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위기(03-09-2023 /








____________________________ 레위기 27장 / 서원(2절) 

이스라엘 자손에게 고하여 이르라 사람을 여호와께 드리기로 서원하였으면 너는 그 값을 정할찌니.
Speak to the Israelites and say to them: 'If anyone makes a special vow to dedicate persons to the LORD by giving equivalent values.


서원(5088) 네데르(neder) נֶדֶר

1. 맹세,   2. 서원한 것

발음 / 네데르 [ neder ]
어원 / 어미활용 נִדְרִי, 복수형 נִדְרֵי ,נְדָרִים,5087서 유래
관련 성경 / 서원(창 28:20, 민 30:2, 잠 20:25, 레 7:16, 민 15:3, 시 116:18), 서원제(레 22:18, 민 29:39, 신 12:6), 서원물(신 12:11, 26)
구약 성경 / 60회 사용

27:1-8.  인신서원의 환산, 즉 인신으로써 한 서원의 환산.
27:9-13. 생축서원의 환산, 즉 생축에 의한 서원.
27:14-15. 가옥서원의 환산, 즉 가옥에 의한 서원의 환산.
27:16-25. 토지서원의 환산, 즉 전답에 의한 서원의 환산.
27:26-29. 헌물 정가에 관한 부언(26-27 첫 새끼의 환산, 28-29 영구 봉헌물).
27:30-33. 십일조의 규정(소산물과 과실 및 소와 양의 십분의 일에 대하여).
27:34- 결어.


소득의 십분의 일을 하나님께 바치는 십일조에 관한 규례가 나타난다.
모든 소산의 십분 일을 구별하여 하나님께 바쳐야 했던 것이다.
원래 십일조는 이스라엘만의 독특한 규례가 아니라 당시 고대 근동 사회에서 널리 시행되던 제도였다.
그러나 지배자가 피지배자를 수탈하는 데 활용하던 고대 근동의 제도와 달리 이스라엘의 십일조는 하나님의 보호와 축복에 대한 자발적인 헌금의 성격을 띠고 있다.
성경에서는 아브라함이 멜기세덱에게 전리품의 십일조를 바친 것이 처음으로 등장하며, 야곱이 벧엘에서 하나님께 십일조를 약속한 경우도 있다.  그러나 성문화된 것은 본장에 나타난 모세의 율법을 통해서이다. 신약에서는 십일조에 관한 예수님의 구체적인 언급이 나타나지 않는다. 다만 초대교회에서 교회의 운영과 지도자의 생계를 위해 십일조를 강조한 전통에 의해 현대에서도 십일조는 성도들의 당연한 의무로 여겨지고 있다.


레위기 27장은 "서원에 대한 규정"을 강조합니다.
서원(誓願)을 히브리어로 "네데르(neder. נֶדֶר)" 라고 합니다.
'네데르'란 "맹세" 또는 "약속한 것"을 의미합니다.
더구나 서원은 의무가 아니라 주로 하나님의 축복에 대한 감사의 마음이나 간구에 대한 응답을 믿음으로 자발적으로 약속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서원을 하면 반드시 지켜야 합니다.
서원의 목록에는 "사람, 생축, 집, 땅(부동산)"에 대해서 말씀하셨습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 부부는 그들의 소유를 모두 팔아 바치겠다고 서원했습니다.
그런데 모든 밭을 팔아 돈을 받은 후에 순간적으로 유혹에 무너지고 말았습니다.
그 결과 모든 것을 바친다고 한 것 때문에 부부가 동시에 죽고 말았습니다.

1. 서원 예물로 사람을 드리는 경우(27:1-2)

사람을 하나님께 드리기로 서원할 경우에는 직접 드릴 수 없으므로 성별과 나이에 따라 돈으로 환산하여 드리게 했습니다. 그 때 성소에 드린 돈을 속전(贖錢)이라고 불렀습니다. 그 속전은 20~60세 되는 남자는 은 50세겔 여자는 은 30세겔이고, 5~20세되는 남자는 은 20세겔 여자는 은 10세겔이고, 60세 이상되는 남자는 15세겔 여자는 10세겔이고, 1개월~5세 되는 남자는 은 5세겔 여자는 은 3세겔입니다.

2. 짐승으로 서원하는 법 (9-13절)

생축을 드리기로 서원했으면 다른 생축으로 바꾸어 드릴 수 없습니다. 만일 더 좋은 다른 짐승으로 드리려 할 때는 전에 드리기로 한 짐승은 드려진 채로 두고 새로 드리려 하는 짐승을 또 드려야 합니다.

3. 가옥으로 서원하는 법 (14-15절)

자기 집을 하나님께 드리기로 서원한 경우에는 짐승과 마찬가지로 제사장이 그 집의 우열을 따라 값을 정하고 그 정가를 속전으로 드려야 합니다. 만일 자기가 그 집에서 계속 살려고 하면 배상금조로 정가에 5분의 1을 더 드려야 합니다. 그러면 그 집이 자기 소유가 되었습니다 (14-15절).

4. 토지로 서원하는 법 (16-25절)

토지를 드릴 경우에도 두락수(斗落數)대로 속전으로 드립니다. 보리 한 호멜지기에 은 50세겔로 계산하여 드립니다. 호멜(Homer)은 고체의 측정 단위로서 한 호멜은 230ℓ 정도 됩니다. 한 호멜지기는 230ℓ 정도의 씨앗을 뿌릴 수 있는 면적을 말합니다.
5. 처음 난 생축에 대한 규정 (26-27절).

생축의 첫새끼는 하나님의 것이므로 하나님께 드려야 합니다. 그것을 자기 것으로 삼거나 팔아서도 안되지만 서원 예물로 사용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26절). 

6. 헌물(獻物)에 대한 규정 (28-29절).

여호와께 아주 바쳐진 것은 그것이 사람이든 생축이든 가옥이든 토지이든 물건이든 서원 예물도 드릴 수 없습니다. 속전으로 대신 드릴 수도 없습니다. 사람과 생축은 죽여야 하고 성읍과 가옥과 물건은 파괴해야 하고 토지는 황무하게 내버려 두어야 합니다.

7. 십일조에 대한 규정 (30-34절).

땅의 10분의 1은 서원 예물로 드릴 수 없습니다. 땅의 10분의 1 은 토지 자체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토지에서 나는 모든 소출의 십일조를 말합니다. 십일조는 하나님께서 하나님 몫으로 성소에 드려야 할 성물로 구별한 것이기 때문에 서원 예물로 드릴 수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내가 서원한 것이 무엇인지 살펴보시고 아직도 그 서원에 대해서 책임과 의무를 감당하지 못한 것이 있다면 속히 정리한 후에 마음을 편하게 다스리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오늘 읽어야 할 말씀
사무엘상 10-12장
누가복음 9:37-62

레위기 27장은 레위기 전체에서 상당히 애매한 위치에 자리 잡고 있습니다.
사실 레위기는 26장으로 끝나야 가장 자연스러운 것입니다.
이것은 아마도 모세가 이 레위기를 다 기록한 이후에 다시금 추가적인 규례를 넣어야 하는 상황이 생겼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중간에 넣을 수 없어서 제일 뒤에 부록형식으로 첨부한 것이죠.

그러면 오늘 본문을 살펴보겠습니다.
오늘 본문은 “서원 무르기 규례”입니다(2, 9절).
서원이란 “하나님께 대한 약속 또는 맹세”를 의미합니다.
즉 어떤 긴급한 상황이 있을 때, “이 어려움을 해결해주시면 제가 ~를 드리겠습니다.” 하고 하나님께 약속하는 것이 서원입니다.
아니면 어떤 문제가 발생했다기보다는 단순히 신앙과 헌신의 표현으로 서원할 수도 있습니다(시 132:2-5).
어떤 경우든 서원이라고 하는 것은 자원해서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구체적으로 무엇을 헌신해 드릴 수 있습니까?
레위기 27장은 그 목록으로 사람, 생축, 집, 땅을 드릴 수 있다고 말씀합니다.

1. 서원 예물로 사람을 드리는 경우(27:1-2)
2. 서원 예물로 생축을 드리는 경우
먼저 사람을 드리는 것과 관련한 규례를 살펴보겠습니다.

본문의 1절과 2절을 보십시오.
1.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일러 가라사대
2. 이스라엘 자손에게 고하여 이르라 사람을 여호와께 드리기로 서원하였으면 너는 그 값을 정할지니

하나님은 누군가가 사람을 여호와께 드리기로 서원할 수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자신을 드릴 수도 있고, 자기 자식을 드릴 수도 있습니다.
사람을 바친다는 말은 몰렉에게 제사하는 것처럼 하나님께 사람을 제물로 드린다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가증히 여기시는 것입니다.
사람을 하나님께 바친다는 것은 두 가지 중의 하나입니다.

하나는 한나가 사무엘을 나실인으로 바쳐서 그로 제사장 직무를 행하도록 한 것처럼 하나님께 자신의 노동력을 헌신해 드리는 것입니다. 다른 하나는 돈을 드려서 하나님께 헌신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나무를 드리는 것하고, 나무의 열매를 드리는 것하고 비교할 수가 있습니다.
방식은 다르지만 결국 똑같은 헌신인 것입니다.

돈을 드려 헌신하는 방식이 레위인들을 하나님께 바치는 행위에서 잘 나타났습니다.
출애굽할 때 어린양의 피로 이스라엘의 모든 장자가 구속함을 얻었습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의 모든 장자와 생축의 첫 새끼는 하나님의 것입니다.
그런데 나중에 보면 하나님께서 장자들 대신에 레위인들을 받으셔서 레위인들로 하여금 성막과 제사의 일을 섬기도록 하셨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레위인들이 이스라엘의 모든 장자들보다 수가 적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모자란 만큼, 한 사람당 오 세겔씩 내도록 하여 헌신하도록 하셨습니다(민 3:44-51).
즉 하나님께서는 돈으로 드리는 것을 레위인으로 대속하여 헌신해드리는 것과 동일한 것으로 여겨주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민수기 말씀을 보면 그 돈을 일컬어서 ‘속전’이라고 표현합니다.

“모세가 레위인으로 대속한 이외의 사람에게서 속전을 받았으니”(민 3:49)

속전이라는 단어는 돈을 주어 그 사람을 노예 됨에서 해방시켜주는 무르기 규례를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본다면 오늘 레위기 본문에서 사람을 바칠 때 돈을 대신하여 드리는 것은 일종의 무르기로서 속전을 하나님께 바치는 행위인 것입니다.
곧 자기 자신을 하나님께 드린 후 속전을 지불하여 무름으로써 다시 자기 생업으로 돌아갈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어쨌든 돈을 속전으로 드렸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그가 헌신했다고 인정해주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물질적인 헌신이 나실인의 경우만큼이나 성소를 섬겨 가는데 있어서 꼭 필요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성소가 잘 돌아가기 위해서는 노동력보다는 사실상 돈이 더 많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노동력은 이미 헌신된 레위인들로도 거의 충분합니다.
그러나 돈은 늘 부족하죠.
그래서 하나님은 사람을 드릴 때 무르는 방식으로 헌신을 하도록 하셔서 돈을 드릴 수 있도록 하셨습니다.

오늘 레위기 27장 전체가 바로 이러한 무르기를 통한 헌신에 포인트가 있습니다.
서원할 때 제사장이 값을 정하는 것도 다 이 무르기를 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그러면 사람을 드릴 때, 제사장이 어떻게 가격을 정합니까?
사람의 경우는 제사장 마음대로 정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친히 정해주셨습니다(레 27:3-7).

본문의 내용을 보면 대체적으로 남자가 여자보다 1.5배 또는 2배 비싸고, 연령대에 따라서는 한창 일할 수 있는 20-60세 연령대가 가장 비싸고, 연소하고나 연로할 경우에는 가격이 낮아집니다.
그래서 20-60세 사이의 남성이 가장 비싸며, 그 값이 무려 50세겔이나 됩니다.
1세겔이 노동자 한 달 월급에 해당하는 것으로 추측되는데, 50세겔이면 오늘날의 1억 정도 됩니다.
일반평민이 1억 정도 벌려면 평생 뼈 빠지게 일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50세겔을 드린다는 것은 사실상 자신의 인생 전체를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남자가 왜 여자보다 값이 비싼가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아마도 역할 면에서 남자가 여자보다 더 가치가 있기 때문에 그런 것 같습니다.
동일한 하나님의 형상이지만, 그러나 오늘날과 같이 과학기술이 발달하지 않은 시대에서는 노동력과 군사력을 제공할 수 있는 남자가 훨씬 가치 있게 여겨졌던 것입니다.
대부분의 학자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이 가격은 아마도 그 당시 노예 시세를 반영하는 것으로 추측됩니다.

그런데 8절에 보면 가난한 자들을 위한 예외규정이 주어집니다.
8. 그러나 서원자가 가난하여 너의 정가를 감당치 못하겠으면 그를 제사장의 앞으로 데리고 갈 것이요 제사장은 그 값을 정하되 그 서원자의 형세대로 값을 정할지니라

다른 서원 예물의 경우는 예외규정이 없는데, 사람을 바칠 때는 가난한 자들을 위한 예외규정이 있습니다.
그것은 다른 서원 예물은 자신이 이미 가지고 있는 것을 그냥 드리면 되는 것이지만, 사람을 드리는 것은 생돈 수 천 만원을 새로 마련해서 드려야 하는 것이므로, 만일 가난할 경우에는 그것을 도무지 감당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이런 예외규정을 두지 않으셨다면, 가난한 자들은 도무지 자신을 헌신해드리는 서원을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은혜로우시게도 하나님은 가난한 자들도 서원할 수 있도록 해주셨습니다.

2. 서원 예물로 생축을 드리는 경우

9. 사람이 예물로 여호와께 드리는 것이 생축이면 서원물로 여호와께 드릴 때는 다 거룩하니
10. 그것을 변개하여 우열간 바꾸지 못할 것이요 혹 생축으로 생축을 바꾸면 둘 다 거룩할 것이며
11. 부정하여 여호와께 예물로 드리지 못할 생축이면 그 생축을 제사장 앞으로 끌어 갈 것이요
12. 제사장은 그 우열간에 정가할지니 그 값이 제사장의 정한 대로 될 것이며
13. 그가 그것을 무르려면 정가에 그 오분 일을 더할지니라

생축을 드리기로 서원할 때는 그냥 “양 한 마리 드리겠습니다.”
그렇게 하지 않고 구체적으로 지정하여 서원합니다.
예를 들면 “다음 달에 태어나는 양을 하나님께 드리겠습니다.”라고 서원하는 것이죠.
그러면 그 약속을 함과 동시에 다음 달에 태어난 양은 이미 하나님의 것으로서 거룩한 것이 됩니다.
그러므로 기한이 되어 서원을 갚을 때 그것을 변개하면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 마음이라는 것이 간사해서 긴급한 상황에서는 아낌없이 드리겠다고 서원하지만, 나중에 실제로 드릴 때는 아까운 마음이 들어서 좀 값이 덜나가는 양으로 바꾸어 드리고 싶은 유혹을 받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렇게 할 경우 더 손해가 있게끔 하셨습니다.
원래 드려야 할 것과 바꾼 것 두 마리 다 드리도록 하신 것입니다.
즉 하나님께 약속했으면 꼼수부리거나 잔머리 굴리지 말고 그 약속을 철두철미하게 지켜야 된다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부정한 짐승의 경우도 마찬가지로 제사장이 값을 정해서 알려줍니다.
그러나 부정한 짐승은 제물로 쓰일 수 없기 때문에 제사장이 그것을 가지고 있다가 다른 사람에게 팔아야 할 것입니다.
만일 정한짐승이든 부정한 짐승이든 서원을 무르고 그 생축을 다시 집으로 데려오고자 한다면, 정해진 값의 1/5을 추가하여 드려야 합니다.
1/5은 우리가 속건제 할 때 배웠듯이 배상의 의미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서원을 함부로 해서는 안 되고, 서원을 했으면 반드시 지켜야 하고, 어기면 그에 대한 배상을 해야 한다는 것을 알고서 서원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레위기 27장이 서원 무르는 것을 무조건 나쁜 것으로 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어떤 경우는 오히려 하나님께서 적극적으로 무르기를 하라고 요구하시는 경우가 있습니다.

예를 들어서 사람을 드리는 경우가 여기에 해당될 것이고, 특별히 부정한 짐승을 드리는 경우도 여기에 해당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부정한 짐승을 드릴 때는 서원자가 정가의 120%를 내고 무르는 것이 더욱 하나님께 헌신하는 것입니다(27절 참조).
그래서 성급하게 서원했다가 자신의 욕심 때문에 약속을 취소하는 나쁜 무르기가 있는가 하면, 그 헌물을 성막이 필요로 하지 않기 때문에 무르기 하여 돈으로 드리는 좋은 무르기가 있는 것입니다.
둘 다 무르는 것이기 때문에 120%를 내야 하지만, 그 동기에 따라서 성격이 많이 달라지는 것입니다.

3. 서원 예물로 부동산을 드릴 경우
14. 사람이 자기 집을 구별하여 여호와께 드리려면 제사장이 그 우열간에 정가할지니 그 값이 제사장의 정한 대로 될 것이며
15. 그 사람이 자기 집을 무르려면 정가한 돈에 그 오분 일을 더할지니 그리하면 자기 소유가 되리라
16. 사람이 자기 기업된 밭 얼마를 구별하여 여호와께 드리려면 두락수대로 정가하되 보리 한 호멜지기에는 은 오십 세겔로 계산할지며17. 그가 그 밭을 희년부터 구별하여 드렸으면 그 값을 네가 정한 대로 할 것이요
18. 그 밭을 희년 후에 구별하여 드렸으면 제사장이 다음 희년까지 남은 연수를 따라 그 값을 계산하고 정가에서 그 값에 상당하게 감할 것이며
19. 밭을 구별하여 드린 자가 그것을 무르려면 정가한 돈에 그 오분일을 더할지니 그리하면 그것이 자기 소유가 될 것이요

집이나 밭을 헌신해드릴 경우도 제사장이 먼저 값을 정해야 합니다.
집은 제사장이 보고 적절한 가격을 매기면 되지만, 땅은 파종하는데 필요한 씨앗의 양으로 그 가격을 정합니다.
보리 한 호멜로 파종할 수 있는 구역의 경우는 희년까지 50세겔로 정해집니다.
희년까지 얼마 남지 않았으면 가격이 많이 싸질 것이고, 희년 다음해에 드렸다면 50세겔 그대로가 될 것입니다.
희년을 기준으로 값을 매기는 이유는 희년까지만 무르기가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희년이 되어서도 무르지 않을 경우 그 밭은 영영히 제사장의 기업이 됩니다.

20. 그가 그 밭을 무르지 아니하려거나 타인에게 팔았으면 다시는 무르지 못하고
21. 희년이 되어서 그 밭이 돌아오게 될 때에는 여호와께 바친 성물이 되어 영영히 드린 땅과 같이 제사장의 기업이 될 것이며

그래서 이 규례는 서원자로 하여금 희년 전까지 이 밭을 무르도록 강력히 권장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물론 정말 하나님께 자신의 땅을 온전히 헌정해드리기를 원하는 사람은 희년에도 무르지 않겠지만, 그러나 그렇게 하지 않고 120%의 속전을 지불하여 희년에 무르기 해서 하나님께 헌신해드릴 수도 있는 것입니다.

문제는 헌신해드린 후에 (헌신해드렸더라도 밭의 관리와 경작은 서원자 본인이 해야 합니다.)
잔머리를 굴려서 손해 보지 않겠다고 그것을 다른 사람에게 팔아버리는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는 것은 아주 나쁜 것으로서 무를 수 있는 권리마저 박탈당하는 벌을 받게 됩니다.
그러면 자신에게 손해가 없도록 하기 위해 다른 사람의 밭을 드리면 어떻습니까?
만일 헌신해드린 밭이 자기 밭이 아닐 경우는 희년이 되면 서원자가 무조건 그 정가를 주고 무르기 해야 하며, 무르기 한 후에 그 밭은 원주인에게 돌려주어야 합니다. 22-24절을 보시면...

22. 사람에게 샀고 자기 기업이 아닌 밭을 여호와께 구별하여 드렸으면
23. 너는 정가하고 제사장은 그를 위하여 희년까지 계산하고 그는 너의 정가한 돈을 그 날에 여호와께 드려 성물을 삼을지며
24. 그 밭은 희년에 판 사람 곧 그 기업의 본주에게로 돌아 갈지니라

결국 핵심은 헌신해드리기로 서원했으면, 정말 서원대로 드리든, 정해진 가격의 120%를 지불하여 무르든, 아니면 어떤 방식으로든 그 서원을 갚아야만 하고, 또 갚을 수밖에 없도록 하나님이 규정하신 것입니다. 서원하면 헌신하는 것은 피할 수 없습니다. 손해를 덜 보겠다고 꼼수를 부릴수록 더 많은 손해를 봐야 합니다. 물론 하나님이 이렇게 하시는 것이 억지로라도 헌신을 받겠다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 한 약속은 반드시 지켜야 하며, 그것이 하나님을 경외한다고 하는 신앙의 표이기 때문에, 그러한 경외함을 배우도록 하시기 위해서 이렇게라도 헌신하도록 하신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약속에 신실하신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여호와 하나님을 믿고 섬기는 이스라엘 백성들도 하나님께 대한 신의를 지켜야 합니다. 중요한 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벌금이 무서워서 헌신할 것이 아니라, 환난 날에 응답하신 그 은혜를 깊이 깨닫고 기억하면서 감사와 자원함으로 헌신해야 하는 것입니다.

4. 서원 예물이 될 수 없는 목록 - 생축의 첫 새끼, 십일조

26절부터는 서원 예물로 드릴 수 없는 목록을 언급합니다.

26. 오직 생축의 첫새끼는 여호와께 돌릴 첫새끼라 우 양을 물론하고 여호와의 것이니 누구든지 그것으로는 구별하여 드리지 못할 것이며
27. 부정한 짐승이면 너의 정가에 그 오분 일을 더하여 속할 것이요 만일 속하지 아니하거든 너의 정가대로 팔지니라 ...
30. 땅의 십분 일 곧 땅의 곡식이나 나무의 과실이나 그 십분 일은 여호와의 것이니 여호와께 성물이라
31. 사람이 그 십분 일을 속하려면 그것에 그 오분 일을 더할 것이요
32. 소나 양의 십분 일은 막대기 아래로 통과하는 것의 열째마다 여호와의 거룩한 것이 되리니
33. 그 우열을 교계하거나 바꾸거나 하지 말라 바꾸면 둘 다 거룩하리니 속하지 못하리라

26절부터 언급되는 생축의 첫 새끼나 십일조 같은 것들은 워낙 하나님의 것이기 때문에 서원 예물로 드릴 수 없습니다.
그것은 의무적으로 드려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자원해서 서원하여 드렸든, 십일조와 같이 의무적으로 드려야 하는 것이든 상관없이 그 헌물이 하나님께 바쳐졌으면 그것은 하나님의 것으로서 거룩한 것입니다.
그리고 서원 예물과 동일하게 생축의 첫 새끼와 십일조의 경우도 그 정가의 120%를 드려서 다시 무를 수가 있습니다(본문의 ‘속하다’는 단어가 ‘무르다[가알]’라는 단어임).
특히 부정한 생축의 첫 새끼는 서원예물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무를 것을 권장합니다. 그러나 서원자가 무르기를 원치 않으면, 제사장이 자신이 정한 가격으로 다른 사람에게 팔아야 합니다. 그런데 주의할 것은 특별히 십일조를 드릴 때, 서원 예물 드릴 때와 마찬가지로 잔머리를 굴리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소나 양의 십일조를 드릴 때 보다 값이 떨어지는 것으로 드리고 싶은 것이 인간의 죄악된 본성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아예 소나 양의 십일조 드리는 방법을 정해주셨습니다. 소나 양을 랜덤하게 일렬로 줄을 세워놓고 지나가게 하면서 열 번째로 지나가는 것을 (그것이 열등한 것이든 우등한 것이든 상관없이) 십일조로 드려야 합니다. 만일 우등한 것이 걸렸는데, 그것을 열등한 것으로 바꾸면 둘 다 바쳐야 합니다.

그러므로 오늘 본문을 요약하면 서원은 반드시 지켜야 하고, 어기거나 잔머리를 굴리면 더 큰 손해를 보게 되며, 헌신해 드릴 때는 성소의 필요에 따라서 서원한 그대로 드릴 수도 있고, 또는 속전을 지불하여 무름으로써 헌신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5. 아주 바쳐진 것은 무를 수 없음

그런데 오늘 본문에 보면 전체문맥의 흐름을 떠나서 전혀 다른 의미의 헌신을 이야기합니다. 이것이 사실상 매우 놀라운 것이고, 또 매우 중요한 부분입니다.
(28)오직 여호와께 아주 바친 그 물건은 사람이든지 생축이든지 기업의 밭이든지 팔지도 못하고 속하지도 못하나니 바친 것은 다 여호와께 지극히 거룩함이며(29)아주 바친 그 사람은 다시 속하지 못하나니 반드시 죽일지니라
28-29절은 아주 바쳐진 헌물을 이야기합니다. 원어로 ‘헤렘’이라는 단어인데 이미 21절에서 한번 사용되었습니다. 즉 밭을 헌신해드렸는데, 희년이 되어서도 무르지 않으면 영영히(헤렘) 바쳐진 땅이 되어 무를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알게 되는 것은 헌신해드리는 것이 다 똑같이 헌신해드리는 것이 아니라 나름대로 등급이 있다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께 헌신해드릴 때 그냥 드릴 수도 있고, 아주! 드릴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나님께 아주 드리는 경우에는 다시 무를 수가 없습니다. 지극히 거룩한 것으로서 제사장의 소유가 되거나, 또는 성막에서 거룩한 용도로만 사용되어야 합니다. 만일 그것이 세속적인 용도로 사용될 때에는 반드시 폐기처분하든지 죽이든지 해야 합니다. 또는 본질적으로 거룩하게 될 수 없는 사물이나 생명체는 하나님께 온전히 드려지는 그 즉시로 죽여야 합니다.
지극히 거룩하신 하나님께 부정한 인간을 아주 바친다는 것은 곧 그 인간의 소멸을 뜻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마치 불 가까이에 나무를 가져다놓는 것과 같습니다. 이러한 사실을 이 ‘헤렘’이라는 단어가 잘 보여줍니다. ‘헤렘’은 이중적인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봉헌’이라는 뜻도 있지만, ‘완전히 멸망시키다, 진멸하다’라는 뜻도 있습니다. 이 두 의미가 연결되어 있는데, 이 사실이 가나안 정복 전쟁에서 잘 나타나는 것입니다.
“이 성과 그 가운데 모든 물건은 여호와께 바치되 기생 라합과 무릇 그 집에 동거하는 자는 살리라 이는 그가 우리의 보낸 사자를 숨겼음이니라”(수 6:17)
원어에 보면 ‘물건’이라는 단어가 없습니다. 그냥 성 안에 있는 모든 것을 바치라고 나와 있습니다. 그것은 물건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과 생축을 다 포함하는 것입니다(기생 라합만 살리는 표현을 보십시오). 그런데 이 구절에서 ‘바치다’라는 단어가 원어로 보면 ‘헤렘’이라는 단어입니다. 표준새번역이 이것을 잘 번역했습니다.
“이 성과 이 안에 있는 모든 것을 전멸시켜서, 그것을 주께 제물로 바쳐라. 그러나 창녀 라합과 그 여인의 집에 있는 사람은 모두 살려 주어라. 그 여인은 우리가 보낸 정탐꾼들을 숨겨 주었다.”(수 6:17,표준새번역)
여리고 성의 모든 사람들과 생축, 모든 사물들을 하나님께 아주 드려야 하는 것입니다. 사람들과 생축을 어떻게 하나님께 드립니까? 그들의 목을 따서 제물로 하나님께 바쳐드립니다. 한편 생명체가 아닌 보물들과 물건들은 여호와의 곳간에 구별하여 드려야 합니다. 이렇게 여리고에 있는 모든 것은 다 여호와께 아주 바쳐진 것으로서 지극히 거룩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것을 절대로 건드리면 안 되는 것이고 절대로 무를 수도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비열하게도 아간이 간사하게 그것을 숨겨서 탈취하다가 하나님의 진노를 받아 죽임당하고 말았던 것입니다. 앞에 서원 예물의 경우는 꼼수를 부리거나 속여서 취하거나 하면 벌금을 무는 것으로 끝이지만, 아주 바쳐진 것을 건드릴 경우에는 하나님께서 용납하지 않으시고 반드시 진노하셔서 엄벌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결론적으로 “사람을 하나님께 아주 바친다”는 것은 하나님의 원수의 목을 따서 하나님께 드림으로 하나님의 마음을 시원하게 해드리는 것을 의미합니다. 가나안 족속들이 얼마나 큰 죄들을 지었습니까? 그래서 이스라엘에게 진멸하여 나에게 바치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가나안 족속만 원수가 아니라 모든 인간이 다 죄인이므로 다 하나님의 원수인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을 하나님께 아주 드린다는 것은 그 자체로는 좋은 의미인데, 문제는 우리가 다 죄인이기 때문에 그것이 곧 우리에게는 죽음을 의미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인생들을 떠나 계시고, 이스라엘 성막 가운데 임재하셨어도 겹겹으로 싸서 텐트로 가려서 보지 못하도록 하신 이유가 우리로 죽임당하지 않도록 하시기 위함입니다. 이것이 은혜입니다.
(29)아주 바친 그 사람은 다시 속하지 못하나니 반드시 죽일지니라
그래서 이 말씀은 정말 자기 자신이나 자식을 죽여서 하나님께 바치라는 말이 아니라, “정말 나에게 온전히 헌신하고 싶냐? 그러나 너희는 죄인이기 때문에 지극히 거룩한 나 하나님의 소유가 될 수가 없다. 안 그러면 너희가 죽어야 된다.” 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은혜로운 것은 더러운 죄인이 온전히 하나님께 바쳐질 수 있는 새로운 길이 열리게 된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아론이 하나님께 온전히 드려진 것에서 잘 나타나는 것입니다. 전적타락하고 부정한 인간에 불과한 아론이 어떻게 하나님께 온전히 드려져서 지극히 거룩한 대제사장이 되었습니까? 아론이 하나님께 아주 바쳐지게 되면 그냥 거기서 죽어버려야 정상인 것인데, 하나님께서는 아론 대신에 수송아지를 대신 죽이심으로 아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의에 대하여는 산자로 여겨주신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사실은 모형과 예표이기 때문에 사실은 아론도 하나님께 온전히 드려지지 못했습니다.
사람이 진짜 온전히 하나님께 드려지는 일은 구약의 모든 모형의 실체가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졌습니다. 참으로 신약의 성도들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께 온전히 아주 드려진 자들입니다. 어떻게 우리가 하나님께 드려졌습니까?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죄를 대신 짊어지시고, 우리 대신 하나님께 아주 드려지셔서 십자가에서 비참하게 처형당해 죽으셨습니다. 자신의 목을 따서 하나님께 제물로 드림으로써 우리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와 분을 모두 삭히시고 하나님의 마음을 시원하게 해드린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를 위해 부활하셔서 우리의 구세주가 되신 것입니다. 그리고 성령님께서 우리를 이 2000년 전의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 속에 집어넣으셔서 우리로 그리스도와 함께 죽게 하시고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아나게 하셔서 우리로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의에 대하여는 하나님께 대하여 산자가 되게 하신 것입니다. 그리하여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께 온전히 드려지게 된 것입니다. 그것을 요한계시록 말씀은 이렇게 표현합니다.
“새 노래를 노래하여 가로되 책을 가지시고 그 인봉을 떼기에 합당하시도다 일찍 죽임을 당하사 각 족속과 방언과 백성과 나라 가운데서 사람들을 피로 사서 하나님께 드리시고”(계 5:9)
그래서 우리는 예수의 피 값으로 아주 하나님께 바쳐진 자들이기 때문에, 신약의 성도들은 서원할 레야 서원할 수가 없습니다. 죽을병에 걸려서, “하나님 살려주시면 제 인생을 하나님께 바쳐드리겠습니다.”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것을 가지고 하나님과 흥정하겠다는 것과 다를 바 없습니다. 그럴 때는 서원할 것이 아니라, 그동안 하나님의 것인데 배은망덕하게 자기 마음대로 살았던 죄를 회개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께 온전히 드려졌습니다. 그리고 한번 드려졌기 때문에 절대로 무를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께 속한 자는 영영히 하나님의 것이 되었고 그의 손에서 빠져나올 수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의 삶이 어떻습니까? 오늘날 우리가 아간이 했던 짓을 우리도 하고 있지는 않는지 우리는 심각하게 우리 자신에게 자문해보아야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적당히 신앙 생활하는 것, 잔머리 굴리면서 꼼수를 부리면서 적당히 헌신하는 것이 얼마나 하나님 앞에서 심각한 죄인지 잘 인식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더 정신 나가면 “예수 믿기 전이 좋았지... 차라리 그때로 돌아가고 싶다...” 그런 마음까지도 품는 것입니다. 그러나 무를 수 없습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38)오직 나의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또한 뒤로 물러가면 내 마음이 저를 기뻐하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39)우리는 뒤로 물러가 침륜에 빠질 자가 아니요 오직 영혼을 구원함에 이르는 믿음을 가진 자니라”(히 10:38-39)
우리 신앙의 자동차에는 후진기어가 없습니다. 오직 전진만 있습니다. 그것이 우리가 가야 할 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우리 대신 십자가에서 죽임 당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깊이 생각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은혜가 어떤 은혜인지, 하나님의 것으로 하나님께 드려졌다는 것이 얼마나 놀라운 특권이고 축복인가 하는 것을 깨달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소유가 되어 하나님 안에서 하나님과 교제 나누는 삶의 행복과 기쁨을 무엇으로 설명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우리는 사도바울의 말씀을 우리 마음에 새겨야 합니다.


로마서 12:1-2
1.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
2.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롬 12:1-2)

정말 우리가 성령충만함을 받아 심령이 변화되어 새롭게 될 수 있기를 원합니다.
그래서 우리 자신을 거룩한 산 제사로 하나님께 온전히 헌신해드릴 수 있기를 원합니다.





레위기 전체의 규례는 출애굽 2년 1월에 한달 동안 시내산에서 모세가 여호와 하나님께로부터 받아 기록한 내용입니다. 이제 그 계시가 본 장으로 끝을 맺습니다. 26장이 레위기 전체의 결론에 해당된다면 27장은 레위기 전체의 부록이라 할 수 있습니다. 27장은 서원에 대한 규례입니다. 1-8절은 사람으로 서원하는 법, 9-13절은 짐승으로 서원하는 법, 14-15절은 가옥으로 서원하는 법, 16-25절은 토지로 서원하는 법, 26-27절은 처음 난 생축에 대한 규정, 28-29절은 헌물(獻物)에 대한 규정, 30-34절은 십일조에 대한 규정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서원(나다르)은 헌신하다 다짐하다 맹세하다 의 뜻입니다. 서원은 사람이 하나님께 무엇을 하겠다고 자원하여 맹세하는 것을 말합니다. 서원의 내용은 사람일 수도 있고 가축일 수도 있고 가옥일 수도 있고 토지일 수도 있습니다. 무엇을 서원하든지 서원하는 자는 하나님과 교제를 통해 은혜를 받게 됩니다. 그리고 서원의 속전은 성전과 제사장 생활 유지에 사용됩니다.




1. 사람으로 서원하는 법 (1-8절)

사람을 하나님께 드리기로 서원할 경우에는 직접 드릴 수 없으므로 성별과 나이에 따라 돈으로 환산하여 드리게 했습니다.
그 때 성소에 드린 돈을 속전(贖錢)이라고 불렀습니다.
그 속전은 20~60세 되는 남자는 은 50세겔, 여자는 은 30세겔
5~20세되는 남자는 은 20세겔, 여자는 은 10세겔
60세 이상되는 남자는 15세겔, 여자는 10세겔
1개월~5세 되는 남자는 은 5세겔, 여자는 은 3세겔

규정된 값을 지불할 수 없는 극빈자는 제사장이 그 형편과 능력에 따라 정해준 대로 해야 합니다(2-8절).
그 속전의 차이는 인격의 차이가 아니고 노동력에 따라 정한 차이입니다.
세겔 (Shekel)은 금이나 은의 무게 단위인데 당시에 화폐의 단위로 사용되었습니다.
한 세겔은 11.4g입니다.
구약에서 은 30세겔은 노예 한사람 값이었습니다.
세겔은 왕궁에서 쓰는 세겔이 있고 성전에서 쓰는 세겔이 있고 일반인이 쓰는 세겔이 있었는데 각각 중수가 달랐습니다.
왕궁에서 쓰는 세겔은 일반인이 쓰는 세겔의 2배였고 성전에서 쓰는 세겔은 일반인이 쓰는 세겔에 5분의 1을 더한 무게입니다.

서원은 자기 능력과 형편에 맞추어서 해야 합니다.
체면이나 명예욕 때문에 분수에 지나치게 했다가 지키지 못하면 위선죄가 됩니다.
명예와 영괌심 때문에 과도하게 서원하면 오히려 범죄하기 쉽습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처럼 범죄하게 됩니다(행 5:1-11).
반대로 능력이 충분한데도 인색함으로나 억지로 해서도 안됩니다(고후 9:6-7).
하나님은 물질의 액수보다도 그 마음과 그 마음을 행위로 옮기는 믿음을 보십니다 (막 12:41: 44).
그러므로 서원은 경솔하게 하거나 억지로 하다가 지키지 못한다면 안됩니다. 진실하게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2. 짐승으로 서원하는 법 (9-13절)

생축을 드리기로 서원했으면 다른 생축으로 바꾸어 드릴 수 없습니다. 만일 더 좋은 다른 짐승으로 드리려 할 때는 전에 드리기로 한 짐승은 드려진 채로 두고 새로 드리려 하는 짐승을 또 드려야 합니다. 그리고 드리려 하는 짐승이 나귀와 같이 부정하다고 규정된 짐승일 경우에는 하나님께 드려질 수 없으므로 제사장이 그 짐승에 해당하는 값을 매기고 서원자는 그 정가(定價)를 속전으로 드려야 합니다. 혹 서원자가 그 부정한 짐승을 다시 물려받아 집으로 가져갈 경우에는 그 짐승의 가치에 5분의 1을 더 드려야 합니다.

한번 서원한 것은 이미 하나님께 바쳐진 것으로 간주한 것입니다. 한번 서원한 것은 바꿀 수 없습니다. 서원은 자발적으로 하는 것입니다 (신23:21-23). 그런데 그것을 철회하거나 자기 손익에 의해 변경시킨다고 하면 하나님을 멸시하고 경홀히 여기는 죄가 됩니다. 시편15:4에는 그 눈은 망령된 자를 멸시하며 여호와를 두려워하는 자를 존대하며 그 마음에 서원한 것은 해로울지라도 변치 아니하며 라고 했고, 전도서5:4에는 네가 하나님께 서원하였거든 갚기를 더디게 말라 하나님은 우매자를 기뻐하지 아니하시나니 서원한 것을 갚으라 라고 했습니다.

3. 가옥으로 서원하는 법 (14-15절)

자기 집을 하나님께 드리기로 서원한 경우에는 짐승과 마찬가지로 제사장이 그 집의 우열을 따라 값을 정하고 그 정가를 속전으로 드려야 합니다. 만일 자기가 그 집에서 계속 살려고 하면 배상금조로 정가에 5분의 1을 더 드려야 합니다. 그러면 그 집이 자기 소유가 되었습니다 (14-15절).

사람이든 생축이든 가옥이든 토지이든 그 값을 정하여 드리되 그것을 계속 자신이 소유권을 가지기 위해서는 그 값의 5분의 1을 더 드려야 합니다 (13,15,19절). 그것은 하나님께 드려야 할 것을 충분히 보상해야 한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님께 서원하여 드린 것은 이미 하나님의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기업이 됩니다. 성소 유지와 제사장 생활에 사용됩니다. 곧 하나님의 것에는 손해가 가지 않도록 하라는 것입니다.

4. 토지로 서원하는 법 (16-25절)

토지를 드릴 경우에도 두락수(斗落數)대로 속전으로 드립니다. 보리 한 호멜지기에 은 50세겔로 계산하여 드립니다. 호멜(Homer)은 고체의 측정 단위로서 한 호멜은 230ℓ 정도 됩니다. 한 호멜지기는 230ℓ 정도의 씨앗을 뿌릴 수 있는 면적을 말합니다. 50세겔은 한 호멜지기에서 50년 동안 얻을 수 있는 소출을 값으로 정한 것입니다. 그것은 한 호멜지기에 매년 한 세겔씩 드린다는 말이 됩니다. 그 토지를 무르려면 정가에 5분의 1을 더해서 드려야 합니다. 만일 그 토지를 무르지 않거나 다른 사람에게 팔게 되면 희년 때에 자기에게로 돌아오지 않고 성물이 되어 제사장 기업이 됩니다. 그리고 드리려 하는 토지가 자기 기업이 아닐 경우에는 매년 나누어 드리지 않고 일시불로 드립니다. 그 정가는 자기 기업일 경우와 같은 방법으로 하되 한 세겔을 20게라로 계산해야 합니다. 게라(Gerah)는 세겔의 20분의 1로서 약 0.57g에 해당합니다 (16-25절).

사람이나 짐승이나 가옥도 마찬가지이지만 토지에 대한 서원법을 보면 하나님께서 서원을 얼마나 신중히 다루시는지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서원을 신중히 해야 합니다. 경솔히 하다가는 그것이 오히려 올무가 될 수 있습니다. 잠20:25 함부로 이 물건을 거룩하다 하여 서원하고 그 후에 살피면 그것이 그물이 되느니라 라고 했습니다. 서원을 하지 않는 것은 죄가 아니지만, 서원을 하고 지키지 않는 것은 죄가 됩니다 (민30:2). 그러므로 서원하고도 갚지 못하는 것은 서원하지 않은 것만 못합니다 (전5:5). 그러나 그것이 서원을 하지 말라는 의미는 아닙니다. 하나님은 진실한 서원을 들으시고 복을 주십니다. 시편61:5에 하나님이여 내 서원을 들으시고 주의 이름을 경외하는 자의 얻을 기업을 내게 주셨나이다 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성령의 감동을 소멸하지 말고 믿음으로 서원하되 믿음으로 한 서원은 손익을 생각지 말고 끝까지 믿음으로 드려야 합니다.

5. 처음 난 생축에 대한 규정 (26-27절).

생축의 첫새끼는 하나님의 것이므로 하나님께 드려야 합니다. 그것을 자기 것으로 삼거나 팔아서도 안되지만 서원 예물로 사용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26절). 하나님께서 출애굽 사건과 관련하여 사람이든 짐승이든 처음 난 것은 유월절 밤에 죽을 데서 살려 주었기 때문에 하나님의 것이라고 했습니다. 출애굽기13:3에 이스라엘 자손 중에 사람이나 짐승이나 무론하고 초태생은 다 거룩히 구별하여 내게 돌리라 이는 내 것이니라 하시니라 고 했습니다. 그래서 원래 하나님의 것을 다시 서원 예물로 드리려 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부정하다고 규정된 짐승들이 있는데 그것도 서원 예물로 드릴 수 없습니다. 부정한 짐승은 나귀, 약대, 사반, 토끼, 돼지 등을 말합니다 (출13:13, 레11:3-8). 부정한 짐승을 드리기로 서원 한 경우에는 제사장이 정한 그 짐승의 정가의 속전을 드리든지 아니면 그 짐승을 정가대로 다른 사람에게 팔아서 그것으로 속전과 배상금(5분의1)을 드려야 합니다 (27절). 이 내용은 11-13절에서 언급된 내용입니다.

하나님께 당연히 드려져야 할 것으로 자신의 믿음을 증명하기 위해 서원하거나 은혜받는 수단으로 서원하지 않아야 합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만홀히 여기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그 위선에 속을 수 있으나 하나님은 중심을 보시기 때문에 속지 않습니다. 그것은 부정한 것을 드리는 것과 다를 것이 없어서 하나님께서 인정하지 않습니다.

6. 헌물(獻物)에 대한 규정 (28-29절).

여호와께 아주 바쳐진 것은 그것이 사람이든 생축이든 가옥이든 토지이든 물건이든 서원 예물도 드릴 수 없습니다. 속전으로 대신 드릴 수도 없습니다. 사람과 생축은 죽여야 하고 성읍과 가옥과 물건은 파괴해야 하고 토지는 황무하게 내버려 두어야 합니다.

여호와께 아주 바친 그 물건 은 하나님께 구별하여 예물로 드려진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멸망키로 정한 것들을 말합니다. 바친 그 물건 은 히브리어로 헤렘 인데 그 뜻은 저주를 받은 것 없애기 위해 바쳐진 것 의 의미입니다. 그래서 여호와께 아주 바쳐진 것이란 하나님께서 파멸하기로 결정한 대상들을 말합니다. 하나님의 공의의 법에 의해 죽임 당할 자로 지목된 자들과 그 소유들을 말합니다. 이를테면 우상 숭배자나 신성 모독자들, 그리고 그들이 기르는 짐승이나 그들이 거하는 성읍이나 그들이 경작하는 토지나 그들이 사용하는 물건 등을 말합니다. 실례로 우상을 숭배했던 가나안 족속과 여리고성 그리고 그 안에 있는 물건들(수6:17, 7:1-5), 미스바로 모이라는 이스라엘 회중의 결의를 반대하고 모이지 않은 길르앗 야베스 사람들(삿21:9-10), 이스라엘이 출애굽할 때 이스라엘을 공격하여 이스라엘의 진행을 방해했던 아말렉 족속들(삼상15:2-3)을 들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미 멸망을 선고하신 것으로 신앙적 헌신을 나타내려 해서는 안됩니다. 하나님 앞에 옳지 못한 것으로 하나님의 마음을 사려고 해서는 안됩니다. 그것은 마치 사울왕이 진멸하라고 한 짐승으로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겠다는 것이나 다름 없습니다. 하나님은 천천의 수양과 만만의 기름 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을 원하십니다. 하나님 말씀을 듣는 것을 원하십니다 (미6:7, 삼상15:22-23).

7. 십일조에 대한 규정 (30-34절).

땅의 10분의 1은 서원 예물로 드릴 수 없습니다. 땅의 10분의 1 은 토지 자체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토지에서 나는 모든 소출의 십일조를 말합니다. 십일조는 하나님께서 하나님 몫으로 성소에 드려야 할 성물로 구별한 것이기 때문에 서원 예물로 드릴 수 없다는 것입니다. 다만 그 소출들을 무를 수는 있었는데 그러려면 그 소출에 해당하는 정가를 속전으로 내고 그것에 배상금조의 5분의 1을 더해서 드려야 합니다 (30-31절). 한편 짐승을 십일조로 드릴 때는 모두 우리에 가두었다가 내어 보내면서 열번째에 걸리는 짐승을 드려야 하는데 그 걸리는 짐승의 우열을 교계(탐색)하거나 다른 것으로 바꾸어 치우면 두 마리 다 드려야 합니다. 그럴 경우 속전으로 대신할 수 없습니다 (32-34절).

소득의 십일조는 모든 소득의 대표로 드리는 것입니다.
그것은 땅과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이 하나님의 것임을 인정하는 것이며 모든 소득이 하나님의 은혜로 얻어진 것임을 고백하는 것이며 앞으로도 은혜로 채워 주실 것을 바라보는 행위입니다(시 24:1, 대상 29:14, 창 2:16-17).
온전한 십일조를 드리는 자에게는 은혜를 넘치도록 부어 주신다고 했습니다(고전 9:7-9, 말 3:8-12, 신 28:1-7).
그래서 십일조를 하는 것은 저축을 하는 것과 같습니다(전 11:1, 마 6:20).
그러므로 십일조는 즐거움으로 드려야 하며 감사와 기쁨으로 드려야 합니다(스 1:4, 고후 9:7).
그것을 신앙을 가장한 위선으로 사용하지 않아야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날 십일조를 자기 의도대로 사용하는 것은 안타까운 일입니다.

하나님께 대한 신앙의 표로, 그리고 하나님께 은혜를 입기 위해 서원을 합니다.
성경에는 하나님을 신뢰함으로 하나님께 서원을 하므로 직면했던 문제들이 해결되고 복을 받았던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삼상 2:20-21, 삿 11:30).
우리도 힘들고 어려울 때 우리 자신을 돌아보며 하나님 앞에 바로 살아가겠다는 결단이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그런 결단들이 감정이나 흥분이나 욕망이나 위선에 의해서가 아니라 진실한 신앙에 의해서 되어지도록 해야 합니다.  

____________________________ 레위기 26장 / 자기를 위하여(1절) 

너희는 자기를 위하여 우상을 만들지 말찌니 목상이나 주상을 세우지 말며 너희 땅에 조각한 석상을 세우고 그에게 경배하지 말라 나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임이니라.
Do not make idols or set up an image or a sacred stone for yourselves, and do not place a carved stone in your land to bow down before it. I am the LORD your God.

1-2 우상과 안식일에 관한 경계.
3-13 하나님께 순종(복종)하는 자에게 약속된 축복.
14-39 하나님께 순종하지 않는 자에게 대한 형벌.
40-46 장래에 있어서의 백성의 회개와 하나님의 권고의 예언.


레위기 26장은 결론 부분으로 계명의 준수에 따른 축복과 저주를 말씀합니다.
그런데 축복과 저주는 동일한 형식에 따라 나타납니다.
땅의 축복과 원수로부터의 보호에 관한 것으로 이 두 가지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중요한 의미를 갖습니다.

첫째, 땅은 언약의 증표이며 생명의 근거

땅을 빼앗긴다는 것은 하나님의 임재를 상실하고 생명의 근거를 박탈당하는 것이므로 더 이상 이스라엘 민족이 존재할 수 없게 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계명의 준수는 근본적으로 언약 공동체의 생존과 직결되는 것이었습니다.

둘째, 원수로부터의 보호하심

이스라엘은 소수 민족으로 주변의 가나안 원주민이나 강대국으로부터 끊임없는 위협을 받고 있었습니다.
원수들의 침략 역시 민족의 생존과 직결된 것이었으며, 하나님 외에는 방어 수단이 전무했습니다.
따라서 계명 준수는 민족의 생존과 직결된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축복과 저주의 형식은 구속사 속에서도 동일하게 적용됩니다.
종말에 나타날 하나님 나라는 가나안 땅의 완성이며, 죄와 사망의 권세는 이스라엘 민족에 대한 원수들의 침략으로 나타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대한 전적인 신뢰의 표현인 계명 준수는 오늘날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으로 나타나고, 그 믿음은 종말의 구원과 영원한 축복을 결정하는 유일한 요소가 됩니다.

하나님은 계명 준수에 따른 축복과 저주를 명하시면서 죄로 인해 저주받은 경우에 회개를 통해 회복할 수 있는 길을 열어 주셨습니다.
이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완악하고 연약함을 미리 아셨기 때문입니다.

본장에서는 이처럼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고 참으시는 자비하신 여호와이심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한편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신 회개의 길은 오늘날 죄에 빠진 성도들에게도 주시는 동일한 은혜이기도 합니다.
성도가 비록 지금 죄에 빠져 하나님의 심판 앞에 놓여 있을지라도 자신의 죄를 진심으로 뉘우치고 하나님 앞에 나아간다면 하나님은 사랑으로 용서하시고 다시 축복의 자리로 인도하실 것임을 교훈합니다.
그러므로 성도들의 삶에서 중요한 것은 죄를 짓지 않으려는 노력파 더불어 죄에 대한 회개를 망설이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우상을 만들지 말지니 

'우상'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엘릴'은 '아니다'(not, no, nor, never)란 뜻의 '알'에서 파생된 말
곧 '없음'(nothing), '공허함'(vanity), '아무 것도 아님'(thing of nought)등의 뜻이다.
이것은 우상의 속성을 한마디로 잘 보여주는 말이다.
한편 한글 개역 성경에는 '우상'(偶像)으로, 그리고 영어 성경에는 'idol' 혹은 'graven image'로 한결같이 번역되어 있는 우상은 본래 히브리어 성경에는 다음 20가지 단어로 나타나는데, 그 모두가 우상의 헛된 속성을 잘 보여 주고 있다.

명칭 및 관련 성구 어근(어근)의 의미

1. 아웬(사 66:3) 존재하지 않음 : 아무것도

2. 엘릴(사 2:8) 아님, 텅빔, 헛됨, 덧없음

3. 헤벨(렘 10:8) :  쓸데없음, 무가치함

4. 세멜(대하 33:15) : 모양이 없음

히브리어로 우상을[아웬]이라고 발음을 하는데 그 뜻은 헛되고 공허한 것, 우상의 집, 거짓, 사기, 불법, 불법을 행하는 자들, 불행, 역경, 재난을 의미합니다.
히브리어 [세멜]의 뜻은 조각된 우상, 초상을 의미합니다.
헬라어로[에이도스]라고 발음을 하는데 그 뜻은 우상을 의미합니다.

'엘릴(אֱלִיל)', 즉 '아무것도 없는 것', '헛된 것'이라는 뜻의 단어가 쓰였다. 이 외에도 '마세카(מַסֵּכָה, 부어 만든 것)', '페셀(פֶּסֶל, 새긴 것)', '테라핌(תְּרָפִים, 드라빔)' 등이 있다. 신약성경에는 '형상'이라는 뜻의 헬라어 '에이도스(εἶδος)'에서 파생된 '에이돌론(εἴδωλον)'이 우상, 거짓 신을 가리키는 단어로 기록됐으며, 이 단어가 영어 아이돌(Idol)의 어원이다.

우상의 종류와 우상을 섬긴 결과

출애굽기20:1-6절
오늘 본문을 이해하려면 모세가 하나님의 인도와 함께 하시는 은혜로 출애굽 하여 하나님께서 홍해를 가르셔서 육지 같이 건너 광야를 거쳐 삼 개월 만에 시내 산에 도착하여 이스라엘 백성들이 시내 산 앞에 장막을 치고 3일 후에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해 십계명을 주셨습니다. 오늘은 1, 2, 3계명을 중심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해드리기 전에 우상의 종류와 우상을 섬긴 결과에 대해 전해드리겠습니다.
1.우상의 원어적인 의미
히브리어로 우상을[아웬]이라고 발음을 하는데 그 뜻은 헛되고 공허한 것, 우상의 집, 거짓, 사기, 불법, 불법을 행하는 자들, 불행, 역경, 재난을 의미합니다. 히브리어 [세멜]의 뜻은 조각된 우상, 초상을 의미합니다. 헬라어로[에이도스]라고 발음을 하는데 그 뜻은 우상을 의미합니다. 헬라어로[에이돌로라테리아]는 우상숭배를 의미합니다.

2.우상의 종류와 명칭
몰렉(레18:21), 밀곰(왕상11:33), 몰록(행7:43), 바알(왕상18:40), 바알세붑(왕하1:16), 바알세불(마10:25), 아스다롯(삼상12:10), 아세라(출34:13), 벨(사46:1),
그모스(왕하23:13), 금송아지(출32:4-35), 므로닥(렘50:2), 느보(사46:1) 느후스단(왕하18:4), 일월성신(신4:19), 숙곳브놋(왕하17:30), 네르갈, 아시마(왕하17:30), 니스록(사37:38),
닙하스, 다르닥(왕하17:31), 림몬(왕하5:18), 아드람멜렉(왕하17:31),
이집트의 모든 우상들(출12:12), 기윤(암5:26), 쓰스, 허매(행14:12), 그리스의 알지 못하는 우상(행17:23), 아데미(행19:24), 다곤(삼상5:2-5), 짐승(계13:1-18) 마르둑 등 이상의 우상들은 다산, 풍년을 준다는 것입니다.

3.우상을 만드는 재료
금(출32:3), 은, 동, 철, 나무(신29:17), 돌(신4:28),
4.우상숭배의 대상이 된 것들
야곱의 외삼촌 라반의 집 우상 드라빔(창31:19), 금송아지(출32:4), 놋뱀(왕하18:4), 일월성신(왕하21:5), 천사(골2:18), 벽에 그린 우상들(겔8:10), 수염소(레17:7), 동물숭배(롬1:23), 에봇(삿8:27) , 사람(행14:11), 우상조각상(민33:52), 배와 그물과 어망(합1:16), 바다, 재물(마6:24), 사탄, 마귀, 귀신(신32:17,시106:36, 고전10:20), 탐심(골3:5)

5.우상에게 바치는 제물과 제사방법
자녀를 우상에게 바쳤다(신12:31), 금송아지 앞에 번제와 화목제를 바치고 먹고 마시며 뛰놀았다(출32:6-25) 이스라엘 백성들이 싯딤에서 모압 여인들과 음행하며 모압 여인들이 바알브올 우상에게 제사를 할 때 이스라엘 백성들이 절을 해서

하나님께서 진노하셨다(민25:1-3절) 향을 피웠다(렘1:16) 우상에게 기도를 했다(욘1:5) 찬양을 하였다(단5:4) 춤을 추었다(출32:18-19) 모든 악기를 동원해서 금신 상 앞에서 연주를 함(단3:5-7) 입을 맞춤(왕상19:18), 무릎을 꿇고 절함(왕상19:18) 북 이스라엘 왕이 유다와 같이 절기를 정하고 제사장을 아무나 세우고 벧엘에서 만든 송아지에게 제사를 드렸다(왕상12:32)

6.우상을 세운 곳
왕궁에, 산당에(레26:30) 은밀한 곳에(신27:15) 집에(창31:19)
7.우상숭배에 대한 하나님의 경고
우상의 형상을 만들거나 섬기지 말라(출20:4-5) 우상의 이름을 부르지 말고 우상을 없애라(출23:13-24)

8.우상을 섬기는 이유
마음이 우준하여(롬1:21-25) 우상숭배자들과 교제함으로(민25:1-3) 이방여인과 혼인함으로(왕상11:6) 사탄에게 이단에게 이교도에게 미혹이 되어.

9.우상을 섬기면 안 된다.
우리가 하나님의 성전이기 때문에(고후6:16)
하나님은 질투하시는 하나님이시라 우상을 섬긴 죄가 3-4대 이른다(출20:5) 하나님의 나라에 못 들어감(갈5:21) 저주를 받는다(신27:15) 하나님이 버리신다(왕상9:6-9) 올무가 된다(삿2:3) 사막이 된다(겔6:5-6) 바벨론 포로가 된다(행7:43) 북 이스라엘과 남 유다가 망한 이유가 바로 우상숭배 한 결과다. 칼과 기근과 전염병으로 망한다(겔6:11) 유황불 못에 들어감(계21:8) 망한다(신30:17-18) 저주를 받음(신11:28) 심판을 받음(신32:15-26)

10.현대의 우상들
고사지내는 것, 우상 앞에 절하거나 신발을 벗거나 향을 피우거나 제물과 헌물을 바치면 안 된다. 우상에게 바친 제물을 먹으면 안 된다. 토정비결, 조각한 우상에게 절하거나 옷을 입히거나, 나무에 금줄을 치거나, 점치거나, 운세를 보거나, 띠 맞추기, 이사 날 자를 액이 꼈다고 피하거나, 굿을 하거나, 묘를 이장을 하면 자손들에게 해롭다거나, 조상을 섬기거나, 제사를 지내거나

바위나 나무에 빌거나, 돌하르방 코를 만지면 아들을 낳는다거나, 해, 달, 별에게 절하거나 기도하거나, 자녀나 남편이 우상시 되거나, 사탄의 음악에 빠지거나, 약물이나 마약에 중독이 되거나, 알콜 중독이 되어 알콜을 의지하거나, 아이돌이 우상이 되거나, 삼위일체 하나님 외에 다른 피조물을 섬기면 다 우상숭배에 해당이 됩니다.

본문 성경 하나님의 말씀인 십계명 1, 2, 3 계명으로 결론을 내겠습니다.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두지 말라고 말씀하셨는데 이 말씀은 우상을 마음에 두지도 말고 절하거나 섬기지도 말라는 뜻입니다. 하늘에 있는 것이나(천사, 일월성신) 땅에 있는 모든 것과 물속에 있는 것 등(물고기 형상이나 용왕 등) 어떤 형상도 만들지 말며 그것들에게 절하지 말며 그것들을 섬기지 말라 네 하나님 여호와는 질투 하는 하나님인즉 나를 미워하는 자의 죄를 갚되 아버지로부터 아들에게로 삼사 대까지 이르게 하거니와 나를 사랑하고 내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는 천 대까지 은혜를 베푸느니라.

너는 네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이 부르지 말라 망령되게 부르는 자를 죄 없다 하지 아니하리라.

태초에 에덴동산에서 사탄(뱀)이 하와를 미혹 할 때 너희가 선악과를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져 하나님과 같이 된다고 유혹을 했습니다(창3장)
하나님과 같이 되려는 것이 교만이며 우상숭배입니다. 하나님의 위치에 놓는 것이 바로 우상숭배입니다. 하나님 보다 더 사랑하고 위하는 것이 우상숭배입니다.

사무엘 선지자의 말대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우상을 버리고 미스바에 모여 기도를 드릴 때 블레셋이 침략해 왔으나 사무엘 선지자가 백성들의 요구대로 하나님께 기도를 드리고 어린양으로 온전한 번제를 하나님께 드렸더니 하나님께서 블레셋군대를 치셔서 패하게 하셨습니다(삼상7장)

솔로몬이 말년에 이방여인들을 후궁으로 맞이하며 우상을 섬기도록 허락해서 솔로몬 왕이 타락한 내용을 보면 솔로몬 왕의 후궁이 700명이었는데 왕비들이 솔로몬이 시돈의 우상 여신 아스다롯, 암몬 자손의 신 우상 밀곰을 섬기게 하였습니다.
 
솔로몬이 후궁들을 위해 모압의 우상 그모스와 암몬의 우상 몰록의 신전을 감람산에 지어주었고 솔로몬이 이방여인인 후비들을 위하여서도 산당을 지어주었고 후비들이 우상에게 분향하며 제사하도록 방관하였습니다.
 
솔로몬이 하나님을 떠나자 하나님께서 두 번이나 솔로몬에게 우상을 섬기지 말라고 경고를 하셨는데도 하나님의 명령을 따르지 않음으로 하나님께서 솔로몬에게 내가 이 나라를 네게서 빼앗아 네 신복여로보암에게 주리라고 말씀을 하셨습니다.
 
다윗을 위하여 아들 대에 가서 나라를 빼앗는다고 말씀하시며 나의 종 다윗과 나의 뺀 예루살렘을 위하여 한 지파를 네 아들에게 주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솔로몬도 다윗처럼 처음에는 하나님을 잘 섬기다가 이방 여인들을 후궁으로 삼아 그 여인들이 섬기는 우상을 왕궁에서 감람산에서 섬기도록 허락함으로서 솔로몬의 사후에 나라가 반으로 갈라져서 북이스라엘은 10지파가 나라를 세워 수도는 사마리아,남쪽 유다 나라는 두 지파가(유다, 베냐민)나라를 세우고 수도는 예루살렘입니다.
 

우상을 섬기면 3-4대를 멸하시며 하나님을 사랑하고 계명을 지키는 자는 천대 즉 3만 년 은혜를 베푸신다고 말씀을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구원과 축복이 여러분과 자자손손에게 내려가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교회 안에는 두 부류의 사람

1. 율법 아래 있는 사람
2. 은혜 아래 있는 사람

은혜 아래 있는 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엄청난 복을 받았다는 것을 깨닫고 감사와 찬송하는 자리로 나아가게 되지만,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지켜서 복을 받고자 하는 것으로 나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속에는 두 계통

1. 말씀을 지키지 못하여서 멸망을 받은 계통
2. 말씀을 지키지 못하였는데도 살아난 계통

하나님은 멸망 받은 계통은 법으로 대하셨고, 살아남은 계통은 은혜로 대하셨습니다.

언약의 백성은 은혜를 적용하시고, 저주의 백성은 법을 적용하신 것입니다.

 

하나님 말씀은 항상 정체성을 확인하는 차원에서 주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인간이 지킬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지킬 수 없는 말씀을 던져 줌으로 인간의 실상을 고발하는 것입니다.
자기 본질을 아는 자는 말씀을 지킬 수 없다는 것을 알고 말씀이 떨어지면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을 구하게 됩니다.

죄인은 복 받는 길을 알려주어도 행할 수 없는 존재들입니다.
죄인이 복을 받고 산다는 것은 오로지 하나 하나님께서 긍휼히 여겨 주실 때입니다.
가나안 땅은 은혜로 살아가는 곳입니다.
은혜를 모르면 가나안에서 살아 갈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광야에서 은혜로 살아간다는 것을 가르치신 것입니다.

광야(廣野); 미드바르 מִדְבָּר 다바르 דָבַר 로고스( λόγος, logos)

이스라엘의 광야 40년은 사실은 가나안이 목적지가 아니라 하나님이 목적지였습니다!
광야의 세월은 의미있는 세월이었습니다.
그 광야에 축복이 있었습니다.  바로 '말씀'의 축복이었습니다.

☛ 광야(廣野) : 히브리어 (미드바르 מִדְבָּר) -

☛ 하나님의 말씀 : 히브리어 "다바르(דָבַר)"

이 두 단어는 같은 어원을 가지는데 신명기서 1:1절에는 이 미드바르(광야)라는 단어와 다바르(말씀)이라는 단어가 함께 나타납니다.

이는 모세가 요단 저쪽 숩 맞은편의 아라바 르광야(미드바) 곧 바란과 도벨과 라반과 하세롯과 디사 합 사이에서 이스라엘 무리에게 선포한 말씀(다바르)이니라


☛ 다바르 דָבַר (말씀 dabar)-> speak 말하다, talk 대화하다, promise 약속하다, commune 교감하며 대화하다, declare 선포하다)

다바르에는 광야에서 신음하는 이들에게 주시는 소망과 사랑의 약속, 구원, 치유, 위로, 용서, 용기, 비전, 희망- 즉 하나님의 마음이 있었습니다.

☛ 다바르 דָבַר 에는 다양한 파생어들이 있습니다. 

☛ 미드바르 מִדְבָּר(광야(廣野 신명기 1:1)

☛ 드비르 דְּבִ֥יר (지성소 至聖所 시편 28:2)- 광야에서도 말씀의 성소가 있다면! 

☛ 데베르 דֶּבֶר(역병(疫病 전염병 傳染病 신명기 28:21) 다바르를 떠날 때

☛ 도베르 דֹּבֶר(목장(牧場 이사야 5:17) 다바르를 붙잡을 때- 인생은 푸른 초장!

그리고 다바르는 헬라어로 곧 로고스( λόγος, logos)입니다. 




[요1:1] 태초에 말씀(다바르=로고스=예수님)이 계시니라 이 말씀(다바르=로고스=예수님)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다바르=로고스=예수님)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광야같은 세상 미드바르를 살 때! 다바르=로고스이신 예수님을 모시면! 영원한 생명을 얻습니다.  

 


광야는 없습니다!

말씀이 있는 한 이곳이 천국입니다!

 

역사는 하나님의 은혜를 드러내는 장소입니다.

우리는 역사 속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배워가게 되는 것입니다.

장차 천국에서 행할 그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는 것을 배우는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가 늘 불순종 하면서도 이렇게 살고 있는 것입니다.


죄인이 산다는 것 자체가 하나님의 은혜로 살고 있음을 증거하는 것입니다.

예수그리스도를 믿는 것은 은혜의 결정체입니다.

예수그리스도의 희생 속에서 살고 있음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들에게 은혜를 담아 놓았습니다.

 

베드로도 예수님을 저주하였고,

바울도 예수님을 죽이는데 앞장을 선 자였습니다.

그런데도 사도의 일을 행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왜 이러한 자들을 사도로 삼으셨을까요?

이는 하나님의 은혜로 살고 있음을 드러내고자 하심입니다.

피조물이 존재하는 그 자체가 창조주의 은혜입니다.

 

은혜를 모르는 자는 성도가 아닙니다.

은혜 받은 성도가 머물 자리는 긍휼의 자리입니다.

긍휼의 자리에서 말씀을 받으면 은혜가 쏟아져 내리는 것을 알 게 됩니다.

 

오직 은혜입니다.


순종의 계명 세 가지(1-2)







오늘 읽어야 할 말씀
사무엘상 7-9장
누가복음 9:18-36

레위기 26장과 27장은 레위기의 결론에 해당하는 말씀입니다.
26장에서는 축복과 저주
27장에서는 약속에 대한 신앙 즉 서원에 대한 것을 말씀합니다.

26:3.
너희가 내 규례와 계명준행하면

26:14-15.
그러나 너희가 내게 청종하지 아니하여 이 모든 명령을 준행하지 아니하며
내 규례를 멸시하며 마음에 내 법도를 싫어하여 내 모든 계명을 준행하지 아니하며 내 언약을 배반할진대.



1-13, 순종의 축복
  * 1-2 / 지켜야 할 계명
14-39, 불순종의 저주
40-46, 회복의 언약


순종의 계명 세 가지(1-2)

너희는 자기를 위하여 우상을 만들지 말지니 조각한 것이나 주상을 세우지 말며 너희 땅에 조각한 석상을 세우고 그에게 경배하지 말라 나는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임이니라.
너희는 내 안식일을 지키며 내 성소를 경외하라 나는 여호와이니라

1. 우상숭배를 하지 말라
하나님 중심의 삶이 무너진다.

2. 안식일을 지키라
예배의 시간을 확보하라

3. 성소를 경외하라
예배의 장소를 확보하라

하나님을 향한 초점을 정확하게 맞추며 살아가라





그러면 먼저 첫 번째 단락부터 살펴보겠습니다.

1. 2계명과 4계명
하나님께서는 이제까지 모세를 통해 모든 규례와 법도를 다 말씀해주셨는데, 상벌규정을 말씀하시기에 앞서서 대표적인 계명 두 가지를 다시금 명하십니다. 사도바울이 빌립보서에서 말한 것처럼, 중요한 내용일 경우에는 반복해서 말하는 것이 말하는 자에게는 수고로움이 없고, 듣는 사람에게는 더욱 안전합니다(빌 3:1). 그러면 여기서 명해지는 계명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우상숭배 금지 계명(1,2계명)과 안식일 계명(4계명)입니다.
(1)너희는 자기를 위하여 우상을 만들지 말지니 목상이나 주상을 세우지 말며 너희 땅에 조각한 석상을 세우고 그에게 경배하지 말라 나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임이니라(2)너희는 나의 안식일을 지키며 나의 성소를 공경하라 나는 여호와니라
이것은 마치 부부가 결혼식을 해서 언약을 맺을 때, 혼인 서약하는 것과 비슷합니다. 남편에 대한 아내의 의무가 정말 많지만, 결혼식 할 때는 그 모든 의무를 다 언급하지 않고, 가장 중요한 것만 언급합니다. 그것은 바로 “정절을 지키면서 남편만을 사랑하고 공경하며, 남편만을 섬기면서 살겠느냐?” 하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은 우상숭배 피하고, 하나님을 경외하면서 하나님만을 예배하라고 지금 명하시는 것입니다.

축복(26:3-13)

1. 때에 맞는 비(3-5)


(3)너희가 나의 규례와 계명을 준행하면
(4)내가 너희 비를 그 시후에 주리니 땅은 그 산물을 내고 밭의 수목은 열매를 맺을지라
(5)너희의 타작은 포도 딸 때까지 미치며 너희의 포도 따는 것은 파종할 때까지 미치리니 너희가 음식을 배불리 먹고 너희 땅에 안전히 거하리라

4절에서 ‘시후’라는 말은 원어로 보면 ‘때’를 뜻하는 단어입니다.
곧 제때에 비를 내려주시겠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농사를 지을 때는 두 번의 비가 꼭 필요한데, 새로 파종하는 가을(10-11월)에 큰 비가 필요하고, 다 자란 곡식들이 풍성한 결실을 맺기 시작하는 늦겨울과 초봄(3-4월)에 약한 비가 필요합니다.
적절한 때에 내리는 적절한 강수량은 곡식의 품질과 생산량을 놀랄만하게 높이지만, 때에 맞지 않는 비는 도리어 아주 파괴적일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먼저 풍요와 번영을 허락해주십니다.

2. 평화(6-8)

(6)내가 그 땅에 평화를 줄 것인즉 너희가 누우나 너희를 두렵게 할 자가 없을 것이며 내가 사나운 짐승을 그 땅에서 제할 것이요 칼이 너희 땅에 두루 행하지 아니할 것이며
(7)너희가 대적을 쫓으리니 그들이 너희 앞에서 칼에 엎드러질 것이라
(8)너희 다섯이 백을 쫓고 너희 백이 만을 쫓으리니 너희 대적들이 너희 앞에서 칼에 엎드러질 것이며

두려움 없이 눕는다는 것은 사방이 트인 들판에서 아늑하고 안전하게 누워있는 그림을 연상시킵니다.
곧 온 땅에 약탈자들이 없고, 전쟁이 없게 해주시겠다는 것입니다.
사실 팔레스틴 땅은 지정학적으로 전쟁이 가장 많이 일어날 수밖에 없는 곳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모든 전쟁에서 승리하게 하시고 원수들이 망하게 하심으로써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평안히 누울 수 있도록 해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너희 다섯이 백을 이기고 백이 만을 이길 것이라고 약속하십니다.
전쟁의 용사이신 여호와께서 친히 싸우심으로 전세가 아무리 불리해도 절대로 지지 않는 것입니다.

3. 번성(9-10)

(9)내가 너희를 권고하여 나의 너희와 세운 언약을 이행하여 너희로 번성케 하고 너희로 창대케 할 것이며
(10)너희는 오래 두었던 묵은 곡식을 먹다가 새 곡식을 인하여 묵은 곡식을 치우게 될 것이며

“창대케 한다”는 단어도 수적 증가를 의미합니다.
이것은 아브라함 언약의 성취입니다.
그런데 옛말에 “자식 많이 낳으면 거지꼴 못 면한다.”는 말이 있죠.
그렇게 이스라엘 백성들이 자식을 많이 낳아서 번성하게 되면, 가난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열 명씩 스무 명씩 낳는데도 풍족합니다.
어느 정도로 풍족하냐 하면, 묵은 곡식이 계속 쌓여서 버리게 될 정도로 풍족한 것입니다.
참으로 놀라운 축복입니다.

4. 임재하심(11-13)

(11)내가 내 장막을 너희 중에 세우리니 내 마음이 너희를 싫어하지 아니할 것이며
(12)나는 너희 중에 행하여 너희 하나님이 되고 너희는 나의 백성이 될 것이니라
(13)나는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어 그 종된 것을 면케 한 너희 하나님 여호와라 내가 너희 멍에 빗장목을 깨뜨리고 너희로 바로 서서 걷게 하였느니라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잘 섬기고 계명을 잘 지키면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사랑하시고, 그들 가운데 장막을 세워 그들 가운데 거하실 것이라고 약속하십니다.
이것이 이스라엘이 받는 축복의 최고봉에 있는 것으로서 최상의 축복입니다.
너희 중에 행한다는 말은 동행한다는 뜻입니다.
에녹이 하나님과 함께 동행 하였던 것처럼, 하나님께서 친히 이스라엘과 동행하시며 그들과 교제 나누시고 그들을 인도하시며 보호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 언약의 목표가 성취될 것입니다.
언약의 목표는 바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되고,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바로 이 목표를 위해서 이스라엘을 애굽의 속박에서 건져내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들의 목에 있는 멍에와 굴레를 부수셨습니다.
‘멍에’는 황소의 등에 얹은 무거운 십자형 나무를 의미하는데, 황소에게 무거운 짐을 지우기 위한 것입니다.
노예들은 늘 무거운 짐을 날라야 하기 때문에 등이 휩니다.
그리고 주인 앞에서 굽신거려야 하기 때문에 결국 새우등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등과 목에 있는 멍에를 부수셔서 그들의 짐을 가볍게 하셨을 뿐만 아니라, 그들의 신분을 존귀케 하여 똑바로 서서 당당하게 걷도록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이러한 출애굽의 은혜를 다시금 상기시키시면서 그들로 하여금 이러한 축복의 약속을 받도록 계명을 지킬 것을 명하고 계신 것입니다.

이제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런 축복을 누릴 것인지 아니면 누리지 못할 것인지는 그들이 어떻게 하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만일 그들이 계명을 지키지 않고, 불순종한다면, 이런 축복들이 그들과 아무런 상관이 없게 될 것입니다. 축복을 못 받는 것은 둘째 치고 오히려 엄청난 저주를 받게 될 것입니다. 어떤 저주를 받게 되는지 이제 저주 단락을 살펴보겠습니다.

저주(詛呪)

저주단락은 축복단락과 대칭되면서도 독특한 특징이 있습니다.
먼저 양이 2배 이상 많습니다(신명기의 경우는 3배 이상 많습니다).
그리고 축복단락에서는 “너희가 순종하면”이라는 조건이 맨 앞에 한번만 나오지만, 저주단락에서는 처음에 “너희가 불순종하면”이라고 말할 뿐만 아니라, 새로운 저주단락이 시작될 때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만일 너희가 불순종하면(대항하면)...”의 표현이 반복됩니다(14, 15, 18, 21, 23, 27절).

저주가 다섯 가지인데, 그것이 축복의 경우처럼 동시적으로 한꺼번에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한 번에 하나씩 주어지고, 그 다음에 회개의 기회가 주어집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이 회개하지 않으면 점층적으로 그 강도와 잔혹성을 세게 하여 벌하시는 것입니다.
그것을 “너희 죄를 위해 너희를 칠 배나 더 징치하리라”라는 표현의 반복이 잘 보여줍니다(18, 21, 24, 28절).
7이라는 숫자는 완성, 또는 온전함을 의미하는데, 그러므로 일곱 배 강하게 재앙을 내리실 것이라는 말은 그들이 죄를 고집할 때 각각의 새로운 단계에서 징벌의 수위를 매번 파격적으로 끌어올리실 것이라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그러면 저주 단락이 어떻게 시작됩니까?
14절과 15절을 보십시오.
14절과 15절을 보면, 그들이 불순종하는 것이 무지나 연약함 때문에 그런 것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줍니다.
(14)그러나 너희가 내게 청종치 아니하여 이 모든 명령을 준행치 아니하며(15)나의 규례를 멸시하며 마음에 나의 법도를 싫어하여 나의

모든 계명을 준행치 아니하며 나의 언약을 배반할진대
여기서 ‘청종’이라는 단어는 그 말하는 사람을 존중하고, 그 말하는 내용의 중요성을 알고서 경청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청종치 아니한다는 것은 하나님을 무시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는 것을 말합니다.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그렇게 멸시하는 이유는 그 규례를 마음에서부터 싫어하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싫어한다’는 단어는 일반적으로 싫어하는 것을 의미하는 단어가 아니라, 성경에서 오직 9번만 사용된 아주 독특한 단어입니다(오늘 본문에서만 5번 쓰임).
이 단어는 “배설물로 취급하다.
싫어하거나 경멸하여 버리다.
낙태를 해버리다.”등의 의미를 가진 단어입니다. 마치 아주 철없는 아이들이 부모의 말을 잔소리로 여겨서 그 잔소리를 들을 때 그 말을 매우 싫어해서, 부모에게 대항하고 달려들듯이, 그렇게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규례와 명령을 싫어하고 듣기를 거부하며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는 것은 곧 언약을 배반하는 것입니다.
부부가 서로만을 사랑하고 서로의 의무를 다하기로 서약했는데, 이 여자가 다른 남자와 바람을 피우게 되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남편이 얼마나 그 아내에 대하여 진노하며 분노하겠습니까? 특히 이스라엘은 그냥 아내가 아니라, 벌거벗겨진 채로 버려졌던 핏덩어리였는데, 하나님께서 데려다가 양육한 여자였습니다. 이제 어엿한 처녀가 되어서 처녀 이스라엘과 결혼 해주신 것인데, 이 여자가 그 은혜를 잊어버리고 다른 남자와 만난다면, 그것은 그냥 악한 것이 아니라, 아주 역겹고 배은망덕한 행위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언약을 배반한 것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어떻게 갚으십니까? 

26:16-17. 질병과 쇠약해짐, 전쟁에서 패배, 대적의 압제, 약탈을 당함

1. 놀라운 재앙(13-17)

‘놀라운 재앙’이란, 놀랍도록 엄청난 재앙이라는 뜻이 아니라, 느닷없이 갑작스러운 재앙이라는 것입니다. 재앙은 예고 없이 옵니다. “평안하다, 평안하다” 할 때에 갑작스럽게 임하는 것입니다(살전 5:3). 그렇기 때문에 이 재앙이 더욱 무서운 것입니다. 그 재앙은 바로 질병과 쇠잔하게 되는 것입니다. 언급되는 질병은 폐병, 열병, 시력감퇴질병(백내장, 녹내장), 식욕상실 & 기력쇠진의 질병입니다. 한두 명이 이렇게 되는 것이 아니라 민족적으로 이렇게 되면... 국가 전체가 쇠약해져서 결국 대적들의 밥이 되고 말 것입니다. 여호와의 보호막이 걷혀지게 되자, 이스라엘은 적들에게 두들겨 맞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파종을 열심히 해도, 대적들의 약탈로 인해서 그것을 얻지 못하게 되는 것이죠. 대적에게 패하고, 대적들의 압제 하에 있게 되고, 얼마나 마음이 약해지고 두려움에 사로잡혔는지 쫓는 자가 없어도 도망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언약적 저주가 이스라엘의 역사 가운데 그대로 성취가 되었습니다.

”(13)곧 그들이 여호와를 버리고 바알과 아스다롯을 섬겼으므로(14)여호와께서 이스라엘에게 진노하사 노략하는 자의 손에 붙여 그 들로 노략을 당케 하시며 또 사방 모든 대적의 손에 파시매 그들이 다시는 대적을 당치 못하였으며(15)그들이 어디를 가든지 여호와의 손이 그들에게 재앙을 내리시매 곧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것과 같고 여호와께서 그들에게 맹세하신 것과 같아서 그들의 괴로움이 심하였더라”(삿 2:13-14)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자마자 타락했는데,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범죄 할 때마다 대적에게 패하게 하시고 압제 당하게 하시고 약탈을 당하게 하셨던 것입니다.


2. 극심한 흉년(18-20)

이스라엘이 이런 비참한 처지에 있게 되었으면 응당 회개해야 할 것인데, 이스라엘이 회개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재앙의 강도를 일곱 배나 높이시는 것입니다. 18절부터 보시면...
(18)너희가 그렇게 되어도 내게 청종치 아니하면 너희 죄를 인하여 내가 너희를 칠배나 더 징치할지라(19)내가 너희의 세력을 인한 교만을 꺾고 너희 하늘로 철과 같게 하며 너희 땅으로 놋과 같게 하리니(20)너희 수고가 헛될지라 땅은 그 산물을 내지 아니하고 땅의 나무는 그 열매를 맺지 아니하리라
하나님은 벌을 칠 배나 더하시는데, 두 번째 저주의 내용은 바로 흉년의 재앙입니다. 그것은 19절에 보는 것처럼 그들의 세력으로 인한 교만을 꺾으시기 위한 하나의 방편입니다. 풍년으로 나라가 부요하게 되고, 군사력이 강하게 되면, 교만하게 됩니다. 하나님은 그러한 교만을 처참하게 깨트리시는데 그들이 누리던 풍요와 번영을 치심으로써 깨트리시는 것입니다. 하늘이 철과 같이 되고 땅이 놋과 같게 되면 농사가 도무지 되지가 않습니다. 하늘은 비를 내리지 않을 것이고 땅은 식물을 내지 않을 것입니다. 가난과 배고픔이 있으며 나라의 경제가 마비될 것입니다.
이 재앙도 이스라엘 역사 속에서 그대로 성취가 되었습니다. 엘리야가 아합 왕에게 흉년을 선언하자 삼년 6개월 동안 비가 오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이 흉년이 얼마나 극심했는지 엘리야를 섬긴 사르밧 과부는 이렇게 얘기했습니다.
“(12)저가 가로되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의 사심을 가리켜 맹세하노니 나는 떡이 없고 다만 통에 가루 한 움큼과 병에 기름 조금 뿐이라 내가 나무가지 두엇을 주워다가 나와 내 아들을 위하여 음식을 만들어 먹고 그 후에는 죽으리라”(왕상 17:12)
물론 사르밧 과부는 하나님의 은혜로 양식을 공급받아 살 수 있었지만, 아마 대부분의 이스라엘 백성들은 굶주림으로 죽어나갔을 것입니다. 이렇게 엄청난 재앙을 당했으면 이제는 회개해야 하는데, 이스라엘이 고집을 부립니다.

3. 들짐승 재앙(21-22)


(21)너희가 나를 거스려 내게 청종치 않을진대 내가 너희 죄대로 너희에게 칠배나 더 재앙을 내릴 것이라
(22)내가 들짐승을 너희 중에 보내리니 그것들이 너희 자녀를 움키고 너희 육축을 멸하며 너희 수효를 감소케 할지라 너희 도로가 황폐하리라

입니다. 우리는 동물원에서 사자나 곰과 같은 야생동물을 보기 때문에 이 재앙이 얼마나 무서운 재앙인지 잘 모릅니다. 그러나 사자나 곰과 같은 아주 위험한 짐승들이 온 마을에 창궐해서 돌아다닌다고 생각해보십시오. 그것이 얼마나 끔찍한 재앙이 되겠습니까? 아마 이스라엘 백성들은 야생짐승들로 인해서 공포에 떨게 될 것입니다. 특히 아이들과 노인들이 수시로 찢겨죽는 일이 발생하여 인구가 대폭적으로 감소하게 될 것이고, 가축들 같은 경우는 아예 씨가 마를 정도로 다 잡아먹히게 될 것입니다. 생존자들은 집밖을 나가는 것을 무서워하기 때문에 길에 사람이 없어 황량하게 될 것입니다.
이런 무서운 재앙을 이 율법을 받는 1세대 이스라엘 백성들이 친히 경험하였던 것입니다. 그들이 광야 길에서 고생함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불평했을 때, 하나님은 그들에게 불뱀을 보내셔서 많은 사람들이 물려죽게 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이스라엘 역사 가운데서도 간헐적으로 야생동물의 재앙을 내리셔서 그들을 징치하셨습니다(왕하 2:24, 17:25-26). 그런데도 이스라엘이 고집을 부리면 이제 어떤 재앙이 임합니까? 네 번째 저주가 임합니다.


4.
도륙, 염병, 극심한 식량난(23-26)


(23)이런 일을 당하여도 너희가 내게로 돌아오지 아니하고 나를 대항할진대
(24)나 곧 나도 너희에게 대항하여 너희 죄를 인하여 너희를 칠배나 더 칠지라
(25)내가 칼을 너희에게로 가져다가 너희의 배약한 원수를 갚을 것이며 너희가 성읍에 모일지라도 너희 중에 염병을 보내고 너희를 대적의 손에 붙일 것이며
(26)내가 너희 의뢰하는 양식을 끊을 때에 열 여인이 한 화덕에서 너희 떡을 구워 저울에 달아 주리니 너희가 먹어도 배부르지 아니 하리라

네 번째 묶음의 저주에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대적하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하나님을 대적했기 때문입니다. 25절에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자신의 원수라고 이야기하십니다. 왜냐하면 언약을 배반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30절에 보면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싫어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왜냐하면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율법을 싫어하였기 때문입니다(레 26:15). 참으로 하나님은 사람이 자기에게 행한 대로 갚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자기를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시고, 자기를 간절히 찾는 자에게 만나주십니다. 반대로 자기를 멸시하는 자를 멸시하시고, 자기를 미워하는 자를 미워하시고, 자기를 대적하는 자를 대적하십니다. 이것은 인격과 인격 사이에 항상 있게 되는 원리인 것입니다. 물론 이런 원리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가 먼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고,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자기 아들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심으로 우리에게 대한 자기 사랑을 확증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사랑은 무조건적이고 영원히 변함이 없는 사랑입니다. 그런데 이것을 오해해서 죄를 지으면서 살아도 예수의 공로 때문에 하나님이 자기를 향해서 사랑의 미소를 짓고 계실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하나님의 인격을 무시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자식이 담배 피다 아버지에게 걸렸는데 아버지의 사랑은 무조건적이고 변함이 없다는 사실을 근거로 해서 아버지가 나를 향해 사랑스러운 미소를 지으면서 자기를 안아줄 것을 기대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것은 아버지의 인격을 무시하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라도 악하게 죄를 범할 때 하나님은 우리를 향해 진노하시고 미운 감정을 나타내시고 교만한 우리를 물리치십니다(약 4:6-10). 그러나 우리가 우리 죄의 악함을 깨닫고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으로 회개한다면, 하나님은 자비와 은혜를 베풀어주실 것입니다.

다시 본문을 돌아와서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대적했을 때 하나님께서도 이스라엘을 대적하시고 그들에게 재앙을 내리십니다. 하나님께서 네 번째로 내리시는 저주는 칼입니다. 이것은 전쟁의 패배로 군인들만 도륙당하는 것이 아니라, 민간인들도 칼로 도륙당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은 이 칼로 배약한 원수를 갚겠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면 백성들은 전쟁에 대한 두려움으로 시골을 떠나 성읍 안으로 가서 안전을 확보하려고 할 것인데, 하나님은 그때 역병이 돌게 하셔서 성읍 안에서 죽게 하시고, 결국 대적에게 점령당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치시고자 하시면 피할 길이 없습니다. 어떠한 대책과 방도도 다 소용이 없습니다(계 6:15). 그리고 그들이 의뢰하는 양식의 지팡이를 끊으실 것입니다. 얼마나 양식이 핍절한지 열 명의 여인에게 양식을 배급하는데, 그 열 명의 여인에게 돌아간 양식의 양이 한 솥에 다 찔 수 있을 만큼 아주 작은 양인 것입니다. 그러니 늘 배고플 수밖에 없죠. 그런데도 회개하지 않으면 이제 마지막 재앙이 내려질 것입니다. 이것은 모든 재앙의 절정에 해당하는 것으로서 그 잔혹성과 비참함을 이루 말할 수 없습니다.



5.
자식을 고기로 먹음, 우상과 함께 파멸됨, 대적의 포로로 잡혀감, 대적의 땅에서 칼로 도륙 당함(27-39)

(27)너희가 이같이 될지라도 내게 청종치 아니하고 내게 대항할진대
(28)내가 진노로 너희에게 대항하되 너희 죄를 인하여 칠배나 더 징책하리니
(29)너희가 아들의 고기를 먹을 것이요 딸의 고기를 먹을 것이며

극심한 기근이나 대적에게 둘러싸여 양식이 전혀 없게 되어졌을 때, 부모가 자식을 죽여서 그 자식을 양식으로 먹는 일이 있게 됩니다(신 28:53-57).
이것이 얼마나 충격적인 일입니까?
우리가 어머니 사랑하면... 너무 아름답고 감동적인 것이어서, “하늘 아래 그 무엇이 높다 하리요 어머님의 은혜는 가이 없어라”라고 노래하는 것인데, 여기서는 어머니가 자기 살겠다고 자식을 죽여서 고기로 먹게 되는 일이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인간의 존엄성마저 완전히 상실한 모습입니다.
신명기 말씀을 보면 그 어머니가 자기 자식을 먹는데, 다른 사람에게 뺏길까봐 심지어 자기 가족들에게도 뺏기지 않으려고 몰래 먹게 된다고까지 언급합니다.
이것보다 더 끔찍하고 충격적인 일이 어디 있습니까?
그런데 이것이 이스라엘 역사 속에서 그대로 성취가 되었던 것입니다.

“(26)이스라엘 왕이 성 위로 통과할 때에 한 여인이 외쳐 가로되 나의 주 왕이여 도우소서(27)왕이 가로되 여호와께서 너를 돕지 아니하시면 내가 무엇으로 너를 도우랴 타작마당으로 말미암아 하겠느냐 포도주 틀로 말미암아 하겠느냐(28)또 가로되 무슨 일이냐 여인이 대답하되 이 여인이 내게 이르기를 네 아들을 내라 우리가 오늘날 먹고 내일은 내 아들을 먹자 하매(29)우리가 드디어 내 아들을 삶아 먹었더니 이튿날에 내가 이르되 네 아들을 내라 우리가 먹으리라 하나 저가 그 아들을 숨겼나이다(30)왕이 그 여인의 말을 듣고 자기 옷을 찢으니라 저가 성 위로 지나갈 때에 백성이 본즉 그 속살에 굵은 베를 입었더라”(왕하 6:26-29)

그리고 이 일은 바벨론에 의해 예루살렘이 함락될 때도 일어났습니다(애 2:20, 4:10).
그러나 이것으로 끝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이런 끔찍한 일을 당하게 하신 뒤에 그들을 우상과 함께 죽이십니다.

(30)내가 너희의 산당을 헐며 너희의 태양 주상을 찍어 넘기며 너희 시체를 파상한 우상 위에 던지고 내 마음이 너희를 싫어할 것이며
여기서 “파상한 우상”은 원어로 보면 ‘우상의 시체’라는 뜻입니다. 즉 우상의 시체위에 이스라엘 백성들의 시체를 던지신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분노한 남편이 간음을 행한 아내와 그 간부를 함께 죽이는 것과 같은 맥락에 있는 것입니다. 뿐만 아닙니다. 31절부터 보시면...
(31)내가 너희 성읍으로 황폐케 하고 너희 성소들로 황량케 할 것이요 너희의 향기로운 향을 흠향치 아니하고(32)그 땅을 황무케 하리니 거기 거하는 너희 대적들이 그것을 인하여 놀랄 것이며(33)내가 너희를 열방 중에 흩을 것이요 내가 칼을 빼어 너희를 따르게 하리니 너희의 땅이 황무하며 너희의 성읍이 황폐하리라 ... (36)너희 남은 자에게는 그 대적의 땅에서 내가 그들의 마음으로 약하게 하리니 그들은 바람에 불린 잎사귀 소리에도 놀라 도망하기를 칼을 피하여 도망하듯 할 것이요 쫓는 자가 없어도 엎드러질 것이라(37)그들은 쫓는 자가 없어도 칼 앞에 있음 같이 서로 천답하여 넘어지리니 너희가 대적을 당할 힘이 없을 것이요(38)너희가 열방 중에서 망하리니 너희 대적의 땅이 너희를 삼킬 것이라(39)너희 남은 자가 너희 대적의 땅에서 자기의 죄로 인하여 쇠잔하며 그 열조의 죄로 인하여 그 열조 같이 쇠잔하리라

하나님께서는 그들로 대적들의 포로가 되게 하실 것입니다.
즉 이스라엘 가운데 대부분은 굶어죽거나 칼에 도륙당해 죽을 것이고 일부 생존자들은 포로로 잡혀가며 예루살렘 성전은 파괴되어 더 이상 제사를 드릴 수 없게 되고, 성읍은 사람이 살 수 없는 곳처럼 황폐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대적의 땅에서도 칼이 끊임없이 따르게 하셔서 끔찍한 살육 당하게끔 하실 것이고, 몸과 마음이 지속적으로 쇠잔하게 될 것입니다.
참으로 끔찍한 재앙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런데 34-35절에 다음을 말씀하십니다.

(34)너희가 대적의 땅에 거할 동안에 너희 본토가 황무할 것이므로 땅이 안식을 누릴 것이라 그 때에 땅이 쉬어 안식을 누리리니
(35)너희가 그 땅에 거한 동안 너희 안식시에 쉼을 얻지 못하던 땅이 그 황무할 동안에는 쉬리라

하나님은 갑자기 땅의 안식을 언급하십니다.
이 말씀은 두 가지를 보여주는데, 첫째는 그동안 이스라엘 백성들이 얼마나 땅을 혹사시키면서 욕심대로 살았는지를 증거 해줍니다.
그러므로 땅의 주인이신 여호와께서 악한 청지기를 쫓아내시고, 땅으로 하여금 그동안 혹사당한 것에 대한 보상을 한꺼번에 받도록 하십니다. 땅은 안식을 누리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은 대적의 땅에서 고통을 당하며 점차로 소멸될 것입니다.

그런데 한편으로 이것은 회복의 메시지도 전해줍니다. 왜냐하면 이스라엘의 포로기간이 바로 땅의 밀린 안식년 기간만큼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즉 490년 동안 70번의 안식년을 안 지켰으므로 그들의 포로 기간이 70년으로 한정되었던 것입니다.
어쨌든 중요한 것은 본문에서 열거된 무시무시한 재앙들이 이스라엘 역사 속에서 그대로 성취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불순종함으로 말미암아 BC 586년에 예루살렘이 함락되고 수없이 많은 사람들이 살육을 당했으며, 예루살렘 성전이 파괴되고 그 남은 자들은 바벨론 포로로 잡혀갔습니다. 이 형벌이 어찌나 극심했는지 예레미야는 다음과 같이 애가를 지어 노래했습니다.
“(20)여호와여 감찰하소서 뉘게 이같이 행하셨는지요 여인들이 어찌 자기 열매 곧 손에 받든 아이를 먹으오며 제사장들과 선지자들이 어찌 주의 성소에서 살륙을 당하오리이까(21)노유는 다 길바닥에 엎드러졌사오며 내 처녀들과 소년들이 칼에 죽었나이다 주께서 진노하신 날에 죽이시되 긍휼히 여기지 아니 하시고 살륙하셨나이다(22)주께서 내 두려운 일을 사방에서 부르시기를 절기에 무리를 부름 같이 하셨나이다 여호와께서 진노하신 날에 피하거나 남은 자가 없었나이다 내 손에 받들어 기르는 자를 내 원수가 다 멸하였나이다”(애 2:20-22)

적용

이스라엘의 멸망은 두 가지를 보여줍니다.

첫째는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가 어떠한지, 언약을 배반한 죄인들을 향한 여호와의 질투와 복수심이 어떠한지를 분명히 보여줍니다.

이스라엘이 받은 끔찍한 저주들은 지옥형벌의 그림자요 모형입니다.
참으로 하나님은 예수님을 믿지 않고 회개하지 아니한 모든 사람들에게 여기 기록된 형벌보다 더 끔찍한 형벌을 내리실 것입니다.

둘째로 이스라엘의 멸망은 하나님이 언약에 신실하신 하나님이심을 보여줍니다.

이 언약에는 언약적 저주도 포함됩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겁만 주시는 것이 아니라, 말씀하신 모든 재앙을 다 이스라엘에게 내리셨던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은 오늘날 우리에게 재림의 때를 약속하시고 최후의 심판과 지옥형벌에 대해 경고하셨습니다. 그것은 겁주시는 것이 아니라, 때가 되면 반드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때가 악하기 때문에, 우리는 구원의 기회가 있는 오늘 하루 동안 참되게 회개하며 예수를 믿고, 믿음으로 이 세상을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사도바울은 이스라엘의 멸망의 역사는 말세를 만난 우리에게 경계로 기록된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이렇게 죄에 대해서 진노하시고 잔혹하게 복수하시는 하나님, 질투하심으로 원수를 갚으시는 하나님이 바로 우리가 섬기는 하나님이십니다. 구약에만 이런 하나님이고 신약에 와서는 용서와 사랑과 자비의 하나님으로 바뀌신 것이 아닌 것입니다. 하나님은 소멸하는 불이시고, 질투하시는 하나님이시라는 표현이 신약성경에서도 나옵니다. 여전히 두렵고 엄위하신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성령이 시기하기까지 우리를 사모하신다는 말씀을 허투루 들으면 안 됩니다.

우리는 그러므로 깨어 정신을 차리고 하나님을 두려워해야 합니다. 죄가 얼마나 심각한 것인지 깨달아야 하며, 죄와 싸우는 삶을 살아야 하고, 죄 가운데 있다면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으로 회개해야 합니다. 그러나 두려움으로 복종할 뿐만 아니라, 더더욱 이러한 우리의 죄에 대한 무한한 분노와 복수를 우리대신 예수 그리스도께 쏟아 부으셨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래서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그 끔직한 고통을 당하셔서 우리를 율법의 저주에서 속량해주셨음을 알고, 그 십자가의 은혜를 깨닫고 믿고 의지해야 합니다. 그래서 그 은혜 안에서 우리의 정과 욕심을 못 박고 더욱 감사와 사랑으로 하나님께 복종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재앙들이 그들에게 미치게 되는 것입니다. 특히 마지막 재앙은 그 잔혹성이 이루 말 할 수 없을 만큼의 엄청난 재앙입니다.

축복과 저주의 말씀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그리고 오늘날 우리들에게 교훈하는 바가 무엇입니까?

가. 계명 순종을 장려하기 위한 방편

첫째로 이 규정들은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계명을 순종하도록 장려하기 위한 도구인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러한 축복과 저주의 말씀을 들었을 때, 그들이 무엇을 느꼈겠습니까? 아마도 그들은 즉시로 모세를 통해서 주신 이 율법의 규례들이 얼마나 엄중한 말씀이며 심각한 말씀인가 하는 것을 깨닫게 되었을 것입니다. 축복을 들으면서 “정말 순종하면서 살아서 복을 받아야 되겠구나” 하는 것을 생각하게 되었을 것이고, 저주에 관한 내용을 들으면서 (정신이 바짝 들어서) “정말 계명을 어기면서 살면 끝장이구나...”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을 것입니다. 결국 법에 처벌규정이 있는 것은 처벌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사람들로 하여금 처벌에 대한 두려움을 느끼게 하여 그들로 법을 지키며 살도록 하는데 목적이 있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궁극적으로 하고자 하시는 말씀은 “그렇기 때문에 너희가 나의 규례와 법도를 청종하고 순종하면서 살아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내용은 오늘날 우리들에게도 동일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신약의 성도들에게도 순종을 장려하시기 위해서 이러한 방법을 동일하게 사용하십니다. 신약에도 상급에 대한 약속의 말씀, 그리고 불순종에 대한 경고의 말씀이 많이 나옵니다(마 5:11-12, 딤후 4:7-8, 빌 3:14, 갈 6:7-8, 엡 5:5-7).
“(7)땅이 그 위에 자주 내리는 비를 흡수하여 밭 가는 자들의 쓰기에 합당한 채소를 내면 하나님께 복을 받고(8)만일 가시와 엉겅퀴를 내면 버림을 당하고 저주함에 가까와 그 마지막은 불사름이 되리라”(히 6:7-8)
이것은 행위구원론을 말하려는 것이 아니라, 순종하면 복을 받고 상급을 받지만, 불순종하고 죄를 고집하면 결국 저주를 받고 망하게 될 것이라고 경고하심으로써 우리로 하여금 성화의 삶을 지속적으로 살아가도록 독려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축복과 저주의 말씀에 있어서 구약과 신약의 근본적인 차이점이 있습니다.
그것은 축복과 저주의 차원이 다르다는 것입니다. 우선 구약에서 약속된 복은 이 땅에서의 풍요와 번영입니다. 그러나 신약에서 약속된 복은 다른 복입니다. 그런데 많은 목회자들이 그것을 모르고 레위기나 신명기의 축복과 관련된 말씀을 그대로 가져와서 오늘날 우리들에게도 적용하는 경우가 많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 잘 믿고, 주일성수 잘하고, 십일조 잘하면, “들어가도 복 받고 나가도 복 받고... 건강하고 사업 잘되고 자식 좋은 대학가고...” 등등의 말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큰 착각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 나라의 가시적인 모형이기 때문에 하나님 나라의 영적인 축복과 행복을 이 땅의 가시적이고 물질적인 풍요와 번영으로 표현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구약의 교회는 구속사적으로 보면 아직 어린 교회입니다. 그래서 율법을 초등학문이라고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어린 아이들에게는 어린 아이들에게 맞는 교육방법이 있습니다. 우리가 작은 아이들에게 “말 잘 들으면 돈 100만원 줄게”라고 말하면 통하질 않습니다. 오히려 아이들에게 “말 잘 들으면 마이쭈 사주고, 말 안 들으면 맴매 맞는다.”라고 말하면 통합니다. 반대로 어른들에게 “마이쭈 사줄 테니 내가 시키는 대로 하라...” 그러면 그것은 상대방을 우롱하는 것이 됩니다. 신약교회는 예수님 잘 믿으면 이 땅에서 건강해지고 부자가 된다는 이야기를 들으면... 그런 사탕발린 복음을 들으면... 화가 나야 합니다.
그러므로 신약교회가 이런 본문을 문자 그대로 취하여 받아들이면 곤란합니다. 신약의 장성한 교회는 이제 알 거 다 아는 그런 나이가 되었기 때문에 그런 저급한 것보다 한 차원 높은 것 그리고 궁극적 차원의 복을 추구하는 것입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오늘날에는 물질적이고 가시적인 복이 전혀 없다고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가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할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필요를 넘치게 채워주시는데, 그 채워주심도 바로 하나님이 주시는 복입니다. 다만 각 사람의 분수에 맞게 허락하시는데, 따라서 부해도 가난해도 신약의 성도들은 자기 형편에 얼마든지 자족하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신약의 성도들이 추구하는 궁극적인 복은 그런 세속적인 복이 아닙니다. 무엇이 우리에게 있어서 궁극적인 복입니까? 예수 그리스도 그분 자신이 우리의 상급이 되시고, 그분 안에서 주어진 구원이 최고의 상급이며, 그분 안에서 장차 주어질 하나님 나라가 우리에게는 최고의 상급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구약에서부터 이미 표현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축복의 끝, 축복의 절정에서 이미 하나님이 이 사실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신약의 성도들은 이 놀라운 복을 이 땅에서부터 이미 받아 누린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다 받은 것이 아니라, ‘아직 아니’의 측면이 있어서 장차 받게 될 부분이 있습니다. 그것은 “... 눈으로 보지 못하고 귀로도 듣지 못하고 사람의 마음으로도 생각지 못할” 그런 것입니다(고전 2:9). 그러므로 성도들은 이 복을 사모하면서 성화의 삶을 살아가며, 이 땅에서 어떠한 고난과 어려움이 임해도 인내해야 하는 것입니다.
나. 율법은 행위언약이다

둘째로 오늘 본문 말씀은 시내산 언약이 행위언약임을 분명히 보여줍니다. 마치 아담의 선악과 금령과 비슷합니다. 지키면 살고 어기면 죽습니다. 마찬가지로 이스라엘이 모든 율법을 온전히 지키면 살고, 또 많은 복을 받지만, 그러나 어기면 형벌을 받습니다. 죽임당하고 멸망당하는 것입니다. 그냥 죽이시는 것이 아니라 가장 잔혹하게 형벌하셔서 죽이십니다. 마지막 재앙에서 보는 것처럼 하나님은 자식을 고기로 먹게 하시고, 원수의 포로로 잡혀가서 온갖 고생하다가 거기서 칼에 도륙당해 죽게 하시는 것입니다. 특히 자식을 고기로 먹게 하시는 것은 완전히 인간됨을 상실하게 되는 처지로까지 떨어뜨리시는 것인데, 정말 충격적인 형벌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이러한 구약의 재앙은 구약의 복이 그러했던 것처럼 궁극적인 지옥형벌에 대한 서막이요 모형일 뿐입니다. 죄 가운데 있는 인생들에 대해 복수하시기 위해 하나님은 영원한 지옥형벌을 예비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오늘 본문을 통해서 바로 하나님 앞에서 짓는 죄가 얼마나 큰 죄이며 얼마나 큰 형벌이 있으며, 하나님 없이 죄 가운데 사는 것이 얼마나 비참한 인생인지를 분명히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참으로 이 행위언약 아래서 모든 인생들은 다 죽을 죄인으로 하나님 앞에 있는 것입니다. 율법을 지키면 복 받지만, 그러나 그것은 하나의 이상일 뿐 전적타락한 인간이 이 율법을 결코 지킬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율법은 이스라엘에게 주어졌지만, 사실상 모든 인류가 율법의 저주아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한편으로 이 율법을 통해서 사람들은 자신이 저주아래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는데, 사실 이것이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율법은 결국 율법의 몽학선생 역할을 위하여 주어진 것입니다. 율법은 우리를 저주아래 있게 하여 우리로 하여금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나아가게끔 합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 우리 대신 죄를 짊어지시고 십자가에서 율법의 저주를 다 당해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께서 우리 대신 율법의 모든 계명을 다 지켜순종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믿음으로 그리스도와 연합한 자는 값없이 죄사함을 받고 의롭다 함을 얻어 하나님이 약속하신 축복을 다 받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율법의 저주에서 속량하여 주심으로 이제 신약의 성도들은 법아래 있지 않고 은혜 아래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는 결코 정죄함이 없습니다.
그러면 은혜 아래 있으니 죄를 지어도 상관이 없습니까? 그럴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율법에서 해방되어 법 없는 자가 되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그리스도의 율법 아래 거하는 자가 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의 율법은 우리 마음에 새겨진 율법을 말합니다. 구약은 율법이 마음 밖에 명해집니다. 율법만 명해지고, 그것을 지킬 수 있는 성령의 은혜가 없습니다. 그러나 신약은 성령님의 은혜로 마음 안에 기록됩니다. 따라서 신약의 성도들은 성령에 의해 거룩하게 함을 입고, 마음에서부터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생겨나서 자원하여 기쁨으로 율법을 순종하며 살게 되는 것입니다.
물론 신약의 성도들도 때때로 계명을 어기며 죄를 지을 때가 있습니다. 그렇게 죄를 지을 때 하나님은 우리를 향해 노하시고, 또 친히 징계하시는 것입니다. 마치 부모가 자식을 징계하듯이 그렇게 징계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은혜언약인데, 이러한 은혜언약이 오늘본문에서도 잘 나타나는 것입니다.

다. 상벌 규정에 나타난 하나님의 은혜 - 회개를 위한 징계

셋째로 이스라엘과 하나님이 맺은 언약은 근본적으로 은혜언약이라는 사실을 오늘 본문이 잘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들은 어린양의 피로 이미 구원받았고, 율법은 감사의 규범으로서 주어진 것입니다. 그리고 이스라엘이 불순종할 때 내리시는 저주는 결국 징계인 것입니다.
“(18)너희가 그렇게 되어도 내게 청종치 아니하면 너희 죄를 인하여 내가 너희를 칠배나 더 징치할지라”(레 26:18)
여기서 ‘징치한다’는 말은 ‘징계하다, 훈육하다’라는 말입니다. 하나님이 내리시는 언약적 저주들이 처벌 그 자체를 목적으로 하는 형벌이 아니라, 그들로 회개하여 돌이키도록 하기 위한 징계라는 것입니다. 만일 이 저주들이 처벌을 목적으로 했다면, 불순종한 즉시로 모두 진멸 당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당장에 다 진멸하지 않으시고, 매 단계마다 회개의 기회를 주시고, 또 남은 자를 두시고 회개할 때까지 징계하시는 것입니다. 물론 이스라엘이 징계를 받고서도 죄를 고집하게 된다면 하나님께서는 더 세게 징계하실 것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도 고집보다 하나님의 고집이 더 세기 때문에 이스라엘은 그 하나님 앞에 항복할 수밖에 없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열거되는 저주들이 과연 징계가 맞나 싶을 정도로 너무나 혹독하고 잔혹하지만, 그러나 우리는 여기서 “하나님이 너무 가혹하게 징계하신다”라고 생각할 것이 아니라, 이렇게까지 코너로 몰지 않으면 도무지 회개할 생각을 하지 않는 이스라엘의 완악함과 강퍅함에 놀라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러한 사실을 생각하면서 오늘 본문 말씀이 곧 우리를 향한 말씀이라는 것을 깨달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자녀로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우리가 죄를 범하면 그 죄에 대해서 징계하시는 것입니다. 징계하실 때는 아주 뼈아픈 징계를 내리시는 것입니다. 건강을 치시기도 하시고, 사업이 망하게 하기도 하시고, 여러 가지 사건과 사고로 어려움에 처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때로는 영적으로 침체에 빠진 상태에서 하나님의 사랑스러운 얼굴을 가리시고 진노와 미움의 얼굴을 대하게 하셔서 짓이기는 고통을 당하게도 하십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향해서 자신의 원수라고 호칭하시고 그들을 싫어하신다고까지 말씀하셨습니다. 그것이 사랑의 징계이고, 미워하는 것이 하나님의 본심이 아니지만, 그러나 그렇게까지 하지 않으면 우리가 도무지 회개할 생각을 하지 않기 때문에 혹독하게 우리를 징계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징계를 받을 때 그 징계를 경홀히 여겨서도 안 되고, 또 그 징계로 낙심하여 절망에 빠져서도 안 됩니다. 아이들이 부모에게 매를 맞았을 때 울면서 다시 부모 품에 안기려고 나아오는 것처럼 그렇게 주님 품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언약을 배반하고 불순종하게 될 때 받게 되는 저주와 형벌은 하나님을 떠난 인간의 비참한 삶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며, 궁극적으로 지옥의 형벌을 예표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행위언약적인 측면에서 볼 때 이 본문에 대한 바른 해석입니다. 그러나 본문을 그렇게만 볼 수 없고, 한편으로 은혜언약적인 측면에서 볼 때 이 언약적 축복과 저주의 본문은 순종을 권장하기 위한 목적의 말씀이며, 또한 언약적 저주조차도 하나님의 사랑의 징계라고 하는 것을 생각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이 상반되는 것 같은 두 가지 측면을 공히 강조하면서 봐야지, 한쪽만 말하거나 두 가지를 섞어버리거나 하면 굉장히 이상한 해석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1. 축복의 성취

그러면 저주 단락을 배우기 앞서서 지난주에 배운 축복의 말씀이 이스라엘 역사 가운데 어떻게 성취되는지 먼저 살펴보겠습니다. 축복이 이스라엘 역사 가운데서 성취되었다는 것이 놀라운 은혜인데, 왜냐하면 전적타락한 인간은 율법을 지킬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이스라엘 백성들은 가나안 땅에 들어가자마자 곧바로 타락해버렸고, 언약을 배반하여 우상을 숭배하였습니다. 그래서 그들에게 언약적 저주가 다 임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들에게 언약적 저주만 임하고 축복은 하나도 못 받았습니까? 그것이 아니라, 다윗과 솔로몬을 통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은혜로 이 축복을 경험합니다. 왕 한 사람의 경건과 순종함을 통해서 온 이스라엘이 축복을 받는 것입니다.
전쟁에서의 승리 - “다메섹 아람에 수비대를 두매 아람 사람이 다윗의 종이 되어 조공을 바치니라 다윗이 어디를 가든지 여호와께서 이기게 하시니라”(삼하 8:6)

평화 - “(24)솔로몬이 하수 이편을 딥사에서부터 가사까지 모두 다스리므로 하수 이편의 모든 왕이 다 관할한바 되매 저가 사방에 둘린 민족과 평화가 있었으니(25)솔로몬의 사는 동안에 유다와 이스라엘이 단에서부터 브엘세바에 이르기까지 각기 포도나무 아래와 무화과나무 아래서 안연히 살았더라”(왕상 4:24-25)

번성 - “유다와 이스라엘의 인구가 바닷가의 모래 같이 많게 되매 먹고 마시며 즐거워하였으며”(왕상 4:20)

풍요 - “왕이 예루살렘에서 은을 돌 같이 흔하게 하고 백향목을 평지의 뽕나무 같이 많게 하였더라”(왕상 10:27)

성전건축 - “(10)제사장이 성소에서 나올 때에 구름이 여호와의 전에 가득하매(11)제사장이 그 구름으로 인하여 능히 서서 섬기지 못하였으니 이는 여호와의 영광이 여호와의 전에 가득함이었더라(12)그 때에 솔로몬이 가로되 여호와께서 캄캄한데 계시겠다 말씀하셨사오나(13)내가 참으로 주를 위하여 계실 전을 건축하였사오니 주께서 영원히 거하실 처소로소이다 하고”(왕상 8:10-13)

솔로몬의 고백 - “여호와를 찬송할지로다 저가 무릇 허하신 대로 그 백성 이스라엘에게 태평을 주셨으니 그 종 모세를 빙자하여 무릇 허하신 그 선한 말씀이 하나도 이루지 않음이 없도다”(왕상 8:56)

물론 이런 평화와 번영은 그리 오래가지 못했습니다. 왜냐하면 결국 다윗도 솔로몬도 허물과 약점이 있는 자들이었기 때문입니다. 더욱이 다윗과 솔로몬은 그나마 괜찮은 왕이었지만, 대부분의 왕들은 앞서서 언약을 배반하고 우상숭배했습니다. 이스라엘이 사느냐 죽느냐 하는 것이 사실상 그들의 왕이 어떤 사람이냐 하는 것에 달려 있는 것인데, 왕들이 앞서서 우상숭배하니 그 결말은 안 봐도 비디오인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이 약속하신 축복의 궁극적인 성취는 보통 인간 왕을 통해서는 이루어질 수가 없는 것입니다. 오직 참 신이시오 참 사람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이루어질 수 있는 것입니다. 다윗과 솔로몬은 바로 이 그리스도의 모형이요 그림자였습니다.
“(24)내 종 다윗이 그들의 왕이 되리니 그들에게 다 한 목자가 있을 것이라 그들이 내 규례를 준행하고 내 율례를 지켜 행하며(25)내가 내 종 야곱에게 준 땅 곧 그 열조가 거하던 땅에 그들이 거하되 그들과 그 자자손손이 영원히 거기 거할 것이요 내 종 다윗이 영원히 그 왕이 되리라(26)내가 그들과 화평의 언약을 세워서 영원한 언약이 되게 하고 또 그들을 견고하고 번성케 하며 내 성소를 그 가운데 세워서 영원히 이르게 하리니(27)내 처소가 그들의 가운데 있을 것이며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 백성이 되리라”(겔 37:24-27)
바로 다윗의 이름으로 오시는 한 사람 예수 그리스도께서 율법의 저주를 다 받으심으로 율법의 저주 아래 있는 우리를 속량하시고, 한 사람 예수 그리스도의 온전히 순종하심으로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된 것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는 결코 정죄함이 없고, 그리스도에게 허락된 모든 언약적 축복을 그리스도와 함께 받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를 믿었으면 이 땅에서부터 하나님 나라의 행복을 미리 받아 누립니다. 그래서 성도의 육신은 고난으로 말미암아 점점 후패해갈지라도 성도의 마음속에는 세상이 줄 수 없는 평안과 기쁨이 있고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땅에서 누리는 것은 하나님이 약속하신 축복의 극히 일부분에 불과합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고자 예비하신 축복은 눈으로도 보지 못했고, 귀로도 들어보지 못했고, 사람의 생각으로도 상상하지 못했던 놀라운 축복입니다. 이 궁극적인 축복의 성취는 주님의 재림의 때에 이루어집니다.

“(2)또 내가 보매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이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니 그 예비한 것이 신부가 남편을 위하여 단장한 것 같더라(3)내가 들으니 보좌에서 큰 음성이 나서 가로되 보라 하나님의 장막이 사람들과 함께 있으매 하나님이 저희와 함께 거하시리니 저희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은 친히 저희와 함께 계셔서(4)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씻기시매 다시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계 21:2-4)
이때는 영육간의 완전한 풍요와 번영이 있게 됩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셔서 언약의 목적인 “너는 내 백성이 되고, 나는 너희 하나님이 되리라”는 목적을 성취하시는 것입니다. 이 모든 은혜가 그리스도 안에서 주어집니다.
그러므로 신약의 성도들에게 있어서 복을 받을 것이냐 저주를 받을 것이냐, 사느냐 죽느냐의 문제는 율법을 준행하느냐 준행하지 않느냐에 달려있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믿어 그분과 연합하느냐, 아니면 믿지 아니함으로 그분밖에 있느냐 하는 것에 달려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행함으로 의롭다 함을 받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은혜로 의롭다 함을 받습니다.
우리가 믿음에 있는지, 우리가 그리스도와 연합하였는지 우리 자신을 돌아보아야 합니다. 그리스도께 우리 안에 계심을 스스로 알고 깨닫고 느끼지 못한다면 우리는 버리운 자입니다(고후 13:5).
그러면 본격적으로 오늘 본문을 살펴보겠습니다. 만일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계명의 말씀을 준행하지 않는다면 다섯가지 묶음의 저주가 임하게 됩니다. 16절부터 보시면...
2. 첫 번째 저주 - 질병, 약탈, 패배, 압제
(16)내가 이같이 너희에게 행하리니 곧 내가 너희에게 놀라운 재앙을 내려 폐병과 열병으로 눈이 어둡고 생명이 쇠약하게 할 것이요 너희의 파종은 헛되리니 너희의 대적이 그것을 먹을 것임이며(17)내가 너희를 치리니 너희가 너희 대적에게 패할 것이요 너희를 미워하는 자가 너희를 다스릴 것이며 너희는 쫓는 자가 없어도 도망하리라
첫 문장의 시작이 의미심장합니다. “내가 이같이 너희에게 행할 것이다...” 곧 불순종과 배반행위에 대해 묵과하지 않으실 것이라는 것입니다.















축복

1. 철에 맞는 비(4절)

"내가 너희에게 철따라 를 주리니 땅은 그 산물을 내고 밭의 나무는 열매를 맺으리라."
순종하는 백성들에게 철 따라 이른 비와 늦은 비로 농사 짓는 일에 어려움이 없게 하신다.

땅은 그 산물을 내고(물질의 복)

5. 너희의 타작은 포도 딸 때까지 미치며 너희의 포도 따는 것은 파종할 때까지 미치리니 너희가 음식을 배불리 먹고 너희의 땅에 안전하게 거주하리라
안전한 거주의 축복(의식주에서 주의 복)

6. 내가 그 땅에 평화를 줄 것인즉 너희가 누울 때 너희를 두렵게 할 자가 없을 것이며 내가 사나운 짐승을 그 땅에서 제할 것이요 칼이 너희의 땅에 두루 행하지 아니할 것이며.
사나운 짐승을 제할 것이다(자연, 환경의 축복)
칼이 없어질 것이다

7. 너희의 원수들을 쫓으리니 그들이 너희 앞에서 칼에 엎드러질 것이라
전쟁의 승리

9. 내가 너희를 돌보아 너희를 번성하게 하고 너희를 창대하게 할 것이며 내가 너희와 함께 한 내 언약을 이행하리라
하나님의 은혜가 함께 한다


저주 6가지

20. 너희의 수고가 헛될지라 땅은 그 산물을 내지 아니하고 땅의 나무는 그 열매를 맺지 아니하리라.
수확하지 못하는 것

33. 내가 너희를 여러 민족 중에 흩을 것이요 내가 칼을 빼어 너희를 따르게 하리니 너희의 땅이 황무하며 너희의 성읍이 황폐하리라.
흩어진다.
주거 불안정

25. 내가 칼을 너희에게로 가져다가 언약을 어긴 원수를 갚을 것이며 너희가 성읍에 모일지라도 너희 중에 염병을 보내고 너희를 대적의 에 넘길 것이며
자연과 환경의 해

17. 내가 너희를 치리니 너희가 너희의 대적에게 패할 것이요 너희를 미워하는 자가 너희를 다스릴 것이며 너희는 쫓는 자가 없어도 도망하리라.(참조 25절)
내가 칼을 너희에게로 가져다가 언약을 어긴 원수를 갚을 것이며 너희가 성읍에 모일지라도 너희 중에 염병을 보내고 너희를 대적의 에 넘길 것이며
염병, 인육을 먹는 것


17. 내가 너희를 치리니 너희가 너희의 대적에게 패할 것이요 너희를 미워하는 자가 너희를 다스릴 것이며 너희는 쫓는 자가 없어도 도망하리라
(돌보심 - 치심)

불순종의 저주(14-19)

7개의 재앙

18절 / 또 만일 너희가 그렇게까지 되어도 내게 청종하지 아니하면 너희의 로 말미암아 내가 너희를 일곱 배나 더 징벌하리라

징벌(히브리어) -



40-46절 회복의 언약

40. 그들이 나를 거스른 잘못으로 자기의 악과 그들의 조상의 악을 자복하고 또 그들이 내게 대항하므로.
41. 나도 그들에게 대항하여 내가 그들을 그들의 원수들의 땅으로 끌어 갔음을 깨닫고 그 할례 받지 아니한 그들의 마음이 낮아져서 그들의 죄악의 형벌을 기쁘게 받으면.

42. 기억하리라
내가 야곱과 맺은 내 언약이삭과 맺은 내 언약을 기억하며 아브라함과 맺은 내 언약을 기억하고 그 땅을 기억하리라


하나님이 나를 알고 나를 기억하는 믿음을 주옵소서!

____________________________ 레위기 25장 / 희년(10절) 


제 오십년을 거룩하게 하여 전국 거민에게 자유를 공포하라 이 해는 너희에게 희년이니 너희는 각각 그 기업으로 돌아가며 각각 그 가족에게로 돌아갈찌며.
Consecrate the fiftieth year and proclaim liberty throughout the land to all its inhabitants. It shall be a jubilee for you; each one of you is to return to his family property and each to his own clan.


1-7, 20-22 안식년에 대하여.
◎ 50년 마다 지켜야 할 회년에 대하여.
8-10 자유를 공포할 것.
11-13 파종하지 말것.
14-19 이웃과의 매매에 대하여.
23-34 토지를 물러줄 것.
35-38 동족을 사랑하여 이식을 취하지 말 것.
36-55 몸을 판 자의 속량.


레위기 25장에서는 두 가지 해에 대한 규례를 말씀합니다.
첫째는 안식년입니다(1-7절)
둘째는 희년입니다(8-55절)

7676. 안식년. 샤바트(shabbâth) שַׁבָּת 

1. 안식일,  2. 한 주일
발음 / 샤바트(shabbâth)
어원 / 7673에서 유래
관련 성경 / 안식일(출 16:23, 느 9:14, 암 8:5), 안식(레 25:4, 신 5:14), 안식년(대하 36:21). [동] 안식하다(레 25:2, 신 5:14)
구약 성경 / 11회 사용

* 7673. שָׁבַת   

1. 휴식하다,  2. 멈추다, 3. 안식일을 거행하다
발음 / 샤바트 [ shâbath ] 
관련 성경 / 안식하다(창 2:3, 출 16:30, 대하 36:21), 쉬다(출 31:17, 잠 22:10), 그치다(사14:4), 끊어지다(사33:8), 마치다(창2:2), 중지하다(느6:3), 멸절하다(사17:3), 없어지다(렘26:29, 겔6:6), 제하다(레26:6), 무르다(룻4:14), 폐하다(왕하23:5), 버리다(시119:119), 끊다(사13:11), 잠잠하다(시8:2), 망하다(암8:4), 떠나다(사30:11), 못하다(레2:13), 제하여 버리다(왕하23:11), 포기하다(대하16:5), 지키다(레23:32), 누리다(레26:34)
구약 성경 / 71회 사용


3104. 희년. 요벨(yôwbêl)  יֹבֵל

1. 뿔 나팔 소리,  2. 은 나팔의 신호,  3. 악기
발음  / 요벨(yôwbêl)
어원  / 혼성. 2936에서 유래한 것으로 보임
관련 성경 /나팔(출 19:13), 희년(레 25:10, 54, 27:18), 양각나팔(수 6:4, 5, 6)
구약 성경 / 27회 사용

* 2936. טָנַף

1. 더럽혀지다,  2. 피엘형 : 더럽히다
발음 / 타나프 [ ṭânaph ]
관련 성경  / 더럽히다(아 5:3)


안식년 제도를 통하여 주시는 은혜

1. 땅에 대한 은혜(4절)

제 칠년에는 땅으로 쉬어 안식하게 할찌니 여호와께 대한 안식이라 너는 그 밭에 파종하거나 포도원을 다스리지 말며.

땅에 대한 은혜란 곧 자연에 대한 은혜라고 하겠습니다.
땅에 경작을 멈추도록 하는 것은 생산력을 증대시킬 수 있는 비결이라고 합니다.
땅의 신음 소리를 들어야 합니다(로마서 8:22)

피조물이 다 이제까지 함께 탄식하며 함께 고통을 겪고 있는 것을 우리가 아느니라.

2. 사람에 대한 은혜(6-7절)

안식년
의 소출은 너희의 먹을 것이니 너와 네 남종과 네 여종과 네 품군과 너와 함께 거하는 객과.
육축과 네 땅에 있는 들짐승들이 다 그 소산으로 식물을 삼을찌니라.

3. 하나님에 대한 신뢰(21절)

명하여 제 육년에 내 복을 너희에게 내려 그 소출이 삼년 쓰기에 족하게 할찌라

희년의 은혜
가난한 사람들에게 새로운 출발을 약속하는 은혜
안식년은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눠주는 은혜를 경험하는 해

1. 자유를 공포하라(10절)

제 오십년을 거룩하게 하여 전국 거민에게 자유를 공포하라 이 해는 너희에게 희년이니 너희는 각각 그 기업으로 돌아가며 각각 그 가족에게로 돌아갈찌며.

종들에게는 자유를, 내 기업은 내 소유로 돌아오게 하라

땅은 원래 사람의 것이 아니라 창조주 여호와 하나님의 것임을 인정하는 것이 희년의 의미라고 하겠다.

모든 것의 주인은 하나님이시다(23절)
구속의 은총을 주시는 하나님( 절)
구속(고엘)의 대상은 네 가지
고엘 - 기업을 회복시켜 줄 자

1. 땅(23-28절, 24-25절)

너희 기업의 온 땅에서 그 토지 무르기를 허락할찌니.
만일 너희 형제가난하여 그 기업 얼마를 팔았으면 그 근족이 와서 동족의 판 것을 무를 것이요

2. 가옥(29절)

성벽 있는 성내의 가옥을 팔았으면 판지 만 일년 안에는 무를 수 있나니 곧 그 기한 안에 무르려니와

3. 채무(35-38절)

네 동족이 빈한하게 되어 빈손으로 네 곁에 있거든 너는 그를 도와 객이나 우거하는 자처럼 너와 함께 생활하게 하되.

4. 종(39-41절)


18-22절 

네가 내 법을 지키면(순종하면) 내가 지켜주실 것이다.
땅은 그 산물을 내리니 너희가 배불리 먹고 거기 안전히 거하리라.
혹 너희 말이 우리가 만일 제 칠년에 심지도 못하고 그 산물을 거두지도 못하면 무엇을 먹으리요 하겠으나.
내가 명하여 제 육년에 내 복을 너희에게 내려 그 소출이 삼년 쓰기에 족하게 할찌라.
너희가 제 팔년에는 파종하려니와 묵은 곡식을 먹을 것이며 제 구년 곧 추수하기까지 묵은 곡식을 먹으리라.

결론 55절 /
이스라엘 자손은 나의 품군이 됨이라 그들은 내가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나의 품군이요 나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니라.

오늘 읽어야 할 말씀
사무엘상 4-6장
누가복음 9:1-17

희년(禧年) 요벨(yôwbêl)  יֹבֵל

기쁠 희(喜) : 口(입 구) + 壴(악기 이름 주)
𠂉(-) + 干(방패 간) + 丨(뚫을 곤)

당시 고대 근동 사회에서 볼 수 없는 독특한 제도가 등장하는데, 바로 희년 제도이다.
희년 <요벨>은 어원상 숫양의 뿔을 뜻하는데 이는 희년의 시작을 알릴 때 숫양의 뿔로 만든 나팔을 부는 데서 유래 된 명칭이다.
희년은 칠 년마다 돌아오는 안식년이 일곱 번 지난 후의 다음해로 오십 년이 되는 때를 말한다.
이때도 안식년과 같이 노동이 금지되고 땅을 휴경해야 한다.
그러나 희년이 갖는 독특성은 모든 채무가 탕감되고 매매되었던 토지가 원주인에게 돌아가고 종 되었던 자들이 자유인이 된다는 데 있다.
언약 공동체만이 지닌 이러한 희년 제도는 몇 가지 면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첫째, 모든 소유가 하나님께 있음을 고백하는 제도

땅이나 인간이나 모든 물질은 원래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이므로 사람이 주인이 될 수 없다.
그러기에 희년이 되면 하나님이 원래 수여한 상태대로 돌려놓아야 하는 것이다.

둘째, 공동체의 유지를 위한 것

공동체 내에서 토지의 매매나 채무, 종이 생기는 것은 경제적인 이유 때문이다.
이는 경제적인 부가 평등하게 분배되지 않고 특정한 곳으로 몰리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경제적인 불평등은 공동체간의 갈등을 초래하고 하나 됨을 파괴한다.
따라서 희년 제도는 경제적인 원인으로 공동체가 파괴되는 것을 방지하고 경제 정의를 실현하는 제도인 것이다.

셋째, 구속사에서 종말론적인 하나님의 구원과 축복을 예표

죄와 사망에서 해방되어 영원한 안식을 얻고 하나님이 세우실 새로운 낙원에서 누릴 무한한 축복의 현세적 경험이 바로 희년인 것이다.


희년 제도는 가진 자와 못 가진 자 사이에 발생할 수 있는 갈등을 미연에 방지하고 언약 공동체 내에 경제적인 평등을 실현하려는 제도이다.
이러한 경제 정의와 평등의 원리는 오늘날 사회에서도 성도들이 지키고 실현해야 할 원리이다.
성도들은 자신이 소유한 물질이 하나님의 소유임을 인정하고 하나님의 뜻을 위해 사용해야 한다.
사회적으로 소외되고 가난한 자를 외면하는 것은 하나님이 제정하신 희년의 정신을 어기는 것이다.
하나님이 성도들에게 물질을 허락하심은 물질이 필요한 자들을 위해 베풀도록 하기 위함이다.
따라서 성도들은 가난한 자를 물질적으로 돌보아야 하며, 경제적으로 불평등한 현대 사회 속에서 경제적인 평등과 정의를 실현하는 데 힘써야 한다.


칠 월 십 일은 속죄일이니

희년이 시작되는 구체적인 날자에 대한 지적이다.
희년은 그 해의 속죄일(종교력 7월 10일, 민간력 1월 10일)에 시작되었는데 이는 먼저 속죄가 선행되어야만 기쁨과 해방, 그리고 자유의 회복이 선포되는 하나님의 은총이 임한다는 사실을 상징적으로 교훈해 준다.
한편 '속죄일 규례'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16장 주석을 참조하라.

나팔을 크게 불지며

유대 종교력으로 7월 10일, 즉 속죄일이 되면 전국에서 일제히 나팔을 불어 희년의 도래를 선포했다.
그러므로 희년 벽두에 울려 퍼지는 여기 이 나팔 소리는 마치 여호와의 시내 산 강림시 울려 퍼졌던 나팔 소리와도 같이(출 19:16) 언약의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은혜로우신 현존(現存)을 알리고, 자유를 잃은 자에게 자유를 선포하며, 땅의 휴식과 더불어 농민들이 노동의 고통으로부터 해방됨을 선포하는 은총의 나팔 소리였다. 한편 여기 이 '나팔'은 양의 뿔로 만들어진 곡선형의 긴 나팔을 가르키는데, 그 소리는 은은한 저음으로 길게 울려 퍼졌다(23:24).

제 오십 년 ... 자유를 공포하라 -
희년이 갖는 가장 중요한 역사적 의의는 바로 자유의 선포이다.
그리고 여기서 말하는 자유는 추상적이거나 관념적인 자유가 아니라, 구체적인 행동을 통해 인간의 현실 속에 분명하게 작용하는 역사적 해방 사건이다.

이런 맥락에서 이 자유의 내용을 세분하여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노예 상태로부터의 해방(39-55절)
둘째, 잃어버렸던 기업의 회복(13절-34절)
셋째, 노동으로부터의 안식과 토지의 휴경 (11절)
넷째, 빚의 탕감

이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어느 누구에게 속할 수 없고, 땅 또한 하나님의 것으로서 어느누구에게 영속되어질 수 없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한편 여기서 '자유'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데로르'의 기본 개념은 '재빠르게 움직이다'(move lapidly)란 의미를 가지고 있는데, 이것은 창공을 재빠르게 날아다니는 제비류(a kind of swallow)의 비행으로부터 연유된 말이다.

그러므로 자유는 일차적으로는 육체적인 모든 구속과 억압, 그리고 영적으로는 모든 죄와 사망의 사슬로부터 해방되어 '그리스도의 품 안'이라는 창공에서 마치 제비같이 재빠르게 훨훨 날아다니는 것, 바로 그것이다.

너희에게 희년이니 -

'희년'(禧年, Jubilee)에 해당하는 희브리어 '요벨'은 '수양의 뿔'(ram's horn)이란 뜻으로, 곧 수양의 뿔로 만든 나팔을 불어 희년의 시작과 자유를 선포했던 사실에서 유래한 명칭이다.

한편 구약의 이 희년 제도는 성도들이 그리스도의 복음에 선포로 말미암아 마침내 죄와 사망과 마귀의 사슬에서 해방되어 참된 기쁨과 안식, 그리고 영원한 생명을 소유하게 될 것을 상징한다(눅 4:18,19).


땅으로 안식하게 하라

땅을 놀게 버려두라라는 말인데 땅이 소득의 유일한 근거인데 어떻게 놀릴 수가 있었을까?
자동차 10부제도 지키려고 마음먹어도 기분내키는 것은 결코 아니다.
하물며 땅을 일년이나 묵히다니
땅을 놀린 다른 예인 유럽의 중세때 돌려짓기와 비교하면 차이가 무엇인가?

    돌려짓기는 지력회복이 목적이지만 안식년은 하나님 앞에서 자유와 평등을 누리는 것이다(4절).
    부수적인 효과도 있겠지만 지력회복이 주목적이라면 7년 만에 쉬는 것은 너무 길다.
    도라지를 옮겨심지 않으면 지력이 약해져서 몇 년 만에 썩어버린단다.
    같은 농작물을 연속해서 심지 않고 바꾸는 것이나 퇴비를 충분하게 넣어줌으로 이것을 방지하는 방법도 있으므로 안식년의 주목적은 지력회복이라고 볼 수 없다.

    소출에 차이가 있다.
    돌려짓기는 땅을 놀림으로 지력을 유지함으로 연작하는 것보다는 분명히 더 나은 효과가 있었을 것이다.
    안식년은 하나님께서 특별히 소출을 많이 주겠다고 약속하셨다(21)

안식년에 땅을 버려두는 것은 종과 품꾼과 객과 들짐승들을 위한 것이다? (O, X)

    X; 땅(4)과 이스라엘 백성(6절의 '너')도 포함되기 때문이다.
    결국 안식년에는 일정한 부분에서는 주인과 종의 구분이 없어진다.
    물질과 노동에 집착하지 않는 연습을 하는 셈이다.
    우리도 때로는 바쁜 일상에서 물러나 하나님과 교제하는 일에 시간을 써야한다. 재물에 집착하지 않는 훈련도 필요하다.

너의 곡물의 스스로 난 것이나 열매를 거두지 말라(5)면서 안식년의 소출은 너희의 먹을 것(6)이라면 말이 맞지 않는데?

    안식년의 소출이란 씨를 뿌리지 않았음에도 스스로 난 곡식이나 열매를 가리키는 말이며 이것을 먹어도 좋다는 뜻이다(6,12).
    다만 특정한 사람이 거두는 것이 아니라 누구에게나 개방된 것이다.

안식의 개념이 다음과 같이 발전하고 있다.
첫 안식의 주인공은 하나님, 그 다음 안식의 주인공은 사람, 이제 안식의 주인공은 땅이다.
도대체 안식의 마지막 목표가 무엇인지 본문을 근거로 설명해 보자.

    안식의 목표는 희년이다.
    모든 자에게 자유가 선포되는 것, 아마 마지막 안식은 하늘나라에서 하나님과 영원한 안식을 누리는 것이 될 것이다.
    안식년이 소출을 즐기는 점에서는 주인과 종과 짐승의 차이마저 없애버리는 해라면 禧年(유비레타, jubilee)은 더욱 확대되어 하나님으로 말미암은 기쁨이 넘치는 해이다.
    노예상태에서 해방, 잃어버렸던 땅과 기업을 되찾음, 노동으로부터 해방이다.
    해방을 당하는 사람이나, 보내는 사람이나 모두 기뻐하는 해이다.
    하나님을 기뻐하지 못하는 사람은 재산의 손실을 몹시 슬퍼하게 될 것이다.
    물질에, 재산 축적에 너무 관심을 기울이지 말고 하나님과 더불어 살라.

나팔을 부는 7월 10일은 49년째인가 50년째인가?
새로운 날을 알리는 나팔이라면 1월에 불어야지 7월에 부나?
1일에 불지 왜 10일에 부나?

    50년 째 7월 10일이다.
    원래 나팔을 부는 날 7월 1일이다.
    종교력으로 7월이지만 실제로는 신년 첫달이다.
    신년이 왔다고 바로 희년을 선포하는 것이 아니라 열흘이나 기다려야했다.
    속죄일을 기다리는 것이다.
    바로 이 과정에서 진정한 자유와 기쁨은 속죄일에 온다는 것을 깨닫게 했을 것이다.

희년에 파종하지 않으면 그 전 안식년까지 연속 2년간 농사를 짓지 않는 셈인데 뭘 먹고 살지?

    하나님 은혜로 살 수 있나 없나 확인해보라는 것이다.
    믿고 따르는 자에게 하나님의 역사하심이 있다.

우리 나라 사람들이 땅을 살 때에는 가장 먼저 생각하는 것이 무엇일까?
이스라엘 사람은?

    우리나라 사람들은 '돈이 되는가'를 제일 먼저 생각한다.
    기업도 그렇고 개인도 땅을 투기의 대상으로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희년이 몇 년 남았는가를 따졌다.
    즉 내가 몇 년 동안 사용할 수 있는가를 먼저 생각했다.
    결코 자신의 것이 될 수 없는 것이다.

나중의 일이지만 안식년은 말할 것도 없고 희년도 끝내 지켜지지 않는다.
누가 희년을 기뻐할 수 없었을까?

    사장님, 대지주, 많은 종을 거느린 주인. 
    부나 권력이 한 사람에게 집중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 아니다.
    인간세상이 결국 그렇게 될 수 밖에 없다고 하더라도 가난하고 약한 자를 돌아보는 노력이 필요하다.
    안식년 제도가 없다할지라도 우리의 삶 속에서 그 정신이 구현되어야 한다.
    각종 임금제도는 최대한으로 노동력을 짜내는 방법이 연구되지만 모두가 함께어울려 사는 방법이 먼저 연구되어야 한다.
    능력없는 사람도 충분하게 고려된 임금체계가 연구되어야 한다.

거래를 할 때 희년의 년수를 감안하는데 속이고 말고 할 게 있을까(17)?
다 아는 사실 아닌가?

    원어의 기본의미는 '억압하다' '분노하다'이다.
    NKJV은 'do not oppress,' NIV는 'do not take advantage of'로 번역하였다.
    희년의 년수에 상관없이 강자의 뜻대로 거래를 하지 말라는 뜻이다.

날씨가 맑을 날이 거의 없는 영국에서는 아침 인사가 Good morning이 되었다.
우리 조상들의 관심사는 '밤새 안녕'과 '진지'였다.
이스라엘의 '샬롬'이라는 인사는 '안녕하십니까?'와 같은 말이다.
이스라엘이 차지한 가나안은 우리보다 더 많은 이민족이 짓밟은 곳이며 농산물이 그리 풍성한 곳이 아니다.
이스라엘을 하필 이런 곳으로 인도하여 땅을 차지하게 하신 하나님의 의도가 무엇인가?

    배부르고 안전하게 거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법도와 규례를 지켜 행하는 것임을 알게 하시려고(18-19).
    잠시만 하나님을 벗어나면 스스로의 힘으로 안녕을 유지할 수 없는 곳에서 하나님만 의지하고 살라는 것이다.
    물을 충분하게 가두어두고 필요할 때마다 가져다 농사를 지을 수 있는 곳이 아니다.
    늑대들(이민족)이 우글거리는 가운데 넣어놓고 '하나님만 의지할래 네 힘으로 막아볼래?' 하시는 셈이다.
    하나님 외에 의지할 것이 많은 사람은 인간적으로 복이 많아 보이지만 진정한 행복을 누리기는 어렵다.

6년째에 충분한 소출을 보장해 주었음에도 결과적으로 이스라엘은 안식년을 제대로 지키지 않아서 토지는 강제로 안식년을 얻게된다. 토지가 어떻게 안식년을 누렸을까?
(스스로 답을 생각해본 다음에 다음 구절을 참고할 것. 레 26:34-36, 41-45, 대하 36:21, 렘 29:10)

    이스라엘 사람들이 포로로 잡혀감으로.
    이에 토지가 황무하여 안식년을 누림같이 안식하여 칠십 년을 지내었으니 여호와께서 예레미야의 입으로 하신 말씀이 응하였더라 (대하 36:21).

    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바벨론에서 칠십 년이 차면 내가 너희를 권고하고 나의 선한 말을 너희에게 실행하여 너희를 이 곳으로 돌아오게 하리라 (렘 29:10).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 사람의 근본되는 목적이기도 하다.
그러면 어떻게 하나님을 경외할 수 있는지 본문에서 근거를 찾아보자.

    사람 사이에 바른 관계를 가지는 것(17, 36, 43).
    적어도 이 본문에 따르면 형제를 억압하지 말 것, 형제를 돌아볼 것, 종이 된 동족을 엄하게 부리지 않는 것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다.
    역이 반드시 성립하는 것은 아니지만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은 사람과의 관계마저 바를 수밖에 없다.

장기판에는 일수불퇴란 말이 있고 고스톱 판에는 낙장불입이란 말이 있다.
오락이나 노름판보다 하나님의 법이 왜 이렇게 더 물렁하나?
왜 언제든지 물려주라고 하는가?

    너희의 것이 아니라 내 것이기 때문이다(23).
    너희가 가진 그 무엇이 절대적인 것이냐?
    생각해 보라는 것이다.
    매사에 하나님을 의식하고 살아야한다는 뜻이다.
    땅도 하나님의 것이요 사람도 하나님의 것이다.
    내 마음대로 해도 좋은 것이 아니다는 생각만 분명해도 사람 사이의 많은 문제는 저절로 해결된다.

성벽이 없는 지역의 가옥은 안되지만 성벽 안에 있는 가옥은 영구히 소유할 수 있다.
이게 도대체 무슨 의도일까?

    성벽안에 있는 가옥은 어떤 면에서 고급주택이다.
    희년이란 제도가 부자를 위한 제도가 아니다.

    성벽안에서는 아무리 거주지를 넓혀도 크게 넓힐 수 없다.
    제한된 범위 안에서 재산의 축적을 허용하는 셈이다.

    그래도 레위인의 것은 영구히 살 수 없다.

흔히 하는 말로 돈놀이를 해서는 안된다.
형제에게 이자를 받지 말라(36)고 하기 때문이다.
그러면 은행은 문을 닫아야하나?

    본문은 착취나, 고리대금을 통하여 가난한 형제(35)를 착취하지 말라고 경고하는 것이다.
    오히려 '너와 함께 생활하게 하라'는 것은 최소한 형제다움(인간다움)을 유지할 수 있도록 도와주라는 말이다.

가난한 형제를 착취하지 말고 함께 살도록 도와주어야하는 이유는 같은 하나님의 자녀이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되는 것'과 '이스라엘에게 가나안 땅을 주는 것'이 어떻게 같은 의미가 되는가?

    필연적인 선후관계.
    부자관계가 회복되면 아버지의 것이 동시에 아들의 것이 된다.
    양자를 들였으면 다음에는 필요한 것을 주는 것이 당연하다.
    출애굽해서 가나안을 준 것은 범죄한 인생을 불러내어 하나님의 나라에 들일 것에 대한 상징이다.

같은 하나님의 자녀가 너무 가난하게 되면 도와주어야 한다(35-38).
그래도 안되면?

    사야한다.
    일을 시켜서라도 돌보아야한다.
    희년까지 생계를 보장해주어야 한다는 뜻이다.
    동족 이스라엘은 영원한 종이 되지 못할 뿐만 아니라 일시적인 종도 안된다.
    종으로 사서라도 종으로 다루지 말고 품군처럼 대우하라는 것은 여전히 형제를 돌아보라는 것이다.
    특히 다른 민족에게 팔려가서 영구히 종이 되는 것을 금하는 것이다.

능력이 없는 동족을 철저하게 도와 주어도 돕는 사람이 기분 나쁘지 않으려면 무엇을 잊지 않아야할까?

    자신들이 노예생활 하던 곳에서 하나님께서 공짜로 구해 주었음을 기억해야한다(38, 42, 55).
    그래서 그리스도인들은 좀 다르게 살아야한다.
    기도, 찬송, 예배가 다른 것이 아니라. 삶의 기준이 좀 달라야한다.

이방인을 샀을 경우에는 영구히 종으로 삼을 수 있었다.
하나님께서 이방인과 유대인을 이렇게 차별하면 되나?

    인격적 차원의 이야기가 아니다. 하나님의 백성이냐 아니냐의 차이이다.
    지금도 이런 차이는 상존하고 있으며 앞으로도 여전히 있을 것이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아주 쉬운 길을 열어놓으신 이상 이것은 비난의 대상이 되지 못한다.

레위기 25장. 안식년과 희년. 은혜의 해.

안식년의 규례를 보게 됩니다(1~7).

안식년 규정은 미래에 소망을 주기 위한 하나님의 배려입니다.
이 규정은 수고로운 노동, 살면서 안게 되는 빚과 같은 인생의 무거운 짐들로부터 완전하게 벗어나는 안식이 올 것을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바라보게 하였습니다.
또한 이것은 현실적으로 부유한 계층의 형성이나, 빚진 자들의 몰락을 막기 위한 장치이기도 했습니다.

여기서 언급하는 것은 땅의 안식년인데, 땅을 그저 죽은 사물로 보지 않고, 인격화하여 말합니다.
땅은 하나님에게 속한 것입니다.
7년째 안식년에는 조직적인 파종과 수확이 금지되었습니다(5).
하지만 사람들은(동물들까지도) 밭과 포도원에서 마음대로 가져다 먹을 수 있었습니다.
지주나 종들이나 똑같았습니다.
땅은 다 하나님께 속한 것이고, 자신의 생계는 전적으로 하나님을 의지해야 한다는 사실을 안식년 마다 뼈저리게 배우게 하신 것입니다. 또한 땅은 하나님의 것이며, 땅에서 나오는 모든 것은 하나님의 공급이며, 그 풍성함은 나누어져야 한다는 사실을 그들은 기억해야 합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이스라엘 백성이 안식년을 제대로 지킨 증거는 별로 없습니다.
기록이 거의 없습니다.
단지 히스기야 때 지켜졌을 가능성이 기록되어 있을 뿐입니다(왕하 19:29; 사 37:30).
나라가 망한 후 하나님께서는 지키지 않은 안식년을 소급해서 억지로 시행되게 하셨습니다(대하 36:21).
포로기 이후 구약과 신약 사이에 안식년이 지켜진 증거들이 있습니다.
인간이 이렇습니다.

희년은, 7번의 안식년을 지낸 다음 해인 50년째 해를 말합니다.
이것은 메시야 시대의 모형으로서 기능합니다.
사회에서 실패한 사람들에게는 새로운 기회를 주고, 그들의 실패를 통해서 이익을 얻은 사람들에게는 얻은 것을 포기해야 하는 시간이었습니다.
희년은 백성들에게 자기 소유가 일시적임을 가르쳐주었습니다.
이 땅의 소유가 영원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자기 힘이 아니라, 하나님의 공급하심과 지켜주심을 신뢰하고 삽니다.
희년의 규정에서 가장 기본적인 원리를 55절이 보여줍니다.
“이스라엘 자손은 나의 종들이 됨이라.”
땅만이 아니라 백성들도 결국은 하나님께 속한 자들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하나님의 법을 오늘날 적용할 때, 모든 소유가 일시적이라는 사실을 기억하고 살아야 합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욕심을 위해서 거짓을 행하며, 다른 사람의 것을 빼앗아가면서 살아갈 수 없습니다.
희년이 이스라엘 백성에게 소망이 되었다면, 우리에게도 소망이 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종과 억압의 시대는 언젠가 반드시 끝나는 날이 있으며, 그리고 영원히 자유할 날이 오고 있습니다.
희년은 자유의 날입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것인 것을 알고, 자기의 것을 기꺼이 포기할 수 있는 사람, 내 배를 채우기보다는 가난하고 외로운 자의 가슴을 채워줄 수 있는 사람, 그런 사람으로부터 하나님의 나라는 진정한 자유의 나라로 이 땅에 서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희년의 가르침입니다.
내 소유는 없습니다.
우리는 그저 청지기이며, 나그네일 뿐입니다.
모두 하나님의 것이며, 하나님의 필요에 따라 각 사람에게 때로는 많게도 하시고, 적게도 하십니다.

하나님의 안식을, 우리의 안식이 되게 하셨으니, 우리도 다른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안식을 나누는 삶을 살기 원합니다.
이 땅에 있다가 없어질 것에 욕심 부리고 가지려 하기보다, 기꺼이 하나님의 것을 나누려고 하는 마음을 갖게 하옵소서.
조금 더 넉넉하고 부요한 마음으로 오늘 하루도 하나님 앞에서, 이웃을 사랑하며 살아가게 하옵소서.

안식년을 지키려고 한다면 반드시 제기되는 질문이 있습니다.
안식년에는 무엇을 먹고 살 것인가?
6년동안 열심히 농사지어 열매와 곡식을 먹었는데, 농사짓지 않는 일곱째 해, 안식년에는 무엇을 먹을 것인가?

이러한 질문에 대해 하나님이 미리 대답해주십니다.
20-21절입니다.

“만일 너희가 말하기를 우리가 만일 일곱째 해에 심지도 못하고 소출을 거두지도 못하면 우리가 무엇을 먹으리요 하겠으나 내가 명령하여 여섯째 해에 내 복을 너희에게 주어 그 소출이 삼 년 동안 쓰기에 족하게 하리라”

여섯째 해에 곡식과 열매를 거두고 나면, 그 곡식과 열매로 여섯째 해를 나고, 그 다음해인 안식년까지 먹어야 하며, 안식년 다음해인 여덟째 해에 파종하여 곡식을 거두기까지도 여섯째 해의 곡식으로 버텨야 하는데 하나님이 그것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여섯째 해에 내 복을 너희에게 주어 그 소출이 삼 년 동안 쓰기에 족하게 하리라”

안식년을 갖게 하기 위해서 하나님은 그 땅에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안식년을 지나고 농사를 지어서 소출을 얻기까지 3년을 살아가기에 충분한 소출의 복을 주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이어서 하나님은 안식년이 일곱번 지나고 난 그 다음해 즉 오십년째 해를 희년으로 지키라고 명령하십니다.
10-12절입니다.

“너희는 오십 년째 해를 거룩하게 하여 그 땅에 있는 모든 주민을 위하여 자유를 공포하라 이 해는 너희에게 희년이니 너희는 각각 자기의 소유지로 돌아가며 각각 자기의 가족에게로 돌아갈지며 그 오십 년째 해는 너희의 희년이니 너희는 파종하지 말며 스스로 난 것을 거두지 말며 가꾸지 아니한 포도를 거두지 말라이는 희년이니 너희에게 거룩함이니라”

한글 성경에 나오는 ‘희년(禧年)”이라는 뜻은 한문으로 복이라는 의미의 희(禧)와 해의 의미인 년(年)을 써서 복된 해라는 의미입니다.
희년에는 종에게 자유가 선포되고 가난과 여러가지 이유로 빼앗겼던 땅과 소유지가 회복되는 해이기 때문에 복된 해, 축제의 해입니다.

이에 대한 자세한 규례가 13절 이하에 설명되고 있습니다.
13-17절은 토지가 본래의 주인에게 돌아가는 것에 대해서,
23-28절은 기업으로 물려받은 땅에 대해서,
29-34절은 성안과 성밖에 있는 가옥에 대해서,
35-38절은 가난한 채무자에 대해서,
39-46절은 종으로 팔린 이스라엘 사람과 이방사람에 대해서,
47-55절은 실제 사례를 들어 희년의 규례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안식년과 마찬가지로 희년에도 농사나 파종을 금지하고 있기 때문에 일곱번째 안식년이 지난 희년을 지낼 때는 4년을 육년째 해의 소출로 먹게 되는 것입니다.
인간의 계산으로는 전혀 가능해 보이지 않지만 하나님은 50년째 해를 희년, 복된 해, 해방과 자유의 해, 축제의 해로 선포하십니다.

안식일, 안식년, 희년이 가능한 이유는 무에서 유를 창조하시는 하나님의 공급하심때문입니다.
출애굽기 16장에서 하나님은 광야로 나와 먹을 것이 전혀 없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기적으로 먹을 것을 공급하셨습니다.
전혀 먹을 것이 없는 광야에서 하늘로부터 만나와 메추라기를 공급하신 것입니다.
광야를 행군해가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기댈 곳은 오직 하나님 뿐이었습니다.
그들이 일곱째 날 안식일을 지킬 수 있는 것은 여섯째 날 일곱째 날까지 공급해주시는 하나님때문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이 일곱째 되는 날 쉬기를 원하셨습니다.
이를 위해 여섯째 날에는 만나를 이틀치 먹을 만큼 베풀어 주셨습니다.
그런데도 일곱째 날에 만나를 거두려고 들판에 나갔던 사람들은 모두 허탕을 치고 돌아와야만 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공급하심과 그 공급하심을 신뢰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누리는 안식일이었습니다.
하나님을 신뢰하지 못한 이스라엘 백성은 헛수고를 한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을 공급하심을 신뢰하지 못하는 사람은 안식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안식을 명령하시는 것은 안식을 위해 미리 준비하셨음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이 우리 눈에 보이지 않는 길로, 우리 머리에 이해되지 않는 명령을 내리신다고 해도 거기에는 이미 하나님의 정확한 공급하심과 예비하심이 계산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살아가는 일주일이라는 시간속에 일곱째 날을 정하셔서 쉼을 얻고 안식을 누리고 하나님과 교제하는 기쁨을 누리게 하십니다.
이를 위해 여섯째 날에 주의 공급하심을 예비하십니다.
하나님은 칠년째 되는 해에 쉼과 안식을 우리를 위해서 명하셨습니다.
이를 위해 여섯째 해에 충분히 공급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리고 그 명령에 순종하면, 내가 살아가는 땅, 환경, 관계, 주변 사람들 까지도 쉼과 복을 얻습니다.
하나님은 50년째 되는 해에 희년을 선포하십니다.
시간과 사람, 땅과 자연, 그 안에 깃들어 있는 모든 것의 소유권을 지니신 하나님께서 땅과 사람과 그 안에 있는 것들을 얽매이고 있던 모든 것에서 부터의 자유를 선포하십니다.

가난으로부터의 자유, 그래서 하나님이 주신 원래의 소유, 땅, 가옥이 회복되고, 하나님이 한 개인과 가정, 가문에게 부여하신 원래의 목적과 계획대로 질서가 회복되고 자유가 회복되기를 원하십니다.
이를 위해 치밀하게 준비하시고 예비하십니다.
안식년, 희년의 규례를 통해서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과 우리들에게 쉼을 주십니다.
자유를 주십니다.
우리에게 참 해방을 주십니다.
모든 굴레와 속박으로부터의 자유를 선포하십니다.

우리와 똑같은 인간의 모습으로 이 땅에 오신 예수님께서 자신이 자라나신 고향 나사렛에서 안식일에 회당에 들어가사, 이사야 (사61:1이하)의 한 구절을 찾아서 읽으셨습니다.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 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롭게 하고 주의 은혜의 해(희년)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누가복음 4:18-21)

그리고는 회당에 있는 모든 자들이 다 주목하고 있을 때 이렇게 덧붙이셨습니다.

“이 글이 오늘 너희 귀에 응하였느니라”

예수님이 우리에게 희년을 선포하십니다.
‘하나님의 공급하심과 예비하심이 있으니 걱정 하지 마라’
먹을 것, 입을 것, 마실 것, 살아갈 걱정 때문에 짓눌리고, 목매어, 억압과 굴레속에 살아가는 자들에게 선포하십니다.
‘내가 공급한다’ 하나님이 예비하신 복과 기업의 은혜를 다 잃어버리고 죄의 노예로, 욕망의 노예로, 돈의 노예로, 가난과 질병의 노예로, 권력과 명예의 노예로 신음하며 살아가는 당신의 자녀들에게 예수님이 선포하십니다.
‘쉼을 얻으라, 자유를 얻으라, 아들이 너희를 자유케 하면 너희가 참으로 자유하리라.’(요 8:36)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자유의 해, 해방의 해, 회복의 해, 구원의 해, 새로운 시대, 희년을 선포하십니다.

두려워하지 말고 주님이 이끄시는 쉼과 안식의 자리로 나아가십시다.
안식년, 희년의 자리로 나아가십시다.
주님이 이끄시는 그곳에 주님의 예비하심이 있습니다.
주님의 공급하심, 주님의 능력이 함께 하십니다.

하나님 아버지, 안식년과 희년의 규례를 통해서 쉼없이 살아가는 우리 인생에 안식을 주시는 분이, 우리에게 공급하시고 예비하시는 분이 하나님이심을 알게하시고 깨닫게 하심을 감사합니다.
희년을 선포하시는 예수그리스도의 안식과 쉼이 우리 인생가운데 풍성하게 하여주옵소서.
바둥거리며 우리 힘으로 살려고 하는 우리의 버거움을 내려놓고 주님의 공급하심과 예비하심을 바라보며 은혜의 날, 은혜의 해를 누리게 하옵소서.
그리하여 우리가 누리는 예수 그리스도안에서의 쉼과 안식, 평안과 기쁨, 회복의 은혜가 오늘 누군가에서까지 흘러가는 복된 날 되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____________________________ 레위기 24장 / 순결한 기름(2절) 


이스라엘 자손에게 명하여 감람을 찧어 낸 순결한 기름을 켜기 위하여 네게로 가져오게 하고 끊이지 말고 등잔불을 켤찌며.
Command the Israelites to bring you clear oil of pressed olives for the light so that the lamps may be kept burning continually.


감람 - 팔레스틴 지역에서 많이 자생하던 기름용 나무로 제사장, 왕, 선지자 등의 임명시 사용되는 순결한 기름이나 혹은 하나님의 거룩한 일에 소용되는 관유(8:2)등을 만들때 주로 사용되었다.

순결한 기름
- 여기서 '순결한'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자크'는 '투명한'(transparent) 혹은 '빛나는'(bright)이란 뜻이다.
곧 이것은 다른 이물질(異物質)이 전혀 섞이지 않은 순수하고 깨끗한 상태를 의미한다.

순결한(자크. 2134) [zak]  זַךְ
 
1. 정결한.
발음 / 자크[ zak ]
어원 / 2141에서 유래
관련 성경 / 순결한(출 27:20, 레 24:2), 순수한(출 30:34), 정결한(욥 11:4, 16:17, 레 24:7), 청결한(욥 8:6, 잠 20:11), 깨끗한(욥 33:9, 잠16:2, 21:8)
구약 성경 / 11회 사용

* 2141. זָכַךְ 
1. 순결하다.
발음 / 자카크[zâkak]
관련 성경 / 깨끗하게 하다(욥 9:30), 깨끗하다(애 4:7)
구약 성경 / 4회 사용

따라서 일상 생활에서 흔히 사용되는 기름은, 감람 나무의 열매, 잎, 가지 등을 함께 으깨어서 만든 반면, 하나님을 섬기는데 사용된 순수한 기름은 오직 감람 열매만을 부수어서 짜낸 순결한 기름이었다(출 27:20).

끊이지 말고 등잔불을 켤지며 -
이것은 일차적으로 제사장이 성소 안에서 제사 활동을 하는데 불편함이 없도록 하고 또한 하나님의 성소를 빛 가운데 보존하기 위함이다.
그리고 여기서 끊이지 말고 불을 켜라는 명령은 하루 24시간 계속적으로 불을 켜라는 뜻이 아니라, 매일 날이 어두워지기 시작하는 저녁 무렵 불을 켠 후 다음날 아침까지 그 불을 꺼뜨리지 말고 잘 간검하라는 의미이다(출 27:20, 21).
한편 빛은 영적으로 복음을 상징하는데, 이는 그리스도의 복음을 통한 하나님의 구원 행동이 계속되고 있음과 또한 역설적으로는 성도들이 복음의 진리를 밝히는 등대 구실을 하여야 함을 암시해 준다(마 5:14-16).

너희는 세상의 이라 산위에 있는 동네가 숨기우지 못할 것이요.
사람이 등불을 켜서 말 아래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 이러므로 집안 모든 사람에게 비취느니라.
이같이 너희 을 사람 앞에 비취게 하여 저희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성막에 대한 규례
24:1-9 / 성소의 두 기구
    24:1-4. 등잔불(등대, 메노라)
    24:5-9. 진설병

24:10-22. 하나님의 이름을 모독한 혼혈아이에 대한 처분을 중심으로 하는 인과응보의 원칙에 대한 말씀

24:10-16, 23. 여호와의 이름을 훼방할 자의 처형.
24:17-22. 살인 상해에 대한 배상의 규정.



24장은 성막에 대한 규례




등불과 진설병의 구속사적 의미.

성막의 기구들에 대한 규례는 이미 앞에서 언급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본장에서는 등불과 진설병에 대해 다시 한번 언급하고 있다.
이는 등불과 진설병이 구속사에서 그리스도를 예표하기 때문에 강조하기 위해서이다.
성소에는 원래 일곱 개의 등불이 놓여 항상 불을 밝혀야 한다.
이것은 죄로 인해 죽음의 어두움에 처해 있는 인간에게 구원의 빛을 밝힌 그리스도를 예표하고 있다.
또한 등불을 밝히는 기름은 성령을 의미하며 오늘날에도 성령은 끊임없이 복음의 빛을 밝혀 구원을 이어 가심을 말해 준다.
한편 진설병은 여섯 개씩 두 줄로 열두 개를 놓았다.
이것은 이스라엘 열두 지파의 헌신을 의미한다.
따라서 진설병은 하나님의 계획을 위해 자신을 드리신 그리스도의 헌신을 상징하고 있다.
또한 속죄 의식을 담당하는 제사장에게 공급되는 진설병은 자신을 생명의 떡이라고 말씀하신 그리스도를 가리키며(요 6:35), 자신을 내어 줌으로 인간들을 구원하시고 생명을 주신 예수님의 사역을 예표한다.

하나님의 이름을 모독한 자는 외국인이든 본토인이든 돌로 쳐죽이라고 명령하고 있다.
왜냐하면 이는 생명의 근원이며 만물을 다스리시는 하나님의 주권에 대한 거부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오늘날의 성도들에게도 마찬가지이다.
그런데 하나님을 모독하는 것은 비단 말로만이 아니라 행동을 통해서도 나타난다.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지 않고 자신의 의지대로 행동하거나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하면서도 죄를 짓는 자는 행동으로 하나님을 모독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생활 속에서 자신의 행위가 혹시 하나님의 이름을 더럽히고 영광을 가리우지 않는지 돌이켜 조심해야 할 것이다.



먼저 2절에서 4절까지의 말씀은 여호와 하나님의 임재의 상징인 등불을 밤 시간동안에 계속해서 켜둘 것을 명령하십니다. 그리고 5절에서 9절은 이스라엘 백성을 상징하는 떡 열두개를 하나님 앞에 항상 진설할 것을 명령하십니다. 그리고 이것을 영원토록 잘 관리하라고 명령하십니다. 성소의 구조상 떡은 등잔대의 정면에 놓여있습니다. 그리고 이 등잔불이 떡상의 떡을 항상 비추도록 하나님의 명령하신 것을 볼때, 이것은 분명 빛의 상징인 하나님과 떡의 상징인 이스라엘 백성들이 계속적인 관계를 맺고 있어야 함을 나타내는 것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성경은 이 관계를 언약으로 설명합니다. 즉 오늘의 말씀은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들이 맺은 언약이 영원함을 눈으로 보여주는 상징인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3절, 8절, 9절에서 영원한 규례, 영원한 언약이라고 강조하고 계신 것입니다. 이 모습을 매일 매일 봄으로, 그리고 이것을 유지하기 위해 매일 매일 신경써서 관리함으로 하나님의 임재로 인해 이스라엘이 살아갈수 있음을 확인하고 또 확인하는 것입니다.

10절이하의 말씀을 읽으면 좀 이해가 어렵습니다. 갑작스럽게 한사람의 이야기로 집중하고 있는데다가 그 결과는 처참하기 때문입니다. 전형적인 구약의 엄격하고 무서운 하나님의 모습이 그려집니다. 

그런데 말씀의 구조를 자세히 보시면 하나님이 이야기 하고 싶으신 것이 “하나님을 모독하는 자를 죽여라, 받은대로 갚아주어라” 라는 것이 아님을 알수 있습니다. 만일에 하나님이 이야기하고 싶은 것이 하나님을 모독하는 자를 죽이라는 것이라면, 14절로 끝내시면 됩니다. 율법대로 죽었기에 더 고민할 이유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이 말씀에서 끝내지 않고 계속 말씀을 이어갑니다. 17절, 사람을 죽인자는 반드시 죽는다 18절, 짐승을 죽인자는 짐승을 갚아주어야 한다. 19절 이웃을 다치게 하면 나도 다쳐야 한다.. 무슨말입니까? 우리의 행동에 분명한 책임을 져야 한다는 말입니다. 나를 넘어서서 누군가에게 영향을 미치는 행동을 했다면, 그것을 원상복구해야할 책임이 있다는 말입니다. 분명 이 말씀들은 죽여라 물어주어라 상하게 해라에 방점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러한 결과가 있으니, 사람의 생명을 해하지 말아라, 짐승을 함부러 죽이지 말아라, 남을 이유없이 해하지 말아라라는 말에 방점이 있는 것입니다. 결과는 확실하지만 그 결과로 우리를 겁박하시고자 하는 것이 하나님의 의도가 아니라, 그 결과를 우리가 경험하지 않게하시려는 것이 하나님의 의도라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한가지 사실을 더 알려주십니다. 그것은 이스라엘 백성의 울타리가 어디까지인가? 라는 사실입니다. 22절의 말씀을 함께 읽어보겠습니다.

“거류민에게든지 본토인에게든지 그 법을 동일하게 할 것은 나는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임이니라.”

하나님의 법은 혈통적 이스라엘 백성에게만 유효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인정하는 그 백성과 같이 있는 것만으로도 동일하게 유효합니다. 하나님의 법이 동일하게 유효하다는 이 말에 집중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법이 적용된다는 사실은 그가 하나님의 관심속에 있다는 중요한 반증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눈에 불신자 같고, 우리의 생각에 교회에 다녀서는 안될것 같은 사람이라도, 하나님의 자녀인 나와 함께 있다면 그는 하나님의 관심속에 있는 사람이라는 해석이 가능해지기 때문입니다. 왜 하나님이 불신자를 나에게 붙여주셨을까요? 왜 우리의 신앙을 힘들게 하는 사람들이 주변에 있을까요? 오늘의 말씀을 통해 그들을 해석하면, 그들이 하나님의 관심속에 있음을 우리를 통해 알려주기 위해서라는 것도 생각해볼수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법이 살리심과 그에 따르는 책임에 방점이 있고, 그 법이 하나님의 사람들과 함께하는 모든 이들에게 동일하게 적용된다는 이 사실속에서 등잔불과 떡을 묵상해보기 바랍니다. 그러면 무엇이 보일까요?

그것이 바로 슬로밋의 아들이 하나님을 모독함으로 죽은 사건입니다. 유대인의 전승에 이 슬로밋의 아들 이야기가 나옵니다. 당시 타국인의 장막터는 순수 이스라엘 혈통을 가진 자들의 장막터와 약간 떨어져 있었습니다. 따라서 당시 아버지의 혈통을 따라야 하는 관례상 이 여인의 아들도 타국인의 장막터에 장막을 쳤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당연히 좋은 곳은 아니었겠지요. 그래서 이 이들이 단지파의 지역에서 장막을 치려 했습니다. 어머니의 신분으로 보면 당연히 단지파에 들어갈수 있다고 보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단지파 사람들에게 거부되었고, 결국 자신의 권리를 되찾고자 단지파의 어떤 사람과 격하게 싸우던중 하나님의 이름까지 모독했다는 것입니다. 무슨 말이냐면, 이 아들이 믿음이 없어서 하나님을 모독한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오히려 아이러니 하게도 믿음이 과도하게 있었기 때문에 하나님을 모독하는 지경까지 가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바라시는 것과 달랐던 겁니다. 그는 하나님의 자녀됨을 가치있게 여긴것이 아니라 자녀됨으로 얻는 권리만을 가치있게 여기고, 그 권리만을 요구한 것입니다. 마치 바리새인들처럼 겉은 신앙인인데 마음은 그렇지 않았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것이 하나님의 자녀가 가져야할 거룩함, 정결함이 아니라는 겁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의 자녀들이 매일 매일을 하나님 앞에 서야 한다고 강조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로서 누리는 결과론적인 은혜와 복을 경험하는 것을 믿음의 최우선으로 삼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됨, 그 자체가 주는 기쁨이 우리의 믿음의 시작이요, 전부가 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임재를 매일 경험하는 것을 가장 중요하게 보고 계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우리도 마찬가지로, 오늘 이 시간이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는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마음으로 삶을 해석할수 있는 우리가 되기를 바랍니다. 믿음의 권리가 주는 욕심에 빠져 믿음의 본질이신 주님을 잊어버리는 미련함을 버리고, 믿음의 기초이신 하나님을 만나는 이 새벽시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레위기 24장의 구조

1절-9절, 등잔불과 진설병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성막 기구 중의 등반대와 등잔불, 그리고 진설병 상과 진설병을 관리하는 규정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깨끗한 감람유를 가지고 오면 그것으로 등잔불을 켰으며, 아론과 제사장들은 등잔불을 계속 관리해야만 했습니다. 또, 진설병은 고운 가루로 떡을 굽고 열 두 지파를 상징하는 열 두 덩이의 떡을 진설병 상에 올려 둡니다. 7일마다 떡을 교체하고 그 떡은 아론과 그의 제사장들이 먹어야 했습니다.

10절-16절, 신성모독과 처벌

이스라엘 여인과 애굽 남자 사이에 태어난 아들이 하나님의 이름을 저주하며 이스라엘 사람과 싸웠습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는 그를 돌로 쳐서 처벌하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이름을 저주하는 행위는 하나님을 모독하는 행위이고, 그 결말은 사형이기 때문입니다.

17절-23절, 각종 상해죄의 처벌

하나님께서는 또 사람을 죽인 자, 짐승을 죽인 자, 이웃에게 손해를 입힌 자 등에 대한 처벌과 관련된 여러 규정들을 말씀해 주십니다. 이 같은 규정의 말씀 후, 하나님의 이름을 모독한 자를 진영 밖에 끌고 나가서 돌로 쳐서 죽이며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였습니다.

레위기 24장

1절-4절, 당신의 빛을 꺼트리지 마십시오

성소 내부에 있는 중요한 성물들 중에 하나는 등잔대와 그 등잔대로 켜는 등잔불이었습니다.
이 등잔불은 항상 켜져 있어야 한다고 하나님께서 명령하셨습니다.
그리고 이 등불을 위해서는 순결한 감람유를 사용해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베푸시는 은혜를 기억하게 하는 순결한 감람유로 등잔의 불을 켰고, 그 불은 꺼트리지 말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성소의 자리에 임재해 계시고 하나님의 높고 위대하심을 모든 백성들이 기억하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신약 시대에는 우리 주 예수님께서 세상의 빛으로 오셨습니다.
어두워진 세상에 빛을 비추시고 우리를 빛의 자녀로 삼아 주셨습니다.
그리고 우리를 세상에 보내시고 빛이 되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우리도 예수님처럼 빛을 꺼트리지 말고, 세상에 빛을 비추는 사명을 감당하며 살아갑시다.

    5절-9절, 거룩한 떡을 함께 나누십시오

    성소 안에는 등잔불과 더불어 진설병 12개와 그것들을 담는 상이 있었습니다. 12개의 떡들은 이스라엘의 12지파를 상징하면서 동시에,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과 맺으신 여러 언약들을 의미합니다. 이 떡들은 아론과 그의 자손들만 먹을 수 있었는데, 그들이 이스라엘을 대표하기 때문입니다. 이 떡을 먹음으로써 하나님과 이스라엘이 서로 교제하며 동행한다는 상징적인 의미가 담겨 있었습니다. 우리 주 예수님은 생명의 떡으로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분 안에 진정한 영생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를 위해 찢으신 주님의 몸을 기억하며 성만찬을 통하여 예수님과 온전한 교제를 지켜 나가야만 합니다. 거룩한 떡을 서로 나눌 때, 우리 안에 예수님께서 함께 하십니다.

    17절-23절, 눈은 눈으로 그리고 이는 이로

    하나님께서는 악을 행하는 자에 대하여 어떻게 대처할 것인지에 대한 규정을 주셨습니다.
    그중에 특히 동해보복법이라고 부르는 규정을 주셨습니다.
    이 규정은 해를 받은 대로 처리하는 법으로, 눈을 다치게 했다면 가해자의 눈을 상하게 하는 처벌규정입니다.
    공의로우신 하나님은 죄를 미워하시고 죄를 제거하라고 명령하셨기에, 동해보복법을 통하여 처벌을 했었습니다.
    그러나 율법의 완성이 되시는 예수님은 원수까지도 사랑하라고 말씀하셨고, 원수를 축복하고 기도하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말씀과 같이 원수를 내가 갚지 말아야 하는 이유는, 하나님께서 친히 원수를 갚아 주시기 때문입니다.
    이제 우리는 예수님의 사랑을 기억하고 원수까지도 사랑하며 모든 처리를 하나님께 맡기는 지혜로운 성도가 됩시다.

    ____________________________ 레위기 23장 / 여호와의 절기(2절) 

    이스라엘 자손에게 고하여 이르라 너희가 공포하여 성회를 삼을 여호와의 절기는 이러하니라.
    Speak to the Israelites and say to them: 'These are my appointed feasts, the appointed feasts of the LORD, which you are to proclaim as sacred assemblies.

    구약의 절기는 그림자이며 몸은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골로새서 2:16-17
    그러므로 먹고 마시는 것과 절기나 월삭이나 안식일을 인하여 누구든지 너희를 폄론하지 못하게 하라.
    이것들은 장래 일의 그림자이나 몸은 그리스도의 것이니라.
    * 폄론(貶論) : 낮출 폄(貶), 논할 론(論)  - 남을 깎아 내려 헐뜯음. 또는 그런 말.  / 폄훼(貶毁)

    안식일의 의미 - 천국을 경험하는 날
    세상에서 안식의 맛을 누리지 못한 사람은 천국에서 안식을 누리지 못할 것이다.


    메누하
    מְנוּחָה 스트롱번호4496

    1. 휴식,  2. 안식처,  3. 평안히
    발음 / 메누하[ menûwchâh ]

    관련 성경 / 쉴 곳(창49:15, 시132:14, 미2:10), 위로(룻1:9), 평안한 곳(시132:8), 봉안(대상28:2), 거한 곳(사11:10), 안식(사66:1), 머뭄(슥9:1),태평(왕상8:56), 평안(대상22:9), 병참(렘51:59).
    구약 성경 / 21회 사용


    카도쉬 
    קָדוֹשׁ 스트롱번호6918

    1. 거룩한
    발음 / 카도쉬[ qâdôwsh ]
    어원 / 6942에서 유래
    관련 성경 / 거룩한(출19:6, 삼상2:2, 사4:3). [명] 성민(신7:6, 14:2,21), 성도(신33:3, 시16:3), 성일(느8:9,10,11), 거룩한 자(시78:41, 사5:19, 호11:9), 성소(시46:4), 성전(시65:4), 거룩하신자(사12:6, 30:11, 호11:12). [부] 거룩히(레21:8, 신23:14).
    구약 성경 / 116회 사용



    여호와의 절기와 세상의 절기는 구별되어야 합니다.
    세상의 절기는 "과거의 사건을 기념하는 것"이라면 여호와의 절기는 "구속의 목적을 성취하려는 것" 이라고 하겠습니다.
    레위기 23장은 유대인의 7대 명절을 말씀합니다.
    모든 절기의 기본 정신과 신앙은 "안식일"에서 출발합니다.
    안식일의 목적은 창조의 완성을 위한 재창조의 쉼이라고 하겠습니다. 

    7대 명절
    - 레위기 7대 절기

    유월절, 무교절, 초실절, 칠칠절, 나팔절, 속죄절, 초막절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유월절(逾越節) Passover. 페사흐
    유월절 - 이렇게 죽으리라!
    그리스도와 피, 구원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
    요한복음 1:29
    이튿날 요한이 예수께서 자기에게 나아오심을 보고 가로되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



    무교절(無酵節) The Feast of Unleavened Bread. 하그 하마쵸트
    무교절 - 무덤에 있으리라!
    자아의 파쇄, 죽음

    초실절(初實節) Feast of Firstfruits. 비쿠림
    초실절 - 부활하리라!
    부활, 성화, 잘 될 것이다.

    부활은 안식 후 첫 날이었다.

    맥추절(麥秋節) The Feast of Harvest. 칠칠절, 오순절. Pentecost. 칵 학카칠
    칠칠절 - 성령을 부어 주리라!
    성령 세례(체험), 요나가 토함을 받는다(물고기 배속)
    오순절의 성도가 됩시다!

    나팔절(喇叭節) The Feast of Trumpet. 로슈 하샤나
    나팔절 - 재림(再臨) 주님 다시 오시리라!
    그리스도의 신부(열 처녀의 비유), 휴거

    속죄일(贖罪日) Day of Atonement. 욤 키푸르
    속죄절 - 심판(審判), 심판하리라!
    알곡과 죽정이로 구분할 것이다. 신부(거룩한 세마포 예비)

    초막절(草幕節) Feast of Tabernacles. 수콧(Sukkot)
    초막절 - 새 하늘과 새 땅(新天地), 새 예루살렘, 천년왕국이 임하리라!

    “절기”를 가리키는 히브리어는 “하그”와 “모에드” 라고 합니다.

    2282. 하그(châg)  חָג 

    1. 축제,  2. 희생 제물

    발음 / 하그(châg) 

    어원 / 2287에서 유래
    관련 성경 / 절기(출 10:9, 왕상 12:32, 말 2:3), 절일(출 32:5, 민 28:17, 시 81:3), 희생(시 118:27)
    구약 성경 / 62회 사용

    * 2287. חָגַג 
    1. 선회하다,  2. 춤을 추다,  3. 절기를 지키다

    발음 / 하가그(châgag) 
    관련 성경 / 지키다(출 12:14, 나 1:15, 슥 14:16), 구르다(시 107:27), 춤추다(삼상 30:16).
    [명] 성일(시 42:4), 절기(출 5:1, 23:14, 신 16:15).
    구약 성경 / 16회 사용

    “하그”는 “춤춘다” “순환한다”는 의미다.
    매년 그맘때가 되면 예외 없이 절기가 돌아오며 주기적으로 순환하는 속성을 두고 불리는 명칭이다.
    축제의 성격을 띠고 있기에 축제의 기본 요소인 춤춘다는 단어가 사용된 것이다.

    4150 모에드(môwʽêd) מוֹעֵד

    1. 정한 때,  2. 시간의 한 점,  3.시간의 공간

    발음 / 모에드(môwʽêd)
    어원 / 3259에서 유래
    관련 성경 / 계절(창 1:14), 기한(삼상 13:8, 시 102:13), 때(출 23:15, 수 8:14, 습 3:18), 회막(출 27:21, 레 24:3, 왕상 8:4), 성막(출 35:21, 40:2), 회막문(출 40:12, 민 16:18, 27:2), 성회(레 23:2,37, 겔 46:11), 절기(레 23:37, 민 29:39, 대하 8:13, 호 2:11), 절기제(민 15:3), 회중(민 16:2, 시 74: 4), 시기(민 28:2, 렘 46:17), 군호(삿 20:38), 날(삼상 13:11), 시간(삼상 20:35), 한 해(왕하 4:16), 회당(시 74:8), 기약(시75:2), 절기의 날(애 2:7, 호 9:5).
    [동] 돌아오다(왕하 4:17), 정하다(욥 30:23, 시 104:19).
    구약 성경 / 223회 사용

    * 3259.  יָעַד 
    1. 지적하다, 2. 예레미야 47:7,  3. 사무엘하 20:5

    발음 / 야드(yâʽad)
    관련 성경 / 상관하지 아니하다(출 21:8), 정하다(렘 47:7, 미 6:9), 주다(출 21:9), 만나다(출 25:22, 29:42, 느 6:2), 모이다(민10:3, 왕상8:5, 시48:4), 뜻이 같다(암3:3), 가다(느6:10), 서로약속하다(욥2:11), 거역하다(민14:35), 소환하다(욥9:19), 다투다(렘49:19, 50:44), 놓이다(렘24 : 1).
    구약 성경 / 29회 사용




    “하그”는 “춤춘다” “순환한다”는 의미다.
    매년 그맘때가 되면 예외 없이 절기가 돌아오며 주기적으로 순환하는 속성을 두고 불리는 명칭이다. 축제의 성격을 띠고 있기에 축제의 기본 요소인 춤춘다는 단어가 사용된 것이다.

    “모에드”는 “특별하게 정해진 시간”을 가리킨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정하신 “모에드”에 따라 공생애 사역을 하셨다.

    요한복음 2:4, 예수께서 가라사대 여자여 나와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내 때가 아직 이르지 못하였나이다.

    성경은 이 절기를 ‘여호와의 절기’라고 밝힌다(레위기 23:2).
    이스라엘 자손에게 고하여 이르라 너희가 공포하여 성회를 삼을 여호와의 절기는 이러하니라. (Speak to the Israelites and say to them: 'These are my appointed feasts, the appointed feasts of the LORD, which you are to proclaim as sacred assemblies.)   

    이스라엘 민족의 절기가 각 민족의 절기와 근본적으로 다르다.
    왜 그럴까요?

    첫째, 이스라엘의 절기는 여호와 하나님이 직접 제정하셨다.
    따라서 과장이나 꾸밈, 조작이 있을 수 없다.
    하나님의 특별한 목적이 드러나기 때문이다.


    둘째, 사건과 절기의 순서가 다르다.

    즉, 다른 민족의 절기는 사건이 발생한 뒤 그 사건이 일어난 날짜를 기념해 생겨났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경우 먼저 절기가 만들어지고 그것에 맞춰 사건이 발생했다. 이스라엘 최대 절기인 유월절을 예를 들어보면 확연히 알 수 있다.


    하나님은 애급에 대한 10가지 재앙 중 마지막 ‘장자의 죽임’이 임할 날짜를 이스라엘 민족에게 미리 알려주셨다. 그리고 재앙을 피할 수 있도록 집집마다 양을 잡아 그 피를 인방과 설주에 바르도록 하셨다. 죽음의 신이 이스라엘의 집에 넘어가도록 정하셨고 이를 유월절로 제정하신 것이다.


    레위기 23장엔 이스라엘의 7개 절기가 언급돼 있다.
    유월절, 무교절, 초실절, 칠칠절, 나팔절, 속죄절(대속일), 초막절 등.

    이는 하나님이 진행하실 인류 구속사의 파노라마를 보여준다.
    절기에는 하나님의 구속의 경륜과 프로그램이 암호화돼 있다.

    유월절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을,
    무교절그리스도의 친교를,
    초실절그리스도의 부활을,
    칠칠절(오순절)그리스도와 성령의 임무 교대를,
    나팔절그리스도의 강림을,
    대속죄일그리스도의 속죄를,
    초막절그리스도의 심판을.



    본절은 본장 전체의 서론 부분으로 본장의 내용이 여호와의 절기에 관한 것임을 분명하게 제시하고 있다. 민 28,29장과 본장에는 구약 시대에 지켜진 이스라엘의 공식 절기가 거의 모두 열거되어 있는데, 절기를 이처럼 상세히 설명하고 있는 이유는 다음과 같다. 첫째, 이 절기들을 통하여 인류의 역사에 직접 개입하시는 당신의 구원 행동을 백성들에게 깨우쳐 주고 둘째, 각 절기가 갖고 있는 상징적 의미 및 구속사적 중요성을 백성들에게 일목요연하게 가르치기 위함이다.

    성회(미크라 코데쉬)

    '거룩한 모임들'이란 뜻으로 앞으로 언급될 모든 절기를 총칭하는 말이다.
    히브리인들은 이 날에 아무 노동도 하지않고, 안식일처럼 거룩하게 여호와의 은혜와, 구원을 찬양하고 기념하면서 지냈다.

    여호와의 절기

    '절기'(모에드)는 '지정하다'(appoint), '만나다'(meet), '소집하다'(summon), '고정하다'(fix)란 뜻을 가진 '야아드'에서 파생된 말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지키라고 특별히 그 시기를 정해놓은 '축제일'(festival)을 의미한다.
    그러나 이 축제일은 단순한 휴식이나 육체적 쾌락을 위한 날이 아니라, 영적 각성과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을 위하여 하나님께 헌신하는 날이다.


    이스라엘에는 민간력과 종교력이 있는데 본문은 종교력으로 표시되어 있다. 종교력으로 1월은 민간력으로 7월이고, 태양력으로는 3, 4월에 해당한다. 수확기도 우리와 다르다. 1월에 보리(봄), 3월에 밀, 5월에 여름실과, 6월에 포도, 7월(가을)에 밭갈기, 8월에 파종, 9-11월은 겨울이다.

    제사에 사용되는 용어를 분명하게 이해하지 못하면 레위기를 읽을 때 어려움이 있다.
    제사의 분류는 어떤 기준으로 나눠 놓은 것인지 생각해보자.

      번제, 소제, 화목제, 속죄제, 속건제 : 제사의 종류
      화제, 거제, 요제, 전제 : 제사의 방법, 화제(불로), 거제(들어올림), 요제(흔듬), 전제(부음).
      소제 : 제물의 종류 곡식을 드리는 제사
      번제 :
      제물의 종류 생축을 드리는 제사

    하나님께서 명하신 절기는 전부 몇 개인가?
    또, 절기의 이름이 나타나지 않은 것은 적당한 이름을 생각해내든지 아니면 작명을 해보자.

      안식일(3, 매주)
      7대 절기 :

      유월절(5, 1월 14일),
      무교절(6, 1월 15-21),
      첫 이삭을 바치는 날(10, 초실절),
      50일 되는 날(3월 10일 경, 칠칠절, 맥추절, 오순절),
      나팔절,
      속죄일,
      장막절(7월 15-22, 수장절, 초막절).

      3대 절기는 유월절, 맥추절, 수장절

    이스라엘의 각종 절기는 무엇하는 날인가?
    절기를 지키는 데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인가?

      성회로 모이는 것(2, 3, 4, 7, 8, 21, 24, 27, 35, 36, 37) 
      일하지 말라(3, 7, 8, 21, 25, 28, 31, 32, 35, 36)는 것도 답이 되겠지만 성회로 모이는 것을 정답으로 하는 것은 일하지 않는 것은 안식의 소극적 표현이고 성회로 모이는 것은 안식의 적극적인 표현이기 때문이다.
      일하지 않는 이유는 하나님 앞에서 성회(축제의 성격을 띤)로 모여야 하기 때문이다.
      특히 2절을 보면 성회가 중요한 것을 알 수 있다.

    성탄절의 주인공은 당연히 예수님이어야 한다.
    그러나 현실은 예수님 대신에 산타가, 교회대신에 백화점이 더 주인공 같이 행세하고 있다.
    이스라엘의 절기에는 누가 주인공일까?

      모든 절기는 여호와의 절기다(2).
      여호와께서 제정하시고 여호와께서 하신 일을 기억하기를 바라고, 여호와께 감사를 드리고,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기를 바라시기 때문이다.
      절기의 목적은 여호와와 관계를 회복, 유지, 발전시키는 것이다.

    일주일씩 지키는 절기는?

      무교절(8, 다음 제 7일이 안식일),
      초막절(36, 다음 제 8일이 안식일)

    가장 중요한 절기이며 가장 먼저 제정되었으며 특정한 날을 정하지 않고 계속 지켜야 하는 절기는?

      안식일 : 가장 기본적인 절기이다.
      하나님과 함께 안식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목표이기 때문이다.
      안식일을 지키기 위해서 가장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
      6일 동안 열심히 일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시고 누린 그 기쁨을 함께 누리는 날이며 그 안식을 잃어버린 우리에게는 다시금 되찾을 영원한 안식을 바라보며 맛을 보는 날이다.

    두 번째로 제정되었으며 어린 양의 피를 보고 죽음의 천사가 그냥 지나간 것을 기념하는 절기는?

      유월절 : 어떠한 사람인가라는 것은 문제가 되지 않았다.
      피를 바른 집안에 있기만 하면 그가 어떤 죄인이었건 상관없이 살아났다는 것은 우리의 구원이 바로 그런 것임을 잘 보여준다.
      나의 공로나 선함 때문이 아니라 문설주와 인방에 바른 피, 즉 예수 그리스도의 피를 의지하여 구원을 얻게 되었다.

    세 번째로 제정되었으며 이스라엘이 출애굽 시에 다급하여 빵을 부풀리지 못한 채 나온 것을 기념하는 절기는?

      무교절 : 딱딱한 무교병을 일주일씩이나 먹으면서 과거의 그 사실을 잊지 않는 것이다.
      이런 행사가 하나님을 기억하게 하고, 한 민족으로 단단하게 묶어주는 역할을 한다.
      그럼에도 하나님을 잊었다는 것은 정말 불가사의다.
      자신의 능력이나 노력을 의지하지 말고 하나님께서 나를 지켜주시기를 기도하자.
      유월절과 무교절은 연속되는 것이기 때문에 나중에는 서로 혼동되어 나타난다.

    '기한에 미쳐' 란 말은 '특정한 날짜가 되거든'이란 뜻이다.
    특정한 날짜가 명시된 절기는 어떤 것이 있는가?

      1월 14일 : 여호와의 유월절
      1월 15-22일 : 여호와의 무교절,
      첫날(15일, 무노동)과 일곱째날(21일)은 성회로 모임, 7일 동안 무교병을 먹을 것과 화제를 드릴 것,
      7월 1일 : 나팔절, 신년 축제일이다.
      7월 10일 : 속죄일
      7월 15-22일 : 수장절, 초막절, 장막절; 한 해의 결실을 저장하고 자신들을 인도하신 하나님을 기억하는 절기이다.

    1월 1일부터 30일까지 전혀 일하지 않아야 하는 날은 며칠인가?

      5일 : 7, 14, 15, 21, 28로 네 번의 안식일과 무교절 첫날(15일)이다.

    첫 이삭을 드리는 제사의 시기를 알 수 있는 말은 11절에 '안식일 이튿날에'라는 말이다.
    이 안식일은 어느 안식일을 가리킬까?

      무교절의 끝에 있는 안식일이다.
      결국 세 절기가 붙어 있는 셈이다.

    첫 이삭을 드릴 때 드린 제사도 번제, 소제, 전제로 만만치 않은데 50일이 지나서 또 새 소제를 드리라는 데 함께 드리는 제사는 더욱 성대하다.
    새 소제(고운가루 에바 10분의 2)를 누룩을 넣어 구운 떡 두 개를 요제로 드리고, 번제(어린 양 7, 젊은 수소1, 수양2)를 화제로, 전제, 속죄제(수염소1), 화목제(어린 수양2)를 드린다.
    이중과세에 세율이 너무 높은 것 아닌가?
    11절의 첫 이삭과 19절의 첫 이삭은 같은 걸까?

      다르다. 아무래도 전자는 작은 추수같고, 후자는 큰 추수인 것 같다 :
      수확기를 아는 유대인들에게는 이렇게만 해도 알아듣지만 우리에게는 다소간의 노력이 필요하다.
      전자는 초실절로 보리, 후자는 칠칠절(五旬절, 맥추절)로 밀을 수확한 것을 기념하는 절기이다.
      하나님은 이유없이 이렇게 제사를 드리라는 분은 아니다.
      제사의 종류만 다른 것이 아니라 후자의 경우에는 성회로 모이라고 하고 더구나 추수 때의 유의사항이 따로 기록된 것을 보아도 더 큰 추수인 것을 알 수 있다.
      이 예물을 드리고 추수를 시작했을까?
      추수를 마치고 이렇게 드렸을까?
      제물이 많은 것은 제사장을 위함인가(20)?

    위의 제사에서 드리는 제물이 많은가? 적은가?

      개인이 드리는 제사라면 나중 제사는 제물이 많은 편이다.
      공동체에서 드리는 제사라면 그리 많은 것은 아니다.
      제사는 제물이 많고 적음의 문제가 아니다.
      하나님을 기억하는 것이 중요하다.
      거의 잊혀져가는 것이지만 예전에는 집안의 어른이 먼저 숟가락을 들기 전에 아이들이 숟가락 드는 일이 없었다.
      이런 풍습은 이어가도 좋은데...

    흔히 누룩은 죄를 상징하는 것이라서 하나님께서 싫어하시는 것으로 설명하는데 여기 번제를 드릴 때 함께 드리는 떡은 누룩을 넣어서 구운 것이다(17). 어떻게 이해해야할까?

      암소는 번제에 사용할 수 없지만 화목제에서는 허용한다.
      제사의 성격에 따라 하나님께서 허용하시는 것이다.
      고생하던 날을 기억해야 하는 무교절에는 무교병을 먹으라고 하셨지만 이 제사는 하나님께 드리지만 사람들이 즐거워하는 절기이기 때문에 번제가 아닌 요제로 흔들어 드리고(17, 20) 제사장에게로 돌렸다(20).
      하나님께서 자신의 입장대신 사람의 입장을 고려하신 것이다.
      이혼의 문제도 본래는 허용된 것이 아니지만 여인을 위하여 허용한 것이다(마 19:8).

    수확기는 일년 중 가장 즐거운 날이다. 이런 때일수록 가난한 자를 돌아보아야 한다. 가난한 자와 객을 위하여 떨어진 것이나 모퉁이를 그냥 버려두라는 것도 고마운 말씀이지만 그보다는 깔끔하게 추수해서 돈이나 현물로 돕는 것이 더 낫지 않을까?

      가난한 자의 체면, 노력을 위함이다.
      남을 도울 때에도 도움을 받는 사람의 입장을 최대한 고려해야한다.
      주는 사람이야 자랑스러울지 몰라도 받는 사람 편에서는 결코 자랑스럽지 못한 경우가 대부분 아닐까?

    1월 7일이 안식일인데 7월 1일을 안식일로 삼으라면 요일에 문제가 생기지 않을까?
    만약 한 달을 30일로 잡으면 7월 2일이 안식일이 되기 때문에 문제가 된다. 어떻게 해결하면 될까?

      특정한 날의 요일을 먼저 고정시키고 일년을 364일로 하면 된다. 윤달처럼, 윤주를 넣던지.


      스스로 괴롭게 하는 게 어떻게 하는 것일까? 자해?

      죄를 회개하며 근신하는 것 : 좋고 편안한 환경을 떠나 거친 음식과 거친 환경에서 지나는 것, 625음식이라면서 주먹밥을 나누는 것과 비슷할 것이다.

    안식일이 아닌데도 일하지 않는 날은 무교절 첫날이다.
    그 외에 또 있는가?

      7월 10일 속죄일이다.

    스스로 괴롭게 하는 날은 언제이며 즐거워하는 날은 언제인가?
    비교하면 무슨 차이가 가장 커 보이는가?

      스스로 괴롭게 하는 날은 7월 10일 하루인데 즐거워하는 날은 7월 15일부터 일주일간이다.

    구약에서 나팔을 부는 경우는 전쟁이 일어났을 때나 특정한 날임을 선포하는 경우,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들을 소집하는 경우에도 나팔을 불었다(출 19장).
    7월 1일에는 무슨 이유로 나팔을 불고 기념하라고 했을까?

      신년의 도래를 알리는 나팔이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새로운 한 해를 기쁨으로 맞이하는 절기이다.
      희년에도 나팔을 불었다.
      모든 것이 원상으로 돌아가는 날이다.
      종으로 팔린 사람이 놓여나고 빼앗겼던 땅도 돌아오는 날이다.
      예수님께서 다시 오시는 그 날에도 나팔 소리가 울려퍼질 것이다.
      새로운 시대가 열렸음을 알린다.

    37-38절을 근거로 하나님께 드리는 예물을 두 종류로 나누어 보자.

      절기예물(단체로, 의무)
      일반예물(개인적, 수시, 자원); 개인적인 헌신과 작정에 따르는 것.

    아름다운 나무 실과와 종려 가지와 무성한 가지와 시내 버들을 취하여 즐거워하라(40)는 것은 어떻게 즐거워하라는 말인가?

      과일은 먹고 다른 가지로는 초막을 짓고 하나님의 은혜를 감사하라는 말이다.
      찬송할 때 종려 가지를 들고 흔들었던 적이 있다. 이 초막은 이스라엘이 광야에서 지낸 것을 기념하는 절기이다.

    '내가 누군지 아느냐? 내가 바로 5파운드야!' 학기초만 되면 이렇게 자신의 별명을 소개하는 선생님이 계셨다.
    5파운드는 야구 배트를 가리키는 말이다.
    별명만 듣고도 아이들은 주눅이 들어버렸다.
    폭력교사는 아니고 학생주임으로 지혜로운 분이었다.
    하나님께서 '나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니라'고 하시는데 본문에서 이 말이 주는 느낌은?

      문맥을 무시한다면 강압적이고 고압적인 느낌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문맥에서 본다면 결코 아니다.
      가난하고 불쌍한 자를 결코 잊지 않으시며 돌아보시는 분이란 뜻이다(22, 43).
      하나님께서 이렇게 폼을 잡고 나서면 가장 두려운 것은 가난하고 힘없는 자를 돌아보았는지 살펴 보아야 한다.

    민수기 28, 29장에도 절기에 관한 상세한 기록이 있다.
    하나님께서 성경의 곳곳에서 절기에 대한 말씀을 자주 하시는 이유가 무엇일까?

      절기를 통해서 하나님의 임재하심을 느끼고 확인하라는 것이다 :
      대부분의 절기가 출애굽과 관련되어 있다.
      심지어 추수 감사도 '우리를 이 땅으로 인도하여 땅을 주셔서...'라는 것이 중요한 부분이다.
      우리의 생각 속에도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워하셨다는 감사가 끊이지 않아야 한다.
      기념하라는 말씀이 많이 나오는 것과 동일하다.
      특정한 날을 기억함으로 흐트러진 공동체의 결속력을 다지고, 영적으로 각성케하는 것이다.
      가정에서도 동일한 원리가 적용될 수 있다. 가정을 위해서라도 기념일을 잊지않고 챙기는 것이 좋다.

    앞에서 각종 제사는 예수님과 관련이 있음을 보았다.
    본문의 각종 절기도 예수님과 어떻게 관련되고 있는지 생각해보아야 한다.
    유월절 어린 양의 피는 예수님의 피를,
    무교절의 무교병은 세상에서 연락(宴樂)대신 거친 길이라도 걷겠다는 각오를 다지게 해준다.
    나팔절의 나팔소리는 예수님의 재림 때 울려 퍼질 나팔소리와 무관하지 않다.
    그러면 초실절에 하나님께 바치는 첫 이삭은 다음 구절을 참고해서 예수님과 관련지어보자.

      사 53:2, 눅 2:7; 보리 이삭은 곡식 중에서는 별로 볼 품이 없는 축에 속한다.
      고전 15:20; 첫 열매를 뒤이어 많은 곡식을 거두게 된다.
      마 28:1, 요 20:19, 행 20:7; 예수님을 안식 후 첫날에 부활하셨고 이 날을 기념하여 주일이 되었다. 첫 이삭을 바치던 날이 바로 안식일 다음 날이었다.

      1에바는 약 23ℓ, 1힌은 약 3.7ℓ

      1. 안식일

      2. 유월절


      3. 무교절


      4. 초실절;
      첫이삭(보리) 단을 바치는 절기(유월절 절기 중의 안식일 다음날)
      안식일 다음 날 첫 수확한 곡식의 첫 이삭 한단을 흔들어 드릴 것, 번제(수양), 소제(기름 섞은 고운가루 에바 10분의 2), 전제(포도주 4분의 1 힌)를 아울러 드릴 것, 제사장이 드림, 드리기 전에는 떡이든지 볶은 곡식이든지 생 이삭이든지 먹지 말 것

      5. 칠칠절 (맥추절,
      오순절) : 밀의 수확과 관련
      새 소제(고운가루 에바 10분의 2)를 누룩을 넣어 구운 떡 두 개를 요제로, 번제(어린 양 7, 젊은 수소1, 수양2)를 화제로, 전제, 속죄제(수염소1), 화목제(어린 수양2)를 요제로(다섯 가지 제사를 드린다15-21)

      6 나팔절 :
      신년도래 (나팔 부는 절기는 뭐야? 어떨 때 나팔을 불렀지?)

      7. 속죄일 :
      7월 10일

      8. 장막절(수장절,
      초막절) : 광야에서 장막생활을 기념하는 절기


    유월절(逾越節) Passover. 페사흐 

    하나님께서 애굽에 내리신 마지막 재앙으로 인하여 애굽인들의 장자가 죽임을 당한데 반하여 이스라엘 백성들은 문설주에 바른 피에 의해서 구원함을 받음으로 재앙이 지난 것을 기념하는 축제이다(레위기 23:5)(민수기 28:16)(신명기 16:1).

    절기의 시작은 1월 14일 저녁부터 시작되었다(레위기 23:5).

    이 때 준비한 흠없고 1년된 어린 숫양을 14일에 무교병과 쓴 나물을 함께 먹었다(출애굽기 12:3-8).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의 역사를 말하며 이와같이 그리스도와 함께 죄인들의 연합을 의미한다.

    유월절 희생양은
    흠없으신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을 예시하고 갈보리 십자가의 대사건을 상징한다(마태복음 26:2) (다니엘 7:26).

    다니엘 7:26
    그러나 심판이 시작된즉 그는 권세를 빼앗기고 끝까지 멸망할 것이요.

    마태복음 26:2
    너희의 아는 바와 같이 이틀을 지나면 유월절이라 인자가 십자가에 못박히기 위하여 팔리우리라.

    무교절(無酵節) The Feast of Unleavened Bread. 하그 하마쵸트

    애굽으로부터 급히 빠져 나왔던 이스라엘 백성이 누룩없는 무교병을 먹으며 고생을 한 것을 기념하기 위한 축제이다(출애굽기 23:15) (레위기 23:6).

    무교병은 하나님께 대한 전적인 희생과 봉사를 의미한다(출애굽기 12:16-20).
    절기의 시작은 1월 15 - 21일까지 7일간 번제와 속죄제를 드린다(민수기 28:19-24).
    7일간 무교병을 먹고 2일간은 곡식단을 흔들고 매일 번제를 드렸다.
    그리고 첫날 과 마지막 날은 성회로 모이고 노동을 금했다(출애굽기 12:15-20).

    죄 없으신 예수 그리스도의 몸이 성도들을 위해 찢기심과 그의 부활에 대한 상징이며 성도들에게 주어지는 생명과 부활에 대한 확실한 소망을 주는 것으로 나타낸다(에베소서 1:21-22)

    모든 정사와 권세와 능력과 주관하는 자와 이 세상뿐 아니라 오는 세상에 일컫는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나게 하시고.
    만물을 그 발 아래 복종하게 하시고 그를 만물 위에 교회의 머리로 주셨느니라.

    무교절은 죽으신 예수님께서 무덤에 안장된 사흘의 기간을 의미합니다.


    초실절(初實節) Feast of Firstfruits. 비쿠림

    첫 곡물(보리 수확)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며 첫 곡식단을 봉헌하는 축제이다(레위기 23:10) (출애굽기 23:16).
    이 절기는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에 들어간 다음에야 지켜질 수 있었다.
    왜냐하면 광야에서는 농사를 짓지 않았으므로 수확을 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안식일 다음 날에 그리스도는 부활하셨다(마가복음 16:2).
    그리스도는 부활의 첫 열매로서 성도들의 부활의 보증이 되심을 나타낸다(로마서 8:23).
    하나님께 바쳐진 첫 이삭단은 성도와 교회를 암시한다.
    절기의 시작은 무교절 후(안식일 다음 날)에 곡식의 단을 거두어 흔들고 번제와 소제를 드리며 예물을 드리기 전에는 먹지 말아야 한다(레위기 23:13-14).
    이는 신약교회의 이방인의 추수를 상징한다(로마서 11:25) (요한계시록 14:4)

    초실절은 부활의 첫 열매가 되신 예수님을 의미합니다.


    맥추절(麥秋節) The Feast of Harvest. 칠칠절, 오순절. Pentecost. 칵 학카칠

    초실절을 드린 후 7주(50일째) 되는 날의 절기이다.
    구약의 맥추절 또는 칠칠절인 절기가 신약적 의미로 변화되어 완성된 것이 오순절이다.
    곡물 수확의 마지막 날로 지정하였고 곡식의 첫 열매(밀 수확)를 바치는 봄 절기인 축제이다(출애굽기 34:22) (레위기 23:15) (신명기 16:8).

    절기의 시작은 안식일 다음날 초실절 후에 50일 째에 소제로서 떡을 흔들고 번제, 속죄제, 화목제와 요제를 드렸다.
    이 날은 성회로 공포되고 노동을 못하게 하고 오직 하나님과 교제하며 그의 은총만을 사모할 수 있도록 하였다(레위기 23:21).

    신약에서는 성령강림절이라고 불리운다.
    예루살렘 회심의 유형이며 갈보리 십자가의 첫 열매를 의미하며 마지막 때의 대추수를 상징한다.

    오순절은 성령강림 때에 임하시는 예수님을 의미합니다.

    나팔절(喇叭節) The Feast of Trumpet. 로슈 하샤나

    역사적으로 이 축제는 시나이 반도를 기념하며 나팔을 불어 성회에 모여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축제이다(레위기  23:24) (민수기  29:1).
    절기의 시작은 유대교 일력으로 7월 1일 시행되었는데 이 날은 안식일이었고 그들은 성회로 모여 여호와께 화제를 드렸다.
    이스라엘의 재결합에 의미를 두고 있다.
    7 이라는 숫자의 신성에 의한 인간력 새해 시작을 기념하는 날이다.
    절차는 일반 월삭보다 더 큰 규모의 희생제사를 거행했다(민수기 29:6).
    나팔을 불어 알리고 번제와 소제와 속죄제를 드렸다.
    이 절기의 나팔소리는 마지막 날에 공중강림과 휴거를 상징한다(데살로니가전서 4:14-17) (요한계시록 11:14-19).

    나팔절은 다시 오실 예수님을 의미합니다.

    속죄일(贖罪日) Day of Atonement. 욤 키푸르

    이스라엘의 죄들이 사함받은 날로 그날은 금식하며 일년 중 가장 기쁜 날의 축제이다(레위기 16:3)(레위기  23:27)(민수기  29:7).
    절기의 시작은 유대인 일력의 7월 10일 안식일날로 성회에 모이고 노동을 금했다.
    이 속죄일의 집행자는 대제사장이 지성소에 들어가 이스라엘의 속죄를 위해 하나님께 제사를 드렸다(레위기 16:34).
    이스라엘의 현재의 비애와 미래의 기쁨을 말하며 온 백성의 죄를 속죄하며 성소를 정결하게 하였다(히브리서 9:12-14).
    절차는 모든 백성은 금식하고 쉬며 번제와 소제를 드리고 속죄를 위한 염소를 잡아 피를 뿌리고 아사셀 염소는 광야로 보냈다.
    그리스도의 속죄의 피를 예표하며 마지막 때 남은 자들의 대속죄와 지상재림을 상징한다(마태복음 24:30)(요한계시록 19:11-21).


    초막절(草幕節) Feast of Tabernacles. 수콧(Sukkot)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광야에서 천막생활을 인도하고 보호하신 은혜를 기념하는 축제이다(출애굽기 23:16) (레위기 23:34) (민 수기 29:12) (신명기 16:13).

    절기의 시작은 7월 15 - 21까지 7일간 계속되었고 그 다음날은 안식일이었다.
    이 때 이스라엘 백성들은 종려나무나 감람나무 가지를 취하여 여호와 앞에서 즐거워했다(레위기 23:40).
    토지 소산의 과일 추수를 마칠 때 여호와의 절기를 지키기 위한 것이다.
    새벽에는 해맞이와 관련된 의식과 아침에는 현수의식 그리고 밤에는 축제의식을 가졌다.
    절차는 초막에서 7일간 거주하며 매일 번제와 소제를 드리고 여덟 번째 날에는 성회로 모인다.
    이스라엘의 메시야왕국(천년왕국)에 대하여 상징한다(다니엘 9:24) (베드로후서 2:9) (데살로니가전서 4:16-17) (마태복음 24:42-44) (요한계시록 20:3-6).

    초막절은 새 하늘과 새 땅으로 임하시는 예수님의 의미합니다.




    ____________________________ 레위기 22장 / 성물(2절)


    아론과 그 아들들에게 고하여 그들로 이스라엘 자손이 내게 드리는 성물에 대하여 스스로 구별하여 내 성호를 욕되게 함이 없게 하라 나는 여호와니라.
    Tell Aaron and his sons to treat with respect the sacred offerings the Israelites consecrate to me, so they will not profane my holy name. I am the LORD.

