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도(默禱)는 일제 강점기의 잔재가 예배 형식으로 굳어진 것이다.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예배를 시작할 때 인도자가 종을 세
번 치면서 “다같이 묵도함으로 예배를 시작하겠다”고 하는 경우를 흔히 볼 수 있었다. 물론 시대마다 조금씩 예배를 시작하는 첫
순서가 차이가 있었던 것은 사실이다.
속사도 시대에는 성경봉독으로 예배를 시작했고, 3~4세기에는 집례자가 “주께서 여러분과
함께”라고 하면, 회중들은 “또한 사제와 함께”라고 응답함으로 예배가 시작되었다. 동방교회나 카톨릭교회는 지금도 이렇게 예배를
시작하고 있다.
반면에 종교개혁자들은 회개의 기도와 사죄의 확신으로 예배를 시작했다. 주지하다시피 카톨릭교회에서는 미사를 드리기
전에 반드시 고해성사를 해야 했다 그러나 종교개혁자들은 카톨릭교회의 고해성사를 거부했기 때문에 그 대신 회개기도로 예배를
시작했다.
그러면 왜 한국교회는 묵도로 예배를
시작했는지 그 사연을 찾아볼 필요가 있다.
일반적으로 두 가지 설명이 가능합니다.
첫째는 우리나라의 많은 종교의식이나 국민의례를
시작할 때 머리를 숙이고 묵념을 하는 것에서 유래했을 가능성이 있다. 우리는 머리를 숙이고 묵념을 해야 일상의 행동이나
생각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었기 때문에 예배를 시작하면서 묵도를 해야 예배에 집중할 수 있다고 생각했고, 그래서 자연스럽게 예배의 첫
순서로 자리를 잡게 된 것 같다.
둘째는
예배를 시작하기 전에 교인들이 시끄럽게 떠드는 것을 조용하게 하는 방편으로 묵상기도를 사용했을 가능성이 있다. 주일학교 어린
아이들처럼 예배를 시작하려고 하는데 교인들이 예배당인지 사랑방인지 구분하지 못하고 떠들어대니까 교인들을 조용히 시키는 방편으로
묵도를 사용했다.
이것과
함께 강대상에 종을 올려놓고 예배를 시작하면서 종을 보통 세 번 땡땡땡 치는 관행이 생겨났다. 처음에는 탁상용 작은 종을 놓고
쳤는데, 이것이 상품화 되면서 점점 커지고, 금으로 도금한 십자가까지 붙여서 강대상에 올라가 있는 경우들을 흔히 볼 수 있다.
물론
종교개혁시대에 개혁교회들이 마을에 세워졌을 때 교회에 큰 종탑을 세우고 예배 시간을 알리는 종을 쳤다. 지금도 서구 교회들이
대부분 종탑을 가지고 있고 특별한 행사를 할 때 종을 치고 있다. 우리 한국교회에서도 교회마다 종탑이 있었고, 예배시간을 알리는
초종과 재종을 쳤다. 특별히 새벽종소리에 대한 아름다운 향수들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강대상에 종을 올려놓고 예배를 시작하면서 종을 치는 것은 세계 그 어느 교회에서도 없는 것이다. 처음에 선교사들이 주일학교
아이들 조용히 시키면서 종을 치던 것이 습관처럼 전해져서 보통 종을 땡땡땡 세 번 치고, “묵상기도 드림으로 예배를 시작하겠다”고
하면서 예배를 시작하는 관행이 자리를 잡게 되었다. 이것은 분명히 잘못된 것이다.
개혁교회의
예배의 첫 번째 순서는 예배의 부름(The call to worship)이다. 오르간 전주가 끝날 때 쯤 예배인도자는 단에
올라서 “이제 다함께 신령과 진정으로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겠습니다”라고 말하면 찬양대의 영광송이 나오고, 이어서 인도자가 성경
말씀(보통 시편말씀)을 몇 절 읽고, 이어서 개회기도를 드림으로 예배가 시작된다.
여기 개회기도는 예배를 위한 기도로 성령님께서
오셔서 예배를 인도해 주시고, 예배자들의 마음을 온전히 주장해 주셔서 하나님이 기뻐 받으시는 예배가 될 수 있도록 예배 자체를
위해 드리는 짧은 기도이다. 어떤 경우는 이 시간에 일반 기도와 같이 죄를 회개하고 성도들의 모든 필요를 구하는 경우들이 있다.
이것은 예배의 각 순서들이 가지고 있는 의미들을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는데서 오는 실수라고 할 수 있다.
이제
한국교회도 120년을 넘어서고 있다. 120년은 결코 짧은 역사라고 할 수 없는 시간이다. 그동안 예배신학적인 고민 없이
관행적으로 해 왔던 잘못 사용했던 용어와 습관들을 하나씩 바로 잡아서 바른 예배 모범을 회복하고, 후손들에게 계승해야 할 사명이
오늘 우리에게 있다.
예배를 시작할 때 “다같이 묵도(默禱)하심으로 예배를 시작합니다”라는 사회자의 말은 너무나 귀에 익숙하다. 보통 한국 기독교인들은 묵도를 ‘묵상기도(默想祈禱)’의 줄임말로 이해하고 있다 그러나 ‘묵도’는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며 조용히 드리는 기도가 아니다. 묵도는 일본인들이 신사참배를 할 때나 가정에서 자신들의 신을 잠시 묵념하는 것을 말한다.
묵도라는
말이 예배에서 사용되기 시작한 것은 일제강점기 이후다. 일제강점기 이전, 선교사들이 한국교회의 전통과 예식을 할 때는 묵도라는
말이 없었다. 1938년 한국 기독교가 신사참배를 공식적으로 인정한 이후 묵도는 예배의 순서가 됐다.
한국교회가 신사참배를
인정하고 받아들임으로써 예배드리기 전에 일본의 신사(神社)에 먼저 참배하는 묵도를 예배의 순서에 넣게 된 것이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이 참담한 역사의 산물은 예배의 순서로 굳어지고 정형화 됐다. 이렇게 오랜 세월 동안 묵도가 예배의 한 순서가 될 수 있었던 것은 묵상기도와 비슷한 어감을 가지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묵상기도는 단순히 소리를 내지 않고 드리는 기도가 아니다. 묵상기도는 하나님의 말씀을 깊이 묵상하며 깨닫는 지적인 노력과
하나님의 말씀을 삶에 적용하고자 하는 의지적인 결단이 바탕이 돼야 한다. 감정에 치우치기보다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자기를
되돌아보고 말씀으로 영적 내적인 성숙을 이끌어내는 것이 묵상기도다.
많은 교회들이 이 문제의 심각성을 공감하고 ‘묵도하심으로’라는 말의 사용을 줄여가고 있는 것은 다행이다. 멘트 없이 예배의 부름을 찬양대의 찬양이나 악기의 연주로 시작하는 교회들도 있다. 하지만 습관에 의해 신사참배의 잔재인 ‘묵도’로 예배를 시작하는 교회들이 아직 많이 있다. 예배를 시작할 때 ‘묵도하심으로’라는 말 대신 성경적인 언어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이상윤 목사(한세대 외래교수)
예배를 시작할 때 “다같이 묵도(默禱)하심으로 예배를 드리겠습니다”라는 사회자의 말은 너무나 귀에 익숙하다. 이 말이 아닌 다른 어떤 표현으로 예배의 시작을 알릴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다.
보통 한국 기독교인들은 묵도를 ‘묵상기도(默想祈禱)’의 줄임말 정도로 이해하고 있다. 그러나 ‘묵도’는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며
조용히 드리는 기도가 아니다. 묵도는 일본인들이 신사참배를 할 때나 가정에서 자신들의 신을 생각하며 잠시 묵념하는 것을 말한다.
묵도라는 말이 예배에서 사용되기 시작한 것은 일제강점기 이후다. 일제강점기 이전, 선교사들이 한국교회의 전통과 예식을 세워나갈
때는 묵도라는 말이 없었다. 하지만 1938년 한국 기독교가 신사참배를 공식적으로 인정한 이후 묵도는 예배의 순서가 됐다.
한국교회가 신사참배를 인정하고 받아들임으로써 예배드리기 전에 일본의 신사(神社)에 먼저 참배하는 묵도를 예배의 순서에 넣게 된
것이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이 참담한 역사의 산물은 예배의 순서로 굳어지고 정형화됐다. 이렇게 오랜 세월 동안
묵도가 예배의 한 순서가 될 수 있었던 것은 묵상기도와 비슷한 어감을 가지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묵상기도는 단순히
소리를 내지 않고 드리는 기도가 아니다. 묵상기도는 하나님의 말씀을 깊이 묵상하며 깨닫는 지적인 노력과 하나님의 말씀을 삶에
적용하고자 하는 의지적인 결단이 바탕이 돼야 한다. 감정에 치우치기보다는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자기를 되돌아보고 말씀으로
영적·내적인 성숙을 이끌어내는 것이 묵상기도이다.
많은 교회들이 이 문제의 심각성을 공감하고 ‘묵도하심으로’라는
말의 사용을 점차 줄여가고 있다. 멘트 없이 예배의 부름을 찬양대의 찬양이나 악기의 연주로 시작하는 교회들도 있다. 하지만 습관에
의해 신사참배의 잔재인 ‘묵도’로 예배를 시작하는 교회들이 아직 많이 있다. 예배를 시작할 때 ‘묵도하심으로’라는 말 대신
성경적인 언어인 ‘묵상’(시 1:2)을 사용하거나 ‘조용히 기도하심으로’라는 말을 사용하는 게 바람직하다.
2. 왕이 이 둘째날 잔치에 술을 마실 때에 다시 에스더에게 물어 가로되 왕후 에스더여 그대의 소청이 무엇이뇨 곧 허락하겠노라 그대의 요구가 무엇이뇨 곧 나라의 절반이라 할찌라도 시행하겠노라
3. 왕후 에스더가 대답하여 가로되 왕이여 내가 만일 왕의 목전에서 은혜를 입었으며 왕이 선히 여기시거든 내 소청대로 내 생명을 내게 주시고 내 요구대로 내 민족을 내게 주소서. (grant me my life--this is my petition. And spare my people)
4. 나와 내 민족이 팔려서 죽임과 도륙함과 진멸함을 당하게 되었나이다 만일 우리가 노비로 팔렸더면 내가 잠잠하였으리이다 그래도 대적이 왕의 손해를 보충하지 못하였으리이다
5. 아하수에로왕이 왕후 에스더에게 일러 가로되 감히 이런 일을 심중에 품은 자가 누구며 그가 어디 있느뇨
6. 에스더가 가로되 대적과 원수는 이 악한 하만이니이다 하니 하만이 왕과 왕후 앞에서 두려워하거늘
7. 왕이 노하여 일어나서 잔치 자리를 떠나 왕궁 후원으로 들어가니라 하만이 일어서서 왕후 에스더에게 생명을 구하니 이는 왕이 자기에게 화를 내리기로 결심한줄 앎이더라
8. 왕이 후원으로부터 잔치 자리에 돌아오니 하만이 에스더의 앉은 걸상 위에 엎드렸거늘 왕이 가로되 저가 궁중 내 앞에서 왕후를 강간까지 하고자 하는가 이 말이 왕의 입에서 나오매 무리가 하만의 얼굴을 싸더라
9. 왕을 모신 내시 중에 하르보나가 왕에게 아뢰되 왕을 위하여 충성된 말로 고발한 모르드개를 달고자 하여 하만이 고가 오십 규빗 되는 나무를 준비하였는데 이제 그 나무가 하만의 집에 섰나이다 왕이 가로되 하만을 그 나무에 달라 하매
♦ 오늘 읽어야 할 말씀 : 에스더 7:1∼10 ♦ 묵상을 위한 주제 : 내 민족을 내게 주소서(3절) ♦ 성구 : 왕후(王后) 에스더가 대답(對答)하여 가로되 왕(王)이여 내가 만일(萬一) 왕(王)의 목전(目前)에서 은혜(恩惠)를 입었으며 왕(王)이 선(善)히 여기시거든 내 소청(所請)대로 내 생명(生命)을 내게 주시고 내 요구(要求)대로 내 민족(民族)을 내게 주소서.
“내 민족을 내게 주소서!(Spare my People!)”
둘째 날 잔치 자리에서 아하수에로 왕은 왕후 에스더에게 “원하는 것이 무엇이냐? 나라의 절반이라도 주겠다”고 말합니다. 이때 왕후 에스더가 왕에게 요청한 것입니다. 내 생명과 내 민족을 구하여 달라는 청원을 듣고 아하수에로 왕은 잠시 고민할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사랑하는 왕후 에스더의 청을 들어주어야 하는가? 아니면 가장 신뢰하는 하만을 지지해야 하는가?
숨이 막힐 것 같은 긴장의 순간이 잠시 자리를 떠났던 왕이 들어왔을 때 하만이 에스더의 걸상에 엎드린 것을 보며 왕은 분노가 치솟았습니다.
“저가 궁중 내 앞에서 왕후를 강간까지 하려는가?”
얼굴을 싸더라 : 고대 페르시아와 로마에서는 죄수의 얼굴과
머리를 수건과 천으로 가려 저주와 죽음을 나타내었다. 얼굴을 싸는 것은 로마나 그리스에서 죄인을 다루는 관습이었는데, 왕의
신하들이 왕의 의사에 따라 그를 죄인으로 취급했던 것을 나타내고 있다.
왕의 신하 ‘하르보나’가 왕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황제의 살해 음모를 고발한 모르드개를 처형하려고 하만이 자기 집 뜰에 50규빗(약 23m) 높이의 교수대를 만들어 놓았습니다.”
그러자 왕은 “하만을 그 교수대에 매달아 처형하라!”고 명령했습니다.
모르드개를 죽이기 위해 만들어 놓은 그 교수대에 하만을 매달자 그제서야 왕의 분노가 가라앉았습니다.
왕후 에스더의 침착하고 지혜로운 처세술을 생각해 봅니다.
첫째 잔치 날에 왕에게 요청할 수 있는 것을 둘째 잔치 날까지 기다리며 신중하게 대처하는 것은 성급한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좋은 교훈이 됩니다.
우리들은 살아온 과거가 있습니다. 앞으로 살아가야 하는 미래도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을 살아야 할 현재가 중요합니다.
과거의 실패를 거울삼아 오늘을 지혜롭게 살아야 하겠습니다.
공중권세를 잡은 사탄은 우리들을 유혹하여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게 하려고 교활한 방법으로 손짓합니다. 이러한 세상에서 오늘도 세상을 이기셨던 예수님처럼 지혜를 구하며 날마다 승리하는 기쁨을 누려야 하겠습니다.
어둠과 죄악과 싸우면서 영원한 구원자이신 주님께서 우리 안에 계시므로 두려움 없이 승리를 확신하며 선한 싸움의 승리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 찬양 / 익은 곡식 거둘 자가
예수 내 구주! 예수 내 생명! 예수 내 권세!
* 추신 나라와 민족을 위한 특별 기도 주간 / 9월 20일(월) - 25일(토) 한국에서는 추석 명절을 맞이하는 연휴가 계속되는 주간입니다. 고향을 찾아 일가친척들을 만날 때 느헤미야처럼 고향 소식을 듣고 진심으로 기도하므로 예루살렘 무너진 성벽을 재건할 수 있었던 것처럼 이번주간은 나라와 민족을 위한 특별 기도주간으로 정하고 우리의 고향 자유대한민국을 위하여 기도하는 주간으로 지내시기 바랍니다.
에스더 7:3
왕후 에스더가 대답하여 가로되 왕이여 내가 만일 왕의 목전에서 은혜를 입었으며 왕이 선히 여기시거든 내 소청대로 내 생명을 내게 주시고 내 요구대로 내 민족을 내게 주소서.
내 생명 내 민족
1. 동일시(同一視, Identification) 동일하게 보는 것 /
히브리서 12:2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저는 그 앞에 있는 즐거움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그러나 합의하시면 이제 그들의 죄를 사하시옵소서 그렇지 않사오면 원컨대 주의 기록하신 책에서 내 이름을 지워 버려주옵소서.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내게 범죄하면 그는 내가 내 책에서 지워버리리라.
로마서 9:1-3 내가 그리스도 안에서 참말을 하고 거짓말을 아니하노라 내게 큰 근심이 있는 것과 마음에 그치지 않는 고통이 있는 것을 내 양심이 성령 안에서 나로 더불어 증거하노니. 나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을 위하여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찌라도 원하는 바로라.
에스더 5:3 왕이 이르되 왕후 에스더여 그대의 소원이 무엇이며 요구가 무엇이뇨 나라의 절반이라도 그대에게 주겠노라.
에스더 7:3 왕후 에스더가 대답하여 가로되 왕이여 내가 만일 왕의 목전에서 은혜를 입었으며 왕이 선히 여기시거든 내 소청대로 내 생명을 내게 주시고 내 요구대로 내 민족을 내게 주소서.
이사야 53:4-6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 하나님께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로마서 14:8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
오늘의 기도
주를 위하여 살아보자!
왕은 그 자리에서 즉각적으로
하만에 대한 처분을 밝히지 않고 잔치 자리에서 갑작스럽게 일어나 왕궁 후원으로 나갔다.
본서 저자는 아하수에로 왕이 왜, 무엇을
하려고 왕궁 후원으로 나갔는지 아무런 언급도 없이 그에 대한 답을 찾는 것을 독자의 몫으로 돌린다. 따라서 이에 대하여 수많은
해석들이 제시됨은 당연한 일인데, 대표적인 견해들을 나열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자신의 끊어오르는 화를 발산하기 위하여 나무를 자르려고 후원으로 갔다는 견해이다. 이는 아람어로 기록된 탈굼(Talgum ll)에 근거를 둔 견해이다.
둘째, 하만에 대한 경멸과 혐오감으로 하만의 얼굴조차 보기 싫어서 자리를 피했다는 견해이다.
셋째는 아직까지 하만에 대한 애정이 남아 있었기 때문에 즉각적으로 그를 벌하기가 쉽지 않아서 자리를 피했다는 견해이다.
넷째, 술과 분노로 인하여 그의 몸이 달아올랐기 때문에 시원한 바람과 함께 진정시키기 위하여 후원으로 갔다는 견해이다.
다섯번째는
다음절과 관련된 것으로 8절에서 하만이 에스더가 있는 걸상 위에 엎드린 것을 보고 그가 자신의 아내를 강간하려는 것으로 오해하는
장면이 나오는 데, 바로 이 사건의 복선을 이루기 위한 저자의 의도적이며 인위적인 삽입이라는 견해이다.
마지막 여섯번째는 하만을 어떻게 벌할 것인지 결정하기 위해서 다소간이라도 시간을 벌려고 자리를 잠시 피했다는 견해이다.
이 중에서 가장 적합한 형태의 해석은 마지막 견해라 할 수 있다. 왜냐하면
본절 후반부에서는 하만이 ‘왕이 자기에게 화를 내리기로 결심한 줄을 알았다’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이것이 왕이 왕궁 후원으로
나간 이유를 암시적으로 말해 주고 있다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본서를 원는 독자는 모두 하만의 표현대로 아하수에로 왕이 이 순간
하만에 대한 분노로 그에게 벌을 내리려고 한다는 것 외에는 달리 생각할 길이 없다.
그렇다면
그가 잔치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왕궁 후원으로 간 이유도 하만에 대한 처벌올 결정하기 위함이라는 논리가 가장 자연스럽다.
왜냐하면 그는 하만에 대한 처벌을 결정하기가 힘들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비록 왕비의 애원이라 해도 제국의 총리 대신을 즉각적으로
처형한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다.
본서 저자는 결정을 한 단계 유보하는 아하수에로 왕의 이런 모습을 본서 시작부터 일관성 있게
그려왔다. 그는 변덕스러운 인물임에도 불구하고 매사를 자신의 주관대로 결정하지 못하였다. 그의 전처 와스디가 그의 명령에 불복했올
때도 아하수에로는 이 문제에 대한 처리를 ‘사례를 아는 박사들’에게 물었다(1:13-15). 그 후 자신의 외로움을 달래기 위한
여인들을 모집하는 문제도 역시 ‘왕의 시신’의 의견을 따랐다(2:2-4). 유다인올 멸절하려는 사건도 하만의 의견을 그대로
수용한 결과였다(3:10-11). 내시 빅단과 데레스가 왕올 모살하려는 음모를 꾸였을 때 모르드개가 고하여 공을 세웠지만 아무런
상급도 내리지 않았었으며, 이후 역대 일기를 읽는 중 이 사건을 발견했을 때도 그는 이 문제을 처리할 자문자를
찾았다(6:3-6). 이와 같이 본서 저자는 아하수에로가 항상 의사결정올 함에 있어서 버릇처럼 조언자를 찾았음을 일관성 있게
보여주었다. 본문에서도 역시 그는 하만을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몰라 ‘왕궁 후원’으로 갔다고 볼 수 있다.
윤용근 변호사(법무법인 엘플러스 대표 변호사)가 매주 금요일 오후 유튜브로 생중계 되고 있는 '차별금지법 바로알기 아카데미'(차바아) 시즌2의 17일(제39회) 순서에서 "인권위원회의 평등법 주장을 팩트체크 한다!"라는 제목으로 강연했다.
윤 변호사는 "1년 전까지만 해도 차별금지법에 관해 관심이 없었다. 아내가 차별금지법에 어떤 문제가 있는지 물어봤는데 대답하지 못했다. 그래서 아내에게 이것을 공부하고 알려 주겠다고 했다. 차별금지법 법안을 읽어보았는데 첫 번째로 부딪힌 것이 사람의 성별이었다. '내가 알지 못하는 성별이 있었나?'라고 생각해보았을 때, 하나님은 사람을 창조하실 때 남자와 여자로 창조하셨는데 왜 이런 법안이 만들어졌는지 끝까지 읽었으며, 차별금지법을 다 읽고나서 느낀 결과는 이것은 인권을 위한 법률이 아닌 국가인권위원회를 위한 법률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법적으로 심각한 사실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고 했다.
그는 이어 "차별금지법에 대해 알고 나니까 말을 하지 않을 수 없었으며, 이 법에 대해 반대를 할 수밖에 없었다. 먼저 법안 발의와 관련해서 어떻게 발의되고 진행되는지 알아보고자 한다. 차별금지법이 2020년 6월 29일에 정의당을 중심으로 해서 발의가 되었다. 이를 반대하기 위해 1년 동안 열심히 싸워왔다. 그런데 2021년 6월 16일에 이상민 의원에 의해 평등법안이 발의되었다"며 "국가인권위원회에서 십수 년 전부터 차별금지법을 제정하기 위해 시안을 국회에 제출했었다. 이 시안을 바탕으로 국회의원들이 차별금지법을 발의하고 했다가 폐기되는 역사가 반복되고 있다"고 했다.
윤 변호사는 "두 법안의 특징을 보면 인권위의 차별금지법안, 평등법안에 기초하며 이름만 바꾸고 법안의 내용은 대동소이하다. 그리고 국회의원들을 보면 중복되는 경우가 상당히 많았다. 그렇다면 왜 중복적으로 법안을 발의할까? 그 의도는 입법과정에서 이렇게 많은 법률안이 발의되었기 때문에 평등법 재정이 필요하다는 것을 정당화시키기 위함이며, 여론을 집중적으로 몰아가기 위함이다. 우리는 평등법을 반대하고 있다. 반대하는 이유를 명확히 할 필요가 있다. 최근에 평등법 제정 반대 국민청원을 한 적이 있었으며, 최단 시간에 10만 명이 반대에 동의했다. 반대하는 이유는 이 법안에 심각한 문제가 있음을 알기 때문이다"라고 했다.
그러면서 "반대의 이유를 보면 성적지향이 다르다고 반대한다는 것이다. 성적지향이라는 규정안에 동성애를 포함하고 있다. 성적지향이란 '이성애, 동성애, 양성애 등 감정적, 호의적, 성적으로 깊이 이끌릴 수 있고 친밀하고 성적인 관계를 맺거나 맺지 않을 수 있는 개인의 가능성'을 말한다"며 "성적지향에 동성애를 포함하고 있어서 반대하는 것이다. 성경에서는 동성애 행위를 죄로 보고 있다. 죄는 금지되는 것이다. 금지되는 죄를 법으로 인정하겠다고 하는 것이 평등법, 차별금지법"이라고 했다.
그는 "그런데 평등법을 반대할 때 법적 근거로 반대했으면 좋겠다. 일반 국민이 동성애를 반대할 때 명백한 헌법의 근거를 가지고 반대한다. 헌법적 근거를 명확히 알고 주변인들에게 전달했으면 좋겠다. 인권위가 그동안 평등법, 차별금지법 제정을 위해 많은 노력을 해왔다. 그런데 법률적으로 심각한 문제가 있어서 우리가 인권위 상대로 지적해왔다. 최근에 인권위에서 평등법이 발의되어야 하는 주장을 10개로 정리해 놓았다. 이 10개의 주장들을 보며 팩트체크를 하고자 한다"라고 했다.
윤 변호사는
첫째 팩트체크, '차별을 포괄적으로 규율하는 법률 제정이 필요한가?
이에 대한 팩트는 이미 이런 법률이 있기 때문에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둘째 팩트체크, '평등법은 개인의 사적 영역에 대한 과도한 국가 개입이 아닌가?
이에 대한 팩트는 국민의 모든 사적 영역에 개입하는 건 과도하다는 것이다.
셋째 팩트체크, '불명확한 차별 개념에 따른 법치주의 원칙 위배가 아닌가?
이에 대한 팩트는 괴롭힘, 구별 등은 너무 주관적인 개념이라는 것이다.
넷째 팩트체크, '여성이나 남성으로 분류되지 않는 '제3의 성'을 성별에 개념에 넣는 것은 과도하다?'
이에 대한 팩트는 성별은 창조 때부터 여성 아니면 남성이라는 것"이라고 했다.
다섯째 팩트체크, '성적지향과 성별 정체성은 불확정적 개념이다?'
이에 대한 팩트는 이는 낯설고 불명확하며, 정의 규정에도 없다는 것이다.
여섯째 팩트체크, '제3의 성, 성별 정체성 개념으로 가족제도 붕괴, 국가 신원 체계 변동 야기, 병역의무 회피 수단으로 악용이 문제가 될 것이다?'
이에 대한 팩트는 주민등록제도, 징병제도, 가족제도가 무너질 수 있다"라고 했다.
일곱째 팩트체크, '화장실, 목욕탕, 탈의실에 성 중립 시설을 두게 되면 여성의 안전이 위협을 받고 여성의 역차별을 초래한다?'
이에 대한 팩트는 화장실, 탈의실 등에 성 중립 시설을 따로 마련해야 하며, 여성 안전 위협과 역차별이 발생한다는 것이다.
여덟째 팩트체크, '평등법이 표현의 자유와 종교의 자유를 제한한다'
이에 대한 팩트는 평등법을 통해 제한이 되며 종교 등 모든 영역에 적용되고 반대하는 표현 자체를 금지한다는 것이다.
아홉째 팩트체크, '차별구제수단이 피해자 위주(소수자 편향성)이다'
이에 대한 팩트는 차별구제수단은 편향적이며, 차별 주장만 하면 상대방이 아니라고 입증해야 한다는 것이다.
열째 팩트체크, '인권위 권환을 강화하여 최상위 사정기관으로 만들려는 것이다?'
이에 대한 팩트는 인권위가 입법부, 행정부, 사법부 등 헌법기관을 통제하는 모순이 발생한다는 것"이라고 했다.
윤 변호사는 "평등법의 목적 조항인 제1조 1항의 규정을 읽어보면 좋아 보이지만, 목적이 정당하다고 해서 착한 법이 되는 것은 아니다. 국민의 생각과 표현을 통제하려는 것이 차별금지법과 평등법이다. 악법이 되는 것이다. 법과 도덕과 윤리는 다르다. 나는 이렇게 주장하고 싶다. '성별'이란 여성과 남성을 말하며, 차별금지대상에서 '성별 정체성' '성적지향' 규정을 삭제, '차별' 개념에서 '괴롭힘, 혐오 등 불확정적 표현' 삭제, 간접차별 규정 삭제, 입증책임 전환 규정 삭제, 징벌적 손해배상 규정 삭제를 주장하고 싶다. 이러한 팩트체크 과정을 통해서 인권위가 차별금지법, 평등법에 대해 얼마나 잘못된 거짓 주장과 사실이 아닌 주장으로 호도하고 있는지 국민이 알아야 한다"고 했다.
에스더 6:1-14
09-18-2021(토)
♦ 9월 18일(토)
♦ 오늘 읽어야 할 말씀 : 에스더 6:1∼14 ♦ 묵상을 위한 주제 : 이 밤에(1절) ♦ 성구 : 이 밤에 왕(王)이 잠이 오지 아니하므로 명(命)하여 역대(歷代) 일기(日記)를 가져다가 자기 앞에서 읽히더니.
“이 밤에(That night)” “역사는 밤에 이루어진다(History is made at night))”는 말처럼 아하수에로 왕은 잠이 오지 않아 역대 일기를 가져와서 읽게 합니다.
그 일기의 내용 중에 왕을 살해하려던 사람들을 체포하여 왕의 생명을 구한 사례가 왕의 마음을 흔들었습니다.
왕은 그 주인공이 누구인가를 확인한 후 그에게 어떻게 해야 할 것을 공교롭게도 하만에게 묻습니다. 하만은 마치 그 사람이 자기라고 착각하여 최고의 특별대우를 하라고 제안합니다.
그런데 그 주인공은 하만이 아니라 오히려 하만이 죽이려했던 모르드개 이었다는 것을 깨닫고 심각한 번민에 사로잡히고 말았습니다.
하만의 계획은 잔치가 열리기 전에 아침 일찍 모르드개를 죽이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날 밤에 왕과 하만이 모르드개를 높이도록 역사하셨습니다.
하만이 세운 오십 규빗의 높은 나무에 달려 죽어야 할 운명의 모르드개와 왕이 특별대우 할 사람이라고 착각한 하만의 생각이 교차되어 하룻밤 사이에 새로운 역사가 펼쳐질 것을 누가 알았을까요?
하만은 자신의 손으로 모르드개에게 왕의 옷을 입히고, 왕의 말에 태우고, 모르드개를 높이며 성을 순회해야 했습니다(10∼11절).
에스더서에는 ‘하나님’이란 칭호가 전혀 사용되지 않았기 때문에 “숨어계신 하나님”을 말씀합니다. 그러나 사건이 전개되면서 그 안에서 드러나는 하나님의 세미한 손길을 깨달을 때 에스더서가 성경이라는 것을 확인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우리의 사고를 뛰어 넘어 역사하십니다. 때로는 전혀 알 수 없는 일이 일어났을지라도 모르는 것은 모르는 것으로 남겨두고 겸손하게 하나님이 역사의 주인 되심을 믿고 깨달을 때까지 인내하며 기다려야 합니다.
성급하게 판단하거나 알려고 하는 인간적인 속성보다는 오래 참고 기다리시는 하나님의 속성을 배워가며 오늘도 믿음과 인내와 소망으로 삶의 영역에 새겨질 하나님의 은총을 찾는 일에 성공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 찬양 / 어둔 밤 마음에 잠겨
예수 내 구주! 예수 내 생명! 예수 내 권세!
인생역전 / "페리페테리아(peripeteia)"
내촌감삼 / 가가와 도요히코(賀川豊彦. 1888. 7. 10 ~ 1960. 4. 23) 일본의 장로교 목사이며 기독교 사회주의자.
일본에 한 어린 소년이 기생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그런데 어머니는 그를 기를 수가 없어서 자기 남편의 본처에게 그 아이를 맡겼습니다.
이 소년은 전혀 얼굴을 모르는 이복 형제들과 함께 생활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배 다른 형제들은 이 소년을 괄시하고 멸시했습니다.
"너는 기생의 아들이지, 너하고 우리는 근본이 달라. 너에게는 더러운 피가 섞여 있어."
그들은 그를 핍박했습니다.
이 어린 소년은 살고싶지 않아 죽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죽을 수도 없었습니다.
그런저런 삶을 살다가 우연히 마루턱에 앉아있는데 속에서 울컥하고 끓어 오르는 것이 있었습니다.
토해서 보니까 붉은 핏덩이였습니다.
놀라 병원에 갔더니 그는 이미 폐결핵 3기 중증환자였습니다.
그러나 아무도 그를 치료해줄 사람도 없고 치료받을 돈도 없었습니다.
그는 죽을때만 기다리고 살아야 했습니다.
그런데 어느날 밖에서 북치는 소리와 함께 어떤 외치는 목소리가 들렸습니다.
"예수를 믿으세요. 예수를 믿으면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있습니다."
그는 그 소리를 듣는순간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 그 곳으로 달려갔습니다.
구세군 전도대가 북을 치면서 전도를 하고 있었는데 한 여인이 앞에 서 있었습니다.
그는 아줌마에게 물었습니다.
"아줌마, 나 같은 기생의 아들도 예수를 믿으면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있나요?"
그 아줌마가 말했습니다.
"그렇습니다. 누구든지 하나님을 믿으면 예수를 믿으면 하나님의 고귀한 자녀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예수를 믿겠습니다."
그는 예수를 영접했습니다.
그리고 날마다 말씀을 읽었습니다.
그의 삶은 점차 변화되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병은 더 심해지지는 않았지만 나아지지도 않았습니다.
어느날 그는 생각했습니다.
'이렇게 살다가 언제 죽을지 모르는데 내가 하루를 살아도 남을 위해서 봉사하면서 살아야지'
그는 자기 짐을 다 정리해서 리어카에 싣고 다리 밑 빈민굴로 내려갔습니다.
빈민굴에는 폐병환자들, 걸인들, 노숙자들이 몰려있었습니다.
그는 그 환자들을 섬겼습니다.
발을 씻겨주고, 목욕도 시켜주고, 약을 구해다주고 그들을 섬겼습니다.
그리고 말씀을 가르쳤습니다.
그러는 과정에서 그의 병은 나았습니다.
의사는 그에게 일년을 못넘긴다고 하였지만 75세가 넘도록 장수하였습니다.
그가 누구입니까.
일본교회가 자랑하는 성자 가가와도요이코 목사님이십니다.
우리는 그를 내촌감삼이라고도 부릅니다.
그는 기생의 아들로 태어난 비운의 운명이였지만
그는 운명을 딪고 예수님을 만남으로 인생이 변화되었습니다.
많은 사람을 위해서 복되고, 선한일을 하고 복음을 증거하다가
하나님 나라로 갈 수 있었습니다.
알프레드 노벨
1833년 10월 21일 날 스웨덴 스톡홀름에서 한 어린 아이가 태어났다. 그런데 너무나 약하게, 병약한 몸으로 태어나서 어머님의 젖을 빨지 못했다. 의사선생님과 주변의 사람들은 말했다. “이 아이는 얼마 오래 살지 못할 것입니다.” “너무나 태어날 때부터 약하게 태어났기 때문에 오래 못 살 것입니다.” 실제로 이 아이가 자라면서 늘 몸이 약했다. 그런데 그 어머니는 그런 얘기를 들었을 때 한편 놀랬지만은 생명의 주인은 주님이라고 믿고 의지했다. 그리고 어린 아이를 안고 눈물 흘리며 기도했다. “하나님 아버지, 이 아이를 살려주옵소서. 이 아이를 살려 주시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귀하게 헌신하도록 하겠습니다.” 그 아이의 생활기록부에는 다음과 같이 적혀 있었다. “빈궁한 가정환경과 병약한 몸으로 수업하기에 굉장히 어려움을 겪었다.” 소년의 아버지는 고무 공장을 운영하다가 부도나서 피신 가버렸고, 이 어머니는 작은 채소가게를 하면서 네 아이를 길러야했다. 그러나 그런 중에도 결코 낙심하지 않았다. 오히려 더욱더 주님을 믿고 의지하고 엎드려 기도했다. 후에 소년은 다이너마이트를 발명해서 세계적인 재벌이 되었다. 그런데 좋은 일에 쓰려고 만든 이 다이너마이트가 사람들에게 피해를 주는 것을 깨닫고는 자신의 전 재산을 인류에 선한 일을 한 사람에게 상을 주는 기금으로 내놓았다. 이 사람의 이름은 알프레드 노벨이다.
두 번째 왕후 에스더의 초대를 받은 아하수에로 왕이 잠이 오지 않아 역사를 읽다가 모르드개의 충성을 알게 되었습니다. 더구나 그에게 상을 주지 않았음을 기억하고 상을 내리려고 신하를 부르는데 마침 하만이 들어오고 있습니다. 그 날 밤에, 마침
하만은 초대 받은 자리에 가기 전에 아하수에로 왕에게 모르드개를 죽이려고 앞마당에 세운 높이 50규빗의 나무에 매달아 죽이려는 것을 허락받기 위하여 입궐하는 중이었습니다. 그런데 아하수에로 왕은 모르드개에게 상을 주려는 것이었습니다.
이러한 현상을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는 "페리페테리아(peripeteia)" 라고 합니다. "페리페테리아"는 "운명의 역전" 이란 뜻입니다.
인생은 일상의 반복(反復)같지만, 사실은 반전(反轉)을 기다리는 초초한 순간들의 연속이다. 예술이란 다가오는 지금 이 시간을 이전과는 질적으로 다른 순간으로 만드는 기술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반전(反轉)’을 그리스어로 ‘페리페테이아’(peripeteia)라고 명명하고 다음과 같이 정의한다. 되돌릴 반(反), 구를 전(轉)
“반전은 사건들이 일어난 과정에서 개연성과 필연성에 따라 발생하는 (급격한) 방향전환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시학이란 작품에서 "어떤 사건을 통해 자신이 습관적으로 가던 길에서부터 이탈하여 ‘주위의 다른 길로’ + ‘자신을 밀어 넣는 행위’(‘페리’ + ‘페테이아’) 라고 정의합니다.
하만은 두 번째 왕후 에스더의 초대를 받아 잔치 자리에 가기 전에 하만의 감정을 매우 기분 나쁘게 하는 모르드개를 죽이려고 앞 마당에 50규빗의 나무를 세웠으므로 그 나무에 하만을 잡아 죽이려는 계획을 허락받기 위해 왕궁을 찾은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왕이 신하를 부른 것은 궁중 역사서를 읽다가 암살당할뻔한 왕을 죽음의 사슬에서 구한 모르드개에게 아무런 상급을 내리지 않았다는 것이 안스러워 상을 주려는 것이었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런 현상을 “페리페테이아”, 즉 ‘운명의 역전’이라고 합니다.
에스더서는 역사에 영향을 미치는 인간의 통제 밖의 힘이
하나님이심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사건의 이면에 계시며 당신의 뜻을 이루어가시는 하나님을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이 혼란스러운 시대를 제대로 살아가기 위해서는 우리의 모든 삶에 임하시는 하나님의 주권적 역사를 통찰해내는 통찰력이
필요합니다. 인간의 뜻은 결국 무너지고 하나님의 계획만이 이루어질 것을 믿으며 하루하루 신실하게 살아야 할 것입니다.
에스더 6:1
이 밤에 왕이 잠이 오지 아니하므로 명하여 역대 일기를 가져다가 자기 앞에서 읽히더니.
에스더 6:4-5
왕이 가로되 누가 뜰에 있느냐 마침 하만이 자기가 세운 나무에 모르드개 달기를 왕께 구하고자 하여 왕궁 바깥 뜰에 이른지라. 시신이 고하되 하만이 뜰에 섰나이다 왕이 가로되 들어 오게 하라.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그 날 밤에, 마침 페리페테이아(운명의 역전) 반전(反轉) 인생역전
창세기 50:20
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 오늘과 같이 만민의 생명을 구원하게 하시려 하셨나니.
사무엘상 17:45
다윗이 블레셋 사람에게 이르되 너는 칼과 창과 단창으로 내게 오거니와 나는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 곧 네가 모욕하는 이스라엘 군대의 하나님의 이름으로 네게 가노라.
에스더 4:16
나를 위하여 금식하되 밤낮 삼일을 먹지도 말고 마시지도 마소서 나도 나의 시녀로 더불어 이렇게 금식한 후에 규례를 어기고 왕에게 나아가리니 죽으면 죽으리이다.
에스더 5:1-14
09-17-2021(금)
♦ 9월 17일(금)
♦ 오늘 읽어야 할 말씀 : 에스더 5:1∼14 ♦ 묵상을 위한 주제 : 잔치에 또 나오소서(8절) ♦ 성구 : 내가 만일 왕(王)의 목전(目前)에서 은혜(恩惠)를 입었고 왕(王)이 내 소청(所請)을 허락(許諾)하시며 내 요구(要求)를 시행(施行)하시기를 선(善)히 여기시거든 내가 왕(王)과 하만을 위(爲)하여 베푸는 잔치에 또 나아오소서 내일(來日)은 왕(王)의 말씀대로 하리이다.
“잔치에 또 나오소서(come tomorrow to the banquet)”
에스더는 죽으면 죽겠다는 각오로 왕 앞으로 나갔습니다(1절). 왕은 에스더를 위해 금규(금홀, 금지팡이, the gold scepter)를 내밀었고 심지어 에스더의 청은 무엇이든지 들어주겠다고 합니다(2∼3절).
위기가 기회로 바뀌는 순간이었습니다. 에스더는 절호의 기회를 맞아 신중하게 일을 진행합니다. 청을 아뢰기 전에 먼저 왕과 하만을 잔치에 초대했습니다(4~8절).
그런데 변수가 발생합니다. 하만이 성문을 지키는 모르드개의 태도에 화가 치솟아 당장 그를 죽일 계획을 세운 것입니다(9~14절).
운명이 날이 멀었기에 안심하고 있을 모르드개에게 죽음의 검은 그림자가 다가왔습니다.
하만은 오십 규빗이나 높은 나무를 세우고 내일 왕과 더불어 왕후 에스더의 잔치에 나갈 때에 왕에게 모르드개를 그 나무에 달기를 구하려고 합니다.
유대인들을 진멸하기 전에 먼저 눈에 가시와 같은 존재 모르드개를 먼저 처형하려고 계획한 것입니다.
오늘날도 사탄은 우리가 모르는 계획을 진행하고 있습니다. 사탄의 은밀한 계획일지라도 전능하신 아버지 하나님은 모두 알고 있습니다.
날마다 하나님께 기도와 말씀으로 나갈 때에 사탄의 계획을 무너트릴 뿐만 아니라 합력하여 좋은 길로 인도하실 것입니다.
악의 시간은 하만의 손에 있었지만, 선의 시간은 모르드개의 편에 기우러져 있습니다.
그 이유는 모든 유대 백성들이 한 마음으로 금식하며 기도한 것과 왕후 에스더는 금식한 후에 죽으면 죽을 것을 각오하고 왕 앞에 나갈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금식과 기도로 간절하게 하나님을 찾는다면 하나님의 위로와 평강을 경험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러한 은혜에 붙잡혀 삶의 영역안에서 하나님의 손을 경험하며 환난풍파 가운데서도 평안을 누리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 찬양 / 이 세상에 근심된 일이 많고
예수 내 구주! 예수 내 생명! 예수 내 권세!
에스더의 지혜 / 에스더 5:8
내가 만일 왕의 목전에서 은혜를 입었고 왕이 내 소청을 허락하시며 내 요구를 시행하시기를 선히 여기시거든 내가 왕과 하만을 위하여 베푸는 잔치에 또 나아오소서 내일은 왕의 말씀대로 하리이다.
어리석은 자는 그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없다 하도다 저희는 부패하고 소행이 가증하여 선을 행하는 자가 없도다.
잠언 14:3 미련한 자는 교만하여 입으로 매를 자청하고 지혜로운 자는 입술로 스스로 보전하느니라.
교만한 아하수에로 / 잠언 16:18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요 거만한 마음은 넘어짐의 앞잡이니라.
시편 149:4 여호와께서는 자기 백성을 기뻐하시며 겸손한 자를 구원으로 아름답게 하심이로다.
베드로전서 5:7 너희 염려를 다 주께 맡겨 버리라 이는 저가 너희를 권고하심이니라.
오늘의 기도
모든 염려를 주님께 맡겨 버릴 수 있는 믿음으로 살아가게 하옵소서!
에스더 4:1-17
09-16-2021(목)
♦ 9월 16일(목)
♦ 오늘 읽어야 할 말씀 : 에스더 4:1∼17 ♦ 묵상을 위한 주제 : 죽으면 죽으리이다(16절) ♦ 성구 : 당신(當身)은 가서 수산에 있는 유다인을 다 모으고 나를 위(爲)하여 금식(禁食)하되 밤낮 삼일(三日)을 먹지도 말고 마시지도 마소서 나도 나의 시녀(侍女)로 더불어 이렇게 금식(禁食)한 후(後)에 규례(規例)를 어기고 왕(王)에게 나아가리니 죽으면 죽으리이다.
왕후 “와스디”가 폐위 된 후에 “에스더”가 왕후가 되었습니다. 에스더는 신중하고 사려 깊은 여인이었습니다. 그런데 에스더에게 큰 시련이 닥쳤습니다.
왕의 최측근 하만은 왕 다음으로 높은 지위에 올랐습니다. 그가 출입하는 왕궁의 문에서 다른 사람들은 모두 꿇어 엎드려 절을 하였으나 모르드개는 무릎을 꿇지 않았고 절하지도 않았습니다.
이와 같은 모르드개 때문에 하만은 몹시 화가 났습니다. 모르드개가 유다인이라는 것을 알게 된 하만은 모든 유다인들을 죽이려는 계획을 품었습니다.
하만은아각( 아말렉) 사람으로서 여호와 하나님에게 경배하는 모르드개의 신앙을 용납치 않았습니다. 결국 모든 도성과 각 지방에서 한 날을 정하여 모든 유다인을 죽일 계획을 합니다. 당시 유대인들의 수가 대략 300-400만 명이었다고 합니다.
모르드개를 비롯하여 모든 유다 백성들은 굵은 베옷을 입고 대궐 문 앞에서 엎드려 통곡하였으며 각 지방의 유대인들도 금식하며 울며 재에 누운 자가 많았다고 합니다.
모르드개는 이 사실을 수산궁 에스더에게 알리어 “왕 앞에 간절히 구하라”고 전달합니다.
이러한 모르드개의 요구에 에스더는 감히 어떤 결단도 하기 어려웠습니다. 왜냐하면 와스디 왕후는 왕이 불렀을 때에 오지 않아서 폐위되는 화를 당했지만 또한 왕이 부르지도 않았는데 왕 앞에 나가는 것도 규례에 어긋나는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에스더가 자신의 곤란한 사정을 모르드개에게 전하였을 때 “너는 왕궁에 있으니 모든 유다인 중에 홀로 면하리라 생각지 말라.”고 합니다(4:13).
모든 유대인들이 죽음의 위기에 직면했다는 것을 알고 왕후 에스더는 죽으면 죽으리이다 결단하고 규례에 없지만 왕 앞에 나갈 것을 각오하고 모든 유대인들에게 금식하며 기도를 부탁한 후 왕 앞으로 나갑니다.
우리는 공동체입니다. 민족도 교회도 공동체입니다. 공동체가 어려울 때에 나 혼자 피한다고 나 혼자서 평안을 누릴 수 없습니다.
월남이 패망하여 공산화 될 때 무작정 배를 타고 바다로 나간 사람들이 대략 100만에 이르렀습니다. 그들을 보트 피플(boat people)이라고 합니다. 공동체를 상실한 백성들의 삶이 얼마나 어려운가를 엿볼 수 있었던 사례라고 하겠습니다.
많은 탈북민들이 중국에서 불법체류자가 되어 쫓기는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한국 전쟁이 일어났을 때 북한 괴뢰군이 남한 전 지역을 거의 장악하고 마지막 낙동강 전선에서 대치하고 있을 때 이승만 대통령은 부산 도지사 숙소로 목회자들을 초청을 하여 이렇게 부탁했다고 합니다.
“우리 한국군은 풍전등화와 같은 운명입니다. 지금은 장마철입니다. 비가 오지 않아야 비행기가 떠서 적진을 폭격할 수 있습니다. 비가 계속 오면 적은 낙동강을 건너올 것입니다. 우리가 의지할 분은 하나님 밖에 없으니 목사님들은 금식하며 기도해 주시기 바랍니다.”
많은 목회자들이 한 마음으로 일주일 동안 철야하며 금식하였고 계속되던 비가 그치자 전투기는 적의 주력 부대를 풍비박산 괴멸시켜 대한민국을 지킬 수 있었고 나아가 인천 상륙작전까지 성공하므로 전세를 바꾸어 놓을 수 있었습니다.
교회 공동체가 코로나 방역이라는 제도에 의해서 예배 공동체가 흔들리고 있습니다. 정부의 코로나 방역에 대한 생각이 교회마다 다르다는 것이 문제라고 하겠습니다.
성경적 가치관과 올바른 역사관이 없다면 서로 다른 주장과 행동에 의해서 교회 공동체는 쉽게 무너질 수밖에 없습니다.
위기의 때는 함께 모여 금식하며 기도하면서 마음과 생각을 하나로 묶어 코로나 방역과 예배에 대한 선지자적인 외침을 한 목소리로 쏟아낼 때 새로운 방향을 찾게 될 것입니다.
♪ 찬양 / 옳은 길 따르라 의의 길을
예수 내 구주! 예수 내 생명! 예수 내 권세!
에스더 4:16
당신은 가서 수산에 있는 유다인을 다 모으고 나를 위하여 금식하되 밤낮 삼일을 먹지도 말고 마시지도 마소서 나도 나의 시녀로 더불어 이렇게 금식한 후에 규례를 어기고 왕에게 나아가리니 죽으면 죽으리이다. 아멘
필사즉생(必死則生) 반드시 죽으려 하는 자는 살고 행생즉사(幸生則死) 요행히 살고자 하는 자는 죽을 것이다.
모르드개의 용기
8절. 왕에게 나아가서 그 앞에서 자기의 민족을 위하여 간절히 구하라. - 민족을 위한 기도
14절. 네가 왕후의 위를 얻은 것이 이 때를 위함이 아닌지 누가 아느냐? - 민족을 위한 기회
에스더의 두 가지 결단
11절. 내가 부름을 입어 왕에게 나아가지 못한지가 이미 삼십일이라. - 규례를 무시하는 믿음
16절. 죽으면 죽으리이다. - 생명까지도 바치려는 믿음
에스더 4:17 모르드개가 가서 에스더의 명한대로 다 행하니라.
오늘의 기도 합력하여 좋은 결과를 얻게 하옵소서!
이윤영 의원 기도(일동기립)
이 우주와 만물을 창조하시고 인간의 역사를 섭리하시는 하나님이시여, 이 민족을 돌아보시고 이 땅에 축복하셔서 감사에 넘치는 오늘이 있게 하심을 주님께 저희들은 성심으로 감사하나이다.
오랜 세월 동안 이 민족의 고통과 호소를 들으시고 정의의 칼을 빼서 일제의 폭력을 굽히시사 하나님은 이제 세계만방의 양심을 움직이시고 또한 우리 민족의 염원을 들으심으로 이 기쁜 역사적 환희의 날을 이 시간에 우리에게 오게 하심은 하나님의 섭리가 세계만방에 현시하신 것으로 믿나이다.
하나님이시여, 이로부터 남북이 둘로 갈리어진 이 민족의 어려운 고통과 수치를 신원하여 주시고 우리 민족, 우리 동포가 손을 같이 잡고 웃으며 노래 부르는 날이 우리 앞에 속히 오기를 기도하나이다.
하나님이시여, 원치 아니한 민생의 도탄은 길면 길수록 이 땅에 악마의 권세가 확대되나 하나님의 거룩하신 영광은 이 땅에 오지 않을 수 없을 줄 저희들은 생각하나이다. 원컨대, 우리 조선독립과 함께 남북통일을 주시옵고 또한 민생의 복락과 아울러 세계평화를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거룩하신 하나님의 뜻에 의지하여 저희들은 성스럽게 택함을 입어 가지고 글자 그대로 민족의 대표가 되었습니다.
그러하오나 우리들의 책임이 중차대한 것을 저희들은 느끼고 우리 자신이 진실로 무력한 것을 생각할 때 지와 인과 용과 모든 덕의 근원되시는 하나님께 이러한 요소를 저희들이 간구하나이다.
이제 이로부터 국회가 성립되어서 우리 민족의 염원이 되는 모든 세계만방이 주시하고 기다리는 우리의 모든 문제가 원만히 해결되며 또한 이로부터 우리의 완전 자주독립이 이 땅에 오며 자손만대에 빛나고 푸르른 역사를 저희들이 정하는 이 사업을 완수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하나님, 이 회의를 사회하시는 의장으로부터 모든 우리 의원 일동에게 건강을 주시옵고, 또한 여기서 양심의 정의와 위신을 가지고 이 업무를 완수하게 도와주시옵기를 기도하나이다. 역사의 첫걸음을 걷는 오늘의 우리의 환희와 감격에 넘치는 이 민족적 기쁨을 다 하나님에게 영광과 감사를 올리나이다. 이 모든 말씀을 주 예수 그리스도 이름 받들어 기도하나이다. 아멘
* 히브리서 12:4 너희가 죄와 싸우되 아직 피흘리기까지는 대항하지 아니하고. In your struggle against sin, you have not yet resisted to the point of shedding your blood.
*갈라디아서 3:13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 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에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신명기 21:22-23 사람이 만일 죽을 죄를 범하므로 네가 그를 죽여 나무 위에 달거든 그 시체를 나무 위에 밤새도록 두지 말고 그 날에 장사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기업으로 주시는 땅을 더럽히지 말라 나무에 달린 자는 하나님께 저주를 받았음이니라.
*베드로전서 2:24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이는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는 나음을 얻었나니.
*열왕기하 6:5-7 한 사람이 나무를 벨 때에 쇠도끼가 물에 떨어진지라 이에 외쳐 이르되 아아, 내 주여 이는 빌려온 것이니이다 하니. 하나님의 사람이 이르되 어디 빠졌느냐 하매 그 곳을 보이는지라 엘리사가 나뭇가지를 베어 물에 던져 쇠도끼를 떠오르게 하고. 이르되 너는 그것을 집으라 하니 그 사람이 손을 내밀어 그것을 집으니라
에스더 3:1-15
09-15-2021(수)
♦ 9월 15일(수)
♦ 오늘 읽어야 할 말씀 : 에스더 3:1∼15 ♦ 묵상을 위한 주제 : 부르(7절) ♦ 성구 : 아하수에로 왕 십 이년(十 二年) 정월(正月) 곧 니산월에 무리가 하만 앞에서 날과 달에 대하여 부르 곧 제비를 뽑아 십이월(十二月) 곧 아달월을 얻은지라.
“부르(the Pur)”는 히브리어 “푸르”의 복수 형으로 “제비 뽑다”는 ‘아카드어’에서 온 단어입니다.
“부림절”은 고대 페르시아 시대에 아각 사람 하만이 유대인들을 살해하려던 음모에서 구원 받은 것을 기념하는 절기를 말합니다.
아각 사람 하만은 유대인들을 살해할 아달월(Adar)을 얻었고 13일 하루 동안 페르시아 제국 내에 거주하는 모든 유대인들을 살해할 음모를 꾀하였습니다.
하지만 극적인 반전을 통하여 유대인들을 살해하려던 하만은 죽임을 당하고 반면 살해당할 위기에 빠졌던 유대인들은 구원을 얻었습니다. 이것을 기념하는 날이 부림절 입니다.
모르드개 한 사람의 잘못은 그 한 사람만 처벌하면 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다 백성 모두를 죽이려는 것은 사람의 계획과 생각이 아니라 사탄의 계략이라고 하겠습니다.
마치 유다에게 사탄이 예수님을 팔아넘길 생각을 넣은 것과 같습니다(요 13:22).
사탄은 생각을 사람에게 집어넣어 그 사람의 마음을 흔들어 놓고 악한 행동을 하게 합니다. 오직 사탄의 목적은 우리를 죽이고 멸망시키는 것이 목적이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백성 모두가 완전히 멸망당하므로 장차 약속된 메시아가 이 세상에 오시는 것을 훼방하려는 것이 사탄의 계략이었습니다. 이러한 계략을 성공시키려고 사탄은 하만의 교만함과 악함을 사용하려 했습니다.
우리에게 태초부터 약속하신 일은 우리를 살리려 이 땅에 메시아가 오시는 것이었습니다. 그 약속대로 메시아는 이 땅에 오셔서 우리 죄를 대신해 죽으시고 삼일 만에 부활하셨습니다. 이 일은 성취되었고 우리를 위해 죽으시고 부활하셔서 우리의 생명의 주가 되신 예수님을 믿으면 구원을 얻습니다.
이 약속의 보증으로 성령을 우리마음에 보내주셔서 영원히 떠나지 않으시고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 하신 일을 날마다 알려주십니다.
그리고 이제는 우리 뜻과 생각이 아니라 오직 예수님의 말씀과 뜻대로만 우리가 살아가도록 인도하십니다.
이것은 성경의 기록대로 예수님을 주인으로 믿는 자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우리의 생각이나 형편이 어떠하든 이미 우리에게 이루어진 일입니다.
눈에 보이는 환경이 어떻든 내 생각이 어떻든 그것은 진리와는 상관없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말씀만이 진리고 사실입니다.
오늘도 우리의 주인 되신 좋으신 하나님 신실하신 아버지만 믿고 주인이신 하나님말씀에만 순종하므로 기쁘고 감사하는 거룩한 삶에 승리하는 성도가 되시기를 우리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 찬양 / 구주와 함께 나 죽었으니
예수 내 구주! 예수 내 생명! 예수 내 권세!
(도입 이야기)
꼬마 감자가 엄마 감자에게 “엄마, 나 감자 맞아?”라고 물었다. 엄마 감자는
“당근이지!”라고 답했다. 그 길로 꼬마 감자는 가출했다. 엄마 감자가 자기보고 ‘당근’이라고 말하자 정체성에 혼란을 느꼈기
때문이다. 가출을 했다가 돌아온 꼬마 감자가 할머니 감자에게 다시 물었다. “할머니, 나 감자 맞아?” 경상도 출신의 할머니
감자는 “오이야(오냐)”라고 대답했다. 그 길로 꼬마 감자는 또 다시 집을 나가고….
우리를 웃게 만드는
이야기이지만 한편으로는 자기 정체성을 아는 것의 중요성을 깨닫게 만든다. 수많은 사람들이 자기가 누구인지, 어떤 목적과 사명을
지닌 존재인지, 공동체의 구성원으로서 어떤 책임과 권리를 지닌 존재인지를 분별하지 못하는 것 같다. 그 결과 삶의 보람을 잃어버린
채 공동체에 꼭 필요한 존재로서 기여하지 못하고 오히려 피해를 끼치는 행동을 보이기도 한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선민으로 택하셨다. 그리고 시시때때로 그들이 하나님 앞에서 어떤 존재인지를 깨닫게 해주셨다.
아브라함을 부르실 때에는 “너는 복의 근원이 될지라 (중략) 땅의 모든 족속이 너를 인하여 복을 얻을 것이니라”고 말씀하셨다.
또한 애굽에서 종살이하던 이스라엘 백성들을 구원하신 뒤에는 “너희가 내게 대하여 제사장 나라가 되며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고
말씀하시며 백성들이 품고 있어야 할 자기 정체성을 분명하게 심어주셨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이스라엘 백성들은 수백년
동안 정체성을 잃어버린 채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했다. 우상을 숭배하며 갖은 죄악에 빠져 살다가 바벨론에서 수십년 동안 종살이를
하게 되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는 예언자들을 통해 다시 그들의 마음에 정체성을 심어주셨다.
