사적인 배경 때문에 지금 이스라엘 영토는 중동의 화약고나 다름없다.
    6일 전쟁 때 이스라엘이 빼앗았던 요르단 서안, 골란 고원, 그리고 팔레스타인이 살고 있는 가자 지구는 언제 터질지 모르는 화약이 묻혀있는 셈이다.

    현재의 예루살렘

    현재의 예루살렘은 분쟁지역인 요단강 서안에 있다.
    1948년 이스라엘 건국 때 예루살렘은 도시가 두 쪽으로 분할되었다.
    예루살렘의 서쪽은 이스라엘, 동쪽은 요르단의 영토로 분할되었다(아래 왼쪽 그림의 푸른색 네모 안의 흰색 부분이 예루살렘 동쪽).
    문제는 예루살렘의 동쪽 요르단 영토에 예루살렘 성과 솔로몬의 성전, 시온산, 성전산, 골고다 언덕, 십자가의 길, 감람산, 겟세마네 동산 등 모든 기독교 성지가 다 있다는 점이다.​

    그래서 3차 중동 전쟁을 통해 요르단을 요단강 동쪽으로 완전히 몰아내고 요르단 서안을 모두 점령하고, 예루살렘을 온전히 차지했다. 하지만 이런 이스라엘의 침공에 의한 영토 확장은 아랍 국가로부터 인정을 받지 못해서 아직까지 분쟁 중에 있다.

    성경을 입체적으로 이해하기 위해서 예루살렘 주변에 있는 산 위치를 아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시온산(Mt. Zion)

    2,500여 년 만에 국가를 재건하는 운동을 시오니즘이라고 부른 것은 유대인에게 시온산의 의미가 그토록 크다는 것을 반증한다. 시온산에는 하나님의 성전이 있었기 때문이다.

    ​"시온으로 돌아가자!"라고 외쳤던 시오니즘(Zionism)의 중심인 시온산에는 구약시대 솔로몬의 성전이 있었고, 아브라함이 이삭을 제물로 드렸던 모리아 산도 시온산 동쪽 끝이다.

    ​신약시대 예루살렘 성과 골고다 언덕, 십자가의 길(Via Dolorosa) 등 예수님의 흔적이 가장 많이 남아 있는 곳도 시온산이다.
    시온산에는 예루살렘 성벽이 잘 구축되어 있어서 시온성이라고도 한다.
    또한 이 성 안에는 솔로몬이 지은 하나님의 성전이 있었다.
    그래서 유대인들에게는 영적인 고향과도 같은 곳이다.

    찬송가 249장(주 사랑하는 자 다 찬송할 때에)은 영어 찬송인 We're Marching to Zion(우리는 시온을 향하여 행진하고 있다.)을 번역한 것이다.

    The Celebration Choir - We're Marching To Zion [with lyrics]

    모리아 산(Mt. Moriah)

    성경에서 모리아 산은 믿음의 조상으로 불리는 아브라함이 100세에 얻은 아들을 하나님의 지시로 번제물로 드리려고 했던 산으로 등장한다.
    그 당시 아브라함은 예루살렘에서 남쪽으로 약 120km 정도 떨어진 그랄과 브엘세바(현재 지명 Beer Sheva) 근처에 거주했다(창세기 20, 21장).
    아들을 번제(burnt offering, 사람을 불에 태우는 제사)로 바치라는 명령을 받고 아브라함은 사흘 길(창 22:4)을 걸어 모리아 산에 도착한다.

    모리아 산에 대한 또 다른 기록은 구약성경 역대하에 나온다.
    솔로몬이 모리아 산에 여호와의 성전을 건축했다는 기록이다.
    그래서 모리아 산을 지금은 성전산(Temple Mount)이라고 부른다.

    현재 모리아 산은 솔로몬의 성전은 오간데 없고 황금색 돔 지붕을 한 이슬람의 알 아크사 모스크(Al Aqsa Mosque)가 자리 잡고 있다.
    가까이 가서 보면 모리아 산(성전산)이 예루살렘 성벽으로 둘러싸여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감람산(Mt. Olive)

    "감람나무 숲속에 눈꽃 피는 밤"이라는 가사가 들어가는 어린이들이 주로 부르는 성탄 찬송이 있다.
    감람나무는 올리브 나무이고 감람산에는 올리브 나무가 무척 많다.
    감람산은 예루살렘 성전 동쪽 바로 앞에 있으며, 성전의 동문과 맞보고 있다.

    ​겟세마네 동산은 감람산 중턱에 있는 작은 동산이다.
    감람산 정상에서 예루살렘 성 쪽으로 조금 내려오면 겟세마네 동산이 나온다.
    겟세마네 바로 앞에 성전 동문이 보인다.
    감람산은 예루살렘 성 동쪽에 있는 작은 언덕이다.
    감람산 정상에서 보면 예루살렘 성과 솔로몬 성전이 한눈에 내려다보인다.
    현재 황금 돔의 모스크가 있는 모리아 산이 예루살렘 성벽 안에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정면으로 보이는 성벽이 동쪽 벽이다.
    감람산 정상에서 줌으로 당겨 찍은 사진인데, 모리아 산 황금 돔 뒤에 보이는 청색 돔 모양의 건물이 골고다 언덕 위에 건축한 성묘교회(The holy sepulchre church)이다.

    ​종려주일 예수님의 예루살렘 성으로 들어간 경로(초록색, Route of Triumphal Entry of Jesus into Jerusalem)인데, 베다니에서 출발해서 감람산을 넘어 벳바게를 지나 겟세마네 옆 길로 기드론 시내를 건너 예루살렘 성 동쪽 문(Eastern Gate, Golden Gate)을 통해 성전으로 들어가셨다.

    감람산에는 예수 승천당이라는 작은 교회가 있다.
    예수님께서 감람산에서 승천하셨다는 것이다(눅 24:50).
    그리고 사도행전의 말씀(행 1:11, 예수는 하늘로 가심을 본 그대로 오시리라)을 근거로 예수님의 재림도 이곳을 통해 이루어진다고 믿기도 한다.






    구약성경 열네번째 역대하 배경

    바벨론 포로 귀환민들에게 신정사회 재건을 촉구하고 있습니다.솔로몬의 치세에서부터 시드기야 치세에 이르기까지의 유다 모든 열왕들의 역사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역대하 1장 요약

    솔로몬은 일천번제를 드렸으며 하나님께 지혜와 지식을 구하게 됩니다.솔로몬의 부귀영화,병거와 마병의 규모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역대하 2장 요약

    솔로몬이 성전을 지을 사람을 준비하였으며,두로 왕에게 성전 지을 기술자들과 준비물을 요청합니다.두로왕이 기술자 후람을 솔로몬에게 천거하였고,이방인의 숫자를 세어보았다고 기술하고 있습니다.

    역대하 3장 요약

    솔로몬이 모리아산에 성전을 짓기 시작하였고,지은 성전의 규모와 크기에 대해서 기술하고 있습니다.

    역대하 4장 요약

    성전 안에 있는 여러가지 기구와 물건의 이름과 용도에 대해서,여러 금으로 만든 물건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역대하 5장 요약

    솔로몬이 성전 건축을 마쳤으며 언약궤를 성전의 지성소로 옮기었으며 백성들은 하나님께 감사 찬양을 드렸다고 기술하고 있습니다.

    역대하 6장 요약

    솔로몬이 이스라엘 백성들의 복을 빌어주었고,연설하는 것과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역대하 7장 요약

    솔로몬은 성전과 제물을 하나님께 바치고,백성들과 함께 절기를 지키었으며 이로 인해서 하나님께서 솔로몬에게 다시 나타나시어 여러가지 일들을 당부하였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역대하 8장 요약

    솔로몬의 여러 활동과 업적에 대해서 기록하고 있고,여러 성과 요새를 만들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역대하 9장 요약

    스바 여왕이 솔로몬을 찾아왔으며,솔로몬의 재산과 지혜에 대해서 말하며 솔로몬의 죽음도 기록하고 있습니다.

    역대하 10장 요약

    애굽의 시삭왕이 예루살렘을 공격하였으며 르호보암이 죽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역대하 11장 요약

    하나님께서 르호보암과 여로보암의 싸움을 말리셧으며,르호보암은 요새를 샇게되고 유다를 강력한 왕국으로 만들어갔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역대하 12장 요약

    애굽의 시삭왕이 예루살렘을 공격하엿고 르호보암이 죽엇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역대하 13장 요약

    유다 아비야가 여로보암과 전쟁하엿으며,하나님께서 도우심으로 아비야가 이스라엘 군대를 무찔렀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역대하 14장 요약

    아비야가 죽고 이후 아사가 왕이 되었으며,아사는 올바른 정치를하였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우상을 없앴으며 계명을 지키라고 백성들에게 말하엿고,구스가 유다를 침공하지만 아사가 물리쳤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역대가 15장 요약

    오뎃의 아들인 아사랴가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였고,아사는 개혁정치를하였고,자신의 어머니를 태후의 자리에서 물러나게 하엿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역대하 16장 요약

    아사 시대에 일어났던 여러가지 일들에 대해서 기록,이스라엘 바아사왕이 유다를 공격하엿고 아사가 아람왕 벤하닷과 조약을 맺음,선견자 하나니를 아가사 가두고 이후 아사가 발에 병이 들어서 죽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역대하 17장 요약

    여호사밧이 유다의 왕이 되었고 점점 강대해지게 되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역대하 18장 요약

    이스라엘의 아합왕과 여호사밧의 동맹,아합이 여호사밧에게 길르앗라못을 공격하기를 제의,선지자들 400명에게 물어보는데 미가야가 아합왕에게 경고하엿지만 이를 무시하고서 아람과 싸우다가 아합은 전사하였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역대하 19장 요약

    선견자인 예후가 여호사밧을 규탄,여호사밧이 개혁을 시도하고 재판관을 세웠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역대하 20장 요약

    모압과 암몬이 쳐들어오게되자 여호사밧과 백성들이 하나님께 기도합니다.하나님께서 적들을 물리쳐 주셨으며 이 외에 여호사밧왕의 행적도 기록하고 있습니다.

    역대하 21장 요약

    여호람이 왕이 된 후에 동생들을 죽엿으며 아합의 집안의 딸과 결혼,에돔에 반역하였으며 엘리야가 여호람에게 예언하였고 이후 여호람이 창자가 빠지는 병으로 인해 죽엇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역대하 22장 요약

    아달랴의 아들인 아하시야가 유다왕이 됨,아하시야는 아합왕의 길을 따라갔으며 예후가 아하시야와 그 신하들을 죽였다,아달랴가 유다의 여왕이 되었으며 요아스가 살아남았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역대하 23장 요약

    여호야다가 백부장을들 모아서 요아스를 왕으로 추대하였고,아달랴는 살해당하였고 여호야다는 개혁 정치를하였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역대하 24장 요약

    요아스가 왕이 된 후에 여호야다와 함께 성전을 수리하였고 여호야다가 죽게 됩니다.요아스와 백성들이 악하게 되는데...요아스는 여호야다의 아들인 스가랴를 죽였으며 아람이 처들어왔고 요아스를 반역자들이 죽였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역대하 25장 요약

    아마샤가 유다왕이 되었으며 부왕을 죽인자들을 죽이고 이스라엘 군대를 돌려보내고,에돔을 물리쳤으며 에돔이 섬기던 우상을 섬기게 됩니다.이스라엘의 요아스왕이 유다 아마샤왕을 패퇴시켰으며 백성들이 아마샤에게 반란을 일으키게 되고 아마샤를 죽엿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역대하 26장 요약

    웃시야가 왕이 되엇으며 선지자 스가랴는 웃시와 왕을 도왓으며 웃시야는 블레셋을 물리쳤습니다.암몬이 조공을 바쳤으며 웃시야는 강한 군대를 만들고,이후 성전에서 불을 피우다가 나병이 생기게 되어서 죽게 되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역대하 27장 요약

    요담이 왕이 되어서 옳은 일을 행하였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역대하 28장 요약

    아하스가 왕이 되었으며 온갖 우상을 섬기게 되며 바알도 섬기게 됩니다.선지자인 오뎃이 유다 백성을 잡아오는 이스라엘의 군대를 꾸짖게 됩니다.아하스가 앗수르왕에게 도움을 구하였으며,다메섹 신들에게 제사하고 하나님 앞에서 온갖 범죄를 저질럿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역대하 29장 요약

    히스기야가 왕이 되었으며 레위 사람들에게 충고합니다.히스기야와 백성들,제사장들은 성전을 깨끗하게 하엿고,백성들과 함께 예배를 드리고 예물을 드렸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역대하 30장 요약

    히스기야가 유월절을 지키라고 명하엿고,백성들은 유월절을 성대하게 지키고 제사를 지냈으며 두 번째 절기인 무교절을 지켰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역대하 31장 요약

    히스기야의 개혁으로 우상들을 무너뜨리고 번제와 십일조를 드렸으며 저성물을 백성들에게 나누어주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역대하 32장 요약

    앗수르의 산헤립이 히스기야를 괴롭히면서 예루살렘을 위협하였고 이에 히스기야는 성벽을 보수하였습니다.산헤립의 신하들은 하나님을 비방하였으며 이에 하나님께서 앗수르를 물리치십니다.히시기야의 병,교만,부,영광에 대해 기록 이후 히스기야의 죽음도 기록하고 있습니다.

    역대하 33장 요약

    므낫세의 패악으로 인해 이방 제단을 쌓았으며 아들들을 제물로 바치게 됩니다.무당과 점쟁이를 믿었으며 우상을 성전에 두었으나 므낫세가 기도함으로 회개하였습니다.므넷세는 죽고 아몬이 왕이 되었다 기록하고 있습니다.

    역대하 34장 요약

    요시야가 왕이 된 후 종교 개혁을 시도하여서 산당과 우상을 없애게 됩니다.성전을 수리하였고 힐기야가 율법책을 발견하게 됩니다.왕과 백성이 율범의 언약을 지키기로 약속하엿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역대하 35장 요약

    요시야가 예루살렘에서 유월절을 지켯고 제사장과 레위의 임무를 알려주었습니다.번제를 드리고 무교절을 지켰으며 애굽의 느고와 요시야가 싸우다가 전사하였다 기록하고 있습니다.

    역대하 36장 요약

    여호아하스,여호야김이 왕이 되었고 바벨론 느부갓네살이 여호야김을 잡아간후 여호야긴이 왕이 됩니다.시드기야가 왕이 되고 느부갓네살을 배반,예루살렘은 멸망하게 되고 고레스가 귀국 명령을 내리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서론

    역대하(2 Chronicles)는 구약 성경의 역사서 중 하나로, 솔로몬 왕의 통치부터 유다 왕국의 멸망과 포로기까지의 역사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 책은 하나님의 성전과 예배의 중요성, 왕들의 종교적 개혁과 불순종의 결과를 강조합니다. 이번 글에서는 역대하의 주요 내용을 요약하고, 현대 신앙생활에 어떻게 적용할 수 있는지를 살펴보겠습니다.


    내용 요약

    역대하의 배경과 구성

    역대하는 이스라엘의 역대기자로 알려진 인물이 기록한 것으로, 주로 유다 왕국의 왕들과 그들의 업적에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이 책은 솔로몬 왕의 통치부터 시작하여 유다 왕국의 멸망에 이르기까지의 기록을 담고 있습니다.

    솔로몬 왕의 통치 (1-9장)

    역대하는 솔로몬 왕의 지혜롭고 부유한 통치로 시작됩니다. 솔로몬의 통치는 성전 건축과 종교적 개혁으로 유명합니다.

    1. 솔로몬의 즉위와 지혜 (1장): 솔로몬은 하나님께 지혜를 구하고, 하나님은 그에게 지혜와 부, 그리고 명예를 주십니다.

    2. 성전 건축 (2-7장): 솔로몬은 예루살렘에 성전을 건축하여 하나님께 헌신의 증거로 삼습니다. 성전 건축 후 솔로몬은 하나님께 기도하고 헌신합니다.

    3. 솔로몬의 정치적 업적 (8-9장): 솔로몬의 정치적 확장과 번영, 그리고 그의 지혜와 부를 듣고 찾은 스바 여왕의 방문을 기록합니다.

    유다 왕국의 역사와 왕들의 통치 (10-36장)

    솔로몬의 죽음 이후, 유다 왕국은 여러 왕들의 통치와 종교적 개혁, 그리고 불순종의 역사를 겪습니다.

    1. 르호보암과 여로보암의 분열 (10-12장): 솔로몬의 아들 르호보암은 민족의 불만을 초래하여 북쪽 이스라엘 지파들이 여로보암을 왕으로 세우고 분열합니다. 르호보암은 유다와 베냐민 지파를 다스립니다.

    2. 여호사밧 왕의 개혁 (17-20장): 여호사밧 왕은 하나님을 경외하며 종교 개혁을 단행하고, 하나님께 의지하여 전쟁에서 승리합니다.

    3. 히스기야 왕의 개혁 (29-32장): 히스기야 왕은 성전을 정화하고 제사와 예배를 회복하며, 아시리아의 침략에서 하나님의 도움으로 유다를 지킵니다.

    4. 요시야 왕의 개혁 (34-35장): 요시야 왕은 율법 책을 발견하고 대대적인 종교 개혁을 실시하며, 백성들을 하나님께로 인도합니다.

    5. 유다 왕국의 멸망 (36장): 유다의 마지막 왕들이 하나님께 불순종하여 바벨론의 침략을 받고, 예루살렘은 함락되며 성전은 파괴되고 백성들은 포로로 잡혀갑니다.

    주요 사건 및 인물

    역대하는 유다 왕국의 역사에서 중요한 사건들과 인물들을 기록합니다.

    1. 종교 개혁과 예배 회복: 여러 왕들이 종교 개혁을 통해 성전을 정화하고 예배를 회복하는 과정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2. 하나님의 심판과 은혜: 왕들의 불순종과 그에 따른 하나님의 심판, 그리고 회개와 돌아옴을 통해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는 과정을 보여줍니다.

    3. 외적 공격과 하나님의 도움: 아시리아와 바벨론과 같은 외적 공격에서 하나님의 도움을 통해 유다 왕국을 지키려는 시도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적용

    1. 하나님의 지혜를 구하라

    솔로몬 왕의 지혜를 구하는 모습은 우리에게 하나님의 지혜를 구하는 삶의 중요성을 가르쳐줍니다. 하나님께서는 솔로몬에게 지혜와 함께 부와 명예를 주셨습니다. 우리도 하나님의 지혜를 구하여 삶의 모든 상황에서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는 것이 중요합니다.

    2. 예배와 성전의 중요성

    역대하에서 여러 왕들이 성전을 정화하고 예배를 회복하는 과정을 통해, 예배와 성전의 중요성을 배울 수 있습니다. 현대 신앙인들도 예배를 소중히 여기고 교회를 중심으로 신앙생활을 해야 합니다. 예배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고 강화하는 중요한 시간입니다.

    3. 회개와 순종의 중요성

    히스기야와 요시야 왕의 종교 개혁은 회개와 순종의 중요성을 강조합니다. 잘못된 길을 가고 있을 때, 회개하고 하나님께 돌아오는 것이 중요합니다. 하나님께 순종하는 삶은 하나님의 축복과 인도하심을 받게 해줍니다.

    4. 하나님께 의지하라

    유다 왕국이 외적 공격에서 하나님께 의지하여 도움을 받은 사례들은 하나님께 의지하는 삶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가르쳐줍니다. 우리는 어려운 상황에서도 하나님께 기도하며, 그분의 도움을 구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필요한 능력과 도움을 주십니다.

    5. 하나님의 심판과 구원의 약속

    유다 왕국의 멸망과 포로기는 하나님의 심판을 보여주지만, 그 안에서 하나님의 구원의 약속도 나타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심판을 경외하며, 그분의 구원의 약속을 믿고 신뢰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의 약속은 우리에게 소망을 줍니다.


















































































































































































    이야기 자료






    설교 좋은 예화 20가지

    1. 신앙의 건망증

    아프리카에 산다는 ‘뱀잡이수리’라는 새에 대한 글을 읽었습니다.
    뱀잡이수리는 독수리의 일종인 것 같은데 주로 공중을 높이 날아다니다가 두더지나 뱀 같은 것을 발견하면 쏜살같이 내려가 낚아챈다고 합니다.
    평상시에는 뱀잡이수리가 민첩하게 잘 날아다닙니다.
    그런데 땅에 내려와 먹이를 먹고 있는데 맹수의 습격을 받게 되면, 날지 않고 혼신의 힘을 다해 뛴다고 합니다.
    너무도 당황한 나머지 자기가 날 수 있다는 사실을 잊어버리는 것입니다.
    날짐승이 뛰어봐야 얼마나 빨리 뛰겠습니까?
    결국 얼마 못 가서 맹수에게 잡아먹히고 맙니다.
    우리 역시 하나님께서 믿음의 날개를 달아주셨는데, 우리가 날 수 있다는 사실을 잊는 때가 많습니다.
    믿음을 적용하지 못하는 사람은 뱀잡이수리와 다를 바 없습니다.
    평상시에는 무척 믿음 있는 사람으로 알려졌지만실제 믿음을 적용해야 할 상황에 맞닥뜨리면 휘청거리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너희의 믿음이 어디 있느냐?”는 핀잔을 들을 사람들입니다.
    믿음이 증발한 것입니다.
    신앙의 건망증이 도진 것입니다.
    신앙의 생활화가 제대로 되지 않으면 신앙인이면서도 사고하는 방식이나 행동은 세상의 영향을 그대로 받게 됩니다.
    지금 내 행동은 누구에게, 무슨 영향을 받은 건지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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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전도면허증

    네덜란드의 유명한 화가 렘브란트의 이야기다.
    그는 젊은 시절 사랑하는 아내를 잃고 방황하던 중 극적으로 하나님을 만났다.
    그리고 곧 재기하여 “엠마오로 가는두 제자” 등의 명작을 남겼다.
    그의 친구들이 종종 이런 질문을 했다고 한다.
    “자네처럼 좋은 그림을 잘 그릴 수 있는 비결이 무엇인가? ”
    그럴 때마다 렘브란트는이렇게 대답했다고 한다.
    “어떻게 그려야 하는지 묻기 전에 일단 붓을 들고 그리기 시작하게.”
    그렇다. 어떤 일을 시작하려고 할 때, 우리는 너무 망설이며 쭈뼛거리는 경우가 많다.
    물론 신중하게 탐색하며 준비하는 일도 필요하다.
    그러나 진취성이나 실천력이 다소 부족해 보이는 사람들에게 진정 필요한 것은 ‘행동’이다.
    오랫동안 고민하며 망설이다가 결국 시작조차 못하는 경우가 너무 많지 않던가.
    교회의 사명인 전도 역시 마찬가지다.
    주님의 전도에 대한 명령에 우리는 얼마나 순종하고 있는가?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은 이 말씀을 실천할 생각은 접어두고 이 말씀의 신학적 의미가 어떻고 배경이 어쩌고 하는 말 잔치에 빠져 있지나 않은지 되돌아보아야 한다.
    이미 운전면허를 딴 사람은 실제로 차를 전진시켜 보아야 한다.

    단지 이론서만 복습하면서 시간을 보낸다면 그는 어리석은 사람이다.
    예수님을 믿는 우리에게도 이미 전도 면허증이 주어졌다.
    “Just do it!”
    어떤 스포츠용품 광고에 나오는 문구이다.
    전도, 그것 역시 지금 바로 시작하면 된다.
    해보면 방법이생기고 그 맛을 깨달아가게 된다.
    해야 할 일을 하지 않고 넋 놓고 앉아 있는 시간은 휴식이 될 수 없다.
    해야 할 일을 하고서 잠깐 쉬는 시간이 휴식이며 재충전의 기회다.

    3. 행복을 주시는 예수님

    로베르토는 찢어지게 가난한 환경에서 자란 소년이었다. 다리가 무릎 안쪽으로 심하게 굽은 이 소년은 가난과 절망이 끊임없이 찾아드는 암담한 삶을 살아갔다. 로베르토는 개처럼 네 발로 기어다녀야 하는 신체의 장애 때문에 교육받을 기회를얻을 수도 없었다. 훌쩍 십대가 되어버린 로베르토에게 삶은 무정하기만 했다. 그런데 온 우주 만물을 창조하시고 운행하시는 하나님께서 천사들을 보내 사람들을감찰하시는 그 하나님께서 로베르토의 불우한 삶에 들어오셨다! 가난과 질병으로 허덕이는 로베르토에게 미국에서 외과 수술을 받을 기회가 생긴 것이다. 그는 오랜시간 수술한 끝에 다리를 똑바로 펼 수 있게 되었고 인생의 변화까지 경험하게 되었다. 그리고 얼마 안 있어 로베르토는 일어나 걸을 수 있을 뿐 아니라 뛰고 달릴 수 있는 다리를 갖게 되었다. 로베르토는 성한 다리라는 열쇠로 소망과 약속이가득한 미래라는 문을 열게 된 것이다! 몇 달 후 로베르토는 인정 많은 후원자들 덕분에 직업 훈련뿐 아니라 개인 교습까지 받을 수 있었다. 소박하고 겸허하고 열정적인 로베르토는 후원자들에게 “제가 할 일은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고 가시는 걸 도와드리는 겁니다. 그분이 절 도와주셨기에 그분을 섬기는 일이 행복할따름입니다” 하는 말로 감사함을 표현했다. 예수님은 행복에 이를 수 있게 하신다.

    로베르토와 같은 육신에 장애가 있는 사람뿐 아니라 영적, 정서적으로 장애가 있는사람들도 말이다. 당신이 누구이건, 당신이 어떤 상황이나 조건 속에 놓여 있건, 당신의 과거가 어떠했건, 당신의 문제가 무엇이건 예수님은 당신을 온전케 하실 수 있다.

    4.감사가 불러온 기적

    일본 해군장교인 가와가미 기이찌는 제 2차 세계 대전이 끝난 후 귀국하여 오랫만에 고향에 돌아와 보니 차마 눈뜨고 볼 수 없으리 만치 피폐해 있어 하루하루 사는 것이 짜증이 났고 불평 불만이 쌓여 갔습니다. 그러다가 그는 전신이 굳어져 조금도 움직일 수 없는 병이 들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이 때에 다행히 정신치료가인 후찌다 씨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후찌다씨는 그에게 매일 밤 “감사합니다.”라는 말을 억지로라도 만 번씩 하라고 시켰습니다. 기이찌는 자리에 누운 채로 하기 싫었지만 낫기 위해 매일 밤 계속해서 “감사합니다.”라는 말을 계속했다고 합니다. 어느 날 아들이 감 두 개를 가지고 와서 “아버지 감 잡수세요.” 라고 말했습니다. 그 때는 이미 그가 매일 계속해서 감사를 많이 했기 때문에 그 감사가 몸에 배어 있었습니다. 그래서 아들에게 “감사합니다.”라고 말하면서 손을 내밀자 신기하게도 손이 움직였고 차츰 뻣뻣하게 굳어져 있었던 목도 움직여졌다고 합니다. 말로만 하던 감사가 실제로 감사가 되어 감사로 불치의 병이 낫게 된 것입니다

    5.한국교회 신자들의 의식구조

    어느 기관에서 한국교회 신자들의 의식구조를 분석한 보고를 다음과 같이 해주고 있습니다.

    위로설교에는 90%가 은혜를 받는다
    축복설교에는 70%가 은혜를 받는다
    죄와 회개설교에는 30%가 은혜를 받는다
    헌금과 헌신설교에는 10%만 은혜를 받는다

    6. 여성이 살기 가장 힘든 나라

    미국의 시사주간지 뉴스위크 최신호(7월 9일자)가, 분야별로 최악의 나라를 선정, 소개를 했는데, 여성이 살기에 가장 힘든 나라로 회교의 나라 아프가니스탄이 뽑혔다.
    1996년, 과격이슬람 세력인 텔레반 정권이 전국을 장악하면서 철저한 회교원리주의 국가로 전환, 심지어 유네스코가 문화유산으로 지정한 2천년 이상된 유물까지도 우상이라 하여 파괴한, 유례를 찾아볼 수 없을 정도의 회교 율법주의 국가로 탈바꿈한 곳이다.
    구체적 내용으로는, 남성들은 턱수염을 깎지 못하도록 하고 이를 어기면 턱수염이 다시 자랄 때까지 감옥에 가두는가 하면, 여성들은 공공장소에서 차도르를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감싸고 있어야 함은 물론 외간 남자와 말도 건넬 수가 없다고 하였다.
    또 여성들은 의무교육도 받을 수도 없으며 집밖에서는 일도 할 수 없고 친척 남성이 동행하지 않으면 외출도 할 수 없다.
    집들의 모든 창에는 페인트로 칠을 해서 밖에서 안을 들여다 볼 수 없도록 했으며, 여러 사람 앞에서 발가벗고 목욕하는 것이 율법에 어긋난다하여 여성공중목욕탕과 뒤이어 남성공중목욕탕까지도 없애버렸으며 도박은 물론 TV, 비디오 등 오락도 못하게 하였다.
    이러다 보니 국가 경제는 최악의 상태가 되었고 거리에는 수 십년간의 내전으로 남편을 잃은 부인들이 당국의 눈을 피해 구걸을 하는 일이 다반사라 전한다.
    "회칠한 무덤 같으니…"(마 23:27).
    거짓종교는 사람을 노예로 만든다

    7. 시련의 유익

    조용한 섬나라인 뉴질랜드.
    그곳에는 날지 못하는 새가 다섯 종류나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 섬에는 새를 해치는 다른 동물들이 없기 때문입니다.
    심지어 뱀들도 독이 없다고 합니다.
    그래서 새들은 굳이 공중으로 날아오를 필요가 없게 되고,그저 나뭇가지나 땅에서 지내다보니 날개는 있어도 날지 못하는 새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안일은 삶을 무기력하게 하지만시련은 새를 날아오르도록 합니다.
    이렇듯 시련은 우리의 삶을 높이 끌어올리는 필수 요소입니다.

    8.함몰 웅덩이 증상

    플로리다의 한 아파트 주민들이 어느 날 아침 눈을 떴을 때 , 창 밖에서 벌어지는 무시무시한 광경을 목격하게 되었다.
    그들이 살고 있는 아파트 바로 앞 도로의 지반이 내려 앉아 플로리다 사람들이 함몰 웅덩이라고 부르는 현상이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
    계속 꺼져 들어가는 웅덩이 속으로 자동차와 도로 그리고 잔디밭이 함몰되어 갔다.
    그 다음은 아파트가 무너질 차례이다.
    이러한 함몰 웅덩이는 가뭄으로 지하수가 고갈되어 지표를 지탱할 힘을 잃을 때 생기는 현상이라고 과학자들은 말한다.
    딛고 있는 땅 조차 안전한지 의심스러울 만큼 갑자기 모든 것이 땅속으로 꺼져 들어간다.
    아마 우리들의 내면이 고갈되어 영적인 침체가 왔을 때 , 피곤으로 무감각한 느낌을 받을 때 , 지금까지 추구해왔던 목표에 대한 쓰디쓴 환멸감 등을 느낄 대 내부는 갑자기 무너지게 된다.
    그러므로 우리의 내면의 상태를 잘 돌보아야 한다.

    9. 오늘 날의 바나바

    사울 왕이 범한 죄 중의 하나는 질투와 미움이었다.
    블레셋 대장 골리앗을 넘어뜨린 다윗을 누구보다도 아끼고 키워야 될 그가 오히려 다윗을 질투하여 미워하고 죽이려고 했다.
    그는 다윗을 죽이기 위해 군대를 풀어서 잡으려고 했다.
    그러나 그는 오히려 굴 속에서 자기 옷만 찢기는 망신만 당했다.
    그때 사울은 깨달았어야 했다.
    하나님이 그를 지켜주신다는 것을. 그러나 그는 그것을 깨닫지 못하고 시종 분노의 칼을 갈다 결국 자기가 먼저 죽는다.
    요한 스타우피츠는 루터를 진심으로 아끼고 키워주었다.
    루터를 키워준 스타우피츠가 없었더라면 16세기의 종교개혁이 성공했을까?
    종교 개혁자 존 칼뱅을 키운 윌리엄 파렐이 제네바에 있었기에 제네바의 종교개혁은 성공했다.
    다소에 묻힐 뻔한 사울을 불러내어 안디옥교회에서 동역한 바나바의 섬기는 마음이 얼마나 아름다운가.
    오늘도 우리 주변에 나보다 나은 사람이 생기면 감사하게 생각하고, 귀하게 여기며 인정해줄 줄 아는 현대판 바나바가 정말로 필요하다

    10. 요강을 닦는 머슴

    평북 정주에 있던 명문 오산학교에는 재미있는 이야기가 전해오고 있다.
    당시 그 동네에는 아주 똑똑한 청년이 살았다.
    그는 남의 집 머슴살이를 하는 청년이었다.
    그는 비록 집안이 가난해서 머슴살이를 했지만 자신의 처지를 비관하거나 부끄러워하지 오히려 열심히 일을 했다.
    그는 매일같이 주인의 요강을 깨끗이 닦아놓곤 했다.
    그러자 모든 일을 성실하게 감당하는 이 머슴의 자세를 보고 주인은 이 청년이 머슴살이를 하기에는 너무 아깝다고 생각해 학자금을 대주며 평양에 있는 숭실학교에 보내 공부를 시켰다.
    마침내 그 청년은 숭실학교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하고 고향으로 내려와 오산학교 선생님이 됐다.
    이 청년이 바로 민족주의자요 독립운동가로 유명한 조만식 선생이었다.
    그는 항상 제자들이 인생의 성공 비결을 물을 때마다 “여러분이 사회에 나가거든 요강을 닦는 사람이 되십시오”라고 일러주었다고 한다.
    성경은 우리에게 인생의 성공비결은 “작은 일에 충성하는 데 있다”고 말해준다

    11.나는 한알의 복음의 씨앗이 되리라

    로마 도미티안 황제 때 안디옥 교회 감독인 이그나티우스는 짐승에 물려 몸이 찢기면서 순교당했다. 그는 로마로 잡혀가면서 소아시아 여러 교회와 서머나 교회 감독이요 동역자인 친구 폴리갑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그대들은 나를 위하여 타협하지 말라. 내가 놓이기를 바라지 말라. 나는 한 알의 밀씨가 되고 짐승의 이빨에 가루가 되어 하나님의 깨끗한 빵이 되기를 원하노라. 그리스도를 위하여 형벌당하기를 원하노라. 그리스도를 소유할 수 있다면 십자가에서 짐승의 이빨에 뼈가 가루되고 손과 발이 잘리더라도 결코 두려워하지 않겠다. 나에게는 오직 그리스도가 있을 뿐이다”고 말하였다.

    이그나티우스는 두려움 없이 죽음을 맞이했다. 왜냐하면 그는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요12:24)’는 말씀을 믿고,한 알의 복음의 씨앗이 되고자 각오했기 때문이다.

    12.마음의 병

    어떤 여자가 남편과 두번째 사별하고 한 믿음직한 남자와 세번째 결혼을 했다.새로 맞은 남편은 아내를 지극한 마음으로 사랑해주었다.그런데 행복에 겨워야 할 부인은 몸이 약해지고 얼굴마저 날이 갈수록 핼쓱해져만 갔다.보다 못한 남편이 물었다.“어디 불편한 일이라도 있는거요” 그러자 부인은 단지 마음의 병이라고만 대답 했다.이에 진실한 남편은 자신이 잘못해주는 것이 아닌가 생각하고 어떻게 더 사랑해주면 되겠느냐며 무슨 말이라도 하라고 하자 부인의 대답은 이러했다.“당신이 또 죽으면 어떻게 하나요” 즉 걱정 때문에 몸이 말라간다는 뜻이었다.

    사람이 긍정적인 방향으로 생각할 때와 부정적인 쪽으로 생각하는 결과의 차이는 엄청나다.‘새가 노래한다’고 보는 것과 ‘새가 운다’라고 생각하는 것은 매우 다르다. 로버트 슐러 목사의 책에 이런 얘기가 실려 있다.한 부인이 시장에 나와 작은 고기만 골라 사길래 상인이 물어보았더니 “우리집 프라이팬이 작아서”라고 대답했다.그러자 그 상인은 “부인,고기를 사기 전에 프라이팬을 바꾸세요”라고 했다고 한다.선입견을 바꾸면 세상이 달라진다

    13.등불 켜고 준비하는 밤

    옛날 어떤 의사가 한밤중에 13㎞나 떨어진 먼 시골로 중환자를 왕진하러 가야만 했다.폭설이 쏟아지고 있었기 때문에 누군가의 도움이 없이는 그 집을 찾을 수가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의사는 가는 길목의 가장 가까운 첫번째 집에다 전화를 걸어 창문에 등불을 켜 둘 것을 부탁했습니다. 그리고 이웃집에다 전화를 해서 역시 창문에 등불을 켜 두도록 부탁했습니다.

    이렇게 하여 환자의 집에 이르는 동안 모든 길목의 집들이 창문에 등불을 켜게 되었고 의사는 쏟아지는 폭설과 어둠을 뚫고 길을 찾을 수가 있었다.바로 이러한 것이 우리 교회의 모습이어야 합니다. 교회는 한 사람의 생명을 살리기 위해 서로 도와주는 길목의 등불이어야 합니다

    14.두 소녀의 조개줍기

    두 소녀가 바닷가에서 사이좋게 조개를 줍고 있었다.문득 그들의 눈앞에 큰 조개가 하나 보였다.그들은 동시에 그 조개를 자기들의 손으로 덮쳤다.두 소녀는 서로 자기의 것이라고 주장했다.결국 고집이 센 소녀가 그 조개를 차지했다.조개를 빼앗긴 소녀는 마음이 언짢았다.두 소녀는 각자 다른 방향으로 헤어져 조개를 줍게 되었다.그런데 조개를 빼앗겼던 소녀는 뜻하지 않게 값진 진주를 발견하게 되었다.그는 그 진주를 얼른 품속에 감추었다.그의 마음은 완전히 풀렸다.그는 다시금 자기 친구 옆으로 다가가서 다정스럽게 이야기를 나누며 조개줍기를 계속했다.그들 앞에 또 큰 조개가 나타났다.그러나 저들은 이전처럼 다투지 않았다.진주를 가진 소녀가 기꺼이 양보했기 때문이다.우리는 천국을 소유한 사람들이다.우리가 영원히 살게 될 천국은 너무나도 좋은 곳이다.천국을 소유한 우리는 이 땅의 사소한 일에 얽매이지 말고 너그러운 마음으로 살아가도록 하자.

    15.십자가 바로보기

    오래전 어떤 목사님이 종려주일 낮 예배 시간에 교인들에게 이렇게 말했다.“오늘 저녁예배 때는 예수님의 십자가에 대해서 특별한 설교를 하려고 합니다. 그러니 십자가를 미리 깊이 묵상하고 오시기 바랍니다”저녁예배 시간이 되었다.많은 사람이 은혜를 사모하면서 예배당에 모였다.목사님은 촛불을 켜들고는 아무 말없이 십자가에 못박히신 예수님의 그림 앞으로 다가갔다.그는 먼저 가시관을 쓰신 예수님의 이마에 촛불을 비추었다.한 참 뒤 그는 말없이 못박힌 예수님의 손과 발을 촛불로 비추었다.마지막으로 창에 찔려 피 흘리시는 예수님의 옆구리로 촛불을 옮겼다.이것이 그의 설교의 전부였다.그는 한 마디의 말도 하지 않았다.그러나 그곳에 참석한 모두가 예수님의 사랑에 감격해서 하염없는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이번 주간은 수난주간이다.예수님의 십자가를 깊이 묵상하면서 큰 은혜의 자리에 나아가는 우리의 모습이 되기를 바란다

    16.묘비 없는 칼뱅의 무덤

    장로교의 창시자인 장 칼뱅은 생전에 남긴 업적도 대단했지만 세상을 떠날 때도 큰 영적 교훈을 남기고 갔다 칼뱅이 스위스 제네바에서 종교개혁을 일으키고 장로교회를 창립하자 그의 영향을 받은 존 낙스는 스코틀랜드로 건너가서 장로교회를 세웠고 다른 많은 지도자들도 유럽 각지로 흩어져 개혁교회들을 세웠다.칼뱅이 죽을 때 남겼던 유언은 지금도 유명한 일화로 전해지고 있다.바로 “내 무덤에 묘비를 세우지 말고 내 무덤의 흔적이 없도록 해달라”는 것이었다.그의 유지를 따라 지금도 제네바에 가면 장 칼뱅의 무덤에는 이름이 없음을 알 수 있다.단지 그를 추모하는 많은 사람들이 너무 아쉬운 나머지 무덤 위에 ‘J.C’라고 이름 약자만 새겨놓았다.그래서 칼뱅의 유언을 음미하는 사람들은 그의 무덤가에서 더 큰 은혜를 받는다고 한다.장차 부활의 새 아침이 올 것을 믿고 살아가는 우리 크리스천들도 칼뱅처럼 아름다운 영적 유산을 이 땅 위에 남기고 가야겠다

    17. 밥 태운 건 마찬가진데

    시어머니가 밥을 앉히고 며느리에게 불을 때라고 일렀다.
    갓 시집을 온 며느리는 밥짓는 경험이 없었던 터라 밥물이 넘치는 줄도 모르고 계속 불을 때다가 밥은 타고 솥은 금이 가고 말았다.
    놀란 며느리가 전전긍긍하고 있자 시어머니는 “내가 물을 너무 적게 부어서 그렇게 됐다”며 며느리를 위로했고, 시아버지는 “내가 부엌에 땔감을 너무 많이 들여서 그랬다”라고 했으며, 신랑은 “제가 너무 물을 적게 길어와서 그렇게 됐다”라고 말했다.
    길 건너에는 술집이 있었다.
    그 집에서도 새 며느리에게 불을 때라고 했고 역시 밥은 타고 솥은 깨졌다.
    화가 난 시어머니가 욕설을 퍼붓고 구박하자 며느리는 일부러 그랬느냐며 대들었고, 시아버지는 어디서 말대꾸냐며 호통을 쳤으며, 이에 지켜보던 신랑이 손찌검을 하자 새댁은 죽이라며 대들었다.
    대판 싸움이 벌어진 것이다.
    가정도, 교회도 그리고 지금 우리나라에 필요한 것은 이해, 사랑, 화해의 물꼬를 트는 것이다.
    경직된 사회에 윤활유를 부어 금속음을 제거하는 일이 급선무다.
    무너지는 가정, 흔들리는 나라가 걱정스럽다.
    주여 이 나라를 구원하여 주소서!

    18. 고통을 행복으로 바꾸는 힘

    인도의 성자 선다싱이 복음을 전하다 어느 날 네팔의 감옥에 투옥됐다.
    그는 마치 바울처럼 감옥에서도 다른 죄수들에게 열심히 복음을 전했다.
    그러자 이를 못마땅히 여긴 간수가 그를 냄새가 심하게 나는 독방에 감금시켰다.
    손과 발을 묶고 옷을 벗긴 채였기 때문에 거머리가 달라붙어 피를 빨았다.
    그러나 오히려 그는 하나님을 소리높여 찬양했다.
    이 모습을 본 선다싱의 고소자가 간수에게 말했다.
    “당신은 선다싱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오?
    그는 고통에도 아랑곳없이 노래하며 행복해하고 있지 않소?”
    그러자 간수는 “그는 미쳤소.
    그리고 우리의 목적은 달성되지 못했소.
    우리는 그의 설교를 중단시켰고 고통을 주었소.
    하지만 그는 오히려 행복에 젖어 노래를 부르고 있소”라고 말했다.
    그러자 선다싱의 고소자는 소리쳤다.
    “그는 미친 놈이다. 당장 석방시켜라!”
    세상을 살다보면 나 때문에 겪는 고난이 있고 예수 그리스도로 인해 겪는 고난이 있다.
    하지만 그리스도 때문에 겪는 고난은 값지고 행복한 고난이다.
    또 영원한 상급도 함께 마련되어 있다.

    19. 마음먹기에 달렸다.

    큰 물건을 등에 지고 길을 나섰던 두 장사꾼이 높고 험난한 재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때는 여름이고 해는 중천에 떠 있어서 가만히 앉아 있어요 땀이 비오듯 흐르는 무더운 날씨였습니다.
    장사꾼 중의 한 사람은 그 큰 재를 짜증난 시선으로 바라다보면서 중얼 거렸습니다.
    "재수없는 날이군, 어느 세월에 이 재를 넘는단 말인가."
    그런데 다른 한 장사꾼은 희망찬 시선으로 놓은 재를 바라보면서, 얼굴에 미소를 띄우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오늘은 재수 좋은 날이군, 이렇게 험한 재가 있으니 재 너머 저 쪽엔 장사꾼이 자주 올 수 없었을거야.
    그러니 재를 넘어 가기만하면 물건은 쉽게 팔 수 있을거야."
    전자의 장사꾼은 재 너머 마을에서 얻게 될 기쁨을 보지 못하고 목전의 고생만 바라본 사람입니다.
    그러니 그에게 있어서 높은 재는 장애물로만 여겨질 뿐이었습니다.
    그러나 후자의 장사꾼은 목전의 고생보다 그 다음에 올 기쁨을 바라다본 사람입니다.
    그에게 있어서 높은 재는 성공을 위한 디딤돌로 여겨졌던 것입니다.
    이와 같이 인생의 모든 역경도 꿈이 있는 자에게는 언제나 성공을 위한 도약대가 되는 것입니다.
    실패할 사람은 목전의 수고만 바라보고 쉽게 좌절합니다.
    그러나 성공할 사람은 고생과 수고 다음에 찾아올 영광을 바라다보면서 인내합니다.

    20. 감추인 보화

    1971년 아폴로 15호로 달에 다녀온 제임스 어윈의 간증을 들어본다.
    "우리가 발견했던 것은 하얀 돌이었습니다.
    영국의 과학자 패트릭 모어(Dr.Patrick More)에 의해 오래전에 '창세기 돌'로도 명명되어 있던 그 돌이 왜 그토록 중요했길래 우리에게 그돌은 찾아 오도록 시켰을까요?
    저는 그 돌을 발견한 것은 기도의 응답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오늘 저는 여러분들이 '진짜 돌'을 찾으시길 기도합니다.
    저는 감추인 보화 비유를 말할 때 곧잘 이 하얀 돌의 모형을 보여드리곤 합니다.
    이 돌을 구하기 위해 왜 그 엄청난 비용과 시간을 들였을까요?
    과학자들에 의하면 그 돌은 달의 산과 표면의 성질을 모두 알아낼 수 있는 표본이기 때문에 귀할 수 밖에 없답니다.
    그러나 우리 인생에서 가장 귀한 돌-감추인 보화-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분이야말로 내인생에 진정한 의미를 가져다 주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한국 목사들이 주기철을 파면하고 가족을 추방

    최덕성 교수의 연구에 의하면, 일제치하의 한국교회의 수난과 그 이후의 진행 과정은 로마제국치하에서의 박해, 특히 7차와 10차 대박해 동안 기독교인들이 당한 수난, 그리고 그 이후 진행 과정과 흡사하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1. 우상숭배와 황제숭배 강요와 거부라는 점,
    2. 국가가 그것을 강요했다는 점,
    3. 수많은 순교자가 생겼다는 점,
    4. 박해 후 교회에 분열의 갈등이 일어났다는 점
    그러나 갈등의 원인과 분열의 원인은 전혀 달랐다.
    (이 글의 많은 내용은 최덕성 교수의 책 <한국교회친일파전통>에서 인용하였다.)

    1901년 평양 장로회신학교 설립

    조선총독부는 장로교 총회 (제27회, 1937)가 모여 신사참배 결의한 후 부총회장 김길창 목사가 각 노회 대표들을 인솔하여 평양신사에서 신사참배를 하였다.
    한국교회가 일본적 종교로 거듭나 새로운 출발을 하게 되었던 것이다.
    약간의 변절을 한 것이 아니라 아예 신도교로 개종한 것이었다.
     

    1938년 9월 신사참배 반대로 인해 평양신학교, “조선예수교장로회 신학교”가 폐교됨

    1938년 여름부터 일제는 개 교회들에게 다음과 같은 질문서를 보냈다. 

    “천황이 높으냐? 여호와가 높으냐?”
    “신사참배는 종교의식이냐? 국가의식이냐?”
    “국가지상이냐? 종교지상이냐?”

    그리고 그 답변에 따라 집회를 허락하던지, 교회를 해산시키던지 하겠다고 위협하였다.
    윤성범은 신앙이 약한자는 신사참배에 항거했고, 그래서 믿음이 약한자이고(롬 14:1), 신앙이 강한 자는(롬 15:1) 그것에 참여했다고 하였다.

    한국교회는 1931년 일제가 제정한 법, “신도(神道)가 절대의 도이며, 국민 모두가 준수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법에 저항하지 않고 순순히 따랐다.
    각종의 배도하는 신앙고백서를 발표하였다.
    “일본기독교조선장로교단 규칙”에 의하면, “황국(皇國)의 도를 따라 신앙에 투철하며 각기의 분을 다하여 신도를 실천하여 황운(皇運)을 부익(扶翼)하여 받든다.”는 것을 교단강령으로 선언하였다.

    일제 말기의 한국교회는 변절한 정도가 아니라 아예 신도교로 개종한 것이다. 일본기독교 조선감리회도 마찬가지였다. 당시의 교회가 단지 “상처받고 수모를 겪는 교회였지 악마의 교회는 아니었다”고 하는 교회역사학자 민경배의 주장은 당시 상황에 대한 바른 이해가 결여된 것임을 보여 준다.

    1939년 12월 25 일 평양노회의 종교재판에 의해서 주기철은 우상숭배를 행하지 않는다는 죄명으로 파면되었다.
    총회 관할 아래에 있는 자가 신사참배를 행하기로 한 총회의 결의에 감히 따르지 않는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교역자로[서] 국가의식 불응은 총회결의 정신 위반”
    이라는 것이다.
    평양 노회는 주기철의 산정현교회 담임목사직을 해임한 것만이 아니라 목사 자격 자체를 박탈했다. 
    그를 파면하고 가족을 사택에서 추방하고, 굶주리고 헐벗고 추위에 떨게한 것은 일제가 아니라 한국교회였다.
    일제 충견이던 친일파 목사들의 솔선수범에 의해서 한국교회는 그리스도의 충성된 증인들을 박해했다.

    주기철의 가족과 수진수난 성도들은 주기철에 대한 파면이 유효한 것으로 인정하지 않았다.
    그 같은 결정을 한 교회를 파괴하여야할 집단으로 보았다.
    배교하는 교회의 결정이 자신들의 영적 상태와 신분에 아무런 영향을 주시 못한다고 생각했다.

    1940년 서울에 숭동교회에 “조선신학교”가 개교했고 초대 학원 원장에 김대현 장로가 취임했다.
    조선신학교는 광복 후 미군정청으로부터 학교인가를 받았다.
    교장에 김재준, 전임강사 송창근, 한경직이 취임했다.
    조선신학교는 1951년 한국신학대학으로 개명하였다.
    평양신학교는 “채필근 신학교”로 다시 개교했으며, 주기철 이름을 졸업생대장 원본에서 없애 버리고 현재의 대장을 다시 만들었다.

    일제말기의 신사참배 거부자들은 일제와 우상숭배를 행하는 기존교회부터 이중으로 공격을 받으면서 성경적 진리 하나를 깨달았다.
    교회의 기구적 연속성, 고전성, 정통성은 절대시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나라의 일은 혈과 육에 속한 것이 아니며, 기구적 유전(遺傳)에 집착하는 것은 죽은 전통이라고 보았다.
    교회는 이름을 가진 조직기구라도 성경의 중추적인 가르침을 명백하게 위반할 경우에는 그 결정에 순종할 필요가 없다.
    그 횡포가 지나쳐 우상숭배를 할 정도이거나 우상숭배를 거부하는 자를 면직, 제명할 정도이면 그 기구를 파괴하는 것이 도리어 하나님의 원하시는 것이라고 확신했다.
    그들은 배도하는 총회와 노회의 명령보다는 하나님의 말씀에 먼저 순종하고자했다.
    우상숭배를 하지 않는 새로운 노회를 조직하여 순결한 한국 기독교를 계승하고자 했다. (p. 197)
     

    1941년 3월 평양장로회신학교 교수회가 해체됨

    1943년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는 해체되었다. 1945년 장로교라는 이름마저 깡그리 사라져 버렸다. 1907년에 첫 노회가 조직되고 1912년 가을에 총회를 조직한 한국 장로교회는 완전히 사라졌다. 그 대신 (평양 장로회신학교 대신) 조선신학교 (서울에)와 채필근신학교가 (평양에) 세워졌다. 일제의 황민화 도장으로 인허된 이 학교는 목사, 전도사가 아닌, 교회사(敎誨師), 정교사, 보교사를 양성했다. 일제는 목사를 “정교사” 전도사를 “보교사”로 부르게 했다. 정교사, 보교사는 일본적 기독교의 순복음(純福音)을 전파하는 자들이었다. 순복음이란 신도주의와 기독교를 혼합한 신도교를 뜻한다. 겉모양은 기독교이지만 내용은 신도주의로 채워진 일본식 혼합종교이다. 일제의 “순복음교회”는 신도교를 뜻한다.
     

    1944년 3월 26일, “일본기독교조선감리교단”의 정교사(正敎師) 안수식

    순일본기독교의 교회사(敎誨師)로 안수를 받은 것이다. 1944년 일본기독교조선장로교단 임원들은 “적성(赤誠)을 다하여 하루라도 빨리 완전한 황민화(皇民化)를 하는 것이 최대의 급선무”라고 하면서 “황국의 도를 따라 ... 신도(神道,臣道)를 실천하며 황운을 부익하여 받든다”고 고백하고서 작위를 하사받듯이 목사 감투를 쓴 자들이었다. 광복 후에도 이들은 참회고백 없이 한국교회를 주름잡았다.
     

    1946년 출옥성도들이 고려신학교(현 교려신학대학원, 천안) 설립

    1995년 6월 장신대학 정기교수회에서 조사하여 주기철 목사의 이름을 학적부에서 제거된 것을 확인하였고, 일제 황민화 정책의 전열에선 '채필근 신학교'가 의도적으로 그의 이름을 삭제하였다고 결론지었다. 채필근 신학교는 신도주의와 기독교가 혼합된 “순정일본적 기독교”(純正日本的基督敎)라고 부르는 신도교의 교회사(敎誨師) 양성소가 되었다. 그리고 광복 (1945년) 후에는 마르크스-레닌주의를 가르친 친공산주의 신학교가 되었다.
     

    한국교회 죄책 고발자 주기철

    주기철은 우상숭배를 거부한다는 까닭으로 자신을 면직시킨 한국교회의 죄책 고발자로 서 있다. 한국교회의 배도, 백귀난행(百鬼亂行), 민족배신, 비인도적 행위를 고발하고 있다. 거짓이 참을 능멸하고, 불의가 정의를 학대하고, 악이 선을 짓밟는 친일파 전통의 악마적 습성에 항거하고 있다. 비진리가 진리를 배척하고, 배도자가 순수 신앙인을 추방하고, 가룟 유다들이 신실한 선지자들을 능멸하는 역사와 전통을 가진 한국교회에 대한 고발자로 서 있다.

    한국교회는 지금까지 주기철의 일제에 대한 항거와 일사각오 신앙만을 강조했지, 그가 배도하는 교권주의 장로교 집단에 항거한 일에 대해서는 눈여겨 보지 않았다. 일제에 의해 박해를 받은 것만 강조했지 한국교회가 그를 박해한 것에는 별로 주목하지 않았다. 는 우상숭배를 거부한다는 까닭으로 자신을 파면한 한국교회를 고발하고 있다. 주기철은 조직기구의 그릇된 결정을 절대화하고 광복 반세기를 넘기도록 공적인 참회고백문 한 장 발표한 바 없는 양심부재의 한국교회를 고발하고 있다.

    주기철은 치리회적 질서를 무시하는 교회, 중세기적 미신을 버리지 않는 교회, 순교자를 교권의 확보와 자파의 위상향상을 위한 수단으로 이용하는 교회에 대한 항의자로 서 있다. 그리스도에 대한 신실성을 갖지 못한 교회, 믿는것과 행하는 것이 불일치하는 교회, 이중성, 기회주의, 두 얼굴, 양시론, 타협주의, 회색주의의 습성을 버리지 않는 교회에 대한 고발자로 서 있다.
     

    1997년 4월 주기철 목사 복권

    주기철 목사의 아들 주광조 장로는 주기철 목사복권과 관련하여 주기철이 “하나님 앞에서 면직도, 파면도 된 바 없다”고 했다. 복권 복직 선포식에서도 그 선포식 자체가 무용하다고 했다. 목사복권 결정은 그 자체가 신학적, 치리회적 근거가 없는 일이며 그 치리회의 결정은 불법이며, 무효이다. 그런데 왜 주광조는 주기철의 목사복권 행사를 원했느가? 주광조 일가에서 주기철의 순교정신은 표류하고 있다.

    목사복권 사건은 조직기구, 형식, 제도를 절대시 하는 그릇된 교회관과 왜곡된 역사인식이 낳은 일대 불상사였다. 교회의 존재는 조직기구와 그 결정에 달려있지 않다. 주기철 목사복권 및 복적선포식에 참석한 일본인 도까 가쓰야 목사는 일본교회가 영원히 죄책을 가지고 있다고 고백하고 있다. 그러나 이 행사를 주도한 통합측 교단과 장신대학은 단 한 마디의 참회의 말도, 반성의 표현도 없었다.

    조직기구(교회)의 결정을 절대화하거나 교회의 본질을 조직기구에서 찾는것은 잘못이다. 교회의 본질을 기구적 연속성과 고전성 혹은 정통성에서 찾는 것은 로마가톨릭 전통이다. 개혁주의 신학은 교회의 존재를 외형적인 요소에서 찾지 않는다. 영적, 신앙고백적 실체에 달려있는 것으로 본다. 배도하는 교회가 결정한 것을 유효한 것으로 여겨 복권을 시킨 것은 개혁주의 교회론과 종교개혁자들에 대한 반역이다.

    그러면 배도하는 교회의 파면을 유효한 것으로 볼 수 없다면, 왜 배도하는 교회의 성례나 안수는 유효한 것을 볼 것인가? 주기철 목사 복권을 주도한 사람들은 결과적으로 한국교회를 로마가톨릭 교회관의 시녀로 갖다 바쳤다. 배도하고 우상숭배하는 교회에서 파면당한 것만큼 명예로운 일이 또 어디 있겠는가? 그가 파면을 당한 것은 순교 다음 가는 영예로운 일이다. 목사복권으로 주기철의 명예가 회복된다고 하는 발상의 배후에는 한국교회의 신앙좌표 설정에 혼란을 준 특정 교회관이 자리잡고 있다. 교권주의, 제도주의, 형식지상주의를 핵심으로 하는 로마가톨릭 교회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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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73년 03월 17일 / 채필근 목사 소천

    1973년 3월 17일 한국 교회의 산증인 중의 한 사람이었던 채필근 목사가 소천했다.
    그는 일생동안 자기만의 노선을 개척한 사람으로 유명하다.
    박형룡 박사가 정통주의 입장을, 김재준이 진보주의 입장을 천명했다면 채필근은 정통주의와 진보주의의 양극단을 배격하고 중도 노선을 걸었다.

    1918년 평양신학교를 졸업한 채필근이 평양신학교의 정통주의에서 온건한 입장으로 선회한 것은 일본에서 유학하면서였다.
    1920년 캐나다 선교회의 주선으로 일본에 유학한 채필근은 메이치학원 고등학부 문과(1923년 졸)와 동경제국대학 문과(1925년 졸)에 유학하면서 신학영역을 넘어 폭넓은 세상 학문을 접할 수 있었다.
    그가 신학뿐만 아니라 종교일반, 철학, 역사, 심리학 등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한 분야에 관심을 갖고 저술도 남겼던 것도 바로 이런 배경 때문이다.

    그에게는 정통과 진보가 공존하고 있었다.
    평양신학교 출신이면서도 조선신학원 설립운동에 관여하였고, 1943년 장로교 총회가 "일본기독교조선장로교단"으로 개편되자 초대 통리로 선출되기도 했다.
    1930년대 초 김재준, 송창근 등이 <신학지남>에 진보적인 글을 발표하고 <아빙돈 단권주석> 번역에 참여하는 등 전통적인 신학이 위협을 받을 때에는 그는 교단의 입장에 서기보다는 진보적인 노선에 있는 이들과 입장을 같이했다.

    교회가 단순히 교회라는 울타리를 넘어 사회 전반에 영향을 미쳐야 한다는 측면에서는 적지 않은 도전을 가져다 주었지만, 교회가 상황과 시대의 변천에 따라 입장을 달리해 교회 본질 자체를 퇴색시켰다는 면에서는 비판을 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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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최대의 보증서이다.

    미국에서 물건을 살 때 보면 몇 십 달러짜리 물건에도 대개 보증서가 붙어 있다.
    그리고 잘못되었을 때 보증서만 보이면 군소리 없이 새 것으로 바꾸거나 수리해 준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최대의 보증서이다.
    그것은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보증하는 것이다.
    먹고 입고 사는 일에도 하나하나 보증이 필요하다.
    그래서 보험회사가 잘 된다.
    퇴직, 은퇴, 생명보험 등 여러 각도에서 알 수 없는 미래에 대하여 안정을 보장받아야 안심이 되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들은 백 년 미만의 제한된 미래만을 보장할 뿐이다.
    그리스도가 발행하시는 생명보험은 영원한 보장을 약속한다.
    우리가 지불하는 보험료는 단지 믿음뿐이다.

    예수께서는 인간이 당하는 죽음 중에서도 가장 고통스러운 십자가형의 죽음을 철저하게 통과하셨다.
    빌라도의 "이 사람을 어떻게 하랴"라는 물음에 대한 군중의 "십자가에 못박으소서. 죽여야 하오. 십자가요! 죽음이요!" 하고 외치는 고함소리에 예수는 만족했을 것이다.
    죽어야 제물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인류의 죄악을 향한 신의 진노를 풀고 용서의 은총을 나타내기 위해서는 죽어야 했던 것이다.
    제단을 생략한 속죄는 있을 수 없다. 예수는 죽어야 했다.
    그 길만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아들의 길이며 종의 길이며 구세주의 길이었다.
    그리고 거기에 따르는 부활과 생명은 하나님의 만족을 나타내는 보상 곧 은혜인 것이다.
    크리스찬의 행복이란 십자가가 주는 기쁨이라고 할 수 있다. 십자가가 가볍게 느껴질 때가 은혜받은 때이다.

    예수께서 지신 십자가를 생각하며 감사할 뿐만 아니라 자신도 예수와 함께 구체적인 십자가를 질 때 은혜에 대한 진정한 기쁨을 맛볼 수 있다.
    십자가는 특별한 성격을 가지고 있다.
    그것을 바라보기만 하는 자는 그것을 어리석은 것이요, 부끄러운 것이요, 손실이요, 후회만이 남는 것으로 여긴다.
    그러나 십자가를 진 자에게는 그것이 자랑과 기쁨과 영광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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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나님 다시 가져 가십시오

    아주, 아주 옛날에 나이가 많은 할머니, 할아버지 부부가 살았습니다.
    그들은 나이가 계속 들면서, 자신들의 미래에 대하여 걱정을 많이 하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가끔 이런 질문들을 해봅니다.
    "만일 우리에게 돈이 다 떨어지면 어떻게 하면 좋을까?"
    "누가 우리를 돌 볼것인가?"
    "누가 우리의 셋돈을 낼 것인가?"
    "누가 우리에게 먹을것을 사 줄것인가?"
    그들은 이와같은 생각들을 가끔 했습니다.

    그들은 매일 "오늘 우리에게 우리의 일용할 양식을 주옵소서"라고 기도했음에도 불구하고, 또 하나님께서 그들의 기도를 매일 들어주셨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계속 장래의 일에 대하여 걱정하고 걱정 했습니다.

    어느날 아침이었습니다.
    할머니가 아침을 만들기 위하여 부엌에 들어갔습니다.
    할머니는 부엌에서 난로위에 큰 보석이 하나 놓여있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할머니는 남편 할아버지에게로 황급히 와서 "여보, 이것좀 보세요! 이 큰 보석좀 보세요. 부엌에 있었어요." 라고 했습니다.
    할아버지는 크 큰 보석을 보고 감탄했습니다.
    그리고 큰 소리로 말햇습니다.
    "여보, 이제 우리는 미래에 대하여 더 이상 걱정안해도 되게 되었어요.
    이 보석은 엄청난 가치가 있어요.
    팔면 큰 돈이 될거예요.
    이것을 팔아서 무엇이든지 많이 삽시다."라고 했습니다.

    그날밤 할머니는 꿈을 꾸었습니다.
    그 꿈에서, 할머니는 천국에 가 있었으며, 한 천사가 할머니에게 모든 곳을 구경시켜 주었습니다.
    구경하는 가운데, 천사가 아름다운 의자가 많이 있는 곳을 보여 주었습니다.
    그런데 의자마다 아름다운 보석이 하나씩 있었습니다.
    천사는 설명했습니다.
    "이 의자들은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을 위해 마련된 것이지 돈을 믿는 사람들을 위해 마련된 것이 아닙니다."라고 했습니다.
    천사는 또 할머니에게 할머니를 기다리고 있는 의자를 보여주었습니다.
    천사는 "할머니가 천국에 오시면 이 의자가 할머의 의자입니다."라고 했습니다.

    할머니가 자기 의자를 자세히 살펴보니 큰 보석이 하나 들어갈 만큼의 빈 구멍이 하나 있었습니다.
    할머니는 천사에게 물었습니다.
    "여기 있던 보석은 어디 갔습니까?"
    천사는 대답하기를, "여기있던 보석이 할머니의 난로위에 있던 그 보석입니다.
    그러니까 할머니는 그 보석을 미리 받은 것입니다.
    만일 할머니가 그것을 팔아서 돈을 써버리면 다시는 되찾을 수 없습니다."라고 했습니다.

    할머니가 꾼 꿈의 내용은 이러했습니다.
    아침에 일어나 할머니는 남편에게 꿈이야기를 했습니다.
    한참동안 그들은 그 보석을 어떻게 할 것인가에 대하여 이야기했습니다.
    결국 그들은 그 보석을 되돌려 주기로 했습니다.
    그들은, "우리는 하나님을 믿어야지 보석을 믿어서는 안된다."라고 햇습니다.

    그날저녁 잠자리에 들기전에 그들은 그 보석을 난로위에 되돌려놓고, "하나님 다시 가져 가십시오"라고 기도했습니다.
    그랬더니 하나님께서 그 보석을 다시 가져가셨습니다.
    그 다음날 아침 그들이 일어나 난로를 보니보석이 없어졌습니다.

    두 노인 부부는 행복감을 느꼈습니다.
    두 노부부는 도둑맞을 염려가 없는 하늘에 보물을 두는 것이 훨씬 낫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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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적 성숙함의 특징들

    우리는 어떻게 스스로의 영적인 상태를 진단할 수 있을까요?
    만일 우리가 잘못 진단을 한다면 결국 스스로에게 속고 맙니다.
    당신은 지금까지 무엇으로 어떤 기준을 가지고 스스로의 영적인 상태를 진단해 왔습니까?

    아래 세 가지 질문은 어쩌면 가장 정확하게 우리들의 영적인 상태를 공개하는 질문이 될 것입니다.

    당신은 이 질문들에 대하여 하나님 앞에서 정직하게 대답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1.  당신은 어떠한 댓가를 치르더라도 하나님께 순종하고자 하는 결단이 있는가?

    2. 당신은 다른 사람에게 의존하지 않고도 스스로를 양육할 수 있는 능력이 있는가?

    3. 당신은 기꺼이 다른 사람들을 섬기고자 하는 자세를 가지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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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채필근(蔡弼近) 목사 : 3년상을 치르고 공자님께 다시 돌아오겠습니다 

    평양신학교 교장을 지냈던 채필근(蔡弼近) 목사는 한학과 동양학은 물론 해박한 신학과 철학을 겸비한 신학자였습니다. 
    본래 채 목사는 철저한 유교가정에서 자랐으며 유교경전에 심취했습니다.
    그런데 14살 되던 1898년도에 아버지가 먼저 복음을 받아들이면서 기독교로 개종했습니다.

    당시 소년 채필근의 심정은 아버지를 이단에게 빼앗긴 것 같은 슬픔으로 가득했습니다.
    개종한 아버지는 600여권의 책을 쌓아 놓고 공부하던 유명한 한학자이셨기 때문입니다.

    채필근은 공자에게 이렇게 하소연했습니다.

    “공자시여, 아버지가 그리스도교를 공박하고 유교를 옹호하는 글을 쓰시겠다더니 기독교 경전 성경을 보시다가 불행하게 그리스도교에 빠지셨습니다.
    공자의 말씀에 이단을 공부하면 해롭다고 하심이 이것을 가리키심인 듯합니다.
    그러나 저는 결코 공자의 도를 버리지 않기로 맹세합니다.”

    그로부터 1년 후 아버지가 채필근을 부르더니

    “내일은 주일이니 예배당에 함께 가자” 라고 말했습니다.
    그는 피할 길이 없었습니다.

    결국 눈물을 머금고 난생 처음 아버지를 따라 예배당에 갔습니다.
    그 날 집으로 돌아온 채필근은 공자께 다시 호소하였습니다.

    “공자님, 정말로 죄송합니다.
    당신의 가르침 중에 아버지가 잘못하면 간하고 간하여도 듣지 않으면 울면서 좇으라고 하셨지요.
    세상을 떠나시면 3년까지 고치지 말라고 하셨지요.
    저도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면 3년상을 치르고 틀림없이 다시 돌아오겠습니다.”

    그러나 채필근은 끝내 공자한테 돌아가지 않고 목사가 되었습니다.

    훗날 채필근 목사는 ‘공자께’ 라는 글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다시 공자에게로 돌아오겠다던 맹세를 지키지 못해 미안합니다.
    그러나 나는 공자가 살아 계시다면 반드시 그리스도교에 귀의할 것이라고 믿습니다.
    공자나 소크라테스, 석가모니 같은 성인들도 만왕의 왕이며 만주의 주이신 그리스도 앞에 무릎을 꿇어야 한다는 것이 기독교 신앙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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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 새벽묵상 역대상




    성전(聖殿)을 정화(淨化)하신 예수

    예루살렘 성전은 유대교의 예배와 삶의 중심이었다.
    성전은 이스라엘 역사를 통해서 백성들이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고 제사를 드리는 처소였다.
    그런데 예수 당시 성전은 율법주의에 빠진 이스라엘이 속죄를 위하여 타성적으로 제사를 드리기 위해 제물을 사고 파는 종교적 장사터로 변모하였다.
    예수는 이 사실을 보고 진노하셨고 동물들을 쫓아내시고 환전상들의 테이블을 뒤엎으시면서 성전을 정화하신 것이다.

    I. 구약의 성전 : 가시적 성전

    구약 출애굽 광야시절에서는 하나님은 이동식 성전인 성막(聖幕, tabernacle)에서 그의 백성들을 만나셨다.
    성막의 지성소는 하나님 임재의 처소였고, 가장 거룩하였다.
    성소에서는 속죄물을 바침으로써 백성들의 죄가 속(贖)함을 받았다.
    지성소(至聖所, sanctum sanctorum)에는 대제사장이 일년에 한번씩 들어가 희생의 제물을 바침으로써 자신과 백성들의 죄를 속죄하였다.
    성막에는 하나님의 법궤와 만나와 아론의 지팡이가 진설(陳設)되었다.
    성막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였다.
    모세는 이 성막에서 하나님을 대신하여 백성들을 만났다.

    이스라엘이 약속의 땅으로 들어간 후에는 솔로몬 왕에 이르러 비로소 예루살렘 성전이 건립되었다.
    이 솔로몬 성전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게 된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의 율법을 지키지 않음으로 이 성전은 바벨론(Babylon)제국에 의하여 훼파되고 하나님의 전(殿)의 집기들은 바벨론으로 옮겨가게 된다.
    구약의 역사서인 역대하서는 이 사실을 기록하고 있다.

    “여호야김이 왕위에 오를 때에 나이가 이십오세라. 예루살렘에서 십일년 동안 다스리며 그의 하나님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하였더라.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이 올라와서 그를 치고 그를 쇠사슬로 결박하여 바벨론으로 잡아가고, 느부갓네살이 또 여호와의 전 기구들을 바벨론으로 가져다가 바벨론에 있는 자기 신당에 두었더라”(역대하 36:5-7).

    그리고 다니엘서 서문에 이 사실이 기록되어 있다.
    “유다 왕 여호야김이 다스린지 삼 년이 되는 해에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이 예루살렘에 이르러 성을 에워쌌더니, 주께서 유다 왕 여호야김과 하나님의 전(殿) 그릇 얼마를 그의 손에 넘기시매 그가 그것을 가지고 시날 땅 자기 신들의 신전에 가져다가 그 신들의 보물 창고에 두었더라”(다니엘 1:1-2).

    그리하여 무너진 성전은 70년 후에 에스라와 학개와 스룹바벨이 바벨론에서 귀환하여 보잘 것 없는 모습으로 복구되고, 헤롯 시대에 와서 성전은 다시 확장 신축된다.

    II. 성전을 정화하심 : 요한복음의 기록

    요한복음의 저자 요한은 복음서 앞부분에 예수의 성전을 정화 사건을 기록하고 있다.
    다른 공관복음서에서는 복음서 끝부분에 기록되고 있는데, 요한복음에서는 성전 정화가 가나 혼인 잔치와 같이 복음서 서두에 놓여 있다.
    여기에는 성전 되신 예수의 메시아성을 강조하려는 저자의 편집 의도가 부각되어 있다.
    유대인의 유월절 절기에 예수는 예루살렘에 올라 가신다.
    성전은 내뜰과 외뜰이 있다.
    외뜰은 내뜰로 들어가는 것이 금지된 이방인 방문자들에게 열려 있었다.
    아브라함의 하나님을 경배하러온 이방인 경외자들은 외뜰에서 경배해야만 했다.
    이방인 경외자들은 방문시 히브리 제사장을 통해서 하나님의 약속을 받도록 도움을 받았다.
    그래서 이사야는 예언하였다.
    “내 집은 만민의 기도하는 집이라고 일컬어지게 될 것이다”(사 56:7).

    그런데 시간이 흐름에 따라서 성전은 기도의 집에서 종교적 장사터로 변모되어갔다.
    짐승들은 성전에서 제사를 드릴 때 희생제물로 사용되었다.
    짐승들은 제사드리는 자들에게 상품처럼 팔렸다.
    그런데 이것이 관례가 되어 버림으로써 하나님의 전(殿)은 장사터로 변모된다.
    외뜰이 팔리는 짐승으로 채워져서 이방인들이 하나님을 경배할 공간까지 빼앗았다.
    성전은 경건의 영과 헌신의 정신 없이 단지 형식적인 율법적 제사를 드리기 위하여 각종 번제물을 사고 파는 장사터로 변모한 것이다.

    예수는 “성전 안에서 소와 양과 비둘기 파는 사람들과 돈 바꾸는 사람들이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노끈으로 채찍을 만드사 양이나 소를 다 성전에서 내쫓으시고 돈 바꾸는 사람들의 돈을 쏟으시며 상을 엎으신다”(요 2:14-15).
    그리고 비둘기 파는 사람들에게 이르신다.
    “이것을 여기서 가져가라. 내 아버지의 집으로 장사하는 집을 만들지 말라”(요 2:16).
    성전부패에 책임이 있는 자들은 성전에서 일과를 수행하는 일반 제사장들이 아니라 거의 전적으로 지도급 제사장 가문이었다.(에녹1서, 모세의 유언 5:3-6:1)

    예수의 성전 정화 행위는 헤롯 성전 뜰의 남단에 위치한 주랑(Royal Portico) 가까이에서 발생한 것으로 추정된다.
    성전 예배에는 순결한 비둘기와 동물이 필요했다.
    환전상들은 성전세를 지불하려는 자들에게 두로 세겔(Tyrian Shekel)로 환전해 주었다.
    두로 세겔은 비록 유대인들에게 반감을 일으키는 상징을 담고 있기는 했지만 최고의 품질과 함께 은의 함량도 가장 높았다.
    두로 세겔은 오늘날 미국 달러(dollar)처럼 당시 구할 수 있는 가장 잘 통용된 주화(鑄貨)였다.

    성전을 정화하신 이러한 예수의 행위를 요한은 다음같이 해석한다.
    “주의 전을 사모하는 열심이 나를 삼키리라”(요 2:17).
    요한과 제자들은 이 사건을 통하여 예수의 메시아적 사명에 관하여 언급하고 있다.
    복음서 저자 마태는 이 성전을 정화하신 예수의 행위가 예수를 십자가 죽음에 이르게 한 고발거리를 제공한 것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예수가 나중에 예루살렘에서 체포되어 공회에서 재판을 받게 되었을 때 두 사람이 와서 성전을 정화할 시(時) 예수가 한 말을 고발하고 있다.
    “이 사람의 말이 내가 하나님의 성전을 헐고 사흘 동안에 지을 수 있다 하더라”(마 26:61).
    유대인들에 의하면 이들은 성전은 하나님의 집이기 때문에 성전을 허문다는 것은 하나님의 이름을 손상하는 것이며, 참람의 죄를 짓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당시 제사장 신분도 아니고 갈릴리에서 올라온 무명 랍비였던 예수가 성전을 정화하신 행위는 그의 메시아 의식에서 바르게 조명될 수 있다.
    성전 정화 행위는 예수의 상징적인 메시아 행위(symbolic Messianic action)였다.
    예수께서 성전을 정화하실 시에 하신 말씀 “이 성전을 허물면 사흘만에 짓겠다”는 나중에 예수가 산헤드린에서 재판을 받을 때 성전 모독의 죄목으로 고발된다.

    III. 성전 정화의 권위는 예수의 메시아 되심에서 나옴

    유대인들은 성전을 정화하신 예수의 행위에 대하여 항의하면서 이에 대한 표적을 보이라고 요구한다.
    “네가 이런 일을 행하니 무슨 표적을 우리에게 보이겠느냐”(요 2:18).
    유대 종교 지도자들은 예수에게 그가 어디서 그런 일을 행하는 권셰를 받았는지 묻고 있는 것이다.
    이에 대하여 예수는 대답한다.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요 2:19).

    성전 정화 행위는 예수의 메시아 의식과 관련하여 이해될 수 있다.
    당시 제사장 신분도 아니고 변두리 지역인 갈릴리에서 올라온 무명 랍비에 불과한 예수가 예루살렘 성전을 정화한 것은 그의 메시아적 자의식에서 나온 것이다.
    성전 정화 행위는 선지자적 표적(表蹟, wonder) 행위 이상의 것이었다.
    우리는 구약의 전통에서 이사야나 에스겔 등 예언자들에게서 타락한 제의(祭儀)에 대한 비판적 예언을 찾아 볼 수 있다.
    그런데 랍비 예수가 몸소 채찍을 들고 성전을 정화하였다는 것은 예언자적 비판을 넘어선 나사렛 예수에게서만 찾아 볼 수 있는 독특한 행위이다.
    이것은 메시아적 표적 행위였다.
    복음서 저자 요한은 이러한 예수의 메시아적 자의식을 다음같이 표현하고 있다.
    “주의 전을 사모하는 열심이 나를 삼키리라” 라는 구약의 수난 시편 69장 9절의 말씀을 인용하여 설명하고 있다.
    예수는 장사터로 변한 성전의 불결해진 모습을 보면서 성전 자체가 되시는 자신의 몸을 청결케 하여야 한다는 성전(聖殿)사모의 열정을 표출한 것이다.
    예수의 인성이 그 안에 계시는 신성을 표출한 것이다.

    예수는 그의 몸인 새로운 영적 성전을 지으시기 위하여 돌로 지어지고 의식(儀式)으로 집전되는 옛 성전을 허시겠다는 것이다.
    이러한 그의 말씀에는 그의 메시아적 사역의 핵심 사상이 들어 있다.
    성전에서 사고 파는 행위를 금지한 이유는 당시 성전 제사가 타락한 것을 지적할 뿐 아니라 성전 제사가 자신이 몸으로 드릴 종말론적 제사에 의하여 능가될 것을 예표하신 것이다.
    또한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만에 짓겠노라”는 예수의 말씀은 메시아로서의 자신의 대속적 죽음을 촉발하게 하는 의도가 담겨있는 말이었다.
    예수는 자신의 죽음이 무엇보다도 이스라엘의 죄를 속하고 이들을 하나님께 화해시키는 진정한 의미와 목적을 종말론적으로 성취한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IV. 성전 정화 행위의 종말론적 성격

    성전 정화 행위가 예수께서 예루살렘 입성 직후에 일어났다는 것은 예수 정화 행위의 종말론적 성격을 드러낸다.
    예수의 성전 정화 행위는 유대교 정결법을 수호하려한 단순한 개혁 행위로 이해하는 것은 이 행위가 갖는 종말론적 성격을 놓치는 것이다. 그것은 세 가지 종말론적 의미를 갖는다.

    제도적 성전 제사 시대 종언 : 예수 안에서 종말론적 예배 시대 도래

    제도적 성전 제사 시대가 지나갔다는 것이다.
    제도적인 성전은 모세가 준 율법에 의하여 생긴 제도다.
    율법은 신성한 하나님의 법이긴 하나 이 율법은 인간의 외면적 행위에 대한 규칙을 명하는 것으로 그것의 효율성은 외부적인 것이었다. 율법에 의한 예배는 진정한 내면성에서 나오는 진심으로 드리는 예배가 아니었다.
    율법에 의하면 진정한 예배란 단지 짐승의 기름이나 제물만을 드리는 것이 아니라 정의를 행하고 하나님의 법을 행하는 의로운 제사여야 했다. 성전 제사가 타락하게 되었을 때 이사야는 불의한 제사를 비판하고 있다.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너희의 무수한 제물이 내게 무엇이 유익하뇨 나는 숫양의 번제와 살진 짐승의 기름에 배불렀고 나는 수송아지나 어린 양이나 숫염소의 피를 기뻐하지 아니하노라”(이사야 1:11).

    “헛된 제물을 다시 가져오지 말라 분향은 내가 가증히 여기는 바요 월삭과 안식일과 대회로 모이는 것도 그러하니 성회와 아울러 악을 행하는 것을 내가 견디지 못하겠노라”(이사야 1:13).

    “너희는 스스로 씻으며 스스로 깨끗하게 하여 내 목전에서 너희 악한 행실을 버리며 악행을 그치고, 선행을 배우며 정의를 구하며 학대 받는 자를 도와 주며 고아를 위하여 신원하며 과부를 위하여 변호하라 하셨느니라“(이사야 1:16-17).

    이러한 구약적 예배는 제물드리는 자의 마음을 변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제물 드리는 자의 허물을 번제 제물에 전가(轉嫁)하여 사함을 받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는 다가오는 그리스도의 예표인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제물되심은 옛 제사의 종말론적인 성취가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나사렛 예수는 사마리아 여인에게 구약적 예배가 끝나고 그 자신 안에서 종말론적 예배의 시대가 도래했음을 알리신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자여 내 말을 믿으라 이 산에서도 말고 예루살렘에서도 말고 너희가 아버지께 예배할 때가 이르리라.
    너희는 알지 못하는 것을 예배하고 우리는 아는 것을 예배하노니 이는 구원이 유대인에게서 남이라”(요한복음 4:21-22).

    예수는 성전에서 나와서 제자들에게 성전파괴를 예언하신다.
    “예수께서 성전에서 나와서 가실 때에 제자들이 성전 건물들을 가리켜 보이려고 나아오니,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가 이 모든 것을 보지 못하느냐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고 다 무너뜨려지리라“(마태복음 24:1-2).
    예수의 성전 파괴 예언은 추후 70년에 로마 디도 장군이 이끈 군대에 의하여 파괴된다.
    예루살렘 성전 파괴에 함께 구약적 성전 예배는 역사 속에서 종말을 고하게 된다.

    신령한 성전의 시대 도래 : 예수의 몸이 성전

    신령한 성전의 시대가 도래했다는 것이다.
    예수의 정화 행위는 메시아가 성전 제도를 바로 잡을 것이라는 약속의 성취를 시사한다.
    예수는 사마리아 여인에게 이제 성전 시대가 지나가고 영으로 드리는 예배시대가 도래했음을 알리신다.
    “아버지께 참되게 예배하는 자들은 영과 진리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아버지께서는 자기에게 이렇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요 4:23).
    하나님에게는 이제 더 이상 외형적 제물을 가지고 예배를 드리는 것이 아니라 진리와 영으로 예배를 드려야 한다고 가르치신다.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영과 진리로 예배할지니라“(요 4:24).
    사마리아 여인은 메시아가 오시면 참된 예배를 알려주실 것이라는 당시 널리 알려진 메시아 대망을 피력한다.
    “여자가 이르되 메시아 곧 그리스도라 하는 이가 오실 줄을 내가 아노니 그가 오시면 모든 것을 우리에게 알려 주시리이다”(요 4:25).
    이에 예수는 자신이 바로 메시아라고 말씀하신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게 말하는 내가 그라 하시니라”(요 4:26).
    메시아이신 그리스도 안에서는 더 이상 제사장에 따라서 예배의 성격이 달라지는 가시적 성전이 필요 없다.
    예수의 몸은 신령한 성전이다: “예수는 성전된 자기 육체를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요 2:21).

    소아시아의 콘스탄티노블에 있는 소피아 성당은 이슬람의 점령 후에 모스코로 변했고,
    러시아 정교의 화려한 성전은 볼세비키 혁명과 70년간 공산주의 시대를 거치면서 곡물창고가 되었다.
    21세기에 들어와서 영국 국교회(성공회), 덴마크 루터교회, 독일의 교회당, 네덜란드 교회당이 폐쇄되고 있다.
    네덜란드에서는 교회가 슈퍼마켓이나 꽃집 또는 서점이나 헬스 클럽으로 변경된 사례들이 발생했다.
    가시적 성전은 변화무상하며, 영구적이 아니다.
    가시적 성전은 비가시적 성전을 상징하는데 그 의미가 있다.
    가시적 성전은 유한하나 비가시적 성전은 영원하다.
    하늘의 성전인 새 예루살렘에서는 더 이상 성전이 필요 없다.

