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가서 / 여호와와 같은 자가 누구인가
미가서의 메시지는 심판과 소망이 복잡하게 섞여 있습니다.
한편으로는 사회악, 부패한 지도층, 그리고 우상 숭배으로 인한 이스라엘
심판을 예언합니다.
이 심판은 사마리아와 예루살렘이 멸망할 때 절정을 이룰 것으로 예상되었습니다.
미가서는 이스라엘
국가의 회복뿐만 아니라 이스라엘과 예루살렘의 변화와 영광을 선포합니다.
소망과 멸망의 메시지는 반드시 모순되는 것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회복과 변화는 심판 후에야 발생하기 때문입니다.
핵심 구절: 미가 1:2, “백성들아 너희는 다 들을지어다 땅과 거기에 있는 모든 것들아 자세히 들을지어다 주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대하여 증언하시되 곧 주께서 성전에서 그리하실 것이니라”
미가 5:2, “베들레헴 에브라다야 너는 유다 족속 중에 작을지라도 이스라엘을 다스릴 자가 네게서 내게로 나올 것이라 그의 근본은 상고에, 영원에 있느니라”
미가 6:8, “사람아 주께서 선한 것이 무엇임을 네게 보이셨나니 여호와께서 네게 구하시는 것은 오직 정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하게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
미가 7:18-19, “주와 같은 신이 어디 있으리이까 주께서는 죄악과 그 기업에 남은 자의 허물을 사유하시며 인애를 기뻐하시므로
진노를 오래 품지 아니하시나이다 19 다시 우리를 불쌍히 여기셔서 우리의 죄악을 발로 밟으시고 우리의 모든 죄를 깊은 바다에
던지시리이다”
요약: 선지자는 백성들을 착취하고 그릇 인도하는 이스라엘의 통치자들, 제사장들, 선지자들을
정죄합니다. 이는 그들의 행위로 인하여 예루살렘이 멸망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선지자 미가는 예루살렘에서 바벨론으로 갈 사람들의
구원을 선언하고 예루살렘이 그 성을 대항하기 위해 모인 나라들을 파괴할 것이고 위로합니다. 미가 선지자는 이상적인 통치자가
베들레헴에서 나와서 그 나라를 지킬 것이며 야곱의 남은 자가 승리할 것이라고 선포하면서 여호와께서 어느 날 그 나라로부터 우상과
군사력을 의지하는 마음을 제거할 것이라고 예언합니다. 선지자는 공의와 충성에 대한 여호와 하나님의 요구에 대하여 강력하고 간결한
요약을 제시하고 오므리와 아합의 길을 따랐던 사람들에게 심판을 선언합니다. 이 책은 애가의 요소로 구성된 예언적인 전례로
마무리됩니다. 이스라엘은 죄를 고백하고 여호와 하나님의 힘센 역사를 통해 구원을 받을 것을 확신합니다.
예표: 미가서 5장 2절은 동방 박사들이 베들레헴에서 태어난 왕을 찾으면서 인용한 메시아적
예언입니다(마 2:6). 동방으로부터 온 이 왕들은 베들레헴의 작은 마을에서 평화의 왕이요 온 세상의 빛이 되시는 분이 나올
것이라는 말을 들었습니다. 죄와 회개와 회복에 대한 미가의 메시지는 우리의 죄를 위한 화목제물(롬 3:24-25)이요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는 유일한 길(요 14:6)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궁극적으로 성취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적용: 하나님은 우리가 그분의 진노를 당하지 않도록 경고하십니다. 하나님의 경고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고 그분의 아들의 희생을 통한 죄 사함을 거부하면 심판은 확실합니다. 하나님은 그리스도를 믿는 신자인 우리를 징계하실 것입니다.
이는 하나님이 우리를 미워하시기 때문이 아니라 사랑하시기 때문에 징계하십니다. 우리가 온전하기를 바라시는 하나님은 죄가 우리를
파멸시키는 것을 아십니다. 온전함은 회복의 약속으로서 하나님께 순종하는 자들에게 이루어질 것입니다.
즉 심판은 임박하여 이르렀고(1:2, 4), 또한 이미 임하였다.
특히 이 심판으로 인해, 사마리아의 멸망을 당하게 되며(1:6, 7), 예루살렘에는 침략군들이 쳐들 올 것이다(1:15).
지구는 23.5도 기우러진 상태에서 돌고 있다.
칼 야스퍼스(Karl Jaspers)
주전 8세기부터 주전 2세기의 시대
축의 시대(Achsenzeit)
독일의 철학가 칼 야스퍼스가 고안한 표현으로 기원전 8세기부터 기원전 3세기까지를 일컫는다.
1949년 출간한 그의 저서 '역사의 기원과 목표'(Vom Ursprung und Ziel der Geschichte)에 처음 등장한다.
이 시기에 인도의 석가모니, 중국의 공자, 희랍의 소크라테스와 같은 여러 사상가들이 등장하였다.
야스퍼스는 이 시기에 새로운 사상과 철학이 중국과 희랍 그리고 인도와 페르시아에서 직접적 문화교류 없이 발생했다고 주장하였다.
이 시기에서 미래 철학자와 종교에 영향을 미친 핵심 사상가들과 그들 사이 공통적으로 떠오른 특징을 분류했다.
이전의 시대는 신화의 시대라고 한다.
그러나 새로운 시대는 신화와 더불어 영웅들이 등장한다.
전쟁과 폭력이 빈번한 시대에 영웅이 등장할 수밖에 없었다.
요즈음의 영웅이란 일상속에서 용기를 제공한 사람들을 말한다.
7월 6일(화)
죄의 근본(미가 1:13)
신흥제국 앗수르의 등장(앗시리아)
제국은 욕망이 강하여 자기를 더 크게 하려고 전쟁을 벌인다.
서쪽에 있는 나라 아람(르신)과 이스라엘(베가)은 동맹을 맺고 앗수르에게 대항하자.
그러나 힘이 부족하므로 유다 왕국 아하스에게 동맹을 제안하였다.
아하스 왕은 아람과 이스라엘과 동맹을 맺을 것이 아니라 앗수르와 동맹을 맺자.
이때 아람과 이스라엘이 이 사실을 알고 유다를 공격하려고 군대를 동원하였다.
이사야 선지자가 등장하여 아하스 왕에게 두려워하지 말라
하나님이 지켜주신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 임마누엘(이사야 7:14).
아하스는 앗수르와 손을 잡았으나 많은 조공을 바쳐야 하였다.
유다의 첫번째 위기가 되었다.
앗수르가 세력을 확장하여 아람의 수도 다마스커스가 732년, 이스라엘은 722년에 멸망시켰다.
이 때 유다의 2차 위기 앗수르
유다의 3차 위기 히스기야 왕 때 반란을 일으켰다.
앗수르의 산헤립은 46개의 성을 초토화시켰다.
이때 라기스가 포함되었으며 미가 선지자의 고향이 라기스와 가깝다.
미가야 / 누가 여호와와 같은가?
미가 7:18
주와 같은 신이 어디있으리이까 주께서는 죄악을 사유하시며 그 기업의 남은 자의 허물을 넘기시며 인애를 기뻐하심으로 노를 항상 품지 아니하시나이다.
미가 선지자(언어의 마술사)
미가 7:18
주와 같은 신이 어디있으리이까 주께서는 죄악을 사유하시며 그 기업의 남은 자의 허물을 넘기시며
인애를 기뻐하심으로 노를 항상 품지 아니하시나이다.
* 주와 같은 신이 어디 있으리이까?(미가야)(마카야후)
미가 1:8-9
이러므로 내가 애통하며 애곡하고 벌거벗은 몸으로 행하며 들개 같이 애곡하고 타조 같이 애통하리니, 이는 그 상처는 고칠 수 없고
그것이 유다까지도 이르고 내 백성의 성문 곧 예루살렘에도 미쳤음이니라.
마지막 시대에 도시들의 운명(10-15절)
2. 베들레아브라(먼지의 집) 티끌에 굴지어다
3. 사빌(아름다운) 벗은 몸에 수치를 무릅쓰고 나가라
4. 사아난(밖으로 나가다) 나오지 못하고
5. 벧에셀(근처의 집, 도피처) 의지할 곳 없음
6. 마롯(고통, 비통) 복을 바라나 재앙이 임함
7. 예루살렘(평화의 도성) 재앙(허물이 보인다)
8. 라기스(무리) 준마에 병거를 메우라
9. 가드모레셋(전별금, 약혼) 작별하는 예물을 주라
10. 악십(메마른 시냇물, 기만) 속이리라
11. 마레사(정복자) 너를 얻을 자가 임할 것이라
12. 아둘람(피난처) 영광이 아둘람까지
뉴욕(New York)
새로운 항구
날마다 새로운 모습으로 변화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에베소서 5:26
이는 곧 물로 씻어 말씀으로 깨끗하게 하사 거룩하게 하시고.
* 라기스(병거로 무장한 성읍)
첫째는 하나님보다 군사력을 의지하는 것
일반적인 해석의 견해
둘째는 우상 숭배(1:5-9 참조)
이는 다 야곱의 허물로 말미암음이요 이스라엘 족속의 죄로 말미암음이라 야곱의 허물이 무엇이냐 사마리아가 아니냐 유다의 산당이 무엇이냐 예루살렘이 아니냐.
이러므로 내가 사마리아를 들의 무더기 같게 하고 포도 심을 동산 같게 하며 또 그 돌들을 골짜기에 쏟아내리고 그 기초를 드러내며.
그 새긴 우상들은 다 부서지고 그 음행의 값은 다 불살라지며 내가 그 목상들을 다 깨뜨리리니 그가 기생의 값으로 모았은즉 그것이 기생의 값으로 돌아가리라.
이러므로 내가 애통하며 애곡하고 벌거벗은 몸으로 행하며 들개 같이 애곡하고 타조 같이 애통하리니.
이는 그 상처는 고칠 수 없고 그것이 유다까지도 이르고 내 백성의 성문 곧 예루살렘에도 미쳤음이니라.
오늘날의 우상은 무엇일까?
말과 말씀을 구분하지 못하는 것이다.
말은 사람의 입에서 나온 모든 것
말씀은 하나님이 선포하신 것이다.
예를 들면,
어느 유명한 목사의 축도가 한국교회 전체에 영향을 미쳤다.
성경적인 축도는 고린도후서 13:13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의 교통하심이 너희 무리와 함께 있을찌어다.
성경의 기록대로 축도를 하면 가장 바람직합니다.
그런데 이 기록에 언제부터인가 축도하는 목사들이 수식어를 더하기 시작했습니다.
이 원인이 어디에서 시작되었는가를 어느 신학자의 견해에 따르면 한경직목사님이라고 합니다.
한경직 목사님이 어느 모임에서 축도를 할 때 수식어를 더하여 시작한 것이 모든 목사들에게 깊은 인상을 주어 따라하게 된 것이라고 합니다.
말은 헬라어로 "레마"라고 합니다.
말씀은 헬라어로 "로고스"라고 합니다.
따라서 우상이란 "레마"를 "로고스"라고 선포하는 것입니다.
문제는 이런 현상에 너무 익숙해졌기 때문에 무엇이 문제인지 구분하지 못합니다.
우상은 하나님을 대신한 모든 것이다.
우상은 짝퉁 하나님이며 ‘만들어진 신(神)’이다.
왜, 인간은 우상을 만들고
하나님으로 섬기는가?
그 이유는 죄 때문이다.
죄인은 창조주 하나님을 버리고 대용품으로 우상을 만들었다.
우상은 형상뿐 아니라
타락한 인간의 마음을 포함한다.
타락한 마음은 우상을 만들어낸다.
돈, 권력, 섹스와 수많은 탐욕의 부산물들이 우상이 된다.
우상과
우상숭배는 구약성경 전체를 관통하는 주제이다.
하나님을 섬겨야할 이스라엘.
그들은 약속의 땅 가나안에서 하나님 대신 가나안의
신들, 고대 근동의 우상들을 숭배했다.
우상숭배는 개인뿐 아니라 이스라엘 왕국 전체의 흥망성쇠를 좌우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스라엘에 대한 사랑을 거두지 않았다.
선지자들은 우상을 떠나 하나님께 돌아올 것을 촉구했다.
우리는
우상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을까?
성경이 말하는 우상은 무엇인가?
하나님의
뜻을 거역한 이후 모든 인간의 역사가 보여 주는 가장 대표적인 타락의 결과는 우상 숭배이다.
피조물을 신(神)으로 삼고 스스로의
욕망을 위해 이용해 왔기 때문이다.
이스라엘 역사에서 우상은
어떻게 숭배되었으며 그 영향은 무엇인가를 이해할 수 있다.
더불어 성경과 고대 근동 자료, 이스라엘 역사를 통해 우상들의 특징들을
쉽고 정확하게 알 수 있다.
우상"이라 하면 무엇이 떠 오르나요?
우리 기독교인들은 사찰이 있는 불상을 먼저 생각하고 그러한 종류의 형상적인 나무, 돌 또는 쇠로 만든 우상으로만 단정해 버리기 쉽습니다.
또 성경에서 표현된 우상에 대해서도 나무나 돌, 쇠로 만든 물질적인 형상에 대한 관심 외에는 깊이 있게 깨달을려고 하지도 못합니다.
그러나 성경에서 말씀하시고 알려주시는 우상의 참된 의미에 대해 알게 된다면 너무나도 놀랍고 깊은 사실들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 만큼 성숙되게 되는 계기가 될 것을 확신합니다.하박국 2:18
새긴 우상은 그 새겨 만든 자에게 무엇이 유익하겠느냐 부어 만든 우상은 거짓 스승이라.
무엇을 알려주고자 하신 말씀인가?
우상은 거짓스승(선지자 혹 목자)이요,
하나님이 보내지 아니했지만 명예와 빵(재물)과 권세를 위한 거짓 스승(목자)을 짐승, 우상이라고 알려주신 것입니다.