(도입 이야기) 어느
날 새끼 호랑이가 엄마와 풀밭에서 재롱을 떨며 장난을 하고 있었습니다. 새끼 호랑이가 그 어미 호랑이에게 물었습니다. "나 호랑이
맞아? 달리기도 못하고 토끼 한 마리도 못 잡고 사냥도 못하는 내가 호랑이 맞아?" 어미는 대답합니다. "그럼 내가 낳은 새끼니까
너는 틀림없는 호랑이다" 또 물어 봅니다. "강아지 만도 못한데 나 호랑이 맞아? 난 아무 것도 못하는데 내가 호랑이 맞아?"자꾸
물어보니까 화가 난 어미 호랑이가 "야 이 개새끼야, 그렇다면 그런 줄 알아" 졸지에 개새끼가 되어 버렸습니다. 여러분 아무
것도 못해도 호랑이는 호랑이요, 사람은 사람입니다.
에스더 3:7
아하수에로왕 십 이년 정월 곧 니산월에 무리가 하만 앞에서 날과 달에 대하여 부르 곧 제비를 뽑아 십이월 곧 아달월을 얻은지라.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아하수에로 왕 12년 / BC 474년
에스더 3:1-2
그 후에 아하수에로 왕이 아각 사람 함므다다의 아들 하만의 지위를 높이 올려 모든 함께 있는 대신 위에 두니. 대궐 문에 있는 왕의 모든 신복이 다 왕의 명대로 하만에게 꿇어 절하되 모르드개는 꿇지도 아니하고 절하지도 아니하니.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신앙의 정체성(신적 경배 거부) / 하나님만 섬기리라
마태복음 16:16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여 이르되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에스더 3:3-4
대궐 문에 있는 왕의 신복이 모르드개에게 이르되 너는 어찌하여 왕의 명령을 거역하느냐. 날마다 권하되 모르드개가 듣지 아니하고 자기는 유다인임을 고하였더니 저희가 모르드개의 일이 어찌 되나 보고자 하여 하만에게 고하였더라.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민족의 정체성 / 천국시민
빌립보서 3:20
오직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 거기로서 구원하는 자 곧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노니.
에스더 3:6
저희가 모르드개의 민족을 하만에게 고한고로 하만이 모르드개만 죽이는 것이 경하다 하고 아하수에로의 온 나라에 있는 유다인 곧 모르드개의 민족을 다 멸하고자 하더라.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역사의 정체성(민족의 위기) / 올바른 역사 인식
요한계시록 22:13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나중이요 시작과 끝이라.
세 가지 정체성(Three Identities)
1. 신앙(Faith), 2. 민족(People), 3. 역사(History)
요한일서 3:10 이러므로 하나님의 자녀들과 마귀의 자녀들이 나타나나니 무릇 의를 행치 아니하는 자나 또는 그 형제를 사랑치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께 속하지 아니하니라.
오늘의 기도 하나님께 속한 백성으로 살아가게 하옵소서!
사도 바울의 고백
1. 나는 날마다 죽노라(고린도전서 15:31)
형제들아 내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서 가진 바 너희에 대한 나의 자랑을 두고 단언하노니 나는 날마다 죽노라
2. 나는 날마다 복종하노라(고린도전서 9:27)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신이 도리어 버림을 당할까 두려워함이로다.
* 부림절
유대인들이 전통적으로 지켜오는 부림절이다. 유대인의 월력은 해가 진 후부터 다음날 해가 지기까지를 하루로 계산하기 때문에 부림절의 시작은 정확히 밤부터 시작된다.
(사진은 부림절에 예루살렘의 가장 중심가인 벤예후다 거리를 가득 메운 유대인들 모습)
부림절을
맞는 현대 유대인들의 모습이 다양하지만, 성경에 기록된 부림에 대한 주요 내용만 간단히 소개한다. 부림절은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유대인들이 지켜야 할 세 절기(유월절, 칠칠절, 초막절)에는 포함되지 않지만, 하누카와 더불어 이스라엘 내외 모든 유대인들이
기쁨으로 지키는 국가적 명절이다.
율법이 정한 절기가 아니기 때문에 유대인들은 부림절에 일하고 매매행위를 해도 종교적인 해를
당하지 않는다.
푸림은 히브리어 푸르의 복수 형태로써 ‘제비 뽑다’는 의미의 아카드어에서 온 단어이다. 부림절은
고대 페르시아 시대에 아각 사람 하만이 유대인들을 살해하려던 음모에서 구원 받은 것을 기념하는 절기이다.
에스더 3:7절에
의하면, 아각 사람 하만은 제비를 뽑아 유대인들을 살해할 달로 아달월 (Adar)을 얻었고 13일 하루 동안 페르시아 제국 내에
거주하는 모든 유대인들을 살해할 음모를 꾀하였다. 하지만 극적인 반전을 통하여 유대인들을 살해하려던 하만은 죽임을 당하고, 반면
살해당할 위기에 빠진 유대인들은 구원을 얻었다. 이것을 기념하는 날이 부림절이다.
유대인들은 아달월 14일과 15일 이틀간
부림절로 지킨다.
에스더 9:17-22절에 부림절에 대한 말씀이 기록되었다.
아달월
13일에 그 일을 행하였고 14일에 쉬며 그 날에 잔치를 베풀며 즐겼고 수산에 거한 유다인은 13일과 14일에 모였고 15일에
쉬며 이 날에 잔치를 베풀어 즐긴지라. 그러므로 촌촌의 유다인 곧 성이 없는 고을 고을에 거하는 자들이 아달월 14일로 경절을
삼아 잔치를 베풀고 즐기며 서로 예물을 주더라. 모르드개가 이 일을 기록하고 아하수에로 왕의 각 도에 있는 모든 유다인에게 무론
원근하고 글을 보내어 이르기를 한 규례를 세워 해마다 아달월 14일과 15일을 지키라. 이 달 이 날에 유다인이 대적에게서
벗어나서 평안함을 얻어 슬픔이 변하여 기쁨이 되고 애통이 변하여 길한 날이 되었으니 이 두 날을 지켜 잔치를 베풀고 즐기며 서로
예물을 주며 가난한 자를 구제하라.
유대인들은 부림절에 네 가지를 실천한다.
첫째는 회당에 참석하여 공적으로
읽는 에스더서를 듣는 일이다.
회당에 참석하여 첫날과 둘째날에 에스더서를 들으며, 모든 사람들은 2:5절, 8:15-16절,
10:3절에 이르러서는 모두 한 목소리로 그 구절을 암송한다. 이 세 구절은 모르드개의 인물, 승리, 유대인의 구원을 담고 있는
말씀들이다.
두번째는 가까운 이웃과 친지들에게 선물을 보내며 기쁨을 함께 나눈다.
세번째는 가난한 사람 두 명 이상에게 자선을 베푼다.
네번째는 세우다트 푸림 만찬을 나눈다.
안식일을
포함하여 유대인들이 절기마다 갖는 만찬은 가족과 친지들이 모여 단순히 음식을 먹는 것 이상의 종교적으로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안식일 식탁에서도, 부림절 식탁에서도 그들은 그 날과 그 의미를 반복하여 묵상한다.
그리스도를 배제한 채, 만약 여기에 그리스도를 통하여 날과 절기, 성경의 구원 사건들을 재해석하여 묵상할 수 있다면, 교회에서 성경을 가르치는 좋은 교육의 기회가 될 것으로 생각한다.
부림절을 이해하기 위해 알아야 할 두 가지
1. 디아스포라 상황에서 주어진 절기 2. 백성들 자발적 동의로 제정된 절기
▲하만이 모르드개가 말을 타고 있는 모습을 부럽고 두려운 모습으로 바라보고 있다. 17세기 네덜란드 화가 피터르 라스트만(Pieter Lastman, 1583-1633)의 그림.
모세 율법에 규정된 절기들을 잇는 부활절, 맥추절, 추수감사절은 그 명맥을 이어가지만, 율법에 규정되지 않는 절기인 부림절은 교회에서 거의 무시된다.
필자는 부림절을 맞아, 그날의 의미를 새롭게 되새기는 것이 신앙의 본질을 이해하는데 중요하다고 생각하여, 이 지면을 빌어 부림절의 의미를 함께 나누고자 한다.
‘부림’은 본래 페르시아의 총리 하만이 유대인의 학살 날짜를 정하기 위해 던진 제비 돌을 일컫는 말이었다(에 3:7; 9:26). 하지만 에스더서에 묘사된 대로 그 ‘부림’이 정한 날은 유대인의 멸망이 아닌 승리의 날이 된다.
부림절은 그런 죽음에서 생명으로의 반전의 역사를 기념하는 날이다. 하지만 이 날은 유대인들이 죽다 살아난 것을 단순히 축하는 날이 아니다. 부림절이 주는 교훈은 이보다 훨씬 깊다.
부림절의 의미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두 가지 사실을 인지해야 한다.
첫째, 부림절은 이스라엘 백성이 자기 땅에 살아가는
상황을 전제한 절기가 아니라, 그들이 이방 나라에 흩어져 사는 디아스포라의 상황에 주어진 절기라는 사실이다.
다시 말해 하나님이 백성이 하나님이 주신 땅에서 누리는 축복을 감사하는 날들이 아니라, 하나님이 없는 것 같은 상황에서 신앙인들이 스스로 일군 기적을 축하하는 날이 부림절이다.
둘째, 이스라엘의 다른 절기들은 하나님 명령의 형태로 내려진 것이지만, 부림절은 모르드개와 에스더의 제안에 백성들의 자발적
동의로 제정된 것이다.
에스더서는 부림절을 백성들이 자발적으로 수용한 결과임을 세 번이나 반복하며 강조한다(에 9:23, 27,
31).
이 두 가지를 염두에 두고 부림절의 의미를 새겨보자. 부림절은 단순히 유대인들이 죽음을 면했음을, 혹은 대적들을 멸했음을
자축하는 날이 아니다. 그 날은 하나님이 역사하지 않는 듯한 세상에서, 유대적 신앙 정체성을 지키며 살아가겠다고 새롭게 다짐하는
날이다.
당시 페르시아에 살던 유대인들에게 신앙은 역사상 처음으로 ‘선택’의 문제가 되었다. 이스라엘 땅에서 유대인의 부모 아래 태어나면 유대인이 되었던 이전에는 유대적 정체성이 선택의 문제가 아니었다.
하지만 페르시아 치하에서 유대인들은 본인이 원하면 페르시아인으로 살 수 있었다. 페르시아 사람들도 제국의 방식에 순응하기만 하면 민족 출신은 굳이 따지지 않았다.
때문에 많은 유대인들이 페르시아식으로 개명한 후 유대인의 정체성을 숨기고 살아갔다. 그것이 출세와 성공에 도움이 되었기 때문이다. 유대인의 부모에게서 태어났다 해도, 신앙을 고집하지 않으면 페르시아 사회에서 성공할 수 있었다.
에스더도 자신의 유대인 이름(‘하다사’)을 숨기고 페르시아인들이 사랑하는 여신을 연상시키는 이름인 ‘에스더’로 궁중 생활을 시작한다. ‘마르둑의 사람’이라는 이름을 가진 모르드개도 유대인의 신분을 숨기고 살았다.
하지만 사회의 불의가 신앙의 임계점을 넘자, 모르드개와 에스더는 자신이 유대인임을 밝히고 유대인으로 살아가는 결단을 한다.
물론 그 순간 모르드개와 에스더는 정반대의 선택을 했을 수도 있다. 그랬다면 오늘날 부림절은 없었을 것이다.
그날이 멸망이 아닌 승리의 날로 뒤바뀐 것은 유대인으로 살겠다는 의지와 선택들이 쌓이고 쌓였기 때문이다. 모르드개와 에스더를 본받아 신앙의 이름으로 불의와 싸운 사람들이 들불같이 일어났기 때문이다.
▲렘브란트 작품 <에스더의 연회에 참석한 아하수에로와 하만>.
이처럼 부림절은 유대인들이 불의한 세상에서 신앙의 정체성을 지키며 살겠다고 공동체적으로 다짐하는 날이다.
요람 하조니는 다음과 같이 부림절의 의미를 설명한다.
“유대인들이 자발적으로 받아들인 것은 부림절이라는 정기 축제이지만, 모르드개가 정말 의도한 것은 (하나님의) 언약을 새롭게
수용하는 운동이라 말할 수 있다. … 그리고 하나님(의 성전)과 멀리 떨어져 사는 유대인들을 위한 세계시민적 메시지를 추가로
전한다.
유대인들이 스스로 일어나 그들의 신앙을 위해 싸운다면, 디아스포라의 환경이 유대 개인뿐 아니라 유대 민족 전체에게 권능과 생명을 허락할 수 있다!” (<에스더서로 고찰하는 하나님과 정치>, 홍성사, 253-54쪽)
부림절의 주인공들에게 유대인이라는 사실은 두려움 가운데 감추어야 할 것이 아니었다. 유대인들이 유대인다워졌을 때, 즉 불의와
담대히 맞서 싸웠을 때, 페르시아 사람들이 오히려 유대인을 존중하고 두려워했다. 나아가 페르시아인들 중 스스로 유대인이 되려는
사람도 생겨났다(에 8:17).
모르드개는 신앙의 이름으로 하만의 독재에 굴하기 거절하다가 직위와 목숨을 잃을 위기에 처했고, 에스더도 자신의 직위와 목숨을 걸고 유대 민족을 학살하려는 하만의 악한 계획을 온몸으로 막아냈다.
부림절의 주인공이 되기 위해서 모든 사람들이 자신의 직위와 목숨을 걸 필요는 없다. 하지만 “네가 왕후의 자리를 얻은 것이 이 때를 위함이 아니냐”라는 모르드개의 도전(에 4:13-14)은 우리 모두에게 여전히 유효하다.
신앙의 가치를 실천하려 할 때, 우리에게는 내려놓아야 할 무엇인가가 생긴다. 그것이 포기일 수도 있고, 나눔일 수도 있다. 귀찮다고 혹은 두렵다고 부림의 날을 멸망에서 승리로 바꾸는 일을 게을리 해서는 안 될 것이다.
신앙인들이 이 세상을 정의와 사랑으로 채워가는 일에 힘쓸 때, 세상도 신앙인들을 존중하게 되고 신앙인들의 편에 서려 할 것이다.
에스더 2:1-23
09-14-2021(화)
♦ 9월 14일(화)
♦ 오늘 읽어야 할 말씀 : 에스더 2:1∼23 ♦ 묵상을 위한 주제 : 굄을 얻더라(15절) ♦ 성구 : 모르드개의 삼촌(三寸) 아비하일 딸 곧 모르드개가 자기(自己)의 딸 같이 양육(養育)하는 에스더가 차례(次例)대로 왕(王)에게 나아갈 때에 궁녀(宮女)를 주관(主管)하는 내시(內侍) 헤개의 정(定)한 것 외(外)에는 다른 것을 구(求)하지 아니하였으나 모든 보는 자(者)에게 굄을 얻더라.
“굄을 얻는다”는 것은 “호감을 주었다”는 뜻입니다(현대인의 성경).
사람을 처음 만났을 때 “호감(好感)”을 갖는 사람과 “비호감(非好感)”으로 다가오는 사람이 있습니다.
‘와스디’는 왕과 방백들에게 ‘비호감’이 되었지만 ‘에스더’는 ‘호감’이 되었습니다.
“에스더”가 호감을 갖게 된 배경을 살펴보겠습니다.
‘에스더’가 왕비로 간택된 것은 ‘와스디’가 폐위되고 4년이 지난 후였습니다.
본문에서 ‘에스더’에 대해서 이렇게 소개합니다(7절). “그의 삼촌의 딸 하닷사(도금양나무) 곧 에스더(별)는 부모가 없었으나 용모가 곱고 아리따운 처녀라 그의 부모가 죽은 후에 모르드개가 자기 딸 같이 양육하더라.” 부모의 충분한 보살핌을 받지 못했던 에스더였지만 그런 기색 없이 에스더의 얼굴은 곱고 아리따웠습니다. 마음과 품행이 곱고 아름다웠습니다.
어느 날 왕의 조서와 명령이 반포되었고, 수많은 사람들이 왕후가 되기 위해서 모였습니다. 요세푸스의 기록에 의하면 처녀들이 도성 수산에 많이 모였는데 그 숫자는 약 400명 정도였다고 합니다.
그들에게 있어서 왕에게 나아갈 수 있는 기회는 한번 이었습니다. 그들은 이 한 번의 기회에 왕의 마음을 사로잡아야 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왕에게 나아갈 때 치장할 수 있는 화려한 장신구들을 다 구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구하는 것은 관리들이 다 주었습니다. 그런데 에스더는 내시 “헤개”가 정한 것 외에는 다른 것을 구하지 아니했습니다(15절).
“모르드개의 삼촌 아비하일의 딸 곧 모르드개가 자기의 딸 같이 양육하는 에스더가 차례대로 왕에게 나아갈 때에 궁녀를 주관하는 내시 헤개가 정한 것 외에는 다른 것을 구하지 아니하였으나 모든 보는 자에게 사랑을 받더라.”
아하수에로 왕에게 호감을 얻게 된 에스더는 특별한 화장품을 사용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임했습니다.
에스더서를 읽으면서 잊지 말아야 할 명제는 “숨어계신 하나님이 지금 무엇을 하고 계시는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보이지 않는 곳에서 에스더가 왕후가 되게 하셨고 모르드개는 왕의 암살 음모를 밝히는 공을 세우게 하십니다.
그러나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볼 수 있는 안목(영안)이 없다면 그저 한 나라의 왕후가 교체된 것으로 볼 수밖에 없습니다.
이 땅에서 일어나는 크고 작은 모든 일들이 우연히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손길이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까?
만일 오늘의 말씀을 에스더와 모르드개가 페르시아 제국에서 성공한 이야기로만 끝맺음을 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가 어떻게 진행되고 있는가를 살펴야 합니다.
사랑하는 믿음의 동지들이여! 하나님께서 어떤 계획과 목적을 이루시려고 나를 여기까지 오게 하신 것일까 생각해 봅시다.
에스더가 왕과 모든 대신들의 마음을 사로잡은 것은 외모의 아름다움이 아니라 감추어진 그 무엇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 무엇은 곧 신앙입니다. 신앙이란 외모로만 사람을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중심을 보시고 결정하시는 하나님의 의도를 생각하며 오늘도 내면의 아름다움을 가꾸는 일에 성공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우리는 세상에 속해 있지만 세상과는 구별된 하나님의 사람들입니다. 하나님께서 에스더에게 역사하셨던 것처럼 오늘도 우리들에게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찾아 믿음으로 굳게 세워지는 주님의 은총이 넘쳐나기를 기도합니다.
♪ 찬양 / 나의 갈길 다가도록
예수 내 구주! 예수 내 생명! 예수 내 권세!
에스더 2:15
모르드개의 삼촌 아비하일의 딸 곧 모르드개가 자기의 딸 같이 양육하는 에스더가 차례대로 왕에게 나아갈 때에 궁녀를 주관하는 내시 헤개의 정한 것 외에는 다른 것을 구하지 아니하였으나 모든 보는 자에게 굄을 얻더라. 아멘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 굄을 얻더라 / 헨(chên) חֵן(자비, 품위, 탄원) 호감을 주었다(현대인 성경) 아리따웠다(공동번역)(새번역)
에스더 2:1-2
후에 크셀크세스 황제는 분노가 가라앉자 와스디가 행한 일과 자기가 내린 칙령을 곰곰이 생각하였다. 그때 황제의 자문관들이 이렇게 말하였다. 아름다운 처녀를 찾아보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첫째, 감정에 흔들리지 말자! 분노(헤마. chêmâʼ) חֵמָה 분노, 독, 따뜻함
세계 4대 해전
1. 살라미스 해전(Battle of Salamis) BC 480년 그리스 아테네 vs 페르시아
에스더서의 배경은 칠십 년의 포로생활을
마치고, 스룹바벨에 의한 일차 귀환과 에스라에 의한 이차 귀환의 중간 시기에 페르시아에서 일어난 사건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본문은 아하수에로 왕 때에 있었던 일입니다(BC 486-BC 465). 그는 바사의 네 번째 왕이었습니다. (고레스 - 캄비세스 - 다리오 - 아하수에로 - 아닥사스다)
아하수에로 왕의 통치와 권력이 인도에서 구스땅 즉 에디오피아에 이르는 127도 즉 아주 광활한 지역을 다스리고
있었습니다. 127도란 127개 나라를 말합니다.
바벨론 제국을 무너트린 강력한 페르시아 왕의 권력은 점점 더 강력한 제국으로 자리를 잡았습니다. 더구나 에스더서에는 "여호와"라는 이름이 단 한번도 사용하지 않은 특별한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그가 통치한 지 3년이 되던 해, 왕은 아주 성대한 연회를 베풀었습니다. 그 연회에는 지방의 모든
장수와 지방관, 그리고 귀족들이 참여하였고, 그 기간은 여섯 달이나 계속되었습니다. 그 기간에, 왕은 연회 참석자들에게 자신의
제국이 얼마나 큰 부를 누리고 있는지, 얼마나 강력한 나라인지 한껏 과시했습니다.
이 긴 연회가 끝나갈 무렵,
아하수에로왕은 이번에는 모든 백성을 대상으로 왕궁 후원 뜰에서 칠 일간에 걸쳐 성대한 잔치를 열었습니다.
6절에 보면, 후원 뜰은
백색, 녹색, 청색 휘장들로 풍성하게 장식되었고 그 휘장들은 자색 가는 베 줄과 은 고리로 대리석 기둥에 고정되었고, 뜰은
화반석, 백석, 운모석, 흑석으로 포장되었으며 금과 은으로 제작된 아름다운 걸상들이 그 포장된 뜰 여기저기에 놓여 있었습니다.
거기에 더해, 포도주는 서로 모양이 다른 수많은 금잔들 안에 담겨 있었습니다. 그리고 왕은 참석자들이 원하는 만큼 마시도록
허락했습니다. 얼마나 성대하고 화려한 잔치인지 상상이 가십니까?
왕의 아내인 왕후 와스디는 별도의 장소에서 여인들을
위해 잔치를 베풀었습니다. 그리고 잔치의 마지막 일곱째 날, 왕은 술 때문에 기분이 고조된 상황에서 어전 내시 일곱 명에게 명하여
왕후 와스디에게 왕후의 옷을 입혀 자기 앞으로 데려오도록 했습니다.
그 이유는 왕후의 아름다움을 지방관과 백성에게
뽐내고 싶었던 것이었습니다. 이 또한 왕, 자신의 탁월성을 과시하려는 욕망에 비롯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왕후는 이 왕의 명령을
거부하였습니다.
왜 왕후가 이런 왕의 명령을 거부하였는지 정확히는 알 수 없지만, 여러 학자의 추측 중 술 취한 손님들에게 자신의
모습을 보임으로서 얻게 되는 왕후로서의 위엄에 대한 손상이 가장 타당한 이유였을 겁니다.
왕은 왕후가 자신의 명령에
따르지 않자 굉장히 분노했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강력한 왕이라 여긴 자신에게, 그것도 많은 지방관과 백성이 보는 앞에서 왕의
명령을 거부한 것은 자신에게 대한 일종의 모독이었고, 도전이었다고 여겼지 않았을까요?
왕은 이 상황에서 어떻게
처신해야 할지를 규례와 법률에 정통한 자들에게 물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대표격인 지방관 므무간(박사 라는 뜻)이 왕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16절 이하의 내용입니다.
므무간은, 그 나라에 사는 모든 여인이 왕후의 행위에 대해 듣게 되면 그들도 왕후의 예를 따라 그들의
남편을 존경하지 않을 것이고, 그래서 왕후는 왕에게뿐 아니라 지방의 관리들과 백성 모두에게 잘못을 저지른 것이다고 지적했습니다.
그리고 왕후가 다시는 아하수에로왕 앞으로 나오지 못하도록 하는 조서를 내려 그것을 법으로 규정하고, 왕후에게 속한 모든 것을 빼앗고, 그녀의 지위를 다른 이에게 넘기라고 조언했습니다.
그렇게
하는 것이 그 나라의 모든 여인이 남편을 존경하게 되는 본보기를 보여 주는 것이라 므무간은 말했습니다. 결국, 그 잔치에
참석했던 모든 이들은 이 므무간의 조언에 찬성했고, 왕은 므무간의 조언을 따라 왕후의 지위를 박탈했습니다.
여기까지가
오늘 본문의 이야기입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마치 일반 역사서를 읽는 듯한 느낌을 받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이 단 한 번도
언급되지 않기 때문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이 단 한 번도 언급되지 않는 것은, 에스더서 전체의 특징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비록 하나님의 이름에 대한 언급은 단 한 번도 없다 하더라도, 오늘 본문을 통해서 그리고, 앞으로 계속 보게 될 에스더서를 통해 선명하게 보여지는 것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섭리입니다.
오늘 본문은 음모로 인해 말살 위기 가운데 처하게 될 유대민족을 구하기 위해, 에스더의 왕후 등극의 밑 작업을 하시는 하나님의 일하심을 볼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을
통한 하나님의 구원계획이 인간의 계략과 방해로 마치 중단되는 것처럼 보여도 하나님은 이미 인간의 모든 결정 위에 계시고, 온
우주 만물뿐 아니라, 역사를 주관하고 계시는 분이셔서 당신의 뜻과 약속을 어떤 방법을 통해서든 이루고야 마시는 분이심을 오늘
본문을 통해 만나게 됩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손길이 닿지 않는 역사가 없고, 하나님의 계획 하심이 없는 역사의 시간이 없습니다. 이것은 우리 개인에게도 그대로 적용되는 부분입니다.
우리가
말할 수 없는 어려움에 처해 답답함을 느낄 때, 우리에게 고통스러운 부분은 물론 그 문제가 해결될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
때문일 겁니다. 그런데 사실 우리는 주님을 인생의 주인으로 모시고 사는 삶에도 고통과 고난이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고, 그래서
어떻게든 그 어려움 속에서 의미를 찾아보고, 이겨보려고 노력해 봅니다. 그런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치 하나님이 이 고통과 고난의
문제 속에 전혀 개입함을 느끼지 못할 때, 그래서 더 이상 이 고난과 고통의 시간이 무의미하게 보일 때, 그때가 가장 고통스러운
순간일 겁니다.
당장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 하더라도, 하나님께서 나의 이 문제 속에 개입하고 계시다는 어떤
사인만이라도 느낄 수 있다면, 이 고난 속에서 어떤 의미를 찾을 수 있을 것 같고, 견뎌 볼 수 있을 것 같은데, 그것을 느낄 수
없어 답답할 때가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오늘 본문을 통해서도 볼 수 있지만, 성경을 통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지속적으로 보여 주는 사실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은 우리가 인식하지 못하고, 느끼지 못하는 그 순간에도 ‘우리를 지키시고
보호하시겠다’는 그 신실한 약속을 이루기 위해서 일하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인생의 역사를 잡고 계시기 때문에, 우리의 일분일초도 무의미한 시간이 있을 수 없고, 우리가 겪는 어떤 일도 그냥 쓸모 없이 버려지는 무의미한 일들이 있을수 없습니다.
비록
지금은 이해하지 못해 답답하고, 아픔이 있다 할지라도, 주님의 섭리를 믿고, 그 주님께 우리의 삶과 문제의 통치권을 내어
드린다면, 분명히 하나님께서 그 일들을 통해 합력하여 선을 이뤄가실 것임을 믿음으로 보게 될 겁니다. 그리고 언젠가는 나를 위해
일하신 하나님의 놀라운 섭리를 감사함과 기쁨으로 고백하게 될 것입니다.
오늘 하루의 삶을 통해 주님께 온전히 삶을 내어 드리고, 나를 이끄시는 주님의 강한 손을 경험해 보시길 소원합니다.
♦ 9월 13일(월)
♦ 오늘 읽어야 할 말씀 : 에스더 1:1∼22 ♦ 묵상을 위한 주제 : 행위의 소문(17절) ♦ 성구 : 아하수에로 왕(王)이 명(命)하여 왕후(王后) 와스디를 청(請)하여도 오지 아니하였다 하는 왕후(王后)의 행위(行爲)의 소문(所聞)이 모든 부녀(婦女)에게 전파(傳播)되면 저희도 그 남편(男便)을 멸시(蔑視)할 것인즉.
남 유다는 바벨론에 의해서, 바벨론은 바사(페르시아)에 의해서 멸망합니다. 바벨론의 포로로 잡혀갔던 남 유다 백성들의 역사가 느헤미야서와 에스라서에서는 포로 귀환의 모습으로 소개되었다면 에스더서에는 포로 귀환하지 않고 포로가 된 땅에서 살아가는 유대인들에 대한 삶을 소개합니다.
에스더서 1장은 당시 “아하수에로(크세르크세스. BC 486-BC 465)” 왕의 왕후 “와스디”가 왕이 베푸는 만찬 자리에 초대를 받고 그 자리에 나오지 않으므로 폐위되는 사건으로 시작합니다. 바사의 다리오 왕은 그리스를 침략하였으나 실패하였고 아들 아하수에로가 다시 그리스 정복에 나서려고 만반의 준비를 합니다.
이때는 당시 인도부터 구스(에디오피아)까지 바사가 점령한 지역이었습니다.
다리오 왕의 꿈을 이루려던 아하수에로는 그리스 정복을 위해 바사 모든 곳의 방백과 관리들을 불러 모으고 힘을 결집을 위해 무려 6개월 동안 성대한 잔치를 베풀었습니다.
잔치가 끝나기 1주일 전 아하수에로는 자신의 힘을 과시하려고 아름다움을 자랑했던 왕비 와스디를 왕 앞으로 오라고 명령합니다. 그러나 왕비 와스디는 왕의 명령을 거절합니다.
이때 방백과 관리들은 나라의 기강을 위해 왕의 명령을 어긴 와스디의 행동은 절대 용서하면 안 된다고 제안하고 아하수에로는 그 제안을 따라 와스디를 폐위시킵니다.
아하수에로 왕은 자신의 절대적인 권력이 절대적임을 보여주려고 왕비 와스디를 더욱 용서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힘을 모아야 할 상황에서 자신의 권력에 도전하는 자에겐 용서가 없다는 것을 보여주려는 것이었을 것입니다.
에스더 1장이 왕비 와스디의 폐위 장면부터 시작하는 이유는 역사의 주인은 절대 권력을 자랑하는 왕이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이심을 보여주는 사례라고 하겠습니다.
그래야 에스더가 아하수에로 왕의 왕비가 될 수 있었고 하만의 계략에서 유다 백성들을 구할 수 있습니다.
포로가 되었던 백성들이 70년 만에 예루살렘으로 돌아올 것이라는 하나님의 약속은 성취되어야 하며 또 언약의 백성의 후손으로 메시아가 오실 것입니다. 따라서 에스더 1장은 매우 중요한 역사의 한 장면이라고 하겠습니다.
역사는 사람들의 욕심과 욕망에 의해서 움직이는 것 같지만 그 배후에는 모든 것을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며 뜻을 성취하시는 하나님이 주관하십니다.
세상 역사가 일시적으로 통치자의 욕망과 생각대로 진행되는 것 같지만 세월이 흐르면 하나님의 섭리안에서 하나님의 통치가 실현된다는 것을 알려주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불안하고 답답한 현실에서도 믿음의 사람들은 처음과 나중이며 알파와 오메가 역사의 주인이신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주관하고 있다는 것을 확신하며 소망을 갖게 됩니다.
매일의 삶이 타락한 인간의 욕심과 욕망에 따라 좌우되는 것 같지만 그러나 나도 모르게 세상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의 감추어진 손길이 깃들여 있습니다.
그러므로 지혜로운 사람은 매일의 말씀을 묵상하며 내 뜻과 생각이 아닌 주인이 되신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며 살아야 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 길이 참된 기쁨이며 행복이고 영원한 곳을 향한 삶이기 때문입니다.
욕심과 욕망에 이끌려 살아가겠습니까? 아니면 모든 염려를 하나님께 맡기고 살아가겠습니까?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주님을 나의 주인으로 모시고 오늘도 진리의 말씀에 아멘하며 즐겁고 행복한 믿음의 주인공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 찬양 / 나의 맘속에 온전히
예수 내 구주! 예수 내 생명! 예수 내 권세!
1절은 그가 인도로부터 구스까지 127도를
다스리는 왕이라 말합니다. 구스는 이집트의 남쪽, 수단의 북쪽 지역을 말하는데, 「페르시아 전쟁사」를 보게 되면, 아하수에로 왕의
아버지였던 다리우스 1세는 바사 왕국을 20개 총독부로 다스렸다고 말합니다. 20개 총독부 안에 127도의 구획 단위로 나뉘어
다스렸다는 의미인데, 에스더의 저자는 둘 중에 더 큰 숫자를 사용함으로써 심리적으로 왕국이 더 커보이도록 하고 있습니다.
이 거대한 왕국의 왕 아하수에로는 바사와 메대의 장수와 각 지방의 귀족과 지방관들을 모아 잔치를 베풉니다. 그 잔치는 180일,
무려 6개월동안 계속됩니다. 아하수에로 왕이 이 잔치를 열었던 이유에 대해서 성경은 다음과 같이 설명합니다.
4절입니다.
그의 영화로운 나라의 부함과 위엄의 혁혁함을 나타내니라.
아하수에로 왕의 잔치는 국력과시를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잔치는 180일로 끝나지 않았습니다. 이 잔치가 마무리 되고,
왕은 7일간의 추가적인 잔치를 진행합니다. 그런데 이 잔치를 설명하는 단어들을 보면 다시 한 번 나라의 부함과 위엄이 드러납니다.
6-7절을 보겠습니다.
백색, 녹색, 청색 휘장을 자색 가는 베 줄로
대리석 기둥 은고리에 매고 금과 은으로 만든 걸상을 화반석, 백석, 운모석, 흑석을 깐 땅에 진설하고 금 잔으로 마시게 하니
잔의 모양이 각기 다르고 왕이 풍부하였으므로 어주가 한이 없으며
고대 페르시아 왕국은 수산, 바빌론, 악메다, 페르세폴리스라는 네 개의 수도가 있었습니다.
수산은 봄에 왕이 머무는
궁전이었습니다. 봄이라는 이미지와 함께 이 잔치의 장면을 생각해봅니다. 후원에는 파릇파릇한 새싹들이 돋아 있고, 아름다운 꽃들이
피어나 있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뛰어난 악사들이 연주하는 음악 아래, 당대 최고의 엘리트들이 모여 잔치를 펼치고 있습니다.
호화로운 장식과 화려한 주안상, 이러한 대단한 잔치가 계속되었습니다. 그렇기에 이 궁전 안에서 맑은 정신을 갖고 있었던 사람을
보기는 힘들었을 것입니다.
심지어 10절에서는 왕마저도 “주흥이 일어나서” 즉, 술에 취해 흥이 나서 7명의 내시들에게 왕후
와스디를 데리고 오라고 명령합니다. 왕후 한 명을 데리고 오는데 동원되는 사람이 7명입니다. 한 명의 왕후를 치장하고 데리고
오는데 무려 7명이나 있어야 했던 것입니다. 이렇게 7명이나 동원해서 왕후를 데리고 오는 이유에 대해서 성경이 설명하는데, 11절
하반절입니다.
이는 왕후의 용모가 보기에 좋음이라.
왕이 술에 취해 왕후를 부른 이유는 왕후의 아름다운 모습을 사람들에게 자랑하고 싶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결국 왕후마저도 왕의 영화로운 나라의 부함과 위엄을 나타내기 위해 사용되는 하나의 도구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왕의 의도를 알았는지, 와스디는 이러한 왕의 명령이 싫었습니다. 성경은 그녀가 왕의 명령을 거절한 이유는 밝히고 있지 않지만,
왕의 명령을 거절한 와스디를 주목하게 합니다. 왕의 명령을 절대 복종해야 했음에도, 그녀가 나가지 않은 것은 어쩌면 참으로
희한하고 대단한 일이었습니다. 이 일로 결국 와스디는 왕의 진노를 사게 되고, 결국 다시는 왕 앞에 오지 못하게 하는 조서를 받게
됩니다. 그리고 결국 왕후의 자리를 자신보다 나은 사람에게 주게 됩니다. 즉, 폐위됩니다.
에스더서를 마지막까지 보게 될 때, 성경은 와스디와 에스더를 대조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와스디는 왕의 명령에도 왕 앞에
나아오지 않으므로 폐위를 당했습니다. 반대로 에스더는 왕이 부르지도 않았는데 나아감으로 왕의 호감을 얻게 됩니다. 와스디와
에스더, 모두 왕의 명령을 거절했지만, 서로 다른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그것은 에스더가 특출하기 때문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미래에 닥칠 위기 속에 언약의 백성들에 대한 대책으로 에스더를 바사 왕국의 중심에 심으셨던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을
구원하시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계획과 도우심이 있었기에 가능한 것입니다.
에스더 1장의 말씀을 우리의 삶 속에 비춰본다면, 이러한 아하수에로 왕의 잔치가 보여주는 화려함과 과장됨이 비단 우리와 멀리 있는
것처럼 느껴지지 않는 것은 지금의 세상도 과장된 모습으로 화려함을 자랑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또한 이 화려한 잔치에서 자신들을
향해 찾아오는 위기조차 알지 못하는 이스라엘 민족의 초라함과 같이 세상 속에서 우리도 스스로를 초라하게 느낄 수 있기 때문입니다.
화려한 번화가의 거리를 생각해봅니다. 그 네온사인 밑에는 사람들이 저마다의 모습을 뽐내듯, 각자의 멋과 아름다움을 자랑합니다.
그러한 과장과 화려함의 중심에서 신앙인의 모습으로 서 있는 우리의 겉모습은 비록 초라하게 보일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화려한
아하수에로 왕의 잔치를 통해 하나님은 바사 왕국의 중심에 에스더를 심을 준비하시고 계시듯, 하나님은 과장됨으로 자기만족하고,
화려하게 자신을 뽑내는 세상의 중심에 하나님의 대책으로 우리들을 심고 계십니다.
화려한 잔치가 계속되었던 바사 왕국 안에서 이스라엘 민족은 자신들에게 몰살당할 위기가 찾아올 것임을 몰랐습니다. 하나님은 그러한
힘없는 이스라엘 민족을 구원하시기 위해 미리 바사 왕국의 중심에 에스더를 심으시며 준비하셨습니다. 이와 같이, 과장됨과 화려함으로
자기를 자랑하는 세상에 빠져 어디로 갈지 몰라 방황하는 많은 사람들을 구원하시기 위해 먼저 우리를 이 시대의 에스더로
심어주셨습니다. 이것을 믿고 의지할 때, 하나님은 우리를 세상 속, 그리고 이 시대 속,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는 귀한 사역에
당신의 대책으로 세워주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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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유다를 바벨론이(BC 586), 바벨론을 바사( 페르시야) 가 점령하며(BC 539. 다니엘 5:30), 바벨론으로 포로로 잡혀간 이스라엘 백성의 역사가 느헤미야 에스라서에 이어 에스더서에도 계속됩니다.
* 다니엘 5:30 그날 밤에 갈대아왕 벨사살이 죽임을 당하였고. (현대인의 성경) 그 날 밤에 바빌로니아의 벨사살왕은 죽임을 당하였고.
에스더서 1장은 당시 아하수에로( 크세르크세스)입니다. 영화 300에서도 크세르크세스왕이 나옵니다. 왕의 아내였던 와스디가 폐위되는 장면부터 시작합니다.
바사의 다리오 왕이 그리스를 점령하려던 시도가 실패하자 아들인
아하수에로가 다시 그리스정복에 나서려 만반의 준비를 합니다. 이때 당시 인도부터 구스( 지금의 에디오피아)까지 바사가 점령한
상태였습니다. 이러는 차에 아버지 다리오 왕의 꿈을 이루려 아하수에로는 그리스정복을 위해 바사 모든 곳의 방백과 관리들을
불러모으고 힘을 결집시키려합니다. 힘의 결집을 위해 장장 6개월의 시간을 들여 잔치를 벌입니다.
그런데 그 잔치가 끝나기 1주일전 아하수에로는 자신의 힘을 뽐내는
방법의 하나로 아름다움을 자랑했던 왕비 와스디를 왕앞으로 오라 명령합니다. 그러나 어찌된 일인지 왕비 와스디는 왕의 명령을
거절합니다. 이때 방백과 관리들은 나라의 기강을 위해 왕의 명령을 어긴 와스디의 행동은 절대 용서하면 안된다고 제안하고
아하수에로는 그 제안을 따라 와스디를 폐위시킵니다.
도대체 무슨 사정인지 이유인지에 상관없이 아하수에로는 자신의 권력이
절대적임을 보여주려 왕비 와스디를 더욱 용서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힘의 집결을 해야 하는 상황에서 자신의 권력에 도전하는
자에겐 용서가 없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함 이었을 것입니다.
여기서 왜 에스더 1장이 왕비 와스디의 폐위 장면 부터 시작되었을까요?
오늘 본문은 에스더 서입니다. 바로 이런 일이 있어야 ,
아하수에로왕의 왕비로 에스더가 즉위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야 에스더서 3장 이후에 나오는 하만의 계략에서 이스라엘 백성을
구할 수 있습니다. (하만은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을 죽이려 계획하고 있었습니다. )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이 70년 만에 다시
예루살렘으로 돌아오리라는 하나님의 약속이 성취되야 하고, 또 이스라엘 백성의 후손으로 메시야 예수님이 오실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오늘 1장의 내용은 중요한 역사의 한 장면인 것입니다.
아브라함을 통한 약속.. 너를 통하여 천하 만민이 복을 받는 다는
약속이 성취되기 위해서 이스라엘의 역사는 계속되어야 했습니다. 그래야 약속대로 천지의 창조주이시고 주인이신 성자하나님이 이땅에
오셔서 우리를 구원하시는 약속이 성취되고 아브라함에게 하셨던 것처럼 이스라엘이 선택된 민족으로 열방에 복음을 전하는 통로가 되어야
하기 때문이었습니다. 하만과 같은 인간의 음모와 계략이 있을 지라도 하나님이 정하신 약속의 성취에는 반드시 이루어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역사는 사람들의 욕심과 욕망에 의해서 움직이는 것 같지만 그
너머에는 그 뒤에는 모든 것을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며 주님의 계획과 뜻을 반드시 성취하시는 하나님이 주관하십니다. 오늘의
내용에서도 사람들의 각자의 욕망과 생각대로 된 일 같지만 이 일은 에스더가 즉위하는데 쓰이게 된 것입니다. 한치 앞밖에 모르고
보이는 상황따라 좌지우지되는 인생들과는 다르게 처음이요 마지막이요 전지전능하신 이땅의 주인이신 하나님은 모든 것을 주관하고 계심을
다시한번 확인합니다.
우리 각자의 인생또한 마찬가지 입니다. 내 뜻대로 내 생각대로 가는
것은 다 욕심과 욕망입니다. 그러나 감사하게도 그럴지라도 하나님은 인내와 사랑으로 끝까지 구원의 역사를 이루십니다. 그러니,
지혜로운 자는 성경의 역사를 통해 깨닫고 돌이켜 내 뜻과 내 생각이 아닌 주인되신 오직 하나님의 뜻에만 무조건 즉각 순종하는 삶을
삽니다. 이 길만이 헛되지 않은 진정한 기쁨이요 행복이요 영원히 없어지지 않는 삶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하루…. 어떤 것을 따르시겠습니까? 욕심과 욕망을 따라
살며, 내 맘대로 내 생각대로 안된다고 아둥바둥하며 낙심하고 좌절하고 온갖 염려와 수고의 무거운 짐을 지고 사시겠습니까?
아니면…. 나를 위해 십자가에서 죽고 부활하신 성자 하나님 예수그리스도만 주인으로 모시고 오직 주님말씀에만 아멘하며 기뻐하고
감사하며 사시겠습니까?
예수님은 부활하셔서 지금도 살아계신 우리의 주인이십니다. 우리 아버지 하나님은 명철과 지혜와 능력이 한이 없으신 분입니다. 그러니, 하나님 말씀에만 순종하며 예수님과 동행하는 삶만이 지혜요 진정한 행복한 삶입니다.
우리는 끝을 알고 사는 사람들입니다. 우리에겐 승리만이 있을진대
오늘 벌어지는 모든 일들은 그저 눈에 보이는 현상일 뿐입니다. 그러니 눈에 보이고 들리고 느껴지는 것때문에 흔들리지 말고 영원하신
하나님의 말씀만 믿고 주인되신 예수님께만 모든 것을 올려드립시다.
오늘 우리의 할일은 역사의 주관자시요, 내 인생의 주관자이신 좋으신
아버지께 모든일에 감사하고 기뻐하며 가족과 교회공동체와 이웃을 사랑하고 , 이땅의 사명인 주와 복음을 위해 달려가는 것
뿐입니다. 다 가진자로서 예수님과 동행하며 승리의 삶을 누리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에스더서 요약
1. 내용 :
에스더서는 하나님의 이름이 한 곳에도 명시되어 있지 않으며, 일반적으로 크세르크세스 1세로 알려진 페르시아 왕 아하수에르 치세 시에 유대 백성을 파멸시키려는 음모에서 그들이 구출된 것을 묘사하고 있다.
하나님께서는 환경을 섭리적으로 인도하심으로써 하만의 계획을 좌절시켰다.
하만은 아하수에르 왕의 측근으로서 유대인의 하나인 모르드개가 그에게 복종하여 절을 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그들에게 앙갚음하고자 했던 것이다.
아하수에로는 "그의 영화로운 나라의 부함과 위엄의 혁혁함"을 나타내기 위하여 베풀어진 연회에 아름다움을 보여주도록 왕비 와스디를 초청하였으나 그녀가 이를 거절하자 화가 난 나머지 그녀를 폐위시켜 버렸다.(1장)
유대인 처녀 에스더는 와스디를 대신할 왕비의 후보들 가운데 하나로 뽑혔고 결국 왕의 마음에 들어 왕비가 되었다.
그녀의 사촌인 모르드개는 왕을 암살하려는 음모를 엿듣고는 에스더를 통해 그에게 이 사실을 알렸으며, 이 일은 궁중 일기에 기록되었다.
이 사건이 있은 직후 최근에 총리가 되었던 하만은 모르드개가 그에게 경의를 표하지
않으려는 것에 화가 난 나머지 유대인들이 그들의 특별한 율법들로 인해 왕에게 전적으로 충성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그들을 진멸할 수
있는 칙령을 왕에게서 얻어내었다.
그러자 모르드개는 에스더에게 그녀가 그녀의 백성인 유대인을 위하여 왕에게 중재해줄 것을 호소했다.
권력의 정점에 있다고 생각했던 하만은 그가 교수대에 달도록 명령했던 모르드개에게 역설적으로 경의를 표하고 왕에 대한 음모를 발견한 대가로 그의 공적을 공표하도록 왕의 명령을 받았다.
또 다른 연회에서 에스더는 유대인에 대한 하만의 음모를 밝혔는데, 그 결과 하만은 그가 모르드개를 달려고 세웠던 바로 그 교수대에 달리게 되었다.
모르드개는 하만을 대신하여 총리가 되었고, 유대인들이 그들을 박해하는 자들에게서 스스로를 보호할 수 있는 새로운 칙령이 내려졌으며,
그들은 그들의 대적을 진멸하게 되었다. 유대인의 이러한 기적적인 구원을 기념하기 위하여 부림절이 제정되었다. 이 명칭은 하만이 유대인 학살을 위해 길 한 날을 결정하기 위해 뽑은 부르, 즉 제비를 따라 지어진 것이다.
2. 목적
이 책의 종교적 가치에 관한 심각한 의심으로 인해 유대인들과 그리스도인 모두 오랫동안 이 책을 각각 그들의 정경으로 인정하기를 꺼려했다.
어떤 유대인들은 이 책이 부림절의 새로운 절기를 제정함으로써 모세가 불완전하다는
사실을 암시하는 것이 아닐까 하고 염려하였지만, 랍비들은 이 책을 모세 오경과 동등하거난 그 이상의 것으로 간주했는데, 그 이유는
아마 이 책이 괴로움을 당하는 유대인들에게 약속하는 소망 때문인 듯하다.
이 책은 397년에 이르러서야 정경으로 인정받았으며, 루터는 여전히 이 책의 중요성을 의심하였다.
이 책의 주된 메시지는 하나님께서 이 책에서 아마 여인의 후손으로 이해되고 있는 듯한 그의 백성들을 보호하신다는 것, 곧 그들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그의 구속 계획을 보존하며 실행하신다는 것이다.
에스더서는 교회의 적 및 하나님 나라와 그의 기름 부음을 받은 자의 멸망을 예언하고 있다. 하지만 에스더와 모르드개의 행동 모두가 칭찬할 만한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그들의 적대감 및 복수의 폴력적 수단 사용은 귀감적인 것이 되지 못하기 때문이다. |사실상 그들은 아마 당시의 유대 백성을 대표한 인물은 아닌 듯하다. 왜냐하면 그들은 다른 유대인 포로들과 함께 고국으로 되돌아 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에스더서의 강력한 소망의 메시지는 이 책이 하나님의 특별 계시인 성경의 일부로 위치할 수 있음을 뒷받침해준다.
저자 :
에스더서는 저자의 이름을 구체적으로 지칭하지 않습니다. 가장 유명한 전통에 따르면 에스더서의 저자는 모르드개(에스더의 주요 인물), 에스라, 또는 느헤미야(바사 풍습에 익숙했을 사람) 중 하나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저작 연대 :
에스더서는 주전 460년에서 350년 사이에 기록된 것으로 추정됩니다.
기록 목적 :
에스더서의 목적은 하나님의 섭리, 특히 그분의 택하신 백성인 이스라엘과 관련한 섭리를
보여주는데 있습니다. 에스더서에는 부림절의 설립과 영속적인 준수의 의무가 기록되어있습니다. 에스더서는 하나님이 에스더를 통해
가져온 유대 민족의 위대한 구원을 기념하기 위해 부림절에 읽혔습니다. 유대인들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부림절 기간 동안 에스더서를
읽습니다.
핵심 구절 :
에스더 2:15, “모르드개의 삼촌 아비하일의 딸 곧 모르드개가 자기의 딸 같이
양육하는 에스더가 차례대로 왕에게 나아갈 때에 궁녀를 주관하는 내시 헤개가 정한 것 외에는 다른 것을 구하지 아니하였으나 모든
보는 자에게 사랑을 받더라”
에스더 4:14, “이 때에 네가 만일 잠잠하여 말이 없으면 유다인은 다른 데로 말미암아 놓임과 구원을 얻으려니와 너와 네 아버지 집은 멸망하리라 네가 왕후의 자리를 얻은 것이 이 때를 위함이 아닌지 누가 알겠느냐 하니”
에스더 6:13, “자기가 당한 모든 일을 그의 아내 세레스와 모든 친구에게 말하매 그 중 지혜로운 자와 그의 아내 세레스가
이르되 모르드개가 과연 유다 사람의 후손이면 당신이 그 앞에서 굴욕을 당하기 시작하였으니 능히 그를 이기지 못하고 분명히 그 앞에
엎드러지리이다”
에스더 7:3, “왕후 에스더가 대답하여 이르되 왕이여 내가 만일 왕의 목전에서 은혜를 입었으며 왕이 좋게 여기시면 내 소청대로 내 생명을 내게 주시고 내 요구대로 내 민족을 내게 주소서”
고상한 에스더는 그녀의 백성이 위험에 처한 것을 깨닫고는 자기 생명을 걸었습니다. 그녀는 기꺼이 죽음에 처할 수 있는
행동을 했고, 남편의 왕국에서 서열 2위인 하만과 대결했습니다. 그녀는 남편인 왕의 지위 앞에서 겸손하고 품위있게 행동하면서도
현명하고 가장 가치있는 상대임을 입증했습니다.
에스더의 이야기는 창세기 41장의 요셉 이야기와 매우 흡사합니다. 두 이야기 모두 유대인의 운명을 주관하는 이방 나라의 군주와
관련이 있습니다. 두 이야기 모두 그들의 민족과 나라를 구원하기 위해 모든 수단을 제공한 이스라엘의 영웅을 보여줍니다. 나쁜
상황으로 보이는 상태에서 하나님의 손길이 분명하게 나타남으로써 그 상황이 참으로 전능하신 하나님의 주권 하에 있으며 궁극적으로는
자기 백성의 유익을 뜻하신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이 이야기의 중심에는 출애굽기에서 시작된 것으로 기록된 아말렉 족속과 유대인
사이의 지속적인 갈등이 있습니다. 하만의 목표는 유대인을 완전하게 근절하는 것으로서 구약 시대에 기록된 마지막 노력이었습니다.
하지만 그의 계획은 결국 그의 죽음으로 끝났고, 유대인들은 구원을 받고, 원수였던 모르드개는 하만이 지녔던 지위에 오르게 됩니다.
잔치는 이 책의 주요 주제입니다. 잔치 기록만 10건이 있으며 많은 일들이 계획되고 꾸며졌지만 잔치에서 다 드러났습니다. 이
책에는 하나님의 이름이 결코 언급되지 않았지만, 수산 성의 유대인들이 사흘 동안 금식하고 기도했을 때 하나님의 개입을 구한 것은
명백합니다(에 4:16).
유대인들의 멸망을 허락하는 칙령이 메대와 바사 법에 따라 기록됨으로 결코 변할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기도가 응답 받을 수 있는 길이 환하게 열렸습니다.
에스더는 왕이 부르지도 않았는데 목숨을 걸고 한 번도 아닌 두 번이나 왕
앞에 나아갔습니다(에 4:1-2, 8:3).
그녀는 하만의 파멸에 만족하지 않고 그녀의 백성을 구원하고자 했습니다. 부림절
제도가 모든 사람이 알 수 있도록 기록되고 보존되었으며 오늘날도 여전히 준수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택하신 백성은 주의 이름을
직접 부르지 않았지만, 에스더의 지혜와 겸손으로 형 집행 정지를 허락 받았습니다.
예표 :
우리는 에스더서에서 하나님의 목적 및 특히 그분의 약속된 메시야에 대항하는 사탄의 계속되는
투쟁을 무대 뒤에서 보게 됩니다. 그리스도께서 인류에게 오시는 것은 유대 종족의 존재에 근거한 것이었습니다. 하만이 유대인들을
멸망시키기 위해 음모를 꾸몄던 것처럼, 사탄은 그리스도와 하나님의 백성을 대적하여 왔습니다. 하만이 모르드개를 위해 설치한
교수대에서 패배한 것처럼, 그리스도께서는 그분의 원수가 그분과 그분의 영적인 후손을 파괴하기 위해 고안 한 바로 그 무기를
사용하십니다. 사탄이 메시야를 멸망시킬 계획으로 고안한 십자가는 도리어 그리스도께서 사용하신 수단이 되었습니다. “우리를 거스르고
불리하게 하는 법조문으로 쓴 증서를 지우시고 제하여 버리사 십자가에 못 박으시고 통치자들과 권세들을 무력화하여 드러내어
구경거리로 삼으시고 십자가로 그들을 이기셨느니라”(골 2:14-15). 하만이 모르드개를 위해 세운 교수형에 자신이 달린 것처럼,
마귀는 그리스도를 멸하려고 자기가 세운 십자가에 의해 멸망 당하였습니다.
적용 :
에스더서는 삶의 상황에서 하나님의 손길을 보든지 또는 우연히 발생한 일들로 보든지 그 둘
사이에서 선택하는 것을 보여줍니다. 하나님은 우주의 주권자이십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계획이 단지 악한 사람들의 행동에 의해 바뀔 수
없다는 것을 확신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이 이 책에는 업급되지 않았지만, 책 전체에서 하나님이 섭리 가운데 자기 백성을
개인적으로 그리고 국가적으로 돌보시는 사실이 분명하게 나타납니다.
예를 들어, 전능하신 하나님이 적절한 시기에 아하수에로 왕으로
하여금 잠을 들지 못하게 하신 사실을 분명하게 볼 수 있습니다. 이 책에는 모르드개와 에스더의 예를 통해 우리 하늘 아버지께서
종종 우리 영혼과 직접 대화하시기 위해 사용하는 침묵의 사랑 언어가 나와 있습니다.
에스더는 경건한 마음과 배우려는 마음을 지니고 있었으면서도 강한 힘을 지니고 있었고 또한 기꺼이 순종하였습니다. 에스더의 겸손은
그녀 주변의 사람들과 현저히 달랐으며, 이로 인해 그녀는 여왕의 위치에 올랐습니다. 그녀는 인간적으로 불가능한 상황은 아닐 지라도
대단히 힘든 상황 속에서 품위와 겸손을 유지하였습니다. 이러한 자세는 우리로 하여금 종종 우리 자신과 다른 사람들을 위해 엄청난
복을 받을 수 있는 그릇이 되게 합니다. 우리는 삶의 모든 분야에서, 그러나 특히 시련 속에서 에스더의 경건한 태도를 본 받아야
합니다. 에스더서 내용을 보면, 단 한번도 불만이나 못된 태도가 드러나지 않습니다. 에스더서를 읽다보면 여러차례 그녀가 주변
사람들로부터 호의를 받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한 호의가 결국 그녀의 백성을 구한 것입니다. 우리는 부당한 박해를 받아들이고
에스더처럼 하나님을 의지하는 겸손과 결단 가운데 긍정적인 태도를 유지할 때 그러한 호의를 얻을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은 때에
하나님이 우리를 그러한 위치에 두실 지 누가 알겠습니까?
♦ 오늘 읽어야 할 말씀 : 느헤미야 13:1∼31 ♦ 묵상을 위한 주제 : 주의 큰 은혜(22절) ♦ 성구 : 내가 또 레위 사람들을 명(命)하여 몸을 정결(淨潔)케 하고 와서 성문(城門)을 지켜서 안식일(安息日)로 거룩하게 하라 하였느니라 나의 하나님이여 나를 위(爲)하여 이 일도 기억(記憶)하옵시고 주(主)의 큰 은혜(恩惠)대로 나를 아끼시옵소서.
“주의 큰 은혜(your great love, your great grace)”
예루살렘의 멸망(BC 586)과 동시에 바벨론의 포로로 끌려갔던 이스라엘 백성들은 세 차례에 걸쳐 예루살렘으로 돌아왔습니다.
불타버린 성전 재건을 시작으로 유다의 총독 느헤미야의 지도하에 허물어진 성벽까지 52일 만에 재건되었습니다.
이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이었습니다.
모든 백성이 말씀에 순종한 결과였습니다.
느헤미야는 모든 개혁을 이루고 하나님께 복을 빌었습니다.
하나님이 기억하시는 일로, 주의 은혜를 사모하였습니다.
느헤미야를 통하여 주신 개혁의 의미를 생각하며 오늘의 시대를 살아야 하고 신앙을 지켜야 하는 우리들에게 개혁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 헤아리며 구별과 성결의 삶을 위한 결단이 필요하지 않을까요?
눈에 보이는 성벽 재건을 완공한 후에 느헤미야는 성벽과 함께 무너져 내린 백성들의 마음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다시 재건하기 시작합니다. 성전을 정결하게 하고, 안식일을 거룩하게 구별하고, 말씀의 기준을 바로 세웠습니다.