    성전은 (유대인들만의 성전 너머) 만인의 기도의 집

    성전은 이제 더 이상 유대인들만의 성전이 아니라 만인의 기도의 집이다.
    요한의 기록에 의하면 예수는 성전을 정화하시면서 “내 아버지 집으로 장사하는 집으로 만들지 말라”(요 2:16b)
    요한은 예수의 성전 정화 동기를 구약 시편 69편 9절을 가져와 “주의 전을 사모하는 열심히 나를 삼키리라”(요 2:17)라고 설명하고 있다. 요한의 이러한 설명을 공관복음과 연결시키면 보다 적극적으로 구약 이사야의 예언 ”내 집은 만민의 기도하는 집이라 칭함을 받으리라“(사 56:7b; 막 11:17a) 라는 구절과 연계하여 이해될 수 있다.
    마태는 “내 집은 기도하는 집이라 일컬음을 받으리라”(마 21:13),
    누가는 “내 집은 기도하는 집이 되리라”(눅 19:46)라고 인용했다.
    “만민”을 누락했으나 인용된 구약 이사야서의 원문에는 “만민의 기도하는 집“이라고 되어 있다.
    따라서 이 구절의 말씀은 성전이 더 이상 유대인만의 기도처가 아니라 택함을 맏은 모든 사람들의 기도처가 될 것을 시사(示唆)해주고 있다.
    마가가 인용한 이사야 56장 7절 다음에는 하나님 선택의 보편화가 약속되어 있다.
    “이스라엘의 쫓겨난 자를 모으시는 주 여호와가 말하노니 내가 이미 모은 백성 외에 또 모아 그에게 속하게 하리라 하셨느니라”(사 56:8). 이방인들도 복음을 믿고 회개하면 성령으로 중생하여 하나님의 백성이 되며 하나님의 언약 공동체 안으로 들어오게 되며 하나님의 성전에서 신령과 진리로 하나님과 교통하게 된다.

    V. 성전 보다 큰 이 인자 예수 그리스도

    마태는 예수와 바리새인 간의 안식일 논쟁에 관해 기록하고 있다.
    안식일에 제자들이 시장하여 밀이삭을 잘라 먹었다.
    이 장면을 본 바리새인들은 제자들이 율례를 어겼다고 비난하였다.
    예수는 이에 관련하여 구약 율법 정신의 관점에서 제자들의 행위를 변호하신다.
    “다윗이 자기와 그 함께 한 자들이 시장할 때에 한 일을 읽지 못하였느냐.
    그가 하나님의 전에 들어가서 제사장 외에는 자기나 그 함께 한 자들이 먹어서는 안 되는 진설병을 먹지 아니하였느냐.
    또 안식일에 제사장들이 성전 안에서 안식을 범하여도 죄가 없음을 너희가 율법에서 읽지 못하였느냐”(마태복음 12:3-5).
    안식일에 제사장들은 성전에서 예배와 의식 집전을 해야 하기 때문에 안식일에 쉴 수 없다.
    일을 해야만한다.
    그러므로 직무상 안식일을 범하는 것이 허용되었다.
    예수는 모세 율법이 제정한 성전법을 넘어서서 성전(聖殿)의 정신을 말씀하시고 자신에게 고유한 전대미문의 결정적인 메시아 권위를 표명하신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성전보다 더 큰 이가 여기 있느니라.
    나는 자비를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노라 하신 뜻을 너희가 알았더라면 무죄한 자를 정죄하지 아니하였으리라.
    인자는 안식일의 주인이니라 하시니라”(마태복음 12:6-8).
    예수 자신은 보이는 구약의 성전보다도 크신 자다.
    성전의 제사에는 회개와 새로운 삶의 결단이라는 윤리가 동반되어야 한다.
    그렇치 않고 드리는 불의한 제사는 하나님이 미워하신다.

    예수의 말씀은 불의한 제물을 드리는 당시의 부패한 성전제사를 질책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한 이사야의 말씀을 확인하고 있다.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너희의 무수한 제물이 내게 무엇이 유익하뇨 나는 숫양의 번제와 살진 짐승의 기름에 배불렀고 나는 수송아지나 어린 양이나 숫염소의 피를 기뻐하지 아니하노라.
    너희가 내 앞에 보이러 오니 이것을 누가 너희에게 요구하였느냐 내 마당만 밟을 뿐이니라.
    헛된 제물을 다시 가져오지 말라 분향은 내가 가증히 여기는 바요 월삭과 안식일과 대회로 모이는 것도 그러하니 성회와 아울러 악을 행하는 것을 내가 견디지 못하겠노라.
    내 마음이 너희의 월삭과 정한 절기를 싫어하나니 그것이 내게 무거운 짐이라 내가 지기에 곤비하였느니라.
    너희가 손을 펼 때에 내가 내 눈을 너희에게서 가리고 너희가 많이 기도할지라도 내가 듣지 아니하리니 이는 너희의 손에 피가 가득함이라. 너희는 스스로 씻으며 스스로 깨끗하게 하여 내 목전에서 너희 악한 행실을 버리며 악행을 그치고, 선행을 배우며 정의를 구하며 학대 받는 자를 도와 주며 고아를 위하여 신원하며 과부를 위하여 변호하라 하셨느니라”(이사야 1:11-17).

    하나님은 인격적인 신이시므로 정의로운 삶과 행실이 동반되지 않은 종교적인 제물 희생을 싫어하신다.
    하나님은 선행을 행하며, 정의를 구하며 학대 받는 자를 도우며, 고아와 과부의 억울함을 변호하는 삶의 제사를 원하신다.
    이러한 윤리적 제사는 구약 하나님이 그의 백성들로부터 바라시는 것이었다.
    관례적으로 드리는 속죄제, 그리고 악행과 죄을 행하면서 신의 진노를 무마하기 위하여 드려지는 제물 희생을 하나님은 가증스럽게 여기신다.
    하나님은 의로운 제사를 원하신다.
    예수의 성전 정화는 구약 이사야가 대언한 의로운 제사를 메시아적 권위로서 수행하신 행위이다.

    구약의 다윗 회개의 시편도 이러한 예수가 가르치는 제사의 정신을 말해주고 있다.
    “주께서는 제사를 기뻐하지 아니하시나니 그렇지 아니하면 내가 드렸을 것이라 주는 번제를 기뻐하지 아니하시나이다. 하나님께서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하나님이여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하지 아니하시리이다...그 때에 주께서 의로운 제사와 번제와 온전한 번제를 기뻐하시리니 그 때에 그들이 수소를 주의 제단에 드리리이다”(시편 51:16-19).

    예수는 성전 제사의 정신이란 하나님에 대한 신앙과 헌신과 회개에 기반해야 하는 것이요, 각종 성전 제사란 이의 가시적 표현이어야 한다.
    그리고 예수는 자신이 안식일의 주인이라고 전대미문의 결정적인 권위를 표명하신다.
    인자가 안식일의 주인이라는 것은 안식일을 제정하신 메시아인 자신이 바로 안식일의 주인공으로서 안식일의 진정한 의미를 충족시키신다는 것이다.

    VI. 신약의 성전 : 예수의 몸

    유대인들은 예수의 말씀: “내가 삼일 만에 이 성전을 지으리라” 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예수를 힐난한다: “이 성전은 사십육 년 동안에 지었거늘 네가 삼 일 동안에 일으키겠느냐”(요 2:20). 예수의 이 말씀은 자신의 대속적 죽음을 통해서 새 성전을 지으실 것을 공포(公布)하신 것이다.

    헤롯 왕은 주전 20년/19년에 화려한 성전 확장공사를 시작하여 실질적으로는 예루살렘 성전을 새로이 건축하였다. 46년간이나 걸렸다. 그러므로 이 사실을 아는 유대인들에게 예수의 말씀은 전혀 이해가 되지 않는 허튼 소리가 되어 버린 것이다. 그러나 복음서 저자 요한은 “삼일만에 성전을 일으키리라”는 예수의 말씀을 영적으로 해석하고 있다: “그러나 예수는 성전된 자기 육체를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후에야 제자들이 이 말씀하신 것을 기억하고 성경과 예수께서 하신 말씀을 믿었더라”(요 2:21-22).

    이 성전 정화 행위는 예수의 십자가와 부활 사건과의 연관 속에서만 바르게 해석되어 질 수 있다. 복음서 저자 요한은 성전이란 예수의 몸이라고 말하고 있다. 유대인들은 성전인 예수를 헐어 버리고자 했다. 말하자면, 성전이신 예수를 죽이고자 했다. 몸을 지니신 예수는 십자가 상에서 돌아가셨다. 그러나 그는 장사된지 사흘 만에 다시 사셨다. 대속적 죽음을 통해서 예수는 그의 몸으로 새로운 성전을 지으신 것이다. 몸을 지닌 예수는 부활 하신 후, 성령의 임재 안에서 새로운 성전이 되신다. 이제 신령한 성전이신 예수(교회)는 우리가 하나님 만나는 처소가 된다. 사도 요한은 그의 계시록에서 하나님 나라에서는 더 이상 보이는 성전이 필요없게 되는데 그 이유는 하나님과 어린양이 스스로 성전이 되시기 때문이라고 하나님의 장막이 인간과 함께 거하는 종말론적 사건을 증언한다: “성 안에서 내가 성전을 보지 못하였으니 이는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와 및 어린 양이 그 성전이심이라”(계 21:22).

    VII. 성도(聖徒)의 몸인 성전

    나사렛 예수는 제자들에게 다른 보혜사인 진리의 영을 보내어 주겠다고 약속하였다. 복음서 저자인 요한은 예수의 말씀을 전해 주고 있다: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리니, 그는 진리의 영이라. 세상은 능히 그를 받지 못하나니 이는 그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라. 그러나 너희는 그를 아나니 그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요 14:16-17). 예수가 보내실 다른 보혜사란 ‘희랍어 ’파라클레토스‘(παράκλητος, parakletos)로서 ”변호사/조력자”를 의미한다. 다른 보혜사는 위로자(comforter)이다. 예수는 그가 부활하신 후에 위로자인 성령을 보내어 주시겠다고 하신 약속에 따라서 오순절 이후에 믿는 자의 마음 속에 위로자 성령을 보내어 주셔서 신자들의 마음 속에 내주하고 계신다.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를 모신 신자들의 몸이 하나님의 성전(聖殿)이라고 하였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교회 신자들에게 보이는 성전이 아니라 성령의 전에 관하여 말하고 있다: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 자신의 것이 아니라”(고전 6:19). 신자의 몸이 성령의 전인 것은 “주와 합하는 자는 한 영”(고전 6:17)이기 때문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영이 신자의 마음 속에 인격적으로 내주하기 때문이다.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고전 6:20).

    여기서 사도 바울은 보이지 않는 교회를 하나님의 성전이라고 말하고 있다. 오늘날 이스라엘의 예루살렘에 가보면 헤롯의 성전은 더 이상 남아있지 않다. 예수께서 성전 정화하신 사건 이후 40년만에 역사적으로 예루살렘 성전은 주후 70년 로마군에 의하여 훼파된다. 그 후로 돌로 지어진 성전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게 된다. 옛날 성전 자리에 남아 있는 것은 이슬람이 세운 황금 성전 모스크(mosque)이다. 그리고 훼파된 성벽의 일부에서 유대인 방문객들이 종이 쪽지에 기도문을 써서 성벽 틈에 밀어 넣은 장면이 보인다. 보이지 않으신 하나님은 더 이상 가시적 성전 속에 계시지 않으시다는 것을 말해준다. 그러나 기독교 복음의 전파를 통하여 복음자체 이신 그리스도는 신자들의 마음 속에 영으로 내주하심으로써 성전을 이루고 계신다.

    VIII. 사라지고 있는 오늘날 유럽교회 : 한국 등 제3지역에서 성장하는 교회

    기독교 이후 시대가 도래함에 따라 2천년 역사를 지녀왔던 유럽지역의 교회당은 폐쇄되거나 이슬람 모스크나 세속 상업용 건물 등으로 변모하고 있다.
    서부 유럽에는 신도들의 수가 급감하자 폐쇄되어 다른 용도로 사용되고 있는 교회당이 수백 개에 이른다.
    특히 덴마크와 영국의 시골에서 이러한 현상이 두드러지고 있다.
    지역 당국이 재정을 지원하는 데에도 한계가 있어서 오래된 교회 건물은 도서관이나 문화 공간으로 용도 변경하여 어떤 건물은 상업적 용도로 탈바꿈 되기도 한다.

    영국 국교회(성공회)에서는 매년 약 20교회가 문을 닫으며, 덴마크에서는 매년 200개의 교회들이 용도가 변경되거나 사용되지 않게 된다.
    독일의 천주교회는 지난 10년 간 515개의 교회가 폐쇄되었다.
    교회 폐쇄가 가장 심한 유럽의 국가는 네덜란드이다.
    네덜란드의 천주교 지도자들은 앞으로 10년 동안 전체 천주교회 1,600개의 2/3 정도가 수명을 다할 것이며, 4년 이내에 700개의 개신교 교회가 문을 닫을 것이라고 전망했다.
    네덜란드는 동성애 허용 등 각종 세속주의와 인본적 자유주의가 득세하는 나라이기도 하다.
    20세기 초반만 해도 헤르만 바빙크, 아브라함 카이퍼 등이 주도된 개혁주의 정통주의가 교회와 사회를 이끌었으나 오늘날 인본적 자유주의가 교회와 사회를 지배하기에 이르런 것이다.
    유럽교회가 사양(斜陽)길을 가고 있는 중요한 이유는 교회가 가진 영성의 쇠퇴다.
    교회 안에 동성애, 혼외정사 허용, 종교다원주의, 세속주의가 들어오면서 이에 많은 신자들은 실망하고 교회를 떠나고 있는 것이다.

    유럽에서 유대교는 아직 굳건하며, 이슬람은 아프리카와 중동의 무슬림 국가들에서 들어오는 이주민들의 증가로 오히려 성장하고 있다. 미국의 Pew Research Center에 따르면, 유럽의 무슬림 비율은 1990년 4.1%에서 2010년에는 6%로 증가했으며, 2030년에는 8% 정도로 높아지고 그 수는 5,800만 명에 이를 것으로 전망된다.

    유럽교회의 쇠퇴현상을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가시적 교회는 조직화된 교회로서 그 수명이 있기 때문이다.
    개인이나 단체나 조직이나 국가도 그 수명이 있고 그 수명이 다하면 사라질 수밖에 없다.
    유럽의 가시적 교회가 세속화 됨으로써 교회의 영성이 상실되고 이 가운데 신자들도 기독교를 하나의 문화와 생활방식으로만 이해하기에 이르게 된 것이다.

    그러나 비가시적 교회는 시대와 공간을 너머서서 영원히 지속한다.
    비가시적 교회는 성령과 말씀이 지배하는 신령한 공동체다.
    지구촌 북반구에 속한 유럽과 미국에서 쇠퇴한 교회는 오늘날 지구촌 남반부 지역과 아시아, 아프리카, 남미지역에서 폭발적으로 성장하고 있다.
    이 지역에서는 가시적 교회도 크게 성장하고 있다.
    한국에서는 비록 탈성장시대에 접어들었다고 하나 세계적으로 메가처치(mega-church)가 7개나 있다.
    교회의 주인이신 성부, 성자 성령되시는 삼위일체 하나님 만이 쇠퇴하지 않고 썩지 아니하시고 영원히 계시고 통치하시기 때문이다.

    IX. 새 하늘과 새 땅의 성전

    요한복음의 저자인 요한은 그의 계시록에서 다시 성전을 언급하고 있다.
    여기서 요한은 새 하늘과 새 땅에서 이루어지는 성전에 관하여 언급하고 있다.
    요한은 종말론적으로 다가오는 새 하늘과 새 땅의 비전을 본다.

    “또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보니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이 없어졌고 바다도 다시 있지 않더라. 또 내가 보매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이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니 그 준비한 것이 신부가 남편을 위하여 단장한 것 같더라”(요한계시록 21:1-2).

    이 종말론적인 새 하늘과 새 땅에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이 하늘에서 지상으로 내려온다.
    그리하여 보이지 않는 하나님은 인간 가운데 거하신다.
    하나님이 거처를 인간의 거처 가운데 정하신다.
    “내가 들으니 보좌에서 큰 음성이 나서 이르되 보라 하나님의 장막이 사람들과 함께 있으매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계시리니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은 친히 그들과 함께 계셔서”(요한계시록 21:3).

    종말론적 현실에서 새 예루살렘 안에 성전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요한은 증언한다.
    “성 안에서 내가 성전을 보지 못하였으니 이는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와 및 어린 양이 그 성전이심이라”(요한계시록 21:22).
    하나님과 어린 양 그리스도가 성전이시기 때문이다.
    해와 달도 필요없다.
    하나님과 어린 양 그리스도가 새 하늘과 새 땅의 등불이 되시고 하나님의 영광이 온 누리에 편만하기 때문이다.
    “그 성은 해나 달의 비침이 쓸 데 없으니 이는 하나님의 영광이 비치고 어린 양이 그 등불이 되심이라”(요한계시록 21:23).
    지상의 성전은 다가오는 하나님 나라의 모형일 뿐이다. 지상의 성전은 성전 자체이신 하나님을 나타내는 상징일 뿐이다.

    X. 성전의 완성으로서 예수 그리스도

    옛 예루살렘 성전이나 신약의 교회당은 하나님의 임재의 처소였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신 이후 그의 성령을 보내어 주신 이래(以來) 하나님은 이제 그의 성도들의 마음 속에 내주하신다.
    그러나 바울은 아직도 우리는 하나님을 희미하게 본다고 말했다.
    “우리가 지금은 거울로 보는 것 같이 희미하나 그 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 지금은 내가 부분적으로 아나 그 때에는 주께서 나를 아신 것 같이 내가 온전히 알리라”(고린도전서 13:12).
    세상의 종말에 이르러 우리는 하나님을 얼굴과 얼굴을 대면하여 보며, 주님이 우리를 아신 것처럼 우리도 주님을 알게 된다.
    이 장면을 계시록의 저자 요한은 계시록 21장에 환상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새 하늘과 새 땅에는 성전이 없다.
    “성 안에서 내가 성전을 보지 못하였으니 이는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와 및 어린 양이 그 성전이심이라”(요한계시록 21:22).
    성전이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종교는 완성되기 때문이다.
    지상의 성전이란 하나님의 임재의 상징이다.
    그곳에서 하나님의 백성들은 하나님을 만난다.
    그 때 하나님의 장막이 인간들 가운데 계셔서 하나님이 친히 인간들의 하나님이 되실 것이다.
    “하나님의 장막이 사람들과 함께 있으매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계시리니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은 친히 그들과 함께 계셔서” 그 때 우리는 하나님을 얼굴과 얼굴을 대면하여 보게 될 것이다(요한계시록 21:3). 


    역대상 26장 요약

    고라, 므라리 자손이 성전 문지기 임무를 맡았고, 게르손의 후손들은 성전 곳간을 맡았고, 다른 레위인들에게도 여러 임무를 맡겼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역대상 27장 요약

    월별로 왕실 근무 지도자와 관원 24,000명을 배치, 이스라엘 각 지파 지도자들의 명단과 다윗왕 왕실의 재산 관리를 돌보는 자들의 명단,신하들과 개인 고문의 명단에 대해 기록하였습니다.

    역대상 28장 요약

    다윗이 성전 지을 계획을 신하들에게 알려주었고, 솔로몬에게는 하나님을 올바르게 섬기라고 당부하였으며 성전을 지을 설계, 예배, 기구 등을 설명하였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역대상 29장 요약

    성전을 짓기 위해서 다윗과 신하들은 하나님께 예물을 바쳤으며 다윗이 백성들과 함께 찬양과 기도를 드린 후 제사를 드렸으며, 이후 다윗이 죽고서 솔로몬이 왕이 되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성막(미시칸. mishkan ) מִשְׁכָּן 스트롱번호 4908

    1. 거주.  2. 욥 18:21. 3. 굴
    발음 [ mishkan ]
    어원  / 7931에서 유래
    구약 성경  / 139회 사용

    성전(비이라. bîyrâh ) בִּירָה
    스트롱번호 1002

    1. 요새.  2. 성전
    발음 [ bîyrâh ]
    구약 성경  / 16회 사용

    교회(에클레시아. ĕkklēsia ) ἐκκλησία, ας, ἡ
    스트롱번호 1577

    1. 회.  2. 모임, 운집.  3. 행 7:38
    발음 [ ĕkklēsia ]

    몸(소마. 
    sōma)  σῶμα, ατος, τό 스트롱번호 4983

    1. 몸.   2. 신체.  3. 시체
    발음 [ sōma ]
    어원 / 4982에서 유래
    그리스도의 공동체, 교회, 롬 12:5, 고전 10:17, 12:12, 27, 엡 1:23, 2:16, 4: 4, 12, 16, 5:23, 30, 골 1:18, 24, 2:19, 3:15.

  • 관련 성경 /  몸(마 5:29, 눅 11:34, 고후 4:10), 시체(마 14:12, 요 19:31, 유 1:9), 주검(눅 17:37), 육체(요 2:21, 히 13:11), 형체(고전15:37, 38, 40), 종(계 18:13).

  • 5월 10일(토) 역대상 26-29장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하나님의 전(29:2)

    내가 이미 내 하나님의 전을 위하여 힘을 다하여 예비하였나니 곧 기구를 만들 과 은과 과 철과 나무며 또 마노와 박을 보석과 꾸밀 보석과 채석과 다른 보석들과 화반석이 매우 많으며.
    With all my resources I have provided for the temple of my God--gold for the gold work, silver for the silver, bronze for the bronze, iron for the iron and wood for the wood, as well as onyx for the settings, turquoise, stones of various colors, and all kinds of fine stone and marble--all of these in large quantities.

    하나님의 전(殿)이란 하나님이 계신 곳을 말합니다.
    하나님이 계신 곳을 눈에 보이는 건물을 중심으로 "성막(聖幕)" "성전(聖殿)" "교회(敎會)" 라고 합니다.
    반면에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심령(心靈)"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어느 제한된 곳에 계시는 존재가 아닙니다.
    야곱은 이런 고백을 합니다(창 28:17).

    "야곱이 잠이 깨어 가로되 여호와께서 과연 여기 계시거늘 내가 알지 못하였도다."

    하나님은 무소부재하신 영적 존재입니다.
    문제는 그 하나님이 여기에 계신다는 것을 인식하지 못하고 깨닫지 못하는 것은 인간의 어리석음 때문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윗은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는 언약궤를 모실 곳을 건축하려고 한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허락하지 않으셨기 때문에 건축을 위한 온갖 재료를 준비하고 그 일을 다윗의 아들에게 위임하게 됩니다.

    나라의 최고 통치자인 왕으로서 얼마든지 전을 건축할 수 있는 여력이 있었지만 건축하지 않았던 다윗의 믿음을 생각합니다.
    또한 내가 건축하지 않는 것일지라도 아들을 위하여 넉넉한 마음으로 재료를 준비하는 다윗의 마음을 생각합니다.
    하나님의 방법을 따르고자 하는 다윗의 순종을 생각합니다.

    그리스도인들도 다윗과 같은 믿음과 생각과 순종을 잊지말아야 하겠습니다.
    믿음은 유일하신 구세수 예수 그리스도만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생각은 나를 버리는 오직 거룩하신 하나님의 계시를 찾는 것입니다.
    순종은 이 길만이 내가 살아갈 유일한 방법이라고 확신하는 것입니다.

    믿음의 사람은 다윗과 같이 잘못했을 때는 즉시 그 길에서 돌이켜 회개할 줄 아는 사람입니다.
    믿음의 사람은 다윗과 같이 선한 계획일지라도 포기할 줄 알고 하나님의 계획을 인정하는 사람입니다.
    믿음의 사람은 다윗처럼 모든 여건이 잘 갖추어졌어도 그 환경을 선택하지 않고 주님이 원하는 길을 따라가는 사람입니다.









    성전은 3부로 나누었습니다(울람)

    (1) 현관(울람. ’ûwlâm)  אוּלָם  - 제사장이 들어오는 입구의 홀

    אוּלָם 스트롱번호 197

    1. 현관.  2. 정문.  3. 왕상7:6.
    발음 [ ’ûwlâm ]
    어원 / 단축형으로 אֻלָם이 사용됨. 복수 אֻלָם, 481에서 유래[맨다는 의미로부터]
    구약 성경 / 19회 사용
    • 1. 명사 현관, 정문, 왕상 7:6.
    • 관련 성경 /  주랑(왕상 6:3), 낭실(대하 3:4, 욜 2:17), 현관(겔 40:7, 8, 41:15, 46:8).

    (2) 헤칼. 성소(할론. challôwn)  חַלּוֹן - 본관 곧 성소인데 붙박이 교창에서 빛이 스며듭니다(왕상 6:4).

    성소는 높이가 약 13.63m 넓이가 약 9m 길이가 18.2m였습니다.
    돌로 마루를 깔고 그 위에 백향목으로 덮었습니다. 성소 내부는 백향목으로 두르고 지붕은 백향목 서까래에 마루로 덮었습니다(왕상 6:9). 백단목 벽기둥들이 운치를 더 했습니다(10:12). 기둥에는 생명나무를 조각하고 금으로 입혔습니다(16:21).

    חַלּוֹן 스트롱번호 2474

    1. 창문. 2. 창 26:8. 3. 수 2:15
    발음 [ challôwn ]
    어원  /  혼성. 복수ים, 욜 2:9, וֹת, 겔 40:16, 2490에서 유래
    구약 성경  / 31회 사용
    • 1. 명사 창문[벽에 구멍이 난 것으로부터], 창 26:8, 수 2:15, 삿 5:28.
    • 관련 성경  /  창(창 8:6, 왕하 9:30), 창문(수 2:21, 삿 5:28, 렘 9:21), 들창(잠 7:6).


    (3) 지성소(드빌. debîyr) דְּבִיר  - 지성소로 올라가는 층계 앞에 백향목으로 만든 작은 향단이 있었습니다.

    지성소는 창도 없고 굴 같은 9m정방형 방인데 주님의 거하시는 방이었습니다(대하 3:8-13). 지성소는 성소보다 마루가 높으며 4.5m 높이 감람나무로 만들고 금으로 장식한 두 그룹이 법궤 위에 마주 섰습니다.
    그룹은 베니게에서 들어온 날개 돋힌 스핑크스(여자 머리에 사자 몸)거나 베니게화한 천사신이었습니다(겔 9:22-25).
    성전 남서북삼면에 있는 이층방들은 창고실로 썼는데 올라가는 문들과 좁은 충계가 안과 밖에 있었습니다.


    דְּבִיר 스트롱번호 1687

    1. 솔로몬 성전의 지성소. 2. 왕상 6:5.  3. 19-22
    발음 [ debîyr ]
    어원 / 1696에서 유래
    구약 성경  / 16회 사용
    • 1. 명사, 남성 솔로몬 성전의 지성소, 왕상 6:5,19-22, 8:6,8, 대하 3:16,4:20, 5:7,9.

    • 관련 성경 /  지성소(왕상 6:5, 8:6, 대하 5:7), 내소(왕상 6:19, 7:49, 대하 4:20), 본전(대하 5:9), 성소(대하 3:16, 시 28:2).




    성전(聖殿)


    홀리랜드호텔에 있던 예루살렘 성전 모형. 현재는 이스라엘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

    성전(聖殿)은 '거룩한 전'이라는 뜻으로, 성경에서는 하나님이 거하시는 처소이자 제사장이 하나님께 제사를 올리는 장소로서 세워진 건축물을 가리킨다.
    솔로몬 시대에 옛적 아브라함이삭을 번제로 드리려고 했던 예루살렘 모리아산[1]에 최초로 건축되었고, 이후 구약시대 내내 이곳에서 제사가 이루어졌다.[2]
    성전의 구조는 기본적으로 성막을 그대로 따랐다.
    다만 성막에 비해 시설의 전체적인 규모가 커졌고, 성전 기명의 숫자도 늘었다.
    내소(內所)인 지성소(至聖所)에 언약궤를 보관했다.
    성전은 하나님이 거하시는 곳으로, 신약시대에는 성도를 가리켜 '하나님의 성령의 전'이라 칭하기도 한다.

    성전 역사 개괄

    성전은 '주께서 영원히 거하실 처소', '하나님의 이름을 두신 곳', '여호와의 집' 등으로 불렸다.[3]
    성전 안에는 언약궤가 보관되어 있었다.
    언약궤는 광야 생활 동안 이동식 성전인 성소(聖所), 곧 성막(聖幕)에 있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에 들어간 후에도 계속해서 여러 지역으로 옮겨졌다가 다윗시온성으로 들여왔다. 다윗은 성막에 보관하던 언약궤를 영구히 안치하기 위해 고정식 성소인 성전을 건축하기로 계획했다. 하나님은 다윗의 아들 솔로몬에 의해 성전이 건축될 것을 예언하셨다. 이에 다윗은 성전 건축을 위한 물자를 넉넉히 준비하고 성전과, 성전에서 사용될 기명들의 식양을 하나님이 알려주신 대로 그려 솔로몬에게 주었다.[4] 그의 사후 솔로몬이 예루살렘 모리아산에 최초의 성전을 건축했다.[1] 그곳은 시온과 인접한 곳이었기에 점차 시온산을 '하나님의 성전이 있는 산'으로 부르게 되었다.
    기원전 6세기 바벨론의 침략으로 파괴되었던 성전은, 성경의 예언대로 바사 제국의 왕 고레스가 유대 민족의 귀환과 예루살렘 성전의 재건령을 내림으로써 유대 총독 스룹바벨(히브리어: זְרֻבָּבֶל)[5]에 의해 재건됐다. 이후 수백 년이 흐르는 동안 예루살렘을 차지한 이방 나라들에 의해 또다시 수난을 겪었다. 로마의 통치 시기 때 헤롯 1세에 의해 증축이 시작되어 기원후 63년경에 비로소 완공되었지만, 약 7년 후인 70년에 로마 장군 티투스의 예루살렘 공격으로 완전히 파괴되었다.

    솔로몬 성전(제1성전)

    솔로몬 성전은 다윗과 솔로몬에 의해 대대적으로 건축된 최초의 성전이며 '제1성전'이라고도 부른다. 솔로몬 재위 4년에 건축이 시작되어 7년 간의 공사를 거쳐 솔로몬 재위 11년에 준공되었다.[6] 이 성전은 남 유다가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네부카드네자르 2세)에 의해 멸망당한 기원전 586년경에 파괴되기까지 약 400년 동안 영광을 누렸다.

    건축 과정

    솔로몬의 선대왕인 다윗은 자신이 예루살렘에 성전을 건축하려 했다. 그러나 하나님은 다윗이 많은 전쟁을 치르며 피를 흘렸기에, 그의 아들 솔로몬이 성전을 건축할 것이라고 하셨다. 이에 다윗은 솔로몬이 차질 없이 성전을 건축할 수 있도록 만반의 준비를 했다. 하나님이 알려주신 성전과 성전 기명의 식양을 솔로몬에게 주었고, 금은보석과 건축 재료를 많이 준비해 두었다.[7] 성경은 다윗이 성전 건축을 위해 준비한 금만 10만 달란트에 달한다고 기록하고 있다.[8]
    다윗은 성전 건축을 위해 자신의 재산으로 금과 은을 내어 봉헌했는데 금의 양만 해도 3000달란트였다. 이에 이스라엘 백성들도 즐거운 마음으로 금 5000달란트, 은 1만 달란트, 놋 1만 8000달란트와 철 10만 달란트와 보석을 봉헌했다.[9] 다윗의 사후 솔로몬이 성전 건축을 시작했을 때 짐꾼 7만 명과 산에서 돌을 떠낼 사람 8만 명에, 감독자만 3600명이 참여했다. 우호국이었던 두로의 후람왕은 기술자와 건축 자재를 배편으로 보내왔다.[10]

    구조 및 구성

    성전 모형도

    성전의 구조와 구성은 역대하 3-5장열왕기상 6-7장에 기록되어 있다.
    성전은 미리 다듬어둔 돌을 가지고 건축했으며, 중심에 성소와 지성소가 있었고 그 주변으로 다락을 지었다. 다락은 3층 구조로, 많은 골방들이 있었다. 전체적인 성전의 규모가 커지면서 지성소도 장(長, 길이)과 광(廣, 너비)과 고(高, 높이)가 모두 20규빗으로 커졌지만 장·광·고가 동일하다는 특징은 그대로 유지됐다.[11]
    지성소 안에는 언약궤를 덮는 속죄소의 그룹 천사와 별개로 그룹 둘을 크게 만들어 세웠다. 이 두 그룹은 외소를 바라보며 두 날개를 활짝 폈는데, 이는 지성소를 모두 덮는 크기였다.[12] 지성소의 그룹 날개 아래 언약궤가 위치했고,[13] 성막과 같이 휘장으로 외소와 구별했다.
    성전 뜰에는 '바다'라고 불리는 대형 물두멍을 만들어 제사장이 이용하게 했고, 소형 물두멍 10개를 만들어 번제물을 씻게 했다. 놋으로 대형 제단도 만들었으며, 금으로 등대 10개를 만들어 외소 좌우에 두었다. 진설병을 둘 상 10개와, 성전에 쓸 100개의 대접을 만들었다. 분향단도 금으로 만들어 설치했다.
    성전은 예루살렘 모리아산, 다윗이 매입했던 오르난(아라우나)의 타작마당 터에 지어졌다.[14] 성전의 방향은 광야 생활 동안 지었던 성막의 방향과 일치하여,[15][16] 성소와 지성소로 이루어진 성전 건물은 서쪽에, 제단은 동쪽에 있었다.

    이후 역사

    성전 짓는 일을 마치고 7일 동안 성전 낙성식을 행한 후 이어서 초막절을 지켰다.[17][18] 낙성식 때 하나님의 영광이 가득했던 솔로몬 성전은 이후 약 400년을 존속했으나, 기원전 586년경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의 침략으로 불타서 완전히 파괴되었다. 성전 기명들은 약탈당했으며, 백성들은 빈천한 자를 제외하고 대다수가 포로가 되어 바벨론으로 끌려갔다.[19][20] 백성들이 하나님의 율례와 명령을 버리고 다른 신을 숭배하면 그들과 더불어 성전 또한 버리시겠다는 하나님의 말씀 그대로였다.[21]

    스룹바벨 성전(제2성전)

    유대 총독 스룹바벨의 주도하에 완공된 성전이라고 하여 흔히 스룹바벨 성전으로 부르며,[22] 두 번째 건축된 성전이므로 '제2성전'이라 부르기도 한다.
    70년의 바벨론 포로 기간이 지난 후 바사 왕 고레스는 바벨론을 점령하고 이스라엘 백성들을 해방시켰다. 예루살렘 성전을 건축하라는 명을 내리고 성전 기명을 돌려주기까지 했는데,[23] 이는 선지자 이사야의 예언이 그대로 이뤄진 것이었다.[24] 기원전 537년경 예루살렘으로 귀환한 남 유다 백성들은 이듬해부터 유대 총독 스룹바벨의 주도하에 성전의 지대를 놓고 건축에 착수했다.

    건축 과정

    • 이방인의 방해로 건축 중단

    스룹바벨 성전의 건축 과정은 에스라 3-6장에 기록되어 있다. 건축령이 내렸지만 성전을 건축하는 과정은 순탄치 않았다. 유대인들이 포로 생활에서 돌아오기 전, 사마리아 지역은 앗수르의 영향으로 이방인들이 정착해 있었다.[25] 그들은 이방신과 하나님을 동시에 섬기는 비정상적인 종교 생활을 했는데, 예루살렘 성전이 건축된다는 소식을 듣고 자신들도 지금까지 하나님께 제사를 드렸다고 주장하면서 공사에 참여하게 해달라고 했다. 스룹바벨과 예수아(여호수아)가 이를 거절하자 그들은 관료들에게 뇌물을 주어 공사를 막는가 하면 백성들에게 겁을 주어 약한 마음을 갖게 하기도 했다. 이방인들의 끈질긴 훼방으로, 성전 지대만 놓인 채 공사는 약 15년 동안 중단됐다. 당시 유대 백성들은 열심히 일해도 늘 결과가 좋지 못했는데, 그 이유는 하나님의 성전을 황무한 채로 내버려두고 자신의 일에만 관심을 두었기 때문이었다.[26]

    • 선지자의 권고로 공사 재개

    선지자 학개스가랴는 성전 공사가 중단된 상황을 안타깝게 여기며 백성과 유대 총독 스룹바벨을 격려했다.[27][28][29] 기원전 520년경 선지자들의 활동으로, 오랫동안 중단된 예루살렘 성전 건축이 다시 시작되었다. 바사 제국의 다리오왕은 왕실의 창고에서 고레스의 조서를 발견했고, 예루살렘 성전 재건을 선대왕인 고레스가 허락했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다리오왕은 성전 건축을 막지 말라고 하는 한편 공사에 투입되는 비용까지 바사 제국의 세금으로 충당하라고 지시했다. 기원전 516년경에 드디어 예루살렘 성전이 완공되었다. 백성들은 기쁜 마음으로 봉헌식을 행했으며 하나님의 절기를 지켰다.

    • 성전의 규모

    스룹바벨 성전의 자세한 구조와 구성은 성경에 기록돼 있지 않다. 다만 이스라엘의 전성기에 건축했던 솔로몬 성전에 비해 규모와 영광이 미치지 못해 실망스러움을 느꼈던 이들이 많았던 것으로 보인다. 하나님은 선지자 학개를 통해 성전의 나중 영광이 더 클 것이라고 격려하시며 성전이 건축되면 큰 축복을 내리겠다고 약속하셨다.[28]

    이후 역사

    • 느헤미야의 성벽 재건

    50여 년 후 바사 제국의 관원으로 일하던 느헤미야는 고국의 예루살렘성이 여전히 훼파된 상태로 있고 백성들은 큰 환난과 능욕을 받고 있다는 소식을 접했다. 이후 느헤미야는 유대 총독이 되어, 성벽 재건 공사를 시작했다. 그러나 공사 소식을 들은 호론 사람 산발랏과 암몬 사람 도비야, 아라비아 사람 게셈 등 여러 대적자가 건축을 방해하고 나섰다. 그들은 조롱과 방해를 일삼았고, 백성들을 죽이고 공사를 중단시킬 계획까지 세웠다. 느헤미야는 백성들을 격려했고, 백성들은 경계와 보초를 서며 성 건축을 이어갔다.
    대적자들의 온갖 훼방을 이겨내고 드디어 예루살렘성이 완공되었다. 소식을 들은 모든 대적과 이방 사람들은 이 역사를 하나님이 이루셨다는 사실을 느끼고 두려워하며 낙담했다. 이후 7월 1일(나팔절)에는 백성들이 수문 앞 광장에 모여서 제사장 겸 학사인 에스라에게 하나님의 율법을 배웠다. 15일 초막절에는 규례대로 초막을 짓고 7일간 절기를 거룩하게 지켰다. 백성들은 절기를 통해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 다시는 하나님의 전을 버리지 않겠다고 맹세했다. 예루살렘성 중건을 기념하는 봉헌식이 거행되었고 느헤미야는 성전과 이스라엘 백성을 정결케 했다.

    • 신구약 중간기

    구약성경의 마지막 책인 말라기가 기록된 때부터 예수님의 탄생 때까지 약 400년의 세월이 흘렀다. 이 400년 동안 팔레스타인 지역은 여러 차례 패권이 바뀌며 정치, 경제, 사회, 문화의 모든 면에서 많은 변화를 겪게 되고, 이스라엘과 예루살렘 성전 역시 열강의 틈바구니에서 많은 수난을 겪었다.
    기원전 4세기 마케도니아의 왕이 된 알렉산더 대왕은 바사 제국을 비롯해 여러 국가를 정복하며 마케도니아에서부터 인도에 이르는 광대한 헬라 제국(헬레니즘 제국)을 건설했다. 알렉산더 사후에 휘하의 장군인 셀레우코스가 시리아 지역을 지배하면서 셀레우코스 왕조가 시작됐다. 셀레우코스 왕조의 안티오코스 4세는 예루살렘 성전에 제우스 신상을 세우고 유대인에게 헬라 신앙을 강요하며 핍박했다. 이 같은 정책에 유다 마카비(마카바이오스, 마카베오)가 셀레우코스 왕조에 무력으로 항쟁했고, 마침내 전쟁의 승기를 잡았다. 유대인들은 기원전 165년경 예루살렘 성전을 탈환하여 성전 내 제우스 신상을 파괴하고 성전을 정화한 뒤 새 번제단을 하나님께 봉헌했다. 하지만 독립의 기쁨을 누린 시간은 짧았다. 로마의 힘이 강해지면서 기원전 63년경 로마 장군 폼페이우스가 예루살렘을 점령했고, 유대인들은 다시 로마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

    헤롯 성전

    헤롯 대왕이 개축한 예루살렘 성전(제2성전) 모형. 이스라엘 박물관.

    헤롯 성전은 이두매(Idumea, 에돔) 출신의 헤롯 대왕이 건축한 성전이다. 폼페이우스가 예루살렘을 공략할 때, 성전도 피해를 입었으나 완전히 파괴되지는 않았다.[30] 헤롯은 훼손된 스룹바벨 성전(제2성전)을 웅장하게 재건축했다.[31][32]

    건축 과정

    로마는 식민지인 유대 나라에 이두매 출신의 헤롯을 왕으로 세웠는데, 그가 유대교로 개종했다고는 하나 이스라엘의 입장에서는 이방 출신의 통치자였다. 정통성이 부족했던 헤롯은 유대인의 환심을 사기 위해 기원전 20년경 예루살렘 성전 증축에 착수했다. 성전의 건축은 예수님이 탄생하기 전부터 시작되어 예수님이 복음을 전파하며 성전을 정결케 하실 때가 건축 46년째였다.[33] 헤롯 성전은 이후에도 30년 이상이 더 걸려서 완공되었다. 헤롯 성전은 크고 화려했다. 성전의 아름다움에 감탄하는 제자들에게 예수님은 "성전의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고 무너질 것"이라고 예언하셨다.[34][35]

    이후 역사

    헤롯 성전은 완공된 지 얼마 되지 않아 예수님의 예언대로 로마군에 의해 철저히 파괴되었다.[36] 2세기에 로마는 또다시 봉기한 유대인들과의 전쟁에서 승리한 후 유대인을 예루살렘에서 내쫓은 뒤 예루살렘 멸망일 하루만 출입을 허가했다. 이때 남은 성전 서쪽 외벽에서 많은 유대인들이 통곡과 기도를 했다고 하여 '통곡의 벽'이라 불리는 유적이 현재까지 남아 있다.[37] 또한 로마인들은 파괴된 성전 터에 로마식 신전을 세우고 예루살렘의 이름을 '아엘리아 카피톨리나(Aelia Capitolina)'로 바꾸고,[38] 안식일하나님의 절기를 지키지 못하도록 명령을 내렸다.[39] 기원후 7세기경에는 이슬람 제국이 이 지역을 차지하여 '바위의 돔(Dome of the rock)'으로 불리는 이슬람식 사원을 세워 현재까지 이르고 있다.

    하나님이 거하시는 성전

    성전은 본질적으로 하나님이 거하시는 처소로, 언약궤가 보관된 곳이며 구약시대 제사가 이루어지던 장소다. 하나님은 원래 하늘에 거하시지만, 성경에는 지상의 성전 역시 하나님이 거하시는 처소라고 되어 있다.
    모세 시대에 하나님은 당신이 거하실 성막을 지으라고 명하셨다.[40] 이후 세월이 흘러 솔로몬이 성전을 건축하고 하나님의 처소임을 밝혔다.[41] 이처럼 성전은 좁은 의미로는 지상에 세워진 특정한 건축물을 가리키지만, 의미를 확장하면 어디든지 하나님이 계신 곳, 하나님의 언약이 있는 곳을 성전이라고 부를 수 있다. 이런 이유로 신약시대 성자(聖子) 하나님인 예수님은 당신의 육체를 성전이라고 비유하셨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 유대인들이 가로되 이 성전은 사십육 년 동안에 지었거늘 네가 삼 일 동안에 일으키겠느뇨 하더라 그러나 예수는 성전 된 자기 육체를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

    - 요한복음 2:19-21

    예수님이 이렇게 비유하신 이유는 예수님의 성령, 즉 하나님의 거룩하신 영이 예수님의 육체 안에 거하시기 때문이다.[42]
    예수님처럼 성령이 직접 육신을 입는 경우는 아니지만, 새 언약 안에 있는 성도들에게도 하나님의 성령이 거하시기 때문에 신약성경은 성도들의 몸도 하나님의 성전이라고 일컫는다.[43][44] 이런 이유로 성도들의 모임인 교회도 성전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새 언약을 지키지 않는 사람은 성령이 거하시는 성전이 될 수 없고, 새 언약이 없는 교회 역시 성전이라고 불릴 수 없다.




    전(殿. temple)이란 히브리 단어는 "비이라()"라고 하며 성경에서는 "전(대상 29:1, 19, 느 2:8), 궁(느 1:1, 에 1:2), 영문(營門)(느 7:2), 도성(에 1:5, 2:5, 9:11)" 이라고 소개됩니다.

    구약 시대에는 전이라고 하였다면 신약에서는 "교회(에클레시아. ἐκκλησία)"라고 합니다.
    전은 물질를 사용하여 세워야 합니다.
    그러나 교회는 믿음의 사람위에 세워야 합니다.
    전은 세울 수도 있고 무너질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교회는 사람의 믿음위에 세워졌기 때문에 무너트릴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는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전(역대상 22:1)

    성전을 건축할 장소가 정하여졌습니다(1절).
    하나님의 영감에 의해 그리고 그의 마음에서 우러나온 고백으로써 “이는 여호와 하나님의 전이라” 고 다윗은 말하였습니다.
    만일 성전이 하나님을 위해 세워지는 것이라면 하나님이 친히 장소를 택하는 것이 합당한 일일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 모든 땅이 그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가 택하신 그 터전은 이방사람들 사이에도 복음의 교회를 세우게 되리라는 것을 나타낸 행복한 전조가 되었습니다(행 15:16-17). 그 땅은 타작마당입니다. 왜냐하면 살아계신 하나님의 교회는 바로 그의 마당이며 그의 타작물이며 또한 “그의 마당의 곡식”이기 때문입니다(사 21:10). 그리스도는 그의 마당을 온전히 정결케 하기 위해 그 손에 키를 가지고 계십니다. 이 집은 바로 제단을 위해 세워질 집이었습니다. 성전이란 바로 제단을 위해 세워진 집입니다. 성전이 세워지기 오래전부터 이미 제단은 있었습니다. 솔로몬의 성전은 이미 다윗 때부터 조직화되기 시작했습니다. 다윗이 법궤를 장차 이스라엘의 수도가 될 예루살렘으로 옮겨다가 장막에 모시고(대상 16:4) 그 앞에서 섬기기 위해 제사장들, 레위인들, 성가대 악대를 조직했습니다(대상 16:4, 25:1-7). 그러나 나단에게 성전 지을 의사를 표시하자 하나님께서는 다윗의 아들 솔로몬으로 하여금 그것을 짓게 하려고 했습니다(대상 17:1-12). 다윗은 성전을 위해 많은 돈과 재물을 그 아들에게 물려주었습니다(대상 18:5-13, 22:6-17). 아버지의 유물과 자기의 모든 것으로 솔로몬(주전 960-922)은 그의 치세 제4-11년간에 아담한 성전을 건립했습니다. 그것은 헤롯 성전보다 적으나 아름답고 화려한 건물로 처음에는 작은 예배당처럼 사용되었습니다. 일반의 예배처소는 아니었고 대제사장도 1년에 한 번 속죄일에만 지정소에 들어갔습니다. 제사장이 하는 일도 기름, 향, 떡을 보급하는 정도였습니다. 경건한 유대인에게는 성전 구내가 전부 집이었습니다(시 66:13). 솔로몬의 성전은 400년을 못갔습니다. 주전 587년에 느부갓네살이 성전을 불살랐습니다. 11년 후 유다의 젊은 왕 여호야긴과 예루살렘 시민들을 바벨론으로 잡아갈 때(왕하 24:10-16) 성전 보물도 (25:13-17)다 옮겨 갔습니다. 시바의 여왕도 솔로몬의 성전을 보고 그 아름다움에 놀랐습니다(왕상 10:4). 솔로몬 성전은 베니게 직공들이 지었는데 베니게, 가나안, 애굽, 신전들의 영향을 맡이 받았습니다. 솔로몬 성전은 좁은 정방형으로 동편에는 문이 있고 서편에는 지성소가 있었습니다.

    길이가 약 33.33m 넓이가 9m 가량이요 약 3m 높은 지대 위에 서 있었습니다.
    히브리, 베니게 노동자 수천명을 풀어 흰 석회석을 갈아서 아름답게 지었습니다(왕상 5:6, 6:7). 내부는 레바논 백향목으로 목수들을 시켜서 아름답게 장식했습니다(6:5-36, 5:6). 출입구로 올라가는 층계는 10계단이 있었고 층계 좌우에는 상징적인 두 기둥(야긴과 보아스)이 벽과 따로 서있었습니다. 좁은 출입문(10×4.5m)은 백향목으로 짰고 그 위에 그룹, 종려나무를 새겼으며 핀 꽂은 금으로 박았습니다(왕상 6:18-35). 문지기가 있었습니다(시 84:10).

    1. 성전은 3부로 나누었습니다(울람)

    (1) 울람-제사장이 들어오는 입구의 홀

    (2) 헤칼-본관 곧 성소인데 붙박이 교창에서 빛이 스며듭니다(왕상 6:4).
    성소는 높이가 약 13.63m 넓이가 약 9m 길이가 18.2m였습니다.
    돌로 마루를 깔고 그 위에 백향목으로 덮었습니다. 성소 내부는 백향목으로 두르고 지붕은 백향목 서까래에 마루로 덮었습니다(왕상 6:9). 백단목 벽기둥들이 운치를 더 했습니다(10:12). 기둥에는 생명나무를 조각하고 금으로 입혔습니다(16:21).

    (3) 드빌-지성소로 올라가는 층계 앞에 백향목으로 만든 작은 향단이 있었습니다.
    지성소는 창도 없고 굴 같은 9m정방형 방인데 주님의 거하시는 방이었습니다(대하 3:8-13). 지성소는 성소보다 마루가 높으며 4.5m 높이 감람나무로 만들고 금으로 장식한 두 그룹이 법궤 위에 마주 섰습니다.
    그룹은 베니게에서 들어온 날개 돋힌 스핑크스(여자 머리에 사자 몸)거나 베니게화한 천사신이었습니다(겔 9:22-25). 성전 남서북삼면에 있는 이층방들은 창고실로 썼는데 올라가는 문들과 좁은 충계가 안과 밖에 있었습니다.

    2. 성전 비품
    성전 비품은 두로의 건축 기술자 허람(그 어머니는 출애굽 납달리 족속)이 많이 만들었습니다. 성전 앞 마당 우편에는 큰 번제단이 있었는데 어떤 이는 그것을 큰 바위 위에 만들어진 것이라 합니다(겔 43:14). 또 어떤 이는 대하 4:1에 묘사한대로 만든 것인데 층계있는 거룩한 탑 모양이었다 합니다. 제단 4귀에 뿔이 있었습니다. 제단 남쪽에는 큰 놋으로 부어만든 “바다”가 있었는데(대하 4:1) 그 두께가 1m 직경이 4.5m 고가 약 2.25m 되었습니다.
    그 가장자리는 백합꽃처럼 아름답게 굽었습니다(왕상 7:23). 놋으로 만든 12마리의 황소등에 놓였는데 3마리씩 4방(춘하추동의 암시)을 향했습니다. 그 황소들은 모양 뿐 아니라 생식력의 상징인 동시에 비를 주는 신으로 중동에서 널리 믿는 바알에도 관련되었습니다. 거룩하게 생각한 동물들이 왕의 보좌나 거룩한 것을 바친 것은 옛적 철시대에 흔히 있던 일이었습니다. 그 놋바다는 원래 제사장들이 깨끗케 하는 의식에 쓰려한 것보다 물이나 바다는 생명의 근본임을 상징적으로 나타낸 것이었습니다.

    3. 성전 안에 불박이로 놓여 있던 것은 (1) 후대 제사 규칙에 의한(레 24:1-4, 민 8:1-4) 7촛대의 전신인, 10개의 금촛대 (왕상 7:49, 대하 4:7) 이 촛대란 사실, 3다리 달린 동경(등잔)으로 그 위에 불심지 7있는 등잔을 놓은 것이었습니다. 성막에는 촛대가 하나뿐이었습니다(출 37:17). 제 2성전에도 하나였는데 안디오커스 에피피네스에게 도적맞고 마카비 시대에 다시 만들었더니 주후 70년에 로마군대가 가져갔습니다. 그 모형만은 티도 개선문 조각에서 볼 수 있습니다. (2) 진설병 상을 12개 만들어 떡 12개를 차례로 놓을 때 상도 차례로 하나씩 썼습니다. 이 떡상은 왕상 6:20-22의 제단과 일치하며 안식일마다 새 떡으로 바꾸어 놓고, 전 것은 제사장들이 먹었습니다. (3) 움직일 수 있는 향단은 금으로 장식했으며 뿔이 있었습니다.

    4. 솔로몬 성전은 초막절에 봉헌되었습니다(왕상 8:12)

    솔로몬의 기도는 넉줄의 시였으나 주전 550년경의 포로 후의 부연하여 봉헌기도를 유창하고 가장 높은 것이었습니다.
    그 내부는 때를 따라 변했을 것입니다. 르호보암 때(주전 922-915) 애굽 왕 시삭이 노래했으며 (왕상 14:25) 악한 여왕 아달야(주전 842-837)가 바알 예배를 성전에서 행했습니다. 아하스(주전 735-715)는 성전 내부를 개조하고 제단도 고쳤습니다 (왕하 16:10-18). 히스기야(주전 715-687)는 모세의 율법의 놋뱀을 버렸습니다(왕하 18:4). 므낫세(주전 687-642)가 앗수르 방식을 따라 성전을 주력했더니(왕하 21:4) 요시야(주전 640-609) 왕이 연보궤에서 율법책을 찾은 후 그것을 폐지했습니다(대하 34:14). 솔로몬 때 시작한 예루살렘성전 중심주의를 강화하여 지방성소들을 폐지하고 그 제사장들에게 예루살렘에서 할 일을 주었습니다(신 12:2-28).





    온 회중에게
    - 온 회중이란 28:1에 기록된 대로 다윗 왕이 솔로몬을 차기 왕으로 지목하고 또한 마지막 유언을 남기기 위해 불러모은 이스라엘의 모든 방백들과 백성의 대표자들을 말한다.

    내 아들 솔로몬이...오히려 어리고 연약하고 이 역사는 크도다

    - 성전 건축이 다윗왕에게 부과된 임무가 아니고 솔로몬에게 부과된 임무였음에도 불구하고 다윗 왕이 성전 건축을 위해 그토록 열심히 준비하게 된 하나의 이유를 설명하는 장면이다.
    그런데 다윗 왕은 이전에 솔로몬과 단독으로 면담하였을 때에도 바로 이와 같은 이유로 인해 많은 준비를 하였노라고 밝힌 바 있다(22:5).
    그러나 22:5과는 달리 본절에서는 특별히 하나님께서 솔로몬을 택하사 성전 건축의 과업을 이루게 하셨다고 다윗은 언급하고있다.
    그래서 22:5에서는 언급되지 아니한 '선택하다', '지정하다', '요구하다'란 뜻을 지닌 히브리어 '바하르'(*)가 여기에 사용된 것이다.
    한편, 솔로몬은 여기에서 다윗 왕이 말한대로 자신의 '여리고 연약함'을 깨달아 왕상 3:7에서 "종은 작은아이라 출입할 줄을 알지 못하고"라고 고백한다.

    전(비이라. bîyrâh) בִּירָה 스트롱번호 1002

    1. 요새.  2. 성전
    발음 [ bîyrâh ]
    구약 성경  / 16회 사용
    • 1. 명사, 여성 요새, 성, 왕궁 [거의 대부분 왕궁에 대해 사용됨], 느1:1, 에1:2, 2:3,8, 3:15, 단8:2
    • 2. 명사, 여성 성전, 대상29:1,19.
    • 관련 성경  /  전(대상 29:1, 19, 느 2:8), 궁(느 1:1, 에 1:2), 영문(營門)(느 7:2), 도성(에 1:5, 2:5, 9:11).

    בַּיִת 스트롱번호1004
    1.

    2.

    장막

    3.

    왕하23:7.

    발음 [ bayith ]
    어원
    연계형 בֵּית, 복수 어미활용 בָּתֵּיהֶם ,בָּתֵּיכֶם ,בָּתֵּינוֹ, 1129에서 유래한 약어로 보임
    구약 성경
    2036회 사용




    전(殿)
    - 히브리어는 '하비라'( הַבִּירָה)인데 이 말이 사용된 용례들을 살펴보면 이 용어는 대단히 웅장하고 거대한 궁전을 가리키고 있다.
    즉, 이 말이 사용된 에 1:2, 5;2:3, 5, 8;3:15;단 8:2 등을 살펴보면, 이 말은 바사의 수산궁 뿐만 아니라 여기에 인접해 있는 모든 부속 건물들까지도 포함한 거대한 하나의 왕궁 단지(團地)를 지시하고 있다.
    또한 느 2:8에서도 이 용어가 사용되었는데 거기에서도 이 단어는 성곽과 집을 포함한 요새화된 성전을 가리키고 있다.
    이렇게 볼 때, 이 '하비라'(*)라는 용어는 특별히 웅장한 모습의 성전을 묘사하는 말임에 틀림없다(Curtis, p,. 301;Pulpit Commentary).

    한편, 다윗 왕이 여기에서 일반적으로 많이 사용된 성전에 해당되는 용어 '바이트'(*) 대신에 '하비라'(*)를 사용한 것은 이 성전을 건축하는 역사(役事)가 어리고 연약한 솔로몬 혼자의 힘으로는 도저히 이루어질 수 없는 대역사임을 회중들에게 알리기 위함이었을 것이다.


    힘을 다하여
    - 이와 의미가 유사한 구절로 22:14의 '환난 중에'를 참조하라.

    마노
    - 이 진귀한 보석인 마노(stones of onyx)는 제사장의 에봇과 흉패에 장식했던 것으로(출 25:7;35:9,27) 성경에 의하면, 이것의 원산지는 에덴 동산의 하윌라(Havilah) 강이다(창 2:11, 12).

    박을 보석
    - 이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밀루임'(*)은 '채우다', '가득하다'는 뜻의 동사 '몰라'(*)에서 파생된 명사형이다. 따라서 이 말은 제사장의 옷이나 기타 여러 기구들에 장식된 보석을 의미하는 말이다.

    꾸밀 보석
    - '꾸밀'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푸크'(*)는 '색깔있는', '그려진'이란 뜻을 가지고 있다(왕하 9:30;사 54:11;렘 4:30). 따라서 이는 문자적으로 '색깔있는 돌'을 의미한다. 그래서 혹자는 이를 대리석이라고 생각하나(Gensenius) 이 보다는 이 돌을 여인들이 눈에 칠했던 안티모니(L. antimony)의 돌과 같이 색깔있는 돌로 이해하는 것이 타당할 듯하다(Ja-mes Wolfendale).

    채석
    - 이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라크마'(*)는 '얼룩 덜룩한 색을 넣다','수놓다'를 의미하는 '라캄'(*)에서 파생된 말로 '다양한 색깔을', '얼룩 덜룩한 빛깔', '자수를 놓은' 등의 의미이다. 이렇게 볼 때 채석은 '여러 가지 빛을 내는 그리고 그러한 무늬가 있는 돌'을 가리킨다고 이해할 수 있다, 그래서 혹자는 이것이 모자이크 자갈이었다고 주장한다(Payne). 그런데 이 히브리 용어는 단지 본문에서만 돌에 적용되었지 다른 곳에서는 자수, 의복, 독수리 날개 등에 사용되어졌다(겔17:3).

    다른 보석
    - 여기서 다른 보석이란 바른 번역이 아니다. 왜냐하면 '다른 보석'에 해당되는 히브리어 '에벤 이카라'(*)는 문자적으로 '희귀한 돌'을말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여기서 '희귀한'에 해당하는 '이카라'(*)는 단순히 어떤 '무거운 것'을 의미했었는데 이것에서 '귀중한', '값비싼'이란 의미가 생겼기에 이를 보석을 생각한 듯하다. 사실 솔로몬은 본절에 언급된 이 값비싼 돌로 성전의 벽을 장식하였다(삼하 12:30;왕상 7:9;10:2;대하 3:6;9:1;욥 28:16;잠 1:13;3:15;사28:16;겔 28:13;단 11:38).

    화반석
    - 히브리어로 '아브네 샤이쉬'(*)인데 여기서 '샤이쉬'(*)는 '희다'는 뜻이다. 따라서 이 화반석은 흰대리석을 의미한다(Keil, Pulpit Commentary, Lange). 이러한 것 때문에 혹자는 이를 '설화 석고'로 이해한다(J. Wolfendale).


    나의 사유의 금 은으로...드렸노니 - 다윗 왕은 지금까지 모은 전리품 뿐만 아니라 자기의 개인 재산까지도 하나님께 드린 것이다(Barker, J. Wolfendale, Wycliffe).


    󰃨 오빌의 금 - 오빌이 오늘날의 어느 곳에 해당하는지에 대해서는 인도, 아라비아, 아프리카 등으로 추측하는 여러 가지 견해가 있으나 확실한 증거를 가진 주장은 하나도 없다. 하지만 오빌은 순도 높은 금의 산지로 고대에 알려졌었다(욥 22:24;28:16;시45:9;사 13:12). 따라서 오빌의 금은 가장 값지고 귀한 금을 의미하는 말이다. 한편 혹자들의 의견에 따르면 이 오빌의 금을 아라비아의 상인들이 가져온 것으로 이해하나(J. Wolfendale) 이 또한 확정적인 자료가 없는 것이다.

    󰃨 금 삼천 달란트와 천은 칠천 달란트라 - 1 달란트(talent)는 약 34kg에 해당하는 무게이기 때문에 금 삼천 달란트과 은 칠천 달란트를 무게로 환산하면 금은 약 102톤에 해당되며 은은 약 238톤에 해당된다. 이와 관련해서는 본서 22:14를 참조하라. 한편, 본문에 언급된 '천은'에서 '은'을 수식하는 말은 히브리어 '자카크'(*)를 번역한 용어이다. 그런데 이 히브리어의 원래의 뜻이 '추출하다', '깨끗하게 하다', '정제하다'라는 의미를 갖고 있기 때문에 본절에 나타난 이 '천은'은 '잘 정련된 은', 즉 최고의 품질을 자랑하는 은으로 이해할 수 있다. 그래서 많은 영역 성경이 이를 'choice silver'(잠 8:19), 'refined silver' 등으로 번역하는 것이다(KJV).

    󰃨 모든 전 벽에 입히며 - 다윗 왕이 바친 사유 재산이 쓰인 용도를 말하고 있다. 여기서 '전(殿)'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바티임'(*)은 성전 안에 있는 중요한 건축물들을 가리킨다(Lange, Curtis). 그래서 본절은 성전 안에 있는 중요한 건축물에 대해서는 모든 벽에다 금.은 칠을 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사실 대하 3:4-9에 보면, 솔로몬은 다윗 왕이 바친 정금으로 낭실 안, 대전 천장과 지성소, 지성소의 다락들을 금으로 입혔다.


    󰃨 오늘날 누가 즐거이 손에 채워 여호와께 드리겠느냐 - 손에 채워 여호와께 드리라는 말은 곧 여호와께 헌물을 드리라는 말과 같은 것이다(Keil). 왜냐하면 '채워'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마레'(*)는 '충만하다', '가득하다', '봉헌하다', '완성하다' 등의 의미가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러한 용어는 성직에 임명되는 후보들에게 사용되어진 말로서 이는 자신이 '헌신적으로 드려지는 예물'임을 자각케 하기 위해서였던 것 같다(Payne, Wycliffe).


    역대상 29장

    1 다윗 왕이 온 회중에게 이르되 내 아들 솔로몬이 홀로 하나님의 택하신 바 되었으나 오히려 어리고 연약하고 이 역사는 크도다 이 전은 사람을 위한 것이 아니요 여호와 하나님을 위한 것이라

    1 그런 다음 다윗왕은 모든 군중을 향해 말하였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왕으로 택하신 내 아들 솔로몬은 아직 어리고 경험이 없는데 그가 해야 할 일은 너무나 막중합니다. 이것은 그가 지어야 할 성전이 사람을 위한 것이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을 위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다윗 왕이…이르되. 다윗은 성전 건축을 위해 자기가 준비한 것들을 자세히 말하고 이스라엘의 부(富)와 지위를 가진 사람들에게 헌납할 것을 호소한다(1~9절). 여호와의 지시에 응하여 백성에게 성소 건축을 위해 헌납할 것을 호소하고(출 25:1~8; 35:4~9), 아낌없는 반응을 받았던(출 35:20~29) 모세의 경험과 비교해 보라.

    어리고 연약하고. 참조 대상 22:5; 왕상 3:7; 잠 4:3.

    전. 비라(birah). 악갓어에서 유래한 외래어로서, 대개는 궁전이나 요새를 나타낸다(느 1:1; 7:2; 에 1:2, 5; 2:3, 5, 8; 3:15; 단 8:2). 이곳과 19절에서는 이것이 성전을 가리키는 데 사용되었다.

    2 내가 이미 내 하나님의 전을 위하여 힘을 다하여 예비하였나니 곧 기구를 만들 금과 은과 놋과 철과 나무며 또 마노와 박을 보석과 꾸밀 보석과 채석과 다른 보석들과 화반석이 매우 많으며

    2 나는 지금까지 최선을 다해 성전 건축에 필요한 여러 가지 자재를 준비했습니다. 금, 은, 놋, 철, 목재, 호마노와 같은 여러 가지 보석과 대리석이 바로 그것입니다.

    힘을 다하여. 이 일에 심혈을 기울인 결과 다윗은 자재들을 많이 모으는 데 성공했다(22:14). 전심(全心)을 다한 사랑은 전심을 다하는 봉사를 낳는다.

    3 성전을 위하여 예비한 이 모든 것 외에도 내 마음에 내 하나님의 전을 사모하므로 나의 사유의 금, 은으로 내 하나님의 전을 위하여 드렸노니

    3 이 밖에도 나는 하나님의 전을 사모하는 마음으로 내 사유 재산에서 성전 건축을 위해

    내 마음에…사모하므로. 다윗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헌신하여 성전을 건축하는 데 자기 재물을 기꺼이 드렸다. 그는 아낌없이 드리는 일에 모본을 보였으므로 후하게 드리도록 요청할 수 있었다.

    4 곧 오빌의 금 삼천 달란트와 천은 칠천 달란트라 모든 전 벽에 입히며

    ​4 순금 100톤과 순은 240톤을 바쳐 성전 벽을 장식하고

    삼천 달란트. 만일 이것이 34.15킬로그램에 해당하는 표준 달란트라면(참조 제2권, 106, 108), 다윗이 모은 금의 양은 113톤(미터법으로는 102톤)이 된다. 그러나 우리는 고대 표준 중량의 정확한 수치를 알 수 없다.

    칠천 달란트. 1달란트를 34.15킬로그램으로 계산할 때(참조 제2권, 106, 108) 헌납한 은의 중수는 263톤 또는 미터법으로 239톤이 된다. 위의 “삼천 달란트”를 참조하라.

    ​5 금, 은그릇을 만들며 공장의 손으로 하는 모든 일에 쓰게 하였노니 오늘날 누가 즐거이 손에 채워 여호와께 드리겠느냐

    ​5 금은 제품을 만들며 기능공들이 세공품을 만드는 데 사용하도록 하였습니다. 이제 나처럼 여호와께 기쁜 마음으로 예물을 바칠 자가 없습니까 ?'

    여호와께 드리겠느냐. 다윗은 기꺼이 자기 자신과 자기 가진 것을 여호와께 바쳤으므로 이제 백성에게 그처럼 행하도록 요청할 수 있었다. 그는 성전 건축 사업과 하나님 경배를 동일시했다. 그들이 이 문제에 성실히 함으로써 하나님께 그들이 얼마나 성실한가를 나타낼 것이었다. 하나님이 받으실 만한 예배는 기꺼이, 즐거운 마음으로, 직접 드리는 예배이다.

    반만 마음을 드린 봉사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함―(29:5 인용)이 반응이 이르러 온 것은 그 건물 비용을 충당하기 위해서 금은 보화를 자유롭게 드리는 헌금에서 뿐 아니라 하나님의 사업의 여러 분야에서 하는 자원 봉사에서도 나타났다. 마음들은 주님의 것을 주께 돌려 드릴 욕망으로 가득하여서 몸과 마음의 모든 힘을 하나님을 섬기는 일에 다 드렸다. 나라의 무거운 짐을 지고 있는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주신 기술과 능력을 하나님을 위해 사용함으로써 마음을 다하여 이기심 없이 일하기로 결심하였다.

    솔로몬에게 한 다윗의 권면과 그 나라의 중책을 맡은 사람들에게 한 그의 호소는 오늘날 주의 사업에서 중요한 책임을 진 사람들이 마음에 간직하여야 할 말씀들이다. 우리 시대의 하나님의 백성들은 그의 계명을 지키는 경우에만 번영할 것이다. 그리고 책임을 진 사람들은 주께 헌신하라는 호소를 받고 있다.

    교회의 직원들, 기관 각부 원장과 총무들, 국내외에서 일하는 일선 사역자들, 모두 다 그들의 달란트를 하나님께 온전히 바침으로써 충실한 봉사를 해야 한다. 반만 마음을 드린 봉사를 하나님은 기뻐하시지 않으신다. 우리의 소유와 우리의 존재는 다 그분께 빚지고 있는 것이다 (리뷰 1905. 9. 14).













    역대상 23장 요약 / 레위 자손의 구분과 임무

    다윗이 레위인이 하는 일을 구분하여서 인구에 따라 나누어주었고 에뤼의 후손 게르손, 고핫, 므라리의 자손들에게 일을 분배하였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역대상 24장 요약 / 24반차의 제사장 조직

    아론의 후손 중에서 제사장의 직무를 수행하게 하였고, 레위 자손들 중에 남은 자들의 명단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역대상 25장 요약 / 찬양대

    아삽, 헤만, 여두둔의 자손을 뽑아서 찬양의 직무를 맡기고 각 가문에서 12명씩을 뽑아 찬양과 음악을 맡겼다고 합니다.



    5월 9일(금) 역대상 23-25장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신령한 노래(25:1)

    다윗군대 장관들로 더불어 아삽헤만여두둔의 자손 중에서 구별하여 섬기게 하되 수금과 비파와 제금을 잡아 신령한 노래를 하게 하였으니 그 직무대로 일하는 자의 수효가 이러하니라.
    David, together with the commanders of the army, set apart some of the sons of Asaph, Heman and Jeduthun for the ministry of prophesying, accompanied by harps, lyres and cymbals. Here is the list of the men who performed this service:

    신령한 노래(


    신령한 노래(spiritual song)

    골로새서 3:16
    그리스도의 말씀이 너희 속에 풍성히 거하여 모든 지혜로 피차 가르치며 권면하고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를 부르며 마음에 감사함으로 하나님을 찬양하고.
    Let the word of Christ dwell in you richly as you teach and admonish one another with all wisdom, and as you sing psalms, hymns and spiritual songs with gratitude in your hearts to God.

    에베소서 5:19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들로 서로 화답하며 너희의 마음으로 주께 노래하며 찬송하며.
    Speak to one another with psalms, hymns and spiritual songs. Sing and make music in your heart to the Lord.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를 부르며 마음에 감사함으로 하나님을 찬양하고…”(골 3:16).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들로 서로 화답하며 너희의 마음으로 주께 노래하며 찬송하며”(엡 5:19).

    시(psalm) : 구약의 시편
    찬미(hymns) : 시편 이외의 찬송
    신령한 노래(spiritual song) : 성령의 감동으로 부르는 노래

    첫째. 영으로 하는 찬양(고린도전서 14:15)


    그러면 어떻게 할꼬 내가 으로 기도하고 또 마음으로 기도하며 내가 으로 찬미하고 또 마음으로 찬미하리라.

    “내가 만일 방언으로 기도하면 나의 영이 기도하거니와 나의 마음은 열매를 맺히지 못하리라 그러면 어떻게 할꼬 내가 영으로 기도하고 또 마음으로 기도하며 내가 영으로 찬미하고 또 마음으로 찬미하리라”(고전 14:14~15).

    여기에서 ‘마음으로’는 헬라어로 ‘누스’(νους)인데, ‘이성적으로’라는 뜻이다. 방언기도는 영 (spirit)이 하는 기도이므로 통역의 은사가 없으면 그 기도가 이성적으로 이해가 되지 않는다.
    그래서 내 영은 기도하지만 나의 마음(mind), 곧 지각(the understanding)은 열매를 맺지 못한다.
    따라서 우리는 ‘영으로’(with the spirit) 기도하고, 또한 ‘지각으로’(with the understanding) 기도해야 한다.

    그런데 바울은 나의 영이 ‘기도’할 수 있듯이 나의 영으로 ‘찬양’할 수 있다고 말한다.
    “내가 영으로 찬미하고 또 마음으로 찬미하리라”(고전 14:15b).
    영으로 찬양하는 것은 마치 방언기도를 드리는 것과 같다.
    곧 이성의 영역을 떠나 내 영이 ‘자유롭게’ 부를 수 있는 찬송의 장르가 있다. 이것을 보통 ‘방언 찬송’이라고 부른다.

    “주는 영이시니 주의 영이 있는 곳에는 자유함이 있느니라”(고후 3:17).
    진정한 영의 찬송은 일정한 곡이 없고, 곡조에 자유함이 넘친다.
    다시 말하면 가락이 제마음대로란 얘기다.
    왜냐하면 성령께서 그 사람에게 가사와 가락(곡조)을 주셔서 '즉흥적으로' 노래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영으로 하는 찬양이 ‘신령한 노래’인 것은 바로 그것 때문이다.

    이렇게 여러 사람이 함께 신령한 노래로 찬양할 때 그것은 수십 성부의 아름다운 찬송이 된다.
    성령이 각 개인의 목소리를 인도해 주실 뿐만 아니라 그것을 모아서 화음을 이루며 영으로 찬양하게 할 때 창출되는 그 조화란, 참으로 천사들의 합창 그 자체처럼 들릴 때도 있다. 이것이야말로 ‘3층천’ 예배인데, 이 때 회중은 강한 성령의 임재를 체험하게 된다.

    새 노래(a new song)
    - ‘신령한 노래’의 또 한 가지 유형으로서 “새 노래” 라는 것이 있다.

    성경은 도처에서 ‘새 노래’로 주를 찬양하라고 말씀하고 있다(시 33:3; 사 42:10; 계 5:9).
    이 ‘새 노래’ 역시 ‘영의 찬양’처럼 악보도 없는 노래를 즉흥적으로 부르는 것이다.
    그러나 나의 마음으로, 곧 지각을 사용하여 노래한다는 점이 ‘방언 찬송’과 다르다.

    즉 ‘새 노래’는 성령께서 곡조와 함께 내 이성으로 알아들을 수 있는 가사를 즉흥적으로 주시는데, 바로 그 가사와 가락으로 주님을 찬양하는 것이다. 따라서 일정한 가사와 곡조가 없는 노래다. 이것은 '예언적 노래'로서 배워서 부를 수 있는 노래가 아니다.

    하나님은 선지자 예레미야에게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보라 내가 내 말을 네 입에 두었노라”(렘 1:9).
    하느님은 예레미야의 입에 말씀을 주셨다.
    그래서 그는 예언할 수 있었다.
    그 하느님은 우리 입에 노랫말도 주신다. 그래서 우리로 새 노래로 찬양하게 하신다.

    “…이새의 아들 다윗이 말함이여 높이 올리운 자, 야곱의 하나님에게 기름부음 받은 자, 이스라엘의 노래 잘하는 자가 말하도다. 여호와의 신이 나를 빙자하여 말씀하심이여 그 말씀이 내 혀에 있도다”(삼하 23:1~2).

    그리하여 우리는 즉흥적으로 ‘예언적인 노래'를 부를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은 초자연적 노래이다. 이러한 노래를 부르면 사람들이 보고 두려워하며 하나님께 굴복한다. 성령의 능력이 그 노래 가운데 있기 때문이다.

    “또 그가 내 입에 새 노래를 두셨으니, 곧 우리 하느님께 드릴 찬양이라. 많은 사람이 그것을 보고 두려워하며 주를 의지하리로다”(시 40:3․ KJV).

    “그러나 다 예언을 하면 믿지 아니하는 자들이나 무식한 자들이 들어와서 모든 사람에게 책망을 들으며 모든 사람에게 판단을 받고 그 마음의 숨은 일이 드러나게 됨으로 엎드려 하나님께 경배하며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 가운데 계시다 전파 하리라 그런즉 형제들아 어찌할꼬 너희가 모일 때에 각각 찬송시도 있으며...”(고전 14:24~26).

    이와 같은 ‘신령한 노래’는 초대교회에서 체험하였고, 일찍이 ‘다윗의 장막’에서도 불리어졌었다. “다윗이 군대 장관들로 더불어 아삽과 헤만과 여두둔의 자손 중에서 구별하여 섬기게 하되 수금과 비파와 제금을 잡아 신령한 노래를 하게 하였으니 그 직무대 로 일하는 자의 수효가 이러하니라”(대상 25:1).

    여기서 ‘신령한 노래를 하게 하였으니’라는 것은 “예언을 하게 했다”(prophesy)는 뜻이다(영어 성경과 비교해 보라). 이 귀한 노래가 오늘날 그리스도의 몸 안에서 성령의 역사와 더불어 다시 회복되고 있다.

    높은 찬양(high praise)
    - ‘신령한 노래’의 범주에 ‘높은 찬양’(high praise)이라고 하는 또 한 가지 유형의 찬송이 있다.

    영적으로 깊고 강한 찬송으로서, 시편 149편 6절에 나온 찬양이다.

    그 입에는 하나님의 존영(尊影)이요 그 수중에는 두 날 가진 칼이로다.
    NIV / May the praise of God be in their mouths and a double-edged sword in their hands.

    “그들의 입에 하나님을 향한 높은 찬양들이 있게 하고, 그들의 손에는 양 날 이 있는 칼이 있어”(시 149:6 ․ KJV).
    Let the high praises of God be in their mouth, and a two-edged sword in their hand;


    새한글 / 하나님 높이는 소리를 목청껏 내야지요, 손에는 날 선 칼을 들고서요.

    여기에서 ‘높은 찬양’은 원어 ‘로맘’(םםור)의 번역이다.
    이 단어는 시 66:17과 함께 성경에 꼭 두 번 사용되었다.
    “내가 내 입으로 그에게 부르짖으며 내 혀로 높이 찬송하였도다”(시 66:17).
    ‘로맘’(םםור)은 ‘룸’(םור)이라는 동사에서 나온 말인데, ‘룸’은 ‘높이다’ ‘높게 하다’의 뜻이다.

    시편 66:17
    내가 내 입으로 그에게 부르짖으며 내 혀로 높이 찬송하였도다.
    I cried unto him with my mouth, and he was extolled with my tongue.


    רוּם 스트롱번호  7313
    1. 격찬하다.  2. 높이다. 3. 세우다
    발음 [ rûwm ]
    어원  / 아람어
    구약 성경  / 6회 사용
    • 1. 격찬하다, 높이다, 세우다, 단 3:1, 4:17, 스 6:3.

    • 문법설명 /  7311과 동일

    • 관련 성경  / 칭송하다(단 4:37), 높이다(단 5:19, 23). [명] 교만(단 5:20).


    רוּם 스트롱번호 7311
    1. 높다.   2. 거만한. 3. 과시하다
    발음 [ rûwm ]
    구약 성경  / 166회 사용




    높이는 것은 ‘찬양’ 하는 것이다.

    그래서 ‘로맘’이라는 단어는 대부분의 영어 성경들이 ‘높은 찬양’으로 번역하고 있다.

    여기서 말하는 ‘높은 찬송’이 실제로 어떤 찬송을 말하는지 확실하지 않다.
    그러나 ‘찬양과 경배’ 사역에서 찬양 인도자(worship leader)로 종사하고 있는 분들은 이 찬송이 영적으로 하나님과 좀더 친밀하게 되었을 때 나오는 자연적이고 즉흥적인 노래(spontaneous song)라는 것을 체험적으로 알고 있다.

    찬양의 깊은 경지에 들어가면 음량은 작아지고, 템포는 느려지고, 소리는 높아진다.
    가사는 있을 수도 있고 없을 수도 있다. 찬송이 영적으로 매우 높은 경지에 있을 때 나오는 참으로 신비한 찬양이다.
    이것이 ‘높은 찬양’으로 이때에 회중은 하나님의 임재를 더욱 깊이 체험하게 된다.

    이 ‘높은 찬양’은 ‘하나님의 말씀’과 함께 사단의 진을 쳐부수는 역할을 한다. ‘높은 찬양’은 영적 전쟁의 아주 강력한 무기이다(시 149:6~9).

    그들의 입에 하나님을 향한 높은 찬양들이 있게 하고,
    그들 의 손에는 양 날이 있는 칼이 있어 이방에 복수하며 그 백성을 처벌하고
    그들의 왕을 쇠사슬로, 그들의 귀족들을 쇠 족쇄로 묶어
    기록된 판결을 그들에게 시행하게 할지니, 이 영광이 그의 모든 성도들에게 있도다.
    너희는 주를 찬양할지어다.


    우리에 입에는 높은 찬양이 있고, 손에는 양날 선 칼이 있어야 한다.

    칼은 하나님의 말씀이다(엡 6:17; 히 6:17).
    ‘하나님의 말씀’과 ‘하나님을 향한 높은 찬양’은 성도들이 갖추어야 할 영적전쟁의 강력한 무기다.

    말씀의 검을 높이 들고, 주께는 찬양을 높이 올 릴 때, 성령의 능력이 강하게 역사하여 흑암의 세력이 쫒겨 가게 된다.

    우리는 모두 ‘신령한 노래’를 부르도록 요청받았다.
    그러므로 ‘신령한 노래’를 불러야 한다.
    그것은 방언찬송, 새 노래, 높은 찬양 등과 같은 '초자연적 노래'이다.
    이러한 찬양들은 우리의 의지를 뛰어 넘는 신비한 찬양들이다.
    이 놀라운 영적 찬양들은 성령의 역사가 강했던 초대교회에선 예배할 때마다 흔히 불려졌던 노래들이었다.


    교회 안에 ‘신령한 노래’가 회복되어야 한다.

    의식적이고 예전적인 예배와 더불어 찬양과 경배로 찬양이 회복되어야 한다

    찬양은 성령으로 충만하여 불러져야 한다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의지해야 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뜻이다

    말씀에 의지하고 성령님의 인도하심에 맡길 때, 우리는 모두 예배 가운데서 ‘신령한 노래’를 부를 수 있고, 결국 더욱 풍성한 찬송생활의 권능을 체험하게 될 것이다



    신령한 노래(spiritual song)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를 부르며 마음에 감사함으로 하느님을 찬양하고…”(골 3:16).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들로 서로 화답하며너희의 마음으로 주께 노래하며 찬송하며”(엡 5:19). 

    여기에서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인들이 열심을 다해 찬양해야 할 것을 강조하면서 세 가지 유형의 찬송을 나열했다. 어떤 이들은 이 구절에 언급된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를 똑같은 찬양의 다른 이름이라고 생각한다. 결코 그렇지 않다. 세 가지 모두 다른 유형의 찬양이다.

    ‘시’(psalm)는 구약의 시편을 말하고, ‘찬미’(hymns)는 시편 이외의 찬송을 뜻한다. 그렇다면 “신령한 노래”(spiritual song)는 어떤 것일까? 그것은 “성령의 감동 아래 즉흥적으로 부르는 노래”이다. 일반 찬양과는 다른 독특한 장르의 찬송인 것이다. 다음과 같은 노래들이 신령한 노래이다.

    1. 영으로 하는 찬양

    ‘신령한 노래’의 첫 번째 유형은 “영으로” 하는 찬양이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 14장 15절에서 “…내가 영으로 찬미하고 또 마음으로 찬미하리라“고 말한다. 이 말씀은 ‘찬양’에 대하여 말하려는 것이 아니고 ‘방언’에 대하여 말하다가 나온 말이다.

    “내가 만일 방언으로 기도하면 나의 영이 기도하거니와 나의 마음은 열매를 맺히지 못하리라 그러면 어떻게 할꼬 내가 영으로 기도하고 또 마음으로 기도하며 내가 영으로 찬미하고 또 마음으로 찬미하리라”(고전 14:14~15).

    여기에서 ‘마음으로’는 헬라어로 ‘누스’(νου?)인데, ‘이성적으로’라는 뜻이다. 방언기도는 영(spirit)이 하는 기도이므로 통역의 은사가 없으면 그 기도가 이성적으로 이해가 되지 않는다. 그래서 내 영은 기도하지만 나의 마음(mind), 곧 지각(the understanding)은 열매를 맺지 못한다. 따라서 우리는 ‘영으로’(with the spirit) 기도하고, 또한 ‘지각으로’(with the understanding) 기도해야 한다.

    그런데 바울은 나의 영이 ‘기도’할 수 있듯이 나의 영으로 ‘찬양’할 수 있다고 말한다. “내가 영으로 찬미하고 또 마음으로 찬미하리라”(고전 14:15b). 영으로 찬양하는 것은 마치 방언기도를 드리는 것과 같다. 곧 이성의 영역을 떠나 내 영이 ‘자유롭게’ 부를 수 있는 찬송의 장르가 있다. 이것을 보통 ‘방언 찬송’이라고 부른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한국교회 성도들이 방언 찬송을 하는 것을 보면 대부분 기존의 찬송가 곡에 맞추어 부른다. 그것은 내 영이 ‘자유롭게’ 부르는 신령한 노래가 못 된다. “주는 영이시니 주의 영이 있는 곳에는 자유함이 있느니라”(고후 3:17). 진정한 영의 찬송은 일정한 곡이 없고, 곡조에 자유함이 넘친다. 다시 말하면 가락이 제마음대로란 얘기다. 왜냐하면 성령께서 그 사람에게 가사와 가락(곡조)을 주셔서 '즉흥적으로' 노래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영으로 하는 찬양이 ‘신령한 노래’인 것은 바로 그것 때문이다.

    이렇게 여러 사람이 함께 신령한 노래로 찬양할 때 그것은 수십 성부의 아름다운 찬송이 된다. 성령이 각 개인의 목소리를 인도해 주실 뿐만 아니라 그것을 모아서 화음을 이루며 영으로 찬양하게 할 때 창출되는 그 조화란, 참으로 천사들의 합창 그 자체처럼 들릴 때도 있다. 이것이야말로 ‘3층천’ 예배인데, 이 때 회중은 강한 성령의 임재를 체험하게 된다.

    2. 새 노래(a new song)

    ‘신령한 노래’의 또 한 가지 유형으로서 “새 노래” 라는 것이 있다. 성경은 도처에서 ‘새 노래’로 주를 찬양하라고 말씀하고 있다(시33:3; 사42:10; 계5:9). 이 ‘새 노래’ 역시 ‘영의 찬양’처럼 악보도 없는 노래를 즉흥적으로 부르는 것이다. 그러나 나의 마음으로, 곧 지각을 사용하여 노래한다는 점이 ‘방언 찬송’과 다르다.

