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가서 / 여호와와 같은 자가 누구인가


미가서 / 여호와와 같은 자가 누구인가


미가서의 메시지는 심판과 소망이 복잡하게 섞여 있습니다.
한편으로는 사회악, 부패한 지도층, 그리고 우상 숭배으로 인한 이스라엘 심판을 예언합니다.
이 심판은 사마리아와 예루살렘이 멸망할 때 절정을 이룰 것으로 예상되었습니다.
미가서는 이스라엘 국가의 회복뿐만 아니라 이스라엘과 예루살렘의 변화와 영광을 선포합니다.
소망과 멸망의 메시지는 반드시 모순되는 것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회복과 변화는 심판 후에야 발생하기 때문입니다.

핵심 구절: 미가 1:2, “백성들아 너희는 다 들을지어다 땅과 거기에 있는 모든 것들아 자세히 들을지어다 주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대하여 증언하시되 곧 주께서 성전에서 그리하실 것이니라”

미가 5:2, “베들레헴 에브라다야 너는 유다 족속 중에 작을지라도 이스라엘을 다스릴 자가 네게서 내게로 나올 것이라 그의 근본은 상고에, 영원에 있느니라”

미가 6:8, “사람아 주께서 선한 것이 무엇임을 네게 보이셨나니 여호와께서 네게 구하시는 것은 오직 정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하게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

미가 7:18-19, “주와 같은 신이 어디 있으리이까 주께서는 죄악과 그 기업에 남은 자의 허물을 사유하시며 인애를 기뻐하시므로 진노를 오래 품지 아니하시나이다 19 다시 우리를 불쌍히 여기셔서 우리의 죄악을 발로 밟으시고 우리의 모든 죄를 깊은 바다에 던지시리이다”

요약: 선지자는 백성들을 착취하고 그릇 인도하는 이스라엘의 통치자들, 제사장들, 선지자들을 정죄합니다. 이는 그들의 행위로 인하여 예루살렘이 멸망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선지자 미가는 예루살렘에서 바벨론으로 갈 사람들의 구원을 선언하고 예루살렘이 그 성을 대항하기 위해 모인 나라들을 파괴할 것이고 위로합니다. 미가 선지자는 이상적인 통치자가 베들레헴에서 나와서 그 나라를 지킬 것이며 야곱의 남은 자가 승리할 것이라고 선포하면서 여호와께서 어느 날 그 나라로부터 우상과 군사력을 의지하는 마음을 제거할 것이라고 예언합니다. 선지자는 공의와 충성에 대한 여호와 하나님의 요구에 대하여 강력하고 간결한 요약을 제시하고 오므리와 아합의 길을 따랐던 사람들에게 심판을 선언합니다. 이 책은 애가의 요소로 구성된 예언적인 전례로 마무리됩니다. 이스라엘은 죄를 고백하고 여호와 하나님의 힘센 역사를 통해 구원을 받을 것을 확신합니다.

예표: 미가서 5장 2절은 동방 박사들이 베들레헴에서 태어난 왕을 찾으면서 인용한 메시아적 예언입니다(마 2:6). 동방으로부터 온 이 왕들은 베들레헴의 작은 마을에서 평화의 왕이요 온 세상의 빛이 되시는 분이 나올 것이라는 말을 들었습니다. 죄와 회개와 회복에 대한 미가의 메시지는 우리의 죄를 위한 화목제물(롬 3:24-25)이요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는 유일한 길(요 14:6)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궁극적으로 성취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적용: 하나님은 우리가 그분의 진노를 당하지 않도록 경고하십니다. 하나님의 경고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고 그분의 아들의 희생을 통한 죄 사함을 거부하면 심판은 확실합니다. 하나님은 그리스도를 믿는 신자인 우리를 징계하실 것입니다. 이는 하나님이 우리를 미워하시기 때문이 아니라 사랑하시기 때문에 징계하십니다. 우리가 온전하기를 바라시는 하나님은 죄가 우리를 파멸시키는 것을 아십니다. 온전함은 회복의 약속으로서 하나님께 순종하는 자들에게 이루어질 것입니다.

미가서의 중요한 주제를 "심판"으로 보는 학자들은 이 면을 부각시켜 지적한다.
즉 심판은 임박하여 이르렀고(1:2, 4), 또한 이미 임하였다.
특히 이 심판으로 인해, 사마리아의 멸망을 당하게 되며(1:6, 7), 예루살렘에는 침략군들이 쳐들 올 것이다(1:15).

추축시대(차축시대)

지구는 23.5도 기우러진 상태에서 돌고 있다.

칼 야스퍼스(Karl Jaspers)


주전 8세기부터 주전 2세기의 시대

축의 시대(Achsenzeit)
독일의 철학가 칼 야스퍼스가 고안한 표현으로 기원전 8세기부터 기원전 3세기까지를 일컫는다.
1949년 출간한 그의 저서 '역사의 기원과 목표'(Vom Ursprung und Ziel der Geschichte)에 처음 등장한다.
이 시기에 인도의 석가모니, 중국의 공자, 희랍의 소크라테스와 같은 여러 사상가들이 등장하였다.

야스퍼스는 이 시기에 새로운 사상과 철학이 중국과 희랍 그리고 인도와 페르시아에서 직접적 문화교류 없이 발생했다고 주장하였다.
이 시기에서 미래 철학자와 종교에 영향을 미친 핵심 사상가들과 그들 사이 공통적으로 떠오른 특징을 분류했다.

이스라엘에서는 예언자들 아모스, 호세아, 미가, 이사야가 등장하였다.
이전의 시대는 신화의 시대라고 한다.
그러나 새로운 시대는 신화와 더불어 영웅들이 등장한다.
전쟁과 폭력이 빈번한 시대에 영웅이 등장할 수밖에 없었다.
요즈음의 영웅이란 일상속에서 용기를 제공한 사람들을 말한다.
 

7월 6일(화)
죄의 근본(미가 1:13)





미가서의 배경 /

신흥제국 앗수르의 등장(앗시리아)
제국은 욕망이 강하여 자기를 더 크게 하려고 전쟁을 벌인다.
서쪽에 있는 나라 아람(르신)이스라엘(베가)은 동맹을 맺고 앗수르에게 대항하자.
그러나 힘이 부족하므로 유다 왕국 아하스에게 동맹을 제안하였다.
아하스 왕은 아람과 이스라엘과 동맹을 맺을 것이 아니라  앗수르와 동맹을 맺자.
이때 아람과 이스라엘이 이 사실을 알고 유다를 공격하려고 군대를 동원하였다.

이사야 선지자가 등장하여 아하스 왕에게 두려워하지 말라
하나님이 지켜주신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 임마누엘(이사야 7:14).

아하스는 앗수르와 손을 잡았으나 많은 조공을 바쳐야 하였다.
유다의 첫번째 위기가 되었다.
앗수르가 세력을 확장하여 아람의 수도 다마스커스가 732년,  이스라엘은 722년에 멸망시켰다.
앗수르를 블레셋에 속한 나라들을 침략하였다.
이 때 유다의 2차 위기 앗수르

유다의 3차 위기 히스기야 왕 때 반란을 일으켰다.
앗수르의 산헤립은 46개의 성을 초토화시켰다.
이때 라기스가 포함되었으며 미가 선지자의 고향이 라기스와 가깝다.

미가야 / 누가 여호와와 같은가?
미가 7:18
주와 같은 신이 어디있으리이까 주께서는 죄악을 사유하시며 그 기업남은 자의 허물을 넘기시며 인애를 기뻐하심으로 노를 항상 품지 아니하시나이다.


미가 선지자(언어의 마술사)
미가 7:18

주와 같은 신이 어디있으리이까 주께서는 죄악을 사유하시며 그 기업의 남은 자의 허물을 넘기시며
인애를 기뻐하심으로 노를 항상 품지 아니하시나이다.

* 주와 같은 신이 어디 있으리이까?(미가야)(마카야후)


미가 1:8-9

이러므로 내가 애통하며 애곡하고 벌거벗은 몸으로 행하며 들개 같이 애곡하고 타조 같이 애통하리니, 이는 그 상처는 고칠 수 없고
그것이 유다까지도 이르고 내 백성의 성문 곧 예루살렘에도 미쳤음이니라.


마지막 시대에 도시들의 운명(10-15절)

가드(술 짜는 틀) 호곡하지 말라
2. 베들레아브라(먼지의 집) 티끌에 굴지어다
3. 사빌(아름다운) 벗은 몸에 수치를 무릅쓰고 나가라
4.  사아난(밖으로 나가다) 나오지 못하고
5. 벧에셀(근처의 집, 도피처) 의지할 곳 없음
6. 마롯(고통, 비통) 복을 바라나 재앙이 임함
7. 예루살렘(평화의 도성) 재앙(허물이 보인다)
8. 라기스(무리) 준마에 병거를 메우라
9. 가드모레셋(전별금, 약혼) 작별하는 예물을 주라
10. 악십(메마른 시냇물, 기만) 속이리라
11. 마레사(정복자) 너를 얻을 자가 임할 것이라
12. 아둘람(피난처) 영광이 아둘람까지

뉴욕(New York)
새로운 항구

날마다 새로운 모습으로 변화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에베소서 5:26 
이는 곧 물로 씻어 말씀으로 깨끗하게 하사 거룩하게 하시고. 



라기스 주민아 너는 준마에 병거를 메울지어다 라기스는 딸 시온의 죄의 근본이니 이는 이스라엘의 허물이 네게서 보였음이니라.

* 라기스(병거로 무장한 성읍)


라기스를 죄의 근본이라고 하는 이유?

첫째는 하나님보다 군사력을 의지하는 것
일반적인 해석의 견해

둘째는 우상 숭배(1:5-9 참조)

이는 다 야곱의 허물로 말미암음이요 이스라엘 족속의 로 말미암음이라 야곱의 허물이 무엇이냐 사마리아가 아니냐 유다의 산당이 무엇이냐 예루살렘이 아니냐.
이러므로 내가 사마리아를 들의 무더기 같게 하고 포도 심을 동산 같게 하며 또 그 돌들을 골짜기에 쏟아내리고 그 기초를 드러내며.
그 새긴 우상들은 다 부서지고 그 음행의 값은 다 불살라지며 내가 그 목상들을 다 깨뜨리리니 그가 기생의 값으로 모았은즉 그것이 기생의 값으로 돌아가리라.
이러므로 내가 애통하며 애곡하고 벌거벗은 몸으로 행하며 들개 같이 애곡하고 타조 같이 애통하리니.
이는 그 상처는 고칠 수 없고 그것이 유다까지도 이르고 내 백성의 성문 곧 예루살렘에도 미쳤음이니라.

우상이란 무엇인가?

오늘날의 우상은 무엇일까?
말과 말씀을 구분하지 못하는 것이다.
말은 사람의 입에서 나온 모든 것
말씀은 하나님이 선포하신 것이다.

예를 들면,
어느 유명한 목사의 축도가 한국교회 전체에 영향을 미쳤다.

성경적인 축도는 고린도후서 13:13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의 교통하심이 너희 무리와 함께 있을찌어다.

성경의 기록대로 축도를 하면 가장 바람직합니다.
그런데 이 기록에 언제부터인가 축도하는 목사들이 수식어를 더하기 시작했습니다.
이 원인이 어디에서 시작되었는가를 어느 신학자의 견해에 따르면 한경직목사님이라고 합니다.
한경직 목사님이 어느 모임에서 축도를 할 때 수식어를 더하여 시작한 것이 모든 목사들에게 깊은 인상을 주어 따라하게 된 것이라고 합니다.

말은 헬라어로 "레마"라고 합니다.
말씀은 헬라어로 "로고스"라고 합니다.
따라서 우상이란 "레마"를 "로고스"라고 선포하는 것입니다.
문제는 이런 현상에 너무 익숙해졌기 때문에 무엇이 문제인지 구분하지 못합니다.


우상은 하나님을 대신한 모든 것이다.
우상은 짝퉁 하나님이며 ‘만들어진 신(神)’이다.
왜, 인간은 우상을 만들고 하나님으로 섬기는가?
그 이유는 죄 때문이다.
죄인은 창조주 하나님을 버리고 대용품으로 우상을 만들었다.
우상은 형상뿐 아니라 타락한 인간의 마음을 포함한다.
타락한 마음은 우상을 만들어낸다.
돈, 권력, 섹스와 수많은 탐욕의 부산물들이 우상이 된다. 

우상과 우상숭배는 구약성경 전체를 관통하는 주제이다.
하나님을 섬겨야할 이스라엘.
그들은 약속의 땅 가나안에서 하나님 대신 가나안의 신들, 고대 근동의 우상들을 숭배했다.
우상숭배는 개인뿐 아니라 이스라엘 왕국 전체의 흥망성쇠를 좌우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스라엘에 대한 사랑을 거두지 않았다.
선지자들은 우상을 떠나 하나님께 돌아올 것을 촉구했다. 

우리는 우상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을까?
성경이 말하는 우상은 무엇인가?

하나님의 뜻을 거역한 이후 모든 인간의 역사가 보여 주는 가장 대표적인 타락의 결과는 우상 숭배이다.
피조물을 신(神)으로 삼고 스스로의 욕망을 위해 이용해 왔기 때문이다.
이스라엘 역사에서 우상은 어떻게 숭배되었으며 그 영향은 무엇인가를 이해할 수 있다.
더불어 성경과 고대 근동 자료, 이스라엘 역사를 통해 우상들의 특징들을 쉽고 정확하게 알 수 있다.


우상"이라 하면 무엇이 떠 오르나요?

우리 기독교인들은 사찰이 있는 불상을 먼저 생각하고 그러한 종류의 형상적인 나무, 돌 또는 쇠로 만든 우상으로만 단정해 버리기 쉽습니다.

또 성경에서 표현된 우상에 대해서도 나무나 돌, 쇠로 만든 물질적인 형상에 대한 관심 외에는 깊이 있게 깨달을려고 하지도 못합니다.

그러나 성경에서 말씀하시고 알려주시는 우상의 참된 의미에 대해 알게 된다면 너무나도 놀랍고 깊은 사실들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 만큼 성숙되게 되는 계기가 될 것을 확신합니다.

하박국 2:18
새긴 우상은 그 새겨 만든 자에게 무엇이 유익하겠느냐 부어 만든 우상은 거짓 스승이라.


무엇을 알려주고자 하신 말씀인가?

우상은 거짓스승(선지자 혹 목자)이요,
하나님이 보내지 아니했지만 명예와 빵(재물)과 권세를 위한 거짓 스승(목자)을 짐승, 우상이라고 알려주신 것입니다.

우상은 결국 그 속에 하나님의 생명력이 없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자기 이익을 위해 일하는 거짓 스승도 그 속에는 하나님의 생명이 없이 비어있거나 다른 것으로 채워져 있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그럼 이천년 전 예수님께서 성육신으로 오셨을 때 상황을 살펴봅니다.

요한복음 8:44
너희는 마귀에게서 났으니 너희 아비의 욕심을 너희도 행하고자 하느니라 저는 처음부터 살인한자요, 진리가 그 속에 없으므로 진리에 서지 못하고 거짓을 말할 때마다 제 것으로 말하나니 이는 저가 거짓말쟁이요 거짓의 아비가 되었음이라.

이 말씀을 통해 그 시대를 들여다보면 그 시대에 세계 민족 중에 하나님께 유일하게 선택받았던 민족 이스라엘의 최고 지도자요 권력자로 행세했던 서기관 바리새인, 율법박사들이 곧 우상(거짓스승)이었으며 그들을 섬기며 그들을 믿고 따르는 유대백성들이 곧 우상을 섬기는 결과가 되었던 것입니다. 

그 시대에 예수님 만이 참된 스승(목자)이셔야 합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유대민족들은 참 스승이요 참 목자이신 예수님을 죽이라 하고 강도는 살리자 하는 도무지 할 수 없는 잘못된 판단을 하게 되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는 일에 참여하고 말았습니다.

그들을 이렇게 만든 장본인들이 누구였을까요?
참 목자, 참스승행세를 하고 예수님을 귀신 바알세불로 만들어 버린 서기관, 바리세인들의 거짓 증언과 말에 속았기 때문이었습니다.

진리가 인정되면서 밝혀진 사실과 같이 결국 그 시대 유대땅에는 예수님 외에는 참 목자가 없는 우상(거짓 목자)천지가 되어 버렸던 것입니다. 

예언서인 다니엘서에도 이런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다니엘 2:36-38
왕이여 왕은 열왕의 왕이시라 하늘의 하나님이 나라와 권세와 능력과 영광을 왕에게 주셨고 인생들과 들짐승과 공중의 새들과 어느 곳에 있는 것을 막론하고 그것들을 왕의 손에 붙이사 "다스리게 하셨으니 왕은 곧 그 (우상의)금머리니이다.  

이 말씀이 말세 종말에 하나님께서 이루실 예언이고 주 재림을 기다리고 있는 우리 때에 이루실 말씀인 것을 믿는다면, 우리에게는 매우 중대하고도 또 매우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바벨론왕 느부갓네살이 바로 이 우상이며 이 우상에게 모든 것 즉 인생들 새들 들짐승 어느 곳에 있는 것이든 "다 이 우상에게 붙이사 우상이 다 다스리게 하신다는 말씀입니다. 다른 사람은 다 우상에게 붙어서 우상의 지배를 받고 있어도 나만은 괜찮겠지...라고 하나님 앞에서 자신있게 말할 수 있을까요? 

다시 예수님 초림때를 살펴보면

마태복음 23:1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예루살렘 성전 모세의 자리(거룩한 자리)에 앉았으며.

그 당시 서기관, 바리세인들은 하나님의 참 목자 행세를 하며 오히려 예수님을 이단(우상=거짓스승)이라고 핍박하고 모든 유대인들에게 선동하였습니다.

사도행전 13:26-27
형제
아브라함의 후예와 너희 중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들아 이 구원의 말씀을 우리에게 보내셨거늘.
예루살렘
에 사는 자들과 저희 관원들이 예수와 및 안식일마다 외우는바 선지자들의 말을 알지 못하므로 예수를 정죄하여 선지자들의 말을 응하게 하였도다.


당시 예루살렘 백성(신앙인)들은 마태복음 23:31~33에서의 말씀과 같이 하나님의 사자로 가장한 마귀의 목자(우상)들을 섬기는 결과가 되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다 하나님의 말씀을 잘못 깨달은 결과입니다.

오늘날 주 재림을 기다리는 때에도 인자의 때가 노아의 때와 롯 때와 같다고 하셨으니 천국에 소망을 둔 우리 신앙인들은 정신을 바짝 차리고 있어야 합니다.

말과 말씀을 구별못하고 말이라면 무조건 믿고 따르는 습관을 이제는 버리고 누가 참된 진리를 전하는 목자이며 누가 거짓을 전하는 우상목자인지를 심각하게 구분하고 분별하여서 참된 깨달음과 믿음으로 주님을 섬겨야 합니다.

모든 시대마다 참은 하나이지 둘이 아니었습니다.
초림때도 예수님은 한 분이지 둘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서기관 바리새인들 같은 우상(가짜 스승)들은 많은 무리며 그들을 따르며 섬기는 신앙인들은 많았습니다.
많은 무리가 옳다고 말하며 믿고 따른다고 해서 참과 거짓이 드러나는 것이 아님을 깨달을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오늘날도(계 22:16) 교회들을 위하여 계시록에 기록된 말씀과 같이 성경 말씀대로 역사하시는 것이며 진리의 영으로 인도하시는 것입니다.
주님의 재림을 기다리는 오늘날의 신앙인 역시 우리 사람의 생각과 세상의 말을 깨끗이 버리고 성령의 생각과 주님의 "말씀"을 인정하고 믿어야 참 신앙인이 되는 것입니다.

로마서 8:6-7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라.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게 하나니.

우리의 생각은 육신의 생각이요 하나님의 생각은 말씀에 있으므로 우리는 "말씀"에 입각해서 신앙생활을 해야 합니다.
먼저는 나 자신이 우상, 즉 가짜 목자를 따르는 자가 되지 않아야 합니다.

오늘날 말씀을 분별하지 못한다면 나도 모른 중에 저 2000년전 서기관 바리새인의 말만 듣고 하나님의 아들을 대적하는 헛된 이스라엘의 유대교 신앙인들과 같은 꼴이 되어 영원한 지옥불에 던지움을 면치 못할 것입니다.

 


가드

뜻 : 술짜는 틀

 

가자의 북쪽 32KM 지점.
(1) 블레셋 5개 중요도시 중의 하나 (삼하 1:20). 이 다섯 성읍은 모두 팔레스타인 남해안과 그 인근에 위치해 있으며 각기 저들의 왕에 의해 통 치되었다(수 13:3, 삼상 6:17) 가드는 옛 가나안 도시로서 그 주민들 가운데는 가드족이라고도 부 르는 키가 큰 아나킴(Anakim)족이 팔레스 타인 산지에 널리 살고 있었다(삼하 6:10-11, 15:18,-22).

(2) 다윗의 손에 죽은 골리앗의 고향(수11:22 삼상17:4).

(3) 엘리 때에 블레셋에게 빼앗긴 언약궤가 이곳에 머무는 동안 모든 사람에게 독종이 전영되어 에그론으로 옮겼고(삼상5:8-10).

(4) 다윗이 정복하요 이스라엘에 속하게 하였고 (대상18:1)

(5) 다윗압살롬을 난을 피하여 다닐 때 생사를 같이 하겠다는 충성된 신하 잇대의 고향(삼하15:18-22).

(6) 솔로몬이 부왕 다윗을 저주한 시므이에게 금족령을 내렸으나 위반하고 이곳에 간 줄을 알고 죽인 곳(왕상2:8,36,41,46).
(7) 르호보암이 국방성을 건축할 때 이 성을 개수보강하였다(대하11:5-10).
* 그러나 최근의 고고학자들은 텔 에스 사피가 가드였던 것으로 더욱 유력시 되 고 있다.
성서나 아시리아, 비잔틴 자료들을 재 검토하면, 가드가 불레셋의 북부 에 위치해 있었음을 알게 된다.

베들레아브라

'티끌 집(베트-레-아브라)'이라는 뜻이 있습니다.
직역하면, "티끌 집에 사는 사람들아 티끌에서 뒹굴어라"는 의미입니다

사빌(Saphil)
아름다운

 아스돗(Ashkelon) 남동쪽 6km, 아소갈론에서 동북 약 11km 지점. 에브라임의 한 성읍인데 현재의 에스솨빌 이라 한다(미 1:11).

가드: 블레셋 지역의 큰 성읍 (의미) 술짜는 틀

베들레아브라
: 먼지의 집 / 하나님의 심판 앞에 먼지 속에서 뒹굴게 될 것이다.

사빌 : 아름다운, 순결한 / 그 도시의 아름다움을 잃은 채, 벌거벗은 수치로 나아가게 될 것

사아난
: 밖으로 나가다  / 하나님의 심판 앞에 나오지 못하고 멸망하게 될 것

벧에셀 : 근처의 집, 도피처 / 하나님의 심판 앞에 이 도시는 그 어디에도 피난하지 못하고 의지할 곳을 모두 잃어버린 채, 애곡하게 될 것

마롯 : 고통, 수고, 비통하다  /  비통한 마음으로 하나님의 심판과 재앙을 맞이하게 될 것

라기스 : 무리 / 병거로 무장한 전쟁에 능한 자들이 있든 성읍. 준마에 병거를 매어 무리를 지어 도시로부터 도망치라

가드모레셋 : 모레셋은 전별금과 발음이 비슷함. 약혼함 / 신랑을 잃은 신부처럼 작별하는 예물을 받게 될 것

악십 : 메마른 시냇물기만 이란 뜻을 가진 성읍 /  여러 도시를 기만하며 속이는 거민들이 될 것

마레사 : 정복자와 발음이 비슷함 / 그 땅의 거민들은 하나님의 영광에 정복당하여 심판자 앞에 독수리처럼 대머리가 된 채, 모두 쫓겨나는 신세를 당하게 될 것

아둘람
: 다윗이 사울을 피하여 숨었든 동굴, 피난처 /

 이 도시는 그 이름처럼 하나님의 심판 앞에 먼지 속에서 뒹굴게 될 것입니다.
11절의 ‘사빌’은 ‘아름다운’의 뜻의 도시이지만, 이제 그 도시의 아름다움을 잃은 채, 벌거벗은 수치로 나아가게 될 것입니다. ‘사아난’의 이름은 ‘밖으로 나오다’라는 뜻이지만, 하나님의 심판 앞에 나오지 못하고 멸망하게 될 것이며,

‘벧에셀’은 ‘도피처’라는 뜻을 가졌지만, 하나님의 심판 앞에 이 도시는 그 어디에도 피난하지 못하고 의지할 곳을 모두 잃어버린 채, 애곡하게 될 것입니다.