어느날 이솝의 주인이 말했다. "얘, 이솝아 , 목욕탕에 가서 사람이 많은지 보고 오너라" 이솝은
목욕탕으로 갔다. 그런데 목욕탕 문 앞에 끝이 뾰족한 큰 돌이 땅바닥에 박혀있는 것이었다. 그래서 목욕탕으로 들어갔던 사람이나
목욕하고 나오는 사람 모두가 그 돌에 걸려 넘어질 뻔 하였다. 어떤 사람은 발을 다치기도 하고 어떤 사람은 코가 깨질 뻔 했다. "에잇, 빌어먹을!" 사람들은 돌에 대고 욕을 퍼부었다. 그러면서도 누구 하나 그 돌을 치우는 사람은 없었다. '사람들도 한심하지, 어디, 누가 저 돌을 치우는가 지켜봐야지' 이솝은 목욕탕에서 그것만 지켜보고 있었다. "에잇! 빌어먹을 놈의 돌멩이!" 여전히 사람들은 돌에 걸려 넘어질 뻔하고는 욕설을 퍼부으며 지나갔다. 얼마 후에 한 사나이가 목욕을 하러 왔다. 그 사나이도 돌에 걸려 넘어질 뻔 하였다. 이솝은 여전히 그 사나이를 지켜보고 있었다. "웬 돌이 여기 박혀 있담!" 그 사나이는 단숨에 돌을 뽑아냈다. 그리고 손을 툭툭 털더니 목욕탕 안으로 들어갔다. 이솝은 그제야 일어서더니 목욕탕의 사람수를 세어보지도 않고 그냥 집으로 달려갔다. 이솝은 주인에게 이렇게 말했다. "선생님, 목욕탕 안에 사람이라곤 한 명밖에 없습니다."
인간은 배우는 동물이다.
요람에서 무덤에 갈 때까지 인간은 배워야 한다. 특별히 인간은 감사의 철학을 배워야 한다.
"행복은 감사 속에 있고 감사는 만족 속에 있으며, 만족의 나무에 감사의 꽃이 피고, 감사의 꽃에 행복의 열매가 열린다"는 말이 있다.
행복이란 무엇인가? 흐믓한 정신적인 만족감이다. 그래서 인간이 행복하기를 원하시는 주님께서는 사도 바울을 통하여 항상 기뻐하고 범사에 감사하라고 가르치신 것이다.
우리는 유대인의 다음 명언을 마음에 새길 필요가 있다.
1. 이 세상에서 가장 현명한 사람은 누구인가? - 모든 사람에게 항상 배우는 사람이다.
2. 이 세상에서 가장 강한 사람은 누구인가? - 자기 자신을 이기는 사람이다.
3. 이 세상에서 가장 부유한 사람은 누구인가? - 자기가 가진 것으로 만족하는 사람이다.
우리는 자기의 가진 것에 대하여 감사할 줄 알아야 한다.
중심이 선 사람
"중심이 딱 선 사람은 어떤 소리를 해도 홀리지 않지만, 중심이 서지 않은 사람은 늘 망상 속에 있으니 걸리게 돼요. 같은 꽃을 보고도 한숨 지으며 눈물 뿌리는 사람이 있고, 웃고 노래하는 사람도 있잖아요. 그렇다고 노래하는 꽃, 눈물뿌리는 꽃이 따로 있나요? 자기 마음을 중심으로 세계가 벌어지는 것이지요." - 서화동의《산중에서 길을 물었더니》중에서 -
* 중심이 선 사람은 흔들리지 않습니다. 바람이 불어도, 눈보라가 쳐도 흔들림 없이 제 길을 갑니다. 일희일비(一喜一悲)하는 것은 중심이 서 있지 않음의 증거입니다.
우리가 또 스스로 규례를 정하기를 해마다 각기 세겔의 삼분 일을 수납하여 하나님의 전을 위하여 쓰게 하되.
시편 51:12 / 주의 구원의 즐거움을 내게 회복시켜 주시고 자원하는 심령을 주사 나를 붙드소서.
마틴 로이드 죤스 목사 /
어떤 영국 농부 하나가 소 한 마리를 길렀는데 그 소가 송아지 두 마리를 낳았다. 기분이 아주 좋아 부인에게 "여보, 송아지 두 마리나 낳았는데 내가 한 마리는 우리 것으로 하고, 한 마리는 주님의 것으로 주님께 바칠꺼야!" 신앙이 별로 없던 남편이 그런 말을 하므로 부인이 아주 기분이 좋아서 “아! 우리 남편이 신앙이 좀 생기는 모양이다” 그렇게 생각을 했다. 그런데 어느날 남편이 아주 시무룩해 가지고서 집에 들어오더니 부인에게 송아지 중에 한 마리가 죽었다고 그래요. 그래서 부인이 "어떤 송아지가 죽었어요?" 그러자 남편은 "물론 하나님의 송아지가 죽었지요?"
이 말은 그 마음에 이미 하나님께 드릴 마음이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헌금은 단순한 물질의 문제가 아니라 믿음의 문제이다. 내 모든 것이 주님의 것이라면, 또 나 자신도 주님의 것이라면 기꺼이 나 자신의 모든 것을 자원하는 마음으로 드릴 수가 있느냐? 는 질문을 해야 한다.
바벨론 포로 생활
1. 안식일에 대한 신앙 2. 결혼에 대한 신앙 3. 물질에 대한 신앙
갈라디아서 5:1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자유롭게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건하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
오늘의 기도
진리의 말씀에 따라 자유를 누리며 살아가게 하옵소서!
9월 7일(화) 느헤미야 9장 / 사유하시는 하나님(17절)
♦ 9월 7일(화)
♦ 오늘 읽어야 할 말씀 : 느헤미야 9:1∼38 ♦ 묵상을 위한 주제 : 사유하시는 하나님(17b) ♦ 성구 : 그러나 주(主)께서는 용서(容恕)하시는 하나님이시라 은혜(恩惠)로우시며 긍휼(矜恤)히 여기시며 더디 노(怒)하시며 인자(仁慈)가 풍부(豊富)하시므로 그들을 버리지 아니하셨나이다.
“사유하시는 하나님(forgiving God)”
학사 에스라를 통해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게 되면서 주의 뜻을 알게 된 하나님의 백성들은 초막절을 지켜야 하겠다고 결단합니다. 초막절은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에서 지내는 동안 하나님께서 베푸신 자비와 은혜를 기억하며 감사하는 절기입니다. 그들은 온 마음과 기쁨으로 초막절을 지켰습니다. 그 달 이십사일 이었습니다(1절).
초막절은 7월 15일에 시작하여 8일 동안 진행되기 때문에 마지막 성회는 7월 23일입니다. 그런데 그 달 24일이라고 하였으므로 7월 24일입니다(9:1). 그러므로 초막절 다음 날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초막절이 끝났지만 예루살렘 성을 떠나지 않고 계속 그곳에 머물면서 또다시 모였습니다. 초막절 절기를 마치고 그 다음 날 모일 때는 온 백성이 금식하며 거친 베옷을 입고 머리에 재를 뒤집어썼습니다. 그들은 초막절 행사 때에는 눈물을 흘릴 수 없었지만 이제는 마음껏 그들의 속마음을 드러낼 수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말씀을 계속 들으면서 매우 괴로웠을 것입니다. 특히, 그들의 죄악을 오래 참으시고 끝까지 사랑하시며 필요한 모든 것을 베풀어 주신 하나님의 은혜와 선하심을 초막절 기간에 깊게 깨닫게 되면서 회개의 영이 그들 모두에게 임한 것입니다.
모든 백성이 거친 베옷을 입고 머리에 하얀 재 가루를 뒤집어 쓴 모습을 상상해 보십시오. 그들의 눈에는 눈물이 고여 있고 두 손으로는 가슴을 치고 있습니다. 이는 지은 죄악에 대해 괴로워하며 아파하며 슬퍼하는 모습입니다. 특히 재를 머리에 썼다는 것은 죽음을 의미합니다. 즉, 하나님 앞에서 끔찍한 죄악을 범한 이스라엘 공동체와 각 개인은 죽어 마땅하다고 고백한 것입니다. 이처럼 참된 회개는 죄에 대한 증오와 거룩에 대한 갈망으로 나타납니다. 그래서 죄에 물들었던 과거의 삶에 대해 마음을 찢으며 머리에 재를 뿌리며 회개하였던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 주의 영의 역사로 말미암아 나타나는 참된 회개는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를 방해하는 모든 관계를 과감히 끊어버립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역사하시는 회개의 영이 주의 백성에게 임하면 삶은 개혁이 일어날 수밖에 없습니다.
이스라엘의 레위 지도자들의 기도는 네 부분으로 그 내용을 용약할 수 있습니다.
첫째는 하나님을 경배하며 감사(9:5∼6) 둘째는 하나님 앞에 지은 죄를 자백(9:7∼31) 셋째는 죄에 대한 용서(9:32∼37) 넷째는 새 언약에 대한 헌신(9:38)
회개의 영이 임할 때 비로써 자기의 죄와 조상의 허물을 자복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이여, 나와 우리의 가족이 지은 죄를 용서하소서.
주여, 우리 공동체가 지은 죄를 용서하소서.
주여, 우리의 부모와 조상들이 지은 죄악을 용서하소서.
주여, 이 민족의 죄를 용서하여 주시고 고쳐주소서.
나라의 정체성이 심하게 흔들리는 것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며 나라와 민족을 사랑해야 하는 교회와 성도들이 세속에 파묻혀 하나님이 기뻐하고 원하는 것보다는 세속적인 것에 마음을 빼앗긴 결과라고 하겠습니다.
이제라도 지난 날의 잘못을 깨닫고 회개의 영을 힘입어 교회 공동체를 바로 세우고 나라와 민족 앞에 가야 할 방향을 제시할 수 있는 신앙으로 거듭나야 하겠습니다.
♪ 찬양 / 죄에서 자유를 얻게 함은
예수 내 구주! 예수 내 생명! 예수 내 권세!
9월 6일(월) 느헤미야 8장 / 여호와의 성일(9절)
자신을 위한 기도
주여, 저에게 건강을 주시되 필요한 때 의미 있게 사용할 수 있도록 그 건강을 잘 보전케 하여주소서.
저의 영혼을 거룩하게 하시고 선하고 맑은 것을 알아보게 해주소서. 악에 굴복하지 않고 두려워하지 말게 해주시며 사물을 자연 질서대로 지킬 수 있는 방법을 발견할 수 있게 해주소서.
지루함을 모르고 원망과 탄식과 부르짖음을 모르는 영을 주소서. 나 자신에 너무 집착하지 말게 해주시며 너무 걱정하지 않게 해주소서.
행복하게 살며 그 행복을 다른 이들과 함께 나눌 수 있도록 저에게 유머를 이해하는 친절과 풍자를 포용하는 은혜를 주소서.
♦ 9월 6일(월)
♦ 오늘 읽어야 할 말씀 : 느헤미야 8:1∼18 ♦ 묵상을 위한 주제 : 여호와의 성일(9절) ♦
성구 : 백성(百姓)이 율법(律法)의 말씀을 듣고 다 우는지라 총독(總督) 느헤미야와 제사장 겸(祭司長 兼) 학사(學士)
에스라와 백성(百姓)을 가르치는 레위 사람들이 모든 백성(百姓)에게 이르기를 오늘은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성일(聖日)이니 슬퍼하지
말며 울지 말라 하고.
느헤미야는 두 부분으로 구분합니다. 첫째는 예루살렘 성벽 재건(1∼7장) 둘째는 예루살렘 신앙 회복(8∼13장)
느헤미야는 성벽 재건이란 가시적인 외적 요소에 만족하지 않고 다시는 예루살렘이 무너지지 않도록 영적 부흥이 있어야 하겠다며 학사 에스라와 더불어 신앙 재건에 심혈을 기우리게 됩니다.
각기 성읍에 거주하던 백성들이 일곱째 달 초하루에 율법을 듣기 원하여 예루살렘 성 수문 앞 광장에 모였습니다. 학사(서기관) 에스라는 백성들의 요청에 따라 율법책을 가져와 수문 앞 광장에서 낭독할 때 레위인들이 에스라가 읽은 말씀의 뜻을 해석하여 백성들에게 깨닫게 하자 백성들은 애통하며 회개의 눈물을 흘렸습니다.
느헤미야는 주님의 거룩한 날이니 슬퍼하지 말라 하였고 백성들은 돌아가서 먹고 마시며 없는 사람들에게는 먹을 것을 나누어 주면서 모두 함께 기뻐했습니다.
이스라엘의 일곱 절기는 유월절, 무교절, 초실절, 칠칠절, 나팔절, 대속죄일, 초막절입니다(레 23장). 일곱 절기는 봄철에 지키는 절기(유월절, 무교절, 초실절, 칠칠절)와 가을철에 지키는 절기(나팔절, 대속죄일, 초막절)로 구분합니다.
7월에는 세 개의 절기(나팔절, 대속죄일, 초막절)가 있으므로 성스러운 달이라고 합니다. 더구나 7은 창조의 수, 완전수, 안식의 수라고 합니다.
이와 같은 배경에서 이스라엘 자손들이 일곱째 달에 일제히 수문 앞 광장에 모였던 것입니다.
나팔절은 7월 초하루, 대속죄일은 7월 10일, 그리고 초막절은 7월 15일부터 일주일간 지킵니다.
초막절은 대속죄일의 은혜와 한 해의 추수를 감사하는 의미에서 가장 성대하게 지켰으며 초막절이 끝나면 모든 절기를 마무리하는 의미에서 성회(아체레트)로 모입니다.
스룹바벨과 에스라에 의해서 성전을 재건한 후에 느헤미야는 성벽을 재건했습니다. 이제부터는 성전을 중심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고 듣고 배우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가까이 하는 삶을 회복해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들이여! 진리의 말씀이 가까이 있을 때에 그 말씀의 진가를 찾아내어 마지막 때에 말씀으로 승리하는 거룩한 주의 백성으로 일어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오늘 하늘 뜻 제목은 미국 유니언신학교에 있는 폴
니터 교수의 책 제목이기도 합니다. 그리스도교의 배타성을 비판하고 종교 간 대화, 이웃 종교와의 평화와 상생을 도모하는 폴 니터의
문제의식이 집약된 제목이라 할 수 있습니다. 십자군 전쟁, 종교개혁 이후 벌어진 종교전쟁들, 각종 마녀사냥과 종교재판들, 서구
열강들이 제3세계를 향한 제국주의적 선교 과정에서 있었던 만행들을 가능하게 했던 것이 '오직 예수 이름으로만'이라는 구호였고,
교회의 폭력과 광기를 덮고 넘어가게끔 했던 면죄부 역할을 했던 것 역시 '오직 예수 이름으로만'이라는 구호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라고 한다면 너무 심한 말일까요.
오늘 우리가 읽은 사도행전 4장 12절 본문은 그리스도교의 절대성과 구원의 배타성을
뒷받침하는 성서적 전거로 오랫동안 사용되어 왔습니다. "예수 밖에는, 다른 아무에게도 구원은 없다"는 베드로의 이 말은
그리스도교 외의 다른 종교들에는 구원이 없으며, 예수를 모르는 사람은 구원받을 수 없다, 는 말과 동일시되었습니다. 당연히 이런
물음이 제기됩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교를 모르는 세계에 살고 있는 사람들, 그리스도교를 모르고 죽었던 사람들, 지금도 예수의
이름을 알지는 못하지만 착하고 선하고 열심히 살아가는 사람들은 죄인이고 구원의 대상이 아닌가? 여러분들은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2.
저는
지금 개신교인 의식조사 프로젝트에 참여하고 있습니다. 개신교인 1000명을 대상으로 신앙 전반에 대한 설문을 실시하고 그것을
토대로 한국 개신교인의 의식의 지도를 그려보는 것입니다. 오늘 이 시간에 그 내용에 대한 간략한 소개를 하겠습니다. 2015년
인구센서스 결과 개신교인의 비율이 종교인 인구 중 가장 높은 순위를 차지했습니다(960만). 하지만 출석률은
88.4%(2004년도)에서 76.7%(2017년도)로 12% 낮아졌습니다. 가나안 성도가 150~200만 가까이 된다는
말입니다.
주목할 만한 사실은 개신교인들의 신앙관이 생각보다 근본주의적이지 않다는 것입니다. (1)'타 종교에서
진리가 있느냐'는 질문에 47%가 '그렇다'(23.9%, 그렇지 않다)고 대답했고, (2) '타 종교의 가르침도 선한가'라는
질문에 58%가 '그렇다'(11.3%, 그렇지 않다), (3)'교회의 현실 참여를 지지하느냐'라는 질문에 48.5%가
'그렇다'(16%, 그렇지 않다), 즉 개신교인 50%가 타 종교에도 진리가 있고, 타 종교의 가르침도 선하고, 교회의 현실
참여에 대해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있다는 결과입니다. 이러한 통계를 근거로 한국 개신교의 성향이 다원주의(pluralism)까지는
아니지만, 배타주의(exclusivism)에서 포괄주의(inclusivism)로 옮겨 가고 있다는 판단을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한국 개신교는 여전히 배타주의적 면모를 지우지 못하고 있기도 합니다. (4)'성서에도 오류가 있다'라는 질문에 20% 만이
'그렇다'(그렇지 않다 50.9%, 보류 29%), (5) '다른 종교에도 구원이 있다'라는 질문에 28.4%가 '그렇다'(그렇지
않다 45%, 보류 26%) 즉, 성서무오설과 구원에 대해서는 여전히 한국 개신교의 과반이 확고하게 성서무오설과 구원의 배타성을
고수하고 있는 셈입니다. 어떤 학자는 과반밖에 되지 않는다는 것에 대해 긍정적인 평가를 내리면서 교인 인구의 고령화로 인해
개신교인들은 한 세대 후 지금보다 2/3 수준으로 떨어질 것이고, 그때쯤 되면 더욱 종교다원주의적으로 흐를 것이다, 라는 예측을
합니다. 암튼 20~30년 내 한국교회는 커다란 격변을 맞을 것이고, 그것은 지금부터 시작되고 있습니다(청년층 급감, 신학교
사양화 등).
3.
한백교회 교인들 같은 진보적인 그리스도인들에게 '예수 밖에는 구원이 없다'는 주장은
제국주의적인 언어로 들립니다. 교회의 역사에서 이단 논쟁, 십자군 전쟁, 마녀사냥, 선교와 식민주의, 원주민 학살, 인종주의,
제국주의적 침략 과정에서 그리스도교의 이름으로 수행된 침략과 학살, 타 종교 배제와 억압, 전통문화의 파괴를 우리는 기억합니다.
그래서 '예수 밖에는 구원이 없다'는 모토 아래 희생당한 모든 희생자에게 교회는 모든 것을 다 내려놓고 용서를 빌어도 시원치
않습니다.
그러나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서,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명령한 모든 것을 그들에게 가르쳐 지키게 하여라. 보아라, 내가 세상 끝 날까지 항상 너희와 함께 있을 것이다"(마
28:19)라는 주님의 명령을 신뢰하며 세상으로 나가 그리스도교를 전하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예수 밖에는 다른 아무에게도 구원은
없다'는 주장은 결코 양보할 수 없는 그리스도교 진리이기도 합니다. 실제로 그런 믿음과 고백으로 선교지에서 온갖 어려움 속에서
복음을 전파하는 이름 모를 선교사 또한 많습니다.
시카고에서 4년마다 한 번 전 세계에 나가 있는 한인 선교사들이
모여 일주일 정도 묵으면서 선교 대회를 합니다. 우리나라 선교사가 1만 8000명쯤 된다고 해요. 미국이 2만 명이 넘는 선교
1위국인데, 대회 장소인 위튼칼리지 빌리그레이엄센터에 2000~3000명 되는 한인 선교사들이 옵니다. 저는 시카고에서 유학하는
동안 이름도 모르는 나라에서 정말 수십 년 동안 헌신적으로 교회를 세우고 그리스도의 사랑을 전하는 많은 선교사를 만날 수
있었어요. 그분들 앞에서 그리스도교 선교의 역사에서 발생했던 폭력들, 현재 선교사들이 저지르는 깃발 꽂고 예수의 이름을 강요하는
제국주의적 선교의 문제점들에 대해 제가 배운 것들, 알고 있는 것들에 대해 자신 있게 말 못 하겠더라고요. 제가 알고 있는 알량한
지식이 또 전부는 아니었습니다.
4.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 밖에는 구원이 없다'라는 구절은 해명이
필요합니다. 왜냐하면 성서 안에는 진리에 대한 배타성과 다원성이 서로 모순적으로 각기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성서에는 가나안에
들어간 아브라함이 가나안 사람들이 섬기는 상수리나무 옆에 제단을 쌓으면서 타 종교와 공생의 길을 간 전통이 있는가 하면(창
12:6-7), 모세가 십계명을 받으러 시내산에 간 사이에 금송아지로 우상을 섬긴 일이 발생하죠. 주께서 우상을 섬긴 이스라엘
백성을 벌하는 일이 발생합니다(창 32장). 즉 가나안이라는 종교다원주의적 상황에서 다른 종교를 인정하는 모습이 성서에는 있고,
반면 그런 경향을 반대하는 전통이 성서에는 또한 있습니다. 이 말은 우리나라 구한말에 척화파와 개화파가 있었듯이, 성경이 쓰일
당시에도 이방의 종교를 포용하느냐 배척하느냐를 두고 성경 저자들 사이에 입장이 달랐다는 것으로 읽힐 수 있을 것입니다.
바벨론
포로기 이후,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더 이상 이스라엘 민족만의 하나님이 아니라, 온 인류, 우주의 주님으로 고백되었습니다. 인간
세계만이 아니라, 우주의 통치자이신 하느님은 한 분이시고, 모든 것의 신이요, 모든 것 위에 계시고, 모든 것을 통하여 계시고,
모든 것 안에 계시는 분이십니다(엡 4:6). 이렇듯 우주적 하느님으로 그려지다가도 동시에 하느님은 땅 위의 많은 백성들 가운데서
이스라엘을 선택하신 당파적인 하나님으로 그려지기도 합니다(신 7:6). 이방신을 섬기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해, "너희의 시체를
너희가 섬기는 그 우상들의 시체 위에다 쌓아놓을 것이다. 나는 도저히 너희를 불쌍히 여길 수 없다"(레 26:30)고 말씀하시는
무서운 하느님은 다른 한편으로, "예수를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예수를 통해 세상을 구원하시려는
것"이라고(요 3:17) 말하는 그런 사랑의 하느님입니다. 마치 옛날 마징가 제트에 나왔던 아수라 백작과도 같은 양면성을 지니고
있는 신입니다. 아주 밀당을 잘하는 애인 같기도 한 하느님입니다. 무엇이 신의 진정한 모습일까요.
5.
이제
오늘의 본문으로 돌아오겠습니다. 사도행전에서 베드로가 한 증언, "이 예수 밖에는, 다른 아무에게도 구원은 없습니다. 사람들에게
주신 이름 가운데 우리가 의지하여 구원을 얻어야 할 이름은, 하늘 아래에 이 이름 밖에 다른 이름이 없습니다"(행 4:12)라는
말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사건의 전말은 이렇습니다. 마가의 다락방 오순절 성령강림 사건 이후 제자들에게 성령의 은사가 임해
사람들을 치유하는 능력이 임했고, 사도들의 말을 듣고 수천 명이 예수를 믿는 일이 발생합니다. 사도행전 1장에 베드로와 요한이
백성을 가르치는 것과 예수의 부활을 내세워 죽은 사람들의 부활을 선전하고 있는 것에 격분한 제사장들과 성전 경비대장과 사두개파
사람들이 몰려와 베드로와 요한을 옥에 가두는 일이 발생했고 다음 날 제자들을 향한 문책이 이어집니다. "그대들은 대체 무슨 권세와
누구의 이름으로 이런 일을 하였소?" 이런 일은 구체적으로 '백성을 가르치는 것'과 '예수의 부활을 내세워 죽은 사람들의 부활을
선전하는 일'입니다. 지금으로 따지면 유언비어 유포, 집시법, 사기 등등의 죄목으로 재판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죠.
이
질문에 대하여 베드로가 말합니다. "백성의 지도자들과 장로 여러분, 이 사람이 성한 몸으로 여러분 앞에 서게 된 것은, 여러분이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으나 하나님이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살리신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힘입어서 된 것입니다(행
4:9-10)." 그리고 나서 오늘 본문이 이어집니다. "이 예수 밖에는, 다른 아무에게도 구원은 없습니다. 사람들에게 주신 이름
가운데, 우리가 의지하여 구원을 얻어야 할 이름은, 하늘 아래에 이 이름 밖에 다른 이름이 없습니다(행 4:11-12)."
베드로가
이 말을 한 후에 거기에 있었던 사람들이 놀랐다고 적혀 있습니다(행 4:13). 왜 놀란 것일까요? 사람들이 나았다는 사실
때문에 놀랐을까요. 나사렛 예수가 죽었다 다시 살아났다는 것 때문에 놀랐을까요. 하루 밤새 수천 명이 예수를 믿었다는 사실에
놀랐을까요. 모두 아닙니다. 그들이 놀랐던 이유는 베드로와 요한의 태도 때문입니다. "그들은 베드로와 요한이 본래 배운 것이 없는
보잘것없는 사람인 줄 알았는데, 이렇게 담대하게 말하는 것을 보고 놀랐다(행 4:13)"고 적혀 있습니다.
당시에
예수와 같았던 사람들, 세례 요한과 같았던 사람들이 너무나 많았습니다. 예수처럼 귀신 들린 사람을 쫒아내는 사람들이 많았고,
예수처럼 병든 사람 고치는 사람도 많았습니다. 가히 기적이 난무하던 시대였습니다. 이 말은 뭐냐 하면 기적을 일으키고 무슨 요술을
부르는 것이 메시아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것보다 중요한 것은 어떤 근거로, 즉 어떤 이름으로, 누구의 이름으로 그 일을
행하느냐입니다. 메시아를 자처하는 사람들은 모두 자기의 이름으로 병을 고치고, 기적을 행하였습니다. 그런데 요한과 베드로는
달랐습니다. 예수의 이름으로 기적을 행한 것입니다. 바로 이 점이 그들을 가두었던 사람들을 놀라게 한 것입니다.
6.
제자들을
옥에 가두었던 사람들의 입장에서 볼 때 예수는 누구입니까. 유대교 지도자들의 입장에서 예수는 율법을 하찮게 여기면서 신성모독을
일삼았던 죄인입니다. 로마제국의 입장에서도 능란한 언변과 기적을 행하면서 민심을 얻고 있는 예수가 골치 아픈 존재였을 것입니다. 그
결과 예수는 유대 지도자과 로마제국 앞잡이들의 음모, 조직되고 동원된 대중들의 광기 어린 선택에 의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습니다. 그렇게 제거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요한과 베드로가 병자들을 치유하고, 사람들을 모아 복음을 전했더니 수천 명씩
예수의 메시지에 동의를 하고 있는 일이 발생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이 이제는 죽어 사라진 예수의 이름으로 지금 자신들과
당당하게 맞짱을 뜨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무척 그들에게는 경악스러웠던 것이죠. 이것이 지금 "이 예수 밖에는, 다른 아무에게도
구원은 없습니다"라는 발언이 벌어지고 있는 상황입니다.
그런데 이 말이 2000년이 지난 후에 '다른 종교에는
구원이 없다'는 말과 동의어가 된 것입니다. 제자들은 이 구절에서 다른 종교의 구원의 유무를 전혀 언급하지 않았고, 그런 의도도
없습니다. 내가 믿는 신, 내가 믿는 신을 향한 구도의 길을 따라가기도 힘겨운 마당에 다른 종교의 구원을 논할 오지랖을 펼칠
정도의 한가함과 여유가 제자들에게는 없습니다. 그리고 사실 (특별히 종교학을 전문적으로 연구하지 않았다 하더라도) 모든 종교는
모두 인간의 구원을 이야기하고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잘 압니다. 특별히 우리나라 같은 다종교 사회에서 오랫동안 살아온 우리는 이
사실을 잘 압니다. 다만 그 방식과 내용이 다를 뿐이지요. 이웃 종교의 구원 논의를 적대하는 방식으로 그리스도교의 정체성을
확보하려는 시도들이 역사적 교회 안에서는 있어 왔고, 그 역사는 광기와 폭력의 역사였습니다. 한국 개신교도 이 문제에 대해
자유롭지 못합니다.
결론적으로 "이 예수 밖에는,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나사렛 예수 밖에는 다른 아무에게도 구원이
없다"는 말은 그리스도교의 절대성이나, 그리스도교만이 갖는 구원의 배타적 독권을 주장하는 말이 아닙니다. 베드로의 이 말은
유대교의 지도자들과 로마제국의 부와 권력에 기대어 살아갔던 사람들, 그리고 이러한 권력의 선동에 넘어가 동원된 대중에게 한
말입니다. 어쩌면 그들에게 있어 구원은 율법에 대한 기계적이고 엄격한 준수에 의해 얻어지거나, 아니면 현실의 권력을 쥐고 있는
로마 황제로부터 온다고 믿었습니다. 예수에 대한 처형은 유대 율법과 로마제국의 영향력을 등에 업고 자신들의 기득권을 유지하려 했던
세력들과 예수와 단판이었습니다. 그 순간 제자들은 뿔뿔이 흩어졌고 민중들은 예수의 십자가 처형에 환호했습니다.
7.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십자가 처형으로부터 도망가거나 회피했던 추종자들은 예수의 죽음으로부터 자신들이 자유롭지 못하다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그것은 씻을 수 없는 트라우마로 남지 않았을까요. 하지만 모든 억압되었던 것은 귀환하기 마련입니다. '그때 내가 왜
그랬을까,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울부짖고 있었을 때 내가 뭘하고 있었던 거지.' 이것이 바로 그들이 던졌던 왜상적 기억의
내용입니다. 어쩌면 성령강림 사건은 억압된 트라우마를 지우고 현실로 귀환하게 하여 다시는 그렇게 행동하지 않겠노라고 다짐하면서,
용기를 주는 역할을 하지 않았을까. 실제로 그들은 변했다고 성서는 말합니다.
예수의 추종자들은 다양한 민중적 메시아
운동들 통하여, 유대-로마 전쟁에서, 회당 시스템에서 축출당하는 위험을 감수하면서도, 지난 시절 예수의 죽음 앞에서 도망갔던
굴욕적인 삶을 살지 않았습니다. 자신들을 휘감는 고통을 속에서도 예수의 고통을 계속 떠올리면서 그 순간을 견디며 예수를
전승하였습니다. 예수를 기억하면서 현실에서 자신들에게 닥치는 불의와 고난에 맞섭니다. 이런 예수 전승의 활성화가 결국 지금
이곳에서의 저항과 이곳에서의 부활사건을 가능하게 한 것 아닐까. 그것이 민중신학이 지금 이곳에서 벌어지고 있는 예수의 사건과
부활을 기억하는 방법입니다.
그렇게 예수의 이야기는 주변의 제자들에 의해서 기억되고 순환되고 전승되면서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습니다. 그 제자들이 지금 "하늘 아래에 이 이름 밖에 다른 이름으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다"고 한 것입니다.
역사적으로 하늘 아래에서 구원을 약속한 사람들이 얼마나 많았습니까. 그리고 지금도 얼마나 많습니까. 뉴타운을 통해 너희를 잘살게 해
주겠다. 경제개발을 해서 너희를 잘살게 해 주겠다. 빨갱이를 이 땅에서 몰아내면 잘살 수 있다. 올림픽과 월드컵을 치르고 나면
우리는 선진국이 될 것이다. 그동안 얼마나 많은 감언이설이 우리를 스쳐 지나갔고, 그 달콤한 속삭임에 얼마나 많이 속았고(속고
있고) 얼마나 우리가 좌절했습니까(지금도 좌절하고 있습니까).
이런 이름은 권력과 자본이라고 단순화하여 말할 수
있겠지만, 그것들은 실로 신과 같은 위력을 지니고 있는 것들이고 실제로 그 힘으로 누군가는 구원을 이루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베드로는 "은과 금은 내게 없으나, 내게 있는 것을 그대에게 주니,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시오"라고
말함으로써, 권력과 자본이 우리를 구원할 수 있다고 믿는 세상에서, 오직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만
구원받을 수 있다고 증언합니다.
"우리가 의지하여 구원을 얻어야 할 이름은, 하늘 아래에 이 이름 밖에 다른 이름이
없습니다(행 4:12)." 이 말은 그 누구도 하늘 아래 있는 세상을 어떤 무엇인가로 지배할 수 없다는 말입니다. 세상은 권력과
자본으로 지배할 수 없습니다. 누군가 하늘 아래 있는 세상을 돈과 권력으로 지배하려고 한다면 그것이 죄입니다. 이렇듯 예수
그리스도만이 우리를 구원하신다는 고백은 자본과 권력만 있으면 세상을 지배할 수 있다고 믿는 사람들을 향한 대항 담론이지, 이웃
종교에 대한 배타적 공격성, 그리스도교를 믿지 않는 이웃 종교인들에 대한 저주의 언어가 절대 아닙니다.
이 말은 또한
제도와 법을 가지고 세상을 가르는 사람들, 그 기준으로 배제와 차별을 일삼는 사람들을 향한 경고의 말이기도 합니다. 국경을
경계로 자국민과 난민을 가르고, 21세기 자본이라는 이름으로 계약직과 정규직을 가르고, 창조의 섭리란 이름으로 남자와 여자를
가르고, 흑인과 백인을 나누면서, 그러한 차이를 차별의 근거로 사용하고, 다름을 배제의 메커니즘으로 사용하는 사람들을 향한
말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바울은 "(그 이름 아래서는) 유대 사람도 그리스 사람도, 종도 자유인도 없으며, 남자와 여자가
없다"(갈 4:28)고 선언하지 않았나 싶습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이 우리를 구원하신다는 제자들의 발언은 세상을
지배하는 전체주의적 이름과 논리에 대한 저항이고 반대이지, 이웃 종교에 대한 배타적 독선이나, 믿지 않는 사람들에 대한 배제나
차별이 아닙니다. 그것은 권세가들을 향해서는 하나님 앞에서 겸손하라는 경고의 구절이고, 민중들에게는 세상에 쫄지 말고 당당하게
맞서라는 격려의 구절이 되어 우리에게 전달되어 지금까지 전달되고 있습니다.
한 나라의 교회 역사는 그 나라의 역사 속에 상호 작용하며 흐른다. "역사는 과거를 배울 수 있는 교과서가 되고 현재를 들여다 볼 수 있는 거울이며 미래를 바라 볼 수 있는 창이다"라는 말이 있다. 지금 한민족의 시대적 소명은 "통일 대한민국"이며 교회도 역시 동일하다. 한반도가 남과 북으로 분단된 지 75년이 경과하고 있지만 한국교회는 그 날을 막연히 기다리기 보다는 그 통일의 비전과 역사적 소명의식을 갖고 능동적으로 준비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신앙의 자유와 자유민주주의를 누리고 있는 우리가 공산체제 하에 억압과 핍박 속에 살아가고 있는 2천 4백만의 북한 동포들과 그 가운데에 신음하며 자유의 날을 갈망하고 있는 그루터기 기독교인들을 기억하며 자유 통일의 날을 함께 품고 나가야 한다.
본 필자는 30여 년 전인 1991.10.1일에 중국 단동 압록강가에서 동이 틀 무렵 신의주를 바라보며 이같이 기도했다.
"하나님 지금 저 강 건너 동편에 해가 떠오르고 있는데, 이제는 하나님의 말씀의 해가 그곳에 떠 올라 저 북녘의 동포를 비추어 주시옵소서!"
나의 이런 기도가 북한선교의 시작이 되었다. 그 후 믿어 지지 않는 사실이 밝혀졌다. 강 건너 철의 장막에 쌓인 신의주 땅에 "신의주 제1교회"를 섬겼던 고령의 기독교 신자가 있음이 확인되었다. 너무도 놀라운 일이었다. 나의 상식으로는 이해 될 수 없었다. 더욱 기이했던 것은 일명 "지하교회 성도"라고 하는 저들 중에는 주일에 자신들이 다녔던 예배당의 뜰을 돌면서 침묵으로 예배를 드리고 있다는 것이었고, 그뿐만 아니라 장차 통일이 되면 공산화되는 시기에 남으로 내려간 성도들은 통일이 되면 교회 재건을 위해 어떤 계획이 있는지를 알고 싶다는 전갈을 보내왔다.
우리가 상식적으로 알기로는 1945년 8월 해방과 더불어 이북지역에는 공산화되는 과정에 많은 기독교인들이 신앙의 자유를 찾아 남으로 내려왔고, 다시 1951년 1.4 후퇴 시에도 많은 이북 동포와 기독교인들이 남으로 내려왔다.
그 후 북한은 엄혹한 공산체제 하에 그 땅에 많은 기독교인들이 숙청되고 산간 벽지로 추방되어 더 이상 그 곳에는 기독교인들이 남아 있을 가능성은 없는 것으로 생각해 왔었다.
그러나 장망성 같은 그곳에 지하기독교인이 있다는 사실을 확인한 후에는 한국교회 역사와 특히 북한 교회사에 대해 관심을 갖고 연구하였다.
한국교회사에서는 1885년 4월 5일 미국 북장로교회로부터 파송된 언더우드 선교사(Horace Grant Underwood, 1859~1916)와 미국 감리교 해외선교부로부터 파송된 아펜젤러 선교사(Henry Gerhard Appenzeller, 1858~1902)가 제물포에 들어 온 그 날이 교회사의 원년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그렇게 되기까지 한국교회사의 디딤돌을 놓은 앞선 선교사가 있었다. 그가 알렌 선교사(Horace Newton Allen,1858~1932)였다. 그는 1884년 9월에 미국 공사관에 공의로 입경하였는데, 그 해 12월 갑신정변시에 고종과 민비의 최 측근인 민영익이 자객에게 테러를 당하여 다 죽어 갈 때에 그를 수술해 살려냄으로 그 공로의 보은으로 1885년 한국 최초의 서양식 근대병원인 광혜원(제중원)이 세워졌다.
이 병원 운영과 조선 의료인 교육에 봉사할 일꾼이 필요하였는데, 이에 언더우드 선교사는 이 병원에 직원으로 들어 올 수 있게 되었고, 아펜젤러는 고종의 승인을 받아 최초의 근대식 학교인 배제학당을 세울 수 있게 되었다.
이 두 명의 최초의 선교사는 알렌 선교사 덕분에 조선 선교사로 들어 올 수 있었던 것이다.
한국교회사에서 알렌을 최초의 한국교회사의 첫 선교사로 인정하지 않은 것은 언더우드나 아펜젤러 선교사처럼 선교사의 신분으로 선교에 전임한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알렌은 1887년에는 고종의 부탁으로 워싱톤의 주미공사관의 참찬관으로 박정양 공사를 돕는 조선의 공직자로 한.미 외교사에 디딤돌을 놓는 기여를 하였다. 1890년에는 조선에 주한 미공사가 공백되자 미 정부에 의해 역으로 주한 미공사관의 대리공사를 맡았다.
그 후 1905년 7월에 미국과 일본이 "가스라 테프트조약"으로 조선을 일본이 지배하는 것을 승인한다는 밀약에 이어서, 그해 11월에 을사늑약이 맺어지고 한성에 미공사관이 폐쇄되자, 그는 미국으로 돌아갔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은 그는 한국교회 역사에 공식인 선교사 신분은 아니었지만, 한국교회사의 정사를 형성하는 데에 개척자였고 선구자적 사역을 한 것이며 나아가서 한.미 외교사에도 크게 공헌한 인물이었음이 확실하다.
이처럼 알렌이 조선 선교의 선두주자로 입경한 후 언더우드와 아펜젤러에 이어서 스크렌턴(Mary F.B. Scranton, 1832~1909) 모자가 들어와 이화학당을 설립하고 연이어 여러 선교사들이 들어왔다. 그 중에 이북 지방에 선교지를 개척하기 위하여 몇몇 선교사가 이에 나선다. 1890년에 미 북장로선교부로 부터 파송된 사무엘 마펫(Samuel Austin Moffett, 1864~1939), 1892년에 카나다 출신이며 감리교 파송인 윌리엄 제임스 홀(William James Hall, 1860~1895)과 그의 아내 로제타 셔워드 홀(Rosseta S. Hall,1865~1951) 의사 부부와 이어서 1897년에 베어드(William M. Baird, 1862~1931) 선교사가 들어와 이들이 이북의 중심지인 평양을 선교지(Mission Station)로 정하여 교회와 학교와 병원을 설립하여 본격적인 이북 지방의 선교가 본격화 되었다. 이들의 사역으로 인해 나타난 결실은 상대적으로 이남지역보다 이북지역의 선교활동이 풍성하게 나타난다.
사무엘 마펫은 왜 평양이 최적의 선교지라고 했을까?
1893년 2월에 캐나다 출신 의료 선교사인 윌리엄 제임스 홀과 사무엘 마펫, 그레이엄 리(Graham Lee, 1861~1916)는 이북 서북지방(황해도,평안도)으로 선교지 탐사를 위해 순회 여행을 한 끝에 왜 평양이 최적의 선교지 인지를 선교 본부에 다음과 같이 보고하였다.
"첫째, 이 평양 도성은 조선에서 가장 문란하고 더러운 곳이므로 선교의 도전 대상지이다. 둘째, 이들은 자기들의 기분에 맞지 않으면 일반인이건 관원들이건 막론하고 돌로 때리는 폭력배들이 많은 곳으로 유명하다. 셋째, 인구가 10만명이 넘으며 주민들은 적극적이고 상업적이라 비교적 번성할 여지가 있는 곳이다. 넷째, 한성과 베이징 간을 연결하는 도로 선상에 위치하므로 육로 사정도 괜찮고 대동강을 통한 해상 교통도 용이한 점으로 볼 때 평양은 찬란한 역사의 도시임이 틀림없다."
이들이 이북지방 곳곳을 답사했던 이유는 조선의 수도인 한성에 선교사들이 집결되자 타지방으로 균형있게 분산될 필요가 있었다. 이로 인해 선교사들은 파송 국가와 단체가 달랐지만 선교지 분할에 대해 합의가 되어야했다. 새로이 조선에 들어온 선교사들에게는 새로운 선교지가 필요했고 선교지가 서로 중첩되지 말아야 했다. 이들은 마치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 땅을 12 지파별로 분배했던 것같이 조선 땅의 선교 지경을 나누게 되었다. 먼저 선교사 수가 많은 미국 북장로교는 경기와 이북 관서 지방을 감리교와 나누었고 강원도는 주로 감리교가 감당하게 되었다. 카나다 장로교는 함경도 지역을, 미국 남장로교는 호남지역을, 경상도 지역은 호주 장로교가 맡게 되었다.
그후 한국교회사의 자료를 보면 이남 지역보다 이북지역의 교회의 부흥이 현격한 차이가 있음을 보게 된다. 여기에는 선교사들의 개개인의 선교 전략이나 선교사들의 수의 크고 작음에 의한 요인도 있었지만, 객관적으로 볼 때에는 그 당시의 지역적 또는 사회적 환경 요인이 매우 컸음을 보게 된다. 이는 그 당시의 교회 현황 자료가 입증하고 있다. 1898년 당시 조선의 장로교 전체 교인 수가 7,500여 명이었는데, 평안도와 황해도에 해당하는 서북지방의 교인수가 5,950명으로 전체 교인의 약 80%를 차지하였다.
이같은 현격한 결과의 원인으로는 첫째, 청일전쟁(1894~1895)중에 평양이 격전지가 되자 전쟁 중에 일반인들도 신변의 안전을 기대하고 교회로 몰렸다. 또한 전세에 따라 신앙인들이 황해도로 흩어지면서 교회가 분리 개척이 되기도 하였다.
둘째로는 서북지방에서는 양반 계층이 상대적으로 적었다. 이는 왕실에서 이 지역의 인재들을 등용하지 않는 차별 정책으로 인해 지식층들은 유교의 전통 문화에 억매이지 않고 새로운 학문과 종교에 쉽게 심취하는 개방형적 의식이 강하므로 기독교의 가르침을 긍정적으로 수용하였다. 이는 조선 최초의 장로교 7인 목사가 모두 이북 출신이며 양반 지식층들이었음을 말해 주고 있다. 예를 들어 한석진, 길선주, 서상륜, 서경조, 이기풍 등이 그런 부류의 사람들이었다.
셋째로는 이북지방에는 자립적 중산층이 많이 형성되었고 이들은 주로 상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이들은 보수 성향이 아닌 진보적 의식이 강하였기에 기독교를 쉽게 받아들일 수 있었다.
넷째로는 선교사들의 사역 중심축이 한성과 경기도, 호남지역보다는 점차 평양을 중심으로 집중되었다. 그 증거로서 장로교의 경우 이북 서북지방에 기독교인 수가 1910년에 23,483명인데 반해 경기와 호남의 기독교인 수는 2,975명이었다. 선교사의 수도 이북 지역의 선교사와 이남지역의 선교사 비율도 45:25명으로 나타나 있다.
다섯째로는 선교사들의 선교 중점 지향이 이남에서는 주로 교육, 의료, 사회사업 등 문화 사역으로 나타났고, 이북 지역에서는 전도 사역과 교회 설립에 비중을 두었다. 뿐만 아니라 이북 지역 주민들은 개방성과 개척 성향이 강하여 그 지역의 복음 확산에 크게 기여하였다.
선교의 역사에 나타난 선교의 역할에는 두 가지가 병행 되었다. 첫째로는 복음화(Evangelization)와 문명화(Civilization)였다. 조선 말기에 왕실은 서양의 영향으로부터 봉건 왕조 유지가 급선무였기에 그 당시 선교사들의 사역을 늘 감시하면서 경계시하였기에 한성과 경기지역에서 교회를 세우며 복음을 전하는 데에는 늘 긴장과 절제가 필요로 하였다. 그 예로서 선교 초기에 최초로 조선에 들어와 왕실의 어의 역할을 하였던 알렌은 언더우드와 여러 선교사들과 사역 활동의 범위를 놓고 갈등이 매우 심각하기도 하였다. 그에 반해 평양을 중심으로 한 이북지역에서는 비교적 중앙 정부의 감시로부터 멀었기에 활달한 사역을 할 수 있었던 환경도 크게 작용되었다. (계속)
제너랄 셔만호 사건이 한국 교회사에 미친 영향
한국교회사의 선교 역사에 장을 연 알렌 선교사(1894년 입경), 언더우드, 아펜젤러, 스크렌턴 모자 선교사(1885년 입경)들은 1기에 속한 선교사들이었다. 그 후 다수의 선교사들이 조선에 들어와 사역의 새로운 지경을 개척하는데, 그 지역이 바로 이북 지역으로 1890년에 사무엘 마펫(Samuel Austin Moffett), 1892년에 윌리엄 제임스 홀(William James Hall), 그레함 리(Graham Lee)선교사는 제 2기의 개척 선교사들로 최초로 평양에 선교의 둥지를 틀었다. 이들은 평양을 선택하여 이북 지역의 선교 개척자들이 되었다.
이들 선교사들이 처음 평양을 방문했을 때에 기이한 것을 발견하게 된다. 그것은 평양 대동문에 걸려있는 배의 닻(anchor)과 쇠사슬이었다. 이 대동문은 바로 전면의 대동강 능라도와 양각도 가운데에 있는 출입문으로 가장 중심적인 평양의 관문이었다. 이 선교사들은 그 동문 벽에 달려있는 그 두 개의 장식물에 대해 현지인들의 설명을 듣고서야 놀라움을 금치 못하며 30여 년 전의 역사를 돌이키게 된다. 이들이 평양에 발을 딛기 전에 이미 그곳에 한 알의 밀알이 된 토마스(Robert Jermain Thomas,1839~1866)선교사가 평양에서 순교의 피를 흘리게 된 이야기를 듣게 된다. 바로 그 유명한 제너랄 셔만호(General Sherman) 사건과 연유된 것이었다.
이 셔만호 사건은 사실상 한국 근대사에 물꼬를 튼 역사이면서 한국교회사와 북한 교회사에 새로운 국면을 갖다 준 중요한 사건으로 그 이후에 상당한 영향을 주게 된다. 왜냐하면 이 사건이 일어난 후 5년이 되는 1871년에 미국 함대 5척이 강화도에서 이 사건의 진상 조사와 사과와 배상을 제시했으나 조선이 이를 거부하자 미군과 조선군 간에 전투가 벌어지는데, 그 역사가 바로 '신미양요'였다. 그러나 이 사건이 연유되어 미정부는 조선과의 수호통상 조약을 11년이 지난 1882년에 제물포에서 조.미 수호 통상조약을 성사시켰다. 그후 1885년 4월 5일에 한국교회사의 최초 선교사로 기록된 언더우드 선교사와 아펜젤러 선교사가 입경할 수 있게 되었다. 이들이 한국교회사 첫 장을 열게 되는 것으로 이어지게 된다. 이처럼 셔만호 사건은 조선과의 외교 관계로 이어졌고 그로인한 조선의 근대사에 큰 영향을 주게 되었다.
그렇다면 셔만호 사건이 어떻게 발생되었고 그 후 어떤 역사로 이어지는지를 알아보아야 한다. 이 사건의 폭넓게 일반 통사적인 측면과 교회사적인 측면이라는 양면을 균형있게 객관화하여 볼 필요가 있다.
먼저 그 당시의 조선을 둘러싼 동북아의 국제 정세를 먼저 살펴보면, 1860년대에 조선에서는 매우 엄정하고도 불안한 쇄국정책을 고수하고 있었다. 이 당시 수렴청정을 하고 있던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 이하응(1821~1898)의 치세하에서 국내적으로는 천주교인들이 이미 왕실에 잠입되어 있었고, 국외적으로는 천주교와 개신교가 중국과 일본에 매우 활발한 포교 활동이 있었다. 조선에서는 오랫동안 봉건사회를 유지하고 있었기에 불교와 유교와 학문적으로는 성리학에 몰입해 왔던 지식층들과 권력층에게는 서양의 기독교는 매우 신선하고도 충격적인 새로운 사상과 종교였기에 진지한 관심을 갖게 되었다.
그러나 왕실은 경계할 수밖에 없는 외세 종교와 학문이였다. 특히 1801년의 황사영백서 사건 이후 천주학이라고도 하는 천주교를 정치적으로는 매우 경계시 하게 되었고 그러던 중에 다시 이양선이라고 하는 서양의 큰 배가 요란한 소리와 검은 연기를 뿜어내면서 평양 도성 한가운데에 나타나자 조선 왕실은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
이 당시 조선 왕실은 청나라가 1884년과 그 후에도 아편전쟁으로 패하면서 서양의 세력들이 중국의 봉건 왕조를 위협하는 모습과 1858년의 일본과 미국과의 수호통상 조약으로 일본의 정국이 급변을 맞이하는 메이지 정국으로 전환되자, 서양과의 국교 수교와 통상에 대해서는 쇄국정책으로 나갈 수밖에 없는 정국으로 치닫게 된 것이다. 즉 조선의 국내외적 상황은 서양의 종교를 받아들이거나 서구의 문물이나 사상의 유입에 대해 빗장을 걸어 잠그게 된 상황으로 굳어지게 된 것이다.
그 시대에는 동아시아에 서양의 근대화된 문명이 큰 조류를 이루면서 식민지 개척시대와 맞물리게 되었으며 동북아의 중국과 일본과 조선도 이 시대적 조류를 거부할 수 없게 되었다. 이러한 시대적 특징과 변화에 대해 역사적 관점으로 이를 '서세동점'(西勢東漸)이라 하였다.
9월 4일(토)
느헤미야 7장 / 마음을 감동하사(5절)
♦ 9월 4일(토)
♦ 오늘 읽어야 할 말씀 : 느헤미야 7:1∼73 ♦ 묵상을 위한 주제 : 마음을 감동하사(16절) ♦ 성구 : 내 하나님이 내 마음을 감동(감동)하사 귀인(貴人)들과 민장(民長)과 백성(百姓)을 모아 그 보계(譜系)대로 계수(計數)하게 하신고로 내가 처음으로 돌아온 자의 보계(譜系)를 얻었는데 거기 기록(記錄)한 것을 보면.
“느헤미야”라는 이름은 “여호와는 나를 도움” 이라는 뜻입니다. 거친 세상 풍파가 심한 세상에서 믿음의 사람들이 위로를 받을 수 있는 유일한 통로는 오직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이 위로하실 때 “마음을 감동(put it into my heart to assemble the nobles)”하게 합니다.
느헤미야 7장의 내용을 크게 두 부분으로 구분합니다.
7:1∼4, 지도자를 임명 7:5∼73,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온 사람들의 이름
두 부분의 내용을 구체적으로 설명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7:5. 그 이름들은 계보대로(가족별로) 등록
7:7. 인솔자 12명의 명단
7:8∼38. 가족별 명단
7:39∼45. 제사장들, 노래하는 사람들, 문지기 등 레위 지파에 속한 명단
7:45∼60. 느디님 사람들(성전에서 막일하는 사람들)과 솔로몬의 신하들의 명단
7:61∼65. 계보가 불확실한 사람들의 명단
7:66∼73. 돌아온 사람들의 총수와 예물의 수
예루살렘 성벽을 재건하는 일은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52일 만에 문짝을 다는 것으로 마침표를 찍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끝이 아니었습니다.
집을 아름답게 건축한 후에 그곳에 들어가 살지 않는다면 그 집은 오랜 세월이 지나지 않아서 흉가가 될 것입니다. 집을 잘 지은 후에는 그 집에 거주하며 잘 관리하고 유지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예루살렘 성벽은 완공으로 끝나지 않고 그 성 안에서 참 평안을 누리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하겠습니다.
하나님의 평가 기준은 “충성(忠誠)”과 “경외(敬畏)”입니다. 하나님은 죄악의 모순덩어리와 같은 우리들을 부르셨고 예수님께서 우리의 구세주가 되심을 믿게 하셨습니다. 이 믿음으로 인하여 우리를 거룩하신 하나님의 자녀로 삼아주셨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답게 살고 계십니까?
오늘도 하나님께 충성하고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하나님으로부터 인정받는 복된 주의 백성들로 사랑받고 인정받는 사람으로 세워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 찬양 / 너 주의 사람아
예수 내 구주! 예수 내 생명! 예수 내 권세!
느헤미야 7:5
내 하나님이 내 마음을 감동하사 귀인들과 민장과 백성을 모아 그 보계대로 계수하게 하신고로 내가 처음으로 돌아온 자의 보계를 얻었는데 거기 기록한 것을 보면. 아멘
지극히 작은 것에 충성된 자는 큰 것에도 충성되고 지극히 작은 것에 불의한 자는 큰 것에도 불의하니라. 누가복음 16:10
토마스 모어의 '자신을 위한 기도'
느헤미야 7장의 내용 구분
7:1-4, 지도자를 임명 7:5-73,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온 사람들의 이름
7:5. 그 이름들은 계보대로(가족별로) 등록 7:7. 인솔자 12명의 명단 7:8-38. 가족별 명단 7:39-45. 제사장들, 노래하는 사람들, 문지기 등 레위 지파에 속한 명단 7:45-60. 느디님 사람들(성전에서 막일하는 사람들)과 솔로몬의 신하들의 명단 7:61-65. 계보가 불확실한 사람들의 명단 7:66-73. 돌아온 사람들의 총수와 예물의 수
예루살렘 성벽을 재건하는 일은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52일 만에, 문짝을 다는 것으로 마침표를 찍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끝이
아니었습니다. 집을 아름답게 건축하고서, 거기에 들어가 살지 않는다면 그 집은 오랜 세월이 지나지 않아서 흉가가 될 것입니다.
집을 잘 짓는 것만큼이나 지어진 집에 들어가 그 집을 잘 유지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예루살렘 성벽은 완공으로 끝나지 않고, 그 성
안에 들어가 사는 것이 성벽을 완공하는 것만큼이나 중요했습니다.
1절이 이렇게 증거합니다.
성벽이 건축되매 문짝을 달고 문지기와 노래하는 자들과 레위 사람들을 세운 후에
성벽이 완공되고 난 후에, 느헤미야는 그 성벽을 관리하는 사람으로 세운 사람들이 문지기와 노래하는 사람들, 레위 사람들이었습니다.
이 세 부류는 모두 레위 지파에 소속된 사람들이었습니다.
성벽을 공사를 방해하려는 여러 시도가 있었습니다. 산발랏과 게셈은 느헤미야에게 사람을 5번이나 보내어서 오노 평지에 있는 한
마을에서 만나자고 했었습니다. 5번째 사람을 보낼 때에는 봉하지 않을 편지를 보냄으로 모욕을 주고, 모함을 했습니다. 심지어
선지자 스마야마저도 뇌물을 받고 느헤미야를 성전에 가두려고 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성벽을 완공했다면, 느헤미야는 응당 최정예 무사들이나 유다 사람들 가운데 기골장대한 사람들을 뽑아서 성벽을 지키려고
해야 할 것 같습니다.
그러나 느헤미야는 물리적인 힘이 강한 사람들이 아니라 레위 지파 사람들로 하여금 성벽을 지키도록
했습니다.
에스라서에서 살폈던 성전재건과 지금 느헤미야서에서 살피는 성벽재건은 단지 건물이 필요하기 때문에 다시 세우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느헤미야는 유다 사람들이 다시는 하나님을 버리거나, 하나님과 우상을 동시에 섬기려고 하다가 나라가 망하는 일을 겪지 않도록,
그들을 하나님을 바르게 섬기는 신앙공동체를 세우려고 하는 것입니다. 또한 예루살렘 성벽을 레위 지파 사람들이 책임을 져야 하는
것은, 그 성벽 안에 70여 년 전에 세워진 성전이 있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2절이 이렇게 증거합니다.
내 아우 하나니와 영문의 관원 하나냐가 함께 예루살렘을 다스리게 하였는데 하나냐는 충성스러운 사람이요 하나님을 경외함이 무리 중에서 뛰어난 자라
예루살렘 성벽 관리 책임자로 레위 지파 사람들과 더불어 하나니와 하나냐가 선임되었습니다. 하나냐가 선정된 이유가 그가 ‘충성스럽고’, ‘하나님을 경외함이 뛰어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충성스럽다’는 열심히 일한다는 의미와 더불어 ‘옳고 그름에 대한 분별력이 뛰어나다’, ‘바른 길, 정도를 걷다’, ‘공평하다’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함이 뛰어나다’는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눈에 보이는 하나님으로 여겨 그 하나님을 존중하는 삶이 다른
사람들과는 달랐다’는 의미입니다. 이것은 느헤미야도 동일했습니다.
5장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유다 백성들이 기근과 납세와
고리이자로 먹고 살 것이 없고, 전답을 잡혀 세금을 내고, 자녀들을 종으로 팔아야 할 때에 느헤미야는 12년 동안 총독의 봉급을
받지 않았다고 했습니다. 그 이유가 “나는 하나님을 경외하기 때문입니다.”라고 고백했습니다.
하나냐는 충성스러움을 통해서는 사람들과 관계를 올바르게 맺어가고, 하나님을 경외함을 통해서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올바르게 맺어가는, 십자가의 삶을 사는 사람이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집에서 신실하게 섬기는 사람은 바로 하나냐와 같이 사람들과의 관계와 하나님과의 관계가 올바른 사람이어야 합니다. 물론 이
둘은 불가분의 관계에 있습니다. 사람과의 관계가 바른 그리스도인이라면 하나님과의 관계도 바를 수밖에 없고, 하나님과의 관계가
올바른 사람은 사람들과의 관계에서도 신실합니다.
만약 사람들과의 관계는 바른데, 하나님과의 관계가 바르지 못하다면 그가 하는 일은 하나님의 일이 아니라 사람이 일이 될 수
있습니다. 반면에 하나님과의 관계가 바른데 사람과의 관계가 바르지 못하면, 그의 일은 사람들을 정죄하는 도구가 될 수 있습니다.
느헤미야의 동생 하나니는 1장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느헤미야가 페르시아의 겨울 궁전인 수산 궁에 있을 때, 예루살렘의 소식을 전해
주었습니다. 그는 형에게 사람들이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왔지만 여전히 환난과 고통을 겪고 있고, 예루살렘 성은 허물어지고 성벽은
불타버렸다는 소식을 전해 주었습니다.