    즉 ‘새 노래’는 성령께서 곡조와 함께 내 이성으로 알아들을 수 있는 가사를 즉흥적으로 주시는데, 바로 그 가사와 가락으로 주님을 찬양하는 것이다. 따라서 일정한 가사와 곡조가 없는 노래다. 이것은 '예언적 노래'로서 배워서 부를 수 있는 노래가 아니다.

    하느님은 선지자 예레미야에게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보라 내가 내 말을 네 입에 두었노라”(렘 1:9). 하느님은 예레미야의 입에 말씀을 주셨다. 그래서 그는 예언할 수 있었다. 그 하느님은 우리 입에 노랫말도 주신다. 그래서 우리로 새 노래로 찬양하게 하신다.

    “…이새의 아들 다윗이 말함이여 높이 올리운 자, 야곱의 하느님에게 기름부음 받은 자, 이스라엘의 노래 잘하는 자가 말하도다. 여호와의 신이 나를 빙자하여 말씀하심이여 그 말씀이 내 혀에 있도다”(삼하 23:1~2).

    그리하여 우리는 즉흥적으로 ‘예언적인 노래'를 부를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은 초자연적 노래이다. 이러한 노래를 부르면 사람들이 보고 두려워하며 하느님께 굴복한다. 성령의 능력이 그 노래 가운데 있기 때문이다.

    “또 그가 내 입에 새 노래를 두셨으니, 곧 우리 하느님께 드릴 찬양이라. 많은 사람이 그것을 보고 두려워하며 주를 의지하리로다”(시 40:3?KJV).

    “그러나 다 예언을 하면 믿지 아니하는 자들이나 무식한 자들이 들어와서 모든 사람에게 책망을 들으며 모든 사람에게 판단을 받고 그 마음의 숨은 일이 드러나게 됨으로 엎드려 하느님께 경배하며 하느님이 참으로 너희 가운데 계시다 전파 하리라 그런즉 형제들아 어찌할꼬 너희가 모일 때에 각각 찬송시도 있으며...”(고전 14:24~26).

    이와 같은 ‘신령한 노래’는 초대교회에서 체험하였고, 일찍이 ‘다윗의 장막’에서도 불리어졌었다.

    “다윗이 군대 장관들로 더불어 아삽과 헤만과 여두둔의 자손 중에서 구별하여 섬기게 하되 수금과 비파와 제금을 잡아 신령한 노래를 하게 하였으니 그 직무대 로 일하는 자의 수효가 이러하니라”(대상 25:1).

    여기서 ‘신령한 노래를 하게 하였으니’라는 것은 “예언을 하게 했다”(prophesy)는 뜻이다(영어 성경과 비교해 보라). 이 귀한 노래가 오늘날 그리스도의 몸 안에서 성령의 역사와 더불어 다시 회복되고 있다.

    3. 높은 찬양(high praise)

    ‘신령한 노래’의 범주에 ‘높은 찬양’(high praise)이라고 하는 또 한 가지 유형의 찬송이 있다. 영적으로 깊고 강한 찬송으로서, 시편 149편 6절에 나온 찬양이다.

    “그들의 입에 하느님을 향한 높은 찬양들이 있게 하고, 그들의 손에는 양 날 이 있는 칼이 있어”(시 149:6 ? KJV).

    여기에서 ‘높은 찬양’은 원어 ‘로맘’(????)의 번역이다. 이 단어는 시 66:17과 함께 성경에 꼭 두 번 사용되었다. “내가 내 입으로 그에게 부르짖으며 내 혀로 높이 찬송하였도다”(시 66:17). ‘로맘’은 ‘룸’이라는 동사에서 나온 말인데, ‘룸’은 ‘높이다’ ‘높게 하다’의 뜻이다. 높이는 것은 ‘찬양’ 하는 것이다. 그래서 ‘로맘’이라는 단어는 대부분의 영어 성경들이 ‘높은 찬양’으로 번역하고 있다.

    여기서 말하는 ‘높은 찬송’이 실제로 어떤 찬송을 말하는지 확실하지 않다. 그러나 ‘찬양과 경배’ 사역에서 찬양 인도자(worship leader)로 종사하고 있는 분들은 이 찬송이 영적으로 하느님과 좀더 친밀하게 되었을 때 나오는 자연적이고 즉흥적인 노래(spontaneous song)라는 것을 체험적으로 알고 있다.

    찬양의 깊은 경지에 들어가면 음량은 작아지고, 템포는 느려지고, 소리는 높아진다. 가사는 있을 수도 있고 없을 수도 있다. 찬송이 영적으로 매우 높은 경지에 있을 때 나오는 참으로 신비한 찬양이다. 이것이 ‘높은 찬양’으로 이때에 회중은 하느님의 임재를 더욱 깊이 체험하게 된다.

    이 ‘높은 찬양’은 ‘하느님의 말씀’과 함께 사단의 진을 쳐부수는 역할을 한다. ‘높은 찬양’은 영적 전쟁의 아주 강력한 무기이다(시 149:6~9).

    6.그들의 입에 하느님을 향한 높은 찬양들이 있게 하고, 그들 의 손에는 양 날이 있는 칼이 있어
    7. 이방에 복수하며 그 백성을 처벌하고
    8. 그들의 왕을 쇠사슬로, 그들의 귀족들을 쇠 족쇄로 묶어
    9. 기록된 판결을 그들에게 시행하게 할지니, 이 영광이 그의 모든 성도들에게 있도다. 너희는 주를 찬양할지어다.

    우리에 입에는 높은 찬양이 있고, 손에는 양날 선 칼이 있어야 한다.
    칼은 하나님의 말씀이다(엡 6:17; 히 6:17).
    ‘하느님의 말씀’과 ‘하느님을 향한 높은 찬양’은 성도들이 갖추어야 할 영적 전쟁의 강력한 무기다.
    말씀의 검을 높이 들고, 주께는 찬양을 높이 올 릴 때, 성령의 능력이 강하게 역사하여 흑암의 세력이 쫒겨 가게 된다.

    우리는 모두 ‘신령한 노래’를 부르도록 요청받았다.
    그러므로 ‘신령한 노래’를 불러야 한다.
    그것은 방언찬송, 새 노래, 높은 찬양 등과 같은 '초자연적 노래'이다.
    이러한 찬양들은 우리의 의지를 뛰어 넘는 신비한 찬양들이다.

    이 놀라운 영적 찬양들은 성령의 역사가 강했던 초대교회에선 예배할 때마다 흔히 불려졌던 노래들이었다. 그러나 방언과 더불어 교회에서 오랫동안 잊혀져 오다가 20세기에 이르러 성령의 역사와 함께 찬양과 경배라는 새로운 양식의 예배가 시작되면서 마침내 신령한 노래들도 다시 부를 수 있게 된 것이다.

    오늘날 교회 안에 ‘신령한 노래’가 회복되고 있다. 의식적이고 예전적인 예배에서는 이러한 놀라운 찬양을 전혀 기대할 수 없다. 순서에 따라 예배가 진행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예배를 우리가 만든 순서에 의지하지 않고 성령님의 인도하심에 맡길 때, 우리는 모두 예배 가운데서 ‘신령한 노래’를 부를 수 있고, 결국 더욱 풍성한 찬송생활의 권능을 체험하게 될 것이다


    신령한 노래와 새 노래


    에배소서 5:19~21

    시와 찬송과 신령한 노래들로 서로 화답하며 너희의 마음으로 주께 노래하며 찬송하며 범사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항상 아버지 하나님께 감사하며 그리스도를 경외함으로 피차 복종하라.

    제도적 예배와 확장된 예배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 오늘 우리의 삶에 예배가 풀어지고 확장되고 있습니까? 함께 모여 예배하는 이 자리에서, 예배를 누리고 계십니까? 에베소서 5장 본문은 성령충만의 방법이자 결과로, ‘예배’를 말합니다. 예배는 세상과 구별된 그리스도인의 삶의 모습이자 세상을 이기는 성도의 능력입니다. 교회는 다 함께 모여, 또한 각 가정과 일터로 흩어져 예배하는, 예배 공동체입니다. 함께 모이나 또한 흩어지는 예배. 이는 신약에서 말하는 예배의 두 가지 개념입니다. 먼저는 좁은 의미의 예배입니다. 이는 오늘 주일예배처럼 특정한 시간에 특정한 장소에서 약속된 교회의 모임으로 드리는 제도적 예배입니다. 제도적 예배는 예수님께서 사마리아 여인에게 말씀하신 요한복음 4장의 예배와 연결됩니다. 주님은 예배의 장소를 묻는 사마리아 여자에게 “이 산에서도 말고 예루살렘에서도 말고, 너희가 아버지께 예배할 때가 이를 것이다. 영과 진리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아버지께서는 이렇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신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현상에 치우친 사마리아 땅의 예배와 율법에 치우친 예루살렘 유대인들의 예배의 중심을 바로 잡아 주시며, 종교적이고 제도적인 의미로의 예배를 가르쳐주신 것입니다. 반면, 넓은 의미의 예배가 있습니다. 각자의 삶의 자리로 이어지는 확장된 예배입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로마서 12장은 세상과 구별되어 주님께 드려진 산 제물, 예배자로 삶을 살아갈 것을 말합니다. 예배의 두 개념은 Worship과 Service란 두 표현에서도 찾아볼 수 있습니다. “이르되 만일 내게 엎드려 경배하면 이 모든 것을 네게 주리라 이에 예수께서 말씀하시되 사탄아 물러가라 기록되었으되 주 너의 하나님께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기라 하였느니라.” 예수님은 경배를 요구하는 사탄에게 주 너의 하나님께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기라’고 말씀하십니다. 경배(Worship)가 앞서 말한 좁은 의미의 예배, 즉 특정한 시간과 장소에서 모여 드리는 제도적 예배에 가깝다면 섬김(Service)은 삶의 모든 영역으로 확장된 예배에 가깝습니다. 우리는 예배당에 모여 함께 예배할 뿐 아니라, 가정과 일터의 자리에서도 주님을 예배함으로 가족과 이웃을 사랑하며 주어진 일과들을 감당해야 합니다. 요한복음 4장처럼 주일예배나 금요철야 같이 약속된 날 예배당에 함께 모일 때도, 로마서 12장처럼 제도적 예배가 끝난 후 각자의 삶의 자리로 돌아갈 때도, 언제나 우리의 예배가 주님안에서 연결되어 있어야 합니다. 종교적 예배, 제도적 예배로 함께 모여 예배할 뿐 아니라, 설거지를 하고 아이들을 씻기고 논문을 쓰고 자료들을 정리하는 모든 삶의 현장이 예배가 되길 축복합니다. 예배를 누릴 수 있는 성도, 예배로 돌파할 줄 아는 성도, 예배로 임재를 나르는 성도로 섭시다.

    서로 화답하는 코이노니아의 예배 - 시와 찬송과 신령한 노래

    세상과 구별된 빛의 자녀들로서 오직 성령 충만할것을 당부한 바울은 이어서 그 결과인 예배의 다섯 가지 형태를 말합니다. 바로 시와 찬송과 신령한 노래, 감사와 피차 복종함입니다. 가장 먼저 언급된 ‘시’는 헬라어 원문으로 ‘줄을 타다’, ‘소리를 내다’라는 의미로, 악기와 함께 부르는 노래를 뜻합니다. 시편에서 악기 소리에 맞추어 불려진 노래가 ‘시’입니다. ‘찬송’은 하나님을 위해 쓴 글과 말들을 낭송하고 외치는 소리입니다.

    오늘날 문학 장르 중 시가 오히려 찬송에 가깝습니다.
    세 번째는 ‘신령한 노래’입니다.
    이는 ‘프뉴마’, 즉 ‘영’적 요소가 강조된 노래로, 방언 기도와 같은 ‘영의 노래’입니다.
    바울은 이렇게 영적으로 풀어지고 선포되는 다양한 예배의 모습들을 골로새서 3장과 고린도전서 14장에서도 언급하였는데, 특별히 방언 기도에 대해 말하며 영의 기도와 마음의 기도, 영의 찬송과 마음의 찬송을 분명히 구별합니다.

    ”그리스도의 말씀이 너희 속에 풍성히 거하여 모든 지혜로 피차 가르치며 권면하고 시와 찬송과 신령한 노래를 부르며 감사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을 찬양하고.“

    “그런즉 형제들아 어찌할까 너희가 모일 때에 각각 찬송시도 있으며 가르치는 말씀도 있으며 계시도 있으며 방언도 있으며 통역함도 있나니 모든 것을 덕을 세우기 위하여 하라.”

    “내가 만일 방언으로 기도하면 나의 영이 기도하거니와 나의 마음은 열매를 맺지 못하리라 그러면 어떻게 할까 내가 영으로 기도하고 또 마음으로 기도하며 내가 영으로 찬송하고 또 마음으로 찬송하리라.“

    이처럼 시와 찬송과 신령한 노래로 드려지는 예배에서 또한 주목할 것은 서로 화답함입니다.
    에베소서 본문에서 바울은 시와 찬송과 신령한 노래로 ‘서로 화답하며’ 마음으로 주께 노래하고 찬송하라 말합니다. 우리가 함께 모여 예배할 때, 누군가는 시로 하나님을 노래하고, 누군가는 찬송으로 하나님을 선포하며, 누군가는 신령한 노래로 주님을 찬양할 것입니다. 분명한 곡조에 따라 노래하는 소리, 주님의 아름다움과 위대하심을 외치고 선포하는 소리, 영의 노래로 주님을 높이는 소리, 그리고 그 영적 노래를 통역하여 풀어내는 소리까지 모두 한데 어우러져 서로 화답하는 아름다운 하모니가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이것이 1세기 교회의 예배였습니다. 초대교회는 수백명이 모일수 있는 예배당이 없었습니다. 적게는 두세사람부터 스무명 정도의 사람들이 둘러앉아 시와 찬송과 신령한 노래로 화답하며 하나님을 예배했습니다. 찬송시와 계시의 말씀과 예언의 노래와 영의 노래로 코이노니아 예배가 이루었습니다. 이 아름다운 예배가 우리에게도 풀어지길 소원합니다. 에베소 교회처럼, 고린도 교회처럼, 성령님의 운행하심에 온전히 이끌려가며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로 서로 화답하여 마음이 하나되고 영이 풍성하게 되는 예배가 열리길 바랍니다.

    서로 화답하는 코이노니아의 예배 - 새노래

    마지막으로 종종 ‘신령한 노래’와 헷갈리는 ‘새노래’에 대해 나눕니다. 신령한 노래가 영적인 노래라면 새노래는 이전과 다른 노래로, 요한계시록 5장 본문으로 새노래를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들이 새 노래를 불러 이르되 두루마리를 가지시고 그 인봉을 떼기에 합당하시도다 일찍이 죽임을 당하사 각 족속과 방언과 백성과 나라 가운데에서 사람들을 피로 사서 하나님께 드리시고.” 새노래는 세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첫째는 어린 양, 즉 약속하신 메시아 예수 그리스도의 노래입니다. 두 번째는 어린 양이 완성하신 의, 모든 저주를 끊어낸 십자가 구속의 선포입니다. 마지막 세 번째는 성장과 새로운 계시로의 노래입니다. 이는 우리가 하나님을 알아가며 넓고 깊어진 만큼 새롭게 불려지는 노래를 의미합니다. 영적으로 어렸을 때는 하나님을 나를 지켜주는 분, 내가 기도하면 필요한 것을 주시는 분 정도로 경험합니다. 그러나 자라나면서 우리는 역사를 운행하시는 크고 위대하신 하나님을 점차 알아가게 됩니다. 주님을 더욱 경험하길 축원합니다. 하나님을 아는 깊이와 넓이가 나날이 확장되어 이전과 다른 새노래로 주님을 노래하길 축복합니다. 10년 전의 하나님, 5년 전의 하나님이 아닌, 오늘 또 새롭게 만난 하나님을 노래합시다. 아침마다 새로운 주님의 자비와 아름다움이 이 교회가 부를 새노래 되기를, 하나님을 아는 깊이와 넓이의 새로운 노래가 계속해서 울려퍼지기를 기도합니다.



    신령한 노래(5구절)

    역대상 25:1
    다윗이 군대 장관들로 더불어 아삽과 헤만과 여두둔의 자손 중에서 구별하여 섬기게 하되 수금과 비파와 제금을 잡아 신령한 노래를 하게 하였으니 그 직무대로 일하는 자의 수효가 이러하니라.

    역대상 25:2
    아삽의 아들 중 삭굴과 요셉과 느다냐와 아사렐라니 이 아삽의 아들들이 아삽의 수하에 속하여 왕의 명령을 좇아 신령한 노래를 하며.

    역대상 25:3
    여두둔에게 이르러는 그 아들 그달리야와 스리와 여사야와 하사뱌와 맛디디야 여섯 사람이니 그 아비 여두둔의 수하에 속하여 수금을 잡아 신령한 노래를 하며 여호와께 감사하며 찬양하며.

    에베소서 5:19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들로 서로 화답하며 너희의 마음으로 주께 노래하며 찬송하며.

    골로새서 3:16
    그리스도의 말씀이 너희 속에 풍성히 거하여 모든 지혜로 피차 가르치며 권면하고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를 부르며 마음에 감사함으로 하나님을 찬양하고.

    호다이스 프뉴마티카이스

    노래(5603)

    신령한(4152)


    󰃨 그리스도의 말씀이 너희 속에 풍성히 거하여 - ‘그리스도의 말씀’에 해당하는 헬라어 ‘호 로고스 투 크리스투’ (*)에 대해 혹자는 주격적 소유격으로 해석하여 ‘그리스도가 하신 말씀’을 의미한다고 주장한다(Bruce, Lenski, Lightfoot). 그러나 ‘호 로고스 투 크리스투’를 꼭 주격적 소유격으로 해석할 이유는 없다. 본절의 소유격은 주격적일 뿐 아니라 목적격적이기도 하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말씀’은 ‘그리스도께서 직접 하신 말씀’은 물론 ‘그리스도에 관한 말씀’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Vaughan, Carson). 한편 ‘너희 속에’는 두 가지로 해석된다. 1. 개인적인 차원에서 ‘너희 마음 속에’를 의미한다(Lightfoot). 2. 공동체의 차원에서 ‘너희들 속에’를 의미한다(Masson, Lohse). 두 견해는 나름대로 타당성을 지닌다(Bruce, O' Brien). 결국 그리스도의 말씀을 해석하고 설교를 듣는 가운데 그리스도의 말씀이 그리스도인 각자는 물론 공동체내에 풍성히 거함으로 그 영향력 아래서 그리스도인들은 다음 두 가지를 행해야 한다. 1. 모든 지혜로 피차 가르치ㅕ 권면하고 ‘가르치고 권면하는 것’은 바울 사도나 디모데가 가르치고 권면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1:28) 골로새 교인들이 피차 ‘모든 지혜로’ 가르치고 권면하는 것을 의미한다. ‘모든 지혜’는 ‘가르치고 권면하는 방법’으로 하나님의 뜻에 대한 인지를 의미한다(O' Brien). 2.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를 부르며 마음에 감사함으로 하나님을 찬양하고 - ‘시’와 ‘찬미’ㅡ 그리고 ‘신령한 노래’를 굳이 구별한다면, ‘시’는 구약 시편을 의미하며 (눅20:42 ;24:44 ; 행 1;20 ; 13:33),‘ 찬미’ 는 ‘축제의 찬양’ (O' Brien, Lohse) 혹은 ‘그리스도인들에 의해 작곡되고 불리는 찬송’ (Lightfoot)을 의미하고, ‘신령한 노래’는 ‘하나님의 행위를 찬양하고 영광을 돌리는 노래’ (Lohse, O' Brien)혹은 ‘즉흥적으로 불리는 영적 노래’를 가리킨다(Bruce). 그러나 세 가지 용어를 정확하게 구별 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헌편 찬양을 그리스도인들의 입술의 열매이며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 행위이다(히 13:15). 진정한 찬양은 ‘감사하으로’ 하나님께 드려져야 한다. 혹자는 ‘감사함으로’의 헬라어 ‘엔 카리티’ (*)가 ‘그리스도인들에게 생명을 부여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로’라는 의미라고 주장한다(Lohse). 그러나 15절과 17절 사이에서 ‘감사함’은 매우 중요한 주제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그리스도인들의 적절한 응답으로서의 감사함’의 의미로 본문을 해석하는 것이 더 타당하다(O' Brien).


    새노래(9구절)

    시편 33:3
    새 노래로 그를 노래하며 즐거운 소리로 공교히 연주할찌어다.

    시편 40:3
    새 노래우리 하나님께 올릴 찬송을 내 입에 두셨으니 많은 사람이 보고 두려워하여 여호와를 의지하리로다.

    * 새 노래는 새로운 노래가 아니라 하나님이 즐겁게 받으실 찬송을 말합니다.

    새(2319) 노래(7892) 쉬르 하다쉬

    새노래...찬송을 내 입에 두셨으니
    - 본 표현이 뜻하는 바는 하나님께서 찬양할 만한 새로운 경우를 허락하셨다는 것이다. 이번에 베푸신 구원은 너무 특징적인 것일 뿐만 아니라 이전의 자비 행위에 덧붙여진 것이기 때문에 새로운 감사의 표현을 매우 적절히 하고 있다. 그리고 이번의 구속 행위는 과거의 자비 행위에 대한 감사를 표현할 때 사용하였던 언어로는 불충분할 만큼 놀라운 하나님 편에서의 중재 사역이었다는 것이다. 또한 이번의 구원 사역은 슬픔의 깊음 이후 영광으로 승귀(昇貴)하신 그리스도의 사건 때만큼 하나님에 대한 감사를 표현하기에는 언어가 불충분할 정도의 위대한 사역이었다는 뜻이다(Barner).

    많은 사람이...두려워하여...의지하리로다
    - 인류의 많은 백성들이 저자가 노래했었던 것과 같은 하나님의 구원 사역을 목도하고 그 결과로 하나님을 존경하고 예배하고 경와하는 것을 배워서 그분만을 온전히 의뢰하게 된다는 것이다. 곧 그의 진실된 예배자들과 친구가 된다는 것을 나타낸 표현이다.







    시편  96:1
    새 노래로 여호와께 노래하라 온 땅이여 여호와께 노래할찌어다.

    시편 98:1
    새 노래로 여호와께 찬송하라 대저 기이한 일을 행하사 그 오른손과 거룩한 팔로 자기를 위하여 구원을 베푸셨도다.

    시편 144:9
    하나님이여 내가 주께 새 노래로 노래하며 열 줄 비파로 주를 찬양하리이다.

    시편 149:1
    할렐루야 새 노래로 여호와께 노래하며 성도의 회중에서 찬양할찌어다.

    이사야 42:10
    항해하는 자와 바다 가운데 만물과 섬들과 그 거민들아 여호와께 새 노래로 노래하며 땅 끝에서부터 찬송하라.

    요한계시록 5:9
    새 노래를 노래하여 가로되 책을 가지시고 그 인봉을 떼기에 합당하시도다 일찍 죽임을 당하사 각 족속과 방언과 백성과 나라 가운데서 사람들을 피로 사서 하나님께 드리시고.

    요한계시록 14:3
    저희가 보좌와 네 생물과 장로들 앞에서 새 노래를 부르니 땅에서 구속함을 얻은 십 사만 사천인 밖에는 능히 이 노래를 배울 자가 없더라.


    역대상 20장 요약

    다윗의 군장인 요압이 암몬땅 랍바를 함락시키고,다윗의 군사들이 블레셋의 거인들을 죽였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역대상 21장 요약

    다윗이 요압을 시켜서 인구조사를 실시하엿고 인구조사에 대한 잘못으로 다윗은 회개합니다.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에게 벌을 내려서 사람을 칠만명이나 죽이셨으며,이로 인해서 다윗은 오르난의 타작마당을 구입하여서 하나님께 제사들 드리게 됩니다.

    역대상 22장 요약

    다윗이 성전을 짓기 위해서 여러 물자들을 준비하였고 다윗이 솔로몬과 신하들에게 성전건축에 대하여서 당부하였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5월 8일(목) 역대상 20-22장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이스라엘의 인구조사(21:1)

    사단이 일어나 이스라엘을 대적하고 다윗을 격동하여 이스라엘을 계수하게 하니라.
    Satan rose up against Israel and incited David to take a census of Israel.

    역대상 21장은 사탄이 다윗을 충동하여 이스라엘의 인구 조사를 시행하도록 유혹하는 것으로 시작합니다.
    다윗은 이제까지 여호와 하나님의 도움을 받아 승리하는 삶을 누렸습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 사탄의 유혹을 받아 여호와 하나님보다 사람의 힘을 생각하며 인구 조사를 명령합니다.
    인간의 힘을 의지하려는 행위는 하나님을 불신하는 태도가 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대적하다(알. ʽal) עַל 스트롱번호 5921

    1. 옷을 입은. 2. 삼하 4:7
    발음 [ ʽal ]
    구약 성경  / 5772회 사용

    격동하다(수트. çûwth)  סוּת    스트롱번호 5496

    1. 찌르다.  2. 자극하다.  3. 히필형 הִסִּית
    발음 [ çûwth ]
    구약 성경  / 18회 사용
    관련 성경  /  충동시키다(삼상26:19), 충동되다(왕상21:25), 옮기다(욥36:16), 꾀다(신13:6, 대하32:11, 렘38:22), 청하다(수15:18, 삿1:14), 감동시키다(삼하 24:1, 대하 18:31), 설득하다(왕하18:32), 충동하다(대상21:1, 욥2:3), 권하다(대하18:2), 꾀임을 받다(대하32:15, 사36:18), 분노하다(욥36:18), 부추기다(렘43:3).

    다윗의 인구 조사(역대상 21:1-17, 사무엘하 24:1-17)

    본서의 내용을 살펴볼 때 지금까지 본서의 기자는 승승 장구하는 다윗 왕의 영광된 측면만을 부각시켜서 기록했다(10:1-20:8).
    그러나 본장에서부터는 관심을 달리하여 하나님의 성전을 건축하기 위해 준비하는 다윗 왕의 모습을 기록하고 있다.
    즉, 자신의 인생 말년에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헌신하는 다윗의 신앙적 행위를 증거하는 것이다.
    사실 이때는 시기적으로 다윗 왕의 통치 말기에 해당하는데 다윗 왕의 세력이 크게 확장되었던 때로부터 약 20년의 세월이 경과한 것으로 보인다(Payne).
    참으로 이 20년의 기간 동안에 다윗 왕은 그의 큰 범죄로 말미암아 일련의 연쇄적인 징계들을 받았다.
    그 징계들이란 암논의 추행 사건(삼하 13장), 압살롬의 반란(삼하 14-19장), 그리고 세바의 반란(20장) 등이었다.
    그러나 본서 저자는 이러한 다윗(David) 왕의 불행했던 역사를 뛰어넘어 곧바로 성전 건축에 관련된 다윗 왕의 역사를 기록하고 있는 것이다.
    이와같이 저자가 다윗 왕이 겪은 고통스런 일련의 역사를 본서에서 생략한 것은 바벨론(Babylon) 유수(幽囚)에서 풀려난 유다 왕조의 후손들에게 될 수 있는 대로 그 왕조의 탁월성 및 정통성만을 부각시키기 위해서였다.
    그래서 그들로 하여금 새로운 신정 국가 건설에 큰 용기를 불어넣어 주고자 하기 위함이었다(Payne).
    그런데 이러한 저자의 의도에도 불구하고 본장에서 다윗 왕이 크게 범죄했다고 생각되는 인구 조사사건이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이 사건이 본서에 언급된 것은 이 일을 계기로 말미암아 예루살렘 성전 건축의 직접적인 배경이 되었기 때문이다.
    즉, 이 사건을 동기로 해서 성전의 부지가 결정되고 성전 건축을 위한 구체적인 준비가 시작되었던 것이다.

    사단이...다윗을 격동하여 이스라엘을 계수하게 하니라
    - 본 문맥은 내용상 삼하 24장과 일치하고 있으나 많은 차이점이 발견된다.

    즉, 삼하 24장에서는 다윗을 격동한 주체가 하나님으로 기록되어 있는 반면 본절에서는 그 주체가 사단으로 기록되어 있는 것이다.
    이에 대해 혹자는 삼하 24장의 기록이 잘못된 것이라고 주장한다(Lange).

    24:1.
    여호와께서 다시 이스라엘을 향하여 진노하사 저희를 치시려고 다윗감동시키사 가서 이스라엘과 유다의 인구를 조사하라 하신지라.

    21:1.
    사단이 일어나 이스라엘을 대적하고 다윗을 격동하여 이스라엘을 계수하게 하니라.

     그러나 이러한 생각은 유대인의 신관(神觀)에 비추어 볼 때 잘못된 추측이다.
    왜냐하면 성경은 하나님께서 사단의 활동을 허락하실 때에야 비로소 사단은 활동을 개시할 수있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욥 1:12; 삼상 26:19).
    참으로 하나님은 이 세상의 모든 일에 간섭하시고 섭리하시는 분이다(욥 12:23; 시 104:9-31; 사 50:2, 3; 갈 1:15, 16).
    그래서 삼하 24장은 바로 이러한 섭리적 차원에서 다윗을 격동하신 주체가 하나님이었다고 기록한 것이다.
    그러나 반면에 본문은 하나님의 섭리에 의해 움직여지는 결과적 측면에서 그 주체를 사단으로 기록한 것 뿐이다.
    따라서 이 두 구절은 어느 하나 잘못된 것이 없으며 다만 상이한 관점에 따라 달리 기록된 것일 뿐이다(PulpitCommentary).
    그렇기 때문에 여기서 사단은 하나님께서 사용하시는 도구였음을 알 수있다.

    그러나 혹자는 이러한 견해와는 달리 사단이 다윗을 격동한 것은 이스라엘과 이스라엘의 하나님에 대한 반감 때문이라고 주장한다(욥 1:11; 2:5, Wycliffe).
    그러나 사단이 다윗을 격동한 것은 이스라엘에 대한 반감이라고 하기보다는 '고소', '기만' '파멸'을 일삼는 사단의 역할을 한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 옳을 듯 싶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이 사단을 이용하여 다음과 같은 자신의 세 가지 목적을 달성하신다.
    첫째는 자신의 세력을 과시하려는 다윗 왕의 교만을 제거하여 겸손하게 만드는것
    둘째는 압살롬의 난, 세바의 난 때에 하나님이 기름부어 세우신 종 다윗을 거역한 이스라엘 백성들을 형벌하시는 것(삼하 24:1)
    셋째는 성전건축을 구체적으로 이룰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하는 것

    그리고 사단의 역할이 인간을 파멸시키는 것인데 이러한 활동을 하나님께서 심판의 도구로 혹은 연단의 도구로 사용하신다는 사상(思想)은 포로기 전후에 나타난 유대교의 사상을 반영한 것으로 생각된다(O. Zockler).


    출애굽기 30:12
    네가 이스라엘 자손의 수효를 따라 조사할 때에 조사 받은사람은생명의 속전을 여호와께 드릴찌니 이는계수할 때에 그들 중에 온역이 없게 하려 함이라.

    민수기 26:2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의 총수를 그 조상의 집을 따라 조사하되 이스라엘 중에 무릇 이십세 이상으로 능히 싸움에 나갈만한 자를 계수하라 하시니.

    사무엘하 24:1-2
    여호와께서 다시 이스라엘을 향하여 진노하사 저희를 치시려고 다윗을 감동시키사 가서 이스라엘과 유다의 인구를 조사하라 하신지라.
    왕이 이에 그 곁에 있는 군대 장관 요압에게 이르되 너는 이스라엘 모든 지파 가운데로 다니며 단에서부터 브엘세바까지 인구를 조사하여 그 도수를 내게 알게 하라.

    사무엘하 24:4
    왕의 명령이 요압과 군대장관들을 재촉한지라 요압과 장관들이 이스라엘 인구를 조사하려고 왕의 앞에서 물러나서.

    사무엘하 24:10
    다윗이 인구 수를 조사한 후에 그 마음에 자책하고 여호와께 아뢰되 내가 이 일을 행함으로 큰 죄를 범하였나이다 여호와여 이제 간구하옵나니 종의 죄를 사하여 주옵소서 내가 심히 미련하게 행하였나이다 하니라.

    역대하 2:7
    전에 솔로몬의 부친 다윗이 이스라엘 땅에 거한 이방 사람을 조사하였더니 이제 솔로몬이 다시 조사하매 모두 십 오만 삼천 육백인이라.






    기독교인을 말씀에서 멀어지게 하는, 사탄의 최신 전략

    최근 사회적 발전 및 디지털 미디어의 출현으로 성경을 찾기가 더 어려워졌다.
    그러나 브라운 박사는 "사탄은 항상 기독교인들을 성경에서 떼어놓기 위해 더 많은 시간을 들인다"고 경고했다.

    그러면서 수 세기 동안 성경읽기를 방해함으로써 사람들의 영적인 눈을 가려 온 사탄의 전략을 설명했다.

    브라운 목사는 "과거에는 일반 사람들이 잘 알지 못하는 언어(라틴어) 안에 성경을 가둬둠으로써 사람들이 성경을 읽지 못하게 했다. 그러나 윌리엄 틴데일의 수고와 사역으로, 성경이 유럽 사람들이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영어로 번역될 수 있었다"고 설명했다.

    유럽 기독교인들이 그들의 신앙을 해외로 전파하던 식민지 시대에는, 사탄이 비영어권 사람들이 그들의 언어로 성경을 읽는 것을 막기 위해 글을 읽거나 쓰지 못하게 했다.

    이에 관해 브라운 목사는 "비슷한 정서가 1655년 뉴헤븐 법전에 나타났는데, 교육의 목적이 아이들이 '성경을 제대로 읽을 수 있도록, 그리고 구원에 필요한 기독교의 주요 근거와 원리를 이해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라고 명시돼 있었다"고 설명했다.

    브라운 목사는 "오늘날 사탄은 '주의 산만'이라는 새로운 전략을 매우 성공적으로 사용하고 있다"며 "주의 산만에는 문자, 이메일, 전화, TV쇼, 뉴스, 스포츠 경기, 소셜미디어 글과 광고 등이 포함돼 있다"고 했다.

    그러면서 유튜브의 추천 영상으로 주의를 빼앗겼던 자신의 경험을 떠올렸다. 그는 우연히 동물이 출연하는 영상을 접하고 거의 1시간 가량 보게 되었다고.

    그는 "물론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에서 멀어진 데 대해 사탄을 탓할 수 없다. 그것은 오직 우리의 선택이다. 그러나 우리의 집중력을 빼앗가는 우리 시대의 유혹을 우리는 인식할 수 있고, 하나님의 말씀을 삶에 우선순위에 두고자 결단할 수도 있다"고 조언했다.

    브라운 목사는 "믿는 자들은 어디서든지 하나님의 말씀의 능력으로, 그들의 삶을 말씀을 읽고 천착하는 데 초점을 두기로 결단함으로써 말씀이 충만한 삶을 살아갈 수 있다"면서 "충분히 말씀을 붙들고 삶 가운데 적용할 수 있다면, 이는 국가에도 말 그래도 혁명적인 영향을 미칠 것"이라고 했다.

    파이퍼 목사가 소개한 사탄의 전략 10가지이다.

    1. 사탄은 거짓말쟁이며, 거짓의 아비다.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서 났으니 너희 아비의 욕심대로 너희도 행하고자 하느니라 그는 처음부터 살인한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없으므로 진리에 서지 못하고 거짓을 말할 때마다 제 것으로 말하니니 그가 거짓말쟁이요 거짓의 아비가 되었음이라(요 8:44)"

    사탄은 자신의 속성에 따라 거짓을 말한다. 그는 거짓말쟁이고 거짓의 아비이기 때문이다. 사탄은 창세기 3장에 처음 등장한다. 그의 입술에서 가장 먼저 나온 말은 진리에 대한 의심이었다("하나님께서 정말 동산에 있는 모든 나무의 실과를 먹지 말라 하시더냐?"). 그리고 두 번째 나온 말은 교묘한 거짓말이었다("네가 절대로 죽지 아니하리라"). 요한은 '그 속에 진리가 없기 때문에 진리에 서지 못하고 진리와 아무런 관계가 없다'고 기록하고 있다. 우리는 거짓과 속임의 핵심을 다루고 있는 것이다.

    2. 사탄은 믿지 않는 자들의 마음을 가리운다.

    이 세상의 신은 믿지 않는 자들의 마음을 가리우고,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의 빛을 보지 못하게 한다(고후 4:4). 그는 거짓을 말할 뿐 아니라 참된 것을 숨긴다. 그는 복음의 귀함을 보지 못하게 한다. 그는 우리가 사실과 증거들을 보면서도, 그 귀한 가치는 알지 못하도록 가리운다.

    3. 사탄은 빛과 의로움의 옷으로 자신을 가장한다.

    고린도후서 11장 13~15절에서 바울은 어떤 이들은 사도가 아니면서 사도인체 한다고 말한다. 그는 "이와 같이 사탄도 자신을 광명의 천사로 가장한다"고 말씀한다. 따라서 사탄의 종들이 스스로를 의의 종으로 가장하는 것은 하나도 이상하지 않다.

    즉, 겉으로는 교회에 참여하기에 충분한 지식을 말하지만 안으로는 바울 사도가 '귀신의 가르침(딤전 4:1)'이라고 언급한 내용들을 가르치는 이들은 사탄의 종이다. 예수님께서는 이들이 마치 양의 탈을 쓴 늑대(마7:15)와 같다고 하셨다. 사도행전 20장 30절 말씀은 이들이 무리들을 끌어내어 멸망으로 이끈다고 기록돼 있다.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분별의 은사(빌1:9)가 없다면, 우리의 사랑은 우둔함에 빠질 수 있다.

    4. 사탄은 기적을 행한다.

    데로니가후서 2장 9절은 마지막 날이 이와 같을 것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악한 자의 임함은 사단의 역사를 따라 모든 능력과 표적과 거짓 기적과 불의의 속임으로 멸망하는 자들에게 있으리니"라고 말씀하신다. 사탄은 마치 이러한 기적들이 현실이 아닌 것처럼 보이게 한다. 사실, 일부 사람들은 사탄이 거짓된 기적들만 행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이에 대한 의심의 여지가 있다. 설령 이것이 진리라고 해도, 사탄의 거짓은 거의 모든 이들에게 충분히 진짜같아 보이기 때문이다.

    5. 사탄은 사람들을 유혹해 죄짓게 한다. 

    사탄은 예수님께서 광야에서 계실 때, 그분을 유혹하려고 했지만 실패했다. 사탄은 예수님이 고통과 순종의 길을 포기하길 바랬다(마4:1~11). 그러나 예수님의 마지막 삶에서 유다를 유혹하는데는 성공했다(눅22:3~6). 고린도후서 11장 3절에 보면, 바울 사도는 모든 신자들에게 다음과 같은 경고의 말씀을 전한다. "뱀이 그 간계로 하와를 미혹한 것 같이 너희 마음이 그리스도를 향하는 진실함과 깨끗함에서 떠나 부패할까 두려워하노라."

    6. 사탄은 사람들의 마음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뽑아내고, 신앙을 죽인다. 

    예수님은 마가복음 4장 1~9절에 나타난 4가지 밭 비유를 말씀해주셨다. 하나님의 말씀의 땅에 뿌려지는데 일부 씨앗은 길 가에 뿌려져서 새들이 재빨리 먹어버린다. 주님은 15절에서 "말씀이 길 가에 뿌리웠다는 것은 이것이니 곧 말씀을 들었을 때에 사단이 즉시 와서 저희에게 뿌리운 말씀을 빼앗는 것이요"라고 말씀하셨다. 사탄은 말씀을 빼앗아간다. 왜냐하면 말씀을 통해 믿음이 자라나는 것을 미워하기 때문이다(롬 10:17).

    바울 사도는 데살로니가 성도들의 믿음에 대해 다음과 같은 염려의 말씀을 전했다. "이러므로 나도 참다 못하여 너희 믿음을 알기 위하여 보내었노니 이는 혹 시험하는 자가 너희를 시험하여 우리 수고를 헛되게 할까 함일러니." 바울 사도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이들의 신앙을 죽이려는 사탄의 계획을 잘 알고 있었다.

    7. 사탄은 때로는 아픔과 질병을 일으킨다. 

    예수님은 허리가 굽어져서 스스로 펼 수 없는 한 여인을 치유해주셨다. 그러자 일부 사람들이 안식일에 이같은 일을 행한다며 예수님을 비난했다. 이에 예수님은 "그러면 열여덟 해 동안 사탄에게 매인 바 된 이 아브라함의 딸을 안식일에 이 매임에서 푸는 것이 합당하지 아니하냐(눅 13:16)"고 말씀하셨다. 예수님은 이같은 질병의 원인이 사탄에게 있음을 아신 것이다.

    사도행전 10장 38절에서 베드로 사도는 예수님에 대해 "하나님이 나사렛 예수에게 성령과 능력을 기름 붓듯 하셨으매 저가 두루 다니시며 착한 일을 행하시고 마귀에게 눌린 모든 자를 고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함께 하셨음이라"고 증거한다. 즉, 사탄이 병으로 사람들을 누른다는 것이다. 이것 역시 그의 계획 가운데 하나이다.

    그러나 모든 질병이 마귀의 역사라고 말하는 실수를 범해선 안 된다. 분명 '육체의 가시'가 우리의 성화를 위한 하나님의 계획일지라도, 사탄의 사자가 될 수 있다(고후 12:7). 그러나 질병이 온전히 하나님의 계획인 경우도 있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이 사람이나 그 부모가 죄를 범한 것이 아니라 그에게서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니라." 그가 예수님의 자비로운 계획 가운데 있었기 때문에 예수님은 사탄을 데려올 필요를 못 느끼셨다.

    8. 사탄은 살인자이다. 

    예수님은 그를 죽이려고 계획한 이들에게 "너희는 마귀의 아비로부터 나왔고, 그 아비의 일을 행하려 한다.그는 처음부터 살인한 자요 진리가 그 속에 거하지 않는다(요8:44)"고 말씀하셨다. 요한 사도는 "가인 같이 하지 말라 저는 악한 자에게 속하여 그 아우를 죽였으니 어찐 연고로 죽였느뇨 자기의 행위는 악하고 그 아우의 행위는 의로움이니라(요일 3:12)"라고 전했다. 예수님은 흠이 없는 서머나 교회에 "네가 장차 받을 고난을 두려워 말라 볼찌어다 마귀가 장차 너희 가운데서 몇 사람을 옥에 던져 시험을 받게 하리니 너희가 십일 동안 환난을 받으리라(계 2:10)"고 말씀하셨다.

    한 마디로 말하면, 사탄은 피에 굶주려 있다.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고 이를 충만케 하려고(요10:10) 이 땅에 오셨다. 그러나 사탄은 할 수 있는대로 생명을 빼앗고, 결국 영원히 불행하게 만들고자 한다.

    9. 사탄은 사역자들의 계획을 대적한다. 

    바울 사도는 데살로니가전서 2장 17~18절에서 자신의 선교 계획이 어떻게 죄절되었는지에 대해 말하고 있다. "형제들아 우리가 잠시 너희를 떠난 것은 얼굴이요 마음은 아니니 너희 얼굴 보기를 열정으로 더욱 힘썼노라. 그러므로 나 바울은 한번 두 번 너희에게 가고자 하였으나 사탄이 우리를 막았도다." 사탄은 전도와 제자도를 싫어한다. 그는 선교사들을 비롯해 전도에 열정이 있는 이들의 길에 할 수 있는 한 모든 방해물들을 던져 놓는다.

    10. 사탄은 하나님 앞에서 신자들을 고소한다. 

    요한계시록 12장 10절은 "또 내가 들으니 하늘에서 큰 음성이 있어 가로되 이제 우리 하나님의 구원과 나라와 또 그의 그리스도의 권세가 이루었으니 우리 형제들을 참소하던 자 곧 우리 하나님 앞에서 밤낮 참소하던 자가 쫓겨 나고"라고 말씀하신다. 사탄은 반드시 패배한다. 그러나 그의 고소는 그치지 않고 있다.

    사탄은 욥에게 한 것과 동일한 방식으로 우리를 대한다. 사탄은 하나님께 우리에 대해 "그들은 정말 당신을 사랑하지 않는다. 당신이 주시는 이익만 바라본다"고 참소한다. "이제 주의 손을 펴서 그의 모든 소유물을 치소서 그리하시면 정녕 대면하여 주를 욕하리이다(욥 1:11)." "그들의 신앙은 진짜가 아니라"면서 하나님 앞에 우리를 고소한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들에게는 '항상 살아서 그들을 위해 간구하시는 분(히 7:25)'이 계시다는 사실이 매우 영광스럽다.

    사탄은 결국 이기지 못할 것이다. 

    앞에서 사탄의 계획을 소개했지만, 이 영적인 싸움에서 승리하는 길은 이미 결정적인 승리를 하신 그리스도를 굳건히 붙드는 것이다.

    요한일서 3:8
    "죄를 짓는 자는 마귀에게 속하나니 마귀는 처음부터 범죄함이라 하나님의 아들이 나타나신 것은 마귀의 일을 멸하려 하심이라"

    히브리서 2:14
    "자녀들은 혈육에 함께 속하였으매 그도 또한 한 모양으로 혈육에 함께 속하심은 사망으로 말미암아 사망의 세력을 잡은 자 곧 마귀를 없이 하시며"

    골로새서 2:15
    "통치자들과 권세들을 무력화하여 드러내어 구경거리로 삼으시고 십자가로 그들을 이기셨느니라"

    마가복음 3:27
    "사람이 먼저 강한 자를 결박지 않고는 그 강한 자의 집에 들어가 세간을 늑탈치 못하리니 결박한 후에야 그 집을 늑탈하리라"

    요한계시록 20:10
    "또 저희를 미혹하는 마귀가 불과 유황 못에 던지우니 거기는 그 짐승과 거짓 선지자도 있어 세세토록 밤낮 괴로움을 받으리라"


    앨리스 베일리(1880-1949)는 역사상 최고위급 사탄숭배자들의 지도자요, 귀신의 능력에 매우 민감한 영매였다.
    기독교를 반대하는 가장 강력한 적대자였던 그녀가 책을 쓴 목적은 세상으로 하여금 기독교를 대체할 수 있는 ‘대체 가치체계’를 만들게 하는 것이었다.
    그녀는 자신의 책에 기록된 모든 것들은 영계로부터 직접 왔고 자신의 창작물은 하나도 없다고 했다.
    그녀에게 책의 내용들을 받아쓰도록 구술한 세 마리의 주신급(主神級) 영들이 있었다고 한다.
    또한 엘리스 베일리가 기독교 가치체계를 악한 것으로 대체하는 데 실천적으로 사용했던 전략은 노인을 상대하지 않고 어린아이들을 공략하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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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앨리스 베일리가 주창한 기독교 말살 시키기 10가지 전략

    기독교를 반대하는 가장 강력한 적대자였던 베일리가 책을 쓴 목적은 세상으로 하여금 기독교를 대체할 수 있는 '대체 가치체계'를 만들게 하는 것이었다.
    그녀는 자신의 책에 기록된 모든 것들은 영계로부터 직접 왔고 자신의 창작물은 하나도 없다고 주장했다.
    또한 베일리가 기독교 가치체계를 악한 것으로 대체하는 데 실천적으로 사용했던 전략은 노인을 상대하지 않고 어린아이들을 공략하는 것이었다.

    앨리스 베일리가 주창한 '10가지 전략'을 살펴보면, 오늘날 각국 의회와 정부가 추진하고 있는 정책들과 꼭 같음을 알 수 있다.
    앨리스가 수립한 이 전략의 핵심은 사회 각 분야에서 하나님을 추방하여 기독교적 전통을 말살하고 건전한 가정을 파괴하며 음란과 퇴폐의 영을 퍼뜨려서 국가와 사회를 타락시키는 것이다.
    최고위급 '사탄숭배자' 앨리스 베일리가 전파한 '가정과 교회, 국가 무너뜨리는 10가지 전략'은 다음과 같다.

    1. 교육시스템으로부터 하나님과 기도를 제거하라

    커리큘럼을 변경시켜서 기독교 문화의 속박으로부터 아동들을 해방시켜라.
    아동들이 학교에 가는 목적은 인생을 직면할 준비를 갖추기 위함이고 아동들은 학교와 교사를 신뢰하며 거기에 우월적 가치를 둘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교육으로부터 하나님을 제거한다면, 아동들은 인생을 직면하는 데에 있어서 하나님이 필요하지 않다는 신념을 무의식적으로 갖게 될 것이다.
    아동들은 진급하는 데 있어서 학교당국이 중요하다고 인정하는 것들에 초점을 맞출 것이며, 하나님에 관하여는 그저 부가적인 존재 정도로 여기게 될 것이다.

    2. 아동들에 대한 부모의 권위를 축소시켜라

    부모와 자식 사이에 의사소통을 끊어라.
    부모들이 자신들이 지키는 기독교적 전통을 자녀들에게 물려주지 못하게 함으로써 부모의 전통이라는 속박으로부터 아동들을 해방시키기 위함이다.

    아래는 앨리스 베일리가 제시한 구체적인 방법들이다.

    첫째, 아동권리를 과잉되게 신장시켜라
    둘째, 체벌을 폐지하라
    셋째, 교사들은 '10가지 전략'의 실행 요원이다.

    3. 기독교 가정 구조 또는 전통적 기독교 가정구조를 파괴하라

    전통적 기독교 가정구조의 억압은 견딜 수 없다. 가정이 국가의 핵심이라고 볼 때 만일 가정을 깨트린다면 국가를 깨트리는 것이다. 이런 감금상태의 구조로부터 사람들을 해방시켜라. 이를 위해 앨리스 베일리가 제시한 구체적인 방법들이다.

    첫째, 성 문란을 조장하라
    둘째, 광고 산업, 미디어-TV, 잡지, 영화 산업을 이용하여 섹스 하는 쾌락이 인생에 있어서 최고의 즐거움이라고 부추겨라(선전전략).

    4. '프리섹스'(Free Sex) 사회를 만들라 - 낙태를 합법화하고 낙태하기 쉽게 만들라

    낙태 병원을 세워라. 학교 안에도 진료소를 만들라. 사람들이 섹스의 쾌락을 누리려면 그에 따르는 불필요한 두려움에서 해방되어야 한다. 다시 말해서 원치 않는 임신으로 인하여 그들의 섹스가 훼방 받지 말아야 한다. 그리스도인들이 말하는 낙태 금지는 우리를 당혹스럽게 하며 이는 우리의 권리를 부정하는 것이다. 아이를 가질지 말지에 관해서 선택할 권리는 우리에게 있다. 한 여성이 임신을 원치 않는다면 그녀는 고통 없이 가능한 용이하게 그 임신을 지워버릴 자유를 가지는 것이 마땅하다.

    5. 이혼하기 쉽게 만들고 이혼을 합법화하라 - 평생결혼의 개념으로부터 사람들을 해방시켜라

    사랑은 '사랑결합'이라는 신비로운 연결을 가졌다. 그것은 마치 난소로부터 발생하는 난자와 같아서 당신이라는 시스템을 경유하면서 당신 안에서 사랑의 호의를 클릭하는데, 세상에는 당신의 그 '사랑결합'에 응답할 수 있는 한 사람이 있다. 당신이 그 사람을 만나면 당신 안에 있는 모든 것들이 클릭하게 되며 이때 만나는 그 사람이 바로 당신의 남자(또는 여자)이다. 만일 당신이 그 사람을 놓치면 그 사랑결합 사이클이 지나갈 때까지 수 년 간 결코 행복하지 못할 것이다. 그러므로 당신이 행복하려면 어떤 대가를 지불하더라도 그 사람을 붙들어라. 그 남자(또는 여자)를 기혼자 상태에서 빼내는 것이라 할지라도 당신의 남자(또는 여자)인 그(또는 그녀)를 붙잡으라. 그(또는 그녀)가 엉뚱한 곳에 있다는 것은 심각한 잘못이다. 그리고 만일 일정 기간 함께 살다가 그 사랑이 이미 죽었음을 알게 된다면 당신은 기독교적 가치 같은 속박에 얽매이지 말라. 기회는 다시 오지 않는다. 당신에게 필요한 것은 쉽게 이혼할 수 있는 방법과 그리고 또 다른 사랑결합의 생성을 허용하는 것이다. 이것은 마치 하나의 난자가 발생하는 것과 같다. 그래서 사랑결합이 생성되면 당신은 다시 한 번 인생을 즐기게 될 것이다.

    6. 동성(연)애를 (누구나 선택할 수 있는) 대체 생활방식으로 만들라

    '섹스'하는 쾌락이 인간 최고의 즐거움이어서 누구도 이런 즐거움에서 제외되어서는 안 되며, 누구도 그 즐기는 방법에 제약을 받아서는 안 된다. 사람들은 스스로 원해서 선택하는 것이라면 그것이 동성(연)애든지 근친상간이든지 수간(獸姦)이든지 아무튼 쌍방이 합의하기만 하면 어떠한 형태의 섹스도 허용되어야 한다.

    7. 예술의 품격을 떨어트려라 '미친 예술'이 되게 하라

    예술이야말로 문화를 변화시키는 중요한 열쇠이다. 인간의 상상력을 더럽히고 타락시키는 새로운 형태의 예술을 장려하라. 왜냐하면 예술은 영의 언어로서 당신은 안에 있는 그것을 회화, 음악, 드라마 등의 형태로 끄집어 낼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유(類)의 예술과 음악과 영화들이 표현하고 있는 품격과 영성과 메시지를 살펴보라.

    8. 미디어를 활용하여 선전하고 인간의 사고방식을 바꿔라

    인간의 태도를 바꾸는데 가장 효과적인 최대의 경로는 미디어다. 신문, 라디오, TV, 영화를 이용하라. 미디어만이 아니라 광고회사, 옥외 광고판, 잡지 등을 통하라.

    9. 종교통합운동을 일으키라

    다른 종교들을 장려하여 기독교와 동등이 되도록 하라. 자신들만이 천국에 갈 수 있는 유일한 길이라는 기독교의 주장을 분쇄하라. 그리함으로써 기독교는 격하될 것이고 여타 종교들이 신장될 것이다. 인간이 자신의 미래와 운명을 결정짓는다는 점에서 인간의 중요성을 부각시켜라(인본주의). 자신이 어떤 존재가 되고 싶은지 선택할 권리가 인간에게 있으며 또한 그렇게 되도록 스스로 만들 능력이 있으며 자신의 목적을 결정할 권리를 인간이 가지고 있다고 말해 주라.

    10. 각국 정부로 하여금 위의 모든 사항들을 법제화 하도록 하고 교회로 하여금 이러한 변화들을 추인하도록 하라 (동성애에 대한 차별금지법을 뜻함)

    교회는 위의 사항들을 수용하도록 결국 교리를 변경시켜야 하며, 사람(성도)들을 변화에 적응시켜서 이러한 사탄적·세속적 구조와 체제 안으로 편입시켜야 한다.






    사탄의 10가지 전략(디모데후서 3:1-4)

    1. 너는 이것을 알라 말세에 고통하는 때가 이르러
    2. 사람들이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며 자랑하며 교만하며 비방하며 부모를 거역하며 감사하지 아니하며 거룩하지 아니하며
    3. 무정하며 원통함을 풀지 아니하며 모함하며 절제하지 못하며 사나우며 선한 것을 좋아하지 아니하며
    4. 배신하며 조급하며 자만하며 쾌락을 사랑하기를 하나님 사랑하는 것보다 더하며.

    가정, 교회, 국가를 무너뜨리는 사탄의 10가지 전략

    지피지기면 백전백승(知彼知己 百戰百勝)
    나를 알고 적을 알면 승리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이란 성령을 잘 알고 따라가고 사탄의 정체를 잘 알아서 이기면 백전백승할 수 있습니다.

    영국인 엘리스 베일리(1880-1949)는 역사상 최고 사탄을 잘 숭배하던 사람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사탄 숭배자들을 모아 지도하는 특별한 사람입니다. 사탄의 영감에 매우 민감한 영매였습니다.

    65년 전 그는 기독교를 말살할 수 있는 전략을 집필하였습니다.
    “기독교 말살을 위하여 10가지 플랜” 이런 책입니다.
    기독교를 이 땅에서 없애고 기독교를 대체할 수 있는 종교를 만들려는 책입니다.
    그는 서두에서 말하고 있습니다.
    “세 사탄이 나에게 와서 알려준 전략이다.”
    그에게 와서 알려준 사탄은 사탄의 우두머리였습니다.
    그런데 엘리스 베일리가 기독교 말살을 하려는 데 공격대상은 노인이 아니라 아동입니다.

    엘리스의 ‘10가지 전략’을 보니까 오늘날 세계 각국 정부의 통치 전략과 일치하고 있습니다.
    다른 말로 바꾸어 말하면 오늘 날 정치는 사탄의 지배를 받고 있다는 말입니다.
    그 전략을 알고 역전략을 세워야 할 필요성에서 이를 공개합니다.
    사탄은 가정, 교회, 그리고 정부를 뒤엎기 위하여 10가지 전력을 가지라는 것입니다.

    1. 교육 시스템에서 하나님과 기도를 제거하라

    가정, 교회 그리고 정부를 파탄시키려면 아동들에게 가르치는 교육에서 기독교 문화를 없애라는 것입니다.
    성경적인 모든 요소를 제거시키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동들로 하여금 기독교 굴레에서 벗어나 자유함을 가지게 하라는 것입니다.
    교육에서 하나님을 필요하지 않은 존재로 만들라는 것입니다.
    인생을 원하는 대로 자유롭게 살게 만들어 주는 교육이 그들의 목표입니다.
    죤 듀이는 현대 교육의 아버지입니다.
    아이들이 원하는 대로 하여 주는 것이 교육이라고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 날 그런 교육이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유대인 교육은 전혀 다릅니다.
    아이들을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 하게 하여 주는 교육이 아니라 성경이 가르쳐주는 대로 살아야 한다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사람을 의지하지 말고 하나님만 의지하고 하나님과 밀담을 나누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래서 아이가 어느 정도 성숙하면 나무 위로 올라가게 합니다.
    그리고 말합니다.
    “뛰어 내려라. 아빠를 믿고 뛰어 내려. 아빠가 받겠다.”
    아이는 아빠를 믿고 나무에서 뛰어 내립니다.
    그러나 아버지는 아이를 받지 않아 곤두박질하고 맙니다.
    아이가 아픔을 토하며 묻습니다.
    “왜 받아준다고 하고 안 받아 주셨어요?” 아버지가 말합니다.
    “너는 인생을 살아가면서 아무도 믿지 말아라. 부모 믿지 말아. 오직 하나님만 믿어라.”
    이것이 유대인의 교육입니다.

    그런데 사탄은 성경대로 사는 것이 아니라 자기 마음대로 살라고 교육시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사탄의 교육 전략입니다.
    사탄의 전략에 넘어간 현실입니다.
    1962년 6월 25일 미국 연방대법원은 정교분리 원칙을 발표하였습니다.
    공립학교에서 하나님과 성경을 가르치는 것에 금지 판결을 내렸습니다.
    주기도문과 수업전 기도는 금지되었습니다.

    오히려 미국의 일부 학교들은 힌두교에서 나온 초월명상법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이는 아이들을 의식 혼미하게 만든후 사탄과 접촉하게 하는 전략입니다.
    아이들에게 명상 가운데 ‘안내자 영’을 만난다고 말해주고 있는 데 이것이 바로 사탄입니다.
    하나님 아닌 귀신과의 교제를 학교가 장려한다.

    2. 아동 부모의 권위를 축소시켜라

    사탄은 두 번째 전략으로 부모와 자녀 사이의 의사소통을 끊고 있습니다.
    부모들은 하나님을 섬기고 있습니다.
    부모가 믿고 따르는 하나님을 아동들에게 전달하지 못 하게 단절시키고 있습니다.
    그래서 부모의 전통에 속박되지 않고 해방되도록 전략을 만들었습니다.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습니까?
    엘리스 베일리는 구체적인 방법들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① 아동들 권리를 과잉되게 신장시켜라.

    실제로 그런 일이 일어났습니다.
    남아공화국은 1997-98년에 유엔이 제정한 유니세프 헌장의 아동 권리를 국내법으로 받아 드렸습니다.
    그래서 이 법대로 살아야 하기에 부모나 교사는 아동들을 가르칠 수 없습니다.
    아동들에게 명령도 할 수 없습니다.
    대신에 아동들은 부모에게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나는 그런 말 듣고 싶지 않아요. 내게 말하는 대로 하고 싶지 않아요.”
    가르치려는 선생님에게도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내게는 권리가 있습니다. 그런 식으로 말하지 마세요.”
    우리나라에도 지금 영향을 미치고 있습니다.

    ② 아동 체벌을 폐지하라.

    아동체벌 금지법은 이미 세계 각국에서 이미 법제화되었습니다.
    실제로 오늘날 선진국 대부분의 나라에서는 아동들이 아무리 잘못해도 체벌할 수 없게 법으로 금지된 실정입니다.
    한국의 학생인권조례 역시 체벌을 일체 금지하고 있습니다.

    어느 초등학교 아이가 지은 시입니다.
    사람들이 놀라서 급히 폐기시켰던 시입니다.
    지금 이런 시대가 되었습니다.

    학원 가기 싫은 날 학원에 가고 싶지 않을 때 이렇게 엄마를 씹어 먹어 삶아 먹곡 구원 먹어 눈깔을 파먹어 이빨을 다 뽑아 버려 머리채를 쥐어뜯어 살코기로 만들어 먹어 눈물을 흘리면 핥아 먹어 심장은 맨 마지막에 먹어 가장 고통스럽게

    ③ 교사들을 10가지 전략의 실행요원으로 사용하라.

    교사들이 아동들에게 이렇게 가르치게 하도록 하는 것입니다.
    “네 부모는 너에게 기도하고 성경 읽으라고 가르치고 강요할 권리가 없다.
    너는 너다. 너는 너 자신을 발견해야 한다.
    너 자신의 권리를 가지고 있다. 자기표출, 자아실현, 자아성취를 해야 한다.”
    지금 유럽 여러 나라에서는 교사들이 아이들이 7살만 되면 이렇게 가르치고 있습니다.

    “너는 부모의 신앙을 따를 것인지 말 것인지 선택할 자유가 있다.
    부모는 자기 신앙을 네게 강제할 권리가 없다.”
    교사들이 가정을 파괴하고 있습니다.
    아이들로 하여금 부모와 하나가 되지 못 하게 가르치고 있습니다.
    자유인이 되게 만들고 있습니다.
    가정과 교회와 국가를 파괴하려는 사탄의 전략이 지금 실행되고 있습니다.

    3. 기독교적 가정 구조를 파괴하라

    국가의 핵심적 요소는 가정입니다.
    사회의 가장 작은 세포는 가정입니다.
    세포가 건강하여야 건강한 몸입니다.
    마찬가지로 가정이 건강하여야 건강한 국가입니다.
    세포가 망가지면 몸이 망가집니다.
    가정을 파괴하면 국가를 파괴할 수 있습니다.
    가장 건강한 가정은 성경적 가정입니다.
    성경적 가정 구조에서 아이들을 살지 못 하게 하면 국가는 파괴됩니다.
    기독교적인 가정 씨스템에서 아이들이 나오게 하여 자유롭게 살게 하면 국가는 혼란이 오게 됩니다.
    사탄은 구체적인 방법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① 성(性)문란을 조장하라.

    젊은이들에게 혼전 성교나 프리섹스를 장려합니다. 그리고 이런 것을 미화시키고 있습니다. 성적 쾌락을 인생 최고의 기쁨이라고 가치관을 심어 줍니다. 심지어 불륜과 혼외정사에 대해서도 사람들이 긍지를 느낄 수 있도록 육욕적인 사회 분위기를 만들고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말하고 있습니다. “음행과 온갖 더러운 것과 탐욕은 너희 중에서 그 이름이라도 부르지 말라. 이는 성도의 마땅한 바니라...너희도 이것을 정녕히 알거니와 음행하는 자나 더러운 자나 탐하는 자 곧 우상 숭배자는 다 그리스도와 하나님 나라에서 기업을 얻지 못하리니 누구든지 헛된 말로 너희를 속이지 못하게 하라”(엡 5:3,5)

    성적으로 극심하게 타락하면 말세의 징조입니다. 마지막 때에는 성적 타락이 극심할 것이라고 예언되어 있습니다. “너는 이것을 알라 말세에 고통하는 때가 이르러 사람들이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며 자랑하며 교만하며 비방하며 부모를 거역하며 감사하지 아니하며 거룩하지 아니하며 무정하며 원통함을 풀지 아니하며 모함하며 절제하지 못하며 사나우며 선한 것을 좋아하지 아니하며 배신하며 조급하며 자만하며 쾌락을 사랑하기를 하나님 사랑하는 것보다 더하며”(딤후 3:1-4) “노아의 때와 같이 인자의 임함도 그러하리라. 홍수 전에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던 날까지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장가 들고 시집 가고 있으면서 홍수가 나서 그들을 다 멸하기까지 깨닫지 못하였으니 인자의 임함도 이와 같으리라”(마 24:37-39)

    “또 일곱 대접을 가진 일곱 천사 중 하나가 와서 내게 말하여 이르되 이리로 오라 많은 물 위에 앉은 큰 음녀가 받을 심판을 네게 보이리라. 땅의 임금들도 그와 더불어 음행하였고 땅에 사는 자들도 그 음행의 포도주에 취하였다 하고”(계 17:1-2) 쾌락에는 여러 의미가 있지만 가장 추구하는 쾌락은 성적인 쾌락입니다. 20세기에 들어서면 가장 많은 범죄는 성적인 범죄입니다. 로마가 멸망된 가장 큰 원인은 가정 파괴였습니다. 성적 타락이었습니다.

    이혼하려고 결혼하고 결혼하려고 이혼하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노아 시대에 가장 큰 범죄도 성적 범죄였습니다. 심지어 동성연애가 만연하였습니다. 서서는 춤을 추고, 앉아서는 술 퍼마시며, 누워서는 음란한 세대였습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마시는 술로 전기를 만들면 우리나라 전체가 3시간 사용하는 전기를 만들 수 있다는 통계가 있습니다. 1919년 공산 국가에서 “혁명을 일으키는 법”이라는 책에 나온 지침입니다. “청년을 타락시키라. 종교를 멀리 하게 하고, 성에 관심을 가지게 하라. 정신을 혼란시키고 사치하게 만들라. 혁명이 일어날 것이다.”

    성적인 타락은 종말 징조 중에 하나입니다. 특별히 AIDS (Acquired Innune Deficieney Syndrome 후천성 면역 결핍증)는 인류사 이래 가장 무서운 병입니다. 노아홍수 심판이후 최대의 공포스런 징벌로 여겨지고 있습니다. 암보다 무서운 말세의 징조입니다. 유해음식, 공기오염, 도덕적 타락등 어느 때보다도 유해한 환경에 살고 있는 것이 현대인입니다. 그리고 감기, 암, 폐렴, 고혈압, 당뇨병 등 인간을 위협하는 바이러스가 끊임없이 인체를 공격하는 환경 속에 살고 있습니다.

    그런 속에서 면역능력이 상실된다면 이는 치명적입니다. AIDS의 원인은 성도덕의 문란에서 오고 있습니다. 동성애, 수간 등에서 대개 나타나고 있습니다. 전염은 상처난 피부와 Oral Sex등으로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현재 미국에는 200만명이 보균자로 알려져 있습니다. AIDS에 감염되면 2년 내에 사망하게 됩니다. 멀지 않아 노아시대, 소돔과 고모라, 바빌론, 로마제국이 성적타락으로 종말을 구했듯이 오늘의 인류도 같은 위기에 처하게 될 것입니다. 알렉산더, 헨리8세, 나폴레옹, 니체도 성병으로 죽었습니다.

    성적 타락의 원인은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프로이드의 섹스이론은 인간을 성적동물로만 보고 있습니다.
    산업혁명으로 여자들이 사회 참여가 활발하여 진 것은 영향을 미치고 있습니다.
    이혼을 가정 파괴가 심해졌습니다.
    영화, TV, 비디오 산업의 번창과 감각적 섹스 예찬도 문제입니다.
    성의 자유를 주제로 한 문학, 연극, 저술도 문제입니다.
    교육기관의 타락으로 혼탁하여졌습니다.
    임신조절 능력이 발달하여 더욱 성적 타락을 부채질하였습니다.
    의학의 발달, 피임법의 발달은 오히려 성의 타락과 비례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낙태 증가, 인간생명의 경시 풍조. 계몽의 실패도 성적 타락을 부채질하고 있습니다.
    간음, 낙태, 프리섹스, 동성애 등의 무서운 죄가 죄로 여겨지지 않는 사상도 문제입니다.
    미국 통계입니다. <크리스천 투데이>(Christian Today)는 앙케이트 조사를 하였더니 기독교인 구독자 1000명 가운데 23%가 깊은 불륜의 관계를 가졌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45%가 부부관계 아닌 이성과 관계를 가졌다고 대답하였습니다.
    교인들의 반 정도가 음란문제 걸려 있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나라만 하여도 심각한 위기입니다.

    몇 가지 이야기를 드려 봅니다.
    물론 꾸민 이야기일 것입니다.
    부부가 아들을 낳아 길렀습니다.
    결혼할 때가 되어 연애를 하면서 한 여자를 사랑하고 결혼을 약속하였습니다.
    아버지에게 여자 사진을 보여 드리면서 말했습니다.
    “아버지! 이 여자를 사랑하고 있습니다. 결혼을 허락하여 주세요.”
    사진을 보신 아버지가 깜짝 놀라면서 말했습니다.
    “아들아! 미안하다. 이렇게 된 마당에 너에게 숨길 수가 없다. 결혼하지 말아라. 얘가 네 이복 여동생이다.”
    아들은 너무 충격을 받아 눕게 되었습니다.
    식음을 전폐하였습니다.
    먹을 수도 마실 수도 없었습니다.
    어머니가 물어도 대답하지 않았습니다.
    대답할 수가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계속 먹지 못 하니까 몸이 점점 수척하여 갔습니다.
    겁이 난 어머니가 집요하게 물었습니다.
    할 수 없이 아들이 말했습니다.
    “어머니! 사실은 내가 결혼하고 싶어하는 여자가 있는 데 이복 여동생이래요. 아버지가 결혼하지 말래요.”
    이 말을 듣고 어머니가 말했습니다.
    “아들아! 안심하고 결혼해라. 너한테만 말하지만 너는 네 아버지 아들이 아니야.”
    이것이 한국의 현실입니다.
    마지막 때에는 성적 타락이 극에 달하는 시대입니다.

    ② 광고, TV, 신문 잡지, 영화 산업을 이용하여 성적 쾌락이 인생 최고의 즐거움이라고 선전하고 부추겨라.

    온통 온 세계가 성적인 분위기입니다. 우리나라에 온 외국인이 한 마디하였습니다. “한국은 어디를 보나 음풍이 불고 있습니다.” 이같은 전략은 전 세계적으로 엄청난 성공을 거두고 있습니다. 오늘날 광고는 거의 벌거벗은 젊은 여자를 이용한 섹스 모티브로 흐르고 있습니다. 모든 매스 미디어가 섹스 코드를 중심으로 하고 있습니다. 이런 분위기는 날로 심해져가고 있습니다. 성적 범죄가 날로 증가되고 있습니다. 사탄의 전략입니다.

    4. 프리섹스 사회를 만들어라

    낙태를 합법화하고 용이하게 하라. 사탄은 프리섹스와 낙태를 통하여 가정과 교회와 국가를 파괴하고 있습니다. 낙태 전문병원을 늘리고 있습니다. 학교 안에 임신 진료소를 만들게 하고 있습니다. 여중고등 학교에 어린이 보관소를 설립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섹스의 쾌락을 누리려면 그에 따르는 불필요한 두려움에서 해방되게 하여야 합니다. 죄의식을 가지지 않게 하고 있습니다. 원치 않는 임신을 하면 섹스가 방해를 받게 되니까 피임법을 발전시키고 있습니다.

    아이를 가질지 임신한 아이를 낙태할지 결정권을 마음대로 가지게 하고 있습니다. 교회의 낙태 금지 주장은 우리의 인권을 부정하는 것이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여성이 임신 후 출산을 원치 않는다면 용이하게 태아 할 자유를 가지게 하고 있습니다. 오늘날 낙태는 거의 모든 나라에서 일상화되고 있습니다. 피임제나 피임약과 함께 낙태는 인구조절의 유력한 수단이 된지 오래되고 있습니다. 낙태는 생명을 죽이는 것입니다.

    산 노인을 죽이는 것이 고려장이고, 태어날 생명을 죽이는 것이 낙태입니다.
    성적 문란의 결과입니다.
    수많은 어린 생명들이 빛을 보기 전에 죽어가고 있습니다.
    모세 시대에는 태어나자 말자 나일 강에 던져 죽여야 했습니다.
    성경에는 나오지 않지만 미드라쉬에는 60만 명을 죽인 것으로 나옵니다.
    예수님 당시에도 헤롯 왕이 어린아이들을 죽였습니다.
    외경에는 60만명 죽인 것으로 나옵니다.
    그러나 요즈음은 수백만 명이 죽어가고 있습니다.
    우리나라는 낙태의 천국이라고 별명이 붙었습니다.

    일 년에 낙태로 죽어가는 생명이 150만 명입니다.
    국제 가족계획 연맹은 우리나라를 포함하여 전 세계적으로 행해지는 낙태가 매년 약 5500만 명에 이를 것으로 추산하고 있습니다.
    정확한 통계가 나오는 미국에서만 1973년에 대법원에서 낙태를 허용한 이래로 1700만 명 이상이 낙태되었다는 보고도 있었습니다.
    우리나라에서 한 해에 새로 태어나는 신생아는 약 600,000 명이지만 낙태로 죽어 가는 태아들은 2.5배가 되 150만 명입니다.
    이것은 한국전쟁에서 죽은 생명들의 10배 이상에 해당하는 무서운 숫자입니다.

    5. 이혼을 쉽게 만들고 합법화하라

    평생 결혼의 개념으로부터 사람들을 해방시켜라.
    남녀간의 사랑은 ‘사랑결합’(love bond)입니다.
    사랑결합이란 육체적인 결합만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정신적으로 영적으로 모두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화성에서 온 남자와 금성에서 온 여자가 하나가 되려면 긴 세월동안 조율이 필요합니다.
    하루아침에 결혼의 하모니가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거친돌은 오랜 세월 파도에 갈고 닦아야 매끄러운 돌이 됩니다.
    로마는 하루아침에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그런데 사탄은 안 맞으면 헤어지라고 당당히 유혹하고 있습니다.
    무엇을 고민하느냐고 시원스럽게 말합니다.
    평생 고생하지 말고 이혼한 후 맞는 짝을 찾으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성경적인 교훈에 매이지 말고 과감하게 헤어지라고 충동질하고 있습니다.
    이혼은 죄가 아니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사람은 얼마든지 있다고 속삭이고 있습니다.
    인생은 한번이고 후회하면 안 된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말하고 있습니다.
    “주는 영이 유여(有餘)하실지라도 오직 하나를 짓지 아니하셨느냐.
    어찌하여 하나만 지으셨느냐.
    이는 경건한 자손을 얻고자 하심이니라.
    그러므로 네 심령을 삼가 지켜 어려서 취한 아내에게 궤사를 행치 말지니라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가 이르노니 나는 이혼하는 것과 학대로 옷을 가리우는 자를 미워하노라”(말라기 2:15-16)

    6. 동성애를 대체 생활방식으로 만들라

    사탄은 섹스의 쾌락은 인간 최고의 즐거움이라고 말합니다.
    누구도 이 즐거움에서 제외되면 안 되며, 그 즐기는 방법에 있어 제약받으면 안된다고 부추기고 있습니다.
    사람이 스스로 원해서 선택하는 것이라면 근친상간이든 동성애든 수간이든 피차 합의한 것이라면 전부 허용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미국은 오바마에 의하여 동성 결혼이 합법화되었습니다.
    목사에게 동성이 와서 결혼 주례를 요청하면 주례를 서주어야 합니다.

    그러나 목사는 하나님이 동성 결혼을 금하고 계시기에 해주지 말아야 합니다.
    만일 거절하면 법을 어기는 것이기에 고발당하여 감옥에 가게 됩니다.
    그리고 목회도 끝입니다.
    비성경적인 것이 법적으로 합법화되고 있습니다.
    말세의 징조중에 하나입니다.
    동성결혼법이 통과된 나라가 18개국입니다.
    동성애를 하나님 앞에서 가증한 것이라거나 죄라고 말하면 “증오 발언”으로 분류되어 불법 행위로 체포, 처벌받고 있습니다.
    성경은 확실히 말해주고 있습니다.
    “너는 여자와 함께 눕는 것같이 남자와 눕지 말라. 그것은 가증히 여기는 것이니라”(레 18:22)

    “이와 같이 남자들도 순리대로 여인쓰기를 버리고 서로 향하여 음욕이 불일듯 하매 남자가 남자를 더불어 부끄러운 일을 행하여 저희의 그릇됨에 보응을 그 자신에 받았으니라”(롬 1:27)
    예루살렘에서도 세계 동성애자들의 축제를 열리고 있습니다.
    World Pride 라고 명명하는 이름으로 동성애 모임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를 극구 반대하는 정통 유대인들과 정면 충돌하고 있습니다.
    예루살렘 벽에는 이런 벽보가 몰래 붙어 있습니다.
    “소돔과 고모라의 한 사람을 죽이면 4,500불 현상금이 붙어 있습니다.”
    우리나라도 동성 연애자들이 극성을 부리고 있습니다.
    점점 심해지고 있습니다.
    이 법을 통과시키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습니다.
    사탄의 전략입니다.

    7. 예술의 품격을 떨어뜨려라

     “미친 예술”이 되게 하라.
    예술은 한 사회의 문화를 변화시키는 중요한 열쇠입니다.
    예술이 발달한 사회가 최고 성숙한 사회입니다.
    예술은 영혼의 언어입니다.
    영혼을 예술로 말하면서 최고 경지에 가게 됩니다.
    음악, 조각, 연극, 영화를 영적으로 잘 승화시켜 인간의 삶을 하나님께 가게 하는 것이 성경적 예술입니다.
    그런데 사탄 예술을 통하여 인간의 상상력을 더럽히고 타락시키는 형태의 예술을 긍정하고 장려하는 것이 사탄의 전략입니다.
    그러므로 예술을 더럽고 난잡하게 만들면 영혼도 같이 난잡해지며 기독교적 자치관은 축출당하게 되어 있습니다.
    사탄은 예술을 외설로 만들고 있습니다.
    예술로 세상을 타락시키려 하고 있습니다.
    사탄의 전략은 예술까지 손을 뻗치고 있습니다.

    8. 미디어를 활용 반(反)기독교적 가치를 선전하고 인간의 사고방식을 바꿔라

    인간의 사고와 태도를 바꾸는데 가장 효과적인 통로는 매스 미디어입니다.
    신문, 잡지, 라디오, TV, 영화, 광고를 이용하여 사탄의 전략을 잘 전달하고 있습니다.
    정치가들이 제일 먼저 점령하는 것은 미디어입니다.
    사탄도 그렇습니다. 유신론을 무신론으로 바꾸는 데 미디어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매스 미디어를 통해 음란, 폭력, 기타 세속적인 자료를 널리 퍼뜨리고 광고하고 있습니다.
    여기에 천문학적인 돈을 쓰고 있습니다.
    정상적인 결혼보다 혼외 섹스 장면이 80-90배 더 많이 미디어를 통해 나타나고 있습니다.
    마치 성문란이 인간의 자연스러운 행위인 것처럼 사람들을 세뇌시키고 있습니다.
    TV 드라마로 동성애가 전 국민에게 방영되고 있다.

    9. 종교통합운동을 일으켜라

    다른 종교들을 관용하게 하고 있습니다.
    다른 종교에도 구원이 있다고 알리고 있습니다.
    다른 종교를 기독교와 대등하게 만들려는 전략입니다.
    기독교만이 천국에 갈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아니라고 조작하고 있습니다.
    기독교와 예수님를 격하시키고 다른 종교와 그 교주들을 격상시키려는 것이 사탄의 전략입니다.
    하나님 없이도 살 수 있다고 선전하고 있습니다.
    자기 운명은 자기가 결정짓는 자기는 자기의 주인이라고 말합니다.
    인간은 누구나 그럴 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인본주의 사상을 부각시키고 있습니다.

    심지어는 사탄을 숭배하게 합니다.
    하나님은 인간에게 선악과를 먹지 못 하게 하였습니다.
    눈도 밝아지지 못 하게 하고 하나님처럼 살지 못 하게 만드는 인간의 적이라고 가르칩니다.
    그리고 반대로 사탄은 자기가 저주 받을 것을 알면서도 선악과를 먹게 하고, 눈이 밝아지게 하고, 하나님처럼 가능성을 개발하게 하는 고마운 존재로 부각시키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멀리하고 사탄을 섬겨야 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 날 사탄 교회인 그로터 교회가 늘어나게 하고 있습니다.

    10. 각국 정부가 이러한 내용을 법제화하게 하고, 교회가 이런 변화들을 추인하게 만들라

    교회는 위의 사항들을 추인하도록 그 교리를 변경시키도록 하는 것이 사탄의 최종적인 결론입니다.
    사람들을 변화에 적응시켜서 이러한 무신론적 인본주의 체제 안으로 편입시키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습니다.
    인간의 의식주와 사상 가치가 기독교 아닌 인본주의에 철저히 입각하도록 만들려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각 국 정부들이 성경을 벗어나는 법률들을 계속해서 제정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아픈 것은 교회가 하나님의 말씀을 세상과 타협해가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현재 위의 10가지 조항들과 관계된 사탄의 략들을 법률로 제정한 국가들이 많습니다.
    정부와 교회는 스스로도 알지 못하는 가운데 사탄의 전략에 말려 들어가 있습니다.
    무슨 병인지 모르는 것이 가장 큰 병입니다.
    무엇이 문제인지 모르는 것은 가장 큰 문제입니다.

    따뜻한 물속에 개구리를 넣습니다.
    개구리는 자기 체온과 맞는 적당한 온도속에서 포근함을 느낍니다.
    서서히 조금씩 온도를 올립니다.
    그래도 개구리는 모릅니다.
    어느 정도 되면 개구리는 익어서 죽게 됩니다.
    그러나 뜨거운 물속에 개구리를 넣으면 금방 튀어 나오게 됩니다.
    이런 원리입니다.
    서서히 교회가 죽어갑니다.
    천천히 가정은 파멸되어 가고 있습니다.
    은근히 국가는 썩어가고 있습니다.
    깨달으면 늦습니다.

    역전략 그러면 사탄의 전략을 이길 수 있는 역전략은 무엇일까요?

    1. 마지막 징조에 대한 관심을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

    이스라엘 귀향 운동을 추진하고 있는 타쿤 단체 부회장으로 일하고 있는 David Rudolf 유대인 목사님과 사이에라에서 30만명의 유대인들을 귀향시키려고 계획하고 있는 헝거리 선교사 M.Veenstra, Z.Gadziala 두 분에게 식사 대접을 하였습니다.

    이들은 내게 예레미야 16장 15절을 수없이 많이 강조하였습니다.

    "이스라엘 자손을 북방 땅과 그 모든 쫓겨났던 나라에서 인도하여내신 주의 사심으로 맹세하리라.
    내가 그들을 그 열조에게 준 그들의 땅으로 인도하여 들이리라"

    이들은 분명 지금은 말세라고 확신하고 있었습니다.

    2년 반 전에 하나님께서 말세의 환상을 너무나 정확하게 주셨기에 이 일에 생명을 바치며 일하고 있다고 단호한 어조로 강조하였습니다. 브라디보스톡에 있는 유대인을 직접 이스라엘로는 못데리고 가도 한국으로 데리고 왔다가 이스라엘로 이송할 수 있으니 협조하여 달라는 부탁으로 나를 만난 것입니다.
    이제부터 우리는 종말과 예수님의 재림 징조에 깊은 관심을 지니고 살아야 합니다.

    2. 죄짓지 말고 살아야 합니다.

    언제 주님이 다시 오신다 할지라도 당장에 천국으로 들림받을 수 있는 준비를 하여야 합니다.
    언제 죽어도 떳떳하게 죽을 수 있는 준비가 있어야 합니다.

    3. 전도하면서 살아야 합니다.

    마지막 때에 하여야 할 최고의 일은 전도입니다.
    전도보다 중요한 것은 없습니다.
    꼭 기억하여야 할 말씀이 있습니다.

    "이방인들이 듣고 기뻐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찬송하며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된 자는 다 믿 더라"(행 13:48)
    하나님이 구원을 주시기로 작정된 자를 찾아내야 합니다. 시간이 급하기 때문입니다.

    이제 말세를 같이 살아가는 성도들이여!
    우리 주 예수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부탁하노니 말씀을 분별하는 복이 임하여서 주님을 부인하는 행동을 하지말기를 축복합니다.

     

     




    다윗의 인구 조사(역대상 21:1-30. 사무엘하 24:1-17)

    역대상 21장에서는 다윗이 인구를 조사하게 됩니다.
    다윗의 마음에 교만한 마음이 들어가서 전쟁에 나갈 만한 자의 숫자를 계수하라고 요압에게 명령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인간의 힘을 의지하려고 했습니다.

    본장은 사무엘하 24장에도 나와 있는 다윗의 인구 조사 사건이다.

    [1-8절] 사단이 일어나 이스라엘을 대적하고 다윗을 격동하여 . . . .

    1절, “사단이 일어나 이스라엘을 대적하고 다윗을 격동하여 이스라엘을 계수하게 하니라.”
    사무엘하 24:1은, “여호와께서 다시 이스라엘을 향하여 진노하사 저희를 치시려고 다윗을 감동시키사 가서 이스라엘과 유다의 인구를 조사하라 하신지라”

    사탄이 다윗을 격동한 것을 사무엘하 24장에서는 사탄이 다윗을 감동시키다로 번역합니다.
    따라서 격동하다 감동하다는 같은 히브리 단어입니다.
    그 단어를 히브리 성경은 "수트(çûwth)"라고 합니다.

    이러한 맥락에서 사탄이 사람을 유혹할 때 격동시키는 방법과 감동시키는 방법을 함께 병행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본문의 ‘격동하다’는 원어와 사무엘하 24:1의 ‘감동시키다’는 원어는 동일하다(수투).

    하나님께서는 다윗이 사탄의 충동을 받아 범죄하도록 허용하셨다.
    사탄은 존재하며 에덴 동산에서와 같이 지금도 사람들을 범죄케 하려고 활동한다.
    그는 하나님의 사람도 격동시켜 범죄케 할 수 있다.
    그는 욥은 시험하였었고(욥기) 베드로에게 잘못된 생각을 주었으며(마 16:23) 그를 밀 까부르듯하였고(눅 22:31) 지금도 우는 사자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는다(벧전 5:8). 하나님께서 항상 우리를 지켜 주지 않으시면 우리는 넘어지기 쉽다.
    우리는 깨어 있어야 하고 항상 주의 은혜에 의지하며 조심해야 한다.