12절의 ‘마롯’은 비통하다‘의 히브리어 발음과 비슷한데, 그들은 비통한 마음으로 하나님의 심판과 재앙을 맞이하게 될 것입니다.

13절의 ‘라기스’는 히브리어로 ‘무리’라는 의미와 흡사한데 하나님은 준마에 병거를 매어 무리를 지어 도시로부터 도망치라고 말씀합니다. 이는 그들에게 임할 심판이 얼마나 처참할지를 예언하고 있습니다.
14절의 ‘가드모레셋’의 ‘모레셋’은 히브리어로 ‘약혼한’의 의미와 비슷합니다. 그들은 신랑을 잃은 신부처럼 작별하는 예물을 받게 될 것입니다.
‘악십’은 ‘기만’이라는 의미를 가지는데, 그들의 이름처럼 여러 도시를 기만하며 속이는 거민들이 될 것입니다.
15절의 ‘마레사’는 히브리어로 ‘정복자’라는 발음과 비슷합니다. 그 땅의 거민들은 하나님의 영광에 정복당하여 심판자 앞에 독수리처럼 대머리가 된 채, 모두 쫓겨나는 신세를 당하게 될 것입니다.

미가 선지자의 시대는 이렇게 막을 내립니다. 하나님의 심판은 모든 도시 위에 임하였고 그 앞에 화려한 도시들은 오늘날 돌 하나 남지 않고 모두 무너져 내릴 것입니다. 미가시대의 무너진 도시들을 묵상하며, 오늘 우리가 사는 이곳, 이 도시, 서울을 바라봅니다.



7월 7일(수) 재앙의 때(미가 2:3)


미가 신학의 3대 원리 (미가 2:1-13)

미가서는 작은 이사야라고 불리는 미가 선지자의 세 편의 설교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미가 1-2장은 첫 번째 설교인데 그 내용은 북 왕국의 수도 사마리아와 남 왕국의 수도 예루살렘이 우상 숭배 때문에 하나님의 심판을 받게 될 것이라는 내용입니다.

미가 2장은 첫 번째 설교의 결론 부분으로서 선지자 미가의 신학의 원리가 무엇인가를 드러내고 있습니다.
우리는 신학이라고 하면 나와는 상관없는 학문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모든 사람은 신학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이든 믿지 않는 사람이든 각각 신학은 가지고 있습니다. 

예를 들면, 어떤 사람은 ‘하나님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사람들을 “무신론자(atheist)”라고 합니다.

또 어떤 사람은 나무도 신이고, 돌도 신이고, 해도 신이고, 달도 신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 사람들을 “범신론자(pantheist)”라고 합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내 신은 내 신이고, 네 신은 네 신이다”라고 말하며 각각 사람마다 신이 다르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을 “다신론자(polytheist)”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만이 신이라고 믿는 것을 "유일신론자(monotheism)"라고 합니다.
유일신론(monotheism)과 단일신론(Henotheism)은 다릅니다."유일신이란 하나님만이 신이라고 믿는 것"을 말합니다.
단일신론(單一神敎, Henotheism, ἑνός θεοῦ)은 다른 신을 인정하지 않고 내가 믿는 신만이 신이라고 주장하는 것을 말합니다.
 
“신학”이란 각 사람이 신에 관하여 가지고 있는 생각을 정리한 것입니다.
신학이 없는 사람은 없습니다.
단지 “거짓 신학”과 “옳은 신학”의 차이가 있을 뿐입니다.
진리를 말하는 신학도 있고, 거짓된 신학도 있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나는 신학을 모르겠다.’라고 생각해서는 안 되고 어떻게 하면 내가 바른 신학을 가질 수 있는지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미가 선지자는 유다 왕 요담, 아하스, 히스기야 때의 거짓된 신학을 가르치는 거짓 선지자들과 싸워야 했습니다.
거짓 선지자들은 거짓된 사상을 가지고 백성들을 미혹하고 오도를 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미가는 미가서 2장에 ‘올바른 신학의 3대 원리가 무엇인가?’를 제시하고 있습니다. 

Ⅰ. 심판의 원리(1-5절)

1-5절까지는 ‘하나님의 심판 원리가 무엇인가?’를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심판하실 때 어떤 원리를 따라 심판 하시는지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유다 백성들의 지도자들은 밤이 되면 침상에 누워 편안히 쉬지 않고 악한 계획을 세운다고 했습니다.
그들은 ‘내일 날이 밝으면 약한 백성들의 밭과 집을 빼앗을 것인가?’ 라는 악한 계획을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그들이 침상에서 악한 계교를 세우는 이유는 그들의 손에 권력과 법을 주무르는 권세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 권세를 악용해서 약한 백성들의 재산을 탈취하고 조상으로부터 유업으로 받은 땅을 빼앗는다는 것입니다. 

열왕기상 21장에 보면 아합이 나봇의 포도원의 포도가 탐스럽게 열리는 것을 보고 그것을 빼앗으려고 했습니다.
그래서 아합은 나봇에게 포도원을 팔라고 말하였습니다.
나봇은 포도원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땅이고, 우리 조상 대대로 농사지은 땅이기 때문에 당신이 아무리 왕이라도 줄 수 없다고 말하였습니다.
그 말을 듣고 아합은 침상에 들어가 누워버렸습니다.
그때 아합의 아내 이세벨이 ‘왕인 당신이 그거 하나 빼앗지 못합니까?’ 라고 말하며, 거짓된 증인 둘을 세워 나봇을 죽이고 그 땅을 빼앗았습니다. 

아합과 같이 권력을 가지고 기업과 땅과 밭을 빼앗는다는 것입니다.
“내가 돌이켜 해 아래서 행하는 모든 학대를 보았도다.
오호라 학대받는 자가 눈물을 흘리되 저희에게 위로자가 없도다.
저희를 학대하는 자의 손에는 권세가 있으나 저희에게는 위로자가 없도다” (전 4:1).

백성들은 빼앗겨도 하소연 할 곳이 없다는 것입니다.
유다 백성들의 지도자들이 약한 백성들의 집과 밭을 빼앗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도 그들에게 재앙을 내리시려는 계획을 세우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앗수르 군대와 바벨론 군대를 보내서 너희의 집과 밭을 빼앗을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때 유다 백성들의 지도자들은 “슬프다 우리가 온전히 망하게 되었도다.”라는 슬픈 애가를 지어 부른다고 하였습니다.
이 이야기에서 미가는 대단히 중요한 하나님의 심판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은 죄 많은 자나 죄 없는 자나 하나님께서 동일한 형벌로 심판하신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의 심판의 원리는 “동해보복(Lex talionis)”의 원리입니다(렉스 탈리오니스).
라틴말로 ‘Lex’라는 말은 법이란 뜻이고, ‘Talionis’는 보복이란 뜻입니다.
쉬운 말로는 ‘이에는 이 눈에는 눈’의 원리입니다. 남의 눈을 뽑은 사람은 하나님께서도 그 사람의 눈을 뽑으시고, 남의 이를 뽑은 사람은 그 사람의 이를 뽑으신다는 것입니다.

지도자들이 악한 계획을 세우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도 재앙을 내릴 계획을 세우시고, 지도자들이 밭과 집을 빼앗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도 그들의 밭과 집과 산업을 빼앗으십니다.
또한 지도자들이 백성들을 슬프게 만들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슬픈 노래를 부르게 하시겠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동해보복의 원리입니다. 

우리는 이 원리를 이스라엘 과거의 신정 통치 국가의 법이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이것은 하나님께서 죄인들을 심판하시는 일반적인 원리입니다.

“저가 웅덩이를 파 만듦이여 제가 만든 함정에 빠졌도다” (시 7:15).
남을 빠뜨리려고 웅덩이를 파놓고서 자기가 거기에 빠진다는 말입니다. 

에스더서 7장에 보면, 악한 아각 사람 하만이라는 자가 있습니다.
그는 궁궐에 출입을 하는 대신입니다.
그가 궁궐에 들어갈 때 유대인 모르드개가 인사하지 않는다고 죽이려고 했습니다.
그리고 모르드개만 죽이는 것으로 성이 풀리지 않아 모르드개의 민족 모두를 말살하려는 계획을 세웠습니다.
그러나 그 일을 하나님께서 역전시키셨습니다.
하만이 모르드개를 죽이려고 자기 집에 오십 규빗이나 되는 장대를 달아 놓았는데, 그 장대에 하만이 달려 죽게 하셨습니다. 
 
프랑스 대혁명이 일어난 1789년 길로틴(guillotine)이라는 사람이 남의 목을 자르려고 교수대를 만들었습니다.
그러나 오히려 그 교수대에서 자신의 목이 잘려 죽었습니다.
이것이 동해보복입니다.
남에게 해를 끼치려 하면 자기가 그 해를 입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심판 원리입니다. 

사무엘하 12장에 보면 다윗이 저녁에 왕궁을 거닐다가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가 목욕하는 것을 보고, 남의 아내인 밧세바를 빼앗았습니다.
그리고 자신이 빼앗은 밧세바의 남편이자 자신에게 충성을 다했던 장군 우리아를 고의적으로 전쟁터에 앞장서게 하여 사망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때에 나단 선지자가 다윗에게 당신이 남의 가정을 파괴하고 남의 아내를 빼앗았으니 칼이 당신 집에서 영영히 떠나지 아니하리라고 말하였습니다.
그리하여 다윗 집안에는 자식들끼리 죽이고 자식들이 아버지를 쫓아내고 아버지의 후처를 겁탈하는 일이 얼어나게 된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동해보복입니다. 

마태복음 26장 52절에 예수님께서도 베드로에게 이 진리를 다시 한 번 확증해 주셨습니다.
“이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검을 도로 집에 꽂으라 검을 가지는 자는 다 검으로 망하느니라” (마 26:52).
남을 죽인 자는 자기도 죽게 된다는 동해보복의 원리를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현세의 심판이든 내세의 심판이든 자기가 저지른 죄와 같은 종류의 형벌을 주시고, 자기가 저지른 죄의 경중에 따라서 많은 죄를 저지른 사람은 많은 형벌을 주시고, 적은 죄를 저지른 사람은 적은 형벌을 주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심판 원리입니다.

“주인의 뜻을 알고도 준비하지 아니하고 그 뜻대로 행하지 아니한 종은 많이 맞을 것이요. 알지 못하고 맞을 일을 행한 종은 적게 맞으리라 무릇 많이 받은 자에게는 많이 요구할 것이요 많이 맡은 자에게는 많이 달라 할 것이니라” (눅 12:47-48). 똑같이 맞을 일을 했어도 알고 저지른 자는 많이 매 맞고 모르고 저지른 자는 적게 매 맞는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많은 죄를 저지르셨습니까?
적은 죄를 저지르셨습니까?
많은 죄를 저지르셨으면 많은 형벌을 받을 것이고, 적은 죄를 저지르셨으면 적은 형벌을 받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기본적으로 죄를 저지른 자는 지옥에 가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벌을 받아서는 안 됩니다.
하지만 우리는 죄가 많이 있습니다.
알고 지은 죄, 모르고 지은 죄, 은밀하게 지은 죄, 공개적으로 지은 죄, 마음으로 지은 죄, 몸으로 지은 죄, 크게 지은 죄, 작게 지은 죄 등 우리의 삶 가운데 죄가 많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죄가 있어도 벌을 안 받는 법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딱 한 가지 방법밖에 없습니다. 내가 받아야 할 벌을 대신 십자가에서 받아 주신 예수 그리스도를 의지하고 그분을 나의 구주로 믿는 길밖에 없습니다. 이것이 복음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어떤 죄가 있어도 벌을 받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믿지 않는 자를 동해보복의 원리로 심판하시지만 믿는 자는 그 심판을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옮겨 버리시기 때문에 우리에게는 심판이 면죄된 줄로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Ⅱ. 올바른 성서해석의 원리(6-11절)

미가 시대의 악한 지도자들은 거짓 선지자들을 좋아했습니다.

“사람이 만일 허망하게 행하며 거짓말로 이르기를 내가 포도주와 독주에 대하여 네게 예언하리라 할 것 같으면 그 사람이 이 백성의 선지자가 되리로다” (미 2:11).

선지자가 나와서 하나님을 믿으면 포도주를 풍성히 주실 것이라고 말하면 그러면 다 좋아한다는 것입니다.
오늘날도 예수 믿으면 부자가 되고, 건강해지고, 출세한다는 이야기를 하면 좋아합니다. 

그러나 복을 많이 받아 돈을 많이 벌고, 쾌락을 많이 누리며 처첩을 천명이나 두었고, 지혜가 세상 모든 사람들보다 뛰어났던 솔로몬의 결론은 무엇이었습니까?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전 1:2).
거짓 선지자들은 사람들이 좋아하는 것들을 가지고 마음을 미혹합니다.
그런데 부자가 되고, 병 낫는 것들도 좋은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복음의 전부가 아닙니다.
그것에 목표를 두면 안 됩니다. 
 
거짓 선지자들의 문제는 성경해석이 편파적이라는 것입니다.

“너희 야곱의 족속아 어찌 이르기를 여호와의 신이 편급하시다 하겠느냐 그의 행위가 이러하시다 하겠느냐 나의 말이 행위 정직한 자에게 유익되지 아니하냐” (미 2:7). 

미가 2장 7절은 세 개의 질문입니다.
두 개는 거짓 선지자가 하는 것이고, 하나는 미가가 하는 질문입니다.

거짓 선지자들은
첫째로, 여호와의 신이 어찌 편급하시냐는 질문을 합니다.

편급이라는 말은 영어로 ‘Impatient’입니다.
하나님께서 어찌 그렇게 참을성이 없으시냐는 말입니다. 거
짓선지자들이 미가에게 말합니다.
“너는 하나님이 우리를 심판한다고 예언하지만 하나님은 오래 참으시는 하나님이신데 참을성이 없어 우리를 심판한다는 말이냐? 미가야 네가 그렇게 말하는 것은 하나님을 욕되게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너는 예언하기를 그치라.” 

거짓 선지자들은 출애굽기 34장 6절을 인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호와로라 여호와로라 자비롭고 은혜롭고 노하기를 더디 하고 인자와 진실이 많은 하나님이로라” (출 34:6). 

거짓 선지자들은 이 말씀만 가지고 이야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둘째로, “그의 행위가 그러하느냐?”라고 질문을 합니다.

“하나님께서 지금까지 우리를 보호해 주시고 광야에서 40년간 우리를 인도하시고, 우리에게 가나안 땅도 주시고 왕도 세워 주셨는데 어찌 우리를 심판하신다고 하느냐? 심판은 하나님의 행위일 리가 없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거짓 선지자들의 문제는 출애굽기 34장 6절만 읽고 7절은 읽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인자를 천대까지 베풀며 악과 과실과 죄를 용서하나 형벌 받을 자는 결단코 면죄하지 않고 아비의 악을 자녀 손 삼사 대까지 보응하리라” (출 34:7).

아버지가 악을 저지르면 삼사대까지 죗값을 받고, 착한 일을 하면 천대까지 인자를 받는다는 이야기입니다.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람이 죄를 지으면 그 자식들이 삼사대까지 아비의 죗값을 받는 다는 것입니다.
잘한 것은 천대까지 복을 주고 잘 못 한 것은 삼사대만 간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잘못한 것을 우리 대에서 끊지 않으면 우리 자손 삼사대까지 우리 죗값이 내려간다는 것을 아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이 남의 재산에 손해를 끼쳤다면 삼사대가 재산에 손해를 보게 됩니다.
여러분이 남에게 못할 짓을 하고 바람을 피웠다면 삼사대가 그러한 문제로 고통을 겪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 때에 우리의 죗값을 끊고 우리 후손들에게 나가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거짓 선지자들은 하나님의 사랑만 강조했지 하나님의 심판은 의도적으로 무시했습니다.
이것은 반쪽 진리입니다.
반쪽 진리는 비 진리입니다.
진리는 온전한 진리가 되어야 합니다.
비 진리는 부패한 삶을 낳게 됩니다.
이렇게 거짓 선지자들에게 배운 사람들이 행하는 짓은 무엇입니까?

“근래에 내 백성이 대적 같이 일어나서 전쟁을 피하여 평안히 지나가는 자들의 의복 중 겉옷을 벗기며, 내 백성의 부녀들을 너희가 그 즐거운 집에서 쫓아내고 그 어린 자녀에게서 나의 영광을 영영히 빼앗는도다” (미 2:8-9). 

이렇게 잘 못된 사상을 가진 백성들이 하는 짓은 전쟁을 싫어하는 평안한 사람들을 지나가는 것을 잡아 겉옷을 벗깁니다.
그리고 부녀들을 집안에서 쫓아내고 자녀들이 누릴 하나님의 축복을 누리지 못하게 하고, 가정을 파괴하고 약탈합니다.
왜냐하면, 백성들이 거짓 선지자들에게 거짓 사상을 배웠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런 사람을 향하여 말씀하십니다.
“이것이 너희의 쉴 곳이 아니니 일어나 떠날지어다. 이는 그것이 이미 더러워졌음이라 그런즉 반드시 멸하리니 그 멸망이 크리라” (미 2:10).

너희같이 악한 거짓말 하는 자들은 하나님께서 기업으로 주신 땅에서 살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미가는 이런 거짓 선지자들을 향해서 질문합니다. “나의 말이 행위 정직한 자에게 유익되지 아니하냐?” 미가가 심판의 말을 해도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에 마음이 올바른 사람은 그것을 받아들여 유익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요나가 앗수르의 수도 니느웨에 가서 심판받을 것이라고 말했을 때 그들이 그것을 듣고 회개하여 돌이켜 심판이 거두어진 것처럼 심판의 메시지도 유익을 주는 것입니다. 

거짓 선지자는 출애굽기 34장 6절은 취했어도, 7절은 버렸습니다.
하지만 미가는 하나님께서 은혜도 주시지만, 심판도 하시는 분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미가는 성경을 균형 있게 이해하고 적용하고 선포 했던 것입니다. 오늘날 대한민국에 이단자들이 많이 있습니다. 이단들의 특징은 성경을 편파적으로 해석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성경을 균형 있게 해석 하고, 적용해야 합니다. 이것이 미가 신학의 바른 원리입니다. 

Ⅲ. 올바른 구원의 원리(12-13절)

미가는 하나님께서 죄에 따라 심판하시는 중에도 “남은 자”에게는 은혜를 베푸신다는 ‘남은 자의 신학’(The theology of the remnants)을 말하고 있습니다.

“야곱아 내가 정녕히 너희 무리를 다 모으며 내가 정녕히 이스라엘의 남은 자를 모으고 그들을 한 처소에 두기를 보스라 양떼 같게 하며 초장의 양떼 같게 하리니 그들의 인수가 많으므로 소리가 크게 들릴 것이며, 길을 여는 자가 그들의 앞서 올라가고 그들은 달려서 성문에 이르러서는 그리로 좇아 나갈 것이며 그들의 왕이 앞서 행하며 여호와께서 선두로 행하시리라” (미 2:12-13). 

이것은 미가가 ‘올바른 구원의 신학’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죄에 따라서 동해보복의 원리로 심판을 하시지만, 남은 자에게는 은혜를 베푸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목자가 되셔서 이스라엘의 남은 자들을 전부 보스라의 양떼 같이 모으신다는 것입니다.

보스라의 양떼같이 된다고 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남은 자들을 모으셔서 특별히 보호하시고, 공급하시고, 돌보아 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13절 말씀은 하나님께서 남은 자들 앞에 앞장서서 원수들을 공격하고 물리치시고 승리를 주신다는 말씀입니다.

보스라의 양 떼 같이(미가 2:12) 

미가 선지자는 북이스라엘의 사마리아와 남유다의 예루살렘의 멸망을 선포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그는 이스라엘의 회복을 선포했습니다.
바벨론의 포로로 끌려간 사람들이 다시 예루살렘으로 돌아오게 될 것이고, 보스라의 양 떼 같이, 초장의 양 떼 같이, 많아질 것이라는 축복의 메시지를 선포했습니다. 

보스라는 모압의 한 지역으로서, 양이 많기로 유명한 곳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모아, 보스라의 양 떼 같이, 초장의 양 떼 같이, 많게 하시겠다고 축복하셨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께로 돌아와, 하나님을 경외하는 백성들이, 푸른 풀밭의 양 떼 같이, 많아질 것이라는 엄청난 축복의 말씀이었습니다.

12절 말씀입니다.
야곱아 내가 반드시 너희 무리를 다 모으며 내가 반드시 이스라엘의 남은 자를 모으고 그들을 한 처소에 두기를 보스라의 양 떼 같이 하며 초장의 양 떼 같이 하리니 사람들이 크게 떠들 것이며.

하나님은 멸망을 당한 이스라엘을 어떻게 초장의 양떼들처럼 많게 해 주시겠다는 것입니까?
북이스라엘은 이미 멸망하여 없어진 지 오래였고, 남유다는 바벨론에 끌려가, 힘들고 고달픈 노예생활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회복시켜, 보스라의 양 떼 같이, 초장의 양 떼 같이, 많게 하시겠다는 것입니까?
도대체 하나님께서는 어떻게 그 일을 이루어 가시겠다는 것입니까?

하나님은 “내가 반드시 이스라엘의 남은 자를 모으고 또 모으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을 업신여기던 예루살렘을 멸망시키셨습니다.
왕과 백성들은 포로로 끌려갔습니다.
하나님은 그 끌려간 사람들 가운데, 진실로 여호와를 경외하는 사람들만 불러 모으고 또 모으실 것입니다.
하나님은 구석구석에 흩어져 있는 양 떼들을 하나하나 다 불러내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지극히 거룩한 나라를 다시 시작하실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하나님의 백성들을 구원하여 많아지게 하시는 방법이었습니다.

아무리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망한다고 해도, 하나님을 진실로 경외하는 백성들은 그들 중에 분명히 남아 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어떤 고난을 당해도, 영원히 사라지지 않고 남아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남아 있는 그 백성들을 불러서, 하나님을 믿는 백성들의 숫자를 차츰 늘려 가시겠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발버둥을 치며 사람을 모으려고 해도, 사람을 모으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특히 하나님의 백성들을 모으는 것은 절대로 사람의 힘으로는 할 수가 없는 것이며, 오직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일입니다.

스가랴 4:6
이는 힘으로 되지 아니하며 능력으로 되지 아니하고 오직 나의 영으로 되느니라. 

주님이 모아 주셔야, 모일 수 있는 것이며, 주님이 많아지게 해 주셔야, 많아질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내가 이스라엘의 남은 자들을 모으고 또 모아서 그들의 숫자를 아주 많게 해 주실 것이다.”고 말씀하여 주시니, 이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나라가 망하고, 포로로 끌려갔으면, 하나님을 믿는 백성들의 숫자는 당연히 줄어들어야 마땅한 일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 숫자가 줄어들지 않고, 날이 갈수록, 오히려 더욱 더 많아졌습니다.
바벨론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고통을 안겨주며, 고달픔에 아파하며, 그들의 눈물을 쥐어짜던 고난의 땅이었습니다.
그곳은 자유롭게 하나님을 믿을 수 없는 버림받은 어둠의 땅이었습니다.
우상숭배로 가득한 죽음의 땅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 그 땅에 옮겨진 후에, 하나님을 믿는 경건한 백성들의 숫자는 날이 갈수록 늘어만 갔습니다.
고난의 시기가 되면, 눈에 보이는 하나님의 백성들의 숫자는 현저하게 줄어든 것처럼 보일지 모르지만, 실제로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백성들의 숫자가 늘어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고난에는 반드시 끝이 있고, 풍랑은 언젠가 잠잠해집니다.
어둠이 지나면 아침이 오듯 터널에는 끝이 있습니다.
고난 중에도, 하나님을 경외하면, 새로운 일들이 시작됩니다.
고난과 역경은 축복의 통로입니다.
어떠한 고난과 역경이 우리를 힘들게 할지라도, 그것은 하나님의 축복의 통로가 되기 때문에 두려워할 것이 없습니다.
힘들고 어려운 일을 만날 때, 왜 나만 겪는 고난이냐고, 원망 불평하지 않아야 합니다.
고난은 축복을 가져다 주는 지름길이요, 축복의 통로요, 축복의 그릇입니다.
고난을 바라보지 말고, 그 고난 속에서 역사하시는 하나님만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오늘 하루도 하나님을 가까이 함으로 복된 하루가 될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세상전쟁은 지휘관이 뒤에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영적인 전쟁은 지휘관이신 하나님께서 앞에 나가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남은 자에게 보호와 인도와 승리를 주십니다. 하나님은 앞장서서 길을 열어 주시는 “바알브라심”의 하나님입니다. 사무엘하 5장 20절에 보면 다윗이 블레셋 사람과 싸울 때도 하나님께서 먼저 앞장서시고 큰 승리를 주셨습니다. 그 동네 이름을 ‘바알브라심’이라고 붙였습니다. 그것은 ‘길을 열어 주시는 하나님이시라.’라는 의미입니다. 우리 성도들 앞길에 하나님께서 앞장서서 길을 열어주시기를 소망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남은 자들을 모아서 특별히 돌보시고, 원수를 물리치시고 승리를 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떤 학자는 이 말씀을 히스기야 왕 시대에 앗수르 왕 산헤립이 공격해왔을 때 하나님께서 승리를 주시겠다는 약속으로 해석합니다. 물론 일차적으로는 그런 의미일 수 있겠지만 남은 자의 신학은 구약 예언서에 전반적으로 나타나고 있는 ‘구원의 신학’입니다. 
 