예루살렘에서 수산궁까지는 약 1,600km 정도 됩니다. 바벨론에서 포로가 되었던 사람들이 돌아올 때에 꼬박 4개월이 걸렸습니다.
현대인의 버킷리스트 가운데 하나는 산티아고 순례길을 걸어보는 것입니다. 산티아고 순례길은 프랑스의
생-장-피에-드-포르_Saint-Jean-Pied-de-Port에서 스페인의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_Santiago de
Compostela까지 인데 약 800km이고 40일이 소요됩니다.
그런데 산티아고 순례길에는 가는 길에 잠잘 수 있는 호텔이
있고, 음식점이 있고, 쉼터가 있습니다. 그리고 짐은 다 실어다 줍니다. 그러나 하나니와 함께 예루살렘에서 수산궁으로 갔던
사람들은 호텔, 음식점, 쉼터는 전무했습니다. 자신이 먹을 것은 자신이 들고 가야 했습니다. 거리도 산티아고 순례기의 2배나
됩니다. 그 먼 길을 가서 예루살렘의 상황을 전했다고 하는 것은 하나니도 하나냐처럼 사람들을 사랑하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이었던 것입니다.
3-4절이 이렇게 증거합니다.
내가 그들에게 이르기를 해가 높이 뜨기 전에는
예루살렘 성문을 열지 말고 아직 파수할 때에 곧 문을 닫고 빗장을 지르며 또 예루살렘 주민이 각각 자기가 지키는 곳에서 파수하되
자기 집 맞은편을 지키게 하라 하였노니 그 성읍은 광대하고 그 주민은 적으며 가옥은 미처 건축하지 못하였음이니라
예루살렘 성벽은 완성이 되었지만, 그 안에 사는 사람은 별로 없었습니다. 그리고 여전히 반대자들은 성벽을 무너뜨리려고 할 것이기
때문에, 느헤미야는 해가 떠서 날이 완전히 밝은 후에 예루살렘 성문을 열고, 해가 지기 전에 문을 닫고 잠그고, 반드시 경비하는
사람을 세우도록 했습니다.
느헤미야는 성벽 완성이 궁극적인 목적이 아니라 완성된 성벽 안에서 온전히 하나님을 섬기는 삶이 목적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교회의 예배당을 예쁘게 짓는 것보다, 그 안에 있는 교회인 사람들의 믿음이 아름답고 신실한 것이 훨씬 더 중요합니다. 교회 구성원들이 충성스럽고 하나님을
경외함이 뛰어난 것이 훨씬 더 중요합니다.
5-73절까지에는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온 사람들의 이름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5절에 의하면 그 이름들은 계보대로(가족별로) 등록을 하였다고 합니다.
7절에는 인솔자 12명의 명단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8-38절은 가족별 명단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39-45절에는 제사장들, 노래하는 사람들, 문지기 등 레위 지파에 속한 명단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45-60절에는 느디님 사람들(성전에서 막일하는 사람들)과 솔로몬의 신하들의 명단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61-65절에는 계보가 불확실한 사람들의 명단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66-73절에는 돌아온 사람들의 총 숫자와 예물의 숫자에 대해서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의 계보는 에스라 2장에도 거의 동일하게 나옵니다. 본래 히브리 성경에는 ‘에스라’와 ‘느헤미야’가 한 권,
‘에스라-느헤미야’로 되어 있습니다. 즉 한 권의 책에 이렇게 긴 족보를 2번 반복해서 기록한 것입니다.
그 이유가 무엇인지 정확하게 알 수는 없지만, 바벨론으로 포로가 되어갔던 사람들이 전부 다 돌아온 것은 아니었습니다. 당시에
이스라엘과 페르시아를 비교하면 페르시아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선진국입니다. 그곳에서 수 십 년을 살게 되니 그곳에서 사는 것이
더 편하다고 생각하여 많은 사람들이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아무 것도 없는 땅, 척박한 예루살렘으로 성전을 재건하고,
성벽을 재건하기 위해서 돌아온 사람들을 하나님께서 귀하게 여겨주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 이름들을 기억해 주셔서 성경에
2번씩이나 새겨주셨습니다. 돌아온 사람들 중에는 레위 지파 사람들도 있었지만, 성전에서 막일을 하는 사람들도 있었고, 종이었던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그들이 사람들로부터는 천하게 여김을 받았을지라도, 그들이 예루살렘을 하나님께서 마음과 정성을 다하여 심어주신
곳이라고 여겼기에 그들은 돌아왔고, 성벽을 재건하는데 온갖 방해가 있었을지라도 그것들을 두려워하지 않고, 하나님을 섬겼기에 그
이름을 지금까지 남겨 주셨습니다.
혹시 유다 사람들이 돌아왔을 때의 예루살렘처럼 우리의 삶이 황량하게 보이고, 척박하게 보일지라도 두려워하지 말고, 오늘도 오직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보고 믿으며 섬기십시다. 하나니와 하나냐처럼 사람들 앞에 충성스럽고, 하나님을 온전히
경외하십시다. 그 때에 하나님께서 마음과 정성을 다해서 심어주신 우리의 삶의 자리에는 하나님께서 맺게 하시는 열매들이 영글어가게
될 것입니다. 이 은총이 오늘도 풍성하시기를 축복합니다.
성경은 사람을 두 종류의 사람으로, 즉 의인과 악인으로 구별합니다. 성경에서 의인은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며, 악인은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입니다. 사람의 행위보다는 그 사람이 하나님을 믿느냐? 아니면 믿지않느냐? 이것이 기준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본문에서
"하나냐"를 일컬어 하나님을 경외함이 무리 중에서 뛰어난 자라고 했던 것처럼 하나님을 믿는다고 해서 모두 믿음의
분량을 똑같지 않습니다.
아무리 오랜 신앙생활을 했을지라도, 경우에 따라서는 초신자보다 더 약한 믿음을 지닌 사람도 있습니다.
믿음은 시간이 흐른다고 저절로 생기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은 내가 믿는 상대방에 대해 아는 만큼의 믿음을 지니고 있습니다.
기독교에 있어서 믿음은 끊임없는 자기 부인입니다. 자신을 비우면 비운만큼 믿음의 분량이 자라납니다. 내 속에 내가 아닌 하나님께서
차지하는 비중이 커지면 커질수록 우리는 그만큼 거룩해질 것이며, 이러한 모습을 일컬어 하나님을 경외한다고 평가받게 됩니다.
이후에 하나님께서는 느헤미야에게 인구조사를 할 필요성을 깨닫게 해주셨습니다. 느헤미야는 각 지파별로 거주할
지역을 배분했습니다. 이를 위한 사전 작업으로 오랜 포로생활을 마치고 귀환한 사람들을 제대로 지파별, 족보별, 출신지역별로 구분을
했는데, 이는 이후에 배분할 때 혼란을 최소화하기 위한 방편이기도 했습니다.
느헤미야는 하나님의 감동 속에서 백성을 모아 그
족보대로 계수하였는데, 그때 그는 바벨론에서 처음 돌아왔던 자들, 즉 약 92년 전에 작성되었던 스룹바벨과 예수아 등을 중심으로
돌아왔던 자들의 족보책을 얻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 6절 이하의 내용은 에스라 2장에 명시되어 있는 내용과 똑같지가 않고,
경우에 따라서 숫자의 차이를 보이고 있습니다. 이에 대해 많은 학자들이 여러 의견들을 제시했지만, 가장 적절한 해석은 다음과
같습니다.
에스라 2장에 명시된 명단은 바벨론에서 조사한 명단으로 바벨론에서 고국으로 귀환하겠다고 약속한 사람들의 명단이지만, 느헤미야 7장의 명단은 처음에 조사할 때는 귀환하겠다고 했지만, 피치 못할 사정으로 오지 못한 사람들과 귀환 도중에 죽은 사람들이
누락되었고, 개인적으로 본국으로 돌아온 사람들이 추가해서 나중에 새로 작성된 명단이기때문에 이같은 숫자의 차이가 난다고
해석합니다.
에스라 2장과 느헤미야 7장에 나타난 숫자의 차이는 분명히 존재하지만, 양자 모두 온 회중의 합계는
42,360명으로 동일하기 때문에 이러한 해석도 가능합니다.
에스라 2장에서 나온 숫자를 더하면 29,818명 느헤미야 7장에 나온 숫자를 합하면 31,089명
수학적 계산으로는 양자 모두 42,360명과는 틀립니다. 따라서 에스라와 느헤미야에 기록된 최종 합계가 42,360명으로 동일한
것으로 보아서, 원본 명단이 하나가 아니라 계수하는 과정에서 당시에 발생했던 상황의 변동으로 여러 개 존재했고, 에스라와
느헤미야는 각각 자기의 편의대로 이들 원본 명단 중에서 필요한 부분만을 본문에 옮겨 적었기에 이러한 숫자의 차이가 생겼다고
생각할 수 밖에 없기 때문에 앞의 주장이 타당하게 여겨집니다.
오늘 본문을 통해 우리의 기준과 하나님의 기준이 어떤 차이가 있는지를 생각해보았습니다. 세상을 향한 우리의 기준이 무엇일까요?
오늘 본문을 통해서 하나님의 평가 기준은 충성과 경외임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자격이라고는 전혀 없는 죄악덩어리인 우리로
하여금 예수님이 나의 구주이심을 믿게 해주시고, 입으로 고백하게 해주시고, 이 믿음을 근거로 우리를 감히 거룩하신 하나님의 자녀
삼아주셨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답게 살고 계십니까? 오늘도 하나님께 충성하고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하나님으로부터 인정받는 복된
하루로 만들어가시기를 축원드립니다.
9월 3일(금)
느헤미야 6장 / 하나님이 이루신 것(16절)
♦ 9월 3일(금)
♦ 오늘 읽어야 할 말씀 : 느헤미야 6:1∼19 ♦ 묵상을 위한 주제 : 하나님이 이루신 것(16절) ♦ 성구 : 우리 모든 대적(對敵)과 사면(四面) 이방(異邦) 사람들이 이를 듣고 다 두려워하여 스스로 낙담(落膽)하였으니 이는 이 역사(役事)를 우리 하나님이 이루신 것을 앎이니라.
평신도 선지자 느헤미야의 유일한 목표는 예루살렘 성벽을 재건하는 것입니다. 만일 느헤미야가 개인적으로 평안하게 살기를 원했다면 얼마든지 아닥사스다 왕궁에서 술 맡은 관원으로 일생을 행복하게 지낼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바벨론 땅에서 태어나서 자랐으면서도 선조들의 고향 땅 예루살렘의 성벽이 훼손되었다는 이야기를 듣고 강열한 애국심이 그 마음을 흔들었습니다.
유다 총독으로 임명을 받고 성벽 재건하는 일에 몰두할 때 여러 차례 외부로부터 훼방꾼들로부터(산발랏, 도비야, 게셈) 어려움을 겪어야 했습니다.
느헤미야 6장에서는 심지어 느헤미야를 유인하는 편지를 다섯 차례씩 보내서 “오노 평지 한 촌”에서 만나자고 제안합니다. 심지어 선지자 “스마야”를 매수하여 성전 외소에 들어가 숨어야 한다고 제안하기도 합니다. 그때마다 느헤미야는 미리 잘못된 음모를 알고 아주 지혜롭게 거절합니다.
결국 예루살렘 성벽을 재건하는 사역이 52일 만에 마쳤습니다. 그 날은 엘룰월 이십 오일이라고 소개합니다.
성벽을 재건하는 사역은 민간력으로 압월(11월) 4일부터 시작하여 엘룰 월(12월)까지 진행되었습니다. 양력으로는 7월 중순 경부터 9월 중순까지 마침 비가 오지 않는 건기(乾期)에 시행되었으므로 순조롭게 진행될 수 있었습니다.
사랑하는 믿음의 동지들이여! 이 세상의 삶은 순간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순간을 마치 영원인 것처럼 착각하고 살아가고 있지는 않았는지요?
영원한 삶을 바라보며 순간의 것 때문에 아주 귀중한 것을 놓치거나 잃어버리는 일이 없어야 하겠습니다.
내일을 모르는 하루살이처럼 내년을 모르는 메뚜기처럼 영원을 모르는 어리석은 사람처럼 살아갈 것이 아닙니다. 영원을 사모하는 믿음으로 오늘을 내일처럼 기도하며 계획하는 일에 성공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친한 네 마리 황소가 있었다. 이 황소는 어디를 가든 함께 가고 맛있는 풀도 나누어 먹었다. 그리고 어떤 위험이 닥쳐오면 네 마리가 힘을 합쳐 위험을 물리쳤다. 네 마리의 황소를 노리는 사자가 있었다. 사자는 한 마리씩 사냥하는 것은 자신 있었지만 힘을 합한 네 마리의 방어에는 자신이
없어 늘 망설이다가 하루는 꾀를 내어 약간 뒤에 처져있는 황소 한 마리에게 다가가 귓속말로 "다른 소들이 네 흉을 본다"라고
말했다. 그리고 세 마리의 황소에게도 같은 방법으로 접근하여 똑같이 말했다. 그러자 네 친구들은 서로 불신하였고, 크게 싸우다가 마침내 각기 흩어져 사자의 먹이가 되고 말았다. 분열을 노린 사자는 네 번의 훌륭한 식사를 마친 것이다
성벽의 길이 : 6.4km 성벽 공사 현장 ; 42곳
느헤미야 6:16
우리 모든 대적과 사면 이방 사람들이 이를 듣고 다 두려워하여 스스로 낙담하였으니 이는 이 역사를 우리 하나님이 이루신 것을 앎이니라. 아멘
느헤미야 6:1
산발랏과 도비야와 아라비아 사람 게셈과 그 나머지 우리의 대적이 내가 성을 건축하여 그 퇴락한 곳을 남기지 아니하였다 함을 들었는데 내가 아직 성문에 문짝을 달지 못한 때라.
느헤미야 6:6
그 글에 이르기를 이방 중에도 소문이 있고 가스무도 말하기를 네가 유다 사람들로 더불어 모반하려 하여 성을 건축한다 하나니 네가 그 말과 같이 왕이 되려 하는도다.
가스무 / 게셈의 아라비아식 이름
느헤미야 6:9
이는 저희가 다 우리를 두렵게 하고자 하여 말하기를 저희 손이 피곤하여 역사를 정지하고 이루지 못하리라 함이라 이제 내 손을 힘있게 하옵소서 하였노라.
느헤미야 6:10
이 후에 므헤다벨의 손자 들라야의 아들 스마야가 두문불출하기로 내가 그 집에 가니 저가 이르기를 저희가 너를 죽이러 올터이니 우리가 하나님의 전으로 가서 외소 안에 있고 그 문을 닫자 저희가 필연 밤에 와서 너를 죽이리라.
느헤미야 6:14-15
내 하나님이여 도비야와 산발랏과 여선지 노아댜와 그 남은 선지자들 무릇 나를 두렵게 하고자 한 자의 소위를 기억하옵소서 하였노라. 성 역사가 오십 이일만에 엘룰월 이십 오일에 끝나매.
링컨의 신앙생활 십계명
1. 주일을 거룩하게 지키며 예배 생활에 힘쓸 것 2. 날마다 성경을 읽고 묵상하며 그 말씀을 실천할 것 3. 하나님께 날마다 겸손히 기도 할 것 4. 하나님 뜻에 순종할 것 5. 하나님께서 베풀어 주신 은혜를 기억하며 감사 할 것 6. 하나님의 도우심을 의지할 것 7. 하나님만을 높여 드리고 영광을 올려 드릴 것 8. 모든 사람은 자유하며 평등 하다고 믿는 것 9. 주님의 명령을 실천 할 것(이웃을 사랑) 10. 하나님의 진리와 공의가 실현 되도록 기도할 것.
요한삼서 1:3 네가 진리 안에서 행한다 하니 내가 심히 기뻐하노라.
오늘의 기도
항상 진리편에 서게 하시고 진리가 승리하는 기쁨을 누리게 하옵소서!
9월 2일(목) 느헤미야 5장 / 은혜를 베푸시옵소서(19절)
♦ 9월 2일(목)
♦ 오늘 읽어야 할 말씀 : 느헤미야 5:1∼19 ♦ 묵상을 위한 주제 : 은혜를 베푸시옵소서(19절) ♦ 성구 : 내 하나님이여 내가 이 백성(百姓)을 위(爲)하여 행(行)한 모든 일을 생각하시고 내게 은혜(恩惠)를 베푸시옵소서.
“은혜를 베푸시옵소서(Remember me with favor.)”
느헤미야와 유다 백성들이 역할을 정하고 마음을 다하여 성벽을 재건할 때 호른 사람 산발랏과 암몬 사람 도비야 그리고 아라비아 사람 게셈이 끊임없이 방해합니다.
도비야는 “유다 백성들이 건축하는 돌 성벽은 여우가 올라가도 무너질 것”이라고 조롱했습니다.
그럼에도 유다 백성들은 낮에는 일하고 밤에는 파수꾼을 세워 지키며 한손으로는 건축도구를 잡았고 또 한손으로는 병기를 잡고서 불철주야 열심히 중수하는 일에 열중했습니다.
그런데 느헤미야 5장은 성벽 재건을 방해하는 일이 외부에만 있었던 것이 아니라 내부에도 있었음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내부의 방해란 흉년으로 인하여 먹을 것을 얻기가 어려울 때 비싼 이자를 받으며 백성들을 힘들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때 느헤미야는 이방 사람들의 비방도 견디기가 어렵지만 같은 동족끼리 힘들게 하는 것은 더 어렵다며 이자를 받지 말고 돈을 빌려주어 이 어려운 때를 극복하자고 제안합니다.
왜냐하면 이런 것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신앙적인 삶이라고 깨우쳤기 때문입니다. 그 결과 느헤미야의 가르침대로 행할 것을 서로 맹세하였습니다.
더구나 느헤미야는 통독으로 임명을 받았지만 12년 동안 백성들에게 총독의 녹을 요구하지 않았던 것처럼 성벽을 재건하는 일이 모두에게 힘든 일이므로 오직 하나님의 은혜만을 구하자고 합니다.
은혜는 받을만한 그릇과 준비를 갖추어야 합니다. 하늘에서 비가 내릴 때 비를 받을 수 있는 그릇이 있어야 하듯이 오늘날도 하나님의 은혜를 받으려면 반드시 은혜를 담을 수 있는 희생과 나눔과 사랑의 마음을 회복해야 합니다.
사랑하는 교우들이여! 어려운 이 시기를 서로 힘을 더하여 함께 극복하겠다는 마음을 가져 봅시다. 그리고 이길 수 있는 믿음과 지혜와 용기와 인내로 무장하여 소망의 그 날을 함께 맞이할 수 있는 복된 주의 백성으로 세워지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내 하나님이여 내가 이 백성을 위하여 행한 모든 일을 기억하사 내게 은혜를 베푸시옵소서. 아멘
- 오늘 내게 필요한 은혜가 무엇일까? 궁극적인 구원은 "예수를 믿고 영생을 얻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나 매일의 삶에서 필요한 것은 "지혜" 라고 하겠습니다. 하루 24시간을 어떻게 사용해야 최대의 효과를 누리며 살아갈 수 있을까?
성벽 건축에 대한 두 가지 적대 세력
1. 외부의 적(산발랏, 도비야, 게셈)
2. 내부의 적(형제 유다 사람) - 큰 흉년으로 인한 곡식 구매를 위한 밭, 포도원, 집을 전당 잡힘, 세금 문제
느헤미야 5:5
우리 육체도 우리 형제의 육체와 같고 우리 자녀도 저희 자녀 같거늘 이제 우리 자녀를 종으로 파는도다 우리 딸 중에 벌써 종된 자가 있으나 우리의 밭과 포도원이 이미 남의 것이 되었으니 속량할 힘이 없도다.
느헤미야 5:6-7a
내가 백성의 부르짖음과 이런 말을 듣고 크게 노하여. 중심에 계획하고 귀인과 민장을 꾸짖어 이르기를 너희가 각기 형제에게 취리를 하는도다.
중심에 계획하고(신중히 생각한 다음)
느헤미야 5:8
우리는 이방인의 손에 팔린 우리 형제 유다 사람들을 우리의 힘을 다하여 속량하였거늘 너희는 너희 형제를 팔고자 하느냐 더구나 우리의 손에 팔리게 하겠느냐 하매 저희가 잠잠하여 말이 없기로.
느헤미야 5:9-10
내가 또 이르기를 너희의 소위가 좋지 못하도다 우리 대적 이방 사람의 비방을 생각하고 우리 하나님을 경외함에 행할 것이 아니냐. 나와 내 형제와 종자들도 역시 돈과 곡식을 백성에게 취하여 주나니 우리가 그 이식 받기를 그치자.
느헤미야의 신앙 / 솔선수범
1. 총독의 녹을 거절(14절, 18절) 2. 과거의 총독 / 은 40세겔, 양식, 포도주를 요구(15절) 3. 하나님을 경외(15b) 4. 성벽 재건에 몰두(16절) 5. 매일 150명의 식사(17절) - 소 1, 양 6, 닭, 각종 포도주를 준비 6. 백성의 부역이 중함(18절)
빌립보서 3:20 오직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 거기로서 구원하는 자 곧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노니.
오늘의 기도 천국 시민으로 이 세상을 살아가는 지혜와 용기와 믿음을 주옵소서!
9월 1일(수) 느헤미야 4장 / 위하여 싸우시리라(20절)
9월 1일(수)
오늘 읽어야 할 말씀 : 느헤미야 4:1∼23
묵상을 위한 주제 : 위하여 싸우시리라(20절)
성구 : 너희가 무론(無論) 어디서든지 나팔 소리를 듣거든 그리로 모여서 우리에게로 나아오라 우리 하나님이 우리를 위(爲)하여 싸우시리라 하였느니라.
“우리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여 싸우시리라(Our God will fight for us)”
이 세상을 영적 전투의 현장과 같다고 합니다.
치열한 싸움터에 나갈 때 나와 함께 싸울 장수가 있다면 두려움이 없습니다.
느헤미야는 성벽 재건을 위하여 철저한 계획을 세웠습니다.
아닥사스다 왕으로부터 고향 방문허가증과 통행증(12,000km) 그리고 성벽을 쌓는 재료를 제공받은 물품 출납증을 갖고 돌아왔지만 여전히 적대 세력들의 공격과 훼방을 받아야 했습니다.
느헤미야 4장은 3차 귀환의 총독으로 예루살렘으로 돌아온(BC 445) 느헤미야가 성벽을 쌓는 일을 훼방하는 "산발랏"과 "도비야"와 "아라바 사람들" "암몬 사람들" 아스돗 사람들"을 대항하여 한 손에는 병기를 잡고 다른 한 손으로는 일을 하며 건축하는 일을 계속합니다. 각기 맡은 지역에서 성벽을 쌓다가 나팔 소리가 울리면 그곳으로 모여 훼방꾼을 물리칠 때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여 싸우실 것"이라고 확신하며 성벽을 쌓는 일에 참여하는 백성들을 격려했습니다.
이와 같은 환경에서 52일 만에 성벽 재건을 마칠 수 있었던 것은 기도와 조직력을 갖추었기 때문입니다.
기도는 원수들을 물리칠 수 있는 능력입니다.
하나님은 때에 맞는 하나님의 방법으로 훼방하고 대적하는 세력들을 물리치고 이기도록 인도하십니다.
오늘도 이와 같은 은혜를 사모하며 그 은혜를 즐기시기 바랍니다.
무너진 성벽을 느헤미야를 통하여 쌓게 하신 것처럼 오늘날도 무너지는 도성의 한 모퉁이를 믿음의 사람들의 손에 의해서 보수하고 세워가도록 도와주실 것입니다.
느헤미야는 성벽을 쌓는 일과 적들이 공격하는 것을 감시하는 파수꾼을 세워 치밀하게 일을 진행시켰습니다.
그런데 성벽 재건 공사를 하던 백성들 사이에 “우리에게는 아직도 할 일 많은데 힘이 다 빠졌다. 그리고 원수들이 우리를 공격해 우리는 결국 죽을 것이다.” 라는 소문이 퍼졌습니다(9∼10절).
성벽을 쌓는 일은 시작되었으나 갑자기 닥쳐온 절망적인 소식에 모두가 두려워 할 때 느헤미야는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여 싸우시리라!” 이렇게 외치며 백성들을 격려했습니다(14절, 20절).
그렇습니다.
때로는 낙심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아주 무너질 수는 없습니다.
다시 일어나게 하시는 주님의 손을 붙잡아야 합니다.
주님의 손을 붙잡는다는 것은 “영적 긴장”을 회복하는 것입니다.
오늘도 말씀과 기도 가운데 보이지 않으시지만 살아계신 영이신 하나님을 경험하며 주가 주시는 영적 능력으로 보이는 세상에 기죽지 말고 승리하게 하시는 말씀으로 세상을 이기는 은총의 하루가 열려지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느헤미야의 이름은 "여호와는 나의 위로자가 되신다" 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위로를 받기 위하여 느헤미야는 철저하게 준비했습니다.
옛날에 어떤 사람이 점쟁이로부터 "당신은 왕이 될 사람이오!" 라는 예언을 들었다고 합니다. 그 예언을 들은 후에는 "나는 왕이야!" 하며 왕의 자리에 오를 그 날을 기다리고 있었다고 합니다. 어느 가을 날 마당 밤나무 아래 평상에 누워 언제쯤 나를 왕으로 모시러 올까 하며 낮짐이 들었는데 갑자기 거센 바람이 불어 밤송이가 떨어져 그 사람의 얼굴위에 떨어져 깜짝 놀라 일어나며 "야, 이 밤나무야! 내가 누군 줄 아느냐?" 하며 호통을 쳤다고 합니다. 이렇게 지내다가 결국 세상을 떠날 때 한 마디 하기를 "여기, 왕이 될 운명을 갖고 태어났지만 세상이 나를 왕으로 몰라주어 결국 이렇게 세상을 떠나는구나!"하고 숨을 거두었다고 합니다.
백범 김구 선생은 청년 시절 과거시험에 응시했지만 가난한 상민의 자식으로 합격될 리가 없었습니다. 좌절에 빠진 그에게 아버지는 관상쟁이가 될 것을 권했습니다.
백범은
‘마의상서’라는 관상책을 열심히 공부했습니다. 그리고 책에서 배운 대로 자신의 얼굴을 살펴보니 가난과 살인, 풍파, 불안,
비명횡사할 온갖 역마살이 다 끼어 있었습니다. 관상책의 이론대로라면 그야말로 하지하(下之下), 최악의 상 그 자체였습니다. 그래서
‘내 관상이 이 모양인데 도대체 누구의 관상을 보아준단 말인가’라며 한탄을 금치 못했습니다.
그러다 그 책 마지막 구절이 눈에 띄었습니다.
‘얼굴 잘생긴 관상(觀相)은 몸이 튼튼한 신상(身相)만 못하고, 몸이 좋은 신상은 마음씨 좋은 심상(心相)만 못하다. 심상이 좋으면 관상이나 신상이 좋은 것보다 낫다.’
이 구절에서 용기를 얻은 백범은 어떻게 하면 심상을 좋게 기를까 고심하다가 ‘이 나라에 태어났으니 나라를 위해 충성을 다하자’고 결단했습니다. 그는 나라의 터를 닦는 훌륭한 민족 지도자로 살았습니다.
외모지상주의가 판치는 세상입니다. 하지만 얼굴이나 외모를 고치는 데 돈과 시간을 들이기보다는 마음을 다듬는 데 최선을 다한다면 하나님께서 위대한 일꾼으로 쓰실 것입니다.
하나님의 위로를 받기 위해서 느헤미야는 끈질긴 기도를 했습니다. 하나님의 위로를 받기 위해서 느헤미야는 철저한 계획과 답사를 하며 준비했습니다.
느헤미야 3장에서 자주 사용되는 단어는 "그 다음은"(22회) "중수(重修)"(28회) 두 단어로 느헤미야 3장을 정리하면 "그 다음은 중수하여" 라고 하겠습니다. 성벽을 재건하는 일을 그 다음은 맡은 구역과 다른 구역이 서로 연결되는 것을 말합니다. 눈에 보이는 연결이 아니라 중수 즉 아주 든든하게 보수하는 것입니다.
성벽의 두께가 대략 5미터, * 1에이커 = 43560m2 / 2.787(대략 3에이커) 그 면적은 121,405m2(대략 37,000평)의 성을 보호하는 성벽을 52일 만에 완성했다는 것은 기적같은 일입니다.
느헤미야 4장은 성벽을 재건하는 백성들을 훼방하는 세력들이 나타났다고 합니다.
산발랏, 도미야, 게셈, 아라비아 사람들, 암몬 사람들, 아스돗 사람들
느헤미야 4:20
너희가 무론 어디서든지 나팔 소리를 듣거든 그리로 모여서 우리에게로 나아오라 우리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여 싸우시리라 하였느니라. 아멘
느헤미야 4:7-8
산발랏과 도비야와 아라비아 사람들과 암몬 사람들과 아스돗 사람들이 예루살렘 성이 중수되어 그 퇴락한 곳이 수보되어 간다 함을 듣고 심히 분하여. 다 함께 꾀하기를 예루살렘으로 가서 쳐서 요란하게 하자.
느헤미야 4:1-2
산발랏이 우리가 성을 건축한다 함을 듣고 크게 분노하여 유다 사람을 비웃으며. 자기 형제들과 사마리아 군대 앞에서 말하여 가로되 이 미약한 유다 사람들의 하는 일이 무엇인가, 스스로 견고케 하려는가, 제사를 드리려는가, 하루에 필역하려는가, 소화된 돌을 흙 무더기에서 다시 일으키려는가?
느헤미야 4:3
암몬 사람 도비야는 곁에 섰다가 가로되 저들의 건축하는 성벽은 여우가 올라가도 곧 무너지리라 하더라.
느헤미야 12:31
이에 내가 유다의 방백들로 성 위에 오르게 하고 또 감사 찬송하는 자의 큰 무리를 두 떼로 나누어 성 위로 항렬을 지어 가게 하는데 한 떼는 우편으로 분문을 향하여 가게 하니.
느헤미야 4:9-10
우리가 우리 하나님께 기도하며 저희를 인하여 파숫군을 두어 주야로 방비하는데. 유다 사람들은 이르기를 흙 무더기가 아직도 많거늘 담부하는 자의 힘이 쇠하였으니 우리가 성을 건축하지 못하리라.
* 기도는 최선의 방법이다! * 기도는 최고의 전략이다!
느헤미야 4:11
우리의 대적은 이르기를 저희가 알지 못하고 보지 못하는 사이에 우리가 저희 중에 달려 들어가서 살륙하여 역사를 그치게 하리라.
느헤미야 4:14
내가 돌아본 후에 일어나서 귀인들과 민장과 남은 백성에게 고하기를 너희는 저희를 두려워 말고 지극히 크시고 두려우신 주를 기억하고 너희 형제와 자녀와 아내와 집을 위하여 싸우라.
느헤미야 4:16-17
성을 건축하는 자와 담부하는 자는 다 각각 한 손으로 일을 하며 한 손에는 병기를 잡았는데. 건축하는 자는 각각 칼을 차고 건축하며 나팔 부는 자는 내 곁에 섰었느니라.
칼 바르트(Karl Barth) 1886-1968
한 손에는 성경을, 한 손에는 신문을!
느헤미야 4:20
너희가 무론 어디서든지 나팔 소리를 듣거든 그리로 모여서 우리에게로 나아오라 우리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여 싸우시리라.
느헤미야 4:21-22
우리가 이같이 역사하는데 무리의 절반은 동틀 때부터 별이 나기까지 창을 잡았었으며. 그 때에 내가 또 백성에게 고하기를 사람마다 그 종자와 함께 예루살렘 안에서 잘찌니 밤에는 우리를 위하여 파수하겠고 낮에는 역사하리라.
느헤미야 4:6(현대인의 성경) 그러나 백성들이 최선을 다해 열심히 일했기 때문에 마침내 우리는 전 성벽을 절반이나 쌓아 올렸다.
오늘의 기도
힘을 다하여 기도하므로 삶의 기쁨을 누리며 살아가게 하옵소서!
빌립보서 1:9-11
내가 기도하노라 너희 사랑을 지식과 모든 총명으로 점점 더 풍성하게 하사. 너희로 지극히 선한 것을 분별하며 또 진실하여 허물 없이 그리스도의 날까지 이르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의의 열매가 가득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찬송이 되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느헤미야 4:1-23
좋은 일을 시도했다가 예기치 않은 일에 부딪힐 때가 있다. 느헤미야도 하나님이 허락하시고 인도하시는 역사임에도 불구하고 위기에 부딪혔다. 이방인으로서 이스라엘에 기생해서 세력을 쌓아가던 산발랏과 도비야가 집요한 방해꾼(2:19)으로 나타난 것이다. 자기들의 입지가 흔들릴 것을 염려해서 방해에 들어간 것이다.
1. 방해하는 역사
산발랏과 도비야의 비웃음(4:1-3)
산발랏이 우리가 성을 건축한다 함을 듣고 크게 분노하여 유다 사람들을 비웃으며. 자기 형제들과 사마리아 군대 앞에서 일러 말하되 이 미약한 유다 사람들이 하는 일이 무엇인가, 스스로 견고하게 하려는가, 제사를 드리려는가, 하루에 일을 마치려는가 불탄 돌을 흙무더기에서 다시 일으키려는가 하고. 암몬 사람 도비야는 곁에 있다가 이르되 그들이 건축하는 돌 성벽은 여우가 올라가도 곧 무너지리라 하더라.
140년간 동안 불타고 무너져서 그대로 흙무더기가 되어있던 예루살렘성을 재건한다는 것은 쉬운 일을 아니었다. 매사가 그렇듯이 그 일 (자체)가 어려운 것이 아니다. 그 일을 이루지 못하게 하는 역사가 있는 것이다. 여기에 (비웃음)이라는 것이 있다.
(내 안)에 있는 비웃음
비웃음은 밖에 만 있는 것이 아니다. 바로 내 안에도 있는 것이다. “술 담배도 끊지 못하는 내가 무슨 일을 하겠는가? 내 앞가림도 하지 못하면서 무슨 밖에 일이냐? 그래 내가 뭐랬어? 해보나 마나 그럴 것이라고 하지 않았는가?”
더욱 거세지는 방해(4:7-8)
산발랏과 도비야와 아라비아 사람들과 암몬 사람들과 아스돗 사람들이 예루살렘 성이 중수되어 그 허물어진 틈이 메꾸어져 간다 함을 듣고 심히 분노하여. 다 함께 꾀하기를 예루살렘으로 가서 치고 그 곳을 요란하게 하자 하기로
북에는 산발랏과 도비야, 남에는 아라비아, 서에는 아스돗, 동에는 암몬 사람들이 힘을 합쳐서 예루살렘성을 공략하겠다는 것이다.
2. 가중되는 위기
그들의 (힘)이 다 빠졌다(4:10)
유다 사람들은 이르기를 흙 무더기가 아직도 많거늘 짐을 나르는 자의 힘이 다 빠졌으니...
마귀의 전략 가운데 하나는 힘빼기 작전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새 힘을 주신다.
이사야 40:29 / 피곤한 자에게는 능력을 주시며 무능한 자에게는 힘을 더하시나니
이사야 40:31 / 오직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새 힘을 얻으리니 독수리가 날개치며 올라감 같을 것이요...
그들은 (낙심)했다(4:10)
.....힘이 다 빠졌으니 우리가 성을 건축하지 (못하리라)
어느 날 마귀가 무기전시회를 열었다. 그중에 한 무기에는 가장 비싼 값이 매겨져 있었다. 그 무기의 이름 바로 ‘낙망’, ‘의욕상실’이었다. 바리새인들의 비판과 종교지도자들에게 버림받은 예수님을 생각해 보라.
히브리서 12:3 / 너희가 피곤하여 (낙심)하지 않기 위하여 죄인들이 이같이 자기에게 거역한 일을 참으신 이를 생각하라
그들은 (두려움)에 빠졌다(4:11)
우리의 (원수들)은 이르기를 그들이 알지 못하고 보지 못하는 사이에 우리가 그들 가운데 달려 들어가서 살륙하여 역사를 그치게 하리라
디모데후서 1:7 /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은 두려워하는 마음이 아니요 오직 능력과 (사랑)과 절제하는 마음이니.
대처할 사람의 수가 (부족)했다(4:12)
그 원수들의 근처에 거주하는 유다 사람들도 그 각처에서 와서 (열) 번이나 우리에게 말하기를 너희가 우리에게로 와야 하리라 하기로
3. 이루는 역사
그들은 (기도)했다(4:4-5)
(우리) 하나님이여 들으시옵소서우리가 업신여김을 당하나이다 원하건대 그들이 욕하는 것을 자기들의 머리에 돌리사 노략거리가 되어 이방에 사로잡히게 하시고. 주 앞에서 그들의 악을 덮어 두지 마시며 그들의 죄를 도말하지 마옵소서 그들이 건축하는 자 앞에서 (주)를 노하시게 하였음이니이다 하고
느헤미야는 대적과 싸우지 않고 오히려 (하나님) 앞에 그 문제를 들고 나왔다.
빌립보서 4:6 /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두 목사님이 각각 문제가 있는 교회에 부임하게 되었다. 한 분은 교회에 부임하자 마다 조리있게 시시비비를 가리기 시작했다. 교인들은 목사님의 조리있는 논리에 수긍했다. 그러나 문제가 밝혀지고 난 뒤에 교인들은 그 교회를 다 떠나고 말았다. 그러나 또 한 분의 목사님은 그 문제를 하나님께 들고 나아가 기도하기 시작했다. 하나님은 그들의 마음을 움직여서 그 문제들을 해결하셨다. 그리고 교회는 부흥하기 시작했다.
기도의 성자 죠지 뮬러는 “(무릎)으로 인생의 싸움을 싸는 것을 배우지 못한 사람은 아직도 기독교 신앙의 ABC를 모르는 사람이다.”라고 했다.
특히, (교회) 곧 믿음공동체가 기도할 때 악한 권세를 물리칠 수 있다. 성경은 합심기도를 가르치고 있다.
(마음)을 담아서 일했다(4:6)
이에 우리가 성을 건축하여 전부가 연결되고 높이가 절반에 이르렀으니 이는 백성이 마음 들여 일을 하였음이니라
(최선)을 다했다(4:9. 13)
우리가 우리 하나님께 기도하며 그들로 말미암아 파수꾼을 두어 주야로 방비하는데
내가 성벽 뒤의 낮고 넓은 곳에 백성이 그들의 종족을 따라 칼과 창과 활을 가지고 서 있게 하고
느 4:16 그 때로부터 내 수하 사람들의 절반은 일하고 절반은 갑옷을 입고 창과 방패와 활을 가졌고 민장은 유다 온 족속의 뒤에 있었으며
느 4:17 성을 건축하는 자와 짐을 나르는 자는 다 각각 한 손으로 (일)을 하며 한 손에는 (병기)를 잡았는데
느 4:18 건축하는 자는 각각 허리에 칼을 차고 건축하며 나팔 부는 자는 내 곁에 섰었느니라
느 4:22 그 때에 내가 또 백성에게 말하기를 사람마다 그 종자와 함께 예루살렘 안에서 잘지니(밤)에는 우리를 위하여 파수하겠고 (낮)에는 일하리라 하고
느 4:23 나나 내 형제들이나 종자들이나 나를 따라 파수하는 사람들이나 우리가 (다) 우리의 (옷)을 벗지 아니하였으며 물을 길으러 갈 때에도 각각 병기를 잡았느니라.
크고 두려우신 하나님을 바라보았다(4:14)
가 돌아본 후에 일어나서 귀족들과 민장들과 남은 백성에게 말하기를 너희는 그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지극히 크시고 두려우신 (주)를 기억하고너희 형제와 자녀와 아내와 집을 위하여 싸우라
☞ 문제보다 (주님)이 더 크다는 사실을 보라! 불신앙은 문제를 더 크게 보지만, 신앙은 주님을 더 크게 본다.
이루시는 하나님(4:15)
우리의 대적이 우리가 그들의 의도를 눈치챘다 함을 들으니라 (하나님)이 그들의 (꾀)를 폐하셨으므로 우리가 다 성에 돌아와서 각각 일하였는데.
하나님은 주의 백성들의 (기도)를 들으시고, 비웃음과 분노와 위협으로 대적하던 그들의 꾀(4:11)를 무너뜨리셨다. 공의와 사랑의 하나님은 결코 그 선하심의 목적을 버리실 수 없다.
나팔소리를 듣거든(4:20)
너희는 어디서든지 나팔 소리를 듣거든그리로 모여서 우리에게로 나아오라 우리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여 싸우시리라 하였느니라
오늘의 나팔소리는 바로 하나님의 (말씀)이다. 어디로 모여야 하는가? 거기에는 누가 계시는가!
선한 일에 힘쓰는 자여! 하나님의 나라와 교회와 가정을 세우려고 하는 자여! 어떠한 장애도 두려워하지 말라! 이 세상의 어떤 문제보다도 크고 두려우신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자녀들과 함께 하신다.
1903년 원산 부흥 운동 이끈 캐나다 선교사 ‘하디’의 삶 1200쪽으로 펴낸 이덕주 교수
“하디 선교사가 수없이 ‘회개하라’고 할 땐 아무 반응이 없던 교인들이 ‘저부터 회개합니다’ 하자 기적처럼 부흥이 일어났습니다.”
‘영(靈)의 사람, 로버트 하디’(신앙과지성사)를 최근 펴낸 이덕주 감리교신학대 은퇴교수는 이렇게 말했다.
캐나다 출신 감리교 의사 선교사로 1890년 조선에 온 하디(1865~1949)는 선교사, 신학 교육자, 신학 교재 60여 권을
쓴 저술가로 평생 한국 복음화에 헌신했다.
특히 1903년 ‘원산 부흥 운동’을 이끈 주인공으로 알려져 있다. 원산 부흥 운동은
4년 후 1907년 평양 장대현교회를 중심으로 한 ‘평양 대부흥’의 도화선이 된 사건. 그러나 한국 개신교인들에게도 하디의
존재는 잘 알려지지 않았다.
1903년 하디 선교사의 회개운동 이후 원산교회는 부흥했다. 새 건물을 짓고 기념촬영한 모습. / 신앙과지성사
이
교수에 따르면 하디는 “한국 개신교인들에게 ‘회개’가 뭔지를 가르쳐준 사람”이다. 원산 부흥 운동 자체가 드라마틱하다. 하디는
1902년 무렵 좌절감에 빠져 있었다. 한국 선교 13년째, 원산 부임 10년째인 이때까지 성과가 없었기 때문이다. 교인 집을
불시에 방문해 보니 술상을 놓고 교인 모임을 하고 있었고, 교인을 빙자한 횡령·사기 사건도 빈발했다. 하디는 ‘세례 교인’을
‘학습 교인’으로 강등시키고 ‘제명’ ‘무기한 (예배) 출석 금지’ 조치도 내렸다. 선교 보고서에 “원산 교인들의 영적(靈的)
상태는 대단히 실망스럽다”고 적을 정도였다
26일 오전 서울 마포구 양화진 외국인 선교사 묘역 내 로버트 하디 가족묘 앞에서 로버트 하디 선교사의 전기 쓴 이덕주 전 감신대 교수가 본지와 인터뷰를 하고 있다. / 남강호 기자
극적
반전이 일어난 것은 이듬해인 1903년 여름. 휴가철을 맞아 외국인 선교사들이 휴양지 원산에 모여 기도회와 성경 공부
모임(사경회)을 열었다. 최고참 선교사 하디가 설교를 맡게 됐다. 그는 문득 자신이 ‘죄인’이라고 고백하기 시작했다. 모태
신앙이었지만 진정한 믿음이 없었고, 조선 교인들을 오만과 교만으로 대했음을 통회(痛悔)했다. ‘성령의 역사’가 일어난 것. 그동안
‘조선 교인 탓’을 하던 하디가 ‘내 탓’이라고 고백하자 다른 외국인 선교사에 이어 조선 교인들로 회개의 불길이 번졌다.
모두
자신의 죄를 고백하고 그리스도인으로 거듭나겠다고 다짐했다. 그동안 갚지 않은 돈을 갚는 운동 아닌 운동이 벌어졌고, 20년 전
본의 아니게 더 받은 봉급을 반환하겠다는 사람도 나왔다. 그 이전까지 ‘회개’는 무슨 뜻인지 감(感)도 못 잡던 조선 교인들이
비로소 회개의 참뜻을 알게 된 것이다. 부흥의 불길은 이내 원산에서 서울, 개성 그리고 평양으로 확산했다. 그 결과 불과 10여 년
후인 1919년 3·1운동 때는 민족 대표 33인의 절반 이상을 개신교인이 차지할 정도로 개신교가 이 땅에 탄탄히 자리 잡게
됐다.
하디 선교사 부부(오른쪽)와 애비슨 선교사 부부. 하디 선교사는 좀처럼 웃지 않는 엄격한 사람이었다. / 신앙과지성사
이
교수는 하디의 삶을 통해 개신교가 조선에 전해져 뿌리 내리는 과정을 꼼꼼히 재구성했다. 그는 “원산 부흥 운동의 본질은 ‘물질적
성장’이나 ‘보여주기 위한 것’이 아니라 새사람으로 거듭나려는 본질적 변화였기에 가능했다”며 “코로나 시대를 맞은 한국 교회도
하디의 삶을 통해 무엇이 우선이고 본질인지 성찰하는 계기가 됐으면 한다”고 말했다.
1949년 사망한 로버트 하디 선교사의 묘비. / 신앙과지성사
2023년 원산 부흥 운동 120주년을 앞두고 하디 선교사의 전도로 세운 간성·강릉중앙·광희문·선교·수표교·양양·종교교회가 ‘하디기념사업회’를 구성하고 기독교대한감리회(감리교) 본부와 감리교신학대가 평전 발간에 뜻을 모았다.
1630년대
미국 뉴잉글랜드 지방에 정착한 영국 청교도들은 교회의 장래를 놓고 고민이 있었다. 정착지의 청교도 교회들을 이끌어갈 미래의
목사들을 어떻게 양성할 것이냐였다. 그 해답이 존 하버드 목사가 기부한 책과 자금으로 1636년 설립된 하버드 칼리지였다. 이후
종합대학으로 발전했지만, 1880년대까지 하버드대의 신조(motto)는 ‘그리스도의 영광을 위하여’와 ‘교회의 그리스도를 위하여’이란 뜻의 라틴어가 번갈아 쓰였다.
지난주부터 하버드대의 새 교목실장으로 일하는 무신론 목회자 그레그 엡스타인 / 링크드인
버드대의 새 교목실장(Chief Chaplain)에 44세의 유대계 출신 무신론자가 지난 주 선출됐다고, 뉴욕타임스가 보도했다.
뉴욕타임스
베스트셀러인 ‘신(神) 없는 선(Good Without God)’이란 책의 저자이기도 한 그레그 엡스타인은 2005년부터
하버드대와 인근 MIT대에서 무신론 커뮤니티를 이끌며 학생들에게 “신이 아니라, 사람들과의 관계에 주목하라”고 가르쳐왔다.
그래서
종종 “세속적, 가치 중심적 철학인 인문주의 운동의 대부(代父)”로 소개된다. 엡스타인은 NYT에 “갈수록 많은 사람이 특정
종교에 속하지 않으면서도, 어떻게 좋은 사람이 되고 도덕적인 삶을 살 것인지에 대해 얘기하고 도움받기를 원한다”고 말했다.
흥미롭게도,
기독교‧천주교‧불교‧힌두교 등 하버드대에서 다양한 종교 커뮤니티를 이끄는 40여 명의 성직자가 만장일치로 무신론자인 엡스타인을
교목실장으로 선출했다.
‘교목실장’이란 직책도 대학 내 존재하는 다양한 종교를 고려할 때 ‘사제(司祭)실장’ ‘종교실장’에
가깝다. 이 대학의 크리스천사이언스 교목인 매깃 해머스트롬은 NYT에 “보수적인 대학에선 ‘도대체 뭔 짓을 하는 거냐?’라고
하겠지만, 하버드대 같은 환경에선 그가 적격”이라며 “엡스타인은 서로 다른 신앙 사이에 소통 채널을 계속 유지해왔다”고 말했다.
무신론자 엡스타인이 하버드대 교목실장으로 선출된 것은 미국사회에서 기독교 색채가 점차 옅어지는 세태를 반영한 것이기도 하다. 여론조사기관 퓨 리서치에 따르면, 자신을 크리스천(개신교‧가톨릭)이라고 응답한 비율은 2007년 78%에서 2019년에는 65%로 줄었다.
반면에, ‘어느 종교에도 속하지 않는다’는 답변은 16%에서 26%로 올라갔다.
2019년도 하버드대 졸업예정자 중에서도 기독교와 가톨릭 신자는 17%와 17.1%에 그쳤고, 불가지론자 21.3%, 무신론자 16.6% 등이었다.
8월 31일(화) 느헤미야 3장 / 성벽을 건축하여(1절)
♦ 8월 31일(화)
♦ 오늘 읽어야 할 말씀 : 느헤미야 3:1∼32 ♦ 묵상을 위한 주제 : 성벽을 건축하여(1절) ♦ 성구 : 때에 대제사장(大祭司長) 엘리아십이 그 형제(兄弟) 제사장(祭司長)들과 함께 일어나 양문(羊門)을 건축(建築)하여 성별(聖別)하고 문짝을 달고 또 성벽(城壁)을 건축(建築)하여 함메아 망대(望臺)에서부터 하나넬 망대(望臺)까지 성별(聖別)하였고.
느헤미야 3장에서는 성벽 재건에 참여했던 사람들을 소개합니다.
미국 사람들이 한국 사람들의 이름이 낯선 것처럼 느헤미야 3장에 소개된 유대인들의 이름도 우리들에게는 매우 낯설게 느껴집니다.
이렇게 낯선 이름들을 기록한 것에는 분명한 의미가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 의미가 무엇일까요?
첫째는 역사적 사실 둘째는 계획적인 성벽 건축 셋째는 조직적인 건축 넷째는 역할 분담
성벽을 건축하는 일에 많은 백성들이 기꺼이 참여했으나 성벽 건축에 참여하지 않은 사람들이 있었습니다(5절).
“그 다음은 드고아 사람들이 중수하였으나 그 귀족들은 그 주의 역사에 담부치 아니하였으며.”
귀족들은 성벽 재건을 위한 사역에 동참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귀족들은 부자들을 말합니다. 왜 부자들은 성벽 재건하는 일에 참여하지 않았을까요?
예수님께서는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 어렵다고 하시며 마치 낙타가 바늘구멍에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는 것보다 더 쉽다고 하셨습니다(마태 19:23∼24).
부자들의 관심은 세상에서 부귀영화를 누리는 것이라면 가난한 사람들의 관심은 어렵지만 서로 의지하며 함께 공존하려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한때 거지로 생활하던 사람이 하나님의 은혜를 받고 새로운 삶을 시작한 후에 간증하기를 부자 동네에서 주는 음식은 반드시 끓여 먹어야 한다고 합니다. 부자들은 먹을 수 없는 상한 것을 주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가난한 동네에서 주는 음식은 마음 편하게 먹을 수 있다고 합니다. 그 이유는 가난한 사람들은 걸인들을 긍휼히 여기는 마음이 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어떤 성벽을 쌓고 있습니까? 부자와 같이 나를 보호하기 위한 성벽입니까? 아니면 악한 영들을 대적하기 위한 성벽입니까?
환난과 근심 걱정이 가득한 세상에서 오늘도 신령한 성벽을 쌓고 주님과 동거하며 믿음으로 승리하는 은혜를 누리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 찬양 / 어디든지 예수 나를 이끌면
예수 내 구주! 예수 내 생명! 예수 내 권세!
느헤미야 3:1
때에 대제사장 엘리아십이 그 형제 제사장들과 함께 일어나 양문을 건축하여 성별하고 문짝을 달고 또 성벽을 건축하여 함메아 망대에서부터 하나넬 망대까지 성별하였고. 아멘
느헤미야 3:32
성 모퉁이 누에서 양문까지는 금장색과 상고들이 중수하였느니라.
양문에서(1절) 양문으로(32절)
요한복음 1:29 / 이튿날 요한이 예수께서 자기에게 나아오심을 보고 가로되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
요한복음 10:1-2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양의 우리에 문으로 들어가지 아니하고 다른데로 넘어가는 자는 절도며 강도요. 문으로 들어가는 이가 양의 목자라.
1절, 양문 - 예수 그리스도(요 1:29)
3절, 어문 - 사람을 낚는 어부(마 4:19)
6절. 옛문 - 성도가 걸어야 할 선한 길(마 11:29) (여사나문) 역대하 13;19 13절, 골짜기문 - 주를 섬기는 자의 겸손(벧전 5:5-6)
느헤미야 3:11 하림의 아들 말기야와 바핫모압의 아들 핫숩이 한 부분과 풀무 망대를 중수하였고.
(개역한글) 화덕망대 (현대인의 성경) 용광로망대
고난은 영광의 화목이다!
베드로전서 4:13 / 오히려 너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 이는 그의 영광을 나타내실 때에 너희로 즐거워하고 기뻐하게 하려 함이라.
누가복음 13:24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들어가기를 구하여도 못하는 자가 많으리라.
오늘의 기도
구원의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자!
느헤미야 3장에서는 일사불란하게 예루살렘 성벽과 성문을 재건하는 역사를 보여주었다. 여기에는 하나님께서 일하시는 원리가 드러났다. 곧 모든 것을 함께하고, 모든 것을 분담하고, 부름받은 것을 믿음으로 순종함으로 하나님께서 하시고자 하시는 역사를 이루게 되는 것을 보았다. 오늘은 예루살렘 성문과 성벽을 재건하면서 각각의 성문에 담겨진 의미들로부터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음성에 귀를 기울여본다.
이스라엘 백성이 바벨론 포로 후 스룹바벨 때 1차로 돌아왔습니다(BC 536년) 에스라 2차 귀환(BC 457년) 느헤미야 3차 귀환(BC 445년)
이스라엘 나라가 재건되어 안정을 찾은 후 BC 440년에 에스라와 느헤미야가 2차로 사람들을 데리고 돌아와 성벽을 재건하고 나라를 회복하는 모습입니다. 느헤미야 때 성벽재건 과정 특히 성문의 재건에 대해 살펴보면서 그 의미, 용도 등을 살펴보려고 합니다.
1. 양문(羊門) 3:1 / 하나님의 어린 양 예수 그리스도
그 때에 대제사장 엘리아십이 그의 형제 제사장들과 함께 일어나 양문을 건축하여 성별하고 문짝을 달고 또 성벽을 건축하여 함메아 망대에서부터 하나넬 망대까지 성별하였고.
양문은 (예수 그리스도)를 의미한다. 성전에 양 같은 제물을 드리기 위해서 이 문을 통해서 들어갔다.
요한복음 10:7-10 / 그러므로 예수께서 다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나는 (양)의 문이라. 나보다 먼저 온 자는 다 절도요 강도니 양들이 듣지 아니하였느니라. 내가 문이니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들어가면 구원을 받고 또는 들어가며 나오며 꼴을 얻으리라. 도둑이 오는 것은 도둑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뿐이요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지 않는 삶은 결국 강도와 도둑(사탄의 권세)에게 빼앗기는 삶이다. 성벽건축은 양문에서 (시작)해서 돌아와 양문에서 (끝)을 맺었다. 인생은 예수님으로부터 시작해서 예수님께로 돌아가는 것이다. 오직 하나님께 나아가는 문은 예수 그리스도 밖에는 없기 때문이다. 곧 양문을 재건하는 것은 곧 (예배)의 회복이라 할 수 있다.
특히 양문 재건에는 ‘성별’이라는 말을 사용했다. 이는 거룩하게, 곧 구별함을 의미한다. 우리는 양문을 드나드는 삶을 통해서 하나님 앞에 구별된 성도의 삶을 살아야 한다. 이는 대속의 은혜로 구원받고 예수님처럼 희생과 섬김으로 구별된 삶이다.
1절에 제일 먼저 양문을 중수했습니다. 이 문은 양이 드나들던 문이라서 양문입니다. 양문의 영적인 의미는 “하나님의 어린양 예수 그리스도”를 의미합니다.
양문 바로 아래 성전이 있어서 양문으로 양을 몰고 와서 잡았습니다. 아무 문으로 양을 가지고 들어가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개인이 양을 끌고 오는 것이 아니라 집단적으로 무리의 양을 끌고 들어갔습니다. 예루살렘 근처에서는 양을 키우지 않았고 주로 보리농사를 지었습니다. 요단 건너 모압 지역에서 주로 양을 키워서 잘 자란 흠 없는 양을 떼로 받아와서 양문으로 가져와 울타리 안에 두었다가 제사 때에 양을 팔았습니다. 그래서 이 양문 근처에 양을 파는 시장이 있었습니다(흠정역). 가까이에 베데스다 연못이 있어서 제사 드리기 전에 양을 씻겼습니다. 많은 양들이 드나들어야 해서 양문에는 문빗장이 없이 쉽게 열릴 수 있도록 되어 있었을 것입니다.
이 문을 재건한 사람은 대제사장 엘리아십입니다. 당시 성벽을 재건하는 데에 부유한 사람들의 헌금을 받아서 재건을 했는데 특히 이 문은 대제사장 엘리아십이 재건에 드는 비용을 낸 것입니다.
엘리아십은 스룹바벨과 같이 바벨론에서 온 예수아의 손자입니다. 당시 대제사장 엘리아십의 손자 중 하나가 성벽 재건을 반대한 산발랏이라는 사람의 딸과 결혼하여 비난을 받았지만(느 13:28), 가장 중요한 이 문의 재건에 앞장서는 훌륭한 일도 했습니다. 또 도비야를 위해 성전 방을 마련한 적이 있습니다(느 13:4, 7).
양문은 성별되어야 한다고 한 유일한 문입니다. 이 문을 레위인 파수꾼들이 항상 지켰는데 레위인들은 성전과 관계가 있는 문만 지켰습니다. 양문은 현재의 스데반문일 것으로 보입니다. 예루살렘 성벽 안의 성전 옆과 밑에는 민가가 있었습니다. 솔로몬 행각 아래 오벨 지역에는 느디님 족속이 살았습니다. 실로암 못 옆에 양지바른 땅에는 대제사장들 같은 지위 높은 사람들이 살았습니다.
2. 어문(魚門) 3:3 / 사람 낚는 어부
어문은 하스나아의 자손들이 건축하여 그 들보를 얹고 문짝을 달고 자물쇠와 빗장을 갖추었고.
두로에서 오는 어상(魚商)이 출입한데서 이 이름이 붙었다. 예수께서는 우리에게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라고 하셨다. 성도는 주님께 낚인 (물고기)로 비유된다.
마태복음 4:19 / 말씀하시되 나를 따라오라 내가 너희를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하시니.
주님 안에 있는 물고기가 다시 세상으로 쓸려나가지 않게 해야 한다. 신앙의 문단속이 필요하다.
3절에서는 어문을 재건하였다고 나옵니다. 어문은 하스나아 사람이 재건했습니다. 물고기를 잡아와서 나르던 문이라서 어문입니다. 그래서 영적인 의미가 “사람 낚는 어부”입니다.
하스나아는 여리고 지방의 이름입니다. 왜 그들이 중수했을까요? 어문은 요단강, 갈릴리에서 물고기를 잡아오는데 요단강 옆에 있던 여리고 지역 사람들이 이 물고기를 예루살렘 성 안으로 들여와서 예루살렘 성 안에 살던 일반 사람들에게 팔았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이 문은 다윗시대에 중요한 출입구였고 고고학적으로 근처에 어시장이 있었다고 합니다. 물고기는 제사에 쓰이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양문으로 들어올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여리고에서 물고기를 들여오기 좋은 방향에 이 어문을 만든 것입니다. 현재의 다메섹문의 동쪽에 있습니다(대하 33:14, 습 1:10). 성벽의 모든 문들은 다 관계있는 사람들이 재건했습니다. 그 문을 많이 드나들고 꼭 그 문이 필요한 사람들이 돈을 드려서 문을 만들도록 한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일하시는 방법입니다.