    다윗은 요압과 백성의 통치자들에게 말하였다.
    “너희는 가서 브엘세바[남쪽 끝의 도시]에서부터 단[북쪽 끝의 도시]까지 이스라엘을 계수하고 돌아와서 내게 고하여 그 수효를 알게 하라.”
    요압이 말했다.
    “여호와께서 그 백성을 지금보다 백배나 더하시기를 원하나이다. 내 주 왕이여, 이 백성이 다 내 주의 종이 아니니이까? 내 주께서 어찌하여 이 일을 명하시나이까? 어찌하여 이스라엘로 죄가 있게 하시나이까?”
    그러나 왕의 명령이 요압을 재촉하였다.

    요압은 마침내 떠나서 이스라엘 땅에 두루 다니며 인구를 조사하였다.
    사무엘하 24:8은 그 기간이 9개월 20일이 걸렸다고 말한다.
    그는 예루살렘으로 돌아와 백성의 수효를 다윗에게 고하기를, 이스라엘 중에 칼을 뺄 만한 자가 110만명이요 유다 중에 칼을 뺄 만한 자가 47만명이라고 하였다.
    요압은 왕의 명령을 밉게 여겨 레위와 베냐민 사람들은 계수하지 아니하였다.
    사무엘하 24:9는 이스라엘에서 칼을 빼는 담대한 자가 80만명이요 유다 사람이 50만명이라고 기록하였다.
    유다의 장정들의 숫자는 대략적인 것일 것이며, 이스라엘의 장정들의 숫자는 110만명 중에 담대한 자(카일)[용사]의 숫자일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다윗의 인구 조사의 일을 불쾌하게 여기셔서 이스라엘을 치셨다.
    인구 조사는 군대의 숫자를 세는 것이었다.
    이스라엘의 힘은 군인의 수에 있지 않고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에 있었다.
    그러나 인구 조사는 군대의 수를 자랑하는 교만함을 나타내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그것은 하나님 앞에서 큰 죄이었다.
    요압은 처음부터 그것을 느꼈고 다윗에게 그것을 하지 말기를 권하였으나, 다윗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치시자 뒤늦게 그것을 깨달았다. 그는 하나님께 아뢰었다.
    “내가 이 일을 행함으로 큰 죄를 범하였나이다. 이제 간구하옵나니 종의 죄를 사하여 주옵소서. 내가 심히 미련하게 행하였나이다.”

    [9-14절] 여호와께서 다윗의 선견자 갓에게 이르시되 가서 . . . .

    여호와께서는 다윗의 선견자 갓에게 말씀하셨다. “가서 다윗에게 말하여 이르기를, 여호와의 말씀이 내가 네게 세 가지를 보이노니 그 중에서 하나를 택하라. 내가 그것을 네게 행하리라 하셨다 하라.”

    갓은 다윗에게 나아가 고하였다. “여호와의 말씀이 너는 마음대로 택하라. 혹 3년 기근일지, 혹 네가 석달을 대적에게 패하여 대적의 칼에 쫓길 일일지, 혹 여호와의 칼 곧 온역이 사흘 동안 이 땅에 유행하며 여호와의 사자가 이스라엘 온 지경을 멸할 일일지 하셨나니 내가 무슨 말로 나를 보내신 이에게 대답할 것을 결정하소서.” 하나님의 징벌은 구체적이었고 엄중하였다. 죄의 징벌은 엄중하다.

    다윗은 갓에게 말했다. “내가 곤경에 있도다. 여호와께서는 긍휼이 심히 크시니 내가 그의 손에 빠지고 사람의 손에 빠지지 않기를 원하나이다.” 다윗은 예전에 약 10여년 동안 사울의 칼을 피하여 고생스런 세월을 보내었기 때문에 그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가를 잘 알고 있었다. 그는 3년 기근이나 석달 피신보다 3일 온역[무서운 전염병]을 원하였다. 여호와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온역을 내리셨고 그로 인해 이스라엘 백성의 죽은 자가 70,000명이었다.

    [15-19절] 하나님이 예루살렘을 멸하러 사자를 보내셨더니 사자가 멸하려 할 때에 여호와께서 보시고 이 재앙 내림을 뉘우치사 멸하는 . . . .

    하나님께서 예루살렘을 멸하러 천사를 보내셨는데, 사자가 멸하려 할 때에 여호와께서 보시고 이 재앙 내림을 뉘우치시고 멸하는 천사에게 “족하다. 이제는 네 손을 거두라”고 말씀하셨다. 천사는 하나님의 심판과 징벌을 받드는 자이다. 하나님께서는 죄에 대해 진노하시고 범죄한 자들에게 징벌하시지만, 자기 백성을 긍휼히 여기시는 자이시다. ‘하나님께서 뉘우치셨다’는 말은 인간적인 표현이다.

    그때에 여호와의 천사는 여부스 사람 오르난의 타작 마당 곁에 섰다. 다윗이 눈을 들어보니 여호와의 천사가 하늘과 땅 사이에 섰고 칼을 빼어 손에 들고 예루살렘 편을 가리키고 있었다. 다윗은 장로들과 함께 굵은 베를 입고 얼굴을 땅에 대고 겸손히 통회자복하는 마음으로 엎드려 하나님께 아뢰었다. “명하여 백성을 계수하게 한 자가 내가 아니니이까? 범죄하고 악을 행한 자는 곧 내니이다. 이 양무리는 무엇을 행하였나이까? 청컨대 나의 하나님 여호와여, 주의 손으로 나와 내 아비의 집을 치시고 주의 백성에게 재앙을 내리지 마옵소서.” 이것이 회개하는 자의 바른 태도이다.

    여호와의 천사는 갓을 명하여 다윗에게 말하게 하였다. “올라가서 여부스 사람 오르난의 타작마당에서 여호와를 위하여 단을 쌓으라.” 다윗은 갓이 여호와의 이름으로 이른 말씀대로 올라갔다.

    [20-30절] 때에 오르난이 밀을 타작하다가 돌이켜 천사를 보고 . . . .

    그때에 오르난은 밀을 타작하다가 돌이켜 천사를 보고 네 아들과 함께 숨었다. 사람은 거룩하고 권세 있는 천사를 보면 다 놀라 숨을 것이다. 다윗이 오르난에게 나아가자 오르난은 내어다보다가 다윗을 보고 타작마당에서 나와서 얼굴을 땅에 대고 절하였다.

    다윗은 오르난에게 말했다. “이 타작하는 곳을 내게 붙이라. 너는 상당한 값으로 붙이라. 내가 여호와를 위하여 여기 한 단을 쌓으리니 그리하면 온역이 백성 중에서 그치리라.” 오르난은 다윗에게 고하였다. “왕은 취하소서. 내 주 왕의 좋게 여기시는 대로 행하소서. 보소서, 내가 이것들을 드리나이다. 소들은 번제물로, 곡식 떠는 기계는 화목으로, 밀은 소제물로 삼으시기 위하여 다 드리나이다.” 오르난은 경건하고 착한 성도이었다. 그는 하나님의 뜻을 받들어 왕과 백성을 위해 자신의 소들과 곡식 떠는 기계와 밀을 즐거이 드리려 하였다.

    그러나 다윗 왕은 오르난에게 말했다. “그렇지 아니하다. 내가 결단코 상당한 값으로 사리라. 내가 여호와께 드리려고 네 물건을 취하지 아니하겠고 값 없이는 번제를 드리지도 아니하리라.” 다윗은 그 기지 값으로 금 600세겔을 달아 오르난에게 주었다. 다윗은 하나님의 일을 위해 정당한 값을 지불하기를 원하였고 백성 중 어느 한 사람에게 짐을 지우기를 원치 않았다. 사무엘하 24:24는 다윗이 은 50세겔로 타작마당과 소를 샀다고 기록하였다. 두 기록의 차이는 타작마당을 포함한 기지(아마, 넓은 땅이었을 것)의 범위의 차이때문일 것이다.

    다윗은 거기서 여호와를 위해 단을 쌓았고 번제와 화목제를 드려 여호와께 아뢰었다. 번제는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와 완전한 순종과 헌신을 상징하는 제사이며 화목제는 하나님과의 교제의 회복을 상징하는 제사이었다. 여호와께서는 하늘에서부터 번제단 위에 불을 내려 응답하셨다. 하나님께서는 때때로 불로 응답하셨다. 또 그가 천사를 명하시므로 심판하는 천사는 칼을 집에 꽂았다.

    이때에 다윗은 여호와께서 여부스 사람 오르난의 타작마당에서 응답하심을 보고 거기서 제사를 드렸다. 왜냐하면 옛날 모세가 광야에서 지은 여호와의 장막과 번제단이 그때에 기브온 산당에 있었지만, 그가 여호와의 천사의 칼을 두려워하여 감히 그 앞에 가서 하나님께 묻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이곳은 후에 솔로몬이 성전을 지은 바로 그곳이었다. 역대하 3:1은, “솔로몬이 예루살렘 모리아산에 여호와의 전 건축하기를 시작하니 그곳은 전에 여호와께서 그 아비 다윗에게 나타나신 곳이요 여부스 사람 오르난의 타작마당에 다윗이 정한 곳이라”고 증거하였다.

    본장에서 우리는 몇 가지 교훈을 얻는다.

    첫째, 우리는 사탄의 시험에 떨어지지 않도록 늘 깨어 조심해야 한다.

    하나님의 사람 다윗이라도 사탄의 충동에 넘어졌다.
    우리는 늘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며 깨어 있자.

    둘째, 우리는 인간의 힘을 의지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만 의지하자.

    다윗의 인구 조사는 그의 교만한 마음의 발동이었다고 본다. 그는 잠시 이스라엘의 힘이 하나님께 있음을 잊어버린 것 같다. 우리는 인간의 힘을 의지하는 안이한 생각을 버리고 오직 하나님만 의지하자.

    셋째, 우리는 하나님의 진노와 징벌이 엄위함을 깨닫고 범죄치 말자.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공로로 구원받은 신약성도들에게도 범죄하면 하나님의 징계가 있음을 잊지 말자. 히브리서 12:8, “징계는 다 받는 것이거늘 너희에게 없으면 사생자요 참 아들이 아니니라.”

    넷째, 우리는 죄를 깨달았을 때, 겸손히, 철저히 통회자복해야 한다.

    이것이 회개하는 자의 바른 태도다. 징벌로부터 구원과 회복을 얻는 길은 오직 하나님의 긍휼밖에 없고, 그의 긍휼을 얻기 위해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공로를 의지하며 철저히 회개하는 길밖에 없다.

    민수기 26:1-65 / 이스라엘의 인구조사

    염병 후에 하나님께서 모세와 제사장 엘르아살에게 이스라엘 온 회중의 수를 계수하라 명하십니다.
    야곱의 장자 르우벤 자손부터 시작하여 하나님의 명령대로 조상의 가문을 따라 이십 세 이상으로 전쟁에 나갈 만한 자를 모두 계수합니다.
    그 총수는 1차 인구조사 때보다 1,820명이 감소한 601,730명입니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각 지파별로 계수한 명수대로 땅을 나눠주어 기업을 삼게 하되 제비를 뽑아 나누라 하십니다.
    레위인은 기업이 없으므로 이스라엘의 총계에 포함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1차 인구조사 때 시내 광야에서 계수했던 사람 중 갈렙과 여호수아 외에는 한 사람도 남지 않고 모두 광야에서 죽었습니다.

    인구 조사 명령(1~4절)

    1. 염병 후에 여호와께서 모세와 제사장 아론의 아들 엘르아살에게 말씀하셨습니다.
    2. “너희는 20세 이상으로 전쟁에 나갈 만한(군대에 나갈 수 있는) 사람의 수를 가문별로 등록해서 온 이스라엘 회중의 수를 계수하라.”
    3. 그래서 모세와 제사장 아론의 아들 엘르아살 여리고 맞은편 요단 강 가의 모압 평지에서 백성에게 말했습니다.
    4. “여호와께서 모세와 애굽 땅에서 나온 이스라엘 자손에게 명령하신 대로 너희는 20세 이상 된 남자들의 수를 계수하라.”

    각 지파 별 인구 숫자(5~51절)

    이스라엘의 자손들 중에서 전쟁에 나가 싸울 수 있는 모든 남자들의 수는

    각 지파별로 다음과 같습니다.

    1차 조사(민수기 1장)  2차 조사(민수기 26장) (+ 증가, - 감소)

    르우벤 지파에서 46,500명 ➠ 43,730명 (- 2,770명)
    시므온 지파에서 59,300명 ➠ 22,200명 (-37,100명)
    갓 지파에서 45,650명 ➠ 40,500명 (- 5,150명)
    유다 지파에서 74,600명 ➠ 76,500명 (+ 1,900명)
    잇사갈 지파에서 54,400명 ➠ 64,300명 (+ 9,900명)
    스불론 지파에서 57,400명 ➠ 60,500명 (+ 3,100명)
    에브라임 지파에서 40,500명 ➠ 32,500명 (- 8,000명)
    므낫세 지파에서 32,200명 ➠ 52,700명 (+20,500명)
    베냐민 지파에서 35,400명 ➠ 45,600명 (+10,200명)
    단 지파에서 62,700명 ➠ 64,400명 (+ 1,700명)
    아셀 지파에서 41,500명 ➠ 53,400명 (+11,900명)
    납달리 지파에서 53,400명 ➠ 45,400명 (- 8,000명)

    합하여 603,550명 ➠ 601,730명 (1,820명 감소)

    인구 조사를 명령하신 이유(52~56절)

    52.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53. “등록된(계수된) 사람의 수를 따라 땅을 나눠주어 기업을 삼게 하라.
    54. 인원수가 많은 자에게는 기업을 많이 줄 것이요,
     수가 적은 자에게는 적게 줄 것이니, 그들이 계수된 수대로 기업을 주되
    55. 오직 그 땅을 제비를 뽑아 나누어 주어 그들의 조상의 지파의 이름을 따라 물려받게 할지니라.
    56. 수가 많든 적든 간에 그들의 기업을 제비를 뽑아서 나누게 할지니라.”

    레위 지파(57~62절)

    57. 레위인으로서 계수된 자들의 종족들은 이러하니, 게르손에게서 난 게르손 종족과, 고핫에게서 난 고핫 종족과, 므라리에게서 난 므라리 종족이며
    58. 레위 종족들은 이러하니, 립니 종족과 헤브론 종족과 말리 종족과 고라 종족이었습니다. 고핫은 아므람을 낳았으며

    59. 아므람의 아내의 이름은 요게벳인데, 그는 레위가 애굽에서 낳은 딸입니다. 요게벳은 아므람에게서 아론과 모세와 그 누이 미리암을 낳았습니다.
    60. 아론에게서는 나답과 아비후와 엘르아살과 이다말이 태어났습니다.
    61. 그러나 나답과 아비후는 (금지된) 다른 불을 여호와 앞에 드리다가 죽었습니다.
    62. 레위인으로서 태어난 지 1개월 이상 된 모든 남자들의 수는 23,000명이었습니다.
    이스라엘 자손 가운데서 그들에게는 땅을 기업으로 주지 않았으므로  그들은 이스라엘 자손의 수에 계수되지 않았습니다.

    세대교체(63~65절)

    63. 이들은 모세와 제사장 엘르아살이 여리고 맞은편 요단 강 가 모압 평지에서 이스라엘 자손의 인구를 조사할 때에 계수한 자들입니다.
    64. 모세와 제사장 아론이 시내 광야에서 계수한 이스라엘 자손은 이 안에는 한 사람도 포함되지 않았으니
    65. 이는 여호와께서 그들에게 대하여 말씀하시기를 ‘그들이 반드시 광야에서 죽으리라’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여분네의 아들 갈렙과 눈의 아들 여호수아 외에는 한 사람도 살아남지 않았습니다.

    묵상

    1. 2차 인구조사

    1) 염병 후의 인구조사(1절)

    이스라엘이 모압과 미디안 여자들에게 미혹을 당하여 바알에게 경배하였다가 하나님의 진노로 염병에 걸려 24,000명이 죽은 후에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의 수를 조사하게 하십니다.
    민수기 1장에서 1차로 인구조사를 한지 약 38년 만에 하는 인구조사입니다.
    1절에서 ‘염병 후에’라는 말이 제일 처음에 나오는 이유는 염병으로 24,000명이나 죽었는데도 이스라엘 백성들의 수가 겨우 1,820명밖에 감소되지 않았다는 것을 증거하기 위해서입니다.

    2) 사막에서 38년간 지낸 후의 인구수의 비교

    이스라엘이 38년간 지낸 광야는 비가 거의 내리지 않는 사막입니다.
    양식도 물도 구할 수 없는 곳이므로 수백만 명은 고사하고 단 몇 명도 지내기 힘든 곳입니다.
    그런 곳에서 전쟁에 나갈 군인의 수만 해도 60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므로 백성들 전체의 수를 따지면 적어도 200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38년간 지냈는데 겨우 1,820명만 감소한 것입니다.
    그것도 그 과정에서 몇 번이나 하나님의 징계를 받아 수만 명씩 죽임을 당했음에도 이런 결과가 나온 것은 그 자체로 큰 기적이 아닐 수 없습니다.

    2. 각 지파의 증감

    1) 많이 감소한 지파들

    1차 조사 때와 비교하여 감소한 지파는 르우벤, 시므온, 갓, 에브라임, 납달리 지파들입니다.
    그 중에서 르우벤 지파는 고라의 일당이 모세에게 대적할 때 르우벤 지파인 다단과 아비람이 함께 참여하였는데 그때 땅이 입을 열어 산채로 지옥에 빠지게 한 일이 있었습니다.
    또 그들과 함께 한 250명은 여호와께로부터 불이 나와 살라 죽게 하였으므로 그 영향으로 그 수가 감소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들보다 더 많이 감소한 시므온과 에브라임과 납달리 지파에 대하여는 그 원인이 나와 있지 않습니다.

    2) 각 지파의 증가와 감소가 중요한 이유

    민수기 26장에서 1차 인구조사와 비교하며 각 지파의 인구수의 증감을 자세하게 증거하는 이유는, 이 사람들이 바로 광야 생활을 마치고 가나안 땅에 들어가는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인구가 많이 감소한 자들은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한 자들이 그만큼 많은 것이고, 인구가 많이 증가한 자들은 가나안 땅에 들어간 자들이 그만큼 많다는 것을 뜻합니다.

    3) 사람의 숫자대로 땅을 기업으로 얻게 하라(52~56절)

    하나님께서는 장차 가나안 땅에 들어가면 지금 조사한 인구의 수를 따라 많은 지파는 땅을 많이 얻게 하고 적은 지파는 땅을 적게 얻게 하라고 명하십니다.
    그리고 그 땅을 분배할 때에 반드시 제비를 뽑아 땅을 얻게 하라고 명하셨습니다.
    제비를 뽑으라는 것은 그 땅을 하나님께서 정해주시겠다는 뜻입니다.
    생명과 사망과 복과 저주의 모든 것이 하나님께 달려 있습니다.

    광야 40년 동안 말씀대로 신실하게 살아온 자들은 가나안 땅에도 더 많이 들어가고, 그곳에서 얻는 땅도 그만큼 더 많이 얻게 됩니다. 이것은 우리가 장차 천국에 들어가도 받는 상급에 차이가 있다는 것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순교를 한 바울과 겨우 주일 예배에나 참여하는 자가 같은 상급을 받을 수는 없는 일입니다.

    묵상 : 가나안 땅은 천국을 상징합니다.

    광야 40년은 이 땅에서의 우리의 한 평생의 삶을 상징하고, 가나안은 인생의 삶을 끝낸 후에 들어가는 천국을 상징합니다.
    어떤 지파는 광야에서 지내는 동안 하나님의 말씀대로 신실하게 살아서 더 많은 자들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고, 어떤 지파는 걸핏하면 불평하고 원망하다가 하나님의 징계를 받아 광야에서 더 많은 사람이 죽어 가나안 땅에 들어간 자들이 그만큼 적었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땅에서 평생을 살아가는 동안 어떤 사람은 땅의 일에만 몰두하다 천국을 준비하지 못해 영원히 멸망을 당하고, 어떤 사람들은 천국을 준비하는 믿음을 가져 영생을 얻습니다.

    3. 세대교체

    1) 여호수아와 갈렙 외에는 한 사람도 없다(63~65절)

    멀리 가나안 땅에 보이는 싯딤에서 인구조사를 할 때에는 38년 전 1차 인구 조사를 할 때 20세 이상으로 계수된 자들은 여호수아와 갈렙 외에는 한 사람도 살아남지 않았습니다.
    그들이 하나님을 원망하여 하나님께서 반드시 광야에서 죽으리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1차 조사 때에 20세 이하였던 자들과 광야에서 새로 태어난 자들만이 살아남았는데, 그들의 수가 1차 조사 때보다 겨우 1,820명만 부족했다는 것입니다. 

    2) 신앙의 명가(名家) 아므람과 요게벳 가족(59~60절)

     이스라엘 백성의 수를 조사한 일들이 기록된 가운데 아므람과 요게벳의 가족이 이야기가 나옵니다.
    아므람과 요게벳이 낳은 자녀는 아론과 모세와 그 누이 미리암입니다.
    이 세 사람은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나오게 한 일을 최 일선에서 한 사람들입니다.
    애굽의 바로왕이 이스라엘의 사내아이를 다 죽이라 명하였을 때 모세의 어머니 요게벳은 바로왕보다 하나님의 명령을 더 두려워하여 모세를 살려 두었는데, 요세벳의 믿음이 그대로 모세에게 이어져서 이스라엘을 구하는 민족의 지도자가 되었습니다.

    묵상 : 하나님께 세움 받는 자가 되십시오.

    세상에서는 꿈과 야망을 가진 자들이 성공을 합니다만, 하나님의 일꾼은 오직 하나님께서 세우십니다.
    하나님께서 80세 노인 모세를 일꾼으로 세우셨고, 하나님께서 노예 요셉을 애굽의 총리가 되게 하셨으며, 하나님께서 소년 다윗을 왕이 되게 하셨습니다.
    모세와 아론과 미리암처럼, 또 여호수아와 갈렙처럼 우리도 하나님께 들어 쓰임 받는 자가 됩시다.
    좋을 때나 나쁠 때나 언제나 변함없이 하나님을 섬기는 자, 하나님께서 이런 자를 일꾼으로 들어 쓰십니다.


    역대상 17장 요약

    나단이 하나님의 말씀과 계시를 다윗에게 말하였며, 다윗은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감사를 드리고 기도를 올렸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역대상 18장 요약

    다윗이 블레셋, 모압, 소바, 시리아, 에돔을 쳐서 굴복시켰으며 여러 전쟁에서 승리한 다윗이 공정하게 나라를 다스렸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역대상 19장 요약

    암몬왕 나하스가 죽게되자 다윗이 위로 사절단을 보내는데 사절단이 첩자로 몰려서 조롱당하다가 돌아오게 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다윗의 군장인 요압이 아람을 물리치고,아비새가 암몬을 물리쳤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민수기 13:20
    토지의 후박과 수목의 유무니라 담대하라 또 그 땅 실과를 가져오라 하니 그 때는 포도가 처음 익을 즈음이었더라.

    사무엘하 10:12
    너는 담대하라 우리가 우리 백성과 우리 하나님의 성읍들을 위하여 담대히 하자 여호와께서 선히 여기시는대로 행하시기를 원하노라 하고

    역대상 19:13
    너는 담대하라 우리가 우리 백성과 우리 하나님의 성읍들을 위하여 담대히 하자 여호와께서 선히 여기시는 대로 행하시기를 원하노라 하고

    시편 31:24
    강하고 담대하라 여호와를 바라는 너희들아.

    이사야 41:6
    각기 이웃을 도우며 그 형제에게 이르기를 너는 담대하라 하고.

    요한복음 16:33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하시니라.

    사도행전 23:11
    그날 밤에 주께서 바울 곁에 서서 이르시되 담대하라 네가 예루살렘에서 나의 일을 증거한 것 같이 로마에서도 증거하여야 하리라 하시니라.


    5월 7일(수) 역대상 17-19장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너는 담대하라(19:13)

    너는 담대하라 우리가 우리 백성과 우리 하나님의 성읍들을 위하여 담대히 하자 여호와께서 선히 여기시는 대로 행하시기를 원하노라.
    Be strong and let us fight bravely for our people and the cities of our God. The LORD will do what is good in his sight.

    담대히하다(아포톨마오. apŏtōlmaō) ἀποτολμάω 스트롱번호 662

    1. 담대히 ~하다.  2. 감히 ~하다. 3. 롬 10:20.
    발음 [ apŏtōlmaō ]

    어원  /  575와 5111에서 유래

    관련 성경 / 
    담대하다(롬 10:20).

    히브리서 10:35

    "그러므로 너희 담대함을 버리지 말라 이것이 큰 상을 얻게 하느니라."

    히브리서 10장 35절은 신앙의 여정을 걷는 성도들에게 주어진 강력한 격려와 도전의 말씀입니다. 
    본문은 우리가 하나님 안에서의 담대함을 포기하지 않을 때, 큰 상이 기다리고 있음을 약속합니다. 
    이 구절은 초대교회의 박해와 어려움 속에서 믿음을 지켰던 성도들에게 특별히 중요한 메시지였습니다. 
    오늘 우리는 이 말씀을 통해 현대의 삶 속에서 어떻게 믿음을 가지고 살아갈 수 있을지 함께 나누고자 합니다.

    1. 담대함의 본질

    히브리서 10장 35절에서 "담대함"이라는 단어는 헬라어로 "파르레시아"(παῤῥησία)입니다. 
    이는 '자신감'이나 '확신', '공개적으로 말하는 용기'를 뜻합니다. 
    성경에서 담대함은 단순한 인간적 용기가 아닌,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신앙적 확신을 의미합니다. 
    이는 두려움을 넘어서는 힘이며, 우리의 믿음과 소망의 기초가 됩니다.

    παῤῥησία, ας, ἡ
    스트롱번호 3954

    1. 숨김없음.  2. παρρησίᾳ : 공공연히.  3. 용기
    발음 [ parrhēsia ]
    어원  /  3956과 4483의 파생어에서 유래
    • 1.  숨김없음, 솔직, 명백, 막8:32, 요7:13, 16:29. [주] μετὰ παρρησίας: 분명히, 노골적으로, 자신있게, 확신을 가지고, 행2:29.
    • 2.  παρρησίᾳ : 공공연히, 내어놓고, 요7: 26, 11:54, 18:20, 골2:15.  

    • 3. 용기, 확신, 대담, 담대, 두려움 없음, 행2:29, 고후7:4, 엡3:12, 히4:16, 요일2:28.

    • 관련 성경  / 
      담력(딤전3:13, 히10:19). [동] 드러내다(막8:32, 요18:20), 드러나게 말하다(요7:13, 26), 드러나다(요11:54), 담대하다(고후7:4, 빌1:20, 히3:6). [부] 밝히(요10:24, 11:14, 16:29), 담대히(행2:29, 엡6:19, 히4:16), 담대하게(행4:13).


    다윗의 담대함 : 사무엘상 17장에서 다윗은 골리앗 앞에서 흔들리지 않는 담대함을 보였습니다. 
    그의 담대함은 자신의 능력이 아닌, 하나님을 신뢰하는 믿음에서 나온 것이었습니다.

    사무엘상 17:45
    다윗이 블레셋 사람에게 이르되 너는 칼과 창과 단창으로 내게 오거니와 나는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 곧 네가 모욕하는 이스라엘 군대의 하나님의 이름으로 네게 가노라 .

    사도들의 담대함 : 사도행전 4장에서 베드로와 요한은 산헤드린 앞에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복음을 전하는 데에 주저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의 담대함은 성령의 충만함에서 비롯되었습니다.

    사도행전 4:8. 12
    이에 베드로가 성령이 충만하여 가로되 백성의 관원과 장로들아.
    다른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

    적용 : 우리가 직장에서, 가정에서, 혹은 사회 속에서 하나님을 증거할 때에도 담대함이 필요합니다. 
    이것은 단순히 소리 높여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말과 행동이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확신과 신뢰를 나타내는 것입니다.

    2. 담대함의 장애물

    담대함을 버리지 말라는 권고는, 우리의 담대함이 위협받는 상황이 있다는 것을 전제합니다. 
    신앙생활 속에서 우리의 담대함을 흔들 수 있는 여러 장애물이 존재합니다.

    두려움 : 두려움은 담대함의 가장 큰 적입니다. 우리가 두려움에 사로잡히면 하나님을 향한 믿음이 약화됩니다. 예수님께서는 마태복음 14장에서 물 위를 걷는 베드로에게 두려움을 극복하라고 하셨습니다. "믿음이 적은 자여 왜 의심하였느냐?"(마태복음 14:31)

    세상의 유혹 : 세상의 재물, 명예, 쾌락은 우리의 담대함을 약화시키는 또 다른 요인입니다. 마태복음 6:24에서 예수님은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의 마음이 세상적인 것에 매여 있을 때, 하나님을 향한 담대함이 줄어들 수밖에 없습니다.

    실패의 경험 : 과거의 실패는 우리의 마음을 무겁게 하고, 다시 도전하려는 의지를 꺾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실패를 넘어서는 하나님의 은혜를 강조합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세 번 부인했지만, 회복의 은혜로 인해 담대하게 복음을 전하는 사도로 변화되었습니다.

    공동체의 부재 : 신앙의 여정에서 혼자 걷는 것은 매우 어렵습니다. 히브리서 10장 24-25절은 "서로 돌아보아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며 모이기를 폐하지 말라"고 권면합니다. 믿음의 공동체는 담대함을 유지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3. 담대함의 상급

    히브리서 10:35
    "담대함이 큰 상을 얻느니라"고 말합니다. 이 상급은 단순히 물질적인 보상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의 영광을 의미합니다.

    영적 상급 : 담대함은 우리의 신앙 성숙과 연결됩니다. 야고보서 1장 12절은 "시험을 참는 자는 복이 있나니 이는 주께서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생명의 면류관을 얻을 것임이라"고 말합니다. 우리가 담대함으로 믿음을 지킬 때, 하나님께서는 생명의 면류관을 주십니다.

    관계적 상급 : 담대함은 우리의 삶 속에서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하게 합니다. 다니엘서 3장에서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가 담대함으로 풀무 불에 들어갔을 때, 하나님께서 그들과 함께하셨습니다. 담대함은 하나님과의 친밀한 관계를 경험하게 하는 통로가 됩니다.

    궁극적 상급 : 우리의 담대함은 최후의 심판 날에 영광스러운 보상으로 나타납니다. 마태복음 25장에서 예수님은 충성된 종들에게 "잘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라고 칭찬하십니다. 이는 우리가 담대함으로 하나님을 신뢰하며 살아갈 때 받을 궁극적 상급을 나타냅니다.

    결론 : 담대함을 붙들라

    히브리서 10장 35절은 단순한 권면이 아니라, 신앙의 여정을 완주하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약속입니다. 초대교회의 성도들은 박해와 고난 속에서도 담대함을 잃지 않았고, 오늘날 우리의 삶 속에서도 동일한 도전과 격려가 필요합니다.

    담대함은 우리에게 주어진 믿음의 선물이며, 이를 지키는 것은 우리의 책임입니다. 우리가 두려움과 유혹, 실패의 경험을 이겨내고 담대함으로 나아갈 때, 하나님은 우리를 통해 영광을 받으십니다. 동시에 우리는 아버지의 상급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우리의 담대함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가능합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모든 두려움과 죄를 이기셨기에, 우리는 주님을 믿음으로 담대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오늘도 "담대함을 버리지 말라"는 말씀을 기억하며, 담대함으로 충만한 삶을 살아가시길 바랍니다.

    강하고 담대할 수 있는 이유(이사야 41:10)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라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참으로 너를 도와 주리라 참으로 나의 의로운 오른손으로 너를 붙들리라.

    하나님은 다윗의 강하고 담대한 믿음 때문에 그를 택하시고 사랑하셨습니다. 우리도 다윗처럼 하나님과의 관계를 확실히 알면 강하고 담대한 믿음을 가질 수가 있습니다. 사람들은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라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참으로 너를 도와 주리라 참으로 나의 의로운 오른손으로 너를 붙들리라’는 이사야 41장 10절 말씀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한 말이지 우리에게 한말은 아니지 않습니까?”라는 질문을 합니다. 예수님은 이스라엘인이요, 유대인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와 접붙임 바 되어 영적인 이스라엘이요, 영적인 유대인인 것입니다. 이스라엘에게 주신 약속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모두 우리들에게 주신 약속인 것입니다.

    1. 두려워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라

    우리가 주님과 함께 하면 항상 함께 계신 주님을 바라봐야지 두려움을 바라보아서는 안됩니다. 우리가 인생을 살아가면서 우리를 두렵게 하는 일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그 두려움을 바라보면 거기에 사로잡혀서 우리는 힘을 잃고 좌절하고 절망하게 됩니다. 하지만 우리와 함께 계신 하나님을 바라보면 우리는 용감하고 담대해질 수가 있는 것입니다.

    성경은 말씀하기를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므로 두려워 하지 말라고 말씀합니다. 왜 하나님이 함께 하시면 두려워 할 이유가 없습니까? 하나님은 우리의 숨을 곳이 되시기 때문입니다. 피난처가 있다는 것은 참으로 복된 일입니다.

    시편 91편 2절에 “나는 야훼를 향하여 말하기를 그는 나의 피난처요 나의 요새요 내가 의뢰하는 하나님이라 하리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적군이 쳐들어 오더라도 우리가 하나님 안에 피할 수가 있고 하나님이 요새가 되어서 어떠한 원수도 무너뜨릴 수가 없는 난공불락의 성이 되시기 때문에 어려울때 하나님을 의지하고, 붙들고, 품에 안길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가 되시는 것입니다.

    또한 하나님은 우리와 함께 계셔서 우리를 건지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시편 91편 3절에 “이는 그가 너를 새 사냥꾼의 올무에서와 심한 전염병에서 건지실 것임이로다”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사는 삶속에 여러 가지 올무가 놓여져 있고 그물이 쳐져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새 사냥꾼의 그물에서와 극한 염병에서 우리를 건져 주십니다.

    시편 91편 5절로 7절에 “너는 밤에 찾아오는 공포와 낮에 날아드는 화살과 어두울 때 퍼지는 전염병과 밝을 때 닥쳐오는 재앙을 두려워하지 아니하리로다 천 명이 네 왼쪽에서, 만 명이 네 오른쪽에서 엎드러지나 이 재앙이 네게 가까이 하지 못하리로다”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이 우리와 같이 계시기 때문에 아무것도 모르는 부지 불식간의 밤에 다가오는 공포와, 원수의 화살에도 보호해 주시고 마귀가 흑암중에 우리에게 가져다 주는 어마어마한 질병에도 우리는 안전합니다. 또한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이 천인이 내 곁에서 쓰러지고 만인이 내 우편에서 쓰러져도 이 재앙이 내게 가까이 오지 못한다고 성경은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이 함께 계시므로 두려워 하지 않습니다. 이 하나님은 항상 우리와 함께 계신 것입니다. 좋을때만 같이 계시고 어려울때는 우리를 떠나시는, 착할때만 같이 있고 우리가 하나님께 불순종한다고 해서 하나님이 우리를 버리시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항상 변함이 없으신 것입니다.

    아무리 위험하고 어려운 환경 가운데 있다 할지라도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므로 우리는 두려워 하지 않고 안전히 거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오늘도 하나님은 우리와 함께 하시므로 두려움을 바라보지 말고 하나님을 바라 보십시오. 우리의 삶의 과정에서 항상 우리를 두려워하게 하고 협박하게 하는 사건들은 늘 다가옵니다. 그러나 그 가운데 하나님이 늘 우리와 함께 계셔서 우리의 피난처요, 요새요, 의뢰하는 하나님이 되시고 하나님은 그 날개로 우리를 덮어 주시므로 하나님을 바라보고 있으면 두려움에서 해방되고 건짐을 받을수가 있는 것입니다.

    2.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라

    하나님께서는 “내가 천사들의 하나님뿐 아니라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 모세의 하나님, 여호수아의 하나님 그리고 바로 너희 하나님”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면 하나님과 내가 무슨 관계가 있습니까? 하나님이 내 하나님이 된다면 하나님은 나와 무슨 관계가 있습니까?

    창세기 22장 13절로 14절에 하나님은 야훼 이레라는 것입니다. 우리를 위해서 예비하시는 하나님인 것입니다. 성경에는 하나님이 자기를 사랑하는 자를 위해서 예비해 놓은 모든 것은 눈으로 보지 못하고 귀로 듣지 못하고 마음으로도 생각지 못한다고 말씀합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삶의 모든 굽이굽이에 우리가 필요한 도움을 하나님은 항상 예비해 놓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어떤 위기가 다가와도 그 위기에 대처할 수 있는 길이 예비되어 있는 것입니다. 어떤 어려움이 있어도 그것을 극복할 수 있는 길이 예비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야훼 이레가 되시는 것입니다.

    또한 하나님께서는 야훼 라파가 되십니다. 출애굽기 15장 26절에 “이르시되 너희가 너희 하나님 나 야훼의 말을 들어 순종하고 내가 보기에 의를 행하며 내 계명에 귀를 기울이며 내 모든 규례를 지키면 내가 애굽 사람에게 내린 모든 질병 중 하나도 너희에게 내리지 아니하리니 나는 너희를 치료하는 야훼임이라”고 말씀합니다. 우리를 지으신 하나님은 우리가 병들어서 상처입기를 원치 아니하시고 고치고 치료하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직접 성령의 능력으로 치료하시기도 하고 훌륭한 의사나 약을 통해서 공기나 물이나 양식을 통해서 우리를 치료하시기도 합니다. 우리는 병들었을때 하나님을 바라보고 하나님께 의지하면 하나님께서 훌륭한 병원으로 인도해 주시고 좋은 약을 먹게 해주시고 좋은 물을 마시고 좋은 음식을 취하게 하시고 혹은 기도를 통하여 성령의 능력으로 고쳐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는 치료자와 환자의 관계인 것으므로 하나님을 바라보면 항상 치료하는 능력이 우리에게 임하는 것입니다. 말라기 4장 2절에 “내 이름을 경외하는 너희에게는 공의로운 해가 떠올라서 치료하는 광선을 비추리니 너희가 나가서 외양간에서 나온 송아지 같이 뛰리라”고 말한 것입니다. 출애굽기 23장 25절에도 “네 하나님 야훼를 섬기라 그리하면 야훼가 너희의 양식과 물에 복을 내리고 너희 중에서 병을 제하리니”라고 말씀한 것입니다.

    또 하나님은 우리에게 야훼 닛시가 되시는 것입니다. 출애굽기 17장 15절로 16절에 보면 하나님은 우리를 대신해 싸워주신다고 하십니다. 우리가 세상을 살아갈 동안에 크고 작은 원수들이 우리를 죽이고 멸망시키려고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우리 힘으로 싸울수가 없어 괴로울때도 하나님은 우리를 위해서 싸워주십니다. 과거를 돌이켜 보십시오. 우리를 향해 원수가 쳐들어와도 항상 하나님께 부르짖고 의지했을 때 하나님은 승리의 깃발을 흔들게 만들어 주셨습니다. 미래도 한가지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위해서 전쟁하는 하나님, 우리를 위해서 싸워주시는 하나님이라는 것을 알아야 되는 것입니다.

    또한 야훼는 샬롬입니다. 사사기 6장 24절에 있는 말씀대로 하나님은 우리에게 평화를 주시는 것입니다. 사람이 부귀, 영화, 공명을 다 가져도 마음에 평화가 없으면 행복하지 않습니다. 권력이 사람에게 행복을 갖다 주지 않습니다. 평안이 없는 권력은 고통밖에 없습니다. 아무리 좋은 음식먹고, 좋은 옷을 입고, 좋은 집에 살아도 평화가 없으면 행복을 절대로 없습니다. 하지만 야훼  하나님을 섬기면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므로 우리 마음속에 평화를 주시는 것입니다. 시편 29편 11절에 “야훼께서 자기 백성에게 힘을 주심이여 야훼께서 자기 백성에게 평강의 복을 주시리로다”, 욥기 22장 21절에 “너는 하나님과 화목하고 평안하라 그리하면 복이 네게 임하리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또 하나님은 야훼 로이가 되십니다. “야훼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는 시편 23편 1절의 말씀대로 하나님이 우리의 목자가 되어서 지팡이를 들고 막대기를 가지고 우리를 인도하시는 것입니다. 지팡이는 우리 길을 만들어 주시고 막대기는 우리를 보호해 주시는 것입니다. 원수가 도둑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러 오면 하나님은 우리에게 복을 주셔서 잔이 넘치게 해주시는 것입니다. 야훼 로이, 우리 목자되신 하나님이 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야훼 찌드케누가 되십니다. 예레미야 23장 5절로 6절에 하나님이 우리의 의가 되신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죄를 짓고 불의하고 추악한 더러운 인생들입니다. 우리 스스로 결코 하나님 앞에 설수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우리 대신 죄가 되셔서 우리 죄를 십자가에서 다 청산하시므로 그리스도를 믿으므로 그 보혈로 씻음받고 은혜의 선물로 의롭다 함을 받아 하나님처럼 의롭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야훼 메카디쉬켐이 되십니다. 출애굽기 31장 13절에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으로 죄와 사망의 법에서 우리를 해방시켜 주신다고 말씀합니다. 성령께 의지하면 성령이 세상의 부패를 다 제하시고 사망을 제하시고 우리를 거룩하고 깨끗하게 해주시는 것입니다.

    그 다음 우리 하나님은 야훼 삼마가 되십니다. 야훼는 우리와 항상 같이 계신다고 에스겔 48장 35절에 말씀한 것입니다. 성경에는 “너희 몸이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거하시는 전인줄 알지 못하느냐”고 말씀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날에는 내가 아버지 안에 네가 내 안에 내가 너희안에 있는 것을 너희가 알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이제 우리 한사람 한사람이 하나님의 성전이요, 하나님은 우리의 성전속에 성령으로 와서 거하시는 것입니다. 우리와 함께 임마누엘로 와 계신 하나님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두려워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하리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즉, 하나님은 내 하나님이 되신 것입니다. 내 하나님은 야훼 이레가 되시고, 야훼 라파가 되시고, 야훼 닛시가 되시고, 야훼 샬롬이 되시고, 야훼 로이가 되시고, 야훼 찌드케누가 되시고, 야훼 메카디쉬켐이 되시고, 야훼 삼마가 되는 하나님인 것입니다. 이 하나님을 우리가 늘 생각하고 의지하면 놀라지 않고 평안하게 인생을 살아갈수 있는 것입니다.

    3.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우리는 다 연약합니다. 영적으로 연약하고, 심적으로 연약하고, 육체적으로 연약하고 생활이 약합니다. 이렇게 형편없이 약한 우리를 강하게 붙들어줄 자가 하나님이라는 것입니다. 고린도후서 4장 7절로 10절에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이는 심히 큰 능력은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 우리가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박해를 받아도 버린 바 되지 아니하며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하고 우리가 항상 예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고 말씀합니다.

    우리는 약해도 우리 질그릇 속에 보배인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이 아버지와 성령과 더불어 우리속에 들어와 계십니다. 예수믿는 사람과 안믿는 사람은 무엇이 다릅니까? 예수믿는 사람은 하나님이 속에 거하시는 사람들입니다. 반면에 예수 안믿는 사람은 공중 권세잡은 자가 그 속에 들어있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보혈로 하나님과 화목되고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와 성령으로 더불어 삼위일체가 우리속에 들어와 계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과 더불어 사는 사람들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않습니다. 아무리 세상의 죄와 불의와 추악과 질병과 저주와 가난과 고통이 우리를 우겨싸도 우겨싸이지 않는 것은 이를 이미 십자가에서 이겨 버리신 예수님이 우리속에 있기 때문입니다. 죄악의 줄도, 부패의 줄도, 질병의 줄도, 저주의 줄도, 죽음의 줄도 산산조각으로 끊어져 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사람으로 아무리 계산해도 나갈 길이 없는 답답한 일을 당해도 홍해를 갈라서 길을 만드신 하나님이 우리속에 계시므로 답답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핍박을 당해도 버림바 되지 않습니다. 세상에 핍박당해서 사람들이 만나주지 아니하고 우리를 외롭게 격리시킨다 할지라도 하늘의 하나님과 우리 주 예수님과 성령께서 우리와 함께 계셔서 우리를 품어 주시므로 조금도 외롭지가 않습니다. 핍박을 받을수록 우리는 은혜가 넘쳐나게 되는 것입니다. 시편 37편 28절에 “야훼께서 정의를 사랑하시고 그의 성도를 버리지 아니하심이로다 그들은 영원히 보호를 받으나 악인의 자손은 끊어지리로다”라고 말씀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담대히 말할수 있는 것은 주님은 나를 돕는 분이시니 내가 무서워하지 아니하겠노라 사람이 어떻게 하더라도 하나님이 나와 같이 계시기에 내가 거꾸러져도 망하지 않습니다. 나는 약해도 내 안에 계신 하나님은 강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능력으로 영혼이 잘되고 범사에 잘되며 강건하고 생명을 얻되 풍성하게 얻고 나갈수가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경에는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고 말한 것입니다.

    4. 참으로 너를 도와주리라

    우리를 도와 주되 미지근하게 도와주는 것이 아니라 “참으로 너를 도와주리라”고 말씀하셨다는 것은 놀라운 말입니다. 우리 하나님께서 우리를 돕기 위해서 예수님을 보내셔서 십자가 위에 몸찢기고 피흘려서 참으로 우리를 대신해서 죄를 짊어지시고 세상을 다 멸하시고 질병을 감당하시고 죽음을 감당하시고 저주를 감당하시고 우리에게 자유와 해방을 주신 주님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주님이 그냥 형식적으로 우리를 도와 주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참으로 내가 너를 도와 주리라.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은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시편 23편 4절에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다니는데 누가 나와 같이 계십니까? 부모, 형제, 친구, 친척도 다 떠나도 주님은 나와 같이 계셔서 그 지팡이로 길을 여시고 막대기로 원수를 쳐서 물리치시고 우리를 도와 주셔서 해를 받지 않게 만들어 주시는 하나님이신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마음에 강하고 담대할 수 있습니다. 원수의 목전에서 진수성찬을 베풀어주시는 주님이 얼마나 감사합니까? 저는 원수가 올때마다 늘 말합니다. “원수가 나를 치면 주님께서 또 밥상 차리시겠구나” 평안할때는 밥상을 안차리시지만 고난당할 때 원수가 쳐들어오면 밥상을 차리셔서 먹게 하시고 원수보다 강하게 만들어 주시고 머리에 성령으로 기름부어 주셔서 긍정적 기쁨을 가지고 살고 잔이 넘치게 만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을 섬기면 참으로 우리를 도와 주셔서 우리를 전인 구원시켜 주시는 것입니다.

    시편 103편 1절로 5절에 “내 영혼아 야훼를 송축하라 내 속에 있는 것들아 다 그의 거룩한 이름을 송축하라 내 영혼아 야훼를 송축하며 그의 모든 은택을 잊지 말지어다 그가 네 모든 죄악을 사하시며 네 모든 병을 고치시며 네 생명을 파멸에서 속량하시고 인자와 긍휼로 관을 씌우시며 좋은 것으로 네 소원을 만족하게 하사 네 청춘을 독수리 같이 새롭게 하시는도다”라고 말씀합니다. 이것이 우리 하나님이신 것입니다. 주님께서 참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뜨거운 열정을 가지고 우리를 도와 주시기를 원하시고 계신 것입니다.

    5. 참으로 의로운 오른손으로 너를 붙들리라

    왜 주님의 손이 의롭습니까? 우리의 죄를 대신 짊어지고 십자가 위에서 몸찢기고 피흘렸기 때문에 그 손은 의롭습니다. 아울러 주님은 값없이 우리를 도와 주셨지만 그분은 대가를 지불했습니다. 예수님께서 거저 우리를 도와 준 것이 아닙니다. 우리 죄와 불의, 추악과 저주를 친히 십자가 위에서 다 몸찢기고 피흘려서 청산하셨기 때문에 우리를 도와 주는 손길은 의로운 손인 것입니다. 불의한 손이 아닌 것입니다. 값을 지불한 손인 것입니다. 주님은 깨끗한 의로운 손으로 우리를 붙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죄를 청산한 의로운 손으로 우리를 붙들어 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의 그 많은 죄가 다 청산되고 용서와 의로운 깨끗한 손으로 주님께서 우리를 붙들어 주셨습니다.

    사랑의 주님은 권능의 손으로 우리를 붙드십니다. 주님이 손을 내게 내밀면 그 손은 용서의 손이요, 거룩한 손이요, 치료의 손이요, 축복의 손이요, 영생천국의 손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내가 불의하게 도와주는 것이 아니다. 너희를 위해서 내가 대신 죽었다.너희를 위해 대신 몸을 찢었고 피를 흘려서 너희의 모든 불의, 추악, 저주, 절망을 청산해 버렸다. 그러므로 내 손은 의로운 손이다. 나의 의로운 오른손으로 나의 백성을 내가 붙들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을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죄를 짓고, 불의하고, 추악하고, 버림받아야 마땅하지만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앞에 나와서 죄를 회개하고 주의 이름으로 부르면 주의 의로운 오른손으로 십자가의 보혈을 통해서 우리를 붙들어 주시고 우리를 살려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너희가 담대함을 버리지 말라 이것이 큰 상을 얻게 하느니라”고 성경은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항상 불안과 공포로 둘러싸여 있습니다. 어느곳을 바라보나 불안하고 공포가 있습니다. 우리는 내일을 도저히 예측할 수가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수많은 사람이 점을 칩니다. 과학이 발달되면 점이 없어질줄 알았는데 과학이 발달되니 인터넷을 통해서 점을 치고, 휴대전화를 이용해 점을 치고, 컴퓨터로 점을 칩니다. 오히려 점이 과학을 이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현상은 사람들이 내일에 대한 불확실성 때문에 불안하고 연약하고 공포에 떨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그런 것을 의지할 필요가 없는것이 “두려워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라. 놀라지 말라. 내가 네 하나님이 됨이라.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참으로 너를 도와 주리라. 참으로 나의 의로운 오른손으로 너를 붙들리라”고 말씀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강하고 담대한 마음을 가지고 하나님을 의지하면 사자와 곰도 물리칠수 있고 골리앗도 물리칠수가 있고, 세상의 원수 마귀를 물리칠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원수는 한길로 왔다가 일곱길로 도망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바라보십시오. 그리고 강하고 담대하십시오. 놀라지 마십시오. 두려워 하지 마십시오. 믿음으로 나가십시오. 성경은 말씀합니다. “네 믿음대로 될지어다.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자에게는 능치 못하심이 없느니라”

    이솝의 우화 가운데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느 숲에 왕 노릇하는 사자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사자에게 늘 당하기만 하는 여우가 있었는데, ‘어떻게 하면 저 사자를 숲에서 쫓아낼 수 있을까?’하고 궁리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문득 한 가지 꾀를 생각해내고는 사자에게 도전장을 보냈습니다.

    “너 사자는 들어라! 이제부터 이 숲의 동물들이 가장 무서워하는 것은 나니까 사자는 그만 왕좌에서 내려오기를 바란다.”

    사자는 어이가 없었지만 그래도 미심쩍어서 ‘동물들이 무서워하는 증거를 대라.’고 했습니다.
    여우는 ‘나를 하루만 따라 다녀 보면 알 수 있다.’고 큰 소리를 쳤습니다.
    그래서 사자는 당장 여우의 뒤를 따라 숲을 다녀 보았습니다.
    아, 그랬더니 정말 동물들이 여우를 보고 줄행랑을 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토끼며 노루는 물론이고, 곰과 멧돼지도 도망을 쳤습니다.
    여우보다 힘도 세고 덩치도 큰 동물들이 모두 슬금슬금 도망을 쳤습니다.
    이것을 본 사자는 저 여우에게 뭔가 막강한 힘이 생겼다고 생각을 하고는 그만 짐을 사서 도망치고 말았습니다.

    이솝 이야기에서 믿음의 사람이 담대할 수 있는 이유는 여우 뒤에 사자가 있다는 것처럼 하나님이 항상 등 뒤에서 밀어주시기 때문에 담대할 수 있습니다.

    담대하려면 먼저 처음 사랑을 회복해야 합니다.

    요한계시록 2:4
    그러나 너를 책망할 것이 있나니 너의 처음 사랑을 버렸느니라.
    Yet I hold this against you: You have forsaken your first love.

    처음 사랑(first love)

    그러나 너를 책망할 것이 있나니 너의 처음 사랑을 버렸느니라.
    -
    본절은 에베소 교회에 대한 책망을 나타낸다.
    '처음 사랑'이 구체적으로 무엇을 말하는가에 대한 견해는 두 가지 이다.

    1. 에베소 교인들이 가졌던 기독교적인 사랑 즉 형제에 대한 사랑을 의미한다고 주장한다(행 20:35; 엡 1:15, Vincent, Plummer, Charles, Moffatt, Rist, Kiddle).

    2. 처음 그리스도를 영접하면서 가졌던 그리스도나 하나님에 대한 사랑을 의미한다고 주장한다(Scott).
    에베소 교인들은 자신들의 교회에 있던 거짓 사도들을 분별하느라고 형제를 의심하고 엄격하게 구별함으로 형제에 대한 사랑이 식어졌다(Barclay, Mounce, Ladd).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신 바와 같이 형제에 대한 사랑은 하나님에 대한 사랑과 불가분리의 관계에 있다(막12:29ff., Beasley-Murray, Johnson).
    그리스도에 대한 사랑은 형제 사랑을 동반하기 때문에 진정한 기독교적 사랑은 어느 하나라도 무시될 수 없는 것이다.
    그러기에 두 가지 견해는 나름대로 타당성을 지닌다.
    한편 '버렸느니라'에 해당하는 '아페카스'는 부정 과거로 단회적 행동을 나타내어 에베소 교인들이 그들이 가졌던 처음 사랑과 완전히 단절되었음을 암시한다.

    따라서 본문은 에베소 교회가 교리적(敎理的)으로 칭찬할 사실이 있다 할지라도 생명 없는 형식주의로 전락하여 사랑을 상실했음을 단호하게 책망하고 있다(Alford, Johnson).


    이사야 38:17
    보옵소서 내게 큰 고통을 더하신 것은 내게 평안을 주려 하심이라 주께서 나의 영혼을 사랑하사 멸망의 구덩이에서 건지셨고 나의 모든 죄는 주의 등 뒤에 던지셨나이다.

    루이카쓰(漏活. 루활) : 눈물의 치료의 효과
    루이카쓰(淚活, 루활)을 우리말로 풀이하면 <눈물 활동> 이라는 모임


    우리가 담대할 수 있는 이유는 하나님의 사랑 때문(로마서 8:31-33)

    그런즉 이 일에 대하여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지 아니하겠느냐?  누가 능히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을 고발하리요. 의롭다 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사실 그리스도인은 외적으로 별로 강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세상 사람들보다 더 약합니다.
    초대교회 이후로 로마 황제의 박해로 엄청난 그리스도인들이 죽임을 당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유대교를 신봉하는 유대인들과 우상숭배자들까지 그리스도인을 대적하는 세력은 세상에 널려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리스도인들은 이들을 대적할 힘이 없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인들은 박해를 당하면서도 물리적으로 대적하지를 않았습니다.
    그래서 엄청난 그리스도인들이 죽임을 당했습니다.
    우리나라 사정도 다르지 않았습니다.

    우리나라에 처음 복음이 전파되던 때는 1832년경이었습니다.
    1832년 화란 선교사 구쯔라프(Gutzlaff)가 만주에서 한인에게 복음을 전했으며,
    1865년 토머스(Robert J.Thomas)선교사가 대동강변에서 첫 순교를 하고,
    1872년 존 로스(John Ross)와 맥킨타이어(John McIntyre)가 만주에서 한인에게 전도를 했습니다.
    이렇게 간접적인 전도 때부터 순교자가 생겨났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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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너럴 셔먼호 사건(General Sherman incident)
    미국의 무장 상선 '제너럴 셔먼(SS General Sherman)이 1866년 7월 25일 평안도 용강현 주영포 앞바다에 도착한 뒤 대동강을 거슬러 평안도의 중심지인 평양부까지 올라와 통상을 요구하며 대포를 쏘고 민간인을 살해하자, 9월 5일 당시 평안 감사 박규수 휘하의 조선군 부대가 배를 급습하여 불태우고 선원들을 살해한 사건이다.

    19세기는 서구 열강에 의한 아시아의 개항 및 식민지화가 극에 달한 때였다.
    당시 유럽과 미국에서는 민, 관을 가리지 않고 눈에 불을 켜고 아시아를 개방시켜 이권을 선점하는 데 혈안이 되어 있었고, 이 즈음하여 아편 전쟁과 쿠로후네 사건으로 중국과 일본도 개항의 길을 선택했다.
    민간상선인 제너럴 셔먼호 역시 비슷한 이유로 조선을 개항의 대상으로 선택하였다.

    제너럴 셔먼 호의 미국인 선주, 프레스턴은 조선을 상대로 개항을 선점하여 한몫 잡을 생각에 단독으로 조선에 개항을 강요하려고 했다. 그는 배를 중국 톈진에 기항하였고 영국의 메도스 상사와 용선 계약을 체결하였다.
    그렇게 제너럴 셔먼 호는 메도스 상사에 위탁된 채 조선으로 출항했다.
    이 배에는 영국 웨일즈 출신 개신교 목사인 토마스가 조선어 통역관으로 승선해 있었다.
    그는 1865년 9월에 세관을 사임하고 1차 조선 선교 여행을 하며 성경책을 나누어주며 선교 활동을 했으나, 조선 당국에 적발되어서 추방당했다.
    이듬해인 1866년 프랑스에서는 프랑스 신부들의 학살에 항의차 조선으로 떠나는 프랑스 해군 원정 함대에 통역관으로 합류하기로 되어 있었으나, 로즈 제독이 이끄는 프랑스 함대는 때마침 베트남에서 일어난 반란을 진압하기 위하여 상하이로 떠났다.
    낭패한 토마스는 미국의 상선인 제너럴 셔먼 호에 통역관으로 승선하여 다시 조선으로 떠날 수 있게 되었다.

    제너럴 셔먼호는 대동강을 거슬러 평양부에 이르렀고 평양부 관민들에게 수교를 제안했으나 거절당했다.
    이에 반발하여 만경대 한사정(閑似亭)까지 거슬러 올라와 약탈을 감행했다.
    처음에는 제너럴 셔먼호에 식량이 떨어졌다고 도움을 요청하자 조선 측에서 소고기와 쌀과 채소 등 식량과 배에 필요한 자재를 거저 나눠주기까지 했으나 이들은 장마 비에 불어난 대동강 물을 거슬러 올라 약탈을 감행하였다.
    이에 조선군이 출동하였으나 배에서 가해진 포격에 여러 군졸 및 구경하던 백성들이 죽고 다쳤다.

    조선군도 대응 포격을 했지만 포의 사정거리가 짧은 탓에 효과를 주지는 못했다.
    그래서 평안감사 박규수는 지금이라도 늦지 않으니 물러가라며 중군 이현익을 보냈으나 되려 그를 잡아가두고 통상을 요구했다.
    실록에 따르면 중군이 납치된 것을 본 군졸들과 백성들이 노하여 배를 포위하고 활과 화승총을 쏘아대고 돌을 던지자 제너럴 셔먼 호의 선원들은 두려워 했고, 퇴역 장교인 박춘권이 조각배를 타고 접근해오자 중군 이현익과 부하들은 셔먼 호에서 뛰어내렸고, 이현익은 무사히 박춘권의 배에 올라탔으나 부하들은 익사하고 말았다.

    분노한 군민들이 몰려오는 것을 본 제너럴 셔먼 호는 도망치려고 했으나, 중군을 억류했다 풀어주는 실랑이를 벌이는 동안 대동강 수위가 낮아져 오도가도 못하는 상황에 처했다.
    평안감사 박규수는 밤중에 기름을 뿌린 짚을 가즉 실은 목선들을 가득히 보내서 불을 질렀다.
    결국 배는 버티지 못하고 불탔다.

    그 이후 우리나라에서도 많은 순교자가 생겨났습니다.
    이렇게 엄청난 순교를 당했지만 물리적으로 대응한 사람은 없었습니다.
    이처럼 그리스도인들은 외적으로 전혀 강하지를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교회는 오늘까지 전 세계에 복음이 전해지면서 수많은 사람들에게 복음이 전해졌으며, 사람들에게 가장 강한 종교로 인식되고 있습니다.
    도대체 이렇게 약한 그리스도인들이 왜 이렇게 강하게 인식되며 엄청난 성장을 할 수 있었겠습니까?
    이유는 단 하나, 사랑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가장 강력하게 말씀한 곳이 본문 31-32절입니다.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지 아니하겠느냐?”
    온 우주를 조성하시고 운행하시며 주관하시는 창조주 하나님이 우리 그리스도인을 위하십니다. 하나님의 이 사랑은 하나님을 떠나 죽은 인생들을 살리기 위하여 독생자 예수님까지도 아끼지 않고 속죄 제물로 내놓으셨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여기서 끝나지 않고 하나님께서 지으신 모든 것을 아끼지 않고 주셨습니다. 결국 하나님의 나라까지 하나님의 자녀들을 위하여 내놓으셨습니다. 본문 앞쪽의 16-17절 상반절입니다. “성령이 친히 우리의 영과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언하시나니, 자녀이면 또한 상속자 곧 하나님의 상속자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상속자니…” 이 보다 더 확실하고 강력한 사랑이 또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세상을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우리 그리스도인은 나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확신하고 온전하게 의뢰해야 합니다.

    우리가 담대할 또 하나의 이유는 예수님의 구속의 사랑 때문(로마서 8:33-35)

    누가 능히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을 고발하리요. 의롭다 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누가 정죄하리요. 죽으실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박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그리스도인이 세상에서 담대하게 주님의 일을 행할 수 있는 이유가 세상으로부터 정죄당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배반하고 쫓겨난 사탄과 그 무리들은 끊임없이 그리스도인들을 정죄하고 하나님께 고발합니다.
    그 대표적인 내용이 욥기에 실려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신실한 믿음으로 인정하신 욥을 사탄이 고발했습니다.
    또한 사탄은 여호수아까지도 고발하고 대적했습니다.

    스가랴 3:1
    절입니다.
    “대제사장 여호수아는 여호와의 천사 앞에 섰고 사탄은 그의 오른쪽에 서서 그를 대적하는 것을 여호와께서 내게 보이시니라.”

    이처럼 지금도 사탄과 그의 무리들은 끊임없이 하나님의 백성들을 대적하고 고발합니다.
    뿐만 아니라 세상 사람들도 하나님의 자녀들을 욕하고 대적합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이들의 대적과 고발을 듣지 않으십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대속의 제물 되신 예수 그리스도 믿는 사람들을 의롭다고 여기시기 때문입니다.

    로마서 8:1-2절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얼마나 놀랍습니까?
    우리 그리스도인은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의 사랑 때문에 결코 정죄되지 않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에게는 ‘성령의 법’이 작용을 합니다.
    ‘성령의 법’은 곧 ‘생명’입니다.
    이 성령께서는 하나님의 뜻을 꿰뚫고 계셔서 우리 그리스도인으로 하여금 하나님의 뜻대로 살도록 인도하십니다.
    결국 성령께서는 성도가 하나님의 뜻 안에서 마음껏 자유를 누리도록 하십니다.
    그렇다면 성령의 지배를 받는 그리스도인은 무슨 일이든 해도 된다는 말입니까?
    물론 해도 됩니다.
    그러나 반드시 욕망을 따르는 육신의 일과 성령을 따르는 영의 일을 분별해야 합니다.
    성령의 인도하심은 하나님의 뜻에 굴복하게 하십니다.
    그러나 육신의 일은 세상의 환경과 자신의 욕망을 따르도록 요구합니다.
    이것이 영적인 싸움이며, 이 싸움에서 육신의 욕망에 지게 되면 그 결과는 죽음임을 잊지 않아야 합니다.
    로마서 8:12-14절입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빚진 자로되 육신에게 져서 육신대로 살 것이 아니니라. 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사람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
    성령께서 하나님의 사람들의 마음에 하나님의 법을 깨우쳐 주시며 인도하셔서 하나님의 사랑에서 벗어나지 않도록 하십니다.
    그래서 본문 37절에서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고 하셨습니다.
    성령께서는 어떤 상황에서도 우리 그리스도인을 놓치지 않으십니다.

    지중해에 있는 ‘키프로스’(성경지명은 ‘구브로’) 기지는 군사적으로는 매우 중요한 요충지입니다.
    이 섬만 뺏으면 지중해를 장악할 수 있다고 합니다.
    팔레스타인 해방기구는 키프로스를 장악하기 위하여 공격할 날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마침 날씨가 흐리고 폭우가 쏟아지면서 지척을 분간하기 어렵도록 안개가 낀 날을 택하여 공격을 감행했습니다.
    그들은 잠수정을 타고 해안으로 잠입하고 있었습니다.
    가까이 있는 사람조차도 분간할 수 없도록 어둡고 흐렸습니다.
    아무리 철통같이 수비를 한다고 해도 침투하는 적을 분간하기가 결코 쉽지 않을 그런 날씨였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공격도 제대로 해보지 못하고 사로잡히고 말았습니다.
    그들이 침투하는 바로 코앞에서 키프로스 수비대가 기다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들이 사로잡히고 난 후에야 왜 그렇게 일찍 사로잡혔는지를 알게 되었습니다.
    그 이유는 키프로스 기지에 있는 레이더 때문이었습니다.
    최신형인 그 레이더에는 침투하는 적들의 양말 줄무늬까지 환히 보였다고 합니다.

     지금 군인들은 적외선 장비나 야간 투시경 장비를 사용하면 악천후나 어둠이나 어떤 상황에서도 상대를 환하게 보면서 전투할 수 있습니다.
    하물며 하나님께 가려지는 것들이 있겠습니까?
    하나님은 우리 그리스도인을 정말 끔찍하게 사랑하시며 단 한 수간도 놓치지 않으십니다.
    그러므로 세상을 두려워하지 말고 담대하십시오.
    담대하게 복음을 전하고 담대하게 주어진 일을 수행하십시오.
    그리하여 이 땅에 사는 동안에 하나님께서 주신 사명을 충성되게 감당하여 하나님 나라를 상속 받으시기를 축복합니다.

    마라나-타(μαράνα-θά)

    누구든지 주님을 사랑하지 않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입니다. 마라나 타! (주여, 어서 오소서!)
    고린도전서 16:22(공동번역)

    이 모든 계시를 보증해 주시는 분이 "그렇다. 내가 곧 가겠다."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아멘. 오소서, 주 예수여! 주 예수의 은총이 모든 사람에게 내리기를 빕니다.
    요한계시록 22:20~21(공동번역)

    본래 마라나 타는 초대 교회에서 자주 사용하는 일종의 기도 구절이었다.
    이를 헬라어로 음역하면 μαράνα θά 가 되고,
    영어로 옮기면 maranatha가 된다.

    일부 학자들은 '마란 아타'로 오인하여 '주님이 오셨다'라고 해석하기도 한다.

    "마라나타(Maranatha)", "마라나 타(maranâ thâ')", "마란 아타( maran 'athâ')"의 뜻과 기원

    Maranatha (either מרנא תא: maranâ thâ' or מרן אתא: maran 'athâ' ) is a two-word Aramaic formula occurring only once in the New Testament (see Aramaic of Jesus) and also in the Didache, which is part of the Apostolic Fathers' collection. It is transliterated into Greek letters rather than translated and, given the nature of early manuscripts, the lexical difficulty lies in determining just which two Aramaic words comprise the single Greek expression, found at the end of Paul's First Epistle to the Corinthians (1 Cor 16:22).

    마라나타(either מרנא תא: maranâ thâ' or מרן אתא: maran 'athâ'  마라나 타 혹은 마란 아타)는 두 단어의 아람어식 어구로는 ( 예수님의 아람어를 참조하라) 신약 성경에서 그리고 디다케에서 단 한 번 사용된 것을 ‘사도의 아버지’ 수집(collection) 일부에서 볼 수 있다. 이것은 초기 원고의 성격, 두 단어의 아람어가 단 하나의 그리스어 표현을 포함하는 결정에 어휘의 어려움이 있어 그리스어로 번역되어지기보다 그리스 문자로 바뀌어(음역되어) 졌고 , 고린도전서 16: 22절 바울 서신의 끝머리에 표현되었음을 찾을 수 있다.(고전 16: 22)

    If one chooses to split the two words as מרנא תא (maranâ thâ), a vocative concept with an imperative verb, then it can be translated as a command to the Lord to come. on the other hand, if one decides that the two words מרן אתא (maran 'athâ), a possessive "Our Lord" and a perfect/preterite verb "has come," are actually more warranted, then it would be seen as a credal expression. This interpretation, "Our Lord has come," is supported by what appears to be an equivalent of this in the early creed acclamation found in the biblical books of Romans 10:9 and 1 Corinthians 12:3, "Jesus is Lord."

    만약, 누군가 두 단어로 (마라나 타) 띄어 쓰도록 선택한다면, 필수 명령형 동사 호격 개념으로는 “주여 오시옵소서”로 번역할 수 있다.
    다른 한 편, 누군가 소유격으로 번역하고저 할 때는 “우리의 주님”이 가능하며 완료형/과거 동사의 표현은 ”Has come, 오셨다”가 사실상 더 보장되는데 오래전 신조(교의)적 표현이라고 할 수 있고, 이 번역은 성경 로마서 10:9과 고전 12:3에 나타나는 "예수는 주시라"는 교회사에서 일찍이 신조(교의) 승인(허락)을 토대로 이 해석 방법의 타당성을 지원받기도 한다.  

    In general, the recent interpretation has been to select the command option ("Come, Lord!"), changing older decisions to follow the preterite option ("Our Lord has come") as found in the ancient Aramaic Peshitta, in the Latin Clementine Vulgate, in the Greek Byzantine texts, Textus Receptus, critical Greek
    texts like Westcott and Hort, Tischendorf, Cambridge, etc., and in the English translations like the King James Version, the Finnish Raamattu, etc. one reason the change from the previous scholarly view has occurred is that the P46 papyrus (ca. A.D. 200) divides it as μαρανα θα ("marana tha").

    일반적으로, 최근의 해석은 고대 아람어 페쉬타에서, 라틴 크레멘타인 벌기트 성경에서, 그리스 비잔틴 텍스트들에서 발견되어진 것처럼 “우리 주님이 오셨다”의 이전 결정을 변경, “오소서, 주님!” 명령형으로 선택했다.
    그리스 비잔틴 교재들, 까다로운 웨스트코트와 같은 그리스 텍스트들과 호르트, 라틴 클레멘타인 벌기트 성경, 호르트비스첸도르프, 캐임브리지 등등, 그리고 킹 제임스 버젼과 같은 영어 번역들, 핀란드 라아마투 등등에서 이전 학자들의 견해를 바꾼 단 하나의 이유는 중요한 그리스어 교재 학술 보기 P46 파피루스 (ca. A.D. 200) 같은 곳에 “마라나 타”로 띄어 분리하는 일이 나타났던 것이다.

    The NRSV of 1 Cor 16:22 translates the expression as: "Our Lord, come!" but notes that it could also be translated as: "Our Lord has come"; the NIV translates: "Come, O Lord"; the NAB notes:

    고전 16: 22을 “NRSV"에는 "우리 주여, 오시옵소서!”로 표현되었다. 
    그러나 이 메모는 역시 "우리 주께서 임하셨다”로 번역될 수도 있고; NIV 에는 "오시옵소서, 오 주여”로 번역되었다; NAB 메모:

    "As understood here ("O Lord, come!"), it is a prayer for the early return of Christ. If the Aramaic words are divided differently (Maran atha, "Our Lord has come"), it becomes a credal declaration. The former interpretation is supported by what appears to be a Greek equivalent of this acclamation in Book of Revelation 22:20 "Amen. Come, Lord Jesus!""

    “여기서 (“O Lord, come”)로 이해되었는데, 이것은 그리스도의 재림이 속히 있으시기를 구하는 하나의 기도문이다. 만약 아람어식 단어를 다른 형태로 나누면 "우리 주님이 오셨다(임재하셨다)”이며, 이것은 신조(교의)로 선포되었다. 이전의 번역은 그리스 어의 계시록 22: 20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와 동등한 타당성을 지원받는다.                  

    The 1985 New Jerusalem Bible translates 1 Cor 16:22, "If there is anyone who does not love the Lord, a curse on such a one. Maran atha." In the context of First Corinthians, understanding the Greek "maranatha" as Aramaic "Maran atha" in the preterits sense would provide substantiation for the preceding anathema. That is, one who does not love the Lord is accursed because our Lord has ascended and come unto his throne (e.g., Dan 7:13) and wields power to implement such a curse. It would also substantiate the following prayer for grace from the ascended Lord Jesus, who has come to his throne and then sends the Holy Spirit.

    1985년 새 예루살렘 성경은 고전16:22을 "만일 누구든지 주를 사랑하지 아니하거든 저주를 받을지어다, Maran atha"로 번역한다. 고린도전서의 문맥으로 보아서, 과거의 판단력 안에서 그리스 사람들은 "maranatha"를 아람어 "Maran atha"로 이해하고 있는 것은 앞에 말한 저주에 대한 입증을 제공할 것이다. 즉 주님의 승천과 그의 보좌 (단 7: 13)를 구현하는 것 그리고 주님을 사랑하지 않는 자에게 무서운 저주를 하는 도구로 사용하는 묘한 힘이 있다. 그것은 또한 그의 왕위와 승천하신 주 예수로부터 오는 은혜와 임하실 그분의 보좌, 그리고 거룩한 성령을 보내어 주실 것을 구하는 기도이기도 하다.


    담대하라(하자크.  châzaq) חָזַק 스트롱번호 2388

    1. 단단히 매다.  2. 굳게 유지하다.  3. 전치사 לְ가 수반되는 경우
    발음 [ châzaq ]
    구약 성경  / 293회 사용


    너는 담대하라(Be strong)

    우리가 우리 백성과 우리 하나님의 성읍들을 위하여 담대히 하자 

    - 요압은 여기서 이스라엘의 성읍들을 '하나님의 성읍들'(the cities of our God)이라고 말하면서 군사들에게 담대히 하자고 권하고 있다. 이러한 요압의 권면에서 우리는 이스라엘의 모든 기업이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확신한 그의 믿음을 발견할 수 있다. 

    이와같이 이스라엘의 성읍을 위하여 싸우는 것은 곧 하나님께서 주신 기업을 지키는 명분있는 싸움이므로 이 전투에서 최선을 다하자고 요압은 권하고 있는 것이다. 

    결국 담대하게 된 요압의 군사들은 명분없는 싸움에 임하고 있는 아람의 용병들보다 사기 면에서 훨씬 앞서게 되었다.

    여호와께서 선히 여기시는 대로 행하시기를 원하노라

    - 하나님의 성읍이 죄악된 이방인의 손에 들어가지 않고 지켜지는 것이 하나님의 선(善)이다.
    따라서 이러한 요압의 말은 하나님의 선하신 뜻대로 승리를 확신하는 말이다(삼하 10:12).
    한편, 본문에 언급된 '선히 여기시는 대로'에 해당되는 히브리어는 '하토브 베에나우'이다.
    그런데 이를 문자적으로 직역하면 '주의 눈에 선한 것을'이라는 말이다.
    이는 주님의 눈에 선해 보이는 것이 곧 완전히 선한 것이라는 의미로 여호와 중심의 사상이 강력히 내포된 구절이다.
    이와같이 참으로 하나님만이 선악의 유일한 기준인 것이다(시 25:8; 33:5; 나 1:7; 마 19:17; 롬 2:4).


    예수님은 이제 마지막 승부가 시작되는 시점에서 제자들에게 마지막 당부를 하신다. 누가 봐도 예수님의 완패, 참패 같은 끔찍한 십자가를 앞두고 있다. 그런데 예수님은 사람들의 예상과는 전혀 다른 말씀을 하신다. “이것을 너희에게 이르는 것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33절), ‘내가 이겼으니 담대하라’,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도대체 왜 이렇게 말씀하셨을까?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니

    ‘담대하라’는 표현은 구약에 9번, 신약에 2번, 11번 나오고, ‘담대하여’가 6번, ‘담대히’가 24번까지 합하면 총 41번 나온다. 가장 먼저 나오는 건 민수기 13장 20절이지만 제일 인상깊은 것은 모세와 여호수아가 이 명령을 꽉 붙들었다는 것이다.

    “너희는 강하고 담대하라 두려워하지 말라 그들 앞에서 떨지 말라 이는 네 하나님 여호와 그가 너와 함께 가시며 결코 너를 떠나지 아니하시며 버리지 아니하실 것임이라”(신31:6) 바로 다음 절에 보면 모세가 여호수아를 불러 온 이스라엘의 목전에서 “너는 강하고 담대하라 너는 이 백성을 거느리고 여호와께서 그들의 조상에게 주리라고 맹세하신 땅에 들어가서 그들에게 그 땅을 차지하게 하라”고 한다.

    40년을 서포트 역할만 하던 여호수아를 향한 모세의 명령이 아니라 이건 하나님의 명령이다. 신명기에 보면 “여호와께서 또 눈의 아들 여호수아에게 명령하여 이르시되 너는 이스라엘 자손들을 인도하여 내가 그들에게 맹세한 땅으로 들어가게 하리니 강하고 담대하라 내가 너와 함께 하리라”(신31:23). 이 명령이 여호수아서에서도 강조된다. “강하고 담대하라 너는 내가 그들의 조상에게 맹세하여 그들에게 주리라 한 땅을 이 백성에게 차지하게 하리라”(수1:6), “오직 강하고 극히 담대하여 나의 종 모세가 네게 명령한 그 율법을 다 지켜 행하고 우로나 좌로나 치우치지 말라 그리하면 어디로 가든지 형통하리니”(수1:7), “내가 네게 명령한 것이 아니냐 강하고 담대하라 두려워하지 말며 놀라지 말라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너와 함께 하느니라”(수1:9).

    광야 시대의 마인드를 버리고 새로운 마인드가 필요하다는 말씀인데 말씀을 잘 보면 “담대하라”는 명령은 대체로 “하나님이 함께하신다”는 약속의 말씀과 짝을 이룬다. “내가 함께하겠다”는 임마누엘의 약속, 성경에 나오는 약속 중 가장 많이 나오는 약속이다. “내가 함께할 것이니 두려워하지 말라, 놀라지 말라, 담대하라” 그러신다.

    풍요로운 도시 문화를 이루었던 가나안의 7족속, 철병거로 무장한 거인들, 요즘 말로 하면 핵무기로 무장한 선진국 같은 그들이 광야에서만 40년을 산 이스라엘 백성이 오면 쳐서 멸망시키겠다고 벼르는 상황이다. 그들을 돌파할 이스라엘 백성들은 군사 훈련 한 번 받은 적이 없는 오합지졸, 좌절감을 느낄 수밖에 없는 상황이지만 여호수아 1장만 해도 3번이나 “강하고 담대하라”고 한다. “주저앉을 이유 없다, 할 수 있다”는 말씀이다.

    얼마나 확신했을까? 여호수아도 같은 말을 한다. “여호수아가 그들에게 이르되 두려워하지 말며 놀라지 말고 강하고 담대하라 너희가 맞서서 싸우는 모든 대적에게 여호와께서 다 이와 같이 하시리라”(수10:25). 하나님이 하신 말씀을 모세가 하고, 모세가 한 말을 여호수아가 똑같이 한다. 이게 바로 ‘제자화 사역’이고, 약속의 땅 가나안을 밟게 된 비결이다. 우리도 이래야 한다. 모처럼 경마장이 쉬는 날, 말들이 모여 말하는 유형에 따라 말들이 싫어하는 인간상이 무엇인가 여론조사를 했다는 우스갯소리가 있다. 동상은 말 바꾸는 인간, 말 머리 돌리는 인간이고, 은상은 이 말 저 말 왔다 갔다 하는 인간, 말허리 자르는 인간이며 금상은 말꼬리 잡고 끈질기게 물고 늘어지는 인간이었단다. 말이 씨가 된다. 말씀으로 무장하고 말씀을 나누는 습관을 가져야 한다.

    “담대하라”는 명령은 바울에게도 임했다. 예루살렘에서 체포되어 미결수로 로마 군영에 갇혀있는데 로마로 가는 길은 보이지 않고 유대 종교지도자들의 음모만 점점 다가온다고 느낄 때, 유대인들이 죽이겠다고 난리칠 때다. 그때 함께 주신 말씀이 “그 날 밤에 주께서 바울 곁에 서서 이르시되 담대하라 네가 예루살렘에서 나의 일을 증언한 것 같이 로마에서도 증언하여야 하리라”였다. 2년 후에 로마로 가지만 할 일이 있다는 것, 사명이 있고 ‘내가 함께하니 담대하라’는 말씀이다.

    그리고 본문 33절에서도 “담대하라”고 하셨는데 바로 앞 절에 보면 “보라 너희가 다 각각 제 곳으로 흩어지고 나를 혼자 둘 때가 오나니 벌써 왔도다 그러나 내가 혼자 있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나와 함께 계시느니라”(요16:32), 제자들이 흩어져 혼자 있게 되실 때였지만 혼자가 아니라 아버지께서 함께하신다는 말씀, 제자들의 배신을 미리 알고 계셨다는 뜻이다.

    혹시 배신당한 적 있나? 당해본 자만 아는 고통이다. 믿은 만큼 배신의 고통은 큰 것, 예수님도 3년 이상 동고동락한 제자들에게 배신을 당하셨기에 그 고통은 대단했을 것, 그런데 감내하신다. 하나님께서 자신과 함께하심을 믿었기 때문이다. 이거다. 임마누엘의 확신이 배신의 고통을 이기게 한다. 고통은 잠깐이지만 임마누엘은 영원한 것, 혹시 배신으로 인해 고통 중에 있더라도 그 고통보다 더 큰 임마누엘의 확신을 가져야 한다. 임마누엘의 약속은 동행의 약속, 관념이 아니라 체험이다. “네가 물 가운데로 지날 때에 내가 함께할 것이라 강을 건널 때에 물이 너를 침몰하지 못할 것이며 네가 불 가운데로 지날 때에 타지도 아니할 것이요 불꽃이 너를 사르지도 못하리니”(사43:2), 임마누엘의 확신이 이기는 힘이다.

    응답하리니

    “지금까지는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무것도 구하지 아니하였으나 구하라 그리하면 받으리니 너희 기쁨이 충만하리라”(24절), 예수님은 “내 이름으로 구하면 받을 것, 그리고 기쁨이 충만할 것”이라고 하셨다. “구하면 받을 것”이라는 말씀을 반복하며 예수님은 고별설교에서 기도가 강조하신다. “너희가 내 이름으로 무엇을 구하든지 내가 행하리니”(14:13) “내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내게 구하면 내가 행하리라”(14:14),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15:7),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무엇이든지 아버지께 구하는 것을 내 이름으로 주시리라 지금까지는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무것도 구하지 아니하였으나 구하라 그리하면 받으리니”(16:23-24).

    응답받는 이유도 밝히셨다. “이는 너희가 나를 사랑하고 또 나를 하나님께로서 온 줄 믿은 고로 아버지께서 친히 너희를 사랑하심이니라”(27절), 먼저 ‘너희가 나를 사랑하고’라고 하셨는데 사랑하면 듣는다는 말씀이다. 경험해서 알지 않나? 사랑하면 들린다. 그리고 사랑하면 응답한다. 그리고 ‘나를 하나님께로서 온 줄로 믿은 고로’라고 하셨는데, 믿으면 응답있다는 말씀이다. 작은 믿음이라도 괜찮다. 하나님은 믿음을 보이면 응답하신다.

    예수님은 14장부터 계속 기도를 말씀하면서 ‘내 이름으로 구하라, 내 이름으로 주시리라’를 강조하셨다. 이건 신앙생활에서 너무도 중요한 기도의 원리다. 마태복음에서도 예수님은 “구하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리하면 찾아낼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구하는 이마다 받을 것이요 찾는 이는 찾아낼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이니라”(마7:7-8)라고 하셨다. 그래서 히브리서 기자는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히4:16)이라고 했다. 성경의 약속을 믿으라는 말씀이다.

    그리고 예수님은 “구하라 그리하면 받으리니 너희 기쁨이 충만하리라”, 응답과 더불어 기쁨이 충만해질 것이라고 하셨다(24절). 여기서 ‘충만하리라’는 ‘플레로오’(πληρόω)의 완료 분사 수동태, 수동태는 기도의 결과로 오는 충만한 기쁨이 스스로 만들어내는 인위적인 것이 아니라 위로부터 주어지는 신적인 것임을 보여준다. 응답받는 기쁨, 충만한 기쁨, 이건 약속이고 축복이다.

    언제든지 응답하실 준비가 되어 있는 분, 응답하길 좋아하시는 분, 그래서 바울도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고 했다(빌4:6). 중요한 것은 확신이다. 확신만 분명하면 못할 일이 없기 때문이다. 예수님이 친히 말씀하셨다.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함이 없느니라”(막9:23). 어떻게 조지 뮬러는 평생 5만 번 기도 응답받고 ‘기도의 아버지’라고 불렸을까? 종교개혁자 마르틴 루터는 왜 하루 세 시간을 기도했을까? 기도하면 응답받고, 기도해야 마귀와의 싸움에서 이길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말씀대로 담대하라. 하나님이 응답하실 것이다.

    내가 세상을 이겼으니

    “이것을 너희에게 이르는 것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33절), 닥칠 일들이 엄청나다. 제자의 배신, 체포, 구금, 심문, 폭행, 조롱, 모함, 무고, 흑색선전, 단죄, 그리고 처형, 힘 가진 자들의 대규모 여론몰이와 속전속결식 공세 앞에 한 차례의 저항도 없이 힘없이 십자가에 달려 짧은 생을 마감하시기까지 숨 가쁘게 일어날 일들, 감당하기 힘든 일들이지만 담대하라고 하신다. 그 이유는 “내가 세상을 이기었으니”, 이기셨다는 거다.

    십자가를 앞둔 목요일 밤, 시시각각 죽음의 그림자가 엄습한다. 세상은 죽이려고 음모를 꾸미고 있다. 군병들이 예수님을 체포하기 위해서 작전계획을 다 마치고 출동 명령만 기다리고 있을 시간, 이에 맞서 예수님을 보호해야 될 제자들은 근심에 쌓여 있다. 한숨만 쉰다. 불과 몇 시간 후의 모습을 말씀하신다. “너희가 다 각각 제 곳으로 흩어지고 나를 혼자 둘 때가 오나니 벌써 왔도다”(32절). 제자들은 예수님의 예고대로 다 달아난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저주하기까지 한다. 예수님 또한 십자가에 못받혀 죽임 당하신다. 세상의 시각으로 보면 끝이다. 예수는 죽고. 예수의 운동은 실패로 끝난다.