우상은 결국 그 속에 하나님의 생명력이 없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자기 이익을 위해 일하는 거짓 스승도 그 속에는 하나님의 생명이 없이 비어있거나 다른 것으로 채워져 있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그럼 이천년 전 예수님께서 성육신으로 오셨을 때 상황을 살펴봅니다.
요한복음 8:44
너희는 마귀에게서 났으니 너희 아비의 욕심을 너희도 행하고자 하느니라 저는 처음부터 살인한자요, 진리가 그 속에 없으므로 진리에 서지 못하고 거짓을 말할 때마다 제 것으로 말하나니 이는 저가 거짓말쟁이요 거짓의 아비가 되었음이라.
이 말씀을 통해 그 시대를 들여다보면 그 시대에 세계 민족 중에 하나님께 유일하게 선택받았던 민족 이스라엘의 최고 지도자요 권력자로 행세했던 서기관 바리새인, 율법박사들이 곧 우상(거짓스승)이었으며 그들을 섬기며 그들을 믿고 따르는 유대백성들이 곧 우상을 섬기는 결과가 되었던 것입니다.
그 시대에 예수님 만이 참된 스승(목자)이셔야 합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유대민족들은 참 스승이요 참 목자이신 예수님을 죽이라 하고 강도는 살리자 하는 도무지 할 수 없는 잘못된 판단을 하게 되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는 일에 참여하고 말았습니다.그들을 이렇게 만든 장본인들이 누구였을까요?
참 목자, 참스승행세를 하고 예수님을 귀신 바알세불로 만들어 버린 서기관, 바리세인들의 거짓 증언과 말에 속았기 때문이었습니다.
진리가 인정되면서 밝혀진 사실과 같이 결국 그 시대 유대땅에는 예수님 외에는 참 목자가 없는 우상(거짓 목자)천지가 되어 버렸던 것입니다.
예언서인 다니엘서에도 이런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다니엘 2:36-38
왕이여 왕은 열왕의 왕이시라 하늘의 하나님이 나라와 권세와 능력과 영광을 왕에게 주셨고 인생들과 들짐승과 공중의 새들과 어느 곳에 있는 것을 막론하고 그것들을 왕의 손에 붙이사 "다스리게 하셨으니 왕은 곧 그 (우상의)금머리니이다.
이 말씀이 말세 종말에 하나님께서 이루실 예언이고 주 재림을 기다리고 있는 우리 때에 이루실 말씀인 것을 믿는다면, 우리에게는 매우 중대하고도 또 매우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바벨론왕 느부갓네살이 바로 이 우상이며 이 우상에게 모든 것 즉 인생들 새들 들짐승 어느 곳에 있는 것이든 "다 이 우상에게 붙이사 우상이 다 다스리게 하신다는 말씀입니다. 다른 사람은 다 우상에게 붙어서 우상의 지배를 받고 있어도 나만은 괜찮겠지...라고 하나님 앞에서 자신있게 말할 수 있을까요?
다시 예수님 초림때를 살펴보면
마태복음 23:1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예루살렘 성전 모세의 자리(거룩한 자리)에 앉았으며.
그 당시 서기관, 바리세인들은 하나님의 참 목자 행세를 하며 오히려 예수님을 이단(우상=거짓스승)이라고 핍박하고 모든 유대인들에게 선동하였습니다.
사도행전 13:26-27
형제들 아브라함의 후예와 너희 중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들아 이 구원의 말씀을 우리에게 보내셨거늘.
예루살렘에 사는 자들과 저희 관원들이 예수와 및 안식일마다 외우는바 선지자들의 말을 알지 못하므로 예수를 정죄하여 선지자들의 말을 응하게 하였도다.
당시 예루살렘 백성(신앙인)들은 마태복음 23:31~33에서의 말씀과 같이 하나님의 사자로 가장한 마귀의 목자(우상)들을 섬기는 결과가 되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다 하나님의 말씀을 잘못 깨달은 결과입니다.
오늘날 주 재림을 기다리는 때에도 인자의 때가 노아의 때와 롯 때와 같다고 하셨으니 천국에 소망을 둔 우리 신앙인들은 정신을 바짝 차리고 있어야 합니다.
말과 말씀을 구별못하고 말이라면 무조건 믿고 따르는 습관을 이제는 버리고 누가 참된 진리를 전하는 목자이며 누가 거짓을 전하는 우상목자인지를 심각하게 구분하고 분별하여서 참된 깨달음과 믿음으로 주님을 섬겨야 합니다.
모든 시대마다 참은 하나이지 둘이 아니었습니다.
초림때도 예수님은 한 분이지 둘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서기관 바리새인들 같은 우상(가짜 스승)들은 많은 무리며 그들을 따르며 섬기는 신앙인들은 많았습니다.
많은 무리가 옳다고 말하며 믿고 따른다고 해서 참과 거짓이 드러나는 것이 아님을 깨달을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오늘날도(계 22:16) 교회들을 위하여 계시록에 기록된 말씀과 같이 성경 말씀대로 역사하시는 것이며 진리의 영으로 인도하시는 것입니다.
주님의 재림을 기다리는 오늘날의 신앙인 역시 우리 사람의 생각과 세상의 말을 깨끗이 버리고 성령의 생각과 주님의 "말씀"을 인정하고 믿어야 참 신앙인이 되는 것입니다.
로마서 8:6-7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라.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게 하나니.
우리의 생각은 육신의 생각이요 하나님의 생각은 말씀에 있으므로 우리는 "말씀"에 입각해서 신앙생활을 해야 합니다.
먼저는 나 자신이 우상, 즉 가짜 목자를 따르는 자가 되지 않아야 합니다.
오늘날 말씀을 분별하지 못한다면 나도 모른 중에 저 2000년전 서기관 바리새인의 말만 듣고 하나님의 아들을 대적하는 헛된 이스라엘의 유대교 신앙인들과 같은 꼴이 되어 영원한 지옥불에 던지움을 면치 못할 것입니다.
가드
뜻 : 술짜는 틀
가자의 북쪽 32KM 지점.
(1) 블레셋 5개 중요도시 중의 하나 (삼하 1:20). 이 다섯 성읍은 모두 팔레스타인 남해안과 그 인근에 위치해 있으며 각기 저들의 왕에 의해 통 치되었다(수 13:3, 삼상 6:17) 가드는 옛 가나안 도시로서 그 주민들 가운데는 가드족이라고도 부 르는 키가 큰 아나킴(Anakim)족이 팔레스 타인 산지에 널리 살고 있었다(삼하 6:10-11, 15:18,-22).
(2) 다윗의 손에 죽은 골리앗의 고향(수11:22 삼상17:4).
(3) 엘리 때에 블레셋에게 빼앗긴 언약궤가 이곳에 머무는 동안 모든 사람에게 독종이 전영되어 에그론으로 옮겼고(삼상5:8-10).
(4) 다윗이 정복하요 이스라엘에 속하게 하였고 (대상18:1)
(5) 다윗이 압살롬을 난을 피하여 다닐 때 생사를 같이 하겠다는 충성된 신하 잇대의 고향(삼하15:18-22).
(6) 솔로몬이 부왕 다윗을 저주한 시므이에게 금족령을 내렸으나 위반하고 이곳에 간 줄을 알고 죽인 곳(왕상2:8,36,41,46).
(7) 르호보암이 국방성을 건축할 때 이 성을 개수보강하였다(대하11:5-10).
* 그러나 최근의 고고학자들은 텔 에스 사피가 가드였던 것으로 더욱 유력시 되 고 있다.
성서나 아시리아, 비잔틴 자료들을 재 검토하면, 가드가 불레셋의 북부 에 위치해 있었음을 알게 된다.
베들레아브라
'티끌의 집(베트-레-아브라)'이라는 뜻이 있습니다.
직역하면, "티끌의 집에 사는 사람들아 티끌에서 뒹굴어라"는 의미입니다
사빌(Saphil)
아름다운
아스돗(Ashkelon) 남동쪽 6km, 아소갈론에서 동북 약 11km 지점. 에브라임의 한 성읍인데 현재의 에스솨빌 이라 한다(미 1:11).
가드: 블레셋 지역의 큰 성읍 (의미) 술짜는 틀
베들레아브라 : 먼지의 집 / 하나님의 심판 앞에 먼지 속에서 뒹굴게 될 것이다.
사빌 : 아름다운, 순결한 / 그 도시의 아름다움을 잃은 채, 벌거벗은 수치로 나아가게 될 것
사아난 : 밖으로 나가다 / 하나님의 심판 앞에 나오지 못하고 멸망하게 될 것
벧에셀 : 근처의 집, 도피처 / 하나님의 심판 앞에 이 도시는 그 어디에도 피난하지 못하고 의지할 곳을 모두 잃어버린 채, 애곡하게
될 것
마롯 : 고통, 수고, 비통하다 / 비통한 마음으로 하나님의 심판과 재앙을 맞이하게 될 것
라기스 : 무리 / 병거로 무장한 전쟁에 능한 자들이 있든 성읍. 준마에 병거를 매어 무리를 지어 도시로부터 도망치라
가드모레셋 : 모레셋은 전별금과 발음이 비슷함. 약혼함 / 신랑을 잃은 신부처럼 작별하는 예물을 받게 될 것
악십 : 메마른 시냇물 즉 기만 이란 뜻을 가진 성읍 / 여러 도시를 기만하며 속이는 거민들이 될 것
마레사 : 정복자와 발음이 비슷함 / 그 땅의 거민들은 하나님의 영광에 정복당하여 심판자 앞에 독수리처럼 대머리가 된 채, 모두 쫓겨나는 신세를 당하게 될 것
아둘람 : 다윗이 사울을 피하여 숨었든 동굴, 피난처 /
11절의 ‘사빌’은 ‘아름다운’의 뜻의 도시이지만, 이제 그 도시의 아름다움을 잃은 채, 벌거벗은 수치로 나아가게 될 것입니다. ‘사아난’의 이름은 ‘밖으로 나오다’라는 뜻이지만, 하나님의 심판 앞에 나오지 못하고 멸망하게 될 것이며,
‘벧에셀’은 ‘도피처’라는 뜻을 가졌지만, 하나님의 심판 앞에 이 도시는 그 어디에도 피난하지 못하고 의지할 곳을 모두 잃어버린 채, 애곡하게 될 것입니다.
12절의 ‘마롯’은 비통하다‘의 히브리어 발음과 비슷한데, 그들은 비통한 마음으로 하나님의 심판과 재앙을 맞이하게 될 것입니다.
13절의 ‘라기스’는 히브리어로 ‘무리’라는 의미와 흡사한데 하나님은 준마에 병거를 매어 무리를 지어 도시로부터 도망치라고 말씀합니다. 이는 그들에게 임할 심판이 얼마나 처참할지를 예언하고 있습니다.
14절의 ‘가드모레셋’의 ‘모레셋’은 히브리어로 ‘약혼한’의 의미와 비슷합니다. 그들은 신랑을 잃은 신부처럼 작별하는 예물을 받게 될 것입니다.
‘악십’은 ‘기만’이라는 의미를 가지는데, 그들의 이름처럼 여러 도시를 기만하며 속이는 거민들이 될 것입니다.
15절의 ‘마레사’는 히브리어로 ‘정복자’라는 발음과 비슷합니다. 그 땅의 거민들은 하나님의 영광에 정복당하여 심판자 앞에 독수리처럼 대머리가 된 채, 모두 쫓겨나는 신세를 당하게 될 것입니다.
미가 선지자의 시대는 이렇게 막을 내립니다. 하나님의 심판은 모든 도시 위에 임하였고 그 앞에 화려한 도시들은 오늘날 돌 하나 남지 않고 모두 무너져 내릴 것입니다. 미가시대의 무너진 도시들을 묵상하며, 오늘 우리가 사는 이곳, 이 도시, 서울을 바라봅니다.
7월 7일(수) 재앙의 때(미가 2:3)
미가서는 작은 이사야라고 불리는 미가 선지자의 세 편의 설교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미가 1-2장은 첫 번째 설교인데 그 내용은 북 왕국의 수도 사마리아와 남 왕국의 수도 예루살렘이 우상 숭배 때문에 하나님의 심판을 받게 될 것이라는 내용입니다.
미가 2장은 첫 번째 설교의 결론 부분으로서 선지자 미가의 신학의 원리가 무엇인가를 드러내고 있습니다.
우리는 신학이라고 하면 나와는 상관없는 학문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모든 사람은 신학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이든 믿지 않는 사람이든 각각 신학은 가지고 있습니다.
예를 들면, 어떤 사람은 ‘하나님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사람들을 “무신론자(atheist)”라고 합니다.
또 어떤 사람은 나무도 신이고, 돌도 신이고, 해도 신이고, 달도 신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 사람들을 “범신론자(pantheist)”라고 합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내 신은 내 신이고, 네 신은 네 신이다”라고 말하며 각각 사람마다 신이 다르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을 “다신론자(polytheist)”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만이 신이라고 믿는 것을 "유일신론자(monotheism)"라고 합니다.
단일신론(單一神敎, Henotheism, ἑνός θεοῦ)은 다른 신을 인정하지 않고 내가 믿는 신만이 신이라고 주장하는 것을 말합니다.
“신학”이란 각 사람이 신에 관하여 가지고 있는 생각을 정리한 것입니다.
신학이 없는 사람은 없습니다.
단지 “거짓 신학”과 “옳은 신학”의 차이가 있을 뿐입니다.
진리를 말하는 신학도 있고, 거짓된 신학도 있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나는 신학을 모르겠다.’라고 생각해서는 안 되고 어떻게 하면 내가 바른 신학을 가질 수 있는지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미가 선지자는 유다 왕 요담, 아하스, 히스기야 때의 거짓된 신학을 가르치는 거짓 선지자들과 싸워야 했습니다.
거짓 선지자들은 거짓된 사상을 가지고 백성들을 미혹하고 오도를 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미가는 미가서 2장에 ‘올바른 신학의 3대 원리가 무엇인가?’를 제시하고 있습니다.