“남은 자의 신학”은 구약 예언서에 전반적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여리고 성이 망할 때에도 기생 라합은 남아 있었습니다. 그리고 엘리야 선지자 시대에 모든 사람들이 우상 숭배하는 것처럼 보여도 하나님께서 바알에게 무릎을 꿇지 아니한 7000명을 남겨 두셨습니다. 그들이 남은 자입니다. 이 세상이 다 망해가는 것 같아도 참된 믿음을 가지고 하나님을 섬기는 남은 자들은 언제나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남은 자를 구원하시고 이방인의 택한 자를 접붙여서 교회를 완성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육적인 이스라엘을 심판하셔도 영적인 이스라엘인 남은 자들을 건져 구원하십니다. 이스라엘의 남은 자가 그루터기가 되고, 참감람나무가 되는 것입니다. 이방인은 돌감람나무였는데, 이방인 중에 하나님께서 택한 자들을 참감람나무에 접붙여서 이스라엘의 남은 자와 이방인의 택한 자가 하나님의 위대한 교회를 구성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돌감람나무가 참감람나무에 접붙임을 받아 참감람나무가 된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남은 자는 참감람나무입니다. 그리고 돌감람나무인 우리가 접붙임을 받아 구원을 받게 되었다는 것이 하나님 역사의 운행 계획이고, 미가의 구원신학인 것입니다. 구원의 주체는 하나님이십니다. 인간이 자유의지로 구원을 받는다는 신학은 성경이 지지하고 있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주권적으로 택한 자를 건져 구원하시는 것이 하나님 주권의 신학이고 옳은 신학이며 루터와 칼빈이 찾아낸 위대한 개신교 신학인 것입니다. 
 
구원의 주체는 하나님이시고, 구원의 대상은 남은 자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택하심을 입은 자입니다. 이들도 본질상 죄인이고, 하나님의 심판을 받기에 합당한 자들이지만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푸심으로 그들의 죗값을 십자가로 다 옮기셔서 죄 사함을 받아 구원받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된 것입니다. “그런즉 이와 같이 이제도 은혜로 택하심을 따라 남은 자가 있느니라” (롬 11:5). 구원의 주체는 하나님이시고, 구원의 대상은 남은 자이고, 구원의 결과는 목자 되시는 하나님의 보호와 공급과 돌보심이며 하나님께서 길을 여는 자가 되어 승리를 주신다는 것입니다. 


현대인은 진리를 상대화하려 하거나, 탈신학을 추구합니다.
그러나 신학은 벗어날 수는 없습니다.
바른 복음, 바른 신학을 추구하는 것이 옳은 일입니다.
바른 복음을 믿고 행하는 길은 이사야, 예레미야, 미가처럼 외로운 길일 수도 있습니다.
오늘날 이 시대를 포스트모던 시대라고 합니다.
포스트모던이라고 하는 것은 사람마다 각각 자기 옳은 소견대로 산다는 것이고, 진리가 상대화되는 것입니다.
진리가 상대화되면 절대적이고 객관적인 진리를 부정하게 됩니다. 
 
그리하여 윤리의 기준이 없어지고, 삶이 부패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남자와 여자가 결혼하라고 말씀하셨지만, 남자가 남자와 여자가 여자와 결혼을 합니다.
하나님 말씀의 기준이 사라지는 것입니다.
또한 그런 것이 나쁘다고 말하면 나쁘다고 말하는 사람을 공격합니다.
오늘날 기독교인들도 신학을 기피하고 탈신학화를 표방합니다.
신학을 거부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신학을 벗어날 수는 없습니다.
절대적인 진리는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절대적으로 살아계신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께서 천지를 지으시고, 인간을 창조 했다는 것은 절대적인 진리입니다.
그리고 인간이 하나님을 거역하고 죄악에 빠져 죄인이 되었다는 것도 절대적인 진리입니다.
또한 인간은 하나님께서 이 땅에 보내주신 구세주 예수그리스도를 믿지 아니하면 죄 사함을 받을 수 없다는 것도 절대적인 진리입니다. 

천하에 인간이 구원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습니다.
예수님을 믿어야 구원받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어야 천국 가는 것입니다.
다른 종교도 훌륭합니다.
하지만 그런 것을 믿어서는 구원받지 못합니다.
예수님을 믿는 우리는 죽어도 다시 살고, 다시 살 때는 영화로운 몸으로 다시 살아 죽지 않고, 썩지 않고, 쇠하지 않고, 슬프지 않고, 질병 없는 영광스런 육신을 입고 영원히 살게 될 줄 믿습니다.
이것이 절대적인 진리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신학을 부인해서는 안 됩니다.
그리고 진리를 믿는 바른 신학을 추구해야 합니다.
바른 복음을 믿고 행하는 것은 때로는 외로운 길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외로워도 가야 될 길입니다.
바른 복음을 믿고, 평생 정도를 행하며 살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7월 8일(목) 여호와의 신(미가 3:8)



미가서 3장의 내용 구분

3:1-4, 정치 지도자들의 죄악
3:5-8, 선지자들의 죄악
3:9-12, 지도자들의 죄악으로 성전의 황폐화


여호와의 신(the Spirit of the LORD)

미가 3:8
오직 나는 여호와의 신으로 말미암아 권능과 공의와 재능으로 채움을 얻고 야곱의 허물과 이스라엘의 죄를 그들에게 보이리라. 아멘 

권능(코흐) : 잠재력(사역 감당할 수 있는 것)
공의(미쉬파트) : 규례(법을 지킬 수 있는 방법)
재능(게브라) : 힘(위협, 협박을 두려워하지 않는 것)


정치 지도자들의 죄악(3:1-4)
- 야곱의 두령, 이스라엘 족속의 치리자들

첫째, 불의(1절)
둘째, 악(2절)
셋째, 부정직(9절)             

 1863. 11. 19 / 케티즈버그 국립묘지 연설
 
국민의
국민에 의한 국민을 위한 통치는 이 땅에서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Government of the people,  by the people, for the people, shall not perish from the earth.




거짓 선지자들의 죄악(3:5-7)
- 유혹하는 선지자

첫째, 돈 봉투(5절)
둘째, 영적 무지(6절)

미가 선지자(3:8)

여호와의 신으로 말미암아

선지자의 강령(마태복음 22:37-40)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는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 

거짓이 난무하는 세상(3:9-12)

- 야곱의 두령, 이스라엘 족속의 치리자들, 거짓 선지자들

첫째, 뇌물 재판(10절)
둘째, 부유한 설교자(10절)
셋째, 거짓 예언(10절)
넷째, 성전의 황폐(10절)

황금의 입 설교자
존 크리소스톰(John Chrysostom. 349-407)

그대의 말 입에 물린 금 재갈과 그대의 손목에 찬 금팔찌와 신발에 달린 금 수술은 곧 그대가 고아를 늑탈하며 과부들을 굶주리게 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그대가 죽은 후 당신의 거대한 저택을 바라보는  통행인들은 수군거릴 것이다.
‘저 저택을 짓기 위해 얼마나 많은 눈물들이 뿌려졌는가?
얼마나 많은 고아들이 헐벗었는가?
얼마나 많은 과부들이 약탈당했는가?
얼마나 많은 노동자들의 임금이 착취되었는가?’
당신의 죽음을 통해서도 이러한 고발의 범위로부터 벗어날 수는 없을 것이다.”


“모든 일에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로마서 4:20
믿음이 없어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치 않고 믿음에 견고하여져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오늘의 기도
견고한 믿음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7월 9일(금) 여호와의 산(미가 4:2)

여호와의 산(the mountain of the LORD)
미가 4:2

오라 우리가 여호와의 산에 올라가서 야곱의 하나님의 전에 이르자
그가 그 도로 우리에게 가르치실 것이라
우리가 그 길로 행하리라 하리니
이는 율법이 시온에서부터 나올 것이요 여호와의 말씀이 예루살렘에서부터 나올 것임이라. 아멘


여호와의 산 :
  시온산(Mt Zion)
  해발 756m
* 남산 : 860ft(270.85m)

그가 : 메시야(4:1-3, ref 이사야 2:2-4)

그 도 : 오라흐(’ôrach) אֹרַח                                  
 
그 길 : 데레크(derek) דֶּרֶךְ

이사야 2:2-4
말일에 여호와의 전의 산이 모든 산 꼭대기에 굳게 설 것이요 모든 작은 산 위에 뛰어나리니 만방이 그리로 모여 들 것이라. 많은 백성이 가며 이르기를 오라 우리가 여호와의 산에 오르며 야곱의 하나님의 전에 이르자 그가 그 도로 우리에게 가르치실 것이라 우리가 그 길로 행하리라 하리니 이는 율법이 시온에서부터 나올 것이요 여호와의 말씀이 예루살렘에서부터 나올 것임이니라.그가 열방 사이에 판단하시며 많은 백성을 판결하시리니 무리가 그 칼을 쳐서 보습을 만들고 그 창을 쳐서 낫을 만들 것이며 이 나라와 저 나라가 다시는 칼을 들고 서로 치지 아니하며 다시는 전쟁을 연습지 아니하리라.

미가 4:1

말일에 이르러는 여호와의 전의 산이 산들의 꼭대기에 굳게 서며
작은 산들 위에 뛰어나고 민족들이 그리로 몰려갈 것이라.

* 말일에(In the last days) / 끝날에
여호와의 산이 회복될 것이다.

미가  3:10-12
시온을 피로, 예루살렘을 죄악으로 건축하는도다.
그 두령은 뇌물을 위하여 재판하며 그 제사장은 삯을 위하여 교훈하며 그 선지자는 돈을 위하여 점 치면서 오히려 여호와를 의뢰하여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우리 중에 계시지 아니하냐 재앙이 우리에게 임하지 아니하리라 하는도다. 이러므로 너희로 인하여 시온은 밭 같이 갊을 당하고 예루살렘은 무더기가 되고 성전의 산은 수풀의 높은 곳과 같게 되리라.

히브리서 1:1-2

옛적에 선지자들로 여러 부분과 여러 모양으로 우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하나님이.
이 모든 날 마지막에 아들로 우리에게 말씀하셨으니 이 아들을 만유의 후사로 세우시고 또 저로 말미암아 모든 세계를 지으셨느니라.


미가 4:2

오라 우리가 여호와의 산에 올라가서 야곱의 하나님의 전에 이르자
그가 그 도로 우리에게 가르치실 것이라 우리가 그 길로 행하리라 하리니
이는 율법이 시온에서부터 나올 것이요 여호와의 말씀이 예루살렘에서부터 나올 것임이라. 

*성전의 회복(예배 회복, 말씀 회복, 삶의 회복)

여호와의 이름을 회복(미가 4:5)

오직 우리는 우리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빙자하여 영원히 행하리로다.
(공동번역) 우리도 자손 만대에 우리 하느님의 이름 야훼를 부르며 살아가자.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사도행전 2:21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로마서 10:13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하나님의 뜻을 깨닫자(미가 4:12)

그들이 여호와의 뜻을 알지 못하며 그 모략을 깨닫지 못한 것이라.

하나님의 뜻(디모데전서 2:4)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데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디모데후서 2:19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마다 불의에서 떠날찌어다.

미가 3:11-12
그 두령은 뇌물을 위하여 재판하며
그 제사장은 삯을 위하여 교훈하며
    그 선지자는 돈을 위하여 점 치면서...
시온은 밭 같이 갊을 당하고 예루살렘은 무더기가 되고 성전의 산은 수풀의 높은 곳과 같게 되리라. 


미가 6:9

여호와께서 성읍을 향하여 외쳐 부르시나니 완전한 지혜는 주의 이름을 경외함이니라
너희는 매를 순히 받고 그것을 정하신 자를 순종할찌니라.

요한복음 4:24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찌니라.

(현대인의 성경)
하나님은 영이시다. 그래서 예배하는 사람은
영적인 진실한 예배를 드려야 하는 것이다.

오늘의 기도

예배하는 삶을 회복하자!
신앙 생활(信仰 生活)


7월 10일(토) 그의 근본(미가 5:2)


미가 5:2
베들레헴 에브라다야 너는 유다 족속 중에 작을찌라도 이스라엘을 다스릴 자가 네게서 내게로 나올 것이라
그의 근본은 상고에 태초에니라. 아멘


* 베들레헴(떡집)
* 에브라다(열매를 많이 맺음) 

이사야 11:1

이새의 줄기에서 한 싹이 나며 그 뿌리에서 한 가지가 나서 결실할 것이요. 

사무엘상 17:12a

다윗은 유다 베들레헴 에브랏 사람 이새라 하는 자의 아들이었는데... 

기원전 8세기를 "격동의 시대"라고 합니다.
격동의 시대는 눈에 보이는 것에 의해서 판단합니다.
물론 지금도 마찬가지라고 하겠습니다.

신앙이란 관점(觀點)을 바꾸는 것이다!

베들레헴(Bethlehem)과 메시아(Messiah)

1. 작은 곳에서 다스릴 자(큰 자)가 세워진다
- 역설적 진리(신앙)

2. 근본(시작)은 영원이다
- 창조적 진리(신앙)

오늘의 시대 

1. 대립의 시대 - 좌편향 : 우편향

 역사의 사건을 혼돈 시키는 교육
 소련군은 해방군으로 미군은 점령군으로 한반도를 지배했다!

2. 혼돈의 시대 - 창조 질서의 파괴(성 정체성의 혼돈)

 어느 목욕탕에서 여탕에 남자가 들어왔다.
 나는 여자라고 주장하더랍니다.
 법적으로 제지할 수 없다고 하는 시대라고 합니다.

3. 대형화 시대 - 가전제품(대형 냉장고)

 자동차도 작은 것은 사고가 나면 생명의 위험을 느끼므로 큰 것이 안전하다.
 작지만 더 튼튼하게 만들면 됩니다.

고린도후서 6:8b-10

속이는 자 같으나 참되고.
무명한 자 같으나 유명한 자요
죽은 자 같으나 보라 우리가 살고
징계를 받는 자 같으나 죽임을 당하지 아니하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아무 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로다. 

 

근본(모차. môwtsâʼ) םֹצָא                                                                                 
- 기원, 시초, 발단, 원인, 해돋이, 새벽녘


신앙의 근본은 무엇인가? 

  1. 예수 그리스도 

  2. 성경(하나님의 말씀)
   
신앙은 좋은데…..말씀(성육신의 삶)은 없다!
제자 훈련은 많은데 제자가 없다!

미가 5:2


베들레헴 에브라다야
너는 유다 족속 중에 작을찌라도
이스라엘을 다스릴 자가
네게서 내게로 나올 것이라
그의 근본은 상고에 태초에니라. 아멘

요한복음 12:24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오늘의 기도
밀알의 삶을 실천합시다!
 

베들레헴과 메시아

작은 곳에서 다스릴 자가 세워진다
(역설적 신앙)

어느 스님이 소록도에 있는 나환자들에게 불경을 가르치고 전하려고 자원하여 소록도에 들어갔다고 합니다.
나환자들의 모습이 처음 보는 사람에게는 잘 적응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부처님의 마음으로 나환자들에게 다가가 불경을 외우고 부처님의 가르침을 전하는데 나환자들이 전혀 반응이 없다고 합니다.
그래서 아직 내가 수양이 부족하구나!
이렇게 깨닫고 더 열심히 나환자들을 섬기는데 하루는 어느 나환자가 세상을 떠나 장례식을 마쳤는데 불교에서는 사람이 세상을 떠나면 49일 동안 제를 지내는데 살아서는 부처님을 믿지 못했지만 죽어서라도 부처님을 소개하려고 매일 같이 정성을 다하여 죽은 사람을 위하여 불경을 외우고 정성을 다하여 예불을 드렸다고 합니다.
한번은 나환자들이 "여보시오, 그러지 말고 예수를 믿으시오!" 라고 하더랍니다.
그런데 어느 날 불공을 드리려고 염불을 외우는데 갑자기 그 입에서 "며칠 후 며칠 후 요단 강 건너가 만나리" 이렇게 찬송이 나오더랍니다.
그때 생각하기를 나는 건강한 스님인데 저 사람들은 나환자들로 건강하지 않은 몸을 갖고도 어찌 저렇게 평안할 수 있을까? 생각하며 아직도 내가 도가 부족하구나 생각하며 더 열심히 나환자들에게 부처님을 소개했다고 합니다.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그 입에서 염불을 외우다말고 찬송이 흘러나오므로 내가 정신이 이상해졌나! 하고 생각했다고 합니다.

나환자와 건강한 스님 더구나 집안 대를 이어 스님이 되었으니 얼마나 철저하겠습니까?
그런데도 나환자들이 어느 한사람도 부처님을 알려고 하지 않더랍니다.
소록도에서 오히려 큰 충격을 받고 나왔는데 이것이 계기가 되어 승복을 벗고 결국에는 목사가 되었다고 합니다.

이런 신앙이 역설적 신앙 아닐까요?
베들레헴에서 탄생하신 예수님 때문에 나환자가 되었지만 불평과 원망이 없이 기쁜 찬송과 감사의 기도를 하며 오히려 스님에게 복음이 무엇인지를 당당하게 보여 줄 수 있는 신앙이 역설적 신앙이라고 하겠습니다.

어느 어린 아이가 예수님의 가르침을 배우려고 아침부터 보리떡과 물고기를 점심으로 준비하고 예수님의 가르침을 들었습니다.
날이 저물 무렵 많은 무리를 바라보신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고 하셨습니다.
제자들은 놀래서 이 많은 사람에게 한 끼 식사를 제공하려면 적어도 300데나리온이 필요합니다.
더 큰 문제는 300데나리온이 있어도 광야에는 식품점도 없고 식당도 없습니다.
어디서 음식을 구합니까?
그런데 어린 아이는 여기 제가 먹을 점심이 있어요.
많지는 않지만 예수님께서 이것을 드시는 것이 좋을 것같아요 하며 자기 도시락을 내놓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어린 아이의 점심 도시락을 들고 하나님께 감사기도를 마친 후에 제자들에게 이것으로 나눠주라고 하셨습니다.
제자들이 도시락을 분배하는데 나눠주고 또 나눠주고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도시락을 먹은 사람이 남자 어른들만 5천 명이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남은 것을 모았더니 12광주리가 되었다고 합니다.

역설적 신앙이란 내가 무엇을 기대하고 작은 것을 내려놓은 것이 아닙니다.
내게도 부족한 양이지만 서로 나눠야 하고 나 보다 예수님께서 먼저 드셔야 한다는 생각으로 드리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자리에서 나타나는 사건은 이적이 될 것입니다.


근본은 영원이다
(창조적 신앙)

1866년 8월 27일에 대동강 평양의 한 포구에 큰 배 한척이 정박했습니다.
이 배 이름은 제너널 셔먼호입니다.
이 배는 조선의 개항과 통상을 요구하며 총과 포를 쏘아대었습니다.
그러다가 이 배는 9월 2일에 양각도 모래톱에 좌초되었는데, 이 배에서 탈출을 시도하던 영국인 토마스 선교사도 스물일곱 살의 꽃다운 나이에 재대로 복음 한번 전하지 못하고 안타까운 순교를 하고 말았습니다.

우리나라에 내한했던 첫 번째 선교사 토나스는 아무런 활동도 하지 못하고 죽었던 것 같습니다.

그때 토마스 선교사를 죽인 병사 박춘권은 이렇게 회고했습니다.

“내가 서양 사람을 죽이는 중에 한 사람을 죽인 것은 내가 지금 생각할수록 이상한 감이 들었다.
내가 그를 찌르려고 할 때 그는 두 손을 마주잡고 무슨 말을 한 후 붉은 베를 입힌 책을 가지고 웃으면서 받으라고 권하였다.
내가 죽이기는 하였으나 이 책을 받지 않을 수가 없어서 받아왔노라.”

토마스를 선교사를 죽인 박춘권은 한문으로 된 성경을 영문주사였던 박영식에게 건넸습니다.
박영식은 종이가 귀하던 시절 한문 성경 종이를 떼어서 도배를 했습니다.
나중에 최치량이라는 사람에게 이 집을 팔았습니다.
최치량은 이집을 개조하여 여관으로 영업을 했습니다.
이후 사무엘 마펫, 마포삼열 선교사가 평양에 첫날밤을 보냈는데 공교롭게도 토마스 선교사가 던져준 성경으로 도배한 방에서 숙박을 했습니다.

가만히 보니 예사 벽지가 아니라 성경이었습니다.
사무엘 마펫 선교사는 이 집을 매입하여 널다리골 교회를 세웠습니다.
이 교회는 나중에 이름을 바꾸어 장대현교회가 되었습니다.

1907년 길선주 목사님이 대부흥운동을 일으켰던 그 유명한 교회입니다.
또한 토마스 선교사를 죽인 박춘권과 여관집 주인 최치량은 장대현 교회 장로가 되었습니다.
사람이 아무리 잘 짜맞춘 드라마라도 이런 역사가 일어날 수 없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드라마입니다.
이 하나님의 드라마를 우리는 역설의 신앙이요, 역설의 인생이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기독교는 역설의 종교입니다.
우리의 신앙은 역설의 신앙이고, 우리의 인생도 하나님의 역설이 아니고는 이해할 수 없는 신비로 가득 차 있습니다.
세상적으로 똑똑하고, 타산적이고, 이기적인 사람은 역설의 진리를 받아드리지 못합니다.
세상적 관점에서 바보가 되는 것이 믿음입니다.
세상적 관점으로는 바보 같아 보일지 모르지만 역설의 신앙을 가진 사람은 예수님 안에서 하늘의 지혜로 살아가고, 예수님의 능력으로 온전해 지고, 예수님으로 인해 모든 것을 가진 사람으로 살아갑니다.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속이는 자 같지만 참된 사람들입니다.
무명한자 같지만 유명한 사람들입니다.
죽은 자 같지만 살아 있고, 징계 받는 자 같지만 죽임을 당하지 않습니다.
근심하는 사람 같지만 항상 예수님 때문에 기뻐합니다.
가난한 사람 같지만 다른 사람을 부요하게 해 주는 사람입니다.
아무 것도 없는 사람 같지만 예수님으로 인해 모든 것을 가진 사람입니다.


인디언과 노 신사

인종 차별이 심했던 때의 이야기이다.
한 미국 신사가 자기 집 정원 앞에서 맥주를 마시며 서 있었다.
이 때 남루하고 몹시 피곤해 보이는 한 인디안이 지나가다가 그 신사에게 빵을 좀 달라고 애걸했다. 
신사는 “너에게 줄 빵이 없다”고 말했다. 
“그렇다면 지금 당신이 마시는 맥주라도 한 잔”주십사고 부탁했고 역시 거절당했다.
몹시도 배고프고 갈증이 난 인디안은 마지막으로 물 한모금이라도 달라고 사정했지만 미국 신사는 
“너처럼 개 같은 인디안에게 줄 물은 없다”고 잘라 말했다. 
인디안은 슬픈 얼굴로 돌아갔다. 
얼마 후에 그 신사가 사냥을 나갔다가 깊은 산중에서 사냥개를 놓쳐 그만 길을 잃었다.
방향 감각도 없이 산 속에서 헤매는데 날이 어두워지기 시작했다.
그는 배고프고 목말라 죽을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마침 그 때 그곳을 지나가던 인디안은 그의 딱한 사정을 보고 당장 구출해서 자기 집으로 안내하여 후히 대접했다.
그 신사가 정신을 차리고 나서 가만히 보니 자기를 구출한 인디안이 바로 얼마전 자기가 박대했던그 인디안이었다.
너무 어이없고 부끄러워서 어쩔 줄 몰라하는 신사에게 인디안이 조용히 말했다고 한다. 
“당신이 얼마 전에 나에게 한 것처럼 내가 당신을 대했다면 지금쯤 당신은 산중에서 죽었을 것입니다”


알렉산더와 예수

 B. C. 350년경 알렉산더 대왕은 세계를 정복하고 거대한 제국을 세웠다. 그리스도와 알렉산더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두 사람은 젊은 날에 일을 시작하여 33세라는 이른 나이에 생을 끝마쳤다. 알렉산더는 왕국에서 태어났고,
예수는 마굿간에서 태어났다.
알렉산더는 왕자로 태어났고,
예수는 목수의 아들로 태어났다.
알렉산더는 왕좌에서 고귀한 왕으로 죽었으며,
예수는 십자가에서 조롱받는 왕으로 죽었다.
알렉산더의 일생은 위대한 성공으로 보이고,
예수의 일생은 실패한 것으로 보인다.
알렉산더는 자신의 소유를 위해 수십만 명의 피를 흘렸다.
예수는 전 인류를 위해서 자신의 피를 흘렸다.
알렉산더는 영광의 바벨론에서 죽었고,
예수는 수치의 갈보리에서 죽었다.
알렉산더는 모든 왕국을 정복하였고,
예수는 죽음을 정복하였다.
알렉산더는 모든 인간을 노예로 만들었고,
예수는 모든 인간을 자유롭게 하였다.
알렉산더는 역사를 만들었고,
예수는 역사를 변화시켰다.