    성물(6944) 코데쉬(qôdesh) קֹדֶשׁ 

    1. 거룩함, 2. 거룩한 것, 3. 지성소
    발음 / 코데쉬[ qôdesh ]
    어원 / 6942에서 유래

    관련 성경
    ☞성회(출12:16, 레23:35, 민28:18), 성소(출26:33, 레20:3, 민8:19), 지성소(출26:33, 레16:16, 왕상6:16), 성결(출28:36, 말2:11), 성물(출28:38, 레22:12, 민6:20), 거룩한 패(출29:6), 성의(출29:29, 레16:32), 거룩한 산(시43:3), 성산(겔28:14), 지성물(레21:22, 민4:4), 거룩한 날(출31:14), 성일(사58:13), 성소(레4:6), 성호(대상16:35, 시105:3, 145:21), 예물(대하31:12), 성전(시5:7, 138:2, 욘2:4), 거룩한 곳(렘31:40), 성도(단12:7). [형] 거룩한(출3:5, 레2:3, 시2:6), 성결한(출15:13, 삼상21:5).
    구약 성경
    477회 사용

    레위기 22장의 내용은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22:1-16.  제사장의 음식(성물)에 대한 규례 

    제사장의 음식은 여호와 하나님께 바쳐진 제물 중 제사장의 몫으로 구별한 것들입니다.
    제사장의 몫으로 구별되었다고 해서 제사장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제사장이라도 부정하게 된 사람은 성물을 먹을 수 없었습니다.
    제사장이 부정하게 되는 경우는 백성들이 부정하게 되는 경우와 다르지 않습니다.
    제사장의 가족과 식솔은 성물을 먹을 수 있었고, 성물을 먹을 수 없는 사람이 모르고 성물을 먹게 되었을 경우에는 속건제를 드려야 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 바쳐진 성물을 더럽히는 죄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22:17-33. 제사에 바쳐지는 제물에 대한 규례

    이스라엘 백성들이 제물로 바치는 것을 제사장이 먹을 수 있는 것은 "지성물"이라고 합니다.
    제사장과 그의 가족들이 먹을 수 있는 것은 "성물"이라고 합니다.
    레위인은 기업을 받지 않기 때문에 백성들이 바친 제물 중에서 하락된 것을 먹을 수 있도록 하셨습니다.



    레위기 22장은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첫 번째 부분인 1-16절은 제사장의 음식(성물) 규례입니다.

    제사장의 음식은 여호와 하나님께 바쳐진 제물 중 제사장의 몫으로 구별한 것들입니다.
    제사장의 몫으로 구별되었다고 해서 제사장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제사장이라도 부정하게 된 사람은 성물을 먹을 수 없었습니다.
    제사장이 부정하게 되는 경우는 백성들이 부정하게 되는 경우와 다르지 않습니다.
    제사장의 가족과 식솔은 성물을 먹을 수 있었고, 성물을 먹을 수 없는 사람이 모르고 성물을 먹게 되었을 경우에는 속건제를 드려야 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 바쳐진 성물을 더럽히는 죄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두 번째 부분 17-33절은 제사에 바쳐지는 제물에 관하여 말씀합니다.

    이 단락에서 반복되는 표현은 “열납되도록”이라는 말입니다(19, 20, 21, 23, 25, 27, 29절).

    열납(悅納) 7522. 라촌(râtsôwn) רָצוֹן 

    1. 기쁨,  2. 즐거움,  3. 의지
    발음 / 라촌[ râtsôwn ]
    어원 / 7521에서 유래 
    관련 성경 / 혈기(창 49:6), 은혜(신 33:16, 잠14:9, 사61:2), 뜻(대하15:5, 시103:21), 마음(에1:8, 9:5),은총(시30:5, 잠8:35, 18:22), 선(시51:18), 소원(시145:16,19), 은택(잠16:15). [동] 받다(출28:38), 기쁘게 받다(레1:3, 19:5, 22:19, 23:11), 기쁘게 하다(잠10:32, 사56:7), 기뻐하다(잠11:1, 12:22). [부] 뜻대로(스10:11, 단11:36),임의로(느9:24, 단11:16)
    구약 성경 / 56회 사용

    열납되도록(리르초네켐)

    '기뽐을 주다', '받아들이다'란 뜻의 '라차'에서 유래한 말로, 제물을 드리는 자가 그 제물을 통하여 '하나님께 참된 즐거음 드릴 수 있도록' 드리라는 의미이다.

    흠없는 수컷

    여호와께 드려지는 모든 희생 제물이 갖추어야 될 기본적인 조건이다.
    이러한 조건 하나님께서 요구하시지 않고 자기 자신이 자원하여 드리는 경우에도 적용되어졌다.
    첫째, 하나님께서 거룩하신 분이시기 때문
    둘째, 자원하여 드리는 것이라 할지라도 그것은 하나님 앞에서 자기 자신의 순수한 신앙을 표현하는 것이기 때문

    이와 같은 것은 오늘날 성도 역시 자원하여 자신을 하나님께 드릴 때, 거룩한 마음과 하나님께서 받으시기에 합당한 흠 없는 정결한 상태로 오직 하나님만 위하여 자신을 드려야 함을 암시한다(롬 12:1).


    하나님이 기쁘게 받으시는 제물이 무엇이며 기뻐하지 않는 제물이 무엇인지 말씀합니다.
    하나님이 기쁘게 받으시는 제물은 흠이 없고 온전한 제물입니다.

    이것은 단지 제물의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온전한 마음에 관한 것입니다.

    로마서 12장 1절은 우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고 말씀합니다. 우리의 모든 삶이 제사이기에 우리의 모든 생각과 말과 행동이 하나님 앞에서 온전해야 합니다. 우리의 힘과 노력으로는 온전해 질 수 없습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공로로만 가능합니다. 온전하신 그리스도 안에서만 우리의 삶과 예배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제물이 될 수 있습니다.



    성전에 들어가지 못하는 제사장

    시므온은 나이가 42세인 제사장이다.
    어느 날 그는 나귀를 타는 중에 실수로 떨어졌는데 불행히도 다리가 심하게 부러져 영구히 불구자가 되었다.
    신체의 문제로 인해 그는 레위기 규정을 따라 더 이상 제사장 직무를 수행할 수 없게 되었다.
    규정에 의하면 앞을 보지 못하거나 다리를 절고 손발이 부러진 불구자는 ‘흠’을 지닌 이유로 제사장으로서 성소에 들어갈 수 없기 때문이다.

    집에서 한가로이 하루하루 보내던 시므온은 삼촌인 제사장 엘리에셀이 병으로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시므온은 오래도록 그를 존경했으며 깊은 교분을 나누었으나 그 장례에 참여할 수 없었다.
    레위기 규정상 제사장은 직계 가족의 장례만 참여하고 집행할 수 있으며 그 외에는 어떠한 장례식도 참여하지 못하도록 금지되어 있기 때문이다.

    레위기 21~22장은 이러한 제사장의 자격과 의무를 다룬 규정이다.
    이것은 제사장이라는 주제로 8~10장과 대칭을 이룬다.
    8~10장이 제사장 위임과 더불어 제사장들의 첫 제사와 실패한 제사를 이야기하고 있는 반면, 21~22장은 제사장의 자격과 준수사항, 그리고 결격사유가 되는 신체적 흠과 그들이 분별해야 하는 짐승의 흠에 관해 다룬다.

    제사장의 장례와 결혼 규정

    시체는 전염성이 강하므로 장례의 절차를 진행하는 사람들이나 전쟁에서 시체와 접촉한 사람들에게 필연적으로 중대한 오염을 유발했다(민 19:11~22). 따라서 성소의 직무를 위해 구별된 제사장들은 장례식을 집행할 수 없음은 물론 장례에 참여하는 자체가 금지되었다.

    다만 일반 제사장들은 직계 가족들의 장례는 치를 수 있었으나(레 21:1~4) 가장 높은 거룩성을 유지해야하는 대제사장에게는 그마저 엄중히 금지되었으며, 심지어 부모의 장례조차 허용되지 않았다(레 21:10~12). 일반 제사장들의 경우 그의 집안에서 출가한 여자는 이미 다른 집안의 가족이므로 그녀의 장례에 참여할 수 없었다. 그러나 직계 가족 중 미혼인 여성들의 장례는 그가 모두 책임져야 했다. 마찬가지로 1~4절에서 제사장의 아내의 장례가 언급되지 않은 것은 시집 온 그녀는 당연히 제사장의 직계 가족이기 때문으로 보인다.

    21:4은 해석상의 논란이 있는 구절이다. “제사장은 그의 백성의 어른인즉 자신을 더럽혀 속되게 하지 말지니라”는 문장에서 ‘어른’ 혹은 ‘주인’을 뜻하는 히브리어 바알(baal)은 ‘남편’을 의미할 수도 있다. 이에 근거하여 혹자는 남편된 제사장이 자신의 아내의 집안사람의 장례에 관여해서 제사장이 부정케 되는 일이 없도록 금지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이 경우 ‘백성’으로 번역된 히브리어 암(am) 범위는 아내의 집안으로 제한된다.

    그러나 4절은 1절과 평행을 이루는 구절이다. 1절이 제사장이 백성의 장례에 참여하지 말라는 원론적 금지 조항이라는 점으로 미루어 볼 때, 4절 또한 포괄적인 금지 규정일 것이다. 즉 제사장은 이스라엘 백성의 장례에 관여하거나 참여해선 안 된다. 이때 바알은 ‘남편’보다는 ‘백성의 어른’으로 해석하는 것이 옳다. 따라서 이 구절에는 제사장이 백성의 장례에 관여하여 자신을 더럽히면 백성 전체를 더럽히는 결과를 초래한다는 의미가 내포된 듯하다.

    5~6절 또한 장례 관행과 관련된 규정으로, 레위기 19:27~29과 신명기 14:1의 규정과 관련이 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장례 때 머리털을 밀고 수염을 깎는 것이 허용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스 9:3; 욥 1:20; 렘 7:29; 16:6; 겔 27:31). 하지만 제사장들에게는 직계 가족의 장례를 치를 때에도 이런 두발 모양이 허용되지 않았다. 대제사장들은 금지된 애곡 행위, 곧 옷을 찢고 머리를 푸는(10절) 행위로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해선 안되었으나 일반 제사장이라면 가능했을 것이다. 참고로 “죽은 자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베지 말며 눈썹 사이 이마 위의 털을 밀지 말라”(신 14:1)는 명령에서 금지된 면도 방법은 이방의 관행으로 보인다. 한편, 몸에 상처를 내고 문신하는 애곡 행위는 일반 백성과 제사장 모두에게 허용되지 않았다(렘 41:5; 48:37).

    정리하자면, 이스라엘에서는 몸을 베거나 눈썹 사이 이마 위 털을 밀거나, 몸에 상처를 내는(문신) 애곡 행위는 이방 관행으로 전적으로 금지되었다. 반면에 머리털을 밀고(깎고) 그것을 풀고 수염을 깎고 옷을 찢고 베옷을 입으며 재를 머리에 뿌리는 관행은 허용되었다. 일반 제사장은 더 엄격해서 머리털을 밀고 수염을 깎는 것이 금지되었고, 다만 옷을 찢고 머리를 푸는 애곡은 허용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대제사장은 그 어떤 애곡 행위도 금지되었다. 제사장들에게 적용되는 결혼 규정 역시 엄격했다. 일반 제사장들은 창녀나 이혼녀와 결혼할 수 없었는데(아마 과부는 가능했던 것으로 보ㅇ니다), 또한 그만큼 자신의 딸도 철저히 관리해야 했다(9절). 그러나 대제사장은 반드시 처녀를 아내로 삼아야 했다(7절, 13~14절).

    제사장의 흠과 짐승의 흠

    이어지는 단락은 제사장이 성소에 들어가려면 갖추어야 하는 신체적 자격요건에 관한 것이다(레 21:18~20). 흥미롭게도 제사장이 성막 내 업무를 처리할 수 없게 만드는 신체적 흠들 12가지(레 21:18~20)와 희생에 부적격한 짐승의 흠들 12가지(레 22:22~24)가 나란히 명시된다. 이 특징들은 지면상 자세한 설명은 생략할 수 밖에 없으나 주목해야할 점은 이 중 네 가지 흠만이 제사장과 희생 짐승에게 공통적이고 나머지는 다르다는 것이다. 그 이유는 인간과 짐승의 생물학적 차이와 신체에 나타나는 증상의 차이 때문일 것이다.

    제사장과 짐승의 흠의 목록이 각각 12가지인 이유는 아마도 12라는 숫자가 ‘완전성의 의미’를 지녔기 때문일 것이다. 따라서 흠들이 굳이 각각 12가지로 제한된다고 볼 필요는 없으며 이 목록을 기준으로 흠의 목록은 더 세부적으로 확대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예컨대, 겉으로 볼 때 손상이 되거나 장애를 지니지 않았으나 삐쩍 마른 가축이라면 속병에 걸린 것으로 판단되어 제물에서 제외되었을 것이다. 또한 목록에 없으나 청각 장애가 있거나 손발이 하나 없는 제사장이 고난도의 성소 업무를 수행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흠을 가진 모든 짐승은 제물로 바쳐질 수 없었는데, 다만 자원의 화목제의 경우는 더한 지체나 덜한 지체를 가진 짐승이 허용되었다(23절). 자원의 화목제의 규준이 다소 완화된 이유는 아마 그것이 감사할 일이나 서원의 이행과 같은 특별한 이유가 없이 마음에 우러나와 바치는 것이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짐승의 흠이 제사장의 흠에 관한 규정과 나란히 등장하는 것은 구성상 어울리지 않지만 이는 의도적 배치임이 분명하다. 제사장에게는 제물로 희생되는 짐승을 검사할 최종 책임이 있기 때문에 짐승의 흠의 목록이 제사장 규정에서 나타나는 것은 자연스럽다. 제사가 드려지는 성막과 제사를 집행하는 제사장, 그리고 제사에서 바쳐지는 희생 제물 모두 흠 없이 거룩해야 했다. 레위기 21~22장은 흠 없는 짐승을 요구하는 1~7장의 동물 제사 규정과 제사장직의 위임과 그 직무의 자격을 제시하는 8장의 내용을 보완하고 있다.

    얼핏 장애인이나 신체에 흠이 있는 사람을 차별하는 것처럼 보이는 율법을 어떻게 해석하면 좋을까? 레위기 제사법에 의하면 분명 ‘흠’은 제물로서 큰 결격사유였지만 이는 제사장에게 요구되는 신체 조건을 명시한 것뿐 장애인에 대한 차별이 아니다. 레위기 21:22~23은 이 질문에 대한 실마리를 제공한다.

    그들은 제사장의 직무에서만 배제되었을 뿐, 제사장 가족의 일원으로서 모든 혜택을 동등하게 누렸다. 다만 그들은 성소의 직무에서 배제된다. 다시 말해 모든 제사장 가족들은 백성들이 바친 성물들을 가족 별로 공평히 나누어 가졌던 것이다. 한편, 구약의 훈육은 많은 경우 실물적 교훈과 상징을 통해 이루어지는데, 여기서도 동일한 원리에 의해 신체적 흠을 불완전성의 상징으로서 하나님의 거룩에 합당하지 않게 여겼을 뿐이다.

    여기에 더해 제사장이 성막 내에서 섬세하고 과중한 업무를 수행하느라 육체적·정신적 피로에 시달렸다고 추정해볼 수 있다. 신체적 장애로 인해 자칫 제의적 실수를 할 가능성도 있으니 그들을 직무에서 배제한 것은 일종의 배려일 수 있다. 장애인의 군 입대를 막는 것이 이들에 대한 차별이 아니듯이 장애인에게 제사장의 역할을 맡기지 않았다 해서 이를 차별이라 볼 수는 없다. 따라서 이것은 단순히 실제적 역할과 흠의 상징성의 문제였다. 물론 신약에 이르러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구약의 교훈을 위해 설정된 이 모든 임시적인 차별의 장벽들이 사라졌다. 그러나 우리가 기억해야할 것은 모든 인간은 하나님 앞에 서면 장애와 흠을 지닌 존재들이라는 사실이다. 그럼에도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 앞에 담대히 나갈 자격을 얻었다는 사실이다.

    제사장의 성물 음식 섭취 규정

    레위기 22:1~16은 성물을 먹을 수 있는 제사장의 자격에 대한 규정이다.
    제사장이 먹는 성물 음식은 지성물과 일반 성물로 나뉘었는데(레 21:22) 아마 여기서 성물이란 제단에 바쳐진 지극히 거룩한 음식을 가리킬 것이다.
    몸이 부정케 된 제사장은 성물과 접촉하거나 성물을 먹을 수 없었으며 이 규정을 어기면 ‘제명’당하는 징벌이 뒤따랐다(3~10절). 여기에는 나병 환자, 유출 환자, 시체를 만진 자, 정액이 유출된 자, 기는 짐승의 사체를 만진 자(참조. 레 11:29~31, 41~43), 그리고 오염원에 접촉된 자와 자연사한 짐승이나 찢겨 죽은 짐승의 사체를 먹는 자들이 포함된다.

    이런 이유들로 부정을 탄 제사장은 목욕을 한 뒤 저녁까지 기다려야 다시 정결케 된다. 부정한 상태에서 성물 음식을 먹음으로써 그것을 더럽히는 것은 중대한 범죄 행위다(9절). 그러나 이 규정은 부정케 된 제사장이 음식을 전혀 먹을 수 없다는 의미는 아니다. 그들은 제단에 오르지 않고 성전에 바쳐진 다른 음식 봉헌물들, 예를 들어 추수의 감사 예물과 같은 일반적인 음식은 먹을 수 있었다.

    일반인들과 제사장 집의 손님, 제사장이 잠시 고용한 일꾼은 성물 음식을 먹을 자격이 없었다. 그러나 제사장의 종과 그의 자녀들은 제사장의 식구로 간주되어 성물을 먹을 수 있었다(11절). 제사장의 딸이 출가하면 시댁의 일원이 되므로 성물을 먹을 권리를 박탈했으며 혼인 관계가 중단되어 아버지 집으로 돌아오는 경우에는 그 권리가 회복되었다(12절). 일반인은 성물 음식을 섭취할 수 없다는 것을 거듭 강조함과 더불어 주어진 추가 지침 한 가지는 실수로 그것을 먹는 경우 이는 성물 침해죄에 속하기에 속건제가 요구된다는 것이다.

    이때 죄인은 성물에 20%를 더하여 갚고, 이어서 숫양 한 마리를 성소에 바쳐야 했다(14절). 그러나 의도적으로 성물을 먹은 자에게는 그 죄에 합당한 형벌이 주어질 것이다(15절). 이 경우에 해당하는 형벌은 명시되어있지 않으나 성경의 다른 구절에 비추어 볼 때 하나님의 직접 심판에 의한 ‘죽음’이나 ‘제명’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마지막으로 제사장들의 유념해야할 몇 가지 추가적인 제의 규정들이 주어진다. 먼저 가축의 새끼가 태어나면 칠일 동안 어미와 같이 있게 하고 팔일 째부터는 희생으로 바칠 수 있다(22:27). 이것은 남자 아이가 태어나면 칠일이 지나 팔일 째에 할례를 해야하는 규정과 병행을 이루고 있는데(창 17:12; 21:4; 눅 1:59; 2:21) 짐승의 경우 “어미와 같이 있게 하라”는 요구사항에서 분명히 가축에 대한 인격적 배려가 깃들어 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이러한 인격적 배려는 바로 뒤잇는 규정에서 명백해진다. 암컷 가축을 잡을 때 어미와 새끼를 같은 날에 잡아서는 안된다(28절). 이어지는 규정은 화목제의 고기를 먹는 규정의 반복이다(28~29절). 유독 첫날 고기를 모두 먹어야 했던 감사의 화목제만 나타나는데, 이것은 아마도 감사의 화목제 고기를 자칫 이튿날까지 먹는 일이 발생하지 않도록 특별한 주의를 주기 위함일 것이다. 반면에 다른 화목제 고기들, 즉 서원의 화목제와 자원의 화목제(특별한 감사한 일이 없이 자원해서 감사의 마음으로 바친 화목제)의 경우 이튿날까지 고기를 먹을 수 있었다. 이 중대한 제사장 규정들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거룩의 속성을 강조하시고 또한 자신이 이스라엘을 거룩하게 하는 여호와임을 상기시키면서 끝을 맺는다(22:31~33).










































































































































































































































































































































      귀찮은 것이 아니라 감사 감격해야 옳다; 여호와와 자신들의 관계가 어떤 것인지를 먼저 살펴야한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당신에게서 만은...'이라는 말은 나와 특별한 관계가 있다는 말인데 다른 분도 아닌 하나님께서 나와 특별한 관계에 있다고 강조한다는 것은 얼마나 영광스런 일인지 모른다. 훌륭한 목사와 성도간의 관계는 헌신을 요구하고 그 헌신을 받아들이는 관계이다. 해준 게 없다고 자식 앞에 비굴한 부모보다는 해준 것도 없으면 자식 앞에 당당한 부모가 보기 좋다. 당당하게 '너에게는 거룩히 여김을 받아야겠다'는 하나님의 선언이 내게는 얼마나 감격스러운지 모른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권위를 세우신다는 것은 뒤집어보면 나를 자녀로 인정하신다는 뜻이다. 홍길동이 온 천하를 헤집고 다니게된 원인은 아버지를 아버지라고, 형을 형이라고 불러보지 못한 탓이다. 그에게 유일한 소원은 아버지를 아버지라고 불러보는 것이었다. 그런데 어느 날 '내가 네게는 아버지라고 불려야겠다'고 한다면?

      짐승들을 빨리 살을 찌우기 위해서 거세시키는 경우를 금함(24); 짐승이든 사람이든 이런 방식을 하나님께서는 좋아하시지 않음; 국화 기르는 것이나 과일나무를 기르는 것도 어떻게 본다면 비슷한 현상인데?


    제사장(祭司長) כֹּהֵן

    코헨(3548) kôhên / כֹּהֵן

    1. 제사장,  2. 대제사장,  3. 왕
    발음 / 코헨 [ kôhên ]
    관련 성경 / 제사장(창 14:18, 레 14:18, 대하 31:19, 스 6:9, 7:12, 24)
    구약 성경 / 752회 사용

    말라크(4397) malʼâk  מַלְאָךְ 

    1. 보내진 자,  2. 하나님의 사자, 3. 천사
    발음 / 마라크[ malʼâk ]
    어원 / ‘대리로 파견하다’는 뜻의 사용하지 않는 어원에서 유래
    관련 성경 / 사자(使者)(창 16:7, 삿 2:1, 시 34:7), 천사(창 19:1, 삼하 24:16, 대하 32:21), 왕(삼하 11:1), 사신(사 14:32, 33:7),
                      파견자(나 2:13)
    구약 성경 / 212회 사용


    3549. כָּהֵן 

    1. 제사장, 2. 스가랴 7:12
    발음 / 카헨 [ kâhên ]
    어원 / 아람어
    관련 성경 / 제사장(스 7:12, 16, 21)
    구약 성경 / 8회 사용

    3550. כְּהֻנָּה 

    1. 제사장직,  2. 제사장의 임무, 3. 제사장의 역할
    발음 / 케훈나 [ kehunnâh ]
    어원 / 3547에서 유래
    관련 성경 / 제사장 직분(민 3:10, 수 18:7, 느 13:29), 제사장(출 40:15)
    구약 성경 / 14회 사용

    * 3547.  카한(kâhan)  כָּהַן   

    1. 예시하다,  2. 사제가 되다,  3. 피엘형   כִּהֵן
    발음 / 카한 [ kâhan ]
    관련 성경 / 제사장 직분을 행하다(출 28:41, 겔 44:13), 제사장이 되다(호 4:6), 제사장 직을 행하다(출 31:10, 39:41)
    구약 성경 /23회 사용


    __________________ 레위기 21장 / 백성의 어른(4절)  

    04-01-2023(토) 사순절 제34일

    제사장은 그의 백성의 어른인즉 자신을 더럽혀 속되게 하지 말지니라.
    He must not make himself unclean for people related to him by marriage, and so defile himself.
    He shall not defile himself as a relative by marriage among his people, and so profane himself.

    레위기 21장과 22장은 제사장에 관한 규례입니다.
    21장에서는 제사장이 지켜야 할 규례
    22장에서는 제사장이 먹어야 할 음식 즉 성물에 관한 규례

    제사장은 하나님의 성소를 섬기고 돌아보는 직무를 맡은 직분입니다.
    우리 모두가 우리 주 예수그리스도로 인하여서 왕 같은 제사장들이 되었다는 사실도 이와 다르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성전 되어진 하나님의 백성들을 우리가 섬기고 또 돌아보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모습들로 인도할 수 있는 그러한 사명을 받은 자가 왕같은 제사장이라는 칭호를 받은 저와 여러분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렇다면 그러한 삶에 그러한 사람의 삶의 모습과 삶의 자리는 그렇지 않은 사람과 사실 같다'라고 말할 수 없겠습니다.

    어떻게 구별되어야 하고, 어떤 인식의 차이가 있으며 또 어떤 목표를 갖고 있는지, 

    오늘의 말씀은 구약성경 레위기 속에서도 얼마든지 신약의 이 시대의 성령의 세대를 살아가고 있는 우리들에게도 큰 도전이 된다' 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오늘 말씀을 통하여서 왕 같은 제사장 하나님의 성전을 섬기는 저와 여러분의 생애가 되어지기를 축원합니다.

    거룩함의 기준이 높을수록 사랑으로 배려합니다

    레위기 21장은 제사장이 지킬 규례입니다.

    레위기 21, 22장은 제사장이 지킬 규례입니다.
    제사장은 백성의 어른입니다.
    대제사장은 형제 제사장들 중에서 으뜸입니다.
    제사장들은 거룩하신 하나님께 제사를 드림과 동시에 백성들로 하여금 거룩하게 살아가도록 본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해 제사장들이 하나님 앞에서, 백성들 앞에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말씀합니다.  

    레위기 21:1-9절은 제사장이 스스로 더럽히지 말아야 할 것들이 무엇인지 설명합니다. 

    주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셨다. 
    아론의 혈통을 이어받은 제사장들에게 알려라. 너는 그들에게 다음과 같이 일러라.

    제사장은 누구든지, 백성의 주검을 만져 자신의 몸을 더럽히는 일이 없도록 하여라.
    가장 가까운 살붙이, 곧 어머니나 아버지나 아들이나 딸이나 형제의 주검은 괜찮다.
    또한 시집가지 못하고 죽은 친누이의 주검도 괜찮다.
    그 여자에게 남편이 없기 때문이다.
    이들의 주검을 만져 몸을 더럽히는 것은 괜찮다.
    그러나 제사장은 백성의 어른이므로, 스스로 더럽혀 욕되게 해서는 안 된다. 

    제사장은 머리털을 깎아 대머리같이 하거나, 구레나룻을 밀거나, 제 몸에 칼자국을 내서는 안 된다.
    그들은 하나님께 거룩하게 구별된 사람들이니, 그들이 섬기는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해서는 안 된다.
    그들은 주께 제물을 살라 바치는 이들, 곧 하나님께 음식을 바치는 이들이기 때문에, 그들은 거룩하여야 한다. 

    제사장은 창녀나, 이미 몸을 버린 여자와 결혼해서는 안 된다. 이혼한 여자와도 결혼하지 않아야 한다.
    제사장은 하나님께 거룩하게 구별된 사람이기 때문이다. 

    너희는 제사장을 거룩하게 생각하여야 한다.
    그는 너희가 섬기는 하나님께 음식제물을 바치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제사장은 너희에게도 거룩한 사람이다.

    너희를 거룩하게 하는 나 주가 거룩하기 때문이다. 

    제사장의 딸이 창녀 짓을 하여 제 몸을 더럽히면, 제 아버지를 더럽히는 것이나 마찬가지이므로, 그 여자는 불태워 죽여야 한다.


    제사장이 지킬 규례들




    1. 제사장은 백성의 시체를 만져서 자신의 몸을 더럽히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한다. 
    →물론 어머니나 아버지나 아들이나 딸이나 형제의 시체에 접촉하는 것 허용 
    →또한 시집가지 못하고 죽은 친누이의 시체에 접촉하는 것도 허용 


    2. 제사장은 머리털을 깎아 대머리같이 하면 안 된다. 
    3. 제사장은 자기 수염 양쪽(구레나룻)을 밀면 안 된다. 

    4. 제사장은 제 몸에 칼자국을 내서는 안 된다. 

    5. 제사장은 하나님께 대하여 거룩해야 한다.

    6. 제사장은 그들이 섬기는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해서는 안 된다. 

    7. 제사장은 창녀나, 이미 몸을 버린 여자와 결혼해서는 안 된다. 

    8. 제사장은 이혼한 여자와도 결혼하지 않아야 한다. 

    ☞ 제사장은 하나님께 거룩하게 구별된 사람이기 때문이다. 
    9. 제사장의 딸이 창녀 짓을 하여 제 몸을 더럽히면, 

    제 아버지를 더럽히는 것이나 마찬가지이므로, 그 여자는 불태워 죽여야 한다.


    레위기 21:10-15절은 대제사장이 지킬 규례입니다. 

    제사장들이 스스로 자신을 더럽히지 말도록 명령한 내용과 동일하게 시체에 접촉하지 말하는 명령입니다.
    제사장에게 하신 명령보다 더 엄격합니다.
    이유는 하나, 형제 제사장들의 으뜸이 되는 대제사장이기 때문입니다. 

    형제 제사장들 가운데서 으뜸되는 대제사장은, 임명될 때에 머리에 기름을 부었고, 또 예복을 입고 거룩하게 구별되었으므로머리를 풀거나 옷을 찢으며 애도해서는 안 된다.
    그는 어떤 주검에도 가까이해서는 안 된다.
    자기 아버지나 어머니가 죽었을 때에도, 그 주검에 가까이하여 몸을 더럽혀서는 안 된다.
     

    대제사장은 절대로 성소에서 떠나서는 안 된다.
    그가 섬기는 하나님의 성소를 더럽혀서는 안 된다.

    그는 남달리, 하나님이 기름부어 거룩하게 구별하고, 대제사장으로 임명하였기 때문이다. 나는 주다. 

    대제사장은 처녀를 아내로 맞이하여야 한다.
    과부나 이혼한 여자나 이미 몸을 버린 여자나 창녀와 결혼해서는 안 된다.
    그는 다만 자기 백성 가운데서 숫처녀를 아내로 맞이하여야 한다.
    그래야만, 그는 더러워지지 않은 자녀를 자기 백성 가운데 남기게 될 것이다. 그를 거룩하게 한 이는 주다.”


    대제사장이 지킬 규례들

    1. 대제사장은, 임명될 때에 머리에 기름을 부었고, 또 예복을 입고 거룩하게 구별되었으므로, 머리를 풀거나 옷을 찢으며 애도해서는 안 된다.

    2. 대제사장은 어떤 주검에도 가까이해서는 안 된다. 

    3. 대제사장은 자기 아버지나 어머니가 죽었을 때에도, 그 주검에 가까이하여 몸을 더럽혀서는 안 된다. 

    4. 대제사장은 절대로 성소에서 떠나서는 안 된다. 

    5. 대제사장은 그가 섬기는 하나님의 성소를 더럽혀서는 안 된다. 

    6. 대제사장은 처녀를 아내로 맞이하여야 한다. 

    7. 대제사장은 과부나 이혼한 여자나 이미 몸을 버린 여자나 창녀와 결혼해서는 안 된다.

    8. 그는 다만 자기 백성 가운데서 숫처녀를 아내로 맞이하여야 한다. 



    레위기 21:16-24절은 아론의 자손 중에 육체에 흠이 있는 자들에 대한 규례입니다. 

    “너는 아론에게 이렇게 말하여라. 대대로, 너의 자손 가운데서 몸에 흠이 있는 사람은 하나님께 음식제물을 바치러 나올 수 없다

    몸에 흠이 있어서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갈 수 없는 사람은, 곧 눈이 먼 사람이나, 다리를 저는 사람이나, 얼굴이 일그러진 사람이나, 몸의 어느 부위가 제대로 생기지 않은 사람이나, 팔다리가 상하였거나 손발을 다쳐 장애인이 된 사람이나, 곱사등이나, 난쟁이나, 눈에 백태가 끼어 잘 보지 못하는 사람이나, 가려움증이 있는 환자나, 종기를 앓는 환자나, 고환이 상한 사람 들이다. 

    제사장 아론의 자손 가운데서 이처럼 몸에 흠이 있는 사람은, 누구든지 주께 가까이 나아와 살라 바치는 제사를 드릴 수 없다. 몸에 흠이 있는 사람은 하나님께 음식제물을 바치러 나올 수 없다. 

    그러나 그 사람(몸에 흠이 있는 아론의 자손)도 하나님께 바친 음식, 곧 가장 거룩한 제물과 거룩한 일반제물을 먹을 수는 있다. 다만 몸에 흠이 있으므로, 그는 휘장 안으로 들어가거나 제단에 가까이 나아와, 내가 거룩하게 한 물건들을 더럽히는 일만은 삼가야 한다. 그것들을 거룩하게 한 이가 바로 나 주이기 때문이다.”


    제사장 아론의 자손 가운데서 몸에 흠이 있는 사람은, 누구든지 주께 가까이 나아와 살라 바치는 제사를 드릴 수 없습니다. 몸에 흠이 있는 사람은 하나님께 음식제물을 바치러 나올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몸에 흠이 있는 아론의 자손들도 하나님께 바친 음식, 곧 가장 거룩한 제물과 거룩한 일반제물을 먹을 수는 있습니다.
              

    하나님께 음식 제물을 드릴 수 없는 자들 즉 몸에 흠이 있는 자들의 목록

    1. 눈이 먼 사람
    2. 다리를 저는 사람
    3. 얼굴이 일그러진 사람
    4. 몸의 어느 부위가 제대로 생기지 않은 사람 
    5. 팔다리가 상하였거나 손발을 다쳐 장애인이 된 사람 
    6. 곱사등이나 난쟁이
    7. 눈에 백태가 끼어 잘 보지 못하는 사람
    8. 가려움증이 있는 환자
    9. 종기를 앓는 환자
    10. 고환이 상한 사람


    제사장은 백성의 어른이라고 하셨습니다.

    어른이란 성숙함이 기준입니다.
    제사장을 라틴어로 폰티팍스(pontifax)라고 합니다.
    '폰티팍스'의 어원은 "다리를 놓는 사람"을 말합니다.
    다리의 용도는 계곡과 계곡 사이를 연결하여 보행자들이 편하게 다닐 수 있도록 하는 것입니다.
    제사장은 피조물과 창조주 사이에 다리가 되어 사람이 전능자를 쉽게 찾아갈 수 있도록 길 안내를 해야 합니다.
    만일 제사장이 어른스럽지 못하면 사람들은 길을 잃어버릴 것입니다.

    레위기 21장은 구약시대 제사장이 지켜야 할 규례들을 말씀합니다.

    21:1-8. 제사장된 자는 스스로 더럽혀 욕되게 해서는 안될 것.
    21:9. 제사장의 딸이 음행했을 때의 벌.
    21:10-15. 제사장은 몸을 더럽혀서 안될 것.
    21:16-24. 제사장은 신체 완전해야 할 것.

    제사장의 개인적 정결 규례는 크게 세 가지로 말씀합니다.
    제사장이 하나님 앞에서 백성들을 대표한다는 면에서 제사장에 대한 이런 규례는 언약 공동체 전체의 대한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첫째는 시체를 만지지 말라
    둘째는 수염이나 털을 깎지 말라
    셋째는 부정하거나 이혼한 여자와의 결혼하지 말라

    시체 접촉 금지는 죄에 대한 정결을 의미합니다.
    구약이나 신약이나 죽음은 죄에 대한 심판의 결과라고 판단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시체 접촉 금지는 범죄에 대한 단호한 경고를 뜻합니다.

    수염이나 털을 깎지 않는 것은 하나님에 대한 전적인 헌신을 의미합니다.
    동양 사상에서 ‘신체발부 수지부모 불감훼상(身體髮膚 受之父母 不敢毁傷)’ 이란 말처럼 "부모로부터 물려 받은 몸의 터럭 하나라도 감히 훼손해선 안 된다."는 정신을 생각나게 합니다. - 효경(孝經), 첫 장의 구절

    부정한 여자 또는 이혼한 여자와 결혼하지 말라는 규례는 하나님께서 세우신 사회의 기초 공동체로서 가정이 건전해야 함을 의미합니다.
    그래야만 언약 공동체 전체가 조화롭게 유지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언약 백성으로서 이스라엘 백성 전체가 하나님 앞에서 거룩해야 하지만 특별히 레위기 21장에서는 제사장은 백성의 어른이므로 모범이 되어야 한다는 점에서 더욱 정결해야 할 것을 강조합니다.

    따라서 오늘날 하나님의 제사장인 성도들도 백성의 어른처럼 정결한 삶을 유지하므로 세상 사람들에게 믿음의 본을 보여줄 수 있습니다.
    만일 성도들이 정결하지 못하고 개인적으로나 가정적으로 문제가 많다면 "예수 믿는 너희들이나 잘 해라!" 비난을 받게 되어 복음을 전할 수 없을 것입니다.

    성도들이 개인적으로나 가정적으로 세상 사람들에게 모범이 될 때 우리가 전하는 말씀이 더욱 힘있게 전파될 것입니다.
    날마다 거룩한 삶과 거룩한 질서 회복을 위해 최선을 다하는 믿음의 사람으로 굳게 세워지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너 주의 사람아




    21:1-12. 제사장의 장례식 참석 규례
    21:13-15. 제사장 결혼규례
    21:16-24. 제사장 신체 조건에 대한 규정

    제사장들 중에서도 대제사장은 성결을 위해 지켜야 할 규례가 더 엄격했습니다.
    예를 들면 대제사장들은 직계존비속에 대해서는 시체에 접근할 수 있었지만(2절), 대제사장들은 예외를 인정하지 않았다.(11절)
    이와 같이 구약의 율법은 하나님을 섬기는 거리에 따라 성결에 대한 요구의 정도가 달랐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보혈의 능력으로 말미암아 신약시대 이후로는 이러한 구분이 다 무너졌다. 예수그리스도를 구주라고 고백하는 그리스도인이라면 누구든지 직접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는 대제사장의 신분의 변화가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제 성도라면 누구나 대제사장 신분으로 성결을 지켜야 하는 의무가 생긴 것이다. 그래야 거룩하신 하나님과 더불어 깊이 교제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제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과 나의 막힘 담을 허물어 주신 그곳에 우리의 교만과 죄악으로 다시금 불결함이 채워지는 것이 아니라 왕 같은 제사장의 신분으로 언제나 주의 말씀을 따라 성결함으로 나아가야 할 것이다.


    나는 오늘 이 말씀을 묵상하면서 하나님 나라의 거룩한 백성으로서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성결한 삶을 살고 있는가 반추하게 되었다.
    세상의 유혹과 시험이 몰려올 때 우리는 도저히 우리의 힘으로 그것들을 이겨낼 힘이 없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만이 하나님의 선한 손이 우리를 도울 뿐이다.
    이제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말미암아 왕 같은 제사장의 신분인 된 우리들이 하나님 앞에서 성결한 삶을 살기 위해서는 오직 기도와 말씀으로 사는 길 밖에 없는 것이다.
    나에게 왕 같은 제사장의 신분을 주신 하나님 아버지께 늘 기도와 말씀 묵상으로 성결함을 잃지 말아야겠다.


    신명기 14:1
    너희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자녀니 죽은 자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베지 말며 눈썹 사이 이마 위의 털을 밀지 말라

    에스겔 44:20
    그들은 또 머리털을 밀지도 말며 머리털을 길게 자라게도 말고 그 머리털을 깎기만 할 것이며

    레위기 19:27-28
    머리 가를 둥글게 깎지 말며 수염 끝을 손상치 말며

    레위기 10:6
    모세가 아론과 그 아들 엘르아살과 이다말에게 이르되 `너희는 머리를 풀거나 옷을 찢지 말아서 너희 죽음을 면하고 여호와의 진노가 온 회중에게 미침을 면케 하라 오직 너희 형제 이스라엘 온 족속이 여호와의 치신 불로 인하여 슬퍼할 것이니라

    이사야 15:2
    그들은 바잇과 디본 산당에 올라가서 울며 모압은 느보와 메드바를 위하여 통곡하도다 그들이 각각 머리털을 없이 하였고 수염을 깎았으며

    이사야 22:12
    그 날에 주 만군의 여호와께서 명하사 통곡하며 애호하며 머리털을 뜯으며 굵은 베를 띠라 하셨거늘

    예레미야 16:6
    큰 자든지 작은 자든지 이 땅에서 죽으리니 그들이 매장되지 못할 것이며 그들을 위하여 애곡하는 자도 없겠고 자기 몸을 베거나 대머리 되게 하는 자도 없을 것이며

    예레미야 48:37
    각 사람의 두발이 밀렸고 수염이 깍였으며 손이 베어졌으며 허리에 굵은 베가 둘렸고

    아모스 8:10
    너희 절기를 애통으로, 너희 모든 노래를 애곡으로 변하며 모든 사람으로 굵은 베로 허리를 동이게 하며 모든 머리를 대머리 되게 하며 독자의 죽음을 인하여 애통하듯 하게 하며 그 결국으로 곤고한 날과 같게 하리라

    미가 1:16
    너는 네 기뻐하는 자식으로 인하여 네 머리털을 깎아 대머리 같게 할지어다 네 머리로 크게 무여지게 하기를 독수리 같게 할지어다 이는 그들이 사로잡혀 너를 떠났음이니라

    제사장은 달랐다! 제사장의 자격과 의무


    고난도 성소 직무 수행 제사장, 함부로 울지도 먹지도 못했다


    신체조건부터 결혼자격까지 흠이 없는 엄격한 규정 통해 하나님 거룩성 드러내는 책임 강조



    성전에 들어가지 못하는 제사장
    시므온은 나이가 42세인 제사장이다. 어느 날 그는 나귀를 타는 중에 실수로 떨어졌는데 불행히도 다리가 심하게 부러져 영구히 불구자가 되었다. 신체의 문제로 인해 그는 레위기 규정을 따라 더 이상 제사장 직무를 수행할 수 없게 되었다. 규정에 의하면 앞을 보지 못하거나 다리를 절고 손발이 부러진 불구자는 ‘흠’을 지닌 이유로 제사장으로서 성소에 들어갈 수 없기 때문이다.

    집에서 한가로이 하루하루 보내던 시므온은 삼촌인 제사장 엘리에셀이 병으로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시므온은 오래도록 그를 존경했으며 깊은 교분을 나누었으나 그 장례에 참여할 수 없었다. 레위기 규정상 제사장은 직계 가족의 장례만 참여하고 집행할 수 있으며 그 외에는 어떠한 장례식도 참여하지 못하도록 금지되어 있기 때문이다.

    레위기 21~22장은 이러한 제사장의 자격과 의무를 다룬 규정이다. 이것은 제사장이라는 주제로 8~10장과 대칭을 이룬다. 8~10장이 제사장 위임과 더불어 제사장들의 첫 제사와 실패한 제사를 이야기하고 있는 반면, 21~22장은 제사장의 자격과 준수사항, 그리고 결격사유가 되는 신체적 흠과 그들이 분별해야 하는 짐승의 흠에 관해 다룬다.

    제사장의 장례와 결혼 규정
    시체는 전염성이 강하므로 장례의 절차를 진행하는 사람들이나 전쟁에서 시체와 접촉한 사람들에게 필연적으로 중대한 오염을 유발했다(민 19:11~22). 따라서 성소의 직무를 위해 구별된 제사장들은 장례식을 집행할 수 없음은 물론 장례에 참여하는 자체가 금지되었다.

    다만 일반 제사장들은 직계 가족들의 장례는 치를 수 있었으나(레 21:1~4) 가장 높은 거룩성을 유지해야하는 대제사장에게는 그마저 엄중히 금지되었으며, 심지어 부모의 장례조차 허용되지 않았다(레 21:10~12). 일반 제사장들의 경우 그의 집안에서 출가한 여자는 이미 다른 집안의 가족이므로 그녀의 장례에 참여할 수 없었다. 그러나 직계 가족 중 미혼인 여성들의 장례는 그가 모두 책임져야 했다. 마찬가지로 1~4절에서 제사장의 아내의 장례가 언급되지 않은 것은 시집 온 그녀는 당연히 제사장의 직계 가족이기 때문으로 보인다.

    21:4은 해석상의 논란이 있는 구절이다. “제사장은 그의 백성의 어른인즉 자신을 더럽혀 속되게 하지 말지니라”는 문장에서 ‘어른’ 혹은 ‘주인’을 뜻하는 히브리어 바알(baal)은 ‘남편’을 의미할 수도 있다. 이에 근거하여 혹자는 남편된 제사장이 자신의 아내의 집안사람의 장례에 관여해서 제사장이 부정케 되는 일이 없도록 금지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이 경우 ‘백성’으로 번역된 히브리어 암(am) 범위는 아내의 집안으로 제한된다.

    그러나 4절은 1절과 평행을 이루는 구절이다. 1절이 제사장이 백성의 장례에 참여하지 말라는 원론적 금지 조항이라는 점으로 미루어 볼 때, 4절 또한 포괄적인 금지 규정일 것이다. 즉 제사장은 이스라엘 백성의 장례에 관여하거나 참여해선 안 된다. 이때 바알은 ‘남편’보다는 ‘백성의 어른’으로 해석하는 것이 옳다. 따라서 이 구절에는 제사장이 백성의 장례에 관여하여 자신을 더럽히면 백성 전체를 더럽히는 결과를 초래한다는 의미가 내포된 듯하다.

    5~6절 또한 장례 관행과 관련된 규정으로, 레위기 19:27~29과 신명기 14:1의 규정과 관련이 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장례 때 머리털을 밀고 수염을 깎는 것이 허용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스 9:3; 욥 1:20; 렘 7:29; 16:6; 겔 27:31). 하지만 제사장들에게는 직계 가족의 장례를 치를 때에도 이런 두발 모양이 허용되지 않았다. 대제사장들은 금지된 애곡 행위, 곧 옷을 찢고 머리를 푸는(10절) 행위로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해선 안되었으나 일반 제사장이라면 가능했을 것이다. 참고로 “죽은 자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베지 말며 눈썹 사이 이마 위의 털을 밀지 말라”(신 14:1)는 명령에서 금지된 면도 방법은 이방의 관행으로 보인다. 한편, 몸에 상처를 내고 문신하는 애곡 행위는 일반 백성과 제사장 모두에게 허용되지 않았다(렘 41:5; 48:37).

    정리하자면, 이스라엘에서는 몸을 베거나 눈썹 사이 이마 위 털을 밀거나, 몸에 상처를 내는(문신) 애곡 행위는 이방 관행으로 전적으로 금지되었다. 반면에 머리털을 밀고(깎고) 그것을 풀고 수염을 깎고 옷을 찢고 베옷을 입으며 재를 머리에 뿌리는 관행은 허용되었다. 일반 제사장은 더 엄격해서 머리털을 밀고 수염을 깎는 것이 금지되었고, 다만 옷을 찢고 머리를 푸는 애곡은 허용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대제사장은 그 어떤 애곡 행위도 금지되었다. 제사장들에게 적용되는 결혼 규정 역시 엄격했다. 일반 제사장들은 창녀나 이혼녀와 결혼할 수 없었는데(아마 과부는 가능했던 것으로 보ㅇ니다), 또한 그만큼 자신의 딸도 철저히 관리해야 했다(9절). 그러나 대제사장은 반드시 처녀를 아내로 삼아야 했다(7절, 13~14절).
     
    제사장의 흠과 짐승의 흠

    제사장이 성소에 들어가려면 갖추어야 하는 신체적 자격요건에 관한 것이다(레 21:18~20).
    흥미롭게도 제사장이 성막 내 업무를 처리할 수 없게 만드는 신체적 흠들 12가지(레 21:18~20)
    희생에 부적격한 짐승의 흠들 12가지(레 22:22~24)가 나란히 명시된다.

    이 특징들은 지면상 자세한 설명은 생략할 수 밖에 없으나 주목해야할 점은 이 중 네 가지 흠만이 제사장과 희생 짐승에게 공통적이고 나머지는 다르다는 것이다.
    그 이유는 인간과 짐승의 생물학적 차이와 신체에 나타나는 증상의 차이 때문일 것이다.

    제사장과 짐승의 흠의 목록이 각각 12가지인 이유는 아마도 12라는 숫자가 ‘완전성의 의미’를 지녔기 때문일 것이다.
    따라서 흠들이 굳이 각각 12가지로 제한된다고 볼 필요는 없으며 이 목록을 기준으로 흠의 목록은 더 세부적으로 확대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예컨대, 겉으로 볼 때 손상이 되거나 장애를 지니지 않았으나 삐쩍 마른 가축이라면 속병에 걸린 것으로 판단되어 제물에서 제외되었을 것이다. 또한 목록에 없으나 청각 장애가 있거나 손발이 하나 없는 제사장이 고난도의 성소 업무를 수행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흠을 가진 모든 짐승은 제물로 바쳐질 수 없었는데, 다만 자원의 화목제의 경우는 더한 지체나 덜한 지체를 가진 짐승이 허용되었다(23절). 자원의 화목제의 규준이 다소 완화된 이유는 아마 그것이 감사할 일이나 서원의 이행과 같은 특별한 이유가 없이 마음에 우러나와  바치는 것이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짐승의 흠이 제사장의 흠에 관한 규정과 나란히 등장하는 것은 구성상 어울리지 않지만 이는 의도적 배치임이 분명하다. 제사장에게는 제물로 희생되는 짐승을 검사할 최종 책임이 있기 때문에 짐승의 흠의 목록이 제사장 규정에서 나타나는 것은 자연스럽다. 제사가 드려지는 성막과 제사를 집행하는 제사장, 그리고 제사에서 바쳐지는 희생 제물 모두 흠 없이 거룩해야 했다. 레위기 21~22장은 흠 없는 짐승을 요구하는 1~7장의 동물 제사 규정과 제사장직의 위임과 그 직무의 자격을 제시하는 8장의 내용을 보완하고 있다.

    얼핏 장애인이나 신체에 흠이 있는 사람을 차별하는 것처럼 보이는 율법을 어떻게 해석하면 좋을까? 레위기 제사법에 의하면 분명 ‘흠’은 제물로서 큰 결격사유였지만 이는 제사장에게 요구되는 신체 조건을 명시한 것뿐 장애인에 대한 차별이 아니다. 레위기 21:22~23은 이 질문에 대한 실마리를 제공한다.

    그들은 제사장의 직무에서만 배제되었을 뿐, 제사장 가족의 일원으로서 모든 혜택을 동등하게 누렸다. 다만 그들은 성소의 직무에서 배제된다. 다시 말해 모든 제사장 가족들은 백성들이 바친 성물들을 가족 별로 공평히 나누어 가졌던 것이다. 한편, 구약의 훈육은 많은 경우 실물적 교훈과 상징을 통해 이루어지는데, 여기서도 동일한 원리에 의해 신체적 흠을 불완전성의 상징으로서 하나님의 거룩에 합당하지 않게 여겼을 뿐이다.

    여기에 더해 제사장이 성막 내에서 섬세하고 과중한 업무를 수행하느라 육체적·정신적 피로에 시달렸다고 추정해볼 수 있다. 신체적 장애로 인해 자칫 제의적 실수를 할 가능성도 있으니 그들을 직무에서 배제한 것은 일종의 배려일 수 있다. 장애인의 군 입대를 막는 것이 이들에 대한 차별이 아니듯이 장애인에게 제사장의 역할을 맡기지 않았다 해서 이를 차별이라 볼 수는 없다. 따라서 이것은 단순히 실제적 역할과 흠의 상징성의 문제였다. 물론 신약에 이르러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구약의 교훈을 위해 설정된 이 모든 임시적인 차별의 장벽들이 사라졌다. 그러나 우리가 기억해야할 것은 모든 인간은 하나님 앞에 서면 장애와 흠을 지닌 존재들이라는 사실이다. 그럼에도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 앞에 담대히 나갈 자격을 얻었다는 사실이다.

    제사장의 성물 음식 섭취 규정
    레위기 22:1~16은 성물을 먹을 수 있는 제사장의 자격에 대한 규정이다. 제사장이 먹는 성물 음식은 지성물과 일반 성물로 나뉘었는데(레 21:22) 아마 여기서 성물이란 제단에 바쳐진 지극히 거룩한 음식을 가리킬 것이다. 몸이 부정케 된 제사장은 성물과 접촉하거나 성물을 먹을 수 없었으며 이 규정을 어기면 ‘제명’당하는 징벌이 뒤따랐다(3~10절). 여기에는 나병 환자, 유출 환자, 시체를 만진 자, 정액이 유출된 자, 기는 짐승의 사체를 만진 자(참조. 레 11:29~31, 41~43), 그리고 오염원에 접촉된 자와 자연사한 짐승이나 찢겨 죽은 짐승의 사체를 먹는 자들이 포함된다.

    이런 이유들로 부정을 탄 제사장은 목욕을 한 뒤 저녁까지 기다려야 다시 정결케 된다. 부정한 상태에서 성물 음식을 먹음으로써 그것을 더럽히는 것은 중대한 범죄 행위다(9절). 그러나 이 규정은 부정케 된 제사장이 음식을 전혀 먹을 수 없다는 의미는 아니다. 그들은 제단에 오르지 않고 성전에 바쳐진 다른 음식 봉헌물들, 예를 들어 추수의 감사 예물과 같은 일반적인 음식은 먹을 수 있었다.

    일반인들과 제사장 집의 손님, 제사장이 잠시 고용한 일꾼은 성물 음식을 먹을 자격이 없었다. 그러나 제사장의 종과 그의 자녀들은 제사장의 식구로 간주되어 성물을 먹을 수 있었다(11절). 제사장의 딸이 출가하면 시댁의 일원이 되므로 성물을 먹을 권리를 박탈했으며 혼인 관계가 중단되어 아버지 집으로 돌아오는 경우에는 그 권리가 회복되었다(12절). 일반인은 성물 음식을 섭취할 수 없다는 것을 거듭 강조함과 더불어 주어진 추가 지침 한 가지는 실수로 그것을 먹는 경우 이는 성물 침해죄에 속하기에 속건제가 요구된다는 것이다.

    이때 죄인은 성물에 20%를 더하여 갚고, 이어서 숫양 한 마리를 성소에 바쳐야 했다(14절). 그러나 의도적으로 성물을 먹은 자에게는 그 죄에 합당한 형벌이 주어질 것이다(15절). 이 경우에 해당하는 형벌은 명시되어있지 않으나 성경의 다른 구절에 비추어 볼 때 하나님의 직접 심판에 의한 ‘죽음’이나 ‘제명’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마지막으로 제사장들의 유념해야할 몇 가지 추가적인 제의 규정들이 주어진다. 먼저 가축의 새끼가 태어나면 칠일 동안 어미와 같이 있게 하고 팔일 째부터는 희생으로 바칠 수 있다(22:27). 이것은 남자 아이가 태어나면 칠일이 지나 팔일 째에 할례를 해야하는 규정과 병행을 이루고 있는데(창 17:12; 21:4; 눅 1:59; 2:21) 짐승의 경우 “어미와 같이 있게 하라”는 요구사항에서 분명히 가축에 대한 인격적 배려가 깃들어 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이러한 인격적 배려는 바로 뒤잇는 규정에서 명백해진다. 암컷 가축을 잡을 때 어미와 새끼를 같은 날에 잡아서는 안된다(28절). 이어지는 규정은 화목제의 고기를 먹는 규정의 반복이다(28~29절). 유독 첫날 고기를 모두 먹어야 했던 감사의 화목제만 나타나는데, 이것은 아마도 감사의 화목제 고기를 자칫 이튿날까지 먹는 일이 발생하지 않도록 특별한 주의를 주기 위함일 것이다. 반면에 다른 화목제 고기들, 즉 서원의 화목제와 자원의 화목제(특별한 감사한 일이 없이 자원해서 감사의 마음으로 바친 화목제)의 경우 이튿날까지 고기를 먹을 수 있었다. 이 중대한 제사장 규정들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거룩의 속성을 강조하시고 또한 자신이 이스라엘을 거룩하게 하는 여호와임을 상기시키면서 끝을 맺는다(22:31~33).



    1. 본문은 제사장과 대제사장이 삶의 영역에서 어떤 기준을 충족시킴으로 하나님의 거룩함과 영광을 드러내야 하는지를 보여줍니다.
    이들은 백성의 지도자로서 백성들보다 더 높은 거룩함의 기준이 요구되는데 이것은 신약의 원리와도 동일합니다(딤전 3:1~13; 고후 4:1~2).

    일반 제사장을 위한 장례와 결혼(1~9),
    대제사장의 경우의 장례와 결혼(10~15),
    모든 레위인들을 위한 봉사의 자격 요건(16~24)
    에 대한 규정을 다루고 있습니다.
    즉 삶의 전반에 있어서 특별히 레위인과 제사장들은 높은 수준의 거룩이 요구되는 것입니다.

    제사장들은 직계 가족이 아닌 한, 죽은 자로 자신을 더럽혀서는 안 됩니다(1~6).
    이 말은 이방 특히 가나안 백성들처럼 애도해서는 안 되고(머리털을 깎아 대머리 같게 하거나 수염 양쪽을 깎거나 살을 베는 행위) 시체를 가까이 해서는 안 된다는 말입니다(5). 대제사장의 경우는 직계 가족, 자신의 부모의 죽음이라고 할지라도 그 시체로 몸을 더럽힐 수 없다는 더 높은 기준이 요구되었습니다(11). 그는 이런 일로 머리를 풀거나 옷을 찢는 애도 행위도 할 수 없고 계속해서 성소에 머물러야 했습니다(10,12). 왜냐하면 대제사장은 하나님께 가장 가까이 행하는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왜 죽음이라는 사건에 대해서 제사장이나 대제사장이 이런 방식으로 요구받는 것일까요? 이스라엘에서 죽음은 우선적으로 사람을 하나님께로부터 분리시킨 저주와 관련이 있는 것으로 여겨졌기 때문입니다(창 3:19). 하지만 제사장과 대제사장은 이 죽음의 시간에도 언약의 영원한 소망을 나타내야 했습니다. 하나님은 산 자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제사장의 결혼 문제가 다루어집니다. 일반 제사장은 ‘기생이나 부정한 여인’ 또는 남편으로부터 ‘이혼당한 여인’을 아내로 취할 수 없습니다(7). 또 제사장의 딸이 창녀가 되면 그것은 아버지를 모독하는 것으로 죽임을 당해야 한다는 규정이 있습니다(9). 대제사장의 경우에는 자기 백성 가운데서(이스라엘) 처녀와만 결혼할 수 있었습니다(13~15). 이들은 세습을 통해서 하나님을 섬기는 직분이었다는 점에서 결혼을 통한 경건한 자손을 얻는 것이 중요하게 여겨졌을 뿐 아니라, 일반 백성에게도 결혼 자체가 신성한 것이라면 이들 제사장들에게는 더더욱 그래야 했을 것입니다. 죽음과 함께 결혼이 제사장의 삶의 중요한 규례로 제시되는 것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결혼은 하나님과의 언약에 비교되는 신성한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제사장의 자격 요건에 대한 규정이 이어집니다(16~23).
    제사장은 제물과 마찬가지로 흠이나 결점이 없이 온전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섬기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창조의 완전함을 드러내야 하기 때문입니다.
    18~20절은 제사장의 육체의 온전함의 목록들을 제시합니다. 제사장들이 이렇게 온전함을 요구받는 것은 백성들의 온전함과 거룩함을 요구해야 하는 자들로서 당연한 것입니다.

     

    7. 사도 베드로는 온 교회가 거룩한 제사장이라고 말했습니다(벧전 2:4~10). 그러니 당연히 모든 성도는 세상이 가지고 있는 기준을 능가하는 거룩함과 온전함을 요구받습니다. 이것은 육체적인 차원의 것일 뿐만 아니라, 영적인 차원의 것입니다. 교회의 영적 지도자들은 비록 구약의 제사장은 아니지만, 성도들보다 더 높은 수준의 거룩이 요구됩니다. 슬픔을 당했을 때에도 믿음의 소망을 드러내야 할 것이고, 결혼 생활에 있어서도 모범과 언약의 순결을 보여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언약 공동체인 교회에게 이런 거룩의 질서와 조건을 여전히 요구하신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성도여. 거룩하십시오!

     


    21장의 대상은 제사장들이다.
    제사장에게만 따로 적용할 규례가 필요한가?

    제사장은 일반인보다 더 엄격한 기준이 요구되었다.
    목사는 좀 더 엄격한 기준을 자신에게 적용하면서 살아야 한다.
    '나도 인간이다' 이런 소리를 가급적 하지 않아야 한다.
    다만 이런 자세는 스스로 다짐하는 것이어야 바람직하다.
    성도들은 '목사도 인간이다'고 말해주는 것이 도움이 될 때가 많을 것이다.

    제사장들이 백성 중의 죽은 자로 인하여 스스로 더럽히지 말라는 것은 구체적으로 무엇을 하지 말라는 것인가?

    그 머리를 풀지 말며 그 옷을 찢지 말며 어떤 시체에든지 가까이 말 것(10-11).
    일반적인 장례 절차에 참여치 말라는 것이다.
    그래도 조금 먼 친척이 있을 수 있고, 가까운 친구가 죽었을 경우도 있는데 이런 일에 전혀 슬픈 기색을 보이지 말라는 것은 너무 하지 않은가?
    기본적으로 하나님의 입장에 서는 것이 제사장의 할 일이다.
    목회자는 개인적이고 가정적인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의 대리인이라는 신분을 잊지 말아야 한다.

    제사장이라도 장례식에 참석하고 슬픔을 표할 수 있는 경우는 어떤 때인가?

    골육지친인 경우에 허용 

    부모, 자녀, 형제, 출가하지 아니한 친자매의 경우에는 허용되었다.
    피도 눈물도 없는 하나님이 아니라 최소한의 예외는 허락하시는 분이시다.
    우리의 연약함을 아시고 하나님께서 양보할 때도 있다는 것에 감사해야 한다.

    제사장이라도 장례식에 참석할 수 있는 대상 중에 아무래도 빠진 사람이 있는 것 같은데?

    아내 :
    이 경우에는 당연직인가?
    아내는 한 몸으로 취급했기 때문에 별도의 사람으로 다루지 않았다.

    제사장들은 머리털을 깎아 대머리 같게 하지 말며 그 수염 양편을 깎지 말며 살을 베지 말라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 (4-5)
    (수염 양편을 깎는다는 말의 원어적 의미는 긴 수염의 끝을 둥글고 짧게 자른다는 뜻이다)

    이교도들의 우상숭배와 관련이 있는 행위이다.

    제사장이 일반인과 달라야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백성의 어른이기 때문(4)
    하나님의 식물을 드리는 자(6)
    여호와께 거룩한 자(7) : 여호와를 위하여 특별하게 구별한 자라는 뜻이다.

    실제로 아론이나 그 아들들이 거룩할 이유가 없다.
    아론만 해도 얼마나 어리석을 짓을 한 사람인가?
    백성들이 요구한다고 해서 금송아지를 만들었던 장본인 아닌가!
    그럼에도 아론과 그 아들들이 거룩한 것은 자신들의 공로가 아님을 보여주는 말씀은?

    8절.
    거룩한 하나님께서 그렇게 여기라고 하시기 때문이다.
    어느 누구도 하나님 앞에서 거룩할 수 없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여기시기 때문에 거룩할 뿐이다.
    오늘날 우리는 모두가 제사장이 되어 하나님께 담대히 나아갈 수가 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피를 흘리신 덕분에 우리 모두를 거룩한 자로 여기시기 때문이다.

    이혼당한 여인이 부정한 여인인가? 그러면 억울한 사람은 없을까?

    제사장은 모든 일에 순결해야한다는 의미이지 이혼한 여인을 탓하려는 것이 아니다.
    여기서 이혼 당한 여인이란 부정한 이유로 버림받은 경우를 가리킨다.
    영국의 황태자가 사랑한 사람이 하필이면 미국의 이혼녀이었다.
    미국사람이라는 것도 싫은데 이유야 어쨌거나 이혼한 사람을 왕비로 모시는 것이 싫다는 것은 인지상정이다.
    하나님의 의도는 제사장이나 제사장의 가족은 순결해야한다는 것이다.
    순결해야하는 이유는?
    우리의 결혼 생활이 나아가서 하나님과 우리와의 관계를 상징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제사장의 딸은 더욱 조심하여야한다. 잘못하면 벌을 더 받는다. 옳은 처사인가?

    사리분별이 가능한 경우에는 마땅히 그래야 한다.
    어릴 때는 구별하는 것이 그리 옳아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그런 구별이 역효과를 낼 수도 있다.
    목사나 장로의 자녀가 그럴 수 있느냐는 말이 들리지 않게 잘 키우는 것이 좋겠지만 너무 강조해서도 안된다고 생각한다.

    대제사장은 제사장보다 더 엄격한 규정이 적용되었다. 예를 든다면?

    부모의 상도 치르지 말라(11)
    대제사장이 제사장보다 다른 점은 무엇인가?
    기름부음을 받고, 예복을 입은 점(10).
    하나님과 가까운 정도에 따라 규정이 더 엄격해 지는 것을 볼 수 있다.
    스스로 하나님과 가깝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하나님을 아는 그 만큼 더 하나님 앞에서 깨끗한 삶을 살도록 노력해야 한다.

    대제사장은 부모의 상도 치를 수 없다. 이것은 너무 비인간적이거나 몰인정한 처사가 아닌가?

    적어도 대제사장은 인간적이 되기 전에 먼저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이라는 것을 기억해야한다.
    백성을 대신해서 하나님을 섬기는 일은 세상의 어떤 일과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한 일이다.
    우리 목사님의 부친이 위독해서 수요일 예배시간이 다가오는데도 목사님께서 부친 곁에 머물러 있으니 예배 시간에 목사가 여기 있으면 되느냐고 억지로 쫓아낸 부친의 모습이 생각난다.

    대제사장의 아내는 순결한 처녀이어야한다. 제사장의 경우보다 더 엄격한가? 굳이 그럴 필요는 없을 것 같다. 왜 그럴까?

    어차피 제사장 중에서 대제사장이 되는 법이니까.
    다시 말하면 총각으로 대제사장이 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라고 생각된다.
    이런 규정을 통해서 강조하는 것은 대제사장의 결혼이 아니라 흠이 없는 가정생활을 영위해야한다는 뜻이다.
    원만하고 아름다운 가정을 이루는 기초가 흠없는 처녀와의 결혼일 것이다.
    성도들은 육체적인 순결에도 노력해야한다.
    그것이 믿음을 바탕으로 하는 가정의 기초가 되기 때문이다. 물론 남자의 순결도 마찬가지다.

    장애자를 이렇게 차별해도 되나(17-21)?

    인격적인 차별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직분에 대한 성결함을 강조하는 의미이다.
    다른 일, 즉 먹는 것으로는 차별하지 않는다(22).
    제사장이라는 직분을 그만큼 소중하게 여기라는 뜻일 뿐이다.
    한국 교회가 현재 어려움에 처한 원인이 이것과 관련이 있다.
    공부 잘하고 똑똑한 아들은 법대, 상대 보내고, 실력이 못한 아들은 신학교에 보낸 결과가 교회의 질적 저하를 초래한 것이다.
    가장 좋은 것을 하나님께 드려야한다는 것과 일맥상통한 것으로 보아야 한다.
    참고로 '장애자'의 상대어는 '정상인'이 아니라 '비장애인'이라고 한다. 장애인도 동등한 인격을 가진 자로 대하자는 뜻의 좋은 표현이다.

    국가 간에도 그렇고 정당간에도 마찬가지인데 대화를 할 때 특히 신경을 쓰는 것이 상대방에서 대화의 상대자가 누구냐라는 것이다. 상대는 장관급인데 이쪽에서 국가 원수가 나간다는 것은 굴욕적이라고 보는 것이다. 본문과 무슨 상관이 있는 말인가?

    거룩한 하나님을 상대로 하는 제사장은 거룩해야한다.
    억지로라도 거룩해야 한다.


    목사는 영적인 아버지인가?

    어떤 목회자가 회의 석상에서 그리고 설교 중에 자기 자신을 “영적인 아버지”라는 주장을 하고 있는데, 과연 사람에게 (개신교 목사에게) 영적인 아버지라는 표현을 적용하는 것이 가능한 것인가요?
    영적인 지도자라면 몰라도 영적인 아버지라는 표현이 자꾸 맘에 걸립니다.

    성경에 “영적인 아버지”라는 표현은 단 한번 나오더군요.

    “우리를 낳아준 아버지가 견책해도 우리가 그를 존경한다면 영적인 아버지께 복종하여 살아야 한다는 것은 더욱 당연한 일이 아니겠습니까?”(히브리서 12:9 - 공동번역)

    “또 우리 육신의 아버지가 우리를 징계하여도 공경하였거든 하물며 모든 영의 아버지께 더욱 복종하며 살려 하지 않겠느냐”(히브리서 12:9 - 개역개정)

    [답변]

    우선 그 목사님께서 어떤 구체적인 상황에서 그 말씀을 하셨는지 설명이 안 되어 있는데다, 또 어떤 의도로 그런 말씀을 하셨는지 본인이 아닌 이상 정확하게 알기는 힘듭니다. 그러나 질문자님께서도 이미 생각해 본대로 성경에 나타난 의미에 따라 과연 그렇게 주장해도 합당한지 아닌지는 추적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우선 히브리서 12:9영의 아버지(the Father of spirits)는 바로 하나님을 가리킵니다.
    따라서 목사님이 이런 의미로는 결코 그 말을 사용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혹시라도 그 목사님이 이 말씀의 뜻처럼 교인들에게 어떤 징벌을 가하면서 하나님 대신에 벌을 주는 것이라는 뜻으로 사용했다면 정말 큰 일입니다.

    대신에 목사님은 아마도 바울 사도가 고린도 교회에 쓴 편지에서 “그리스도 안에서 일만 스승이 있으되 아비는 많지 아니하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복음으로써 내가 너희를 낳았음이라”(고전 4:15)고 한 말씀을 염두에 두고 한 말씀인 것 같습니다.
    바울은 사실상 자기를 고린도 교회 교인들에게 “영적인 아버지”가 된다고 말한 셈입니다.

    당시 고린도 교회는 네 개의 당파(1;12)가 있을 정도로 분쟁이 심했습니다. 성도들을 실질적으로 양육하는 이는 하나님이신데(3:7) 하나님의 사역자에 불과한 인간 지도자를 추종하고 경배했었습니다. 아직 영적 분별력이 미숙한데다 인간적인 이기심과 시기심이 작용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영적 성장의 진정한 주관자는 하나님이시고 당파의 주역이 된 자신과 아볼로는 단지 그분의 종이란 사실을 강조했습니다.(3:8,9)

    이어서 간곡한 어조로 인간적인 교만과 분파주의를 버리고 화합하여 일치될 것을 권합니다.(4:1-21) 그런데 자신이 다른 지도자들과는 근본적으로 차이가 있는 입장에서 그 권고를 하고 있음을 분명히 밝히기 위해 “영적인 아버지”라는 표현을 사용했습니다. 그러나 고린도 교회의 설립자(교회를 낳은 아버지)인 자신의 위치와 특권을 강조하기 위한 뜻이 아니라 부성애적 사랑에 바탕을 둔 표현이었습니다.

    바울이 “일만 스승”과 “많지 않는 아비”를 대비하고 있음에 주목해야 합니다. 즉 말씀을 교리에 비추어 가르치기만 하는 목회자는 얼마든지 많지만 정말 아비의 심정으로 성도의 유익만을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희생하며 한 사람씩 따뜻하게 참 사랑으로 섬기는 목자는 많지 않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요한복음 10장에 예로든 것 같은 선한 목자는 바울 당시나 지금이나 아주 드문가 봅니다.

    그렇다고 바울이 자신을 스스로 선한 목자라고 높이는 표현은 더더욱 아닙니다. 지금 서로 교만해지고 시기심으로 분쟁에 휩싸인 고린도 교인들의 상태가 너무 안타까워 정말 아버지의 심정으로 간절하게 권한다는 뜻입니다. 감정적 동정이나 율법적 훈계와는 거리가 먼 권면입니다. 그 바탕에는 아주 따끔한 질책과 너무나 넓은 자비가 동시에 깔려 있습니다. 실제 아들에게 하는 아버지의 훈계의 성격에 비추어 보면 바울이 왜 이런 표현을 사용했는지 짐작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럼 이제 답변은 다 나온 셈입니다. 정말 바울과 같은 입장이라면 그런 표현을 써도 되겠습니다만, 그래도 고린도 교회의 예처럼 아주 특별한 경우에 한해서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질문 가운데 “회의석상에서 설교 중에 주장하고 있다”라는 말씀이 자꾸 신경 쓰이게 합니다. 자주 사용하여 마치 목사는 다 그렇다고 주장하거나, 스스로 자기를 높이려는 시도로 보이기 때문입니다.

    “나는 선한 목자라 내가 내 양을 알고 양도 나를 아는 것이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 같으니 나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노라”(요10;14,15) 아버지는 아들을 위해서 목숨을 내어 놓습니다. 또 아비는 아들을 알고 아들도 아비를 아는 것은 너무나 당연합니다. 구태여 서로 아비나 아들이라고 주장할 이유가 하등 없습니다. 영적인 권위는 지도자가 스스로 세우는 것이 아니라 성도들이 진심으로 존경하고 따를 때에 자연적으로 세워지는 법입니다.

    자신은 모든 것을 희생하더라도 오직 복음의 진리를 정확하게 가르치겠다는 헌신을, 또 성도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라고 권하는 열정과 정말로 자기 아들 같이 사랑하고 섬기겠다는 심정을 강조하기 위해 목사님들이 “영적인 아버지”라고 표현하는 경우는 있을 것입니다. 진짜 진짜로 –강조했습니다- 그렇다면 크게 문제 삼을 일은 아니라고 봅니다.

     

    그러나 혹시라도 그 의도한 뜻이 아래와 같은 경우에 해당된다면 아주 잘못된 것입니다.

    목사 때문에 예수를 믿게 되었다. 복음을 전한 전도자의 입장이 아니라 구원을 받는데 결정적인 역할과 힘을 발휘했다. 자기가 아니었다면 결코 믿을 수 없었다. 그래서 문자 그대로 복음을 잉태케 해 준 아버지다. 바울의 표현대로 하자면 복음의 씨를 심고 물을 주는 정도가 아니라, 아예 자라게 했고 구원 받을 믿음을 실제로 목사가 심어 주었다.

    목사의 영적인 권위는 신성불가침이며 어느 누구에게도 제약 받을 수 없다. 하나님을 잘 섬기려면 목사부터 잘 섬겨야 한다. 그래야 하나님의 축복도 많이 받는다. 하나님을 경배하기 이전에 인간 목사를 경배해야 한다.

    그래서 앞으로의 영적 지도와 권면과 징계를, 성경 말씀을 가르침에서 뿐만 아니라 모든 교회 일을 수행함에 있어서, 아버지의 명령으로 알아서 절대 순종해야 한다. 나아가 목사가 하는 어떤 일에도 반대나 불만이 있어선 안 된다. 그리고 정말 아들이 아버지를 섬기듯이 모든 면에서 목사를 정성스레 섬겨야 한다.

    한마디로 바울은 하나님의 종의 입장에서 오직 성도의 유익을 위해 섬기고 또 성도를 하나님 안에서 거룩하게 세우려는 애끓는 심정에서 자신을 그렇게 표현했습니다. 그에게는 말씀으로 가르치거나 사랑으로 섬기거나 간에 정말 혼자서 일만 스승을 감당하고도 남을 열정과 정성과 진심이 있었습니다.









    ____________________________ 레위기 20장 / 반드시 죽어야 할 죄(2절) 



    03-31-2023(금) 사순절 제33일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또 이르라 그가 이스라엘 자손이든지 이스라엘에 거류하는 거류민이든지 그의 자식을 몰렉에게 주면 반드시 죽이되 그 지방 사람이 돌로 칠 것이요.
    Say to the Israelites: 'Any Israelite or any alien living in Israel who gives any of his children to Molech must be put to death. The people of the community are to stone him.

    20:1-5. 몰렉 숭배에 대한 형벌
    20:7-8. 거룩하라는 명령
    20:6, 9-21, 27. 박수를 추종하는 자, 부모를 저주하는 자, 또는 여러가지 음행에 대한 형벌
    20:22-26. 다른 국민과 달리 거룩하라는 명령


    죽어 마땅한 사람이 되지 말고
    살아 마땅한 삶이 됩시다!

    죽어야 할 죄를 짓지 말고
    살아야 할 거룩을 회복하자!


    몰렉(Molech)
    몰록(Μόλοχ, מֹלֶךְ)은 고대 근동의 신이다.
    가나안과 페니키아에서 숭배되었으며, 북아프리카 및 레반트 문화와 연관이 있다.
    바빌로니아 지방에서는 명계의 왕으로, 가나안에서는 태양과 천곡의 신으로 알려졌다.

    고대 가나안 주민들이 섬기던 신 중의 하나로서, 그를 예배하는 데 어린이를 희생제물로 바치는 일 때문에 이스라엘 사람들은 그를 특별히 무섭게 여겼다(레 20:2, 렘 32:35).

    몰록(왕상 11:7)이란 이름의 꼴은 옛 그리스어 번역본을 따른 것이다.
    본디 이 신은 '멜렉'(임금)이라고 불렸는데(밀곰), 히브리 본문을 전해 내려오던 유다 사람들이 이 이름의 자음에다 부끄러움을 뜻하는 히브리 낱말('보셋')의 모음을 붙여서 '몰렉'(레 18:21)이라 부르게 되었다.

    이로써 이스라엘의 '임금'이신 여호와(시 93:1, 97:1, 99:1, 사 52:7)에서 '여호와 또는 하나님이 통치하신다'고 옮긴 문장은 '여호와 또는 하나님이 임금이시다'라는 뜻으로 이해할 수도 있다)를 셈족 지역에서 지하 세력들 특히 불의 주로 널리 알려져 있는 신과 혼동하지 않게 하려고 한 듯하다.

    몰록 종교 의식은 특히 주전 8-7세기에 이스라엘에도 들어왔다.
    사람들은 정해진 예식을 거행하여 제물을 몰록의 통치 영역인 불에 바침으로써 이 신을 섬겼다.
    아이들도 몰록에게 제물로 바쳤다(레 18:21, 신 18:10, 왕하 16:3, 23:10, 렘 7:31, 32:35, 겔 16:20-22).

    ‘몰록’은 암몬족의 신인데 '그모스'와 마찬가지로 어린아이들을 인신제사로 바쳤던 신으로서 제사 의식 중에는 어린아이를 불 위로 걷게 하거나, 또는 불에 달군 기둥 위를 걷게 하는 잔인한 의식이 있었습니다.

    유대의 자료에는 ‘이 혐오스러운 종교적 관행은 매우 무시무시하게 진행되었음'을 기록하였습니다.

    카르타고의 ‘타니트 신전’은 이 신을 섬기는 신전이었는데, 신전 안에서 제물로 바친 새끼 양이나, 염소의 제물 보다 많은, 어린 아이들을 태운 뼈를 담은 항아리가 출토되기도 하였습니다.


    신접한 자와 박수

    (오보 & 이드오니)אוֹב אוֹ יִדְּעֹנִי

    신명기 18장 9-14절은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거든 가나안 족속들의 가증한 행위를 본 받지 말 것을 강조하는 금령을 선포하고 있다.
    이 중에 10-11절은 아래와 같이 아홉 가지 부류의 사람들을 제시하고 있다.

    10 그의 아들이나 딸을 불 가운데로 지나게 하는 자나 점쟁이나 길흉을 말하는 자나 요술하는 자나 무당이나 11 진언자신접자박수 초혼자를 너희 가운데에 용납하지 말라”

    여기에 언급된 아홉 가지 부류의 사람들 중에 “신접자”와 “박수”가 레위기 19:31; 20:6에도 언급되어 있다.
    “신접자”와 “박수”가 누구이며 어떠한 종교사적 배경이 있길래 디아스포라 공동체에서 엄금하고 있는지, 그리고 신명기에 기명된 아홉 가지 사람들 중에 유독 이 두 부류의 사람들만 레위기에 언급되어 있는지 궁금하다.

    더 나아가 오늘날 한국의 전통종교들에 속하는 무속에 대해서 지극히 혐오하고 금기시하는 기독교인들의 태도는 얼마나 성서적인가를 물어 보려고 한다.

    위의 모든 용어들은 개역개정에 나타난 단어들인데 새번역과 공동번역과 천주역은 각기 다르게 번역하고 있다.
    히브리어 원어로 “신접자(神接者)”는 אוֹב(오브)이고 “박수”는 יִדְּעֹנִי (이드오니)이다.

    신접자(神接者) 178. אוֹב   
    1. 물병
    2. 점장이
    발음 [ ’ôwb ]
    어원 / 복수 אוֹבוֹת, 1과 동형에서 유래[아버지라는 말을 떠듬거리며 말한다는 점에서 유래된 것 같다]
    관련 성경 / 신접한 자(레 19:31, 삼상 28:3, 사 29:4), 신 접자(신 18:11)
    구약 성경 / 17회 사용

    박수. 3049.
    יִדְּעֹנִי 스트롱번호3049

    1. 선지자
    2. 예언의 영
    발음 [ yiddeʽônîy ]
    어원 / 3045에서 유래
    관련 성경 / 박수(레 19:31, 삼상 28:3, 대하 33:6), 마술사(사 8:19), 요술(사 19:3)
    구약 성경 /11회 사용

    * 3045. יָדַע    
    1. 보다
    2. 지각하다
    3. 사사기 13:21
    발음 / 야다  [ yâdaʽ ]

    "나를 위하여 신접한 여인을 찾으라"(사무엘상 28:7)

    사울은 블레셋의 침공으로 인하여 깊은 고민에 빠졌다.
    자신을 위해 기도해주고 지도해 주던 사무엘이 죽었고 의지할 자가 없다는 생각에 더욱 크게 절망한 것 같다.
    사울은 제사장들을 대량 학살하는 사건(22:18, 19)으로 인하여 '우림과 둠밈'이라는 계시 수단을 자신의 경쟁자인 다윗에게 넘겨주고 말았다.

    이 때는 영적으로 어두운 때였다.
    "선지자로도 꿈으로도...대답지 아니하는 때"였다.
    이러한 계시(啓示)의 단절은 악한 인물 또는 악한 시대에 대한 징벌의 성격을 띠는 것으로서(6절; 3:1), 여기서는 곧 하나님께서 사울과 함께 하지 아니하신다는 사실을 확증해 주는 객관적 증거이다.

    이러한 때 일수록 하나님의 신앙을 회복하는 기회로 삼았어야 하는데 사울은 신접한 여인을 찾아 나눔으로 자신을 더욱 나락으로 떨어트렸다.

    "나를 위하여 신접한 여인을 찾으라"

    이같은 사울의 명령은 하나님께서 금하시고(레 19:31), 또한 사울 자신이 세워놓은 규범(3절)을 스스로 무너뜨리는 것이었다.

    아무튼 이것은 하나님께로부터의 계시가 완전히 단절된 상황에서, 비신앙적 인물인 사울이 필연적으로 택할 수 밖에 없는 방법이었다. 한편 여기서 '신접한'은 문자적으로 '혼령을 다스리는'이란 의미로, 곧 '신접(新接) 한 여인'이란 죽은 자의 혼령을 통해 미래의 일을 알아보는 자를 가리킨다(레 19:31).

    사울이 접신녀(接神女)를 찾아가서 문의한 이 사건은, 사울의 집권 초기에 그가 이스라엘 사회에서 모든 박수와 무당들을 쫓아낸 것(3절)이 그 자신의 확고한 신념에 따른 행동이 아니었음을 증명해 준다.
    사울은 (1) 하나님의 계명(출 22:18; 레 19:31; 20:27; 신 18:10-14)을 충실히 지켜야 된다는 신념이나,
    (2) 또는 초혼술(超魂術)은 철저하게 미신적이어서 신뢰의 대상이 못된다는 신념 등에 따라 박수와 무당을 축출한 것이 아니었던 것이다. 사울은 다만 이스라엘 사회에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했던 사무엘과, 그리고 여호와 하나님을 향한 순수한 신앙으로 막 발돋음해 가던(7:2, 5-11) 이스라엘 백성들의 환심을 사기 위한 인간적 목적에 따라 그같은 정책을 시행했다고 볼 수 있다.

    한편, '엔돌'(Endor)은 '거주의 샘'이란 뜻이다.
    그 위치는 다볼 산(Mt. Dabor) 남쪽 약 6.4km, 소(小) 헬몬 산 북쪽 경사 지대이다.
    그리고 '수넴'으로부터는 북동쪽으로 약 6~7km 정도의 지점으로 추정된다.
    오늘날에도 소 헬몬산 경사 지대에 '엔돌'이란 마을이 있는데(수 17:11), 무당들이 거처하기에 좋은 많은 동굴들이 있다고 한다(Robinson, Thompson, Stanley).


    1. 사울이...변장하고

    옷은 곧 그 사람의 신분을 상징한다는 점(18:4)에서, 사울은 왕의 표시가 되는 일체의 복장과 장식물을 제거하고 완전한 평민의 복장을 취했던 것 같다.
    즉 아무도 자신을 이스라엘의 왕 사울로 알아보지 못하도록 변장을 했던 것이다.
    변장한 채 엔돌의 신접한 영인을 찾아가는 사울의 모습에서 그의 철저한 타락상을 볼 수 있다.
    한편 미신적(迷信的)인 발상에서 무당이나 점장이를 찾아가는 것은 하나님께서 언급하신 바 있는 영적 간음 행위이다(레 19:31; 신 18:9-14).
    그러므로 성도들은 급박한 상황이 닥칠 때일수록 더욱 하나님을 굳게 의지하고 성경 말씀에 근거한 상담과 기도에 힘쓰는 등 끝까지 신앙적인 자세를 지켜야만 할 것이다.

    신접한 여인이 사울의 청을 거절하자, 사울은 자신이 복술 행위를 적발키 위해 찾아온 싸람이 결코 아님을 밝힘으로써 그 무녀를 안심시킨다.
    그러나 사울은 "여호와께서 사시거니와"이라며 자신의 목적을 달성키 위해 하나님께서 가중히 여기시는 복술 행위를 여호와의 이름으로 요청하는 등 그의 완악해지고 굳은 심령의 타락 상태를 여실히 드러내고 있다.

    2. 신접한 술법으로

    히브리 원문대로 번역한다면 '유령' 혹은 '그것을 불러내기 위한 도구'를 의미한다(3절).
    한편 '술법'은 '점을 치다'란 의미가 있는 동사에서 파생된 말로(겔 21:29; 미 3:6), 바로 이 동사에서 본서 6:2에서도 나타나는 '복술자'(卜術者)라는 단어가 나왔다(신 18:10; 사 3:2; 슥 10:2).
    따라서 사울은 지금 신접한 여인에게 '복술'(卜術) 행위를 요청한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복술 행위는 하나님께 가증한 행위로서, 율법에서 철저히 금지시킨 행위였다(신 18:10-14; 레 19:31; 20:27).

    3. 사람을 불러 올리라

    죽은 자의 영혼을 불러내는 행위를 가리킨다.
    11절 주석참조.신접한 자와 박수 - 3절; 레 19:31 주석 참조.


    •신접한 여인의 행위

    1.  "내가 누구를...불러 올리랴?"

    이같은 무녀의 질문은 고대 히브리인들의 음부관을 반영하고 있다. 즉 고대 히브리인들은 사람이 죽으면
    경건한 자나 불경건한 자를 막론하고 일단 모두 '스울'(Sheol) 즉 '음부'(陰部)라고 부르는 지하 세계로 들어가 휴식을 취한다고 보았다. 아마도 이러한 생각은 시체가 땅 속에 묻히는 것과 관련되어 파생된 단순한 개념인 듯하다(창 27:35). 그러나 계시(啓示)가 점진 완료된 신약 시대의 관점에서 엄밀히 말하면, 죽은 자 중 성도는 낙원으로 가 위로와 안식을 누리고, 불신자는 지옥으로가 고통을 당하게 되는 것이지, 어떤자도 음부에서 단순한 휴식을 취하지는 않는다(눅 16:19-31).

    반면 고대 히브리인들은 하나님이나 천사는 땅 위의 어느 공간에 거주하고 있는 것으로 생각했다. 그러므로 죽은 자의 세계 또는 죽은 자의 혼과 교통할 수 있다고 믿는 접신녀(接神女)는 '스올'(음부)로부터 죽은 자의 혼(魂)을 불러 올릴 수도 있다고 한 것이다.

    2.  여인이 사무엘을 보고
    이 접신녀(接神女)가 실제로 사무엘을 보았는지에 대한 해석은 구구하다. 그러나 그 해석은 크게 다음 몇 가지로 분류된다.

    (1) 실제로 사무엘의 혼이 임한 것을 무녀가 보았다는 견해(Josephus, Klein, Keil, Lange)

    이 견해는 여러가지 맹점이 있다. 첫째, 하나님께서 성도 특히 선지자의 영혼을 무당의 술수에 이용되도록 하실 리 없으며 둘째, 혼이 땅에서 올라왔다는 13절의 언급은 성도들의 영혼은 하늘로 올라간다는(전 3:21; 눅 16:22, 23) 성경적 개념과는 배치되며, 오히려 접신술(接神術) 등과 같은 거짓 사상과 합치된다(사 29;4)는 점 등에서 잘못됐음이 분명하다.


    (2) 거짓 혼이 사무엘의 혼인양 행세하면서 나타난 것을 보았다는 견해(Luther, Calvin, M. Henry, Grotius, Patrick)

    이 견해가 가장 타당한 것 같다. 실제 사무엘의 혼이 아닌 사무엘을 가장한 사단의 어떤 형상을 봤음이 분명하다.


    (3) 본문의 '사무엘' 앞에 '이름'이라는 단어가 필사자의 실수로 탈락됐을 것으로 간주하고, 그 무녀(巫女)는 사무엘의 어떤 형상을 본 것이 아니라 다만 사울의 입에서 나온 '사무엘'이라는 '이름'을 들었을 뿐이라는 견해(Hertzberg)

    이 견해는 뚜렷한 근거 없이 원문 중 '보고'를 '듣고'로 변경시켜야 되는 문제가 있다는 점에서,


    (4) 그냥 아무것도 본 것이 없으나 거짓으로 본 척했을 뿐이라는 견해(Smith).

    이 견해는 첫째, 12절의 '사무엘을 보고'는 무당의 말이 아닌 본서 저자의 언급이며 둘째, 영매(靈媒)등은 주관적 혹은 심리적으로 어떤 형상(혹은 환상)을 보기도 한다는 점 등에서 볼 때 타당성이 없다.

    한편, 무녀가 유령같은 것을 보고 놀랐을 때, 사울이 그녀에게 "네가 무엇을 보았느냐!" 고 물은 것을 통해 그 때 사울은 아무 형상도 보지 못했음을 시사해 준다. 사실 그 무녀가 어떤 형상을 본 것은 초자연적 혹은 심리적 현상이었기 때문에, 사울이 아무것도 못본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또한 여기 사울의 이 질문은 사울이 무당이 위치했던 곳과 어느 정도 격리되어 있었음을 말해 준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사울과 무당이 각기 다른 방에 있었다고는 볼 수 없다.


    3. 내가 신이 땅에서 올라오는 것을 보았나이다

    여기의 '신'은 형태상으로는 복수이나 단수로 이해해야 할 것이다. 즉 그 무녀는 자기가 본 어떤 형상에 대한 자신의 두려움을 반영하기 위하여 한 혼의 형상만을 보았으면서도, 그것을 복수 곧 '장엄 복수'로 표현한 것이다. 그렇다면 여기 '신'이란 단어가 갖는 의미는 무엇일까? 이 '신'은 항상 어떤 '신'(god) 장체만을 의미치 의미치 않는다. 즉 이말은 '신적인 존재' 곧 '영'(靈)을 의미하기도 한다는 점에서, 어떤 '영적인 존재' 곧 '유령'을 가리킨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 사무엘 유령의 정체
    한편 '사무엘을 불러 올리라'는 사울의 요청(11절)으로 접신녀가 불러 올린 사무엘에 대한 해석은 매우 어려운 난제 중 하나임에 틀림없다. 특히, "사무엘이 사울에게 이르되"라는 표현처럼 성경 기자는 여기서 마치 실제의 사무엘이 등장하여 말하는 것처럼 기술하고 있다. 그러나 실상에 있어서 성경 기자는, 사무엘을 흉내내어 나타났고 그 이름을 빙자하여 말하고 있는 악령을 편의상 간결하게 '사무엘'이라는 말로 표현하고 있을 뿐이다. 이때 악령은 초혼술(招魂術)에서 흔히 볼 수 있듯이, 영매(靈媒)인 접신녀(接神女)의 입을 통해서 말하고 있었다.

    아무튼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우리는 접신녀와 초혼술(招魂術)의 정체를 바로 이해할 필요가 있다. 먼저 초혼술을 행사하는 접신자는 우선 강신(降神)이라고 하는 특수한 심령적 경험을 통과한 사람으로서, 죽은 자위 혼을 불러 일으켜 현실의 인간과 의사 소통을 할 수 있도록 하는 매개체의 역할을 하게 된다. 이것이 소위 초혼술(招魂術)이라고 불리우는 일종의 이교적 사술(邪術)형태이다. 그러나 초혼술은 다음과 같은 성경적 근거에서 악령의 역사이며, 사단의 속임수이다.

    (1) 초혼 자체가 성립될 수 없다. 즉 성경은 사람이 죽게 되면 그 혼은 즉시 지상의 세계와 차원이 다른 처소(천국 혹은 지옥)로 옮겨지고 지상의 세계와 교통하지 못하는 것으로 말하고 있다(눅 16:19-31; 23:43; 고후 5:1). 따라서 초혼이 이루어진다면 그것은 결코 죽은 자의 혼이라 볼 수 없고, 다만 죽은 자의 혼을 가장한 사단 혹은 귀신의 역사에 불과할 뿐이다.

    (2) 초혼자는 사단의 역사를 위해 동원된 도구 역할을 하는 셈이다. 한걸음 더 나아가 초혼자는 사람들로하여금 하나님과의 바른 교제를 방해하며 미혹하게 한다는 점에서 하나님의 백성들이 결코 용납해서는 안된다(신 18:10, 11). 즉 성경은 신접자, 초혼자, 무당 등을 존재 자체부터 정하고 있는 것이다(출 22:18; 레 19:31; 20:27; 신 18:10-14). 결국 이런 이유로 여기서 접신녀가 불러 올린 사무엘은 진짜 사무엘의 혼이 될 수 없다. 즉 '땅에서 올라온 그 신'은 루터(Luter)나 칼빈(Calvin)이 말한대로 사무엘의 형체를 입고 나타난 사단적 유령(곧 사단의 부림을 받은 귀신)으로 보아야 한다.그 모양이 어떠하냐 사울의 이같은 질문은, 무당이 실제로 사무엘의 형상을 보았는지의 여부를 확인키 위한 것이다. 따라서 이때 사울은 무당이 사무엘을 봤다는 언급에 대하여 일말의 의심을 갖고 있었던 것 같다.

    아무튼, 사울은 자기 앞에 나타난 악령을 진짜 사무엘의 영으로 착각하고 그에 대한 존경의 표시로 무릎을 꿇고 앉아 있었던 것이다(14절). 그러다가 자기가 기대하던 해결책은 얻지 못하고 대신 악령으로부터 자신의 멸망에 대한 예언을 듣게 되자(16-19절), 그는 (1) 큰 두려움의 엄습과 (2) 육체적 탈진으로 땅바닥에 길게 엎드러지고 말았다. 이것은 하나님을 멀리 떠나 자행 자지(自行自止)하던 타락자 사울 왕이 머지 않아 비참한 종말을 맞이할 것에 대한 하나의 전조(前兆)였다.(31:1-6).

    첫째, 신접술은 하나님께서 금하신 방법이다.

    신명기 18:9-12,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주시는 땅에 들어가거든 너는 그 민족들의 가증한 행위를 본받지 말 것이니 그 아들이나 딸을 불 가운데로 지나게 하는 자나 복술자나 길흉을 말하는 자나 요술하는 자나 무당이나 진언자나 신접자나 박수나 초혼자를 너의 중에 용납하지 말라. 무릇 이런 일을 행하는 자는 여호와께서 가증히 여기시나니.”

    둘째, 신접술로 나타난 사무엘은 사울의 경배를 받았다.

    14절, “사울이 그가 사무엘인 줄 알고 그 얼굴을 땅에 대고 절하니라.” 이것은 인간에게는 합당치 않은 일이라고 본다. 그가 진짜 사무엘이었다면, 그의 발 앞에 엎드렸던 고넬료에게 일어서라고 한 베드로처럼 말하였을 것이라고 본다(행 10:25-26). 

    셋째, 하나님께서는 후에 사울의 그 행위를 정죄하셨다.

    역대상 10:13-14, “사울의 죽은 것은 여호와께 범죄하였음이라. 저가 여호와의 말씀을 지키지 아니하고 또 신접한 자에게 가르치기를 청하고 여호와께 묻지 아니하였으므로 여호와께서 저를 죽이시고 그 나라를 이새의 아들 다윗에게 돌리셨더라.”

    넷째, 신접술에 의해 올라왔다고 하는 사무엘이라는 영은 땅에서 올라왔다.

    13절, “여인이 사울에게 이르되 내가 신이 땅에서 올라오는 것을 보았나이다.”
    그러나 의인은 하늘의 안식에 들어간다. 전도서 3:20-21, “다 흙으로 말미암았으므로 다 흙으로 돌아가나니 다 한 곳으로 가거니와 인생의 혼은 위로 올라가고 짐승의 혼은 아래 곧 땅으로 내려가는 줄을 누가 알랴.” 시편 73:24, “주의 교훈으로 나를 인도하시고 후에는 영광으로 나를 영접하시리니.” 구약 성도도 죽은 후에 영광에 들어갔다. 또 하늘에 올라간 의인의 영은 다시 땅으로 내려올 수 없고(눅 16:26), 또 하나님께서 악령의 활동인 신접술에 의해 사무엘을 땅으로 내려보내실 리도 없다. 

    다섯째, 악령도 강한 추측으로 어느 정도 미래를 예측하며 예견하기도 한다.

    무당들도 신기한 일을 하며 어느 정도 미래를 예측하며 예견한다. 마태복음 24:11, [종말의 징조들 중에] “거짓 선지자가 많이 일어나 많은 사람을 미혹하게 하겠으며.”

    [20-25절] 사울이 갑자기 땅에 온전히 엎드러지니 이는 사무엘의 말을 인하여 심히 두려워함이요 또 그 기력이 진하였으니 이는 그가 종일 종야에 식물을 먹지 못하였음이라. 그 여인이 사울에게 이르러 그 심히 고통함을 보고 그에게 이르되 여종이 왕의 말씀을 듣고 나의 생명을 아끼지 아니하고 왕이 내게 이르신 말씀을 청종하였사오니 그런즉 청컨대 이제 여종의 말을 들으사 나로 왕의 앞에 한 조각 떡을 드리게 하시고 왕은 잡수시고 길 가실 때에 기력을 얻으소서. 사울이 거절하여 가로되 내가 먹지 아니하겠노라. 그 신하들과 여인이 강권하매 그 말을 듣고 땅에서 일어나 침상에 앉으니라. 여인의 집에 살진 송아지가 있으므로 그것을 급히 잡고 가루를 취하여 뭉쳐 무교병을 만들고 구워서 사울의 앞에와 그 신하들의 앞에 드리니 그들이 먹고 일어나서 그 밤에 가니라.

    사울이 신접한 여인을 만난 것은 그를 더욱 절망케 했을 뿐 아무런 해결책이 되지 못했다. 거짓된 신비주의는 참된 해답이 아니다. 

    본장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우리는 범죄했을 때 하나님 앞에서 철저히 회개하고 오직 하나님의 계명에 순종해야 한다. 모든 문제의 해결은 회개에 있다. 사울에게는 철저한 회개가 없었다. 사람이 죄를 범할 수는 있으나 회개가 중요하다. 회개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하나님의 은혜이다. 물론 회개는 하나님의 계명을 순종하는 것으로 나타나야 한다. 우리는 다 부족한 자이므로 때때로 실수하고 넘어질 수 있으나 죄를 깨달을 때 그 죄를 철저히 회개하고 청산하고 하나님의 계명에 순종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것이 모든 문제의 해결책이다. 

    둘째로, 우리는 위기 상황에서 하나님만 의지하고 담대히 행해야 한다. 사울은 블레셋과의 전쟁에서 두려워 떨었고 철저히 회개하고 하나님을 의지하는 대신에 신접한 여인에게 찾아갔다. 죄인은 위기 상황에서 두려워 떨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는 그럴 때에 더욱 하나님을 의지해야 한다. 믿음은 위기 상황에서 빛을 발하는 법이다. 우리에게 닥친 세상의 모든 일들은 영적 전쟁과 같다. 그러나 이 전쟁에서 승리하는 길은 다른 어디에 있는 것이 아니고 오직 하나님께 있다. 우리는 오직 하나님만 의지하고 담대히 행하자.




    사전의 정의에 의하면 “신접하다”란 “몸에 귀신이 내려 접하다”란 뜻이다.
    “박수”는 한자어가 없는 순수한 우리말로서 “남자무당”이라고 정의되어 있다.
    이 두 가지 용어는 אוֹב אוֹ יִדְּעֹנִי (오보 오 이드오니)라고 나란히 병접되어 함께 언급되기 때문에 그 한글번역어들을 특정하여 살펴 보기로 하자.

    (오보 오 이드오니)אוֹב אוֹ יִדְּעֹנִי

     

    신8:11

    레19:31

    레20:6

    개역

    신접자나 박수

    신접한 자와 박수

    신접한 자와 박수

    개정

    신접자나 박수

    신접한 자와 박수

    접신한 자와 박수무당

    새역

    귀신을 불러 물어 보는 사람과 박수

    혼백을 불러내는 여자 / 점쟁이

    혼백을 불러내는 여자와 마법을 쓰는 사람

    공역

    도깨비 또는 귀신을 불러 물어 보는 자

    죽은 사람의 혼백을 불러 내는 여인이나 점장이들

    죽은 사람의 혼백을 불러내는 여인들과 점장이

    천역

    혼령이나 혼백을 불러 물어 보는 자

    영매들과 점쟁이들

    영매들과 점쟁이

    NKJ

    a medium or a spiritist

    mediums and familiar spirits

    A man or a woman who is a medium, or who has familiar spirits

    NRS

    who consults ghosts or spirits

    mediums or wizards

    A man or a woman who is a medium or a wizard

     

    “신접자”, “귀신을 불러 물어 보는 사람”, “도깨비를 불러 물어 보는 자”, “혼령을 불러 물어 보는 자”라고 번역한 히브리어 명사 אוֹב (오브)는 성경에 17회 언급되며 오경에는 레19:31; 20:6, 27; 신18:11의 네 구절에만 나온다. 이 명사는 사무엘상서 28장에 네 차례나 언급되는데 사울이 사무엘을 불러올려달라고 אוֹב (오브)에게 부탁하는 장면에 나온다(삼상18:3, 7, 7, 8, 9). 그 אוֹב (오브)는 אֱלֹהִים (엘로힘)이 지하에서 올라오는 것을 보고 있다고 사울에게 말했다. 이로 미루어 볼 때 는 망자의 혼을 불러내는 영매였던 것 같다. 오늘날에서 이러한 행위를 하는 자를 “무당”이라고 부른다.

    이 단어와 병행하는 יִדְּעֹנִי (이드오니)는 성경에 11회 언급되는데 오경에는 3회 나온다(레19:31; 20:6, 27; 신18:11; 삼상28:3, 9; 왕하21:6; 23:24; 대하33:6; 사8:19; 19:3). 위의 도표에서 보듯이 이 단어는 “박수”, “박수무당”, “점쟁이”, 마법을 쓰는 사람”, “귀신을 불러 물어 보는 자”, “혼백을 불러 물어 보는 자”, “점장이들”, “점장이”, “점쟁이들” 따위로 다양하게 번역되었다. 영역본들은 spiritist, familiar spirits, one who has familiar spirits, wizards 따위로 번역했다. 명사 יִדְּעֹנִי (이드오니)는 ‘알다’란 동사 ידע (야다)에서 파생했기에 남들이 모르는 어떤 것을 알고 있다고 알려진 데에서 비롯한 용어였을 것이다. 이 단어는 항상 אוֹב (오브)와 함께 나란히 언급되고 있다. 이로 미루어 볼 때 아마도 יִדְּעֹנִי (이드오니)는 אוֹב (오브)의 단짝이거나 배우자였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우리말로 ‘무당’의 남자 동료를 ‘박수’라고 부르는 관습이 이에 해당할 수 있을 것 같다.

    박수는 굿거리에 직접 나서서 의례를 집행하며 춤과 노래를 부르기도 하지만 굿거리에 직접 나서지는 않고 여무(女巫)가 춤을 추는 동안 3현 6각을 다루는 잽이의 역할을 하기도 한다.
    제정일치시대의 박수는 무당과 더불어 사제권과 왕권(王權)을 지닌 권력자였다.
    우리나라에서는 제정일치가 이루어졌던 시대의 단군· 동명왕· 박혁거세· 남해 등을 박수로 간주한다.
    가나안의 종교문화에서 권력자로 군림하던 샤먼으로서의 무당과 박수는 정교가 분리되던 시대에 왕의 조력자로서 신전을 관리하는 관직으로 정해졌으며, 지방에서는 산당에서 일하는 무속 샤먼으로 행세했을 것이다.
    이들은 신전들과 지방성소들과 산당들에서 접신하는 종교현상을 보이면서 신들이 뜻을 전달하는 일을 하였다.
    또한 이들은 권력자들이나 왕들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면서 길흉을 점쳐주거나 통치를 위한 지배이데올로기를 창출하는 역할을 하기도 하였다. 

    성경은 국가신전과 지방성소와 산당들의 종교적 관례가 모두 거짓 신탁을 내리면서 혹세무민하는 악습을 금지하고 있다.
    성경으로 말씀예배를 드리던 디아스포라 공동체는 잘못된 우상종교의 미신과 폐단을 척결하고 오로지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하여 시내산에서 주신 말씀에 의거하여 말씀공부와 말씀예배로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라는 야훼의 말씀을 진리의 도로 내세웠다.

    오늘의 교회 안에 기독교인들이 은사를 받아서 말씀 없이 예언하고 길흉을 점치고 돈을 받고 축복권을 남발하는 행태들이 나타나고 있다.
    이러한 이들은 기도원이라고 간판을 붙인 곳에서 성행하지만, 건전하다고 자부하는 일반교회들의 목회자들 중에서 종종 무당이나 박수처럼 신비함을 가장한 거짓신탁과 축복권을 남발하는 자들도 많이 있다.
    더 나아가 정치적인 목적을 위하여 일부 정치권력자들과 야합하여 하나님을 빙자하여 말씀을 신탁처럼 내뱉고 성도들뿐만 아니라 일반인들까지도 속이는 종교인들이 근자에 기독교에서 나타나고 있다.
    성경은 말씀 이외의 어떠한 신비한 행위도 교회 안에서 금지할 것을 가르치고 있다.
    하나님을 빙자하고 사칭한 자에게는 무서운 징벌이 기다리고 있음을 두려워해야 한다.





    ‘몰록’의 우상은 소의 머리에 사람의 모습을 하였는데, 두 손을 펴고 직립하여 서 있거나, 단상에 걸터앉은 것도 있었으며, 그 몸과 단은 속이 비어있으며, 제전이 있을 때는 그 속에 불을 지펴서 그 몸체을 뜨겁게 달군 뒤에, 제사장은 어린아이의 아버지에게서 아이를 받아 우상의 두 손 위에 놓고 태워 죽게 하였으며, 이때 아이의 아버지에게 아이의 곡성이 들리지 않게하기 위하여 북을 울리도록 하였다고 전해집니다.


    이 신을 섬기는 것에 대해 모세 시대부터 바벨론 유수 기간까지 약 900여년간 선지자들이 경고 해 왔던 기록들이 성경 곳곳에 기록되어 있으며, 특별히 출애굽 한 이스라엘 백성이 철저히 진멸하였던 가나안의 나라나 성읍들이 이러한 신들을 섬기고 있었기에 하나님의 무서운 

    ‘진노의 심판’를 받은 것으로 기록되었습니다.

    이 신에게 제사를 드렸던 곳이 후에는 죽은 짐승들의 사체를 버리고, 온갖 오물을 버리는 곳이 되어 이를 불태우는 연기가 밤낮 타오르게 되었으며, 구더기와 온갖 벌레들이 서식하고 악취가 풍기는 불쾌한 곳이 되었습니다.

    < 몰렉 Molech 그림출처 US_RoninHammer>

    제사지냈던 장소의 이름은 ‘게벤 힌놈’ 곧 ‘힌놈의 아들의 골짜기’란 뜻으로써 신약성경에서 예수께서 ‘지옥’ ( 헬 : gevenna 게엔나 )으로 불렀던 곳입니다.

    < 레 18:21 너는 결단코 자녀를 몰렉에게 주어 불로 통과케 말아서 네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하지 말라 나는 여호와니라 >

    아리러니컬 하게도 출애굽한 이스라엘은 이러한 신들을 섬겼던 가나안 민족들을 처절하고 냉정하게 응징하였던 심판의 도구가 되었었으나, 그 후손들은 오히려 그 신들을 받아들임으로써, 자신들이 처절한 심판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학자들 간에는 앞에 열거된 모든 신들이 바벨론의 니므롯 ( 담무즈 Tammuz )이 신격화되어 퍼져나간 것으로 보기도 하는데, 신들의 이름이나, 신상의 모양, 인신제사법 등이 유사하며, ‘신들의 아내들’의 명칭 또한 동일하거나, 니므롯의 아내 ‘세라미스’에게서 나온 이름들인 것을 볼 때 사단의 ‘은밀’하고 ‘통일된’ 계략들이 인류 역사 속에 얼마나 뿌리깊게 역사되어 왔는지를 성경과 역사는 알려 주고 있습니다.

    < 몰렉 Molech 사진출처. boughtmearabbit>

    레위기 20:1-5 / 몰렉 숭배의 죄
    머리는 소의 형상, 몸은 사람의 형상

    1.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일러 가라사대
    2.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또 이르라 무릇 그가 이스라엘 자손이든지 이스라엘에 우거한 타국인이든지 그 자식을 몰렉에게 주거든 반드시 죽이되 그 지방 사람이 돌로 칠 것이요.
    3 나도 그 사람에게 진노하여 그를 그 백성 중에서 끊으리니 이는 그가 그 자식을 몰렉에게 주어서 내 성소를 더럽히고 내 성호를 욕되게 하였음이라.
    4. 그가 그 자식을 몰렉에게 주는 것을 그 지방 사람이 못본체하고 그를 죽이지 아니하면
    5. 내가 그 사람과 그 권속에게 진노하여 그와 무릇 그를 본받아 몰렉을 음란히 섬기는 모든 사람을 그 백성 중에서 끊으리라 >

    레위기 20:6-8 / 접신자를 따르는 자의 죄(신접자, 오보트, 박수 이데온)
    죽은 자의 신을 불러내어 미래를 알아내는 힘
    영매 즉 죽은 자의 혼을 사용한다.

    신명기 18:9-11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주시는 땅에 들어가거든 너는 그 민족들의 가증한 행위를 본받지 말 것이니.
    그 아들이나 딸을 불 가운데로 지나게 하는 자나 복술자길흉을 말하는 자요술하는 자무당이나.
    진언자신접자박수 초혼자를 너의 중에 용납하지 말라.

    레위기 20:9 / 부모를 저주하는 죄

    부모는 하나님의 대리자로 주셨다.
    에베소서 6:1-2
    자녀들아 너희 부모를 주 안에서 순종하라 이것이 옳으니라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라 이것이 약속 있는 첫계명이니.

    옳으니라 - 자연스럽다, 자연법
    순종하라 - 내적인 자세
    공경하라 - 외적인 자세
    약속 있는 첫 계명 - 신적 계명

    3. 이는 네가 잘 되고 에서 장수하리라.

    유대인의 경영자는 직원을 선택할 때 먼저 부모와 인터뷰를 진행한다.
    먼저 부모와의 관계가 중요하다고 한다.


    레위기 20:10-


    로마서 12:1-2

    1.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적 예배니라
    2.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1. 본문이 언급하는 죄의 종류를 크게 나눈다면 몇 가지인가?

      우상숭배, 성범죄 두 가지로 대별할 수 있다. 
      빠뜨리기 쉬운 죽을 죄가 한 가지 더 있다.
      무엇일까?
      그것은 범죄행위를 방관하는 죄이다(4).
      당연히 말해야하고 행동해야할 때 말하지 않고 행동하지 않는 것도 사형에 해당하는 죄이다.

    2. 몰렉은 암몬족의 신으로 머리는 황소이며 몸통은 사람인 청동우상이다. 밑에서 불을 때면 뜨거워진 팔에 유아를 얹어서 죽게하는 방식으로 섬겼다고 한다. 이와 관련해서 죽어야할 자는 어떤 자들인가?

      몰렉에게 자식을 주는 자와 그것을 방관하는 자.
      현대판 몰렉은 무엇일까?
      몰렉보다 더욱 잔인한 우상은 어쩌면 돈이다.
      돈 때문에 남편이나 아내를, 혹은 자녀나 부모를 죽이는 일이 가끔 보이는 것이 우리 사회이다.
      말씀대로 우리 이웃이 그렇게 하면 돌로 쳐야 하나?
      그렇게 죽어야할 사람이 얼마나 될까?
      구약의 율법을 지금 우리가 문자 그대로 시행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3. 몰렉에게 자녀를 주는 것이 어떻게 성소를 더럽히고 하나님의 거룩한 이름을 더럽히는 것이 되나?

      이스라엘의 자녀는 곧 하나님의 자녀이며 하나님의 자녀를 마음대로 다른 곳에 팔아먹는다는 것은 곧 하나님을 무시하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할아버지 밥그릇을 허락도 없이 덜어서 자녀에게 주면 노발대발하실 것이다. 밥 몇 숟가락이 아까워서가 아니다.

    4. 그 지방 사람이 몰렉숭배자를 돌로 쳐서 심판을 하면 하나님도 그를 백성 중에서 끊으리라고 말씀하신다.
    사람들이 나서서 심판하면 하나님은 좀 빠지셔야하는 것 아닌가?

      사람들의 심판과 상관없이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심판이 있다는 말씀이다. 사람들이 돌로 치거나 치지 않거나 하나님의 심판이 있다. 결국 사람들의 심판이 진짜 심판이 아니라 하나님의 심판이 진짜 심판이다. 하나님의 심판에 사람들이 동조하는 것일 뿐이다.

    5. 신접한 자, 박수를 추종하는 자를 하나님께서 싫어하시는 이유가 무엇인가?

      음란한 짓이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우상숭배는 두 가지 측면에서 간음이다. 1) 인간적인 측면에서 보면 이스라엘이 다른 신들을 그렇게 쉽게 추종한 것은 그런 신들을 섬기는 과정이 음란한 탓이다. 물론 본인들은 그것을 결코 음란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예술? 사랑? 자유? 라고 말하겠지만 실상은 음란이다. 2) 영적인 측면에서 보면 하나님과 맺은 관계를 파기하는 것이며 곧 하나님의 사랑을 배신하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6. 여호수아를 통해서 가나안 주민을 전멸시키시는 이유는 극심한 우상숭배 때문이었다. 사방에 우상이 널려 있는 상태에서 이스라엘 백성만 유독 그런 행위에 물들지 말라고 경고하시는 것이다.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명령을 하시는 이유가 무엇인가?

      나는 너희를 거룩케하는 여호와니라; 너희는 특별히 내 백성이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이야 애인을 줄줄이 꿰차고 다니든 말든 손가락질도 하고 웃기도 하겠지만 내 애인이 바람피우는 것은 용납하지 못하는 것처럼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관계 때문이다. 예수 믿는 우리에게는 이런 하나님이 계신다. 그래서 구별된 삶을 살아야한다. 불행한가? 애비없이 제 마음대로 사는 고아가 부러워 보이는가?

    7. 아비나 어미를 저주하는 행위는 왜 이렇게 무서운 것인가?

      보이는 부모(형제)를 공경(사랑)하지 못하면 보이지 않는 하나님도 공경할 수 없기 때문이다(요일 4:20). 부모를 저주하는 것이 곧 하나님을 저주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아비를 조롱하며 어미 순종하기를 싫어하는 자의 눈은 골짜기의 까마귀에게 쪼이고 독수리 새끼에게 먹히리라 (잠 30:17)

    8. 하나님께서 주시는 가장 큰 벌은 '백성 중에서 끊쳐지는 것'이다. 내 백성이 아니라는 말이다. 본문에서 이와 비슷한 다른 표현을 찾아보자.

      무자하리라(21); 단순히 자식이 끊어진다는 의미 이상으로 하나님과 관계가 끊어진다는 의미이다.

    9. 성범죄에 대한 10-21절의 내용은 18장에서 상세하게 언급한 내용이다. 반복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두 본문을 자세히 비교해 보자. 차이점이 있는지?

      형벌에 대한 부분이 추가되어 있다; 처벌규정이 덧붙여져 있는데 예외없이 사형이다. 성범죄를 왜 이렇게 중벌에 처했을까? 성 윤리가 모든 윤리의 기초가 되기 때문이다. 이것이 무너지면 다른 것은 볼 것도 없다. 역으로 성적인 유혹이 그만큼 집요하고 매력적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위험한 것을 왜 인간에게 주셨는가? 잘 쓰면 그만큼 아름다운 것이기 때문이다. 남용, 오용이 잘못이지 약 자체가 나쁜 것은 아니다.

    10. 남매 간에는 하체를 보는 것만으로도 죽을 죄가 되는가(17)? 한 집안에서 살면서 실수로 보게되면 어떡하지?

      여기서 본다는 것은 성관계를 가진다는 말의 완곡하게 표현한 것일 뿐 단순하게 본다는 의미가 아니다.

    11. 경도(생리)중인 여인과 동침하는 것이 죽을 죄가 되는 것은 피근원을 드러내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것은 아무도 피를 먹지말라고 하면서 피를 소중하게 여겼던 사상과 관련이 있을 것이다. 비정상적인 성관계를 금지하는 규정들은 오늘날에도 존중되어야하지만 이 문제만은 조금 다르게 다루어져야한다고 본다. 무슨 차이점이 있어서?

      다른 모든 관계는 정상적인 성관계를 맺을 수 있는 관계가 아니지만 이 경우는 정상적인 부부의 관계일 수 있기 때문이다. 피에 대한 개념이 달라졌으므로 문자 그대로 적용할 일은 아니라고 본다. 윤리적인 탈선의 문제도 아니요 형법에 저촉되는 일도 아닌 종교의식상의 부정이기 때문이다. 다음과 같은 성의학자들의 의견을 존중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심리적으로 불안정할 수 있음에 주의하고 의학적으로 크게 문제가 될 것은 없으나 몸이 약해져 있는 상태이므로 조심스럽게 대해야한다는 것 같다.

    12. 여기에 언급된 이런 성범죄가 사형에 해당할 정도로 심각한 범죄인 이유가 무엇일까?

      가정파괴범이기 때문이다; 가정은 하나님께서 최초로 인간에게 준 제도이다. 이것을 파괴하는 것은 곧 하나님의 창조를 허무는 일이다. 강도, 강간범에게 가정파괴범이란 말로 그들의 범죄의 심각성을 지적해낸 법관은 법에도 없는 이 말을 처음 사용해서 칭찬을 많이 들었다. 가정을 허무는 것은 단순히 한 가정의 일이 아니라 사회의 근간을 흔드는 일이기 때문에 심각한 범죄행위가 된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하나님이 가장 소중하게 만든 작품을 깨뜨리는 일임을 잊지 말아야한다.

    13. 예전에 유행하던 '지구를 떠나거라'는 말은 웃음을 주는 표현이었지만 잘 생각해보면 웃을 일만은 아니다. '죽어라'는 말이기 때문이다. 본문에서도 이와 같은 표현이 있다면?

      땅이 토하여 내리라(22), 무자하리라(21), 백성 중에서 끊쳐지리라(18); 다 답이 될 수 있겠으나 전자가 더 좋은 답이라고 본다.

    14. 하나님이 거룩한 것이야 당연하지만 그렇다고 우리까지 꼭 거룩해야 하나?

      하나님의 소유가 되었기 때문이다; 소유란 자녀요 아내인 관계를 말한다. 너희로 나의 소유를 삼으려고 너희를 만민 중에서 구별하였음이라(26). 당시의 가나안 풍속과 이스라엘이 지켜야하는 성적인 자세는 너무나 다르다. 그런 삶을 살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의 뜻을 기억하자. 현대인들이라고 해서 이런 점에서는 옛날보다 더한 것도 없고 덜한 것도 없는 것 같다. 우리 주변은 예전이나 지금이나 성적으로 문란하고 우상이 들끓고 있다. 이런 가운데서 성도는 어떤 삶을 지녀야할지 의견을 나누어 보자.

    15. 가나안 원주민들이 이스라엘에 의해서 철저하게 죽음을 당하거나 쫓겨나야했던 것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만 편애하셨기 때문이 아니란 증거가 본문에 있는가?

      이런 계명을 어기면 이스라엘도 쫓겨나리라고 말씀하고 있는 점이다(22); 가나안 족속들이 쫓겨난 것은 결국 그들이 저지른 범죄행위의 대한 심판이다. 다른 측면에서 본다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땅을 주시려고 그랬다고 볼 수도 있지만 심판의 측면에서 보아도 틀림없는 일이다. 그렇게 될 것을 하나님께서는 미리 알고 계셨을 뿐이다(창 15:16).

    16. 가나안 땅은 우리나라에 비해서도 척박한 땅이요, 농사에 적합한 비도 그리 많지 않다. 그런데 왜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라고 하는가?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이다; 상징적으로 천국을 가리킨다. '예수가 지옥에 있다면 나는 지옥으로 가겠다'는 것은 루터의 말이다. 진정으로 젖과 꿀이 흐르는 곳은 하나님이 계신 곳에서 하나님과 교제를 나누는 것이다. 가나안보다 더 비옥한 땅은 천지삐깔이다.

    17. 왕처럼 귀한 분이 특별히 귀한 것을 따로 보관해놓고 보고 또 보면서 소중하게 여기는 것을 가리키는 말이 본문에 있다. 하나님에게 이스라엘이 그러했고, 또 우리가 그러하다. 우리말로는 별로 실감이 나지 않는데 어느 단어일까?

      소유; 세굴라(    )라는 단어인데 하나님께서 우리를 얼마나 소중한 존재로 여기시고 있는가를 잘 보여주는 단어이다. 그가 너로 인하여 기쁨을 이기지 못하여 하시며 너를 잠잠히 사랑하시며 너로 인하여 즐거이 부르며 기뻐하시리라(습 3:17b)는 표현에 가장 잘 어울리는 표현이다.


    레위기 20장은 하나님께서 가증스럽게 여기시는 흉악한 범죄들에 대해서 말씀하십니다.
    흉악한 범죄들은 “반드시 죽여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사랑의 하나님께서 왜 이렇게 잔인한 형벌을 강조하셨을까요?

    창조주이시며, 구원자이신 여호와 하나님을 떠나, 가나안 즉 세상의 악한 풍습을 따르고, 우상을 숭배하며, 근친상간 등의 죄악을 행하는 것을 하나님께서 가증히 여기시며 용납하지 않으시기 때문입니다.

    거룩(카도쉬)이란 죄악으로부터 떠나는 윤리적이고 도덕적인 문제만이 아닙니다.
    거룩(카도쉬)이란 영원한 삶과 죽음의 문제라는 것을 분명하게 알려주고 있습니다.

    레위기 20장에서 흉악죄를 크게 세 가지로 분류합니다.

    첫째는 몰렉 숭배의 죄(20:1-5)
    몰렉이란 머리는 소의 형상이며 몸은 사람의 모습을 갖춘 암몬 사람들이 섬기는 우상을 말합니다.

    둘째는 접신자를 따르는 죄(20:6-8)
    접신자는 무당을 말합니다.
    미래가 불투명한 시대를 살아야 하는 사람들은 미래를 알고 싶어하는 강열한 욕망이 있습니다.
    믿음이란 미래를 알기 때문에 믿는 것이 아니라 볼 수 없고 알 수 없지만 미래를 인도하는 주가 여호와 하나님이심을 확신하는 것입니다.

    신명기 18:9-11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주시는 땅에 들어가거든 너는 그 민족들의 가증한 행위를 본받지 말 것이니.
    그 아들이나 딸을 불 가운데로 지나게 하는 자나 복술자길흉을 말하는 자요술하는 자무당이나.
    진언자신접자박수 초혼자를 너의 중에 용납하지 말라.

    셋째는 부모를 저주하는 죄(20:9)

    하나님은 세상 모든 사람들에게 부모님을 하나님의 대리자로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성경인 주 안에서 부모를 순종하라(내적인 자세), 공경하라(외적인 자세)고 하셨습니다.

    에베소서 6:1-2
    자녀들아 너희 부모를 주 안에서 순종하라 이것이 옳으니라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라 이것이 약속 있는 첫계명이니.

    부모를 공경하고 순종하는 자녀들에게 네가 잘 되고 땅에서 장수하게 될 것이라고 약속하셨습니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믿고 섬긴다는 것은 보이는 부모님을 공경하는 것에서 확인할 수 있는 가르침이라고 하겠습니다.

    오늘도 진리의 말씀에 따라 거룩한 주의 백성으로 주위 사람들에게 인정받는 하루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옳으니라 - 자연스럽다, 자연법
    순종하라 - 내적인 자세
    공경하라 - 외적인 자세
    약속 있는 첫 계명 - 신적 계명

    3. 이는 네가 잘 되고 에서 장수하리라.

    유대인의 경영자는 직원을 선택할 때 먼저 부모와 인터뷰를 진행한다.
    먼저 부모와의 관계가 중요하다고 한다.


    레위기 20:10-


    로마서 12:1-2




    하나님의 백성은 우상숭배에 대한 경고를 받습니다(2b~6).
    우상숭배의 결과는 ‘백성 중에서 끊으리라’는 것입니다(3, 5, 6).
    자녀를 산 채로 바치는 몰렉 제사는 가장 잔인하고 저속하고 역겨운 이방 종교를 대표하는 것입니다.
    이런 금지된 제사에 대한 처벌은 돌로 치는 것입니다(2). 이것은 공동체 전체에 악한 영향을 미치는 것이었기에 엄중한 처벌을 받아야 했습니다. 만일 공동체가 이 처벌을 행하지 않는다면(4) 하나님께서 친히 그를 백성 중에서 끊어내시겠다고 하셨습니다(5).

    하나님께서는 가나안 땅에서 자행되고 있는 성적인 타락에 대해 정죄하십니다(9~21).
    하나님은 가정이 파괴되는 것을 원치 않으십니다.
    간음은 사형입니다(10).
    근친상간(11~12)의 경우도 사형으로 처벌해야 합니다.
    결혼 관계를 위반하는 것은 어떠한 이유에서든 잘못입니다.

    동성애 역시 생명을 위한 하나님의 창조 질서를 범하는 가증한 죄로 사형에 해당합니다(13).
    14절은 아내와 장모를 함께 취하는 경우를 다루는데 여기 ‘취한다’고 한 단어는 사실상 결혼 관계를 암시하는 말입니다. 물론 이스라엘 공동체가 이런 관계를 용인하지는 않았겠지만, 가나안의 문화를 닮아가는 것을 하나님은 엄격히 금하시고, 그들을 불에 태워 죽이라고 명하신 것입니다. 수간의 경우도 하나님의 창조 질서의 위반으로 사형에 해당합니다(15~16).

    하나님의 백성은 거룩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들도 가나안 사람들이 그 땅에서 토해냄을 받은 것과 같이 되고 말 것입니다(22~23).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님의 약속이 온전히 성취될 소망을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24). 그들은 자기들의 하나님과 같이 거룩해야 합니다(25~26). 그러므로 다시 한 번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삶이 거짓 종교들로부터 자신을 지켜야 하고, 그런 거치는 자들을 돌로 쳐서 제거해야 할 것을 명하십니다(27)

    거짓 종교는 언제나 저속하고 역겨운 삶으로 인도합니다.
    하지만 참된 종교는 거룩한 삶으로 인도합니다.
    본문은 무서운 경고의 메시지입니다.
    죽음의 형벌을 초래하는 죄악들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금지 규례와 함께 처벌 규정, 즉 범죄에 대한 형량이 함께 기록된 것은 단순히 처벌이 목적이 아닌, 하나님의 구원의 의지도 함께 담겨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소극적으로는 개인의 구원을 이루어갈 뿐만 아니라, 적극적으로는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악의 세력을 대항하고, 하나님 나라의 공의와 사랑을 세상에 알려야 할 의무가 있는 것입니다.
    세상을 닮고 따라가는 것은 곧 죽음입니다.

     







    __________________ 레위기 19장 / 하나님을 경외하라(14절)  

    03-30-2023(목) 사순절 제32일

    너는 귀먹은 자를 저주하지 말며 맹인 앞에 장애물을 놓지 말고 네 하나님을 경외하라 나는 여호와이니라.
    'Do not curse the deaf or put a stumbling block in front of the blind, but fear your God. I am the LORD.

    경외하라(3372) 야레(yârêʼ) יָרֵא 

    1. 떨다
    2. 두려워하다
    3. 민수기 14:9. 다만 여호와를 거역하지는 말라 또 그 땅 백성을 두려워하지 말라 그들은 우리의 먹이라 그들의 보호자는 그들에게서 떠났고 여호와는 우리와 함께 하시느니라 그들을 두려워하지 말라 하나.
    발음 / 야레[ yârêʼ ]
    관련 성경 / 두렵다(창18:15, 삼하7:23, 말4:5), 두려워하다(창19:30, 신5:5, 왕하10:4), 경외하다(출1:21, 왕상1:50, 대상16:25), 놀라다(합3:2,사57:11, 시106:22), 공경하다(레19:30), 두렵게 하다(느6:13, 삼하14:15, 느6:19), 내놓다(욥32:6), 보다(사60:5), 위험하다(신8:15), 두렵다(시47:2), 엄위하다(시65:5, 66:5), 기이하다(시139:14), 지존하다(시111:9).
    [명]위엄(출15:11, 시68:35), 두려움(시76:12, 사18:2)
    구약 성경 / 293회 사용


    하나님을 경외하라( fear your God)

    하나님의 속성 중에서 피조물인 우리들이 도저히 본받을 수 없는 속성이 있는가 하면 본받을 수 있는 속성도 있습니다.
    본받을 수 없는 속성은 "영원, 전지전능, 무소부재"와 같은 절대적 속성입니다.
    반면에 본받을 수 있는 속성은 "사랑, 거룩, 의"와 같은 속성은 상대적 속성이라고 합니다.
    따라서 너희는 서로 사랑하라, 너희는 거룩하라, 너희는 의를 행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또한 오늘의 본문에서 너희는 하나님을 경외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왜 하나님을 경외하라고 하셨을까요?
    애급에서 나온 이스라엘 백성들이 정착해야 할 땅은 이방인들의 문화와 제사가 거룩한 백성들을 유혹하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레위기 19장에서 사회생활에 관한 다양한 규례들을 소개합니다.

    레위기 19장에 소개된 규례들은 수직적이며 수평적 규범이 동시에 강조됩니다. 
    이것은 당시 고대 근동 사회와 형식적인 면에서 차이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내용 면에서는 뚜렷한 구별이 나타납니다.

    고대 근동의 규범은 수직적 관계가 수평적 규범으로 전환될 때 그 중개자인 신관이나 족장이 신을 대신하여 특권을 누리게 됩니다. 
    따라서 이들은 사회의 규범보다 위에 있어 개인의 의지에 따라 사회를 통치합니다. 
    그러나 레위기 19장에 나타난 모세 율법은 수직에서 수평의 규범으로 전환할 때 중개자가 없고 모든 공동체의 구성원들이 하나님 앞에서 동일하게 취급됩니다. 

    이것은 오직 하나님만이 그들의 통치자임을 나타내기 위한 것입니다.
    또한 규범의 내용도 개인의 의지가 아니라 정의라는 규범에 의해 제정된 것입니다. 
    따라서 모세 율법은 정의와 평등이라는 내용 면에서 고대 근동의 다른 규범보다 우월성을 갖습니다.


    본장은 언약의 공동체 내에서 지켜야 할 인간과의 규범에 대해 네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말로 결론을 맺고 있다.
    이것은 이웃에 대한 사랑 이 형식적인 것이 아니라 진심으로 우러나오는 것이어야 함을 의미한다.
    왜냐하면 이웃에 대한 사랑은 곧 나에 대한 사랑이며 하나님께 대한 사랑의 표현이기 때문이다.
    타인을 대할 때 마치 그리스도를 대하듯이 대하고 또한 그를 영접할 때 그리스도께 하듯이 영접하고 사랑을 베풀어야 한다.
    그래서 성경은 보이는 바 형제를 사랑하지 않는 자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다고 말씀하고 있다.

    본문 1절에서 2절입니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너는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에게 말하여 이르라 너희는 거룩하라 이는 나 여호와 너희 하나님이 거룩함이니라”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거룩한 삶을 요구하시는 이유는 하나님께서 거룩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본질적으로 거룩하십니다. 그에 따라 거룩하신 하나님께로부터 하나님의 백성으로 부름 받은 이스라엘의 책무는 거룩하신 하나님의 백성답게 그에 부합되는 거룩한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를 통해 하나님의 백성들은 거룩하신 하나님을 닮아 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를 위해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통해 이스라엘 온 회중에게 거룩한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지켜야할 규례를 전하게 하십니다.

    관련하여 오늘 본문은 크게 3가지 종류의 규례로 나눠 볼 수 있습니다. 1절부터 8절까지는 ‘부모님과 하나님을 대하는 규례’이며, 9절부터 18절까지는 ‘이스라엘 공동체 내에서의 규례’이고, 19절부터 36절까지는 ‘개인 규례’에 관한 내용입니다. 먼저 3절입니다. “너희 각 사람은 부모를 경외하고 나의 안식일을 지키라 나는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이니라”

    하나님께서 요청하신 거룩한 백성의 첫 번째 책무는 ‘부모를 경외하는 것’이었습니다. 참고로 이와 유사한 내용이 십계명중 제5계명에 ‘네 부모를 공경하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두 규례 사이에는 미묘한 차이점이 있습니다. 본문의 경우 ‘경외하라’라는 동사가 쓰인 반면 십계명에서는 ‘공경하라’는 동사가 쓰였다는 점입니다. ‘경외하다’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야례’는 주로 ‘하나님’을 목적어로 하는 동사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는 ‘부모’가 목적어입니다. 곧 부모의 권위가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임을 강조하며 공경의 차원을 넘어 부모를 경외하라는 뜻입니다.

    아울러 거룩한 백성의 첫 번째 책무가 ‘부모를 경외하는 가정내 규례’에서부터 시작된다는 것은 ‘진정한 거룩’은 가정으로부터, 부모자녀간의 바른 관계로부터 출발해야한다는 점을 알 수 있습니다. 사실 예배당 안에서의 거룩한 모습은 그리 어렵지 않게 찾아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예배당 밖에서의 거룩, 곧 가정 내에 진정 거룩한 모습이 있는지 여부는 파악하기가 어렵습니다. 쉽게 드러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거룩한 백성의 첫째 요건으로 ‘부모를 경외하는 것’, 곧 ‘신앙 안에서 부모와 자녀가 바른 관계를 맺는 것’을 첫 번째로 요청하고 계신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요청하시는 거룩한 백성의 두 번째 책무는 ‘안식일을 지키는 것(3절)’, ‘우상 숭배하지 않는 것(4절)’, ‘화목제를 잘 이행하는 것(5-6절)’ 으로 대표되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안식일을 가리켜 ‘우리의 안식일’이 아니라 ‘나의 안식일’임을 분명하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곧 안식일이라는 시간의 주인이 하나님이심을 강조하고 계신 것입니다. 주일은 단순히 ‘휴일’이 아니라 ‘주님의 날’입니다. ‘주님을 경배하며 주님께 예배드림을 위해 하나님께서 구별해 놓으신 날’입니다. 거룩한 백성임을 인지하며 거룩한 백성답게 살아가려는 그리스도인이라면 주일을 절대 경홀히 여기지 않습니다. 거룩한 백성임의 표지이기 때문입니다.

    더불어 하나님을 경외하는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들은 우상을 숭배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자리에 다른 것들을 올려놓고 숭상하지 않습니다. 아울러 화목제라는 지극히 개인적인 순종이 요구되는 영역에서까지도 철저하게 하나님의 말씀을 준행합니다. 거룩한 그리스도인은 자기중심적 사고를 탈피하여 삶의 아주 작은 영역 속에서도 하나님을 경외하는 일을 실천해 나갑니다.

    이제 9절부터 18절까지는 ‘이스라엘 공동체 내에서의 규례’에 관한 내용입니다. 다른 말로 하자면 ‘사회윤리’에 대한 내용입니다. 9절에서 10절입니다. “너희가 너희의 땅에서 곡식을 거둘 때에 너는 밭 모퉁이까지 다 거두지 말고 네 떨어진 이삭도 줍지 말며 네 포도원의 열매를 다 따지 말며 네 포도원에 떨어진 열매도 줍지 말고 가난한 사람과 거류민을 위하여 버려두라 나는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이니라”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으로서 실천해야할 기본적인 ‘사회윤리’는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을 배려하는 것’이었습니다. 당시 이스라엘 공동체내에는 가난한 사람 뿐 만 아니라 나그네와 같은 외국인들이 있었습니다. 그런 그들을 위해 하나님께서는 곡식을 다 수확하지도 말고 땅에 떨어진 이삭도 줍지 말며 포도 열매를 다 따거나 떨어진 열매를 줍지 말라 명령하십니다. ‘탐욕적인 삶’이나 ‘인색한 삶’이 거룩한 하나님의 백성에게는 합당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또한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은 도둑질이나 거짓말로 이웃에게 피해를 주지 않으며(11절), 이웃의 재산을 강탈하거나 약자의 것을 착취하지도 않아야합니다(13절). 공의로 재판하며(15절), 이웃에 대해 험담하거나 이웃의 생명을 담보로 이익을 취해서도 안 됩니다(16절). 타인을 미워하는 마음을 품어서도 안 되며, 이웃이 잘못을 하면 반드시 타일러야만 합니다(17절). 서로 앙심을 품거나 원수를 갚아서도 안 됩니다(18절 전반절). 결국 이 모든 사회윤리의 근간은 한 문장으로 요약 될 수 있는데 바로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입니다(18절 하반절).

    거룩한 하나님의 백성은 자신과 이웃을 동일시합니다. ‘나’는 하나님의 백성이지만 동시에 ‘내 이웃’ 또한 하나님의 백성이기 때문입니다. 아니 내가 ‘이웃’ 으로 규정하지 않는 ‘낯선 타인’ 또한 ‘하나님께서 만드신 존재’임을 인식하며 존중하려 애를 씁니다. 사랑하려 노력합니다. 더 나아가 보다 적극적인 자세로 ‘원수’까지 사랑하며 ‘나를 박해하는 사람’을 위해 기도하려합니다(마 5:44). ‘죄인이었던 나’를 사랑으로 품어주신 사랑의 하나님을 알고 믿기 때문입니다. 이웃을 나처럼 사랑하며 원수까지도 품는 것은 거룩하신 하나님을 닮기 원하는 아니 닮아야만 하는 하나님의 백성에게 요청되는 모습입니다.

    이제 19절부터 36절까지는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이 개인의 삶의 영역에서 실천해 나가야 할 ‘신앙윤리’입니다. 19절입니다. “너희는 내 규례를 지킬지어다 네 가축을 다른 종류와 교미시키지 말며 네 밭에 두 종자를 섞어 뿌리지 말며 두 재료로 직조한 옷을 입지 말지며”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은 종이 다른 가축을 교미시키거나 서로 다른 두 종류의 씨앗을 함께 재배해서는 안 된다고 말씀하십니다. 아울러 두 재료를 섞어 짠 옷감으로 만든 옷도 착용하지 말라 하십니다. ‘거룩’은 ‘구분’입니다. 하나님께서 ‘구분’해 놓은 것을 ‘지키는 것’ 또한 ‘거룩’입니다. 그런 차원에서 ‘종간(種間)의 혼합을 금지하는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는 것’ 또한 일상의 삶에서 ‘거룩을 실천해나가는 것’입니다.

    아울러 20절부터 22절까지는 다른 남자와 정혼한 여종과 동침했을 경우 속건제를 드리는 규정이며, 23절부터 25절까지는 과목을 먹는 규정에 관한 내용, 26절부터 36절까지는 점이나 술법, 머리가를 둥글게 미는 것, 문신 등에 대한 금지 규례이며, 노인을 공경하며 거류민들을 사랑할 것과 공평한 저울과 추의 사용에 대한 규정이 계속해서 언급됩니다. 모두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해야 할 것’과 ‘하지 말아야 할 것’에 대해 ‘구분’해 놓으신 규례들을 준수하라는 내용입니다. 거룩한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님께서 구분해 놓으신 것을 존중하며 그 규정들을 일상의 삶에서 준행합니다. 마지막 절인 37절이 ‘하나님께서 세우신 모든 규례와 법도를 지켜 행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으로 끝나는 것은 이와 무관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은 하나님의 말씀을 단순한 지식적 앎으로 생각하며 축적하는데 만족하지 않고 삶속에서 행동으로 구체화시켜 나갑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모두를 거룩하신 하나님의 자녀로 불러주셨습니다. 그리고 오늘 우리에게 새로운 한 날을 또 허락하셨습니다. 부르심에 합당한 거룩한 삶으로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입증함으로 하나님께서 영광 받으시기를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우리가 하나님의 거룩한 자녀임을 직시하며 오늘도 구별된 삶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삶으로 준행해 나아간다면 우리를 통해 하나님의 거룩하심은 드러나기 마련이며 그를 통해 하나님께서 영광 받으시는 선순환의 역사는 반드시 일어날 것입니다. 이 사실을 기억하시며 하나님의 구분된 명령을 삶속에서 실행해 나가심으로 하나님께는 영광이요 우리 모두에게는 큰 기쁨이 넘치는 복된 하루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저희를 하나님의 거룩한 자녀로 삼아주심을 감사합니다.
    저희들에게 허락하신 이 하루를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준행함으로 거룩한 자녀답게 살아가도록 인도하여 주시고
    세상 사람들의 눈에 이 땅에 거룩한 주의 자녀들이 있다는 것을 확인시켜 그들에게도 거룩한 삶의 의미를 깨우칠 수 있는 기회가 제공될 수 있도록 복음의 문을 열어주시옵소서.


    일상생활 속의 거룩(1-8절)
    레위기 18-20장은 하나님의 백성의 윤리적 기준, 즉 하나님의 백성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해서 증거합니다.
    (1-2)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너는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에게 말하여 이르라 너희는 거룩하라 이는 나 여호와 너희 하나님이 거룩함이니라

    18장의 마지막 절의 마지막 부분이 “나는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이니라”입니다. 그리고 19장에 “나는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이니라”, 또는 “나는 여호와이니라”가 15번이나 나옵니다. 그래서 18장에서 하나님의 백성이 윤리적으로 정결한 삶을 살아야 한다고 말씀하시는 하나님께서 19장에서는 하나님의 백성은 일상에서도 거룩한(구별된) 삶을 살아야 한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께서는 하나님께서 거룩하신 하신 것처럼 하나님의 백성도 거룩해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만약 누군가에게 “학생다워라”, “의사다워라”라고 말한다면, 그것은 그 말을 듣는 사람이 이미 학생이고, 의사이기 때문입니다. 학생이 아닌 사람에게 학생다우라고 말할 수 없고, 의사가 아닌 사람에게 의사다우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백성인 우리에게 “너희는 거룩하라”라고 말씀하시는 것은 우리가 이미 거룩한(구별된)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그 거룩한 삶, 구별된 삶이 무엇인지를 구체적으로 말씀하십니다.
    (3) 너희 각 사람은 부모를 경외하고 나의 안식일을 지키라 나는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이니라

    이 말씀은 십계명 중, 제5계명과 4계명에 상응하는 명령입니다.
    십계명에서는 ‘부모를 공경하라’라고 했는데, 여기에서는 ‘경외하라’라고 말씀합니다. ‘공경하다’는 ‘무겁게 여기다’의 의미인데, 그 무거움은 하나님께로부터 비롯되었다는 것을 일깨워줍니다. 즉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은 부모를 경외를 경외하고, 부모를 경외하는 사람은 하나님도 경외하는 사람이어야 함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또한 안식일을 구별하여 지키며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는 것은 자신의 모든 삶과 모든 시간이 하나님을 향해 있음을 고백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백성(그리스도인)이 거룩해진다는 것(구별된다는 것)은 일상의 삶에 신실한 것입니다.

    (4) 너희는 헛된 것들에게로 향하지 말며 너희를 위하여 신상들을 부어 만들지 말라 나는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이니라

    이 말씀은 십계명의 제1계명과 2계명에 상응하는 명령입니다.
    고대나 지금이나 동일하게 사람들이 하나님 한분만을 섬기는 것으로 만족하지 못해서 ‘우상’을 만들고, 섬기는 이유는 모두 ‘자기를 위해서’입니다. 자신이나 가족이든, 부귀영화든, 건강이든, 입신양명이든, 인간관계든 그 무엇이든지, 그것을 우상으로 삼는 것은 오직 ‘자기를 위해서’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신상(우상)들을 만들지 말아야 할 이유가 ‘너희를 위하여_우리를 위하여’라고 하십니다. 사람들은 ‘자기 자신’이라는 신을 만족시키기 위해서 ‘우상’을 만드는데, 하나님은 우리를 위해서 우상을 만들지 말라고 하십니다. 그것은 하나님 한 분만으로도 충분하기 때문입니다.

    (5-8) 너희는 화목제물을 여호와께 드릴 때에 기쁘게 받으시도록 드리고 그 제물은 드리는 날과 이튿날에 먹고 셋째 날까지 남았거든 불사르라 셋째 날에 조금이라도 먹으면 가증한 것이 되어 기쁘게 받으심이 되지 못하고 그것을 먹는 자는 여호와의 성물을 더럽힘으로 말미암아 죄를 담당하리니 그가 그의 백성 중에서 끊어지리라

    화목제물을 먹는 문제는 7:15-18에도 동일하게 나와 있습니다.
    화목제는 일종의 잔치 제사입니다. 잔치의 큰 특징 중의 하나는 참석한 사람들과 함께 나누는 것입니다. 당시에는 하나님께 제사를 드릴 때, 제물 드림을 통해서 드렸습니다. 제물 중에서 번제물은 모두 태워서 드렸습니다. 그래서 남는 것이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그리고 소제, 속죄제, 속건제의 제물은 하나님 앞에서 태워서 드리는 부분을 제외하고, 나머지는 제사장의 몫이었습니다. 그런데 화목제물은 기름과 피는 하나님께 드리고, 제사장에게는 앞 가슴살, 오른쪽 뒷다릿살을 주고, 나머지는 제사를 드리는 사람의 몫이었습니다.
    화목제에는 그냥 감사해서 드리는 ‘감사제’, 어떤 서원이 있어서 드리는 ‘서원제’, 자원해서 드리는 ‘자원제(낙헌제)’ 등이 있었습니다. ‘감사제’로 드리는 제물은 당일에 다 먹어야 했고, ‘서원제’와 ‘자원제(낙헌제)’는 그다음 날까지 먹을 수 있었습니다. 만약 셋째 날에도 먹으면 드린 화목제는 무효가 되었습니다.
    화목제의 제물은 흠 없는 소나, 양이었습니다. 만약 화목제물을 소로 드렸다면, 제사장분을 빼고도 약 300kg(500근) 정도 남는다고 합니다. 그 정도의 양이면, 최소한 1,000명이 먹을 수 있습니다. 그것을 이틀 만에 다 먹어야 합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해가 떨어지고 나면 다음 날이 됩니다. 만약 오후 2시쯤에 제사를 드렸다면, 해가 떨어지기 직전일 것입니다. 그러면 만 하루 만에 다 먹어야 합니다. 가족은 물론 일가친척이 먹어도 다 먹지 못합니다. 그래서 이웃과도 나누어 먹고, 잘 모르는 사람과도 나누어 먹고, 심지어 감정이 좋지 않은 사람과도 나누어 먹으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나누어 먹는 것이 거룩하게 사는 것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사회생활 속의 거룩(9-18절)
    9-18절에서는 사회생활 속의 거룩에 대해서 증거합니다.
    (9) 너희가 너희의 땅에서 곡식을 거둘 때에 너는 밭 모퉁이까지 다 거두지 말고 네 떨어진 이삭도 줍지 말며

    하나님께서는 곡식을 추수할 때 땅에 떨어진 알갱이는 줍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혹시 추수하는 사람이 최대한 조심해서 땅에 알갱이를 떨어뜨리지 않도록 할까 봐 아예 밭모퉁이는 추수하지 않고 남겨두도록 했습니다. 그것은 추수하는 일꾼의 수고를 덜어주기 위함이 아니라, 농사를 지을 땅이 없는 고아와 과부를 비롯한 가난한 사람들과 이방인(거류민, 나그네)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룻이 시어머니와 함께 모압에서 베들레헴으로 와서 보아스의 밭에서 곡식을 주웠던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즉 하나님의 백성이 거룩하게(구별되게) 사는 것은 자신의 수입 중에는 이웃을 위한 몫도 있음을 기억하는 것이라고 일깨워주시는 것입니다.

    (10) 네 포도원의 열매를 다 따지 말며 네 포도원에 떨어진 열매도 줍지 말고 가난한 사람과 거류민을 위하여 버려두라 나는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이니라

    포도 농사에서 수확할 때도 동일하게 적용되었습니다.
    우리 교회는 매달 첫째 주일을 ‘나눔주일’로 지키고 있습니다. 나눔주일의 의미는 내가 여유가 있기 때문에 이웃을 돕기 위해서 여분의 새 물품을 가져온다는 것만이 아닙니다. 우리 개인이 가져오는 쌀 한 봉지, 라면 한 봉지, 기름 한 병, 통조림 한 통 등은 가난해서 먹을 것이 없는 사람들 전체의 필요에 비하면 미미합니다. 하지만 그것은 우리의 삶과 신앙에 하나님의 풍성함을 경험하게 해 줍니다. 우리가 시장에서 나 아닌 다른 사람을 위해서 먹거리를 구입한다는 것은 내 마음과 삶에 이웃을 위한 공간이 있다는 의미이고, 또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마음이 있다는 의미입니다. 또한 다른 사람을 위해 구입한 먹거리가 집 안 한쪽이나 자동차 안에 있는 것을 자녀나 가족이 보는 것은, 삶에 이웃을 위한 공간이 있어야 한다는 것을 수백 마디의 말로 교육하는 것보다 훨씬 더 강력한 메시지입니다. 나눔주일은, 주는 자가 받는 자보다 복이 있다는 예수님의 말씀처럼, 우리가 가져온 물건을 받는 사람보다 우리에게 훨씬 더 풍성한 의미를 줍니다.

    (11-12) 너희는 도둑질하지 말며 속이지 말며 서로 거짓말하지 말며 너희는 내 이름으로 거짓 맹세함으로 네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하지 말라 나는 여호와이니라

    자신의 것이 아닌 다른 사람의 것을 도둑질하는 것은 상대가 가진 것을 자신도 가질 권리가 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문제는 자신이 갖게 되는 것을 바른 절차, 정당한 과정을 거치지 않고 가지려고 하기 때문에 바르지 않은 것이고, 틀린 것입니다. 그로 인해서 다른 사람들이 누려야 하는 것을 누리지 못하기도 하고, 그 비용을 대신 감당하기도 합니다. ‘속이다’는 어쩔 수 없는 상황이 아니라 마땅히 정직해야 할 상황에서 거짓되게 행하는 것입니다. 또한 ‘거짓말하다’는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 약속을 깨뜨리거나 상대를 속이는 행동을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당시 사람들은 맹세하는 자신보다 더 위대하다고 생각되는 존재의 이름으로 맹세하곤 했습니다. 그래서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으로 맹세하고서 상대를 속이거나 거짓말하는 것은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게 일컫는 것일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존재를 부정하고 멸시하는 것과 같았습니다. 그래서 여호와 하나님은 속이거나 거짓을 위한 맹세로 인하여 결코 더럽게 사용될 수 없는 이름인 것을 상기시켜 주는 것입니다.

    (13) 너는 네 이웃을 억압하지 말며 착취하지 말며 품꾼의 삯을 아침까지 밤새도록 네게 두지 말며

    이 말씀은 힘이 있는 사람이 그 힘으로 이웃의 삶을 더 힘들게 만들고, 더 많은 것을 취하려고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만약 품꾼에게 주어야 할 삯을 주인이 아침까지 갖고 있다고 해서 그것이 더 늘어나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품꾼은 삯을 받지 못하면 밤새 그 가족들이 굶을 수 있습니다. 그러한 행위는 거룩한(구별된) 하나님의 백성을 하지 않는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14) 너는 귀먹은 자를 저주하지 말며 맹인 앞에 장애물을 놓지 말고 네 하나님을 경외하라 나는 여호와이니라

    다른 사람이 가진 장애나 선천적으로 가질 수밖에 없는 것으로 인해 상대를 경멸하거나 헐뜯는 것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 거룩한 백성의 품격과는 거리가 먼 것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나와 다른 사람들 역시 나와 함께 사회를 구성하고, 함께 살아가는 존재입니다.

    (15) 너희는 재판할 때에 불의를 행하지 말며 가난한 자의 편을 들지 말며 세력 있는 자라고 두둔하지 말고 공의로 사람을 재판할지며

    법은 유전무죄나 무전유죄도 아니고, 유전유죄나 무전무죄도 아니며, 공평해야 한다고 말씀합니다. 그래야 법이 법다워지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을 공평하신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16) 너는 네 백성 중에 돌아다니며 사람을 비방하지 말며 네 이웃의 피를 흘려 이익을 도모하지 말라 나는 여호와이니라

    돌아다니지 않고서도 다른 사람을 비방하는 것은 바르지 않는 일이고, 돌아다니면서 다른 사람을 비방하는 것은 더 바르지 않은 일입니다.
    가인이 동생 아벨을 죽였을 때, 하나님께서는 가인에게 “네 아우의 핏소리가 땅에서부터 내게 호소한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자신의 이익을 위해 다른 사람들의 피를 흘리게 하면, 하나님께서는 결코 그 사실을 모르지 않으십니다.

    (17) 너는 네 형제를 마음으로 미워하지 말며 네 이웃을 반드시 견책하라 그러면 네가 그에 대하여 죄를 담당하지 아니하리라

    하나님의 구별된 백성은 형제자매를 미워하지 않아야 한다고 하는데, ‘마음으로’ 미워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가인이 동생 아벨을 죽일 때도 ‘몹시 분하여 안색이 변했다’라고 증거합니다. 이미 그 마음에서 극도의 증오심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거룩한 사람은 ‘심(心)보를 바르게 한다’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삶을 바르게 하는 것뿐만 아니라 이웃의 삶도 바르게 인도한다고 하십니다.

    (18) 원수를 갚지 말며 동포를 원망하지 말며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나는 여호와이니라

    하나님의 백성이 원수를 스스로 갚으려고 하는 것이 바르지 않는 것은, 인간의 분노는 100% 온전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로마서에서도 “내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하나님의 진노하심에 맡기라 기록되었으되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고 주께서 말씀하시니라(롬 12:19)”라고 말씀하십니다. 원수를 갚는 것은 사람의 영역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역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바르게 정리해 주실 것을 믿는 사람만 하나님께 맡길 수 있습니다. 그래서 맡기는 것은 믿음입니다. 또한 원수갚음을 하나님께 맡기는 사람이 다른 사람을 원망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자기를 바르게 사랑하는 사람은 이웃도 사랑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백성, 이스라엘 자손에게 ‘너희는 거룩하라’라고 명령하셨습니다.
    그것은 그들이 거룩해야 하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피조물인 우리는 하나님의 속성 중 본받을 수 없는 것이 있습니다.
    전지전능하심, 무소부재하심, 영원하심 등은 우리가 본받을 수 없습니다.
    하지만 사랑하심, 의로우심, 거룩하심 등은 본받을 수 있는 것이기에 우리에게 ‘사랑하라’, ‘의를 행하라’, ‘거룩하라’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자손에게 하신 말씀을 우리에게도 동일하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거룩하라.”
    오늘 하루도 거룩한 삶, 구별된 삶을 살기 위해서 눈을 들어 하나님을 바라보십시다.
    그것이 거짓이 난무한 세상에서 진리의 통로로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백성에게 “너희는 거룩하라”라고 명령하셨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백성은 애굽 사람들이나 가나안 땅 사람들과는 다른 구별된 삶을 살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백성으로 세속적인 가치관을 따라 살지 않고 구별된 삶을 신실하게 살아가게 하여 주옵소서.
    또한 그 구별된 삶이 일상에서 구별된 것임을 잊지 않게 하여 주시옵소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게 하시고, 나의 소유와 수입에는 이웃의 몫도 있음을 잊지 않게 하여 주시옵소서.
    또한 이웃과 함께 살아가야 함도 되새기게 하시고, 모든 사람을 공평하게 대해야 함도 잊지 않게 하여 주시옵소서.
    오늘 하루도 주님을 향해 눈을 듦으로 거룩한 삶, 구별된 삶을 살아가는 은혜의 하루가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화목제 고기를 아끼지 마라



    블레셋이 다시 유다를 침략했다. 헤브론 인근 마을에 살던 조나단은 애국심에 불타 전쟁터로 달려갔다. 전투는 치열했다. 철병거를 앞세워 진격한 블레셋의 공세에 많은 희생자가 발생했다. 패배를 앞둔 절박한 순간, 때 아닌 폭우가 쏟아져 블레셋의 철병거가 무용지물이 되는 기적이 일어났다. 마침내 유다가 승리했다. 조나단은 무사히 전쟁터에서 고향으로 귀환했다. 하나님의 은혜로 전쟁을 극적으로 승리함으로써 그가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던 것이다.

    조나단은 기쁜 마음을 가지고 하나님께 감사의 표시로 각각 번제의 양과 화목제의 소를 준비해서 성전으로 올라갔다. 양은 번제로 하나님께 바치고, 소는 화목제로 하나님께 바친 뒤 마을 사람들과 잔치를 베풀기 위한 제물이었다. 번제는 전체를 태워 하나님께 드리나, 화목제는 내장 부위의 기름 덩어리와 콩팥, 그리고 간엽을 떼 드리면 되었다. 화목제 규정을 따라 소의 몸통 중에 가슴과 오른쪽 뒷다리는 수고한 제사장의 몫으로 드리고 제사장은 다른 제사장들과 함께 그것을 나누어 먹었다. 나머지 몸통의 고기는 모두 조나단이 가져와 마을 사람들을 위해 잔치를 벌인다.

    마을 사람 전체가 화목제의 잔치에 초대되었다. 그날 소를 화목제로 바친 조나단은 그다지 부유하지는 않아 평소 소고기를 먹을 기회가 많지 않았다. 그는 비싼 소고기에 욕심이 발동해 사람들 몰래 왼쪽 뒷다리 둘을 잘라 뒷마당의 선선한 창고에 걸어놓았다. 이로 인해 초대된 사람들의 몫은 크게 줄었다. 평소 여러 사람의 간증이 쏟아지고 고기도 실컷 먹으며 기쁨이 넘쳤던 화목제 잔치와는 사뭇 실망스러웠다.

    그런데 놀랍게도 며칠 후 마을 사람들은 조나단이 갑자기 앓더니 사망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사망의 원인으로 그가 화목제물의 고기를 몰래 숨겨 놓아 규정을 어겼기 때문이라는 이야기가 돌았으며 가족들은 하나님이 제정하신 ‘끊어짐’(제명)의 형벌의 원칙을 따라 가족묘에 그를 묻지 않았다고 알려졌다. 이로써 그는 영원히 공동체로부터 제명되었다.

    레위기 19장에서 왜 화목제 규정이 다시 등장하는가?

    접대자 조나단이 화목제 규정을 모르는바가 아니었다. 감사의 화목제 고기는 당일에 모두 먹어야 하고 식탁에 참여하는 모든 사람은 정결해야 한다. 그러나 그는 고기 욕심에 눈이 멀어 뒷다리 둘을 몰래 감춰놓은 것이다. 만일 이 고기를 당일에 먹지 않고 다음날 먹는다면 율법은 이에 대해 매우 엄중한 ‘끊어짐’(제명)의 형벌을 경고한다(레 7:21). 이틀간 먹을 수 있었던 서원과 자원의 화목제와 달리 감사의 화목제의 유통기한은 하루로 제한되어 있기 때문이다(레 7:15~18). 하나님께서는 만일 사람들이 실컷 먹고도 고기가 남게 되면 정한 날짜가 지난 그 고기는 모두 태워서 없애라 하셨다(레 7:19).

    묘하게도 이 규칙이 레위기 19장에서 다시 등장한다(5~8절). 다시 한번 화목제 고기 유통기한의 준수가 강조되고 있으며 제명의 형벌이 경고되는 것이다. 레위기 19장에 화목제 규정이 다시 등장하는 것은 매우 생뚱맞아 보인다. 왜냐하면 레위기 19장에 나열된 수 많은 법들은 대체로 윤리법들과 약자 보호법, 그리고 사회 정의와 관련된 것들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레위기 18장과 20장의 가족 보호법 사이에 끼인 19장은 대체로 동포 이웃과의 조화로운 공동체적 삶을 지시하는 사회윤리법이라 할 수 있다. 그 이유를 뒤에서 다시 설명하겠지만 결론부터 말하자면, 화목제 고기에 대한 탐욕을 버리고 공동체와 이웃을 위해 아낌없이 베풀라는 강조를 위함이다. 즉, 이 화목제 규정은 공동체의 화합과 일치에 찬물을 끼얹는 탐심과 욕심을 버리라는 명령이다.

    공동체를 세우기 위한 법들: 레위기 19장

    레위기 19장의 법들은 대체로 인권과 관련한 것들이다. 예를 들어 19장에는 다양한 약자 보호법과 더불어 거짓과 불의한 상거래, 그리고 정의의 왜곡을 경고하는 법들이 나타난다. 가난한 사람들과 외국인 거류민(나그네)을 위해 밭과 과수원의 작물 중 일부는 거두지 말고 남겨두어야 한다(9~10절). 이웃을 억압하지도, 착취하지도 말며 품꾼의 삯을 아침까지 주지 않는 일은 없어야 하며(13절), 장애인을 잘 보살피고(14절) 나그네(거류민)를 학대하거나 차별하지 말아야 한다(34절). 또한 사회적 정의를 위해 도둑질 및 거짓말(11절), 상거래 과정의 속임수(36절), 그리고 재판의 왜곡과 무고한 피흘림에 대해 강력히 경고한다(15~16절).

    보다 적극적으로는 원수를 갚지 말고 이웃과 동포를 자신과 같이 사랑할 것이며(17절) 어르신들을 잘 공경할 것을 권면한다(32절). 공동체에 대한 이러한 배려는 자연의 지평으로 확대되어 과실수를 심을 때 탐욕에 가득 차 아직 어린 나무로부터 열매를 훑어내지 말 것을 명령한다(23~25절). 더불어 사람들을 현혹하여 공동체의 신앙적 정체성을 혼란케 하는 사악한 이교적 관행들, 즉 점술과 마법을 금지하고 이방의 가증한 장례 문화나 딸에게 매춘행위를 시키는 것과 같은 음란한 사회적 관행을 금지한다(26~29절). 오히려 백성들은 그런 이방의 종교와 관행들을 거부하고 여호와 예배를 위해 지정된 때(안식일)와 장소(성소)를 잘 지켜야 한다(30절).
    그러나 이러한 레위기 19장의 법들은 체계나 통일성 없이 무작위로 나열된 것처럼 보이므로 학자들은 오랫동안 이 법들의 논리적 연결성과 구조성을 찾는 데 애를 먹었다. 당장에 학자들이 찾아낸 것은 레위기 19장이 십계명을 토대로 작성되었다는 것이다. 실제로 19장에서 안식일 준수와 우상 숭배 금지가 가장 선두에 등장하는 등, 19장은 십계명 중 대부분을 언급하며 그 구체적인 사례를 들어 논의를 확장한다. 이런 점에서 레위기 19장은 십계명의 주석이라 볼 수 있다. 19장을 자세히 살피면, 우리는 이 장에 제1계명부터 제10계명에 이르는 십계명 전체가 흩어져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지난 호에서 우리는 레위기 19장을 둘러싸고 있는 18장과 20장은 가족 보호법으로 볼 수 있음을 밝힌 바 있다. 이것들은 윤리법들이다. 19장도 마찬가지로 사회를 건강하게 유지하기 위한 사회 윤리법들로 구성된다. 물론 엄밀하게 보면 19장이 윤리 규정만으로 구성된 것은 아니다. 의식법으로 볼 수 있는 화목제물의 고기를 먹는 기일 준수의 요구(5~8절), 3년간 과실수 열매의 수확 금지(23~25절) 등 몇 가지 제의법들(ritual laws)이 한데 어우러져 있다. 따라서 많은 학자들은 18~20장 전체를 윤리법의 목록으로 보기를 거부한다.

    그러나 이러한 제의법들 또한 윤리적 목적을 내포하는 것으로 보인다. 예를 들어 앞서 말한 대로 화목제 고기를 즉시 나누지 않고 보관하다 상하게 하는 것은 탐욕의 죄라 할 수 있다. 이어지는 9~10절은 가난한 사람들과 나그네를 위해 추수 때 논밭의 이삭과 포도원에 떨어진 열매를 줍지 말라는 명령인데, 이런 문맥을 고려해 볼 때 화목제 고기에 대한 경고는 분명히 고기를 아낌없이 나누라는 의도일 것이다. 이것이 공동체의 선을 도모하고 공동체가 한 몸, 한 가족으로 세워지게 한다. 한편 3년간의 과실수 수확 금지에는 자연에 대한 배려와 존중의 의도, 나아가 생태학적·윤리적 교훈이 묻어있다. 4년째 과일은 수확해서 성전에 바치고 백성들은 5년째 과일부터 즐길 수 있다. 이것은 자연에 대한 배려이기도 하지만, 공동체의 이익을 위한 것이기도 하다. 만일 어린 과실수를 일찍부터 훑어내면 부실한 과실수가 되어 결국 공동체 전체의 손해를 초래할 것이다. 레위기 18장에서 월경 중인 아내와 동침하지 말라는 명령(19절)도 아내에 대한 인격적 존중이 깃들어 있다고 볼 수 있고 또한 지나친 성적 욕망의 통제와 절제를 위함일 수 있다. 레위기 18~20장 전체의 법의 취지는 이와 같이 윤리적 목적에 경도되어 있는 것이 분명하다.

    물론 분명히 순수하게 의식적인 것으로 보이는 규정들도 나타난다. 백성들은 여호와의 거룩을 훼손하는 일을 삼가야 한다. 거룩한 것은 정결해야하므로 그들은 가축의 이종교배를 금지하고 밭에 두 종류의 씨를 뿌리거나 두 종류의 옷감으로 옷을 만드는 것과 같은 이질적인 것들의 ‘혼합’은 금지된다(19절). 또한 백성들은 머리를 둥글게 깎거나 수염 끝을 잘라서는 안 된다(27절). 정통 유대교 신자들은 오늘날에도 이러한 머리모양을 고수한다. 아마 이런 두발 규정은 이어지는 28절 장례에서의 애곡에 대한 규정과 관련이 있을 것이다. 즉 이스라엘 백성들은 평소에 장례식을 연상케 하는 머리를 해서는 안 된다(욥 1:20; 렘 7:29; 겔 27:31). 또한 죽은 자를 위해 하나님의 창조물인 자기 몸을 해하지 말아야 한다. 자신의 몸을 스스로 베거나 몸에 문신을 새겨서는 안 된다(레 19:28; 참조. 신 14:1). 이것들은 이방의 장례식에서 실천된 제의적 관행들로 추정된다. 그러나 이러한 지침들도 하나님의 질서를 엉망으로 만드는 동성애나 수간을 금지하는 것처럼 본질상 이방과의 구별을 위한 윤리적 지침으로 경도되어 있다고 볼 수 있다. 문신을 새기거나 칼로 베는 등, 하나님의 주신 몸을 학대하는 것도 비윤리적이라 이해할 수 있다.
    한편, 거룩한 삶은 사회 정의 및 이웃 사랑과 깊은 관련이 있다. 거룩은 사랑 안에서 구체적인 실제로 표현되어야 한다. 거룩한 백성은 이웃을 자신과 같이 사랑해야 한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 아버지가 온전한 것처럼 너희도 온전하라고 말씀하시며 원수까지 사랑하는 것이 자녀의 삶이라 하셨다. 온전함은 거룩의 핵심적 개념이다. 거룩한 삶이란 만인을 사랑하는 삶이다. 신약은 그것을 “남에게 대접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마 7:12; 눅 6:31)는 황금률로 규정했다. 거룩한 사람은 자신의 힘으로 사회적 약자를 돌보고, 이웃을 돕는 자가 되어야 한다. 레위기 19장에 가득 찬 사회 정의와 인권을 위한 법에서 확인되듯이 하나님 백성된 고용주는 회사원들의 복지를 돌보고 넉넉한 임금을 지불하여 최저 생계를 보장해 줄 수 있어야 하며(엡 6:9; 골 4:1; 딤 6:2) 또한 노동자는 최선을 다해 고용주와 회사를 위해 일해야 하며(엡 6:5; 골 3:22; 딤 6:1; 딛 2:9) 다른 사람의 일을 마치 자신의 일처럼 돌보아야 한다(빌 2:4). 모든 그리스도인은 이웃을 보살피기 위해 폭압적 불의에 저항할 수 있어야 한다. 사회적 약자와 장애인, 소외된 사람을 돕고 그들과 더불어 사는 길을 모색해야 한다. 이것이 탐욕과 이기심을 극복하는 삶이다.

    자비로운 추수법을 통해 본 약자 보호법

    레위기 19장 9~10절은 자비로운 추수 규정이다. 이 법은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밭모퉁이의 곡식을 추수하지 말라고 권하면서 나아가 바닥에 떨어진 이삭들을 줍지 말고 남겨둘 것을 명령한다. 또한 이 법은 과실수를 일차 수확 후 남은 과일까지 샅샅이 거두는 행위를 하지 말라고 금지한다. 과실수는 따고 남은 것이 있는가 하면, 수확 중에 바닥에 떨어진 것도 있다. 농장주는 가난한 자들을 위해 이것들을 다시 훑어가는 탐욕을 부려선 안된다. 율법은 이삭과 과일을 얼마나 남겨둬야 하는지 명시하고 있지 않다. 율법은 사랑과 자비의 자발적 실천을 강제하지는 않는다. 법은 개개인이 자신의 양심에 따라 능동적으로 실천해야 하는 것이다. 그럼에도 자비심이 충만했던 사람은 관례적 기준보다 몇 배나 많은 이삭을 떨어트려 놓거나 모퉁이에도 많은 곡식을 남겨 놓았을 것이다. 룻기에서 성실한 룻의 모습을 본 보아스는 일꾼들에게 곡식 다발에서 일부러 뽑아낸 곡식을 바닥에 많이 흘려놓으라는 지시를 내린다(룻 2:15~16). 주인은 밭에 이삭을 넉넉히 남겨둘 뿐 아니라 낫질을 하지 않는 모퉁이 구역을 넓게 산정하며 가지에 많은 포도송이를 남겨두는 자비심을 품어야 한다.

    자비로운 추수법에서 한 가지 더 주목해야 할 사실은 이 법이 곡식과 포도원의 포도에만 국한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은 다양한 재산을 갖추고 있었다. 그들은 특히 소, 양, 염소와 같은 가축을 많이 길렀고, 무화과나무나 감람나무와 같은 여러 가지 과실수도 길렀다. 그들은 전 재산에 이 같은 율법을 적용하여 자선과 구제를 위해 가난한 자들을 상대로 나눔을 실천해야 했을 것이다. 이때도 율법은 단지 권장사항일 뿐 개인이 율법을 지키지 않거나 교묘히 악용한다 해도 제재할 수 있는 법적 수단은 마땅치 않았다. 하나님께서 제정하신 법과 제도라 해도 인간이 마음으로 순종하여 자발적으로 따르지 않는다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부르짖으면 내가 반드시 들을 것이다!’라고 약속하신다. 이것은 자비로우신 하나님께서 직접 그들의 보호자가 되신다는 의미다.






    6918. 거룩한(카도쉬. qâdôwsh) קָדוֹשׁ

    1. 거룩한
    2. 욥기 6:10. 그러할지라도 내가 오히려 위로를 받고 그칠 줄 모르는 고통 가운데서도 기뻐하는 것은 내가 거룩하신 이의 말씀을 거역하지 아니하였음이라..
    3. 레위기 21:6. 그들의 하나님께 대하여 거룩하고 그들의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하지 말 것이며 그들은 여호와의 화제 곧 그들의 하나님의 음식을 드리는 자인즉 거룩할 것이라
    발음 / 카도쉬 [ qâdôwsh ]
    어원 / 6942에서 유래
    관련 성경 / 거룩한(출19:6, 삼상2:2, 사4:3). [명] 성민(신7:6, 14:2,21), 성도(신33:3, 시16:3), 성일(느8:9,10,11), 거룩한 자(시78:41, 사5:19, 호11:9), 성소(시46:4), 성전(시65:4), 거룩하신자(사12:6, 30:11, 호11:12).
    [부] 거룩히(레 21:8, 신 23:14)
    구약 성경 / 116회 사용

    * 6942. קָדַשׁ 

    1. 거룩하다
    2. 신성하다.
    3. 자신을 하나님께 드린 사람에게 사용되어
    발음 / 카다쉬 [ qâdâsh ]
    관련 성경 / 거룩하다(출29:21, 사29:23, 학2:12), 빼앗기다(신22:9), 성별하다(느3:1), 준비하다(렘22:7, 미3:5), 예비시키다(렘51:27,28),구별하다(민8:17, 대상26:27), 드리다(대상18:11), 빼앗다(대상18:11), 예비하다(렘12:3), 깨끗하게 하다(삼하11:4).
    [명] 성물(레22:2, 대상26:28), 성회(욜1:14, 2:15), 성호(레22:32), 성소(대하26:18, 겔7:24), 거룩한 자(사29:23)
    구약 성경 / 171회 사용

    하나님 창조질서 왜곡하는 부적절한 성범죄 경계하다

    사회적 안전과 질서 유지하는 공동체의 ‘가족관계’ 보호하는 데 초점 맞추고 있어

     

    레위기 11~15장과 18~20장의 관계: “너희는 거룩하라”

    ▲ 김경열 목사(총신대 강사)

    레위기 11~15장이 의식적 정결법이라면 18~20장은 윤리적 정결법에 속하는데, 이것들을 각각 ‘정결법’과 ‘성결법’으로 칭하기로 하자. 흥미롭게도 레위기 11장 44~45절의 ‘너희는 거룩하라’는 명령은 레위기 20장의 마지막 부분(25~26절)에서도 나타난다. 따라서 우리는 레위기 11~20장 전체가 동일한 목표, 즉 “너희는 거룩하라”는 목표를 지향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레위기 11~15장이 의식적 정결을 통해 거룩을 구현한다면, 레위기 18~20장은 윤리적 정결을 통해 거룩을 구현한다. 이스라엘 백성은 의식적 정결을 유지함으로써 거룩한 백성으로 살아야 한다. 또한 이스라엘 백성은 윤리적 정결의 삶을 삶으로써 거룩한 백성의 자격을 유지해야 한다. 그 사이에 레위기 16~17장이 끼어있다.

    여기서 속죄일은 이스라엘의 국가적 속죄와 회복을 위한 가장 중대한 제의 시스템이다. 만일 백성들이 의식적으로 부정하게 되어 그들의 거룩이 훼손되고 상실된다면 그들은 몸을 정결케 하고 속죄제를 드림으로써 거룩을 회복해야 한다(레 11~15장). 정결법에 지정된 정결 의식을 치르지 않은 자는 ‘제명’이라는 형벌을 받는데(레 15:31) 이 문제는 속죄일까지 이어질 수 있다. 윤리적 삶을 사는 데 실패하여 거룩함을 상실한 인간에게는 사형과 제명이라는 결과가 기다리고 있다(레 18~20장). 그러나 만일 하나님께서 심판을 유보하시면 그들은 즉각 회개와 더불어 속죄의 기회를 얻을 수 있고, 특별히 속죄일은 마지막 회개의 자리가 될 수 있다. 연중에 해결되지 못한 그들의 모든 죄는 최종적 속죄일에 짐승의 피와 아사셀 염소 의식을 통해 사해지고 성전 역시 전면적 정화를 이룸으로써 그들은 마침내 원래의 거룩성을 회복하고 처음의 자리로 돌아간다.

    윤리적 성결을 위한 법

    레위기 18~20장의 구성이 흥미로운 것은 19장을 사이에 두고 18장과 20장이 주로 불법적 성관계들을 금지하는 규정들로 이루어져있다는 점이다. 18장은 구체적 대상들이 명시된 대가족 안에서 금지된 근친상간과 그 외 불법적 성관계들을, 20장은 그런 금지된 성관계에 대한 징벌들을 자세히 규정한다. 그런 불법적 행위는 땅이 토해낼 만큼 대단히 역겹고 문란하며 그에 따른 형벌은 가혹한 죽음이다. 한편, 18장과 20장 사이에 있는 19장은 대부분 십계명을 비롯하여 사회 정의에 초점을 맞춘 다양한 윤리적 조항들로 채워져 있다. 한편, 여기서 금지된 것은 단순히 근친간의 성관계를 의미하는가 아니면 근친간의 결혼 관계인가? 이 표현 자체는 일시적·충동적 성적 행위인 것처럼 보이지만 구약의 율법은 남녀의 혼전 순결을 명령하므로 성관계와 결혼 관계를 구분할 필요가 없다. 즉 근친 간에는 결혼은 물론 어떠한 성관계도 금지된다. 18장과 20장에서 불법적인 것으로 금지된 행위들을 목록으로 만들면 다음과 같다.

    근친상간의 금지

    다음과 같은 근친상간의 관계가 금지된다: 1)어머니; 2)계모; 3)누이; 4)손녀; 5)이복누이; 6)고모; 7)이모; 8)숙모; 9)며느리; 10)형수나 제수; 11)한 여자와 그녀의 딸; 12)한 여자와 그녀의 손녀; 13)아내의 누이(처형이나 처제); 14)장모. 18장에 나열된 근친의 대상 중 흥미롭게도 친딸과 장모가 빠져 있다. 장모는 18장에는 누락되어 있지만 20장에는 나타나고 있으므로 18장에서도 당연히 포함된다고 간주할 수 있다. 그러나 딸은 그렇지 않다. 17절에 딸이 명시되지만 이 경우는 자신과 혈연관계가 아닌 딸을 가리킨다. 아마 딸은 가장 역겨운 사례인 어머니를 명시함으로써 자동으로 그 아래 포함되는 것으로 보인다.

    참고로 이집트 왕가에서는 혈통 보존을 위한 남매간의 결혼이 일상적이었다. 그러나 레위기법은 친누이든 의붓 누이나 배다른 누이든 그녀와의 결혼 혹은 성관계가 금지된다. 핵가족을 넘어 대가족 내에서는 3촌까지 혼인이 금지된다. 그러나 4촌부터는 결혼이 가능했다. 실제로 구약에서는 족내혼의 전통에 따라 4촌간의 결혼이 성행하여 그런 부부가 많이 존재한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이웃 나라들에서는 남매혼 뿐 아니라 근친혼이 성행했다. 특히 이집트와 로마의 왕가에서는 혈통 보존을 위해 근친혼을 장려한 결과 유전병을 지닌 자녀들이 많이 태어났다.

    물론 레위기 18장의 율법이 주어지기 전인 족장 시대에는 금지된 결혼을 묵인하는 장면들이 나타난다. 우선 친 남매가 아닌 배다른 남매간의 결혼이 허용되었다. “그는 정말로 나의 이복누이로서 내 아내가 되었음이니라”(창 20:12)라는 아브라함의 진술에서 이 점을 알 수 있다. 또한 아브라함의 형제 나홀은 조카인 밀가를 아내로 맞았다(창 11:27~29). 야곱의 장자였던 르우벤은 아버지의 첩 빌하와 관계를 맺었으며, 다말은 시아버지 유다를 속여 집안의 혈통을 잇는 행위를 저질렀는데, 레위기 법에서는 아버지의 아내와 며느리와의 성관계 금지를 나란히 배치하여 이를 어길 경우 사형에 처할 것을 명한다(레 20:11~12). 레위기 법은 이러한 모든 행위들을 금지한다. 카미카엘(C. M. Carmichael)에 의하면 레위기 18~20장의 법들은 족장들 사이의 이러한 풍속들을 배경으로 작성되었는데 그런 행위들을 이제는 불법으로 규정하면서 그에 관한 법률적인 금지 규정을 만든다. 레위기는 이러한 관례들을 가나안과 이집트의 풍습으로 규정하고 있다. 따라서 성경의 관점을 따르면 오히려 족장들 역시 이 지역 문화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아브라함이 이복누이와 결혼했던 지역이 우르 땅, 즉 메소포타미아였다는 것은 당시 그러한 결혼이 그 지방의 관행이었음을 시사한다.
     
    다른 유형의 성관계들의 금지

    그 밖의 다른 유형의 금지된 성관계들이 몰렉 희생의 금지와 더불어 추가된다: 1) 월경 중인 아내; 2) 이웃의 아내; 3) 몰렉에 자녀 바치기; 4) 동성애; 5) 수간. 월경 중인 아내와 잠자리를 금하는 데는 부정을 탄 상태라는 제의적 이유도 있겠지만(레 15:24) 아마도 몸 상태가 정상이 아닌 아내에 대한 배려 역시 자리 잡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여기서 금지된 모든 사악한 성관계들을 이집트와 가나안의 관행으로 볼 수는 없다. 예를 들어 어머니나 딸, 혹은 이웃의 아내와의 성관계는 보편적 금기사항이었다. 어떤 사람은 고대 근동 지역에서 수간과 동성애가 자행되었다는 증거가 매우 희박하다고 주장하지만 이에 대한 증거가 다수 존재한다. 예를 들어, 히타이트 법전은 양, 소, 돼지, 개와의 수간은 금했으나, 말과 나귀와의 수간은 금하지 않았다. 그러나 구약은 어떤 형태의 수간이든 여러 곳에서 죽음의 형벌과 더불어 금지하고 있다(출 22:19; 민 35:16~21; 신 27:1). 한편, 가나안의 신화에서는 신들과 동물의 교접이 일상적으로 벌어졌으며 구약은 가나안에 만연했던 동성애 풍습을 고발하고 있다(창 19:4~8; 삿 19:22). 수간 행위를 히브리어로 테벨(tebel)이라 하는데 이것은 ‘문란한 일’로 번역되었으나 의미상으로 볼 때 그보다는 ‘뒤틀림’ 혹은 ‘혼합’에 가깝다. 금지된 모든 성관계 역시 개념상으로는 일종의 테벨이라 볼 수 있다. 즉 수간, 동성애, 그리고 여타의 금지된 성관계들은 모두 하나님의 창조 질서를 엉망(테벨)으로 만드는 짓이다.


    이웃의 아내와의 간음과 수간은 오늘날까지도 통하는 보편적 금기사항이지만, 동성애에 대한 현대 그리스도인의 인식은 크게 변하고 있다. 그러나 동성애는 항구적, 본질적 도덕법으로서 구약뿐 아니라 신약에서도 엄격히 금지된다(롬 1:26~27; 고전 6:9; 딤전 1:10). 동성애는 문화와 시대적 상황에 따라 달리 해석할 여지가 있는 문제가 아니라 간음과 근친상간 및 수간, 음행, 그리고 우상숭배와 더불어 동일한 범주의 항구적인 불법행위다. 여기서 동성애만 별개의 문제로 제외하려는 시도는 대단히 잘못된 의도적인 본문의 곡해다.

    몰렉 숭배와 접신술사 및 박수무당

    몰렉(molek)은 ‘몰록’이라고도 불리는데 아마 ‘밀곰’과 더불어 동일한 신의 명칭으로 보인다. 어떤 사람은 몰렉에게 실제로 자녀를 불살라 바쳤을 리가 없다고 주장하나, 성경의 수많은 증거는 그런 사악한 관행이 실제로 존재했음을 말해준다(신 12:31; 18:10; 왕하 16:3~4; 렘 7:31; 19:5; 32:35; 겔 16:21; 사 57:5~9; 30:33). 중요한 것은 므낫세 치하의 타락상에서 볼 수 있듯이 몰렉 제의와 같은 자녀 희생제가 사악한 종교적 관행들, 즉 사술, 요술, 신접술, 점술을 동반한다는 것이다(대하 33:2~6). 접신술은 고대 중동에서 광범위하게 실행된 종교 행위였다. 영매들과 심령술사들은 귀신들, 특히 망자 의식을 통해 죽은 자의 혼령과의 접촉을 시도했다. 그러나 이 접신술은 영매에게 혼령이 들어와 메시지를 전하는 동양의 접신 방식이 아니라 망자의 혼령을 불러내어 그와 대화를 나누며 메시지를 전달하는 영매술을 의미한다(예, 삼상 28장의 엔돌의 무녀가 사무엘의 혼령을 부르는 장면). 구약에서 점과 마술을 사악한 행위로 취급한다. 그 이유는 인간이 점을 통해 미래를 예측한 뒤 적절한 예방 조치나 마술을 통해 미래의 일을 자기 뜻대로 조종하려 하기 때문이다. 점술을 통해 “길흉을 말하며” 미래를 미리 알아내려는 인간의 시도는 사악했다. 마술과 사술로 하늘의 시간표를 바꾸고 운명의 조작을 시도하는 것과 같았다. 이는 곧 역사를 주관하는 하나님에 대한 중대한 도전이었다.

    그렇다면 20장에 나열된 금지된 성관계의 목록에 몰렉 숭배와 초혼술의 금지 명령이 끼어있는 이유는 무엇인가? 구약의 여러 증거들을 통해 볼 때 몰렉에게 자녀를 희생시키는 것이 가나안의 점술 및 초혼술(망자 의식)과 깊이 결부되어있었기 때문일 것이다(신 18:10; 왕하 17:17; 21:6; 대하 33:6). 이 경우 몰렉은 지하 세계의 신으로 추측된다. 몰렉에게 자녀를 바침으로써 죽은 조상의 혼령을 불러내는 의식이 진행되었다는 추론이다. 세 가지 측면에서 몰렉신을 위한 자녀의 희생은 가족 파괴적 악행이다. 첫째, 거짓 신을 상대로 사랑하는 자녀를 희생시킨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둘째, 이 행위는 가족에게 약속된 언약의 ‘씨’를 바치는 셈이다. 셋째, 이 관행은 죽은 자가 살아있는 가족의 삶을 통제한다는 점에서 사악하다. 이러한 이유들로 인해 이 사악한 관행들의 금지명령이 가까운 가족 간의 성적인 문제를 다룬 법들과 나란히 배열된다고 볼 수 있다.

    한편, 레위기 18장과 20장에 등장한 성적 범죄의 목록은 다음과 같이 세 가지 범주로 정리해볼 수 있다. 이 목록에 포함된 범죄들은 모두 부적절한 성 범죄의 일종으로 간주될 수 있다. 몰렉 신 숭배를 넓은 의미에서 성 범죄의 범주에 넣을 수 있는 이유는 실제로 몰렉 신 숭배를 ‘몰렉을 따라가 매춘을 한다’, 즉 몰렉을 ‘음란히 섬긴다’고 표현하기 때문이다: 1) 악신과의 금지된 혼음; 2) 사람과의 금지된 성관계; 3) 동물과의 금지된 결합. 이런 일들은 이집트 족속과 가나안 족속들 사이에서 행해지던 풍속이었다(레 20:3, 24). 그 일로 그들은 땅에서 징벌을 당하여 멸절당했다. 그런 가증한 행위는 이스라엘 백성과 땅을 모두 ‘더럽힌다.’ 땅은 이스라엘 역시 토해낼 것이고, 이런 불법적인 성관계를 맺은 자는 ‘끊어질 것이다’(레 20:26~28).

    이 모든 것들은 결국 공동체 안에서 ‘가족 관계’를 보호하는 데 초점을 맞추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가족은 사회의 기본 단위임과 동시에 사회적 안전을 위한 초석이다. 남자와 여자에 대한 제사장의 관점의 중심에는 세계와 사회의 질서는 결혼과 대가족에 기반하고 있다는 믿음이 존재했다. 즉 각 가족의 안정성을 기반으로 사회가 유지될 수 있는 것이다. 바로 그런 이유에서 레위기 19장의 공동체의 유대를 위한 다양한 사회 윤리법들이 가족 보호법인 레위기 18장과 20장으로 둘러싸여 있는 것으로 보인다.

    __________________ 레위기 18장 / 규례와 법도를 지키라(5절)  

    03-29-2023(수) 사순절 제31일

    너희는 내 규례와 법도를 지키라 사람이 이를 행하면 그로 말미암아 살리라 나는 여호와이니라.
    Keep my decrees and laws, for the man who obeys them will live by them. I am the LORD.

    규례(2706)  חֹק 

    1. 제한된 것,  2. 과업,  3. 경계
    발음 / 호크 [ chôq ]
    어원/ 2710에서 유래
    관련 성경 / 녹(창47:22), 법(창47:26), 규례(출12:24,레6:22), 수효(출5:14), 법도(출15:25, 왕상3:14), 율례(출18:16, 민30:16, 수24:25), 소득(레6:18, 레10:13), 몫의 음식(민18:8), 명령(레10:15, 잠8:29, 습2:2), 경계(욥26:10), 한계(욥38:10, 잠8:29, 렘5:22), 명령(시2:7, 148:6), 일(잠31:15), 한량(사5:14), 일용할 양식(겔16:27), 지경(미7:11). [동] 작정하다(욥23:14). [형] 정하다(욥23:12), 필요하다(잠30:8)
    구약 성경 / 129회 사용

    * 2710. חָקַק  
    1. 자르다,  2. 조각하다,  3. 윤곽을 그리다
    발음 / 하카크 [ châqaq ]
    관련 성경 / 새기다(사49:16), 그리다(겔4:1, 23:14), 있다(잠8:27), 정하다(잠8:29), 쓰다(사30:8),만들다(사10 : 1), 쪼아내다(사22:16), 세우다(잠8:15), 씌어지다(욥19:23). [명] 통치자(창49:10), 방백(삿5:9), 규(민21:18, 시60:7,108:8), 법(신33:21, 잠31:5), 다스리는 자(삿5:14), 율법(사33:22)
    구약 성경 / 19회 사용



    법도(4941) מִשְׁפָּט 

    1. 판단,  2. 레위기 19:15, 3. 욥기 9:32
    발음 / 미쉬파트 [ mishpâṭ ]
    어원 / 8199에서 유래
    관련 성경  정의(창18:19), 법(렘30:11), 공의(신16:18,시25:9), 율례(왕상9:4), 양식(출26:30, 왕상6:38), 판결(출28:15, 민27:11, 삼상8:3), 규례(레5:10, 민15:16, 삼상30:25), 법도(레18:4, 신4:1), 재판(레19:35, 신1:17), 법(레24:22, 왕하17:26,27), 사연(민27:5), 판결법(민27:21), 몫(신18:3), 권리(신21:17), 송사(신24:17, 왕상3:11), 방식(수6:15), 관습(삼상2:13), 계명(왕상2:3), 직무(왕상4:28), 일(왕상8:45,59), 모양(왕하1:7), 풍속(왕하17:33,34,40), 반열(대상6:32), 판단(대상16:12), 사정(욥13:18, 사40:27), 응답(욥19:7), 정당함(욥27:2), 판단력(시72:1), 뜻(습3:8), 작정(잠29: 26), 권리(사10:2, 렘32:7), 재판석(사28:6), 보응(사49:4), 심문(사53:8), 형벌(렘49:12, 습3:15), 화(렘51:9), 죄(겔7:23), 죄악(겔7: 27), 의로움(렘12:1). [동] 합당하다(신19:6), 공의롭다(신32:4), 재판받다(수20:6, 삿4:5), 심문하다(왕하25:6), 재판하다(욥14:3), 옳다(욥34:4), 정직하다(욥34:6), 공판하다(시35:23), 심판하다(시119:84, 사3:14), 정직하다(잠12:5), 작정하다(잠16:33), 적당하다(사28:26), 바르게 하다(사32:7), 송사하다(사54:17)
    구약 성경 / 424회 사용

    * 8199. שָׁפַט   
    1. 심판하다
    2. 분사형 שׁוֹפֵט: 재판장
    3. 저주하다
    발음 / 솨파트 [ shâphat ]
    관련 성경 / 판단하다(창16:5, 출18:16, 시98:9), 재판하다(출18:26, 왕상3:9, 잠31:9), 판결하다(민35:24, 신1:16, 왕상3:28), 다스리다(삼상8:20, 왕하23:22), 심판하다(왕상8:32, 겔7:3,시10:18, 사11:4), 신원하다(잠31:9, 애3:59),징벌하다(대하20:12, 22:8), 다스리다(왕하23:22, 대하26:21), 변론하다(사43:26), 다투다(잠29:9). [명] 재판장(신1:16, 수8:33, 욥12:17), 사사(삿16:31, 삼상4:18, 대상17:10),방백(삼상6:16), 법관(창19:9), 재판관(삼하15:4, 대하19:6, 욥9:24, 시141:6), 심판자(욥23:7), 재판자(미5 : 1), 재판(시37:33), 심판(시9:19, 사66:16)
    구약 성경 / 142회 사용

    지키라(8104) שָׁמַר 

    1. 지키다, 2. 동산을 지키다,  3. 창세기 30:31 지키리이다
    발음 / 솨마르  [ shâmar ]
    관련 성경 / 지키다(창18:19, 신4:2, 렘51:12), 두다(창37:11, 삼하11:16), 시무하다(민3:7), 행하다(신5:32, 느12:45), 보호하다(출23:20, 삼상26:15), 인정하다(욥10:14), 바라다(욥24:15),삼가다(신24:8, 시17:4), 기다리다(잠8:34),따르다(호4:10), 살피다(욥13:27, 시37:37), 보존하다(시86:2, 잠22:18), 단속하다(출21:29), 준행하다(레26:3), 실행하다(신23:23), 감시하다(욥33:11), 보전하다(잠14:3), 유의하다(사42:20), 맡다(민3:28), 주관하다(왕하22:14, 에2:3), 엿보다(시71:10), 살펴보다(전11:4), 순찰하다(아3:3), 지키다(겔40:45,슥11:11), 조심하다(수23:11), 방비하다(왕하6:10), 보호받다(시37:28), 충만하다(말2:15),은밀하다(삼상19:2). [명] 문지기(왕하25:18, 느11:19), 감독(느2:8), 파수꾼(사62:6)
    구약 성경 / 411회 사용


    레위기 18장은 그리스도인의 성생활에 대한 교훈을 강조하는 말씀입니다.
    거룩한 성도가 되기 위하여 성생활을 하지 않아야 한다는 매우 잘못된 생각을 갖는 것은 성경적인 사고가 아닙니다.
    성경은 성생활을 금하는 것이 아니라 잘못된 성생활 즉 이교 문화권에서 성행했던 성생활과 문화를 철저하게 금하고 있습니다(3절).

    "너희는 너희가 거주하던 애굽 땅의 풍속을 따르지 말며 내가 너희를 인도할 가나안 땅의 풍속과 규례도 행하지 말고."

    그러므로 "규례와 법도를 지키라(Keep my decrees and laws)"고 하셨습니다(4-5절)

    "너희는 내 법도를 따르며 내 규례를 지켜 그대로 행하라 나는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이니라.
    너희는 내 규례와 법도를 지키라 사람이 이를 행하면 그로 말미암아 살리라 나는 여호와이니라."

    규례(호크)는 "제한된 것"을 의미합니다.
    법도(미쉬파트)는 "판단"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규례와 법도를 지키라는 것은 성생활의 대상은 제한되었다는 것을 판단하여야 하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인간을 정의할 때 "섹스하는 인간(호모 섹수스, homo sexus)" 이라고 합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인간을 지으셨을 때 남자와 여자로 창조하셨고 땅을 점령하고 번성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남자와 여자의 성생활은 더럽고 추한 것이 아닙니다.

    레위기 18장에서는 성 범죄에 관해 아주 단호하게 금하며 애굽과 가나안의 풍습을 좇지 말라고 합니다.
    당시 근동 사회에서 가장 빈번하게 발생하는 범죄가 성 범죄였습니다.
    근친 상간과 간통 및 강간은 다툼과 전쟁을 일으키는 원인 중 하나였다.
    따라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성 범죄를 강력히 금하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첫째는 성적으로 순결함으로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이방인들과 구별될 것을 요구합니다.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드러내기 위한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둘째는 성 범죄가 가져올 공동체간의 갈등과 분열을 미연에 방지하기 위한 것입니다.
    성 범죄로 인해 일어나는 갈등은 당사자간에 다툼과 미움을 불러일으키고 결국 공동체는 분열되어 하나로 합쳐질 수 없게 되기 때문입니다. 

    모든 사람을 사랑해야 한다고 주장하며 동성애자들의 잘못된 방법도 인정해야 한다는 것은 비성경적인 주장입니다.
    사람은 사랑하되 잘못된 방법은 바르게 고칠 수 있는 길을 가르쳐야 합니다.
    쾌락을 위한 삶이 아니라 주 안에서 함께 즐거워할 수 있는 생명의 길을  찾아가야 하겠습니다.


    본문에서 가르치는 교훈을 소개합니다.

    6-18절. 근친상간에 관한 죄
    가정을 철저하게 지켜야 할 하나님의 명령을 지키기 위한 것
    현대 가정의 붕괴는 막장 드라마와 같은 현상이 사람들을 자극하는 것이라고 하겠다.
    현대 과학은 근친 결혼은 기형아 출산율이 높아지고 있다고 알려주고 있다.
    고대 사회는 대가족 사회에서 자주 발생할 수 있는 환경이었다.

    19절. 일방적인 성행위에 대한 경고
    너는 여인이 월경으로 불결한 동안에 그에게 가까이 하여 그의 하체를 범하지 말지니라.

    20절. 간음에 대한 경고
    너는 네 이웃의 아내와 동침하여 설정하므로 그 여자와 함께 자기를 더럽히지 말지니라.

    21절. 자녀 학대에 대한 경고
    너는 결단코 자녀를 몰렉에게 주어 불로 통과하게 함으로 네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하지 말라 나는 여호와이니라.

    22절. 동성애에 대한 경고
    너는 여자와 동침함 같이 남자와 동침하지 말라 이는 가증한 일이니라.
    자유주의 신학을 주장하는 사람은 동성애를 하나님이 허락하신 사랑이라고 강조하고 가르친다.

    로마서 1:26-27
    이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들을 부끄러운 욕심에 내버려 두셨으니 곧 그들의 여자들도 순리대로 쓸 것을 바꾸어 역리로 쓰며.
    그와 같이 남자들도 순리대로 여자 쓰기를 버리고 서로 향하여 음욕이 불 일듯 하매 남자가 남자와 더불어 부끄러운 일을 행하여 그들의 그릇됨에 상당한 보응을 그들 자신이 받았느니라.

    고린도전서 6:9
    간음, 탐색, 남색.....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하지 못하다
    불의한 자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줄을 알지 못하느냐 미혹을 받지 말라 음행하는 자나 우상 숭배하는 자나 간음하는 자나 탐색하는 자나 남색하는 자나.
    Do you not know that the wicked will not inherit the kingdom of God? Do not be deceived: Neither the sexually immoral nor idolaters nor adulterers nor male prostitutes nor homosexual offenders.

    23절. 수간에 대한 경고
    너는 짐승과 교합하여 자기를 더럽히지 말며 여자는 짐승 앞에 서서 그것과 교접하지 말라 이는 문란한 일이니라.



    1-5. 애굽이나 가나안의 악습을 따르지 말라는 말씀.

    하나님께서는 오랜 애굽 생활로 인해 그 곳의 풍속에 익숙해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애굽의 풍속을 본받지 말라고 명하십니다. 

    또한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들어갈 가나안은 우상 숭배와 음란한 성적 행위가 극에 달해 있었으므로 쉽게 죄악에 물들 가능성이 있어 그 땅에 들어가기 전부터 가나안의 풍속과 규례를 좇지 말라고 명하십니다(1-3). 

    그러면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당신의 법도와 규례를 지킬 경우에 그로 인하여 살게될 것을 약속하셨습니다(4-5). 

    하나님께서는 오늘 날 성도들에게도 세상을 본받지 말라고 요구하십니다.

    6-20. 근친간의 음란에 대한 경계

    하나님은 가장 먼저 가족간의 성행위를 금하셨습니다. 어미와의 성행위와 계모와의 성행위, 남매간의 성행위, 형수나 제수와의 성행위를 금지 시켰습니다(6-11). 

    하나님께서는 친척간의 성행위를 금하셨습니다. 고모와 백모, 그리고 숙모에 대한 간음은 아버지와 어머니를 범하는 것과 동일한 패륜으로 간주되었습니다. 자부와 손녀, 그리고 외손녀와의 성행위는 상위 위계자로서 파렴치한 행위이며, 혈족간의 위계 질서를 스스로 파괴하고 인격적 권위와 윤리적 황폐를 초래하는 만행입니다(12-18). 
     
    월경 중인 여자와 성교를 급하신 하나님께서는 타인의 아내와 통간하여 그로 자기를 더럽히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타인의 아내와 통간하는 행위는 주님께서 명하신 혼인의 순결을 더럽히는 일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권위 및 질서에 대한 명백한 도전이므로 철저히 금해야 합니다(19-20).

    근친 성교와 결혼이 성행했던 고대 사회에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의 영적, 육적 순결의 필요성을 가르치셨습니다.

    21-23. 몰렉 숭배, 기타 가증히 여길 죄

    하나님은 자녀를 몰렉에게 주어 불로 통과케 말도록 하셨습니다.
    몰렉은 암몬 민족의 국가 신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 백성이 암몬 신에게 자신의 자녀를 바치는 것은 이스라엘의 구속주요 왕이신 여호와께 대한 불충이었습니다(21).

    하나님께서는 동성 또는 짐승과의 교합을 금하셨습니다.
    동성 연애는 하나님의 본래적인 창조 질서에 정면으로 도전하는 것입니다.
    또한 인간이 짐승과 교합하는 것은 인간으로서의 품위와 존엄성을 스스로 유린하는 반인간적인 죄악입니다(22-23).

    24-30. 이러한 일로 말미암아 몸을 더럽히는 자는, 가나안 거민처럼 멸절되리라는 경고

    하나님께서는 가나안 땅의 가증한 풍속을 멀리할 것을 강조하셨습니다.
    그들의 행위와 풍습은 하나님께서 미워하시는 가증한 일로 그것을 행하면 "백성 중에서 끊쳐지리라"고 경고하셨습니다(24-29). 

    하나님의 명령에 언제나 철저하게 순종하는 것이 거대한 죄악의 물결에서 가장 효과적으로 자신을 보호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내 명령을 지키고 너희 있기 전에 행하던 가증한 풍속을 하나라도 좇음으로 스스로 더럽히지 말라"는 말씀에 귀 기울여야 합니다(30절).

    레위기 18장에서는 성 범죄에 관해 아주 단호하게 금하며 애굽과 가나안의 풍습을 좇지 말라고 합니다.
    당시 근동 사회에서 가장 빈번하게 발생하는 범죄가 성 범죄였습니다.
    근친 상간과 간통 및 강간은 다툼과 전쟁을 일으키는 원인 중 하나였다.
    따라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성 범죄를 강력히 금하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첫째는 성적으로 순결함으로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이방인들과 구별될 것을 요구합니다.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드러내기 위한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둘째는 성 범죄가 가져올 공동체간의 갈등과 분열을 미연에 방지하기 위한 것입니다.
    성 범죄로 인해 일어나는 갈등은 당사자간에 다툼과 미움을 불러일으키고 결국 공동체는 분열되어 하나로 합쳐질 수 없게 되기 때문입니다.

    성경에서 성 범죄는 다른 죄보다 더욱 엄하게 다루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성 범죄는 인간 속에 거하는 하나님의 형상에 대한 모독이며 파괴이기 때문입니다.
    존엄하게 지어진 인간을 쾌락의 대상으로 삼는 것은 인간을 짐승과 같이 취급 하는 행위가 됩니다.
    그런데 오늘날 인간의 성을 상품과 같이 팔고 사는 세태는 성적 타락으로 인해 심판 받은 소돔과 고모라보다 더욱 심각한 수준으로 드러나고 있습니다.
    이런 시대에서 성도들은 성적 타락의 유혹에 빠지지 않도록 자신을 지켜야 합니다.
    순간의 쾌락 뒤에 임할 하나님의 준엄한 심판을 기억하며 결코 자신과 상대방을 짐승과 같은 존재로 만들지 않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거룩(聖) Holy

    - 카도쉬, 코데쉬

    이사야 6:3
    서로 불러 이르되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만군의 여호와여 그의 영광이 온 에 충만하도다 하더라.

    제사법은 관계의 회복
    정결법은 생명의 회복
    성결법은 거룩의 회복

    육체의 생명은 피에 있다.
    피를 함부로 쏟거나 먹거나 할 수 없다.

    레위기의 주제 - 하나님은 생명이시다! 하나님은 거룩이시다!
    (하나님은 빛이시다!)

    인간은 왜 사랑해 후손을 낳고 죽는 것일까?

    생물이라면 본능적으로 당연히 하는 일이 아니냐고 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사랑과 죽음은 섹스를 하는 생물에게만 나타나는 숙명적인 현상이다.
    섹스의 즐거움이 있는 대신에 죽음의 고통이 있는 게 바로 인간이다.

    무성생식을 하는 아메바 같은 하등동물에는 죽음도 사랑도 없다.
    예를 들어 아메바는 환경만 적당히 주어지면 자신의 몸을 둘로 갈라 또 다른 자신을 만들어 낸다.
    이때 만들어진 두 개체는 같은 유전 정보를 갖는 복제품이다.
    물론 아메바도 언젠가는 죽는다.
    하지만 자신의 몸에서 갈라져 나간 복제품이 대를 이어 수억 년 동안 계속 복제품을 남기게 된다.

    인간은 왜 이런 편한 방법을 놔두고 섹스와 죽음을 택하게 되었을까?
    유성생식은 무성생식보다 다양한 자손을 만들 수 있어 환경 변화에 적응하기 쉽다는 게 지난 수십 년 동안 유력한 학설이었다.
    그러나 최근에는 기생충, 박테리아, 바이러스 같은 기생생물의 침입에 대한 방어 수단이라는 학설이 주목을 받고 있다.

    정자와 난자는 우리의 몸이 만들어 낸 가장 신선한 세포이다.
    비록 몸은 바이러스나 기생충에 감염됐다 하더라도 정자와 난자는 감염되는 법이 없다.
    그래서 새로 태어난 아기는 기생충에서 자유로운 것이다.
    유전자의 입장에서 보면 낡고 병든 ‘생존 기계’에 목을 매느니 차라리 낡은 기계는 버리고 새로운 기계를 만들어 쓰는 게 더 유리한 것이다.

    인류의 역사는 바이러스 같은 기생충과의 전쟁의 역사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바이러스는 지금도 인류를 위협하는 최대의 적이다.
    1918년의 스페인 독감은 1년 동안 유럽에서 2천 100만 명의 목숨을 앗아갔다.
    무서운 에이즈로 일부 아프리카 국가의 평균 수명은 거의 절반으로 뚝 떨어진 상태다.

    우리의 몸에는 지난 수십억 년 동안 기생충과 전쟁을 벌여 온 상처와 흔적이 그대로 남아 있다.
    조상이 기생충과 맞서 싸우면서 습득해 유전자를 통해 물려준 면역 체계가 그것이다.
    천연두에 대한 면역 능력이 없었던 아메리카 인디언들은 컬럼버스의 미 대륙 발견 이후 유럽인들이 퍼뜨린 천연두에 맥없이 쓰러져 몰살당하다시피 했다.

    때로는 기생생물이 우리 몸 속에 들어와 우리 몸의 부속품이 되기도 한다.
    대표적인 것이 인체 세포의 에너지 생산 기관인 미토콘드리아이다.
    세포 내의 발전소로 불리는 미토콘드리아는 수십억 년 전 인간이 하찮은 하등동물이었을 때 우리 몸에 기생해 살림을 차렸다.
    세포 내 기관 가운데 유일하게 미토콘드리아만이 자신의 유전 정보를 지닌 핵을 갖고 있다는 것이 기생의 증거다.
    다행히 미토콘드리아가 엄청난 에너지를 만들기 때문에 우리는 걷고 뛸 수 있다.

    인간 게놈 프로젝트를 통해서도 인간의 염색체에는 박테리아 유전자와 비슷한 유전자가 200개나 존재한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이 유전자들은 인간이 아직 하등한 무척추동물이었을 때 박테리아 감염 과정에서 우리 몸에 들어와 살림을 차린 것이다.
    우리의 몸은 박테리아와 하등동물의 유전자를 짜깁기해서 만든 셈이다.

    때로는 바이러스가 여러 숙주를 옮겨 다니면서 다른 생물의 유전자를 사람한테 옮기기도 한다.
    또한 바이러스는 우리 몸에 들어와서 유전자를 망가뜨리기도 하지만 잠자고 있는 유전자의 스위치를 켜는 일도 한다.
    인간은 바이러스에 맞서 면역 체계를 만들어 전쟁을 벌여 왔지만 한편으로는 바이러스가 돌연변이와 진화의 원동력이 된 것이다.

    어렸을 적에 똥구멍을 가렵게 했던 기생충도 우리 몸에 꼭 해로운 것만은 아니다.
    긁적거리면 어머니는 요충약을 먹였다.
    요충은 항문을 가렵게 하지만 그다지 위험한 기생충은 아니다.
    일부 의사는 우리 몸이 이 기생충과의 싸움을 통해 조금씩 전투력을 향상시키기 때문에 유아기 때는 오히려 우리 면역 체계의 훌륭한 스파링 파트너가 된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이처럼 기생생물은 인간을 몰살시키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인간을 진화시켰고 성을 발명하게 했을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남자가 먼저 만들어졌을까 아니면 여자가 먼저 만들어졌을까?
    어떻게 보면 닭과 달걀 같은 문제로 보이지만 여자가 먼저 만들어졌다고 보는 것이 옳다.
    성경에는 아담의 갈비뼈를 빼서 이브를 만들었다고 하지만 과학적으로 보면 이브의 갈비뼈를 빼서 아담을 만들었다고 보는 편이 맞다.

    태아는 자궁에서 임신 8주가 되기까지 성기에 차이가 없다.
    임신 8주가 지나면서 Y염색체에 존재하는 TDF라는 고환 결정 유전자의 스위치가 켜지고 남성 호르몬인 테스토스테론이 만들어져야 태아는 남성의 특징을 갖게 된다.
    하지만 여아의 경우는 Y염색체가 없기 때문에 원래 인체의 설계도가 계획한 대로 태아가 만들어진다.
    사람이 만들어지는 과정을 기차에 비유한다면 여자는 원래의 궤도를 따라 그대로 달리다 보면 만들어지는 것이고 남자는 궤도를 수정해 만들어지는 것이다.
    따라서 사람의 기본형은 여성이고 남성은 옵션형이다.

    성’(섹스)은 인간의 기본적 욕구이다.

     

    진화론에서는 섹스의 본질은 생존에 있으며, 종족의 유지가 그 목적이라고 한다. 분명한 것은 성욕은 생존과 함께 인간의 2대 욕구로써 인류의 문명을 발전시킨 동력이 되어 왔다. 오늘날에는 법적으로 성에 관한 선택권을 부여하는‘성적 자기결정권’을 프라이버시권리로 인정하게 되었으니 성의 천국이 되었다. 현대인은 성을 종교로 믿는 경향이 있으며, 티머시 켈러는 이를 ‘거짓 신’이라고 부른다. 성생활에도 왕도는 없으므로 그 방법을 터득하고 알맞게 개발해야 한다. 오늘날 결혼이라는 ‘제도’와 자연으로서의 ‘사랑’: 그 계곡에서 많은 사람들이 방황하고 있다.