Ⅰ. 심판의 원리(1-5절)
1-5절까지는 ‘하나님의 심판 원리가 무엇인가?’를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심판하실 때 어떤 원리를 따라 심판 하시는지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유다 백성들의 지도자들은 밤이 되면 침상에 누워 편안히 쉬지 않고 악한 계획을 세운다고 했습니다.
그들은 ‘내일 날이 밝으면 약한 백성들의 밭과 집을 빼앗을 것인가?’ 라는 악한 계획을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그들이 침상에서 악한 계교를 세우는 이유는 그들의 손에 권력과 법을 주무르는 권세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 권세를 악용해서 약한 백성들의 재산을 탈취하고 조상으로부터 유업으로 받은 땅을 빼앗는다는 것입니다.
열왕기상 21장에 보면 아합이 나봇의 포도원의 포도가 탐스럽게 열리는 것을 보고 그것을 빼앗으려고 했습니다.
그래서 아합은 나봇에게 포도원을 팔라고 말하였습니다.
나봇은 포도원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땅이고, 우리 조상 대대로 농사지은 땅이기 때문에 당신이 아무리 왕이라도 줄 수 없다고 말하였습니다.
그 말을 듣고 아합은 침상에 들어가 누워버렸습니다.
그때 아합의 아내 이세벨이 ‘왕인 당신이 그거 하나 빼앗지 못합니까?’ 라고 말하며, 거짓된 증인 둘을 세워 나봇을 죽이고 그 땅을 빼앗았습니다.
아합과 같이 권력을 가지고 기업과 땅과 밭을 빼앗는다는 것입니다.
“내가 돌이켜 해 아래서 행하는 모든 학대를 보았도다.
오호라 학대받는 자가 눈물을 흘리되 저희에게 위로자가 없도다.
저희를 학대하는 자의 손에는 권세가 있으나 저희에게는 위로자가 없도다” (전 4:1).
백성들은 빼앗겨도 하소연 할 곳이 없다는 것입니다.
유다 백성들의 지도자들이 약한 백성들의 집과 밭을 빼앗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도 그들에게 재앙을 내리시려는 계획을 세우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앗수르 군대와 바벨론 군대를 보내서 너희의 집과 밭을 빼앗을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때 유다 백성들의 지도자들은 “슬프다 우리가 온전히 망하게 되었도다.”라는 슬픈 애가를 지어 부른다고 하였습니다.
이 이야기에서 미가는 대단히 중요한 하나님의 심판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은 죄 많은 자나 죄 없는 자나 하나님께서 동일한 형벌로 심판하신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의 심판의 원리는 “동해보복(Lex talionis)”의 원리입니다(렉스 탈리오니스).
라틴말로 ‘Lex’라는 말은 법이란 뜻이고, ‘Talionis’는 보복이란 뜻입니다.
쉬운 말로는 ‘이에는 이 눈에는 눈’의 원리입니다. 남의 눈을 뽑은 사람은 하나님께서도 그 사람의 눈을 뽑으시고, 남의 이를 뽑은 사람은 그 사람의 이를 뽑으신다는 것입니다.
지도자들이 악한 계획을 세우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도 재앙을 내릴 계획을 세우시고, 지도자들이 밭과 집을 빼앗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도 그들의 밭과 집과 산업을 빼앗으십니다.
또한 지도자들이 백성들을 슬프게 만들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슬픈 노래를 부르게 하시겠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동해보복의 원리입니다.
우리는 이 원리를 이스라엘 과거의 신정 통치 국가의 법이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이것은 하나님께서 죄인들을 심판하시는 일반적인 원리입니다.
“저가 웅덩이를 파 만듦이여 제가 만든 함정에 빠졌도다” (시 7:15).
남을 빠뜨리려고 웅덩이를 파놓고서 자기가 거기에 빠진다는 말입니다.
에스더서 7장에 보면, 악한 아각 사람 하만이라는 자가 있습니다.
그는 궁궐에 출입을 하는 대신입니다.
그가 궁궐에 들어갈 때 유대인 모르드개가 인사하지 않는다고 죽이려고 했습니다.
그리고 모르드개만 죽이는 것으로 성이 풀리지 않아 모르드개의 민족 모두를 말살하려는 계획을 세웠습니다.
그러나 그 일을 하나님께서 역전시키셨습니다.
하만이 모르드개를 죽이려고 자기 집에 오십 규빗이나 되는 장대를 달아 놓았는데, 그 장대에 하만이 달려 죽게 하셨습니다.
프랑스 대혁명이 일어난 1789년에 길로틴(guillotine)이라는 사람이 남의 목을 자르려고 교수대를 만들었습니다.
그러나 오히려 그 교수대에서 자신의 목이 잘려 죽었습니다.
이것이 동해보복입니다.
남에게 해를 끼치려 하면 자기가 그 해를 입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심판 원리입니다.
사무엘하 12장에 보면 다윗이 저녁에 왕궁을 거닐다가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가 목욕하는 것을 보고, 남의 아내인 밧세바를 빼앗았습니다.
그리고 자신이 빼앗은 밧세바의 남편이자 자신에게 충성을 다했던 장군 우리아를 고의적으로 전쟁터에 앞장서게 하여 사망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때에 나단 선지자가 다윗에게 당신이 남의 가정을 파괴하고 남의 아내를 빼앗았으니 칼이 당신 집에서 영영히 떠나지 아니하리라고 말하였습니다.
그리하여 다윗 집안에는 자식들끼리 죽이고 자식들이 아버지를 쫓아내고 아버지의 후처를 겁탈하는 일이 얼어나게 된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동해보복입니다.
마태복음 26장 52절에 예수님께서도 베드로에게 이 진리를 다시 한 번 확증해 주셨습니다.
“이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검을 도로 집에 꽂으라 검을 가지는 자는 다 검으로 망하느니라” (마 26:52).
남을 죽인 자는 자기도 죽게 된다는 동해보복의 원리를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현세의 심판이든 내세의 심판이든 자기가 저지른 죄와 같은 종류의 형벌을 주시고, 자기가 저지른 죄의 경중에 따라서 많은 죄를 저지른 사람은 많은 형벌을 주시고, 적은 죄를 저지른 사람은 적은 형벌을 주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심판 원리입니다.
“주인의 뜻을 알고도 준비하지 아니하고 그 뜻대로 행하지 아니한 종은 많이 맞을 것이요. 알지 못하고 맞을 일을 행한 종은 적게 맞으리라 무릇 많이 받은 자에게는 많이 요구할 것이요 많이 맡은 자에게는 많이 달라 할 것이니라” (눅 12:47-48). 똑같이 맞을 일을 했어도 알고 저지른 자는 많이 매 맞고 모르고 저지른 자는 적게 매 맞는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많은 죄를 저지르셨습니까?
적은 죄를 저지르셨습니까?
많은 죄를 저지르셨으면 많은 형벌을 받을 것이고, 적은 죄를 저지르셨으면 적은 형벌을 받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기본적으로 죄를 저지른 자는 지옥에 가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벌을 받아서는 안 됩니다.
하지만 우리는 죄가 많이 있습니다.
알고 지은 죄, 모르고 지은 죄, 은밀하게 지은 죄, 공개적으로 지은 죄, 마음으로 지은 죄, 몸으로 지은 죄, 크게 지은 죄, 작게 지은 죄 등 우리의 삶 가운데 죄가 많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죄가 있어도 벌을 안 받는 법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딱 한 가지 방법밖에 없습니다. 내가 받아야 할 벌을 대신 십자가에서 받아 주신 예수 그리스도를 의지하고 그분을 나의 구주로 믿는 길밖에 없습니다. 이것이 복음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어떤 죄가 있어도 벌을 받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믿지 않는 자를 동해보복의 원리로 심판하시지만 믿는 자는 그 심판을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옮겨 버리시기 때문에 우리에게는 심판이 면죄된 줄로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Ⅱ. 올바른 성서해석의 원리(6-11절)
미가 시대의 악한 지도자들은 거짓 선지자들을 좋아했습니다.
“사람이 만일 허망하게 행하며 거짓말로 이르기를 내가 포도주와 독주에 대하여 네게 예언하리라 할 것 같으면 그 사람이 이 백성의 선지자가 되리로다” (미 2:11).
선지자가 나와서 하나님을 믿으면 포도주를 풍성히 주실 것이라고 말하면 그러면 다 좋아한다는 것입니다.
오늘날도 예수 믿으면 부자가 되고, 건강해지고, 출세한다는 이야기를 하면 좋아합니다.
그러나 복을 많이 받아 돈을 많이 벌고, 쾌락을 많이 누리며 처첩을 천명이나 두었고, 지혜가 세상 모든 사람들보다 뛰어났던 솔로몬의 결론은 무엇이었습니까?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전 1:2).
거짓 선지자들은 사람들이 좋아하는 것들을 가지고 마음을 미혹합니다.
그런데 부자가 되고, 병 낫는 것들도 좋은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복음의 전부가 아닙니다.
그것에 목표를 두면 안 됩니다.
거짓 선지자들의 문제는 성경해석이 편파적이라는 것입니다.
“너희 야곱의 족속아 어찌 이르기를 여호와의 신이 편급하시다 하겠느냐 그의 행위가 이러하시다 하겠느냐 나의 말이 행위 정직한 자에게 유익되지 아니하냐” (미 2:7).
미가 2장 7절은 세 개의 질문입니다.
두 개는 거짓 선지자가 하는 것이고, 하나는 미가가 하는 질문입니다.
거짓 선지자들은
첫째로, 여호와의 신이 어찌 편급하시냐는 질문을 합니다.
편급이라는 말은 영어로 ‘Impatient’입니다.
하나님께서 어찌 그렇게 참을성이 없으시냐는 말입니다. 거
짓선지자들이 미가에게 말합니다.
“너는 하나님이 우리를 심판한다고 예언하지만 하나님은 오래 참으시는 하나님이신데 참을성이 없어 우리를 심판한다는 말이냐? 미가야 네가 그렇게 말하는 것은 하나님을 욕되게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너는 예언하기를 그치라.”
거짓 선지자들은 출애굽기 34장 6절을 인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호와로라 여호와로라 자비롭고 은혜롭고 노하기를 더디 하고 인자와 진실이 많은 하나님이로라” (출 34:6).
거짓 선지자들은 이 말씀만 가지고 이야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둘째로, “그의 행위가 그러하느냐?”라고 질문을 합니다.
“하나님께서 지금까지 우리를 보호해 주시고 광야에서 40년간 우리를 인도하시고, 우리에게 가나안 땅도 주시고 왕도 세워 주셨는데 어찌 우리를 심판하신다고 하느냐? 심판은 하나님의 행위일 리가 없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거짓 선지자들의 문제는 출애굽기 34장 6절만 읽고 7절은 읽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인자를 천대까지 베풀며 악과 과실과 죄를 용서하나 형벌 받을 자는 결단코 면죄하지 않고 아비의 악을 자녀 손 삼사 대까지 보응하리라” (출 34:7).
아버지가 악을 저지르면 삼사대까지 죗값을 받고, 착한 일을 하면 천대까지 인자를 받는다는 이야기입니다.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람이 죄를 지으면 그 자식들이 삼사대까지 아비의 죗값을 받는 다는 것입니다.
잘한 것은 천대까지 복을 주고 잘 못 한 것은 삼사대만 간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잘못한 것을 우리 대에서 끊지 않으면 우리 자손 삼사대까지 우리 죗값이 내려간다는 것을 아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이 남의 재산에 손해를 끼쳤다면 삼사대가 재산에 손해를 보게 됩니다.
여러분이 남에게 못할 짓을 하고 바람을 피웠다면 삼사대가 그러한 문제로 고통을 겪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 때에 우리의 죗값을 끊고 우리 후손들에게 나가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거짓 선지자들은 하나님의 사랑만 강조했지 하나님의 심판은 의도적으로 무시했습니다.
이것은 반쪽 진리입니다.
반쪽 진리는 비 진리입니다.
진리는 온전한 진리가 되어야 합니다.
비 진리는 부패한 삶을 낳게 됩니다.
이렇게 거짓 선지자들에게 배운 사람들이 행하는 짓은 무엇입니까?
“근래에 내 백성이 대적 같이 일어나서 전쟁을 피하여 평안히 지나가는 자들의 의복 중 겉옷을 벗기며, 내 백성의 부녀들을 너희가 그 즐거운 집에서 쫓아내고 그 어린 자녀에게서 나의 영광을 영영히 빼앗는도다” (미 2:8-9).
이렇게 잘 못된 사상을 가진 백성들이 하는 짓은 전쟁을 싫어하는 평안한 사람들을 지나가는 것을 잡아 겉옷을 벗깁니다.
그리고 부녀들을 집안에서 쫓아내고 자녀들이 누릴 하나님의 축복을 누리지 못하게 하고, 가정을 파괴하고 약탈합니다.
왜냐하면, 백성들이 거짓 선지자들에게 거짓 사상을 배웠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런 사람을 향하여 말씀하십니다.
“이것이 너희의 쉴 곳이 아니니 일어나 떠날지어다. 이는 그것이 이미 더러워졌음이라 그런즉 반드시 멸하리니 그 멸망이 크리라” (미 2:10).
너희같이 악한 거짓말 하는 자들은 하나님께서 기업으로 주신 땅에서 살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미가는 이런 거짓 선지자들을 향해서 질문합니다. “나의 말이 행위 정직한 자에게 유익되지 아니하냐?” 미가가 심판의 말을 해도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에 마음이 올바른 사람은 그것을 받아들여 유익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요나가 앗수르의 수도 니느웨에 가서 심판받을 것이라고 말했을 때 그들이 그것을 듣고 회개하여 돌이켜 심판이 거두어진 것처럼 심판의 메시지도 유익을 주는 것입니다.
거짓 선지자는 출애굽기 34장 6절은 취했어도, 7절은 버렸습니다.