3. 옛문(古門) 3:6 / 성도가 걸어야 할 새 길
옛문은 바세아의 아들 요야다와 브소드야의 아들 므술람이 중수하여 그 들보를 얹고 문짝을 달고 자물쇠와 빗장을 갖추었고.
버릴 것과 지켜야 할 것을 분별할 때, 새롭고도 견고하게 변화될 수 있다.
(1) (옛사람)으로 살았던 삶을 회상해보라.
신명기 24:22 / 너는 애굽 땅에서 종 되었던 것을 기억하라 이러므로 내가 네게 이 일을 행하라 명령하노라
(2) 앞서 (받은 은혜)를 잊지 말라
이사야 46:9 / 너희는 옛적 일을 기억하라 나는 하나님이라 나 외에 다른 이가 없느니라 나는 하나님이라 나 같은 이가 없느니라
(3) 거듭 (변화)를 받아야 할 것이 무엇인가 생각하라.
고린도후서 5:17 /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6절에서 옛문을 재건했다고 나옵니다. 옛문은 가장 오래된 문으로 옛날 성벽에 있던 문이었기에 옛날부터 있었다고 해서 옛문입니다. 또 에브라임의 여사나 지역으로 통하는 문이었기 때문에 여사나의 문이라고도 불렸습니다(대하 13:19). 이 문의 영적 의미는 “성도가 걸어야 하는 선한 길”입니다.
이 옛문을 중수한 사람은 요야다와 므슬람이 재건하였는데(6절) 금장색, 향품장사(8절), 예루살렘의 절반을 다스리는 르바야(9절)와 나머지 절반을 다스리는 할로헤스의 아들 살룸과 그의 딸들(12절)도 참여했습니다.
르바야와 할로헤스 두 사람이 예루살렘의 지주였고 함께 중수한 사람들도 예루살렘의 권력자이고 부자이며 옛날부터 땅의 주인이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이들이 오랫동안 예루살렘에서 살면서 이 옛문을 가장 많이 이용했던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중수하도록 한 것으로 보입니다.
4. 골짜기문 3:13 / 주를 섬기는 자의 겸손
골짜기 문은 하눈과 사노아 주민이 중수하여 문을 세우며 문짝을 달고 자물쇠와 빗장을 갖추고 또 분문까지 성벽 천 규빗을 중수하였고.
13절에서 보면 골짜기문을 재건하였습니다. 이 문의 옆에는 힌놈의 골짜기가 있어 그쪽으로 내려가는 길에 있는 문이라서 골짜기문이라고 불립니다. 이 문의 영적 의미는 “주를 섬기는 자의 겸손”을 의미합니다. 이문은 하눈과 사노아 거민이 재건하였습니다.
사누아는 예루살렘에서 서남쪽으로 12마일정도 아래에 있는 동네입니다. 이들이 성전에 오는 가장 빠른 길이 이 골짜기문으로 통합니다. 사누아 사람들이 평소에 많이 드나드는 문이라서 그들이 중수한 것입니다. 그들이 문과 함께 성벽 500m정도를 중수하였습니다.
5. 분문(糞門) 3:14 / 영육의 더러움을 깨끗이 함
분문은 벧학게렘 지방을 다스리는 레갑의 아들 말기야가 중수하여 문을 세우며 문짝을 달고 자물쇠와 빗장을 갖추었고.
화덕망대를 지나고 골짜기문이 기다리고 있다.
눈물의 골짜기문에서부터 더럽고 냄새나는 분문까지 1천규빗(약450미터)이나 되는 긴 성벽을 중수해야 했다. 벧학게렘 지방은 포도원지역으로 예루살렘의 남부로 좁다란 지역이다. 당시 그곳을 다스리는 레갑의 아들 말기야가 이 더러운 것들이 배출되는 분문을 중수한다. 극상품 포도주를 생산하려면 틀에서 발로 밟혀야 하듯이 포도원 통치자 아들이 분문에서 (낮아짐)의 훈련을 밟고 있다. 내 힘으로 할 수 있다는 교만을 비우고 나를 배설물로 여기기까지 낮아지는 과정이 없이 귀하게 성별되기는 어렵다.
사도 바울의 고백을 보라.
빌립보서 3:8 /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무엇보다 예수께서 쓰레기에 버려질 인생을 구원하기 위해서 침 뱉음을 받으시고 종보다 낮아지셨다.
14절에서는 분문을 재건한 내용이 나옵니다. 이 문은 레갑의 아들 말기야가 재건하였습니다. 이 문의 영적인 의미는 “영육의 더러움을 깨끗이 함”입니다. 레갑 족속은 미디안 중 겐 족속에 속한 족속입니다. 이 문을 통해 성전에서 제사할 때 양의 배설물과 여러 재와 쓰레기를 가져와서 힌놈의 골짜기에서 태웠습니다. 이 문은 힌놈의 골짜기로 바로 통합니다. 이런 일을 느디님 사람들이 했기 때문에 그들이 많이 드나들었습니다. 그래서 레갑 족속이 분문을 재건할 때 느디님 사람들이 함께 도왔습니다. 느디님 사람들은 레갑 족속과 관련이 많습니다. 느디님 사람은 옛날 전쟁의 포로로서 성전의 노예가 된 미디안 사람과 기드온 사람 등 이방인들이 포함된 집단으로 바벨론에서 2차 귀환할 때 함께 돌아왔고 에스라를 통해 성전의 봉사자로서 정식으로 인정을 받았습니다.
6. 샘문 3:15 / 성령 충만
샘문은 미스바 지방을 다스리는 골호세의 아들 살룬이 중수하여 문을 세우고 덮었으며 문짝을 달고 자물쇠와 빗장을 갖추고....
쓰레기가 나가는 분문을 지나면 샘문에 이르게 된다. 하나님은 배설물 같은 우리를 주님의 보혈로 씻기시고 샘솟는 생명수를 마시게 하신다.
요한복음 4:14 /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내가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
이사야 53:5 /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
출세의 문, 재물의 문, 권력의 문, 쾌락의 문 등을 두드리고 있다. 그러나 그 문을 지나면 허무와 절망과 사망이 기다리고 있다. 오늘 우리에게 새롭게 열어주신 문이 있다. 예수 그리스도! 주님은 우리가 영원한 생명과 영원한 영광으로 들어가게 하는 문이다.
15절에서는 샘문을 재건했습니다. 실로암 옆에 있는 문으로 그 곳으로 통하는 문입니다. 실로암 연못이 생기기 전에도 옆의 기드온 골짜기 근처에 물웅덩이가 많았기 때문에 샘문이라고 하였습니다. 영적으로는 “성령 충만”의 의미가 있습니다. 이 문은 미스바를 다스린 유다지파 골호세의 아들 살룬이 재건하였습니다.
7. 수문(水門) 3:26 / 말씀의 물로 정결케 됨
그 때에 (느디님) 사람은 오벨에 거주하여 동쪽 (수문)과 마주 대한 곳에서부터 내민 망대까지 이르렀느니라.
물을 길으러가기 위해서 드나드는 문이었기 때문에 이 이름이 있었다. 나아가 수문앞 광장은 제사장 겸 학사 에스라가 백성들을 모으고 말씀을 선포하며 백성들을 깨운 곳이었다.
8:2-3 / 일곱째 달 초하루에 제사장 에스라가 율법책을 가지고 회중 앞 곧 남자나 여자나 알아들을 만한 모든 사람 앞에 이르러. 수문 앞 광장에서 새벽부터 정오까지 남자나 여자나 알아들을 만한 모든 사람 앞에서 읽으매 뭇 백성이 그 율법책에 귀를 기울였는데
8:16 / 백성이 이에 나가서 나뭇가지를 가져다가 혹은 지붕 위에, 혹은 뜰 안에, 혹은 하나님의 전 뜰에, 혹은 수문 광장에, 혹은 에브라임 문 광장에 초막을 짓되
메마른 영혼들이 (생명수)를 마시게 하기 위해서 (예수)께서 생명수의 문이 되셨다.
요한복음 7:38 /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리라 하시니
요한계시록 21:6 / 또 내게 말씀하시되 이루었도다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마지막이라 내가 생명수 샘물을 목마른 자에게 값없이 주리니
요한계시록 22:1 / 또 그가 수정 같이 맑은 생명수의 강을 내게 보이니 하나님과 및 어린 양의 보좌로부터 나와서.
요한계시록 22:17 / 성령과 신부가 말씀하시기를 오라 하시는도다 듣는 자도 오라 할 것이요 목마른 자도 올 것이요 또 원하는 자는 값없이 (생명수)를 받으라 하시더라.
수문은 느디님 사람들이 맡았다.
느디님 사람들은 기브온에 속하여 여호수아 시대 이후 이스라엘의 종이 된 사람들이었다. 가나안 족속을 진멸하는 과정에서
전쟁포로로 살아남은 사람들이다. 그들은 하나님의 은혜를 선택했다. 성전에서 잡일을 하던 종으로 살다가 바벨론 포로로 함께
잡혀갔다. 그 후 포로기가 끝나고 예루살렘으로 귀환할 때 돌아오지 않을 수도 있었다. 돌아와도 또 종의 신분이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들은 돌아왔다.
시편 84:10 / 주의 궁정에서의 한 날이 다른 곳에서의 천 날보다 나은즉 악인의 장막에 사는 것보다 내 하나님의 (성전 문지기)로 있는 것이 좋사오니.
오늘의 느디님 사람은 누구라고 생각하는가? 그들의 선택을 오늘도 기억해야 할 것이다.
26절에서 나오는 수문은 실로암 연못 위에 있는 문입니다. 영적으로 “말씀의 물로 정결케 됨”을 의미합니다. 기드온 골짜기의 물들이 많으므로 예루살렘 성안 사람들의 식수 공급을 위해 그 문을 통해 물을 길어 날랐습니다. 이 문으로 양이 들어온다면 물이 오염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각각 다 문을 정해서 역할에 맞게 이용하도록 규정한 것입니다. 우리나라에도 옛날 동대문 근처에 사람이 죽으면 그 시신을 성 밖으로 내보내는 시구문이 따로 있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문에는 역할에 따라 나눠지는 것입니다.
8. 마문(馬門) 3:28 /
마문 위로부터는 제사장들이 각각 자기 집과 마주 대한 부분을 중수하였고.
마문은 왕궁에 이르는 말이 드나드는 문이기에 붙여진 이름이다.
마문에서 처형된 여왕 아달랴 이야기(역대하 23:15)
이에 무리가 그(아달랴)에게 길을 열어 주고 그가 왕궁 말문(마문) 어귀에 이를 때에 거기서 죽였더라.
아달랴는 북이스라엘왕 오므리의 딸로서 남유다로 시집을 가서 아합과 이세벨의 며느리가 되었다. 남편이 여호람왕, 아들은 아하시야왕, 친정아버지는 오므리왕, 시아버지는 아합왕으로서, 자신도 왕이 되려고 아들과 손자들까지 죽였다. 아달랴는 이세벨의 성질을 닮아 야심과 수완으로 이세벨과 같은 독부였다.
제사장 여호야다의 아내 여호세바의 활동으로 왕자 요아스 만은 구출했다. 이로써 다윗의 왕통이 단절되지 않은 동시에, 메시야의 계통을 계승해 주었다. 제사장 여호야다의 활동에 의해 왕자 요아스의 옹립운동을 일으키고 요아스를 세우고 율법책을 주고 기름을 부어 왕이 되게 하였다.
아달랴가 이 소리를 듣고 여호와의 전에 들어가서 옷을 찢으며 "반역이로다 반역이로다"하며 부르짖는 것을 성전
밖으로 몰아내어 마문 어귀에서 처형했다. 그리고 이어 바알의 신당을 헐고, 우상을 깨뜨리고, 또 바알의 제사장을
죽였다(왕하11장, 대하22장).
이는 마문 역사에 남는 교훈이다. 말을 타는 자는 스스로 권위를 높여서는 안 된다.
스스로 높아지려고 하는 것은 하나님이 싫어하시는 일이다. 결국 자신도 죽고 공동체에도 해를 끼친다. 아달랴가 죽음으로 요아스가 왕이 되어 예수 그리스도의 계보를 이어갈 수 있었던 것처럼, 세속적인 권위가 죽어야 영적 권위가 살아난다.
☞오직 (예수)께서 (말)을 타시게 하라! 그러면 예수께서 당신을 (등) 뒤에 태우실 것이다.
제사장들이 마문과 자기 집과 마주 대한 부분들을 중수하는 데 참여했다.
자기가 사는 동네를 깨끗하게 하지 않고 다른 데를 깨끗하게 한다는 것은 그릇된 일이다.
딤전 3:4 [감독의 직분]자기 집을 잘 다스려 자녀들로 모든 공손함으로 복종하게 하는 자라야 할지며
딤전 3:5 사람이 자기 집을 다스릴 줄 알지 못하면 어찌 하나님의 교회를 돌보리요
딤전 3:12 집사들은 한 아내의 남편이 되어 자녀와 자기 집을 잘 다스리는 자일지니
28절에서 마문을 재건하였습니다. 이 문의 영적 의미는 “그리스도 군사의 선한 싸움”입니다. 이 문은 말이 드나드는 문으로 제사장들이 재건하였습니다. 성전에서는 말이 필요 없으므로 이 문이 성전 옆에 있지 않는 것입니다. 말이 성전 쪽으로 가지 못하도록 울타리를 쳐 두었을 것입니다. 왕궁이 성전 서쪽 옆에 있었는데 말은 보통 비싸고 군사용으로 쓰이므로 왕실에서 이 문을 통해 말을 이용했습니다. 당시에는 왕이 없었으므로 이 문은 제사장들이 재건하였습니다. 아합의 딸인 아달랴가 왕궁 근처의 이 마문 옆에서 죽임 당했습니다(왕하 11:15- 21). 아마도 어머니는 이세벨일 것입니다(왕하 8:18).
9. 동문(東門) 3:29 /
그 다음은 임멜의 아들 사독이 자기 집과 마주 대한 부분을 중수하였고 그 다음은 (동문)지기 스가냐의 아들 스마야가 중수하였고.
예루살렘성의 동문은 성전의 동쪽으로 난 문과 일직선상에 있다.
에스겔 42:15 / 그가 안에 있는 성전 측량하기를 마친 후에 나를 데리고 동쪽을 향한 문의 길로 나가서 사방 담을 측량하는데
성전의 동문은 여호와의 영광이 들어오는 문이다. 세상 영광이 아닌 하나님의 영광이 임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
에스겔 43:4 / 여호와의 영광이 동문을 통하여 성전으로 들어가고.
성전으로 들어가는 문은 이 동쪽으로 난 문 하나 밖에 없다. 어둠이 물러가고 해가 뜨는 방향이다.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서 들어가는 문은 오직 하나 뿐이다. 예수께서 양이 들어가는 유일한 문이다.
요한복음 14:6 /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29절에서는 동문을 스가냐의 아들 스마야가 재건하였다고 나옵니다. 그는 레위인이고 성전의 문지기 계열입니다. 이 문은 성전으로 드나드는 중요한 문이므로 레위인이 지켰고 그래서 그 문지기인 례위인들이 재건한 것입니다. 성막과 성전은 동쪽으로 하나의 문만 만들어 그 곳으로 사람들이 들어오도록 하였습니다. 천국으로 들어가는 유일한 길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나타내기 위해서입니다. 그래서 이 문의 영적인 의미는 “다시 오실 그리스도”입니다. 이 문은 감람삼으로 일직선으로 이어집니다. 감람산에서 해가 떠서 비취면 동문으로 성전에 빛이 들어옵니다. 예수님께서 감람산에서 재림하실 것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10. 함밉갓문(Muster gate,검열문 / 12:39 감옥 문 / 라틴역 : 재판관의 문) 3:31 / 죄수의 문
그 다음은 금장색 말기야가 함밉갓 문과 마주 대한 부분을 중수하여 느디님 사람과 상인들의 집에서부터 성 모퉁이 성루에 이르렀고.
이 문은 (군대)가 드나드는 문이다. 군인은 자신의 이름으로 살지 않는다. 바로 함께 하는 공동체로 산다. 교회는 하나님의 이름으로 함께 하는 공동체요. 하나님의 군대다. 군대는 (공동체)를 지켜야 한다.
출애굽기 12:41 / 사백삼십 년이 끝나는 그 날에 여호와의 군대가 다 애굽 땅에서 나왔은즉.
31절에서 함밉갓문이 나오는데 이는 히브리어로 된 문 이름을 그대로 따왔습니다. 다른 문은 다 한글로 번역했는데 이 문만 그대로 두어서 어렵습니다. 우리나라 말로 바꿔서 하자면 “죄수의 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함밉갓은 “점호하다”의 뜻입니다. “죄수를 점호하다”는 것입니다. 그 문 옆에는 감옥이 있어서 죄인들을 매일 점호했을 것입니다. 이 문은 양문과 동문 사이에 있는 문으로 성전과 가까운데 죄인을 그곳에 둔 이유가 궁금합니다. 보통 죄인들은 골까기 문 근처에 감옥이 있어서 그 곳에 가두어 두었습니다. 지금 가보면 넓은 웅덩이에 지붕을 씌운 감옥이 남아있습니다. 그러나 함밉갓문에 따로 감옥을 둔 것은 아마도 성전 제사에 있어 죄를 지은 사람을 끌고 나가서 가두는 곳이었을 것으로 보입니다. 제사를 방해하고 율법을 어기는 등 예배와 관계되어 문제를 일으킨 죄인을 멀리 골짜기문까지 데려가서 가둘 수 없으므로 성전 옆에 가까운 곳에 따로 감옥을 만들어 가둔 것으로 보입니다. 그래서 이 문의 영적 의미는 “그리스도의 심판대”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예배를 잘 드리는지 심판하시는 것입니다.
이 문은 금장색 말기야가 재건하였습니다. 보통 문을 재건할 때 그 문과 관계된 사람이 중수하였는데 성벽을 재건할 때 죄인이 없으므로 중수하게 할 수 없으니 금장색 말기야는 부자이므로 그에게 재건하도록 한 것으로 보입니다.
어려운 사람은 어려운 대로, 넉넉한 사람은 넉넉한 대로 섬기게 하는 것이 공평합니다. 이 문은 예루살렘 성전이 무너질 때 가장 심하게 무너졌었습니다. 죄인을 가두었던 방을 완전히 무너뜨리셨습니다.
☸ 다시 양문으로!
3:32 성 모퉁이 성루에서 양문까지는 금장색과 상인들이 중수하였느니라
양문에서 출발하여(1절) 양문으로 돌아왔다(32절). 성벽건축은 양문에서 시작해서 돌아와 양문에서 마무리 되었다. 인생은 예수님으로부터 시작해서 예수님께로 돌아가는 것이다. 곧 양문을 재건하는 것은 곧 (예배)의 회복이다. 성벽을 재건하는 것은 하나님의 공동체를 회복하여 든든히 세우는 운동이다.
화덕망대를 지나칠 수 없다(느헤미야 3:11)
하림의 아들 말기야와 바핫모압의 아들 핫숩이 한 부분과 <화덕 망대>를 중수하였고
앞선 개역성경에서는 화덕망대를 ‘풀무망대’, 현대인의 성경에서는 ‘용광로망대’라 하였다. 성도의 삶에는 풀무질과 같은 (고난)의 시기가 있다. 고난은 영광의 화목이다!
로마서 8:18. 생각하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도다.
베드로전서 4:13. 오히려 너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 이는 그의 영광을 나타내실 때에 너희로 즐거워하고 기뻐하게 하려 함이라.
베드로전서 5:10. 모든 은혜의 하나님 곧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부르사 자기의 (영원한) 영광에 들어가게 하신 이가 (잠깐) 고난을 당한 너희를 친히 온전하게 하시며 굳건하게 하시며 강하게 하시며 터를 견고하게 하시리라.
또한 이 망대에는 화덕이 있어서 불을 피워 연기를 내어 신호를 하지 않았는가 생각한다. 우리의 (기도)는 깨어있는 삶이며, 깨어있게 하는 사역이다.
막 14:38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있어) 기도하라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 하시고
눅 21:36 이러므로 너희는 장차 올 이 모든 일을 능히 피하고 인자 앞에 서도록 (항상) 기도하며 깨어 있으라 하시니라
엡 6:18 모든 기도와 간구를 하되 항상 (성령) 안에서 기도하고 이를 위하여 깨어 구하기를 항상 힘쓰며 여러 성도를 위하여 구하라
.
지금까지 살펴본 문들 외에도 성경 곳곳을 살펴보면 예루살렘 성벽에는 다른 문들이 있었습니다.
에브라임문(느 8:16)과 베냐민문(렘 37:13) 등 각 지파가 드나드는 문이 있었다고 나옵니다. 에브라임문은 모퉁이문에서 200m 정도 떨어져있습니다. 첫문(슥 14:10)은 엣문과 에브라임문 사이에 있었던 것으로 추측됩니다. 높은문(대하 27:3)은 “주의 전에 높은 문”의 의미가 있는 문으로 파수꾼의 문이고 왕궁과 성전 사이에 있는 문입니다. 또 안문(겔 8:3), 새문(렘 36:10), 가운데문(렘 39:3) 등이 있습니다.
예루살렘이 여러 번 무너지고 다시 지어졌기 때문에 고대의 문과 성벽의 모습과 지금 성벽의 모습과는 많이 다릅니다. 따라서 지금 있는 문과 성경에 나오는 문은 이름과 위치가 조금씩 다를 것으로 생각됩니다.
그래서 오늘은 예루살렘을 재건한 느헤미야 시절에 재건된 문을 중심으로 살펴보았습니다. 이스라엘의 모든 사람들이 참여해 각 층, 각 족속이 연합하여 성벽을 재건하였습니다. 미디안, 레갑, 느디님 사람들을 배우면서 이 내용도 궁금하실 것 같아서 연구해보았습니다. 각각의 문을 재건한 사람들은 자신들이 드나드는, 자신들과 관련이 있는 문이기에 돈을 들이고 노력을 들여서 앞장서서 재건을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이스라엘도 망했습니다. 우리의 가정, 교회, 나라도 무너질 수 있습니다. 이런 재난이 발생했을 때 방치하고 무관심하게 멀리서 보고만 있는 것이 아니라 앞장서서 내가 관계된 곳이라도 세우기 위해 노력하였으면 좋겠습니다.
어느 부분이 약한지 잘 살펴보고 내가 쌓아서 내 가정, 내 교회, 내 나라를 견고하게 세우는 성도들이 다 되기를 바랍니다.
느헤미야 3장 성벽을 세우는 사람들
전도서 9:10, “네가 어떤 일을 하든지, 네 힘을 다해서 하여라.”
느헤미야
그리고 그와 함께 했던 이스라엘 백성들로부터 몇 가지 교훈을 얻고자 합니다.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갔던 이스라엘 백성중의 일부가 고레스 왕의 칙령에 따라 고향 땅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들이 예루살렘에 돌아 와서
'여호와의 새 일'을 시작하였는데 그것은 파괴된 성전을 다시 짓는 일과 예루살렘 성을 수축하는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몇 차례에
걸쳐 성벽을 수축하려고 하였지만 그때마다 반대에 부딪혀 실패하였고 백성들의 사기 또한 저하되어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섭리와
느헤미야의 기도를 통하여 아닥사스다 왕이 성벽 재건을 허락함으로 느헤미야가 주전 444년에 예루살렘에 도착하였습니다.
느헤미야는 하나님이 감동으로 주신 비전을 제시하면서 소집된 백성의 지도자들에게 성벽 재건에 참여할 것을 촉구합니다. 그들에게 성전
재건의 필요성과 더불어 이 일은 하나님이 원하신다는 확신을 불어넣으며 무리들의 공감대를 형성합니다. 우리가 당하는 곤경은 너희
눈에 보는 바와 같다. 예루살렘이 폐허가 되고 성문은 불에 탔다면서 먼저 예루살렘의 비참한 상황을 무리들로 하여금 깨닫도록
합니다. 성벽 재건은 단순히 무너진 성벽에 대한 개축 공사가 아니라 하나님의 성전이 있는 예루살렘 성을 대적들로부터 보호하기
위함이요, 예루살렘 성을 중심으로 이스라엘 백성이 선택된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정체성 (identity)을 회복하기 위함이라.
나라를 세우자. 역사를 만들자. 미래에 도전하자. 하나님이 함께 하시고 페르시아 왕조차도 이 사역을 돕는다는 느헤미야의 설명을
들은 지도자들은 어떠한 반응을 보입니까? 마음이 뜨거워지며, 오랜 동안 잊어왔던 선택된 백성들으로서의 정체성을 깨닫게 되었고,
성벽 재건이라는 사명이 자기들에게 주어진 것을 분명히 깨닫습니다. Let us start rebuilding. 모든 거민들이 한
마음으로 하나님이 원하시는 성벽 재건의 선한 일에 참여하게 됩니다. 성벽의 둘레는 4 마일, 두께는 1 m, 높이는 5 m 이상
되는데 느헤미야는 불과 52일 만에 성벽 재건에 성공합니다. 느헤미야가 어떻게 이 일을 수행할 수 있었는지 성경적 형통의 원리를
살펴보고 교회당 건축을 앞둔 저희 교회에 적용하면서 아름다운 열매를 거두고자 합니다.
1) 리더들의 솔선수범
대제사장 엘리아십과 그 형제 제사장들이 먼저 일을 시작하면서 백성들에게 본을 보입니다. 제사장들이 북쪽 성벽을 맡아 공사에 임했던
것은 그 곳이 성전과 가까운 곳이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양문의 기둥을 놓고 문짝을 달았으며 함메아 망대에서 하나넬 망대에 이르는
구간에 돌을 쌓아 성벽을 건축하였습니다. 다른 문에는 '성별한 후에'라는 말이 없이 그냥 '들보를 얹고 문짝을 달고 자물쇠와
빗장을 갖추었고'라고만 기록되어 있는데 양문에 대해서는 '성별하고 문짝을 달았다고 언급한 것은 이 양문이 다른 문과는 달리 성전과
관계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희생 제사에 사용되는 양들이 이 문을 통해 성 안으로 들어가 인접한 베다스다 못(참조, 요
5:2-9)에서 깨끗이 씻은 후에 이 문을 통하여 성전 구역으로 운반되었기에 양문이라고 불렸습니다. 제사장 가문의 사역을 제일
먼저 기록한 것은 예루살렘 성벽 중수 사업의 종교적인 의미를 부각시키기 위함이었을 것입니다. 예루살렘은 성전이 있는 거룩한
도성으로 새 예루살렘을 예표하였기 때문입니다.
2) 역할의 분담
성벽 재건은 성벽 북쪽에 있는 양문에서부터 시작하여 시계의 반대방향으로 진행되었습니다.
3장은 성벽 중건 사업에 동참한 사람들의 명단과 그들이 맡은 관할 구역 등을 상세히 소개하고 있습니다. 느헤미야는 각 집안별로
작업량과 장소를 할당하여 그 일을 감당하게 하였는데, 이는 일의 책임 의식을 고취시키고 하나님의 일을 감당함에 있어서의 신앙적인
자세를 다지기 위함이었습니다. 특히 각 지역별로 분할하여 해당 지역의 거주자들이 자기 지역을 할당하여 성벽 중건 작업을
책임지도록 하였습니다.
그렇게 한 이유는:
1) 자기 집 부근의 성벽을 쌓도록 할당된 백성들은 개인적으로 열심히 참여하게 하기 위함입니다.
2) 시간을 낭비하면서 다른 지역으로 이동할 필요가 없기 때문입니다.
3) 성벽 건축에 온 가족이 함께 참여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일을 하는 자세는 "그 다음은"이라는 단어에 잘 담겨져 있습니다. 3장에만 28번이나 ‘그 다음에’라는 표현이
반복하여 사용됩니다. 예루살렘 성을 다시 세우는 것은 크고 힘든 일이지만 각 사람이 자기의 몫을 감당하였을 때 가능하였습니다. 한
사람이 자기에게 맡겨진 일을 잘 감당하고, 그 다음 사람이 그 다음 부분을 잘 감당하면 결국 전체가 이루어집니다. 느헤미야는 이
공사를 수행함에 있어서 성벽 공사를 42 개 부분으로 구분하고 이것을 38개 가문에 분담시켰습니다. 역할을 분담함으로 일을 능률
있게 하고, 책임 의식을 고취합니다.
교회의 사역도 목회자가 다 감당할 수 없습니다. 역할을 분담해야 합니다. 엡 4:12에 의하면 목사의 하는 일은 성도들을 잘
훈련시켜서 그들로 하여금 봉사의 일을 감당하게 한다고 하였습니다. 그럴 때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가 세워지게 됩니다. 찬양대,
교사, 친교, 청소, 비품 관리, food bank에서 음식 분배 등등. 할 일은 너무 많습니다. 금년에 어떤 사역부서에서 섬기기
원하십니까? 아직까지 결정하지 않으신 친교실 분들은 벽에 붙여놓은 신청서에 표시해주시기 바랍니다.
3) 공동 참여
본문에는 대제사장 가문으로부터 시작하여 평민에 이르기까지 각기 한 부분씩을 담당하여 예루살렘 성벽을 중건한 책임자들의 명단이 나와
있습니다. 하나님의 일을 함에 있어서 지위고하, 빈부귀천, 남녀노소의 구분이 없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 각계각층에서 참여합니다.
이 공사에는 유다의 모든 계층의 사람들이 적재적소에 배치되었습니다. 제사장이 앞장서서 일합니다. 성전에서 가장 천한 일을 담당하는
느디님 사람들이 자기들이 거주하는 성전 망대 주변 지역을 재건합니다. 각 지방의 통치자들 즉 예루살렘 지방, 벧학게렘, 미스바,
벧술, 그일라 지방을 다스리는 자들의 아들들도 성벽 중건에 참여합니다. "금 장색, 향품장사"들은 힘든 육체노동이 별로 필요하지
않은 비교적 고급 업종에 종사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들도 자기의 일들은 잠시 접어둔 채 성벽 중건에 참여합니다. 레위인도 일반
상인들도 참여합니다. 이들 뿐 아니라 개인들도 참여합니다. 관리의 아들 르바야는 부와 권력을 소유하였음에도 불구하고 대신 일할
사람을 고용하지 않고 자기 손으로 직접 수고하였습니다. 모두가 한마음이 되어 자기에게 할당된 직임을 기쁜 마음으로 감당하였습니다.
- 특히 여성들이 참여합니다.
예루살렘의 절반을 다스리는 할로헤스의 아들인 살룸이 자기 딸들과 함께 성벽을 보수하는데 참여하였습니다. 여성들의 지위를 제대로
인정받지 못하던 시대에 여성들의 헌신이 인상적입니다. 예수님의 사역을 물질적으로 도운 사람들도 주로 여인들이었습니다. 눅 8장에
보면 막달라라고 하는 마리아와 요안나와 수산나와 그 밖에 여러 다른 여자들이 자기들의 재산으로 예수의 일행을 섬겼다고 합니다.
오늘날도 경건한 여성들의 수고가 주님의 일을 하는데 필요합니다. 하나님의 일을 감당함에 있어서 남녀의 구분이 있을 수 없습니다.
- 원근각처에서 참여합니다.
성안에 있는 사람들뿐 아니라 성 밖에 거주하는 자들도 이일에 참여하였습니다. 예루살렘 밖에 사는 자들은 성벽 부근에 사람이 살지
않은 지역에 할당되었습니다. 여리고(2), 드고아(5, 27), 기브온(7), 미스바(7) 사람들이 참여하였습니다. 기브온
사람들은 여호수아를 속여 조약을 맺고 이스라엘의 종이 되었던 족속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과거에 연연하지 않고 함께 일하였습니다.
예루살렘에서 약 20km 쯤 떨어진 드고아에서 온 평민들도 동편 성벽의 한 부분을 담당하였습니다.
- 하나님의 일에는 귀천이 없습니다.
분문은 성읍이 더럽혀지지 않도록 시중의 쓰레기와 오물을 실어 나르는 데서 붙여진 이름입니다. 벧학게렘 지방을 다스리는 레갑의 아들
말기야와 아들이 그쪽 부분을 담당하였습니다. 지도층이 솔선수범하였습니다. 교회에서 누군가 화장실을 청소해야 하고, 어지럽혀진
방을 깨끗이 해야 하고, 친교 후에 설거지를 해야 합니다. 누군가 주보를 접어야 하고 나누어 주어야 합니다. 물론 일을 하고
싶어도 육신의 연약함을 인하여 할 수 없는 분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성도들은 다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일에는 큰
것, 작은 것, 더러운 것, 천한 것이 없습니다. 하나님 보시기에 다 귀하기 때문입니다.
4) 사역에 대한 열정
생물 시간에 리비히의 ‘최소율의 법칙’을 배운 적이 있습니다. 여러 개의 널빤지로 만들어진 통이 있는데 그 높이가 다르다고
가정합시다. 그 통에 물을 부어 넣을 때 어디까지 물이 차겠습니까? 길이가 가장 짧은 널빤지까지 물이 차오를 것이요 그 이상은
아무리 부어도 물은 다 새어 나갈 것입니다. 성벽 건축은 모든 구간에서 튼튼히 잘 지어져야 합니다. 모든 사람들이 열심을 내어
성벽의 99%를 잘 지었다 할지라도 1%가 여전히 무너진 상태로 있다든지 제대로 지어지지 않았다면 대적들이 그곳을 집중적으로
공격해 올 것이요 그렇게 되면 99%를 짓는데 들인 노력이 헛수고가 됩니다.
일부 미온적인 사람들이 있었으나 대체로 자기가 맡은 일들을 최선을 다해 감당하였습니다. 그들은 일이 어려운 곳이나 쉬운 곳이나를
막론하고 불평 없이 즐거운 마음으로 건축 공사에 참여했습니다. 3:20절을 개역성경에서는 바룩이 한 부분을 힘써 중수하였다고
나옵니다. '한 부분'이라고 번역된 말은 '둘째 부분'이라는 뜻입니다. 표준새번역에서는 제대로 번역하고 있습니다. 바룩은
제사장으로서 다른 제사장들과 함께 먼저 한 공사를 끝내고 성 굽이에서부터 대제사장 엘리아십의 집 문까지 또 다른 부분을 맡아
일하면서 여호와께 대한 열심 있는 신앙의 모습을 나타내 줍니다. 이처럼 자신에게 배당된 공사를 먼저 마치고 또 다른 일에 투입된
경우는 여러 곳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11, 19, 24, 27절).
하나님의 일은 특정 개인의 힘으로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모든 사람들이 다양한 배경에도 불구하고 한마음이 될 때 하나님의
일이 이루어집니다. 공동의 목적을 위해 한마음이 될 때 인간적인 차이는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일할 수 있는 사람은 열과 성을
다하여(20절) 참여해야 합니다. 한 마음으로 그들이 가진 달란트와 자원을 합치면 무슨 일이든지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협동의
유익입니다. 자신의 일을 감당하고 남을 돕는 사람들은 공동체에 뜨거운 열성을 불어넣습니다. 성도 모두가 각기 한 분야씩을 분담하여
그 일을 책임지고, 자원하여 기쁜 마음으로 모든 일에 참여할 때 아름다운 열매를 풍성하게 거둡니다.
* 하나님의 일에도 비협조적인 사람들이 있습니다.
5절에 보면 드고아 집안의 어떤 유력자들은 공사 책임자들에게 협조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협조하다'라는 말은 ‘어깨를
들이대다’는 뜻이므로 그들이 비협조적이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러한 기록이 3장에 포함된 것은 백성들 모두가 공사를 찬성한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나타내기 위함입니다. 그들은 남들보다 많은 역량을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일에 참여하지 않고 구경꾼으로
남았습니다. 성벽 중건 사역은 느헤미야 개인의 이름을 드러내기 위한 일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하나님의 일이라는 것을
그들은 알지 못하였습니다. 모두 힘을 합하여 참여하는 사역에 그들이 어떤 이유로 참여하지 않았는지 정확히 알 수는 없으나 분명한
것은 그들의 비협조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일은 계속 진행된다는 것입니다. 요즈음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하다보면 드고아 귀족
같은 사람들이 있게 마련입니다. 그리고 참여하지 않는 사람들이 도리어 말이 많습니다. 그러나 낙심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이
시작하신 일은 하나님께서 반드시 이루시기 때문입니다. 소극적이거나 무관심하거나 냉소적인 모습이 우리에게는 없어야 합니다.
본문에는 그 성벽 중건에 참여한 사람들의 이름들이 열거되어 있습니다. 백성들은 느헤미야의 지도 아래 예루살렘 원근각처에 사는
사람들이 다함께 모여 성벽 중건에 자발적으로 참여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일을 하는데 있어서 3장에 나타난 성경적인 원리는 솔선수범,
역할 분담, 공동 참여, 그리고 열정입니다. 이 원리는 모든 공동체에서 필요한 업무 수행 방법입니다. 어떻게 하면 이 원리를
우리의 사역에 적용할 수 있습니까?
1) 주인의식을 가져야 합니다.
무너진 성벽을 다시 지으려면 시간도 들여야 하고 물질도 바쳐야 하고 육신의 힘도 써야 합니다. 이 일은 느헤미야 좋은 일만 시키는
것이지 생각한다면 아무도 참여하지 않을 것입니다. 드고아 귀족들은 그런 사람들이었습니다. 권리만 찾을 줄 알았지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의무는 제대로 감당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참여하는 사람들은 주인의식이 있었기에 힘들지만 성벽 중건 작업에
참여하였습니다. 이 성벽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요 이 성을 지으면 우리가 대적의 위험으로부터 보호를 받게 될 것이다. 이
성은 제사장들의 성도 느헤미야의 성도 아니요 하나님의 성이요, 우리의 성이라는 의식이 있었습니다.
여호수아 3장을 보면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능력으로 요단강물을 여시고 이스라엘 백성들을 마른 땅으로 건너게 하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여호수아는 제사장들을 향하여 언약궤를 메고 요단강으로 들어서라고 명령하였습니다. 말씀에 순종한 제사장들의 발이
강물에 잠기자마자 위에서부터 흘러내리던 물이 그 흐름을 중단하고 멀리 밀려올라가 쌓이기 시작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인도하심과
신실하심을 믿고 제사장들이 앞장서서 믿음의 발을 내디딜 때 길이 열렸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발을
디뎌야 할 곳이 어디입니까? 그 발을 먼저 내디디려면 이 일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맡기신 일이요 우리가 감당해야 한다는
주인의식이 있어야 합니다. 이 교회는 목사나 어떤 특정인의 교회가 아니라 우리 주님의 교회요 우리와 우리 자식들이 믿음의 뿌리를
내리며 섬겨야할 우리 교회라 하는 의식이 있어야 합니다. 주인 의식을 가질 때 자원하는 마음이 생깁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에서 하나님의 성막을 지을 때도 '마음이 감동된 자와 무릇 자원하는 자가' (출 35:21) 참여했습니다. 허물과 죄로 인하여
영적으로 죽은 우리를 구원하신 주님의 은혜를 기억할진대 기쁨으로 주님을 섬겨야 합니다. 섬기되 '주의 구원의 즐거움을 내게
회복시키시고 자원하는 심령을 주사 나를 붙드소서' (시 51:12) 하면서 자원하는 마음을 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2) 희생정신이 있어야 합니다.
느헤미야와 더불어 일한 사람들은 사방에 대적들이 여전히 존재하여 안전을 위협받고 포로에서 귀환하여 아직 안정된 삶을 살지 못하던
시절에 최선을 다하여 하나님의 사업에 봉사하였습니다. 그들이 성벽 중건공사를 할 때에 일에만 몰두한 것이 아닙니다. 언제 대적들이
쳐들어와서 방해할지 알 수 없었기에 한 손으로 일을 하고 다른 한 손에는 병기를 잡았습니다. (4:17) 겪은 고통이 클수록
성취한 사역은 위대하며, 고난이 클수록 영광도 더욱 빛납니다.
when you are comfortable, you don't really grow.
편안할 때 제대로 성장하지 않는다는 말 있습니다. 여기가 좋사오니 하는 의식을 가질 때 우리의 신앙은 그대로 있는 것이 뒷걸음을 치게 되어 있습니다.
2월부터 본당 사용료를 3700불에서 5000불로 올리겠다는 통보를 건물주로부터 받았습니다. 게다가 교육관을 쓰려면 추가로 돈을 더
지불해야 합니다. 한편으로는 건물주의 처사가 지나치다 싶지만 또 한편으로는 지난 10년 동안 이 장소를 사용하였으니 이제는
주님이 예비하신 곳으로 떠날 준비를 하라는 사인으로 생각됩니다. 인류 역사는 도전과 응전 속에 발전해왔다고 역사학자인 아놀드
토인비가 말했습니다.
우리 앞에 건물 사용료 인상이라는 당장의 도전이 있습니다. 교회당 건축이라는 더 큰 도전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너무 부담스러워 이미 건물이 마련된 곳으로 가서 편안하게 신앙생활 하시겠습니까? 아니면 한 번 해보자는 적극적이고도
긍정적인 자세를 가지고 도전해보시겠습니까?
하만이 페르샤 제국에 흩어져 사는 유대인들을 다 죽이려는 계획을 세웁니다. 아닥사스다 왕은 사건의 전모를 제대로 알지 못한 채
하만의 요청에 따라 어인을 찍어 유대인을 죽이라는 조서를 내립니다. 민족의 위기 앞에서 모르드개는 왕에게 호소할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인 에스더에게 이 문제를 해결하도록 요청했습니다. 왕의 부름을 받지 않고 그 앞에 나아갈 경우 자칫하면 죽을 수도 있었습니다.
이미 공포된 조서를 거두도록 왕을 설득하는 일도 불가능하게 보였습니다. 그러나 에스더는 왕비의 자리에 연연하여 편안하게 있기보다
민족의 아픔을 자기 것으로 하면서 죽으면 죽으리라 담대하게 왕 앞에 나아갔습니다. 죽기를 각오한 에스더의 희생이 있었기에
유대인은 구원을 경험할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무리를 불러 놓고 말씀하셨습니다.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오너라. (막 8:35) (If anyone wishes to come after Me, let him deny
himself, and take up his cross, and follow Me.) 자기를 당장 부인해라. 네 십자가를 당장
져라. 그리고 계속해서 나를 따르라. 이것이 주님의 제자의 모습입니다.
주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은 희생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가진 모든 것은 다 하나님께서 주신 것입니다. 주님께로부터 온 것을 주님께 돌려드리는 것뿐이라는 의식이 있어야 합니다.
오늘날에도 진실한 그리스도인들은 주를 위하여 고난 받기를 기뻐합니다. 고난을 당한다고 육신적인 박해를 받는 것만 말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일을 위하여 때로 자기의 계획이나 일을 유보하거나 희생하는 것도 고난입니다. 고난이 없이는 하나님의 영광에 참여할 수
없습니다.
* 하나님의 일에 참여한 사람은 하나님이 기억하십니다.
3장에 나타난 성벽 공사에 참여한 자들의 명단이 갖는 의미는 매우 큽니다. 그 이름들은 성벽 재건이라는 하나님의 역사에 동참한
것을 보여주는 기념비적인 이름들입니다. 그들의 이름이 성경에 기록되어 있다는 것은 그 이름들을 하나님께서 기억하신다는 뜻입니다.
후세에 그들의 이름을 후손들이 볼 때 얼마나 자랑스럽습니까? 반면에 드고아 귀족의 자손들은 얼마나 부끄럽겠습니까? 이 자리에 함께
한 모든 교우들이 주인의식을 가지고 자원하여 주의 일을 감당하고, 주님을 위하여 고난 받는 것을 기쁨으로 생각하며 자기를
포기하는 자세로 주님의 몸 된 이 팔로마한인교회를 세워가야 합니다. 먼 훗날 우리의 후손들이 이 교회역사를 보면서 목사와 장로들이
함께 일어나 성전의 기초를 놓고 성별하였고, 그 다음은 어떤 교우들이 음향시설을 기증하였고, 그 다음은 어떤 교우들이 페인트를
칠하였고, 그 다음은 어떤 교우들이 실내장식을 하였고, 그 다음은 어떤 교우들이 조경을 하였다고 할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52일간의 예루살렘 중건 역사를 통하여 공동체적 참여의 위력을 경험하였습니다. 비록 포로에서 귀환한 별로 가진 것
없고 내세울 것 없는 그들이었지만 기도와 말씀으로 얻어진 느헤미야의 영력, 철저한 조사와 분석을 바탕으로 한 계획, 낙심한
백성들에게 동기를 부여하고 역사 세우기에 동참하자는 느헤미야의 호소, 하나님의 도성인 예루살렘의 성을 다시 지음으로서 선민으로서의
정체성 회복을 원하는 백성들의 결단과 헌신 등이 합쳐져서 아름다운 열매를 거두었습니다.
2007년도 저희 팔로마한인교회에서 벌이는 귀한 역사에 한 마음이 되어 참여합시다. 성벽을 재건하던 이스라엘 백성들과 같이 어깨를
서로 들이대고 참여합시다. 팔로마 공동체의 하나됨의 위력을 보여줍시다. 우리가 드린 모든 수고를 주님께서 기억하실 것입니다.
건축하는 모든 과정에 하나님께서 함께 하십니다. 비전을 가지고 나아가는 자들에게 지혜와 능력을 주십니다. 기도로 참여하는 사람들,
물질로 참여하는 사람들, 손과 발을 움직여 참여하는 사람들이 다 필요합니다. 하나님께는 불가능한 일이 없다는 마리아의 고백을
각자의 고백으로 삼으며 온 교우들이 한 마음으로 ‘팔로마 성전을 짓는 사람들’이 되어 나아가면서 주님이 베푸시는 은혜를 풍성하게
경험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 오늘 읽어야 할 말씀 : 느헤미야 2:1∼20 ♦ 묵상을 위한 주제 : 하나님께 묵도하고(1절) ♦ 성구 : 왕이 내게 이르시되 그러면 네가 무엇을 원(願)하느냐 하시기로 내가 곧 하늘의 하나님께 묵도(黙禱)하고.
“하늘의 하나님께 묵도하고(I prayed to the God of heaven)”
느헤미야가 왕 앞에서 묵도한 것은 평범한 기도가 아니었습니다.
왜냐하면 느헤미야는 예루살렘으로부터 올라왔던 사람으로부터 당시 예루살렘 성벽이 훼파된 상태로 흉물스럽게 방치되었다는 이야기를 들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때부터 삼 개월 동안 지속적으로 예루살렘 성벽을 어떻게 하면 다시 쌓을 수 있을까 생각하며 기도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왕이 느헤미야에게 “왜 안색이 좋지 않은가?” 라는 질문을 합니다. 그 순간 왕에게 대답을 하기 전에 잠간 기도한 것이 묵도(黙禱, silent prayer)입니다.
당시 페르시아 제국의 아닥사스다 왕은 세계를 통치하는 왕입니다.
최고의 권력자에게 함부로 말을 할 수 없었던 포로로 끌려온 유다 사람의 후손으로서 다만 하늘의 하나님에게 지혜를 기도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고향 땅의 형편을 아뢸 수 있었습니다.
만일 왕의 질문에 엉뚱한 말을 한다면 무서운 형벌이 떨어질 수도 있는 절박한 상황입니다.
왜냐하면 아하수에로 왕은 연회 자리에 왕후를 불렀으나 왕후가 오지 않았기 때문에 즉시 왕후의 위를 폐하였기 때문입니다. 더구나 아닥사스다 왕은 아하수에로 왕의 아들이었습니다.
기도의 사람 느헤미야의 묵도는 지난 삼 개월 동안 줄기차게 기도했던 모든 것을 아주 짧게 아뢸 수 있는 기도자의 속사정을 진솔하게 아뢸 수 있는 기도라고 하겠습니다.
소리도 없고, 눈도 감을 수 없고, 마음속으로 “주여 할 말을 내게 주옵소서!” 이렇게 기도하지 않았을까 생각합니다.
평소에 기도하지 않았다면 이런 때에 아닥사스다 왕에게 무슨 말을 할 수 있겠습니까?
사도 바울은 항상 기도하라고 가르쳤습니다. 느헤미야처럼 기도하는 일에 놀라운 은혜를 경험할 수 있도록 인내하며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나만이 갖는 기도 응답의 비밀을 신앙생활의 무기로 잘 활용하여 신앙생활에 승리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 찬양 / 기도하는 이 시간
예수 내 구주! 예수 내 생명! 예수 내 권세!
느헤미야 2:4
왕이 내게 이르시되 그러면 네가 무엇을 원하느냐 하시기로 내가 곧 하늘의 하나님께 묵도하고.
느헤미야 2:5
왕에게 고하되 왕이 만일 즐겨하시고 종이 왕의 목전에서 은혜를 얻었사오면 나를 유다 땅 나의 열조의 묘실 있는 성읍에 보내어 그 성을 중건하게 하옵소서.
느헤미야 2:7
내가 또 왕에게 아뢰되 왕이 만일 즐겨하시거든 강 서편 총독들에게 내리시는 조서를 내게 주사 저희로 나를 용납하여 유다까지 통과하게 하시고.
느헤미야 2:8
또 왕의 삼림 감독 아삽에게 조서를 내리사 저로 전에 속한 영문의 문과 성곽과 나의 거할 집을 위하여 들보 재목을 주게 하옵소서 하매 내 하나님의 선한 손이 나를 도우심으로 왕이 허락하고.
느헤미야 2:9-10
군대 장관과 마병을 보내어 나와 함께하게 하시기로 내가 강 서편에 있는 총독들에게 이르러 왕의 조서를 전하였더니. 호론 사람 산발랏과 종 되었던 암몬 사람 도비야가 이스라엘 자손을 흥왕케 하려는 사람이 왔다 함을 듣고 심히 근심하더라.
마태복음 6:33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오늘의 기도
하나님의 공의가 실현되는 도구로 사용하여 주옵소서!
첫째, 벨사살 왕의 역사성
다니엘
5장에서 바벨론 왕 벨사살이 큰 잔치를 베푼 사실을 보여 줍니다. 그런데 오랫동안 역사 가들은 벨사살 왕이 과연 역사적으로 실제
했던 인물인가에 대해 의심해 왔었습니다. 왜냐하면 바벨론의 여러 문헌에 의하면 바벨론 제국의 마지막 왕은 나보니두스였으며,
바벨론 왕의 역대 왕들 중에 벨사살이라는 이름을 가진 왕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단지 다니엘서 5장에서 만 언급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벨사살이 역사적인 실제 인물이었으며 바벨론 제국 멸망 당시 그 가 바벨론을 통치한 왕이었다는 사실이 고고학적
증거들을 통해 분명히 증거되었습니다.
벨사살이
가공의 인물이 아닌 역사적으로 존재했던 인물임을 확증된 것은 1854년 한 영국 영사 가 바벨론 왕 나보니두스(Nabonidus
BC 555-539)가 옛 바벨론의 갈대아 우르 지역의 수호신 인 ‘달의 신’에게 바치기 위해 우르에 세운 신전의 폐허 속에서 몇
개의 조그만 점토 기둥들을 발 굴함으로써 였습니다. 그 기둥들에는 가로 세로 10cm 정도의 정방형에 글씨가 새겨져 있었는데 그
글의 내용은 나보니두스와 그의 큰 아들의 건강과 장수를 신께 기원하는 것이었습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았습니다. ‘바벨론의 왕인 나 곧 나보니두스가 당신께 죄를 짓지 않도록 해 주소서. 그리고 나의 장남이며
사랑하는 아들인 ‘벨사살’의 마음에 당신에 대한 경외심이 있게 하소서.’라 했습니다. 한편 1854년 이후에 벨사살에 대한
바벨론의 문헌들이 더 발견 되었는데, 그 때마다 벨사살의 왕자 또는 왕의 아들로만 언급되었고, ‘왕’으로서 확인되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나 또 다른 비문에서 벨사살이 비록 법적으로 왕위를 계승 받지는 못했지만 그 부친 나보니 두스와 바벨론의 공동 섭정을
하였음이 밝혀졌습니다.
바벨론의
최고신인 ‘벨’ 또는 ‘말둑’이라 불리우는 신보다 다른 도시 즉 하란과 우르의 수호신인 ‘달의 신’에게 더 많은 관심을 가졌던
괴짜 나보니두스 왕은 BC 555년에 등극한 지 3년이 되던 때부터 실제 통치권을 자신의 아들에게 맡겨 버리고 바벨론을 떠나
아라비아의 테이마(Teima) 라는 오아시스 주변에서 거주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 이유에 대해서는 분명히 알려져 있지
않으나 일반적으로 학자들은 그가 바사 왕 고레스 2세와의 전투에서 패한 후 실의에 빠져 그곳에서 은둔 생활을 했을 것으로 봅니다.
한편 이런 사실이 다니엘이 어떻게 바벨론 제국의 셋째 치리자가 될 수 있었는가를 설명해 줍니다.
즉
벨사살의 아버지 나보니두스가 정식 왕이었기 때문에 그의 지위가 첫째이고 벨사살 자신은 섭 정왕으로서 둘째 가는 자리에 있었고
따라서 다니엘에게 나라의 셋째 가는 자리를 줄 수 밖에 없 었던 것입니다. 한편 바벨론 제국의 메대-바사 연합군에 의해 멸망하기
직전인 BC 539년에 나 보니두스가 바벨론으로 다시 돌아왔었습니다. 그러나 아들 벨사살에게 실제 왕권을 내어 주지 않 았습니다.
다니엘서5장에서 벨사살이 메대바사 연합군에게 죽게 되고 나보니두스 왕은 메대바 사 연합군에게 항복했습니다.
이런
사실을 통해서 볼 때에 다니엘서의 벨사살이 다니엘이 허구의 인물을 이야기 한 것이 아니 고 역사적으로 실존한 인물이었음을 살펴
보았습니다. 비록 바벨론 여러 문헌에 벨사살이 법적 인 왕으로 나타나지 않았다 할지라도 고고학 자료들은 그가 실질적인 통치자였음을
분명히 증거 하고 있습니다. 성경은 그 기록 의도가 역사적 사실을 알려 주기 위해서가 아닐지라도 반대로 역 사적인 사실을
바탕으로 기록된 것임을 보여 줍니다. 그리고 이 같은 성경 기록의 역사성은 성경 이 하나님의 영감을 받은 저자들에 의하여 기록된
정확 무오한 하나님의 말씀임을 다시 한번 확 증하는 것입니다.
둘째, 벨사살의 연회와 하나님 모독사건 (1-4)
이제까지
우리는 다니엘 1장에서 다니엘의 바벨론 왕실에서의 성장 배경, 제 2-4장은 느부갓 네살 왕 통치 당시의 주요 사건들과 왕의
꿈을 통한 간접적인 묵시들을, 그리고 본 제 5장은 느 부갓네살왕이 죽은지(BC 562년) 약 23년 후인 바벨론의 마지막 왕
벨사살(BC550-539년)의 통치 말기에 있었던 신비한 손가락이 나타나 왕궁 벽에 글씨를 쓴 사건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일반
역사의 기록에 나타난 느부갓네살 이후의 바벨론 왕들의 계보는 다음과 같습니다. 느부갓 네살(BC 604-562), 그이 아들
에윌므로닥 (또는 아벨말둑BC 562-560), 에윌므로닥은 살해 됩니다.
다음
왕으로 느부갓네살의 딸과 결혼한 네르갈 사레셀이 왕이 됩니다. 네르갈 사레셀(또는 네 리 글리솔BC 560-556), 다음으로
네르갈 사레셀의 아들 라보로 소알후드(또는 라바시 말둑 BC556)는 왕이 된지 8개월 만에 암살되어 죽고 느부갓네살의 다른
사위인 나보니 두스(BC 556-539년)가 왕이 됩니다. 나보니 두스의 아들이 벨사살입니다. 느부갓네살은 벨사살의 외
할아버지입니다.
「나보니두스와 벨사살」(Nabonidus and Belshazzar,
R. P. 도허티, 1929년)이라는 책에서는 벨사살의 어머니는 니토크리스였고 니토크리스는 느부갓네살(2세)의 딸이었을 것이라고
추론합니다. 만일 사실이 그러하였다면 느부갓네살은 벨사살의 외할아버지였던 셈입니다.
고대 근동 국가에서 왕들이 잔치를 배설하고
귀족들과 함께 술을 마시는 것은 흔히 볼 수 있는 일 입니다. 그러나 벨사살이 베푼 연회는 정상적인 연회가 아니라 지극히
비정상적이고 방탕한 것이 었습니다. 왜냐하면 벨사살이 연회를 열고 있을 당시는 바사와 고레스 2세가 바벨론 제국을 다 점령하고
수도인 바벨론 성을 2년 동안 포위하고 있을 때이기 때문입니다. 바로 그날 밤에 벨사 살 자신이 죽게 될 그런 급박한 상황에
잔치를 베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벨사살은 자신의 생 명과 나라의 존폐가 경각에 달려 있는 위태로운 시기에 자신의 악함과
어리석음을 온 세상에 드 러내려고 한 듯이 술에 취하고 방탕하는 비 정상적인 대 연회를 열었던 것입니다.
귀인
일천명을 불러 모아 잔치를 합니다. 멸망해 가는 제국이었지만 여전히 이 정도의 연회를 열 여력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리스의
역사가 크세노폰에 의하면 식민지로부터 들여온 각양의 좋 은 것들을 엄청나게 쌓아 두었기 때문에 바벨론 성이 포위되더라도 20년은
견딜 수 있었다고 합 니다. 당시 바벨론 제국은 이미 고레스에게 계속 패하여 수도인 바벨론 성까지 밀려 포위되어 있 었습니다.
패전이 거듭되면서 타지에서 바벨론 성으로 도피해 온 귀족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그 런데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바벨론이
마지막까지도 그런 국력을 가지고 있었다는 사실이 아 니라 그 많은 사람들 중 왕의 비정상적인 행동에 간언하는 자가 전혀 없었을
만큼 바벨론의 상류 층 전체가 패역하고 부패했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은 한 나라가 멸망할 시기가 가까울 때에 자연 스럽게 나타나는
말기적 현상이라 할 수 있습니다.
벨사살이
잔치를 할 때에 하나님의 전의 기명들로 술을 마시는 지극히 불경스러운 행동을 한 것 은 술에 취해 취기로 한 행동이 아니라
벨사살이 불경을 저지른 핵심 원인은 부왕 느부갓네살에 의해 증거된 여호와가 세계 역사의 절대 주권자라는 사실을 의도적으로 부인하고
자신의 권세가 절대적이며 고레스의 공격으로부터 바벨론을 얼마든지 수호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과시하기 위 한 지극히 교만된
마음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3이에
예루살렘 하나님의 전 성소 중에서 탈취하여 온 금 그릇을 가져오매 왕이 그 귀족들과 왕 후들과 후궁들과 더불어 그것으로
마시더라. 4그들이 술을 마시고는 그 금, 은, 구리, 쇠, 나무, 돌로 만든 신들을 찬양하니라.’ 여기서 금은구리 쇠 나무 돌로
만든 신들이란 바벨론의 온갖 잡신 들을 총칭하는 것입니다. 이 잡신들을 찬양하며 술에 취했다는 말을 통해 고성방가하며 음란한
행동을 자행하는 광란의 광경을 상상해 볼 수 있습니다. 동시에 벨사살과 일천의 귀인들이 이럴 때에 왜 하필이면 하나님 전의
기명들을 가져 오게 해서 술을 마시며 우상들을 찬양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이들이 얼마나 고이적으로 여호와 하나님을 모독하고
있는가를 볼 수 있습니다. 사탄 은 개인이나 국가를 망하게 하는 자입니다. 사람들은 죽으려고 발광을 합니다.