    그런데 예수님은 “내가 이겼다”고 하신다. ‘이겼다’는 헬라어 ‘니카오’(νικάω)는 우리에게 익숙한 단어다. 승리의 여신 ‘니케’와 상표 ‘나이키’ 때문이다. 요한일서에서는 여러 번 승리자 되신 예수님을 말한다. “청년들아 내가 너희에게 쓰는 것은 너희가 악한 자를 이기었음이라”(요일2:13) “청년들아 내가 너희에게 쓴 것은 너희가 강하고 하나님의 말씀이 너희 안에 거하시며 너희가 흉악한 자를 이기었음이라”(요일2:14), “자녀들아 너희는 하나님께 속하였고 또 그들을 이기었나니 이는 너희 안에 계신 이가 세상에 있는 자보다 크심이라”(요일4:4).

    급기야 요한은 선언한다. “무릇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마다 세상을 이기느니라 세상을 이기는 승리는 이것이니 우리의 믿음이니라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는 자가 아니면 세상을 이기는 자가 누구냐”(요일5:4-5), 예수님이 니케(νίκη), 나이키(nike), 승리자이시다. 예수님이 이긴 세상은 그냥 세상이라 불리거나 흉악한 자, 악한 자라 불린다. ‘이기었느니라’는 시제도 의미가 있다. 헬라어에서 완료형, 과거에 어떤 사건이 일어나 현재에 영향을 미치는 상태를 서술한다. 예수님의 승리는 앞으로 있을 부활 이후가 아니라 이미 일어났다. 그 승리는 성육신 사건에서부터 시작되었다.

    십자가의 고난을 앞두고 있는 이 시점에 예수님은 이미 승리자이시다. 왜냐하면 십자가가 인간사에 있어서 가장 밑으로 낮은 곳으로 가는 것이지만 그 십자가가 하늘로 올라가는 길이기 때문이다. 세상적인 관점에서 보면 실패요 수치요 형벌이지만 이 길이 승리의 길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선언하셨다. “내가 세상을 이겼노라”, 십자가의 길이 부활의 길이요 만왕의 왕이 되는 영광의 길, 그래서 피하지 않으셨다.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피하실 수 있지만 그 어떤 시도도 하시지 않고 군중들과 지도층과 로마정권과 그 군대와 맞서셨다.

    예수님은 지금도 성령의 형태로 우리와 함께하시기에 우리 또한 승리자다. “무릇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마다 세상을 이기느니라” 승리자, 그렇다면 “피하라, 타협하라, 모른 척하라, 부인하라, 기억나지 않는다 하라, 아부하라, 너도 돈을 뿌리고 뇌물도 쓰라, 사서 고생하지 말라, 도망가라” 등 내 안에서 일어나는 온갖 유혹과 시험을 물리쳐야 한다.

    계시록에 보면 요한은 ‘이기는 자’를 강조하고 또 강조한다. 에베소 교회를 향해서도 그러셨고(계2:7), 서머나 교회를 향해서도 그러셨고(계2:11), 버가모 교회를 향해서도 그러셨고(계2:17), 두아디라 교회를 향해서도 그러셨고(계2:26), 사데 교회를 향해서도 그러셨고(계3:5), 빌라델비라 교회를 향해서도 그러셨고(계3:12), 라오디게아교회를 향해서도 그러셨다(계3:21). 요한은 소아시아 일곱교회를 향한 성령의 말씀을 쓸 때 한 마디로 ‘이긴 자’에 꽂힌 사람처럼 “이기는 그에게는...”을 강조하며 썼다.

    매일 아침 일어나는 아프리카의 영양(antelope)은 가장 빠른 사자(lion)보다 더 빨리 달리지 않으면 먹혀 죽는다는 것을 잘 안다. 매일 아침 일어나는 사자도 가장 느린 영양보다 더 빨리 달리지 않으면 굶어 죽는다는 것을 잘 안다. 우리가 영양이건 사자이건, 그것은 중요하지 않다. 해가 뜨면 그저 달리면 된다. 주님이 함께하시기 때문이다. “담대하라.”



    너는 담대하라 우리가 우리 백성과 우리 하나님의 성읍들을 위하여 담대히 하자 여호와께서 선히 여기시는 대로 행하시기를 원하노라

    삼하 10:12

     

    사람이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생각하시며 인자가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돌보시나이까

    시편 8:4

     

     

    ‘주께서 선히 여기시는 대로 행하시기를.’ 이를 바랄 때 우리는 담대할 수 있다. 즉 어떠하든 주를 의뢰하기 때문이다. “그가 나를 죽이시리니 내가 희망이 없노라 그러나 그의 앞에서 내 행위를 아뢰리라(욥 13:15).” 누가 답을 듣고 싶어 하는 어느 질문지에 ‘개신교 목사로서’ 기꺼이 답을 해주었다. 그러느라 나는 종일 교회에 있었고, 글방에 있는 시간이 싫지 않았다. 가만 보면 내가 할 수 있는 게 아니다.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할 수 있을 뿐이다.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빌 4:13).” 성경을 그 중심에 두고 있음으로 흔들리지 않는다. 애매할 게 없다. 단호하고 단순할 뿐이다. 복잡하지 않다. 그리 말해주었다. 오늘 처한 이 모든 현실도 그러하다. 주께서 선히 여기시는 대로 행하실 것이다. 어떠하든, 이를 붙들고 바랄뿐이다.

     

    생각은 명료하고 삶은 단순하였다. 힘들면 힘든 거지 힘든 걸 안 힘든 것처럼 굴 것도 없고, 다만 그 가운데서 “능히 너희를 보호하사 거침이 없게 하시고 너희로 그 영광 앞에 흠이 없이 기쁨으로 서게 하실 이 곧 우리 구주 홀로 하나이신 하나님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광과 위엄과 권력과 권세가 영원 전부터 이제와 영원토록 있을지어다 아멘(유 1:24-25).” 곧 오늘의 나로 하여금 주 앞에서 거침이 없게 하심인데, 오늘 본문은 이에 담대할 것을 말씀하신다. “너는 담대하라 우리가 우리 백성과 우리 하나님의 성읍들을 위하여 담대히 하자 여호와께서 선히 여기시는 대로 행하시기를 원하노라(삼하 10:12).” 담대할 수 있는 것은 이 모든 일이 하나님의 선하신 뜻대로 이루어지는 것임을 신뢰하는 것이다. 설령 그 결과가 내가 원하는 방향이 아니더라도 하나님은 선하시다.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롬 12:2).” 주어진 한 날의 삶에서 나의 날들이 더욱 단순하고 담백하기를 기도한다. 너무 생각이 많다. 유혹하는 것들도 많다. 한데 이는 우리 마음의 일이지, 세상은 본래 그러했다. 마치 “가시떨기에 뿌려졌다는 것은 말씀을 들으나 세상의 염려와 재물의 유혹에 말씀이 막혀 결실하지 못하는 자요(마 13:22).” 곧 “세상의 염려와 재물의 유혹과 기타 욕심이 들어와 말씀을 막아 결실하지 못하게 되는 자요(막 4:19).” 그러니 이를 어쩔 것인가? 나는 누가 어떤 질문지를 주며 답을 부탁하였을 때 그저 마다할 생각이었다. 그러면서도 틈틈이 생각을 적고 그 근거를 말씀에서 찾아가면서 나의 확고한 중심이 무엇인지 알 수 있었다. 다들 그 마음에 따라 산다. ‘길가 밭’ 같거나 ‘돌짝 밭’ 같으면 영락없다. 이는 현실의 문제가 아니었다.

     

    그래서 성경은 엄연하였다. “오직 오늘이라 일컫는 동안에 매일 피차 권면하여 너희 중에 누구든지 죄의 유혹으로 완고하게 되지 않도록 하라(히 3:13).” 다른 때의 이야기가 아니고, 남 이야기도 아니고, ‘오직 오늘이라 일컫는 동안’의 일이다. 은혜는 그때마다 필요하다. 묵은 것으로 사는 게 아니다. 문득 드는 생각이 내가 누군가의 인생에서 어느 한 시점으로 잊히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나는 누구도 구원할 수 없다. 구원 받게 할 수도 없다. 다만 그, ‘오늘이라 일컫는 동안에’ 저는 나에게 나는 저에게 소요되는 것이다. 그 모든 일은 우리가 시작한 게 아니었다. “너희 안에서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는 확신하노라(빌 1:6).” 나는 이처럼 아침마다 묵상을 글로 쓰는 일을 사랑한다. 또한 누구와 어떤 일로 말하거나 생각할 때 성경을 떠올릴 수 있는 것에 대해 참으로 귀히 여긴다.

     

    다 저녁께 손위처남이 조카와 함께 어머니를 뵈러 왔다. 이런저런 대화를 나눌 때, 두서없는 말 가운데서도 우리의 중심은 보인다. 하다못해 그 사람의 ‘오늘이라 일컫는 동안’의 영적인 상태나 모습이 어떠한가를 알 수 있겠다. 일상은 그저 스쳐서 사라지는 게 아니다. 내남없이 흘러가는 것 같으나 그것이 모여 대해(大海)를 이루듯 이는 곧 교회다. “자기 앞에 영광스러운 교회로 세우사 티나 주름 잡힌 것이나 이런 것들이 없이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려 하심이라(엡 5:27).” 각각 그 개개의 생이 모여,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려 하심’이었다. 서로의 ‘티나 주름 잡힌 것이나 이런 것들이 없이’ 한데 모여 주를 바라며 그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시려고, “이는 그가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는 것이라(엡 1:6).”

     

    나는 왁자지껄 오가는 말 속에서 문득 그런 생각을 하였다. 우리가 주의 이름을 부르고 주께 기도하며 아뢸 수 있는 것은 주의 영이 우리 가운데 함께 하심의 증거다. 성령으로만 가능하다. 우리 안에 소망을 두신 이유다. 그러므로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심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해 하는가 너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 그가 나타나 도우심으로 말미암아 내가 여전히 찬송하리로다(시 42:5).” 누구의 부탁으로 여러 질문에 답을 하다 나는 오늘이라 일컫는 동안 나에게 향하신 주의 거룩하시고 인자하신 은혜를 되새길 수 있었다. 전에 같으면 귓등으로도 듣지 않던 화두다. 또는 나의 완고함으로 더없이 덧대어 답 없는 답을 끊임없이 요구하였을 것이다. 그래서 나는 누구에게 덧붙여 말하였다.

     

    ‘이와 같은 질문에 시달리는 것은 마귀에게 틈을 주는 일이다. “마귀에게 틈을 주지 말라(엡 4:27).” 왜냐하면 저는 우리의 마음을 완고하게 하기 위해 숱한 질문을 갖게 하고, 괜한 일에 참견하게 하며,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을 생각을 품게 한다. 그래서 성경은 이를 경계한다. 정작 저들은 답을 원하는 게 아니라 논쟁을 원한다. 그러므로 자신의 완고한 마음을 더할 뿐이다. 이에 “누가 철학과 헛된 속임수로 너희를 사로잡을까 주의하라 이것은 사람의 전통과 세상의 초등학문을 따름이요 그리스도를 따름이 아니니라(골 2:8).” 우리는 다만 우리 스스로도 증명할 수 없는, 설명할 수 없는 믿음을 가지고 사는 사람들이다. 그 믿음은 우리가 취한 게 아니다. 그리 더하신 주의 은혜다. 값없이 주신 선물이다. 괜한 질문에 일일이 답하지 않는 것 역시 우리에게 필요한 답이 된다.’

     

    굳이 답을 하지 않아도 이미 답이 되는 답이 있다. 빌라도가 물었다. 진리가 무엇인가? 그러나 예수님은 답하지 않으셨다. 저는 진리를 앞에 두고, 이미 다 알면서도, 실은 굳이 답을 바라고 했던 질문도 아닌 거였다. 우린 이와 같이 헛된 질문들 앞에서 얼마나 자주 시달리곤 하는지. 남이 하는 것도 그렇지만 스스로 되풀이하는 질문도 그저 피곤하기만 할 따름이다. 본래 질문이란 몰라서 하는 것이기 보다 동조를 구하는 것이다. 원하는 답은 이미 손에 쥐고 그 답에 합하면 동의하고 부합하면 적대시하는 것이다. 그래서 성경은 ‘누가 철학과 헛된 속임수로 너희를 사로잡을까 주의하라.’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우리 지적인 허영이 또는 갈급한 호기심이 실은 그리 선하지 못하다. 종종 누가 와서 퉁명스럽게 묻는다. 교회 세습에 대해 목사님은 어찌 생각하십니까? 동성애에 대해, 이혼에 대해, 돈이 많은 부자로 사는 것에 대해 목사님 생각은 무엇입니까? 할 때 저들은 이미 자기 할 말을 입에 가득 머금고 있었다.

     

    그러니 뭐라 한들! 그저 좋으실 대로 하시라. 다만 우리는, “하나님을 자기의 도움으로 삼으며 여호와 자기 하나님에게 자기의 소망을 두는 자는 복이 있도다(시 146:5).” 조금은 새삼스러웠고 새로웠다. 나의 확고함이 두려우면서도 감사하였다. 구구절절 이어지던 말을 덜어내고 성경의 근거를 놓지 않았다. 형님과 어머니가, 아내와 형님이 서로서로 주고받는 대화에서 우리의 중심이 하나님을 모시고 살 수 있는 것이 신비하였다. 종종 지난날을 회상하며 ‘그땐 그랬지’ 하는 말끝마다 나는 아찔하였다. 그처럼 예전의 내 모습을 스스로 미워할 수 있는 게 또한 복이었다. “그 때에 너희가 너희 악한 길과 너희 좋지 못한 행위를 기억하고 너희 모든 죄악과 가증한 일로 말미암아 스스로 밉게 보리라(겔 36:31).”

     

    이에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내가 이렇게 행함은 너희를 위함이 아닌 줄을 너희가 알리라 이스라엘 족속아 너희 행위로 말미암아 부끄러워하고 한탄할지어다(32).” 이 모든 게 날 위한 게 아니라 주의 거룩하신 이름을 위한 것이라는 데 나는 이제 안도한다. “그러므로 너는 이스라엘 족속에게 이르기를 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이스라엘 족속아 내가 이렇게 행함은 너희를 위함이 아니요 너희가 들어간 그 여러 나라에서 더럽힌 나의 거룩한 이름을 위함이라(22).” 조금은 의아한 게 전에 같으면 반감이 들 말씀인데 이제는 그 중심을 붙들게 하는 것이었으니, 스스로 이와 같은 변화를 눈여겨 볼 수 있는 것이 또한 은혜이었다. 종종 누구를 생각하다 또 어떤 이를 그리워하다 그만둔다. 나는 저의 어느 한 지점으로 족하다. 다만 우리의 훗날에 주 앞에서 함께 기뻐할 수 있기를.

     

    고작 그런 정도의 “사람이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생각하시며 인자가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돌보시나이까(시 8:4).”문득 돌이켜 보면 이 모든 게 얼마나 아름다운지! “여호와 우리 주여 주의 이름이 온 땅에 어찌 그리 아름다운지요 주의 영광이 하늘을 덮었나이다(1).” 그러므로 “여호와 우리 주여 주의 이름이 온 땅에 어찌 그리 아름다운지요(9).” 아멘.

     






    역대상 13장 요약

    기럇여아림에 잇는 하나님의 궤를 가지고 왔으며 가져온 하나님의 궤를 오벧에돔의 집으로 옮겼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역대상 14장 요약

    두로왕 하람이 궁전건축을 위해서 인부들과 나무를 보내주었고,다윗은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인하여 블레셋을 물리쳣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역대상 15장 요약

    다윗이 언약궤를 옮기기 위해서 아론과 레위 자손들을 불러 모았으며,하나님의 궤를 옮기기 위해서 레위인들에게 여러 임무를 부여하였고, 하나님의 궤를 예루살렘으로 옮겼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역대상 16장 요약

    궤를 장막으로 옮긴후에 백성들이 여호와 앞에서 찬양하였고 다윗이 감사의 찬양을 하나님께 올리고 언약궤 앞에서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들을 임명하였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역대상 16:10
    그 성호를 자랑하라 무릇 여호와를 구하는 자는 마음이 즐거울찌로다

    역대하 11:16
    이스라엘 모든 지파 중에 마음을 오로지하여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를 구하는 자들이 레위 사람을 따라 예루살렘에 이르러 그 열조의 하나님 여호와께 제사하고자 한지라.

    에스라 6:21
    사로잡혔다가 돌아온 이스라엘 자손과 무릇 스스로 구별하여 자기 땅 이방 사람의 더러운 것을 버리고 이스라엘 무리에게 속하여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를 구하는 자가 다 먹고.

    시편 105:3
    그 성호를 자랑하라 무릇 여호와를 구하는 자는 마음이 즐거울찌로다.

    시편 119:2
    여호와의 증거를 지키고 전심으로 여호와를 구하는 자가 복이 있도다




    5월 6일(화) 역대상 13-16장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여호와를 구하는 자(16:10)

    그 성호를 자랑하라 무릇 여호와를 구하는 자는 마음이 즐거울찌로다.
    Glory in his holy name; let the hearts of those who seek the LORD rejoice.

    11. 여호와와 그 능력을 구할찌어다 그 얼굴을 항상 구할찌어다.
    Look to the LORD and his strength; seek his face always.

    여호와를 구하는 것은 그의 임재를 구하는 것입니다.
    히브리인의 사고는 하나님의 임재를 하나님의 얼굴이라고 표현합니다.
    그러므로 "여호와 그 능력을 구할찌어다 그 얼굴을 항상 구할찌어다." 라고 합니다(11절).

    여호와의 얼굴 즉 은혜를 구하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첫째는 하나님의 능력을 기다리는 것

    사람은 누구나 제한된 조건에서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나를 제한시키는 것 때문에 전능하신 하나님의 도움을 기다리며 구합니다.
    비록 사람마다 그 제한된 것이 다를지라도 그것을 해결할 수 있는 능력이 여호와 하나님께 있다는 것을 알고 믿기 때문입니다.

    둘째는 하나님의 질서를 따르려는 것

    제한 된 것을 해결한 후에 내 마음대로 내 멋대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내게 은혜를 베풀어주신 하나님의 말씀따라 순종하는 것이 바람직한 신앙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러므로 시편 기자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내가 전심으로 주를 찾았사오니 주의 계명에서 떠나지 말게 하소서.
    내가 주께 범죄치 아니하려 하여 주의 말씀을 내 마음에 두었나이다."(시편 119:10-11)

    하나님의 은혜를 사모하십니까?
    은혜를 받은 후에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은혜를 받은 후에는 은혜 받기 전의 삶을 버리고 은혜 받은 삶을 살아야 합니다.

    이러한 삶을 영적 성장이라고 합니다.
    제자리 걸음에 익숙한 신앙이 아니라 이제부터는 성장하는 신앙으로 발돋움해야 하겠습니다.

    주여,
    나를 광활한 곳으로 인도하소서

    주여,
    나를 저 높은 곳으로 이끄소서

    주의 은혜가 헛되지 않도록 나를 살피소서.



    히브리인의 사고는 하나님의 얼굴 앞에 서게 되면 그분이 계시는 곳에 있게 되는 것이라고 합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얼굴을 구한다는 것은 곧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는 것입니다.

    여호와를 구한다는 것은 그의 임재를 구하는 것입니다.
    “임재”란 히브리어 단어 “얼굴”에 대한 통상적 번역입니다.
    우리는 그의 “얼굴”을 구해야 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하나님께 접근하는 히브리식 방법입니다.
    하나님의 얼굴앞에 있다는 것은 그의 임재 가운데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자녀들은 늘 하나님의 임재 가운데 있지 않습니까?
    그렇기도 하고 아니기도 합니다.
    두 가지 측면에서는 그렇다고 할 수 있습니다.

    첫째, 하나님은 편재하는 분이며 그러므로 항상 모든 것과 모든 사람들 가까이에 계십니다.
    하나님은 모든 것을 존재하게 붙들고 계십니다.
    그의 능력은 만물을 지탱하며 다스리시는 것 안에 항상 존재합니다.

    둘째, 하나님은 늘 우리 곁에 계시고 우리를 위해 일하시며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해주신다는 언약의 측면에서 항상 그의 자녀들과 함께 하십니다.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 (마태복음 28:20)

    그러나 하나님의 임재가 늘 우리와 함께 하지 않는 측면이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경은 계속해서 우리에게 "여호와를... 구할지어다 그의 얼굴을 항상 구할지어다"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의 임재가 나타나 우리가 이를 의식하고 이에 의탁하고 의지하는 하나님의 임재는 우리가 늘 끊임없이 경험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때때로 주님을 등한시하고 주님을 생각하지 않으며 주님을 신뢰하고 의뢰하지 않습니다. 즉, 주께서 우리에게 "분명히 나타나시지 않는"—즉, 우리 마음의 눈으로 볼 때 주님이 위대하고 아름다우며 소중하게 인식되지 않는 그러한 때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한 때에 있어서 하나님의 얼굴—그의 인격의 빛남—은 우리의 육신적 욕망들의 커튼 뒤로 숨겨지는 것입니다. 이러한 어두운 상태는 늘 우리를 사로잡으려고 준비하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에게 "그분의 임재를 항상 구하라"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분의 위대하심과 아름다움과 가치에 대한 지속적인 자각을 즐기도록 우리를 부르십니다.

    이는 "구하는 것"을 통해 일어납니다. 지속적으로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는 것 말입니다. 하지만 이는 실제로 무엇을 뜻합니까? 구약과 신약 공히 말씀하기를, 이는 하나님께로 우리의 "생각과 마음을 고정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즉, 우리 마음의 의식과 우리 마음의 애정을 하나님께 의식적으로 고정하고 집중하는 것입니다.

    "이제 너희는 마음과 뜻을 바쳐서 너희 하나님 여호와를 구하라" (역대상 22:19)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의 것을 찾으라 거기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느니라 위의 것을 생각하고 땅의 것을 생각하지 말라" (골로새서 3:1-2)

    이렇게 마음을 하나님을 향해 설정하는 것은 생각이 그냥 떠돌아 다니는 것과 반대됩니다. 이는 하나님께 마음을 향하려는 의식적 선택입니다. 바울은 교회를 위해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주께서 너희 마음을 인도하여 하나님의 사랑과 그리스도의 인내에 들어가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데살로니가후서 3:5). 이는 우리 측면에서 볼 때에는 우리의 의식적 노력입니다. 그러나 동시에 하나님을 구하는 그러한 노력은 하나님이 주시는 선물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찾기 위해 이러한 정신적, 정서적 노력을 하는 것은 하나님을 잃어버려서가 아닙니다. 동전이나 양이라면 잃어버릴 수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잃어버릴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하나님을 의식적으로 만나기 위해서는 무언가를 통해서 나아가거나 아니면 빙 돌아서 가야 하는 것이 있습니다. 이렇게 통해서 나아가거나 돌아서 나아가는 것, 이것이 바로 하나님을 구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종종 숨어 계십니다. 우리는 중개하는 매개체들을 통해서 나아가야 하며 장애물들을 돌아서 나아가야 합니다.

    하늘은 하나님의 영광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이를 통하여 하나님을 구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자신을 말씀을 통해 계시하십니다. 따라서 우리는 말씀을 통하여 하나님을 구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다른 사람들 가운데 나타나는 은혜의 증거들로 우리에게 자신을 보여주십니다. 따라서 우리는 이를 통하여 하나님을 구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을 구하는 것은 하나님께로 향하는 자연적 수단을 통해서 나아가려는 의식적인 노력입니다. 즉, 우리의 모든 경험 속에서 지속적으로 생각을 하나님께 고정시키고 우리의 생각과 마음을 그의 계시의 수단을 통하여 그에게로 향하도록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을 구한다는 의미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하나님을 분명하게 보고 하나님의 임재의 빛 가운데 있기 위해서는 빙 돌아서 가야 하는 수많은 장애물들이 있습니다. 우리는 영적으로 침체되게 하는 활동으로부터 벗어나야 합니다. 우리는 그로부터 도망가고 돌아서 가야 합니다. 그것들은 우리의 길을 막고 있습니다.

    우리는 무엇이 세상과 말씀에 나타나는 하나님에 대해 우리를 지극히 민감하게 하는지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무엇이 우리를 침체되게 하고 눈을 가리며 하나님을 찾고 싶어하지도 않게 만드는지 압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보기 위해서 이러한 것들로부터 떠나고 그로부터 돌아서 가야 합니다. 하나님을 구하는 것은 이러한 노력을 포함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모든 경험 속에서 하나님을 향하여 우리의 생각과 마음을 향할 때 우리는 하나님을 향해 부르짖습니다. 이 또한 하나님을 구한다는 의미입니다.

    "너희는 여호와를 만날 만한 때에 찾으라 가까이 계실 때에 그를 부르라" (이사야 55:6)

    "네가 만일 하나님을 찾으며 전능하신 이에게 간구하고" (욥기 8:5)

    구하는 것은 부르는 것과 간구하는 것을 수반합니다. 오 주님, 저의 눈을 열어주십시오. 오 주님, 저는 눈이 먼 자와 같이 어두우니 저를 불쌍히 여기시고 주를 계시하여 주시옵소서. 저는 주의 얼굴을 보기 원합니다.

    주님을 구하는 데 있어서 가장 큰 장애물은 교만입니다. “악인은 그의 교만한 얼굴로 말하기를 여호와께서 이를 감찰하지 아니하신다 하며 그의 모든 사상에 하나님이 없다 하나이다” (시편 10:4). 따라서, 주님을 구하는 데 있어 겸손은 필수적입니다.

    여호와를 구하는 자들을 향한 위대한 약속은 이것입니다. 그들은 그를 찾게 될 것입니다. “네가 만일 그를 찾으면 만날 것이요” (역대상 28:9) 그리고 그를 찾았을 때는 큰 상이 있습니다.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 (히브리서 11:6). 하나님 그분이 바로 우리의 가장 큰 상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하나님을 소유할 때 우리는 모든 것을 갖는 것입니다. 따라서 “여호와와 그의 능력을 구할지어다 그의 얼굴을 항상 구할지어다”



    여호와를 구하는 자(시편 119:1-8)

    행위 완전하여 여호와의 법에 행하는 자가 복이 있음이여, 여호와의 증거를 지키고 전심으로 여호와를 구하는 자가 복이 있도다.
    실로 저희는 불의를 행치 아니하고 주의 도를 행하는도다.
    주께서 주의 법도로 명하사 우리로 근실히 지키게 하셨나이다
    내 길을 굳이 정하사 주의 율례를 지키게 하소서.
    내가 주의 모든 계명에 주의할 때에는 부끄럽지 아니하리이다.
    내가 주의 의로운 판단을 배울 때에는 정직한 마음으로 주께 감사하리이다.
    내가 주의 율례를 지키오리니 나를 아주 버리지 마옵소서“

    시 119:10
    내가 전심으로 주를 찾았사오니 주의 계명에서 떠나지 말게 하소서.

    본문의 말씀은 율법을 사랑하고 계승(繼承)하기 위하여 진력하는가운데 여러가지 핍박을 받아 역경속에서 말씀을 지켜온 에스라 같은 분의 작품이라고도 합니다.

    본 시편은 가장긴장으로서 22단락으로 8절씩 히브리어 알파벳순으로 구성되여 176절로 되어있습니다. [9-10, 25, 34, 111, 112, 145편] 율법 말씀 증거 도 법도 율례 계명 판단 규례의 9가지의 표현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설명합니다.
    생명의 말씀은 하나님의 은혜로 깨닫고, 하나님의 은혜로 지키며 실천하게 되는 것 입니다.
    말씀은 생명력을 발산하며 소생하고 번영케하시고 성공하게 하시고 승리하게하시고 영화롭게하는 것 입니다.
    전심으로 여호와를 구하는 자 는 말씀을 지키는자, 하나님을 의지하는자, 말씀에 붙들린자,
    말씀의 진미를 아는자, 말씀을행하는자, 말씀의 복을 누리는자. 라는 것입니다.

    시편에서 여러 가지 복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시 1:1-3 “복있는 사람은 악인의 꾀를 좇지 아니하며 죄인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아니하고,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로다, 저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시절을 좇아 과실을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으니 그 행사가 다 형통하리로다”

    시32:1-2“허물의 사함을 얻고 그 죄의 가리움을 받은 자는 복이 있도다. 마음에 간사가 없고 여호와께 정죄를 당치 않은 자는 복이 있도다” 고 했습니다.

    시 73:28 하나님께 가까이 함이 내게 복이라 내가 주 여호와를 나의 피난처로 삼아 주의 모든 행사를 전파하리이다. 시 118:26 여호와의 이름으로 오는 자가 복이 있음이여 우리가 여호와의 집에서 너희를 축복하였도다. 라고 하였습니다.

    욜 2:32 누구든지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니 이는 나 여호와의 말대로 시온산과 예루살렘에서 피할 자가 있을 것임이요 남은 자 중에 나 여호와의 부름을 받을 자가 있을 것임이니라. [롬10;13]

    1, 회복시켜 주신다고 하였습니다.

    호 6:1,3 “오라 우리가 여호와께로 돌아가자 여호와께서 우리를 찢으셨으나 도로 낫게 하실 것이요 우리를 치셨으나 싸매어 주실 것임이라, 그러므로 우리가 여호와를 알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 그의 나오심은 새벽 빛같이 일정하니 비와 같이, 땅을 적시는 늦은 비와 같이우리에게 임하시리라” 하리라. 고하였습니다.

    2, 좋은 것을 주십니다.

    마 7:7-11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을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구하는 이마다 얻을 것이요 찾는 이가 찾을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 열릴 것이니라. 너희 중에 누가 아들이 떡을 달라 하면 돌을 주며, 생선을 달라 하면 뱀을 줄 사람이 있겠느냐, 너희가 악한 자라도 좋은 것으로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 지 않겠느냐”

    3, 성령을 주십니다.

    눅 11:9-13 “내가 또 너희에게 이르노니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을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것이니, 구하는 이마다 받을 것이요 찾는 이가 찾을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 열릴 것이니라. 너희 중에 아비 된 자 누가 아들이 생선을 달라 하면 생선 대신에 뱀을 주며, 알을 달라 하면 전갈을 주겠느냐, 너희가 악할지라도 좋은 것을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너희 천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 하시니라”

    4, 하나님이 불러 주십니다.

    출 3:4 여호와께서 그가 보려고 돌이켜 오는 것을 보신지라 하나님이 떨기나무 가운데서 그를 불러 가라사대 모세야 모세야 하시매 그가가로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창 22:11 여호와의 사자가 하늘에서부터 그를 불러 가라사대 아브라함아 아브라함아 하시는지라 아브라함이 가로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하매
    삼상 3:4,6 “여호와께서 사무엘을 부르시는지라 그가 대답하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하고, 여호와께서 다시 사무엘을 부르시는지라,,, 삼상 3:8-10 “여호와께서 세번째 사무엘을 부르시는지라,,, 여호와께서 임하여 서서 전과 같이 사무엘아 사무엘아 부르시는지라 사무엘이 가로되 말씀하옵소서 주의 종이 듣겠나이다” 라고 하였습니다.

    왕상 3:4-5 “이에 왕이 제사하러 기브온으로 가니 거기는 산당이 큼이라 솔로몬이 그 단에 일천 번제를 드렸더니, 기브온에서 밤에 여호와께서 솔로몬의 꿈에 나타나시니라 하나님이 이르시되 내가 네게 무엇을 줄꼬 너는 구하라”

    행 9:3-4 “사울이 행하여 다메섹에 가까이 가더니 홀연히 하늘로서 빛이 저를 둘러 비추는지라. 땅에 엎드러져 들으매 소리 있어 가라사대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 하시거늘” 이라고 하였습니다.

    마 16:16-17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여 가로되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

    요 21:15-17 “저희가 조반 먹은 후에 예수께서 시몬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내 양을 치라 하시고, 세 번째 가라사대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내 양을 먹이라” 라고 하였습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여호와를 구하는 자는 하나님께서 복을 주시고 회복시키시고 좋은 것을 주시고 성령을 주신다고 하였습니다.
    특별히 모세를 불러서 히브리민족의 위대한 지도자의 사명을 주셨습니다.
    아브라함을 불러서 복의 근원을 삼으시고 약속하신 언약을 이루어주셨습니다.
    사무엘을 불러서 앞으로의 되어질 중대한 사건을 예고하여 주셨습니다.
    솔로몬을 꿈에 불러서 원하는 대로 주시마고 구하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사울을 불러서 이방의 대 사도로 사용하여 세계복음화의 기반을 놓았습니다.
    베드로를 불러서 신앙의 기반이 되는 바른고백을 하게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요한의 아들 시몬아,,, 세 번이나 불러서 내양을 치라 내양을 먹이라 고 사명의식을 일깨워 주었습니다. 여러분 여호와를 구하여,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읍시다.


    1) 行爲가 穩全하여 여호와의 律法을 따라 行하는 者들은 福이 있음이여 (2) 여호와의 證據들을 지키고 全心으로 여호와를 求하는 는 福이 있도다 (3) 참으로 그들은 不義를 行하지 아니하고 主의 道를 行하는도다 ㅡ"여호와의 율법, 여호와의 증거,여호와를 따라 행하고, 지키고, 구하는 자는 복이 있다." 시편 119 편의 핵심 키워드는 주의 법, 율례, 도, 증거, 의다. 한마디로 하면 '말씀'이다. 복있는 사람은 불의를 행하지 않고, 주의 도를 행한다. 의를 행하고, 주의도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행위가 온전하여 여호와의 율법을 따라 행한다.


    ● 엘 (El : God) 

    ○ 엘(El) : 강한 능력을 가지신 통치자. 주로 복합어로 사용됨. '강함/첫 번째'의 뜻. 성경에서 250번 사용됨.
    ○ 엘로힘(Elohim)(창1:1) : 전능하신 창조주 하나님, 약 2,500번 사용됨.
    ○ 옐로아(Eloah)(욥기) : Elohim의 단수형(El의 뜻)
    ○ 엘 엘리온(El-Elyon)(창14:18-20 14:14. 시92) :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God Most High), 천지의 소유자의 뜻. 36번 사용됨.
    ○ 엘 샤다이(El-Shaddai)(출6:3) : 그 백성의 궁핍을 채워 주시는 하나님(God Almighty), 전능자/가슴의 뜻. 엘과 함께 7번 사용, 전능함의 뜻으로 41번 사용.
    ○ 엘 올람(EL-Olam) (창21:33) : 영생하시는 하나님(the Everlasting God). 3번 사용(사40:28, 롬16:26)
    ○ 엘 로이(El-Roi) (창 16:13) : 감찰하시는 하나님.

     ● 야웨 또는 여호와(Yahweh 또는 Jehovah)

    ○ 여호와(창4:13:6, 말3:6) : 언약의 하나님, 영원하신 하나님. 약 7,600번 사용됨.
    ○ 여호와 이레 (Jehovar-Jireh)(창22:13-14) : 준비하시는 하나님(the lord will provide).
    ○ 여호와 라파(Jehovar-Rapha)(출15:26) : 병을 치료해 주시는 하나님 (the Lord who heals you), '여호와 로페카'로 발음하는 학자도 있음.
    ○ 여호와 닛시(Jehovar-Nissi(출17:8-15) : 승리의 깃발 되시는 하나님 (the Lord Is-My-Banner).
    ○ 여호와 샬롬(Jehovar-Shalom)(삿6:24) : 평강의 하나님(the Lord Shalom).
    ○ 여호와 라하(Jehovar-Raah)(시23:1) : 나의 목자되신 하나님(The Lord is my Shepherd).
    ○ 여호와 삼마(Jehovah-Shammah)(겔48:35) : 거기 계시는 하나님(The Lord is there).
    ○ 여호와 찌두케누(Jehovar-Tsidkenu)(렘23:6) : 우리의 의가 되시는 하나님
    ○ 여호와 체바오트(Jehovah-Sabaoth)(시84:8) : 만군의 여호와(Lord God of Hosts), '여호와 츠바오츠'로 발음하는 학자도 있음.
    ○ 여호와 메카디쉬켐(Johovar-mekoddishkem)(레20:8) : 거룩케 하시는 하나님
    ○ 여호와 나학카(사58:11) : 나의 인도자 되신 하나님
    ○ 여호와 게올레오트(렘51:56) : 보복하시는 하나님.
    ○ 야웨 라하민(Yahweh-Rachamin) : 고난당하는 백성들을 어머니와 같이 태중에 안아 친밀하게 돌보시는 하나님

    ● 아도나이 (Adonai)

    ○ 나의 주, 주인, 선생님의 뜻.
    ○ 구약에서는 주권을 내포 (23:17) - the Lord God, 통치를 내포 (10:16) - the Lord, the Lord of hosts.
    ○ 신약에서는 영화롭게 된 그리스도에게 사용됨 (계19:16) - King of king and Lord of lords.
    ○ 단수 형태인 아돈(Adon)으로 30번, 아도나히(Adonahy)로 약 290번, 복수 형태인 아도나이(Adonai)로 무수히 사용됨.

     ● 아버지(Father) : 압(Ab), 아바(Abba), 파테르(Pater)

     ○ 신구약에서 모두 사용됨. 만물을 지으시고 인간을 창조하신 창조주로서의 하나님.
    ○ 죄를 회개하고 그리스도의 피값으로 죄사함을 얻음으로써 하나님과 영적 관계를 맺은 자녀들만이 부를 수 있는 이름.

     ● ‘앤 스팽글러 / 축복의 이름 / 주지현 역 / 좋은씨앗’에 나오는 성호들

     저자는 이 책에서 "하나님의 이름을 모두 싣지는 못했으나 가장 의미있는 이름들을 다루도록 최선을 다했다."며, 26가지의 성호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 중에는 위에서 살펴본 호칭과 중복되는 것도 있지만 새로운 것도 있습니다. 직접 읽어보시기를 권고 드리며 여기서는 간략히 소개만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1. 엘로힘(Elohim) : 하나님은 위대한 창조자이시다(창1:1).
    2. 엘로이(El Roi) : 하나님은 우리를 감찰하신다 (16:13-14).
    3. 엘샤다이 (El Shadday) : 하나님은 전능하시다(창 17:1-2).
    4. 엘올람(El Olam) : 하나님은 영원/영생하시다(창21:32-33)
    5. 여호와 이레 (Yahweh Yireh) : 하나님이 공급하신다(창22:13-14).
    6. 여호와(Yahweh) : 하나님은 주이시다(출3:14-15)
    7. 아도나이(Adonay): 하나님은 주님/주인이시다(시 16:2).
    8. 여호와 로페(Yahweh Rophe) : 하나님은 치유자이시다(중 15:26)
    9. 여호와 닛시(Yahweh Nissi) : 하나님은 나의 깃발이시다(출17:15-16)
    10. 에쉬 오클라/엘 칸나(Esti Oklar/El Kanna) : 하나님은 소멸하는 물/질투하시는 하나님이시다. (출34:14: 신4:23-24).
    11.  케도시 이스라엘(Qedush Yisrael)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거룩한 자이시다. (레19:1-2).
    12. 여호와 샬롬(Yahweh Shalom) : 주는 평화이시다(삿6:24)
    13. 여호와 체바오드(Yahweh Technoth) : 하나님은 만군의 주이시다(삼상17:45-46)
    14. 여호와 추리(Yahweh Tsuri) : 주님은 반석이시다(시 144:1).
    15. 여호와 로이(Yamweh Roi) : 여호와는 나의 목자이시다(시23:1-3)
    16. 하쉠(Hashem) :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왕상 8:28-29)
    17. 멜렉(Melck) : 하나님은 왕이시다(시72-1-3)
    18. 이쉬(Ish) : 하나님은 남편이시다(호2:16, 19-20). 엔력(다
    19. 엘차이(El Chay): 하나님은 살아 계신다(왕하 19:15-16).
    20. 믹달오즈(Migdal Oz) : 하나님은 견고한 망대이시다(시91:1-2),
    21. 쇼페트(Shophet) : 하나님은 심판자이시다(시94:15).
    22. 미크웨 이스라엘(Miqweh Yisrael) :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소망이시다(렘17:7-8)
    23. 여호와 칫케누(Yahweh Taidgenu) : 주님은 우리의 의가 되신다(렘23:6).
    24. 엘앨리온(El Elyon) : 하나님은 가장 높은 분이시다(단4:34).
    25. 여호와 삼마(Yahweh Shammah) : 여호와가 거기 계신다(겔48:35).
    26. 압/아바/파테르(Ab/Abba/Pater) : 하나님은 아버지이시다(눅15:20)







    5월 5일(월) 역대상 9-12장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바벨론의 포로가 된 유다(9:1)

    이스라엘이 그 보계대로 계수되고 이스라엘 열왕기에 기록되니라 유다가 범죄함을 인하여 바벨론으로 사로잡혀 갔더니.
    All Israel was listed in the genealogies recorded in the book of the kings of Israel. The people of Judah were taken captive to Babylon because of their unfaithfulness.

    통일 이스라엘 왕국은 사울과 다윗 그리고 솔로몬의 시대를 거쳐 북에는 열 지파를 중심으로 이스라엘을 세웠고, 남에는 두 지파가 중심이 되어 유다를 세웠습니다.
    북 이스라엘은 강대국 앗수르에 의해서 무너졌습니다.

    남 유다가 바벨론의 포로가 되었다는 것은 바벨론에 의해서 무너진 사건을 말합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세웠던 나라가 왜 바벨론에 의해서 무너졌을까요?

    선지자 예레미야는 그 원인을  두 가지라고 합니다(예레미야 2:13).
    "내 백성이 두가지 악을 행하였나니 곧 생수의 근원되는 나를 버린 것과 스스로 웅덩이를 판 것인데 그것은 을 저축지 못할 터진 웅덩이니라."

    첫번째 원인은 여호와 하나님을 버린 것(생수의 근원)
    두번째 원인은 우상을 숭배한 것(웅덩이를 판 것)

    오늘날 자유대한민국이 무너질 위기의 원인은 무엇일까요?

    첫째는 공짜를 좋아하기 때문(공짜는 양잿물도 마신다)
    둘째는 무식하기 때문(공산주의 이념에 대한 지식)
    세새는 혈연주의와 연고주의 때문(지연, 학연, 연고주의)

    대한민국은 지금, 우리가 알지 못하는 사이에 심각한 정치적, 사회적 위기에 직면해 있다. 최근 언론들은 윤석열 대통령 탄핵에 집중하며, 국가의 안전과 자유에 관한 중요 사항들은 대부분 보도되지 않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그 어느 때보다 경계하고, 행동해야 할 시점에 있다. 만약 우리가 지금 이 순간을 지나치면, 대한민국은 곧 중국 공산당의 영향력 아래 놓이게 될 것이다.

    한국의 공산화 수순

    우리는 홍콩에서 중국 공안이 경찰로 위장하여 폭력을 유발하고, 무력으로 자유를 진압했던 사례를 잘 알고 있다.
    이 사건에서 중국은 자유를 압살하고, 홍콩을 통제하는 데 성공했다.
    그리고 이제 대한민국이 그 같은 경로를 밟을 위기에 처해 있다.

    사회적 갈등과 폭력적인 진압
    :
    최근의 정치적 혼란은 단순한 내정의 불안정이 아니다.
    갈등이 격화되며, 이미 정치적인 탄압과 법적 강제들이 진행 중이다.
    이를 토대로 점차적으로 정부는 시민들을 통제하고, 반대 의견을 제시하는 이들을 '정신병원'에 보내는 수순을 밟고 있다.
    이는 단순히 표현의 자유를 넘어, 나아가 물리적 통제와 억압을 의미한다.
    여기서 그치지 않고, 제도적 차원에서 반대 세력을 제거하고, 그들의 자유를 박탈하는 법적 수단까지 등장했다.

    장기적출, 인권의 상실
    :
    과거의 예를 들어, 독재 정권 하에서 정치적 반대파가 감금되고, 그들이 '위험한 존재'로 낙인 찍혔을 때 어떻게 그들의 자유와 인권이 무시되었는지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한다.
    지금 우리가 겪고 있는 정치적 억압은 점차적으로 폭력적인 진압과 연계되며, 장기적출과 같은 비인도적인 처우로 이어질 수 있다.
    이는 사회 전반에 걸쳐 공포를 퍼뜨리고, 자유 대한민국을 근본적으로 흔들리게 만들 것이다.

    중국 공산화의 위협
    :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가 언급한 "누군가의 것을 뺏어야 욕망을 충족시킬 수 있는 상황"이 더욱 심각해지고 있다.
    이 발언에서 그는 갈등의 격화와 함께 '대규모 전쟁'이 발생할 수 있다고 경고했다.
    이러한 경고는 단순한 정치적 예언이 아니다.
    바로 지금, 그 갈등의 씨앗이 곳곳에서 자라고 있으며, 이는 통제되지 않는 폭력으로 발전할 가능성이 크다.
    결국, 우리는 내란을 일으켜 수많은 대한민국 국민들이 처형당하고, 그 자리에 중국인을 이주시켜 중국공산화를 달성하려는 음모가 현실로 다가오고 있다.

    우리에게 남은 책임 : 자유를 지키기 위한 행동

    이 상황에서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할까?
    순국선열들이 북한 공산주의의 탱크를 향해 폭탄을 안고 돌격하여 자유 대한민국을 지켰던 그 정신을 이어가야 한다.
    그들은 한민족의 자주독립과 자유를 위해 목숨을 바쳤고, 이제 우리는 그들의 뜻을 이어받아 자유 대한민국을 지켜내야 한다.

    공산화 방지의 첫 걸음 : 정보의 확산과 진실의 전달

    가장 먼저 우리가 해야 할 일은 국민들에게 현재 상황을 정확히 전달하는 것이다.
    언론이 침묵하고 있거나 왜곡된 정보를 제공할 때, 우리는 이를 바로잡고 진실을 알려야 한다.
    대중의 눈을 가리는 미디어에 맞서, 독립적이고 객관적인 정보가 공유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정치적 저항과 참여


    정치적 투쟁은 결코 선택이 아니다.
    대한민국의 자유와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한 저항은 우리 모두의 책임이다.
    정치적 저항은 단지 거리로 나가 목소리를 높이는 것에 그치지 않는다.
    우리는 적극적으로 법적 절차에 참여하고, 입법과 정치적 논의를 통해 우리의 입장을 분명히 해야 한다.
    악법이 통과될 때마다 이를 막기 위해 서명하고, 목소리를 높여야 한다.

    시민 의식의 각성

    시민들은 무관심과 방관으로 사회의 변화를 지켜보는 입장에서 벗어나야 한다.
    정부의 통제와 억압을 인정할 경우, 우리는 다시는 자유를 회복할 기회를 가질 수 없을 것이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자유를 지키기 위해 힘을 합쳐야 한다.

    함께 싸워야만 한다

    현재 대한민국은 자유와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한 중대한 기로에 서 있다.
    이 기로에서 우리가 방관하면, 이 땅은 곧 공산주의의 지배를 받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행동한다면, 자유 대한민국을 지킬 수 있다.
    우리 모두가 순국선열들의 정신을 이어받아, 자유 대한민국을 위해 싸워야 한다.
    우리의 후손들이 자유로운 대한민국에서 살아갈 수 있도록, 지금 이 순간부터 우리가 나서야 한다.

    자유와 민주주의는 결코 주어지지 않는다.
    그것은 우리가 지키고 쟁취해야 하는 것이다.

    오늘의 싸움이 내일을 결정한다는 사실을 잊지 말자.

    공산화 되기 직전입니다

    개혁주의 유산과 자유 대한민국의 위기

    사무엘 러더퍼드 신학자는 “법이 곧 왕이다”라는 말을 남겼다.
    성경이 증언하는 바에 따르면, 우리의 주인이자 왕은 하나님이시다.
    그렇다면 왜 러더퍼드는 ‘법이 왕’이라고 했을까?
    이는 성경이 정치적 질서를 확립하는 데 필요한 기준을 제공하기 때문이다.
    성경은 인간의 자의적 통치를 방지하고, 법치주의를 가능하게 하는 최종 권위이자 기반이다.
    따라서 법 아래 모든 사람은 평등하며, 법치주의는 개혁주의 전통에서 계승된 소중한 유산이다.

    《법이 왕이다(Lex Rex)》는 스코틀랜드의 학자이자 지도자인 사무엘 러더포드(1600~1661)가 쓴 책

    대한민국의 법치주의를 정착시키는 데 결정적인 기여를 한 분이 있다.
    바로 이승만 대통령이다.
    갈라디아서 5장1절,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자유롭게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건하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는 말씀을 깊이 새겼다.

    그는 미국 유학 시절 자유민주주의 정치체제를 연구하며, 이를 조선 땅에 실현하고자 했다.
    대한민국 건국 과정에서 이승만 대통령은 법치주의를 바탕으로 한 자유민주주의의 기틀을 확립하였고, 그 결과 대한민국은 법 앞에서 평등하고 정의로운 국가로 자리 잡을 수 있었다.

    즉, 법치주의의 뿌리는 성경이며, 이는 반드시 지키고 계승해야 할 개혁주의적 유산이자 대한민국의 근간이다.
    그렇기에 그리스도인은 법치주의를 훼손하려는 세력에 맞서 싸워야 한다.
    그러나 현재 대한민국에서 법치주의가 심각하게 위협받고 있다.
    특정 정치 세력을 중심으로 한 반국가세력이 이를 훼손하고 있으며, 그 실태는 다음과 같다.

    첫째, 현재 국회는 특정 정치인을 보호하기 위해 입법을 남용하고 있다.

    여소야대의 국회를 방탄으로 무법적 자기 보호 기능으로 사용

    그 목표를 이루기 위해 재판을 지연시키고, 검찰 수사에 개입하며 법의 공정성을 무너뜨리고 있다.
    또한, 법치를 지키려는 검사들을 탄핵하는 등 법적 질서를 심각하게 훼손하고 있다.
    법 앞에 모든 국민이 평등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특정 정치인을 위한 특혜가 계속되고 있는 현실은 법치주의를 심각하게 위협하는 행위다.

    둘째, 헌법이 보장하는 집회의 자유가 침해되고 있다.

    최근 대학생들이 자발적으로 나선 탄핵 반대 시국선언이 집회법을 위반한 이들에 의해 방해받고 있다.
    그러나 경찰은 불법 점거에 대해 강경 대응하기는커녕, 오히려 합법적인 시위를 펼치는 대학생들과 이를 지지하는 시민들을 압박하고 있다.
    법 적용이 특정 집단에게만 관대하고, 일반 국민에게는 엄격한 현실은 법치주의의 근본을 뒤흔드는 것이다.


    셋째, 대통령 탄핵 심판 과정에서 법적 공정성이 심각하게 훼손되고 있다.

    헌법재판소가 정치적 편향성을 보이며, 특정 이념을 앞세운 판결을 내리고 있다.
    또한, 수사 권한이 없는 공수처가 무리하게 현직 대통령을 조사하고, 법원의 영장 발부 기준마저 편향적으로 운영되는 등 법치주의가 심각하게 파괴되고 있다.
    이제 이러한 현실을 직시해야 한다.
    자유와 헌정질서를 유린하는 반국가세력은 자유 대한민국을 파괴하고 있으며, 국민들은 이를 바로 알지 못했다.
    그러나 대통령의 계엄령이 선포되면서 국민들은 이 상황을 인식하게 되었다.
    이제 행동해야 한다.
    대한민국의 자유민주주의를 수호하고, 법치주의를 지키기 위해 싸워야 한다.
    대통령이 복귀하여 강력한 개혁을 단행하고, 반국가세력을 척결할 수 있기를 간절히 소망한다.

    “비겁한 사역자가 되지 말라. 비겁한 신앙인이 되지 말라.”




    바벨론 포로의 원인

    이스라엘 백성들이 본토 이스라엘에서 멀리 1,500km나 떨어진 바벨론 땅으로 포로가 되어 끌려간 것은, 율법적 관점에서 ‘언약의 땅에서 쫓겨나게 된 것’을 말합니다.
    레위기에서는 이를 “땅이 그 거민을 토해내는 것”으로 말씀하고 있습니다(레 18:24-25).

    레위기 18:27-28
    너희의 전에 있던 그 땅 거민이 이 모든 가증한 일을 행하였고 그 땅도 더러워졌느니라 너희도 더럽히면 그 땅이 너희 있기 전 거민을 토함 같이 너희를 토할까 하노라.

    이것은 땅을 더럽히는 자가 받는 공통적인 심판의 원리로써, 출애굽 때 가나안 거민의 죄를 심판하고 그들을 토해내는 도구로 이스라엘을 사용하셨던 하나님이 이제 이스라엘의 죄를 심판하고 그들을 토해내는 도구로 바벨론을 사용하신 것입니다. 

    예레미야 2:13에서 예레미야 당시에 이스라엘 백성이 행한 근본적인 두 가지 악을 말씀하고 있는데, 이것이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가게 된 원인이었습니다.

    새한글 /

    나의 백성이 두 가지 나쁜 짓을 했기 때문이다.
    그들이 나를 버렸다.
    생수의 샘인 나를! 자신들을 위해 웅덩이를 팠다, 무너져서 물을 담을 수 없는 웅덩이를!”

    첫 번째 악은 “생수의 근원 되는 하나님을 버린 것”
    두 번째 악은 “스스로 웅덩이를 판 것”인데, 곧 다른 신을 섬기는 우상숭배의 죄를 뜻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권면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하고 경멸하며 ‘욕으로’ 여길 정도로 타락하고 말았습니다(렘 6:10). 그렇게 하나님을 버린 결과, 우상숭배하는 죄와 안식일‧안식년을 범하는 죄에서 돌이키지 못하고 바벨론에게 망하고 말았던 것입니다.

    (1) 우상숭배의 죄


    남 유다가 망하기 직전 활동했던 예레미야 선지자는 그들의 죄를 지적하면서, 우상숭배에 대하여 여러 차례 경고하였습니다(렘 1:16-17, 5:19, 13:10, 25:6-7, 44:5-6 등). 당시 유다 백성들은 우상숭배에 골몰하여, 그 섬긴 우상의 수가 그들이 거한 성읍의 수와 같을 정도였습니다(렘 2:28, 11:13).


    예레미야 16:11-13
    너는 그들에게 대답하기를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너희 열조가 나를 버리고 다른 신들을 좇아서 그들을 섬기며 그들에게 절하고 나를 버려 내 법을 지키지 아니하였음이라.
    너희가 너희 열조보다 더욱 악을 행하였도다 보라 너희가 각기 악한 마음의 강퍅함을 따라 행하고 나를 청종치 아니하였으므로 내가 너희를 이 땅에서 쫓아내어
    너희와 너희 열조의 알지 못하던 땅에 이르게 할 것이라 너희가 거기서 주야로 다른 신들을 섬기리니 이는 내가 너희에게 은혜를 베풀지 아니함이라 하셨다 하라.


    자유민주주의 정치 체제와 자유시장 경제 체제

    대한민국의 정체성은 자유민주주의 정치 체제와 자유시장경제를 통해 국가를 지탱하고 있다.
    이는 모든 국민이 공유하는 가치체계이며 자유와 책임이 법치주의와 절차적 민주주의 속에서 균형을 이루고 시장 경제를 통해 국민이 더 나은 삶을 추구할 수 있는 구조를 만드는 것이다.

    최광칼럼 / 대한민국의 정체성을 아시나요

    국가 정체성에 대한 무지(無知)

    정치 지도자들 중에서 대한민국의 정체성(national identity)을 정확히 알아서 자식이나 친지에게 설명해 주거나 국민에게 알아들을 수 있도록 설명할 수 있는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될까?
    대한민국의 정체성이 자유민주주의 정치 체제와 자유시장 경제 체제라 알고 있다 하더라도 그 내용을 정확히 알고 국가의 수많은 정책 중 어느 것이 국가 정체성과 부합하는지 또는 부합하지 않는지를 판별할 수 있는 지도자가 과연 몇 명이나 될까? 

    국가와 민족을 위해 현재 정치를 하고 있는 사람들, 앞으로 새싹의 정치인이 되고 싶어 하는 청년들 모두 기본에 충실해야 한다. 그 기본 중의 기본이 대한민국의 정체성을 정확히 아는 것이다.

    대한민국의 헌법은 전문(前文)과 10개 장 130개 조문의 본문(本文) 그리고 5개 조문의 부칙(附則)으로 구성되어 있다. 
    우리의 헌법 전문을 읽어 본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될까. 
    상당히 긴 헌법 전문이 지향하는 바는 과연 무엇인가. 
    어느 나라든 각 나라의 헌법은 그 나라의 정체성을 담아내는 최고의 법률 문서이다. 
    대한민국의 정체성은 과연 무엇인가. 
    대한민국의 정체성은 두 가지 개념으로 요약된다고 한다. 
    하나는 대한민국이 정치적으로 자유민주주의 국가란 것이고 다른 하나는 경제적으로 대한민국이 자본주의 자유시장경제 체제란 것이다.

    사회 제도는 하늘과 자연이 부여하는 것이 아니라 그 사회의 구성원이 만드는 것이다. 
    제도를 훌륭하게 설계하고 그 제도를 본래의 취지대로 적절하게 운영하면 어느 나라든 번창하고 국민은 잘살게 된다는 것이 역사의 교훈이다. 
    어느 시대 어느 나라 정치 지도자이든 국가 정체성의 틀 속에서 활동하고 동시에 모든 정치가는 국가 정체성을 정립하고 유지 발전시켜야 하는 사명을 띠고 있다.

    국가 정체성에 관한 세 가지 질문

    대한민국의 국가 정체성인 자유민주주의 정치 체제와 자유시장 경제 체제에 대해 크게 세 가지 질문이 제기된다.

    첫째, 자유민주 정치 체제와 자본주의 자유시장 경제 체제란 무엇인가?
    둘째, 우리나라 헌법이 과연 자유민주주의 정치 체제와 자본주의 자유시장 경제 체제를 얼마나 잘 구현하고 있는가?
    셋째, 자유민주주의 정치 체제와 자본주의 자유시장 경제 체제의 양립이 가능한가?

    위의 세 가지 질문에 대한 초보적 답은
    첫째, 자유민주주의 정치 체제에 대해서는 국민 모두가 나름 잘 알고 있으나 자본주의 자유시장 경제 체제에 대해서는 전문가들조차도 제대로 인지하고 있지 못하며 
    둘째, 우리 현행 헌법은 자유민주주의 정치 체제는 상당 수준까지 구현하고 있으나 자본주의 자유시장 경제 체제와 관련해서는 매우 미흡한 수준이라는 것 
    셋째, 자유민주주의 정치 체제와 자본주의 자유시장 경제 체제는 기본적으로 양립이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오늘날 우리 사회가 안고 있는 수많은 문제, 우리 사회를 병들어 앓게 하는 문제들이 이들 세 가지 요인으로 인해 야기되고 있다.

    정치적 의사결정 대(對) 시장적 의사결정

    우리 모두는 두 가지 의사결정 과정 속에서 생활을 영위하고 있다. 하나는 유권자로서 참여하는 정치적 의사결정 과정이고 다른 하나는 생산자·소비자로서 참여하는 시장적 의사결정 과정이다. 정치적 의사결정 과정과 시장적 의사결정 과정은 의사결정 투표의 수·의사결정의 빈도·의사결정 합의의 기준 등에서 크게 다르다.

    먼저 두 가지 다른 의사결정 과정에서 참여자가 갖는 투표 수에 차이가 있다. 민주주의 사회에서 정치적 결정은 사회 구성원들의 투표에 의해 이루어지므로 사회 구성원은 모두 똑같은 수의 표, 즉 1인 1표를 가지고 참여한다. 반면에 시장적 의사결정의 경우 사회 구성원은 자신이 갖고 있는 경제력에 비례하여 불균등한 수의 표를 가지고 의사결정에 참여한다. 만약 A의 소득이 5000만 원이고 B의 소득이 5억 원일 경우 시장을 통한 의사결정 과정에서는 B가 A에 비해 10배의 투표권을 행사한다.

    다음으로 정치적 의사결정 과정에서의 선택은 시장적 의사결정 과정에서처럼 언제나 가능한 것이 아니며 매일매일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특정기간이 지나야만 가능하다. 경제력만 있으면 보통 재화나 용역은 시장에서 언제든 구입이 가능하지만 국민이 선출하는 공직자는 비록 현재의 공직자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 하더라도 일정 기간, 즉 선출된 공직자의 임기가 다할 때까지 4년 또는 5년을 기다리는 수밖에 없다.

    마지막으로 합의를 결정하는 기준에서 두 가지 형태의 의사결정 과정에 차이가 있다. 
    시장적 의사결정 과정에서는 참가자 전원이 합의를 해야 거래가 이루어지므로 의사결정이 항상 만장일치로 이루어지는 반면 정치적 의사결정 과정에서는 만장일치에 의한 의사결정은 매우 드물고 통상적으로 참여자의 과반수가 찬성하면 받아들여지는 다수결 제도에 의해 이루어지고 있다.

    누가 참된 민주화 세력인가

    1948년 건국과 함께 시작된 대한민국의 자유민주주의 정치 체제, 즉 민주주의를 놓고 정치 지도자와 국민 모두 회의에 빠져 있다. 인류가 갖게 된 지고지선(至高至善)의 정치 체제인 민주주의 체제에서 77년 성상(星霜)을 살며 때로는 민주화를 외치며 목숨 건 투쟁을 하기도 했는데 민주주의를 빌미로 정치가 우리 사회를 병들게 하고 있는데도, 그리고 민주 세력이라 자처하는 집단이 반(反)민주적 행태를 일삼고 있는데도 이를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 이 나라의 일부 좌파 세력은 ‘민주화’나 ‘민주주의’가 자신들의 전용 특허인 양 내세우면서도 3대에 걸친 진짜 독재국가인 북한에 대해서는 침묵하고 있다.

    민주주의란 도대체 무엇인가. 대한민국에 민주주의가 언제 도입되고, 누구에 의해 정착되었는가. 민주주의는 만능인가. 이러한 근본적인 질문이 제기되는 것에 대해 많은 사람이 의아해 할 것이다. 그런데 앞의 세 가지 질문에 대해 정확히 답하고 자신 있게 설명할 수 있는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될까.

    유신 체제로 대표된 왜곡된 비(非)민주적 통치 체제에 대한 국민적 저항을 우리는 ʻ민주화 운동ʼ이라 불러 왔다. 이 과정에서 ʻ닭장ʼ과 ʻ철장ʼ을 오간 사람들을 ʻ민주화 투사ʼ라 부르고 이들에 의해 민주화가 완성된 것으로 생각들 한다. 사실 1980년대의 민주화 투사들은 참으로 고생을 했으며 그들의 희생이 큰 역할을 했다.

    그러나 대한민국의 민주화를 논한다면 먼저 건국 과정과 6·25전쟁의 와중에서 이 나라를 세우고 지키기 위해 고군분투한 사람들의 노력이 높이 평가되어야 한다. 이승만 대통령을 중심으로 자유민주주의 헌법을 기초로 해서 대한민국을 건국한 자체가 우리의 5000년 역사에서 가장 최초의, 그리고 가장 큰 민주화 작업이었다. 인류 역사에서 공산주의·사회주의가 정점에 달했던 제2차 세계대전 직후의 그 극심한 혼란 속에서 자유민주주의 국가를 수립한 위업이 없었다면 1980년대 민주화가 가능했겠는가. 정부 수립 후 3년이 채 안된 시점에 공산 세력이 무력 도발을 했을 때 이를 격퇴시킨 그 고군분투의 과정이 어쩌면 건국 이후 우리나라 민주화의 두 번째 초석이 아닌가. 1980년대의 민주화는 세 번째 방점이다.

    민주주의는 흠결 많은 정치 제도

    민주정치 체제를 놓고 우리나라에서의 문제는 민주정치 체제를 지고지선의 제도, 하나의 절대적 가치로 신격화해 숭앙한다는 것이다. 사실 달리 보다 나은 대안이 없기에 민주정치 체제를 버릴 수 없지만 여기엔 치명적 결함이 존재하며 문제 또한 아주 많다. 성숙한 개인들의 독립적 판단이 뒷받침되지 않을 경우 민주주의는 ‘떼’의 정치, ‘폭도’의 정치가 되며 우중정치로 쉽게 흘러간다는 것을 역사가 수없이 보여주고 있다. 투표에 의한 민주주의의 결과 파시즘·나치즘이 탄생했고 북한을 비롯한 사회주의·공산주의 국가들에서 인민민주주의 독재 체제가 등장했다.

    민주주의를 놓고 완벽한 정치체제라 찬양하기는커녕 모두 언제나 문제투성이임을 지적했는데, 영국 정치철학자 토머스 홉스는 “민주주의는 당파 투쟁·선전 선동·폭민정치 따위로 변질될 우려가 가장 많은 최악의 정치 체제”라 했고 60여 년 동안 영국 의회 의사당인 웨스터민스터 궁전을 드나들었던 윈스턴 처칠은 “민주주의는 가장 나쁜 정부의 형태다. 모든 다른 정부 형태를 제외한다면”이라고도 했다.

    지고지선의 가치는 자유이지 민주주의가 아니다

    오늘날 우리 사회에서 가장 중요하게 추구해야 할 정치적 가치는 자유이지 민주주의가 아니다. 인도와 홍콩이 그 좋은 사례이다. 인도는 세계에서 가장 큰 민주정치 체제 국가이지만 인도인들은 자유를 제한하는 수많은 보호적 규제 속에서 살아왔다. 그래서 그들의 소득 수준은 아직도 매우 낮다. 홍콩은 영국의 지배를 받던 옛날이나 중국의 지배를 받는 현재나 시민에게 통치자를 선출할 권리가 없기에 민주정치 체제가 아니다. 그러나 지구상의 그 어떤 곳보다 가장 광범위하게 선택의 자유가 허용되어 있다(최근은 아니지만). 그래서 소득 수준이 높다.

    민주정치 체제는 가장 나쁜 국가 형태, 즉 전제정치나 독재정치를 피하는 수단이다. 한국 현대 정치사에서 관심의 초점은 ʻ어떻게ʼ 민주주의를 이룰 것인가에 있었으며 ʻ왜ʼ 민주주의여야 하는가는 관심의 주된 대상이 아니었다. 민주화를 위한 열렬한 투쟁이 있었지만 정작 민주정치 체제의 본질과 정당성에 대한 고민에는 그만큼의 열정이 바쳐지지 않았다. 그래서 우리가 오늘날 폭민주의 사회에 살고 있는 것이 아닐까.

    정치 체제로서 민주주의가 무엇인가에 대해서는 어려서부터 비교적 잘 교육을 받았으나, 경제 체제인 자본주의 시장경제에 대해서는 자본주의 시장경제 질서가 가져오는 각종 이득은 향유하면서도 그 체제의 핵심 내용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일반인이 제대로 교육받은 바가 거의 없다. 대학에서 경제학을 전공하는 학생들에게 “자본주의 시장경제가 무엇이냐”고 물어보면 제대로 대답하지 못하는 경우가 대부분이고 또한 상당수의 학생들은 그러한 질문을 왜 하는지 무척 의아해 한다.

    자유시장경제(自由市場經濟) 체제란 무엇인가?

    사실 경제학 교과서뿐만 아니라 한글 사전은 물론이고 국내의 경제학 대사전에도 자본주의와 시장경제에 대한 정확한 설명이 실려 있지 않다. 예를 들어 한글학회가 펴낸 ‘우리말 큰사전’은 자본주의를 다음과 같이 정의하고 있다. 

    “(자본주의란) 자본의 경제적 세력을 가지고, 또는 그 이득으로 인권·상권의 패권을 가지려는 주의, 곧 자본에 대한 이윤만을 유일의 목적으로 하는 경제적 활동 내지 경제 조직의 총괄적 표현이다.”

    이는 자본주의의 멸망을 예언한 카를 마르크스가 규정한 자본주의에 관한 정의인데, 아주 잘못된 정의라고 판단된다. 사전이 무릇 모든 설명이나 정의의 준거(準據)가 된다는 점에서 보면 이러한 잘못된 정의는 매우 심각한 것이다. 이러한 현실에서 자본주의 시장경제가 대한민국에서 제대로 정착·발전되기 어려울 것이다.

    자본주의 자유시장경제 체제는 사유재산 제도와 선택의 자유를 근간으로 각각의 경제 주체가 자기 책임하에 자유롭게 사익을 추구하게 하여 ‘어떤 재화를, 얼만큼, 누구를 위해, 어떻게, 언제, 어디에서 생산하고 소비하는가’ 하는 기본적인 경제 문제를 정부 아닌 시장을 통해 해결함으로써 사회 구성원의 복지를 최대로 증진시키는 경제 체제이다.

    우리 국민은 경제에 관한 한 문맹이 많다. 더욱 안타까운 것은 정치가들을 포함해 국가 정책을 다루는 중요한 위치에 있는 사람의 상당수도 경제 문맹인이라는 점이다. 기본 개념을 잘 모르고 정확한 지식이 없이 경제 문제에 대해 너무 많은 사람이 너무나 많은 이야기를 한다.

    경제 문맹이 지배적인 상태에서 민주주의라는 미명하에 각자가 자신의 주장을 제약 없이 개진하고 그리고 투표로써 경제 정책을 결정할 때 그 결과는 우리가 상상하기 힘들 정도의 비극적 종말로 귀착된다.

    정치 논리 대 경제 논리

    오늘날 우리 경제의 문제는 본질적으로 그 구조에 있다. 따라서 문제를 치유하기 위한 처방도 구조에 관한 것이어야 한다. 경제 정책의 운용은 경제 이론이라는 과학을 근거로 한 하나의 정치적 예술이다. 과학적 요소와 예술적 요소가 잘 조화될 수 있을 때 경제 정책은 성공할 수 있으며 국민 복지 또한 증진될 수 있다.

    최근의 중요한 정책 결정을 살펴보면 정책 결정 과정에서 과학적 요소인 경제 논리는 뒷전으로 밀린 채 정치 논리가 경제정책을 지배하여 원하는 목적이 달성되지 않음은 물론 오히려 더 큰 부작용과 후유증만을 발생시키고 있다.

    경제 논리와 정치 논리는 그 궤를 달리한다. 경제는 자체의 논리에 따라 움직이기 때문에 이를 무시한 정책을 펴면 경제는 경제대로 병만 들고 원하는 결과가 나오지 않는다. 정치의 전당인 국회에서 정치 논리를 깡그리 무시하고 국정을 논하라고 요구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경제 논리가 무시되고 정치 논리가 부각될 때 결국 정치 논리도 살아남지 못한다는 엄연한 사실을 우리의 정치 지도자들은 분명히 인식해야 한다.

    시장경제와 경기 규칙

    오늘날 우리 사회의 각종 혼란과 고통, 특히 경제적 측면에서의 혼란과 고통은 기본적으로 자본주의 시장경제의 본질에 대한 이해의 부족과 자본주의 시장경제를 뒷받침하는 사회 질서, 즉 경기 규칙에 대해 정치가와 사회 구성원 모두의 이해가 부족하고 문제의 핵심을 고심해 보지 않은 데서 초래되는 것으로 판단된다. 자본주의의 경기 규칙을 무시하고 자본주의를 실행하려는 데서 모든 문제가 발생한다는 말이다.

    우리 모두가 선진국 진입을 갈망하고 있다. 그러나 선진국 진입은 역사적으로 예외적인 사건이다. 지난 1세기 동안 중진국에서 선진국으로 진입한 나라는 일본과 아일랜드뿐이다. 남미의 몇 나라는 20세기 초에 미국·유럽에 견줄 수 있는 선진국이었으나 최근엔 중진국으로 후퇴했다.

    대다수 전문가가 우리의 선진국 진입이 시간의 문제이지 종국엔 가능할 것으로 생각하고 있지만 현재와 같은 반(反)시장적 정책 기조·국론 분열·국제 사회에서의 고립·노사 관계의 불안·근로 의욕의 저하·저출생과 고령화·지구적 경쟁의 심화·안보 불안 등이 계속될 경우 선진국 진입은커녕 남미와 같이 추락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물론 우리나라에도 많은 사람들, 특히 정치가와 관료들도 입으로는 ‘자본주의 시장경제’를 신봉하고 있다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현실과 정책은 아직은 거리가 멀다. 모든 것을 정부가 주도하는 정부 중심적인 경제운영 방식에 기본적으로 큰 변화가 없다. 심지어 민간에서도 ‘작은 정부’를 주장하다가도 어떤 문제에 가서는 정부에 의존하려는 경향도 자주 나타나고 있다.

    도대체 왜 우리는 누구나 구호로 내세우는 ‘시장경제’를 실천하지 못하는 것일까. 이에 대한 대답은 우리 자신도 모르게 체화되어 있는 뿌리 깊은 ‘형평’ 위주의 사고방식이 정치를 통하여 반(反)시장적 정책을 양산해 내는 데 그 원인이 있다는 것이다. 개혁이라는 이름으로 시장을 짓누르고 ‘민족’ ‘평등’ ‘복지’라는 미명으로 개인의 자유와 권리를 교묘히 제한하면서도 자신들을 시장경제주의자라고 오도하는 사람들이 경제정책을 좌지우지하는 한 경제는 멍들 수밖에 없다.

    경제민주화의 오류

    최근 우리 사회의 중요한 화두는 단연 경제민주화이다. 경제민주화는 말 그대로 경제의 민주화이고 이는 곧 경제의 정치화를 의미한다. 즉 경제민주화란 정치적 의사결정 과정이 시장적 의사결정 과정을 지배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정치가 경제를 다스린다는 것이 경제민주화의 본질이라면 여기서 제기되는 문제는 정치와 경제의 각각의 본질이 무엇이고 그리고 정치와 경제가 어떻게 상호 연관되어 있느냐 하는 것이다.

    결론부터 말하면 경제를 민주화하고 정치화하면 그 경제는 멍들어 쇠락한다. 이는 단순한 추측이 아니고 역사에서 증명된 사실이다. 경제의 민주화를 역사상 가장 완벽히 이룬 나라들이 옛 소련과 중국 그리고 현재의 북한 등 사회주의 국가들이다. 재벌도 없고, 노동자가 기업 운영, 아니 나라 운영의 핵심이고, 일감 몰아주기도 없고, 동반성장위원회도 필요 없고, 세금은 아예 없고, 대형마트의 영업시간 제한도 필요 없는 등 오늘날 경제민주화 주창자들이 내세우는 경제민주화가 완벽히 실현될 뻔했던 곳이 북한을 포함한 이들 사회주의 국가들이 아닌가.

    양립 불가능한 민주정치 체제와 자유시장경제 체제

    민주정치 체제와 자유시장경제 체제는 공통적으로 개인의 자유·책임·경쟁·참여·법치를 강조하는 자유주의 사상에 기초하고 있기 때문에 병행 발전하는 속성이 일부 있다. 민주정치 체제는 정치권력의 남용을 차단함으로써, 그리고 자유로운 풍토를 조성함으로써 진정한 시장경제 체제의 성장과 발전에 기여한다. 또한 시장경제 체제는 각자의 능력과 노력에 따라 정당한 보상을 받게 함으로써 민주정치 체제의 물적 기반을 제공하고 정치적 안정에 기여한다.

    그러나 민주정치 체제와 시장경제 체제는 근원적으로 출발에서부터 다르고 진행 과정과 지향 목표도 다르기 때문에 각각 분리하여 논의되어야지 ‘민주적 시장경제’나 ‘경제민주화’ 같이 혼합될 경우 개념이 혼돈스러워지고 이를 바탕으로 정책이 수립되는 경우 혼란이 초래될 수밖에 없다. 이는 어느 한 나라가 완벽한 민주정치 체제와 완벽한 시장경제 체제를 가지고 있더라도 본래 이질적(異質的)인 두 체제가 상충할 것이고 특히 경제정책을 두고는 양립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우리는 정치적 의사결정은 과오를 범하지 않는 전지전능한 주체에 의해 높은 곳으로부터 이루어지는 것으로 알고 있으나 이는 사실이 아니다. 최근 화두로 등장한 경제민주화 논의 내용과 방법을 두고 진행되는 논의에서 갑론을박의 근원은 관련자 모두가 정치적 민주정치 체제와 자본주의 시장경제 체제의 본질 그리고 그 양자의 차이를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는 데에 있는 것이다.

    민주정치 체제의 경우 강제성이 항시 전제되나 시장경제 체제는 자발성이 근간을 이룬다. 선거를 통해 직접 결정되든 또는 선거를 통해 선출된 사람들의 합의에 의해 결정되든 민주정치 체제에서의 의사결정은 다수결로 이루어지며 이 과정에서 반대를 한 소수도 최종 결정이 이루어진 후에는 반드시 그 결정에 따라야 할 의무를 진다.

    그러나 이와 같은 강제성은 시장경제 체제에는 존재하지 않는다. 시장경제 체제에서는 생산자든 소비자든 상대방에게 자신이 가진 것을 제공할 의사를 표명하고 상대방이 자신의 제의를 수용할 때에만 거래가 이루어진다. 어느 누구도 상대방에게 자신의 선택을 강요할 수 없다. 모든 거래는 자발적으로 이루어지며 성사되는 거래의 경우는 항시 만장일치가 이루어진다.

    많은 사람이 정치적 민주정치 체제와 시장경제 체제를 같은 것으로 이해하고 있으며 민주정치 체제와 시장경제 체제가 잘 조화되는 제도라고 인식하는 경우가 많은데, 문제는 앞서 간략히 언급한 바와 같이 이러한 이해와 인식이 전적으로 잘못된 것이라는 점에 있다. 참으로 잘못된 이해와 인식이 최근 대두된 경제민주화 등장의 배경이며 경제민주화 주창자들조차도 헷갈리고 소리만 요란하지 구체적 내용에 오면 전혀 새로운 것이 없는 이유이다.

    경제민주화를 놓고 일반 국민에게 묻고 싶은 것이 하나 있다. 우리 국민은 대체로 정치를 싫어하는 정도를 넘어 혐오하는 지경이다. 우리 국민은 또한 정부의 무능력과 비효율을 한탄한다. 경제민주화는 경제에 대한 정치의 개입이고 정부에 의한 경제의 통제이다. 정치인들이 하는 대부분의 일에 전혀 신뢰를 보내지 않는 국민이, 정치인들이 경제에 개입하면 경제가 잘 되리라고는 어떻게 신뢰하는가. 정부의 무능력과 비능률을 한탄하는 국민이, 정부가 경제에 개입하면 경제가 잘 되리라고 어떻게 기대하는가.

    국가 번영의 요체

    잘사는 국가 번창의 길을 놓고 선각자들이 내놓은 수많은 처방의 핵심은 ‘리더십(leadrship)’ ʻ제도(institution)’와 ʻ사상(ideology)’이다. 역사를 살펴보면 한 나라의 장기적 번영을 결정하는 것은 그 나라의 천연자원도 아니고, 문화적 자산도 아니며 ʻ지도자와 제도와 이념ʼ에 있다. 훌륭한 제도와 이념의 핵심은 자유주의 정신과 자본주의 시장경제인데 우리의 경우 반(反)자유주의 정신이 풍미하고 있으며 반(反)자본주의적·반(反)시장적 정책이 홍수를 이루고 있다.

    20세기의 역사가 우리에게 주는 가장 중요한 교훈 가운데 하나는 개인의 자유와 권리를 효과적으로 보호하는 나라는 번영을 누리고 경제가 번창하는 데 반하여 한정된 이성과 이기주의적 편견의 소유자인 인간 또는 그 집단이 무제한적으로 권력을 휘두르면 그 사회는 부패하고 경제는 쇠퇴한다는 것이다.

    자본주의의 냉혹함에 대해 말이 많은데 그 이유는 자본주의가 모든 사람을 각자의 능력과 기여에 따라 달리 대우하기 때문이다. 자본주의 시장경제 체제에서 많은 사람이 불행함을 느끼는 것은 자본주의가 각자에게 가장 바람직한 상황 또는 지위에 도달할 수 있는 기회는 예외 없이 부여하지만 그 상황 또는 지위에는 소수의 사람만이 도달할 수 있기 때문이다. 더 큰 능력을 발휘하고 더 많은 재능을 가진 소수의 모습을 볼 때 다수는 자존심이 상하고 불평하게 마련이다.

    자유경제 체제에 벗어나는 특단의 조치만으로 크게는 경제 위기가 극복되고, 작게는 문제로 대두된 각각의 사안이 해결된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아무리 어려운 국면이나 내용이라 하더라도 문제를 순리대로, 원칙에 따라, 원천적으로 풀어야지 충격요법으로, 대증요법(對症療法)으로 대처해서는 안 된다.

    통상적으로 우리는 정부가 무엇을 해야 하느냐를 중심으로 생각한다. 정부가 해야 할 일을 찾다 보면 모든 일을 정부가 해야 하는 것으로 결론이 나기 십상이다. 따라서 정부가 무엇을 하지 말아야 하는가를 살피고 이를 제대로 인식·실천하는 것이 필요하다. 개인·민간 또는 시장이 잘할 수 있는 일들에 정부가 개입하지 말아야 하며, 더더욱 국민 세금을 투입해 낭비를 초래해서는 안 된다. 경제적 번영을 보장하는 각종 제도를 확립·정착시키면서 정책의 내용을 제대로 만들어 필요조건을 충족시키고 정치적 지도력이 발휘되어 국민적 에너지가 결집되는 충분조건이 충족될 때 경제정책은 성공을 거두고 경제는 번창하게 된다.



    (1) 우상숭배의 죄

    남 유다가 망하기 직전 활동했던 예레미야 선지자는 그들의 죄를 지적하면서, 우상숭배에 대하여 여러 차례 경고하였습니다(렘 1:16-17, 5:19, 13:10, 25:6-7, 44:5-6 등). 당시 유다 백성들은 우상숭배에 골몰하여, 그 섬긴 우상의 수가 그들이 거한 성읍의 수와 같을 정도였습니다(렘 2:28, 11:13).



    하나님께서는 예레미야에게 힌놈의 아들의 골짜기에서 오지병을 깨뜨리게 하심으로써, 우상숭배한 범죄의 대가로 이스라엘이 반드시 패망할 것을 경고하셨다(렘 19:1-15, 참고-렘 7:30-34)

    예레미야 16:11-13 “너는 그들에게 대답하기를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너희 열조가 나를 버리고 다른 신들을 좇아서 그들을 섬기며 그들에게 절하고 나를 버려 내 법을 지키지 아니하였음이라

    12 너희가 너희 열조보다 더욱 악을 행하였도다 보라 너희가 각기 악한 마음의

    강퍅함을 따라 행하고 나를 청종치 아니하였으므로 내가 너희를 이 땅에서 쫓아내어

    너희와 너희 열조의 알지 못하던 땅에 이르게 할 것이라 너희가 거기서 주야로

    다른 신들을 섬기리니 이는 내가 너희에게 은혜를 베풀지 아니함이라 하셨다 하라” 


    유다의 심각한 우상숭배의 죄악을 깨우쳐 회개케 하시려고,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종 선지자들을 ‘부지런히’ 보내어 말씀을 전하셨지만 그들은 듣지 않고 무시했으며(대하 36:14-16, 렘 7:25, 25:4, 26:5, 29:19, 35:15, 44:4),  하나님의 실존을 불신하면서 선지자들을 거짓 선지자로 매도하고 죽이는 데 앞장섰습니다(렘 5:12-13). 그리고 회개할 기회를 주어도 회개치 않았습니다(렘 19:1, 10-13). 심지어 하나님의 성전 안에까지 우상을 갖다놓고 섬김으로써, 바벨론에 의해 성전이 파괴되기 전 이미 그들 스스로가 성전을 더럽혔던 것입니다(렘 32:34, 겔 8:1-18, 22:4).

    (2) 안식일과 안식년을 이행하지 않은 죄

    1) 안식일의 불순종
    안식일 준수여부는 율법에 대한 순종과 불순종을 나누는 기준이며 축복과 저주를 가름하는 분기점입니다(렘 17:19-27). 이는 안식일이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거룩하게 하시는 여호와인 줄 알게 하는 영원한 표징이기 때문입니다(출 31:13, 겔 20:12, 20). 하나님께서는 안식일을 지키지 않으면 성문에 불을 놓아 예루살렘 궁전을 삼키게 하겠다고 예레미야를 통해 엄중하게 경고하셨는데(렘 17:27),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를 지키지 않음으로, 바벨론 포로의 직접적인 원인이 되었습니다.

    에스겔 22:8 “너는 나의 성물들을 업신여겼으며 나의 안식일을 더럽혔으며”
    에스겔 22:26 “그 제사장들은 내 율법을 범하였으며 나의 성물을 더럽혔으며 거룩함과 속된 것을 분변치 아니하였으며 부정함과 정한 것을 사람으로 분변하게 하지 아니하였으며 그 눈을 가리워

    나의 안식일을 보지 아니하였으므로 내가 그 가운데서 더럽힘을 받았느니라”  


    2) 안식년의 불순종
    안식년의 규례는 ‘제 7년에 땅을 쉬게 하라’는 것과 ‘동족 히브리 사람 종을 7년째 자유케 하라’는 내용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레 25:2-7, 신 15:12-18).

    ① 6년 동안 땅에 파종하고, 제 7년에는 그 땅을 쉬게 하라(출 23:10-11, 레 25:1-7, 26:34-35)
    이스라엘 백성은 언약의 땅 가나안에 들어간 이후로는 7년째 되는 그 해에는 그 땅에 파종해서는 안되었으며(레 25:2-4), 스스로 난 곡물이나 열매라 할지라도 거두지 말고 땅이 안식하도록 해야 했습니다(레 25:5). 그리고 안식년을 지키면 제 6년에 3년 소출을 주심으로 제 7년 안식년 뿐만 아니라 제 8년과 제 9년 까지도 부족함이 없게 해 주신다고 약속하셨습니다(레 25:21, 렘 25:22). 이로써 모든 것이 하나님의 것이요, 하나님으로부터 말미암는다는 사실을 알도록 하셨습니다(레 25:23).


    그러나 유다 백성들은 욕심으로 인하여 제 7년에도 파종함으로 안식년을 지키지 않았습니다. 이에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가게 하심으로 땅이 안식하게 하셨던 것입니다(레 26:43).

    역대하 36:21 “이에 토지가 황무하여 안식년을 누림 같이 안식하여 칠십년을 지내었으니 여호와께서 예레미야의 입으로 하신 말씀이 응하였더라” 

    ② 종이 동족 히브리 사람이면 6년 동안 부리다가 7년째는 자유케 하라(출 21:2-6, 신 15:12-18)
    율법에는 히브리 종인 경우 종이 된 지 7년째 되는 해에 반드시 놓아 자유하게 하도록 규정했습니다(출 21:2, 신 15:12). 그리고 자유의 몸이 된 종을 빈손으로 보내서는 안되며(신 15:13-14), 노예의 몸값을 받지 않고 조건 없이 해방시켜 주도록 규정하였습니다(출 21:2, 신 15:18).


    그러나 유다 백성들은 안식년의 규례를 어기고 종들의 자유를 빼앗았습니다(렘 34:8-14). 이에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바벨론에 끌려가게 하시어 그들도 자유를 빼앗기게 하셨던 것입니다. 