하지만 미가는 하나님께서 은혜도 주시지만, 심판도 하시는 분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미가는 성경을 균형 있게 이해하고 적용하고 선포 했던 것입니다. 오늘날 대한민국에 이단자들이 많이 있습니다. 이단들의 특징은 성경을 편파적으로 해석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성경을 균형 있게 해석 하고, 적용해야 합니다. 이것이 미가 신학의 바른 원리입니다.
Ⅲ. 올바른 구원의 원리(12-13절)
미가는 하나님께서 죄에 따라 심판하시는 중에도 “남은 자”에게는 은혜를 베푸신다는 ‘남은 자의 신학’(The theology of the remnants)을 말하고 있습니다.
“야곱아 내가 정녕히 너희 무리를 다 모으며 내가 정녕히 이스라엘의 남은 자를 모으고 그들을 한 처소에 두기를 보스라 양떼 같게 하며 초장의 양떼 같게 하리니 그들의 인수가 많으므로 소리가 크게 들릴 것이며, 길을 여는 자가 그들의 앞서 올라가고 그들은 달려서 성문에 이르러서는 그리로 좇아 나갈 것이며 그들의 왕이 앞서 행하며 여호와께서 선두로 행하시리라” (미 2:12-13).
이것은 미가가 ‘올바른 구원의 신학’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죄에 따라서 동해보복의 원리로 심판을 하시지만, 남은 자에게는 은혜를 베푸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목자가 되셔서 이스라엘의 남은 자들을 전부 보스라의 양떼 같이 모으신다는 것입니다.
보스라의 양떼같이 된다고 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남은 자들을 모으셔서 특별히 보호하시고, 공급하시고, 돌보아 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13절 말씀은 하나님께서 남은 자들 앞에 앞장서서 원수들을 공격하고 물리치시고 승리를 주신다는 말씀입니다.
보스라의 양 떼 같이(미가 2:12)
미가 선지자는 북이스라엘의 사마리아와 남유다의 예루살렘의 멸망을 선포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그는 이스라엘의 회복을 선포했습니다.
바벨론의 포로로 끌려간 사람들이 다시 예루살렘으로 돌아오게 될 것이고, 보스라의 양 떼 같이, 초장의 양 떼 같이, 많아질 것이라는 축복의 메시지를 선포했습니다.
보스라는 모압의 한 지역으로서, 양이 많기로 유명한 곳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모아, 보스라의 양 떼 같이, 초장의 양 떼 같이, 많게 하시겠다고 축복하셨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께로 돌아와, 하나님을 경외하는 백성들이, 푸른 풀밭의 양 떼 같이, 많아질 것이라는 엄청난 축복의 말씀이었습니다.
12절 말씀입니다.
야곱아 내가 반드시 너희 무리를 다 모으며 내가 반드시 이스라엘의 남은 자를 모으고 그들을 한 처소에 두기를 보스라의 양 떼 같이 하며 초장의 양 떼 같이 하리니 사람들이 크게 떠들 것이며.
하나님은 멸망을 당한 이스라엘을 어떻게 초장의 양떼들처럼 많게 해 주시겠다는 것입니까?
북이스라엘은 이미 멸망하여 없어진 지 오래였고, 남유다는 바벨론에 끌려가, 힘들고 고달픈 노예생활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회복시켜, 보스라의 양 떼 같이, 초장의 양 떼 같이, 많게 하시겠다는 것입니까?
도대체 하나님께서는 어떻게 그 일을 이루어 가시겠다는 것입니까?
하나님은 “내가 반드시 이스라엘의 남은 자를 모으고 또 모으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을 업신여기던 예루살렘을 멸망시키셨습니다.
왕과 백성들은 포로로 끌려갔습니다.
하나님은 그 끌려간 사람들 가운데, 진실로 여호와를 경외하는 사람들만 불러 모으고 또 모으실 것입니다.
하나님은 구석구석에 흩어져 있는 양 떼들을 하나하나 다 불러내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지극히 거룩한 나라를 다시 시작하실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하나님의 백성들을 구원하여 많아지게 하시는 방법이었습니다.
아무리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망한다고 해도, 하나님을 진실로 경외하는 백성들은 그들 중에 분명히 남아 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어떤 고난을 당해도, 영원히 사라지지 않고 남아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남아 있는 그 백성들을 불러서, 하나님을 믿는 백성들의 숫자를 차츰 늘려 가시겠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발버둥을 치며 사람을 모으려고 해도, 사람을 모으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특히 하나님의 백성들을 모으는 것은 절대로 사람의 힘으로는 할 수가 없는 것이며, 오직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일입니다.
스가랴 4:6
이는 힘으로 되지 아니하며 능력으로 되지 아니하고 오직 나의 영으로 되느니라.
주님이 모아 주셔야, 모일 수 있는 것이며, 주님이 많아지게 해 주셔야, 많아질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내가 이스라엘의 남은 자들을 모으고 또 모아서 그들의 숫자를 아주 많게 해 주실 것이다.”고 말씀하여 주시니, 이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나라가 망하고, 포로로 끌려갔으면, 하나님을 믿는 백성들의 숫자는 당연히 줄어들어야 마땅한 일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 숫자가 줄어들지 않고, 날이 갈수록, 오히려 더욱 더 많아졌습니다.
바벨론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고통을 안겨주며, 고달픔에 아파하며, 그들의 눈물을 쥐어짜던 고난의 땅이었습니다.
그곳은 자유롭게 하나님을 믿을 수 없는 버림받은 어둠의 땅이었습니다.
우상숭배로 가득한 죽음의 땅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 그 땅에 옮겨진 후에, 하나님을 믿는 경건한 백성들의 숫자는 날이 갈수록 늘어만 갔습니다.
고난의 시기가 되면, 눈에 보이는 하나님의 백성들의 숫자는 현저하게 줄어든 것처럼 보일지 모르지만, 실제로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백성들의 숫자가 늘어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고난에는 반드시 끝이 있고, 풍랑은 언젠가 잠잠해집니다.
어둠이 지나면 아침이 오듯 터널에는 끝이 있습니다.
고난 중에도, 하나님을 경외하면, 새로운 일들이 시작됩니다.
고난과 역경은 축복의 통로입니다.
어떠한 고난과 역경이 우리를 힘들게 할지라도, 그것은 하나님의 축복의 통로가 되기 때문에 두려워할 것이 없습니다.
힘들고 어려운 일을 만날 때, 왜 나만 겪는 고난이냐고, 원망 불평하지 않아야 합니다.
고난은 축복을 가져다 주는 지름길이요, 축복의 통로요, 축복의 그릇입니다.
고난을 바라보지 말고, 그 고난 속에서 역사하시는 하나님만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오늘 하루도 하나님을 가까이 함으로 복된 하루가 될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세상전쟁은 지휘관이 뒤에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남은 자에게 보호와 인도와 승리를 주십니다. 하나님은 앞장서서 길을 열어 주시는 “바알브라심”의 하나님입니다. 사무엘하 5장 20절에 보면 다윗이 블레셋 사람과 싸울 때도 하나님께서 먼저 앞장서시고 큰 승리를 주셨습니다. 그 동네 이름을 ‘바알브라심’이라고 붙였습니다. 그것은 ‘길을 열어 주시는 하나님이시라.’라는 의미입니다. 우리 성도들 앞길에 하나님께서 앞장서서 길을 열어주시기를 소망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남은 자들을 모아서 특별히 돌보시고, 원수를 물리치시고 승리를 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떤 학자는 이 말씀을 히스기야 왕 시대에 앗수르 왕 산헤립이 공격해왔을 때 하나님께서 승리를 주시겠다는 약속으로 해석합니다. 물론 일차적으로는 그런 의미일 수 있겠지만 남은 자의 신학은 구약 예언서에 전반적으로 나타나고 있는 ‘구원의 신학’입니다.
“남은 자의 신학”은 구약 예언서에 전반적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여리고 성이 망할 때에도 기생 라합은 남아 있었습니다. 그리고 엘리야 선지자 시대에 모든 사람들이 우상 숭배하는 것처럼 보여도 하나님께서 바알에게 무릎을 꿇지 아니한 7000명을 남겨 두셨습니다. 그들이 남은 자입니다. 이 세상이 다 망해가는 것 같아도 참된 믿음을 가지고 하나님을 섬기는 남은 자들은 언제나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남은 자를 구원하시고 이방인의 택한 자를 접붙여서 교회를 완성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육적인 이스라엘을 심판하셔도 영적인 이스라엘인 남은 자들을 건져 구원하십니다. 이스라엘의 남은 자가 그루터기가 되고, 참감람나무가 되는 것입니다. 이방인은 돌감람나무였는데, 이방인 중에 하나님께서 택한 자들을 참감람나무에 접붙여서 이스라엘의 남은 자와 이방인의 택한 자가 하나님의 위대한 교회를 구성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돌감람나무가 참감람나무에 접붙임을 받아 참감람나무가 된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남은 자는 참감람나무입니다. 그리고 돌감람나무인 우리가 접붙임을 받아 구원을 받게 되었다는 것이 하나님 역사의 운행 계획이고, 미가의 구원신학인 것입니다. 구원의 주체는 하나님이십니다. 인간이 자유의지로 구원을 받는다는 신학은 성경이 지지하고 있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주권적으로 택한 자를 건져 구원하시는 것이 하나님 주권의 신학이고 옳은 신학이며 루터와 칼빈이 찾아낸 위대한 개신교 신학인 것입니다.
구원의 주체는 하나님이시고, 구원의 대상은 남은 자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택하심을 입은 자입니다. 이들도 본질상 죄인이고, 하나님의 심판을 받기에 합당한 자들이지만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푸심으로 그들의 죗값을 십자가로 다 옮기셔서 죄 사함을 받아 구원받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된 것입니다. “그런즉 이와 같이 이제도 은혜로 택하심을 따라 남은 자가 있느니라” (롬 11:5). 구원의 주체는 하나님이시고, 구원의 대상은 남은 자이고, 구원의 결과는 목자 되시는 하나님의 보호와 공급과 돌보심이며 하나님께서 길을 여는 자가 되어 승리를 주신다는 것입니다.
현대인은 진리를 상대화하려 하거나, 탈신학을 추구합니다.
그러나 신학은 벗어날 수는 없습니다.
바른 복음, 바른 신학을 추구하는 것이 옳은 일입니다.
바른 복음을 믿고 행하는 길은 이사야, 예레미야, 미가처럼 외로운 길일 수도 있습니다.
오늘날 이 시대를 포스트모던 시대라고 합니다.
포스트모던이라고 하는 것은 사람마다 각각 자기 옳은 소견대로 산다는 것이고, 진리가 상대화되는 것입니다.
진리가 상대화되면 절대적이고 객관적인 진리를 부정하게 됩니다.
그리하여 윤리의 기준이 없어지고, 삶이 부패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남자와 여자가 결혼하라고 말씀하셨지만, 남자가 남자와 여자가 여자와 결혼을 합니다.
하나님 말씀의 기준이 사라지는 것입니다.
또한 그런 것이 나쁘다고 말하면 나쁘다고 말하는 사람을 공격합니다.
오늘날 기독교인들도 신학을 기피하고 탈신학화를 표방합니다.
신학을 거부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신학을 벗어날 수는 없습니다.
절대적인 진리는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절대적으로 살아계신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께서 천지를 지으시고, 인간을 창조 했다는 것은 절대적인 진리입니다.
그리고 인간이 하나님을 거역하고 죄악에 빠져 죄인이 되었다는 것도 절대적인 진리입니다.
또한 인간은 하나님께서 이 땅에 보내주신 구세주 예수그리스도를 믿지 아니하면 죄 사함을 받을 수 없다는 것도 절대적인 진리입니다.
천하에 인간이 구원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습니다.
예수님을 믿어야 구원받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어야 천국 가는 것입니다.
다른 종교도 훌륭합니다.
하지만 그런 것을 믿어서는 구원받지 못합니다.
예수님을 믿는 우리는 죽어도 다시 살고, 다시 살 때는 영화로운 몸으로 다시 살아 죽지 않고, 썩지 않고, 쇠하지 않고, 슬프지 않고, 질병 없는 영광스런 육신을 입고 영원히 살게 될 줄 믿습니다.
이것이 절대적인 진리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신학을 부인해서는 안 됩니다.
그리고 진리를 믿는 바른 신학을 추구해야 합니다.
바른 복음을 믿고 행하는 것은 때로는 외로운 길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외로워도 가야 될 길입니다.
바른 복음을 믿고, 평생 정도를 행하며 살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7월 8일(목) 여호와의 신(미가 3:8)
3:1-4, 정치 지도자들의 죄악
3:5-8, 선지자들의 죄악
3:9-12, 지도자들의 죄악으로 성전의 황폐화
여호와의 신(the Spirit of the LORD)
미가 3:8
오직 나는 여호와의 신으로 말미암아 권능과 공의와 재능으로 채움을 얻고 야곱의 허물과 이스라엘의 죄를 그들에게 보이리라. 아멘
권능(코흐) : 잠재력(사역 감당할 수 있는 것)
공의(미쉬파트) : 규례(법을 지킬 수 있는 방법)
재능(게브라) : 힘(위협, 협박을 두려워하지 않는 것)
정치 지도자들의 죄악(3:1-4)
- 야곱의 두령, 이스라엘 족속의 치리자들
첫째, 불의(1절)
둘째, 악(2절)
셋째, 부정직(9절)
1863. 11. 19 / 케티즈버그 국립묘지 연설
국민의 국민에 의한 국민을 위한 통치는 이 땅에서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Government of the people, by the people, for the people, shall not perish from the earth.
거짓 선지자들의 죄악(3:5-7)
- 유혹하는 선지자
첫째, 돈 봉투(5절)
둘째, 영적 무지(6절)
미가 선지자(3:8)
여호와의 신으로 말미암아
선지자의 강령(마태복음 22:37-40)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는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
- 야곱의 두령, 이스라엘 족속의 치리자들, 거짓 선지자들
첫째, 뇌물 재판(10절)
둘째, 부유한 설교자(10절)
셋째, 거짓 예언(10절)
넷째, 성전의 황폐(10절)
황금의 입 설교자
존 크리소스톰(John Chrysostom. 349-407)
그대의 말 입에 물린 금 재갈과 그대의 손목에 찬 금팔찌와 신발에 달린 금 수술은 곧 그대가 고아를 늑탈하며 과부들을 굶주리게 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그대가 죽은 후 당신의 거대한 저택을 바라보는 통행인들은 수군거릴 것이다.