당연한 말씀

고든(C.D. Gordon)의 글에 나오는 이야기이다.
길가에서 과일을 팔고 있는 작은 소녀가 있었다. 그녀는 시간만 있으면 언제나 성경을 읽곤 하였다.
하루는 한 젊은 신사가 과일을 사려고 그녀 앞에 섰지만, 이 소녀는 책에 열중해 있어 손님이 온 것을 알지 못했다.
“얘야, 너는 무얼 그리 열심히 읽고 있니?”
“네, 하나님의 말씀이죠.”
이 젊은 신사는 회의주의자였다. 그는 소녀에게 다시 물었다.
“누가 이 책이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이야기해 주었니?”
“하나님께서 제게 그렇게 말씀하신 걸요.”
“뭐, 하나님이 네게 말씀하셨다고? 말도 안돼! 너는 만나 보지도, 함께 이야기하지도 못할텐데!”
소녀는 조금의 동요도 없이 젊은 신사를 쳐다보며 이야기했다.
“누가 아저씨께 하늘에 태양이 있다고 이야기해 주던가요?”
“그건 당연한 말이 아니니? 난 저 햇살이 좋단다.”
“그래요! 아저씨 말씀이 옳아요. 그렇게 아저씨가 태양을 느끼듯 저는 하나님을 느껴요! 제가 성경을 읽으면 하나님께서는 저를 따뜻하게 해준답니다. 제가 이 성경을 읽어서 얻은 저 햇살과 따스한 마음은 하나님이 아니시고는 제게 줄 분이 없지요!”


요한복음 4:24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지니라.

신령은 눈으로 볼 수 없지만 진정은 눈으로 볼 수 있습니다.
따라서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하는 것은 눈으로 볼 수 없는 하나님을 눈으로 볼 수 있도록 살아가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강도 만난 사람은 세 종류의 사람을 만났습니다.
첫째는 제사장
둘째는 레위인
셋째는 사마리아인

눈으로 보이는 것은 제사장과 레위인에게서 하나님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전혀 볼 수 없었습니다.
반면에 사마리아 사람은 눈으로 하나님을 볼 수 없는 처음부터 무시당한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 사마리아 사람에게는 하나님을 볼 수 있었습니다.
이것이 신령과 진정의 예배라고 하겠습니다.

얼마전 정기 검진을 받기 위해 예약된 시간에 주치의를 만났습니다.
이야기를 나누는 중에 은혜라는 이야기가 자연스럽게 나와 은혜가 무엇인가요?
은혜는 주는 것입니다.

신앙생활(信仰生活)

신앙(信仰)은 명사형(名詞形)이다.
생활(生活)은 동사형(動詞形)이다.
따라서 신앙생활이란 추상명사를 동사로 바꾸는 것이다.
보이지 않는 것을 보이는 것으로 바꾸는 것이다.

생활신앙이란 동사를 추상명사로 바꾸는 것이다.
보이는 것을 보이지 않는 것으로 바꾸는 것이다.



예수의 탄생을 예언하다.

미가는 구약성서의 선지자다.
그는 베들레헴에서 장차 이스라엘을 다스릴 인물이 태어날 것이라고 예언했기 때문에 크리스마스와 관련되는 인물이다.

미가 5:2
이스라엘을 다스릴 자가 네게서 내게로 나올 것이라 그의 근본은 상고에, 영원에 있느니라.

그리스도교도들은 예수가 베들레헴에서 태어남으로써 그 예언이 실현되었다고 믿는다.
그 예언은 마태복음에서 헤롯 왕의 궁정 자문관들이 오랫동안 바라던 왕이 베들레헴에서 태어나리라고 보고할 때에도 인용되었다.

미가서에는 몇 가지 자주 인용되는 구절들이 있다.
평화로운 시기를 예언한 것이 그런 예다.

미가 4:3
무리가 그 칼을 쳐서 보습을 만들고 창을 쳐서 낫을 만들 것이며 이 나라와 저 나라가 다시는 칼을 들고 서로 치지 아니하며 다시는 전쟁을 연습하지 아니하고.

미가 6:8
사람아 주께서 선한 것이 무엇임을 네게 보이셨나니 여호와께서 네게 구하시는 것은 오직 정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하게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

 

7월 12일(월) 완전한 지혜(미가 6:9)


성경에서는 주로 완전한 이란 단어보다 "온전한" 이란 단어를 더 많이 사용합니다.
그런데 미가 선지자는 "완전한 지혜"를 강조합니다.

지혜는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을 아는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을 안다는 것은 하나님을 믿는 것이며, 진리를 아는 것을 말합니다.

진리가 무엇입니까?
생명을 살리는 것이 진리라고 하겠습니다.

주나라 황제 주원장의 황후는 지혜로운 여인이었다.
주원장이 황제가 된 후, 어느 날 궁에서 왕후와 담소를 나누다가 갑자기 무릎을 탁치며 말했다.

“나, 주원장이 황제가 될 줄이야. 나도 상상치 못했단 말야!”
그리고는 기쁜 나머지 뛰어 일어나 춤을 추면서 옛날 변변치 못했던 시절의 모습을 적나라하게 드러냈다.
한 마디로 황제의 체통을 떨어뜨리는 추태를 부린 것이다.
그 때 두 명의 관리가 그것을 지켜보고 있었다.
황제는 그들이 있다는 사실을 깜빡 잊고 있었던 것이다.
잠시 후 주원장이 밖으로 나가자 황후는 두 관리를 불렀다.

“황제가 곧 돌아오실 것이다.
너희들 중 하나는 벙어리 행세를 하고, 하나는 귀머거리 행세를 해라.
그렇지 않으면 너희 둘의 목숨이 붙어 있지 못할 것이다.“

주원장은 밖으로 나가다가 자기가 한 짓을 생각해 보니 대단히 부끄러웠다.
그런 추태가 밖으로 소문이 나면 큰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황제는 급히 궁으로 돌아와 관리를 불러들였다.
주원장이 곧 관리 중 하나는 벙어리이고 하나는 귀머거리라는 사실을 확인하고 안심이 되어 관리는 생명을 건지게 되었다. 

영원히 죽어 마땅한 죄인의 생명을 살려준 것이 "완전한 지혜"가 아닙니까?


완전한 지혜 / 미가 6:9

여호와께서 성읍을 향하여 외쳐 부르시나니 완전한 지혜는 주의 이름을 경외함이니라
너희는 매를 순히 받고 그것을 정하신 자를 순종할찌니라.

지혜(투쉬야. tûwshîyâh) תּוּשִׁיָּה 
- 지혜(미가 6:9)
- 지식(잠언 8:14)       
내게는 도략과 참 지식이 있으며 나는 명철이라 내게 능력이 있으므로.

완전한 지혜
주의 이름을 경외하는 것
경외(라아,  râʼâh) רָאָה

  • 보다, 왕의 얼굴을 보다, 하나님의 얼굴을 보다

시편 9:10
여호와여 주의 이름을 아는 자는 주를 의지하오리니 이는 주를 찾는 자들을 버리지 아니하심이니이다.

시편 86:11

여호와여 주의 도로 내게 가르치소서 내가 주의 진리에 행하오리니 일심으로 주의 이름을 경외하게 하소서. 

미가 6:8

사람아 주께서 선한 것이 무엇임을 네게 보이셨나니 여호와께서 네게 구하시는 것이
오직 공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히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 

공의(미쉬파트) מִשְׁפָּט
  • 공의로운 삶, 공평한 자세


마틴 루터 1517년 10월31일 자신이 사제로 일하고 있는 비텐베르크 성당 문 위의 벽에 95항목의 신학명제가 적힌 대자보를 내다걸었습니다.
교회사가들은 훗날 이 날을 종교개혁일로 정했습니다.
루터가 바로 그 날을 시점으로 종교개혁을 시작한 것은 아닙니다.
더구나 그는 종교개혁을 의도한 것도 아닙니다.
복음공동체인 교회의 본질이 무엇인지, 그것이 당시에 어떻게 왜곡되었는지를 신학적으로 해명한 것뿐입니다.
그런 노력이 교회 내외의 여러 가지 요인과 맞물려 당시 교회와 사회를 변혁하는 에너지로 자리를 잡았습니다.
오늘 우리는 종교개혁의 정신을 이어받는 종교개혁의 후예들입니다.
무엇이 종교개혁의 정신일까요?

루터가 비텐베르크 성당 문 위에 붙인 95 항목의 신학 명제는 핵심적으로 두 가지 내용입니다.
하나는 면죄부가 신학적으로 타당성이 없다는 것
다른 하나는 교황무오설 역시 신학적으로 잘못이라는 것

오늘 우리의 눈에 당시 가톨릭의 면죄부와 교황무오설이 언어도단인 것처럼 보일지 모르겠지만 당시에는 나름으로 일리가 있었습니다.
면죄부나 교황무오설이나 그 중심은 교회입니다.
면죄부는 당시 베드로 성당 건축비 조달을 위한 조치였고, 교황무오설 역시 교회의 권위를 강화하려는 것이었습니다.

세상의 건축물보다 더 웅장하고 좋은 성당을 건축하는 노력이나, 그리고 세상의 왕보다 더 막강한 교권을 확보하려는 노력은 모두 교회를 위한 것이었습니다.

교회를 위해서 비성서적인 교리를 끌어들인 것뿐입니다.
사람은 목적만 좋으면 그 수단은 별로 문제를 삼지 않는 경함이 있습니다.
좋은 게 좋다는 식입니다.
그런데 머물러 있으면 종교는 부패하기 마련입니다.
그래서 종교개혁자들은 교회를 가리켜 ‘에클레시아 샘퍼 레포만다!’(늘 개혁되는 교회) 라고 규정했습니다.

한시적으로가 아니라 항상 개혁되는 교회가 되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말은 누구나 개혁이라고 하지만 그게 간단한 게 아닙니다. 종교 집단에서는 개혁이 특히 어렵습니다. 그 이유는 종교가 보수적이기도 하고, 경건의 모양을 취하기 때문입니다. 경건한 모양으로 살아가는 사람의 잘못을 뚫어보기는 어렵습니다. 교회 안에 그런 풍토가 굳어졌습니다. 기도하고, 눈물 흘리고, 찬미를 부르는 사람은 자타가 경건한 사람으로 인정합니다. 교회에 어떤 문제가 생기면 기도를 하자고 말합니다. 그것은 원칙적으로 옳지만 실제로는 옳지 않습니다. 기도하는 방식으로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면 시시비비가 가려지지 않습니다. 어떤 목사님들은 교회에 문제가 생기면 일주일 기도, 또는 금식기도를 합니다. 아무리 비민주적이고, 잘못된 일을 하더라도 이런 경건한 포즈를 취하기만 하면 모든 게 해결되는 것처럼 행동합니다. 루터가 당시에 면죄부와 교황무오설을 문제 삼았다는 것은 목숨을 담보로 내놓는 행위였습니다. 대다수의 사람들은 루터의 말이 옳기는 하지만 그대로 따라가기는 귀찮다고 생각했을 겁니다. 종교적인 경건에 담긴 위선은 분간하기도 힘들고, 그것을 지적하는 것은 더 힘듭니다. 그래도 그런 걸 따지지 않으면 교회는 순식간에 본질로부터 이탈됩니다.


인자(헤세드) חֵסֵד

  • 인간을 사랑하는 것

옛날 어느 가난한 홀어머니에게 두 아들이 있었는데 너무 가난하여 삯바느질로 아들을 가르쳤습니다.
비가 억수같이 쏟아지는 어느 날 어머니가 바느질을 하고 있는데 처마에서 떨어지는 물방울 소리가 이상하게 들려 가만히 살펴보니까 처마 맡에 항아리가 묻혀 있었습니다.
항아리를 꺼내보니까 그 안에는 금화가 가득 들어 있었습니다.
그 돈만 있으면 고생하지 않아도 두 아들 공부시킬 수 있고 좋은 집 사서 호의호식하며 살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어머니는 금화가 가득 들어 있는 항아리를 다시 땅 속에 깊이 묻어버렸습니다.
그리고 서둘러 그 집을 팔고 다른 곳으로 이사를 갔습니다.
그 어머니는 계속하여 삯바느질로 고생하며 두 아들을 공부시켰는데 두 아들이 나란히 과거에 급제하였습니다.
지긋지긋한 가난에서 벗어나게 된 후 어느 날 어머니는 높은 벼슬길에 오른 두 아들을 불러놓고 금화항아리 이야기를 들려주었습니다. 그러자 두 아들은 놀라면서 왜 그 고생을 하시면서 그렇게 하셨느냐고 하면서, 그 돈이 있었다면  어머니가 그 고생을 하지 않고도 우리 둘이 넉넉히 공부할 수 있었을 텐데 왜 사서 고생을 하셨느냐고 하자, 어머니가 두 아들에게 말했다고 합니다.
만약 그 많은 돈이 있었는데도 너희들이 그렇게 열심히 공부하여 이렇게 훌륭하게 될 수 있었다고 생각하느냐? 나는 그것이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나도 그 돈으로 고생을 면하고 싶었지만 너희들을 망치게 될까 해서 그렇게 한 것이다 라고 하였답니다.
유명한 이야기입니다.
금화가 가득 들어 있는 항아리보다 귀한 지혜입니다.

자비로운 하나님

유대인의 전설에 의하면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시기 바로 전에 그의 보좌 주위에 있는 천사들과 의논을 하셨다고 한다.

정의의 천사는 사람을 만들면 안된다고 말했다.
그 이유는 “사람을 만들면 그가 동료 사람들에게 모든 종류의 사악을 자행할 것이고, 또 사람은 강퍅하고 잔인하고 부정직하여 세상은 불의로 가득 차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라는 것이었다.

그 다음에 진리의 천사가 반발하며 “사람을 만들지 마십시오.
그는 거짓되고, 그의 형제들을 속일 것이며 심지어 하나님 당신도 속일 것입니다”라고 했다.

거룩의 천사도 “사람을 절대로 만들지 마십시오. 그는 당신의 면전에서 당신의 이름을 더럽힐 것입니다”라고 말했다.

이번에는 하나님께서 가장 사랑하시는 자비의 천사가 한 걸음 앞으로 나아가서 말하기를 “저희의 하늘의 아버지, 사람을 만드시옵소서. 그가 죄를 짓고 정의와 진리와 거룩의 길에서 멀어질 때, 제가 부드러운 손길로 그를 감싸고 사랑스런 음성으로 그에게 말하여 다시 당신께 데리고 오겠나이다”라고 말했다.

과연 그렇다. 자비의 천사의 말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우리 인간은 전적으로 타락하고 부패한 존재이다. 인간 스스로의 힘으로 하나님께 나아갈 수도 없는 구제불능의 존재이다. 그러나 자비로우신 하나님은 우리의 죄를 사해주시고, 허물을 덮어주시고, 실수를 용서해주신다.

하나님의 지혜와 세상의 지혜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지혜를 주실 때 여러 경로를 통해 지혜를 주십니다.

여기 두 지혜가 대조되어 나타납니다.
하나는 세상 지혜이고 다른 하나는 하나님의 지혜입니다.
하나님의 지혜는 곧 그리스도라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라고 합니다.
일반적으로 지혜라고 하면 사물에 대한 판단 능력과 미래를 예측하는 지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학생 때는 지혜보다 지식이 돋보입니다.
사회에서도 때로는 지식이 지혜보다 돋보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일평생을 함께 살 사람이라면 지식이 깊은 사람보다 지혜가 많은 사람을 택해야 합니다. 지식은 공부를 많이 하면 누구나 얻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지혜는 공부를 많이 한다고 얻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공부를 많이 하여 지혜를 얻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지혜는 하나님께서 주십니다. 지혜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은사입니다. 우리가 얻는 수많은 지식과 지혜가 있을지라도 구원의 지혜가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가 없는 사람은 결국 무가치한 지혜를 가진 사람일뿐입니다. 우리의 삶을 영생으로 이끄시는 그리스도를 얻은 사람은 모든 것을 다 얻은 사람이 될 것입니다.


겸손(차나) צָנַע 

  • 하나님과 더불어 교제하는 것


미국의 초대 대통령 조지 워싱턴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그는 뛰어난 전략가요, 정치가요, 군인이었습니다.
그의 뒤를 이은 사람은 부통령을 하던 존 애덤스였습니다.
애덤스가 대통령으로 취임한 이듬해인 1798년 미국은 뜻하지 않은 외환(外患)을 만났습니다.
신대륙에 널려있는 막대한 이해관계에 뛰어든 프랑스가 미국에 무력도발을 한 것입니다.
이와 같은 위기 상황에서 이를 해결할 만한 전략가는 이미 퇴임한 전직 대통령 워싱턴밖에 없다고 생각한 애덤스는 워싱턴을 찾아가 도움을 요청했습니다.
그런데 애덤스 대통령은 워싱턴에 대한 예우 때문에 고민했습니다.
왜냐하면 당시 참모총장의 계급은 중장이었기 때문입니다.
이때 워싱턴은 특별대우를 마다한 채 중장계급을 달고 현역으로 복귀, 프랑스의 위협으로부터 미국을 건졌습니다.

조국을 사랑하는 마음은 계급을 초월했습니다.
미국 국민은 지금까지도 그를 미국 역사상 위대한 인물의 한 사람으로 존경하고 있습니다.

“겸손과 여호와 경외함의 보응은 재물과 영광과 생명이니라”(잠언 22:4)
겸손은 위대한 사람이 반드시 지녀야 할 품격입니다.
우리는 자신의 낮춤에 대한 본보기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낮아질 대로 낮아진 사도 바울이 예수님이 겸손하심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즉 ‘근본은 하나님의 본체’이시나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이 땅에 종의 모습으로 오신 예수님이 참된 겸손의 모습인 것입니다.
하늘의 모든 영광을 다 버리고 이 땅에 가장 비천한 모습으로 오신 예수님.
그의 가난하심은 성도들에게 부요함을 주셨고(고후 8:9)
그가 받으신 질고와 고난과 굴욕은 성도들에게 사유의 은총과 참된 자유와 평화와 승리를 주셨습니다(사 53:4,5).
예수님 자신의 뜻은 아니었지만(눅 22:42)
오로지 하나님의 뜻에 대한 철저한 복종을 실천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셨습니다(9절).
이는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으심 뒤에 오는 그리스도의 승귀(昇貴), 곧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과 승천, 그리고 영광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 성도들에게도 이웃과 교회의 덕을 위하여, 더 나아가서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포기해야 할 삶의 부분들이 있습니다. 이는 성도의 제1 목적이 바로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데 있기 때문입니다.


7월 13일(화) 행위의 열매(미가 7:13)



미가 7:13

그 땅은 그 거민의 행위의 열매로 인하여 황무하리로다.

그 땅은 어디인가?

1. 가나안
2. 이방인의 땅
3. 죄악이 가득한 세상

미가서는 하나님의 백성들을 괴롭혔던 이방 나라들을 말합니다.
그렇지만 오늘날 우리들에게는 죄악이 가득한 세상이라고도 하겠습니다.

이사야 3:10-11

너희는 의인에게 복이 있으리라 말하라 그들은 그 행위의 열매를 먹을 것임이요.
악인에게는 화가 있으리니 화가 있을 것은 그 손으로 행한대로 보응을 받을 것임이니라.

예레미야 32:19

주는 모략에 크시며 행사에 능하시며 인류의 모든 길에 주목하시며 그 길과 그 행위의 열매대로 보응하시나이다. 

미가 7:7

오직 나는 여호와를 우러러보며 나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보나니
나의 하나님이 나를 들으시리로다. 

터키에서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다.
옛날 어느 어진 왕이 민정시찰을 나갔다.
그때 한 가난한 여인이 왕 앞에 달려와 무릎을 꿇고 “제가 잠든 사이 도둑이 들어와 물건을 훔쳐 달아났습니다”고 말했다.
“물건을 생각하면 잠들지 말았어야지.어찌 잠들었는가?” 하고 왕이 여인을 꾸짖었다.
그러자 이 여인은 “저는 폐하를 믿고 편히 잠들었습니다.
폐하께서는 늘 깨어 백성을 보살펴주시리라 생각했습니다”고 대답했다.

이 말을 들은 왕은 여인에게 큰 상을 내렸다.
왜냐하면 왕을 믿고 있었기 때문이다.

예수를 믿는 우리가 이 여인처럼 예수님을 믿고 있었는가?

믿음은 완전히 맡기는 것입니다.
그런데아직도 맡기지 못하는 부분이 너무 많습니다.
맡길 수 있는 마음이 흔들리지 않도록 잘 다스려야 하겠다.

 
참 평안은 믿음에서 온다.
하나님께 맡기고 깊이 잠들 수 있는 삶은 행복한 삶이다.
도둑과 부자는 다 같이 불안하다.
빼앗으려는 불안과 빼앗기지 않으려는 불안은 자신만을 의지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그 사랑하시는 자에게는 잠을 주신다

마태복음 7:17-18
       
이와 같이 좋은 나무마다 아름다운 열매를 맺고 못된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나니.
좋은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을 수 없고 못된 나무가 아름다운 열매를 맺을 수 없느니라.


미가 7:9

내가 여호와께 범죄하였으니 주께서 나를 위하여 심판하사 신원하시기까지는 그의 노를 당하려니와
주께서 나를 인도하사 광명에 이르게 하시리니 가 그의 의를 보리로다.

잠언 1:31       

그러므로 자기 행위의 열매를 먹으며 자기 꾀에 배부르리라.

오늘의 기도

나의 삶이 답이다!

오직 주만 바라보며 살아가게 하소서!

여호수아가 가나안 땅으로 들어간 후에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마지막 유언처럼 남겨준 신앙
오직 나와 내 집은 여호와만을 섬기겠노라!







탈무드에서 말하는 지혜로운 사람이 갖추는 일곱가지 조건

첫째, 침묵하고 들을 줄 아는 사람

자기보다 현명한 사람을 만났을 때에는 침묵하고 듣는 것입니다.
이것은 분명히 들을만한 말이다, 해서 마음을 열고 경청합니다.
들을수록 자기에게 도움이 되는 것을 알므로 현명한 사람입니다.
들을 줄 아는 것을 믿음이라고 합니다.

둘째, 남의 이야기에 끼어들지 않는 사람

남의 이야기에 절대로 끼어 들지 않는 것입니다.
남들이 좋은 말을 하든 나쁜 말을 하든 그 사이에 끼어 드는 따위의 주책없는 짓은 안 하는 사람이 지혜로운 사람입니다.

셋째, 신중하게 대답하는 사람

대답할 때에 덤벙대지 않고 언제나 신중하게 생각하고 대답하는 사람입니다.

넷째, 이치에 맞는 질문과 대답을 하는 사람

핵심을 찌르는 질문을 하고, 이치에 맞는 대답을 하는 것입니다.
가만히 보면 질문하는 것을 들을 때, 저 사람이 왜 질문을 하는지 모르겠는 경우가 있습니다.
질문을 하는 것인지 제 자랑을 하고 있는 것인지 도대체 알 수가 없어요.
정리되지 않은 질문을 합니다.

다섯째, 일의 순서를 아는 사람

해야 할 일을 먼저 하고, 미루어도 될 일은 맨 마지막에 하는 것입니다.
순서를 정한다, 그 말입니다.