    섹스는 인간의 ‘기본적 욕구’이다.

    성욕은 인간의 기초적인 ‘자연적 욕구’로써 죽음과 함께 가장 강력한 욕구이다.
    그리스 철학자 에피쿠로스는 성욕을 먹고 입는 욕구, 부와 명예의 욕구와 함께 인간의 3대 욕구로 들고 있다.

    김정운 교수는 행복을 구체화할 수 없다면 가짜라고 비판하면서 ‘자는 것’ : 잠자리가 좋아야 행복해진다고 한다.
    인간은 동물적 존재로써 섹스를 한다.
    기본적으로는 종족 보존을 위한 본능으로 신이 인간에게 내려준 선물이다.
    그런데 인간만이 쾌락을 추구하기 위해 언제든 섹스를 할 수 있다고 한다.

    쇼펜하우어는 남녀 간의 사랑이란 아무리 별나라의 신비함을 간직하고 있더라도 그 본질은 성욕을 충족시키는데 있다고 했다.
    1960년대 이후 우리나라에도 성 혁명의 바람이 불어 닥쳐 혼전 섹스가 증가하고 성윤리가 무너지기 시작했다.

    성은 본능이 아니라 ‘충동’이라고 프로이트는 말했다.
    그 이유는 동물은 종족 보존을 위해 본능적으로 섹스를 하지만, 인간은 쾌락을 위해 충동적으로 섹스를 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오늘날에는 성을 (성적) 쾌감을 느끼기 위한 유희의 수단으로 여기는 경향이 있다.
    생식을 위한 성행위는 1%에 불과하고, 99%는 쾌락을 위해 한다는 통계가 있다.

    그렇지만 성은 남녀 사이에 신비함이 숨어 있어 성은 신비함을 가지고 있으며, 섹스는 성교 이상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
    진정한 사랑은 육체적 사랑에 그치지 않고, 섹스가 정신과 육체가 합일되는 교량역할을 하는 데 그 가치가 있는 것이다.
    육체와 정신이 하나가 되는 상태가 황홀감을 주는 최고의 행복이다.
    그러므로 성의 올바른 기능을 통해 성적 욕구를 충족시키면서 건전한 사랑을 키워가는 것이 지속적인 행복을 누리는 길이다.

    성은 여러 가지 ‘순기능’을 한다.

    다른 동물들은 번식을 위해서 일정한 시기에만 섹스를 하는데, 인간은 시도 때도 없이 섹스를 즐긴다.
    하나님의 섭리를 배반한 것인가, 아니면 쾌락을 누리도록 진화한 것인가?
    섹스를 하면 옥시토신이 대량으로 혈류에 유입되어 오르가즘을 느끼게 되는데, 이로 인해 심신에 기쁨과 건강을 가져다준다.
    이는 부부관계를 돈독하게 할 뿐 아니라 사랑이라는 감정 이상의 상태에 도달한다.

    진화심리학자 데이비드 버스는 사회조사를 한 후 인간이 섹스 하는 이유가 자그만 치 237가지나 된다고 했다.
    가장 중요한 이유는 육체적 쾌락, 황홀감, 섹스의 재미, 발정상태, 애정표현 등을 들고 있다.
    이러한 이유들은 애정표현의 수단이란 것을 제외하면 결국 쾌락을 추구하는 것들이다.
    그러나 그 느낌은 순간적인 것으로 다시 평상으로 돌아간다.
    이러한 느낌을 계속 유지하려고 하면 섹스 중독이 되고, 과한 섹스는 건강을 해칠 뿐 아니라 반사회적 행위가 될 수 있다.
    그러므로 그 기능을 최대한 프라이버시로서 누리되, 사회적 문제가 되지 않도록 주의를 기우려야 한다.
    가정 내에서 부부 간에 이루어지는 것은 건전한 섹스이지만, 가정 밖에서 불법적으로 이루어지는 섹스는 바람직하지 않다.

    한 사회조사에서‘성생활이 삶과 인간관계에 얼마나 영향을 미친다고 봅니까?’라는 질문에 대하여 대다수의 사람들이 성생활이 행복지수에서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고 보았다.
    그러므로 건전한 성생활을 통해 행복지수를 높이는 것이 행복으로 가는 중요한 방법이다.

    ‘성적 자기결정권’이 기본적 인권으로 인정되다.

    이제 성은 더 이상 단순한 방사(房事)가 아니라 자유의사에 따라 성을 누릴 수 있는 개방된 세상이 되었다.
    오늘날에는 법적으로 성에 관한 선택권을 부여하는‘성적 자기결정권’을 프라이버시 권리로 인정하게 되었으니 성의 천국이 되었다.

    성인 만남 사이트 애슬리 매디슨에는 Life is short. Have an affairs.(인생이란 짧다. 바람을 피워라.)라는 광고가 실려서 세상의 이목을 끌기도 했다.

    칸트는 혼외정사나 매춘이 상대방을 목적 자체로 존중하지 않고 대상화하기 때문에 정당화될 수 없다고 한다.
    이는 성이 이성 사이에 사랑을 매개로 이루어져야 할 신성한 것이어야 한다는 말이다.
    이제 섹스는 사랑을 전제로 한다거나 섹스를 하면 책임을 저야 한다는 것은 윤리적 요구일 뿐 법적으로 책임을 묻기 어렵게 되었다. 우리나라 헌법재판소는 형법상 간통죄를 위헌으로 결정함으로써 간통죄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이 결정이 나왔을 때 많은 남성들이 갈채를 보냈다고 한다. 다만 결혼을 한 다음에는 부부는 순결의무를 다하기 위해 배우자 이외의 사람과 간통을 한 경우에는 민법이 손해배상을 인정하고 있을 뿐이다. ‘하루 밤만의 자유’라는 소설책을 읽어보니 ‘오직 하루 밤의 자유를!’이 그 주제다. “당신의 몸은 나의 일기장이다. 열어라. 읽어라. 그것이 진정한 세계사다.”라고 끝을 맺는다. 그 본체는 성적 자유가 아니라 성적 유희에 지나지 않는다. 성적 자기결정권은 법과 도덕이 허용하는 범위 내에서 인정되며, 불륜은 인정되지 않는다.

    성이 ‘거짓 신’의 위치에 오르다.

    섹스는 인간의 기본적 욕구로서 자연현상의 일부이지만, 일부일처제라는 결혼제도에 의해 합법적으로 인정되는 범위 안에서만 인정되고, 혼외정사는 불륜이고 불법이다.
    그런데 행복해지려면 억압된 성을 해방시켜야 한다는 성 혁명이 제기된 후 섹스는 행복의 중요한 요소로 인식되면서 일부 사람들은 성적 쾌락을 추구하기 위해 그 대상을 찾아다니고 있으며, 성산업이 이를 부채질하고 있다.

    주세페 토마시 디 람페두사의 소설 ‘레오퍼드’에서 주인공인 공작은 사랑을 “1년간 타오르는 불과 그 후 30년간의 재”라고 정의하고 있다. 남아있는 30년의 지루함을 풀거나 성적 욕망을 채우기 위해 새 파트너를 찾아 나선다.
    그래서 간통이 행하여지고, 심지어는 성매매를 하게 된다.
    나아가 불꽃이 꺼지면 새 파트너를 만나기 위해 이혼까지 불사한다.
    다시 인간사회는 ‘소돔과 고모라의 시대’로 돌아가고 있는가?
    현대사회는 탐욕의 문화에 젖어 있고, 성을 우상으로 숭배하는 경향이 있다.
    현대인들은 성을 종교로 믿는 경향이 있으며, 티머시 켈러는 이를 ‘거짓 신’이라고 부른다.
    인공행복을 통한 섹스는 그 신성성을 잃게 되고,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파탄을 맞게 되어 끝내 불행을 초래하게 된다. 성에 대한 욕망으로부터 벗어나야 비로소 자유함을 느낄 수 있고, 내면의 평화가 깃들게 되어 참된 행복을 누릴 수 있다. 성에도 과유불급의 원칙이 적용된다. 성도덕이 바로 서고, 성행위를 절제함으로써 건강한 사회를 만들어가야 진정한 행복을 누릴 수 있게 된다.

    ‘쿨리지 효과’는 인간에게도 적용된다.

    결혼을 하면 남편은 옛날 애인이 아니고 아저씨로 변한다고 한다.
    열정적인 사랑은 식어가고, 여성들은 사랑을 목매어하면서 살아가야 한다.
    대화는 안 통하고 섹스는 줄어들고, 집안은 절간처럼 변해간다.

    챈들러의 표현에 따르면, “첫 키스는 마법이고, 두 번째 키스는 친밀함이지만, 세 번째 키스는 일상”이라고 한다.
    미국 전 대통령 쿨리지는 영부인과 함께 양계장을 방문할 기회가 있었다.
    영부인은 농부에게 수탉은 어떻게 그 많은 수정란을 만들어내는지 묻자 매일 수십 번씩 수정을 한다고 하자 그 사실을 대통령에게 전해 달라고 했다.
    이 이야기를 들은 대통령은 매번 같은 암탉을 상대하느냐고 물으니 매번 다른 암탉이라고 농부가 대답하니 미소를 지으면서 이 사실을 영부인에게 말해달라고 했다.
    이처럼 ‘참신함’이 성적 욕망과 능력에 영향을 준다는 이론에 대통령의 이름을 따서 ‘쿨리지 효과’라는 이름이 붙게 되었다.

    그래서 성적 욕구라는 자연현상과 일부일처제라는 제도 사이에 갈등이 일어난다.

    가메야마 사나에는 불륜을 긍정하지도 부정하지도 않고 “현재 이루어지고 있는 사실”일 뿐이라고 하면서 불륜은 사적 행위로 누구도 손가락질 할 자격이 없다고 했다.

    부부 관계 사이에도 아무리 서로 사랑을 한다고 하더라도 계속 새로운 변화와 자극을 주지 않으면 쿨리지 효과가 적용된다는 사실은 엄연한 현실이므로 이러한 현상을 극복하기 위해서 항상 노력을 해야 행복한 결혼생활을 지속할 수 있다.

    성생활에 ‘왕도’는 없다.

    부부 사이에 가장 행복감을 주는 것은 성행위를 통해 얻는 쾌감이라는 점에는 누구도 부정 못할 것이다.
    그래서 성이 부부생활에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고 있으며, 불만의 원인이 되기도 하고 이혼의 사유가 되기도 한다.
    그런데 성에도 쾌락적응 현상이 나타나므로 이를 극복하는 것이 결혼생활의 중요한 과제다.
    남녀 사이에는 그 본성상 성적 태도에 차이가 있다는 점을 인식해야 한다.
    생물학적으로는 남녀 사이에 성감대의 분포나 오르가즘에 도달하는 시간과 만족을 느끼는 형태에 있어서 차이가 있으므로 성생활에 있어서 남녀 사이에 항상 간극이 있기 마련이다.
    오르가슴이나 성적 만족은 성교를 통해서만 얻는 것이 아니고, 로맨틱한 터치만으로 흥분시킬 수 있다.
    키스는 그 자체만으로 두 영혼이 동화되는 과정이고, 성감대의 접촉만으로도 성적 흥분을 느낄 수 있다.
    부부는 남성과 여성 사이에 성감대나 성감정의 차이점을 잘 이해하고, 협업하는 정신으로 접근하고 실행해야 만족감을 느낄 수 있다.
    성행위의 횟수나 성행위 시간이 성의 만족도나 행복감을 결정하지는 않는다.
    부부 사이에 성생활을 지속하면서 성적 쾌감을 느끼기 위해서는 친밀도가 중요하고, 결국 두 사람이 그 방법을 터득하고 개발해야 한다. 성적 문제는 정신적 문제로서 성행위가 목적이 아니라 즐기는데 집중하라고 엘리스·하퍼는 권고한다.
    성생활에도 왕도는 없다.
    서로 한 마음으로 노력하고 협력한 길밖에는. 사랑이란 이처럼 협업으로 이루어지고, 노력으로 극복하는 것이다.

    ‘불륜과 사랑 사이’에서 사람들은 방황하고 있다.  

    ‘불륜’이란 사전적 의미로는 윤리에 어긋난다는 말이다.
    기혼자가 다른 이성과 섹스 하는 것은 윤리적으로 금지되고 있다.
    그런데 법률이 이를 간통죄로 규정하여 처벌의 대상으로 만들었으며, 그 배경에는 종교들이 일부일처제를 요구하면서 간통을 금지시킨 규범이 있다.
    결혼은 일상으로 무료함과 공허함을 탈피하기 위해 성적 일탈을 통해 쾌락을 추구하는 경향이 있는데, 불륜 역시 이러한 본능이 시키는 짓이다.
    처벌과 비난 그리고 이혼이라는 위험성을 무릅쓰고 불륜을 계속 하는 이유는 금기를 깨는 스릴과 쾌락 때문이다.
    불륜하면 영화 ‘메디슨 카운티의 다리’가 생각난다.
    사진작가 킨 케이드는 메디슨 카운티에 지붕이 있는 다리를 찍기 위해 갔다가 가정주부인 프란체스카를 만나 4일간의 사랑에 빠진다.
    두 사람 사이의 사랑은 뜨겁고 흡족했다.
    킨 케이드는 떠나기 전날 함께 떠나자고 청하지만 프란체스카는 유부녀로서 가정을 지키기 위해 이를 거절한다.
    그는 그녀의 선택을 받아드리고 홀로 떠난다.
    결혼이라는 ‘제도’와 자연으로서의 ‘사랑’: 이상과 현실이 충돌하는 현상이다.
    그 계곡에서 많은 사람들이 헤매고 있다. 어디에서 바라보느냐에 따라 그 평가는 달라진다. 두 사람의 진솔한 사랑에 많은 사람들이 환호하고 선망의 대상이 되기도 하였다. 이 영화가 회자되는 이유는 가정과 사랑 사이에 놓인 ‘건널 수 없는 다리’를 건넌 모습에서 대리만족을 얻었기 때문이 아닐까? ‘내로남불’: 내가 하면 로맨스이고, 남이 하면 불륜이라는 속설이 규범과 현실의 간극을 잘 표현하고 있다.


    __________________ 레위기 17장 / 그 피가 생명과 일체라(14절)  

    03-28-2023(화) 사순절 제30일

    모든 생물은 그 생명과 일체라 그러므로 내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르기를 너희는 어떤 육체든지 먹지 말라 하였나니 모든 육체생명은 그것의 인즉 그 를 먹는 모든 자는 끊어지리라.
    because the life of every creature is its blood. That is why I have said to the Israelites, "You must not eat the blood of any creature, because the life of every creature is its blood; anyone who eats it must be cut off."

    그 피가 생명과 일체라(the life of every creature is its blood)

    1818. 피(담, dâm) דָּם 

    1. 피,  2. 유혈 살해,  3. 포도즙(창세기 49:11, 신명기 32:14)
    발음 / 담 [ dâm ]
    어원 / 1826에서 유래
    관련 성경 / 피(창 4:11, 왕하 3:22, 겔 35:6), 산혈(레 12:4,5,7), 살인(시 26:9), 살육(겔 5:17), 피투성이(겔 16:6,22), 피 값(겔 3:18), 죄(겔33:6), 핏빛(욜 2:31), 피 흘린 자[죄](레 17:4, 신 21:8), 피흘리기를 즐기는 자(시 59:2)
    구약 성경 / 360회 사용

    דָּם 1818 [dâm]
    • 1. 남성형 명사 포도즙, 창세기 49:11, 신명기 32:14.
    • 2. 남성형 명사 피, 신19:10,13, 27:25, 삼상14:32,33,왕하21:16, 시106:38, 렘19:4, 22:17, 겔33:25
    • 3. 남성형 명사 유혈 살해, 학살, 살인죄, 창37:26, 레17:4, 19:16, 신17:8.
    창세기 49:10-11
    규가 유다를 떠나지 아니하며 통치자의 지팡이가 그 발 사이에서 떠나지 아니하기를 실로가 오시기까지 이르리니 그에게 모든 백성이 복종하리로다.
    그의 나귀를 포도나무에 매며 그의 암나귀 새끼를 아름다운 포도나무에 맬 것이며 또 그 옷을 포도주에 빨며 그의 복장을 포도즙에 빨리로다.

    신명기 32:14
    소의 엉긴 젖과 의 젖과 어린 기름바산에서 난 숫양과 염소와 지극히 아름다운 을 먹이시며 또 포도즙의 붉은 술을 마시게 하셨도다.

    * 1826.  דָּמָם   

    1. 침묵하다,  2. 놀라다,  3. 출애굽기 15:16
    발음 / 다맘  [ dâmam ]
    관련 성경 / 머무르다(수 10:12), 기다리다(삼상 14:9), 잠잠하다(시 4:4, 사 23:2, 애 3:28), 멸하다(렘 8:14), 침묵하다(출 15:16), 쉬게 하다(애 2:18), 적막하다(렘 25:37, 48:2), 멸절되다(렘 49:26, 50:30), 끊어지다(렘 51:6), 평온하다(시 131:2),
    [부] 가만히(렘 47:6)
    구약 성경 / 30회 사용

    창세기 9:1-5
    1. 하나님노아와 그 아들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에 충만하라
    2. 의 모든 짐승과 공중의 모든 에 기는 모든것과 바다의 모든 고기가 너희를 두려워하며 너희를 무서워하리니 이들은 너희 에 붙이웠음이라
    3. 무릇 산 동물은 너희의 식물이 될찌라 채소 같이 내가 이것을 다 너희에게 주노라
    4. 그러나 고기를 그 생명 되는 채 먹지 말것이니라
    5. 내가 반드시 너희 곧 너희 생명찾으리니 짐승이면 그 짐승에게서, 사람이나 사람의 형제면 그에게서 그의 생명을 찾으리라

    1-9. 희생 동물을 잡는데 대하여.
    10-16. 피를 먹지 말라시는 경계.

    레위기 17장에서는 짐승을 먹을 때 피와 함께 먹는 것을 금하고 있습니다.
    이와 같은 금령은 노아 홍수 후에 하나님께서 노아에게 주신 규례에서 이미 언급한 것입니다(창 9:4-5).

    "그러나 고기를 그 생명 되는 째 먹지 말 것이니라.
    내가 반드시 너희의 곧 너희의 생명찾으리니 짐승이면 그 짐승에게서, 사람이나 사람의 형제면 그에게서 그의 생명을 찾으리라."

    이미 피에 대한 금령이 레위기 1-7장 및 11장에서 소개되었습니다.
    그런데 또 다시 소개되는 것은 제사장에겜만 국한 된 것이 아니라 모든 백성들이 범하지 말아야 할 계율이기 때문이며 동시에 두 가지 중요한 의미를 갖습니다.

    첫째는 성경에서 피는 생명을 상징합니다.

    피를 먹는 것은 생명을 취하는 것이며, 모든 생물의 생명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의 권한에 대한 침범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러므로 본 금령은 짐승만이 아니라 인간의 모든 생명이 하나님께 달려 있음을 의미합니다.

    둘째는 성경에서 피는 속죄를 의미합니다.

    피를 흘림으로 속죄가 이루어집니다.
    그런데 피를 먹는 것은 속죄의 효과를 무효화 시키며 거부하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따라서 피의 금령은 그리스도의 피 흘림을 통한 속죄를 상징하며 그 은혜를 거부하는 자는 멸망할 것을 강조한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식용으로 짐승을 잡을 때 반드시 먼저 하나님 앞에 예물로 드리라고 합니다.
    이것은 백성들이 먹고 살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임을 강조하기 위한 것입니다.
    아무리 자신이 생계를 위하여 수고할지라도 하나님께서 허락하지 않으면 아무 것도 얻을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자신이 얻은 물질을 자기 노력의 대가로 여기는 것은 잘못된 것임을 암시합니다.

    성도들은 세상에서의 모든 수확을 통해 하나님의 베풀어 주시는 은혜라는 것을 깨닫고 감사해야 합니다.
    그럴 때 하나님께서는 더욱 큰 은혜로 채워 주실 것입니다.

    피는 생명을 지켜주지만 예수님의 피는 영생을 약속하셨습니다.
    영원한 생명을 약속하신 주의 보혈의 공로를 의지하여 무너지는 세상의 가치를 바르게 세워가는 일에 밑거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레위기 17장은 제사와 고기를 먹는 것에 관한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이 내용은 이미 1-7장과 11장에서 다뤘습니다.
    다만 차이점이 있다면 제사장의 역할에 관한 내용이 아니라 일반 백성들이 범하지 말아야 하는 점에 대해 소개하고 있습니다.

    (4절) "먼저 회막 문으로 끌고 가서 여호와의 성막 앞에서 여호와께 예물로 드리지 아니하는 자는 피 흘린 자로 여길 것이라 그가 피를 흘렸은즉 자기 백성 중에서 끊어지리라"

    회막 문 앞에서만 가축을 잡을 수 있었습니다. 그 이유는 화목제로 드려진 이후 고기를 먹을 수 있었습니다. 제물로 드려지지 않고 가축을 도살하여 고기를 먹는 것은 금지되었습니다.

    (7절 상) "음란하게 섬기던 숫염소에게 다시 제사하지 말 것이니라"

    다른 신들 특별히 '숫염소'는 히브리어로 '쎄이림'으로 고대에 귀신을 반인반수의 염소의 형태로 인식하곤 했었습니다. 그러므로 이방신에게 제물을 바칠 수 있는 가능성을 없애기 위해서로 이해 할 수 있습니다.

    (8-9절) "너는 또 그들에게 이르라 이스라엘 집 사람이나 혹은 그들 중에 거류하는 거류민이 번제나 제물을 드리되 회막 문으로 가져다가 여호와께 드리지 아니하면 그는 백성 중에서 끊어지리라"

    이스라엘 백성들 중에 거류민(게르/타국인)들도 함께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타국인을 압제 하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출 23:9) "너는 이방 나그네를 압제하지 말라 너희가 애굽 땅에서 나그네 되었었은즉 나그네의 정경을 아느니라"

    즉, 이스라엘 백성들이 누구보다도 이방 나그네의 심정을 잘 알 테니 압제하지 말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과 함께 거주하는 거류민들도 동일하게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살아야 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지킬 때 거류민들도 안전과 보호를 받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정리해보면, 1-9절까지는 고기를 먹을 때 이스라엘 백성들이라면 누구라도 고기를 먹기 위해서는 회막 문 여호와의 제단에 제사를 드리고 난 이후 먹을 수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어 10-16절에서는 피에 관해 말씀하십니다.

    (11절) "육체의 생명은 피에 있음이라 내가 이 피를 너희에게 주어 제단에 뿌려 너희의 생명을 위하여 속죄하게 하였나니 생명이 피에 있으므로 피가 죄를 속하느니라"

    특별히 피를 먹지 말라고 명합니다. 그 이유는 11절 상반 절에 따르면 '육체의 생명은 피'에 있기 때문입니다. 피를 먹는 다는 것은 생명을 경시한다는 의미인 것입니다. 피를 먹지 않는 다는 것은 모든 생명, 인간 뿐 아니라 모든 가축들의 생명도 존귀하게 여긴다는 의미입니다.

    또한 피를 먹지 말아야 하는 이유는 11절 하반 절에 따르면 '피가 죄를 속하기' 때문입니다. '죄를 속하다'는 의미는 '몸값을 대신 지불'하다는 의미입니다. 피가 생명의 값을 지불한다는 뜻입니다. 인간의 죄를 속죄한 동물은 단순히 지불된 돈이 아니라 생명의 값입니다. 인간의 죄를 속하는 피는 신성하기 때문입니다.

    이 또한 이스라엘 자손이든지 거류민이든지 동일하게 적용되면 피를 먹는 즉시 하나님의 백성으로 부터 끊어지게 되며 그 죄를 스스로 담당해야 합니다.

    오늘 본문을 통해 두 가지 생각해 봐야 할 것이 있습니다.

    첫째로, 제물을 어디서 드리는 가가 중요하다는 사실입니다. 반드시 회막 문 여호와의 제단에서 드려야 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제물을 드린다는 것은 ‘고기를 먹기위한’즉, 필요를 채우기 위한 제물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제물을 하나님께만 드린 다는 의미는 우리의 도움은 다른 이에게도 다른 신에게도 있지 않다는 믿음의 고백인 것입니다. 하나님만이 우리의 도움 되신다는 고백인 것입니다.

    (시편121:1-2) "내가 산을 향하여 눈을 드리리라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올까 나의 도움은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에게서 로다"

    둘째로, 제물의 피는 생명을 지켜주지만, 예수님의 보혈은 영생을 주신다는 사실입니다. 성찬식을 할 때 절대로 잊지 말아야 할 사실이 이것입니다. "이것은 나의 피, 언약의 피라" 하신 예수님의 보혈은 우리를 영원한 생명으로, 부활의 영광으로 인도하신다는 사실입니다.

    (요6:54)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영생을 가졌고 마지막 날에 내가 그를 다시 살리리니"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만이 우리의 도움 되심을 잊지 말고 살아갑시다.
    공동체안에서 성찬의 떡과 잔을 나누며 예수님의 살과 피만이 우리를 영원한 생명으로, 부활의 영광으로 인도하신다는 것을 기억하십시다.
    뿐만아니라, 주일에 주신 말씀기억하며, 구체적으로 공동체안에서 주어진 환경속에서 믿음의 선순환을 실천하기 위해 주님의 사람들을 섬기며 살아가십시다.


    ‘피는 곧 생명’ 희생짐승의 피는 대속의 효과 불러온다

    피와 관련된 잘못 자행될 가능성 컸던 화목제는 취급 방식 엄중히 강조하고 있어

    사슴을 잡아 온 요아킴

    ▲ 김경열 목사(총신대 강사)

    최근 요아킴은 전염병으로 양떼를 많이 잃었다. 그로 인해 일부 하나님께 제물로 쓸 여유는 있으나 식용으로 양을 잡아먹을 처지는 아니었다. 그래서 요아킴은 요즘 마을 밖 야산으로 사슴 사냥을 나간다. 오후 늦은 시간 그는 하나님의 은혜로 커다란 사슴을 잡는 데 성공했다. 요아킴은 아직 숨이 붙어있는 사슴의 목을 따 피를 모두 빼냈다. 그리고 흙으로 피를 덮었다. 하나님께서 율법으로 생명을 상징하는 피는 먹어선 안되고 피를 빼내 땅에 흘려 흙으로 덮으라 명하셨기 때문이다. 흥에 겨워 돌아오는 길에 요아킴은 바위 위에 죽은 산양 한 마리가 놓여 있는 것을 발견했다. 병들어 죽었거나 독사에 물려 죽었을 것이다. 고기를 덤으로 얻게 된 행운일 수 있으나 요아킴은 그 산양의 사체를 두고 산을 내려왔다. 율법에서 자연사한 짐승이나 들짐승에 찢겨 죽은 짐승은 먹지 못하도록 금지했기 때문이다.
     
    피를 금지하는 레위기 17장

    요아킴이 말한 율법들은 레위기 17장에 집약되어 있다. 여기에서 크게 두 가지 문제가 제기될 수 있다. 첫째, 17장에서 화목제 규례가 추가로 주어지는데(3~9절) 뒤이어 느닷없이 ‘피’의 의미와 기능에 대한 설명이 등장한다. 왜 화목제에 관한 문맥에서 ‘피’에 관해 설명하는 것일까? 둘째, ‘일반 도살’의 문제다. 레위기에서 화목제라는 제의 도살 후 평민들이 고기를 먹는 것이 허용된다. 그렇다면 과연 가축을 제단이 아닌 자신의 집에서 잡아먹는 일반 도살이 가능했는가? 17장의 규정은 언뜻 그런 일반 도살을 금지하는 것으로 보인다(2~6절).

    결론부터 말하자면 레위기 17장은 궁극적으로 11절의 의미와 기능을 설명하기 위해 쓰였다. 이 장에는 서로 무관해 보이는 법들이 일관성 없이 산발적으로 등장하는 것처럼 보인다. 17장의 전체 구조와 관찰되는 법의 종류는 다음과 같다:

    a. 합법적인 화목제 도살(1~7절)
    b. 합법적인 제의적 도살(8~9절)
    c. 피의 의미와 기능(10~12절)
    d. 사냥한 짐승의 섭취 방법(13~14절)
    e. 스스로 죽은 짐승의 섭취 금지(15~16절)

    이 법들은 서로 무관한 듯 보이지만 실은 피의 문제와 서로 연관되어 있다. 그래서 피 섭취를 금지하는 10~12절이 17장의 중심에 놓여 있으며 다른 법들이 대칭 구도로 배치되어 있다.
    첫 번째 법(1~7절)은 이스라엘 백성은 진영 안이든 밖이든(들판에서) ‘염소 신’에게 화목제로 바치기 위해 가축을 도살해선 안 된다는 규정이다. 두 번째 법(8~9절)은 이스라엘인과 이방인 모두 하나님의 성소가 아닌 곳에서 번제와 다른 제사들을 드리지 말아야한다는 규정이다. 여기서 3~4절은 모든 짐승의 도축은 반드시 성소에서 이루어져야한다는 뜻으로 보인다. 그로 인해 고대로부터 랍비들은 오랫동안 이 문제로 논쟁을 벌였다. 사냥한 짐승의 고기는 허용되지만 가축의 일반 도살은 레위기에서 전면 금지된 것인가 하는 쟁점에 대해 학자들 사이에서도 의견이 두 갈래로 나뉜다. 레위기 후대 저작을 따르는 대다수 학자들은 신명기에서는 일반 도살이 허용되었는데 후대의 레위기 법이 이것을 금지하고 고기를 먹기 위한 모든 도축을 성소로 제한했다고 주장한다. 즉 레위기 법에서는 고기를 먹기 위해서는 언제나 짐승을 성소에 끌고 온 뒤 화목제로 도살해서 드려야 한다. 이 견해는 각 사람의 성읍 내에서(아마 들판에서도) 짐승을 잡아 그 피를 땅에 흘려 흙으로 덮은 뒤 고기를 먹을 수 있다는 일반 도살법(신명기 12장)과 정면으로 대치되며, 역사서에 기록된 합법적으로 짐승을 잡아먹는 일화와도 모순된다(예, 삼상 14:31~35). 그들은 이에 대한 답변으로 처음에, 그리고 원래는 세속에서 일반 도살이 허용되었으나(신명기), 포로기 이후에 제사장 그룹들이 제의 체계를 구축하는 과정에서(레위기의 편집과 새로운 법들의 창안) 금지시켰다고 말한다.

    그러나 이에 대해 다른 설명들이 가능하다. 보수적 입장의 학자들은 환경 변화로 인해 법이 개정되었다고 본다. 레위기 17장의 법은 성막이 매우 근접해 있던 광야를 배경으로 주어진 반면, 신명기 12장의 법은 가나안 땅 중앙에 놓인 성전과 멀리 떨어져 있던 성읍을 배경으로 주어졌다는 것이다. 가능한 견해 중 하나다. 그러나 광야 시절에도 고기를 먹을 때마다 성소에서 잡았다는 생각은 적절치 않다. 집에서 기른 비둘기는 그런 제한이 없다. 또한 제단에 올릴 수 없는 흠을 가진 짐승은 버렸을까? 그런 짐승은 집에서 얼마든지 잡아서 먹었을 것이다. 또한 들짐승의 사냥은 허용되고 있다. 결론적으로 가축의 일반 도살이 광야에서도 가능했다는 결론이다. 그러므로 3~9절은 번제나 화목제, 특히 화목제를 드리려고 사적인 제단이나 불법적 성소로 달려가는 것을 금지하는 것이다. 일반 도살은 그와 별개로 당연히 전제되고 있다. 

    피의 의미와 기능, 그리고 피 섭취의 금지(10~12절) 

    세 번째 법은 피에 대한 규례다. 여기서 왜 피에 대한 경고와 교훈이 화목제에 관한 문맥에서 갑자기 나타나는가 하는 의문을 제기해볼 수 있다. 특히 11절에서 피가 생명이라는 진술과 더불어 피의 속죄 기능이 설명된다. 왜 피의 의미와 기능이 이때 진술된 것일까? 분명 4절에 비추어볼 때 1~9절의 합법적 제사에 대한 법은 피가 어떤 제단에 돌려지는가에 초점을 두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우리는 여기서 3~7절이 오직 화목제 문제만 집중적으로 다루는 이유를 추론해 볼 수 있다. 아마도 고기가 주요 목적 중 하나였던 화목제는 가장 사적인 성격이 강해 피를 잘못 취급할 가능성이 컸을 것이다. 그런 위험은 다른 제사에서도 물론 발생할 수 있었기 때문에 8~9절에서는 “번제와 제물을 드리되”라는 말로 다른 제사들을 포괄하고 있다. 그럼에도 이 경고의 강조점은 3~7절의 화목제에 놓여 있다. 10, 14절의 경고대로 이때 자칫하면 피를 제대로 쏟지 않고 고기를 먹을 위험이 컸다. 또한 7절이 암시하듯이 짐승을 가지고 사적인 제단이나 불법적인 우상의 제단으로 향할 가능성이 컸을 것이다. 그러나 그 피를 더 이상 그런 개인 제단이나 우상의 제단에 뿌려선 안 된다. 결론적으로 화목제의 주요 목적 중 하나가 제물로 드린 고기를 나누어 먹는 것이었던 만큼 피를 다룰 때 실수하기 가장 쉬운 제사였다고 볼 수 있다. 이런 점에서 화목제에서 피와 관련된 잘못이나 범법 행위가 자행될 가능성이 가장 컸으므로 피 취급방식을 엄중히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10~12절을 보면 피의 의미와 기능을 설명하는 11절을 중심으로 10절과 12절에는 피를 먹지 말라는 경고가 주어진다. 전체적인 흐름상 10절은 앞의 희생 짐승들과 관련된 피의 섭취 금지와, 그리고 12절은 이어지는 사냥한 짐승과 자연사한 짐승의 피 섭취 금지와 연결되는 것으로 보인다.

    사냥한 짐승의 피와 자연사한 짐승의 고기 섭취 금지(13~16절)

    정결한 야생 동물의 사냥이 허용되어 네발짐승뿐 아니라 새도 사냥할 수 있었는데 이때 사냥한 짐승의 고기를 먹기 전에 그 피를 모두 땅에 쏟은 뒤 흙으로 덮어야 했다. 여기서 피가 남아있는 고기를 피 채 먹지 말라는 경고가 다시 한 번 주어진다(13~14절). 사냥한 짐승의 섭취는 가축의 일반 도살이 오래전부터 허용된 관행이라는 분명한 암시다. 아마도 짐승을 사냥했을 때 고기를 피가 있는 채로 먹게 될 확률이 가장 높았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15~16절은 도살된 짐승이 아닌 스스로 죽은 짐승이나 찢겨 죽은 짐승의 섭취를 금지한다. 이러한 짐승과 접촉한 자 역시 부정결해졌다는 점에서 이 규정은 마치 짐승의 사체와의 접촉을 금하라는 경고처럼 보인다. 그러나 여기서는 피의 문제가 초점이 된다. 이러한 짐승들의 사체에는 모두 피가 남아있으므로 결국 이런 짐승의 사체를 먹는다면 고기와 더불어 피를 먹는 셈이다. 요약하자면 레위기 17장의 법들은 모두 피의 문제와 관련되어 있다. 이 장은 피의 의미와 기능을 설명하면서 피의 섭취를 금지하는 10~12절을 중심으로 피 문제로 실수하지 않도록 짐승의 불법적인 제의 도살을 금지하고, 사냥한 짐승의 고기를 먹기 전에 반드시 피를 쏟아내도록 하며, 스스로 죽은 짐승의 고기에는 여전히 피가 남아있으니 섭취하지 않도록 한다.

    피는 곧 생명, 생명을 속하는 피 (11절)

    11절을 제대로 번역하면 다음과 같다: “왜냐하면, 육체의 생명은 그 피 안에 있기 때문이다. 내가 그것을 너희를 위해 제단에 주었는데, 이는 너희 생명을 속죄하기 위함이다. 이는 그 피가 그 생명으로 대속하기 때문이다.” 11절은 구약 성경에서 유일하게 피의 기능을 알려주는 대목인 만큼 매우 중요하다. 이 구절의 히브리어 원문에 의하면 피에 관해 다음과 같은 순서로 세 가지 명제를 도출할 수 있다. 1) 짐승의 피는 생명이다 2) 피는 제단에 귀속된다 3) 피가 대속을 한다. 여기서 이 세 명제의 적용 범위는 뒤로 갈수록 좁아진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 첫 번째 명제는 모든 짐승의 피에 해당되며 사냥감도 예외는 아니므로 사냥한 짐승의 피 역시 절대 먹어선 안 된다. 두 번째 명제는 그 범위가 희생 짐승으로 좁혀진다. 즉 희생으로 바쳐지는 짐승의 피는 결코 불법적 제단이나 다른 곳에서 임의대로 처리되어선 안 되고, 반드시 제단으로 돌려져야 한다. 마지막 세 번째로 그렇게 바쳐진 어떤 희생짐승의 피는 대속의 효과를 불러온다. 여기서 많은 학자들은 11절에서 제시된 피의 의미와 기능은 모든 희생 짐승에 적용된다고 본다. 일단 피의 기능과는 별개로 피의 의미, 즉 피는 곧 생명이므로 제단에 돌려져야한다는 원칙은 화목제 짐승을 포함한 모든 희생 제물에 적용된다. 나아가 희생 짐승을 포함한 모든 짐승의 피는 곧 그것의 생명과 같은 것으로 간주된다(14절). 따라서 모든 짐승의 피가 곧 그것의 생명이라는 것이 모든 짐승의 피가 인간 생명을 위해 대속을 만든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그 기능은 대속의 희생 짐승들에 제한되는 것이다.

    결국 피의 대속 기능은 대속의 제사인 속죄제와 속건제를 포함하여 아마도 인간의 기본적 죄성을 속죄하는 번제에 적용된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화목제는 결코 죄 때문에 드리는 제사가 아닌 축제와 잔치의 제사였기에 대속의 기능이 있었는지 매우 의심스러우며 구약 전반에 그런 증거가 나타나지 않는다.

    신약에서의 피의 문제

    구약은 생명을 상징하는 피를 먹지 말도록 한다. 그러나 피 섭취의 금지는 신약에서도 항구적으로 계승되는 규정인가? 사도행전 15장 20절과 29절에서 예루살렘 공의회는 교회 내의 유대파 그리스도인들로부터 발생한 율법 준수 논쟁에서 잠정적으로 다음과 같은 네 가지 금지령을 내렸다. 1) 우상의 더러운 것(제물) 2) 피 3) 목매어 죽인 것 4) 음행. 음행을 제외한 나머지는 전부 먹는 것과 관계가 있다. 우상에 바쳐진 음식과 피가 금지됨은 물론 목매어 죽인 것 역시 그 고기 안에 피가 담겨있다는 점에서 피 금지와 관련이 있다고 볼 수 있다. 어떤 그리스도인들은 사도행전 15장에서 정한대로 피는 영구적으로 금지되었다면서 선지 해장국을 먹지 않는다. 우선 음행의 금지는 본질에 관한 규례이자 신약으로 이어지는 불변의 도덕법이다. 그러나 먹는 것은 외적인 형식에 지나지 않는다. 예수께서는 더 이상 입으로 들어가는 것이 사람을 더럽히지 않는다고 교훈하셨다(막 7:14~23). 바울 또한 이 정신을 이어받아 신자들은 원칙적으로 이제 모든 음식으로부터 자유하다고 선포한다(롬 14:15; 고전 10:25~26). 바울은 심지어 우상의 제물마저도 알고 먹는 것은 주의해야 하나 시장에서 모르고 사서 먹을 경우 아무 문제가 없다고 말한다. 음식은 이제 무엇이든 스스로 속된 것은 없으되 속되게 여기는 그 사람에게 속된 것일 뿐이다(롬 14:14). 만물이 다 깨끗하되 거리낌으로 먹는 사람에게 악할 뿐이다(롬 14:20). 하나님께서 지으신 모든 것은 모두 선하며 단지 감사함으로 받으며 버릴 것이 없다(딤전 4:3~4). 필자는 피 역시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를 통해 피의 대속을 완성한 이상 짐승의 피에 더 이상 특별한 의미를 부여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__________________ 레위기 16장 / 아사셀 염소(8절) 


    03-27-2023(월) 사순절 제29일

    두 염소를 위하여 제비 뽑되 한 제비는 여호와를 위하고 한 제비는 아사셀을 위하여 할지며.
    He is to cast lots for the two goats--one lot for the LORD and the other for the scapegoat.

    레위기 16장은 레위기 신학의 핵심이 되는 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문단 분해
    1-28. 제사장이 지성소에 들어가 행해야 할 속죄일의 의식.
    29-34. 칠월십일은 1년에 1차씩 속죄의 대 안식일로써 지키라는 명령.

    유대인의 달력 7월에는세 가지 중요한 절기가 있는 달입니다(양력 10월 경에 해당).
    7월 1일은 새해(로쉬 하샤나)
    7월 10일은 대속죄일(욤 키퍼)
    7월 15일은 초막절(수카)

    아사셀 염소(Scapegoat)란 "떠나보냄"이란 뜻으로 대속죄일에 두 마리 염소 중 제비를 뽑아 한 마리를 광야로 보내는 염소를 말합니다.

    대제사장은 두 염소를 성막안 북편 번제 희생을 잡는 곳에 둔 후(1:11. 16:7)에 항아리속에서 제비를 뽑았습니다.
    "칼피(Calphi)"라고 부르는 항아리(urn) 속에는 똑같은 크기나 모양를 가진 두 개의 제비가 들어 있었는데, 각각의 제비에는 '여호와를 위하여(라 예호와)'라는 글과 '아사셀을 위하여(라 아자젤)'라는 글이 새겨져 있습니다.
     
    대제사장은 백성들 앞에서 항아리를 흔든뒤, 두 손을 넣고 한 손에 하나씩 제비를 집어 두 마리의 염소들 각각의 머리 위에 그 제비를 놓습니다.

    이때 그 머리 위에 '여호와를 위하여(la-JEHOVAH)'라는 제비가 얹힌 염소는 그 목에 붉은 천을 두른 후 여호와께 속죄제로 드렸고, '아사셀을 위하여(la-Azazel)'라는 제비가 얹힌 염소는 그 뿔에 붉은 천을 맨 후 무인지경의 광야로 내보냈습니다(The Preacher's Homiletic Commentary, Vol.III. p. 200-201).

    아사셀 염소가 광야로 나가 모든 백성들 앞에서 사라질 때 백성들은 그들의 죄가 완전히 사하여졌다는 것을 확인하고 소리높여 환호합니다.
    이러한 예식은 메시아가 모든 백성들의 죄를 짊어지신 것을 상징하는 예표라고 하겠습니다.

    그러나 이 속죄제도 우리의 모든 죄를 근본적으로 없애줄 수는 없습니다.
    일 동안의 죄만 사하는 것입니다.
    제사의 유효 기간이 일 년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그 이듬해 짓는 모든 죄를 사하기 위해서는 또 그 다음해 7월 10일 대속죄일에 역시 같은 방법으로 속죄제사를 드려야 했습니다.
    이 제사는 예수님이 오실 때까지 계속해서 드려졌습니다.
    이 제사는 우리의 죄를 영원히 씻어줄 만한 능력은 없기 때문에 불완전한 제사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심으로 이 제사는 더 이상 드릴 필요가 없어졌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는 대제사장으로서 그의 몸을 속죄희생의 제물로 드리셨기 때문입니다.

    히브리서 7:27
    그는 저 대제사장들이 먼저 자기 죄를 위하고 다음에 백성의 죄를 위하여 날마다 제사 드리는 것과 같이 할 필요가 없으니 이는 그가 단번에 자기를 드려 이루셨음이라.

    히브리서 9:12
    염소와 송아지의 피로 하지 아니하고 오직 자기의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사 단번에 성소에 들어가셨느니라.

    히브리서 9:26
    그리하면 그가 세상을 창조한 때부터 자주 고난을 받았어야 할 것이로되 이제 자기를 단번에 제물로 드려 죄를 없이 하시려고 세상 끝에 나타나셨느니라.

    히브리서 9:28
    이와 같이 그리스도도 많은 사람의 죄를 담당하시려고 단번에 드리신 바 되셨고 구원에 이르게 하기 위하여 죄와 상관 없이 자기를 바라는 자들에게 두 번째 나타나시리라.

    히브리서 10:10
    이 뜻을 따라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단번에 드리심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거룩함을 얻었노라.

    베드로전서 3:18a
    그리스도께서도 단번에 죄를 위하여 죽으사 의인으로서 불의한 자를 대신하셨으니 이는 우리를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려 하심이라.

    사랑하는 믿음의 사람들이여,
    나를 위하여 영원한 속죄의 제물이 되시고 다시 살아나셔서 다시 오실 것을 약속하신 주님을 기다리는 믿음으로 날마다 내 삶의 자리에서 세상의 소금과 빛의 역활을 바르게 감당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부탁하며 축복합니다.


    초막절(5521) 수카(çukkâh) סֻכָּה 

    1. 오두막,  2. הַג הַסֻּכּוֹת 회막의 축제, 3. 레위기 23:43
    발음 / [ çukkâh ]
    관련 성경 / 우릿간(창 33:17), 초막(레 23:42, 느8:14, 욘4:5), 야영(삼하11:11), 장막(삼하22:12, 왕상20:12, 시18:11), 굴(욥38:40), 원두막(사1:8),천막(사4:6, 암9:11)
    구약 성경 / 31회 사용

    5799. 아사셀(ʽăzâʼzêl) עֲזָאזֵל

    1. 보냄의 염소 : 속죄의 염소. 레위기 16:8
    발음 / 아사셀(ʽăzâʼzêl)
    어원 / 579와 235에서 유래
    관련 성경 / 아사셀(레 16;8,10, 26)
    구약 성경 / 4회 사용

    뜻풀이부

    1.명사 보냄의 염소: 속죄의 염소. 레16:8,10, 26. 

    * 579. אָנָה   

    1. 도달하다,  2. 만나다, 3. 참석하다.
    발음 / 아나(’ânâh)
    관련 성경 / 넘기다(출 21:13), 미치다(시 91:10), 임하다(잠 12:21), 시비하다(왕하 5:7)
    구약 성경 / 4회 사용

    * 235.  אָזַל 

    1. 구르다,  2. 회전하다, 3. 떠나다
    발음 / 아잘(’âzal)
    관련 성경 / 다하다(삼상 9:7), 줄어지다(욥 14:11), 돌아다니다(렘 2:36), 돌아가다(잠 20:14), 거래하다(겔 27:19)
    구약 성경 / 5회 사용

    아사셀 염소(Scapegoat)란 "떠나보냄"이란 뜻으로 대속죄일에 두 마리 염소 중 제비를 뽑아 한 마리를 광야로 보내는 염소를 말합니다.

    두 염소를 위하여 제비뽑되

    제비(lot)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고랄'(gôwrâl. גּוֹרָל)은 '돌처럼 거칠다'(be rough as stone)란 기본개념을 갖고 있는데, 이것은 당시의 제비 도구가 작고 매끈한 모양의 자갈(pebble)이었음을 암시합니다.

    제비(1486)(고랄, gôwrâl)  גּוֹרָל 

    1. 제비,  2. 어떤 사람에게 몫으로 할당된 것
    발음 / [ gôwrâl ]
  • 어원 / 복수 גּוֹרָלוֹת ,גּוֹרָלִים, ‘거칠다’는 뜻의 사용하지 않는 어원에서 유래

  • 관련 성경 / 제비(레 16:8, 수 17:14, 21:5), 제비 뽑힌 자(대상 24:7, 25:9), 제비 뽑음(레 16:8, 민 26:55, 수 14:2)
  • 구약 성경 /  77회 사용

  • 한편, 대제사장 아론은 두 염소를 성막안 북편 번제 희생을 잡는 곳에 둔 후(1:11; 16:7), 항아리속에서 제비를 뽑았다.
    칼피(Calphi)라 불리우는 이 항아리(urn) 속에는 똑같은 크기나 모양를 가진 두 개의 제비가 들어 있었는데, 각각의 제비에는 '여호와를 위하여'(라예호와)라는 글과 '아사셀을 위하여'(라아자젤)라는 글이 새겨져 있었다.
    대제사장은 백성들 앞에서 항아리를 흔든뒤, 두 손을 넣고 한 손에 하나씩 제비를 집어 두 마리의 염소들 각각의 머리 위에 그 제비를 놓았다.

    이때 그 머리 위에 '여호와를 위하여'(la-JEHOVAH)라는 제비가 얹힌 염소는 그 목에 붉은 천을 두른 후 여호와께 속죄제로 드렸고, '아사셀을 위하여'(la-Azazel)라는 제비가 얹힌 염소는 그 뿔에 붉은 천을 맨 후 무인지경의 광야로 내보냈다고 한다(The Preacher's Homiletic Commentary, Vol.III. p. 200-201)


    ‘아사셀’이란 말은 히브리어로 ‘완전한 제거’ 또는 ‘내어놓음’이라는 의미를 가진 말입니다.
    이제 대제사장은 이 염소에게 안수하여 이스라엘 자손의 모든 죄를 담당시키고, 미리 정한 사람에게 맡겨 광야로 보냅니다.
    한 마리의 염소가 죽어서 속죄소 위에 피를 흘림으로써 이스라엘 백성들이 짓는 1년치의 죄가 이미 다 사해졌는데, 왜 또 이 염소에게 안수해서 죄를 담당시킵니까?

    레위기 16장 8절에 보면, “두 염소를 위하여 제비뽑되 한 제비는 여호와를 위하고, 한 제비는 아사셀을 위하여 할지며”라고 했습니다.
    여호와를 위하는 염소의 피는 속죄소 위에 뿌려져서 ‘여호와 앞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정결케 합니다.

    두 번째 염소, 즉 아사셀을 위한 염소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죄가 그들의 눈앞에서 떠나가는 사실을 볼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준비된 염소입니다.

    ​대제사장이 7월 10일에 아사셀을 위한 염소의 머리에 안수하면 어떻게 됩니까?
    이스라엘 백성이 일 년 동안 짓는 모든 죄가 아사셀을 위한 염소의 머리로 넘어갑니다.
    온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 장면을 지켜봅니다.
    그 후에는 미리 정해 놓은 사람이 그 염소를 끌고 광야의 무인지경으로 갑니다.
    그 염소가 이스라엘 백성들의 눈앞에서 점점 멀어져갈 때, 염소에게 옮겨진 이스라엘 백성들의 모든 죄도 그들의 눈에서 점점 멀어져갈 것입니다.
    그러다가 어느 시점에 가면 그 염소가 영영 보이지 않게 되겠죠. 그리고 그 염소는 나중에 악한 짐승에게 잡아먹혀 없어지고 말 것입니다.
    그러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아, 내 죄를 짊어진 염소가 보이지 않는구나.
    내 시야에서 영영히 사라졌구나.
    그러면 내 죄도 염소와 함께 영영히 나를 떠나갔구나. 이제 더 이상 내 죄를 찾아볼 수가 없네!’ 하는 마음이 생기는 것입니다.
    그것이 믿음입니다.
    이 염소는 우리의 죄를 완전히 제거하는 염소라고 해서 ‘아사셀을 위한 염소’라 부르는 것입니다.
    이 염소는 백성들의 죄가 그들의 눈앞에서 떠나가는 것을 보고 믿을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준비된 염소입니다.

    ​사람들이 그 염소를 자세히 주목하면 자기에게 죄가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이나 자기 죄를 지고 가는 속죄제물을 주목하지 않고 ‘자기 자신을’ 자세히 주목합니다.
    자기 자신을 바라보면 죄인처럼 여겨지게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금방울소리와 같은 이 복음을 귀로 듣고 믿든, 우리 죄를 담당한 예수님을 말씀 속에서 눈으로 보고 믿든, 대속물의 죽음으로 우리의 죄가 사해졌다는 믿음을 주시고 싶어하십니다.

    ​“우리의 죄를 따라 처치하지 아니하시며, 우리의 죄악을 따라 갚지 아니하셨으니...동이 서에서 먼 것같이 우리 죄과를 우리에게서 멀리 옮기셨으며”(시편 103:10~12)

    ​동쪽과 서쪽은 영원히 만날 수 없는 방향입니다.
    아사셀을 위한 염소가 우리의 죄를 지고 우리 눈앞에서 사라졌듯이, 예수님은 우리의 모든 죄를 우리가 다시는 볼 수 없는 곳으로 옮기셨습니다.

    ​이렇게 해서 대속죄제는 끝이 납니다.
    그러나 이 속죄제도 우리의 모든 죄를 근본적으로 없애줄 수는 없습니다.
    1년 동안의 죄만 사하는 것입니다.
    제사의 유효 기간이 1년입니다.
    그러면 그 이듬해 짓는 모든 죄를 사하기 위해서는 또 그 다음해 7월 10일에 역시 같은 방법으로 속죄제사를 드려야 했습니다.
    그래서 이 제사는 예수님이 오실 때까지 약 1500년 동안 계속해서 드려졌습니다.
    그러나 이 제사는 우리의 죄를 영원히 씻어줄 만한 능력은 없기 때문에 불완전한 제사였습니다.

    아사셀을 위한 염소의 역할은 무엇이었는가?

    레위기 16장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숫염소 둘을 준비하여, 대속죄일의 정결 예식에서 각각 역할을 담당하도록 합니다(5절).
    어떤 염소가 어떤 예식에 사용될지를 결정하기 위해 대제사장은 제비를 사용했는데, 이는 여호와가 선택하신다는 것을 암시합니다.
    그런 다음 두 염소를 구분하기 위해 제비를 뽑고 각각에 제비 표를 붙였습니다(8절).
    “여호와께 속한” 제비를 받은 염소는 여호와를 위한 염소로서, 부정과 죄들을 성소에서 정결케 하기 위해 속죄제로 드려졌다(참조 15-19, 25절).
    “아사셀에게 속한” 제비를 받은 다른 염소는 여호와 앞에 드려졌다.
    그러나 그것은 여호와께 희생 제물로 드려지지 않고, 산 채로 여호와께로부터 광야의 아사셀에게 보내졌다(10절).
    “속죄”가 그 살아있는 염소에 대하여 행해졌는데, 대제사장이 그 염소의 머리 위에 양손을 얹고 이스라엘의 도덕적 죄를 고백함으로써 그 염소에게 옮긴 후 그것이 그 모든 악을 진영으로부터 짊어지고 나감을 의미했다(20-22절).

    아사셀에 관한 각양한 견해들 :

    “아사셀이 누구이며, 아사셀을 위한 염소는 무엇을 대표하는가?”이다.
    “아사셀”의 의미를 그것의 어원을 근거로 알려고 수없이 시도했지만 실패했다.
    “아사셀”(히브리어 아자젤[‘Aza’zel])에 대한 일반적인 영어 번역 “도망의 염소”(Scapegoat; 엣-아젤[‘ez-’azel]에서 파생함)는 확실하지 않으며, 레위기 16:10(“보낼지니”)에 비추어 볼 때 그 의미가 맞지 않기 때문에 이 번역을 받아들일 수 없다.
    아사셀에게 속한 염소는 아사셀에게 보내졌다. 따라서 이 구절을 “아사셀” 대신에 “도망의 염소”(Scapegoat)로 읽으면 그 염소에게 속한 염소[goat for Scapegoat]가 그 염소[Scapegoat]에게 보내졌다는 말이 되어 버린다.

    많은 학자들은 “아사셀”을 황폐한 곳, “제거”의 의미, 신 등으로 해석하였다.
    널리 알려진 유대인의 견해는 아사셀을 귀신으로 본다(예를 들어, 에녹 1서 9:6; 10:4, 5, 8, 아브라함의 묵시서; 들염소, 염소-귀신, 인적이 없는 곳에 있는 귀신들과의 연관성에 대해서는 레 17:7; 사 13:21; 34:14; 눅 11:24; 계 18:2 등을 비교하라).
    아사셀이 귀신이라는 견해를 지지하는 어떤 그리스도인들(재림교인들을 포함하여)은 이 살아있는 염소를 귀신의 왕이며 하나님의 대적(大敵)인 사단의 상징으로 본다.

    그러나 다른 그리스도인들은 이러한 견해로 보면 사단이 죄를 대신 짊어지는 것처럼 되므로 이를 반대하고, 소위 “도망의 염소”를 인간의 죄를 짊어지고 성문 밖에서 고난당하신 그리스도(히 13:12; 그러나 11절은 아사셀을 위한 염소와는 상관이 없는 문맥임을 보여준다)의 상징으로 해석하기를 선호한다.

    아사셀을 위한 염소는 제물로 희생되지 않았음 :

    “아사셀”의 정체를 밝히는 단서는 한 염소는 여호와께 속하고 다른 염소는 아사셀에게 속했다고 말하는 레위기 16:8-10이다.
    아사셀은 한 염소를 소유할 수 있는 여호와가 아닌 다른 독립적인 존재를 가리키는 고유명사임이 분명하다.
    그러나 살아있는 염소는 아사셀에게 바쳐진 제물이 아니다.
    오히려 이 “운반-염소”(tote-goat)는 죄를 제거하는 이 비(非)희생 정결 예식에서 이스라엘의 죄를 광야에 있는 아사셀의 영토로 멀리 실어다 버리는 “쓰레기 운반 트럭” 같은 기능을  한다(참조 5절; 이 경우에는 “속죄제”로 번역되어서는 안 된다). 어떤 사람의 “마당”에다 그러한 유독성 쓰레기 한 짐을 쌓아 놓는다면, 이는 정말로 못된 행위이다. 이런 점에서, 이 예식을 명하신 여호와께서는 아사셀을 이스라엘의 죄의 창시자로 보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그러므로 이 죄들은 그것들의 근원으로 되돌려진다. 아사셀이 죄의 창시자로서 사람들을 유혹하여 죄 짓게 한 후(창 3장; 계 12:9), 그들이 용서 받았는데도 그들을 비난하는 사단(계 12:10; 위증자에 대한 처벌을 말하는 신 19:16!
    -21과 비교하라)을 대표한다면 위의 논리에는 타당성이 있다.

    “‘여호와의 염소’는 여호와께 속했고, 따라서 여호와께 드려졌으며, 그것은 또한 인간의 죄를 위해 죽으신 분 곧 여호와(요 8:58; 10:30)이신 그리스도(히 13:11-13)를 상징했다.

    여호와와 여호와의 염소 사이에 밀접한 연관성이 있다고 본다면 아사셀에게 속한 염소도 아사셀을 대표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고려해야 한다.”(Roy Gane, Leviticus, The NIV Application Commentary [Grand Rapids, MI: Zondervan, 2004], 290).

    그리스도만이 우리의 죄를 대신 지시는 분임 :

    여호와께 속한 염소는 그분께 제물로 드려졌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의식 체계 너머에 있는 실재를 가리키는 더 높은 수준의 상징 즉 “표상”에서 이 염소는 여호와 곧 인간의 죄를 대신하여 죽으신 그리스도를 대표한다(요 1:29; 히 13:11-13). 이렇게 높은 차원의 관점에서 볼 때, 아사셀의 영역인 광야로 산 채로 추방된 염소가 하나님의 백성들의 죄에서 그의 몫을 담당하고 결국 그런 죄들을 배후에서 조종한 자로서 그 책임을 짊어질 자 곧 사단(아사셀)을 상징한다고 말하면 의미가 통한다. 죄는 그것을 불러일으킨 장본인에게 되돌려지고, 그는 자기가 속한 곳으로 보내진다. 이로써 하나님의 백성을 위한 일종의 속죄가 이뤄지는데(레 16:10), 이는 기본적으로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관계를 가로막아 온 죄의 장본인(사단)을 그들 가운데서 깨끗이 제거함으로써 하나님과의 화목을 이루는 것을 의미한다(참조 민 25:7, 8, 13). 그러나 이 속죄의 국면에는,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대신하여 제공하신 속죄(우리를 대신한 그분의 희생을 받아들일 때 그분이 우리의 모든 허물을 짊어!
    지신다)와는 달리 대속이 없다. 사단은 우리의 죄와 관련하여 그 자신의 몫 때문에 죽을 것이며, 그리스도만이 우리의 죄를 대신 지시는 분이시다.

    대속죄일에 아사셀을 위한 살아있는 염소는 이스라엘 백성의 죄를 그 근원으로 되돌림으로써 이스라엘 공동체를 정결케 하기 위해 진영에서 그들의 죄들을 짊어지고 나갔다.
    이와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백성들은 결국 유혹과 악한 무고(誣告)로부터 해방될 것인데(계 20:1-3), 사단이 그들에게 이러한 계략을 사용한 데 대한 책임을 지고 처벌을 받을 때이다.

    1. 또 내가 보매 천사가 무저갱의 열쇠와 큰 쇠사슬을 그의 손에 가지고 하늘로부터 내려와서
    2. 을 잡으니 곧 옛 이요 마귀요 사탄이라 잡아서 천 년 동안 결박하여
    3.무저갱에 던져 넣어 잠그고 그 위에 인봉하여 천 년이 차도록 다시는 만국을 미혹하지 못하게 하였는데 그 후에는 반드시 잠깐 놓이리라.

    레위기 16장은 레위기 신학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자비하심, 이스라엘의 용서의 필요성, 그리고 정결과 속죄에 대한 강조가 레위기 16장에 소개됩니다.
    속죄의 핵심은 “대속죄일”에 거행되는 의식에서 발견됩니다.
    특히 1-10장이 하나님과 교제를 지속하는 개인적인 방법을 제시한다면, 16장은 공동체 전체의 관점에서 하나님과 맺은 언약을 지속할 수 있는 방법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에서 속죄일은 일 년 중 가장 거룩한 날입니다.
    대속죄일은 이스라엘 달력으로 일곱째 달의 열째 날로, 양력으로는 10월 초순에 해당합니다(욤 키퍼).
    속죄일의 주요 목적은 죄와 부정으로 더럽혀진 회막의 부정을 정결하게 하는 것입니다.

    대제사장이 일 년에 단 한 번 지성소에 들어가서 이스라엘 전 백성의 죄를 속하기 위하여, 속죄제를 드림으로써 죄로 인해 분리되었던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 사이를 화해시켰던 절기입니다.
    그러나 한 개인의 속죄제나 속건제가 아닌 이스라엘 백성 전체를 위한 대속죄일 규례입니다.

    나답과 아비후를 먼저 언급하심으로 죄의 심각성을 깨닫게 하고, 하나님을 경배할 수 있는 방법을 제시합니다.
    인간이 고안한 인본주의적인 예법이 아닌, 하나님 중심의 예배법으로 하나님 앞에 나아가야 합니다.
    구약에서 하나님의 은혜와 인간의 믿음의 필요성을 속죄일의 의식보다 더 분명하게 묘사하는 그림은 없습니다.

    11-15장에서 모든 사람은 예외없이 부정에 노출되어 있음을 보았습니다.
    하나님이 본래 만드셨던 사람, 아니 더 나아가 피조 세계 전체가 타락한 상태라는 것을 보았습니다.
    음식, 질병, 성, 아무에게도 보일 수 없는 가장 은밀한 부분까지, 인간은 모든 부분에서 부정에 노출되어 있습니다.
    이러한 부정을 가진 인간은 결코 하나님 앞, 성소로 나아갈 수 없었습니다.
    하나님의 임재와 다스림을 받을 수가 없습니다.
    죄의 치명적인 결과이며, 죄는 결코 하나님과 만날 수가 없게 합니다.
    그래서 이러한 부정을 면하기 위해서, 제사는 필수입니다.

    그러나 문제는 인간이 모든 부정과 죄에 대하여, 민감하게 하나님께 사죄하며 부정을 제거하고 있지는 않다는 것입니다.
    사실 그럴 실력도 능력도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러한 부정의 상태로 하나님의 성소와 회막에 나아가며, 부정한 상태로 하나님의 진 안에 머물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의 진노만 부를 뿐입니다.

    속죄일에 행하는 의식의 주요 목적은 부정한 예배자들이 부지중에 오염시킨 성소의 모든 부정을 정결하게 하는 것에 있습니다(16:16, 19).
    대제사장은 하나님의 임재가 지속적으로 이스라엘의 성소에 머무르도록 하기 위해, 죽음을 무릅쓰고 지성소에 들어가야 했습니다.
    바로 이 날 대제사장은 자신의 죄부터 회개하며, 온 백성의 회개를 인도하여, 전 공동체를 죄의 사슬로부터 해방시킵니다.
    그저 한 번의 행사로 마치는 절기가 아닙니다.
    하나님과 백성과 자연의 총체적인 공동체가 재차 건강한 공동체로 회복할 수 있는 기회가 바로 이 대속죄일인 것입니다.
    그리고 결국 한 대제사장은 그 죄를 속하기 위해 장차 십자가에서 죽음을 당하였습니다.

    우리는 죄에 대하여 민감하지 않은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조차도 죄사함과 회개, 그리고 정결에 대한 깊은 이해와 처절한 자기 인식이 없습니다.
    철저히 모든 죄를 제거하기 원하시는 하나님의 간절하심과 대충 얼버무리려 하는 인간의 완악한 마음에는 큰 간격이 있습니다.
    1-16장에서 다룬 예배자의 삶이 철저한 거룩과 정결의 삶인 것을 제대로 배웠다면, 이 시대의 그리스도인의 모습을, 그리고 오늘 나의 모습을, 시대적인 흐름 앞에서 고민하지 않을 수가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거룩한 삶을 살기를 원하십니다.
    우리가 거룩해야, 거룩하신 하나님을 만날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와 교제하기 원하시며, 우리와 영원한 안식을 함께 누리기를 원하시는 하나님께서, 오늘도 우리에게 거룩할 것을, 죄에서 멀어질 것을 요구하십니다.
    단순하게 착하게 살면 좋겠다는 것이 아니라, 거룩하고 정결하여 하나님과 교제할 수 있는 삶을 살라는 하나님의 마음을 읽을 수 있는 마음을 주옵소서.
    그리하여 오늘도 죄를 멀리하게 하시고, 거룩을 더욱 사모하게 하옵소서.


    속죄(3725) 키푸르(kippûr) כִּפֻּר 

    1. 구속,  2. 속죄, 3. 구원
    발음 / 키푸르[ kippûr ]
    어원 / 3722에서 유래[복수형으로만 쓰임]
    관련 성경 / 속죄(출 30:10), 속전(출 30:16), 속죄일(레 23:27, 25:9), 속죄제(민 5:8).
                     [동] 속죄하다(출 29:36, 레 23:28, 민 5:8)
    구약 성경 / 8회 사용

    * 3722. כָּפַר덮다 카파르  

    1. 덮다,  2. 전면에 퍼지다,  3. 머리로 덮히다
    발음 / 카파르 [ kâphar ]
    관련 성경 / 칠하다(창 6:14), 속죄하다(출 30:10, 신 32:49, 겔 45:17), 알다(사 47:11), 용서하다(겔 16:63), 마치다(단 9:24), 속량하다(신21:8), 풀다(창 32:20), 속죄하게 하다(레 17:11), 사하다(대하 30:18, 시 78:38), 폐하다(사 28:18)
     [명] 속죄제(느 10:33, 겔 43:26), 속죄물(출 29:33)
    구약 성경 / 101회 사용

    아사셀 염소(the scapegoat)

    하나님께 나아갈 때는 죄의 문제를 먼저 해결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거룩하시고 인간은 죄인이기 때문에 더러운 죄를 가지고 거룩하시고 온전하신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는 없습니다.
    그러므로 ‘속죄’는 레위기의 가장 중요한 주제 가운데 하나로 다루고 있습니다.

    속죄’라는 말은 ‘덮는다’는 뜻입니다.
    “어떤 사람이 지은 죄에 대하여 그 대가를 치르고 속량(贖良)받는 일”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죄를 지을 때마다 속죄제를 드렸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속죄일이 필요했던 것은 이스라엘의 제의에서 백성의 모든 죄를 완전하게 속죄하기 위해서는 평일의 속죄제와 속죄일의 속죄제가 모두 필요했습니다.
    평일에는 죄가 드러나거나 깨닫게 될 경우 속죄제를 드려야 했습니다.
    반면에 속죄일에는 일년 동안 해결하지 못하고 누적된 죄들을 한꺼번에 용서함 받아야 할 필요가 있었던 것입니다.
    다시 말해 속죄일은, 미해결된 백성의 모든 죄와 성전의 지성소까지 누적된 죄를 철저히 닦아내는 날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이 속죄일에는 평일에 용서받지 못한 백성의 모든 죄와 그로 인해 누적된 성소의 오염을 깨끗이 청소함으로써 온 이스라엘 백성의 모든 속죄가 이루어졌습니다.

    성전은 매년 한 번 이루어지는 대대적 청소를 통해 원래의 거룩한 상태로 유지하고 성전으로서의 기능을 할 수 있었습니다.
    속죄일의 철저한 청결을 거쳐 다시 거룩해진 성소는 여호와의 지속적인 임재를 유지했습니다.
    이 점에서 이스라엘에게 있어 속죄일은 이스라엘백성들의 거룩함을 유지하기 위해 가장 중요한 날이었던 것입니다.

    속죄일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모든 죄를 속량해 주시는 날 입니다.

    레위기 10장에 보면 아론의 두 아들 나답과 아비후가 하나님이 명하시지 않은 다른 불로 제사를 드리다가 불에 타서 죽은 일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잘못하면 죽임을 당할 수 있기 때문에 이 문제는 매우 심각한 것이었습니다.
    이제는 어느 누구라도 담대하게 성소에 나아가서 제사의식을 거행하기에는 두려움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모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지성소에는 정한 날만 들어가고, 절차를 거쳐 들어감으로써 죽음을 면하라는 것’입니다. 즉 마음대로 들어가고 나갈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론이 성소에 들어가려면 수송아지로 속죄제물을 삼고 숫양으로 번제물을 삼고

    거룩한 세마포 속옷을 입으며 세마포 속바지를 몸에 입고 세마포 띠를 띠며 세마포 관을 쓰고세마포 옷은 거룩하기에 죄로 더러워진 몸을 씻고 세마포 옷을 입어야’ 했습니다.

    속죄일에는 세 번 지성소에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첫 번째 들어갈 때(14절)

    우선 자신의 죄와 가족들을 위하여 수송아지로는 속죄제를, 수양으로는 번제를 드리도록 하셨습니다.
    그리고 위임식 때 입었던 화려한 예복은 벗고, 몸을 씻고, 희고 깨끗한 세마포 옷을 입어야 했습니다.
    이것은 겸손의 표현이자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설 자격이 없다는 자각의 표현이었습니다.
    하얀 세마포는 겸손과 정결을 상징하는 옷입니다.

    아론은 이처럼 먼저 자기 자신과 그 가족을 위한 속죄제의 수송아지를 드려야 했습니다.
    그것은 인간의 죄 때문이었습니다.

    두 번째 들어갈 때

    수송아지를 잡아 그 피를 가지고 들어가 손가락으로 속죄소 동쪽에 뿌리고, '앞'에 일곱 번 뿌립니다.
    이렇게 피를 속죄소 위에 뿌리는 것은 십계명의 돌비, 곧 율법의 정죄가 하나님께 상달되는 것을 막아주는 역할을 하기 때문입니다.
    속죄소의 피가 우리의 죄를 덮어주고 가리워 줌으로 언약궤 위에 그룹들 사이에 계신 하나님께서 그 피를 보시고 우리를 용서해 주시는 것입니다.
    "앞에" 뿌리는 것은 그 율법의 정죄가 인간을 괴롭히지 못하도록 막아주는 것을 뜻합니다.

    세 번째 들어갈 때(8절)

    염소의 피를 가지고 지성소에 들어갑니다.
    "여호와를 위하여" 제비 뽑힌 염소를 잡아(8절) 백성을 위한 속죄제를 드리랴고 들어갔습니다.
    그리고 속죄소 위와 앞에 일곱 번 뿌렸습니다.
    염소의 피를 취하여 지성소를 위하여 뿌리고 회막을 위하여도 피를 뿌렸습니다.

    이와 같이 대제사장은 세 번에 걸쳐 지성소에 들어가 자신과 그의 가족, 그리고 백성을 위하여 속죄제를 드리고 나올 때까지는 백성은 물론, 일반 제사장들까지도 회막문 밖에서 기다려야 했습니다(17절).

    지성소에서 대속죄를 마친 후 대제사장은 회막 앞뜰에 있는 번제단을 속죄해야 합니다.
    그는 염소의 피를 번제단 네 귀의 뿔에 바르고(18절) 또 손가락으로 그 피를 그 위에 일곱 번 뿌려 이스라엘 자손의 부정에서 단을 성결케 했습니다(19절).
    이렇게 함으로써 대속죄일의 제사가 끝나고, 백성들은 일 년간 범죄한 모든 죄를 속죄 받았습니다.

    이처럼 이스라엘 백성들은 매년 7월 10일이면 자신들의 허물과 잘못을 회개하면서 나머지 남은 364일의 기간을 하나님 앞에서 거룩하게 살 것을 다짐했습니다.

    보통 때는 피 뿌리는 것만으로 사람들을 위한 속죄가 이루어졌습니다(4장).
    그러나 속죄일에는 그와 아울러 상징적이면서 현실적으로 죄를 없애는 예식이 거행되었습니다.
    곧 백성의 모든 죄를 염소에게 짊어지워 그 염소를 광야로 내몰아 거기서 죽게 하는 것입니다.

    피를 뿌리는 것과 염소를 광야로 내보내는 일은 세상 죄를 짊어지고 가신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의 행위를 암시합니다.

    그래서 로마서 3:24-26은 이렇게 기록합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써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제물로 세우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심이니 곧 이 때에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사 자기도 의로우시며 또한 예수 믿는 자를 으롭다 하려 하심이라”

    또한 레위기 16장을 배경으로 히브리서 9-10장이 가르쳐주고 있는 것은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자신을 제물로 드려 죽으심으로써 사람이 바치는 모든 제사에 종지부를 찍은 속죄 행위가 이루어졌다는 것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속죄일은 우리의 죄를 대속하기 위하여 죽으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단번에 죄 사함을 받는 것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원죄에 대하여 우리는 그분으로 말미암아 죄 사함 받고 하나님께서는 의롭다고 인정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단번에 모든 죄를 사하여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는 놀랍고 측량할 길 없습니다. 그러나 한 번 목욕한 사람도 발은 더러워질 수 있습니다. 날마다 죄를 자백함으로 깨끗함을 받고, 자신의 삶속에서 계속 이어지는 믿음의 선순환을 통해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가는 성도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우리의 죄를 위하여 단 번에 십자가에 죽으사 우리의 죄를 사하시고 그 피로 우리를 거룩하다 하시고 양자 삼으신 것을 감사드립니다.
    구원받은 자녀로, 이제 하나님의 자녀답게 살게 하시고, 거룩하게 살게 하시고, 구별되게 사는 주의 백성 되게하여 주옵소서.
    하지만 연약한 육신을 입은 몸으로 죄를 짓고, 범죄할 때 마다 더러워진 발을 씻고, 손을 씻듯 주 앞에 나아가 회개하고 용서함 받음으로 용서받은 기쁨으로 날마다 새롭게 살아가는 믿음의 사람 되게하여 주시고, 이제는 더 이상 같은 죄를 반복하여 죄 가운데 빠지는 일이 있지 않도록 은혜를 더하여 주옵소서. 


    __________________ 레위기 15장 / 부정한 자(2절)  

    03-25-2023(토) 사순절 제28일

    이스라엘 자손에게 고하여 이르라 누구든지 몸에 유출병이 있으면 그 유출병을 인하여 부정한 자라.(2절)
    Speak to the Israelites and say to them: 'When any man has a bodily discharge, the discharge is unclean.

    1-15 유출병과 그 결례.
    16-18 설정의 부정.
    19-30 부인의 유출의 부정과 결례.
    31-33 본장의 결론.


    3절. 그 유출병으로 말미암아 부정함이 이러하니 곧 몸에서 흘러 나오든지 그것이 엉겼든지 부정한즉.

    유출병(조브) זוֹב 

    1. 흐름, 2. 유출병
    발음 (zôwb)
    어원 / 2100에서 유래
    관련 성경 / 유출병(레 15:2, 3,15,33), 유출(레 15:13,25,30, 레15:25).
    구약 성경 / 13회 사용

    * 2100. זוּב 
    1. 흐르다. 2. 시편 78:20, 3. 레위기 15:25

    발음 / 주브(zûwb)
    관련 성경 / (물을) 내다(시78:20), 흘러나다(시105:41,사48:21), 쇠약하다(애4:9), 흐르다(출3:8,레20:24, 겔20:6), 유출하다(레15:19). [명]백탁병자(삼하3:29), 유출(레15:25), 유출병(레15:2, 민5:2).
    구약 성경 / 41회 사용

    1329. 몸, 바사르(bâsâr) בָּשָׂר
    1. 살,  2. 살아있는 몸의 살,  3. 가축의 살코기 출 16:12
    발음(bâsâr)
    어원 / 1319에서 유래
    관련 성경 / 살(창 2:21, 시 27:2, 슥 14:12), 몸(창 2:24, 출 30:32, 레 14:9), 육체(레 17:11, 민 16:22), 혈육(창 6:12, 시 56:4), 생물(창 7:21, 민 18:15), 고기(창 9:4, 출 12:8, 레 16:27), 포피(창 17:14, 레 12:3), 하체(레 6:10), 육신(창 6:3, 신 5:26, 대하 32:8, 잠 14:30), 전부(사10:18).
    구약 성경 / 270회 사용

    * 1319. בָּשַׂר 

    1. 기뻐하다,  2. 피엘형 בִּשַּׂר   .기쁜 소식으로 즐겁게 하다
    발음 /  [ bâsar ]
    관련 성경 / 전하다(삼하 18:20, 사 41:27, 렘 20:15), 전파하다(삼상 31:9, 삼하 1:20), 소식을 전하다(대상 10:9), 선포하다(대상 16:23),
    소식(왕상 1:42, 삼하 18:26, 31), 공포하다(시 68:11).
    구약 성경 / 24회 사용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 12 지파가 진을 치고 있는 진중의 중심인 성막을 임재의 처소로 삼으셨기 때문에 이스라엘은 존귀하신 하나님의 거룩이 손상되지 않게  그들 역시 삶의 전반에 거룩이 요구 되었다 

    그래서 더러워진 자가 정결하게 되는 속죄를 위하여  5대 제사(번제, 소제, 화목제, 속죄제, 속건제) 제도를 가르쳤고 이어서 삶의 정결을 위해 정한 음식과 부정한 음식을 배우게 하셨으며(11장) 산모 정결법(12장)과 문둥병 정결법[13, 14장)을 명하셨습니다.
    레위기15장은 은밀한 성생활에서 유발되는 정상적인 유출 또는 비정상적인 유출에서의 정결법을 말씀합니다.

    여기서 유출이란 체내 분비물 유출을 말하는데 15장 전체를 놓고 보면 네 가지 분비물 유출로써 남자에게 관련된 두 가지와 여자에게 관련된 두 가지를 소개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또 정상적인 체내 분비물 유출인 경우와 비정상적인 유출로 구분합니다.
    남성의 경우 정상 유출은 15:16-18
    여성의 경우 정상 유출은 15:19-24에서 다루고 있으며

    남성의 경우 비정상적인 유출은 15:2-15에서 
    여성의 경우 비정상적인 유출은 15:25-30에서 다룬다.

    이것들은 모두 남녀 성생활과 관련된 유출이면서 생식기에서 일어나는 배출을 다루고 있다. 

    그런데 여기서 궁금한 것이 있다.
    성병으로 인한 비정상적 유출은 부정한 것이라고 하겠지만 자녀 생산을 위한 유출이나 혹은 남녀의 정상적인 성행위에서 나오는 사정(유출) 뿐만 아니라(15:16-18) 스스로 설정하는 오난이즘(자위. 창 38:9. 레 15:16)까지도 모두 부정하게 보며 물로 씻는 정결을 요구하는 것을 보면서 왜 하나님은 이렇게 드러내고 싶지 않은 은밀한 부분까지도 정결을 요구하시고 있는지 궁금하지 않을 수 없는데 이는 위생적으로도 자기 백성들의 건강한 삶을 위해 정결을 요구하신 것은 아닌가 생각된다.

    그러나 한편 분비물 유출과 관련하여 같은 내용을 다루고 있는 출애굽기의 말씀에서 유추해보면  분비물 사정[유출]이나 심지어 대변(똥) 기타 몸의 유출물로 자신이 부정하게 되지 말라 하시는데 (여기서 대변의 문제는 자신의 변을 자신의 눈으로 봄으로써 부정하게 되는 것이다] 이는 거룩한 전쟁을 앞두고 진을 더럽힌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당시 이스라엘 사람들의 경우 하나님을 만난다거나 전쟁에 출정하는 것 같은 중요한 일을 앞에 놓고 있을 때 여인을 가까이 하지 말라 하시는 것들이  모두 여기에 관련하여 이해하게 되는데 이는 당시 바알 숭배를 추구했던 이교도들과 정반대되는 것이다.

    이교도들은 자신들의 신전에서 신전 창기들을 통해서라도 성적 에너지 방출과 같은 분비물 유출을 통해 신인합일[神人合一]을 추구한 것에 반해 야훼 하나님의 백성들은 하나님을 만나거나 함께 하는 일을 앞두고 거꾸로 성적인 억제나 절제를 통해 정결을 도모하고 하나님과 함께하는 친밀성을 고양시켰던 것을 감안하면 분비물 유출을 다루고 있는 레위기 15장의 말씀들은 당시 만연한 이교도들의 우상숭배로부터 자기 백성을 보호하며 여호와 신앙의 순수성을 지키게 하신 방도로도 이해하게 된다(민 25:1-9).

    그런데 자기 백성들의 보건 위생적인 생활과 하나님과 함께하는  중요한 일을 위해 주신 이런 유출 관련 정결 법 및 거룩과 속됨을 구별하는 레위기의 많은 정결 법들이 예수님 시대에 이르러는 일반 백성들을 가장 극심하게 억압하는 율법으로 작용하게 되는데 예수님은 이에 대해 스스로 정결 법을 위반하는 행위를 하시면서 까지 이런 정결법의 굴레에 매여서 제대로 숨도 쉴 수 없는 당시 사람들에게 출구를 제시하신다. 

    그의 생애와 교훈과 사역을 보여주는 복음서에 보면 예수님은 문둥병자를 친히 손으로 만져 치유하심으로 자신이 스스로 부정한 자가 되시기도 하며(마 8:1-4) 12년간 혈루병[유출병]으로 고생한 여인이 자기의 옷자락을 만지는 것을 다 아시면서도 허용하시는 것을 통해 
    자신도 함께 부정한 자가 되시고(마 9:18-26) 심지어 죽은 지 며칠이 지난 나인 성 과부의 아들이 시체로 들어있는 부정한 상여의 관을 접촉하면서까지 죽은 자를 살려내시고(눅 7:11-17) 또 부정한 것들과 접촉하는 이러한 행위를 통하여 우리에게 매시야[그리스도]로 오신 그를 통하여 그리고 그 분 안에서 레위기가 말하는 모든 정결예법의 시효가 만료되었음을 보여주신다.

    그가 친히 부정한 것들에 접촉하는 것 뿐 아니라 부정한 자들이 자신을 만지고 접촉하는 죄인들에게 접촉당하심으로써 모든 부정한 자들을 정결케 하시는 새로운 길을 열어주신 것인데 구약에서 자기 백성에게 엄중한 정결법을 요구하신 하나님께서 인간이 결코 이룰 수 없는 정결의 자리에 이르게 하시기 위해서 친히 사람의 몸으로 찾아 오시고 율법 아래 나시어 이 모든 것을 이루어주셨다.

    흠도 티도 없는 가장 거룩하신 주님께서 나 같이 부정한 죄인을 정케 하시기 위해 나의 모든 부정을 한 몸에 뒤집어쓰시고 스스로 부정한 자가 되시어 십자가에 달리심으로 례위기 법전이 요구하는 모든 정결예법을 단 번에 완성해 주신 것을 감사드립니다.

    날 정결케 하시는 이 은혜를 힘입어 오늘도 삶의 현장에서 세상을 주님의 것으로 세워가는 일에 바르게 쓰임받도록 인도하여 주시옵소서.


    1. 부정한 곳에 접촉함으로 부정하게 되는 이차적인 경우(하루만 부정)는 제외하고 일차적으로 부정한 경우(7일 부정)를 몇 가지 언급하고 있는가?

      5가지;
      1) 유출병이 있는 자(1-12), 2) 설정함으로 부정을 입은 자(16-18), 3) 불결을 앓는 여인(19-24),
      4) 유출병이 있는 (남)녀(25-26, 27절은 남자를 가리킴), 5) 불결한 여인과 동침한 자에게 관한 것(32-33).

    2. 부정한 경우를 의미상으로 분류한다면 크게 두 가지로 나눌 수 있겠다. 어떻게 나눌 수 있을까?

      1) 실제로 불결하고 죄이기 때문에 부정; 남녀가 유출병이 있는 경우, 회복된 후 정결례를 행하기까지 부정함
      2) 죄를 상징적으로 가르치는 경우(출산이나 생리의 경우)나, 의식법상 부정하다고 간주되는 경우(설정);
      실제로 불결하거나 죄는 아니지만 그대로 하나님 앞에 나아오기에는 의식상으로도 문제가 있다고 여겨지는 경우, 일정 기간 부정함. 식사 도중에 화장실 얘기하는 것이나 어른들 앞에서 방귀를 뀌는 경우처럼 무슨 큰 죄가 되거나 나빠서라기보다는 의식상으로 그렇다는 말이다. 요즈음 아이들은 '생리적인 현상을 어떡하라고?' 하면서 대든다.

    3. 유출병이란 것은 구체적인 병명이 아니라 몸에서 비정상적으로 흘러나오는 병을 총칭하는 말이다. 여인의 유출은 19절부터 언급하고 있으므로 2-3절의 유출병은 남자의 병이다. 그렇다면 현대식으로 하면 무슨 병일까?

      성병(임질); 성병의 증상을 잘 모르기 때문에 대답을 잘 못할 것이다. 현대인은 성병이라면 으레껏 매독이나 에이즈를 떠올리겠지만 매독은 신대륙을 발견하고 정복자들이 날뛰던 시대에 본격적으로 창궐하기 시작했고 에이즈는 최근에야 등장한 것이다. 성경시대에는 임질이라고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현대의 성병과 비교하면 병 축에 들지도 않는 것이지만.

      매독만 해도 좋은 치료약이 발명되었기 때문에 요즈음은 잠잠한 듯 싶으나 한 때는 공중화장실은 성병 치료를 위한 안내문이 도배되다시피 했었다. 무서운 질병이었다. 자기만 해로운 것이 아니라 후손에게까지 치명적인 손상을 입히는 무서운 질병이었다. 두뇌가 없는 아이처럼 심각한 장애를 유발시킨다. 이름은 제일 아름다운지 모른다. VD라고 하는 데 비너스의 병이란 뜻이다. 우리말로 매독이란 것도 매화꽃의 독이란 말로 미화되어 있다. 위대한 예술가들이 단명한 원인으로 곧잘 지목되는 병이다. 이제 더 무서운 AIDS로 대체되었다. 정신적으로, 육체적으로 건강한 부부관계를 유지하는 것만이 예방을 위한 최선의 길이다.

    4. 부정한 자가 되면 옷을 빨고 몸을 씻고 저녁까지 기다려야한다. '옷을 빨고'란 표현이 몇 번 나오는가?
    물이 그리 흔한 곳도 아닌 데 이렇게 열심히 빨 수 있었을까?

      10번 (5, 6, 7, 8, 10, 11, 13, 21, 22, 27); 부정한 짓을 않으면 이렇게 많이 빨 일이 없지! 일단 부정하게 되면 무조건 빨아야하고 몸을 씻어야한다. 바리새인들이 손씻지 않는 제자들과 싸움을 했던 것을 보면 이것이 얼마나 중요하게 여겼는 지 알 수 있다. 우리는 우리 옷을 어디에 빨아야 하는가? 어린양의 피에 빨아야한다
      (계 2:4, 3:7, 22:14).

    5. 왜 저녁까지 부정하다고 할까?

      하루의 시작이 저녁이기 때문이다. 유대인들에게 저녁은 하루의 끝이기도 하고 시작이기도 하다. 해가 지는 것을 보면서 드디어 나의 부정이 끝나는구나 라는 느낌을 가지게 된다면 새로운 저녁을 맞는 느낌이 우리와 좀 다를 것 같다. 아마 저녁에 중요한 일이 많았을 것이며 즐거운 마음으로 잠자리에 들 수 있었을 것이다. 분을 품어도 저녁까지 품지 말라던가!

    6. 유출병과 문둥병을 비교해보면?

      유출병;내부적인 질병이지만 겉으로 봐서(타인이 보기에)는 멀쩡하다.
      문둥병;내부적인 질병이면서 겉으로 확연하게 드러난다.
      겉과 속을 다 정결하게 유지하라는 분부이다. 보이는 죄도 무섭지만 남이 알지 못하는 나 혼자만이 아는 것까지 정결케 하여야한다.

    7. 유출병이 있는 자는 전염병을 옮기는 병원균이나 마찬가지다. 이 사람은 주변을 온통 부정하게 만들 수 있다. 이 사람으로 말미암아 이차적으로 부정하게되는 경우는 다음과 같다. 무슨 느낌이 드는가? 혹은 이와 관련하여 무엇이 생각나는가?

      1) 유출병 있는 자의 침상에 접촉하는 자
      2) 유출병 있는 자의 몸에 접촉하는 자
      3) 유출병 있는 자의 침이 묻은 자
      4) 유출병 있는 자의 몸 아래 닿았던 것에 접촉한 자
      5) 그런 것을 옮기는 자
      6) 유출병 있는 자가 물로 손을 씻지 않고 만진 자
      7) 유출병 있는 자가 만진 질그릇과 목기

      이런 곳에 접촉하더라도 깨달았을 때 부정하다. 유출병은 겉으로 드러나는 병이 아니다. 본인이 부정하다고 자수하지 않으면 주변 모든 사람을 부정하게 만들 수 있다. 알지 못하고 깨닫지 못하면 부정한 것이 아니다(5:3).

      가급적이면 꼼짝 않고 있는 것이 좋겠다. 돌아다닌다면 주변을 온통 부정하게 만들어버린다.
      차라리 부정하지 않도록 미리 노력하는 것이 좋겠다. 누구처럼 고백성사가 싫어서 나쁜 짓 하지 않는 것처럼.

    8. 아무리 유출병이 있는 사람이라도 만져야할 사람이 있다면 어떡하나? 애기 젖이라도 먹여야하면 어떡하지?

      손을 씻으면 된다.(11) 세심하게 신경을 쓰고 계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다. 너무나 인간적인 하나님이시다!

    9. 이렇게 부정하게 된 물건이나 장소는 어떻게 하나?

      우선 병자가 나아야된다.(26) 그 다음에는 언급이 없다? 저녁까지 부정!

    10. 유출병이 깨끗해지면 정함을 받는 절차는 무엇인가?

      1) 7일을 계산하여 옷을 빨고 흐르는 물에 몸을 씻을 것이요(13)
      2) 제 8일에 산비둘기 둘이나 집비둘기 새끼 둘을 취하고 그 하나는 속죄제로, 하나는 번제로 드릴 것(14)

      다른 속죄제와 비교하면 극히 간단하다. 가난한 자가 드리는 제사를 드리라는 것이다. 온 천지를 부정하게 만드는 자신의 부정함에 비하면 정결례는 너무 간단하다.

    11. 설정이란 원어의 의미는 남녀간의 정상적인 성관계를 말한다.
    부부간의 성행위에서의 설정도 왜 부정하다고 할까?

      원래 부부의 성은 하나님께서 주신 복이었지만 범죄한 이후 인생 자체가 저주 아래 놓여버린 탓이다. 어떻게 보면 가장 동물적인 행동이기에 종교의식상 부정한 것으로 취급한 것이다. 하나님께 가까이 하는 자는 여자를 가까이 하지 말라는 것이다(삼상 21:4, 출 19:15). 주 안에서 거듭난 우리는 그렇게 부정하게 여길 필요가 없다. 사람을 부부간에 그렇게 만드신 분이 하나님인데? 사람을 남자와 여자로 만드신 분도 하나님이시고 그 둘 사이에 엄청난 비밀을 묻어두신 분도 하나님인데? 처음에는 그랬지. 어쨌든 범죄의 무서움을 말하고 있다. 모든 복이 일순간에 저주로 바뀌어 버린 것이다. 예수님께서 다시 원래대로 돌려놓으셨다.

    12. 유출병이 있는 남자와 유출이 있는 여자 중에 어느 쪽이 더 부정할까? 무슨 근거로?

      남자; 유출병이 있는 남자가 만진 것(물로 손을 씻지 않고 만진 자, 유출병 있는 자가 만진 질그릇과 목기; 11-12)은 부정하게 되는 반면에 유출이 있는 여자가 만진 것에 대한 언급은 없으며, 정하게 되는 과정에서 여자는 '옷을 빨고 흐르는 물에 몸을 씻으라'는 말이 없어서 남자가 더 부정한 것 같기도 하다. 여자의 유출은 대체로 정상이지만 남자의 유출은 비정상적인 현상이기 때문에 더 죄가 많은 것이다.

    13. 생리로 인해서 부부관계는 최소한 얼마간 금지되어야 하는가?

      칠일(19); 이 기간에는 임신이 되지 않는다고 한다. 혹시 된다면 비정상적인 아이가 태어날 가능성이 많단다. 이런 점을 감안해서 주신 말씀인가?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산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어도 그런 의식이 항상 살아 있기가 쉽지 않다. 유대인들은 이런 규정들로 인하여 하나님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도록 만들어 놓았다. 그래도 하나님을 잊어버리고 우상을 섬겼다는 것은 정말 불가사의다. 아니면 이런 하나님을 고의로 버렸는가?

    14. 동침하다가 생리의 시작을 알게된 경우는 어떻게 되나?

      생리중인 여인과 동침한 자는 백성 중에서 끊쳐지리라(레 20:18)는 규정과 비교해보면 24절(여인과 동침하여 그 불결에 전염되면 칠 일 동안 부정할 것)이 바로 이런 경우를 가리키는 경우일 것이다.

    15. 이렇게 세밀하게 부정한 경우를 언급하면서 부정해서는 안된다고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부정한 상태로 그들 가운데 있는 하나님의 장막에 나아옴으로 죽임을 당하지 않게 하기 위함이다. 어른을 모시고 살면 이런 제약이 많은 법이다. 그럼 어떻게 하나? 나 편하라고 어른을 버려? 그런 세상이 되어가고 있는 것 같다. 하나님을 그렇게 생각하면 이것은 엄청난 손실이다. 달리 설명하면 이런 과정을 통해서 하나님을 결코 잊지 말라는 당부라고 하겠다.

    16. 여자의 생리현상을 부정하다고 하면 되나?

      실제로 부정해서 부정한 것이 아니라 종교의식상으로 그렇다는 말이다; 부부간의 설정과 출산도 부정하다고 하는 판이니 서럽게 여길 필요는 없는 것 같다. 생명의 상징인 피를 흘린다는 점과 자신의 느낌으로도 정하다는 느낌을 갖지 못하는 심리적인 이유도 있을 것이다. 실제로 그런 느낌을 가질 이유가 없다. 귀신과 관련된 일(제사, 배타는 일)에 여자를 뺀 이유도 이런 식으로 부정하다고 여긴 탓이 아닐까? 어떻게 보면 종족보존이라는 사명을 위하여 여성이 다소간 희생당한 측면도 있고 보호받은 측면도 있는 것 같다.

      '인자야 이스라엘 족속이 그 고토에 거할 때에 그 행위로 그 땅을 더럽혔나니 나 보기에 그 소위가 월경 중에 있는 여인의 부정함과 같았느니라' (겔 36:17)

    17. 부정하게 되는 경우를 너무나 상세히 기록하고 있다. 부정함을 방지하기 위한 노력을 엿볼 수 있다. 하나님께서 부정함에 대한 거부감이 어떤지를 알 수 있다. 식구 중에 이렇게 깔끔하고 까다로운 사람이 있으면 얼마나 피곤할까? 이런 말씀을 읽으면서 우리가 지녀야할 태도는 무엇인가?

    예수님께 감사; 예수께서 이런 규정을 충족시키시고 우리를 하나님 앞에 깨끗한 존재로 세우시지 않았다면 우리의 삶도 얼마나 고달플까? 부정에 대한 이런 모든 의식법적 규례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충족되었으므로 더 이상 의미가 없다. 그 속에 담긴 하나님의 뜻과 영적 교훈을 잘 알아서 수용해야한다


    남자에게 부정한 유출병(1-2)  

    유출병은 일종의 성병으로 정액이나 더러운 피가 몸에서 흘러 나오는 즉 방탕한 성생활의 결과로 생기는 질병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으로 선택된 이스라엘은 몸과 마음이 깨끗해야 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생활 또는 성기능도 항상 정결해야 하고 정상적으로 유지해야 했습니다(1-2).

    유출병자와 접촉된 자와 기구 정결례(3-12) 

    하나님은 유출병을 앓는 병자 뿐 아니라 유출병자와 접촉한 침상, 의자, 안장 등도 다 부정하며 그 부정한 물건과 접촉한 사람까지도 부정하다고 규정하셨습니다. 유출병자로 인하여 부정하게 된 자는 그 옷뿐만 아니라 그의 몸도 물로 씻어야 합니다(3-12) 

    유출병자의 정결 의식(13-15)  

    유출병에서 치료함을 받은 사람은 자신의 몸을 씻고 옷도 7일 간에 걸쳐 빨아야 합니다. 이는 병균이 옷에 붙어 있다가 옷을 통해 다시 옮겨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유출병이 그치고 성결의 기간을 마친 후 자신의 부정을 속함받기 위해 제물을 제사장에게 가져가고 제사장은 그를 위해 속죄제와 번제를 드려야 했습니다(13-15). 

    설정한 자의 정결 의식(16-18)


    설정이란 말은 남자의 정액이 분비되는 것을 말합니다. 남녀의 성관계를 통한 정액의 방출도 의식적으로 부정한 것으로 간주되었습니다.
    설정을 한 자는 저녁까지 기다린 후 몸과 옷을 씻음으로 부정을 제거했습니다. 정수가 묻은 옷이나 가죽은 물에 빨았습니다. 동침한 남녀는 물로 씻도록 했습니다(16-18).

    여인의 유출 정결례(19-33)


    여자의 월경은 피와 연관되어 의식적인 불결로 간주되어 월경 중에 있는 여인과 접촉한 자와 그 여인이 누웠던 자리와 앓았던 자리도 부정한 것으로 간주되어 옷을 빨고 물로 씻어야 했습니다. 그 여인은 부정의 기간이 지난 후 비둘기 두 마리를 속죄제와 번제를 드려 속죄해야 합니다(19-29).

    일단 부정해졌던 자가 공동체의 일원으로 복귀하려면 속죄제를 드려 정결케 되고 난 뒤 일정 기간의 연단을 거치고 난 후에야 비로소 공동체의 일원이 될 수 있었습니다. 그것은 부정해진 사람이 그냥 공동체 안에 머물게 되면 그 곳에 속한 모든 사람을 부정케 만들어 그들을 죽음으로 내몰기 때문이었습니다(30-31). 

    죄를 범했을 경우 먼저 하나님께 회개하고 용서를 빌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죄악이 온 교회와 성도들을 더럽히게 됩니다. 부정한 병과 규례를 통해 우리는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당신의 백성들도 거룩할 것을 요구하신 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32-33). 

    주께서 주신 오늘! 항상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고 있음을 명심하고 부정한 모습들을 살펴 언제 어디서나 주 안에서 정결하게 살아가길 원합니다. 




    __________________ 레위기 14장 / 정결케 되는 날(2절)

    03-24-2023(금) 사순절 제27일

    문둥 환자의 정결케 되는 날의 규례는 이러하니 곧 그 사람을 제사장에게로 데려갈 것이요.
    These are the regulations for the diseased person at the time of his ceremonial cleansing, when he is brought to the priest:

    6883. 차라아트(tsâraʽath)  צָרַעַת

    - 하나님께서 치심으로 얻은 병 즉 하나님께서 치셨다. 얻어 맞았다!

    정한 산 새 두 마리 -

    여기서 '정한새'는 율법적으로 부정하다고 판결받은 새 종류 이외의 모든 들새를 지칭한 것이다(11:13-19).
    완치된 문둥병자의 정결 예식을 위해 준비된 정한 산 새 두 마리 중 한 마리는 죽여 그 피를 취하고, 다른 한 마리는 '백향목 나무가지에 우슬초 줄기와 더불어 홍색실로 묶어'(Mishna) 그 죽은 새의 피에 몸을 적신 후 넓은 들판으로 날려 보냈다.
    한편 여기서 피를 흘리며 죽어간 새는 일차적으로 문둥병자의 부정을 속하기 위한 희생 제물로서의 의미를 갖지만(Keil), 영적으로는 범죄하여 죽을 수 밖에 없는 인류의 죄짐을 대신 지고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그리스도의 대속 사역을 상징한다(The Preacher's Homiletic Commentary, p. 182).

    반면 들판으로 날려보낸 새는 일차적으로 문둥병자가 그 병과 부정에서 해방되어 자유케 된 것을 의미하며(Lange), 구속사적으로는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로 말미암아 모든 성도들이 죄와 사망으로부터 해방되어 영생을 얻게 될 것을 상징한다(Matthew Henry).

    백향목 -

    레바논의 특산물로서 위로 곧게 뻗어 품위가 있어 보이며, 강하여 좀이 잘 먹지도 않고 잘 썩지도 않을 뿐만 아니라 광택과 향기가 아름다우며 오래 보존되는 특징을 가진 귀한 나무이다.
    이같은 나무가 문둥병자의 정결 의식에 특별히 사용된 것은 문둥병이 죄의 부패성을 상징하는 반면, 이 백향목은 죽음을 극복한 생명의 능력 또는 생명의 영속성을 상징하기 때문이다(Keil Delitzsch, p. 386).

    홍색실 -

    '홍색'은 붉은 피 색깔을 나타낸다. 따라서 일차적으로 이 홍색실은 그 건강한 피 색깔로 인해 '회복된 혈색'(Matthew Henry, Lange), 혹은 '활기찬 생명의 신선함'(Keil)을 의미한다. 나아가 구속사적으로 본절의 홍색실은 특별히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말미암은 구원의 능력을 상징한다(수 2:18).

    우슬초 -

    고대 근동 지역의 담벽에 흔히 자라는 박하초 식물로 그 냄새가 향기롭다(왕상 4:33).
    그러므로 이것은 일차적으로 문둥병자가 그 병의 악취로부터 해방되었음을 나타내기 위하여 사용되었다고 볼 수 있다(Lange, Matthew Henry).
    나아가 성경에서 이 식물은 주로 희생제물의 피를 뿌릴 때 사용되었는테, 죄 및 부정으로부터 정결케 하는 능력을 상징한다(시 51:7).
    한편 후일 히브리 기자는 백성을 대표한 모세가 하나님과 언약을 체결한 후, 이스라엘 백성을 정결케 하는 예식 때(출 24:6-8) 물과 피와 붉은 양털 및 홍색실을 취하여 뿌렸다는 사실을 증거함으로써, 하나님께서는 바로 문둥병자와도 같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깨끗케 하여 당신의 자녀로 삼으셨다는 놀라운 복음을 설파하였다(히  9:19, 20).



    거룩하게 되는 방법
    첫째는 제사를 통하여
    둘째는 제사장을 통하여 - 하나님의 인정에 의한 것

    정결케 되는(2893) 토호라 [ ṭohŏrâh ] טָהֳרָה

    1. 청정,  2. 세정
    관련 성경 / 정결(레 13:7, 15:13), 깨끗함(레 13:35), 정함(레 14:32), 정결하게 함(민 6:9, 대상 23:28, 겔 44:26), 결례(레 14:23, 느 12:45)구약 성경 / 13회 사용

    14장의 문단 구성

    1-20. 나병의 정결케되는 규례의 순서
    21-32. 가난한 자의 정결케 되는 규제
    33-53. 집안 나병과 그 처치
    54-57. 결론

    문둥병 환자의 정결 의식

    범죄한 백성들에게 제사를 통해 속죄의 길을 열어 주신 하나님은 문둥병으로 인해 공동체에서 제외된 자들에게도 성결 의식을 통해 복귀의 가능성을 열어 주셨습니다.
    문둥병이 죄의 결과로 인식되었다는 점에서 본장에 나타난 문둥병 정결 의식은 속죄 의식을 상징한다고 하겠습니다.
    문둥병자를 위한 정결 의식을 위해 산새 두 마리, 백향목, 홍색실, 우슬초 등을 준비합니다. 
    이 준비물들은 구속사에서 볼 때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을 예표합니다. 
    산새 두 마리는 각각 대속의 제물이 되신 그리스도와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상징합니다. 
    백향목은 성경에서 생명과 번성을 의미하며 그리스도 안에서 성도들에게 주어지는 영생과 축복을 말합니다. 
    그리고 홍색실은 십자가에서 흘리신 그리스도의 보혈을 의미하며, 물을 뿌려 정결하게 하는 우슬초는 그리스도를 통해 모든 죄가 씻겨졌음을 상징합니다.
    문둥병 환자의 정결 의식을 통해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을 예표합니다.

    문둥병은 당시 의술이 발달하지 못했던 시대에는 가장 무서운 병이었습니다.
    특히 전염되는 특성 때문에 모든 사람들로부터 멸시당하고 배척받았지요.
    그러나 하나님은 그런 문둥병자에게도 정결함을 받고 공동체에 복귀할 수 있는 기회를 주셨습니다.
    이는 죽을 수밖에 없는 죄인에게도 생명으로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보여 주신 것입니다.
    아무리 큰 죄인이라도 하나님께 나와 회개하면 용서함을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세상에서의 삶에서 죄에 빠졌을 때도 낙심하지 말고 간절한 마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면 용서받고 위로함을 받을 수 있습니다. 


    표준새번역
    “사람들이 악성 피부병에 걸린 환자를 제사장에게 데려가면”

    그 당시 나병은 천형(天刑)으로서 하나님께 대한 죄의 결과였습니다.
    그러기에 부정한 나병환자는 진 밖에서 혼자 따로 살아야만 했습니다.
    하지만 오늘 본문에서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나병환자 스스로가 제사장에게 가는 것이 아니라 공동체의 사람들이 그를 데리고 제사장에게 가야한다’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역으로 이야기 하자면 비록 천벌을 받아 징계를 받고 있는 죄인일지라도 신앙공동체는 그를 외면할 것이 아니라 늘 관심을 가지고 돌보아야한다는 것입니다.

    우리 주변에도 중죄를 짓고 감옥에 수감되어 격리되어 있는 그리스도인들이 있습니다.
    물론 ‘어떻게 그리스도인으로서 그런 일을 저지를 수 있나!’ 하며 그를 정죄하며 비난의 화살을 퍼부을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의 삶에서는 주님을 비롯한 우리 그리스도인들 모두의 이름이 걸려있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그런 뉴스를 접할 때마다 범인(凡人)의 경우보다 더 분개하곤 합니다.

    하지만 오늘 본문을 통해 하나님께서는 ‘천형(天刑)을 받은 큰 죄인일지라도 공동체가 그를 외면해서는 안 된다’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가 회복될 때까지 관심을 가지고 돌보아야 한다’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죄는 미워하되 사람은 미워하지 말고 끝까지 품어야 한다는 것’이 하나님의 본심이시기 때문입니다.

    우리 모두는 다 하나님 앞에서 죽을 수밖에 없는 죄인이었습니다.
    하지만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님께서는 그런 우리를 외면하지 않으셨습니다.
    죄인 된 우리에게 관심을 가지시고 낮고 낮은 이 땅에 찾아 오셨습니다.
    그리고 우리 영혼 돌봄을 위해 자신의 몸이 십자가에서 갈기갈기 찢기시는 것도 마다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런 주님의 사랑이 있었기에 죄인이었던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라는 신분을 얻게 된 것입니다.

    그런 우리이기에 비록 우리 눈에 큰 죄를 지은 그리스도인일지라도 우리는 결코 그를 외면해서는 안 됩니다. 정죄하며 그를 마음으로부터 완전히 밀어내서도 안 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회복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반드시 죄로부터 그를 회복시켜주시는 ‘사랑과 자비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우리 스스로가 그 일에 증인이지 않습니까? 그러기에 우리는 죄에 빠졌었던 그리스도인을 계속 정죄함으로 그를 우리 마음으로부터 분리해낼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회복시키실 그 날을 기대하며 지속적인 관심과 사랑으로 그에게 다가가야 합니다.

    10절부터 20절까지는 나병이 나은 자가 드리는 네 가지 제사 - 속건제, 속죄제, 번제, 소제 - 의식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속건제는 어떤 사람이 하나님 혹은 다른 사람에게 져야할 의무에 대해 부적합한 행위를 했거나 그 의무를 거부했을 때 요구되는 제사입니다. 그에 대한 잘못을 용서받기 위해 드려지는 제사가 바로 속건제입니다. 이와 더불어 나병환자의 정결예식에는 속죄제가 포함되었습니다. 나병은 하나님의 진노에 의한 것이었기에 정결해지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용서가 필요했습니다. 그러기에 반드시 속죄제가 드려져야 했습니다. 이와 관련하여 속건제와 속죄제가 저지른 과거 죄에 대한 청산 절차라면, 번제와 소제는 이제 하나님께 새롭게 헌신하고 봉사할 것을 다짐하겠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본문의 제사란 오늘 날 우리가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의 원형입니다. 우리 또한 어떤 의미에서는 영적 나병환자 아닙니까? 거룩하신 하나님의 자녀로서 성결한 삶을 살아가야함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그토록 싫어하시는 죄를 아직도 반복해서 저지르고 있으니까 말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주일을 부활하신 주님 안에서 우리가 누리게 된 영생을 기뻐하는 축제일로만 생각할 것이 아니라, 죄에 대해 통회하며 하나님께 용서를 구하는 속건제와 속죄제의 날로 기억해야 합니다. 더 나아가 죄에 대한 통회함을 넘어 하나님의 자녀다운 성결함으로 새로운 한 주간을 살아갈 것을 다짐하는 결단의 날로 삼아야 할 것입니다. 그를 통해 다시금 겸비함과 거룩함을 회복할 수 있게 되기 때문입니다.

    21절부터 32절까지는 가난한 나병환자가 낫게 된 후 드리는 제사에 대한 소개가 있습니다. 특별히 제물과 관련, 우리는 본문 내용을 통해 그가 상대적으로 값이 덜 나가는 제물로 제사를 드릴 수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일반인들과 제물은 달랐을지라도 하나님께서는 그에게도 제물을 요구하셨습니다. 가난한 자라고 해서 면제해 주시지 않으셨습니다. 그것은 가난한 자에 대한 하나님의 속 깊은 배려이셨습니다.

    제사는 오늘날의 예배로, 제물은 헌물에 비유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헌금을 통해 모든 것이 주님께로부터 온 것임을 다시금 기억하게 되고, 마음에 새기게 됩니다. 이는 곧 우리가 물질에 빼앗겼던 마음을 다시금 주님께로 모으게 하는 구심점 역할을 합니다. 가난하면 오히려 돈에 더 집착하게 되고, 돈의 마력에 (魔力) 끌려가기 십상입니다. 그러기에 하나님께서는 상대적으로 값이 덜 나가는 제물일지라도 가난한 자에게도 제물을 요청하셨던 것입니다. 가난한 자를 더 가난한 자리로 이끌어 가시고자 함이 아니라 헌금을 통해 그의 심령을 하나님 나라로 채워주심으로, 돈의 마력에 빠지지 않도록 하시기 위한 특별하신 배려였던 것입니다.

    둘째 단락인 33절부터 53절까지는 집에 발생한 나병 색점으로부터 정결하게 되는 지침이 소개되고 있습니다. 이는 이스라엘 백성이 약속의 땅에 들어가 거주하는 집에서 나병이 발생했을 경우 이를 처리하는 규례입니다. 약속의 땅에서 지은 집도 나병 발생의 여지가 있다는 것입니다.

    이는 흡사 오늘 우리 그리스도인의 모임인 교회와 비슷합니다. 신앙 공동체인 교회는 구원을 받은 사람들의 모임입니다. 즉 약속의 땅에 들어선 사람들의 집합체입니다. 하지만 죄라는 것이 언제 그 공동체에 파고들지 모릅니다. 그러기에 교회공동체의 지체인 우리 각 자가 먼저 죄에 대해 깨어있어야 합니다. 아울러 교회라는 집 또한 노출된 죄로부터 공동체를 정화해 나갈 수 있는 순결의 능력을 잃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오늘 함께 나누신 말씀들을 기억하심으로, 오늘 한 날을 주님 안에서 넉넉함과 겸비함, 헌신과 순결의 삶을 살아가시는, 사랑하는 우리 교우님들 되시기를 소원합니다.



    __________________ 레위기 13장 / 제사장이 진단하여(3절)

    03-23-2023(목) 사순절 제26일

    제사장은 그 피부의 병을 진찰할찌니 환처의 털이 희어졌고 환처가 피부보다 우묵하여졌으면 이는 문둥병의 환처라 제사장이 진단하여 그를 부정하다 할 것이요.
    The priest is to examine the sore on his skin, and if the hair in the sore has turned white and the sore appears to be more than skin deep, it is an infectious skin disease. When the priest examines him, he shall pronounce him ceremonially unclean.

    레위기서의 목적은
    첫째, 거룩한 백성
    둘째, 거룩한 나라

    거룩한 백성은 거룩한 삶이 요구됩니다.
    거룩한 삶을 위하여
    1-10장 / 제사법
      1-7장 : 제사의 방법과 규례
      8-10장 : 제사장을 위한 규례

    11-16장 / 정결법
      11장(47절) : 음식에 대한 것
      12장(8절) : 산모의 출혈
      13장(59절) : 나병
      14장(57절) : 나병
     
    17-27장 / 성결법

    13장 - 나병의 성격
    14장 - 나병의 정결 방법(구원의 문제)

    문둥병의 네 가지 특성(성격) / 문둥병은 죄의 모형으로 생각

    6883. 차라아트(tsâraʽath) צָרַעַת

    1. 나병
    2. 레위기 13:2
    3. 민수기 12:10.
    구름이 장막 위에서 떠나갔고 미리암은 문둥병이 들려 눈과 같더라 아론미리암을 본즉 문둥병이 들었는지라.
    발음 / 차라트(tsâraʽath)
    어원 / 6879에서 유래
    관련 성경 / 나병(레 13:2, 왕하 5:3, 대하 26:19)
    구약 성경 / 35회 사용

    * 6879. צָרַע 

    1. 몹시 괴롭다
    2. 푸알분사형 ׃מְצֹרָע 나병
    발음 / 차라(tsâraʽ)
    관련 성경 / 나병환자(레 13:44, 45, 22:4, 민 5:2, 삼하 3:29, 왕하 5:1, 7:3,8, 15:5), 나병(출 4:6, 레 14:3, 왕하 5:27).
    구약 성경 / 20회 사용


    부정(2930) 타메 טָמֵא 

    1. 불결하다,  2. 니팔형 נִטְמָא. 분사 복수형 נִטְמְאִים : 에스겔 20:30, 3. 민수기 5:13
    발음 / 타메(ṭâmêʼ)
  • 관련 성경 / 부정하다(레 11:25, 민 19:14), 더럽히다(민 6:12, 시 79:1, 겔 22:3), 더러워지다(레 18:25, 시 106:39, 미 2:10), 부정하게 하다(레 22:5),더럽다(왕하 23:10,13, 사 30:22
    [명] 부정(레 15:32, 5:3)
  • 구약 성경 / 163회 사용
  • 불결하다, 더럽혀지다, 오염되다, 타락하다, 부정하다, 부패하다, 모독하다[특히 제례상 불결한 의미로 쓰임],
    레 15:32, 18:20, 23.《반》 טָהַר 레 11:24이하.



    악성 피부병과 유출병에 대한 엄격한 조치는 거룩한 창조질서 회복에 그 목적이 있어

    문둥병(나병)이 아닌 악성 피부병(레위기 13~14장)

    레위기 13~14장은 표면에 발생한 악성 번식의 진단과 그 처리 방식에 대한 규정이다. 13장은 사람의 피부에 발생한 악성 번식들의 증상과 진단법이 설명되고 14장은 그로부터 정결함을 되찾는 복잡한 절차들로 채워진다. 먼저 두 가지 이유에서 ‘문둥병’(한글개역) 혹은 ‘나병’(개역개정), 즉 ‘한센병’이라는 번역은 오류다. 첫째, ‘문둥병/나병’이라 번역된 히브리어 단어 짜라아트(tsa-ra-at)는 ‘벽이나 물건의 표면에 번지는 악성 곰팡이’라는 뜻으로도 쓰인다. 벽이 문둥병에 걸릴 수는 없으니 짜라아트를 ‘문둥병/나병’으로 옮기는 것은 적절치 않다.

    둘째, 사람의 피부에 발생된 짜라아트의 증상들은 나병(한센병)과는 거리가 멀다. 많은 학자들이 지적한대로 사람의 피부에 나타난 짜라아트는 불에 덴 피부에 나타나는 증상을 포함해(레 13:24~28) 매우 다양한 양상의 피부병들을 가리킨다. 대표적인 증상으로는 피부가 눈처럼 하얗게 일어나며 피부 발진(색점)으로 붉게 부풀어 오른 종기, 전염성이 있는 피부 발진, 머리털이 빠지며 생기는 머리의 피부염을 비롯한 피부 질환들이 있다. 따라서 우리는 편의상 ‘나병’이라는 말을 사용하겠지만, 사람 피부의 짜라아트는 악성 피부병, 건물이나 사물의 표면에 나타나는 짜라아트는 악성 곰팡이로 해석하는 것이 옳다. 그러나 이러한 악성 표피 질환은 보건위생학적인 부정결이 분명하나 그보다 더욱 중요하게는 제사장에 의해 제의적인 부정결로 판정된다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

    악성 피부병과 악성 곰팡이 증상들

    악성 피부병, 즉 나병의 증상들 중에 대표적인 것이 피부가 군데군데 하얗게 변하는 피부 발진인데 이때는 털도 덩달아 희어지기 때문에 마치 피부에 눈이 내린 것처럼 보이게 된다. 예를 들어 저주를 받은 미리암(민 12:10)과 나아만(왕하 5:27)에게서 공통적으로 나병의 전형적인 증상으로 “나병이 발하여 눈같이 되었다”라는 표현이 사용된다. 일단 나병의 증상이 발견되면 제사장이 악성 여부를 판정하는데 현대 의학적 방법으로 표현하자면 질환의 양성과 음성을 판정하는 것과 비슷하다. 음성 판정이 내려지면 추방을 면하고 자신의 거처에서 일련의 정결 의례를 치러야 하지만, 악성 판정이 내려지면 그 즉시 추방된다. 여기서는 지면상 악성 피부병과 악성 곰팡이의 종류들과 증상들을 설명할 수 없다. 이 증상들은 대체로 다음과 같은 종류들로 나뉜다: (1)나병증상과 진단(13:2~17); (2)치료된 종기의 감염(13:18~23); (3)화상과 피부 감염(13:24~28); (4)옴(13:29~37); (5)어루러기(13:38~39); (6)비정상적 대머리(13:40~44). 이것들에 대해서는 필자의 저서 <레위기의 신학과 해석>을 참고하라. 건물벽이나 옷, 가죽 등의 사물 표면에 발생한 악성 곰팡이는 청색 얼룩점이나 홍색 얼룩점 여부에 의해 판정된다. 악성 번식의 진단과 판정, 그리고 정결 절차는 다음과 같이 정리해볼 수 있다. <표 참조>

    한편, 나병에 걸린 사람의 피부는 마치 송장과 같다(민 12:12). 즉, 나병은 죽음에 속한 증상이므로 부정하다. 또한 나병과 송장의 연관성은 시신과의 접촉으로 부정결해진 사람을 위한 정결 규례(민 19:1~13)와 나병 환자의 정결 규례(레 14:4~7)의 유사성을 통해 암시된다. 마찬가지로 악성 곰팡이가 핀 건물이나 사물 역시 무덤과 그 안에 있는 물건을 연상케 한다.

    사람의 경우 최종적으로 악성 번식으로 판정되면 추방된다. 그는 즉각 진 밖으로 추방되는데, 병이 완치된 후에는 진영 내로 복귀가 가능하다. 다만 그때에는 네 단계에 걸친 매우 까다롭고 복잡한 정결 절차가 요구된다(레 14:1~32). 그것에 대한 상세한 도표와 설명도 필자의 책을 참고하라.

    유출병들과 정결례(레위기 15장)

    정결법의 마지막 주제는 남녀 생식기에서 발생하는 다양한 유출병이다.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생명의 기운이자 씨앗인 피와 분비물, 그리고 정액의 유출은 곧 생명이 빠져 나간다는 의미다. 신체의 유출은 생명에서 멀어지고 죽음에 가까워지고 있다는 신호이기에 부정하게 여겨졌다. 유출병을 다룬 레위기 15장은 크게 남성의 만성 유출과 설정(1~18절), 그리고 여성의 만성유출과 월경(25~30절)으로 나뉜다. 한편, 유출병으로 인한 부정결의 이차, 삼차 감염의 양상과 그것에 따른 조치는 굉장히 복잡하다(필자의 저서의 도표를 참고하라).

    (1)남자의 만성 유출과 설정(1~18절): 남자의 성기로부터 발생하는 유출은 정액 유출과 만성 비뇨기 질환에 의한 유출로 나뉜다. 첫 번째 유출병인 몸(즉, 성기)에서 액체가 흘러나오는 증상(3절)은 성기로부터 분비물이 나오는 임질과 같은 성병일 가능성이 있다. 두 번째는 성기에 분비물이 끼어 배뇨에 지장을 주는 증상으로 볼 수 있다. 이처럼 비뇨기 질환으로 인한 유출은 장기간 지속되는 것이 특징이다. 유출병을 앓던 남자의 유출이 중단되면 그날로부터 7일을 기다린 후에 옷을 빨고 목욕을 한다. 그리고 8일 째에 그는 성소에 올라가 속죄제와 번제로 비둘기 두 마리를 바친다. 여기서 핵심은 속죄제인데, 그는 유출병으로 인해 그 자신뿐 아니라 성소 역시 더럽혀졌기에 속죄제의 피로 그러한 오염을 씻어낸다. 한편, 남자의 성기로부터의 설정은 두 가지로 나뉜다. 몽정처럼 불가항력인 설정과 정상적인 성관계에 의한 설정이다. 두 경우 모두 하룻동안 부정케 된다. 당일에 목욕을 한 뒤 저녁까지 기다렸을 것이다(18절).

    (2)여자의 만성 유출과 월경(19~24절): 여자의 자궁 출혈 또한 두 가지로 나뉜다. 하나는 매달 생리적 현상으로 찾아오는 월경과 다른 하나는 비정상적으로 계속되는 자궁 출혈이다. 월경이 찾아오면 여자는 7일간 부정한 상태로 지낸다. 이 기간은 대략 여성의 평균적인 월경 기간과 일치한다. 본문에는 명시되어 있지 않으나 추정컨대 7일째 되는 날 여자는 옷을 빨고 목욕을 한 뒤 그날 저녁이면 정결을 회복한다. 이때 성소에 올라가 희생을 드릴 필요는 없었다는 점에서 이어지는 만성 자궁 출혈에 비해 부정결의 정도가 낮았다. 월경 중인 여자와 잠자리를 할 경우 심각한 결과가 초래된다. 본문은 남자가 여자와 마찬가지로 7일간의 부정결 기간을 겪어야한다고 명시한다. 7일째 되는 날, 본문에 역시 언급되지 않으나 그는 옷을 빨고 목욕을 해야 했을 것이다. 한편, 여자의 만성 출혈은 상태가 더욱 심각하다(25~30절). 이것은 여자의 성기로부터 출혈이 오래 지속되는 상태를 가리킨다. 월경으로 인한 정상적인 출혈을 넘어 장기간 지속되는 이러한 만성 자궁 출혈은 의학적 관점에서 볼 때 혈루증일 가능성이 크다. 자궁 출혈이 지속되는 동안 환자인 여자는 부정결한 상태를 벗어날 수 없다. 따라서 월경과 마찬가지로 접촉을 통해 부정결이 감염된다. 출혈이 멈추면 그로부터 7일을 더 기다린 뒤 본문에는 언급되지 않지만 옷을 빨고 목욕을 해야 했을 것이다. 월경과는 달리 8일 째에 그녀는 반드시 성소에 비둘기 두 마리를 가지고 올라와 속죄제와 번제를 드려야한다. 이러한 사실은 만성 자궁 출혈이 월경보다 훨씬 더 강한 부정결이었음을 말해준다. 무려 12년 동안 만성 자궁 출혈을 앓던 복음서의 혈루증 앓던 여인에 대한 이야기는 이러한 배경에서 이해할 때 그녀의 절실함이 더욱 강하게 느껴진다.

    정결법의 의의

    정결법에 관해 한 가지 풀어야할 숙제는 왜 자연스러운 출산과 생리, 그리고 정상적인 성관계를 더럽게 여겼느냐는 것이다. 출산과 월경의 문제는 앞서 어느 정도 설명한 바 있는데 출산과 성 관계가 그 자체로는 더러운 것으로 간주되지 않았음을 기억해야 한다. 그것은 하나님 창조의 축복이었으나 다만 그런 행위 뒤에 발생한 신체로부터의 피와 정액의 유출 때문에 부정을 유발했다. 앞서 말한 대로 이것은 ‘생명력의 소실’이므로 부정하게 여겨진다. 성경신학적 관점에서는 이 문제를 포함한 레위기 11~15장의 부정결들은 아마 창세기 3장에서 인간의 범죄로 인해 몸과 자연의 창조질서가 다소 어긋난 결과로 보아야할 것이다.

    정액이 부정결을 유발하기 때문에 하나님 면전에, 즉 성소에 올라갈 때나 거룩한 전쟁을 수행할 때는 부부간의 성관계가 금지되었고(출 19:15; 삼상 21:4~6; 참조. 삼하 11:11), 몽정을 해도 그 사람을 진 밖으로 내보냈다(신 23:10). 바울이 기도에 집중하려 할 때 부부가 방을 따로 쓰도록 권면한 이유도(고전 7:5) 이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이방의 제의에서 성관계는 성소 내에서 중요한 제의 중 하나로 실행되곤 했다. 수메르 사회에는 ‘성혼례’(sacred marriage rite) 제도가 있었는데 신당의 꼭대기 층에서 새해를 맞을 때마다 풍요와 다산을 기원하며 선택된 여자 사제와 도시 국가의 통치자인 왕이 혼인식을 거행하고 성관계를 가졌다. 그러나 구약은 인간의 성 행위를 철저히 인간의 영역으로 제한했다. 성소에서는 어떠한 성 행위도 금지되었으며 각자의 처소에서 성 행위를 한 후에는 성소에 접근할 수 없었다. 자녀의 출산은 창조의 질서 내에서 하나님의 축복으로 허용되는 것이지 성소에서의 제의적 성행위라는 수단을 통해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성 자체는 하나님께서 주신 아름다운 선물이지만 인간에 의해 최상의 쾌락을 위한 수단으로 오용될 위험은 상시 존재했다. 그로 인해 하나님 앞에 특히 집중해서 나아갈 때는 일시적인 성적인 절제가 요구되는 것으로 보인다.

    정결법의 정-부정 구분은 기본적으로 제의 신학에 의한 것이지만 그 배경에는 보건-위생학적 관심이 결부되어 있다. 먹지 못하도록 금한 짐승들 중 일부는 비위생적인 곳에 서식하며, 월경을 겪는 여자의 일시적인 격리와 산모의 장기 격리는 그녀의 신체적 회복을 위한 배려이기도 하다. 또한 악성 피부병과 곰팡이는 강한 전염성과 번식력으로 인해 그 오염원이 차단되거나 파괴되었다. 유출병 환자의 활동 제한과 부분적 격리는 병원균의 감염을 차단하고 불결한 신체적 상태를 청결케 하여 환자가 조속히 회복되도록 하기 위한 조치일 수 있다. 그러나 레위기의 정-부정의 진단은 언제나 그런 보건 위생학적 조치 이상의 제의적·신학적 개념에 의한 것이다. 앞서 강조한 대로 ‘부정 탔다’는 것은 그런 위생적 개념 이상의 정신적·관념적 개념으로, 부적절하고 흉조를 예감케 하는 상태를 말한다.

    이미 논의한 바와 같이 정결법의 목적은 ‘거룩’에 있다. 신약에서 정결법의 형식은 모두 폐지되었지만 그 본질적 취지는 율법을 통해 계승된다. “너희를 부르신 거룩한 이처럼 너희도 모든 행실에 거룩한 자가 되라. 기록되었으되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 하셨느니라”(벧전 1;15~16; 참조. 벧전 2:9). 바울은 신자들의 모임인 교회를 ‘성전’이라 칭하면서 그 영적인 성전을 더럽히면 하나님께서 그를 멸하실 것이라 경고한다(고전 3:16-7). 그러므로 신자는 거룩한 신분을 유지하기 위해 세상과는 구별된 정결한 삶을 살아야 한다. 바울은 ‘부정한 것을 만지지 말라’는 레위기의 정결법을 영적·윤리적 교훈으로 바꾸어 재적용한다: “그러므로 너희는 그들 중에서 나와서 따로 있고 부정한 것을 만지지 말라”(고후 6:17). 음식법은 폐지되었으므로 먹는 문제로 하나님의 사역이 방해를 받아서는 안 된다. 만물이 모두 깨끗하고 부정한 음식이란 없으며 거리낌으로 먹는 사람에게 악할 뿐이다(롬 14:20). 하나님의 백성은 “거룩함을 온전히 이루어 육과 영의 온갖 더러운 것에서 자신을 깨끗케”해야 한다(고후 7:1). 이렇게 자신을 깨끗하게 하는 사람은 귀하게 쓰이는 그릇이 되어 주인이 기쁘게 사용하고 모든 선한 일을 하기에 합당한 사람이 될 것이다(딤후 2:21). 이렇듯 신약에서는 신체적·외적 정결성과 완전함보다는 내면의 도덕적 정결성과 완전성이 산 제물로 드려지는 신자의 표준이 된다.



    1. 부정한 것(불결성)
    13장-15장 / 부정하다 53회 반복 사용
    죄는 부정한 것

    이사야 64:6
    무릇 우리는 다 부정한 자 같아서 우리의 의는 다 더러운 옷 같으며 우리는 다 잎사귀 같이 시들므로 우리의 죄악이 바람 같이 우리를 몰아가나이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로마서 3:23)

    2. 전염성

    레위기 13:5-8
    칠일만에 제사장이 그를 진찰할찌니 그의 보기에 그 환처가 변하지 아니하고 병색이 피부에 퍼지지 아니하였으면 제사장이 그를 또 칠일 동안을 금고할 것이며.
    칠일만에 제사장이 또 진찰할찌니 그 환처가 엷어졌고 병색이 피부에 퍼지지 아니하였으면 피부병이라 제사장이 그를 정하다 할 것이요 그는 옷을 빨 것이라 그리하면 정하리라.
    그러나 정결한 여부를 위하여 제사장에게 보인 후에 병이 피부에 퍼지면 제사장에게 다시 보일 것이요.
    제사장은 진찰할찌니 그 병이 피부에 퍼졌으면 그를 부정하다 진단할 것이라 이는 문둥병임이니라.


    야고보서 1:15
    욕심 - 죄 - 장성한즉 - 사망

    47-59절 / 의복

    3. 격리


    45-46절
    문둥 환자는 옷을 찢고 머리를 풀며 윗입술을 가리우고 외치기를 부정하다 부정하다 할 것이요.
    병 있는 동안은 늘 부정할 것이라 그가 부정한즉 혼자 살되 진 밖에 살찌니라.



    4. 불살라야 해결

    52.
    그는 그 색점 있는 의복이나 털이나 베의 날이나 씨나 무릇 가죽으로 만든 것을 불사를찌니 이는 악성 문둥병인즉 그것을 불사를찌니라

    55. 그 빤 곳을 볼찌니 그 색점의 빛이 변치 아니하고 그 색점이 퍼지지 아니하였으면 부정하니 너는 그것을 불사르라 이는 거죽에 있든지 속에 있든지 악성 문둥병이니라.

    57절.
    그 의복의 날에나 씨에나 무릇 가죽으로 만든 것에 색점이 여전히 보이면 복발하는 것이니 너는 그 색점 있는 것을 불사를찌니라.


    문둥병을 불사름으로 해결하듯 죄에 대한 것도 불사름에 의해서 해결
    요한계시록 20:14-15

    1. 사망과 음부도 불못에 던지우니 이것은 둘째 사망 곧 불못이라
    2. 누구든지 생명책에 기록되지 못한 자는 불못에 던지우더라

    요한계시록 21:8
    그러나 두려워하는 자들과 믿지 아니하는 자들과 흉악한 자들과 살인자들과 행음자들과 술객들과 우상 숭배자들과 모든 거짓말 하는 자들은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에 참예하리니 이것이 둘째 사망이라.

    마가복음 9:43
    만일 네 손이 너를 범죄케 하거든 찍어버리라 불구자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두 손을 가지고 지옥 꺼지지 않는 불에 들어가는 것보다 나으니라.







    문둥병의 감정법

    1-8 피부병(발진 또는 색점)에 의한 감정법.
    9-17 난육(생살)에 의한 감정법.
    18-23 종처에 의한 감정법.
    24-28 화상에 의한 감정법.
    29-37 모발환처에 의한 감정법.
    38-44 색점과 대머리에 의한 감정법.
    45-46 문둥병자의 격리.
    47-59 의복에 생기는 나병과 그처리.


    문둥병의 공동체적 의미.

    율법에 나타난 정결 규례 중에서 본장에 나타난 문등병에 관한 규례가 가장 상세히 다루어졌다.
    이는 당시 문화에서 문둥병은 개인만이 아니라 공동체에 심각한 상황을 야기하는 원인이 되기 때문이다.

    첫째로 당시에 문둥병은 접촉만으로도 전염되는 병으로 인식되었고 치료가 거의 불가능하였다.
    따라서 문둥병 환자가 발생한 경우 공동체 전체에 전염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하여 철저히 격리시키거나 추방시켜야 했다.

    둘째로 천형의 병으로 여겨지던 문둥병은 죄에 대한 신의 저주로 생각되었다.
    따라서 문둥병이 발생한 경우 공동체 전체가 신께 제사를 통해 용서를 구하였던 것이다.
    이로써 공동체 전체에 대한 신의 저주를 면하고자 하였으며 또한 자신들의 죄의 요소를 제거하는 계기로 삼아서 전체 공동체의 성결성을 유지하고자 하였다.

    본장에 나타난 문둥병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문둥병의 발생은 이스라엘에게 하나님과의 관계에 대한 위기를 보여 준다.
    따라서 제사장은 문둥병 유무를 철저하게 가려내어 하나님께 속죄의 의식을 드렸던 것이다.
    그러므로 문둥병에 관한 규례는 단순히 위생학적인 전염병 예방의 내용보다 하나님과의 관계를 파괴시키는 죄에 대한 엄중한 경고를 의미한다.


    본장에 나타난 문둥병은 당시 사람들에게 죄의 대가로 여겨졌다.
    따라서 문둥병 환자를 격리하는 것은 죄로부터 다른 사람들을 보호한다는 의미를 지닌다.
    이와 같이 죄는 문둥병처럼 타인에게 전염되는 특성을 지니며 돌이킬 수 없는 결과를 초래함을 교훈해 주고 있다.
    그러므로 죄에 대해 심각함을 깨닫지 못하고 대수롭지 않게 생각한다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죄에 오염되어 버리고 만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죄악의 모든 요소들로부터 철저히 자신을 보호하고 악한 자와는 절대로 관계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또한 죄에 대해서는 아주 단호한 자세로 싸워야 하며 죄가 될 수 있는 것들은 그 모양이라도 버리는 결단력 있는 삶을 살아야 한다. 그럴 때 하나님의 심판을 면할 수 있다.


    성경에서 가장 많이 언급된 질병은 나병입니다.
    나병 관련 단어가 83회나 등장합니다.
    성경에서 나병이 처음으로 등장하는 때는 모세가 하나님을 만나는 장면에서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을 출애굽 시키라는 하나님의 명령 앞에서 모세는 거부합니다. 그 불순종으로 모세의 손은 나병에 걸립니다. 그러나 그 즉시 하나님은 나병에 걸린 모세의 손을 치유하심으로 나병 같은 불치병도 고칠 수 있는 전능자 하나님이심을 보여주셨습니다.
    모세의 누이 미리암도 나병에 걸렸습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의 대리자였던 모세가 구스 여자와 결혼한 것을 비방함으로써 하나님이 주신 모세의 권위를 훼손시킨 것에 대한 하나님의 벌이었습니다. 열왕기하 5장에는 엘리사의 사환 게하시가 문둥병에 걸렸다가 치유받은 나아만 장군에게 보상금을 요구했다가 나병에 걸렸습니다. 그리고 역대기하 26장에는 블레셋을 정복하고 교만해진 웃시야 왕이 제사장의 규례를 어기고 여호와의 성전에 들어가 향단에 분향하는 범죄를 저지름으로 인해 나병에 걸렸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말씀, 곧 그의 권위와 경륜과 주신 규례에 대한 불순종이 있을 때, 형벌로 주어진 병이 나병입니다. 모든 병이 그렇지만 특히 나병이 더욱 더 부정한 질병으로 해당된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본문 1~2절을 보시겠습니다. ‘여호와께서 모세와 아론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만일 사람이 그의 피부에 무엇이 돋거나 뾰루지가 나거나 색점이 생겨서 그의 피부에 나병 같은 것이 생기거든 그를 곧 제사장 아론에게나 그의 아들 중 한 제사장에게로 데리고 갈 것이요’

    오늘 본문에서 나병으로 번역된 단어, ‘차라아트’는 악성피부병을 포함하는 광범위한 피부질환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2절의 ‘나병’에 1)이 있는데 아래를 보면, ‘넓은 의미로 악성피부병을 뜻함’이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나병은 한센씨병, 또는 한센병이라 부릅니다. 나병을 한센병이라 부르는 이유는 1873년 노르웨이의 세균학자이자 의학자인 아우메우에르 게하르트 한센(Armauer Gerhard Henrik Hansen, 1841-1912)이 나병 바이러스를 발견했기 때문입니다. 이후 나병 치료를 위한 연구가 본격화 되면서 1941년에 'DDS (Diamino-Diphenyl Sulfone)'라는 특효약이 발명되어 한센병은 완치가 가능한 질병이 되었습니다. 나병이란 말이 역사적으로 질병보다는 멸시, 격리, 차별, 편견의 의미를 담고 있었기 때문에 현재는 나병이라 하지 않고 한센병으로 부르고 있습니다.

    사실 오늘 본문의 내용은 한센병에 대한 설명이라기 보다는 악성피부병에 대한 내용입니다. 본문 2~42절까지는 주로 오늘날의 마른 버짐이나 기계충, 피부손상과 관련이 있고, 47~59절은 곰팡이 세균과 관련된 증상이 기록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반면 나병으로 불리는 한센병은 곰팡이나 일반 세균이 아닌 특정 쪽팡이 세균과 관련이 있는 질병입니다. 따라서 나병, 즉 한센병으로 번역되어 있는 오늘 본문의 단어를 보다 정확하게 번역하면 악성피부병입니다. 하지만 당시 고대 사회에서는 악성피부병과 한센병을 구분할 수 없었기에 피부에 생긴 단순한 문제를 제외하고는 모두 한센병으로 불렀습니다.

    문제는 한센병을 부정한 병으로 보았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한센병에 걸린 사람을 부정한 사람으로 취급했습니다. 여기서 부정하다는 말은 단지 질병의 확산을 막기 위한 방지 차원에서 격리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은 자, 저주받은 자로 취급을 받았다는 의미입니다. 이로인해 한센병에 걸렸다고 판단된 사람은 의료적 격리가 아닌 사회적 격리, 종교적 격리, 비인격적 격리를 당해야만 했습니다.

    이것을 오늘 내 실존에 비추어서 생각해 보겠습니다.
    율법적으로 볼 때, 한센병에 걸린 사람은 부정한 사람입니다. 부정한 사람은 거룩한 공동체에 들어오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절대로 나아갈 수 없는 사람이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부정한 사람이요 거룩한 공동체에 들어오지 못하는 사람이요 그래서 하나님 앞에 절대로 나아갈 수 없는 사람은 실은 다름 아닌 나 자신이었습니다. 본래 우리 모두는 하나님으로부터 선택받지 못해 영원히 멸망받을 수밖에 없는 이방인이었습니다. 그러고보니 율법으로는 우리가 바로 한센병 걸린 자와 같은 존재였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렇게 살아야만 했습니다. 본문 45~46절입니다.

    ‘나병 환자는 옷을 찢고 머리를 풀며 윗입술을 가리고 외치기를 부정하다 부정하다 할 것이요 병 있는 날 동안은 늘 부정할 것이라 그가 부정한즉 혼자 살되 진영 밖에서 살지니라’

    옷을 찢고 머리를 풀며 윗입술을 가리고 부정하다 부정하다를 반복하면서 혼자서 그것도 사람들로부터 격리되어 살아야만 하는 존재였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우리에게 다가오셨고 우리를 위해 십자가 달려 죽으심으로 우리를 고쳐주셨습니다. 그 은혜로 우리는 정결한 존재가 되었으며, 더 이상 격리되어 혼자 살지 않아도 되었습니다. 이 사실을 인정한다면 우리의 마음속에 한 가지 사실이 각인되어야 합니다. 그것은 감사입니다.

    누가복음 17장에 보면, 열 명의 한센병에 걸린 사람들의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주님을 우연히 만난 열 명은 소리높여 자신을 긍휼히 여겨 달라고 외쳤습니다. 이에 주님은 그들을 치유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제사장에게 가서 너희 몸이 깨끗케 되었음을 보이라 하셨습니다. 그 길로 열 명은 제사장에게 가서 한센병이 치료되었음을 확증받았습니다. 그 가운데 9명은 각자 자신의 길로 가버렸으나 1명만이 다시 주님께 돌아와 치유받은 것에 대해 감사를 표했습니다. 이에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누가복음 17:17~19절입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열 사람이 다 깨끗함을 받지 아니하였느냐 그 아홉은 어디 있느냐 이 이방인 외에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러 돌아온 자가 없느냐 하시고 그에게 이르시되 일어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하시더라’

    한센병에서 고침 받고 감사한 마음을 표현한 사람과 감사하지 않은 사람의 차이는 하늘과 땅 차이입니다. 주님은 감사를 표현한 한 사람에게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 사람은 이 한 사람뿐이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또한 주님은 감사를 표현한 것을 믿음으로 보셨으며, 그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감사는 이처럼 귀한 것입니다. 감사는 곧 믿음이요 감사는 곧 구원받은 증거가 되기 때문입니다.

    한때 예수님을 믿는 성도들을 핍박하던 사울이 회심하고 돌이켜 주님을 핍박하던 자에서 주님을 위한 사명자로 살아갈 때, 그는 주님이 걸어가신 좁은 길, 고독한 길을 걸었습니다. 편한 세상길을 포기하고 남들 가지 않는 험한 길을 걸어갔습니다. 이처럼 주님의 은혜에 감사하는 사람은 세상 사람들이 다 그렇게 하기에, 나도 그렇게 사는 사람이 아니라, 진리의 좁은 길을 걸어가는 사람입니다.

    한센병에 걸린 자와 같은 나를 고치시고 구원해 주신 주님께 삶으로 감사를 드리는 오늘 하루가 되시길 원합니다.







    __________________ 레위기 12장 / 정결케 되는 기한(4절)

    03-22-2023(수) 사순절 제25일

    그 여인은 오히려 삼십 삼일을 지나야 산혈이 깨끗하리니 정결케 되는 기한이 차기 전에는 성물을 만지지도 말며 성소에 들어가지도 말 것이며.



    טָהוֹר 스트롱번호2889

    1.

    순수한.

    2.

    깨끗한

    3.

    혼합되지 않은

    발음 [ ṭâhôwr ]
    어원
    2891에서 유래
    관련 성경
    ☞정결한(창7:2, 8:20, 출37:29, 합1:13), 부정하여지지 아니한(레11:36), 깨끗한(레7:19, 대하13:11, 사66:20), 정한(레10:10, 민19:19, 겔22:26), 순결한(레24:4,6, 시12:6), 성결한(대하30:17), 맑은(겔36:25). [명] 순금(출25:11, 대하3:4, 대상28:17), 정결(민9:13).
    구약 성경
    95회 사용

    טָמֵא 스트롱번호2930
    1.

    불결하다

    2.

    니팔형 נִטְמָא. 분사 복수형 נִטְמְאִים: 겔20:30

    3.

    민5:13

    발음 [ ṭâmêʼ ]
    관련 성경
    ☞부정하다(레11:25, 민19:14), 더럽히다(민6:12, 시79:1, 겔22:3), 더러워지다(레18:25,시106:39, 미2:10), 부정하게 하다(레22:5),더럽다(왕하23:10,13, 사30:22). [명] 부정(레15:32, 5:3).
    구약 성경
    163회 사용

    하나님께서는 출산 자체를 부정하다고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라, 출산 때 나오는 산혈을 부정하다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정해진 기간이 지나면 산혈이 깨끗하게 된다고 합니다.
    즉 출산의 산혈이 사람을 부정하게 만들고, 그래서 정결하게 되기까지의 기한을 채워야 한다고 합니다.

    출산의 산혈이 왜 산모를 부정하게 하는 것일까요?
    성경의 다른 본문들을 통해 그 이유를 짐작해 볼 수 있습니다.
    성경은 피는 곧 생명이라고 말씀합니다.
    산모가 해산할 때 피를 많이 흘리게 되는 것은 곧 산모의 생명이 많이 소실되는 것이고, 산모로서 정상적인 몸 상태를 유지하지 못하게 합니다.
    그래서 그 정상적이지 않은 상태를 부정하다고 말하는 것이라 생각할 수 있겠습니다.

    피나 체액의 유출에 대해서는 15장에서 좀 더 자세히 살펴보겠습니다.

    또 한 가지, 출산 시 산혈이 산모를 부정하게 한다는 것은 창세기 3장에서 범죄한 하와에게 하나님이 주신 형벌을 생각나게 합니다.
    여자에게 해산의 고통을 더하셨는데, 출산은 하나님의 명령이요, 복임에도 불구하고 타락한 인간은 그 명령을 순종하고, 복을 누림에 있어서 죄의 영향에서 자유롭지 않게 된 것입니다.

    큰 고통을 수반하게 되었고, 많은 피를 흘리며 생명의 위협을 경험해야 했습니다.
    피를 많이 흘려서 생명의 위험을 경험하며 출산하는 이 일은 첫사람의 죄, 곧 원죄를 생각하게 하고, 우리가 죄의 영향 아래 있음을 기억하게 하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이렇게 부정하게 된 산모가, 정결해지기까지의 시간을 보낸 후에 하나님께 나와 번제와 속죄제를 드려야 한다고 말씀합니다.
    해산의 산혈로 부정하게 된 것은 단순히 시간이 지나면 정결해지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해산의 피로 부정하게 된 것을 제사로 깨끗하게 한다는 것은 나의 피로 부정하게 된 것을 나를 대신하는 희생제물의 피로 깨끗하게 한다는 의미입니다.

    우리의 부정한 것, 우리의 죄를 그리스도의 피로 깨끗하게 해주셨음을 오늘 말씀을 통해 기억해야 하겠습니다.

    8절에 보면 가난한 사람에게는 번제로 어린양이 아니라 비둘기 두 마리로 대신하게 하였습니다.
    누가복음에 보면 마리아가 예수님을 낳은 후에 비둘기 두 마리로 제사하였다고 기록했습니다.
    예수님이 아주 가난한 가정에서 태어나셨음을 알 수 있지요.

    예수님께서는 가장 가난한 가정에서 태어나셨고, 율법 아래 태어나셨습니다.
    예수님의 피로 우리의 죄를 깨끗하게 해주시기 위해,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셨습니다.
    우리 안에 이 죄와 부정함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만 깨끗해집니다.

    우리는 우리의 죄가 시간이 지나면 저절로 깨끗해지는 것이라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깨끗하게 되기 위해 번제와 속죄제를 드린 것처럼, 우리 역시 우리의 죄를 그리스도의 보혈의 공로를 의지하여 회개하고, 우리를 깨끗하게 하신 그리스도의 은혜에 감사하여야 하겠습니다.


    1. 아들을 낳으면 7일간 부정 (경도할 때와 같다)하고, 33일이 지나야 산혈이 깨끗하게 된다(40일 동안).
       여자를 낳으면?

      2×7일 간 부정하고, 66일이 지나야 산혈이 깨끗하게 된다. 80일 간의 휴식.

    2. 해산한 여인이 성물을 만지거나 성소에 들어가지 말아야한다는 것은 평소에는 성물을 만지거나 성소에 들어간다

      좁은 의미로 성물은 성소에 들어 있는 기구를 말하는 것이지만 넓게는 하나님께 드려진 모든 예물을 가리킨다.
      성소도 마찬가지로 넓게는 예배나 제사를 위해서 설치한 성소 주변의 뜰까지 포함하는 의미이다.
      예배까지 참석하지 말라는 명이다.

    3. 아들이든 딸이든 한 생명이 태어나는 것은 축하할 일이 아닌가? 그런데 왜 부정하다고 하는 걸까?
        예전 풍습이지만 우리나라에서도 출산하면 대문에 걸어두는 것을 금줄이라 한 것과 닮은 점이 있지 않을까?

      사람들의 접근을 금지하는 역할 
      기본적으로 산모와 태아를 보호하기 위하여 사람들의 접근을 막아야할 필요가 있다. 정결케 되기까지 성물을 만지거나 성소에 들어가지 말라는 것은 '모든 일에 열외'라는 표현과 다름 아니다. 모든 의무에서 벗어나 쉬어야하기 때문이다. 충분한 육체적, 정신적 휴식을 위하여 심지어 남편조차 접근하지 못한다. 하나님께 대한 의무마저 면제다. 부정한 여인은 함부로 돌아다니지도 못하고 만지지도 못한다. 가만히 누워있는 것이 상책이다. 산모가 따뜻한 방에 누워서 바람도 쇠지 않고 한 달(40일)을 지나는 것이 몸을 회복하는 데 아주 요긴하다. 이 때 산후 조리를 잘못하면 평생 병을 얻게된다. 무리하게 일을 해서는 안된다라고 명하는 것보다 아예 부정하다하여 아무도 접근하지 못하게 하는 것이 출산한 본인의 건강 회복을 위해서 훨씬 유리하다. 출산한 여인이여! 한달 동안 여왕처럼 지낼지어다. 이 말과 한달 동안 부정하다는 말은 동일한 결과를 가져온다. 군대서 한창 고생스럽게 훈련 받는 중에 험한 말로 '너 이리 나와봐' 하면서 빼내서 쉬게하는 경우가 더러 있다. 아는 훈련병을 만나서 말이다. 다만 불러낼 때 말을 좀 거칠게 해야한다.

      여인에게 해산의 고통을 더한 하나님의 의도(창세기 3:16)
      출생 자체는 인간적인 측면에서 보면 엄청난 복이기도 하면서 고생의 시작이기도 하다. 출생을 마냥 기뻐할 수만도 없는 것이, 원래는 하나님께서 주신 복이었지만 타락한 이후 고통이 더해 졌다. 홍수 이후 인간의 수명이 짧아지는 것이 하나님의 원하심이다. 이렇게 일그러진 모습으로 오래 사는 것을 원하시지 않기 때문이다. 처음 에덴 동산의 회복을 앞당기려는 것이다. 해산의 고통은 떠나버린 인간을 다시 자녀로 만들기 위한 하나님의 고통을 상징하는 것이다. 바울은 한 생명을 하나님께로 돌아오게하는 것을 해산의 고통이라고 표현했다(갈 4:11). 범죄한 인간을 다시 하나님의 자녀로 삼기 위하여 독생자를 보내시고 그가 십자가에 달려 고통 당함을 차마 바로 보지 못하는 하나님의 마음이 바로 이 해산의 고통이다. 여인들은 뱀의 머리를 부술 후손을 낳는다는 생각으로 해산의 고통을 이겨야했다. 이 고통에 담긴 의미를 이해한다면 여인에게 해산의 고통은 곧 구원의 길이기도 하다(딤전 2:15). 그런만큼 부정한 기간이란 해산의 고통과 동일한 의미를 지니고 있는 셈이다. 범죄한 이후 여인의 후손을 통해서 완전한 구원을 이루시기까지 하나님의 편치 못한 심경을 담고 있는 기간이다.

    4. 여자를 낳으면 부정함과 산혈이 깨끗하여지는 기간이 왜 더 길까?

      남자를 출산한 경우와 여자를 출산한 경우 신체적으로 어떤 차이가 있는지 좀 알아봐야겠다.
      아마 산부인과 의사를 만나는 것이 좋겠다.
      차이는 없을 것이란 예상이다.

      친구 부인이 둘째 딸을 낳을 때 시어머니가 제주도에서 포항까지 와서 병실을 지키다가 딸이라는 말을 듣고 바로 제주도로 돌아가 버렸다.
      남편이란 친구는 날마다 술집에서 헤롱거리고 산모는 산모대로 울어서 눈이 퉁퉁 붓고... 어쩌면 딸을 낳은 뒤의 이런 정신적인 차이조차 감안하지 않았을까?

      선악과를 용감하게 따먹은 것이 여자이었음도 감안하지 않았을까?
      우리가 잘 알지 못하는 차이점이 있다는 암시가 아닐까?
      사실은 남자와 여자는 다른 언어를 사용하는 이족(다른 민족)이나 마찬가지다.
      레위기 27:2-7을 보면 사람의 값이 남자와 여자가 다르다. 이런 점이 감안되었을 것이다.

      남자아이는 할례 받는 대신 여자아이는 기간이 늘어난 것으로 이해할 수도 있다. 드려야할 유향이 없으면 다른 노력이 좀 더 필요한 것(레 2)을 감안하면 그렇게 생각할 수 있다. 그렇다면 여자아이도 어릴 때 할례를 받은 셈이다.

    5. 아이들의 포경 수술을 반대하는 무리가 있다.
    괜히 쓸데없이 사람을 학대하는 행위라는 것이다.
    건강상 해야한다고 떠들어서 수술이 유행처럼 번지게 할 때는 언제고, 불필요한 고통을 주는 짓이라고 하지 말라니 도대체 어느 장단에 맞춰야할지 모르겠다.
    이스라엘 사람들에게는 건강상 이유가 아니라 민족의 정체성과 관련된 중요한 일이니 고민할 것도 없겠다.
    일생 중 고통이 가장 적고 수술하기도 수월한 때가 언제일까?

      생후 8일 째 아픔도 적고 피도 쉽게 응고된단다.

    6. 경도 즉 생리에 대하여 '어떤 여인이 유출을 하되 그 유출이 피면 칠 일 동안 불결하니 무릇 그를 만지는 자는 저녁까지 부정할 것'(레 15:19)이라고 한다. 생리현상을 불결하다(2)고 말하는 것은 종족 보존에 대한 사명을 지닌 여성에 대한 모독 아닌가?

      외형상 피 흘림을 부정한 것으로 다룸으로 여성뿐만 아니라 남성까지 보호하는 측면이 있다; 본인 스스로도 불결하다는 느낌을 가지게 됨으로 몸을 정하게 하겠지만 부부관계마저 멀리하게 하는 결과를 가져온다. 남자의 시도 때도 가리지 않는 성욕으로부터 일정기간 피할 수 있다. 세상의 좋은 것은 다 먹었을 왕들이 일찍 죽는 것은 거의 대부분 많은 여자들을 거느린 탓이다. 죽을 줄도 모르고 열심히 종족 보존에 힘쓰는 것을 일정기간 강제로 쉬게 만드는 것이다. 만약 생리도 소변보듯이 간단하게 처리할 수 있었더라면 남자들의 수명은 지금보다 훨씬 더 단축되었을 것이다.

    7. 정하게 되기위해서 일정한 기한이 지나야하고 기한이 차면 제사를 드려야한다는 것은 이중 과세(?)가 아닌가?

      정결케 되기 위한 기한이 있는 경우 기한이 차면 저절로 정결케된다. 다만 자녀를 낳은 여자의 경우 부정한 기간이 긴데도 제사를 드려야하는 것이 그 기간이 본인의 건강회복을 위한 것이기 때문이다.

    8. 기한이 차거든 번제로 1년 된 어린 양과 속죄제를 위하여 집 비둘기 새끼나 산비둘기를 드려야한다. 가난한 여자는?

      아무리 가난해도 생략해서는 안된다. 만약 힘이 미치지 못하면 집 비둘기 새끼 둘이나 산비둘기 둘을 가져다가 하나는 번제로 하나는 속죄제로 드려야한다. 헌금할 돈이 없는데 10원이라도 반드시 해야한다면 어떤 느낌인가? 그 10원이 진짜 10원을 의미한다면 이것은 대단히 고마운 일이다. 그렇게 작은 것도 기쁘시게 받으신다면 누구나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결국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것은 제물이 아니라 드리는 사람의 마음이다. 사람들끼리 이런 표현이 사용될 때는 10원이 문자대로 10원이 아닌 게 문제다.

    9. 감사와 경배의 의미로 드리는 번제 예물은 어린 양이고 죄를 속하기 위한 속죄제물은 집비둘기 새끼나 산비둘기라는 것은 아무래도 제물이 바뀐 느낌이다. 죽을 죄를 지은 사람이 용서받기 위해서 내야하는 몸값과 그 용서에 감사해서 선물을 드리는 경우를 가정해서 생각해보면 아무래도 제물이 바뀐 느낌이 드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의도하시는 바가 무엇일까?

      만약 속죄제물이 어린 양이라면 가난해서 제사드리지 못하는 사람도 많을 것이고 제물을 함부로 다른 것으로 바꿀 수도 없다. 최소한의 제물로 속죄의 길을 열어줄테니 누구나 오라는 것이다. 아무리 바쁘고 힘들어도 '예수는 믿어야한다'는 하나님의 요구라고 생각된다. 정말 간단한 방법으로 구원을 얻을 수 있는 길을 열어두신 것이다. 그런 다음 감사와 예배는 자신의 형편을 감안해서 드리라는 것이다.

    10. 해산한 여인의 부정은 아이 때문일까? 피를 흘렸기 때문일까?

      피를 흘렸기 때문; 경도할 때, 산혈이 깨끗하리니 등의 표현을 보면 그렇게 말하는 것이 정답이라고 해야겠다.

      출생은 누구나 기뻐하는 경사스런 일이다. 그러나 성경은 반드시 그렇게 말하지 않는다. 범죄한 이후에도 1000년 가까이 살던 우리 조상들의 수명을 십분의 일로 단축시켜버린 하나님의 뜻을 기억해야 한다. 이 땅에 천년만년 잘 먹고 잘 살아서는 안된다는 뜻이다. 우리 인간들끼리 본다면 기뻐할 일이지만 하나님을 기억하면 마냥 기뻐할 일은 아니다. '내가 죄악 중에 출생하였음이여 모친이 죄 중에 나를 잉태하였나이다' 라고 말한다(시 51:5). 우리 인생 자체가 저주 아래 있기 때문에 진정한 기쁨은 예수의 피로 속죄받고 다시 태어나는 것이다. 구속사적인 입장에서 보면 해산 자체는 부정한 일이다. 인간적인 삶에서 볼 때는 물론 경사스러운 일이다. 하나님께서 이런 면도 인정하시기 때문에 자녀를 복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레위기는 전통적으로 유대인이 다섯 살쯤 된 자녀에게 가르치기 시작하는 모세 오경의 첫 번째 책이라고 한다. 
    성경의 첫 번 째 책인 창세기가 아니라 레위기를 자녀에게 첫 번째 성경 교육으로 시작한다는 것은 레위기의 비중을 그만큼 중시한다는 의미일 것이다.

    실제로 레위기는 중요한 예배와 섬김의 지침서이자[1-10장 21-27] 
    생활 지침서로서 정하고 부정한 음식 문제부터 시작해서[11장]
    오늘의 말씀인 산모 정결법[12장]
    그리고 이어지는 문둥병이나 유출 병의 정결법과[14. 15장]
    심지어 침실 내밀한 곳에서 이뤄지는 성생활이나 성윤리 도덕의 문제까지도 세세하게 다루고 있다.[18. 20장]

    따라서 이 책은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먼저 하나님께 향한 바른 예배[제사]를 강조하고 또 예배 후에는 공동체 안팎에서 거룩한 예배자로 살도록 요구한다. 

    오늘의 말씀으로 주신 산모 정결법은[레 12장] 출산한 여인의 하혈[출혈]과 관련하여 주시는 말씀인데 출산 후 출혈이 얼마나 가는지 인터넷 검색창에 쳐보니 출산 후에도 길게는 2주간 하혈을 하며 몇 달간 지속되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 

    산모를 부정하다고 규정한 것은 출산과정에서 나오는 출혈 때문으로 보는데[12:2] 이 산혈이 깨끗해지는데 필요한 기간이 아들일 경우 7+33일, 딸일 경우 14+ 66일로써 이 기간 동안에는 성물을 만질 수 없고 성소에도 들어갈 수 없다. 

    그러나 이 정결을 위한 기간이 차면 산모는 정결례를 위해 번제와 속죄제를 드리는데 이는 일년 된 어린 양과 비둘기를 회막문 제사장에게로 가져가 속죄제를 드리고 그리고 나서 산혈이 깨끗하리라고 한다. 

    그러나 어린 양을 드릴만한 경제적 여유가 없으면 비둘기 두 마리를 가져가 하나는 번제물로 하나는 속죄 제물로 삼아 드려서 속죄가 되게 하라고 하신다.

    앞선 말씀에서 죽은 시체의 부정에 대해서 말씀하셨다면 오늘의 말씀에서는 아기를 출생시킨 산모의 부정과 정결 기간을 말씀하신다.
    결국 죄와 저주아래 놓여 진 인간은 출생에서부터 죽음까지 부정이라는 굴레를 벗어날 수 없는가 보다 

    최초의 인간이 자신의 존재와 이유가 되는 창조자보다 뱀[사단 마귀]를 선택하고 반역한 이후 인간은 죄와 저주의 굴레를 벗어날 수 없으며 이 저주의 굴레를 풀어줄 구원자를 필요로 하게 되었는데 그는 바로 여자의 출산을 통해 이 땅에 오실 여자의 후손 이었다[창 3:15]

    따라서 죽은 것들의 부정에 대해서 말하는 어제의 말씀이나 출산의 부정에 대해서 말씀하시는 오늘의 말씀들이 결국은 죄와 저주의 굴레를 벗어날 수 없는 인간의 비참함과 그 인간을 죄와 저주로 부터 풀어주실 구원자 - 여자의 후손 [그리스도]를 기다리는 희망으로 이어지게 하는 것 같다. 

    여성이 출산 후 자신의 정결을 위해 번제와 속죄제를 드려야 하는 제사 제도에서도 자신을 온전히 정결케 하실 구원자를 기다리는 희망을 담고 있는데 마침내 그 구원자 - 여자의 후손이 되시는 예수님께서 이 땅에 탄생하셨을 때 예수님을 출생시킨 산모 마리아도 오늘의 말씀과 같은 똑같은 정결규례를 이행하였다.[눅 2:22-24]

    이제 우리와 똑같이 태어나신 예수님을 통해 출생부터 죽음까지 부정의 굴레를 떠날 수 없는 인간에게 희망의 태양이 비쳐 온 것이다. 

    특별히 오늘의 말씀에 나타난 산모의 정결예법에서 여아 출산의 경우 남아 출산보다 갑절의 정결기간을 필요로 하며 두문불출 집에만 있어야 할 것을 말씀하시는데 이는 남아선호 사상이 강했던 고대 농경사회의 배경에서 생각해 보면 자칫 소훌 하게 방치될 수 있는 여아를 보호하시고 배려하신 차원에서 산모가 집밖으로 나가지 못할 긴 기간을 정하신 것 같다.

    여성들은 사람을 계수하는 숫자에도 넣어주지 않았던 당시 풍습을 생각해보면 남아를 출산하지 못하고 여아를 출한했을 경우 출산의 수고와 고통에 대해 대우받지 못하며 또 자칫 소훌 하게 보호될 수 있는 여아에 대해 충분한 보호가 되도록 산모가 집밖으로 나가지 못하는 정결기간을 남아보다 두 배를 더 갖게 하신 것으로 이해하게 된다. 

    집안에만 있어야 하는 산모는 그만큼 긴 기간을 자신의 몸을 잘 추스르며 또 출생된 아이의 보호에 정성을 쏟을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아이를 출산한 산모의 정결법을 가르치는 오늘의 말씀 속에서 산혈을 깨끗하게 하는 정결기간을 두므로 하나님 앞에 정결을 도모하는 것은 물론 산모와 출생된 아이들 특히 여아들을 보호하신 우리 하나님의 자상하신 성품을 본다.

    왜냐하면 산모가 남아를 출산하거나 여아를 출산하는 것은 산모 자신의 뜻이 아니라 이 세상에 남녀의 성비를 균등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숨은 섭리도 이 속에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과연 우리 하나님은 거룩하신 하나님이실 뿐만 아니라 우리네 인생이 살아가는 모든 삶의 영역 세세한 부분까지도 간섭하시며 특별히 약자를 동정하고 배려하시는 좋으신 하나님 되심을 오늘의 말씀에서 확인하게 된다.  

    [말씀에 응답하는 기도]

    때가 차 매 아들을 보내시되 여자의 후손으로 출생하게 하셔서 [갈4:4]
    죄와 저주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없는 우리를 구원하시고 희망을 주심을 찬양합니다.

    특별히 산모들이 아이들을 출산할 때 여아는 남아보다 갑절의 정결기간을 주셔서  보호와 배려의 기간으로 삼게 하신 자비하심을 보면서
    나도 항상 약한 자를 동정하고 배려하는 신앙과 삶이 되게 하옵소서.




    __________________ 레위기 11장 / 먹을 만한 생물(2절)

    03-21-2023(화) 사순절 제24일

    이스라엘 자손에게 고하여 이르라 육지 모든 짐승중 너희의 먹을만한 생물은 이러하니.
    Say to the Israelites: 'Of all the animals that live on land, these are the ones you may eat:

    Speak to the sons of Israel, saying, 'These are the creatures which you may eat from all the animals that are on the earth.

    먹을 만한 생물(Something Edible)
    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먹을 수 있는 것과 먹을 수 없는 것을 구별하라고 하셨을까요?
    가장 중요한 이유는 이스라엘 백성들은 애급에서 430년 노예생활을 하였기 때문에 그들 스스로 무엇을 먹어야 할지 알지 못했습니다.
    노예는 오직 주인이 제공하는 음식만 먹고 살아야 했습니다.
    애급에서 나온 후에 광야 40년 동안은 하늘에서 내려준 만나와 메추라기만 먹고 살았습니다.
    무려 500년 동안 스스로 무엇을 찾아서 만들어 먹어야 할지를 알지 못한 백성들에게 다양한 짐승들과 다양한 물고기들과 다양한 조류들과 다양한 곤충들을 볼 때 무조건 잡아 먹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먹어야 할 것과 먹지 말아야 할 것을 미리 지정하고 그 규정에 따라 먹을 것만 잡아서 먹도록 배려하신 것입니다.
    따라서 먹을 수 있는 것과 먹을 수 없는 것을 구별하는 것을 "카도쉬" 즉 "거룩"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오늘날은 사람마다 체질이 다르고 식성이 다르기 때문에 먹는 것도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심지어 몸에 병이 있을 때는 담당 의사로부터 먹어야 할 것과 먹지 말아야 할 것에 대한 정보를 얻을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과 현대인들에게 먹을 것과 먹지 못할 것을 통한 공통된 목표는 같습니다.

    레위기 11:44-45
    나는 여호와 너희 하나님이라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몸을 구별하여 거룩하게 하고 에 기는바 기어다니는 것으로 인하여 스스로 더럽히지 말라.
    나는 너희의 하나님이 되려고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여호와라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찌어디.

    먹을 수 있는 것과 먹을 수 없는 것이 어떤 것이냐가 아니라 "거룩"을 유지하라고 하셨습니다.
    "카도쉬"라는 히브리 단어를 구별이라고 하는 것의 의미는 먹을 수 있는 것과 먹을 수 없는 것을 구별하는 것이 곧 거룩의 시작이기 때문입니다.
    무엇을 먹느냐?
    무엇을 먹지 않느냐?
    이러한 것을 구분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가를 찾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왜냐하면 어떤 사람에게는 맛 있는 먹거리가 어떤 사람에게는 맛이 없는 것이 될 수 있습니다.
    또한 어떤 사람에게는 체질에 맞지 않는 음식이지만 또 어떤 사람에게는 체질에 맞는 음식이 되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레위기 11장에서 강조하는 것은 "거룩(코데쉬, qôdesh.  קֹדֶשׁ )" 입니다.
    그렇다면 '거룩'이란 무엇일까요?
    '거룩'이란 "하나님을 닮아가는 것"입니다(11:44-45)

    "나는 여호와 너희 하나님이라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몸을 구별하여 거룩하게 하고 에 기는바 기어다니는 것으로 인하여 스스로 더럽히지 말라. 나는 너희의 하나님이 되려고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여호와라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찌어다."

    본질상 진노의 자녀로 태어난 사람이 어떻게 거룩한 하나님을 닮아갈 수 있을까요?
    "거룩(코데쉬)"의 어원은 "카다쉬(qâdâsh.  קָדַשׁ  )"라고 합니다.
    '카다쉬'란 "자신을 하나님께 드린 사람'을 말합니다.
    자신을 하나님께 드린 사람을 '거룩하다' 또는 '신성하다'고 일컫습니다.

    구약시대에 규정한 먹을 수 있는 것과 먹을 수 없는 것을 오늘의 시대에 그대로 적용할 수 없다는 것은 하나님의 법이 시대에 따라 바뀐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거룩"을 유지하라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어느 미국 교회에서 있었던 이야기를 소개합니다.
    그 교회 담임목사님이 광고 시간에 어느 나이 많은 여자 교인이 지난 주간에 담배를 끊었다고 알리며 모두 축하합시다 하고 말했습니다. 모든 교인들이 함께 손뼉을 치며 즐거워 했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그 목사님이 "나는 아직도 담배를 끊지 못했는데 저 부인이 담대를 끊었다는 것은 놀라운 소식입니다." 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성경은 분명하게 말씀합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외모사람을 취하지 아니하심이니라."(로마서 2:11)
    "주는 외모사람을 취하심이 없느니라."(골로새서 3:25b)
    "만일 너희가 외모사람을 취하면 죄를 짓는 것이니 율법이 너희를 범죄자로 정하리라."(야고보서 2:9)
    "그들이 물어 가로되 선생님이여 우리가 아노니 당신은 바로 말씀하시고 가르치시며 사람을 외모로 취치 아니하시고 오직 참으로서 하나님의 도를 가르치시나이다."(누가복음 20:21)

    무엇을 먹는냐 먹지 않느냐가 아니라 예수님을 나의 구세주로 믿느냐 믿지 않느냐에 따라 믿지 않는 사람을 긍휼히 생각하여 주님을 영접할 수 있는 기회를 만들어주는 일에 성공하시기 바랍니다.
     

    거룩함(6944) 코데쉬( qôdesh)  קֹדֶשׁ

    1. 거룩함,  2. 거룩한 것, 3. 지성소
    발음 / 코데쉬(qôdesh)
    어원 / 6942에서 유래
    관련 성경 / 성회(출 12:16, 레 23:35, 민 28:18), 성소(출 26:33, 레 20:3, 민 8:19), 지성소(출 26:33, 레 16:16, 왕상 6:16), 성결(출 28:36, 말 2:11), 성물(출 28:38, 레 22:12, 민 6:20), 거룩한 패(출 29:6), 성의(출 29:29, 레 16:32), 거룩한 산(시 43:3), 성산(겔 28:14), 지성물(레21:22, 민 4:4), 거룩한 날(출 31:14), 성일(사 58:13), 성소(레 4:6), 성호(대상 16:35, 시 105:3, 145:21), 예물(대하 31:12), 성전(시 5:7, 138:2, 욘 2:4), 거룩한 곳(렘 31:40), 성도(단 12:7). [형] 거룩한(출 3:5, 레 2:3, 시 2:6), 성결한(출 15:13, 삼상 21:5).
    구약 성경 / 477회 사용

    * 6942. 카다쉬(qâdâsh)  קָדַשׁ 

    1. 거룩하다,  2. 신성하다,  3. 자신을 하나님께 드린 사람에게 사용되어
    발음 / 카다쉬(qâdâsh)
    관련 성경 / 거룩하다(출 29:21, 사 29:23, 학 2:12), 빼앗기다(신 22:9), 성별하다(느 3:1), 준비하다(렘 22:7, 미 3:5), 예비시키다(렘51:27,28),구별하다(민 8:17, 대상 26:27), 드리다(대상 18:11), 빼앗다(대상 18:11), 예비하다(렘 12:3), 깨끗하게 하다(삼하 11:4). [명] 성물(레 22:2, 대상 26:28), 성회(욜 1:14, 2:15), 성호(레 22:32), 성소(대하 26:18, 겔 7:24), 거룩한 자(사 29:23).
    구약 성경 / 171회 사용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방인과 구별된 삶을 사는 것
    첫 번째는 흠이 없는 제물을 하나님 앞에 제사로 드리는 그 제사를 통해서 이방인들과는 구별된 삶을 살았습니다.
    두 번째는 먹을 수 있는 음식 가운데 먹을 수 있는 것과 먹을 수 없는 것을 구별해서 먹을 수 있는 것만 먹는 그런 일들을 통해서 이방인과의 삶과 구별된 삶을 그들이 살게 된 것입니다.

    그러면 먹을 수 있는 것과 먹을 수 없는 것을 잘 구별해서 먹을 수 있는 것만 먹어야 하는데, 그러면 정말 먹을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하나님께서 4가지 영역으로 나눠서 말씀을 구체적으로 하십니다.

    1. 포유류(땅의 짐승)
    땅에 있는 것 중에는 굽이 갈라지고, 되새김질을 할 수 있는 동물은 다 정결한 짐승이기 때문에 너희가 먹어도 좋다.
    예를 들면, 소나, 양과 같은 동물입니다.
    굽이 갈라지긴 했지만, 되새김질을 할 수 없는 동물은 부정하다.
    그런 동물은 먹지 말라! 대표적 예시가 돼지입니다.
    또는 굽은 갈라지지 않았지만, 되새김질을 할 수 있는 동물이 있는데, 그런 동물들도 부정하다.
    그런 동물들도 먹지 말라! 대표적인 것이 낙타, 토끼 같은 동물입니다.

    2. 어류
    물에 사는 물고기에 대해서는 먹을 수 있는 것을 딱 지정해 주셨습니다.
    지느러미와 비늘이 있는 물고기
    강에 살던, 바다에 살던 상관없이 지느러미가 있고, 비늘이 있는 것은 정결한 물고기이기 때문에 너희들이 먹어도 좋지만, 만약에 지느러미가 없다든지, 비늘이 없는 고기는 부정한 고기이기 때문에 너희들이 먹어서는 안 된다.

    3. 조류
    공중 영역 하늘의 영역에서는 먹지 말아야 할 것을 지정해 주십니다.
    ​주로 맹금류입니다.
    독수리라든지, 매라든지, 올빼미라든지, 부엉이라든지 그 중에는 박쥐도 들어가 있습니다.
    이런 것들은 절대 부정한 것이기 때문에 절대

    4. 곤충
    날개가 있고, 4발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땅을 기어 다니는 곤충은 부정한 것이기 때문에 절대 먹지 말고, 날개도 있고, 4발이 있지만, 그러나 땅에서 뛸 수 있는 곤충! 메뚜기라든지, 귀뚜라미라든지 이런 것은 정결한 곤충이기 때문에 너희가 먹을 수 있다.

    특별히 어떤 동물이던 간에 배로 땅을 기어 다니는 뱀이라든지, 지네라든지, 악어도 거기에 들어갑니다.
    그런 것은 다 부정한 것이기 때문에 그런 것들은 먹어서는 안 된다.

    ​이렇게 하나님이 구체적으로 먹을 수 있는 것과 먹을 수 없는 것을 구별해 주셨습니다.

    중요한 것은 왜 어떤 짐승은 정결하고 어떤 짐승은 부정한 것일까?
    왜 어떤 짐승은 먹을 수 있는데, 왜 어떤 짐승은 먹을 수 없는 것일까?

    ​도대체 그 기준이 무엇일까?
    하나님은 어떤 기준을 가지고 저것은 먹어도 좋고, 저것은 먹어서는 안 된다. 그렇게 말씀하신 것일까?

    ​사실 생각이 많습니다.
    크게 두 가지를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하나는 하나님이 그 동물들을 다 만드셨기 때문에 어떤 동물이 인간의 몸에 건강에도 좋고, 먹어서 몸에 의로운지를 하나님이 다 아신다.

    ​그리고 어떤 동물이 먹으면 인간의 몸에 해롭고, 건강에 안 좋은지도 하나님은 다 아신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인간의 몸에 도움이 되고, 건강에도 유익한 그런 동물들은 다 먹을 수 있게 하셨고, 인간의 몸에 해롭거나, 건강에 좋지 않은 영향을 줄 수 있는 그런 동물들은 먹지 말라고 했다. 이런 생각입니다.

    ​지금도 이런 생각을 하는 사람이 많이 있습니다. 특별히 안식교 교인들이 그렸습니다. 안식교 교인들은 지금도 그렇게 믿고, 그렇게 생활하고 있습니다.

    또 한 가지 생각은 그것이 먹을 수 있는 것은 우리 건강에 도움이 되는 것이고, 먹을 수 없는 것은 우리 건강에 해롭기 때문이다. 그것이 의학적으로나, 과학적으로나 입증인 된 것이 아무 것도 없습니다. 그런 것과 상관없이 하나님이 부정하다고 이야기하셨기 때문에 부정한 것이고, 하나님께서 정결하다고 말씀하시니깐 정결한 것이지! 그것이 의학적으로 그런 근거가 있어서, 과학적으로 그런 근거가 있어서 그런 것은 아니다. 그냥 하나님이 그렇게 정하셨기 때문에 그런 것으로 믿고 우리는 순종해야 하는 것이다.

    예를 들면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하나님이 우리를 의롭게 여겨주십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의롭게 여겨주시기 때문에 우리가 의로워 진 것이지!

    ​우리의 내면에 의로움이 있어서 의로워진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의롭다고 말씀하시니깐 의로운 것입니다.

    그런 것처럼 정결 동물이나, 부정한 동물도 그런 이유에서 그렇게 말씀하신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문제는 구약시대에 엄격한 규정했던 먹을 수 있는 음식과 먹지 안 않아야 할 음식 신약 시대에 오면 폐지가 됩니다. 먼저 마가복음 7:15~16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이 하시는 말씀입니다.

    “무엇이든지 밖에서 사람에게로 들어가는 것은 능히 사람을 더럽게 하지 못하되 사람 안에서 나오는 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니라 하시고”

    그러니깐 어떤 음식이든 다 먹어도 괜찮다는 것입니다.
    부정한 음식이라고 그래서 그것이 우리 안에 들어와서 부정하게 만드는 것도 아니고, 정결한 음식이라고 해서 그것이 우리 안에 들어와서 정결하게 만드는 것도 아니다. 예수님이 직접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어떤 음식이든, 상관이 없다. 음식이 우리를 부정하게 만들거나, 정결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다. 이렇게 예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도 그렇게 말씀하십니다.

    사도행전 10:10~15 

    15. “그가 시장하여 먹고자 하매 사람들이 준비할 때에 황홀한 중에 하늘이 열리며 한 그릇이 내려오는 것을 보니 큰 보자기 같고 네 귀를 매어 땅에 드리웠더라

    그 안에는 땅에 있는 각종 네 발 가진 짐승과 기는 것과 공중에 나는 것들이 있더라 또 소리가 있으되 베드로야 일어나 잡아먹어라 하거늘 베드로가 이르되 주여 그럴 수 없나이다 속되고 깨끗하지 아니한 것을 내가 결코 먹지 아니하였나이다 한대 또 두 번째 소리가 있으되 하나님께서 깨끗하게 하신 것을 네가 속되다 하지 말라 하더라”

    베드로가 12시 기도 시간에 기도하러 옥상에 올라가서 기도를 하려고 하니깐 배가 너무 고픈 것입니다. 그때 마침 환상 중에 먹을 것이 가득 담긴 바구니가

    내려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세히 들여다보니깐 레위기에서 먹어서는 안 되는 동물들만 가득한 것입니다. 그런데도 하나님이 뭐라고 말씀하시냐면 베드로야! 일어나서 잡아먹어라! 베드로가 어떤 생각을 했겠습니까! 하나님이 나를 시험하시나 보다! 저런 것들은 먹을 수 있는 동물들이 아닙니다. 레위기 말씀에 의하면 저런 동물들은 먹을 수가 없습니다. 저는 한 번도 저런 동물을 먹어본 적이 없습니다. 그랬더니 하나님이 뭐라고 말씀하시냐면 내가 깨끗하게 한 것을 네가 속되다고 말하지 말라! 내가 정결케 한 것을 네가 부정하다고 말하지 말라! 이미 하나님은 뭡니까? 모든 것을 다 정결하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디모데전서 4:4~5
    하나님께서 지으신 모든 것이 선하매 감사함으로 받으면 버릴 것이 없나니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로 거룩하여짐이라. 

    어떤 음식도 그것이 부정한 음식이든, 정결한 음식이든 상관없이 우리가 기도하고 먹으면, 그 기도로 인해서 다 정결한 음식이 된다는 것입니다.
    어떤 음식이든 우리가 감사함으로 기도하고 먹으면, 어떤 것이든 먹을 수 있다.
    아무런 상관이 없다.
    이렇게 말씀을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신약에 와서는 이렇게 다 폐지될 수밖에 없었던 문제를 왜 구약시대에서는 그처럼 하나님께서 엄격하게 구별하고,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지키라고 명령하신 것일까?
    도대체 하나님은 어떤 생각과 어떤 의도로 그렇게 하신 것일까?

    하나님의 백성은 이방인들하고는 달라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할 수 있는 것이 있고, 할 수 없는 것이 있다.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해서 모든 것을 다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해야 될 일이 있고, 해서는 안 되는 일이 있다는 것입니다.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것도 아니지만, 모든 것을 할 수 없는 것도 아니다.

    ​그것을 잘 구별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구별해서 사는 것이 구별된 삶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훈련하고, 가르치려는 목적으로 먹는 것 가지고, 이것은 먹을 수 있는 것이고, 이것은 먹을 수 없는 것이다.
    그것을 가지고 그런 훈련을 하는 것입니다.
    굉장히 중요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에게는 할 수 있는 것이 있고, 할 수 없는 것이 있습니다.
    해야만 하는 것이 있고, 해서는 안 되는 것이 있습니다.
    이것을 지킬 줄 알아야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말씀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구약시대에 그들이 제사를 통해서 이방인들과 구별된 삶을 살았고, 먹을 수 있는 음식과 먹지 못하는 음식을 구별하는 것을 통해서 이방인과 다른 구별된 삶을 살았는데 아니 이것이 다 폐지된 다음에 오늘 우리는 무엇으로서 이방인들과 믿지 않는 사람들과 구별된 삶을 살아야 하느냐? 이 과제가 우리에게 남아 있는 것입니다. 이미 제사 제도나, 먹는 문제는 폐지가 되었기 때문에 오늘 우리는 제사를 드리지 않습니다. 제사 대신에 예배를 드립니다. 여기서 우리가 명심해야 될 것은 제사 대신에 예배를 드리는데 그 예배가 오늘 이렇게 모여서 드리는 예배가 다가 아닙니다. 그것을 아셔야 합니다. 이것이 우리가 생각하는 예배의 모두가 아닙니다. 로마서 12:1 말씀을 보시겠습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

     

    여기서 말하는 영적 예배라고 하는 것은 영으로 드리는 예배라는 것이 아니고, 너희들의 일상적인 삶 속에서 드리는 삶을 통해서 드리는 예배가 영적인 예배다. 우리가 이렇게 모여서 드리는 예배와 그것을 구별하기 위해서 사도바울이 그것을 영적인 예배라고 표현을 한 것입니다. 그것을 잘못 이해해서 영적 예배는

    영으로 예배를 드리는 것으로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가 예배를 드리는 것도 영으로 예배를 드리는 것입니다. 굳이 영적 예배라고 표현한 것은 이렇게 우리가 모여서 예배만이 예배가 아니라, 우리들이 일상에 돌아가서 우리들의 삶으로서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 그 예배도 있다는 것입니다. 그 예배가 영적인 예배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스라엘 백성들은 제사라는 것을 통해서 구별된 삶을 살았습니다. 제사에서 어떤 것이 부정하고, 어떤 것이 거룩하냐? 구별이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 드려지는 제물 가운데 흠이 있는 것은 부정한 것이고, 흠이 없는 것은 정결한 제물이 됩니다. 그것으로 구별을 했습니다. 먹거리를 통해서는 하나님이 먹을 수 있다고 한 음식은 정결한 음식이고, 먹어서는 안 된다고 규정한 것은 다 부정한 음식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당시 구약시대에 이것은 정결하다. 저것은 부정하다는 그 근거는 다 제사 적인 것에서 나온 것입니다. 그런데 이미 우리는 그런 제사를 드리지 않습니다. 다 폐지가 되었기 때문에 또 먹는 문제도 다 폐지되었기 때문에 다 무엇이든지 먹을 수 있습니다. 그러면 그런 우리들에게는 이것이 무슨 의미가 있느냐?

    ​그래서 제사를 드리지 않고, 삶으로서 예배를 드리는 우리들에게는 제이적은 부정과 정결함은 큰 의미가 없습니다. 삶으로서 예배를 드리는 우리들에게 있어서는 어떤 것이 필요하냐? 삶 속에서 우리가 사는 행위로 나타나는 윤리적인 측면에서 무엇이 정결한 것이고, 무엇이 부정한 것이냐? 그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의 삶 속에서 어떤 삶이 부정한 삶이고, 어떤 삶이 정결한 삶이냐! 이것을 잘 분별해서 정결한 삶을 살아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떤 것이 정결한 삶이냐? 어떤 것이 부정한 삶이냐? 여러 가지가 있지만, 크게 3가지를 우리가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하나는 절제된 삶입니다.

    ​절제된 삶은 정결한 삶이고, 무절제한 삶은 부정한 삶입니다. 왜 절제된 삶은 정결한 삶이고, 무절제한 삶은 부정한 삶이냐? 우리가 고린도전서 14:33 말씀을 보시겠습니다.

    “하나님은 무질서의 하나님이 아니시요 오직 화평의 하나님이시니라 모든 성도가 교회에서 함과 같이”

    이것을 뒤집어 이야기하면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인가요?
    하나님은 질서의 하나님이시다.
    그 질서의 하나님을 화평이라고 설명을 했습니다. ​

    하나님은 질서의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은 질서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거룩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거룩하시기 때문에 너희도 거룩 하라!

    ​그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신약에서는 어떻게 표현하느냐?
    고린도전서 14:40 말씀을 보시겠습니다.

    “모든 것을 품위 있게 하고 질서 있게 하라”

    하나님은 질서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거룩하신 하나님이다.
    그러니 너희도 거룩 하라! 어떻게? 너희도 품위 있게! 질서 있게 살라는 것입니다.

    ​질서 있게 사는 것이! 절제함을 가지고 사는 것이! 그것이 정결한 삶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절제가 있는 삶이 무엇입니까? 먹고 싶다고 해서 아무거나 먹지 않는 것입니다. 하고 싶다고 해서 무엇이나 다 하는 것이 아닙니다.

    ​말할 수 있다고 해서 생각 없이 되는대로 모든 것을 말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이 절제입니다. 그런데 무절제라는 무엇이냐?

    ​질서가 없다고 하는 것은 무엇이냐? 먹고 싶으면, 뭐든지 다 먹는 것입니다. 원숭이 골도 먹고, 박지도 잡아먹고 끝이 없는 것입니다.

    ​그것이 무절제한 삶입니다. 하고 싶으면, 참지를 못하고 무엇이든지 다 해야 합니다. 끝까지 다 해봐야 합니다.

    ​바람 피고 싶으면 바람 피고, 외도하고 싶으면 외도하고, 동성애 연애를 하고 싶으면 동성애 연애를 하고 질서가 없는 것입니다.

    ​하고 싶은 대로 다 해보는 것입니다. 그것이 부정한 삶입니다. 말하는 것도 다른 사람의 입장과 다른 사람의 처지를 생각해서 해야 할 말인지, 하지 말아야 말인지 생각하며 말을 해야 하는데 그렇지 않고, 그냥 내가 하고 싶은 말! 내 입으로 내가 말하는데 누가 뭐라고 하느냐! 그래서 하지 말아야 말! 못 할 말!

    ​그냥 다 쏟아 부는 것입니다. 그것이 무절제한 삶입니다. 그렇게 사는 삶이 무엇이냐? 부정한 삶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과 어떤 면에서 구별이 되어야 하느냐? 바로 이렇게 절제가 있는 삶! 삶의 품격이 있고, 질서가 있는 그런 삶으로 우리가 믿지 않는 사람들과 구별이 되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섬기는 삶은 정결한 삶이고, 섬김을 받는 삶은 부정한 삶입니다. 왜 그러느냐? 섬김을 받으려고 하는 것은 교만에서 나온 생각이고, 섬기려고 하는 삶은 겸손에서 나오는 마음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섬김을 받으려고 하는 것은 부정한 것이고, 섬기는 것은 정결한 것이다. 하는 것을 우리가 조금 더 설명하기 위해서 생각하려고 합니다. 인간이 섬김을 받기를 원하는데, 그 뿌리는 교만해 있는 것입니다. 도대체 얼 만큼 섬김을 받으면, 만족할까? 얼 만큼의 섬김을 받으면 더 이상 원이 없을까? 이사야 14:12~14 말씀을 보시겠습니다. 마귀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제일 마지막 부분을 보시겠습니다.

    “너 아침의 아들 계명성이여 어찌 그리 하늘에서 떨어졌으며 너 열국을 엎은 자여 어찌 그리 땅에 찍혔는고 네가 네 마음에 이르기를 내가 하늘에 올라 하나님의 뭇 별 위에 내 자리를 높이리라 내가 북극 집회의 산 위에 앉으리라 가장 높은 구름에 올라가 지극히 높은 이와 같아지리라 하는도다”

     

    그러니깐 하나님처럼 돼서, 섬김을 받는 것! 거기까지입니다. 그래서 인간의 욕심이 끝이 없는 것입니다. 인간의 교만도 끝이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처럼 되려고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거기까지 가야 합니다. 그래서 인간의 욕망도 부정한 것이고, 인간의 교만도 부정한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여러분들이 잘 아는 것처럼 요한복음 13장에 제자들의 발을 씻겨 주십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을 섬겨주셨습니다.

    ​그런데 제자들의 발을 그냥 씻겨 주신 것이 아닙니다. 계기가 있었습니다. 왜 제자들의 발을 씻겨 주셨는지! 누가복음 22:24~27 말씀을 보시겠습니다.

    “또 그들 사이에 그 중 누가 크냐 하는 다툼이 난지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이방인의 임금들은 그들을 주관하며 그 집권자들은 은인이라 칭함을 받으나 너희는 그렇지 않을지니 너희 중에 큰 자는 젊은 자와 같고 다스리는 자는 섬기는 자와 같을지니라 앉아서 먹는 자가 크냐 섬기는 자가 크냐 앉아서 먹는 자가 아니냐 그러나 나는 섬기는 자로 너희 중에 있노라”

     

    너희들은 누가 섬김을 받아야 하느냐를 두고 다투고 있는데, 예수님은 너희 중에 섬김는 자로 있다는 것입니다. 사실은 섬김을 받을 수 있는 자가 있다면, 예수님인데 예수님은 뭐라고 말씀하시냐면 나는 너희들 중에 섬기는 자로 있다. 그러시면서 마가복음 10:45 절에 아주 유명한 말씀을 하십니다.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십자가를 말하는 것입니다. 인자가 온 것은 십자가를 통해서 인간을 구원하러 오신 것입니다. 인간을 무엇으로부터 구원을 하는 것입니까? 죄로부터 구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죄는 부정한 것이고, 구원은 정결한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예수님은 무엇으로 설명하느냐? 섬김으로 설명하시는 것입니다. 섬김은 정결한 것이고, 섬김을 받는 것은 부정한 것입니다. 그러면 섬긴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항상 상대방의 입장에서 생각하고, 말하고, 상대방을 배려해주고, 상대방을 도우려고 하는 것이 섬기는 것입니다. 섬김을 받는 것은 항상 자기 입장에서 생각하고, 자기 입장에서 말하고, 모든 사람이 다 자기중심적으로 움직여지는 것을 바라는 것입니다. 자기 이익을 위해서 모든 사람이 그렇게 움직여주기를 바라는 것들 그것이 섬김을 받으려고 그러니 우리가 예수 믿지 않는 사람들과 어떤 면에서 구별된 삶을 살 수 있느냐? 섬김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은 섬김을 받으려고 하기보다는 섬기려고 하는 그런 자세로 사는 사람들이다. 세상 사람들이 우리를 그렇게 인정을 해줘야 합니다. 그래야 구별이 되는 것입니다.

    세 번째는 정직하게 사는 것입니다. 진실하게 사는 것은 정결하게 사는 것이고, 거짓되게 사는 것은 부정하게 사는 것입니다. 왜 그러느냐?

    ​시편 33:4
    “여호와의 말씀은 정직하며 그가 행하시는 일은 다 진실하시도다”

    하나님은 정직하고, 진실하시다. 그래서 하나님은 거룩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우리에게도 진실을 요구하시고, 정직을 요구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마귀라는 존재는 전혀 다릅니다.

    요한복음 8:44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 너희 아비의 욕심대로 너희도 행하고자 하느니라 그는 처음부터 살인한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없으므로 진리에 서지 못하고 거짓을 말할 때마다 제 것으로 말하나니 이는 그가 거짓말쟁이요 거짓의 아비가 되었음이라”

    거짓의 근원이 누구냐? 마귀라는 것입니다. 거짓이 어디서부터 온 것이냐? 거짓의 뿌리가 어디냐? 마귀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마귀는 부정한 영입니다.

    ​그 마귀가 부정한 영이라는 것을 신약성경에서는 여러 가지로 이야기를 합니다.

    마가복음 1:23, 1:26

    “23 마침 그들의 회당에 더러운 귀신 들린 사람이 있어 소리 질러 이르되

    26 더러운 귀신이 그 사람에게 경련을 일으키고 큰 소리를 지르며 나오는지라”

     

    우리가 무엇으로서 믿지 않는 사람과 구별된 삶을 살겠습니까?
    정직하고, 진실하고!믿지 않는 사람과 다른 것이 무엇이냐?
    주일날 성경책 가지고 교회에 오는 것 그것 외에는 그들과 다른 것이 없습니다.
    우리가 무절제한 삶을 산다는 것은 레위기 적인 말씀으로 하면, 하나님이 먹지 말라고 금한 그 음식을 먹는 것입니다.
    우리가 다른 사람에게 섬김을 받으려고

    하는 그런 삶도 하나님이 부정하다고 그것을 먹지 말라는 그 음식을 우리가 먹고사는 것입니다. 정직하게 못 하게 사는 것도 결국 우리가 부정한 음식을 먹으며 사는 것입니다.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들은 제사를 통해서, 먹는 것을 가지고 구별된 삶을 살았다면, 오늘 우리는 절제된 삶으로, 섬기는 삶으로, 정직하고 진실한 삶으로 구별된 삶을 살아내어야 합니다. 여러분들이 구원받았다는 것이 자랑스럽습니까! 여러분들이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것이 자랑스럽습니까!

    ​그러면 하나님의 자녀로서 구별된 삶을 사는 것도 자랑스러워야 합니다. 지금 이 시간에 하나님께서 우리 모두에게 그렇게 하나님의 자녀로서, 구원받은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구별된 삶을 살아갈 수 있는 은혜를 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거룩하신 아버지 하나님!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들이 먹을 수 있는 것과 먹을 수 없는 것을 가지고 구별된 삶을 살았던 것처럼 우리들은 절제된 삶! 섬김의 삶! ​정직한 삶을 통해 구별된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하나님 우리 모두에게 은혜를 베풀어 주시옵소서.


    거룩한 백성의 정결한 삶(레 11~15장)

    정결과 부정결의 교훈은 ‘거룩’의 주제와 연결되어 있다

    레위기 11장은 부정한 짐승의 문제를 다룬 ‘음식법’ … 
    상징과 실제의 세계 혼동하지 말아야

     

    ▲ 김경열 목사(총신대 강사)

    돼지를 먹지 못한 구약 백성들

    이스라엘 땅에 혹독한 기근이 찾아왔다. 곡식과 과일은 거둘 것이 없었고 가축마저 떼죽음당해 식량 부족으로 온 나라가 아우성이다. 기근의 고통은 신실한 요아킴과 그의 가족도 예외는 아니었다. 들판에는 산양, 야생염소, 사슴, 비둘기, 참새, 등등 아직 더러 있었으나 특히 멧돼지들이 많이 보였고 녀석들이 굶주림에 식량을 찾아 마을 어귀까지 내려오곤 했다. 그러나 요아킴과 마을 사람들은 굶주림 속에서도 멧돼지만은 잡지 않았다. 멧돼지만이 아니라 야생 새들 중 독수리와 따오기와 같은 새들, 그리고 기근을 함께 버티고 있던 가축들인 낙타와 노새도 끝까지 잡아먹지 않았다. 이것들은 하나님의 율법에서 엄중히 식용 금지된 부정한 짐승이기 때문이다. 율법에 불순종하여 하나님의 징계로 찾아온 대기근 속에서 요아킴과 백성들은 크게 회개하며 극한의 상황 속에서도 율법을 준수하려 애를 썼다. 오랜 기다림 끝에 마침내 단비가 내렸다. 대지를 적시며 땅이 살아나고 온갖 생명이 힘차게 다시 약동했다. 순종하는 백성에게 ‘이른 비와 늦은 비’를 주겠다고 약속하신 하나님께서 은혜를 내려주신 것이다.

    왜 어떤 짐승들은 식용 금지되었는가?

    소위 ‘정결법’이라 불리는 레위기 11~15장은 모든 짐승들을 정결한 것과 부정한 것으로 분류하는 한편(11장) 인간과 사물의 다양한 부정결한 상태를 정의하고 그 해결책을 제시한다(12-15장). 부정결의 문제는 결국 ‘거룩’이라는 주제와 결부되어 있다. 거룩한 백성은 곧 정결한 백성이기 때문이다. 레위기 11~15장의 주제를 장별로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11장, 정-부정 동물과 음식법; 12장, 산모의 출산 후 부정결; 13-14장, 악성 표피 질환의 부정결, 15장, 신체의 유출들의 부정결.

    왜 어떤 짐승이 부정하고 사람과 사물의 어떤 상태가 부정한가? 오래도록 학자들은 이 문제를 놓고 씨름해왔는데, 주로 레위기 11장의 연구에 주력해왔다. 그들은 오랜 연구 끝에 결국 레위기 11장은 11~15장의 전체적 맥락 속에서 파악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과연 레위기 11~15장을 관통하는 부정결의 근원적 원리(rationale)는 무엇인가? 레위기 11장에 대한 다양한 이론들을 살피면 그 답이 발견된다. 특히 레위기 11장은 강단에서 가장 흔하게 풍유적(알레고리) 해석으로 설교되는 본문이므로 각별한 주의가 요망된다.

    레위기 11장은 신명기 14장과 더불어 부정한 짐승의 문제를 다룬 ‘음식법’이다. 오늘날도 유대인들은 여전히 ‘코세르’(kosher)라는 이름으로 이를 준수하고 있다. 레위기 11장은 음식 관련 규정과 더불어 사체 접촉의 부정결이라는 주제를 다루는데 양자는 밀접히 결부되어 있다. 짐승은 음식으로 허용된 짐승(정결한 짐승)과 금지된 짐승(부정결한 짐승)으로 나뉜다. 이때 짐승의 구분은 구약의 세계에서 허용된 상징을 통해 교훈을 주기 위한 목적을 가질 뿐 부정하고 흠이 있는 짐승이 내재적·존재론적으로 열등하다는 의미는 아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피조물을 창조하시고는 보시기에 좋았다 하셨다(창세기 1장). 따라서 구약을 읽을 때는 상징의 세계와 실제의 세계를 혼동하지 말아야 한다. 예를 들어 독수리는 경우에 따라 부정적인 상징으로 쓰이기도 하고, 긍정적 상징으로 쓰이기도 한다. 레위기 11장(신 14장)에서는 먹지 못할 새로 가장 먼저 언급될 만큼 부정한 생물의 대표 격이며, 신명기 28장 48~51절에서는 장차 이스라엘을 침공할 흉악한 민족을 상징하지만, 출애굽기 19장 4절(신 32:11)에서는 이스라엘을 시내산까지 이끌어주신 하나님의 완벽한 보호와 인도하심에 대한 상징물로 사용된다. 또한 나귀와 낙타는 부정한 짐승이었지만 짐을 부리는 가축으로 매우 귀한 재산이기도 했다. 부정한 짐승은 순전히 먹는 것과 관련해 그 상징성 때문에 부정하게 여겨졌다. 부정한 짐승들은 몇 가지 신체적 특징과 기준에 의해 판정되거나 짐승들의 목록으로 범주화된다. 그동안 동물을 정-부정으로 구분하는 기준에 대해서는 많은 이론들이 제시되었는데 그중 가장 대표적인 것 몇 가지는 다음과 같다.

    a) 보건-위생학적 설명: 부정한 짐승은 비위생적이며 건강에 해롭다는 주장이다. 일부 유대교 랍비들의 해석으로, 제칠일 안식일 교회가 이를 따른다. 어떤 랍비들은 일부 동물들은 서식 환경이 불결하다는 이유로 금지된다고 말하기도 하고, 지느러미와 비늘이 없는 물고기는 탁한 물에서 살고, 체액이 차기에 먹으면 몸에 해롭다. 또한 육식조류의 피는 탁하고 진하므로 이것을 먹으면 마음이 잔인해지고 몸에서 검은 빛깔의 체액이 분비된다. 미생물학이 발달한 근대에 이르러 부정한 짐승들에 대한 과학적 연구를 통해 돼지고기는 선모충균이 가득하고 토끼는 야토병을 일으킨다는 사실이 밝혀짐으로써 보건-위생학적 설명이 힘을 얻었다. 이런 견해의 문제점은 금지된 짐승들 중에는 영양이 뛰어나고 위생적으로도 문제가 없는 것들이 많고 반대로 허용된 짐승들 중에도 건강에 좋지 않은 것들이 다수 포함되어 있다는 것이다. 허용된 초식성 반추동물 중에도 위험한 기생충의 숙주역할을 하는 것이 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그리고 돼지를 비롯한 금지 동물뿐 아니라 닭이나 염소 등도 불결한 생활습성을 가졌다. 위생을 기준으로 음식의 정-부정을 판가름했다면 ‘독초’는 왜 부정한 음식에 속하지 않는지 설명할 길이 없다. 무엇보다 하나님께서 인간의 건강을 고려하여 주신 법이기에 이 법은 계속 유효하다는 주장은 신학적 문제를 내포한다. 신약은 먹을 수 있는 것과 없는 것의 구분을 완전히 폐기했다. 제칠일 안식일 교회는 레위기 음식법의 항구적 유효성을 주장하지만 예수(막7:14~20)와 사도들(행10:9~16)의 가르침을 볼 때 이는 더 이상 효력이 없음이 분명하다. 하나님께서 건강을 증진하기 위해 주신 법을 나중에는 스스로 제거했다는 설명은 납득하기 어렵다. 물론 음식법 외에 다른 정결의식에 관한 율법들, 말하자면 출산한 여인을 장기간 격리시키고, 곰팡이와 피부병을 취급할 때는 청결을 엄격히 요구하고, 질병의 원인이 될 수 있는 사체를 멀리하게 하는 조치에는 보건 위생학적인 의도가 엿보인다. 그러므로 음식법에도 그런 위생학적 고려가 전혀 없었다고는 말하기 어려울 것이다. 그럼에도 보건-건강학·위생학적 설명은 이미 제시된 여러 난점을 통해 알 수 있듯이 그 규정에 대한 포괄적인 근거가 될 수는 없다. 레위기의 정결법에서 정결과 부정결은 보건 위생적 개념을 일부 포함하기는 하지만 그 이상의 고도의 신학적 개념이다.

    b) 상징적(풍유적) 해석: 정결하고 부정한 짐승의 구분은 그것들이 지닌 상징성 때문에 주어졌다. 정결한 짐승들은 의인으로서 이스라엘 사람들의 행동양식을 나타내며, 반대로 부정한 짐승들은 죄인들의 모습을 나타낸다는 식의 해석이다. 이스라엘 백성은 유순한 초식 동물을 먹고 난폭한 육식 동물은 피해야 한다. 갈라진 굽은 의와 불의의 구분을 상징하고 새김질은 회상을 표시한다. 파괴적 습성을 가진 쥐는 혐오스럽고, 족제비는 입 모양을 볼 때 소문내기의 상징이다. 지느러미와 비늘을 가지고 강한 물살에 저항하는 물고기는 인내와 절제를 상징한다. 이와 같은 해석이 오래도록 한국교회 강단에서 여과 없이 전달되었다. 그러나 풍유적 해석법은 현대의 성경 해석학에서 매우 위험한 것으로 간주되어 더는 주석가들의 지지를 받지 못하고 있다. 근거없는 해석은 주관성이라는 함정에 빠지기 쉽다. 예를 들어 한국교회에서는 흔히 갈라진 굽은 신약과 구약의 말씀을 상징하고 새김질은 말씀의 묵상을 상징한다는 해석이 흔히 통용된다. 그러나 갈라진 굽은 선과 악을 상징하고 새김질은 선악의 분별을 상징한다는 해석도 존재한다. 둘 중 어느 것이 옳은 것인가? 이와 같이 풍유적 해석은 명확한 기준이 없기에 주관성을 피할 수 없다. 무엇보다도 성경 해석이야 교인들에게 감동과 은혜만 되면 문제가 없다는 식의 태도로는 이단의 창궐을 막을 수 없다.

    그 외 금지된 동물이 이방의 제의에서 제물로 바쳐졌다는 ‘이방 제의 기원설’이 있으나 이스라엘의 이웃 나라들에서 공통적으로 소, 양, 염소가 주 제물이었다는 점에서 잘못된 주장이다. 또한 ‘생태학적 설명’이 있는데, 이에 따르면 이스라엘의 생태적 환경이 부정한 짐승들이 인간에게 도움을 주지 못했기 때문에 배척되어 결국 금지된 짐승으로 법제화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동일한 생태적 환경에 사는 이웃 나라들이 그런 짐승들을 허용했다는 것은 이런 설명을 수용하기 어렵게 한다. 학자들에게 가장 인기있고 매우 중요한 이론은 다음의 구조주의적 설명이다.

    질서는 정결, 무질서는 부정결로 간주하는 구조주의적 설명

    구조주의에 입각한 메리 더글러스는 ‘부정결’과 ‘오염’은 질서를 벗어난 것, 변칙적이고 자리를 이탈한 상태, 그리고 흠이 있는 불완전한 상태라고 주장했다. 그와 반대로 정결한 것은 원래의 자리에 있는 상태, 정상적인 것, 그리고 흠이 없는 완전한 상태를 말한다. 정결과 더불어 거룩 또한 적합한 질서를 일컫는 개념이다. 모든 동물은 하늘, 땅, 수중의 각 영역에 맞는 신체 구조와 이동 방식을 지녀야 한다. 예를 들어 정한 것으로 분류되는 짐승, 물고기, 새, 그리고 곤충은 저마다 삶의 영역에 부합하는 신체 구조와 이동방식을 가졌다. 더글러스에게 있어 모든 생물은 창세기 1장의 자연 생태계에 적합한 신체 구조와 이동방식을 가져야 하며, 이 기준을 벗어난 것은 무엇이든 “변칙적인 것”이기에 부정하다.

    (1) 지상(땅): 정상적인 지상 동물에게는 갈라진 굽과 새김질이 필수다. 예컨대 굽이 갈라지지 않은 발(paw)은 펑퍼짐한 모양의 손과 같다. 즉 규칙을 이탈해 손이 발의 역할을 하는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신체적 특징을 가진 개, 고양이, 호랑이 등의 짐승들은 부정하다. 날거나 걷지 않고 기는 동물 역시 물고기나 새, 짐승 중 어느 것으로도 분류할 수 없으므로 자동적으로 배제된다. (2) 공중: 예를 들어, 새 중에 공중과 수중의 두 영역을 넘나드는 것은 질서를 어지럽히므로 부정하다. 새에는 구체적인 신체 기준이 적용되지 않고 20종류의 목록이 제시된다. (3) 수중: 정상적인 어류에게 요구되는 지느러미와 비늘을 가진 물고기만이 정결하다. 따라서 상어나 갈치처럼 지느러미가 없는 어류는 부정하고, 해삼, 낙지, 멍게, 조개류는 자동으로 배제된다. 또한 이들은 기어서 이동하는 종들이다. 수중에서 기는 동작은 정상적인 이동 방식이 아니므로 부정하다. (4) 기는 것: 어느 부류에도 속하지 않는 애매한 동물들은 부정하다. 땅, 물, 공중을 불문하고 기어 다니는 짐승들은 물고기도, 짐승도, 새도 아니기 때문에 모두 부정하다.

    결국 더글러스에게 있어서 부정한 동물이란 정상적인 신체 형태와 이동 방식을 벗어난 변칙적인 것들이요 정결한 동물들은 그러한 요건을 갖춘 것들이다. 이러한 음식법의 표준과 정-부정 동물은 거룩하신 하나님께서 온전하고 완전하신 분임을 증언한다. 그것들은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완전성, 정결성, 통일성을 인식시킨다. 더글러스의 새로운 견해에 성경학자들의 반응은 열광적이었으며 지금도 큰 인기를 끌고 있다. 그러나 그녀의 이론은 많은 반론을 불러일으켰다. 특히 이동 방식의 변칙성(anomaly) 설명에 대한 집요한 비판이 이어졌다. 이것이 전 동물계에 일관성 있게 적용되지 않기 때문이다. 우선 가축의 경우 굽의 갈라짐은 논외로 하더라도 새김질은 신체적 특징이나 운동방식과는 무관하며, 음식섭취와 관련이 있다. 물고기의 비늘 역시 운동방식과 아무 상관이 없다. 부정한 새들이 공중과 물을 오가며 이동할 것이라는 주장도 추론에 불과하다. 11장의 목록에 있는 20가지의 새들 중 많은 것이 어떤 종인지 알려지지 않았으므로 그 새들 전부가 다이빙을 하고, 수영을 한다고 확신할 수는 없다. 또한 이스라엘 사람들의 생활환경은 물이 드문 고지대였으므로 그들에게 익숙한 조류는 대부분 오히려 강이나 호수의 생태적 습성과 거리가 멀었을 것이다. 게다가 공중을 나는 새는 모두 땅을 걸어 다니므로 두 영역을 넘나드는 변칙으로 간주되어야 한다. 따라서 더글러스의 기준은 일관성이 없다. 무엇보다 왜 지상의 짐승다운 짐승의 표준이 갈라진 굽과 새김질로, 또한 수중의 짐승의 표준은 마땅히 지느러미와 비늘로 결정되었는지 납득하기 어렵다.

    이런 답변들에 만족하지 못한 일련의 구약학자들은 정-부정을 가르는 가장 설득력 있는 이유를 찾아냈다. 그것은 바로 생명과 죽음의 두 축이다. 우리는 지면상 이 문제를 다음 호에서 다루기로 하자. 동시에 그 생명-죽음의 두 축이 어떻게 레위기 11장의 음식법과 나머지 12~15장에 이르는 모든 정결법에 일관되게 적용되는지 살펴볼 것이다. 우리는 생명-죽음을 기준으로 나뉘는 정결과 부정결의 교훈이 결국 ‘거룩’을 가르치기 위한 레위기의 중대한 신학이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먹을 수 있는 것(something edible)

    육지의 모든 짐승 중에서
    1. 먹을 만한 것은 무엇인가?
    2. 일반적인 특성은 무엇인가?
    3. 왜 그런 짐승들만 먹으라시는가?