‘저 저택을 짓기 위해 얼마나 많은 눈물들이 뿌려졌는가?
얼마나 많은 고아들이 헐벗었는가?
얼마나 많은 과부들이 약탈당했는가?
얼마나 많은 노동자들의 임금이 착취되었는가?’
당신의 죽음을 통해서도 이러한 고발의 범위로부터 벗어날 수는 없을 것이다.”
“모든 일에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로마서 4:20
믿음이 없어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치 않고 믿음에 견고하여져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오늘의 기도
견고한 믿음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7월 9일(금) 여호와의 산(미가 4:2)
여호와의 산(the mountain of the LORD)
미가 4:2
오라 우리가 여호와의 산에 올라가서 야곱의 하나님의 전에 이르자
그가 그 도로 우리에게 가르치실 것이라
우리가 그 길로 행하리라 하리니
이는 율법이 시온에서부터 나올 것이요 여호와의 말씀이 예루살렘에서부터 나올 것임이라. 아멘
여호와의 산 :
시온산(Mt Zion)
해발 756m
* 남산 : 860ft(270.85m)
그가 : 메시야(4:1-3, ref 이사야 2:2-4)
그 도 : 오라흐(’ôrach) אֹרַח
그 길 : 데레크(derek) דֶּרֶךְ
이사야 2:2-4
말일에 여호와의 전의 산이 모든 산 꼭대기에 굳게 설 것이요 모든 작은 산 위에 뛰어나리니 만방이 그리로 모여 들 것이라. 많은 백성이 가며 이르기를 오라 우리가 여호와의 산에 오르며 야곱의 하나님의 전에 이르자 그가 그 도로 우리에게 가르치실 것이라 우리가 그 길로 행하리라 하리니 이는 율법이 시온에서부터 나올 것이요 여호와의 말씀이 예루살렘에서부터 나올 것임이니라.그가 열방 사이에 판단하시며 많은 백성을 판결하시리니 무리가 그 칼을 쳐서 보습을 만들고 그 창을 쳐서 낫을 만들 것이며 이 나라와 저 나라가 다시는 칼을 들고 서로 치지 아니하며 다시는 전쟁을 연습지 아니하리라.
미가 4:1
말일에 이르러는 여호와의 전의 산이 산들의 꼭대기에 굳게 서며
작은 산들 위에 뛰어나고 민족들이 그리로 몰려갈 것이라.
* 말일에(In the last days) / 끝날에
여호와의 산이 회복될 것이다.
미가 3:10-12
시온을 피로, 예루살렘을 죄악으로 건축하는도다.
그 두령은 뇌물을 위하여 재판하며 그 제사장은 삯을 위하여 교훈하며 그 선지자는 돈을 위하여 점 치면서 오히려 여호와를 의뢰하여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우리 중에 계시지 아니하냐 재앙이 우리에게 임하지 아니하리라 하는도다. 이러므로 너희로 인하여 시온은 밭 같이 갊을 당하고 예루살렘은 무더기가 되고 성전의 산은 수풀의 높은 곳과 같게 되리라.
히브리서 1:1-2
옛적에 선지자들로 여러 부분과 여러 모양으로 우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하나님이.
이 모든 날 마지막에 아들로 우리에게 말씀하셨으니 이 아들을 만유의 후사로 세우시고 또 저로 말미암아 모든 세계를 지으셨느니라.
미가 4:2
오라 우리가 여호와의 산에 올라가서 야곱의 하나님의 전에 이르자
그가 그 도로 우리에게 가르치실 것이라 우리가 그 길로 행하리라 하리니
이는 율법이 시온에서부터 나올 것이요 여호와의 말씀이 예루살렘에서부터 나올 것임이라.
*성전의 회복(예배 회복, 말씀 회복, 삶의 회복)
여호와의 이름을 회복(미가 4:5)
오직 우리는 우리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빙자하여 영원히 행하리로다.
(공동번역) 우리도 자손 만대에 우리 하느님의 이름 야훼를 부르며 살아가자.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사도행전 2:21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로마서 10:13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하나님의 뜻을 깨닫자(미가 4:12)
그들이 여호와의 뜻을 알지 못하며 그 모략을 깨닫지 못한 것이라.
하나님의 뜻(디모데전서 2:4)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데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디모데후서 2:19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마다 불의에서 떠날찌어다.
미가 3:11-12
그 두령은 뇌물을 위하여 재판하며
그 제사장은 삯을 위하여 교훈하며
그 선지자는 돈을 위하여 점 치면서...
시온은 밭 같이 갊을 당하고 예루살렘은 무더기가 되고 성전의 산은 수풀의 높은 곳과 같게 되리라.
미가 6:9
여호와께서 성읍을 향하여 외쳐 부르시나니 완전한 지혜는 주의 이름을 경외함이니라
너희는 매를 순히 받고 그것을 정하신 자를 순종할찌니라.
요한복음 4:24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찌니라.
(현대인의 성경)
하나님은 영이시다. 그래서 예배하는 사람은
영적인 진실한 예배를 드려야 하는 것이다.
오늘의 기도
예배하는 삶을 회복하자!
신앙 생활(信仰 生活)
7월 10일(토) 그의 근본(미가 5:2)
미가 5:2
베들레헴 에브라다야 너는 유다 족속 중에 작을찌라도 이스라엘을 다스릴 자가 네게서 내게로 나올 것이라
그의 근본은 상고에 태초에니라. 아멘
* 베들레헴(떡집)
* 에브라다(열매를 많이 맺음)
이사야 11:1
이새의 줄기에서 한 싹이 나며 그 뿌리에서 한 가지가 나서 결실할 것이요.
다윗은 유다 베들레헴 에브랏 사람 이새라 하는 자의 아들이었는데...
기원전 8세기를 "격동의 시대"라고 합니다.
격동의 시대는 눈에 보이는 것에 의해서 판단합니다.
물론 지금도 마찬가지라고 하겠습니다.
신앙이란 관점(觀點)을 바꾸는 것이다!
베들레헴(Bethlehem)과 메시아(Messiah)1. 작은 곳에서 다스릴 자(큰 자)가 세워진다
- 역설적 진리(신앙)
2. 근본(시작)은 영원이다
- 창조적 진리(신앙)
오늘의 시대
1. 대립의 시대 - 좌편향 : 우편향역사의 사건을 혼돈 시키는 교육
소련군은 해방군으로 미군은 점령군으로 한반도를 지배했다!
2. 혼돈의 시대 - 창조 질서의 파괴(성 정체성의 혼돈)
어느 목욕탕에서 여탕에 남자가 들어왔다.
나는 여자라고 주장하더랍니다.
법적으로 제지할 수 없다고 하는 시대라고 합니다.
3. 대형화 시대 - 가전제품(대형 냉장고)
자동차도 작은 것은 사고가 나면 생명의 위험을 느끼므로 큰 것이 안전하다.
작지만 더 튼튼하게 만들면 됩니다.
고린도후서 6:8b-10
속이는 자 같으나 참되고.
무명한 자 같으나 유명한 자요
죽은 자 같으나 보라 우리가 살고
징계를 받는 자 같으나 죽임을 당하지 아니하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아무 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로다.
근본(모차. môwtsâʼ) םֹצָא
- 기원, 시초, 발단, 원인, 해돋이, 새벽녘
신앙의 근본은 무엇인가?
예수 그리스도
2. 성경(하나님의 말씀)
신앙은 좋은데…..말씀(성육신의 삶)은 없다!
제자 훈련은 많은데 제자가 없다!
미가 5:2
베들레헴 에브라다야
너는 유다 족속 중에 작을찌라도
이스라엘을 다스릴 자가
네게서 내게로 나올 것이라
그의 근본은 상고에 태초에니라. 아멘
요한복음 12:24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오늘의 기도
밀알의 삶을 실천합시다!
베들레헴과 메시아
(역설적 신앙)
나환자들의 모습이 처음 보는 사람에게는 잘 적응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부처님의 마음으로 나환자들에게 다가가 불경을 외우고 부처님의 가르침을 전하는데 나환자들이 전혀 반응이 없다고 합니다.
그래서 아직 내가 수양이 부족하구나!
이렇게 깨닫고 더 열심히 나환자들을 섬기는데 하루는 어느 나환자가 세상을 떠나 장례식을 마쳤는데 불교에서는 사람이 세상을 떠나면 49일 동안 제를 지내는데 살아서는 부처님을 믿지 못했지만 죽어서라도 부처님을 소개하려고 매일 같이 정성을 다하여 죽은 사람을 위하여 불경을 외우고 정성을 다하여 예불을 드렸다고 합니다.
한번은 나환자들이 "여보시오, 그러지 말고 예수를 믿으시오!" 라고 하더랍니다.
그런데 어느 날 불공을 드리려고 염불을 외우는데 갑자기 그 입에서 "며칠 후 며칠 후 요단 강 건너가 만나리" 이렇게 찬송이 나오더랍니다.
그때 생각하기를 나는 건강한 스님인데 저 사람들은 나환자들로 건강하지 않은 몸을 갖고도 어찌 저렇게 평안할 수 있을까? 생각하며 아직도 내가 도가 부족하구나 생각하며 더 열심히 나환자들에게 부처님을 소개했다고 합니다.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그 입에서 염불을 외우다말고 찬송이 흘러나오므로 내가 정신이 이상해졌나! 하고 생각했다고 합니다.
나환자와 건강한 스님 더구나 집안 대를 이어 스님이 되었으니 얼마나 철저하겠습니까?
그런데도 나환자들이 어느 한사람도 부처님을 알려고 하지 않더랍니다.
소록도에서 오히려 큰 충격을 받고 나왔는데 이것이 계기가 되어 승복을 벗고 결국에는 목사가 되었다고 합니다.
이런 신앙이 역설적 신앙 아닐까요?
베들레헴에서 탄생하신 예수님 때문에 나환자가 되었지만 불평과 원망이 없이 기쁜 찬송과 감사의 기도를 하며 오히려 스님에게 복음이 무엇인지를 당당하게 보여 줄 수 있는 신앙이 역설적 신앙이라고 하겠습니다.
날이 저물 무렵 많은 무리를 바라보신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고 하셨습니다.
제자들은 놀래서 이 많은 사람에게 한 끼 식사를 제공하려면 적어도 300데나리온이 필요합니다.
더 큰 문제는 300데나리온이 있어도 광야에는 식품점도 없고 식당도 없습니다.
어디서 음식을 구합니까?
그런데 어린 아이는 여기 제가 먹을 점심이 있어요.
많지는 않지만 예수님께서 이것을 드시는 것이 좋을 것같아요 하며 자기 도시락을 내놓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어린 아이의 점심 도시락을 들고 하나님께 감사기도를 마친 후에 제자들에게 이것으로 나눠주라고 하셨습니다.
제자들이 도시락을 분배하는데 나눠주고 또 나눠주고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도시락을 먹은 사람이 남자 어른들만 5천 명이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남은 것을 모았더니 12광주리가 되었다고 합니다.
역설적 신앙이란 내가 무엇을 기대하고 작은 것을 내려놓은 것이 아닙니다.
내게도 부족한 양이지만 서로 나눠야 하고 나 보다 예수님께서 먼저 드셔야 한다는 생각으로 드리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자리에서 나타나는 사건은 이적이 될 것입니다.
근본은 영원이다
(창조적 신앙)
이 배 이름은 제너널 셔먼호입니다.
이 배는 조선의 개항과 통상을 요구하며 총과 포를 쏘아대었습니다.
그러다가 이 배는 9월 2일에 양각도 모래톱에 좌초되었는데, 이 배에서 탈출을 시도하던 영국인 토마스 선교사도 스물일곱 살의 꽃다운 나이에 재대로 복음 한번 전하지 못하고 안타까운 순교를 하고 말았습니다.
우리나라에 내한했던 첫 번째 선교사 토나스는 아무런 활동도 하지 못하고 죽었던 것 같습니다.
그때 토마스 선교사를 죽인 병사 박춘권은 이렇게 회고했습니다.
“내가 서양 사람을 죽이는 중에 한 사람을 죽인 것은 내가 지금 생각할수록 이상한 감이 들었다.
내가 그를 찌르려고 할 때 그는 두 손을 마주잡고 무슨 말을 한 후 붉은 베를 입힌 책을 가지고 웃으면서 받으라고 권하였다.
내가 죽이기는 하였으나 이 책을 받지 않을 수가 없어서 받아왔노라.”
토마스를 선교사를 죽인 박춘권은 한문으로 된 성경을 영문주사였던 박영식에게 건넸습니다.
박영식은 종이가 귀하던 시절 한문 성경 종이를 떼어서 도배를 했습니다.
나중에 최치량이라는 사람에게 이 집을 팔았습니다.
최치량은 이집을 개조하여 여관으로 영업을 했습니다.
이후 사무엘 마펫, 마포삼열 선교사가 평양에 첫날밤을 보냈는데 공교롭게도 토마스 선교사가 던져준 성경으로 도배한 방에서 숙박을 했습니다.
가만히 보니 예사 벽지가 아니라 성경이었습니다.
사무엘 마펫 선교사는 이 집을 매입하여 널다리골 교회를 세웠습니다.
이 교회는 나중에 이름을 바꾸어 장대현교회가 되었습니다.
1907년 길선주 목사님이 대부흥운동을 일으켰던 그 유명한 교회입니다.
또한 토마스 선교사를 죽인 박춘권과 여관집 주인 최치량은 장대현 교회 장로가 되었습니다.
사람이 아무리 잘 짜맞춘 드라마라도 이런 역사가 일어날 수 없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드라마입니다.