여섯째, 예와 아니오가 분명한 사람

모를 때에는 모른다고 사실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모르면서 아는 체하는 사람은 현명한 사람이 못됩니다.
모르는 것은 모른다고 똑똑하게 말하는 사람이 현명한 사람입니다.

일곱째, 배울 줄 아는 사람

배운다는 것은 진실을 인정할 줄 아는 것입니다.
사실을 사실대로 인정하는 것이 현명한 사람의 태도입니다.
탈무드에는 또 이런 말도 있습니다. '현명한 사람은 모든 것에서 배우는 사람이다.
이런 일에든 저런 일에든 모든 것으로부터 배운다.'

헬라의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렇게도 말합니다.
"현명한 사람은 원수로부터 많은 것을 배운다."
나를 괴롭히는 원수로부터도 배울 것이 있다는 것을 알고 많은 것을 배울 줄 아는 사람이 현명한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지혜로운 왕의 가르침

어느 젊은이가 왕을 찾아와 성공하는 비결이 무엇인가를 가르쳐 달라고 하였다.
어떤 나라에 젊은 재상이 나이 많은 왕에게 말하기를 자기는 아직도 젊은 몸인데 유혹에 들지 않는 좋은 무슨 교훈이 있으면 말씀해 주시면 고맙겠다고 부탁을 했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왕이 가만히 잠깐 생각하더니 그 옆에 잇는 신하를 불러서 얼른 안에 들어가서 금 잔에 기름을 가득 부은 것을 가져오라고 하였습니다, 그것을 젊은 재상에 주면서 "자, 이 금잔에 기름이 가득하지 아니하냐? 이 가득한 기름을 가지고 이 궁전에 나가서 아무 거리, 아무 모퉁이, 다 돌아오되 한 시간 이내로 다 돌아 오라. 돌아올 때  한 방울이라도 흘리면 안 된다. 한 방울이라도 그 기름이 흘러내리게 될 것이면 곧 자네 목을 베겠노라. 그런 줄 알고 한 방울도 흘리지 말고 곧 다녀 오라." 그러면서 그 뒤에는 군인 한 명에게 칼을 뽑아 가지고 뒤를 좇아가게 했습니다.

한 방울을 흘리면 목을 자른다고 하니까 이 젊은 재상이 금 잔에다 기름을 가득 담아 가지고서는 조심스럽게, 그렇지만 한 시간 안에 돌아오라고 하니까 빨리 서둘러 땀을 뻘 뻘 흘려 가면서 그 모퉁이를 돌아서 어느 거리를 돌아서 겨우 한 시간만에 다시 가지고 왔습니다.

한 방울도 흘리지 아니하고 땀을 뻘뻘 흘리면서 숨이 차서 가지고 돌아 왔단 말입니다.

"한 방울도 안 흘렸는가?"  "네 안 흘렸습니다."

그 때에 왕이 묻기를 "그 아무 거리에서 아무 상점들을 보았나? 거리를 가다가 아무개를 보았나? 어디쯤 가면 누구가 있는데 보았나?" 물어 보았습니다. "그만 못 보았습니다." "아니 못 보았다니, 지나오면서 못 봐?" "이 기름 잔만 보려고 다른 것을 볼 사이가 있어야지요." 그때 노 왕이 웃으며 하시는 말이 "그러면 자네 유혹에 들지 않는 비결을 배웠나?"

우리가 다 배웠습니다. 시험에 들지 않는 비결 가운데 제일 좋은 비결은 우리가 열심을 품어 하나님이 내게 맡긴 사명을 부지런히 하고 하나님의 집에 나와서나, 내 가정에 있어서나, 내 직장에 있어서나 내가 맡은 책임을 충성되게 부지런히 전 정력을 다해서 하는 가운데 자연 유혹이나 시험에 들 사이도 없게 되는 것입니다. 공격이 언제든지 최선의 방어라는 전법이 있는 것입니다.












미가서(Micah)

 

구약 소선지서의 여섯 번째 책으로, 모레셋 사람 미가에게 임한 여호와의 말씀을 기록한 책이다(미 1:1).
미가서는 베들레헴에서 한 통치자가 나실 것을 예언한 것(미 5:2-4)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려 준 본문(미 6:6-8)으로 우리에게 친숙하다.
그러나 미가서의 내용과 구조는 이해하기가 쉽지 않다.
그의 심판과 구원에 대한 예언들은 종종 어떤 논리적인 연속도 없는 것처럼 보이지만 예언들은 세 왕(요담, 아하스, 히스기야)의 통치 기간에 걸쳐 선포되었다.

미가서의 서두에서는 사마리아의 멸망과 산헤립의 침략에 대해서(미 1:2-16),
결론 부분에서는 바벨론 유수와 회복(미 7:8-13)에 대해서 예언하고 있다.
비록 이스라엘(사마리아)과 유다(예루살렘) 모두에 대해 예언하고 있으나 우선적으로 유다에게 향한 예언으로 보는데, 이는 서두에 유다 왕들의 이름만 언급되고 있기 때문이다(미 1:1).

 

저자와 기록 연대

미가서의 저자는 미가이다(미 1:1).

미가(mika)는 미가야(mikayehu)의 축약형으로, ‘여호와와 같은 자가 누구인가’라는 뜻이다.

그의 고향은 모레셋(Moresheth)으로, 이곳은 예루살렘에서 남서쪽으로 약 40km 정도 떨어진 곳에 있는 마을이다.
미가서 1:14에서는 그의 고향이 ‘가드모레셋’이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이는 블레셋 사람의 성읍인 가드 부근에 위치하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본다.

스바냐 선지자(습 1:1)나 요엘 선지자(욜 1:1)의 경우와는 달리 그의 아버지 이름이 언급되고 있지 않은 점으로 보아 그는 비천한 가문의 출신일 것으로 보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구사한 언어와 수사법은 탁월한 것이었다.

한편 여호야김 왕 때 제사장들과 거짓 선지자들이 예레미야를 죽이려고 모의했을 때 몇몇 장로들이 예레미야의 심판에 대한 예언을 정당화하기 위해 미가의 사역을 언급했고(렘 26:17-19) 이로 인해 예레미야는 죽음을 피할 수 있었다(렘 26:24).

미가는 요담, 아하스, 히스기야 등 세 명의 유다 왕이 통치하는 동안 활동했는데(미 1:1),
아마 요담 왕 말년경에 시작해서 히스기야 왕 시대 초인 약 BC 730년경부터 BC 690년대에 종결되었을 것으로 본다.
분명한 것은 그의 사역이 이사야 선지자의 사역 기간과 겹쳐진다는 점이다.
이사야, 아모스, 호세아 등은 그와 동시대에 활동했던 선지자들이다.

 

시대적 배경

미가가 활동했던 BC 8세기 무렵에는 남북 이스라엘을 둘러싼 주변 정세가 급변하고 있던 때였다.
이사야 선지자와 같이 사마리아와 북왕국의 멸망을 예언했던(미 1:6) 미가는 BC 732년 르신 치하의 아람이 멸망하는 것과 BC 722년 북왕국 이스라엘이 멸망하는 것을 직접 목격했다(미 1:1).

또한 디글랏 빌레셀 3세(BC 745-727), 살만에셀 5세(BC 727-722), 사르곤 2세(BC 722-705), 산헤립(BC 705-681) 등과 같은 앗수르의 통치자들 아래 앗수르가 흥기하는 것을 목격했다(미 1:1).

이 앗수르는 바벨론에 의해 쇠퇴하기까지 한 세기가 넘게 고대 근동을 지배하였다.
한때 산헤립의 침공으로 히스기야 왕은 결정적인 위기를 맞기도 했으나 이사야와 미가의 사역을 통해 히스기야 왕이 회개함으로 예루살렘이 무사할 수 있었다(왕하 18장 이하).

그러나 히스기야가 죽은 뒤 유다의 통치자들은 하나님께 등을 돌렸으며, 이로 말미암아 유다는 미가의 예언대로 BC 586년에 멸망하고 말았다. 그러나 미가는 이들이 다시 귀환할 것을 예언했다(미 7:15).


미가서의 특징

1. 미가서에는 탁월한 수사법과 그림같이 생생한 언어들이 많이 사용되었다.
특별히 미가서 1:10-16은 이점을 잘 보여 주고 있다.
그 내용은 산헤립의 군대가 예루살렘으로 진군할 때 취할 경로에 대한 예언적인 서술이다.
여기에서 미가는 재미있는 언어유희(word-play)들을 사용하여 장차 각 도성의 이름과 그 도성이 장차 처할 운명을 연결시켜 주고 있다.

2. 미가서는 하나님을 섬기는 참된 길은 오직 ‘공의와 인자와 겸손’임을 강조한다(미 6:7-8).
이는 공교롭게도 같은 시기에 활동했던 아모스(공의, righteousness)와 호세아(인자, steadfast love)와 이사야(겸손히 행함, humility and faith)의 메시지 주제를 종합하여 말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3. 구속받은 자의 윤리적인 교훈이 강조되고 있다.
‘가진 자’들의 탐심과 ‘없는 자’들에 대한 착취를 질책하는(미 2:1-5, 8-9) 한편 통치자들의 불의와 탈취를 질타하고(미 3:1-4, 9), 선지자들(미 3:5-7)과 제사장들(미 3:11-12)과 같은 지도자들의 부정과 욕심을 신랄히 비판하고 있다.

 

미가서의 내용 개관

1. 배교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과 사마리아, 유다의 사회악(미 1:1-3:12)

2.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소망의 말씀(미 4-5장)

3. 여호와의 요구 사항들(미 6장)

4. 이스라엘의 상황에 대한 선지자의 탄식과 구원의 노래(미 7장)

 


미가서의 핵심 주제들

심판 :

이스라엘과 유다 모두 하나님의 길을 떠나 범죄했다.

이러한 죄들은 제의적인 것들(미 1:5-7)과 사회적인 것들(미 2:1-2)이었으며, 하나님의 길을 떠난 이스라엘의 지도자들(미 2:6-11; 3:1-3) 또한 여기에 포함되었다.

미가서는 이러한 죄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 강조되고 있다.

소망 : 

미가는 포로생활로부터 구속받을 것에 대한 확실한 소망을 제시하고 있다(미 4:10).
또한 죄에 대한 심판자로서의 하나님 모습뿐만 아니라 은혜가 풍성하시며, 아브라함에게 주신 언약의 약속을 지키시는 데 있어서 신실하신 모습 또한 보여 주고 있다(미 7:18-20).

메시아 왕국 :

회복은 하나님께서 남은 자들에게 그의 은총을 베푸시는 것과 함께 시작된다(미 2:12-13; 4:4-7).
또한 유대인들의 회복은 이방인들의 회복과 관련되며(미 7:12-13), 구속은 창조와 관련된다(미 7:14).
그리고 다윗의 자손인 메시아에 의해 그 왕국이 재건설될 것이며, 이 땅의 모든 부도덕이나 우상 숭배와 부당한 권력과 부패가 없는 영원한 왕국이 될 것이다(미 5:10-15).

 







마크래버튼(Mark Labberton) 박사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하나님의 지시가 어떻게 우리의 희망의 원천이 될 수 있는지를 고찰합니다.
미가서는기원전 8세기에기록되었습니다.
배경은 주로 이스라엘이 내부적으로 엄청난 불협화음과 압력을 받고 있는 시기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의 삶과 그들의 경험은 미가를 포함한 선지자들의 음성과 외부국가의 세력과, 하나님에 대한 그들의 경험안에서의 혼란에의해 공격을 받아왔습니다. 미가서가 강력한 책인 이유는이것을 듣고있는 많은 분들이 이미 알고있는 구절 때문입니다.

그 구절이 왜 그렇게 중요한지 거슬러가며 살펴보겠습니다.

미가 6장 6절-8절의 말씀입니다.

"내가 무엇을 가지고 여호와 앞에 나아가며 높으신 하나님께 경배할까 내가 번제물로 일년된 송아지를 가지고 그 앞에 나아갈까 여호와께서 천천의 숫양이나 만만의 강물같은 기름을 기뻐하실까 내 허물을 위하여 내 맏아들을, 내 영혼의 죄로 말미암아 내 몸의 열매를드릴까 사람아 주께서 선한 것이 무엇임을 네게 보이셨나니 여호와께서 네게 구하시는 것은 오직 정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하게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

미가서의 이 부분은 아마도 가장 자주 인용되는 구절일뿐 아니라, 어떤 면에서는 미가서 전체에서 가장 강력한 희망의 언어일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미가서에서 선지자들을 통해 여러 차례, 극도의 책임감, 실망, 슬픔, 심판의 말씀을 하십니다.
미가서는 가혹한 책입니다.
그 이유는 이스라엘백성이 고백하는 것과 행동하는 것 사이에 불협화음이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백성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성품과 정의와 불쌍히 여기심을 반영하기를 원하십니다.
하지만 수 년 동안 반복해서이스라엘은 주변국을 수용했습니다.
자신의 식욕에 적응하며, 의와 정의의 하나님을 섬긴다고 주장하면서도, 자기 집안 사람들을 학대함으로써 자신의 위선과 예배를 배반했습니다.

종종 가난한 사람들, 사회. 문화속에서소외 된 사람들을 학대했습니다.
학대받은 사람들은 이스라엘백성이 생각하기에 가치가 없거나 가치가 낮은 것으로 여겨졌던 이방인들 입니다.

이 주제는 소선지서와 대선지서 전체에 걸쳐 무거운 주제입니다.
하지만 여기 이 특별한 책인 미가서에서 그 말씀은 계속해서 나옵니다.
솔직히 말해서 미가서에는 엄청난 심판과, 엄청난 책임감과, 때로는 상실된 희망이 있습니다.
6장의이 구절을 읽기전까지는....
이미 백성의 총체적인 부패가 눈 앞에 다가 왔을 때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희들에게 원하는 것은 극적인 예배행위가 아니다."
번제물이나, 숫양 수 천마리나, 기름 수만 병이나, 심지어 맏아들을 드리는 것도 아닙니다.
사실 그 어떤 것보다 훨씬 더 평범하고 근본적인 것을 원하십니다.

"사람아 주께서 선한 것이 무엇임을 네게 보이셨나니 여호와께서 네게 구하시는 것은 오직 정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하게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

정의, 인자,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것,
이 세가지는 미가서의 핵심에 놓인 희망의 씨앗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입니다.
복잡하지 않습니다.
지나치게 정교하지도 않습니다.
궁극적으로, 세계를 정의하는 이기적인 방식이나 세계를 이해하는 부족주의적인 방식을 완전히 뒤바꾸는 것입니다.
사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하나님 자신의 품성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우리는 선한 일을 해야 합니다.
선한 일이란 정의를 행하고, 인자를 사랑하고, 하나님과 겸손히 걷는 것입니다.
간단합니다.
그 가르침으로 우리의 삶을 근본적으로 재정비 할 준비가되어있습니까?
이것은 기원 전 8세기 미가서의 도전이었습니다.
그리고 오늘 우리의 도전입니다.











































































































헤롯 가문


헤롯(Herod) 가문

신약을 읽기 위해서 빠뜨릴 수 없는 인물들이 있다. 바로 헤롯 가문이다.
헤롯 가문은 예수님의 탄생과 성장, 그리고 십자가형과 초대교회의 상황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
헤롯 가문의 이야기를 간략하게 살펴보자.

이두매인(Idumea)

헤롯가문은 아이러니하게 유대인들이 아닌 이두매인들이다.
이두메인들은 야곱의 형이었던 에서의 후예인 에돔족속을 말한다.
이두매는 ‘에돔 사람의 땅’이란 뜻이다.

사해 남쪽과 동쪽에 걸쳐있다.
이곳을 페트라지역이라 부른다.
에돔은 붉다는 뜻이다.

유다지파 남쪽에 위치한 시므온 지파와 지척이며 대부분 유대인들과 원수지간이었다.
그들은 바벨론 침공 때 함께 멸망 당했지만 잔존 세력들이 남아 계속하여 에돔 사람들로 역사에 남았다.

마카비 시대에 이두메인들은 마카오에게 참패를 당한다.
요세푸스는 후에 요한 히르카누스 1세가 모든 이두메 사람들을 정복한 후 할례를 받는 조건으로 남아 있게 했다.
유대인 여인들과 섞이면서 반은 에돔족속이고 반은 유대인으로 살아가는 이들이 이두매인들이었다.

그들은 유대인들에게 심한 열등감을 가지고 있었고, 때로는 복수심을 품기도 했다.
겉으로는 유대인의 범주 안에 들었지만 유대인들은 이두매인들을 열등한 민족으로 하대했다.   

1. 헤롯대제(Herod the Great, B.C. 73- B.C. 4)

예수님의 탄생과 베들레헴 유아 학살 사건의 장본인이다.
헤롯 가문을 실제적으로 일으킨 인물로 평가 받는다.
그는 교활했고, 단호했다.
자신의 지위를 지키위 위해 극단적으로 비정했다. 
세 아들에게 영토를 물려준다.
아켈라오에게 자신의 전영토를 물려주지만 뜻대로 되지 못한다.
결국 유대, 사마리아, 사해 동남쪽인 이두메 지역의 분봉왕이 된다.

2. 헤롯 아켈라오(B.C. 23 - A.D. 18)

유대, 사마리아, 이두메 지역 분봉왕

바리새인들이 폭동을 일으키자 3천명을 학살한다.
끊임없이 유대인과 마찰한다.
유대인과 마찰로 인해 6년에 폐위되어 갈릴리로 유배되어 18년에 죽는다.
그후 그의 지역은 로마 직할령이 된다.
빌라도가 유대 총독으로 온 이유 이다.   

3. 헤롯 안티파스(B.C. 3 - A.D. 39)

헤롯 안티파스에게는 갈릴리와 요단동편 계곡이 주어진다. 

빌립의 아내인 헤로디아를 빼앗아 아내를 삼는다.
세례 요한이 비판하자 생일날 헤로디아의 딸의 요구로 세례 요한의 목을 자른다.
빌라도와 원수지간이지만 예수님을 죽일 때는 마음을 합한다.   

4. 헤롯 빌립1세

골란 지역과 베다니 지역을 주었다.
헤롯 대왕의 아들이다.
헤롯 안디바의 이복 동생이다. 

아내 헤로디아를 헤롯 안디바(안티파스)에게 빼앗김.
살로메의 생부일 가능성이 많다.
성경에 기록이 거의 없다. 

5. 헤롯 아그립바1세(A.D.37 - 44)

헤롯 대왕의 손자다.
야고보를 죽인 헤롯이다. 

예수님의 생애는 어릴 시절 헤롯 대왕, 어린 시절은 헤롯 아켈라오, 공생애 기간은 헤롯 안티파스가 있었다.
사도행전이 시작되면 아그립바 1세와 아그립바 2세가 등장한다. 
누가는 그가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지 않아 충으로 죽었다고 말한다.

6. 헤롯 아그립바2세(A.D.27 - 100)

바울을 심문한 헤롯이다.
성경은 헤롯이라 하지 않고 바로 아그립바로 부른다(행 25-26장)
헤롯 아그립바 1세의 아들이며, 헤롯 대왕의 증손자이다.
정식 이름은 아르쿠스 율리우스 아그립바2세(Marcus Julius Agrippa II, A.D. 27-100)이다.
일반적으로 헤롯 아그립바 2세(Herod Agrippa II)로 부른다.



자료 출처: https://392766.tistory.com/entry/성경인물-연구-신약편-헤롯Herod-가문 [Pensées]

기독교 전통의 7대 죄악



 

 

기독교 전통에는 일곱 가지 대죄(大罪)라는 것이 있습니다.
교만, 분노, 나태, 시기, 탐욕, 탐색, 탐식입니다.
일종의 칠거지악(七去之惡)입니다.
"칠거지악"은 한자 뜻 그대로 “제거되어야 할 일곱 가지 악”이란 뜻이지요.
신세대한글학회 회장 류 박사에게 전통적인 용어들을 현대적 감각을 살려 번역해 달라고 했더니 아래와 같이 보내왔습니다.

1.  교만(Superbia, Pride):                           공작새                   “잘난체”

2.  분노(Ira, Wrath):                                    사자                       “죽을래”

3.  나태(Socordia, Sloth):                           달팽이                    “귀찮아”

4. 질투(Invidia, Envy):                                뱀                           “배아파”

5.  탐욕(Avaritia, Greed):                            두꺼비                     “더더더”

6.  탐색(Luxuria, Lust):                               염소                        “밝힘증”

7.  탐식(Gula, Gluttony):                              돼지                       “배터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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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에 나오는 '7대 죄악'

- 탐, 탐, 나, 정, 교, 시, 분(탐나 탐정 분교시)

탐식(Gluttony), 탐욕(Greed), 나태(Sloth), 정욕(Lust), 교만(Pride ), 시기(Envy), 분노(Wrath)

 


그리스도교의 윤리관에서 비롯된 이 일곱 가지 죄는 단테의 <신곡>과 밀턴의 <실락원>에도 등장합니다.

중세 사람들은 인간을 영원한 파멸로 이끄는 이런 악덕들 마다 각기 대응하는 동물이 있다고 믿었습니다.

탐식은 돼지나 염소,
탐욕은 늑대,
교만은 박쥐나 공작새,
시기는 여우,
나태는 당나귀에 해당합니다.

더욱이 이 시대에는 주요한 고대 서사시의 신과 영웅들이 각각 특정한 윤리적 의미를 내포한다고 보는 알레고리적 해석으로 판이나 디오니소스, 에로스와 같은 신들과 사티로스나, 켄타우로스와 같은 잡종 생물들, 세이렌이나 고르곤 자매들과 같은 괴물들은 인간에게 악영향을 준다고 여겨졌습니다.

 

 

 

LORENZETTI, Ambrogio
Allegory of Bad Government (detail)
1338-40

 

이 일곱가지 죄는 초기 기독교 시대에 그리스의 수도자 에바그리오 도 폰토에 의해 처음 체계화되었다고 합니다.
당시만 해도 여덟 가지였으며 인간이 그르치기 쉬운 부정적 성향들을 정의하고 있습니다.

(에바그리오가 꼽은 목록에서 가장 심각한 죄악이 탐식이라는 것은 아주 흥미로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 죄악들 모두 우리를 지옥에 떨어뜨릴 수 있는 것들이라고 강조하고 있습니다.

16세기에 이르러 그레고리우스 교황은 이 목록에 '시기' 를 포함시키고, 기존의 '교만'과 '허영'을 하나로 합쳤습니다.

17세기에 이 목록은 다시 수정을 거치게 됩니다.
그리하여 '멜랑콜리' 를 더 이상 죄에 포함시키지 않는 대신 '나태'가 새로이 그 자리를 차지하게 되었습니다.

 

BOSCH, Hieronymus
The Seven Deadly Sins (detail)
c. 1480


◆ 탐식(Gluttony)

탐식은 과다한 식욕으로서 음식에 지나치게 탐닉해 있거나,
육신이 음식에 점령당한 상태를 말합니다.

중세에는 탐식을 5가지 형태로 분류했는데요,

너무 빨리 먹는 탐식(praepropere), 너무 비싼 음식을 먹는 탐식(laute), 너무 많이 먹는 탐식(nimis), 너무 오래 먹는 탐식(ardenter), 너무 거하게 먹는 탐식(studiose) 이 바로 그것입니다.

현대인들은 중세인들보다는 신에서 벗어나 속세의 삶을 추구합니다.
하지만 음식과의 관계에서만큼은 어찌보면 더큰 사회적 잣대를 들이대고 있습니다.
다이어트나 몸매에 대한 우리의 비이성적이고도 열정적인 태도는 '탐식'에 대해 어찌보면 중세인들보다 더 엄격한 심판을 내리고 있는 것같습니다.

 

  

 BRUEGEL, Pieter the Elder
The Land of Cockaigne  1567

농부와 목사, 병사가 나무아래 누워있습니다.
이들은 당시의 사회 계급, 즉 평민 계급과 성직자 계급, 귀족 계급을 나타냅니다.
브뤼겔은 종이 그림에 우의적인 사물들을 등장시키곤 했는데요,
탐식에 빠져 늘어져 있는 사람들 사이로 깨진 달걀, 스스로 접시위에 올라가 있는 칠면조, 옆구리에 칼을 꽂은 채 돌아다니는 돼지가 보입니다.

왼쪽 위에는 지붕이 파이로 뒤덮인 헛간 속에서 한 기사가 입을 벌린 채 자신의 모든 욕망이 채워지기를 기다리며 앉아 있습니다.

위에도 언급했듯이 처음 '일곱가지 죄악'을 체계화한 그리스의 수도자 에바그리오는 '탐식'을 가장 심한 죄악으로 꼽았습니다.