      1) 굽이 갈라져서 쪽발이 되고 되새김질 하는 것 : 소, 양, 염소, 사슴, 노루
      2) 대체로 풀을 먹고 사는 동물이며 평화로운 짐승들이다.
      3) 구별된 삶과 묵상하는 삶을 통해 평화로운 삶을 영위할 것은 요구하신다. 
      먹을 수 없는 이유를 생각할 때마다 갈라졌느냐, 되새김질을 하느냐를 따져야한다.
      당연히 사람에게도 갈라졌느냐 되새김질이 중요하다는 것을 인식하게 된다.
      갈라지는 것의 의미는 거룩(구별)을 뜻하고, 되새김질은 묵상을 뜻한다.
      그렇게 하노라면 자연스럽게 모든 사람과 평화하는 삶을 살게 될 것이다.

      사반 : 토끼 비슷한 초식 동물
      토끼 : 실제로는 되새김질을 하지 않는다. 그냥 모양만 하는 것처럼 보일 뿐이다.

    물에 있는 모든 것 중에서 먹을 만한 것은 어떤 것이며 그것이 무슨 의미를 지니고 있을지 생각해보자?

      지느러미와 비늘이 있는 것.
      지느러미는 물고기가 방향을 잡아서 나아가는 데 필요한 것이다.
      살아가는 방향이 분명해야하고 때로는 물을 거슬러 나갈 줄도 알아야한다.
      한 곳에 머물러 있거나 타의에 휩쓸려 가는 삶은 안된다.

      비늘이 없는 것은 땅에 기는 짐승과 비교할 수 있다(뱀장어류).
      진흙에 깊이 박혀 있거나(조개류) 물 밑 깊은 곳에서 공격적이고 음흉하다.
      미꾸라지의 파고 들어가는 성질은 유명하다.
      끊는 물에 미꾸라지와 두부를 함께 넣으면 미꾸라지가 두부에 파고 들어가서 익어버리기 때문에 마치 백찜에 속을 넣은 것같이 된다나!
      반면에 비늘이 있고 지느러미가 있는 물고기는 대체로 수면 가까이에서 활발하게 움직이며 산다.
      가끔은 수면으로 뛰어오르기도 하고. 하늘을 바라보면 살아야하는 그리스도인들의 삶과 비슷한 점이 많다.

    곤충 중에서 먹을 만한 것 무엇인가? 왜 그럴까?

      날개가 있고 땅에 뛰는 다리가 있는 것 :
      날개가 있는 데 기는 것은 가증하다.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을 받았으면서도 마치 하나님이 없는 것처럼 맥빠진 모습으로 사는 것은 하나님께서 가증하게 여기신다.
      뛰는 다리란 땅에서 살되, 땅에 속하지 않는 것을 의미한다.
      땅에 발을 디디긴 하되 빠지지는 말라는 것이다.
      귀뚜라미는 날개가 없음에도 정한 것으로 취급되었다.

    정한 짐승과 부정한 짐승, 먹을 수 있는 짐승과 먹어서는 안 되는 짐승을 구분합니다.
    굽이 갈라지고 새김질하는 짐승은 정하기에 먹을 수 있습니다.
    둘 중의 하나만 해당하는 낙타, 토끼, 돼지는 먹을 수 없습니다.
    불완전하다는 것입니다.

    비늘과 지느러미를 가진 물고기도 먹을 수 있습니다.
    비늘과 지느러미를 완벽한 물고기의 조건으로 본 것입니다.

    독수리, 타조, 올빼미처럼 먹이를 탈취하는 조류는 먹을 수 없습니다.
    날개가 있으면서 동시에 네발로 기어 다니는 곤충도 부정합니다.
    메뚜기처럼 날개가 있어도 네 발로 뛰는 것은 먹을 수 있습니다. 

    심지어, 부정한 짐승의 사체를 만지거나 접촉해도 부정합니다.
    이처럼 정한 것과 부정한 것 (clean vs. unclean)에 대한 규정이 복잡하고 엄격합니다.

    레위기 11장에서 알려주는 정한 것과 부정한 것의 기준이 명확하지 않습니다.
    그러다 보니 다양한 견해가 제시되었습니다.

    첫째로, 특별한 기준이 없고 하나님께서 정한 것과 부정한 것을 임의로 정하시고 이스라엘 백성들의 순종을 요청하셨다는 것입니다.
    정한 것과 부정한 것 사이에 뚜렷한 기준이 없는 것을 고려한 해석입니다.

    둘째는, 본문의 부정한 짐승들은 이스라엘이 아닌 이방 민족의 제사에 사용된 것이라는 견해입니다.
    그러니 먹을 수 없습니다.
    돼지가 대표적인데, 그렇다면 바알신의 상징인 소고기도 금해야 했기에 일관성이 없습니다. 

    셋째는, 의학이 발달한 근래에 제기된 의견으로 위생상의 이유라는 것입니다.
    세균을 옮기기 쉽거나 박테리아 등을 갖고 있는 위험한 짐승들이라는 것입니다.
    상하기 쉽고 종종 전염병을 일으키는 돼지가 대표적입니다.
    그런데 구약성경에서 부정한 짐승이 건강상 해롭다는 지적이 없다는 것이 함정입니다.

    네 번째는, 상징적인 의미가 있다는 견해입니다.
    구약의 율법에서는 온전한 것(wholeness)과 창조 섭리에 맞는 자연스러운 것(normality)을 중요시 합니다.
    레위기 11장에서 정한 것으로 분류한 것들은 하나님의 창조 섭리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는 것입니다.

    또한, 먹이를 새김질하는 짐승을 정한 것으로 구분한 것은 하나님 말씀을 새김질하듯이 묵상하는 것을 의미한다는 식입니다.
    상징적인 해석은 그럴듯하지만, 비약이 있고 주관적입니다.

    어느 한 가지 의견만 지지하거나 고집할 것도 아닙니다.
    어떤 견해가 맞는지를 두고 집요하게 연구할 것도 아닙니다.
    본문 자체가 명확한 입장을 보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레위기 11장의 정한 것과 부정한 것의 구분이 만고불변의 진리라면 하나님께서 정확한 기준을 제시하셨을 것이니 본문의 규정을 현대에 맞출 필요도 없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너희 몸을 구별하여 거룩하게 하고 스스로 더럽히지 말라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는 말씀입니다(레 11:44-45).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임의적 명령이든, 이방의 풍습을 따르지 말아야 했든지 위생상의 이유나 상징적인 의미에서든지 11장의 규정을 지켜야 했습니다.
    당시에는 그것이 몸을 더럽히지 않고 하나님 백성에 걸맞은 거룩한 삶이었습니다.
    그렇다면, 현대를 사는 우리에게 세상 사람들과 구별되는 “거룩함”은 무엇일까요?
    우리 몸을 스스로 더럽히는 것들은 없는지요?
    구약의 이스라엘이 먹는 것으로 거룩함을 유지했다면 우리는 무엇을 갖고 거룩함을 지켜야 할까요?
    “거룩함”이라는 단어를 붙잡고 오늘 하루를 살아 봅시다.

    나는 여호와 너희의 하나님이라.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몸을 구별하여 거룩하게 하고 (레 11:44)

    For I am the LORD your God. Consecrate yourselves therefore, and be holy, for I am holy. (Lev 11:44)

    하나님 아버지 구약의 복잡한 규정을 지키지 않아도 하나님 백성으로 거룩함의 길을 걷게 하소서.



    정결한 짐승 섭취를 통해 거룩한 백성의 신분 유지하다

    생명은 질서, 죽음은 무질서에 속해 … 죄의 증상으로 나타난 부정결 씻어 내는 속죄제 필요

    앞선 글에서 우리는 왜 어떤 동물이 정결하고 다른 동물은 부정한지 여러 견해를 살펴보았다. 나아가 우리는 왜 산모는 부정하게 여겨졌고 나병(정확히는 악성 피부병)과 신체의 유출증은 부정한지를 질문해볼 수 있다. 정결과 부정결이 구분되는 기준은 생명과 죽음이라 볼 수 있다. 이 견해의 장점은 음식법뿐 아니라 레위기 11~15장 정결법 전체에 잘 들어맞는다는 것이다. 이에 따르면 생명과 죽음은 각각 질서와 무질서를 가리킨다. 죽음은 곧 하나님의 부재이자 거룩의 부재를 나타내며, 부정한 것이다. 생명이 제거된 자리에는 죽음이 들어온다. 하나님과 결합된 인간은 생명 안에 있기에 거룩하고, 하나님 없는 인간은 죽음의 영역에 속하니 부정하다.
    이러한 관점에서 금지된 짐승과 새들 중 대다수는 피를 내면서 죽음을 유발하는 육식동물, 죽음의 찌꺼기와 사체를 먹는 청소동물(scavengers), 그리고 돼지와 같은 잡식성 동물들이다. 다른 한 부류들로는 멧돼지와 육식 조류와 같이 고대 이스라엘인들 사이에서 악마의 거주지로 간주되었던 황량한 광야와 황무지에서 사는 것들이다. 죽은 자를 부르는 강신술과 관계된 동물들 역시 부정하다. 예를 들어 이사야 65장 2~7절에서 이스라엘인들은 마술, 강신술을 동원해 집회를 열면서 돼지고기와 가증한 짐승의 국물을 먹는다. 한편 죽음은 강력한 부정결의 근원이므로 사체와의 접촉은 피해야 했다. 심한 피부병은 사체의 피부를 연상시키고, 악성 곰팡이가 핀 건물은 습한 지하나 무덤과 상태가 비슷하기 때문에 부정하게 여겨졌을 것이다. 신체적 유출은 생명의 액체가 몸에서 빠져 나가기 때문에 부정했을 것이다. 둘 다 남녀 생식기로부터의 유출과 관련되어 있다. 여성의 자궁 출혈과 남성의 정액 유출 및 비뇨기 질환으로 인한 유출이 여기에 해당된다.

    이와 같이 모든 정-부정을 구분하는 근거는 ‘생명’과 ‘죽음’일 수 있다. 11~15장을 ‘생명’과 ‘죽음’으로 완벽하진 않지만 거의 일관성 있게 설명할 수 있다. 생명에 속하고 생명과 가까운 것은 정결하고, 죽음에 속하고 죽음과 가까운 것은 부정결하다. 더불어 더글라스의 견해인 질서와 무질서를 생명과 죽음에 적용하는 것이 가능하다. 곧 생명은 질서에 속하고 죽음은 무질서에 속한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부정결의 문제를 해결하려면 특히 속죄제가 필수적으로 요구된다. 이것은 특히 레위기 12~15장의 부정결의 증상들이 죄와 관련되어 있다는 유추를 가능하게 만든다. 추정컨대 부정을 유발하는 신체적 유출의 배경과 기원은 창세기 3장의 인간이 저지른 최초의 범죄로 거슬러 올라간다. 다시 말해 인체에 나타나는 여러 가지 부정결과 그와 비슷한 사물의 부정결은 아담의 범죄로 인해 발생된 신체적·자연적 변화로 인한 증상일 가능성이 있다. 죄의 증상으로 나타난 부정결을 씻어 내기 위해 속죄제가 요구되는 것이다.

    레위기 11장: 정-부정 동물(음식법)과 사체 접촉

    창세기 1장을 비롯 성경 전반의 우주관은 하늘, 땅, 수중으로 삼중적인데, 레위기 11장의 자연계는 4중으로 구분된다(공중/지상/지표면/수중). 땅을 지상과 지표면으로 세분화하면 생물들을 네 영역에 분포시키는 것이다. 특이하게 11장에는 자연계를 구분하는 경우 외에도 의도적으로 4배수의 숫자를 사용하고 있다. 경계선에 있는 동물 4종(4~7절); 금지된 조류 20종(13~19절); 허용된 곤충 4종(20-22절); 금지된 기는 동물 8종(29~30절). 각 영역별로 부정한 짐승들의 목록이 주어진다. 앞서 말한 대로 부정결을 판별하는 기준은 생명과 죽음이다.

    지상의 짐승 중에 사냥하는 짐승과 사체를 먹는 짐승, 잡식성 짐승은 부정하다. 생명-죽음이라는 기준에 따라 제일 먼저 초식 동물이 허용되며, 그것을 토대로 반추 동물(소, 양, 염소)의 공통점인 갈라진 굽과 새김질이 표준으로 결정되어 자연계 전체에 적용되었다고 볼 수 있다. 이때 경계선에 위치한 네 부류의 짐승들에 유의해야 한다(4~7절). 언제나 진짜와 비슷한 가짜가 더 위험한 법이기 때문이다.

    수중 생물 중 바닥을 청소하는 종류는 우선 배제된다. 수중에서 기는 짐승들은 수중 밑바닥에 널브러진 죽은 어류의 잔해를 섭취할뿐더러 수면 밑을 배로 쓸고 다니거나 그곳에서 산다. 수중을 헤엄치는 물고기는 지느러미와 비늘을 모두 가지고 있지만 지상 동물과 달리 이 둘 중 하나만 가진 물고기는 정결한 동물로 분류되지 않는다. 더글라스가 말한 대로 육상 동물과 수중 동물에게 신체적 기준을 적용한 데는 짐승의 흠을 판별한 것과 마찬가지로(레 22:17~25) ‘완전성’이라는 교훈을 가르칠 목적이 있었을 것이다. 따라서 더글라스의 구조주의적 설명에 오류는 있을지언정 그녀가 발견한 ‘신체적 완전성으로서의 거룩’이라는 개념을 배제할 수는 없다. 그러니 결국 ‘생명과 죽음’을 기준으로 정-부정 동물을 구분했고, 거기에 신체적 완전성의 원리가 덧붙여진 것이 분명하다. 그래야 동물의 굽과 새김질, 비늘 지느러미와 같이 정결한 짐승에게 요구된 신체적, 생태적 특징이 설명된다.

    공중의 새에도 같은 기준이 적용되어 주로 육식 조류와 사체를 먹는 습성을 가진 조류, 물고기를 잡아먹는 새들이 부정하게 여겨졌다. 다만 금지된 조류들 사이에서 별다른 신체적 공통점을 찾아볼 수 없어 금지된 조류 20가지를 목록으로 정리한 것으로 보인다(13~19절). 이 조류들의 정확한 종류가 무엇인지는 알 길이 없고 현대의 번역 성경들뿐만 아니라 고대의 역본들도 천차만별이다. 지표면을 기는 짐승을 부정하게 여긴 것은 아마도 사체와 뼈가 깔린 지표면을 쓸고 다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지표면이 부정한 영역으로 취급되는 또 다른 이유는 음부(스올)의 접촉면이기 때문이다. 구약에서는 기본적으로 지하를 의미하는 음부를 망자의 세계로 인식한다. 즉 지표면은 죽음의 잔해들이 널려있고, 동시에 사체가 묻혀있는 지하 세계와 맞닿아있다. 따라서 두더지나 쥐처럼 땅속을 드나드는 짐승들 또한 기는 것의 범주에 포함되어 가증하게 여겨지는 듯하다. 곤충류는 새처럼 나는 생물임과 동시에 기는 것으로 분류되어 부정하지만, 네 종류의 메뚜기는 발로 뛰는 특징 때문에 허용된다(20~22절).

    이 음식법의 목적은 정결한 짐승의 섭취를 통해 거룩한 백성의 신분을 유지하는 것이다(레 11:44~45). 한편 레위기 11장은 부정한 짐승의 섭취를 금지함과 동시에 부정을 유발하는 짐승의 사체와의 접촉 역시 금지하고 있다. 이때 정한 짐승과 부정한 짐승 사체 모두 접촉이 금지된다. 만일 접촉이 발생하면 하루의 시간이 지난 뒤 목욕하고 옷을 빤 뒤 저녁까지 기다려야 한다. 참고로 인간의 시신의 경우 훨씬 강력한 부정결의 근원으로서 송장과 접촉한 사람이나 물건과 접촉되면 그것들도 부정케 된다.

    레위기 12장: 산후 정결법 

    자녀를 출산한 여인은 부정하게 여겨졌는데 이것은 아이를 낳은 것 자체가 아니라 그로 인해 발생한 자궁 출혈 때문이다. 이어서 거론되는 악성 피부병(13~14장) 및 신체의 유출(15장)과 더불어 이러한 부정은 당사자의 의지와 상관없이 자연적 또는 불가항력적으로 발생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경의 법은 그것들을 부정한 상태로 간주한다. 출산은 ‘생육하고 번성하라’는 하나님의 창조 명령에 따른 행위임에도(창 1:26~28) 그로 인한 출혈은 부정하게 여겼다는 것은 언뜻 매우 부당한 조치로 보인다. 그러나 알고 보면 여기에는 오경의 신학적 배경이 놓여 있다. 11장과 달리 12~15장은 대부분 인간의 몸에서 발생되는 부정한 증상들을 다룬다. 12장은 산후 출혈, 13~14장은 문둥병으로 불려온 악성 피부병(건물과 사물의 표면에 발생하는 곰팡이를 포함한다), 그리고 15장은 생식기로부터의 액체가 빠져나가는 증상들을 부정하게 취급한다. 그것은 월경을 포함한 자궁 출혈과 정액의 유출, 혹은 비뇨기 질환으로 인한 유출이다. 더글라스는 11장의 해석과 같은 맥락에서 이러한 신체적 유출이 부정한 이유는 완전한 담지체인 몸이 체액 소실로 인해 불완전해지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그것보다는 몸으로부터 ‘생명의 액체’가 빠져나간 결과라 할 수 있다. 둘 다 남녀 생식기로부터의 유출과 관련되어 있다. 일단 이러한 액체는 몸으로부터 빠져 나가는 순간 접촉을 통해 2차, 3차 감염을 일으키는 유출물이 된다.

     

    이와 같이 산모가 부정을 타는 이유는 출혈 때문이라 할 수 있는데 달리 보면 그녀는 출혈과 더불어 생명을 내줌으로써 죽음에 다다르는 과정을 거쳐 새로운 생명을 탄생시킨다. 즉 산모는 죽음과 생명의 중간 상태에 놓인 존재이기에 부정하게 된다. 12장의 산모의 부정결과 정결에 관한 규례는 다음과 같이 정리해 볼 수 있다. <표 참조>

    레위기 12장의 가장 큰 난점은 출산한 아이의 성별에 따라 부정결한 상태가 지속되는 기한에 차이가 있다는 점이다. 남자 아이를 낳으면 산모는 7일간 부정한 상태로 있다가 8일 째에 아이를 할례한다(2~3절). 이때 본문에는 생략되어 있으나 다른 사례들에 비추어볼 때 산모의 부정함은 목욕과 더불어(아마도 옷 세탁을 포함) 깨끗이 씻길 것이다. 그러나 산모는 그로부터 33일이 지나야 비로소 완전히 남은 산혈이 완전히 깨끗해졌다(4절). 그러나 이 기간에는 성소에 접근이 제한되고 성물을 만지는 것이 금지될 뿐(4절), 집안에 격리되지 않고 별다른 제약 없이 일상생활을 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다만 성소 접근을 금지한 데서 알 수 있듯이 일상생활에도 어느 정도의 제한이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남아를 출산한 산모가 완전히 정결해지기까지는 총 40일간이 소요되었다. 여아를 낳았을 때는 그 기간이 두 배로 늘어난다. 목욕과 더불어 마무리되는 일차 부정결의 기간은 14일이며, 그 후 66일 동안은 성소 접근이 금지되었다. 완전한 정결을 위해 총 80일이 소요되는 셈이다.

    이 같은 차이가 발생하는 원인은 아직 명확히 규명되지 않았는데 이에 대해 그 동안 다양한 설명들이 시도되었다. 여아를 낳으면 실제로 출혈 기간이 더 길다는 의학적 근거를 제시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여아가 미래의 산모인 이유로 여아는 매달 운명적으로 부정결의 고통을 겪는 미래의 산모라는 점이 고려되어 두 배의 기간이 요구된다는 주장도 있다. 그러나 가장 강력한 의견은 고대에서의 남녀의 차이 때문이라는 견해다. 고대 이스라엘의 가부장 체제 속에서는 여자가 남자보다 열등했으며, 몸값도 반값이었다는 것이다(레 27:2~7). 그러나 반드시 부정결한 정도가 높은 쪽의 가치가 상대적으로 떨어지는 것은 아니다. 예를 들어 사람의 시체는 돼지의 사체보다 더럽지만, 사람과 돼지의 가치는 정반대다. 결국 어느 것도 남아와 여아 출산 사이의 차이에 대한 명쾌한 답변은 되지 못한다.

    그 이유가 무엇이었든 출산을 마친 여인을 장기간 격리시키고 그녀의 활동을 제한한 배경에는 산모의 육체적 회복과 감염 방지를 위한 배려가 숨어있었을 것이다. 만일 여아의 경우 산모의 출혈이 더 오래 가고(남아의 두 배에는 훨씬 못 미칠지언정) 그만큼 회복에 오랜 시간이 걸린 것이 사실이라면 그 기간을 넉넉히 두 배로 할 것을 법제화했는지도 모른다.

    오랜 기간이 지나 산혈이 완전히 깨끗해진 뒤 산모는 마지막으로 성소에 제사를 드리러 올라와야 한다. 이때 도표에서 보는 바와 같이 번제를 위한 어린 양 한 마리와 속죄제를 위한 집비둘기나 산비둘기 한 마리가 요구된다. 그러나 가난한 여자의 경우 번제의 어린 양을 비둘기로 대체하여 비둘기 두 마리로 약소한 제사를 바쳤다(레 12:8). 복음서에는 마리아가 예수님을 출산한 뒤 8일 만에 할례를 하고, 정결 기간을 지낸 후 희생제를 바치러 예루살렘 성전에 올라온 일화가 기록되어 있다(눅 2:21~24). 그녀가 비둘기 두 마리를 바친 점으로 미루어볼 때 예수님은 매우 가난한 가정에서 태어나셨을 것이다.

    여기서 속죄제는 그녀의 부정결로 제단이 더럽혀졌기에 필수며, 번제는 아마도 자녀 출산에 대한 감사의 뜻으로 드렸을 것이다. 번제에 관한 규정이 앞서 등장하는 것으로 보아 순서상 번제를 먼저 드렸을 것이다. 이것은 이 희생제에서 출산에 대한 감사가 우선되어야 함을 암시한다. 그러나 사실은 뒤에 드려진 속죄제가 더 중요했다. 성소를 오염시킨 그녀의 부정결을 씻어내야 했기 때문이다.




     

    __________________ 레위기 10장 / 다른 불(1절)

    03-20-2023(월) 사순절 제23일

    아론의 아들 나답아비후가 각기 향로를 가져다가 여호와의 명하시지 않은 다른 불을 담아 여호와 앞에 분향하였더니.
    Aaron's sons Nadab and Abihu took their censers, put fire in them and added incense; and they offered unauthorized fire before the LORD, contrary to his command.

    성경을 읽을 때 어떤 사건에 대한 이해가 매우 중요합니다.
    사건을 이해하는 방법은 "대립 사건(對立 事件)" 또는 "유사 사건(類似 事件)"을 구분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은 아벨의 죽음과 같은 것과 비교할 때 "유사 사건"이라고 합니다.
    반면에 아이 성을 공격하고 실패했을 때 아간이 죽임을 당하는 것은 "대립 사건"이라고 하겠습니다.

    레위기 10장은 제자상 위임식 후에 첫번 제사를 마친 후에 아론의 두 아들이 여호와께서 명하지 않은 불을 사용하므로 여호와 앞에서 불이 나와 나답과 아비후가 죽고 말았습니다.

    왜 제사장으로 임명을 받은 "나답"과 "아비후"가 "여호와가 명하지 않은 다른 불(unauthorized fire, strange fire)"을 사용하였을까요?
    여호와가 명하지 않은 불이란 위임식 때 하늘에서 불이 떨어졌습니다(9:24).

    "불이 여호와 앞에서 나와 단 위의 번제물과 기름을 사른지라 온 백성이 이를 보고 소리지르며 엎드렸더라."

    제사장의 임무는 이때 떨어진 불을 잘 관리하여 제사 때마다 그 불을 사용해야 합니다.
    따라서 여호와의 명하지 않은 다른 불이란 단 위의 번젬물과 기름을 태웠던 불이 아니라 일상생활에서 사용하던 불을 말합니다.
    그 결과 나답과 아비후는 불에 타 죽고 말았습니다(10:2).

    "불이 여호와 앞에서 나와 그들을 삼키매 그들이 여호와 앞에서 죽은지라."

    축복의 불과 저주의 불을 생각해 봅니다.
    축복의 불이란 "제물을 태우는 여호와 앞에서 나온 불"을 말합니다(9:24).
    저주의 불이란 "나답과 아비후를 태웠던 불"을 말합니다(10:2).

    왜 나답과 아비후가 여호와께서 명하지 않은 불을 사용하였을까요?
    그 이유를 레위기 10장 9절에서 찾아봅니다.

    "너나 네 자손들이 회막에 들어갈 때에는 포도주나 독주를 마시지 말아서 너희 사망을 면하라 이는 너희 대대로 영영한 규례라."

    본문에 의하면 나답과 아비후가 포도주나 독주를 마셨기 때문에 다른 불을 사용한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향단에 불을 피울 때는 번제단의 불을 향로에 담아 향단에 옮겨서 분향해야 합니다.
    그러나 나답과 아비후는 여호와께서 명하시지 아니한 다른 불을 담아 여호와 앞에 분향하였습니다.

    나답과 아비후가 죽자 모세는 웃시엘의 아들들인 미사엘과 엘사반을 불러 회막 성소 앞에 있는 두 시체를 옮겨 장사되었습니다.
    그리고 모세는 아론과 그의 두 아들을 불러 슬픔의 표현을 금지시키고 여호와의 진노가 온 회중에게 미침을 면케 하라고 하였습니다. 

    우리에게 견디기 어려운 시련이 닥칠 때에도 그러한 상황을 허락하신 주님의 손길을 인정하며 불평하지 않고 묵묵히 참고 견디는 믿음이 필요합니다.

    제사장은 포도주와 독주를 마시지 말아야 합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은 거룩하신 분이기 때문에 제사장들은 그들의 직무를 수행하는 데 있어서 성결해야 했으며 특히 포도주와 독수를 마시지 말 것을 당부하셨습니다.
    정신이 맑아야 거룩한 것과 속된 것, 부정한 것과 정한 것을 바르게 구별할 수 있을 뿐 아니라 백성들을 온전히 가르칠 수 있기 때문이다. 나답과 아디후의 심판 사건 직후에 주신 것입니다.
    노아도 술 취함으로 범죄하였던 것 처럼 신앙 생활을 파괴하는 독약이 되는 포도주를 멀리해야 합니다. 

    사랑하는 교우들이여,
    주님께서 주신 오늘
    겸손한 자세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길이 재앙을 물리치는 길이요 하나님의 축복을 받을 수 있는 지름길이라는 것을 잊지말아야 하겠습니다.


    제사장들에게는 제사의 음식을 먹어야 하는 규례가 이미 주어져 있었습니다.
    모세는 그것을 명했지만, 회중의 죄를 위한 제사의 고기를 아론과 두 아들들은 먹지 않았습니다.
    모세는 이 일로 인하여 노했지만, 이 제사에는 자신들의 죄악도 포함되어 있었다고 생각해서 속죄제물을 먹지 않았다고 한 아론의 대답을 모세는 합당하게 여겼습니다.

    나답과 아비후의 불순종과, 엘르아살과 이다말의 불순종은, 모두 동일한 불순종이지만, 질적인 차이는 완전히 다릅니다.
    제사장의 직무를 얼마나 소중히 여기며, 하나님 앞에서 자신이 어떻게 서야 하는 것을 알고, 더욱 더 거룩하고자 한 엘르아살과 이다말의 말은 모세를 납득시키기에 충분했습니다.
    하나님의 법이 막무가내로 무조건 지켜야 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더욱 중요한 마음을 주님께 어떻게 드리느냐에 따라 이러한 융통성은 발휘됩니다.

    나답과 아비후가 여호와의 명하시지 않은 다른 불을 가지고 왔다는 것은, 바울 사도의 언어로 하면 다른 복음을 전하는 것일 것입니다(갈 1).

    사람들은 자기의 방법, 자기의 불, 자기 생각이 하나님의 옛 방식이나 인기 없는 방법보다 낫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또 이런 것은 언뜻 보기에 대수롭지 않아 보이고 사소해 보이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천사라 할지라도 저주를 받아야 한다고 사도 바울이 선언한 바와 같이 심각한 일입니다.
    자기의 방법과 방식으로 하나님을 예배하고 하나님의 교회를 세워보려고 하는 모든 헛된 시도들은 하나님의 심판의 대상이 될 뿐입니다. 예배와 삶과 행동과 모든 판단의 기준은, 나의 판단과 경험과 생각이 결코 아닙니다. 모든 기준은 오직 성경이며, 오직 하나님의 말씀과 명령뿐입니다.

    오늘 하루 우리의 삶 속에서,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고 판단하는 모든 것의 기준이, 오직 하나님의 말씀이 되게 하옵소서.
    내 눈에 좋은 것을 택하거나, 내가 보기에 옳다고 여기는 것을 옳게 여기는 것이 아니라, 이것을 하나님께서 기뻐하실까? 하나님께서 이것을 인정하실까? 하나님의 뜻은 무엇일까? 계속하여 물으며, 사람을 기쁘게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오늘 이 하루가 되게 하옵소서. 오늘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살게 하옵소서.


    아론의 아들 나답과 아비후 -

    대제사장 아론과 그 아내 엘리세바 사이에는 네 아들, 곧 나답과 아비후, 및 엘르아살과 이다말이 있었습니다(출 6:23).
    네 아들들 중에서 나답과 아비후는 제사장 직무를 잘못 감당하여 여호와의 불로 죽임을 당했기 때문에 셋째 아들인 엘르아살이 후일 아론의 뒤를 이어 대제사장이 되어 레위 족속의 어른이 되었습니다(출 6:25; 민 20:28).

    향로(마흐타)
    -

    이것은 성소 안에 설치된 분향단에 아침과 저녁마다 새로이 향을 사를 때 사용되는 불씨를 번제단에서 향단까지 옮기는데 쓰이던 금제 그릇을 가리킨다.
    성경의 다른 부분에는 '불똥 그릇'(출 25:38), '통'(출 27:3; 38:3)이라고도 합니다. 

    다른 불 -

    직역하면 '이상한 불'(strange fire)인데 이 불이 구체적으로 어떠한 불을 가리키는지는 확실치 않습니다.
    여호와께서 명하신 불, 즉 번제단의 제물이 타는 불이 아닌 '일반 불' 또는 다른 불"을 의미하는 듯합니다(The Preacher's Homiletic Commentary).

    나답과 아비후는 분향할 불로는 오직 번제단의 불만을 사용해야 한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이를 어긴 것은 여호와의 규례를 멸시하는 행위이며 하나님께 대한 불순종의 죄라고 하겠습니다.

    하나님의 규례를 지키지 않는 불순종의 죄로 인하여 나답과 아비후는 저주의 불에 의해서 죽고 말았습니다.
    왜 나답과 아비후가 이런 잘못을 행하였는지 추측하게 하는 말씀은 포도주와 독주를 마시지 말라고 당부한 것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한편 나답과 아비후가 이러한 죄를 범하게된 이유 중의 하나는 그 날 독주를 마신 때문이라고 추측된다.
    왜냐하면 이 사건 이후 곧 독주 금지 규례가 주어지기 때문입니다(9절). (Matthew Henty, Harrison).

    여호와의 불

    모든 제사가 마무리되었을 때 여호와의 불이 제단 위의 번제물을 불살랐습니다.
    여호와의 불은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제단 위의 번제물을 사르는 여호와의 불을 보고서 백성들은 놀라움과 두려움으로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린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제사 후에 여호와의 불로 임재하신 것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를 하나님께서 목도하고 계실 뿐 아니라 영광을 받으시는 제사임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이 광경을 본 제사장들과 백성들이 어찌 함부로 제사를 드렸겠습니까?

    신약의 사도들은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산 제사를 마무리하셨을 때 하나님의 영광이 불같이 임하심을 목도하였기에 그들은 온전한 예배의 삶을 드렸던 것입니다.

    ​마태복음 27:50-51
    예수께서 다시 크게 소리 지르시고 영혼이 떠나시니라 이에 성소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까지 찢어져 둘이 되고 땅이 진동하며 바위가 터지고.

    ​그러므로 오늘날 성령의 임재를 경험하지 못한 자들은 영과 진리로 드리는 예배의 의미를 잘 모르는 것입니다.
    우리가 드리는 예배에 성령께서 임재하고 계심을 깨닫지 못하는 자들은 그 마음에 진실함으로 예배를 드리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의 몸 된 공동체의 제사장들입니다.
    그러므로 교회의 예배는 공적인 예배이면서 아울러 성도 한 사람 한 사람이 하나님 앞에 진정으로 드리는 참 제사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레위기 10:1-2
    아론의 아들 나답과 아비후가 각기 향로를 가져다가 여호와께서 명령하시지 아니하신 다른 불을 담아 여호와 앞에 분향하였더니
    불이 여호와 앞에서 나와 그들을 삼키매 그들이 여호와 앞에서 죽은지라.

    하나님의 불이 번제단의 제물을 사른 바로 그날, 즉 아론과 모세가 백성들을 축복한 바로 그날 나답과 아비후가 각기 자기 향로에 다른 불로 향을 태우다가 죽임을 당하였습니다.

    마치 이 장면은 오순절 성령 강림 후에 교회가 부흥하기 시작할 때, 하나님 앞에 밭을 팔아서 드리고도 죽었던 두 사람 아나니아와 삽비라 사건을 떠 올리게 합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영광과 은혜가 부어진 후에 사람들은 그 영광을 자신의 의로 바꾸려는 죄를 범하게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것에 대해서 철저하게 응징하십니다.
    하나님의 영광은 결코 인간의 의로 대신할 수 없는 것임을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후에 가장 많이 범죄하는 것이 바로 교만의 죄입니다.
    자신 마치 특별하거나, 어떤 의로운 사람인 것처럼 생각하거나 행동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러한 것을 결코 참지 않으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가 부어진 후에 가장 경계해야 하는 것이 교만입니다.
    사탄이 태초에 아담에게 역사했던 그 교만의 더러운 물을 거듭난 주의 자녀들에게도 부으려 하는 것입니다.

    ​나답은 '관대하다'라는 뜻이며,
    아비후는 '아버지는 그이시다'라는 뜻으로 오늘날 자유주의와 권위주의(율법주의)자들을 대변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오늘날에도 교회 안에 교회를 무너뜨리는 나답과 아비후들이 있습니다.
    저들은 하나님의 거룩함을 시대에 편승하여 적당주의로 격하시키거나, 그리스도인의 특권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는 자들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불은 영광의 불이시면서 동시에 소멸하시는 분이십니다.
    이것은 서로 다른 속성이 아니라 거룩이라는 하나의 속성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즉 하나님의 영광은 거룩함에서 비롯된 것이기에 그 거룩함을 더럽히는 죄에 대해서는 소멸하시는 불로 역사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마주한 자들에게 나타나는 반응은 경외함도 있지만 동시에 그 영광을 잊어버리는 자들이 있습니다.
    홍해의 기적과 광야에서 반석의 물을 마시며, 만나와 메추라기로 배부르고 구름기둥과 불기둥으로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영광을 마주한 자들이 여호수아와 갈렙을 제외하고 모두 광야에서 죽었습니다.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은 십자가를 통해서 하나님의 기적과 은혜를 체험한 자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을 노래하면서도 죄를 짓기에 빠른 발(감사하지 못하고 늘 불평하는 입술, '다오다오'하는 만족하지 못하는 탐욕,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보다 자신을 자랑하기 바쁜 자 등)이 아닌지 항상 스스로 살펴야 할 것입니다.


    __________________ 레위기 9장 / 축복(23절)

    03-18-2023(토) 사순절 제22일

    모세아론이 회막에 들어갔다가 나와서 백성에게 축복하매 여호와의 영광이 온 백성에게 나타나며.
    Moses and Aaron then went into the Tent of Meeting. When they came out, they blessed the people; and the glory of the LORD appeared to all the people.

    22. 아론이 백성을 향하여 을 들어 축복함으로 속죄제와 번제와 화목제를 필하고 내려오니라.
    23. 모세아론이 회막에 들어갔다가 나와서 백성에게 축복하매 여호와의 영광이 온 백성에게 나타나며.

    * 축복(祝福) 1288. 바라크(bârak) בָּרַךְ 

    1. 무릎을 꿇다,  2. 하나님께 기원하다,  3. 피엘형 בֵּרֵךְ
    발음 / 바라크(bârak)
    관련 성경 / 문안하다(삼상 13:10), 무릎을 꿇다(대하 6:13, 시 95:6), 찬송하다(창 9:26, 왕상 1:48, 시 113:2), 복을 받다(창 24:31, 삼하2:5, 시 72:17), 축복하다(창 27:33, 민 23:11, 왕상 8: 66), 칭찬하다(삼상 25:33), 복이 있다(삼상 25:33, 룻 2:19, 20), 찬양하다(삼하18:28, 왕상 5:7, 시 106:48), 송축하다(왕상 8:15, 스 7: 27), 복되다(출 20:11, 잠 5:18), 복을 주다(사 19:25, 출 20:24, 신 15:6), 복을 얻다(창 12:3, 시 128:4), 복을 내리다(출 23:25, 신 28:8), 은혜를 베풀다(신 7:13), 저주하다(왕상 21:10, 13), 욕되게 하다(욥 1:5), 복을 빌다(욥 31:20), 자랑하다(시 10:3), 욕하다(욥 2:9), 풍부히 주다(신 14:24), 축사하다(삼상 9:13), 인사하다(왕하 4:29), 축하하다(시 49:18), 꿇리다(창 24:11), [명] 찬송(신 33:20, 시 135:21, 욥 1:21), 복된자(사 65:23), 축복(민 23:20), 복(대상 4:10), 안부(왕하 10:15)
    구약 성경 / 256회 사용


    여호와의 영광(榮光)

    כָּבוֹד 스트롱번호3519
    1. 무거움
    2. 영광
    3. 사무엘상 4:21

    발음 / 카보드(kâbôwd)
    어원 / 3513에서 유래
    관련 성경 / 재물(창 31:1), 영화(창 45:13, 삼상 6:5, 시 8:5), 영광(창 49:6, 출 33:18, 대하 1:11, 에 5:11), 존귀(잠 15:33), 귀(貴)(대상29:12, 잠 3:16), 존영(잠 11:16), 영예(잠 25:2, 29:23), 위력(사 8:7),심령(시 108:1).
    구약 성경 / 199회 사용

    * 3513.  כָּבַד 
    1. 무겁다
    2. 대부분 비유적인 용법으로 쓰임
    3. 영광스럽다
    발음 / 카바드(kâbad)
    관련 성경 / 쫓겨나다(욥 30:8), 상하다(시 109:16), 낙심하다(단 11:30), 근심하다(겔 13:22).
    구약 성경 / 113회 사용

    영광(榮光) = 불 화(火) + 덮을 멱(冖 . 冪) + 열 십(十) + 사람 인(人)

    영광. 1391. δόξα, ης, ἡ 
    1. 광명
    2. 위엄
    3. 누가복음 2:9
    발음 / 독사(dŏxa)
    어원 / 1380의 어간에서 유래
    관련 성경 / 영광(마 4:8, 막 8:38, 눅 2:9), 광채(행 22:11), 영화(榮華)(요 17:5).
    신약 성경 / 166회 사용

    * 1380. δοκέω 
    1. 생각하다
    2. ἐδό κουν πνεῦμα θεω- ρεῖν: 그들은 귀 신을 보는 것으로 믿었다
    3. εἴ τις δοκεῖ σοφὸς εἶναι: 만일 누가 스스로 지혜 있다고 생각한다면
    발음 / 도케오(dŏkĕō)
    관련 성경 / 생각하다(마 3:9, 눅 17:9, 요 11:13), 주관하다(막 10:42), 알다(눅 1:3, 요 20:15, 행 15:28), 가결하다(행 15:22), 유력하다(갈2:6), 보이다(고전 12:22), 여기다(고후 11:16). [명] 생각 (마 17:25, 21:28, 요 11:56), 의견(눅 10:36)
    신약 성경 / 63회 사용


    하나님의 영광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나요?
    질문 /
    신약 성경을 읽다보면 “영광”이라는 말이 참으로 어렵습니다.  

    - “목자들은 자기들에게 이르던 바와 같이 듣고 본 그 모든 것으로 인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찬송하며 돌아가니라” (눅 2:20)
    - “영광중에 나타나서 장차 예수께서 예루살렘에서 별세하실 것을 말할새” (눅 9:31)  
    - “내게 주신 영광을 내가 그들에게 주었사오니 이는 우리가 하나가 된 것 같이 그들도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이니이다.”(요17:22)

    상기 구절의 영광이 각기 다른 의미인 것 같습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영광을 어떻게 이해하고 또 어떻게 구분해야하는지 궁금합니다.

    영광(榮光)은 하나님만의 광채  

    먼저 아셔야 할 것은 “영광”이라는 용어는 오직 하나님과 그분의 역사에만 적용됩니다.
    그 의미는 쉽게 말해 하나님께 도저히 가까이 범접할 수 없는 거룩함이나 눈을 뜨고 볼 수 없을 정도의 찬란한 광채가 난다는 것입니다. 성경에는 간혹 인간이나 물건에도 영광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지만, 앞뒤 문맥만 잘 살피면 금방 하나님의 영광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그분의 영광이 가장 잘 드러나는 예를 구약과 신약에 각각 하나씩 들어보겠습니다.  

    모세가 시내 산에서 하나님께 율법을 받았을 때에 그분의 영광의 광채가 그 얼굴에 반사되어서 백성들이 보지 못할 정도였습니다. “아론과 온 이스라엘 자손이 모세를 볼 때에 모세의 얼굴 꺼풀에 광채 남을 보고 그에게 가까이 하기를 두려워하더니.”(출 34:30)

    또 예수님이 베드로를 비롯해 제자 셋을 데리고 변화산에 올랐을 때입니다. “엿새 후에 예수께서 베드로와 야고보와 그 형제 요한을 데리시고 따로 높은 산에 올라가셨더니 저희 앞에서 변형되사 그 얼굴이 해 같이 빛나며 옷이 빛과 같이 희어졌더라.”(마 17:1,2)

    하나님의 영광은 빛으로만 드러나는 것은 아닙니다. “여호와께서 그 거하시는 온 시온 산과 모든 집회 위에 낮이면 구름과 연기, 밤이면 화염의 빛을 만드시고 그 모든 영광 위에 천막을 덮으실 것이며.”(사 4:5)

    구름과 연기와 화염의 빛을 “그 모든 영광”이라고 합니다.
    구름이나 연기로도 그 영광을 드러내었다는 뜻입니다.

    결국 영광이란 하나님의 임재를 실제로 느꼈을 때의 인간 인식의 총칭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문제는 그분의 실체가 임재하면 그 앞에 설 자는 아무도 없습니다.
    그분은 더럽고 추한 것과는 절대 공존할 수 없는 소멸하는 불이십니다.
    ‘불’이라는 표현도 사실은 인간이 이해할 수 있도록 인간의 언어로 표현한 것일 뿐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은 인간이 죽지 않고도 당신을 인식할 수 있는 형태나 상황으로 당신을 드러내십니다.    

    “모세가 가로되 원컨대 주의 영광을 내게 보이소서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내가 나의 모든 선한 형상을 네 앞으로 지나게 하고 여호와의 이름을 네 앞에 반포하리라 나는 은혜 줄 자에게 은혜를 주고 긍휼히 여길 자에게 긍휼을 베푸느니라 또 가라사대 네가 내 얼굴을 보지 못하리니 나를 보고 살 자가 없음이니라.”(출 33:18,19)
    모세가 하나님의 영광을 보고자 원했지만 직접 그분을 보고 살 자가 없기에 바위틈에 숨게 하고 당신의 모든 선한 형상으로 모세 앞에 지나게 했습니다. 모세가 본 것은 얼굴이 아니라 그분의 등이었습니다.(23절)

    말하자면 인간이 본 하나님의 영광은 그분의 모든 선한 형상입니다. 그분의 얼굴이 아니라 등입니다. 시내 산에서 율법을 받을 때에 모세의 얼굴에 반사된 광채도 단순히 그분을 인식토록 만든 수단으로써 빛이 동원된 것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나 어떤 형태로 나타나시든 하나님이 당신을 드러내고 싶으면 인간이 그분의 임재를 분명하게 인식할 수 있게끔 하십니다. 그래서 A. Richardson 이라는 신학자는 “영광이란 하나님의 지상(地上) 임재(臨在)를, 주로 빛으로 나타나는, 인간이 인식한 것을 효과적으로 표현하는 용어다.”라고 정의했습니다. Bengel은 더 명료하게 “영광은 하나님의 신성이 드러나는 것이다”(The Glory is the Divinty manifests.)라고 정의했습니다.

    영광은 바로 하나님 자신

    그러나 영광을 단지 하나님의 임재를 인식할 수 있는 빛 같은 물리적 현상에만 제한시켜 이해해선 많이 부족합니다. 영광은 그분의 속성 전체를 망라한다고 봐야 합니다. 쉽게 비유하면 이러합니다. 아주 의로운 사람이나 특정 분야의 최고 전문가를 만나면 저절로 고개가 숙여집니다. 우리말로 ‘아우라’라고 표현하듯이 왠지 모르게 뒤에서 빛이 나는 것 같고 큰 권위가 느껴집니다. 실제로 빛이 나거나 물리적 힘이 작용한 것은 아닙니다. 그 사람이 쌓아온 그 모든 성품이나 실력, 나아가 그 인격체 자체가 아우라인 것입니다.

    사람에게서도 이러할진대 정말로 하나님을 대면하고 그분과 교제, 동행한 체험이 있다면 그분에게서 느끼는 아우라는 인간의 언어로는 도무지 설명하지 못합니다. 영광이라는 한 단어로 밖에는 말입니다. 영광은 그분의 임재는 물론 동행하심을 직접 겪고 난 이후에 그분 전체를 한 마디로 표현하는 것입니다.

    예레미야 선지자는 그래서 영광은 하나님에게만 속하지만 곧 이스라엘의 영광이라고 말했습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 역사 속에 간섭하셔서 그들로 당신을 알게 했던 그 모든 신앙체험을 한 마디로 표현하면 영광이라는 뜻입니다. “어느 나라가 그 신을 신 아닌 것과 바꾼 일이 있느냐. 그러나 나의 백성은 그 영광을 무익한 것과 바꾸었도다.”(렘2:11) 이스라엘이 당신께서 간섭하신 내용을 제대로 안다면 도무지 우상을 숭배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여호와 우리 주여 주의 이름이 온 땅에 어찌 그리 아름다운지요. 주의 영광을 하늘 위에 두셨나이다.”(시8:1) 하늘 위에 영광을 두셨으니 하늘의 별빛으로도 이해할 수 있지만 어디까지나 쉽게 설명하기 위한 비유입니다. 동일 내용을 평행구절로 반복하는 것은 히브리어의 대표적 수사법입니다. “주의 이름‘과 ”주의 영광“은 동의어입니다. 주의 이름 즉, 그분의 모든 속성을 온 땅과 온 하늘, 우주 만물에 드러내었다는 것입니다.  

    주님이 가르치신 기도도 마찬가지입니다.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마6:13) 여기서 영광은 그분의 그분다우심, 그분의 모든 속성이 영원하다는 것입니다. 바울도 그래서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지지 않는다.(immortal)”(롬1:23)고 형용했습니다.

    요컨대 영광은 하나님 당신이라고 말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인간에게서 고귀한 성품, 권세, 힘 등이 다 없어져도 여전히 인간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에게서 당신의 품성, 권위, 능력 등이 다 합쳐져서 겉으로 드러나는 아우라 즉, 영광이 사라지면 하나님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Calvin은 “우리가 그분을 알 때 그분의 영광을 본다.”라고 말했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는 곳은?

    비록 영광이 하나님 당신이라고 말할 수 있어도 구체적으로는 인간이 인식할 수 있어야만 합니다. 이미 말씀드린 대로 반드시 빛, 구름, 연기 같이 물리적 양상을 갖출 필요는 없습니다. 그렇다고 단순히 종교적 관념으로 머무는 것도 아닙니다. 당신의 백성과 당신 사이에서 반드시 지정의적 반응이 수반되는 영적 교감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신자가 그분의 영광을 맛보면 반드시 1) 그분의 그분다우심에 대한 경외감과, 2) 피조물인 인간으로서 그분 앞에 서게 되는 겸비함을, 동시에 느끼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런 영광을 보고 지각할 수 있는 경로는 크게 셋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우선 하나님의 창조와 그 피조물에 드러납니다.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게 되나니 그러므로 저희가 핑계치 못할찌니라.”(롬1:20) 아름답고 위대한 자연을 바라볼 때에 분명히 창조주 하나님의 손길을 감지할 수 있습니다. 또 그 모든 것들이 완벽하게 운행되는 모습을 볼 때에 그분의 숨결을 들을 수 있습니다. 창조와 창조물을 통해서 하나님의 영광을 보아 아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만물을 창조하시고 마지막으로 인간을 만드신 후에 심히 좋았다고 말했습니다. 당신의 뜻대로 완벽하게 만들어졌다는 것입니다. 특별히 인간은 당신의 형상대로 만드셨는데, 당신의 영광스런 속성을 인간에게도 부여했다는 뜻입니다. “남자는 하나님의 형상과 영광이니 그 머리에 마땅히 쓰지 않거니와 여자는 남자의 영광이니라.”(고전1:17) 하나님에게만 적용될 영광을 인간도 일부 갖고 있기에 인간을 숭배해도 된다는 뜻은 결코 아닙니다. 하나님과 영으로 교통할 수 있고 이 땅을 그분 대신에 다스려야 할 책임을 맡았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발견할 수 있는 둘째 대상은 예수님과 그 십자가입니다. “참 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취는 빛이 있었나니 ...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아버지 품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셨느니라.”(요1:9,14,17) 태초부터 계셨던 말씀이 육신이 되어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이 하나님의 영광을 사람들이 볼 수 있도록 다 드러내었다고 합니다.

    성경은 또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시어 죄인을 구속하는 사역을 완성하신 것을 하나님의 영광이라고 표현합니다. 외적으로는 비천한 모습으로 죽으셨기에 찬란한 광채가 나는 상태와는 전혀 반대이지만 앞에서 말한 대로 하나님의 성품과 능력이 온전히 드러났기 때문입니다. 당신의 독생자를 죽이시더라도 죄인을 너무나 사랑하시어 구원하시겠다는 뜻은 도무지 인간의 생각과 다른 오직 그분만의 성품이기에 영광이라고 표현하는 것입니다. 또 그 구원의 은혜를 맛본 자는 그분에 대한 경외감과 자신에 대한 겸비함을 절감하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가 이런 고난을 받고 자기의 영광에 들어가야 할 것이 아니냐 하시고는”(눅24:26)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가 스승의 참혹했던 십자가 죽음을 이해하지 못하자 부활하신 예수님이 당신의 죽음은 구약성경에 예언된 하나님의 구원이라고 풀어서 설명해주었습니다. 또 그래서 예수님은 죽기 전날 밤에 제자들을 위한 기도를  “아버지여 때가 이르렀사오니 아들을 영화롭게 하사 아들로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옵소서.”(요17:1)라고 시작했습니다.

    셋째로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는 곳은 바로 예수님의 재림 때입니다. “그 때에 사람들이 인자가 구름을 타고 능력과 큰 영광으로 오는 것을 보리라.”(눅21:27) “너희 믿음의 시련이 불로 연단하여도 없어질 금보다 더 귀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실 때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하려 함이라.” 믿음의 시련을 견뎌낸 성도들에게는 독생자의 영광으로 덧입히실 것이라고 합니다. “그가 만물을 자기에게 복종케 하실 수 있는 자의 역사로 우리의 낮은 몸을 자기 영광의 몸의 형체와 같이 변케 하시리라.”(빌3:21) 천국에서 부활한 성도는 영광스런 육체를 입게 될 것입니다. “우리 생명이신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그 때에 너희도 그와 함께 영광중에 나타나리라.”(골3:4) 부활한 성도도 주님과 함께 강림한다고 합니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는 것은?

    창조와 재림에 드러나는 하나님의 영광은 모든 사람이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과 그 십자가는 성령의 간섭으로 신자의 영이 거듭나야 비로소 그 영광을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은 후에도 신자 속에 내주하신 성령을 통해 하나님의 영과 교통함으로써 그분의 영광을 인식할 수 있습니다. 또 그런 자만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습니다.  

    말하자면 성경 말씀을 읽고, 기도를 하며, 찬양과 예배를 드리는 중에, 아니 평소에도 하나님에 대해 묵상하는 중에 그분의 영광을 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성령의 충만함 가운데 하나님이 바로 내 앞에 서있다는 인식을 느낄 때가 있습니다. 자신의 삶과 인생에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거룩하신 성품, 위대한 능력, 신비한 섭리, 완전하신 인도, 또 장래에 보여주실 비전 등을 깊이 깨달을 수 있습니다.  

    그러면 저절로 그 자리에 무릎 꿇고 엎드리게 됩니다. 외적 예배의 형태를 갖춘다는 것이 아니라 신자의 심령이 완전히 낮아진다는 것입니다. 또 오직 하나님의 은혜와 권능으로 자신의 심령과 삶에 가득 채워지기를 소원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분 뜻대로 순종하여 그분의 일에 쓰임 받고 싶어지며 실제로 그렇게 실천하게 됩니다. 하나님이 자기를 통해 이루고자 하는 사역에 함께 동참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는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본 신자가 그에 합당한 반응을 보이는 것입니다. 가장 먼저 하나님의 하나님다우심을 온전하고도 절대적으로 인식하는 것입니다. 자연히 그분에 대한 경외와 소망과 믿음과 사랑이 자신의 생각과 말과 행동을 주장하게 됩니다.

    반드시 거창한 종교적 의식이나 업적으로 영광을 돌리는 것이 아닙니다. 진정으로 영광을 돌리는 것은 그분의 뜻이 세상에 구현되도록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는 것이 하나님의 영광이라고 했듯이 사탄의 미혹된 영혼들에게 주님의 사랑을 전하여 죄에서 구원 받게 하는 것이 하나님께 가장 큰 영광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려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뿐 아니라 그분의 영광을 보려고만 해도, 하나님 외의 어떤 다른 존재나 대상을 경배해선 안 됩니다. 특별히 사람들과 자신을 높이는 그 어떤 것이라도 완전히 제거되기 전까지는 하나님께 온전히 영광을 돌리는 것이 아닙니다. 이런 맥락에서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에게 언제나 질투의 하나님으로 다가옵니다. “너는 다른 신에게 절하지 말라 여호와는 질투라 이름하는 질투의 하나님이니라.”(출34:14)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에게 당신만의 십자가 사랑으로 사랑하셨기에 절대적 배타적 사랑을 요구할 수 있습니다. “오직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자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게 하려 하심이라.”(벧전2:9) 신자는 무엇을 먹든 마시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해야 합니다. 웨스트민스터 소요리 문답 1항 대로 “사람의 첫째 되는 목적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과 그를 즐거워하는 것”이어야 합니다.  

    하나님 영광의 구체적 예들

    지금껏 설명 드린 하나님의 영광에 대한 근본 개념을 갖고서 질의하신 세 구절의 구체적 의미를 살펴봅시다.


    “목자들은 자기들에게 이르던 바와 같이 듣고 본 그 모든 것으로 인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찬송하며 돌아가니라”(눅2:20) 본문에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는 것은 그분의 그분다우심을 온전히 실감했다는 것입니다. 놀라운 일이 일어났는데 인간이 아니고 하나님이 하신 일이 분명하다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객관적 사실만 수긍한 것이 아니라 실제로 하나님의 놀라운 권세를 보고 들으면서 그 분을 향한 경외심으로 충만해졌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목자들은 주의 사자가 곁에 서고 주의 영광이 저희를 두루 비취매 크게 무서워했습니다. 또 천사가 기쁨의 좋은 소식을 전하며 두려워 말라고 했습니다. 나아가 홀연히 허다한 천군이 그 천사와 함께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평화라고 찬송했습니다. 그래서 그 천사들의 말대로 베들레헴에 가서 보니 마리아가 아기 예수를 낳아 강보에 안고 있음을 목도했습니다.(2:8-19) 이 모두가 환상이나 공상이 아니라 실제 체험이었을 뿐 아니라 그러는 와중에 너무나 놀라운 하나님의 권세에 온전히 붙들려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가 그 현장에 있었다고 상상해 보십시오. 밤중에 천사가 나타나서 찬란한 빛 가운데서 메시아 탄생에 대한 예언을 합니다. 또 그 예언을 보증하기 위해서 하늘에서 천군이 내려와 웅장한 찬양을 합니다. 헨델의 메시아 합창곡보다 더 장엄하고 경건하게 들렸을 것입니다. 또 그 예언대로 실제로 일어났으며 아기 예수를 보는 순간 틀림없이 천사의 예언대로 말로 형용할 수 없는 평강을 느꼈을 것입니다. 그럼 하나님에게 감사와 찬양과 경배를 올려 드릴, 즉 그분께 모든 영광을 돌려드릴 수밖에 없지 않겠습니까?  
    .

    “영광중에 나타나서 장차 예수께서 예루살렘에서 별세하실 것을 말할새” (눅 9:31) 본문의 영광도 같은 의미입니다. 변화산에서 예수님이 기도할 때에 실제로 “용모가 변화되고 그 옷이 휘어져 광채가 나더니 무든 두 사람이 예수와 함께 말하니 이는 모세와 엘리야.”(29,30절)였습니다. 성경에 구체적 묘사가 없지만 베드로를 비롯한 세 제자가 본 것은 천국의 영광이었습니다. 지상세계와 전혀 다른 광채와 위엄이 아름답게 눈앞에 펼쳐졌던 것입니다.  

    변화산 기사의 첫 머리는 “이 말씀을 하신 후에 팔일 쯤 되어”(28절)입니다. 예수님이 “이 말씀”대로 실현되는 것을 제자들에게 보여주려고 산에 올라갔다는 뜻입니다. 바로 앞에 있는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여기 섰는 사람 중에 죽기 전에 하나님의 나라를 볼 자들도 있느니라.”(27절)라는 말씀입니다. 제자 중 일부가 죽기 전에 천국의 영광을 볼 수 있다고 말했으니 세 제자가 본 것은 실제 천국의 모습이었던 것입니다. 얼마나 아름답고 장엄했으면 베드로가 산 밑으로 내려가기 싫다고 말했을까요?  


    “내게 주신 영광을 내가 그들에게 주었사오니 이는 우리가 하나가 된 것 같이 그들도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이니이다.”(요17:22) 요한복음 17장은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시기 직전 제자들을 위해 중보 기도한 내용입니다. 그 기도의 시작이 십자가에 죽음으로써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난다고 했습니다. 죄인을 구원하는 일이 하나님의 영광이었던 것입니다. 바로 그 영광을 제자들에게 주신 것입니다. 제자들도 동일한 사역을 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제자들이 진리의 영인 성령을 통해 복음의 비밀 깨닫게 되고, 또 성삼위 하나님이 하나가 된 것 같이 하나가 되며, 비록 세상에서 미움을 받으나 진리로 이겨내며, 하나님이 당신을 세상에 보낸 것 같이 저들도 세상으로 보내달라고 간절히 기도하신 것입니다. 또 세상 사람들이 복음의 진리를 전하는 제자들을 볼 때에 아버지의 이름과 당신의 십자가 사랑을 알게 해달라고 하면서 기도를 마쳤습니다.  

    “곧 내가 저희 안에,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셔 저희로 온전함을 이루어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은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과 또 나를 사랑하심 같이 저희도 사랑하신 것을 세상으로 알게 하려 함이로소이다 아버지여 내게 주신 자도 나 있는 곳에 나와 함께 있어 아버지께서 창세 전부터 나를 사랑하시므로 내게 주신 나의 영광을 저희로 보게 하시기를 원하옵나이다 의로우신 아버지여 세상이 아버지를 알지 못하여도 나는 아버지를 알았삽고 저희도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줄 알았삽나이다 내가 아버지의 이름을 저희에게 알게 하였고 또 알게 하리니 이는 나를 사랑하신 사랑이 저희 안에 있고 나도 저희 안에 있게 하려 함이니이다.”(요17:23-26)


    요컨대, 하나님의 영광은 당신께서 인간 앞에 당신다우심을 직접 나타내실 때에 인간이 보고 듣고 느끼게 되는 장엄함과 거룩함을 말합니다. 그분의 현현(顯現)은 천사나 빛과 구름 같은 가시적 매개체를 통해, 혹은 말씀과 기도 같은 신자와의 불가시적인 영적교통을 통해 드러납니다.

    어떤 경로가 되었던 그분을 실제로 만나 그분의 마음을 읽게 된 신자는 그분을 향한 사랑과 소망으로 충만해집니다. 또 마땅한 감사와 찬양과 경배를 올려드리며 그분 뜻대로 순종하게 됩니다. 이것 외의 어떤 반응도 그분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 아닙니다. 아니 그분의 영광을 실제로 본 것도 아닙니다.  



    레위기 1장부터 7장은 다섯 가지 제사에 관한 말씀입니다.
    레위기 8장부터 10장은 제사를 집례하는 제사장에 관한 말씀으로 8장에서는 제사장의 위임식,  9장에서는 제사장이 집례하는 첫번째 제사에 대하여, 10장에서는 제사장이 여호와께서 명하지 않은 다른 불을 사용하여 제사를 드렸을 때 아론의 두 아들 나답과 아비후가 죽는 사건을 소개합니다.

    레위기 9장의 내용을 소개합니다.

    1-6. 아론과 그 아들들의 임직식의 헌물에 대한 모세의 명령
    7-14. 아론이 자기를 위해 속죄제와 번제를 드리다.
    15-21. 백성을 위해 속죄제, 번제, 소제, 화목제(수은제, 감사제)를 드리다.
    22-24. 제사장이 백성을 축복하매 하늘에서 불이 임하여 번제를 사르다.

    칠 일 간의 위임식을 끝낸 아론과 그 아들들이 제사장으로 취임하는 모습을 기록하고 있다.
    모세가 제사를 지낸 위임식과 달리 취임식부터는 아론이 직접 제사를 드리기 시작한다.
    모세는 아론에게 제사장의 직무를 시작하도록 명하였다(1-7절).
    이에 아론은 자신을 위하여 속죄제와 번제를 드리고(8-14절)
    백성들을 위하여 속죄제와 화목제를 드렸다(15-21절).
    이때 하나님께서 불로 단 위의 제물과 기름을 사르셔서 취임을 인정하는 증표를 주셨다(22-24절).

    레위기 8장에 소개된 제사장 임직에 대한 계속입니다.
    7일 동안의 위임식을 마친 제사장은 자신과 이스라엘 백성들을 위하여 속죄제를 드렸습니다.
    이는 제사장이 위임된 후 하나님께 드린 첫 제사로서 제사장들을 위한 제사, 온 회중을 위한 제사, 모세와 아론의 축복과 불로 나타난 여호와의 영광 등으로 이루어졌습니다.
    그중에서도 아론이 드린 첫 제사는 아론이 신적 권위를 갖고서 이스라엘과 하나님 사이의 중재자로 출발하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아론은 제사장으로 선택된 후 칠 일 간의 위임식 행사를 통해 속죄제를 드리고 스스로를 정결케 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본장에서는 취임식 행사로 아론에게 다시 속죄제를 드리도록 요구하고 있다.
    이는 몇 가지 측면에서 구속사적 의미를 보여 준다.

    첫째는 끊임없이 요구되는 속죄 제사를 통해 인간의 철저한 부패와 죄성을 보여 주고 있다.
    즉 인간은 나면서부터 죽을 때까지 언제나 지중에 존재하므로 오직 하나님 외에는 소망이 없음을 말해 주는 것이다.

    둘째는 끊임없이 드려야 하는 속죄제는 구원에 있어 인간의 노력이 얼마나 불완전한지를 보여 줌으로써 완전한 대제사장인 그리스도에 대한 소망을 나타내고 있다.
    예수님의 대속은 자신을 단번에 드림으로 모든 구원을 이루시고 짐승의 희생 제사를 온전히 이루신 것이다.
    한편 아론이 백성들을 위하여 속죄제를 드린 것은 영원한 대제사장이신 예수께서 구원 사역의 유일한 중보자이심을 예표하고 있다.

    칠 일 간의 위임식 행사를 통해 끊임없이 자진을 정결케 한 아론은 취임식을 맞아 다시금 속죄제를 드려야 했다.
    인간은 연약하고 죄의 본성을 가지고 있으므로 하나님 앞에서 언제나 죄인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하나님 앞에서 스스로 자랑할 수 있는 자는 아무도 없음을 교훈해 준다. 따라서 성도들은 매일의 삶 속에서 자신의 죄를 돌아보아 회개하여야 하며, 하나님 앞에 겸손히 엎드려 오직 그의 구원과 은혜만을 바라보는 자가 되어야 할 것이다.


    1) 아론에게 헌제를 지시하는 모세(1-2)
    모세는 제사장들의 위임식 후 팔 일째 되는 날에 아론과 그 아들들과 이스라엘 장로들을 불러모으고 아론으로 하여금 대제사장으로서 첫 제사를 드리라고 하였습니다. 이는 대제사장인 아론도 하나님 앞에서 항상 자신의 죄를 사함받아야 하는 죄인이기 때문입니다(1-2). 

    2) 제사의 순서(3-6)
    아론이 자기와 백성을 위하여 드리는 제사의 순서로 첫 번째로 드리는 속죄제는 하나님과 백성 사이의 있는 죄를 용서받는 것을 의미합니다. 두번째로 드리는 번제는 속죄받은 자로서의 온전한 헌신을 나타냅니다. 마지막으로 드리는 화목제는 하나님과 백성의 진정한 교제와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축복에 감사하는 것을 의미합니다(3-4)

    모세가 아론에게 명령한 것은 모두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하였습니다(5-6).

    3) 아론 자신을 위한 속죄제와 번제(7-14)
    위임식이 끝난 아론은 대제사장으로서의 백성의 죄를 위한 속죄제를 드리기 전에 자신을 위한 속죄제를 먼저 드렸습니다(7-11). 그 이유는 죄의 문제가 해결된 후에야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감사와 하나님에 대한 전적인 헌신의 고백이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자신을 위해 속죄제를 드린 아론과 그 아들들은 번제를 드렸습니다. 번제의 향기를 하나님께서 향기로운 제사라고 하셨듯이, 번제는 속죄함을 받은 하나님 백성의 헌신과 성결과 충성스러운 삶을 상징합니다(12-14). 

    구약 시대의 제사장들도 회개해야 할 죄인이기 때문에 완전하고도 영원한 그리스도의 중보가 필요한 것입니다.

    4) 백성을 위한 제사 (15-21)
    아론은 자신을 위해 속죄제와 번제를 드리고 난 후 백성을 위해 속죄제와 번제와 소제, 그리고 화목제를 드렸습니다(15-21).

    5) 손을 들어 축복함(22) 
    아론은 하나님과 백성 간의 중보자로서 그 모든 제사가 하나님께 기쁘게 열납되었다는 의미에서 백성을 향해 손을 들어 축복하였습니다. 축복을 선포하는 자는 제사장이지만 축복을 주시는 분은 오직 하나님이십니다(22).

    6) 하나님의 영광(23-24) 
    아론은 대제사장으로서 첫 직무를 끝마치고 모세와 함께 회막에 들어갔습니다. 그리고 얼마 후에 모세와 아론은 회막에서 나와 백성에게 축복하였습니다. 그때 여호와의 영광이 온 백성에게 나타났습니다. 이것은 제사장으로 위임된 아론의 첫 직무를 기쁘게 받으셨다는 것을 의미했고, 그의 축복 행위에 대한 응답이었습니다. 그리고 불이 여호와 앞에서 나와 단 위의 번제물과 기름을 모두 태웠습니다(23-24). 
     
    주께서 주신 오늘! 하나님의 말씀대로 지시한 모세 그리고 순종한 아론의 순종을 통해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났던 것 처럼 나의 생각을 버리고 하나님의 말씀에 온전히 순종하는 삶을 살아가길 원합니다.  

    아론과 그의 아들들이 제사장 취임식을 하고 8일이 지났습니다(1절). 모세가 이들을 불러 예배를 시작하게 합니다. 위임식 이후 8장 35절에서 ‘ 칠 주야를 회막 문에 머물면서 여호와께서 지키라고 하신 것을 지키라 그리하면 사망을 면하리라 내가 이같이 명령을 받았느니라 ’ 고 했던 모세의 명령을 온전히 지켜 회막 문 밖으로 나가지 않던 7일이 지나 첫 번째 행보를 시작합니다. 제사장이라는 신과 인간의 중재자로서 그들은 먼저 하나님과 완전한 만남을 마친 후, 사람에게 나아갔음을 교훈 삼아야 합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부르십니다. 그분이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 우리를 회복시키시고 새로운 직분을 임명하셨습니다. 베드로전서 2장 9절은 ‘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 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려 하심이라 ’ 고 선언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스스로가 그렇게 잘나지 못하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모세보다 나은 분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가 아닌 척 위선을 뒤집어쓰지도 말고, 그대로 포기해 버리지도 말라고 하십니다. 먼저 우리가 하나님과 만나는 것을 최우선적으로 하기 원하십니다.

       모세가 아론에게 속죄제와 번제를 드려야 한다고 한 것은 예수님이 우리에게 바라는 예배이기도 합니다. 아론은 자신이 하나님과 이스라엘 간의 다리 역할을 하는 제사장으로 위임받았음에도, 여전히 모세의 말을 따라 자신을 위한 예배를 준비합니다. 우리도 택하신 족속, 왕 같은 제사장, 거룩한 나라, 소유된 백성이라는 거창한 명칭에 취하지 말고 예수님 말씀을 따라 바른 예배를 드려야 할 책임이 있습니다.

       아론은 먼저 속죄제를 드립니다. 8장의 임직식에서 이미 속죄제와 번제를 드렸음에도 재차 드려야만 했습니다. 그토록 중요한 고백이었습니다. 8절부터 11절입니다. 제사장의 속죄제는 일반적인 속죄제가 간, 기름, 콩팥만 번제단 위에 얹어서 태웠던 것과 달랐습니다. 기름, 콩팥, 간을 번제단 위에서 태울 뿐 아니라 나머지 고기와 가죽도 이스라엘 진영 밖 재를 버리는 곳에서 다 태웠습니다. 나아가 제물의 피를 손가락에 찍어서 제단 네 뿔에 바르고 제단 밑에 쏟아 버렸습니다. 이것은 이스라엘의 제사장들이 ‘ 세상을 바꾸고 신과 마주하게 돕겠다 ’ 는 명분을 들어 사람들에게 지시를 내리는 자가 아니라, 스스로를 가장 먼저 죄 사함이 필요한 존재로 여겨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속죄제의 제물이 흠 없는 수송아지였다는 것은 아론이 하나님과의 독대 이후 처음 드린 예배에서 출애굽기 32장에 있던 사건, 하나님 계명을 받으러 간 모세를 기다리지 못하고 백성에게서 모은 황금으로 송아지를 만들었던 것, 을 떠올려야 했다는 것입니다. 그는 자신이 하나님 은혜 없이는 이 자리에 설 수 없는 ‘ 만성적 우상 제작자 ’ 임을 잊지 말아야 했습니다. 제물의 피로 제단 네 뿔에 찍고 밑에 쏟아 대속물의 흔적이 예배에 선명히 드러나야 했습니다. 속죄제를 드리고 나서, 아론은 번제를 시작합니다. 12절부터 14절입니다. 숫양 머리나 각을 뜬 사지를 태운 후 그 위에 내장과 정강이를 씻어서 태웠습니다. 속죄제를 드림으로 죄를 용서받았을 뿐 아니라, 번제를 통해 자기 인생을 헌신하겠다고 다짐한 것입니다.

       이렇게 은혜에 대한 감사 고백으로서의 속죄제와 헌신을 소망하고 결단하는 번제를 마친 아론은 백성을 위한 제사를 시작합니다. 15절부터 22절은 이 제사들을 통해 백성을 위한 염소를 가져다가 속죄제를 통해 죄 용서를 선언하고, 번제를 통해 하나님께 헌신하기로 고백하고 결단하며, 소제를 통해 이것이 매일의 순종과 헌신으로 증명되어야 함을, 화목제를 통해 그 결과로 받기 원하는 것은 오직 하나님과 참된 교제의 기쁨임을 전했다고 합니다.

       기억해야 할 것은 이 예배는 온 백성의 철저한 준비와 긴장감 속에 이루어졌다는 것입니다. 모세는 백성에게 제물을 준비하게 합니다. 이 제사는 한 사람만의 노력으로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백성들은 숫염소를 가져와 속죄제를, 흠 없는 송아지와 어린양을 가져와 번제를, 수소와 숫양을 가져와 화목제를, 기름 섞은 소제물을 가져와 소제를 드렸습니다(3-4절). 아론과 자녀들이 임직식을 마치고 회막 문에서 하나님과 독대하던 때는, 백성들도 거룩한 두려움과 떨림으로 기다려야 했습니다. 23절에서도 모세와 아론이 회막에 들어갔다가 나올 때까지 이스라엘 백성들은 기다려야 했습니다. 그 기다림이 지나야 하나님 영광의 임재 구름을 영접합니다. 모든 과정에서 불순한 부분이 하나라도 있었다면 결코 예배를 완수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이를 기억하며 우리가 주일에 예배를 드리기 위해 어떤 준비를 하는지, 하루를 거룩한 두려움과 떨림으로 조심하는지, 그리하여 주일을 제외한 월요일부터 토요일까지의 여섯 날이 삶의 예배로 드려지고 있는지 점검해야 합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께서 명령하셨던 예배의 명령들을 하나씩 실천합니다.

       예배는 약속으로 시작해 축복으로 맺습니다. 4절은 여호와의 영광이 ‘ 오늘 ’ 나타날 것이라 예언하고 6절은 여호와의 영광이 ‘ 너희에게 ’ 나타날 것이라고 약속합니다. 그리고 그것이 16-17절에서 이루어집니다. 이루어진 약속은 확실한 축복을 전합니다. 아론이 이스라엘 백성을 축복한 내용은 민수기 6장 24-26절에 있습니다. ‘ 24 여호와는 네게 복을 주시고 너를 지키시기를 원하며 25 여호와는 그의 얼굴을 네게 비추사 은혜 베푸시기를 원하며 26 여호와는 그 얼굴을 네게로 향하여 드사 평강 주시기를 원하노라 할지니라 하라 ’ 오늘도 예배를 준비하고, 예배자로 살아가는 모두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분명한 축복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복을 주시고 지켜주시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얼굴을 우리에게 비추사 은혜 베푸시기를 확실히 원하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그 얼굴을 우리에게 향하여 드사 평강 주시기를 원하십니다. 복과 안전, 은혜와 평강은 예배를 통해서만 경험할 수 있음을 감사해야 합니다.

       24절에는 하나님의 불이 하늘에서 떨어져 제물을 태우는 것을 온 백성이 보고 소리 지르며 엎드렸습니다. 하나님의 임재는 막연하지 않았습니다. 예배를 드린 날, 영광이 불로 제단 위 번제물과 기름을 태웠습니다. 골고다 언덕에서 피를 쏟아 자신을 제물 삼으셨던 예수님을 닮기 위해 스스로를 제단 위에 두는 모든 이에게 주시는 약속입니다. 하나님의 거룩한 불이 반드시 임하시고, 제단 위에 올려둔 인생을 성령의 불길로 태우심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온 백성이 찬송 부르며 주님께 굴복할 것입니다.

       히브리서 12장 28-29절입니다. ‘ 28 그러므로 우리가 흔들리지 않는 나라를 받았은즉 은혜를 받자 이로 말미암아 경건함과 두려움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섬길지니 29 우리 하나님은 소멸하는 불이심이라 ’


    죄(罪) = 넉 사(四) + 아닐 비(非) / 하마르티아(hamartia) ἁμαρτία


    불법(不法) 요한일서 3:4
    죄를 짓는 자마다 불법을 행하나니 죄는 불법이라.
    Everyone who sins breaks the law; in fact, sin is lawlessness.

    불의(不義) 요한일서 5:17
    모든 불의가 죄로되 사망에 이르지 아니하는 죄도 있도다.
    All wrongdoing is sin, and there is sin that does not lead to death.

    불선(不善) 야고보서 4:17
    이러므로 사람이 선을 행할줄 알고도 행치 아니하면 죄니라.
    Anyone, then, who knows the good he ought to do and doesn't do it, sins.

    불신(不信) 요한복음 16:9, 마가복음 16:16
    죄에 대하여라 함은 저희가 나를 믿지 아니함이요.
    in regard to sin, because men do not believe in me;

    믿고 세례를 받는 사람은 구원을 얻을 것이요 믿지 않는 사람은 정죄를 받으리라.
    Whoever believes and is baptized will be saved, but whoever does not believe will be condemned.

    불순종(不順從)

    에베소서 2:2
    그 때에 너희가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속을 좇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
    in which you used to live when you followed the ways of this world and of the ruler of the kingdom of the air, the spirit who is now at work in those who are disobedient.

    에베소서 5:6
    누구든지 헛된 말로 너희를 속이지 못하게 하라 이를 인하여 하나님의 진노가 불순종의 아들들에게 임하나니.
    Let no one deceive you with empty words, for because of such things God's wrath comes on those who are disobedient.

    디도서 1:6
    책망할 것이 없고 한 아내의 남편이며 방탕하다 하는 비방이나 불순종하는 일이 없는 믿는 자녀를 둔 자라야 할찌라.
    An elder must be blameless, the husband of but one wife, a man whose children believe and are not open to the charge of being wild and disobedient.





    ἁμαρτία, ίας, ἡ  266

    1. 죄.
    2. 고린도후서 11:7 / 내가 너희를 높이려고 나를 낮추어 하나님의 복음을 값없이 너희에게 전함으로 죄를 지었느냐
    3. 요한복음 9:41 / 께서 가라사대 너희가 소경 되었더면 죄가 없으려니와 본다고 하니 너희 죄가 그저 있느니라
    발음 / 하마르티아(hamartia)
    어원 / 264에서 유래
    관련 성경 / 죄(요 8:21, 롬 5:20), 불법(살후 2:3), 죄악(히 11:25).
    신약 성경 / 173회 사용

    * 264. ἁμαρτάνω 

    1. 하나님의 종교적 도덕적 법을 어기고 잘못하다.
    2. 죄를 범하다
    발음 / 하마르타노(hamartanō)
    어원 / [기본형] 미래 ἁμαρτήσω, 제2부정과거 μάρτω, 가정법 ἤμαρτον, 제1부정과거 ἡμάρτησα, 가정법 ἁμαρτή- σω, 과거분사 ἁμαρτήσας, 1[부정불변사]과 3313의 어간에서 유래
    관련 성경 / 죄를 범하다(마 18:15), 죄를 짓다(눅 15:18, 롬 6:15), 죄로 인하다(요 9:2), 범죄하다(롬 2:12), 죄가 있다(벧전 2:20).
    신약 성경 / 43회 사용

    성경에서 말하는 죄의 개념

    1. 죄의 본질  

    죄에 대한 잘못된 생각과 견해들이 많이 있다.
    예를 들어, 죄를 물질적 몸의 특징, 진화되지 못한 동물성, 존재의 부정 혹은 제한, 단순한 결핍, 실재(實在)하지 않는 착각, 정신의 불건전한, 병적 상태, 선에 대한 필요한 대립 원리, 사람의 이기심, 인간의 자아 적 의식의 투쟁 등으로 보는 것들이 그러하다.

    성경적인 관점에서 보는 죄란 하나님의 법을 어기는 것이다.

    요한일서 3:4은 "죄를 짓는 자마다 불법을 행하나니 죄는 불법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죄”라는 히브리어 “하타”는 “표적을 빗나가다, 실패하다”이라는 뜻이며,
    이와 관련된 용어들은 아바르(벗어나다, 위반하다), 파솨(반역하다, 위반하다), 솨가(잘못을 범하다, 길을 벗어나다)등이 사용되었다.

    신약에서도 하마르티아, 포네로스, 아디키아, 파라바시스등의 단어가 사용되었는데, 이 단어들은 “악, 불의, 부정, 위반”등의 의미를 갖는다.

    즉 죄는 단순히 사회의 도덕적인 기준을 어기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함을 말하며, 그 기준에 부족한 것이나 그것을 어기는 것을 말한다. 

    시편 51:4
    내가 주께만 범죄하여 주의 목전에 악을 행하였사오니 주께서 말씀하실 때에 의로우시다 하고 주께서 심판하실 때에 순전하시다 하리이다.

    하나님의 법을 어긴 것이 죄이므로, 죄는 하나님 앞에서의 문제이다.
    특히, 하나님의 법은 하나님의 인격과 속성과 권위를 반영하므로, 죄는 그 성격상 하나님의 인격과 속성을 모독하는 것이요 그의 권위를 침해하는 것이다.
    여기에 죄의 사악성과 심각성이 있다. 

    창세기 39:9
    그런즉 내가 어찌 이 큰 악을 행하여 하나님께 죄를 지으리이까? 

    하나님의 법을 어긴 것이 죄이므로, 죄는 항상 적극적 성격을 가진다.
    소극적 죄, 태만의 죄도 결국 하나님의 법을 어긴 죄가 된다.
    또한, 죄와 죄가 아닌 것, 둘 중에 하나라는 선(線)이 분명하다.
    그 둘 사이에 중립지대는 없다. 

    ▶ 원죄(原罪, original sin) 

    원죄(原罪)란, 아담이 지은 죄를 가리키는데, 우리는 이러한 의문이 생길 수가 있다.
    창세기 시대에 아담이 저지른 그의 실수 때문에 왜 내가 하나님께 죄인이 되며, 아담이 지은 죄로 인하여 나까지도 죽어야만 하는가?

    무엇보다도 나는 결코 선악과를 먹은 적이 없다.
    그러므로 내가 죄인이라는 것은 억울한 일이라고 항변할 수 있다.
    그러나 성경은 모든 사람들이 죄를 지은 것으로 간주하고 있다고 말하고 있다.

    로마서 5:12-14
    12. 그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들어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               
    13. 죄가 율법 있기 전에도 세상에 있었으나 율법이 없었을 때에는 죄를 죄로 여기지 아니하였느니라.               
    14 그러나 아담으로부터 모세까지 아담의 범죄와 같은 죄를 짓지 아니한 자들까지도 사망이 왕 노릇 하였나니 아담은 오실 자의 모형이라. 

    하나님은 아담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창세기 2:16-17
    16.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명하여 이르시되 동산 각종 나무의 열매는 네가 임의로 먹되               
    17.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 하시니라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는 말씀에는 “먹지 않으면 죽지 않는다.”는 반대적인 의미가 담겨져 있다.
    아담은 하나님께 지음을 받은 첫 사람으로서, 온 인류를 대표하는 것이다.
    “먹지 말라”는 하나님의 당부는 아담과 하나님만의 관계가 아니라, “인류 전체와 하나님과의 관계적인 언약”이었다.
    아담은 모든 인류를 대표하여 하나님과 언약하였다고 보는 것이 바로 “언약적 대표설”이라고 부른다.

    만일 그 실과를 먹으면 죽게 되며, 그 실과를 먹지 않으면 영원히 죽지 않게 되는 언약인 것이다.
    이 사실은 로마서 5장이 증거 할 뿐만 아니라, 죄와 정죄와 죽음의 보편성이 증거 한다.
    성경은 분명히 죄의 보편성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다.

    로마서 3:23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에베소서 2:1
    그는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

    죄는 죄책(罪責)과 부패성(오염)으로 구성된다.
    다시 말하여 우리에게 “원죄(原罪)”가 있다는 것은 우리가 “죄책과 오염”을 갖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죄란 물질명사가 아니라, 관계(關係)를 의미한다.
    죄책이란, 하나님의 법을 어겼다는 “법적 책임”을 가리키는데, 좀 더 분석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도덕적으로 비난 받아야 마땅하다는 사실
    둘째, 하나님의 공의에 따라 형벌을 받아야 한다는 사실

    죄에서 중요한 것은 바로 이 죄책(罪責)이다.
    특히 원죄에 의한 죄책을 우리는 "원시적 죄책(Original Guilty)" 이라고 한다.
    또 부패성이란, 죄인이 가지고 있는 죄악 된 성질(죄성, 罪性), 죄를 향한 경향성(傾向性) 혹은 연약성(軟弱性)을 가리킨다.
    아담의 첫 범죄의 죄책의 전가(轉嫁) 뿐만 아니라,  또한 그 범죄로 인한 인성의 부패성이 모든 인류에게 전달되었다.
    즉 원죄의 결과가 오염된 죄 성을 초래한다.
    그것을 우리는 원시적 오염(Original pollution)이라고 부른다. 

    예레미야 17:9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이라 누가 능히 이를 알리요마는.

    시편 14:1
    어리석은 자는 그의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없다 하는도다. 그들은 부패하고 그 행실이 가증하니 선을 행하는 자가 없도다.

    고린도후서 11:3
    뱀이 그 간계로 하와를 미혹한 것 같이 너희 마음이 그리스도를 향하는 진실함과 깨끗함에서 떠나 부패할까 두려워하노라

    시편 51:5
    내가 죄악 중에서 출생하였음이여 어머니가 죄 중에서 나를 잉태하였나이다.
    다윗의 이와 같은 고백은 곧 죄성(罪性)을 의미한다.

    사도 바울은 이와 같은 죄성을 본질상 진노의 자녀라고 하였다
    에베소서 2:3
    전에는 우리도 다 그 가운데서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

    그리스도인이 되기 전에 우리는 진노의 자녀이었다고 한다.
    이것은 이미 부패와 오염된 죄성을 갖고 있었다는 것을 말한다.

    창세기 6:5
    여호와께서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가득함과 그의 마음으로 생각하는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

    이사야 64:6
    무릇 우리는 다 부정한 자 같아서 우리의 의는 다 더러운 옷 같으며...

    시편 58:3
    악인은 모태에서부터 멀어졌음이여 나면서부터 곁길로 나아가 거짓을 말하는도다.
      

    ▶ 자범 죄(自犯罪, actual sin)

    자범 죄(自犯罪)란, 원죄의 부패성을 가진 모든 사람들이 실생활 속에서 짓는 죄를 가리킨다. 
    원죄와 자범 죄는 몇 가지 측면에서 서로 구별된다.

    첫째, 인과(因果)의 관계가 있다.
    원죄는 원인이요 자범죄는 그 결과이다.
    그러므로 원죄는 하나이지만, 자범죄는 여러 겹(sins)이다.

    둘째, 인식의 측면에서도 서로 다르다.
    원죄는 모든 사람에게 다 인식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불신앙자들은 그것의 존재를 빈번히 부정하지만, 자범죄의 존재는 일반적으로 인정된다.
    물론 오늘날 진화론의 영향으로 사람들의 죄의식이 많이 상실되어 있다.
    진화론자들은 사람의 죄를 동물성의 잔재(殘在) 정도로 간주하기 때문에 그것을 하나님께 대한 악으로 보기보다는 단순히 다른 사람들에 대한 악 정도로 생각한다.

    셋째, 죄책의 측면에서도 서로 다르다.
    원죄는 본성의 죄로서 죄책을 포함하지만, 자범죄는 자신의 의지적 악행이기 때문에 더 큰 죄책을 가진다고 본다.

    예수를 믿는 그리스도인은 과거와 현재와 장래의 모든 죄로부터 사함을 받는다.
    그것은 “죄책”에 대해서 면책되어짐을 뜻한다.
    그러나 거듭난 그리스도인들도 그 “죄성”은 갖고 있다.
    즉 거듭난 그리스도인이라고 하여도 알게 모르게 죄를 지을 수 있으며, 또한 그리스도인은 죄를 지어도 하나님과의 법적 신분적 상태는 변하지 않는다.

    로마서 8:1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우리는 소위 칭의적 상태(의롭다고 부르심)를 유지하며, 하나님의 자녀로서 효력이 유지된다.
    그러나 하나님은 결코 죄를 기뻐하지 않으시며, 성경은 죄와 심판에 대하여 징계와 책망의 차이가 있음을 밝히 증거하고 있다.

    예수께서는 "47 주인의 뜻을 알고도 준비하지 아니하고 그 뜻대로 행하지 아니한 종은 많이 맞을 것이요 48 알지 못하고 맞을 일을 행한 종은 적게 맞으리라..."고 말씀하셨다(눅 12:47, 48).

    또 “우리가 다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나타나게 되어 각각 선악간에 그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고후 5:10)라고 말하고 있다.

    또한 “불의를 행하는 자는 불의의 보응을 받으리니...”(골 3:25)이라고 하였고

    “자신은 구원을 받되 불 가운데서 받은 것”(고전 3:15)이라고 말하고 있다.

    하나님께서 각 사람의 행한 대로 보응하실 것이라고 증거한

    바울 사도의 증거도 죄와 심판의 차등(差等)을 전제한다(롬 2:6). 

     

    “각 사람에게 그 행한 대로 보응하시되....”(롬2:6) “ 

     

    2. 구약과 신약에서 나오는 죄의 개념 


    * 구약성경에서의 죄의 개념 8
    가지

    죄에 대한 성경적 개념은 신구약 성경에서 죄에 대해 사용된 단어들에 관한 연구를 통해서 살펴볼 수 있다.
    성경에 나오는 '은혜(grace)'를 나타내는 단어에 비해서 죄에 대한 용어는 상당히 많이 있다.

    '은혜'를 표현하기 위해서 오직 세 가지의 단어가 사용된다.
    구약성경에 있는 첸(chen)과 체세드(chesed),
    신약성경에 있는 카리스(charis)이다.

    그와는 대조적으로, 구약성경에는 죄를 나타내는 최소한 8개의 기본 단어가 있으며,  신약에는 최소한 12개의 기본 단어가 있다. 
    그 모든 단어들이 죄에 대한 교리에 있어 기본적인 개념의 틀을 제공하고 있다. 

    1. 챠타(Chata) - 표적을 벗어난 것 

    죄에 대한 모든 형태의 단어 중에서 가장 기본적인 이 단어는 구약 성경에 522회 사용되고 있다. 이 단어의 기본적인 뜻은 '표적을 벗어난 것(to miss the mark)' 으로 헬라어 하말타노(hamartano)와 같은 의미를 가진 단어이다. 그러나 '표적을 벗어난 것'은 '다른 표적을 쏜 것' 이라는 의미도 내포하고 있다.

    예를 들어 사람이 올바른 표적을 맞히지 못해서 죄를 짓는 것은 잘못된 표적을 맞힌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즉 이 단어는 '수동적인 벗어남의 개념(a passive one of missing)' 뿐만 아니라 '능동적인 쏨의 개념(an active one of hitting)'도 가지고 있습니다. 이 단어는 도덕적인 죄악, 우상숭배, 의식적인 죄를 지칭할 때 사용된다. 

    2. 라(Ra) - 파멸시킴(breaking up)' 혹은 '폐허로 만듦(ruin) 

    구약성경에서 444번 나오는 이 단어는 헬라어 카코스(kakos) 및 포네로스(poneros)에 상응하는 단어로, '파멸시킴(breaking up)' 혹은 '폐허로 만듦(ruin)' 이라는 기본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다.
    이 단어는 때때로 재난(calamities)을 의미하기도 하고 많은 경우에 '사악한 것(wicked)'이라고 번역된다.
    이 단어는 또한 '도덕적으로 그릇된 것(something morally wrong)' 은 물론 '손상을 입히는 것(something injurious)' 도 의미한다(창 3:5, 38:7, 삿 11:27).
    이사야 45:7에서는 하나님이 빛과 어둠, 평안(well-being)과 라(ra, 환난)도 창조하신 분으로 언급되고 있다.
    어떤 사람은 이 구절에 나오는 단어가 재난 및 다른 사악한 상태를 의미하는 것이라고 이해한다.
    이러한 이해가 사실이라면, 이것은 비록 죄를 짓는 것에 대한 책임은 창조주가 아닌 피조물에게 있을지라도 사악한 것을 포함한 모든 것이 하나님의 계획안에 포함되어 있다는 사실을 드러내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3. 파샤(Pasha) - 반역하는 것(to rebel) 

    이 단어가 보통 '배반(transgression)' 이라는 단어로 번역되고 있을지라도 이 단어가 가지고 있는 기본 개념은 '반역하는 것(to rebel)' 이다.
    열왕기상 12:19, 열왕기하 3:5, 잠언 28:21, 이사야 1:2을 보라. 

    4. 아원(Awon) - 부정(inquity, 죄악)과 죄책(guilt, 저주)이라는 개념 

    이 단어는 히브리 사상에서 서로 밀접한 관련을 가지고 있는 부정(inquity, 죄악)과 죄책(guilt, 저주)이라는 개념(삼상3:13)을 모두 포함하고 있는 단어이다.
    이 단어가 '고난당하는 종(사53:6, the Suffering Servant)' 및 '훼방하는 죄(a defiant sin)' 와 관련하여 사용되고 있다는 점을 주목하라. 

    5. 샤가그(Shagag) - 잘못한 것(to err), 길을 잃어버린 것(to go astray) 

    이 단어는 '잘못한 것(to err)'이나 양 혹은 술 취한 사람이 보여주는 모습과 같은 '길을 잃어버린 것(to go astray)'을 의미하는 단어이다(사 28:7).
    이 단어는 실수를 언급하는 단어인데, 그 실수를 범하는 사람은 그 실수에 대해 책임을 져야 했습니다.
    율법에서 이 단어는 길을 잃은 사람이 율법에서 어떤 명령을 했는지 알아야 할 책무가 있었다는 것을 암시하는 단어이다. 

    6. 아샴(Asham) -고의적인 죄와 고의가 아닌 죄에 대한 죄책(intentional and unintentional guilt) 

    이 단어는 거의 대부분 레위기, 민수기 및 에스겔서에 나와 있는 성막 및 성전의 의식과 관련하여 사용되고 있다.
    하나님 앞에서의 죄책감이 이 단어가 가지고 있는 중요한 개념이다.
    이 단어는 속죄제와 속건제를 지칭할 때 사용되는 단어로서 '고의적인 죄와 고의가 아닌 죄에 대한 죄책(intentional and unintentional guilt)'을 의미하는 단어로 사용된다. 

    7. 라샤(Rasha) - 사악한 것(wicked) 

    이 단어는 출애굽 전에는 거의 사용되지 않고, 시편, 에스겔, 그리고 지혜서(the Wisdom literature)에 주로 나타나는 단어이다.
    이 단어의 뜻은 '의로운 것' 의 반대되는 개념으로 '사악한 것(wicked)'을 의미하는 단어이다

    출애굽기 2:13, 시편 9:16, 잠언 15:9, 에스겔 18:23

    8. 타흐(Taah) - 이리저리 방황하는 것(to wander away)' '길을 잃는 것(to go astray) 

    이 단어는 '이리저리 방황하는 것(to wander away)' '길을 잃는 것(to go astray)'을 의미하는 단어로, 비록 사람이 그 자신의 죄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깨닫지 못하고 있을지라도 우연히 벌어진 죄라기보다는 계획적인 죄를 뜻하는 단어이다.

    민수기 15:22, 시편 58:3, 119:21, 이사야 53:6, 에스겔 44:10,15

    이러한 단어 연구를 통해서는 우리는 구약 성경이 가르치고 있는죄에 대한 개념의 3가지 결론을 도출해낼 수 있다. 

    1. 죄는 많은 형태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죄에 대해 사용된 단어의 다양성으로 인해,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신의 죄가 특별히 어떤 죄의 형태인지를 인식할 수 있었다.

    2. 죄는 율법과 반대되는 입장에 서 있는 것으로, 궁극적으로 죄는 하나님께 불순종하는 것이다.

    3. 불순종에는 긍정의 개념과 부정의 개념이 모두 포함되어 있는데, 그 개념은 부정의 개념에서  '좋은 일을 하지 못한 것(omission)' 뿐만 아니라 긍정의 개념에서 '그릇된 일을 한 것(commission of wrong)'도 강조하는 개념이다.   
    죄는 '표적을 벗어난 것' 뿐만 아니라 '그릇된 표적을 쏜 것'을 의미했다.

    * 신약성경에서의 죄의 개념 12가지 

    1. 카코스(Kakos) - 나쁜 것(bad) 

    '나쁜 것(bad)'을 의미하는 단어로, 이 단어의 부사형은 때때로 '육체적으로 나쁜 것(physical badness)'

    즉 질병(disease)을 의미하기도 하지만(막 1:32), 이 단어의 형용사형은 보통 '도덕적으로 나쁜 것(moral badness)'을 지칭합니다(마 21:41, 24:48, 막 7:21, 행 9:13, 롬 12:17, 13:3-4,10, 16:19, 딤전 6:10). 

    2. 포네로스(Poneros) - 악한 것(evil) 

    이 단어는 '악한 것(evil)'에 대한 기본적인 용어로, 거의 대부분 '도덕적 죄악(moral evil)'을 지칭하는 단어로 사용되고(마 7:11, 12:39, 15:19, 행 17:5, 롬 12:9, 살전 5:22, 히 3:12, 요이 11), 악한 영이라 불리는 귀신을 지칭할 때에도 이 단어가 사용된다(눅 11:26, 행 19:12). 

    3. 아세베스(Asebes) - 경건치 않은 것(godless) 

    '경건치 않은 것(godless)'이라는 뜻을 가진 이 단어는 거의 대부분 베드로후서와 유다서에서 경건치 않는 배교자라는 표현으로 나타난다. 구원받지 못한 사람은 경건치 아니한 자라고 지칭된다(롬 4:5, 5:6). 

    4. 에노코스(Enochos) - 죄책(guilt) 

    이 단어는 '죄책(guilt)'을 의미하는 단어로 대개 자신의 범죄가 죽기에 마땅한 경우를 지칭할 때 이 단어가 사용된다.

    (마 5:21-22, 막 14:64, 고전 11:27, 약 2:10). 

    5. 하말티아(Hamartia) - 표적을 빗나가는 것(missiong the mark) 

    이 단어는 죄에 대해 가장 흔히 사용되는 단어로서 신약성경에서 여러 가지 형태로 약227번 등장하는 단어이다. 어떤 작가가 죄에 대해 한 가지 용어만을 꼭 사용해야 한다면 그는 이 단어를 사용했을 것이다.

    이 단어가 은유하고 있는 원래 뜻은 '표적을 빗나가는 것(missiong the mark)'이다.

    그러나 구약 성경에서의 챠타(chata)처럼, 이 단어는 부정형의 개념뿐만 아니라 '그릇된 표적을 맞추는 것(hitting some wrong mark)'이라는 긍정형의 개념도 포함하고 있는 단어이다. 복음서에서 이 단어가 사용될 때, 이 단어는 거의 대부분 용서 혹은 구원을 언급하는 문맥에서 발견된다(마 1:21, 요 1:29). 이 단어와 관련된 다른 몇 개의 중요한 참고구절로는 사도행전 2:38, 로마서 5:12, 고린도전서 15:3, 고린도후서 5:21, 야고보서 1:15, 베드로전서 2:22, 요한일서 1:7, 2:2, 요한계시록 1:5이 있다. 

    6. 아디키아(Adikia) - 의롭지 못한 어떤 행동(any unrighteousness conduct) 

    이 단어는 넓은 의미로 '의롭지 못한 어떤 행동(any unrighteousness conduct)'을 의미하는 단어이다. 이 단어는 구원받지 못한 사람과 관련해서(롬 1:18), 돈과 관련해서(눅 16:9), 인간 육신의 지체와 관련해서(롬 6:13, 약 3:6), 행위와 관련해서(살전 2:10) 사용되는 단어이다. 

    7. 아노모스(Anomos) - 법과 질서가 없는 것(lawless) 

    '불법(iniquity)'이라고 번역되는 이 단어는 '법과 질서가 없는 것(lawless)'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이 단어는 넓은 의미로 법을 어기는 것과 관련되어 사용된다(마 13:41, 24:12, 딤전 1:9).

    종말론적 사상과 관련하여 이 단어는 불법의 사람, 즉 적그리스도를 언급할 때 사용되는 단어이다(살후 2:8). 

    8. 파라바테스(Parabates) - 법을 위반하는 것

    범죄자(transgressor)'를 의미하는 이 단어는 보통 특별히 '법을 위반하는 것' 과 관련해서 사용되는 단어이다(롬 2:23, 5:14, 갈 3:19, 히 9:15). 

    9. 아그노에인(Agnoein) - 무지한 우상숭배(ignorant worship) 

    이 단어는 참된 하나님 이외의 다른 신에 대한 '무지한 우상숭배(ignorant worship)'를 언급할 때 사용되는 단어인데(행 17:23, 롬 2:4), 그러한 무지는 사람을 죄인의 상태로 만든다(히9:7). 

    10. 플라나오(Planao) - 비난받아 마땅하기까지 길을 잃는 것(to go astray in a culpable sense) 

    '비난받아 마땅하기까지 길을 잃는 것(to go astray in a culpable sense)'이 바로 이 단어가 의미하는 것이다(벧전 2:25).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을 속일 수 있다(그들을 길을 잃게 하는 것)(마 24:5-6); 사람들은 그들 자신을 속일 수 있다(요일 1:8); 그리고 사단은 만국을 미혹으로 이끕니다(계1 2:9, 20:3,8). 

    11. 파라프토마(Paraptoma) - 타락해 나가는 것(falling away) 

    이 단어가 가지고 있는 개념은 '타락해 나가는 것(falling away)'으로서, 대부분의 경우에 의도적인 타락에 대해서 사용되고 있다. 사도 바울은 이 단어를 로마서 5:15-20에서 6번 사용하고 있다. 마태복음 6:14, 18:35, 고린도후서 5:19, 갈라디아서 6:1, 에베소서 2:1, 그리고 야고보서 5:16을 보라. 

    12. 히포크리시스(Hypocrisis) - 

    이 단어는 세 가지 개념을 함께 가지고 있다.

    (1) 어떤 사람이 계시를 그릇되게 해석하는 것(to interpret falsely as an oracle might do);

    (2) 어떤 사람이 거짓된 행동을 꾸미는 것(to pretend as an actor does);

    (3) 그릇된 것으로 알려진 해석을 따르는 것(to follow an interpretation known to be false).     
    종말의 때에 거짓 선생들은 거짓된 해석을 할 것이고, 거짓된 행동을 꾸밀 것이며,  많은 사람들은 그들의 가르침을 좇게 될 것이다(딤전 4:1-2). 외식하는 자들은 처음에 그들 자신이 미혹되어서 그릇된 것을 옳게 만들고, 나중에는 다른 사람까지 미혹하게 된다. 이것이 이 죄의 치명적인 속성이다. 

    신약성경의 단어 연구로부터 몇 가지 결론이 도출될 수 있다.

    (1) 죄는 '존재하는 어떤 뚜렷한 기준'을 어기는 것이다.

    (2) 궁극적으로 모든 죄는 하나님에 대해 의도적으로 반역하는 것이고 하나님의 표준을 어기는 것이다.

    (3) 죄악은 여러 가지 형태를 가지고 있다.

    (4) 인간의 책무는 분명하며 모든 인간들은 그 책무를 뚜렷하게 이해할 수 있다.
    그 책무를 다하지 않는 것도 큰 의미에서 죄라고 말할 수 있다. 

     

    죄의 가장 중요한 성격은 '하나님과 반대방향을 지향하는 것(that it is directed against God)' 이다.

    우리는 죄에 관한 단어연구를 통해 거룩하신 하나님의 보시기에 죄가 얼마나 치명적인 것인지를 깨닫게 된다.

    하박국은 다음과 같이 언급했다.
    하박국 1:13
    주께서는 눈이 정결하시므로 악을 차마 보지 못하시며 패역을 차마 보지 못하시거늘 어찌하여 거짓된 자들을 방관하시며 악인이 자기보다 의로운 사람을 삼키는데도 잠잠하시나이까.

     3. 성경에서 말하는 '죄'(sin, 罪)란, 

    죄 - 히브리어로 하타아(핫타스)
    죄 - ‘άμαρτία’(하마르티아) /  목표에서 벗어난 것

    1) 화살이 과녁의 목표에 미달하는 것
    2) 과녁의 목표를 더 지나쳐 빗나가 버린 것 

    이 의미는 화살이 과녁을 맞추지 못하고 벗어난다는 것이다.
    그리고 여기에서 지칭하는 과녁이란 하나님의 말씀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을 벗어나는 것이 죄이며, 이단이므로 죄와 이단은 서로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예를 들어 아담의 죄를 단순히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를 따먹은 것이라고 한다면 이것으로써는 정당한 기준 점이 없으므로 죄라고 하기에는 부족한 표현이며,정확히 표현하자면 그 나무의 실과를 따먹지 말라고 한 하나님의 말씀을 어긴 것이기에 죄가 되는 것이다.

    무엇보다 사람의 본분에서 벗어나는 것이고(전도서 12:13)

    성경과 진리의 영이라는 과녁을 이탈하는 것이다.

    *사람이 지음을 받을 때 하나님의 뜻을 적중 시킬 존재의 목적을 가지고 창조 되었다.(창 1:26-27)

    그럼에도 인생은 그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에 부족하고 빗나가 버렸다.
    바로 그 상태가 죄이며, 불행이다. 

    죄는 하나님의 뜻을 배반하는 것(도덕적인 관념과는 다르다.)
    죄는 과녁을 맞추지 못한 것
    죄는 부주의로 범한 과실까지도 포함됨(모르고 지은 죄)
    죄는 하나님께 대한 반역을 말함
    죄는 하나님과의 교제를 파괴하고 이반하여 자기 임의대로 행동하는 것(롬 8:6-8).

    죄에 대해 변함없이 적대하시는 하나님은, 그 의로움과 그 완전한 공의라는 속성 때문에 죄를 용납하실 수 없다.
    세상 죄는 어린 양(예수님)의 어깨위에 지워졌으며(요 1:29)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은 그 십자가에 쏟아졌다.
    그러기에 십자가의 피 아래에서만 인간은 비로소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에서 자유로울 수 있다.
    그래서 오직 예수 이름으로만 구원을 얻을 수 있다.(행 4:12, 요 14:6)

    죄가 실재(實在)하듯 지옥도 사실이며 심판도 사실이다.(히 9:27. 계 20:10. 계 21:8. 롬 3:23. 롬 6:23. 요일 1:9)죄와 지옥과 심판은 서로 별개가 아니라, 하나이다.

    죄는 무엇을 했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의 문제이다.(마 8:21-22)
    죄는 윤리나 도덕의 문제이기도 하지만, 나타난 죄의 여러 현상보다 더 깊고 본질적인 문제이다.
    죄는 아버지를 등지고 나가는 탕자와 같다.
    죄는 만왕의 왕께 반역하는 태도입니다.
    창조주이신 만주의 주를 거절하는 것이다.
    자신의 존재 근원이 되시는 분을 일부러 잊는 것이다. 하나님 아버지와 원수 되는 것이다.
    죄는 자기중심적인 마음과 생각이며 삶의 태도이다.(자아)
    죄는 항상 육체적이며 동물적이며 본능적입니다.(자아), 유다서1:10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어졌지만 신적 형상을 잃고(본능과 탐심만이 생명을 추동[推動]하는) 짐승이 된 것이다.

    죄는 늘 육체-중심적이며, 물질적이며, 권력적이다.

    죄는 항상 외모-지상주의 적이며 쾌락적이며 이기주의적이다.

    죄는 개인-이기주의, 집단-이기주의, 국가-이기주의로 나타난다.

    죄는 항상"먹음직도 하고, 보암직 도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러운"(창세기 3:6)특징이 있다.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을 위한 육체적 욕구와 에너지로 움직여지는 모든 가치들이다.

       요일 2:16의 말씀은 창세기3:6절과 하나가 된다.

       인간의 삶 그 자체가 거의 전부 죄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죄는 그 자체로 하나님과 원수가 되는 것이다.

    죄는 다양한 현상으로 나타나지만 그 본질은 하나이다. 

     

    딤후3장1절-5절에서 나타나는 현상과 갈5장19-21에서 열거되는 것들이다.

    또, 보이지 않는 - 영이신 전능자 앞에서 보이는 사람(목사나 교주)을 높이 세우는 것은 아론의 금송아지를

    숭배하는 것(출32:)와 똑같다. 자기를 높이는 목사나 이단 사이비 교주들은 우상이다.

    세상에서 성공한 사람을 믿음의 본보기로 추겨 세우고 설교의 례[例]와 간증의 본보기로 삼는 행위 역시

    육체의 소욕을 좇는 것이며, 변장술로 은폐한 죄이다. 

     

    하나님을 거부하고 자신의 삶을 살고 자기 육신의 사고방식대로 생각하는 것 그것이 죄이다.

    (롬 8:5-7. 롬 8:13.- 요 14:17. 고전 2:12. 요 3:6. 요 6:63)

    죄는 하나의 세력이다. 욕심, 시기, 미움, 증오등과 같이, 악의 힘, 어둠의 힘이고, 타오르는 열정이다.

    죄는 지옥이 지옥 되게 하는 원소이며 지옥을 불타오르게 하는 에너지원(源)이다.(약 3:6) 

     

    * 죄는 자기의 의를 나타내기 위한 순종도 죄다(롬10:2-3) - 자존심, 체면, 자기생각

        마 5:45-47 (자기가 할 수 있는 것만 해도 안 된다.) - 원수 사랑해야


    *죄와 관계된 성경구절

    약 4:17, 약 2:9, 롬 14:23, 삼상 12:23, 요 8:24-27, 16:9, 롬 12:11, 잠 21:4, 신 15:7-11, 렘 48:10


    *죄의 종류

    바이스 - 음주(중독), 마약 복용(자기가 자신에게)

    크라임 - 율법 상의 죄 - 도적, 상해, 살인, 사기

    씬(sin) - 종합적인 죄(하나님을 떠날 때)


    4. 죄란 무엇인가? 

     

    1. 죄란 무엇인가? 

     

    일반적으로 죄라고 말할 때 살인, 강도, 간음, 사기 등 외형적인 범죄를 죄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성경은 외형적인 범죄뿐만 아니라 교만, 질투, 증오, 시기, 탐욕, 음욕 등도 내적인 죄라고 지적하고 있다. 예수님께서는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음욕을 품고 여자를 보는 자마다 마음에 이미 간음하였느니라.”(마 5:28)고 말씀하셨다.


    그렇다면 이 세상에 죄 없는 자가 있을까?

    성경은 인류 모두 죄의 구속을 받고 있는 죄인들이라고 말씀하고 있다(롬 3:10). 아무리 선하고 의로운 일을 행한다 할지라도 율법아래선 죄인이며, 예수 그리스도 외에는 죄 없는 이가 없다고 말씀한다. 기독교적인 신앙관에서는 죄에 대해 인간의 전적타락(Total Depravity)을 믿고 있다. 인류는 죄의 영향에 의해 온갖 부패와 불의, 불행, 질병 등을 영육 간에 불행한 고통을 겪게 되었고, 종국에는 사망에 이르게 되었다(창3:16-19, 롬6:23).

    “여인에게서 태어난 사람은 그 사는 날이 짧은데다가, 그 생애마저 괴로움으로만 가득 차 있다.”(표준 새 번역, 욥14:1)죄의 기원과 종류모든 인류가 죄인일 수밖에 없는 사실은 타락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인간이 타락함으로써 죄가 마음 깊숙이 뿌리내리게 됐기 때문이다.

    인간 마음 깊숙이 뿌리내리고 있는 죄는 크게 4가지인데 불법, 불의, 불신, 불순종이다.


    죄의 기원을 살펴보면 크게 두 가지로 보고 있다.

    먼저 교만과 탐욕으로 하나님께 도전한 천사들(사단)의 타락으로 죄가 기원했다고 본다(유 6, 벧후 2:4).

    두 번째는 하나님의 형상대로 선하게 창조된 인류가 마귀의 유혹과 인간의 선택으로 죄가 들어왔다는 것이다(창3:1-13).


    즉 죄는 사단에게서 기인하였고 인간에게 죄를 짓도록 사단이 유혹했다.

    타락에서 기원된 죄는 외적인 범죄뿐만 아니라

    그 근원(분노, 욕심, 교만 등)까지 죄로 규정하고 있다.

    불신자나 초신 자의 경우 왜 모든 인류가 죄인지에 대해 반문할 수 있다.


    성경은 하나님을 믿지 못하는 것 자체가 죄가 된다고 말하고 있다(요16:9).

    더 나아가 하나님의 뜻에 반대되는 일을 행하는 모든 행위를 죄라고 규정하고 있다.

    인류의 조상인 아담이 죄를 지음으로 인해 모든 인류는 죄를 가지고 태어나게 된다(시 51:5).

    이것을 ‘원죄’(Original Sin)라고 구분한다. 원죄는 한 사람의 순종치 않음으로 발생한 죄악이다.

    또한 원죄는 아담이 인류에게 남긴 상속 물로 인류의 가장 보편적인 죄악이며 모든 사람을 죽음으로 몰고 왔다(롬5:12). 이 원죄의 속박의 틀을 깨신 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인 것이다. 즉 한 사람의 죄악으로 사망이 들어왔던 것을 한 사람의 희생으로 의롭게 될 수 있게 됐다(롬 5:15-21).

    한편 아담 이후 인간들은 수많은 죄악을 범하게 됐는데 이를 ‘본죄 혹은 자범 죄’(Actual Sin)라고 불린다. 자범 죄는 한 개인이 원죄의 영향을 받아 스스로 고의적으로 짓는 범죄를 가리킨다. 그러나 자범 죄는 ‘살인, 강도, 사기, 간음 등’ 외부적인 생활의 죄와 ‘교만, 질투, 증오, 육욕, 사욕 등’ 마음으로 짓는 내적 생활의 죄로 구분된다.

    죄의 본질과 특성인류에게 원죄를 선사한 아담이 지은 죄는 무엇일까?


    대부분의 사람들은 아담이 선악과를 따 먹음으로 죄가 들어왔다고 생각한다.

    더불어 하나님께서 에덴동산에 선악과를 두지 않으셨거나 선악과만 없었다면

    죄는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하나님께서 일부로 인류가 죄를 짓도록 만들기 위해 동산 가운데 선악과를

    두신 것이 아니냐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다.

     

    과연 그럴까?

    아담의 죄는 금단의 열매를 따먹은 것이 죄라기보다는 불순종이 죄의 원인이 된다.

    인간에게 자유의지(선택권)를 주신 하나님께서는 인간에게 에덴동산을 지킬 것과

    선악과를 먹지 말 것을 명령하셨다. 그러나 사단의 유혹에 넘어간 인간은 교만과 욕심으로

    하나님의 명령을 불순종하게 된 것이다.


    특히 하나님께서는 아담과 하와에게 회개의 기회를 주셨을 때

    그들은 잘못을 타인에게 전가시키는 죄를 범하였다.


    죄의 특성은

    ① 전염성이 강하다는 점이다. 아담 한 사람의 죄가 온 인류에 전가됐으며, 죄는 주변 사람들을 쉽게 오염시킨다. ② 불치의 병(사망에 이르는 병)과 같다. 죄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피가 없었다면

        완치되기 어려운 병처럼 용서받기 어렵다.

    ③ 고리의 빚과 같다. 죄는 빚처럼 갚지 않으면 견딜 수 없으며,

        고리의 이자처럼 불어나듯 죄를 용서받지 못하면 다른 죄까지 불러온다(눅 7:41, 마 6:12).

    ④ 족쇄와 같다. 법을 어기면 벌을 받아야 하듯 죄를 범하면 반드시 그에 따르는 대가를 치루어야 하며,

        심판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다(요일 3:4).

    ⑤ 사단의 노예로 만든다. 죄를 진 모든 인간은 사단의 노예로 살아갈 수밖에 없다(롬 6:17-18).


    그렇다면 전적 부패한 인간은 죄로부터 어떻게 자유로워 질수 있는가?

    인간은 스스로의 힘으로 죄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그렇다고 율법을 통해 죄를 깨달을 수는 있지만 치유하거나 속죄 받지는 못한다. 성경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피와 그를 믿음으로써 죄 용서함을 받고 의롭다함을 받을 수 있다(롬 3:25, 고후 5:21). 그리스도를 향한 믿음과 회개만이 죄에서 해방될 수 있다.


    2. 죄의 본질 4대 요소 

     

    ① 불순종(不順從)

    죄의 본질은 불순종이며, ‘믿음과 신뢰의 결핍’에서 나오는 것으로 불신에서 파생된 죄악이다. 특히 불순종은 하나님의 법에 대한 이탈, 지나침(반항, 계명위반)으로 의미한다. 많은 사람들의 하나님의 명령에 불순종함으로써 징계를 받았다(아담, 사울 등). “한 사람이 순종하지 아니함으로 많은 사람이 죄인 된 것 같이”(롬 5:19)


    ② 불법(不法)

    하나님께서는 죄악 된 인류를 구원의 방편으로 율법을 주셨다. 하나님의 법이든 사람이 만든 법이든 주어진 법을 어기는 것은 죄이다. 법을 알면서 어겼거나 법이 있는 줄도 모르고 어기게 된 경우도 불법에 해당된다(눅 12:47,48, 롬 2:12).

    “죄를 짓는 자마다 불법을 행하나니 죄는 불법이라”(요일 3:4)


    ③ 불의(不義)

    가장 근본적인 불의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것이고, 하나님과 관계, 사람과 사람간의 관계가 올바르지 못한 것을 의미한다(시 50:6, 신 24:13). 또한 선지자시대에는 의가 가난하고 궁핍한 사람들을 돕는다는 개념을 포함하고 있다(단 4:27, 암 5:12)

    “불의한 자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줄을 알지 못하느냐”(고전 6:9)


    ④ 불신(不信)

    불신은 불순종과 배반을 의미하는 것으로 하나님의 긍휼을 받고도 믿지 못하는 죄다(요 16:9). 불신은 범사에 믿음을 좇지 않는 것으로 하나님의 말씀과 교훈을 따라 행치 않는 것을 의미한다. 불신앙은 모든 죄의 원천으로 하나님으로부터 등을 돌리는 것이다.

    “믿음을 따라 하지 아니하였기 때문이라 믿음을 따라 하지 아니하는 것은 다 죄니라”(롬14:23)


    <용서받지 못하는 대죄>


    성경은 하나님의 뜻에 어긋난 모든 것들, 선을 행하지 않고 악한 행동과 생각들을 죄라고 규정하고 있다.

    이 모든 죄악들을 속죄 받을 수 있는데 그것은 하나님의 구속은혜와 회개라고 말씀하고 있다.

    그러나 회개하고 기도해도 용서받지 못하는 죄가 있다. 요한일서 5장에는 ‘사망에 이르는 죄’와 ‘이르지 않는 죄’가 있는데, 전자는 기도할 필요가 없고 후자의 경우 하나님께 기도로 간구할 것을 지시하고 있다(16-17절).


    죄악 가운데도 하나님으로부터 용서받는 죄와 그렇지 못한 죄가 있음을 말해주고 있는 것이다.


    ① 성령 훼방 죄 : 성령의 사역을 방해하는 행위로 하나님의 나라를 받아들이지 있고 비방·모독하는 죄(마12:31)② 성령 거역 죄 : 성령의 인도를 거부하고, 성령의 사역을 부정(불신)하는 참람 죄(마12:32)

    ③ 성령 배반 죄 : 하나님의 말씀과 내세 능력, 은사 등을 맛보고 성령에 참여했다가 배교하는 죄

                         (히6:4-5, 10:26-27)


    <죄를 이기는 비결>


    ▲ 죄에서 떠난 성결의 삶을 살아라.

    거룩과 순결의 삶을 가는 성도는 세상의 모든 죄악과 유혹에서 벗어날 수 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신앙과 성결의 삶을 살면 죄가 왕 노릇하지 못한다(롬 1:4, 약 3:15-18, 4:8)..


    ▲ 육신의 정욕에 순종하지 말라

    죄악 된 인간은 육체적인 욕망으로 인해 죄를 짓게 되며, 성경은 육체의 욕망 15가지를 제시하고 있다(갈 5:19-21). 육신의 정욕은 하나님 나라의 유업을 받지 못하도록 방해하지만 이에 순종해서는 절대 안 된다(요일 2:16). 영혼을 거스리는 육체의 정욕을 제어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벧전 2:11).


    ▲ 의의 병기로 만들어야 한다.

    성경은 우리의 육체를 불의의 병기로 만들어 죄를 짓지 말고 의의 병기로 만들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도구로 사용되도록 해야 한다고 말씀한다(롬 6:13). 하나님의 의의 병기가 되기 위해서는 기도와 간구, 말씀으로 무장해야 한다(히 6:13-18).


    3. 파멸로 이르게 하는 7가지 죄악


    인간을 파멸로 이르게 하는 내적인 죄악을 크게 7가지로 규정하고 있다.


    외적인 살인, 강도, 강간, 사기 등은 아니지만 외부적인 죄악의 근원이 되고 있다.

    또한 내적인 7가지 죄악은 현대인으로 하여금 영적인 죄악을 저지르게 만들고

    하나님을 멀리하도록 만드는 가장 심각한 죄악들이다.


    1) 교만(Pride)

    교만은 신앙적으로 하나님을 의존하고 복종하기를 거부하며 영광을 자기에게 돌리는 행위로 ‘겸손’의 반대되는 것이다. 성경은 교만을 죄의 근원이며 본질로 간주하였다. 또한 교만은 극단적으로 자기중심적이기 때문에 일종의 자기 숭배의 죄악이다. 지나친 우월감으로 인한 교만은 이웃(교인)과 나, 더 나아가 하나님과의 사이에 벽을 쌓는 죄악이다. 중세스콜라 신학자 토마스 아퀴나스는 루시퍼가 교만하게 하나님으로부터 독립하여 자신의 보좌를 높이려는 시도를 했을 때 최초로 교만이 나타났다(사 14:12-14)고 말했다. 즉 교만은 마귀가 타락한 원인이었고, 최초의 인간 아담과 하와를 타락하게 한 주요 수단이다. 잠언에서는 교만을 패망의 선봉이라고 말하고 있고(잠 16:18), 예수님은 사람의 악한 마음에서 나오는 더럽게 하는 악덕 중의 하나로 지목하고 있다(막 7:22).


    ▲성경어원 : 교만(게아, 잠 8:13), 거만(가아와), 장점을 뽑아내는 것(가온, 잠 16:18)으로 신령한 지혜에 유해한 것으로 규정하고 있다.

    ▲대표적 인물 : 느부갓네살(단 4:30,37),


    2) 탐욕(Greed)

    탐욕, 탐심은 이기심을 살찌우는 죄악으로 인간을 물질의 노예가 되게 만든다.

    성경은 탐욕을 일만 악의 뿌리라고 규정하고 있고(딤전 6:10),

    십계명에서는 10번째 계명으로 탐욕하지 말 것을 명령하셨다.히브리인들은 ‘욕망은 영혼을 충동질하여 다른 사람들과 다른 사물들에 미치도록 만든다.’고 생각했다. 구약성경에서는 율법으로 탐심을 금하고 있다(출 20:17). 사도행전 20:33, 디모데전서 6:9, 로마서 7:7에서는 ‘강렬한 욕망이 그릇된 방향으로 가면 돈에 집중될 수 있다’고 지적하며, 탐욕은 돈을 사랑하는 것(금전욕)과 동일시하였다(딤전 6:10).탐욕이란 단어는 종종 악한 것의 목록 속에 들어 있는 비도덕성과 관련되며(엡4 :19), 신약에서는 본질적으로 으뜸가는 우상숭배로 표현하고 있다(엡 5:5, 골 3:5). 또한 터무니없는 욕심(눅 12:15), 법을 어기고 남의 것을 탐내는 것(출 20:17), 소유할 권리가 없는 것을 가지려는 노력(딤전 6:10) 등을 의미한다.


    ▲성경어원 : 이웃의 소유를 탐내는 것(하마드, 신 5:21), 부당한 이득을 탐내는 것(베차, 잠 28:16), 이기적인 욕심(아와, 잠 21:26), 강렬한 욕망(에피뒤미아, 행 20:33), 무지비한 자기 주장(플레오넥시아, 고후 2:11).

    ▲대표적 인물: 아간(수 7:16-26), 발람(벧후 2:15)


    3) 분노(Wrath)

    분노 그 자체는 인간의 자연스러운 감정이지만, 분노를 통제하지 못했을 때는 범죄가 발생하였다. 최초의 분노 자 가인은 제사문제를 경쟁관계로 인식하고 하나님이 아벨의 제사만 받은 것에 격분해 동생을 살인하게 됐다. 가인의 상황을 예로 볼 때 분노의 원인은 내 자신 속에서 발생하며, 분노가 일어나는 것은 죄의 소원을 다스리지 못했기 때문이다.

    즉, 분노는 인간관계를 경쟁관계로 인식케 만들며 항상 폭력을 유발하게 만든다.구약에서 분노에 부들부들 떠는 난폭한 주먹은 신적 권위를 주제넘게 사칭하는 것으로 여겨 하나님의 심판을 받았다(시 37:8-9). 그래서 맹렬한 격분은 이스라엘에 있어서 금지되고 거부되었다(창 49:5-7). 신약에서는 인간의 분노와 그 실행에 대해 강력히 금지하고 있다. 이런 가르침은 산상수훈에서 잘 나타난다(마 5:9,21,22). 분노는 본질적으로 성도를 성화(聖化)하지 못하게 하며, 궁극적으로 영화(榮化)하지 못하게 막는 걸림돌과 같다. 그래서 성경은 우리에게 분노의 해소 방법으로 기도와 용서를 제안하고 있다.


    ▲성경어원 : 성나다, 화를 내다(카챂, 사 8:21), 흔들리다, 격동하다(라가즈, 신 2:25)

    ▲대표적 인물 : 가인(창 4:3-16)


    4) 음욕(Lust)

    성경은 모든 음행과 정욕을 죄로 규정하고 있다.

    무절제한 정욕(색욕)은 선한 생활을 파괴할 뿐 아니라 죄의 종이 되게 하며,

    고난과 파멸을 초래한다는 것이다. 잠언 기자는 “여인과 간음하는 자는 무지한 자라 이것을 행하는 자는 자기의 영혼을 망하게 하며 상함과 능욕을 받고 부끄러움을 씻을 수 없게 되나니”(잠6:32-33)고 말씀하고 있다.

    특히 성경은 음행을 믿음으로 대항해 직접 싸워야 하는 죄악이기보다는 피하라고 경고하고 있다. 그 만큼 연약한 인간이 음행의 죄를 떨쳐버리기 어렵다는 것을 반증한다(고전 6:18). 또한 음행은 하나님께서 거하시는 성도의 몸(성전)을 오염시키는 일과 같다. 방탕한 마음에서 생기는 음욕은 식을 줄 모르며 급격히 오염되는 특성이 있다. 성경에서 음행으로 인해 소돔과 고모라의 멸망했고(유 7), 모압 여인과 음행한 이스라엘 백성들은 죽임을 당했다(민 25장). 한편 성경에서는 단순한 육체적인 관계만이 아닌 신앙적인 배교행위까지 영적 음란행위로 규정하고 있다.


    ▲성경어원 : 음탕함과 부절제함, 외설스러움, 육욕(아셀게이아, 갈 5:19). 아셀게이아는 육욕과 관계되는 의미로 공공의 예의를 지키지 못하고 범하는 호색스러움을 의미한다.

    ▲대표적 인물 : 소돔과 고모라 사람들(창 19장)


    5) 탐식(Gluttony)

    인간을 죄악으로 유혹하는 3대 욕구를 물욕, 성욕, 식욕이라고 한다.

    식욕은 가장 쉽게 저지를 수 있는 죄악으로 에서는 식탐으로 인해 장자 권을 팔았다.

    탐식은 절제하지 못하는 탐욕스러운 인간의 모습을 극명하게 나타내는 모습으로

    성경에서는 책망되고 있는 악습으로 지적하고 있다(잠 23:21). 고대 히브리인들은 배나 육체는 열정이나 탐욕의 중심이 되는 곳으로 보았다.

    그래서 배를 의미하는 ‘베텐’(욥 20:20)이 탐욕을 의미하는 단어로 사용되었다.탐식이라는 것은 우리를 순간적인 유혹에 굴복시켜 버리게 만들고, 파멸시키는 죄악이며, 가장 저지르기 쉬운 죄악이다. 성경은 탐식이 탐욕과 밀접한 연관이 있으며, 악하고 게으른 자들이 지닌 특성(롬 1:29, 잠 21:26)이라고 말하고 있다. 즉 절제하지 못하는 식욕은 육체를 부담스럽게 하고 고통스럽게 하며, 서서히 육체를 파괴시켜 나가는 죄악이다. 또한 탐식은 육체만 파괴하는 것만 아니라 영성을 파괴하는 죄악이기도 하다.

    히브리 기자는 탐식으로 장자권을 판, 에서를 가리켜 망령된 자라고 기록하였다(히 12:16-17).


    ▲성경어원 : 탐식을 뜻하는 파고스(마 11:19, 딛 1:12)는 ‘배만 위하는 게으름 장이’, ‘나태한 배’, ‘태만한 탐식가’ 등으로 사용됐다.

    ▲대표적 인물 : 에서(창 25:29-34, 히 12:16-17)


    6) 질투(Envy)

    질투, 시기는 자기의 가능성을 제한시키며, 일상적 삶을 빼앗아 가는 죄악이다. 결국 자신의 삶을 파괴시키는 것이다. 성경은 질투가 죄악 된 행동의 동기가 되어 분쟁과 분열, 미움, 살인까지 가져온다고 말하고 있다(고후 12:20, 갈 5:21). 질투는 사랑의 반대행위로 이웃이나 타인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에게 생겨난다(고전 13:4). 질투는 타인에 대한 불순한 내적 감정을 의미하며 본질적으로 죄이다. 질투는 타인에 대한 시기로 증오로 발전하게 되고, 대립하게 됨에 따라 참된 그리스도인의 교제에 걸림돌이 된다(고전 13:4). 그래서 예수님은 외적인 행위가 따르지 않더라도 생각과 태도만으로 죄가 된다고 말씀하셨다(마 5:21-31).질투를 의미하는 히브리어(키나)와 헬라어(젤로오, 행7 :9)는 감정이 오로지 한 가지에만 신경을 쓰는 것을 말한다. 지나친 질투는 결국 타인뿐만 아니라 본인 자신의 삶을 파괴시키는 죄악입니다. 질투를 극복할 수 있는 완전한 해결책은 사랑이다. 이웃을 사랑하고 축복하는 것은


    ▲성경어원 : 검붉게 된다(키나, 민5 :14), 이기주의, 야망, 경쟁(에리디아, 롬 1:29)

    ▲대표적 인물 : 요셉의 형들(창 37:34), 사울(삼상 18:6-9)


    7) 나태(Sloth)

    일반적으로 나태라는 말을 행동이나 노동을 싫어하는 것, 태만한 것, 게으른 것, 느린 것, 부지런하지 않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신학적인 면에서는 행동이나 정신적인 사물(事物)에 대한 게으름을 의미하는 것 뿐 아니라 교회의 활동에 대해 냉담하고 적극적이지 못한 것도 의미한다. 나태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 태만의 죄로 단테는 ‘게으름은 사랑을 포기한 죄악’이라고 말했다. 잠언은 나태한 자를 한없이 게을러 늘 잠자는 자로 묘사하고 있다. 결국 나태는 하나님께서 주신 은사를 사용하고 그 소명을 수행하는 일에 게으르거나 불순종하는 것이다. 나태한 사람은 행동을 요구하는 어떤 상황에 반응치 못하고 어떤 목적도 없는 말을 분주히 분에 넘치게 말한다. 또한 나태는 일상생활과 함께 신앙생활을 파괴시키는 죄악이다. 사단은 성도를 죄의 그림자에 머물게 하기 위해 성경 보기 싫은 나태, 기도하기 싫은 나태, 전도하며 봉사하기 싫은 나태 등 영적 태만을 주입하려고 애를 쓴다. 그래서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항상 깨어 기도하라고 말씀을 하셨다.


    ▲성경어원 : 비생산적, 무익한, 비효과적인, 텅빈(알고스, 마1 2:36),

    ▲대표적 인물 : 미련한 다섯 처녀(마 25장)4. 죄는 과녁에서 빗나감


    죄를 의미하는 히브리어 ‘하타아트’와 헬라어 ‘하마르티아’를 살펴보면

    ‘과녁을 쏘아 맞출 수 있는데 맞추지 않는 오만한 행위’를 뜻한다.


    ①표적을 쏘아 빗나가다(이탈)

    ②표적을 지나쳐가다(과도)

    ③표적에 못 미치다(미달) 등으로, 죄는 알고 있는 의무의 태만을 의미한다(약 4:17). 

     

    5. 무엇이 죄인가? 

     

    대개의 사람들은 ‘자신이 생각할 때 “나쁘다”고 생각되는 모든 것’을 “죄”라고 믿고 있다.

    그러나 성경은 ‘하나님이 정해놓은 기준(목표)’에 반하는 모든 것을 죄라고 정의한다. 

     

    히브리어에 있어서 죄를 나타내는 3대 용어는

    A) [불의] 아-와(아벤)(에벨) : [악을 행하다], [불의를 행하다]

    B) [허물] 페솨 [파-솨] : [거역, 반역]

    C) [죄] 헤-트 :[과녁을 벗어나다, 실패하다]

     

    -----------------------------------

    A) [불의]

    [아-원]이 원어로서, [악을 행하다], [불의를 행하다] 등을 뜻하는 동사[아-와]에서

    온 명사 ⇨사악한 행위. 의도적, 의식적, 악의 성질, 또는 동기와 내용

    의(옳지)롭지 않은 행위, 악한 행위, 의롭지 않은 의식(생각), 동기 등 -- 대개의 도덕적 기준에서 벗어난 것.


    B) [허물]

    원어 페솨[파-솨] [거역, 반역]을 의미하는 동사 에서 온 명사로서, 여기서는 하나님께 대한 반역이 죄로 생각되고 있다(창 31:36, 왕상 12:19, 사 1:2, 호 8:1).

    창 31:36
    야곱이 노하여 라반을 책망할새 야곱이 라반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내 허물(페솨)이 무엇이니이까 무슨 죄가 있기에 외삼촌께서 내 뒤를 급히 추격하나이까

    왕상 8:50
    주께 범죄한 백성을 용서하시며 주께 범한(파솨; 반역한, 거역한) 그 모든 허물을 사하시고 그들을 사로잡아 간 자 앞에서 그들로 불쌍히 여김을 얻게 하사 그 사람들로 그들을 불쌍히 여기게 하옵소서

    왕상 12:18,19
    18 르호보암 왕이 역꾼의 감독 아도람을 보냈더니 온 이스라엘이 그를 돌로 쳐죽인지라 르호보암 왕이 급히 수레에 올라 예루살렘으로 도망하였더라.                   
    19 이에 이스라엘이 다윗의 집을 배반(파솨)하여 오늘까지 이르렀더라 

    호 8:1
    나팔을 네 입에 댈지어다 원수가 독수리처럼 여호와의 집에 덮치리니 이는 그들이 내 언약을 어기며 내 율법을 범함(파솨 ; 반역한, 거역한)이로다.

    “의(옳지)롭지 않은 행위, 악한 행위, 의롭지 않은 의식(생각), 동기 등등으로 대개의 도덕적 기준에서 벗어난 것”이 [불의](아원)라면 [허물](페솨)(거역, 반역)은 보다 <근본>을 배반하는 일들이다.

    예를 들면 나라에서 정해 놓은 <사회 도덕규범>을 범하는 것이 [불의](아원)이며, 나라의 헌법에 반역함{[허물](페솨)(거역, 반역)}은 <그 나라를 배반하는 것>이다.

    또 다른 예: 과거 5공 당시 사기행각, 강도행각, 거짓, 살인 등등의 범죄(도덕적인 것 거역)는 죄 값을 치루면 되지만, 당시의 ‘반공법위반’은 <대한민국 자체를 배반>하는 것으로 “헌법을 거역하는 행위”로 규정되었다.

    ‘도덕법 위반’하는 것보다 훨씬 더 큰 죄가 ‘반공법위반’으로 <국가 반역> 죄에 해당하는 것.

    (반공법 위반은 도덕법으로 근거한 “악행”[아-원]이 아니다.)

    이에 비하여 히브리 원어 [헤-트 af] <죄>는 전혀 다른 의미를 가진다.


    C) [죄]

    [헤-트 af]와 그 여성 형 [핫타-아]그리고, 가장 많이 씌어진 꼴로는 [핫타-스]인데 (창 4:7 기타 빈출), 하말티아 (헤-트, 하말티아) : [과녁을 벗어나다, 실패하다]

    창 4:4-7 4 아벨은 자기도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으로 드렸더니 여호와께서 아벨과 그의 제물은 받으셨으나

                5 가인과 그의 제물은 받지 아니하신지라 가인이 몹시 분하여 안색이 변하니

                6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 네가 분하여 함은 어찌 됨이며 안색이 변함은 어찌 됨이냐

                7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선을 행하지 아니하면 죄(헤-트)가

                  문에 엎드려 있느니라 죄(욕망)가 너를 원하나 너는 죄(욕망)를 다스릴지니라 

         

    창 18:20 여호와께서 또 이르시되 소돔과 고모라에 대한 부르짖음이 크고 그 죄(헤-트)악이 심히 무거우니

     

    왕상 8:50 주께 범죄(헤-트)한 백성을 용서하시며 주께 범한 그 모든 허물(파-샤)을 사하시고

                  그들을 사로잡아 간 자 앞에서 그들로 불쌍히 여김을 얻게 하사

                  그 사람들로 그들을 불쌍히 여기게 하옵소서 

     

    <죄>라는 단어의 원뜻이 “과녁을 벗어나다”라면 “과녁이 무엇인가”에 대한 문제 풀이부터 해야 할 것이다.

    그 다음에 “왜 벗어났는가”에 대한 문제 해결점으로 접근 해 본다. 

     

    첫째 <과녁>.

    “목표물”, 또는 “하고자 하는 목적”. 혹은 “필연적으로 해야 되는 일”

    이 “목표”는 “하고자 하는 어떤 목적”이며, 이는 인간(人間)이 “하고자 하는 어떤 목적”이

    아니라 신(神)이 “하고자 하는 어떤 목적”이다. 곧 “Will of God”이다.

    이 “죄의 개념”에서 “과녁에서 벗어나는 원인”은 무엇인가?

    여러 가지 이유가 있을 것이다.

    ‘목표물이 보이지 않았던지’, 아니면 ‘의도적으로 목표물을 보려하지 않았던지’

    그것도 아니면 ‘목표물이 오해 됐던지’, 

     

    둘째 <목표물의 내용>.

    성경에서 사용되는 “화살이 맞추어야할 <목표>”는 신(神)이 “하고자 하는 어떤 목적”이다.

    어떤 자의 말처럼 “저절로 우주가 생겨나고, 저절로 발전되어지고,

    그리고 현재 저절로 존재되고 있다”고 한다면 “저절로 생겨났으니 저절로 우주가 없어진다.”고 해야 한다.

    (‘저절로’는 ‘진화’란 뜻)

     

    논리가 옳은가?

    “하고자 하는 어떤 목적”의 그 내용은---

    신은 모든 우주 만물을 창조 하실 때 분명히 어떤 목적에 의해서, 계획하시고,

    그리고 그 계획대로 완성하시고, 또한 온전한 완성을 위해 계획대로 진행되고 있는 것이다.

    그 “신의 계획된 내용”을 기록한 성경은 신(神)이 “하고자 하는 어떤 목적”이다.

    신은 우주 만물이 생겨나기 전부터 ‘그리스도의 출현을 계획’하셨고,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라고 기록됨은

    <인간의 영원한 구원>이 신(神)의 궁극적 목표가 됨을 설명하는 구절이 된다. 

     

    요 17:5 아버지여 창세 전에 내가 아버지와 함께 가졌던 영화로써 지금도 아버지와 함께 나를 영화롭게 하옵소서

    엡 1:4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신은 “사람을 흙으로 지으시고 살게 하는 생기(生氣)를

    그 코에 불어 넣으니 <생령>이 되었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다.

    흙으로 짓고 +생기=생령-이것은 사람 만드는 공식이다.

    아마도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라도 ‘혼이 있는 모든 생물’을 만드는 하나님의 공식일 것 같다.

    이런 공식에 의해 창조된 사람은 보기에는 좋았지만 ‘영원 할 수 있느냐’에 문제점이 있다.

    죽지 않고 거의 천년을 살아온 창세기 5장에 기록된 ‘사람들의 삶은 어떠했을까’


    상상 해 본다. 행복했을까?? 불행했을까? 어떻게, 왜 ‘행복하고 불행 했을까’ 

     

    <하나님의 목표>는 “신(神)이 특정 피조물과 영원히 거하는 것”이다.

    “영원히 거하는 존재”는<신(神)이어야만 한다.>는 필연적인 조건이다.

    신(神)만이 영원하다. 신(神)이 아니고는 영원 할 수가 없다.

    모든 짐승들은 ‘죄를 범하는 범죄’라는 것이 없다.

    그 이유는 짐승들에게는 어떠한 율법도 주신일이 없기 때문이며,

    율법이 주어 졌다 해도 그 율법을 지킬만한 능력을 소유하고 있지 못하기 때문이다.

    신은 ‘지킬 능력이 없는 대상’에게<지켜야 할 법을 주셨다>고 할 수 없다.

    사람에게만 그런 능력이 있고, 사람만이 주어진 율법을 “지키던지, 안 지키던지”일 뿐이다.

    ‘신의 목표에서 벗어난 자’들 중에 짐승들은 없다.

    짐승은 신의 목적과 무관하게 지음을 받았기에 짐승에게는 <죄>가 없다.

    짐승을 지은 신의 목적은 “잡혀 먹히기 위함”

     

    즉 ‘짐승들은 신과 함께 영원히 거할 계획’이 되어있지 않기 때문이다.

    짐승들이 어떻게 태어나든, 어떻게 자라나든, 그 짐승이 동료를 몇이나 물어 죽였던지,

    혹은 사람을 몇 명이나 잡어 먹었던지 - “신의 과녁에서 벗어나는 짐승은 없으며,

    신의 과녁(목적)과는 무관 한 짐승들이다.”

    사람이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를 먹지 아니 했다”면 얼마의 기간 동안

    에덴에서 살 수 있을는지는 알 수 없으나(6000년? 아니면 6억년?) 신과 영생하지는 못한다.

    혈과 육은 신과 영생할 수 없기 때문이다.

    사람은 선악과를 먹음으로 죽을 수 있게 된다.

     

    혈과 육을 가지고는 결코 신의 세계로 갈 수 없다.

    혈과 육을 가지고 있으면 신의 목표에서 벗어 난 것이다.

    혈과 육이 없어야 신의 세계로 갈 수 있는 조건이 된다.

    혈과 육을 가진 사람 자체가 신의 목표에서 벗어 난 것이다.

    그러나 누구든지 혈과 육을 가지고 있는 동안(산혼)신의 영을 받아서

    <혼과 영(신)의 결합>이라는 <새로운 피조물>이 신으로부터 출생되고,

    혈과 육을 가진 사람이 혈과 육을 포기하여 죽을 때

    ‘혈과 ’육은 흙으로부터 왔으니 본디의 본향인 흙으로 귀향하고,

    영은 신으로부터 왔으니 본디의 본향인 신에게로 귀향한다.

    단 귀향 때는 결합된 혼과 같이 간다.

    혼과 영의 결합은 독립된 하나의<새로운 피조물>이기 때문이다.

    대개의 사람들은 선악과를 먹은 것 자체가 <원죄>라고 알고, 그렇게 믿고 있다.

    그런 가르침을 누구로부터 오랫동안 받아 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성경에<원죄>라는 단어는 없으며 또한 ‘선악과를 먹은 것이<원죄>’라고

    기록된 성경도 없다. 

     

    <원죄>란 뜻은

    성경은 ‘한 사람 아담의 범죄를 통하여 죄가 세상에 들어 왔고, 죄로 인하여 사망이 왔다’고 기록하고 있다.

    억지로 라면 “먹지 말라”는 것을 먹은 “불순종”이<원죄>일 수가 있다.

    <죄의 시작>이 되는 것이 원죄(原罪)다. 원조(元祖), 원천(源泉)

    모세 출현 오래전부터 있는 죄는 ‘율법을 범함으로 오는 죄’

    곧 “[불의](아-와), [허물] (페솨)”가 아니라 “[죄](헤-트)”이다

     

    *****************************************************************************


    롬 5:12-19 12 그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헤-트,하말티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헤-트, 하말티아)로

                        말미암아 사망이 들어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헤-트,하말터노)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 

                   13 죄(헤-트, 하말티아)가 율법 있기 전에도 세상에 있었으나 율법이 없었을 때에는

                       죄를 죄로 여기지 아니하였느니라

                   14 그러나 아담으로부터 모세까지 아담의 범죄와 같은 죄(헤-트, 하말티아)를

                      짓지 아니한 자들까지도 사망이 왕 노릇 하였나니 아담은 오실 자의 모형이라(원형, 모형)

                   15 그러나 이 은사는 그 범죄와 같지 아니하니 곧 한 사람의 범죄를 인하여 많은 사람이 죽었은즉

                       더욱 하나님의 은혜와 또한 한 사람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말미암은 선물(도레아)은

                      많은 사람에게 넘쳤느니라

                  16 또 이 선물은 범죄한 한 사람으로 말미암은 것과 같지 아니하니 심판은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정죄에 이르렀으나 은사는 많은 범죄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심에 이름이니라

                  17 한 사람의 범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그 한 사람을 통하여 왕 노릇 하였은즉 더욱 은혜와 의의

                      선물을 넘치게 받는 자들은 한 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생명 안에서 왕 노릇 하리로다

                  18 그런즉 한 범죄로 많은 사람이 정죄에 이른 것 같이 한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아 생명에 이르렀느니라

                  19 한 사람이 순종하지 아니함으로 많은 사람이 죄인 된 것 같이 한 사람이 순종하심으로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되리라

     

    누구든지 사단에게 순종하면 사단이 그의 왕이 된다. 

     

    롬 6:16 너희 자신을 종으로 내주어 누구에게 순종하든지 그 순종함을 받는 자의 종이 되는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혹은 죄의 종으로 사망에 이르고 혹은 순종의 종으로 의에 이르느니라 

     요 10:10 도둑이 오는 것은 도둑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뿐이요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 

     

    사단이 “우리”의 왕이면 “우리”는 사단의 종이다.

    ‘사단의 종’이 낳은 후손도 ‘사단의 종’이니 아담과 같은 범죄를 하지 아니하여도

    “우리”는 사단의 소유물이며, 그의 종이다.

    종은 주인에게 순종되어야 한다. 죽으라면 죽을 수밖에 없다.

    사단은 거짓의 아비이며, 사단은“사망 그 자체”이다.

    그러므로 “죄를 짓지 아니한 자들이라도 사망이 왕 노릇하여” 모든 사람은 다 죽음에 이른다.

     

    ***********************************************************************

     

    사람으로 갓 태어난 아기의 범죄([불의] 아-와, [허물] 페샤)는 없다.

    그러나 <육체로 태어난 자체>가 치명적인 죄이다.

    ‘육으로는 갈 수 없는 하나님의 나라’

    ‘육으로는 하나님과 영원히 거할 수 없는 악 조건. 

     

    창 6:2-4 2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을 보고 자기들이 좋아하는 모든 여자를 아내로 삼는지라

                3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나의 영이 영원히 사람과 함께 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그들이 육신이 됨이라

                   그러나 그들의 날은 백이십 년이 되리라 하시니라

                4 당시에 땅에는 네피림이 있었고 그 후에도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에게로 들어와 자식을

                  낳았으니 그들은 용사라 고대에 명성이 있는 사람들이었더라


    “육체가 됨”은 “하나님의영이 영원히 함께 할 수 없다”는 결론이다.

    육체가 되고, 영의 존재가 결혼 생활과 인간의 삶을 사는 것은 육적 존재가 됨이다.

    성경에는 ‘사망에 이르는 죄와 사망에 이르지 아니하는 죄’가 있다고 기록되고 있다.

     

    요일 5:16 누구든지 형제가 사망에 이르지 아니하는 죄 범하는 것을 보거든 구하라

                 그리하면 사망에 이르지 아니하는 범죄자들을 위하여 그에게 생명을 주시리라

                 사망에 이르는 죄가 있으니 이에 관하여 나는 구하라 하지 않노라

     

    아-와()와 페샤(허물)로 불리는 죄는 사함이 가능할지 모르나

    헤-트(죄)는 이 세상과 저 세상에서도 사함이 못되는 “신의 목표에서 벗어 난 것”이 된다.

    “신의 목표에 도달하는 길”은 여러 조건들이 있을 것이다.

     

    그 중에 가장 초점이 되는 것은---

    혈과 육을 가진 사람이 육신에만 매어 살 때 신의 목표에서 벗어 난 것이다.

    혈과 육을 가진 사람이 육신에만 매어 살 때 <죄> 이다.

    혈과 육을 가진 사람이 육신에만 매어 살 때 <원죄>가 드러난다.

     

    이 죄에서의 해결은 육적이 아니라 “혈과 육”을 초월 할 수 있는

    “신의 과녁(목표)에 맞는 신의 영을 받는 것”만이 해결책이다. 

     

    6. 죄, 죄인, 죄의 진정한 본질을 드러낸다.  


    죄는 거역이다.

    곧 선과 악 사이에 하나님께서 두신 경계인 율법을 밟고 넘어가는 것이다.(시 51:1, 눅 15:29)

    죄는 죄악이다.

    곧 금지된 것으로 명시가 되었던 안 되었던 간에 본질적으로 그릇된 행동이다.

    죄는 잘못이다.

    곧 옳은 데에서 벗어나는 것이다.(시 51:9, 롬 3:23)

    죄는 목표를 벗어나는 것이다.

    곧 하나님의 기준을 충족하는 데에 실패한 것이다.

    죄는 범죄이다.

    곧 하나님의 권위의 영역 안으로 자신의 의지가 침입하는 것이다.(엡 2:1 허물)

    죄는 불법이다.

    곧 영적인 무정부상태이다.(딤전 1:9)

    죄는 불신이다.

    곧 하나님의 진실하심을 모욕하는 것이다. 

     

    죄는 다음 세 가지로 요약될 수 있다.

    1. 죄는 율법을 범하는 것

    요한일서 3:4
    죄를 짓는 자마다 불법을 행하나니 죄는 불법이라.

    2. 죄는 그것이 행동이든지 상태이든지 하나님의 성품에 대해 일치되어야 할 것이지 부족한 것이다.

    3. 죄는 본질적으로 하나님을 향한 적의를 가진다. 

     

    모든 사람은 두 가지를 충족시키고 있기 때문에 죄인이다.

    첫째 있는 그대로의 상태가 죄인으로 규정된다.

    이는 의가 없는 모든 인간의 타락한 상태이다.

    모든 인간의 자연적 상태가 바로 죄의 상태이다.(롬 5:12)

     

    시 51:5 내가 죄악 중에서 출생하였음이여 어머니가 죄 중에서 나를 잉태하였나이다

    시 39:5 주께서 나의 날을 한 뼘 길이만큼 되게 하시매 나의 일생이 주 앞에는 없는 것 같사오니

             사람은 그가 든든히 서 있는 때에도 진실로 모두가 허사뿐이니이다 (셀라)

     

    죄는 인간의 본성이다. 즉 인간은 죄를 타고 난다.

    그러나 누구든지 구원받으면 옛 사람은 새 사람으로 태어나는 것이며 변화된

    새 성품은 하나님의 본성에 동참하게 되는 것이다.(벧후 1:4)

    둘째 죄는 행동이다.

    죄의 성품이 표출되는 것, 즉 행동으로 옮겨지는 것이 바로 죄들이다.

    그러므로 인간은 모태에 있거나, 갓 태어나거나 죽기 직전의 사람이나

    누구든지 죄인의 상태에 있으며 죄들을 행하고 있기 때문에 죄인인 것이다.

    인간은 허물과 죄 가운데 죽은 상태에서 태어나서, 죄와 더불어 살다가, 죄와 하나가 되어

    하나님 앞으로 심판 받으러 돌아간다. 태어날 때부터 진노의 자녀이며 불순종의 자녀이다.(엡 2:1-3)

     

    죄는 아담을 통해서 세상에 들어 왔으며 그 죄는 사단과 함께 온 것이다.

    약 1:14-15

    롬 5:12

    사 14:12-14

     

    죄는 하나님에 대항하여 비방하는 것에 귀를 기울이는 것이며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것에

    의심하는 것이다. 로마서1장은 죄 있는 인간의 모습을 잘 설명해 주고 있다.(롬 1:29-31) 

     

    그 외에도 성경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고 있다.

    롬 3:23, 5:12, 3:10 

     

    첫 사람 아담이 지은 죄는 불순종이다.

    아담은 선과 악의 지식의 나무의 열매를 먹으면 죽는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아담은 하나님에 대한 믿음도 있고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죽는다는 사실도 믿었다. 

     

    그런데 그는 죄를 지었다. 바로 죄는 알면서 짓는 것이다.

    그래서 처음 아담이 지은 죄는 불순종이다. 롬 5:12,14,16,17,18,19 

     

    한 사람의 불순종으로 인하여  

    롬 5:12-19  

    죄는 세상에 들어오지 않을 수도 있었다. 

     

    만약 이브에게서 죄가 끝났다면 죄가 세상에 들어오는 것이 불가능했다.

    이브는 아담 없이 혼자서 자녀를 낳을 수 없기 때문이다.

    아담의 의도적인 죄는 세상으로 들어와 사람들에게 전수되었다.

    지금도 아담 안에서 태어난 모든 사람에게서 죄는 계속되고 있다. 

     

    시편 51:5 - 이제 모든 사람들은 태어나면서부터 죄인이라는 사실이 분명해졌다.

    롬 1;29-31, 갈 5:19-21, 골 3:5,8, 딤전 1:9-10, 고전 6:9-10, 막 7:20-23

    50여 가지의 죄들이 기록되어 있다. -

    바울은 죄인들의 상태를 이렇게 말한다.

    딛 1:15, 딤전 4:2, 전 7:20, 시 39:5 롬 3:4, 요일 1:8,

    과녁에 미치지 못한 화살이 하나님의 의에 미치지 못한 인간과 같다. 

     

    나무에 열린 열매의 많고 적음에 관계없이 그 나무는 그 열매의 이름에 따라 그 나무로 불려 진다.

    그 이유는 그 나무 안에 그 열매를 맺게 하는 씨가 있기 때문이다.

    유전 되는 것 가운데는 외양적인 모습뿐만 아니라 성품, 성씨, 성격, 말씨, 행동 등도 부모를 통해 유전된다.

    비물질적인 것이 유전되는데 그 가운데 핵심이 죄(의 성품)이다. 

     

    그런데 정작 결단코 용서받을 수 없는 죄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씀하신다.

    요 16:9에 죄에 대하여 라 함은 그들이 나를 믿지 아니함이요

    요 3:18에 그를 믿는 자는 심판을 받지 아니하는 것이요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아니하므로 벌써 심판을 받은 것이니라

    요 3:36에 아들을 믿는 자에게는 영생이 있고 아들에게 순종하지 아니하는 자는 영생을 보지 못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진노가 그 위에 머물러 있느니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시는 그리스도의 피를 거절한 사람들은

    스스로 참으로 구원받을 길을 거절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요일 1:7에 그가 빛 가운데 계신 것 같이 우리도 빛 가운데 행하면 우리가 서로 사귐이 있고

                  그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7. 사망에 이르는 죄(요한일서 5:16-17)

    누구든지 형제가 사망에 이르지 아니하는 죄 범하는 것을 보거든 구하라 그리하면 사망에 이르지 아니하는 범죄자들을 위하여 그에게 생명을 주시리라.  사망에 이르는 죄가 있으니 이에 관하여 나는 구하라 하지 않노라.                 
    모든 불의가 죄로되 사망에 이르지 아니하는 죄도 있도다.


    사망에 이르는 죄(사망에 이르지 아니하는 죄?)

    예수님을 믿고 구원을 체험한 사람이라 할지라도 실수로 혹은 일시적인 미혹에 빠져서 죄를 범할 수 있다.

     그런 죄는 회개하면 즉시 죄 사함을 받을 수 있다.

    그러나 사함을 얻지 못하는 죄가 있는데 그것을 마 12:31-32에서는 "성령을 훼방하는 죄"로 표현하고 있다. 하나님 아버지를 거역했을 때는 아들의 중보로 사함 받을 수 있는 길이 있다. 아들 되시는 예수님을 거역했을 때는 성령님의 중보로 사함 받을 수 있는 길이 있다. 그러나 성령님을 거역하면 더 이상 중보자가 없기 때문에 사함 받을 수 있는 길이 없다는 것이다.(현재시대)

     

    *성령을 훼방하는 가장 흔한 죄 중의 하나가 성령의 감동으로 기록된 성경을 부인하는 것이다.

    제일 두려운 것이 있다면 하나님의 말씀이다.

    왜냐하면 성경을 믿지 못하면 하나님을 무시한 죄가 되고, 하나님의 말씀을 저버리면

    하나님을 업신여긴 죄가 되기 때문이다. 이것이 성령훼방죄가 된다.

    사망에 이르는 죄의 또 하나의 유형은 히 6:4-6, 10:26-27에 기록되어 있다.

    한번 비췸을 얻고 하늘의 은사를 맛보고 성령에 참예 한 바 되고

    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내세의 능력을 맛보고 타락한 자들은 다시 새롭게 하여 회개케 할 수 없다고 했다.

     

    *받은바 은혜를 배신하는 행위는 회개하여 사함 받을 수 없다는 것이다.

    *십계명 가운데 제1계명부터 제4계명을 범하는 것 - 우상숭배 죄,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 죄, 사망에 이르는 죄 (마 22:37-39)

     

    요한계시록 22:18-19 18 내가 이 두루마리의 예언의 말씀을 듣는 모든 사람에게 증언하노니

                                     만일 누구든지 이것들 외에 더하면 하나님이 이 두루마리에 기록된

                                     재앙들을 그에게 더하실 것이요

                                19 만일 누구든지 이 두루마리의 예언의 말씀에서 제하여 버리면

                                    하나님이 이 두루마리에 기록된 생명나무와 및 거룩한 성에

                                    참여함을 제하여 버리시리라 - 구원받지 못함 

    악(惡)
    하나님께 불순종, 윤리적으로 부패한 행동, 영적으로 악의 본체는 마귀(요한복음 8:44)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 너희 아비의 욕심을 너희도 행하고자 하느니라 저는 처음부터 살인한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없으므로 진리에 서지 못하고 거짓을 말할 때마다 제 것으로 말하나니 이는 저가 거짓말장이요 거짓의 아비가 되었음이니라.
    You belong to your father, the devil, and you want to carry out your father's desire. He was a murderer from the beginning, not holding to the truth, for there is no truth in him. When he lies, he speaks his native language, for he is a liar and the father of lies.

    죄(罪)

    하나님의 말씀을 믿지 못하는 불신으로 인간을 항상 욕심과 거짓과 미움에 갇혀 살게 만들고 죽음을 두려워하는 것.

    하나님의 말씀을 알려하지 않는 것
      - 말씀을 깨닫지 못하는 것(노력 없는 상태)
      - 영적으로 짐승인 상태 (시편 49:12, 20)
        사람은 존귀하나 장구치 못함이여 멸망하는 짐승 같도다.
        But man, despite his riches, does not endure; he is like the beasts that perish.

        존귀에 처하나 깨닫지 못하는 사람은 멸망하는 짐승 같도다.
        A man who has riches without understanding is like the beasts that perish.
     













    레위기 5대 제사

    번제(燔祭) / 구울 번(燔), 제사 제(祭) 

    - 구원(예수와 연합)
    번제(燔祭) / 구울 번(燔), 제사 제(祭)

    Burnt Offering


    히브리어 / 올라 <올라간다>

    번제(Burnt Offering)

    1) 어의

    번제를 뜻하는 히브리어 '올라'( )는 '올라가다', '실어 올리다', '높이다'라는 뜻의 '아라'( )에서 파생된 것으로서 '위로 드려지는 제사', '위로 올라가는 제사'를 뜻한다. 이러한 단어의 의미는 불에 태워진 희생 제물의 향기가 하나님께 상달된다는 의미를 포함하고 있다.

    2) 제물의 종류

    번제에 사용된 제물은 수송아지, 수양, 수염소, 혹은 비둘기인데, 이 모든 제물은 반드시 흠없고 일년 된 수컷임을 그 특징으로 하였으나 비둘기에 대해서만은 수컷이나 암컷 중 어느 것을 드리라는 특별한 지시가 없다.

    3) 번제의 방법

    ① 헌제자가 제물이 될 짐승을 끌고 회막문 여호와 앞으로 나아온다.

    ② 헌제자의 손을 제물의 머리 위에 얹고 안수한다.

    ③ 헌제자가 제물을 잡아 피를 제사장에게 주면 제사장은 그 피를 번제단 사면

    에 뿌린다.

    ④ 헌제자가 제물의 가죽을 벗기고 각을 뜬다.

    ⑤ 제사장은 그 뜬 각과 머리와 기름, 그리고 물로 씻은 내장과 정강이를 단 위

    에서 불 사른다.

    이러한 방법은 양과 염소의 경우 역시 마찬가지였으나 비둘기의 경우는 달라서 제사장 혼자서 머리를 비틀어 끊고 단 위에 불사르며 피는 단 곁에 흘리고 멱통과 창자 등은 재 버리는 곳에 버리고 몸은 쪼개어 단 위에서 불살랐다.

    4) 번제의 목적

    번제의 목적은 두 가지로 나타난다. 그 첫번째는 '속죄를 위한 것'(레1:4,16:24)인데 대부분의 주석가들이 속죄제와 속건제가 죄를 속하기 위해 드려지는 제사라는 점을 들어 이 목적을 등한시 여기거나 그냥 지나쳐 버리려 하지만 번제의 주된 목적은 성경이 밝히 말해 주고 있는 대로 '속죄를 위한 것'이다. 번제의 두번째 목적은 '하나님을 향한 자신의 헌신에 대한 표현'이다. 이러한 목적은 창22장에 나오는 아브라함의 순종에서 잘 나타나는데 그는 자신의 순종과 믿음의 증명을 위해 자신의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바치려 하였고, 그러한 믿음과 순종을 인정하신 여호와께서는 그를 위해 미리 준비해 놓으신 양을 제물로 삼아 번제를 드리게 하심으로 아브라함의 헌신과 믿음을 인정하셨다.

    5) 번제의 영적 의미

    번제는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과 구원의 희생을 상징'함과 동시에 그의 희생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은 성도들이 하나님께 헌신하고 그의 뜻대로 순종하며 살아갈 것을 상징한다. 그러므로 번제의 영적 의미는 한마디로 '그리스도의 희생과 성도들의 헌신'이라고 할 수 있다



    먼저 속죄제를 통해서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모든 잘못된 것을 제거하여 정결케 하고 이제는 전적으로 헌신을 상징하는 번제를 드립니다.
    번제는 온 삶과 생명 전체를 하나님께 바치는 헌신을 의미합니다.

    보잘 것 없는 사람을 하나님과 백성들의 중재자로 세워주시니 얼마나 감사합니까? 그 은혜를 생각하면 죽기까지 충성하기로 헌신을 다짐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저도 목사 안수를 받을 때 하나님의 은혜가 너무나 크고 감사하여 눈물이 핑 돌았던 경험이 있었습니다.

    저드슨(1788-1850)이 대학을 거쳐 신학교를 졸업하자 보스톤시에 있는 상류층의 교회에서 부목사로 와 달라는 초빙을 받았습니다. 그의 동료 친구들은 모두 부러워하며 집의 어머니와 누이도 매우 기뻐했습니다. 그러나 저드슨은 고개를 흔들었습니다.

    "하나님은 나를 해외선교에 쓰시려고 부르셨습니다. 내가 이곳에 남아서 일을 해도 주님의 일을 하는 것이지만 나는 부분적으로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이 됩니다. 나는 주님께 전체로 순종하렵니다."

    안일한 자리를 물리친 저드슨은 결국 철통같은 불교의 나라 미얀마(버마)에 선교사로 갔습니다. 그곳은 너무나도 어려운 곳이었기에 목숨을 바칠 각오로 일했으나 처음의 한 사람을 전도하여 세례를 베푸는데 무려 6년간의 갖은 고생을 다 했습니다. 저드슨은 오랜 기간을 버마의 감옥에서 지나기도 했고 죽음과 질병의 고비도 몇 번이나 넘겼습니다. 그러나 저드슨의 거룩한 헌신은 5만 명이라는 크리스천을 미얀마(버마)땅에 탄생시키고 전세계의 크리스천들의 마음에 꺼지지 않는 횃불을 밝히 켜 놓은 것입니다.

    제사장은 자신의 욕망이나 정욕을 죽이고 마침내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드리는 일꾼입니다. 제사장이 되어 임직을 행하기 전에 먼저 희생을 각오하는 번제물이 되어야 합니다.

    어떤 사람이 진정 헌신의 사람이 될 수 있을까요?

    감사하는 마음을 가진 사람이 헌신의 사람이 됩니다. 바울의 고백을 들어보십시오.

    딤전 1:12 나를 능하게 하신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께 내가 감사함은 나를 충성 되이 여겨 내게 직분을 맡기심이니

    사랑하시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의 죄를 용서하여 주시고 일꾼으로 세워 주신 은혜를 감사하게 생각하십니까? 그렇다면 죽도록 충성하며 헌신하기를 다짐하십시오. 하나님은 자기 일꾼들이 온전히 헌신하시기를 소원하고 있습니다. 손에 쟁기를 잡은 일꾼이 뒤를 돌아보면 안됩니다. 주님만 바라보아야 합니다.

    소제(素祭) / 힐 소(素), 제사 제(祭) 

    - 성품, 변화(고운가루)(자아 파쇄)

    파쇄(破碎) - 깨트릴 파, 부술 쇄 / 깨어져 부스러짐. 또는 깨뜨려 부스러뜨림. 부숨. 부서짐.

    소제(素祭) / 힐 소(素), 제사 제(祭)
    Grain Offering
    Serial Offering
    Meat Offering

    히브리어 / 민하 <선물>

    소제(Grain Offering)

    1) 어의

    소제를 뜻하는 히브리어 '민하'( )는 '분배하다', '수여하다'라는 의미의 어근 '마나'( )에서 유래한 것으로 '헌물', '조공', '희생 제물'을 뜻하는데 특별히 '피 없는 곡물 제사'에 사용되어 말 그대로 '소제', 또는 '피 없는 곡물 제사'를 뜻한다.

    2) 제물의 종류

    소제에 드려진 제물의 종류는 모두 네 가지였다. 그 첫째는 '고운 가루'로서 여기에는 '기름'과 '유향'이 첨가된다. 둘째는 누룩을 넣지 않고 '고운 가루'에 '기름'을 섞어 만든 '무교병'으로서 무교병을 만드는 방법은 '화덕에 구운 것'(레2:4)과 '번철에 부친 것'(레2:5), 그리고 '솥에 삶은 것'(레2:7)의 세 가지였다. 소제물의 세번째는 '처음 익은 곡식'이었으며, 네번째는 '첫이삭'이었는데 특별히 첫이삭을 소제물로 드릴 때는 볶아 찧은 것에다 기름과 유향을 드려야 했다.

    3) 소제의 방법

    소제를 드리는 방법은 제물을 제단으로 가져오기 전에 집에서 제물을 준비하는 것에 더욱 주목해야 하는데 그것은 제물을 준비하는 과정 자체가 소제를 드리는 방법에 속하기 때문이다.

    첫째, 고운 가루의 소제물일 경우에는 그 위에 기름을 붓고 유향을 놓은 후 제사장에게로 가져오는데 제사장은 고운 가루 한 줌과 모든 유향을 취하여 기념물로 제단 위에 불사른 후 나머지는 자신의 음식으로 취한다.

    둘째는, 무교병을 소제물로 삼을 경우인데 이 때는 화덕에 구운 것과 솥에 삶은 것은 고운 가루에 기름을 섞어 만들고, 번철에 구울 경우에는 고운 가루를 누룩 없이 기름과 섞어 구운 후 조각으로 나누고 그 위에 기름을 붓는다. 이러한 무교병의 소제물 역시 제사장에게로 가져가면 제사장은 그것 중 기념할 만큼만 취하여 여호와께 화제로 드리고 나머지는 자신의 음식으로 취하였다.

    셋째는, 첫이삭을 드릴 경우인데 이 때는 반드시 그 곡식을 볶아야 하며 그 위에 기름을 붓고 유향을 더한 후 제사장에게로 가져가야 하며 제사장은 그중 얼마와 모든 유향을 취하여 여호와께 화제로 드린 후 나머지는 자신의 음식으로 취하였다(이때의 나머지에 대해 성경의 특별한 언급이 없지만 소제물이 제사장의 음식으로 주어졌다는 일반적인 규례를 따를 때 첫이삭의 소제물 역시 제사장의 음식으로 주어진 것으로 보아야 한다). 한편 이러한 모든 소제물에 반드시 지켜야 할 법칙이 한 가지 있는데 그것은 모든 소제물에는 누룩과 꿀을 넣지 말고 반드시 소금을 치라는 것이었다.(레2:11,13)

    4) 소제의 목적

    소제의 목적 역시 두 가지로 볼 수 있는데

    첫째는 우리가 삶을 영위할 수 있도록 물질을 공급하여 주시고 보호하여 주신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에 감사하며 경배 돌리기 위함이며,

    둘째는 자신의 땅을 가지고 있지 않은 제사장과 레위인에게 음식을 제공하여 그들을 보호하기 위한 것이었다.

    5) 소제의 영적 의미

    소제의 영적 의미는 우리를 구원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늘로부터 내려오는 영적 양식의 공급자가 되실 뿐만 아니라 자신 스스로 생명의 떡이 됨을 상징하는 동시에(요6:32-35), 이러한 영적 양식과 일용할 육적 양식까지도 공급받는 성도들이 드려야 할 감사의 의무를 상징한다. 한편 모든 소제물에 '소금'을 치라는 명령은 '영원한 계약'을 상징하는 '소금'(민18:19,대하13:5)을 통해 제사 드리는 자가 하나님과의 영원한 계약 관계에 있음을 깨닫게 하는 것으로서 하나님께서 제사 드리는 자를 결코 버리지 않을 것과 제사 드리는 자는 그 계약법을 지켜야 할 영원한 의무가 있음을 뜻하는 것이다. 이렇듯 하나님과의 영원한 계약 관계에 있는 자는 죄악과 세상의 유혹에서 떠나야 하는데 이러한 사실은 죄악을 상징하는 '누룩'과 달콤한 세상의 유혹을 상징하는 '꿀'을 모든 소제물에서 제하라는 하나님의 준엄하신 명령으로 주어졌다.

    화목제(和睦祭) / 화목할 화(和), 회복할 목(睦), 제사 제(祭)

    - 관계회복, 교제

    화목제(和睦祭) / 화목할 화, 회복할 목, 제사 제
    Fellowship Offering(7:13)
    Peace Offering(7:37),
    Freewill Offering(7:16) 자원제, 신명기 12:17, 낙헌 예물

    히브리어 / 제바흐 쉘라밈 <제물, 평화>

    화목제(Peace Offering)

    1)어의

    화목제를 뜻하는 히브리어 '제바흐 쉐라밈'( )은 '동물을 살육하다', '죽이다', '제사 드리다'라는 뜻의 '자바흐'( )에서 파생된 '도륙', '희생물'을 뜻하는 '제바흐' )와 '완전한', '정다운', '공평한', '평화로운'을 뜻하는 '솨렘' )에서 파생된 '쉐라밈'( )의 합성어로서 그 의미는 '사람이 하나님과의 완전한 관계', 또는 '평화로운 관계를 얻고자 하는 희생 제물'이라는 의미이다.

    2) 제물의 종류

    ⑴ 소와 염소 : 흠 없는 것으로서 암컷,수컷 구별 없이 어느 것이든 가능하다. 그러나 전부를 드리는 것이 아니라 내장에 덮인 기름과 내장에 붙은 모든 기름, 그리고 두 콩팥과 그 위의 기름, 허리 근방에 있는 것과 간에 덮인 꺼풀을 콩팥과 함께 드리도록 되어 있었다.

    ⑵ 양 : 소와 마찬가지로 흠 없는 것으로 하되 암,수 어느 것이든 가능하였고, 어린 양을 드릴 수도 있었다. 양의 경우 역시 양의 기름만을 드리되 미려골(등심뼈 또는 척추)에서 베어 낸 기름진 꼬리와 내장에 덮인 것과 모든 기름진 두 콩팥과 간에 덮인 기름과 꺼풀만을 콩팥과 함께 드릴 수 있었다.

    3) 화목제의 방법

    화목제를 드리는 방법은 번제의 방법과 거의 유사한데 그 순서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① 헌제자가 제물이 될 짐승을 끌고 여호와 앞으로 나아온다.

    ② 헌제자의 손을 제물의 머리 위에 얹고 안수한다.

    ③ 헌제자가 제물을 잡아 피를 제사장에게 주면 제사장은 그 피를 번제단 사면에 뿌린다.

    ④ 헌제자가 제물의 가죽을 벗기고 그 속의 내장에 덮인 기름과 내장에 붙은 모든 기름과 콩팥과 그 위의 기름과 허리 근방에 있는 것과 간에 덮인 것을 제사장에게 주면 제사장은 그것들을 받아 제단에서 불사른다.

    ⑤ 제물의 가슴은 '요제'로 제물의 우편 뒷다리는'거제'로 흔들어 제사장의 음식으로주어지는데 제사장과 가족들은 그것을 그날에 다 먹어야 하며 남은 것은 불에 태워야 했다.

    4) 화목제의 특색

    화목제는 다른 제사와는 달리 두 가지의 특색이 있었다. 그것은 첫째로, 의무적인 제사가 아닌 '선택적인 제사'로서 '자원함으로나'(레7:16), '서원함으로'(레7:16,삼상1;21이하), 그리고 '감사함으로'(레7:15)드리는 제사였으며, 둘째로, 화목 제물의 고기를 헌제자도 먹을 수 있는 일종의 축제 형식의 제사였다는 점이다(레7:15-21)

    5) 화목제의 영적 의미

    화목제의 영적 의미는 화목제의 성격이 드러내는 바 그대로 하나님과 죄인을 화목케 하는 '화목 제물되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상징'과(롬 3:25, 엡 2:13 ,골 1:20), 그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목을 누리는 성도들의 친교인 '성만찬에 대한 예표'이다(고전 10:16)

    헌신을 상징하는 번제의 수양을 드린 후에 따 다른 수양, 곧 위임식 수양을 제물로 드렸습니다.
    속죄제, 번제, 화목제의 제사를 드릴 때마다 아론과 그의 아들들은 제물 위에 안수하였습니다.
    모세는 위임식 수양을 잡고 그 피를 취하여 아론의 오른 귓부리와 오른 손 엄지가락, 오른 발 엄지가락에 피를 발랐습니다.
    그의 아들들에게 같은 예식을 거행하였습니다.

    이것은 제사장들의 귀도, 손도, 발도 하나님을 위하여 성별 되었음을 의미합니다.
    먼저 아론과 그의 아들들의 오른 귓부리에 피를 바른 의미가 무엇인지 생각해 봅시다.
    제사장은 먼저 귀를 성별 하여 하나님의 명령하심에 귀를 기울여야 함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귀로 하나님의 말씀만 들으라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듣는 것이 중요합니다.
    아담과 하와는 마귀의 음성에 귀를 기울였다가 타락하였습니다.
    가룟 유다도 마귀의 음성에 귀 기울였다가 하나님의 아들을 팔아먹는 배신자가 되었습니다.

    사람은 듣는 것을 조심해야 합니다.
    성경에서 귀 있는 자는 들으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귀가 따로 있다는 말씀입니다.
    여러분들에게는 그런 귀가 있습니까? 오직 주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시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잠언 5:1-8
    내 아들아 내 지혜에 주의하며 내 명철에 네 귀를 기울여서.
    근신을 지키며 네 입술로 지식을 지키도록 하라. 
    대저 음녀의 입술은 꿀을 떨어뜨리며 그 입은 기름보다 미끄러우나. 
    나중은 쑥같이 쓰고 두 날 가진 칼같이 날카로우며.
    그 발은 사지로 내려가며 그 걸음은 음부로 나아가나니. 
    그는 생명의 평탄한 길을 찾지 못하며 자기 길이 든든치 못하여 그것을 깨닫지 못하느니라.
    그런즉 아들들아 나를 들으며 내 입의 말을 버리지 말고. 
    네 길을 그에게서 멀리하라 그 집 문에도 가까이 가지 말라.

    오른 귓부리에 피를 바른 후에 오른손 엄지가락과 오른발 엄지가락에 피를 발랐습니다.
    손과 발은 행위를 나타냅니다.
    특히 오른 쪽은 힘과 능력을 상징합니다.
    이것은 자신에게 주신 힘과 능력을 다하여 주님만을 위하여 행동하겠습니다 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또한 이 피는 제사장들의 옷에도 뿌려졌습니다.
    관유와 피가 그들의 옷에 뿌려짐으로 그들의 입는 예복이 거룩하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보혈과 성령의 기름 부으심이 없다면 우리가 결코 거룩하게 될 수 없음을 가리켜 주는 것입니다.

    모세는 화목제물과 소제물을 아론과 그 아들들의 손에 두어 여호와 앞에 흔들어 요제를 삼게 하였고 모세가 그들의 손에서 취하여 단 윗 번제물 위에 불사르니 이는 향기로운 냄새를 위하여 드리는 위임식 제사였습니다.

    위임식 수양으로 드리는 화목제물 가운데서 모세의 응식은 무엇이었습니까?
    수양의 가슴이었습니다.
    그리고 나머지는 아론과 그 아들들에게 위임식 광주리의 떡과 함께 회막 안에서 삶아 먹고 나머지는 불사르도록 하였습니다.

    이렇게 모든 의식을 마치고 아론과 그의 아들들은 제사장이 되었습니다. 성막은 아무나 다가설 수 있는 곳이 아니었습니다. 거룩한 영역을 침범하는 자는 죽임을 당하였습니다. 아론과 그의 아들들은 거룩한 제사 의식을 수행하기 위해 위험한 곳에서 일하였습니다. 이곳은 삶과 죽음이 교차하는 곳이었습니다. 이제 이들은 그 안에서 머물 수 있는 안전한 통과가 주어졌습니다. 삶과 죽음 사이에 있는 제사장들은 거룩한 곳과 비거룩한 곳, 삶과 죽음 사이의 중보자로서 살게 된 것입니다.

    위임제는 제사의 종류가 아닙니다. 제사장을 세우는 위임식 제사를 의미합니다. 이 의식은 7일간 계속되었습니다. 제사장은 7일 동안 회막에서 나오지 못합니다(33,34). 성막에는 의지나 쉴 곳이 없다는 것이 특징입니다. 7일 동안 그들은 편히 누워서 잠도 못 자고 철야를 하면서 지냈을 것입니다. 매일 수송아지 한 마리로 속죄제를 드리고, 아침저녁으로 어린양 한 마리씩으로 번제와 소제를 겸하여 바쳤을 것입니다(출 29:36-39).

    이와 같이 7일 동안 위임식이 거행된 것은 제사장의 직분이 얼마나 거룩하고 큰 직분인가를 알 수 있습니다. 후일에 대제사장은 최고의 권위자로 나타납니다.

    그러나 인간의 중보자는 영원하지 못하다는 흠이 있습니다. 죽을 수밖에 없는 인간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보내주신 영원히 살아 계신 대제사장이 계십니다. 그분이 바로 우리의 구주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히브리서 4:14-16
    그러므로 우리에게 큰 대제사장이 있으니 승천하신 자 곧 하나님 아들 예수 시라 우리가 믿는 도리를 굳게 잡을지어다.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 연약함을 체휼하지 아니하는 자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한결같이 시험을 받은 자로되 죄는 없으시니라. 
    그러므로 우리가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

    우리의 대제사장이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가시는 우리 성도님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속죄제(贖罪祭) / 속죄할 속(贖), 허물 죄(罪), 제사 제(祭)

    Sin Offering
    Purification Offering

    히브리어 / 하타트(chaṭṭâʼth) 2403. חַטָּאָת

    1. 죄
    2. 우상에 대해 적용되기도 함
    3. 속죄제
    발음 / 하타트(chaṭṭâʼth)
    어원 / 2398에서 유래
    관련 성경 / 죄(창 4:7, 레 4:3, 대하 6:25), 죄악(창 18: 20,사 5:18), 속죄제(출 29:14, 민 15:27, 왕하 12:16), 속죄 제물(레 4:32, 민 8:8, 대하 29:23), 속죄 희생(레 4:25), 허물(레 5:6), 잘못(레 5:10,11), 속죄(레 10:19, 민 8:7), 속건제(레 7:7), 번제(레 4:29), 죄악(시 32:5, 애4:6), 죄인(잠 5:22, 13:6), 벌(슥 14:19). [동] 범죄하다(느 1:6, 욥 35:3).
    구약 성경 / 221회 사용


    속죄제 : 하나님의 계명을 범한 죄에 대한 제사
    속건제 : 손해를 입힌 것에 대한 보상을 위한 제사

    속죄제(Sin Offering)는 하나님의 계명을 범한 죄에 대한 제사를 말합니다.
    속죄제의 제물은 신분에 따라 그 종류가 달라질 수 있습니다.
    제사장은 "흠 없는 수송아지"(4:3)
    온 회중은 "수송아지"(4:13)
    족장은 "흠 없는 수염소"(4:23)
    평민은 "흠 없는 암양이나 암염소"(4:28)
    이 외에도 가난한 자는 "산비둘기"나 "집비둘기"를 제물로 드릴 수 있었으며(5:7), 이보다 더 가난한 자는 고운 가루 에바 십분의 일을 제물로 드릴 수 있습니다(5:11)

    속죄제의 영적인 의미는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신 후 무덤에 장사되었을 때 안식 후 첫날 새벽에 막달라 마리아와 여자들이 준비한 향품을 가지고 무덤에 찾아갔을 때 무덤은 열려 있었고 찬란한 옷을 입은 두 천사가 “어찌하여 산자를 죽은자 가운데서 찾느냐? 그가 여기 계시지 않고 말씀하시던 대로 살아나셨느니라”라고 일러주었습니다.

    막달라 마리아와 다른 여자들이 제자들에게 달려가 부활의 사실을 알렸을 때 사도들은  믿지 않았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분명한 사실이었지만 제자들에게 체험되지 않은 사건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부활은 제자들에게 신앙 사건화가 되지 못했습니다.
    따라서 오늘날도 속죄제의 제사를 통하여 예수님의 부활을 나의 신앙으로 사건화하지 못하면 도저히 믿을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2023년 전 갈보리 언덕에서 일어났던 십자가 사건은 곧 주께서 나를 위하여 죽으신 사건이었으며 주님의 부활은 곧 나를 위한 부활 사건으로 인정할 때에 신앙의 사건화가 일어날 것입니다.

    이러한 신앙은 종말에 나타날 메시야의 구원사건( Salvation Event) 이라고 합니다.
     

    3) 속죄제의 방법

    ① 헌제자가 제물이 될 짐승을 회막문 여호와 앞으로 가져온다.

    ② 헌제자의 손을 제물의 머리 위에 얹고 안수한다.

    ③ 헌제자가 제물을 잡아 피를 제사장에게 주면 제사장은 그 피를 손가락으로 찍어 성소 앞에 일곱 번 뿌리고 향단 뿔에 바른 후 회막 앞과 번제단 밑에 전부 쏟는다.

    ④ 희생 제물의 모든 기름과 콩팥을 번제단 위에서 불사른 후 그 나머지 부분은 진 바깥 재 버리는 정결한 곳에서 나무 위에 놓고 불사른다. 그러나 아론과 그 아들들을 위한 속죄제는 진 밖에서 불사르지 않고 다리와 고기를 회막 뜰에서 구워 먹도록 하였다(레6:24-27)


    1) 어의

    속죄제를 뜻하는 히브리어 '하타트'( )는 '과녁에서 벗어나다', '죄를 짓다', '속죄물을 드리다', '속죄하다'를 뜻하는 '하타'( )에서 파생된 것으로 '하나님의 법에서 벗어난 죄로부터 청결과 속죄함을 얻기 위하여 드리는 제사'를 뜻한다.

    2) 제물의 종류

    속죄제의 제물은 범죄자의 사회적인 위치에 따라 달랐다.

    ① 제사장 -- 흠 없는 수송아지를 드림(레4:3)

    ② 온 회중 -- 수송아지를 드림(레4:13)

    ③ 족장 -- 흠 없는 수염소를 드림(레4:23)

    ④ 평민 -- 흠 없는 암양이나 암염소를 드림(레4:28)

    이 외에도 가난한 자는 산비둘기나 집비둘기를 제물로 드릴 수 있었으며(레5:7), 이보다 더 가난한 자는 고운 가루 에바 십분의 일을 제물로 드릴 수 있었다(레5:11)

    3) 속죄제의 방법

    ① 헌제자가 제물이 될 짐승을 회막문 여호와 앞으로 가져온다.

    ② 헌제자의 손을 제물의 머리 위에 얹고 안수한다.

    ③ 헌제자가 제물을 잡아 피를 제사장에게 주면 제사장은 그 피를 손가락으로 찍어 성소 앞에 일곱 번 뿌리고 향단 뿔에 바른 후 회막 앞과 번제단 밑에 전부 쏟는다.

    ④ 희생 제물의 모든 기름과 콩팥을 번제단 위에서 불사른 후 그 나머지 부분은 진 바깥 재 버리는 정결한 곳에서 나무 위에 놓고 불사른다. 그러나 아론과 그 아들들을 위한 속죄제는 진 밖에서 불사르지 않고 다리와 고기를 회막 뜰에서 구워 먹도록 하였다(레6:24-27)

    4) 속죄제와 속건제의 차이

    속죄제의 목적은 '범죄에 대한 용서'를 위한 것이었다. 그런데 이러한 목적은 속건제의 경우 역시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이 둘은 근본적인 차이가 있다.

    첫째는, 범죄의 성격적 차이로서 속죄제가 하나님께 범죄한 자, 즉 '율법을 범한 죄'를 위한 제사였던 반면에, 속건제는 인간에게 범죄한 죄, 즉 '도덕적인 범죄의 대속을 위한' 제사였다.

    둘째는, 속죄제는 속건제와는 달리 '범죄한 일을 배상할 수 없는 죄'에 대한 용서를 구하는 제사였던 반면, 속건제는 '배상이 가능한 죄'에 대한 용서를 구하는 제사였다는 점이다.

    5) 속죄제의 영적 의미

    속죄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를 지심으로 모든 인류의 죄를 대속하신 '그리스도의 대속 사역'을 상징한다. 그리스도는 실로 속죄 희생의 어린 양이 되셔서(벧전1:19) 모든 인류의 대속물이 되셨는데, 그의 죽음의 장소는 속죄제 희생 제물이 진 바깥 정결한 곳에서 불살라진 것처럼 예루살렘 성 바깥의 골고다 산상의 고통스런 십자가였다.

    Q :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 사건은 이미 2016년 전에 일어났던 고대 사건인데요. 이 고대의 사건을 오늘을 사는 현대인들에게 전도로 믿게 하려면 쉽지 않는 줄 압니다. 어떻게 십자가 사건과 부활의 고대 사건을 현재의 우리에게 적용시켜 믿게 하는 것이 가능한지요?

    A :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신 후 무덤에 장사되었을 때 안식 후 첫날 새벽에 막달라 마리아와 여자들이 준비한 향품을 가지고 무덤에 찾아갔습니다. 무덤에 가보니 무덤은 열려 있었고 큰 돌은 굴려져 있었습니다. 그때 찬란한 옷을 입은 두 천사가 말합니다. “어찌하여 산자를 죽은자 가운데서 찾느냐? 그가 여기 계시지 않고 말씀하시던 대로 살아나셨느니라” 그래서 막달라 마리아와 다른 여자들이 제자들에게 달려가 그 부활의 사실을 흥분하여 알렸을 때 사도들은 저희 말이 허탄한 듯이 보여, 믿지 아니했다고 했습니다. 문제는 분명히 예수님의 부활 사건이 확실한 사건이었지만 그것이 제자들에게 체험되어지지 아니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부활 사건이 그들에게 신앙 사건화가 되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 사건은 신학적으로 말한다면 “종말에 나타난 메시야의 구원사건”( Salvation Event)이라고 부릅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이 과거의 사건이 나와 무슨 관계가 있느냐는 것입니다.
    그래서 중요한 것은 2016년 전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으심이 나를 위한 죽음의 사건이 되고 그리스도의 부활 사건이 바로 나를 위한 부활 사건으로 적용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즉 신앙사건화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사건이 나를 위한 신앙사건화가 되기 위해서는 성령님의 중재가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과 부활사건은 2023년전 고대의 사건입니다.
    우리와는 엄청난 시간적인 갭이 있습니다.
    고대의 구원의 사건이 우리에게 생생하게 믿어지려면 성령님이란 중개자가 필요합니다.
    중매자는 전혀 알지 못하는 남남의 관계를 가장 가까운 부부의 관계로 연결시킵니다.

    성령님은 예수님의 영이시기에 고대의 예수님과 현재의 우리를 연결시켜줍니다.
    성령님은 하늘의 예수님과 땅의 우리들을 연결시켜줍니다.
    그래서 성령님의 역사로 감동 감화하시면 그리스도의 사건이 바로 현재 나를 위한 사건으로 의심 없이 받아들여지고 그리스도의 죽음이 나와 개인적인 관계를 맺게 하고 그리스도의 부활이 내생명과 절대적인 관계에 임하게 만들어줍니다.
    그래서 결국은 그리스도가 나의 구세주요 주인으로 믿고 고백하게 연결시켜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부활절 후에 성령님이 강림해서 그리스도의 사건을 믿게 하기 위해 이 땅에 찾아오신 것입니다.
    이 성령님은 그리스도를 믿게 하는 그리스도의 영이신 것입니다.
    중매의 영이십니다.
    전도하면 성령님이 역사하여 고대의 십자가 사건이 나를 위한 사건이었다고 의심 없이 믿게 하는 것입니다. 이게 기적입니다.


    첫 번째 부류의 사람은 헬라인들

    헬라인이란 혈통적으로 그리스 인들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헬라인이란 지혜와 지식을 숭상하는 부류의 사람들을 가리킵니다.
    요즈음 말로 헬라인을 정의한다면 세상 고등 교육을 잘 받은 지성인이라는 말입니다.
    이들은 십자가를 어떻게 보고 있습니까?
    십자가를 foolish하다, 즉 미련하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 사람들은 십자가는 미련한 것이기에 그 십자가 안에는 참된 지혜를 찾을 수가 없다고 말합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십자가를 경멸합니다.
    그들은 철학을 통하여 사물의 근본을 밝히려고 노력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의 지성적인 눈에는 십자가는 천하기 그지없습니다.

    두 번째 부류의 사람은 유대인들

    유대인들은 이성으로 논리를 추구하는 것을 좋아하기보다는 신앙으로 기적이 일어나는 것을 보기 좋아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22절에서 헬라인은 지혜를 추구하지만 유대인들은 표적을 찾는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유대인들이 메시야를 기다릴 때에도 메시야라고 주장하는 사람이 진짜 메시야인지 아닌지를 구별하는 척도도 메시야로서의 표적을 행했는가에 달려 있습니다.
    이런 관점에서 본다면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는 유대인의 관점에서 본다면 전혀 메시야의 자격을 갖추지 못한 분입니다.
    십자가에 달려서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절규하면서 하나님께 원망하면서 십자가 위에서 운명하신 예수를 메시야라고 볼 수가 없지요.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메시야는 힘과 능력을 가지고 있어서 로마를 뒤집어 엎어 버리고 이스라엘의 영광을 되찾아 주는 분이 되어야 합니다. 그런 기대를 우리 주님 예수에게서 유대인들을 볼 수가 없었습니다. 범죄자의 한 사람으로 수치스럽게 맥없이 나무 위에서 죽었던 나사렛 출신의 목수를 유대인들이 어떻게 메시야로 믿을 수가 있었겠습니까?

    세 번째 부류의 사람들은 십자가를 자랑하는 사람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 형틀에 달리어서 죽었습니다. 그런 수치스러운 십자가를 우리들은 자랑합니다. 왜냐고요? 23절과 24절 말씀에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며 하나님의 지혜이기 때문입니다. 18절에 기록되어 있는 데로 십자가의 도, 즉 십자가의 메시지는 현재 영적으로 멸망 당하여 있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현재에 얻어 가지고 있는 우리들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기 때문입니다.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가 누구입니까? 오늘 우리들에게는 2천년이라는 시간의 갭이 있어서 십자가가 미화되어 있습니다. 십자가의 이미지는 오늘 현대를 사는 우리들에게는 아름답고 고상합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 당시의 십자가는 그야말로 처절한 십자가입니다. 피를 흘리면서 고통 스럽게 죽어 가는 처형대라는 말입니다. 그런 십자가에 달려서 죽어가는 예수를 바라 보면서 그를 주님이라고 부를 수가 있겠습니까? 세상 사람들은,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모두 십자가에 못박혀서 피흘리면서 고통스럽게 죽어 가는 예수를 저주 받은 자로 보았습니다. 십자가에서 절규하면서 죽어가는 예수를 바라보면서 예수께서 주님이시다 라는 고백을 하는 무리들이 바로 그리스도인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십자가 저 뒤에 있는 것을 보았기 때문인데, 그것이 무엇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지혜와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피흘리며 죽어 가는 예수의 모습 속에 무엇이 나타나 있습니까? 오늘 본문 24절에는 이런 말씀이 기록되어져 있습니다:오직 부르심을 받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 십자가 저 뒤에는 하나님의 능력과 지혜가 드리워져 있습니다.

    첫 번째로 십자가에는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났습니다.
    어떤 능력입니까? 나의 죄를 사하는 능력이 십자가입니다. 인생들이 죄를 지어서 죄에 매여 살게 되었습니다. 그 죄의 속박과 죄의 권세로부터 벗어나기 위해서는 막강한 힘과 능력이 있어야 합니다. 죄인들이 그런 죄의 속박을 부수고 죄의 권세로부터 탈출하도록 만들어 주는 권세가 십자가의 능력입니다. 18절 말씀은 이렇게 기록되어져 있습니다:십자기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얻은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십자가는 죄를 멸하는 능력입니다.
    인류의 과학기술 문명이 발달하여서 로켓을 쏘아서 지구를 벗어 나서 달로 그리고 태양계 밖으로 까지 나갈 정도가 되었습니다. 로켓이 지구를 벗어 나기 위해서는 지구가 끌어 당기는 중력을 뿌리칠 수 있는 힘이 있어야 합니다. 그런 힘이 없으면 로켓은 땅으로 떨어 집니다. 굉음을 내면서 로켓이 하늘로 솟아 올라가는데, 몇 분 동안 중력을 뿌리치는 가속도를 내면 지구의 중력이 영향력을 미치지 않는 무중력 상태에 들어가게 되지요.
    십자가에 나타난 능력은 우리를 나락으로 잡아 당기는 죄악의 권세를 뿌리치는 능력입니다. 죄의 권세는 우리를 유혹하면서 나락에 떨어지도록 우리를 잡아 당깁니다. 그러나 우리는 십자가의 능력으로 죄의 권세를 이겼습니다. 더 이상 죄의 권세가 우리를 억압하지 않는 그런 상태에 진입해 있습니다.
     
    두 번째로 십자가 위에는 하나님의 지혜가 나타났습니다.
    십자가는 하나님의 지혜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죄에 빠진 인류를 바라보시면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딜레마에 빠져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두가지의 속성을 가지고 계십니다. 하나님의 공의와 하나님의 사랑! 이 두가지는 서로 대척하는 속성입니다. 하나님이 속에 가지고 있는 공의라는 속성은 인류를 그대로 멸망시키라고 주장하시지만 그러나 하나님이 속에 가지고 계시는 다른 속성인 사랑은 인류를 구원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하나님은 그런 딜레마 속에 놓여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을 모두 충족시킬 묘책이 있겠습니까? 그 방법이 바로 십자가입니다. 하나님의 고민이 해결되었습니다. 십자가는 하나님이 자신의 딜레마에서 빠져 나오는 지혜가 담겨 있습니다. 십자가는 하나님의 공의도 100% 만족시켰고 하나님의 사랑도 100%만족시켰습니다. 어떻게 십자가가 그런 일을 했습니까?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신 분은 다름 아닌 하나님의 독생자입니다. 독생자라는 말은 하나님과 독특한(unique) 관계를 맺고 있는 아들이라는 말입니다. 하나뿐이면서 하나님과 독특한 관계를 맺고 있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피흘리면서 죽었습니다. 왜 그 아들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셔야 했는가?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심은 인류가 지었던 죄값을 청산하기 위해서입니다. 예수는 죄를 짓지 않았지만 우리의 죄를 대신해서 지고서 십자가에서 피흘리고 죽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공의가 만족되었습니다. 그냥 우리가 지은 죄를 말로 면죄하신 것이 아니라 그의 하나 뿐인 아들이 죄인인 우리를 대신하여서 피흘리고 죽었기에 그 댓가로 우리의 죄가 사하여졌습니다.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피흘리심으로써 하나님의 공의가 만족되었습니다.
    또한 십자가 사건은 하나 뿐인 아들, 예수를 십자가에 죽일 정도로 하나님이 죄에 빠진 인류를 사랑하고 있음을 입증하는 사건입니다. 로마서 5:8절에는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지극한 사랑의 표현이 십자가입니다. 십자가에는 인류를 구원하려는 감추어진 하나님의 지혜가 들어 있습니다. 십자가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입은 여러분과 저에게는 십자가는 더 이상 수치스러운 물건이 아닙니다. 그 십자가는 여러분과 저를 죄와 죽음과 영원한 지옥의 심판에서 건지시기 위하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당하신 고난입니다.

    세 번째로 십자가를 통하여 죄를 멸하는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하고, 십자가를 통하여 하나님의 지혜를 체험한 성도들에게 우리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것은 무엇입니까?

    전도입니다. 21절 말씀은 이렇게 기록되어져 있습니다:하나님의 지혜에 있어서는 이 세상이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므로 하나님께서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셨도다. 세상에서 솟아난 지혜인, 유교, 도교, 불교, 또한 스스로 계시의 종교라 자처하는 이슬람교도 그들 자체의 지혜로는 결코 십자가를 수용할 수가 없습니다. 십자가 안에 있는 하나님의 지혜와 하나님의 능력을 결코 세상 지혜는 알 수가 없습니다. 먼저 깨닫고 믿고 안 자들이 전도를 통하여 십자가의 도를 전수 할 때에 영혼을 구원할 수가 있습니다. 다른 길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십자가의 도를 깨우친 그리스도인이라면 누구라도 땅끝까지, 우리 주님이 가라 하는 곳으로 갈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합니다.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면서 만민에게 복음을 전하라라는 명령은 우리 주님이 부활하신 후에 제자들에게 주신 명령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전도사역을 통하여 세상 불신자들을 구원하시기를 원하십니다. 참 미련한 방법이지만, 전도 외에는 사람의 영혼을 구원할 방법이 없습니다. 세상 많은 사람들이 영혼이 우리에게 달려 있습니다.
    올해 우리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표어는 사람 낚는 어부가 되게 하소서 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이 복음을 가지고 이방 불신 세계로 가지 않기에 많은 사람들이 지옥 불 속으로 들어갑니다. 교회에 성령 불이 꺼져 가고 있기에 수 많은 사람들이 지옥 불 속으로 들어가고 있음을 기억하시길 바랍니다. 다시금 교회가 성령으로 불타 오르기를 바라고 소원할 뿐입니다.

    십자가는 죄를 멸하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우리를 죄의 늪에서부터 건져 올리는 능력이 십자가 위에 나타나 있습니다. 십자가는 우리의 자랑입니다. 더 이상 그것은 수치가 아닙니다. 십자가에는 우리를 구원하기 위한 우리 하나님의 무한한 지혜가 나타나 있습니다. 십자가는 우리 하나님의 지혜입니다. 이 땅에서의 모든 우리의 삶을 끝내고 영원 세계에 들어 갈 때에도 우리는 십자가를 의지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이 땅 위에서 생겨난 인간의 지혜로는 십자가에 나타난 하나님의 지혜를 헤아려 알 수가 없습니다. 그러기에 우리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전도를 명하셨습니다. 지금도 우리 주님의 바람 같은 성령은 교회 밖, 불신 세계에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 불고 있습니다. 다양한 종류의 사람들이 교회 밖에 살고 있습니다. 학문을 연마하며 지혜를 추구하며 사는 지성인들의 가슴속에도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께서 들어가실 수가 있습니다. 또한 유대인들처럼 신앙적인 체험을 구하는 사람들의 심령 속에도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는 들어 가실 수가 있습니다. 주님 명령 따라서 내가 깨달아 알게 된 십자가의 도를 불신 이웃들에게 전하는 우리의 삶이 되어야겠습니다.
    올 한 해 동안 미련하기도 하고 우직한 방법인 개인 전도를 통하여 적어도 한 영혼을 구원하는 우리들이 되어야겠습니다. 복음을 전해야 하는 타겟을 정하고 기도한 후에 복음을 전하기를 바랍니다.

    제사장의 위임식 제사 가운데 가장 먼저 드려야 하는 제사가 있는데 그것이 바로 속죄제입니다.
    제사장에게 왜 속죄제가 필요할까요? 제사장은 남을 위한 속죄를 위해 중보하기 전에 자신이 먼저 속죄를 입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모세가 속죄제의 수송아지를 끌어오니 아론과 그 아들들이 수송아지의 머리 위에 안수하였습니다. 자신들의 모든 죄를 수송아지에게 전가시키는 것을 의미합니다. 짐승이 죽는 것은 자기 죄 때문이라는 것을 분명히 자각해야 했습니다. 죄없는 짐승이 죽어 가는 동안 제사장은 죄가 얼마나 무서운 것이며, 이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서 무엇보다 성결해야 한다는 것을 마음에 굳게 결심하게 되었을 것입니다.

    위임을 위한 속죄제는 수송아지의 피를 향단의 네 뿔에 바르지 않고(레 4:3-12절의 속죄제의 규정과 다르다) 오히려 바깥의 번제단의 네 뿔에 바르고 그 다음에 남은 피는 제단 밑에 쏟았습니다. 이와 같이 피는 장막 내부로 가져가지 않았습니다. 이는 이들이 아직은 제사장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임직식의 기간이 칠일간이었음을 볼 때(8:33) 이들은 아직은 제사장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따라서 제물의 피를 장막 내의 향단으로 가지고 가지 않고 바깥 제단에다 발랐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사야를 일꾼으로 부르실 때에도 먼저 그의 죄를 용서하여 주셨던 것을 봅니다.

    사 6:7 그것을 내 입에 대며 가로되 보라 이것이 네 입에 닿았으니 네 악이 제하여졌고 네 죄가 사하여졌느니라 하더라

    왜 이사야 선지자에게는 숯불을 입에 대었을 까요?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해야 하는 사람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부정한 입술을 가지고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 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 아닙니까? 그러므로 먼저 그의 입술을 정결케 하신 것입니다.

    레위기에서 계속 강조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거룩”입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가지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가지려면 무엇보다 거룩해야 합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 거룩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성화된 삶을 살 수 있을까요? 우리가 십자가의 보혈로 정결함을 받은 후에 성화된 삶을 계속 이어가기 위해서는 말씀에 철저하게 순종하며 기도를 힘써서 하나님의 능력으로 무장을 해야 합니다. 그래야 자신을 세속으로부터 지킬 수 있는 것입니다.


    속건제(贖愆祭) / 바칠 속(贖) . 속죄할 속(贖), 허물 건(愆), 제사 제(祭) 

    Guilt Offering
    Trespass Guilt

    히브리어 / 아샴 <보상, 배상, 죄책> 817. אָשָׁם.

    1. 잘못

    2. 죄짓게 하는 것
    3. 속건제
    발음 / 아샴(’âshâm)
    어원 / 816에서 유래
    관련 성경 / 죄(창 26:10, 잠 14:9), 속죄제(레 5:6), 속건제(레 5:16), 속건제물(민 6:12), 죄값(민 5:7, 8), 죄(시 68:21), 죄과(罪過)(렘 51:5).구약 성경 /46회 사용

    이사야 53:10 - 그 영혼을 속건 제물.....

    속건제(Trespass Offering)

    1. 어의

    속건제를 뜻하는 히브리어 '아솸'은 '죄'(Sin)가 아닌 '범죄'(Guilt),'범법'(Tresspass), '손해'(Damage) 등을 의미하는 것으로 '사회적인 죄', 또는 '도덕적인 죄를 용서받기 위해 드리는 제사'를 뜻한다.

    2. 속건제의 제물

    속건제의 제물은 범죄의 형태에 따라 매우 다양하게 나타나고 있어 이러한 제물을 일일이 열거하자면 너무나도 복잡하고 광범위하다.
    그러므로 각각의 범죄에 대한 속건 제물에 대해서는 레 5:14, 6:7, 7:1-10, 14:1, 15:2을 참고하도록 하되 이러한 여러 가지 제물을 요약하면 '흠 없는 일년된 수양', '범죄물과 그 범죄물의 오분의 일을 더하여 본인에게 주는 일', '산비둘기나 집비둘기 둘'이나, '고운 가루 에바 십분의 삼'과 '기름 한 록' 등이다.

    3. 속건제의 영적 의미

    속건제는 성도가 신앙생활 가운데서 범하기 쉬운 죄를 범했을 때 드리는 제사로서 그러한 범죄는 진리를 배반하거나 하나님을 배반하는 죄, 예수 그리스도를 부인하거나 성령의 사역을 거스리는 죄가 아닌 '실수와 실족의 범죄'를 뜻한다.

    그러므로 속건제는 구원에 관련된 원죄에 대한 회개나 기도가 아닌 날마다 육신의 연약함 때문에 짓게 되는 육적인 죄, 즉 '자범죄에 대한 회개와 기도에 대한 상징'이다.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레위기는 여호와께 드려야 할 5 대 제사의 규례로서 시작된다.
    그런데 이러한 레위기의 시작은 당연한 귀결이었다.
    왜냐하면 건축된 성막의(출 40:17) 주된 목적이 제사였고, 따라서 성막이 완성된 지금 그곳에서 드려질 제사의 규례가 주어지는 것은 당연한 논리요 순서이기 때문이다.

    제사의 종류에 대해서는 학자에 따라 5 대 제사로 분류하기도 하고 6 대 제사로 분류하기도 한다.
    이러한 차이는 제사장의 위임식 때 거행하는 위임제를 여기에 포함시키느냐 그렇지 않느냐에 따른 차이인데, 여기서는 5 대 제사만을 거론할려고 하는데 그 이유는 제사장의 위임식 때 행해진 위임제는 모든 이스라엘에게 관련된 것이 아니라 제사장의 위임에만 관련된 것으로 보고, 모든 이스라엘이 행해야 할 나머지 5 대 제사, 즉 '번제와 소제', '화목제와 속죄제' 그리고 '속건제'에 대해서만 살펴보기로 한다.




    __________________ 레위기 10장 / (23절)

    03-20-2023(월) 사순절 제23일



    1-7 아론의 아들 나답과 아비후가 다른 불을 드려, 소멸되다.
    8-11 제사장의 음주에 관한 훈계
    12-15 소제 및 화목제(감사제, 수은제)의 제사장의 응식에 대하여
    16-20 아론의 아들이 속죄제의 규례를 범하여 모세에게 견책되다.


    잘못 드린 제사[레 10장]
      
    [내용개요]
    아론과 그의 아들들은 제사장이라는 축복된 사명을 받았다. 그러나 그 축복은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할 때 주어지는 것이었다. 본장은 취임 첫 날 아론의 두 아들이 죽는 비극적인 사건을 통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율법이 갖는 의미를 보여 주고 있다. 아론의 아들 중 나답과 아비후는 명하지 않은 불로 분향하다 불에 태워 죽음을 당하였다(1-7절). 이 일을 계기로 하나님은 제사장은 제사시 음주를 금하고 거룩한 음식은 반드시 단 옆에서 먹도록 명하셨다(8-15절). 또한 나답과 아비후의 일로 두려워한 나머지 속죄 제육을 먹지 않고 불사른 엘르아살과 이다말에 대한 모세의 견책이 나타난다(16-20절).


    [강  해]
    본장에서는 하나님의 명령에 대한 순종의 축복과 불순종의 저주라는 이스라엘 역사 전체를 관통하는 주제를 엿볼 수가 있습니다. 모처럼의 성스러운 임직식을 끝내고 하나님의 제사장으로 구별된 아론의 두 아들 즉 나답과 아비후가 자의로 분향하던 중 하나님의 형벌을 받아 죽었습니다. 본장에는 이 형벌 사건과 이 사건이 계기가 되어 제정된 제사장의 음주에 관한 훈계, 제사장의 몫으로 돌린 소제와 화목제에 관한 규정, 제사장 엘르아살과 이다말의 범과에 대한 모세의 견책 등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신학주제]
    나답과 아비후의 죽음. 본장에는 취임식 첫 날에 아론의 두 아들 나답과 아비후가 죽는 사건이 나타난다. 제사장은 성소의 등불을 켜고 끌 때 향을 살라 바쳐야 하는데 그때 사용되는 불은 반드시 번제단에서 취해야 한다. 그런데 나답과 아비후는 다른 불로 향을 사르다 하나님의 진노를 받아 죽음을 당한 것이다. 이스라엘의 지도적 위치에 있는 제사장들이 명하지 않은 불로 향을 태웠다는 이유로 죽음을 당한 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율법이 갖는 의미를 보여 준다. 그것은 생명의 구원이다. 즉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의 축복 속에 존재할 수 있는 것은 아브라함의 자손이라는 혈통적 조건 때문이 아니라 율법에 대한 순종 때문임을 가리키는 것이다. 이는 오늘날 영적 이스라엘의 조건 또한 외적인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임을 말해 준다.


    [영적교훈]
    본장에서 하나님은 나답과 아비후의 사건을 계기로 제사장의 음주에 대한 금지를 명하셨다. 나답과 아비후는 자신들의 막중한 임무에도 불구하고 자신들의 육체적 정욕을 제어하지 못하였기에 죽음을 당한 것이다. 이는 성도들이 하나님의 일을 하기 위하여 먼저 자신을 돌아보아 모든 일에 절제하고 정결케 하여야 함을 교훈해 준다. 성결하신 하나님께서는 몸과 마음이 깨끗한 자를 택하여 자신의 일을 위하여 쓰시기 때문이다.




    __________________ 레위기 9장 / 축복(23절)

    03-18-2023(토) 사순절 제22일

    모세아론이 회막에 들어갔다가 나와서 백성에게 축복하매 여호와의 영광이 온 백성에게 나타나며.
    Moses and Aaron then went into the Tent of Meeting. When they came out, they blessed the people; and the glory of the LORD appeared to all the people.

    22. 아론이 백성을 향하여 을 들어 축복함으로 속죄제와 번제와 화목제를 필하고 내려오니라.
    23. 모세아론이 회막에 들어갔다가 나와서 백성에게 축복하매 여호와의 영광이 온 백성에게 나타나며.

    * 축복(祝福) 1288. 바라크(bârak) בָּרַךְ 

    1. 무릎을 꿇다,  2. 하나님께 기원하다,  3. 피엘형 בֵּרֵךְ
    발음 / 바라크(bârak)
    관련 성경 / 문안하다(삼상 13:10), 무릎을 꿇다(대하 6:13, 시 95:6), 찬송하다(창 9:26, 왕상 1:48, 시 113:2), 복을 받다(창 24:31, 삼하2:5, 시 72:17), 축복하다(창 27:33, 민 23:11, 왕상 8: 66), 칭찬하다(삼상 25:33), 복이 있다(삼상 25:33, 룻 2:19, 20), 찬양하다(삼하18:28, 왕상 5:7, 시 106:48), 송축하다(왕상 8:15, 스 7: 27), 복되다(출 20:11, 잠 5:18), 복을 주다(사 19:25, 출 20:24, 신 15:6), 복을 얻다(창 12:3, 시 128:4), 복을 내리다(출 23:25, 신 28:8), 은혜를 베풀다(신 7:13), 저주하다(왕상 21:10, 13), 욕되게 하다(욥 1:5), 복을 빌다(욥 31:20), 자랑하다(시 10:3), 욕하다(욥 2:9), 풍부히 주다(신 14:24), 축사하다(삼상 9:13), 인사하다(왕하 4:29), 축하하다(시 49:18), 꿇리다(창 24:11), [명] 찬송(신 33:20, 시 135:21, 욥 1:21), 복된자(사 65:23), 축복(민 23:20), 복(대상 4:10), 안부(왕하 10:15)
    구약 성경 / 256회 사용




    레위기 1장부터 7장은 다섯 가지 제사에 관한 말씀입니다.
    레위기 8장부터 10장은 제사를 집례하는 제사장에 관한 말씀으로 8장에서는 제사장의 위임식, 9장에서는 제사장이 집례하는 첫번째 제사에 대하여, 10장에서는 제사장이 제사를 잘못 집례했을 때에 관한 말씀입니다.