이 하나님의 드라마를 우리는 역설의 신앙이요, 역설의 인생이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기독교는 역설의 종교입니다.
우리의 신앙은 역설의 신앙이고, 우리의 인생도 하나님의 역설이 아니고는 이해할 수 없는 신비로 가득 차 있습니다.
세상적으로 똑똑하고, 타산적이고, 이기적인 사람은 역설의 진리를 받아드리지 못합니다.
세상적 관점에서 바보가 되는 것이 믿음입니다.
세상적 관점으로는 바보 같아 보일지 모르지만 역설의 신앙을 가진 사람은 예수님 안에서 하늘의 지혜로 살아가고, 예수님의 능력으로 온전해 지고, 예수님으로 인해 모든 것을 가진 사람으로 살아갑니다.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속이는 자 같지만 참된 사람들입니다.
무명한자 같지만 유명한 사람들입니다.
죽은 자 같지만 살아 있고, 징계 받는 자 같지만 죽임을 당하지 않습니다.
근심하는 사람 같지만 항상 예수님 때문에 기뻐합니다.
가난한 사람 같지만 다른 사람을 부요하게 해 주는 사람입니다.
아무 것도 없는 사람 같지만 예수님으로 인해 모든 것을 가진 사람입니다.
인종 차별이 심했던 때의 이야기이다.
한 미국 신사가 자기 집 정원 앞에서 맥주를 마시며 서 있었다.
이 때 남루하고 몹시 피곤해 보이는 한 인디안이 지나가다가 그 신사에게 빵을 좀 달라고 애걸했다.
신사는 “너에게 줄 빵이 없다”고 말했다.
“그렇다면 지금 당신이 마시는 맥주라도 한 잔”주십사고 부탁했고 역시 거절당했다.
몹시도 배고프고 갈증이 난 인디안은 마지막으로 물 한모금이라도 달라고 사정했지만 미국 신사는
“너처럼 개 같은 인디안에게 줄 물은 없다”고 잘라 말했다.
인디안은 슬픈 얼굴로 돌아갔다.
얼마 후에 그 신사가 사냥을 나갔다가 깊은 산중에서 사냥개를 놓쳐 그만 길을 잃었다.
방향 감각도 없이 산 속에서 헤매는데 날이 어두워지기 시작했다.
그는 배고프고 목말라 죽을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마침 그 때 그곳을 지나가던 인디안은 그의 딱한 사정을 보고 당장 구출해서 자기 집으로 안내하여 후히 대접했다.
그 신사가 정신을 차리고 나서 가만히 보니 자기를 구출한 인디안이 바로 얼마전 자기가 박대했던그 인디안이었다.
너무 어이없고 부끄러워서 어쩔 줄 몰라하는 신사에게 인디안이 조용히 말했다고 한다.
“당신이 얼마 전에 나에게 한 것처럼 내가 당신을 대했다면 지금쯤 당신은 산중에서 죽었을 것입니다”
알렉산더와 예수
B. C. 350년경 알렉산더 대왕은 세계를 정복하고 거대한 제국을 세웠다. 그리스도와 알렉산더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두 사람은 젊은 날에 일을 시작하여 33세라는 이른 나이에 생을 끝마쳤다. 알렉산더는 왕국에서 태어났고,
예수는 마굿간에서 태어났다.
알렉산더는 왕자로 태어났고,
예수는 목수의 아들로 태어났다.
알렉산더는 왕좌에서 고귀한 왕으로 죽었으며,
예수는 십자가에서 조롱받는 왕으로 죽었다.
알렉산더의 일생은 위대한 성공으로 보이고,
예수의 일생은 실패한 것으로 보인다.
알렉산더는 자신의 소유를 위해 수십만 명의 피를 흘렸다.
예수는 전 인류를 위해서 자신의 피를 흘렸다.
알렉산더는 영광의 바벨론에서 죽었고,
예수는 수치의 갈보리에서 죽었다.
알렉산더는 모든 왕국을 정복하였고,
예수는 죽음을 정복하였다.
알렉산더는 모든 인간을 노예로 만들었고,
예수는 모든 인간을 자유롭게 하였다.
알렉산더는 역사를 만들었고,
예수는 역사를 변화시켰다.
당연한 말씀
고든(C.D. Gordon)의 글에 나오는 이야기이다.
길가에서 과일을 팔고 있는 작은 소녀가 있었다. 그녀는 시간만 있으면 언제나 성경을 읽곤 하였다.
하루는 한 젊은 신사가 과일을 사려고 그녀 앞에 섰지만, 이 소녀는 책에 열중해 있어 손님이 온 것을 알지 못했다.
“얘야, 너는 무얼 그리 열심히 읽고 있니?”
“네, 하나님의 말씀이죠.”
이 젊은 신사는 회의주의자였다. 그는 소녀에게 다시 물었다.
“누가 이 책이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이야기해 주었니?”
“하나님께서 제게 그렇게 말씀하신 걸요.”
“뭐, 하나님이 네게 말씀하셨다고? 말도 안돼! 너는 만나 보지도, 함께 이야기하지도 못할텐데!”
소녀는 조금의 동요도 없이 젊은 신사를 쳐다보며 이야기했다.
“누가 아저씨께 하늘에 태양이 있다고 이야기해 주던가요?”
“그건 당연한 말이 아니니? 난 저 햇살이 좋단다.”
“그래요!
아저씨 말씀이 옳아요. 그렇게 아저씨가 태양을 느끼듯 저는 하나님을 느껴요! 제가 성경을 읽으면 하나님께서는 저를 따뜻하게
해준답니다. 제가 이 성경을 읽어서 얻은 저 햇살과 따스한 마음은 하나님이 아니시고는 제게 줄 분이 없지요!”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지니라.
신령은 눈으로 볼 수 없지만 진정은 눈으로 볼 수 있습니다.
따라서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하는 것은 눈으로 볼 수 없는 하나님을 눈으로 볼 수 있도록 살아가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강도 만난 사람은 세 종류의 사람을 만났습니다.
첫째는 제사장
둘째는 레위인
셋째는 사마리아인
눈으로 보이는 것은 제사장과 레위인에게서 하나님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전혀 볼 수 없었습니다.
반면에 사마리아 사람은 눈으로 하나님을 볼 수 없는 처음부터 무시당한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 사마리아 사람에게는 하나님을 볼 수 있었습니다.
이것이 신령과 진정의 예배라고 하겠습니다.
얼마전 정기 검진을 받기 위해 예약된 시간에 주치의를 만났습니다.
이야기를 나누는 중에 은혜라는 이야기가 자연스럽게 나와 은혜가 무엇인가요?
은혜는 주는 것입니다.
신앙(信仰)은 명사형(名詞形)이다.
생활(生活)은 동사형(動詞形)이다.
따라서 신앙생활이란 추상명사를 동사로 바꾸는 것이다.
보이지 않는 것을 보이는 것으로 바꾸는 것이다.
생활신앙이란 동사를 추상명사로 바꾸는 것이다.
보이는 것을 보이지 않는 것으로 바꾸는 것이다.
미가는 구약성서의 선지자다.
그는 베들레헴에서 장차 이스라엘을 다스릴 인물이 태어날 것이라고 예언했기 때문에 크리스마스와 관련되는 인물이다.
미가 5:2
이스라엘을 다스릴 자가 네게서 내게로 나올 것이라 그의 근본은 상고에, 영원에 있느니라.
그리스도교도들은 예수가 베들레헴에서 태어남으로써 그 예언이 실현되었다고 믿는다.
그 예언은 마태복음에서 헤롯 왕의 궁정 자문관들이 오랫동안 바라던 왕이 베들레헴에서 태어나리라고 보고할 때에도 인용되었다.
미가서에는 몇 가지 자주 인용되는 구절들이 있다.
평화로운 시기를 예언한 것이 그런 예다.
미가 4:3
무리가 그 칼을 쳐서 보습을 만들고 창을 쳐서 낫을 만들 것이며 이 나라와 저 나라가 다시는 칼을 들고 서로 치지 아니하며 다시는 전쟁을 연습하지 아니하고.
미가 6:8
사람아 주께서 선한 것이 무엇임을 네게 보이셨나니 여호와께서 네게 구하시는 것은 오직 정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하게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
7월 12일(월) 완전한 지혜(미가 6:9)
그런데 미가 선지자는 "완전한 지혜"를 강조합니다.
지혜는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을 아는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을 안다는 것은 하나님을 믿는 것이며, 진리를 아는 것을 말합니다.
생명을 살리는 것이 진리라고 하겠습니다.
주나라 황제 주원장의 황후는 지혜로운 여인이었다.
주원장이 황제가 된 후, 어느 날 궁에서 왕후와 담소를 나누다가 갑자기 무릎을 탁치며 말했다.
“나, 주원장이 황제가 될 줄이야. 나도 상상치 못했단 말야!”
그리고는 기쁜 나머지 뛰어 일어나 춤을 추면서 옛날 변변치 못했던 시절의 모습을 적나라하게 드러냈다.
한 마디로 황제의 체통을 떨어뜨리는 추태를 부린 것이다.
그 때 두 명의 관리가 그것을 지켜보고 있었다.
황제는 그들이 있다는 사실을 깜빡 잊고 있었던 것이다.
잠시 후 주원장이 밖으로 나가자 황후는 두 관리를 불렀다.
“황제가 곧 돌아오실 것이다.
너희들 중 하나는 벙어리 행세를 하고, 하나는 귀머거리 행세를 해라.
그렇지 않으면 너희 둘의 목숨이 붙어 있지 못할 것이다.“
주원장은 밖으로 나가다가 자기가 한 짓을 생각해 보니 대단히 부끄러웠다.
그런 추태가 밖으로 소문이 나면 큰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황제는 급히 궁으로 돌아와 관리를 불러들였다.
주원장이 곧 관리 중 하나는 벙어리이고 하나는 귀머거리라는 사실을 확인하고 안심이 되어 관리는 생명을 건지게 되었다.
영원히 죽어 마땅한 죄인의 생명을 살려준 것이 "완전한 지혜"가 아닙니까?
완전한 지혜 / 미가 6:9
여호와께서 성읍을 향하여 외쳐 부르시나니 완전한 지혜는 주의 이름을 경외함이니라
너희는 매를 순히 받고 그것을 정하신 자를 순종할찌니라.
지혜(투쉬야. tûwshîyâh) תּוּשִׁיָּה
- 지혜(미가 6:9)
- 지식(잠언 8:14)
내게는 도략과 참 지식이 있으며 나는 명철이라 내게 능력이 있으므로.
완전한 지혜
주의 이름을 경외하는 것
경외(라아, râʼâh) רָאָה
보다, 왕의 얼굴을 보다, 하나님의 얼굴을 보다
시편 9:10
여호와여 주의 이름을 아는 자는 주를 의지하오리니 이는 주를 찾는 자들을 버리지 아니하심이니이다.
시편 86:11
여호와여 주의 도로 내게 가르치소서 내가 주의 진리에 행하오리니 일심으로 주의 이름을 경외하게 하소서.
사람아 주께서 선한 것이 무엇임을 네게 보이셨나니 여호와께서 네게 구하시는 것이
오직 공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히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
공의로운 삶, 공평한 자세
마틴 루터는 1517년 10월31일 자신이 사제로 일하고 있는 비텐베르크 성당 문 위의 벽에 95항목의 신학명제가 적힌 대자보를
내다걸었습니다.
교회사가들은 훗날 이 날을 종교개혁일로 정했습니다.
루터가 바로 그 날을 시점으로 종교개혁을 시작한 것은
아닙니다.
더구나 그는 종교개혁을 의도한 것도 아닙니다.
복음공동체인 교회의 본질이 무엇인지, 그것이 당시에 어떻게 왜곡되었는지를
신학적으로 해명한 것뿐입니다.
그런 노력이 교회 내외의 여러 가지 요인과 맞물려 당시 교회와 사회를 변혁하는 에너지로 자리를
잡았습니다.
오늘 우리는 종교개혁의 정신을 이어받는 종교개혁의 후예들입니다.
무엇이 종교개혁의 정신일까요?
루터가 비텐베르크 성당 문 위에 붙인 95 항목의 신학 명제는 핵심적으로 두 가지 내용입니다.
하나는 면죄부가 신학적으로 타당성이
없다는 것
다른 하나는 교황무오설 역시 신학적으로 잘못이라는 것
오늘 우리의 눈에 당시 가톨릭의 면죄부와
교황무오설이 언어도단인 것처럼 보일지 모르겠지만 당시에는 나름으로 일리가 있었습니다.
면죄부나 교황무오설이나 그 중심은
교회입니다.
면죄부는 당시 베드로 성당 건축비 조달을 위한 조치였고, 교황무오설 역시 교회의 권위를 강화하려는 것이었습니다.
세상의 건축물보다 더 웅장하고 좋은 성당을 건축하는 노력이나, 그리고 세상의 왕보다 더 막강한 교권을 확보하려는 노력은 모두
교회를 위한 것이었습니다.
교회를 위해서 비성서적인 교리를 끌어들인 것뿐입니다.
사람은 목적만 좋으면 그 수단은 별로 문제를 삼지
않는 경함이 있습니다.
좋은 게 좋다는 식입니다.
그런데 머물러 있으면 종교는 부패하기 마련입니다.
그래서 종교개혁자들은 교회를
가리켜 ‘에클레시아 샘퍼 레포만다!’(늘 개혁되는 교회) 라고 규정했습니다.