     예레미야 34:17 “그러므로 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너희가 나를 듣지 아니하고 각기 형제와

    이웃에게 자유를 선언한 것을 실행치 아니하였은즉 내가 너희에게 자유를 선언하여 너희를 칼과

    염병과 기근에 붙이리라 나 여호와의 말이니라 내가 너희를 세계 열방 중에 흩어지게 할 것이며”

    유다 백성은 무수한 죄 때문에 피 흘린 성읍이 되었고, 두껍게 녹슬어 버린 가마같이 되고 말았습니다(겔 24:6). 하나님께서는 유다를 ‘바벨론 포로 생활 70년’이라는 풀무 속에 집어넣고, 하나님의 노와 분을 쏟아서 유다의 죄악을 정결케 하셔야만 했습니다(렘 29:10-11, 겔 22:21-22, 24:12-14).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을 바벨론에 포로로 보내셨으나, 70년이라는 긴 시간 동안 영적 암흑 상태로 방치해두지 않으시고 말씀을 보내어 철저하게 회개케 하시어 새로운 백성이 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예레미야를 통해 그들이 포로로 흩어진 상태에서도 하나님에 의해 구원 받을 수 있다는 희망의 메시지를 전하게 하셨습니다(렘 29:11-14). 정복자 바벨론에게 복종하고 그 땅에서 적응하며 그 역경 속에서 회개하여 정결케 됨으로써, 마침내 하나님의 정의와 구속 경륜을 확실히 깨닫고 믿게 하기 위함이었던 것입니다.


    남 유다의 멸망과 바벨론 포로의 역사

    이스라엘은 북방 강대국 앗수르와 바벨론, 남방 강대국 애굽 사이에 낀 약소 국가였습니다. 남 유다의 제 16대 왕 요시야 당시는 세계 최강국이던 앗수르가 쇠퇴기에 접어들었고, 바벨론이 신흥 세력으로 부상하고 있었습니다.

    1. 므깃도 전투와 갈그미스 전투
    애굽은 앗수르를 도와 바벨론의 남하를 막기 위하여 갈그미스에서 바벨론과 싸우려고 하였습니다. 애굽 왕 느고는 갈그미스로 가기 위해 팔레스타인 지역을 통과해야 했는데, 이때 반 앗수르 입장이었던 요시야 왕은 북진하는 애굽과 전쟁을 하게 되었습니다.

    애굽 왕 느고는 사자를 보내어 화친을 요청하며, 이 일은 하나님의 명령이고 자신이 싸우려는 대상은 요시야 왕이 아님을 분명히 했습니다(대하 35:21). 그러나 요시야 왕은 듣지 않고 변장까지 하면서 전쟁터에 남기를 고집하였습니다(대하 35:21-22). 전쟁터에서 애굽의 궁수가 쏜 화살에 중상을 입은 요시야는 예루살렘에 돌아와 죽고 말았습니다(대하 35:23).

    요시야는 종교 개혁을 통해 영적 내리막길로 곤두박질하던 남 유다에 일시적으로나마 제동을 걸었지만, 요시야가 죽은 이후 남 유다의 국운이 갑자기 쇠약해지고 순식간에 멸망의 길로 치닫게 되었습니다.  


    이후 애굽과 바벨론이 맞서는데, 이것이 갈그미스 전투(주전 605년)입니다. 이 전투에서 승리한 바벨론은 당시 근동 지방을 장악하였고, 애굽은 다시 일어나지 못했습니다(왕하 24:7).

    바벨론의 느부갓네살 왕은 갈그미스 전투에서 승리한 후, 아프리카 대륙과 근동 아시아 지역을 잇는 전략적 요충지인 남 유다 왕국마저 정복하기 위하여 예루살렘을 공격하였고, 3차에 걸쳐 유다 왕과 백성들을 바벨론으로 끌고 갔습니다.

    3차에 걸친 바벨론 포로의 과정은 성전 파괴의 과정과 다름없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바벨론을 들어서 가장 아끼는 성전을 파괴하심으로써 이스라엘을 철저하게 징계하셨습니다(왕상 9:7-9).

    Tissot_The_Flight_of_the_Prisonersjpg

    Flight of The Prisoners 19세기 프랑스의 화가 티소(James Tissot)가 그린

    불타는 예루살렘과성전, 그리고 바벨론 군대에 포로로 끌려가는 유다 백성들

    2. 바벨론 제 1차 포로
    1) 포로 시기 – 주전 605년 / 여호야김 제 3(혹은 4)년, 느부갓네살 원년
    이때는 여호야김 왕 제 3년(단 1:1)이었습니다. 그런데 예레미야 46:2은 이때를 여호야김 4년이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두 기록에 1년 차이가 나는 이유는 열왕기하 23:34을 통해 해명할 수 있습니다. 열왕기 기자는 여호야김이 그의 동생 여호아하스를 대신하여 왕이 되었다고 기록하지 않고, 여호야김이 그의 아버지 요시야를 대신하여 왕이 되었다고 기록하였습니다. 역사적으로는 요시야(주전 640-609b년), 여호아하스(주전 609b-608년), 여호야김(주전 608-597년) 순으로 왕이 되었지만(왕하 23:3-0, 34, 대하 36:1-4), 요시야 다음에 바로 여호야김이 왕이 된 것처럼 기술한 것은, 3개월의 짧은 통치 기간 동안 악을 일삼았던 여호아하스를 왕으로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왕하 23:31-32). 이러한 관점에 따르면 제 1차 바벨론 포로로 끌려간 주전 605년은 여호야김 제 4년이 되는 것입니다.

    2) 포로 대상과 당시 상황
    제 1차 바벨론 포로 때에는 다니엘을 포함한 왕족과 귀족들이 끌려갔습니다(단 1:3). 여호야김은 처음 3년은 바벨론을 섬기다가 다시 애굽과 동맹하여 반(反)바벨론 정책을 펼쳤고(왕하 24:1), 주전 602년 쇠사슬로 결박당하여 바벨론으로 끌려갔으며 성전 기구들을 약탈당하였습니다(왕하 24:2, 단 1:1-2, 5:2).

    3. 바벨론 제 2차 포로
    1) 포로 시기 – 주전 597년 / 여호야긴 즉위년, 느부갓네살 8년
    여호야긴은 주전 597년에 즉위하여 3개월 10일을 통치하고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갔습니다(왕하 24:8-12, 대하 36:9-10). 바벨론 역대기에 따르면, 티쉬리월(7월)로 시작되는 달력을 기준할 때 여호야긴이 왕이 딘 것은 주전 597년 불월(8월)이며, 3개월 10일이 지나 왕위에서 쫓겨난 것은 주전 597년 아달월(12월) 2일입니다. 바벨론이 예루살렘을 포위한 후 얼마 동안의 시간이 경과한 다음에(왕하 24:10-11) 느부갓네살 왕이 예루살렘 성에 이르러 주전 597년 아달월(12월) 2일에 마침내 예루살렘 성을 점령한 것입니다. 이때 왕위에서 쫓겨난 여호야긴은 주전 597년* 니산월(1월) 10일에 바벨론으로 끌려가게 됩니다(대하 36:10). * 남유다 통치 연도는 티쉬리월 기준이므로 해가 바뀌지 않음.

    2) 포로 대상과 당시 상황
    바벨론은 여호와 전의 모든 보물과 왕궁 보물을 집어내었으며 또 이스라엘 왕 솔로몬이 만든 것 곧 여호와의 전의 금기명을 다 훼파하였습니다(왕하 24:10-13, 대하 36:10).
    그리고 여호야긴 왕과 왕의 모친과 왕의 아내들과 내시와 나라의 권세 있는 자들이 포로로 끌려갔습니다(왕하 24:12, 15). 이때 용사 7천 명을 포함하여 방백과 백성 총 1만명, 그리고 공장과 대장장이 1천 명이 끌려갔는데, 그들은 모두 강장하여 싸움에 능한 자였습니다(왕하 24:14-16). 반란의 구심점이 될 소지가 있는 최고 지도자들과 탁월한 인물들을 모두 뽑아서 끌고 감으로 ‘빈천한 자’ 외에는 그 땅에 남은 자가 없도록 하여 남 유다를 철저히 무력화 시킨 것입니다. 여기에는 에스겔 선지자와 에스더의 사촌 모르드개의 조상도 포함되어 있었습니다(겔 1:1-3, 에 2:5-6).
     
    4. 바벨론 제 3차 포로
    1) 포로 시기 – 주전 586년 / 시드기야 11년, 느부갓네살 19년
    시드기야는 바벨론에게 항복하라는 예레미야 선지자의 권면(렘 27:12)을 듣지 않고 반(反)바벨론 정책을 고집하였고(왕하 24:20, 렘 27:12-13, 37:2), 바벨론은 시드기야 제 9년 10월 10일부터 예루살렘을 포위하였습니다(왕하 25:1, 렘 39:1, 52:4). 시드기야가 애굽에 원군을 요청하여 바벨론 군대가 떠났다가 애굽 군대가 즉각 퇴각하자 다시 바벨론 군대가 예루살렘을 침공하여(렘 37:5, 11, 겔 17:15) 시드기야 11년까지 약 30개월 동안(티쉬리 기준 달력) 예루살렘 성을 에워쌌습니다(왕하 25:1-2, 대하 36:11-20, 렘 37:7-10, 겔 17:12-21). 마침내 주전 586년 시드기야 제 11년 4월 9일에 예루살렘 성이 함락되고 말았습니다(왕하 25:1-3, 렘 39:1-2, 52:4-6).

    2) 포로 대상과 당시 상황
    예루살렘이 포위되어 있는 동안 기근이 극심하여 자녀를 잡아먹을 정도로 비극적 참상이 빚어졌는데(애 2:20, 4:10, 사 9:20, 겔 5:10), 이는 모세의 예언대로(레 26:28-29, 신 28:53-57)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한 결과였습니다. 결국 BC 586년, 남 유다는 바벨론에 의해 완전히 멸망하였고, 예루살렘 성이 함락된 4월 9일은 유다인들에게 바벨론 유수 기간 내내 금식과 애통의 날로 지켜졌습니다(슥 7:5, 8:19).

    성이 함락되던 때 시드기야는 밤에 도망하다가 갈대아 군대에게 잡혀 하맛 땅 립나로 끌려가 바벨론 왕에게 신문을 당하였습니다. 바벨론 왕은 시드기야의 목전에서 그 아들들을 죽이고, 시드기야의 두 눈을 빼고 사슬로 결박하여 바벨론으로 끌어다가 죽는 날까지 옥에 가두었습니다(왕하 25:4-7, 렘 39:4-7, 52:7-11).


    예루살렘이 함락된 지 한 달 만인 5월 10일에 바벨론 시위대장관 느부사라단이 와서 여호와의 전과 왕궁과 예루살렘의 모든 집을 귀인의 집까지 불사르고 사면 성벽을 헐었습니다(왕하 25:8-12, 대하 36:18-19, 렘 39:8-10, 52:12-16). 그리고 성전의 두 놋기둥(야긴과 보아스)과 받침들과 놋바다를 깨뜨려 그 놋을 바벨론으로 가져갔고, 또 가마들, 부삽들, 불집게들, 숟가락들과 섬길 때에 쓰는 모든 놋그릇을 다 가져갔으며, 또 금물의 금과 은물의 은을 가져갔고, 솔로몬이 여호와의 전을 위하여 만든 두 기둥과 한 바다와 그 받침들을 취하였습니다(왕하 25:13-17, 대하 36:18-19, 렘 52:17-23).

    그리고 대제사장 스라야와 부제사장 스바냐와 전 문지기 세 사람을 잡고, 군사를 거느린 장관(내시) 하나와 왕의 시종 칠 인(혹은 다섯 사람)과 군대장관의 서기관 하나와 국민 육십 명을 잡아갔으며, 립나에서 그들을 쳐 죽였습니다(왕하 25:18-21, 렘 52:24-27).

    한편, 예레미야 52:28-30에는 바벨론에 항복하지 않고 끝까지 항거하다 소규모로 잡혀간 자들이 총 4,600명이 있음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제 이스라엘 민족은 포로로 끌려간 자와 고국 땅에 남겨진 자, 그리고 재난을 피하여 주변국으로 도망친 자 등으로 나뉘어, 민족 전체가 갈기갈기 찢기고 그 존재가 점점 사라지는 최악의 비극적 상황에 처하게 되었습니다.

    선민 유다 백성이 하나님 없는 이방 나라 바벨론으로 포로 되어 끌려간 것은 하나님의 진노로 말미암은 최대의 비극이요 수치였습니다. 이는 우상을 숭배하고 안식일과 안식년을 지키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고 그 거룩하신 뜻을 멸시한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징계와 진노의 표현이었습니다(대하 36:21, 참고-렘 34:8-16). 

    그러나 절대로 망하지 않을 것만 같던 바벨론이 하나님의 주권 역사로 메대와 바사의 연합군에 의해 멸망하게 하시고(참고-렘 50:3, 9, 41-46장, 51장) 이스라엘 백성이 귀환하도록 하셨습니다(대하 36:22-23, 스 1:1-4).






    남유다의 멸망과 바벨론의 1차 2차 3차 4차 포로의 역사

    ​이스라엘(남 유다)은 북쪽에는 앗수르와 바벨론이 진을 치고 있었고 남쪽에는 애굽이 진을 치고 있는 강대국의 틈새에 끼어 있는 약소국가이었습니다.

    남 유다의 제16대 왕 요시야 당시는 세계 최강국이던 앗수르가 쇠퇴기에 접어들었고, 바벨론이 신흥 세력으로 부상하고 있었습니다.

    1. 므깃도 전투와 갈그미스 전투

    애굽은 앗수르를 도와 바벨론의 남하를 막기 위하여 갈그미스에서 바벨론과 싸우려고 하였습니다. 애굽 왕 느고는 갈그미스로 가기 위해 팔레스타인 지역을 통과해야 했는데, 이때 반 앗수르 입장이었던 요시야 왕은 북진하는 애굽과 전쟁을 하게 되었습니다.

    애굽 왕 느고는 사자를 보내어 화친을 요청하며, 이 일은 하나님의 명령이고 자신이 싸우려는 대상은 요시야 왕이 아님을 분명히 했습니다(대하 35:21). 그러나 요시야 왕은 듣지 않고 변장까지 하면서 전쟁터에 남기를 고집하였습니다(대하 35:21-22). 전쟁터에서 애굽의 궁수가 쏜 화살에 중상을 입은 요시야는 예루살렘에 돌아와 죽고 말았습니다(대하 35:23).

    요시야는 종교 개혁을 통해 영적 내리막길로 곤두박질하던 남 유다에 일시적으로나마 제동을 걸었지만, 요시야가 죽은 이후 남 유다의 국운이 갑자기 쇠약해지고 순식간에 멸망의 길로 치닫게 되었습니다.

    이후 애굽과 바벨론이 맞서는데, 이것이 갈그미스 전투(주전 605년)입니다. 이 전투에서 승리한 바벨론은 당시 근동 지방을 장악하였고, 애굽은 다시 일어나지 못했습니다(왕하 24:7).

    바벨론의 느부갓네살 왕은 갈그미스 전투에서 승리한 후, 아프리카 대륙과 근동 아시아 지역을 잇는 전략적 요충지인 남 유다 왕국마저 정복하기 위하여 예루살렘을 공격하였고, 3차에 걸쳐 유다 왕과 백성들을 바벨론으로 끌고 갔습니다.

    3차에 걸친 바벨론 포로의 과정은 성전 파괴의 과정과 다름없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바벨론을 들어서 가장 아끼는 성전을 파괴하심으로써 이스라엘을 철저하게 징계하셨습니다(왕상 9:7-9).

    Flight of The Prisoners 19세기 프랑스의 화가 티소(James Tissot)가 그린

    불타는 예루살렘과성전, 그리고 바벨론 군대에 포로로 끌려가는 유다 백성들

    2. 바벨론 제 1차 포로

    1) 포로 시기 – 주전 605년 / 여호야김 제 3(혹은 4)년, 느부갓네살 원년

    이때는 여호야김 왕 제 3년(단 1:1)이었습니다. 그런데 예레미야 46:2은 이때를 여호야김 4년이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두 기록에 1년 차이가 나는 이유는 열왕기하 23:34을 통해 해명할 수 있습니다. 열왕기 기자는 여호야김이 그의 동생 여호아하스를 대신하여 왕이 되었다고 기록하지 않고, 여호야김이 그의 아버지 요시야를 대신하여 왕이 되었다고 기록하였습니다. 역사적으로는 요시야(주전 640-609b년), 여호아하스(주전 609b-608년), 여호야김(주전 608-597년) 순으로 왕이 되었지만(왕하 23:3-0, 34, 대하 36:1-4), 요시야 다음에 바로 여호야김이 왕이 된 것처럼 기술한 것은, 3개월의 짧은 통치 기간 동안 악을 일삼았던 여호아하스를 왕으로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왕하 23:31-32). 이러한 관점에 따르면 제 1차 바벨론 포로로 끌려간 주전 605년은 여호야김 제 4년이 되는 것입니다.

    2) 포로 대상과 당시 상황

    제 1차 바벨론 포로 때에는 다니엘을 포함한 왕족과 귀족들이 끌려갔습니다(단 1:3). 여호야김은 처음 3년은 바벨론을 섬기다가 다시 애굽과 동맹하여 반(反)바벨론 정책을 펼쳤고(왕하 24:1), 주전 602년 쇠사슬로 결박당하여 바벨론으로 끌려갔으며 성전 기구들을 약탈당하였습니다(왕하 24:2, 단 1:1-2, 5:2).

    3. 바벨론 제 2차 포로

    1) 포로 시기 – 주전 597년 / 여호야긴 즉위년, 느부갓네살 8년

    여호야긴은 주전 597년에 즉위하여 3개월 10일을 통치하고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갔습니다(왕하 24:8-12, 대하 36:9-10). 바벨론 역대기에 따르면, 티쉬리월(7월)로 시작되는 달력을 기준할 때 여호야긴이 왕이 딘 것은 주전 597년 불월(8월)이며, 3개월 10일이 지나 왕위에서 쫓겨난 것은 주전 597년 아달월(12월) 2일입니다. 바벨론이 예루살렘을 포위한 후 얼마 동안의 시간이 경과한 다음에(왕하 24:10-11) 느부갓네살 왕이 예루살렘 성에 이르러 주전 597년 아달월(12월) 2일에 마침내 예루살렘 성을 점령한 것입니다. 이때 왕위에서 쫓겨난 여호야긴은 주전 597년* 니산월(1월) 10일에 바벨론으로 끌려가게 됩니다(대하 36:10). * 남유다 통치 연도는 티쉬리월 기준이므로 해가 바뀌지 않음.

    2) 포로 대상과 당시 상황

    바벨론은 여호와 전의 모든 보물과 왕궁 보물을 집어내었으며 또 이스라엘 왕 솔로몬이 만든 것 곧 여호와의 전의 금기명을 다 훼파하였습니다(왕하 24:10-13, 대하 36:10).

    그리고 여호야긴 왕과 왕의 모친과 왕의 아내들과 내시와 나라의 권세 있는 자들이 포로로 끌려갔습니다(왕하 24:12, 15). 이때 용사 7천 명을 포함하여 방백과 백성 총 1만명, 그리고 공장과 대장장이 1천 명이 끌려갔는데, 그들은 모두 강장하여 싸움에 능한 자였습니다(왕하 24:14-16). 반란의 구심점이 될 소지가 있는 최고 지도자들과 탁월한 인물들을 모두 뽑아서 끌고 감으로 ‘빈천한 자’ 외에는 그 땅에 남은 자가 없도록 하여 남 유다를 철저히 무력화 시킨 것입니다. 여기에는 에스겔 선지자와 에스더의 사촌 모르드개의 조상도 포함되어 있었습니다(겔 1:1-3, 에 2:5-6).

    4. 바벨론 제 3차 포로

    1) 포로 시기 – 주전 586년 / 시드기야 11년, 느부갓네살 19년

    시드기야는 바벨론에게 항복하라는 예레미야 선지자의 권면(렘 27:12)을 듣지 않고 반(反)바벨론 정책을 고집하였고(왕하 24:20, 렘 27:12-13, 37:2), 바벨론은 시드기야 제 9년 10월 10일부터 예루살렘을 포위하였습니다(왕하 25:1, 렘 39:1, 52:4). 시드기야가 애굽에 원군을 요청하여 바벨론 군대가 떠났다가 애굽 군대가 즉각 퇴각하자 다시 바벨론 군대가 예루살렘을 침공하여(렘 37:5, 11, 겔 17:15) 시드기야 11년까지 약 30개월 동안(티쉬리 기준 달력) 예루살렘 성을 에워쌌습니다(왕하 25:1-2, 대하 36:11-20, 렘 37:7-10, 겔 17:12-21). 마침내 주전 586년 시드기야 제 11년 4월 9일에 예루살렘 성이 함락되고 말았습니다(왕하 25:1-3, 렘 39:1-2, 52:4-6).

    2) 포로 대상과 당시 상황

    예루살렘이 포위되어 있는 동안 기근이 극심하여 자녀를 잡아먹을 정도로 비극적 참상이 빚어졌는데(애 2:20, 4:10, 사 9:20, 겔 5:10), 이는 모세의 예언대로(레 26:28-29, 신 28:53-57)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한 결과였습니다. 결국 BC 586년, 남 유다는 바벨론에 의해 완전히 멸망하였고, 예루살렘 성이 함락된 4월 9일은 유다인들에게 바벨론 유수 기간 내내 금식과 애통의 날로 지켜졌습니다(슥 7:5, 8:19).

    성이 함락되던 때 시드기야는 밤에 도망하다가 갈대아 군대에게 잡혀 하맛 땅 립나로 끌려가 바벨론 왕에게 신문을 당하였습니다. 바벨론 왕은 시드기야의 목전에서 그 아들들을 죽이고, 시드기야의 두 눈을 빼고 사슬로 결박하여 바벨론으로 끌어다가 죽는 날까지 옥에 가두었습니다(왕하 25:4-7, 렘 39:4-7, 52:7-11).

    예루살렘이 함락된 지 한 달 만인 5월 10일에 바벨론 시위대장관 느부사라단이 와서 여호와의 전과 왕궁과 예루살렘의 모든 집을 귀인의 집까지 불사르고 사면 성벽을 헐었습니다(왕하 25:8-12, 대하 36:18-19, 렘 39:8-10, 52:12-16). 그리고 성전의 두 놋기둥(야긴과 보아스)과 받침들과 놋바다를 깨뜨려 그 놋을 바벨론으로 가져갔고, 또 가마들, 부삽들, 불집게들, 숟가락들과 섬길 때에 쓰는 모든 놋그릇을 다 가져갔으며, 또 금물의 금과 은물의 은을 가져갔고, 솔로몬이 여호와의 전을 위하여 만든 두 기둥과 한 바다와 그 받침들을 취하였습니다(왕하 25:13-17, 대하 36:18-19, 렘 52:17-23).

    그리고 대제사장 스라야와 부제사장 스바냐와 전 문지기 세 사람을 잡고, 군사를 거느린 장관(내시) 하나와 왕의 시종 칠 인(혹은 다섯 사람)과 군대장관의 서기관 하나와 국민 육십 명을 잡아갔으며, 립나에서 그들을 쳐 죽였습니다(왕하 25:18-21, 렘 52:24-27).

    한편, 예레미야 52:28-30에는 바벨론에 항복하지 않고 끝까지 항거하다 소규모로 잡혀간 자들이 총 4,600명이 있음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제 이스라엘 민족은 포로로 끌려간 자와 고국 땅에 남겨진 자, 그리고 재난을 피하여 주변국으로 도망친 자 등으로 나뉘어, 민족 전체가 갈기갈기 찢기고 그 존재가 점점 사라지는 최악의 비극적 상황에 처하게 되었습니다.

    선민 유다 백성이 하나님 없는 이방 나라 바벨론으로 포로 되어 끌려간 것은 하나님의 진노로 말미암은 최대의 비극이요 수치였습니다. 이는 우상을 숭배하고 안식일과 안식년을 지키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고 그 거룩하신 뜻을 멸시한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징계와 진노의 표현이었습니다(대하 36:21, 참고-렘 34:8-16).

    그러나 절대로 망하지 않을 것만 같던 바벨론이 하나님의 주권 역사로 메대와 바사의 연합군에 의해 멸망하게 하시고(참고-렘 50:3, 9, 41-46장, 51장) 이스라엘 백성이 귀환하도록 하셨습니다(대하 36:22-23, 스 1:1-4).


    예레미야 선지자 - 눈물의 선지자

    1. 인적 사항

    ① 예레미야는 ‘여호와께서 세우시다’라는 뜻.
    ② 제사장 아비아달의 후손으로 추정됨(왕상 2:26).
    ③ 제사장 힐기야의 아들로 베냐민 땅 아나돗에서 출생(렘 1:1).
    ④ 남 유다 요시야 왕 제13년 곧 B.C.627년부터 예루살렘 멸망(B.C.586년)
        이후 유다 남은 백성들이 애굽에 이주하여 정착할 때인 B.C.580년까지 약 50여 년 동안 사역함.
    ⑤ 선민 이스라엘의 구원을 위해 많은 눈물을 흘리며 기도한 까닭에 소위 ‘눈물의 선지자’라고 불림.
    ⑥ 유대 전승에 의하면 평생 독신으로 살다가 말년에 애굽에 끌려가(렘 43:5-7) 돌에 맞아 순교했다고 함. 

    2. 시대적 배경

    예레미야 사역 초기 국제 정세는 갈대아와 앗수르가 세력 다툼을 하느라고 남 유다에 관심이 없었기 때문에 유다로서는 다소 평화로운 상태였다.
    또한 내적으로는 善王(요시야)이 등극하여 성전을 정결케 하고 우상을 제거하는 등 내실을 다지던(건축)시기였다.
    그러나 B.C.609년 요시야가 므깃도에서 애굽 왕 느고(Neco, B.C.610-595년)와 싸우다가 전사(대하 35:20-24)한 뒤로 하나님이 아닌 애굽을 의지 대상으로 삼은 이후 왕들의 악행과 失政이 계속됨에 따라 유다는 급속히 쇠퇴의 길로 치달았다.
    그리하여 유다는 B.C.605년 바벨론에 의해 첫 침공을 당하여 복속된 이래 B.C.597년과 B.C.586년 거듭해서 침공을 당함으로써 마침내 멸망하고 만다.
    이렇게 볼 때 예레미야가 활동하던 이 시기는 이스라엘 민족이 가장 참혹하고도 광범위하게 시련을 당한 비운의 시기였음을 알 수 있다. 에레미야 당시의 시대적 배경과 관련해서는 예레미야 서론을 참조하라.

    3. 주요 생애

    요시야 통치 시기

    출생

    B.C. 647 년경

    선지자로 소명 받음

    B.C. 627 년

    렘 1:4,5

    요시야와 함께 종교 개혁 단행

    B.C. 627-609 년

    렘 11:1-8

    여호야김 통치 시기

    여호야김의 행악을 규탄함

    B.C. 609-597 년

    렘 22:18,19

    예루살렘 멸망 예언

    렘 25:1-38

    시드기야의 통치 시기

    바벨론에 무조건 항복을 주장함

    B.C. 597-586 년

    렘 38:14,17,18

    바벨론 포로 및 귀환 예언

    렘 32:1-44

    반역죄로 고발당해 옥에 갇힘

    B.C. 587 년

    렘 37:4-15

    석방되어 시위대 뜰에 거함

    렘 37:16-21

    진흙 구덩이에 던져짐

    렘 38:1-6

    에벳멜렉의 상소로 구출됨

    렘 38:7-13

    예루살렘 멸망 및 시드기야와 유다인들의 포로됨

    B.C. 586 년

    렘 52:4-34

    전쟁 와중에도 안전하게 보호를 받음

    렘 39:11-14

    죽음

    B.C. 580 년경

    4. 성품

    ① ‘눈물의 선지자’로 불릴 만큼 천성적으로 동정심이 많고 온유한 자(렘 9:1).
    ② 백성들의 박해로 인해 자신의 선지자직에 대해 수없이 갈등과 회의를 거듭한 내성적 성품의 소유자(렘 20:7-10).
    ③ 유다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 메시지를 전할 때에 사정없이 외치는 강인한 성품의 소유자.
    ④ 몇 차례에 걸친 투옥과 박해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주의 말씀을 전한 것으로 볼 때 소명 의식이 투철하고 인내심이 강한 자(렘 20:1-3; 37:13-15; 38:4-18).

    ​5. 구속사적 지위

    ① 구약 선민의 후손 유다의 패역함을 깨우치기 위해 소명 받은 선지자(렘 3:11-22).
    ② 유다 백성과 하나님 사이에서,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달한 대언자임과 동시에 백성들의 회개를 촉구하여 하나님과 화목을 꾀하는 중보자적 역할을 감당한 자(렘 15:19).
    ③ 출생 전부터 하나님의 전적인 의지와 은혜로 인해 선택된 자(렘 1:5).
    ④ 하나님의 계시의 말씀을 전했음에도 불구하고 백성들은 물론 심지어 가족들에 의해서 조차 배척받고 핍박당한 그의 생애는 이 땅에서 복음을 전하고도 동족인 유대인들에 의해 핍박을 받고 끝내 죽임을 당하신 그리스도의 생애를 예표함(렘 11:21-23; 26:6-9).

    ​6. 평가 및 교훈

    ① 예레미야는 원래 내성적이고 나약한 인물이었지만(1:6절) 하나님께서 함께 동행하실 때에는 늘 힘있고 강하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사역자의 모습을 나타내었다. 그러므로 하나님 나라의 일꾼으로 부름 받은 성도들은 자신은 하나님의 일을 하기에 너무 나약하고 초라하다고 생각하며 하나님의 부르심에 머뭇거릴 필요가 없다. 인간적인 나약함이나 부족함이 하나님의 부르심에 전혀 결격 사유가 되지 않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강하고 능력 있는 자를 부르셔서 그들의 강한 것에 의지해 당신의 말씀을 선포하시지 않는다. 하나님께서는 오히려 연약하고 힘없는 자들을 택하셔서 소명과 함께 그것을 능히 감당할 힘도 함께 주심으로 스스로 힘과 능력이 있다고 생각하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시는 분이시다(고전 1:27-29). 그런즉 사명을 맡은 성도들은 인간적 재능을 갈고 닦는 것도 중요하지만 무엇보다도 위로부터 내려오는 하나님의 능력을 힘입기 위해 더욱 노력해야 한다.

    ② 예레미야가 극심한 박해로 인해 사명을 포기하고픈 지경에까지 이르렀듯이 오늘날의 사역자들도 여러 가지 모양의 고난과 고통으로 인해 사역을 포기하고 싶은 충동을 느낄 때가 있을 것이다. 이는 사역자들이 반드시 극복해야만 하는 장애물들로 이런 때일수록 더욱 마음을 가다듬고 장차 있을 상급을 기대하는 마음으로 곁길로 가지 않도록 노력해야 한다. 그러한 낙심과 절망 중에도 다시 일어나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을 끝까지 바르게 선포한 예레미야와 같이 실로 끝까지 하나님을 의뢰하는 자만이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하늘 축복을 받아 누리게 될 것이다(렘 17:5-8).

    ③ 바벨론에 투항하라는 반민족적 언사 때문에 예레미야는 동족들에게 많은 고난을 당해야했다. 그러나 이는 예레미야가 자기 민족을 사랑하지 않거나 세계정세에 대한 기회주의적 외교를 최하기 위한 수단이 아니라 하나님의 섭리와 주권에 대한 그의 깨달음에 의한 것이었다(렘18:6).

    오늘날의 성도들도 많은 사람으로부터 동의를 얻지 못할 뿐더러 도리어 조롱과 비웃음의 손가락질을 받는다고 하더라도 하나님의 뜻과 그 분이 지시하시는 바를 반드시 선포해야할 의무가 있다.

    ④ 예레미야는 유다의 암담한 미래를 예언함과 동시에 회복의 소망도 외쳤다. 이는 여호와 신앙에 있어서 믿음이나 사랑만큼 소망의 중요성도 가르쳐 주는 교훈으로 제시된다. 극도의 황금만능 사상과 비윤리적인 상황으로 치닫는 오늘날, 사회의 사방에서 들려오는 암울한 상황과 암담한 현실 속에서 막심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성도된 우리는 복음을 높이 들어 어두운 곳에 소망의 빛을 비추어야 하겠다.

    7. 핵심 성구

    “보라 내가 오늘날 너를 열방 만국 위에 세우고 너로 뽑으며 파괴하며 파멸하며 넘어뜨리며 건설하며 심게 하였느니라”(렘 1:10).





    이스라엘의 멸망

    1. 北이스라엘의 멸망과 처참한 운명의 유다.

    이스라엘이 南北으로 나뉘어 혼란 속에 빠져 있을 때,
           티그리스강 상류의 동쪽 연안지대에서는 초강대국 앗시리아 제국이 건설되고 있었다.
    앗시리아 제국의 팔레스타인 침공은 기원전 1,100년에서 633년에 걸쳐 이루어졌다.
    이 시기는 이스라엘이 남북으로 분열하여,멸망의 길로 치닫고 있는 시기이기도 하다.

    앗시리아 제국은 지중해 연안의 도시들에 대하여 여러 번에 걸쳐 공격을 하였다.
    이 와중에 北이스라엘 왕국의 수도 사마리아는 앗시리아의 3년에 걸친
                    공격 끝에 침략자의 손에 넘어가게 된다(기원전 722년).
    이렇게 북이스라엘의 역사는 끝나고 말았다.
    멸망한 북이스라엘에는 異民族이 옮겨와 살았고, 앗시리아의 지배하에 들어가게 되었다.

    이러한 격동 속에서 유다의 운명은 어찌되었을까?
    ①앗시리아가 활동할 당시 남유다의 왕은 히스기야였다.
        그는 다른 왕들처럼 바알 神을 따르지 않고 하느님을 섬겼다.
    ②이에 히스기야왕은 하느님의 도움으로
                앗시리아의 엄청난 공격을 막아내고 승리하게 된다.
    ③때문에 유다는 북이스라엘처럼 앗시리아에 멸망당하지 않고 살아남게 되었다.

    그러나 정세의 변화는 어지러웠고,
                기원전 650년경에는 그때까지 앗시리아의 지배하에 있던
                바빌로니아가 점점 세력을 키워 새로운 지배자로 등장하게 된다.

    과연 바빌로니아 제국의 등장은 유다에 어떤 영향을 끼치게 될까?
    당시 주변 정세를 살펴보면,
    ①신흫 바빌로니아 제국의 등장으로 앗시리아의 세력이 쇠퇴하자,
    ②그것을 두려워한 이집트가 바빌로니아에 대항하여 앗시리아와 동맹을 하게 된다.
    ③이 사이에 낀 유다 왕국은 복잡한 정치적 선택을 해야만 했다.
        이집트와 동맹하여 바빌로니아에 대항할 것인가?
         그렇지 않으면 바빌로니아와 화해하여 대국 이집트에 대적할 것인가?
        유다는 왕국의 존립을 놓고 일생일대의 선택을 해야만 하였다.
        대국 사이에 낀 약소국의 처참한 운명이었다.
     
    2. 예언자 예레미야의 등장
     
    이러한 혼란 속에서 홀연히 나타나 절망을 누르고
                고난의 길을 걸은 예언자가 있었는데, 바로 유다 왕국의 예레미야였다.
    예레미야는 예루살렘 근교의 제사장 집안에서 태어나
                       생애의 대부분을 예루살렘에서 보냈다.
    ①이집트일까 아니면 바빌로니아일까라는 선택 속에서,
                  예레미야는 바빌로니아 왕 느부갓네살(재위605-562)이
                  유다 왕국을 위하여 하느님이 사용할 왕이라고 예언하고,
                  이집트와 동맹을 맺는 것을 반대했다.
    ②그러나 그의 이런 주장은 예루살렘 사람들에게 커다란 반감을 샀다.
     ③결국 예레미야는 배신자로 고발당하고 지하의 흙탕물에 잠기게 된다.
    ④기원전 605년, 드디어 대국끼리의 격돌이 현실로 나타났다.
        바빌로니아왕 느부갓네살과 이집트 느고왕이 격돌하는데,
                   이것이 유프라테스강 주변에서 발생한 카르케미쉬 전투이다.
        결과는 느부갓네살왕의 승리로 끝난다.
    ⑤바빌로니아 군대는 지중해의 해안을 따라 평야 쪽으로 침공해 왔다.
        모든 것이 예레미야의 예언대로였던 것이다.

    3. 南유다도 멸망

    ①유다 왕국의 여호야킴왕 시대에 바빌로니아가 침공하자
               여호야킴은 항복하고 조공을 바칠 것을 약속한다.
    ②그런데 정세가 다시 변하게 된다.
        이집트 느고왕이 세력을 회복하여 바빌로니아를 내쫒게 된다.
        이제 또 다시 유다는 선택의 기로에 서게 되었다.
    ③지금이야말로 바빌로니아의 지배로부터 도망칠 수 있는절호의 기회였다.
        유다의 여호야킴왕은 상황을 뒤집고 이집트의 느고왕에게 붙었다.
    ④그러나 이를 어쩌라! 여호야킴왕의 판단은 결국
                   유다 왕국이 바빌로니아로부터 침략당하는 계기가 되었다.
       드디어 태세를 재정비한 느부갓네살왕은 반역을 이유로
                   즉시 이스라엘의 수도 예루살렘을 침략하여 점령하게 된다.
       이 사건으로 예루살렘의 군사와 목공과 철공 등 1만여 명이 체포되어
                            바빌로니아로 끌려가게 된다.
    ⑤이때 유다는 간신히 독립왕국의 체면을 지키는 것을 인정받게 되는데,
                이는 느부갓네살왕의 특별한 처분에 의한 것이다.
                예레미야의 예언이 그대로 적중한 셈이다.
    ⑥이때 유다 왕국은 여호야킴왕으로부터 시드키야왕 시대로 넘어가고 있는 시기였다.
        새롭게 왕이 된 시드키야는 이러한 굴욕을 참아내지 못하고 이집트와 동맹을 맺게 된다.
    ⑦이에 느부갓네살왕의 노여움이 폭발하여  바빌로니아 大군단이 예루살렘을 침공하게 된다.
        양국간의 격렬한 공방은 약 2년간 계속되었고,
                       유다 군대는 모두 힘을 다 쏟아 부었지만,결국 예루살렘은 함락당하고 만다.

    ⑧예루살렘 성전은 무너지고, 거리는 일순간에 비탄에 잠기게 되었다.
        약탈이 곳곳에서 일어났고, 병사들은 체포되어 쇠사슬에 묶여
                    바빌로니아로 연행되어 갔다.
       이때 연행되어진 병사가 1-2만이라고 전해지고 있으며,
               이것이 바로 ‘제2차 바빌론 유배’이다.
    ⑨열왕기에서 제2차 바빌론 유배에 대해 ‘이제 남아 있는 것은
                   포도를 만드는 자와 농부뿐이었다’라고 전하고 있다.
    ⑩이제 남유다도 멸망하여 이스라엘은 완전히 역사의 뒷무대로 사라지고,
         또한 번성하였던 바빌로니아 제국도
                 기원전 538년 페르시아의 왕 고레스에 의해 멸망당하고 만다.








    북이스라엘의 멸망 이유, 당시 국제적 정세를 바탕으로


    열왕기하 17장 당시의 국제정세와 북이스라엘의 상황

    열왕기하 17장은 북이스라엘의 멸망을 다루고 있으며, 그 배경에는 당시 고대근동의 복잡한 국제 정세와 정치적 상황이 깊이 얽혀 있습니다. 호세아 왕이 애굽에 도움을 요청하고 앗수르와 갈등을 빚게 된 사건은 단순한 정치적 실수가 아니라, 당대 강대국들 간의 힘의 균형과 북이스라엘 내부의 분열된 정치 세력 간의 갈등에 의해 결정되었습니다. 이 부분에서는 당시 고대근동의 주요 강대국들, 북이스라엘의 정치적 상황, 그리고 호세아가 취한 외교적 선택의 결과에 대해 자세히 살펴보겠습니다.


    1. 고대근동의 국제 정세: 앗수르와 애굽의 패권 경쟁

    기원전 8세기 후반은 앗수르 제국이 중동에서 가장 강력한 제국으로 부상하던 시기였습니다. 디글랏빌레셀 3세(Tiglath-Pileser III, 재위 기원전 745-727년)의 군사적 개혁과 정복 전쟁으로 앗수르는 주변 국가들을 속국으로 만들고 조공을 통해 지배력을 확대했습니다. 특히 팔레스타인 지역과 시리아-팔레스타인 지역은 앗수르에게 전략적으로 중요한 지역이었으며, 이 지역을 장악함으로써 앗수르는 애굽과의 무역로와 군사적 요충지를 확보할 수 있었습니다.

    반면, 애굽은 한때 중동 지역에서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했으나, 기원전 8세기에는 앗수르에 비해 국력이 쇠퇴한 상태였습니다. 당시 애굽은 리비아 출신 왕조인 제22왕조와 제23왕조로 나뉘어 있었고, 내부 분열로 인해 정치적 혼란을 겪고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애굽은 여전히 팔레스타인 지역의 국가들에게 하나의 대안적 세력으로 간주되었습니다. 북이스라엘과 시리아 등 일부 국가들은 앗수르의 지배에서 벗어나기 위해 애굽과 동맹을 맺으려는 시도를 했습니다.

    2. 북이스라엘의 정치적 상황: 친앗수르파와 친애굽파의 갈등

    북이스라엘은 정치적으로 불안정한 상황에 처해 있었습니다. 이전 왕들인 예후와 여로보암 2세 시기에 잠시 번영을 누리기도 했으나, 그 이후 왕권이 약화되고 연이은 왕위 찬탈과 반란으로 인해 혼란이 지속되었습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북이스라엘 내부에는 두 가지 주요 정치 세력이 형성되었습니다.

    1. 친앗수르파:
      이들은 앗수르의 군사적 우위를 인정하고 조공을 바치며 평화를 유지하자는 입장을 취했습니다. 이들은 앗수르와의 전쟁이 국가에 치명적인 결과를 가져올 것을 우려하며, 외교적으로 앗수르에 굴복하는 것이 현실적이라고 판단했습니다. 친앗수르파는 정치적 안정을 통해 국내의 경제와 군사력을 보존하려는 목표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2. 친애굽파:
      이들은 앗수르의 압박에서 벗어나기 위해 애굽과의 동맹을 추진했습니다. 이들은 애굽이 여전히 강대국으로서 앗수르에 대항할 능력이 있다고 믿었으며, 애굽과 협력하여 앗수르의 지배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이라 기대했습니다. 그러나 애굽은 당시 내부적으로 분열된 상황이었고, 북이스라엘에 실질적인 군사 지원을 제공할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습니다.

    호세아는 이러한 갈등 속에서 초기에는 친앗수르파의 입장을 따랐으나, 점차 친애굽파의 영향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는 앗수르에 조공을 끊고 애굽 왕 소(So)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외교적 결정을 내렸습니다(열왕기하 17:4). 그러나 애굽은 실질적인 군사적 개입을 하지 않았고, 이로 인해 북이스라엘은 고립된 상태에서 앗수르의 침략을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3. 앗수르의 대응과 사마리아 포위전

    앗수르는 호세아의 반란을 중대한 도전으로 간주하고 즉각적으로 대응했습니다. 앗수르 왕 살만에셀 5세는 군대를 동원하여 사마리아를 포위했습니다. 이 포위전은 약 3년 동안 지속되었으며, 앗수르는 철저한 봉쇄 전략을 통해 사마리아의 외부 지원을 차단하고 내부를 고갈시켰습니다. 사마리아 주민들은 기근과 내부 혼란에 시달리며 점차 저항력을 잃어갔습니다.

    사마리아가 함락된 후, 많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앗수르로 포로로 끌려갔습니다. 앗수르는 점령지의 민족들을 분산시키는 정책을 통해 반란의 가능성을 차단하고, 이스라엘 지역에 여러 이방 민족들을 이주시켰습니다. 이는 이스라엘의 민족적, 종교적 정체성을 약화시키는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4. 애굽의 소극적 대응

    애굽은 호세아가 도움을 요청했을 때 군사적 개입을 하지 않았습니다. 이는 당시 애굽이 앗수르와의 전면전을 회피하고자 했기 때문입니다. 애굽은 팔레스타인 지역의 국가들에게 정치적 영향력을 유지하려 했으나, 앗수르와의 직접적인 충돌을 피하며 자신들의 국익을 우선시했습니다. 이로 인해 호세아의 기대는 무너졌고, 이스라엘은 외교적 고립 상태에서 멸망하게 되었습니다.

    5. 북이스라엘의 멸망 이유와 이후의 상황

    열왕기 기자는 북이스라엘의 멸망 원인을 단순한 외교적 실패나 군사적 패배로 보지 않았습니다. 그는 명확하게 이스라엘의 멸망을 그들의 죄악과 하나님의 언약 파기로 인한 하나님의 심판으로 설명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주신 율법을 무시하고, 주변 이방 민족들의 우상 숭배 문화를 받아들였습니다(열왕기하 17:7-12). 그들은 바알과 같은 이방 신들을 섬기고, 산당과 목상을 세우며 끊임없이 하나님을 떠났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여러 선지자들을 보내어 경고하셨으나, 이스라엘 백성은 선지자들의 음성을 무시하며 회개하지 않았습니다(17:13-14). 그 결과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그들의 죄악으로부터 돌이키기 위해 심판을 내리셨고, 결국 앗수르에 의해 멸망하도록 허락하셨습니다. 열왕기 기자는 이를 하나님의 공의와 거룩함을 드러내는 사건으로 기록하며, 이스라엘이 언약에 대한 불순종으로 인해 멸망하게 되었음을 강조합니다.

    이스라엘이 멸망한 후, 앗수르는 정복된 지역을 재편성하기 위해 이방 민족들을 사마리아로 이주시켰습니다. 이로 인해 이스라엘 땅에는 혼합된 민족과 종교가 형성되었고, 이는 나중에 사마리아인과 유대인 사이의 갈등의 근원이 되었습니다. 또한, 북이스라엘의 멸망은 남유다에게도 큰 경고가 되었습니다. 남유다는 이 사건을 통해 하나님께 대한 불순종의 결과를 목격하였으나, 이후에도 우상 숭배와 불순종의 길을 계속 걷게 됩니다.

    결론

    열왕기하 17장에 나타난 북이스라엘의 멸망은 단순히 한 국가의 멸망이 아니라, 하나님의 경고와 심판이 이루어진 사건이었습니다. 당시 고대근동의 국제정세 속에서 북이스라엘은 앗수르와 애굽 사이에서 전략적 결정을 내렸으나, 인간적인 방법에 의존한 선택은 결국 실패로 끝나고 말았습니다. 우리는 이 사건을 통해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순종과 신뢰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깊이 깨달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경고를 주시고 회개의 기회를 제공하시지만, 끝내 그분의 뜻을 무시하는 자들에게는 심판이 임하게 됩니다. 오늘날 우리도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신뢰하며 그분의 뜻에 따라 살아가는 결단을 내려야 할 것입니다.









    역대상 5장 요약

    르우벤 자손의 이름과 그들이 살았던 지역,갓 자손의 지역과 그들의 후손과 그 이름,동쪽 지파의 군대 규모와 그들이 탈취한 재산, 므낫세 반지파의 영역과 자손들에 대해서 말하고 잇습니다.
    동쪽지파 사람들이 범죄함으로 앗수르에 의하여 다른 지방으로 이주하여 살았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역대상 6장 요약

    레위의 자손과 대제사장 아론 자손의 이름, 레위의 세 아들 게르손,고핫,므리리의 자손과 이름을 말하고 있습니다.
    다윗이 임명한 찬송하는 직분을 맡은 자들의 이름을 말하고 있습니다.
    아론의 자손들과 그 자손들이 했던 일,아론과 레위 사람들이 이스라엘으로부터 받은 정착지와 목초지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역대상 7장 요약

    잇사갈,베냐민의 자손들과 그들의 군대 규모,납달리와 므낫세 자손들의 이름,에브라임 자손들의 이름과 그들이 살던 지역,아셀의 아들들과 그들의 군대 규모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역대상 8장 요약

    베냐민 자손들과 그들의 이름,기브온의 조상 여이엘과 그의 자손,사울왕의 가계와 그들의 이름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5월 3일(토) 역대상 5-8장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장자의 명분(5:1)

  • 이스라엘의 장자 르우벤의 아들들은 이러하니라 (르우벤은 장자라도 그 아비의 침상을 더럽게 하였으므로 장자의 명분이 이스라엘의 아들 요셉의 자손에게로 돌아갔으나 족보에는 장자의 명분대로 기록할 것이 아니니라.

  • 2. 유다는 형제보다 뛰어나고 주권자가 유다로 말미암아 났을찌라도 장자의 명분은 요셉에게 있으니라)

  • The sons of Reuben the firstborn of Israel (he was the firstborn, but when he defiled his father's marriage bed, his rights as firstborn were given to the sons of Joseph son of Israel; so he could not be listed in the genealogical record in accordance with his birthright,
  • and though Judah was the strongest of his brothers and a ruler came from him, the rights of the firstborn belonged to Joseph)
  • 장자의 명분(the rights of the firstborn) 8구절(구약 7, 신약 1)
    창세기 25:31, 32, 33, 34, 27:36. 역대하 5:1, 2. 히브리서 12:16

    장자의 명분은 장자의 축복권을 말합니다(베코라)

    장자의 명분(베코라. bekôwrâh) בְּכוֹרָה
    스트롱번호 1062

    1. 초태생.  2. 느 10:37. 3. 창 4:4
    발음 [ bekôwrâh ]
    구약 성경 / 7회 사용
    관련 성경 / 첫 새끼(창 4:4), 장자의 명분(창 25:31, 27:36, 대상 5:1), 처음 난 것(신 12:17, 14:23, 느 10:36).
    히브리서 12:16
    음행하는 자와 혹 한 그릇 식물을 위하여 장자의 명분을 판 에서와 같이 망령된 자가 있을까 두려워하라.

    프로토토키아(prōtŏtŏkia) πρωτοτόκια, ων, τά  스트롱번호 4415
    1. 장자권.   2. 장자의 권리.  3. 히 12:16.
    발음 [ prōtŏtŏkia ]
    어원  /  4416에서 유래

    πρωτότοκος, ον 스트롱번호 4416
    1. 처음 난.   2. 마 1:25. 3. 롬 8:29
    발음 [ prōtŏtŏkŏs ]
    어원  /  4413과 5088의 대체어에서 유래
    • I. 처음 난.
      • 1. [문자적으로] 마1:25, 눅2:7, 히11:28.
      • 2. [비유적으로]
        • a. [그리스도] 롬8:29, 골1:18, 히1:6, 계1:5.
        • b. [사람에 대해서] 히12:23.
    • 관련 성경  /  맏(롬8:29, 히1:6), 먼저 나신(골1:15), 장자(히11:28, 12:23).


    로마서 8:9
    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

    성령, 하나님의 영, 그리스도 영(로마서 8:1-28)

    로마서 7장에서는 율법과 은혜의 관계를 남편의 비유로 설명합니다. 
    우리가 율법이라는 옛 남편에서 벗어난 것은 예수 그리스도라는 새로운 남편을 만나기 위해서입니다.
    율법이라는 옛 남편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라는 새 남편을 만나야 의롭다하심을 얻고 거룩한 삶을 살 수 있는 것입니다.
    의롭다함을 얻는 것도 새 남편인 예수님이 주시는 은혜요, 예수를 믿고 거룩한 삶을 사는 것도 예수님이 주시는 성령의 능력과 은혜를 경험할 때 가능합니다.
    율법의 행위가 아니라 은혜로 의롭다함을 얻는 것이고, 역시 은혜로 거룩함에 이를 수 있는 것입니다.
    구원의 과정뿐 아니라 성화의 과정에 성령의 도우심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는 겁니다.

    7장에 이어지는 오늘 본문 8장에는 우리가 거룩한 삶을 살도록 인도하시는 성령의 사역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살펴봅니다.

    I. 성령

    먼저 본문에서 소개하는 성령님에 대해서 살펴봅니다.

    1. 그리스도의 영 (9), 하나님의 영(9)

    9절에서 사도 바울은 성령을 ‘그리스도의 영’ 혹은 ‘하나님의 영’으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9)하십니다.

    성령을 ‘그리스도의 영’이라고 꼭 집어 소개한 것은 초대교회 안에 그리스도의 영이 아닌 ‘다른 영’을 전하는 자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사도 요한은 요한1서 4장에서 “사랑하는 자들아 영을 다 믿지 말고 오직 영들이 하나님께 속하였나 분별하라 많은 거짓 선지자가 세상에 나왔음이라.
    이로써 너희가 하나님의 영을 알지니 곧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오신 것을 시인하는 영마다 하나님께 속한 것이요.
    예수를 시인하지 아니하는 영마다 하나님께 속한 것이 아니니 이것이 곧 적그리스도의 영이니라 오리라 한 말을 너희가 들었거니와 지금 벌써 세상에 있느니라.”(요일 4:1-3)라고 경계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도 고린도후서 11장 4절에서 ‘다른 예수’와 ‘다른 영’과 ‘다른 복음’을 전하는 자들을 조심하라 권하고 있습니다.

    교회 안에 그리스도의 영이 아닌 다른 영을 전하는 자들이 있습니다.
    초대 교회 당시에는 영지주의라고 하는 이단이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오신 것을 부인하는 다른 영, 적그리스도의 영을 전했습니다.
    오늘날엔 알파코스, 신사도운동, 관상기도와 같은 영성 프로그램들을 통해 다른 영들이 전파되고 있습니다.
    분별해야 합니다.
    영적인 역사가 나타난다고 이를 다 믿지 말고 이 영들이 하나님께 속하였나 분별해야 합니다.

    성령님을 “그리스도의 영” 또는 “하나님의 영”이라고 부른 두 번째 이유는 우리가 성령의 도우심이 없이는 “그리스도”와 “하나님”을 알 수 없기 때문입니다.
    성령의 주요한 사역이 바로 우리가 ‘그리스도’와 ‘하나님’에 대해서 알 수 있도록 도우시는 겁니다.
    “그리스도의 영”을 받아야 그리스도를 알 수 있고, “진리의 영”(요 16:13)을 받아야 진리 되신 하나님의 말씀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처럼 그리스도의 영을 받아 그리스도를 아는 자가 바로 “그리스도의 사람”(9)인 것입니다.

    2. 양자의 영 (15)

    15절부터는 성령을 “양자의 영”으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였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아바 아버지라 부르짖느니라.”(15) 하십니다.

    예수를 믿는다 하면서 아직도 하나님을 두려움의 대상으로만 생각한다면 ‘종의 영’에서 벗어나지 못한 겁니다.
    율법주의자들은 항상 사람들을 두려움으로 몰아갑니다.
    “이것저것을 행하고 지키지 않으면 지옥 간다.”라고 끊임없이 위협하고 협박합니다.
    문제는 우리가 아무리 노력해도 율법의 요구를 온전히 만족시킬 수 없다는데 있습니다.
    그래서 율법의 행위로 구원을 받고자 하는 자는 항상 두려움과 죄책감에 사로잡힐 수밖에 없습니다.
    죄의 종노릇하는 ‘종의 영’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a. 하지만 율법주의라고 하는 ‘종의 영’이 아닌, ‘양자의 영’을 받은 자들은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 부르게 됩니다. (15)

    “아바 아버지”라 할 때, “아바”는 “아빠”라는 뜻입니다.
    어린 아이가 처음 말을 배우면서 아버지를 부를 때 사용하는 단어가 바로 “아바”입니다.
    율법주의적 관점에서 보면 하나님을 “아빠”라고 부르는 건 상상도 할 수 없는 불경건한 행위입니다.
    하지만,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고 성령을 받은 사람들은 하나님을 “아빠”라고 친근히 부르며 또 그렇게 가까이 계시는 하나님을 경험하게 됩니다.
    종의 영이 아니라 양자의 영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스바냐 3장 17절에서 하나님은 당신의 택한 백성들을 사랑하시는 ‘아빠 하나님’으로 자신을 계시하십니다.
    “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너의 가운데 계시니 그는 구원을 베푸실 전능자시라 그가 너로 인하여 기쁨을 이기지 못하여 하시며 너를 잠잠히 사랑하시며 너로 인하여 즐거이 부르며 기뻐하시리라 하리라.”
    이 말씀을 묵상하면 사랑하는 자녀의 모습을 바라보며 어쩔 줄 몰라 하는 아빠의 모습이 떠오릅니다.
    하나님이 양자의 영을 받은 성도들을 이와 같이 기뻐하시고 사랑하신다는 겁니다.

    b. 양자의 영을 받으면, 그리스도와 함께한 후사의 자격을 얻게 됩니다. (17)

    “자녀이면 또한 후사 곧 하나님의 후사요 그리스도와 함께한 후사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될 것이니라.”하십니다.

    ‘후사’란 상속자란 뜻입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으면, 하나님의 나라를 상속받을 수 있는 특권이 주어집니다.
    특별히 본문에서는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한 후사”라고 소개합니다.
    “예수님과 함께 하나님의 나라를 상속받을 자들”이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주님과 함께 하나님의 나라를 상속받기 위해서는 주님과 함께 고난도 받아야 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자녀이면 또한 후사 곧 하나님의 후사요 그리스도와 함께한 후사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될 것이니라.”(17)하십니다.

    예수님도 친히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하셨습니다.
    제자의 길은 고난의 길이라는 말씀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예수를 믿기 때문에 겪어야 하는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다.”(18)하십니다.
    양자의 영을 받고 “그리스도와 함께 된 후사”로서 이 땅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고난을 받으면, 장차 그리스도와 함께 영광에도 참여하게 될 것이라 하십니다.

    II. 성령의 역할

    이제는 그리스도의 영이요, 하나님의 영이요, 양자의 영이신 성령님이 우리를 통해서 하시는 일들을 살펴봅니다.

    1. 죄와 사망의 법에서 우리를 해방하신다. (2) 하십니다.

    지난 시간에도 살펴본 것처럼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우리를 해방하십니다.
    본문에서 율법을 ‘죄와 사망의 법’으로 묘사한 것은, 율법의 행위로 구원받고자 하는 자들은 결코 ‘죄와 사망의 권세’로부터 벗어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율법의 행위가 아니라, 생명을 주시는 성령의 능력만이 우리를 죄와 사망의 권세에서 벗어나게 할 수 있습니다.
    율법을 지킴으로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 말씀과 성령으로 거듭난 자만이 새 생명의 은혜를 경험할 수 있는 겁니다.

    2. 우리를 인도하신다. (14, 28) 하십니다.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그들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14)하십니다. 사도행전 2장에 보면 예수님의 약속을 붙들고 마가의 다락방에서 기도하던 제자들이 ‘성령 충만’(행 2:4)을 받았다 했습니다. 그렇다면 과연 성령 충만(filled with the Holy Spirit)이 무엇일까요 ? 어떤 신학자는 ‘성령 충만’을 ‘성령에 붙들리는 삶’으로 표현합니다. 성령에 붙들려 성령의 인도하시는 데로 살아가는 것이 바로 ‘성령 충만’이라는 겁니다.

    오순절 마가의 다락방에 성령이 강림한 뒤, 스데반 집사는 성령에 붙들려 복음을 전하다가 순교의 길을 갔습니다. 빌립 집사는 성령에 붙들려 광야로 나갔다가 에디오피아 여왕 간다게의 내시를 만나 복음을 전했습니다. (행 8:26,27) 사도 바울도 본래는 아시아로 가서 복음을 전할 계획을 세웠지만, 성령께서 막으시자 드로아 지방으로 내려가 기도하다가 마게도냐 사람의 환상을 보고(행 16:10) 유럽으로 발걸음을 돌려 빌립보, 데살로니가, 베뢰아, 고린도, 에베소 교회를 세웠습니다. 이것이 바로 성령충만한 사람들의 모습입니다.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그들은 곧 하나님의 아들”(14)이라 하십니다. 내 욕심과 생각이 아니라, 날마다 기도하며 성령의 인도함을 따르는 자가 곧 하나님의 자녀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성령께서 우리를 인도하시는데, 과연 어떤 길로 인도하시는 것일까요? 28절에서는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하십니다.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하심은 과정 속에는 어려움이 있어도 그 결과를 아름답게 하신다는 뜻입니다.

    요셉은 하나님이 주신 꿈 때문에 형들에게 미움을 사서 애굽 땅으로 팔려가 억울한 종살이 옥살이를 했습니다. 하지만, 오히려 그러한 사건들을 통해 요셉은 바로 왕 앞에 설 수 있게 되었고, 바로왕의 꿈을 해석해 줌으로 애굽의 총리대신이 될 수 있었습니다. 이렇듯 애굽의 총리대신이 된 요셉은 훗날 기근으로 어려움에 처한 형제들을 만나 그가 꾸었던 꿈처럼 형제들을 구원하는 사명을 감당하게 됩니다. 요셉의 실패와 고난도 합력하여 하나님의 더 큰 뜻을 이루는 수단으로 사용하셨습니다.

    성령의 인도를 따르는 삶에도 고난이 찾아올 수 있습니다. 하지만, 성령의 인도를 따르는 자들은 언제나 그 결과를 좋게 하시는 즉,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할 수 있습니다.

    3.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신다.(26) 하십니다.

    요한복음에서 예수님이 소개한 성령님의 또 다른 이름 ‘보혜사’(파라클레토스, 요 15:26)는 “옆에 서서 돕는 자”라는 뜻입니다.
    영어 성경에서는 이 단어를 Counselor(NIV), Comforter(KJV) 혹은 Helper(NASB)라고 번역해놓았습니다.
    상담자, 위로자, 돕는 자라는 뜻입니다.

    제자들이 성령의 도우심이 없이는 온전한 믿음 생활을 할 수 없음을 아셨기에 예수님이 ‘보혜사’ 성령을 보내주시겠다는 약속을 주신 것입니다.
    “힘으로 되지 아니하며 능으로 되지 아니하고 오직 나의 신으로 되느니라.”(슥 4:6)하십니다.
    성령의 도우심을 받아야 믿음을 지키고 사명도 감당할 수 있는 것입니다.

    성령께서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는데, 특별히 우리의 기도를 도우신다고 소개하고 있습니다.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가 마땅히 빌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26)하십니다.
    우리가 마땅히 빌 바를 알지 못하나 성령께서 친히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고, 또 우리가 기도할 때 우리의 생각과 욕심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대로”(27) 기도하도록 도와주십니다.

    모든 기도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
    욕심으로 구하는 기도는 오히려 하나님을 근심케 만듭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기도, 응답 받는 바른 기도를 드리려면 성령의 도우심을 받아야 합니다.

    III. 결론(結論)

    그리스도의 영이요 하나님의 영이요 양자의 영이신 성령 하나님을 내 마음에 모시면 그리스도를 알고,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얻게 됩니다.
    성령님은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고, 합력하여 선을 이루도록 우리의 삶을 인도하십니다.

    이런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으려면 날마다 “영으로서 몸의 행실을 죽이고” (13), “육신의 생각이 아니라 영의 생각을 좇으며”(6) 육체의 소욕이 아니라, 성령의 소욕을 따라 살아가는 훈련을 해야 합니다.

    “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그들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13,14절) 하십니다.

    그리스도의 영(로마서 8:9)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 
    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에 있나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

    너희가 믿음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신 줄을 너희가 스스로 알지 못하느냐 그렇지 않으면 너희가 버리운 자니라(고린도후서 13:5)

    예배당에 다닌다고 그리스도인이 아니다.
    학습받고 세례받았다고 그리스도인이 아니다.
    집사 되고 장로 되고 신학하고 목사 되었다고 그리스도인이 아니다.
    장로교, 감리교, 성결교 찾는다고 그리스도인이 아니란 말이다.
    그럼 누가 그리스도인일까?
    그리스도의 영이 없는 자는 그리스도인이 아닌 것이다. 그리스도의 영은 어떤 것인가?

    1. 그리스도의 영은 성령이다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 초월하신 성부께서 육체를 입으신 제한 있는 그리스도로 나타나셨다.
    그리스도께서는 죽으신 후에 다시 부활하사 승천하시고 성령으로 오시어 "내가 세상 끝날까지 같이 하겠다"고 하시고, 너희는 내 안에 있으라 나도 너희 안에 있으리란 약속으로 우리 안에 내주하시는 영이시다.

    하나님은 예수를 세우사 우리의 지혜와 의(義)와 성결과 구속이 되시는 것이다.
    어떻게 사람이 성결할 수 있는가? 성결의 주님께서 나의 중심에 오시어 나의 죄악을 정결케 하시고 그의 성결을 주시는 것이다.
    그의 보혈로 정케 하시고 말씀으로 깨끗케 하시고 불로 사르시는 것이다.

    또한 여러 가지 모양으로 연단 시키어 정화시킨다(단 12:10 ; 히 12:10)

    나의 전무를 그에게 바치면 그가 다 해주시는 것이다.

    내가 애쓰는 것 주께 맡기고 감정을 억제하고 말씀에 서면 불완전한 구원 완전해지고 내가 붙잡았던 것 그가 붙들어 주실 것이다.

    2. 유화의 영이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나를 배우라. 너의 마음이 평안히 쉼을 얻으리라.
    예수가 있는 심령은 온유하고 겸손하다.
    솜과 같이 부드럽고 고기같이 부드럽다.
    어떤 사람의 마음은 돌과 같아서 남과 충돌이 잘된다.

    돌같은 마음은 차디찬 마음, 감각이 없는 마음, 움직임이 없는 마음, 비쭉비쭉 나와서 남을 찌르기를 잘하는 마음이다. 그

    마음이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땅을 차지한다는 말은 논이나 몇 마지기 얻고 밭이나 몇 천 평 얻는다는 말인가? 물론 주와 같이 죽으면 주와 같이 살고, 주와 같이 욕을 받으면 주와 같이 영광을 받을 것이요, 주와 같이 참으면 주와 같이 왕 노릇하리라고 하셨다.

    주께서 천년 왕국에 만왕의 왕이 되시사 이 세상을 다스리실 때에 우리는 다섯 고을 차지하고 혹은 열 고을 차지하는 분봉왕으로 땅을 차지할 것이다. 그러나 마음이 온유한 사람은 이 세상에서 사람의 심지(心地)를 얻는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제일 귀한 것이다. 나라의 영토는 칼과 창으로 얻으려니와 사람의 마음은 마음으로 얻는다고 어떤 성도가 말하였다.

    3. 사죄의 영이다

    아버지여 저들의 죄를 용서하여 주옵소서. 주님은 우리 죄를 속하러 오시어 피를 쏟아 주시고, 사죄의 기도를 가르쳐 주시고, 사죄의 법을 가르쳐 주시고, 사죄의 본을 보이시고 사죄의 기도를 몸소 하셨다.

    주기도문에서 우리가 우리에게 죄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달라는 간구를 가르치셨다.
    베드로가 선생님, 형제가 내게 죄를 지으면 몇 번이나 용서할까요, 한 일곱번 하리까 하니 예수께서는 아니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용서하라 하셨다.
    그러면 "7×7=49", 490번 하란 말인가?
    아니 무조건 용서하란 말이다.
    어떤 사람이 빚을 만 냥 지고 갚을 도리 없어 주인에게 탕감 받고 나가다가 자기에게 백 냥 빚진 사람을 보고 빚을 갚으라고 재촉하니, 빚진 자는 간절히 빌며 좀 참아 달라고 하였으나 "이 자식은 밤낮 조금만 참으라고 한다"며 가두고 빚 갚으라고 야단한다.
    그 말을 그 전에 탕감하여 준 주인이 듣고 그 잔인한 자를 잡아다가 "나는 네 빚을 많이 탕감하였는데 너는 그 적은 빚을 용서하지 않느냐?
    너도 내 빚을 다 갚으라"고 처음 탕감하였던 것을 도로 물렸단다. 무슨 소리인가?

    우리들은 주님 앞에 만 냥 아니 억억만 냥 탕감 받은 자들인데, 형제가 내게 죄를 지으면 백 냥은 고사하고 오십냥 아니 열 냥 아니 십 전도 받아먹으려고 하는 것이다.

    깔다귀는 걸러 먹고 약대는 통으로 삼켜, 남의 죄는 깔다귀같은 죄라도 요리 거르고 저리 걸러서 정죄하고 제 죄는 약대같이 큰 죄, 들보 같은 죄라도 꿀떡꿀떡 다 집어삼키는 무자비한 자를 책망하셨다.

    내가 주님 앞에 죄사함 받았는지 못 받았는지 내가 남의 죄를 얼마나 사하느냐 못 사하느냐가 표적이다. 죄 많은 바리새인과 서기관은 음행하다 잡힌 여자를 돌로 때려죽이려고 달려들었지만 죄 없으신 예수는 음행한 여자를 너그러이 용서하고 살려 주신 것이다. 죄 많은 사람이 도리어 남의 죄를 정죄하기 잘하며 죄 없는 사람은 남을 잘 용서하는 것이다.

    4. 희생의 영이다

    주님은 밀알이 땅에 들어가 썩어져 좋은 열매를 맺는다고 자신의 희생을 선고하시고 실천하셨다(요 12:12).
    주님은 33세에 십자가를 지신 것이 아니라 탄생 이후 최후까지 녹아지고 사라져 희생제물이 되셨다.
    그리스도를 모신 사람도 항상 희생의 정신을 가지고 생활해 나가는 것이다.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
    소금은 귀한 일을 많이 한다.
    맛없는 것 맛있게 하고 썩을 것을 썩지 않게 한다.
    그렇게 좋은 일을 많이 하면서도 칭찬 한 번도 듣지 못한다.
    소금을 장에 넣으면 장 달다고 하지 소금 달다는 사람 한 사람도 없고, 소금을 김치국이나 곰국에 넣으면 김치국이나 곰국 맛 좋다고 하지 소금 맛 좋다는 사람을 보지 못하였다.

    소금은 실컷 좋은 일을 해 놓고도 칭찬은 한 번도 못 받는 것이다.
    그래도 불평 불만 없이 녹아지는 것이다.
    그러나 예수 믿는 사람들이야 어디 그런가?

    무슨 일할 적에 누가 칭찬을 하고 잘한다고 추켜 주면 아주 기분이 좋아서 신이 나 떠들지만 주가 알아주지 않으면 이것 괜히 동무 몰래 양식 내기지 누가 아나 하며 섭섭해 하고 불평, 불만, 낙망, 실망자가 많은 것이다.

    잘 녹아져라.
    누가 알아주든지 몰라주든지 그리스도만을 위해 녹아지자.
    양초는 자체가 녹아져서 그 빛을 잘 발휘하는 것이 아닌가?
    내가 죽으면 예수 살고 내가 살면 예수 죽으시고, 내가 높아지면 예수 낮아지시고, 내가 나타나면 예수께서 숨으시고, 내가 숨을 때에 예수 나타나시는 것이다.
    녹아져라.
    부스러져라.

    5. 복종하는 영이다

    그리스도의 영은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옵소서 하는 성지에 절대 복종하는 영이시다(마 26:42).

    무슨 일에든지 어느 때든지 어디서든지 아버지 뜻대로가 그의 일생 생활이다. 그러나 모든 인간들은 내 뜻대로 마옵소서 하지 않고 아버지 뜻대로 마옵시고 내 뜻대로 하옵소서 하다가 망한다.

    주여, 주여 하는 자가 다 천국에 가는 것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뜻대로 하는 자라야 들어가는 것이다.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 뜻대로 하옵소서 하면 사막이 변하여 낙원이 되고, 아버지 뜻대로 마옵시고 내 뜻대로 하옵소서 하면 낙원이 변하여 사막이 된다고 어느 성도는 말하였다.

    그러면 아버지의 뜻은 어떻게 알 수 있는가?
    그 방법은 네 가지로 판별할 수 있다.

    첫째, 성경을 통하여 아버지의 뜻을 아는 것이다.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묵시하신 바로 아버지의 모든 사정과 뜻을 거기 발표하신 것이다. 그래서 성경을 애독하고 상고하여 그 말씀에 하라는 것은 절대 순종하고 하지 말라는 것은 뼈를 갈고 피를 쏟아서라도 하지 않을 것이다.

    둘째, 또한 나의 지도자에게 문의할 것이다.
    거룩하고 신령한 주와 동행하는 지도자에게 순종할 것이다. 교회의 당회와 노회 총회에 순종할 것이다. 그러나 성경에서 탈선된 지도는 받아서는 안되며 서로 겸양과 사랑으로 주의 뜻을 알아볼 것이다.

    셋째, 돌아가는 섭리에 순종할 것이다.
    모든 섭리는 하나님의 뜻이라고 하는 것이다. 요셉은 형님들에게 팔리고 보디발의 아내에게 모함을 받고 감옥에 들어갔으나 섭리에 순종하여 욕됨과 영광을 받은 것이다. 그래서 이십 년만에 만난 형님들을 조금도 원망하지 않고 "형님들이 나를 이 곳에 판 것을 한탄하지 마소서. 형님들이 나를 이 곳에 보낸 것이 나니라 하나님께서 보내신 것이다"고 그의 섭리를 믿고 감사하고 증거하였다.

    넷째, 사심 없는 맑은 양심으로 기도해 보아 성지를 알게 되는 것이다.
    톨스토이는 모든 결정은 양심만이 해야 한다고 하였다. 양심은 의와 불의, 선과 약을 분별하며 할 일과 안 할 일을 지시하는 것이다.

    모든 실패는 양심에 순종하지 않고 자아 욕심으로 동하고 정함에서 하나님의 뜻을 거스려 불행을 초래하고 과거에 주님 가슴에 창칼을 박은 것도 원통한데 주님 가슴에 잔못을 많이 박아 드리는 것이다.

    결말

    볼지어다. 내가 문밖에서 문을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소리를 듣고 문을 열면 나는 저희 안에 들어가 저로 더불어 먹고 저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 산 그리스도를 우리 안방에 모시자. 주님을 곁방살이 시키지 말고 안방 중심에 모시어 그리스도의 영으로 충만하여 주와 나와 혼연 일체의 생활을 보낼지어다.

    쇠를 불에 넣으면 쇠는 쇠인데 불이다.
    불은 불인데 쇠이다.
    그의 개성이 없어지는 것이 아니요 그리스도 성화 지경에 이르는 것이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나니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살았다는 증거가 분명한 자는 행복이로다.

    아름답다 예수여 나의 좋은 친구
    나 위하여 죽음과 나 위하여 사셨네
    예수님은 내 생명 또한 나의 기쁨
    예수 없이 내 생명 잠시라도 못사네
    예수님 내 주여 내 중심에 오셔서
    주님 한 분만으로 만족하옵니다
    나의 모든 것의 모든 것 되시는 예수께서 친히 나의 모든 것이 되시네.




    따라서 명분을 잃으면 축복도 잃는다.
    명분을 잃으면 축복도 잃어버리게 된다.

    창세기 25:32
    에서가 이르되 내가 죽게 되었으니 이 장자의 명분이 내게 무엇이 유익하리요.

    죽게 된 현실과 장자의 명분 사이에서 현실적인 필요를 채우는 에서의 모습이 이해가 됩니다.
    명분보다는 실리니까요!
    명분이라는 단어의 뜻은 '이름이나 신분에 따라 마땅히 지켜야 할 도리' 입니다.
    하지만 사실 원어에는 이 '명분'이라는 단어가 들어있지 않습니다. 다만 '장자권' 이라고만 표기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에서는 죽게 되는 것보다는 장자권을 포기함으로 팥죽 한 그릇을 얻었습니다.
    하지만 반대로 그렇게 가벼이 여기고 팔아버린 명분 때문에 마침내는 장자의 축복도 잃어버리게 됩니다.

    일단 이 문제부터 짚고 넘어가야 겠습니다.
    에서가 당시에 그 팥죽 한그릇이 아니면 정말 죽게 되었던 것일까요? 그만큼 상황이 급박했던 것일까요?
    우리가 흔히 '배고파 죽겠다' 라는 표현을 합니다. 그러나 진짜 죽을만큼 배고파 본적은 없었을 것입니다. 그정도가 되려면 한 주일 이상은 굶어봐야 겪게 될 일이니까요.
    에서 역시도 마찬가지 였을 것입니다. 사냥을 하기 위해 여기저기 뛰어다녀야했고 육신적으로 많이 지치고 피곤했기에 많이 허기가 진 것이 사실이었겠지만 그렇다고 죽을만큼 배고프지는 않았습니다. 게다가 조금만 기다렸으면 그의 어머니가 맛있고 풍성한 저녁을 준비해 왔을 것입니다. 그렇기에 조금만 참고 기다렸다면 그는 그의 배고픔도 채웠을 것이며 장자의 명분을 팔지 않아도 되었을 것입니다.
    우리는 이 사실 만으로도 에서가 장자의 명분을 얼마나 가볍고 하찮게 여겼는가를 확인하게 됩니다.

    그렇다면 장자의 명분은 팥죽 한그릇에 넘겨도 될만큼 그렇게 가볍고 하찮은 것이었을까요?
    장자의 명분에는 재산의 2배를 물려받을 권리, 제사장의 권리 그리고 무엇보다도 메시야의 조상이 될 거룩한 권리가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그만큼 장자의 명분은 영예로운 것이었으며 그렇기에 그만큼의 책임과 의무도 컸습니다.
    하지만 이 장자의 명분이 가진 단점?이 있었는데 (적어도 에서에게 있어서) 이 장자의 명분은 지금의 배고픔을 채워주는 일에는 아무런 유익이 되지 못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에서는 이 명분을 기꺼이 팥죽 한 그릇과 바꾸어 버리죠.

    그러면 이제 오늘날로 한번 넘어와 봅시다.
    오늘날은 어떻습니까? 에서가 살던 당시의 장자의 명분은 없지만 우리에게도 비슷한 명분이 있습니다.
    바로 '그리스도인' 이라는 이름 입니다.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 속에 재물을 두배 받을 축복 같은건 없어도,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리,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되는 권리가 있음은 분명합니다.
    더불어 이 또한 책임과 의무가 있습니다.
    하지만 현실 속에 살다보면 그리스도인 이라는 명분 때문에 손해도 봐야하고 오해도 받아야 할 때가 종종 있음을 보게 됩니다.
    당장의 유익과 편리함에 그리스도인 이라는 명분은 정말 불편스럽다고 느낄 때가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 그리스도인이라는 명분을 지켜야 그리스도인이 받을 축복도 누릴 수 있습니다.
    눈 앞의 이익 때문에 명분을 거스리면 축복도 놓칠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이라는 명분이 지금 당장의 이익이 되지 못할 때가 많죠?
    지금 눈앞의 문제가 신앙 때문에 풀리지 않아 고민될 때 있죠?
    당장의 이익과 편리가 신앙 때문에 가로막혀 힘들죠?
    지금 그 문제 해결 안되면 끝날거 같죠?
    이 또한 지나갈 것입니다.
    구름 저편 밝은 태양이 빛나고 있듯이 고난 저편 그분의 약속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리고 지금의 어려운 순간에도 여전히 하나님의 의로우신 오른팔이 우리를 붙들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오늘도 하나님 백성이라는 명분을 귀하게 여기고 백성답게 삽시다.
    감사하며 사랑하며 삽시다.


    본절에서부터 마지막 절까지는 요단 동편에 위치한 지파들(르우벳, 갓, 므낫세 반 지파)에 대한 기록이다.
    이들 지파들은 함께 기업을 받았으며(수 13:8-12) 함께 단을 쌓아 하나님께 제사를 드렸다(수 22:10, 27, 34).
    또한 이들은 지형적 특성상 이방인들과 싸움에 있어서도 함께 연합하여 싸웠다(민 32:25-27;수 4:12, 13).

    르우벤은...그 아비의 침상을 더럽게 하였으므로 -
    야곱의 장자(長子) 르우벤(Re-uben)이 야곱의 첩 빌하와 근친상간을 범한 것을 가리키는 구절이다(창 35:22).

    이스라엘이 그 땅에 유할 때에 르우벤이 가서 그 서모 빌하와 통간하매 이스라엘이 이를 들었더라 야곱의 아들은 열둘이라.

    그는 이 죄로 말미암아 장자권적 주도권은 유다에게 넘겨주고 말았으며(2절; 창 49:8), 두 몫을 차지하는 장자의 상속권(신 21:17)은 요셉에게 넘겨주고 말았다(창 49:3, 4).

    창세기 49:8
    유다야 너는 네 형제찬송이 될찌라 네 이 네 원수의 목을 잡을 것이요 네 아비의 아들들이 네 앞에 절하리로다.

    신명기 21:17
    반드시 그 미움을 받는 자의 아들을 장자로 인정하여 자기의 소유에서 그에게는 두 몫을 줄 것이니 그는 자기의 기력의 시작이라 장자의 권리가 그에게 있음이니라.


    창세기 49:3-4
    르우벤아 너는 내 장자요 나의 능력이요 나의 기력의 시작이라 위광이 초등하고 권능이 탁월하도다마는.
    의 끓음 같았은즉 너는 탁월치 못하리니 네가 아비의 침상에 올라 더럽혔음이로다 그가 내 침상에 올랐었도다.


    장자의 명분이...요셉의 자손에게로 돌아갔으나 -
    요셉의 장자권은 그의 두 아들 에브라임과 므낫세를 통해 성취되었다.
    즉, 요셉은 두 아들을 통하여 이스라엘 내에서 두 기업(基業)을 획득하였다(창 48:22).

    족보에는 장자의 명분대로 기록할 것이 아니니라 -
    본 족보가 장자의 명분대로 기록되었다면 요셉의 후손들이 먼저 소개되어야 했을 것이다.
    그러나 본 족보는 장자의 명분대로 기록된 것이 아니라 저자의 구속사적(救贖史的) 시각에 따라 기록된 것이어서 요셉의 후손들이 나중에 기록되어 있다(23, 24절;7:14-29).

    역대상 5:2
    유다는 형제보다 뛰어나고 주권자가 유다에게서 났으나 장자의 명분은 요셉에게 있으니라 

    유다는 형제보다 뛰어나고 -
    여기서 '뛰어나고'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가바르'는 '우세하다', '힘이 강하다'는 뜻이다.
    이는 곧 다른 지파에 비해 숫자적으로 월등한 유다 지파의 세력을 가리키는 말이다(민 1:27).
    유다 지파는 이와 같은 월등한 세력으로 인해 가나안 정복 당시 이스라엘 군대의 선두 주자가 되었다(삿 1:1-21).

    주권자가 유다로 말미암아 났을지라도 -
    이는 유다 지파 출신의 다윗 왕을 가리키는 말이다(삼하 5:1-3).
    다윗은 실로 하나님께서 택정 하셨던 이스라엘의 목자이자 주권자로서 장차 유다 지파의 계통을 좇아 탄생할 만왕의 왕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하였다(28:4).
    이와 관련해서는 야곱이 임종 시(臨終時)에 유다 자손들에게 베풀었던 축복을 살펴보라.


    장자의 명분(장자 상속권)

    고대 중근동 지역에서 맏아들이 누리는 권리를 ‘장자의 명분’ 또는 ‘장자 상속권’이라 부른다.

    특별한 권리

    고대 중근동 지역에서 장자는 형제들 중에서 특별한 권리를 가지고 있었다. 
    맏아들은 평소의 식탁에서도 아버지를 이어 높은 자리에 앉았고 일상 생활에서도 다른 형제들에 비해 주도적인 위치를 누렸다.

    아버지가 죽을 때에는 장자에게 특별한 축복이 주어졌고 유산상속도 다른 형제들 보다 두 배 많은 몫을 받을 수 있었다.
    아버지를 이어 가문의 대표가 되며 왕족의 경우 당연히 왕위 계승권을 가졌다.

    당시의 장자 상속권은 성경에 기록된 족장들뿐만 아니라 바빌론, 앗수르에서도 정착된 제도였다.
    이미 발굴된 고대 바빌론, 앗수르의 기록물들에서도 이런 사실이 확인된다. 

    특별한 책임

    장자에게 주어진 책임도 크다. 부친이 사망할 경우 어머니는 물론이고 다른 형제나 결혼하지 않은 여자 형제들도 부양 할 책임이 있었다.

    장자권의 이동

    장자의 권리는 심각한 죄를 저지르면 박탈될 수 있었다.
    성경에 기록된 사례로는 르우벤이 있다.
    르우벤은 야곱의 장자였으나 아비의 침상을 더럽힌 죄로 장자의 명분을 누리지 못했다.

    장자의 권리는 매매를 통해서 다른 형제에게 넘겨질 수 있었는데 흔한 일은 아니었고 자랑할 만한 일도 아니었다.
    있을 수는 있는 일이지만 손가락질 받는 행위였다(에서의 경우). 
    첩이나 종의 자식들에게는 먼저 태어났어도 장자의 권리가 주어지지 않았다(이스마엘의 경우).

    • 출애굽 이후 주어진 율법에서는 사람이나 짐승을 막론하고 초태생, 곧 장자는 하나님의 소유였다.

    에서의 장자권과 가나안

    에서는 이삭의 맏아들로서 장자의 명분을 소유하고 있었지만 장자 상속권을 ‘가벼이’ 여겼다. 에서에게 장자의 명분은 당장의 배고픔 앞의 죽 한그릇 보다 못한 것이었다. 장자의 명분을 팔라는 야곱의 제안을 에서는 대수롭지 않게 여겼지만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삭의 하나님”이 에서의 하나님이 아닌 야곱의 하나님이 되는 사건의 발단이 되었다.

    에서가 물려 받을 장자의 명분에서 가장 크고 소중한 것은 하나님의 언약을 물려 받는 것이었다. 후손에 대한 약속, 그 후손이 가나안 땅을 차지할 것이라는 약속은 아브라함에서 이삭으로, 이삭에게서 이삭의 장자권을 가진 아들에게로 이어질 것이었다. 에서는 억울할지 모르지만 야곱이 장자의 명분을 구입한 것은 절차에 있어서도 아무런 문제가 없는 것이었다. 야곱이 아버지의 축복은 속여서 받았지만 훗날 장자의 명분을 소유한 아들로서 가나안으로 돌아오게 되고 에서는 가나안을 떠나 세일산에 정착한다.


    요셉의 장자 명분(역대상 5:1-2)

    르우벤은 야곱의 장자였습니다.
    그런데 야곱의 침상에 올라가게 됨으로 저주를 받아 장자의 명분을 빼앗겼습니다.
    르우벤의 장자의 명분이 요셉에게 넘어갔습니다.
    르우벤은 장자의 명분을 빼앗겼기 때문에 두 배의 복을 받지 못했습니다.
    대신 요셉은 두 아들이 야곱의 양자로 들어가게 됨으로 가나안 땅을 두 배로 받게 되었습니다.
    요셉은 두 배의 복을 받는 장자가 되었습니다.
    우리도 장자의 명분을 소홀히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르우벤처럼 죄를 지어서도 안 됩니다.