    아론의 첫 번째의 직무 수행[레 9장]
     

    1-6 아론과 그 아들들의 임직식의 헌물에 대한 모세의 명령
    7-14 아론이 자기를 위해 속죄제와 번제를 드리다.
    15-21 다음으로 백성을 위해 속죄제, 번제, 소제, 화목제(수은제, 감사제)를 드리다.
    22-24 제사장이 백성을 축복하매 하늘에서 불이 임하여 번제를 사르다.


    [내용개요]
    본장에서는 칠 일 간의 위임식을 끝낸 아론과 그 아들들이 제사장으로 취임하는 모습을 기록하고 있다. 모세가 제사를 지낸 위임식과 달리 취임식부터는 아론이 직접 제사를 드리기 시작한다. 모세는 아론에게 제사장의 직무를 시작하도록 명하였다(1-7절). 이에 아론은 자신을 위하여 속죄제와 번제를 드리고(8-14절), 백성들을 위하여 속죄제와 화목제를 드렸다(15-21절). 이때 하나님께서 불로 단 위의 제물과 기름을 사르셔서 취임을 인정하는 증표를 주셨다(22-24절).


    [강  해]
    본장은 레8장에 소개된 제사장 임직에 대한 계속입니다. 7일 동안의 위임식을 마친 제사장은 자신과 이스라엘 백성들을 위하여 속죄제를 드렸습니다. 이는 제사장이 위임된 후 하나님께 드린 첫 제사로서 제사장들을 위한 제사, 온 회중을 위한 제사, 모세와 아론의 축복과 불로 나타난 여호와의 영광 등으로 이루어졌습니다. 그중에서도 아론이 드린 첫 제사는 아론이 신적 권위를 갖고서 이스라엘과 하나님 사이의 중재자로 출발하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신학주제]

    취임식 제사. 아론은 제사장으로 선택된 후 칠 일 간의 위임식 행사를 통해 속죄제를 드리고 스스로를 정결케 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본장에서는 취임식 행사로 아론에게 다시 속죄제를 드리도록 요구하고 있다. 이는 몇 가지 측면에서 구속사적 의미를 보여 준다. 첫째는 끊임없이 요구되는 속죄 제사를 통해 인간의 철저한 부패와 죄성을 보여 주고 있다. 즉 인간은 나면서부터 죽을 때까지 언제나 지중에 존재하므로 오직 하나님 외에는 소망이 없음을 말해 주는 것이다. 둘째는 끊임없이 드려야 하는 속죄제는 구원에 있어 인간의 노력이 얼마나 불완전한지를 보여 줌으로써 완전한 대제사장인 그리스도에 대한 소망을 나타내고 있다. 예수님의 대속은 자신을 단번에 드림으로 모든 구원을 이루시고 짐승의 희생 제사를 온전히 이루신 것이다. 한편 아론이 백성들을 위하여 속죄제를 드린 것은 영원한 대제사장이신 예수께서 구원 사역의 유일한 중보자이심을 예표하고 있다.


    [영적교훈]
    칠 일 간의 위임식 행사를 통해 끊임없이 자진을 정결케 한 아론은 취임식을 맞아 다시금 속죄제를 드려야 했다. 인간은 연약하고 죄의 본성을 가지고 있으므로 하나님 앞에서 언제나 죄인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하나님 앞에서 스스로 자랑할 수 있는 자는 아무도 없음을 교훈해 준다. 따라서 성도들은 매일의 삶 속에서 자신의 죄를 돌아보아 회개하여야 하며, 하나님 앞에 겸손히 엎드려 오직 그의 구원과 은혜만을 바라보는 자가 되어야 할 것이다.


    1) 아론에게 헌제를 지시하는 모세(1-2)
    모세는 제사장들의 위임식 후 팔 일째 되는 날에 아론과 그 아들들과 이스라엘 장로들을 불러모으고 아론으로 하여금 대제사장으로서 첫 제사를 드리라고 하였습니다. 이는 대제사장인 아론도 하나님 앞에서 항상 자신의 죄를 사함받아야 하는 죄인이기 때문입니다(1-2). 

    2) 제사의 순서(3-6)
    아론이 자기와 백성을 위하여 드리는 제사의 순서로 첫 번째로 드리는 속죄제는 하나님과 백성 사이의 있는 죄를 용서받는 것을 의미합니다. 두번째로 드리는 번제는 속죄받은 자로서의 온전한 헌신을 나타냅니다. 마지막으로 드리는 화목제는 하나님과 백성의 진정한 교제와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축복에 감사하는 것을 의미합니다(3-4)

    모세가 아론에게 명령한 것은 모두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하였습니다(5-6).

    3) 아론 자신을 위한 속죄제와 번제(7-14)
    위임식이 끝난 아론은 대제사장으로서의 백성의 죄를 위한 속죄제를 드리기 전에 자신을 위한 속죄제를 먼저 드렸습니다(7-11). 그 이유는 죄의 문제가 해결된 후에야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감사와 하나님에 대한 전적인 헌신의 고백이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자신을 위해 속죄제를 드린 아론과 그 아들들은 번제를 드렸습니다. 번제의 향기를 하나님께서 향기로운 제사라고 하셨듯이, 번제는 속죄함을 받은 하나님 백성의 헌신과 성결과 충성스러운 삶을 상징합니다(12-14). 

    구약 시대의 제사장들도 회개해야 할 죄인이기 때문에 완전하고도 영원한 그리스도의 중보가 필요한 것입니다.

    4) 백성을 위한 제사 (15-21)
    아론은 자신을 위해 속죄제와 번제를 드리고 난 후 백성을 위해 속죄제와 번제와 소제, 그리고 화목제를 드렸습니다(15-21).

    5) 손을 들어 축복함(22) 
    아론은 하나님과 백성 간의 중보자로서 그 모든 제사가 하나님께 기쁘게 열납되었다는 의미에서 백성을 향해 손을 들어 축복하였습니다. 축복을 선포하는 자는 제사장이지만 축복을 주시는 분은 오직 하나님이십니다(22).

    6) 하나님의 영광(23-24) 
    아론은 대제사장으로서 첫 직무를 끝마치고 모세와 함께 회막에 들어갔습니다. 그리고 얼마 후에 모세와 아론은 회막에서 나와 백성에게 축복하였습니다. 그때 여호와의 영광이 온 백성에게 나타났습니다. 이것은 제사장으로 위임된 아론의 첫 직무를 기쁘게 받으셨다는 것을 의미했고, 그의 축복 행위에 대한 응답이었습니다. 그리고 불이 여호와 앞에서 나와 단 위의 번제물과 기름을 모두 태웠습니다(23-24). 
     
    주께서 주신 오늘! 하나님의 말씀대로 지시한 모세 그리고 순종한 아론의 순종을 통해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났던 것 처럼 나의 생각을 버리고 하나님의 말씀에 온전히 순종하는 삶을 살아가길 원합니다.  

    아론과 그의 아들들이 제사장 취임식을 하고 8일이 지났습니다(1절). 모세가 이들을 불러 예배를 시작하게 합니다. 위임식 이후 8장 35절에서 ‘ 칠 주야를 회막 문에 머물면서 여호와께서 지키라고 하신 것을 지키라 그리하면 사망을 면하리라 내가 이같이 명령을 받았느니라 ’ 고 했던 모세의 명령을 온전히 지켜 회막 문 밖으로 나가지 않던 7일이 지나 첫 번째 행보를 시작합니다. 제사장이라는 신과 인간의 중재자로서 그들은 먼저 하나님과 완전한 만남을 마친 후, 사람에게 나아갔음을 교훈 삼아야 합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부르십니다. 그분이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 우리를 회복시키시고 새로운 직분을 임명하셨습니다. 베드로전서 2장 9절은 ‘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 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려 하심이라 ’ 고 선언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스스로가 그렇게 잘나지 못하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모세보다 나은 분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가 아닌 척 위선을 뒤집어쓰지도 말고, 그대로 포기해 버리지도 말라고 하십니다. 먼저 우리가 하나님과 만나는 것을 최우선적으로 하기 원하십니다.

       모세가 아론에게 속죄제와 번제를 드려야 한다고 한 것은 예수님이 우리에게 바라는 예배이기도 합니다. 아론은 자신이 하나님과 이스라엘 간의 다리 역할을 하는 제사장으로 위임받았음에도, 여전히 모세의 말을 따라 자신을 위한 예배를 준비합니다. 우리도 택하신 족속, 왕 같은 제사장, 거룩한 나라, 소유된 백성이라는 거창한 명칭에 취하지 말고 예수님 말씀을 따라 바른 예배를 드려야 할 책임이 있습니다.

       아론은 먼저 속죄제를 드립니다. 8장의 임직식에서 이미 속죄제와 번제를 드렸음에도 재차 드려야만 했습니다. 그토록 중요한 고백이었습니다. 8절부터 11절입니다. 제사장의 속죄제는 일반적인 속죄제가 간, 기름, 콩팥만 번제단 위에 얹어서 태웠던 것과 달랐습니다. 기름, 콩팥, 간을 번제단 위에서 태울 뿐 아니라 나머지 고기와 가죽도 이스라엘 진영 밖 재를 버리는 곳에서 다 태웠습니다. 나아가 제물의 피를 손가락에 찍어서 제단 네 뿔에 바르고 제단 밑에 쏟아 버렸습니다. 이것은 이스라엘의 제사장들이 ‘ 세상을 바꾸고 신과 마주하게 돕겠다 ’ 는 명분을 들어 사람들에게 지시를 내리는 자가 아니라, 스스로를 가장 먼저 죄 사함이 필요한 존재로 여겨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속죄제의 제물이 흠 없는 수송아지였다는 것은 아론이 하나님과의 독대 이후 처음 드린 예배에서 출애굽기 32장에 있던 사건, 하나님 계명을 받으러 간 모세를 기다리지 못하고 백성에게서 모은 황금으로 송아지를 만들었던 것, 을 떠올려야 했다는 것입니다. 그는 자신이 하나님 은혜 없이는 이 자리에 설 수 없는 ‘ 만성적 우상 제작자 ’ 임을 잊지 말아야 했습니다. 제물의 피로 제단 네 뿔에 찍고 밑에 쏟아 대속물의 흔적이 예배에 선명히 드러나야 했습니다. 속죄제를 드리고 나서, 아론은 번제를 시작합니다. 12절부터 14절입니다. 숫양 머리나 각을 뜬 사지를 태운 후 그 위에 내장과 정강이를 씻어서 태웠습니다. 속죄제를 드림으로 죄를 용서받았을 뿐 아니라, 번제를 통해 자기 인생을 헌신하겠다고 다짐한 것입니다.

       이렇게 은혜에 대한 감사 고백으로서의 속죄제와 헌신을 소망하고 결단하는 번제를 마친 아론은 백성을 위한 제사를 시작합니다. 15절부터 22절은 이 제사들을 통해 백성을 위한 염소를 가져다가 속죄제를 통해 죄 용서를 선언하고, 번제를 통해 하나님께 헌신하기로 고백하고 결단하며, 소제를 통해 이것이 매일의 순종과 헌신으로 증명되어야 함을, 화목제를 통해 그 결과로 받기 원하는 것은 오직 하나님과 참된 교제의 기쁨임을 전했다고 합니다.

       기억해야 할 것은 이 예배는 온 백성의 철저한 준비와 긴장감 속에 이루어졌다는 것입니다. 모세는 백성에게 제물을 준비하게 합니다. 이 제사는 한 사람만의 노력으로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백성들은 숫염소를 가져와 속죄제를, 흠 없는 송아지와 어린양을 가져와 번제를, 수소와 숫양을 가져와 화목제를, 기름 섞은 소제물을 가져와 소제를 드렸습니다(3-4절). 아론과 자녀들이 임직식을 마치고 회막 문에서 하나님과 독대하던 때는, 백성들도 거룩한 두려움과 떨림으로 기다려야 했습니다. 23절에서도 모세와 아론이 회막에 들어갔다가 나올 때까지 이스라엘 백성들은 기다려야 했습니다. 그 기다림이 지나야 하나님 영광의 임재 구름을 영접합니다. 모든 과정에서 불순한 부분이 하나라도 있었다면 결코 예배를 완수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이를 기억하며 우리가 주일에 예배를 드리기 위해 어떤 준비를 하는지, 하루를 거룩한 두려움과 떨림으로 조심하는지, 그리하여 주일을 제외한 월요일부터 토요일까지의 여섯 날이 삶의 예배로 드려지고 있는지 점검해야 합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께서 명령하셨던 예배의 명령들을 하나씩 실천합니다.

       예배는 약속으로 시작해 축복으로 맺습니다. 4절은 여호와의 영광이 ‘ 오늘 ’ 나타날 것이라 예언하고 6절은 여호와의 영광이 ‘ 너희에게 ’ 나타날 것이라고 약속합니다. 그리고 그것이 16-17절에서 이루어집니다. 이루어진 약속은 확실한 축복을 전합니다. 아론이 이스라엘 백성을 축복한 내용은 민수기 6장 24-26절에 있습니다. ‘ 24 여호와는 네게 복을 주시고 너를 지키시기를 원하며 25 여호와는 그의 얼굴을 네게 비추사 은혜 베푸시기를 원하며 26 여호와는 그 얼굴을 네게로 향하여 드사 평강 주시기를 원하노라 할지니라 하라 ’ 오늘도 예배를 준비하고, 예배자로 살아가는 모두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분명한 축복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복을 주시고 지켜주시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얼굴을 우리에게 비추사 은혜 베푸시기를 확실히 원하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그 얼굴을 우리에게 향하여 드사 평강 주시기를 원하십니다. 복과 안전, 은혜와 평강은 예배를 통해서만 경험할 수 있음을 감사해야 합니다.

       24절에는 하나님의 불이 하늘에서 떨어져 제물을 태우는 것을 온 백성이 보고 소리 지르며 엎드렸습니다. 하나님의 임재는 막연하지 않았습니다. 예배를 드린 날, 영광이 불로 제단 위 번제물과 기름을 태웠습니다. 골고다 언덕에서 피를 쏟아 자신을 제물 삼으셨던 예수님을 닮기 위해 스스로를 제단 위에 두는 모든 이에게 주시는 약속입니다. 하나님의 거룩한 불이 반드시 임하시고, 제단 위에 올려둔 인생을 성령의 불길로 태우심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온 백성이 찬송 부르며 주님께 굴복할 것입니다.

       히브리서 12장 28-29절입니다. ‘ 28 그러므로 우리가 흔들리지 않는 나라를 받았은즉 은혜를 받자 이로 말미암아 경건함과 두려움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섬길지니 29 우리 하나님은 소멸하는 불이심이라 ’



    __________________ 레위기 8장 / 위임식(22절)

    03-17-2023(금) 사순절 제21일

    또 다른 수양 곧 위임식의 수양을 드릴쌔 아론과 그 아들들이 그 수양의 머리에 안수하매.
    He then presented the other ram, the ram for the ordination, and Aaron and his sons laid their hands on its head.

    위임식(委任式) 4394

    또 다른 수양 곧 위임식의 수양
    제사장 위임식을 위해 준비한 두 마리의 수양 중(2절) 이미 한 마리는 번제로 드렸고(18절)
    이제 이것은 위임식용 화목제 제물로 드릴 나머지 한마리를 가리킨다.
    따라서 이 수양을 '위임식의 수양' 혹은 '위임제의 수양' 이라고 불렀다.
    한편, 위임식 제사 곧 위임제(委任祭)에 대해서는 7:37 주석을 참조하라.

    4394.  מִלֻּא 

    1. 완성,  2. 박음.  3. 봉헌
    발음 / 밀루(millûʼ)
    어원 /  4390에서 유래
    관련 성경 / [동] 물리다(출 25:7, 35:9), 가공하다(대상 29:2). [명] 위임식(출 29:22, 레 8:22, 33, 레 7:37).
    구약 성경 / 5회 사용

    * 4390.  מָלֵא 

    1. 타동사 채우다,  2. 창세기 1:22,  3. 출애굽기 16:32
    발음 / 마래(mâlêʼ)

    위임제

    이 제사는 1-7장 사이에는 나타나지 않았지만, 이미 출 29:19-30에서 계시받았기 때문에 여기에 함께 기록되었다.
    한편, 위임제(委任祭, the Consecrations)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밀루임'은 '채우다'(fill), '봉헌하다'(consecrate)란 뜻의 '말라'에서 파생된 말이다.
    따라서 위임제란 여호와의 제단 위에 제사 예물을 드리도록 손에 무엇인가를 채워주는 의식을 가리킨다(출 29:29; 대상 29:5; 대하 29:31).
    즉 위임제란 하나님께 제물을 드릴 수 있는 자로 제사장을 성별하는 의식을 가리킨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아론과 그의 아들들이 여호와의 거룩한 제사장으로 성별되기 위하여 제물을 손에 채워 여호와께 드리는 특수한 제사를 의미한다(Keil).
    이런 의미에서 위임제는 번제, 소제, 속죄제, 속건제, 화목제 등과는 달리 제사의 한 종류가 아니라, 이러한 기존의 여러 제사 방법을 통하여 '성직(聖職) 임명'이라는 특수한 목적을 이루는 특별 제사이다.
    한편 제사장 위임식에 대한 보다 자세한 규례는 출애굽기 29:19-28의 주해를 참조하라.


    제사장 위임식의 일곱 가지 절차(레위기 8:1-36)

    아론(모세의 형)과 그 아들들(나답, 아비후, 엘르아살, 이다말)의 제사장 위임식을 말씀하셨는데 이 위임식에는 일곱 단계의 절차가 있었습니다.

    1. 온 회중을 회막앞에 모음(1-5절)
    2. 제사장을 물로 씻김(6절)
    3. 예복을 입힘(7-9절)
    4. 기름을 부음(10-12절)
    5. 제사를 드림
     속죄제(14-17절)
     번제(18-21절)
     위임제(22-29절)
    6. 하나님과 교제의 음식을 먹음(31-32절)
    7. 칠일동안 성막 안에 머무름(33-36절)
    ※제사장과 교회: 예수님은 더 뛰어나신 제사장입니다.(히4:14-19:14) 따라서 이스라엘이 제사장 나라였듯이(출19:6) 그리스도의 지체인 신약교회도 제사장 나라입니다.(벧전2:5,9, 계1:6절) 구약시대에 제사장들이 특별히 구별된 예복을(레8:7-9) 입었듯이 신약시대의 그리스도인들도 믿음과 사랑과 소망으로 옷 입으며(살전5:8) 친절과 겸손과 인내로 옷 입어야 합니다.(골3:12) 특히 제사장 위임제에서 17절에 보면 가죽을 불살랐다고 했는데 가죽은 언제나 제사장 몫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임명될 때 드리는 제사는 제사장을 위하는 것이기 때문에 이 부분을 불태웠습니다. 아들들을 위하여 드리는 번제, 위임제(8:18-21)에서는 두 마리의 숫양이 필요했는데(8:2) 그 가운데 한 마리는 번제물로(인간의 죄에 대한 속죄 물로), 한 마리는 위임 제물로 바쳤습니다. 이때 숫양의 피를 제사장의 귀와 손과 발에 발랐는데(23-24) 이는 거룩한 성별과 온전한 헌신을 상징한 것입니다. 첫 번째 제사장의 위임식은 모세가 집례 하였고 7일 동안 거행했습니다. 7일이 지난 후에야 비로소 제사장으로 구별되었는데 신약의 성도들도 하나님께 예배드린 후에는 세상과 구별되어야 합니다. 바울도 사도로 부름을 받고서 자신이 거룩하게 구별되었다고 했습니다.(롬1:1절)

    오른 귓부리... 오른손 엄지... 오른발 엄지 -

    화목 제물로 잡은 수양의 피를 제사장의 이러한 신체 부위에 바르는 것은 곧 하나님께 대한 제사장의 전적 순종과 헌신을 상징적으로 나타내 보여 주는 것이다. 왜냐하면 사람이 손과 발의 엄지 가락을 잃으면 그는 힘을 쓸 수 없는 사람이 되기 때문이다(삿 1:6). 따라서 손과 발, 특히 그중에서도 오른손과 오른발의 엄지는 힘을 나타내며 여기에 피를 바른 것은 이것으로 열심히 봉사해야 하는 것을 상징한다고 볼 수 있다. 반면에 귀는 대체적으로 '예속'을 의미하는 신체 부위이다. 그러므로 고대 근동에서는 어떤 사람의 귀에 구멍을 뚫으면 그는 일평생 상전에게 소속된 사람으로서 충성을 다할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이해하였었다(21:6). 그러나 여기서 제사장의 귓부리에 화목제물의 피를 바른 것은 그가 하나님의 말씀을 주의깊게 듣고서 그 말씀대로 철저히 순종하는 것을 나타내는 상징적 행위로 이해함이 보다 타당하다(Wycliffe).

    단 위의 피와 관유를... 옷에 뿌리라 -

    수양의 피 중 단 위에 뿌리고 남은 피를 또다시 거룩한 목적에 쓰이는 관유(7절)와 섞어 제사장의 옷에 뿌렸다. 이처럼 피 섞은 기름을 제사장들의 옷에 뿌린 것은 피에 의해 그 옷을 입는 제사장의 죄가 가리워지며, 기름에 의해 거룩히 구별되는 것을 나타내기 위함이다.


    레위기 7:37
    이는 번제와, 소제와, 속죄제와, 속건제와, 위임제와, 화목제의 규례라

    레위기 8:28
    모세가 그것을 그들의 손에서 취하여 단 윗 번제물 위에 불사르니 이는 향기로운 냄새를 위하여 드리는 위임식 제사로 여호와께 드리는 화제라

    레위기 8:31
    아론과 그 아들들에게 이르되 내게 이미 명하시기를 아론과 그 아들들은 먹으라 하셨은즉 너희는 회막 문에서 그 고기를 삶아 위임식 광주리 안의 떡과 아울러 그곳에서 먹고

    레위기 8:33
    위임식은 칠일 동안 행하나니 위임식이 마치는 날까지 칠일 동안은 회막 문에 나가지 말라


    제사장 안수식의 일곱 가지 절차

    제사장이 안수를 받는 과정은 레위기 8장에 일곱 가지 절차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레위기 8장에서 가장 많이 반복되어 나오는 말씀이 있는데,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하심과 같았더라”는 구절입니다.
    이 구절이 매 단계마다 기록되어 있는데, 총 7번 기록되어 있습니다.

    첫 번째 단계는 안수식 준비 단계

    레위기 8장 1~4절에 기록되어 있는데, 안수식 준비를 위해서는 총 세 가지를 갖춰야 합니다.

    첫째는 안수 받을 대상자입니다. 아론과 그의 아들들입니다.
    둘째는 준비물입니다.
    제사장에게 입힐 의복, 제사장에게 부을 관유라는 기름, 속죄제를 드릴 수송아지, 번제와 화목제를 드릴 숫양 두 마리, 그리고 제사장이 먹고 하나님께 일부는 태워 드릴 무교병 떡 한 광주리입니다.
    셋째는 이스라엘 온 회중을 불러 회막 문 안에 모이게 하는 일입니다.

    8장 3절에 “온 회중을 회막문에 모으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인구가 300만명이 넘는데 어떻게 다 모일 수 있겠습니까?
    회중 가운데 지도자들이 모이는 것입니다.
    이것은 제사장의 안수식이 은밀하게 진행되는 것이 아니라 공개적으로 진행되는 일이라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두 번째 단계는 씻음과 입힘의 단계

    레위기 8장 5~9절에 따르면 모세는 물두멍의 물로 아론과 그의 아들들을 씻깁니다.
    그리고 아론에게 속옷을 입힌 후 겉옷을 입힙니다.
    그런데 물로 씻길 때 이스라엘의 온 회중이 보고 있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벌거벗긴 채로 씻겼겠습니까?
    그렇지는 않습니다.
    왜냐하면 제사장의 의복가운데는 속옷 안에 입는 ‘고의’(속바지)가 있는데, 이것을 입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씻긴 후 입힌 속옷은 흰색 원피스입니다.
    일반 제사장은 이 흰색 속옷을 입고 띠를 띠고 직무를 수행하면 됩니다.
    그러나 대제사장은 흰색 속옷을 입고, 그 위에 청색 겉옷을 입습니다.
    그리고 에봇을 걸치고, 열 두 개의 보석이 박힌 판결 흉패를 가슴에 붙입니다.
    이 흉패에는 주머니가 있어서 우림과 둠밈을 보관합니다.
    제사장이 하나님의 뜻을 물어볼 때 쓰는 도구입니다.
    그리고 머리에 관을 씁니다.
    관에는 ‘여호와께 성결’이라고 새겨진 금띠가 둘려 있습니다.

    대제사장 의복의 특징은 ‘영광스럽고 아름답다’(Glory and Beauty)는 것입니다.
    대제사장은 백성들 앞에 하나님을 대표하고, 하나님 앞에 백성들을 대표하는 중보자이기 때문에 영광스럽고 아름다운 의복을 입어야 하는 것입니다.
    대제사장이 의복을 제대로 갖춰 입는 것은 매우 중요한 것입니다.
    성막 안에서 아무 것이나 입고 일하면 안 되는 것입니다.

    세 번째 단계는 관유라는 기름을 붓는 단계

    모세는 관유를 취해 성막에 바르고, 번제단 뿔에 일곱 번 뿌리고, 번제단, 물두멍 등 성막의 모든 기구에 바르고 아론의 머리에도 기름을 붓습니다.
    그러면 아론과 그의 아들들, 성막의 모든 기구가 거룩해지는 것입니다.
    거룩하게 되었다는 것은 하나님을 위한 것 외에 다른 목적으로 사용할 수 없다는 의미입니다.

    바벨론의 마지막 왕 벨사살은 여호와의 성전에서 가져온 기름 바른 기명들을 사용해서 술을 마시다 그 날 밤 죽고 말았습니다.
    모세가 아론의 머리에 기름을 붓는 장면이 시편 133편 2절에 이렇게 묘사되어 있습니다. “머리에 있는 보배로운 기름이 수염 곧 아론의 수염에 흘러서 그 옷깃까지 내림 같고.” 관유를 부으면 수염을 적시고, 옷을 적시는데, 그 모습이 매우 아름다웠던 것입니다. 관유는 향내가 매우 깊습니다.

    네 번째 단계는 속죄제를 드리는 단계

    레위기 8장 14~17절까지로, 수송아지 한 마리로 속죄제를 드리는 단계입니다.

    속죄제는 여호와의 금령을 모르고 범한 죄를 속하기 위한 제사입니다.
    흠 없는 수송아지 머리에 안수하고 모세가 죽입니다.
    그리고 그 피를 번제단 뿔에 바르고 남은 것은 번제단 밑에 쏟고 내장 기름은 다 태운 후 나머지는 진 밖으로 가지고 나가 불태우는 것입니다.
    그러면 부지중에 여호와의 금령을 범한 죄들을 용서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일반적인 제사장의 속죄제인 경우, 분향단의 뿔에도 피를 바르고 분향단 밑에도 일곱 번 뿌리는 절차가 필요한데, 제사장 안수식에서의 속죄제는 이런 과정이 생략되어 있습니다.
    번제단을 중심으로만 이루어진 것입니다.
    그것은 온 회중이 밖에서 다 지켜보는 가운데 행해졌기 때문입니다.
    공개적으로 진행되는 것이 이토록 중요한 것이었습니다.

    다섯 번째는 번제를 드리는 단계

    숫양 한 마리로 번제를 드리는 단계입니다.
    번제는 알고 지은 죄를 용서받기 위한 제사입니다.
    부지중에 지은 죄는 속죄제, 알고 지은 죄는 번제를 통해 용서받는데, 이는 모든 종류의 죄를 다 속한다는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여섯 번째는 화목제를 드리는 단계

    숫양 한 마리로 화목제를 드리는 단계입니다.
    레위기 8장 22~29절에 기록되어 있는데, 화목제의 특징은 고기를 드리는 사람이 먹을 수 있다는 점입니다.
    그런데 일반적인 화목제와는 차이가 있습니다.
    안수식의 화목제는 ‘위임제’(Offering of Consecration)라고 합니다.
    그러면 왜 ‘위임’을 의미하는 단어(Dedication이나 Delegation)를 사용하지 않고, ‘성별’이라는 의미의 단어(Consecration)를 사용했을까요?
    그것은 모세가 자기 권한을 아론에게 분여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는 하나님이 아론을 구별하여 택하시고 세우시는 것이기 때문에 ‘성별’(Consecration)을 사용한 것입니다.

    화목제를 드리기 위해서는 아론과 그의 아들들이 숫양 머리에 안수하고 모세가 잡습니다.
    그리고 모세는 그 피를 세 군데 바릅니다.
    아론과 그의 아들들의 오른쪽 귓부리와 오른손 엄지, 오른발 엄지에 바릅니다.
    이는 제사장들이 바른 말을 듣고, 옳은 일을 행하고, 좋은 곳에만 가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성도들은 바른 소리를 듣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아무리 착한 사람도 “이 사람 나쁜 사람이다!”라는 말을 몇 번만 듣게 되면 그 사람이 나쁜 사람으로 보이게 되어 있습니다.
    나쁜 말을 들으면 선입견이 생기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귓부리에 피를 발라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손으로 도적질과 같은 나쁜 일을 하지 말고 선한 일을 행해야 합니다.
    또 발로 좋은 곳을 향해 가야 합니다.
    그리고 남은 피는 모두 제단 주위에 뿌립니다.

    그리고 나서 세 가지를 태웁니다.
    내장 기름과 광주리의 무교병 떡 세 개와 우편 뒷다리를 태웁니다.
    원래 일반적인 화목제에서 제사장은 두 가지 고기를 먹을 수 있도록 되어 있었습니다.
    가슴 고기와 우편 뒷다리 고기입니다.
    그런데 위임제에서는 가슴 고기만 먹고 우편 뒷다리는 하나님께 태워드립니다.
    이것은 제사장이 먹는 몫도 하나님이 주신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여러분이 먹고 사는 것은 모두 하나님이 주신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내가 노력해서 벌었지! 하나님이 해 준 것이 무엇이냐?”고 말합니다.
    그런데 병이 들어 아파서 입원하면 내가 노력해서 번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금방 알게 됩니다.
    하나님이 복을 주셔야 먹고 살 수 있는 것입니다.

    일곱 번째는 무교병을 먹는 단계

    레위기 8장 30~31절에 기록되어 있는데, 가슴 고기를 먹고 광주리에 남은 무교병을 먹는 단계입니다.
    그런데 그냥 먹는 것이 아니라 모세가 관유와 피를 섞어 제사장의 옷에 뿌린 후 먹게 합니다.
    온전한 거룩을 추구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음식을 먹는다는 것은 하나님과 교제가 이루어지게 되었다는 의미입니다.

    아론과 그의 아들들은 7일 동안 회막 문 안에 거하며 위임식의 절차를 반복적으로 행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일은 졸속으로나 은밀하게 진행되는 것이 아니라 공개적이고 또한 신중하게 진행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제사장 안수식의 세 가지 영적 의미

    제사장의 안수식 일곱 가지 절차를 통해 하나님이 우리에게 하시는 말씀은 세 가지입니다.

    첫째, 하나님은 절대적으로 거룩한 분

    인간은 제멋대로 하나님께 나아갈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 막말을 하고 건방진 자세로 나아갈 수 없는 것입니다. 죄를 가지고 접근할 수 없습니다. 모세와 아론과 같은 사람들이 기름을 바르고 피를 바르고 제사를 통해 하나님께 나아갔던 것처럼 우리도 하나님께 나아갈 때는 진실함과 거룩함으로 접근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대통령을 접견할 때도 무턱대고 나아가지 않습니다. 그에 합당한 예의를 갖추는 것입니다. 인간인 대통령에게도 예절을 갖춰야 한다면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막말을 하고 제멋대로 행동할 수 있겠습니까? 그럴 수 없는 것입니다. 레위기 10장에 아론의 두 아들이 현장에서 즉사한 이유는 자기 멋대로 하나님께 접근하려 했기 때문이었습니다.

    둘째, 인간은 어느 누구도 자기 스스로의 능력으로 하나님께 나아갈 수 없다는 것

    자기 힘으로 접근하려고 하면 현장 즉사입니다. 그래서 거룩하신 하나님께 나아가려면 중보자가 필요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셋째, 죄로 오염된 인간이 하나님과 교제를 이루기 위해서는 구별된 대제사장의 희생제사가 필요하다는 것

    구약 시대에 거룩하신 하나님과 죄인 사이에 중보를 하는 사람이 대제사장 아론이었습니다.
    그러나 아론은 예표이고, 실체는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거룩하신 하나님과 죄인 된 인간 사이를 중보해서 하나님께 나아가 교제할 수 있도록 하시는 분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 한 분 뿐이십니다.

    공자, 석가모니, 모하메드가 아무리 훌륭하고 탁월한 종교인이었다 해도 그들은 중보자가 될 수 없습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하나님이 계신 천국에 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고,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 분과 교제하며 살게 되는 우리 모두가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출애굽기 29장 제사장의 위임식(Ordination)

    위임식은 특별한 의식을 통해서 제사장이 다른 사람들과 구별되게 함으로써 새로운 거룩한 영역에 들어가게 한다.
    그들은 사람들을 대표하여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는 거룩한 일을 하기위해 남들과 구분된 삶을 살아야 한다.
    그들은 자신이 해야 할 일이 무엇이며 그 일이 얼마나 소중한 일인지 또 어떻게 그 일을 수행해야 하는지를 알아야 한다.
    위임식은 손을 채우다(Fill his hands), 지원하다(Support)라는 뜻이 있다.
    제사장으로 위임한다는 말은 그의 손을 채운다는 뜻이다.
    그에게 권위와 능력을 부여함으로써 기능을 채우게 한다.
    모세는 그들에게 안수하여 능력을 부여하였다.
    위임식은 제사장을 회막 문으로 데려다가 옷을 입히는 것으로 시작되며 7일간 진행된다.

    위임식은 4단계로 나누어 지는데
    첫째 단계에서는 아론과 그의 아들들이 의복을 입고(29:4-9)
    둘째 단계에서는 수송아지를 속죄제물로 바치며(29:10-14)
    세째 단계에서는 수양을 번제로 바치고(29:15-18)
    네째 단계에서는 다른 수양하나를 위임식을 위한 희생의 제물로 바친 후 그 희생의 고기를 하나님 앞에서 먹는다(29:19-41).

    3차례의 제사를 살펴보면 먼저 속죄 제물(Sin Offering)로 제단(Altar)을 정화시켜 제단이 가장 거룩한 곳이 되게 한다.
    이 곳에 수송아지의 피를 단의 네 귀퉁이 뿔에 바르고 제단의 밑에 피를 쏟음으로써 제단을 정결케하는 의식을 마친다.

    두번째는 번제(Burnt Offering)로 아론과 그 아들들의 죄를 속죄하기 위해 수양 전체를 하나님께 향기로운 냄새로 바쳐 하나님의 은혜와 자비를 구한다.

    세번째는 위임식을 위한 수양을 잡아 속죄 제물 때 피를 바르는 것과는 달리 피를 제단과 제사장에게 뿌린다.
    이는 피의 의식(Blood Rite)으로 불린다(출 24:6, 8).
    이 피의 의식을 통해 제사장은 부정한 영역에서 거룩한 영역에 속한 자로 바뀐다.

    3차례의 제사는 속죄제와 번제를 거쳐 화목제를 드린 후 거룩한 음식을 먹는 순서로 발전한다.
    출애굽기 29장이 제사장의 위임식에 관한 지침을 지시한다면 레위기 8장은 이 지침을 시행하는 것을 기록한다.
    위임식은 제사장을 거룩하게 하는 의식이다.
    따라서 희생의 제물로 사용되는 동물은 흠이 없고 완전해야 한다.
    그들이 입는 의복도 거룩해야 한다.
    그들은 옷을 입기위해 회막문 앞으로 나와야 한다.
    회막의 입구는 제단과 성막 사이에 위치한다.
    제사장들은 이 곳에서 의식을 행했다.
    제사장의 위임식은 이스라엘 백성이 지켜보는 가운데 행한다.
    그들은 의복을 입기 전에 먼저 몸을 씻어야 한다.
    몸 전체를 물에 담가 씻는지 아니면 손과 발 만을 씻는지를 정확히 알 수 없지만 몸을 정결하게 한 후 아론이 옷을 입고 그의 아들들이 차례로 옷을 입는다.
    옷을 입은 후에는 모세가 그들의 머리에 기름을 붓는다. 기름을 붓는 행위는 그 사람에게 특별한 신분을 부여하는 정결의식으로 왕과 선지자들이 기름부음을 받았다.               

    출애굽기 29:20
    피를 아론의 오른쪽 귓부리와 그의 아들들의 오른쪽 귓부리에 바르고 그 오른손 엄지와 오른발 엄지에 바를 것을 명하셨다.

    레위기 14장에 기록된 문둥병 환자의 정결의식과 같다.

    귀와 손과 발에 피를 바르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여야 하고 삶에서 행위로 반응하고 삶의 방향을 올바로 정립해야 하는 것을 상징한다.

    제사장의 위임식과 문둥병 환자의 정결의식이 같은 이유는 무엇일까?
    제사장과 문둥병 환자는 어떤 관계가 있는가?

    성경은 분명 의학서적이 아니다.
    그런데 왜 성경에서는 문둥병 환자에 대해 깊은 관심을 보이며 자세히 기록하는가?

    문둥병은 가장 무서운 전염병이며 인간의 모든 신경조직을 파괴시키는 병으로 회복의 가능성이 희박한 절망의 병이다.
    문둥병에 걸린 사람은 공동체에서 분리되어 정상적인 생활을 영위하지 못한다.
    비록 살아있지만 죽은 자와 같은 어두운 삶을 살아야 한다.

    우리 모두는 죄로 인해 몸이 썩어가는 문둥병 환자이다.
    우리가 문둥병을 치유받고 정결의식을 거쳐 거룩해지지 않으면 공동체 안으로 들어갈 수 없다.
    문둥병 환자의 정결의식의 과정을 자세히 살펴보면 흥미로운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먼저 제사장이 진 밖으로 나가 문둥 환자의 상태를 파악하기 위해 진찰한다.
    그것은 예수님이 진 밖에 있는 우리를 만나기 위해 찾아 오시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정한 산 새 두마리를 잡는다.
    한마리는 죽음을 당하고 다른 한 새는 산채로 취하여 들에 놓아 날아가게 한다.
    죽은 새는 예수님의 죽음을 상징하며 산 새는 우리 믿는 자들을 상징한다.

    죽은 새의 피에 의해 살아있는 새가 정결케 되기 때문이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을 통해 생명을 얻었다.
    그러나 그 것은 끝이 아니라 시작이다.
    우리에겐 공동체 안으로 들어가기 위해 해야 할 일들이 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삶의 변화이다.
    삶의 변화가 없이는 완전히 치유된 것으로 볼 수 없다.

    우리 모두는 제사장이다.
    그러나 제사장은 그냥 자동으로 되는 것이 아니다.
    반드시 위임식이라는 정결의식을 거쳐야 한다.
    특히 피뿌림과 기름부음이 없으면 제사장이 될 수 없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죄로부터의 구원과 성령의 기름부음이 있어야 하며 삶의 변화가 필요하다.
    삶의 변화가 없이 어떻게 남들과 구분된 삶을 살며 제사장의 거룩한 직무를 수행할 수 있겠는가?
    결국 우리가 문둥병 환자라고 생각하던 아니면 제사장이라고 생각하던 우리에게 요구되는 요구사항은 같다.

    나병 환자의 정결예식(레위기 14:1~20)

    제사장의 진단(1~3절)
    제사장이 행하는 정결 의식(4~8절)
    환자가 행하는 정결의식(9절)
    정결함을 받을 자가 드리는 속건제(10~18절)
    하나님의 백성이 된 후에 드리는 속죄제와 번제와 소제(19~20절)

    레위기 13장 - 나병의 종류와 진단과 조치법 : 나병의 영적인 의미

    13장과 14장은 나병(문둥병, 한센병) 을 다루는 장입니다. 구약 성경에 기록된 나병은 피부병의 일종으로 전염성이 강하고, 사람의 피부에 발생될 뿐 아니라 의복, 그릇이나 집 안의 벽 등에 발생되는 것으로 나옵니다. 나병에 관해서 아는 바가 없어서 나병과 관련된 자료를 찾아보았습니다. 그 중에 가톨릭대학교 의과대학 한센병연구소의 채규태 교수님의 글을 비롯해서 위키백과, 서초구 보건소의 의학자료를 비롯해서 여러 가지 자료를 검색해 보았습니다. 그 중에 한센병 질환자의 사진 자료는 너무나 끔찍해서 사진을 보는 것만으로도 견디기 힘들만큼 끔찍합니다. 가톨릭의대 채규태 교수님의 글을 읽으면 구약에 기록된 나병에 대한 기록은 현대의 한센병과는 거리가 멀다는 견해를 보입니다.

    성서에는 특히 구약성서에는 나병에 관한 기록이 많다.
    위에서도 언급한 <출애굽기 4:6>의 나병에서부터 <루까 17:22>의 열명의 나환자에 이르기 까지 약 50회 정도 언급된다.
    출애굽기에 나오는 손에 문둥병이 들어 마치 흰 눈이 덮인 것 같았다 <출애굽기 4:6>는 문둥병은 오늘날 우리가 보는 나균 감염으로 발생하는 문둥병(leprosy, Hansen's disease, 한센병)과는 다른 것으로 생각되며, 탈락성 피부염의 일종으로 보인다.
    성서가 희랍어로 번역될 때, 히브리어인 zaraath, Tsraath(unholy, unclean)에 해당되는 말이 희랍어에는 leprosy 였다.
    여기에 사용한 문둥병이라는 용어는 사람 뿐 아니라 집이나 옷에 생기는 깨끗하지 못한 질환을 뜻하고 있음을 성서에서 찾아 볼 수 있다<레위기 13장, 사람에 생긴 문둥병, 옷에 생긴 문둥병 레위기 13:47-59, 집에 생긴 문둥병 14:33-57>.
    따라서 구약의 문둥병은 오늘날 우리가 진단하고 치료하는 전염병의 일종인 한센병(나병, 문둥병)과는 거리가 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오늘날 한센병을 앓고 있는 사람들에게 성서에 기록되어 있는 질병이므로 하느님의 심판을 받은 것이라고 말한다면 너무나 가혹한 처사임을 분명히 인식하여야 한다.

    가톨릭의대 한센병연구소 채규태 교수의 글 중에서

    이와 같은 의학자의 견해를 참고하며 오늘 본문의 말씀의 내용을 분해해 보겠습니다.
    글의 말미에는 나병과 관련된 영적인 의미가 무엇인가에 대해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2~23절 : 사람의 피부에 생긴 나병(심각한 피부병)
    24~28절 : 화상에 난 나병
    29~39절 : 환부에 생긴 나병, 옴, 피부 어루러기 등
    40~44절 : 대머리에 난 나병
    47~59절 : 털옷, 베옷, 가죽 옷 등에 발생한 나병

    ​새번역에서는 한글개역성경에서 문둥병으로 번역했고, 개역개정에서는 나병으로 번역한 단어를 백선, 악한 피부병 , 곰팡이 등으로 번역하였기 때문에 헷갈릴 수 있는데 채규태 교수님의 글에서도 볼 수 있듯이 현대인이 생각하는 한센병과 구약에 기록된 문둥병, 나병이 거리가 멀다는 것들을 고려해서 번역한 용어가 아닌가 생각됩니다.

    ​성경에서 수많은 질환들이 등장하지만 그 중에서 특정 질병에 대해 가장 자주 등장하고, 많은 지면을 할애해서 설명하는 질병은 나병(문둥병, 한센병)이 유일하다 생각됩니다.
    왜 이렇게 하나님은 나병에 대해서 이렇게 집중적으로 중요하게 다루시는 것일까요?
    여러 질병 가운데 가장 더럽고, 부정하고, 전염성이 강한 질환이기 때문입니다.
    마치 전염병을 일으키는 바이러스나 세균처럼 주위 사람들에게 악한 질병을 퍼트리는 역할을 하기 때문에 엄격히 격리하고 차단하라고 명하신 것입니다.

    나병(癩病, Leprosy) 또는 한센병(Hansen's disease; HD)은 미코박테리아의 일종인 나균(Mycobacterium leprae)과 나종균(Mycobacterium lepromatosis)에 의해 발생하는 만성 감염병이다.
    처음 감염되었을 때는 아무 증상이 없고, 이 잠복기는 짧으면 5년, 길면 20년 가량 지속된다.
    증상이 발현하면 신경계, 기도, 피부, 눈에 육아종이 발생한다.
    이렇게 되면 통각 능력을 상실하고, 그 결과 자신도 모르는 사이 신체 말단의 부상 또는 감염이 반복되어 썩어 문드러지거나 떨어져 나가서 해당 부위를 상실하게 된다.
    체력의 약화와 시력의 악화 또한 나타난다.

    위키백과 나병에 대한 정의

    그런 까닭에 나병에 걸린 사람은 진영 안에서 살지 못하고 초기에 제사장이 진단을 하는 기간 동안에도 엄격하게 격리해서 관찰하는 기간을 두게 하셨고, 나병으로 확진 판정을 받게 되면 진영 밖으로 내보내서 혼자 생활해야 했습니다.

    45. 악성 피부병에 걸린 사람은 입은 옷을 찢고 머리를 풀어야 한다. 또한 그는 자기 코밑 수염을 가리고 '부정하다, 부정하다' 하고 외쳐야 한다.

    46. 병에 걸려 있는 한, 부정한 상태에 머물러 있게 되므로, 그는 부정하다. 그는 진 바깥에서 혼자 따로 살아야 한다."

    구약 성경에 기록된 나병에 걸린 대표적인 사람들

    ​구약 성경은 심각한 피부질환인 나병을 영적인 문제와 연결해서 다루고 있다는 걸 발견할 수 있습니다.
    구약 성경에 등장하는 나병에 걸린 사람들은 누가 있을까요?

    1. 모세

    구약 성경에서 최초로 나병에 걸린 것으로 표현된 인물은 모세입니다.
    출애굽기 3장에서 하나님이 호렙산에서 떨기나무 불꽃으로 부르십니다.
    그 때부터 하나님은 모세를 애굽으로 보내서 바로에게 내 백성을 보내라 명하라 하시지만 모세는 끝까지 하나님의 부르심을 거역하며 따를 수 없다고 반항하는 내용이 기록된 장면에서 등장하는 구절입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에 거역한 모세에게 나병이라는 이적을 보여주신 사건입니다.

    ​출애굽기 4:6~7
    6. 여호와께서 또 그에게 이르시되 네 손을 품에 넣으라 하시매 그가 손을 품에 넣었다가 내어보니 그의 손에 나병이 생겨 눈 같이 된지라7. 이르시되 네 손을 다시 품에 넣으라 하시매 그가 다시 손을 품에 넣었다가 내어보니 그의 손이 본래의 살로 되돌아왔더라.

    2. 미리암

    하나님이 세우신 모세를 대적한 미리암에서 나병이 발병합니다.
    민수기 12장 전체가 미리암에게 하나님이 진노하사 나병이 발병하게 한 사건을 기록하고 있는 장입니다.
    그 사건의 발단은 모세가 아내 십보라가 죽은 후에 구스 여인인 흑인여자를 두번째 아내로 맞아들인 일에 대해 미리암과 아론 두 사람이 모세를 심하게 비방한 사건입니다.
    4절에 보면 하나님이 모세, 아론, 미리암 세 사람을 지명하여 부르십니다. 그런 후에 벌어진 사건입니다.

    ​민수기 12:1~13

    1. 모세가 구스 여자를 취하였더니 그 구스 여자를 취하였으므로 미리암과 아론이 모세를 비방하니라.
    2. 그들이 이르되 여호와께서 모세와만 말씀하셨느냐 우리와도 말씀하지 아니하셨느냐 하매 여호와께서 이 말을 들으셨더라.
    4. ○여호와께서 갑자기 모세와 아론과 미리암에게 이르시되 너희 세 사람은 회막으로 나아오라 하시니 그 세 사람이 나아가매.
    5. 여호와께서 구름 기둥 가운데로부터 강림하사 장막 문에 서시고 아론과 미리암을 부르시는지라 그 두 사람이 나아가매.
    6. 이르시되 내 말을 들으라 너희 중에 선지자가 있으면 나 여호와가 환상으로 나를 그에게 알리기도 하고 꿈으로 그와 말하기도 하거니와.
    7. 내 종 모세와는 그렇지 아니하니 그는 내 온 집에 충성함이라.
    8. 그와는 내가 대면하여 명백히 말하고 은밀한 말로 하지 아니하며 그는 또 여호와의 형상을 보거늘 너희가 어찌하여 내 종 모세 비방하기를 두려워하지 아니하느냐.
    9. 여호와께서 그들을 향하여 진노하시고 떠나시매.
    10. 구름이 장막 위에서 떠나갔고 미리암은 나병에 걸려 눈과 같더라 아론이 미리암을 본즉 나병에 걸렸는지라.
    11. 아론이 이에 모세에게 이르되 슬프도다 내 주여 우리가 어리석은 일을 하여 죄를 지었으나 청하건대 그 벌을 우리에게 돌리지 마소서.
    12. 그가 살이 반이나 썩어 모태로부터 죽어서 나온 자 같이 되지 않게 하소서.
    13. 모세가 여호와께 부르짖어 이르되 하나님이여 원하건대 그를 고쳐 주옵소서.


    미리암에게 나병이 발병한 원인은 하나님이 자신의 대리자로 세우신 모세를 비방하고, 모세보다 자신을 높이려한 미라임의 교만과 모세의 권위를 무시한 태도로 말미암은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아론이 미리암을 위해 기도한 구절을 보면 12절에 나병이 걸려서 중증으로 심각해지면 살이 썩어문드러지고, 형체를 알아볼 수 없는 지경까지 악화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미리암의 경우도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영적인 교만과 거역하는 태도가 직결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3. 웃시야 왕

    남유다 왕국의 왕 중에서 나병에 걸린 유일한 왕이 웃시야 왕입니다.

    역대하 26:16~19

    16. ○그가 강성하여지매 그의 마음이 교만하여​ 악을 행하여 그의 하나님 여호와께 범죄하되 곧 여호와의 성전에 들어가서 향단에 분향하려 한지라.
    17. 제사장 아사랴가 여호와의 용맹한 제사장 팔십 명을 데리고 그의 뒤를 따라 들어가서.
    18. 웃시야 왕 곁에 서서 그에게 이르되 웃시야여 여호와께 분향하는 일은 왕이 할 바가 아니요 오직 분향하기 위하여 구별함을 받은 아론의 자손 제사장들이 할 바니 성소에서 나가소서 왕이 범죄하였으니 하나님 여호와에게서 영광을 얻지 못하리이다​.
    19. 웃시야가 손으로 향로를 잡고 분향하려 하다가​ 화를 내니 그가 제사장에게 화를 낼 때에 여호와의 전 안 향단 곁 제사장들 앞에서 그의 이마에 나병이 생긴지라.

    웃시야 왕의 이마에 나병이 발병하게 된 이유는 미리암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하나님이 그를 쳐서 징계하심으로 발병하였습니다. 성소 안에 있는 분향단은 오직 제사장만 할 수 있게 법을 정하셨는데 마음이 교만하여 하나님의 법도를 무시하고 거역한 웃시야 왕은 악행을 저지르다가 하나님의 진노에 징계를 당한 것입니다. 이 경우에도 나병이 영적인 교만과 하나님의 명령에 대한 거역의 경우에 발병한 것을 볼 수 있죠.

    5. 엘리사 선지자의 시종 게하시

    ​엘리사 선지자 시대에 아람 왕국의 장군 나아만은 나병을 고침 받으려고 엘리사 선지자를 찾아옵니다. 그는 많은 예물을 가지고 엘리사를 찾아와서 나병을 고침받기를 구합니다. 나아만 장군이 엘리사 선지자에게 한 행동은 14장에서 나병 환자의 정결례를 다룰 때 조금 더 소상히 설명을 하기로 하고, 여기선 게하시의 행동에만 초점을 맞추겠습니다.

    ​열왕기하 5:15~16, 20~27

    15. ○나아만이 모든 군대와 함께 하나님의 사람에게로 도로 와서 그의 앞에 서서 이르되 내가 이제 이스라엘 외에는 온 천하에 신이 없는 줄을 아나이다 청하건대 당신의 종에게서 예물을 받으소서 하니

    16. 이르되 내가 섬기는 여호와께서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노니 내가 그 앞에서 받지 아니하리라 하였더라 나아만이 받으라고 강권하되 그가 거절하니라

    20. ○하나님의 사람 엘리사의 사환 게하시가 스스로 이르되 내 주인이 이 아람 사람 나아만에게 면하여 주고 그가 가지고 온 것을 그의 손에서 받지 아니하였도다 여호와께서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노니 내가 그를 쫓아가서 무엇이든지 그에게서 받으리라 하고

    21. 나아만의 뒤를 쫓아가니 나아만이 자기 뒤에 달려옴을 보고 수레에서 내려 맞이하여 이르되 평안이냐 하니

    22. 그가 이르되 평안하나이다 우리 주인께서 나를 보내시며 말씀하시기를 지금 선지자의 제자 중에 두 청년이 에브라임 산지에서부터 내게로 왔으니 청하건대 당신은 그들에게 은 한 달란트와 옷 두 벌을 주라 하시더이다

    23. 나아만이 이르되 바라건대 두 달란트를 받으라 하고 그를 강권하여 은 두 달란트를 두 전대에 넣어 매고 옷 두 벌을 아울러 두 사환에게 지우매 그들이 게하시 앞에서 지고 가니라

    24. 언덕에 이르러서는 게하시가 그 물건을 두 사환의 손에서 받아 집에 감추고 그들을 보내 가게 한 후

    25. 들어가 그의 주인 앞에 서니 엘리사가 이르되 게하시야 네가 어디서 오느냐 하니 대답하되 당신의 종이 아무데도 가지 아니하였나이다 하니라

    26. 엘리사가 이르되 한 사람이 수레에서 내려 너를 맞이할 때에 내 마음이 함께 가지 아니하였느냐 지금이 어찌 은을 받으며 옷을 받으며 감람원이나 포도원이나 양이나 소나 남종이나 여종을 받을 때이냐

    27. 그러므로 나아만의 나병이 네게 들어 네 자손에게 미쳐 영원토록 이르리라 하니 게하시가 그 앞에서 물러나오매 나병이 발하여 눈같이 되었더라​

    엘리사 선지자는 나아만 장군이 강권하며 예물을 바치는 것을 끝까지 거절합니다. 그런데 게하시는 물욕, 탐욕에 눈이 어두워서 선지자의 뜻을 거스르고, 독단으로 재물을 청하여 받게 됩니다. 그 게하시의 거스름에 대한 징벌로 나병이 그에게 임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나병을 통해서 주시는 교훈은 무엇일까요?
    나병의 특징을 꼽아보겠습니다.

    첫째, 나병은 잠복 기간이 깁니다.

    5년에서 20년에 걸쳐 오랜 잠복기간을 거친 후에 발병하기도 한다고 합니다.

    우리 안에 내재되어 있는 교만이나 거역한 태도는 평상시에는 마음 속에 깊이 잠재되어 있고, 노출되지 않는 상태일 수 있습니다. 그러다 어떤 게기에 부딪히게 될 때 드러나게 되죠. 미리암이 그랬고, 게하시가 그렇습니다. 웃시야 왕은 그가 하는 일들이 잘 되고, 강성해질 때 그 속에 잠재되어 있던 교만이 두드러지게 솟아나와 제사장만이 할 수 있는 일을 왕이 직접 제사장의 일까지 침범하여 직접 수행하고자 했죠.

    둘째, 발병이 되면 신경이 마비되어 무감각하게 됩니다.

    양심이 마비되면 무감각하게 됩니다. 부끄럽고 수치스러운 일을 저지르고도 부끄러움을 모르는 사람을 일컬어 얼굴에 철판을 깔았다고 합니다. 양심이 화인 맞은 자, 저주받은 자라고 하죠. 영적으로 나병에 걸리면 나타나는 증상이 이렇습니다. 죄 짓기를 밥먹듯이 하게 되면 누구나 똑같은 경로를 거쳐 양심이 마비된 파렴치한이 됩니다.

    셋째, 전염성이 강합니다.

    현대의 한센병은 대한 치료제가 개발되어 있기 때문에 치료제를 복용하면 며칠 안에 99%의 균이 사멸되기 때문에 전염성이 강하지 않다고 합니다. 구약 시대는 치료제가 없었고, 하나님의 징계로 인한 질병이었으며 진영 안에 두지 않고 진영 밖으로 쫓아냈던 것은 전염성이 강했기 때문이었습니다. 나병에 걸려서 중증이 되면 살이 썩어서 심한 악취가 나고, 얼굴이나 손발 등이 썩어서 떨어져 나가고 악종이 생기는 등 사람의 형체가 보기에 고통스러울정도로 변하기 때문에 고립된 독신생활을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영적인 죄악의 전염성솨 강력한 파괴력을 상정적으로 보여주는 질환이었던 거지요.

    ​이러한 까닭에 사람을 부패하게 만들고, 영적으로 파멸에 이르게 하는 가시적인 질병으로 나병이 성경에 등장하고, 나병에 대한 강력한 경계심을 갖게 함으로써 자신을 하나님 앞에서 더러운 것과 접촉하지 않음으로 거룩함, 성결함을 지키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일인가를 깨닫게 한다는 사실입니다.

    참고로 첨언하자면 나병, 문둥병은 공관복음에 기록되어 있지만 예수님이 우리의 죄를 대신하여 짊어지시고 희생제물로 피를 뿌리신 후에는 요한복음부터 요한계시록까지 나병-문둥병에 대한 기록이 한 번도 등장하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요? 율법 시대에 부정하다, 더럽다 정죄받은 것들이 모두 예수 안에서 해결된 것을 보여줍니다. 우리가 진정으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옛 사람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고, 내 안에 계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살아간다면 더 이상 문둥병, 나병에 대한 두려움과 공포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받아 죄에 빠지지 않기를 힘서야 합니다. 무엇보다 하나님 앞에 교만함, 거역하는 불순종의 죄는 각별히 조심해야 합니다.

    레위기 14장(1~20) : 나병환자의 정결예식과 제사장 위임식의 비교

    레위기 14장 1~9절 나병 환자의 1단계, 10~32절 2단계 정결 예식의 절차에 대한 말씀을 상고해 보았습니다. 그 중에 특히 2단계의 속건제 제사를 드리는 방법과 절차를 보면 오른쪽 귓볼, 오른손 엄지, 오른발 엄지에 피를 바라는 장면에서는 제사장 위임식에서 숫양을 드리는 위임제에서 같은 일을 했던 것을 떠올릴 수 있었죠. 나병 환자가 병에서 고침 받았을 때 드리는 정결 예식이 왜 이렇게 제사장 위임식과 유사한가에 대해 흥미를 끌게 되었는데요. 이번 글에서는 이 두 가지 예법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닮아있는가에 대해 복습을 겸해서 다루어보려고 합니다.​

    첫째, 나병 환자의 정결 예식

    ​나병에 걸린 사람은 제사장의 진단을 받은 후에 나병으로 판명이 날 경우 더 이상 이스라엘 백성들의 공동체 안에서 함께 생활할 수 있는 자격을 박탈당하고 진영 밖으로 쫓겨나서 혼자 살아야 했습니다. 진영 안과 밖은 하나님과 언약을 맺은 백성이냐, 아니면 이방인과 같이 자격 없는 자들인가를 가르는 중요한 분기점이 됩니다. 나병 환자는 미리암, 엘시사 선지자의 시종 게시하, 웃시야 왕처럼 하나님을 거역하여 치명적인 죄를 저지른 자에게 하나님이 진노하사 내리는 천형과 같은 질병이었습니다. 하나님을 직접 대적하거나 혹은 하나님이 위임하여 세우신 직분을 맡은 사람을 대적하고 거역할 경우에 징벌적인 의도에서 발병한 병이 곧 성경에 기록된 나병의 성경적인 의미입니다.

    ​그러므로 나병 환자의 정결예식은 하나님과 관계가 단절되고, 언약 백성의 반열에서 쫓겨난 사람이 다시 언약 백성의 지위를 회복하고, 하나님 앞에 거룩한 제사장과 같이 세움을 받는 과정을 보여주는 예식이지요. 나병환자의 영적인 지위는 다음과 같은 과정을 거치게 됩니다.

    ​진영 밖 -> 1단계 정결예식 -> 진영 안으로 들어옴. (언약 백성의 지위, 신분을 회복함) 2차 정결예식 > 회막에 들어갈 수 있는 지위를 회복 > 회막에서 2단계 정결예식 -> 거룩하고 정결함을 입은 사람으로 제사장처럼 하나님께 쓰임받는 사람이 될 수 있게 됩니다.

    ​정결 예식을 받은 나병 환자의 삶의 여정은 아래와 같이 됩니다.

    진영 밖 -> 진영 안 -> 회막 안 -> 하나님 앞에 선 거룩한 삶

    나병 환자가 진영 밖에 추방되어 살아가는 모습은 언약 밖에 있던 이방인의 영적인 신분과도 같다는 걸 알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방인에 대해 아래와 같이 기록하고 있습니다.

    ​에베소서 2:11~15

    11. ○그러므로 생각하라 너희는 그 때에 육체로는 이방인이요 손으로 육체에 행한 할례를 받은 무리라 칭하는 자들로부터 할례를 받지 않은 무리라 칭함을 받는 자들이라

    12. 그 때에 너희는 그리스도 밖에 있었고 이스라엘 나라 밖의 사람이라 약속의 언약들에 대하여는 외인이요 세상에서 소망이 없고 하나님도 없는 자이더니

    13. 이제는 전에 멀리 있던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워졌느니라

    14.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원수 된 것 곧 중간에 막힌 담을 자기 육체로 허시고

    15. 법조문으로 된 계명의 율법을 폐하셨으니 이는 이 둘로 자기 안에서 한 새 사람을 지어 화평하게 하시고

    특히 에베소서 2장 12절을 보면 그리스도 예수께서 이방인으로서 이스라엘 나라 밖에 있던 약속의 언약에 대해 밖에 있던 외인이었던 이방인 성도들을 13절에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말미암아 14절에 언약 백성과 이방인 사이에 있던 중간에 막힌 담을 자기 육체로 헐어 15절에 이 둘(이스라엘 백성과 이방인) 그리스도 안에서 한 새 사람을 지어 화평하게 하셨다 라고 강해하고 있습니다.

    갈라디아서 3:28~29

    28. 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남자나 여자나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
    29. 너희가 그리스도의 것이면 곧 아브라함의 자손이요 약속대로 유업을 이을 자니라.​

    ​이 과정이 위에 그림으로 도식을 그려놓은 것처럼 나병 환자가 진영 밖에 있다가 흐르는 물 가운데 오지그릇 안에서 잡은 피와 물을 백향목 가지에 묶은 우슬초에 피를 묻혀 일곱번을 뿌린 후에 진영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던 것과 영적인 원리가 같다는 걸 알 수 있습니다.

    레위기 14:6~8

    6 그렇게 한 다음에, 제사장은 백향목 가지와 홍색 털실 한 뭉치와 우슬초 한 포기와 그리고 그 살아 있는 나머지 새를 가져다가, 생수가 섞인 죽은 새의 피에 찍어서,
    7 악성 피부병에 걸렸다가 정하게 된 그 사람에게 일곱 번 뿌린다. 그런 다음에, 제사장은 그에게 '정하다'고 선언하고, 살아 있는 새는 들판으로 날려보낸다.
    8 정하다는 선언을 받은 그 사람은 옷을 빨고, 털을 모두 밀고, 물로 목욕을 하면, 정하게 된다. 그리고 진으로 돌아온 뒤에, 그는 이레 동안 장막 바깥에서 살아야 한다.

    둘째, 제사장 위임식의 절차와 순서

    ​그러면 이제 복습을 겸해서 이미 공부하였던 레위기 8장 제사장 위임식의 2단계 순서를 간략히 정리해 보겠습니다.

    제사장 위임식도 두 단계로 진행되는데 1단계를 물로 씻고 제사장의 옷을 입혀주는 일입니다. 그런 후에 2단계로 속죄제, 번제, 위임식 숫양 제사, 곡식제사를 드립니다.

    1단계 제사장 위임 예식 - 물로 몸을 씻기고 거룩한 제사장의 옷을 입힙니다.

    6. ○모세는 아론과 그의 아들들을 데려다가 물로 씻게 하였다.

    7. 모세는 아론에게 속옷을 입혀 주고, 띠를 띠워 주고, 겉옷을 입혀 주고, 에봇을 걸쳐 주고, 그 에봇이 몸에 꼭 붙어 있도록 에봇 띠를 띠워 주었다.

    8. 모세는 또 아론에게 가슴받이를 달아 주고, 그 가슴받이 속에다가 우림과 둠밈을 넣어 주었다.

    9. 모세는 아론의 머리에 관을 씌우고, 관 앞쪽에 금으로 만든 판, 곧 성직패를 달아 주었다. 이렇게 모세는 주께서 명하신 대로 하였다.

    12. 그리고 또 모세는, 거룩하게 구별하는 기름 가운데서 얼마를 아론의 머리에 붓고, 그에게 발라서, 아론을 거룩하게 구별하였다.

    13. 모세는 아론의 아들들을 데려다가, 그들에게 속옷을 입혀 주고, 띠를 띠워 주고, 머리에 두건을 감아 주었다. 이렇게 모세는 주께서 명하신 대로 하였다.

    가장 먼저 그들에게 번제단과 성막 사이에 있는 물두멍의 물로 그들의 몸을 씻기고, 거룩한 세마포로 만든 제사장의 옷을 입혀줍니다. 대제사장인 아론에게는 제사장 옷 위에 에봇을 입히고, 가슴에 흉패를 붙이고, 제사장의 관을 씌우고, 기름을 그의 이마에 붓고 발라주지요. 그의 아들들인 일반 제사장에게는 물로 몸을 씻기고 하얀 세마포로 지은 제사장의 옷만 입혀줍니다. 이 과정은 나병 환자에게 물로 몸을 씻은 후에 옷을 빨아서 입게 한 일과 유사합니다.

    2단계 짐승의 희생 제사를 드리는 의식

    모세는 먼저 수송아지로 제사장을 위한 속죄제를 드립니다. (14~17절)

    그런 다음에 숫양으로 번제를 드립니다. (18~21절)

    숫양 한 마리로 위임식 제사를 드립니다.(22~29절) 이때 곡식제사를 함께 드립니다.(26절)

    22. ○그렇게 한 다음에, 모세위임식에 쓸 또 다른 숫양 한 마리를 끌어 오게 하였다. 아론과 그의 아들들이 그 숫양의 머리 위에 손을 얹었다.

    23. 모세는 그 제물을 잡고, 그 피를 얼마 받아서, 아론의 오른쪽 귓불과 오른쪽 엄지손가락과 오른쪽 엄지발가락에 발랐다.

    24. 모세는 또 아론의 아들들을 오게 하여, 그 피를 오른쪽 귓불 끝과 오른쪽 엄지손가락과 오른쪽 엄지발가락에 발랐다. 모세는 남은 피를 제단 둘레에 뿌린 다음에,

    위임식을 위해 숫양 한 마리를 제사 드렸다고 기록된 22~29절에서 특히 27절에서 곡식 제사로 드린 제물을 흔들어서(요제) 바치는 제물로 드렸다는 구절과 29절에 모세가 숫양 제물의 가슴고기를 흔들어서 바치는 제물로 드렸으니 이 고기는 모세의 몫이라는 표현을 빌면 위임식으로 숫양을 드리는 제사는 속건제 규례에 따라 드린 제사라는 걸 알 수 있습니다.

    다시 정리해 봅니다. 제사장 위임식의 희생제사 드린 순서는 아래와 같습니다.

    속죄제 -> 번제 -> 위임식을 위한 속건제, 곡식제사(소제)

    나병 환자를 위한 2차 정결 예식에서 제사를 드린 순서(레위기 14장 12~20절)

    속건제 -> 속죄제 -> 번제, 곡식제사

    12 제사장은 숫양 한 마리를 끌어다가, 그것을 기름 한 1)록과 함께 속건제물로 바치는데, 그것은 주 앞에서 흔들어 바치는 제물이므로, 제사장은 그것들을 흔들어야 한다.

    13 제사장이 그렇게 하고 나면, 정하게 되려는 그 사람이 속죄제물과 번제물을 잡는 바로 그 장소 곧 거룩한 곳에서, 나머지 숫양 한 마리를 잡는다. 속건제물은 속죄제물과 마찬가지로 제사장의 몫이 된다. 그것은 가장 거룩한 것이다.

    14 제사장은 속건제물의 피를 받아다가 정하게 되려는 사람의 오른쪽 귓불과 오른손 엄지와 오른발 엄지에 발라야 한다.

    19 부정한 상태에서 이제 정하게 되려는 그 사람의 죄를 속하여 주려고, 제사장은 속죄제물을 바친다. 그렇게 한 다음에, 정하게 되려는 그 사람이 번제물을 잡으면,

    20 제사장은 번제물과 곡식제물을 제단에 바친다. 이렇게 하여, 제사장이 그의 죄를 속하여 주면, 그는 정하게 된다.

    제사 드리는 순서는 다르지만 공통점은 양쪽 다 속건 제물의 제사를 바칠 때 희생 양의 피를 발라서 오른쪽 귓볼, 오른손 엄지, 오른발 엄지에 바르게 하신다는 점입니다.

    제사장 위임식에서 마지막에 하는 것은 피와 기름을 뿌리는 것이었습니다. 레위기 8장 30절

    30. ○또 모세는 거룩하게 구별하는 기름과 제단에 있는 피를 가져다가, 아론, 곧 제사장 예복을 입은 아론에게 뿌렸다. 그는 또 아론의 아들들, 곧 제사장 예복을 입은 그의 아들들에게도 뿌렸다. 이렇게 하여 모세는, 아론과 그의 옷 및 그의 아들들과 그들의 옷을 거룩하게 구별하였다.

    나병 환자에게 속건 제사를 드릴 때 기름을 바르는 장면(레위기 14장 15~18절)

    15 그런 다음에, 제사장은 기름 한 록에서 얼마를 덜어, 왼손 바닥에 붓고,

    16 오른쪽 손가락으로 왼손 바닥에 부은 기름을 찍어, 그 손가락에 묻은 기름을 주 앞에서 일곱 번 뿌린다.

    17 그리고 제사장은 손바닥에 남아 있는 기름을, 정하게 되려는 그 사람의 오른쪽 귓불과 오른손 엄지와 오른발 엄지에, 이미 발라 놓은 속건제물의 피 위에 덧바른다.

    18 그리고 나머지 기름, 곧 제사장의 손바닥에 남아 있는 기름은, 정하게 되려는 사람의 머리에 바른다. 그리고 나서, 제사장은, 주 앞에서 그 사람의 죄를 속하여 주어야 한다.

    레위기 8장 30절에서 위임식 속건제 제사를 종결할 때 피와 기름을 제사장에게 뿌리는 의식을 행한 것처럼 나병 환자를 정결하게 하는 정결 예식 중 속건제 제사를 드릴 때 피를 바르고, 기름을 뿌리고, 발라주며 머리에 기름을 바르는 의식을 했습니다. 제사장의 속건제나 나병 환자의 속건제나 동일하게 피와 기름을 뿌리고 발라주었습니다.

    이방인인 우리는 원래 진영 밖에 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약속 받은 언약 밖에 있었던 사람이고, 하나님을 모르고 하나님과 단절된 상태에서 살았습니다. 그런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희생으로 말미암에 그의 피로 나병 환자와 같은 소망 없는 존재인 우리가 죄에서 구원을 받아 정결함을 받은 존재가 되었습니다. 이방인 성도는 유대인과 동등한 신분과 자격을 부여받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 회막 앞에서 하나님 앞에 선 자로서 기름(성령) 부음을 받은 거룩한 세마포 옷을 입은 존재로 구약 시대의 제사장들처럼 하나님을 경외하고 섬기기 위해 성막 안 성소, 지성소에 들어갈 수 있는 자격과 신분과 권한을 부여받은 존재가 되었습니다.

    이러한 영적인 원리에 대해 히브리서는 아래와 같이 해설해 주고 있습니다.

    히브리서 10장 19~25절

    19 그러므로 형제자매 여러분, 우리는 예수의 피를 힘입어서 담대하게 지성소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20 예수께서는 휘장을 뚫고 우리에게 새로운 살 길을 열어 주셨습니다. 그런데 그 휘장은 곧 그의 육체입니다.

    21 그리고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집을 다스리시는 위대한 제사장이 계십니다.

    22 그러니 우리는 확고한 믿음을 가지고, 참된 마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갑시다. 우리는 마음에다 예수의 피를 뿌려서 죄책감에서 벗어나고, 맑은 물로 몸을 깨끗이 씻었습니다.

    23 또 우리에게 약속하신 분은 신실하시니, 우리는 흔들리지 말고, 우리가 고백하는 그 소망을 굳게 지킵시다.

    24 그리고 서로 마음을 써서 사랑과 선한 일을 하도록 격려합시다.

    25 어떤 사람들의 습관처럼, 우리는 모이기를 그만하지 말고, 서로 격려하여 그 날이 가까워 오는 것을 볼수록, 더욱 힘써 모입시다.

    19절에서 "지성소"를 한글 개역, 개역개정은 "성소"로 번역했는데 다른 한글 번역본은 "지성소"로 번역을 했더군요. 휘장이 찢어진 것은 마태, 마가, 누가 복음에 공통적으로 기록된 "이에 성소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까지 찢어져 둘이 되니라"(마가복음15:38절) 말씀을 가리키는데 이 휘장은 성소와 지성소를 가로 막는 휘장입니다.
    그러므로 이 휘장이 찢어짐으로 대제사장이 매년 7월 10일 대속죄일 절기에 한번만 들어갈 수 있었던 지성소에 대제사장이 아닌 일반 제사장된 이들도 들어갈 수 있는 자격을 얻게 되었음을 설명한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아무나 지성소에 들어갈 수 있다는 뜻일까요?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의 피 뿌림을 받고, 물로 정결하게 씻음 받은 사람들이 거룩한 기름 부음을 받고, 거룩한 세마포 옷을 입은 제사장 같은 이들만이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설 수 있다는 규례를 잊지 말아야 합니다.
    비유를 하자면 제사장 위임식을 거친 제사장이나 나병 환자였다가 병 고침을 받은 사람이 1단계, 2단계 정결 예식을 치른 후에(물로 씻음받고, 피 뿌림, 기름 부음을 받은) 하나님 앞에 설 수 있었던 것과 같이 거룩함을 받고, 기름부음을 받은 사람들이 들어갈 수 있다는 걸 알게 하신다는 말입니다.

    ​나병 환자가 병이 나은 후에 본래의 생활로 복귀하기 위해서 거쳐야 하는 2단계 정결예식 가운데 2단계 정결 예식을 다룬 내용입니다.
    오늘은 2단계 정결 예식의 과정과 절차에 초점을 맞추어서 말씀을 깊이 있게 읽어보도록 하겠습니다.

    ​본문에 들어가기 전에 어제 상고했던 1단계 정결 예식 가운데 몇 가지 점을 복습을 겸해서 짚어보고 싶습니다.
    어제 밤에 잠들기 전에 1단계 정결 예식을 머리 속으로 곱씹어 보는 중에 두 가지 부분이 새롭게 깨달아졌습니다.

    ​1단계 정결 에식은 물이 흐르는 곳에서 진행합니다.
    흐르는 물이란 고인 물, 즉 오염물질이 고여있는 썩은 물이 아니라 오염되지 않고, 살아있는 생명의 물이라는 뜻이 있을 것입니다.
    두 마리의 새 중에서 한 마리는 그 물이 담긴 오지 그릇 안에서 잡아서 피를 흘립니다.
    이 피를 백향목 나무 가지에 우슬초를 붉은 홍색실로 묶은 후에 피를 정결함을 받을 사람에게 일곱번 뿌리죠.
    즉 제사장이 피를 뿌림으로써 생명을 희생한 그 피로 말미암아 죄 사함을 받게 한다는 의미입니다.
    이때 나병 걸렸다 나은 사람이 죄 사함을 받는 것은 타율적인 은혜로 말미암은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과 피 흘리심으로 말미암아 신약의 성도가 죄와 저주에서 놓임 받음을 믿는 것과 같지요.
    일방적인 은혜의 선물입니다.

    ​그런 다음에 더려워진 옷을 빨고, 몸에 난 털을 모두 면도해서 밀어버리게 합니다.
    그런 후에 온 몸을 깨끗한 물에 몸을 담가 씻게 하지요.
    이 과정 중에서 몸에 난 털을 모두 밀어버리라고 하신 것에는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
    왜? 털을 밀어버리라고 하셨을까?
    그러자 이어지는 한 단어가 있었습니다.

    ​한 터럭조차 남김 없이!

    이 뜻이구나.
    나병에 걸렸던 육신입니다.
    나병에 걸리게 만들었던 죄와 악행입니다.
    그 모든 것에 대한 연결 지점이 될만한 것은 한 터럭조카도 남김이 없어야 한다.
    이런 의도의 말씀이 아니었을까.
    과거에 대한 미련과 집착을 완전히 떨쳐버리되, 지극히 사소한 것까지도 완전히 끊어라. 완전한 절연, 완전한 단절의 의미가 아닌가. 그런 후에야 진영으로 다시 돌아올 수 있다.

    ​이렇게 제사장을 통해서 정결 의식을 받은 나병 환자였던 사람은 꿈에도 그리워하던 진영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 허락 되었습니다.
    그러나 집에 도착했지만 안에 들어갈 수는 없지요.
    칠일을 밖에 머물다가 칠일 째 되는 날 다시 옷을 빨고, 몸에 난 털을 모두 밀고, 목욕을 하는 일을 거치라 하십니다.

    같은 행동을 두 번 반복하게 하십니다.
    이중의 단절, 이중의 절연. 과거의 죄악에 결탁되었던 삶에서 완전히 돌이키라는 말씀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피를 뿌림으로 말미암아 죄를 용서받고, 죄와 저주에서 벗어나 자유함을 누리는 것은 타율적으로, 외부에서 일방적으로 임하는 은혜입니다.
    이렇게 죄사함 받은 사람이 옷을 빨아 입고, 몸에 난 털을 밀고, 몸을 씻음으로 거룩하게 하는 것은 자율적인 거룩한 삶을 이루고자 하는 자신의 의지를 나타냅니다.
    성막 뜰에 있는 번제단에서 희생 제사를 통해 피 흘림으로 죄를 속죄 받으면 그 다음에 번제단과 성막 사이에 있는 물두멍에서 손과 발과 얼굴을 씻고, 때로는 목욕을 합니다.

    즉 희생의 피의 은혜로 죄사함 받은 후에 죄와 단절된 거룩한 삶을 살고자 하는 열심과 노력이 뒷받침 되어야 하죠.
    그런 후에 성소에 들어가면 상에 진열된 무교병 떡을 먹고, 등잔대에는 기름에 불을 켜고, 분향단에서 하나님이 받으실만한 거룩한 향을 피워올리죠. 하나님 앞에서 날마다 하나님의 얼굴을 뵈며 말씀을 귀기울여 듣고, 그 말씀을 깊이 묵상하고, 상고하며 실천하는 삶을 살아갑니다.

    ​나병 환자였던 사람의 1단계 정결 예식은 성막 뜰 안에 있는 번제단과 물 두멍에서 이뤄지는 것들을 진영 밖에서 동일한 영적인 원리로 한번 체험하게 하신 것이라는 것을 말씀을 상고하는 과정을 통해서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둘째, 2단계 정결예식(10~32절) : 속건제, 속죄제, 번제

    ​두 번째 단계의 정결 예식을 위해 하나님은 4가지 제물을 준비하라 명하십니다.
    즉 짐승의 희생 제사를 드릴 숫양 두 마리, 암양 한 마리를 준비하라 하시고, 곡식 제사를 드릴 기름에 섞은 고운 밀가루 십분의 삼 에바, 기름 한 록을 준비하라고 하십니다.

    참고로, 에바는 고체 용량을 나타내는 단위이고, 록이나 힌은 액체의 용량을 나타내는 단위입니다.
    1록은 0.54리터(약 두 홉 반)

    10. 여드레째 되는 날에, 그는 흠 없는 숫양 두 마리와, 흠 없는 일 년 된 어린 암양 한 마리와, 곡식제물로 바칠 기름 섞은 고운 밀가루 십분의 삼 에바와, 기름 한 록을 가져 와야 한다.
    11. 그를 정하게 할 제사장은, 정하게 되려는 그 사람을 그 제물들과 함께 회막 어귀, 주 앞에 세운다.

    숫양 두 마리와 암양 한 마리는 무슨 제사에 쓰일 제물일까요?

    숫양 한 마리는 속건제용 제물이고, 암양 한 마리는 속죄제용 제물이며, 남은 숫양 한 마리는 속죄제용 제물로 쓰이게 됩니다.

    ​속건제 제사는 무조건 숫양을 한 마리를 드립니다.(레 5:15, 18)
    다른 짐승 제물은 사용하지 않습니다.

    속죄제는 수송아지(제사장, 온 이스라엘 회중), 족장은 숫염소, 일반 평민은 암염소 또는 암양을 드립니다.(레4장) 그런데 경제적으로 빈곤한 사람은 새 2마리로 대신할 수 있고, 여기에도 못 미치면 곡식 가루 십분의 일 에바를 곡물로 바칠 수 있습니다.

    번제는 소, 염소, 양이나 가리지 않고, 가능한데 다만 수컷이라야 합니다. 이에 힘이 못 미치면 산비둘기, 집비둘기 새끼 등의 날짐승도 가능합니다.

    화목제는 소, 양, 염소 세 가지만 가능한데 성별은 무관합니다.

    ​이런 제사별로 사용되는 제물의 종류를 기억하고 있다면 숫양 두 마리, 암양 한 마리를 준비하라는 말씀을 읽으면 아, 무슨 무슨 제사를 드리라는 것이구나 라고 유대인들은 즉각 알아들었을 것입니다.

    ​이렇게 제물을 준비한 후에 그 사람으로 하여금 드디어 성막 울타리 문을 지나 번제단 앞에 설 수 있었습니다. 나병 환자라면 진영 안에 들어올 수도 없었으니 성막 울타리 안에 들어간다는 건 꿈도 끌 수 없었을테니 당사자로서는 하나님 앞에 설 수 있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감격에 눈물이 쏟아지지 않았을까 생각해 봅니다.

    ​(1) 나병 환자의 정결 제사 중 첫번째 제사가 속건제입니다.

    ​제사장은 숫양 한 마리를 끌어와 기름 한 록과 함께 속건 제물로 바칩니다. 속죄제는 하나님 앞에 자신의 죄를 고백하고 용서 받기 위해 드리는 제사입니다. 반면 속건제는 하나님 뿐 아니라 사람에 대한 범죄에 대한 죄를 용서 받기 위해 드리는 제사를 말하지요.

    12 제사장은 숫양 한 마리를 끌어다가, 그것을 기름 한 록과 함께 속건제물로 바치는데, 그것은 주 앞에서 흔들어 바치는 제물이므로, 제사장은 그것들을 흔들어야 한다.

    13 제사장이 그렇게 하고 나면, 정하게 되려는 그 사람이 속죄제물과 번제물을 잡는 바로 그 장소 곧 거룩한 곳에서, 나머지 숫양 한 마리를 잡는다. 속건제물은 속죄제물과 마찬가지로 제사장의 몫이 된다. 그것은 가장 거룩한 것이다.

    14 제사장은 속건제물의 피를 받아다가 정하게 되려는 사람의 오른쪽 귓불과 오른손 엄지와 오른발 엄지에 발라야 한다.

    나병이 단순히 육체의 피부병이 아니라 영적인 죄를 의미하는 질환을 상징한다고 보는 이유가 이런 이유 때문입니다. 속죄제를 드리기에 앞서서 속건제를 먼저 드려야 한다는 것은 하나님 뿐 아니라 사람에 대한 죄를 먼저 사함받지 않으면 안된다는 뜻이 되겠죠. 본인이 상처, 피해를 준 사람과 먼저 화해가 필요함을 보여주는 근거가 된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13절에 "나머지 숫양 한 마리를 잡는다." 라는 구절이 나오는데 이는 표준새번역, 새번역의 오역이라 생각됩니다. 개역한글, 개역개정, 공동번역, 우리말성경 등 타 한글번역본은 "그 어린 숫양"으로 번역하고 있습니다. 12절과 13절에서 제사장이 흔든다는 것은 곧 요제로 드린다는 말인데 속건제로 드린 제물은 제사장의 몫이 된다는 것을 부연 설명한 것으로 숫 양 두 마리 중에 한 마리를 산 채로 요제로 드려서 제사장의 몫으로 차지하고, 남은 한 마리 숫양을 잡아서 피를 흘리는 제물로 삼는다는 게 아닙니다. 숫양 두 마리 중에 한 마리는 속건제로 드리라는 말씀을 "나머지 숫양 한마리"라고 번역해서 혼란을 일으킨 오역일 뿐입니다.

    14절에 속건제로 드린 숫양의 피를 받아서 정결함을 받을 사람의 오른쪽 귓볼, 오른손 엄지, 오른발 엄지에 피를 바르라고 하십니다. 그런데 이 과정은 레위기 8장 22~23절에서 숫양으로 제사장 위임식 제사를 드리는 장면에서 동일하게 등장합니다.

    오른 쪽 귓볼과 오른쪽 엄지 손가락, 오른 쪽 엄지 발가락에 피를 발라서 거룩하게 하신다는 것은 과거의 죄인된 삶에서 단절하였으니 앞으로는 또 다시 악한 말에 귀를 기울이고, 죄를 저지르는데 손과 발을 바쁘게 놀리지 말 것이며 하나님의 말씀에만 귀를 기울이고, 거룩한 일에, 순종하는 일에 손과 발을 부지런히 놀리며 살아가라는 뜻이 있는 것이겠지요. 삶이 지향하는 방향과 뜻과 가치관에 하나님 말씀 중심으로 완전히 새롭게 변화받아야 할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라 봅니다.

    그런 다음에 기름 한 록을 준비하게 하셨던 그 기름을 발라주라 명하십니다.

    15 그런 다음에, 제사장은 기름 한 록에서 얼마를 덜어, 왼손 바닥에 붓고,

    16 오른쪽 손가락으로 왼손 바닥에 부은 기름을 찍어, 그 손가락에 묻은 기름을 주 앞에서 일곱 번 뿌린다.

    17 그리고 제사장은 손바닥에 남아 있는 기름을, 정하게 되려는 그 사람의 오른쪽 귓불과 오른손 엄지와 오른발 엄지에, 이미 발라 놓은 속건제물의 피 위에 덧바른다.

    18 그리고 나머지 기름, 곧 제사장의 손바닥에 남아 있는 기름은, 정하게 되려는 사람의 머리에 바른다. 그리고 나서, 제사장은, 주 앞에서 그 사람의 죄를 속하여 주어야 한다.

    16절에 그 기름을 손가락에 찍어 주 앞에서 일곱번 뿌리라고 하십니다. 여기서 "주 앞에서"란 어느 대상을 말할까요? 성소 안에 있는 휘장이나 기물에 뿌리는 건 아닌 것이 확실합니다. 평민 개인을 위한 희생 제사는 모두 번제단 앞에서 이루어지니까요. 성소 안에 들어가지 않지요. 구체적으로 기름을 뿌리는 대상이 명시되어 있지 않지만 이러지는 구절을 통해서 유추해 보면 정결함을 받을 사람을 대상으로 기름을 일곱 번 뿌리라는 뜻인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 무방하다 생각됩니다.

    기름을 일곱 번 뿌린 후에 그 기름을 오른쪽 귓볼, 오른쪽 엄지 손가락, 오른쪽 엄지 발가락에 피를 발랐던 곳에 덧바르라 하십니다. 그런 후에 남은 기름을 머리에 바르라고 하십니다. 대체 나병에서 회복된 사람이 무엇이길래 레위기 8장 30절에 제사장 위임식 말미에 아론과 그의 아들들과 그들이 입은 제사장 옷에 기름을 뿌려 거룩하게 하라 명하셨던 그 일을 이들에게도 하라고 하시는 것일까요?

    이 단계에까지 이르고 보면 14장에서 나병 환자의 정결 예식에는 뭔가 다른 뜻이 들어있다는 확신이 듭니다. 나병 환자란 한센씨 병이 든 특정한 한 사람을 위한 것이 아니라 심각한 나병에 걸려 살이 썩어져 나가고, 감각이 무뎌져서 아픔조차 느끼지 못하는 썩어 문드러진 하나님의 백성 전체에 대한 상징이라는 걸 말입니다. 레위기 14장의 나병에 걸려 부정한 자는 특정인이 아니라 하나님께 부르심을 받아 구원을 받은 모든 언약 백성 전체를 상징하는 존재이며 영적으로 부패하고 썩어 영원히 멸망할 수밖에 없는 이들을 부르셔서 피 뿌려주시고, 기름을 뿌려주시고, 발라주시고, 머리에 기름을 부어주심으로 거룩한 제사장 나라를 삼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의도를 2단계에 걸친 정결 예식을 통해서 우리에게 계시해 주시는 말씀이 아닌가!

    (2) 속죄제를 드리고, 번제를 드릴 때 곡식 제사를 함께 드린다(19~20절)

    ​속건제를 드린 후에 속죄제를 드리게 하십니다.

    19 부정한 상태에서 이제 정하게 되려는 그 사람의 죄를 속하여 주려고, 제사장은 속죄제물을 바친다. 그렇게 한 다음에, 정하게 되려는 그 사람이 번제물을 잡으면,ㅋ
    20 제사장은 번제물과 곡식제물을 제단에 바친다. 이렇게 하여, 제사장이 그의 죄를 속하여 주면, 그는 정하게 된다.

    위의 19절과 20절을 보시면 속죄제를 드리는 것을 설명한 말씀을 보면 "제사장은 속죄 제물을 바친다"는 한 구절로 끝내 버립니다. 세부적인 설명이 없죠. 또한 번제로 드릴 숫양 한 마리를 잡으면 20절에 기름 섞은 고운 밀가루 십문의 삼 에바를 번제물과 함께 번제단에 바친다 라고 간략히 기술하고 넘어갑니다. 즉, 속건제 -> 속죄제 -> 번제+소제 순서로 제사를 드리되 나병 환자의 정결 제사 중에 핵심은 속건제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죠. 이렇게 네 가지 제사를 드리고 나면 나병을 앓았던 환자는 드디어 하나님 앞에 정한 사람으로 인정받을 수 있게 됩니다. 참으로 길고도 먼 여정이었습니다.

    나병 환자의 2단계 정결예식의 초점이 속건제에 맞춰져 있다는 것은 바로 이어지는 21~22절에서도 확인할 수 있습니다.

    21 그러나 가난해서 그렇게 많은 것을 바칠 수 없는 사람이, 자기의 죄를 속하려 할 때에는, 그는, 제사장이 흔들어 바칠 속건제물로는 숫양 한 마리를 가져 오고, 곡식제물로 바칠 기름으로 반죽한 고운 밀가루는 십분의 일 에바만 가져 오면 된다. 기름은 마찬가지로 한 록이다.

    22 힘이 닿는 대로, 산비둘기 두 마리나 집비둘기 새끼 두 마리를 가져다가, 한 마리는 속죄제물로, 다른 한 마리는 번제물로 바치면 된다.

    숫양 두 마리, 암양 한마리를 감당할 수 없는 가난한 사람에 대한 규례가 21절부터 32절까지 이어집니다. 속건제로 드릴 숫양은 그대로 유지하고, 속죄제, 번제를 드릴 제물은 새 두 마리로 대체합니다. 또한 기름 섞은 고운 밀가루는 십분의 삼 에바에서 십분의 일 에바로 줄여도 된다고 하십니다. 변동이 없는 것은 속건제를 드리는 숫양 한마리와 기름 한 록입니다.

    25~29절은 13~18절의 과정을 되풀이 하는 내용입니다. 다시 말하면 속건제 제물로 숫양을 잡고, 그 피를 정함을 받을 사람의 오른쪽 귓볼과 엄지 손가락, 엄지 발가락에 바르고, 기름을 그 사람에게 일곱 번 뿌린 후에 오른쪽 귓볼, 엄지 손가락, 엄지 발가락에 바르고, 남은 기름을 머리에 바릅니다. 그런 후에 속죄제와 번제는 새 두 마리로 대신합니다. 피를 통해서 말씀을 듣는 귀와 말씀을 순종할 손과 발을 거룩하게 하고, 그 위에 기름 - 성령을 부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 앞에서 정결함을 받은 사람으로서 성령의 이끄심에 순종하여 거룩한 제사장과 같은 삶을 살라는 것에 모든 초점이 맞추져 있는 것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나병 환자 단계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살지 못하고 진열 밖에서 살아야 했습니다.
    몸은 썩어문드러지는 불치병에 걸려있고, 부정한 존재라 감히 하나님 앞에 나갈 수 없을 뿐 아니라 하나님의 언약 백성과 동등한 삶을 살 수조차 없는 비참한 존재였습니다.
    이는 이방인 불신자의 영적인 상태를 상징적으로 보여줍니다.

    1단계의 정결 예식 단계

    나병 환자처럼 영원히 멸망할 수 밖에 없는 이방인 불신자인 우리에게 하나님은 영원한 제사장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그의 피를 힘입어 죄 사함을 받고, 우리의 모든 죄와 허물을 침례(세례)를 통해서 물로 씻어 목욕함으로써 정결함을 받게 되었습니다. 이 과정을 통해서 진영 밖에 머물러 있던 사람이 진영 안 하나님의 백성들의 공동체 속으로 들어갈 자격을 얻었습니다. 하나님께 부름받은 신자의 단계입니다.

    2단계 정결 예식 단계

    하나님은 제사장을 통해 우리를 하나님 앞에 서게 하십니다. 우리에게 숫양 두 마리와 암양 한마리, 고운 밀가루와 기름을 준비하라 하십니다.

    지금은 정결하게 되었으나 과거의 우리는 나병을 앓던 썩어 문드러진 더럽고 부정한 자들이었습니다. 세상에서 하나님과 무관하게 살던 때의 모든 더러움과 허물, 죄와 악행을 단절하고 이제는 하나님 앞에서 그의 말씀을 부지런히 상고하고 연구하며 배우기를 힘쓰다가 그 말씀대로 순종하며 살아야 할 존재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살아야 할 것을 알면서도 제대로 그런 삶을 살지 못하는 비루한 존재가 바로 우리들이었습니다. 그런 우리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도록 귀에 기름을 발라주시고, 깨달은 말씀대로 순종하며 살아갈 수 있도록 손과 발에도 기름을 발라 주셨습니다. 그 뿐 아니라 머리에 기름을 발라주셨죠. 머리에 기름을 바른다는 것은 곧 제사장의 이마에 기름을 붓는 것과 다름 없지요. 거룩한 성령의 사람으로 세워주신 것입니다. 과거에는 진영 밖에 있는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를 수 없는 존재였지만 이제는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의 얼굴을 뵈옵고, 그 분에게 기름을 부어 세움을 받은 정결하고 거룩한 신분으로 새롭게 태어났음을 인증을 받았습니다.

    ​나병을 앓던 사람이 진영 밖에서 살다가 제사장의 부르심을 받고, 진영 안으로 들어온 후에 성막 문 어귀에서 하나님께 기름부음을 받는 거룩한 사람으로 세움을 받는 이 모든 과정은 이방인 출신의 모든 신앙인들의 영적인 여정을 보여주는 한 폭의 그림이 아닌가.







    구약에서 회개라는 단어가 사용된 말씀

    욥기 42:6
    그러므로 내가 스스로 한하고 티끌과 재 가운데서 회개하나이다

    시편 7:12
    사람이 회개치 아니하면 저가 그 칼을 갈으심이여 그 활을 이미 당기어 예비하셨도다


    제사장의 위임식

    제사장의 위임식

    모세에 의해서 아론과 그 아들들을 데려다가 몸을 씻기고 예복을 입힌 후에 기름을 붓고 발라주는 의식을 거행하였습니다.
    이렇게 위임을 받은 제사장을 위해 세 가지 위임식 제사를 드렸습니다.
    이러한 위임식 제사를 통하여 제사장은 하나님과 백성 앞에서 기능과 자격 및 특권을 가지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위임식 제사를 통해서 신약 시대를 살아가는 왕 같은 제사장으로 부름 받은 우리가 하나님 앞에 드려야 할 영적인 제사가 무엇인지를 살펴보려고 합니다.

    1. 속죄제(14-17절) 

    제사장의 위임식 제사 가운데 가장 먼저 드려야 하는 제사가 있는데 그것이 바로 속죄제입니다.
    제사장에게 왜 속죄제가 필요할까요? 제사장은 남을 위한 속죄를 위해 중보하기 전에 자신이 먼저 속죄를 입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모세가 속죄제의 수송아지를 끌어오니 아론과 그 아들들이 수송아지의 머리 위에 안수하였습니다. 자신들의 모든 죄를 수송아지에게 전가시키는 것을 의미합니다. 짐승이 죽는 것은 자기 죄 때문이라는 것을 분명히 자각해야 했습니다. 죄없는 짐승이 죽어 가는 동안 제사장은 죄가 얼마나 무서운 것이며, 이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서 무엇보다 성결해야 한다는 것을 마음에 굳게 결심하게 되었을 것입니다.

    위임을 위한 속죄제는 수송아지의 피를 향단의 네 뿔에 바르지 않고(레 4:3-12절의 속죄제의 규정과 다르다) 오히려 바깥의 번제단의 네 뿔에 바르고 그 다음에 남은 피는 제단 밑에 쏟았습니다. 이와 같이 피는 장막 내부로 가져가지 않았습니다. 이는 이들이 아직은 제사장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임직식의 기간이 칠일간이었음을 볼 때(8:33) 이들은 아직은 제사장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따라서 제물의 피를 장막 내의 향단으로 가지고 가지 않고 바깥 제단에다 발랐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사야를 일꾼으로 부르실 때에도 먼저 그의 죄를 용서하여 주셨던 것을 봅니다.

    사 6:7 그것을 내 입에 대며 가로되 보라 이것이 네 입에 닿았으니 네 악이 제하여졌고 네 죄가 사하여졌느니라 하더라

    왜 이사야 선지자에게는 숯불을 입에 대었을 까요?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해야 하는 사람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부정한 입술을 가지고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 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 아닙니까? 그러므로 먼저 그의 입술을 정결케 하신 것입니다.

    레위기에서 계속 강조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거룩”입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가지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가지려면 무엇보다 거룩해야 합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 거룩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성화된 삶을 살 수 있을까요? 우리가 십자가의 보혈로 정결함을 받은 후에 성화된 삶을 계속 이어가기 위해서는 말씀에 철저하게 순종하며 기도를 힘써서 하나님의 능력으로 무장을 해야 합니다. 그래야 자신을 세속으로부터 지킬 수 있는 것입니다.

    2. 번제(18-21절)

    먼저 속죄제를 통해서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모든 잘못된 것을 제거하여 정결케 하고 이제는 전적으로 헌신을 상징하는 번제를 드립니다.
    번제는 온 삶과 생명 전체를 하나님께 바치는 헌신을 의미합니다.

    보잘 것 없는 사람을 하나님과 백성들의 중재자로 세워주시니 얼마나 감사합니까? 그 은혜를 생각하면 죽기까지 충성하기로 헌신을 다짐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저도 목사 안수를 받을 때 하나님의 은혜가 너무나 크고 감사하여 눈물이 핑 돌았던 경험이 있었습니다.

    저드슨(1788-1850)이 대학을 거쳐 신학교를 졸업하자 보스톤시에 있는 상류층의 교회에서 부목사로 와 달라는 초빙을 받았습니다. 그의 동료 친구들은 모두 부러워하며 집의 어머니와 누이도 매우 기뻐했습니다. 그러나 저드슨은 고개를 흔들었습니다.

    "하나님은 나를 해외선교에 쓰시려고 부르셨습니다. 내가 이곳에 남아서 일을 해도 주님의 일을 하는 것이지만 나는 부분적으로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이 됩니다. 나는 주님께 전체로 순종하렵니다."

    안일한 자리를 물리친 저드슨은 결국 철통같은 불교의 나라 미얀마(버마)에 선교사로 갔습니다. 그곳은 너무나도 어려운 곳이었기에 목숨을 바칠 각오로 일했으나 처음의 한 사람을 전도하여 세례를 베푸는데 무려 6년간의 갖은 고생을 다 했습니다. 저드슨은 오랜 기간을 버마의 감옥에서 지나기도 했고 죽음과 질병의 고비도 몇 번이나 넘겼습니다. 그러나 저드슨의 거룩한 헌신은 5만 명이라는 크리스천을 미얀마(버마)땅에 탄생시키고 전세계의 크리스천들의 마음에 꺼지지 않는 횃불을 밝히 켜 놓은 것입니다.

    제사장은 자신의 욕망이나 정욕을 죽이고 마침내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드리는 일꾼입니다. 제사장이 되어 임직을 행하기 전에 먼저 희생을 각오하는 번제물이 되어야 합니다.

    어떤 사람이 진정 헌신의 사람이 될 수 있을까요?

    감사하는 마음을 가진 사람이 헌신의 사람이 됩니다. 바울의 고백을 들어보십시오.

    딤전 1:12 나를 능하게 하신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께 내가 감사함은 나를 충성 되이 여겨 내게 직분을 맡기심이니

    사랑하시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의 죄를 용서하여 주시고 일꾼으로 세워 주신 은혜를 감사하게 생각하십니까? 그렇다면 죽도록 충성하며 헌신하기를 다짐하십시오. 하나님은 자기 일꾼들이 온전히 헌신하시기를 소원하고 있습니다. 손에 쟁기를 잡은 일꾼이 뒤를 돌아보면 안됩니다. 주님만 바라보아야 합니다.

    3. 화목제(22-29절)

    헌신을 상징하는 번제의 수양을 드린 후에 따 다른 수양, 곧 위임식 수양을 제물로 드렸습니다.
    속죄제, 번제, 화목제의 제사를 드릴 때마다 아론과 그의 아들들은 제물 위에 안수하였습니다.
    모세는 위임식 수양을 잡고 그 피를 취하여 아론의 오른 귓부리와 오른 손 엄지가락, 오른 발 엄지가락에 피를 발랐습니다.
    그의 아들들에게 같은 예식을 거행하였습니다.

    이것은 제사장들의 귀도, 손도, 발도 하나님을 위하여 성별 되었음을 의미합니다.
    먼저 아론과 그의 아들들의 오른 귓부리에 피를 바른 의미가 무엇인지 생각해 봅시다.
    제사장은 먼저 귀를 성별 하여 하나님의 명령하심에 귀를 기울여야 함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귀로 하나님의 말씀만 들으라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듣는 것이 중요합니다.
    아담과 하와는 마귀의 음성에 귀를 기울였다가 타락하였습니다.
    가룟 유다도 마귀의 음성에 귀 기울였다가 하나님의 아들을 팔아먹는 배신자가 되었습니다.

    사람은 듣는 것을 조심해야 합니다.
    성경에서 귀 있는 자는 들으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귀가 따로 있다는 말씀입니다.
    여러분들에게는 그런 귀가 있습니까? 오직 주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시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잠언 5:1-8
    내 아들아 내 지혜에 주의하며 내 명철에 네 귀를 기울여서.
    근신을 지키며 네 입술로 지식을 지키도록 하라. 
    대저 음녀의 입술은 꿀을 떨어뜨리며 그 입은 기름보다 미끄러우나. 
    나중은 쑥같이 쓰고 두 날 가진 칼같이 날카로우며.
    그 발은 사지로 내려가며 그 걸음은 음부로 나아가나니. 
    그는 생명의 평탄한 길을 찾지 못하며 자기 길이 든든치 못하여 그것을 깨닫지 못하느니라.
    그런즉 아들들아 나를 들으며 내 입의 말을 버리지 말고. 
    네 길을 그에게서 멀리하라 그 집 문에도 가까이 가지 말라.

    오른 귓부리에 피를 바른 후에 오른손 엄지가락과 오른발 엄지가락에 피를 발랐습니다.
    손과 발은 행위를 나타냅니다.
    특히 오른 쪽은 힘과 능력을 상징합니다.
    이것은 자신에게 주신 힘과 능력을 다하여 주님만을 위하여 행동하겠습니다 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또한 이 피는 제사장들의 옷에도 뿌려졌습니다.
    관유와 피가 그들의 옷에 뿌려짐으로 그들의 입는 예복이 거룩하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보혈과 성령의 기름 부으심이 없다면 우리가 결코 거룩하게 될 수 없음을 가리켜 주는 것입니다.

    모세는 화목제물과 소제물을 아론과 그 아들들의 손에 두어 여호와 앞에 흔들어 요제를 삼게 하였고 모세가 그들의 손에서 취하여 단 윗 번제물 위에 불사르니 이는 향기로운 냄새를 위하여 드리는 위임식 제사였습니다.

    위임식 수양으로 드리는 화목제물 가운데서 모세의 응식은 무엇이었습니까?
    수양의 가슴이었습니다.
    그리고 나머지는 아론과 그 아들들에게 위임식 광주리의 떡과 함께 회막 안에서 삶아 먹고 나머지는 불사르도록 하였습니다.

    이렇게 모든 의식을 마치고 아론과 그의 아들들은 제사장이 되었습니다. 성막은 아무나 다가설 수 있는 곳이 아니었습니다. 거룩한 영역을 침범하는 자는 죽임을 당하였습니다. 아론과 그의 아들들은 거룩한 제사 의식을 수행하기 위해 위험한 곳에서 일하였습니다. 이곳은 삶과 죽음이 교차하는 곳이었습니다. 이제 이들은 그 안에서 머물 수 있는 안전한 통과가 주어졌습니다. 삶과 죽음 사이에 있는 제사장들은 거룩한 곳과 비거룩한 곳, 삶과 죽음 사이의 중보자로서 살게 된 것입니다.

    위임제는 제사의 종류가 아닙니다. 제사장을 세우는 위임식 제사를 의미합니다. 이 의식은 7일간 계속되었습니다. 제사장은 7일 동안 회막에서 나오지 못합니다(33,34). 성막에는 의지나 쉴 곳이 없다는 것이 특징입니다. 7일 동안 그들은 편히 누워서 잠도 못 자고 철야를 하면서 지냈을 것입니다. 매일 수송아지 한 마리로 속죄제를 드리고, 아침저녁으로 어린양 한 마리씩으로 번제와 소제를 겸하여 바쳤을 것입니다(출 29:36-39).

    이와 같이 7일 동안 위임식이 거행된 것은 제사장의 직분이 얼마나 거룩하고 큰 직분인가를 알 수 있습니다. 후일에 대제사장은 최고의 권위자로 나타납니다.

    그러나 인간의 중보자는 영원하지 못하다는 흠이 있습니다. 죽을 수밖에 없는 인간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보내주신 영원히 살아 계신 대제사장이 계십니다. 그분이 바로 우리의 구주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히브리서 4:14-16
    그러므로 우리에게 큰 대제사장이 있으니 승천하신 자 곧 하나님 아들 예수 시라 우리가 믿는 도리를 굳게 잡을지어다.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 연약함을 체휼하지 아니하는 자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한결같이 시험을 받은 자로되 죄는 없으시니라. 
    그러므로 우리가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

    우리의 대제사장이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가시는 우리 성도님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__________________ 레위기 8장 / 제사장 위임식

    03-17-2023(금) 사순절 제21일


    내용개요
    본장에서부터는 제사를 전담할 제사장의 위임식에 관한 기록이 나타난다.
    출애굽기 29장을 통해 제사장의 임명이 이루어졌으나 이제 성막이 완성되고 제사에 관한 규례가 완성된 시점에서 본격적인 제사장의 활동이 시작되고 있다.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아론 일가에 대해 제사장 위임식을 거행하도록 명하셨다(1-9절).
    이에 모세는 아론과 그 아들들에게 관유를 붓고 위임식을 위해 속건제와 번제, 화목제를 드렸다(10-29절).
    그 후에 아론 일가는 성막 안에서 칠 일을 지내며 위임식 행사를 함으로 제사장 취임의 모든 준비를 끝냈다(30-36절).


    강해
    레위기 8장은 출애굽기 29장에 기록된 모세의 규정을 전제하며, 레1-7장까지의 모든 제사 규정을 성취한 내용입니다.
    특히 본장은 아론과 그의 자손들이 제사장으로 성별되는 위임식에 대해 자세히 언급하고 있습니다.
    이 제사장 위임식은 이미 모세가 시내 산에서 지시받은 규례로 제사 제도가 규정되기 전에는 시행될 수 없었기 때문에 유보되다가 성막이 건립되고 제사 제도가 완비된 후에 시행되게 된 것입니다

    신학주제
    위임식 제사의 의미는 제사장이 갖는 중요한 위치를 나타낼 뿐 아니라 구속사에서 대제사장이신 그리스도를 예표한다는 점에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갑습니다.

    먼저 기름 부음의 예식으로 성경에서 기름 부음을 받을 수 있는 신분은 왕과 제사장 그리고 선지자와 같이 하나님의 대리인으로 특별한 역할을 담당한 자에게만 가능합니다.
    이런 의미에서 예수 그리스도는 곧 세상의 왕이며 죄를 대속하실 대제사장이시며 복음을 전할 선지자로 오실 것임을 예표한다고 하겠습니다.
     
    또한 속죄제는 대속 의식을 담당할 제사장이 먼저 성결해야 함을 가리키며 순결하신 그리스도를 예표합니다.

    번제는 제사장이 먼저 하나님께 대한 철저한 헌신을 맹세하는 것으로, 자신을 대속의 제물로 바친 그리스도의 희생을 예표합니다.

    그리고 화목제는 백성들과 하나님 사이를 중재하기 위해 제사장이 먼저 하나님과 화평해야 함을 말하며, 대속으로 인간과 하나님 사이를 화해시킨 그리스도의 사역을 예표합니다.

    영적교훈
    자신을 대속 제물로 드림으로 모든 희생 제사를 완성하신 그리스도를 힘입어 오늘날 모든 성도들은 하나님의 제사장이 되었습니다(벧전 2:9).

    오직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데서 불러 내어 그의 기이한 에 들어가게 하신 자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따라서 본장에 나타난 제사장 규례는 영적 제사장인 성도들에게도 해당된다고 하겠습니다.
    죄악 된 세상을 향하여 복음을 전파해야 할 성도들은 먼저 자신이 하나님 앞에 바로 서야 하며 맡겨진 사명을 위해 전적으로 헌신하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또한 언제나 하나님을 사랑하고 기뻐하는 자가 될 때 자신의 삶을 통해 죄악으로 더러워진 세상을 정결케 하는 제사장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__________________ 레위기 7장 / 제사법에 대한 추가 법규

    03-16-2023(목) 사순절 제20일

    레위기 7장 내용 분해

    1-10.   속건제의 규례
    11-34. 화목제 희생의 규례
    * 22-27. 기름과 피를 먹지 말라
    35-38. 제사법의 부언

    본장은 다섯 가지 제사에 대한 최종 결론으로 희생 제물에 관한 처리 규정과 제사장의 분깃에 대해 말씀합니다.
    속건제와 속죄제의 제사 규례와 제사장의 분깃에 대한 설명(1-10절)
    화목제 희생 고기에 관한 규례와 제사장의 분깃에 대한 설명(11-34절)
    특히 부정한 자는 화목제 희생 고기를 먹지 못하게 하는 금령이 강조됩니다.
    하나님은 이 제사에 관한 규례를 이스라엘 자손 대대로 지ㅣ라고 말씀합니다(35-38절)
     
    레위기 7장에는 6장에 이어 속건제 및 화목제의 규례가 언급되어 있으나, 이 제사들에 있어서 제사장의 몫과 그 제물을 먹는 규례가 언급되어 있습니다.
    특히 제사 제도에 대한 규정이 주는 의미는 하나님께 제사하는 모든 일이 매우 중요하다는 것을 우리에게 가르쳐 줍니다.


    구약 제사의 현대적 의미

    하나님의 임재를 나타내는 성막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삶의 중심이며 생명의 근거이다.
    따라서 하나님의 임재에 상응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헌신을 표시하는 제사는 공동체의 핵심적인 행위이다.
    제사는 하나님과 이스라엘을 하나로 묶고 축복과 충성을 약속하는 증표인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구약에 나타난 제사는 비록 현대에 이르러 그 형식은 사라졌다 할지라도 내용은 여전히 유효한 것이다.
    끊임없는 희생 제물을 요구하는 제사는 자신의 몸을 단번에 드려 모든 희생 제사를 완성시키신 그리스도에 의해 폐기되었다.
    그러나 매일의 삶 속에서 자신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산 제사로 드리는 영적 제사는 성도들이 드려야 할 제사 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구원에 대한 전적인 헌신을 표시하는 구약 제사의 영적 계승이며, 그것을 통한 속죄와 축복은 현대의 성도들에게도 여전히 유효한 것이다.

    본장에서 부정한 자는 화목 제사의 제물을 먹지 못하게 금하고 있다.
    원래 화목 제물은 공동 식사를 통해 모두가 나눠 먹도록 되어 있다.
    그러나 부정한 자는 참여하지 못하는 것이다.
    이는 단순히 음식을 먹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화목 제물이 뜻하는 하나님과의 친교와 축복에 들어가지 못함을 의미한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거룩하시므로 죄 있는 자와 함께 하지 않으시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비록 구원받은 성도라 할지라도 범죄한 자는 하나님의 축복을 얻지 못함을 교훈해 준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언제나 자신을 돌아보아 죄에 빠지지 않도록 조심하며 죄를 지었을 때 지체 말고 하나님께 회개함으로 축복받는 자가 되어야 한다.

    속건제에 관한 규정

    7 “허물을 속하는 속건제에 관한 규정은 이렇다:

    속건제의 제물은 대단히 거룩한 것이므로 제단 북쪽의 번제물을 잡는 곳에서 잡아야 한다. 제사장은 그 피를 받아 단 사면에 뿌리고

    내장을 덮고 있는 모든 기름과 기름진 꼬리와

    두 콩팥과 그 위에 덮여 있는 허리 부분의 기름과 간에 덮여 있는 간 꺼풀을 떼어내어

    제사장은 이 모든 것을 제단에서 불로 태워 나 여호와에게 화제로 바쳐야 한다. 이것이 허물을 속하는 속건제이다.

    이 제물은 매우 거룩한 것이므로 거룩한 곳에서 제사장들만 먹도록 하라.

    “속죄제와 속건제에 다 같이 적용되는 규정은 이렇다. 그 제물의 고기는 제사를 드리는 제사장의 몫이다.

    번제물을 드리는 제사장이 그 제물의 가죽을 갖도록 하라.

    화덕에 구운 소제물과 솥이나 철판에서 만든 소제물은 그것을 드린 제사장의 몫이다.

    10 이 밖의 모든 다른 소제물은 기름을 섞은 것이든 마른 것이든 모든 제사장들이 똑같이 나눠 먹어야 한다.”

    화목제에 관한 규정

    11 “나 여호와에게 드릴 화목제의 규정은 이렇다:

    12 만일 사람이 화목제를 감사하는 마음으로 드리고자 하면 그는 누룩을 넣지 않고 기름을 섞어서 만든 빵과 누룩을 넣지 않고 기름을 발라 얇게 구운 과자와 고운 밀가루에 기름을 섞어 만든 과자를 감사의 희생제물과 함께 드려야 하며

    13 또 누룩을 넣고 만든 빵도 화목제의 그 감사제물과 함께 드려야 한다.

    14 그리고 각 예물 중에서 하나씩 제단 앞에서 들어올려 나 여호와에게 바친 다음 그것을 화목제의 피를 뿌린 제사장에게 주도록 하라.

    15 감사하는 마음으로 드린 화목제물의 고기는 그 날에 다 먹어야 하며 다음날까지 조금도 남겨 두어서는 안 된다.

    16 “그러나 만일 누가 감사의 예물이 아닌 서약이나 자원의 예물로 화목제를 드리면 제사장은 제사를 드린 그 날에 그 제물을 먹어야 하지만 남은 것이 있으면 다음날까지도 먹을 수 있다.

    17 그렇지만 3일째까지 남은 것은 전부 불로 태워야 한다.

    18 만일 3일째 되는 날에 그 화목제물의 고기를 조금이라도 먹으면 나 여호와는 그 제사를 받지 않겠다. 그것은 제물로서의 가치를 잃어버렸기 때문에 그 제물을 드린 자에게도 아무런 유익이 없고 오히려 더러운 것이 되고 만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그 제물을 먹는 자는 그 죄의 대가를 마땅히 받아야 할 것이다.

    19 “만일 그 제물의 고기가 부정한 것에 접촉했으면 그것을 먹지 말고 불로 태워 버려라. 이 화목제물의 고기는 의식상 깨끗한 자만 먹을 수 있다.

    20 그러나 부정한 자가 나 여호와에게 바친 이 화목제물의 고기를 먹으면 그는 자기 백성 가운데서 제거될 것이다.

    21 만일 사람의 부정이든 부정한 짐승이든 무엇이든지 부정한 것을 만진 후에 나 여호와에게 바친 화목제물의 고기를 먹는 자는 자기 백성 가운데서 제거될 것이다.”

    기름과 피는 먹지 못한다

    22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셨다.

    23 “너는 소나 양이나 염소의 기름을 먹지 말라고 백성들에게 일러라.

    24 저절로 죽은 동물이나 맹수에게 찢겨 죽은 동물의 기름이 다른 목적을 위해서는 쓰일 수 있으나 너희가 그것을 먹어서는 안 된다.

    25 누구든지 나 여호와에게 불로 태워 바친 희생제물의 기름을 먹는 자도 자기 백성 가운데서 제거될 것이다.

    26 새의 피든 짐승의 피든 피는 절대로 먹지 말아라.

    27 무슨 피든지 피를 먹는 자는 자기 백성 가운데서 제거될 것이다.”

    제사장들의 몫

    28 여호와께서 다시 모세에게 말씀하셨다.

    29 “누구든지 나 여호와에게 화목제물을 드리려고 하는 자는 자기 손으로 직접 그 제물을 가져오라고 백성들에게 말하라.

    30 그 사람은 그 제물의 기름과 가슴을 나 여호와에게 가져올 것이며 제사장은 그 가슴을 제단 앞에서 흔들어 요제로 나 여호와에게 바치고

    31 그 기름을 단에서 불로 태운 다음 그 가슴은 아론과 그 자손들에게 주어야 한다.

    32-33 그리고 그 제물의 우측 뒷다리는 들어 올려 나 여호와에게 거제로 드린 다음 그 화목제물의 피와 기름을 드리는 제사장이 갖도록 하라.

    34 이스라엘 백성들이 드리는 화목제물 중에서 흔들어 바친 가슴과 들어올려 바친 뒷다리는 내가 제사장들에게 주었으므로 이것은 항상 그들이 차지해야 할 몫이다.

    35 나 여호와에게 불로 태워 바친 이 제물 중에서 가슴과 우측 뒷다리는 아론과 그 자손들이 제사장으로 위임되던 그 날에 그들의 몫으로 정해진 것이다.

    36 그들이 위임되던 날에 나 여호와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이것을 그들에게 주라고 명령하였다. 그러므로 이것은 그들이 대대로 차지할 몫이다.”

    37 이것은 번제와 소제와 속죄제와 속건제와 위임제와 화목제에 관한 규정으로

    38 여호와께서 시나이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제물을 드리라고 명령하신 그 날에 모세에게 말씀하신 것이다.


    __________________ 레위기 6장 / 죄가 드러나는 날

    죄(罪) - 넉 사(四) + 아닐 비(非)
    하마르티아(
    hamartia) ἁμαρτία

    불법(不法) 요한일서 3:4
    불의(不義) 요한일서 5:17
    불선(不善) 야고보서 4:17
    불신(不信) 요한복음 16:9, 마가복음 16:16

    ἁμαρτία, ίας, ἡ  266

    1. 죄.
    2. 고린도후서 11:7 / 내가 너희를 높이려고 나를 낮추어 하나님의 복음을 값없이 너희에게 전함으로 죄를 지었느냐
    3. 요한복음 9:41 / 께서 가라사대 너희가 소경 되었더면 죄가 없으려니와 본다고 하니 너희 죄가 그저 있느니라
    발음 / 하마르티아(hamartia)
    어원 / 264에서 유래
    관련 성경 / 죄(요 8:21, 롬 5:20), 불법(살후 2:3), 죄악(히 11:25).
    신약 성경 / 173회 사용

    * 264. ἁμαρτάνω 

    1. 하나님의 종교적 도덕적 법을 어기고 잘못하다.
    2. 죄를 범하다
    발음 / 하마르타노(hamartanō)
    어원 / [기본형] 미래 ἁμαρτήσω, 제2부정과거 μάρτω, 가정법 ἤμαρτον, 제1부정과거 ἡμάρτησα, 가정법 ἁμαρτή- σω, 과거분사 ἁμαρτήσας, 1[부정불변사]과 3313의 어간에서 유래
    관련 성경 / 죄를 범하다(마 18:15), 죄를 짓다(눅 15:18, 롬 6:15), 죄로 인하다(요 9:2), 범죄하다(롬 2:12), 죄가 있다(벧전 2:20).
    신약 성경 / 43회 사용







    ♦  3월 15일(수) 사순절 제19일

    ♦ 오늘 읽어야 할 말씀 : 레위기 6:1∼30
    ♦ 묵상을 위한 주제 : 죄가 드러나는 날(5절)
    ♦ 성구 : 무릇 그 거짓 맹세한 물건을 돌려보내되 곧 그 본물에 오분 일을 더하여 돌려보낼 것이니 그 죄가 드러나는 날에 그 임자에게 줄 것이요.  

    레위기 6장은 1장에서부터 5장에 언급된 다섯 가지 제사의 결론이라고 하겠습니다.

    6장의 내용을 분해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6:1∼7. 재산권을 침해한 자가 드려야 할 속건제
    6:8∼13. 번제와 화목제
    6:14∼23. 소제
    6:24∼30. 속건제를 드리는 절차와 방법

    따라서 6장에서는 제사의 원인만이 아니라 절차와 방법까지 상세한 규례를 언급하므로 이스라엘 백성의 모든 삶이 전적으로 하나님의 뜻에 의해 이루어지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오늘 묵상할 주제는 “죄가 드러나는 날(the day the sin is revealed)”입니다.

    세상에는 두 종류의 죄인뿐입니다.
    첫째는 현장에서 간음 중에 붙잡혀 온 드러난 죄인입니다.
    둘째는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처럼 드러나지 않은 죄를 지니고 있는 죄인

    죄가 드러나지 않았다고 하여 죄가 작은 것도 아닙니다.
    성 프란시스는 “하나님은 얼마나 위대하시며 나는 그 앞에 얼마나 죄인인가를 좀 깨닫게 해주세요!” 라고 날마다 기도했다고 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모든 육체의 죄들이 밝히 드러나는 그 순간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먼저 내 안에 감추어진 죄를 자복해야 합니다.

    죄는 먼저 생각으로 시작합니다.
    마치 가룟 유다가 예수님을 팔아넘길 생각을 했던 것처럼.........
    이와 같이 사람은 먼저 죄를 생각하고 그 다음에 행동으로 옮깁니다.

    결국 우리가 죄를 짓는 것은 몸뿐만 아니라 몸을 사용하는 마음이라고 하겠습니다.

    예수님은 인류의 죄를 위해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임을 당하셨습니다.
    그 보혈의 공로로 인하여 주홍 같은 우리의 죄는 희어졌으며 동이 서에서 먼 것 같이 우리 죄과를 멀리 옮기셨습니다.
    마치 컴퓨터의 delete 삭제 버튼을 누른 것 같이 깨끗이 지워주셨습니다.
    죄인을 의인으로 여겨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내게 크게 다가오면 올수록 빛이신 예수 그리스도에게 다가가면 갈수록 우리의 죄에 대한 반응은 더욱 더 예민해지게 됩니다.

    죄가 있던 그 자리에 그리스도의 영이신 성령이 자리를 잡으면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계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새로운 생명의 삶을 누릴 수 있습니다.

    오늘도 보혈을 지나 하나님 품에서 행복한 믿음의 주인공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주와 동행 365 제74일 읽어야 할 말씀
    신명기 26∼27장
    마가복음 14:27∼53

    ♪ 찬양 / 예수로 나의 구주 삼고


    예수 내 구주!
    예수 내 생명!
    예수 내 권세!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레위기의 목표

    1. 거룩한 나라
    2. 거룩한 백성

    레위기 / 27장, 859절
    히브리어 명칭 : 와이크라(그리고 그가 부르셨다)
    목표 : 제사장 나라, 거룩한 백성
    내용 분해 :

    1장- 16장 / 거룩한 길, 하나님께 나가는 방법, 성소를 중심한 제사법전
     
    1-7, 제사 규례
      8-10, 제사장 규례
      11-16, 결례 규례

    17장-27장 / 거룩한 삶,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는 방법, 공동체 생활을 배경으로 전개되는 성결법전
     
    17, 제사를 통한 거룩
      18-22, 가정과 사회를 통한 거룩
      23-25, 절기를 통한 거룩
      26, 축복과 저주를 통한 거룩
      27, 서원을 통한 거룩

    해리슨(Harrison)
    레위기는 기독교 신앙과 교리의 기초를 다루는 가장 중요한 말씀이다. 









    제사 드리는 방법에 따른 분류

    1. 요제(Wave Offering, 테누파) 8573. תְּנוּפָה

    1. 흔듦
    2. 손을 내두름
    3. 특별의식. ׃חֲזֵה תְנוּפָה 흔들어 드리는 제물
    발음 / 테누파(tenûwphâh)
    어원 / 5130에서 유래
    관련 성경 / 요제(출 29:24, 레 7:30, 민 6:20), 요제물(출 29:27, 민 18:11). [동] 흔들다(레 7:34, 민 6:20, 사 19:16).
    구약 성경
    30회 사용
    농산물을 제물로 드릴 때 사용하는 제사 방법이다.

    히브리어 '테루마'는 "앞뒤로 움직이다", "흔들다"는 뜻의 히브리어 동사 '노프'의 힢일형에서 유래된 말이다.
    탈굼에서는 이 단어를 "일어서다", "들어 올리다"는 동작을 나타내는 의미로 해석하였다.
    마쏘라 사본에서는 이 동사의 힢일형이 "들어 올리다"는 의미와(사 10:15) "흔들다"는 의미로(사 19:16) 모두 사용되었다.

    제물을 드리는 방법에는 화제, 거제, 요제, 전제가 있었는데, 요제는 그 중 하나였다.
    제사의 종류는 번제, 속죄제, 속건제, 화목제, 소제가 있었다.

    요제로 드려진 제물들은 다음과 같다.
    곧 화목 제물로 드려진 동물의 가슴 부분(레 7:30, 9:21,10:14-15,민 6:20,18:18),
    성막 장식용으로 바쳐진 보석류(출 35:22, 38:24),
    위임식 수양의 가슴과 넓적다리 부분(29:22-26, 레 8:25-29),
    칠칠절에 드린 누룩 넣은 빵과 곡식의 첫 열매와 어린 양 두마리(23:11-14, 17, 20),
    문둥병의 정결예식에 사용된 어린 수양과 감람유(14:12, 24)등이다.

    여러 종류의 제물들을 한꺼번에 요제로 드린 경우도 있었던 것 같다(출 29:22-24, 레 8:25-27).
    또한 요제는 '순결을 판단하기 위한 소제' 때에도 사용되었다(민 5:25).

    민수기 8:11,15, 21절에서 아론은 '이스라엘 자손을 위한 요제'로 레위인을 여호와께 드렸다고 나타나 있다.
    요제는 하나의 의식 행위였으며, 요제로 인하여 제물들이 여호와께 헌납되었다.
    그러나 요제의 정확한 의미와 성격은 명백히 밝혀져 있지 않다.
    아마도 요제를 드릴 때는, 먼저 제사장이 봉헌자의 손바닥 위에 요제물을 얹어 놓은 다시 봉헌자의 손에서 제사장의 손으로 옮겨 놓고 제사장이 앞뒤로 흔드는 절기를 따랐던 것 같다(민 6:19-20).
    제사장이 자신의 예물을 요제로 드릴 때는 요제물을 처음부터 자기 손바닥 위에 올려놓고 흔들었을 것이다.

    요제물을 앞으로 내미는 행동은 여호와께서 제물을 다시 제사장에게 주는 것을 의미한다.

    2. 거제(擧祭, Offering, 테루마) 8641. תְּרוּמָה 

    1. 헌납
    2. 요제
    발음 / 테루마(terûwmâh)
    어원 / 7311에서 유래
    관련 성경 / 제물(출 25:2, 삼하 1:21), 요제물(출 29:27), 성물(레 22:12, 민 5:9), 예물(출 36:3, 신 12:17, 겔 20:40), 거제(민 15:19, 신 12:6, 느 10:39), 거제물(민 18:8, 느 12:44), 뇌물(잠 29:4), 봉헌물(말 3:8)
    구약 성경 / 76회 사용

    제물을 들어서 제사 드림. 제물을 번제단 위에 높이 들어올렸다가 아래에 내려놓는 제사로, 하나님께 바쳤다가 제사장이 다시 하나님으로부터 받는 것을 의미하는 데서 생겨났다(레 7:14,민 15:19, 신 12:6)


    ​3. 화제(火祭, Fire Offering, 이솨) 801. אִשָּׁה 

    1. 희생
    2. 이 단어는 모든 종류의 희생 제물을 나타내는 데 사용되며 특히 종교적 의식을 나타내는 문구에서 빈번하게 사용된다
    발음 / 이솨(’ishshâh)
    어원 / 784에서 유래
    관련 성경 / 화제(火祭)(출 29:18, 레 8:21, 민 15:3, 출 30:20, 레 7:5, 민 29:6), 화제물(레 4:35, 신 18:1, 수 13:14)
    구약 성경 / 65회 사용




    4. 전제(奠祭, Drink Offering, 네쉐크) 5262  נֶסֶךְ 

    1. 전제
    2. 주상
    발음 / 네쉐크(neçek)
    어원 /  5258에서 유래
    관련 성경 /  전제물(창 35:14, 민 6:15), 전제(출 29:40, 왕하16:13, 욜 1:13). [동] 붓다(민 4:7), 부어 만들다(사 41:29, 렘 10:14, 51:17).
    구약 성경 / 21회 사용









    창세기 - 선택(12:1-2)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너는 복이 될지라.
    The LORD had said to Abram, "Leave your country, your people and your father's household and go to the land I will show you.
    I will make you into a great nation and I will bless you; I will make your name great, and you will be a blessing. 

    출애굽기 - 구원(3:10)(19:5-6)     

    3:10. 이제 내가 너를 바로에게 보내어 너에게 내 백성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게 하리라.               
    So now, go. I am sending you to Pharaoh to bring my people the Israelites out of Egypt.

    19:5-6.  세계가 다 내게 속하였나니 너희가 내 말을 잘 듣고 내 언약을 지키면 너희는 모든 민족 중에서 내 소유가 되겠고.
                      너희가 내게 대하여 제사장 나라가 되며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 너는 이 말을 이스라엘 자손에게 전할지니라.
         Now if you obey me fully and keep my covenant, then out of all nations you will be my treasured possession. Although the whole  
         earth is mine,
         you will be for me a kingdom of priests and a holy nation.' These are the words you are to speak to the Israelites."

    레위기 - 성화(11:44-45), 베드로전서 1:15-16

    나는 여호와 너희의 하나님이라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몸을 구별하여 거룩하게 하고 에 기는 길짐승으로 말미암아 스스로 더럽히지 말라.
    나는 너희의 하나님이 되려고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여호와라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
    I am the LORD your God; consecrate yourselves and be holy, because I am holy. Do not make yourselves unclean by any creature that moves about on the ground.
    I am the LORD who brought you up out of Egypt to be your God; therefore be holy, because I am holy.

    베드로전서 1:15-16
    오직 너희를 부르신 거룩한 이처럼 너희도 모든 행실에 거룩한 자가 되라.
    기록되었으되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 하셨느니라.
    But just as he who called you is holy, so be holy in all you do;
    for it is written: "Be holy, because I am holy.

    거룩(聖) / 날마다 그리스도를 닮아가려는 것
    1. 신분의 거룩(중생, 거듭남)
    2. 심판의 거룩(마지막 날 그리스도와 함께)
    3. 일상의 거룩(경험과 실천적 거룩)

    성(聖) = 귀 이(耳) + 입 구(口) + 북방 임(壬)<크다>  / 맡길 임(任) <맡기다>
    속(俗) = 풍속 속(俗) / 사람 인(人) + 굴곡 곡(谷) <막히다>

    민수기 - 연단(21:8)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불뱀을 만들어 장대 위에 매달아라 물린 자마다 그것을 보면 살리라.
    The LORD said to Moses, "Make a snake and put it up on a pole; anyone who is bitten can look at it and live.


    신명기 - 경고(6:4-5)

    이스라엘
    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유일한 여호와이시니.
    너는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
    Hear, O Israel: The LORD our God, the LORD is one.
    Love the LORD your God with all your heart and with all your soul and with all your strength.

     
    오경의 5P

    창세기 / 계획(Plan)
    출애굽기 / 통과(Pass)
    레위기 / 목적(Purpose)
    민수기 / 백성들(People)
    신명기 / 선물(Present)

    거룩(聖과 俗)

    거룩(카도쉬)
    1. 소극적 의미의 거룩  :  정결
    - 죄를 멀리하는 것

    2. 적극적 의미의 거룩  :  분별(구별)
    - 구별할 줄 아는 것

    고린도전서 10:31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
    So whether you eat or drink or whatever you do, do it all for the glory of God.

    로마서 14:8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라.
    If we live, we live to the Lord; and if we die, we die to the Lord. So, whether we live or die, we belong to the Lord.

    5대 거룩

    1. 거룩한 하나님(레위기 19:2)

    너는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에게 고하여 이르라 너희는 거룩하라 나 여호와 너희 하나님이 거룩함이니라.
    Speak to the entire assembly of Israel and say to them: 'Be holy because I, the LORD your God, am holy.

    - 요한일서 1:5, 하나님은 빛(어두움은 죄)


    2. 거룩한 제사장(레위기 21:4)

    제사장은 백성의 어른인즉 스스로 더럽혀 욕되게 하지 말지니라.
    He must not make himself unclean for people related to him by marriage, and so defile himself.


    3. 거룩한 땅(레위기 18:27,  20:24)

    너희의 전에 있던 그 땅 거민이 이 모든 가증한 일을 행하였고 그 땅도 더러워졌느니라.
    for all these things were done by the people who lived in the land before you, and the land became defiled.

    내가 전에 너희에게 이르기를 너희가 그들의 땅을 기업으로 얻을 것이라 내가 그 땅 곧 젖과 이 흐르는 땅으로 너희에게 주어 유업을 삼게 하리라 하였노라 나는 너희를 만민 중에서 구별한 너희 하나님 여호와라.
    But I said to you, "You will possess their land; I will give it to you as an inheritance, a land flowing with milk and honey." I am the LORD your God, who has set you apart from the nations.

    4. 거룩한 백성(레위기 10:10)

    그리하여야 너희가 거룩하고 속된 것을 분별하며 부정하고 정한 것을 분별하고.
    You must distinguish between the holy and the common, between the unclean and the clean.
    - 분별하는 것


    5. 거룩한 구세주(히브리서 10:1)

    율법은 장차 오는 좋은 일의 그림자요 참형상이 아니므로 해마다 늘 드리는바 같은 제사로는 나아오는 자들을 언제든지 온전케 할 수 없느니라.
    The law is only a shadow of the good things that are coming--not the realities themselves. For this reason it can never, by the same sacrifices repeated endlessly year after year, make perfect those who draw near to worship.



    파루스의 승리


    BC 3세기, 그리스 북부에 피루스라는 왕이 있었습니다.
    그는 전쟁 전문가로 주변에 많은 나라를 정복한
    풍부한 경험과 강한 군사력을 가지고 있어
    로마에도 전쟁을 선포했습니다.

    하지만, 피루스의 신하인 키네아스는
    로마와의 전쟁이 국력을 크게 소모할 것으로 생각해
    왕을 찾아가 말했습니다.

    "폐하, 로마와 전쟁을 해서 이긴 다음에는
    무엇을 하실 것입니까?"

    "우리가 로마 전체를 지배하게 된다."

    그리고 왕은 시칠리아, 아프리카 북부 카르타고에 이어
    마케도니아 전역을 지배할 수 있게 된다며 흥분하며 말했습니다.
    대답을 들은 뒤 키네아스는 '그다음에는?'이라는
    질문을 던지자 왕은 말했습니다.

    "키네아스, 주변의 나라들을 모두 정복하면
    우린 정말로 편히 앉아서 인생을
    즐길 수 있을 거라네."

    모든 정복에 성공한 뒤에야 편히 쉬겠다는
    왕의 대답에 키네아스는 답했습니다.

    "폐하, 원하는 것이 그것이라면 전쟁할 필요가 없습니다.
    우린 지금도 그렇게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피루스 왕은 키네아스의 말을 듣지 않고
    2만 5,000명의 군인과 20마리의 코끼리를 이끌고
    로마를 침공했습니다.

    격렬한 전쟁이 끝난 후,
    피루스 왕은 승리를 얻었지만, 코끼리는 다 죽고
    군인들도 4분의 3이나 죽어 남은 병력이
    얼마 되지 않았습니다.

    패배나 진배없는 승리를 표현할 때
    '피루스의 승리'라고 합니다.





    무모하게 계속되는 전쟁은
    아무리 노력하고 수고해도 결국 돌아오는 것은
    패배뿐입니다.

    매우 소중한 것으로 생각했던 승리의 전유물이
    사실은 아무 쓸모없는 것으로 판명 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인생에서
    무엇이 헛되고 참된 것인지 깨닫고 분별하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 오늘의 명언
    물을 빤히 바라보는 것만으로는 바다를 건널 수 없다.
    스스로 헛된 바람에 빠지지 않도록 하라.
    - 존 포웰 -




    히브리어 / 아샴








    계약 법전 출애굽기 20:22-23:33 
    신명기 법전 신명기 12:1-26:16
    성결 법전 레위기 17:1-26:46


    절기를 가리키는 히브리어는 '하그'와 '모에드'다. 하그는 '춤춘다' '순환한다'는 의미다. 매년 그맘때가 되면 예외 없이 절기가 돌아오며 주기적으로 순환하는 속성을 두고 불리는 명칭이다. 축제의 성격을 띠고 있기에 축제의 기본 요소인 춤춘다는 단어가 사용된 것이다. 모에드는 '특별하게 정해진 시간'을 가리킨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정하신 '모에드'에 따라 공생애 사역을 하셨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여자여 나와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내 때가 아직 이르지 못하였나이다"(요 2:4)

    성경은 이 절기를 '여호와의 절기'라고 밝힌다(레 23:2). 이스라엘 민족의 절기가 각 민족의 절기와 근본적으로 다르다. 왜 그럴까?

    첫째, 이스라엘의 절기는 여호와 하나님이 직접 제정하셨다. 따라서 과장이나 꾸밈, 조작이 있을 수 없다. 하나님의 특별한 목적이 드러나기 때문이다.

    둘째, 사건과 절기의 순서가 다르다. 즉, 다른 민족의 절기는 사건이 발생한 뒤 그 사건이 일어난 날짜를 기념해 생겨났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경우 먼저 절기가 만들어지고 그것에 맞춰 사건이 발생했다. 이스라엘 최대 절기인 유월절을 예를 들어보면 확연히 알 수 있다.

    하나님은 애굽에 대한 10가지 재앙 중 마지막 '장자의 죽임'이 임할 날짜를 이스라엘 민족에게 미리 알려주셨다. 그리고 재앙을 피할 수 있도록 집집마다 양을 잡아 그 피를 인방과 설주에 바르도록 하셨다. 죽음의 신이 이스라엘의 집에 넘어가도록 정하셨고 이를 유월절로 제정하신 것이다.

    레위기 23장엔 이스라엘의 7개 절기가 언급돼 있다. 유월절, 무교절, 초실절, 칠칠절, 나팔절, 대속일, 초막절 등. 이는 하나님이 진행하실 인류 구속사의 파노라마를 보여준다. 절기에는 하나님의 구속의 경륜과 프로그램이 암호화돼 있다.

    유월절은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

    무교절은 그리스도의 친교

    초실절은 그리스도의 부활

    칠칠절(오순절)은 그리스도와 성령의 임무 교대

    나팔절은 그리스도의 강림

    대속죄일은 그리스도의 속죄

    초막절은 그리스도의 심판


    여호와의 3대 절기와 이스라엘의 농사

    1. 여호와의 3대 절기

    이스라엘의 농사는 하나님의 농사의 그림자이다. 또한 농사의 목적은 알곡을 수확하기 위함이듯이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을 경작하시는 목적은 하나님 나라의 아들들을 얻기 위하심이다(고전9:10). 세상농사의 종류가 다양하듯이 하나님의 농사에도 여러 종류가 있어서 각 시대별로 다른 복음의 씨가 뿌려진다(눅16:16). 또한 농사의 끝에는 부활을 의미하는 추수의 때가 있다(계14:6-7).

    여호와의 3대 절기는 하나님의 3가지 농사를 예표한다. 여호와의 3대 절기로는 출23:14-16에서와 같이 '무교병의 절기'와 밭에 뿌린 것의 첫 열매를 거두는 '맥추절'과 연종에 모든 수확을 거두어 저장하는 '수장절'이다.

    <무교절, 유월절>

    · 무교절은 율법시대를 예표한다.

    · 율법시대는 애굽에서 마지막 유월절날 어린양의 피를 문설주에 바름으로 시작되었고, 어린 양이신 예수그리스도께서 유월절날 십자가에서 피를 흘리심으로 마감되었다.(출12:7-11, 요13:1)

    · 또한 주님은 삼일 후 초실절날 약속에 따라 부활의 첫 열매로 사망권세를 이기시고 무덤에서 일어나셨다(고전15:23).

    <맥추절, 칠칠절, 오순절>

    · 맥추절은 교회시대를 예표한다.

    · 교회시대의 농사는 주님께서 부활하신 후 50일째가 되던 오순절날 성령께서 하늘로부터 내려오심으로 시작되었다(행2:1-3). 또한 교회시대는 밭에 뿌린 것의 첫 열매를 거두는 의미의 맥추절에 성령의 첫 열매(롬8:23,약:18,계14:4)가 하늘로 수확됨으로서 마쳐질 것이다.

    · 마13:39에서 추수 때는 세상 끝이요, 추수 때에는 추수꾼을 보내어 가라지는 불사르고 알곡(영어성경은 '밀'로 표현됨)은 곳간에 거두어진다(마13:30).

    <수장절, 초막절, 장막절>

    · 수장절은 천년왕국시대를 예표한다.

    · 연종에(세상나라의 끝) 모든 농사의 작물을 거두고 초막을 짓고 일주일동안 안식을 하게 된다. 또한 이 절기는 출애굽한 조상들이 광야에서 초막생활을 한 것을 기념하는 의미로 행하여진다(레 23:39-43). 초막은 결핍이나 초라함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여호와의 특별한 보호와 지켜주심을 의미한다(시27:5).

    · 일시적인 광야생활을 지나 약속의 땅에 들어가 안식하였던 것과 같이 일시적인 천년왕국 후에는 영원시대가 도래하게 된다. 광야에 거할 때 바위에서 물이 솟아 나오고 불기둥이 그들을 비쳐주었지만 영원한 약속의 땅에서는 하나님의 보좌로부터 발원하는 생명수가 있을 것이며(계22:1-2) 어린양이 우리를 비추어주는 등불이 되어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낼 것이다(계21:23).

    2. 이스라엘의 농사의 4가지 주요작물

    이스라엘의 농사는 하나님의 농사를 예표한다. 이스라엘의 농사에는 4가지 주요 작물이 있다(대하2:15, 계6:6). 이는 보리, 그리고 기름포도주이다.

    <보리와 밀; 곡물농사>

    · 곡식농사보리와 밀이 있으며 보리는 가난한 자를 위한 것으로서 밀의 대용작물 혹은 그림자에 해당한다. 또한 보리농사는 율법시대를, 밀농사는 교회시대를 예표한다. 주님께서는 초실절에 보리농사의 첫 열매로 부활하셨고 성령의 첫 열매는 밀농사의 첫 열매(출34:22)가 거두어지는 맥추절에 있을 것이다(출23:16).

    · 또한 추수시기별로 구분해 볼 때 추수를 시작할 시기에 얻는 첫 열매본격추수기와 추수가 끝날 무렵의 이삭줍기추수가 있다 (출23:19, 룻2:23).

    · 여호와께서는 곡물의 첫 열매에 관한 제사의 방법을 지시하실때 곡물에 따라 다른 방법을 주셨다. 보리의 첫 열매는 첫 이삭 한 단을 제사장께 가져가 요제로 드리고(레23:10-12), 50일이 지난 후 밀의 첫 열매는 가루를 내어 누룩을 넣어 떡 두 개를 만들어 제사장에게 드려 여호와께 요제로 드려야 한다(레 23:16-17, 20).

    · 또한 레23:22에서는 밀을 추수할 때 모퉁이까지 다 베지 말며 또 떨어진 것을 줍지 말라고 하셨다. 이는 가난한 자와 객을 위한 것으로 남기라 하셨으니 이는 이삭줍기 추수에 해당하는 것이다. 이와 같이 레위기 23장에서는 밀 추수의 3종류를 언급하였지만 보리는 오직 첫 열매만 언급이 되어 있음을 기억하자.

    <포도와 올리브; 열매농사>

    · 포도주틀은 주님께서 재림하신 후 행하시는 악인에 대한 심판을 의미한다(사63:3, 욜3:13, 계14:20).

    · 올리브 농사는 이스라엘의 농사중 마지막 작물이다. 또한 올리브 열매에서 얻어지는 감람기름의 주목적은 태워져 빛을 발함이다. 광야시절 여호와의 장막 안에는 감람유 등불은 항상 빛을 발하였다. 마지막 농사인 감람열매는 천년왕국의 농사 즉 영원한 복음의 열매인 것이다. 광야의 장막 안 등대에서는 감람유가 항상 태워져 여호와의 영광을 나타냈듯이 영원한 복음은 "여호와께 영광을 돌리며 만물을 지으신 여호와를 경배하라"는 내용을 갖는다(계14:6-7).

    <작물별 추수시기>

    · 보리농사의 추수4-5월에 있다.

    · 밀농사의 첫 열매5-6월에 시작된다. 이후 추수기는 3개월 정도 지속되어 이삭줍기로 마쳐진다.

    · 포도의 수확8-9월에 있게 된다. 또한 포도주틀을 밟는 시기와 밀의 추수(타작마당)의 시기는 맞물린다(민18:27,30).

    · 올리브열매의 수확은 연종에 있어 9월 중순-11월 중순경이다. 올리브열매의 타작은 포도수확 이후에 있다(사24:13).

    위와 같은 모든 농사들이 끝나면 작물들은 거두어져 저장되고 다음해의 새 농사가 준비되는것 처럼, 영원한 복음을 끝으로 인간경작의 농사는 종결되고 새로운 시대인 새하늘과 새땅의 시대가 도래하게 되는 것이다.

    3. 곡물의 제사방법

    레위기 23장은 여호와의 절기에 대하여 상세한 규례를 소개한다. 그 중에서 보리농사의 첫 열매인 초실절(9-14절)과 밀농사에 해당하는 오순절(15-22절)에 대하여 살펴보자.

    <초실절>

    · 보리의 첫 이삭 한 단이 거두어져 제사장에게로 주어지며, 제사장은 안식일 이튿날 그 단을 여호와 앞에 열납되도록 흔들어 요제를 드린다.

    · 주 예수님께서는 초실절에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로 부활하셔서 하늘에 오르사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아 계신다(눅22:69,히12:2).

    <오순절>

    · 보리의 초실절 이후 50일을 계수하여 새 소제를 드리는데, 이는 밀의 첫 이삭(20절)을 빻아 고운가루로 만들고 누룩을 넣어 떡 두 개를 만들어 첫 요제로 여호와께 드린다(17절). 누룩으로 구워진 떡은 죄의 성정(누룩은 죄악을 상징함)을 지니고 있는 인간을 의미한다. 또한 떡 두 개는 이스라엘과 이방인을 대표한다.

    · 주님의 부활이후 50일째 날이었던 오순절 날에 120 문도에게 성령이 강림하심으로 교회시대의 농사가 시작되었다. 이제 밀농사의 추수 때가 이르러 성령의 첫 열매가 인류 가운데 처음으로 구속함을 입게 될 것이다(계14:4).

    · 율법시대가 출애굽시의 유월절에 시작하여 주님이 십자가에서 희생하신 유월절에 이중적으로 이루어진 것과 같이, 교회시대도 역시 2,000년 전 오순절 날에 성령강림으로 시작하여 어느 한 맥추절(오순절)날에 인류 가운데 첫 구속함을 받은 첫 열매(약1:18, 계14:4)가 거둠어 짐으로 이중적으로 이루어질 것이다.

    · 밀의 첫 열매는 보리의 첫 열매와 같이 여호와께 요제로 드려진다. 즉 성령의 첫 열매는 주님처럼 하나님의 보좌로 부활·휴거되어 대환난시에 하늘에서 거하는 자들(계12:12,13:6)이 되는 것이다. 이후 밀의 추수는 세상나라의 끝(마13:30,39) 시기에 주님이 구름을 타고 강림하실 때에(마24:29-30) 구름 위에서 낫을 휘두루매 곡식이 공중으로 거두어지는 것이다(계14:14-16, 살전4:14-17, 살후2:1-3,7-8).

    · 이스라엘에서는 농부가 사는 집과 밭의 중간지점에 곳간을 지어놓고 수확된 알곡을 곳간에 저장한다. 마찬가지로 교회시대의 알곡성도는 하늘과 지상의 중간지점인 공중으로 모이게 되는 것이다. 또한 밀의 이삭줍기 추수는 주님이 지상에 재림하셔서 이 세상의 모든 권세와 정사를 멸하신 후(고전15:23) 천년왕국이 시작되기 직전에 있게 된다. 땅에 남겨진 밭의 모퉁이와 떨어진 낱알들은 이삭줍기 추수로 거두어짐과 같이 늦게 익어진 성도는 땅에 남겨지나 천년왕국 직전 이삭줍기의 추수에 이기는 자로 부활·휴거되어 1,000년간 주님과 함께 열국을 통치하게 된다. 이와같이 알곡은 익는 순서에 따라 거두어지게 되는 것이다.

    주님은 자신을 광명한 새벽별이라 하셨다(계22:16). 일출 직전에 나타날 때 깨어 있는 자들만이 새벽별을 볼 수 있는 것처럼, 깨어 있는 성도들은 주님을 첫 열매의 자격으로 맞이할 수 있을 것이다. 어두운 때는 대환난기이며 일출은 천년왕국 시대인 것이다.






    피그말리온 효과 / 교사기대효과, 로젠탈효과, 실험자효과 

    피그말리온 효과(pygmalion effect)는 교육심리학에서 심리적 행동의 하나로 교사의 기대에 따라 학습자의 성적이 향상되는 것을 말한다. 로젠탈 효과(Rosenthal effect), 교사 기대효과(Teacher expectancy effect), 실험자 효과라고도 한다.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조각가인 피그말리온은 조각에 심취하여 삶 전체를 조각에만 몰두하며 살았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피그말리온은 자신이 이상형으로 생각하는 여인을 조각상으로 만들고자 결심했습니다.
    그렇게 완성한 조각상은 너무나 완벽하고 아름다웠습니다.
    너무나 아름답게 조각된 조각상에 자신도 모르게 점점 빠져든 피그말리온은 차가운 조각상에 마치 살아있는 여인인 것처럼 진심으로 대했습니다.
    이것을 올림포스산 위에서 측은하게 지켜본 사랑과 미의 여신 아프로디테는 아들 에로스를 보내 조각상에 생명을 불어넣어 주었습니다.
    피그말리온은 사람이 된 아름다운 여인에게  '갈라테이아(Galatea)'라는 이름을 붙여주고 행복하게 잘 살았다고 합니다.

    이 이야기에서 유래된 심리학 용어로 '피그말리온 효과'가 있습니다.
    일이 잘 풀릴 것이라고 기대하면 잘 풀리고, 안 풀리겠다고 생각하면 정말 일이 잘 풀리지 않는다는 자기 충족적 예언(self-fulfilling prophecy)과도 같은 말이라고 합니다.


    번제단과 성막 뜰(출애굽기 27:1-21)  

    출애굽기 27:1-8
    번제단에 관한 규정

    구약에서 제사(祭祀)를 위한 세 가지 필수적인 요소가 있다.

    첫째는 제사장(祭司長) 코헨(kôhên) 3548 כֹּהֵן
    - 제사장, 대제사장

  • 관련 성경 / 제사장(창 14:18, 레 14:18, 대하 31:19, 스 6:9, 7:12, 24)
  • 구약 성경 / 752회 사용
  • 둘째는 제물(祭物) 제바흐(zebach) 2077  זֶבַח
    - 살륙, 희생,

    어원/ 2076에서 유래
    관련 성경 / 제사(창 31:54, 출 12:27, 민 15:5), 희생(창 46:1, 레 3:1, 신 12:11), 제물(레 19:6, 신 18:3), 제육(祭肉)(잠 17:1), 잔치(겔39:17, 19), 제사를 드림(삼상 10:8)
    구약 성경 / 162회 사용

    * 2076. 자바흐(zâbach) זָבַח 

    1. 살륙하다,  2. 제사드리다,   3. 피엘형 זבַּח
    발음 / 자바흐(zâbach)
    관련 성경 / 희생을 드리다(출 8:27, 13:15, 호 4:14), 드리다(출 20:24, 신 16:5, 대하 30:22), 잡다(신 12:21), 제사드리다(신 16:2, 삼상 1:4, 대하 30:22), 제사하다(왕상 13:2, 삼상 16:2, 시 106:37), 예비하다(겔 39:19), 잡아드리다(신 15:21)
    구약 성경 / 134회 사용

    셋째는 제단(祭壇) 미즈베하(mizbêach) 4196  מִזְבֵּחַ

    - 제단
  • 어원 / 2076에서 유래(자바흐 / 자바흐(zâbach) זָבַח )
  • 관련 성경 / 향단(출 40:5, 26, 레 4:7), 번제단(레 4:7), 제단(민 16:39, 왕상 1:53, 시 84:3).
  • 구약 성경 /  400회 사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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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사(祭祀)의 3요소(要所)


  • 예수님은 대제사장(大祭司長)

    히브리서 3:1
    그러므로 함께 하늘의 부르심을 입은 거룩한 형제들아 우리의 믿는 도리의 사도시며 대제사장이신 예수를 깊이 생각하라.

    히브리서 5:5
    또한 이와 같이 그리스도께서 대제사장 되심도 스스로 영광을 취하심이 아니요 오직 말씀하신 이가 저더러 이르시되 너는 내 아들이니 내가 오늘날 너를 낳았다 하셨고.

    히브리서 5:10
    하나님께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은 대제사장이라 칭하심을 받았느니라.

    히브리서 6:20
    그리로 앞서 가신 예수께서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아 영원히 대제사장이 되어 우리를 위하여 들어 가셨느니라.

    히브리서 4:14
    그러므로 우리에게 큰 대제사장이 있으니 승천하신 자 곧 하나님 아들 예수시라 우리가 믿는 도리를 굳게 잡을찌어다.
    히브리서 9:11
    그리스도께서 장래 좋은 일의 대제사장으로 오사 손으로 짓지 아니한 곧 이 창조에 속하지 아니한 더 크고 온전한 장막으로 말미암아.

    히브리서 4:15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 연약함을 체휼하지 아니하는 자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한결 같이 시험을 받은 자로되 죄는 없으시니라.

    히브리서 2:17
    그러므로 저가 범사에 형제들과 같이 되심이 마땅하도다 이는 하나님의 일에 자비하고 충성된 대제사장이 되어 백성의 죄를 구속하려 하심이라.


    예수님은 제물(祭物)

    로마서 3:25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 제물로 세우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심이니.

    에베소서 5:2
    그리스도께서 너희를 사랑하신 것 같이 너희도 사랑 가운데서 행하라 그는 우리를 위하여 자신을 버리사 향기로운 제물과 생축으로 하나님께 드리셨느니라.

    요한일서 2:2
    저는 우리 죄를 위한 화목 제물이니 우리만 위할뿐 아니요 온 세상의 죄를 위하심이라.

    히브리서 10:14
    저가 한 제물로 거룩하게 된 자들을 영원히 온전케 하셨느니라.

    히브리서 9:23
    그러므로 하늘에 있는 것들의 모형은 이런 것들로써 정결케 할 필요가 있었으나 하늘에 있는 그것들은 이런 것들보다 더 좋은 제물로 할찌니라.

    예수님은 제단(祭壇)

    로마서 11:3
    주여 저희가 주의 선지자들을 죽였으며 주의 제단들을 헐어버렸고 나만 남았는데 내 목숨도 찾나이다 하니.

    레위기 3:2
    그 예물의 머리에 안수하고 회막 문에서 잡을 것이요 아론의 자손 제사장들은 그 피를 제단 사면에 뿌릴 것이며.

    레위기 4:25
    제사장은 그 속죄 희생의 피를 손가락에 찍어 번제단 뿔에 바르고 그 피는 번제단 밑에 쏟고.

    레위기 4:30
    제사장은 손가락으로 그 피를 찍어 번제단 뿔에 바르고 그 피 전부를 단 밑에 쏟고.

    시편 84:3
    나의 왕, 나의 하나님, 만군의 여호와여 주의 제단에서 참새도 제 집을 얻고 제비도 새끼 둘 보금자리를 얻었나이다.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출애굽기 25-26장은 성막과 그 내부에 관한 것이었지만, 27장은 희생제물을 드리는 제단과 그에 따른 제사도구들에 관한 것이다.
    이 단은 제물을 태워 드리는 단이기 때문에 ‘번제단,’ 놋으로 만들었기 때문에 ‘놋단’이라 부른다.
    그러나 전체를 놋으로 만든 것은 아니고, 조각목으로 사방 5규빗(2.25m), 높이 3규빗(1.35m) 크기로 제작한 다음 놋으로 싼 것이다.
    넓이는 1.5~1.6평 정도이다.

    번제단에 필요한 도구들, 곧 재통, 부삽, 대야, 고기갈고리, 불 옮기는 그릇, 그물, 고리, 등은 모두 놋으로 만들어졌다.
    놋은 십자가를, 조각목은 버림받은 인간을 상징한다.
    제단은 하나님께 속죄예물과 감사예물을 바치는 곳이다.
    버림받은 인간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보혈로 감싸질 때 비로소 속죄함을 받고 감사할 이유를 갖게 된다.

    모세가 광야에서 죽어가는 자들을 위해서 놋뱀을 만들어 세웠고, 또 그것을 바라본 자들이 죽다가 살아났듯이, 번제단과 그것의 부속기구들을 모두 놋으로 만든 것은 그리스도의 구속의 능력을 상징하는 것이다.

    민수기 21장 5-9절을 보면, 백성이 하나님과 모세를 원망하다가 불뱀들에게 물려 죽어가고 있었는데, 그들이 잘못을 깨닫고 회개했을 때, 하나님께서는 모세로 하여금 놋뱀을 만들어 장대에 매달아 세우게 하였다.

    8-9절을 보면,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불뱀을 만들어 장대 위에 달라. 물린 자마다 그것을 보면 살리라. 모세가 놋뱀을 만들어 장대 위에 다니 뱀에게 물린 자마다 놋뱀을 쳐다본즉 살더라.”

    조각목은 죄로 인해서 버림받은 인간을 상징한다고 했고, 놋은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상징한다고 했다.
    조각목이 놋으로 감싸지듯이 죄를 범한 인간일지라도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구속의 능력을 믿고 의지하고 바라보는 자는 죽지 않고 영원히 살게 된다. 민수기에서 불뱀에 물린 자들을 위해서 놋뱀을 만들어 세운 것은 고대 근동과 그리스 로마세계에서 뱀은 치유의 상징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따라서 놋뱀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예표였다고 볼 수 있다.

    번제단의 네 모퉁이는 뿔 모양으로 만들어졌는데, 그리스도의 구원의 능력을 상징 한다.
    고대근동에서는 뿔을 신성과 힘과 권세의 상징으로 여겼다.

    레위기 4장 25절을 보면, “제사장은 그 속죄제물의 피를 얼마 받아다가, 손가락으로 찍어서 번제단의 뿔에 바르고, 나머지 피는 번제단 밑바닥에 쏟아야 한다.”고 되어 있다.
    제물을 번제나 화제로 바치기 전에 그 제물의 피를 제단 모퉁이 뿔에 발랐던 것이다(레 4:18).
    이 의식은 단을 깨끗케 하는 예식이었다.

    레위기 8장 15절을 보면, “모세는 그 수소를 잡고, 그 피를 얼마 받아다가 손가락으로 찍어서 제단의 뿔에 두루 돌아가며 발랐다.”고 했고, “그렇게 하여서, 모세는 제단을 깨끗하게 하였으며, 또 나머지 피는 제단의 밑바닥에 쏟아서 제단을 속하여 거룩하게 하였다.”고 했다.

    희생제사에서 제물의 피를 제단 뿔에 바르는 것은 그리스도의 피가 갖는 속죄능력을 상징하는 것이다.
    또 제단 뿔을 붙잡고 탄원을 하면 억울한 누명이나 실수로 인해 범한 죄 때문에 죽을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사면을 받을 수도 있었다(왕상 1:51). 성도는 어떠한 죄를 범했을지라도 그리스도의 보혈의 능력을 의지하고 회개하면 그 죄를 사함 받고 구원받는다는 것의 예표였던 것이다.

    새찬송가 268장에서 잘 표현되었듯이, 죄에서 자유를 얻게 하는 것은 보혈의 능력, 주의 보혈이다. “주의 보혈 능력 있도다. 주의 피 믿으오. 주의 보혈 그 어린양의 매우 귀중한 피로다.”

    27장 9-19절은 성막 뜰에 관련된 내용이다.
    성막 뜰의 크기는 남쪽과 북쪽이 각각 100규빗 곧 45미터, 동쪽과 서쪽이 각각 50규빗 곧 22.5미터로써 306평 정도이다.
    울타리는 5규빗 곧 2.25미터 높이로 세마포로 쳤다.
    기둥은 5규빗 곧 2.25미터마다 하나씩 세웠고, 각 기둥은 놋받침을 만들어 받쳤다.
    그러니까 성막 뜰의 경계를 표시할 울타리를 치는데 2.25미터 기둥 60개, 놋받침 60개, 2.25미터 폭 세마포가 126미터 필요했다.
    또 각각의 기둥에는 은갈고리와 은고리와 놋말뚝들을 필요로 했다.
    성막의 뜰은 하나님의 구속사역이 이루어지는 장소이다.
    속죄를 위한 제사가 드려지고, 회개와 씻음이 이뤄지는 곳이다.

    성막문은 동쪽에 하나뿐이었다.
    크기는 20규빗 곧 9미터이었고, 청색 자색 홍색실과 가늘게 꼰 베실로 수놓아 짠 휘장을 쳤다.
    문은 그리스도를 상징한다.
    구원에 이르는 문은 오직 하나임을 의미한다.
    그러니까 성막 밖의 인간이 하나님의 임재장소인 거룩한 성막 안으로 들어갈 수 있는 통로는 동쪽문 하나뿐이었던 것이다.
    이것은 죄인이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있는 유일하고 새로운 생명의 길이 ‘문’이신 예수님뿐임을 강조하는 예표였던 것이다.

    요한복음 10장 9절에서 예수님은 말씀하시기를, “내가 문이니,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들어가면 구원을 얻고, 또는 들어가며 나오며 꼴을 얻으리라.”고 하셨다.

    27장 20-21절은 등대의 연료 및 그 사용방법에 대한 규정이다.
    이처럼 등대의 제작 규례와 사용 명령을 따로 구분하여 지시할 만큼 등대와 그것의 연료가 되는 기름은 상당히 중요한 역할을 했다.

    네 겹의 앙장으로 씌워진 성막 안은 밤이면 바깥으로부터 자연광을 흡수할 수 없기 때문에 칠흑 같이 어두웠다.
    바로 이곳 성소에 놓인 황금등대 위의 일곱 개 등잔에 불을 밝힘으로써 그 내부를 밝게 하며 제사장의 활동을 용이하게 하였다.
    이처럼 등댓불은 죽은 것 같은 실내를 생명이 넘치는 곳으로 만든다.
    결국 이 등대는 죄로 어두워진 인간의 양심과 음란하고 악한 세상을 밝히기 위해 이 땅에 오신 그리스도와 그분의 빛을 받아 이 땅에서 ‘빛’으로 살아가야 할 우리 성도들을 상징하는 예표였던 것이다.
    예수님은 요한복음 8장 12절에서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두움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고 하셨고, 마태복음 5장 14절에서는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 위에 있는 동네가 숨기우지 못할 것이요.”라고 하셨다.

    성소를 밝히는 기름의 재료는 올리브유였다.
    지방 함유량이 60퍼센트 이상으로 많은 양의 기름이 추출된다.
    올리브유는 질이 좋고 향기가 좋아 고대로부터 향유와 식용유로도 사용되어져왔다.
    따라서 올리브유는 성도의 순결한 믿음을 상징하는 것으로써 성소를 밝힐 유일한 기름으로 규정되어 있다.
    신약시대에는 올리브유가 성령님의 임재를 상징하는 ‘인침’의 표시로 사용되었고, 치유를 목적으로도 사용되었다.
    이뿐만 아니라, 올리브유는 성령님의 특성을 상징하는데도 사용되었다.
    등잔에 기름이 충분할 때 어둠을 오랫동안 밝힐 수 있는 것처럼, 우리 성도들도 성령의 기름으로 충만할 때 내 속의 어둠을 몰아내고, 세상의 어둠도 몰아낼 수 있다.





    ______________________레위기 6장 

    6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셨다.

    “누구든지 전당잡은 물건과 맡은 물 건을 돌려 주지 않거나 강도질하거나 자기 이웃을 착취하거나

    분실물을 주운 다음에도 그 사실을 부인하고 거짓 맹세하는 등,

    4-5 이런 죄를 범한 자는 그 죄가 드러나는 날에 그 물건의 5분의 을 더하여 주인에게 돌려 주어야 하며 그는 자기 허물을 속할 속건제물을 나 여호와에게 가져와야 한다.

    그는 네가 정한 값에 해당하는 흠 없는 숫양을 제사장에게 가져갈 것이며

    제사장은 그를 위해 속죄해야 한다. 그러면 그가 용서받게 될 것이다.”

    번제에 관한 규정

    8-9 여호와께서는 아론과 그의 아들들에게 이런 명령을 전하라고 모세에게 말씀하셨다. “이것은 불로 태워 바치는 번제에 관한 규정이다. 번제물은 놋제단 위에 밤새도록 얹어 놓고 불이 꺼지지 않도록 해야 하며,

    10 다음날 아침 제사장은 고운 모시로 만든 속옷과 겉옷을 입고 번제물의 재를 가져다가 단 곁에 둔 다음

    11 다른 옷으로 갈아 입고 그 재를 야영지 밖의 깨끗한 곳으로 가져가야 한다.

    12 그리고 단 위의 불은 항상 피워 두어 꺼지지 않게 해야 한다. 너희 제사장은 아침마다 그 위에 나무와 번제물을 올려놓고 화목제물의 기름을 태우도록 하라.

    13 단의 불은 꺼지지 않고 계속 타야 한다.”

    소제에 관한 규정

    14 “다음은 곡식을 제물로 드리는 소제에 관한 규정이다: 제사장은 제단 앞에서 나 여호와에게 제물을 바쳐야 한다.

    15 그는 곱게 빻은 밀가루 중에서 한 움큼을 떠내어 감람기름과 향을 섞은 다음 전체를 나 여호와에게 바쳤다는 표로 그것을 단 위에서 불로 태워야 한다. 그것은 나 여호와를 기쁘게 하는 향기이다.

    16-17 그 나머지 밀가루는 제사장들이 먹을 몫이다. 그러나 이것은 누룩을 넣지 말고 구워 성막 뜰에서 먹어야 한다. 내가 이것을 나에게 바친 화제물 중에서 제사장들에게 주었으므로 그것은 속죄제물이나 속건제물과 같이 아주 거룩한 것이다.

    18 그러므로 이것은 대대로 제사장들만 먹어야 한다. [a]누구든지 이것을 만지는 자는 거룩해질 것이다.”

    19-20 또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셨다. “아론의 자손들이 기름 부음을 받아 제사장으로 위임되는 날에 그들은 나 여호와께 소제물로 고운 밀가루 [b]2.2리터를 바치되 반은 아침에, 반은 저녁에 바쳐야 한다.

    21 그들은 그것을 감람기름으로 반죽하여 철판에 구운 다음 썰어서 나 여호와를 기쁘게 하는 소제물로 바쳐야 한다.

    22-23 아론의 자손이 자기 아버지의 대를 이어 기름 부음을 받고 제사장으로 위임되는 날에 이 소제물을 바치게 하라. 이것은 영구히 지켜야 할 규정이다. 이 제물은 나 여호와 앞에서 완전히 불로 태워야 하며 아무도 그것을 먹어서는 안 된다.”

    속죄제에 관한 규정

    24-25 여호와께서는 아론과 그의 아들들에 게 이런 명령을 전하라고 모세에게 말씀하셨다. “이것은 속죄제에 관한 규정이다. 속죄제의 제물은 대단히 거룩하므로 제단 북쪽의 번제물을 잡는 곳에서 잡아야 한다.

    26 제사를 드리는 제사장은 그 제물을 성막 뜰, 거룩한 곳에서 먹도록 하라.

    27 그 고기에 접촉하는 자마다 거룩해질 것이다. 그러므로 그 제물의 피가 묻은 옷은 거룩한 곳에서 빨아야 한다.

    28 만일 그 고기를 토기에 삶았으면 그 그릇은 깨뜨려 버리고 놋그릇에 삶았으면 그 그릇을 깨끗이 닦고 물에 씻어야 한다.

    29 이 제물은 매우 거룩한 것이므로 제사장들만 먹도록 하라.

    30 그러나 피를 가지고 성막에 들어가 성소에서 죄를 속하기 위해 사용된 속죄제물의 고기는 제사장이라도 먹어서는 안 되며 그것은 완전히 불로 태워야 한다.”

    Footnotes

    1. 6:18 어떤번역문에는 ‘누구든지제사장이아닌사람이이것을만지면해를입을것이다’ 로되어있음.
    2. 6:19-20 히 ‘에 1/10’


    죄가 드러나는 날(레위기 6:5) / the day the sin is revealed

      죄가 드러나는 날(레위기 6:5) / the day the sin is revealed

      무릇 그 거짓 맹세한 물건을 돌려 보내되 곧 그 본물에 오분 일을 더하여 돌려 보낼 것이니 그 가 드러나는 에 그 임자에게 줄 것이요.
      or whatever it was he swore falsely about. He must make restitution in full, add a fifth of the value to it and give it all to the owner on the day he presents his guilt offering.

      그 거짓 맹세한 물건

      이웃의 물건을 횡령하거나 탈취하고서도 결코 그러한 일이 없다고 거짓 맹세함으로써, 그것을 자신의 소유물로 삼고 있는 부당한 물건을 가리킨다.

      본물에 오분 일을 더하여

      이웃의 물건을 거짓맹세로 부당하게 취한 자가 죄 용서함 받기 위해서는 먼저 그 물건을 주인에게 성실히 돌려주는 일부터 시작해야 했다.
      이때 이웃의 물건을 횡령, 탈취 등으로 취한 자는 자신이 취한 물건, 즉 본물(本物) 뿐만 아니라 그동안 피해자가 겪었을 손실이나 어려움 등을 고려하여 본물의 가치에 덧붙여 손해 배상격으로 1/5(20%)을 더 가산하여 갚아야 했다.
      이러한규정을 통하여 우리가 깨닫는 교훈은 다음과 같다.

      1. 진정한 회개는 단지 말 뿐만 아니라 행동으로써 그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어야 한다는 사실이다(마 3:8).
      이런 의미에서 예수께서는 산상수훈을 통해 누구든지 하나님께 예물을 드리려는 자는 먼저 형제와 화해한 후. 하나님께 예물을 드리는 것이 마땅하다고 가르치셨다(마 5:23,24).

      2. 본물에 오분 일을 덧붙여 갚는 행위는, 진정한 회개가 단지 죄 짓기 이전 상태로의 환원이 아니라 그 이상의 신실한 생활에로의 향상을 의미한다는 사실이다.

      삭개오의 경우, 그는 예수님과의 만남을 통해 진정 회개한후에 그 회개의 표시로 만일 자신이 토색(討索) 한 물건이 있을때는 배로 갚겠다고 고백했음을 볼 수 있다(눅 19:8).

      죄가 드러나는 날에

      남의 물건을 횡령하거나 약탈한 자가 자신의 범죄를 사함받기 위해 하나님께 속건제를 드리는 날에.

      여호와께 신실치 못하여 범죄하되(2절)

      이 말은 속건제의 대상 중 하나인 이웃에 대한 모든 범죄가(1-7절) 궁극적으로 여호와께 신실치 못한 데서 기인하고 있음을 분명히 밝혀주고 있다.

      왜냐하면 사람이 여호와께 대한 진실한 신뢰가 없을 때그 형상대로 지음받은 인간에게도 역시 신실치 못하여 쉽게 범죄할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인간에 대한 범죄는 곧 하나님께 대한 범죄와 일맥 상통한다(Matthew Henry, The preacher's Complete Homiletic Commentary). 이런 의미에서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의 계명은 결코 별개의 계명이 아니라, 상호 밀접히 연관된 계명으로서 모든 율법의 핵심을 이루는 2대 정신이다(마 22:36-40).

      남의 물건을 맡거나

      은행이나 보험 제도를 갖추고 있지 못했던 고대사회에서는 장기간 출타시 귀중한 물품을 이웃에게 위탁하는 관습이 있었다.
      이때 기탁된 남의 물건을 맡은 자는 성실히 그 책임을 감당해야했다.
      그런데 만일 남의 물건을 맡은 자가 나중에 거짓말로 그러한 사실을 부인할 경우, 그것은 그에게 죄가된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만일 맡은 물건이 도적을 당했을 경우, 위탁자는 그 정황 여하에 따라 자신의 책임유무를 재판장앞에서 엄격히 따져, 면제가 되기도 하고 혹은 배상의 책임을 지기도 했다(출 22:7-13).

      전당 잡거나 -

      이말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테수멧야드'는 곧 '서약이나 맹세의 증거로 준 담보물'을 뜻한다.
      따라서 이러한 남의 담보물을 마치 자기 소유인 양 타인에게 마음대로 처분하는 행위는 죄가 된다는 의미이다.
      영어 성경(KJV)은 '친분이나 우정을 속여 물건을 횡령하는 것'이란 뜻으로 번역하고 있다.

      늑봉하고도

      '늑봉하다'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아솩'은 '압제하다','사기치다', '협박하다'란 뜻이다.
      따라서 늑봉(勒捧)이란 폭력과 사기 등으로 이웃을 협박하여 소유물을 빼앗는 행위를 가리킨다(신 24:14; 호 12:7; 욥 24:2).










      레위기 6장은1장에서부터 5장에 언급된 다섯 가지 제사의 결론이라고 하겠습니다.
      6:1-7. 재산권을 침해한 자가 드려야 할 속건제
      6:8-13. 번제와 화목제
      6:14-23. 소제
      6:24-30. 속건제를 드리는 절차와 방법








      따라서 6장에서는 제사의 원인만이 아니라 절차와 방법에까지 상세한 규례를 언급하므로 이스라엘 백성의 모든 삶이 전적으로 하나님의 뜻에 의해 이루어지고 있다고 합니다.

      세상에는 두 종류의 죄인들 뿐입니다.

      첫째는 현장에서 간음중에 붙잡혀 온 죄인은 드러난 죄인입니다.
      둘째는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처럼 드러나지 않은 죄를 지니고서 드러난 죄인들을 정죄하는 죄인입니다.
      죄가 드러나지 않았다고 하여 죄가 작은 것도 아닙니다.

      성 프란시스는 “하나님은 얼마나 위대하시며 나는 그 앞에 얼마나 죄인인가를 좀 깨닫게 해주세요” 라고 날마다 기도했다고 합니다.
      하나님의 무한하신 존재의 빛 앞에 우리 자신이 벌거벗은 것 같이 모든 육체의 현저한 죄들이 밝히 드러나는 그 순간은 얼마나 두려운 시간일까?

      죄는 먼저 우리의 생각에서부터 시작한다.
      사람은 먼저 죄를 생각하고 그 다음에 행동으로 옮긴다.
      결국 우리가 죄를 짓는 것은 몸 뿐만이 아니라 몸을 사용하는 마음이다.
      그리고 우리의 마음이 부패되는 데는 단 1분도 걸리지 않는다.


      예수님은 인류의 죄를 위해서 십자가에서 돌아가셨다.
      그 보혈의 공로로 인하여 주홍 같은 우리의 죄는 희어졌으며, 동이 서에서 먼 것 같이 우리 죄과를 멀리 옮기셨으며, 우리의 죄를 발로 밟으시고, 우리의 죄를 깊은 바다에 던져주셨다.
      마치 컴퓨터의 DELETE 삭제 버튼을 누른 것 같이 깨끗이 지워주셨다. 이 얼마나 놀랍고 엄청난 하나님의 사랑이며 은혜인가?

      그리하여 죄인을 의인으로 여겨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내게 크게 다가오면 올수록 “이제는 죄를 마음껏 지어도 되겠지”가 아니라, 빛이신 예수 그리스도에게 다가가면 갈수록 우리의 죄에 대한 반응은 더욱 더 예민해지게 된다는 사실이다. 죄가 용서되어진 그 마음에 그리스도의 영이신 성령이 들어오시면,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계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기 때문이다.

      보혈을 지나 하나님 품으로

      예수님은 인간이 하나님을 볼 수 있는 기관을 마음이라고 하셨다. 산상수훈에서 예수님은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라고 하셨다 (마 5:8).

      마음을 눈으로 볼 수 있는 사람은 없다. 그러나 마음이 없다고 말하는 사람도 없다.
      잠언 4장 23절에는 “모든 지킬 만한 것 중에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고 말씀하신다. 고귀한 마음을 가진 사람도 때로는 헛된 생각에 사로잡힐 수 있다. 그러나 헛된 생각을 마음에 오래 품지 않고 떨쳐버려야 한다.

      루터는 “새가 우리 머리 위로 날아가는 것을 막을 수는 없다. 그러나 그 새가 우리 머리 위에 앉는 것은 막을 수 있다. 더군다나 새가 우리 머리에 둥지를 트는 것은 더욱 막을 수 있다”고 하였다.

      예수님이 우리를 위하여 보배로운 피를 흘려 주신 이유는 우리가 어떤 죄를 짓더라도 회개만 하면 용서하기 위함만은 아니다. 그가 돌아가심은 모든 죄를 용서하심과 동시에 우리로 보혈의 능력을 힘입어 천국백성이 되게 하기 위함이다. 결코 우리에게 이중적인 삶을 살게 함이 아니다.

      예수님이 돌아가셔야 할 정도로 무서운 죄에 대해 우리가 더 민감하게 반응하게 하심이다. 우리의 마음은 생명의 근원이 되는 중요한 처소이다. 그리고 인생과 신앙생활을 더 풍요롭게 하는 능력의 근원이 되기도 한다. 세례 요한은 예수님이 오시기에 앞서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 (마 3:2)고 선포했다. 진정한 회개는 나 중심의 삶에서 하나님 중심의 삶으로 돌이키는 것이다.

      이제는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사심으로 날마다 나의 자아가 십자가에서 죽는 것을 연습하는 것이다. 보혈을 지나 하나님 아버지 품으로 한 걸음씩 나아가고 있는 우리에게 사도 바울은 이렇게 말씀하신다. “새 사람을 입었으니 이는 자기를 창조하신 이의 형상을 따라 지식에까지 새롭게 하심을 입은 자니라” (골 3:10)  

      “보혈을 지나 하나님 품으로, 보혈을 지나 아버지 품으로, 보혈을 지나 하나님 품으로 한걸음씩 나가네. 존귀한 주 보혈이 내 영을 새롭게 하시네, 존귀한 주 보혈이 내 영을 새롭게 하네” (보혈을 지나 찬양 가사)

      어느 랍비가 제자들에게 1달러를 주며 이 강의실을 가득 채울 수 있는 물건을 구하여 오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여러 제자들이 시장으로 달려가서 과연 강의시를 가득 채울 수 있는 물건이 무엇일까 하고 열심히 찾았습니다.
      어떤 제자는 휴지, 어떤 제자는 강냉이, 어떤 제자는 솜뭉치.....
      다양한 물건을 갖고 날이 어두워질 무렵 제자들이 모였습니다.
      랍비는 제자들이 가져온 물건들을 보며 하나씩 확인하였으나 마음에 맞는 물건이 없었습니다.
      그때 한 제자가 강의실의 불을 모두 끄라고 한 후에 손에 들고 있던 초에 불을 밝혔습니다.
      그러자 어둡던 강의실이 밝아지며 모든 것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작은 촛불이 어둡던 강의실을 환하게 밝힌 것입니다.
      죄는 내 마음을 어둡게 합니다.
      그러나 죄를 드러내면 내 마음은 아주 환하게 밝아질 것입니다.

      레위기의 목표는 "거룩한 나라" "거룩한 백성"입니다.
      거룩한 나라는 거룩한 백성이 세워갈 수 있습니다.
      자유대한민국은 자유를 사랑하고 지키려는 국민들에 의해서 유지될 것입니다.
      공산주의와 김일성주의를 추종하는 주사파들에 의해서 자유대한민국은 유지될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들은 천국 시민권자들로서 무엇을 지켜야 할까요?
      오직 복음으로만 나를 무장하고 세상의 소금과 빛이 되어 나를 지켜야 합니다.
      나의 가족들을 지켜야 합니다.
      나의 조국을 지켜야 합니다.


      마르틴 루터의 가장 절친한 친구였던 필리프 멜란히톤(Philipp Melanchthon,) 은 늘 죄의식에 쉽게 사로잡혀 루터를 성가시게 했습니다. 보다 못한 루터는 어느날 맬란히톤에게 살인 같은, 도저히 용서 안 될 것 같은 죄라도 저지르고 오라는 의미심장한 말을 던졌습니다.

      루터의 이 말을 “구원 받았으니 이제 맘껏 죄지어도 된다”고 한 것이 아니냐는 식으로 곡해하는 사람들이 있지만, 사실 루터의 강조점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다는 진리가 우리 삶에 비추는 능력을 말하려했던 것입니다(로마서 8:1).

      새로운 피조물이 된 믿는 자들은 이제 죄에 대하여는 죽고 하나님에 대하여는 살아난 자라는 것입니다(로마서 6:11, 3:21).
      이제 죄가 드러나더라도 그 죄가 믿는 자들을 주장하지 못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로마서 6:14).

      드러나는 죄를 미워하고 멀리하는 것은 예수님의 은혜에 시선을 고정할 때 성령님을 통해 이뤄지는 열매이지 결코 우리 스스로의 노력으로 지켜낼 수 없는 부분입니다. 성화를 강조하면 할수록 우리는 성화에서 멀어지게 됩니다. 칭의를 말하고 고백 할수록 영적성숙은 자연스럽게 이뤄집니다. 정죄감 없이 더욱 주님을 좇는 능력이 생수처럼 뿜어져 나오게 됩니다. 사단은 계속 죄의식을 갖도록 유혹하고 인간으로 하여금 온갖 방법으로 그 죄의식을 줄이거나 없애도록 노력하게 만들지만 헛될 뿐입니다. 예수님이 성취하신 죄사함과 의롭게 하심의 은혜에 마음과 영혼을 고정시키면 우리는 성령의 능력으로 바다 위를 걷게 될 것입니다. 죽일 듯이 몰아치는 폭풍과 삼킬 듯 넘실거리는 파도를 보느라 우리의 시선을 예수님의 얼굴에서 떼지 않기를 바랍니다.


      세 가지 죄

      첫째, 남의 물건을 위탁 받거나 전당 잡고도 이를 부인하는 것
      둘째, 강도질하거나 늑봉하고도 그 사실을 부인하는 것
      셋째, 남이 잃은 유실물을 습득하고도 그 사실을 부인하는 것
      이러한 죄는 율법을 위배한 것이요, 그것은 곧 하나님께 대한 죄입니다.

      원상 회복과 보상

      하나님은 부당하게 가로챈 물건을 원주인에게 돌려주도록 하셨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욕심 때문에 이웃에게 손해를 입힌 사람은 이웃이 당한 고통을 보상하도록 하셨습니다.
      이때 하나님은 탈취한 사람이 물건을 돌려줄 때에는 본물의 5분의 1을 더해 주도록 배상의 원칙을 정해 주셨습니다.
       

      ___________________ 레위기 5장



      속죄제를 필요로 하는 경우

      5 “만일 어떤 사람이 법정에 증인으로 소환되었으나 자기가 보거나 들은 것을 말하지 않으면 그는 그 결과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한다.

      “어떤 사람이 죽은 들짐승이나 가축이나 곤충과 같이 의식상 부정한 것을 만졌을 경우에는 그가 모르고 만졌을지라도 부정하게 되어 과실을 범하는 자가 된다.

      “만일 그가 모르고 사람의 부정에 접촉하였다가 그것을 알게 되면 그는 과실을 범한 자가 될 것이다.

      “어떤 사람이 선한 일이든 악한 일이든 아무 생각 없이 어떤 일을 하겠다고 맹세하였다가 후에 자기가 한 일을 깨달으면 그는 과실을 범한 자가 된다.

      “누구든지 이런 과실을 범한 자는 자기가 과실을 범했다고 고백하고

      자기가 범한 그 과실에 대하여 속죄제물로 어린 양의 암컷이나 암염소를 끌고 와서 나 여호와에게 바칠 것이며 제사장은 그 사람의 과실을 위해 속죄해야 한다.

      “만일 그가 어린 양이나 염소를 바칠 형편이 못 되면 자기가 범한 과실에 대해서 산비둘기 두 마리나 집비둘기 두 마리를 나 여호와에게 가져와 한 마리는 속죄제물로, 다른 한 마리는 번제물로 바쳐야 한다.

      그는 그 제물을 제사장에게 가져갈 것이며 제사장은 속죄제물을 먼저 드리되 그 목을 완전히 끊지 말고 비틀어

      피를 단 곁에 뿌리고 그 나머지 피는 제단 밑에 흘려야 한다. 이것은 속죄제이다.

      10 그리고 나머지 한 마리는 규정대로 불에 태워 번제로 드려야 한다. 이와 같은 방법으로 제사장이 그 사람의 과실을 위해 속죄하면 그가 용서받게 될 것이다.

      11 “만일 그가 산비둘기 두 마리나 집 비둘기 두 마리도 바칠 형편이 못 되면 그는 자기가 범한 과실에 대하여 고운 밀가루 [a]2.2리터를 가지고 와서 속죄제로 드려야 한다. 이것은 속죄제이므로 그 위에 기름을 붓거나 향을 놓아서는 안 된다.

      12 그는 그것을 제사장에게 가져갈 것이며 제사장은 전체를 바쳤다는 표로 그 가루 한 움큼을 집어다가 단에서 나 여호와에게 불로 태워 바치는 화제물 위에 얹어 태워야 한다. 이것은 속죄제이다.

      13 이와 같은 방법으로 제사장이 과실을 범한 그 사람을 위해 속죄하면 그가 용서받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 제물의 나머지는 곡식으로 드리는 소제물의 경우와 같이 제사장에게 주어야 한다.”

      속건제

      14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셨다.

      15 “어떤 사람이 무의식 중에 나 여호와에게 드리는 거룩한 예물에 대하여 잘못을 범하면 그는 벌금으로 네가 정한 값에 해당하는 흠 없는 숫양을 나 여호와에게 바쳐야 한다. 이것은 허물을 씻는 속건제이다.

      16 그는 거룩한 예물을 드리는 데 있어서 범한 잘못에 대하여 자기가 바치도록 되어 있는 예물의 5분의 을 더 추가하여 제사장에게 가져갈 것이며 제사장은 속건제의 숫양으로 그를 위해 속죄해야 한다. 그러면 그가 용서받게 될 것이다.

      17 “어떤 사람이 나 여호와가 금한 명령 중 하나를 모르고 범했을지라도 그것은 죄가 되므로 그는 그 죄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한다.

      18 그는 모세 네가 정한 값에 해당하는 흠 없는 숫양을 속건제물로 제사장에게 가져갈 것이며 제사장은 그가 모르고 범한 잘못에 대하여 속죄해야 한다. 그러면 그가 용서받게 될 것이다.

      19 그가 나 여호와에게 잘못을 범했으니 이 속건제를 반드시 드려야 한다.”

      Footnotes

      1. 5:11 히 ‘에바 1/10’

      레위기 5장
      속죄제와 속건제

      속죄제를 드려야 할 세 가지 경우와 속건제에 대한 규례를 소개합니다.
      속죄제는 하나님과 관련하여 범한 죄를 사죄받기 위하여 드리는 제사
      속건제는 인간이나 성물과 관련하여 범한 죄를 사죄받고 자 드리는 제사


      증인으로서 진실을 말하지 않는 자
      무의식중에 거짓 맹세를 하였거나 부정한 것을 만진 자는 자신의 경제적 능력에 따라 속죄제를 드려야 한다(1-13절).
      여호와의 성물에 대해 범죄하거나 무의식 중에 금령 중 하나라도 어긴 자는 지정한 규정에 따라 속건 제물을 드려야 한다(14-19절).
      두 제사가 모두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였으나 그 실제 적응에 있어 구분이 정확지 않아 후 일에는 속죄제와 속건제가 구별 없이 같이 드려진다.


      레위기 5장은 속죄제가 요구되는 세 종류의 범죄와 속건제에 대한 말씀입니다.
      속죄제와 속건제의 제사 드리는 법은 똑같으나 다만 구분이 있다면 속건제에 해당하는 범죄의 경우에는 5분의 1에 해당하는 배상액을 더 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속죄제와 속건제는 거의 같은 맥락에서 다루어지는 주제라고 하겠습니다.

      5장의 문단 분해

      1. 증인으로서의 죄
      2-3. 부정한 것을 만졌을 때의 죄
      4. 무심코 한 말의 죄
      5-6. 이상의 죄를 위한 어린양 또는 산양(염소)의 속죄제
      7-10. 가난한 자를 위한 비둘기로서의 속죄제 및 번제
      11-13. 고운 가루로서의 속죄제
      14-16. 성물에 대하여 범과 했을 때의 속건제
      17-19. 계명을 어긴 죄에 대한 속건제


      속죄제는 하나님과 관련하여 범한 죄를 사죄받기 위하여 드리는 제사
      속건제는 인간이나 성물과 관련하여 범한 죄를 사죄받기 위한 제사
      증인으로서 진실을 말하지 않는 자나 무의식중에 거짓 맹세를 하였거나 부정한 것을 만진 자는 자신의 경제적 능력에 따라 속죄제를 드려야 한다(1-13절).
      또한 여호와의 성물에 대해 범죄하거나 무의식 중에 금령 중 하나라도 어긴 자는 지정한 규정에 따라 속건 제물을 드려야 한다(14-19절). 두 제사가 모두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였으나 그 실제 적응에 있어 구분이 정확지 않아 후 일에는 속죄제와 속건제가 구별 없이 같이 드려진다.



      속죄제와 속건제의 의미(레위기 5:1-19)

      레위기 4장에서 속죄제는 죄를 지었을 때 그 죄를 속하기 위해서 드리는 제사로 언급되었습니다. 제물은 빈부에 따라 형평에 맞게 드렸습니다. 제사장과 온 회중은 흠 없는 수송아지로, 족장은 흠 없는 숫염소로, 평민은 흠 없는 암염소나 어린 암양으로 드렸습니다. 그러나 가난한 자는 산비둘기나 집비둘기 두 마리로, 극빈자는 고운 가루 십분의 일 에바, 곧 2.3리터를 바치도록 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제물에 차별을 두신 것은 속죄제나 속건제가 의무제이기 때문에 하나님께 죄를 범한 자가 경제적인 이유로 속죄를 받지 못하는 일이 생기지 않도록 그 피해를 줄이기 위함이었습니다. 구속사적인 관점에서 볼 때, 속죄제나 속건제의 규례는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말미암아 구속에 이르는 길에 결코 빈부귀천의 차별이 있을 수 없다는 복음의 보편성에 대한 모형이자 그림자라고 볼 수 있습니다. 복음에는 빈부귀천의 차별이나 남녀반상의 차별이 없습니다. 복음은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차별 없이 누구한테나 주어진다는 것이 로마서의 말씀입니다.
      속죄제는 대속을 위한 제사였습니다. 하나님의 계명 중 하나라도 범했거나 어떤 사건에 직간접으로 연루된 증인이 정직하게 진술하지 않음으로써 하나님과 자기 자신을 속이고 타인에게 해를 끼쳤을 때나(1절), 자신도 모르게 짐승이나 사람의 부정한 것에 접촉하여 부정을 입었을 때나(4절), 경솔하게 맹세한 후에 그 맹세가 잘못되었음을 깨달았을 때(4절) 반드시 바쳐야 하는 제사입니다. 이 경우 범죄자는 반드시 먼저 죄를 인식하고, 그것이 하나님께 죄가 된다는 사실을 솔직하게 고백해야 했습니다. 그런 후 비로소 속죄를 바라는 겸허한 심령으로 어린 암양이나 암염소를 취하여 속죄제 규례를 따라 하나님께 예물을 바쳐야 했습니다. 이것은 속죄제의 근본정신이 죄에 대해서 철저히 깨닫고, 겸손히 회개하는데 있다는 사실을 암시하는 것입니다. 바쳐진 예물 가운데 남은 것은 제사장이 먹었습니다.
      속죄제와 속건제의 차이점에 대해서 다시 한 번 정리해 보겠습니다.
      속죄제는 특별한 죄에 대하여 바치는 제사이고, 속건제는 보상이 가능한 죄, 곧 성물이나 이웃에게 범한 죄에 대하여 바치는 제사로써 오분의 일이 플러스되는 벌금형이 함께 주어졌습니다. 단순한 벌금형으로도 처벌이 가능하지만 제사를 바치는 이유는 죄의 근원적인 용서가 하나님께 있기 때문입니다.
      속죄제와 속건제의 형식적 차이를 보면, 첫째, 제물이 다릅니다. 속죄제는 소, 염소, 양, 비둘기, 고운 가루를 드렸지만, 속건제는 오로지 흠 없는 숫양을 드렸습니다. 둘째, 속죄제는 남은 피를 번제단 밑에 쏟았으나 속건제는 쏟지 않았습니다. 셋째, 속건제는 언제나 개인적인 제사였지만, 속죄제는 집단적인 제사도 포함했습니다. 동물의 머리위에 손을 얹고 죄를 전가시키는 문제를 속건제에서는 언급하고 있지 않는데, 당연한 일이기 때문에 생략된 것으로 봅니다. 끝으로 속건제는 속죄제와 달리 특별한 경우에도 드려졌습니다. 곧 문둥병자가 나은 후에(4:1-20), 또한 나실인이 부정한 허물을 용서받기 위해 속건제를 드리기도 했습니다. 
      속건제는 단순히 어떤 사람이 잘못을 범한 것에 대한 책임, 범과 등을 보상하는 제사입니다. 속죄제는 무의식중의 범죄를 속하고 속건제는 의식적으로 하나님과 타인의 명예를 손상시킨 것을 배상하는 제사입니다.
      속건제를 바치는 경우를 크게 두 가지로 나눠볼 수 있습니다. 첫째는 하나님의 성물에 대해 범한 죄이고(14-19절), 둘째는 이웃에게 범한 죄입니다(6:1-7). 첫째 죄는 다시 고의로 하나님의 성물에 대하여 범과한 것과 부지중에 계명 중 하나를 범한 것으로 나눠서 설명할 수 있습니다.
      레위기 5장은 다른 사람의 재물을 가로채는 사기 행위를 했거나 그것을 부인하며 거짓 맹세하였을 때도 속건제를 바쳐야 한다고 규정하였습니다. 사람에게 잘못한 것은 하나님께 잘못한 것이 되고, 하나님께 잘못한 것은 사람에게 잘못한 것이 되기 때문에 이웃에게 죄를 범하였을 때 하나님과 이웃 모두에게 죄를 범한 것이 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속건제를 바쳐야 하고, 손해를 끼친 사람에게는 범죄물과 그 범죄물의 오분의 일을 더하여 본인에게 배상을 해야 합니다.
      속건제는 속죄제와 불가분의 관계입니다. 이는 그리스도께서 속죄 제물인 동시에 속건제물이 되셨다는 사실에서 알 수 있습니다. 구약의 속죄제와 속건제가 예표한 하나님의 구속 사역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십자가 위에서 성취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죄에 따르는 형벌을 받으심으로써 속죄제를 완성하셨고, 하나님의 모든 요구들을 순종하심으로써 속건제를 완성하셨습니다.
       신약성서에서는 다양한 언어로 구원의 의미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첫째, ‘의롭다 하심’(4:24; 5:1/justification)이란 말이 있는데, ‘의롭다 하심’은 법정용어입니다. 법정에서의 무죄 선언에 비유될 수 있습니다.
      둘째, ‘구속(救贖)’(3:24/redemption)이란 단어가 있습니다. ‘구속’은 노예시장의 통용어입니다. 근본개념은 몸값 지불, 즉 속전(贖錢)을 내고 노예의 속박에서 풀려나는 것을 말합니다. 속건제의 의미를 이 몸값 지불의 ‘구속’의 의미에서 찾을 수가 있습니다.
      셋째, ‘화목’(5:10-11/reconciliation)이란 단어가 있습니다. ‘화목’은 중재(仲裁)용어입니다. 분단의 벽을 헐고 적대감정을 풀어 화평의 관계를 회복하는 것을 말합니다.
      넷째, ‘그 피를 인하여’(3:25; 5:9/sacrifice)가 있습니다. ‘그 피를 인하여’는 피해보상의 개념이며, 희생제사 용어입니다. 그리스도는 우리를 위하여 속죄제물, 희생제물, 대속제물이 되셨습니다. 안수를 통해서 예배자의 죄가 제물에게 전가되듯이, 우리의 죄가 그리스도에게 전가되었고, 그분은 우리의 죄를 친히 짊어지시고 우리를 위해서 대신 십자가에 못 박히심으로 우리가 하나님께 끼친 피해를 보상하셨습니다.
      두 번째의 구속개념과 네 번째의 피해보상 개념이 속죄제 및 속건제와 연관을 갖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당신의 아들 예수님을 통해서 죄인이며 피조물에 불과한 우리를 위해서 친히 속죄제물이 되시고, 속건제물이 되셨습니다. 이 사실이 얼마나 귀하고 소중하고 기쁘고 반갑고 복된 소식입니까? 이 복음의 깊이와 가치를 깨닫고, 그것을 잘 간직하고 잘 전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오분의 일(1/5)

      레위기 6:5
      무릇 그 거짓 맹서한 물건을 돌려 보내되 곧 그 본물에 오분 일을 더하여 돌려 보낼 것이니 그 죄가 드러나는 날에 그 임자에게 줄 것이요

      레위기 22:14
      사람이 불지중 성물을 먹으면 그 성물에 그 오분 일을 더하여 제사장에게 줄지니라

      레위기 27:13
      그가 그것을 무르려면 정가에 그 오분 일을 더할지니라

      레위기 27:15
      그 사람이 자기 집을 무르려면 정가한 돈에 그 오분 일을 더할지니 그리하면 자기 소유가 되리라

      레위기 27:27
      부정한 짐승이면 너의 정가에 그 오분 일을 더하여 속할 것이요 만일 속하지 아니하거든 너의 정가대로 팔지니라

      레위기 27:31
      사람이 그 십분 일을 속하려면 그것에 그 오분 일을 더할 것이요

      민수기 5:7
      그 지은 죄를 자복하고 그 죄 값을 온전히 갚되 오분지 일을 더하여 그가 죄를 얻었던 그 본주에게 돌려 줄 것이요









      Penses   5 4 Sin Offering



        5


      속죄제

      4 여호와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이렇게 전하라고 모세에게 말씀하셨다.
      “누구든지 무의식 중에 나 여호와가 금한 명령 중 하나를 어겼을 경우에는 이렇게 하여라.
      “만일 기름 부음을 받은 [a]제사장이 모르고 범죄하여 백성에게 그 죄의 재앙이 돌아가게 하였으면 그는 자기가 범한 죄에 대하여 흠 없는 수송아지 한 마리를 속죄제로 나 여호와에게 바쳐야 한다.
      그는 그 수송아지를 성막 입구 나 여호와 앞에 끌어다가 그 수송아지 머리 위에 손을 얹은 다음 그것을 나 여호와 앞에서 잡아야 한다.
      그리고 기름 부음을 받은 제사장은 그 수송아지 피를 가지고 성막에 들어가서
      손가락으로 피를 찍어 나 여호와 앞 곧 성소의 휘장 앞에 일곱 번 뿌리고
      또 그 피를 성막 안의 향단 뿔에 바를 것이며 그 송아지의 나머지 피는 성막 입구에 있는 번제단 밑에 모두 쏟아야 한다.
      그런 다음 그는 그 속죄제물의 모든 기름, 곧 내장을 덮고 있거나 그것에 붙어 있는 기름과
      두 콩팥과 그 위에 덮여 있는 허리 부분의 기름과 간에 덮여 있는 간 꺼풀을 떼어내어
      10 화목제물의 기름을 떼어냈을 때처럼 그것을 번제단 위에서 불로 태워야 한다.
      11 그러나 그 수송아지의 가죽과 그 모든 고기와 그 머리와 다리와 내장과 똥,
      12 곧 기름 부분을 제외한 그 나머지는 모두 야영지 밖으로 가지고 가서 재 버리는 정결한 곳에서 나뭇불로 태워야 한다.
      13 “만일 이스라엘 전체 백성이 잘못하여 나 여호와가 금한 명령 중 하나를 어겨 범죄하고도 깨닫지 못하다가
      14 후에 그 죄를 깨달으면 그들은 수송아지 한 마리를 속죄제로 드려야 한다. 그들은 그것을 성막 앞으로 끌어다 놓고
      15 백성의 장로들이 나 여호와 앞에서 그 수송아지 머리에 손을 얹은 다음 그것을 내 앞에서 잡을 것이며
      16 기름 부음을 받은 제사장은 그 수송아지 피를 가지고 성막으로 들어가서
      17 손가락으로 피를 찍어 나 여호와 앞 휘장 앞에서 일곱 번 뿌리고
      18 또 성막 안 나 여호와 앞에 있는 향단 뿔에 그 피를 바를 것이며 나머지 피는 성막 입구에 있는 번제단 밑에 쏟아야 한다.
      19 그리고 그는 그 송아지의 기름을 다 떼어내어 단에서 불로 태워
      20 속죄제의 수송아지에게 한 것처럼 해야 한다. 이런 식으로 제사장이 백성을 위해 속죄하면 그들이 용서받게 될 것이다.
      21 그런 다음 그는 [b]기름을 제외한 그 수송아지의 나머지 부분을 야영지 밖으로 가지고 가서 제사장 자신의 죄 때문에 바친 그 송아지처럼 그것을 불에 태워야 한다. 이것은 전체 백성을 위한 속죄제이다.
      22 “만일 백성의 지도자가 모르고 나 여호와의 명령 중 하나를 어겨 범죄하였다가
      23 후에 자기 죄를 깨닫게 되면 그는 흠 없는 숫염소 한 마리를 제물로 가져와서
      24 그 숫염소 머리에 손을 얹은 다음 나 여호와 앞 번제물을 잡는 곳에서 잡아야 한다. 이것은 속죄제이다.
      25 제사장은 그 속죄제물의 피를 손가락으로 찍어 번제단 뿔에 바르고 나머지 피는 모두 번제단 밑에 쏟을 것이며
      26 그 모든 기름은 화목제 제물의 기름처럼 단 위에서 불로 태워야 한다. 이와 같은 방법으로 제사장이 죄를 범한 지도자를 위해 속죄하면 그가 용서받게 될 것이다.
      27 “만일 일반 백성이 모르고 나 여호와가 금한 명령 중 하나를 어겨 범죄하였다가
      28 후에 자기 죄를 깨닫게 되면 그는 흠 없는 암염소 한 마리를 끌고 와서
      29 그 머리에 손을 얹은 다음 제단 북쪽의 번제물을 잡는 곳에서 잡을 것이며
      30 제사장은 손가락으로 그 피를 찍어 번제단 뿔에 바르고 나머지 피는 모두 그 제단 밑에 쏟아야 한다.
      31 그런 다음 그는 화목제 제물의 기름을 떼어낸 것처럼 그 암염소의 기름을 모두 떼어내어 단 위에서 불로 태워 나 여호와를 기쁘게 하는 향기가 되게 해야 한다. 이와 같은 방법으로 제사장이 그를 위해 속죄하면 그가 용서받게 될 것이다.
      32 “만일 그가 어린 양을 속죄제물로 가져올 경우 그는 흠 없는 암컷을 끌고 와서
      33 그 머리에 손을 얹은 다음 번제물을 잡는 곳에서 잡을 것이며
      34 제사장은 그 속죄제물의 피를 손가락으로 찍어 번제단 뿔에 바르고 그 나머지 피는 모두 번제단 밑에 쏟아야 한다.
      35 그런 다음 그는 화목제의 어린 양에서 기름을 떼어낸 것처럼 그 제물의 모든 기름을 떼어내어 나 여호와에게 불로 태워 바치는 화제물 위에 얹어 태워야 한다. 제사장이 이런 식으로 그 사람을 위해 속죄하면 그가 용서받게 될 것이다.”

      Footnotes

      1. 4:3 또는 ‘대제사장이’
      2. 4:21 또는 ‘그 송아지를’

      속죄제, 속죄 제물(4:3, 8, 14, 20, 21, 24, 29, 34) 2403

      하타트(2403)
      חַטָּאָת 

      1. 죄
      2. 우상에 대해 적용되기도 함
      3. 속죄제
      발음 / 하타트(chaṭṭâʼth)
      어원 / 2398에서 유래
      관련 성경 / 죄(창4:7, 레4:3, 대하6:25), 죄악(창18: 20,사5:18), 속죄제(출29:14, 민15:27, 왕하12:16), 속죄 제물(레4:32, 민8:8, 대하29:23), 속죄 희생(레4:25), 허물(레5:6), 잘못(레5:10,11), 속죄(레10:19, 민8:7), 속건제(레7:7), 번제(레4:29), 죄악(시32:5, 애4:6), 죄인(잠5:22,13:6), 벌(슥14:19). [동] 범죄하다(느1:6, 욥35:3).
      구약 성경 / 221회 사용

      * 2398. חָטָא 
      1. 벗어나다
      2. 비틀거리다
      3. 사사기 20:16
      발음 / 하타(châṭâʼ)

      요아킴은 최근 태어나 가장 정신없는 한달을 보냈다. 딸의 결혼식을 성대히 치른 뒤 며칠 못가 지병을 않으시던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겨우 장례식을 마친 뒤 한숨 쉬려는가 했더니 최근 사업을 함께 시작한 동업자 녀석이 모든 물건을 빼돌려 도망을 가고 말았다. 요아킴은 쉴 겨를이 없었다. 그 녀석이 두로 항으로 도망간 뒤 배에 오르면 끝장이었다. 서둘러 추적을 떠난 요아킴은 이틀을 노숙한 뒤 삼일 째에도 이른 아침부터 발걸음을 재촉했다. 요아킴은 반나절이 지나 어느 마을에 도착한 뒤에 그 날이 안식일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일련의 큰 사건들이 연이어 발생한 바람에 안식일 날짜를 망각하는 중대한 실수를 범한 것이다. 가슴이 덜컹거리며 두려움에 사로잡힌 요아킴은 그 자리에서 무릎 꾾고 하나님의 용서를 구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 그의 죄가 해결될 수는 없었고 속죄제를 바쳐야만 했다. 하나님의 은혜로 요아킴은 그 범죄자가 배에 승선하기 직전 체포할 수 있었다. 재산을 되찾아 집으로 돌아온 요아킴은 안식일을 무심코 범했던 죄를 용서받기 위해 즉시 성전으로 올라가야 했다. 더불어 그에게는 추가로 드려야할 제물이 있었다. 바로 잃었던 재산을 되찾게 해주신 하나님께 대한 감사의 번제와 화목제였다. 하지만 그 중 가장 중요한 제사는 속죄제였다. 죄를 용서받지 않고 드리는 번제와 화목제를 하나님께서 기뻐하실리 없기 때문이다.

      무심코 지은 죄를 위해 바친 속죄제

      요아킴이 안식일을 무심코 범한 뒤 바친 제사는 ‘속죄제’였다. 속죄제는 두 가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제사였다. 첫째, ‘비고의적인 죄’를 해결하고(레 4~5장) 둘째, ‘부정결’의 문제를 해결했다(레 11~15장). 예컨대 여자가 아이를 낳으면 산후 정결례를 거쳐 깨끗케 되는데, 일정 기간 날짜가 지난 뒤 목욕을 해야 하며, 가장 중요하게는 자녀 출산에 대한 감사의 번제와 더불어 ‘속죄제’를 바쳐야만 했다(더 자세한 것은 나중에 레 12장을 다룰 때 설명할 것이다). 덧붙여 유출병 걸린 여자가 피가 멈춘 뒤, 또는 악성 피부병(나병이라는 번역은 잘못이다) 환자가 치료된 뒤 반드시 바쳐야하는 것도 속죄제다. 사람이 부정을 탔을 때 그것은 죄 문제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속죄제가 요구된 이유는 무엇인가? 분명 그것은 그런 다양한 부정결들은 창세기 3장에서 죄가 세상에 들어온 후 발생된 죄의 증상들이기 때문일 것이다. 따라서 부정결의 문제도 근원을 따지면 죄의 문제에서 비롯된 것이기 때문에 속죄제가 요구된 것으로 추측된다.

      그러나 우선 속죄제는 속건제와 더불어 ‘죄’를 해결하는 제사였다. 속건제가 해결하는 죄는 재산상의 피해를 입힌 죄에 국한된다는 점에서 속죄제가 다루는 죄와 차이가 난다. 속건제에서는 상대방의 금전적/물질적 손해를 배상하고 하나님께 속건제 숫양을 바쳐 그 문제를 해결한다. 그러나 속죄제는 도덕적 계율을 어긴 죄인데, 다만 그 죄는 ‘비고의적인 죄’ 다시 말해 ‘그릇’ ‘무심코’ 여호와께서 금지하신 계명을 범한 죄다. 한글 성경에서는 단순히 ‘여호와의 계명 중 하나라도’라고 되어 있으나 히브리어 원문의 의미는 정확히 ‘여호와께서 금지하신 계명 중 하나라도’이다. 고의적인 죄의 경우는 일부 고의성이 가벼운 경우를 제외하고(레 5:1~4) 매우 심각하여 속죄제는 허용되지 않았다. 그것은 반역죄로서 하나님께서 직접 징벌하셔서 처단하시거나(예, 레 10장의 잘못된 제사를 드린 나답과 아비후) 하나님의 지시로 백성들이 처형을 했다(예, 레 24장의 하나님을 저주한 이스라엘 평민). 다만 어떤 반역죄의 경우 심판이 유보되어 하나님께서 회개의 기회를 주시기도 했다.

      어쨌든 금지 명령은 매우 중대한 계명이다. 따라서 무심코 위반했다 하더라도 상당히 심각하다. 요아킴의 경우 안식일에 여행이 절대 금지되어 있으나 그는 무심코 이 금지 명령을 위반했다. 속죄제를 바쳐 죄가 속죄되어 하나님께 용서받아야만 했다. 요아킴은 평민이었기 때문에 바쳐야하는 속죄제 짐승은 암염소나 암양이었다.