셋째, 왕궁 벽에 나타난 신비한 손가락(5-16)
‘5그
때에 사람의 손가락들이 나타나서 왕궁 촛대 맞은편 석회벽에 글자를 쓰는데 왕이 그 글자 쓰는 손가락을 본지라. 6이에 왕의
즐기던 얼굴 빛이 변하고 그 생각이 번민하여 넓적다리 마디 가 녹는 듯하고 그의 무릎이 서로 부딪친지라.’ 그 때에 무리가 술에
취해 성전 기명 모독, 음주, 향락 등 점차 광적인 향락 상태로 고조되어 가던 그들의 악행이 우상숭배로 절정에 이르렀던 바로 그
때에 하나님의 심판이 선언되었습니다. 바벨론 제국의 궁극적 원인이 절대자이신 여호와 하나님을 모독하고 도전한 데 있음을 선명하게
드러내어 줍니다. 손가락이 나타나서 왕궁 촛대 맞은 편의 석회벽에 글자를 쓰는 것을 보고 왕이 얼굴 빛이 변하고 번민하여
넓적다리가 녹는 듯 하고 무릎이 서로 부딪칩니다. 세상에 사람의 손가락이 나타나 글을 쓰는 것을 보고 놀라지 않을 사람이
누구이겠습니까? 사람들은 촛대 맞는 편 흰 분벽 위에 있는 글을 촛불로 인해 잘 볼 수 있었습니다.
이
때에 벨사살이 공포에 싸여 소리질러 말하기를 바벨론 박사들을 불러 들이라고 했습니다. 그 들이 왕 앞에 서자 왕이 말하기를.
"저 글을 읽고 뜻을 풀어주는 사람은 자주색 도포를 입혀 주고 금목걸이를 걸어주며 이 나라에서 셋째 가는 높은 자리에
앉혀주리라." 제일 먼저 불러들인 사람 들은 바벨론 박사들이었습니다. 벨사살은 느부갓네살이 하나님의 징계로 정신 이상으로 일정 기
간 동안 왕위에서 쫓겨났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습니다. 따라서 그 사건을 예언하였던 다니엘에 대해서도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벨사살이 어째서 이런 위급한 상황에서 가장 믿을 만 한 다니엘을 부르지 않았으며 태후의 깨우침이 있은 후에야 다니엘의
존재를 기억하게 되었을까 요?
벨사살은
유대 사람을 경멸하였을 것입니다. 아마도 왕권이 바뀌면서 다니엘과 유대인들을 질투 하고 미워하던 사람들이 벨사살 왕에게 좋지
않은 말을 하였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벨사살 정권 하에서는 다니엘이 실권에서 물러났을 것입니다. 그렇기에 이 연회에 참석도 못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유대사람을 경멸하였고 유대의 하나님도 대수롭지 않게 여겼을 것입니다. 왕의
박사들이 다 들어 왔으나 역시 한 사람도 그 글을 알거나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자신의 박 사들이 홀연히 나타난 손가락이 쓴
글자를 해석하지 못하자 불안과 공포가 급증했습니다. 연회 에 초대된 귀인들도 혼비백산하여 놀라 동요하고 혼란에 빠져 그리하여
흥겨움으로 인해 소란 하고 떠들석 하던 분위기는 멈추어지고 연회장은 갑자기 불안감으로 술렁이기 시작했습니다. 바벨론의 박사들이 그
글을 해석하지 못하자 분위기는 완전히 동요와 혼란의 상태에 이르렀습 니다. 이 때에 태후가 소란한 연회장에 대해 듣고 연회장으로
들어 왔습니다.
이
태후는 본래는 연회장에 없었습니다. 그리고 2절에서 벨사살왕의 왕후들과 빈궁들이 잔치에 참여했다고 했으니 벨사살 왕의 왕비는
아닙니다. 아마도 벨사살의 어머니 왕후일 가능성이 큽니 다. 어머니 태후는 아버지 나보니더스의 아내로서 바벨론 궁에 있지 않고
남편을 따라 테이마 (Teima)에 머물고 있다가 나보니더스가 이 때쯤에는 바벨론으로 돌아와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왕비가
다니엘에 대해서 너무나 잘 알고 있으며 다니엘의 능력을 높이 평가하고 있는 것으로 보 아 그녀는 느부갓네살의 딸인 나보니더스의
아내요 벨사살의 어머니인 니토그리스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태후가
이 일로 번민하거나 얼굴이 파래질 필요가 없다고 말합니다. 태후는 다니엘을 불러 글자 를 해석하게 하면 문제는 간단하게 해결될
것이라 했습니다. 그는 거룩한 신들의 영이 있는 사 람이라고 다니엘을 벨사살 왕에게 소개합니다. 왕의 부친 느부갓네살 왕 때에
있었던 자인데 다 니엘은 신들이 가지는 지혜를 가진 자요 느부갓네살 왕이 바벨론의 박수와 술객과 갈대아 술사 와 점쟁이의 어른을
삼은 자라고 말했습니다. 그리고는 그 사람이 벨드사살이라 이름을 가진 이 다니엘이라 했습니다. 그리고 다니엘은 능히 꿈을 해석하며
은밀한 말을 밝히며 의문을 파할 수 있는 사람이라고 소개했습니다.
우리가
유의해야 할 점은 다니엘의 바벨론 식 이름인 벨드사살과 왕의 이름인 벨사살이 비슷하 고 뜻도 비슷합니다. 다니엘은 본래
히브리식의 이름이며, 벨드사살은 궁중 교육 시절에 환관 장으로부터 받은 바벨론식 이름입니다. 벨드사살이란 뜻은 ‘벨 신이여 그의
생명을 지키소서.’ 이며 벨사살의 뜻은 ‘벨 신이여 왕을 보호하소서’입니다. 이렇게 해서 벨사살이 다니엘을 불렀 습니다. 그리고
묻기를 ‘네가 우리 부왕이 유다에서 사로잡아 온 유다 자손 중의 그 다니엘이냐’ 고 묻습니다. 다니엘을 향한 벨사살의 말이 참으로
밉살스럽습니다. 태후의 소개로 불러들인 다 니엘에게 질문하는 벨사살의 태도가 몹시 거만합니다. 지금 벨사살에게 중요한 것은
다니엘의 출신이 아니라 바벨론의 그 누구도 해석하지 못하고 있는 분벽에 쓰인 글자의 의미를 알아내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엉뚱하게 다니엘의 출신을 거론함으로써 은연 중에 포로 출신의 노인에게 도움을 받고 싶지 않다는 오만함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한편 이 대화에서 밝혀진 것은 벨사살이 이제야 다니엘과 첫 대면을 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22그분의
아들이신 임금님께서는 그것을 다 아시고도 겸손해지기는커녕 23오히려 하늘의 대 주재를 거역하시고..’ 22절에서 보여 주듯이
벨사살 왕은 느부갓네살 시대에 행하였던 다니엘의 행적들을 다 알고 있었던 것으로 보이는데 벨사살은 이제야 다니엘과 첫 대면을
한다는 것은 그 가 다니엘을 얼마나 경원시 했는가를 알 수 있습니다. 다니엘은 느부갓네살의 은인이요 느부갓 네살이 정신병으로
권좌에서 쫓겨 났을 때에 왕의 자리를 지키고 나라를 지킨 일등 공신을 이제 야 만난다는 것은 벨사살이 얼마나 무능하고 어리석은
인간인가를 보여 줍니다. 지혜자는 지혜자 를 찾아 가까이 해야합니다.
‘16내가 네게 대하여 들은즉 너는 해석을 잘하고 의문을 푼다 하도다 그런즉 이제 네가 이 글을 읽고 그 해석을 내게 알려 주면 네게 자주색 옷을 입히고 금 사슬을 네 목에 걸어 주어 너를 나라의 셋째 통치자로 삼으리라 하니’
넷째, 왕궁 벽에 쓰인 글자를 다니엘이 해석(17-29)
‘17다니엘이
왕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왕의 예물은 왕이 친히 가지시며 왕의 상급은 다른 사람 에게 주옵소서 그럴지라도 내가 왕을 위하여 이
글을 읽으며 그 해석을 아뢰리이다.’ 다니엘은 벨사살 왕이 제공하겠다 한 상을 마다한 이유로서 세가지를 생각해 보겠습니다. 첫째로
다니엘 은 본래 재물이나 권세에 얽매이지 않고 청렴 결백했기 때문입니다. 둘째로 다니엘 자신이 세상 의 재물이나 권세에 영향을
받지 않고 오직 진리만을 말한다는 것을 보여 주기 위해서 입니다. 셋째로 바벨론은 하루 밤만 지나면 멸망할 것이므로 왕이 주는
상은 하루 밤 만에 무용지물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럴지라도 왕에게 글의 내용을 알려 주겠다고 했습니다.
‘18왕이여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이 왕의 부친 느부갓네살에게 나라와 큰 권세와 영광과 위엄을 주셨고 19그에게 큰 권세를 주셨으므로 백성들과
나라들과 언어가 다른 모든 사람들이 그의 앞 에서 떨며 두려워하였으며 그는 임의로 죽이며 임의로 살리며 임의로 높이며 임의로
낮추었더니’ 에서 다니엘은 먼저 느부갓네살 왕이 하나님의 징계로 정신병에 걸려 폐위되었다가 하나님의 주 권과 위엄을 알게 된 후
다신 회복되었던 사실을 상기시키면서 느부갓네살 시대의 융성을 허락하 신 분이 벨사살 왕이 그토록 경멸하는 유대 민족의 하나님이심을
밝히고 있습니다. 느부갓네살 왕의 마음이 높아지며 뜻이 강퍅하며 교만을 행하므로 하나님께서 느부갓네살왕을 폐위시켰다고 했습니다.
다니엘이
이렇게 느부갓네살 왕의 행적에 대해 벨사살 왕에게 상기시키는 것은 그것이 분벽의 글에 나타난 하나님의 뜻과 필연적인 연관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느부갓네살이 교만하여 하나님의 징계를 받은 것처럼 그 보다 더 교만한 벨사살에 대한 심판도 필연적임을
교훈하기 위해서 입니다. 벨사살은 하늘의 주재이신 하나님을 거역하고 그 성전의 기명을 가지고 술을 마시고 보지도 듣지도 알지도
못하는 신상들을 찬양하면서 벨사살 왕의 모든 길을 작정하시는 하나님께는 영광을 돌리지 아니함으로 하나님께서 사람의 손가락을 보내
심판을 선언하시고 있다고 했습니다.
‘25기록된
글자는 이것이니 곧 메네 메네 데겔 우바르신이라. 26그 글을 해석하건대 메네는 하 나님이 이미 왕의 나라의 시대를 세어서
그것을 끝나게 하셨다 함이요. 27데겔은 왕을 저울에 달아 보니 부족함이 보였다 함이요 28베레스는 왕의 나라가 나뉘어서 메대와
바사 사람에게 준 바 되었다 함이니이다 하니’에서 ‘메네’라는 문자적인 의미는 ‘그가 세어서 끝나게 했다.’고 다니 엘이 풀이
했듯이 하나님께서 기간을 세어서 바벨론 왕국을 멸망하도록 하였다는 의미인데 메네 메네를 두번 반복함으로써 반드시 속히 될 것을
보여 줍니다. 데겔은 문자적으로 ‘너는 저울질을 받았다’ 또는 ‘너는 너무 가볍다’라는 뜻입니다. 베레스는 히브리음으로 페레스
(פְּרֵס)인데 이 단 어의 복수형은 ‘파르신(וּפָרָס)입니다.
이것을
한글 음역에서는 ‘바르신’으로 음역하였는데 그 앞에 ‘그리고’ 또는 ‘그러나’ 라는 뜻을 가 진 접속사 ‘우’가 결합되어
25절에서는 ‘우바르신’이라고 표기되었습니다. 그러므로 25절의 ‘우 바르신’과 28절의 ‘베레스’는 복수와 단수라는 차이를
가지고 있을 뿐 동일한 의미의 단어입니다. 그리고 이 단어는 복수와 단수 사이에 의미상 큰 차이를 가지고 있지 않으므로 양자는
동일한 단어 로 취급해도 무방합니다. 그리고 ‘바르신’은 또한 ‘바사인’이란 뜻도 가지고 있고 ‘나누다, 조각을 내다’란 뜻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바사가 바벨론을 멸망시킨 사실과 오묘하게도 연결되고 있습니다.
‘29이에
벨사살이 명하여 그들이 다니엘에게 자주색 옷을 입히게 하며 금 사슬을 그의 목에 걸어 주고 그를 위하여 조서를 내려 나라의 셋째
통치자로 삼으니라’에서 다니엘의 해석이 벨사살 왕 에게 아주 불리했지만 일천명의 귀족들 앞에서 한 약속이기에 자신의 제안대로
다니엘에게 상금 과 셋째 치리자로 삼았습니다. 그러나 벨사살은 그 날 밤에 죽임을 당합니다.
다섯째, 왕궁 벽에 쓰인 글자 예언의 성취(30, 31)
‘30그 날 밤에 갈대아 왕 벨사살이 죽임을 당하였고 31메대 사람 다리오가 나라를 얻었는데 그 때에 다리오는 육십 이세 였더라.’
여기서
우리는 신 바벨론제국의 멸망과 멸망의 과정을 살펴보면서 성경의 놀라운 예언을 알아보 겠습니다. 바벨론은 오랜 세월 동안 존속해
왔습니다. 최초 바벨론은 니므롯이 창시자 였으며, BC 18세기, BC16세기의 고대 바벨론은 함무라비왕 때 가장 왕성했습니다.
그 이후에 점점 약해져 앗 수르에 멸망을 당합니다. 바벨론은 멸망은 했지만 일부가 살아남아서BC 626년 나봇폴라살은 갈
대아인을 모아 신 바벨론을 건설합니다. 그 아들 느부갓네살 왕 시대에 와서 바벨론제국은 강대국 이 됩니다. 바벨론제국의 성은
시날평야의 유브라테스강을 중심으로 세워졌습니다. 바벨론성은 유 브라테스강이 한 가운데로 흘렀고 바벨론성에 도착한 유브라테스강은 세
갈래로 나누어져 흘렀습 니다. 한 줄기는 바벨론성 안으로 흐르고 두 줄기는 바벨론성 주위를 감싸고 돌아서 흐르게 하였습 니다.
이렇게 한 것은 누구도 성벽에 접근하지 못하게 한 것입니다.
성벽의 두께가 30m인데 이 30m는 10층 건물 높이 입니다. 성곽은 위로 올라갈수록 좁아집니다. 성벽의
높이는 약120m인데 성벽은 이중으로 되어 있고 성벽 둘레로는 유브라테스강이 흘렀습 니다. 성벽의 흙은 해자를 판 흙으로 벽돌을
구워 만들었고, 성벽의 벽돌은 콜타르를 사용했습니 다. 성벽 위에는 양쪽에 가옥들이 마주 보도록 만들어졌습니다. 양편 가옥들
가운데 4두마차가 지나갔습니다. 정말 대단한 바벨론 성의 규모입니다. 바벨론 도성은 성안의 집들이 3-4층 건물들 이 밀집되도록
이루어졌습니다. 이렇게 난공불락의 성이 무너진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 습니다. 그렇다면 난공불락의 바벨론성이 어떻게
해서 무너졌겠습니까?
바벨론
성이 어떻게 쉽게 무너졌는가 하면 페르시아의 고레스 왕이 바벨론 성을 공격하려고 왔는 데 성벽의 높이도 문제이지만 가장 큰
문제는 성주위로 돌아 흐르는 급한 물살이었습니다. 고레스 왕이 유브라데스 강물을 건너다가 자신의 마차를 끄는 말 중에 아주 아끼던
백마(神馬)가 물에 휩 쓸려 죽었습니다. 이에 격분한 고레스가 말하기를 '내가 이 강물로 하여금 '여자들이 무릎을 적시지 않고도
건널 수 있도록 하겠다’고 맹세 하였습니다. 그리고는 군사들을 시켜서 강 양쪽에 180갈래 로 나누어 유브라데스강의 물줄기를
360갈래로 나누었습니다. 이런 고레스의 대단한 고집과 집 념으로 강물의 수위가 낮아지면서 그 동안 보이지 않던 성안으로
들어가는 유브라데스의 강줄기가 보인 것 입니다.
그곳으로
군사가 들어가면서 바벨론 성이 힘 없이 함락되었습니다. 벨사살왕은 적이 성안으로 들 어오는 줄도 모르고 주색잡기에 정신이 없다
보니 힘 한번 쓰지 못하고 그 화려했던 바벨론 제국은 한 순간에 멸망을 당했습니다. 이 놀라운 역사가 성경에 예언되었습니다.
고레스가 바벨론 성을 무 너뜨릴 것을 성경은 이미 고레스가 태어나기 전에 고레스란 이름을 지어주고 고레스의 앞길을 평 탄케
해주겠다고 예언했습니다. 이사야 44장 26절~28절에,
‘내
종의 말을 응하게 하며 내 사자의 모략을 성취하게 하며 예루살렘에 대하여는 이르기를 거기 사람이 살리라 하며 유다 성읍들에
대하여는 이르기를 중건될 것이라. 내가 그 황폐한 곳들을 복 구시키리라 하며 깊음에 대하여는 이르기를 마르라 내가 네 강물들을
마르게 하리라 하며 (유브 라데스 강물이 마르리라), 고레스에 대하여는 이르기를 그는 나의 목자라 나의 모든 기쁨을 성취
하리라. 예루살렘에 대하여는 이르기를 중건되리라 하며 성전에 대하여는 이르기를 네 기초가 세움이 되리라.’라고 예언되었습니다.
이사야45장
1절~4절에, ‘나 여호와는 나의 기름 받은 고레스의 오른손을 잡고 열국으로 그 앞에 항복하게 하며 열왕의 허리를 풀며 성 문을
그 앞에 열어서 닫지 못하게 하리라. 내가 고레스에게 이르기를 내가 네 앞서 가서 험한 곳을 평탄케 하며 놋문을 쳐서 부수며
쇠빗장을 꺾고 네게 흑암 중의 보화와 은밀한 곳에 숨은 재물을 주어서 너로 너를 지명하여 부른 자가 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인
줄 알게 하리라. 내가 나의 종 야곱, 나의 택한 이스라엘을 위하여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 니 너는 나를 알지 못하였을지라도
나는 네게 칭호를 주었노라.’ 이렇게 신 바벨론제국의 멸망과 멸망의 과정이 페르시아 고레스왕이 태어나기도 전에 이렇게 할 일들을
예언한 성경은 확실한 예언입니다. 바벨론성을 어떻게 무너뜨릴 것을 이미 성경은 그 방법을 기록했습니다. 유브라데스 강 물줄기를
막아서 마르게 하고 다른 곳으로 돌릴 것을 고레스가 태어나기 전에 예언했습니다.
바벨론제국이
멸망함으로써 느부갓네살에게 보이셨던 신상의 꿈을 통한 예언의 일부와 벨사살 과 그 신하들에게 나타난 손가락으로 쓴 글의 예언이
성취되었습니다. 역사 속에서 바벨론 제국 은 완전히 멸망하고 이제 은으로 된 가슴과 팔, 곧 메대 바사 제국이 세계를 제패한
것입니다. 이제까지 바벨론을 정복하고 벨사살 왕을 죽인 왕이 바사의 고레스인 줄 알았는데 난데 없이 메 대사람 다리오가 나라를
얻었다고 합니까? 여기서 우리는 고레스와 다리오의 관계를 알아 보기 로 하겠습니다. 이 다리오는 역사학자들이 메대 나라의 다섯번째
왕인 카악사레스 2세로 봅니 다. 카악 사레스 2의 아버지인 아스티아게스 왕은 슬하에 두 남매 카악사레스와 딸 만데인을 두었는데
만데인을 바사국왕 캄비세스와 결혼시킵니다. 이 두 사람 사이에서 태어난 자가 고레스 2세입니다.
한편
부왕 캄비세스 시대는 바사국이 메대국의 속국이었습니다. 그러다가 고레스가 왕이 된 후 에 자신의 외 할아버지인 메대 왕
아스티아게스에게 반란을 일으켜 독립을 선언하고 그로수스, 앗시리아와 메대 나라의 상당부분까지 정복했습니다. 이때에 카악사레스
2세와 고레스가 연합 할 때는 메대와 바사가 동동하기 보다는 오히려 메대가 바사의 속국이 되어 있었다고 볼 수 있 었습니다.
그러나 고레스는 카악사레스 2세의 딸 과 결혼하여 양국 간에 결혼동맹을 맺고 자신 은 계속하여 정복 전쟁을 수행하는 동안 자신의 외
삼촌이자 장인인 카악사레스 2세인 다리오를 존중하여 메대-바사 과도 제국의 왕으로 추대 하였습니다. 그것이 다니엘 5:31의
내용입니다. 그 후 고레스는 2년 후 모든 정복 전쟁을 결론 짓고 정식 왕으로 등극하게 됩니다 그 때가 BC 538년이요 그 해에
유다를 고토로 돌아가도록 했습니다.
“아프간 기독교인들 위해 기도해 주세요”
“탈레반은 기독교인이라는 걸 알게 되는 그 즉시 죽일 겁니다.”
아프가니스탄 수도인 카불에서 지난 21일 국민일보에 보내온 현지 기독교 사역자의 메시지는 이슬람 무장조직 탈레반이 장악한 아프간의 긴박한 상황을 고스란히 담고 있었다.
A씨(35)는 국민일보와 서면 인터뷰에서 “탈레반이 장악하기 전에도 아프간에서 기독교인의 삶은 힘겨웠지만 적어도 죽이지는 않았다”며 “지금 기독교인들은 숨어 있고, 어떤 활동도 할 수 없다”고 전했다.
아프간 남부 간즈니주 출신인 A씨는 카불에서 대학을 나와 직장생활을 하는 평범한 남성이었다. 아프간에서 99%를 차지하는 이슬람교도이기도 했다.
A씨는 ‘하나님을 어떻게 만났냐’는 질문에 “이슬람이 아프간을 덮은 약 900년은 아프간 사람들이 어둠 속을 걸은 시간”이라며 “2001년 유엔군이 아프간에 들어오면서 하나님 나라의 문이 열리고 복음의 씨앗이 뿌려졌다.
무엇보다 예수님은 젊은 세대에게 다가왔다”고 설명했다.
당시 20대인 A씨도 하나님을 만난 젊은 세대 중 한 명이었다. 그는 “이슬람교도였던 나는 어둠 속에 사는 게 얼마나 힘든지 알고 있다”며 “2009년 어둠 속에서 주님을 찬양하게 됐고, 이듬해부터 아내와 함께 하나님 나라를 확장하기 위해 카불과 인근 지역에 가정교회를 세웠다”고 말했다.
그가 이끄는 10개의 가정교회는 각각 5~8명 정도가 모여 예배하고 제자훈련을 받는다. 예배당이 따로 없어 공원, 자동차 등 장소를 가리지 않고 만났다. 아프간 문화에 맞춰 아내는 여성, A씨는 남성 성도를 담당했다.
한국과는 남다른 인연을 맺었다. 인연의 과정은 강대흥 한국세계선교협의회(KWMA) 사무총장이 대신 얘기해 줬다. 강 총장은 “2017년으로 기억한다. A씨는 광명교회 세계기도자학교 아프간 대표로 참여했다”며 “당시 나는 태국 선교사로 A씨를 만났고 지금까지 연락해 왔다”고 말했다.
강 총장은 탈레반이 아프간 장악을 시도한다는 소식을 접하자마자 A씨와 아프간에서 빠져나올 방법을 고민했다. 그때 찾은 방법이 유학이다. 강 총장을 통해 국내 선교단체는 아시아 국가에 있는 한 국제학교를 연결해 줬고 A씨의 입학 절차를 밟기 시작했다. 그러나 탈레반이 카불을 점령한 뒤 A씨의 탈출 계획은 멈춰 섰다. A씨도 “할 수 있는 모든 수단을 동원해 아프간을 떠날 준비를 하고 있지만 쉽지 않은 여정이 될 듯하다”고 말했다.
좋지 않은 상황임에도 A씨는 아프간을 위한 계획과 비전을 놓지 않고 있다.
그는 “첫 번째 목표는 안전하게 탈출하는 거다. 탈출에 성공하면 외국학교에서 신학 공부를 계속하고 싶다”며 “그 다음은 외부에서 SNS 등 네트워크 기술을 활용해 아프간을 돕는 방법을 찾겠다”고 했다. 이어 “몇 년이 걸릴지 모르지만 아프간으로 돌아가서 아프간을 위해 봉사하고 싶다”는 말도 덧붙였다.
기도제목을 물었더니 당연하면서도 슬픈 답이 돌아왔다.
“우리가 다른 나라로 나갈 수 있는 방법을 찾을 수 있었으면 좋겠어요. 무엇보다 아프간 국민의 안전을 위해 기도해 주세요.”
미국 복음연합(TGC)은 21일(현지시간) 인터넷 홈페이지에 ‘탈레반에 대해 알아야 할 9가지’에 대해 글을 올렸다. TGC는 “우리는 잔인한 이슬람주의 정권인 탈레반에 대해 알아야 한다”고 밝혔다.
첫째, 탈레반이란 이름은 ‘학생’을 의미한다.
탈레반은 ‘학생’ 또는 ‘구도자’를 의미하는 파슈토어에서 나온 용어이다. 원래 탈레반은 파키스탄의 전통적인 이슬람 학교에서 교육을 받은 아프가니스탄 동부 및 남부 파슈툰 지역의 종교 학생 (탈레반) 운동이었다.
둘째, 탈레반 학생들은 학교에서 코란과 전쟁 훈련을 받았다.
원래 탈레반 학생들이 다녔던 학교는 그들의 라이벌을 제압하기 위해 무력을 사용하는 훈련을 받은 무장 단체로 조직됐다. 학생들은 공부에만 참여하는 그룹과 종교 전쟁에 참가할 준비를 하는 그룹 등 두 그룹으로 나뉜다. 18세 이상의 사람들은 당시 소련과 싸우고 전투에서 돌아올 때 학업으로 돌아간다.
셋째, 탈레반은 아프간 내전 동안 집권했다.
1979년 12월 당시 3만명의 소련군은 공산주의 아프가니스탄 정부를 지원하기 위해 아프가니스탄을 침공했다. 소련은 88년 철수하기 전까지 10년간 주둔했다. 소련 철수 이후 내전은 96년 정부가 탈레반에게 넘어갈 때까지 계속됐다. 공식적으로 아프가니스탄의 구원을 위한 연합 이슬람 전선(United Islamic Front)으로 알려진 아프간 북부 동맹은 탈레반에 반대하기 위해 96년 말 결성됐다. 북부 동맹은 미군이 이슬람 정권을 전복시킨 2001년 9월까지 탈레반 정부와 방어 전쟁을 치렀다.
넷째, 미국 정부는 탈레반과 평화 협정을 맺었다.
2020년 2월, 미국 트럼프 행정부는 미군을 철수하고 최대 5000명의 탈레반 전투 및 정치범을 석방하도록 요구하는 협정에 탈레반과 서명했다. 그 대가로 탈레반은 미국과 동맹국의 안보를 위협하는 어떤 집단이나 개인이 아프가니스탄 땅을 사용하는 것을 금지하는 데 동의했다. 바이든 대통령은 이 합의를 존중하기로 했으며, “내가 직접 협상한 것은 아닐지 모르지만 미국 정부가 합의한 것이며 이는 의미가 있다”고 말했다.
다섯째, 탈레반은 인신매매와 성노예에 가담했다.
탈레반은 집권하는 동안 강제 결혼과 성노예를 이유로 여성을 자주 납치했다. 아프가니스탄 정부에 따르면 탈레반은 정권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정기적으로 여성을 성노예로 매매했다. 좀 더 최근에 탈레반은 부도덕한 범죄 혐의로 기소된 일부 아동과 성인 성매매 피해자를 구금하고, 노동을 강요했다고 미 국무부가 밝혔다. 탈레반은 또 남성 성매매 피해자를 처벌하고 피해자 소년을 성인 인신매매범과 동일한 책임이 있는 범죄자로 기소하기도 했다. 당국은 소년 성매매 피해자들을 범죄 혐의로 소년원에 송환하고 몇 년간 가뒀다.
여섯째, 탈레반은 특정 이유를 위한 목적으로 소년병을 징집했다.
휴먼라이츠워치(HRW)에 따르면 탈레반은 나이별로 어린이를 모집해 훈련한다. HRW는 “남자아이들은 6살부터 세뇌를 시작하고 최대 7년 동안 탈레반 교사 밑에서 종교 과목을 계속 공부한다”고 말했다. 탈레반이 모집한 소년들의 친척에 따르면 탈레반 교육을 받은 아이들은 13살이 될 때까지 총기 사용, 급조폭발물(IED) 생산 및 배치를 포함한 군사 기술을 배웠다. 그런 다음 탈레반 교사는 훈련된 소년병을 해당 지역의 특정 탈레반 그룹에 소개한다.
일곱째, 탈레반은 인권을 짓밟은 역사가 있다.
탈레반 치하의 아프가니스탄은 세계 최악의 인권 기록을 보유하고 있다고 미 국무부가 밝혔다. 90년대에 탈레반이 집권했을 때 사회적 통제는 ‘악덕과 덕’의 경찰로 알려진 도덕 공무원에 의해 통제되고 운영됐다. 이들 관리는 지역 사회를 순찰하면서 복장과 품행, 수염 길이, 남성의 금요 기도 참석 여부, 스마트폰이나 기타 기기 사용과 관련해 탈레반이 규정한 사회 규범의 준수 여부를 점검했다.
여덟째, 탈레반은 소녀와 여성을 억압한 역사가 있다.
90년대에 탈레반이 집권하자 여자대학을 폐쇄하고 거의 모든 여성이 직장을 그만두도록 했다. 탈레반은 여성의 의료 접근을 제한했고 복장 규정을 잔인하게 시행했으며 여성이 도시를 이동할 수 있는 능력을 제한했다. 아프간의 오랜 내전 동안 남편과 다른 남성 친척을 잃은 5만명에 달하는 여성들이 수입원이 없었다고 미 국무부가 전했다. 많은 사람이 소유물을 팔고 거리에서 구걸하거나 더 심한 경우 가족을 먹여 살리기 위해 구걸해야 했다. 여성들은 또 베일과 함께 부르카를 착용해야 했다. 보기가 허용된 부르카의 작은 메시 패널은 시야가 제한돼, 안전하게 길을 건너는 것조차 어려웠다는 증언이 많다.
아홉째, 탈레반은 아프가니스탄에서 기독교인을 박해한 역사가 있다.
아프가니스탄에 남아 있는 소수 기독교인은 탈레반의 귀환을 두려워하고 있다. 이슬람에서 기독교로 개종한 한 크리스천은 탈레반이 어떻게 신자들을 장악하며, 향후 어떻게 탈레반이 운영될 것인지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그들은 알려진 기독교인들을 죽이고 두려움을 퍼뜨리려고 할 것입니다. 이미 15살의 독신 소녀가 있으면 탈레반 군인과 결혼해야 한다는 포스터가 나오고 있습니다. 기독교인들은 딸을 그들에게서 빼앗겨 탈레반과 강제로 결혼할 것을 두려워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세뇌를 위해 종교학교인 마드라사로 보내질 것입니다. 부모는 죽임을 당할 수도 있고, 죽임을 당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한 남성은 자신의 집이 현재 탈레반의 소유라는 편지를 받았습니다. 그는 공예품을 만드는 단순한 사람이고 그의 모든 재산은 집에 있습니다. 탈레반은 기독교인의 소유와 재산을 탈취하고 그들의 모든 여성을 빼앗을 것입니다.”
8월 28일(토)
느헤미야 1장 / 하늘의 하나님(4절)
16세기 교황 율리우스 2세가 당시 미술의 천재 미켈란제로에게 "시스틴 성당"에 "천지창조 벽화를 그려달라"고 부탁했다고 합니다. 미켈란제로는 누워서 천정을 바라보며 4년 동안 열정적으로 그림을 그렸습니다. 어느 날 미켈란제로와 평소에 가깝게 지내던 추기경이 미켈란제로에게 "내가 볼 때는 그림이 완성되었는데 무엇을 그렇게 그리는가?" 그러자 미켈란제로는 추기경에게 "내가 볼 때에는 끝났을지라도 하나님이 보실 때에는 아직도 끝나지 않았습니다"
우리가 아무리 열심히 성경을 읽고 기도하며 성도들의 삶을 살아갈지라도 하늘의 하나님께서 보실 때에는 아직도 부족하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믿음과 생각이 곧 하늘의 하나님이란 의미라고 하겠습니다.
♦ 오늘 읽어야 할 말씀 : 느헤미야 1:1∼11 ♦ 묵상을 위한 주제 : 하늘의 하나님(4절) ♦ 성구 : 내가 이 말을 듣고 앉아서 울고 수일(數日) 동안 슬퍼하며 하늘의 하나님 앞에 금식(禁食)하며 기도(祈禱)하여.
스룹바벨 성전은 재건되었고, 에스라의 영적 개혁도 이루어지고 있었지만 여전히 이스라엘 백성들의 삶에는 평강이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이스라엘의 성벽이 훼파되었기 때문입니다. 성전은 이미 준공되었으니 성벽 정도는 별 문제가 안 되리라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좋은 집도 벽이 무너지면 언제든지 침입자가 들어올 수 있기에 안정감을 찾기는 어렵습니다. 마찬가지 이유로 이스라엘 백성들은 무너지고 불타버린 성벽으로 인해 큰 고통을 당하고 있었습니다. 이때 평신도 지도자 느헤미야는 수산 궁에 왕의 술을 맡은 관원으로 “하늘의 하나님(the God of heaven)”에게 기도했습니다.
‘하늘의 하나님’은 “전지전능(全知全能)” “무소부재(無所不在)”하신 하나님을 말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예루살렘의 무너진 성벽을 재건하기 위해 느헤미야를 바사 왕의 궁전에 심어 놓으셨습니다. 그는 왕의 술 관원이었습니다. 당시 술 관원은 왕의 모든 음식을 주관하고 왕의 신변과 관련된 많은 일들을 맡았기에 왕의 총애를 받는 사람만이 설 수 있는 자리였습니다.
마치 야곱의 가족들을 극심한 가뭄과 기근으로부터 구원하시려고 요셉을 애급으로 보내셨던 것과 같다고 하겠습니다. 우리는 이와 같은 성경의 교훈에서 오늘 내가 있는 그 삶의 자리가 나의 선택과 결정이 아니라 하나님의 구원을 위하여 나를 심어놓으신 자리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내가 하는 그 일을 영혼을 구원하는 마음으로 바르게 정직하게 감당해야 합니다.
느헤미야는 유다에서 온 사람들로부터 예루살렘 성벽이 무너졌다는 소식을 듣고 어떻게 이 일을 해결할 수 있을지 기도하고 있었습니다(4절).
느헤미야는 성벽이 무너졌다는 이야기를 듣고 애통하는 마음을 갖고 기도하게 됩니다(6∼10절).
느헤미야는 왕궁에서 지내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무너진 성벽으로 고통당하는 백성들의 아픔을 외면할 수 없었고 예루살렘의 현실에 대해서 애통하는 마음을 갖고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일꾼을 부르실 때 그에게 애통하는 마음을 갖게 합니다. 애통하는 마음이 곧 사명이 됩니다.
오늘 나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내 마음을 아프게 하는 그것이 곧 나의 사명이 되어야 합니다.
자유대한민국이란 나의 조국이 주사파들의 손에 의해서 자유가 흔들리고 있습니다. 흔들리는 자유를 바로 세우려면 힘을 모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이미 오랫동안 주사파들은 그들의 힘을 키웠기 때문입니다.
1945년 8월 15일 해방 후에 북한 김일성을 세웠고(주체사상) 남한에서는 이승만을 세웠습니다(자유민주주의). 그 결과 북한은 가장 가난한 빈곤국가 되었습니다. 반면에 남한은 경제 강국으로 일어났습니다. 이제는 어느 길을 선택하고 누구를 세워야 하는가를 결정해야 할 매우 중요한 때라고 하겠습니다.
죄에서 자유를 얻게 하신 하나님의 사랑을 힘입은 교회와 성도들에게 무엇을 선택하고 결정해야 하는가를 분명하게 가르치고 깨우쳐야 합니다.
선택의 기준은 오직 하나님이어야 합니다.
성경의 가르침에 따른 오늘의 선택과 결정이 자유대한민국이 주사파들의 지배를 받는 나라가 될 것인가? 아니면 자유민주주의를 토대로 계속 발전하고 성장하여 복음을 전 세계에 전할 수 있는 통일한국으로 자리를 잡을 것인가?
느헤미야가 왕 앞에 나가기 전에 먼저 하늘의 하나님 앞에 기도했던 것처럼 우리도 먼저 하늘의 하나님께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도움을 기도한 후에 올바른 선택과 결정으로 복음으로 열매를 맺는 선교국가로 세워질 수 있도록 힘을 모아야 하겠습니다.
내가 있는 자리는 사명을 실천할 수 있는 자리가 되어야 합니다.
내가 갖는 아픔과 고통은 사명을 자극하는 아픔과 고통입니다.
나의 사명을 잘 감당하기 위하여 겸손히 하늘의 하나님의 도우심을 기도해야 합니다.
사랑하는 교우들이여!
나를 심으신 그 자리에서 나의 사명을 찾고 그 사명을 위하여 기도하며 열매를 맺는 일에 성공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내가 이 말을 듣고 앉아서 울고 수일 동안 슬퍼하며 하늘의 하나님 앞에 금식하며 기도하여 가로되 하늘의 하나님 여호와 크고 두려우신 하나님이여 주를 사랑하고 주의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 언약을 지키시며 긍휼을 베푸시는 주여 간구하나이다. 아멘
1:1. 하가랴의 아들 느헤미야의 말이라 아닥사스다왕 제 이십년 기슬르월에 내가 수산궁에 있더니.
BC 445년 11월 중순 - 12월 중순
수산 궁에 있더니 : 봄, 가을(수산 궁) 겨울(바벨론 궁) 여름(메대의 악메다 궁)
느헤미야 1:6-11
이제 종이 주의 종 이스라엘 자손을 위하여 주야로 기도하오며 이스라엘 자손의 주 앞에 범죄함을 자복하오니 주는 귀를 기울이시며 눈을 여시사 종의 기도를 들으시옵소서 나와 나의 아비 집이 범죄하여.
주를 향하여 심히 악을 행하여 주의 종 모세에게 주께서 명하신 계명과 율례와 규례를 지키지 아니하였나이다.
옛적에 주께서 주의 종 모세에게 명하여 가라사대 만일 너희가 범죄하면 내가 너희를 열국 중에 흩을 것이요.
만일 내게로 돌아와서 내 계명을 지켜 행하면 너희 쫓긴 자가 하늘 끝에 있을찌라도 내가 거기서부터 모아 내 이름을 두려고 택한 곳에 돌아오게 하리라 하신 말씀을 이제 청컨대 기억하옵소서.
이들은 주께서 일찍 권능과 강한 손으로 구속하신 주의 종이요 주의 백성이니이다.
주여 구하오니 귀를 기울이사 종의 기도와 주의 이름을 경외하기를 기뻐하는 종들의 기도를 들으시고 오늘날 종으로 형통하여 이 사람 앞에서 은혜를 입게 하옵소서 하였나니 그 때에 내가 왕의 술 관원이 되었었느니라.
시편 144:15 이러한 백성은 복이 있나니 여호와를 자기 하나님으로 삼는 백성은 복이 있도다. - 참조 / 시편 33:12
오늘의 기도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민족으로 붙잡아 주시옵소서!
하늘의 하나님(느헤미야 1:4-5)
내가 이 말을 듣고 앉아서 울고 수일 동안 슬퍼하며 하늘의 하나님 앞에 금식하며 기도하여. 가로되 하늘의 하나님 여호와 크고 두려우신 하나님이여 주를 사랑하고 주의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 언약을 지키시며 긍휼을 베푸시는 주여 간구하나이다.
내가 너에게 하늘의 하나님, 땅의 하나님이신 여호와를 가리켜 맹세하게 하노니너는 내가 거주하는 이 지방 가나안 족속의 딸 중에서 내 아들을 위하여 아내를 택하지 말고(창세기 24:3)
하늘에 계신 하나님
유대인의 하늘개념
오늘은 하나님을 수식하고 있는 “하늘에 계신”이라는 구절을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하늘에 계시다고 하는 뜻이 무엇일까요?
먼저 유대인의 하늘 개념을 살펴보아야 합니다. 우리가 가진 성경에는 하늘이라는 단수로 나오지만 희랍어 성경에서는 ‘호 엔 호
오우라노스’(ὁ ἐν τοῖς οὐρανοῖς· )라고 복수로 되어 있습니다.
직역을 하면 ‘하늘들 안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라는
의미입니다. 유대인들은 하늘을 삼중의 하늘로 생각했습니다. 새들이 날아다니는 파란 하늘이 있고, 그 위에는 공중 권세 잡은
자들이 장악하고 있는 두 번째 하늘이 있고 어떤 악도 범접할 수 없는 거룩한 하나님이 계신 보좌가 있는 세 번째 하늘이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마태가 하늘들 안에 계신 아버지라고 한 것은 결코 가벼운 표현이 아닙니다.
비록 하나님은 세 번째 하늘에 계시지만,
새들이 날아다니는 첫 번째 하늘과 공중권세 잡은 자들이 장악하고 있는 악의 하늘도 주님의 임재와 통치로부터 벗어날 수 없는
하늘이라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기도를 들으시는 하나님을 하늘에 계신 분으로 묘사하고 있는 것은 하나님이
창조하신 모든 만물들을 초월하여 계신 하나님이심을 기도할때마다 명심하라고 가르치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에게 있어 하늘은 하나님과 동의어였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영광이라는 말의 유대교적 표현은 하늘 영광입니다.
이것은
단지 이스라엘 사람들에게만 그런 것이 아니라 모든 나라들이 자신의 나라의 기원이 하늘과 관계 있다고 믿었습니다. 이처럼 ‘하늘에
계신’ 이란 말은 하나님은 하늘에 계시고 그 앞에 기도하는 우리는 땅에 있다고 하는 지극히 평범한 사실을 우리에게 일깨워
줍니다. 하나님과 창조세계는 창조주와 피조물의 관계이고 인간도 그 범주에서 예외가 될 수 없습니다.
하늘에 계시다는 의미
그렇다면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계와 인간, 창조주이신 하나님과의 관계는 어떻게 생각해야 할까요? 여기서 하늘에 계시다는
의미를 이 질문에 비추어 생각하게 됩니다. 이 세상은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신 수많은 흔적들로 가득 차 있습니다. 비록 죄인이지만
편견과 아집에 강력하게 사로잡히지 않는다면 이성을 통해서도 하나님이 계신 것과 선과 악이 분명히 존재한다는 사실은 또렷이 핑계할
수 없을 정도로 알아낼 수 있습니다. 더욱이 그리스도인의 가장 중요한 의무는 성경뿐만 아니라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계 속에서
하나님의 신성의 흔적을 찾아내고 그것들을 기뻐하며 그것들이 가지고 있는 진리의 성격들을 성경 계시의 빛으로 해석해서 올바른
지식으로 드러내어 누구든지 그 지식을 통해 창조주 하나님을 생각하게 하는 것입니다.
1. 구별된 존재의 하나님
이렇게 하나님은 창조하신 세계에 당신의 흔적을 남겼습니다. 그러나 자연세계에 묻어있는 하나님의 흔적을 모두 합친다고
할지라도 인간의 영혼과 정신에 남아 있는 것에 비할 수 없습니다. 이것을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부르고 하나님처럼 생각하고 하나님처럼
뜻을 정할 수 있는 지성과 의지의 기능이라고 불러도 좋을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은 당신이 창조하신 세계와 당신을 닮은 존재로
만든 인간 사이에 떼어놓을 수 없는 흔적을 가지고 연속성을 이루고 계신 분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인간과 세계 속에 뚜렷한 흔적을
남기셨음에도 하나님과 피조물 사이의 차이에는 범접할 수 없는 무한한 질적인 격차가 있습니다. 이러한 탁월한 질적인 격차를 성경은
거룩하심이라고 불렀습니다. 빽빽한 구름과 천둥소리와 같은 하나님의 음성으로 하나님이 임재 하셔서 들려주신 율법속에는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니라”고 하는 하나님의 거룩하심에 관한 선언이 묻어 있습니다. 선지자들이 핍박을 받아 죽어가면서까지
백성들을 탄핵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외쳤던 이유는 백성들이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서 선택 받은 백성답게 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시인들이 위기를 만나고 핍박을 당할 때 매일 묵상하며 위로를 받았던 하나님의 속성이 바로 거룩하심이었습니다.
2. 거룩하신 하나님
하나님께서는 왜 하나님의 아들이 우리의 죄를 대신 담당해서 죽임을 당하지 않고는 우리가 하나님 앞에 나갈 수 없도록
만드셨습니까? 바로 하나님의 거룩하심 때문입니다. 오순절 성령이 강림하였을 때 사도들의 눈이 열렸고 예수 십자가의 의미를 다시
확인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사도들이 성도들에게 신명을 바쳐 가르치려 했던 교훈은 “하나님이 거룩하신 하나님이시니 너희는 거룩한
삶을 살라”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요한계시록에서 사도 요한이 복음 증거를 위하여 갇힌바 된 몸임에도 하늘의 영광을 바라보며 소망을
가졌던 이유가 무엇 때문입니까? 그 나라가 거룩한 나라였기 때문입니다.
성경 곳곳에 있는 거룩하신 하나님에 대한 묘사를 종합해 볼 때, 하나님의 거룩하심은 무엇일까요? 원래 이 거룩하심은
피조물들에게는 티끌만큼도 없는 것이고 오직 하나님께만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제한적으로 당신과 관계를 맺는 사람과 제도,
물건과 도구들에게까지 이 거룩하심을 분여해 주십니다. 우리는 타락한 이후 거룩함을 찾아 볼 수 없을 정도로 죄의 영향에서 피할 수
없는 전적으로 타락한 존재가 되었습니다. 그런 우리를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피로 씻어 그리스도 예수의 몸에 접붙여 주실 때 우리는
성도라 일컬음을 받게 됩니다. 타락한 죄인들의 모임이 거룩할 리가 없지만, 살아계신 하나님과 관계를 맺고 그 거룩하신 영향아래
있기 때문에 교회를 거룩한 성도의 무리라고 불러도 좋은 것입니다.
거룩하심은 두 가지로 이루어집니다.
첫째는 존재적 초월성입니다. 하나님은 모든 피조물들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질적으로
완전히 다른 위대하고 무한하신 하나님이라는 사상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앙은 어느 한 순간에 지성에 벼락을 맞는 것입니다.
이제까지는 전혀 그럴 리가 없다고 생각했던 사실, 하나님은 살아계시며 온 땅과 만물위에 뛰어나시며 나의 지성을 넘어서는 무한히
광대하시고 엄위로우신 분이라는 사실을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런 지성의 벼락을 맞고 자신이 비로소 객관적으로 보이는 것이 신앙의
시작입니다. 주관적으로 봤을 때는 자신이 온 우주의 중심이고 자신이 무한적인 존재라고 생각했지만 위대하신 하나님을 만나면서 자신이
정말 티끌 같은 인간임을 깨닫는 것입니다. 그리고 모든 우주의 중심이 하나님이시고 그 존재의 크기와 위대함은 곧 가치의 크기와
위대함과 하나라는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래서 자신의 존재가 ‘후’하고 부시는 하나님의 바람 앞에서 아무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을 때 말할 수 없는 두려움 속에서 떨며 그 분 앞에 엎드리는 것이 바로 신앙의 시작입니다.
두 번째 요소는 하나님의 도덕적 완전성입니다.
하나님은 부족한 것이 없으시고 보이지 않는 분이시지만, 당신이 창조하신
세계와 관계를 맺으시고 돌보시고 다스리시고 이끄시는 모든 과정을 통해서 그 분이 어떤 성품을 갖고 계신 분이신지를 인간에게
보여주십니다. 특별히 하나님의 이런 속성은 하나님이 창조하신 자연 세계에도 드러나지만 영혼을 가진 인간들과 관계를 맺으시는 가운데
당신의 속성을 충만하게 드러내십니다.
한 가지 예로 하나님을 닮은 존재이기에 인간은 사랑도 있고 사랑할 능력이 있습니다. 그래서 신앙을 갖지 않아도 사랑할 줄도
알고 사랑 받는 것이 좋은 줄을 압니다. 그러나 어느 날 율법을 통해 자신이 끔찍한 죄인인지를 깨닫습니다. 그리고 차마 인간이 죄
가운데서 죽는 것을 보실 수 없어서 외아들을 사람의 몸 입혀 이 세상에 보내신 하나님의 사랑을 만나게 됩니다. 그 완전한
하나님의 아가페의 사랑을 깨닫게 될 때, 자신의 마음속에 있던 사랑이 아무것도 아니며 바로 그 무한한 하나님의 사랑을 아주
조잡하게 흉내 낸 것임을 발견하게 됩니다. 이때 그는 하나님은 도덕적으로 완전하신 분이시고 자신은 같은 사랑을 갖고 있으면서도
죄악된 인간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이때 인간이 보여줄 수 있는 반응이 참회의 눈물입니다. 완전하고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서
불완전하고 더러운 얼룩으로 물든 자신의 도덕성을 보면서 하나님의 진노 아래에 있음을 깨닫습니다. 이때 인간은 자기를 의지하며
살아왔던 모든 생각과 기대들을 포기하게 됩니다. 오직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 이외에는 아무 소망이 없다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3. 통치하시는 하나님
그러한 자각을 하나님을 높이면서 표현하는 정수가 예배입니다. 예배를 드리면서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 것은 그가
하나님을 가소롭게 생각하는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예배를 드리면서 마음에 우러나오는 사랑과 경건으로 경배를 드리지 않는 것은 그
사람이 하나님 앞에 살아가는 삶이 건성의 삶이라는 것을 입증하는 것입니다. 예배에 목숨을 건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죄가 들어온
다음부터 이 세상은 문제투성이가 되었습니다. 여러분들이 지금 고민하는 문제가 끝나도 종류만 다르지 또 다른 문제들이 등장합니다.
문제들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죽는 날까지 계속됩니다. 문제는 이 땅에서 일어나도 해결은 하늘로부터 옵니다. 문제들에 에워 쌓여
고통을 받을수록 눈을 들어 위에 것을 바라보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바로 이 땅은 하늘에 계신 거룩하신 하나님이 사랑하시고
다스리시고 통치하시고 심판하시는 세상입니다.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하나님을 기도 속에서 우러른다고 하는 것은 오히려 이 땅을
다스리시는 전능하고 거룩하신 하나님의 주권을 충만하게 인식한다는 의미입니다. 그 주권을 앙망하게 될 때에 우리는 비로소 어린아이와
같은 마음으로 하나님 앞에 마음을 쏟아 하나님을 의지하며 매달릴 수 있게 됩니다.
결 론
여러분들이 지니고 있는 인생의 많은 문제들은 이 땅에서 생겨났지만 결국 그것이 문제인 이유는 여러분들에게 하늘의 자원이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험악한 세상을 이길 수 있는 힘을 하늘에 계신 하나님께로부터 공급받도록 그 분을 앙망하며 그
분을 사랑하며 그 분을 위하여 사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느헤미야서는 저자의 이름을 구체적으로 지칭하지는 않지만, 유대교와 기독교의 전통은 에스라를 저자로 인정합니다. 이것은 에스라서와 느헤미야서가 원래 하나라는 사실에 근거합니다.
저작 연대 :
느헤미야서는 주전 445년에서 420년 사이에 기록된 것으로 추정됩니다.
기록 목적 :
성경의 역사서 중 하나인 느헤미야서는 바벨론 포로 생활에서 돌아온 이스라엘의 회복 및 예루살렘 성전 재건에 관한 이야기를 계속합니다.
핵심 구절 :
느헤미야 1:3, “그들이 내게 이르되 사로잡힘을 면하고 남아 있는 자들이 그 지방 거기에서 큰 환난을 당하고 능욕을 받으며 예루살렘 성은 허물어지고 성문들은 불탔다 하는지라”
느헤미야 1:11, “주여 구하오니 귀를 기울이사 종의 기도와 주의 이름을 경외하기를 기뻐하는 종들의 기도를 들으시고 오늘 종이 형통하여 이 사람 앞에서 은혜를 입게 하옵소서 하였나니 그 때에 내가 왕의 술 관원이 되었느니라”
느헤미야 6:15-16, “성벽 역사가 오십이 일 만인 엘룰월 이십오일에 끝나매 16 우리의 모든 대적과 주위에 있는 이방
족속들이 이를 듣고 다 두려워하여 크게 낙담하였으니 그들이 우리 하나님께서 이 역사를 이루신 것을 앎이니라”
요약 :
느헤미야는 바사에 거하는 히브리 사람이었는데 어느날 예루살렘 성전이 재건축되고 있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습니다. 그는 예루살렘 성을 보호할 성벽이 없다는 것을 알고는 염려하게 되었습니다. 느헤미야는 하나님이 그 성을 구하기
위해 자신을 사용하시기를 부탁하였습니다. 하나님은 그의 기도에 응답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바사왕 아닥사스다의 마음을 부드럽게
하셔서 느헤미야에게 복을 빌도록 하셨을 뿐만 아니라 그 사업에 필요한 물품을 제공하도록 하셨습니다. 왕은 느헤미야가 예루살렘으로
돌아가서 총독이 되는 것을 허락하였습니다.
반대와 고소에도 불구하고 성벽이 세워졌고 적들은 잠잠해졌습니다. 느헤미야로부터 용기를 얻은 사람들은 많은 반대에도 불구하고 성벽이
완성될 수 있도록 풍성한 십일조와 보급품 및 인력을 바침으로써 성벽 재건은 52일 동안에 마쳤습니다. 그러나 느헤미야가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에 예루살렘은 다시 배도에 빠졌기 때문에그들의 단합된 노력은 매우 짧았습니다. 12년 후에 다시 돌아온 느헤미야는
성벽은 강하지만 사람들이 약해진 것을 발견했습니다. 그는 사람들에게 솔직하게 말한 후에 도덕을 가르치는 일에 착수했습니다.
“내가 그들을 책망하고 저주하며 그들 중 몇 사람을 때리고 그들의 머리털을 뽑고”(느 13:25). 그는 기도를 통해 참된 예배를
다시 회복시켰고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준수하게 함으로써 백성들이 부흥할 수 있도록 격려하였습니다.
예표 :
느헤미야는 기도의 사람이었으며 그의 백성을 위해 열정적으로 기도했습니다(느 1). 하나님의
백성을 위한 열렬한 중보기도는 요한복음 17장에 나오는 대제사장의 기도에서 그분의 백성들을 위해 간절하게 기도하셨던 중보자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합니다. 느헤미야와 예수님은 둘 다 하나님의 백성을 향해 불타는 사랑을 가지고 있었으며, 그들은 하나님 보좌 앞에서
그들을 위해 기도로 중보하였습니다.
적용 :
느헤미야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성경 본문을 사랑하고 귀중하게 여기도록 인도했습니다. 느헤미야는
하나님을 사랑하며 하나님께 존귀와 영광을 돌리기를 원하였기 때문에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을 향하여 그토록 오랫동안 바라던 믿음과
순종으로 그들을 이끌었습니다.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인들은 성경의 진리를 사랑하고 귀하게 여겨야 하며 그 진리들을 기억하고,
밤낮으로 묵상하며, 모든 영적 필요를 얻기 위해 그 진리들을 의지해야 합니다. 디모데후서 3장 16절은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라고 말합니다. 만일 우리가 이스라엘 민족의 영적인 부흥을
보기를 바란다면(느 8:1-8), 먼저 하나님의 말씀과 함께 시작해야 합니다.
우리 각자는 영적 또는 육체적인 상처를 가진 사람들을 향해 진심어린 긍휼을 가져야 합니다. 연민을 느끼면서도 도움을 주지 않는
것은 성경적인 지지를 전혀 받을 수 없습니다. 때때로 우리는 다른 사람들을 제대로 섬기기 위해 내 자신의 편안함을 포기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는 올바른 마음으로 우리의 시간과 돈을 바치기 위해서는 철저하게 믿을 수 있는 명분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이 우리를 통해 일하시도록 허락하면 불신자들까지도 그것이 하나님의 일이라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느헤미야 전체 요약
1. 명칭
느헤미야서는 70인역에서 ‘에스라 제2서’로 불렀는데 그 이유는 에스라서와 느헤미야서를 느헤미야 한 사람의 저작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그만큼 에스라서와 느헤미야서는 뗄 수 없는 관계이다. 느헤미야란 이름은 1장 1절의 주인공 이름에서 유래했다.
느헤미야란 말의 ‘하나님의 위로’란 뜻이다. 내용은 크게 두 가지로 전반부(1∼7장)에는 예루살렘의 성벽을 재건하는 내용이고 후반부(8∼12장)는 에스라와 느헤미야의 종교개혁으로 되어 있다.
2. 저자
혹자는 에스라의 저작으로 보기도 하나, 본서에 일인칭 화법이 사용되었고 체험적 내용이 기록되었다는 점에서 느헤미야가 더 유력하다.
3. 기록연대
B.C. 420년경. 느헤미야 총독 재직 시기를 B.C. 444-425년경으로 볼 수 있으나 본서는 은퇴 이후의 기록인 듯하다.
4. 배경
바사의 전성기였던 아닥사스다 왕 통치기(B.C.464~424년)를 배경으로 하여 당시 이방인으로부터 수모를 받고 있던 팔레스타인에 거주하던 유다인의 부흥 과정이 수록되어 있다.
5. 기록목적
(1) 3차 귀환의 과정과 성벽중건의 역사를 보여 주기 위하여.
(2) 이스라엘의 예루살렘 정착과 종교적 정황을 보여주기 위하여.
(3) 언약에 신실하신 하나님의 사랑과 이에 대한 인간 복종의 당위성을 강조하기 위하여.
6. 특징
(1) 회복의 책 : 포로로부터의 회복, 무너짐으로부터의 성벽재건, 잃었던 신앙의 회복, 언약의 갱신 등이 기록되어 있다.
(2) 분리의 책 : 이교도, 잡혼으로부터의 분리 등 이스라엘 백성의 성결에 큰 비중을 둔다.
7. 요절
"성 역사가 오십이 일 만에 엘룰월 이십오 일에 끝나매 우리 모든 대적과 사면 이방 사람들이 이를 듣고 다 두려워하여 스스로 낙담하였으니 이는 이 역사를 우리 하나님이 이루신 것을 앎이니라.“
(느6:15-16)
8. 내용과 주요사상
본서의 주 무대는 귀 한민들의 일상생활과 종교의 중심지였던 예루살렘을 외적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건축한 성벽의 모형도이다.
① 에스라 : 에스라는 제사장이요 율법 학자였다(스7:11). 그는 아닥사스닥 왕 때 바벨론으로 부터 많은 유대인을 이끌고 예루살렘에 돌아왔다. 그는 먼저 성전에서 제사를 드리고 이방 여자와 결혼한 제사장과 백성들에게 이혼할 것을 명령하고 율법 준수를 강조하였다. 바벨론 포로가 되어 황야에서 눈물지었던 유태인은 과거의 모든 고통을 잊고 마음은 새로운 성도 재건에 정열을 불태웠다.