당시는 먹을 것이 늘 부족하던 시기였기 때문이 아닐까합니다.
또한 배가 부르면 게으르고 나태해져 다른 악덕들이 침투하기 쉬운 상태가 되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던 것이겠지요.

 

 MASSYS, Quentin
The Moneylender and his Wife 1514

 

◆ 탐욕(Greed)

 

때로는 욕심으로도 일컬어지는 '탐욕' 은 치사하고 인색한 노랭이 같은 구두쇠를 떠올리게 합니다.
그렇기에 환전상과 고리대금업자는 탐욕의 의인화로 주로 등장하는 인물들이지요.
이들은 테이블에 앉아 금화들을 살펴보며 무척 만족스러워합니다.
손가락으로 그것들을 만지작거리며 그토록 많은 물질적 재산을 소유하고 있음에 대단한 기쁨을 느끼는 것입니다.
들고 있는 저울은 황금이 지닌 선한 가치와 악한 가치의 이중적 성격을 가리킵니다.

  

 

 MASSYS, Quentin
The Moneylender and his Wife (detail) 1514

'소유'와 '탐욕'은 엄연히 다릅니다.

전통적인 그리스도교의 가르침에 따르면 탐욕은 물질에 대한 사랑, 즉 소유한 물건을 즐기는 것이라기 보다는 단지 소유 그 자체를 즐기는 것이라고 합니다.

사실 필요하지도 않은 차를 한 대 더 사거나 거실에 좋은 텔레비전을 두고도 안방에 한 대 더 들여놓는 것은 '소유'를 즐기는 것입니다.

또한 탐욕스러워지는 것, 즉 욕심을 부린다는 것은 소유물을 좋아하는 것뿐만 아니라 아직 갖지 못한 것에 대한 소유의 욕망을 품는 것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남이 소유한 물건에 대한 욕망을 말하는 것이죠.

 

 DURER, Albrecht
The Temptation of the Idler; or The Dream of the Doctor  c. 1498

 

 ◆ 나태(Sloth)

 상적으로 나태는 일하기 싫어하거나 능력 발휘를 꺼리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따라서 왜 교회가 나태를 '7가지 죄악'의 목록에 집어넣기 위해

그토록 애썼는지 이해하기란 어렵지 않습니다.

중세의 유럽은 모든 사회가 교회 통치를 받던 시절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 인간들에게 시간을 주었고,

당시 성직자들은 사람들의 이 소중한 시간을

충실한 노동에 바치도록 만들 필요가 있었죠.

바로 교회 성전을 짓는 데 필요한 세금과 노동력을

헌납하도록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래서 당시 성직자들은 조금의 게으름도 엄청난 죄라며

과장하여 표현해야 했습니다.

이들은 게으름에 대해 '정신과 감정,

영혼을 마비시키는 상태'라고 정의를 내렸습니다.

 

 

뒤러의 작품속에는 한 의사가 졸고 있습니다.

나태의 의인화된 모습이죠.

악마는 확성기를 이용하여 게으른 주인공의 귀에

죄스러운 생각들을 밀어 넣고 있습니다.

이는 '나태는 악마의 귀' 라는 중세의 격언을 바탕으로 한 것입니다.

반라의 비너스 여신은 육욕의 상징이며,

여기서는 잠든 이에게 초대의 손길을 내밀며 유혹하고 있습니다.

  

 

 

VERONESE, Paolo
Temptation of St Anthony
1552-53

 

◆ 정욕(Lust)

 

 

왜 성경이 그토록 '정욕의 죄'에 매달리는지를 이해하기란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정욕은 이기심에서 비롯된 죄로서, 타인에 대한 배려 없이 자신의 만족만을 추구하기 때문입니다.

아침이 되기 전에 잠자리에 은밀히 숨어 있다가 밤이 되면 다시 깨어나죠.

정욕은 음란, 외설, 호색, 음탕함이며 난잡함을 말합니다.

정욕에 대한 종교적 해석은 한마디로 '육체의 성적 욕구'입니다.

좀더 자세히 말하자면, 대개 바지 속에 감추어진

육체의 일부가 느끼는 욕구라고 할 수 있습니다.

 

순진한 소녀들이나 나이 든 아주머니들이 그렇듯이

선량한 종교는 육체의 일부에 관해 이야기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으며,

다른 사람이 이야기하는 것도 원치 않습니는다.

 

종교의 눈으로 보았을 때 정욕은 '더러운 마음의 표출' 인 것입니다.

그래서 신부들은 대대로 '정욕의 죄'는

우리를 영원한 지옥의 불구덩이에 빠뜨린다고 설교해 왔습니다.

당시에는 수백 년 동안 지저분한 성병으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고통속에서 죽어갔으니...

이해도 할 만합니다. 

 

<성 안토니의 유혹>은 극단으로 검약한 생활을 추구하며

사막에서 수행을 하는 성 안토니의 이야기입니다.

사탄이 그를 타락하게 만들기 위해 아름다운 반라의 아가씨로 변해 찾아와

유혹아였지만 안토니는 육신의 유혹을 물리쳤죠.

그는 수도원을 건립, 수많은 행적을 쌓았고 성인의 반열에 올랐습니다

 

 

 

BRONZINO, Agnolo
Venus, Cupide and the Time (Allegory of Lust)
1540-45

 

 

이탈리아 매너리즘 계열의 화가 브론치노의 유명한 작품입니다.

<시간과 사랑의 알레고리>라는 이름의 이 작품을 보면

야릇한 장면이 묘사되어 있는것을 볼 수 있습니다.

벌거벗은 어머니 아프로디테가 유혹적인 자태로

아레스와의 사이에서 낳은 아들 큐피트와 함께 있는 모습입니다.

세월은 진실의 도움을 받아 비너스 여신과 큐피트의 근친상간의

 만행을 만천하에 드러내고 있습니다.

나체로 그려진 육욕은 죄악에 빠지면 정신적 자산과

세속적 자산 모두를 잃게 된다는 교훈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비너스 뒤에 보이는 시기는 천사같은 얼굴에 스핑크스의 몸과 뱀의 꼬리,

좌우가 뒤바뀐 손을 가진 어린 소녀의 모습을 하고 있네요.

 

상징과 우의로 가득찬 이 미스테리한 작품은

많은 미술사 학자들의 골머리를 앓게 했습니다.

특히 아프로디테가 에로스에게 축축한 붉은 혀를 내밀어

농도 짙은 키스를 하는 근친상간의 태도는 두고두고 학자들을 괴롭힌 부분입니다.

지금은 육체적 정욕에 대한 경고를 담은 그림으로 해석되고 있습니다.

 

 

 

BOSCH, Hieronymus
The Seven Deadly Sins (detail)
c. 1480

 

 

◆ 교만(Pride)

 

중세의 종교적 관점에서 '교만'은 도를 넘어선,  신에 대한 사랑보다도 우위에 서고자 하는 거만함, 무례함을 의미합니다.

오만하고 자만심에 대한 열망이 천사들의 반란을 부추기고  루시퍼의 몰락을 가져왔다고 설명합니다.
그래서 교만의 죄는 치명적인 죄악의 목록 중에서도 최상의 자리를 지키고 있습니다.
교만한 자는 자신의 재능과 아름다움, 부와 권력, 지식에 대한 우월감으로 남을 깔보거나 불손한 태도를 지닙니다.

보쉬의 그림에서 자만심은 오만하고 부유한 젊은 여성의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자만의 도상은 부분적으로 허영의 도상과 겹치는데요, 그래서 그런지 궤짝에는 황금과 보석이 담겨있습니다.
자만함에 가득찬 여인은 늑대의 머리와 두꺼비의 발을 가진 악마가 들고 있는 거울을 보고 있습니다.

 

 

BRUEGEL, Pieter the Elder
The Tower of Babel  1563 

사람이 교만하면 낮아지게 되겠고 마음이 겸손하면 영예를 얻으리라" - 잠언 29:23 -

'바벨탑'에 대한 이야기는 인간의 교만함에 대한 신의 경고의 메세지를 담고 있습니다.
홍수 심판 후 번성해진 노아의 후손들은 동방으로 옮겨 가다가 시날땅에서 마음을 합하여 큰 도시를 이루고 하늘까지 닿는 탑을 쌓아서 '인본주의 사회의 나라'를 세우기 시작했습니다. 그것은 신의 심판이 다가올지라도 탑의 꼭대기가 하늘에 닿아 있으면 심판을 면할 수 있을 것이란 교만한 생각에서 비롯된 것이었습니다.

결국 바벨탑은 인간 교만의 상징이요, 탐욕의 징표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분노한 신은 그들의 언어를 혼잡하게 하였고,  하루아침에 말이 통하지 않게 된 이들은 더 이상  탑을 세울 수 없게 되었던 것입니다.

 

 

 BELLINI, Giovanni
Four Allegories  c. 1490

 

 ◆ 시기(Envy)

 

'시기'의 죄는 대개의 경우 시샘하거나 감탄하는 불만족의 감정으로 묘사됩니다.

이것은 다른 누군가의 소유물이나 업적, 또는 개인적 자질에 대해 시샘하거나

감탄하는 마음에서 생기는 불만이죠.

이런 시기심 때문에 사람들은 결국 남이 가진 것을 손에 넣고자 하는

욕망에 사로잡히게 됩니다.

시기의 죄를 성경에서는 '비열하고 졸렬한 죄악'이라고 묘사하고 있습니다.

질투하는 사람들처럼 갈라지고 독이 있는 혓바닥을 지닌 뱀은

질투의 전형적인 상징물입니다.

소라껍질은 시기하는 사람들의 뒤틀리고 현혹하는 행동을

암시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DOSSI, Dosso
Anger or the Tussle
1515-16

 

 ◆ 분노(Wrath)

 

'분노'가 무엇인지에 관해 사람들은 다양한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어찌보면 당연한 일입니다. 분노는 반사적인 감정이기 때문입니다.

교회에서는 분노를 불과 연관지어 설명합니다.

연기가 나고, 이글이글 타오르죠. 분노는 사탄과 연관됩니다.

지옥의 불구덩이처럼 분노는 한번 타오르면 모든 것을 태워버릴만큼 강렬합니다. 하지만 분노란 통제된 감정일 뿐 사람의 어깨 위에 앉아

성질만 내는 사탄은 아닙니다.

 

 

'도소 도시'의 작품에서 분노는 두 여인 사이에 벌어진

난투 장면으로 나타납니다. 입가의 거품과 붉게 충혈된 눈, 부어오른 얼굴은

분노의 전형적인 표현이죠. 왼쪽아래의 남자는 자신의 머리를 쥐어뜯으며

스스로의 분노를 표현합니다.


오바댜(Obadiah) 여호와의 종, 여호와를 경배하는 자

 ♦ 6월 30일(수)

♦ 오늘 읽어야 할 말씀 : 오바댜 1:1∼21
♦ 묵상을 위한 주제 : 중심의 교만(3절)
♦ 성구 : 바위틈에 거(居)하며 높은 곳에 사는 자(者)여 네가 중심(中心)에 이르기를 누가 능히 나를 땅에 끌어내리겠느냐 하니 너의 중심(中心)의 교만(驕慢)이 너를 속였도다.

오바댜서는 예언서 중에 가장 짧은 책입니다.
비록 가장 짧은 내용이지만 예언서의 축소판과 같습니다.
왜냐하면 이스라엘을 핍박했던 믿음이 없던 이방 족속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을 말씀하기 때문입니다.
오바댜서는 북 이스라엘과 남 유다에 대한 예언이 아니라 “에돔의 멸망”에 대한 예언입니다.

에돔이 무너지게 된 이유는 교만(驕慢)와 오만(傲慢) 이라고 합니다.
에돔의 교만은 무엇일까?
‘에돔’은 “에서”의 후손입니다.
에서는 야곱에게 장자권을 빼앗겼으면서도 이삭의 산지를 차지한 것으로 만족하며 하나님의 장자권에 대해 아무런 미련도 아쉬움도 없었습니다.
하나님은 이러한 에서에 대해 몹시 못마땅하셨습니다.
야곱이 장자의 축복을 이삭게서 가로채갔지만 에서에게 변한 것은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에돔의 교만은 하나님이 주시는 장자권보다 자신이 가진 재산과 부에 대해 자부심( זָדוֹן 가온, 교만. pride, proud)을 갖는 것이었습니다.
자신의 부와 가치에 대해 자부심을 가지는 것은 세상에서 이상할 것이 없을 뿐 아니라 당연한 사고방식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교만과 오만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교만이란 하늘의 복을 버리고 세상의 기복을 붙잡고 자랑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에돔은 “페트라” 라고 하는 난공불락의 천연 요새와 같은 지역에 거주하며 어느 누구도 이곳을 침략하거나 빼앗을 수 없다고 자랑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에돔의 이와 같은 교만을 유목민이며 상인이었던 “나바티안”에게 넘겨주심으로 오바댜의 예언을 성취하셨습니다.

♪ 찬양 / 주께로 나오라

예수 내 구주!
예수 내 생명!
예수 내 권세!

* 교만(가온.  gâʼôwn ) / גָּאוֹן

1.  장대함,  2. 장식,  3.교만

관련 성경
위엄(출 15:7, 욥 37:4, 미 5:4), 교만(레 26:19,잠 16:18, 겔 7:20), 영화(시 47:4, 사 14:11), 거만(잠 8:13), 오만(사 13:11),
영광(사 13:19, 암 6:8, 나 2:2), 아름다움(사 60:15), 자고(렘 48:29).
구약 성경 / 49회 사용

* 가달(gâdal) / גָּדַל

1. 함께 꼬다. 2. 위대해지다. 3.좋은 평가를 받다

크다(창 19:13, 애 1:9, 단 11:37), 중히 여기다(삼상 26:24), 위대하다(삼하 7:22, 시 35:27, 70:4), 자라나다(왕상 12:8, 대하 10:8),
많다(스 9:6), 심하다(욥 2:13), 기르다(욥 31:18), 창성하다(전 2:9), 장성하다(창 25:27, 출 2:11), 창대하다(창 26:13, 렘 5:27, 미 5:4), 자라다(출 2:10, 삿 11:2, 삼상 3:19), 나타내다(민 14:17), 견고하다(삼하 7:26, 대상 17:24), 무겁다(애 4:6), 커지다(단 8:9,10), 더하다(슥 12:7), 크게 하다(수 4:14, 왕상 1:37, 암 8:5), 높이다(에 5:11), 존귀하게 하다(에 10:2), 양육하다(사 1:2, 23:4, 51:18), 강하게 하다(대상 29: 12), 기르다(단 1:5), 크게 여기다(욥 7:17), 교육하다(왕하 10:6), 행한 큰 일(삼상 12:24), 스스로 교만하다(시 38:16), 들다(시41:9), 낫다(전 1:16), 자만하다(렘 48:26, 42), 강대하다(단 8:4,8), 높아지다(단 8:11), 웅장하다(대상 22:5), 베풀다(창 19:19), 자랑하다(겔 35:13), 크게 벌리다(옵 1:12).

오바댜는 구약 성경 39권 중 31번째 책으로 12권의 소선지서 중 한 권입니다.
1장 21절로 구성된 가장 짧은 책입니다.

오바댜는 히브리어로 '여호와의 종' 이라는 뜻입니다.
오바댜는 그가 살고 있던 유다와 가장 가까운 나라인 에돔 족속을 향한 심판을 예언합니다.
또한 택한 백성을 향한 하나님의 회복을 선포합니다.

오바댜는 에돔(Edom, 붉다)의 유다에 대한 악행으로 심판을 받을 것이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합니다.
에돔의 심판과 더불어, 오바댜 후반 부는 모든 나라가 받을 심판과 하나님의 나라에 대해 예언합니다.

에돔은 야곱(이스라엘)의 형 에서(Esau)의 자손으로 이스라엘과 형제 나라입니다.
그런데 에돔은 이스라엘과 친하지 않았습니다.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탈출하여 광야를 지날 때 에돔 땅을 지나갈 수 있도록 부탁했지만 에돔은 거절했습니다(민수기 20장).
남유다가 바벨론으로 부터 환난을 겪을 때 도와주기는 커녕 유다의 재물을 약탈했습니다(열왕기하 8장, 역대하 21장).


배경

오바댜의 예언은 유다 백성이 바빌로니아에서 유배 생활을 하고 있던 주전 587년과 538년 사이의 어느 시기에 전해졌다.
이 예언은 사해 남단에서 남남동에 위치해 있던 에돔이라는 나라를 향하여 그 멸망을 선포하는 내용으로 되어 있다.
다윗과 솔로몬이 다스리던 동안에 이스라엘은 에돔을 지배하였지만, 그 이후로는 에돔의 영토는 그 소유권을 둘렀고 자주 전쟁이 벌어졌는데, 이것은 아카바만으로 통하는 주요 교역로가 에돔의 영토를 통과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주전 4세기경에는 이들이 페트라를 그들의 수도로 하여 새로운 나라를 세웠다.
이때 많은 에돔인들이 이두메아로 이주하였다.
그러나 많은 에돔인들은 에돔 땅에 그대로 남아서 나바테아인들과 동화되어 그대로 살았다.

내용

오바댜의 예언 내용은 매우 간결하고 짧은 에돔 족속에 대한 한정된 심판처럼 보이나, 담겨 있는 의미는 심오하다.
하나님의 백성 유다에게 행한 에돔의 교만하고 악한 행동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은 전 우주적인 심판으로 확대된다.
그리고 이스라엘의 회복, 하나님의 통치, 하나님의 나라의 완성을 묘사하고 있다.
오바댜 예언의 핵심적인 내용은 이방인에 대한 하나님의 공정한 심판과 이스라엘의 회복이다.
남은 자가 땅을 회복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언약에 대한 갱신이다.

구조

제1단원(1-9절)

사탄적 삶을 사는 에돔의 오만에 대한 하나님의 징벌 선포(1-4절)와 이 선포의 성취 역사(5-7절)
이를 바탕으로 미래의 종말론적 심판이 예고된다(8-9절).

제2단원(10-15절)

에서는 에돔이 저지른 죄악의 역사적 실례를 통하여 에돔의 지혜의 부정적 실체를 고발하며, 에돔을 포함한 모든 민족들이 그들이 저지른 죄악 때문에 징벌을 받을 심판의 날이 가까이 왔음을 선포한다.

제3단원(16-21절)

에서는 에돔의 사악함과 무지와 죄악에 대한 하나님의 징벌, 선민 이스라엘의 승리와 회복, 공의의 하나님 여호와의 주권 선포와 하나님의 통치 등을 함축적으로 전개하며 삼단 양식을 마감한다.

제목

구약의 선지서 중 가장 짧은 책인 본서의 표제는 다른 선지서들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저자의 이름에서 유래되었다.
한글 개역 성경의 표제 '오바댜'는 구약 히브리 원전의 표제 '오바디아'의 음역으로, 그 뜻은 '여호와의 종', '여호와를 경배하는 자'이다. 70인역(LXX)과 벌게이트역(Vulgate)에서도 히브리 원전의 표제를 음역한 '옵디우'와 '압디아스'를 본서의 표제로 사용하고 있으며, 이를 따라 대부분의 영어 성경에서도 '오바디아'를 본서의 표제로 사용하고 있다.

저자와 기록 연대

본서의 저자가 '오바댜'라는 사실은 본서 자체의 증거(1:1)만 있을 뿐 성경의 다른 내증은 없다.
그러나 이 사실은 유대인들의 전승과 교부들의 증거 및 종교 개혁자들의 증거 등의 풍부한 외증으로 초대 교회 초기부터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별다른 논란없이 그대로 받아들여져 왔다.

본서의 기록 연대는 예루살렘 성이 멸망한 직후인 B.C. 586년경으로 볼 수 있다.

신학적 주제

오바댜의 예언들은 묵시를 통해 오바댜에게 주어졌다.
거기에는 풍부한 신학적인 주제들이 담겨 있다.
10-14절은 형제관계와 인간관계 속에 내재된 의무들에 관한 것이고,
3-4,8절은 열방들의 죄악과 오만을 다루고 있으며,
15-16,21절은 여호와의 날에 최종적으로 드러날 모든 열방에 대한 하나님의 주 되심을 선포한다.

15절은 인간의 죄로 인한 결과들을 다루고
17,21절은 남은 자라는 주제를 다룬다.

이와 같이 오바댜서는 민족주의적이고 보복적인 냄새를 풍기는 편향된 냉용을 담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성경의 몇몇 기본적인 신학을 담고 있는 책이다.

또한 하나님의 정의에 대한 사실을 강조하고 있다.

"원수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 살아계신 하나님의 손에 빠져 들어가는 것이 무서울진저"(히 10:30-31).
하나님의 은혜에 복종하고 응답한 자는 모든 것을 가진 자이나, 그분의 은혜를 교만하여 져버린 자는 모든 것을 잃어버린 자인 것이다.


개관과 구조
  • 저자 : 선지자 오바댜
  • 저작 시기: BC 845, 에돔이 유다의 적을 도왔다 (왕하 8:20-22, 대하 21:8-17)
  • 목적 : 에돔과 모든 나라에 대한 심판 경고
  • 오바댜에 보는 하나님 : 공의
  • 당시 통치자: 유다 여호람 왕
  • 특징 : 예레미야 49:7-22에서 오바댜 1-9 인용
  • 책 이름 약자 : 옵, Obad.

구조

  • 에돔에 대한 심판 (1-9)
  • 에돔의 죄 (10-14)
  • 최후의 심판과 하나님의 나라 (15-21)

에돔에 대한 심판 (1-9)

교만한 애돔은 반드시 하나님의 심판을 받을 것입니다.

에돔의 죄 (10-14)

  • (1:10) 네가 네 형제 야곱에게 행한 포학으로 말미암아 부끄러움을 당하고 영원히 멸절되리라

최후의 심판과 하나님의 나라 (15-21)

  • (1:21) 구원 받은 자들이 시온 산에 올라와서 에서의 산을 심판하리니 나라가 여호와께 속하리라
예레미야 49:16
바위 틈에 살며 산꼭대기를 점령한 자여 스스로 두려운 자인 줄로 여김과 네 마음의 교만이 너를 속였도다 네가 독수리 같이 보금자리를 높은 데에 지었을지라도 내가 그리로부터 너를 끌어내리리라 이는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한장밖에 없는 선지서 오바댜  오바댜는 누구일까?
결론적으로 오바댜가 누구인지 정확한 정보는 없다.
단지 추측은 할 수 있다.
그의 이름 오바댜(  עֹבַדְיָה servant, worshipper of Jehovah)는 여호와의 종. 여호와의 예배자라는 뜻이다.

고대 유대랍비들은 그가 아합의 궁내 대신이며 아합에게 핍박당하는 여호와의 선지자들을 굴속에 숨겨주고 양식을 공급해준 오바댜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그는 공식적으로 선지자라는 칭호가 없다

오바댜서를 기록한 오바댜는 여호와의 묵시를 받은 선지자였다.

오바댜서를 기록한 시기는 여러가지 추측이 있지만 여호사밧왕의 아들 여호람의 통치기간 또는 아하스왕의 통치기간 혹은 바벨론에 의해 예루살렘이 함락된 후라는 견해가 있는데 다 확실하지 않다.

만일 여호와사밧 왕의 아들 여호람통치기간이라면 혹시 아합의 궁내대신 오바댜와 동일인물일 가능성도 있다.
아합과 이세벨의 악정하에서도 여호와의 신실한 믿음을 지킨 궁내대신이 후에 여호와의 계시를 받아 오바댜서를 기록했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오바댜에 대한 견해

혹자는 오바댜는 아마도 에돔사람인데 여호와 신앙을 개종하여 유대인이 된 것같다 그래서 에돔에 반대하여 예언하는데 적합한 사람인 것같다고 한다. 그럼에도 모든 추측이 확실하지 않다.

분명한 것은 오바댜가 받은 계시는 에돔의 길을 걷는 세상 모든 족속들에 대한 하나님의 경고라는 사실이다.

오바댜서가 여호와하나님으로 받은 말씀인 것만은 확실하다.

​에돔은 에서의 후손으로 야곱과 이삭의 유산을 나눈 형제이다.
야곱이 에서의 장자권을 속여 빼앗았지만 에서는 여전히 이삭의 땅에 거하면서 안정된 삶을 살았고 20년 후에 야곱과 만났을 때 에서는 이미 족장으로 부족함이 없었다.

야곱이 20년만에 아버지 이삭의 땅으로 돌아 온 후 에서는 이삭의 땅을 동생야곱에게 넘기고 세일산에 거주하며 에돔족속의 조상이 되었다.