      속죄제는 짐승의 피로 성전과 그 기물들의 오염을 씻어내는 효과를 낸다는 점이 가장 큰 특징이다. 인간의 죄와 부정결이 성전과 그 기물들을 더럽히기 때문이다. 이렇게 속죄제는 죄와 부정결의 문제를 위해 바치는 것이 원칙이나, 그 외에도 제사장 임직이나 레위인의 임직, 또는 나실인의 서원과 같은 몇 가지 특별한 예식에 속죄제를 드렸으며, 국가적 절기마다 다양한 속죄제를 바치곤 했다. 그 기능에 대해서는 몇 가지로 의견이 나뉘는데 그중 가장 그럴듯한 설명은 아마도 절기별로 제단과 성전의 잠재적 부정결을 닦아내는 기능을 했을 것이란 견해다.

      속죄제와 속건제, 특히 속죄제는 그 제사의 특징과 의미, 제사의 절차를 설명하기 위해서는 대단히 많은 지면을 필요로 하는데, 여기서는 최대한 간략하게 설명해야하는 아쉬움이 있다. 상세한 설명과 목회적 적용과 여러 힌트, 특히 속죄제의 자세한 교회론적 의미에 대해서는 필자의 책 <레위기의 신학과 해석>(새물결 플러스)의 도움을 받기 바란다.

      신분에 따라 등급화된 속죄제

      속죄제는 죄인의 신분과 사회적 지위에 따라 달랐다. <표>는 높은 지위로부터 낮은 지위에 이르기까지 제물의 크기와 가치가 줄어든다는 것을 보여준다.

      우선 4장에서 먼저 (대)제사장의 비고의적인 죄에 대해 수소를 바칠 것을 명령한다. 많은 학자들이 3절의 ‘기름부음받은 제사장’을 대제사장으로 해석하지만, 만일 그렇게 될 경우 제사장이 목록에서 누락되므로 이것은 분명 대제사장을 포함한 제사장들로 보아야 한다. (대)제사장과 회중은 동급이었다. 따라서 둘 다 수소가 요구된다. 이때 회중은 제사장이 포함된 회중을 의미한다. 만일 제사장과 회중이 분리되어 취급되는 경우, 제사장이 제외된 회중의 제물은 흔하게 숫염소였다(레 9장; 16장). 족장은 평민의 지도자로서 숫염소를 속죄제로 바쳤고, 평민은 암염소나 암양을 바쳤다. 여기서 수컷이 암컷보다 제의적 가치 면에서 우위에 놓여 있음이 다시 확인된다(시장 가치로는 암컷이 월등히 비쌌다). 한편, 제사장과 평민 사이에는 레위인이 있어야 하는데 레위기 4~5장의 목록에서 빠져있다. 아마 레위인은 제사장과 평민 사이의 신분이었다는 점에서 족장과 동급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양과 염소를 조달하기 어려운 가난한 계층을 위해서는 비둘기 두 마리가 속죄제로 바쳐졌다. 이때 한 마리는 번제와 같이 모두 제단에 태웠고, 다른 한 마리는 피를 제단에 흘린 뒤 제사장이 섭취하는 방식으로 두 비둘기가 처리되었다. 그러나 가난한 계층 중에는 심지어 비둘기마저 힘에 겨운 사람들이 있었다.

      그런 극빈자들이 무심코 죄를 범했을 경우에도 죄 문제를 그대로 넘길 수는 없었기에 하나님께서는 마지막 수단을 그들에게 허락하셨다. 바로 그들이 평소 음식으로 먹는 밀가루 1/10에바(약 2.2리터)를 소제의 속죄 제물로 가져오라 명하신 것이다(레 5:11~13).

      경제적 형편과 무관하게 죄의 문제는 어떤 방법으로든 반드시 해결되어야 했다. 비록 밀가루는 피가 없는 속죄 제물이었지만, 하나님은 자신의 재량으로 극도로 가난한 자들을 위해 밀가루 제물에 피의 효력이 있는 것으로 간주해주셨다. 마지막 한 사람을 위해서까지 속죄의 길을 열어주신 하나님의 큰 은혜가 아닐 수 없다.

      매우 특이한 속죄제의 피뿌리기

      속죄제의 피 의례는 매우 독특한 방식으로 이루어졌다. 먼저 (대)제사장과 회중을 위한 속죄제 수소는 안수 후 도살을 한 뒤 그 피를 양푼에 받아 내성소로 가지고 들어간다. 거기서 양푼의 피를 손가락으로 찍은 뒤 지성소 휘장 앞의 향단 주변에 ‘뿌리고’ 향단의 네 뿔에 ‘발랐다’(레 4:6~7, 17~18). 그러나 평민을 위한 속죄 제물인 염소와 양의 피는 마당에 놓인 번제단의 네 뿔에 ‘바른다’(레 4:25, 30). 비둘기의 경우에 피를 양푼에 받지 않고 죽인 뒤 몸채 들고 마당의 번제단 벽에 일부를 뿌리고 남은 피는 제단 아래 흘렸다(레 5:9). 여기서 주목해야할 것은 제사장과 회중을 위한 속죄제 수소의 피는 내성소에 들어가 향단에 처리한 반면, 평민의 속죄제 짐승(염소와 양, 비둘기)의 피는 마당의 번제단에서 처리했다는 점이다. 이것은 신분에 따른 죄의 오염력과 영향력이 차이가 났기 때문이다. 제사장과 회중의 죄의 ‘독기’는 내성소까지 침범해 향단을 더럽힌 반면, 평민의 죄는 마당의 번제단을 더럽히는 결과를 낳았다. 그러한 이유로 피를 뿌리는 위치가 달랐다.

      <표>에서 확인해 볼 수 있듯이 피를 어디에 뿌렸느냐에 따라 속죄제 고기 처분 방식도 달라졌다. 내성소에서 피를 뿌린 짐승의 경우 결코 그 고기를 제사장이 먹지 못하고 진영 밖의 재를 버리는 ‘정결한 곳’에서 소각을 해서 없앤다. 반면에 마당의 번제단에서 피가 처리된 속죄제 짐승의 고기는 제사장들에게 일종의 수고비로 건네져 그것을 먹어서 없앴다. 이것은 분명히 속죄제 고기의 오염도의 차이로 인한 것이다. 내성소에 피를 뿌린 속죄제 짐승의 경우 피를 통해 흡수된 오염이 강해 먹을 수 없어 밖에 반출해 태웠던 반면, 마당에 피를 뿌린 속죄제 짐승의 경우 그 오염이 경미해 제사장이 먹을만 했기에 하나님께서 그 제사를 집례한 제사장들이 먹도록 조치하시고 밖에 버려 태우진 않았다고 볼 수 있다. 이렇게 해서 속죄제는 ‘태우는 속죄제’와 ‘먹는 속죄제’로 나뉜다.

      속죄제의 피 뿌리는 특유의 동작은 아래의 비교를 통해 분명해진다. 우선 속죄제 외의 다른 모든 제사들, 즉, 번제/속건제/화목제에서는 피를 뿌리는 방식이 공통적으로 ‘끼얹다’(zaraq ‘dash, throw’)이다. 피를 양푼에 받은 뒤 제단 사면 벽에 뿌려서 처리한다. 그러나 속죄제는 전혀 다르다. 그것은 피를 양푼에 담은 뒤 다음 세 가지 동작을 통해 피를 처리한다.

      a. ‘뿌리다’(히자-hizza ‘sprinkle’) : 손가락으로 제단 주변에
      b. ‘바르다’(나탄-natan ‘daub, put’) : 손가락으로 제단의 네 뿔에
      c. ‘쏟다’(샤파크/야차크-shapak/yatsak ‘pour’ ): 제단 밑에

      속죄제에서는 피가 든 양푼을 들고 제단 벽에 끼얹는 것이 아니라, 손가락을 양푼에 담아 피를 찍은 뒤 소량의 피를 제단 주변에 뿌리거나 제단 뿔에 바르는 동작으로 피를 처분한다. 피가 대량으로 남는데, 이 남은 피는 제단 밑에 쏟는다. 여기서 손가락으로 피를 뿌리고 바르는 동작이 매우 중요하다. 이것이 가져오는 효과는 제단의 정화이기 때문이다(레 8:16; 16:19). 즉, 속죄제의 피를 특이한 동작으로 뿌리고 바를 때 제단과 성전이 청소된다. 이것이 속죄제의 가장 큰 특징이다.

      죄의 자백이 요구됨

      레위기 5장 1~6절은 약간의 고의성이 있는 죄들을 위해 바치는 속죄제 규정이다. 네 가지 사례가 주어지는데 이것은 모두 고의성이 개입되어 있으므로 그 죄의 공개적인 인정과 자백이 요구된다. 이런 죄의 인정과 자백은 속죄제 절차에서 매우 중요했다. 그것 없이는 속죄제는 아무런 효력이 발생되지 않았을 것이다. 혹자는 이 경우는 고의성이 있기 때문에 더 죄질이 나빠 ‘자백’이 요구되었지만, 4장의 죄들은 ‘비고의적’인 죄들이 때문에 죄질이 가벼워 자백이 요구되진 않았다고 말한다. 실제로 4장에는 ‘자백’의 요구가 나타나지 않는다. 그러나 4장은 ‘금지명령’이기 때문에 요아킴의 사례에서 보듯이 무심코 그 죄를 지었다하더라도 심각했다. 따라서 자백은 그런 심각한 상황에서 자동적으로 수반되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런 이유로 4장에서는 자백을 명시적으로 요구하고 있지 않을 것이다. 속죄제의 최종적 효과는 ‘속죄’와 그로 인한 ‘죄사함’이었다(레 4:20, 26, 35).


      속죄제는 레위기 4:1-6:7에 걸쳐 소개된다.

      ‘하타트’라는 단어에서 왔다.
      ‘과녁에서 벗어나다’ ‘죄를 짓다’ 속죄하다‘라는 뜻을 가진다.
      죄를 짓고 나서 속죄하기 위해 드려지는 제사이다.
      죄와 상관없는 제사는 없지만, 속죄제의 경우 죄와 직접적으로 연결되어있다.

      1970년대 새로운 속죄제 이론과 더불어 정결제(purification offering)로 부르기로 제안했다.
      트렘페 롱맨Ⅲ와 레이몬드 딜러드 역시 ‘정결제’로 부른다. 정결제로 부르는 이유는 제사방법에 대한 것이 아니라 용어 때문이다.

      속죄제에 대한 내용은 레 4:1-5:13까지 나와 있지만, 6:25-7:7에서 속건제와 함께 다루어진다.
      고의적인 죄는 말할 것도 없거니와 부지주의 죄도 포함한다.
      5:1-6에서는 부지중에 지은 죄에 대해 다룬다.
      민수기 15:22-31에서 부지중의 죄와 고의로 지은 죄를 설명한다.

      속죄제는 드리는 사람들을 구체적으로 구분해 놓았다.
      다른 제사와 다르게 물질의 부가 아닌 지휘체계 안에서 구분했다. 내용은 아래와 같다.

      4:3-12. 제사장
      4:13-21. 이스라엘 온 회중
      4:22-26. 이스라엘의 지도자
      4:27-35. 이스라엘의 평민

      속죄제 제사 방법

      신분에 따라 드리는 제물과 방법이 약간씩 다르다. 대제사장과 전체 회중의 경우 반드시 수소를 드려야 하고, 밖에서 소각된다.
      또한 피뿌림도 마당이 아닌 내성소까지 들어간다.
      그런데 숫양은 보이지 않는다.

      (아래의 표는 김경열의 것에서 가져옴)

      신분

      제물

      피의 취급

      소각 대상

      남은 고기

      (대)제사장

      수소

      내성소/향단

      기름

      밖에서 소각

      회중

      족장

      숫염소

      마당/번제단

      두 콩팥

      제사장 섭취

      평민

      암염소

      혹은 암양

      마당/번제단

      간엽

      제사장 섭취

      빈민

      비둘기 두 마리

      (속죄제와 번제)

      마당/번제단

      번제 비둘기

      속죄제 비둘기

      제사장 섭취

      극빈

      밀가루 1/10에바

      없음

      한 움큼

      제사장 섭취

      제사장이 드리는 속죄제(4:3-12)

      제물을 회막문 앞에 가져온다. 제물의 머리에 안수하고 잡는다.
      기름부음을 받은 제사장은 피를 받아 회막에 가져가서 성소의 휘장 파에 일곱 번 뿌린다.
      회막 안 향단 뿔들에 바르고, 피 전부를 회막문 앞 번제단 밑에 쏟는다.(4-7)

      수송아지의 모든 기름을 떼어내고 더불어 다른 내장도 떼어낸다.
      떼어낼 것들은 다음과 같다.
      내장에 덮인 기름, 내장에 붙은 모든 기름, 두 콩팥과 그 위의 기름, 허리쪽에 있는 것과 간에 덮인 꺼풀 등이다.
      이것들을 모두 번제단 위에 불사른다.

      그러나 나머지 수송아지의 가죽과 모든 고기, 머리와 정강이와 내장, 똥 등은 진영 바깥 재 버리는 곳에서 불로 사른다.
      *죄를 사함 받는다는 말이 없다.

      평민이 드리는 속죄제(4:13-21)

      제물을 회막문 앞으로 가져온다. 회중의 장로들이 제물의 머리에 안수하고 잡는다. 제사장은 수송아지의 피를 회막에 가지고 들어가서 손가락으로 피를 찍어 회막 안 제단의 뿔에 바르고, 나머지는 번제단 밑에 쏟는다. 기름만을 취하여 제단에 불사른다. 나머지는 진영 밖에 나가 재버리는 곳에 모두 불태운다. *제사장이 회중을 위하여 속죄하여 죄사함을 받는다.

      속죄 제사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제사를 상징한다.

      속죄 제사를 통해 죄인들이 구원을 얻게 된다.

      속죄 제사는 이스라엘 백성 중에 어누 누구도 필할 수 없는 제사입니다.
      하나님의 계명을 어긴 죄가 있는 자들은 반드시 속죄 제물을 가지고 하나님께 나와야 합니다.
      이 제사는 제사장부터 평민에 이르기까지 예외가 없는 제사입니다.
      가난한 자들도 죄가 있으면 속죄 제사를 드려야만 속죄받을 수 있습니다.
      이것은 무엇을 말씀하고 있는 것일까요?
      하나님 앞에 모든 자들이 죄인인데 이 모든 죄인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제사를 통하지 않고는 절대 속죄받을 수 없는 것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속죄제의 의미를 통해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 제사를 깨다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레위기 4:2
      이스라엘 자손에게 말하여 이르라 누구든지 여호와의 계명 중 하나라도 그릇 범하였으되.

      속죄제사는 누구든지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을 하나라도 지키지 못하고 범죄 하면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입니다.

      ‘범하였으되’ עשה(아사 6213) 준행하다, 범하다, 범죄 하다, 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떨어졌지만 말씀대로 살지 못한 자들은 하나님께 속죄 제사를 드려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행동에 옮기지 못하고 범죄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죄를 지은 것이 자신이 아니라고 우겨도 되지 않습니다.
      자신의 행동이 올바르고 윤리적으로 깨끗하게 살았다고 해도 하나님 앞에서 죄가 없는 것이 아닙니다.
      이 죄는 계속해서 짓고 있습니다.
      그래서 죄를 지을 때마다 속죄 제물을 가지고 와서 속죄를 받아야 합니다.
      우리도 이미 아담으로부터 원죄가 있기 때문에 반드시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 제사를 통해 구원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윤리적으로 양심적으로 살아간다고 해서 하나님 앞에 죄가 없는 것이 아닙니다.

      레위기 4:3
      만일 기름 부음을 받은 제사장이 범죄 하여 백성의 허물이 되었으면 그가 범한 죄로 말미암아 흠 없는 수송아지로 속죄 제물을 삼아 여호와께 드릴지니.

      만약에 제사장이 하나님께 범죄 하여 백성들 앞에 허물이 있으면 수송아지로 속죄 제물을 삼아 여호와께 드려야 합니다.

      ‘속죄제물을’ חטאה(핫타아 2403) 속죄 희생, 이라는 뜻입니다.
      이 단어는 חטא(하타 2398) 정결하다, 제사드리다, 깨끗이 하다, 라는 뜻에서 유래되었습니다.
      제사장이 죄를 범하면 흠 없는 수송아지를 속죄 제물로 하나님께 드렸습니다.
      이 수송아지는 제사장의 모든 죄를 전가받아 죽었습니다.
      범죄 한 제사장 대신으로 제물이 죽었던 것입니다.
      이 제물이 희생을 당하고 제사장은 정결하며 깨끗하게 되어 하나님 앞에 설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이 제사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희생을 나타내고 있는 제사입니다.
      주님의 피 흘림이 지금의 구원받은 제사장들을 살린 것입니다.

      레위기 4:12
      똥 곧 그 송아지의 전체를 진영 바깥 재 버리는 곳인 정결한 곳으로 가져다가 불로 나무 위에서 사르되 곧 재 버리는 곳에서 불사를지니라.

      제사장을 위해 희생된 송아지의 가죽과 고기와 머리와 정강이와 내장과 똥을 진영 바깥 재 버리는 곳에 가져다가 불로 태워버리라고 하나님은 명령하고 있습니다.

      ‘가져다가’ יצא(야차 3318) 이끌어내다, 건져내다, 옮기다, 불러내다, 라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정결한 곳으로 송아지의 제물을 모두 가져가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송아지의 제물은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하고 있습니다.
      이 제물을 통하여 죄로 죽었던 자들이 살아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죄악에서 건져내 주시고 불러내어 의인의 자리로 이끌어 내시는 것입니다.
      결국 이 송아지가 죽고 내가 구원받게 되는 것을 상징하고 있습니다.

      송아지의 제물을 하나님께서 허락하셨기 때문에 진영 바깥 재 버리는 곳으로 가지고 갈 수 있습니다. 하나도 빠짐없이 모두 제물을 챙겨가야 합니다. 이 제물은 이미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제사이며 예수 그리스도도 진영 바깥 재 버리는 곳에서 죽을 것을 예언하고 있는 말씀입니다.

      (히 13:11-12) 이는 죄를 위한 짐승의 피는 대제사장이 가지고 성소에 들어가고 그 육체는 영문 밖에서 불사름이라 그러므로 예수도 자기 피로써 백성을 거룩하게 하려고 성문 밖에서 고난을 받으셨느니라

      예수님께서도 자신의 육체는 영문 밖에서 불사름이 되었고 예수님의 피로 백성을 거룩하게 하시려고 성문 밖에서 고난을 받으셨습니다.

      ‘사를지니라’ שרף(사라프 8313) 불사르다, 불타다, 분향하다, 라는 뜻입니다. 속죄 제물은 재버리는 곳에서 불에 태워지게 됩니다. 이 제물이 불태워져 하나님께 향기로운 냄새가 되어 하나님이 흠향하기에 좋은 냄새가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바로 십자가에서 영원한 속죄를 이루어 주시는 예수님의 제사를 상징합니다. 예수님의 영원한 속죄 제사가 하나님께 분향이 되어 올라가게 되고 택함 받은 백성들은 예수님을 통하여 구원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고난은 자신이 원한 것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아니면 택한 하나님의 백성들을 살릴 길이 없었기 때문에 십자가에 죽으셨습니다.
      구약의 송아지 제물은 계속해서 드려야 하지만 신약에서는 예수 그리스도 한 분이면 끝입니다. 더 이상의 속죄 제물은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모든 죄를 사함 받고 영원한 천국을 바라보게 되었으며 죄인에서 의인의 자리에 있는 줄을 깨달아야 합니다.

      (레 4:13-14) 만일 이스라엘 온 회중이 여호와의 계명 중 하나라도 부지중에 범하여 허물이 있으나 스스로 깨닫지 못하다가 그 범한 죄를 깨달으면 회중은 수송아지를 속죄제로 드릴지니 그것을 회막 앞으로 끌어다가

      만일 이스라엘 회중이 하나님 앞에 계명을 어겨 허물이 있지만 스스로 깨닫지 못하다가 범한 죄를 깨달으면 속죄제를 드려야 합니다.

      ‘스스로 깨닫지 못하다가’ שגה(샤가 7686) 범죄 하다, 길을 잃다, 미혹되다, 라는 뜻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 앞에 정도를 걷지 못하고 길을 잃어 신앙을 버리고 우상을 섬기거나 세상의 미혹에 빠져 살아갈 때에 제대로 깨닫지 못하고 죄인 줄도 모르고 있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계속해서 하나님 앞에 죄를 짓고 있으면서도 죄인 줄도 모르는 상태가 계속 이어지다가 깨달을 때에 속죄 제사를 드리는 것입니다. 우리들도 이럴 수 있습니다. 나는 신앙생활을 열심히 한다고 하지만 자신이 열심히 할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인정하시는 열심이어야 합니다. 구원에 관해서 나의 열심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공로를 무시하고 부인하는 것은 자신의 열심에 빠져 하나님께 죄를 짓게 되는 것입니다. 이럴 때에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공로를 인정하는 것이 속죄 제사를 드리는 것입니다.

      (레 4:20) 그 송아지를 속죄제의 수송아지에게 한 것 같이 할지며 제사장이 그것으로 회중을 위하여 속죄한즉 그들이 사함을 받으리라

      회중들을 위해 송아지의 속죄 제사를 드림으로 회중들이 죄 사함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사함을 받으리라’ סלח(살라흐 5545) 용서하다, 사하여 주다, 라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드린 속죄 제사를 통하여 회중들의 모든 죄를 용서해 주시고 완전하게 사하여 주시는 것을 말씀합니다. 바로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 보혈을 통해 택한 자들의 모든 죄를 용서해 주시고 생명을 주시는 것을 예표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죄 사함을 받은 것은 전적인 하나님의 주권 속에서 이루어진 일입니다. 인간의 힘으로는 절대 죄를 용서함 받을 수 없습니다. 완전하게 죄가 깨끗해진 것은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이루어진 일이라는 것을 상징해 주고 있습니다. 내가 구원받은 것도 이와 같습니다. 하나님의 절대 주권으로 죽음의 자리에서 생명의 자리로 옮겨주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보혈의 공로가 아니면 나는 절대 구원을 얻을 수가 없습니다. 내 힘으로는 죄에서 빠져나올 어떠한 힘도 없기 때문입니다.

      속죄제를 드리는 방법은 무엇입니까?

      첫째, 제물의 머리에 안수해야 합니다.

      (레 4:15) 회중의 장로들이 여호와 앞에서 그 수송아지 머리에 안수하고 그것을 여호와 앞에서 잡을 것이요

      속죄 제사를 드릴 때에는 흠 없는 제물을 드려야 합니다. 조금의 흠이라도 있으면 제물로서는 불합격입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무 흠도 없고 점도 없으신 분입니다.

      (벧전 1:19) 오직 흠 없고 점 없는 어린양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된 것이니라

      죄인들의 죄를 사해주기 위해서는 흠이 없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어린양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를 통해 죄인들의 죄를 사해주셨습니다. 그래서 흠 없는 제물에 안수를 하여 자신들의 죄를 전가시켰던 것같이 우리의 죄를 예수 그리스도께로 전가시키고 예수님의 의가 나에게 올 때 구원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구약에서 안수의 행위는 이 시대에 적용해보면 주님의 십자가 공로를 내가 믿는 것을 의미합니다. 또한 나의 죄를 하나님께 고백하고 회개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요일 1:9)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그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하나님께 나의 죄를 자백하면 하나님은 주님을 통해 죄를 사해주시고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해 주시는 것입니다. 반드시 죄의 고백과 회개가 있어야 합니다.

      둘째, 피를 뿌려야 합니다.

      (레 4:17) 그 제사장이 손가락으로 그 피를 찍어 여호와 앞, 휘장 앞에 일곱 번 뿌릴 것이며

      속죄 제물의 피를 성막의 휘장에 일곱 뿌려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를 상징하고 있습니다. 피가 없이는 죄 사함을 받을 수가 없습니다.

      (히 10:20) 그 길은 우리를 위하여 휘장 가운데로 열어 놓으신 새로운 살 길이요 휘장은 곧 그의 육체니라

      휘장은 예수그리스도의 육체를 의미하고 있습니다. 항상 나의 죄를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 보혈 앞에 고백해야 합니다. 피를 일곱 번 휘장에 뿌린 것은 완전한 회개를 상징합니다. 우리의 죄를 날마다 주님 앞에 뿌려야 합니다. 그리고 죄 사함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 보혈을 떠나서는 살 수 없습니다. 주님의 보혈 안에 늘 거주하고 있어야 합니다.

        속죄제는 크게 두 종류로 나눌 수 있습니다.

        회중 전체를 위한 속죄제
        개인을 위한 속죄제

        회중 전체를 위한 속죄제를 드릴 때에는 제물의 피를 성소 안으로 옮겨서 뿌린 다음 나머지는 번제단 밑에 쏟고 고기는 진 밖에서 불사르게 됩니다.

        개인을 위한 속죄제를 드릴 때에는 제물의 피가 성소 안으로 옮겨지지 않습니다.
        번제단 밑에 다 쏟게 됩니다.
        대신 개인을 위한 속죄제물의 고기는 제사장이 먹습니다.

        왜 이런 과정을 하나님께서 겪게 하셨을까요? 

        속죄제는 속죄 과정을 설명하고 있는 제사입니다.
        ‘속죄제’라는 말과 ‘속죄하다’라는 말이 우리말로는 비슷한데 히브리어로는 전혀 다르다는 사실을 먼저 알아야 합니다.

        ‘속죄하다’는 히브리어로 ‘카파르(כָּפַר)’라고 하며 죄를 ‘덮다(cover)’와 ‘지운다’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는 동사입니다.
        ‘카파르’라는 동사가 기본형으로 쓰인 예를 성경에서 찾아보면 매우 흥미롭습니다.
        홍수 당시 노아에게 방주를 만든 다음 “역청을 그 안팎에 칠하라”(창세기 6:14)고 한 말이 바로 카파르입니다.
        역청으로 나무 전체를 덮어서 나무가 보이지 않도록 지운 것과 같습니다.
        쉽게 설명해서 볼펜으로 쓴 글씨를 지우려면 화이트를 칠하여 글씨를 덮어서 지우게 됩니다.
        ‘카파르’는 그렇게 죄를 ‘덮어서 지운다’는 뜻입니다.

        이 단어에서 나온 파생어 중에 ‘코페르(כֹּפֶר)’라는 단어가 있는데, ‘속전(ransom)’ ‘보상’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내가 다른 사람의 물건을 망가뜨리면 돈을 주어 보상을 하려고 할 것입니다.
        이때 보상을 뜻하는 단어가 바로 코페르입니다.
        ‘속죄일’을 뜻하는 ‘욤 키푸르’ 역시 동사 카파르에서 나왔습니다.

        속죄의 과정으로는 용서와 정결이 있습니다.
        이사야 43:25
        “나 곧 나는 나를 위하여 네 허물을 도말하는 자니 네 죄를 기억하지 아니하리라.”


        속죄제의 의미와 속죄제를 드리는 방법


        속죄제(Sin Offering) 어의


        속죄제를 뜻하는 히브리어 ‘하타트'는 ‘과녁에서 벗어나다’, ‘죄를 짓다’, ‘속죄물을 드리다’,
        ‘속죄하다’를 뜻하는 ‘하타'에서 파생된 것으로 ‘하나님의 법에서 벗어난 죄로부터 청결과 속죄함을 얻기 위하여 드리는 제사’를 뜻한다.

        제물의 종류

        속죄제의 제물은 범죄자의 사회적인 위치에 따라 달랐다.

        제사장 — 흠 없는 수송아지를 드림(레 4:3)
        온 회중 — 수송아지를 드림(레 4:13)
        족장 — 흠 없는 수염소를 드림(레 4:23)
        평민 — 흠 없는 암양이나 암염소를 드림(레 4:28)

        이 외에도 가난한 자는 산비둘기나 집비둘기를 제물로 드릴 수 있었으며(레 5:7) 
        이보다 더 가난한 자는 고운 가루 에바 십분의 일을 제물로 드릴 수 있었다(레 5:11)

        속죄제의 방법

        헌제자가 제물이 될 짐승을 회막문 여호와 앞으로 가져온다.
        헌제자의 손을 제물의 머리 위에 얹고 안수한다.
        헌제자가 제물을 잡아 피를 제사장에게 주면 제사장은 그 피를 손가락으로 찍어 성소 앞에 일곱 번 뿌리고 향단 뿔에 바른 후 회막 앞과 번제단 밑에 전부 쏟는다.
        희생 제물의 모든 기름과 콩팥을 번제단 위에서 불사른 후 그 나머지 부분은 진 바깥 재 버리는 정결한 곳에서 나무 위에 놓고 불사른다. 그러나 아론과 그 아들들을 위한 속죄제는 진 밖에서 불사르지 않고 다리와 고기를 회막 뜰에서 구워 먹도록 하였다(레6:24-27)


        속죄제와 속건제의 차이

        속죄제의 목적은 ‘범죄에 대한 용서’를 위한 것이었다.
        그런데 이러한 목적은 속건제의 경우 역시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이 둘은 근본적인 차이가 있다.

        첫째는, 범죄의 성격적 차이로서 속죄제가 하나님께 범죄한 자, 즉 ‘율법을 범한 죄’를 위한 제사였던 반면에, 속건제는 인간에게 범죄한 죄, 즉 ‘도덕적인 범죄의 대속을 위한’ 제사였다.

        둘째는, 속죄제는 속건제와는 달리 ‘범죄한 일을 배상할 수 없는 죄’에 대한 용서를 구하는 제사였던 반면, 속건제는 ‘배상이 가능한 죄’에 대한 용서를 구하는 제사였다는 점이다.

        속건제의 의미와 속죄제와의 차이

         

         

        속건제(Guilt Offering)의 어의


        속건제를 뜻하는 히브리어 ‘아솸'( )은 ‘죄'(Sin)가 아닌 ‘범죄'(Guilt),’범법'(Tresspass), ‘손해'(Damage) 등을 의미하는 것으로 ‘사회적인 죄’, 또는 ‘도덕적인 죄를 용서받기 위해 드리는 제사’를 뜻한다.

        속건제의 제물

        속건제의 제물은 범죄의 형태에 따라 매우 다양하게 나타나고 있어 이러한 제물을 일일이 열거하자면 너무나도 복잡하고 광범위하다. 그러므로 각각의 범죄에 대한 속건 제물에 대해서는 레5:14, 6:7, 7:1-10, 14:1, 15:2을 참고하도록 하되 이러한 여러 가지 제물을 요약하면 ‘흠 없는 일년된 수양’, ‘범죄물과 그 범죄물의 오분의 일을 더하여 본인에게 주는 일’, ‘산비둘기나 집비둘기 둘’이나, ‘고운 가루 에바 십분의 삼’과 ‘기름 한 록’ 등이다.

         

        속건제와 속죄제의 차이

         

        죄와 관계된 제사

         

        가. 속죄제(하타아트-sin offering)
        * 제물이 대상과 재력에 따라 차이가 있다.
        - 제사장과 백성 전체(수송아지)
        - 족장(수염소)
        - 평민(어린 암양, 암염소)
        - 가난한 자(비둘기, 곡식 가루)

        * 향기로운 냄새를 위한 제사가 아니라, 죄를 속하기 위해 드린 제사였다.

        * 번제처럼 모든 제물을 제단에 불사르지 않고 기름을 제외한 모든 제물을 진 밖으로 가져가서 태워야 했다.

        * 인간의 죄성과 연약함을 인해 부지중에 지은 죄를 속하기 위해 드려졌다.


        나. 속건제(아샴-배상제사(trespass offering))
        * 속건제는 생활 중에 범한 죄나, 자기 의무를 태만히 해서 남에게 해를 입혔을 경우에 드리는 사죄와 보상에 대한 제사였다.

        * 속건제를 드리는는 경우는 다음과 같았고, 그 외에는 속죄제사를 드렸다.
        - 하나님의 성물을 범했을 때
        - 하나님의 법에 따라 마땅히 해야 할 것을 하지 않은 경우
        - 이웃에게 악을 행하거나 물질에 손해를 입힌 경우
        - 남의 물건을 강제로 빼앗거나/ 분실물을 습득하거나/ 저당물을 잡거나/ 거짓맹세로 남에게 피해를 입힌 경우
        - 시체로 인해 몸이 부정케 된 경우

        * 속건제는 다음과 같은 세 가지 속죄 원리가 나타난다.
        - 잘못이 있을 때는 자백하고 인정하라.
        - 죄에 대한 대가를 지불하라.
        - 번제는 계속해서 드리지만 속건제는 한 번에 해결할 문제이다.


        다. 속죄제와 속건제의 같은 점과 다른 점

        *. 같은 점
        이 두 제사는 백성들이 "여호와의 명령을 어긴 경우에 드리는 제사"였다. 백성들은 "여호와께서 금한 일을 했거나, 또는 하라고 한 일을 하지 않았을 경우"에 이 제사를 드리도록 되어 있었다. 그러나 이 제사는 결코 고의로 지은 죄를 속하기 위한 제사는 아니었다. 하나님은 고의, 또는 계획적으로 지은 범죄(짐짓 죄)에 대해서는 반드시 처벌하게 하셨다.

        속죄 제사를 통해서 용서받을 수 있는 죄는 실수나 연약함으로 지은 죄(그릇 범한 죄)였다. 속죄 제사를 드릴 수 있는 죄는 다음과 같았다.
        1) 실수나 부지 중에 지은 죄(4:13,22,27,5:18)
        2) 부주의로 인해 지은 죄(5: 1,4,15)
        3) 무의식적으로 짓는 죄(민 35:11,15, 22, 23).

         

        * 다른 점

        속죄제는 일반적으로 여호와의 명령을 어긴 보편적인 경우에 드렸다. 그러나 속건제(보상제사)는
        1) 여호와의 성물을 드릴 것을 자기가 사용했거나(5:15-19)
        2) 남의 물건을 빼앗거나 손에 넣고 부인하거나 거짓 맹세를 해서 피해를 입힌 경우에 이를 보상하기 위해 드려졌다(5:20-25).

         

        *. 제사 절차상의 차이점
        - 속죄제는 속죄제물만 드렸지만, 속건제는 속건제물 외에 불법으로 취한 것에 1/5(전체 6/5)을 더한 배상이 요구되었다.
        - 속죄제는 제물을 드리는 자가 그 제물을 죽이고 직접 불에 태웠다(4:15,24,29,33).
        - 그러나 속건제는 제사장이 대신해서 제물을 잡았으며, 그 제물도 제사장이 먹어야만 했다(14:12).
        - 속죄제물은 개인의 경우 암컷을 드렸다(4:28,32). 그러나 속건제사는 제물로 수양이 필요했으며(5;18, 6:6), 훔친 것 외에 1/5에 해당하는 배상을 첨가했다.
         


        요아킴은 최근 태어나 가장 정신없는 한달을 보냈다.
        딸의 결혼식을 성대히 치른 뒤 며칠 못가 지병을 않으시던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겨우 장례식을 마친 뒤 한숨 쉬려는가 했더니 최근 사업을 함께 시작한 동업자 녀석이 모든 물건을 빼돌려 도망을 가고 말았다.
        요아킴은 쉴 겨를이 없었다.
        그 녀석이 두로 항으로 도망간 뒤 배에 오르면 끝장이었다.
        서둘러 추적을 떠난 요아킴은 이틀을 노숙한 뒤 삼일 째에도 이른 아침부터 발걸음을 재촉했다.
        요아킴은 반나절이 지나 어느 마을에 도착한 뒤에 그 날이 안식일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일련의 큰 사건들이 연이어 발생한 바람에 안식일 날짜를 망각하는 중대한 실수를 범한 것이다.
        가슴이 덜컹거리며 두려움에 사로잡힌 요아킴은 그 자리에서 무릎 꾾고 하나님의 용서를 구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 그의 죄가 해결될 수는 없었고 속죄제를 바쳐야만 했다.
        하나님의 은혜로 요아킴은 그 범죄자가 배에 승선하기 직전 체포할 수 있었다.
        재산을 되찾아 집으로 돌아온 요아킴은 안식일을 무심코 범했던 죄를 용서받기 위해 즉시 성전으로 올라가야 했다.
        더불어 그에게는 추가로 드려야할 제물이 있었다.
        바로 잃었던 재산을 되찾게 해주신 하나님께 대한 감사의 번제와 화목제였다.
        하지만 그 중 가장 중요한 제사는 속죄제였다.
        죄를 용서받지 않고 드리는 번제와 화목제를 하나님께서 기뻐하실리 없기 때문이다.

        무심코 지은 죄를 위해 바친 속죄제

        요아킴이 안식일을 무심코 범한 뒤 바친 제사는 ‘속죄제’였다.
        속죄제는 두 가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제사였다.

        첫째, ‘비고의적인 죄’를 해결(레 4~5장)
        둘째, ‘부정결’의 문제를 해결(레 11~15장)

        예컨대 여자가 아이를 낳으면 산후 정결례를 거쳐 깨끗케 되는데, 일정 기간 날짜가 지난 뒤 목욕을 해야 하며, 가장 중요하게는 자녀 출산에 대한 감사의 번제와 더불어 ‘속죄제’를 바쳐야만 했다(더 자세한 것은 나중에 레 12장을 다룰 때 설명할 것이다).

        덧붙여 유출병 걸린 여자가 피가 멈춘 뒤, 또는 악성 피부병(나병이라는 번역은 잘못이다) 환자가 치료된 뒤 반드시 바쳐야하는 것도 속죄제다.

        사람이 부정을 탔을 때 그것은 죄 문제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속죄제가 요구된 이유는 무엇인가?
        분명 그것은 그런 다양한 부정결들은 창세기 3장에서 죄가 세상에 들어온 후 발생된 죄의 증상들이기 때문일 것이다. 따라서 부정결의 문제도 근원을 따지면 죄의 문제에서 비롯된 것이기 때문에 속죄제가 요구된 것으로 추측된다.

        그러나 우선 속죄제는 속건제와 더불어 ‘죄’를 해결하는 제사였다. 속건제가 해결하는 죄는 재산상의 피해를 입힌 죄에 국한된다는 점에서 속죄제가 다루는 죄와 차이가 난다. 속건제에서는 상대방의 금전적/물질적 손해를 배상하고 하나님께 속건제 숫양을 바쳐 그 문제를 해결한다. 그러나 속죄제는 도덕적 계율을 어긴 죄인데, 다만 그 죄는 ‘비고의적인 죄’ 다시 말해 ‘그릇’ ‘무심코’ 여호와께서 금지하신 계명을 범한 죄다. 한글 성경에서는 단순히 ‘여호와의 계명 중 하나라도’라고 되어 있으나 히브리어 원문의 의미는 정확히 ‘여호와께서 금지하신 계명 중 하나라도’이다. 고의적인 죄의 경우는 일부 고의성이 가벼운 경우를 제외하고(레 5:1~4) 매우 심각하여 속죄제는 허용되지 않았다. 그것은 반역죄로서 하나님께서 직접 징벌하셔서 처단하시거나(예, 레 10장의 잘못된 제사를 드린 나답과 아비후) 하나님의 지시로 백성들이 처형을 했다(예, 레 24장의 하나님을 저주한 이스라엘 평민). 다만 어떤 반역죄의 경우 심판이 유보되어 하나님께서 회개의 기회를 주시기도 했다.

        어쨌든 금지 명령은 매우 중대한 계명이다. 따라서 무심코 위반했다 하더라도 상당히 심각하다. 요아킴의 경우 안식일에 여행이 절대 금지되어 있으나 그는 무심코 이 금지 명령을 위반했다. 속죄제를 바쳐 죄가 속죄되어 하나님께 용서받아야만 했다. 요아킴은 평민이었기 때문에 바쳐야하는 속죄제 짐승은 암염소나 암양이었다.

        속죄제는 짐승의 피로 성전과 그 기물들의 오염을 씻어내는 효과를 낸다는 점이 가장 큰 특징이다. 인간의 죄와 부정결이 성전과 그 기물들을 더럽히기 때문이다. 이렇게 속죄제는 죄와 부정결의 문제를 위해 바치는 것이 원칙이나, 그 외에도 제사장 임직이나 레위인의 임직, 또는 나실인의 서원과 같은 몇 가지 특별한 예식에 속죄제를 드렸으며, 국가적 절기마다 다양한 속죄제를 바치곤 했다. 그 기능에 대해서는 몇 가지로 의견이 나뉘는데 그중 가장 그럴듯한 설명은 아마도 절기별로 제단과 성전의 잠재적 부정결을 닦아내는 기능을 했을 것이란 견해다.

        속죄제와 속건제, 특히 속죄제는 그 제사의 특징과 의미, 제사의 절차를 설명하기 위해서는 대단히 많은 지면을 필요로 하는데, 여기서는 최대한 간략하게 설명해야하는 아쉬움이 있다. 상세한 설명과 목회적 적용과 여러 힌트, 특히 속죄제의 자세한 교회론적 의미에 대해서는 필자의 책 <레위기의 신학과 해석>(새물결 플러스)의 도움을 받기 바란다.

        신분에 따라 등급화된 속죄제

        속죄제는 죄인의 신분과 사회적 지위에 따라 달랐다. <표>는 높은 지위로부터 낮은 지위에 이르기까지 제물의 크기와 가치가 줄어든다는 것을 보여준다.

        우선 4장에서 먼저 (대)제사장의 비고의적인 죄에 대해 수소를 바칠 것을 명령한다. 많은 학자들이 3절의 ‘기름부음받은 제사장’을 대제사장으로 해석하지만, 만일 그렇게 될 경우 제사장이 목록에서 누락되므로 이것은 분명 대제사장을 포함한 제사장들로 보아야 한다. (대)제사장과 회중은 동급이었다. 따라서 둘 다 수소가 요구된다. 이때 회중은 제사장이 포함된 회중을 의미한다. 만일 제사장과 회중이 분리되어 취급되는 경우, 제사장이 제외된 회중의 제물은 흔하게 숫염소였다(레 9장; 16장). 족장은 평민의 지도자로서 숫염소를 속죄제로 바쳤고, 평민은 암염소나 암양을 바쳤다. 여기서 수컷이 암컷보다 제의적 가치 면에서 우위에 놓여 있음이 다시 확인된다(시장 가치로는 암컷이 월등히 비쌌다). 한편, 제사장과 평민 사이에는 레위인이 있어야 하는데 레위기 4~5장의 목록에서 빠져있다. 아마 레위인은 제사장과 평민 사이의 신분이었다는 점에서 족장과 동급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양과 염소를 조달하기 어려운 가난한 계층을 위해서는 비둘기 두 마리가 속죄제로 바쳐졌다. 이때 한 마리는 번제와 같이 모두 제단에 태웠고, 다른 한 마리는 피를 제단에 흘린 뒤 제사장이 섭취하는 방식으로 두 비둘기가 처리되었다. 그러나 가난한 계층 중에는 심지어 비둘기마저 힘에 겨운 사람들이 있었다.

        그런 극빈자들이 무심코 죄를 범했을 경우에도 죄 문제를 그대로 넘길 수는 없었기에 하나님께서는 마지막 수단을 그들에게 허락하셨다. 바로 그들이 평소 음식으로 먹는 밀가루 1/10에바(약 2.2리터)를 소제의 속죄 제물로 가져오라 명하신 것이다(레 5:11~13).

        경제적 형편과 무관하게 죄의 문제는 어떤 방법으로든 반드시 해결되어야 했다. 비록 밀가루는 피가 없는 속죄 제물이었지만, 하나님은 자신의 재량으로 극도로 가난한 자들을 위해 밀가루 제물에 피의 효력이 있는 것으로 간주해주셨다. 마지막 한 사람을 위해서까지 속죄의 길을 열어주신 하나님의 큰 은혜가 아닐 수 없다.

        매우 특이한 속죄제의 피뿌리기

        속죄제의 피 의례는 매우 독특한 방식으로 이루어졌다. 먼저 (대)제사장과 회중을 위한 속죄제 수소는 안수 후 도살을 한 뒤 그 피를 양푼에 받아 내성소로 가지고 들어간다. 거기서 양푼의 피를 손가락으로 찍은 뒤 지성소 휘장 앞의 향단 주변에 ‘뿌리고’ 향단의 네 뿔에 ‘발랐다’(레 4:6~7, 17~18). 그러나 평민을 위한 속죄 제물인 염소와 양의 피는 마당에 놓인 번제단의 네 뿔에 ‘바른다’(레 4:25, 30). 비둘기의 경우에 피를 양푼에 받지 않고 죽인 뒤 몸채 들고 마당의 번제단 벽에 일부를 뿌리고 남은 피는 제단 아래 흘렸다(레 5:9). 여기서 주목해야할 것은 제사장과 회중을 위한 속죄제 수소의 피는 내성소에 들어가 향단에 처리한 반면, 평민의 속죄제 짐승(염소와 양, 비둘기)의 피는 마당의 번제단에서 처리했다는 점이다. 이것은 신분에 따른 죄의 오염력과 영향력이 차이가 났기 때문이다. 제사장과 회중의 죄의 ‘독기’는 내성소까지 침범해 향단을 더럽힌 반면, 평민의 죄는 마당의 번제단을 더럽히는 결과를 낳았다. 그러한 이유로 피를 뿌리는 위치가 달랐다.

        <표>에서 확인해 볼 수 있듯이 피를 어디에 뿌렸느냐에 따라 속죄제 고기 처분 방식도 달라졌다. 내성소에서 피를 뿌린 짐승의 경우 결코 그 고기를 제사장이 먹지 못하고 진영 밖의 재를 버리는 ‘정결한 곳’에서 소각을 해서 없앤다. 반면에 마당의 번제단에서 피가 처리된 속죄제 짐승의 고기는 제사장들에게 일종의 수고비로 건네져 그것을 먹어서 없앴다. 이것은 분명히 속죄제 고기의 오염도의 차이로 인한 것이다. 내성소에 피를 뿌린 속죄제 짐승의 경우 피를 통해 흡수된 오염이 강해 먹을 수 없어 밖에 반출해 태웠던 반면, 마당에 피를 뿌린 속죄제 짐승의 경우 그 오염이 경미해 제사장이 먹을만 했기에 하나님께서 그 제사를 집례한 제사장들이 먹도록 조치하시고 밖에 버려 태우진 않았다고 볼 수 있다. 이렇게 해서 속죄제는 ‘태우는 속죄제’와 ‘먹는 속죄제’로 나뉜다.

        속죄제의 피 뿌리는 특유의 동작은 아래의 비교를 통해 분명해진다. 우선 속죄제 외의 다른 모든 제사들, 즉, 번제/속건제/화목제에서는 피를 뿌리는 방식이 공통적으로 ‘끼얹다’(zaraq ‘dash, throw’)이다. 피를 양푼에 받은 뒤 제단 사면 벽에 뿌려서 처리한다. 그러나 속죄제는 전혀 다르다. 그것은 피를 양푼에 담은 뒤 다음 세 가지 동작을 통해 피를 처리한다.

        a. ‘뿌리다’(히자-hizza ‘sprinkle’): 손가락으로 제단 주변에
        b. ‘바르다’(나탄-natan ‘daub, put’): 손가락으로 제단의 네 뿔에
        c. ‘쏟다’(샤파크/야차크-shapak/yatsak ‘pour’): 제단 밑에

        속죄제에서는 피가 든 양푼을 들고 제단 벽에 끼얹는 것이 아니라, 손가락을 양푼에 담아 피를 찍은 뒤 소량의 피를 제단 주변에 뿌리거나 제단 뿔에 바르는 동작으로 피를 처분한다. 피가 대량으로 남는데, 이 남은 피는 제단 밑에 쏟는다. 여기서 손가락으로 피를 뿌리고 바르는 동작이 매우 중요하다. 이것이 가져오는 효과는 제단의 정화이기 때문이다(레 8:16; 16:19). 즉, 속죄제의 피를 특이한 동작으로 뿌리고 바를 때 제단과 성전이 청소된다. 이것이 속죄제의 가장 큰 특징이다.

        죄의 자백이 요구됨

        레위기 5장 1~6절은 약간의 고의성이 있는 죄들을 위해 바치는 속죄제 규정이다. 네 가지 사례가 주어지는데 이것은 모두 고의성이 개입되어 있으므로 그 죄의 공개적인 인정과 자백이 요구된다. 이런 죄의 인정과 자백은 속죄제 절차에서 매우 중요했다. 그것 없이는 속죄제는 아무런 효력이 발생되지 않았을 것이다. 혹자는 이 경우는 고의성이 있기 때문에 더 죄질이 나빠 ‘자백’이 요구되었지만, 4장의 죄들은 ‘비고의적’인 죄들이 때문에 죄질이 가벼워 자백이 요구되진 않았다고 말한다. 실제로 4장에는 ‘자백’의 요구가 나타나지 않는다. 그러나 4장은 ‘금지명령’이기 때문에 요아킴의 사례에서 보듯이 무심코 그 죄를 지었다하더라도 심각했다. 따라서 자백은 그런 심각한 상황에서 자동적으로 수반되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런 이유로 4장에서는 자백을 명시적으로 요구하고 있지 않을 것이다. 속죄제의 최종적 효과는 ‘속죄’와 그로 인한 ‘죄사함’이었다(레 4:20, 26, 35).







        히브리서 7:5
        레위의 아들들 가운데 제사장의 직분을 받는 자들이 율법을 좇아 아브라함의 허리에서 난 자라도 자기 형제인 백성에게서 십분의 일을 취하라는 명령을 가졌으나.


        히브리서 7:10
        이는 멜기세덱이 아브라함을 만날 때에 레위는 아직 자기 조상의 허리에 있었음이니라.

        (공동번역) 멜기세덱이 아브라함을 맞았을 때에 레위가 조상 아브라함의 몸 속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현대인의 성경) 이것은 멜기세덱이 아브라함을 만났을 때 레위는 아직 태어나지 않고 자기 조상의 몸 속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Winds in my Mind

        아직 자기 조상의 허리에 있었음이니라

        히브리서 7:4-10
        이 사람의 어떻게 높은 것을 생각하라 조상 아브라함이 노략물 중 좋은 것으로 십분의 일을 저에게 주었느니라.
        레위의 아들들 가운데 제사장의 직분을 받는 자들이 율법을 좇아 아브라함의 허리에서 난 자라도 자기 형제인 백성에게서 십분의 일을 취하라는 명령을 가졌으나.
        레위 족보에 들지 아니한 멜기세덱은 아브라함에게서 십분의 일을 취하고 그 약속 얻은 자를 위하여 복을 빌었나니.
        폐일언하고 낮은 자가 높은 자에게 복 빎을 받느니라.
        또 여기는 죽을 자들이 십분의 일을 받으나 저기는 산다고 증거를 얻은 자가 받았느니라.
        또한 십분의 일을 받는 레위도 아브라함으로 말미암아 십분의 일을 바쳤다 할 수 있나니 이는 멜기세덱이 아브라함을 만날 때에 레위는 아직 자기 조상의 허리에 있었음이니라.

        레위가 조상의 허리에 있었다는 말씀은 히브리서 기자의 아주 특이한 표현 방법으로 "허리"생식 기관을 은유족으로 표현한 것이라고 합니다.

        예를 들면 남편이 허리를 다쳐 고통을 받는다는 말은 육체적인 기관 허리가 아니라 생식 기관을 사용하기 어렵다는 표현입니다.

        아브라함이 십일조를 바칠 때 레위는 아직 태어나지 않았던 때입니다.
        그러나 그 허리에 있었다는 것은 장차 태어날 것을 알려주신 것입니다.
         

        창세기 12:2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케 하리니 너는 복의 근원이 될지라.  

        하나님 나라의 복입니다.
        우리는 이 복에 대해서 바로 깨달아야 합니다.
        사람들은 복이라고 하면 이 세상에도 받고 하나님 나라에서도 받는 것으로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복은 하나님 나라라는 것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멜기세덱이 아브라함을 만날 때에 레위는 아직 자기 조상의 허리에 있었음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자기들의 이성적 지식으로 마치 율법을 잘 지켜야 복을 받는 것으로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멜기세덱이 아브라함을 만날 때에 레위는 아직 자기 조상의 허리에 있었다고 말씀을 하고 있고 아브라함의 복을 받으려면 아브라함과 같은 믿음을 가진 자라야 복을 받을 수 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허리'라는 말이 나오는 이게 무슨 뜻입니까?

        창세기 35:11

        그에게 이르시되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니라 생육하며 번성하라 국민과 많은 국민이 네게서 나고 왕들이 네 허리에서 나오리라.

        즉 이스라엘이라는 인물이 된 야곱의 허리에서 많은 국민과 많은 왕이 줄줄이 쏟아져 나온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많은 국민과 많은 왕은 어디 들어있는 겁니까?
        이미 야곱 안에 담겨 있는 겁니다.
        그것이 허리라는 배출구를 통해서 역사 안에서 터져 나오게 되어 있습니다.
        그렇게 보면, '허리'라는 말은 결코 분화되지 않는다는 겁니다.
        '따로 따로'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모두가 하나의 원질 안에 예속되어 있다는 말입니다.

        동양식으로 말하지만 '허리'란 '배'를 뜻합니다.
        아무리 후손들이 번식해도 모두 선조의 뱃속에 이미 담겨 있었던 존재였다는 겁니다.

        그러면 레위 족속이 아브라함의 허리에 있다는 말은 무슨 말일까요?

        레위 지파가 하는 일은 이미 하나님께서 아브라함 내린 그 약속에 다 담겨 있는 일이다는 겁니다.
        아브라함의 허리에서 나온 자가 이삭이고 그 이삭의 허리에서 나온 자가 야곱이고 그 야곱의 허리에서 나온 자 중의 하나가 레위입니다. 그래서 결과적으로 레위 지파는 아브라함의 허리 안에 있는 자입니다.

        신약에 와서 '허리'라는 말 보다 다른 확실한 말을 성경은 우리에게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안'이라는 말입니다.
        즉 '예수님 허리'가 아니라 그냥 "예수님 안에 있음"으로 표현하는 겁니다.

        로마서 8:1-2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갈라디아서 3:26-27
        너희가 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으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자는 그리스도로 옷 입었느니라.

        예수님을 믿기만 하면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겁니다.
        더 이상 율법에 매여 살면 안됩니다.

        사도 바울은 이런 점을 우려해서 다음과 같이 당부하고 있습니다.
        갈라디아서 4:10-11
        너희가 날과 달과 절기와 해를 삼가 지키니 내가 너희를 위하여 수고한 것이 헛될까 두려워하노라.

        사도는 평소에 다음과 같이 당부한 점을 유의합시다.
        "내가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라는 당부 말입니다. 사도 바울은 성도가 율법에 더 이상 매이지 않고 해방되었다고 합니다.

        갈라디아서 4:4-5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 율법 아래 나게 하신 것은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을 속량하시고 우리로 아들의 명분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멜기세덱이 아브라함을 만날 때에 레위는 이미 자기 조상의 허리에 있었음이라는 의미는?

        창세기 14:17-24

        아브라함이 조카 롯을 구하기 위한 전투에서 승리합니다.
        돌아오는 길에 살렘왕 멜기세덱을 만나 전리품의 십분의 일을 그에게 드립니다.
        그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제사장이기도 했습니다.
        왕이자 제사장의 신분을 동시에 가진 자는 멜기세덱 외에 예수님 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멜기세덱을 오실 예수님의 모형으로 생각합니다.
        구약시대의 제사장은 레위지파에서만 할 수 있었기 때문에 레위라는 호칭은 제사장과 같은 의미로 쓰여집니다.

        조상의 허리에 있었다는 표현은 태어나기 전 이라는 뜻 입니다.

        그 의미는 레위지파 제사장보다 멜기세덱 제사장이 더 우월하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레위지파의 조상인 아브라함이 멜기세덱 제사장에게 진리품의 십분의 일을 드렸기 때문입니다.
        예수님도 제사장입니다.
        그러나 레위지파 계열의 제사장보다 우월하십니다.
        그 이유는 멜기세덱 계열의 제사장이기 때문입니다.

        야곱의 허리에서 나온 사람이 모두 칠십이요 요셉은 애굽에 있었더라”(출애굽기 1:5)
        “The descendants of Jacob numbered seventy in all; Joseph was already in Egypt.”(Exodus 1:5)

        출애굽기는 야곱의 계보로부터 시작합니다.
        이 계보 끝 출애굽기 1장 5절창세기 46장 27절을 그대로 인용하면서도 단 하나의 단어를 바꿔 말하고 있습니다.
        야곱의 ‘집 사람’을 야곱의 ‘허리’로 바꿉니다.
        여기서 간과해선 안 될 메시지가 있습니다.
        ‘야곱의 허리’란 히브리어로 ‘예렉 야코프’라고 하는데, ‘예렉’은 단지 허리가 아니라 ‘허벅지 관절에 있는 둔부의 힘줄’을 말하며 ‘허벅다리 사이’, 사타구니 ‘생산의 자리’를 의미합니다(창세기 32:32).

        5절. / 야곱의 혈속(네페쉬 요츠에 예레크 야아콥)
        - 직역하면 '야곱의 허리로부터 나온 영혼들'이다.
        이처럼 후손을 '허리에서 난 자'로 묘사하고 있는 것은 허리에 후손을 얻을 생명력이 보존되어 있다고 믿는 히브리인들의 관용적 표현이다(히 7:5).

        * 예레크(3409) יָרֵךְ

        1. 넓적다리
        2. 무생물에 적용될 경우.
        3. 성막에 있는 등대
        발음 / 예레크(yârêk)
        어원 / 연계형 יֶרֶךְ, 어미활용 יְרֵכִי, 쌍수 יִרֵכַיִם, ‘부드럽다’는 뜻의 사용하지 않는 어원에서 유래
        관련 성경 / 허벅지(창 24:2, 32:25, 47:29), 몸(창 46:26,삿 8:30), 밑판(출 25:31, 민 8:4), 넓적다리(출 28:42, 민 5:22, 겔 24:4), 쪽(출40:22, 민 3:29, 왕하 16:14), 다리(삿 3:16, 21), 허리(출 32:27,시 45:3, 아 3:8), 볼기(렘 31:19).
        구약 성경 / 34회 사용



        한편 여기서 사람을 '영혼'(네페쉬)으로 서술한 것은(창 12:5) 영혼을 인격의 대표격으로 여긴 히브리인의 사고(시 42:1, 2, 5)를 반영한다. 그리고 혈속(血屬)이란 가장을 중심으로 몇 대(代)가 함께 기거하는 이른바 대가족을 가리킨다.
        따라서 이는 1절의 '권속'과 비교되는 혈연 집단이다.

        야곱은 얍복강에서 하나님의 축복을 받아내겠다고 씨름해 기어이 이깁니다.
        이때 생산의 자리가 골절되는 부상으로 절뚝거리는 중상을 입게 됩니다.
        그 대가로 야곱과 그의 자손들의 번영을 약속받았기에 ‘허리’라는 단어를 의도적으로 쓴 것입니다.
        ‘야곱의 허리’는 야곱의 고난을 통해 세워진 이스라엘 가문을 뜻합니다.
        이스라엘의 번성(출 1:7)엔 조상들의 고난의 대가가 있었습니다.

        믿음의 가문은 그냥 세워지는 것이 아닙니다.
        인생의 값은 고난의 값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저절로 성취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 약속을 이루기 위해 과정이라는 고난을 지불해야 합니다.
        그만한 값을 치를 때 비로소 값진 인생이 됩니다.

        10절 “이는 멜기세덱이 아브라함을 만날 때에 레위는 이미 자기 조상의 허리에 있었음이라.”

        허리에 있었다는 말은 자식을 낳는 생식에 대한 부분을 묘사하는 말입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이 십일조를 드린 것은 레위 후손들이 드린 것과 마찬가지라는 것을 이야기를 하는 것입니다.
        그 논리를 완성함으로 인해서 레위인의 십일조를 받는 사람은 제사장이므로 멜기세덱이 제사장이라는 논리를 완성하는 것입니다.
        또한 유대인들이 자랑하고 드높이는 제사장과 레위인보다 멜기세덱이 더 높은 위치에 있는 사람인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럼으로써 허탄한 족보와 신화 이야기를 더 이상 하지 못하도록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구원과 관계가 없고 영적 성장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레위 지파가 아닌 멜기세덱을 따라서 대제사장이 되셨습니다. 제사장들이 성경에 많이 나오지만 아론이 첫 번째 대제사장이었는데 그는 하나님이 직접 세우신 대제사장이므로 그를 제외하고는 멜기세덱보다 훌륭한 대제사장은 없었다고 생각합니다. 제사의 영역에서는 아론을 제외하고 가장 탁월한 제사장이라고 생각합니다. 반면에 홉니와 비느하스처럼 수준이 낮은 제사장들도 성경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멜기세덱은 성경에서 높다고 할 만큼 최고수준의 제사장이 확실합니다.

        모세가 광야에서 40년 동안 생활할 때 이드로의 집에서 생활했습니다. 이드로의 집에서 모세가 그렇게 오랫동안 살았는데 이드로가 만일 하나님의 제사장이 아닌 이방신의 제사장이라면 그가 그렇게 오래 함께 있었겠습니까. 이드로의 하나님과 모세의 하나님이 다르다고 생각할 수 없는 것입니다.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들을 인도하면서 이드로의 말을 듣고 백성들을 다스렸는데 만약 이드로가 이방신의 제사장이라면 그런 사람의 말을 듣고 따라갔다는 것이 되므로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람이 이방신의 제사장의 말을 따른 것이 된다면 큰 문제입니다. 그래서 이드로가 믿은 하나님과 모세가 믿은 하나님이 같은 하나님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드로의 충고를 모세가 받아들인 것입니다. 그런데 이드로는 애굽에서 유대인과 같이 살지도 않았고 오히려 가나안 지역에서 미디안 족속으로 산 자입니다. 그러므로 꼭 유대인만 구원을 받았다고 보면 안 됩니다. 이드로는 미디안 사람이고 제사장입니다. 히브리서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유대인들이 자신들에게만 구원이 있는 것처럼 자부하고 있지만 그렇지 않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유대인이 아니라도 이방 땅에도 훌륭한 사람들이 많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려고 하는 것입니다. 욥도 훌륭하고 이드로도 훌륭하고 멜기세덱도 훌륭합니다. 결국 히브리서를 통해 예수 그리스도를 드러내면서 한편으로는 유대인들의 편협 된 사고를 깨려는 의도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모든 이야기들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께서 얼마나 위대하신 분이신지를 보여줍니다.

         

        히브리서 7:10
        이는 멜기세덱이 아브라함을 만날 때에 레위는 이미 자기 조상의 허리에 있었음이라.

        중학교 생물교과서 진화론을 이야기할 때에 예문이 “옛날 히브리사람들은 (성경에) 자손의 씨(정자)가 허리에 있다고 믿었다“라는 예가 있었다.

        교과서 저자는 성경시대의 옛 사람이 생물학도 모르는 무식한 사람들이며 그 성경을 믿는 그리스도인들이 무식하다는 간접적인 비아냥이다.

        (인간의 이론 진화론이 판치는 비이성적인 세태이기 때문에 그렇다.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
        진화론 창조론 모두 한편 합리성이 있고 다른 한편 증명할 수 없는 모순이 있다.
        과학적인 태도라면 두 주장을 다 언급해야 과학적이고 객관적인 것이다.
        그런데 사람은 대세, 유행을 따른다.
        지금은 진화론이 대세 유행이어서 창조를 주장하면 무식해 보여 그런 것은 아닐런지?
        진화론, 창조론 모두 논리성과 모순이 있는 데 어느 것을 선택하는 가는 믿음이다.
        나는 창조를 믿는다.)

        그런데 성경 전체를 문맥을 따라 읽어 보면 “허리”라는 표현은 종종 reproductive organ system (생식기관)을 포괄적으로 의미함을 알 수 있다.

        성경 어디에 그런 내용이 있을까?
        그러려면 성경을 문맥을 따라 조화롭게 읽어야 한다.
        성경의 문맥을 떠나서 일부 구절, 내용만 가지고 해석 설파 하는 것을 경계하라.

        예를 들어
        우리말도 뒤를 본다, 뒷간, 볼일을 본다… 라 말하면 젊잔은 표현이지만 똥을 눈다(싼다), 똥깐 이라고 말하면 비속 표현인 것과 같다.
        이런 경우, 문맥상 뒤를 본다는 말을 “자신의 뒤쪽을 본다”고 하면 오해다.

        성경에서 Sex와 관련된 것을 직접적으로 기술하는 것이 불편하여 완곡한 표현했다.
        이렇게 말하면 내가 억지 주장을 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면 성경의 다음 구절을 읽어보자.

        창세기에 있는 유다의 아들 오난의 이야기이다.

        [창세기 38:8,9]
        유다가 오난에게 이르되 네 형수에게로 들어가서 남편의 아우 된 본분을 행하여 네 형을 위하여 씨가 있게 하라
        오난이 그 씨가 자기 것이 되지 않을 줄 알므로 형수에게 들어갔을 때에 그의 형에게 씨를 주지 아니하려고 땅에 설정하매

        오난의 이야기를 보면 구약에서도 생식기관을 통해 자손이 이어진다는 것을 명확히 알고 있었다.
        남자의 정액이 여성의 몸에 들어가 자녀가 생긴다는 것을 알았다는 것이다.

        롯의 두 딸도 성행위를 통해 자손이 생긴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창세기 19:31-38 참조)

        구약시대의 사람들도 다 알고 있었다는 말이다.
        (우리가 말하는 성행위라는 표현만도 완곡한 표현이다.
        자세하게 표현을 하면 음란 소설이 될 것이다.
        그러니 완곡한 비유적 표현을 성경에 썼을 것이다.)

        성경을 문맥을 따라 전체적으로 읽는 것이 중요하다.
        히브리서 7:10 및 성경 많은 곳의 문맥에서 허리는 reproductive organ system (생식기관)을 의미한다.
        그 냥 쉽게 말해서 그의 몸에서 라고 이해하면 된다.
        그 이상의 해석은 불필요하다.

        성경의 문맥을 무시하고 해석, 설명하는 오류를 범하지 말아야한다.
        또한, 그렇게 말하는 사람을 경계해야한다.
        믿는 사람이 성경 전체를 주의 깊게 열심히 읽어야 하는 이유이다.

        허리가 reproductive organ system (생식기관) 혹은 몸을 표현하는 구절은 많이 있지만
        무작위로 둘을 뽑았다.

        [창세기 35:11]
        하나님이 그에게 이르시되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 생육하며 번성하라 한 백성과 백성들의 총회가 네게서 나오고 왕들이 네 허리에서 나오리라

        [출애굽기 1:5]
        야곱의 허리에서 나온 사람이 모두 칠십이요 요셉은 애굽에 있었더라

        그런데 이것을
        다음과 같이 이상하게 현학적으로 풀어 설명하는 것은 듣는 이를 혼란에 빠지게 한다.
        뭔 히브리어가 어쩌구 저쩌구 … 하면서

        물론 전문가라면 원어(히브리어, 헬라어)를 열심히 공부해야한다. 그러나
        문맥을 무시한 원어를 들먹이는 현학적인 해석은 사람을 혼동시킨다.
        자기도 잘 이해를 못했으니까 성경의 문맥을 떠나 복잡하게 설명을 하는 것이다.
        문맥을 따라 명료하게 설명을 할 수 없으면 자기도 잘 모른다는 뜻이다.
        요즈음 이런 사람들(설교자)이 매우 많은데 이런 설교자를 경계한다.

        (문맥을 따라 이해한다는 것은 제나라 말, 국어를 잘 이해 한다는 말인데 제 나라 말도 문맥을 따라 잘 이해하지 못하면서 원어로 이해하려 하면 매우 이상한 뒤틀린 오해, 해석을 하게 된다.
        이런 사람은 제대로 진지하게 성경을 읽었나 하는 의심을 하게 된다.

        아마 요즈음 유식한 교인이 많기 때문에 자기도 모르는 열등감에
        뭔가 더 우월하다는 것을 나타내려고 원어가 어쩌구저쩌구 하는 것이 아닐까 하는 비뚤어진 생각을 해본다.
        그렇다고 꼭 원어로 해석을 하지 말라는 말은 아니다.
        인간에게 절대라는 말은 잘못이다.)

        몇 가지 예를 들어 본다.
        예를 들 것도 없이 Naver, Google에서 “허리에서”라고 찾아보면 많이도 나온다.
        (쓸데없는 일이지만 시간 나는 분은 찾아보세요)

        (1) 히브리 원어에서 “허리”는 무엇이라고 하는 데 그 뜻은 원어에서는 어쩌구저쩌구 ….
        이런 설명은 문제라고 생각한다.

        성경을 진지하지 읽지 않는 수준 미달의 설교자가 많이 있다.
        듣는 사람은 주의해야한다.
        예수님을 믿는 성도는 성경 진지하게 전체적으로 많이 읽어야 한다.

        (2) 이스라엘의 허리는 “얍복강에서 이스라엘로 이름이 바뀐 야곱의 허리”라고 한 사람도 있다,
        (창세기 32_22-32 참조)







        속죄제의 영적 의미(레위기 4:1-35)






        레위기 4장은 속죄제에 관한 내용입니다. 4장에서는 제사장과 온 회중과 족장과 평민이 속죄제를 바쳐야할 경우와 방법에 대해서 설명하고 있습니다. 속죄제는 5장에서도 이어지는데, 5장에서는 가난한 자와 극빈자가 속죄제를 바쳐야할 경우와 방법 및 속건제에 대해서 설명하고 있습니다.
        제사장이 속죄제를 바치는 경우에는 죄 범한 제사장이 흠 없는 수송아지를 회막문 앞으로 끌어와서 그 제물의 머리에 안수한 후에 도살합니다. 다른 정결한 제사장이 그 제물의 피를 받아 회막에 가지고 들어가서 손가락에 그 피를 찍어 성소 휘장 앞에 일곱 번 뿌리고 향단 뿔에 바릅니다. 그리고 나머지 피는 모두 번제단 밑에 쏟아 붓습니다.
        도살된 제물 가운데 내장에 붙은 모든 기름과 콩팥과 허리 근방에 붙은 기름과 간에 덮인 꺼풀을 콩팥과 함께 취하여 정결한 제사장이 번제단 위에 불사릅니다. 그리고 제물의 나머지 곧 가죽과 고기와 머리와 다리와 내장을 진 바깥 재 버리는 곳인 청결한 곳으로 가져다가 불로 나무 위에서 태웁니다. 이스라엘의 온 회중이 속죄제를 바치는 경우에도 제사장이 속죄제를 바치는 경우와 동일한 방법으로 바칩니다. 그렇게 하면 사함을 얻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족장이 속죄제를 바치는 경우에는 흠 없는 수염소를 예물로 가져다가 그 제물의 머리에 안수하고 도살합니다. 제사장은 그 피를 받아 손가락으로 찍어 번제단 뿔에 바르고 나머지 피는 번제단 밑에 붓습니다. 그리고 모든 기름은 단 위에서 불사릅니다. 평민이 속죄제를 바칠 경우에도 동일한데, 다른 것이 있다면, 수염소가 아니라 암염소를 바친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기억할 것은 족장과 평민의 속죄제의 경우, 앞서 제사장과 온 회중의 속죄제에서와 같이 제물의 가죽과 살코기를 모두 진 바깥에서 태우라는 언급이 없다는 것입니다. 또 제사장과 온 회중을 위한 속죄제에서는 그 피를 가지고 성소에 들어가 휘장 앞에 일곱 번 뿌리고 향단 뿔에 바르도록 했지만, 족장과 평민을 위한 속죄제에서는 성소에 들어가지 않고 그냥 번제단 뿔에 바르도록 하고 있습니다. 그와 같이 하면 사함을 얻으리라고 했습니다.
        구약시대의 제사는 자발적인 제사와 의무적인 제사로 나눠집니다. 자발적인 제사에는 번제, 소제, 화목제가 있고, 의무적인 제사에는 속죄제와 속건제가 있습니다. 속죄제는 부지중에 혹은 실수로 지은 죄를 사함받기 위한 제사이고, 속건제는 사람이나 성물에 대하여 범한 죄를 사함받기 위한 제사였습니다. 속죄제를 정화제사, 속건제를 배상제사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번제가 과거의 죄를 사함받기 위한 것이고, 소제는 개인적 성별을 위한 것이며, 화목제는 하나님과 공동체의 교제유지를 위해 바쳐진 제사라면, 속죄제는 무지로 범한 죄를 용서받기 위해서 드리는 제사입니다.
        속죄제를 드리는 목적은 뜻하지 않게 하나님께서 주신 계명 가운데 하나를 범한 것에 대해 속죄를 구하는 것입니다. 속죄제를 드려야 하는 구체적인 상황은 5장에 나타나 있는데, 증인임에도 불구하고 증언을 하지 않았을 때, 부정한 들짐승이나 가축이나 곤충의 시체를 만졌을 때, 부정한 사람과 접촉했을 때, 경솔하게 맹세했을 때 등입니다. 이 모두는 고의가 아니라 부지중에 범한 죄들입니다.
        속죄제에는 몇 가지 중요한 특징이 있습니다.
        첫째는 예배자 자기 죄를 깨닫고 사함받기 위해서 하나님께 제물을 가지고 나아간다는데 있습니다. 물론 이 경우에는 의무적인 것입니다. 죄를 깨닫고서도 그 죄를 사함받기 위해서 하나님께 나아가지 않을 수 없다는 뜻입니다. 속죄제의 제물은 범죄자의 사회적 신분에 따라 달랐습니다. 제사장과 온 회중은 흠 없는 수송아지를, 족장은 흠 없는 숫염소를 드렸습니다. 평민은 흠 없는 암염소나 암양을 드렸고, 가난한 자는 산비둘기나 집비둘기를 제물로 드릴 수 있었습니다. 극빈자는 고운 가루 에바 십분의 일을 제물로 드릴 수 있었습니다. 에바는 ‘바구니’란 뜻으로 양을 재는 단위입니다. 1에바는 약 23리터입니다. 따라서 그 십분의 일은 약 2.3리터에 해당됩니다. 그리고 이들 가난한 자와 극빈자의 속죄제에 대해서는 5장에서 설명됩니다.
        둘째는 속죄제가 십자가를 지심으로 인류의 죄를 대속하신 그리스도의 대속 사역을 상징한다는 데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이 대속희생의 어린양이 되사 모든 사람의 대속물이 되셨으며 그가 죽으신 장소는 예루살렘 성 바깥 골고다 언덕이었습니다. 속죄제 희생제물이 불살라진 곳이 진 바깥 정결한 곳이듯이 예수님도 진 바깥 골고다 언덕에서 대속제물이 되셨습니다. 
        구약시대에는 짐승의 피로써 하나님의 선민이 되었지만, 신약시대에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써 하나님의 선민이 됩니다. 짐승의 피가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의 피가 믿는 자들의 죄를 대속하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과 사도들의 입장은 구약시대의 짐승의 피는 신약시대의 그리스도의 피에 대한 모형과 그림자에 불과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그리스도의 피로써만이 진정으로 속죄를 입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죽음은 인간의 죄를 대속하기위한 것이었습니다(고전 15:3). 예수님은 잡히시던 날 밤에 제자들에게 포도주잔을 주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죄 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바 나의 피 곧 새 언약의 피니라”(마 26:28). 또 예수님의 수제자 베드로는 그리스도께서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이는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벧전 2:42절)고 하셨습니다. 또 바울 사도는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는 자로 우리를 대신하여 죄를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저의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고후 5:21)고 하셨습니다. 이들 말씀들은 그리스도께서 친히 속죄를 위한 제물처럼 우리의 죄를 짊어지시고 우리를 대신해서 하나님의 진노를 푸시려고 제물이 되어 주셨다는 사실을 말해 주는 것입니다. 
        셋째는 이 은혜를 감사하고 기뻐해야 한다는데 있습니다. 우리는 죄에서 자유 하였고, 의로운 자라는 칭함을 믿음으로 받았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마땅히 받아야 할 것을 받은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사랑으로 인한 것이며, 우리의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닙니다(요 3:16). 우리를 의롭게 하시는 의로움이 우리의 것이 아닌 것은 그리스도께서 친히 짊어지신 죄의 대가가 그분의 것이 아닌 것과 같습니다(고후 5:21).



              467-34










          화목제

          3 “화목제를 드릴 때 누구든지 소로 드리고 싶은 사람은 수컷이든 암컷이든 흠 이 없는 것을 나 여호와에게 바쳐야 한다.

          그 제물을 가져온 사람은 그 짐승의 머리에 손을 얹은 다음 그것을 성막 입구에서 잡아야 하며 아론의 자손 제사장들은 그 피를 제단 사면에 뿌려야 한다.

          그는 화목제물 중에서 나 여호와에게 불로 태워 바칠 부분, 곧 내장을 덮고 있거나 그것에 붙어 있는 모든 기름과

          두 콩팥과 그 위에 덮여 있는 허리 부분의 기름과 간에 덮여 있는 간 꺼풀을 떼어낼 것이며

          아론의 자손들은 그것들을 단의 불붙는 나무 위, 번제물 위에 놓아 태워야 한다. 이것은 불로 태우는 화제이며 나 여호와를 기쁘게 하는 향기이다.

          “만일 나 여호와에게 드릴 화목제의 제물이 양이라면 암컷이든 수컷이든 그것은 반드시 흠 없는 것이어야 한다.

          만일 그 제물이 어린 양일 경우 그것을 드리는 사람은 그 양을 나 여호와 앞에 끌어다가

          그 머리에 손을 얹은 다음 성막 앞에서 잡을 것이며 아론의 자손들은 그 피를 단 사면에 뿌려야 한다.

          그리고 그는 화목제물 중에서 나 여호와에게 불로 태워 바칠 부분, 곧 등뼈 부근에서 잘라낸 기름진 꼬리와 내장을 덮고 있거나 그것에 붙어 있는 모든 기름과

          10 두 콩팥과 그 위에 덮여 있는 허리 부분의 기름과 간에 덮여 있는 간 꺼풀을 떼어낼 것이며

          11 제사장은 그것들을 단 위에서 불로 태워야 한다. 이것은 나 여호와에게 불로 태워 바치는 음식이다.

          12 “만일 화목제의 제물이 염소라면 그는 그것을 나 여호와 앞에 끌어다가

          13 그 머리에 손을 얹은 다음 성막 앞에서 잡을 것이며 아론의 자손들은 그 피를 단 사면에 뿌려야 한다.

          14 그는 그 제물 중에서 나 여호와에게 불로 태워 바칠 부분, 곧 내장을 덮고 있거나 그것에 붙어 있는 모든 기름과

          15 두 콩팥과 그 위에 덮여 있는 허리 부분의 기름과 간에 덮여 있는 간 꺼풀을 떼어낼 것이며

          16 제사장은 그것들을 단 위에서 불로 태워야 한다. 이것은 불로 태워 바치는 음식이며 마음을 기쁘게 하는 향기이다. 모든 기름은 나 여호와의 것이다.

          17 너희는 기름과 피를 먹지 말아라. 이것은 너희가 어느 곳에 살든지 대대로 지켜야 할 불변의 규정이다.”



          레위기 3장 17절 말씀에서 하나님께서 왜 기름과 피를 먹지 말라고 하셨나요?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는 목적에 따라 번제, 소제, 화목제, 속죄제, 속건제로 구분되며 제사 드리는 방법에 따라서는 화제, 요제, 거제, 전제로 나누어집니다.
          화제 중에는 제물에서 떼어낸 기름을 불에 사르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는 그 중에서 예물을 가져다가 여호와께 화제를 드릴지니 곧 내장에 덮인 기름과 내장에 붙은 모든 기름과 두 콩팥과 그 위의 기름 곧 허리 쪽에 있는 것과 간에 덮인 꺼풀을 콩팥과 함께 떼어낼 것이요 제사장은 그것을 제단 위에서 불사를지니 이는 화제로 드리는 음식이요 향기로운 냄새라 모든 기름은 여호와의 것이니라”(레위기 3:14-16)

          이 말씀 중에서 중요한 것은 모든 기름은 여호와의 것이다 라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기름을 먹지 말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고기를 그 생명 되는 피째 먹지 말 것이니라”(창세기 9:4)

          고기를 먹되 그 생명되는 피째 먹지 말라는 말씀이십니다.
          그 이유는 이렇게 설명합니다.

          “이스라엘 집 사람이나 그들 중에 거류하는 거류민 중에 무슨 피든지 먹는 자가 있으면 내가 그 피를 먹는 그 사람에게는 내 얼굴을 대하여 그를 백성 중에서 끊으리니 육체의 생명은 피에 있음이라 내가 이 피를 너희에게 주어 제단에 뿌려 너희의 생명을 위하여 속죄하게 하였나니 생명이 피에 있으므로 피가 죄를 속하느니라”(레위기 17:10-11)

          모든 생명의 주인은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인간이 함부로 생명을 다루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인간의 생명경시 풍조를 경계하시기 위하여 그런 명령을 주신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사야 55:6-9  복음의 7대 연합

          너희는 여호와를 만날만한 때에 찾으라 가까이 계실 때에 그를 부르라 악인은 그 길을, 불의한 자는 그 생각을 버리고 여호와께로 돌아오라 그리하면 그가 긍휼히 여기시리라 우리 하나님께로 나아오라 그가 널리 용서하시리라 여호와의 말씀에 내 생각은 너희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 길과 달라서 하늘이 땅보다 높음 같이 내 길은 너희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 생각보다 높으니라.



          복음의 7대 연합

          1. 탄생의 연합
          2. 고난의 연합
          3. 죽음의 연합
          4. 부활의 연합
          5. 승천의 연합
          6. 재림의 연합
          7. 왕국의 연합


          골로새서 1:19-20
          아버지
          께서는 모든 충만으로 예수 안에 거하게 하시고.
          그의 십자가의 로 화평을 이루사 만물에 있는 것들이나 하늘에 있는 것들을 그로 말미암아 자기와 화목케 되기를 기뻐하심이라.

          화목제의 제사는 관계를 회복하게 합니다.

          첫째는 하나님과의 관계(대신관계)
          둘째는 사람과의 관계(대인관계)
          셋째는 물질과의 관계(대물관계)
          물질관계는 세상의 환경과 물질과 모든 피조물과의 관계가 회복되는 것을 말합니다.
          넷째는 자기 자신과의 관계(대아관계)

          에베소서 2:13-18
          이제는 전에 멀리 있던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로 가까와졌느니라.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중간에 막힌 담을 허시고.
          원수 된 것 곧 의문에 속한 계명의 율법을 자기 육체로 폐하셨으니 이는 이 둘로 자기의 안에서 한 새 사람을 지어 화평하게 하시고.
          또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 원수 된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
          또 오셔서 먼데 있는 너희에게 평안을 전하고 가까운데 있는 자들에게 평안을 전하셨으니.
          이는 저로 말미암아 우리 둘이 한 성령 안에서 아버지께 나아감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요한복음 6:38-40
          내가 하늘로서 내려온 것은 내 뜻을 행하려 함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려 함이니라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은 내게 주신 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이것이니라.
          아버지의 뜻은 아들을 보고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는 이것이니 마지막 날에 내가 이를 다시 살리리라 하시니라 .

          하나님으로부터 용서의 빚을 지었기 때문에 용서해야 할 마음을 갖습니다.
          화목의 능력과 용서의 능력은 사람에게서 찾을 수 없지만 용서 받은 사람은 십자가안에서 내가 더 큰 용서를 받았기 때문에 사람과의 담을 무너트릴 수 있습니다.
          사람은 용서를 하지 않으려고 하는 본능적인 속성을 갖는다.

          십자가의 빚을 알고 깨닫고 체험한 사람만이 사람과의 담을 무너트릴 수 있습니다.
          가장 큰 용서를 받은 사람은 나라는 것을 믿는 것이 기독교 신앙의 핵심입니다.

          화목제물을 해석하는 열쇠는 오네시모(Oneimus, 이익)

          골로새인 빌레몬의 종으로 일찌기 주인에게 죄를 짓고 로마에 도망하여 있는 중 바울에게서 복음을 듣고 회개하여 신자가 되었다.
          바울이 골로세서를 써서 두기고와 오네시모편에 보내었다(골 4:7-9).
          바울이 그를 전 주인에게 권하여 보내며 빌레몬서를 붙여 그 신덕을 증거하고 또 그 죄를 사하여 형제같이 사랑하라 하였다(골 4:9, 몬10-12).






          화목제의 영적의미(레위기 3:1-17)

          레위기 3장은 화목제에 관한 말씀입니다.
          화목제의 특징은 ‘제사자가 바친 고기를 먹는 제사’입니다.
          화목제는 하나님과의 친교를 위해서 무교병과 함께 드립니다.
          화목제는 제사자가 암컷과 수컷 중에서 소나 양이나 염소 가운데서 흠이 없는 것으로 회막문에 가져와서 그 동물의 머리에 안수를 함으로써 동물로 하여금 제사자를 대신하게 하고, 예배자의 죄를 그 동물에 전가시켜 시켜 희생시킵니다.
          예배자가 동물을 죽여 피를 받아 제사장에게 주면, 제사장은 그 피를 제단 사면에 뿌립니다. 가죽을 벗기고, 각을 뜨지만, 번제와는 달리 고기를 태우지 않습니다. 오직 콩팥과 내장의 덮인 모든 기름과 기름진 꼬리를 제사장이 제단의 불에 놓아 태웁니다.
          동물의 가슴은 요제로, 오른쪽 뒤 넓적다리는 거제로 흔든 다음 가죽과 함께 제사장에게 주어지고, 나머지는 예배자가 가져다가 가족 친지들과 함께 그날에 다 먹어야 합니다.
          제사장도 마찬가집니다. 먹다 남은 것은 불에 태웁니다.

          화목제의 종류에는 자원제사와 서원제사와 감사제사가 있습니다.
          특히 항해나 광야여행에서 무사히 돌아왔을 때, 병이 나았을 때, 감옥에서 나왔을 때 드리는 제사입니다.
          감사제로써 화목제는 유월절 양, 제사장 위임식, 나실인의 서원 등에 드리며, 반드시 고기는 제사 드린 바로 그 날에 모두 먹어야 합니다.

          화목제의 의미에는 하나님과 사람들과의 평화, 언약체결에 대한 확증, 인간이 하나님께 제물을 드리면, 하나님이 받으시고 그 제물을 다시 인간에게 선물로 주시는 의미, 곧 하나님의 선물로써의 의미를 갖습니다.
          이 선물을 제사장과 예배자와 예배자의 가족친지들이 함께 하나님 앞에서 나눔으로써 화목을 공고히 한다는 의미를 갖습니다.
          하나님이 내리신 선물을 하나님 앞에서 나누어 먹음으로써 하나님과 사람 사이, 사람과 사람사이에 신비로운 연결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서 먹는 것이지 하나님과 함께 먹는 것은 아닙니다.

          기독교에서 행하는 성만찬의 의미를 가장 잘 표현해 주는 제사가 바로 이 화목제입니다.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과 사람사이에, 사람과 사람사이에 갈등과 반목을 샬롬, 곧 평화로 바꾸시기 위해서 하나님의 선물, 곧 화목제물로 이 땅에 오셨던 것입니다.

          "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안에 있는 영생이라"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를 화목제물로 삼으시고, 그의 피로 인한 구속을 믿는 인간들의 범한 죄를 용서하심으로서 당신의 공의로우심을 나타내시고, 또한 예수를 믿는 자들을 의롭다고 부르십니다.
          하나님은 공의로우신 분이시며, 죄를 벌하십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에 죄범한 인간들이 모두 멸망 받기를 원치 아니 하십니다.
          따라서 하나님은 인간들의 죄로 인한 진노를 푸시고 원수된 죄인들과의 관계 개선을 위해서 하나밖에 없는 아들로 친히 하나님과 죄인 사이의 화목제물로 삼으셨습니다.

          화목제물이란 말은 일반적으로 신의 진노를 풀기 위해서 인간이 마련한 희생제물을 뜻하지만, 성서가 말하는 화목제물은 진노하신 하나님께서 스스로 화목제물이 되셨음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정신은 피해자가 가해자를 벌하기보다는 오히려 먼저 화해의 길을 모색하는 자기부정과 희생의 정신을 말합니다. 이런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정신을 통해서 우리는 자신의 평화, 가정의 평화, 지역사회의 평화, 더 나가서는 국제사회의 평화를 도모할 수가 있고, 하나님의 나라를 앞당겨 실현 할 수가 있습니다. 이 일을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화목하게 하는 직책을 주셨습니다(고후 5:17-20).

          고대 근동지방에서는 공동식사를 통해서 평화 협정이나 협약 또는 계약체결을 인준하는 규정관습이 있었습니다.
          이삭과 아비멜렉(창 26:30),
          야곱과 라반(창 31:54)
          다윗과 아브넬(삼후 3:20).
          쌍방간에 의견이 교환되고, 그것이 수용되고, 계약이 체결되면, 그것이 백성들에게 공포되고, 그들은 하나님을 보고 먹고 마셨습니다(출 24:1-11).

          이스라엘 민족은 하나님을 계약의 하나님으로, 그들을 계약의 백성으로 믿었습니다. 출애굽 사건이 있은 후에 시내산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들을 종살이에서 해방하신 야훼 한 분만을 그들의 신으로 섬기며, 그들은 야훼의 백성이 되기로 하나님과 계약을 체결했습니다. 그러고 나서 그들은 하나님께 화목제사를 드렸고, 언약의 피뿌림을 받았으며, 그 제물을 나누어 하나님을 보고 먹고 마셨습니다. 이로써 그들은 열국 중에서 하나님의 “소유가 되었고, 제사장 나라가 되었으며, 거룩한 백성”(출 19:5-6)이 되었습니다. 이것이 구약(舊約)이요 이스라엘의 선민계약이었습니다.
          그리스도인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침례식 때에 우리 모두는 하나님과 계약을 체결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구속의 사건으로 인해서 죄의 종살이로부터 우리를 해방하시고, 성령으로 사는 새로운 삶을 주신 하나님 한 분만을 구세주로 모시고 섬기며, 하나님은 우리의 하나님이 되시기로 새로운 계약을 체결했습니다. 죄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바 그리스도의 언약의 피로 된 것입니다. 
          이것이 신약(新約)이요 그리스도인들의 선민계약입니다.

          성만찬은 바로 이 새로운 선민계약체결을 공고히 하기 위해서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벧전 2:9-10)된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을 보고 먹고 마시는 행위입니다. 성만찬은 하나님과의 약속을 공고히 할 뿐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을 확인하는 귀중한 시간인 것입니다.

          우리 조상들은 제사상에 올린 음식을 신(神)의 선물(膳物, gift)이라고 여겼습니다.
          비록 제사상의 음식이 인간이 차린 음식이고, 다분히 잘 보살펴주시라는 뇌물의 성격을 띤 것이지만, 신(神)은 인간들의 정성을 받으시고, 음식은 예배공동체를 내리시기 때문에 선물이라고 하는 것 같습니다.
          이렇게 제사 음식은 신이 내린 선물이고, 예배공동체에 대한 신(神)의 뜻이 담긴 음식이기 때문에 공동체의 모든 구성원은 반드시 이 제사 음식을 먹어야 했습니다.
          예전에 우리가 사용하던 ‘복덕방’이란 말이 바로 이 선물을 나누던 회관을 뜻했다고 합니다.
          이 말이 토지나 가옥 중개업소란 뜻으로 한동안 사용되기는 했지만, 먼 옛날의 복덕방은 각종 부락제 때 제사상에 올린 음식과 살코기를 마을회관으로 옮겨와 나눠 먹던 장소였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먹고 마심으로 복을 받고(飮福, 음복), 먹고 마심으로 덕담을 나누는(飮德, 음덕) 신성한 장소가 복덕방이었던 것입니다.
          복덕방에서 선물을 나누는 행위는 신의 뜻(神意, 신의)을 나누는 행위였고, 한 공동체의 결속과 연대를 신의 명령(神命, 신명)으로 이해하고 받아드렸던 엄숙한 행위였습니다.
          제물은 이와 같이 마을 공동체를 강하게 결속시키고 공동 운명체임을 자각시키는 중요한 역할을 해냈습니다.

          복 복(福), 덕 덕(德), 방 방(房)

          제사가 끝나면 음식을 나누어 먹는 일을 '음복(飮福)'이라 하는데 이 때의 '복(福)'은 '제사에 쓴 고기와 술'이라는 의미이다. '명복(冥福)을 빈다'라는 말을 가끔씩 듣는데 이 때의 '명(冥)'이 '저승 명'이기에 '저승에서의 복을 빈다'라고 해석해야 한다. '복생어미(福生於微)'라는 말이 있다. 복은 미세한 일에서 생긴다는 의미이다.

          복덕방의 어원은 '생기복덕(生起福德), 즉 복과 덕을 생기게 하는 것이라는 말에서 유래 하며, 복덕방(福德房)은 말 그대로 복과 덕이 있는 방을 말합니다.
          복덕방은 원래 일종의 뒷풀이 장소였습니다.
          마을의 당제나 동제를 지내고 난 뒤에 제사음식을 나누어 먹던 당산나무 아래나 그 곁에 넓은 마당집을 일컫는 말로, 마을 유지들은 음식과 돈을 기부하고 가난한 사람들은 제를 올리기 위해 노동력을 제공하고 제사음식은 모두 골고루 복덕방에서 나누어 먹었던 곳이 바로 복덕방입니다.
          제사음식을 받으러 윗마을 아랫마을 사람들이 다들 마을입구 복덕방 자리에 모이게 되면 집안 대소사에 관한 이야기가 자연스럽게 오가고 간단한 물건을 교환하거나 흥정도 자주 이루어져 나중에는 타지 사람들까지 그 마을에 빈집이 있는지 동네사람들이 어떤지 알아보곤 했던것이 자연스럽게 복덕방에서 집을 사고팔수 있도록 중개하는 곳이 되었습니다.
          복덕방은 마을전체의 사람들과 어울리며, 개방적으로 부동산을 알아보고 흥정한 것처럼, 기획부동산이나 일부 뜨내기 부동산처럼 자신의 이익을 위한 장소가 아닌 진정한 복덕방으로써의 책무를 다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신성한 뜻을 받들어 주님의 살과 피를 나누는 곳이 복덕방이요, 성도들이 먹고 마시는 떡과 잔은 모두가 한 운명체임을 주님의 명령으로 받는 하나님의 구원의 선물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택하신 자들의 구원과 축복을 위해서 외아들 예수님을 화목제물(和睦祭物)로 삼으시고, 구원을 위한 선물로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희생당하심은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서 마련하신 화목제물 곧 선물인 것입니다. 이 선물을 나누는 곳이 교회입니다. 그리고 이 제물 곧 하나님의 선물을 상징하는 성찬의 나눔이 있는 곳이 바로 하나님의 신령한 복을 나누는 복덕방인 것입니다.







          03-10-2023(금)

          _________________ 레위기 2장 / 소제(素祭) 민하(민카), grain offering.
                                    serial offering. meat offering(KJV)

          누구든지 소제의 예물을 여호와께 드리려거든 고운 가루로 예물을 삼아 그 위에 기름을 붓고 또 그 위에 유향을 놓아.
          And when any will offer a meat offering unto the LORD, his offering shall be of fine flour; and he shall pour oil upon it, and put frankincense thereon:




          Penses   5 2 Grain Offering

          소제의 의미 

          소제의 의미 / 겉사람을 죽여라
          - 구원 받은 후에 새로운 삶을 회복해야 한다.
            곡식이 고운가루가 되려면 철저하게 부서지고 깨져야만 한다.

          고린도후서 4:16
          그러므로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겉사람은 후패하나 우리의 속은 날로 새롭도다.

          번제의 의미

          번제의 의미 / 영혼 구원
          - 원죄의 문제를 해결한다.

          야고보서 1:21
          그러므로 모든 더러운 것과 넘치는 악을 내어 버리고 능히 너희 영혼을 구원할바 마음에 심긴 도를 온유함으로 받으라.

          히브리서 10:39
          우리는 뒤로 물러가 침륜에 빠질 자가 아니요 오직 영혼을 구원함에 이르는 믿음을 가진 자니라.

          시편 17:13
          여호와여 일어나 저를 대항하여 넘어뜨리시고 주의 칼로 악인에게서 나의 영혼을 구원하소서.

          소제에 사용할 수 있는 예물

          1. 고운가루(2:1)
          - 씨앗, 성장, 열매, 추수, 탈곡, 맷돌
          -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의 과정

          2. 기름(2:1)
          - 성령을 상징
          - 창세기 28:18-19,  요한일서 2:20, 27,  요한계시록 8:3-4

          3. 유향(2:1)
          - 불로 굽게 되면 향기가 난다
          - 마태복음 2:11


          4. 소금(2:13)
          - 방부제(마태 5:13)
          - 언약(민수기 18:19, 역대하 13:5)


          소제의 제물

          1. 고운가루(1절)

          2. 기름(누가복음 4:17-19)
          선지자 이사야의 글을 드리거늘 책을 펴서 이렇게 기록한 데를 찾으시니 곧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케 하고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였더라

          3. 유향(시편 141:2)
          나의 기도가 주의 앞에 분향함과 같이 되며 나의 손 드는 것이 저녁 제사 같이 되게 하소서.
          May my prayer be set before you like incense; may the lifting up of my hands be like the evening sacrifice.


          에베소서 5:2
          그리스도께서 너희를 사랑하신 것 같이 너희도 사랑 가운데서 행하라 그는 우리를 위하여 자신을 버리사 향기로운 제물과 생축으로 하나님께 드리셨느니라.
          and live a life of love, just as Christ loved us and gave himself up for us as a fragrant offering and sacrifice to God.

          요한복음 12:24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I tell you the truth, unless a kernel of wheat falls to the ground and dies, it remains only a single seed. But if it dies, it produces many seeds


          에베소서 1:7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로 말미암아 구속 곧 죄 사함을 받았으니.
          In him we have redemption through his blood, the forgiveness of sins, in accordance with the riches of God's grace.


          요한복음 6:32-33
          예수
          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늘에서 내린 떡은 모세가 준것이 아니라 오직 내 아버지하늘에서 내린 참 떡을 너희에게 주시나니
          하나님의 떡은 하늘에서 내려 세상에게 생명을 주는 것이니라.

          소제는 고운가루가 되는 것처럼 세상에 나가 작은 예수로 살아야 하는 것이다.

          우리는 각기 다른 모양의 십자가를 지고 가지만, 목적지는 같다.
          목적지가 같은 만큼 우리에게는 많은 길동무들이 있다.
          같은 모습으로 닮아 가는 자매와 형제들이 있는 것이다.
          세상 사람들은 우리를 보며 예수님을 보고, 우리가 스칠 때 예수님의 향기를 맡는다.
          우리는 작은 예수다.
          예수님은 복 있는 자가 되려면 마음을 비우고, 슬퍼할 줄 알며, 온유하며, 남을 불쌍히 여기며, 마음이 깨끗하고, 화평케 하며, 의를 위해 굶주리고 목말라야 한다고 말씀하셨다(마태복음 5:3~12).
          예수님을 닮기를 사모하는 사람은 날마다 이 교훈의 거울에 자기를 비춰 보면서 순종 하지 않으면 안 된다.
          오늘날 세상 사람들의 눈에 비치는 우리들의 이미지는 너무 참담하다.
          그들의 눈에 우리는 예수님을 믿지 않는 자들과 전혀 다를 게 없다.
          성경을 들고 있다고 해서 우리를 특별하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어쩌다 이 지경에 까지 이르렀을까.
          예수님을 닮아 가야 하는 거룩한 목표를 상실했기 때문이다.
          ‘너무 비현실적인 목표야.
          이대로 사는 사람이 어디 있겠어. 믿음만 있으면 구원받는데…’ 하는 등의 변명을 늘어놓으면서 예수님을 닮는 우리의 목표를 마치 응접실에 걸어 놓은 액자처럼 쳐다만 보며 신앙생활을 하는 데 그 원인이 있다.

          예수님의 복 있는 사람의 조건에 대한 메시지는 분명하다.
          예수님의 제자는 하늘에 계신 하나님과 같이 온전해야 한다는 것이다.
          세상에서 부름받은 제자는 땅에서부터 예수님을 닮는 것을 목표로 삼아 열심히 오르는 자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내세의 구원을 외치는 자는 많지만 예수님의 제자가 되자고 외치는 자는 많지 않은 것이 우리의 현실이다.

          세상 사람들의 눈에 비친 우리의 모습이 이러한 현실을 잘 설명하고 있지 않은가.
          흠이 없는 자가 되어야 한다는 말이 아니다.
          우리가 오를 정상이 어디인지를 분명히 하자는 것이다.
          그 정상은 ‘작은 예수’가 되는 것이다.
          그렇게 되려고 흉내라도 내야 한다.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다(야고보서 2:26)

          영국의 어느 술집 주인이 빌리 그레이엄 목사의 전도집회에서 복음을 듣고는 마음의 변화를 얻어 “나 예수 믿겠습니다.”하고 벌떡 일어나 앞에 나가서 무릎 꿇고 기도하고 돌아갔다.
          그리고는 곧바로 자기 술집 앞에 간판을 하나 붙였는데, “나 엊저녁에 예수 믿었소 오늘부터 술집 영업 안 합니다.”라고 써 놓았다고 한다. 이것이 믿음이다.
          어제와 오늘의 인생이 완전히 바뀌는 것이 믿음이다.
          이것은 기적처럼 저절로 일어나는 현상이 아니라 우리의 의지를 통해 행동으로 드러나는 믿음의 과정이다.
          “너는 믿음이 있고 나는 행함이 있으니 행함이 없는 네 믿음을 내게 보이라 나는 행함으로 내 믿음을 네게 보이리라”(야고보서 2:18) 아브라함이 믿음의 조상으로 인정받게 된 데에는 그의 마음속 믿음뿐 아니라 행동으로 드러나는 믿음을 하나님이 보셨기 때문이다.
          아브라함은 100세에 아들을 주신 이가 죽은 아들을 능히 살리실 수도 있다고 믿었다.
          그래서 그는 늘그막에 얻은 아들을 바침으로 아들보다 하나님이 자신의 우선순위에 있음을 행동으로 증명했고, 그로 말미암아 우리의 신앙의 뿌리이며 믿음의 조상이자 하나님의 친구로 일컬음을 받았다.

          제자로 사는 것은 제자처럼 생각하거나 제자처럼 말하는 것이 아니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예수님이 사신 모습을 따라 ‘사는’ 것 이다.
          이것이 제자 훈련의 핵심이다
          .

          그러나 현대 교회의 성도들은 예수님처럼 변하는 것은 점진성을 가지고 마지막 날에나 이루어지는 것이라는 점만 강조하여, “우리는 모두 인간인데…”하며 눈감아 주는 현실주의에 곤두박질치고 있는 실정이다.

          이것이 바로 우리 한국 교회에 냄새가 진동하는 이유 중 하나일 것이다.
          작은 예수가 되라는 명령은 목회자뿐 아니라 모든 믿는 자에게 요구하시는 하나님의 표준이다.

          맥스 루케이도는 이렇게 말했다.
          하나님은 당신을 있는 그대로 사랑하신다.
          그러나 그대로 두지는 않으신다.
          하나님은 당신이 예수님처럼 되기를 원하신다.”

          헨리 나우엔은 더 강하게 이야기한다.
          진정한 구원은 그리스도가 되는 것이다.
          진정한 구원은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가 되는 것이다.”

          이것은 마지막 날에 얻게 될 변화를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다.
          지금 우리가 있는 자리가 우리의 모습을 말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마태복음 5:48)
          이것이 주님이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수준이다.

          원수를 사랑하라는 명령도 부담스러워하는 우리에게 주님은 온전하라고 명령하신다.
          이 명령에 따르려고 몸부림치지 않는 한 우리가 배우고 외우는 말씀들은 결국 우리 입에서 맴도는 메마른 구호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 유향 /
          유향은 향기를 발하는 일종의 향수입니다.
          유향이라는 말만 들어도 향기가 납니다.
          냄새나는 마굿간에서 예수가 나셨기에 향수인 유향을 선물한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이 탄생하신 것까지는 몰랐을 것입니다.

          황금 - 왕권을 상징
          유향 - 제사장을 상징
          몰약 - 메시아

          황금의 의미 - 왕

          황금은 왕권을 의미합니다.
          우리나라 박물관을 가보아도 왕은 황금으로 왕관을 만들어 썼습니다.
          황금 띠를 띠고 황금 그릇을 사용하였습니다.
          동방박사중에 한 명이 아기 예수에게 황금을 선물로 드린 것은 예수님은 우리의 왕이라고 하는 믿음의 고백이 들어 있는 것입니다.

          당시 역사가 세네카는 당시 중동에서는 이런 말이 있었다고 전하여 주고 있습니다.
          <황금을 가지지 않고는 왕을 만날 생각을 하지 말아라.>
          왕을 만날 때에는 반드시 준비하여야 하는 선물이 황금이었습니다.
          황금은 금속의 왕이고 예수님은 세상에 왕이십니다.
          예수님은 <왕되신 사람>이며 <사람이 되신 왕>이셨습니다.
          예수님은 힘으로 이 세상을 통치하시는 왕이 아니라 사랑으로 통치하시는 왕이셨습니다.
          예수님은 총이나 법으로 이 세상을 다스리시지 않으시고 십자가로 온 세상을 다스리신 왕이십니다.
          세상의 왕은 못 할 것이 너무  많은 왕이지만 예수 왕은 못 할 것이 없으신 전지전능하신 왕입니다.
          세상의 왕은 모든 면에 전문적인 지식을 가지고 있지 못 하기에 참모들이 같이 일해주어야만 하는 왕이지만 예수 왕은 모든 면에 탁월한 지식을 가지신 왕중의 왕이십니다. 정치, 경제, 교육, 건강 모든 면에 그를 따를 자가 없는 왕이십니다.
          세상의 왕은 임기가 있는 일시적인 왕이지만 예수 왕은 영원한 왕이십니다.
          세상의 왕은 이 땅의 왕이지만 예수 왕은 오는 세상에서도 왕이십니다.

          어느 역사학자가 알렉산더 왕과 예수님을 비교한 글이 있습니다.
          BC 350년 경 알렉산더 대왕은 세계를 정복하고 거대한 제국을 세웠다.
          그리스도와 알렉산더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두 사람은 젊은 날에 일을 시작하여 33세에 세상을 마쳤다.
          알렉산더는 왕국에서 태어났고 예수는 마굿간에서 태어났다.
          알렉산더는 왕자로 태어났고 예수는 목수의 아들로 태어났다.
          알렉산더는 왕좌에서 고귀한 왕으로 죽었으며 예수는 십자가에서 조롱받으며 죽었다.
          알렉산더는 일생에 위대한 성공을 보였고 예수의 일생은 실패한 것으로 보인다.
          알렉산더는 자신의 소유를 위하여 수 십만의 피를 흘렸고 예수는 전 인류를 위하여 피를 흘렸다.
          알렉산더는 영광의 바벨론에서 죽었고 예수는 수치의 갈보리에서 죽었다.
          알렉산더는 모든 왕국을 정복하였고 예수는 죽음을 정복하였다.
          알렉산더는 모든 사람을 노예로 만들었고 예수는 모든 인간을 자유케 하였다.
          알렉산더는 역사를 만들었고 예수는 역사를 변화시켰다.

          아기 예수에게 황금을 바친 것은 예수님은 왕이라는 고백이 들어 있습니다.

          유향의 의미 - 제사장

          유향은 향기를 발하는 일종의 향수입니다.
          유향이라는 말만 들어도 향기가 납니다.
          냄새나는 마굿간에서 예수가 나셨기에 향수인 유향을 선물한 것은 아닙니다.
          동방박사들은 별을 따라 오기는 하였지만 마굿간에서 예수님이 탄생하신 것까지는 몰랐을 것입니다.
          유향은 가정에서는 온 가정을 향기롭게 하는 데 사용하였고 성전에서는 제사드리는 데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이었습니다.
          제사중에 가장 많은 제사가 소제입니다.
          소제는 다른 제사를 드리고 하나님이 그 제사를 받으셨음을 감사드리며 드시는 일종의 감사 제사였기에 모든 제사 후에 거의 소제가 드려졌습니다.
          그런데 소제를 드릴 때에는 반드시 유향이 필요하였습니다.

          레위기 2:1-2
          누구든지 소제의 예물을 여호와께 드리려거든 고운 가루로 예물 을 삼아 그 위에 기름을 붓고 또 그 위에 유향을 놓아 아론의 자손 제사장들에게로 가져 올 것이요 제사장은 그 고운 기름 가루 한 줌과 그 모든 유향을 취하여 기념물로 단 위에 불사를지니 이는 화제라 여호와께 향기로운 냄새니라.

          그리고 분향단위에는 늘 향이 꺼지지 않고 타고 있었습니다. 향을 내는 향품은 소합향, 나감향 그리고 풍자향을 유향으로 섞어 버므려 태우게 되어 있었습니다.

          출애굽기 30:34-36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는 소합향과 나감향과 풍자향의 향품을 취하고 그 향품을 유향에 섞되 각기 동일한 중수로 하고
          그것으로 향을 만들되 향 만드는 법대로 만들고 그것에 소금을 쳐서 성결하게 하고
          그 향 얼마를 곱게 찧어 내가 너와 만날 회막 안 증거궤 앞에 두라 이 향은 너희에게 지극히 거룩하니라.

          청진기라고 하면 제일 먼저 생각나는 사람은 의사입니다.
          망치와 톱하면 제일 먼저 떠오르는 사람은 목수입니다.
          시멘트와 모래와 자갈하면 얼른 떠오르는 이는 건축가입니다.
          유향하면 제일 먼저 떠오르는 이는 제사장입니다.
          유향은 제사장이 사용하는 물건중에서 가장 필요한 것이었습니다.

          제사장은 라틴어로 폰티펙스(Pontifex)라고 하는 데 이는 다리를 놓는 사람이라는 의미입니다.

          아기 예수에게 유향을 선물한 것은 아이를 기르는 방에 향기가 늘 진동하기를 바란다는 바램으로 유향을 선물하였겠지만 그 속에 들어 있는 영적 의미는 <예수님은 제사장>이라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을 향하여 길을 여신 분이 예수님이십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돌아 가실 때 하나님이 계신 지성소를 향하여 난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로 찢어져 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누구나 담대히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 때 예수님은 크게 외치셨습니다.
          <다 이루었다.>

          마태복음 27:50-51
          예수께서 다시 크게 소리 지르시고 영혼이 떠나시다.이에 성소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까지 찢어져 둘이 되고 땅이 진동하며 바위가 터지고.

          히브리서 10:19-20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나니 그 길은 우리를 위하여 휘장 가운데로 열어 놓으신 새롭고 산 길이요 휘장은 곧 저의 육체니라.

          유향을 선물한 것은 예수님은 제사장이라는 고백입니다.
          진실로 예수님은 제사장입니다.

          몰약의 의미 - 메시야(선지자)

          몰약은 시스터스(cistus)라고 하는 나무에서 나오는 진입니다. 아주 값진 기름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제사장과 왕과 선지자들에게는 머리에 기름을 부었습니다. 그 때 붓는 기름을 관유라고 하는 데 관유를 만들 때에 몰약을 썼습니다.

          출애굽기 30:23-29
          너는 상등 향품을 취하되 액체 몰약 오백 세겔과 그 반수의 향기로운 육계 이백 오십 세 겔과 향기로운 창포 이백 오십세겔과 계피 오백 세겔을 성소의 세겔대로 하고 감람 기름 한 힌을 취하여 그것으로 거룩한 관유를 만들되 향을 제조하는 법대로 향기름을 만들지니 그것 이 거룩한 관유가 될지라.너는 그것으로 회막과 증거궤에 바르고 상과 그 모든 기구며 등대 와 그 기구며 분향단과 및 번제단과 그 모든 기구와 물두멍과 그 받침에 발라 그것들을 지 성물로 구별하라 무릇 이것에 접촉하는 것이 거룩하리라.
          이같이 값비싼 향을 만들 때 넣은 재료가 바로 몰약입니다. 그래서 솔로몬 왕의 침상에는 몰약을 뿌렸습니다.

          <내 침상에는 화문 요와 애굽의 문채 있는 이불을 폈고 몰약과 침향과 계피를 뿌렸노라>( 잠7:16-17)

          예수님의 생애는 몰약으로 시작하여 몰약으로 끝났습니다. 예수님이 이 세상에 탄생하셨을 때 몰약을 선물로 받으셨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죽으셨을 때 마지막으로 받은 선물도 바로 몰약이었습니다. 예수님이 세상을 떠나자 니고데모가 몰약과 침향을 100근쯤 가지고 와서 예수님의 시체에 발랐습니다.

          <일찍 예수께 밤에 나아왔던 니고데모도 몰약과 침향 섞은 것을 백 근쯤 가지고 온지라>( 요19:39)

          아주 귀한 사람의 침상에 뿌리고 정말 귀한 분의 몸에 바르고 하나님이 택하신 존귀한 자
          의 머리에 붓는 기름이 바로 몰약입니다. 아기 예수님에게 몰약을 드린 것은 너무나 그 분을  존귀하게 여기는 자세입니다.
          그런데 메시야란 <기름부음을 받은 자> 곧 그리스도라고 하는 의미입니다. 동방박사는 예수님을 메시야로 알았기에 몰약을 드린 것일까요? 아주 존귀한 사람의 시체에 바르는 기름이기에 예수님의 죽으심을 예수님이 태어날 때부터 알았던 것일까요?
          이런 것은 전혀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메시야에게 붓는 기름이라는 것만은 틀림이 없습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태어나신 목적이 인간의 죄를 짊어지고 죽으시기 위하여 오신 것입니다.죄의 값은 사망이기에 대신 죽으러 오신 분이십니다.
          아마 이 세상에 예수님에 관한 그림이 가장 많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그림이 있다고 바클레이는 소개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목수일을 하다가 너무 피곤하고 기지개를 펴는 데 벽에 그림자가 비쳐졌습니다
          예수님이 두 팔을 벌리고 있기에 그림자는 십자가로 나타났습니다.
          그런데 그 십자가를 어머니 마리아가 근심스럽게 의미심장하게 바라보고 있는 그림입니다.

          그렇습니다.
          동방박사들은 아기 예수님에게 황금과 유향과 몰약을 드렸습니다. 이 세 가지 선물속에 예수님에 대한 모든 예언이 다 들어 있습니다.
          예수님은 왕중에 왕이십니다.
          예수님은 제사장중에 제사장이십니다.
          예수님은 오직 한 분이신 메시야이십니다.

          하나님은 온전하신 분이시기에 우리에게 온전하기를 기대하시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마5;48)

          예수님도 온전한 분이시기에 우리에게 온전하기를 원하시고 계십니다.

          <믿음의 주요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저는 그 앞에 있는 즐거움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 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히12;2)

          그래서 바울은 하나님을 믿으면서 온전하여 지면서 우리에게 온전하여 지기를 권면하고 있습니다.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한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롬12;2)

          우리는 온전케 될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함께 하시면 온전케 될 수 있습니다.

          <모든 은혜의 하나님 곧 그리스도안에서 너희를 부르사 자기의 영원한 영광에 들어가게 하신 이가 잠간 고난을 받은 너희를 친히 온전케 하시며 굳게 하시며 강하게 하시며 터를 견고케 하시리라>(벧전5;10)

          그러면 온전케 되려면 어떻게 하여야 하나요?
          예수님의 말씀에서 그 해답을 찾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가 온전하고자 할 진대 가서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을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좇으라>(마19;21)

          예수님은 온전하고자 하면 네 구제하라고 하였습니다. 남의 아픔을 내 아픔으로 여길 수 있는 이들이 온전한 이들입니다.
          우리는 이제 1층에 까페를 개설하였습니다. 쌀을 샇아 두어야 합니다. 누가 가지고 가는 지 모르게 가지고 가게 하여야 합니다. 누가 쌀을 갖다 놓았는 지 모르게 갖다 놓아야 합니다.
          옷도 그렇습니다.
          까페를 통하여 지역을 섬기기로 하였습니다. 성탄절을 지내며 전도하고 도와주어야 진정으로 주님께 예물을 드리는 것이 됩니다.

          소제에 사용할 수 없는 것

          1. 누룩(Yeast)(2:5, 11)

          - 죄와 부패의 상징(고린도전서 5:6-8)
          너희의 자랑하는 것이 옳지 아니하도다 적은 누룩이 온 덩어리에 퍼지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누룩 없는 자인데 새 덩어리가 되기 위하여 묵은 누룩을 내어버리라 우리의 유월절 양 곧 그리스도께서 희생이 되셨느니라.
          이러므로 우리가 명절을 지키되 묵은 누룩도 말고 괴악하고 악독한 누룩도 말고 오직 순전함과 진실함의 누룩 없는 떡으로 하자 .

          * 바리새인의 누룩(교훈) / 마태 8:15,  16:6, 11-12, 누가 12:1)

          2. 꿀(Honey)(2:11)

          - 정욕, 탐욕의 상징(잠언 25:27)
          을 많이 먹는 것이 좋지 못하고 자기의 영예를 구하는 것이 헛되니라.

          소제의 의미

          1. 삶을 영위하는 물질을 주신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에 대한 경배
          2. 땅을 소유하지 않은 제사장과 레위인에게 음식을 제공하고 보호하는 것
          3. 예수는 생명의 떡(요한복음 6:32-35)
          4. 영원한 계약(소금)

          소제의 제물

          1. 고운 가루(1절) fine flour
          - 한 줌을 취하여 기념물
          - 남은 것(아론과 그 자손에게)
          - 기름(성령), 유향(예수님의 거룩한 삶, 온유와 겸손)

          2. 화덕에 구운 것(4절) baked in an oven
          - 고운가루, 기름, 무교병

          3. 번철에 부친 것(5절) on a griddle
          - 고운가루, 누룩을 넣지 말라

          4. 솥에 삶은 것(7절) cooked in a pan
          - 고운 가루, 기름

          5. 첫 이삭(14절) first fruits
          - 볶아 찧은 것, 기름, 유향




          1-3. 고운가루(맥분)로써 만드는 소제
          4. 화덕에 구운 것을 드리는 때
          5-6. 번철(남비)에 부친 것을 드리는 때
          7. 솥에 삶은 것으로 드리는 때
          8-10. 소제 드리는 법
          11, 13. 누룩이나 꿀을 넣지 말고 소금을 쳐야 할 것
          12, 14-16. 첫 이삭을 소제로 드리는 때(볶아 찧은 것)

          번제, 소제, 화목제가 바르게 드려질 때는 향기로운 냄새가 드러납니다.
          따라서 냄새 제사라고도 합니다.

          소제는 겉사람을 죽여야 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은 완전한 인간이며 완전한 하나님이셨습니다.
          소제는 인성을 다스려야 하는 제사라고 하겠습니다.

          하나님은 번제를 통하여 구원하시고, 소제를 통하여 성화시키신다.
          인간을 깨부시는 것이다.
          소제 - 겉사람
          소제는 앞의 제사를 전제로 드려진다.
          소제 자체는 피가 없지만 번제에서 피가 있기 때문에 속죄가 당연히 가능하다.

          1a. 누구든지 곡식으로 나 여호와에게 소제를 드리려거든 고운 밀가루를 바쳐라.
          맷돌에 집어넣어 곡식 낟알을 돌려야만 고운가루가 되는 것처럼 구원받은 사람은 맷돌속에 들어가서 고운가루가 되어야 합니다.
          구원을 받았지만 거친가루가 되었기 때문에 고운가루가 되어야만 소제가 될 수 있습니다.

          고운가루가 됩시다!
          밀을 맷돌에 넣어 돌려서 밀이 완전히 벗겨지고 부셔지어야만 고운가루가 됩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맷돌 속에 집어넣으셔서 고운가루가 되도록 역사합니다.

          나의 환경, 사건, 고난은 맷돌과 같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깨어진 사람의 특징


          소제

          2 “누구든지 곡식으로 나 여호와에게 소제를 드리려거든 고운 밀가루를 바쳐라. 제물을 바치는 자는 그 밀가루에 감람기름을 붓고 그 위에 향을 놓아.
          아론의 자손 제사장들에게 가져가야 할 것이며 제사장은 감람기름이 섞인 그 고운 밀가루 한 줌과 모든 향을 집어 그 제물 전체를 나 여호와에게 바쳤다는 표로 그것을 제단 위에서 불로 태워야 한다. 이것은 불로 태우는 화제이며 나 여호와를 기쁘게 하는 향기이다.
          그 소제물의 남은 것은 아론과 그 자손들에게 주어라. 이것은 나 여호와에게 바친 화제 중에서 아주 거룩한 것이다.
          “만일 너희가 화덕에 구운 것으로 소제를 드리려고 하면 그것은 고운 밀가루에 누룩을 넣지 않고 감람기름을 섞어 구운 빵이나 감람기름을 발라 구운 얇은 과자여야 한다.
          만일 철판에 부친 것으로 소제를 드리려고 하면 그것은 고운 밀가루에 기름을 섞어 누룩을 넣지 말고 만든 것이어야 한다.
          그리고 그것을 조각으로 나누어 그 위에 기름을 부어라. 이것은 곡식으로 드리는 소제이다.
          만일 너희가 솥에 찐 빵으로 소제를 드리려고 하면 그것은 고운 밀가루에 감람기름을 섞어 만든 것이어야 한다.
          너희는 나 여호와에게 바칠 이런 소제물들을 제사장에게 가져갈 것이며 제사장은 그것을 단으로 가지고 가서.
          나에게 전체를 드렸다는 표로 그 일부를 단에서 불로 태워야 한다. 이것은 불로 태우는 화제이며 나 여호와를 기쁘게 하는 향기이다. 10 소제물의 남은 것은 아론과 그 자손들에게 주어라. 이것은 나 여호와에게 바친 화제 중에서 아주 거룩한 것이다.
          11 “너희는 나 여호와에게 곡식으로 드리는 소제물에 누룩을 넣지 말아라. 너희가 나에게 바치는 소제물에 누룩이나 꿀을 넣어서는 안 된다.
          12 누룩과 꿀은 제일 처음 추수한 예물로서 나에게 바칠 수 있으나 그것을 단에 올려 태워서는 안 된다.
          13 너희는 곡식으로 드리는 모든 소제물에 소금을 쳐라. 소금은 너희와 나 사이에 맺은 계약의 상징이므로 너희 모든 예물에 이 소금을 쳐야 한다.
          14 너희가 첫 이삭을 나 여호와에게 소제로 드리려거든 그것을 볶아서 찧은 다음.
          15 그 위에 감람기름을 붓고 향을 얹어 바쳐라. 이것은 곡식으로 드리는 소제이다.
          16 그리고 제사장은 그 모든 것을 나 여호와에게 바쳤다는 표로 찧은 곡식 일부와 감람기름 일부와 모든 향을 불로 태워야 한다. 이것은 나 여호와에게 불로 태워 바치는 화제이다.”

          구원을 받은 사람도 자아 즉 인간성이 나타나므로 하나님과 동행을 방해하므로 자아의 파쇄가 필요합니다.
          고운가루가 되어야 합니다.


          소제는 고운가루가 되어야 하는 것이다!
          2:1a. 누구든지 곡식으로 나 여호와에게 소제를 드리려거든 고운 밀가루를 바쳐라.

          깨어진 사람의 특징

          1. 언어가 부드럽다.

          * 고집은 마귀의 역사와 같다. 
           

          2. 유향 - 주님의ㅡ 성품 온유와 겸손

          1b. 제물을 바치는 자는 그 밀가루에 감람기름을 붓고 그 위에 향을 놓아.

          3. 기름 -
          1b. 제물을 바치는 자는 그 밀가루에 감람기름을 붓고 그 위에 향을 놓아.

          내적 기름의 부음 : 반죽하기 위하여
          외적 기름의 부음 : 반죽을 요리하기 위하여

          가루가 된 제물에 유향이 첨가되어 향기로은 제물이 됩니다.
          가루가 된 제물에 기름을 부어 가루가 덩어리로 만들어지는 것처럼 성령의 역사로 하나가 될 수 있습니다.

          4. 누룩을 넣지 말라
           “만일 너희가 화덕에 구운 것으로 소제를 드리려고 하면 그것은 고운 밀가루에 누룩을 넣지 않고 감람기름을 섞어 구운 빵이나 감람기름을 발라 구운 얇은 과자여야 한다.

          누룩은 잘못된 교훈을 의미합니다.

          바리새인들의 누룩을 주의하라!
          예수에 대하여 잘못된 교리 즉 기독론이 잘못된 것.
          이단 종파의 교주 - 정명석 하나님께서 1만명의 여자와 동침하라고 하셨다.
          여학생들을 유혹하려고 영어를 가르치고 취업하기에 필수적인 과목들을 가르친 후에  인간 관계를 친밀하게 형성한 후에 드디어 교리를 드러낸다.

          고린도전서 5:7-8
          너희는 누룩 없는 자인데 새 덩어리가 되기 위하여 묵은 누룩을 내어버리라 우리의 유월절 양 곧 그리스도께서 희생이 되셨느니라.
          이러므로 우리가 명절을 지키되 묵은 누룩도 말고 괴악하고 악독한 누룩도 말고 오직 순전함과 진실함의 누룩 없는 떡으로 하자.

          마태복음 16:6
          예수께서 이르시되 삼가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의 누룩을 주의하라.

          사람의 본성은 누룩을 좋아한다.
          귀가 솔깃하여 귀담아 듣고 마음에 담은 후에 전달하려고 한다.

          * 설교의 품위를 높이려면 누룩을 넣을 것이 아니라 오직 예수로만 전해야 한다.

          자아의 죽음 - 뜻, 견해, 의지
          하나님의 뜻, 견해, 의지는 살아나야 합니다.
          나의 뜻, 견해, 의지는 반드시 죽어야 합니다.

          뜻 : will

          1. 사람이나 신과 같은 존재가 어떤 일에 대해 마음속에 품고 있는 생각이나, 어떤 일을 하고자 하여 가지는 마음이나 바람.
          2. 뜻이 굳다.
          3. 말이나 글, 또는 단어 등이 나타내거나 가리키는 바. 의미(意味).

          견해(見解) : view

          1. 어떤 사물에 대한 자기의 의견이나 평가.
          견해를 달리하다.


          의지(意志) : meaning

          1. 어떠한 일을 이루려고 하는 마음가짐. 지의(志意)
          의지가 강한 사람.
          2. 철학•윤리학 /
          어떠한 목적을 실현하기 위해 자발적으로 의식적인 행동을 하게 하는 내적(內的) 욕구. 도덕적 가치 평가의 원인도 됨.
          3. 심리학 /
          생활체(生活體)가 나타내는 목적적 행동을 발생시켜, 그것을 통제하는 심적(心的) 과정. 반사적(反射的)·본능적인 행동과는 구별됨.




          1-3절은 고운 가루로 드리는 소제에 대해서,
          4-10절은 굽고, 부치고, 찐 것으로 드리는 소제에 대해서,
          11-13절은 누룩과 꿀을 삼갈 것과 모든 소제물에 언약의 소금을 칠 것에 대해서,
          14-16절은 첫 이삭을 볶아 찧은 것으로 드리는 소제에 대해서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들 말씀에 나타난 영적의미를 간략하게 살펴보겠습니다.

          첫째, 소제에는 다섯 가지 예물

          고운 기름 가루, 고운 기름 가루를 화덕에 구운 것, 고운 기름 가루를 번철에 부친 것, 고운 기름 가루를 솥에 찐 것, 첫 이삭 곡식을 볶아 찧은 것이 그것들입니다.

          고운 가루의 상징적 의미는 그리스도를 본받아 모든 거칠고 조악한 모습을 없애고 하나님 앞과 그리스도 안에서 깨어지고 부서진 순수한 심령으로 하나님을 섬기고 봉사할 것을 말합니다.

          둘째, 소제는 하나님께 향기로운 냄새로 드리는 화제

          기념이 될 만큼만 불에 태우고 나머지는 제사장이 자기 몫으로 취합니다.
          번제는 동물로 드리는 제사이고, 소제는 곡물가루로 드리는 제사입니다.
          번제는 가죽을 벗겨 제사장이 취하고, 새의 멱통과 더러운 것은 버리고, 나머지는 전부 불태워 향기로운 냄새로 하나님께 드려지지만, 소제는 가루 한 움큼과 유향을 불살라 향기로운 냄새로 하나님께 드리고 남은 것은 제사장이 취했습니다.

          또 번제는 피를 단 사면에 뿌리는 제사였지만, 소제는 곡식의 가루로 드렸기 때문에 피없는 제사였습니다.
          가톨릭 학자들은 이 소제에서 성만찬의 근거를 마련하기도 합니다.

          번제가 그리스도의 고난과 대속적인 죽음을 예표 했다면, 소제는 율법의 요구를 만족시키신 그리스도의 거룩한 삶을 예표 합니다.

          소제물은 찬양의 제물이며 하나님께서 자비를 보여주신 데 대한 언약백성의 감사를 상징합니다.
          소제물로는 최상의 것을 드렸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가진 최상의 것, 곧 우리의 몸과 마음, 우리의 재능과 학식 등의 최상의 것을 주님을 위해 바쳐야 함을 의미합니다.

          셋째, 소제는 단독 제사이기보다는 다른 제사와 함께 드려지는 제사

          출애굽기 29장민수기 15장에 설명된 내용으로 봐서 번제와 소제는 서로 연관된 제사로써 번제가 먼저 드려졌습니다.
          따라서 소제는 번제를 완성시키는 제사로 볼 수 있습니다.
          이처럼 ‘공물’의 의미를 지닌 소제는 일반적으로 다른 제물들과 함께 드려졌습니다.
          그리고 소제는 예배자가 하나님께 드리는 선물입니다.
          하나님께서 번제를 통해서 죄를 용서해 주실 것을 확증해주시고, 예배자는 소제를 통해서 하나님께 선물을 드림으로써 응답하게 됩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솔선해서 주신 한량없는 은총에 대해서 예배자가 감사의 응답으로 바치는 헌신적인 삶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넷째, 소제물은 기름과 유향을 섞어 드려야 합니다

          여기서 ‘기름’은 올리브유를 말합니다.
          그리고 ‘유향’은 유향나무의 수지를 건조시켜 얻은 우윳빛 향료를 말합니다.
          아라비아산 수입품으로써 거룩한 관유에 섞는 향료 중 하나였습니다.
          동방박사들이 예수님께 바쳤던 예물들 가운데 한 가지가 바로 이 유향이었습니다.
          유향과 기름부음은 성령의 충만함과 향기라는 그리스도인의 삶을 의미합니다.

          고린도후서 2:14-17
          항상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서 이기게 하시고, 우리로 말미암아 각처에서 그리스도를 아는 냄새를 나타내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라. 우리는 구원 얻는 자들에게나 망하는 자들에게나 하나님 앞에서 그리스도의 향기니, 이 사람에게는 사망으로 좇아 사망에 이르는 냄새요, 저 사람에게는 생명으로 좇아 생명에 이르는 냄새라. 누가 이것을 감당하리요. 우리는 수다한 사람과 같이 하나님의 말씀을 혼잡하게 하지 아니하고, 곧 순전함으로 하나님께 받은 것 같이 하나님 앞에서와 그리스도 안에서 말하노라.


          다섯째, 소제물에는 누룩과 꿀을 넣지 말아야 합니다.

          누룩이 부패를 상징하고, 꿀이 쾌락을 상징하기 때문입니다.
          ‘누룩’에 해당하는 히브리어는 ‘하메츠,’ 곧 ‘흥분시키는 것,’ ‘날카롭게 쏘는 것’이란 의미가 있습니다.
          따라서 누룩은 그 속성상 성경에서 종종 죄와 거짓 교훈, 위선과 허영을 상징하는데 쓰입니다.
          ‘꿀’은 벌꿀로써 발효의 성질을 가지고 있으므로 종종 누룩과 동일하게 취급됩니다.
          무엇보다도 꿀은 세상적인 쾌락을 상징합니다.
          우리 성도들은 이런 것들에서 벗어나 하나님 앞에 순전한 자들이 되어야 합니다.

          여섯째, 소제물에는 언약의 소금을 넣어야 합니다.

          13절에서 “네 모든 소제물에 소금을 치라. 네 하나님의 언약의 소금을 네 소제에 빼지 못할지니, 네 모든 예물에 소금을 드릴지니라.”

          소금은 누룩과 반대로 부패를 방지합니다.
          고대근동지방에서는 중요한 매매나 언약체결 시에 체결된 언약을 공고히 하기 위해서 공동식사를 했습니다.
          이때 어떤 경우에도 변함없이 약속을 이행한다는 뜻으로써 상대방의 소금을 먹었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소금은 언약체결을 상징하며, 그 언약을 신실하게 지킬 것과 불변성을 상징합니다.
          이것은 우리 성도들이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지표로 삼고 사회의 부패를 방지하며 유익을 끼치는 삶을 살아야할 뿐 아니라, 하나님과의 서약을 신실하게 지켜야 할 것을 교훈하는 말씀입니다.

          일곱째, 번제와 마찬가지로 소제도 생활형편이 고려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형편과 처지를 참작하시는 분이심을 알 수 있습니다.


          갈라디아서 2:20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I have been crucified with Christ and I no longer live, but Christ lives in me. The life I live in the body, I live by faith in the Son of God, who loved me and gave himself for me.

          빌립보서 1:20-21
          나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을 따라 아무 일에든지 부끄럽지 아니하고 오직 전과 같이 이제도 온전히 담대하여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히 되게 하려 하나니.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니라.

          I eagerly expect and hope that I will in no way be ashamed, but will have sufficient courage so that now as always Christ will be exalted in my body, whether by life or by death.
          For to me, to live is Christ and to die is gain.

          고린도후서 4:10-11
          우리가 항상 예수 죽인 것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도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우리 산 자가 항상 예수를 위하여 죽음에 넘기움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죽을 육체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니라.
          We always carry around in our body the death of Jesus, so that the life of Jesus may also be revealed in our body.
          For we who are alive are always being given over to death for Jesus' sake, so that his life may be revealed in our mortal body.

          선악과를 따서 먹을 때에 죽어야 할 것이 살아났기 때문에 산 자가 되었다.
          그러므로 죽어야 한다.
          따라서 주님 앞으로 나오려면 반드시 산 자가 죽은 자가 되어야 한다.
          선악과에 감염된 사람은 산 자가 되었으므로(자아, 육, 고집) 죽어야 한다.
          산 자의 핵심은 선악과이므로 죽음은 영, 혼, 육의 죽음으로 나타난다.
          영은 선악과를 먹은 즉시 죽었다.
          예수를 모르기 때문
          혼은 죽지 않고 살아서 몸부림을 친다.
          선악과의 독성은 인간의 혼은 하나님의 뜻, 견해, 의지를 따르지 못하게 한다.
          자기의 뜻, 견해, 의지를 주장한다.

          고린도전서 15:31
          형제들아 내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서 가진바 너희에게 대한 나의 자랑을 두고 단언하노니 나는 날마다 죽노라.
          I die every day--I mean that, brothers--just as surely as I glory over you in Christ Jesus our Lord.



          본장은 소제에 관한 규례를 언급하고 있다.
          소제는 각종 제사 중 유일하게 피가 없는 제사로 주로 번제나 화목제와 함께 드려졌다.
          본장에서는 독자적으로 드리는 소제에 관해 다루고 있다.

          고운 가루로 드릴 때는 유향과 함께 드리고 (1-3절),
          굽거나 삶은 것으로 드릴 때는 누룩을 넣어서는 안 되었다(4-10절).
          또한 모든 소제물에는 소금을 쳐야 하고(11-13절),
          첫 이삭은 볶아서 기름과 유향과 함께 드렸다(14-16절).
          소제는 피 없는 곡물의 제사라는 특징을 지니고 있으며 대체로 피 흘림이 있는 제사의 부수적 제사로 드려졌다.
          본장에 나타난 소제는 가나안 정착 후에 이루어질 농경 생활을 내다본 제사 의식으로서, 백성들이 하나님께 감사와 충성을 표현하고자 할 경우 언제든지 드릴 수 있었다.

          레위기 2장에서는 소제의 법과 그 예물에 대하여 언급하고 있습니다.
          소제는 번제가 목축적인 제사인 데 비하여 농경적인 제사로 곡물, 감람유 등 식물성 재료로 드리는 제사입니다.
          우리는 소제를 통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기본적인 식물을 주신 사실과 우리가 마땅히 생명에 대한 감사를 하나님께 예물로 드려야 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소제 드리는 방법

          1. 세 가지 방법

          소제 드리는 방법은 세 가지인데 첫 번째는 화덕에 구운 것으로 소제를 드리는 경우입니다.
          이 방법은 고운 가루에 기름을 섞어 만든 무교병이나 기름 바른 무교 전병을 드리는 것입니다.

          두번째는 번철에 부친 것으로 소제를 드리는 경우입니다.
          이 방법은 고운 가루에 누룩을 안 넣고 기름을 섞어 조각으로 나누어 드리는 것입니다.

          세번째는 고운 가루에 기름을 섞어 솥에 삶은 것을 드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 세 가지 방법 중에서 제사를 드리는 사람이 자유롭게 선택하여 드릴 수 있도록 하셨습니다.
          a. 화덕의 기름(레 26:26)
          b. 번철에 부친 것에 대한 규례(레 2:5)

          소제 드리는 절차

          모든 제사에는 절차가 매우 중요합니다.
          소제물을 여호와께로 가져다가 제사장에게 줍니다.
          제사장은 그것을 단으로 가져다가 기념할 것을 취하여 단 위에서 불에 태워 화제로 드립니다.
          그리고 소제물의 남은 것은 제사장과 그 가족에게 주어 식물로 삼게 합니다.
          a. 제사장은 하나님께서 세우심(히 5:5)
          b. 여호와의 제단에서 드리는 제물(사 56:7)

          소제 드릴 때의 주의 사항

          소제물에 있어서 금지된 것과 반드시 넣어야 할 것이 있었습니다.
          즉 누룩과 꿀은 소제물에 넣어서는 안 되는 것이었고, 반드시 넣어야 하는 것은 소금입니다.
          누룩과 꿀은 부패의 속성과 전염의 성질이 있습니다.
          그러나 소금은 부패와 불결로부터 벗어나서 정결한 상태가 계속 유지되는 것을 상징해 줍니다.
          a. 소제를 드릴 때(레 2:7)
          b. 누룩을 넣지 말라(레 6:17)



          '민하'는 구약에서 광범위한 용도를 갖는다.
          비제의적 본문들에서 그것은 다른 사람들에게 주는 "예물(들)"을 의미할 수 있는데, 특히 어떤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의무적으로 바쳐야 하거나 다른 사람의 호의를 얻기 위해 드리는 선물이다(예를 들어, 삼상 10:27; 창 32:14; 43:11).

          그것은 또한 "어떤 나라가 그들의 통치자에게 바치는 공물"(왕상 5:1[4:21])을 지시한다.
          제의적 배경에서 민하는 드리는 품목이 구체적으로 지시되지 않은 제물에 대해 사용된다.
          예를 들어, 창세기 4:3-5에서 그것은 땅의 소산 중에서 드리는 제물과 가축 떼 중에서 드리는 제물에 공히 사용된다.
          그러나 제의적 본문들에서 민하의 의미는 보통 제한적 의미인 "곡식 제물"이다.
          이 제물을 지칭하기 위해 민하가 선택된 것은 곡식 제물이 여호와의 주권과 예배자의 생명에 대한 그분의 전적인 요구를 인식하는 가운데 드리는 예물이라는 사실을 추가적으로 지시한다.
           
          시편 20:4에서 민하는 올라("번제")와 병행을 이룬다.
          민하는 여호와께 바치는 일종의 곡식 제물을 지시하고 올라는 제단에서 태워지는 제물을 지시할 것이다(참조. H. J. Kraus, Psalmen 1-59. BKAT 15/1 [ Neukirchen-Vluyn: Neukirchener. 1978] 311).

          이 두 단어는 함께 성소에서 드려지는 다양한 제물들을 수반한다.
          그러나 더욱 빈번하게 민하는 전반적인 제물을 포함하는 '제바흐'와 짝을 이룬다(삼상 2:29; 3:14; 사 19:21; 암 5:25; 시 40:7). 함께 나타나는 이 두 단어가 "곡식"과 "짐승"을 의미하는 것이 가능하지만, 더욱 그럴듯한 것은 민하가 올라(번제)를 대신하는 용어라는 것이다(참조. Rendtorff, Studien. 191-192). 그렇다면 민하는 하나님께 전적으로 바치는 희생물을 지시하고, 제바흐는 절기 식사가 되는 제물들을 나타낸다. 후기 예언서인 말라기에서 민하는 일반적으로 희생물의 의미로 사용된다(1:10, 11, 13; 2:12, 13; 3:3, 4). 따라서 민하는 폭넓은 의미론적 범위를 갖는다. 그 결과 민하의 엄밀한 의미가 의심스러운 몇몇 구절들이 있다(예를 들어, 슥 3:10). 이것은 민하가 또 다른 용도로 사용된 사례다. 그것은 때로 매일 특정 시간에 바치는 제물에 대한 언급으로서 하루 중 어떤 시간을 지칭하는 문구에서 사용되기도 한다. 대체로 올라(번제)는 이러한 방식으로 사용되는데, 그러나 몇 군데에서는 저녁의 민하에 대한 언급이 있으며(왕상 18:29; 스 9:4, 5; 단 9:21), 한 군데는 아침의 민하다(왕하 3:20). 민하의 폭넓은 의미론적 범위를 고려하면, 이러한 매일 드리는 민하의 정확한 성격은 불확실하다. 그것은 동물 희생, 특히 제단에서 완전히 태우지 않는 제물을 지시하거나 혹은 가능하게는 소제(곡식제)를 지시할 수도 있다.
            제의 법안에서는 민하가 일반적으로 소제물(곡식 제물)을 나타낸다. 적은 양이 제단 위에서 태워지며, 나머지는 제사장들의 몫이 된다. 그것은 거의 매번 올라(번제)를 수반하며(삿 13:15-16, 19; 왕하 16:13, 15; 렘 14:12; 대상 21:23). 또한 자주 '제바흐 쉘라밈'(화목제)도 수반한다(레 7:12-13; 민 6:17). 흔히 나싸크("전제 물" : 붓는 제물)가 소제물과 함께 드려진다(민 15:1-21; 28-29장).
            일부 본문들은 독자적인 민하에 대해 말한다. 제사장의 소제(곡식제)가 6:12-16(19-23)에서 묘사된다. 이 단락은 제사장 위임식 날과 그 이후에 날마다 민하가 드려진 것을 지시하는 것처럼 보인다. 민수기 5:11-15에는 질투의 소제(민하트 키느앗: 개역 성경: 의심의 소제)에 대한 언급이 있다. 그것은 자신의 아내가 의심스럽다고 염려하는 어떤 남편이 아내의 정절을 시죄법(범죄 여부를 시험하는 의식)으로 시험해 볼 것을 요구할 때 제사장에게 가져오는 제물이다. 칠칠절에는 회중이 햇곡식의 제물을 드린다(민하 하다샤: 23:16-17; 민 28:26). 이때 또한 번제가 이에 수반되는 소제(곡식제) 및 전제와 더불어 드려진다(23:18).  - WBC 레위기 주석에서 발췌

          󰃨 누구든지 ... 드리려거든 - 소제는 구약의 5대 제사 중 번제, 화목제 등과 더불어 제물드리는 자가 자신의 생활 형편에 따라 그 마음에 기쁜대로 자발적으로 드리는 자원제(自願祭)이다. 그러나 속죄제와 속건제는 죄사함 받기 위하여 반드시 드려야만 하는 의무제(義務祭)였다.

          󰃨 소제(민하) - '선물' 혹은 '공물'(貢物)이란 뜻의 '민하'는 기본적으로어떤 사람이 보다 높은 사람의 호의(favor)얻기 위하여 드리는 예물을 가리켰다(창32:21 ;43:15). 그러나 후에는 받은 호의나 은혜에 대하여 감사하는 마음을 표하기 위해 자발적으로 바치는 예물을 뜻하게 되었다(Kell). 한편 구약의 5대 제사 중 소제가 번제, 화목제. 속죄제, 속건제 등 다른 네 가지 제사와 다른 독특한 특징은 다른 4가지 제사는 동물을 희생시켜 드리는 '피 있는 제사'이나 소제만은 피 없는 '곡물제사'라는 점이다. 그리고 소제에는 두 가지 형태가 있다. 즉 번제, 화목제 등과 같은 피흘리는 제사들과 더불어 그 일부로서 함께 드려지는 소제의 경우가 있고(출 29:38,39;레23:12, 13;민 15:5-10), 또한 독자적으로 드려지는 경우가 있다. 소제는 주로 피 흘리는 제사의 부속적 제사로서 특히 번제와 더불어 드려졌으나, 본장에 나타난 소제의 경우에는 백성들이 하나님께 대해 감사와 충성을 표현할 이유를 발견했을 때, 언제든지 드릴 수 있었던 독자적인 소제에 관한 규례이다(Matthew Henry). 소제에 관한 보다 자세한 내용은(서론, 구약 제사의 종류와 의미)를 참조하라.

          󰃨 고운 가루(쏠레트) - 기본 동사 '쌀라'는 '흔들다'란 뜻인데, 곧 이 말은 고대 이스라엘 사람들이 고운 가루를 골라내기 위하여 빻은 가루를 흔들었기 때문인 듯하다. 한편 소제의 예물이 되는 고운 가루는, 먼저 인간과 관련되어 겉모습이 완전히 깨어진 후 순결한 심령으로 하나님을 섬기는 것을 상징하며(고후 4:10-12), 그리고 그리스도와 관련되어서는 조금도 조악(粗惡)한 데가 없는 그리스도의 순결하고 완전한 인성(人性)을 상징한다(히 4:15 ;요일 3:5).

          기름을 붓고

          소제 예물의 종류로는 크게 '날 것'과 '요리된 것'이 있다.
          요리된 예물의 경우에는 기름을 고운 가루(밀가루)와 '섞어야' 했지만(4-7절), 요리된 제물이 아닌 경우에는 단지 기름을 '붓기만' 했다(1,15절).
          한편 여기서 기름(쉐멘)은 감람나무 열매로부터 짜낸 올리브 기름을 가리키는데 영적으로 이 기름은 성령의 사역을 상징한다고 볼 수 있다(The Preacher's Complete Homiletic Commentary).

          유향을 놓아

          '유향을 첨가하여'. 여기서 유향(레보나)은 감람과에 속하는 유향나무로부터 짜넨 고급 향료를 가리키는데, 이것을 첨가하는 이유는 제물이 향기를 풍기도륵 하기 위함이었다.
          영적 의미에서 유향으로부터 퍼져 나오는 이 향기는 성도의 아름다운 기도나 모범적인 생활(고후 2:15), 혹은 하나님 앞에 전적 순종하신 그리스도의 향내나는 아름다운 생애를 상징한다(엡 5:2).

          고운 기름 가루 한 줌

          소제물에는 5가지 종류가 있다.
          1. 고운 기름 가루 한 줌으로 드리는 소제
          2. 화덕으로 구운 것을 드리는 소제(4절)
          3. 번철에 부친것을 드리는 소제(5, 6절)
          4. 솥에 삶은 것을 드리는 소제(7절)
          5. 첫 이삭을 볶아 찧은 것으로 드리는 소제(14절)

          '한 줌'은 손에 가득(handful) 퍼담은 양을 가리키며 (Keil, Lange), 유대 랍비들의 주장처럼 단지 손가락으로 움켜 집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기념물(*, 아즈카라).

          '기억하다'란 뜻의 '자칼'(*)에서 유래한 말로, 곧 기념물이란 인간 편에서는 풍성한 소산을 허락하신 하나님의 은혜을 기억하여 드리는 제물이란 뜻이요, 하나님 편에서는 하나님께 상달되어 하나님의 기억에 남을 만한 제물이란 뜻이다(시 20:3; 행 10:4).
          따라서 기념물은 순수한 '여호와의 몫'으로서 '기념의 몫' 혹은 '기억의 몫'이라고도 한다.
          한편 소제물 중 '아스카라'(기념물)로 취해지지 않은 나머지 소제물은 '제사장의 몫'이 되어 아론과 그의 자손들에게 돌려졌다(서론, 구약제사의 종류와 의미).

          이는 화제라 여호와께 향기로운 냄새니라

          1:9,13,17에서 이미 반복된 말로, 하나님께 불살라 바쳐지는 제물이 하나님 앞에 기쁘게 상달되어진다는 의미이다.
          자세한 내용은 1:9 주석을 참조하라.

          제사 드리는 자가 정해진 번제 규례를 따라 자발적인 순종과 헌신의 마음으로 제사를 드릴 때, 그것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다는 뜻이다(엡 5:2; 고후 2:15; 빌 4:18).
          특별히 여기서 '향기로운'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니호아흐'는 '편안한'(Commfortable), '휴식의'(restful)란 뜻이다.
          즉 이것은 희생 제물이 하나님께 열납됨으로 말미암아 죄로 인한 하나님의 진노가 멈추고, 이제 안정되고 평화로운 안식의 상태가 되었다는 의미이다.



          언약의 소금

          소금은 부패를 방지하고 맛을 내게 할 뿐 아니라, 그 맛을 지속시키는데 절대 필요한 생활 필수품이다.
          따라서 이소금은 고대로부터 계약을 체결하고 그 체결한 계약을 확증할 때 계약 당사자들이 그것을 먹음으로써 계약의 지속성과 변개치 않을 것임을 표시했던 우정과 친교, 그리고 불변성의 상징물이었다(MatthewHenry, Keil, Lange, The Preacher's Complete Homiletic Commentary).

          이러한 견지(見地)에서 살펴볼 때 하나님께서 당신께 바칠 모든 소제물에 소금을 치라고 명령한 이유는 명확하다.
          즉 그것은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과 맺은 언약이 진실되고 불변할 것이라는 사실을 나타내기 위함이었다.
          그리하여 백성들로 하여금 감사와 기쁨 중에그 언약을 믿고 바라며 살아가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하나님께서는 바로 이러한 사실을 소금이 갖는 속성에 반영시켜 그 백성들에게 확증시켰던 것이다.

          따라서 성경은 영원히 변치 않는 확실한 언약을 가리켜 '소금 언약'(Covenant of Salt)이라고 불렀다(민 18:19; 대하 13:5).
          아울러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 자신의 소제물에 소금을 치는 인간의 행위는 그 영원한 하나님의 사랑의 언약에 대해 믿음과 감사를 나타내는 신앙 고백적 행위였다.

          그러므로 후일 그리스도께서도 이 '소금의 원리'로서 그리스도인의 생활 규범을 삼으셨던 것이다(마 5:13; 막 9:50).
          한편 후대에 이르러 이처럼 제물에 소용되는 소금은 제단에 불을 지필 장작나무와 더불어 공동 부담으로 마련되어(스 7:20-22), 성전 뜰 소금의방에 항상 비치해 두고 있었다(Matthew Henry's Commentary).


          제단의 의미

          놋 제단이다.
          놋 제단은 사람이 하나님께 가까이 갈 수 있도록 하는 유일한 길이다.
          사람은 오직 놋 제단의 제물을 통해서만 하나님과 교통할 수 있다.

          놋 제단의 첫 번째 의미는 심판이다.
          사람이 사탄에 의해서 손상되었고 죄의 독을 주입받았기 때문에, 사람이 하나님께 가까이 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먼저 죄가 처리되어야 한다.
          심판을 통과하는 것 말고는 죄를 처리할 수 있는 다른 길이 없다.
          놋 제단에는 모든 희생 제물을 태우기 위한 불이 있으며, 제단에 입혀진 놋은 하나님의 심판을 상징한다.

          하나님께 제단에 바쳐진 희생 제물을 심판하시고 그것을 불로 태우실 때마다 구속이 성취되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제단에서 하나님의 심판을 통과한 이들은 하나님에 의해 구속된 것이다.

          하나님께서 구속하신 모든 사람은 결국에는 제단에 두어져야 하고 번제물로서 하나님께 바쳐져야만 한다.

          주님은 성령께서 오시면 “세상을 책망하시어,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깨닫게 하실 것입니다.”(요 16:8)라고 말씀하셨다. 하나님은 십자가에서 이미 우리의 죄들을 심판하셨다. 그러므로 우리도 반드시 이 심판의 빛 안에서 우리 자신을 심판해야 한다. 우리의 생활이 반드시 심판받아야 하며, 우리의 의복도 반드시 심판받아야 한다. 우리의 가족도 반드시 심판받아야 하며 우리의 직장도 반드시 심판받아야 한다. 우리에게 속한 모든 것은 반드시 심판을 통과해야 한다.

          이것은 인간 사회에 있는 칭찬이나 아첨과는 대조적이다.
          복음을 듣기 위해 오는 사람에게 하나님의 교회가 반드시 말해 주어야 하는 첫 번째 말은 바로 “사랑하는 친구여, 당신은 죄인입니다!”라는 것이다.
          우리의 존재와 우리가 가진 것과 우리가 하는 일은 좋든지 나쁘든지 관계없이 모두 십자가에 두어져야 하고 불태움을 통과하고 죽음에 넣어져야 한다.

          이러한 심판을 통과하지 않고 놋 제단에서 심판받지 않은 사람들은 구속받을 수 없다.
          심판을 통과한 모든 이는 피로 깨끗하게 되었고 구속되었다.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것은 구속받은 모든 이가 헌신하여 전제단에서 그들 자신을 바치는 것이다.
          그러므로 구속의 제단은 번제단이 된다.
          하나님은 그 제단에 두어진 모든 것은 완전히 얻으신다.
          만일 여러분을 완전히 얻지 못하신다면 여러분은 하나님에 의해 건축될 수 없다.
          하나님의 건축은 제단에서부터 시작한다는 것을 기억하라.


          '예배 본다'와 '제단 쌓는다'

          한국 교회가 예배 호칭에 대하여 반드시 고쳐야 할 말은 “예배 본다”라는 말과 예배 행위를“제단 쌓는다”라고 표현하는 말이다.
          ‘예배’라는 말의 근본적인 원리로 볼 때 ‘본다’라는 말과 결합할 수 없는 말이다.
          “예배 본다”라는 말은 신학적 근거가 없을 뿐 아니라 근본적인 뜻으로도 써서는 안될 말이다.

          “예배 본다”라는 말을 교회사적으로 보면 한국 교회는 1777년 가톨릭에서부터 1865년 개신교 <토마스>의 선교로 이어져 <알렌>, <언더우드>, <아펜 젤러>, <스크랜 톤> 등의 선교사들에 의하여 의료와 교육, 예배 등이 시행되면서 한국인들에게는 “경이로운 일”로 보이게 되었다.

          그리고 대원군시대와 그 직후까지 종교에 대한 박해와 인명이 희생되는 사건으로 인하여 백성들은 교회 출석이나 신앙을 선뜻 가지려 하지 않고 관망하고 있을 때 먼저 교인(입교)된 신자들이 전도의 방법으로 ‘주일’ 혹은 ‘특별집회’의 “예배하는 것”이 볼만하고 재미가 있고 서양인(선교사)이 왔으니 “구경하러 가자”라는 뜻으로 “예배 보러 가자”고 한 말이, 그 후에 그렇게 전도 받은 사람들이 예배는 “보는 것”으로 알고 “예배 본다”라는 고정어를 만들게 되어 그것이 오늘에까지 관용어가 되었다.

          혹자는 요 1:46에 <빌립>이 <나다나엘>을 예수님께 소개하고 인도할 마음으로 “와 보라”한 말씀이 근거가 될 수 있지 않느냐고 하는 지론(持論)을 펴기도 하나, 이는 예배에 적용될 수가 없는 억지에 불과하다. 예배는 하나님의 임재에 대한 신앙인의 영성적 반응이며 인격적 응답행위인 것으로써 “보는 것”이 될 수는 없다. 만약 “예배 본다”라는 호칭 사용을 계속 방치한다면 예배자는 ‘예배 참관자’(예배 관람자) 또는 ‘예배 구경꾼’에 지나지 않게 된다.

          ‘제단 쌓는다’를 ‘예배한다’로.

          ‘제단’이나‘쌓는다’라는 말은 구약적인 용어로서 “하나님을 만난다”는 상징성은 있으나 그리스도로부터 열려진 신약교회의 표현은 아니다.

          이 “제단”이라는 말의 구약적인 의미는 “하나님의 만남의 장소”(창 25:22, 17:15)였고, 제물과 화해를 받으시던 곳이며 속죄의 장소였는데 이 말이 구약에 42회, 신약에 20여 회가 기술되고 있으나 신약에서 ‘제단’이라는 표현은 구약제단의 사상적 인용이고 실제적으로 하나님과 신약의 교인 사이에 제단이 존재하지 않았다.

          원래 ‘제단’의 또 다른 의미는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달려 고귀한 희생을 치루실 것을 예표(豫表)한 곳으로서 “피 흘림이 없이는 죄사함이 없다는 사실을 선포해 주던 곳”이 제단이었다(히 9:9, 22).
          그래서 예수님이 속죄의 제물이 되어 주심으로 제물도, 피흘림도, 제단도 그리스도로 완성되었다.
          따라서 예수님의 십자가 속죄물이 되신 이후의 신약교회는 제단이 요구되지 않았으며, 초대 교회 교인들은 실제적으로 제단을 사용하지 않았다.
          십자가상에서 완전한 제물이 되신 그리스도께서 개개인의 제단이 되셨기 때문이다(히 10:14, 18).

          그러므로 오늘날 상당수의 교회가 예배 행위의 별칭으로 “제단 쌓는다”라는 말을 쓰는 것은 그리스도의 중보사상으로나 신약 교회의 예배 원리에서 보아 잘못된 것이다.
          많은 교회들이 ‘바쳐야 받을 수 있다’는 이교적 발상에서 “제단 쌓는다”라는 말의 사용 사례를 보면 “신흥교단”들, “사이비 종파”, “무속풍의 기복신앙인과 지도자들”, 미신적 불건전 신비파들 등인데 이들은 가정제단, 새벽제단, 구국제단, 민족제단, 피의 제단, 불의 제단, 능력제단 등과 교회당 내의 소예배실을 ○○제단, 그리고 ○○산 제단 등의 이름을 걸고 제단이 뜻하는 바와 같이 희생을 요구하여 그 희생에 상응하는 ‘헌금’을 유인하고 여기에 복을 강조할 뿐 아니라, 성경이나 교리보다는 체험이나 개인의 은사를 더 강조하고 있다.

          그러나 히 10:18 이후에는 제단은 요구되지 않고 제물이 없으므로 “쌓는다”라는 ‘제의(祭儀)적 구조’나 ‘제물의 조성’이 전혀 요구되지 않는다.
          따라서 “제단 쌓는다”라는 말이 예배적 사상을 담은 표현이라면 “예배한다”로 갱신되어야 한다.

          히브리서 10:18
          이것을 사하셨은즉 다시 죄를 위하여 제사드릴 것이 없느니라.

          제단(祭壇) altar(KJV, NASB, NIV)


          요약

          구약 때에는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는 단을 말하며, 신약 때에는 하나님예배를 드리는 곳을 말한다.

          개념


          하나님
          께 제사를 드리기 위한 단이다(출 20:24~25)
          희생 제물을 드리는 번제단을 태워 드리는 분향단이 있다(출 27:1~8)

          영적 의미

          육적인 제단은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는 단이며,
          영적인 제단은 영적 제사인 예배(롬 12:1)를 드리는 곳이다.
          즉 제단은 하나님이 계신 곳이다.

          종류

          번제단

          분향단

          시대별 제단의 의미

          모세 때

          • 실제 을 잡은 로써 제사를 올렸던 제단을 말한다.
          • 모세율법을 따라 드렸던 제사는 개혁할 가 있음을 말씀하셨다(히 9:10).

          초림 때

          재림 때

          하나님의 제단

          이방(사단)의 제단


          제단은 하느님과 만나는 장소

          초대교회 때 카타콤바라는 지하묘지의 순교자 무덤 위에서 미사를 지낸 것에서 유래한다.
          성당 중심이 되는 제단은 바로 그리스도를 뜻하기 때문이다.

          옛날 사람들은 자연에는 신비스러운 초자연적 존재가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신적 존재가 나타날 것 같은 장소에 제단을 설치하여 신성시하였다. 따라서 제단은 일반적으로 사람들이 신에게 제사를 봉헌하고 희생을 바치는 시설이었다. 그러므로 제단은 보통 사람이 접근해서는 안 되는 신성한 장소로서 두려움과 매력을 동시에 주는 장소였다.

           

          유다인들에게 제단은 하느님과 계약을 맺는 장소로서 중요했다. 이스라엘 백성을 이집트에서 탈출시킨 모세는 하느님에게서 십계명을 받기 위해 시나이산에 오르기 전 제단을 쌓고 희생을 바쳐서 계약 표시로 삼았다.

           

          성서에서 최초로 언급되는 제단은 노아가 대홍수가 끝난 후 야훼 앞에 쌓은 제단이다(창세 8,20 참조). 구약시대 제단은 하느님과 인간의 결합을 나타내는 표시였다. 아브라함이 하란을 떠나 가나안 땅에 도착했을 때 야훼께서 아브라함에게 나타나 그 자손에게 이 축복된 땅을 주겠다고 하셨다. 이 말씀을 듣고 아브라함은 야훼를 위해 제단을 쌓았다(창세 12,7 참조).

           

          이처럼 유다인들에게 제단은 희생을 바치는 장소뿐 아니라 신적 존재와 만남의 표시가 되었다. 모세도 아말렉 사람들과 전투에서 승리한 후 기념 제단을 쌓았다(출애 17,15 참조). 유다인들은 제단을 흙이나 돌로 쌓았는데, 특히 돌로 쌓을 경우에는 다듬지 않은 돌을 사용해야 했다(출애 20,25 참조). 거룩한 제단은 인간 손이 더해져 부정을 타서는 안 되고 자연 그대로 존재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이처럼 제단은 하느님과 관계를 가진다는 점에서 완전성의 상징이 되었다.

           

          신약성서에서 제단은 실제적이라기보다 비유적 의미를 지닌다. 제단은 예수님께서 죄인들 손에 넘어가시기 전 제자들과 마지막 만찬을 나누신 식탁을 의미했다(마태 26,20-46 참조). 구약성서의 희생과는 본질적으로 완전히 다른 의미를 지닌 새로운 희생을 위한 제단이라 할 수 있다. 하느님 집인 교회 건물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도 바로 이 제단이었다. 제단의 상징적 의미는 무엇보다 최후 만찬 식탁의 모방이라는 것이다. 또 제단은 구원의 희생이 이루어진 거룩한 십자가의 상징이 되었다. 따라서 제단은 주님이신 그리스도 자신을 나타내는 것이었다.

           

          가톨릭 교회에서 제단이라고 하면 미사성제를 거행하는 단을 말한다. 이 제단은 성당의 중심이며 성당도 이를 중심으로 건축된다. 이 제단은 주님이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신 골고타산도 의미하며 신령한 바위이신 그리스도를 의미하기도 한다. 최후 만찬 식탁을 모방한 제단은 예수의 살과 피를 나타내는 성체와 성혈을 바치는 단이 되었다. 여기에서 교회에 현존하는 그리스도의 십자가 희생이 반복된다.

           

          보통 가톨릭 성당의 제단은 성당 전면에 설치되어 제대를 중심으로 사제와 신자가 마주보고 미사를 봉헌할 수 있도록 견고하고도 품위있게 축성된 것이다. 개신교의 제단 양식은 일정하지 않지만 최근에는 정면에 설치해서 십자가, 촛대, 꽃으로 장식하는 교회가 많아지고 있다.



          03-09-2023(목)

          _________________ 레위기 1장 / 번제(燔祭) 올라, burnt offering

          3절. 그 예물이 소의 번제이면 흠 없는 수컷으로 회막 문에서 여호와 앞에 열납하시도록 드릴찌니라.
          If the offering is a burnt offering from the herd, he is to offer a male without defect. He must present it at the entrance to the Tent of Meeting so that it will be acceptable to the LORD.

          1-2. 생축(가축)으로 예물 드림에 관한 지시
          3-9. 소의 번제에 대하여
          10-13. 양 혹은 산양의 번제에 대하여
          14-17. 산비둘기 또는 집비둘기 번제에 대하여

          제사의 종류는 " 번제(燔祭), 소제(素祭), 화목제(和睦祭), 속죄제(贖罪祭), 속건제(贖愆祭)" 다섯 가지로 구분합니다.
          그리고 제사를 드리는 방식에 따라 "화제(火祭), 요제(搖祭), 거제(擧祭), 전제(奠祭)"로 설명합니다.
          전제를 다른 말로 "관제(灌祭)" 라고도 합니다.

          번제(燔祭. 올라, burnt offering)의 의미는 "하나님 향한 기쁨의 봉헌" 및 "전적인 헌신의 제사"를 말합니다.
          번제를 뜻하는 히브리어 ‘올라'는 ‘올라가다’, ‘실어 올리다’, ‘높이다’라는 뜻의 ‘아라'에서 파생된 것으로서 ‘위로 드려지는 제사’, ‘위로 올라가는 제사’를 말하며, 불에 태워진 희생 제물의 향기가 하나님께 상달된다는 의미를 포함합니다.

          번제의 방법

          1. 헌제자가 제물이 될 짐승을 끌고 회막문 여호와 앞으로 나아온다.
          2. 헌제자의 손을 제물의 머리 위에 얹고 안수한다.
          3. 헌제자가 제물을 잡아 피를 제사장에게 주면 제사장은 그 피를 번제단 사면에 뿌린다.
          4. 헌제자가 제물의 가죽을 벗기고 각을 뜬다.
          5. 제사장은 그 뜬 각과 머리와 기름, 그리고 물로 씻은 내장과 정강이를 단 위에서 불 사른다.

          이러한 방법은 양과 염소의 경우 역시 마찬가지였으나 비둘기의 경우는 달라서 제사장 혼자서 머리를 비틀어 끊고 단 위에 불사르며 피는 단 곁에 흘리고 멱통과 창자 등은 재 버리는 곳에 버리고 몸은 쪼개어 단 위에서 불살랐습니다.

          번제의 목적

          첫번째는 ‘속죄를 위한 것'(레 1:4, 16:24)
          대부분의 주석가들이 속죄제와 속건제가 죄를 속하기 위해 드려지는 제사라는 점을 들어 이 목적을 등한시 여기거나 그냥 지나쳐 버리려 하지만 번제의 주된 목적은 성경이 밝히 말해 주고 있는 대로 ‘속죄를 위한 것’입니다.

          두번째는 ‘하나님을 향한 자신의 헌신에 대한 표현’
          창세기 22장에 소개된 아브라함의 순종에서 잘 나타납니다.
          그는 자신의 순종과 믿음의 증명을 위해 자신의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바치려 하였고, 그러한 믿음과 순종을 인정하신 여호와께서는 그를 위해 미리 준비해 놓으신 양을 제물로 삼아 번제를 드리게 하심으로 아브라함의 헌신과 믿음을 인정하셨습니다(여호와 이레).

          사랑하는 믿음의 동지들이여
          매일같이 번제를 드리는 믿음으로 삶의 현장에서 복음의 전령으로 승리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레위기의 5대 제사와 번제에 대한 이해 

          레위기는 여호와께 드려야 할 5 대 제사의 규례로서 시작된다.
          그런데 이러한 레위기의 시작은 당연한 귀결이었다.
          왜냐하면 건축된 성막의(출 40:17) 주된 목적이 제사였고, 따라서 성막이 완성된 지금 그곳에서 드려질 제사의 규례가 주어지는 것은 당연한 논리요 순서이기 때문이다.

          번제(Burnt Offering)의 어의

          번제를 뜻하는 히브리어 ‘올라'는 ‘올라가다’, ‘실어 올리다’, ‘높이다’라는 뜻의 ‘아라'에서 파생된 것으로서 ‘위로 드려지는 제사’, ‘위로 올라가는 제사’를 뜻한다.
          이러한 단어의 의미는 불에 태워진 희생 제물의 향기가 하나님께 상달된다는 의미를 포함하고 있다.

          번제로 드리는 제물의 종류

          번제에 사용된 제물은 수송아지, 수양, 수염소, 혹은 비둘기인데, 이 모든 제물은 반드시 흠없고 일년 된 수컷임을 그 특징으로 하였으나 비둘기에 대해서만은 수컷이나 암컷 중 어느 것을 드리라는 특별한 지시가 없다.

          번제의 방법

          헌제자가 제물이 될 짐승을 끌고 회막문 여호와 앞으로 나아온다.
          헌제자의 손을 제물의 머리 위에 얹고 안수한다.
          헌제자가 제물을 잡아 피를 제사장에게 주면 제사장은 그 피를 번제단 사면에 뿌린다.
          헌제자가 제물의 가죽을 벗기고 각을 뜬다.
          제사장은 그 뜬 각과 머리와 기름, 그리고 물로 씻은 내장과 정강이를 단 위에서 불 사른다.

          이러한 방법은 양과 염소의 경우 역시 마찬가지였으나 비둘기의 경우는 달라서 제사장 혼자서 머리를 비틀어 끊고 단 위에 불사르며 피는 단 곁에 흘리고 멱통과 창자 등은 재 버리는 곳에 버리고 몸은 쪼개어 단 위에서 불살랐다.

          번제의 목적

          번제의 목적은 두 가지로 나타난다.

          첫번째는 ‘속죄를 위한 것'(레 1:4, 16:24)인데 대부분의 주석가들이 속죄제와 속건제가 죄를 속하기 위해 드려지는 제사라는 점을 들어 이 목적을 등한시 여기거나 그냥 지나쳐 버리려 하지만 번제의 주된 목적은 성경이 밝히 말해 주고 있는 대로 ‘속죄를 위한 것’이다.

          두번째는 ‘하나님을 향한 자신의 헌신에 대한 표현’이다.
          이러한 목적은 창세기 22장에 나오는 아브라함의 순종에서 잘 나타나는데 그는 자신의 순종과 믿음의 증명을 위해 자신의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바치려 하였고, 그러한 믿음과 순종을 인정하신 여호와께서는 그를 위해 미리 준비해 놓으신 양을 제물로 삼아 번제를 드리게 하심으로 아브라함의 헌신과 믿음을 인정하셨다.

           


          회막(會幕) 4150(회), 168(막) 오헬 모에드

          4150.
          מוֹעֵד 

          1. 정한 때.
          2. 시간의 한 점
          3. 시간의 공간
          발음 / 모에드(môwʽêd) ]
          어원 / 3259에서 유래
          관련 성경 /계절(창1:14), 기한(삼상13:8, 시102:13), 때(출23:15, 수8:14, 습3:18), 회막(출27:21, 레24:3, 왕상8:4), 성막(출35:21, 40:2), 회막문(출40:12, 민16:18, 27:2), 성회(레23:2,37, 겔46:11), 절기(레23:37, 민29:39, 대하8:13, 호2:11), 절기제(민15:3), 회중(민16:2, 시74: 4),시기(민28:2, 렘46:17), 군호(삿20:38), 날(삼상13:11), 시간(삼상20:35), 한 해(왕하4:16),회당(시74:8), 기약(시75:2), 절기의 날(애2:7, 호9:5). [동] 돌아오다(왕하4:17), 정하다(욥30:23, 시104:19).
          구약 성경 / 223회 사용

          * 3259. יָעַד 

          1. 지적하다
          2. 렘47:7.
          3. 삼하20:5.
          발음 / 야아드(yâʽad)
          관련 성경 / 상관하지 아니하다(출21:8), 정하다(렘47:7, 미6:9), 주다(출21:9), 만나다(출25:22,29:42, 느6:2), 모이다(민10:3, 왕상8:5, 시48:4), 뜻이 같다(암3:3), 가다(느6:10), 서로약속하다(욥2:11), 거역하다(민14:35), 소환하다(욥9:19), 다투다(렘49:19, 50:44), 놓이다(렘24:1)
          구약 성경 / 29회 사용

          168.  אֹהֶל 

          1. 장막
          2. 주택이나 거주지
          3. 성전 건물
          발음 / 오헬(’ôhel)
          어원 / 166에서 유래
          관련 성경 / 장막(창4:20, 출16:16, 대하1:4), 성막(출 26:36, 왕상1:39), 막(출26:12, 14, 36:19), 회막(출30:16, 레1:1, 민4:3), 천막(대하14:15, 렘 4:20), 성전(겔41:1). 집(삿19:9).
          구약 성경 / 345회 사용

          * 166.  אָהַל
          1. 밝다
          2. 히필형 : 칼형과 동일 1)빛내다
          발음 / 아할(’âhal)
          관련 성경 / 빛나다(욥 25:5)
          구약 성경 / 4회 사용

          예물(禮物) 7133 קָרְבָּן  

          1. 제단
          2. 희생 제물
          3. 레위기 2:1
          발음 / 고르반(qorbân)
          어원 / 7126에서 유래, 연계형 :קָרְבַּן
          관련 성경 / 예물(레 1:2, 27:9, 민 5:15), 제물(레 4:32, 겔 20:28), 희생(겔 40:43)
                           [동] 드리다(레 2:12, 느 10:34)
          구약 성경 / 80회 사용

          * 7126.  קָרַב 

          1. 접근하다
          2. 시편 69:19
          3.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감
          발음 / 가랍(qârab) 

          레위기 1-7장은 다양한 종류의 제사들에 대한 규정을 기록하고 있다.
          크게 1-5장과 6-7장으로 다시 나눌 수 있는데 먼저 1-5장에서 제사는 다음의 순서로 기록되어 있다.

          ​​  번제(1장)
            소제(2장)
            화목제(3장)
            속죄제(4:1-5:13)
            속건제(5:14-6:7)

          ​그리고 6-7장에서는 다음과 같은 순서로 기록되어 있다. 

          ​  번제(6:8-13)
            소제(6:14-18)
            위임식에서의 소제(6:19-23)   
            속죄제(6:24-30)
            속건제(7:1-10)
            화목제(7:11-21, 28-34)
           

            1-5장은 교훈적인 목적을 위해 기록되었고,
            6-7장은 집행상의 세부 사항을 묘사하기 위해 기록되었다고 볼 수 있다.

            1-5장은 또다시 두 부분으로 나눌 수 있는데,
            1-3장은 여호와께 향기로운 냄새(레아흐 니호아흐 라도나이)로 드려지는 희생들에 대한 내용이다
            (번제 - 올라, 소제 - 민하, 화목제 - 제바흐 쉘라밈).
            4-5장은 특정한 죄들을 대속하는(카파르) 제사들이다(속죄제 - 하타트, 속건제 - 아샴).
           속죄제는 희생을 드리도록 요구된 사람의 신분에 따라, 속건제는 범죄의 성격에 따라 규정이 주어진다.
           누구든지 죄를 지은 사람은 언약 공동체의 일원으로 남기 위해 반드시 제사를 드려야 했다.

            6-7장은 희생제사에 대한 세부 사항들을 기록하고 있다.
           희생제물의 거룩성과 남은 부분들의 처리에 대한 부분을 다루고 있다.
           제사장들이 받는 부분에 대해서도 기록되어 있다.

          여호와

          이 신(神)명칭은 레위기 전반을 통해 사용되고 있다.
          그것은 레위기가 특별히 언약의 백성이자 선민인 이스라엘 백성의 거룩과 성결에 대해 취급하고 있는 책이기 때문이다. 즉 '언약의 하나님', '구속주 하나님'이라는 뜻을 가진 '여호와'란 신명칭은 특별히 '언약의 백성'과 관련하여 사용되어지는 신명칭인 만큼 레위기의 주제 및 내용에 합당하게 적절히 사용되어지고 있는 것이다(Lange).

          회막(오헬 모에드)

          '만남의 천막'이란 뜻으로 특별히 회막(會幕)이란 용어는 하나님과 언약 백성 간의 만남의 장소로서의 기능을 강조한 말이다.
          실로 하나님께서는 이 '회막'을 통하여 인간들 사이에 최초로 거주하셨고, 또한 인간들과 만나셨다. 특히 여기서 회막을 통하여 인간들 사이에 거주하신 하나님의 거주는 장차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신'(요 1:14)
          그리스도의 거주를 예표한다(The Preacher's Complite Homiletic Commentary).
          한편 이 말이 성경 다른 곳에서는 성막(출 26:9), 증거막(출 38:21), 법막(대하 24:6), 여호와의 전(출 23:19), 여호와의 장막(왕상 2:28)등으로도 표기된다.
          또한 모세가 바로 직전에 시내 산 아랫자락에 회막을 세웠기 때문에(출 40:34-37) 모세가 여호와의 말씀을 들으러 더 이상 시내 산을 등정할 필요가 없게 되었고, 회막에서 여호와와 직접적인 교통을 하여 이 규정들을 받았다고 할 수 있다.

          부르시고(와이크라)

          직역하면 '그리고 그가 부르시고'란 의미인데 히브리 성경에서는 이 말이 첫 단어로 나온다.
          아울러 '와이크라'란 단어는 각 성경의 첫 단어를 대체적으로 그 책의 제목으로 삼던 히브리인들의 관례를 따라 본서의 히브리 성경의 제목으로도 사용된 말이다.
          특별히 이 단어에서 '그리고'(and)란 뜻을 지닌 '와'(*)는 의미상 출 40:33절에 이어지는 접속사로서 본서가 출애굽기의 후편임을 강력히 시사한다.
          또한 '부르시고'에 해당하는 '이크라'는 특별한 임무를 부여할 때나 중요한 사항을 전달하고자 할때(출 3:4; 19:3) 주로 사용되는 동사로서 부름받는 자의 적극적이고 구체적인 반응을 구하는 동사이다.

          일러 가라사대

          자기 백성에 대한 왕의 자격으로서, 더 나아가 그들의 죄를 속(贖)해 주시는 구속주의 자격으로서 택함 받은 백성이 마땅히 지켜 행해야 할 생명의 법도를 지금 선포하시는 것이다.

          레위기는 결코 쉬운 성경이 아니다.
          제사 자체가 낯설고 특이하다.
          또한 구약 전반을 연구하면 레위기에 나타난 제사들이 특징들이 섞여 있거나 명확하게 구분되지 않은 경우가 대부분이다.
          많은 경우 한 번 제사 지낼 때 번제와 화목제, 화목제와 속죄제를 함께 드리는 경우가 흔하다.
          그렇기 때문에 각 제사가 어떤 의미를 갖는지 이해하는 것이 어렵다.
          구약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레위기의 제사법에 대한 명확한 이해가 선행되어야 한다.

          1. 번제(Burnt Offering)
          2. 소제(Grain Offering)
          3. 화목제(Fellowship Offering)
          4. 속죄제(Sin Offering)
          5. 속건제(Guilt Offer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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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번제는 하나님 향한 기쁨의 봉헌이자 전적인 헌신의 제사
          공적 행사에서 기본 제사로 드려 차별없음이 번제의 정신이었다

          하나님께서 힘을 주신다

          요아킴은 하나님께 감사의 마음으로 충만하여 자신의 가축 중에 양 한 마리를 하나님께 바치기로 결심했다.
          그는 평소 상품의 물건으로 찜해 둔 녀석을 골라 몸 상태를 잘 살핀 후 아무런 흠이 없다는 것을 확인하고 성소로 가져갔다.
          성소에는 이미 많은 사람들이 다양한 목적으로 크고 작은 짐승을 바치려고 올라와 있었고 제사장들은 제사를 집행하느라 분주했다.
          제단은 피로 흥건히 얼룩져 있었고, 제단 주변에는 짐승의 흘린 피 자국들이 여기저기 보였다.
          잠시 기다리다 자신의 순서가 되자 요아킴은 양을 끌고 자신의 번제를 담당할 제사장 앞에 섰다.
          제사장은 양의 몸을 다시 면밀히 검사하여 흠이 있는지 살폈다.
          합격 판정이 내려지자 요아킴의 번제 바치기가 시작되었다.

          그는 제사장이 보는 앞에서 자신의 손을 양의 머리에 얹고서 이 번제를 통해 비천한 자신을 받아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하고 왜 이 번제를 바치는지 말씀드렸다.
          그는 시편의 감사시를 낭송하여 부르면서 하나님께 찬송을 올린 뒤 도살용 칼로 그 짐승의 고통이 최대한 빨리 끝나도록 목의 급소를 찔러 짐승을 도살했다.

          요아킴과 제사장은 번제의 절차를 따라 신중히 그 제물을 마지막 순서까지 무사히 잘 드렸고 정성을 다해 바친 제사는 하나님께서 기쁘게 받으신다는 약속을 기억했다.
          요아킴은 기쁨으로 충만하여 집으로 돌아왔다.
          하나님의 은혜가 집안에도 가득히 들어차 있음이 느껴졌다.
          요아킴은 매일 자신이 받은 축복을 감사하며 지냈고 어려운 시기가 닥칠 때에는 번제를 드린 순간의 결심과 감격을 기억하면서 하나님을 더욱 의지하며 인내했다.

          명칭에서 살펴 본 번제의 의미

          요아킴이 드린 제물은 번제였다.
          이때 그 제물은 전체를 모두 제단 위에 올려서 태웠다.

          번제는 우리말로 ‘태우는 제사’를 뜻하며 대부분의 영어 성경들에서도 마찬가지로 ‘the burnt offering’이다.
          그러나 번제의 히브리어 ‘올라’(ola)는 단순히 ‘올리는 것’이다.
          이것은 ‘올라가다’는 의미를 지닌 동사 ‘알라’(ala)에서 기원한 명사다.
          번제의 이름 ‘올라’는 우연하게도 우리 말 ‘올라가다’와 발음이 일치한다.

          이런 이름이 의미하는 바는 번제의 짐승의 모든 부위가 제단 위에 ‘올려 바쳐져’ 불에 타면서 짐승 전체가 연기되어 향기로 하나님께 ‘올라가기’ 때문이다.
          그래서 전체를 태워 드린다는 의미를 반영하여 어떤 영어 성경들은 ‘전번제’(whole burnt offering)로 번역하기도 한다.

          ▲ 번제를 드리기 위해 양과 염소, 또는 소의 가죽은 벗겨지고 몸 안의 오물들이 제거됐다.
          또 가죽을 제외하고는 모두 불태웠다.
          번제는 이처럼 누구나 드릴 수 있었지만 드리는 자의 전적인 헌신을 필요로 했다.

          번제의 특징

          희생 짐승은 마당의 제단 근처에서 잡는데, 작은 가축인 양과 염소의 경우 “제단 북편”으로 도살 장소가 정확히 명시된다(레 1:11).
          그러나 대형 가축인 소의 경우 위치가 정해지지 않는데, 아마 그 이유는 힘이 세고 덩치가 큰 소를 통제하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번제는 가죽을 제외하고 다 태운다.
          가죽은 제사장의 수고비로 돌아간다(레 7:8).
          가죽을 벗기는 행위에 옛사람을 벗어버리고 속사람의 온전한 헌신을 상징한다는 의미를 부여하기도 하지만, 실은 가죽의 특성상 잘 타지 않고 다른 부위도 덩달아 잘 타지 않게 되며 또한 향기로운 냄새가 아닌 악취를 풍기기 때문에 가죽을 벗겼을 것이다.

          가죽을 벗겨내고 짐승으로부터 더러운 똥와 오물들을 다 깨끗하게 제거한 뒤 모든 부위를 다 드렸다(레 1:9):
          몸통, 머리, 정강이, 창자. 번제는 다른 제사들과 달리 인간의 몫이 없이 모두 하나님께 태워져 바쳐진 이유로 랍비들은 번제가 다른 희생 제사들보다 우월했다고 설명한다.
          그러나 적어도 감사의 목적으로 바친 목축하는 사람의 짐승의 번제와 농사꾼의 곡식의 소제 사이에 우열이 있었다고 보기는 어렵다.
          그럼에도 번제가 가장 중요했던 이유는 가장 기본적인 감사와 헌신의 제사였기 때문일 것이다.

          드리는 때

          오대 제사중 처음 세 가지, 번제와 소제, 그리고 화목제는 자발적인 제사로 ‘감사’가 그 기본적 동기라 할 수 있다.
          물론 각 제사의 용도는 그 외에도 다양했다. 예

          를 들어 소제의 제물은 감사의 예물로만 바치지 않고 가장 가난한 사람을 위한 속죄제로 바쳐질 수 있었다.
          번제 또한 자신의 비뚤어진 마음을 회개하는 마음으로 드릴 수 있었고 중대한 일을 앞두고 하나님의 도움을 구하고자 바치기도 했으나 기본적으로 번제의 취지는 “감사와 봉헌”이었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번제는 누구나 자신이 원하는 때에 성전에 올라가 번제를 드릴 수 있었다.

          성경에는 노아가 홍수 후에 감사의 번제를 드릴 때 처음 등장한다(창 8:20).
          여호와께서는 그 번제의 향기를 받으시고 다시는 사람의 악한 본성으로 인해 물로 땅을 심판하지 않으시겠다고 약속하신다(창 8:21; 9:11).
          이처럼 번제에는 하나님의 진노를 완화하고 태도를 바꾸시게 하는 기능이 있었다.
          어린 양을 바친 아벨의 제사 역시 번제의 속성을 가졌다(창 4:2~4).
          성경 신학적 관점에서 볼 때 아담이 타락한 이후 하나님께서 그에게 가르쳐주신 제사법이 후손에게 전수된 것이 번제가 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특히 번제에 드린 짐승의 가죽이 제사장에게 돌아간 것은 에덴에서 아담과 이브에게 가죽옷을 입혔던 것을 연상시킨다(창 3:21).
          이것은 분명 신학적 암시를 담은 구절이다.
          에덴이 일종의 성전이었다고 가정하면 아담은 그 성전을 관리하는 제사장이었을 것이다.
          따라서 아담이 최초로 번제 드리는 법을 전수받은 인물이라는 추론이 가능하다.

          성경에서 번제는 대부분 공적인 행사에서 기본 제사로 드려진다.
          의외로 지극히 사적인 번제는 구약성경에서 드물다. 몇 가지 예를 살펴보자면 하나님께 감사와 기쁨을 표시하기 위해
          아낌없이 모두 드릴 때(삼상 6:13~14),
          완전한 헌신을 다짐할 때(창 22:2; 삿 11:31),
          고난 중에 하나님께 탄원하며 의지하고자 할 때(삿 21:2~4; 미 6:6) 번제를 바쳤다.
          때로는 서원을 이행하기 위해 화목제와 더불어(레 7) 번제를 함께 올리기도 했다(레 22:18).

          그러나 번제를 의무적으로 바치는 경우도 있었다.
          크게 다음 세 가지 경우가 이에 해당된다.

          a. 상번제 :
          상번제란 항상 드리는 번제를 의미한다.
          매일 아침저녁으로 제사장이 일년 생 숫양을 드리곤 했는데(민 28:3~4) 아마 이스라엘 백성들도 아침에는 처소에서, 저녁에는 각자의 일터에서 마음으로나마 번제에 동참했을 것이다.

          b. 안식일과 절기 :
          상번제 외에 안식일에는 소제와 전제와 더불어 일년 생 숫양 두 마리를 함께 드렸다(민 28:9).
          절기마다 번제에 요구되는 짐승과 그 숫자가 달랐다(민 28~29장 외).

          c. 기타 :
          경우에 따라 속죄제를 드릴 때 번제가 요구되기도 했다.
          일례로 레위기 12장에서 산모가 아이를 낳으면 부정해졌는데 이때 그녀는 일정 기간의 자연 정화 과정을 거친 뒤 성전에서 속죄제와 더불어 번제를 바쳐야 했다.
          그 외에도 다시 정결한 상태를 회복하기 위해 흔히 속죄제와 번제를 함께 드렸으며(레 14:13; 15:15), 나실인 서약을 할 때도 속죄제 및 화목제와 더불어 번제가 요구되었다(민 6장).
          출산한 여인의 경우 속죄제는 부정결한 산혈로 인한 제단의 오염을 씻어내기 위해 바쳐지나 번제에는 자녀를 얻은 것에 대한 감사의 의미가 담겨있을 것이다.
          부정한 자를 깨끗케 하는 속죄제에 번제가 동반되는 것도 다시 정결해진 것을 감사하기 위해서일 수 있다.

          기능과 목적

          번제의 일차적 목적은 감사로 드리는 헌신과 봉헌이다.
          여호와께 제사를 드리면 그분이 기쁘게 받으신다는 진술이 그 증거다(레 1:2~3).
          즉 번제는 여호와께 전적인 기쁨이 되는 제사다.
          아브라함에게 독자 이삭을 번제로 바치라 하신 하나님의 요구는 곧 아브라함의 완전한 섬김과 헌신을 확인하기 위함이었다(창 22:2).
          자주 번제는 감사의 표시로 하나님께 바쳤다.
          모세의 장인 이드로의 사례에서 볼 수 있듯이, 이때 화목제가 동반될 수 있는데 번제는 전적으로 하나님께 감사의 제물로 드리고 화목제는 사람들을 초청해 그 고기를 먹으며 감사와 기쁨을 나누었다(출 18:9~10).

          제물에는 제물을 바치는 사람의 마음이 담겨있어야 한다.
          정성스러운 번제를 바치면 하나님께서 ‘그를 기쁘게 받으신다’고 말한다.

          미드라쉬 레위기 주석에서 랍비들은 희생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하나님께 올리는 희생 제물은 부서진 마음이다;
          오 하나님, 부서지고 회개한 마음을 멸시하지 마소서.”

          번제에 의한 속죄는 전적인 헌신의 표시에 뒤따른 부수적 효과라 할 수 있다(레 1:4):
          “그를 위하여 속죄가 될 것이라.”

          여기서 한 가지 질문이 발생한다.
          이미 죄를 위한 속죄제와 속건제라는 제사가 별도로 존재하는데 그렇다면 번제는 이런 제사들과 어떤 기능적 차이가 있는가?

          속죄제·속건제는 쌍둥이 제사로서 구체적인 죄의 문제를 다룬다.
          그렇다면 번제를 드린 목적은 인간의 기본적 죄성(sinfulness), 즉 원죄의 속죄를 위해서일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가 단번에 모든 죄를 영원히 속죄하시기 전까지는 원죄 역시 거듭해서 속죄해야 할 대상 중 하나였다.

          레위기에서 속죄제·속건제가 신설되기 전에는 죄를 용서받기 위해 번제를 드렸다는 사실은 매우 중요하다(욥 1:5).
          즉 번제는 본래 구체적인 죄를 용서받기 위해 드리는 제사이기도 했으나 속죄제·속건제가 생긴 이후로는 원죄를 속죄하는 제한적 기능만을 수행하게 되었다고 볼 수 있다(참조. Milgrom 1991: 175~176).

          물론 레위기에서 제사법이 제정된 이후에도 잘못을 저지른 뒤 하나님의 진노를 누그러뜨리기 위해 번제를 드리는 경우가 있었다.
          예컨대 다윗이 자신의 군사력을 과시하려는 야욕에서 인구조사를 벌이자 그 결과가 하나님의 재앙이 임하여 많은 백성들이 희생되었다. 다윗이 황급히 번제와 화목제를 드리자 하나님의 진노가 가라앉고, 재앙이 멎었다(삼하 24:25; 대상 21:26).
          자기 의를 드러내는 교만은 인간의 원죄의 근원적 뿌리다.
          따라서 번제는 원래 하나님께 기쁨의 표시로 바쳐지곤 했지만 때로는 자신의 죄된 본성을 용서받고 욥처럼 부지불식간에 저지른 죄를 사함받기 위해 드리기도 했을 것이다.
          그러나 많은 경우 번제는 하나님을 향한 기쁨의 봉헌물이자 감사의 표시로서 전적인 헌신과 아낌없는 드림을 보여주는 제사였다.

          번제의 종류와 비둘기 번제가 주는 의미

          번제의 짐승은 다음과 같이 등급이 나뉘었다.
          본문에 구체적으로 명시되지는 않았지만 형편이 어려운 사람에게는 새나 곡식을 바치는 것을 허용했다는 사실에서(레 5:7, 11) 신분과 경제력에 따라 각기 다른 등급의 제물이 권장되었을 것으로 추정해볼 수 있다.
          여기서 반드시 명심해야 할 점은 제물의 크기나 종류와 상관없이 번제의 효력은 동일했다는 사실이다.
          9절과 13절, 그리고 17절 끝에서 소와 염소/양, 그리고 비둘기의 번제 각각의 효과에 대한 최종적 진술이 나타난다:
          “이는 화제라 여호와께 향기로운 냄새니라.”

          소와 비둘기의 크기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크게 차이가 나지만, 여호와는 모든 제물을 동등하게 평가하셨다.
          겉모양과 크기를 보는 사람과 달리 하나님께서는 중심과 태도를 보시기 때문이다.

          신약에는 두 렙돈 밖에 바치지 못하는 과부의 헌금에도 동일한 정신이 깃들어 있다는 대목이 있다(막 12장; 눅 21장).
          번제의 정신은 차별 없는 제사에 있다.
          누구에게나 여호와 앞에 나와 예배할 자격이 있다.
          따라서 교회 안에 신분이나 빈부, 인종, 지역에 따른 차별이 존재해서는 안 된다.


          레위기 1 Korean Living Bible

          번제

          1 여호와께서는 성막에서 모세를 불러 이스라엘 백성에게 다음과 같은 명령을 전하라고 말씀하셨다.
          “너희 중에 누구든지 나 여호와에게 제물을 드리고자 하거든 너희 가축 중에서 소나 양을 바쳐라.
          “만일 그 제물이 소를 잡아 불로 태워 바치는 번제라면 흠 없는 수소로 하고 내가 기쁘게 받을 수 있도록 그것을 성막 입구 나 여호와 앞에서 바쳐라.
          제물을 바치는 자가 번제물의 머리에 손을 얹으면 내가 그것을 그의 죄를 대신 속죄하는 희생의 제물로 받을 것이다.
          그는 나 여호와 앞에서 그 수송아지를 잡고 아론 자손의 제사장들은 그 피를 가져다가 성막 앞에 있는 제단 사면에 뿌려야 한다.
          그리고 그는 그 제물의 가죽을 벗기고 각을 뜰 것이며
          제사장 아론의 자손들은 제단 위에 불을 놓고 그 불 위에 나무를 벌여놓은 다음
          머리와 기름을 포함하여 그 각 뜬 제물을 단의 불붙는 나무 위에 벌여놓아야 한다.
          그리고 그 사람은 내장과 다리를 물로 씻을 것이며 제사장은 그 모든 제물을 단 위에서 불로 태워야 한다. 이것은 불로 태우는 화제이며 [a]나 여호와를 기쁘게 하는 향기이다.
          10 “만일 그 제물이 양이나 염소를 잡아 불로 태워 바치는 번제라면 그것은 흠 없는 수컷이어야 한다.
          11 그 제물을 가지고 온 사람은 나 여호와 앞 제단 북쪽에서 그 짐승을 잡아야 하며 아론의 자손 제사장들은 그 피를 단 사면에 뿌려야 한다.
          12 그리고 그는 그 짐승의 각을 뜨고 제사장들은 머리와 기름을 포함하여 각 뜬 그 제물을 단의 불붙는 나무 위에 벌여놓아야 한다.
          13 또 그 사람은 내장과 다리를 물로 씻어야 하며 제사장은 그 모든 제물을 단 위에서 불로 태워야 한다. 이것은 불로 태우는 화제이며 나 여호와를 기쁘게 하는 향기이다.
          14 “만일 나 여호와에게 드리는 제물이 새를 불로 태워 바치는 번제이면 그것은 산비둘기나 집비둘기 새끼여야 한다.
          15 제사장은 그것을 단으로 가지고 가서 목을 비틀어 끊고 그 머리를 단 위에서 불태우고 그 피를 단 곁에 흘릴 것이며
          16 멱통과 내장은 제거하여 제단 동쪽의 재 버리는 곳에 던져야 한다.
          17 그리고 그는 그 새의 날개를 잡고 몸을 완전히 떼어내지 말고 찢어서 그것을 단의 불붙는 나무 위에서 태워야 한다. 이것은 불로 태우는 화제이며 나 여호와를 기쁘게 하는 향기이다.”

          Footnotes

          1. 1:9 또는 ‘여호와께 향기로운 냄새니라’

          Q. 소의 번제로 드릴 경우, 어떤 소를 드려야 했나요?(3)
            A. 흠 없는 수컷

          Q. 왜 하나님은 암컷이 아니라 수컷을 드리라고 하셨을까요?
            A. 수컷은 암컷을 대표하기 때문[QA성경]

          학교에서 반장은 반학생을 대표한다.
          마찬가지로 남성은 여성을 대표한다.
          남성이 우월하거나 여성이 열등하다는 뜻은 아니다.

          Q. 제물을 드리는 사람은 소를 어디에서 드리라고 하셨나요?(3)
            A. 회막 문에서

          Q. 4절 “그는 머리에 안수할지니”에서 그는 제사장을 가리킬까요? 제물 드리는 사람을 가리킬까요?
            A. 제물 드리는 사람

          Q. 제물을 드리는 사람은 회막 문에서 번제물인 소의 머리에 안수를 합니다. 안수는 무슨 뜻인가요?
            A. 손을 머리에 얹고 기도하는 것

          Q. 제물을 드리는 사람은 안수할 때 무슨 기도를 했을까요?
            A. 자기의 죄와 허물을 고백하는 기도.

          * 안수에는 제물을 드리는 사람의 죄가 번제물인 짐승에게 옮겨진다는 의미가 담겨 있다.

          Q. 제사자가 번제물의 머리에 안수하면, 어떻게 된다고 말씀하시나요?(3)
            A. 그(제사자)를 위하여 기쁘게 받으심이 되어 그(제사자)를 위하여 속죄가 될 것이라

          ** 속죄란 죄에 대해 값을 치르고 없애는 것이다. 제사자는 번제물인 짐승을 자기 죄의 값으로 지불하여 죄를 해결한다.

          Q. 여호와 앞에서 그 수송아지를 잡는(죽이는) 사람은 제사장과 제물 드리는 사람 중 누구일까요?(5)
            A. 제물 드리는 사람

          ** 수송아지를 잡는다는 것은 짐승의 목숨을 끊는 행위를 말한다. 제물 드리는 사람은 번제물의 목덜미를 칼로 그어 죽였다.

          Q. 제물을 드리는 사람이 자기 죄를 위해 산 짐승을 죽일 때 어떤 기분이나 생각이 들었을까요?
            A. 다양한 대답이 가능하다.

          ** 자기 죄 때문에 짐승이 피 흘리는 모습을 보면서 짐승을 불쌍하게 생각했을 것이고, 죄의 심각성을 깨달았을 것이다.

          Q. 제사장들은 짐승의 목덜미에서 흘러나오는 피를 어떻게 했나요?(5)
            A. 그 피를 가져다가 회막 문 앞 제단 사방에 뿌릴 것이며.

          ** 피를 그릇에 담아서 번제단 사면에 부었다.

          Q. 번제물의 가죽을 벗기고 각을 뜨는 것은 제사장과 제물 드리는 사람 중 누가 했을까요?(6)
            A. 제물 드리는 사람

          ** 각을 뜨는 것은 죽인 짐승을 머리, 몸통, 다리 등으로 잘라 나누는 것을 말한다.

          Q. 번제단 위 나무를 준비하고 각 뜬 제물을 태우는 일은 누가 했나요?(7~9)
            A. 제사장

          Q. 번제는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를 나타냅니다.
          번제는 OO와 어떤 관련이 있는지 말해보세요.
          제물 드리는 사람, 번제물은 무엇을 가리킬까요?


            A. 제물 드리는 사람은 죄인인 OO이고, 번제물은 예수 그리스도를 나타낸다. 번제물이 제사자의 죄를 속죄한 것처럼,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우리 대신 죽으셔서 OO의 죄를 없애셨다.

          Q. 만약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지 않으셨다면, OO는 어떻게 될까요?
            A. OO의 죗값을 OO가 직접 치러야 한다. 즉 죽어서 영원한 지옥불에서 자기 죄에 대한 벌을 받는다.

          구약의 5대 제사에는 번제 뿐 아니라 소제, 화목제, 속죄제, 속건제가 있다.
          모든 제사는 예수 그리스도를 나타낸다.
          번제물 때문에 제사자의 죄가 없어지는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께서 OO 대신 죽으셨다.

          하나님은 자기 아들을 OOO을 위해 제물로 주셨다.
          하나님께서 OO를 어마어마하게 사랑했기 때문이다.
          OO는 하나님을 찬양하며 살고, 하나님을 더욱 사랑해라.

          기도 :
          하나님 아버지, 사랑하는 아들을 제물로 주시니 감사드립니다.
          OO가 예수 그리스도께서 대신 죽으신 사실을 영원히 잊지 않게 하옵소서.
          OO가 일평생 예수님을 굳게 믿고, 하나님을 사랑하며 살게 하옵소서.
          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1. 번제(Burnt Offering)

          번제(燔祭) : 불사를 번(燔), 구울 번(燔), 제사 제(祭)

          구약(舊約) 시대(時代)에 하나님께 올리던 제사(祭祀)의 한 가지.
          짐승을 통째로 태워 제물(祭物)로 바친 것으로, 매일(每日) 아침 저녁과 안식일(安息日) 또는 매달 초하루와 무교절ㆍ속죄제(贖罪祭)에 지냄.

          번제(5930) (올라, ʽôlâh) עֹלָה 

          1. 제단 위에 드려진 것.  2. 상승
          발음 / 올라(ʽôlâh)
          관련 성경 / 번제(창 8:20, 레 10:19), 번제물(출 10:25, 레 3:5, 민 6:11) 
          [동] 올라가다(겔 40:26), 번제하다(창 22:7, 8).
          구약 성경 / 9회 사용

          1. 번제

          번제는 레위기 1장에 기록되어 있다.
          번제는 ‘전체를 태워 모두 바치는 수직적 헌신의 제사’1이다. 

          번제가 기록된 레위기 1장의 구조를 잠깐 살펴보자.

          1-2절 서론
          3-9절 소의 번제
          10-13절 양과 염소의 번제
          14-17절 새의 번제

          1-2절에 해당하는 서론은 후에 자세히 살펴보기로 하고, 곧바로 번제로 넘어가자.
          한 가지 짚고 넘어갈 것은 2절에 번역된 ‘예물’은 히브리어 고르반 막 7:11에서 언급된 것으로 ‘하나님께 드려짐’으로 받는다.

          2. 용어해설

          번제(Burnt Offering)는 ‘불태우는 제사’이다.
          모든 제사는 불, 즉 화제를 기본으로 한다.
          번제의 히브리어 단어 ‘올라’는 ‘올라가다’ ‘높이다’는 뜻인 ‘아라’에서 온 단어다.
          희생제물을 불로 태워 하늘로 올려 보낸다는 뜻에서 붙여진 이름 인듯하다.

          3. 드리는 방법

          1.2 드리는 방법

          소를 드릴 경우, 먼저 ‘흠 없는 수컷’(3절)이어야 한다.
          양과 염소인 경우에도 동일하게 흠 없고, 수컷이어야 한다.
          새로 드릴 경우는 산비둘기와 집비둘기 새끼이어야 한다.
          암수 구분은 없다.
          회막 문에서 드려야 한다.
          먼저 제사자(제사장이 아님)는 자신의 번제물의 머리에 안수한다.
          그(제사자)는 숫송아지를 잡는다.
          그 때 흐르는 피를 아론의 제사장들은 피를 받아 회막 문 앞 제단 사방에 뿌린다.
          그는 번제물의 가죽을 벗기고 각을 뜬다.(6절)
          내장과 정강이는 물로 씻는다.

          새로 드릴 경우 가축과 다르게 제단 위로 바로 가져간다.
          제단에서 목을 비틀어 불사른다.
          흐르는 피는 곧바로 제단 곁에 흘린다.(15절)
          그러나 먼저 모이주머니와 더러운 것들은 제거하여 제단 동쪽 재 버리는 곳에 던진다.
          몸을 찢지만 완전히 찢지 않는다는 점도 특이하다.

          제물을 잡는 곳이 이곳에는 드러나지 않는다.
          5절에서는 단지 ‘여호와 앞’이라고 기록되어 있지만 11절에서는 ‘제단 북쪽 여호와 앞’이라고 방향을 정해 두었다.

          번제의 의미

          우리는 가장 먼저 언급되는 번제를 통해 몇 가지 교훈을 얻을 수 있다.

          1 전부를 드리는 제사

          첫 번째 교훈은 번제는 ‘모든 것’을 드려야 한다는 점이다.
          제물이 준비되면 제사장들은 각을 뜬 제물의 머리와 기름을 제단 불 위에 놓여진 나무 위에 올려놓는다.
          제사장을 불로 ‘전부’(9절) 태워 드려야 한다.
          전부를 드린다는 의미에서 ‘전번제’로 부르기도 하는 이 제사는 제사의 가장 기본적인 의미를 알려 준다.

          제물은 제사자를 상징한다.
          그는 안수함으로 자신을 제물과 대입된다.
          죄를 지어 드리는 제사가 아니기 때문에 전가로 확정할 수 없으나, 제물과 제사자는 다른 존재가 아닌 것이다.

          2 대가를 지불하는 제사

          두 번째 교훈은 제사를 드리기 위해서는 반드시 대가를 치러야 한다.
          ‘소’로 번역된 히브리어 ‘베헤마’는 들짐승인 ‘하야’와 반대되는 집에서 기르는 가축을 말한다.
          대체로 소로 번역되지만 양과 염소와 같은 더 작은 가축도 포함한다.
          구약 시대에 소는 최고의 가치를 지닌 가축이다.
          그렇기 때문에 제사장이나 족장들이 드릴 때는 소를 드린다.
          가축이 귀했던 시대에 소를 제물로 드린다는 것은 큰 희생의 의미를 지닌다.
          또한 사냥을 통해 공짜까지라고 할 수는 없으나 약간의 노력으로 드릴 수 있는 들짐승이 아니다.
          소는 가축을 기르는 사람들에게 가장 중요한 재산이자 가족과 같은 의미로도 사용된다.
          소는 자신이 드릴 수 있는 최고의 가치를 하나님께 다린다는 의미다.
          또한 흠이 없어야 한다는 조건은 일반 소가 아닌 최고의 소를 드려야 한다는 말이다.

          제사(예배)는 실용적 측면에서 가장 무의미한 일이다.
          그렇기 때문에 종종 하나님께 드려지는 제사는 사치스러운 것이다.
          예배드림은 자신의 이득을 위한 것이 아니다.
          전적으로 하나님께 헌신하는 상징적 행위이다.
          번제가 비록 사랑과 헌신을 목적으로 하지만 속죄가 전제되어 있다는 것은 분명하다.(4절)

          고든 웬함은 Milgrom의 말을 인용하여 ‘속죄제는 성막의 다양한 부분을 죄로 말미암아 일어난 부정에서 정결하게 하는 것과 관련 있지만 번제는 더 일반적인 의미에서 죄를 속죄하는 제사’라고 말한다.
          즉 번제는 부지중에 지었을 죄에 대한 제사인 것이다.(민 15:24, 욥 1:5)

          3 감사와 헌신

          김경열은 번제가 가치 있는 이유를 ‘가장 기본적인 감사와 헌신의 제사였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죄와 직접적으로 연결되지 않는다.
          자원하여 드리는 감사와 충성의 표시로서 드리는 제사인 것이다.
          그렇기에 종종 죄와 상관없이 하나님과의 관계를 위해 드리는 화목제와 동반되기도 한다.
          번제가 모든 제물을 불살라 드리는 전적 헌식의 의미를 담고 있다면, 화목제의 경우는 사람들을 초대함 함께 음식(제물)을 먹으며 기쁨을 나눈다.(출 18:9-10)

          4 흠 없는 수컷

          가장 중요한 의미는 하나님에 드려지는 제물은 ‘흠 없는 제물’이어야 한다는 점이다.
          수컷이 대표성을 상징한다면, 흠 없음은 제물의 가치를 의미하다.
          아무리 크고 멋있어 보여도 흠이 있다면 열납 되지 않는다.
          22장에서 자원제물이나 서원제물이 번제로 드려질 경우, 조금의 흠도 허락되지 않는다.
          즉 최고의 제물을 드려야 한다.
          제물에 흠이 없다는 말에는 몇 가지의 의미를 갖는다.
          후대로 넘어가면 제물을 돈으로 구입해 드리지만, 당시는 집에서 기른 가축이어야 했다.
          흠이 없기 위해서는 가축 중에서 아무거나 드리면 안 된다.
          자신이 좋은 것과 하나님께서 바라는 것은 다르다.
          흠 없는 제물을 드리기 위해서는 제물로 드릴 가축을 꼼꼼히 살펴야 한다.
          주의를 기울이지 않으면 겉으론 흠 없이 보이지만 실제로는 그러지 않을 수 있다.
          준비되지 않는 제사는 위험할 수 있다.

          번제를 드릴 때는 수컷을 드려야 한다.
          이 또한 다른 제사와 차이를 보인다.
          속죄제의 경우, 족장은 숫염소를 가지고 와야 하지만 일반 백성은 암염소를 드려도 된다.(레 4:22-31)
          새를 드리는 경우는 특별히 예외가 적용된다.
          새는 극빈자들을 위한 제물이며, ‘흠이 없어야 한다’는 조항이 붙지 않는다.

          존 E. 하틀리는 ‘가난한 자가 번제물을 구하는 데 있어서 선택의 폭을 더 넓혀 주었을 것’이다.

          매일 드려지는 제사

          레위기 존 E. 하틀리는 번제가 매일 드려지고, 절기 때마다 드려졌음을 상기킨다.
          대하 16:40에 의하면 다윗의 지시한 것이 율법에 나타난 대로인지 아니면 다윗이 정한 것인지 약간 모호하다.
          하지만 아침과 저녁에 번제를 드리는 행위는 그 이후 계속되었을 것이다.

          김경열은 번제를 다음과 같이 구분한다.

          a. 상번제

          상번제란 항상 드리는 번제를 의미한다. 매일 아침저녁으로 제사장이 일 년생 숫양을 드리곤 했는데(만 28:3-4) 아마 이스라엘 백성들도 아침에는 처소에서, 저녁에는 각자의 일터에서 마음으로나마 번제에 동참했을 것이다.

          b. 안식일과 절기

          상번제 외에 안식일에는 소제와 전제와 더불어 일년 생 숫양 두 마리를 함께 드렸다.(민 28:9) 절기마다 번제에 요구되는 짐승과 그 숫자가 달랐다.(민 28-29장 외)

          c. 기타

          경우에 따라 속죄제를 드릴 때 번제가 요구되기도 했다. 일례로 레위기 12장에서 산모가 아이를 낳으면 부정해졌는데 이때 그녀는 일정 기간의 자연 정화 과정을 거친 뒤 성전에서 속죄제와 더불어 번제를 마쳐야 했다.

          영적인 교훈

          번제의 의미를 정리하면 이렇다.
          번제는 직접적인 죄로 인한 것은 아니다.
          그렇지만 부지중에 지었을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대하 29:7-8)가 임하는 것을 막는 것이다.
          고든 웬함은 ‘사람의 죄에 대한 하나님의 불쾌감이 처벌로 이어지지 않도록 차단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악한 본성을 지닌 인간은 의도하지 않았지만 죄를 지을 수 있다.
          자신이 인지하든 하지 못하든 죄는 언제든지 타락한 인간의 심성 속에 존재한다.
          속죄제가 계명을 위반한 경우에 드리고, 속건제가 물질적 보상에 대한 것이다.
          그렇다면 번제는 무엇인가?
          번제는 인간의 근본적 죄성에 대한 하나님 앞에 드려지는 겸손의 마음이다.
          번제는 속죄의 의미를 전제하지 직접적이지 않다.
          즉 자신을 되돌아보며 혹시 모르고 지었을 부지중의 죄에 대해 하나님께 자신의 허물을 고백하는 것이다.

          고든 웬함은 더 나아가 번제가 ‘구원에 대한 감사제로, 자원제로, 또는 서원이 이루어질 때 서원제로 드려지는 것이 매우 적절’하다고 말한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제사는 감사로 드리는 제사이다.(시 50:23, 겔 46:2)
          고든 웬함은 안수를 기도와 연관지어 하나님과의 친밀함과 정성어린 예배로 확장시킨다.
          번제에서 제사자는 하나님에 대한 깊은 사랑과 헌신에 대한 결심을 갖는다.
          자신의 죄인됨을 부정하지 않고 하나님의 은혜가 자신의 삶을 인도할 것을 간구하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번제는 속죄의 의미는 전제하는 동시에 감사와 찬양의 제사이다.

          신약으로 나아가기

          신약에서 번제라는 단어는 오직 두 곳에서 사용된다.(막 12:33, 히 10:6-8)
          나머지 부분은 구약의 본문을 인용하거나 의역한 것이다.
          나머지는 함축적 의미에서 번제가 언급된다.
          마가는 예수님의 죽음을 ‘자기 목숨을 위한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함’이라고 강조한다(막 10:45).