그는 또 조직적으로 종교 교육을 실행할 것을 계획하는 등 성전 건축과 종교심의 고취 혈통의 순화와 후세 교육의 강화 등 민족 재건에 주력 하였다.
② 느헤미야 : 느헤미야는 아닥사스닥 왕의 명령을 받고 예루살렘의 성곽을 제건 할 권한과 유다를 다스리는 권세를 가지고 예루살렘에 돌아왔다. 에스라가 돌아온 후 10년 후 이었다.
이 때에 주변 여러 이방 민족의 방해가 있었지만 강인한 성격의 소유자인 느헤미야는 백성을 무장시켜 일면 재건, 일면 국방의 중대사를 성공적으로 지도하였다.
그는 종교적, 사회적 부패와 나약을 극복하고 민족중흥과 개혁을 이루는데 큰 공을 세웠다.
9. 내용분해
1) 총독 느헤미야 (느1:1-7:73)
① 느헤미야가 권세를 갖고 고국에 돌아옴 (느1:1-2:20)
② 예루살렘 성곽 건축자들의 명단 (느3:1-32)
③ 무장을 하고 일함 (느4:1-23)
④ 대금업자들을 꾸짖음 (느5:1-19)
⑤ 예루살렘 성곽을 완성함 (느6:1-19)
⑥ 돌아온 자들의 명단 (느7:1-73)
2) 에스라와 느헤미야 (느8:1-13:31)
① 에스라가 율법 책을 백성에게 읽어줌 (느8:1-18)
② 백성이 회개하고 하나님을 송축함 (느9:1-38 )
③ 백성이 율법 준수를 맹서함 (느10:1-39)
④ 예루살렘 주민의 명단 (느11:1-36)
⑤ 각 족속의 명단과 축하 행사 (느12:1-47)
⑥ 느헤미야가 성전을 정화함 (느13:1-31)
10. 내용분해(소분류)
1) 느1:1 느헤미야의 첫 번째 귀국과 기도
① 느1:1 느헤미야의 첫 번째 귀국 ② 느1:4 예루살렘을 위한 기도
2) 느2:1 예루살렘에 돌아온 느헤미야
① 느2:1 느헤미야의 요청이 허락됨 ② 느2:11 예루살렘 성을 건축하기 시작함
3) 느3:1 성벽 건축자들
① 느3:1 북쪽과 서쪽의 성벽 건축 ② 느3:14 남쪽과 동쪽 성벽 건축
4) 느4:1 성전 재건의 방해 자들
①느4:1 산발랏의 방해를 물리침 ② 느4:4 기도하는 느헤미야
③ 느4:15 대적에 대한 방비와 성벽 건축
5) 느5:1 느헤미야가 가난한 자들 도움
① 느5:1 백성들의 불평 ② 느5:6 느헤미야의 책망
③ 느5:12 백성들의 순종 ④ 느5:14 느헤미야의 양심 선언
6) 느6:1 대적의 음모를 물리침
① 느6:10 스마야의 거짓 예언 ② 느6:15 성벽 건축 완공
③ 느6:17 도비야의 위협
7) 느7:1 예루살렘 성 재건 후의 조치
① 느7:1 예루살렘 치리자 임명 ② 느7:5 첫 귀환민의 명단을 찾음
③ 느7:8 이스라엘 백성의 수 ④ 느7:39 제사장과 레위인들
8) 느7:46 느디님인과 솔로몬 신복 자손들
① 느7:61 혈통 불평인들 ② 느7:70 성벽 건축을 위한 헌물
9) 느8:1 초막절을 지킴
① 느8:9 백성들의 통회 ② 느8:13 초막절 준수
10) 느9:1 백성들이 죄를 고백
① 느9:1 백성들의 금식과 회개 ② 느9:4 제사장들과 레위인들의 기도
③ 느9:16 배반의 역사 회고 ④ 느9:32 포로 시대의 회고
11) 느10:1 언약에 인친 자들
① 느11:1 예루살렘의 새로운 사람들 ② 느11:1 귀향 민들의 정착지
③ 느11:10 예루살렘에 정착한 제사장들 ④ 느11:25 여러 정착지
12) 느12:1 제사장과 레위인들 성벽의 봉헌
① 느12:1 제사장과 레위인들의 기록 ② 느12:27 예루살렘 성 봉헌식
③ 느12:44 백성이 성직자들을 받들다
13) 느13:1 느헤미야가 다시 돌아옴
① 느13:1 이방인과의 분리 정책 ② 느13:4 성전 정화
③ 느13:10 십일조 규례 강화 ④ 느13:15 안식일 규례 강화
⑤ 느13:23 이방인과의 잡혼 경제 ⑥ 느13:29 느헤미야의 저주와 축복
11. 주제
예루살렘의 회복. 3차 귀환 이후에 있었던 예루살렘 성벽재건 작업은 물론 이스라엘 민족의 사회, 정치적 개혁과 언약 갱신을 통한 종교 부흥을 기술함으로써 예루살렘의 현실적 회복과 영적 회복을 보여준다.
12. 배경
바사의 전성기였던 아닥사스다 왕 통치기(B.C. 464~424년)를 배경으로 하여 당시 이방인으로부터 수모를 받고 있던 팔레스타인에 거주하던 유다인의 부흥 과정이 수록되어 있다.
13. 기록목적
(1)3차 귀환의 과정과 성벽중건의 역사를 보여주기 위하여.
(2)이스라엘의 예루살램 정착과 종교적 정황을 보여주기 위하여.
(3)언약에 신실하신 하나님의 사랑과 이에 대한 인간 복종의 당위성을 강조하기 위하여.
14. 특징
(1) 회복의 책 : 포로로부터의 회복, 무너짐으로부터의 성벽재건, 잃었던 신앙의 회복, 언약의 갱신 등이 기록되어 있다.
(2) 분리의 책 : 이교도, 잡혼으로 부터의 분리 등 이스라엘 백성의 성결에 큰 비중을 둔다.
15. 요절
"성 역사가 오십이 일 만에 엘룰월 이십오 일에 끝나매 우리 모든 대적과 사면 이방 사람들이 이를 듣고 다 두려워하여 스스로 낙담하였으니 이는 이 역사를 우리 하나님이 이루신 것을 앎이니라."(6:15-16)
16. 결론
느헤미야의 성벽의 재건이 왜 그렇게 중요하게 다루어지고 있는지 의아해할 것이다.
이것은 미슈나에 많은 울타리 율법(fence law)을 보면 알 수가 있다. 본래 울타리란 집을 보호하고 주인의 안전을 유지하기 위해서 만들듯이 유대인들이 울타리 율법을 만든 것은 그 율법을 보호하고 잘 지키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나중에는 이론중심과 형식화로 변질되었다. 예를 들면 유대인들이 가장 중요시하는 것이 안식일 법인데 이것을 위해서 하지 말아야 할 것 39가지를 만들었다. 그래서 결과적으로는 외식주의에 빠지게 되어 주님으로부터 신랄한 비판을 받은 것이다. 그러나 본래의 의도는 율법을 보호하고 잘 지키자는 선의에서 비롯된 것이다.
마찬가지로 느헤미야는 하나님의 전인 성전을 보호하기 위해서 예루살렘의 성벽이 아름답게 세워져 있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한 것을 보고 성벽 재건을 시작한 것이다. 성전 건축 때와 마찬가지로 방해자들이 있었다. 그들이 바로 산발랏과 도비야, 게셈의 무리들이었다. 이들은 먼저 유대인들이 능력도 없으면서 성벽 재건을 하려는 것을 비웃으면서 바사 왕을 배반하려는 저의가 아니냐 하면서 정치적으로 모함하였다. 그러자 백성들의 원망이 터져 나왔다.
그러나 52일 만에 성벽은 완공되었다. 성벽이 완공된 후에 에스라의 개혁은 시작되었는데 중요한 것은 율법 책을 낭독한 후에 해석하여 깨닫게 하여 주었다는 점이다. 이것이 오늘날 설교의 모형이다. 이때 함께 모여 율법을 들었고 기뻐하였으며, 먹을 것을 나누어주었으며 회개 운동이 일어나게 되었다
윌리암 윌보포스(William Wilberforce) 1759. 8. 24-1833. 7. 29 영국의 노예재도 폐지 운동을 이끈 정치인
할아버지인 윌리엄 윌버포스(1690-1776) 발트 교역에서 부자가 되었다. 아버지 로버트 윌보포스(1728-1768) 윌버포스는 만18세인 1776년 영국 케임브리지 대학교의 세인트 존스 칼리지에 입학했다. 목사가 되려고 하였으나 너는 정치를 하라는 요한 웨슬리의 조언에 따라 정치인으로 결단하였다. 그는 학생들의 모임에 몰두하고 공부에 열중하지는 않았다. 친구 중에서, 특히 윌리암 피트를 사귀었고, 둘의 우정은 평생 계속되었다. 만 22세인 1781년 학사 학위 만 29세에 석사 학위를 받았다.
교회사에서는 윌리엄 윌버포스를 로버트 레이크스(주일학교 창시자), 존 벤 신부(Rev. John Venn)등과 더불어 18세기 영국 성공회 복음주의자 중 한 사람으로 평가한다. 윌리엄 윌버포스는 영국 성공회 신자로서 그의 노예제도 반대운동을 기독교 운동의 모델로 볼 수 있다.
* 에이브러햄 링컨(Abraham Lincoln, 1809년 2월 12일 ~ 1865년 4월 15일)
8월 27일(금) 에스라 10장 / 하늘의 하나님(4절)
♦ 오늘 읽어야 할 말씀 : 에스라 10:1∼44 ♦ 묵상을 위한 주제 : 힘써 행하소서(4절) ♦ 성구 : 이는 당신(當身)의 주장(主張)할 일이니 일어나소서 우리가 도우리니 힘써 행(行)하소서.
“힘써 행하소서(take courage and do it)”
북 이스라엘은 앗수르(살만에셀 왕)에 의해서 망합니다(BC 722). 남 유다는 그 후 136년 후에 바벨론(느부갓네살 왕)에 의해서 망합니다(BC 586).
바벨론에 의해서 망한 후 70년이 지나서 유다 사람들은 사만 이 천 명 정도가 1차 귀환한 후 총독 스룹바벨의 지도를 받아 성전을 건축합니다.
그 후 다시 60년이 지나서 에스라를 중심으로 만 여명 정도의 사람이 2차 귀환합니다.
오늘 말씀은 에스라가 2차 귀환한 후에 유다를 개혁한 사건입니다.
에스라의 개혁을 통하여 유다의 순수성을 지킬 수 있었고 그곳에서 메시야가 태어나서 세계에 복음이 전파될 수 있었습니다.
오늘의 시대를 기독교의 위기라고 합니다. 위기를 말하면서도 위기를 극복할 마음이 없다는 것이 문제가 나일까요?
기독교인의 정체성을 확립하고 구원의 역사를 이어갈 수 있는 계기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백성들이 이방 여인을 아내와 며느리로 맞이하여 하나님을 떠나 우상을 숭배하게 하였던 것에 대해 에스라가 제시하는 가르침을 따라서 아내와 그들의 소생을 다 내보내기로 하나님과 언약을 세우고 율법대로 하자고 합니다.
아내를 보내는 것은 그 결혼이 하나님의 율법에 어긋난 것으로 무효의 법적 상태였다는 점에서 볼 때 타당한 행동이라고 하겠습니다.
소생 즉 그 아내에게서 태어난 자녀들을 보내는 행동은 현대인의 관점으로는 꽤 잔인하게 보입니다. 그렇지만 자녀들은 어머니의 종교적 영향을 크게 받기 때문에 틀림없이 이방의 풍습이나 종교에 젖어 있었을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주변의 허다한 다신 종교로부터 여호와 신앙의 순수성을 지켜야 하기에 가나안 족속을 모두 멸절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그 명령을 지키지 못한 결과는 너무 처참하고 고통스런 현실이 되었습니다.
백성들의 범죄로 파기되었던 언약을(렘 31:32) 스룹바벨과 함께 귀환한 사람들이 다시 갱신했듯이(6:16∼17) 최근의 범죄(9:1∼2)로 인하여 또 파기된 언약(9:10, 15)을 다시 갱신하려는 것입니다.
이 상황에서 백성들이 해야 할 일은 죄를 제거하는 일이었습니다.
죄를 제거하지 않는다면 더 큰 어려움이 닥쳐올 것을 알았기에 지도자의 제안을 믿고 따르려는 유다 백성들의 마음이 아름답다고 하겠습니다.
예전에는 교회를 대표할만한 어른과 같은 지도자가 있었는데 오늘날은 대형교회는 있지만 교회의 어른 역할을 할 만한 지도자가 없다는 것이 안타깝습니다.
에스라 혼자서 이런 일을 진행한다면 얼마나 힘들었을까요? 그래도 에스라를 돕겠다는 사람들이 일어나서 자신들이 도와주려고 하니 일어나서 힘써 행하라고 합니다.
교회를 사랑하고 나라와 민족을 사랑하는 사람은 많습니다. 그러나 그 일에 모든 것을 맡기고 헌신하려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그래서 일 할 일군이 없다고 합니다.
뜻을 같이 할 수 있는 일군을 보내달라고 기도합니다. 믿음으로 함께 할 협력자(協力者)를 찾는 것이 중요합니다. 혼자 힘으로는 쉽게 무너질 수밖에 없지만 두 세 사람이면 넉넉하게 견디고 이길 수 있다는 솔로몬의 지혜를 마음에 새겨봅니다.
나는 믿음으로 협력할 수 있는가? 오늘도 솔선수범하여 협력하는 신앙으로 무장하시기 바랍니다.
♪ 찬양 / 주의 진리 위해 십자가 군기
예수 내 구주! 예수 내 생명! 예수 내 권세!
에스라 10:4
이는 당신의 주장할 일이니 일어나소서 우리가 도우리니 힘써 행하소서. 아멘
(공동번역) 일어나십시오. 선생님이 알아서 일을 처리하십시오. 우리는 다만 따르겠습니다. 기를 내어 밀고 나가십시오
에스라 10:1
에스라가 하나님의 전 앞에 엎드려 울며 기도하여 죄를 자복할 때에 많은 백성이 심히 통곡하매 이스라엘 중에서 백성의 남녀와 어린 아이의 큰 무리가 그 앞에 모인지라.
죄에 대한 연대 의식 자복할 때(야다. yâdâh) יָדָה / 던지다 10:11, 자복(토다. tôwdâh) תּוֹדָה / 고백, 감사
에스라 10:2
엘람 자손중 여히엘의 아들 스가냐가 에스라에게 이르되 우리가 우리 하나님께 범죄하여 이 땅 이방 여자를 취하여 아내를 삼았으나 이스라엘에게 오히려 소망이 있나니.
스가냐(여호와께서 거하심)의 개혁 제의
에스라 10:3
곧 내 주의 교훈을 좇으며 우리 하나님의 명령을 떨며 준행하는 자의 의논을 좇아 이 모든 아내와 그 소생을 다 내어 보내기로 우리 하나님과 언약을 세우고 율법대로 행할 것이라. - 신명기 7:3-4
신명기 7:3-4
또 그들과 혼인하지 말찌니 네 딸을 그 아들에게 주지 말 것이요 그 딸로 네 며느리를 삼지 말것은. 그가 네 아들을 유혹하여 그로 여호와를 떠나고 다른 신들을 섬기게 하므로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진노하사 갑자기 너희를 멸하실 것임이니라.
에스라 10:4-5
이는 당신의 주장할 일이니 일어나소서 우리가 도우리니 힘써 행하소서. 이에 에스라가 일어나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과 온 이스라엘에게 이 말대로 행하기를 맹세하게 하매 무리가 맹세하는지라.
에스라 10:6-7
이에 에스라가 하나님의 전 앞에서 일어나 엘리아십의 아들 여호하난의 방으로 들어가니라 저가 들어가서 사로잡혔던 자의 죄를 근심하여 떡도 먹지 아니하며 물도 마시지 아니하더니. 유다와 예루살렘의 사로잡혔던 자의 자손들에게 공포하기를 너희는 예루살렘으로 모이라.
에스라 10:8
누구든지 방백들과 장로들의 훈시를 좇아 삼일 내에 오지 아니하면 그 재산을 적몰하고 사로잡혔던 자의 회에서 쫓아 내리라.
이스라엘 총회 소집
에스라 10:11-12
이제 너희 열조의 하나님 앞에서 죄를 자복하고 그 뜻대로 행하여 이 땅 족속들과 이방 여인을 끊어 버리라. 회 무리가 큰 소리로 대답하여 가로되 당신의 말씀대로 리가 마땅히 행할 것이니이다.
사로잡혔던 자의 자손이 그대로 한지라 제사장 에스라가 그 종족을 따라 각기 지명된 족장 몇 사람을 위임하고 시월 초하루에 앉아 그 일을 조사하여. 정월 초하루에 이르러 이방 여인을 취한 자의 일 조사하기를 마치니라.
요한일서 1:9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케 하실 것이요.
오늘의 기도
숨은 죄를 자복할 회개의 영을 주옵소서!
8월 26일(목) 에스라 9장 / 주 앞에(15절)
♦ 오늘 읽어야 할 말씀 : 에스라 9:1∼15 ♦ 묵상을 위한 주제 : 주 앞에(15절) ♦ 성구 :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여 주(主)는 의(義)롭도소이다 우리가 남아 피(避)한 것이 오늘날과 같사옵거늘 도리어 주(主)께 범죄(犯罪)하였사오니 이로 인(因)하여 주(主) 앞에 한 사람도 감(敢)히 서지 못하겠나이다.
날마다 주 앞에서(before you) 일어날 수 있는 은혜를 누리며 살아야 하겠습니다.
이 은혜가 헛되지 않을 그리스도인의 삶이 세상을 움직일 수 있어야 합니다.
포로로 끌려갔던 유다 백성의 2차 귀환을 마쳤습니다.
많은 사람이 함께 걸어야 했던 그 먼 거리를 무사히 예루살렘에 도착하게 하신 하나님의 은혜를 잊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도착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에스라는 충격적인 소식을 들었습니다(1~2절). 그 소식은 백성들이 이방인들과 결혼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이방인과의 결합은 단순한 결합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빠져버린 이스라엘 공동체의 정체성을 뒤흔드는 심각한 결합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이방여인을 아내로 맞이하면 그들의 우상도 함께 들어오기 때문입니다.
포로생활을 할 수밖에 없었던 것도 하나님을 떠난 우상숭배에 열중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또 다시 이방 여인들을 며느리와 아내로 맞이하는 것을 담담하게 지켜보는 사람들을 향하여 에스라는 속옷과 겉옷을 찢고 머리털과 수염을 뜯으며 기가 막혀 앉아 있었습니다(3절).
에스라는 그 백성들이 지은 죄를 자신의 죄로 끌어안고 기도했습니다(6절).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부끄럽고 낯이 뜨거워서 감히 나의 하나님을 향하여 얼굴을 들지 못하오니 이는 우리 죄악이 많아 정수리에 넘치고 우리 허물이 커서 하늘에 미침이니이다.”
부끄럽고 낯이 뜨거워 하나님께 얼굴을 들 수 없다는 것은 우리의 죄가 너무 크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에스라의 이와 같은 모습에서 두 가지를 생각합니다.
첫째는 죄를 무겁게 여기고 솔직하고 구체적으로 자백해야 합니다. 둘째는 죄를 짓는 것을 무관심하게 바라보면 안 될 것입니다.
교회 공동체 안에 우리들을 묶어주신 것은 그 공동체도 나의 몸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러므로 가정과 교회와 사회와 국가라는 공동체는 곧 나의 몸입니다. 좋은 일은 함께 기뻐해야 합니다. 슬픈 일은 함께 울며 슬퍼해야 합니다. 고통스러운 일은 함께 아파해야 합니다. 따라서 공동체의 잘못과 부정은 곧 나의 잘못이며 부정한 것임을 깨닫고 주님의 용서를 구해야 합니다.
오늘도 에스라의 모습을 생각하며 어떤 환경에서든지 주님을 꼭 붙잡고 내적 개혁과 내적 성숙이 일어나는 복된 하루가 펼쳐지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 찬양 / 귀하신 주여 날 붙드사
예수 내 구주! 예수 내 생명! 예수 내 권세!
에스라 9:15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여 주는 의롭도소이다 우리가 남아 피한 것이 오늘날과 같사옵거늘 도리어 주께 범죄하였사오니 이로 인하여 주 앞에 한 사람도 감히 서지 못하겠나이다. 아멘
에스라서 개요
1. 기록 연대 : BC 458-444 2. 기록자 : 에스라 3. 이름의 뜻 : 하나님이 도우신다 4. 기록 대상 : 유다 백성들 5. 핵심 단어 : 귀환, 회복 6. 내용 : 1차, 2차 귀환 후 헌신 7. 구조 : 1-6장 1차 귀환(스룹바벨) BC 536 7-10장 2차 귀환(에스라) BC 457 * 느헤미야 1-13장 3차 귀환
에스라 9:1
이 일 후에 방백들이 내게 나아와 가로되 이스라엘 백성과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이 이 땅 백성과 떠나지 아니하고 가나안 사람과 헷 사람과 브리스 사람과 여부스 사람과 암몬 사람과 모압 사람과 애굽 사람과 아모리 사람의 가증한 일을 행하여.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죄가 세상에 만연하였다(백성, 제사장, 레위 사람들)
에스라 9:2
그들의 딸을 취하여 아내와 며느리를 삼아 거룩한 자손으로 이방 족속과 서로 섞이게 하는데 방백들과 두목들이 이 죄에 더욱 으뜸이 되었다 하는지라.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방백, 두목 : 그 방백과 지도자 으뜸이 되다 : 앞장 서다
에스라 9:3-4
내가 이 일을 듣고 속옷과 겉옷을 찢고 머리털과 수염을 뜯으며 기가 막혀 앉으니. 이에 이스라엘 하나님의 말씀을 인하여 떠는 자가 이 사로잡혔던 자의 죄를 인하여 다 내게로 모여 오더라 내가 저녁 제사 드릴 때까지 기가 막혀 앉았더니.
에스라 9:5-6
저녁 제사를 드릴 때에 내가 근심 중에 일어나서 속옷과 겉옷을 찢은대로 무릎을 꿇고 나의 하나님 여호와를 향하여 손을 들고. 말하기를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부끄러워 낯이 뜨뜻하여 감히 나의 하나님을 향하여 얼굴을 들지 못하오니 이는 우리 죄악이 많아 정수리에 넘치고 우리 허물이 커서 하늘에 미침이니이다.
에스라 9:11
전에 주께서 주의 종 선지자들로 명하여 이르시되 너희가 가서 얻으려하는 땅은 더러운 땅이니 이는 이방 백성들이 더럽고 가증한 일을 행하여 이 가에서 저 가까지 그 더러움으로 채웠음이라.
에스라 9:15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여 주는 의롭도소이다 우리가 남아 피한 것이 오늘날과 같사옵거늘 도리어 주께 범죄하였사오니 이로 인하여 주 앞에 한 사람도 감히 서지 못하겠나이다.
데살로니가전서 5:22 악은 모든 모양이라도 버리라.
오늘의 기도
주의 말씀으로 모든 악한 것을 물리치게 하옵소서!
8월 25일(수) 에스라 8장 / 아하와 강가(21절)
♦ 오늘 읽어야 할 말씀 : 에스라 8:1∼36 ♦ 묵상을 위한 주제 : 아하와 강가(21절) ♦ 성구 : 때에 내가 아하와 강가에서 금식(禁食)을 선포(宣布)하고 우리 하나님 앞에서 스스로 겸비(謙卑)하여 우리와 우리 어린 것과 모든 소유(所有)를 위(爲)하여 평탄(平坦)한 길을 그에게 간구(懇求)하였으니.
“아하와 강가(by the Ahava Canal)”
‘아하와’라는 강 이름의 뜻은 “물”이라고 합니다.
“아하와 강”은 “바벨론 서북방을 흐르는 강 혹은 운하”를 말합니다.
“에스라”가 이 강가에서 백성과 제사장을 조사하였고 또 금식을 선포하고 기도한 후 정월 12일에 이곳에서 출발하여 “예루살렘”으로 향했습니다(스 8:15, 21, 31).
에스라 7장에서 에스라가 등장하였고, 율법에 능통한 학자였던 에스라가 백성들을 이끌고 예루살렘으로 돌아오게 되었습니다. 이때를 “2차 포로 귀환기”라고 하며, 8장에서는 예루살렘으로 돌아온 사람들의 명단이 소개됩니다.
2차 귀환자의 명단을 소개하면서 두 제사장 “비느하스”와 “이다말” 가문의 후손과 왕족인 다윗의 자손을 먼저 언급합니다(1∼2절). 그리고 에스라와 함께 예루살렘으로 돌아온 사람들의 숫자가 종족별로 소개됩니다(3∼14절).
백성들이 바벨론을 떠나 예루살렘으로 향해 가는 길에 아하와 강가에서 사흘 동안 머무르게 되었습니다(15∼20절).
그곳에서 귀환자 명단을 확인하게 되는데 그들의 무리 가운데는 레위 사람이 한 사람도 없음을 알게 되었습니다(15절).
이 때 에스라는 레위 사람들을 수소문하여 그들도 예루살렘으로 함께 돌아가도록 권유하면서 최종적으로 추가된 38명의 레위인과 함께 귀환하게 됩니다.
바벨론에서 포로가 되어 그곳에서 무려 140년 동안 생활했던 백성들은 바벨론 문화에 익숙해졌습니다.
몸에 익숙한 생활환경을 떠나서 낯선 땅으로 옮겨가려 할 때 먼저 예루살렘에 도착했던 사람들로부터 정착생활의 불편과 어려움에 대한 이야기를 듣게 됩니다. 이러한 이야기를 들었을 때 바벨론을 떠나려는 백성들은 많지 않았습니다.
마찬가지로 지구촌에서 예수를 믿는 성도들의 수가 많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가르치셨던 좁은 문과 좁은 길을 선택하고 심지어 자기 십자가를 짊어질 불편과 고통을 기꺼이 받아드릴 성도들이 얼마나 될까요?
사람을 환경적 존재(coram environmental)라고 합니다.
환경적 존재는 익숙하고 편안해진 환경을 떠나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아무도 가지 않으려는 그 길을 마다하지 않고 찾아오신 분이 성자 예수님입니다.
그 길은 고난의 길입니다. 그 길은 멸시와 천대의 길입니다. 그 길은 생명으로 인도하는 길입니다.
선지자 에스라처럼 오늘날도 수많은 성도들 중에서 십자가의 길을 걸어가야 할 거룩한 백성들을 찾아 삶의 자리에서 일어나 좁은 문을 지나 좁은 길을 걸어가야 할 주의 백성들을 일으켜 세워야 합니다.
그 길을 선택하는 주의 백성들의 수가 채워질 때 비로써 영광과 감격과 감사와 찬양의 넘치는 그 세상이 회복될 것입니다.
예수님을 통해서 하나님의 자녀가 된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겠습니까?
우리를 위해서 친히 목숨까지 내어주신 예수님의 희생과 사랑에 힘입어 이제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를 위해서 자원하는 자로 살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것이 고생의 길이고, 드러나지 않는 일이라 하더라도 말입니다. 우리가 자원하지 않더라도 하나님은 어딘가에 숨겨져 있는 38명의
레위 인을 찾아내실 것입니다. 잠시 이 땅에서 살아야 하는 우리의 이름이 하나님의 역사에 기여한 사람들 명단에 기록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하나님의 일은 하나님의 능력과 지혜로만 감당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길은 하나님의 인도하심과 보호하심 속에서만 걸어갈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믿음의 동지들이여! 오늘 우리가 걸어야 할 이 길이 험할지라도 순종하는 마음으로 그 길을 걸어갈 때 그 길에서만 누릴 수 있는 자유와 기쁨이 있습니다.
사악한 세력들이 흔드는 세상에서 사람의 능력으로 버틸 수 없습니다. 에스라처럼 아하와 강가에서 긴박한 기도를 하였듯이 우리도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기도할 때에 이 시대를 극복하고 이길 수 있습니다.
사람의
능력으로 가능한 일이라면 그 일은 더 이상 하나님의 일이 아닙니다. 사람의 지혜로 찾을 수 있는 길이라면 그 길은 더 이상
하나님의 길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고생길이며 십자가의 길이라 하더라도 믿음의 사람은 간절한 심령으로 기도하며 주님의 보호하심과
인도하심을 따라 순종의 길을 걸어갈 수 있습니다.
오늘 하루만이라도 자원하는 순종의 길을 기도하며 걸어갈 때 그 오늘은 내일의 소망이 될 것입니다. 내일의 소망은 또 내일의 꿈을 키워갈 수 있는 은총의 날이 될 것입니다.
때에 내가 아하와강 가에서 금식을 선포하고 우리 하나님 앞에서 스스로 겸비하여 우리와 우리 어린것과 모든 소유를 위하여 평탄한 길을 그에게 간구하였으니. 아멘
기도의 자리가 분명한가? (예화) 밀림 지역의 어느 원주민 리더를 방문한 선교사가 그 원주민에게 "요즈음 기도를 하지 않았군요?" 그러자 원주민이 깜짝 놀라며 "어떻게 아셨어요?" "집 뒤에 잡초가 많이 자랐다는 것을 보고 알았습니다." 밀림 지역인지라 매일 하루에 세번씩 기도하려면 밀림의 길을 걸어가야 하는데 기도하지 않으면 잡초가 무성하게 자랍니다. 기도하지 않으면 마음에 잡초가 무성합니다. 에스라는 금식을 선포했습니다. 겸손한 마음으로 평탄한 길을 간구했습니다.
에스라 8:1
아닥사스다왕이 위에 있을 때에 나와 함께 바벨론에서 올라온 족장들과 그들의 보계가 이러하니라.
함께(임. ʽîm) עִם
1. 도울 때 2. 행동으로 함께 할 때 3. 바로 가까이 있을 때
에스라 7:13
조서하노니 우리 나라에 있는 이스라엘 백성과 저희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 중에 예루살렘으로 올라갈 뜻이 있는 자는 누구든지 너와 함께 갈찌어다.
1차 귀환(BC.537년) 고레스 / 스룹바벨, 예수아(49,897명) 2차 귀환(BC.458년) 아닥사스다 / 에스라(1,754명) 3차 귀환(BC.444년) 아닥사스다 / 느헤미야(통계 없음)
에스라 8:15
내가 무리를 아하와로 흐르는 강가에 모으고 거기서 삼일 동안 장막에 유하며 백성과 제사장들을 살핀즉 그 중에 레위 자손이 하나도 없는지라.
258명을 불러오다
말리 자손 중 세레뱌와 아들 18명 므라리 자손 중 여사야와 그 형제들 20명 느디님 사람 중 220명
에스라 8:21
때에 내가 아하와강 가에서 금식을 선포하고 우리 하나님 앞에서 스스로 겸비하여 우리와 우리 어린것과 모든 소유를 위하여 평탄한 길을 그에게 간구하였으니.
금식 겸비(겸손) 평탄한 길(곧은 길, 안전한 길)
에스라 8:22-23
22. 이는 우리가 전에 왕에게 고하기를 우리 하나님의 손은 자기를 찾는 모든 자에게 선을 베푸시고 자기를 배반하는 모든 자에게는 권능과 진노를 베푸신다 하였으므로 길에서 적군을 막고 우리를 도울 보병과 마병을 왕에게 구하기를 부끄러워 하였음이라. 23. 그러므로 우리가 이를 위하여 금식하며 우리 하나님께 간구하였더니 그 응낙하심을 입었느니라.
에스라 8:31
정월 십 이일에 우리가 아하와강을 떠나 예루살렘으로 갈쌔 우리 하나님의 손이 우리를 도우사 대적과 길에 매복한 자의 손에서 건지신지라.
디모데후서 2:11
미쁘다 이 말이여, 우리가 주와 함께 죽었으면 또한 함께 살 것이요.
오늘의 기도
주와 함께 옳은 길을 걷게 하옵소서!
8월 24일(화) 에스라 7장 / 학사 에스라(6절)
♦ 오늘 읽어야 할 말씀 : 에스라 7:1∼28 ♦ 묵상을 위한 주제 : 학사 에스라(6절) ♦ 성구 : 이 에스라가 바벨론에서 올라왔으니 저는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께서 주신바 모세의 율법(律法)에 익숙한 학사(學士)로서 그 하나님 여호와의 도우심을 입으므로 왕에게 구(救)하는 것은 다 받는 자(者)더니.
“에스라(Ezra, 조력자)”는 2차 포로 귀환 때에 예루살렘으로 돌아온 지도자입니다. 그는 모세의 율법에 능통한 학사이었습니다(teacher well versed in the Law of Moses).
“학개”와 “스가랴” 선지자가 유다의 총독으로 임명을 받은 “스룹바벨”과 대제사장 “여호수아”와 협력하여 제2의 성전(스룹바벨 성전)을 완공한 후에 “에스라”가 바벨론에서 예루살렘으로 돌아왔습니다.
이미 성전은 세워졌기 때문에 이제는 모세의 율법을 가르쳐야 합니다. 하나님은 때를 맞춰 “에스라”를 세웠습니다. "에스라"를 통하여 성전을 중심으로 활동하는 공동체를 세울 것입니다.
성경은 에스라의 인품을 이렇게 증언합니다(7:25-26).
“에스라여
너는 네 손에 있는 네 하나님의 지혜를 따라 네 하나님의 율법을 아는 자로 유사와 재판관을 삼아 강 서편 모든 백성을 재판하게
하고 그 알지 못하는 자는 너희가 가르치라. 무릇 네 하나님의 명령과 왕의 명령을 준행치 아니하는 자는 속히 그 죄를 정하여 혹
죽이거나 정배하거나 가산을 적몰하거나 옥에 가둘찌니라.”
아닥사스다 왕의 이와 같은 조서는 에스라가 어떤 사람이었는지를 알려주고 있습니다.
오늘날에도 에스라와 같은 하나님의 사람이 세워지기를 기도해야 합니다. 에스라와 같은 신앙의 사람이 없다면 그 나라와 그 백성들은 헛된 것만 자랑하는 헛된 것에 도취되어 결국에는 무너져버릴 것입니다.
대형교회를 찾아다닐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인정하고 나라의 지도자가 두려워할 줄 아는 작아도 큰 교회를 찾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소돔과 고모라 성에 의로운 사람 열 명이 없어서 불의 심판을 받았던 것처럼 오늘날도 하나님이 찾으시는 그 사람과 그 교회가 없기 때문에 무서운 불과 사나운 바람과 폭풍우와 지진의 재앙이 임하지 않기를 기도할 뿐입니다.
BC 537 고레스 포로 귀환 칙령 BC 536 성전 재건축 시작 BC 516 성전 재건 완성 * BC 586 남 유다 멸망(바벨론 느부갓네살) 586-516= 70 / 70년 만에 돌아온 것으로 계산하는 근거가 된다.
에스라 7:9
정월 초하루에 바벨론에서 길을 떠났고 하나님의 선한 손의 도우심을 입어 오월 초하루에 예루살렘에 이르니라.
정월 초하루 : 니산월 초하루(유월절)
마태복음 28:20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찌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오늘의 기도
성경대로 믿고 성경대로 살아가는 믿음
8월 23일(월) 에스라 6장 / 생명을 위하여 기도하게 하라(10절)
♦ 오늘 읽어야 할 말씀 : 에스라 6:1∼22 ♦ 묵상을 위한 주제 : 생명을 위하여 기도하게 하라(11절) ♦ 성구 : 저희로 하늘의 하나님께 향기(香氣)로운 제물(祭物)을 드려 왕(王)과 왕자(王子)들의 생명(生命)을 위(爲)하여 기도(祈禱)하게 하라.
“생명을 위하여 기도하게 하라(pray for the well-being)”
이 때 생명은 바사 왕 고레스와 왕자들을 말합니다. 이방 나라 왕이었지만 하나님에게 기도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것을 깨달은 왕의 마음을 헤아려 봅니다.
물질 만능의 시대를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이 그들의 자녀들에게 기도가 얼마나 필요한가를 바르게 가르쳐야 하겠습니다.
“고레스”는 바사(페르시아, 현재 이란) 제국의 초대 왕으로(BC 558∼529) 메대 왕 “아스타게스”의 통치하에 있던 ‘얀샴’에서 출생했습니다.
그는 주전 539년에 바벨론 전역을 정복하여 바사를 최대 제국으로 세웠습니다.
“다리오 왕”은 “고레스”의 치하에 있던 바벨론의 통치자로서 주전 539년 10월 갈대아 사람 “벨사살 왕”이 죽은 후에 왕위에 올랐습니다.
다리오 왕은 성전 건축을 지원하였고 소용되는 경비까지도 지불하였습니다.
“닷드내”와 “스달보스내”의 글을 받은 다리오 왕은 바벨론의 보물 창고 중 서적 곳간에서 고레스의 조서에 대한 기록을 얻게 되었습니다.
고레스의 조서를 확인한 다리오는 “닷드내”와 “스달보스내”에게 조서를 내립니다.
첫째는 성전 재건 사역을 막지 말라. 둘째는 강 서편의 세금 중에서 재건에 필요한 비용과 성전 제사에 필요한 모든 물품을 제공하라. 셋째는 왕과 왕자를 위하여 기도하게 하라.
다리오는 변개할 수 없는 메대의 법칙을 강조하면서 누구도 성전 재건을 방해하지 못할 것을 확인합니다.
고레스 왕의 조서에다 추가된 다리오 왕의 조서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매일 필요한 번제물의 공급 명령과, 자신의 명령을 변개하는 자와 그 가문은 엄벌에 처할 것, 그리고 성전을 허무는 자를 여호와께서 벌하시기를 원하는 것이었습니다(8∼12).
성전 건축을 시작한 지 20년 만에 드디어 성전이 완공되었습니다.
백성들은 수소와 숫양을 화목 제물로 바치고 이스라엘 열두 지파를 의미하는 숫염소 열두 마리를 속죄 제물로 바쳤을 때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영광으로 성전을 충만케 하셨고, 건축하는 데 충성한 유대 백성을 복 주셨습니다.
또한 백성들은 성전 봉헌 후 가장 먼저 유월절을 지켰습니다. 그들이 유월절을 마지막으로 지킨 것은 요시야 왕 때였으나, 그 후 약 80년 만에 다시 유월절을 지키게 되었습니다.
이는 바벨론의 포로에서 풀려난 유대 백성이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한다는 의미입니다(16∼22).
오늘의 역사도 하나님이 주관하십니다. 인간의 욕망에 의해서 세상이 흘러가는 것 같을지라도 주님은 반드시 하늘의 뜻을 이루어 가십니다.
그러므로 이 세상에서 믿음의 사람들은 두 가지를 기도해야 합니다.
첫째는 내가 살고 있는 성읍의 평안을 위하여 기도해야 합니다(렘 29:7).
둘째는 나라의 지도자와 관리들이 헛된 욕망에 미혹되지 않도록 기도해야 합니다(딤전 2:2).
그러면 우리 모두가 평안의 삶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하시는 전화위복의 참 좋으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 찬양 / 나 어느 곳에 있든지
예수 내 구주! 예수 내 생명! 예수 내 권세!
1. 에스라 6:10
저희로 하늘의 하나님께 향기로운 제물을 드려 왕과 왕자들의 생명을 위하여 기도하게 하라. 아멘
에스라 6:1-2 이에 다리오왕이 조서를 내려 서적 곳간 곧 바벨론에서 보물을 쌓아둔 곳에서 조사하게 하였더니. 메대도 악메다 궁에서 한 두루마리를 얻으니 거기 기록하였으되.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페르시아 왕들의 궁전 겨울 : 바벨론 궁 봄 : 페르시아 “수산 궁(느 1:1)” 여름 : 메대 “악메다”(아람어) / (헬) 에크바타나. (페)하그마타나
에스라 6:3-5 3. 고레스왕 원년에 조서를 내려 이르기를 예루살렘 하나님의 전에 대하여 이르노니 이 전 곧 제사 드리는 처소를 건축하되 지대를 견고히 쌓고 그 전의 고는 육십 규빗으로 광도 육십 규빗으로 하고.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솔로몬 성전(왕상 6:2) : (고) 높이 30규빗(13.5m) (광) 너비 20규빗(9m) (장) 길이 60규빗(27m)
4. 큰 돌 세 켜에 새 나무 한 켜를 놓으라 그 경비는 다 왕실에서 내리라. 5. 또 느부갓네살이 예루살렘 전에서 취하여 바벨론으로 옮겼던 하나님의 전 금, 은 기명을 돌려 보내어 예루살렘 전에 가져다가 하나님의 전 안 각기 본처에 둘찌니라 하였더라.
에스라 6:6-7
6. 이제 강 서편 총독 닷드내와 스달보스내와 너희 동료 강 서편 아바삭 사람들은 그곳을 멀리하여. 7. 하나님의 전 역사를 막지 말고 유다 총독과 장로들로 하나님의 이 전을 본처에 건축하게 하라.
에스라 6:8-9
8. 내가 또 조서를 내려서 하나님의 이 전을 건축함에 대하여 너희가 유다 사람의 장로들에게 행할 것을 알게 하노니 왕의 재산 곧 강 서편 세금 중에서 그 경비를 이 사람들에게 신속히 주어 저희로 지체치 않게 하라.
9. 또 그 수용물 곧 하늘의 하나님께 드릴 번제의 수송아지와 수양과 어린 양과 또 밀과 소금과 포도주와 기름을 예루살렘 제사장의 소청대로 영락 없이 날마다 주어.
에스라 6:10
저희로 하늘의 하나님께 향기로운 제물을 드려 왕과 왕자들의 생명을 위하여 기도하게 하라.
다니엘 6:28
이 다니엘이 다리오 왕의 시대와 바사 사람 고레스 왕의 시대에 형통하였더라.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다리오 왕을 움직인 사람 다니엘 고레스(키루스 2세) - 캅비세스 - 다리오
로마서 8:28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오늘의 기도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하시는 역사가 믿음의 증거로 열매맺게 하옵소서!
8월 21일(토) 에스라 5장 / 다시 건축하노라(11절)
♦ 오늘 읽어야 할 말씀 : 에스라 5:1∼17 ♦ 묵상을 위한 주제 : 다시 건축하노라(11절) ♦ 성구 : 저희가 우리에게 대답(對答)하여 이르기를 우리는 천지(天地)의 하나님의 종이라 오랜 옛적에 건축(建築)되었던 전(殿)을 우리가 다시 건축(建築)하노라 이는 본래(本來) 이스라엘의 큰 왕(王)이 완전(完全)히 건축(建築)한 것이더니.
바벨론에서 70년 동안 포로 생활을 하던 백성들이 예루살렘으로 돌아와 초막절을 지키고 성전 건축을 위한 기초를 쌓을 때 머지않아 하나님께 예배할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감에 부풀어 있었습니다.
그러나 사마리아 사람들의 왜곡된 고소와 고발 심지어 관리들에게 뇌물을 주며 집요하게 성전 재건을 훼방하므로 성전 재건의 기쁨은 땅속에 묻혀버렸습니다.
이제는 성전 건축보다는 개인의 집을 짓는 일에 열중하게 되었습니다.
그 때 학개와 스가랴 두 선지자가 등장하여 백성들을 깨우쳤습니다.
“만군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여 이르노라 이 백성이 말하기를 여호와의 전을 건축할 시기가 이르지 아니하였다 하느니라. 여호와의 말씀이 선지자 학개에게 임하여 이르시되 이 성전이 황폐하였거늘 너희가 이때에 판벽한 집에 거주하는 것이 옳으냐? 그러므로 이제 만군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니 너희는 너희의 행위를 살필지니라.”(학개 1:2∼5)
하나님께서 고레스 왕을 통해서 유다 사람들을 고국으로 돌아가라고 한 것은 성전을 짓게 하려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풀어 주실 때는 반드시 그 은혜에 합당한 삶을 살아야 한다는 강력한 요구와 같습니다. 만일 그 은혜를 외면한다면 은혜를 멈추게 하여 생각하지 못했던 어려움에 직면하게 될 것입니다.
“성전은 황폐하였는데 너희는 어떻게 판벽한 집에서 사느냐?”
‘판벽한 집’은 “화려하게 꾸민 집”을 말합니다.
다시 성전 재건에 몰두할 때 또 다른 어려움도 겪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성전 건축 공사를 막을 수가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유다 장로들을 돌보셨기 때문”입니다.
어떤 어려운 일이 나를 힘들게 합니까?
그 어려움이 은혜에 합당한 믿음의 길을 걷지 못한 것이라면 당장 그 자리에서 무릎을 꿇고 회개해야 합니다.
처음 사랑을 되찾아 주님 앞에 더 가까이 나가면 반드시 회복시켜 주실 것입니다. 오늘도 그 은혜에 버금가는 믿음의 사람으로 든든하게 세워져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세상을 향하여 “진리의 길을” “믿음의 길을” “소망의 길을” 따라 순종하는 순례자의 삶을 보여주므로 주님께 영광 돌리는 일에 성공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 찬양 / 저 멀리 뵈는 나의 시온 성
예수 내 구주! 예수 내 생명! 예수 내 권세!
에스라 5:11
저희가 우리에게 대답하여 이르기를 우리는 천지의 하나님의 종이라 오랜 옛적에 건축되었던 전을 우리가 다시 건축하노라 이는 본래 이스라엘의 큰 왕이 완전히 건축한 것이더니. 아멘
고레스(키루스 2세) / 스룹바벨 현대인 성경(13절) 키루스 황제 원년 캄비세스 / 성전 건축 중단 명령
다리오(다레이오스 1세) / 성전 재건 / 학개, 스가랴 6절 다리오 왕
아하수에로(크세르크세스) / 에스더
아닥사스다(아르타 크세르크세스) / 에스라, 느헤미야
에스라 5:1
선지자들 곧 선지자 학개와 잇도의 손자 스가랴가 이스라엘 하나님의 이름을 받들어 유다와 예루살렘에 거하는 유다 사람들에게 예언하였더니.
학개 1:1 / 다리오왕 이년 유월 곧 그 달 초하루에 여호와의 말씀이 선지자 학개로 말미암아 스알디엘의 아들 유다 총독 스룹바벨과 여호사닥의 아들 대제사장 여호수아에게 임하니라 가라사대. 8절 / 너희는 산에 올라가서 나무를 가져다가 전을 건축하라 그리하면 내가 그로 인하여 기뻐하고 또 영광을 얻으리라 나 여호와가 말하였느니라.
스가랴 1:1 / 다리오왕 이년 팔월에 여호와의 말씀이 잇도의 손자 베레갸의 아들 선지자 스가랴에게 임하니라 가라사대.
4절 / 너희 열조를 본받지 말라 옛적 선지자들이 그들에게 외쳐 가로되 만군의 여호와께서 말씀하시기를 너희가 악한 길, 악한 행실을 떠나서 돌아오라 하셨다 하나 그들이 듣지 않고 내게 귀를 기울이지 아니하였느니라 나 여호와의 말이니라.
에스라 5:2 / 이에 스알디엘의 아들 스룹바벨과 요사닥의 아들 예수아가 일어나(쿰) 예루살렘 하나님의 전 건축하기를 시작하매 하나님의 선지자들이 함께 하여 돕더니.
5절 / 하나님이 유다 장로들을 돌아 보셨으므로 저희가 능히 역사를 폐하게 못하고.
에스라 5:11 / 저희가 우리에게 대답하여 이르기를 우리는 천지의 하나님의 종이라 오랜 옛적에 건축되었던 전을 우리가 다시 건축하노라 이는 본래 이스라엘의 큰 왕이 완전히 건축한 것이더니.
12절 / 우리 열조가 하늘에 계신 하나님을 격노케 하였으므로 하나님이 저희를 갈대아 사람 바벨론왕 느부갓네살의 손에 붙이시매 저가 이 전을 헐며 이 백성을 사로잡아 바벨론으로 옮겼더니.
솔로몬 성전 착공 BC 966년(왕하 6:1), 완공 BC 959년(왕상 6:38) 스룹바벨 성전 착공 BC 518년경, 완공 20년 후
에스라 5:13-15 / 바벨론 왕 고레스 원년에 고레스왕이 조서를 내려 하나님의 이 전을 건축하게 하고. 또 느부갓네살의 예루살렘 하나님의 전 속에서 금, 은 기명을 옮겨다가 바벨론 신당에 두었던 것을 고레스왕이 그 신당에서 취하여 그 세운 총독 세스바살이라 이름한 자에게 내어주고. 일러 가로되 너는 이 기명들을 가지고 가서 예루살렘 전에 두고 하나님의 전을 그 본처에 건축하라.
빌립보서 4:6-7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오늘의 기도
모든 염려를 온전히 주님께 맡겨버리게 하옵소서!
8월 20일(금) 에스라 4장 / 홀로 건축하리라(3절)
♦ 오늘 읽어야 할 말씀 : 에스라 4:1∼24 ♦ 묵상을 위한 주제 : 홀로 건축하리라(3절) ♦ 성구 : 스룹바벨과 예수아와 기타(其他) 이스라엘 족장(族長)들이 이르되 우리 하나님의 전(殿)을 건축(建築)하는데 너희는 우리와 상관(相關)이 없느니라 바사 왕(王) 고레스가 우리에게 명(命)하신대로 우리가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를 위(爲)하여 홀로 건축(建築)하리라.
바벨론 포로 생활을 마치고 바사 왕 고레스의 칙령에 따라 예루살렘으로 돌아온 백성들에게 포로로 붙잡혀 가지 않고 고토 예루살렘에 남아 있던 백성들이 찾아와서 성전을 건축하는 일에 함께 참여하겠다고 제안합니다.
이때 총독 스룹바벨과 대제사장 여호수아 그리고 각 족장들은 성전을 건축하는 일에 그들이 참여를 거부하여 말하기를 “홀로 건축할 것” 이라고 합니다.
좋은 뜻으로 성전 건축에 참여하려던 사람들은 이와 같은 반대 의견에 반발하여 페르시아 왕과 관리들에게 뇌물을 제공하고 노골적으로 성전 건축하는 것을 훼방하게 됩니다.
성전 건축에 참여할 것을 반대한 이유는 대부분의 사회 지도층 사람들은 모두 포로로 붙잡혀 갔고 예루살렘에는 천한 백성들만 남겨 놓았습니다(왕하 24:14∼16).
세월이 지나면서 고토 예루살렘에 남아 있던 사람들은 이방 사람들의 종교와 생활 풍속에 영향을 받아 신앙의 순수성과 유대 혈통의 순수성을 잃어버리고 말았습니다(스 9:1∼2).
이러한 사람들의 제안이라고 거부하므로 성전의 거룩성을 지키려고 했던 것입니다.
물질적인 지원과 도움을 받는 것을 거부한 까닭은 예루살렘에 세워질 성전은 순수한 믿음에 의해서 거룩한 방법으로 건축하는 것이 옳다고 판단한 것입니다.
물질이 풍성하면 모든 일을 쉽게 진행할 수 있는 자본주의 세상에서 신앙의 순수함을 유지하려는 모습을 생각하며 오늘날도 그리스도인들이 철저하게 세상의 소금과 빛으로 드러나야 하겠습니다.
소금은 다른 물체에 들어가 그 형체를 완전히 녹여 부셔지고 흔적조차 없어집니다.
빛은 어둠 속에 들어가 순식간에 어둠을 몰아내고 모든 것들이 분명하게 드러나도록 하고 빛은 드러나지 않습니다.
쉽고 빠른 길이 좋은 것이 아니라 비록 어렵고 느릴지라도 성경적인 방법에 따라 순종하는 믿음의 길을 선택하므로 동기와 과정과 결과가 하나님이 인정하고 모든 사람들에게 본이 되며 덕이 되는 길을 선택해야 하겠습니다.
오늘도 믿음으로 승리하는 거룩한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 찬양 / 어두움 후에 빛이오며
예수 내 구주! 예수 내 생명! 예수 내 권세!
에스라 4:3
스룹바벨과 예수아와 기타 이스라엘 족장들이 이르되 우리 하나님의 전을 건축하는데 너희는 우리와 상관이 없느니라 바사 왕 고레스가 우리에게 명하신대로 우리가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를 위하여 홀로 건축하리라 하였더니.
(현대인의 성경) "우리가 단독으로 건축하겠소"
에스라 4:1-2
유다와 베냐민의 대적이 사로잡혔던 자의 자손이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를 위하여 전을 건축한다 함을 듣고. 스룹바벨과 족장들에게 나아와 이르되 우리로 너희와 함께 건축하게 하라. 우리도 너희 같이 너희 하나님을 구하노라 앗수르 왕 에살핫돈이 우리를 이리로 오게한 날부터 우리가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노라.
하나님께 제사를 드렸다고 하는 사람들이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를 위하여 전을 건축한다는 소문을 듣고 찾아와서 함께 참여하겠다고 합니다.
그러나 스룹바벨과 여호수아는 그들의 제안을 거부합니다. 왜 거부했을까요?
에스라 4:4-5
이로부터 그 땅 백성이 유다 백성의 손을 약하게 하여 그 건축을 방해하되. 바사 왕 고레스의 시대부터 바사 왕 다리오가 즉위할 때까지 의사들에게 뇌물을 주어 그 경영을 저희하였으며.
에스라 4:24
이에 예루살렘에서 하나님의 전 역사가 그쳐서 바사 왕 다리오 제 이년까지 이르니라.
잠언 28:10
정직한 자를 악한 길로 유인하는 자는 스스로 자기 함정에 빠져도 성실한 자는 복을 얻느니라.
오늘의 기도
굳건한 신앙으로 세상 유혹을 이기게 하옵소서!
8월 19일(목) 에스라 3장 / 여호와의 전 지대(10절)
♦ 오늘 읽어야 할 말씀 : 에스라 3:1∼13 ♦ 묵상을 위한 주제 : 여호와의 전 지대(10절) ♦ 성구 : 건축자(建築者)가 여호와의 전(殿) 지대(地帶)를 놓을 때에 제사장(祭司長)들은 예복(禮服)을 입고 나팔을 들고 아삽 자손 레위 사람들은 제금(提琴)을 들고 서서 이스라엘 왕(王) 다윗의 규례(規例)대로 여호와를 찬송(讚頌)하되.
“여호와의 전 지대”란 성전을 재건할 기초를 말합니다. 바벨론 포로생활 70년 만에 예루살렘으로 돌아왔던 귀환 백성들이 드디어 칠월에 모두 모여 하나님의 단을 만들고 모세의 율법에 따라 아침과 저녁으로 번제를 드리며 “초막절”을 지킵니다.
칠월이란 유대 민족의 중요한 절기가 시작됩니다. 칠월 초하루는 “신년(로쉬 하 샤나)” 칠월 십일 “대속죄일(욤 키퍼)”
이와 같은 율법의 가르침에 따라 칠월에 하나님의 단을 만들었습니다.
율법은 25세 이상의 레위 사람들이 일을 시작하도록 규정하였으나(민수기 8:24) 봉사할 인원이 부족하여 20세 이상의 레위 사람들을 세워 감독하게 합니다(8절).
성전 재건의 지대를 놓을 때 모든 백성들이 여호와를 찬송하며 즐거이 찬양하였으나 노인들은 첫 성전(솔로몬 성전)을 보았기 때문에 대성통곡합니다(12절).
바벨론 포로 생활 70년은 성전이 없는 생활을 하며 하나님께 단을 쌓았으나 이제는 고레스 왕의 칙령에 따라 예루살렘으로 돌아와서 성전을 재건한다는 기쁨과 처음 성전과 비교할 때 초라한 모습에 통곡하는 어른들도 있었습니다.
사랑하는 믿음의 사람들이여! 팬데믹으로 인하여 거의 1년 6개 월동안 교회에서 모여 함께 예배할 수 없었던 우리들이 다시 모여 예배하는 그 날에 어떤 모습으로 예배했습니까?
성전을 재건하는 감격의 마음이 느껴집니까? 아직도 예배자의 감격과 예배자의 삶이 회복되지 않았다면 속히 예배의 감격과 예배자의 거룩한 삶을 회복해야 하겠습니다.
“어리석은 자여 오늘 밤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이러한 주님의 음성이 들려오기 전에 날마다 예배자의 거룩한 삶이 이 세상을 흔들어 하나님의 마음을 함께 나눌 수 있는 기쁨과 감사와 찬양이 넘쳐나는 세상으로 세워가야 하겠습니다.
“예수 한국 복음 통일을 위하여!” “예수 천국 복음 천하만국을 위하여!”
♪ 찬양 / 빛나고 높은 보좌와
예수 내 구주! 예수 내 생명! 예수 내 권세!
에스라 3:10
건축자가 여호와의 전 지대를 놓을 때에 제사장들은 예복을 입고 나팔을 들고 아삽 자손 레위 사람들은 제금을 들고 서서 이스라엘 왕 다윗의 규례대로 여호와를 찬송하되. 아멘
에스라 이름의 의미는 "여호와께서 도우신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무엇을 도와주실까요? 어제 수요성서학당에서 "이 시대에 예수를 믿는다는 것"에 대한 강좌에 참여했던 성도들이 이구동성으로 "마음이 무겁다!"고 하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이 시대에 예수를 어떻게 믿어야 하는가? 뚜렷한 정답은 없습니다. 그러나 문제를 알고 기도할 때 하나님의 도우심을 기대할 수 있는 것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주전 537년, 페르시아의 고레스왕의 칙령으로, 바벨론에서 포로생활을 하던 이스라엘 백성들은 마침내 예루살렘으로 돌아올 수
있었습니다.
에스라 1-6장은 1차로 돌아온 사람들 에스라 7-10장은 2차로 돌아온 사람 느헤미야 1-13장은
3차로 돌아온 사람들에 대해서 증거합니다.
바벨론 포로생활에서 돌아온 사람들은 일반 회중이 42,360명, 남녀 종이 7,337명, 노래하는
남녀가 200명 등 모두 49,897명(약 5만명)이었습니다.
그들은 고국으로 돌아와 자신들의 고향 땅에서 회복과 안식의 시간을
가졌습니다. 그러다가 귀환한 7월에 예루살렘으로 모였습니다. 7월은 이스라엘의 종교력으로 태양력으로는 9-10월
경입니다.
그들이 예루살렘으로 ‘일제히’ 모였습니다. ‘일제히’라는 문자적인 뜻은 ‘한 사람처럼’ 입니다. 포로에서 돌아온 이스라엘
백성들은 한 사람이 움직이는 것처럼 예루살렘으로 모였습니다.
무교절과 칠칠절과 더불어 이스라엘 백성들의 3대 명절 중에 하나인
초막절을 7월 15일일부터 일주일동안 지켰습니다. 그 절기를 지키기 위해 한 사람같이 예루살렘으로 모였던 것입니다. 마치
추석명절에 많은 사람들이 일제히 움직이듯이 그렇게 움직였습니다.
이렇게 예루살렘으로 모인 것은 수십년 동안 바벨론에서 포로생활을 하다가 돌아와 처음 맞는 초막절이었습니다.
에스라 3:1
이스라엘 자손이 그 본성에 거하였더니 칠월에 이르러 일제히 예루살렘에 모인지라.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칠월 : 디슬리 월(양력 9-10월) 일제히 : 한 사람 처럼
7월(디슬리 월) 양력 9-10월
7월 1일 / 나팔절(로슈 하샤나) 신년, 새해
7월 10일 / 속죄일(욤 키퍼)
7월 15일 / 초막절(수콧)
에스라 3:8
예루살렘 하나님의 전에 이른지 이년 이월에 스알디엘의 아들 스룹바벨과 요사닥의 아들 예수아와 다른 형제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과 무릇 사로잡혔다가 예루살렘에 돌아 온 자들이 역사를 시작하고 이십 세 이상의 레위 사람들을 세워 여호와의 전 역사를 감독하게 하매.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이월 : 시브월(왕상 6:1) 솔로몬 성전 건축 시작일
에스라 3:11-12
서로 찬송가를 화답하며 여호와께 감사하여 가로되 주는 지선하시므로 그 인자하심이 이스라엘에게 영원하시도다 하니 모든 백성이 여호와의 전 지대가 놓임을 보고 여호와를 찬송하며 큰 소리로 즐거이 부르며.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과 족장들 중에 여러 노인은 첫 성전을 보았던고로 이제 이 전 지대 놓임을 보고 대성 통곡하며 여러 사람은 기뻐하여 즐거이 부르니.