    사람에게 중요한 것은 자신이 어디에서 나왔는지에 관한 정체성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족보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유대인들은 족보를 통해서 자신들의 명예를 중요하게 생각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우상을 섬기고 나라가 이방 나라에 의하여 파괴되고 포로로 끌려가게 되었습니다.
    이들의 정체성은 사라졌습니다.
    이방 나라에서 살다 보니 자신들이 어디에 소속되어 있는지 조차도 몰랐습니다.
    그래서 바벨론에서 해방되어 다시 예루살렘으로 돌아왔을 때에 처음에 한 작업이 족보를 만드는 작업이었습니다.
    성전이 파괴되고 제사장들도 이방 나라로 끌려갔기 때문에 제사를 드릴 수 없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우상을 섬기면서 타락해져 갔습니다.
    바벨론에서 돌아와 성전을 수축하고 제사를 드려야 하는데 제사장의 맥은 끊어졌습니다.
    자격도 없는 자가 제사장의 사역을 할 수 없었기 때문에 자신들의 족보를 만들어 정통성을 증명하려고 했습니다.
    만약에 족보의 정통성이 없으면 그 사람은 레위지파라 할지라도 제사장의 사역을 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에게는 자신의 정통성을 위해서라도 족보가 중요합니다.

    역대 상에 기록하고 있는 족보는 유대인의 각 지파의 정통성을 나타내기 위해서 족보를 정리했습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은 르우벤 지파의 족보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오늘 말씀을 통해서 나도 예수 그리스도의 영적 족보에 들어가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족보에 올라갔다는 것은 생명 책에 이름이 기록된 것을 의미합니다.
    르우벤은 야곱의 장자로 태어났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으로부터 장자의 명분을 빼앗기게 됩니다.
    아버지의 권위에 도전했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통해서 하나님의 주신 은혜를 거부하고 자신의 능력으로 구원을 얻으려고 한다면 하나님은 가차 없이 장자의 명분을 빼앗아 구원의 자리에서 탈락시켜버립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서 내가 받은 구원의 장자 명분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깨닫는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1절 우베네 레우벤 베코르 이스라엘 키 후 하베코르 우베할렐로 예추에 아비브 니트나 베코라토 리브네 요세프 벤 이스라엘 베로 레히트야헤스 라베코라

    역대상 5:1
    이스라엘의 장자 르우벤의 아들들은 이러하니라 (르우벤은 장자라도 그의 아버지의 침상을 더럽혔으므로 장자의 명분이 이스라엘의 아들 요셉의 자손에게로 돌아가서 족보에 장자의 명분대로 기록되지 못하였느니라)

    이스라엘의 아들 중에 르우벤은 장자의 명분을 가지고 태어났습니다.
    그런데 문제를 일으켰습니다.
    야곱의 침상을 더럽혔기 때문에 장자의 명분이 야곱의 아들 요셉의 자손에게로 돌아갔습니다.
    르우벤은 족보에 장자의 명분대로 기록되지 못했습니다.
    그럼 르우벤이 아버지의 침상을 더럽혔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아버지의 첩 빌하와 동침한 사건을 말합니다.


    22절 바예히 비쉐콘 이스라엘 바아레츠 하히 바옐레크 레우벤 바이쉐카브 에트 빌하 필레게쉬 아비브 바이쉐마 이스라엘 바이헤이우 베네 야아코브 쉐넴 아사르

    창세기 35:22
    이스라엘이 그 땅에 거주할 때에 르우벤이 가서 그 아버지의 첩 빌하와 동침하매 이스라엘이 이를 들었더라 야곱의 아들은 열둘이라

    이스라엘이 베들레헴으로 들어오다가 라헬이 죽었습니다.
    그리고 에델 망대를 지나 장막을 쳤을 때에 르우벤이 아버지의 첩 빌하에게 들어가서 동침했습니다.
    이것을 이스라엘이 알게 되었습니다. 르우벤이 왜 라헬이 죽자마자 첩 빌하에게 들어가서 동침했는지를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르우벤이 가서’라는 단어는 πορευω(포류오 4198 VIAPS3 동사, 직설법, 과거, 수동태, 단수, 3인칭) 나아가다, 행하다, 라는 뜻입니다.
    우리가 70인 역으로 보면 르우벤이 왜 라헬이 죽자마자 빌하에게 들어갔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르우벤은 항상 아버지에게 불만이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자신의 어머니 레아는 사랑하지 않고 라헬만 사랑했기 때문입니다.
    이런 모습을 르우벤은 어려서부터 보았습니다.
    그때부터 아버지에 대한 복수심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라헬이 죽자마자 아버지의 침상을 더럽히기 위해서 빌하에게 들어갔습니다.
    아버지에게 수치심을 더해주기 위해서입니다.
    현재 아버지는 사랑했던 라헬이 죽었습니다.
    그런 상태에서 라헬의 첩 빌하에게 들어갈 수 있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래서 다시는 빌하에게도 들어가지 못하도록 했던 르우벤의 조치였습니다.
    르우벤은 이미 이런 계획을 모두 세웠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과거 시제를 사용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순간적인 생각으로 행동에 옮긴 것이 아니라 치밀하게 계획을 세워서 기회가 왔을 때 행동에 옮긴 것을 의미합니다.
    그것도 아버지에게 복수하겠다는 마음을 굳건히 먹고 있었으며 변하지 않았다는 것을 말합니다.
    수동태를 사용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자신에게 기회가 왔고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아버지에게 복수를 하려고 빌하에게 들어갔다는 의미입니다.

    이런 자들이 누구입니까?
    율법주의자들입니다.
    이런 자들은 하나님의 권위에 도전하려고 하며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이 구원이 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결국 자신의 육적인 장자의 힘을 믿고 아버지의 침상을 더럽히는 자들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에 수치를 주는 자들입니다.

    ‘동침하매’라는 단어는 κοιμαω(코이마오 2837 VIAPS3 동사, 직설법, 과거, 수동태, 단수, 3인칭) 잠자다, 죽다, 라는 뜻입니다.
    70인 역에 르우벤이 빌하와 동침했다는 것은 더 이상 아버지와 관계를 맺지 못하도록 더럽혀 죽였다는 의미입니다.
    더 이상 아버지의 것이 되지 못하도록 아버지의 침상을 더럽히고 모욕을 주었다는 말씀입니다.
    르우벤이 하나님 앞에 괴씸 죄에 걸린 것이 무엇입니까?
    르우벤은 이미 아버지에게 복수하려고 준비를 철저히 했기 때문입니다.
    과거 시제를 사용한 것은 아버지의 권위에 도전하여 아버지에게 수치를 주려고 준비했다는 의미입니다.
    수동태를 사용한 것은 자신에게 기회가 왔기 때문에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빌하에게 들어가서 철저하게 죽이고 파괴시킨 것을 말합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고 있습니까?
    율법주의자들이 자신의 장자 명분을 앞세워 자신이 가지고 있는 명예와, 재물과, 권력을 가지고 하나님 아버지께 도전하는 것과 같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의를 믿음으로 구원받은 자들을 사랑한다는 이유로 하나님께 도전하여 예수 그리스도에게 수치를 주게 됩니다.

    ‘더럽혔으므로’라는 단어는 (할랄 2490 P.VPNG.MZS 전치사. 동사, 피엘(강조능동), 부정사연계형. 남성, 3인칭, 단수) 꿰뚫다, 꿰찌르다, 더럽히다, 라는 뜻입니다. 르우벤은 아버지 야곱의 침상을 완전하게 더럽혔습니다. 르우벤이 빌하와 동침함으로 야곱의 마음을 꿰뚫어 버리고 관통하여 야곱은 믿었던 르우벤으로부터 꿰찔림을 받았습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를 유대인들에게 보내셨는데 믿었던 유대인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음으로 하나님의 마음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꿰찔림을 받으셨습니다. 르우벤은 아버지의 침상을 완전하게 더럽혀서 더 이상 회복 불가능한 상태로 만들어 버렸습니다. 그 이유가 피엘, 강조능동을 사용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빌하에게 완전하게 들어가 다시는 아버지와 동침하지 못하도록 만들어 버렸다는 의미입니다.

    우리들은 르우벤과 같은 신앙생활을 하면 안 됩니다. 자신이 가진 육적인 권세가 최고라고 장자의 명분을 함부로 사용하여 자신의 힘으로 구원을 얻을 수 있다고 하면서 예수 그리스도를 수치 주어서는 안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의로만이 구원을 받을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르우벤처럼 자신의 힘이 많아지면 하나님께 도전하려고 합니다. 우리는 항상 겸손한 자세로 하나님께 나가야 합니다.

    ‘장자의 명분’이라는 단어는 (베코라 1062) 처음 낳은 것, 장자권, 이라는 뜻입니다. 구약에서 장자의 명분을 가진 사람은 두 배의 몫을 받게 됩니다. 르우벤은 장자의 권세가 있기 때문에 두 배의 몫을 아버지로부터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아버지의 권위를 손상시켰기 때문에 장자의 명분을 박탈당하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주신 영적 장자의 명분을 무시하면 안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의로 구원을 얻은 것을 자신의 능력과 힘으로 열심히 하여 구원을 얻는 것이라고 하면 르우벤과 같은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과 같습니다. 이런 자는 야곱의 아들이지만 장자의 명분을 박탈당했습니다. 내가 교회 안에 들어와서 구원을 얻었다고 하지만 구원을 받은 것이 아닙니다. 르우벤이 계속해서 아버지의 권위에 도전하려고 했던 것처럼 마음속에서 계속해서 율법의 의로 구원을 얻으려고 하는 것과 같습니다.


    2절 키 예후다 가바르 베에하이브 우레나기드 미메누 베하베코라 레요세프

    대상 5:2 유다는 형제보다 뛰어나고 주권자가 유다에게서 났으나 장자의 명분은 요셉에게 있으니라

    르우벤이 장자이지만 이 장자의 명분이 누구에게로 넘어갔습니까? 영적 장자의 명분은 유다에게 넘어갔고 육적 장자의 명분은 요셉에게 넘어갔습니다. 유다의 뿌리에서 구원자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이 땅에 오셨기 때문에 유다는 영적 장자의 명분을 받았습니다. 요셉은 가나안 땅을 분배받을 때에 자신의 아들인 에브라임과 므낫세가 두 몫을 받는 복을 받았습니다. 장자는 구약에서 두 배의 몫을 유산으로 받게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은 요셉을 선택하셔서 두 배의 몫을 허락하여 주셨습니다.

    ‘주권자가’라는 단어는 (나기드 5057) 통치자, 지도자, 우두머리, 라는 뜻이며 נגד(나가드 5046) 말하다, 알리다, 선언하다, 라는 뜻에서 유래되었습니다. 유다 지파에서 나오는 주권자가 누구입니까? 그는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십자가에서 모든 것을 구속하시고 선언해 주셨습니다. 내가 모든 것을 이루었다.라고 선택된 자들에게 알려주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나의 인생의 통치자이며, 영적인 지도자이며, 교회의 우두머리가 되시는 분입니다.

      

    10절 로 야수르 셰베트 미후다 우메호케크 미베인 라겔라이브 아드 키 야보 쉴로 베로 이케하트 암밈

    창 49:10 규가 유다를 떠나지 아니하며 통치자의 지팡이가 그 발 사이에서 떠나지 아니하기를 실로가 오시기까지 이르리니 그에게 모든 백성이 복종하리로다

    통치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유다를 통해서 나올 것이 예언되어 있습니다. 통치자의 지팡이가 유다를 떠나지 않습니다. 실로가 오시면 모든 백성이 그에게 복종하게 됩니다. 실로는 바로 구원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영적인 장자의 명분을 르우벤에게 빼앗아 유다에게 주었습니다. 유다 지파는 영적인 축복을 받아서 다윗 왕이 탄생되었고 다윗왕의 후손을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가 이 땅에 오시는 통로가 되었습니다. 유다는 영적 장자의 명분을 받은 축복의 사람입니다. 우리들도 하나님께 선택받은 영적 장자의 명분을 가진 사람이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르우벤처럼 자신이 가진 것을 기쁨으로 여기지 않고 하나님의 권위에 도전하게 되면 하나님은 빼앗아 버립니다. 결국 르우벤은 자신의 행위로 구원을 얻으려고 하는 율법주의자들의 표상입니다.

    육적 장자의 명분은 요셉이 받았습니다. 자신의 두 아들을 통해서 가나안 땅을 두 몫으로 받게 되었습니다. 그럼 요셉은 육적인 장자의 명분을 받아 어떻게 쓰임 받게 됩니까? 애굽으로 가서 가족들이 살 수 있는 길을 열어주게 됩니다. 요셉이 없었다면 예수 그리스도도 절대 탄생할 수 없습니다. 구약의 요셉은 애굽에 가서 총리대신이 되어 영적인 장자인 유다가 살 수 있는 길을 준비한 사람입니다. 요셉이 없으면 영적인 장자의 명분을 받은 유다도 살 수 없습니다. 그렇게 되면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은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럼 신약의 요셉은 육적 장자의 명분을 받아 어떻게 쓰임을 받게 됩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공생애를 준비하게 만듭니다. 마리아의 남편 요셉이 없었다면 예수 그리스도는 십자가의 사역을 할 수 없었습니다.

      

    21절 호 데 에게르데이스 파렐라벤 토 파이디온 카이 텐 메테라 아우투 카이 엘덴 에이스 겐 이스라엘

    마 2:21 요셉이 일어나 아기와 그 어머니를 데리고 이스라엘 땅으로 들어가니라

    헤롯이 예수님의 목숨을 노렸지만 요셉이 애굽에 내려가서 생명을 보존하고 헤롯이 죽은 후에 나사렛에 와서 살게 됩니다. 요셉은 예수님이 공생애의 사역을 감당할 수 있도록 사생애의 기간을 함께 했던 육적 장자였습니다. 또 한 명의 요셉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준비하는 육적 장자입니다.


    59절 카이 라본 토 소마 호 이오세프 에네튈릭센 아우토 신도니 카다라

    마 27:59 요셉이 시체를 가져다가 깨끗한 세마포로 싸서

    아리마대 요셉은 예수님의 시체를 가져다가 깨끗한 세마포로 싸고 자신이 들어갈 무덤에 장례를 치렀습니다.
    아리마대 요셉이 없었다면 예수님의 부활을 준비하지 못했습니다.
    이렇게 요셉은 육적 장자의 명분을 받아 예수 그리스도가 오는 길을 예비한 사람들입니다.
    르우벤은 아버지의 권위에 도전하여 침상을 더럽히고 수치를 주어 장자의 명분을 잃어버렸습니다.
    하지만 유다와 요셉은 장자의 명분을 받아 하나님께 쓰임 받고 축복받는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이제 우리들도 예수 그리스도께서 주신 영적 장자의 명분을 귀하게 생각하고 열심히 주님께 충성하는 인생이 되어야 합니다. 또한 육적 장자의 명분을 받아 복을 받으면 주님의 영광을 높이는 데 사용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물질을 쓰고 교회에 충성하고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서 사용해야 합니다. 그럴 때에 하나님께서 영적인 장자는 구원을 받고 육적인 장자는 이 땅에서 축복을 받아 누리는 신앙이 되는 것입니다.




    고대 중근동 지역에서 맏아들이 누리는 권리를 ‘장자의 명분’ 또는 ‘장자 상속권’이라 부른다.
    고대 중근동 지역에서 장자는 형제들 중에서 특별한 권리를 가지고 있었다.
    맏아들은 평소의 식탁에서도 아버지를 이어 높은 자리에 앉았고 일상 생활에서도 다른 형제들에 비해 주도적인 위치를 누렸다.
    아버지가 죽을 때에는 장자에게 특별한 축복이 주어졌고 유산상속도 다른 형제들 보다 두 배 많은 몫을 받을 수 있었다.
    아버지를 이어 가문의 대표가 되며 왕족의 경우 당연히 왕위 계승권을 가졌다.









    그리스도인의 권리포기

    그리스도인의 권리포기 : 이 땅에서 하늘의 것을 성취하는 방법

    '권리포기'란 단념하는 것이 아니라, 더 귀한 가치를 발견하고 그것을 취하기로 결정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가 포기한 배우자, 자녀, 재산, 경력, 생명 중에서 아무것도 가져가지 않으십니다.
    우리의 소유가 아니라 우리의 신을 벗기기 원하시는 때문입니다.
    얻게 되는 건 오히려 우리입니다.
    포기하는 바로 그 순간부터 하나님의 것이 전부 우리 것이 됩니다.
    포기할 때 하나님의 계획과 비전이 우리 것이 되는 것입니다.
    포기하는 것은 잃어버리는 것이 아닙니다.
    무엇을 포기할 것인가? - 본문중에서

    권리를 포기하는 것이 처음에는 어렵다 신을 벗을 때 다 잃어버린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신을 벗게 되면 그 때부터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이 나의 삶 속에서 이루어지는 것을 볼 수 잇다는 것을 기억하자.  
    권리 포기는 예수님을 따르는 삶의 기본이며, 그분의 제자가 갖추어야 할 가장 중요한 덕목 입니다.

    예수님은, "무릇 내게 오는 자가 자기 부모와 처자와 형제와 자매와 및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아니하면 능히 나의 제자가 되지 못하고 누구든지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지 않는 자도 능히 나의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눅 14:26-27)고 하셨습니다.
    또한, "너희 중에 누구든지 자기의 모든 소유를 버리지 아니하면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 하리라"(눅 14:33)고 하셨습니다.

    '부모, 처자, 형제, 자매, 자기 목숨"은 우리가 섬기며 돌아보아야 할 권리이고 책임 입니다.
    우리에게는 소유하며 누릴 권리가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제자가 되고자 한다면 이 모든 것을 미워하거나 버려야 한다고 하십니다.
    이 모든 것을 사랑하고 소유하며 주의 제자가 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의 부름을 받은 베드로와 안드레는 즉시 어부로서의 생명인 그물을 버려두고 예수님을 좇았습니다.
    또한 야고보와 요한도 배와 삯군들과 아버지를 버려두고 예수님을 좇았습니다.

    이들은 예수님을 따르기 위해 자신이 가지고 있는 권리들을 포기 했습니다.
    권리를 포기한다는 것은 어찌 보면 권리를 양도 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즉 내가 가진, 또는 나에게 주어진 권리를 예수님께 드려서 그분이 나의 권리를 가지시도록 하는 것 입니다.

    김원호 장로님을 오랫동안 알고 지내면서 권리 포기라는 주제의 책을 쓰기에 참으로 적합한 사람이라고 생각 하였습니다.
    그는 자신에게 주어진 권리들을 계속적으로, 그리고 점진적으로 포기한 사람입니다.

    그가 주 예수 그리스도에게 철저하게 순종하려고 늘 애쓰는 것을 보아왔습니다.
    그는 권리를 포기할 때 예수님이 삶의 모든 영역에서 주님이 되시는 것을 잘 보여주었습니다.
    그는 그렇게 예수님이 주가 되시는 삶의 모델이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김원호 장로님과 함께 일하시기가 아주 쉬웠을 것입니다.
    예수님께 권리를 드린 그의 삶을 통해, 포기할 때 주어지는 영광과 특권을 나타내셨습니다.
    김원호 장로님 부부의 경건한 삶에서 겸손, 소박함, 환경을 초월하는 마음의 평안, 예수님과 동행하는 영광, 하나님의 뜻을 행함 등을 쉽게 찾아볼 수 있습니다.

    우리가 주고받게 되는 많은 질문이 있습니다. '갖고 싶은 것이 무엇입니까?' '무엇을 하고 쓰십니까?' '이 책을 통해 무엇을 얻고 싶으십니까?' 그리고 이에 대한 다양한 대답들을 듣게 됩니다.

    그렇다면 혹시 '무엇을 포기 하셨습니까?' 라는 질문을 받은 적이 있습니까? 생소하게 들리는 이 질문을 받는 다면 당신은 뭐라 대답하시겠습니까?

    이 세대의 문화는 안전과 편안함을 최고의 가치로 여깁니다. 그래서 스트레스와 고생과 위험은 가능한 멀리해야 하는 '나쁜' 것으로 여깁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이와 정확히 반대되는 이야기를 하셨습니다. '자기(의 모든 소유와 권리)를 포기하고 십자가를 지라는(쉬운 말로, 와서 죽으라는)' 예수님의 부르심은, 구원과 은혜로 감격한 때라도 멈칫하게 하는 '무서운'말씀입니다.

    오늘날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은 아직 자신이 살아 있다고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교회는 안전과 편안함을 지향하는 이세대의 정신을 받아들였습니다.

    생명을 아끼지 않고 복음을 전하며 기꺼이 소유를 팔아 소외된 사람들을 돕던 교회가, 지금은 안전하고 근사한 일만을 찾고 있습니다. 잃어버린 영혼을 찾아서 낯설고 어려운 곳으로 가는 것은 특별한 사람과 단체와 교회들만 하는 일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것에 대한 성경의 관점은 명확합니다. 예수님을 따르려는 사람은 죽어야 합니다. 2천 년 전에 그분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기꺼이 채우기 원하는 이들을 하나님은 여전히 찾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자기 권리를 포기하고 세상과 반대되는 우선순위와 가치를 품은 사람을 통해 일하시기 때문입니다.

    제가 속한 예수 전도단은, DTS(Discipleship Training School) 훈련에서 사역에 이르기까지 '권리 포기'를 핵심 가치 중 하나로 삼고 있습니다. 저는 독자와 사역의 입장에서 이 귀한 가르침이 문서로 더 많은 이들에게 전해지게 된 것이 하나님이 허락하신 커다란 축복이라고 생각합니다.

    또한 '권리 포기의 삶'을 실제로 살고 계신 김원호 장로님의 손으로 출간되는 책이라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에게 더 풍성한 영향력을 미칠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이제 어떻습니까? 자신의 것을 포기하고 기쁘게 고난에 동참할 준비가 되어 있습니까?

    이 책은 우리의 우선순위와 가치관을 바꾸게 할 것입니다. 우리의 권리를 하나도 남김없이 그리스도의 발 앞에 놓게 할 것입니다. 모세와 여호수아가 그랬듯이 발에서 신을 벗게 할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권리를 포기한 바로 그 자리에서 이전에 보지 못한 하나님의 역사를 목도하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야말로 그리스도인이 누릴 수 있는 가장 귀한 특권입니다.

    신앙생활을 하면서 늘 갖게 되는 의문들을 1985년 봄부터 계속해서 예수전도단의 각종 훈련과 말씀 공부를 하며 이러한 의문이 풀려가지 시작했고, 차츰 삶의 모습, 사고방식, 인격, 성품이 변해가는 것을 느끼게 되었다.
    나의 근본적인 문제점은 삶의 모든 현장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말씀을 따르기로 선택하는 대신, 그분의 진리 앞에서도 여전히 육신으로부터 나오는 자기 권리를 주장하는 데 있다.
    그래서 나는 진정한 믿음의 삶에 대해 다시 배우게 되었다.
    그것은 세속적이고 육신적이고 개인적인 모든 권리를 포기하며, 하나님의 말씀과 뜻앞에 순복하기로 선택하며 나 자신을 투자하는 것이다.
    이 책에서는 믿음의 선진들은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어떻게 자기의 권리를 포기하고 순복했는지, 하나님은 그들을 통해서 어떠한 일을 이루셨는지, 그들의 권리 포기를 통해서 우리는 무엇을 깨달아야 하는지 등의 내용을 나누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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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나님은 우리가 포기한 배우자, 자녀, 재산, 경력, 생명 중에서 아무것도 가져가지 않으십니다.
    우리의 소유가 아니라 우리의 신을 벗기기 원하시는 때문입니다.
    얻게 되는 건 오히려 우리입니다.
    포기하는 바로 그 순간부터 하나님의 것이 전부 우리 것이 됩니다.
    포기할 때 하나님의 계획과 비전이 우리 것이 되는 것입니다. 포기하는 것은 잃어버리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오늘도 그분의 음성 앞에서 자기 권리를 포기하고 믿음으로 사는 사람, 자기 힘으로 감당할 수 없는 것을 말씀하시더라도 그 말씀하신 하나님이 행하실 것임을 신뢰하며 믿음으로 살아가는 사람을 찾고 계십니다.

    그리스도인의 권리포기 - 김원호 장로

    글을 시작하며

    이 땅에서 하늘의 것을 성취하는 방법 - 당신이 포기할 때 하나님이 시작하신다. 권리포기는 예수님을 따르는 삶의 기본이며, 그분의 제가 갖추어야 할 가장 중요한 덕목입니다. 권리를 포기한다는 것은 어찌 보면 권리를 양도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즉 내가 가진, 또는 나에게 주어진 권리를 예수님께 드려서 그분이 나의 권리를 가지시도록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권리를 드린 삶을 살 때에, 포기할 때 주어지는 영광과 특권을 나타내십니다.

    예수님을 따르려는 사람은 죽어야 합니다. 2천 년 전에 그분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기꺼이 채우기 원하는 이들을 하나님은 여전히 찾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자기 권리를 포기하고 세상과 반대되는 우선순위와 가치를 품은 사람을 통해 일하시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권리를 포기한 바로 그 자리에서 이전에 보지 못한 하나님의 역사를 목도하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야말로 그리스도인이 누릴 수 있는 가장 귀한 특권입니다.

    1. 권리포기란 믿음으로 사는 것이다

    십자가와 믿음

    “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이 말씀에 의하면 내가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달린 것이다. 그렇게 죽은 자에게 무슨 권리가 있는가? 하나님은 바로 이것을 말씀하신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기 때문에, 이제부터 나에게는 아무 권리도 없다.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 사신 것이라.”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살고 계시기 때문에 오직 그리스도의 권리밖에는 없다는 것이다.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내가 육체를 입고 오늘도 살아가는 이유는 단 한 가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다.

    음성을 듣고, 따르고, 하나님을 신뢰하라

    창조주 하나님이 절대적인 주권을 가지고 지금도 우주를 다스리심을 믿는 것이 믿음에 필요한 전제조건이다. 그 다음 믿음에는 필요한 세 가지 조건이 있다. 먼저 믿음은 들음에서부터 오는 것이므로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에서 믿음이 시작된다. 그러므로 믿음의 첫 번째 조건은 먼저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이다. 이렇게 들려주신 말씀을 받아들이는 것이 믿음이고, 그래서 믿음의 두 번째 조건은 들은 그대로 따르는 것이다. 순종하는 것을 말한다. 세 번째 조건은 내가 할 수 없는 일을 말씀하셨더라도 그렇게 말씀하신 하나님이 행하실 것이라는 온전한 신뢰이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들은 대로 따르며,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이 믿음으로 사는 것이고, 권리포기이다. 이 결정은 내 의견, 내 주장, 내 욕심, 내 계획, 내 야망대로 한 것이 아니고, 오직 하나님의 음성을 따라 순종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않고, 자기 스스로 그냥 포기하는 것은 진정한 포기가 아니다. 자신의 생각과 결정이기 때문에 거기에는 하나님의 절대 주권을 인정하는 믿음이 없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들은 후에는 즉시 따르며, 말씀하신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이 믿음의 삶이며 이것이 권리포기의 삶이다.

    2. 말씀 앞에서 신을 벗으라

    신을 벗으면 ‘당신에게 나의 모든 권리를 양도합니다. 나의 소유권을 포기합니다’라는 의미를 갖는 것이 이스라엘 전통이다. 따라서 하나님이 ‘네 신을 벗으라’고 말씀하시면, 이는 ‘네 권리를 포기하라’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하나님이 부르심에 대한 모세의 반응

    하나님은 모세에게 ‘네 신을 벗으라’고 말씀하신다. 모세가 미디안 광야로 오기 전에 포기한 권리는 ‘바로 공주의 아들로 사는 것’이다. 그것은 권력과 명예, 정욕과 재물 등 인간이 추구하는 가장 중요한 것들을 이미 포기했다는 뜻이다. 그런데 모세에게 무슨 권리가 남아 있다고, 하나님은 호렙산에서 그를 부르시고 신을 벗으라고 말씀하셨을까?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으면 자신의 능력이나 주위 환경을 바라보면서 계산하지 말고, 그대로 따르며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인데 모세는 비록 음성을 들었어도 ‘따르는’것부터 걸려 넘어지고 있다. 그래서 하나님이 몇 번이나 말씀하셔도 계속 핑계를 대며 바로에게 못 간다고 대답하였던 것이다. 근본적으로는 하나님의 언약까지도 부인하고 싶은 반항의 마음이 모세의 내면에 있었다는 말이다. 하나님이 모세의 힘으로 하라고 하셨는가? 신을 벗으라고 하는 말은 자신의 힘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는 뜻이다. 이것이 믿음으로 살아가는 삶이다. 하나님은 이 말씀을 하시기 위해 호렙산에서 떨기나무 불을 놓고 모세를 불러 발에서 신을 벗으라고 말씀하셨다.

    사명을 이루기 위한 여호수아의 선택

    하나님이 모세에게 말씀하신 것처럼, 여호와의 군대장관이 여호수아에게 말한다.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 네가 선 곳은 거룩하니라.” 왜 여호수아에게 신을 벗으라고 했을까? 하나님은 여호수아의 마음이 안정되지 못하고 여리고 성의 공략에 대하여 큰 부담이 있다는 것을 잘 알고 계셨다. 여호수아는 이제 이스라엘의 군 사령관으로서, 작전 계획을 세우고 가나안을 정복하기 위한 전투를 지휘하여 전쟁에서 승리할 책임이 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서는 신을 벗고 맨발로 전쟁을 치르라는 의미이다. 이것은 모든 권리를 포기하라는 말씀이다. 아무 권리도 없으므로 작전 계획을 세우고 전투를 지휘할 권리도, 전쟁 승패에 대한 책임을 질 권리도 없다. 모든 권리를 내려놓아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여리고 성을 무너뜨리는데 있어서 치밀한 작전 계획이나 탁월한 전투 지휘 능력이 아니고 오직 말씀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보고 온전히 따르는 것을 원하셨다. 자신의 능력으로 도저히 할 수 없어도 말씀하신 하나님이 행하실 것이라는 믿음으로 서 있기를 원하셨다. 그래서 신을 벗으라고 말씀하셨다. 여호수아가 하나님의 작전 명령을 듣고 그대로 따랐을 때 여리고 성은 무너졌다.

    여리고 성을 보고 자신을 보면, 전쟁을 할 수 없다. 하나님을 바라보아야 전쟁을 할 수 있다. 강하고 담대해질 수 있다. 하나님은 이것 때문에 여호수아에게 신을 벗으라고 한 것이다.

    누가 여호와의 종인가?

    모세와 여호수아는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는 하나님의 말씀 앞에 자신의 모든 권리를 포기하는 삶을 살았고, 하나님의 원대한 계획을 이루는 영적 지도자로 영원히 기록되고 있다. 그러나 이 두 사람도 단 한번씩, 하나님 말씀 앞에 신을 벗지 않고 자기 권리를 행사하는 실수를 범했다.

    하나님은 모세에게 지팡이를 들고 말하라고 하셨는데, 모세는 화가 나서 바위를 두 번이나 지팡이로 내려쳤다. 하나님은 모세가 하나님을 믿지 않았다고 한다. 여기서 모세가 믿지 않았다는 것을 무엇을 말하는가? 모세가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지만 들은 그대로 행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절대주권은 인정하였지만 말씀하신 음성 그대로를 따르지 않은 것이다. 그 결과 모세는 그토록 고대하던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했다.

    여호수아는 가나안에 들어가면 가나안의 모든 족속을 진멸하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다. 하지만 하나님께 묻지 않고 기브온 족속에게 속아서 화친을 맺고 말았다. 이것이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않고 자기가 주인이 되어 맘대로 했던 여호수아의 단 한번 실수였다.

    그러면 누가 여호와의 종인가? 우리는 두 사람의 실수를 통해서 무엇을 배울 수 있는가? 바로 하나님 말씀 앞에서 신을 벗고, 들은 대로 따르며, 하나님을 신뢰하는 사람이 ‘여호와의 종’이라는 것이다. 사람들에게 ‘주님의 종’이라고 불리는 것은 중요하지 않다.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정말 신을 벗었는가, 벗지 않았는가가 중요하다. 사람들이 뭐라 하든 하나님의 말씀 앞에 신을 벗지 않았다면 하나님은 ‘내 종’이라고 부르지 않으신다. 하나님을 주라고 부르고 자신을 종이라고 한다면, 모든 권리를 그분 앞에서 포기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 그렇게 신을 벗고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믿음으로 살아가는 사람을 하나님은 ‘내 종’이라고 부르신다.

    영적 권위는 누구에게 주시는가?

    하나님은 어떤 사람에게 영적 권위를 주실까?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주시는 영적 권위는 절대적인가? 이스라엘 자손들은 모세의 영적 권위에 도전하고 집단적으로 반기를 들 때가 많았다. 그럴 때마다 모세는 다만 그들 앞에서 ‘엎드리는 일’ 밖에 하지 않았다. 왜 모세는 단호한 태도를 보이지 않고 엎드리기만 했을까? 하나님 앞에서 신을 벗은 사람은 사람 앞에서도 신을 벗기 때문에 스스로 결정하지 않는다. 자신의 유익과 명예를 위해 스스로는 아무것도 결정하지 못한다. 그저 하나님께 ‘이때 제가 무엇을 해야 합니까?”라고 물어보는 것이다. 하나님은 이런 자세를 취한 모세에게 엄청난 영적 권위를 주어서 이스라엘 백성을 인도하는 영적 지도자로 세워 주셨다. 이러한 지도자에게 하나님은 영적 권위를 부여하신다. 모세의 영적 권위에 도전하고 성공한 백성이나 족장들은 없다. 영적지도자의 성공이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그가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신을 벗고 조건 없이 따르며,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의 뜻과 계획이 이루어지도록 하는 것이다.

    3. 무엇을 포기할 것인가

    권리 포기라고 하면 다 잃어버린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말씀 안에서 순종하는 것은 잃어버리는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을 얻는 것이다.

    사회적 안정감을 포기하라

    아브라함은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라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였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말씀 앞에 신을 벗고, 사회적인 안정감과 정체성을 보장받을 수 있는 자신의 모든 권리를 포기하였다. 그러므로 아브라함을 믿음의 조상이라고 말하는 데는 분명한 이유가 있다. 아브라함을 통해 배우게 되는 믿음은, 하나님이 말씀하시면 사회적 안정감과 정체성을 포함한 모든 권리를 포기하고 신을 벗고 순종하는 삶이다.

    더 큰 축복의 약속을 위해 포기하라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이삭을 바치라고 하셨을 때, 아브라함은 그대로 순종하였다. 도저히 포기할 수 없는 소중한 것이라 할지라도 하나님의 말씀을 들은 후에는 그대로 따랐다. 하나님이 이삭을 다시 주실 것이라고 신뢰하는 것이다. 약속의 자손을 데려가신 후에는 반드시 회복시키실 하나님을 신뢰한 것이다. 이삭 역시 아버지가 자신을 제물로 바치려고 했을 때 뿌리치며 도망치지 않았다. 이삭도 부모의 삶을 통해 믿음으로 사는 것을 배운 것이다.

    신을 벗은 사람을 통해 원대한 계획을 이 땅 가운데 이루려는 하나님의 마음과 또한 자녀에게 주시는 약속과 축복을 기억해야한다. 모든 권리를 빼앗기 위해 신을 벗으라고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다. 신을 벗은 자에게는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축복과 약속이 반드시 있다.

    스스로 되갚음하는 것을 포기하라

    다윗은 사울에 충성을 다했지만, 다윗을 시기한 사울은 오히려 그를 죽이려고 했다. 다윗은 사울에게 쫓기어 도망칠 수밖에 없었다. 쫓기는 생활 중에 다윗은 사울에게 복수할 기회가 두 번이나 있었지만, 하나님 말씀 앞에 신을 벗고 복수할 권리를 포기하고 말씀에 순종하였다. 하나님의 말씀 앞에 복수할 권리를 포기한 다윗에게는 사울이 원수로 보이지 않고 오직 ‘여호와의 기름부음 받은 자’로만 보인다. 이런 다윗에게 엄청난 축복의 말씀이 주어졌다.

    4. 예수님의 권리포기(어떻게 여호와의 종이 되는가? )

    예수님은 하나님의 본체이심과 천국보좌를 포기하고 이 땅에 인간으로 오시고, 우리 모든 사람의 죄 때문에 생명을 포기하셨다. 그리 이 땅에서 계시는 동안 여러 가지 권리를 포기하셨다. 예수님이 왜 이러한 권리포기를 제자들에게 직접 보여주셨을까? 앞으로 예수님을 대신해서 복음을 들고 나갈 때 그 모든 권리를 포기해야 제자의 삶을 살 수 있음을 가르치신 것이다.

    세상 풍속을 따르는 권리

    예수님은 세상 풍속을 좇는 것을 포기하시고 이 땅에서 사역하셨다. 그리스도인으로서 항상 깨어있지 못할 때, 우리는 왜곡된 사고와 잘못된 습관의 공격으로 인해 그리스도의 문화가 아니라 세상 풍속에 젖어 살 수 있다.

    자존심을 지키는 권리

    예수님은 사람들에게 인격을 무시당하고 모욕을 받았을 때 감정적으로 말씀하지도 않고 혈기를 부리지도 않으셨다. 예수님의 영적권위에 도전한다고 저주하지도 않으셨다. 그저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것을 따라서 그냥 단순하게 반응하셨다. 이것이 자존심을 세우려는 권리를 포기하는 삶이다.

    사랑받고 인정받고 감사받는 권리

    주님은 사랑받고 인정받고 감사받는 권리를 포기하고 이 땅에서 사셨다. 따라서 사람들의 배신을 하셨을 때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라고 말씀하실 수 있으셨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자기 권리를 포기하고 행할 때, 사랑받고 인정받는 것은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

    자기 영광을 취할 권리

    예수님은 그분의 모든 사역 속에서 자기의 영광을 취할 권리를 포기하고 언제나 하나님의 이름으로 사역하였다. 사람들이 자신을 바라보고 칭찬하고 경배하려고 할 때에 하나님이 하신 일이라고 말하며 영광을 돌리셨다.

    왕국을 만들어 군림하는 권리

    예수님은 자신의 왕국을 만들어서 군림하고, 새로운 교단을 만들어 총회장이 되고, 신학대학을 만들어 총장이 되는 권리를 포기하고 이 땅에서 사역하셨다. 에수님이 가시는 곳마다 사람들이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예수님께서 개척교회를 세웠다면, 기존 종교지도자들인 대제사장, 장로, 바리새인들을 능가하며 이스라엘 전국을 휩쓰는 새로운 예수교단을 창설하여 이 새 교단의 총회장으로 군림할 수 있었다. 예수님은 몰려오는 군중을 조직화해서 그 위에 군림하지 않으시고 늘 모인 군중을 흩으셨다.

    5. 제자들의 권리포기 (어떻게 여호와의 종을 대해야 하는가?)

    제자들은 예수님을 섬기는 삶 속에서 어떤 권리를 포기했을까?
    우리는 예수님의 제자이기 때문에, 열두 제자들이 어떻게 예수님을 섬기고 그분 앞에서 배웠는지 이해하고 배워야한다.

    불평불만 하는 권리

    예수님의 제자들은 불평 불만하는 권리를 포기하고 주님을 따랐다.
    여러 가지로 불평할 상황들이 많았지만, 예수님의 제자들은 한명도 불평불만을 한 일이 없다.

    건의하거나 간섭하는 권리

    제자들은 예수님의 사역에 대하여 건의하거나 간섭하지 않았다.
    제자들은 배고프고, 공동생활 집도 없고, 머리 둘 곳 없는 예수님을 좋아다니면서도, 예수님이 어떤 사역을 하시든지 건의하거나 간섭하는 권리를 포기하고 그냥 예수님을 섬기기만 하는 삶을 살았다.

    비판이나 험담하는 권리

    제자들은 비판이나 험담하는 권리를 포기하고 예수님을 섬겼다.
    오늘날의 교회에서는 비판하다가 안 되면 그 다음에 험담으로 넘어간다.
    하지만 제자들은 충분히 비판을 하거나 험담을 할 수 있는 상황에서도 그러한 권리들을 포기하고 예수님을 섬겼다.

    소외되었을 때 반발하는 권리

    예수님이 제자 중 누군가를 편애하더라도 반발하지 않고 주님을 섬겼다.
    예수님은 베드로, 야고보, 요한 세 명의 제자들을 특별히 더 사랑하셨다.
    하지만 그들 세 명만 사랑하고 자신을 찬밥 취급한다고 반발하는 제자들은 없었다.
    제자들은 어떠한 경우에도 예수님께 반발하는 권리를 포기했다.

    상처받고 떠나는 권리

    제자들은 상처받고 떠나는 권리를 포기하고 예수님을 섬겼다. 베드로는 예수님께 사탄이라는 소리를 들었을 때 아마도 정말 큰 상처를 받았을 것이다. 그러나 마음에 깊은 상처를 입고 좌절감 속에서 등을 돌려 돌아가지 않았다. 제자들은 예수님께 어떤 일에도 반발하고 떠날 권리를 포기하고 주님을 섬겼기 때문에 그런 일은 없었다.

    ​“사람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만 경외하자! 사람들의 시선 때문에, 사람들의 평가 때문에, 나를 둘러싼 사람들의 말 때문에 좌지우지 되는 것은 정말 어리석은 일이다.
    오직 하나님만 바라보고, 하나님 앞에서 나의 신을 벗으면 모든 것이 해결 되는 거야.
    내가 사람들에게 잘 보이려고, 여기에 있는 것이 아니잖아.. ”

    ​답을 얻으니까 마음이 참 편안하다.
    ‘권리포기’에 대한 나의 머릿속의 깨달음이 가슴으로 내려오기까지 많은 시간이 걸릴 수도 있다.
    그리고 나의 삶으로 옮겨지기까지는 더 많은 시간이 걸릴 수도 있다.
    하지만 조급하게 생각하지 말고, 한 번에 너무 많은 것을 이루려고 욕심 부리지도 않고, 오직 주님만 바라보며 한걸음이 나아가려한다.



    야베스의 기도(4:10)

    야베스가 이스라엘 하나님께 아뢰어 가로되 원컨대 주께서 내게 복에 복을 더 하사 나의 지경을 넓히시고 주의 으로 나를 도우사 나로 환난을 벗어나 근심이 없게 하옵소서 하였더니 하나님이 그 구하는 것을 허락하셨더라.
    Jabez cried out to the God of Israel, "Oh, that you would bless me and enlarge my territory! Let your hand be with me, and keep me from harm so that I will be free from pain." And God granted his request.

    야베스(Jabez) : 고통을 불러오다

    야베스는 누구?

    바빌론 유배 이후 집필된 역대기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그들의 유산과 정체성을 상기시키는 역할을 합니다.
    이러한 맥락에서 야베스는 수많은 이름들 사이에서 믿음의 등대로서 돋보입니다.
    그의 이야기는 짧지만 강력한 심리적, 영적 함의를 담고 있습니다.

    야베스는 "형제들보다 더 명예로운" 사람으로 소개됩니다.
    이 묘사는 그를 즉시 차별화하여 어떤 자질이 그를 그렇게 구별되게 만들었을지 생각해 보도록 유도합니다. 야베스의 가족이나 이스라엘 사회에서 그가 어떤 위치에 있었는지에 대한 자세한 맥락 정보가 없다는 점에 주목해야 합니다. 하지만 바로 이러한 세부 정보가 부족하기 때문에 그의 이야기는 시대와 문화를 뛰어넘어 공감을 불러일으킬 수 있습니다.

    심리학적으로 우리는 야베스의 이름에 대한 부담에도 불구하고 그의 명예로운 성품이 어떻게 발전했는지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이는 인간 정신의 회복탄력성과 출생 환경이나 어린 시절의 경험을 초월할 수 있는 능력을 말해줍니다.

    역대기에 야베스가 등장하는 것은 문학적 목적도 있습니다. 현대 독자들에게는 건조하게 느껴질 수 있는 족보의 한가운데서 그의 이야기는 이야기적 흥미와 영적 통찰력을 제공합니다. 이 고대 목록의 모든 이름 뒤에는 희망과 고난, 하나님과의 관계를 가진 실제 인물이 있었다는 사실을 상기시켜 줍니다.

    코스


    야베스를 통해 여러분 자신의 인생 여정을 되돌아보시기 바랍니다. 우리 각자는 출신이나 이름에 관계없이 하나님의 눈에는 '더 존귀한' 존재가 될 수 있는 잠재력을 지니고 있습니다. 야베스처럼 우리 모두는 시대를 초월한 하나님의 백성의 이야기라는 위대한 이야기의 일부입니다.

    역대기가 기록된 당시의 역사적 맥락도 고려해 봅시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유배 후 정체성을 재건하던 시기에 야베스의 이야기는 용기를 주었을 것입니다. 어려운 상황에서도 하나님을 부르면 축복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줬기 때문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뿌리로부터 단절감을 느끼거나 과거에 대한 부담감을 느끼는 현대 사회에서 역대기에 나오는 야베스의 이야기는 희망을 제시합니다. 이 이야기는 우리의 정체성이 우리의 출신이나 우리에게 주어진 이름에 의해 고정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를 통해 변화될 수 있다는 것을 가르쳐 줍니다.

    야베스라는 이름의 뜻은 무엇인가요?

    이러한 작명은 고대 이스라엘 문화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관습으로, 이름에는 종종 중요한 의미가 담겨 있으며 때로는 출생과 관련된 상황을 예언하거나 설명하기도 합니다. 심리학적으로 우리는 그러한 이름이 개인의 자기 인식과 인생 여정에 미치는 깊은 영향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자신의 존재와 관련된 고통을 끊임없이 상기시키는 이름을 가지고 자랐다고 상상해 보세요. 그러한 이름의 무게는 엄청난 부담이 될 수 있으며, 잠재적으로 자신의 정체성과 인생관을 형성할 수 있습니다. 이는 부모의 태도와 어린 시절의 경험이 개인의 심리적 발달에 얼마나 강력한 영향을 미치는지 잘 보여줍니다.

    하지만 야베스의 이야기는 시작이 주는 한계를 뛰어넘을 수 있다는 아름다운 교훈을 우리에게 가르쳐 줍니다. 야베스는 이름과는 달리 "형제들보다 더 명예로운 사람"으로 성장했습니다. 이러한 변화는 운명과 자유 의지, 우리가 태어난 환경과 우리의 선택 사이의 상호작용에 대해 생각해 보게 합니다.

    인류 역사에서 이름이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었는지 생각해보게 됩니다. 많은 문화권에서 이름은 아이의 미래에 영향을 미친다고 믿으며 매우 신중하게 선택됩니다. 따라서 야베스라는 이름은 타인이나 환경이 우리에게 부여한 꼬리표와 기대를 넘어 자신을 정의하기 위한 투쟁이라는 더 넓은 인간 경험의 축소판으로 볼 수 있습니다.

    야베스라는 이름의 의미는 인간의 삶에서 고통의 현실을 강조하기도 합니다. 고통과 슬픔은 모든 가족과 모든 세대에 영향을 미치는 보편적인 경험입니다. 하지만 야베스의 이야기에서 알 수 있듯이 고통은 반드시 끝이 있을 필요는 없습니다. 믿음과 기도를 통해 슬픔에서 시작된 고통은 축복의 원천으로 바뀔 수 있습니다.

    영적인 관점에서 야베스라는 이름의 의미는 하나님 앞에서 정직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일깨워 줍니다. 야베스의 어머니는 아들의 이름을 지을 때 자신의 고통을 숨기지 않고 솔직하게 표현했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가장 어려운 상황에서도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신뢰하며 우리의 슬픔과 어려움을 하나님 앞에 가져가도록 부름받았습니다.

    야베스의 이름과 그의 성품의 대조는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강력한 간증으로 작용합니다. 우리의 정체성은 과거나 타인의 인식에 의해 고정되는 것이 아니라 신과의 관계를 통해 새롭게 형성될 수 있음을 보여줍니다.

    여러분이 자신의 삶에서 어떤 이름과 꼬리표를 달고 있는지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기도할 때 하나님 앞에 가져가야 할 고통스러운 연관성이나 제한적인 믿음이 있나요? 야베스처럼 우리 모두는 하나님의 축복을 구하고 주어진 이름이나 환경의 한계를 넘어 우리의 영역을 확장할 수 있도록 초대받았습니다.

    야베스의 기도는 무엇인가요?

    여러 세대에 걸쳐 신자들의 마음을 사로잡은 짧지만 강력한 간구인 야베스의 기도에 주목해 봅시다. 역대상 4장 10절에 나오는 이 기도는 다음과 같습니다: "오, 주께서 저를 축복하시고 제 영토를 넓혀 주시기를! 주님의 손이 저와 함께 하시고, 저를 해로부터 지켜주셔서 고통에서 벗어나게 하소서."

    이 기도는 간결하고 직접적으로 인간의 가장 깊은 갈망과 하나님과의 관계의 본질에 대해 많은 것을 드러냅니다. 역사적 유물이자 신앙의 힘에 대한 살아있는 증거로서 이 기도를 자세히 살펴봅시다.

    야베스는 하나님의 축복을 구합니다. 이 요청은 단순해 보일 수 있지만, 신의 은총에 대한 우리의 근본적인 의존성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심리적으로는 진정한 성취는 우리 자신의 노력만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더 높은 곳에서 비롯된다는 것을 인식하면서 긍정과 지지에 대한 우리의 타고난 욕구를 말합니다.

    "내 영토를 넓혀 달라"는 탄원은 역사적으로 다양한 방식으로 해석되어 왔습니다. 고대 이스라엘의 맥락에서는 문자 그대로 영토 확장을 의미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하지만 영향력, 책임감 또는 영적 성장에 대한 요청으로 은유적으로 이해할 수도 있습니다. 기도의 이 부분은 하나님의 뜻과 일치할 때 개인과 공동체의 번영으로 이어질 수 있는 진보와 발전에 대한 인간의 욕망을 반영합니다.

    그러자 야베스는 하나님의 임재를 구합니다: "주님의 손이 저와 함께 하소서." 이 아름다운 신적 동행의 이미지는 우리가 인생을 혼자 살아갈 수 없음을 상기시켜 줍니다. 심리적으로는 안전과 인도에 대한 우리의 필요성을 말해줍니다. 역사적으로는 모세나 다윗과 같이 리더십 역할에서 하나님의 임재에 의존했던 인물들의 경험을 떠올리게 합니다.

    마지막으로 야베스는 위험과 고통으로부터 보호해 달라고 기도합니다. 이 기도는 이 세상의 고통의 현실을 인정하는 동시에 하나님의 보호 능력에 대한 신뢰를 표현합니다. 야베스의 이름에 담긴 의미를 생각하면 고통의 유산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열망을 암시하는 이 기도문은 특히 가슴을 울립니다.

    야베스의 기도에는 축복, 성장, 동반자 관계, 안전 등 인간의 가장 깊은 욕구가 담겨 있습니다. 이 기도는 이러한 욕구를 하나님께 직접적이고 정직한 방식으로 표현하는 모델을 제시합니다.

    이 고대의 기도가 여러분의 삶에 어떻게 적용될 수 있을지 생각해 보세요. 신체적, 정서적, 영적 영역 중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확장하라고 부르시는 영역은 무엇인가요? 어떻게 하면 일상적인 경험에 하나님의 임재를 더 온전히 초대할 수 있을까요? 하느님의 보호와 치유가 필요한 곳은 어디인가요?

    또한 이 개인적인 기도가 우리의 공동체적 신앙 여정에 어떻게 부합하는지 생각해 봅시다. 야베스는 개인적인 축복을 위해 기도하지만, 그의 영토 확장은 그의 공동체 전체에 유익을 가져다주었을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 삶에서 하나님의 축복을 위해 기도할 때, 우리는 이러한 축복이 주변 사람들에게 어떻게 넘쳐날 수 있는지 고려하도록 부름받았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도전과 불확실성에 압도당하는 현대 사회에서 야베스의 기도는 담대하고 신뢰하는 간구의 모범을 제시합니다. 이 기도는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과 능력을 확신하며 우리의 욕망과 두려움을 하나님 앞에 가져가도록 격려합니다.

    야베스의 기도가 중요한 이유는 무엇인가요?

    야베스의 기도의 중요성은 성경에 짧게 언급된 것 이상의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역사적으로 신자들에게 미친 지속적인 영향과 오늘날 우리의 삶과의 관련성은 신중하게 고려할 가치가 있습니다.

    이 기도의 의미는 야베스의 이름과 출신과 대조된다는 데 있습니다. 야베스는 고통 속에서 태어났고 고통을 상징하는 이름을 가졌지만, 그것이 하나님과의 관계를 정의하는 것을 허용하지 않았습니다. 고통에서 축복으로의 변화는 인간의 경험에 깊은 울림을 줍니다. 우리의 이야기를 재구성하고 인생의 도전을 극복하는 데 있어 신의 개입을 구하는 힘이 얼마나 강력한지를 보여줍니다.

    이 기도는 대담함에서도 주목할 만합니다. 야베스는 축복과 확장, 신적 임재와 보호를 직접적으로 요청하며 하나님께 다가갑니다. 이러한 대담한 기도는 우리 자신의 하나님에 대한 접근 방식을 점검하도록 도전합니다. 우리는 합당하지 않다는 느낌이나 두려움 때문에 기도를 제한하고 있지는 않나요? 야베스의 모범은 우리가 자신감과 신뢰를 가지고 우리의 가장 깊은 소망을 하나님 앞에 가져가도록 격려합니다.

    역사적으로 역대기에 이 기도가 포함된 것은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국가와 정체성을 재건하던 포로기 이후 시기에 쓰인 이 기도는 불확실한 시대에 하나님의 축복과 보호를 구하는 백성들의 공감을 불러일으켰을 것입니다. 이 기도는 우리 시대를 포함한 모든 시대에 우리의 필요와 열망을 가지고 하나님께로 나아갈 수 있음을 일깨워줍니다.

    이 기도가 강조하는 인간사에 대한 하나님의 적극적인 개입은 이 기도의 또 다른 중요한 측면입니다. 야베스는 추상적인 축복을 구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손길이 자신과 함께 해달라고 간구합니다. 이는 우리 삶에 친밀하게 관여하시는 하나님, 즉 신적 내재성의 신학을 반영합니다. 세속화된 세상에서 이것은 우리 존재의 모든 측면에 임재하시려는 하나님의 열망을 강력하게 상기시키는 역할을 합니다.

    Psychologically the prayer addresses fundamental human needs – for blessing (acceptance and affirmation), expansion (growth and development), divine presence (security and guidance), and protection (safety and peace). Its comprehensive nature makes it a model for holistic prayer that addresses both spiritual and practical concerns. The Lord’s Prayer is often seen as a beginner’s guide to prayer는 겸손과 진정성을 가지고 신에게 다가갈 수 있는 틀을 제공합니다. 이 기도는 영적 성취와 인도에 대한 우리의 필요를 인정하고 신과의 연결을 통해 이러한 성취를 추구하도록 상기시켜 줍니다. 이 기도는 인간의 다양한 필요를 다룸으로써 포괄적이고 접근 가능한 방식으로 더 높은 힘에 다가갈 수 있는 로드맵을 제공합니다. 따라서 이 기도는 모든 종교를 가진 사람들이 신과 연결되기를 원하는 사람들에게 기초적인 도구로 사용됩니다.

    기도의 단순함과 간결함 또한 이 기도의 중요성에 기여합니다. 단 몇 마디에 강력한 신학과 하나님에 대한 깊은 신뢰가 담겨 있습니다. 따라서 접근하기 쉽고 기억하기 쉬워 신자들이 쉽게 내면화하고 개인화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야베스의 요청을 들어주셨다는 사실은 기도의 중요성에 무게를 더합니다. 이는 진실한 기도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을 보여주는 증거이며, 모든 세대의 신자들이 자신의 필요와 욕구를 가지고 하나님께 나아가도록 격려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삶의 복잡성에 압도당하는 현대의 상황에서 야베스의 기도는 하나님과 연결되는 간단하면서도 강력한 방법을 제시합니다. 축복, 확장, 임재, 보호라는 네 가지 요소는 인생의 도전과 기회에 대처할 수 있는 틀을 제공합니다.

    I encourage you to consider the significance of this prayer in your own life. How might embracing its spirit of bold trust transform your relationship with God? How could it reshape your approach to life’s challenges and opportunities? Embracing the spirit of bold trust found in this prayer can lead to a deeper sense of peace and confidence in God’s faithfulness. It can also provide a framework for approaching life’s challenges with courage and hope, knowing that God is always at work for our restoration. By incorporating the spirit of this prayer into our own lives, we can experience a renewed sense of faith and a willingness to trust God’s timing and plan for our lives. In doing so, we can find comfort and strength in knowing that our 회복을 위한 기도 들으시고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적극적으로 일하고 계심을 믿습니다.

    이 기도의 공동체적 의미에 대해서도 생각해 봅시다. 야베스는 개인적인 축복을 위해 기도하지만, 그가 추구하는 확장은 필연적으로 그의 공동체에 도움이 될 것입니다. 이는 우리의 기도가 개인적인 것이지만 항상 하나님의 축복이 우리 삶에 미치는 더 넓은 영향을 고려해야 한다는 것을 상기시켜 줍니다.

    야베스 기도의 지속적인 중요성은 영감과 격려, 그리고 변화를 가져오는 기도의 힘에 있습니다. 이 기도는 우리가 담대하게 기도하고, 하나님의 선하심을 신뢰하며, 우리 삶에 하나님의 적극적인 개입을 구하도록 도전합니다. 이 기도를 받아들일 때, 야베스처럼 우리 삶과 공동체에서 하나님의 축복, 확장, 임재, 보호의 변화시키는 힘을 경험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성경에 야베스가 몇 번이나 언급되나요?

    이렇게 언급이 적다 보니 처음에는 야베스의 중요성이 줄어든 것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바로 이 간결함이 야베스에 대한 기록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데 어떻게 작용하는지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모든 단어에 무게가 실리는 성경의 경제학에서 야베스의 이야기를 긴 족보에 포함하기로 한 결정은 많은 것을 말해줍니다.

    역사적으로 역대기의 맥락을 고려해야 합니다. 바빌론 유배 이후에 쓰여진 이 책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그들의 유산과 정체성을 상기시키는 역할을 했습니다. 이 족보 기록에 야베스의 이야기가 포함된 것은 그의 모범이 국가와 신앙을 재건하는 민족에게 특히 가치 있는 것으로 여겨졌음을 시사합니다.

    심리적으로 야베스의 짧은 등장이 주는 영향은 잘 살아온 한 인생의 힘을 상기시켜 줍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생각할 거리를 던져줍니다: 우리는 어떻게 기억될 것인가? 우리의 이야기가 단 몇 문장으로만 전해지더라도 우리는 어떤 유산을 남길 수 있을까요?

    야베스가 한 번은 그의 이름을 설명하고 한 번은 그의 기도를 이야기하는 데 두 번이나 언급된다는 사실은 강력한 서사적 흐름을 만들어냅니다. 우리는 그의 이름에서 그가 가진 잠재적 한계를 보고, 바로 이어서 기도를 통해 하나님과의 변화된 만남을 봅니다. 이 간결한 스토리텔링은 인간의 한계와 신의 가능성 사이의 대비를 강조하는 역할을 합니다.

    야베스의 이름은 단 두 번만 언급되지만, 그의 이야기의 영향력은 이러한 직접적인 언급을 훨씬 뛰어넘습니다. 특히 그의 기도는 역사상 수많은 신자들에게 영감을 주었으며, 짧은 성경 구절이 얼마나 큰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는지를 보여줍니다.

    저는 야베스에 대한 제한적인 언급이 성경 전체에서 볼 수 있는 패턴과 일치한다는 점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종종 세상의 기준으로는 하찮아 보이는 사람들을 통해 일하신다는 것입니다. 처음에는 가족 중 막내였던 기드온이나 형제 중 막내였던 다윗을 생각해 보세요. 야베스의 이야기는 겸손한 자를 높이시는 하나님이라는 성경의 주제에 부합합니다.

    성경에 등장하는 야베스의 간결한 모습은 우리 자신의 성찰과 적용으로 그 빈틈을 메우도록 초대합니다. 그의 이야기는 우리 자신의 고난과 열망을 투영할 수 있는 캔버스가 되어, 그의 기도를 접하는 모든 신자들에게 깊은 개인적 경험을 선사합니다.

    야베스에 대한 성경의 제한된 언급에서 우리가 무엇을 배울 수 있는지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아무리 짧게 기록된 삶이라도 하나님의 목적과 일치할 때 강력한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잠재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상기시켜 줍니다. 둘째, 작은 행동도 큰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는 사실을 알고 신앙의 유산을 남길 수 있는 모든 기회를 최대한 활용하도록 도전합니다.

    언급이 드물다는 것은 성경에 세심한 주의를 기울여 접근하도록 우리를 초대합니다. 때로는 가장 강력한 진리는 긴 담론이 아니라 신앙과 인간 경험의 본질을 포착하는 짧고 강렬한 순간에서 발견된다는 사실을 상기시켜 줍니다.

    또한 야베스의 제한된 모습이 우리 자신의 삶과 어떤 관련이 있는지 생각해 봅시다. 우리 중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기여가 작거나 눈에 띄지 않는다고 느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야베스의 이야기는 하나님께서 모든 생명을 보시고 소중히 여기시며, 우리의 신실함이 우리가 상상하는 것 이상의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것을 확신시켜 줍니다.

    가시성과 양으로 가치를 측정하는 현대 사회에서, 성경에 짧지만 중요하게 등장하는 야베스는 반문화적인 메시지를 전합니다. 진정한 영향력은 언급의 양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의 질과 기도의 진정성에 의해 측정된다는 것을 시사합니다.

    야베스의 기도의 결과는 무엇이었나요?

    성경은 우리에게 간결하지만 강력하게 말합니다: "하나님이 그가 구하는 것을 허락하셨다"(역대상 4:10). 이 간단한 말씀 속에는 우리가 주의 깊게 숙고해야 할 깊은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야베스의 기도를 들으셨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기도가 들리지 않거나 무시당한다고 느끼는 세상에서, 하나님께서 우리의 간구에 귀 기울이신다는 이 말씀은 깊은 위로가 됩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도 우리의 기도에 귀를 기울이신다는 사실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은 기도에 응답하시나요?? 성경에 나오는 야베스의 예에서 알 수 있듯이 대답은 '그렇다'입니다. 이는 우리의 기도가 헛된 것이 아니라 사랑스럽고 세심한 하나님께서 들으시고 고려하신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안심시켜 줍니다. 이러한 지식은 하나님께서 자녀의 부르짖음에 신실하게 응답하신다는 사실을 알고 담대하고 자신 있게 그분께 다가갈 수 있도록 영감을 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단순히 들으시는 것 이상으로 신성한 관대함으로 응답하셨습니다. 야베스의 요청을 들어주신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하시고, 그분의 자녀들과 대화를 나누고, 우리의 삶 속에서 행동하시려는 의지를 보여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멀고 비인격적인 신이 아니라 자녀를 축복하기를 기뻐하시는 사랑의 아버지이십니다.

    그러나 본문은 하나님께서 야베스의 기도에 어떻게 응답하셨는지에 대한 구체적인 내용을 제공하지 않는다는 점에 유의해야 합니다. 이러한 모호함은 우리 자신의 기도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이 항상 즉각적으로 나타나거나 우리가 기대하는 형태로 나타나지 않을 수 있다는 점을 생각하게 합니다. 때로는 기도의 열매가 천천히 익어 시간이 지나면서 우리가 처음에 인식하지 못한 방식으로 드러나기도 합니다.

    심리적으로도 우리는 기도하는 행위, 즉 하나님 앞에 우리의 가장 깊은 희망과 두려움을 표현하는 것 자체가 어떻게 변화를 일으킬 수 있는지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야베스의 기도는 그의 외부 환경뿐만 아니라 내면의 풍경도 변화시켜 하나님을 더 깊이 신뢰하고 신의 자녀로서 자신의 정체성을 더욱 강력하게 인식하게 했을 것입니다.

    야베스의 요청이 받아들여진 것은 주변 사람들과 그의 이야기를 듣는 모든 이들에게 강력한 간증이 됩니다. 하나님의 신실하심과 능력에 대한 증거가 되어 다른 사람들이 자신감을 가지고 은혜의 보좌로 나아갈 수 있도록 격려합니다.

    하지만 이 구절을 하나님께서 우리의 모든 요청을 들어주신다는 보장으로 해석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합니다. 우리 주님은 무한한 지혜로 우리에게 진정으로 가장 좋은 것이 무엇인지 알고 계십니다. 때때로 그분의 가장 큰 선물은 우리의 구체적인 요청을 들어주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마음이 그분의 뜻에 더 가깝게 일치하도록 변화시키는 것입니다.

    야베스의 기도의 결과는 신성한 응답, 개인적인 변화, 지속적인 간증 등 겹겹이 쌓여 있었습니다. 이 이야기는 진실한 기도의 힘, 사랑의 하나님의 세심한 배려, 그리고 그분이 우리 삶에서 일하시는 신비한 방식을 상기시켜 줍니다. 우리도 야베스처럼 정직과 믿음, 용기를 가지고 주님께 다가서서 우리 삶에 대한 주님의 완전한 뜻을 항상 신뢰하며 그분의 축복을 구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야베스의 이야기는 성경의 다른 가르침과 어떤 관련이 있나요?


    야베스의 이야기는 짧지만 성경 전체에서 발견되는 다른 많은 가르침과 깊은 공감을 불러일으킵니다. 이 이야기는 빛을 비추면 하나님의 더 큰 진리의 광채를 반영하는 작은 보석과도 같습니다. 이 간결한 내러티브가 성경의 지혜가 담긴 광범위한 태피스트리와 어떻게 얽혀 있는지 살펴보세요.

    야베스의 이야기는 기도의 힘에 대한 성경의 근본적인 가르침을 강조합니다.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아낼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다"라는 마태복음 7:7의 주 예수님 말씀을 떠올리게 됩니다. 야베스의 경험은 이 원리를 생생하게 보여 주며, 하나님께서 자녀의 간절한 청원에 귀 기울이신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이는 "주님은 그를 부르는 모든 이에게, 진실로 그를 부르는 모든 이에게 가까이 계신다"(시편 145:18)는 시편 기자의 확신을 반영합니다.

    야베스의 축복 기도는 신의 은총과 풍요라는 성경의 개념과 일치합니다. 창세기에서 우리는 처음부터 하나님은 자신의 창조물을 축복하기를 기뻐하시는 창조주이심을 알 수 있습니다. 성경 신학의 초석인 아브라함의 언약은 근본적으로 축복의 약속입니다. 따라서 야베스의 이야기는 하나님의 백성을 축복하시려는 하나님의 열망에 대한 더 큰 이야기의 축소판으로 볼 수 있습니다.

    영토를 넓혀 달라는 요청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약속의 땅에 대해 하신 약속을 떠올리게 합니다. 이는 여호수아가 자신의 유산을 주장한 담대함과 믿음은 종종 우리가 하나님의 약속을 주장하기 위해 나서야 한다는 성경의 원리를 상기시켜 줍니다. 야베스의 기도의 이러한 측면은 우리 자신의 믿음을 돌아보게 합니다. 우리는 욕심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을 섬기고 영광을 돌리기 위해 우리의 능력을 확장하려는 열망에서 하나님께 '더 많은 것'을 구할 만큼 담대할 수 있을 만큼 담대한가요?

    하나님의 손길이 함께 해달라는 야베스의 간구는 모세, 다윗, 선지자 등 하나님의 임재와 능력에 의지하여 소명을 완수했던 성경 속 많은 인물들의 경험을 떠올리게 합니다. 이는 우리에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는 바울의 가르침과도 일치합니다(빌립보서 4:13). 이는 우리가 하나님에 대한 의존과 모든 노력에서 하나님의 인도와 능력을 구하는 것의 중요성을 상기시켜 줍니다.

    위험으로부터 보호해달라는 기도는 죄로 인해 훼손된 세상과 영적 전쟁의 현실에 대한 성경적 이해를 반영합니다. 이는 예수님께서 악에서 구해달라고 기도하라고 가르치신 주기도문과도 일맥상통합니다. 고통에 대한 야베스의 관심은 또한 인간의 고통과 하나님의 구속 사역에 대한 우리의 희망에 대한 성경의 광범위한 이야기와도 연결됩니다.

    심리학적으로 야베스의 이야기는 정체성과 목적에 대한 인간의 욕구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그의 기도는 자신의 이름에 담긴 부정적인 의미를 극복하고 하나님의 축복을 바탕으로 새로운 정체성을 확립하기 위한 노력으로 볼 수 있습니다. 변화와 새로운 정체성이라는 주제는 복음 메시지와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 되라는 바울의 가르침의 핵심입니다(고린도후서 5:17).

    역사적으로 우리는 야베스의 개인적 경험과 이스라엘의 집단적 경험 사이에 유사점을 찾을 수 있습니다. 야베스가 자신의 영토를 확장하고 위험을 피하고자 했던 것처럼 이스라엘 민족도 약속의 땅에서 자신의 자리를 확립하고 지키고자 했습니다. 이러한 개인과 집단의 유사성은 우리 개인의 영적 여정이 세상에서 하나님이 일하시는 더 큰 이야기의 일부임을 상기시켜 줍니다.

    야베스의 이야기는 작지만 그 안에는 기도의 힘, 하나님의 축복에 대한 열망, 믿음의 중요성, 신의 인도와 보호에 대한 우리의 의존, 하나님과의 관계가 주는 변화의 힘 등 성경의 여러 위대한 주제의 메아리가 담겨 있습니다. 이 이야기는 더 큰 성경 이야기의 축소판 역할을 하며, 우리 자신의 이야기를 세상에서 진행 중인 하나님의 사역의 일부로 보도록 초대합니다. 우리도 야베스처럼 담대하게 기도할 수 있는 용기와 하나님의 축복을 기대하는 믿음, 그리고 우리 개인의 이야기가 하나님의 사랑과 구속이라는 더 큰 이야기와 어떻게 연결되는지 볼 수 있는 지혜를 갖기를 바랍니다.

    초대 교회 교부들은 야베스에 대해 무엇을 가르쳤나요?

    초대 교회 교부들은 지혜롭게도 종종 그리스도와 복음의 렌즈를 통해 구약의 이야기를 해석하려고 노력했습니다. 교부들이 야베스에 대해 구체적으로 자세히 언급하지는 않았지만, 성경에 대한 일반적인 접근 방식은 우리의 이해를 도울 수 있습니다.

    성경을 우화적으로 해석한 것으로 유명한 알렉산드리아의 오리겐은 야베스의 이야기에서 그리스도인의 신앙 여정을 예시한 것으로 보았을 것입니다. 영토의 확장은 하나님에 대한 미덕과 지식으로 영혼이 성장하는 것으로 이해될 수 있습니다. 오리겐은 종종 인간의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영적 싸움을 강조했는데, 이는 야베스가 위험으로부터 보호해 달라고 기도한 것과 일치합니다.

    성 어거스틴은 기도와 하느님의 은총에 대해 묵상하면서 야베스에게서 인간의 의지와 하느님의 행동이 어떻게 협력하는지에 대한 모범을 발견했을 것입니다. 어거스틴의 은혜에 대한 가르침은 모든 좋은 것은 하느님으로부터 오는 것이지만 우리의 참여가 필요하다는 점을 강조합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야베스의 기도는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의 은혜를 전적으로 의지하면서 적극적으로 그분의 축복을 구해야 하는지에 대한 모범으로 볼 수 있습니다.

    성경을 실제적으로 적용하는 것으로 유명한 성 요한 크리소스톰은 야베스의 이야기를 통해 신자들에게 기도의 힘을 격려했을 것입니다. 크리소스톰은 모든 신자가 하나님께 접근할 수 있다는 점을 자주 강조했는데, 야베스의 성공적인 청원은 자신감을 가지고 하나님께 다가갈 수 있도록 격려하는 역할을 할 수 있습니다.

    이는 교부들의 일반적인 가르침에 근거한 사변적인 해석이지만, 모든 이야기에서 그리스도와 신앙의 삶을 가리키는 교훈을 찾아내는 성경에 대한 가톨릭적 접근 방식을 반영합니다.

    초대 교회 교부들이 구약성서의 이름과 사건에서 종종 예언적 의미를 발견했다는 사실도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고통을 주는 자"라는 뜻의 야베스라는 이름은 영적 성장과 하나님 나라의 확장에 종종 수반되는 고통을 예고하는 것으로 해석될 수 있습니다.

    교부들의 성경에 대한 접근 방식은 심리적으로 인간의 조건에 대한 깊은 탐구를 수반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그들은 야베스의 이야기에서 한계를 극복하고 축복을 찾고자 하는 인간의 보편적인 욕망을 반영한 것으로 보았을 것입니다. 이는 인간이 신을 닮아가는 과정, 즉 신격화에 대한 교부들의 이해와도 일맥상통합니다.

    역사적으로 초대 교회는 종종 핍박을 받았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교부들은 야베스의 보호를 위한 기도에서 적대적인 환경에서 안전과 확장을 위한 교회 자체의 청원에 대한 모델을 발견했을 것입니다.

    야베스에 대한 교부들의 상대적인 침묵이 그의 이야기의 가치를 부정하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이 이야기는 교부 해석의 광범위한 원칙을 이 이야기에 적용하도록 우리를 초대합니다. 교부들은 성경을 전체론적으로 읽으며 모든 부분에서 전체 구원 이야기의 울림을 보라고 가르쳤습니다.

    현대의 맥락에서 우리는 교부들의 접근 방식에서 배울 수 있습니다. 교부들은 성경을 단독으로 읽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인류의 관계에 대한 장대한 이야기의 일부로 읽으라고 상기시켜 줍니다. 교부들은 문자 그대로를 넘어 더 깊은 영적 진리를 찾도록 격려합니다. 그리고 항상 그리스도와 복음에 비추어 성경을 해석하라고 가르칩니다.

    현대 기독교인들이 야베스로부터 배울 수 있는 교훈이 있을까요?

    야베스의 이야기는 비록 짧지만, 현대 그리스도인의 삶과 관련된 많은 교훈을 얻을 수 있는 깊은 지혜의 우물과도 같습니다.
    이 고대의 기도를 묵상하면서 그 안에 담긴 시대를 초월한 진리에 마음을 열고 오늘날 우리의 신앙 여정에 어떻게 적용될 수 있을지 생각해 봅시다.

    야베스는 우리에게 진실하고 담대한 기도의 힘을 가르쳐 줍니다.
    자립과 독립을 장려하는 세상에서 야베스는 하나님께 대한 우리의 근본적인 의존을 상기시켜 줍니다.
    그의 기도는 소심하거나 주저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감 있고 구체적입니다.
    이는 우리 자신의 기도 생활을 돌아보게 합니다.
    우리도 똑같이 담대하고 구체적으로 하나님께 나아가고 있나요?
    아니면 실망할까 봐 두려워하거나 자격이 없다고 생각하여 주저하고 있지는 않나요?
    야베스는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과 능력을 신뢰하면서 우리의 가장 깊은 욕망과 필요를 하나님 앞에 가져가도록 격려합니다.

    심리적으로,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필요와 욕구를 표현하는 이 행위는 깊은 치료 효과가 있습니다.
    자신의 생각과 감정을 명확히 하는 데 도움이 되며, 이를 통해 상황에 대한 새로운 관점을 얻는 경우가 많습니다.
    하나님께 고민을 맡기는 행위는 가시적인 결과를 보기 전에도 불안을 완화하고 평안함을 증진할 수 있습니다.

    야베스의 영토 확장을 위한 기도는 반드시 물질적인 측면이 아니라 하나님과 다른 사람들을 섬길 수 있는 우리의 능력에 대한 성장과 확장에 대한 기독교적 소명을 말합니다.
    현대적 맥락에서 이는 선한 영향력을 확대하고, 더 많은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사랑의 메시지를 전하며,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우리의 재능과 능력을 개발할 기회를 찾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이는 우리가 안전지대를 넘어 세상에 더 큰 영향력을 미칠 수 있는 방법을 적극적으로 모색하도록 도전합니다.

    하나님의 손길이 함께 해달라는 요청은 우리의 모든 노력에 하나님의 인도와 능력이 필요하다는 것을 일깨워 줍니다.
    개인의 성취를 미화하는 문화 속에서 야베스의 기도는 진정한 성공은 하나님으로부터 온다는 사실을 겸손하게 인정하는 것입니다.
    이는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힘으로 인생의 도전을 관리하려고 할 때 경험하는 스트레스와 번아웃에 대한 강력한 해독제가 될 수 있습니다.

    위험으로부터 보호해 달라는 야베스의 기도는 종종 혼란스러운 세상에서 깊은 울림을 줍니다.
    이 기도는 우리가 삶의 모든 상황을 통제할 수는 없지만 우리의 안전과 안녕을 하나님께 맡길 수 있음을 상기시켜 줍니다. 이것은 문제 없는 삶을 보장하는 것이 아니라 인생의 어려움 속에서도 하나님의 임재와 돌보심을 확신하는 것입니다. 불안이나 두려움으로 어려움을 겪는 많은 사람들에게 야베스의 기도의 이러한 측면은 특히 위로와 힘이 될 수 있습니다.

    성경에 나오는 야베스의 이야기는 매우 간결하지만 중요한 교훈을 담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의미 있는 삶은 반드시 업적의 양이나 전기의 길이로 측정되는 것이 아니라, 신앙의 진실성과 하나님의 뜻과 우리의 욕망이 일치하는지에 따라 결정된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명성과 유산에 집착하는 문화에서 이것은 하나님의 경륜에서 진정으로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강력하게 상기시켜 줍니다.

    역사적으로 보면 야베스의 상황과 우리의 상황 사이에 유사점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야베스가 변화와 도전의 시대에 살았던 것처럼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기도로 하나님께 의지한 그의 대응은 우리가 복잡한 세상을 어떻게 헤쳐나갈 수 있는지에 대한 모델을 제시합니다.

    마지막으로, 하나님께서 야베스의 요청을 들어주셨다는 사실은 기도의 효능을 믿도록 격려합니다. 우리는 항상 하나님의 지혜에 우리의 의지를 복종해야 하지만, 야베스의 경험은 하나님께서 자녀의 부르짖음을 들으시고 응답하신다는 사실을 상기시켜 줍니다. 이를 통해 기도에 대한 우리의 헌신과 우리 삶에서 하나님의 역사에 대한 기대를 새롭게 할 수 있습니다.

    야베스의 이야기는 비록 고대의 이야기지만 현대의 상황에 강력하게 시사하는 바가 있습니다. 이 이야기는 우리에게 담대하게 기도하고, 영적인 삶의 성장을 추구하며, 하나님의 힘과 보호에 의지하고, 기도의 힘을 믿도록 도전합니다. 우리도 야베스처럼 우리의 가장 깊은 필요를 하나님 앞에 가져갈 수 있는 용기와 모든 일에서 하나님의 인도를 구할 수 있는 지혜, 그리고 하나님께서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고 응답하신다는 것을 믿는 믿음을 갖기를 바랍니다. 이 짧은 성경 이야기를 통해 하나님과의 관계와 주변 세상에 대한 우리의 영향력을 형성할 수 있도록 일상 생활에서 이러한 교훈을 실천해 봅시다.

    야베스의 기도가 최근 몇 년 동안 인기를 끌고 있는 이유는 무엇인가요?

    최근 몇 년 동안 야베스의 기도에 대한 관심이 다시 높아지는 현상은 우리의 신중한 성찰을 촉구하는 현상입니다.
    그것은 성경의 시대를 초월한 힘뿐만 아니라 현대의 특별한 영적 갈망을 말해줍니다.
    목회적 감수성과 역사적 관점으로 이 트렌드를 살펴봅시다.

    야베스의 기도가 다시 인기를 얻게 된 것은 2000년에 출간된 브루스 윌킨슨의 저서 '야베스의 기도' 덕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작은 책은 수백만 명의 독자들에게 큰 반향을 일으켰고, 야베스는 상대적으로 무명에서 많은 기독교인의 영적 수행의 최전선에 서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이 특별한 기도가 현대 신자들에게 그토록 깊은 울림을 준 이유는 무엇일까요?

    우리는 문화적 맥락을 고려해야 합니다.
    세속화와 불확실성이 증가하는 시대에 많은 크리스천은 하나님과 연결되고 삶에서 그분의 능력을 경험할 수 있는 실질적인 방법을 찾고 있습니다.
    야베스의 기도는 분명한 요청과 긍정적인 결과가 보고된 기도로서, 신과 소통하는 데 있어 간단해 보이는 공식을 제시합니다.
    이 기도는 명확성을 추구하는 인간의 욕망에 호소하여 영적인 삶에 결과를 가져다줍니다.

    심리적으로 기도의 인기는 의미와 목적에 대한 깊은 욕구를 반영하는 것일 수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자신을 간과하거나 하찮게 여기는 세상에서, 짧고 진심 어린 기도가 신의 축복과 영향력 확대로 이어질 수 있다는 생각은 매우 매력적입니다.
    이는 의미 있는 영향력을 끼치고 싶고, 우리 삶이 거대한 계획에서 중요하다는 것을 알고 싶어 하는 우리 본연의 갈망을 대변합니다.

    이 기도가 강조하는 신의 축복은 최근 수십 년 동안 두드러진 번영 신학의 특정 흐름과 맞닿아 있습니다.
    신앙을 개인적인 이득을 위한 수단으로 축소하는 것은 경계해야 하지만, 하나님의 축복에 대한 열망은 본질적으로 잘못된 것은 아닙니다.
    이는 하나님은 자녀에게 좋은 선물을 주기를 기뻐하시는 사랑의 아버지라는 성경적 진리를 반영하는 것입니다.

    역사적으로 야베스 기도의 인기와 영적 돌파구의 열쇠로 특정 기도나 수행을 강조한 다른 운동의 유사점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동방 정교회 전통의 예수 기도부터 가톨릭의 묵주기도에 이르기까지, 기독교인들은 오랫동안 신앙 생활의 닻 역할을 할 수 있는 간결하고 반복 가능한 기도에 끌려왔습니다.

    야베스 기도의 단순함 또한 이 기도의 매력 중 하나입니다.
    정보가 넘쳐나고 시간과 주의력이 경쟁적으로 요구되는 시대에, 핵심적인 영적 욕구를 요약한 짧고 기억하기 쉬운 기도는 일관된 기도 생활을 유지하는 데 유용한 도구가 될 수 있습니다.
    더 정교하거나 즉흥적인 형태의 기도에 주눅이 들 수 있는 분들에게도 시작점을 제공합니다.

    야베스의 기도(역대상 4:9-10)

  • 야베스는 그 형제보다 존귀한 자라 그 어미가 이름하여 야베스라 하였으니 이는 내가 수고로이 낳았다 함이었더라
  • 야베스가 이스라엘 하나님께 아뢰어 가로되 원컨대 주께서 내게 복에 복을 더 하사 나의 지경을 넓히시고 주의 으로 나를 도우사 나로 환난을 벗어나 근심이 없게 하옵소서 하였더니 하나님이 그 구하는 것을 허락하셨더라



  • 본문에 야베스라는 사람이 등장합니다. 이 야베스는 미국의 브루스 윌킨스가 “야베스의 기도”라는 책을 쓴 이후로 아주 유명해졌습니다. 이 야베스에 대해서 성경은 아주 짤막하게 유다 자손임을 간단하게 소개하고 있습니다. 단 두절뿐입니다. 그래서 이 야베스가 어떤 사람인지 구체적으로 자세하게 알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알 수 있는 것은 그의 이름과 그의 어머니의 증언을 통해서 야베스는 태어날 때 아주 고통스럽게 낳았다는 것만 알 수 있습니다. 야베스라는 뜻은 고통, 슬픔이라는 뜻입니다. 그 어머니가 야베스를 낳을 때 난산해서 죽을 뻔하며 낳았습니다. 그래서 그 이름을 고통이라는 뜻으로 야베스라고 지었다고 했습니다.

    옛날에는 이름을 지을 때 의미나 뜻을 부여해서 지었습니다. 딸을 많이 낳는 집에서는 이제 딸은 그만 낳으라는 뜻에서 말순이, 끝순 이라는 이름을 지었습니다. 어느 돈에 집착하는 아버지는 아들을 낳아놓고 이름을 “돈”이라고 지은 아버지도 있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이름을 지을 때 뜻을 부여해서 짓습니다. 성경을 보면 대부분 그렇게 나타납니다. 예를 들면 아브라함은 원래 이름은 아브람이었습니다. 그런데 후에 하나님은 아브라함이라고 고쳐서 지어주셨습니다. 아브람은 그냥 “아버지”인데 “아브라함”은 “많은 사람들의 아버지“ “열국의 아버지”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이 이 장차 아브라함을 사용하시는데 개인적인 차원에서 사용하시는 것이 아니고 민족의 아버지로 사용하시려고 그의 이름을 개인적 차원에서 공적차원의 이름으로 고쳐주십니다.

    또 그 아내 사라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원래 이름은 사래였습니다. “여자”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사래도 “사라”라고 고쳐 주셨습니다. “많은 사람의 여주인”이라는 뜻입니다. 거기에도 공적인 뜻이 부여된 이름입니다. 또 야곱도 마찬가지입니다. “야곱”은 “발꿈치를 잡다“는 뜻입니다. 야곱은 태어 날 때 먼저 나오는 형의 발꿈치를 잡고 나왔다 해서 붙여진 이름입니다. 그런데 후에 하나님은 그의 이름도 고쳐 주십니다. “발꿈치를 잡다”라는 명예스럽지 못한 이름에서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으로 개명하십니다. “하나님과 겨룬 자“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은 이 야곱을 민족을 위해서 사용하실 계획을 가지고 계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적어도 민족적인 인물이 되기 위해서는 사기꾼이라는 뜻의 야곱이라는 이름으로는 안 된다고 보신 것입니다. 그래서 이름을 바꾸어 주셨습니다. 이름은 이렇게 중요한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여기 야베스도 마찬가지입니다. 야베스라는 이름은 고통, 아픔, 슬픔이라는 뜻입니다.  그의 어머니가 그를 낳을 때 아주 고통스럽게 낳았다 해서 그 이름을 고통이라는 뜻으로 야베스라고 이름을 지은 것입니다. 그런데 야베스가 태어날 때 뿐 아니고 그가 자랄 때도 아주 고통스런 환경에서 자랐습니다. 그 말은 아주 보잘 것 없는 사람으로 자랐다는 말입니다. 아주 초라하게 자랐다는 말입니다. 야베스는 그 많은 백성들 중에서 가장 빈약하고 초라하고 가난하게 자랐습니다.  