한시적으로가 아니라 항상 개혁되는 교회가 되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말은
누구나 개혁이라고 하지만 그게 간단한 게 아닙니다. 종교 집단에서는 개혁이 특히 어렵습니다. 그 이유는 종교가 보수적이기도
하고, 경건의 모양을 취하기 때문입니다. 경건한 모양으로 살아가는 사람의 잘못을 뚫어보기는 어렵습니다. 교회 안에 그런 풍토가
굳어졌습니다. 기도하고, 눈물 흘리고, 찬미를 부르는 사람은 자타가 경건한 사람으로 인정합니다. 교회에 어떤 문제가 생기면 기도를
하자고 말합니다. 그것은 원칙적으로 옳지만 실제로는 옳지 않습니다. 기도하는 방식으로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면 시시비비가 가려지지
않습니다. 어떤 목사님들은 교회에 문제가 생기면 일주일 기도, 또는 금식기도를 합니다. 아무리 비민주적이고, 잘못된 일을
하더라도 이런 경건한 포즈를 취하기만 하면 모든 게 해결되는 것처럼 행동합니다. 루터가 당시에 면죄부와 교황무오설을 문제 삼았다는
것은 목숨을 담보로 내놓는 행위였습니다. 대다수의 사람들은 루터의 말이 옳기는 하지만 그대로 따라가기는 귀찮다고 생각했을
겁니다. 종교적인 경건에 담긴 위선은 분간하기도 힘들고, 그것을 지적하는 것은 더 힘듭니다. 그래도 그런 걸 따지지 않으면 교회는
순식간에 본질로부터 이탈됩니다.
인자(헤세드) חֵסֵד
인간을 사랑하는 것
옛날 어느 가난한 홀어머니에게 두 아들이 있었는데 너무 가난하여 삯바느질로 아들을 가르쳤습니다.
비가 억수같이 쏟아지는 어느 날
어머니가 바느질을 하고 있는데 처마에서 떨어지는 물방울 소리가 이상하게 들려 가만히 살펴보니까 처마 맡에 항아리가 묻혀
있었습니다.
항아리를 꺼내보니까 그 안에는 금화가 가득 들어 있었습니다.
그 돈만 있으면 고생하지 않아도 두 아들 공부시킬 수
있고 좋은 집 사서 호의호식하며 살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어머니는 금화가 가득 들어 있는 항아리를 다시 땅 속에 깊이
묻어버렸습니다.
그리고 서둘러 그 집을 팔고 다른 곳으로 이사를 갔습니다.
그 어머니는 계속하여 삯바느질로 고생하며 두 아들을
공부시켰는데 두 아들이 나란히 과거에 급제하였습니다.
지긋지긋한 가난에서 벗어나게 된 후 어느 날 어머니는 높은 벼슬길에 오른 두
아들을 불러놓고 금화항아리 이야기를 들려주었습니다. 그러자 두 아들은 놀라면서 왜 그 고생을 하시면서 그렇게 하셨느냐고 하면서,
그 돈이 있었다면 어머니가 그 고생을 하지 않고도 우리 둘이 넉넉히 공부할 수 있었을 텐데 왜 사서 고생을 하셨느냐고 하자,
어머니가 두 아들에게 말했다고 합니다.
만약 그 많은 돈이 있었는데도 너희들이 그렇게 열심히 공부하여 이렇게 훌륭하게 될 수
있었다고 생각하느냐? 나는 그것이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나도 그 돈으로 고생을 면하고 싶었지만 너희들을 망치게 될까 해서
그렇게 한 것이다 라고 하였답니다.
유명한 이야기입니다.
금화가 가득 들어 있는 항아리보다 귀한 지혜입니다.
자비로운 하나님
유대인의 전설에 의하면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시기 바로 전에 그의 보좌 주위에 있는 천사들과
의논을 하셨다고 한다.
정의의 천사는 사람을 만들면 안된다고 말했다.
그 이유는 “사람을 만들면 그가 동료 사람들에게 모든 종류의
사악을 자행할 것이고, 또 사람은 강퍅하고 잔인하고 부정직하여 세상은 불의로 가득 차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라는 것이었다.
그
다음에 진리의 천사가 반발하며 “사람을 만들지 마십시오.
그는 거짓되고, 그의 형제들을 속일 것이며 심지어 하나님 당신도 속일
것입니다”라고 했다.
거룩의 천사도 “사람을 절대로 만들지 마십시오. 그는 당신의 면전에서 당신의 이름을 더럽힐 것입니다”라고
말했다.
이번에는 하나님께서 가장 사랑하시는 자비의 천사가 한 걸음 앞으로 나아가서 말하기를 “저희의 하늘의 아버지, 사람을
만드시옵소서. 그가 죄를 짓고 정의와 진리와 거룩의 길에서 멀어질 때, 제가 부드러운 손길로 그를 감싸고 사랑스런 음성으로 그에게
말하여 다시 당신께 데리고 오겠나이다”라고 말했다.
과연 그렇다. 자비의 천사의 말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우리 인간은 전적으로
타락하고 부패한 존재이다. 인간 스스로의 힘으로 하나님께 나아갈 수도 없는 구제불능의 존재이다. 그러나 자비로우신 하나님은 우리의
죄를 사해주시고, 허물을 덮어주시고, 실수를 용서해주신다.
하나님의 지혜와 세상의 지혜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지혜를 주실 때 여러 경로를 통해 지혜를 주십니다.
여기 두 지혜가 대조되어 나타납니다.
하나는 세상 지혜이고 다른 하나는
하나님의 지혜입니다.
하나님의 지혜는 곧 그리스도라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라고 합니다.
일반적으로 지혜라고 하면 사물에 대한 판단 능력과 미래를 예측하는 지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학생 때는 지혜보다 지식이
돋보입니다.
사회에서도 때로는 지식이 지혜보다 돋보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일평생을 함께 살 사람이라면 지식이 깊은 사람보다
지혜가 많은 사람을 택해야 합니다. 지식은 공부를 많이 하면 누구나 얻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지혜는 공부를 많이 한다고
얻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공부를 많이 하여 지혜를 얻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지혜는 하나님께서 주십니다. 지혜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은사입니다. 우리가 얻는 수많은 지식과 지혜가 있을지라도 구원의 지혜가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가 없는 사람은 결국 무가치한
지혜를 가진 사람일뿐입니다. 우리의 삶을 영생으로 이끄시는 그리스도를 얻은 사람은 모든 것을 다 얻은 사람이 될 것입니다.
겸손(차나) צָנַע
하나님과 더불어 교제하는 것
미국의 초대 대통령 조지 워싱턴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그는 뛰어난 전략가요, 정치가요, 군인이었습니다.
그의 뒤를 이은 사람은 부통령을 하던 존 애덤스였습니다.
애덤스가 대통령으로 취임한 이듬해인 1798년 미국은 뜻하지 않은 외환(外患)을 만났습니다.
신대륙에 널려있는 막대한 이해관계에 뛰어든 프랑스가 미국에 무력도발을 한 것입니다.
이와 같은 위기 상황에서 이를 해결할 만한 전략가는 이미 퇴임한 전직 대통령 워싱턴밖에 없다고 생각한 애덤스는 워싱턴을 찾아가 도움을 요청했습니다.
그런데 애덤스 대통령은 워싱턴에 대한 예우 때문에 고민했습니다.
왜냐하면 당시 참모총장의 계급은 중장이었기 때문입니다.
이때 워싱턴은 특별대우를 마다한 채 중장계급을 달고 현역으로 복귀, 프랑스의 위협으로부터 미국을 건졌습니다.
조국을 사랑하는 마음은 계급을 초월했습니다.
미국 국민은 지금까지도 그를 미국 역사상 위대한 인물의 한 사람으로 존경하고 있습니다.
“겸손과 여호와 경외함의 보응은 재물과 영광과 생명이니라”(잠언 22:4)
겸손은 위대한 사람이 반드시 지녀야 할 품격입니다.
우리는 자신의 낮춤에 대한 본보기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낮아질 대로 낮아진 사도 바울이 예수님이 겸손하심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즉 ‘근본은 하나님의 본체’이시나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이 땅에 종의 모습으로 오신 예수님이 참된 겸손의 모습인 것입니다.
하늘의 모든 영광을 다 버리고 이 땅에 가장 비천한 모습으로 오신 예수님.
그의 가난하심은 성도들에게 부요함을 주셨고(고후 8:9)
그가 받으신 질고와 고난과 굴욕은 성도들에게 사유의 은총과 참된 자유와 평화와 승리를 주셨습니다(사 53:4,5).
예수님 자신의 뜻은 아니었지만(눅 22:42)
오로지 하나님의 뜻에 대한 철저한 복종을 실천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셨습니다(9절).
이는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으심 뒤에 오는 그리스도의 승귀(昇貴), 곧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과 승천, 그리고 영광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 성도들에게도 이웃과 교회의 덕을 위하여, 더 나아가서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포기해야 할 삶의 부분들이 있습니다. 이는 성도의 제1 목적이 바로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데 있기 때문입니다.
7월 13일(화) 행위의 열매(미가 7:13)
미가 7:13
그 땅은 그 거민의 행위의 열매로 인하여 황무하리로다.
그 땅은 어디인가?
1. 가나안
2. 이방인의 땅
3. 죄악이 가득한 세상
미가서는 하나님의 백성들을 괴롭혔던 이방 나라들을 말합니다.
그렇지만 오늘날 우리들에게는 죄악이 가득한 세상이라고도 하겠습니다.
이사야 3:10-11
악인에게는 화가 있으리니 화가 있을 것은 그 손으로 행한대로 보응을 받을 것임이니라.
예레미야 32:19
주는 모략에 크시며 행사에 능하시며 인류의 모든 길에 주목하시며 그 길과 그 행위의 열매대로 보응하시나이다.
미가 7:7
오직 나는 여호와를 우러러보며 나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보나니
나의 하나님이 나를 들으시리로다.
옛날 어느 어진 왕이 민정시찰을 나갔다.
그때 한 가난한 여인이 왕 앞에 달려와 무릎을 꿇고 “제가 잠든 사이 도둑이 들어와 물건을 훔쳐 달아났습니다”고 말했다.
“물건을 생각하면 잠들지 말았어야지.어찌 잠들었는가?” 하고 왕이 여인을 꾸짖었다.
그러자 이 여인은 “저는 폐하를 믿고 편히 잠들었습니다.
폐하께서는 늘 깨어 백성을 보살펴주시리라 생각했습니다”고 대답했다.
이 말을 들은 왕은 여인에게 큰 상을 내렸다.
왜냐하면 왕을 믿고 있었기 때문이다.
예수를 믿는 우리가 이 여인처럼 예수님을 믿고 있었는가?
믿음은 완전히 맡기는 것입니다.
그런데아직도 맡기지 못하는 부분이 너무 많습니다.
맡길 수 있는 마음이 흔들리지 않도록 잘 다스려야 하겠다.
참 평안은 믿음에서 온다.
하나님께 맡기고 깊이 잠들 수 있는 삶은 행복한 삶이다.
도둑과 부자는 다 같이 불안하다.
빼앗으려는 불안과 빼앗기지 않으려는 불안은 자신만을 의지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그 사랑하시는 자에게는 잠을 주신다
마태복음 7:17-18
이와 같이 좋은 나무마다 아름다운 열매를 맺고 못된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나니.
좋은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을 수 없고 못된 나무가 아름다운 열매를 맺을 수 없느니라.
미가 7:9
내가 여호와께 범죄하였으니 주께서 나를 위하여 심판하사 신원하시기까지는 그의 노를 당하려니와
주께서 나를 인도하사 광명에 이르게 하시리니 가 그의 의를 보리로다.
잠언 1:31
그러므로 자기 행위의 열매를 먹으며 자기 꾀에 배부르리라.
오늘의 기도
나의 삶이 답이다!
오직 주만 바라보며 살아가게 하소서!
여호수아가 가나안 땅으로 들어간 후에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마지막 유언처럼 남겨준 신앙
오직 나와 내 집은 여호와만을 섬기겠노라!
탈무드에서 말하는 지혜로운 사람이 갖추는 일곱가지 조건
첫째, 침묵하고 들을 줄 아는 사람
자기보다 현명한 사람을 만났을 때에는 침묵하고 듣는 것입니다.
이것은 분명히 들을만한 말이다, 해서 마음을 열고 경청합니다.
들을수록 자기에게 도움이 되는 것을 알므로 현명한 사람입니다.
들을 줄 아는 것을 믿음이라고 합니다.
둘째, 남의 이야기에 끼어들지 않는 사람
남의 이야기에 절대로 끼어 들지 않는 것입니다.
남들이 좋은 말을 하든 나쁜 말을 하든 그 사이에 끼어 드는 따위의 주책없는 짓은 안 하는 사람이 지혜로운 사람입니다.
셋째, 신중하게 대답하는 사람
대답할 때에 덤벙대지 않고 언제나 신중하게 생각하고 대답하는 사람입니다.
넷째, 이치에 맞는 질문과 대답을 하는 사람
핵심을 찌르는 질문을 하고, 이치에 맞는 대답을 하는 것입니다.
가만히 보면 질문하는 것을 들을 때, 저 사람이 왜
질문을 하는지 모르겠는 경우가 있습니다.
질문을 하는 것인지 제 자랑을 하고 있는 것인지 도대체 알 수가 없어요.
정리되지 않은
질문을 합니다.
다섯째, 일의 순서를 아는 사람
해야 할 일을 먼저 하고, 미루어도 될 일은 맨 마지막에 하는 것입니다.
순서를 정한다, 그 말입니다.
여섯째, 예와 아니오가 분명한 사람
모를 때에는 모른다고 사실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모르면서 아는 체하는 사람은 현명한 사람이 못됩니다.
모르는 것은 모른다고 똑똑하게 말하는 사람이 현명한 사람입니다.
일곱째, 배울 줄 아는 사람
배운다는 것은 진실을 인정할 줄 아는 것입니다.
사실을 사실대로 인정하는 것이 현명한 사람의 태도입니다.
탈무드에는 또 이런
말도 있습니다. '현명한 사람은 모든 것에서 배우는 사람이다.
이런 일에든 저런 일에든 모든 것으로부터 배운다.'
"현명한 사람은 원수로부터 많은 것을 배운다."
나를 괴롭히는 원수로부터도 배울 것이 있다는 것을 알고 많은 것을 배울 줄 아는 사람이 현명한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어느 젊은이가 왕을 찾아와 성공하는 비결이 무엇인가를 가르쳐 달라고 하였다.