          바울 역시 번제를 암시하는 말을 한다.

          그리스도께서 너희를 사랑하신 것 같이 너희도 사랑 가운데서 행하라 그는 우리를 위하여 자신을 버리사 향기로운 제물과 희생제물로 하나님께 드리셨느니라(에베소서 5:2)

          번제의 핵심은 자신의 죄성에 대한 깊은 숙고이다.
          번제가 죄에 대한 직접적인 연관이 아니지만 자신의 악한 본성으로 인해 지었을 수도 있는 죄를 겸손하게 인정하는 것이다.
          주님은 세족식을 거행하면서 목욕을 한 자는 발만 씻으면 된다고 하셨다.
          매일드리는 상번제는 매일의 회개와 같은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 앞에서 거룩하게 살기를 노력하는 것이며, 매일 주어지는 시간들에 대해 감사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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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수할지니(1:4)

          안수(按手)는 피차간 서로 언합하여 하나기 됨을 상징하는 행위로서 안수의 목적은 자신이 가진 그 무엇을 타인에게 전가(轉嫁)시키시 위한 것이다.
          따라서 제물에 안수하는 행위는 제물을 드리는 자가 안수를 통하여 그 제물과 하나됨을 나타내는 동시에 자신의 죄를 그 동물에게 전가시킨다는 것을 상징적으로 나타내는 행위인 것이다.
          따라서 제물 드리는 자는 자신이 직접 피를 흘리지 않고도 자신과 연합된, 안수받은 제물의 피흘림을 통해 자신의 죄를 속함 받을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때 제물 드리는 자는 자기 대신 처참히 죽어가는 제물의 모습을 통해 죄의 심각성과 속죄의 은총을 마음속 깊이 체험해야 했다.

          '안수할지니'에 해당하는 원어 '사마크 야도'는 '그가 자신의 손을(위에) 얹힐지니'란 의미인데 원어상 그 말 속에는 두가지 뜻이 내포되어 있다.

          첫째, 제물을 드리는 자가 '직접' 자신의 손을 제물 위에 놓아야 한다
          둘째, 제물 위에 손을 얹되 '힘껏 단단히 누르면서' 얹어야 된다(카일, Keil)
          특히 이 점에 대해 유대 랍비들의 말을 빌리면,
          제물을 드리는 자는 그의 양손을 희생 제물의 양 뿔 사이에 얹고 있는 힘을 다해 힘껏 눌러야 한다(Matthew Henry).

          안수(按手)

          안수는 다양한 희생들에서 발견되는 의례다.
          번제, 화목제(3:2, 8, 13), 속죄제(4:4,15, 24, 29, 33), 속건제에는 아무런 의식도 제시되어 있지 않을지라도, 이 안수 의례가 역시 그 희생 의식의 일부였던 것으로 추측될 수 있다.

          사람이 짐승의 머리에 한 손을 올렸는지 아니면 두 손을 올렸는지는 논쟁이 되고 있다.
          몇 군데에서 사람이 바치는 대상 위에 두 손을 모두 올린다고 명시적으로 진술된다(16:21; 참조. 민 27:23; 신 34:9).
          일반적인 용어인 야도("그의 손")는 짐승에게 한 손을 대는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받아들여진다.
          탈굼역(Tg)은 레위기 1-4장에 있는 야도를 "그의 오른손"으로 번역한다.
          그렇지만 미쉬나(Mishnah)는 두 손의 안수를 요구한다(m. Menah. 9.8).

          이 의례의 의미를 밝혀 보려고 그 동안 많은 의견들이 제안되었다.
          한 입장은 희생을 드리는 사람이 자신의 죄를 짐승에게 전가한다는 것이다(Noordtzij, 22-23).
          이것은 속죄일의 아사셀 염소의 경우에 해당되지만(16-21),
          그 의례의 의미를 다른 희생들에 적용하는 것에는 심각한 난관들이 있다.
          아사셀의 경우에는 대제사장이 한 손이 아닌 두 손으로 그 염소 위에 안수하며, 그 염소는 회중의 죄를 짊어진 채 더렵혀진다.
          로드리게즈(Rodriguez, Substitution, 217-19)와 키우치(Kiuchi, Purification Offerings, 115)는 이러한 주장에 이의를 제기하면서,
          10:17을 토대로 속죄제의 고기가 죄를 짊어지면서 동시에 가장 거룩한 것으로 분류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들의 입장은 속죄제의 고기는 제단에서 태우지 않지만, 제사장들이 먹거나 아니면 진 밖의 정결한 장소에서 태웠다(4:12).
          게다가 안수 의례는 죄의 대속에는 거의 관심이 없는 희생제인 화목제 의식의 일부다(3:2).

          노트(Noth. 22)는 사람이 자신의 인격을 그 짐승에게 전가한다고 생각한다.
          이 입장의 변형인 또 다른 견해는 이러한 몸짓으로 사람이 제물을 통해 얻는 영적인 힘이나 거룩을 스스로 요청하고 있다는 것이다(J. Pederson, Israel, 3-4; 366).
          그러나 여전히 이러한 두 가지 해석을 화목제에 적용하기는 어렵다.

          다른 이론은 바치는 자와 희생물 사이에 동일화가 형성된다고 주장한다(W. R. Smith. Religion of the Semites, 325: R. K. Yerkes. Sacrifices in Greek and Roman Religions and Early Judaism, 134).

          페터(R. Peter, VT 27[1972] 48-55)는 제물에 한 손을 얹는 것은 바치는 자가 그 짐승을 자신과 동일시하는 몸짓인 반면, 두 손을 올리는 행위(예를 들어, 레 16:21; 24:14)는 한 편에서 다른 편으로의 어떤 것의 전이를 의미한다고 주장한다
          - 이를테면, 한 사람이 갖는 특별한 신적 능력을 다른 사람에게 부여하는 행위(신 34:9; H. H. Rowley, Worship in Ancient Israel, 133; 참조. Hoffmann. 1:122).

          동일화의 범위는 이 견해를 주장하는 사람들 사이에 다양하다.
          로울리(Rowley)의 제안에 의하면, 바치는 자는 자신과 하나님 사이에 어떤 장벽이 있든지 짐승의 죽음이 그것을 제거하고, 또한 바치는 자가 이 의례로써 감사와 충성 속에 하나님께 자신을 양도하는 것을 상징하는 방식으로 자신을 짐승과 동일시한다(133). 게세(H. Gese, Essays on Biblical

          Theology, tr. K. Crim[Minneapolis: Ausgburg. 1981] 104-8)가 믿는 바는, 희생을 가져오는 당사자가 안수로 자신을 그 짐승과 동일시함으로써 그것이 자신을 대신해서 역할하게끔 한다는 것이다.
          거룩한 제단 위에 짐승의 생명을 앙도할 때, 역시 바치는 자의 생명이 그렇게 상정적으로 양도된다.
          야노브스키(B. Janowski. Siihne. 220-21)는 비슷한 해석을 한다.
          그의 말에 의하면, 짐승의 대체가 상징적으로 하나님께 대한 당사자의 생명의 양도를 나타낸다는 점에서 바치는 자는 안수를 통해 그 짐승의 죽음에 동참한다.

          속죄일에 아사셀을 위한 염소에게 죄들을 전가하는 의례와 대조적으로, 이 의례는 주체적인(subjective) 전가를 표현한다(아사셀 염소는 불특정 다수의 죄와 관련되지만, 번제의 안수는 개인이 주체가 되어 직접적인 전가가 된다는 의미).
          즉 짐승의 네페쉬("생명력")가 바치는 자의 네페쉬를 대신한다(참조. 레 17:11).

          키우치(Purification Offering, 116-19)는 마찬가지로 그 의례가 대체를 상징하는 것으로 해석한다.
          그는 이 견해의 근거를 "열납"이라는 '라촌'의 의미에 두었지만(참조. 7:18),
          본문은 대체의 성격에 대해 어떤 분명한 증거도 제공하지 않는다는 것을 지적한다.
          이 의례가 화목제에서 사용된다 할지라도(3:2), 이러한 입장들은 속죄제에 적합할 수 있다(4:1-5:13).
          그러나 그 제물이 어떤 방식으로 대체하는 제물로 간주되었는지 아무것도 암시되어 있지 않다(de Vaux, AI. 416, 448-49: Bertholet. 2-3). 대체의 개념이 원래의 안수 행위 배후에 있었는지의 여부는 구약 본문들로부터 결정짓기가 불가능하다.

          3장과 4장에 있는 규정들에서 안수 행위가 짐승의 도살 뒤에 따르는데, 렌토르프(Rendtorff, 35-40)는 번제 규정 단락(1:3-17)의 4절에서 뒤따르는 단어들이 "그리하면 열납되어 그를 위하여 속죄가 될 것이라"는 사실을 주목한다.
          그는 이 절이 안수 의례에 대한 설명이라고 해석한다.
          즉 이 의례는 희생이 짐승을 바치는 개인에게 영적인 효과를 발휘하도록 하는 데 필수적이다.
          바꾸어 말하면, 안수는 희생의 혜택이 바치는 자에게 발휘되는 것을 보증한다. 나아가 유대 전승이 강조하는 대로(참조. b. Menah. 93b), 이 의례는 대리자가 다른 사람을 위해 제물을 드리지 못하게 만든다.

          바치는 자는 번제물의 머리에 안수하면서 연약한 한 인간으로서 자신의 무가치함과 죄성을 고백하고 또한 기도를 읊거나 시편을 인용함으로써 하나님께 대한 믿음을 진술한다.

          그런 경우들을 위한 가능한 시편들로서 남아 있는 것들은 시편 40, 51 그리고 66편이다.
          또한 제사장은 시편 30편이나 50편과 같은 어떤 시편을 사용하여 응답해 주었을지도 모른다(Wenham, 53).
          죄의 대가가 죽음이기 때문에 바치는 자는 분명하게 짐승의 죽음이 필요하다는 것을 인식한다. - WBC레위기 주석에서 발췌



          번제에 대한 해설

          번제는 중앙 성소에서 가장 정기적으로 바치는 제사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규정은 개인적인 번제에 초점을 맞추었다.
          가장 큰 관심은 그 희생이 하나님께서 그것을 받으시는 방식으로 드려진다는 것이었다.
          따라서 예배자는 성소 입구에서 흠 없는 수컷을 바쳐야 하고 이어서 지정된 의식을 신중하게 따라야 했다.
          열납되는 희생은 여호와께서 바치는 자의 죄의 성향을 위한 대속으로 그 짐승을 받으신다는 것을 의미했다.
          당사자는 자신의 제물을 통해 속죄되면서 확신을 가지고 거룩하신 하나님의 존전에 나아갔을 것이다.
          그는 그 외의 다른 제물들을 자유롭게 드릴 수 있었다.

          보통 번제를 드린 후에 사람들은 화목제를 바쳤는데(3장), 그것은 자신의 가족이나 혈족을 위한 축제 음식으로 쓰여졌다.

          번제 드리기가 여호와의 개인적 예배의 중대한 부분이었기 때문에, 너무 가난해서 소나 앙/염소를 바칠 수 없는 사람들을 위한 약관이 만들어졌다.
          그런 사람은 비둘기나 산비둘기를 바칠 수 있었다.
          이러한 새들은 매우 흔한 것이어서 쉽게 구할 수 있었을 것이다.
          새의 작은 크기를 감안해 볼 때 의식 절차는 눈에 띄게 달랐으나 효력은 동일했다.

          번제를 드리는 가운데 이스라엘 사람들은 자신의 완전한 죄성과 하나님의 전적인 생명에 대한 주권을 인정했다.
          왜냐하면 번제는 전체를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제사장이나 바치는 자에게는 어떤 것도 돌아가지 않았다.
          그것은 목자나 농부의 기본 재산에서 취한 값비싼 예물이었다.
          이 제물을 가져와 바치는 자는 여호와께서 일용할 양식을 채워 주실 것을 신뢰하면서 믿음으로 행동했다.

          이 제물을 통하여 하나님은 당사자에게 인간의 일반적인 죄성에 대하여 용서를 부여했다.
          그런 용서는 주기적으로 필요했다.
          타락한 인간은 세상에서 하나님의 저주 아래 살기 때문에 하나님의 모든 율법을 다 지키지 못하면서 매일 죄를 짓는다.
          온갖 인간관계 속에서 존재하는 갈등들은 인간의 기본적 죄성에 대한 증거가 된다.
          모든 사람이 이 죄성에 굴복하기 때문에, 인간은 하나님과의 교제를 유지하기 위해 정기적으로 자신의 죄성을 대속해야 한다.
          고대의 이스라엘 사람이 얼마나 자주 그런 제물을 바쳤을까?
          아마 각 사람의 죄에 대한 자각과 여호와를 향한 열심의 정도에 따라 몹시 다양했을 것이다.
          최소한의 기준은 아마도 절기에 바치는 연례적인 희생이었을 것이다.
           
          번제에 대한 이해는 신약의 많은 구절들을 조명해 준다.
          그리스도의 희생적 죽음에 대한 신약의 언어 중 많은 것들이 일반적인 것이기에 구약의 제의 법안의 특정한 희생들과 관련짓기가 어렵지만, 그리스도의 죽음은 번제에 비견될 수 있다.
          이 제사에 요구된 짐승과 마찬가지로 그분은 흠 없는 남성이었다(벧전 1:18-19).
          그분은 하나님께 완전한 복종의 삶을 살면서 결점이 없으셨다.
          이러한 이유로 그분의 희생은 옛 언약 하에서 바친 그 어떤 제물보다 훨씬 뛰어난 것이었다(히 9:23-26).
          십자가의 제단 위에서 예수께서는 자신을 성부 하나님께 완전히 드리셨다(롬 8:32).
          번제와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의 죽음은 하나님께 "향기로운 냄새"였다(엡 5:2).
          빈번하게 드린 번제와는 달리, 그리스도께서는 단번에 영원한 제사로 자신을 드리셨다(히 10:12).
          그리스도의 최종적인 죽음은 하나님께 대한 신실한 예배의 일부인 짐승 제사를 종결시켰다. 
           
          그리스도의 죽음으로 인해 믿는 자는 더 이상 매일 번제가 드려지는 손으로 만든 성소에서 예배를 드리지 않아도 된다(히 7:27).
          오히려 예수께서는 하늘의 지성소로 자신의 피를 가져가심으로써 자신을 따르는 자들을 위한 영원한 구원을 보증해 주셨다(히 9:11-14). 그렇지만 믿는 자는 구약의 성도들과 마찬가지로 여전히 매일의 속죄를 필요로 한다.
          그리스도의 죽음만으로 충분하다.
          요한이 쓴 대로 "그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계속적으로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한다"(요일 1:7).
           
          신약의 신자가 더 이상 성소에 짐승을 가져오지 않을지라도,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는 여호와의 예배가 그러했던 것처럼 완전한 헌신을 요구한다.

          구약의 신자는 자신의 가축 떼에서 가져온 희생을 드림으로써 자신의 헌신과 믿음을 표현했다.
          자신이 제사장인 신약의 신자는 마찬가지로 하나님께 대한 자신의 사랑과 신뢰를 자발적으로 표현했다.
          짐승을 대신해서 그는 영적인 희생을 드렸다(벧전 2:5).

          히브리서 13:15-16에 따르면, 믿는 자는 찬양의 희생제와 선행의 제사, 그리고 자신의 소유를 이웃에게 베푸는 나눔의 제사를 드린다.
          사람이 이러한 전심으로 희생들을 드릴 때, 그의 제물은 하나님께 받아들여질 수 있다.
          하나님께서 제물을 받으실지에 대한 관심은 신구약 모두에서 공통적이다.
           
          바울은 신자들을 위해 희생의 은유를 확대시킨다.
          그는 신자들에게 자신의 몸을 살아 있는 희생(개역 성경: 산 제사)으로 드리라고 말한다(롬 12:1, 2).
          그가 염두에 두고 있는 제사는 번제다.
          왜냐하면 번제물 전체가 제단에서 완전히 태워지는 것처럼, 신자는 자신을 전적으로 드려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짐승이 흠이 없어야 하는 것처럼 신자도 역시 거룩해야 한다.
          이러한 개인적인 제물이 효력을 갖기 위해 번제와 마찬가지로 그 제물이 하나님께 받아들여질 만한 것이어야 한다.
          신자의 삶은 살아 있는 번제로서 계속적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야 한다.
          - WBC 레위기 주석에서 발췌



          번제의 영적의미(레 1:1-17)

          레위기 1장의 내용은 번제에 관한 것입니다. 번제의 핵심은 하나님을 향한 온전한 헌신과 감사에 있습니다. 번제는 제물을 모두 태워 향기로운 냄새가 하늘로 올라가게 하는 제사방식입니다. 
          제물은 예배자의 생활형편에 따라 수소, 숫염소, 숫양, 산비둘기 또는 집비둘기 가운데서 드릴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반드시 흠이 없어야 했고, 1년 된 수컷이어야 했습니다.
          제사방법은 예배자가 제물이 될 짐승을 끌고 성막문 하나님 앞으로 끌고 갑니다. 속죄를 위해서 예배자가 제물의 머리에 손을 얹고 안수를 합니다. 예배자의 죄를 제물에게 전가시키는 것입니다. 죄를 뒤집어 쓴 제물이 예배자를 대신해서 죽는 것입니다. ‘죄의 삯은 사망이다’는 교훈을 담고 있는 것입니다. 예배자가 제물을 잡아 그 피를 제사장에게 주면, 제사장은 그 피를 번제단 사면에 뿌립니다. 예배자는 제물의 가죽을 벗기고 각을 뜹니다. 제사장은 그 뜬 각과 머리와 기름과 물로 씻은 내장과 정강이를 단 위에서 불로 태웁니다. 양과 염소도 동일한 방법으로 시행합니다. 단 비둘기의 경우에는 제사장이 직접 새의 머리를 비틀어 끊고 몸은 쪼개어 단 위에 불사르며 피는 단 곁에 흘리고 멱통과 창자 등은 재 버리는 곳에 버립니다.
          번제는 가죽을 제외한 모든 것을 불로 태웁니다. 불로 태우기 때문에 번제를 화제라고 부릅니다. 번제는 가죽을 제외한 모든 것이 하나님의 몫이 되고, 제사장은 가죽을 취하지만, 예배자의 몫은 없습니다. 번제의 영적인 의미는 그리스도께서 생명 전체를 바쳤다는 것이고, 성도들의 온전한 헌신을 의미합니다. 불로 태우는 화제의 경우, 번제만 해당되는 것은 아닙니다. 소제, 화목제, 속죄제, 속건죄 모두에 해당이 됩니다.
          이제 번제가 갖는 영적의미에 대해서 살펴보겠습니다.
          첫째, 번제에 쓰인 제물들은 제각각 상징적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먼저 어린 숫양은 순전함을 나타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파송하시면서 “보라 내가 너희를 보냄이 양을 이리 가운데 보냄과 같도다”(마 10:16)고 하셨습니다. 또 온순한 양은 부드러운 마음씨를 상징하며, 형제사랑을 나타내기도 합니다. 마태복음 25장에서 예수님은 양과 염소의 비유에서 굶주리고 헐벗은 자들, 병들고 옥에 갇힌 자들, 나그네 된 자들을 돌보고 구해준 선한 사람들을 양의 무리로 분류하셨습니다. 요한복음에서는 예수님을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라고 했고, 계시록에서도 예수님을 어린양으로 묘사했습니다. 수소는 어질고 착한 마음씨를 상징합니다. 소는 밭을 갈거나 짐을 나르는 일에 쓰이지만, 불평이나 잔소리 없이 주인의 일을 묵묵히 수행합니다. 하나님의 구속사역을 이루기 위해서 무거운 십자가를 지시고 묵묵히 골고다 언덕에 오르신 예수님을 상징합니다. 염소는 험한 바위산이나 높은 곳을 좋아합니다. 저 높은 곳을 향하여 험한 곳도 마다않고 달려 나가는 참 신앙인을 상징합니다. 비둘기는 평화를 상징할 뿐 아니라, 오랫동안 메시지 전달자로 활동해 왔습니다. 평강의 왕으로서 하나님의 뜻을 전달하기 위해서 오신 예수님을 상징하는 새입니다.
          둘째, 번제는 온전한 헌신을 의미합니다. 성도들은 하나님 앞에서 흠이 없는 산 제물이 되어야 합니다. 어린 새끼들처럼 마음과 생각이 순전하고 깨끗하고 순수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런 깨끗한 마음을 받으십니다. 무엇보다도 우리 자신을 산 제물로 온전히 하나님께 드려야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께서 받으시고 복을 주십니다. 바울은 로마서 12장 1절에서,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권하기를,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고 하셨습니다.
          셋째, 번제는 영적 예배의 그림자입니다. 번제의 핵심사상은 온전한 헌신입니다. 온전한 예배를 상징합니다. 예수님께서 사마리아 여인에게 말씀하시기를, “아버지께 참으로 예배하는 자들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아버지께서는 이렇게 자기에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니라.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지니라”(요 4:23-24)고 하셨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신령과 진정으로 드리는 참 예배의 그림자가 번제인 것입니다.
          그러면 여기서 말하는 온전한 헌신, 곧 신령과 진정으로 드리는 영적 예배란 무엇을 말할까요? 출애굽기와 레위기에서 분명하게 알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이 지시하시고 보여주신 그대로의 예배를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순종의 예배를 기뻐하십니다. 사도들이 우리에게 보여준 예배는 예수님의 생애를 재현하는 것이었습니다. 기독교는 전통적으로 사도들의 가르침을 정통신학으로 여겨왔습니다. 따라서 사도들의 가르침대로 하지 않는 예배는 온전한 예배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의 생애는 갈릴리에서의 말씀의 사역과 예루살렘에서의 다락방사역으로 나뉩니다. 기독교는 교회가 처음 세워진 때부터 제1부 말씀예배와 제2부 성만찬예배를 온전한 예배로 드려왔습니다. 그러나 개신교에서는 말씀과 기도와 찬양예배를 신령과 진정으로 드리는 예배로 생각하면서 예배에서 주의 만찬을 제외시켜왔습니다. 가톨릭 미사가 갖는 미신적인 요소들 때문이었습니다. 초기 개혁가들이었던 루터나 칼뱅 등은 가톨릭 미사의 미신적인 요소만을 제거한 채 매주일 예배 때마다 주의 만찬을 시행하고자 했으나 칼뱅의 선임자이자 군인이었던 츠빙글리가 주의 만찬을 일 년에 4차례로 제한시켜버린 것이 그만 굳어져서 바로 잡을 기회를 놓치게 되었고, 오늘날까지 그 잘못된 전통이 그대로 시행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주의 만찬이 빠진 예배는 기도회이지 온전한 예배라 말할 수 없는 불완전한 예배인 것입니다. 1960년대부터 수많은 신학자들이 이 점을 지적하고 있고 바로 잡으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만, 너무 오랫동안 굳어져 있고 오해도 있는 터라 쉽게 고쳐지지 않고 있습니다.
          하나님께 드리는 온전한 예배는 하나님의 뜻대로 드리는 예배란 사실이고, 하나님의 뜻은 성서에 기록되어 있으며, 기독교 예배는 신약성서에 기록되어 있기 때문에 신약성서교회예배가 바르게 회복되어야 합니다. 우리 성도님들이 그 점을 깊이 인식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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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레위기 : 오경의 세 번째 책

          레위기는 히브리성서에서 첫 글자를 따서 바이크라[외치다] 라는 명칭으로 나타난다.
          반면에 헬라어-라틴어성서에서는 제사장들을 위한 책으로 분류하여 헬라어 성서에서 류에이티콘[leueitikon]과 라틴어 성서에서 레비티콘[levitikon]으로 불리웠으며, 결국에 헬라어-라틴어성서에 따라서 ‘레위기’로서 불린다.

           전체 구조



          레위기는 처음부터 이 책이 시내산에서 하나님이 모세에게 주신 출애굽 율법의 연속선상에 있음을 제시한다. 레위기 1장 1절과 7장 38절 그리고 27장 3절을 보면, 계시의 장소로서 시내산이 등장한다. 즉, 레위기 1장 1절은 모세가 하나님으로부터 율법을 부여받은 장소와 시기를 출애굽의 연장선상으로 제시하며, 또한 하나님의 현현 → 율법 수여 → 제의에 필요한 제도와 기구 제작(이상 출애굽)과 더불어, 후속으로 제의의 이론과 실행을 제시하는 레위기의 시작을 알린다.

          레위기 본론에 해당하는 레위기 1-25장은 간단한 구조를 가지고 있다.
          먼저 소위 욤 키푸르(Yom Kippur)라고 하는 속죄일이 나타나는 레위기 16장을 기준으로 정확하게 두 개의 주제가 나누어진다.

          전반부(레 1-15장)는 인간으로 하여금 하나님 앞에 죄를 어떻게 제거하고 나아갈 수 있는가를 제시하는 제사법과 제사의 실행(레 1-7장)과 하나님과의 교제를 거룩하게 유지하기 위하여 무엇을 알아야 하는지 설명하는 소위 정결법(레 11-15장)이 제시된다.
          이 전반부(레 1-15 장)는 주제가 두 개인 것 같지만, 정확하게 보면 인간이 하나님에게 나아가지 못하게 하는 것을 제거한다는 측면에서 하나의 주제로 생각할 수 있다.
          또한 속죄일(레 16장)을 지나 소위 ‘성결법전’(Holiness Code)으로 불리우는 법전이 레위기(레 17-27장) 차지한다.

          레위기의 주제를 힘있게 이끄는 것은 세 가지 큰 단락 속에 섞여서 있는 이야기체들이다. 3개로 이루어진 이야기 형식들은(레 8-10 장; 16장; 24:10-23) 주제와 주제를 힘있게 연결하고, 전개된 주제를 끝내면서 전환점으로서 새로운 주제를 이끈다.25) 첫 번째 이야기 형식은 제의의 이론과 실행(레 1-7장)을 마감하는 이야기 형식으로 제사장의 위임과 역할에 대한 레위기 8-10장이다. 제사를 드리기 원하는 자와 주재하는 자가 레위기 8-10장을 통해 연결된다. 또한 제사장은 그 뒤에 나타나는 정결법(레11-16장)에서 정한 것과 부정한 것을 판별하는 주체가 된다. 이 이야기에서는 제사를 진행하게 하는 주체와 정결을 판단하게 하는 주체, 즉 제사장이 전반부를 이끌어 나간다.

          두 번째 이야기 형식은 레위기 16장으로서 대속죄일(Day of Atonement)이라고 한다. 선택된 백성이 거룩한 길로 가기 위하여 지난 죄를 회개하고 정리하는 과정을 제시한다.

          세 번째 이야기 형식은 세 가지 이야기체 중 가장 짧은 구절로서 레위기 24장 10-23절에 나타난다. 이 이야기는 신성모독(10-16절)과 사법적 결과들(17-23절)을 제시한다. 여기에서 신성모독이 인간이 행하는 범죄들 중에 가장 극단적인 제시하며, 마지막 결론을 유도하는(레 26장) 법전을 강조할 수 있게 한다.

          레위기의 결론은 레위기 26장에서 볼 수 있다. 레위기 26장은 축복(레 26:3-13)과 저주(레 26:14-46)으로 나누어지며, 율법의 순종과 불순종에 따른 결과를 제시한다. 율법에 대한 순종은 추수를 위한 충분한 비(레 26:4), 점령한 땅에서의 평화(레 26:6), 마지막으로 가장 중요한 하나님이 함께하심(레26:11-12)이다. 반면에 율법에 대한 불순종은 병과 슬픔(레 26:16), 전쟁과 기근, 역병(레 26:23-29)들이다. 레위기 전체뿐만 아니라, 율법서의 결론을 이끈다.

          결론 부분의 마지막 레위기 27장은 종교적 서원으로 나타나는 부록이다. 처음 부분은 자발적인 서약을 다루는 인간(2-8절)과 짐승, 물질(9-13절)과 헌정된 물건(14-2절)에 대하여 다루며, 그 헌정된 것에 대한 제약 규정이 뒤따른다(26-33절). 마지막 서원의 종착역은 십일조 (레 27:30-34)에 해당한다.


          2.3.1. 제사법(레 1-7장)

          레위기 1-7장은 제사에 대한 율법을 다루고 있는 장들이다. 여기 나오는 제사들은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를 긍정적으로 만드는 행위이다. 특히 인간이 거룩한 존재(하나님)와 소통할 수 있는 방법의 시도이다. 이스라엘은 제물과 제물을 드리는 자와 제사장이 중심이 되어 거룩한 존재와의 만남을 시도하였다. 다음에 제시되는 5개의 제 사법은 이스라엘 제의의 가장 기초적인 제사 방법이다.



          번제(레 1장) :

          히브리어 명칭은 올라(레 1장; 6:8-13)이며, ‘올라가는 것’이라는 의미이다.
          번제는 가죽과 부정한 부위(예, 새의 모이 주머니 등)를 제거하고 동물 전체 부위를 화제(불에 태우는 행위)로 드린다.
          원역사의 이른 시기부터(창 4:4; 8:20; 15장: 아브라함) 드려진 제사이다.
          이 제사가 속죄의 기능을 가졌다는 것은 아마도 희생제물 머리에 손을 얹는 행위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에게는 선물로서 작용한다.
          레위기 6장 8-13절에 또 한 번 나오는 번제는 제사장의 책임이 적혀 있다.
          제사장은 제물을 밤새도록 타게 해야 하며, 아침에 옷을 갈아입고 단 옆에 있는 재를 치우는 역할을 했다.

          소제(레 2장) :

          히브리어 명칭은 민하(레 2장; 6:14-18)이다.
          이 단어의 원래 의미는 ‘선물’이다.
          즉, 권력자에게 호의를 불러일으킬 목적으로 주는 예물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레위기 2장에서 사용하는 공식 명칭은 ‘소제’ 또는 ‘음식제’이다.
          소제물은 곡식 가루로 드리는 제사이다.
          번제가 가축을 드리는 제사라면, 소제는 밭에서 추수한 곡식을 드리는 제사이다.
          동물보다는 저렴한 가격의 곡식으로 드려진다는 점에서 가난한 자들이 드리는 것이다.
          레위기 6장 14-18절에서 제사장들은 한 움큼의 소제물을 단위에 향과 함께 태워야 했다.
          나머지는 누룩을 넣지 않고 아론과 그의 자손들이 먹을 수 있었다.

          화목제(레 3장) :

          이 제사는 히브리어 단어 샬롬(평강)에서 나온 단어와 희생 제물을 뜻하는 제바흐를 합성해서 사용하는 용어이다.
          두 단어에서 보듯이 이 제사의 특징은 내부적 평안보다는, 다른 사람에게 평안을 비는 용어로 사용된다.(창 29:6; 삼하 18:30 등)

          이 제사는 짐승의 기름기 일부만 제단에서 태워 하나님께 드리며, 나머지는 제사를 드리는 사람들과 주위에 있는 자들이 나눠 먹는다.
          나눔의 교제는 화해와 화목을 전제로 한다.
          후반부 제사장 규정(레 7:11-16)에서 화목제물은 감사의 표현으로 무교병과 무교전병으로 드리며(레 7:12), 서원이나 자원하는 맹세(레 7:16)로도 드려진다.
          제사장의 몫으로는 가슴과 오른쪽 뒷다리이며, 아론과 그 아들들에게 속한 것이다.(레 7:28-34)

          속죄제와 속건제(레 4:1-6:7) :

          이 단락은 두개의 비슷한 제사 종류로서 속죄제(레 4:1-5:13)속건제(레 5:14-6:7)로 나눠진다.
          속죄제와 속건제는 위에서 제기한 3개의 제사-번제, 소제와 화목제– 와는 다른 차이를 제시한다.
          물론 5개의 모든 제사가 개인의 속죄에 관여되기는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앞의 3개의 제사(번제, 소제 그리고 화목제)는 인간이 지은 직접적인 죄와 관련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스스로 드리는 감사와 찬양의 성격을 가진다.
          반면에 속죄제와 속건제는 부지 중에 ‘야훼의 계명을 어긴 경우’(레 4:2)에 해당한다.
          위의 세 가지 제사가 자발적인 행위라고 한다면, 속죄제와 속건제는 부지중에 죄를 범한 경우에 드리는 제사이다.

          위의 개념설명에서 보듯이, 속죄제는 히브리어에서 죄에 대하여 말하는 하타[죄를 짓다]라는 동사에서 나온 명사로서 핫타아[일반적인 죄(창 31:36); 죄를 깨끗하게 하는 매개물(속죄물: 민 19:9); 속죄제(레 6:18, 23; 겔 40:39; 42:13; 45:19; 스 8:35; 6:17비교, 느 10:34)라고 한다.
          단어가 지적하듯이 죄와 관련되어 있으며, 죄의 영향을 다루고 있다.
          즉, 하나님과 인간에게 죄를 지은 후에 잘못되었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 드리는 제사이다.
          이것을 부지중에 지은 죄(레 5:1- 6)라고 한다.
          속죄제는 죄를 지은 사람의 지위에 따라 제물이 달라지기도 한다.

          속건제는 히브리어 단어 아샴[~va:죄, 범죄(민 5:7,8); 값, 대속물, 속건제물(삼상 6:3, 4, 8, 17; 사53:10); 속건제(레 5:15, 18, 19, 25; 6:10; 7:1, 2, 5 ,7 등등)]이라고 하며, 이 역시 ‘보상함으로 죄값을 치르다’라는 동사에서 나온 단어이다. 그래서 이 단어는 단순한 범죄의 속죄보다는 속죄와 배상의 의미를 같이 가지고 있다. 그 죄과를 치르기 위하여 제사장에게 1/5을 추가로 배상 지급해야 한다.(레 5:16)

          * 5개 제사의 차이점

          첫째, 번제, 소제와 화목제는 “여호와께 향기로운 냄새”(번제: 레 1:9, 13, 17; 소제: 레 2:2, 9; 6:15, 21; 화목제: 레 3:5, 16)가 주제인 반면에, 속죄제와 속건제는 “속죄와 사함을 받으라”(속죄제: 레 4:20, 26, 31, 35)는 주제이다.

          둘째, 번제, 소제와 화목제는 제사를 드려야 하는 시기와 죄의 종류에 대하여 언급이 없다.
          왜냐하면 ‘자발적’이기 때문이다.
          반면에 속죄제와 속건제는 자발적이기 보다는 제사를 드려야만 하는 조건적인 경우이며 또한 속죄와 보상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

          셋째, 이 제사들은 전부 ‘피의 사용법’을 제시한다.
          그러나 번제, 소제와 화목제는 피를 성막 바깥으로 가져가서 뿌려진다.(레 1:5, 11, 15; 4:25 등)
          그러나 속죄제와 속건제는 피를 성막 안으로 가지고 들어가서 성소와 지성소 앞 분향단의 뿔 등에 뿌린다.

          전체적으로 보면 레위기 1-7장에서 이러한 제사의 종류를 제시하는 방법이 동일하게 두 부분으로 나뉘어 있는(레 1:1-6:7.  레 6:8- 7:38)것 같지만, 명백하게 앞의 제사(레 1:1-6:7)는 제물을 바치는 사람을 중요시하며, 평신도를 염두에 둔다.
          그리고 뒤에 제사(레 6:8-7:38)는 제사장의 책임을 강조한다.
          이것은 야훼에게 드리는 제사가 평신도와 제사장이 함께 했을 때 진실한 영향력을 발휘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2.3.2. 제사장 법(레 8-10장)

          출애굽기에서 성막이 만들어지고(출 25-40장), 레위기에서 제사의 종류와 규정(레 1-7장)이 주어진다. 그리고 레위기에 속한 3개 이야기 형식 중에 하나인 레위기 8-10장은 하나님 예배를 집전할 제사장들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다. 이것은 앞의 제의에 관계되는 여러가지 경우를 판별하게 하는 결정적인 주제와 예배를 인도할 힘을 가진다는 것을 통하여 레위기 1-7장을 마무리 하고 있다. 그리고 또한 이 이야기의 목적은 이미 출애굽기 29장 43-46절에 기록되어 있다.


          43 “내가 거기서 이스라엘 자손을 만나리니 내 영광으로 말미암아 회막이 거룩하게 될지라.
          44 내가 그 회막과 제단을 거룩하게 하며 아론과 그의 아들들도 거룩하게 하여 내게 제사장 직분을 행하게 하며,
          45 내가 이스라엘 자손 중에 거하여 그들의 하나님이 되리니
          46 그들은 내가 그들의 하나님 여호와로서 그들 중에 거하려고 그들을 이집트 땅에서 인도하여 낸 줄을 알리라 나는 그들의 하나님 여호와니라.”(출 29:43-46)



          전체적으로 이 이야기를 끌고가는 것은 “하나님이 명하신 대로 그대로 행했다”(레 8:4, 5, 9, 13, 17, 21, 29, 34 ,36; 9:6, 7, 10, 21; 10:7, 13, 15)라 는 말이다. 이것은 야훼의 지침에 대한 절대적 순종을 의미하며, 그 순종은 제사장과 그의 가족들, 결국에는 이스라엘 모든 백성들이 따라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레위기 8-10장은 세 부분으로 나누어지는데, 제사장의 위임식(레 8장)과 제사장의 직분을 올바르게 수행하는 방법(레 9장), 마지막으로 제사장 직무 수행에 있어서 금기사항(레 10장)을 제시한다. 제사장의 기원을 주제로 하는 레위기 8장은 아직 제사장으로 임명되지 않은 아론과 그의 아들들이 주인공이 되며, 이 임명 절차로 그들은 전적으로 제사장 가문으로서 이스라엘의 모든 제 사를 집전하게 된다. 레위기 8장의 구조는 위임식 준비(1-4절), 위임식의 거행(5-32절) 그리고 추가규정(33-36절)으로 구성되어있다. 특히 위임식 준비에서 모세가 온 회중(에다)이라고 말하는 단어는 중요한 사건에 대한 집단 증인으로서 작용한다. 비록 능동적으로 제사를 집행하지는 않지만, 그들이 그 사건에 있다는 것 자체로 그 사건을 정당화한다. 즉, 온 회중을 모았다는 것은 모든 이스라엘 민족이 이 위임식의 증인이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 다음 위임식 거행에서 아론의 착복식(5-9절), 제사장에게 기름 부음 (10-13절), 제사장이 드리는 제사(속죄제: 14-17절; 번제: 18-21절), 위임에 대한 화목제사(22-30절)의 순서로 이어진다. 레위기 8장은 출애굽기 29장과 닮은 꼴을 형성한다. 즉, 출애굽기 29장이 실행 규칙을 제정한 것이라면, 레위기 8장은 실제로 거행된 것을 보고하고 있다.

          레위기 9장은 이레동안 위임식을 거행한 다음, 이제 정식적으로 완전하게 승인된 대제사장을 중심으로 제사를 드린다. 그렇다고 해서 모세의 역할이 줄어든 것은 아니다. 레위기 8장에서 이레동안 위임식을 행한 시기(레 8:33)와 칠 주야를 기다린 행위(레 8:35)를 통하여 모세가 이 제사의 주재자 임을 알 수 있다. 또한 레위기 9장에서도 대 제사장 아론의 직무가 시작되기 전에 첫 번째 공식적인 제사 지침을 모세가 명령(레 9:1-7)한다. 그 명령 후에 아론이 공식적인 첫 제사를 시작한다. 아직까지는 증인으로서 ‘온 회중’을 모으지 않는다. 공식적으로 준비는 아론, 그의 아들들 그리고 이스라엘 장로들이다.(레 9:1) 그리고 난 후 모세는 ‘온 회중’을 모은다.(레 9:5) 그리고 야훼의 영광이 나타날 것을 기대하며, 모세는 아론에게 제사의 시작을 명령한다.(레 9:6-7)

          아론의 제사는 자신을 위한 제사로 시작한다. 첫 번째, 아론 자신을 위한 속죄제(레 9:8-11)와 번제(레 9:12-14)를 드린다. 대 제사장이라 할지라도 하나님 앞에 나아가기 위하여 자신부터 정결해야 한다. 그 다음 단락은 온 이스라엘 백성을 위한 속죄제, 번제, 화목제 그리 고 소제를 드린다(레 9:15-21). 그리고 아론의 축도(레 9:22-23)와 야훼의 영광(레 9:24)이 나타나며 9장이 끝난다. 9장의 진정한 목적은 제사를 통한 “야훼의 영광”이 회막에 나타났으며(레 9:23), 그리고 그 영광을 이스라엘이 경험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들이 경험한 것을 이스라 엘은 두 가지로 표현한다: 소리지르며[룬] 그리고 엎드렸다[나팔]. 여기에서 ‘룬’은 기쁨을 가지고 소리 지르는 것을 의미한다. 또한 여기에서 ‘엎드리다’라는 표현은 문맥상 불이 내려와 번제물을 태우는 것을 보고, 두려움 속에서 엎드린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상황은 두려움만을 표현했다기보다는 존경을 포함한 경외를 의미한다. 백성들은 제사를 통하여 야훼의 임재를 경험하고 기쁨의 환 성 속에서 야훼 경외를 경험한다. 이것은 오늘날 성도들이 예배를 통한 야훼 임재를 경험하는 것과 다를 바가 없다.

          레위기 10장에서 야훼께서 명하지 않은 불을 분향함으로 올바른 예배가 손상되었다.
          그리고 하나님의 불을 통한 심판이 나타난다.(레 10:1-3)
          미사엘과 엘사반과 아론이 모세의 명을 순종함으로 손상된 예배가 회복된다.(4-7절)
          이어서 모세가 아닌 야훼께서 처음으로 아론의 대 제사장직을 확인하는 명령이 나타난다.(8-11절) 거룩하고 속된 것을 분별하라는 명령은 자연스럽게 레위기 11-15장으로 연결하게 하는 작용을 한다. 마지막으로 모세 지시와 아론 사람들의 지시 불이행에 대한 논쟁과 모세의 수용으로 이어지는 레위기 10:12-20은 먼저 모세가 소제에 관하여 명령(12-15절), 엘르아살과 이다말의 지시 불이행(16절), 모세의 책망(17-18절) 그리고 아론의 중재(19 절) 마지막으로 모세의 수락(20절)으로 끝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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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월 26일(수)
          유월절 : 페사흐

          초막절(레위기 23:33-44) 수코트(Succoth)

          레위기 23:34

          이스라엘 자손에게 고하여 이르라 칠월 십오일은 초막절이니 여호와를 위하여 칠일 동안 지킬 것이라.

          7월 1일  나팔절(23:24)
          7월 10일 속죄일(23:27)
          7월 15일 초막절(23:34)


          7대 절기

          1. 유월절(Passover) 페사흐(Pesach
          2. 무교절(Unleavened Bread) 마초트(Matsot) / 무교병(Matzo) 맛초, 무교절(맛차)
          3. 초실절(First Fruits) 바쿠림(Bakurim)
          4. 오순절(Feast of Week) 샤브옷(Shavuot)
          5. 나팔절(Trumpet) 로쉬 하사나(
          Rosh Hashanah)
          6. 속죄일(Atoinment) 욤 키퍼(Yom Kippur)
          7. 초막절(Feast of Tabernacles) 수콧(Sukkot)


          1 . 유월절(레 23:4-5; 고전 5:7)

          히브리어로는 '넘어가다' 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니산월(아빕월, 1월) 14일 해질 무렵, 나흘 전에 준비한 수양을 구워 무교병과 쓴 나물과 함께 먹고 그 피를 문설주에 바르고 아침까지 남은 것은 불에 태워 버린다.
          애굽이 하나님의 진노로 장자를 잃는 열 번째 재앙을 당할 때 구원받은 것과 해방을 기념하는 날이다.

          2. 무교절(레 23:6-8: 고전 5:7,8)

          히브리어로는 맛차로. 니산월(아빕월, 1월) 15일부터 7일 동안(21일 까지) 누룩이 없는 무교병을 먹는다.
          절기의 이름도 이 누룩 없는 떡을 먹는다하여 무교절이라 불리웠다.
          무교절이 시작되는 첫 날과 마지막 날은 '성회' 로 백성이 모이고 노동을 하지 못했으며 매일 하나님께 화제를 드렸다

          3. 초실절(레 23:9-14: 고전 15:20)

          초실절은 히브리어로 바쿠림이라 불리며 무교절 기간 중에 있는 절기로, 유월절 후 첫 안식일 다음 날이다.
          추수 전에 곡식의 첫 이삭 한 단을 하나님께 드리는 절기로써 양식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는 날이다.
          초실절 예물을 하나님께 드리기 전에는 떡이나 볶은 곡식, 생 이삭이라도 먹지 않았다.

          4. 오순절(칠칠절, 맥추절) (레 23:15-21 : 행 2:1-47: 고전 12:13: 엡 2:11-22)

          히브리어로는 솨부아 '맹세하다' 라는 뜻으로 밀을 수확할 수 있도록 복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는 날이다.
          칠칠절은 초실절로부터 50일째에 해당하는 날로써 보통 시완월(3월) 6일경이 된다.
          이 날은 하루만 절기로 지키는데 성회를 공포하고 노동이 금지되며 하나님께 번제를 드렸고 수염소 한 마리를 속죄제로 드렸다.
          특이한 것은 모든 절기에는 누룩이 없는 무교병을 쓰지만 칠칠절만은 누룩을 넣은 유교병을 소제로 사용한다.

          5. 나팔절(레 23:23-25)

          나팔절은 티쉬리월(7 월) 1일로 유대 민간력으로는 1월에 해당하는 새해 첫날이다.
          이 날은 나팔을 하루 종일 일정한 간격으로 불었으며 성회가 선포되고 노동을 금했다.
          그리고 속죄제로 수염소 한 마리를 드렸다.

          6. 속죄일(레 23:26-32; 히 9:25, 26)

          이 날은 성회가 선포되고 노동을 금하며 마음을 괴롭게 하는 날로 티쉬리월( 7월) 10일이다.
          특별히 연중 이 날만 대제사장이 지성소에 들어갔다. 그리고 하나님을 위한 수염소와 아사셀을 위한 수염소를 드렸다.

          7. 초막절(레 23:33-34)

          수장절, 장막절이라고도 불린다.
          티리쉬월(7월) 15일부터 8일 동안 행해진다. 초막절은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을 나와 광야에 머물었던 것을 기념하는 동시에 풍성한 수확을 허락하신 하나님께 감사하는 절기이다.
          첫날과 여덟째 날에는 성회로 모이고 노동이 금지되었으며 각 날마다 그에 상응 하는 제사를 드렸다.


          메시아의 도래를 바라보는 예언적 절기

          - 전도서, 시편 113-118편

          시편 118:25

          여호와여 구하옵나니 이제 구원하소서 여호와여 우리가 구하옵나니 이제 형통케 하소서.

          구원해 주소서!
          아도나이 호쉬안나!

          장막(수카)을 만드는 4가지 재료(아르바미님)
          레위기 23:40

          첫날에는 너희가 아름다운 나무 실과와
          종려 가지와 무성한 가지와
          시내 버들을 취하여
          너희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칠일 동안 즐거워할 것이라.

          아르바 미님(레위기 23:40)

          4(아르바)   종류들(미님)

                          아름다운 나무 실과(에트로그. Etrog)
                향이 있고 맛도 있다
                            토라를 배우고 실천하는 사람

          종려 가지(룰라브. Lulav)
          맛은 있으나 향이 없다
          토라를 배우고 실천하지 않는 사람

          아르바미님(레위기 23:40)


          무성한 가지(하다스. Hadas)
          향은 있으나 맛이 없다
          토라를 배우지 않았으나 실천하는 사람

          시내 버들(아라바. Aravah)
          맛도 없고 향도 없다
          토라를 배우지도 않고 실천하지 않는 사람



          초막절을 지키는 규례 

          1. 안식하라(35절, 39절)

          2. 성회로 모이라(35절, 37절)
          3. 제물을 바치라(37절)

          4. 초막을 짓고 거주하라(42절)


          느헤미야 8:16-17

          백성이 이에 나가서 나무 가지를 취하여
          혹은 지붕 위에, 혹은 뜰 안에, 혹은 하나님의 전 뜰에,
          혹은 수문 광장에, 혹은 에브라임 문 광장에 초막을 짓되 사로잡혔다가 돌아온 회 무리가 다 초막을 짓고
          그 안에 거하니 눈의 아들 여호수아 때로부터 그 날까지
          이스라엘 자손이 이같이 행함이 없었으므로
          이에 크게 즐거워하며.

          성전에서 지키는 의식 두 가지

          실로암 연못에서 물을 길어온다. 

          제사장의 뜰 중앙에 초막절 마지막 날에 물을 붓는다.

          이사야 12:2-3
          보라 하나님은 나의 구원이시라
          내가 의뢰하고 두려움이 없으리니
          주 여호와는 나의 힘이시며 나의 노래시며 나의 구원이심이라.
          그러므로 너희가 기쁨으로 구원의 우물들에서 물을 길으리로다.


          요한복음 7:37-38

          명절 끝날 곧 큰날에
          예수께서 서서 외쳐 가라사대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리라.





          초막절 = 수장절=장막절(수카, 수콧)

          1. 수확물을 창고에 저장하는 것
          2. 광야 40년의 삶을 기념하는 절기(옷, 신발, 하나님의 돌보심)
          3. 가나안 땅에 입주하여 한 해 풍성한 수확물을 창고에 저장한 후 광야에서 하나님의 은혜로 지낸 시간을 기억하는 절기
          4. 이른 비를 간구하는 절기
          5. 한 해 농사의 절기를 마치며 농사의 전환기를 준비하는 절기로 우기가 시작한다.
              비가 오기를 간구한다.
              한 해 농사의 사이클의 마감과 더불어 과실들을 수확한다(5대 과일 / 포도, 무화과, 올리브, 대추야자, )
          6. 추수감사의 의미(대추수감사절)

          수카(초막)를 만드는 4가지 식물 : 아르바 미님
          레위기 23:40 / 실과 종려, 시내버들,

          아브라(4) 미님(종류들)

          1. 아름다운 나무 실과 - 에트로그(Etrog)

          2. 종려가지 - 룰라브(Lulav) Palm frond
          3. 무성한 가지 - 하다스(Myrtle)
          4. 시내버들 - 아라바(Willow)

          아름다운 실과(에트로그)
          향이 있고, 맛도 있다. 4종류의 사람이 있다.

          토라를 배우고 실천하는 사람

          종려가지(룰라브)

          맛은 있으나 향이 없다.
          토라를 배우고 실천하지 않는 사람

          무성한 가지 - 하다스(Myrtle)

          향은 있으나 맛이 없다.
          토라를 배우지 않았으나 실천하는 사람

          시내버들 - 아라바(Willow)

          맛도 없고 향도 없다
          토라를 배우지도 않고 실천하지 않는다.

          광야의 백성들
          1. 아름다운 나무 실과 - 에트로그(Etrog)

          요단강 건너는 백성들
          2. 종려가지 - 룰라브(Lulav) Palm frond

          젖과 꿀이 흐르는 땅
          3. 무성한 가지 - 하다스(Myrtle)


          약속의 땅에 얻은 열매 상징
          4. 시내버들 - 아라바(Willow)


          실로암 못에서 물을 떠온다.
          동틀 무렵 물을 떠와 제단에서 관제 의식을 행한다.
          수문에서 레위인들이 나팔을 분다.

          관제의 축제
          여인의 뜰에서
          불을 켠다(가지가 촛대 5개)
          수전절(촛대 9개)
          성전(촛대 7개)

          7일 째 해가 지고 8일 째 해가 뜰 때까지 관제의 축제(요한복음 8장, 아침이 되니.....)
          아침까지 밤을 새워 행사한다(All night)

          여인뜰, 니카노 문, 15개 계간 중 10계단에서 나팔을 불며 동쪽으로 향한다.
          순결과 공의의 문에 도착했을 때 한 바퀴를 돌고 지성소가 있는 서쪽을 향하여
          "이 성전에 계신 아버지여 저 이방인들은 성소를 등지고 얼굴을 동쪽을 향하고 떠오르는 태양을 숭배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눈은 여호와를 향합니다."

          가장 나이가 많은 랍비의 선창에 따라

          우리의 죄를 사하여 주시는 주여!
          우리 노인들에게 젊은이들의 죄를 우리에게 돌리지 마소서
          젊을 때에 죄를 사함받는 자들은 복이 있을지어다.

          간음한 여인이 붙잡혀 들어왔다.(요 8장)




          초막절 제물
          1. 종료나무
          2. 모짜(예루살렘 남서쪽 시냇가)의 버드나무 가지 / 시내 버들, 잘랐을 때 물이 없으면 말라 죽는다. 물이 필요한 것(물 =은혜)
              성전 제단 남서쪽에 세운다. 제단에 기울도록 한다.
              제단 주위를 매일 한 바퀴씩 돈다(시계 반대 방향으로). 7일 째 일곱 바퀴를 돈다.
              요한복음 7장
              시편 118:25 - 기도문(여호와여 구하옵나니 이제 구원하소서, 형통케 하소서!)
              안나 아도나이 호시아 나, 안나 아도나이  하츨레하 나
              제사장의 뜰이 개방된다(아이들, 심지어 여자들도 들어올 수 있다)
              버드나무 가지를 "호시아나" 라고 한다.
          3.
          4.

          누워서 하늘의 별이 3개가 보여야 한다.
          아파트를 계단식 형으로 건축한다. 하늘 조망권을 화복한다.
          예루살렘은 종교화, 텔아비브는 세속화 된다.

          마태복음 17:4
          초막 셋을 짓되.......
          초막의 의미는 수카를 말한다.
          변화산 사건이 초막절 즈음에 일어났던 사건이라고 추측한다.

          7일 동안 황소 70마리를 번제로 드린다.
          13, 12, 11, 10, 9, 8, 7마리 = 70마리
          왜 창세기 10장에 열방의 70민족으로 소개된다.
          열방을 축복하는 제사장 백성으로 삼으셨기 때문에 7일 동안 70마리 황소를 바친다.
          제사장 백서으이 역할

          7 : 완전수
          70 :
          숫양 : 14
          어린 양 : 98(7의 14 배수)
          364에바의 소제 : 7의 48배

          초막절은 완성을 의미(수확의 완성)
          첫 열매를 시작으로 밀과 여름 과실의 수확
          구원의 최종적 완성
          심판의 최종적 완성
          초실절 - 칠칠절 - 초막절 / 교회가 완성되어가는 과정
          교회 탄생 - 교회의 성장 - 재림(완성, 열방도 포함)

          스가랴 14:16, 19,
          솔로몬 성전의 봉헌

          열왕기상 8:2
          에다님 월(티스리월)


          레위기 23:39, 여호와의 절기
          다양한 이름으로 불리운다 / 수장절(feast of ingathering), 장막절

          너희가 토지 소산 거두기를 마치거든 칠월 십오일부터 칠일 동안 여호와의 절기를 지키되 첫날에도 안식하고 제 팔일에도 안식할 것이요.

          광야 40년 생활을 위하여 천막(Tent)을 쳤다.
          잠시 머물러 있는 동안 만나와 메추라기를 공급하여 먹게 하셨다.

          3대절기 / 유월절, 오순절, 초막절
          2대절기 / 유월절, 초막절

          지키는 방법

          1. 안식하며 제물을 드리는 절기
          - 노동을 하지 말라(35절, 39절)

          첫날에는 성회가 있을찌니 너희는 아무 노동도 하지 말찌며.

          39절, 너희가 토지 소산 거두기를 마치거든 칠월 십오일부터 칠일 동안 여호와의 절기를 지키되 첫날에도 안식하고 제 팔일에도 안식할 것이요.

          첫날과 마지막 날에도 안식하라.
          휴지구 즉 쉼표가 필요한 인생이다.

          대략 9월말-10월 중순까지
          한국의 경우 추석의 절기와 비슷하다.

          2. 성회로 모이라(35절, 37절,

          첫날에는 성회가 있을찌니 너희는 아무 노동도 하지 말찌며.

          쉬면서 하나님을 묵상하라.

          3. 제물을 바치라(37절)

          이것들은 여호와의 절기라 너희는 공포하여 성회를 삼고 번제와 소제와 희생과 전제를 각각 그 에 여호와께 화제로 드릴찌니.

          신명기 16:16
          너희 중 모든 남자는 일년 삼차 곧 무교절과 칠칠절과 초막절에 네 하나님 여호와의 택하신 곳에서 여호와께 보이되 공수로 여호와께 보이지 말고.

          신앙의 전통을 위하여 남자들에게 의무적으로 하도록 가르쳤다.

          38절, 이는 여호와의 안식일 외에, 너희의 헌물 외에, 너희의 모든 서원 예물 외에, 너희의 모든 낙헌 예물 외에 너희가 여호와께 드리는 것이니라.

          서원 제물,
          앞으로 이루어 주실 것을 믿고

          자원 제물

          낙헌 제물


          초막을 짓고 거주하는 절기(42절)

          간이 초막(수카)

          너희는 칠일 동안 초막에 거하되 이스라엘에서 난 자는 다 초막에 거할찌니.

          마당, 아파트의 경우 계단식 형으로 짓는다.
          심면만 막는다.

          하늘의 별을 본다.
          누구든지 올 수 있다.

          느헤미야 8:16-17
          포로에서 귀환한 후 먼저 초막적을 지켰다.

          백성이 이에 나가서 나무 가지를 취하여 혹은 지붕 위에, 혹은 뜰 안에, 혹은 하나님의 전 뜰에, 혹은 수문 광장에, 혹은 에브라임광장에 초막을 짓되
          사로잡혔다가 돌아온 회 무리가 다 초막을 짓고 그 안에 거하니 의 아들 여호수아 때로부터 그 까지 이스라엘 자손이 이같이 행함이 없었으므로 이에 크게 즐거워하며.

          4가지 식물을 갖고 초막을 짓기도 하고
          아르바미님

          40절, 첫날에는 너희가 아름다운 나무 실과 종려 가지무성한 가지시내 버들을 취하여 너희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칠일 동안 즐거워할 것이라.

          4가지 식물(아르바미님)
          1. 아름다운 나무 실과(Etrog)
          2. 종려가지(Lulav)
          3. 무성한가지(Hadas) - 영생을 상징
          4. 시내버들(Aravah) - 그늘과 쉼이 있는 곳



          1. 쉼과 예물
          2. 초막을 짓고 거한다
          3. 메시아의 도래를 바라보는 예언적 절기
          - 전도서(헛되다는 것을 강조하여 주의 명령을 따라 살아가는 것이다)
          - 시편 113-118편을 읽는다

          시편 118:25

          여호와여 구하옵나니 이제 구원하소서 여호와여 우리가 구하옵나니 이제 형통케 하소서.
          O LORD, save us; O LORD, grant us success.

          구원해 주소서(아도나이 호쉬안나) - 호산나

          초막절 마지막 날 / 호산나 라바(큰 구원을 베풀어 주소서)
          심핫 베잇 하소에바(Simchat Beit Hashoeva) :  실로암에서 물을 길어 오는 의식


          성전에서 지키는 의식 두 가지

          제사장의 뜰 중앙에 초막절 마지막 날에 물을 붓는다(전제, 관제) 실로암 연못으로 간다.
          히스기야 왕 시대에 지하수로를 만들었다(히스기야 턴널) 500m
          물을 붓는 순간 나팔을 분다

          이사야 12:2-3

          보라 하나님은 나의 구원이시라 내가 의뢰하고 두려움이 없으리니 주 여호와는 나의 힘이시며 나의 노래시며 나의 구원이심이라
          그러므로 너희가 기쁨으로 구원의 우물들에서 을 길으리로다.

          요한복음 7:37-38
          명절 끝날 곧 큰날에 예수께서 서서 외쳐 가라사대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리라 하시니.

          마지막 날은 밤새도록 춤을 추며 네 개의 기둥에 불이 켜진다.

          요한복음 8:12
          예수께서 또 일러 가라사대 나는 세상의 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두움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을 얻으리라.

          세상의 빛이시다 - 생명의 근원이시다!





          여호와의 절기(레위기 23:39)


          너희가 토지 소산 거두기를 마치거든 칠월 십오일부터 칠일 동안 여호와의 절기를 지키되 첫날에도 안식하고 제 팔일에도 안식할 것이요.

          칠월절기(열왕기상 8:2, 역대하 5:3, 느헤미야 8:14)

          열왕기상 8:2,
          이스라엘 모든 사람이 다 에다님월 곧 칠월 절기솔로몬왕에게 모이고.


          역대하 5:3,
          칠월 절기에 이스라엘 모든 사람이 다 왕에게로 모이고.

          느헤미야 8:14
          율법책을 본즉 여호와께서 모세로 명하시기를 이스라엘 자손은 칠월 절기에 초막에 거할찌니라 하였고.


          수장절 : 여름 실과를 거두어 저장하는 절기

          초막절을 지키는 7일 동안 7명의 사람을 초대한다.
          7 사람은 나그네의 삶을 대표하는 인물이다.

          1. 아브라함(은혜)
          2. 이삭(용기)
          3. 야곱(영광)
          4. 모세(영원)
          5. 아론(존귀)
          6. 요셉(기본)
          7. 다윗(왕권)











          3대 명절(출애굽기 23:14-17, 34:18-23)

          1. 유월절(무교절)
          2. 칠칠절(초실절, 맥추절, 오순절)
          3. 초막절(수장절, 장막절)

          출애굽기 23:14-17

          14. 너는 매년 삼차 내게 절기를 지킬찌니라
          15. 너는 무교병의 절기를 지키라 내가 네게 명한대로 아빕월의 정한 때에 칠일 동안 무교병을 먹을찌니 이는 그 에 네가 애굽에서 나왔음이라 빈 손으로 내게 보이지 말찌니라
          16. 맥추절을 지키라 이는 네가 수고하여 밭에 뿌린 것의 첫 열매를 거둠이니라 수장절을 지키라 이는 네가 수고하여 이룬 것을 연종에 밭에서부터 거두어 저장함이니라
          17. 너의 모든 남자는 매년 세번씩 주 여호와께 보일찌니라

          출애굽기 34:18-23

          18. 너는 무교절을 지키되 내가 네게 명한대로 아빕월 그 기한에 칠일 동안 무교병을 먹으라 이는 네가 아빕월에 애굽에서 나왔음이니라
          19. 무릇 초태생은 다 내 것이며 무릇 네 가축의 수컷 처음 난 우양도 다 그러하며
          20. 나귀의 첫 새끼는 어린 양으로 대속할 것이요 그렇게 아니하려면 그 목을 꺾을 것이며 네 아들 중 장자는 다 대속할찌며 빈 손으로 내 얼굴을 보지 말찌니라
          21. 너는 엿새 동안 일하고 제 칠일에는 쉴찌니 밭 갈 때에나 거둘 때에도 쉴찌며
          22. 칠칠절 곧 맥추의 초실절을 지키고 가을에는 수장절을 지키라
          23. 너희 모든 남자는 매년 세번씩 주 여호와 이스라엘하나님 앞에 보일찌라.






          5월 19일(수)

          대속죄일(레위기 23:26-32)

          26.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일러 가라사대
          27. 칠월 십일은 속죄일이니 너희에게 성회라 너희는 스스로 괴롭게 하며 여호와께 화제를 드리고
          28. 이 에는 아무 일도 하지 말것은 너희를 위하여 너희 하나님 여호와 앞에 속죄할 속죄일이 됨이니라
          29. 이 에 스스로 괴롭게 하지 아니하는 자는 그 백성 중에서 끊쳐질 것이라
          30. 이 에 누구든지 아무 일이나 하는 자는 내가 백성 중에서 멸절시키리니
          31. 너희는 아무 일이든지 하지 말라 이는 너희가 그 거하는 각처에서 대대로 지킬 영원규례니라
          32. 이는 너희의 쉴 안식일이라 너희는 스스로 괴롭게 하고 이 구일 저녁 곧 그 저녁부터 이튿날 저녁까지 안식을 지킬찌니라.

          새해(로쉬 하샤나) :로쉬(머리, head), 하샤나(해, year)
          - 한 해의 머리가 되는 날, 한 해의 으뜸이 되는 날

          한국의 경우 보신각에서 종을 울린다.
          이스라엘은 뿔 나팔을 분다.

          레위기 23:24,
          이스라엘 자손에게 고하여 이르라 칠월 곧 그 일일로 안식일을 삼을찌니 이는 나팔을 불어 기념할 이요 성회라.

          유대력으로 7월 1일(새해, 로쉬 하샤나)
          태양력으로 9월 -10월 경

          설날 השנה ראש (로쉬 하샤나)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새 해를 맞이하여 첫날을 명절로 삼고 축하한다.
          우리 민족도 새해 첫날을 맞이하여 기뻐하는 ‘설날’이 있다.
          설은 “원단/세초/연시”라는 한자말로도 표현한다.
          1월 1일을 양력으로 신정(新正)이라고 하고 음력으로 구정(舊正)이라고 한다.
          해가 바뀌어 새로이 한 해를 맞이하는 첫 날 곧 ‘설’을 쇨 때마다 한 살을 더 먹는다.
          설 명절은 설날부터 대보름인 15일까지 이어진다.

          유대인들에게도 설날이 있는데 השנה ראש (로쉬 하샤나)라고 부른다.
          유대인의 ‘로쉬 하샤나’도 하루로 끝나지 않는다.
          열흘 후에 지키는 ‘욤 키푸르’(대속죄일)에 이르기까지 회개의 시간을 가진다.

          유대인들은 ‘로쉬 하샤나’를 티쉬리월 첫째 날과 둘째 날에 지킨다.
          티쉬리월은 양력 9월 말이나 10월 초에 오는데 이 달이 음력으로 첫째 달이 되는 까닭이 탈무드에 나온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신 달을 티쉬리월이라고 간주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일반으로는 니산월을 한 해의 시작으로 간주하지만 유대교 종교력은 이스라엘 백성이 출애굽 한 때를 기준으로 삼아 티쉬리월을 한 해가 시작되는 달로 지키는 것이다. 하지만 정작 출애굽기는 아빕월을 한 해 첫달로 지키라고 규정한다. 여기에서 장구한 세월에 걸친 유대 달력의 변천사를 짐작할 수 있다.

          창세기 1장 1절에 히브리어 ראש (로쉬)란 단어가 나온다.
          ‘태초에’란 어구에 있다.
          이 명사는 본디 머리를 가리켰는데 그 의미가 확장되어서 “으뜸/시작/우두머리/지도자” 따위로 그 의미가 다양해졌다.
          “태초에 하나님께서 하늘과 땅을 창조하셨다”는 문장에서  בְּרֵאשִׁית (브레쉬트)는 “한 처음에/태초에”란 뜻이다.
          이 어구에 나오는 “로쉬”는 모든 창조의 처음을 가리키기에 탈무드는 티쉬리월에 오는 새 해의 첫 날 “로쉬 하샤나”를 창조신학과 연결시켰다.

          하샤나(השנה)는 ‘해/년(年)’을 뜻하는 명사 <샤나>에 정관사 <하>가 접두한 형태이다.
          “로쉬 하샤나”는 ‘나팔절’(욤 테루아 יוֹם תְּרוּעָה)이라고 부르기도 하는데 정작 성경에는 ‘나팔절’ 이란 단어가 나오지 않는다.
          나팔절은 민수기 23장 ‘칠월 초하룻날 나팔을 불며 쉬라’는 말씀에서 유추한 용어이다.
          레위기 23장 23절 이하에도 나온다.
          나팔절 곧 설날은 오늘날까지 지키고 있는 유대인의 네 가지 큰 명절 중 하나이다.

          로쉬 하샤나는 느헤미야 8장에도 나오는데 디아스포라 공동체는 토라를 읽으며 설 명절을 지켰다.
          토라를 읽으며 명절을 지켰다는 데 주목해야 한다.

          출애굽기 12장 2절에 רֹאשׁ חֳדָשִׁים (로쉬 호다쉼)이란 말이 나오는데 이는 첫째 달이란 듯이다.
          첫째 달 첫날부터 열흘 동안 속죄한 후에 대속죄일을 맞이한다. 이 명절에는 안식일과 동일하게 노동을 하지 말고 쉬어야 한다. 느혜미야에 나타난 로쉬 하샤나에서는 서로 기쁨을 나누는 축제의 성격을 띠고 있다.

          설날의 성경적 의미는 여러 가지로 찾아 볼 수 있다.
          로쉬 하샤나는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신 것을 기념하는 뜻을 지닌다.
          이 날은 정결하게 되고 새로워지는 시간이요, 용서받는 때이며, 새 출발을 의미한다.
          또 심판의 날이란 뜻도 있다.
          우리가 설날을 새 출발에 방점을 두지만, 성경의 설날은 지금까지 지은 죄를 뉘우치는 회개로부터 시작하는 날이 된다.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 공로로 죄씻음을 받고 다시는 죄를 짓지 않겠다는 다짐으로 새롭게 한 해를 시작하는 축제를 벌인다.
          그런 의미에서 설날은 희년을 선포하는 것처럼 양각나팔을 불어 토라공부와 토라실천의 결기를 다짐하는 뜻 깊은 성숙의 날이 되어야 한다.


          대속죄일
          레위기 23:27-28,
          27. 칠월 십일은 속죄일이니 너희에게 성회라 너희는 스스로 괴롭게 하며 여호와께 화제를 드리고
          28. 이 에는 아무 일도 하지 말것은 너희를 위하여 너희 하나님 여호와 앞에 속죄할 속죄일이 됨이니라

          레위기 16:29,
          너희는 영원히 이 규례를 지킬지니라 칠월 곧 그 십일에 너희는 스스로 괴롭게 하고 아무 일도 하지 말되 본토인이든지 너희 중에 우거하는 객이든지 그리하라.

          대속죄일(욤 키퍼) : 욤(날, the day). 키퍼(카파르) 덮는다, cover.

          새 해는 속죄를 통해서 맞이할 수 있다.

          레위기 16:31
          이는 너희에게 큰 안식일인즉 너희는 스스로 괴롭게 할지니 영원히 지킬 규례라.

          큰 안식일 (솨바트 솨바톤) / 안식일 중의 안식일

          대속죄일

          1. 시기적 중요성 : 새해와 맞물려서 시작한다(로쉬 하샤나)
                                       새해 맞이의 절정은 속죄로 시작한다.

          2. 초막절(7월 15일) : 레위기 23:34,
          이스라엘 자손에게 고하여 이르라 칠월 십오일 초막절이니 여호와를 위하여 칠일 동안 지킬 것이라.

          용서를 받아야 초막절이 찾아온다.
          자기를 대면하는 날, 자기 성찰의 절기

          레위기 16:29-34,

          29절, 31절에서 반복되는 것
          스스로 괴롭게 하고 아무 일도 하지 말라.
          나그네까지도 참여해야 한다.
          스스로 괴롭게 할지니

          괴롭게 한다는 세 가지 의미
           1. 하루 금식
           2. 하루 금욕
           3. 하루 기도

          3. 중보자의 중요성 : 대제사장을 바라본다

          대제사장의 속죄일에 입는 옷에 방울이 달려 있다.
          대제사장이 지성소에서 나올 수 없을 경우 죄가 용서받지 못했다는 것
          대제사장은 유일한 중보자이신 메시아를 보여주는 상징적인 사례라고 하겠다.

          첫째, 진지한 준비(레위기 16:1-5)

          1. 아론의 두 아들이 여호와 앞에 나아가다가 죽은 후에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시니라
          2.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네 형 아론에게 이르라 성소의 장안 법궤 위 속죄소 앞에 무시로 들어오지 말아서 사망을 면하라 내가 구름 가운데서 속죄소 위에 나타남이니라
          3. 아론이 성소에 들어오려면 수송아지로 속죄 제물을 삼고 수양으로 번제물을 삼고
          4. 거룩한 세마포 속옷을 입으며 세마포 고의를 살에 입고 세마포 띠를 띠며 세마포 관을 쓸찌니 이것들은 거룩한 옷이라 로 몸을 씻고 입을 것이며
          5. 이스라엘 자손의 회중에게서 속죄 제물을 위하여 수염소 둘과 번제물을 위하여 수양 하나를 취할찌니라.


          아론의 두 아들이 진지한 준비가 없었다.
          아무 때나 나올 수 없었다.
          그러나 현재는 아무 깨나 나올 수 있다.

          12-13절,
          향로
          를 취하여 여호와 앞 단 위에서 피운 불을 그것에 채우고 또 두 손에 곱게 간 향기로운 향을 채워 가지고 장 안에 들어가서
          여호와 앞에서 분향하여 향연으로 증거궤 위 속죄소를 가리우게 할찌니 그리하면 그가 죽음을 면할 것이며

          아론의 두 아들은 아무 때나 아무 불이나 사용하므로 죽임을 당하였다.

          레위기 8:7-9,

          제사장의 평상복을 벗고 속죄일에는 세마포 옷을 입는다.

          둘째, 자신을 위한 속죄의 제물을 드린다.

          레위기 16:6
          아론은 자기를 위한 속죄제의 수송아지를 드리되 자기와 권속을 위하여 속죄하고.

          13-14절,
          여호와 앞에서 분향하여 향연으로 증거궤 위 속죄소를 가리우게 할찌니 그리하면 그가 죽음을 면할 것이며
          그는 또 수송아지의 를 취하여 손가락으로 속죄소 동편에 뿌리고 또 손가락으로 그 를 속죄소 앞에 일곱번 뿌릴 것이며.

          셋째, 백성을 위한 속죄 제물을 드린다.

          레위기 16:15
          또 백성을 위한 속죄제 염소를 잡아 그 를 가지고 장 안에 들어가서 그 수송아지 로 행함 같이 그 로 행하여 속죄소 위와 속죄소 앞에 뿌릴찌니.

          레위기 16:21
          아론은 두 으로 산 염소의 머리에 안수하여 이스라엘 자손의 모든 불의와 그 범한 모든 를 고하고 그 염소의 머리에 두어 미리 정한 사람에게 맡겨 광야로 보낼찌니.

          예수께서 죄를 짊어지고 극적으로 처리한 모습

          "아사셀 염소"(레위기 16:10,
          Azazel / 염소 + 사라진다(go away)

          넷째, 번제를 드린다.

          레위기 16:23-25,
          25. 속죄제 희생의 기름을 단에 불사를 것이요
          27. 속죄제 수송아지와 속죄제 염소를 성소로 들여다가 속죄하였은즉 그 가죽과 고기와 똥을 밖으로 내어다가 불사를 것이요.

          속죄함을 받은 후에 용서의 확신이 중요하다.
          그 후에 반드시 해야 할 것은 "번제(태워버린다, 온전한 헌신)"

          번제가 없으면 열매가 없다.
          예배를 통헤서 나를 온전히 주 앞에 바치는 훈련이 중요하다.

          대속죄일(יֹום כיפור 욤 키푸르, יֹום הַכִּפֻּרִים 욤 하 키푸림)은 유대력으로 티쉬리(7) 월 10일이며 유대인들이 1년에 한 번 속죄하는 날로 큰 안식일이며 성회로 모였다. 이 날에는 육체적인 노동뿐만 아니라 개인적인 일까지 금지되었으며, 만약 이 날에 일을 하면 하나님의 대속의 은혜를 모르는 자로 죽임을 당했다. 따라서 이 날은 오직 금식을 하면서 스스로 괴롭게 해야 한다.

          크리스천은 오순절을 성령강림절로 지키지만, 유대인이 지키는 오순절은 모세가 시내산에서 토라를 받은 날이다. 모세가 시내산에서 토라를 받고 내려왔을 때, 산 밑에서는 아론과 이스라엘 백성들이 금송아지를 만들어 섬기고 있었다. 그래서 모세는 그들의 죄를 속죄하기 위하여 다시 산으로 올라갔다.

          "이튿날 모세가 백성에게 이르되 너희가 큰 죄를 범하였도다. 내가 이제 여호와께로 올라가노니 혹 너희의 죄를 속할까 하노라 하고"(출 32:30)

          모세는 이스라엘이 지은 우상숭배의 죄를 "큰 죄"라고 하며 그 죄를 속죄하러 하나님께 다시 올라갔다. 처음과 마찬가지로 모세는 40일간 하나님과 함께 있으면서 반역한 그들을 위하여 자기의 이름을 생명책에서 지워달라며 간절히 하나님께 속죄하고 내려왔다. 모세가 40일간 속죄하고 내려온 날이 속죄일인 티쉬리 월 10일이다.

          출애굽기 34장 29절 이하를 보면, 모세가 여호와 하나님께 속죄하고 두 돌판을 가지고 내려왔을 때, 그의 얼굴에서 광채가 났다고 기록하고 있다. 모세의 얼굴에서 광채가 나므로 사람들은 그에게 가까이 하는 것을 두려워했다. 그들은 여호와 하나님께서 그들 앞에 나타나셨을 때에 무척 두려워했다. 왜냐하면 주님의 임재는 나팔소리와 함께 구름과 연기와 불과 우뢰와 번개 가운데 임하셨기 때문이다(출 19:16-19, 20:18).

          그 뒤에 주께서는 70명의 장로를 산 위로 부르셔서 만나주셨고, 대제사장이 1년에 한 번 지성소에 들어오면 속죄소 앞에서 만나주시겠다고 말씀하셨다. 즉 우리가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것은 주 앞에 엎드려 회개할 때이다. 회개를 하지 않는 사람은 결코 하나님을 만날 수도 없고 그분으로부터 사명을 받을 수 없다.

          “거기서 내가 너와 만나고 속죄소 위 곧 증거궤 위에 있는 두 그룹 사이에서 내가 이스라엘 자손을 위하여 네게 명령할 모든 일을 네게 이르리라"(출25:22)

          언약궤 위에 있는 두 그룹은 날개를 펴서 언약궤와 속죄소를 덮고 있으며 얼굴을 서로 대하여 속죄소를 향하게 했다. 그곳에서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1년에 한 번 모든 백성을 대표한 대제사장을 통하여 만나주시고 죄를 사하여 주셨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속죄양이 되시고 대제사장이 되셔서 보혈의 피를 흘리시므로 피뿌림을 받은 우리들은 그분의 보혈의 공로로 1년에 단 한 번 대제사장만 들어갈 수 있는 지성소에 매일 아무 때나 들어갈 수 있게 되었다.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조상의 유전한 망령된 행실에서 구속된 것은 은이나 금 같이 없어질 것으로 한 것이 아니요 오직 흠 없고 점 없는 어린양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한 것이니라"(벧전 1:18-19)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나니 그 길은 우리를 위하여 휘장 가운데로 열어 놓으신 새롭고 산 길이요 휘장은 곧 저의 육체니라. 또 하나님의 집 다스리는 큰 제사장이 계시매 우리가 마음에 뿌림을 받아 양심의 악을 깨닫고 몸을 맑은 물로 씻었으니 참 마음과 온전한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자"(히 10:19-22


          ▶ 대속죄일의 의미


          대속죄일의 히브리어 '욤 키푸르'의 '욤'은 '날'을 의미하며 '속죄'를 뜻하는 '키푸르'(כִּפֻּרִ)는 동사 '카파르'(כָּפַר)에서 유래했다. '카파르'(כָּפַר)는 '속죄하다'(make an atonement) 이외에 '화해하다'(make reconciliation), '용서하다'(forgive), '덮다'(to cover), '자비롭다'(be merciful), '씻다'(cleanse) 등의 뜻을 갖고 있다.

          따라서 '대속죄일'이라는 말은 우리의 죄와 허물을 씻어주고 덮어주고 용서해주시는 하나님의 긍휼하심으로 인하여 단절되었던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어 하나님 아버지와 화해하여 은혜의 자리에 나아가게 되는 매우 기쁜 날이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피 뿌림'으로 이루어진 것이다. "피는 죄를 속하는 것"이므로 아무데나 뿌려지면 안된다. 그래서 어떠한 피도 먹지 말라고 하신 것이며 오직 그리스도의 피만 마시라고 한 것이다.

          "육체의 생명은 피에 있음이라. 내가 이 피를 너희에게 주어 단에 뿌려 너희의 생명을 위하여 속하게 하였나니 생명이 피에 있으므로 피가 죄를 속하느니라"(레 17:11)

          과거에는 대제사장 이외에 그 누구도 여호와 하나님을 만나러 지성소에 들어갈 수 없었다. 그리고 대제사장도 1년에 한 번 하나님께서 지정해주신 대속죄일에만 들어가서 여호와 하나님을 만날 수 있었다. 그런데 지금은 어떠한가?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의 공로로 왕같은 제사장이 된 우리는 아무 때나 어디에서든 하나님 아버지 앞에 나아갈 수 있다. 이는 아무 때나 어디에서나 주님 앞에 무릎을 꿇고 죄를 자복할 수 있다는 말이다. 언제든지 내가 원하는 것을 구하게 됐다는 말이 아니다.

          그런데 그렇게 회개할 수 있도록 만나주시는 주님 앞에 우리는 너무 교만하다. 1년에 단 한 번 만나주시던 주님을 매일 만날 수 있게 되니 회개를 해야할 필요도 느끼지 못하며, 주님 앞에 나아가는 시간도 습관적으로 늦게 나가서 예배 시간도 제대로 지키지 못한다. 또 다른 볼 일 때문에 예배가 끝나기도 전에 나가기도 한다. 심지어 빠지기도 한다. 아침에 눈을 떴을 때에나 밤에 자기 전에도 주님 앞에 무릎을 꿇지 않는다.

          그리고 예배하기 위하여 정결하고 거룩한 옷차림이나 마음가짐으로 나아가지 않고 자기 취향에 맞고 편한 옷차림과 편한 마음으로 나아간다. 예배를 구경하러 가는 구경꾼들이 얼마나 많은가? 정말로 주님을 두렵고 떨림의 대상이라고 믿는다면 어떻게 예배 시간에 늦을 수 있으며 중간에 나갈 수 있을까? 그리고 아무리 덥거나 춥거나 불편하다고 내가 원하는 옷차림과 자세로 예배의 자리에 나올 수 있을까?

          레위기 16장에는 대제사장 아론의 두 아들이 여호와께 나아갔다가 죽은 뒤에 주께서 모세에게 죽고싶지 않으면 대제사장이 지성소에 아무 때나(무시로) 들어오지 말라고 하신 말씀이 기록되어 있다.

          "아론의 두 아들이 여호와 앞에 나아가다가 죽은 후에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시니라.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네 형 아론에게 이르라. 성소의 장안 법궤 위 속죄소 앞에 무시로 들어오지 말아서 사망을 면하라. 내가 구름 가운데서 속죄소 위에 나타남이니라. 아론이 성소에 들어오려면 수송아지로 속죄 제물을 삼고 수양으로 번제물을 삼고 거룩한 세마포 속옷을 입으며 세마포 고의를 살에 입고 세마포 띠를 띠며 세마포 관을 쓸찌니 이것들은 거룩한 옷이라. 물로 몸을 씻고 입을 것이며 이스라엘 자손의 회중에게서 속죄 제물을 위하여 수염소 둘과 번제물을 위하여 수양 하나를 취할찌니라"(레 16:1-5)

          "향로를 취하여 여호와 앞 단 위에서 피운 불을 그것에 채우고 또 두 손에 곱게 간 향기로운 향을 채워 가지고 장 안에 들어가서 여호와 앞에서 분향하여 향연으로 증거궤 위 속죄소를 가리우게 할찌니 그리하면 그가 죽음을 면할 것이며"(레 16:12-13)

          이 말씀을 통하여 아론의 두 아들은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대로 행하지 않았기에 죽은 것을 알 수 있다. 속죄소에서 주님을 만나는 날은 1년에 한 번 대속죄일 뿐이며, 또 그곳에 나아갈 때에는 반드시 대제사장의 화려한 옷을 입으면 안 되고 흰 세마포 옷을 입어야만 한다. 또 반드시 목욕을 한 뒤에 세마포 옷을 입고 그곳에 들어가야 하며 빈손으로 들어가도 안 되며 반드시 향과 피를 갖고 들어가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하는 절기와 안식일

          많은 이들이 '여호와의 절기'와 '안식일'에 대해 잘못 알고 잘못 가르치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셨기 때문에 여호와의 절기나 안식일을 지키는 것이 아니다. '여호와의 절기'와 '안식일'은 모두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한다. 따라서 절기들을 지켜야 하는 것이 아니라 '안식일의 주인'이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 거해야 한다. 그분 안에 거할 때, 지켜지고 완성되는 것이다.

          성경은 결혼을 통하여 신랑이신 예수 그리스도와 신부인 교회가 하나라는 것을 말씀한다. 그래서 우리가 주님 안에 그리고 주님께서 우리 안에 거하신다는 것을 계속해서 말씀한다. 주님 없이 율법을 지킬 수 있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다. 그래서 율법을 친히 만드시고 완성하신 주님과 한 몸이 된 이들에게만 계명을 지켰다고 인정해주시고 의롭다고 인정해주시는 것이다. 그런데 많은 이들이 그것을 모르기 때문에 절기나 안식일을 지켜야 하느냐에 대하여 쓸데없는 논쟁을 하느라 세월을 아끼라는 주님의 말씀을 헛되이 지키고 있다.

          "나는 나의 사랑하는 자에게 속하였고 나의 사랑하는 자는 내게 속하였다"(아 6:3)

          "그 날에는 내가 아버지 안에,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너희가 알리라"(요 14:20)

          "내가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의 사랑 안에 거하는것 같이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거하리라"(요 15:10)



          ▶ 스스로 괴롭게 하는 날





          본문 27절에 보면 "너희는 스스로 괴롭게 하며 여호와께 화제를 드리라"라고 말씀하고 있다.
          또 32절에서도 "이는 너희의 쉴 안식일이라.
          너희는 스스로 괴롭게 하고 이 달 구일 저녁 곧 그 저녁부터 이튿날 저녁까지 안식을 지킬찌니라"라고 말씀한다.

          Mishnah의 Yoma 8:1에 의하면 스스로 괴롭게 하는 것은 다음과 같다.

          '금식'(물도 마시지 않음), '금욕'(부부관계), '목욕 및 샤워 금지', '향수나 크림 금지', '가죽으로 된 신발과 옷 착용 금지'

          특히 이 날이 안식일과 겹칠 경우 안식일은 기쁜 날이므로 금식하지 않지만, 속죄일은 안식일 중의 안식일(שַׁבַּת שַׁבָּתֹון)이며 반드시 금식을 하며 경건하게 보내야 했다. 그래서 안식일과 명절이 겹치지 않도록 하기 위하여 힐렐 2세는 티쉬리 월 1일이 수요일이나 금요일이 되지 않도록 했다(359년).

          "이는 너희에게 큰 안식일(שַׁבַּת שַׁבָּתֹון)인즉 너희는 스스로 괴롭게 할지니 영원히 지킬 규례라"(레 16:31)

          속죄일을 맞으며 우리 자신을 괴롭게 하는 것이 무엇인지 생각해보자.
          왜냐하면 우리 스스로 괴롭게 하면서 안식을 지키라고 하시기 때문이다.
          그런데 많은 이들이 국어에서 말하는 '안식'을 생각하기 때문에 성경에서 말씀하는 '안식'의 개념을 모른다.
          본문 말씀을 통해 우리는 안식일에 무엇을 해야하는지 알 수 있다.
          우리 스스로를 괴롭게 하는 것이 안식하는 것이라는데, 이것이 우리의 상식으로 이해가 될까?
          성령의 조명이 없으면 절대로 이해 불가능이다.

          안식일의 개념은 우리가 하고싶은 모든 것을 중단하는 것이다.
          오락이나 운동을 하며 놀고싶고, 사먹고 파티하고 싶고, 학교 공부나 숙제를 하고 싶고, 자고 싶고, 돈 벌고 싶고, 데이트하고 싶고, 커피숖에 앉아서 즐기고 싶고, 여행을 가고싶은 우리의 모든 육적이고 세상적인 것을 끊는 것이 안식이다.

          오직 안식일의 주인이신 예수 그리스도만 생각하며 그분만 예배하며 우리가 원하는 모든 것을 중단하는 것이 진정한 안식에 들어간 것이다.
          안식일에 제사장들은 절대로 쉴 수 없었다.
          가장 바빴다.
          그래서 예수님도 "아버지께서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라고 하셨다.
          세상이 돌아가기 위해 하나님께서는 안식일에도 일하신다는 사실을 유대인들은 알기에 예수께서 하신 그 말을 반박할 수 없었다.

          안식일은 쉬는 날이 아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주님만 예배하기 위하여 우리의 모든 것을 버리고 부인하고 내려놓고 번제물이 완전히 재가 될 때까지 타듯이 우리를 온전히 그분께 드리는 희생의 날이 안식일이다.

          한국의 추석과 여호와의 절기 중 마지막 추수때 즉 심판때인 추수감사절인 장막절이 자주 같은 날이다.
          왜냐하면 추석과 장막절 모두 보름달이 뜨는 때이기 때문이다.
          그 동안 우리는 미국 청교도들의 전통에 의해 11월 마지막주 목요일에 추수감사절을 지켜왔다.
          그러나 우리 크리스천은 추수감사절을 사람이 만든 시기가 아닌 여호와 하나님께서 지정해주신 날인 장막절에 지켜야 할 것이다.

          "너희가 하나님의 계명은 버리고 사람의 유전을 지키느니라. 또 가라사대 너희가 너희 유전을 지키려고 하나님의 계명을 잘 저버리는도다"(막 7:8-9)

          ▶대속죄일의 절차


          이날에 대제사장은 모든 백성의 죄를 속죄하기 위하여 지성소에 들어가서 정결한 동물의 피를 속죄소에 뿌리며 하나님의 긍휼하심을 기원했다.

          대제사장은 먼저 자신과 그의 가족들의 죄를 속죄하기 위하여 수송아지의 피로 속죄하고 이어서 백성들의 죄를 속죄하기 위하여 염소의 피로 속죄했다.

          1. 대제사장은 향로를 취하여 제단 위에서 피운 불을 채우고, 두 손에 곱게 간 향기로운 향을 채워서 지성소로 들어가 분향하여 향연으로 속죄소를 가려서 죽음을 면하게 한다(레 16:12-13).
          하나님을 대면하여 보지 않기 위해서이다.

          2. 분향 후 수송아지의 피를 갖고 지성소에 들어가 대제사장과 그의 가족들을 속죄하기 위하여 손가락으로 속죄소 동편에 그 피를 뿌리고 속죄소 앞에 일곱 번 뿌린다(레 16:14).
          7은 완전 수로 일곱 번 피를 뿌렸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가 완전하다는 것을 예표하는 것이다(히 7:27, 9:12, 10:10).

          3. 백성들의 죄를 속죄하기 위하여 두 마리의 염소가 준비되는데 대제사장은 성전 동쪽 문에서 두 염소를 제비 뽑은 뒤 여호와를 위한 것과 아사셀을 위한 것을 구별한다. 그리고 아사셀 염소의 뿔에 ‘아사셀을 위하여’ 라고 쓴 붉은 띠를 묶는다.

          4. 대제사장은 속죄제 염소로 제비뽑힌 염소를 잡아 그 피를 가지고 지성소에 들어가서 (2)와 같은 방식으로 속죄소 위와 속죄소 앞에 뿌린다.

          5. 성소에 있는 분향단을 위하여 속죄하기 위하여 수송아지와 염소의 피를 취하여 분향단 귀퉁이 네 뿔에 바르고 손가락으로 그 피를 그 위에 일곱 번 뿌려서 이스라엘 자손의 부정에서 분향단을 성결케 한다(레 16:18-19).

          6. 대제사장은 동쪽 문으로 가서 두 손으로 산 염소(아사셀 염소)의 머리에 안수하고 이스라엘 자손의 모든 불의와 그 범한 모든 죄를 고하고 그 죄를 염소의 머리에 두어 모든 불의를 지고 무인지경에 이르렀을 때 미리 정한 사람에게 맡겨 광야로 보낸다(레 16:20-21). 아사셀 염소가 광야로 가는 동안 대제사장은 소의 내장을 제거한 뒤 소와 염소를 묶고 아사셀 염소가 절벽에 이르렀을 때 불로 사른다. 이때 염소가 다시 돌아오는 불상사(죄가 돌아옴)를 막기 위하여 절벽으로 끌고가 밀어서 죽인다.

          7. 대제사장은 여인의 뜰로 가서 대속죄일과 관련된 토라를 읽은 후 지성소에 들어갈 때 입었던 세마포 옷을 회막에 들어가 벗고 거룩한 곳(정결탕)에서 물로 몸을 씻고 자기 옷을 입고 나와서 두 마리의 양으로 자기의 번제와 백성의 번제를 드린다.
          두 마리의 양을 북쪽에서 잡고 그 피를 담아 번제단 둘레에 바른다.
          자기와 백성을 위하여 속죄하고 속죄제 희생의 기름을 단에 불사른다(레 16:23-25). 그리고 소제와 전제를 드린다.

          "7월 10일에는 너희가 성회로 모일 것이요 마음을 괴롭게 하고 아무 노동도 하지 말 것이며 너희는 수송아지 하나와 수양 하나와 일년 된 수양 일곱을 다 흠 없는 것으로 여호와께 향기로운 번제를 드릴 것이며 그 소제로는 고운 가루에 기름을 섞어서 쓰되 수송아지 하나에는 에바 십분지 삼이요 수양 하나에는 에바 십분지 이요 어린 양 일곱에는 매 어린 양에 에바 십분지 일을 드릴 것이며 또 수염소 하나를 속죄제로 드릴 것이니 이는 속죄제와 상번제와 그 소제와 그 전제 외에니라"(민 29:7-11)

          8. 세 번에 걸쳐 지성소에 출입하며 번제를 마치면 대제사장은 흰 세마포 새옷으로 갈아입고 손과 발을 씻고 지성소에 들어가 향로와 불을 제거하고 향로와 부삽을 가지고 나온다.

          9. 수송아지와 염소의 가죽과 고기와 똥을 밖으로 내어다가 불사르고 그것을 불사른 자는 옷을 빨고 물로 몸을 씻은 후에 진에 들어올 수 있다(레 16:27-28).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나니 그 길은 우리를 위하여 휘장 가운데로 열어 놓으신 새롭고 산 길이요 휘장은 곧 저의 육체니라. 또 하나님의 집 다스리는 큰 제사장이 계시매 우리가 마음에 뿌림을 받아 양심의 악을 깨닫고 몸을 맑은 물로 씻었으니 참 마음과 온전한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자"(히 10:19-22)

          이날 모든 사람은 흰 옷을 입고 오는데, 계시록에서 흰옷은 '성도들의 옳은 행실'이라고 말씀한다. 또한 매50년째 되는 희년에 있는 속죄일에는 모든 빚을 탕감해 주어야 했으며 팔렸던 종들도 해방되었다.

          하나님께서는 긍휼이 한이 없으신 자비하신 분이다. 그래서 어떠한 죄도 하나님 앞에 고백될 때면 하나님께서는 용서해 주신다. 그러므로 속죄양이 되시고 대제사장이 되셔서 단번에 우리의 죄를 대속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그 크신 은혜를 우리는 잊지말아야 한다.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조상의 유전한 망령된 행실에서 구속된 것은 은이나 금 같이 없어질 것으로 한 것이 아니요 오직 흠 없고 점 없는 어린양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한 것이니라"(벧전 1:18-19)

          우리의 예배는 반드시 회개가 동반되어야만 한다. 회개가 없는 예배는 가증한 종교의 형식일 뿐이다. 구원받은 성도가 할 수 있는 특권이 바로 회개이다. 회개를 통하여 우리는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며 마귀의 종노릇하던 곳에서 해방되어 자유를 맛 볼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매사에 회개할 수 있음에 감사해야 한다.

          현대의 유대인들은 속죄일이 시작되기 전 오후에 만찬을 갖는다.
          그리고 속죄일은 목욕이나 샤워를 할 수 없기에 속죄일 전에 먼저 정결 의식을 행한다.
          대속죄일 저녁이 되면 남자들은 키텔(Kittel)이라는 흰 예복을 입고 기도회로 모인다.
          저녁 기도회에서는 '콜 니드레(Kol Nidre) 기도'로 시작한다.
          그래서 대속죄일 저녁에 드리는 예배를 '콜 니드레'라고 부른다.

          막스 브루흐(Max Bruch)의 첼로 협주곡으로 유명한 '콜 니드라이'(Kol Nidrei, Op. 47: 신의 날: Day of Atonement)는 아람어인 '모든 서약들'(All Vows)이란 뜻의 '콜 니드레'(Kol Nidre)를 <히브리 선율에 의한 첼로, 관현악, 하프를 위한 아다지오>로 하프와 관현악이 함께 어우러지는 환상곡이다.

          콜 니드레 기도는 "모든 서약들"이라는 말 그대로 유대인들이 하나님 앞에서 실행하지 못한 모든 서약들을 "동이 서에서 먼 것처럼" 기억하지 않으시고 도말해주시기를 바라며 하는 기도이다. 이 예배를 드리는 동안 "우리가 해야 할 것과 하지 말아야 할 계명을 어긴 것을 용서하옵소서. 우리가 알고 지은 죄와 모르고 지은 죄를 용서해 주옵소서"라는 기도를 많이 한다. 특히 대부분 말로 지은 죄를 고백하는 것으로 '악한 혀'(라숀 하라아 Lashon ha-Raa)라는 뜻의 죄 즉 거짓 맹세하거나 악하게 말하거나 저주나 욕을 한 것들의 죄를 고백하는 기도이다.

          그 동안 나의 입에서는 어떠한 말이 나왔는가? 주님과 사람들에게 무언가 하겠다고 말로 약속을 해놓고 지키지 않은 것들은 얼마나 많은가? 화가 나서 내뱉은 말은 어떤 것들인가? 그러면서도 우리의 혀가 '악한 혀'가 아니라고 말할 수 있는가?

          7월 10일에는 오전 8-9시부터 회당에서 예배가 시작되며 오후에는 요나서를 낭독하는데, 니느웨 사람들이 회개하므로 하나님의 용서를 받은 것처럼 유대인들도 회개하며 용서를 구하므로 하나님으로부터 긍휼하심을 얻기 위함이다.

          대속죄일의 마지막 예배를 '네일라'라고 한다.
          이때 예배자들은 마지막으로 네일라 기도를 한다.
          그들은 마지막 기도의 문이 닫히기 전까지 하나님께서 그들을 용서해주시기를 간절히 바라는 마음으로 예배를 드리며 '테키야 그돌라'의 나팔 소리가 울려퍼지는 순간 모든 예배와 대속죄일이 끝난다.

          테키야 그돌라의 긴 나팔 소리는 금식이 끝났음을 선포하는 것이며 이때부터 유대인들은 죄의 용서함을 받은 기쁨을 갖고 5일 후에 있을 여호와의 절기의 가장 하이라이트인 장막절 축제를 준비하기 시작한다. 각자 집 앞에 초막(수콧)을 만들기 위해 종려나무 가지를 비롯한 초막에 필요한 것들을 나르며 마지막 심판날인 추수 때를 준비한다.

          여호와의 절기 중 가장 마지막 절기인 장막절은 안식일을 의미한다.
          장막절은 7번째 절기이며 안식일은 7번째 날이다.
          7은 완전 수이다.
          불완전한 인간(인간의 수는 6)이 하나님(하나님의 수 1)과 하나가 된 상태가 7이며 그것이 안식이다.
          그래서 하나님 안에 거하는 자만이 무시로 기도하며 범사에 감사할 수 있고 항상 기뻐할 수 있는 것이다. 감사절인 장막절에 신랑이신 그리스도와 결혼 잔치를 하게 되는 데 어찌 감사하지 않을 수 있으며 어찌 기뻐하지 않을 수 있으며 신랑과 대화를 안 할 수 있단 말인가?

          안식에 들어가 범사에 감사하는 사람은 진정으로 천국을 소유한 것이며 임마누엘 주님과 동행하는 것이며 지성소에 들어간 것이다. 지성소에는 세상의 것은 아무 것도 갖고 들어갈 수 없고, 화려한 대제사장의 옷도 입을 수 없고 오직 '성도의 옳은 행실'을 의미하며 '그리스도의 의'를 상징하는 '흰 세마포 옷'만 입고 '성도들의 기도'인 '향'과 '속죄할 피'를 갖고 들어갈 수 있다. 즉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기도와 선한 행실과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 외에는 없는 것이다.

          지금 내가 하고싶은 일은 무엇인가? 그것을 모두 중단할 수 있는가? 예수 그리스도 한 분 만으로 정말 만족하며 살아왔고 살고 있으며 살아갈 수 있는가? 나 스스로 얼마나 나를 괴롭게 할 수 있는가? 지금 내가 무엇을 버려야 하는가? 정말 버리기 싫은 것이 있는가? 그것이 무엇인가? 그것이 나의 우상이며 회개할 제목이다.

          "주 여호와 내가 말하노라. 네가 잿물로 스스로 씻으며 수다한 비누를 쓸찌라도 네 죄악이 오히려 내 앞에 그저 있으리니"(렘 2:22)

          우리는 우리를 스스로 깨끗케 할 수도 구원할 수도 없는 연약한 존재이다. 우리가 무엇을 하려고 하면 할 수록 '자기의 의'라는 더러운 때가 계속해서 추가될 뿐이다. 우리는 지성소에 들어가서 그리스도의 피뿌림을 받아야만 비로소 정결해질 수 있다. 그래서 우리에겐 속죄양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가 필요한 것이다.

          "곧 하나님 아버지의 미리 아심을 따라 성령의 거룩하게 하심으로 순종함과 예수 그리스도의 피 뿌림을 얻기 위하여 택하심을 입은 자들에게 편지하노니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더욱 많을찌어다"(벧전 1:2)

          유대인들은 다른 절기보다 대속죄일을 가장 열심히 지킨다. 그 이유는 그들의 행위를 기록한 책이 마지막으로 봉해지는 날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은 주께서 마지막으로 책을 봉하시기 전까지 최선을 다해 금식하며 기도하며 하나님의 긍휼을 기대하는 것이다. 그래서 대속죄일이 되기 40일 전부터 잘못한 사람들을 찾아다니며 용서를 구하는 것이다. 사람들에게 잘못한 것을 회개하지 않으면 대속죄일에 하나님께 죄를 용서해달라고 할 자격이 상실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예물을 제단에 드리다가 거기서 네 형제에게 원망 들을 말한 일이 있는 줄 생각나거든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 (마 5:23-24).

          그러나 안타까운 것은 속죄양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그들은 모른다는 것이다. 반면에 크리스천들 중에 대속죄일이 언제인지 아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고, 대부분 관심도 없다. 그래서 그 날에 대해 이야기를 들어보지 못한 사람이 허다하다. 심지어 목사들 중에는 대속죄일이나 여호와의 절기 이야기를 하면 이단처럼 취급하는 이들도 있다. 이 얼마나 통탄할 일인가? 하나님의 말씀에 가감하면서도 전혀 죄책감을 느끼지 못하는 이들이 너무 많다.

          "내가 이 책의 예언의 말씀을 듣는 각인에게 증거하노니 만일 누구든지 이것들 외에 더하면 하나님이 이 책에 기록된 재앙들을 그에게 더하실 터이요, 만일 누구든지 이 책의 예언의 말씀에서 제하여 버리면 하나님이 이 책에 기록된 생명 나무와 및 거룩한 성에 참예함을 제하여 버리시리라"(계 22:18-19).

          여호와의 절기는 예수 그리스도의 모형이며 그분을 제대로 알기 위해 예행 연습을 하는 리허설(성회)이다. 우리 크리스천은 그러한 리허설(성회)을 통하여 예수께서 오셨을 때에 그분이 신랑이신 예수 그리스도라는 것을 알았으나 유대인들은 그렇게 열심히 리허설을 하면서도 아직까지도 메시야를 기다리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제 대속죄일을 맞을 때마다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서 물과 피를 쏟으신 예수 그리스도를 기억하여 금식하며 회개하는 가운데 주님의 긍휼을 바라보아야 할 것이다. 많은 이들이 구약에 있는 말씀들과 규례들을 구시대의 유물로 착각한다. 제사제도는 십자가 사건으로 폐하여졌다. 그러나 구약의 모든 것이 폐하여 진 것이 아니다.

          대속죄일을 맞으며 요나서를 묵상하는 가운데 니느웨 사람들처럼 함께 회개의 자리에 나아가자. 그것이 지성소로 들어가는 것이다. 지성소로 들어가는 것은 목숨을 걸고 들어가는 것이다. 아론의 두 아들처럼 하나님의 지시하신 방법이 아닌 자기들 마음대로 들어갔다가는 죽는 곳이 지성소이다. 따라서 여호와 하나님과 그분의 말씀을 가볍게 여기지 말고 두렵고 떨림으로 구원의 길을 가자.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나 있을 때 뿐아니라 더욱 지금 나 없을 때에도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빌 2:12).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오라. 우리가 서로 변론하자. 너희 죄가 주홍 같을 지라도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요 진홍 같이 붉을지라도 양털같이 되리라"(사 1:18).



















          대속죄일은 연중 성정 행사의 클라이막스이다.
          대제사장이 혼자서 주관하는 제사
          아브라함의 천사가 대제사장을 돕는다.

          안식일 중의 안식일 / 거리에는 차량도 다니지 않는다(단, 앰블런스는 제외)
          TV.

          히브리서 9:7, 11-12

          7. 오직 둘째 장막은 대제사장이 홀로 일년 일차씩 들어가되 없이는 아니하나니 이 는 자기와 백성의 허물을 위하여 드리는 것이라.

          11. 그리스도께서 장래 좋은 일의 대제사장으로 오사 손으로 짓지 아니한 곧 이 창조에 속하지 아니한 더 크고 온전한 장막으로 말미암아
          12. 염소와 송아지의 로 아니하고 오직 자기 영원한 속죄를 이루사 단번에 성소에 들어 가셨느니라.

          대제사장의 대리 임명







          나팔절(레위기 23:23-25)


          23.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일러 가라사대
          24. 이스라엘
          자손에게 고하여 이르라 칠월 곧 그 일일안식일을 삼을찌니 이는 나팔을 불어 기념할 이요 성회라
          25. 아무 노동도 하지 말고 여호와께 화제를 드릴찌니.

          칠월 : 정확하게 번역하면 일곱번째 달 초하루
          왜냐하면 1년 12달에 초하루는 모두 12번 있기 때문이다.

          양각나팔 : 쇼파르(shofar)
          나팔절에 양각 나팔을 부는 방법 : 최대한 길게 소리를 내어 분다
          이러한 방법을 "테키야 하 그돌라" 라고 한다.
          예전에 한국에 민방위 훈련시 사이렌을 길게 울려 불던 방식과 비슷하다.

          유대인들은 "나팔절"을 "신년" "새해"라고 부릅니다.
          히브리어로 "로슈 하샤나"
          "로슈(머리)" "하샤나(한 해)" 즉 "한 해의 머리" 즉 한 해의 시작을 말합니다.

          2021 / Sep. 6-8 (Hebrew Year 5782)


          이스라엘에 거주하는 한국인들에게 "나팔절" 즉 "신년"과 관계된 우스개 이야기가 있습니다.
          한국인들은 구정 때 한 살, 신정 때 또 한 살, 그리고 나팔절 때 또 한 살을 먹으므로 일 년에 세 살을 먹는다고 합니다.

          나팔절은 신약에서 "예수님의 재림"에 해당합니다.
          레위기 23장은 이스라엘의 절기가 아니라 그리스도인에게는 여호와의 절기라고 하겠습니다.

          유월절 - 무교절 - 초실절 - 오순절 - 나팔절 - 속죄일 - 장막절

          나팔절에 사용하는 나팔은 수양의 뿔로 만든 나팔을 만든다.
          그 유래를 창세기 22장에서부터 시작합니다.
          2절에서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데리고....."
          나팔절은 사랑의 대상에 대한 우선순위가 결정되어야 한다.

          12, 13절에서 "....네가 네 아들 네 독자라도 내게 아끼지 아니하였으니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
          아브라함이 눈을 들어 본즉 한 수 양이 뒤에 있는데 뿔이 수풀에 결렸는지라. 아브라함이 가서 그 수양을 가져다가 아들을 대신하여 번제로 드렸더라."

          수풀에 뿔이 걸려 있는 수양은 신약에서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상징합니다.
          아들을 대신하여 즉 나를 대신하여, 우리를 대신하여......

          나팔절은 어떠 날인가?

          1. 천지창조가 완성된 날
           아담이 창조 된 날, 인간의 역사가 시작되는 날이다.
           인류 역사의 시작

          2. 인류가 심판을 받는 날

          3. 아브라함이 이삭을 모리아 산에서 바친 사건
           이삭 대신 죽은 수풀에 뿔이 걸린 수양.
           수양을 기념하기 위하여 수양의 뿔을 분다.
           양각 나팔을 불기 때문.

          일곱 번째달의 월삭이 나팔절이다.
          칠(안식, 샤밧)
          일 년은 12번의 월삭이 있다.

          월삭이 중요한 이유

          사무엘상 20:5
          다윗이 요나단에게 이르되 내일은 월삭인즉 내가 마땅히 왕을 모시고 앉아 식사를 하여야 할것이나 나를 보내어 제 삼일 저녁까지 들에 숨게 하고

          사무엘상 20:18
          요나단이 다윗에게 이르되 내일은 월삭인즉 네 자리가 비므로 네가 없음을 자세히 물으실 것이라.

          사무엘상 20:24
          다윗이 들에 숨으니라 월삭이 되매 왕이 앉아 음식을 먹을 때에

          이사야 1:13
          헛된 제물을 다시 가져오지 말라

          헛된 제물을 다시 가져오지 말라 분향은 나의 가증히 여기는바요 월삭과 안식일과 대회로 모이는 것도 그러하니 성회와 아울러 악을 행하는 것을 내가 견디지 못하겠노라.

          골로새서 2:16
          그러므로 먹고 마시는 것과 절기나 월삭이나 안식일을 인하여 누구든지 너희를 폄론하지 못하게 하라.
          Therefore do not let anyone judge you by what you eat or drink, or with regard to a religious festival, a New Moon celebration or a Sabbath day.


          나팔절과 생명책

          탈무드에서 나팔절이 되면 저 하늘 보좌에서 3권의 책이 펼쳐진다.
          1. 생명책 - 영원한 영생에 들어갈 사람

          2. 멸망의 책 - 죽음의 책, 영원한 멸망

          3. 중간 책 - 하는 것에 의해서 결정되는 것
          10일 후에 결정된다. 나팔절부터 10일 7월 10일이 속죄일이다.
          중간책에 있는 사람들은 이 기간동안 회개해야 한다.

          시편 69:28,
          저희를 생명책에서 도말하사 의인과 함께 기록되게 마소서.
          May they be blotted out of the book of life and not be listed with the righteous.

          출애굽기 32:32,
          생명책에 있는 목록에서 내 이름을 지워달라

          그러나 합의하시면 이제 그들의 를 사하시옵소서 그렇지 않사오면 원컨대 주의 기록하신 책에서 내 이름을 지워 버려주옵소서.
          But now, please forgive their sin--but if not, then blot me out of the book you have written.


          나팔을 부는 세 가지 목적

          1. 언약(계약) 시내산 언약 출 19장을 기억하기 위하여

          2. 사탄을 혼비백산하게 하기 위하여

          3. 죄의 잠에서 깨어 회개하도록

          * 모든 숫놈의 뿔 나팔을 불 수 있다.
          그러나 소의 뿔은 안 된다.
          출애굽기 32장 금송아지 우상 사건 때문에....

          양각나팔과 더불어 양 쪽에 은나팔(하초츠라)을 짧게 분다.
          성소 계단에서 쇼파르(한글성경에서 호각)

          시편 98:6

          나팔과 호각으로 왕 여호와 앞에 즐거이 소리할찌어다.
          with trumpets and the blast of the ram's horn-- shout for joy before the LORD, the King.



          나팔절 때 바치는 제물
          - 일곱번째 월삭

          월삭에 드리는 제물 : 소 2, 양 7, 수염소 1
          속죄일 : 10개의 제물을 추가적으로 드린다
          (황소 1. 수양 1. 양 7. 염소 1)

          나팔을 동문에서 분다.
          가운데 양각나팔(쇼파르) 길게
          양쪽에 호각(하초츠라) 짧게

          성전 꼭대기에 올라가서 다시 나팔을 분다.

          월삭을 어떻게 알 수 있는가?
          - 초승달을 본 2명의 증인들이 성전에 와서 보고한다
          - 3명의 증인이 필요하다(나팔절)

          감람산 꼭대기에서 봉화를 올린다.
          주후 350년에 달력을 만들어서 절기를 지킨다.
          사마리아 지역에 안렉산드리온(사마리아 지역에 위치)에서 봉화를 올려야 할 때 올리지 않으므로 유대력을 만들게 되었다.
           
          느헤미야 8:2

          칠월 일일에 제사장 에스라가 율법책을 가지고 남자, 여자 무릇 알아 들을만한 회중 앞에 이르러.
          So on the first day of the seventh month Ezra the priest brought the Law before the assembly, which was made up of men and women and all who were able to understand.

          칠월 일일 : 나팔절(일곱번째 달 초 하루)



          느헤미야 8:9-10

          백성이 율법의 말씀을 듣고 다 우는지라 총독 느헤미야와 제사장겸 학사 에스라와 백성을 가르치는 레위 사람들이 모든 백성에게 이르기를 오늘은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성일이니 슬퍼하지 말며 울지 말라 하고
          느헤미야
          가 또 이르기를 너희는 가서 살진 것을 먹고 단 것을 마시되 예비치 못한 자에게는 너희가 나누어 주라 이 은 우리 주의 성일이니 근심하지 말라 여호와를 기뻐하는 것이 너희의 힘이니라 하고.
          Then Nehemiah the governor, Ezra the priest and scribe, and the Levites who were instructing the people said to them all, "This day is sacred to the LORD your God. Do not mourn or weep." For all the people had been weeping as they listened to the words of the Law.
          Nehemiah said, "Go and enjoy choice food and sweet drinks, and send some to those who have nothing prepared. This day is sacred to our Lord. Do not grieve, for the joy of the LORD is your strength."

          단 것을 마시되 : 사과를 꿀에 찍어 먹는다.


          나팔절과 재림


          마태복음 24:31

          저가 큰 나팔소리와 함께 천사들을 보내리니 저희가 그 택하신 자들을 하늘 이 끝에서 저 끝까지 사방에서 모으리라.

          데살로니가전서 4:16

          주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로 친히 하늘로 좇아 강림하시리니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고.

          나팔절과 예수님의 시험

          요한일서 2:16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 좇아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 좇아 온 것이라.
          For everything in the world--the cravings of sinful man, the lust of his eyes and the boasting of what he has and does--comes not from the Father but from the worl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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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회와 절기(레 23:1~44)

          1~2절, 44절을 보시면 “성회를 여호와의 절기라”고 하셨습니다.

          절기는 신앙과 하나님께 돌릴 영광을 위하여 특별행사를 갖는 것입니다. 모형과 상징이 비유 교훈인 것처럼 깨닫게 하는데 유익이 있습니다. 그러나 모형과 상징을 실상보다 중히 여길 필요는 없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구약시대의 성회와 절기도 실상을 알게 하실 목적으로 주신 것임을 아셔야 할 것입니다.

          ① 1~8절은 “안식일, 유월절, 무교절에 대한 말씀”이고,
          ② 9~14절은 “첫 이삭을 드리는 행사”인데, 이것을 초실절(출 34:22)이라고도 합니다.
          ③ 15~21절은 “칠칠절 행사”이고,
          ④ 22절은 “가난한 자와 객을 위한 배려”이며,
          ⑤ 23~25절은 “7월 1일 나팔 부는 성회”이고,
          ⑥ 26~32절은 “7월 10일 속죄일 성회”이며,
          ⑦ 33~44절은 “7월 15일 초막절 행사”입니다.

          선민의 월력 개념을 살피면 출애굽한 달을 첫 달로 삼고(출 12:2), 그 달 10일에 유월절 제물을 준비했으며(출 12:3), 14일 해질 때에 잡아 유월절 양의 피를 문설주에 발랐으니(출 12:6), 그 14일 이 유월절 첫날이고(출 12:11), 그 다음 날부터 7일 동안 무교병을 먹는 날을 무교절이라고 합니다(출 12:18). 출애굽한 것은 유월절 밤이 지난 다음 날이었습니다(출 12:29~34, 37~41, 13:3). 1월 15일부터 출애굽 행군이 시작되었고, 안식일 용어는 출 16:25에서 만나를 받았을 때에 “오늘은 안식일이라” 하셨는데, 그때가 2월 15일(출 16:1)경이었습니다(마라, 엘림을 떠나고 만나를 먹을 무렵). 이 말씀을 드리는 이유는 1월 14일부터 21일까지의 유월절 기간이 첫 안식일(15일)부터 다음 안식일까지로 계산하였을 것으로 믿기 때문입니다. 그때부터 1주간 계획의 행사가 시작되어 지금까지 온 줄 압니다. 출애굽 당시의 아빕월(출 13:4, 신 16:1)을 1월로 시작하였고(양력으로 3, 4월에 해당), 왕정시대에 시브월(2월, 왕상 6:1, 37)과 에다님월(왕상 6월, 느 6:15), 기스르월(9월, 느 1:1, 슥 7:1), 데벳월(10월, 에 2:16), 스밧월(11월, 슥 1:7), 아달월(12월, 스 6:15, 에 3:7, 8:12)이 나온즉, 1년의 달 수는 12월인데 달의 날 수는 잘 알수 없습니다. 다만 유대력 1월을 양력 3월 15일~4월 15일로 추정하는 것입니다.

          1. 안식일, 유월절, 무교절(1~8절)

          이 절기는 출애굽할 때 시행하였지만(출 12:1~31) 여기에서 주신 계명은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지키라는 것(10절, 출 13:5)”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명에 의하여 하는 행사는 다 성회이고, 본 장에서는 6대 절기(유월절, 초실절, 칠칠절, 나팔절, 속죄절, 초막절)를 말씀하셨는데, 월삭(민 10:10)과 안식일은 절기에 들지 않습니다(3, 4절). 그리고 초실절이 곧 맥추절이며(출 23:16), 출 23:16의 수장절이 본문 22~25절에 해당하는 나팔절과 같은 것으로 사료됩니다. 수장절은 추수를 끝내고 연종에 하는 행사이기 때문입니다(절기상 연종은 추수를 끝낸 때임). 안식일에 대하여는 3절에서 “육일 동안 일하고 일곱 째 날은 무슨 일이든지(무노동을 강조한 뜻) 하지 말고 쉬라”고 하셨습니다(출 20:8~11). 4~8절에서 유월절(7일 중 첫날), 무교절(7일 중 6일간)의 말씀이 나옵니다. 유월절은 출애굽 전날 밤(문설주의 피, 애굽의 장자와 초태생 죽음)을 기념하는 뜻이고, 무교절은 누룩없는 떡을 먹으며 애굽을 탈출한 것을 기념하는 것입니다(15절). “첫날도 성회로, 7일도 성회로 모이라” 하셨는데, 이 날은 안식일과 겸하게 된 줄 압니다. 그리고 이 유월절을 기한에 미쳐(전) 공포하라(준비의 뜻)고 하셨습니다. 8절에 기록된 화제에 대하여는 민 28:16~25에 자세히 기록되었습니다.

          2. 초실절 행사(9~14절)

          이 시기는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첫 농사를 짓고 곡물을 거두었을 때 할 일입니다(10절). 안식일 이튿날에 첫 이삭 한 단을 제사장에게로 갖고 가서 제사장이 하나님 앞에 열납되도록 흔드는 것입니다. 그때에 1년 된 수양을 번제로 드리고, 다른 소제와 전제(힌 1/4의 포도주)도 함께 드립니다(11~13절). 14절은 “첫 소출을 하나님께 드리기 전에는 먹지 말라”는 뜻이고, “대대로 영원한 규례라” 하심은 하나님께 대한 감사를 영원히 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이 초실절이 다음 칠칠절을 계산하는 기점이 되는데, 이 날짜는 첫 곡식을 거두어 들일 수 있는 안식일 다음 날입니다. 영적 해석가들은 이 날을 예수님의 부활의 예표로, 그리고 칠칠절, 즉 오순절 요제를 성령 강림의 예표라고도 합니다.

          3. 칠칠절 행사(15~21절)

          15절에서 안식일 이튿날(초실절 행사일)부터 7안식을 지나는 날은 곧 50일 째 되는 날이기 때문에 오순절이라고도 하지만, 구약에서는 칠칠절로 말씀하셨고, 오순절이란 용어는 행 2:1에서 기록되었습니다. 16~17절에서 (그날에 고운 가루) 에바 2/10로 누룩을 넣고 만든 떡 두 개를 하나님께 첫 요제로 드리고(두 개의 의미는 알 수 없음), 18절에서는 “이 떡과 함께 1년 된…어린 양 일곱과 젊은 수소 하나와(늙은 소는 값이적음) 수양 둘을 그 소제, 전제와 함께 번제를 드리라(번제 규례 1장)”고 하셨습니다. “화제”는 불태운 것을 뜻하고, “향기로운 냄새”란 번제로 굽는 냄새를 뜻하는 것입니다. 또 19~20절에서 “수염소 하나로 속죄제를 드리고 1년 된 어린 수양 둘로 화목제를 드릴 것”은 레 3:1~17에, 20, 21절에서 드린 속죄제는 레 4:13~21에 준하여 드리는 것입니다. 17절에서 “누룩 넣은 떡을 만들어 드린다”는 것은 무교병과 대조되는 말씀인데, 새 소제(첫 이삭으로 만든 떡)를 드리는 제물로서 무교병(고난의 상징)의 입장에 머물지 않음을 상징하는 뜻으로 여겨집니다. 따라서 율법과 고난 상징의 시대가 복음(부활)과 성령의 시대로 전환될 것을 예고하신 의미라고 생각합니다. 오순절 성령 강림을 예고하시는 일이 아니고서야 구테여 칠칠절 다음 날 50일 째 되는 날을 성회로 열어 새 소제를 드리게 하실 이유가 있으셨을까? 하는 것입니다. 21절은 “그날도 안식일처럼 지키고 성회로 여기며…영원한 규례라(14절)”고 하셨습니다.

          4. 가난한 자와 객을 위한 배려(22절)

          이삭을 줍는 자와 배 고프게 지나가는 나그네는 항상 있는 것인즉 곡물을 벨 때 모퉁이까지 다 베지 말고 떨어진 것을 줍지 않게 하신 것은 가장 쉬운 방법으로서의 구제 행위라 할 것입니다. 예수님의 자선방식은 “자신이 필요 이상 갖지 않으시면서(고후 8:9) 구제할 때 은밀하게 하라(마 6:2~4)”는 것이었습니다.

          5. 7월 1일 나팔 부는 성회(23~25절)

          이 절기를 나팔절이라고 합니다.
          “7월 1일을 안식일, 또는 성회로 삼고 하나님께 화제를 드리라”고 하셨습니다.
          화제는 불태운다는 뜻인즉 규례대로(출 29:18, 레 1:9, 2:2, 신 18:1) 드리면 됩니다.
          왜 나팔을 불고 성회를 삼았을까요?
          “추수가 끝났은즉 가난한 사람들이 이삭을 주으러 가도 된다, 또 앞으로 10일 후면 속죄제 성회가 있은즉 준비하라”는 뜻으로 이해합니다.
          민 29:1~6을 참고하십시오. 백성을 다스리는 일정이 주밀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6. 7월 10일 속죄일(26~32절)

          속죄일 행사인즉 마땅히 속죄제를 드려야 할 것입니다. 회중을 위한 속죄제 규례는 레 4:13~21에 기록되었습니다. 본문에서 주신 말씀은 “7월 10일에 시행하라. 9일 저녁부터 준비하여 이튿날까지 안식하고 성회로 지켜라(26, 32절). 스스로 괴롭게 하고(죄를 생각하는 뜻) 하나님께 화제를 드려라. 속죄일인즉 일하지 말라(28절, 속죄가 먹고 사는 일보다 중요하다는 뜻). 스스로 괴롭게 하지 않는 자는(중심에 통회하지 않는 자, 시 51:17 참고) 백성 중에서 끊쳐질 것이라(29절). 이 날에 일하는 자는 멸절시키리라(30절). 아무 일도 하지 말라. 너희 거하는 각 처에서 대대로 영원히 지킬 규례라”고 하셨습니다. 회개하고 속죄 받는 행사에 참여하지 않는 자는 완악한 자로서 살아남을 수 없음을 알리는 엄격한 행사라고 할 것입니다. 이 행사는 레 16:5~22에서 “아사셀 양”이란 말씀으로 더 자세히 기록되었습니다.

          7. 초막절(33~44절)

          “7월 15일은 초막절이니 7일 동안 지키라(34절)”고 하셨습니다. “첫 날도 성회요, 아무 노동도 하지 말며(고용인들을 해방하는 뜻도 있음, 안식일처럼 지키는 뜻), 7일 동안 (매일) 화제를 드릴 것이요, 8일도 성회이며, 하나님께 드릴 거룩한 대회라(35~36절)”고 하셨습니다. 37~38절은 “초막절 뿐 아니라 다른 절기들을 지킬 때 미리 공포하여 준비하게 하고, 번제, 소제, 희생과 전제를 각각 그날에 화제로 드리고, 안식일 외에, 헌물 외에, 서원예물 외에, 낙헌예물 외에 드릴 것이라” 하시므로 이 초막절 행사를 다른 제사나 예물과 겸하지 않게 할 것을 명하신 것입니다. 39절은 “소산 거두기를 마친 때의 행사”이므로 감사절 의미가 있지만 더 큰 이유를 40~44절에서 말씀하셨습니다. 곧 “40년 동안 광야에서의 초막 생활을 기념하면서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는 것”입니다(신 16:13, 출 23:16을 참고하십시오). 출 23:16에서는 수장절이라고 하셨습니다. 수장절은 소출을 다 거둔 의미이고, 초막절은 광야의 초막생활을 기념, 전수, 감사하는 의미입니다. “첫 날에 아름다운 나무 실과와 종려가지, 무성한 가지, 시내 버들을 취하여(초막을 만들고) 출생자가 다 그 안에 거하며 너희 하나님 여호와 앞에 즐거워할 것이라(40절)” 하셨으니, 감사에는 예물에 앞서 즐거움이 있어야 합니다. 41절에서 “이는 내가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던 때에 초막에 거하게 한 줄을 너희 대대로 알게 함이라” 하셨으니, 초막에 거한 것도 감사할 일이요, 기념할 일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계획적으로 그렇게 하셨기 때문입니다. 이 말씀을 주신 때는 마라와 엘림을 거쳐(출 15:2~27) 신광야에 왔고, 만나와 메추라기를 먹었을 때, 즉 출애굽 2개월 15일 즈음입니다(출 16:1). 마라는 쓴물이고, 엘림은 단물입니다. 유교병은 굳은 떡이나 무교병은 부드러운 떡입니다. 칠칠절에는 “누룩을 넣어 먹으라(17절)”고 하셨습니다. 초막생활도 있었지만 가나안에 정착하는 생활도 있은즉 성도는 항상 소망 중에 살면서 고난도 취미와 낙으로 즐겨야 할 것을 교훈하신 것입니다(성령님 및 교리설교 9과 “성령 강림절을 지키는 정신”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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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과이곡(五果二穀)

          오순절의 의미

          "일곱주를 셀지니 곡식에 낫을 대는 첫날부터 일곱주를 세어 네 하나님 여호와앞에 칠칠절을 지키되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복을 주신대로 네 힘을 헤아려 자원하는 예물을 드리고"(신 16:9~10)

          곡식에 처음 낫을 대는 날이 바로 초실절입니다.
          이날은 예슈아께서 부활의 첫 열매로 부활하신 날이기도 합니다.
          이 초실절부터 계수하여 7주를 지나면 49일이고 그 다음날이 50일 이 날이 오순절입니다.
          이 오순절의 구속사적인 의미는 성화를 의미합니다.
          즉 구원받은 자가 거룩한 삶을 살아가는 성화의 과정을 말합니다.
          유월절에서 구원을 받고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다고 구원이 완성된 것이 아닙니다.
          구원받은 것은 시작이고 성화의 과정이 필요합니다.
          거룩한 삶을 살고 더 이상 죄짓지 않도록 살아야합니다.

          ​그렇게 살기 위하여 그 당시에 토라말씀을 주셨고 예슈아시대에는 성령을 주셨습니다.
          놀랍게도 이 오순절에 주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오순절에 주신 토라(율법과 계명) 와 성령의 역활은 무엇일까요?
          여기서 토라를 다 율법이라고 신약번역자들이 번역해놓았습니다.

          토라의 역활

          첫째, 죄를 깨닫게 합니다.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을 하리요. 율법이 죄냐 그럴수 없느니라. 율법으로 말미암지 않고는 내가 죄를 알지 못하였으니 곧 율법이 탐내지 말라 하지 아니하였더라면 내가 탐심을 알지 못하였으리라."(롬7:7)

          ​토라(율법)의 중요한 역할은 죄가 무엇인지 가르쳐주는 역할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세상사람과 똑같이 살면 죄를 짓고도 죄인지 알지를 못합니다. 세상 따라 살때는 탐내는 것이 죄인줄 알지 못하다가 토라를 보니까 탐내는 것이 죄라고 가르쳐주니까 죄인줄 압니다. 또한 동성애가 죄가 아니라고 세상은 말합니다. 그러나 성경의 가르침은 동성애는 죄라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그래서 그러한 죄를 짓지 않으려고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백성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처럼 토라는 죄를 알려주고 죄를 짓지 않도록 경고도 합니다.

          ​둘째, 선하고 의로운 삶으로 도와줍니다.

          "또 어려서부터 성경을 알았나니 성경은 능히 너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슈아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느니라.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하게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할 능력을 갖추게 하려함이라."(딤후3:15~17)

          ​이 당시의 성경은 구약성경을 말합니다. 왜냐하면 이 때는 신약이 나오지도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구약 말씀 전체인 토라와 선지서 시가서입니다. 여기서 토라, 모세오경이 중심입니다. 디모데는 이 성경이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고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함으로 의의 열매를 맺게 하며 또한 모든 선한 일을 행할 능력에 있기에 선한 열매를 맺게 한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오순절은 이스라엘에서 생산되는 7가지의 식물(보리, 밀, 석류, 포도, 무화과, 대추야자열매, 올리브)을 거두어 하나님께 드리는날이듯이 우리는 이 날에 성화의 열매 선하고 의로운 열매들을 이 오순절에 드리도록 하기 위해 토라말씀을 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백성들은 토라의 가르침으로 선한 열매 의의 열매를 맺도록 해야합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토라의 가르침대로 살지 못하고 불순종하고 죄를 짓고 토라말씀보다 유전과 전통을 가르치고 토라가 되시는 예슈아를 거부하였습니다. 예슈아는 토라 말대로 사셨고 토라를 완성하셨습니다. 친히 유월절 어린양이 되사 십자가에서 모든 죄를 짊어지고 죽으셨기 때문입니다. 또 최고의 법인 하나님사랑과 이웃사랑을 실천하심으로 모든 울법을 이루셨던 것입니다. "사랑은 이웃에게 악을 행하지 아니하나니 그러므로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니라."(롬13:10) 이와같이 예슈아는 선하고 의로운 삶을 살도록 우리에게 가르쳐 주기 위해 시내산에서 이 토라를 주셨습니다.

          ​성령의 역할

          첫째 말씀을 가르치고 생각나게 하십니다.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리라."(요14:26) 토라받은 오순절에 성령님이 오셔서 백성들이 성화의 과정을 걸어가도록 즉, 토라의 가르침에 따라 성공적으로 걸어가도록 모든 것을 가르치고 모든 말씀을 생각나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보혜사는 변호하고 보호하심을 말합니다.

          ​토라말씀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기록되었기 때문에 성령께서 하나님의 깊은 것이라도 통달하십니다. 그러므로 잘 모르면 성령님께 물어보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입니다. 성경에 기록된 말씀으로 응답하실 것입니다. 매년 오순절을 지내면서 자신의 성화 과정을 점검합시다. 또한 성령의 도움을 받아 구원의 완성을 향하여 죄를 짓지 않고 거룩한 삶을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되시길 축복합니다.

          ​들째 성령의 열매를 맺게 하십니다.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 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갈 5:33~23) 하나님의 오순절에 7가지의 소산물을 예물로 가져오라고 하셨습니다. 마찬가지로 성령님을 보내주신 후에는 우리에게 9가지의 성령의 열매를 맺어 드립니다. 어떻게 열매를 맺는가요?

          ​성령을 따라 살고 성령 충만함으로 토라의 가르침 따라 살 때에 맺는 열매입니다. 그러므로 성화의 과정을 성령님과 동행할 때 이러한 열매를 맺게 됩니다. 하나님은 구원받은 백성이 성령의 열매를 맺기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토라와 성령을 이 오순절에 보내주신 하나님의 뜻을 알고 거룩한 삶을 살아가길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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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초막절의 의미

          "너희 타작마당과 포도주틀의 소출을 거두어들인 후에 이레 동안 초막절을 지킬 것이요. 절기를 지킬 때에는 너와 네 자녀와 노비와 네 성중에 거주하는 레위인과 객과 고아와 과부가 함께 즐거워하되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택하신 곳에서 너는 이레 동안 네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절기를 지키고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 모든 소출과 네 손으로 행한 모든 일에 복을 주실 것이니 너는 온전히 즐거워할지니라."(신 16:13)

          이 초막절은 초막을 지어놓고 그 속에서 하나님이 광야를 잘 인도해 주심을 감사하고 축하하고 기뻐하며 파티를 하는 절기입니다. 7일간 이 기간 내내 맛있는 음식과 노래와 춤을 초막 안에서 즐깁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나라를 의미합니다. 즉, 완전한 구원을 이루는 천국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특이한 점이 있습니다. 초막절에 들어가기 전에 반드시 거쳐야 할 다른 절기가 있습니다.

          그것이 대속죄일입니다. 이 날은 금식하며 회개하는 날로서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는 날입니다. 물론 이전부터 회개를 하지만 이날은 특별히 하나님과의 관계와 다른 것에 흠이 있는지 살펴보면서 최종 회개하는데 그동안 성화의 과정을 거치면서 살아왔다 해도 완전한 의를 이루지 못함과 온전한 거룩함을 이루지 못하는 한계가 있기에 놀랍게도 이 대속죄일을 마련하여 이날에 십자가의 보혈로 모든 죄를 깨끗이 씻고 초막절로 들어가도록 하신 하나님의 은혜가 있다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중요한 것은 죄를 없애야 천국에 들어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절기의 사이클에서 구원의 완성인 초막절로 들어가기 전에 대속죄일에 온전히 회개하여 십자가의 보혈로 그동안의 죄를 씻고 초막절을 맞이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구속사적 관점으로 보면 초막절은 구원의 완성입니다. 성경은 신랑 되신 어린양 예슈아와 혼인잔치의 예표가 초막절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절기의 사이클에 따라 유월절은 어린양 예슈아를 통하여 구원을 받아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오순절은 말씀과 성령으로 구원을 이루어가는즉, 거룩해지는 성화의 과정을 거친 후에 가을 절기인 초막절에 들어가서 완전한 구원을 이루게 하는 계획이 들어있는 이 3대 명절은 하나님의 놀라운 구속사의 예표라는 것입니다.

          결론입니다. 이러한 3대 절기를 매년 지나면서 우리는 구원을 지키고 이루어가며 거룩한 삶을 살고 천국까지 이르는 것을 연습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절기의 사이클에 따라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되길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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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4-28-2021(수) 오후 7:00

          초실절(初實節) 레위기 23:9-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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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일러 가라사대
          10. 이스라엘 자손에게 고하여 이르라 너희는 내가 너희에게 주는 땅에 들어가서 너희의 곡물을 거둘 때에 위선 너희의 곡물의 첫 이삭 한 단을 제사장에게로 가져갈 것이요
          11. 제사장은 너희를 위하여 그 단을 여호와 앞에 열납되도록 흔들되 안식일 이튿날에 흔들 것이며
          12. 너희가 그 단을 흔드는 에 일년 되고 흠 없는 수양을 번제로 여호와께 드리고
          13. 그 소제로는 기름 섞은 고운 가루 에바 십분 이를 여호와께 드려 화제를 삼아 향기로운 냄새가 되게 하고 전제로는 포도주 힌 사분 일을 쓸 것이며
          14. 너희는 너희 하나님께 예물을 가져오는 그날까지 떡이든지 볶은 곡식이든지 생 이삭이든지 먹지 말찌니 이는 너희가 그 거하는 각처에서 대대로 지킬 영원규례니라.



          히브리 백성들이 지키는 명절은 교훈적이며 예언적입니다.
          유월절과 무교절에 이어서 초실절이라고 합니다.
          초실절은 첫 열매를 하나님께 바치는 절기라고 하겠습니다.
          첫 이삭은 보리 추수를 말합니다.
          밀 추수는 맥추절이란 절기를 지킵니다.

          히브리백성들이 바벨론에 포로가 될 때부터 흩어진 백성 즉 디아스포라가 되면서 절기를 지키는 것이 어려워졌습니다.
          이때까지는 초실절을 지키는 것에 어려움이 없었을 것입니다.
           

          절기를 지키는 날 / 안식일 다음 날 즉 부활의 날

          11. 제사장은 너희를 위하여 그 단을 여호와 앞에 열납되도록 흔들되 안식일 이튿날에 흔들 것이며

          안식일 이튿날에 흔들 것이며 - 주일

          영적 의미는 첫 열매는 인간의 부활의 생명이 되는 부활의 주님을 상징합니다.
          안식일 다음 날 부활하셨다.
          이 날은 곧 초실절이 갖는 영적 의미라고 하겠습니다.
          주일을 지키는 것도 이런 의미에서 바람직한 신앙이라고 하겠습니다.

          안식후 첫날 마리아와 몇 명의 여인들이 무덤으로 달려갑니다.
          그곳에서 무덤이 비었다는 것을 알고 부활의 소식을 전합니다.

          고린도전서 15:20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도다.

          첫 열매 : 첫 그 열매(the first fruit)

          한 단을 가져갈 것이요


          10. 이스라엘 자손에게 고하여 이르라 너희는 내가 너희에게 주는 땅에 들어가서 너희의 곡물을 거둘 때에 위선 너희의 곡물의 첫 이삭 한 단을 제사장에게로 가져갈 것이요
          12. 너희가 그 단을 흔드는 에 일년 되고 흠 없는 수양을 번제로 여호와께 드리고


          흔드는 것은 기쁨의 표현입니다.
          한 줄기가 아니라 한 단을 바쳤습니다.

          고린도전서 15:23
          그러나 각각 자기 차례대로 되리니 먼저는 첫 열매인 그리스도요 다음에는 그리스도 강림하실 때에 그에게 붙은 자요.

          그리스도에게 붙어 있는 자들이 함께 부활한다.
          부활은 예수님 한 분에게만 성립된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 속한 자들 모두가 부활할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사람은 출생 후에 세상을 떠나는 시간은 각 사람마다 달리 떠납니다.
          어린 생명, 갓난 아기, 소년, 소녀, 청년, 장년, 노년..............등
          그러나 모두 부활의 날에는 모두 함께 일어날 것입니다.

          데살로니가전서 4:13-14
          형제
          들아 자는 자들에 관하여는 너희가 알지 못함을 우리가 원치 아니하노니 이는 소망 없는 다른이와 같이 슬퍼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
          우리가 예수의 죽었다가 다시 사심을 믿을찐대 이와 같이 예수 안에서 자는 자들도 하나님이 저와 함께 데리고 오시리라 .

          흠 없는 양, 고운 가루, 포도주

          12. 너희가 그 단을 흔드는 에 일년 되고 흠 없는 수양을 번제로 여호와께 드리고.
          13. 그 소제로는 기름 섞은 고운 가루 에바 십분 이를 여호와께 드려 화제를 삼아 향기로운 냄새가 되게 하고 전제로는 포도주 힌 사분 일을 쓸 것이며

          현대인들의 적용
          - 첫째 것을 바치는 신앙( 첫째 것은 소중하고 의미가 있다)

          (예) 가인과 아벨의 제사 / 첫 열매와 첫 새끼
                 첫 새끼를 드린 양

                 가인은 땅의 소산(창세기 4:3)
                 아벨은 자기도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창세기 4:4)

          잠언 3:9-10
          네 재물과 네 소산물의 처음 익은 열매로 여호와를 공경하라.
          그리하면 네 창고가 가득히 차고 네 즙틀에 새 포도즙이 넘치리라 .


          1. 첫 월급을 예물로 바치는 신앙
          2. 사업장에서는 첫 수입을 예물로 바치는 신앙
          3. 첫 시간을 무릎을 꿇고 시작하는 신앙
          4. 첫 시간에 성경을 펴서 말씀을 읽고 시작하는 신앙
          5. 음식을 만들었을 때 목회자에게 먼저 가져다 드렸던 신앙
          6. 이웃의 영혼을 바칠 수 있는 신앙(직장, 이웃, 학교....)


          로마서 15:16
          이 은혜는 곧 나로 이방인을 위하여 그리스도 예수의 일군이 되어 하나님의 복음의 제사장 직무를 하게 하사 이방인을 제물로 드리는 그것이 성령 안에서 거룩하게 되어 받으심직하게 하려 하심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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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4-21-2021(수) 오후 7:00

          무교절(無酵節) 레위기 23:5-8


          정월 십사일 저녁은 여호와의 유월절이요
          이 달
          십오일은 여호와의 무교절이니 칠일 동안 너희는 무교병을 먹을 것이요
          그 첫날에는 너희가 성회로 모이고 아무 노동도 하지 말찌며
          너희는 칠일 동안 여호와께 화제를 드릴 것이요 제 칠일에도 성회로 모이고 아무 노동도 하지 말찌니라.

          출애굽 당시 상황과 무교절의 유래

          이스라엘 백성들이 유월절을 지키고 급히 애급에서 나오느라 누룩을 넣지 않은 떡을 가지고 나오면서 칠일간 무교병을 먹게 되었다(출애굽기 12:17~20).

          유월절 밤에 애급 앙 바로가 장자를 멸하는 재앙을 당하고 모세와 아론을 불러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데리고 떠나라고 하였다(출애굽기 12:30~31).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가나안으로 출발한 후에 애급 왕 바로의 군대에게 쫓기기 시작하여 홍해 바다를 건너는 7일 동안의 고생한 날들을 기억하기 위한 절기이다(신명기 16:3).

          유교병을 그것과 아울러 먹지 말고 칠일 동안은 무교병 곧 고난의 떡을 그것과 아울러 먹으라 이는 네가 애굽 땅에서 급속히 나왔음이니 이같이 행하여 너의 평생에 항상 네가 애굽 땅에서 나온 을 기억할 것이니라.

          그래서 무교병을  '고난의 떡'이라고도 불렀다.

          구약 시대의 무교절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하나님의 백성들이 지켜야 할 율법을 알려 주시면서 15일부터 7일동안 무교절임을 선포하셨다(레위기 23:6~8). 애급에서 나온 것을 평생 기념하기 위해서 무교병을 먹으라는 율법(신명기 16:3~8)에 따라서, 오늘 날에도 유대인들은 무교병을 먹는다.

          3. 유교병을 그것과 아울러 먹지 말고 칠일 동안은 무교병 곧 고난의 떡을 그것과 아울러 먹으라 이는 네가 애굽 땅에서 급속히 나왔음이니 이같이 행하여 너의 평생에 항상 네가 애굽 땅에서 나온 을 기억할 것이니라>
          4. 그 칠일 동안에는 네 사경 내에 누룩이 보이지 않게 할 것이요 또 네가 첫날 해 질 때에 제사드린 고기를 밤을 지내어 아침까지 두지 말것이며
          5. 유월절
          제사를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주신 각 성에서 드리지 말고
          6. 오직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 이름을 두시려고 택하신 곳에서 네가 애굽에서 나오던 시각 곧 초저녁 질 때에 드리고
          7.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택하신 곳에서 그 고기를 구워먹고 아침에 네 장막으로 돌아갈 것이니라.
          8. 너는 육일 동안은 무교병을 먹고 제 칠일에 네 하나님 여호와 앞에 성회로 모이고 아무 노동도 하지 말찌니라

          구약에서 무교절을 지키는 장면

          1. 출애굽 당시 모세와 이스라엘 백성들이 지킨 무교절(출애굽기 12:17)

          2. 솔로몬 시대 무교절 지키는 무겨절(역대하 8:13)

          3. 히스기야 시대 남유다에서 지킨 무교절(역대하 30:13)

          4. 요시아 시대 남유다에서 지킨 무교절(역대하 35:17)

          5. 바벨론 포로 시절에 지킨 무교절(에스라 6:22)

          구약 무교절 예법

          1. 무교절 첫날과 끝날 성회를 열고 아무 노동도 하지 않음(레위기 23:7)
          2. 무교절 절기 7일간 무교병을 먹음(레위기 23:6)
          3. 무교절 절기 7일간 집에서 누룩을 제거(출애굽기 12:19)

          신약 시대의 무교절

          이스라엘 백성들이 유월절을 지키고 고난을 받은 것처럼, 예수님도 최후의 만찬으로 많이 알려져 있는 유월절을 지키시고 무교절(니산월 15일)에 십자가에 달리는 고난을 받으셨다.

          초대교회 성도들은 신랑을 빼앗길 날에는 금식하라는 가르침대로 무교절에 금식으로 고난에 동참했다.

          그러나 신랑을 빼앗길 날이 이르리니 그 날에는 금식할 것이니라

          그리고, 신약성경에 무교절에 대한 기록이 있다.

          우리는 무교절 후에 빌립보에서 배로 떠나 닷새 만에 드로아에 있는 그들에게 가서 이레를 머무니라

          신약에서 무교절을 지키는 장면

          신약 무교절 예법

          현대 이스라엘에서 무교절

          무교절은 7일 간의 휴일이며, 첫날과 마지막 날은 법정 공휴일로, 휴일 식사, 특별기도 서비스가 진행되며 그날에는 일을 하지 않음으로써 하나의 성일로 기념된다. 그리고 이스라엘이 아닌 외국에 거주하는 유대인들도 유월절을 포함하여 8일 동안 축제를 기념한다.

          카라이테 유대교인들과 사마리아인들은 다른 종류의 유대력을 사용하는데,이 달력은 종종 현대의 유대력과 하루나 이틀씩 차이가 발생한다. 예를 들어, 2009년에 일반 유대교에서 사용한 유대력의 니산월 15일은 4월 9일에 해당하는 반면, 카라이테 유대교인들과 사마리아인들이 사용한 달력에서 아빕월(=니산월) 15일은 2009년 4 월 11일에 해당한다. 카라이테 유대교인과 사마리아인유월절은 하루 동안 진행되며 연이어 6일 간의 무교절 축제가 이어진다.

          유월절과 무교절 날짜 논란

          많은 이스라엘 사람들이 10일부터 유월절과 무교절 준비를 같이 시작하고 날짜도 하루 차이이고(유월절은 14일, 무교절은 15일로 부터 7일간), 봄철 대표 절기가 무교절이다 보니, 유월절과 무교절을 흔히 혼동한다.

          유월절 다음날인 15일부터 7일간 무교절로 지내며 누룩을 넣지 않은 빵을 먹으며 15일과 7일째에 성회를 가진다.(레위기 23:6~8)
          원래 이 두 축제는 별개의 축제로 취급되었으나 누룩을 넣지 않은 빵이 노예 생활에 대한 기억이며 죄악으로부터 정결하게 된다는 것을 의미하는데다, 실질적으로 무교절에 쓸 누룩을 넣지 않은 빵을 만들기 위해서는 유월절 전부터 준비해야 했으므로 점차 하나의 절기로 여겨졌다.

          참고) 무교절과 유월절이 같은 절기이다는 주장과 사실 확인

          출애굽기 12장 내용과 레위기 23장 내용이 일부 차이가 있어 결국 무교절과 유월절은 같은 절기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너희는 무교절을 지키라 이 날에 내가 너희 군대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었음이니라 그러므로 너희가 영원한 규례를 삼아 이 날을 대대로 지킬지라 정월에 그 달 십사일 저녁부터 이십일일 저녁까지 너희는 무교병을 먹을 것이요 칠 일 동안은 누룩을 너희 집에 있지 않게 하라 무릇 유교물을 먹는 타국인이든지 본국에서 난 자든지 무론하고 이스라엘 회중에서 끊쳐지리니 너희는 아무 유교물이든지 먹지 말고 너희 모든 유하는 곳에서 무교병을 먹을지니라

          출애굽기 17절 초반에 보면, "무교절을 지키라"는 내용이 있고, "십사일 저녁부터 이십일일 저녁까지 무교병을 먹으라"는 내용이 존재한다. 무교절은 명칭에서 비롯된 것처럼, 무교병을 먹는 날로 알려져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19절에 보면, "칠 일 동안은 누룩을 너희 집에 있게 않게 하라"고 적혀 있다. 그러므로 14일부터 무교절이 시작하므로, 유월절은 무교절에 포함된 비 독립 절기라는 주장이다.

          십사일부터 이십일일은 팔일에 해당한다. 8일간 무교병을 먹게 되는 이유는 다음과 같다.

          14일 저녁 유월절에는 양고기와 무교병과 쓴 나물을 먹으라고 하셨다. (참고: 영문 위키 Passover Seder)

          이달 십사 일까지 간직하였다가 해질 때에 ... 그 밤에 그 고기를 불에 구워 무교병과 쓴 나물과 아울러 먹되 ... 손에 지팡이를 잡고 급히 먹으라 이것이 여호와의 유월절이니라

          15일부터 21일(칠 일)은 무교절에는 무교병을 먹으라고 하셨다.

          기한에 미쳐 너희가 공포하여 성회로 삼을 여호와의 절기는 이러하니라 정월 십사일 저녁은 여호와의 유월절이요 이 달 십오일은 여호와의 무교절이니 칠 일 동안 너희는 무교병을 먹을 것이요

          즉, 유월절날 무교병을 먹게 되어 있는 절기 내용 때문에 유월절과 무교절이 같다고 여기는 것이지, 유월절은 무교절과 같지 않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무교절 The feast of Unleavened Bread

          출애굽기 12:15
          너희는 칠일 동안 무교병을 먹을지니 그 첫날에 누룩을 너희 집에서 제하라 무릇 첫날부터 칠일까지 유교병을 먹는 자는 이스라엘에서 끊쳐지리라.

          1.  무교절(無酵節)의 의미   

          무교병(無酵餠)은 히브리어 ‘맛차’, 헬라어 ‘아쥐모스’로, 누룩이 없는 떡을 말합니다.
          한자로는 ‘없을 무(無), 술괼 교(酵), 떡 병(餠)’(창 19:3)이며,
          반죽을 부풀게 하는 누룩을 넣지 않고 만든 넓적하고 얇은 빵입니다.
          무교병은(출 12:15) 주로 긴급한 상황 속에서 만들어 먹었으며(출 12:33-34, 39, 삼상 28:24-25),
          “고난의 떡”으로도 불렸습니다(신 16:3).

          2. 무교절을 지키는 방법   

          무교절은 유월절이 끝난 직후인 1월 15일부터 21일까지 7일간 지키는 절기입니다(출 12:18, 레 23:5-8).
          7일 동안 집안에 누룩을 없애고 누룩을 넣지 않는 떡(무교병)을 먹으며 지내는데, 이는 성도의 성별된 생활을 상징합니다.
          특별히 “그 첫날에 누룩을 너희 집에서 제하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출 12:15).   

          유대인들은 니산월(태양력 3-4월)이 되면 유월절 전에 온 집안의 누룩을 제거하는데, 이 행사는 깊은 구속사적인 의미를 함축하고 있습니다.
          유월절이 오기 며칠 혹은 몇 주 전부터 대청소를 합니다.
          카펫트도 청소하고 옷이나 침구, 커튼 등도 세탁하고, 집안에 있는 먼지를 샅샅이 제거합니다.
          주머니까지도 일일이 뒤집어서 털어 냅니다.
          너무 낡고 더러운 것들은 새 것으로 교체합니다.
          가정은 물론이고 각 건물마다 곰팡이와 먼지를 완전히 닦아 내는 대청소로 한바탕 소동이 벌어집니다.
          그리고 마을마다 불을 피워 남아 있는 누룩들을 태우고, 식기들과 조리 도구들도 끓는 물로 소독하여 누룩의 흔적조차 모두 없앱니다. 특히 유월절 전날 저녁에는 누룩을 제거하는 일이 그 절정에 이릅니다.

          누룩의 영적 의미     

          1. 잘못된 교훈(wrong teaching) /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의 교훈    

          마태복음 16:6
          예수께서 이르시되 삼가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의 누룩을 주의하라.

          마태복음 16:11-12
          어찌 내 말한 것이 떡에 관함이 아닌 줄을 깨닫지 못하느냐 오직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의 누룩을 주의하라.
          그제야 제자들이 떡의 누룩이 아니요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의 교훈을 삼가라고 말씀하신 줄을 깨달으니라.

          마태복음 16:6, 11을 볼 때,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의 누룩을 주의하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막 8:15).
          이 누룩은 바로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의 교훈”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마 16:12).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은 율법을 문자적인 의미로 지키려고 노력했습니다.

          이와 같은 노력에 대해서 예를 들어 말씀하시기를 "간음하지 말라"는 율법을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는 자마다 이미 간음하였다"고 하셨습니다. 잘못된 교훈은 행동으로 나타난 것만 죄라고 가르쳤으나 예수님께서는 행동하기 이전의 마음과 생각을 주의하라고 하셨습니다.

          또 다른 예를 들면 안식일에 가축이 웅덩이에 빠져 있을 때 만일 가축이 죽을 것같으면 끄집어내야 합니다.
          그러나 가축이 죽지 않을 것같으면 안식일이 지난 후에 웅덩이에서 꺼내야 합니다.

          길을 가던 제자들이 안식일이 밀 이삭을 잘라 먹었을 때 바리새인들은 당신의 제자들이 안식일에 하지 못할 일을 한다고 합니다.
          그 때 예수님께서는 다윗이 시장하여 진설병을 먹었다.
          또 안식일에 제사장들이 성전 안에서 안식을 범하여도 죄가 없다는 것을 율법에서 읽지 않았느냐?
          나는 자비를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않는다.
          인자가 안식일의 주인이라고 하셨습니다.

          2. 외식(hypocrisy) /

          누가복음 12:1
          그 동안에 무리 수만 명이 모여 서로 밟힐만큼 되었더니 예수께서 먼저 제자들에게 말씀하여 가라사대 바리새인들의 누룩 곧 외식을 주의하라.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바리새인들의 누룩 곧 외식을 주의하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외식(外飾)은 겉만 번지르르하게 꾸미는 것으로, 속과 겉이 다른 것을 말합니다.

          마태복음 15장
          제자들이 손을 씻지 않고 떡을 먹는 것을 본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장로의 유전을 지키지 않느냐?
          부모를 공경하라고 하였으나 하나님께 드렸다고 하면 부모를 공경할 것이 없다며 너희 유전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폐한다고 하셨습니다.
          입술로는 하나님을 공경한다고 하면서도 마음은 내게서 멀다고 하셨습니다.

          3. 음행(sexual immorality) /    

          고린도전서 5:1
          너희 중에 심지어 음행이 있다 함을 들으니 이런 음행은 이방인 중에라도 없는 것이라 누가 그 아비의 아내를 취하였다 하는도다.

          고린도 교회에 음행이 있었는데, 이것은 누룩과 같아서 온 교회에 금방 퍼져 나가고 있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 ‘적은 누룩’이 온 덩어리에 퍼지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고 책망하면서, ‘묵은 누룩, 괴악하고 악독한 누룩’을 내어버리라 즉 누룩이란 죄악을 의미합니다.

          고린도전서 5:6-8
          너희의 자랑하는 것이 옳지 아니하도다 적은 누룩이 온 덩어리에 퍼지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누룩 없는 자인데 새 덩어리가 되기 위하여 묵은 누룩을 내어버리라 우리의 유월절 양 곧 그리스도께서 희생이 되셨느니라.
          이러므로 우리가 명절을 지키되 묵은 누룩도 말고 괴악하고 악독한 누룩도 말고 오직 순전함과 진실함의 누룩 없는 떡으로 하자.

          누룩의 결과 / 죽음(death) 로마서 5:1, 6:23

          죽음은 모든 것을 썩이고, 냄새를 풍기고 이용이 불가능하게 하기 때문이다.
          그 같이 누룩도 같은 작용을 한다.
          그리고 죽음은 죄의 댓가요, 악의 열매이다(로마서 5:21, 6:23).

          로마서 5:21
          이는 죄가 사망 안에서 왕노릇 한 것 같이 은혜도 또한 의로 말미암아 왕노릇 하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생에 이르게 하려 함이니라.

          로마서 6:23
          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이니라.

          누룩 / 쥐메 zuvmh, 2219

          zuvmh, 2219(zyme: 쥐메). 효모, 누룩 leaven.

          zumovw, 2220(zymoo: 쥐모오). 발효시키다 ferment.

          azumo", 106(azymos 아쥐모스). 누룩 없는 unleavened.

           

          1. 고전 헬라어 문헌.

           

          쥐메(zyme:)는 아리스토텔레스(주전 4세기)로부터 텝투니스 파피루스(Tebtunis Papyri; 주후 2세기)에 이르기까지 세속 헬라어에 나타난다. 쥐모오(zymoo:)는 히포크라테스(Hippocrates: 주전 5세기)의 글에서 처음 사용된다. 누룩은 곡식을 발효시킬 때 쓰이는 것으로 이스트가 아니라 오래 되고 시큼해진 가루반죽이다. 이것을 저장해 두었다가 즙을 첨가하여 발효소가 되게 만든 후, 새 가루 반죽에 “넣어”(13:33; 13:21) 그 속으로 스며들고 가루반죽이 부풀도록 하는 것이다. 로마 국가 제의(祭儀)에서 플라멘 디알리스(Flamen Dialis)는 누룩과 접촉해서는 안 되었다. 그 이유는 플루타르크(Quaestiones Romanae 109)의 주장에 따르면, 누룩이 약하게 하고 시큼하게 하고 부패시키기 때문이다.

           

          구약성경

           

          1. 쥐메(zyme:)는 70인 역본과 요세푸스의 글 가운데 절기(축제) 및 제사 규정과 관련된 제의 문맥(cultic contexts)에서 문자적으로 사용된다(예: 12:15; 12:19; 16:3; 요세푸스, Ant. 3, 252이하). 그것은 유대 의식에 있어서 반드시 금기는 아니었다. 누룩은 화목제의 감사희생에서는 사용되었으나(7:13), 불로 태워드리는 소제에서는 사용이 금지되었다(2:11; 6:17). 매년 유월절과 무교절 예식 때에는, 모든 누룩은 니산월 14일 하루 동안에 전 유대 가정에서 하나도 남김없이 제거되었고, 유대인들은 그날 저녁부터 7일 동안 오직 무교병만을 먹으며(20:14; 20:20) 애굽에서 급히 도망쳐 나온 것을 기념하였다(12:34; 12:39). 이러한 춘계 대청소는 제의 의식이었지만, 한편 그것은 신 누룩을 계속 사용함으로써 야기되는 연속적인 전염병 발생을 막고자 하는 위생상의 목적을 갖고 있다(C. L. Mitton, “Leaven”, ExpT 84, 1972-73, 339이하).

           

          2. 비유적으로 누룩은 랍비 전승에서 서로 다른 여러 가지 의미들을 갖는다. 랍비 알렉산더는 그것을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에 대한 인간적인 억제를 나타내는 은유로서 사용하였다(I. Abrahams, Studies in Pharisaism and the Gospels, I, 1917, 52이하). 반면에 랍비 히야 바 압바(Rabbi Chiyya bar Abba)는 토라(율법)를 지키는 이스라엘 백성을 그 능력으로 다시 하나님에게로 인도할 '토라'를 누룩으로 묘사하였다(SBI 728). 필로(Philo) 역시 그것에 전이된 여러 가지 다른 의미들을 부여하였다. 한편으로, 그것은 과장된 오만함, 탐닉 및 허식을 상징하며(Quaest. in Exod, 1, 15; 2, 14), 다른 한편으로 그것은 완벽한(영적) 음식물과 행복한 기쁨을 나타낸다(Spec. Leg. 2, 185).

           

          신약 성경

          1. 쥐메(zyme:)와 쥐모오(zymoo:)

          공관복음서와 바울 서신에 나타난다.
          각각의 경우는 문학적 표현 즉 비유, 은유, 격언(잠언) 및 상징에 속한다.
          비록 학자들 가운데에는 신약성경에서 “누룩은 전염병처럼 퍼지는 악 영향을 표상하기 위하여 상징적으로 사용된다”고 주장하는 이들도 종종 있기는 하지만, 다양한 용례들의 요점은 문맥에 따라 다르다(C. L. Mitton, Op. cit., 342).

          (a) 비유, 13:3313:21에서는, 예수의 말씀과 사역에서 보여지는 하나님의 → 왕국 Kingdom이 눈에 띄이지 않지만 영속적으로 팽창한다는 사실이 반죽 전체에 스며들기까지는 그 속에 감추어져 있는 누룩에 비유되고 있다.

          오데버그(H. Odeberg)는 이 비유를 악에 대한 경고로 해석하며(Herren Kommer, 1962, 199-201),
          미톤(C. L. Mitton)은 영향력 있는악의 힘과 비교하는 것이라고 말한다(Op. cit., 341).
          그렇지만 이 비유 앞에 있는 겨자씨 비유의 요점은 적은 것에 의한 팽창 또는 성장이다(참조: 고전 5:6의 경구).
          도마 복음서는 누룩을 비유적으로 사용하면서 그것의 팽창하는 성질을 강조한다(p.1-525*) (B. Gartner, The Theology of the Gospeis of Thomas, 1961, 230이하).

          마태와 누가의 요점은 은밀하고 신비한 침투에 의한 팽창이며, 악의 영향력은 아닌 것으로 보여진다(B. Gerhardsson, “The Seven Parables in Matthew 13”, NTS 19, 1972-73, 22이하). 반죽이 의미하는 것이 사회의 문화인지 아니면 지역적 세상(orbis terrarium)인지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시사된 바가 없다.

          (b) 은유, 8:15에서 누룩은 제사들이 조심해야 하는 바리새인과 헤롯('헤롯당'의 다른 표현임)의 속성을 가리킨다.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을 경계하라는 내용의 16:11이하에서는 이 은유가 교훈으로 해석되며, 바리새인들만이 언급되고 있는 12:1에서는 '외식' hypocrisy으로 설명된다. 몇몇 학자들(예: V. Taylor, The Gospel According to St. Mark, 1953, 365)의 견해에 따르면, 그 훈계가 암시하는 바는 누룩이 악한 어떤 것을 지시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반드시 그러한 것은 아니다(H. Windisch, TDNT Ⅱ 906). 만일 바리새인들이 후에 랍비 히야 바 압바(위의 '구약성경' 2를 보라)가 주장한 것과 유사한 주장을 율법(토라)에 대해서 한다면, 마가복음에 설명되지 않은 경고는 설명 없이도 이해되었을 것이다. 뿐만 아니라 이 경우에 있어서 마태는 기독교인 대중에게 편지를 하면서 누가와 마찬가지로 그 은유를 올바로 해석하였다. 왜냐하면 바리새인의 율법 준수가 예수님 보시기에는 더 이상 활력에 찬 믿음이 아니라 가면이었기 때문이다(참조: 6:2이하; 23:13).

          (c) 격언(잠언). 고전 5:65:9에서 바울은 “적은 누룩이 온 덩어리에 퍼진다”는 말을 한다.
          형식에 있어서는 잠언(격언)이지만, 바울 외에는 다른 곳에서 잠언으로 사용된 예를 찾아볼 수 없는 이 말들은 기독교 교회에서 누룩의 비유와 관련되어 있었을 것이다. 빈디쉬(Windisch)는 예수께서 격언의 요점을 비유의 형태로 승화시키셨다고 생각한다(Op. cit., 905). 그러나 그 비유가 바울을 제외하고 복음의 전승형성 이전에 존재했었다는 증거가 없으므로, 비유로 인하여 격언이 교회 내에 생겼을 가능성이 있다. 그리고 다른 경우에 있어서도 공관복음 전승이 신약서신들의 소재에 영향을 준 것으로 보인다(참조: H. Riesenfeld, The Gospel Tradition and its Beginnings, 1957, 15). 고린도전서에서의 그 격언은 공동체 안에 범법자가 계속 존재함으로써 공동체가 범법의 죄를 짓게 된다(고전 5:1)는 내용을 상징적으로 나타내며, 갈라디아에서의 비유적 표현은 회중의 이해(판단)에 미치는 거짓 교사의 영향력을 가리킨다.

          (d) 상징. 고전 5:7에서 바울은 공동체에게 “묵은 누룩을 내어버리라”고 권면했다.

          이것은 범죄자를 축출하라(고전 5:13)는 명령이거나 죄와의 연합에 대한 “자랑”을 버리라는 훈계일 것이다.
          명령의 근거는 유월절 → 어린 양 Lamb 그리스도께서 희생당하셨다는 것과,
          기독교인들은 “누룩 없는” 자들이라는 사실,
          그리고 명절은 누룩(곧 악과 악의)를 내어버리고 누룩 없는 떡(곧 순전함과 진실함)을 함께 나눔으로써 지켜야 한다는 것이다(우화가 아닌, A. T. Hanson, Studies in Paul's Techique and Theology, 1974, 112이하).

          이 상징은 유월절 의식을 상기시키며 기독교가 그리스도를 유월절 → 어린 양 Lamb(19:14; 19:31; 벧전 1:19)과 동일시한 것을 기억케 한다. 유대인들은 유월절 음식을 먹기 전에 누룩을 내버렸다. 이와 마찬가지로 기독교인도 누룩을 내버려야 하는데, 그 이유는 유월절 희생이 이미 일어났기 때문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기독교인은 하나님에게 받아들여지게 되고 하나님에 의해 새롭게 된다(고전 6:11). 이것이 바울의 윤리적 교훈의 전형적인 예이다. 이 윤리적 교훈에 따르면 기독교인을 위하여 그리스도 안에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행동(직설법으로 표현되었다)은 그리스도와 같은 삶을 살라는 권면의 근거(명령법으로 표현되었다)이니 하나님이 신자 안에서 역사할 때 악을 버리고 선을 좇는 것이다. 이 밖의 다른 예들을 찾아볼 수 있는 구절은 6:1; 고전 6:19이하; 그리고 2:20-4:1 등이다.

          2. 아쥐모스(azymos)는 '누록 없는' unleavened을 뜻하며, 고전 5:7이하(위의 1. (4)를 보라)의 경우를 제외한 신약성경의 다른 곳에서는 복수 형태의 '타 아쥐마'(ta azyma)로 나오는데, 이는 '무교(병)절'을 의미한다.이것은 본래 아빕월에 지켜지던 일종의 추수감사절이었는데(23:14-17), 유월절 의식의 일부가 되었다. 후자는 니산월 15일부터 21일까지 행해졌지만, 14:12에서 볼 수 있는대로, 니산월 14일에 시작되는 것으로 정해져 있었다(Josephus, Ant. 2, 15, 1; 14, 2, 1). 유대인들은, 22:1이 보여주는 바와 같이, 언제나 유월절을 무교절과 동일시하였다(45:21; Josephus, War, 2, 10). (p.1-526*) - G. T. D. Angel.

          → 떡 Bread, → 절기 Feast, → 굶주리다 Hunger, → 희생제사 Sacrifice.

          O. T. Allis, “The Parable of the Leaven”, EQ 19, 1947, 254이하; Arndt, 340; J. P. Lewis, “Leaven”, ZPEB Ⅲ 901이하; Liddell-Scott, 757; C. L. Mitton, “Leaven”, ExpT 84, 1972-73, 339-42; H. Windisch, zym? etc., TDNT Ⅲ 902-6








          "떡"은 주님이시다.
          요한복음 6:22-29
          나는 생명의 떡이라"고 했다.
          그러므로 누룩없는 떡은 예수 그리스도는 죄와 악이 없을 뿐 아니라 죽음이 그를 주장하지를 못하고 다스릴 수 없음을 의미한다.
          예수 그리스도에게는 생명과 부활의 능력만이 작용한다.
          그러기 때문에 죽음에서 부활하셨다.
          즉, 주님은 의롭고 거룩하실 뿐만 아니라 생명의 근본이심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그 떡을 먹는 이스라엘 자신들에게 의롭고 거록함만이 아니라 생명이 주어지는 것이다.
          그 이유는 "그 거룩한 떡에 접촉된자는 거룩하여 진다"는 레위기의 말씀에 근거한 것이다. 그렇다면 이것은 신약시대에 제2이스라엘 되는 성도가 생명의 떡이 되시는 주님과 영적인 관계를 가질 때, 주님의 십자가의 공로를 힘입을 때, 의롭고 거ㄹ함만이 아니라 영생을 얻게 됨을 의미한다.그러므로 천하 다른 이름으로 구원이 없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 안에만 있다. 그 구원에는 칭의,거룩함, 생명이 있다. 그것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 안에만 있다. 그 구원에는 칭의,거룩함,생명이 있다. 그것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믿는 자 안에 주어지는 것이다 (요6:39-54,롬8:10-23,고전15:12-57).그러므로 요한복음 6장 22-29절에 주님은 자신이 생명의 떡이 되심을 말씀했다. 우리가 주의할 것은 이 무교절은 1주간 계속됨이다. 그 첫날과 마지막 날에 성회로 모이고, 다음 둘째 날에서 여섯째 날까지 5일간은 일을 했다. 이 날에 무슨 일을 했을까? 이 날에 한 일은 레위기 23장 9-14에 의하면 초실절을 지켰다. 즉 이스라엘이 처음 익은 보리단을 거두어 하나님께 바친 것이다. 그러므로 이날은 하나님을 위한 일을 하는 날이다. 위 성경에서 하나님께 드림이 된 처음 익은 곡식단은 무엇인가?이것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의미한다.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도다(고전 15:20)고 했다.103)
          이런 첫 열매 되시는 그리스도의 부활은 그에게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성도들에게도 그 부활의 생명과 소망이 주어진 것이다. 그러기 때문에 고린도전서 15장 23절 이하에 "그러나 각각 자기 차례대로 되리니 먼저는 첫 열매인 그리스도요 다음에는 그리스도가 강림하실 때에 그에게 붙은자"이라고 했다. "이것은 일반 신자들의 부활을 보장하는 것이기도 하다.104)
          그 부활은 전체 성도에게와 이스라엘과 이방인에게도 다 미친다(행 26;23). 물론 부활 때에 제1차 부활과 제 2차 부활이 있다. 그러나 부활의 역사는 하나이다.

          우리들이 이 유월절과 무교절을 살펴보면 시간적으로 전주간과 차주간의 관계를 알 수 있다.
          그와같이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의 관계도 역시 시간적인 차이가 있다.
          즉 주님께서 전주간에 십자가를 지시고 죽으셨는가 하면 차주간인 안식일 후 첫날에 부활하셨다.
          또한 그리스도를 믿고 따르는 우리들도 주안에서 죽으나 사나 주안에서 사는 부활의 영광이 있다.
          우리는 이 소망중에 살고 있다(고전 15:12-57,딤전 4:14-16).

          그러므로 우리는 그 무교절에서 배운 진리가 크다.
          주님의 행하신 일들은 다 하나님의 거룩한 뜻과 섭리에 따라서 기록된 것이다.
          그리스도의 초림만 아니라 그의 대속의 죽음과 부활도 다 그렇다.
          앞으로 생각할 성령의 강림과 주님의 재림과 심판도 하나님의 거룩한 뜻에 따라 되어진 것이다.
          그 그리스도의 부활은 우리에게 부활의 소망의 확증이요, 의롭게 함과 거룩함과 생명의 유대를 증거하는 증서이다.





          신약시대의 무교절

          구약시대에 지킨 무교절이 출애굽 당시의 고난을 기억하기 위한 절기라면
          신약시대의 무교절은 그리스도의 십자가 고난을 기억하고 잊지 않기 위한 절기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신랑을 빼앗길 날이 이르리니 그날에는 금식할 것이니라” 하셨다(마태복음 9:15, 마가복음 2:20, 누가복음 5:35).

          성경에서 신랑은 예수님을 가리킨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고난당하시며 운명하신 날, 즉 신랑을 빼앗긴 날은 유월절 다음 날인 무교절이었다.
          바로 성력 1월 15일이다.
          그래서 새 언약 안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은 해마다 이날이 되면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무한한 사랑으로 고난을 참으신 그리스도의 참사랑을 기억하기 위해 금식하며 예배를 드린다.

          우리는 무교절 후에 빌립보에서 배로 떠나 닷새 만에 드로아에 있는 그들에게 가서 이레를 머무니라 (사도행전 20:6)

          바울과 누가 일행은 마케도니아 지역인 빌립보에 있을 때 무교절을 맞이했다.
          ‘무교절 후에 떠났다’는 말은 빌립보에서 무교절을 지키고 떠났다는 뜻이다.

          예수님께서는 유대인들에게 말씀하시길 “너희가 아브라함의 자손이면 아브라함의 행사를 할 것이라”고 하셨다.
          이는 아브라함처럼 행사하지 않는 것은 아브라함의 자손이 아니기 때문이라는 말로 해석할 수 있다.
          초대교회의 성도들이 ‘그리스도인’이란 칭호를 받게 된 것은 그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진실히 믿었기 때문이며 그리스도의 가르침대로 따르는 순수한 믿음을 가졌기 때문이었다.

          우리가 진정한 그리스도인이라면 그리스도의 행사를 해야 한다.
          신랑을 빼앗긴 날에는 금식으로 동참하는 사람들이 진정한 그리스도인들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유월절에 마지막 만찬을 드시고 무교절에 십자가에서 운명하셨다.
          절기를 따라 절기의 제물이 되신 것이다.
          무교절은 초대교회 사도들과 성도들이 지키던, 아주 소중한 그리스도의 율법이다.



          유월절 Passover


          출애굽기 12:27
          너희는 이르기를 이는 여호와의 유월절 제사라 여호와께서 애굽 사람을
          치실 때에 애굽에 있는 이스라엘 자손의 집을 넘으사 우리의 집을 구원하셨느니라 하라 하매 백성이 머리 숙여 경배하니라.    

          유월절은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의 노예 생활에서 해방된 것을 기념하는 날로, 유대 민족에게 있어서 최대의 축제일입니다.

           1) 유월절의 의미

          ‘유월절’은 히브리어 ‘페사흐’로 ‘건너뛰다, 뛰어넘다’라는 뜻을 가진 ‘파사흐’에서 유래하였습니다(출 12:13, 23).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출애굽 시키시면서 애굽에 내리신 마지막 재앙은 사람부터 짐승까지 처음 난 것을 치신 장자 재앙이었습니다(출 12:29-30, 13:15). 이 때 이스라엘 백성에게 어린 양을 잡아 그 피를 문설주와 인방에 바르게 하심으로, 죽음의 사자가 이스라엘 백성의 집을 그냥 넘어 가게 하셨습니다. 유월절은 바로 그날, 이스라엘 백성이 죽음에서 구원 받은 것을 기념하여 지키는 절기로(출 12:13-14, 21-23, 27), 매년 반드시 지켜야 할 이스라엘의 3대 절기인 유월절, 칠칠절, 초막절 중의 하나였습니다(출 23:14-17, 34:18-23, 신 16:1-16).    

           

          2) 유월절 어린양의 준비   

          하나님께서 어린 양은 1월 10일에 준비하였다가(출 12:3), 특히 1월 14일 해 질 때에 잡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출 12:6). 유월절 제물로 사용되는 어린 양은 1년 된 수컷으로(출 12:5), 1월 14일까지 보관하면서 제물로서 합당한지 시험합니다. 만일 이때에 준비한 양이 흠이 있거나, 제물로서 합당하지 못한 기타 다른 요소들이 발견되면, 유월절 어린양으로 사용할 수 없었습니다.   

           

          특히 유월절 양을 1월 14일 해 질 때에 잡으라고 하셨는데(출 12:6), 해 질 때는 오후 3시부터 오후 6시 사이를 가리킵니다. 예수님께서 유월절 어린 양으로(요 1:29, 고전 5:7) 인간의 대속을 위해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때가, 바로 유월절 양을 잡기 시작하는 오후 3시였습니다(마 27:46-50).    

           

          3) 유월절을 지키는 방법 (제도)   

          유월절은 니산월(태양력 3-4월) 14일에 지켜졌으며, 특별히 성경에서는 마지막 10번째 재앙을 통해 애굽의 모든 장자들을 멸하신 유월절인 니산월(1월) 14일 밤(유대 달력으로 15일이 시작되는 밤)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1월 14일 저녁에 양을 잡아서 피와 고기를 분리시켰는데, 고기는 고기대로, 피는 피대로 사용될 수 있게 한 것입니다. 또 양의 죽는 모습을 통하여 죽음의 고통과 대가를 크게 느끼고 생각케 하는 것인데 그 양의 죽음은 대속의 죽음을 뜻합니다. 피는 양을 먹는 집 문설주와 인방에 바릅니다(출 12:7, 22). 이 피를 바름으로 양을 잡은 집을 표시하고, 양의 피냄새를 풍기어 양의 희생을 느끼게 하였습니다. 어린 양의 고기는 그날 밤에 불에 구어 먹되 무교병과 쓴 나물과 같이 먹습니다(출 12:8-9).    

           

          여기서 몇 가지 주의할 것이 있습니다(출 12:9-11, 46).     

          ① 날로 먹어서는 안됩니다.     

          ② 물에 삶아 먹어도 안됩니다.     

          ③ 아침까지 남겨 두어서는 안되며, 남은 것은 불에 태웁니다.     

          ④ 뼈를 꺾어서는 안됩니다.     

          ⑤ 머리 뿐 아니라 정강이와 내장도 남김없이 다 구워 먹게 되어 있습니다.     

          ⑥ 먹을 때 자세는 허리에 띠를 띠고, 발에 신을 신고, 손에 지팡이를 잡고 급히 먹습니다. 또한, 주의해야 할 것은 그 밤에 자기 집 문 밖에 나가지 말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 애굽에 재앙을 내리심으로 애굽 사람을 치러 두루 다니시기 때문입니다(출 12:2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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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4-14-2021(수)

          유월절(踰月節) 요한복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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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대 절기 /
          유월절, 무교절, 초실절, 오순절, 나팔절, 속죄절, 장막절


          가나 혼인 잔치 , 물을 포도주, 가버나움에 들러

          요한복음 2:13, 유대인의 유월절이 가까운지라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셨더니.

          요한복음 2:23, 유월절에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계시니 많은 사람이 그 행하시는 표적을 보고 그 이름을 믿었으나.

          요한복음 3:1, 바리새인 중에 니고데모라 하는 사람이 있으니 유대인의 관원이라.

          공생애 첫번째 유월절 : 니고데모와의 대화

          예수님의 일방적인 선포하시는 말씀이다.
          이것을 유월절 배경에서 이해해야 한다.
          유월절에 고대 이스라엘 국가가 탄생한 것처럼 유월절의 화두는 거듭남에 의한 하나님 나라를 깨우치셨다.

          거듭남(아노덴) 
          위로부터 above
          다시 / 니고데모가 어리석은 사람이 아니다.
          학문적으로 깊은 사람이었으므로 아노덴을 다시라고 이해한 것이 합당하다.
          born again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영적으로 설명하신다. 위로부터 from above

          요한복음 6:4-5
          마침 유대인의 명절인 유월절이 가까운지라 
          예수께서 눈을 들어 큰 무리가 자기에게로 오는 것을 보시고 빌립에게 이르시되 우리가 어디서 떡을 사서 이 사람들로 먹게 하겠느냐 하시니.

          유월절에는 모든 유대인들이 예루살렘으로 향한다.
          그런데 지금 예수님께서는 갈릴리 벳세다에 계신다.
          이것은 굉장히 놀라운 사건이다.
          이 해에 예수님은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지 않았다.
          왜 그러셨을까?
          세례 요한의 처형이 있었다.

          가버나움은 헤롯 안티파스의 영역(세례 요한을 처형한 헤롯)
          벳세다는 헤롯 빌립의 영역(헤롯 안티파스와 사이가 좋지 않았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이 지역으로 이동하셨다)

          요한복음 기자는 전혀 다른 각도에서 유월절을 조명한다.

          1. 보리떡
          2. 물고기 

          요한복음 6:9
          여기 한 아이가 있어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졌나이다 그러나 그것이 이 많은 사람에게 얼마나 되겠삽나이까

          보리떡은 가난한 자들의 식량
          유월절에는 밀떡을 먹는다.

          빈들 - 벳세다는 유다 지방에서 가장 푸르른 지역. 년 강우량이 1000-1200mm
          광야, 빈들(에레모스)이 아니다(지리적으로)
          그런데 왜 광야, 빈들이라고 표현하였을까?

          마태복음 14:15 
          저녁이 되매 제자들이 나아와 가로되 이곳은 빈 들이요 때도 이미 저물었으니 무리를 보내어 마을에 들어가 먹을 것을 사먹게 하소서.

          애급에서 나온 백성들이 제일 먼저 들어간 곳이 광야 에레모스 빈들이었다.

          요한복음 6:35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

          자신을 생명의 떡이라고 표현하셨다.

          요한복음 13장부터 18장까지의 기록이 마지막 유월절 6시간에 일어났던 일을 기록한다.
          해가 질 때부터 자정까지 6시간 동안 진행된 유월절 만찬 자리에서 있었던 사건이다.

          요한복음 13장 최후의 만찬 자리 / 큰 다락방
          1. 크다
          2. 2층
          3. 가구가 준비된 방
          4. 사랑방(손님을 위한 방으로 '카탈루마' 라고 한다)

          유월절 만찬을 "세데르(Seder)" 라고 한다.
          이 때 4잔의 포도주를 마신다. 
          취하지 않도록 1잔의 포도주에 3잔의 물을 넣어 희석시켜서 마신다.
          왜 4잔의 포도주를 마시는가?

          출애굽기 6:6-8
          그러므로 이스라엘 자손에게 말하기를 나는 여호와라 내가 애굽 사람의 무거운 짐 밑에서 너희를 빼어 내며 그 고역에서 너희를 건지며 편 팔과 큰 재앙으로 너희를 구속하여
          너희로 내 백성을 삼고 나는 너희 하나님이 되리니 나는 애굽 사람의 무거운 짐 밑에서 너희를 빼어낸 너희 하나님 여호와인줄 너희가 알찌라
          내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주기로 맹세한 땅으로 너희를 인도하고 그 땅을 너희에게 주어 기업을 삼게 하리라 나는 여호와로라 하셨다 하라.

           4개의 동사를 기념하는 의미에서 4잔의 포도주를 마신다.
          유월절 행사의 핵심 코드는 "해방"
          그러므로 "기쁨"이다.

          기쁨의 상징은 포도 / 예수님은 포도나무, 너희는 가지

          유월절 만찬 음식
          무교병 - 급하게 나왔다. 구원의 즉각성(무교병을 먹는 것)과 점진성
          어린 양 - 삶은 어린 양 고기
          쓴나물 - 마로르
          하로셋 - 무화과 대추야자 건포도 등을 혼합하여 만든 소스로 애급의 고역
          구은 계란 - 고통 상징
          포도주 4잔 -
          소금 -

          이적, 기적, 기사, 표적

          wonder / 이적(異蹟), 기사(奇事)
          miracle /  기적(奇蹟)
          sign / 표적(表蹟)

          성경은 이적과 기적과 기사 그리고 표적으로 가득하다.
          인간의 능력을 초월하는 초인간적인 놀라운 행적으로 병을 고치고 죽은 자를 살리는 등의 사건 그리고 자연계에서 벌어지는 초자연적인 현상으로 물 위로 걷는다든가 물로 포도주를 만드는 사건 등을 이적, 기적, 기사라고 하고 이것들은 메시아적 증거로서 표적이라고 한다.

          영어 성경은 이적과 기사를 Wonder로, 기적을 Miracle로 번역했고 표적은 sign이라고 번역했다.
          한글 성경은 헬라어 세메이온(σημειόν)을 이적 또는 표적이라고 번역했고,
          테라스(τέρας)를 기적이라고 번역해서 혼선 양상을 보인다.
          이적, 기적, 가사는 테라스(τέρας)로 번역해야 하고 세메이온(σημειόν)은 표적으로 번역해야 구분이 될 것이다.

          “표적”이란 히브리어로 ‘오트’(תוא)이고,
          헬라어는 쎄메이온(σημεῖον)이며 영어로는 ‘사인’ (sign)으로 ‘표시’, ‘징조’, ‘증표’ 등의 뜻을 가진다.

          표적을 둘로 나누어 본다면 초인간적 행사를 이적 기적이라 하고 초자연적 행사를 이적 기사라고 할 것이다.
          그러므로 이적이나 기적이나 기사는 표적(sign, σημεῖον)의 다른 명사들이다.
          그래서 히브리어에서는 이적, 기적, 기사, 표적이 ‘오트’(תוא)로 통일된다.

           요한복음에는 예수 그리스도가 메시아라는 일곱 개의 대표적 표적이 나타난다.

          1. 가나의 혼인 잔치에서 물을 포도주로 바꾸신 표적(요 2:1~11)

          2.  가버나움에서 죽어가는 고관의 아들을 고치신 표적(요 4:46~54))

          3.  베데스다에서 38년 된 병자를 고치신 표적(요 5:1~9)

          4.  디베랴 바다 건너편에서 오병이어로 5,000명의 무리를 먹이신 표적(요 6:1~15))

          5. 디베랴 바다에서 물 위를 걸으신 표적,(요 6:16~21)

          6.  실로암에서 날 때부터 장님이었던 사람의 눈을 뜨게 해주신 표적(요 9:1~12)

          7.  베다니에서 죽은 지 사흘 된 나사로를 살리신 표적(요 11:1~44)

          표적의 의미가 무엇인가?

          성경에 나타난 구속사적 표적들을 살펴보자.

          첫째,  이스라엘 구원의 언약을 성취하시는 하나님의 표적

          지팡이로 뱀을 만들어 보이시는 일, 모세의 손에 문둥병을 발하게 하셨다가 다시 치유하시는 일 등이 약속을 이행하시겠다는 하나님의 표적인 것이다. 임마누엘 하나님의 언약은 반드시 성취된다는 사인이다.

          둘째, 무흠하신 속죄의 어린 양이신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표적

          메시야가 성령으로 잉태되고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태어나게 하시고 성령세례를 받게 하신 것은 예수님께서 속죄 양으로 오신 메시아이심을 나타내는 표적이다(사 7:14). 예수 그리스도의 무죄하심과 속죄주의 자격을 나타내는 사인이다.

          셋째, 기적을 통해 천국을 보이시는 성령님의 능력의 표적

          예수님의 영이신 성령님의 권능을 따라 나타나는 치유사역과 초자연적 기적 등은 바로 구약에 예언된 메시아가 예수 그리스도이심을 나타내는 표적이다. 예수 그리스도가 성령님을 통해 만물을 회복하고 우리를 천국으로 초대하시는 메시아인 증거의 사인이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주님에 의한(by Jesus), 주님에 대한(of Jesus), 주님을 위한(for Jesus) 표적을 탐욕에 의하여 인간의 욕망을 채우는 표적으로 오인하게 되었다.

           

          오병이어의 표적이 있은 뒤에 유대인들은 예수님께 질문했다. 모세는 만나를 통해 먹을 것을 제공하는 표적을 보였는데 예수는 무슨 표적을 보이겠는가? 라고 질문하게 된다. 유대인들이 주님을 따른 것은 경제적 해결이나 정치적 이슈로 표적을 구했음을 스스로 자인하는 장면이다

           

          그 증거로 주님께서 오병이어의 기적을 행하셨을 때 주님을 따르는 무리가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이때 주님께서 그들을 보면서 말씀하셨다.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나를 증거하는) 표적을 본 까닭이 아니요 (이 땅의)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이로다”(요 6:26)라고 하셨다.

           

          주님은 정치적이고 탐욕적인 표적을 추구하는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에게 진정한 표적이 무엇인가를 선포하셨다.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구하나 선지자 요나의 표적 밖에는 보일 표적이 없느니라 요나가 밤낮 사흘 동안 큰 물고기 뱃속에 있었던 것 같이 인자도 밤낮 사흘 동안 땅 속에 있으리라.”(마 12:39~40))

           

          주님은 이미 자신에 대한 표적으로 많은 이적 기사를 통해 주님이 구약에 예언된 메시아이심을 나타내 보이셨다. 그러나 깨닫지 못하고 육신의 욕망을 채우고자 하며 이 땅의 표적만을 구하는 저들에게 요나의 표적을 통해 종말론적 구속자로 오시는 주님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을 증거하신 것이다. 요나의 표적이 주님 자신을 증거하는 모형으로서의 진정한 표적이라는 것을 알려주신 것이다. 그러나 깨달을 수 있는 귀 있는 자만이 알 수 있었다.

           

          바울사도께서는 고린도교회를 향하여 선포했다.

           

          “유대인은 (땅의)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땅의) 지혜를 찾으나 우리는 (표적과 지혜로)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한다”(고전 1:22~23).

           

          성경에 나타나는 이적 기사의 표적의 목적이 예수 그리스도가 구약에 예언한 메시아요 구세주라고 표식인데 이것을 모르는 군중들에게 바울 사도께서는 하나님이 보내신 진정한 표적으로서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죄인을 구원하시는 구세주이심을 선포하신 것이다.



          이스라엘의 7대 절기

          출애굽기 34:22절 말씀이 많은 혼동을 불러 일으키는 것 같은데…
          일단은 레위기 23장을 중심으로 7절기를 정리하시는 것이 좋을 듯…


          1 . 유월절(레 23:4-5; 고전 5:7)

          히브리어로 "페사흐"
          '넘어가다' 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니산월(아빕월, 1월) 14일 해질 무렵, 나흘 전에 준비한 수양을 구워 무교병과 쓴 나물과 함께 먹고 그 피를 문설주에 바르고 아침까지 남은 것은 불에 태워 버린다.
          애굽이 하나님의 진노로 장자를 잃는 열 번째 재앙을 당할 때 구원받은 것과 해방을 기념하는 날이다.

          2. 무교절(레 23:6-8: 고전 5:7,8)

          히브리어로는 맛차로. 니산월(아빕월, 1월) 15일부터 7일 동안(21일 까지) 누룩이 없는 무교병을 먹는다.
          절기의 이름도 이 누룩 없는 떡을 먹는다하여 무교절이라 불리웠다. 무교절이 시작되는 첫 날과 마지막 날은 '성회' 로 백성이 모이고 노동을 하지 못했으며 매일 하나님께 화제를 드렸다

          3. 초실절(레 23:9-14: 고전 15:20)

          초실절은 히브리어로 바쿠림이라 불리며 무교절 기간 중에 있는 절기로, 유월절 후 첫 안식일 다음 날이다. 추수 전에 곡식의 첫 이삭 한 단을 하나님께 드리는 절기로써 양식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는 날이다. 초실절 예물을 하나님께 드리기 전에는 떡이나 볶은 곡식, 생 이삭이라도 먹지 않았다.

          4. 오순절(=칠칠절=맥추절) (레 23:15-21 : 행 2:1-47: 고전 12:13: 엡 2:11-22)

          히브리어로는 솨부아 '맹세하다' 라는 뜻으로 밀을 수확할 수 있도록 복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는 날이다. 칠칠절은 초실절로부터 50일째에 해당하는 날로써 보통 시완월(3월) 6일경이 된다. 이 날은 하루만 절기로 지키는데 성회를 공포하고 노동이 금지되며 하나님께 번제를 드렸고 수염소 한 마리를 속죄제로 드렸다. 특이한 것은 모든 절기에는 누룩이 없는 무교병을 쓰지만 칠칠절만은 누룩을 넣은 유교병을 소제로 사용한다.

          5. 나팔절(레 23:23-25)

          나팔절은 티쉬리월(7 월) 1일로 유대 민간력으로는 1월에 해당하는 새해 첫날이다.
          이 날은 나팔을 하루 종일 일정한 간격으로 불었으며 성회가 선포되고 노동을 금했다. 그리고 속죄제로 수염소 한 마리를 드렸다.

          6. 속죄일(레 23:26-32; 히 9:25, 26)

          이 날은 성회가 선포되고 노동을 금하며 마음을 괴롭게 하는 날로 티쉬리월( 7월) 10일이다. 특별히 연중 이 날만 대제사장이 지성소에 들어갔다. 그리고 하나님을 위한 수염소와 아사셀을 위한 수염소를 드렸다.

          7. 초막절(레 23:33-34)

          수장절, 장막절이라고도 불린다.
          티리쉬월(7월) 15일부터 8일 동안 행해진다. 초막절은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을 나와 광야에 머물었던 것을 기념하는 동시에 풍성한 수확을 허락하신 하나님께 감사하는 절기이다. 첫날과 여덟째 날에는 성회로 모이고 노동이 금지되었으며 각 날마다 그에 상응 하는 제사를 드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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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4-07-2021(수)
          유월절(踰月節)  출애굽기 12:11-13, 레위기 23: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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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대 절기 /
          유월절, 무교절, 초실절, 오순절, 나팔절, 속죄절, 장막절


           1. 시기(時期)

            a. 아빕월(אָבִיב, Abib) : ‘어린 이삭’ ‘새로운’
             * 출 13:4, 23:15, 34:18, 신 16:1
            * 유대 달력으로 첫째 달(정월), 아빕월(보리 추수기, 보리가 익는 계절)

            b. 니산월(נִיסָ֗ן, Nisan) : ‘움직이다’ ‘출발하다’
             - 바벨론식 표기 / 느헤미야, 에스더
            * 느 2:1, 에 3:7 

              c.  신년 : 로쉬하사나(1월 1일)


           2. 제물(祭物)(출애굽기 12:5)

              a. 10일 어린 양을 취하라(출 12:3)

              b. 흠 없고 일년 된 수컷 양, 염소(출 12:5)

              c. 14일 까지 간직, 해 질 때 잡을 것(출 12:6)

            3. 방법(方法)


                a. 양의 피를 먹을 집 좌우 문설주, 인방에 바를 것(출 12:7)

                b. 고기를 불에 구워 무교병, 쓴나물과 먹을 것(출 12:8)

                c. 아침까지 남겨두지 말 것(남은 것은 소화하라)(출 12:10)

                d. 급히 먹으라(출 12:10)
                * 허리에 띠를 띠고, 신을 신고, 지팡이를 잡고

           4. 결과(結果)

               a. 장자, 초태생, 애굽의 모든 신에게 벌을 내릴 것(출 12:12)

                b. 피가 표적이 되리라(넘어가리라)(출 12:13)

           5. 의의(意義)

                a. 바로(생명의 신, 주)가 신이 아니다

              b. 여호와 하나님만이 생명의 주가 되신다
               사도행전 3:15
                생명의 주를 죽였도다
                그러나 하나님이 죽은자 가운데서 살리셨으니
                우리가 이 일에 증인이로라.

                * 요한복음 1:29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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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3-31-2021(수)
          유월절(踰月節)  출애굽기 12:11-13, 레위기 23: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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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대 절기 /
          유월절, 무교절, 초실절, 오순절, 나팔절, 속죄절, 장막절


          1. 유대인 : 여호와의 절기

          출애굽기 12:14

          너희는 이 날을 기념하여 여호와의 절기를 삼아
          영원한 규례로 대대에 지킬찌니라.  

          * 그림자 : 참 형상이 아니다.

          히브리서 10:1  
          율법은 장차 오는 좋은 일의 그림자요
          참형상이 아니므로
          해마다 늘 드리는바 같은  제사로는 나아오는 자들을 언제든지 온전케 할 수 없느니라.

          2. 예수 그리스도 : 구속의 은혜

          베드로전서 1:18-19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조상의 유전한 망령된 행실에서 구속된 것은 은이나 금 같이 없어질 것으로 한 것이 아니요.
          오직 흠
          없고(自犯罪) (原罪) 없는 어린양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한 것이니라.

          3. 그리스도인 : 복음의 시작

          마가복음 1:1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복음의 시작이라.

          사도 바울은 복음의 핵심을 가장 정확하게 깨달았다.   

          로마서 1:16-17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첫째는 유대인에게요 또한 헬라인에게로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유월절(踰月節)

          성전(聖殿) : 공간적 배경 / 제사법, 성막 구조
          절기(節氣) : 시간적 배경

          유월절 : 니산월 14일, 무교절 전야(Eve)
          무교절 : 니산월 15일-21일

          주일안에 세 절기가 지켜진다 : 유월절, 무교절, 초실절
          유월절 양 안에서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이 교제한다.

          고린도전서 5:7-8
          너희는 누룩 없는 자인데 새 덩어리가 되기 위하여 묵은 누룩을 내어버리라 우리의 유월절 양 곧 그리스도께서 희생이 되셨느니라.
          이러므로 우리가 명절을 지키되 묵은 누룩도 말고 괴악하고 악독한 누룩도 말고 오직 순전함과 진실함의 누룩 없는 떡으로 하자.

          언제 지키느냐?

          유대 달력으로 첫째 달(정월)이면서, 동시에 아빕월(보리 추수기, 보리가 익는 계절)에 지켜야 한다.

          마치 한국에서 농사를 지을 때 양력보다는 음력을 기준으로(24절기) 파종하고 수확하는 것과 비슷합니다.

          문제는 유대인의 달력은 "태음력"
          태음력은 한 달이 29.5일
          29.5일은 1년이면 354일 / 태양력보다 11일이 부족하다.
          3년이 되면 33일 즉 한 달이 부족한다.
          3년마다 윤달을(아달월) 추가한다.
          그러므로 유월절을 지킬 때 반드시 정월이면서 아빕월에 유월절을 지킨다.

          역사적 사건과 농사적 추수기를 의도적으로 연결시키신 하나님

          출애굽의 기적으로 약속의 땅에 인도하신 과거의 하나님은 작물의 수확을 주시는 천지의 하나님이심을 강조하는 것이다.

          (적용) 누구나 출애굽의 사건이 있었다(구원)
          그런데 출애굽의 사건만 갖고 있다면 현재의 삶에서 구원을 누리지 못하는 것이라고 하겠다.
          그러므로 유월절이란 과거의 사건(니싼월, Nissan)에서 출발하여 약속의 땅(현재의 삶)에서도 구원의 길로 인도하시는 하나님을 만나야 합니다.

          유월절을 지키는 유대인들의 풍경

          1. 순례자를 위한 도로 보수
            니싼월 전 달인 아달월 15일에 성전에서 사람들을 파견하여 도로 및 우물물을 보수한다.
            평토장한 평민들의 무덤을 관리(뼈가 나뒹굴어 순례자들이 부정하게 되기 때문) unmark grave
            마태복음 23:27, 회칠한 무덤 / 무덤에 회칠을 하여 순례자들의 성결을 보호한다.

          2. 누룩제거

          고린도전서 5:7

          스바냐 1:12

          3. 붉은 암송아지를 잡아서 정결케 하는 재를 만든다

          감람산 번제단 위에서 붉은 암송아지를 태운다.
          백향목과 우슬초를 함께 묶에서 태운다.
          실로암 연못에서 떠온 물에 재를 풀어서 정결케 하는 의식을 행한다.
          먼 지역에서 성전을 찾은 순례객이 부정하게 되었을 때 일주일울 기다릴 수 없으므로 특별하게 정결케 하였다.
          7회 반복하여 정하다! 라고 선포한다.

          * 정결케 하는 피 / 송아지의 피와 암송아지의 재와 그리스도의 피

          히브리서 9:13-14
          염소와 황소의 와 및 암송아지의 재로 부정한 자에게 뿌려 그 육체를 정결케 하여 거룩케 하거든
          하물며 영원하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흠 없는 자기를 하나님께 드린 그리스도가 어찌 너희 양심으로 죽은 행실에서 깨끗하게 하고 살아계신 하나님을 섬기게 못하겠느뇨.

          시편 51:7
          우슬초로 나를 정결케 하소서 내가 정하리이다 나를 씻기소서 내가 눈보다 희리이다.

          성전에 봉헌된 소년 제사장이 유월절 준비를 위하여 실로암 물에 가서 생수를 길어온다.
          이때 처음으로 성전 밖으로 나갈 수 있었다.

          4. 그릇을 정결탕에 넣어 정결케 한다.

          돌그릇
          놋그릇
          질그릇 : 부정하여 질 때는 깨트려 버린다.

          사람 : 질그릇과 같다.
          사람은 날마다 깨트려서 버려야 하는 부정한 존재이다.

          5. 성전세 : 반세겔

          마태복음 17:24
          가버나움에 이르니 반 세겔 받는 자들이 베드로에게 나아와 가로되 너의 선생이 반 세겔을 내지 아니하느냐?

          유월절과 성경의 사건들

          역대하 30:1 
          히스기야가 온 이스라엘과 유다에 보내고 또 에브라임과 므낫세에 편지를 보내어 예루살렘 여호와의 전에 와서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를 위하여 유월절을 지키라 하니라.

          에브라임과 므낫세에 편지를 보내어 : 
          남 유다 히스기야 왕이 통치 할 때 북 이스라엘이 앗수르에 의해서 멸망합니다(BC 722).

          사마리아 산지(에브라임과 므낫세 지역) - 남북이 나뉘었지만 거국적인 유월절을 지키려고 하였다.
          많은 난민을 받아드리므로 예루살렘의 인구가 10배 증가 예루살렘 영토는 4배로 증가한다.
          메시아의 모델로 묘사된다.

          요시야의 유월절

          역대하 35:1 
          요시야가 예루살렘 여호와 앞에서 유월절을 지켜 정월 십 사일에 유월절 어린 양을 잡으니라


          주전 612년 앗수르가 연합군에 의해서 멸망한다(메데, 바사 연합군)
          요시아 왕 때 일시적으로 남북이 통일이 된다.
          통일된 이스라엘을 기념하여 전국적인 유월절을 지키게 된다.

          느헤미야의 유월절

          느헤미야 2:1 
          아닥사스다왕 이십년 니산월에 왕의 앞에 술이 있기로 내가 들어 왕에게 드렸는데 이전에는 내가 왕의 앞에서 수색이 없었더니.

          니싼월(Nissan) 14일 - 유월절 

          에스라 6:15 
          다리오왕 육년 아달월 삼일에 전을 필역하니라. /

          - 주전 615년 스룹바벨 성전의 완공과 봉헌의 때를 의미한다.

          아달월은 니싼월 전 달 즉 12월을 말합니다.

          에스라 6:19-22 
          사로잡혔던 자의 자손이 정월 십사일에 유월절을 지키되
          사로잡혔다가 돌아온 이스라엘 자손과 무릇 스스로 구별하여 자기 땅 이방 사람의 더러운 것을 버리고 이스라엘 무리에게 속하여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를 구하는 자가 다 먹고
          즐거우므로 칠일 동안 무교절을 지켰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저희로 즐겁게 하시고 또 앗수르 왕의 마음을 저희에게로 돌이켜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신 하나님의 전 역사하는 손을 힘있게 하도록 하셨음이었느니라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이 일제히 몸을 정결케 하여 다 정결하매 사로잡혔던 자의 모든 자손과 자기 형제 제사장들과 자기를 위하여 유월절 양을 잡으니. 

          사도행전 12:3-4
          유대인들이 이 일을 기뻐하는 것을 보고 베드로도 잡으려 할쌔 때는 무교절일이라
          잡으매 옥에 가두어 군사 넷씩인 네 패에게 맡겨 지키고 유월절 후에 백성 앞에 끌어 내고자 하더라.

          애급에서 노예생활하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풀려난 때가 유월절
          베드로가 감옥에서 풀려난 때가 유월절

          요한복음과 유월절

          예수님의 공생애 기간은 3년입니다.
          3년 동안 유월절 절기를 몇번 지냈을까요?
          분명하게 세 번 유월절을 지키셨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세 차례 유월절을 지키셨던 것 중에서 마지막 유월절을 살펴보는 것도 의미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요한복음 13:23 
          예수의 제자 중 하나 곧 그의 사랑하시는 자가 예수의 품에 의지하여 누웠는지라.

          요한복음 13:25
          그가 예수의 가슴에 그대로 의지하여 말하되 주여 누구오니이까?

          유대 풍속에 따라 만찬의 자리 배정을 살펴보면

          가룟 유다
          예수님
          사도 요한 

          예수님은 유다의 품에 안겨 있다. - 제자를 끝까지 사랑하시는 예수님의 모습
          이미 유다가 예수를 팔아 넘길 것을 아시면서도 그 품에 안겨 있었다는 것은 유다로 하여금 회개의 기회를 주시려고 하신 것이다.

          베드로가 만찬석의 말석에 앉았을 것이라고 유추할 수 있는 다섯 가지 근거

          1. 성격 :  다혈질 / 가룟 유다를 싫어했다. 다른 제자들은 갈릴리 사람, 유다는 가룟 사람이었다.
             
          2. 낮은 자가 되라 / 베드로는 큰 자가 되기 위해 먼저 말석을 차지한다.

          3. 나를 팔 것이다 / 요한에게 머리짓을 하여 물어보자! 

          4. 식사 이후에 발을 씻어주어야 한다 / 

          5.

          나는 참포도나무 - 포도는 기쁨을 상징한다.
          중용, 절제 / 

          유월절 절기는 기쁨의 절기이지만 현재는 로마의 압제에 있었다.
          유대인들은 5차례 봉기를 일으켰다.

          15:2,
          1. 열매를 잘 맺는 가지
          2. 열매를 잘 맺지 못하는 가지 

          제거해 버린다(야이로) - 1. 잘라버린다 take out
                                                  2. 살짝 들어주는 것 lift up

          흠 없는 양
          다리를 꺾는다 / 예수님의 다리는 꺾이지 않았다.
          흑암이 임하다 / 흑암 재앙(3일) 3시간 동안 태양 빛이 어둠
          6시부터 9시까지 흑암
          신포도주 / 우슬포로 찍어서 (우슬초 양의 피 좌우 문지장)















          가나 혼인 잔치 , 물을 포도주, 가버나움에 들러 

          요한복음 2:13, 유대인의 유월절이 가까운지라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셨더니

          공생애 첫번째 유월절 : 니고데모와의 대화
          예수님의 일방적인 선포하시는 말씀이다.
          이것을 유월절 배경에서 이해해야 한다.
          유월절에 고대 이스라엘 국가가 탄생한 것처럼 유월절의 화두는 거듭남에 의한 하나님 나라를 깨우치셨다.

          거듭남(아노덴) 
          위로부터 above
          다시 / 니고데모가 어리석은 사람이 아니다. 학문적으로 깊은 사람이었으므로 아노덴을 다시라고 이해한 것이 합당하다.
          born again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영적으로 설명하신다. 위로부터 from above

          요한복음 6:4-5
          마침 유대인의 명절인 유월절이 가까운지라 
          예수께서 눈을 들어 큰 무리가 자기에게로 오는 것을 보시고 빌립에게 이르시되 우리가 어디서 떡을 사서 이 사람들로 먹게 하겠느냐 하시니.

          유월절에는 모든 유대인들이 예루살렘으로 향한다.
          그런데 지금 예수님께서는 갈릴리 벳세다에 계신다.
          이것은 굉장히 놀라운 사건이다.
          이 해에 예수님은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지 않았다.
          왜 그러셨을까?
          세례 요한의 처형이 있었다.

          가버나움은 헤롯 안티파스의 영역(세례 요한을 처형한 헤롯)
          벳세다는 헤롯 빌립의 영역(헤롯 안티파스와 사이가 좋지 않았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이 지역으로 이동하셨다)

          요한복음 기자는 전혀 다른 각도에서 유월절을 조명한다.

          1. 보리떡
          2. 물고기 

          요한복음 6:9
          여기 한 아이가 있어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졌나이다 그러나 그것이 이 많은 사람에게 얼마나 되겠삽나이까

          보리떡은 가난한 자들의 식량
          유월절에는 밀떡을 먹는다.

          빈들 - 벳세다는 유다 지방에서 가장 푸르른 지역. 년 강우량이 1000-1200mm
          광야, 빈들(에레모스)이 아니다(지리적으로)
          그런데 왜 광야, 빈들이라고 표현하였을까?

          마태복음 14:15 
          저녁이 되매 제자들이 나아와 가로되 이곳은 빈 들이요 때도 이미 저물었으니 무리를 보내어 마을에 들어가 먹을 것을 사먹게 하소서.

          애급에서 나온 백성들이 제일 먼저 들어간 곳이 광야 에레모스 빈들이었다.

          요한복음 6:35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

          자신을 생명의 떡이라고 표현하셨다.

          요한복음 13장부터 18장까지의 기록이 마지막 유월절 6시간에 일어났던 일을 기록한다.
          해가 질 때부터 자정까지 6시간 동안 진행된 유월절 만찬 자리에서 있었던 사건이다.

          요한복음 13장 최후의 만찬 자리 / 큰 다락방
          1. 크다
          2. 2층
          3. 가구가 준비된 방
          4. 사랑방(손님을 위한 방으로 '카탈루마' 라고 한다)

          유월절 만찬을 "세데르(Seder)" 라고 한다.
          이 때 4잔의 포도주를 마신다. 
          취하지 않도록 1잔의 포도주에 3잔의 물을 넣어 희석시켜서 마신다.
          왜 4잔의 포도주를 마시는가?

          출애굽기 6:6-8
          그러므로 이스라엘 자손에게 말하기를 나는 여호와라 내가 애굽 사람의 무거운 짐 밑에서 너희를 빼어 내며 그 고역에서 너희를 건지며 편 팔과 큰 재앙으로 너희를 구속하여
          너희로 내 백성을 삼고 나는 너희 하나님이 되리니 나는 애굽 사람의 무거운 짐 밑에서 너희를 빼어낸 너희 하나님 여호와인줄 너희가 알찌라
          내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주기로 맹세한 땅으로 너희를 인도하고 그 땅을 너희에게 주어 기업을 삼게 하리라 나는 여호와로라 하셨다 하라.

           4개의 동사를 기념하는 의미에서 4잔의 포도주를 마신다.
          유월절 행사의 핵심 코드는 "해방"
          그러므로 "기쁨"이다.

          기쁨의 상징은 포도 / 예수님은 포도나무, 너희는 가지

          유월절 만찬 음식
          무교병 - 급하게 나왔다. 구원의 즉각성(무교병을 먹는 것)과 점진성
          어린 양 - 삶은 어린 양 고기
          쓴나물 - 마로르
          하로셋 - 무화과 대추야자 건포도 등을 혼합하여 만든 소스로 애급의 고역
          구은 계란 - 고통 상징
          포도주 4잔 -
          소금 - 








          헤롯 아그립바 1세 / 헤롯 대왕의 손자











          민수기 19:1-10







          마치 한국에서 음력을 지킬 때 윤달이라고 하여 같은 달을 2회 반복하는 경우와 비슷하다.


          레위기 23:5
          정월 십사일 저녁은 여호와의 유월절이요.

          아빕월 : "텔 아비브"
          아비브(아빕) 봄이란 뜻(보리 추수 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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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3-24-2021(수)

          7대 명절(레위기 23:1-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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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레위기 23:2

            이스라엘 자손에게 고하여 이르라  너희가 공포하여 성회를 삼을 여호와의 절기는 이러하니라.        
            

          7대 절기 /
          유월절, 무교절, 초실절, 오순절, 나팔절, 속죄절, 장막절

          1. 유대인 : 여호와의 절기(출애굽기 12:14)

          너희는 이 날을 기념하여 여호와의 절기를 삼아 영원한 규례로 대대에 지킬찌니라.  

          * 여호와의 절기 / a festival to the LORD

            1. 유월절(5)
            2. 무교절(6)
            3. 초실절(10)
            4. 오순절(16)
            5. 나팔절(24)
            6. 속죄절(27)
            7. 초막절(34)

          7대 절기 /
          유월절, 무교절, 초실절, 오순절, 나팔절, 속죄절, 장막절

          1. 유대인 : 여호와의 절기(출애굽기 12:14) - 그림자

          2. 예수 그리스도 : 구속의 절기(베드로전서 1:18-19) - 실체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조상의 유전한 망령된 행실에서 구속된
          것은 은이나 금 같이 없어질 것으로 한 것이 아니요.
          오직 흠
          없고 점 없는 어린양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한 것이니라.
             
             (자범죄) (원죄)

          히브리서 10:1

            율법은 장차 오는 좋은 일의 그림자요 참형상이 아니므로
            해마다 늘 드리는바 같은  제사로는 나아오는 자들을 언제든지 온전케 할 수 없느니라.


          로마서 13:10

            사랑은 이웃에게 악을 행치 아니하나니 그러므로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니라.

             Love does no harm to its neighbor.
             Therefore love is the fulfillment of the law.

          야고보서 2:8

            너희가 만일 경에 기록한 대로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과 같이 하라 하신
            최고한 법을 지키면 잘하는 것이거니와.
          If you really keep the royal law found in Scripture, Love your neighbor
          as yourself, you are doing right.