에스겔 18:30
나 주 여호와가 말하노라 이스라엘 족속아 내가 너희 각 사람의 행한대로 국문할찌라 너희는 돌이켜 회개하고 모든 죄에서 떠날찌어다 그리한즉 죄악이 너희를 패망케 아니하리라.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오늘의 기도
회개의 기도가 성도들의 삶의 현장과 각 교회에서 크게 울려퍼지게 하옵소서!
8월 18일(수)
에스라 2장 / 본 성에 이른자(3절)
♦ 오늘 읽어야 할 말씀 : 에스라 2:1∼70
♦ 묵상을 위한 주제 : 본성에 이른 자(1절) ♦ 성구 : 옛적에 바벨론 왕(王) 느부갓네살에게 사로잡혀 바벨론으로 갔던 자(者)의 자손(子孫) 중에서 놓임을 받고 예루살렘과 유다 도(道)로 돌아와 각기(各其)
남 유다 왕국이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에게 무너지고 많은 유능한 인재들이 바벨론으로 포로가 되어 붙잡혀 갔습니다.
에스라 2장은 포로가 되었던 사람들이 예루살렘으로 돌아온 사람들의 이름을 소개합니다. 이때 돌아온 사람들은 모두 42,360명이라고 합니다. 또한 남종과 여종이 7,337명 그리고 노래하는 남녀 200명도 함께 돌아왔습니다.
말은 736마리, 노새 245마리, 낙타 435마리, 나귀 6720마리로 총 8,136 마리였습니다.
그런데 같은 민족이 아닌 낯선 나라 사람들의 생소한 이름을 읽는 것도 불편합니다. 왜 이렇게 불편한 이름들을 소개하셨을까요?
생소한 많은 사람들의 이름을 소개한 이유가 무엇일까요?
첫째, 하나님은 돌아온 사람들을 기억합니다.
훗날 하나님 나라에 들어갔을 때 수많은 사람들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모두 생소한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세상에서 생소했던 사람들이 서로 만나는 순간 정확하게 그 이름을 알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 좋은 예가 마태복음 17장 변화산에서 제자들이 모세와 엘리야를 이전에 본 적도 없었는데 한 눈에 알아볼 수 있었던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둘째, 이름을 기록으로 남겨주신다.
성경은 주의 백성들의 이름이 기념책에 또는 생명책에 기록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말 3:16, 시 69:28, 계 20:15, 13:8).
이 땅에서 행하는 모든 것들이 정확하게 기록으로 남게 될 것입니다.
셋째, 선봉자가 있습니다.
스룹바벨과 예수아와 느혜미야와 스라야와 르엘라야와 모르드개와 빌산과 미스발과 비그왜와 르훔과 바아나 등과 함께 나온 이스라엘 백성이라고 합니다(2절).
익숙한 이름도 있지만 생뚱맞은 이름도 있습니다. 귀환하는 이스라엘에게 앞장서서 걸어가는 지도자들이 있었음을 알려주십니다. 누군가 앞서 걸어갈 때 그 뒤를 따르게 될 것입니다.
이러한 이름을 읽으면서 누군가는 이렇게 결단할 수 있습니다. “내가 먼저 달려가는 사람이 되겠다!”
하지만 이것보다 더 중요한 교훈은 앞서 걸어가셨던 예수님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넷째, 그룹으로 나누셨다.
이스라엘은 약속의 백성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이 백성들을 특정한 기준에 따라 나누어 계수합니다. 예를 들면 조상이 누구였는가? 역할이 무엇이었는가? 이름도 인원도 상황도 다른 그룹들도 등장합니다. 이러한 구절들을 보며 교회가 공동체 된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배워야 합니다. 모두가 같은 모습이 될 필요도 없고 그래서도 안 됩니다. 한 몸에 손이 100개만 있는 것을 좋게 보기는 어렵습니다. 다양한 부서와 각기 다른 역할이 있어야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약속의 땅을 향해 돌아간다는 공통점이 있었기에 모두가 각자의 자리에 도착할 수 있었습니다.
다른 그룹들을 비난하면서 자기 그룹이 가장 최고라고 자랑하거나 주장하지 않는다면 모두가 서로 같은 목표와 공통점을 갖는 공동체를 이루며 목적지를 향하여 나가야 합니다.
다섯째, 신분 확인이 어려운 사람들
그들의 조상의 가문과 선조가 이스라엘에 속하였는지 밝힐 수 없었다고 분류된 사람들이 소개됩니다(59∼63).
비록 함께 긴 여정을 함께 하며 예루살렘으로 돌아왔지만 제사를 위한 일에 종사할 수 있는 신분이라고 확정될 때까지는 지성물을 먹지 말라는 제약이 제시됩니다.
그러나 그들도 돌아온 사람의 무리에 속하여 공동체의 일원으로 인정하였다고 합니다.
사랑하는 믿음의 동지들이여! 나는 공동체의 일원으로서 부끄러움이 없는 일군으로 살아가고 있었는지요? 만일 부끄러운 삶이 있었다면 그 일에서 떠나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순결하고 온전한 예배자로서 거룩한 공동체를 세워가는 일에 머릿돌처럼 귀중하게 쓰임 받는 지체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 찬양 / 거룩 거룩 거룩 전능하신 주님
예수 내 구주! 예수 내 생명! 예수 내 권세!
에스라 2:1
옛적에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에게 사로잡혀 바벨론으로 갔던 자의 자손 중에서 놓임을 받고 예루살렘과 유다 도로 돌아와 각기 본성에 이른 자. 아멘
* 본성(이르. ʽîyr) עִיר 도시, 성, 성읍, 고을, 도성 귀환 여정 : 16,00km(약 120일) / 42,360명(64절) 포로 된 사람들 : 200-300만 명 / 2-3% 귀환
1. 역사적 배경은? 페르시아 시대 / 포로 기 이후
2. 에스라서의 목표는? 회복(하나님, 성전, 제사)
3. 에스라서에 대한 예언적 배경은?
이사야 44:28, 고레스(이름을 예언)
고레스에 대하여는 이르기를 그는 나의 목자라 나의 모든 기쁨을 성취하리라 하며 예루살렘에 대하여는 이르기를 중건되리라 하며 성전에 대하여는 이르기를 네 기초가 세움이 되리라 하는 자니라.
* 이사야 선지자가 활동하던 시기는 기원전 8세기 이었다. 그러므로 이사야의 예언은 대략 200년 전에 선포한 것이었다.
예레미야 29:10, 칠십 년이 차면(햇수를 예언)
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바벨론에서 칠십년이 차면 내가 너희를 권고하고 나의 선한 말을 너희에게 실행하여 너희를 이곳으로 돌아오게 하리라.
4. 귀환은 제2의 출애굽 사건(에스라 1장)
에스라 2:2
곧 스룹바벨과 예수아와 느헤미야와 스라야와 르엘라야와 모르드개와 빌산과 미스발과 비그왜와 르훔과 바아나등과 함께 나온 이스라엘 백성의 명수가 이러하니.
* 귀환 공동체의 지도자들 * 에스라 2장 / 제2의 아브라함 사건(창세기 12:1)
창세기 12:1-2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케 하리니 너는 복의 근원이 될찌라.
스룹바벨 : (뜻) 바벨론의 자손, 바벨론에서 태어났다
1. 여호야긴 왕의 손자(마 1:12, 눅 3:27) 2. 스알디엘의 아들(스 3:2, 학 1:1) 3. 브다야의 아들(스알디엘의 형제)(대상 3:19) 4. 세스바살의 조카(스 1:11) 에스라 2장의 족보 내용을 구분
2:2, 지도자 그룹 2:3-20, 가족(3절. 바로스 자손) 2:21-35, 지역(21절. 베들레헴 사람) 2:36-42, 사역자(36절. 제사장들) 2:43-54, 성전의 종들(43절. 느디님 사람) 2:55-58, 솔로몬 신복 2:59-63, 평민들(족보가 분명하지 않은 사람)
히브리서 11:13-15 이 사람들은 다 믿음을 따라 죽었으며 약속을 받지 못하였으되 그것들을 멀리서 보고 환영하며 또 땅에서는 외국인과 나그네로라 증거하였으니. 이같이 말하는 자들은 본향 찾는 것을 나타냄이라. 저희가 나온바 본향을 생각하였더면 돌아갈 기회가 있었으려니와.
오늘의 기도
돌아갈 내 고향을 바라보는 신앙
8월 17일(화) 에스라 1장 / 전을 건축하라(3절)
♦ 오늘 읽어야 할 말씀 : 에스라 1:1∼11 ♦ 묵상을 위한 주제 : 전을 건축하라(3절) ♦ 성구 :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참 신(神)이시라 너희 중에 무릇 그 백성(百姓)된 자(者)는 다 유다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서 거기 있는 여호와의 전(殿)을 건축(建築)하라 너희 하나님이 함께 하시기를 원(願)하노라.
선지자 예레미야의 예언대로 바벨론 70년의 포로 생활은 고레스 왕의 칙령에 의하여 유다 백성들은 예루살렘으로 돌아오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예레미야를 통해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남 유다는 멸망당하고 바벨론으로 끌려가 70년 동안 그들을 섬기게 될 것이며(렘 25:11∼12), 70년 후에는 약속의 땅으로 돌아오게 할 것이다(렘 29:10)”
주전 605년 이스라엘 백성들은 바벨론의 포로로 끌려갔습니다. 이것을 “1차 포로”라고 합니다. 이때 끌려간 사람들 중에 “다니엘”도 포함됩니다.
1차 포로를 시작으로 주전 587년 남 유다가 멸망할 때까지 3차례에 걸쳐 이스라엘 백성들은 바벨론 포로로 끌려갔습니다.
주전 538년 “고레스”에 의해 바벨론 제국은 무너졌고, 바벨론을 점령한 고레스는 현재의 “이란”인 페르시아 제국을 세웠습니다.
‘고레스’는 제국의 임금으로 즉위했던 해에 바벨론으로 끌려온 포로들을 고국으로 귀환시키라는 조서(칙령)를 전국 각지에 내렸습니다.
이에 따라 주전 536년 유다 백성들은 예루살렘으로 귀환했는데, 이때 이루어진 포로 귀환을 “1차 포로 귀환” 이라고 합니다.
이 사건은 하나님께서 말씀하신대로 70년 만에 이루어진 일입니다(605년-536년=70년).
페르시아 왕 고레스는 “하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나에게 이 땅에 있는 모든 나라들을 주셨다. 여호와께서는 나에게 유다의 예루살렘에 성전을 건축하라”고 하셨다며 유다 백성들을 예루살렘으로 돌아가라고 합니다(2절).
“전을 건축하는 것”은 포로 생활에서 돌아온 백성들이 자원하여 진행한 사건이 아니라 페르시아 왕의 칙령에 의해서 시작된 것입니다.
이것을 “하나님의 섭리”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섭리’는 하나님의 통치하고 다스린다는 것을 말합니다.
만일 포로들이 예루살렘으로 돌아가서 성전을 건축하겠다고 주장한다면 이것은 반란에 해당합니다. 그러나 포로를 지배하는 새로운 왕의 명령에 의해서 성전을 재건하게 하신 것은 하나님의 백성일지라도 생각조차 할 수 없었던 사건입니다.
그러나 선지자 예레미야는 이러한 사건이 일어날 것이라고 예언한 것입니다.
선지자적 통찰력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것이 분명한 증거라고 하겠습니다.
사랑하는 믿음의 사람들이여! 자유대한민국에서 진행되는 현실을 예레미야와 같은 선지자적인 안목을 갖지 못하면 공산화 작업이 은밀하게 진행되는 것을 어느 누구도 예측할 수 없습니다.
믿음이란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고 그 말씀을 삶에 적용하는 것입니다.
말씀을 바르게 읽고 깨닫는 지혜를 기도해야 합니다. 그리고 말씀을 바르게 가르치고 지도하는 목회자들이 도처에 세워지기 위하여 기도해야 합니다.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참 신(神)이시라 너희 중에 무릇 그 백성(百姓)된 자(者)는 다 유다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서 거기 있는 여호와의 전(殿)을 건축(建築)하라 너희 하나님이 함께 하시기를 원(願)하노라.”(3절)
오늘도 진리의 말씀을 굳게 붙잡고 믿음으로 가정과 교회와 나라와 민족을 세우는 일에 내 몫을 잘 감당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부탁합니다.
♪ 찬양 / 어느 민족 누구게나
예수 내 구주! 예수 내 생명! 예수 내 권세!
BC 722년 북 이스라엘 멸망(앗수르)
BC 586년 남 유다 멸망(바벨론) - 유다가 이스라엘 멸망 후 136년 후에 망하는 것은 그 기간만큼 깨닫고 뉘우칠 기회를 허락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유다는 깨닫지 못하고 무너지고 말았습니다.
바벨론 1차 침략 BC 606년 여호와김 / 다니엘과 세 친구들의 포로
바벨론 2차 침략 BC 597년 여호야긴 / 에스겔 포로 바벨론 3차 침략 BC 586년 시드기야 / 멸망, 성전과 성벽 파괴
선지자 예레미야의 예언 / 70년 포로 생활 후 돌아오게 돌 것이다.
BC 539년 바벨론 멸망(바사, 페르시아 현재 이란) -바벨론의 포로가 되었던 남 유다 백성들은 자연적으로 바사(베르시아)의 포로가 되어야 했습니다. 바사 왕 고레스의 칙령(勅令)에 의거 포로들은 본국으로 돌아가라고 하였다.
1차 포로 귀환 BC 536년 스룹바벨 총독으로 임명, 여호수아 대제사장 2차 포로 귀환 BC 467년 에스라 3차 포로 귀환 BC 447년 느헤미야
포로 귀환의 모든 역사를 담은 말씀이 "에스라, 느헤미아, 학개, 스가랴"입니다. 에스라와 느헤미야서는 1, 2차 포로귀환을
이야기하며 그 가운데 성전을 재건하는 가운데 영적인 각성이 일어나는 것을 말씀합니다. 학개, 스가랴서는 3차 귀환때 성벽과 성전이 재건되며
그들이 영적인 회복을 이루어 동류되는 과정을 기록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예레미야 선지자를 통해 이같은 심판을 말씀하시며 포로로 잡혀갈 것과 성벽이 무너지고 성전이 파괴될 것이라 하였을 때
이스라엘 백성들뿐 아니라 남유다의 왕들은 그 말을 듣지 않았습니다.
예루살렘을 떠나면 큰 일이 나는 줄 알았던 그들은 성전이
절대 무너지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하나님이 예레미야를 통해 말씀하신 것을 믿지 못하고 끝까지 예루살렘에 남아있다가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였습니다.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들 또한 포로로 잡혀서 종살이 하는 시간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시간 가운데
오히려 하나님의 뜻을 알게 되고, 이스라엘에 있을 때 보다 더욱 더 하나님께 다가갈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곳에서 회당을 지어
안식일 모임, 절기 모임을 지니고 하나님의 말씀과 뜻을 나누었습니다. 그리하여 70년이 지난 후,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포로된
자리에서 다시 귀환시키십니다.
하나님의 방법으로 귀환을 시키십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께서 고레스왕의 마음을 감동시켜 그가
하나님이 온 세상의 유일한 신임을 인정하고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여 그 주권을 가진 하나님이 시키시는 대로 이스라엘을 다시
예루살렘으로 복귀시키는 것입니다(에스라 1:1~2)
이방의 왕이 이같은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고 고백하는 것은 하나님이 그의 마음을 만지지 않으시고는 불가능한 일입니다. 당시
포로들은 온갖 노역에 궃은 일을 할 뿐 아니라 노동력의 근간을 이루는 중요한 자원이었습니다. 그런 그들을 해방시키는 것은
나라적으로 손실이 크고 바벨론의 백성들에게도 불편이 상당한 일이었을 것입니다.
그 모든 것을 감수하고 귀환을 시키는 왕의 명령과 그것이 3차에 걸쳐 순차적으로 이루어진 것은 하나님의 방식으로 이루어진 은혜스러운 방법이었던 것입니다.
70년이란 시간은 짧은 시간이 아닙니다. 우리나라만 해도 일제 치하에 있었던 기간이 이보다 짧은 36년이었으나 아직도 그 아픔을
간직하고 있으며 여러 전쟁의 피해자들과 희생자들이 아직도 그것을 증언하며 고통스러워하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70년의 시간동안 온갖 힘든 일이 있었을 것입니다. 아픔의 시간이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 시간을 통해 그들은
하나님께로 나아올 수 있었고 그 아픔이 결국은 연단과 훈련을 통한 축복의 통로가 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일을 반드시 성취하십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반드시 이루십니다. 우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말씀과 순종하는
우리의 삶에 하나님께서는 각자 맡은 사명과 소명을 주시고 우리를 통하여 반드시 그것을 성취 시키십니다. 그 성취의 과정 속에
우리에게 각자 주신 분복을 누리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 분복을 누리는 우리는 세상이 어둠으로 간다고 해도, 우리 앞에 여러
상황들이 일어난다고 해도 그 분복을 누리며 은혜 가운데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에스라 선지자는 고레스 왕이 취한 외교정책을 신학적 관점 즉 하나님의 시각으로 보고 있습니다. 고레스가 이런 결정을 내린
것은 그가 취한 외교정책의 결과이기 이전에 하나님께서 고레스 왕의 마음을 움직이셨기에 가능한 일이라고 설명합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세상 사람들과 바로 이 점에서 구별됩니다. 역사를 단순한 인과관계로만 이해하려고 하는 세상 사람들과는 달리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세상 역사를 하나님의 섭리의 관점에서 이해하고 바라보아야 합니다.
1절입니다.
“바사 왕 고레스 원년에 여호와께서 예레미야의 입을 통하여 하신 말씀을 이루게 하시려고 바사 왕 고레스의 마음을 감동시키시매 그가 온 나라에 공포도 하고 조서도 내려 이르되”
에스라는 바사 왕 고레스 원년에 여호와께서 예레미야의 입을 통해 하신 말씀을 이루게 하시려고 바사 왕 고레스의 마음을 감동시켰다고
설명합니다.
예레미야의 입을 통해 하신 말씀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벨론 포로로 잡혀가겠으나 다시 예루살렘으로 돌아오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고레스 왕이 이전 두 제국의 통치자들과 달리 피정복민에 대하여 관용정책을 취하게 된 것은 하나님께서 그의 마음을 움직이신
결과였습니다. 고레스 왕은 자신의 정치적 판단에 따라 관용정책을 시행하였지만, 그러한 정치적 판단을 내릴 수 있게 한 분은
하나님이셨습니다.
사실 고레스가 역사의 무대에 등장할 것과 그에 의해 이스라엘이 해방될 것은 이미 그가 바사 제국의 왕이 되기 160년 전에 이사야 선지자에 의해 예언된 일입니다.
이사야 44장 28절입니다.
“고레스에 대하여는 이르기를 내 목자라 그가 나의 모든 기쁨을 성취하리라 하며 예루살렘에 대하여는 이르기를 중건되리라 하며 성전에 대하여는 네 기초가 놓여지리라 하는 자니라”
이사야 선지자는 고레스의 이름까지도 분명하게 기록해 두었습니다. 그렇다면 이러한 사실이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는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 역사의 주관자가 되신다는 것입니다. 세상의 역사가 부와 권력을 가진 몇몇 사람들에 의해 움직이는 것 같이 보이지만,
실은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잠언 16장 9절입니다.
“사람이 마음으로 자기의 길을 계획할지라도 그의 걸음을 인도하시는 이는 여호와시니라”
인간의 모든 마음의 생각과 계획까지도 하나님께서 인도하신다고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이 세상 역사를 주관하시는 분이 하나님이심을
믿음으로 고백하는 자들이 바로 신앙인입니다. 때때로 인간의 생각과 판단에 비추어 인정할 수 없는 일들이 일어나기도 합니다. 그러나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듯 우리가 알 수 없는 하나님의 섭리 안에서 이 세상 역사는 진행하고 있습니다.
오늘 이 새벽에 우리가 기억하고 묵상해야 할 말씀은 이 세상 역사를 통해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기 위해 힘써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뿐만아니라 하나님께서 모든 역사의 주인이 되시기에 그 분의 말씀과 뜻에 순종하는 삶을 사는 것이야 말로 인생의 행복이며 참
기쁨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1. 이스라엘의 역사를 기록하고 있는 역사서(사무엘, 열왕기, 역대기)가 공통적으로 전하는 메시지는 무엇입니까?
2. 이스라엘 왕국이 멸망하고 다시 회복되는 과정을 통해 하나님은 어떤 분이란 생각이 드십니까?
3. 고레스가 이 땅에 등장하기 160년 전에 이미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 예언되었다는 사실이 우리에 주는 메시지는 무엇입니까?
4. 세상 역사를 주관하시는 분이 하나님이라는 믿음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볼 때, 오늘 내 삶 속에서 일어나는 크고 작은 일들이 어떻게 보여집니까?
학자 겸 제사장인 지도자 - 에스라
에스라의 인적사항
1. 에스라의 뜻 : ‘여호와가 도움 2. 스라야의 아들(스 7:1) 3. 대제사장 아론의 16대 손 4. 학자겸 제사장 5. 제2차 포로 귀환 때 유다인을 인솔한 지도자 중 한 사람
시대적 배경
남 유다
왕국이 멸망(BC 586)한 후 바벨론 포로생활 70년이 지났다. 바벨론을 멸망시키고 바사제국이 등장하였다. 바사왕
고레스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옛 고국으로 돌아갈 수 있도록 대대적인 귀환 명령이 내려졌다.
1차 포로 귀환이 있은 후 바사 왕
아닥사스다 1세(BC 464-424년)가 다스릴 때 2차 포로귀환(BC 444)을 시도하게 되는데 이때 포로들을 이끌었던
인물이 에스라이다.
에스라의 특징
BC
722년에 앗수르 제국의 살만에셀에 의해 북 이스라엘 멸망
BC 586년에 바벨론 제국의 느부갓네살에 의해 남 유다가
멸망 포로로 끌려갔던 수많은 유대인들은 포로지에서 70년의 세월이 지난 이후에 새로운 변화가 일어났다.
BC 559년바사 고세르 왕에 의해 바벨론 멸망
바벨론을 점령한
바사제국의 초대왕 고레스에 의해 B.C 536년에 1차 포로귀환 인도자 : 스룹바벨, 예수아
아닥사스다 왕 1세(에스더의 남편이었던 아하수에로 왕의 아들) 때에 2차 포로 귀환 BC 457년 인도자 : 에스라이다.
그러므로 당시에 시대적 상황에서 에스라는 아주 훌륭한 지도자이며 그가 미친 영향력은 매우
컸다.
에스라는 어떤 인물인가?
1. 에스라는 뛰어난 학자이며 제사장이었다.
에스라라는
인물은 에스라서의 7장에서 처음으로 언급되어 진다. 그런데 에스라를 소개할 때 제일 먼저 에스라가 아론의 혈통이라는 것을
강조한다. 에스라의 족보를 언급하면서 결국 대제사장 아론의 16대 손이라는 것을 강조한다. 실제적으로 에스라는 제사장의 신분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이다.
에스라는
자신의 혈통의 정통성을 강조하고 있다. 그러면서 에스라에게 붙는 별칭이 있는데 이는 에스라가 학자였다는 것이다. 지금까지 어떤
제사장을 언급해도 학자임을 강조한 적이 없었다. 그런데 유독 에스라에게만은 학자라는 별칭이 붙게 되었다. 그것도 모세의 율법에
익숙한 학자라는 것이다. 에스라는 하나님의 말씀에 아주 익숙한 다른 말로 말하면 율법에 능통한 학자였다.
에스라 7:12 모든 왕의 왕 아닥사스다는 하늘의 하나님의 율법에 완전한 학자 겸 제사장 에스라에게
당시에
아닥사스다 왕도 에스라에 대해서 언급하기를 하나님의 율법에 완전한 학자겸 제사장이라고 말하고 있다. 에스라가 특별한
호칭을 받게 된 이유는 에스라의 말씀에 대한 남다른 사랑이 있음을 엿볼 수 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멸망하게 된 원인 중에
하나도 하나님의 말씀을 제대로 선포하는 자가 없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시대적으로 암울했던 시기를 돌이켜 보면 거짓 선지자들이
난무했고, 아첨하기에 바빴고 자기의 실속을 챙기기에 바빴다. 그리고 권력을 가진 자의 비위를 마치기에 급급했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을 제대로 알 수 없었으며 하나님의 말씀을 제대로 해석해서 알려 주는 자들이 없었던 것이다. 이것은 참으로 슬픈 현실이었다.
에스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참으로 사랑하는 사람이었다. 그리고 그 말씀을 연구하는 사람이었다.
이것이
에스라의 됨됨이다. 그는 포로지에서 더욱 하나님의 말씀가운데 가까이 나아간 것이다. 사실 포로지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수많은
딜레마에 휩싸여 있었을 것이다. 왜 우리 나라가 망했을까? 하나님이 지키시는 나라가 왜 망한것인가? 하나님은 과연 살아 계신
것인가? 하는 의문점을 가지고 있었을 것이다. 우리에게 진정한 희망이 있는 것인가? 하는 회의적인 생각들이 가득했다. 그러기에 이
시점에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기갈이 더욱 강했을 것이다. 이러한 시기에 에스라는 진정한 학자요. 제사장이었던 것이다.
교훈
우리는
하나님 말씀을 가까이 해야 한다. 구약시대에는 하나님의 말씀이 희귀했다. 당시에는 인쇄술이 없었기에 오늘날 처럼 손 쉽게
하나님의 말씀을 대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당시에 지도자들이 제사장들이 말씀을 가르치면 그것이 곧 하나님의 말씀이었다.
그런데 오늘날은 어떤가? 집집마다 성경책이 없는 집이 없다. 또한 글을 모르는 사람이 거의 없다. 그런데도 하나님의 말씀을 가까이
하지 않는 다면 이는 참으로 어리석은 일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능력이 있다고 했다. 하나님의 말씀은 혼과 영과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며 우리의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한다고 했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를 교훈하고, 책망하고, 의로 교육한다. 하나님의 말씀은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하게 만듭니다.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습니다. 인생의 이정표가 되고, 살의 지침서가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말씀을 가까이 하고 말씀을 연구하는
사람들이 되어야 한다. 그리고 말씀대로 살려고 하고 말씀을 능히 가르치는 사람이 되어야 하겠다.
에스라는 아닥사스다 왕에게 인정받는 인물이었다.
에스라는
당시 바사제국에서 고위직에 있었을 것으로 추정이 된다. 왜냐하면 에스라는 왕의 신임을 얻고 있었기 때문이다. 에스라가 하나님의 율법에 완전한 학자겸 제사장으로 인정받게 되는데 누구에게 인정받고 있는가? 아닥사스다 왕에게 인정을 받고 있는
것이다.
아닥사스다왕은
에스라를 통해서 여러 이야기들을 들었을 것이다. 특히 에스라가 학자의 신분이고 제사자의 신분이었기에 이스라엘의 문화나 특성들,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섬기는 하나님에 대해서 물어 보았을 것이다. 그때 에스라의 대답은 거침이 없었을 것이다. 역사적으로
하나님이 어떻게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끌어 왔는지... 그리고 그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이스라엘 백성들이 왜 이렇게 비참하게
되었는지 등에 대해서 자세히 언급했을 것이다. 그러기에 아닥사스다 왕도 인정하는 인물이 된 것이다. 또한 에스라는 왕의 신임을
받는 자였다. 아닥사스다 왕이 볼 때 에스라는 믿고 신임할 수 있는 인물이었음에 틀림이 없다. 그 특징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2차 포로 귀환의 지도자로 삼음
아마도
에스라는 자기 민족에 대한 이야기를 왕에게 하고 나서 남은 포로들을 돌려 보내 달라고 간청했을 것이다. 그것이 가능한 것은
당시에 아닥사스다 왕은 모든 민족에 대해서 관대한 정책을 폈다. 그리고 각각의 모는 민족들이 자신이 섬기는 신들을 자유롭게
섬기도록 포용정책을 펴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시기에 에스라는 하나님을 섬기는 신앙이 어떠한 것인지를 주장했을 것이다.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은 예루살렘 성지가 있는데 그곳에 올라가서 하나님을 경배해야 한다고 했을 것이다.
하나님에게
경배하지 않게 되면 하나님의 징계는 상상을 초월한다고 했을 것이다. 어떤 나라든지 하나님이 노를 발하시면 바람 앞에
등불이요(풍전등호), 바람 앞에 티끌이요(풍전지진), 알을 쌓아 놓은 형국(누란지세)이 될 것이라는 했을 것이다.
이러한
간청을 들은 아닥사스다 왕은 에스라를 2차 포로 귀환의 지도자로 세우게 된다. 그래서 실제로 에스라는 아닥사스다 왕 7년 정월
초하루에 포로민들을 이끌고 바벨론을 출발하여 5월 초하루에 예루살렘에 도착하게 되었다. 얼마나 감격스러운 일인가? 에스라는 자기
민족을 이끄는 지도자로 인정을 받게 된 것이다.
에스라가 구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왕이 주었다.
에스라가 왕에게 요청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받았다고 한다. 이는 매우 보기 드문 일이다. 이는 아닥사스다 왕이 에스라를 얼마나 신임했는지 잘 알 수 있는 대목이다.
① 예루살렘에 올라갈 뜻이 있는 모든 자는 에스라와 함께 가도록 허락을 받음(7:13)
② 하나님께 예배하기 필요한 모든 은금과 예물을 가지고 가도록 허락을 받음(7:15-18)
③ 성전에 쓰일 물건이 필요하면 궁중창고에서 가져다가 쓰도록 허락을 받음(7:19-22)
④ 하나님의 성전에서 일하는 사람에게 조공, 관세, 통행세를 받지 못하게 함(7:24)
⑤ 에스라로 하여금 법관과 재판관을 세울 인사권과 사법권을 줌(7:25-26)
이러한
조치는 정말 파격적인 조치였다. 당시에 에스라가 가지고 있었던 권한이 얼마나 컸는지를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에스라는 총독정도의
권한을 가진 것이다. 이토록 아닥사스다 왕은 에스라를 신임했다. 아닥사스다 왕은 에스라로 하여금 팔레스타인 지역을 잘 관리해서
반란이 일어나지 않도록 지혜롭게 다스리게 한 것이다.
이처럼
에스라가 왕의 신임을 얻을 수 있었던 것은 에스라가 정직히 행한 것이다. 아닥사스다 왕에게 충성된 사람이었던 것이다. 자신의
상전에게 신임을 얻는 행위도 매우 중요하다. 상전의 마음을 시원케 하는 인물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에스라는 편법을 사용하거나
간계를 사용한 것이 아니다. 자신이 인기를 얻기 위해 모략을 꾸민 것이 아니다. 에스라는 그의 순수성과 진실성과, 성실성이
인정받은 것이다. 에스라가 섬기는 하나님이 참 하나님인줄 알게 했다는 것이다.
교훈
우리는 우리의 상관에게 인정받는 사람인가? 아니면 애물단지인가? 돌이켜 보아야 한다. 작은 구역 안에도 구역장의 마음을 시원케 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늘 구역장의 기도제목이 되는 사람이 있다.
각
부서에도 보면 무슨 일을 맞기면 아무 근심 걱정이 없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늘 근심이 되는 사람이 있습니다. 또한 무엇을 하던지
사사건건 트집을 잡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잘 따라주고 지지해주고 격려하며 힘을 주는 사람이 있음을 알아야 한다. 우리는 어떤
사람인가?
나는 상관에게 인정받는 사람인가? 아니면 애물단지인가? 우리의 인정이 우리의 순수성과, 진실성과 성실성에서 나오는 것인가? 아니면 아첨에서 나오는 것인가? 우리는 돌이켜 보아야 할 것이다.
에스라는 하나님께 인정받고 도움 받는 사람이었다.
위에서
우리는 에스라가 아닥사스다왕의 인정을 받았다고 했는데 실제로 에스라가 아닥사스다 왕의 인정을 받을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의
역사였다. 에스라는 사람에게 인정 받기를 원했다기 보다는 하나님께 인정받기를 원했던 사람이다. 그래서 말씀을 연구하고, 그
말씀대로 살려고 노력했다. 그러한 에스라의 모습이 하나님에게 인정을 받은 것이다.
6절에 의하면 에스라가 왕에게 구하는 것을 다 받게 된 이유가 하나님의 도우심이 있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에스라가 왕의 조서를 듣고 너무나 감사해서 여호와를 찬양한 내용을 보면 하나님의 절대적인 은총이었음을 알 수 있다.
여호와께서
아닥사스다 왕의 마음에 예루살렘 여호와의 성전을 아름답게 꾸밀 마음을 주셨다. 여호와께서 왕과 그의 보좌관들과 궨세있는 모든
방백들 앞에서 은혜를 얻게 하시고 하나님의 여호와의 손이 내 위에 있으므로 내가 힘을 얻었다. 그래서 올라오게 되었다고 찬양하고
있는 것이다.
에스라는 하나님의 인정을 받고 하나님의 도움을 받은 것이다. 하나님은 준비된 에스라를 통해 이스라엘을 회복할 계획을 가지고 계셨던 것이다.
교훈
사실
에스라가 형통하게 된 것은 철저히 하나님의 은혜였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하나님은 아무나 들어서 사용하지 않음을 알아야 한다.
스스로 겸비하는 인생을 들어서 사용하는 것이다.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낮추는 인생을 들어서 사용하신다. 에스라는 그랬다.
하나님의 말씀을 부지런히 연구했다. 그리고 그 말씀대로 살기위해 노력했다. 이것이 겸비가 아니고 무엇인가?
그렇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스스로 겸비하면 하나님의 인정을 받게 된다.
예수님도 말씀하셨다. 심령이 가난한자, 애통하는 자, 온유한 자가 복이 있다는 것이다. 이 말이 무엇인가? 자신을 겸비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스스로 겸비하여 하나님의 인정과 도움을 받는 백성이 되어야 하겠다.
그렇다. 에스라는 이렇게 자신의 본분에 충실했고, 하나님의 말씀을 늘 연구하고 그대로 살려고 노력했고, 가르치려고 했던 인물이다. 그래서 왕에게 인정을 받고, 하나님의 인정과 도움을 받는 사람이 되었다.
이러한 에스라가 한 일이 무엇인가?
믿음으로 백성을 이끌었다.
앞에서도 살펴보았지만 에스라는 참으로 위대한 지도자였다. 2번째 대대적인 귀환을 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햇던 인물이 에스라였다. 에스라는 이러한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끄는데 혁혁한 공을 세운 인물이다.
에스라가
백성들을 이끌고 예루살렘 고국으로 돌아오는 길은 짧은 여정이 아니었다. 앞에서도 살펴 보았지만 이 여행길은 4개월이 걸리는 대
장정이었다. 날짜로 보자면 120일이 걸리는 기간이었다. 이 기간 동안에는 많은 위험의 요소들이 있다. 당시에 포로민들이 가지고
가는 물건은 값비싼 물건들이 많이 있었다. 많은 은금과 짐승들이며, 기구들이 포함되어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정보는 금방 퍼지게
되어 있다. 그래서 그 큰 제국을 가로질러 오는 동안에 얼마나 많은 위험요소가 있었겠는가? 그래서 에스라는 이 일을 위해 철저히
하나님께 기도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실제로
에스라고 백성들을 이끌고 바벨론을 출발하여(아닥사스다왕 7년 정월 초하루) 아하와 강가에 머물렀을 때 금식을 선포하고 하나님
앞에서 스스로 겸비했다. 하나님께 기도하기를 어린아이와 모든 소유를 이끌고 가는데 평탄한 길을 달라고 한 것이다. 사실 에스라는
아닥사스다 왕에게 큰 소리를 쳤다.
하나님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선을 베푸시고 배반하는 자들에게는 권능과 진노를 내리신다고 한 것이다. 그러니 왕에게 자기 민족을 지킬 수
있도록 보병이나 마병을 붙여 달라고 구할 수가 없게 된 것이다. 에스라는 절대적으로 하나님을 신뢰하는 자였다. 그러기에 왕에게
요청하지 못하고 하나님께 간곡히 기도한 것이다. 모든 백성이 금식하며 스스로 겸비하게 한 것이다. 그랬더니 하나님이 이 기도를
응답하셨다고 한다.
에스라 8:31 첫째 달 십이 일에 우리가 아하와 강을 떠나 예루살렘으로 갈새 우리 하나님의 손이 우리를 도우사 대적과 길에 매복한 자의 손에서 건지신지라
이처럼 에스라는 철저히 하나님의 도우심을 의지하고 믿음으로 나갔던 지도자였다. 예루살렘에 도착한 에스라는 여호와께 감사의 번제를 드렸다.
교훈
지도자는
믿음으로 그 공동체를 이끌어야 한다. 지도자가 상황이나 형편만을 탓하고 있으면 안된다. 안 될 지도 모르는 부정적인 일들만
늘어놓게 되면 누가 그 지도자를 따르겠나! 그러므로 지도자는 더욱 하나님께 무릎을 꿇고 기도해야 하며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해야
한다. 자기 혼자 뿐만 아니라 자기와 함께 하는 모든 사람들이 다 같이 겸비할 수 있도록 이끌어야 한다.
백성을 참으로 사랑하고 중보했다.
백성들을
이끌고 예루살렘에 무사히 도착한 에스라는 감사의 번제를 드렸다. 그런데 이것이 끝이 아니었다. 문제는 항상 발생하고 그 과제를
풀어야 할 일이 생긴 것이다. 방백들이 에스라에게 나와서 이스라엘의 실상을 이야기 하는데 이 땅의 백성들과 제사장, 고관,
방백들이 이 땅의 딸들을 맞이하여 아내와 며느리로 삼아서 하나님의 백성의 거룩함을 훼손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 일에 방백들과
고관들이 더욱 앞장서서 행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 소리를 들은 에스라는 너무나 황망했다.
에스라는
그 자리에서 자신의 속옷과 겉옷을 찢고 머리털과 수염을 뜯으며 기가 막혀 주저 앉아 버렸다. 자신이 그동안 바사의 왕에서 여러
가지 위험을 무릎쓰고 이스라엘 백성들을 대변했던 일 자신의 하나님을 자랑했던 일, 그리고 120일 동안 위험을 무릎쓰고 백성들을
이끌고 귀국한 일 등이 주마등 처럼 스쳐 지나갔을 것이다. 예루살렘 성전을 회복하고 아름답게 꾸미기 위해 수많은 예물과 은금과
그릇들과 짐승들을 준비해 오고 세금 면제를 받았는데 실상 이 곳 백성들은 가증한 일을 일삼고 있었던 것이다.
에스라는 너무나 황당하고 어이가 없고, 기가 막히고, 부끄럽고 해서 너부러져 있었다. 그리고 저녁 제사를 드릴 때에 에스라는 초췌한 모습으로 일어나 무릎을 꿇고 하나님께 손을 들고 기도했다.
에스라 9:6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부끄럽고 낯이 뜨거워 감히 나의 하나님을 향하여 얼굴을 들지 못하오니 이는 우리 죄악이 많아 정수리에 넘치고 우리 허물이 커서 하늘에 미침이니이다.
에스라는 하나님 앞에서 너무나 부끄럽고, 황망하여 어찌할 바를 알지 못한다며 계속 기도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조상때로부터 하신 일이 얼마나 많습니까? 수많은 전쟁에서 건지시고 수많은 환난에서 건지셨건만 이 민족이 범죄하여 하나님이
수많은 징계를 하셨고 그래도 정신을 차리지 않으므로 결국 종살이를 하게 하셨는데 아주 버리지 않고 은혜를 베푸셔서 소생하게 하시고
성전을 세우며 이렇게 유다와 예루살렘에서 우리를 위해 울타리를 쳐 주셨는데 하나님이 이렇게 하셨는데도 우리가 주의 계명을
저버렸으니 이제 무슨 말씀을 할 수 있겠습니까? 이제 하나님 앞에 설 자가 없나이다. 하며 흐느껴 울며 기도하자. 그 자리에 모인
수많은 백성들이 크게 통곡하며 회개했다.
그러자
백성 중에 스가냐라 하는 자가 말하기를 이제라도 우리에게 소망이 있음은 우리가 주의 교훈을 따르며 하나님의 명령을 떨며 준행하는
자의 가르침을 따라 모든 아내와 그들의 소생을 다 내보내기로 우리 하나님과 언약을 세우고 율법대로 행할 것이다. 이 모든 일을
당신이 주장 하소서 우리가 힘써 돕고 행하겠습니다.
그래서 대대적인 정화 작업을 하게 되었다. 조사단을 선별하여 세우고 이방여인을 취한 자들을 철저히 조사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하나님 말씀 앞에서 성결하게 했다.
교훈
그렇다. 우리는 삶이 한 가지 일을 해결하면 끝나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평생 문제를 풀며 살아가는 인생이다. 한가지 일을 성공적으로 끝냈으면 또 다른 문제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에스라의 대처 능력이 이떠한가?
에스라는
자신의 권력을 마음껏 휘두르지 않았다. 오히려 하나님 앞에서 본인이 없드린 것이다. 그리고 철저히 중보하며 회개한 것이다.
이러한 에스라의 모습을 보고 모든 백성들이 겸비할 것을 다짐한 것이다. 자신들을 스스로 성결이 하기롤 결단한 것이다. 그렇다.
지도자는 백성을 뜨겁게 사랑하는 마음이 있어야 한다. 자기 권한을 사용하기 보다는 정말 안타까워하고 마음아파하는 그 모습을 보여
주는 것이었다. 그리고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이었다. 이것이 지도자의 영성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우리가
영성이 있어야 하겠다. 우리 모두는 크고 작은 지도자의 위치에 있다. 그러므로 영성을 기르자. 정말 내면 깊숙한 곳에서 백성을
사랑하고 백성의 죄 때문에 아타까워하며 눈물을 흘리는 사람이 되자 그럴 때 공동체가 회복되고 치유 될 것이다.
결론
에스라는 참으로 위대한 지도자였습니다. 에스라는 늘 노력하는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께
더욱 가까이 나가기 위해서 말씀을 연구하고 그 말씀대로 준행하려고 노력했던 사람입니다. 에스라의 이러한 모습은 왕에게 인정을 받게
되고 하나님에게 인정을 받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에스라는 믿음으로 공동체를 이끌었습니다. 하나님이 절대적으로 함께 하실
것을 믿은 것입니다. 그리고 백성을 뜨겁게 사랑하는 지도자였습니다. 백성들의 잘못을 보고 자신의 권한을 가지고 징계할 수도
있었는데 스스로 겸비하여 성결하게 하도록 하기 위해 뜨겁게 중보하며 기도한 것입니다. 그리고 너무나 안타까워하며 눈물 흘리며
기도한 것입니다. 이것이 지도자의 마음을 엿볼 수 있는 대목입니다. 참으로 백성을 사랑하는 모습이 보입니다.
1. 말씀을 연구하고 실행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자기 개발, 자기 정화)
2. 하나님과 상사에게 인정받는 사람이 되자(순수, 정직, 성실)
3. 믿음과 사랑과 참 중보의 지도자가 되자(참 마음이 전달됨 - 하나님과 백성에게)
에스라 1:3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참 신이시라 너희 중에 무릇 그 백성 된 자는 다 유다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서 거기 있는 여호와의 전을 건축하라 너희 하나님이 함께 하시기를 원하노라. 아멘
build the temple of the LORD.
에스라 1:1-3 : 역대하 36:22-23
역대기 / 성전 중심, 하나님 중심, 다윗 중심
에스라 / 70년 포로 생활 후 포로의 삶에 익숙한 삶 신앙적으로 온전하지 못할 수밖에 없었다. 회복케 하시는 하나님을 찾으라!
에스라 1:1
바사 왕 고레스 원년에 여호와께서 예레미야의 입으로 하신 말씀을 응하게 하시려고 바사 왕 고레스의 마음을 감동시키시매 저가 온 나라에 공포도 하고 조서도 내려 가로되.
바사(페르시아) : 이란 고레스 : 캄비세스 1세(BC 600-539) 아들. 키루스 2세 예레미야 예언 : 70년 포로생활(25:11) 후 귀환(29:10, 대하 36:22)
하나님께서 일하시는 방법 : 여호와, 말씀, 감동시킨다
에스라 1:2
바사 왕 고레스는 말하노니 하늘의 신 여호와께서 세상 만국으로 내게 주셨고 나를 명하사 유다 예루살렘에 전을 건축하라 하셨나니.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하늘의 신 : 하늘(빛), 땅(어둠) 하나님께서 일하시는 방법 : 여호와, 명하사, 건축하라
에스라 1:3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참 신이시라 너희 중에 무릇 그 백성 된 자는 다 유다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서 거기 있는 여호와의 전을 건축하라 너희 하나님이 함께 하시기를 원하노라.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바사 왕의 통치 방법 : 돌아가서 나를 위하여 기도하라!
하나님은 참신 / 하늘의 신(빛의 신) 땅의 신(어둠의 신)
에스라 1:4
무릇 그 남아 있는 백성이 어느 곳에 우거하였든지 그곳 사람들이 마땅히 은과 금과 기타 물건과 짐승으로 도와주고 그 외에도 예루살렘 하나님의 전을 위하여 예물을 즐거이 드릴찌니라 하였더라.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제2의 출애급 사건(출애굽기 12:35-36)
로마서 6:13 또한 너희 지체를 불의의 병기로 죄에게 드리지 말고 오직 너희 자신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산 자 같이 하나님께 드리며 너희 지체를 의의 병기로 하나님께 드리라.
오늘의 기도
의의 병기로 사용되게 하옵소서!
(자녀들, 교회, 나라와 민족)
* 세스바살과 스룹바벨
느혜미야 12장 1절
본문에는
제1차 포로 귀환 당시 지도자로서 제사장 예수아와 나란히 스알디엘의 아들 스룹바벨을 소개하고 있다. 그런데 학자들 간에 이
스룹바벨이 스 1:8, 11에 언급된 유다 목백 세스바살과 동일 인물인지 아니면 다른 인물인지에 대하여 많은 논란이 제기 된다.
이에 세스바살과 스룹바벨의 관계에 대한 학자들 간의 상반된 두 견해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
1. 동일 인물이라는 견해
스
1:8,11을 보면 제1차 포로귀환 당시 바사왕 고레스로부터 성전 기명(器皿)을 받아 예루살렘으로 가지고 온 목백(총독) 이
세스바살로 나온다. 그런데 본문과 스 2:2를 보면 제1차 포로 귀환자의 명단 속에는 세스바살은 없고 스룹바벨만 언급되어 있다.
따라서 바사 왕이 동시에 두 사람을 유다 총독으로 임명하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에 세스바살과 스룹바벨은 동일 인물로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Kel. Kidner. Graetz )
뿐만
아니라 스 5:16을 보면 세스바살이 전지대를 놓았다고 기록되어 있는 반해, 전지대 공사에 관한 직접적인 기록인 스
3:8-13에는 세스바살이 아닌 스알디엘의 아들인 스룹바벨로 나타난다. 이런 사실에서 세스바살과 스룹바벨은 동일 인물로 보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이다.
또한
이 두 사람을 동일 인물로 보는 학자들의 도다른 주장 중의 하나는 ‘세스바살’을 스룹바벨의 다른 이름이라고 말한다. 즉
‘세스바살’은 ‘태양의 신이여, 아들을 지키소서’ 라는 뜻의 바벨론식의 이름으로서, 바벨론이 바사 궁정에서 지낼 때 사용한
이름이라는 것이다.(Kwil).
2. 서로 다른 인물이라는 견해
세스바살은
바사 왕 고레스에게서 성전 기명을 받아 예루살렘으로 옮겨온 일과 관련해서만 나타나고 성전 재건 사업에 관한 기록들 속에는 한
번도 언급되지 않는다는 점에서 스룹바벨과 다른 인물이라는 견해이다. 즉 세스바살은 단지 성전 지대 공사와 관련해서 단 한 번
언급되는데(스 5:16) 이것은 강 서편(바벨론, 메소포타미아 서편 지역) 총독 닷드내가 바사 왕에게 보낸 보고서에 언급된
것이다. 그러므로 세스바살이 전지대 공사에 직접 관여 했다기 보다는 단지 포로 귀환자들의 대표로서 언급되었음이 분명하다는 것이다.
또 만일 세스바살을 스룹바벨의 숙부로 본다면 공식적인 서류에 그를 대표자로 기록 할 수도 있는 것이다.(Williamson.
Meyer. Graetz).
또한 스룹바벨이란 이름이 에스라, 학개, 스가랴서에 나오는데 세스바살과 동일 인물임을 암시하고 있는 곳은 한 곳도 없다는 것이다.
그러면 세스바살은 누구인가? 이에 대해서도 두 가지 견해가 있다.
가. 스룹바벨 이전의 유다 총독
B.C.538년
바사 왕 고레스의 칙령 반포 이후 1차로 기명을 가지고 예루살렘으로 귀환한 목백(총독) 이라는 견해이다. 이 견해에 따르면
스룹바벨의 귀환은 B.C.537년이 아닌 그 이후 시대가 될 것이고, 가장 가능성이 있는 것은 사마리아 사람들의 방해 공작으로
인해 성전 재건 사업이 중단되었다가 다시 성전 재건 사업을 개시한 시기인 B.C.520년 바사 왕 다리오
1세(B.C.522-485년) 통치시기에 귀환 했다고 보는 것이다. 그렇다면 결국 또 한 차례 포로 귀환이 이루어지는 셈이 되는데
이에 관한 확실한 근거는 없다. 뿐만 아니라 전지대 공사 기록에서 이미 스룹바벨이 언급되고 있기 때문에 스룹바벨은 그보다 훨씬
이전에 귀환 했음이 분명하다.
나. 스룹바벨의 숙부(叔父)
세스바살을
스룹바벨의 아버지 스알디엘의 동생 세낫살로 보는 견해이다.(대상 3:18-19). 즉 세스바살은 스룹바벨의 숙부로서, 제 1차
포로 귀환시 예루살렘으로 스룹바벨과 함께 귀환한 유다 목백(총독) 이라는 견해이다. 이렇게 볼 때 문제점은 어떻게 동시에 총독이 둘
일 수 있는가 하는 점이다. 그러나 당시 세스바살은 고령으로 원로 총독이었고, 스룹바벨이 실제로 총독의 업무를 관장했다고 본다면
그것은 별 문제가 되지 않는다.
더욱이
스룹바벨을 총독으로 언급하고 있는 곳이 성경 어디에도 없다는 사실과 성전재건 공사 중단 이후 그 공사를 다시 개시할 때에도
세스바살이 여전히 통독으로 언급된 사실(스 5:16)에서 그 증거를 발견하게 된다. 그러나 B.C.520년 성벽 재건 공사 중단
이후 다시 개시하게 된 시기부터는 스룹바벨이 정식 총독으로서의 역할을 수행했을 것이다.
3. 결론
위의
두 견해 중에서 어느 한 견해가 옳다고 단정 지어 말할 수는 없다. 그러나 역대상 3:18-19절의 스룹바벨의 족보와 제1차
포로귀환자들의 명단 등에서 볼 때 세스바살과 스룹바벨이 서로 다른 인물이라고 보는 견해가 더 타당한 듯하다.
그리고 그 견해 중에서도 세스바살은 스룹바벨의 숙부로서 원로 총독이었으며, 실제로 총독의 업무를 관장한 것은 스룹바벨이었다고 보는 견해가 타당한 듯하다.
한편 ‘세스바살’과 ‘스룹바벨’ (바벨론의 씨 라는 뜻임) 이 다 같이 바벨론식 이름이라는 점에서 포로 귀환 당시 히브리인들이 바벨론의 풍속에 얼마나 젖어있었는지를 알 수 있다.
성경을 읽는 독자들의 첫 과제는 성경 전체를 읽는 것이다. 여러 번, 때로는 수십 번씩 성경을 읽은 독자들도 있다. 그런데
독자들이 성경에 대해서 좀 더 체계적으로 알고 싶을 때에 좀 더 깊이 공부하고 싶을 때에 가장 먼저 참조할 수 있는 것이 관주
성서이다.
그래서 이번 호에서는 우리말 성서를 오랫동안 연구해 온 본 공회 민영진 부총무로부터 효과적인 성서 읽기를 위한 관주의
쓰임새에 대해서 알아본다.
관주 성서, 그리고 우리말 관주 성서의 역사
우리말 성경에서 관주(貫珠, 혹은 串珠)는 본문 가운데의 어떤 어휘나 구절의 의미 또는 내용이 다른 어휘나 구절과 관련되어서 이해에 도움을 주는 전후참조(reference)를 뜻합니다.
최초의 우리말 관주 성서는 1911년에 이익채가 「鮮漢文新約全書」에 관주(串株)를 붙여 펴낸 것입니다. 구약에 관주가 첨가되기
시작한 것은 1926년에 나온 정태용의 「蘚漢文舊約全書」며, 오늘의 「관주」 성서와 같은 형태가 골격을 이룬 것은 1930년에
나온 「관쥬 셩경젼셔」입니다. 그후 1956년에 나온 「관주 성경전서 개역한글판」에 와서 관주는 일단 마무리되었습니다. 그러나
1964년에 나온 「貫珠聖經全書 簡易 國漢文 한글판」은 부분적으로 내용상 가감 및 수정한 흔적을 보입니다.
우리말 성경에서 관주의 종류와 역할
우리말 성경에서 관주는 일반적으로 네 가지로 분류합니다.
첫째, 인증(引證) 관주
신약 본문에 구약
본문이 인용되어 있을 때, 신약은 관주에 인용 표시를 하고 인용의 출처를 밝힙니다. 반대로 구약 본문 자체도 관주에 인증 표시를
하고 인용의 출처를 밝힙니다.
예를 들면, 마 1:23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는 구절이 있습니다. 이 곳 관주는 이 구절이 사 7:14에서 인용된 것임을 밝히고 있습니다. 구약의 이사야서 7:14을
찾아보면 과연 같은 구절이 나오고 그 곳 관주에도 이 본문이 신약 마 1:23에 인용되었음을 알려줍니다.
둘째, 비교(比較) 관주
문자적 평행구나 사상적 평행구를 지시합니다.
평행구를 제시하는 것으로서는 마 6:9∼13의 주기도와 눅 11:2∼4의 주기도를 비교시킨 예를 비롯하여 공관복음서의 평행구들이 비교되어 있습니다.
비슷한 주제를 비교시킨 것으로서는 창 3:8 “동산 나무 사이에 숨은지라”에 붙은 관주를 예로 삼아 볼 수 있다. 여기서 관주는 시
139:1∼12 ; 렘 23:23∼24을 창 3:8과 비교해 볼 것을 지시합니다. 창세기의 본문은 아담과 하와가 여호와를 거역한
후 여호와를 피하여 숨는 장면을 묘사한 것입니다. 관주가 지시하는 시 139편은 여호와께서는 사람의 생각을 꿰뚫어 보시고 환히
아시기 때문에 그를 떠나 어디로 도망칠 수도 숨을 거둘 수도 없다는 것을 고백한 시입니다.
따라서 여기 관주는 아담과 그의 아내가
동산나무 사이에 숨는다고는 했으나 그렇다고 인간이 하나님 앞에서 숨을 수 없는 피조물임을 말해 줍니다. 특정 주제를 가지고
성서적으로 명상해 보려는 사람들에게 이러한 관주는 좋은 안내자가 될 것입니다.
셋째, ‘보라’ 관주
일반적으로 어떤 특정한 용어의 최초 출처, 어떤 개념에 대한 성서 안에서의 다른 저자들의 이해를
반영합니다.
예를 들면 창 5:1의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하실 때에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으시되”에서 여기 ‘형상’이라는 단어에 창
1:26,27을 보라는 지시가 있습니다.
창 1장은 하나님이 사람을 지으실 때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하나님의 모양대로
지어내셨다는 것을 성서에서 최초로 언급한 곳입니다. 이 곳의 관주로 표시된 엡 4:24 ; 골 3:10을 보면 하나님의 형상이
신약에서 어떻게 이해되고 그 뜻이 어떻게 적용되고 있는지를 보여줍니다. 에베소서의 필자는 진리에 근거한 의와 거룩함으로 다시 지음
받은 새 피조물이 결국 하나님의 형상을 본뜬 새 인간상임을 암시합니다.
골 3:10은 새 사람이란 창조하신 이의 형상을 따라 끊임없이 새로워져서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 이르는 사람이라고 말함으로써
하나님의 형상과 새 사람과의 관계를 암시합니다. 따라서 신약의 이 두 구절은 창세기의 하나님 형상(形象) 이해에 도움을 줍니다.
넷째, 일반 관주는 ‘보, 비, 인’과 같은 지시가 없는 관주
마 1:2의 “아브라함이 이삭을 낳고”에 붙어 있는 관주는
아브라함이 사라에게서 아들을 낳아 그 이름을 이삭이라고 지었던 것, 곧 이삭의 출생 배경을 말하는 창 21:3을 참조할 것을
지시합니다.
또한 소박하게나마 성서어구사전(Concordance)의 구실도 합니다. 요 10:23에는 “솔로몬 행각”이라는 어구가 나옵니다. 그곳의 일반 관주는 이 말이 여기 외에 행 3:11 ; 5:12에도 나옴을 일러줍니다.
미흡하지만 성서사전(Bible Dictionary)의 구실도 하고 있습니다. 고전 16:2에 보면 바울은 고린도교회 사람들에게
매주일(每週日) 첫날마다 연보를 저축해 둘 것을 부탁합니다. 매주일 첫 날이란 어느 날입니까? 관주는 여기서 행 20:7을
지시합니다. 성도들이 “안식 후 첫 날에” 떡을 떼러 모였던 것을 가리키면서 “매주일 첫 날”이 안식일(토요일) 다음날
일요일이었음을 암시합니다.
관주의 유익과 한계
성서를 읽는 독자들과 교사들이 성서 사전이나 주석을 가지지 아니하고도 관주의 지시만 잘 활용할 수 있다면 성서 이해의 폭과 깊이를
넓힐 수 있을 것입니다. 특히 비교 관주는 여러 곳에 흩어진 같은 사상·같은 주제들을 연결시켜 주기 때문에, 한 본문을 실마리로
하여 깊은 경지까지 사색을 연장할 수 있게 해 줍니다.
성서를 읽는 독자들이 「관주 성서」를 충분히 활용하여 전후참조 구절이 제시하는 그 지식들을 체계적으로, 효과적으로 사용하면 성서
읽기에 큰 도움을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관주 성서」의 전후참조 구절들이 우리나라에서는 아직도 본격적으로 성서학적 검토
대상이 되어본 적이 없다는 사실을 고려해야 할 것입니다.
이러한 문제점을 해결하기 위해서 대한성서공회에서는 장기적으로는 성서학적으로 검증을 거친 관주를 만들기 위한 연구 작업 중이며, 단기적으로는 「개역개정판」에 넣을 관주 내용을 위해서 실무 작업을 위한 준비를 하고있습니다.
*자료출처 / 대한성서공회 뉴스레터 '성서한국' 2000 봄 통권 제 46권 1호에서 발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