이 후로 야곱은 이스라엘의 조상이 되었고 이스라엘과 에돔은 형제부족이지만 서로 적대적인 관계를 유지하게 된다.
야곱은 여호와의 언약인 장자권을 유산으로 받았고 에서는 이삭의 재산을 유산으로 받았던 것이다.
야곱은 여호와의 언약을 지키기 위해 연단을 받았지만 에서는 자신의 방식대로 유산을 지켜나갔다.
에서는 하나님의 도우심보다 난공불락의 높은 바위에 거하면서 스스로 재산과 안전을 지키면서 높은 성을 쌓아 나갔던 것이다.
에돔족속의 자신들을 지키기 위해 택한 곳이 바로 페트라라고 불리우는 곳였다.
에돔족속들이 살고 있는 바위틈 산꼭대기 독수리보금자리같이 높은 곳은 페트라이다.
페트라는 사해 남동쪽 바위가 많은 산악지대로써 천연요새라고 할 수 있다.
바위가 많다고 해서 페드라라고 부른다.
그 바위는 모래바위(사암)이다.
자연동굴에 거주하거나 바위를 파서 만든 집에 거주하며 적들의공격으로부터 보호해준다.

훌륭한 자연경관으로 여름에는 휴양지 겨울에는 안식처로 유명하다.

수도 페트라는 폭 3미터미만의 1킬로 이상의 암반 골짜기 끝에 위치하며 적은 인원으로 적의 공격을 쉽게 차단할 수 있는 전략적 요충지이기도 하다.

실제 페트라를 세운 족속은 나바티안이었다.
나바티안은 유목민인데 중국 인도 이집트와 로마를 오가며 향유와 비단을 팔아 부를 이루었다고 한다.
그들은 페트라를 점령한 후에 깊은 계곡안에 사암절벽들을 깍아 웅장한 건물을 지어 도시를 형성하게 되었다.
나바티안은 보따리 상인으로 에돔족속이 은밀히 거하는 요새를 드나들었다.
에돔이 거하는 은밀한 요새에 외세의 침입이 잦았지만 좁고 1킬로나 되는 협곡을 통과하지 못하고 에돔에게 전멸당했다.
그러나 나바티안이 에돔의 요새를 점령할 수 있었던 것은 보부상으로 에돔족속들이 거래했기 때문이다.
보부상들은 보따리에 무기를 숨겨서 잠입하여 난공불락의 요새를 함락시키고 그곳에 나바티안의 도시 페트라를 세웠던 것이다.
나바티안은 수백년동안 은밀하게 자신들의 은신처를 간직했지만 후에 바벨론과 로마의 침략으로 몰락하게 되었다.

에돔의 교만
에돔의 교만은 무엇일까?

에서는 야곱에게 장자권을 빼앗겼으면서도 이삭의 산지를 차지한 것으로 만족하며 하나님의 장자권에 대해 아무런 미련도 아쉬움도 없었다.
하나님은 이러한 에서에 대해 몹시 못마땅하셨던 것이다.
실상 에서의 마음속에 있는 것은 아버지 이삭의 재산이었다.
야곱이 장자의 축복을 이삭에게서 가로채갔지만 에서에게 변한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에돔의 교만은 하나님이 주시는 장자권보다 자신이 가진 재산과 부에 대해 자부심( זָדוֹן pride, proud )을 가지는 것이다.

자신의 부와 가치에 대해 자부심을 가지는 것은 세상에서 이상할 것이 전혀없을 뿐 아니라 당연한 사고방식이다.

그러나 하나님으로 볼 때는 교만하며 오만하고 불경하기까지 하다.

나사로는 하나님의 장자권에 자부심을 가졌고 부자는 재산과 부에 자부심을 가졌다.

나사로는 아브라함품에 안겼고 부자는 뜨거운 지옥불에서 고통을 당했다.

야고보는 장사를 하여 이익을 남기리라고 말한 자에게 허탄한 자랑을 하지 말고 주의 뜻이면 우리가 살기도 하고 이것저것 하리라 말하라고 했다.

진짜 교만은 하늘의 복을 버리고 세상의 기복을 붙잡고 자랑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에돔의 교만을 완전히 벗겨버리셨다.

그것이 에돔의 난공불락의 산성 페트라를 나바티안에게 넘겨주신 것이다.

에돔이 자랑하던 요새와 금은보화를 일개 유목민이며 보따리 장수들인 나바티안에게 수탈당하게 된 역사이다.


에돔의 포학

에돔족속은 앗수르가 북이스라엘을 침략할 때 예루살렘이 바벨론군대에 포위당하며 함락될 때 대적들을 도와서 형제인 야곱의 후손들을 치는데 함께 공격했고 침략당하는 이스라엘을 탈취하며 도망가는 유대인들을 사로잡아 죽이거나 대적들에게 넘겨주는 악행을 저질렀다.

형제족속이 사로잡히고 칼로 죽임을 당하고 초토화될 때 고소해하며 오히려 이스라엘이 멸망함으로 얻을 자신들의 이득을 기뻐하고 좋아했던 것이다.

하나님은 이러한 에돔의 악행을 결코 기뻐하지 않으셨다.

하나님은 애굽에서 나와 광야에서 물이 없어 힘들어하는 이스라엘백성들을 뒤에서 공격한 아말렉에 대해 그 이름을 천하에서 지워버리겠다고 말씀하셨다.

아무 상관이 없어도 힘이 없어 쓰러지는 약자를 몰래 공격하여 그 알량한 재물을 약탈하고 무고한 자들을 살해하려는 아말렉에 대해서고 하나님은 그렇게 분노하셨는데 하물며 함께 피를 나눈 형제가 고난을 당하고 원수에게 쫓길 때 도와주지는 못할 망정 대적을 도와 잡아주고 죽이고 약탈하고 그 이권을 챙기는 에돔족속에 대해 하나님은 마치 포도원에 포도알맹이가 하나도 남지 않을 만큼 도적떼들에게 수탈당한 것처럼 에돔의 모든 것을 말갛게 벗겨버리겠다고 하셨다.

우리 주님은 원수를 미워하지 말고 원수를 축복하고 위하여 기도하며 주릴 때 먹을 것을 목말라 할 때 마실것을 주라고 하셨다.

그래야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아들이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난공불락의 속임수

에서는 세일산에 본거지를 옮기면서 영토를 확장하여 왕의 대로라고 불리우는 무역로를 개척했는데 이 길은 아카바만에서 시리아까지 이르고 네게브에서 아라비아 사막까지 이르는데 애굽 아라비아 시리아 메소포타미아에서 온 많은 대상들이 이곳을 지나가게 되었는데 왕의 대로를 지나가는 많은 무역상들에게 통행세를 받아서 에돔은 큰 부를 확보하게 되었다.

에돔은 그 부를 아라바쪽에 있는 깍아지른듯한 낭떠러지와 사암으로 되어 있는 천혜의 요새인 페트라를 수도로 삼았고 난공불락의 오만함에 빠져 있었던 것이다.
어느 누구도 어떤 강대한 족속도 그들의 은신처를 침략하여 들어올 수 없다고 믿었다.
이 세상에서 난공불락의 요새는 없다는 것이다.
인간이 만들어 놓은 완전한 방범은 없다.
아무리 철저하게 장막을 쳐놓고 높은 첨탑을 세워 경계를 해도 결국은 뚫리게 되어 있고 무너지게 되어있다.
이것이 오바댜가 에돔에 던지는 경고인 것이다.
인간은 스스로 만들어놓은 첨단 요새에서 홀로 안전하다고 믿고 살지만 그 첨단요새망이 무너지는 것은 순식간이다.

여호와의 전쟁은 여리고성도 강력한 블레셋요새도 무너뜨렸다.
여호사밧의 거룩한 전쟁앞에 하나님을 백성을 대적한 모압과 암몬 세일족속들은 자기들 끼리 칼부림하여 자멸하게 되었다

난공불락

나는 무너지지 않는다 나는 과부가 되지 않는다 나는 실패하지 않는다고 불패신화를 외쳤던 모든 제국들과 권력자들과 나라들은 다 무너졌다.
진정한 피난처요 영원한 안식처는 오직 여호와 하나님을 의지하며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피난처로 삼는 것이다.
오바댜선지자는 에돔족속을 향해 하나님보다 부와 재산 그리고 든든한 요새를 의지하며 자랑하는 자마다 다 멸망할 것이라고 여호와의 말씀을 전했다.
페트라는 완전히 멸망하여 사막가운데 모래바람에 풍화되면서 기이한 요새를 찾는 많은 관광객들에게 이 세상에 영화는 오래가지 못한다는 하나님의 교훈을 남기고 있다.


요엘(여호와는 하나님이시다)

요엘의 뜻 : ‘여호와는 하나님이시다
- 브두엘의 아들 / 브두엘(하나님을 확신하고 있는 사람)


6월 18일(금)
여호사밧 골짜기(요엘 3:2)

요엘 3:2

내가 만국을 모아 데리고 여호사밧 골짜기에 내려가서 내 백성 곧 내 기업된 이스라엘을 위하여 거기서 그들을 국문하리니 이는 그들이 이스라엘을 열국 중에 흩고 나의 땅을 나누었음이며.

* 여호사밧(여호와께서 심판하신다)


여호사밧

여호와(야흐. Yâhh / יָהּ ) + 샤파트(shâphat / שָׁפַט )
    여호와 + 심판하다
(여호와께서 심판하신다)

* 여호사밧 골짜기 / 여호와께서 심판하실 골짜기


역대하 20장
                  여호사밧       :         아람의 전쟁
            (유다 제4대 왕)       (모압, 암몬, 마온 사람)

역대하 20:12-13
우리 하나님이여 저희를 징벌하지 아니하시나이까? 
우리를 치러 오는 이 큰 무리를 우리가 대적할 능력이 없고 어떻게 할줄도 알지 못하옵고 오직 주만 바라보나이다 하고.
유다 모든 사람은 그 아내와 자녀와 어린 자로 더불어 여호와 앞에 섰더라.

역대하 20:14. 레위 사람 야하시엘

15b. 이 큰 무리로 인하여 두려워하거나 놀라지 말라 이 전쟁이 너희에게 속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라.

17절a. 이 전쟁에는 너희가 싸울 것이 없나니 항오를 이루고 서서 너희와 함께 한 여호와가 구원하는 것을 보라.


역대하 20:20b

너희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를 신뢰하라 그리하면 견고히 서리라 그 선지자를 신뢰하라 그리하면 형통하리라.

(군대 앞에 노래하는 자들에게 거룩한 예복을 입히고 여호와를 찬송, 여호와께 감사하세 그 자비하심이 영원하도다)

역대하 20:26

제 사일에 무리가 브라가 골짜기에 모여서 거기서 여호와를 송축한지라 그러므로 오늘날까지 그곳을 브라가 골짜기라 일컫더라.

* the Valley of Beracah 

브라가 / 베라카(Berâkâh.  בְּרָכָה ) 송축

이사야 43:21

이 백성은 내가 나를 위하여 지었나니 나의 찬송을 부르게 하려 함이니라.
The people whom I formed for Myself Will declare My praise.

오늘의 기도

여호사밧과 같은 골짜기를
브라가와 같은 골짜기로 만들기 위하여!

시편 126:6

울며 씨를 뿌리러 나가는 자는 정녕 기쁨으로 그 단을 가지고 돌아오리로다.
He who goes out weeping, carrying seed to sow, will return with songs of joy, carrying sheaves with him.

역사적 배경은 역대하 20장에서 찾는다.

유다 왕 제4대 "여호사밧"은 모압, 암몬, 마온 사람들이 공격하려고 엔게디에 모여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
여호사밧은 두려워하여 모든 유다 백성들에게 금식하라 공포한 후 여호와께로 낯을 향하여 간구하였다.
이때 여호와의 신이 레위 사람 "여하시엘"에게 임하여 아르기를 "이 전쟁은 여호와께 속한 것이므로 두려워하거나 놀라지 말라" 하셨다.
그리고 저희가 "시스 고개"올라올 것이니 "여루엘 들" 앞에서 만나게 될 것이다.
너희는 싸울 것이 없다.
여호와가 구원하는 것을 보라.
여호사밧과 모든 백성들은 여호와께 엎드리고 그핫 자손과 고라 자손은 일어서서 큰 소리를 여호와를 찬송하였다.

여호사밧은 군대 앞에 노래하는 자들을 세우고 "여호와께 감사하세 그 자비하심이 영원하도다" 하며 찬송하게 하였다.
여호와께서 복병을 두어 적군을 물리치셨고 4일 후에 적군의 물건을 취하였는데 너무 많아 가져갈 수 없을 만큼 많았다.
"브라가(송축) 골짜기"에 모여 여호와를 송축하였다.

여호사밧의 골짜기가 연합군들에게는 패배의 골짜기가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백성들에게는 승리의 골짜기가 됩니다.
승리의 골짜기를 브라가 골짜기라고 불렀습니다.
브라가는 송축하다는 뜻입니다.

오늘도 내가 머물고 있는 그 자리가 어제의 그 자리가 아닙니다.
어제와 똑같은 자리로 만드는 것도 누구입니까?
내가 어제와 같은 자리로 만들 수 있습니다.
그러나 내가 승리의 자리 브라가의 자리로 만들 수도 있습니다.
어떤 자리에 머물고 싶습니까?
어제와 똑같이 지루하고 답답하고 소망이 없는 자리로 만들 수도 있지만
찬송하며 나갈 때 하나님의 도움을 받아 승리하는 자리로 만들어 주실 것입니다.

6월 17일(목)

여호와께로 돌아오라(요엘 2:13)

"여호와께로 돌아오라"는 말씀은 어느 개인에게 요구하신 것일까요?
아니면 민족 공동체에게 요구하신 것일까요?
이스라엘 민족 공동체에게 요구하신 것입니다.
성경의 배열 순서에 따라 호세아(하나님의 사랑과 회복)와 아모스(하나님의 정의와 심판) 사이에서 징검다리 말씀이라고 하겠습니다.
요엘서는 "하나님께로 돌아오면 회복할 수 있다"는 것을 강조합니다.

여호와께로 돌아오라(공동체의 회개)
요엘 2:13
너희는 옷을 찢지 말고 마음을 찢고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로 돌아올찌어다
그는 은혜로우시며 자비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하시며 인애가 크시사 뜻을 돌이켜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시나니. 

옷을 찢는 것(비게데켐)
형식, 습관
큰 슬픔, 큰 재난, 회개

창세기 37:29
르우벤이 돌아와서 구덩이에 이르러 본즉 거기 요셉이 없는지라 옷을 찢고.

민수기 14:6
그 땅을 탐지한 자 중 눈의 아들 여호수아와 여분네의 아들 갈렙이 그 옷을 찢고.

사무엘하 1:11
이에 다윗이 자기 옷을 잡아 찢으매 함께 있는 모든 사람도 그리하고.

마음을 찢는 것(키르우 리바브켐)
아픔, 고통

시편 34:18
여호와는 마음이 상한 자에게 가까이 하시고 중심에 통회하는 자를 구원하시는도다.

시편 51:17

하나님의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하나님이여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치 아니하시리이다.

상한 심령(broken spirit)
- 죄를 깨닫는 마음
* 하나님의 은혜를 입기 전에는 회복할 수 없는 마음

완고한 심령(stubborn spirit)
- 죄를 깨닫지 못하는 마음


이사야 55:7
악인은 그 길을, 불의한 자는 그 생각을 버리고 여호와께로 돌아오라 그리하면 그가 긍휼히 여기시리라
우리 하나님께로 나아오라 그가 널리 용서하시리라. 


요엘 2:28
그 후에 내가 내 신을 만민에게 부어 주리니 너희 자녀들이 장래 일을 말할 것이며 너희 늙은이는 꿈을 꾸며
너희 젊은이는 이상을 볼 것이며.

* 만민(알 콜 바사르) : 모든 사람
육체가 된 타락한 사람에게


창세기 6:3
나의 신이 영원히 사람과 함께 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그들이 육체가 됨이라.
                          죄를 지은 인간


사도행전 2:17.
모든 육체에게 부어주리니.

사도행전 2:38

베드로가 가로되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얻으라 그리하면 성령을 선물로 받으리니.

사도행전 3:19

그러므로 너희가 회개하고 돌이켜 너희 죄 없이 함을 받으라
이같이 하면 유쾌하게 되는 날이 주 앞으로부터 이를 것이요.

오늘의 기도

성령의 지배를 받는
상한 심령으로 살아가게 하옵소서!

주여, 불쌍히 여겨주시옵소서
주여, 심령을 새롭게 하옵소서 


6월 16일(수)
여호와의 날(요엘 1:15)

여호와의 날(The day of the Lord) /
욤 아도나이(יוֹם אֲדֹנָי)

요엘(Joel) 1:15

오호라 그 날이여 여호와의 날이 가까왔나니 곧 멸망 같이 전능자에게로서 이르리로다.


오호라 그 날이여 여호와의 날이 가까왔나니 곧 멸망 같이 전능자에게로서 이르리로다.

                            (5회)  1:15, 2:1, 11, 31. 3:14
                             * 2:31 /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
                                언약의 백성 : 구원
                                이방인 : 심판
                                 구체적 내용 / 재앙적 심판의 날(1:12-14) 

오호라 그 날이여 여호와의 날이 가까왔나니 곧 멸망 같이 전능자에게로서 이르리로다.
                                                                           멸망(쇼드, shod, שֹׁד)                           
                                                                                            전능자(샤다이, shadday, שַׁדַּי)

1절. 여호와께서 브두엘의 아들 요엘에게 이르신 말씀이라.
                        * 브두엘(Bethuel) 하나님을 확신하고 있는 사람
                                                     하나님의 집(ref. 벧엘)
                                                 * 요엘(Joel) 여호와는 하나님이시다

 

2절. 늙은자들아 너희는 이것을 들을지어다 땅의 모든 거민아 너희는 귀를 기울일지어다
너희의 날에나 너희 열조의 날에 이런 일이 있었느냐?

* 늙은자들아 / 생물학적 나이가 아니라
                        시대를 먼저 살았던 어른들

3절. 너희는 이 일을 너희 자녀에게 고하고 너희 자녀는 자기 자녀에게 고하고 그 자녀는 후시대에 고할 것이니라.

* 신앙교육(말씀교육)을 몇 대째 계속하는가?
* 말씀교육이 없는 시대는 반드시 무너질 것이다

4절. 팟종이가 남긴 것을 메뚜기가 먹고 메뚜기가 남긴 것을 이 먹고 늣이 남긴 것을 황충이 먹었도다.

* 팟종이, 메뚜기, 늣, 황충은 무엇일까?

2:25. 내가 전에 너희에게 보낸 큰 군대 곧 메뚜기와 늣과 황충과 팟종이의 먹은 햇수대로 너희에게 갚아주리니.


5절. 무릇 취하는 자들아 너희는 깨어 울찌어다 포도주를 마시는 자들아 너희는 곡할찌어다 이는 단 포도주가 너희 입에서 끊어졌음이니.

                                                          * 울찌어다(바카,  בָּכָה) 흐느끼다

                                                                                                                             * 곡할찌어다(얄랄, יָלַל  ) 고함치다, 소리치다

오호라 그 날이여 여호와의 날이 가까왔나니 곧 멸망 같이 전능자에게로서 이르리로다.

                                                                         * 멸망(쇼드, shod, שֹׁד)                           
                                                                                           * 전능자(샤다이, shadday, שַׁדַּי)


오늘의 기도

말씀 교육을 회복하기 위하여

1. 기독교 신앙을 자녀에게 가르치자
2. 예배를 회복하자(예배와 삶)


6월 17일(목)
여호와께로 돌아오라(요엘 2:13)


여호와께로 돌아오라(공동체의 회개)
요엘 2:13

너희는 옷을 찢지 말고 마음을 찢고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로 돌아올찌어다
그는 은혜로우시며 자비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하시며 인애가 크시사 뜻을 돌이켜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시나니. 

* 마음을 찢으라!

<옷을 찢는 것>은 무서운 재앙이나 극심한 재난이 닥쳤을 때 이스라엘이 행했던 전통적이고도 관습적인 행위였습니다(창 37:29-35). 본래 마음을 찢는다는 의미의 상징적인 표현이었지만 나중에는 그런 의미를 상실하고 위선적이고도 습관적인 의미로 퇴색되자 요엘 선지자가 여기서 다시 내적인 심령의 통회를 요청하고 나선 것입니다.

옷을 찢는 것
창세기 37:29-30

르우벤
이 돌아와서 구덩이에 이르러 본즉 거기 요셉이 없는지라 옷을 찢고
아우들에게로 와서 가로되 아이가 없도다 나는 나는 어디로 갈까?

마음을 찢는 것

옷을 찢는 것은 형식입니다.
마음을 찢는 것은 아픔입니다.

옷을 찢을 때는 하나님과의 사귐에 있어서  아픔이 동반되지 못한다.
반면  마음을 찢을 때는 하나님과의 사귐에 있어서 아픔이  함께 동반됩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기 위한 아픔이 있는 것이 마음을 찢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하나님을 향하여  아픔이 있다는  것은  바로  하나님을 향하여 감각이 생겼다는 것이다. 
하나님을 향하여 감각이 생겼으니  그 사귐에 있어서 사랑의 깊이와 넓이를 깊고 넓게  가져 갈 것은  자명한 일이다.    

우리는 사랑하는 사람을  잃었을 때 아픔을 느낀다. 
그러나 사랑하는 대상이 아니면  아픔을 느낄 수가 없다. 
즉  하나님을 향하여 이 아픔의  감각을 찾으라는 요청이라는 것이다.

하나님은 요엘을 통하여  세상적으로 보기에 멋있게 보이고 휼륭한 모습으로 까지 보이게 하는 신앙인의 모습  즉  옷을  찢는  멋있는 형식주의적  신앙인의 모습에서  벗어나   진정으로 아픔을 느끼는  살아있는 신앙인의 모습을 갖추기를  요청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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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엘 이름속에 내포된 ‘여호와는 하나님이시다’ 라는 의미는 ‘역사 속에서의 하나님의 주권적인 섭리’를 뜻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일생 뿐 만 아니라 온 인류의 역사를 주관하시는, 오직 유일한 주권자이십니다.

핵심단어 : 여호와의 날

그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있어 ‘여호와의 날’은 이스라엘의 원수들에는 두려움의 날이지만 주의 백성들에게는 위로의 날이며 보상의 날로 이해되어져 왔습니다.

하지만 요엘은 당대에 유다가 당면한 국가적인 위기 상황(메뚜기 재앙)을 통해 비록 주의 백성들일지라도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살지 않을 경우, 두려움과 심판의 ‘여호와의 날’을 맞이할 수 있음을 상기시켜 줍니다. 그를 통해 이스라엘 백성들이 회개하며 하나님 앞에 겸비케 함으로장래에 임하게 될 궁극적 ‘여호와의 날’을 잘 준비하며신앙 성숙의 자리로 나아가도록 돕고 있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 또한 하나님의 심판대에 서는 ‘여호와의 날’이 반드시 있습니다. 만약 오늘 우리 삶에 하나님의 징계로 인한 고통이 있다면 그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로 하여금 ‘여호와의 날’을 미리 경험케 하심으로 회개를 통해 향후 다가올 ‘여호와의 날’을 준비시키시 위한 하나님의 은총의 손길입니다.

특징 : 요엘의 예언은 개인의 경험이나 환상 대신 자연 재앙을 통해 이루어집니다.

일반적인 선지서들의 경우, 선지자 개인의 경험이나 환상을 바탕으로 예언이 이루어지는데 반해 요엘은 메뚜기 재앙을 바탕으로 예언합니다.

구성

요엘서는 크게 두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1) 메뚜기재앙과 장차 임할 여호와의 날에 대한 경고의 내용인 1장 1절부터 2장 17절
2) 회개를 통한 선민 이스라엘의 회복과 축복의 약속에 대한 내용인 2장 18절 부터 3장 21절

1장은 1) 책 제목에 대한 설명인 1절과
2) 여호와의 날의 예시로 주어진 메뚜기 재앙을 통한 경고를 다루는 2절부터 4절까지의 내용,
3) 메뚜기 재앙으로 인해 빚어 지게 되는 참상 및 회개 성회를 촉구하고 있는 5절부터 14절,
4) 궁극적인 여호와의 날에 대한 탄식과 간구의 내용인 15절부터 마지막 20절까지의 네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표제 (1절)

본문 1절입니다.
브두엘의 아들 요엘에게 임한 여호와의 말씀이라

요엘은 남유다에서 활동했던 선지자로 요엘의 예언 선포는 남유다의 제 8대왕이었던 요아스(B.C. 835~796)의 통치 초기로 여겨집니다. 당시는 통일 이스라엘 왕국이 남과 북으로 분열된 지 약 100여년 정도 지난 시기로 두 왕국간의 정치적 갈등은 거의 해소되었으나 종교적으로 두 왕국 모두 패역한 길로 걸어가고 있을 때였습니다. 바로 그 때 브두엘의 아들 요엘에게 하나님의 말씀이 임하게 됩니다.