어떤 나라에 젊은 재상이 나이 많은 왕에게 말하기를 자기는 아직도 젊은 몸인데 유혹에 들지 않는 좋은 무슨 교훈이 있으면 말씀해 주시면 고맙겠다고 부탁을 했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왕이 가만히 잠깐 생각하더니 그 옆에 잇는 신하를 불러서 얼른 안에 들어가서 금 잔에 기름을 가득 부은 것을 가져오라고 하였습니다, 그것을 젊은 재상에 주면서 "자, 이 금잔에 기름이 가득하지 아니하냐? 이 가득한 기름을 가지고 이 궁전에 나가서 아무 거리, 아무 모퉁이, 다 돌아오되 한 시간 이내로 다 돌아 오라. 돌아올 때 한 방울이라도 흘리면 안 된다. 한 방울이라도 그 기름이 흘러내리게 될 것이면 곧 자네 목을 베겠노라. 그런 줄 알고 한 방울도 흘리지 말고 곧 다녀 오라." 그러면서 그 뒤에는 군인 한 명에게 칼을 뽑아 가지고 뒤를 좇아가게 했습니다.
한 방울을 흘리면 목을 자른다고 하니까 이 젊은 재상이 금 잔에다 기름을 가득 담아 가지고서는 조심스럽게, 그렇지만 한 시간 안에 돌아오라고 하니까 빨리 서둘러 땀을 뻘 뻘 흘려 가면서 그 모퉁이를 돌아서 어느 거리를 돌아서 겨우 한 시간만에 다시 가지고 왔습니다.한 방울도 흘리지 아니하고 땀을 뻘뻘 흘리면서 숨이 차서 가지고 돌아 왔단 말입니다.
"한 방울도 안 흘렸는가?" "네 안 흘렸습니다."그 때에 왕이 묻기를 "그 아무 거리에서 아무 상점들을 보았나? 거리를 가다가 아무개를 보았나? 어디쯤 가면 누구가 있는데 보았나?" 물어 보았습니다. "그만 못 보았습니다." "아니 못 보았다니, 지나오면서 못 봐?" "이 기름 잔만 보려고 다른 것을 볼 사이가 있어야지요." 그때 노 왕이 웃으며 하시는 말이 "그러면 자네 유혹에 들지 않는 비결을 배웠나?"
우리가 다 배웠습니다. 시험에 들지 않는 비결 가운데 제일 좋은 비결은 우리가 열심을 품어 하나님이 내게 맡긴 사명을 부지런히 하고 하나님의 집에 나와서나, 내 가정에 있어서나, 내 직장에 있어서나 내가 맡은 책임을 충성되게 부지런히 전 정력을 다해서 하는 가운데 자연 유혹이나 시험에 들 사이도 없게 되는 것입니다. 공격이 언제든지 최선의 방어라는 전법이 있는 것입니다.미가서(Micah)
구약 소선지서의 여섯 번째 책으로, 모레셋 사람 미가에게 임한 여호와의 말씀을 기록한 책이다(미 1:1).
미가서는 베들레헴에서 한 통치자가 나실 것을 예언한 것(미 5:2-4)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려 준 본문(미 6:6-8)으로 우리에게 친숙하다.
그러나 미가서의 내용과 구조는 이해하기가 쉽지 않다.
그의 심판과 구원에 대한 예언들은 종종 어떤 논리적인 연속도 없는 것처럼 보이지만 예언들은 세 왕(요담, 아하스, 히스기야)의 통치 기간에 걸쳐 선포되었다.
미가서의 서두에서는 사마리아의 멸망과 산헤립의 침략에 대해서(미 1:2-16),
결론 부분에서는 바벨론 유수와 회복(미 7:8-13)에 대해서 예언하고 있다.
비록 이스라엘(사마리아)과 유다(예루살렘) 모두에 대해 예언하고 있으나 우선적으로 유다에게 향한 예언으로 보는데, 이는 서두에 유다 왕들의 이름만 언급되고 있기 때문이다(미 1:1).
저자와 기록 연대
미가서의 저자는 미가이다(미 1:1).
미가(mika)는 미가야(mikayehu)의 축약형으로, ‘여호와와 같은 자가 누구인가’라는 뜻이다.
그의 고향은 모레셋(Moresheth)으로, 이곳은 예루살렘에서 남서쪽으로 약 40km 정도 떨어진 곳에 있는 마을이다.
미가서 1:14에서는 그의 고향이 ‘가드모레셋’이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이는 블레셋 사람의 성읍인 가드 부근에 위치하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본다.
스바냐 선지자(습 1:1)나 요엘 선지자(욜 1:1)의 경우와는 달리 그의 아버지 이름이 언급되고 있지 않은 점으로 보아 그는 비천한 가문의 출신일 것으로 보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구사한 언어와 수사법은 탁월한 것이었다.
한편 여호야김 왕 때 제사장들과 거짓 선지자들이 예레미야를 죽이려고 모의했을 때 몇몇 장로들이 예레미야의 심판에 대한 예언을 정당화하기 위해 미가의 사역을 언급했고(렘 26:17-19) 이로 인해 예레미야는 죽음을 피할 수 있었다(렘 26:24).
미가는 요담, 아하스, 히스기야 등 세 명의 유다 왕이 통치하는 동안 활동했는데(미 1:1),
아마 요담 왕 말년경에 시작해서 히스기야 왕 시대 초인 약 BC 730년경부터 BC 690년대에 종결되었을 것으로 본다.
분명한 것은 그의 사역이 이사야 선지자의 사역 기간과 겹쳐진다는 점이다.
이사야, 아모스, 호세아 등은 그와 동시대에 활동했던 선지자들이다.
시대적 배경
미가가 활동했던 BC 8세기 무렵에는 남북 이스라엘을 둘러싼 주변 정세가 급변하고 있던 때였다.
이사야 선지자와 같이 사마리아와 북왕국의 멸망을 예언했던(미 1:6) 미가는 BC 732년 르신 치하의 아람이 멸망하는 것과 BC 722년 북왕국 이스라엘이 멸망하는 것을 직접 목격했다(미 1:1).
또한 디글랏 빌레셀 3세(BC 745-727), 살만에셀 5세(BC 727-722), 사르곤 2세(BC 722-705), 산헤립(BC 705-681) 등과 같은 앗수르의 통치자들 아래 앗수르가 흥기하는 것을 목격했다(미 1:1).
이 앗수르는 바벨론에 의해 쇠퇴하기까지 한 세기가 넘게 고대 근동을 지배하였다.
한때 산헤립의 침공으로 히스기야 왕은 결정적인 위기를 맞기도 했으나 이사야와 미가의 사역을 통해 히스기야 왕이 회개함으로 예루살렘이 무사할 수 있었다(왕하 18장 이하).
그러나 히스기야가 죽은 뒤 유다의 통치자들은 하나님께 등을 돌렸으며, 이로 말미암아 유다는 미가의 예언대로 BC 586년에 멸망하고 말았다. 그러나 미가는 이들이 다시 귀환할 것을 예언했다(미 7:15).
미가서의 특징
1. 미가서에는 탁월한 수사법과 그림같이 생생한 언어들이 많이 사용되었다.
특별히 미가서 1:10-16은 이점을 잘 보여 주고 있다.
그 내용은 산헤립의 군대가 예루살렘으로 진군할 때 취할 경로에 대한 예언적인 서술이다.
여기에서 미가는 재미있는 언어유희(word-play)들을 사용하여 장차 각 도성의 이름과 그 도성이 장차 처할 운명을 연결시켜 주고 있다.
2. 미가서는 하나님을 섬기는 참된 길은 오직 ‘공의와 인자와 겸손’임을 강조한다(미 6:7-8).
이는 공교롭게도 같은 시기에 활동했던 아모스(공의, righteousness)와 호세아(인자, steadfast love)와 이사야(겸손히 행함, humility and faith)의 메시지 주제를 종합하여 말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3. 구속받은 자의 윤리적인 교훈이 강조되고 있다.
‘가진 자’들의 탐심과 ‘없는 자’들에 대한 착취를 질책하는(미 2:1-5, 8-9) 한편 통치자들의 불의와 탈취를 질타하고(미 3:1-4, 9), 선지자들(미 3:5-7)과 제사장들(미 3:11-12)과 같은 지도자들의 부정과 욕심을 신랄히 비판하고 있다.
미가서의 내용 개관
1. 배교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과 사마리아, 유다의 사회악(미 1:1-3:12)
2.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소망의 말씀(미 4-5장)
3. 여호와의 요구 사항들(미 6장)
4. 이스라엘의 상황에 대한 선지자의 탄식과 구원의 노래(미 7장)
미가서의 핵심 주제들
심판 :
이스라엘과 유다 모두 하나님의 길을 떠나 범죄했다.
이러한 죄들은 제의적인 것들(미 1:5-7)과 사회적인 것들(미 2:1-2)이었으며, 하나님의 길을 떠난 이스라엘의 지도자들(미 2:6-11; 3:1-3) 또한 여기에 포함되었다.
미가서는 이러한 죄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 강조되고 있다.
소망 :
미가는 포로생활로부터 구속받을 것에 대한 확실한 소망을 제시하고 있다(미 4:10).
또한 죄에 대한 심판자로서의 하나님 모습뿐만 아니라 은혜가 풍성하시며, 아브라함에게 주신 언약의 약속을 지키시는 데 있어서 신실하신 모습 또한 보여 주고 있다(미 7:18-20).
메시아 왕국 :
회복은 하나님께서 남은 자들에게 그의 은총을 베푸시는 것과 함께 시작된다(미 2:12-13; 4:4-7).
또한 유대인들의 회복은 이방인들의 회복과 관련되며(미 7:12-13), 구속은 창조와 관련된다(미 7:14).
그리고 다윗의 자손인 메시아에 의해 그 왕국이 재건설될 것이며, 이 땅의 모든 부도덕이나 우상 숭배와 부당한 권력과 부패가 없는 영원한 왕국이 될 것이다(미 5:10-15).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하나님의 지시가 어떻게 우리의 희망의 원천이 될 수 있는지를 고찰합니다.
미가서는기원전 8세기에기록되었습니다.
배경은 주로 이스라엘이 내부적으로 엄청난 불협화음과 압력을 받고 있는 시기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의 삶과 그들의 경험은 미가를 포함한 선지자들의 음성과 외부국가의 세력과, 하나님에 대한 그들의 경험안에서의 혼란에의해 공격을 받아왔습니다. 미가서가 강력한 책인 이유는이것을 듣고있는 많은 분들이 이미 알고있는 구절 때문입니다.
그 구절이 왜 그렇게 중요한지 거슬러가며 살펴보겠습니다.
미가 6장 6절-8절의 말씀입니다.
"내가 무엇을 가지고 여호와 앞에 나아가며 높으신 하나님께 경배할까 내가 번제물로 일년된 송아지를 가지고 그 앞에 나아갈까 여호와께서 천천의 숫양이나 만만의 강물같은 기름을 기뻐하실까 내 허물을 위하여 내 맏아들을, 내 영혼의 죄로 말미암아 내 몸의 열매를드릴까 사람아 주께서 선한 것이 무엇임을 네게 보이셨나니 여호와께서 네게 구하시는 것은 오직 정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하게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
미가서의 이 부분은 아마도 가장 자주 인용되는 구절일뿐 아니라, 어떤 면에서는 미가서 전체에서 가장 강력한 희망의 언어일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미가서에서 선지자들을 통해 여러 차례, 극도의 책임감, 실망, 슬픔, 심판의 말씀을 하십니다.
미가서는 가혹한 책입니다.
그 이유는 이스라엘백성이 고백하는 것과 행동하는 것 사이에 불협화음이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백성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성품과 정의와 불쌍히 여기심을 반영하기를 원하십니다.
하지만 수 년 동안 반복해서이스라엘은 주변국을 수용했습니다.
자신의 식욕에 적응하며, 의와 정의의 하나님을 섬긴다고 주장하면서도, 자기 집안 사람들을 학대함으로써 자신의 위선과 예배를 배반했습니다.
종종 가난한 사람들, 사회. 문화속에서소외 된 사람들을 학대했습니다.
학대받은 사람들은 이스라엘백성이 생각하기에 가치가 없거나 가치가 낮은 것으로 여겨졌던 이방인들 입니다.
이 주제는 소선지서와 대선지서 전체에 걸쳐 무거운 주제입니다.
하지만 여기 이 특별한 책인 미가서에서 그 말씀은 계속해서 나옵니다.
솔직히 말해서 미가서에는 엄청난 심판과, 엄청난 책임감과, 때로는 상실된 희망이 있습니다.
6장의이 구절을 읽기전까지는....
이미 백성의 총체적인 부패가 눈 앞에 다가 왔을 때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희들에게 원하는 것은 극적인 예배행위가 아니다."
번제물이나, 숫양 수 천마리나, 기름 수만 병이나, 심지어 맏아들을 드리는 것도 아닙니다.
사실 그 어떤 것보다 훨씬 더 평범하고 근본적인 것을 원하십니다.
"사람아 주께서 선한 것이 무엇임을 네게 보이셨나니 여호와께서 네게 구하시는 것은 오직 정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하게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
정의, 인자,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것,
이 세가지는 미가서의 핵심에 놓인 희망의 씨앗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입니다.
복잡하지 않습니다.
지나치게 정교하지도 않습니다.
궁극적으로, 세계를 정의하는 이기적인 방식이나 세계를 이해하는 부족주의적인 방식을 완전히 뒤바꾸는 것입니다.
사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하나님 자신의 품성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우리는 선한 일을 해야 합니다.
선한 일이란 정의를 행하고, 인자를 사랑하고, 하나님과 겸손히 걷는 것입니다.
간단합니다.
그 가르침으로 우리의 삶을 근본적으로 재정비 할 준비가되어있습니까?
이것은 기원 전 8세기 미가서의 도전이었습니다.
그리고 오늘 우리의 도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