    그런데 성경을 보면 후에 야베스는 크게 성공한 사람으로 나타납니다. 그래서 성경을 보면 야베스는 “그 형제들 보다 귀한 자”라고 했습니다. 이 야베스가 후에 크게 성공했다는 말입니다. 그 말은 야베스는 자신의 운명을 스스로 개척해서 마침내 성공했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이 야베스는 오늘 성공을 바라는 현대인들의 모델이 될 수 있습니다. 그는 아주 열악한 환경에서 스스로 미래를 개척해서 드디어 크게 성공한 사람입니다. 그러면 야베스는 어떻게 해서 그렇게 성공했습니까. 이 야베스에게는 몇 가지 특징이 있습니다. 금년 한해를 살아가면서 이 특징을 기억하고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기  대

    첫째는 미래에 대한 분명한 기대입니다. 10절을 보면 야베스가 이렇게 기도합니다. “야베스가 이스라엘 하나님께 기도하기를 주께서 내게 복을 주시려거든 나의 지역을 넓혀 주십시오. 하고 기도했습니다. 여러분, 이것이 기대이고 희망이고 비전입니다. 현재 환경은 고통스럽고 불만족스럽고 어려움이 있고 초라하고 빈약하지만 그런데 야베스는 그런 환경을 보지 않고 미래를 보고 먼 훗날을 보고 앞으로의 시간을 내다보았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내게 복을 주시려거든 내 지역을 넓혀 주십시오..

    사람은 이 같은 미래에 대한 꿈과 계획과 기대가 있어야 합니다. 이 같은 생각이나 마음 그리고 기대와 뜻이 있으면 기도하게 됩니다. 그래서 사람은 미래를 위해서 이런 기대나 꿈이나 소망을 가지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그러면 반드시 기도하게 됩니다. 킬케골이라는 철학자는 사람으로 하여금 “죽음에 이르게 하는 병”은 다름 아닌 “절망“이라고 했습니다. 절망은 비전이 없는 삶이고 기대도 꿈도 희망도 없는 삶을 말합니다. 사람에게 이 같은 기대나 비전이 없으면 희망도 없게 됩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때로 삶을 포기하기도 하는 것입니다.

    두 아이를 강에 내다 버린 아버지가 있습니다. 그의 마음을 열어보면 분명 그 마음속에는 절망으로 가득 차 있었을 것입니다. 그 마음 어디에도 희망의 싹이라고는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자신의 아이들을 강에 던져 버렸을 것입니다. 또 근래에 와서 자살자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지난해에는 1만 3천명이나 스스로 목숨을 끊어 삶을 포기했습니다. 그들은 하나같이 어딜 봐도 희망이 없으니까 에라 모르겠다 하고 약을 먹고 불을 질러 죽고 철길에 떨어져 죽고 아파트에서 떨어져 죽었을 것입니다. 이 무소망이 문제입니다. 절망이 문제입니다. 내년은 경제가 더 어렵다고 하는데 많은 사람들이 지금 지레 겁을 먹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새해가 되었는데도 별로 반가운 것이 없는 것입니다. 사람에게는 이 기대와 믿음과 소망과 비전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이 중요합니다. 사람은 미래를 생각하며 살아가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야베스는 꿈과 기대와 소망과 비전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기도했습니다. “내게 복을 주시려면 내 지역을 넓혀 주십시오.” 이 꿈이 있으면 현재 상황이 아무리  어려워도 모두 극복할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살아가는데는 반드시 이 희망과 꿈과 비전과 기대와 소망이 있어야 합니다. 야베스에게는 이 희망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결국 야베스는 그 꿈을 이루어 형제들 가운데서 가장 유력한 자가 되었다고 했습니다. 여러분은 이런 꿈과 기대와 비전이 있습니까. 씨를 심으면 반드시 싹이 나듯이 기대가 있는 사람은 반드시 뜻을 이루게 되어 있습니다. 새해에는 이런 꿈과 기대를 가지고 시작하시길 기원합니다.

    기  도

    10절을 보면 “야베스가 이스라엘 하나님께 아뢰어 이르되 .. 주의 손으로 나를 도우사 나로 환난을 벗어나 내게 근심이 없게 하옵소서“하고 기도했다고 했습니다. 지금 야베스가 처한 환경은 어려움과 고난과 힘든 환경이었습니다. 환경이 어려우면 살아가기가 참 힘듭니다. 배고픔의 고난, 열악한 환경에서 자랄 때의 아픔, 추위, 더위는 상당히 무섭습니다. 여러분, 자랄 때 방학이 얼마나 반가웠습니까. 여름방학, 겨울방학 얼마나 신나게 기다려집니까. 그런데 오늘 가난한 아이들은 방학이 두렵습니다. 방학이 되면 학교에서 먹던 점심을 굶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가난은 그렇게 아픈 것입니다. 오늘 고시원, 하숙집, 셋방으로 전전하면서 살아가는 기댈 곳 없는 젊은이들은 남들의 평안함을 보게 되면 자신의 모습은 더욱 초라하게 보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 삶에는 먼 훗날이 잘 안보입니다. 오늘 현재가 너무 힘겹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낙심하게 되고 도중에서 삶을 포기하는 경우가 발생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야베스는 참 대견합니다. 그가 처한 환경은 열악하고 가난하고 고통스럽고 낙심의 요소들만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에게는 꿈이 있었고 기대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야베스는 그때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내게 복을 주시려거든 나를 도우사 환난을 벗어나 내게 근심이 없게 하소서”. 야베스는 환경을 탓하지 않고 꿈을 이루려고 기도했습니다. 여러분, 우리 신앙인에게는 이런 기도하는 복이 주어져 있습니다. 이것은 생각해 보면 참으로 굉장한 복입니다. 고아의 아버지라고 일컫는 조지 뮬러는 고아를 양육하다가 먹을 것이 떨어지면 얻으러 가지 않고 기도 굴로 들어갔다고 합니다. 돌아다니며 먹을 것을 교섭하고 보조청원을 해야 하는데 그는 기도 굴로 들어갔습니다. 기도하고 나오면 먹을 것을 실은 마차가 왔다는 것입니다.  

    어느 건축가의 아내는 남편이 집을 짓는데 지어놓은 집이 팔리지 않으면 남편은 아내에게 빨리 산에 갔다 오라고 안달했습니다. 그러면 아내는 짐을 싸들고 산으로 가서 기도했습니다. “집이 팔리게 하옵소서, 이 집이 팔려야 선교지에 보내던 선교비를 제때 보낼 수 있습니다. 팔리지 않으면 선교지에 보낼 돈이 없습니다, 그러면 모두 굶습니다.” 그렇게 기도하고 내려오면 집이 팔렸다고 합니다. 그 기도에 명분이 있지 않습니까. 그렇다고 매사 선교비 보낸다고 거짓말하고 기도하면 안 됩니다.

    다윗은 어려울 때 마다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기쁠 때 하나님께 기도했고 감사할 때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예수님도 가장 힘들 때 산으로 가서 기도하였습니다. 십자가 지기 전날 밤에도 산에 올라가 밤새 철야기도를 했습니다. 공생애를 시작하던 때도 먼저 산으로 올라가 40일 금식기도하고 사역을 시작하였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이렇게 기도할 수 있다는 것은 복이고 은혜이고 특권입니다. 어떤 때는 답답할 때 골방에 들어가 조용히 기도하고 싶을 때가 있습니다. 그때 조용히 들려오는 하나님의 격려의 음성을 들을 수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어떤 때는 조용히 기도해서는 시원찮을 때가 있습니다. 그 때는 산에 가서 부르짖어 기도해야 합니다. 소리를 높여서 주여, 여호와여, 아버지여 하고 기도하면 마음이 시원해집니다. 자신감이 생겨납니다. 확신도 주어집니다. 우리들이 그렇게 하나님께 소리를 높여 기도할 수 있다는 것도 복입니다. 우리들이 어디 가서 누굴 붙잡고 그렇게 부르짖을 수 있습니까. 성경은 “네 입을 크게 열라”고 했습니다. 그 말은 부르짖으면 응답하겠다는 메시지입니다. 야베스는 그 어려운 환경에서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내게 복을 주시려거든 주의 손으로 나를 도우사 나로 환난을 벗어나 내게 근심이 없게 하옵소서”. 야베스가 그 상황에서 기도할 때 조용조용히 기도했겠습니까. 아마 그는 큰소리로 부르짖어 기도했을 것입니다.

    어느 시부모가 며느리 자랑을 했습니다. 아들집에 가느라 미국엘 갔습니다. 며느리가 참 잘하더라고 합니다. 방문을 마치고 오는데 며느리가 편지 한통을 주면서 비행기 안에서 보라고 하더라고 합니다. 그래서 비행기를 타고 편지를 뜯어보니까 그렇게 써 있더라고 합니다. “저는 부모님을 만나게 된 것을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이번 저희들을 찾아주셔서 저희들에게는 상당한 용기가 되었습니다, 부모님을 만나게 해 주신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하고 써 있습니다. 그 며느리가 얼마나 사랑스러웠겠습니까. 그 며느리가 결혼 전에 결혼을 위해서 상당기간동안 기도했다고 합니다. 기도 내용은 세 가지입니다. 첫째는 권사 시어머니가 아닌 집사 시어머니를 만나게 해 주시고, 둘째는 가슴이 넓은 남편을 만나게 해 주시고, 세 번째는 가능하면 미국에 가서 살게 해 주십시오“하고 기도 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기도내용이 그대로 이루진 것입니다. 그러니 얼마나 그 마음이 만족했겠습니까.  

    여러분, 우리 신앙인에게 이렇게 기도할 수 있다는 것이 복이고 은혜입니다. 그래서 야베스는 지금 처한 환경을 원망하고 탓하지 않고 기도했습니다. “내게 복을 주시려거든 근심에서 벗어나 평안하게 해 주십시오.”이것이 희망과 꿈과 비전의 근거이고 소망입니다. 이것이 있는 사람은 오늘 살아가는데 문제가 없습니다. 다 이길 수가 있습니다. 장래를 바라보며 비전이 있고 꿈이 있고 기대가 있는 사람은 기도하게 됩니다. 새해는 여러분의 가슴에, 입술에 이 기도가 있기를 기원합니다.

    응   답

    야베스의 기도는 마침내 응답을 받습니다. 9절을 보면 “야베스는 그의 형제들보다 귀중한 자라”고 했습니다. 10절을 보면 “하나님이 그가 구하는 것을 허락하셨더라”고 했습니다. 그 말은 하나님이 그로 하여금 응답하셔서 만족하게 하셨다는 말입니다. 뜻과 기대를 이루었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마침내 야베스는 아주 초라하던 자리에서 일어나 그의 형제들 가운데서 가장 귀중한 자가 되었다고 했습니다.

    여러분, 우리 신앙인은 무엇보다도 이 응답받는 복을 받아야 합니다. 이사야는 웃시야 왕이 죽던 해 나라를 걱정하면서 성전에서 뜨겁게 기도를 합니다. “이 백성을 기억하소서”. 그때 환상 속에서 하늘 문이 열립니다. 그리고 하늘 보좌가 나타납니다. 그 보좌에서 시작된 하나님의 옷자락이 자신이 앉아있는 성전지붕을 덮은 것을 보았습니다. 무슨 뜻입니까. 그 뜻은 “걱정하지 마라, 내가 이렇게 지키고 있다" 그 말입니다. 그것이 응답의 생활입니다. 기도생활에는 이런 응답받는 생활이 주어져야 합니다.

    성경에 보면 한나라는 여인이 나옵니다. 이 여인은 아이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날마다 성전에 나가 “나에게 아들을 주세요, 주시면 나실 인으로 바치겠습니다”하고 기도했습니다. 여기 나실인이라는 말은 하나님께 바쳐진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나실인이 되면 평생 독주를 마시면 안 되고 몸에 병들어도 약을 먹어서도 안 됩니다. 그리고 죽은 시체를 보거나 만져도 안 됩니다. 그 말은 어머니가 죽어도 갈 수가 없다는 말입니다. 한나는 그래도 내 몸으로 아이를 낳게 해 달라고 기도합니다.  

    저는 세상에서 가장 절실하고 간절한 기도는 아이없는 부인이 아이를 달라고 기도하는 기도라고 생각합니다. 그 기도가 얼마나 간절하고 절실하겠습니까. 한나가 얼마나 간절하게 기도했으면 음성도 없이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른 상태로 기도했겠습니까. 그러니까 엘리 제사장이 그 모습을 보고 오늘도 술 취했구나 하고 제발 술을 끊으라고 큰소리로 책망을 했을 정도입니다. 그때 한나의 심정을 이해한 엘리가 이렇게 말합니다. “평안히 가라,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네가 기도하여 구한 것을 허락하시기를 원하노라”(17). 그러고 나서 얼마 있다가 아들 사무엘을 낳지 않습니까. 그것이 응답의 생활입니다.

    이제 새해가 되었습니다. 새해에 우리 모두 야베스 처럼 분명한 꿈과 기대가 있어야 합니다. 환경을 탓하고 원망하고 현실만 바라보면 가지고 있던 꿈도 상실되기 쉽습니다. 현실만 보면 그 어디에도 희망은 보이지 않습니다. 그래서 꿈을 갖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리고 기도가 있어야 합니다. 꿈은 저절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기대와 꿈을 갖고 그것을 이루기 위한 기도가 있어야 합니다. 또 모든 기도에는 하나님이 이루어 주시는 응답의 복을 받아야 합니다. 그래서 성경은 “구하라, 찾으라, 두드리라”고 했습니다. 그러면 응답해 주시겠다고 약속했습니다. 새해에는 이렇게 응답받고 꿈을 이루고 성취하며 살아가는 축복의 해가 되시기를 기원합니다.





    야베스의 기도는 구약 성경에 등장하는 짧지만 강력한 기도입니다.
    이 기도는 역대상 4:9-10에 기록되어 있으며, 야베스라는 인물이 하나님께 드린 간절한 기도를 담고 있습니다.
    야베스는 자신의 이름이 고통이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어, 삶이 고통스러울 것이라는 예언적 의미를 가지고 있음을 인식하고 있었습니다. 성경에는 야베스의 삶에 대한 기록은 없지만 우린 그의 기도가 하나님께 상달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야베스의 기도를 통해 우리가 알 수 있는 점은, 그는 어려움에 봉착했을 때 긍정적으로 마주하는 자세가 있었고, 하나님에 대한 믿음으로 간곡하게 하나님께 고하며 하나님께 의지하고 구했다는 것입니다.

    야베스의 기도는 어떤 기도인가요?

    야베스의 기도는 가족 계보를 정리한 역사적인 구절 안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야베스는 그 형제보다 존귀한 자라 그 어미가 이름하여 야베스라 하였으니 이는 내가 수고로이 낳았다 함이었더라, 야베스가 하나님께 아뢰어 가로되 원컨대 주께서 내게 복에 복을 더 하사 나의 지경을 넓히시고 주의 손으로 나를 도우사 나로 환난을 벗어나 근심이 없게 하옵소서 하였더니 하나님이 그 구하는 것을 허락하셨더라” (역대상 4:9-10).

    브루스 윌킨슨 박사 (Dr. Bruce Wilkinson ) 데이빗 콥 (David Kopp )의 베스트셀러 야베스의 기도

    내 삶을 기적으로 채우는 기도의 원리 (The Prayer of Jabez: Breaking Through to the Blessed Life: 2000)의 출간으로 인해 잘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야베스가 유다의 자손이었다는 것, 존귀한 자였다는 것, 그리고 고통 가운데 태어났기 때문에 어머니가 “야베스” (“비통해하다” 혹은 “슬픔을 만드는 사람”의 의미)라는 이름을 붙여주었다는 것 외에, 야베스에 대해 알려진 것은 별로 없습니다.
    야베스는 기도를 통해 하나님께 보호와 축복을 구하며 울부짖습니다.
    “슬픔의 사람” 야베스는 언어 유희를 사용하여, 자기의 이름을 상기시키고 예감하게 하는 슬픔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해 달라고 하나님께 간구합니다.

    역대상 4:10에 있는 야베스의 기도는 네 가지 긴급 요청을 포함합니다.

    첫째, 하나님의 축복
    야베스는 이스라엘의 하나님께서 모든 축복의 근원이심을 인정하고, 하나님께 은총을 구합니다.
    틀림없이, 최소한 부분적으로라도 이 간구는 아브라함과 그의 자손들에게 하신 하나님의 약속에 기반한 것이었습니다(창세기 22:17).

    둘째, 지경의 확장
    야베스는 자신이 도전하는 모든 시도에서 승리와 번영을 얻고, 자신의 삶의 지경이 넓어지기를 기도합니다.

    셋째, 하나님 손의 도우심
    이는 야베스가 자신의 일상 속에서 하나님의 인도하심과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나기를 구하는 방식입니다.

    넷째, 환난으로부터의 보호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제자들에게 다음과 같은 방식으로 기도하라고 가르치셨습니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우리를… 악에서 구하시옵소서” (마태복음 6:9, 13).
    야베스는 확신을 가지고 하나님을 자신의 보호자로 여깁니다.

    기도 안에 담긴 야베스의 목적은 슬픔에서 자유로워지는 삶을 사는 것이었습니다.
    기도의 마지막 부분에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야베스의 기도를 들으셨고, 응답하셨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지혜를 구했던 솔로몬의 겸손한 기도 (열왕기상 3:5-14)와 같이, 축복을 구했던 야베스의 경건한 기도 또한 응답 받았습니다.
    야베스가 누린 성공은 태어날 때의 슬픔보다 큰 것이었습니다.
    야베스의 기도는 야베스의 이름을 극복했습니다.

    야베스의 기도는 우리 삶 속에서 기도를 우선 순위에 두어야 하는 좋은 본보기가 됩니다.
    우리는 필요한 때에 도움을 얻기 위해서 늘 하나님을 의지해야 하고, 기도 제목들을 가지고 곧장 은혜의 보좌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히브리서 4:16).
    한나, 요나, 히스기야, 바울의 기도 – 그리고 물론 우리 주님의 본이 되는 기도 (마태복음 6:9-13) –와 함께 야베스의 기도는 하나님의 자녀가 하나님의 선하심에 의지하며 겸손과 믿음으로 지극히 크신 이에게 나아가는 아름다운 본을 보여줍니다.


    “야베스가 하나님께 자신의 필요를 구했고, 하나님은 그 기도를 다 들어 주셨다.
    야베스처럼 경제적 풍요와 마음의 평안을 위해 기도하라.
    하나님은 우리를 위해 엄청난 복을 쌓아놓으셨는데, 우리가 구하지 않아서 누리지 못하는 것이다.”

    과연 야베스의 기도가 그런 의미를 담고 있을까요?
    우리는 이 말씀의 의미를 역대기의 주제 안에서, 구문에 대한 성경적 분석을 통해 이해해야 합니다.
    그리고 이 말씀을 주신 하나님의 뜻에 합당하게, 우리의 삶에 적용을 해야 합니다.
    역대기는 바벨론 포로에서 귀환한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나님께서 주신 말씀입니다.
    바벨론에서 예루살렘으로 돌아온 이스라엘 백성의 수는 많지 않았습니다.
    무너졌던 성전을 다시 건축했고 허물어진 성벽을 다시 세웠지만, 이전의 영광에 비하면 초라할 뿐이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백성이 맞나?
    이 땅이 약속의 땅이 맞는 걸까?
    이런 의문을 가진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조상들과 맺어주셨던 하나님의 언약이 여전히 유효하다는 것을 깨닫게 하는 책이 역대기입니다.
    우리는 약속의 땅에 택하신 백성을 통해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신다는 하나님의 언약을 중심으로 이 책을 읽어야 합니다.

    야베스의 기도가 들어있는 1-9장의 계보 역시 언약의 두 축인 자손과 땅에 대한 관점이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온 이스라엘의 계보와, 지파별-가문별로 거주하는 땅에 대한 기록은 하나님 나라에 대한 언약이 여전히 유효하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야베스가 어떤 사람일까요?
    일단 기록된 위치로 봐서 유다 지파에 속한 사람입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13절에 그나스와 그의 아들 옷니엘, 15절에 여분네의 아들 갈렙과 그의 자손 등이 나열된 것으로 봐서는 그들과 비슷한 시대 사람으로 볼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야베스는 여호수아에서 사사기로 이어지는 가나안 정복시대의 사람으로 추측할 수 있습니다.

    2:55절을 보면 야베스라는 성읍이 나오는데, 이것이 성경에서 유일하게 기도의 사람 야베스와 같은 고유명사가 사용된 구절입니다.

    아마도 이 야베스라는 성읍을 세운 사람이 바로 4장의 야베스라고 여겨집니다.
    야베스가 세운 도시에 하나님의 말씀을 필사하는 서기관들이 많이 거주했고, 그들이 레갑 가문과 관련이 있다는 것입니다.
    예레미야 35장의 기록에 따르면 레갑 가문은 온 이스라엘이 하나님께 불순종하는 중에도 끝까지 신앙을 지킨 것으로 하나님께 인정받은 사람들입니다.
    이런 기록들을 통해 야베스가 믿음의 사람이었다는 것을 추측할 수 있습니다.
    참고로 야베스의 아버지에 대한 기록이 없고, 이름을 어머니가 지었다는 것을 가지고 아버지가 없는 사생아라고 보는 것은 근거가 약합니다.
    원래 역대상 4장은 자손이 아니라 땅과 성읍을 중심으로 기록한 계보라서 부모 자식 관계를 다 기록하지 않았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야곱의 열두 아들은 모두 레아와 라헬 두 어머니가 이름을 지었습니다.
    어머니가 수고로이 낳았다 해서 난산이나 장애를 가지고 태어난 것으로 보는 것도 근거가 약합니다.
    선악과 사건 이후로 모든 여자는 자식을 낳을 때 수고로이, 고통스럽게 낳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태어난 모든 남자는 먹고 살기 위해 수고를 해야 합니다.
    언약의 두 요소인 자손과 땅. 여기에 관련된 모든 일, 다시 말하면 자손을 낳고 땅의 소산을 얻기 위해서 사람은 고통을 감내해야 합니다.이것이 죄의 결과입니다.
    그러니 야베스에 대한 9절의 설명은 야베스 만의 특별한 배경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타락한 인생의 보편적인 상황에 대한 기록으로 보는 것이 타당합니다.
    야베스는 그의 형제보다 귀중한 자라고 했습니다.
    고통 중에 태어난 보편적인 인생의 전형인 야베스가 다른 형제보다 귀중한 것은 그의 기도 때문인가 봅니다.
    이스라엘의 하나님께 기도했다고 하죠.
    이스라엘의 하나님이라는 호칭 역시 언약에 기반한 표현입니다.
    하나님께서 야곱의 이름을 이스라엘로 바꿔 주신 것은 얍복 나루에서 하나님과 씨름한 후인 창세기 32:28장에 처음 기록되었는데,
    특히 35:10절이 중요합니다.

    야곱이 밧단아람에서 돌아올 때 하나님이 다시 야곱에게 나타나셔서 그에게 복을 주시고 이름을 이스라엘이라 부르신 겁니다.

    바로 이어서 아브라함과 이삭에게 준 땅을 이스라엘과 그의 후손에게 주시겠다고 하셨으니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곧 언약의 하나님입니다.

    야베스가 언약의 하나님께 드린 기도의 내용을 봅시다.

    “주께서 내게 복을 주시려거든.”
    예전의 개역 한글에는 “원컨대 주께서 나에게 복에 복을 더하사”
    이 구절도 역시 아브라함에게 주셨던 하나님의 언약을 기반으로 하는 전형적인 표현입니다.
    아브라함이 모리아 산에서 이삭을 번제로 바치려 했다가 양으로 대신했던 사건 이후에 하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죠.
    창세기 22:17절. “내가 네게 큰 복을 주고 네 씨가 크게 번성하여 하늘의 별과 같고 바닷가의 모래와 같게 하리니 네 씨가 그 대적의 성문을 차지하리라”
    여기서 “내가 네게 큰 복을 주고”라고 번역된 원문에 사용된 어휘들이 야베스의 기도의 첫 문장 “주께서 나에게 복에 복을 더하사“와 똑같습니다.

    창세기를 보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복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그 복의 내용은 역시 자손과 땅 이라는 언약의 두 요소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민족의 번성, 약속의 땅 가나안.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통해서 의로운 나라를 이루시기로 하셨습니다.
    이렇게 세워질 나라는 그 자체가 복이며, 동시에 세상에 복을 주는 나라가 됩니다.
    이것이 타락한 세상을 회복하는 하나님의 방식입니다.
    그 언약은 소돔과 고모라의 심판이 선포될 때 더 구체적으로 아브라함에게 주어집니다.
    18:18 ”아브라함은 강대한 나라가 되고 천하 만민은 그로 말미암아 복을 받게 될 것이 아니냐. 내가 그로 그 자식과 권속에게 명하여 여호와의 도를 지켜 의와 공도를 행하게 하려고 그를 택하였나니 이는 나 여호와가 아브라함에게 대하여 말한 일을 이루려 함이니라.”

    죄로부터 벗어나 의와 공평을 행하는 나라.
    이런 하나님의 나라를 통해서 온 세상이 죄로부터 회복될 것입니다.
    결국 야베스가 구한 복은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바로 그 복입니다.
    아브라함에게 주시겠다 하신 가나안 땅에 아브라함의 자손으로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나라를 건설하는 것입니다.
    그 복을 위해 야베스가 구한 첫 번째 구체적인 기도 제목은 “나의 지역을 넓히시고.”입니다.

    개역 한글로는 “나의 지경을 넓히시고.”
    이 말도 성경에서 의미가 분명하게 정해져 있는 표현입니다.

    신명기 19:8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 조상들에게 맹세하신 대로 네 지경을 넓혀 네 조상들에게 주리라고 말씀하신 땅을 다 네게 주실 때”

    “네 지경을 넓힌다”는 말은 “네 조상들에게 약속하신 가나안 땅을 차지한다”는 의미의 전형적인 표현입니다.

    출애굽기 34:24 “내가 이방 나라들을 네 앞에서 쫓아내고 네 지경을 넓히리니 네가 매년 세 번씩 여호와 네 하나님을 뵈려고 올 때에 아무도 네 땅을 탐내지 못하리라”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할 때 하나님께서 가나안 땅의 대적을 물리치시고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에서 안식을 누리는 것.

    그것이 바로 지경을 넓히는 것이며, 하나님께서 모세와 이스라엘에게 맺어주신 언약의 핵심입니다.

    그 이후로 어떻게 되었나요?

    애굽에서 나와 광야를 지난 이스라엘 백성은 여호수아의 인도 아래 마침내 가나안 땅에 들어갔습니다.

    각 지파별로 가나안 땅을 분배받았습니다.

    여호수아 24장을 보면 “하나님께서 너희가 수고하지 아니한 땅과 너희가 건설하지 아니한 성읍들을 너희에게 주었다”고 하십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그런 하나님만을 섬기겠다고 세겜에서 맹세했습니다.

    그러나 아직 그 땅을 모두 차지한 것은 아닙니다.

    가나안 사람을 다 몰아내지 못하고 오히려 지배를 당하는 사사 시대로 이어집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그 땅을 온전히 차지하지 못한 것은 불순종의 결과였습니다.

    그런 상황 속에서 야베스는 기도했습니다.

    “나의 지경을 넓혀 주십시오. 약속의 땅을 차지하게 해 주십시오.”

    야베스는 어쩌면 하나님의 약속에 근거하여 “이 산지를 내게 주소서” 라고 말했던 갈렙과 같이 가나안을 물리치고 그 땅을 취한 용사일 겁니다.

    나의 지경을 넓혀 달라는 야베스의 기도는 “지금은 땅이 열 평 밖에 없지만 앞으로 100평을 갖게 해 주세요.” 이런 개념이 전혀 아닌 겁니다.

    이 말씀을 가지고 “부동산이 많아지게 해 달라, 사업이 확장되게 해달라,

    꼭 돈이 아니더라도 더 많은 꿈을 꾸라. 이상을 크게 가져라.” 이렇게 적용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과 아무런 상관이 없는, 지극히 자의적인 적용입니다.

    야베스의 두 번째 기도 역시 언약에 근거한 것입니다.

    “주의 손으로 나를 도우사 나로 환난을 벗어나 내게 근심이 없게 하옵소서.”

    당시의 형제들, 이스라엘 백성들이 환난을 당하고 근심을 겪는 이유는 불순종의 죄 때문이었습니다.
    사사 시대의 이스라엘은 진멸하라 했던 가나안 사람들을 살려두고, 오히려 그들이 섬기는 태양신, 비의 신이라는 우상을 섬겼습니다.
    농사가 잘 되어 부자가 되길 바랬던 거죠.
    그 결과 이스라엘은 바로 그 가나안 사람들에 의해서 노략을 당했습니다.
    더 많은 것을 얻으려고 악을 행하다가 결국 모든 것을 빼앗기는 환난을 겪습니다.
    가나안 사람이 두려워 근심 속에 살았습니다.
    이런 시대를 살고 있는 야베스는 악을 버리고 죄를 멀리 함으로서 환난과 근심에서 벗어나는 길을 선택했습니다.
    우상이 아닌 하나님의 손을 의지했습니다.
    그러니 형제보다 귀중한 자라는 평가를 받았습니다.
    성경에서 보여주는 믿음의 사람이 하는 기도는 모두 동일한 원리를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언약을 나의 뜻으로 삼고 내 뜻을 하나님의 언약 앞에 내려 놓는 것.”
    내가 처한 환경에 굴복하지 않고, 세상의 흐름에 동화되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언약을 신뢰하고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이 성경적인 기도입니다.
    하나님께 자신의 바램을 구하지 않아서 복을 못 받은 것이니 강력하게 구해라.
    자산이 늘어나기를 구하고, 사업이 확장되기를 구하라.
    하나님은 능치 못하실 일이 없다면서 부동산을 사놓고 오르기를 기도하고, 주식을 사놓고 오르기를 기도하면 하나님 입장에서 참 난처하실 겁니다.

    옳고 그름을 모르는 채로 잘못된 관점의 기도를 계속 하다보면 잘못된 신앙의 체계가 몸에 굳어질 수 있습니다.
    그러니 우리는 기도하기 전에 먼저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듣고 깨달은 만큼 그 말씀을 붙잡고 기도해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의 모든 영역이 타락했기 때문에 조금만 방심하면 신앙은 바로 변질됩니다.
    지속적으로 모든 부분에서 말씀의 원리를 따라야 합니다.
    우리의 기도를 돌아보고 삶을 점검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언약의 복은 타락한 세상의 회복을 위한 복입니다.
    죄와 악은 고통을 가져오지만, 하나님의 언약은 온전한 안식을 줍니다.
    야베스의 기도는 그러한 언약의 복을 구하는 기도입니다.
    야베스와 같은 삶을 살고, 야베스와 같이 기도의 응답을 받는다는 것은 특별한 것이 아닙니다.
    성경이 늘 말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죄 사함을 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된 우리는,
    성령님의 은혜로 말씀을 깨달으며, 그 말씀에 순종하여 죄를 멀리하고 선을 행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개역개정,18 또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새번역,18 나도 너에게 말한다. 너는 ㉤베드로다. 나는 이 ㉥반석 위에다가 내 교회를 세우겠다. ㉦죽음의 ㉧문들이 그것을 이기지 못할 것이다. / ㉤그, '페트로스' ㉥그, '페트라' ㉦그, '하데스의', 곧 '죽은 자들이 모여 있는 세계의' ㉧또는 '세력이'.

    우리말성경,18 그리고 내가 너에게 말한다. 너는 베드로다.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울 것이니 지옥의 문들이 이것을 이길 수 없을 것이다.

    개역개정,19 내가 천국 열쇠를 네게 주리니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 하시고.
     
    새번역,19 내가 너에게 하늘 나라의 열쇠를 주겠다. 네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릴 것이다."

    우리말성경
    ,19 내가 네게 하늘나라의 열쇠를 줄 것이다. 무엇이든 네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네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릴 것이다.” 

    묶다(데오. dĕō) δέω 스트롱번호 1210

    1. 묶다.   2. 마 13:30. 3. 마 12:29
    발음 [ dĕ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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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풀다(루오. lüō) λύω
    스트롱번호 3089

    1. 풀다.  2. 깨다. 3. 열다
    발음 [ lü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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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구약성경 열세번째장 역대상 배경

    역대상은 아담에서 출발을 해 사울 왕가의 몰락,다윗왕 이야기와 솔로몬이 등극하는 그부분까지를 다루고 있습니다.

    역대상 1장 요약

    아담에서 아브라함까지 이르는 이스라엘의 계보와 족보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아브라함의 아들 이스마엘의 자손들의 계보와 족보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이삭의 아들에서부터 자손들의 계보와 족보에 대해서 말합니다.에돔 땅에서 살아가는 원주민과 에돔을 통치하는 왕들의 족보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역대상 2장 요약

    이스라엘 열두 아들의 이름,유다의 아들들과 그 자손들의 이름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다윗의 직계 존속과 그의 방계 존속과 형제들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헤스론의 아들들,자손들 이름,장남 여라브엘의 자손들의 이름,갈렙의 아들과 그 자손들의 이름을 말하고 있습니다.

    역대상 3장 요약

    다윗이 헤브론과 예루살렘에서 낳은 아들과 딸의 이름,솔로몬 왕의 아들들과 그들이 낳은 자손의 이름,바벨론 포로로 잡혀간 여호야긴의 자손들과 이름을 말하고 있습니다.

    역대상 4장 요약

    유다의 아들들과 그의 후손들의 이름,여러 족보와 후손의 이름,유다의 아들인 셀라의 자손과 이름,시므온 자손의 이름과 그들이 살았던 지역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5월 2일(금) 역대상 1-4장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아담 셋 에노스(1:1)

    아담, , 에노스
    Adam, Seth, Enosh

    아담은 인류의 시조가 됩니다.
    아담이란 이름은 "인간" 또는 "인류"라는 뜻입니다.
    셋이란 이름은 "대신" 또는 "임명하다"라는 뜻입니다.
    에노스라는 이름은 "연약한 사람" 또는 "죽어야 할 존재"라는 뜻입니다.


    아담(Adam) אָדָם

    이름의 뜻과 간략한 소개

    '아담(Adam)'은 히브리어로 '흙', '땅'을 의미하며, 인간이 흙으로 창조되었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그는 성경에 기록된 최초의 인간으로, 하나님이 직접 창조하신 존재입니다.
    아담은 하와(Eve)와 함께 에덴동산에 거하며 하나님과 교제했으나, 금지된 선악과를 먹고 죄를 범하여 동산에서 추방되었습니다.
    그는 아벨, 가인, 셋 등 여러 자녀의 아버지로서 인류의 조상으로 여겨집니다.
    그의 생애는 창세기 1장부터 5장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1. 창조와 에덴동산 생활

    아담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첫 인간으로, 에덴동산에 거하며 하나님과의 친밀한 교제를 누렸습니다(창세기 1:26-27).
    그는 하나님께서 동산에 있는 모든 나무의 열매를 자유롭게 먹을 수 있도록 허락받았으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금지되었습니다(창세기 2:16-17).
    아담은 또한 동물들을 이름 지으며, 하나님이 맡기신 창조물 관리의 사명을 수행했습니다.
    그러나 아담은 홀로 있는 것이 좋지 않다는 하나님의 뜻에 따라 하와와 짝을 이루어 가정을 이루었습니다(창세기 2:18-25).

    2. 죄의 타락과 추방

    아담과 하와는 뱀(사탄)의 유혹을 받아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고 선악과를 먹음으로써 죄를 범했습니다(창세기 3장).
    이 사건으로 인해 아담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절되었으며, 죄와 사망이 세상에 들어오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아담과 하와를 동산에서 추방하시고, 남자는 땀을 흘리며 노동으로 생계를 이어가야 했고, 여자는 출산의 고통을 겪게 되었습니다(창세기 3:16-19).
    그러나 하나님은 이 과정에서 인류를 구원할 희망의 약속(메시아의 예언)을 주셨습니다(창세기 3:15).

    3. 가족과 후손

    아담과 하와는 에덴동산 밖에서 자녀들을 낳아 키웠습니다.
    그들 사이에서 태어난 첫 아들 가인은 동생 아벨을 시기하여 살해하는 비극을 초래했습니다(창세기 4장).
    이로 인해 아담의 가정은 깊은 상처를 입었지만, 하나님은 셋(Seth)을 주셔서 경건한 계보를 이어가게 하셨습니다.
    셋의 자손들은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며 경건한 삶을 살았습니다(창세기 4:26).

    4. 긴 생애와 죽음

    아담은 930세까지 살면서 많은 후손을 남겼습니다(창세기 5:5).
    그러나 그의 죄로 인해 모든 인류는 죄의 영향을 받게 되었고, 하나님과의 단절된 관계를 회복하기 위해 구원의 필요성이 강조되었습니다.
    그의 죽음은 인류 역사상 최초의 기록된 자연적 죽음으로, 죄의 결과로 인한 인간의 유한성을 상징합니다.

    5. 아담의 타락과 인류의 죄(구속사적 의미)

    아담은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고 선악과를 먹음으로써 죄를 범하였습니다.
    그의 불순종은 단순히 개인적인 범죄에 그치지 않고, 전 인류에 죄와 죽음을 가져오는 원인이 되었습니다.
    이 사건은 기독교 신학에서 "원죄(Original Sin)"로 정의되며, 아담의 후손인 모든 인간은 이 죄의 본성을 물려받아 죄인이 된다고 설명됩니다(로마서 5:12).

    아담의 타락으로 인해 인간은 하나님과 단절된 상태로 태어나며, 자신의 힘으로는 결코 구원을 얻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이로 인해 인류는 하나님의 구속 계획 없이는 영원히 죽음과 심판 아래 놓일 수밖에 없는 운명이 되었습니다.
    구약과 신약 성경 전체는 이러한 타락한 상태의 회복을 위한 하나님의 구속 사역을 중심으로 전개됩니다.
    아담의 타락은 인류가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기 위해 중보자이신 메시아, 곧 예수 그리스도의 필요성을 명백히 합니다.

    6.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속과 회복

    아담은 하나님과의 언약을 어긴 첫 번째 사람으로, 타락의 상징적 인물이지만 신약성경에서는 그와 대조되는 두 번째 아담(Second Adam)으로서 예수 그리스도를 소개합니다(고린도전서 15:22, 45).
    아담이 불순종으로 인해 죄와 죽음을 세상에 가져왔지만, 예수 그리스도는 십자가에서의 순종과 희생을 통해 인류에게 생명과 구원을 제공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죄가 없는 완전한 인간으로서 아담이 실패한 하나님의 뜻에 온전히 순종하셨습니다(빌립보서 2:8).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은 아담의 후손으로 태어난 모든 사람에게 새로운 생명의 길을 열어주었습니다.
    바울은 로마서에서 이를 설명하며, "한 사람의 불순종으로 많은 사람이 죄인이 된 것 같이, 한 사람의 순종으로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되리라"(로마서 5:19)고 기록하였습니다.

    아담이 인류에게 육체적, 영적 죽음을 가져왔다면, 예수 그리스도는 인류에게 영생과 하나님과의 화목을 회복하는 길을 열어주셨습니다. 이러한 구속의 사역은 인간이 스스로의 노력으로 해결할 수 없는 죄의 문제를 하나님이 친히 해결하신 사건입니다.

    이로써 아담과 예수 그리스도는 성경에서 인류의 타락과 구속을 상징하는 중요한 인물로 자리 잡고 있습니다. 아담을 통해 죄가 들어왔고 예수를 통해 구원이 이루어진다는 이 구속사의 흐름은 성경의 핵심 주제 중 하나입니다.

    교훈

    1. 하나님의 형상과 인간의 책임

    아담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되어 하나님과 깊은 교제를 나누는 존재로 설계되었습니다. 이 사실은 모든 인간이 하나님의 특별한 목적과 계획 속에 존재하며, 하나님을 섬기고 피조세계를 관리할 책임이 있음을 가르쳐줍니다. 오늘날 우리도 하나님과의 친밀한 관계 속에서 맡겨진 사명을 충실히 감당해야 합니다.

    2. 순종의 중요성

    아담의 타락 사건은 하나님께 대한 불순종이 얼마나 심각한 결과를 초래하는지를 보여줍니다. 아담과 하와의 작은 불순종은 인류 전체에 죄와 죽음을 가져왔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에게 순종을 요구하시며, 불순종은 필연적으로 심판과 고통을 초래합니다. 이 교훈은 신앙 생활에서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온전한 순종이 중요함을 일깨웁니다.

    3. 죄와 구원의 필요성

    아담의 타락 이후, 하나님은 즉시 구원의 계획을 언급하셨습니다(창세기 3:15). 이는 하나님께서 인간의 죄에도 불구하고 구속의 계획을 준비하고 계심을 나타냅니다. 오늘날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과의 단절된 관계를 회복할 수 있습니다. 이 교훈은 구원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강조합니다.

    4. 책임과 결과의 원리

    아담은 자신의 선택에 대한 책임을 피할 수 없었습니다. 죄는 그 자신뿐 아니라 후손들에게도 깊은 영향을 미쳤습니다. 이는 우리의 선택과 행동이 타인에게도 영향을 미칠 수 있음을 경고합니다. 따라서 우리는 하나님의 뜻에 따라 책임 있는 선택을 해야 하며, 그 결과를 감당할 준비가 필요합니다.

    5. 회복과 희망

    아담의 생애는 비록 죄로 인해 시작된 인류의 고난과 죽음의 역사 속에서도, 하나님의 구속 계획과 회복의 약속이 여전히 유효함을 보여줍니다. 하나님은 아담과 그의 후손들을 완전히 포기하지 않으셨고,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생명과 소망을 제공하셨습니다. 이는 우리가 죄에서 회개하고 하나님께 돌아갈 때 새로운 삶을 시작할 수 있음을 가르칩니다.




    셋(Seth)  שֵׁת

    개요

    셋은 아담과 하와의 세 번째 아들이다.
    아벨이 죽자 아벨을 대신하여 하나님께서 주신아들이다.
    셋의 뜻은 ‘대신함’ ‘대체됨’이란 뜻이다.
    셋은 에노스를 낳고 912세에 죽는다.
    셋의 생에는 설명되어 있지 않고 에노스를 낳고 에노스 시대에 하나님의 이름을 불렀다는 이야기가 전부다.

    셋의 출생과 의미

    셋의 출생은 두 번에 걸쳐 소개된다.
    한 번은 가인의 후손을 마치고 곧바로 소개한다.

    창세기 4:25~26
    아담이 다시 자기 아내와 동침하매 그가 아들을 낳아 그의 이름을 셋이라 하였으니 이는 하나님이 내게 가인이 죽인 아벨 대신에 다른 씨를 주셨다 함이며 셋도 아들을 낳고 그의 이름을 에노스라 하였으며 그 때에 사람들이 비로소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

    두 번째 언급은 5장에서 아담의 족보 안에 셋이 아담의 아들로 소개된다.
    만약 창세기 4장이 없다면 어떻게 될까?
    큰 흐름 속에서 보면 그다지 문제가 되지 않는다.
    셋의 두 번째 언급은 별다른 점은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가인과 아벨의 족보에서 빠짐으로 셋이 곧바로 이어가고 있다는 점은 유의해 볼 필요가 있다.

    창세기 5:4 아담은 셋을 낳은 후 팔백 년을 지내며 자녀들을 낳았으며
    창세기 5:5 그는 구백삼십 세를 살고 죽었더라
    창세기 5:6 셋은 백오 세에 에노스를 낳았고
    창세기 5:7 에노스를 낳은 후 팔백칠 년을 지내며 자녀들을 낳았으며
    창세기 5:8 그는 구백십이 세를 살고 죽었더라.

    창세기 4장과 5장에서 셋의 자리는 확실히 가인과 아벨의 빈 공백을 채워 주고 있다.
    우리는 셋의 출생애를 통해 몇 가지 의미를 찾을 수 있다.

    하나님은 은혜를 끊지 않으신다.

    비록 가인과 아벨의 일로 아담의 자손들이 끊이기지만 셋을 허락하심으로 이 땅에 생육하고 번성하도록 은혜를 베푸신다.
    타락 이후의 생육과 번성은 양면성을 가진다.
    축복인 동시에 저주다.
    이것은 창세기 11장에서 선명하게 드러난다.
    악은 합할수록 더욱 악해지고, 선을 합할수록 더욱 선해진다. 마치 물감이 합하면 검어지지만 빛이 합하면 흰색-무색이 되는 것과 같은 이치다.

    저주와 축복의 양면성

    셋의 출생과 생애는 확실히 저주 안에 복이 있고, 복 안에 저주가 있음을 보여준다.
    가인의 저주와 아벨의 죽음은 아담의 후손들이 끊어질 위기에 처하지만 셋을 주심으로 이어가게 하신다.
    셋은 결혼하여 아이를 낳고, 팔백칠 년을 더 살다 912세에 죽음을 맞이 한다.
    죽음이 지배하는 세상에서 생명을 통해 세대와 세대가 끊이지 않게 이어가게 하신다.
    하지만 자신 또한 죽음을 맞이함으로 죄의 값이 사망임을 분명히 보여주고 있다.

    미술 분야에서 사용하는 용어로 물감은 감산혼합, 빛은 가산혼합이라 부른다.

    가산 혼합 :
    빛을 가하여 색을 혼합할 때, 혼합한 색이 원래의 색보다 밝아지는 혼합.
    빛의 색은 겹칠수록 밝아지는데, 만들어진 색은 원래의 빛의 밝기를 합한 것이 된다.
    컬러텔레비전을 비롯한 조명 따위에 이용된다.
    적색(赤色), 녹색(綠色), 청색(靑色)을 기본 삼원색(三原色)으로 쓰며, 이 혼합에서의 보색(補色)은 두 가지 색을 합하여 백색(白色)이 되는 경우를 말한다.

    감산혼합 :
    혼합색이 원래의 색보다 명도(明度)가 낮아지도록 색을 섞는 방법.
    시안(cyan), 마젠타(magenta), 황색(黃色)의 각 비율을 변화시킴으로써 여러 가지 색을 만들 수 있다.

    로마서 6:23 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이니라.

    에노스(Enos) 'אֱנוֹשׁ

    에노스(Enos)는 창세기 5장에서 셋의 아들로 언급되는 인물로, 성경에서 중요한 신앙적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그의 이름은 인간의 나약함과 연약함을 상징하며, 그의 생애는 인류가 하나님을 향해 나아가기 시작한 중요한 전환점을 나타냅니다.

    1. 에노스의 이름 : 히브리어 의미와 풀이

    에노스(Enos)의 이름은 히브리어로 'אֱנוֹשׁ' (에노시, Enosh)로 표기되며, 그 뜻은 '인간', '사람', '연약한 자'라는 의미를 지닙니다.
    이 이름은 인류의 나약함과 필멸성을 상징하며, 인간이 본질적으로 죄와 고난 가운데서 하나님의 은혜를 필요로 하는 존재임을 암시합니다.
    인간의 연약성을 강조할 때 에노시라는 단어를 사용했고,
    '아담'이란 단어는 보통 사람을 강조할 때 사용합니다. 

    에노스의 이름은 성경에서 인간의 한계와 죄성을 강조하는 데 사용되기도 합니다.
    예를 들어, 시편 103편 15절에서 "인생은 풀과 같으며, 그의 영화는 들의 꽃과 같도다"라는 구절에서 사용된 '인생'이라는 단어가 바로 '에노스'와 같은 히브리어입니다.
    이는 인간의 삶이 얼마나 덧없고 연약한지를 보여주는 표현입니다.

    582. 에노쉬(’ĕnôwsh. אֱנוֹשׁ)

    אֱנוֹשׁ 스트롱번호582
    1.

    사람.

    2.

    일반적으로는 전 인류에 대한 집합명사로 쓰임

    3.

    무리

    발음 [ ’ĕnôwsh ]
    어원
    605에서 유래
    구약 성경
    42회 사용
  • 관련 성경
    ☞사람(창6:4, 삼하1:11, 겔9:2), 남자(창13: 8), 동행자(창24:54,59, 삼상18:27), 백성(창 26:7, 수8:14, 왕상21:13), 주민(레18:27), 불량배(신13:13), 쌍방(신19:17), 무리(수9:14, 삿19:25, 왕하4:40), 지휘관(수10:24), 후손 (삿9:28), 대장부(삼상4:9), 난봉꾼(대하13: 7), 인생(욥4:17, 시144:3), 신하(잠25:1), 인구(전9:14), 족속(사45:14), 장정(렘18:21), 남편(렘29:6, 44:19, 겔16:45), 친구(렘38:22).

  • 인생(*, 에노쉬) - 히브리어 성경은 인간을 가리킬 때 '에노쉬'와 '벤아담'(*)을 사용하는데(68:18; 신 32:26; 잠 23:28; 욜 1:12), 특히 태어나지만 반드시 한번은 죽는 존재로서의 유한한 인간을 뜻할 때 주로 '에노쉬'을 사용한다.
    한편, '에노쉬'를 '최선의 상태인 인간'으로 해석하는 견해도 있으나 별로 설득력이 없다(Davies).

    벤 아담

    בֵּן 스트롱번호1121
    1.

    아들

    2.

    손자의 아들

    3.

    복수 בָּנִים

    발음 [ bên ]
    어원
    연계형 בֶּן־, 복수 בָּנִים, 복수 연계형 בְּנֵי,1129에서 유래
    구약 성경
    4891회 사용
    אָדַם 스트롱번호119
    1.

    얼굴이 붉어지다

    2.

    푸알형 분사 םְאָדָּם : 붉어지다.

    3.

    붉게 물들다

    발음 [ ’âdam ]
    구약 성경
    10회 사용

  • 관련 성경
    ☞붉다(애4:7, 나2:3, 잠23:31).

  • 󰃨 그 날이 풀과 같으며 - 본 회화적 묘사는 인간 존재 본질의 일시성을 강조한다. 유사 표현으로는 90:5; 욥 14:2; 사 40:6, 7; 51:12등이 있다.

    󰃨 꽃과 같도다 - 곧 시들어버리는 것이 특징인 꽃이 인생의 영화(榮華)와 같다는 말이다. 여기서 '꽃'은 '치이츠'(*)로서 그 문자적인 뜻은 '빛나는 것' 혹은 '반짝이는 무엇'이며 봄철에 침울한 광경을 밝고 다채로운 색상으로 바꾸어버리는 들에 핀 꽃들을 가리킬 때 주로 사용된다.



    따라서, 에노스의 이름은 인류가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연약함을 깨닫고, 그분의 도우심과 은혜를 필요로 하는 존재라는 사실을 상징합니다. 그의 이름이 주는 의미는 인간이 스스로의 힘으로는 살아갈 수 없으며, 하나님께 의존해야 한다는 깊은 신학적 메시지를 담고 있습니다.

    2. 에노스의 생애

    에노스는 아담과 하와의 셋째 아들 셋의 아들로, 그의 탄생은 창세기 4장 26절과 창세기 5장 6-11절에서 언급됩니다.

    " 셋도 아들을 낳고 그의 이름을 에노스라 하였으며 그 때에 사람들이 비로소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 " (창세기 4:26)

    에노스의 생애는 그의 탄생 때 중요한 신앙적 전환점과 연결됩니다. 창세기 4장 26절에 따르면, 에노스가 태어난 시점에 사람들은 처음으로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구절은 인간이 처음으로 하나님을 향해 기도하고 예배하며, 그분을 인식하기 시작했음을 의미합니다.

    에노스의 생애는 성경에서 구체적으로 많은 기록을 남기지 않았지만, 그가 살았던 시대는 인류가 하나님께 다시 돌아가는 중요한 신앙의 시작을 알리는 시대였습니다. 셋의 계보를 통해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는 신앙적 행위가 시작되었으며, 에노스는 그러한 변화의 중심에 있었던 인물로 볼 수 있습니다. 에노스는 905세까지 살았으며, 그의 생애 동안 인류는 점차 하나님을 인식하고 그분께 나아가는 삶을 시작했습니다(창세기 5:11).

    3. 에노스 이야기의 교훈

    에노스의 짧은 기록 속에서 우리는 중요한 신앙적 교훈을 얻을 수 있습니다. 그가 등장한 시점에 사람들이 처음으로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다는 사실은, 에노스의 생애와 그가 상징하는 것이 신앙의 회복과 하나님께 나아가는 시작을 의미함을 보여줍니다.

    1) 하나님을 향한 회개와 돌아옴

    에노스의 생애와 그가 태어난 시점은 인류가 하나님을 향해 기도하고 예배하기 시작한 중요한 전환점을 나타냅니다. 그의 이름이 '연약함'을 상징하는 것처럼, 인간은 자신의 연약함을 깨달을 때에 비로소 하나님께 나아가게 됩니다. 인간은 스스로의 힘으로는 죄와 고통 속에서 벗어날 수 없으며, 하나님의 도우심을 필요로 하는 존재임을 인식해야 합니다.

    에노스의 시대에 사람들이 하나님을 찾기 시작했다는 것은, 인류가 자신들의 연약함을 깨닫고 하나님께 돌아오기 시작했음을 의미합니다. 이는 신앙 생활에서 회개와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상기시켜줍니다. 우리의 연약함을 인정하고, 그분의 은혜를 구할 때 우리는 참된 회복과 구원의 길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2) 기도와 예배의 시작

    에노스가 태어난 때에 사람들이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다는 것은 인류 역사에서 최초로 기도와 예배가 시작된 사건을 의미합니다. 하나님께서 인간과 다시 교제하시기 시작했으며, 사람들은 하나님을 향해 그들의 마음을 열고 그분의 이름을 부르기 시작했습니다. 이는 예배와 기도가 신앙 생활에서 얼마나 중요한 역할을 하는지를 보여줍니다.

    하나님께 기도하고 예배하는 것은 그분과의 관계를 맺는 중요한 방법입니다. 에노스의 시대에 시작된 이 신앙의 행위는 오늘날 우리의 신앙 생활에도 여전히 중요한 요소로 남아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우리의 마음을 열고, 그분의 도우심과 인도를 구해야 합니다. 기도와 예배는 단순한 종교적 의무가 아니라, 하나님과의 친밀한 교제를 의미합니다.

    3) 인간의 연약함과 하나님의 은혜

    에노스의 이름이 '연약함'을 의미하는 것은 인간의 필멸성과 한계를 상기시킵니다.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죄성과 연약함을 지닌 존재로, 하나님의 도우심 없이는 온전히 살아갈 수 없습니다. 에노스의 시대에 인류가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기 시작한 것은, 인간이 자신의 연약함을 깨닫고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기 시작했음을 상징합니다.

    이 교훈은 오늘날 우리에게도 적용됩니다. 우리의 삶에서 우리가 연약하다는 것을 깨닫는 순간이야말로 하나님께 나아가고, 그분의 도움을 구할 수 있는 기회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연약함을 아시고, 그분의 능력과 은혜로 우리를 도우시는 분이십니다. 에노스의 이야기는 우리가 연약할 때 하나님의 능력이 더욱 분명하게 드러난다는 중요한 진리를 가르쳐줍니다.

    4. 결론

    에노스는 성경에서 셋의 아들로, 그의 이름은 '연약한 자'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그의 생애는 인류가 처음으로 하나님을 향해 기도하고 예배하기 시작한 중요한 시기로 기록됩니다. 에노스의 시대에 사람들은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기 시작했으며, 이는 인류가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신앙의 회복을 의미합니다.

    에노스의 이야기는 우리의 연약함을 깨닫고, 하나님께 나아가 그분의 도움을 구해야 한다는 중요한 교훈을 줍니다. 또한, 기도와 예배는 신앙 생활에서 필수적인 요소임을 상기시킵니다. 인간은 하나님 없이 스스로의 힘으로 살아갈 수 없으며, 우리의 삶 속에서 하나님을 향해 나아가야 한다는 메시지를 에노스의 생애를 통해 배우게 됩니다. 에노스의 시대에 시작된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은 오늘날에도 계속되며, 우리는 우리의 연약함 속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는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아담(Adam)은 '흙'이란 뜻의 히브리어 '아다마'와 동일한 어원을 가진 이름으로서 그 의미는 '사람'입니다(창 1:27).

    그런데 역대상의 족보는 유다 왕국의 위상과 기원을 밝히기 위해 쓰여졌음에도 불구하고 히브리 민족의 시조인 아브라함으로부터 시작하지 아니하고 인류의 시조인 아담으로부터 시작합니다.

    이것은 유대민족의 기원이 되시는 하나님은 온 인류의 아버지가 되신다는 사실과 모든 종족은 유일한 기원을 갖고 있다는 사실을 명백하게 증거하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셋(Seth)은 '택함을 받은 자', '대신 줌'이란 뜻입니다.
    셋은 가인에게 살해당한 아벨 대신 하나님께서 아담의 가정에 주신 선물이었습니다(창 4:25).
    본 족보에서 아담의 맏아들 가인과 차자(次子) 아벨이 언급되지 않은 이유는 아벨은 후사가 없었기 때문이며, 가인은 불경건한 자였기 때문에 의도적으로 생략했을 것이라 추정합니다(창 4:1-12).

    에노스(Enosh)는 '약한 사람'이란 뜻입니다.
    그런데 특기할 사실은 그의 시대에 여호와께 대한 최초의 예배가 시작되었다는 것입니다(창 4:26).
    그러므로 이러한 사실은 아담의 타락(창 3장) 및 가인의 범죄 이후 죄악에 대하여 무기력해진 사람들이여호와를 의지하지 않고는 죄의 유혹을 이기며 살 수 없었음을 시사해 준다.
    그런데이같은 점은 날이 갈수록 죄악이 관영(貫盈)해지는 오늘날에 있어서는 더욱 그러하다.


    에노스는 셋이 105세에 낳은 아들(창 5:6, 대상 1:1)로, 아담 이후 235년에 출생했다.
    에노스는 90세에 게난을 낳았고 815년간 자녀를 낳았으며, 905세에 죽었다(창 5:9-11). 에노스는 아담과 695년을, 노아와는 84년을 함께 지냈으며, 그의 나이 752세에 에녹의 승천을 목격했다.
    성경은 셋이 자기 아들을 낳고 ‘에노스’라고 이름 지은 동기에 대해 ‘그 때에 비로소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기 때문’이라고 소개하고 있다(창 4:26). 이는 쉽게 말해 공식적인 예배가 시작되었다는 뜻이다. 가인과 아벨도 제사를 드린 것으로 보아 이미 제사 드린 지는 오래되었으나 비로소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다는 뜻은 하나님을 올바르게 섬기기 위한 규칙적인 예배 생활을 시작했음을 말한다. 에노스는 스스로 구원하기에 무능하고 나약한 전 인류를 예표한다.

    이스라엘의 족보 (1-9장)

    역대상은 아담에서부터 시작하여 이스라엘의 족보를 나열하며, 이를 통해 이스라엘 민족의 정체성과 하나님의 구속 역사를 나타냅니다.

    1. 아담에서 아브라함까지 (1장) :
    첫 사람 아담부터 아브라함의 족보를 기록합니다.
    2. 이스라엘의 12지파 (2-8장) : 야곱의 12아들(12지파)의 족보를 상세히 나열하며, 각 지파의 후손들을 기록합니다.
    3. 귀환한 백성들의 족보 (9장) : 바벨론 포로에서 귀환한 백성들의 족보를 기록하며, 귀환 이후의 상황을 설명합니다.

    ​다윗 왕의 통치 (10-29장)

    역대상의 주요 내용은 다윗 왕의 통치와 그의 종교적 업적에 중점을 두고 있습니다.

    1. 사울 왕의 죽음 (10장) :
    사울 왕의 죽음과 그의 왕국의 몰락을 기록하며, 다윗 왕의 등장을 예고합니다.
    2. 다윗 왕의 등극과 통치 (11-29장) : 다윗 왕의 통치 기간 동안의 업적과 사건들을 기록합니다.
            예루살렘 정복 (11-12장) : 다윗이 예루살렘을 정복하고 그의 수도로 삼는 과정입니다.
            다윗의 위대한 군사들 (11-12장) : 다윗을 도운 군사들과 그들의 큰 공로를 나열합니다.
            언약궤의 반환 (13-16장) : 다윗이 언약궤를 예루살렘으로 옮기는 과정과 예배의 재건입니다.
            하나님과의 언약 (17장) :  하나님께서 다윗과 맺은 언약과 다윗의 왕조에 관한 약속입니다.
            다윗의 군사 활동과 정치적 업적 (18-20장) : 다윗의 승리와 정치적 확립을 기록합니다.
            인구 조사와 그 결과 (21장) : 다윗의 인구 조사의 잘못과 그에 따른 재앙, 그리고 하나님의 은혜로 해결되는 과정입니다.
            성전 건축 준비 (22-29장) : 다윗이 솔로몬이 성전을 건축할 수 있도록 준비하는 과정과 관련된 지시사항입니다.

    ​주요 사건 및 인물

    역대상은 다윗 왕의 통치를 중심으로 중요한 사건들과 인물들을 기록합니다.

    1. 다윗의 승리와 패배 : 다윗의 승리는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의한 것이며, 그의 패배는 그의 실수와 교만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2. 예배와 찬양의 재건 : 다윗은 언약궤를 예루살렘으로 옮기고, 예배와 찬양을 재건하여 하나님을 경배하는 중심지로 삼았습니다.

    3. 성전 건축 준비 : 다윗은 하나님께 성전을 건축하고자 했으나, 하나님께서는 그의 아들 솔로몬이 이를 행할 것을 명하셨습니다. 다윗은 이에 따라 성전 건축을 위해 필요한 자재와 인력을 준비했습니다.

    적용

    1. 하나님의 계획을 신뢰하라

    역대상에서 다윗 왕의 이야기는 하나님의 계획을 신뢰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보여줍니다. 다윗은 언약궤를 옮기고 예배를 재건하는 과정에서 하나님께 기도하고 인도함을 구했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삶에서도 하나님의 계획을 신뢰하고, 그분께 기도하며 인도함을 받아야 합니다.

    2. 예배와 찬양을 중심에 두라

    다윗 왕이 언약궤를 예루살렘으로 옮기고 예배와 찬양을 재건한 것은 하나님을 중심에 두는 삶의 중요성을 보여줍니다. 현대 신앙인들도 예배와 찬양을 삶의 중심에 두고, 하나님께 경배하는 것을 우선시해야 합니다. 이는 우리의 신앙 생활을 더욱 깊이 있고 의미 있게 만들어 줄 것입니다.

    3. 실수를 인정하고 회개하라

    다윗 왕의 인구 조사와 그에 따른 잘못을 통해 우리는 실수를 인정하고 회개하는 것이 중요함을 배울 수 있습니다. 다윗은 자신의 실수를 인정하고 하나님께 회개함으로써 하나님의 용서를 받았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실수를 겸허히 인정하고, 하나님께 회개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4.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라

    다윗 왕은 성전 건축의 준비 과정에서 하나님께 순종하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하나님께서 성전을 건축할 자로 솔로몬을 지목하셨을 때, 다윗은 그 명령에 순종하며 필요한 자재와 인력을 준비했습니다. 우리도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는 것이 중요하며, 이를 통해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나가야 합니다.

    5. 지도자의 책임과 영향력

    역대상의 다윗 왕의 이야기는 지도자의 책임과 영향력을 강조합니다. 다윗 왕은 하나님께 순종하며 백성들을 올바른 길로 인도하려 노력했습니다. 지도자의 위치에 있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뜻에 따라 행동하며, 백성들에게 긍정적인 영향을 미쳐야 합니다.


    포로생활을 마치고 돌아온 이스라엘 백성들을 다윗은 여호와의 법대로 잘 이끌며 통치했습니다. 중간에 여호와를 노하게 한 일도 있었으나다윗은 마음을 다하여 여호와를 섬기고 성전을 건축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습니다. 그러한 내용들이 들어있는 역대상의 내용을 요약하였습니다.

    [역대상]

    -저자: 에스라

    -연대: B.C.458~400년경 기록(2차 바벨론 포로 귀환 후)

    -목적: 아브라함에 대한 하나님의 언약이 성취되었으며, 성전건축과 국가의 번영을 통해 구속사를 나타낸다. 하나님께 충성하면 축복을, 불순종하면 저주를 받음을 확인시켜 준다.

    -개요:아담~다윗까지의 족보 - 다윗의 등극 - 다윗의 치적 - 다윗의 말년, 솔로몬의 등극




    역대상 연대기

    BC 1010년 : 사울의 사망(대상 10:6), 다윗의 즉위(대상 11:3)

    BC 1003년 : 예루살렘 천도(대상 11:7), 법궤의 예루살렘 안치(대상 15:29)

    BC 991년 : 다윗의 간음죄(대상 11:1-21)

    BC 990년 : 솔로몬의 출생(삼하 12:24)

    BC 979년 : 압살롬의 반란(삼하 15:10-12)

    BC 973년 : 다윗의 인구조사(대상 21:1)

    BC 970년 : 다윗의 사망(대상 28:11-21), 솔로몬의 즉위(왕상 2:12)


    역대기의 족보들

       특히 역대상 1:1-2:2은 아담에게서 시작하여 그의 후손인 족장 이스라엘의 아들들의 족보가 나온다. 이 모든 자료들은 창세기에 언급된 족보에서 출발한다. 역대상 2:3-8:40은 이스라엘 지파들의 족보이다. 그것은 다음과 같다. 

       (1) 다윗과 그의 왕위 계승자들을 포함하는 유다 지파의 족보(2:3-4:43) 

       (2) 이스라엘 왕국에 속하여 요단 강 동편에 살았던 지파들의 족보(5:1-26) 

       (3) 레위 지파의 여러 즉보(6:1-81) 

       (4) 북왕국에 속하여 요단 서편에 살았던 자들의 족보(7:1-40) 

       (5) 첫 번째 왕 사울을 포함하는 베냐민 지파의 족보(8:1-40).

       역대상 9장은 주로 포로 이후 예루살렘 주민들에 대한 목적이지만, 8:29-38에 있는 사울의 족보를 반복하면서 결말을 짓는다(9:35-44).

        이렇듯 족보로 이루어진 서론의 중요성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역대기 저자가 활동했던 시대와 상황들을 살펴보는 것이 필요하다. 역대기 저자는 포로 후기 시대, 아마도 BC 4세기 중반에 살았을 것이다. 많은 제사장들과 지도자들이 그가 활동하던 시대보다 한 세기 반 이전에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왔고, 그 땅에 남아 있던 자들과 함께 BC 516년에 예루살렘에서 성전을 재건했다. 

       BC 5세기 중반에는 바사의 지원으로 에스라와 느헤미야가 돌아왔다. 에스라는 사람들이 율법의 규정들을 따르도록 했고(아마도 오경의 일부였을 것이다), 느헤미야는 예루살렘 성벽의 재건을 감독하며 그 지방의 총독으로 일했다. 당시 바사 왕국은 애굽을 포함한 고대 근동의 대부분을 장악했다. 전에 유다로 불렸던 작은 팔레스타인 공동체는 바사 제국 안에서 비교적 안전하게 살았지만, 정지적으로 독립하고자 하는 소망은 없었다.

        유다의 종교적 중심은 예루살렘 성전과 제사장 그리고 성전에서의 예배 생활이었다. 역대기는 성전의 권위와 유효성을 주장하며, 유다에 속하지 않은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성전을 인식하고 성전 예배에 참여하라고 초정한다. 역대기 저자가 본 이스라엘 공동체는 수적인 면에서 미약했지만, 저자는 이 공동체를 모든 이스라엘로 이해하려고 했다. 그러므로 그가 열두 지파의 족보들을 열거한 것은, 이스라엘의 과거에 대한 회상과 앞으로의 비전, 둘 다를 보여 준다. 

       첫 번째와 마지막 지파인 유다와 베냐민은 포로 후기 인구의 주류가 되었고, 이들 지파는 이스라엘의 가장 위대한 왕 다윗과 첫 번째 왕 사울을 배출한 지파들이다. 특별히 역대기 저사가 관심을 기울이고 있는 부분은 족보 한가운데 있는 레위인들의 족보다. 

       역대기 저지는 대제사장들, 일반 제사장들 그리고 일반 레위인들 외에 찬양자들과 문지기들로 불렸던 레위인들의 특별한 서열과 이스라엘 온 땅에 펼쳐진 48개의 레위인들의 성읍을 언급하고 있다. 

        역대상 2-8장에 있는 지파들의 족보는 창세기에서 가져온 것으로, 역대기 저자는 창조로 돌아가 이스라엘 연대기의 계속성을 보여 주고자 했다. 그는 또한 광대한 족보를 가지고 있는 다른 민족들과의 관계에서 이스라엘을 이해하려 하고 있다. 

       그러므로 1장은 구체적으로 언급되어 있지는 않지만, '이스라엘의 선택'을 암시하고 있으며, 세상의 다양성과 동일성을 보여 주고 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은 어느 시대든, 하나님이 선택하신 백성으로서 모든 인류에게 증인 역할을 하고 있다.


    역대기 기록 의도

       역대기 저자는 사울의 죽음과 그의 통치에 대한 심판을 서술한 후에, 역대상의 나머지 부분은 다윗 왕권에 대한 이야기를 서술한다. 여기서 역대기 저자는 자신보다 2세기 앞서 여호수아, 사사기, 시무엘, 열왕기에 서술되었던 이야기에 자신의 신학적 이해를 적용해 다시 서술한다. 

       그는 여호수아와 사사기의 이야기들을 생략하고, 마지막 장을 제외한 사무엘상 모두를 생략하며, 유다 왕국에 대해 말하는데 필요한 부분 외에 열왕기의 북왕국에 대한 모든 이야기를 생략한다. 역대기 저자는 또한 다윗 왕이 밧세바와 간음한 것과 그녀의 남편 우리야를 살해한 것, 다윗의 아들 암논이 그의 이복 여동생 다말을 범한 것, 압논에 대한 압살롬의 복수, 압살롬의 반역과 죽음, 사울의 후손들이 끊어진 것, 다윗 용사들의 공적, 다윗의 두 시편들과 사무엘하 11:1-23:7에 있는 대부분의 이야기를 생략한다. 

       부분적으로 이런 생략은 다윗의 이상적인 모습을 보여주기 위한 것이며, 그의 명성과 권위를 유지하려는 시도이지만, 더 나아가 이스라엘의 신앙적 유산에 대한 다윗의 공헌, 곧 성전 건축을 위한 계획과 역대기 저자 시대에 예루살렘에서 봉사했던 제사장들의 다양한 반차에 대한 임명에 집중하기 위해서다.

        한편 역대기 저자는 주요 부분을 많이 첨가하기도 한다. 12장에는 헤브론에 있는 다윗에게 나아왔던 지도자들과 군사들의 명단을, 15-16장의 대부분은 예루살렘에서 언약궤의 도착과 연결된 의식들을 언급하고 있다. 22장, 28-29장에는 다윗의 마지막 말이 기록되어 있고, 23-27장은 다윗이 다양한 분야의 레위인들과 관료들을 임명하는 것을 보여 주고 있다.

    역대기 저자는 성전 중심의 예배를 지향한다

    역대기의 중심 주제

       역대기는 우리에게 성경 역사를 포함한 모든 역사는 특정 관점에서 기록되고, 한 세대가 과거로부터 얻은 메시지는 나중 세대의 관심사와는 무관할 수 있다는 사실을 말해 준다. 여호수아에서 열왕기에 이르는 초기 이스라엘 역사는, 예루살렘이 이스라엘 백성의 죄로 인해 파괴되었다는 사실에 초점을 맞춘다. 그러나 3세기 이후에 바벨론의 손안에 있는 예루살렘은 더 이상이 사실에 집중할 필요가 없게 되었다. 

       대신 역대기 저자의 믿음에는 제사와 찬양을 통하여 하나님께 예배하는 것이 중심에 있었다. 그는 하나님 백성의 영적 생활에 예배가 얼마나 중요한지 알았다. 예배야말로 백성의 마음을 하나님께로 돌이키는 중요한 방편이었다.

       역대기 저자는 바로 이 예배가 다윗과 솔로몬의 유산이며, 모세와 통일 왕국의 두 왕과 개개인의 하나님의 사자들에 의해 보증된 제사 제도와 제사장 제도를 통해 그의 시대에 성전에서 가장 잘 행해질 수 있다고 판단했다. 역대기 저자는 바사 왕이 이 예배를 가능하게 하는 역할을 했으며, 제국의 식민지 생활에서도 이 예배는 최우선 순위며, 그 시대의 중심적인 사명이라는 것을 분명하게 결론짓고 있다. 

       유다 왕국 밖의 사람들, 특히 옛 북왕국 주민들에 대한 바사 왕의 환대는 에스라와 느헤미야의 책들에 있는 많은 분리주의적 측면들과 날카로운 대조를 이룬다. 분열되기 전의 이스라엘은 다윗과 솔로몬 왕이 즉위할 때, 예루살렘을 점령할 때, 예루살렘으로 언약궤가 이동할 때 그리고 성전 건축할 때 함께 참여 했다. 

       북이스라엘을 날카롭게 비평하는 설교의 결론에서도 유다 왕아 아비야(아비얌)는 여전히 북왕국 사람들을 '이스라엘 자손들'이라고 부르고 있다(대하 13:12). 여호와께서 남왕국의 아사 왕과 함께하심을 보고 북왕국의 수많은 사람들이 아사에게로 도망쳐 왔다. 히스기아는 특별히 북왕국 에브라임과 므낫세 지파를 포함한 이스라엘과 유다 모두를 유월절에 초대했다. 요시아의 개혁은 므낫세와 에브라임과 납달리 성읍으로 확장되었다.

       역대기 저자 시대에 이들 북왕국 영토들 가운데 어느 한 부분도 유다에게 속해 있지 않았지만, 과거 북왕국에 대한 왕들의 호의적인 태도는 역대기 저자가 그의 시대에 이스라엘에게 바라고 있는 태도라는 것을 확실히 표현하고 있다. 연합과 직무를 행함에 있어서 다른 사람들에 대한 열린 태도는 과거나 지금이나 하나님의 백성이 지녀야 할 중심 덕목이다.

       예루살렘 성전 예배의 특징과 정당성이 역대기 저자의 중심 주제이지만, 그는 또한 이스라엘 역사에서 수많은 다른 중요한 사항들을 강조한다. 다윗의 왕권은 역대기에서 여호와의 왕국과 동일시되며, 다윗 왕조에 대한 신성한 위임은 출애굽과 시내 산 사건에 대한 관심을 사그라들게 한다. 복음은 언제나 특별한 시간, 장소, 문화의 도전 혹은 나쁜 상황에 대한 하나님의 좋은 소식이다. 

       성경 전체를 통해 '신실함'은 상을 받으며 그렇지 못할 때는 벌을 받는 것이 마땅한 것으로 되어 있지만, 역대기에서는 이 상과 벌이 더 즉각적이며 개인적으로, 대개 한 사람의 생애 안에서 일어난다. 죄의 결과나 의로운 행동에 대한 보상은 세대를 님 기지 않는다. 

       다윗은 자신의 유언에서 다음과 같은 사실을 말하고 있다. 

    “네가 만일 그를 찾으면 만날 것 이요 만일 네가 그를 버리면 그가 너를 영원히 버리시리라”(대상 28:9) 

       이런 응보의 신학은 절대적인 신적 공의의 한 원리가 아니라 여호와의 철회되지 않는 '언약적 긍휼'을 보여 주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17:13) 아사, 여호람, 요아스, 아마샤, 웃시야와 같은 왕들의 이야기는 상을 받은 신실한 기간과 그렇지 못한 기간으로 나뉜다. 므낫세의 경우는 예외적으로, 신실하지 못했을 경우에도 번영이 있었다. 역대기 저자는 하나님과 왕들 사이에 상호 작용하는 이 모든 원인과 결과의 관계를 하나님의 백성을 위한 영적 교훈으로 제시하고 있다.

    기쁨과 믿음이 충만한 예배 공동체를 지향한 책

       성전 예배와 제사장에 대한 초점은, 우리로 하여금 역대기 저자가 경건과 신앙생활에 대하여 매우 경직된 사고를 가졌다는 생각을 갖게 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가 얼마나 '기쁨'이라는 단어를 많이 사용하고 있는지 그리고 '믿음'에 대하여 얼마나 따뜻하게 말하고 있는지를 주목해 보라. 

    “너희 하나님 여호외를 신뢰하라 그리하면 견고히 서리라 그의 선지자 들을 신뢰하라 그리하면 형통하리라”(대하 20:20) 

       예배드릴 때는 활기 넘치는 음악과 온전한 마음으로(대상 28:9) 우리 자신을 낮추어야 한다(대하 7:14: 12:6-12; 30:6-11; 32:26; 33:12-14). 기도 역시 마찬가지다(대하 32:20-24: 33:13). 역대기 저자는 예배 공동체를 지지하는 한편, 보다 나은 미래를 소망했다. 

       역대기의 첫 부분, 족보에 나와 있는 지역에 대한 언급들은 과거에 형성되었고, 미래에도 여전히 기대할 수 있는 이스라엘의 땅을 의도적으로 개관하는 것이다. 역대하 30:6-9에서는 그 땅에 있는 자들의 회개로 인해 바벨론에 있는 포로들이 귀환할 것이라는 약속의 말씀을 언급한다. 

       찬양하는 자들의 시편은 다음과 같이 노래하고 있다. 

    “우리 구원의 하나님이여 우리를 구원하여 만국 가운데어서 건져내시고 모으사"(대상 16:35)

       그러나 역대기 저자 자신이 왕조의 궁극적인 회복을 소망하고 있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역대기는 성전 중심의 예배를 강조한다.

    나가면서

       역대기 저자는 특정한 역사적 상황에서 하나님 백성의 목적과 자유를 예견하고, 한 세대의 신학이 후에 다른 세대의 삶을 언급하기 위하여 변화될 필요가 있다는 것을 보여 주는 하나의 예가 된다. 전통으로부터 하나님의 모든 백성을 포괄적으로 이해하고자 한 역대기 저자는 하나님의 백성을 여전히 괴롭히고 있는 분열은 말할 것도 없고 그들 자신의 공동체에 대하여 폐쇄적인 한계를 유지하려는 자들의 주장을 거부한다. 

       역대기 저자는 성전 건축과 예배 드림에 있어 다윗과 솔로몬의 공헌을 강조하고 있지만 한편으로 성전을 위한 계획이 여 호외로부터 말미암았고(대상 28:19) 솔로몬 성전의 첫 제사 때 하늘에서 내려온 불은 그것을 확증해 주는 증거물이었음을 인지하고 있었다(대하 7:1).


    역대상 장별 요약

    아담에서 다윗까지의 족보 1장-9장

    1장 /  아담에서 아브라함까지 족보  
      아브라함의 후손들 족보
      에돔의 원주민들과 왕들 : 에돔 땅에 거주하던 원주민들과 그 땅을 다스린 왕들의 족보.

     - 이스라엘 민족의 조상들 족보(아담에서 아브라함까지 족보)

    2장 /  유다의 자손들
      헤스론의 자손들
      갈렙의 자손들

     - 유다 가문의 족보(헤스론, 갈렙의 자손들 중심)

    3장  /  다윗의 아들들

      유다의 왕들 : 솔로몬의 후손으로 유다의 왕들을 나열함
      여호야긴의 자손들 : 바벨론의 포로로 잡혀간 여호야긴의 후손들을 나열함

     - 다윗의 자녀들과 후손들의 족보

    4장 / 
    유다의 다른 자손들

      시므온의 자손들

     - 유다의 후손들과 시므온의 후손들 족보

    5장 /  르우벤의 자손들

      갓의 자손들
      므낫세 동쪽 반 지파 사람들: 바산에서 바알, 헤르몬, 스닐, 헤르몬산에 이르는 넓은 땅에 살았던 많은 사람들

     - 요단 동편의 지파들(르우벤, 갓, 므낫세)

    6장  /  레위의 자손들

      성전의 성가대원들 : 성막에서 찬양할 성가대를 조직한 다윗
      아론의 후손들
      레위 사람들의 주거지 : 여러 지파에게서 땅을 분배받은 레위사람들

     - 레위의 후손들 족보와 거주지

    7장 /  잇사갈의 자손들

      베냐민 자손들
      납달리의 아들들과 므낫세 서쪽 반 지파 사람들
      에브라임의 후손들
      아셀의 자손들

     - 요단 서편의 지파들(잇사갈, 베냐민, 납달리, 므낫세 반, 에브라임, 아셀 지파)

    8장  /  베냐민의 자손들

     - 재 언급되는 베냐민 지파의 족보


    9장  /  포로생활에서 돌아온 사람들: 바빌로니아의 포로에서 자기들의 고장으로 돌아간 사람들

      예루살렘으로 돌아온 제사장들 : 바빌로니아의 포로에서 돌아온 제사장과 여러 재능 있는 자들
      예루살렘으로 돌아온 레위인들: 바빌로니아의 포로에서 돌아온 레위인들
      성전 문지기 : 성전의 동, 서, 남, 북을 지키는 문지기 212명
      성전 일을 맡은 다른 레위인들: 성전의 청소, 음식준비, 성가대원 등 다른 일을 맡은 레위인
      사울의 족보

     - 포로에서 귀환한 레위인들, 제사장들 족보와 임무, 사울 왕가의 족보

    다윗의 등극

    10장  / 사울왕의 죽음 : 블레셋과의 전쟁에서 전사한 사울왕

     - 사울의 비극적 최후

    11장  / 이스라엘의 왕이 된 다윗 : 이스라엘의 지도자들이 다윗을 왕으로 추대함.

     다윗의 명장들 : 다윗에게 충성한 용감한 군인들, 이스라엘의 3대명장, 30명의 용장

    - 다윗 왕조의 시작과 협력한 장수들

    12장  /  다윗을 지지한 용사들: 사울을 피해 숨어있던 다윗을 지지한 용감한 군인들은 후에 이스라엘군의 지휘관이 됨

     헤브론에서 다윗의 편에 가담한 군인들 : 사울 대신 다윗을 왕으로 지지했던 많은 군인들이 다윗편에 가담함

     - 다윗을 왕으로 옹위한 용사들

    다윗의 치적

    13장  /  법궤 운반과 웃사의 죽음 : 다윗은 아비나답의 집에서 하나님의 궤를 가져오려 했지만 궤를 손으로 만진 웃사를 여호와께서 노하셔서 죽임. 궤를 가져오지 못하고 오벧-에돔의 가족에게 맡겨둠.

     - 하나님의 궤를 옮기는 다윗 왕(아미나답-오벳에돔), 웃사의 죽음

    14장  /  예루살렘에 안착한 다윗

     블레셋군을 격퇴함 : 이스라엘 왕이 된 다윗은 블레셋 사람들의 침략을 하나님께 묻고 무찌름

     - 블레셋과의 전쟁 승리

    15장  /  법궤를 예루살렘으로 옮김 : 다윗은 성막을 세운 후 오벧-에돔에 맡겨둔 하나님의 궤를 예루살렘으로 가지고 옴.
    다윗이 기뻐 춤추며 뛰니 그의 아내 미갈이 보고 속으로 업신여김.

     - 성공적으로 옮겨진 언약궤(오벳에돔-예루살렘)

    16장  / 감사의 찬송 : 다윗이 여호와께 부르던 감사의 찬송

      지속된 정규적인 예배 : 다윗은 여호와의 법궤앞에서 매일 아침저녁으로 제사를 드리라고 명함.

     -  다윗 왕의 감사 찬송

    17장  / 다윗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 하나님께서는 다윗이 죽은 후 다윗의 아들이 성전을 건축할 것이라고 말씀하심.

     다윗의 감사기도 : 여호와께 다윗집안의 장래 일을 말씀해주신 것에 대한 감사기도를 드림

    - 다윗에게 주신 하나님의 언약(왕국언약, 메시야 언약)

    18장 /  다윗의 승리 : 하나님께서 다윗이 가는 곳마다 전쟁에서 승리하게 하심

    - 다윗 왕이 성취한 초기의 승리(모압, 소바, 시리아)

    19장  /  다윗에게 패배당한 암몬군과 시리아군 : 다윗과의 전쟁에서 패배한 암몬, 시리아군대

     - 다윗 왕의 후기 승리(암몬, 시리아)

    20장  /  랍바성 점령 : 요압장군은 이스라엘군대를 이끌고 암몬 왕을 침략하고 랍바성을 함락시킴.

      블레셋 거인들을 죽임 : 가드에서 블레셋 거인들을 죽이고 승리한 다윗과 그 부하들

     -  암몬과 블레셋을 격파한 다윗 왕

    21장  /  다윗의 인구조사 : 인구조사를 시행한 다윗에게 하나님은 노하셔서 무서운 전염병을 내려 많은 사람이 죽음.
         예루살렘을 치기 위해 하나님은 천사를 보내셨으나 불쌍한 생각으로 다시 거두심.
         다윗은 여호와께 회개하고 단을 쌓아 용서를 구함

     - 다윗의 인구조사 성전터 선정(오르난의 타작마당)

    22장  /  다윗의 성전 건축 준비: 솔로몬에게 성전건축을 할 것을 명하는 다윗, 성전의 기초작업을 하는 다윗

    - 성전 건축의 준비

    23장  /  레위인들의 직무상 분류 : 다윗이 나이가 많아 솔로몬을 왕으로 삼음. 성전의 여러 업무를 맡게 된 레위인들

     - 레위인의 직분 배정(38,000명)

    24장  /  제사장들의 직무상 분류 : 아론의 후손인 제사장들의 업무를 나눔.

      성전 직무를 맡은 다른 레위인들 : 레위 자손 중 성전업무를 맡을 사람을 제비로 뽑음.

     - 제사장 24반차(엘르아살 16반, 이다말 8반)

    25장   /  성가대원들과 그들의 직무 : 다윗, 레위 지도자들이 여호와를 찬양할 사람들을 뽑음.

     -  찬양대의 24반차(아삽, 헤만, 여두둔)

    26장  /  성전 문지기 : 고라집안의 아삽 자손들이 성전 문지기를 맡음.
     
      성전의 다른 직무 :
    성전 창고, 예물 보관 관리 업무를 맡은 레위인들
      다른 레위인들의 직무 : 종교업무, 행정업무를 담당한 레위인들

     - 레위인의 성전 문지기-창고 관리, 사무관과 재판관의 직무

    27장  /  이스라엘의 군대 편성 : 12개 군단으로 편성된 이스라엘 군대

      각 지파의 행정관들 :
    각 지파에서 행정관을 1명씩 뽑음.
      다윗의 재산 관리자들과 그의 측근자들 : 다윗 곁에서 재산을 지키며 왕의 자문관, 친구로 있던 여러 측근자들

     - 다윗 군대의 편성(12 군단), 12지파의 행정관들, 재산관리자

    다윗의 말년, 솔로몬의 등극

    28장  / 성전 건축을 위한 다윗의 교훈 : 다윗은 행정관 12명, 군 지휘관, 그밖의 모든 주요인사를 소집하고 여호와의 명령을 지킬것을
     명령함. 솔로몬에게도 여호와를 잘 섬기라고 지시함.

     - 성전건축을 위한 다윗의 마지막 유언

    29장  /  성전건축을 위한 예물 : 다윗이 성전건축을 위해 예물을 바쳤다고 말하자 여러 족장들과 장관들이 기쁜마음으로 예물을 드림.

      다윗의 찬양 : 여호와께 감사하고 성전건축을 위해 모은 예물을 하나님께 드리며 찬양함
      왕으로 인정된 솔로몬 : 다윗은 솔로몬을 다시 왕으로 선언하고 기름을 부음.
      다윗의 죽음 : 40년동안 이스라엘을 통치한 후 나이가 들어 죽은 다윗.

      - 성전건축 예물과 다윗의 찬양, 임종, 솔로몬 왕의 등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