요엘서의 표제인 1절에는 요엘의 아버지인 브두엘이 언급됩니다. 아들 요엘에게 ‘여호와는 하나님이시다’ 라는 이름을 지어준 요엘의 아버지 ‘브두엘’ 의 이름의 뜻은 ‘하나님의 사람’, ‘하나님은 광대하게 하셨다’ 라는 의미입니다. 이름들에 담겨진 의미를 통해 우리는 요엘의 아버지인 브두엘과 브두엘의 아버지인 요엘의 조부 또한 하나님을 경외하는 신실한 믿음의 사람들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향한 믿음과 아들 또한 그런 믿음을 가지고 커가기를 바라는 그들의 신앙적인 열망을 이름에 담긴 의미를 통해 엿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 있어 중요한 책무가 있습니다. 바로 우리가 지닌 믿음을 우리의 후손들에게 잘 계승해 주는 것입니다. 믿음은 결코 그냥 계승되지 않습니다. 내가 내 자손들에게 믿음의 징검다리 역할을 하고자 하는 열망과 의지를 가지고 노력해 갈 때 비로소 실현됩니다. 내가 아무리 열심히 신앙생활을 한다고 할지라도 내 대에서 믿음이 끊긴다는 것은 그 어떤 일보다도 가슴 아픈 일일 것입니다.

오늘 요엘의 아버지인 브두엘과 브두엘의 아버지인 요엘의 조부는 성경에 거의 기록이 없는 아주 미미한 인물들입니다. 하지만 요엘을 통해 우리는 그들의 믿음이 요엘에게 잘 계승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런 믿음을 승계받은 요엘을 통해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역사를 써 내려 가신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믿음의 계승,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힘써야 할 중요한 책무중에 하나입니다.

메뚜기 재앙을 통한 경고 (2절-4절)

이제 본문 2절부터 4절까지는 당면하고 있는 재앙을 통해 요엘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경고하는 내용이 담겨져 있습니다

본문 2절입니다.
늙은 자들아 너희는 이것을 들을지어다 땅의 모든 주민들아 너희는 귀를 기울일지어다 너희의 날에나 너희 조상들의 날에 이런 일이 있었느냐

요엘은 먼저 늙은 자들, 곧 나이든 노인들에게 질문을 던집니다. 그들이 조상들로부터 전해들은 이야기들 중에 최근 이스라엘이 경험하고 있는 재앙과 비견할 수 있는 날이 있었는지를 묻습니다. 그만큼 그들이 직면하고 있는 재앙이 충격적이며 두려운 일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3절입니다.
너희는 이 일을 너희 자녀에게 말하고 너희 자녀는 자기 자녀에게 말하고 그 자녀는 후세에 말할 것이니라

요엘은 나이든 노인들에게 현재의 재앙에 대해 자녀들에게 말하고 자녀들은 또한 후세에 말할 것을 당부하고 있습니다. 당대에 경험하고 있는 이 일이 결코 잊혀져서는 안되며 그 일을 교훈삼아 다시는 후손들이 반복해서 그런 재앙을 겪지 말게 하라는 바람이 담겨져 있는 것입니다.

믿음의 바른 계승을 위해서는 이처럼 후세를 교훈하여 세워나가는 일이 필요합니다. 물론 항상 바른 삶으로 본을 보이며 진면교사역할을 하면 좋겠지만 비록 부끄러운 고백일지라도 그 일이 반면교사가 되어 후손들을 하나님 앞에서 바르게 세워 나가는 일이라면 주저하지 말고 전해야합니다. 그를 통해 그들이 경각심을 갖고 바른 신앙적 삶을 견지해 나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 면에서 성경은 진면교사적인 인물들과 반면교사적인 인물들이 총망라된 인생 표본의 집합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 경건한 삶으로 하나님 역사의 통로로 쓰임 받았던 복된 인생이 있는가 하면 그와는 반대되는 불경건한 삶으로 하나님께 징벌받았던 가여운 인생 또한 등장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하나님께서는 신명기 11장 19절 말씀을 통해 ‘네 자녀에게 부지런히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고 강론하라'고 명령하고 계신 것입니다. 그를 통해 자녀와 후손들을 교훈하여 세워나감으로 그들이 하나님을 경외하며 바른 믿음을 계승해 나갈 수 있게 되기 때문입니다.

4절입니다.
팥중이가 남긴 것을 메뚜기가 먹고 메뚜기가 남긴 것을 느치가 먹고 느치가 남긴 것을 황충이 먹었도다

그 재앙은 바로 메뚜기 떼의 습격이었습니다. 본문에 등장 하는 ‘팥중이’, ‘메뚜기’, ‘느치’, ‘황충’ 은 모두 ‘메뚜기’ 를 가리키는 각기 다른 4개의 히브리어를 우리 말로 옮긴 것으로 이 단어들이 각 각 다른 4종류의 메뚜기를 가르키는 것인지 아니면 메뚜기의 4단계 변태 과정중에 있는 메뚜기의 유충과 성충을 가리키는 지는 명확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중요한 점은 메뚜기 재앙이 한 번이 아니라 여러번 반복해서임했다는 사실입니다. 당시 메뚜기 재앙이 얼마나 심각했는지를 잘 보여주는 대목입니다.

메뚜기 재앙으로 인한 참상과 회개 성회의 개최 촉구 (5절-14절)

이제 5절에서 14절까지는 메뚜기 재앙으로 야기된 참상들이 보다 구체적으로 기록되어 있으며 그에 대하여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회개의 성회를 개최하기를 촉구하는 내용이 담겨져 있습니다.

5절에서 7절입니다.
취하는 자들아 너희는 깨어 울지어다 포도주를 마시는 자들아 너희는 울지어다 이는 단 포도주가 너희 입에서 끊어졌음이니 다른 한 민족이 내 땅에 올라왔음이로다 그들은 강하고 수가 많으며 그 이빨은 사자의 이빨 같고 그 어금니는 암사자의 어금니 같도다 그들이 내 포도나무를 멸하며 내 무화과나무를 긁어 말갛게 벗겨서 버리니 그 모든 가지가 하얗게 되었도다

나이든 노인들을 향해 경고의 메세지를 전달한 요엘은 이제 ‘취하는 자들’ 곧 ‘포도주를 마시는 자들’ 에게 술 공급이 끊기게 된 것을 슬퍼하라고 합니다. 날카로운 이빨을 가진 사자가 먹이를 덮치는 것처럼 메뚜기 떼의 습격으로 인해 포도나무는 물론이거니와 무화과나무 또한 초토화 되었기 때문입니다.

사실 포도나무와 무화과나무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내려주신 복의 상징이었습니다. 축복의 땅 가나안에서 누리는 풍성한 삶의 표지였습니다. 그런데 그 상징인 포도나무가 망가지고 무화과나무는 전부 갉아먹혀서 하얗게 죽어 버리게 된 것입니다.

아쉽게도 요엘서에는 이 메뚜기 재앙에 대한 원인이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다. 하지만 요엘서의 시대적 배경이 되는 요아스 왕 재위시 제사장 여호야다가 죽은 후, 이스라엘 백성이 우상을 숭배하며 타락의 길을 걸었던 사실로 미루어 볼 때 그에 대한 징벌로 하나님께서 축복의 상징인 포도나무와 무화과나무를 저주의 상징으로 바꾸어 버리신 것임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신명기 30장 19절 말씀처럼 우리 인생 행로에는 복과 저주가 공존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 말씀을 청종하며 의지할 때에는 하나님께서 동행해주시는 복된 길을 걷게 되지만 그 반대에 경우, 하나님께 징벌받는 고통의 길로 걸어가기 마련입니다. 바른 그리스도인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복이 아니라 복의 근원이신 하나님과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하나님께서 동행해주시는 복된 길을 선택하며 살아갑니다.

당면한 심각한 재앙 앞에 요엘 선지자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이렇게 슬퍼하라고 선언하고 있습니다. 8절입니다.
너희는 처녀가 어렸을 때에 약혼한 남자로 말미암아 굵은 베로 동이고 애곡함 같이 할지어다

마치 결혼을 앞둔 처녀가 남편될 사람을 잃었을 때처럼 슬프게 곡하라고 요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권하고 있습니다. 약혼한 남자를 잃는 것은 당시 사람들이 상상할 수 있는 최고의 고통스러운 경험중 하나였기 때문이었습니다.

메뚜기 재앙은 비단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만 영향을 미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9절에서 10절입니다.
소제와 전제가 여호와의 성전에서 끊어졌고 여호와께 수종드는 제사장은 슬퍼하도다 밭이 황무하고 토지가 마르니 곡식이 떨어지며 새 포도주가 말랐고 기름이 다하였도다

메뚜기 떼로 인해 곡식이 죽게 되고 포도나무 또한 망가져 버리게 되자 그 일을 담당하며 백성들의 헌금으로 살아가던 제사장 또한 생활이 궁핍해 져 탄식하게 됩니다. 더 나아가 곡물 제사였던 소제와 포도주를 부어 드리던 전제는 또한 드릴 수 없는 상황에까지 이르게 됩니다.

이처럼 죄는 나 뿐 만 아니라 내 주변의 사람들에게 점차 영향을 미칠 뿐 만 아니라 종국에는 하나님과의 관계까지 단절시키고야 마는 엄청난 파급효과를 불러일으킵니다. 그러기에 하나님께서는 ‘악은 어떤 모양이라도 버리라’고 권면하고 계신 것입니다(살전 5:22).

본문 14절입니다.
너희는 금식일을 정하고 성회를 소집하여 장로들과 이 땅의 모든 주민들을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성전으로 모으고 여호와께 부르짖을지어다

죄로 인해 야기된 죽음과도 같은 재앙앞에 요엘은 제사장들로 하여금 금식을 선포하고 성회를 열어 백성들을 성전에 모으고 하나님께 부르짖도록 합니다. 하나님의 용서와 자비를 구하기 위함입니다. 나봇을 죽이고 그의 포도원을 빼앗았던 아합 왕이 엘리야를 통해 하나님의 심판 경고를 듣고 금식하며 기도하자 하나님께서는 그의 겸비함을 보시고 용서하사 재앙을 유보해 주셨습니다(왕상 21:17-29)

하나님께 징계를 받아 죽을 지경에 이르게 되었을 때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취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은 참회의 마음을 담은 금식과 중심을 담은 기도입니다. 그런 모습과 기도는 하나님께 곧바로 상달되고 그를 통해 죽음과도 같은 징계의 자리는 용서와 구원의 자리로 변화되게 됩니다.

궁극적인 여호와의 날에 대한 탄식과 간구 (15절-20절)

이제 15절부터 마지막절인 20절까지는 궁극적인 여호와의 날에 대한 탄식과 간구에 관한 내용입니다.
15절입니다.
슬프다 그 날이여 여호와의 날이 가까웠나니 곧 멸망 같이 전능자에게로부터 이르리로다

요엘 선지자는 이스라엘 백성을 향해 하나님께서 작정하신 ‘여호와의 날’이 곧 도래될 것임을 선포합니다. 요엘 선지자가 말하는 ‘여호와의 날’은 일차적으로는 바벨론에 의한 멸망의 날을 가리키는 것으로 볼 수 있으며 궁극적으로는 하나님의 최후의 심판의 날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16절부터 20절까지 묘사된 바에 의하며 ‘여호와의 날’은 한마디로 '파멸의 날’입니다. 성전에서의 기쁨과 즐거움은 없어지고(16절), 사람들의 곤핍함은 극에 달하며(17절), 가축들 또한 고통스러워 하는 혹독한 고통의 날(18절)입니다.

그 때에 취해야할 행동에 대해 요엘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19절 상반절 말씀입니다.
여호와여 내가 주께 부르짖으오니

바로 그 때 하나님께 부르짖어야 한다고 요엘은 증언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로 부터 온 징벌적 재앙이기에 그 재앙을 거두어 주실 수 있는 하나님께 기도로 자비와 용서를 구하라는 뜻입니다.

비록 죄로 인한 징계의 고통 속에 있을지라도 하나님께 부르짖고 기도하며 참회의 자리로 나아갈 때 우리는 하나님께 용서받는 은총을 경험하게 됩니다. 그 과정을 통해 정화된 심령을 지니게 된 우리는 하나님과 독대할 수 있는 한적한 곳, 겟세마네를 찾아 하나님께 기도하는 성숙한 그리스도인으로 변화되어 가고, 결국 하나님의 원대로 기도하며 그 기도가 상달되는 은혜를 경험하며 우리에게도 임할 여호와의 날을 대비하는 기도의 사람으로 살아가게 합니다.

오늘도 이 사실을 기억하시며 한적한 겟세마네의 기도 처소에서 기도하는 삶을 살아가심으로 주님의 용서와 자비하심을 경험하며 다가 올 여호와의 구원의 날을 기쁨으로 준비해 가시는 사랑하는 우리 성도님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아멘!

요엘 선지자가 어떤 사람이고 언제 사역했는지는 성경에 나와 있지 않습니다.

단지 사도행전 2장 16절에 오순절 성령강림 이후에 베드로와 사람들에게 일어난 놀라운 성령충만의 역사로 요엘의 예언이 성취되었다는 것 외에는 언급된 것이 없습니다.

일반적으로 요엘 선지자는 아모스와 동시대 사역자라고 생각합니다.
그 이유는 요엘도 아모스가 탄식했던 것과 동일하게 메뚜기 떼나 기근이나 불의 심판들에 대해서 예언했기 때문이지요(암 4:7-11, 7:1-6).

아모스는 북이스라엘에서,
요엘은 남유다에서 사역했습니다.
요엘은 호세아와 오바댜와도 동시대에 사역했을 것으로 봅니다.

여호와의 날

요엘서는 ‘여호와의 날’을 5회나 언급합니다(1:15, 2:1,11,31, 3:14).
여호와의 날이 아주 가까이 왔다고 합니다.
그날은 슬픈 날, 멸망의 날, 주민들이 떠는 무시무시한 날입니다.
어둡고 캄캄한 날이요 짙은 구름이 덮인 날로 심히 두렵다고 표현합니다.
여호와의 날은 지금 닥친 일일 수도 있고, 더 큰 심판이 임할 거라는 서곡에 불과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때가 언제든 항상 깨어 있고, 하나님께 나아가 부르짖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1장 1절-2장 11절에는 재앙의 날들에 대한 예언이 나와 있습니다.

그것은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엄청난 것입니다.
이것을 후대에 걸쳐서 말해주라고 하십니다.
단순히 신기한 이야깃거리로 삼으라는 게 아니라 ‘가르치라’라고 하십니다.
이것을 교훈으로 삼아서 하나님을 경외하고 죄를 미워하는 법을 배우기를 원하십니다.

특별히 메뚜기 떼로 인해 대자연의 황폐화가 일어나는 것을 말합니다.
팥중이와 메뚜기와 느치와 황충이 때문에 남은 게 하나도 없이 철저하게 황폐해집니다(1:4).
자연재해로 인한 재앙은 오히려 모든 백성들이 회개할 기회를 갖게 하고, 하나님 앞에 나아가서 그분의 얼굴을 구할 때라는 것을 알려줍니다.

1장 14절에 “너희는 금식일을 정하고 성회를 소집하여 장로들과 이 땅의 모든 주민들을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성전으로 모으고 여호와께 부르짖을지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돌아오라

요엘은 “여호와의 말씀에 너희는 이제라도 금식하고 울며 애통하고 마음을 다하여 내게로 돌아오라 하셨나니 너희는 옷을 찢지 말고 마음을 찢고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로 돌아올지어다 그는 은혜로우시며 자비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하시며 인애가 크시사 뜻을 돌이켜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시나니 주께서 혹시 마음과 뜻을 돌이키시고 그 뒤에 복을 내리사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 소제와 전제를 드리게 하지 아니하실는지 누가 알겠느냐”(2:12-14)라고 말합니다.

이는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다섯 영역으로 설명합니다.

첫째 은혜로우시며,
둘째 자비로우시며,
셋째 노하기를 더디 하시며,
넷째 인애가 크셔서 뜻을 돌이켜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시고,
다섯째 더 나아가서 복을 내리시는 분이라고 말합니다.

일반적으로 계획을 변경하거나 취소하거나 연기할 경우는 애초에 계획을 잘못 세웠거나 그것을 실현할 수 있는 능력이 없을 때지요.

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우신 계획을 돌이키실 때는 전적으로 우리를 긍휼히 여기는 마음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성품을 의지하여 회개하며 나아가서 은혜를 간절히 구하면 주께서는 심판의 계획을 세우셨다 할지라도 뜻을 돌이키시고 심판하지 않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요엘서에는 악한 죄악 가운데 있을지라도 하나님의 성품을 의지하면서 주께로 돌아가 간절히 부르짖으면 우리를 긍휼히 여기시어 재앙을 돌이키실 뿐만 아니라 더 나아가서 복을 주신다고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나아가서 회개할 때 중심은 우리의 행위를 기반으로 하는 게 아니라, 이 같은 하나님의 성품을 의지하며 기도하는 것입니다.

풍성한 삶으로의 회복

2장 18-32절에서 하나님은 백성들이 비록 죄를 지었다 할지라도 회개하면 긍휼을 베푸실 것이라고 약속하십니다.
특히 18-27절까지의 말씀을 통해 이를 다섯 가지로 말씀하십니다.

첫째, 우리에게 양식을 주셔서 풍족한 삶을 살게 하겠다고 하십니다.
둘째, 다시는 이방 나라들로부터 수치를 당하지 않게 하시겠다고 하십니다.
셋째, 이스라엘을 괴롭혔던 모든 군대들을 메마르고 적막한 땅으로 쫓아내어 다시는 괴롭히지 못하도록 하겠다고 하십니다.
넷째, 회개하여 돌이키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이른 비와 늦은 비를 적당히 내려주겠다고 하십니다.
다섯째, 그들에게 이전에 있었던 팥중이와 메뚜기와 느치와 황충이가 먹은 햇수대로 도로 갚아주겠다고 약속하십니다.

더 놀라운 것은 28-32절에 성령을 부어주시겠다는 말씀입니다.
이것을 사도행전에서는 시간적으로 명확하게 ‘말세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말세에 내가 내 영을 부어주리니”라고 했지요(행 2:17).
‘말세’라는 시간은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셨을 때부터 다시 오실 때까지의 기간을 말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요엘 선지자를 통해 마지막 때에 온 백성에게 성령을 부어주심으로 영적으로 풍성한 삶을 살도록 약속하십니다.

여호사밧 골짜기

3장에서 주님은 때가 되면 하나님의 백성의 원수들을 벌하시고, 모든 억울함을 풀어주시고, 예루살렘을 영광스럽게 회복하여 형통하고 영원한 삶을 살게 할 거라고 말씀하십니다.

여호사밧 골짜기는 하나님이 그의 백성을 위해 열방을 심판하는 법정입니다(3:2).

열방의 죄목은

첫째는 이스라엘 백성을 여러 나라로 흩어버리고 그들의 땅을 나누어 가져간 것.
둘째는 포로로 잡아 온 유대인의 젊은 남녀를 인신매매업자에게 판 것.
셋째는 하나님의 금과 은을 부당하게 빼앗고 성전의 보물을 그들의 신전으로 가져간 것입니다.

열방에 내려진 선고는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는 하나님은 그의 백성을 다시 돌아오게 하실 것입니다.
둘째는 그들이 행한 그대로 당하게 될 것이고,
셋째는 하나님이 직접 그들을 심판하실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그의 백성에게는 피난처와 산성이 되실 것입니다.

심판의 결과는 다음과 같습니다.
애굽은 황무지가 되고, 에돔은 황무한 들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유다는 영원히 있을 것이고, 예루살렘은 대대로 있을 것입니다.
이 약속들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부분적으로 성취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신약의 교회들에게서 온전히 성취될 것입니다.

요엘서는 역사 속에서 하나님이 주권적으로 역사하심을 강조합니다.
하나님을 거역하는 악인은 멸망을 받을 것이나 죄악 가운데 있다 할지라도 그분의 성품을 의지하여 회개하고, 간절히 그분의 얼굴을 구하면 긍휼히 여기시고 반드시 회복시키실 것을 약속하십니다.

선지자 요엘

  1. 선지자 요엘에 대해서는 그 자신이 1:1에서 소개한 내용외에 더 알려진 것이 없다.
  2. 요엘이란 이름이 성경에 제일 먼저 언급되기는 사무엘의 아들로서 (삼상8:2)그 이름은 "주님은 나의 하나님이다."라는 의미를 갖는다.
  3. 정확한 연대 추정은 어렵다.

제목

저자의 이름을 그대로 사용한 히브리어 표제명 '요엘'은 그 뜻이 '여호와는 하나님이시다'이다.
또한 구약 헬라어 역본인 70인역(LXX)에서도 히브리어 표제를 그대로 음역한 '요엘'을 표제로 사용하였으며, 이러한 전통에 따라 영어 성경들과 한글 개역 성경의 표제명도 '요엘'로 쓰고 있다.
이러한 표제의 뜻은 역사 속에서의 하나님의 주권적인 섭리를 강조하는 본서의 내용과도 잘 부합된다.

저자와 기록 연대

본서의 저자가 브두엘의 아들 '요엘'(1:1)이라는 사실은 전통적으로 인정되어 왔다. 그러나 요엘에 대해서는 그 자신과 아버지의 이름 외에 알려진 것이 없다. 다만 그의 부친의 이름인 '브두엘'의 뜻이 '하나님의 성실'이며 '요엘' 자신의 이름 뜻이 '여호와는 하나님이시다'인 점에서 그가 경건한 가문 출신일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어떤 전승은 그가 전제와 소제에 대하여 자주 언급한 점을 근거로 그의 부친이 제사장이었다고 전하기도 한다(1:9, 13, 14). 그리고 그가 본서에서 시온과 예루살렘에 대한 언급을 자주 하는 것으로 보아(2:15-17, 23, 32 ; 3:1, 5, 6, 16, 17, 20, 21) 예루살렘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거주하며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활동하였을 것으로 추측한다. 한편 본서의 기록 연대에 관해서는 본서를 남유다 제8대 왕 요아스의 재위 기간(B.C. 835-796년)중의 기록으로 보는 전기 연대설과 느헤미야의 종교 개혁(B.C. 432년경) 이후의 기록으로 보는 후기 연대설이 대립되어 있다.


특징

  1. 메뚜기 재앙에 대한 기록.
  2. 성령을 모든 육체에 부어 주실 것을 최초로 암시(2:28~29)
  3. 예언의 계속성-요엘 선지자 당시부터 세상 끝날 때까지 이르는 광대한 예언의 범위
  4. 문체의 스타일은 아주 순수하고 부드러우며 물 흐르는 듯 하면서도 힘이 있고 유연하다.


요엘의 사역

  1. 그 당시는 가뭄, 메뚜기 재앙등이 몹시 심했다.
  2. 비록 모세(신 28:38~39)와 솔로몬(왕상8:37)이 이러한 재앙은 하나님의 징계의 일종이라는 것을 말했지만 이 경우에 있어 백성들은 이것이 징계임을 깨닫지 못했다.
  3. 요엘은 백성들의 영적 생활의 슬픈 현실을 지적하고 그것이 재앙이 되었음과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필수적인 단계로서의 국가적인 회개를 역설했다.


중심어구 및 메시지

  1. 중심어구: "주의 날"(1:15, 2:1.11.31, 3:14)로서 "주의 날"은 교회가 없어짐으로 시작되며 주께서 이 세상의 치를 직접 판단하고 간섭하는 날로서 천년 동안 계속된다.
  2. 메시지: 요엘은 "신앙부흥의 선지자"라고 불려왔다. 그는 모든 진정한 부흥의 기초로써 진실한 회개를 지적하고 있으며 이것을 위해 노력했던 것이다. 이 책은 회개의 책이다. 마음을 찢으면(2:13) 휘장이 찢어지고(마 27:51) 하늘이 갈라진다.(사64:1). 즉 진정한 회개 후에는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고 오순절의 축복이 임하는 것이다.



신약 성경으로의 인용 및 유사 비유

2:28-32(3:1-5) 사도행전 2:17-21
2:31(3:4), 2:10, 3:15(4:15) 마태복음 24:29, 마가복음 13:24, (누가복음 21:25), 요한묵시록 6:12, 9:2
2:32(3:5) 로마서 10:13
3:13(4:13) 요한계시록 14: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