          7대 절기 /
          유월절, 무교절, 초실절, 오순절, 나팔절, 속죄절, 장막절

          1. 유대인 : 여호와의 절기(출애굽기 12:14) - 그림자

           2. 예수 그리스도 : 구속의 절기(베드로전서 1:18-19) - 실체

          3. 그리스도인 : 복음의 시작(마가복음 1:1)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복음의 시작이라.

                                   The beginning of the gospel



           영원한 복음(요한계시록 14:6)

           또 보니 다른 천사가 공중에 날아가는데 땅에 거하는 자들
           곧 여러 나라와 족속과 방언과 백성에게 전할  영원한 복음을 가졌더라.
                                                                                the eternal gospel


          사도 바울은 복음의 핵심을 가장 정확하게 깨달았다.
           

            로마서 1:16-17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첫째는 유대인에게요 또한 헬라인에게로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7대 절기

                                                          

                유월절, 무교절, 초실절, 오순절, 나팔절, 속죄절, 장막절

          1. 유대인 : 여호와의 절기(출애굽기 12:14) - 그림자

           2. 예수 그리스도 : 구속의 절기(베드로전서 1:18-19) - 실체

          3. 그리스도인 : 복음의 시작(마가복음 1:1) - 영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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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월 10일(수) 레위기 제1강

          레위기의 3대 분류

          1-10장 :  제사법
          11-15장 :  정결법
          16-27장 : 거룩법


          레위기내용을 크게 두 단락으로 구분합니다.

          레위기 1장 -16장 : 거룩한 길
          - 하나님 앞으로 나가는 방법

          레위기 17장 - 27장 : 거룩한 삶
          -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는 방법

          두 단락을 좀 더 구체적으로 설명합니다.

          레위기 1장 -16장 : 거룩한 길
          - 하나님 앞으로 나가는 방법

          1장 - 7장 / 제사 규례
          8장 - 10장 / 제사장 규례
          11장 - 16장 / 결례, 규례

          레위기 17장 - 27장 : 거룩한 삶
          -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는 방법

          17장 / 제사를 통한 거룩
          18장 - 22장 / 가정, 사회를 통한 거룩
          23장 - 25장 / 절기를 통한 거룩
          26장 / 축복, 저주를 통한 거룩
          27장 / 서원을 통한 거룩

          레위기 1장을 읽기 전에 먼저 레위기에서 반드시 기억해야 할 몇 가지 주제를 소개합니다.

          첫째는 다섯 가지 제사의 종류

          1. 번제(燔祭)

          2. 소제(素祭)
          3. 화목제(和睦祭)
          4. 속죄제(贖罪祭)
          5. 속건제(贖愆祭)

          둘째는 제사를 드리는 네 가지 방법

          1. 화제(火祭) fire offering / 제이쉬세, 불로 태운다
          2. 요제(搖祭) wave offering / 테누파, 앞뒤로 흔든다
          3. 전제(奠祭) drink offering / 네데크, 관제(빌 2:17)
          4. 거제(擧祭) heave offering / '테루마'(terumah), '들어올려진 것'

          * 요제는 주로 성소 안에서, 거제는 주로 밖에서

          셋째는 일곱 가지 절기

          1. 유월절(逾越節) pass over
          2. 무교절(無酵節) unleavened bread
          3. 초실절(初實節) first fruits
          4. 오순절(五旬節) pentecost (칠칠절) feast of ewwk
          5. 나팔절(喇叭節) trumphet
          6. 속죄절(贖罪節) atonement
          7. 장막절(帳幕節) feast of tebernacl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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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레위기 1: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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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번제의 규례 / 레위기 6:8-13


          레위기 1장에 관한 질문(02-04-2021, 목)

          1. 여호와께서 모세를 부르신 곳은?

          2. 여호와께 드릴 예물은?

          3. 번제의 제물의 종류는?


          4. 여호와께 향기로운 냄새는?

          첫째, 여호와께서 모세를 부르신 곳은?(1절)

          여호와께서 회막에서 모세를 부르시고 그에게 일러 가라사대 .

          회막(會膜) the tent of meeting(출애굽기 27:21) / KJV the tabernacle of the congregation

          회막(오헬 모에드)
          요한복음 1:14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 즉 그리스도의 거주를 예표하는 말씀이다.

          성경에서 회막은 여러 용어로 표현합니다.

          성막(聖幕) 출애굽기 26:9
          증거막(證據幕) 출애굽기 38:21
          법막(法幕) 역대하 24:6
          여호와의 전(殿) 출애굽기 23:19 - 대궐 전(殿)
          여호와의 장막(帳幕) 열왕기상 2:28

          cf. 성막(聖幕) the tabernacle.(출애굽기 26:27)
          성막 저편 널판을 위하여 다섯이요 성막 뒤 곧 서편 널판을 위하여 다섯이며.

          cf. 장막(帳幕)  tents (출애굽기 13:20)
          그들이 숙곳에서 발행하여 광야 끝 에담에 장막을 치니.


          2. 여호와께 드릴 예물은?(2-3절)

          이스라엘 자손에게 고하여 이르라 너희 중에 누구든지 여호와께 예물을 드리려거든 생축 중에서 소으로 예물을 드릴찌니라. 그 예물이 소의 번제이면 흠 없는 수컷으로 회막 문에서 여호와 앞에 열납하시도록 드릴찌니라.

          예물(禮物)이란 히브리 단어는 "고르반"과 "테루마"라고 합니다.

          고르반(7133) : 제물, 희생물, 제단 가까이 가져온 것(레위기 1:2)

          이스라엘 자손에게 고하여 이르라 너희 중에 누구든지 여호와께 예물을 드리려거든 생축 중에서 소나 양으로 예물을 드릴찌니라.
           
          테루마(8641) : 선물(올려서 바치는 것) 요제, 봉헌물, 바친(출애굽기 25:2)

          이스라엘 자손에게 명하여 내게 예물을 가져오라 하고 무릇 즐거운 마음으로 내는 자에게서 내게 드리는 것을 너희는 받을찌니라.

          예물(禮物)과 제물(祭物) הַצָעָה
          예(禮)는 정성을 다하여 드린 예물
          제(祭)는 제사를 위해 바쳐진 예물

          예물은 바치는 사람의 자세를 강조
          제물은 제사에 드려진 물건을 강조

          제물(4503, 민하) / 선물, 공물, 제물

          민하(명여)는 사용되지 않은 어근 마나흐(빌려주다, 선물을 주다)에서 유래했으며, '선물(gift), 공물(tribute), 제물(offering)'을 의미한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히브리어 어근 마나흐에서 유래하였다고 단정한다.
          아랍어 마나하는 일정한 기간 동안 '어떤 사람에게 어떤 것(암낙타, 염소, 양, 혹은 한 구획의 땅)을 빌려주다'라는 전문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으며 따라서 차용자가 빌린 것에서 나온 소산물을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고(예: 소산, 우유, 수확 곡물 등), 그후 본래의 소유물을 되돌려 주는 것이다. 이때 수확물은 무료로 주는 선물이 된다.

          구약성경에서 이 단어는 약 210회 나온다.

          1.  민하는 사람이 사람에게 주는 '선물'을 의미한다.

          민하는 야곱이 에서에게(32:14-22, 33:21), 야곱의 아들들이 요셉에게(43:11, 43:15, 43:26) 드린 예물(선물)에 대해 사용되었다.

          민하는 우월한 사람, 특히 왕에게 바치는 선물이라는 세속적 배경에서 사용되는데, 이는 그 사람에 대한 존경 혹은 복종의 태도를 나타낸다. 삼상 10:27에서 사울을 경멸한 이스라엘 사람들은 그에게 "예물을 드리지 아니하니라", 즉 그를 새로운 왕으로 인정하지 않았다.

          민하는 이런 의미로 6:18, 삼상 10:27, 대하 9:24, 왕하 8:8-9, 왕하 20:12, 39:1, 45:13, 대하 32:23에서 사용되었다.

          2.  민하는 '공물'이란 의미를 나타낸다.

          3:15, 3:17-18, 삼하 8:2, 삼하 8:6, 대상 18:2, 대상 18:6, 왕상 5:1, 왕하 17:3-4, 대하 17:5, 대하 17:11, 대하 26:8, 10:6, 72:10.

          3. 민하는 가장 자주 제물이나 예물이라는 제의적 의미로 사용되었다.

          민하는 특히 곡식 예물을 뜻하나, 민하가 원래예물 혹은 공물을 의미하였기 때문에 이 단어가 특별한 제의적 의미를 나타낼 때 이 단어가 막연하게나마 그러한 의미로 사용될 수 있다고 스나이드(Snaith)가 말하는 것은 정확한 것처럼 보인다. 이러한 관계에서 특별히 흥미로운 것은 삼상 2:29, 삼상 3:14, 19:21에서 제바흐와 민하 간의 구별, 14:1220:3에서 올라와 민하의 구별, 5:22에서 셸렘과 민하 간의 구별이다. 또한 4:3-4을 참조하라.

          아벨과 가인은 하나님께 민하를 드렸다(4:4-5). 그러나 아벨에 있어서 그가 하나님께 동물 중에서 가장 좋은 부분을 바쳤으며 이는 하나님께 진정한 헌신을 반영하는 행위라고 언급되며 반면에 가인에 있어서는 단순히 그가 땅의 수확물 중에서 민하를 드렸다고 언급된다. 하나님께서는 그러한 형식적인 것을 거절하셨다. 가인의 진실한 복종의 결여(피흘림이 없는 희생제물을 주목하라)는 마침내 죄의 행위를 유발하였다(4:7 이하). 민하의 이러한 용법은 그 용어가 특별한 의미로 동물의 희생 제물을 의미하지는 않는다는 것을 가리킨다.

          소제는 2:1-166:14-23, H7-16에서 정의되고 있다. 이것은 곡식단 형태일 수 있으며, 대강 찧어서 건조하게 볶은 곡식, 가루로 빻거나(오직 밀만이 그러함, 보리가루는 "의심의 소제"를 위해 보존되었던 것 같다) 혹은 빵을 만들거나 혹은 과자로 만들어 솥에 넣고 굽거나 혹은 기름으로 튀겼다. 향과 소금은 예비된 민하의 한 부분이었으나 누룩과 꿀은 첨가되지 않았다.

          민하는 매일 아침 저녁으로 제물로 드렸으며 신성한 제물이어서 예배하는 자와 함께 먹을 수 없었고 제사장들만이 그것을 먹었다. 속죄의 개념이 특별히 민하에 존재하지는 않으나 화목의 개념이 확실히 들어 있다. 일상적으로 누룩으로 발효된 떡과 더불어 그 땅의 새 소산의 제물(23:16)은 하나님 백성들의 전체적인 삶을 위대하신 주님께 위탁한다는 것을 가리킨다.(G. L. C.)

          (참조: BDB; Gesenius; TWOT).

          [동의어] (관련성구)

          합하브(1890) / 선물, 제물
          합하브(명남)는 야하브(3051: 주다)에서 유래했으며, '선물, 제물'을 의미한다.

          구약성경에서 이 단어는 8:13에 한번 나오며 '제물'을 의미한다:
          "내게 드리는 제물로 말할찌라도 저희가 고기로 제사를 드리고 먹거니와 여호와는 그것을 기뻐하지 아니하고 이제 저희의 죄악을 기억하여 그 죄를 벌하리니 저희가 애굽으로 다시 가리라".

          (참조: Gesenius; HELOT).

           

          [참고 - 합하브(bh:b]h' , 1890). 선물 gift.

          8:13은, 그들이 "내게 드리는 제물"의 고기로 제사를 드리고 그것을 먹는다(they sacrifice flesh for the sacrifies of "mine offerings" and eat it, KJV), "그들은" 희생 제물을 "사랑하며, 그들은 고기를 제물로 바치고 그것을 먹는다"("they love" sacrifice, they sacrifice flesh andeat it, RSV), "내게 드리는 제물"에 관해서는(as for the sacrifiecs of "mine offerings", ASV), 그들은 제물을 "가져온다"(they "bring" sacrifices, Modern Language Bibie), "내 희생 선물"에 관하여는(as for "my sacrificial gifts, NASB와 NIV). KB는 이것이 전와되었다고 생각하고 이 구절과 4:18에 나오는 이 단어를 아하브(bh'a' , 158, 사랑 love)의 한 어형으로 수정한다. 개역 표준 성서는 이 두 구절이 불분명하다고 생각하며, 게다가 KB의 견해에 따른다. 그러나 합하브(bh:b]h' , 1890) 어형이이레적인 중복은 아니다. - P. R. Gilchrist.] (p. 640).

          [동의어] (관련성구)

          자바흐(2076) / 희생제물로 도살하다

          자바흐(동사)는 기본어근이며, '희생제물로 도살하다'를 의미한다.

          구약성경에서 이 단어는 약 130회 이상 나온다.

          1. 자바흐는 희생제물로 바칠 짐승을 잡는 것에 대해 사용되었다.

          산당에서 우상에게 바치는 제사와 관련하여 피엘형으로 19회 나오지만 대부분이 칼형으로 나온다. 피엘형 중에서 3회는 솔로몬(왕상 8:5, 대하 5:6), 히스기야(대하 30:22)의 풍부하고도 올바른 제물들을 언급한다.

          2. 자바흐는 '먹기 위해 도살하는 것'에 대해 사용되었다(삼상 28:24, 34:3, 대하 18:2, 12:15, 12:21, 왕상 19:21).

          3. 자바흐는 하나님의 심판으로 살해하는 것에 대해 사용되었다(39:17-19, 왕상 13:2, 왕하 23:20).

          (참조: BDB; TWOT).

          [동의어] (관련성구)

          제바흐(2077)  / 희생, 희생제물 sacrifice

          제바흐(명남)는 자바흐(jb'z: , 2076)에서 유래했으며, '희생, 희생제물 sacrifice'을 의미한다.

          구약성경에서 이 단어는 약 160회 나온다.

          제바흐는 종종 예물(40:6)이나 번제물(삼상 6:15, 10:25)과 연결되어 나온다. 이 명사는 자주 화목제(셸라밈, 3:1, 17:5)와 밀접히 연접하여 사용되지만 가끔은 화목제와 구별되기도 한다(15:8, 22:27).

          종종 제바흐는 자바흐(jb'z: , 2076)의 동족 대격이기도 하나, 희생은 '만들어' 지기도 하고('made' 6:17, 왕상 12:27), '가져오기도 하며'('brought' 4:4, 12:6), '가까이 가져오기도 한다'('brought near, 7:11).

          [동의어] (관련성구)

          코르반(7133) / 제물, 헌물, 예물

          1. 코르반(명남)은 카라브(br'q; , 7126: 가까이 오다, 접근하다)에서 유래했으며, 가까이 가져오는 것, 즉 드려진 것, 특별히 하나님께 드려진 것을 가리킨다. 이것은 "희생으로 드려질" 것이라는 의미에서나(이 경우 이 단어는 모든 제의적 희생제사와 제물에 사용된다) 또는 단순히 성소에서 사용될 것이라는 의미에서 신에게 '바치는 제물, 헌물, 예물'을 의미한다(7:13이하, 참조: KD, Pentateuch, Ⅱ, p. 271; Vos, BT, p. 175).

          구약성경에서 이 단어는 82회 나온다.

          명사 코르반은 여기에서 주어질 수 있는 것 이상으로 더 깊이 주목해 볼만한 가치가 있다. 제사 예물의 주 요소들에는 다음과 같은 것이 포함된다. 첫째 헌물자가 행해야 할 점이 있다. 그의 예물 선택은 자아 희생을 반영해야 하며 자기의 생계 수단과 소산물로 이루어져야 한다(Vos BT, p. 175). 그 헌물은 흠이 없어야 한다. 왜냐하면 가장 좋은 것이 하나님께 속하기 때문이다. 헌물자의 사랑과 헌신은 응당 그로하여금 가장 좋은 것을 드리게 해야 하며(4:4) 오직 이것만이, 필수적이고 완벽한 희생제사의 도덕적 순수성을 반영할 수 있었다(벧전 1:19).

          예물은 하나님에 의해 지정되며(레 1-7장) 하나님이 지정한 장소로 가져왔다(KD, Pentateuch, Ⅱ, p. 279). 예배의 열납은 하나님의 표준에 부합하는가에 달려 있다. 희생 제사용으로 구별해 놓은 산 제물에 안수하여(KD, ibid) 헌물자의 의향 뿐만 아니라 죄까지 그 제물에 전가시킨다(Vos, BT, p. 180).

          그 다음 자아 고백적 죽음의 형벌이 대속적으로 그 짐승에게 가해졌다(Vos, ibid). 이와 같이하여 피는(q, v.) 덮는 것으로 사용되며(13:15) 고기는 불사르고(KD, op. Cit., p. 280) 인간의 생명은 상징적으로 하나님께 바쳐지게 되었다.

          제사장은 피와 살(혹은 "곡물")을 받아 예정된 의식의 세부 사항에 따라 그것을 바친다. 하나님의 열납의 지시에 의해 이 모든 것은 불살라졌다.

          여기서 한가지 크게 주의해야 할 것은 이교도의 희생제사 관념과는 달리 성경의 가르침에는 하나님께로의 하등의 가치 전달 개념이 없다는 점이다(Vos, BT, p. 176). 이스라엘 제사의 핵심적 의미는 영적인 것이었다(19:4-8, 7:21 이하, 14:3).

          (참조: L. J. COPPES).

          우리는 후기 유대교에서 동일한 일반적인 용법을 발견하지만, 이 때이 용어는 어떤 것이 하나님께 드려질 때 - 희생제물로 드리거나 용도를 바꿈,즉 세속적인 사용과 관리를 중지함으로써 - 하는 맹세 용어이다. 하나님께 드려지는 것들에는 물건들, 음식들 따위가 있을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또한 개인이나 집단, 또는 전 국민이 될 수도 있다. 그것은 사람이나 물건이 성전에 넘겨진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단순히 그것들의 관리의 주체가 바뀐다는 것을 의미한다. 코르반은 개인의 포기의 형태를 취할 수도 있지만, 다른 사람이 어떤 사람의 종이나 소유를 사용하는 것을(압력을 가하는 것, 복수하는 것, 상해를 입히는 것) 거부하는 한 방법이다. 따라서 그것은 결혼이나 가족 관계 내에서조차 관계를 깨뜨리는 결과를 초래할 수도 있었다. 따라서 랍비는 순수한 관점에서, 그러나 그 과정의 철저한 결과를 고려하고 그 맹세를 변경하려 하거나 그 결과를 경감시킬 방법을 찾고자 하였다.

          신약 시대에 코르반은 하나의 맹세를 가리키게 되었는데, 이 맹세로써 자기의 소유물이 관념상 성전에 바쳐지게 되며(실제로는 자신이 가지고 있음), 따라서 타인에게 주어질 수 없었다.

          코르반은 신약성경에서 7:11에 한번 나온다: "너희는 가로되 사람이 아비에게나 어미에게나 말하기를 내가 드려 유익하게 할 것이 [고르반] 곧 하나님께 드림이 되었다고 하기만 하면 그만이라 하고". 코르반은 7:10이하의 서기관 및 바리새인과의 논쟁에서만 나타난다. 15:3이하에서는 '재물'(한글개역, "드림")이라는 의미로 도론을 사용한다(참조: 5:23 - 5:24; 8:4등; 또한 5:1; 8:3 - 8:4; 9:9; 11:4). 예수님의 논지는 비록 그 아들이 서원으로 인하여 부모에 대한 모든 의무로부터 자기를 자유롭게 하더라도 서기관들이 그 서원(코르반)을 지지하고 있다는 것이다. 서기관의 논지(30:2 - 30:3에 기초함)는, 하나님께 한 서원이 언제나 우선권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그 응답으로 예수님은 29:13을 인용하신다. 서기관들은, 하나님의 사랑과 공의는 일치하고, 하나님은 인간의 안녕에 관심을 갖고 있다는 사실을 잊고 있었기 때문에, 율법의 성취에 대한 그들의 관심을 올바르게 나타낼 수 없었다. 예수님은 성경의 유효성을 약화시키고자 하신 것이 아니라, 성경의 유효성을 성경의 온전한 문맥(취지)에 두자는 것이다. 여기에서 그 목적은 성화일 것이지만, 성화 그 자체는 자비로 이끈다. 제 4계명은 이것을 나타낸다. 그러나 코르반에 대한 방어적인 실행은 회피의 수단이 된다.

          초대교회의 석의는 21:4(여기에는 타 도라가 쓰임)의 노선을 따라서만 이 말씀을 해석한다. 라틴어 코르반(corban)은 자선 상자이며, 자선은 하나님께 드려진 제물로 간주된다. 후대에 이 용법은 사라졌다.

          (참조: Walter Bauer; K.H.Rengstorf; C.Brown).

           

          2. 쿠르반(명남)은 카라브(br'q; , 7126: 가까이오다, 접근하다)에서 유래했으며, '제물, 헌물'을 의미한다.

          구약성경에서 이 단어는 느헤미야에서 2회 나온다(10:34, 13:31).

           

           

          [동의어] (관련성구)

          hm;WrT](8641, 테루마)

          기증물, 제물

           

          테루마(명여)는 룸(!Wr , 7311)에서 유래했으며, '기증물 contribution, 제물 offering'을 의미한다.

          구약성경에서 이 단어는 76회 나온다.

           

          테루마의 용법은 대략 테누파(hp;WnT] , 8573)의 용법과 유사하다. 테누파는 여러가지 제물을 나타내는 일반적인 제사 용어로 사용되며 또한 특히 직무를 이행하는 제사장을 위해 지정해 둔 제물들의 부분(몫)을 가리키는 용어로 사용된다.

          테루마는 일반적으로 다음과 같은 것들을 나타낸다: 성막 건축을 위해 바친 물질들(25:2-3), 성전 건축을 위해 바사왕과 그 밖의 사람들이 드린 헌물(8:25), 반세겔의 속량금(30:13), 제사장들에게 주도록 정해 놓은 십일조의 십일조(18:25-32), 그리고 에스겔의 성전 이상에 나오는 거룩한 구역(45:1, KJV '봉납(물) oblation', NASB '배당, 몫 allotment'), 우상에게 바친 제물(40:20)과 전리품 중에서 바친 제물(31:29)도 이 단어로 지칭된다. 그 땅의 처음 익은 곡식으로 만든 떡 재물을 가리키는 이 용어의 용법(15:20)은 첫 열매의 단을 언급하는 테누파(요제)의 용례를 상기시킨다.

          테루마는 직무를 이행하는 제사장을 위해 정해 놓은 희생 제물의 몫을 가리키는 용어로서 "거제물"의 넓적다리를 가리켜 반복 사용된다(10:14-15, 6:20, KJV는 '넓적다리 thigh' 대신 '어깨 shoulder'라고 번역함, 한글개역은 본문에 "넓적 다리"라고 기록하고 난외주에 "어깨"라고 기록한다).

          화목 제사에서 제사를 집행하는 제사장의 몫으로 할당된 수반되는 곡식 제물의 몫도 이 단어로 지칭된다(7:14, 대조적으로 테누파[요제]는 결코 고기가 아닌, 제사장의 몫을 지칭하지 않는다는 점을 주목하라). 테루마는 친족들에게 제사장의 몫을 먹지 말라고 금하는 구절에서도 나온다(22:12).

          "거제물"이라는 말은 본래 이 제물이 드려질 때의 이 제물을 물리적으로 교묘히 다루는 것을 가리키는 것 같다. 그러나 그러한 교묘히 다루는 것을 분명히 언급하는 성경의 예는 없다. 이 용어는 의미가 약화되어서 예물을 어떤 방식으로 드리는지에 대한 암시 없이 단순히 '예물 gift'이나 '제물 offering'을 의미하게 되었다.

          이 단어는 한 번 비제의적 용법으로 사용되어 뇌물로 매수하는 자들이나 이기적으로 선물을 강요하는 사람을 언급한다(29:4, "선물의 사람들" men of gifts, 한글개역 "뇌물을 억지로 내게 하는 자").(A. Bowling)

          (참조: BDB; THAT; TWOT)

          http://blog.naver.com/PostView.nhn?blogId=minan09301&logNo=221112093567&categoryNo=0&parentCategoryNo=0&viewDate=&currentPage=1&postListTopCurrentPage=1&from=postView


          3. 번제의 제물의 종류는?(3절, 10절, 14절)

          (3절) 소의 번제 : 흠없는 수컷
          그 예물이 소의 번제이면 흠 없는 수컷으로 회막 문에서 여호와 앞에 열납하시도록 드릴찌니라.

          (10절) 양, 염소의 번제 : 흠 없는 수컷
          만일 그 예물이 떼의 이나 염소의 번제이면 흠 없는 수컷으로 드릴찌니.

          (14절) 새의 번제 : 산비둘기, 집비둘기 새끼
          만일 여호와께 드리는 예물이 새의 번제이면 산비둘기나 집비둘기 새끼로 예물을 삼을 것이요.

          수컷을 제물로 바치는 것은 목축을 할 경우 암컷은 새끼를 낳기 때문에 수컷 보다 더 가치가 높았다고 합니다.
          반면에 수컷은 주로 식용으로 사용한다고 합니다.
          제사를 위해 바치는 것도 부담을 적게 하도록 배려한 것이라고 합니다.

          4. 여호와께 향기로운 냄새는?

          성경에서 향기(香氣), 냄새라는 단어가 제일 많이 나오는 곳은 레위기입니다.
          레위기에는 제사를 설명할 때 ‘여호와께 향기로운 냄새니라
          여호와께 드려 향기로운 냄새가 되게 하라’는 표현(表現)이 반복(反復)됩니다.
          제사(祭祀)에는 늘 냄새가 있었습니다.
          제물(祭物)을 태울 때 나는 냄새입니다.
          그 냄새가 하나님께 향기로운 냄새라고 성경(聖經)은 말합니다.

          마무리를 위한 질문과 적용

          1. 오늘날 그리스도인에게서 나는 향기, 하나님께 드려질 향기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바로 우리가 살아서 제물이 될 때 나는 냄새입니다.
              우리가 산 제물 될 때, 자아의 죽음이 만들어내는 냄새입니다.
              그 냄새가 하나님께 향기로운 냄새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편지(고린도후서 3:2-3)

          너희가 우리의 편지라 우리 마음에 썼고 뭇사람이 알고 읽는바라.
          너희는 우리로 말미암아 나타난 그리스도의 편지니 이는 먹으로 쓴 것이 아니요 오직 살아 계신 하나님의 영으로 한 것이며 또 돌비에 쓴 것이 아니요 오직 육의 심비에 한 것이라.
          You yourselves are our letter, written on our hearts, known and read by everybody.
          You show that you are a letter from Christ, the result of our ministry, written not with ink but with the Spirit of the living God, not on tablets of stone but on tablets of human hearts.


          예수 그리스도의 향기(고린도후서 2:15)

          우리는 구원 얻는 자들에게나 망하는 자들에게나 하나님 앞에서 그리스도의 향기니.
          For we are to God the aroma of Christ among those who are being saved and those who are perishing.

          하나님께 드려지는 가장 아름다운 향기는 예수의 향기입니다.
          예수는 우리를 위해 자신을 버리사 향기로운 희생 제물로 자신을 드렸습니다.
          예수 십자가 향기는 개선 행진의 냄새가 그렇듯 누군가에게는 생명의 냄새이고, 누군가에게는 사망의 냄새입니다.
          마찬가지로 누군가는 십자가를 바라만 보아도 눈물이 나고, 누군가는 십자가만 보면 화내고 짜증을 냅니다.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서 내가 죽을 때 비로소 우리에게서 예수의 향기가 납니다.
          상처 안 받으려고 피해 다니고, 죽지 않으려고 도망 다니면 우리는 향기 나는 삶을 살 수 없습니다.
          내가 상처받고 죽을 때 비로소 내 안의 예수 향기가 나옵니다.
          그러나 우리는 자아가 타버릴까 봐 방화복을, 자아가 죽을까 봐 방탄복을 입고 삽니다.
          그러면 하나님께 향기로운 냄새를 올려 드릴 수 없습니다.

          교회 안에는 옛 자아가 죽으면서 나는 냄새가 진동해야 합니다.
          내 맘이 상해서 나는 냄새, 내 자아가 타들어 가는 냄새, 그 냄새가 하나님께 향기로운 냄새입니다.
          십자가는 내가 죽는 곳입니다.
          십자가는 꽃길이 아닙니다.
          가시밭길입니다.
          그러나 그 가시밭길만이 생명의 길입니다.
          내가 스스로 산 제물이 될 때 나는 그 냄새가 바로 그리스도의 향기입니다.

           하나님,
          저희들이 세상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편지로 읽혀지기를 원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향기로 흘러넘치기를 원합니다.
          저희들 안에 주 예수의 부활 생명의 싹이 솟아나야 하겠습니다.
          부활 생명은 십자가 고난을 거쳐야 하오니
          세상에서 겪는 모든 힘들고 어려운 과정을 참고 인내하며 오직 주님만 닮아가며
          향기로운 냄새로 퍼지며
          그리스도의 편지로 읽혀지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레위기 제2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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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월 17일(수) 레위기 2:1-16  소제(素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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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제의 규례 / 레위기 6:14-18,
          6:19-23 제사장 위임식
          (고운가루 에바 1/10, 아침에 절반 그리고 저녁에 절반, 기름으로 반죽하여 번철에 굽고 기름에 적시어 썰어서 소제로 드려야 한다.)

          레위기 1장부터 7장까지는 다섯 가지 제사에 대해서 소개합니다.

          1장에서는 번제의 제사를 말씀합니다.

          번제의 예물에는 흠없는 수컷 소, 흠없는 수컷 양 염소 그리고 새들 중에서 집둘기산비둘기 새끼를 제물로 바칠 수 있습니다.
          개역 한글 성경에서는 비둘기를 집비둘기와 산비둘기라고 구분했지만 번제의 제사의 규정을 살펴보면 비둘기라고 하는 것이 훨씬 더 당시 번제의 제사에 가깝다고 합니다.

          그 이유는 번제의 제물은 가축 즉 내가 집에서 키우던 것을 제물로 가져오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1장에서는 제물이 왜 달라지는지 설명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4장과 5장에서 속죄제의 규정에서 이스라엘의 평민들에게 어린 암양을 제물로 가져오라고 합니다.
          그러나 형편이 어려울 때는 비들기를 가져오라고도 합니다.

          따라서 번제의 제물이 달라지는 것은 가정 경제적인 형편에 따라 이렇게 가르친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1:2, 자원하는 제사
          이스라엘 자손에게 고하여 이르라 너희 중에 누구든지 여호와께 예물을 드리려거든 생축 중에서 소나 양으로 예물을 드릴찌니라.

          누구든지 여호와께 예물을 드리려거든 / 억지로 제물을 가져오는 것이 아니라 자원하는 믿음으로 제물을 가져와야 합니다.

          1:4, 제물을 가져온 사람이 제물에 안수하라
          그가 번제물의 머리에 안수할찌니 그리하면 열납되어 그를 위하여 속죄가 될 것이라.

          안수한다는 동사가 손을 얹는 것만이 아니라 "누르다. 기대다. 의지하다"는 뜻으로 사용하는 단어라고 합니다.
          따라서 번제의 제물에 안수하는 것은 제물에 나의 몸을 그대로 실어서 바치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러므로 제물이 되는 짐승(가축)에게 안수하는 것은 내 손만 얹는 것이 아니라 나의 모든 것 즉 나의 몸까지 온전하게 전부를 드리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번제의 제물을 집에서 내가 직접 키우던 가축 즉 나와 가장 가깝게 지내던 것으로 나를 상징하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그 번제물을 내 손으로 내가 직접 죽여야 합니다.
          나를 죽이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기쁘게 받으시는 제사는 나를 죽여서 완전하게 바치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런데 이제까지 수천번 수만번의 예배를 드렸는데 아직도 내가 너무 팔팔하게 살아있어서 이것이 온전한 제사가 아니며 거룩하고 신령한 예배가 아닙니다.

          하나님께 향기로운 냄새는 그리스도의 향기가 되는 삶을 회복하는 것이라고 소개했습니다.
          또는 그리스도의 편지로 읽혀져야 합니다.

          번제가 상징하는 의미는 "헌신(獻身)"이라고 하겠습니다.

          오늘부터 사순절이 시작됩니다.
          2021년 사순절 기간동안 내가 하나님께 헌신하기 위하여 번제의 제물처럼 완전히 불태워져 연기가 되어 하늘로 올라가야 할 것이 무엇인가를 찾아 한 가지씩 실천할 수 있는 은혜를 회복하여 부활주일 예배 때는 번제의 제물이 되는 기쁨을 함께 나눌 수 있기를 기대하며 기도합시다.

          제사 제도를 어디에서 말씀하셨을까요?
          레위기 7:37-38
          이는 번제소제 속죄제 속건제 위임제 화목제의 규례라.
          여호와께서 시내 광야에서 이스라엘 자손에게 그 예물을 여호와께 드리라 명하신 시내산에서 이같이 모세에게 명하셨더라

          레위기 2장 / 소제에 관한 질문

          1. 소제로 바쳐지는 예물은?

          2. 소제의 제물에 첨가하는 것들은?

          3. 소제물의 남은 것은 어떻게 합니까?

          4. 소제물에 넣지 말아야 하는 것들은?

          5. 모든 소제물에 넣어야 할 것은?

          (질문과 대답)

          1. 소제로 바쳐지는 예물은?

          (1절) 고운가루

          누구든지 소제의 예물을 여호와께 드리려거든 고운 가루로 예물을 삼아 그 위에 기름을 붓고 또 그 위에 유향을 놓아.

          가루로 가져온 소제물에는 반드시 유향(乳香) 놓아야 합니다.
          당시 유향은 매우 비싼 가격에 거래되었기 때문에 가난한 사람들은 유향을 넣지 않는 소제물을 드렸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면 가난한 사람들은 어떤 소제물을 바쳤을까요?
          고운가루를 음식으로 만들어 드릴 때는 유향을 넣지 않았습니다.

          (4절) 화덕에 구운 것

          네가 화덕에 구운 것으로 소제의 예물을 드리려거든 고운 가루에 기름을 섞어 만든 무교병이나 기름을 바른 무교전병을 드릴 것이요.

          화덕(가마)에 구운 것은 기름을 넣는다.

          (5절) 번철에 부친 것

          번철에 부친 것
          으로 소제의 예물을 드리려거든 고운 가루에 누룩을 넣지 말고 기름을 섞어

          번철(빵굽는 판, 철판)에 부친 것에 기름을 넣는다.

          (7절) 솥에 삶은 것

          네가 솥에 삶은 것으로 소제를 드리려거든 고운 가루와 기름을 섞어 만들찌니라

          솥에 삶은 것(솥에 찐빵, 냄비에 구운 곡식)

          2. 소제의 제물에 첨가하는 것들은?

          (1절) 기름과 유향

          누구든지 소제의 예물을 여호와께 드리려거든 고운 가루로 예물을 삼아 그 위에 기름을 붓고 또 그 위에 유향을 놓아.


          3. 소제물의 남은 것은 어떻게 합니까?

          (3절) 소제물의 남은 것아론과 그 자손에게 돌릴찌니 이는 여호와의 화제 중에 지극히 거룩한 것이니라.

          소제물의 남은 것은 제사장의 몫이었다.

          (10절) 소제물의 남은 것아론과 그 자손에게 돌릴찌니 이는 여호와의 화제 중에 지극히 거룩한 것이니라.


          4. 소제물에 넣지 말아야 하는 것들은?(11절)

          (11절) 무릇 너희가 여호와께 드리는 소제물에는 모두 누룩을 넣지 말찌니 너희가 누룩이나 을 여호와께 화제로 드려 사르지 못할찌니라.

          누룩 : 물질을 변질시킨다
          꿀은 더 달게 만들고, 누룩은 더 크게 만든다.
          하나님 앞으로 나올 때는 있는 모습 그대로 주님 앞에 나와야 한다.

          5. 모든 소제물에 넣어야 할 것은?(13절)

          네 모든 소제물에 소금을 치라하나님언약의 소금을 네 소제에 빼지 못할찌니 네 모든 예물에 소금을 드릴찌니라.

          첫째, 변치 않는 언약(민수기 18:19, 역대하 13:5)

          민수기 18:19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께 거제로 드리는 모든 성물은 내가 영영한 응식으로 너와 네 자녀에게 주노니 이는 여호와 앞에 너와 네 후손에게 변하지 않는 소금 언약이니라.

          역대하 13:5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께서 소금 언약으로 이스라엘 나라를 영원히 다윗과 그 자손에게 주신 것을 너희가 알것이 아니냐.

          하나님을 향한 그 마음을 변치 말아야 한다는 약속

          둘째,  성결케하는 것(출애굽기 30:35, 에스겔 16:4, 열왕기하 2:21)

          출애굽기 30:35
          그것으로 향을 만들되 향 만드는 법대로 만들고 그것에 소금을 쳐서 성결하게 하고.

          에스겔 16:4
          너의 난 것을 말하건대 네가 날 때에 네 배꼽줄을 자르지 아니하였고 너를 물로 씻어 정결케 하지 아니하였고 네게 소금을 뿌리지 아니하였고 너를 강보로 싸지도 아니하였나니.

          열왕기하 2:21
          엘리사가 물 근원으로 나아가서 소금을 그 가운데 던지며 가로되 여호와의 말씀이 내가 이 물을 고쳤으니 이로 좇아 다시는 죽음이나 토산이 익지 못하고 떨어짐이 없을찌니라 하셨느니라.

          소금은 반드시 넣어야 한다.
          누룩과 꿀을 넣지 말아야 한다.
          이러한 규정으로 인하여 아무리 작은 제사일지라도 소홀하게 여기지 말아야 한다.

          소제가 번제 다음으로 소개된 것은 역시 헌신의 의미와 감사의 의미를 내포한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다른 제사에서는 무엇을 넣어라 넣지 말라는 규정이 없습니다.
          오직 소제의 제사에만 이러한 규정에 따라 제사를 드리라고 한 것은 작은 제사일지라도 함부로 하지 말아야 한다는 교훈이 담겨져 있다고 하겠습니다.

          번제(올라) : 올라간다
          소제(민하) : 선물(膳物)

          번제 소제 상징적 의미는 "헌신(獻身)" 이라고 하겠습니다.

          헌신(獻身) : 출애굽기 32:39

          모세가 이르되 각 사람이 그 아들과 그 형제를 쳤으니 오늘날 여호와께 헌신하게 되었느니라 그가 오늘날 너희에게 복을 내리시리라.

          헌신이란 히브리 단어는 "마래" 라고 합니다.
          마래의 뜻은 "가득 채운다"는 뜻입니다.

          예를 들면 가득 채워진 물 항아리에는 다른 것을 넣을 수 없듯이 마음에 가득채워진 성령은(성령 충만)은 주님을 위하여 헌신하는 삶을 감당하게 합니다.


          누룩은 부패와 위선을 의미합니다(마태복음 16:12)
          그제야 제자들이 떡의 누룩이 아니요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의 교훈을 삼가라고 말씀하신 줄을 깨달으니라.

          꿀은 세속적인 쾌락과 재리를 상징합니다(잠언 5:3)
          대저 음녀의 입술은 을 떨어뜨리며 그 입은 기름보다 미끄러우나.

          이와 같이 누룩과 꿀은 우리의 삶을 부패시키고, 하나님으로부터 분리시키는 독소와 같은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소제물로서 화제를 드릴 때에는 누룩과 꿀을 드리지 말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또한 누룩과 꿀은 발효성이 강한 식품으로써, 높은 온도에서는 쉽게 발효하여 그 원래의 성질이 변질되는 특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누룩과 꿀은 쉽게 변질되는 신앙을 상징하기도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신앙을 변질시키는 누룩과 꿀을 우리의 삶 속에서 단호하게 제해 버려야 하는 것입니다.

            또한, 본문 13절에는 “네 모든 소제물에 소금을 치라 네 하나님의 언약의 소금을 네 소제에 빼지 못할지니 네 모든 예물에 소금을 드릴지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고대에는 소금이 매우 비싸고 귀한 식품이었습니다. 또 소금은 맛을 내고 오래 두어도 변질되지 않는 성질을 가지고 있어서 언약의 상징물로 지정되었으며, 모든 예물에 첨가되었습니다. 그래서 본문에서도 소금을 가리켜 “네 하나님의 언약의 소금”이라고 표현한 것입니다. 소금은 바로 우리의 신앙의 순수성과 불변성을 상징합니다. 따라서 소제물에 소금을 치라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순수하고 변치 않는 신앙을 유지하라는 말입니다.

            소제물에 대한 주의 사항은, 우리가 부패와 세속적인 유혹을 멀리하고 하나님을 향한 변함 없는 순수한 믿음을 갖고 신앙 생활을 하여야 한다는 것을 일깨워 줍니다. 우리가 이렇게 살아갈 때, 우리의 삶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이 될 것입니다.


          레위기 제3강 02-24-2021(수)
          제사(祭祀)와 예배(禮拜)
          제사의 여섯 가지 원칙(레위기 1:1-9)과 예배의 두 가지 원칙(요한복음 4:24)
          제사라는 단어 / 831구절
          예배라는 단어 /   10구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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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레위기 1:1-9, 제사(祭祀)의 여섯 가지 원칙(原則)
          요한복음 4:24, 예배(禮拜)의 두 가지 원칙(原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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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구약의 제사는 구원 즉 애급에서 인도하신 은혜에 대한 감사
          신약의 예배는 재림하실 주님을 기다리는 믿음
          회당 예배 : 말씀 중심
          다락방 예배 : 성만찬 중심

          16세기 종교개혁을 거쳐 17세기 이성주의와 합리주의 시대를 맞이하면서 예배가 설교 중심으로 바뀌기 시작하였다고 합니다.
          그 이후 예배의 중심은 말씀과 성찬이 아니라 설교가 되었기 때문에 개신교회는 설교자에 따라 대형화 되는 추세를 나타냈습니다.
          그러나 가톨릭교회는 대형화되지 않습니다.
          최근에는 교회 예배가 마치 문화적인 양상으로 변화되고 있는 추세라고 하겠습니다.
          이러한 때에 앞으로 예배가 어떻게 변화할지 예측하기 어렵습니다.
          제사와 예배에 대한 이해를 함께 나누려고 합니다.

          도축(屠畜), 도살(屠殺)과 제사(祭祀)의 차이점?


          기르는 가축을 죽게 하고(殺)+피를 빼고(放血)+가죽을 벗겨내고(剝皮)+뼈를 바르고(拔骨)+모양을 갖추는(整形) 과정 모두가 도축, 도살에 들어간다.

          제사에는 짐승의 머리 위에 손을 얹어 반드시 안수(安受)를 한다.

          몽골 지방의 유목민들이 짐승을 잡을 때는 몸 밖으로 피가 나오지 않는 방법으로 짐승을 죽인다고 합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의 제사에서 짐승을 죽일 때는 반드시 몸 밖으로 피가 나와야 합니다.
          그래야 그 피를 제사장이 들고 성소로 들어가서 뿌릴 수 있습니다.

          첫째, 흠 없는 제물(祭物)(1:3, 10)

          제물은 생축(生畜)(베헤마) : 반드시 집에 기르던 짐승이어야 한다.

          둘째, 안수(按手)(1:4)(누를 按, 손 手)

          안수(按手)는 손을 머리 위에 얹는 기도를 말한다.
          히브리어 - “싸마크”(기대다. 눕히다) 야드”(손) / 싸마크 야드(안수하다) : 누르다, 기대다, 의지하다
          헬라어로 - “에피티데미”(눕히다. 얹다) 케일“(손)  / 에피키데미 케일(안수하다)
          영어 - Laying of Hands, Ordination

          신약에서 “안수”가 “에피데시스”라는 동사로서 씌어져 있는 것은 4곳이다(행 8:18, 딤전 4:14, 딤후 1:6, 히 6:2).

          셋째, 잡으라(1:5)

          제물의 경우 소와 양과 염소라고 하면 그 제물을 어떻게 죽여야 할까?
          살아있는 소를 제물로 바친다면 단번에 소를 죽일 수 있을까요?
          살아있는 염소를 제무롤 바친다면 단번에 염소를 죽일 수 있을까요?
          아마 어느 누구도 도살장에서 전문 직업을 갖고 있는 도살꾼이 아니라면 양과 염소 그리고 소를 단번에 죽일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런데 제물을 바치는 사람이 직접 그 제물을 죽여야 합니다. 제물을 죽이는 것조차 쉬운 일이 아닙니다. 간단하지도 않습니다.

          그렇다면 제물을 반드시 죽여야 하는데 어떻게 해야 합니까?
          염소를 죽이려고 하면 여러 차례 칼로 찌르고 또 찔러야 합니다.
          그러면 염소가 가만히 있겠습니까?
          닭 모가지를 비틀어 죽이는 것도 할 수 없는 사람이 어떻게 닭보다 훤씬 더 크고 강한 염소를 쉽게 죽일 수 있을까요?
          염소가 칼에 찔리면 비명을 지르고 몸부림을 치며 온몸을 흔들기 때문에 피가 제물을 바치는 사람에게 튀어 온 몸에 피 범벅이 될 것입니다. 소와 염소는 칼에 찔리면 엄청난 난장판이 된다고 합니다.

          그런데 양이 칼에 찔리면 양은 찌른 사람의 눈을 쳐다보며 아무런 비명고 지르지 않고 하늘만 쳐다본다고 합니다.

          이사야 53:7
          그가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 때에도 그 입을 열지 아니하였음이여 마치 도수장으로 끌려가는 어린 과 털 깎는 자 앞에 잠잠한 같이 그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

          넷째, 가죽을 벗기라(1:6)

          소와 염소와 양의 가죽을 벗기는 일이 간단할까요?
          가죽을 벗기는 것도 쉽지 않습니다.
          어디서부터 어떻게 벗겨야 할지 모릅니다.
          그런데도 제물을 바치는 사람이 직접 그 가죽을 모두 벗겨내야 합니다.

          주방에서 닭 요리를 할 때 닭껍질 벗기는 것조차 힘들다고 하여 마트에서 닭을 구입할 때 껍질을 벗겨놓은 것을 구입하는 것이 주부들의 마음입니다.

          다섯째, 각(脚)을 뜨라(1:6)(다리 脚)

          각을 뜬다는 것은 아무렇게나 마구 잘라내는 것이 아니라 마디를 분리시키는 것을 말합니다.
          예를 들면 손을 분리시키려면 여덟 마디로 분리시켜야 한다고 합니다.
          뼈 마디 마디를 분리시키는 것을 각을 뜬다고 합니다.

          여섯째, 단(壇)위에 두고 불사르라(1:9)(제터 壇)

          내장과 정갱이를 물로 씻어야 합니다.
          제물과 내장과 정갱이는 모두 불로 태워야 합니다.
          이것을 향기로운 냄새라고 하셨습니다.

          왜 제물이 타는 연기를 향기로운 냄새라고 하셨을까?

          제물의 조건
          흠 없는 제물의 머리 위에 안수하는 것 : 나의 죄를 짐승에게 넘겨주는 것(轉嫁)( 구를 轉, 시집 갈 嫁)
          짐승의 흠 없는 것이 나에게로 전가된다.

          예수님의 경우
          1. 나의 죄가 예수님에게 전가
          2. 죄와 더불어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도 전가된다.
          (하나님의 진노는 제물을 잡는 과정에서 철저하게 드러난다)
          왜냐하면 제물을 잡는 과정이 이렇게 힘들고 고통스럽다면 누가 죄를 지으려고 하겠는가?
          3. 예수님의 의(義)가 나에게 전가된다.

          제물이 타는 냄새와 연기가 향기로운 것이 아니라 죄가 완전히 소멸(燒滅)되는 것이 향기로운 냄새가 된다.

          성도란?
          제사로 언약을 맺은 사람들

          시편 50:5
          나의 성도를 내 앞에 모으라 곧 제사로 나와 언약한 자니라.

          요한복음 4:24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찌니라.
          God is spirit, and his worshipers must worship in spirit and in truth.

          신령이란?
          성령(in Spirit)

          진정이란?
          진리(in Truth)

          예배는 성령의 도움을 받아 진실한 삶의 열매를 드리는 것

          시편 50:23, 그 행위를 옳게 하는 자에게 내가 하나님의 구원을 보이리라.

          제사란?

          바치는 것을 통하여 


          잠언 21:3
          의와 공평을 행하는 것은 제사 드리는 것보다 여호와께서 기쁘게 여기시느니라.


          시편 51:7
          하나님의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하나님이여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치 아니하시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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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레위기 3:1-17, 7:11-36 화목제(和睦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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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첫째는 다섯 가지 제사의 종류

           1. 번제(燔祭)

           2. 소제(素祭)
           3. 화목제(和睦祭)
           4. 속죄제(贖罪祭)
           5. 속건제(贖愆祭)

          둘째는 제사를 드리는 네 가지 방법

           1. 화제(火祭) fire offering / 제이쉬세, 불로 태운다
           2. 요제(搖祭) wave offering / 테누파, 앞뒤로 흔든다
           3. 전제(奠祭) drink offering / 네데크, 관제(빌 2:17)
           4. 거제(擧祭) heave offering / '테루마'(terumah), '들어올려진 것'

          * 요제는 주로 성소 안에서, 거제는 주로 밖에서

          셋째는 일곱 가지 절기

           1. 유월절(逾越節) pass over
           2. 무교절(無酵節) unleavened bread
           3. 초실절(初實節) first fruits
           4. 오순절(五旬節) pentecost (칠칠절) feast of ewwk
           5. 나팔절(喇叭節) trumphet
           6. 속죄절(贖罪節) atonement
           7. 장막절(帳幕節) feast of tebernacles


          레위기에서 구약 시대에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께 어떻게 예배해야 하였는지 살펴봅니다.
          오늘은 화목제라는 제사를 함께 살펴보겠습니다.


          화목제에 대한 내용을 살펴보기 전에 질문을 하겠습니다.
          질문은 단순합니다.
          예와 아니오라고 대답하면 됩니다.

          (질문) 화목제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에게 제사하는 것이 맞습니까?

          (질문) 하나님의 백성들이 화목해야 할 대상은 누구일까요?   

          첫째는 하나님과 화목해야 합니다.
          둘째는 하나님의 백성들끼리 서로 화목해야 합니다.

          화목제를 오늘의 시대를 살아가는 성도들에게 적용해 봅니다.

          (질문) 나는 하나님과 화목한 신앙입니까?

          (질문) 교회 공동체 안에서 모든 성도들과 화목하고 있습니까?

          (질문) 가족들끼리 화목하고 있습니까?

          어느 교회에서 코로나 바이라스로 인하여 예배당을 리모델링하기로 결정했습니다.
          리모델링 하기 위한 헌금도 넘치도록 참여하여 재정적으로 아무런 문제가 없습니다.
          강대상을 중심으로 성가대석이 있고 반대편에 그랜드 피아노가 있습니다.
          예배당을 리모델링 하면서 가급적이면 더 많은 교인들이 참여하도록 준비 위원회를 조직했습니다.
          그리고 위원회로 모였습니다.
          마침 성가대 대장과 지휘자와 반주가가 참여하여 그랜드 피아노를 성가대석과 가까이 배치하는 것이 좋다고 의견을 제시했습니다.
          이렇게 회의를 마쳤습니다.
          그런데 어느 장로님께서 그랜드 피아노를 전에 놓여 있던 곳으로 옮겼습니다.
          그 다음에는 다시 성가대석 가까이 또 옮겼습니다.
          이렇게 주일 마다 그랜드 피아노가 오른편으로 왼편으로 옮겨지면서 예배당 바닥에 흠집이 생겨나기 시작했습니다.
          바닥만 흠집이 생긴 것이 아니라 서로 자기 주장을 하는 사람들의 마음에도 흠집이 생겼습니다.

          이렇게 반복하던 중 결국에는 교회의 분쟁은 점점 더 심각해졌고 결국에는 분열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런 현상이 오늘 우리에게는 없다고 단정할 수 있습니까?

          아직도 누구는 무엇 때문에 거리낌이 내 안에 도사리고 있다면 오늘 화목제 제사를 살펴보며 내 안에 거리끼는 것들도 모두 정리해야 하겠습니다.
           

          3:1-5, 소의 화목제
          3:6-11, 양의 화목제
          3:12-17, 염소의 화목제


          화목제(和睦祭) - 화목할 화(和), 화목할 목(睦), 제사 제(祭)

          Fellowship Offering (레위기 7:13) NIV
          Peace Offering (레위기 7:37) KJV
          Freewill Offering (레위기 7:16) NIV - 자원제
          Freewill Offering (신명기 12:17) - 낙헌 예물

          제바흐 쉐라밈

          제바흐(제물) + 쉐라밈(평화) - 단수 "샬롬"


          화목제의 근거


          로마서 3:23-25

          23. 모든 사람이 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24.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 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25.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로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 제물로 세우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심이니 .

          :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한다.
          구속 : 하나님의 은혜로 의롭다
          예수의 피 : 화목제물

          출애굽기 25:21
          속죄소를 궤 위에 얹고 내가 네게 줄 증거판을 궤 속에 넣으라.
          Place the cover on top of the ark and put in the ark the Testimony, which I will give you.

          화목제물(和睦祭物)의 종류(種類) / 소, 염소, 양

          소,  염소 : 흠 없는 암컷,수컷 / 소(3:1), 양(3:6), 염소(3:12)

          3:1(소)
          사람이 만일 화목제의 희생을 예물로 드리되 로 드리려거든 수컷이나 암컷이나 흠 없는 것으로 여호와 앞에 드릴찌니.

          3:6(양)
          만일 여호와께 예물로 드리는 화목제의 희생이 양이면 수컷이나 암컷이나 흠 없는 것으로 드릴찌며.

          염소(3:12)
          만일 예물이 염소면 그것을 여호와 앞으로 끌어다가.

          * 화목제에서 ""는 제물로 바칠 수 없다.
          왜냐하면 제사장과 제사자가 나누려면 양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화목제(和睦祭)의 종류(種類) 레위기 7:11-18


          감사제(感謝祭)(7:11-15)

          감사제는 서원제와 자원제보다 더욱 엄숙한 제사였습니다.
          감사제는 소제(12절)뿐 아니라 유교병(13절)과 함께 드려야 했습니다.
          감사제를 드릴 때 무교병과 유교병 어느 하나만 드린 것이 아니라 이들 모두를 함께 드렸다(14절).

          서원제(誓願祭)(7:16-18)


          서원제와 자원제의 제물은 그 이튿날까지 먹는 것이 허용되었습니다(16-17).
          반면 감사제의 제물은 제사 드린 당일에 다 먹어야 했습니다(15절). 

          자원제(自願祭)(樂獻祭)(7:16-18)

          서원제와 자원제의 제물은 그 이튿날까지 먹는 것이 허용되었습니다(16-17).
          반면 감사제의 제물은 제사 드린 당일에 다 먹어야 했습니다(15절).
          제물을 제사 드린 당일에 다 먹지 못한 경우에는 태워야 했습니다.

          제물의 고기를 당일에 먹어야 한다는 규례는 다른 제사의 제물과 관련해서는 나타나지 않습니다.
          아마 고기를 신속히 먹어야 한다는 명령은 예배자에게 다른 사람들,
          특히 가난한 사람들과 함께 고기를 나누어 먹도록 장려하기 위한 방편으로 인 것입니다.
          즉 당일에 고기를 다 소비하라는 것은 다 나누어 함께 먹으라는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이를 어기고 남은 고기를 먹으면 그가 드린 제사는 가증하게 될 뿐 아니라 그 고기를 먹은 자는 죄를 지은 자로 간주되었습니다(18절). 이 경우에는 부정한 자가 제물을 먹었을 경우 위의 경우보다 더욱 심각한 심판을 받았습니다.
          그는 그의 백성 중에서 끊어지는 형벌을 받았습니다(20-21절).

          “백성 중에서 끊어지다”라는 구절은 죽음과 같은 하나님의 직접적인 심판을 지칭합니다.
          백성 중에서 끊어지는 벌은 다양한 죄와 결부되어 나타나는데 주로 사람들이 판단하기에 대단히 힘든 종교적인 죄, 성적인 범죄와 관련되어 나타납니다(7:20-21, 25, 27; 17:4, 9; 18:29; 19:8; 20:17-18; 22:3절 등).
          그만큼 부정한 가운데 제물을 먹는 것은 하나님을 모욕하는 행위였던 것입니다.



          신약(新約)의 화목제(和睦祭)

          신약에서 화목제와 가장 가까운 제도는 성만찬(聖晩餐) 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를 지시기 전 제자들에게 “이 잔은 내 피로 세운 새 언약”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고전 11:25).
          새 언약의 피옛 언약의 피에 대한 표현입니다.
          그렇다면 옛 언약의 피는 무엇이었을까요?

          출애굽기 24:8
          모세가 그 를 취하여 백성에게 뿌려 가로되 이는 여호와께서 이 모든 말씀에 대하여 너희와 세우신 언약니라.

          출애굽기 24장에서 백성들이 여호와의 모든 말씀을 준행하겠다고 약속하자 모세는 이스라엘 열두 지파를 상징하는 열두 기둥을 세우고 번제와 화목제를 드립니다.

          언약서를 백성들에게 낭독하자 백성들은 다시 한 번 여호와의 모든 말씀을 준행하겠다고 약속합니다(7절).
          그러자 모세는 화목제의 피를 양푼에 담아 반은 하나님을 상징하는 단에 뿌리고(6절),
          나머지 반은 백성들에게 뿌리며,
          “이는 여호와께서 너희와 세우신 언약의 피”(8절)라고 선언합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먹고 마신 최후의 만찬은 이와 같은 면에서 화목제와 유사합니다.
          성만찬과 화목제의 유사점은 참여하는 자가 정결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구약에서 제물을 바친 자들이 제물을 먹기 위해 정결해야 했던 것처럼
          신약에서도 자기 몸을 살피지 않고 주의 만찬에 참여하는 자에게 하나님의 심판을 경고했습니다.

          “만일 몸이 부정한 자가 여호와께 속한 화목제의 희생의 고기를 먹으면 그 사람은 자기 백성 중에서 끊쳐질 것이요”(레 7:20)

          “그러므로 누구든지 주의 떡이나 잔을 합당치 않게 먹고 마시는 자는 주의 몸과 피를 범하는 죄가 있느니라”(고전 11:27)

          십자가에서의 그리스도의 죽음번제라고 합니다.
          제자들과 함께 그의 살과 피를 나눈 최후의 만찬화목제와 흡사합니다.






          구별 없이 어느 것이든 가능하다.
          그러나 전부를 드리는 것이 아니라 내장에 덮인 기름과 내장에 붙은 모든 기름, 그리고 두 콩팥과 그 위의 기름, 허리 근방에 있는 것과 간에 덮인 꺼풀을 콩팥과 함께 드리도록 되어 있었다.

          양 : 소와 마찬가지로 흠 없는 것으로 하되 암,수 어느 것이든 가능하였고, 어린 양을 드릴 수도 있었다.
          양의 경우 역시 양의 기름만을 드리되 미려골(등심뼈 또는 척추)에서 베어 낸 기름진 꼬리와 내장에 덮인 것과 모든 기름진 두 콩팥과 간에 덮인 기름과 꺼풀만을 콩팥과 함께 드릴 수 있었다.













          화목제는 여호와께 향기로운 냄새를 드리는 세 번째 제사입니다. 그러나 번제와 소제는 의무적으로 드려야 하는 제사인 반면 화목제는 제사 자가 그것을 드리기를 원할 때 드리는 선택적 제사라는 면에서 차이가 있습니다. 매일 아침과 저녁으로 드린 번제와 소제와는 달리 이 제사는 성소에서 매일 정규적으로 드리는 제사가 아니었습니다. 화목제는 감사함으로 자원함으로 또는 소원을 성취하기 위해 드렸습니다(레7:15-16절). 화목제의 제물은 암수에 관계없이 가축인 소, 양 또는 염소로 드릴 수 있었습니다. 화목제에 대해서는 3장에는 제물과 방법에 대해서 그리고 7장에는 화목제의 종류와 거제와 요제, 그리고 제사장에게 돌려진 제물에 대한 말씀이 나옵니다. 그래서 화목제는 오히려 7장에 훨씬 중요한 내용들이 많이 들었습니다.

          화목제와 번제와 소제의 차이점은 예배 자에게 제물로 드린 동물의 고기를 먹는 것이 허용되었다는 것입니다. 번제의 경우 제물 전체를 태워 하나님께 드렸으면 소제의 경우 한줌의 제물만을 기념물로 태우고 나머지는 제사장들에게 주었습니다. 화목제의 경우 동물의 일부는 태웠으며, 일부는 제사장들이 먹었습니다. 또 그 가운데 일부는 예배 자에게 돌려져 예배 자와 그 친지들이 함께 먹었습니다. 따라서 화목제는 성소와 성소 근처에서 먹는 즐거운 축제였습니다.


          각 문단은 “사람이 만일 화목제의 희생을 드리되 소/양/염소로 드리려거든 수컷이나 암컷이나 흠 없는 것으로 여호와 앞에 드릴지니”라고 시작합니다(1, 6, 12).

          그리고 “이는 화제라 여호와께 향기로운 냄새니라.” 또는 이와 유사한 구절로 결론을 맺습니다(5, 11, 16).

          마지막 문단은 기름과 피를 먹지 말라는 구체적 명령이 추가 되었습니다.
          “대대로 영원한 규례”라는 표현은 레위기에서 중요한 원칙을 강조하기 위해 자주 나타납니다.

           

          2. 화목제 의식

          화목제를 드리고자 하는 자는 암수에 관계없이 흠 없는 가축(소나 양이나 염소)을 여호와 앞으로, 즉 회막 문 앞으로 가지고 왔습니다(1,6-7,12절).

          예배 자는 제물의 머리에 안수했습니다. 안수가 자신을 제물과 동일시하는 상징적 행위라는 점은 중요합니다. 아마 예배 자는 동물의 머리에 안수하며 예배 드리는 이유를 고백했을 것으로 보입니다. 예를 들면 기도 응답이나 서원이 성취되었다는 고백들입니다.

           

          화목제 의식은 안수 한 후에 동물을 잡습니다.

          제사장은 그 피를 단 사면에 뿌립니다.

          그리고 동물의 가죽을 벗기고 토막 냅니다. 이것은 레위기 3장에서 나타나지 않지만 번제로 유추할 수 있습니다. 여기까지는 번제와 동일하게 화목제 의식이 진행되었습니다.

          그러나 화목제가 번제와 다른 점은 번제가 동물 전체를 제단 위에서 태운 것과는 달리, 화목제에는 내장을 덮고 있는 기름과 콩팥을 덥고 있는 기름, 그리고 간 주위에 있는 기름만을(양으로 드릴 경우 꼬리의 기름까지) 여호와께 드리는 화제로 태웠습니다(3-5, 9-11, 14-16절)

           

          화목제 의식은 예배 자와 함께 예배하는 사람들 또는 가족들이 그 나머지 고기를 먹는 성스러운 식사에 참여하는 것으로 끝맺습니다. 그래서 신약의 성만찬과 가장 유사한 모습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화목제 의식을 잘 이해하기 위해서는 7장에 소개되는 제사장들에게 주는 화목제 규례를 참조해야 합니다. 레위기 3장은 공동식사 자체에 대해서는 거의 설명하지 않습니다. 단지 7:20-21절에서 이 식사에 참여하는 모든 자는 의식적으로 정결해야 한다고 규정할 뿐입니다. 만일 부정한 자가 이를 먹으면 이스라엘 백성 중에서 끊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뒤에 다시 살피겠습니까만 제사장들이 제물을 먹지 못하게 하는 부정은 레위기 22장에 상세히 소개됩니다. 일반 백성 가운데 사람의 시체나 부정한 동물의 사체를 접촉한 자(11:24-40) 또는 몸에 유출병이 있는 자는 부정한 자로 간주되었으며, 이런 자는 적절한 정결의식을 행하기 전까지 어떤 제물도 먹을 수 없었습니다.

           

          하나님께는 콩팥과 기름 부위를 태워 드린 반면, 제사장들은 가슴과 뒷다리를 먹을 수 있었습니다(7:31-34절). 한 편 예배 자와 동참자들은 그 나머지를 먹었습니다. 그러나 피와 기름은 결코 먹어서는 안 되었습니다(3:17; 7:22-27절). 피는 생명을 속하기에 먹으면 안 되었으며(17:11절), 기름은 아마도 가장 좋은 부분이었기에 하나님께 드린 것으로 보입니다. 구약에서 기름은 최고의 것과 동의어로 사용됩니다(창4:4; 45:18; 시81:16절). 제물은 상징적으로 예배자 자신을 나타내기에 하나님께 제물의 최상의 부위를 드린다는 것은 예배자 자신의 최고의 부분을 하나님께 드림을 의미합니다. 콩팥도 특별히 단에서 하나님께 드렸습니다. 콩팥과 내장은 구약에서 감정의 좌소로 간주되었습니다(욥19:27; 시16:7; 렘4:14; 12:2). 따라서 콩팥을 한님께 드림은 오늘날 우리 마음을 드림과 같은 의미였습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피를 먹는 것은 전적으로 금지되었습니다. 그것을 먹는 자는 자기 백성 중에서 끊쳐 지리라고 선언되었습니다(25-26절).

           

          화목제 중에는 제사장의 분깃(7:28-36절)이 있습니다. 제사를 집행하는 제사장은 백성이 드리는 모든 제물에서 분깃을 받았다(6:26; 7:6-10). 이것은 제사장으로 기름부음을 받았기 때문에 주어지는 몫이었다(35). 화목제의 경우는 제사장은 가슴(30절)과 오른쪽 뒷다리(33절)을 받았습니다. 가슴은 요제라 불리며 뒷다리는 거제라 불립니다. 정통적인 해석은 거제의 경우 제물을 취하여 수직으로 흔드는 의식을 행한 것으로, 요제의 경우 제물을 취하여 수평으로 흔드는 의식을 행한 것으로 이해합니다. 이렇게 드린 제물은 제사장의 몫이 되었습니다.

           

          3. 화목제의 목적

          화목제의 히브리어 명칭인 쉘라밈은 화평한 관계(샬롬), 하나님께 드리는 선물(아카드어의 “슐마누”) 등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또는 일련의 제사를 “완성하는”(샬렘)절차를 나타낸다고 여겨지기도 합니다.

          레위기 7장은 감사제, 서원제, 자원제라는 세 가지 종류의 화목제를 소개합니다(7:11-18절).
          이 세 형태의 제사에서 구원 또는 평화가 공통적으로 발견됩니다.

          화목제는 원수나 병의 공격에서 하나님의 도우심을 간구하거나 자신의 잘못을 고백하며 드렸고(삿 20:26; 21:4; 삼하 24:25)
          혹은 환난에서 구원 받은 후에 하나님의 자비에 초점을 맞추어 감사제를 드렸습니다(예. 시 56:12-13).

          또 어려운 상황을 만났을 때 사람들은 흔히 하나님의 도우심을 간구하며 서원제의 약속을 합니다.
          따라서 서원이 이루어졌을 경우 서원자는 화목제를 드려야 했습니다.
          에서를 피해 집에서 도망 다니던 야곱이 만일 하나님이 자신을 안전하게 집으로 돌아가게 하시면 여호와가 자신의 하나님이 될 것이라고 벧엘에서 서원하고(창 28:20-22), 돌기둥 위에 기름을 부음으로 자신의 서원을 확실하게 보증합니다.

          그 후 야곱은 벧엘로 다시 돌아오자 제사를 드립니다(창 35장).
          삼상 1장에서 한나는 만일 하나님이 아들을 낳게 해 주시면 그 아들을 하나님께 바치겠다고 서원합니다(삼상 1:11절).
          사무엘이 태어나고 젖을 뗀 후 한나는 세 마리의 수소와 가루 한 에바와 포도주 한 가죽 부대로 서원제를 드렸습니다(삼상 1:24)

          세 번째로 소개되는 화목제는 자원제입니다.
          이것은 때로 낙헌제라고 번역되기도 했습니다(출 35:29; 스 1:4; 8:28; 시 54:6).
          자원제 또는 낙헌제는 하나님의 호의와 선하심에 대해 예배자가 자발적으로 드리는 제사로 신명기는 추수를 한 후 드리는 자원제를 언급합니다(신 16:10)
          자원하여 화목제를 드릴 경우에는 흠이 있는 제물이 허용되었습니다(레 22:23절).
          하지만 감사제나 서원제에는 반드시 흠이 없는 동물로 제사 드렸습니다.

          이 외에도 화목제는 흔히 언약 의식과 함께 나타납니다(출 24:5; 신 27:7; 왕상 8:63)
          아마도 이스라엘을 하나님의 백성으로 선택하심에 대한 감사의 의미와 언약을 지키겠다는 서원의 의미로 화목제를 드린 듯합니다.

          가끔 죄에 대한 고백과 구원에 대한 탄원이 나타나기도 하지만 화목제는 대부분 즐거운 경우에 드렸습니다.
          따라서 제사 후 뒤따르는 성스러운 식사는 여호와 앞에서 즐거움을 나누는 기회였습니다(신 12:12, 18;  27:7; 왕상 8:66)

          마찬가지로 화목제에도 피를 뿌리는 의식이 거행되기는 하지만 속죄는 화목제의 주목적이 아니었습니다.
          속죄는 화목제를 드리기에 앞서 드려진 번제의 주요 목적이었습니다.
          화목제에서 피 뿌리는 의식이 나타나는 것은 이와 같이 즐거운 경우에조차 인간은 항상 죄를 용서 받아야 함을 상기시킵니다.

          화목제를 드리는 예배자는 하나님의 언약의 법을 준수할 것을 서원하거나,
          하나님이 예배자의 기도를 응답하여 주시면 하나님을 위해 특정한 일을 하겠다고 구체적으로 서원합니다.
          반면에 하나님은 이들에게 복을 주시겠다는 것을 화목제 식사를 통하여 가시적으로 보증하십니다.
          고기를 먹으며 즐기는 것은 언약을 지키는 자에게 모든 다른 축복들(레 26:3-13; 신 28:1-14)도 주실 것임을 물리적으로 상기하게 하는 역할을 합니다.
          하나님이 언약을 지키는 자들은 집에서든 집 밖에서든 평화를 누리며 풍성한 수확과 많은 자녀들과 번역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화목제는 하나님과 이스라엘이 확인하는 화평한 관계를 표현하는 제사입니다.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고 난 이후 하나님이 주신 예물을 먹고 나누면서 평안과 기쁨을 확인하는 예배가 바로 화목제입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요구하시는 것은 하나님과 이스라엘 사이에 이루어지는 샬롬입니다.
          화목제가 드려지는 때가 감사할 때, 서원을 드릴 때, 그밖에 하나님께 대한 자신의 사랑을 임의적으로 표현할 때 드리게 되기에 화목제는 궁극적으로 하나님과의 화목을 강조하는 예배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화목제는 하나님과 이스라엘이 누리는 거룩한 교제를 드러내는 제사입니다. 화목제는 잔치입니다. 예배하는 자가 하나님의 식탁, 즉 제단에서 하나님을 주빈으로, 예배드린 자를 객(客)으로 삼아 먹고 나누는 기쁨의 잔치입니다. 화목제는 서로 나눠주는 예물입니다(히 13:16). 하나님의 은혜를 서로 나누고 확인하는 제사가 바로 화목제입니다. 신앙은 이론이 아닙니다. 신앙은 지식이 아닙니다. 신앙은 삶입니다. 하나님과 화목하여 누리는 기쁨과 감사의 삶입니다. 우리의 삶이 잔치가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화목을 드러내는 잔치가 되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은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적인 죽음으로 인하여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는 것은 순전히 예수의 피 덕분이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나니”(히 10:19)라고 히브리서 기자는 말씀하고 있습니다.

           



          화목제(Fellowship Offering) 제바흐 쉐라밈


          화목제를 뜻하는 히브리어 ‘제바흐 쉐라밈'
          "자바흐"는 ‘동물을 살육하다’, ‘죽이다’, ‘제사 드리다’에서 파생된 "도륙" ‘희생물’을 뜻하는 ‘제바흐에서 파생하였다.
          ‘완전한’, ‘정다운’, ‘공평한’, ‘평화로운’을 뜻하는 ‘솨렘’에서 파생된 ‘쉐라밈'
          "제바흐"와 "쉐라밈"의 합성어로 그 의미는 ‘사람이 하나님과의 완전한 관계’, 또는 ‘평화로운 관계를 얻고자 하는 희생 제물’ 이라는 의미이다.

          제물(祭物)의 종류(種類) / 소, 염소, 양

          소와 염소 : 흠 없는 것으로서 암컷,수컷 구별 없이 어느 것이든 가능하다.
          그러나 전부를 드리는 것이 아니라 내장에 덮인 기름과 내장에 붙은 모든 기름, 그리고 두 콩팥과 그 위의 기름, 허리 근방에 있는 것과 간에 덮인 꺼풀을 콩팥과 함께 드리도록 되어 있었다.

          양 : 소와 마찬가지로 흠 없는 것으로 하되 암,수 어느 것이든 가능하였고, 어린 양을 드릴 수도 있었다.
          양의 경우 역시 양의 기름만을 드리되 미려골(등심뼈 또는 척추)에서 베어 낸 기름진 꼬리와 내장에 덮인 것과 모든 기름진 두 콩팥과 간에 덮인 기름과 꺼풀만을 콩팥과 함께 드릴 수 있었다.

          화목제를 드리는 방법


          1. 제물을 갖고 여호와 앞으로 나온다.
          2. 손을 제물의 머리 위에 얹고 안수한다.
          3. 피를 제사장에게 주면 제사장은 그 피를 번제단 사면에 뿌린다.
          4. 제물의 가죽을 벗기고 그 속의 내장에 덮인 기름과 내장에 붙은 모든 기름과 콩팥과 그 위의 기름과 허리 근방에 있는 것과 간에 덮인 것을 제사장에게 주면 제사장은 그것들을 받아 제단에서 불사른다.
          5. 제물의 가슴은 ‘요제’로 제물의 우편 뒷다리는’거제’로 흔들어 제사장의 음식으로주어지는데 제사장과 가족들은 그것을 그날에 다 먹어야 하며 남은 것은 불에 태워야 했다.

          화목제의 특색


          화목제는 다른 제사와는 달리 두 가지의 특색이 있었다.

          첫째, 선택적 제사

          의무적인 제사가 아닌 ‘선택적인 제사’
          1. ‘자원함으로'(레 7:16)
          2. ‘서원함으로'(레 7:16, 삼상 1;21이하)
          3. ‘감사함으로'(레 7:15) 드리는 제사

          둘째, 축제의 제사

          화목 제물의 고기를 제물을 바치는 사람도 먹을 수 있는 일종의 축제 형식의 제사(레 7:15-21)







          요아킴은 먼 여행길을 떠났다. 사해에서 캔 소금 덩어리를 다메섹에 가서 팔면 가족들 일년 생계는 걱정할 필요가 없는 돈을 만질 수 있었다. 영세했던 요아킴 일행의 여행 장비는 빈약했으며 낙타와 노새는 노쇠했다. 300km가 넘는 여행길은 어려웠다. 큰 강을 만나 떠내려갈 뻔 했고, 뜨거운 광야 길을 건널 때는 길을 잘못든 바람에 물이 고갈되어 쓰러질 뻔했다. 우여곡절 끝에 목적지를 불과 하룻 길 앞둔 어느 날, 일행은 산적떼를 만났다. 모든 것을 빼앗길 찰나였다. 그 때 어디선가 갑자기 십수명의 군인들이 나타나 극적으로 그들을 물리쳐주었다. 그들은 임무를 마치고 마침 다메섹으로 복귀하고 있던 참이라 했다. 참으로 하나님이 보내신 하늘의 천군천사들이었다. 힘든 여행길을 마치고 요아킴은 고향으로 돌아왔다. 소금도 좋은 값으로 팔아 당분간 넉넉히 살 수 있게 되었다.

          요아킴은 하나님께 바칠 번제의 양과 화목제 소를 각각 한 마리 씩 고른 후 당장에 성전으로 달려갔다. 자신의 여행길에서 함께 해주신 하나님, 여러 차례 위기의 순간에 구원의 손길을 베풀어주신 여호와 하나님께 감사의 제사를 바치고 친족과 마을 사람들을 위해 기쁨의 잔치를 베풀고 싶었기 때문이다. 번제를 감사의 제물로 먼저 바친 후, 요아킴은 화목제를 또한 하나님께 올려 드렸다. 제사 규례를 따라 번제의 양은 남김없이 모두 태워져 하나님께 감사의 제물로 올라갔다. 이어서 화목제의 수소는 내장의 기름 덩어리와 두 콩팥, 그리고 간엽을 도려내 바친 후 가슴과 오른쪽 넓적다리는 수고하신 제사장님 몫으로 드리고 나머지 대부분의 몸통을 집으로 가져왔다. 그리고 요아킴은 마을 사람 모두를 불러 그 화목제 짐승으로 불고기 파티를 열었다. 그 동안 껄끄러운 관계였던 친구 시므온도 초대를 받고선 기꺼이 기쁨으로 달려와 주었다. 즐겁게 고기를 삶고 구워 먹으며 요아킴은 여행길에 어떻게 하나님께서 자신을 보호하셨는지 간증을 들려주었다. 감사가 풍성히 넘쳤다. 간증을 들은 다른 사람들도 또한 최근에 있었던 특별한 하나님의 은혜를 더하여 나누었다. 잔치의 자리에서 아름다운 찬양의 노래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모두가 시편의 찬양을 노래했다. 그 순간 요아킴과 시므온을 비롯 모두가 하나님 앞에서 화목하고 하나가 되었다.

          화목제의 특징

          위험한 여행을 마치고 돌아온 요아킴이 바친 제사는 번제와 화목제였다. 번제는 여러 목적으로 바쳤지만, 가장 대표적인 자원의 제사로서 감사의 제물로 바치는 경우가 많았다. 이때 흔하게 화목제가 수반되었다. 번제가 하나님께 온전히 바쳐진 제물이었다면, 화목제는 하나님께 일부 바치고 나머지 대부분은 사람이 함께 나누기 위한 제물이었다. 따라서 번제가 수직적인 제사였다면 또 하나의 감사의 제물이었던 화목제는 주로 사람들과 기쁨을 나누기 위한 수평적인 제사였다고 볼 수 있다.

          레위기 3장에서 규정된 화목제의 히브리어는 쉘라밈(shelamim)이다.
          이 단어는 분명 ‘샬롬’에서 기원한 것이다.
          샬롬은 평화와 친교, 다시 말해 관계가 좋은 상태를 말한다.

          화목제는 영어 성경에서 ‘평화의 제사’(peace offering)나 ‘친교의 제사’(fellowship offering)로 번역한다.
          흔히 알고 있는 대로 화목제는 하나님과 ‘화목하기 위해’ 바치는 제사가 아니라 하나님과 이미 ‘화목한 관계’를 감사하며 기뻐하기 위해 바친다.
          하나님과 관계가 틀어졌을 경우 관계를 복원하여 ‘화목’하고 화해하기 위한 제사는 속죄제속건제라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죄가 하나님과 백성 사이를 가로막기 때문이다. 감사의 번제나 화목제는 하나님과 이미 화목한 관계 속에서 교제를 지속하고 기쁨과 감사를 표현하기 위해 바치는 제사다. 화목제는 하나님 앞에서 영적인 잔치를 베풀어 사람들과 고기를 나누는 것에 목적이 있었기에 소, 양, 염소를 암수 구분 없이 화목제로 바칠 수 있었다. 비둘기는 제외되었는데 고기를 나누기에 너무 빈약했기 때문이다. 양과 염소는 아마 가족과 친족들만 초대해서 나누었던 반면, 소를 잡을 때는 마을 잔치가 벌어졌을 것이다. 어느 것을 바칠 지는 자신의 형편과 감사의 정도에 따라 제사자 본인이 결정할 수 있었다. 화목제의 가장 큰 특징은 짐승의 일부만 하나님께 바치고 나머지는 전부 사람들이 나누어 먹었다는 점이다. 이때 하나님께 바치는 부위는 내장 부위의 기름 덩어리(suet), 두 콩팥, 그리고 간엽(liver lobe)이었다. 흔히 히브리어 요테레트 카베드(yoteret kabed)를 간꺼플로 번역하는데 그런 얇은 막이 제물에 적합했을리 없다. 랍비들은 그것을 ‘간의 손가락’, 다시 말해 간의 어느 한 토막으로 번역한다. 그것은 간 중에서 ‘미상엽’이라는 부위로 알려진다. 콩팥과 간엽을 바치는 이유에 대해서는 여러 의견이 있으나 그 기관들이 인간의 감정이 집약되는 기관, 즉 감정의 좌소이기 때문이라고 보는 견해가 있다. 특히 간은 당시 널리 퍼져 있던 간점술을 금지하기 위해 제단에 바치라고 했다는 견해가 있다. 그러나 콩팥은 단순히 기름 덩어리에 묻혀 있기 때문에 기름과 한 덩어리로 취급된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화목제에서 태워지는 이 부위들을 단순히 ‘기름’이라고 표현하는 경우가 많다(레 6:12; 왕상 8:64; 대하 7:7; 사 1:11). 그리고 짙은 빨간 색의 간에 대해서는 고대인들에게는 그 기관이 피를 만드는 기관으로 간주되어 ‘피는 곧 생명’이며 하나님께 돌려야하기 때문에 간이 요구되었다는 설명이 가장 그럴 듯 하다.
          ▲ 고대 팔레스타인 양의 거대한 꼬리와 꼬리를 위한 수레

          양의 경우는 특별히 미골에서 벤 기름진 꼬리를 잘라 바치라는 규정이 더해졌다(레 3:9). 꼬리가 두툼하고 묵직한 것이 팔레스타인 양의 특징이다. 최근에는 그런 양을 보기 힘들지만, 헤로도투스의 기록에 의하면 고대 팔레스타인 지역에는 어떤 양은 꼬리가 너무 거대한 나머지 바퀴가 달린 수레를 다는 경우도 있었다고 한다. 이처럼 기름진 꼬리는 미골을 절단하여 제단에 바쳤다(레 3:9). 그러나 염소 꼬리나 소 꼬리는 기름이 아닌 고기 덩어리이므로 제단에 바치지 않았다(레 3:3-4, 14-15).

          이렇게 기름과 일부 내장을 제하고 남은 고기(아마 남은 내장도 포함되어 있었을 것이다)는 제사장 몫으로 일부를 떼어낸 뒤 제사자가 가져가 이웃과 함께 나누어 먹었다. 제사장의 몫은 가슴과 오른쪽 뒷다리, 나머지는 모두 제사자의 몫이었다.

          그렇다면 왜 짐승의 기름을 여호와께 바쳤을까? 이에 대해서는 기름이 가장 맛있는 부위였다거나 콜레스테롤 덩어리라 인체에 해로워 제물로 바쳤다는 설이 있다. 기름에 잘 타는 부위인 만큼 제물의 소각을 도왔을 것이라는 실용적 이유를 내세우는 학자도 있다. 그러나 밀그롬이 말한 대로 내장에 엉긴 지방 덩어리는 고기 위에 붙은 비계와 달리 먹을 수 없는 부위다. 또한 콜레스테롤이 인체에 유해하다는 관점은 현대 의학의 발달과 함께 등장했으며, 과하게 섭취하지 않는 이상 콜레스테롤은 반드시 필요한 영양소다. 또한 해로운 것을 바치라했다는 견해는 ‘기름은 내 것이라’는 하나님의 선언과도 어울리지 않는다. 하나님께서 기름에 대한 소유권을 주장하신 데는 다른 의미가 있다. 그것은 제물이 향기로운 냄새를 내는 데 있어서 기름이 핵심적이기 때문이다. 더불어 고대 이스라엘에서는 기름이 부와 풍요의 상징이자 힘의 근원으로 간주되었기에 풍요와 힘의 근원이 하나님이심을 인정하면서 그것을 하나님께 되돌려드리는 의미가 있었을 것이다.

          화목제를 드리는 때

          번제와 마찬가지로 화목제 역시 자발적인 제사였기에 개인은 원하면 언제든 화목제 짐승을 바칠 수 있었다. 화목제는 월삭이나(민 10:10) 오순절 같은 일부의 절기에 공적 제의로 바쳐지는 경우를 제외하면(레 23:19) 매우 사적인 성격이 강한 제사였다. 민수기 29장 39절에 따르면 절기마다 바친 화목제는 절기법으로 규정되어 있기보다는 잔치를 위한 자발적 제사였음을 알 수 있다(참조. 대하 7:7). 또한 특별한 행사나 국가적 행사에서도 화목제를 풍성하게 드렸다(민 7장; 삿 20:26; 삼상 11:15; 대하 7:7; 30:22; 31:2). 화목제는 레위기 이전에도 이미 하나님께서 전수해주셔서 바쳐지던 제사였다(예, 출 18:12). <표>

          a. 감사제/찬양제: 요아킴의 사례에서 보듯이, 여행을 무사히 마치거나 전쟁터에서 무사히 돌아왔을 때, 질병에서 회복되었을 때처럼 특별한 축복으로 인해 드리는 화목제였다. 감사의 화목제를 드릴 때 당일에 고기를 먹었다는 점으로(레 7:15) 미루어보면 감사의 기쁨이 충만했을 때 모든 고기를 즉시 먹는 것이 바람직했다.

          b. 서원제: 하나님께 서원한 내용을 이행할 때 드리는 제사다. 한나가 아들 사무엘이 젖을 뗀 뒤 성전에 데리고 올라가 서원을 실행하며 수소 세 마리(혹은 삼년생 수소 한 마리)를 서원제로 바친 것(삼상 1:24)이 그 예다. 서원의 화목제 때는 이튿날까지 고기를 먹고, 종종 서원을 이행하기 위해 화목제와 더불어 번제를 함께 바쳤던 것으로 보인다(레 22:18).

          c. 자원제/낙헌제: 특별한 일이 있어서 감사하는 것이 아닌 단순히 기쁨으로 자원해서 드리는 화목제였다. 이때도 이튿날까지 고기를 먹을 수 있었다. 이 경우 순전히 자발성에 의해 바치는 제사였던 이유로 짐승의 발이 더하거나 덜한(아마도 짧거나 긴) 약간의 흠이 있는 짐승도 바칠 수 있었다.

          화목제의 고기는 지정된 기한 이후로는 거룩성을 상실하여 더러운 고기(히. 피굴)로 간주되었다. 이렇게 일정 기간 후에 제의적으로 부패한 고기나 부정한 것과 접촉한 고기를 먹는 것은 스스로를 부정케 하는 심각한 죄였기에 그런 고기는 진 밖에서 불살라 없애야 마땅했다. 또한 부정한 사람들이 속죄제의 고기를 먹으면 끊어지는(cutting off) 형벌을 받았다(레 7:18~20). 이는 아마 공동체에서 제명된다는 의미일 텐데, 고대 사회에서 공동체로부터 배제되는 것은 죽음과도 같았다.

          화목제의 의의

          화목제는 죄를 위해 드리는 제사가 아니었다. 화목제는 번제와 같이 하나님과 지속적으로 평화로운 관계를 유지하고 이를 기뻐하는 감사의 제사라 할 수 있다. 화목제는 기쁨을 이웃과의 교제 속에서 나누는 일종의 잔치의 제사다(레 7:11~21). 요아킴의 사례에서 보듯이 큰 일을 겪은 사람은 마음에 여유가 생기는 법이다. 이때 다른 사람과 반목 관계에 놓인 것이 매우 사소해 보일 수 있다. 이때 화목제를 바치면서 공동체의 친목이 강화되고 불편한 관계에 놓인 사람들도 특별한 축제로 인해 화해의 관계로 복원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이런 점에서 화목제는 사람과 사람 사이의 화목을 만드는 부수적 효과가 있었을 것이다.

          그동안은 예배에서 번제적 요소, 즉 하나님을 향한 수직적 경배만이 강조되는 경향이 있었다. 그러나 하나님과의 수직적 교제(번제) 못지않게 사람 간의 수평적 교제(화목제)도 중요하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된 제사의 정신은 예배를 통해 실현되어야 마땅하다. 예배 시간은 짧지만 최대한 성도 간의 축하, 감사, 위로 및 합심의 기도 시간을 가져야 할 것이다. 하나님은 예배가 풍성한 교제와 나눔의 자리가 되는 것을 기뻐하실 것이다. 부족한 화목제의 요소는 예배 후 식사와 교제, 구역 예배나 여러 프로그램을 통해 채울 수 있다. 더불어 신자들은 자신의 물질을 화목제의 정신을 따라 이웃과 넉넉히 나눌 수 있어야할 것이다. 비단 물질만이 아니라 어려운 이웃을 섬기는 데 우리의 시간과 힘, 또한 지식을 사용할 수도 있다.

          예수님께서는 예배에 앞서 성도들끼리의 나눔과 화해를 크게 강조하셨다. ‘그러므로 예물을 제단에 드리다가 거기서 네 형제에게 원망 들을 만한 일이 있는 줄 생각나거든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마 5:23~24). 이에 따르면 성찬식은 그리스도의 죽음을 기념함과 동시에 성도가 서로 사랑하라는 계명을 실현하는 중요한 예식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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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속죄제(贖罪祭) 레위기 4:1-5:13, 6:2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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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질문

          1. 속죄제를 드려야 할 사람은 누구인가?

           (1) 제사장(3절)
           (2) 이스라엘 온 회중(13절)
           (3) 족장(22절)
           (4) 평민(27절)

          2. 속죄제의 제물은 무엇인가?

           (1) 흠 없는 수송아지(3절) / 제사장(3절)
           (2) 수송아지(14절) / 이스라엘 온 회중(13절)
           (3) 수염소(23절) / 족장(22절)
           (4) 암염소(28절), 어린 양(32절) / 평민(27절)

          1. 속죄제의 언어적 의미

          속죄제는 히브리어로 “하타트” 라고 합니다.

          학자들에 따라서는 속죄제가 부정하게 된 성소를 정결하게 하는 기능을 중요하게 여겨서 히브리어 “하타트”를 "속죄제"(sin offering)로 번역하기보다는 “정결제”(purification offering)로 번역하는 것이 낫다고 말합니다.

          히브리어 “하타트”는 본래 “”를 나타내는 명사형입니다.
          구약에서 이 단어가 보통 155회 정도 이런 의미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동시에 이 말은 “죄의 용서”를 나타내는 “속죄제”라는 의미로도 사용됩니다.

          히브리어 “하타트”가 속죄제란 의미로 사용된 것은 구약에서 대략 135회 정도입니다.
          속죄제(하타트)는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뜻을 어기고 살면서 하나님의 백성다운 목표를 어긋난 삶을 살게 되었을 때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기 위하여 드리는 제사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속죄제를 드림으로써 “범한 죄에 대해서 속죄함을 받고 사함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4:20, 26, 31, 35: 5:6, 10, 13, 16).
          일반적으로 속죄제는 속죄 제물을 드리는 자에게 “속죄함을 받게 하고, 용서함을 얻게 합니다.”

          속죄제를 드려야 되는 상황은 크게 둘로 구분됩니다.

          첫째는 부지중에 하나님의 금령을 어긴 것을 깨달았을 때 드리는 제사입니다(4:3-35).

          특히 2절에서 ‘누구든지 여호와의 계명 중 하나라도 그릇 범죄하였으되’라고 말씀합니다.
          그러니까 속죄제는 명시적인 계명을 부지 중에 어겼을 때 드리는 예배였던 것입니다.

          둘째는 법정의 증언을 기피하거나 부정한 물체 등에 접촉하였거나 맹세한 것에 대한 약속을 이행하지 않은 것 등을 깨달았을 때 드리는 제사입니다(5:1-13).

          그 어느 것이든 고의성이 없는 잘못과 허물에 해당합니다.
          부주의하여 저지르거나, 무심코 저지르거나, 태만하여 저지른 범법행위가 여기에 속합니다.
          만약 고의적으로, 의도적으로 저지른 범죄행위가 있다면 거기에 따른 형벌은 공동체로부터 “추방되는” 것 외에 다른 방도가 없었습니다.

          속죄제의 특징은 성소에 피가 뿌려진다는 것입니다.
          성소는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과 만나주시는 하나님 자신을 눈에 보이게 표현한 곳입니다.
          바로 그 성소에 속죄제의 피가 뿌려졌습니다.
          왜 이렇게 하는 것일까요?

          이스라엘 신앙에서 죄의 삯은 부정(不淨)입니다.
          죄는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관계를 파괴시키는 부정을 남깁니다.
          죄는 이스라엘 공동체에서 사람과 사람의 관계를 파괴하는 부담스러운 실체입니다.
          이 같은 관계의 파괴는 단순히 죄인에게 주는 죄책(罪責)으로만 그치지 않습니다.
          관계의 파괴는 거룩한 신앙공동체의 질서를 근본적으로 뒤흔드는 위기를 초래합니다.
          하나님의 성소가 죄로 인한 부정에 오염되게 되는 결과를 맞게 되는 것입니다.

          2. 4:1-5:13절의 구조

          레위기에 네 번째 나타나는 속죄제의 구조는 앞의 1-3장과 명백하게 구분됩니다.
          레위기 1-3장이 제물을 중심으로 구성되어 있는 반면, 속죄제에서는 제사를 드리는 자의 사회적 지위가 문단을 배열하는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서론(4:1-2절)에 이어 각각의 단락은 “만일(임)"로 시작합니다(4:3,13, 22, 27, 32; 5:7,11).
          “제사장이 그이 범한 죄에 대하여 그를 위하여 속죄한즉 그가 사함을 얻으리라.”
          또는 이와 유사한 구절로 각 문단이 끝납니다(4:20, 26, 31, 35; 5:10,13).
          이 표현은 대제사장이 범죄하여 속죄제를 드리는 첫 번째 단락(4:3-12)에는 나타나지 않습니다.
          그 이유는 자신의 죄 때문에 제사를 드리는 대제사장 스스로 자신의 용서를 선포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4:22절과 5:1절은 종속적인 경우를 소개하는 만일로 시작하지 않고 각각 아쉐르(만일)와 네페쉬키(만일 누구든지)로 문장을 시작하여 새로운 주제가 시작되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이런 구분에 의해 다음과 같이 단락을 구분해 볼 수 있습니다.

          4:1-2, 서론
          4:3-21, 성소에서 피가 뿌려지는 속죄제 
            4:3-12. 대제사장의 속죄제 
            4:13-21. 온 회중의 속죄제
          4:22-35, 번제단에 피를 바르는 속죄제
            4:22-26. 족장의 속죄제
            4:27-31. 평민의 속죄제(염소로 드리는 경우)
            4:32-35. 평민의 속죄제(어린 양으로 드리는 경우)

          5:1-13, 속죄제의 규례
            5:1-6. 속죄제를 드리는 네 경우
            5:7-10. 가난한 자의 속죄제
            5:11-13. 극빈자의 속죄제

          3. 속죄제 의식

          속죄제는 레위기에 소개되는 제사 중에서 가장 자세히 묘사되어 있습니다.
          먼저 제사자는 신분에 따라 자신이 드려야 하는 흠 없는 동물을 선택했습니다.
          제사자는 선택된 제물을 회막의 입구로 가져와서, 그의 손으로 제물의 머리에 안수한 다음 잡았습니다.
          여기까지는 다른 동물의 제사의식과 동일하지만 이 후의 의식은 독특하게 속죄제에만 나타납니다.

          번제와 화목제의 경우 제사장이 동물의 피를 단 주위에 뿌렸습니다.
          그러나 속죄제에서는 피의 일부를 대야에 담아 특별한 용도로 사용했으며, 나머지 피는 단 밑에 부었습니다.
          대야에 담은 피는 제사자의 신분에 따라 다양하게 사용되었습니다.

          기름부음을 받은 제사장 또는 이스라엘 온 회중이 속죄제를 드릴 경우,
          대제사장은 이 피를 가지고 회막 안으로 들어가서 피를 성소의 휘장, 즉 회막의 가장 내부에 위치한 성소와 지성소를 구분하는 휘장에 일곱 번 뿌렸습니다. 그리고 약간의 피를 성소에 위치한 향단의 뿔에 발랐습니다.
          이 의식은 성막에서 둘째로 거룩한 장소, 즉 제사장들만 들어가도록 허용된 성소에서 거행되었습니다.

          족장이나 평민이 속죄제를 드릴경우 회막 안으로 가지고 들어가지 않고 단지 회막 뜰에 위치한 번제단의 뿔에 발랐습니다(레 4:22-35). 레위기 16장에 소개되는 속죄일에는 대제사장이 피를 가지고 지성소까지 들어가서 언약궤를 덮고 있는 속죄소 앞에 피를 뿌렸습니다(16:14-15).

          대속죄일에는 일 년에 한번 시은좌에 피를 뿌림으로 죄를 덮었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죄의 경중과 상황에 따라 피가 뿌려지는 곳이 달라졌다는 말입니다.

          피 뿌리는 의식에 이어 동물의 고기를 처리하는 의식이 진행되었습니다.
          휘장에 뿌리거나 단에 바르고 남은 피는 번제단 밑에 쏟았으며,
          기름 부위는 화목제와 마찬가지로 번제단에서 여호와께 향기로운 냄새로 태웠습니다(4:31).

          기름과 콩팥을 제외한 나머지 고기는 기름부음을 받은 제사장 또는 온 회중이 죄를 지었을 때(4:3-21)
          백성이 죄를 지었을 때 각각 다르게 처리되었습니다(4:22-35).

          제사장 또는 온 회중이 부지중에 죄를 지었을 때에는 동물의 나머지 부분, 즉 가죽, 고기, 머리, 다리, 내장과 똥은 진 밖으로 가지고 나가서 재를 버리는 곳에서 불에 태웠습니다(4:11-12, 21).
          그러나 만일 일반 백성 중 하나가 속죄제를 드릴 때에는 단지 기름 부위와 콩팥만 태웠고 그 나머지 고기는 제사장의 몫으로 주었습니다(6:26-30).

          가난한 사람은 가축 대신에 비둘기 두 마리로 제사를 드릴 수 있었는데 그중 한 마리는 번제로 나머지 한 마리는 속죄제로 드렸습니다(5:7-10). 만일 새도 드리지 못할 정도로 가난할 경우, 그는 유향과 기름을 넣지 않은 고운 가루 에바 십분의 일로 속죄제를 드릴 수 있었습니다. 이때에는 한 줌의 기념물만이 제단에서 태웠으며, 그 나머지는 제사장에게 주었습니다(5:11-13).

          속죄제는 제사를 드리는 사람의 신분에 따라 드리는 제물과 의식이 자세히 설명되고 있습니다.
          이런 부분을 사회적 신분에 따라 정리해 보면 이렇습니다.

          (1) 대제사장의 속죄제(4:3-12)

          기름부음을 받은 제사장이라는 표현은 레위기 4장과 6장에만 나타납니다(4:3,5,16; 6:22).
          이 표현은 오직 대제사장을 가리키는 전문적 용어로 이해하는 것이 좋습니다.
          3절의 “백성의 허물이 되었으면”이라는 표현은 대제사장의 죄는 자신뿐만 아니라 백성 전체에 영향을 미친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구약의 제사장은 백성에게 주의 법도와 규례를 가르치는 교사의 역할을 했습니다.
          따라서 이들은 자신의 공적인 삶에서는 물론 사적인 삶에서도 모범을 보여야 했습니다.
          대제사장은 이스라엘을 대표하는 이상적인 사람이었습니다.
          특히 대제사장은 제사장들의 우두머리로서 그의 삶은 모든 사람들이 지향해야 할 거룩한 삶의 전형적인 모범이 되어야 했습니다.

          대제사장이 지은 죄가 일반 백성이 지은 죄보다 심각했다는 것은 대제사장이 가장 값비싼 수송아지로 제사를 드렸다는 사실과 제물의 피를 가지고 성소까지 들어가서 피 뿌리는 의식을 행했다는 것에서 잘 나타납니다.
          수송아지는 대제사장과 온 회중이 죄를 지었을 경우에만 제물로 드렸습니다(4:4,14)

          (2) 온 회중의 속죄제(4:13-21)

          온 회중이 죄를 지었을 때 드리는 속죄제의 의식은 한 가지만 제외하고 대제사장의 경우와 같습니다.
          온 회중이 죄를 지었을 경우 회중 전체가 제물의 머리에 안수할 수 없었기에 회중을 대표하는 장로들이 수송아지의 머리에 안수했습니다(15절).

          (3) 족장의 속죄제(4:22-26)

          족장은 존경받는 특권을 지닌 위치에 있었습니다.
          그래서 족장 또는 지도자의 죄는 일반 백성보다 심각하게 간주되었습니다.
          족장의 죄는 대제사장이나 온 회중의 죄만큼 심각하게 간주되지는 않았지만 죄를 지은 족장은 일반 백성의 제물보다 더 비싼 숫염소로 제사를 드려야 했습니다.

          족장이 죄를 지었을 경우 제사장은 피를 가지고 성소로 들어가지 않고 다만 회막 뜰에 위치한 번제단의 뿔에 피를 바르는 의식을 거행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앞의 두 경우 콩팥과 기름을 제외한 모든 고기들을 진 바깥에서 소각한 반면, 족장을 포함하여 일반 백성이 속죄제를 드렸을 경우에는 제사장들이 기름과 콩팥을 제외한 나머지 고기들을 먹을 수 있었습니다.
          즉 피를 가지고 성소에 들어가서 피 뿌리는 의식을 행한 기는 제사장들이 먹을 수 없었으며 진 밖에서 불살라야 했던 반면(4:12, 21),
          회막 뜰에서 의식을 행한 제물들은 제사장들이 먹을 수 있었습니다(6:24-30)

          (4) 평민의 속죄제(4:27-35; 5:7-13)

          평민은 대제사장이나 족장과 같이 비싼 제물로 속죄제를 드리지 않아도 되었습니다.
          평민은 암염소(4:28) 또는 암컷의 어린양(4:32)을 제물로 드릴 수가 있었습니다.
          평민의 속죄제 의식은 족장의 경우와 동일했습니다.

          가난한 자는 비둘기 두 마리로 제사를 드리는 것이 허용되었으며(5:7-10),
          극빈자는 밀가루로도 드릴 수 있었습니다(5:11-13).

          선택적으로 드리는 화목제는 반드시 생축(소, 양, 염소)으로 제사를 드린 반면,
          의무적으로 반드시 드려야 했던 번제와 속죄제에서 양이나 염소를 드릴 수 없는 가난한 자에게는
          생축이 아닌 비둘기 또는 밀가루(소제)로 제사를 드리는 것이 허락되었습니다.

          가난한 자가 비둘기 두 마리로 각각 번제와 속죄제를 드린 것을 보면(5:7),
          본문에는 명시되어 있지 않지만 아마도 부유한 사람들도 속죄제와 함께 번제를 드렸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4. 속죄제를 드리는 경우(5:1-6)

          레위기는 속죄제를 드려야 하는 다양한 경우를 소개합니다.
          출산으로 부정해진 여인이 정결해지기 위하여(레 12:6),
          심각한 피부병으로 부정해진 사람이 나았을 경우 정결해지기 위하여(레 14:19),
          유출병에서 나은 자가 정결해지기 위하여(레 15:15,30)

          그 외 번번하지는 않지만
          제사장 위임식(레 8:14),
          제단의 봉헌식(민 7:16),
          레위인 위임식(민 8:8)
          나실인이 서원이 성취되었을 때(민 6:14)

          레위기 4장은 단순히 여호와의 금령을 부주의로 그릇 행했을 경우 속죄제를 드려야 한다고 언급하지만(4:2,13, 22, 27)
          5:1-6절은 좀 더 구체적으로 이 제사를 드려야 하는 네 가지 경우를 소개합니다.

          ①. 법정에서 증인의 의무를 행하지 않았을 경우(5:1; 참조, 잠 29:24)

          ②. 부지중에 부정한 동물의 사체에 접촉했을 경우(5:2; 참조. 11:24-28)

          ③. 모르고 부정한 사람과 접촉했다가 후에 그 사람이 부정한 사람이라는 것을 깨달았을 경우(3, 참조.15:13-15, 25-30)

          ④. 무심결에 맹세를 했다가 후에 자신이 이를 지키지 않았음을 깨달았을 경우

          이런 네 가지 경우 자신의 죄를 고백하고 속죄제를 드려야 했습니다.
          5:6절은 자신의 허물을 고백한 사람에게 “그 허물을 인하여 여호와께 속죄제를 드리되 양 떼의 암컷 어린양이나 염소를 끌어다가 속죄제를 드릴 것”을 명하고 있습니다.
          여기 사용된 속죄제라는 말은 하타트가 아니라 야샴이라는 말로 벌금의 성격이었습니다.

           

          5. 속죄제의 목적

          동물로 드리는 모든 제사(번제, 화목제, 속죄제, 속건제)는 제물의 머리에 안수한 다음 동물을 죽이며,
          그 피를 제단에 뿌린 다음 그 고기 전체, 또는 콩팥과 기름을 단에서 태웁니다.
          따라서 동물로 드리는 모든 제사가 하나님의 진노를 가라앉히는 속죄의 기능이 있음은 자명합니다.
          하지만 각 제사의식의 독특한 점들은 각 제사의 강조점과 목적이 무엇인지를 잘 보여줍니다.

          번제는 죄의 사악함과 그 영향의 심각성을 보여주며,
          제물 전체를 불사름으로서 하나님과의 관계가 다시 회복되었음을 보여줍니다.

          화목제는 번제를 드린 다음에 드리는 제사로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의 결과로 주어지는
          평화와 구원을 감사하며 즐기는 제사입니다.

          속죄제의 독특한 점은 피 뿌리는 의식에서 발견됩니다.
          구약에서 속죄제는 정결 또는 정화와 깊은 관련이 있습니다.
          속죄제는 특히 출산한 여인(레 12:6),
          악질 전염성 피부병(14:19),
          또는 유출병(15:15, 30)의 경우에서 보듯이 몸의 정결과 관련하여 드렸습니다.

          속죄제의 피 뿌리는 의식은 이스라엘의 부정을 깨끗이 씻어내는 효력이 있는 것으로 묘사됩니다.
          “너희는 이와 같이 이스라엘 자손으로 그 부정에서 떠나게 하여 그들로 그 가운데 있는 재 장막을 더럽히고 그 부정한 중에서 죽음을 면케할 지니라”(레 15:31).

          속죄일에는 대제사장이 피를 번제 단에 뿌렸는데,
          이것은 이스라엘 자손의 부정에서 단을 성결케하기 위함이었습니다(16:19).

          여기서 알 수 있는 것은 죄가 사람을 더럽힐 뿐 아니라 하나님의 성소까지 오염시키며,
          이 오염된 것을 정결케 하는 합당한 수단이 바로 동물의 피라는 것을 보여줍니다.

          번제죄인과 하나님 사이의 화해를 위한 제사
          속죄제죄로 생긴 오염과 더럽힘을 처리하는 제사
          속죄제는 성소 또는 성전을 정결케 함으로 하나님이 이스라엘 가운데 지속적으로 거하실수 있게 합니다.

          속죄제의 가장 중요한 목적은 그의 백성 가운데 하나님이 계속 머무르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하나님을 섬기기에 적합하도록 예배에 사용되는 여러 도구들에 피가 칠해졌습니다.
          향단과 번제단, 그리고 휘장 뿐 아니라 속죄소에까지 피가 뿌려졌으며(레 16)
          더 나아가서는 제사장들의 귀와 손가락과 발가락 그리고 그들의 옷에도 피가 뿌려졌습니다(출 29:19-21; 레 8:22-24, 30).

          히브리서 9:22
          율법을 좇아 거의 모든 물건이 피로써 정결케 되나니 피 흘림이 없은즉 사람이 없느니라.

          히브리서 9-10장은 이런 속죄제사와 그리스도의 피가 어떤 상관관계가 있는지를 자세하게 다루고 있습니다.
          신약성경의 저자들은 속죄제의 피를 예수 그리스도의 피라고 증거합니다. 
          죄로 인한 부정과 타락에서 하나님의 사람을 정결하게 할 수 있는 것은 오로지 예수의 피라는 것입니다(벧전 1:2; 요일 1:7).
          이런 사상을 가장 적극적으로 표현하고 있는 신약의 말씀은 히브리서입니다(히 9:12-14).
          예수 그리스도는 “오직 자기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셨기” 때문에 우리들의 양심을 깨끗케 하고 죽을 행실을 떠나 살아계신 하나님을 섬기게 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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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속죄제(Sin Offering) 어의


          속죄제를 뜻하는 히브리어 ‘하타트'는 ‘과녁에서 벗어나다’, ‘죄를 짓다’, ‘속죄물을 드리다’, ‘속죄하다’를 뜻하는 ‘하타'에서 파생된 것으로 ‘하나님의 법에서 벗어난 죄로부터 청결과 속죄함을 얻기 위하여 드리는 제사’를 뜻한다.

          제물의 종류

          속죄제의 제물은 범죄자의 사회적인 위치에 따라 달랐다.

          제사장 : 흠 없는 수송아지(레 4:3)
          온 회중 : 수송아지(레 4:13)
          족장 : 흠 없는 수염소(레 4:23)
          평민 : 흠 없는 암양, 암염소(레 4:28)
          가난한 사람 : 산비둘기, 집비둘기(레 5:7)
          극빈자 : 고운가루 에바 십분의 일(레 5:11)

          * 에바(Ephah)

          성경의 부피 단위 중 에바(אֵיפָה, Ephah)는 ‘바구니’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한 바구니에 넣을 정도의 양이며, 스아와 마찬가지로 가루나 볶은 곡식 등을 재는 단위다.
          22ℓ에 해당한다.
          12되와 같은 양이다.(1되 1.8 리터)

          네가 단 위에 드릴 것은 이러하니라 매일 일 년 된 어린양 두 마리니 한 어린양은 아침에 드리고 한 어린양은 저녁 때에 드릴지며 한 어린양에 고운 밀가루 에바 십분 일과 찧은 기름 힌의 사분 일을 더하고 또 전제로 포도주 힌의 사분 일을 더할지며 한 어린양은 저녁 때에 드리되 아침과 일반으로 소제와 전제를 그것과 함께 드려 향기로운 냄새가 되게 하여 여호와께 화제를 삼을지니 (출애굽기 29:38~41)

          하나님께 매일 드리는 제사를 이름하여 ‘상번제’라고 한다.
          *  날마다 바치는 번제물(민수기 28:1-8) / 상번제(常燔祭)

          아침과 저녁에 드리는 이 제사에는 일년 된 어린양과 고운 밀가루 에바 10분의 1과 기름, 포도주를 드린다.
          에바의 10분의 1은 2.2ℓ로 1되 가량의 양이다.
          무게로는 2.2kg 정도인 셈이다.

          속죄제의 방법

          헌제자가 제물이 될 짐승을 회막문 여호와 앞으로 가져온다.
          헌제자의 손을 제물의 머리 위에 얹고 안수한다.
          헌제자가 제물을 잡아 피를 제사장에게 주면 제사장은 그 피를 손가락으로 찍어 성소 앞에 일곱 번 뿌리고 향단 뿔에 바른 후 회막 앞과 번제단 밑에 전부 쏟는다.
          희생 제물의 모든 기름과 콩팥을 번제단 위에서 불사른 후 그 나머지 부분은 진 바깥 재 버리는 정결한 곳에서 나무 위에 놓고 불사른다.
          그러나 아론과 그 아들들을 위한 속죄제는 진 밖에서 불사르지 않고 다리와 고기를 회막 뜰에서 구워 먹도록 하였다(레6:24-27)


          속죄제와 속건제의 차이

          속죄제의 목적은 ‘범죄에 대한 용서’를 위한 것이었다.
          그런데 이러한 목적은 속건제의 경우 역시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이 둘은 근본적인 차이가 있다.

          첫째는, 범죄의 성격적 차이로서 속죄제가 하나님께 범죄한 자, 즉 ‘율법을 범한 죄’를 위한 제사였던 반면에,
          속건제는 인간에게 범죄한 죄, 즉 ‘도덕적인 범죄의 대속을 위한’ 제사였다.

          둘째는, 속죄제는 속건제와는 달리 ‘범죄한 일을 배상할 수 없는 죄’에 대한 용서를 구하는 제사였던 반면,
          속건제는 ‘배상이 가능한 죄’에 대한 용서를 구하는 제사였다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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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3-17-2021(수)

          속건제(贖愆祭) 레위기 5:17-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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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7. 만일(萬一) 누구든지 여호와의 금령(禁令) 중(中) 하나를 부지중(不知中)에 범(犯)하여도 허물이라 벌(罰)을 당(當)할 것이니
          18. 그는 너의 지정(指定)한 가치(價値)대로 떼 중(中) 흠(欠) 없는 수양(羊)을 속건(贖愆) 제물(祭物)로 제사장(祭司長)에게로 가져올 것이요, 제사장(祭司長)은 그의 부지중(不知中)에 그릇 범(犯)한 허물을 위(爲)하여 속(贖)한즉 그가 사(赦)함을 얻으리라

          19.이는 속건제(贖愆祭)니 그가 실(實)로 여호와 앞에 범과(犯過)함이니라.

          속건제(Guilt Offering)의 어의

          속건제를 히브리어로 ‘아샴(asam)'이라고 합니다.
          '아샴'이란
          ‘범죄'(Guilt),’범법'(Trespass), ‘손해'(Damage) 등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지 못한 것이 아니라 '사회적인 죄’, ‘도덕적인 죄를 용서받기 위해 드리는 제사’를 말합니다.

          다섯 제사(Five Offering)

          1. 번제(Burnt Offering) : 올라 / 희생
          2. 소제(Grain Offering) : 민하 / 헌신
          3. 화목제(Peace Offering) : 제바흐 쉐라밈 / 화평
          4. 속죄제(Sin Offering) : 하타트 / 바른 관계
          5. 속건제(Guilt Offering) : 아샴 / 바른 생활

          예수님께서 우리의 죄를 대속하시려고 속죄제의 제물이 되셨을까요?
          아님면 속건제의 제물이 되셨을까요?

          이사야 53:10
          여호와께서 그로 상함을 받게 하시기를 원하사 질고를 당케 하셨은즉 그 영혼을 속건제물로 드리기에 이르면
          그가 그 씨를 보게 되며 그 날은 길 것이요  또 그의 손으로 여호와의 뜻을 성취하리로다.

           * 속건제물(his life a guilt offering)

          속죄제의 제물 :
            1. 제사장, 회중 / 흠 없는 수송아지
            2. 족장 / 수염소
            3. 평민 / 암염소, 어린 양
            4. 가난한 자 / 비둘기 두 마리(속죄, 번제)
            5. 극빈자 / 고운가루 에바 1/10  

          속건제의 제물 :
           1. 흠없는 수양
            2. 배상 

          속죄제와 속건제

          레위기 7:7
          속건제나 속죄제는 일례니 그 제육은 속하는  제사장에게로 돌아갈 것이요 .
          (현대인) 속죄제와 속건제에 다 같이 적용되는 규정은 이렇다. 그 제물의 고기는 제사를 드리는 제사장의 몫이다.

          • 속죄제는 제물을 바치는 사람이 안수한다. 그러나 속건제물은 제사장이 제물의 머리에 안수한다

          속죄제와 속건제의 차이

          1. 제물이 다르다
          속죄제 : 소, 염소, 양, 비둘기, 고운 가루
          속건제 : 흠 없는 수양


          2. 남은 피의 처리
           속죄제 : 번제단 밑에 쏟는다
           속건제 : 쏟지 않았다

          3. 속건제 : 개인적인 제사
            속죄제 : 집단적인 제사도 포함
            동물의 머리에 손을 얹고 죄를 전가시키는 것을  

            속건제에서는 언급하지 않았다.

           4. 속건제 : 특별한 경우
            나병환자가 나은 후에(레 4:1-20)
            나실인이 부정한 허물을 용서받기 위해(민 6:1-12)


          시편 19:12
            자기 허물을 능히 깨달을 자 누구리요
            나를 숨은 허물에서 벗어나게 하소서.

          * 동북아에서 중국을 겨냥한 쿼타(quarter) : 호주, 인도, 일본, 미국
          - 일본 주일 미군 사령관(three star),한국 주한 미군 사령관(four star)
          한국 정부가 극좌파 편향적 정치색으로 동북아 펜타(penta) : 호주, 인도, 일본, 한국, 미국
          미국의 국방부장관. 국무장관이 한국을 방문한다.
          그런데 한국 정부는 여전히 중국과 북한의 지시를 따르려고 한다.
          일본에서 기자들의 질문 / 중국과 북한의 선언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느냐?
          그러자 미국은 중국과 북한의 선언에 관심이 없다.
          오직 미국이 관심을 갖는 것은 한국의 입장이 무엇인가?
          한국의 입장에 따라 대응할 것이다.


          레위기 제사의 의미
          제사(예배)의 형식은 시대에 따라 바뀔 수 있다.
          그러나 제사의 본질은 바뀔 수 없다.

          시편 51:17
          하나님의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하나님이여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치 아니하시리이다.
          The sacrifices of God are a broken spirit; a broken and contrite heart,
          O God, you will not despise.

          상한 심령(Broken Spirit)
          통회하는 마음(Contrite Heart)


          속건제를 드려야 할 경우


            1. 성물에 대한 것(레 5:15a)
            누구든지 여호와의 성물에 대하여 그릇 범과하였거든 여호와께 

            속건제를 드리되.

            2. 계명(율법)에 어긋난 것(레 5:17)

            만일 누구든지 여호와의 금령중 하나를 부지중에 범하여도 

            허물이라 벌을 당할 것이니.


            3. 이웃에게 악을 행하거나 물질에 손해를 입힌 경우(레 6:1-7)

            남의 물건을 강제로 빼앗거나
            분실물을 습득하거나
            저당물을 잡거나
            거짓맹세로 남에게 피해를 입힌 경우

            4 시체로 인해 몸이 부정케 된 경우


          속건제 제사의 세 가지 속죄 원리

            1. 잘못을 자백하고 인정하라

            2. 죄에 대한 대가를 지불하라


            3. 한 번에 해결


          속건제의 제물은 범죄의 형태에 따라 매우 다양하게 나타나고 있어 이러한 제물을 일일이 열거하자면 너무나도 복잡하고 광범위하다. 그러므로 각각의 범죄에 대한 속건 제물에 대해서는 레 5:14, 6:7, 7:1-10, 14:1, 15:2을 참고하도록 하되 이러한 여러 가지 제물을 요약하면 ‘흠 없는 일년된 수양’, ‘범죄물과 그 범죄물의 오분의 일을 더하여 본인에게 주는 일’, ‘산비둘기나 집비둘기 둘’이나, ‘고운 가루 에바 십분의 삼’과 ‘기름 한 록’ 등이다.

          속건제와 속죄제의 차이

          죄와 관계된 제사

          가. 속죄제(하타아트-sin offering)

          * 제물이 대상과 재력에 따라 차이가 있다.
          - 제사장과 백성 전체(수송아지)
          - 족장(수염소)
          - 평민(어린 암양, 암염소)
          - 가난한 자(비둘기, 곡식 가루)

          * 향기로운 냄새를 위한 제사가 아니라, 죄를 속하기 위해 드린 제사였다.

          * 번제처럼 모든 제물을 제단에 불사르지 않고 기름을 제외한 모든 제물을 진 밖으로 가져가서 태워야 했다.

          * 인간의 죄성과 연약함을 인해 부지중에 지은 죄를 속하기 위해 드려졌다.


          나. 속건제(아샴-배상제사(trespass offering))

          * 속건제는 생활 중에 범한 죄나, 자기 의무를 태만히 해서 남에게 해를 입혔을 경우에 드리는 사죄와 보상에 대한 제사였다.

          * 속건제를 드리는는 경우는 다음과 같았고, 그 외에는 속죄제사를 드렸다.
          1. 하나님의 성물을 범했을 때
          2. 하나님의 법에 따라 마땅히 해야 할 것을 하지 않은 경우
          3. 이웃에게 악을 행하거나 물질에 손해를 입힌 경우
          4. 남의 물건을 강제로 빼앗거나/ 분실물을 습득하거나/ 저당물을 잡거나/ 거짓맹세로 남에게 피해를 입힌 경우
          5. 시체로 인해 몸이 부정케 된 경우

          * 속건제는 다음과 같은 세 가지 속죄 원리가 나타난다.
          1. 잘못이 있을 때는 자백하고 인정하라.
          2. 죄에 대한 대가를 지불하라.
          3. 번제는 계속해서 드리지만 속건제는 한 번에 해결할 문제이다.


          다. 속죄제와 속건제의 같은 점과 다른 점

          * 같은 점
          이 두 제사는 백성들이 "여호와의 명령을 어긴 경우에 드리는 제사"였다.
          백성들은 "여호와께서 금한 일을 했거나, 또는 하라고 한 일을 하지 않았을 경우"에 이 제사를 드리도록 되어 있었다.
          그러나 이 제사는 결코 고의로 지은 죄를 속하기 위한 제사는 아니었다.
          하나님은 고의, 또는 계획적으로 지은 범죄(짐짓 죄)에 대해서는 반드시 처벌하게 하셨다.

          속죄 제사를 통해서 용서받을 수 있는 죄는 실수나 연약함으로 지은 죄(그릇 범한 죄)였다.
          속죄 제사를 드릴 수 있는 죄는 다음과 같았다.

          1. 실수나 부지 중에 지은 죄(4:13, 22, 27, 5:18)
          2. 부주의로 인해 지은 죄(5:1, 4, 15)
          3. 무의식적으로 짓는 죄(민 35:11,15, 22, 23).

          * 다른 점

          속죄제는 일반적으로 여호와의 명령을 어긴 보편적인 경우에 드렸다.
          속건제(보상제사)는

          1. 여호와의 성물을 드릴 것을 자기가 사용했거나(5:15-19)

          2. 남의 물건을 빼앗거나 손에 넣고 부인하거나 거짓 맹세를 해서 피해를 입힌 경우에 이를 보상하기 위해 드려졌다(5:20-25).

          * 제사 절차상의 차이점

          1. 속죄제는 속죄제물만 드렸지만,
          속건제는 속건제물 외에 불법으로 취한 것에 1/5(전체 6/5)을 더한 배상이 요구되었다.

          2. 속죄제는 제물을 드리는 자가 그 제물을 죽이고 직접 불에 태웠다(4:15, 24, 29, 33).
          속건제는 제사장이 대신해서 제물을 잡았으며, 그 제물도 제사장이 먹어야만 했다(14:12).

          3. 속죄제물은 개인의 경우 암컷을 드렸다(4:28, 32).
          속건제사는 제물로 수양이 필요했으며(5;18, 6:6), 훔친 것 외에 1/5에 해당하는 배상을 첨가했다.









          구약성경의 부피 단위

          갑(Cab) / 빈 그릇

          (קַב, Cab)은 히브리어로 ‘빈 그릇’이라는 뜻으로서 오목한 그릇을 가리킨다.
          갑은 구약시대 이스라엘에서 고체를 측량할 때 사용하던 단위이며 1.2ℓ에 해당한다.
          반 되 정도의 양이다.
          성경의 부피 단위 중 가장 작다. 성경에는 열왕기하 6장에 한 번 언급되어 있다.

          아람 사람이 사마리아를 에워싸므로 성중이 크게 주려서 나귀 머리 하나에 은 팔십 세겔이요 합분태 사분 일 갑에 은 다섯 세겔이라 (열왕기하 6:25)

          사마리아는 항상 하나님의 말씀을 떠나 악을 행했다.
          그런 사마리아는 아람의 군대에 의해 포위당하고 말았다.
          성이 포위되자 성안에 있는 사람들은 굶주림으로 ‘나귀 머리’, 비둘기의 배설물인 ‘합분태’를 먹으며 생명을 유지했다.
          합분태가 실제 비둘기 똥이 아니라 이와 비슷하게 생긴 식물이라는 주장도 있다.

          여하튼 당시 합분태 사분 일 갑은 0.3ℓ의 적은 양이었는데 이것이 5개월치 급여만큼이나 비싸졌다.
          그마저도 없어서 못 먹는 사람이 생겼고 결국 사마리아 성안에서는 인육을 먹는 일이 발생하기도 했다.
          이 사건은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지 않는 것이 얼마나 끔찍한 결과를 낳는지 알려주는 좋은 예라 할 수 있다.

          오멜(Omer) / 보리 한 묶음

          오멜(עֹמֶר, Omer)은 ‘보리 한 묶음’이라는 뜻으로 구약시대 하루분의 양식이다.
          1오멜은 2.2ℓ에 해당하며 에바의 10분의 1, 그리고 1되와 같은 양이다.
          무게로는 2.2kg가량이다.

          여호와께서 이같이 명하시기를 너희 각 사람의 식량대로 이것을 거둘지니 곧 너희 인수대로 매명에 한 오멜씩 취하되 각 사람이 그 장막에 있는 자들을 위하여 취할지니라 하셨느니라 이스라엘 자손이 그같이 하였더니 그 거둔 것이 많기도 하고 적기도 하나 오멜로 되어 본즉 많이 거둔 자도 남음이 없고 적게 거둔 자도 부족함이 없이 각기 식량대로 거두었더라 (출애굽기 16:16~18)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 생활 당시 양식이 없어 굶주림에 허덕일 때 하나님께서 만나를 내려주셨다.
          일곱째 날 안식일을 제외한 6일 동안 백성들은 매일 아침 만나를 거둘 수 있었다.
          만나를 거둘 때 주의할 것은 각 사람이 먹을 만큼만 거두는 것이었다.
          즉 1인당 1오멜만 거둬야 했다.

          스아(Seah)

          스아(סְאָה, Seah)는 ‘세아’로도 번역되어 있다.
          주로 가루나 곡식을 측량할 때 사용하는 단위다.
          1스아는 7.3ℓ로 4되에 해당한다.

          여호와께서 마므레 상수리 수풀 근처에서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시니라 … 내가 떡을 조금 가져오리니 당신들의 마음을 쾌활케 하신 후에 지나가소서 … 아브라함이 급히 장막에 들어가 사라에게 이르러 이르되 속히 고운 가루 세 스아를 가져다가 반죽하여 떡을 만들라 하고 아브라함이 또 짐승 떼에 달려가서 기름지고 좋은 송아지를 취하여 하인에게 주니 그가 급히 요리한지라 (창세기 18:5~7)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사람의 모습으로 나타나셨을 때 온 정성을 다해 하나님을 대접했다.
          이때 사용한 고운 가루 3스아는 약 22ℓ의 양이다.
          오늘날 팬케이크 하나를 만들려면 밀가루가 0.3ℓ(300㎖) 정도 소용된다는 것을 가정했을 때, 3스아는 70개 이상의 팬케이크를 만들 수 있는 양이다.

          에바(Ephah) / 바구니

          에바(אֵיפָה, Ephah)는 ‘바구니’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한 바구니에 넣을 정도의 양이며 스아와 마찬가지로 가루나 볶은 곡식 등을 재는 단위다.
          약 22ℓ에 해당한다.
          12되와 같은 양이다.

          네가 단 위에 드릴 것은 이러하니라 매일 일 년 된 어린양 두 마리니 한 어린양은 아침에 드리고 한 어린양은 저녁 때에 드릴지며 한 어린양에 고운 밀가루 에바 십분 일과 찧은 기름 힌의 사분 일을 더하고 또 전제로 포도주 힌의 사분 일을 더할지며 한 어린양은 저녁 때에 드리되 아침과 일반으로 소제와 전제를 그것과 함께 드려 향기로운 냄새가 되게 하여 여호와께 화제를 삼을지니 (출애굽기 29:38~41)

          하나님께 매일 드리는 제사를 이름하여 ‘상번제’라고 한다. 아침과 저녁에 드리는 이 제사에는 일년 된 어린양과 고운 밀가루 에바 10분의 1과 기름, 포도주를 드린다. 에바의 10분의 1은 2.2ℓ로 1되가량의 양이다. 무게로는 2.2kg 정도인 셈이다.

          호멜(Homer) / 당나귀

          호멜(חֹמֶר, Homer)은 성경의 부피 단위 중 최대 단위로 약 230ℓ에 해당한다.
          히브리어 호멜은 ‘당나귀’라는 뜻을 가지고 있으며, 1호멜은 당나귀가 한번에 질 수 있는 양을 말한다.
          주로 밀과 보리의 양을 잴 때나 메추라기의 양을 잴 때도 사용했다.
          오늘날 쌀 한 가마의 무게가 80kg인데 이는 리터로 환산하면 약 180ℓ다.
          호멜이 230ℓ이므로, 1호멜은 쌀 한 가마 반 정도에 해당하는 양이다.

          백성이 일어나 종일 종야와 그 이튿날 종일토록 메추라기를 모으니 적게 모은 자도 십 호멜이라 그들이 자기를 위하여 진 사면에 펴 두었더라 (민수기 11:32)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먹이기 위해 내려주신 것은 만나만이 아니었다. 그들을 위해 메추라기도 보내주셨는데, 적게 모은 자도 10호멜이었다고 하니 그 양이 얼마나 방대했는지 알 수 있다.

          신약성경의 부피 단위

          되, 코이닉스(χοινιξ)

          한글개역성경의 부피 단위 중 하나인 ‘되’는 헬라어 ‘코이닉스(χοινιξ)’를 옮겨놓은 말이다. 헬라의 부피 단위로 약 1.2ℓ다. 현재의 1되(1.8ℓ)보다 조금 작다.

          내가 네 생물 사이로서 나는 듯하는 음성을 들으니 가로되 한 데나리온에 밀 한 되요 한 데나리온에 보리 석 되로다 또 감람유와 포도주는 해치 말라 하더라 (요한계시록 6:6)

          말, 모디오스(μοδιος)

          예수님께서 빛의 역할에 대해 하신 말씀 가운데 ‘말’이 등장한다.

          사람이 등불을 켜서 말 아래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 이러므로 집안 모든 사람에게 비취느니라 (마태복음 5:15)

          여기에서 ‘말’은 동물 말(Horse)이 아니다. 헬라어로 모디오스(μοδιος)인데, 고체의 부피를 잴 때 사용했던 바구니(Basket)를 가리킨다. 이 말씀을 공동번역에서 살펴보면 “등불을 켜서 됫박으로 덮어두는 사람은 없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즉, 오늘날의 됫박 역할을 했던 ‘말’이라는 부피를 측량하는 도구를 가리킨 것이다. 말의 부피는 약 8.7ℓ로 오늘날의 1말(약 18ℓ)보다는 10ℓ 정도의 차이가 있다.

          말, 사톤(σατον)

          예수님의 천국에 대한 가르침 속에도 부피 단위인 ‘말’이 등장한다.

          또 비유로 말씀하시되 천국은 마치 여자가 가루 서 말 속에 갖다 넣어 전부 부풀게 한 누룩과 같으니라 (마태복음 13:33)

          비유 속에 나타난 ‘말’은 헬라어 부피 단위인 ‘사톤(σατον)’을 번역한 말이다. 약 12ℓ로 가루 3말은 36ℓ의 많은 양이다. 적은 누룩으로 많은 양의 가루를 부풀게 한 것처럼 천국 소망은 우리의 믿음을 부풀게 하는 역할을 한다고 강조하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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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첫째,  다섯 가지 제사의 종류

          1. 번제(燔祭)
          2. 소제(素祭)
          3. 화목제(和睦祭)
          4. 속죄제(贖罪祭)
          5. 속건제(贖愆祭)

          둘째, 제사를 드리는 네 가지 방법

          1. 화제(火祭) fire offering / 제이쉬세, 불로 태운다
          2. 요제(搖祭) wave offering / 테누파, 앞뒤로 흔든다
          3. 전제(奠祭) drink offering / 네데크, 관제(빌 2:17)
          4. 거제(擧祭) heave offering / '테루마'(terumah), '들어올려진 것'

          * 요제는 주로 성소 안에서, 거제는 주로 밖에서

          셋째, 일곱 가지 절기

          1. 유월절(逾越節) pass over /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
          2. 무교절(無酵節) unleavened bread / 무덤에 안장되신 예수
          3. 초실절(初實節) first fruits / 부활의 첫 열매가 되신 예수
          4. 오순절(五旬節) pentecost (칠칠절) feast of ewwk / 성령 강림으로 임재하신 예수
          5. 나팔절(喇叭節) trumphet / 다시 오실 예수
          6. 속죄절(贖罪節) atonement / 심판주가 되신 예수
          7. 장막절(帳幕節) feast of tebernacles / 새 하늘과 새 땅과 더불어 나타나실 예수


          레위기 2장 / 소제에 관한 질문 (02-15-2021, 월)

          1. 소제로 바쳐지는 예물은?

          2. 소제의 제물에 첨가하는 것들은?

          3. 소제물의 남은 것은 어떻게 합니까?

          4. 소제물에 넣지 말아야 하는 것들은?

          5. 모든 소제물에 넣어야 할 것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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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 유월절(레위기 23:4-5, 고린도전서 5:7) /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

          *
          기한에 미쳐 너희가 공포하여 성회로 삼을 여호와의 절기는 이러하니라.
            정월 십사일 저녁은 여호와의 유월절이요 .

          * 너희는 누룩 없는 자인데 새 덩어리가 되기 위하여 묵은 누룩을 내어버리라 우리의 유월절 양 곧 그리스도께서 희생이 되셨느니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 양(요한복음 1:29)

          이튿날 요한이 예수께서 자기에게 나아오심을 보고 가로되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

          히브리어로는 '넘어가다' 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니산월(아빕월, 1월) 14일 해질 무렵,
          나흘 전에 준비한 수양을 구워 무교병과 쓴 나물과 함께 먹고 그 피를 문설주에 바르고 아침까지 남은 것은 불에 태워 버린다.
          애급이 하나님의 진노로 장자를 잃는 열 번째 재앙을 당할 때 구원받은 것과 해방을 기념하는 날이다.

          2. 무교절(레위기 23:6-8,  고린도전서 5:7-8) / 무덤에 안장되신 예수

          * 십오일은 여호와의 무교절이니 칠일 동안 너희는 무교병을 먹을 것이요
            그 첫날에는 너희가 성회로 모이고 아무 노동도 하지 말찌며
            너희는 칠일 동안 여호와께 화제를 드릴 것이요 제 칠일에도 성회로 모이고 아무 노동도 하지 말찌니라 .

          * 너희는 누룩 없는 자인데 새 덩어리가 되기 위하여 묵은 누룩을 내어버리라 우리의 유월절 양 곧 그리스도께서 희생이 되셨느니라.
            이러므로 우리가 명절을 지키되 묵은 누룩도 말고 괴악하고 악독한 누룩도 말고 오직 순전함과 진실함의 누룩 없는 떡으로 하자.

          히브리어로는 맛차.
          니산월(아빕월, 1월) 15일부터 7일 동안(21일 까지) 누룩이 없는 무교병을 먹는다.
          절기의 이름도 이 누룩 없는 떡을 먹는다하여 무교절이라 불리웠다.
          무교절이 시작되는 첫 날과 마지막 날은 '성회' 로 백성이 모이고 노동을 하지 못했으며 매일 하나님께 화제를 드렸다

          3. 초실절(레위기 23:9-14, 고린도전서 15:20) / 부활의 첫 열매가 되신 예수

          *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일러 가라사대
            이스라엘
          자손에게 고하여 이르라 너희는 내가 너희에게 주는 땅에 들어가서 너희의 곡물을 거둘 때에 위선 너희의 곡물의 첫 이삭 한 단을 제사장에게로 가져갈 것이요 
            제사장은 너희를 위하여 그 단을 여호와 앞에 열납되도록 흔들되 안식일 이튿날에 흔들 것이며 
            너희가 그 단을 흔드는 에 일년 되고 흠 없는 수양을 번제로 여호와께 드리고 
            그 소제로는 기름 섞은 고운 가루 에바 십분 이를 여호와께 드려 화제를 삼아 향기로운 냄새가 되게 하고 전제로는 포도주 힌 사분 일을 쓸 것이며 
            너희는 너희 하나님께 예물을 가져오는 그날까지 떡이든지 볶은 곡식이든지 생 이삭이든지 먹지 말찌니 이는 너희가 그 거하는 각처에서 대대로 지킬 영원규례니라 .

          *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도다.

          초실절은 히브리어로 바쿠림이라 불리며 무교절 기간 중에 있는 절기로, 유월절 후 첫 안식일 다음 날이다. 추수 전에 곡식의 첫 이삭 한 단을 하나님께 드리는 절기로써 양식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는 날이다. 초실절 예물을 하나님께 드리기 전에는 떡이나 볶은 곡식, 생 이삭이라도 먹지 않았다.

          4. 오순절(칠칠절, 맥추절) (레위기 23:15-21, 사도행전 2:1-47, 고린도전서 12:13, 에베소서 2:11-22) / 부활의 첫 열매가 되신 예수

          * 안식일 이튿날 곧 너희가 요제로 단을 가져온 부터 세어서 칠 안식일의 수효를 채우고  
            제 칠 안식일 이튿날까지 합 오십일을 계수하여 새 소제를 여호와께 드리되
            너희 처소에서 에바 십분 이로 만든 떡 두개를 가져다가 흔들찌니 이는 고운 가루에 누룩을 넣어서 구운 것이요 이는 첫 요제로 여호와께 드리는 것이며
            너희는 또 이 떡과 함께 일년 되고 흠 없는 어린 양 일곱과 젊은 수소 하나와 수양 둘을 드리되 이들을 그 제와 그 전제와 함께 여호와께 드려서 번제를 삼을찌니 이는 화제라 여호와께 향기로운 냄새며
            또 수염소 하나로 속죄제를 드리며 일년 된 어린 수양 둘을 화목제 희생으로 드릴 것이요
            제사장은 그 첫이삭의 떡과 함께 그 두 어린 양을 여호와 앞에 흔들어 요제를 삼을 것이요 이것들은 여호와께 드리는 성물인즉 제사장에게 돌릴 것이며
            이 에 너희는 너희 중에 성회를 공포하고 아무 노동도 하지 말찌니 이는 너희가 그 거하는 각처에서 대대로 지킬 영원규례니라.

          * 우리가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자나 다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고 또 다 한 성령을 마시게 하셨느니라.

          히브리어로는 솨부아 '맹세하다' 라는 뜻.
          밀을 수확할 수 있도록 복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는 날이다.
          칠칠절은 초실절로부터 50일째에 해당하는 날로써 보통 시완월(3월) 6일경이 된다.
          이 날은 하루만 절기로 지키는데 성회를 공포하고 노동이 금지되며 하나님께 번제를 드렸고 수염소 한 마리를 속죄제로 드렸다.
          특이한 것은 모든 절기에는 누룩이 없는 무교병을 쓰지만 칠칠절만은 누룩을 넣은 유교병을 소제로 사용한다.

          5. 나팔절(레위기 23:23-25) / 재림하시는 예수

          *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일러 가라사대
            이스라엘
          자손에게 고하여 이르라 칠월 곧 그 일일로 안식일을 삼을찌니 이는 나팔을 불어 기념할 이요 성회라
            아무 노동도 하지 말고 여호와께 화제를 드릴찌니라.
           

          나팔절은 티쉬리월(7 월) 1일로 유대 민간력으로는 1월에 해당하는 새해 첫날이다.
          이 날은 나팔을 하루 종일 일정한 간격으로 불었으며 성회가 선포되고 노동을 금했다.
          그리고 속죄제로 수염소 한 마리를 드렸다.

          6. 속죄일(레위기 23:26-32,  히브리서 9:25, 26) / 심판주로 오실 예수

          *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일러 가라사대
            칠월 십일은 속죄일이니 너희에게 성회라 너희는 스스로 괴롭게 하며 여호와께 화제를 드리고
            이 에는 아무 일도 하지 말것은 너희를 위하여 너희 하나님 여호와 앞에 속죄할 속죄일이 됨이니라
            이 에 스스로 괴롭게 하지 아니하는 자는 그 백성 중에서 끊쳐질 것이라
            이 에 누구든지 아무 일이나 하는 자는 내가 백성 중에서 멸절시키리니
            너희는 아무 일이든지 하지 말라 이는 너희가 그 거하는 각처에서 대대로 지킬 영원규례니라
            이는 너희의 쉴 안식일이라 너희는 스스로 괴롭게 하고 이 구일 저녁 곧 그 저녁부터 이튿날 저녁까지 안식을 지킬찌니라. 


          이 날은 성회가 선포되고 노동을 금하며 마음을 괴롭게 하는 날로 티쉬리월( 7월) 10일이다.
          특별히 연중 이 날만 대제사장이 지성소에 들어갔다.
          그리고 하나님을 위한 수염소와 아사셀을 위한 수염소를 드렸다.

          7. 초막절(레위기 23:33-34) / 새 하늘과 새 땅으로 오실 예수


          *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일러 가라사대
            이스라엘
          자손에게 고하여 이르라 칠월 십오일은 초막절이니 여호와를 위하여 칠일 동안 지킬 것이라

          수장절, 장막절이라고도 불린다.
          티리쉬월(7월) 15일부터 8일 동안 행해진다.
          초막절은 이스라엘 백성이 애급을 나와 광야에 머물었던 것을 기념하는 동시에 풍성한 수확을 허락하신 하나님께 감사하는 절기이다. 첫날과 여덟째 날에는 성회로 모이고 노동이 금지되었으며 각 날마다 그에 상응 하는 제사를 드렸다.














          거제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제물로 바쳐진 것을 의미하며(골 1:22, 히 9:24~25),
          생명의 양식으로 우리에게 주어지심(요 6:33~58, 롬 8:32)을 상징하는 것으로,
          우리에게 풍성하게 주어지는 영의 양식과 축복을 상징한다.

          ‘화목제’(레 7:14, 32), ‘땅의 처음 익은 소산물을 드릴 때’, ‘십일조를 드릴 때’, ‘전리품을 드릴 때’ 거제라는 방법으로 제사를 드렸다.

          거제를 드리기 위해서 경배자는 화목제 희생제물의 우편 뒷다리와 처음 익은 곡식가루와 떡, 타작마당의 곡식, 십일조, 포도주, 기름 등(레 7:32, 민 15:20, 18:24, 31:50~53, 느 10:39)을 하나님께 제물로 드렸다.

          제사장들은 경배자가 화목제 희생제물을 가져오면 제사장이 여호와 앞에서 화목제 희생제물의 우편 뒷다리를 높이 들어 내린 후 바쳤고 하나님은 이를 기뻐 받으셨다.

          “하나님의 떡은 하늘에서 내려 세상에게 생명을 주는 것이니라 저희가 가로되 주여 이 떡을 항상 우리에게 주소서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요 6:33~35)

          “이제는 그의 육체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화목케 하사 너희를 거룩하고 흠없고 책망할 것이 없는 자로 그 앞에 세우고자 하셨으니”(골 1:22)





























































































































































































































































































































































          마태복음(01 / 28 / 2023 - 03 / 08 / 2023)


          3D 현상


          그리스도의 사랑

          영국의 선교사인 허드슨 테일러가 중국 대륙의 전도 책임자로 있을 때 그는 가끔 전도를 희망하는 후보자를 면접하였다 한번은 봉사하기로 결심한 한 사람을 만나 "왜 당신은 해외 선교사로 가기를 원합니까?"하고 물었다.

          선교사 후보자는 대답하기를 "나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전세계에 나가서 복음을 전하라고 명령하셨기 때문에 가기를 원합니다."라고 대답하였다.

          또 다른 한 명은 수백만의 사람들이 그리스도 밖에서 타락하고 있기 때문에 선교사로 나가기를 원한다고 대답하였다.

          그때 허드슨 테일러는 말하기를 "그 모든 동기들은 좋지만 시험과 시련 그리고 고생, 심지어 죽음의 순간을 당할 때, 그것은 당신을 구하지 못합니다. 단지 한 가지 동기가 당신을 어려운 시험과 시련에서 견디게 해줄 것입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사랑입니다."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아프리카에 있는 선교사가 한번은 이런 질문을 받았다고 한다.
          당신은 "당신이 하고 있는 일을 진실로 좋아해서 하십니까?"
          그의 대답은 충격적이었다.
          "아닙니다. 나와 처는 먼지와 이 고생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초라한, 냄새가 나는 이런 오두막집에서 사는 것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좋아하지 않는다고 그리스도를 위하여 아무 것도 하지 않으면 되겠습니까? 우리는 가라는 명령을 받았고,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시기 때문입니다."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당신이 주님을 사랑하지 않는다면 위험하거나 불쾌한 조건에서 나도 시험을 당할 때 주님을 섬기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오직 그리스도의 사랑만이 진정한 봉사를 하게 할 것입니다.


          3D 현상

          산업사회를 지나면서 우리가 흔히 듣던 3D 현상이 있다.
          더럽고(dirty)
          어렵고(difficult)
          위험한(dangerous) 것은 회피하는 현상이다.

          정보사회의 3D 현상
          디지털(digital)
          디엔에이(DNA)
          디자인(design)이 신 3D 현상이다.

          이 셋은 정보사회에 있어서 가장 중요하게 습득해야 할 것들이다.

          ‘디지털’이란 말은 손가락이나 발가락을 의미하는 ‘디지투스(digitus)'에서 온 말이다.
          컴퓨터의 모든 자료는 ’비트(bit)' 단위로 기억되는데 하나의 글자를 기억하는데 필요한 8개의 비트를 묶어 놓은 것을 ‘바이트(bite)'라고 한다.
          컴퓨터 데이터의 가장 작은 단위는 0과 1로 이루어져 있는 ’비트‘와 '네트(net)'의 결합으로 컴퓨터를 통한 정보산업 즉 ’디지털 혁명‘은 가능하게 되었다.
          ’비트‘는 자유자제로 변형이 가능하고, ’네트‘는 공간의 제한을 받지 않고 전달이 가능하다.
          이러한 특성이 컴퓨터와 통신을 가능하게 하였고 이제는 컴퓨터와 통신은 각각 다른 기술이 아니라 통합 기술로 발전하고 있다.

          디지털의 세계는 아날로그의 세계와는 다르다.
          어떤 이는 이전의 시대를 진공관의 시대, 아날로그 시대라고 하고, 현대를 디지털의 시대라고 정의한다.
          시대의 변화에 따라 정신의 변화도 엄청나게 달라지고 있는 것이다.
          디지털로 표현되는 정보사회는 이제 인간의 상상력이 미치는 것은 무엇이든 가능한 시대가 된 것이다.

          정보사회는 이전의 산업사회와는 달리 효율성이나 효과성보다 유연성이나 창의성이 더 중요한 사회이다.
          정보사회는 조직의 혁신 방안도 구조조정이나 리엔지니어링 그리고 모듈레이션 등으로 발달하게 되므로 정보 마인드로 변화하는 것이 일차적으로 중요하다.
          정보사회는 인간의 위상도 상당히 달라진다.
          인류의 1차 혁명이라고 할 수 있는 농업혁명 시대는 자연을 모델로 한 지식이 지배하였고 2차 혁명인 산업혁명 시대는 기계를 모델로 한 지식이 지배하였지만 3차 혁명인 정보혁명 시대는 사람을 모델로 한 지식이 지배하게 되었다.
          이러한 변화는 방송 매체의 패러다임에도 상당히 영향을 줄 것이 분명하다.

          산업 사회와 정보 사회의 차이를 개미 사회와 거미 사회란 말로 표현하기도 한다.
          개미란 부지런히 일하여 모든 먹이를 독점하는 시대를 의미한다.
          그러므로 산업 사회에서는 부지런한 사람들이 소유하게 되었으며 소유를 독점하던 시대이다.
          그러나 거미는 개미가 아니다.
          거미는 공중에 거미줄을 치고 사는 생물로 부지런히 일하는 타입이 아니라 좋은 길목에 거미줄을 치고 기다리다가 먹이가 걸리면 잡아먹는다.
          정보 사회는 부지런함 보다 정보망을 많이 가지고 있는 사람이 승리한다.
          정보 사회는 개미 사회와 같이 독점이 아니라 공유하는 사회이다.
          그러므로 정보 사회를 살아야 하는 우리는 정보 네트워크를 가져야 하며 모든 지식과 소유의 공유로 전환해야 한다.

          현대의 인터넷은 WWW(World Wide Web)로 대변된다. WWW는 세계적인 거미줄 망이다.
          즉 인터넷은 거미줄이다.
          미래 사회는 전 세계가 거미줄 망으로 연결될 것이고 이 거미줄을 의존하고 살게 될 것이다.
          현재는 인터넷을 알지 못하면 조금 불편한 정도이지만 앞으로는 인터넷을 알지 못하면 생존이 불가능한 시대가 올 것이다.
          인터넷은 좋든 싫든 생활의 중심에 서 있는 생존수단으로 변형을 몸부림하고 있는 것이다.

          정보사회는 모든 사람이 중심인 사회이다.
          거미의 자리는 항상 거미줄의 중심이다.
          이런 정보사회로의 이동은 사회의 전통적 규범이나 가치에 대 전환을 가지고 오므로 혼란으로 이해되기도 한다.
          이미 우리 사회도 전통 규범이나 가치가 혼돈 되는 정보사회의 현상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이런 사회에서 인터넷의 순기능이 극대화는 가장 중요한 과제이다.



          너희는 가서

          `가서'(포류덴테스)는 제 1과거 분사형으로서 끝없이 지속적으로 나아가야 할 것을 시사한다.
          물론 이 분사는 `너희는 제자를 삼아'라는 본동사의 보조 역할 밖에는 하지 않으나 제자를 만드는 사역이 `모든 족속'에 확장되길 요구하는 문맥에서 `가다'라는 분사가 매우 의미 심장한 명령적 의미를 지닌다고 할 수 있다.

          사실 한 분사가 명령형에 의존하는 부수적인 분사로서의 기능을 가질 때는 보통 그 분사는 독립성이 짙은 명령적 의미를 갖는다(2:8,13; 9:13; 11:4; 17:27; C. Rogers, The Great Commission, pp.258-67).

          결국 '가서'란 선교에 있어서 적극적이고 능동적이며 지속적이어야 함을 강조하는 말씀이라 본다.
          진정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진 분이 위임한 권세와 당부한 명령을 가지고 언제 어디서나 복음 전하는 길을 `가는' 선교사들이 바로 성도들인 것이다.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방인의 길'과 `사마리아인의 고을'로 가지 말고 이스라엘 집의 잃은양에게 가라고 하셨고(10:5, 6)
          예수 자신은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에게로만 보냄을 받았다고 말씀했던 것(15:24)과는 대조적으로 이제는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으라고 한다.

          이는 이제 더이상 유대인과 이방인의 차별(差別)이 존재하지 않음을 뜻한다.
          한편 `모든 족속'에 대해 이스라엘을 제외한 모든 이방족속들을 지칭한다는 견해가 있다(Hare, Walker).
          즉 이스라엘은 이제 영광된 지위를 상실했기 때문에 복음 전파 대상에서 제외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스라엘을 포함한 모든 민족을 가리킨다는 견해가 있다(Trilling, Hubbard,John p.Maier).
          사실 마태가 '족속'(에드네)이라는 말을 관사없이 사용할 경우 대부분 `민족들', `백성들'을 뜻했으며(24:9,14; 25:32) 그리고 그 표현은 `(구분없이) 모든 백성들' 혹은 `(구분없이) 모든 나라들'을 의미했다.
          따라서 이방인만이 본 지상 명령의 관심대상이라고 보는 것은 불필요한 제한을 설정하는 것이 된다.

          `제자를 삼아(마데튜사테)란 말은 `제자를 만들라'는 강한 명령으로서 가르치고 훈련시키라는 의미이다.
          사실 한 자연인을 그리스도의 제자로 만든다는 것은 그를 선생과 제자에의 관계에로 인도함을 뜻한다.
          제자란 그리스도의 권세있는 교훈의 멍에를 메야 하며(11:29), 그리스도가 말한 것이기 때문에 그가 말한 바를 진리로 받아들이고, 그리스도가 요구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 요구의 정당성을 인정하고 순복하는 것을 모두 포함한 말이다(Broadus).

          진정 제자들은 예수의 가르침을 듣고 이해하고 순종하는 자들이다(12:46-50).
          한편 이와 더불어 제자는 선포와 응답을 모두 필요로 하는 존재이기 때문에 `제자를 삼아'라는 말 속에는 회개의 신앙을 이끌어내는 복음의 선포가 은연 중에 내포되었다고도 볼 수 있다.
          이 제자직에 대한 응답은 세례를 받고 가르침을 받는 일이다.
          이러한 사실은 본절과 다음 절에 이어지는 지상명령에서 주어진 바 `가라', `세례를 주라',`가르쳐 지키게 하라'는 단어가 모두 `제자 삼으라'는 본 동사의 보조 역할을 하는 분사형을 취하고 있다는 사실에서 더욱 확연(確然)해진다.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라고 하셨다.

          세례를 주고

          예수께서 `세례를 주라'고 말씀하시기는 이곳이 처음이다.
          그런데 우리는 여기서 세례가 처음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베풀어지다가(행 2:38; 8:16; 10:48; 롬 6:3; 고전 1:13,15; 6:11; 10:2)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이 점차 아버지, 아들, 성령의 이름으로 확대 되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이에 관해 리겐바하(E. Riggenbach)는 말하기를 디다케(Didach, 12사도 교훈집) 당대에, 예수의 이름으로주는 세례와 삼위(三位)의 이름으로 주는 세례는 공존했다 한다.
          그러나 분명히 밝혀둘 것은 예수께서 세례를 받으실 때 성삼위의 조화로운 협력이 있었다는 사실과(3:16, 17) 초대 교회에서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다 하더라도(행 8:16; 10:48) 그것이 창조자이시요 섭리자이신 성부 하나님과 죄를 고백케 하시며 위로하시는 성령의 권위와 실체를 이미 전제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실로 삼위 일체라는 신앙이 후대의 교회가 확실한 토대를 세우고 또 초대교부 터툴리안(Tertullian)에 의해 그 용어가 공식 사용되었다 하더라도 그것은 분명 예수의 가르침과 삶에 의해 증거되고 또 사도들에(고전 12:4-6; 고후 13:13; 요일 3:23,24) 의해 계승 발전되었다는 사실은 간과되어서는 안 된다.

          어떻든 제자들이 되는 자들은 삼위(Trinty)하나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아야 한다.
          여기서 `이름'(오노마)이란 하나님의 품성과 속성 및 그분의 전인격을 암시하며 또 그분의 권위와 권능이라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특별히 `오노마'가 복수가 아닌 단수로 사용된것은 삼위 하나님의 완전한 하나되심을 강조해 준다고 보겠다.
          그리고 `이름으로'에서 `...으로'(에이스)에 관해 몇몇 신약 성경 기자들과는 달리, 마태는 분명히 헬레니스틱 그리스어(Hellenistic Greek)에서 흔히 나타내는 '에이스(엄격히는 `안으로'란 뜻)와 '엔' (*, 엄격히는 `안에'라는 뜻) 간의 혼동을 피하고 있다.

          만일 그렇다면 전치사 `안으로'는 어떤 관계 안으로 들어오는 행위 혹은 주님의 권세 아래로 들어오는 행위를 강하게 시사해 준다(Allen, Albrigth and Mann).

          한편 `세례를 주고'에 해당하는 헬라어 `밥티조'는 `잠근다'(왕하 5:14; 시 68:23), `씻는다'(막7:4; 눅 11:38; 딛 3:5)는 뜻으로 사용되고 있어 이를 `세례' 또는 `침례'로도 각각 번역할 수 있다.

          이에 대해서는 3:6, 11, 13-17의 주석을 참조하라.
          사실 중요한 것은 `세례'냐 `침례'냐 하는 것이 아니라 세례란 죄사함을 받고(막16:16) 메시야의 계약 공동체의 일원이 되며, 메시야의 주권에 굴복하겠다는 서약의 표(Sign)라는 사실이다(Beasley-Murray, Baptism pp.90-92).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마태복음에서 예수의 공생애는 `가르침', `전파하심' 그리고 `병 고침'으로 요약될 수 있다(4:23; 9:35).
          그런데 예수께서 일찍이 제자들을 파송하면서 `병을 고치고', `전파할 것을' 명하셨지만(10:7-9)
          지금처럼 `가르치는 것'에 대한 직접적 명령은 하시지 않았다.
          그 이유는 예수께서 살아있는 유일한 선생으로서(23:8) 가르치는 권세가 그분에게만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제는 승천하실 때가 되었으므로 당신의 뜻을 받들어 천국 일꾼으로 계속 매진(邁進)해야 할 제자들에게 `가르칠' 책임과 권위를 부여해 주고 계신 것이다.
          제자들은 이제 세상에 나아가 생전에 스승이 가르쳐 주신 계명들과 교훈(디다케)을 가르칠 수 있는 권리와 동시에 의무를 갖게 된 것이다.
          한편 `가르쳐'(디다스콘테스)는 현재 분사형으로서 지속적인 가르침을 강조한 말이다.
          즉 예수의 가르침은 오고오는 세대들에게 전달되고 보존되어야 할 것이었다(딤후 2:2).
          실로 처음 예수의 가르침에 접했던 제자들(`눈의 목격자들 - eyewitnesses')이 예수께서 가르치신 것들을 주의깊게 전달하여 줄 때 다음은 `귀의 목격자들'(earwitnesses)을 낳게 된다(O'Brien pp.264ff.).
          이러한 역동적이고 생명력 넘치는 전달 과정을 통해 하나님의 나라는 더욱 든든히 서 갈 것이다.
          한편 제자들이 가르치는 바는 단지 추상적이고 이론적인 교리로 끝나서는 아니되었다.
          그것은 반드시 `지키고' 순종해야 할 그리고 전의지적 결단과 실행이 동반되어야 할 살아있는 가르침이어야 했다.

          볼지어다(이두)

          마태가 자주 사용하던 간투사로서, 예수께서 지상 대명령을 마치시면서 그에 곁들여 당신의 위대한 약속을 주시고자 제자들의 주의를 환기시키고 계신 것이다.
          따라서 이 `볼지어다'는 본문에서 `확실히' 정도의 뜻이 될 것이다.

          세상 끝 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예수의 탄생이 선지자의 예언을 성취하는 것이며 그 이름은 `임마누엘'이라는 말로 시작되었다(1:23).
          `임마누엘' 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말씀은 이제 본서의 마지막에 강조적으로 다시 언급되고 있다.
          이 약속은 성도들에 대한 넘치는 위로와 힘이 아닐 수 없다.

          비록 그분은 잠시후 승천하실 것이지만 무소부재하신 그분은 여전히 당신의 사람들의 형제요 친구요 구원자요 상담자요 안내자로서 모든 공간 모든 시간을 초월하여 `함께' 계실 것이다. 진정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지니신 그분이 `함께' 하신다는 것은 모든 지식과 권능과 사랑를 가지고 언제라도 돕고 위로해 주실 것이라는 초월한 약속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단 매일매일의 삶 속에서 그분의 계명을 지킴으로써 그분의 임재(臨在)를 체험하고 그분의 주권을 인정하는 자에게만 그분의 약속은 실현이 될것이다. 한편 여기서 `세상 끝날까지'(*, 헤오스 테스 쉰테레이아스 투 아이오노스)란 복음이 땅끝까지 전파되어 주께서 재림하시는, 세상 역사의 종말을 가리킨다(24:3). 그리고 `항상'(*, 파시스 타스헤메라스)이란 신약에서 여기에만 나오는데 직역하면 `모든 날의 전체'가 된다. 이는 우리의 먼 장래만이 아니라 우리가 현재 살고 있는각각의 날들 모두를 가리킨다. 실로 주님의 임재는 이 `세상 끝날까지'(13:39, 40, 49; 히 9:26) 지속될 것이다. 즉 하나님 나라가 완성될 그때인 역사의 종말 때까지 게속될 것이다. 여기에는 심판에 대한 묵시적 경고가 내포되어있다. 주와 더불어 살아가는 성도 내지는 신앙 공동체는 그 궁극 지향점이 종말이므로 감히 더불어 계신 주님을 떠나 제멋대로 행동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한편 주님의 지상 명령과 그것의 성취 사이의 기간은 추정하기가 어렵다. 어쨌든 그 기간은 교회가 지속적으로 선교해야하는 활동 기간이며, 또 교회가 주의 재림(parousia)을 예비해야 하는 준비 기간인 동시에 교회가 주의 잔치를 현재적으로 누려야 하는 희락(喜樂)의 기간이기도 하다. 이상으로 본서는 지속적인 선교와 가르침에 대한 기대와 명령으로 끝이 난다. 앞에서 보아왔듯이 본서에 기술된 다섯개의 강화들은 예수의 가르침이라는 동일한 내용과 함께 끝을 맺고 있다(3:1-26:5). 반면 예수의 수난과 부활 기사는 그의 제자들에게 동일한 사역을 수행하도록 위임함으로 끝이났다.

          즉 십자가와 빈 무덤, 그리고 부활하신 주의 영광스런 승리의 현현과 승귀에 비추어서 그 사역을 수행하라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본서는 주의 명령이 완성되는 `세상 끝날까지'는 종결되지 않는 미완(未完)의 책인 것이다.


          요한계시록 2:26 
          이기는 자와 끝까지 내 일을 지키는 그에게 만국을 다스리는 권세를 주리니

          요한계시록 22:14
          그 두루마기를 빠는 자들은 복이 있으니 이는 저희가 생명 나무에 나아가며 문들을 통하여 성에 들어갈 권세를 얻으려 함이로다

          창세기 1:1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온 우주 만물을 창조하신 그 하나님이 주신 권세.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 권세를 오늘도 사용하고 계신다는 사실을 알고 계십니까?
          오늘은 그 권세가 무엇이며 그 권세를 얻기 위해 예수 그리스도는 어떤 일을 하셨으며 그 권세가 어떻게 사용되는지 살펴보면서 말씀의 은혜를 더하고자 원합니다.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하늘과 땅을 창조하신 분이 하늘에 계신 분이 땅의 권세를 가지셔야만 했을까요?

          사실 하늘과 땅의 권세는 예수님께 있었습니다. 그러나 땅에서 사건이 일어났죠?! 

          바로 인간의 원죄에 관한 사건입니다.
          창세기 1:28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하나님이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

          하나님이 만드신 피조세계의 청지기로 사람을 세웠는데 그 사람이 죄를 범하고 말았고 이로 인해 땅이 하나님의 땅으로 온전히 기능하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하늘과 땅의 권세는 여전히 하나님이 가지고 계시지만 인간의 죄로 인해 하나님의 나라를 온전히 세워가기 위한 땅에 심각한 문제가 발생하였고 이 문제를 회복하기 위해서는 하늘과 땅의 권세 이상의 권세가 필요했습니다.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가 그것입니다.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란? 하늘과 땅의 권세 그 위에 있는 (인간의 모든 죄악도 해결하는 권세를 말씀합니다. 곧 구원을 주실 수 있는 권세를 말씀합니다

          하늘과 땅의 권세를 가지신 분이 이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지시기 위하여 인간의 죄악을 해결하시기 위하여 어떤 일을 하셨습니까? 

          베드로전서 2:24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이는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는 나음을 얻었나니

          그 몸으로 죄를 담당하셨습니다
          보배로운 피로 말미암아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예수님이 받으셨습니다.
          하늘과 땅의 권세 그 이상의 권세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
          죄인을 의롭다하시고 하나님 나라의 땅을 온전히 세워가도록 그렇게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예수께서 나아와 말씀하여 이르시되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이 권세는 그냥 그런 권세가 아닙니다.
          물질의 권세, 명예의 권세, 멋진 집, 멋진 차, 부동산의 권세 이런 것일까요?
          여러분과 제가 지금 바라고 소망하는 권세는 무엇입니까?
          이 권세를 얻기 위해서 무엇을 해야합니까?
          그 권세를 어디에 사용하기 원하십니까? 
          예수 그리스도는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받기 위하여 고난 당하셨고 조롱당하셨으며 우리를 대신하여 십자가에 달리시며 자신을 주시며 피흘리시며 생명을 내어주셨습니다 모든 일을 하셨습니다.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받으시기 위해서 이렇게 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이 권세를 과연 어디에 사용하고 계십니까? 하늘과 땅의 권세 그 이상의 권세 우리의 죄를 사하시기 위한 권세 우리를 깨끗케 하시기 위한 권세.
          이 권세를 예수 그리스도는 어디에 사용하고 계십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가 어느 곳에 사용됩니까?
          너희는 바로 여러분과 저 그의 택하심을 받은 하나님의 자녀에게 그의 백성에게 사용됩니다.
           

          요한복음1:12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제자들과 초기 기독교인들이 예수님에게 하늘과 땅의 권세가 주어졌다고 고백한 이유는 예수를 통해서 생명을 얻었다는 데에 있다.
          이런 생명은 부자가 된다거나 사람들에게서 존경을 받음으로써 얻게 되는 게 아니다.
          예수의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서만 주어지는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를 하나님과 본질이 동일한 분으로 인식하고 믿었다.
          그 결과가 하늘과 땅의 권세라는 표현에 녹아 있다.

          우리에게 문제는 제자들이 경험한 그런 생명을 우리가 경험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것은 죄와 죽음으로부터의 해방이다.
          십자가에 이르는 사랑과 부활에 대한 희망을 아는 사람은 죄와 죽음으로부터 해방된 사람이다.
          그것이야말로 참된 해방이다.
          이는 곧 예수로부터 생명을 얻었다는 뜻이다.
          그게 확실하다면 그는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가 예수에게 주어졌다’고 고백할 수밖에 없다.




          127. [요한계시록 13:2]
          내가 본 짐승은 표범과 비슷하고 그 발은 곰의 발 같고 그 입은 사자의 입 같은데 용이 자기의 능력과 보좌와 큰 권세를 그에게 주었더라

          128. [요한계시록 13:4]
          용이 짐승에게 권세를 주므로 용에게 경배하며 짐승에게 경배하여 가로되 누가 이 짐승과 같으뇨 누가 능히 이로 더불어 싸우리요 하더라

          129. [요한계시록 13:5]
          또 짐승이 큰 말과 참람된 말 하는 입을 받고 또 마흔 두달 일할 권세를 받으니라

          130. [요한계시록 13:7]
          또 권세를 받아 성도들과 싸워 이기게 되고 각 족속과 백성과 방언과 나라를 다스리는 권세를 받으니

          131. [요한계시록 13:12]
          저가 먼저 나온 짐승의 모든 권세를 그 앞에서 행하고 땅과 땅에 거하는 자들로 처음 짐승에게 경배하게 하니 곧 죽게 되었던 상처가 나은 자니라

          132. [요한계시록 13:15]
          저가 권세를 받아 그 짐승의 우상에게 생기를 주어 그 짐승의 우상으로 말하게 하고 또 짐승의 우상에게 경배하지 아니하는 자는 몇이든지 다 죽이게 하더라

          133. [요한계시록 16:8]
          네째가 그 대접을 해에 쏟으매 해가 권세를 받아 불로 사람들을 태우니

          134. [요한계시록 16:9]
          사람들이 크게 태움에 태워진지라 이 재앙들을 행하는 권세를 가지신 하나님의 이름을 훼방하며 또 회개하여 영광을 주께 돌리지 아니하더라

          135. [요한계시록 17:12]
          네가 보던 열 뿔은 열 왕이니 아직 나라를 얻지 못하였으나 다만 짐승으로 더불어 임금처럼 권세를 일시 동안 받으리라


          136. [요한계시록 17:13]
          저희가 한 뜻을 가지고 자기의 능력과 권세를 짐승에게 주더라

          137. [요한계시록 18:1]
          이 일 후에 다른 천사가 하늘에서 내려오는 것을 보니 큰 권세를 가졌는데 그의 영광으로 땅이 환하여지더라

          138. [요한계시록 20:4]
          또 내가 보좌들을 보니 거기 앉은 자들이 있어 심판하는 권세를 받았더라 또 내가 보니 예수의 증거와 하나님의 말씀을 인하여 목 베임을 받은 자의 영혼들과 또 짐승과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지도 아니하고 이마와 손에 그의 표를 받지도 아니한 자들이 살아서 그리스도로 더불어 천년 동안 왕노릇 하니

          하늘과 땅의 권세를 가지신 예수님
          마태복음 28:18-20


          “하늘에 오르사 전능하신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다가”
          사도신조의 고백 라는 것에 대한 신앙고백입니 다. 죄와 사망의 권세를 깨뜨리시고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40일 후에 하늘로 올라 가셨습니다.
          지금은 하늘 위에 서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아 계시지만 장차 세상을 심판하기 위하여 다시 오실 것입니다.

          종교 개혁자 칼빈 (J.Calvin)은 사도신경 가운데 그리스도에 관한 내용을 설명하면서 탄생, 고난, 부활, 승천에 관한 것은 과거의 사건으 로,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아 계심은 현재의 상태로, 재림하실 것이라고 함은 미래에 대한 것이라고 분류하였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대낮에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하늘로 올라가신 것은 자연을 초월하는 신비로운 사건입니다.
          또 그가 지금 하 나님 우편에 좌정하시고 계신다는 것도 전능하신 주님으로서 우주적인 왕권을 행사하고 계심을 뜻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땅에 서 뿐 아니라 하늘에서의 모든 권세를 다 가지시고 인류와 역사를 지배하고 계십니다.
          그러면 “...하늘에 오르사 전능하신 하나 님 우편에 앉아 계시다가...”라는 의미를 함께 생각해 보면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1. 하늘에 오르신 예수님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하늘로 올라 가셨다는 사실은 그를 믿는 우리들에게 매우 큰 희망을 가지게 합니다.
          구약 시대 에녹(창 5:24)과 엘리야(왕하 2:11)도 육체를 가진 채 하늘로 올라갔습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하늘」이란 장소로서의 하늘이며 하나님께서 계신 영역을 말합니다.
          곧 신령한 장소입니다.
          땅에 대한 하늘이요, 죄가 없는 곳입니다.
          하늘은 본래 예수님이 계시던 그곳입니다.
          따라서 하늘은 마침내 하나님의 백성이 갈 곳이며, 예수님께서 우 리를 위해 예비해 놓으신 곳입니다.

          ⑴ 승천의 내용
          마가복음 16:19에는 “주 예수께서 말씀을 마치신 후에 하늘로 올리우사 하나님 우편에 앉으시니라”고 말씀하 시고 있습니다.
          또 누가복음 25:50-51에 보면 “예수께서 저희를 데리고 베다니 앞까지 나가사 손을 들어 저희에 게 축복하시더니 축복하실 때에 저희를 떠나 하늘로 올리우시니”라고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그런데 「누가복음의 속편」이라는 사도행전에는 예수님께서 하늘로 올라가신 장면을 매우 상세하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사도행 전 1:9-11에는 “이 말씀을 마치시고 저희 보는데서 올리워 가시니 구름이 저를 가리워 보이지 않게 하더라 올라가 실 때에 제자들이 자세히 하늘을 쳐다보고 있는 데 흰옷 입은 두 사람이 저희 곁에 서서 가로되 갈릴리 사람들아 어찌하여 서서 하늘 을 쳐다보느냐 너희 가운데서 하늘로 올리우신 이 예수는 하늘로 가심을 본 그대로 오시리라 하였느니라”고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탄생이나 부활이 한쪽 구석에서 은밀하게 이루어진 사건이 아닌 것처럼 주님이 승천도 대낮에 많은 사람이 보는 앞에서 이루어 진 사건입니다.
          이는 예수님의 성육신과 그의 지상 사역이 확실한 역사적 사건이요, 객관적인 사실임을 증명하는 것입니다.

          ⑵ 승천의 의미
          예수님께서 육체를 가지시고 하늘로 올라가신 것은 여러 가지로 중요한 의미를 나타내고 있습니다.

          ① 예수님의 지상 생활의 완성을 뜻합니다.
          성탄으로 시작된 그의 지상 생활은 십자가 위에서 죽으시고 무덤 속에서 3일만에 살아나신 것과 부 활 후 40일 동안 제자들과 활동하시다가 감람산 위에서 하늘로 올라가심으로서 지상에서의 활동이 완료된 것입니다. 다 시 말하면 육체를 입고 세상에 오신 예수님의 생애는 그의 승천과 함께 매듭지어 진 것입니다. 역사 속에서 하나님의 아들이 하셔 야 될 모든 일들을 완료하신 것이 됩니다.
          요한복음 19:30에 보면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시고 숨을 거두시기 직전 “다 이루었다”고 말씀하셨습니 다. 여기서 「다 이루었다」고 하신 것은 인류의 죄를 구속하기 위한 속죄 사역을 십자가 위에서의 죽음으로서 완성하셨음을 선언하 는 것입니다. 그러나 십자가 이후에도 주님께서 하실 일이 있었습니다. 곧 3일만에 무덤에서 부활하신 일이며,40 일 동안 더 머무르면서 부활의 사실을 사람들에게 증거 하는 일이었으며, 그리고 하늘로 올라간 사건이었습니다. 이와 같은 일련의 사 건들을 통하여 그가 세상에 오신 목적을 완전히 달성하게 되었습니다.

          ② 본래 하늘에서 오셨다는 것을 확인한 것입니다.
          당시 많은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믿지 않았습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으로부터 오셨다는 사실 전체를 거부하고 있 었습니다(요9:29) “하나님이 모세에게는 말씀하신 줄을 우리가 알거니와 이 사람은 어디서 왔는지 알지 못하노라” 그러나 예수님께 서는 유대인들을 향하여 “하늘에서 내려온 자 곧 인자 외에는 하늘에 올라간 자가 없느니라”(요3:13)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가 육신을 입고 세상을 오실 때 하늘의 보좌를 비워 두고 오셨습니다.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 됨을 취할 것으 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 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빌2:6-8) 이제 지상에서 하셔야 될 그의 사역을 다 마치셨기에 다시 그가 왔던 곳으 로 되돌아가시게 된 것입니다.

          ③ 예수님의 승천은 우리의 소망이 됩니다.
          예수님께서 성육신으로 하늘에서 내려오신 것이 우리의 구원을 위한 축복이었던 것처럼 그의 승천 역시 성도들에게 「소망의 확증」을 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성도가 가지게 될 궁극적인 소망을 「하늘 나라」요, 「아버지의 집」이라고 말씀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요 한복음 14:2-3에 보면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 여 처소를 예비하러 가노니 가서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 게 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늘로 올라가신 예수님은 그곳에 장차 들어가야 될 우리들을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신다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우리들도 예수님처 럼 하늘로 올라가게 된다고 하였습니다. 데살로니가전서 417에 보면 “그 후에 우리 살아 남은 자도 저희와 함께 구 름 속으로 끌어 올려 공중에서 주를 영접하게 하시리니 그리하여 우리가 항상 주와 함께 있으리라”고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⑶ 승천의 소망을 가진 자의 자세
          예수님께서 하늘로 올라가신 현장에서 그 장면을 소개하는 누가의 기록에는 거기 나온 무리들에게 천사가 당부했던 말을 기록하였 습니다. 사도행전 1:11에 보면 “가로되 갈릴리 사람들아 어찌하여 서서 하늘을 쳐다보느냐 너희 가운데서 하늘로 올 리우신 이 예수는 하늘로 가심을 본 그대로 오시리라 하였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① 재림의 주님을 기다려야 합니다.
          예수님의 승천하신 현장에 나온 천사는 예수님이 하늘로 올라가시는 그 장면처럼 구름을 타고 다시 오실 것을 분명하게 증언하였 습니다. 요한계시록 1:7에도 언급하기를 “볼지어다 구름을 타고 오시리라 각인의 눈이 그를 보겠고 그를 찌른 자들 도 볼 터이요 땅에 있는 모든 족속이 그를 인하여 애곡하리니 그러하리라 아멘”고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신부가 신랑을 맞이 하기 위하여 단장을 하고 기다리듯이 성도는 언제든지 다시 오실 예수님을 맞이하게 될 줄을 알고 소망 중에 기다려야 합니다. 그래 서 예수님은 마 25:13에서 “그런즉 깨어 있으라 너희는 그 날과 그 시를 알지 못하느니라”고 말씀하시고 있는 것 입니다.

          ② 주님께서 맡기신 일에 충실하여야 됩니다.
          멍청하게 서서 하늘만 쳐다보고 있는 어리석은 자가 되지 말고 자기가 하여야 될 일이 무엇인지 찾아서 열심히 일해야만 됩니 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즉시 요한의 다락방으로 가서 기도에 힘쓰던 중 아버지의 약속하신 성령을 충만하게 받았습니다(행 2:1-4) 또한 성령의 권능을 힘입어 열심히 복음을 전파하였습니다. 그것은 하늘로 올라가신 예수님께서 세상에 남겨둔 그의 제자들 과 교회에 분부하신 지상 명령이기 때문입니다(마28:18-20)
          그런데 우리가 주의할 것이 있습니다. 첫 번째는 주님의 재림을 기다린다고 하면서 규모없이 생활해서는 안됩니다. 규모있게 생 활해야 합니다(살후 3:10,11) 그래서 사도 바울은 “일하기 싫거든 먹지도 말라”고 경고하고 있습니다. 두 번째 는 주님의 재림이 지연된다고 해서 선을 행하다가 낙심하지 말아야 합니다(살후 3:13,갈 6:9)

          2. 하나님 우편에 앉아게신 예수님

          신앙고백의 “전능하신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다가”라는 말씀 중에서 “우편에 앉아 계시다가”라고 한 말은 현재 진행되고 있 는 사실을 강조합니다. 곧 그리스도의 승천부터 재림하실 때까지 그 하늘 좌소가 하나님 보좌 우편으로서 그의 지위와 권능과 사역 에 변함이 없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⑴ 하나님 아버지가 주시는 보상입니다.
          하늘로 올라가신 예수님께서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아 계시는 것은 그의 지상 사역과 관련된 하나님의 보상이라고 할 수 있습니 다. 십자가상의 죽음과 무덤 속에까지 내려가신 그의 희생이 가장 비참하게 된 비하(卑下)였다면 부활과 승천 그리고 하나님 우편 에 좌정하시는 것은 그가 취할 수 있는 최상의 영광에 해방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빌 2:9-11에 서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 있 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 니라”라고 말씀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12:2에도 “저는 그 앞에 있는 즐거움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 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고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따라서 여기에서 「앉았다」는 개념은 휴식과 기쁨이라는 뜻이 있습니다. 히브리 말 가운데 「쉰다」라는 단어의 「안식」의 뜻 이 있습니다(시1611) 지금 예수님은 하나님 보좌 우편에서 영원한 기쁨을 누리고 계십니다. 그 기쁨은 고통과 폭풍이 지난 뒤 에 맑은 날씨와 같은 기쁨입니다. 주님이 누리시는 기쁨은 죽음의 권세를 이기고 부활하신 기쁨이요, 영광의 자리, 심판의 자리를 획 득하신 기쁨입니다(롬8:34)

          ⑵ 하늘 위에서의 사역입니다.
          일반적으로 성도가 죽어 하늘나라에 들어가면 세상에서와 같이 일을 하지 아니하고 편하게 안식하며 즐기게 됩니다. 요한 계시 록 14:13에 보니 “또 내가 들으니 하늘에서 음성이 나서 가로되 기록하라 지금 이후로 주 안에서 죽는 자들은 복 이 있도다 하시매 성령이 가라사대 그러하다 저희 수고를 그치고 쉬리니 이는 저희의 행한 일이 따름이라 하시더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하늘 위에 올라가신 후에도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면서 지상에 있는 그의 교회와 성도들을 위하 여 쉬지 않고 일하시는 것입니다(롬8:34) “누가 정죄하리요 죽으실 뿐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 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 그 곳에서 하늘의 영들과 천사들을 부리면서 세상과 역사를 주관하십니다 (벧전3:22) “저는 하늘에 오르사 하나님 우편에 계시니 천사들과 권세들과 능력들이 저에게 순복하느니라”
          이와 같이 그리스도의 사역을 가리켜 칼빈 목사는 「대리(代理)의 기능」이라고 하였습니다. 마치 고대 국가에서 제왕이나 군주 가 영의정과 같은 대신 옆에 앉혀 두고 자기를 대신하여 나라를 통치하게 하는 것과 같다는 것입니다. 애굽의 바로 왕이 요셉을 총리 를 세운 다음 인정 반지를 손에 끼워 주며 애굽 전국을 총리 하게 한 것과 같은 것입니다(창41:40-43)

          ⑶ 우편에 앉은 것은 권능의 표시입니다.
          사람들 중에는 오른편 손보다 왼편의 손을 더 힘있게 사용하는 왼손잡이가 있습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오른팔 또는 오른손이라 고 할 때에 이는 힘이 있고 자유자재로 편하게 활동할 수 있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아 계시는 예 수님은 모든 권세를 행사하시면서 하나님의 나라 경영을 주도하고 계십니다.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위임받았으며(마28:18)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행사하시면서(빌2:9) 역사를 주관하시 는 것입니다. 그는 교회의 머리로서 지상 교회를 통하여 구속사(救贖史)를 주도하시는 한편 인류 역사의 주권자로서 세상의 모든 역사 를 관장하십니다. 요한계시록 19:16에는 예수님을 가리켜 “만왕의 왕이요 만주의 주”라고 하였습니다. 보좌 우편 에 계시는 예수님의 권세는 언제나 정당하고 바르게 사용됩니다. 곧 악을 징벌하고 선을 권장하며 어두운 역사를 밝고 올바르게 이끌 어 가시는 것입니다.

          인간들 사이에도 오른편이라고 할 때 왼편에 비해서 바르고 정당한 것이라고 하는 개념을 가집니다. 수천년의 인류역사 가운 데 폭군이나 무신론적 독재 권력에 의하여 잘못되고 그르쳐진 사건들이 많이 있었지만은 예수 그리스도는 원대한 그의 경륜을 따라 악 을 선으로 바뀌어 놓습니다. 더욱이 지상에 있는 그의 교회와 복음 사업을 통하여 하나님의 나라 곧 하나님의 통치와 주권이 이 땅 위 이루어지도록 역사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기도도 하나님 보좌 우편에 계시는 예수님의 의도하시는 이 땅에 이루어 자기 를 구하는 것이 되어야 합니다.

          ⑷ 우편에 앉은 것은 심판의 권리를 상징합니다.
          예수님은 이제 심판 받는 자가 아니라 심판의 주가 되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재림하실 때에 만왕의 왕으로 만인을 심판 하시는 심판 주로 오실 것입니다. 「초림」과는 전혀 다릅니다(히12:2) 그러므로 주의 백성들은 이 땅에 사는 동안 짧든지 길든 지 주님의 십자가만을 져야 합니다. 왜냐하면 장차 우리들은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 앉을 택함 받은 자녀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부활하신 후에 제자들과 40일 동안 함께 계시다가 하늘에 오르사 하나님의 보 좌 우편에 앉아 계시면서 우리를 통치하시고, 우리를 위하여 기도하시고, 우리를 감찰하시고 계십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하나님의 정 한 때에 장차 세상을 심판하시려 오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백성들은 만왕의 왕, 만주의 주로 오실 그리스도를 기다릴 뿐 만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 자신에게 주신 일에 충실하게 삶을 살아야 합니다.

          요한계시록 20:6
          이 첫째 부활에 참예하는 자들은 복이 있고 거룩하도다 둘째 사망이 그들을 다스리는 권세가 없고 도리어 그들이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제사장이 되어 천년 동안 그리스도로 더불어 왕노릇 하리라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란

          부활하신 예수님이 승천하시기 직전에 제자들에게 주신 지상명령이자 모든 신자에게 맡겨진 사명입니다.
          자신이 속한 가정, 학교, 직장, 사회 어디에서든지 또 필요하다면 선교사가 되어 언제 어디서 누구를 만나더라도 십자가 구원의 복음을 자기가 하는 일이나 전문적인 사역을 통해 증거하라는 것입니다.

          또 그러면 예수님이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로 신자와 함께 하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마가복음의 평행 구절에선 그 권세를 “믿는 자들에게는 이런 표적이 따르리니 곧 저희가 내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새 방언을 말하며 뱀을 집으며 무슨 독을 마실찌라도 해를 받지 아니하며 병든 사람에게 손을 얹은즉 나으리라”(마가 16:17,18)고 구체적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신자가 매직 파워를 가진 슈퍼맨이 된다는 뜻은 아닙니다.

          예수님은 분명히 “믿는 자들에게는 이런 표적이 따른다고” 했지 “믿는 자들은 이런 능력을 가지게 될 것”이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능력은 그것을 소유한 자가 시행하겠다고 마음만 먹으면 할 수 있는 것을 말합니다.

          예컨대 자전거 타기, 수영, 언어 같이 한 번 배우면 평생을 두고 잊어버리지 않고 언제 어디서든 수행할 수 있는 것입니다.

          반면에 표적은 특별한 경우에 특별한 사람에 의해 특별한 의미를 드러내고자 하나님이 초자연적 간섭을 하는 것입니다.
          인간이 이미 소유하고 있어서 언제든 포켓에서 꺼내어 쓸 수 있는 능력과는 다르기에 “따른다”고 말했습니다.
          마가복음에서 말한 대로 믿는 자에게만 나타나며 그것도 예수를 믿는 자는 구원을 얻고 믿지 않는 자는 심판을 받는다는 하나님의 진리를 드러내기 위해서입니다.
          그래서 믿지 않는 자에게는 구원으로 초대하고 이미 믿은 자에게는 그 믿음을 더욱 견고하게 세우려는 뜻입니다.  

          그런데 지상 명령과 함께 표적의 약속을 주셨습니다.
          특별히 전도할 때에 표적이 많이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실제 오지의 선교 현장에선 많은 표적이 따릅니다.
          사단이 그때까지 자기 노예로 부리던 사람들에게 진리의 복음이 들어오는 것이 두려워 자기 모든 능력을 동원해 갖은  방해를 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으로선 더 큰 능력을 보여줄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신자가 사단과 맞서 당당하게 싸우기만 하면 그 권세가 드러난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신자가 주님을 전적으로 신뢰하는 믿음 위에서 간절히 기도하고 말씀으로 무장했는데도 권세가 별로 나타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사단과 사람과 죄악에 져서 넘어질 때가 그렇지 않을 때보다 더 많습니다.

          물론 표적은 항상 나타나지 않고 전적으로 하나님의 필요와 뜻에 의해서만 드러난다는 것이 원인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당신의 권세가 끝 날까지, 땅 끝까지 함께 한다고 분명히 약속하셨으므로 언제 어디서든 그 권세가 나타나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마태와 마가가 기록한 내용이 서로 상충되는 결과가 됩니다. 아니면 우리 믿음에 문제가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아무래도 둘 다 아닌 것 같아 신자들이 혼란스러워 합니다.  
              
          그럼 제 삼의 원인이 있다는 뜻이 됩니다. 예수님이 거짓말 하셨거나 신자가 믿음이 없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권세를 잘못 이해하고 있습니다. 우선 표적을 능력으로 오해했을 뿐 아니라, 예수님이 수호신처럼 신자가 무슨 일을 해도 지켜주는 것처럼 착각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신자와 항상 함께 하는 예수님의 권세는 다른 것입니다.

          “내가 천국 열쇠를 네게 주리니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는”(마16:19) 권세를 말합니다. 또 다시 신자가 자신의 문제를 기도하여 응답받는 능력을 말하는 단순한 의미가 아닙니다. 이 말씀 앞에 예수님은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고 했습니다. 역으로 말해 음부의 권세를 이기는 권세인 것입니다. 음부에 붙잡혀 있는 영혼을 구해내는 권세입니다.

          또 그런 기도를 하고 전도하고 있는 신자 자신에게도 마찬가지로 적용되는 권세입니다. 잠시 사단의 유혹에 넘어가 죄악에 빠져있어도 기도하면 흑암의 권세를 이겨내고 거룩하게 해주십니다. 다른 말로 신자가 현실의 경제적 궁핍으로 기도한다고 해서 하나님이 다 들어주시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본인의 영적인 성결과 성숙을 전제로 들어주기도 안 들어주기도 한다는 뜻입니다.

          요컨대 예수님의 권세란 신자가 흔히 생각하듯 인간이 도저히 해내지 못하는 어렵고 큰일을 해치우는 능력을 뜻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오직 신자로 사단을 이기도록 하는 능력인데 이 또한 힘으로 사단을 이기게 해준다는 뜻이 아닙니다. 비유컨대 귀신들린 자에게서 귀신이 쫓겨나가게 하는 것이 한쪽에선 예수님이 다른 쪽에서 사단이 그 귀신을 붙들고 줄 당기기 시합을 하다가 예수님이 더 힘이 세어 귀신을 끄집어낸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누구든지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이라 시인하면 하나님이 저 안에 거하시고 저도 하나님 안에 거하느니라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사랑을 우리가 알고 믿었노니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사랑 안에 거하는 자는 하나님 안에 거하고 하나님도 그 안에 거하시느니라.” (요일4:15,16) 신자에게 함께하는 예수님의 권세는 처음부터 끝까지 그분의 사랑입니다. 사랑이 바로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이자, 하늘과 땅의 다른 모든 권세를 이길 수 있습니다.  

          귀신들린 자를 두고 사단과 예수님이 힘겨루기 하는 것은 분명히 맞습니다. 그러나 사단은 그 귀신들린 자를 사랑하지 않습니다. 어떻게 하든 자기 종으로 부려먹을 욕심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이 사단을 언제 어디서든 이기는 이유는 그 능력으로도 아예 비교가 되지 않지만 더 근본적으로는 귀신들린 자의 영혼마저 예수님이 진정으로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이자 주로 시인하는 믿음의 고백을 하자 음부를 이기는 권세를 주었습니다. 믿는 자에게는 사단에게 이길지 질지는 이미 선택과 가능성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언제 어디서든 사단에 대한 승리는 확보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그 승리를 찾아서 누리느냐 못 누리느냐는 믿음만으로는 안 됩니다. 비유하자면 신자는 예수님을 믿어 자신의 주로 영접하는 순간 음부를 이기는 열쇠를 받아 포켓에 넣어 놓았습니다. 표적이 아니라 능력이 되었습니다. 언제든 꺼내 쓸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때로는 그것을 꺼내 쓰는 일이 귀찮고 싫은 것입니다. 예수님의 사랑 가운데 완전히 잠겨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대신에 신자가 되어서도 자신은 언제 어디서나 사랑하니까 자신의 문제만은 열심히 기도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사랑이 결핍된 채로는 아직 포켓에서 열쇠를 끄집어내지도 않았다는 사실을 신자는 모릅니다. 자기 포켓에 열쇠가 있으니 당연히 열리겠거니 생각한 것입니다. 그 열쇠를 포켓에서 꺼내어 직접 열쇠 구멍에 끼우는 것은 오직 예수님의 사랑만이 할 수 있는 일입니다. 우리 대부분의 기도는 사실 그렇지 않으니 당연히 표적이나 능력이 나타날 리가 없지 않겠습니까?

          바울 사도는 “내가 예언하는 능이 있어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알고 또 산을 옮길만한 모든 믿음이 있을찌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 것도 아니라고”(고전13;2) 했습니다. 또 요한 사도도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어 쫓나니 두려움에는 형벌이 있음이라 두려워하는 자는 사랑 안에서 온전히 이루지 못한다”(요일4:18)고 했지 않습니까?

          예수님의 제자들이 귀신을 쫓아내지 못했을 때에도 틀림없이 어떤 축사를, 말하자면 기도의 형식은 취했을 것입니다. 그럼 예수님과 제자들의 축사에 차이점이 무엇이었겠습니까? 고상하고 심오한 내용이 들어가지 않은 것입니까? 열심과 정성과 심지어 믿음의 차이입니까? 근본적으로 예수님은 귀신들린 자의 영혼을 정말 사랑했고 제자들은 그러지 못한 것입니다.

          하늘과 땅을 움직이는 것은 오직 예수님의 십자가 사랑의 권세입니다. 하나님이 전지전능하신 권세를 갖고 있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것입니다. 말하자면 하나님의 포켓에는 전지전능한 권세가 항상 들어 있습니다. 그런데 그분이 그것을 끄집어내어 쓰느냐 마느냐를 결정하는 것은 오직 그분의 사랑입니다. 다른 말로 신자가 그분의 권세에 동참할 수 있는 길도 결국 그분의 사랑 안에 잠기는 길 뿐이라는 뜻입니다.  

          또 다시 주님이 나를 영원토록 사랑해주셔서 기도만 하면 나를 형통케 해주실 것이라는 분홍빛 환상에 젖어 들어선 안 됩니다. 주님의 사랑은 음부에 붙들린 모든 불쌍한 영혼을 구원해 내는 사랑입니다. 신자들에게 분명히 말씀하셨지 않습니까?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라”고 했고 또 그럴 때에 당신의 권세가 함께 할 것이라고 했지 않습니까?

          신자는 믿음의 고백을 하는 순간 영원토록 주님의 사랑 안에 이미 잠겨 있는 것입니다.
          더 이상 따로 자신을 위해 받을 사랑이 없습니다.
          이제는 그 사랑을 주위에 나눠주어야 합니다.
          정말로 주위에 미혹된 영혼과 심지어 잠시 죄악에 빠진 자신마저 참으로 불쌍하고 안타까이 여겨야 합니다.

          지금 그런 사랑의 마음으로 자신과 이웃을 위해 기도하고 있습니까?
          그래서 그런 사랑이 세상의 어떤 권세보다도 힘이 더 세다고 확신하십니까?
          흔히들 모성애는 세상에서 가장 강한 힘이라고 하지 않습니까?
          인간끼리도 그러할찐대 왜 하나님의 사랑에는 의존하려 하지 않고 자꾸 그 능력만 그것도 무조건 무엇이든 해줄 것 같은 능력에만 목을 매달고 있습니까?

          능력에 사랑이 따라가는 것이 아니라 사랑에 능력이 따라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정말로 사랑하십시오.
          이웃도 진정으로 사랑하십시오.
          그리고 그렇게 사랑할 수 있는 권세를 받았고 그 권세를 열심히 쓰고자 하는 소망과 열정이 있는 자신도 사랑하십시오.
          그러면 천하에 정말로 두려울 것 하나 없을 것이며 이루지 못할 “사랑의 일”이라고는 하나 없을 것입니다.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마태복음 28:1-20

                                                                                                모든 권세(18절)

          예수께서 나아와 일러 가라사대 하늘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Then Jesus came to them and said, "All authority in heaven and on earth has been given to me.

          모든 권세(all authority)는 "모든 권세", "모든 족속", "모든 것", "모든 날(항상)"을 포함하는 매우 중요한 용어를 말합니다.
          권세에 해당하는 헬라어 `에쿠시아'는 "능력", "힘", "절대적 권세"를 뜻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와 같은 권세로 지상 사역을 완수하셨습니다.

          첫째는 가르치는 권세(마태복음 7:29)

          이는 그 가르치시는 것이 권세 있는 자와 같고 저희 서기관들과 같지 아니함일러라.


          둘째는 병을 고치는 권세(마태복음 8:1-13)

          2. 한 문둥병자가 나아와 절하고 가로되 주여 원하시면 저를 깨끗케 하실 수 있나이다 하거늘
          3. 예수께서 손을 내밀어 저에게 대시며 가라사대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 하신대 즉시 그의 문둥병이 깨끗하여진지라

          13. 예수께서 백부장에게 이르시되 가라 네 믿은대로 될찌어다 하시니 그 시로 하인이 나으니라


          셋째는 죄인을 용서하는 권세(마태복음 9:6, 마가복음 2:10, 누가복음 5:24)

          마태복음 9:6
          그러나 인자가 세상에서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는 줄을 너희로 알게 하려 하노라 하시고 중풍병자에게 말씀하시되 일어나 네 침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라.

          마가복음 2:10

          그러나 인자가 땅에서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는 줄을 너희로 알게 하려하노라 하시고 중풍병자에게 말씀하시되.

          누가복음 5:24
          그러나 인자가 땅에서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는 줄을 너희로 알게 하리라 하시고 중풍병자에게 말씀하시되 내가 네게 이르노니 일어나 네 침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라.

          예수께서 나아와 일러 가가사대

          예수께서는 당신께 대한 의혹을 떨쳐버릴 수 없었던 당신의 형제들(10절)에게 가까이 접근하셔서 그들로 하여금 당신의 부드러운 음성과 그 깊은 사랑의 자태를 직접 체험케 하셨다.
          그리고 예수는 아마 본문 이하에 기록된 말씀보다 더 많은 말씀으로 그들의 실추(失墜)된 마음을 굳게 세우고 하나님 나라의 새로운 사명자로서의 자의식을 고취시켰을 것이다.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18-20절에서 특기할 만한 사실은 `모든'이라는 말이 강조되고 있다는 점이다.
          이 `모든'이란 말이 본 문단을 단단히 묶고 있다(모든 권세, 모든 족속, 모든 것, 모든 날<항상>).
          한편 여기서 권세에 해당하는 헬라어 `에쿠시아'는 능력, 힘, 절대적 권세를 뜻하는데 예수께서는 이러한 권세로 가르치고(7:29),
          병을 고치며(8:1-13), 죄인을 용서하셨다(마 9:6, 마가 2:10, 누가 5:24).

          마태복음 9:6
          그러나 인자가 세상에서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는 줄을 너희로 알게 하려 하노라 하시고 중풍병자에게 말씀하시되 일어나 네 침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라.

          마가복음 2:10

          그러나 인자가 땅에서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는 줄을 너희로 알게 하려하노라 하시고 중풍병자에게 말씀하시되.

          누가복음 5:24
          그러나 인자가 땅에서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는 줄을 너희로 알게 하리라 하시고 중풍병자에게 말씀하시되 내가 네게 이르노니 일어나 네 침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라.

          이제 복음서의 마지막에 이르러 예수는 자신이 지상에서의 권세 뿐 아니라 온 우주의 권세가졌음을 확정적으로 선언하고 있다.
          그런데 이 선언을, 부활로 인해 십자가 사건 이전에 가졌던 권세와는 비교할 수 없는 권세가 예수께 주어졌다고 보는 것은 타당치 않다. 그리고 또 예수께서 죽기 전에 가르치고 행한 것들이 부활후 지금 말하고 행하는 것들보다 권세면에 있어서 조금 낮은 것이라고도 할 수 없다.
          진정 부활 이전의 사역기간 동안에 행하신 그분의 말씀은 신적 권위가 있는 것이었고(24:35),
          또 성부 하나님과 동일한 권위를 지니시었다(9:6).
          따라서 그의 권세는 부활 전이나 후나 모두 절대적인 권세있다.
          단지 차이점이 있다면, 부활후에는 `하늘과 땅의 모든 것', 즉 우주의 모든 권세가 그분에게 주어졌다는 것이다.
          이 권세는 아버지께서 주신 것이다, 그러므로 아버지는 아들에게 종속하지 않는다(고전 15:27, 28).
          이제 아버지의 모든 권세는 아들을 통해서만 행사된다.
          결국 예수는 중보자적 왕이신 것이다.
          이러한 권세는 그분의 지극한 겸비(兼備)에 대한 보상으로 주어진 것이다(빌 2:5-11).
          이로 말미암아 구속사의 대전환점이 도래했으니 곧 메시야 `왕국'(그분의 왕적 통치, 그분의 구원하는 신적 권세의 행사; 3:2; 13:37-39)이 새로운 전능으로 임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단 7:13,14에 이미 암시되어 있던 터였다(France, Jesus pp.142-143).
          어쨌든 한때 비하와 고난을 당하신 `인자', 곧 예수는 온 우주의 권세를 받으시고 이제 당신의 형제들에게 선교 지상명령을 하달하고 계신 것이다.

          모든 권세(파스 에쿠시아)

          모든(파스) 3956.

          πᾶς, πᾶσα, πᾶν, gen. παντός, πάσης, παντός 

          1. 매
          2. 모든 종류의
          3. 어떤 것이든지다
          발음 / 파스(pas)
          관련 성경 / [형] 마다, 각(마3:10, 눅 3:9, 요 1:9), 무엇이든지 다(마 18:19, 고후 1:4), 온, 전체(마 2:3, 롬 11:26), 모든(고후 1:4, 빌 1:1), [명] 누구든지 (눅 16:16), 다(마 18:26), 모든 사람(롬 11:32), 만물(롬 11:36), 무엇이(행 17:25).
          신약 성경 / 1244회 사용

          권세(에쿠시아) 1849.

          ἐξουσία, ας, ἡ 

          1. 선택의 자유
          2. 능력
          3. 사도행전 1:7
          발음 / 에쿠시아(ĕxŏusia)
          어원 / 1832 ‘능력’의 의미에서 유래
          관련 성경 / 권위(마 7:29, 눅 4:6), 군사(마 8:9), 권능(마 10:1, 행 8:19), 권한(막 13:34, 행 1:7), 병사(눅 7:8), 관할(눅 23:7), 마음(행 5:4), 권리(고전 7:37, 9:5, 12, 살후 3:9), 자유(고전 8:9), 힘(계 9:19).
          신약 성경 / 102회 사용

          * 1832.  ἔξεστι 
          1. ~은 적합하다.
          2. 마태복음 12:2
          3. 마태복음 20:15
          발음 / 에케스티(ĕxĕsti)
          관련 성경 / 옳다(마 12:10,12, 막12:14, 눅6:9, 20:22), 가하다(고전6:12), 합당하다(눅14:3), 권한이 없다(요18:31).
          신약 성경 / 32회 사용


          마가복음 16:15-18
          또 가라사대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
          믿고 세례를 받는 사람은 구원을 얻을 것이요 믿지 않는 사람은 정죄를 받으리라.
          믿는 자들에게는 이런 표적이 따르리니 곧 저희가 내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새 방언을 말하며.
          뱀을 집으며 무슨 독을 마실찌라도 해를 받지 아니하며 병든 사람에게 손을 얹은즉 나으리라 하시더라.


          마가복음 9:29
          이르시되 기도 외에 다른 것으로는 이런 유가 나갈 수 없느니라 하시니라.


          예수님의 권세를 깨우치고 가르치는 것이 참된 성경공부라고 하겠습니다.
          이제라도 모든 교회와 성도들에게 이와 같은 권세를 회복할 수 있도로 기도와 간구의 영을 부어주셔서 세상을 새롭게 변화시키는 역사가 찬송으로만 허공을 때릴 것이 아니라 세상을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 특히 그리스도인들에게 임하기를 간절히 소원합니다.


          서해안에 진흙 속에 걸려 멈추어 있는 배들은 움직이지 못합니다.
          그 배를 운행하기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할까요?
          터보엔진과 커다란 마력의 기관, 증기력이 필요하다고 말하겠습니까? 아닙니다.
          밀려오는 바다의 조수 외에는 필요한 것이 없습니다.
          조수가 밀려 올 때 배들은 살아서 움직이고 큰 배들은 짐을 싣고 제 시간에 바다로 항해 할 수 있습니다.

          2000년전 제자들에게 하신 이 명령은 오늘 우리에게도 하시는 명령입니다.
          그러기에 예수를 구주로 믿고 따르는 성도들이 해야 할 가장 중요한 사명은 바로 복음을 전파하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여러분에게 주님이 명령하시는 복음전파의 사명이 있습니다. 주님의 지상 대명 복음전파의 사명이 주어졌으니 그러므로 나아가 모든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복음 전파의 사명을 최선을 다하여 감당하시는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이 가장 원하시고 기뻐하시는 일입니다. 그러므로 영혼을 사랑하는 뜨거운 마음으로 더욱 전도하는 일에 힘써서 전도의 열매를 많이 맺으시기를 바랍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 부활하신 주님께서 이 명령을 하실 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모든 권세가 주님께 있음을 선언하시는 말씀입니다.
          부활하신 주님은 이 권세로서 제자들에게 지상 대명령을 하시는 것입니다.
          부활하신 주님이 가지신 모든 권세는 하나님이 부여하신 권세 곧 하나님의 권세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모든 권세, 하나님이 주신 하늘과 땅의 권세는 과연 어떤 권세일까요?

          세상의 권세와는 분명히 다른 것입니다. 
          세상의 권세는 착취하고 억압하는 권세입니다.
          세상의 권세는 다분히 파괴적이며 폭력적인 권세입니다.
          이기적이며 자기의 세력과 부를 위하여 사용하는 권세입니다.

          많은 관광객들이 즐겨 찾는 피라미드와 만리장성은 세상 권세가 상징하는 대표적인 것입니다.
          당시 그와 같은 것을 세울 수 있었던 애굽의 왕과 중국의 진시황제의 권세를 대단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유뮬처럼 남아 있습니다.
          그러나 부활하신 예수님의 권세는 무엇일까요?
          창조의 권세와 심판의 권세라고 하겠습니다.

          하나님의 권세, 부활하신 주님의 권세는 다릅니다.
          사람을 살리는 생명의 권세요 사랑의 권세입니다.

          하늘의 권세는 무엇입니까?

          창조의 권세입니다.
          모든 세상 만물을 창조하신 전능자의 권세입니다.
          말씀으로 모든 것을 만드신 창조주의 권세입니다.
          모든 생명을 주관하시고 다시리시는 주권자의 권세입니다.
          사람의 권세와는 비교될 수 없는 우주적인 권세입니다.
          해 아래 모든 것들은 그 권세에 굴복할 수 밖에 없는 모든 권세입니다.
          하늘의 권세는 죽은 자를 살리시는 생명의 권세이며 모든 사람의 생명과 사망과 복과 저주를 주관하시는 권세입니다.
          뿐만 아니라 십자가에서 죄의 값을 치르시며 사랑하여 구원하시는 권세입니다.
          또한 예수님을 사망의 권세에서 일으키시고 부활케 하시는 권세가 하늘의 권세입니다.

          땅의 권세는 무엇입니까?

          병든 자를 고치시는 권세입니다.
          앉은뱅이를 일으키시고 소경의 눈을 뜨게 하시는 권세입니다.
          묵인 자를 자유케 하며 은혜의 해를 온 땅 가득히 선포하시는 권세입니다.
          연약한 자를 붙들어 주시며 넘어진 자를 일으켜 세워주시고 위로하시는 권세입니다.
          가난한 자를 부요케 하시며 굶주린 자를 먹이시고 벗은 자를 입혀주시는 권세입니다. 

          부활하신 주님께 이 모든 하늘과 땅의 권세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모든 권세를 주님께 주셨습니다.
          그리고 그 권세로서 생명을 살리고 주의 은혜를 선포하게 하셨습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가 주님을 믿고 신뢰하며 따를 때 우리에게도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가 임하는 것입니다.
          이 모든 하늘과 땅의 권세는 우리들이 십자가에 달리신 주님을 의지하며 부활하신 주님을 믿으면 누리게 될 권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지신 주님을 온전히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우리를 죄와 사망에서 건지시고 부활하신 주님을 온전히 믿고 의지하시기를 바랍니다.
          그분은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지신 분이십니다.
          우리가 주님을 온전히 믿고 의지할 때 주님은 모든 권세로서 우리에게 복을 주시고 은혜를 베풀어 주실 것입니다.

          주님을 신뢰하고 의지하는 성도들에게 하늘의 권세로서 사망에서 생명으로 인도해주시고 구원하여 주실 것입니다 또한 땅의 권세로서 우리의 약함을 강하게 하시고 복과 은혜를 베풀어 주실 것입니다.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지신 주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모든 권세를 가지신 주님의 말씀 앞에서 순종해야 합니다. 

          첫째, 너희는 가라

          부활하신 주님은 제자들을 세상으로 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가라”  ‘어디로’  ‘세상으로’
          가야할 그 세상에는 누가 있습니까? 죄에 물든 멸망 받을 사람들이 있습니다. 바로 그곳으로 가라는 것입니다.

          우리를 세상으로 보내시는 분은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지신 주님이십니다.
          주님은 제자들에게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한 숨을 내쉬시며 ”성령을 받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미 우리는 왜 성령을 받아야 하는가를 지난 주일에 살펴보았습니다.
          성령을 받아야 보내심의 사명을 온전히 감당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성령을 받아야 성도다운 삶, 제자로서의 합당한 사람을 살 수 있기 때문입니다.
          성령을 받아야 하나님의 뜻대로 살 수 있기 때문이다.
          성령을 받지 못하면 자기 뜻대로 고집대로 경험대로 살 수 밖에 없다. 하나님의 음성을 따라 살지 못하고 자아의 음성을 듣고 살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성령을 받으면 주님의 권세를 따라 살 수 있기 때문이다. 주님이 우리를 사랑하시고 용서하셨던 것처럼 우리도 사랑하며 용서하며 살 수 있기 때문이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성령을 받아 여러분들은 세상으로 가야 합니다. 주님의 복음을 들고 보내심을 따라 어디든지 가야합니다.

          롬10:14-15 은 말씀합니다.
          “그런즉 너희가 믿지 아니하는 이를 어찌 부르리요 듣지도 못한 이를 어찌 믿으리요 전파하는 자가 없이 어찌 들으리요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으면 어찌 전파하리요 기록된 바 아름답도다 좋은 소식을 전하는 자들의 발이여 함과 같으니라.”

          이러한 주님의 위임은 아무에게나 주어지는 위임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자들, 주님을 위해 일하고자 하는 자들에게 주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보내심을 받았다는 것은 은혜이며 특권입니다. 하나님의 사람이라는 뜻이며 주님을 위해 일할 자격자라로 인정되었다는 것입니다. 

          가서 우리가 해야 할 일이 무엇입니까? 생명의 복음을 전하는 것입니다.
          부활하신 주님은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아버지의 이름 아들의 이름 뿐 아니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라고 말씀하신다.

          교회는 어떤 곳이어야 합니까? 물론 예배하는 곳이며 기도하는 곳이어야 합니다. 그러나 더욱 본질적인 교회의 역할은 복음을 전하는 교회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교회는 모이기를 힘쓰는 교회이어야 합니다. 또한 흩어지기를 잘하는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교회의 사명은 모이는 사명과 흩어지는 사명이 동시에 존재합니다.
          궁극적인 교회의 사명은 세상으로 가는 교회가 되는 것이다.
          모여서 은혜 받고 성령 받아 복음 들고 흩어지는 기능이 교회의 건강한 기능입니다.
          이것이 교회입니다. 우리 교회는 모이기를 힘쓰는 교회이며 복음 들고 흩어져서 전도하는 교회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둘째,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으라 

          선교의 대상은 특정한 몇 사람이 아닙니다. 모든 사람입니다. 모든 사람들에게 복음이 필요합니다.
          롬10:13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누구든지, 모든 사람입니다. 특히 복음이 전하여지지 않은 곳에 복음이 필요합니다.
          저는 우리 교회가 모든 사람을 품고 선교하는 교회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모든 족속들에게 특히 미전도 종족들에게 생명의 복음을 전하는 교회가 되기를 원합니다. 우리 교회의 비젼이 여러분들의 가슴 속에 깊이 새겨져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세계를 가슴에 품고 땅 끝까지 선교한다.’

          “모든 족속”이라는 말에는 가장 가까운 나의 가족들이 있음도 명심하시기를 바랍니다.
          친구, 친지, 부모 형제들로부터 전도를 실천해야 합니다. 부활하신 주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라”고

          성도 여러분,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으라는 말씀에 순종하여 오늘부터 복음을 전하는 전도자의 삶을 사시기 바랍니다. 한 영혼을 품고 기도하며 그 영혼을 주께로 인도하는 귀한 전도의 사명에 온전히 헌신하시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셋째, 내가 네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모든 것을 가르쳐야 합니다. 일부만을 가르쳐서는 안 됩니다.
          겸손도 가르쳐야 하고 인내도 가르쳐야 하고 헌신도 가르쳐야 합니다. 예배드리는 것도 가르쳐야 하고 말씀을 읽는 것과 기도하는 것도 가르쳐야 합니다.
          어떻게 주님을 섬겨야 하는지도 가르쳐야 하고 어떻게 충성해야 하는지도 가르쳐야 합니다.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와 성령님의 역사하심을 가르쳐야 합니다. 감사의 생활과 십일조의 생활과 주님께 드리는 모든 헌신의 생활을 가르쳐야 합니다. 하나님의 복을 받는 길이 무엇인지를 잘 가르쳐야 합니다.
          진정한 가르침은 믿음의 생활로 본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말하는 것 보다 더욱 큰 가르침은 행함으로 보여주는 가르침입니다.
          모든 권세를 가지신 주님은 제자들에게 이렇게 명령하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일부만 가르치지 말고 모든 것을 가르치시기를 바랍니다. 먼저여러분 모두 모든 것을 배워서 모든 것을 아름답게 실천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부활하신 주님께서는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자에게 격려의 말씀도 하셨습니다. 
          “내가 세상 끝날 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이 말씀은 승리에 대한 약속입니다. 마지막까지 교회와 성도의 승리를 보장해주시겠다는 약속의 말씀이신 것입니다.
          세상 끝날 까지는 곧 주님이 이 땅에 오실 때까지, 재림하시고 모든 세상의 심판주로 오실 때까지를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 때까지 주님께서 항상 동해해 주시겠다고 말씀하시고 약속하시는 것입니다.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잘 들으십시오. 항상 입니다. 언제나 동행하시겠다는 것입니다. 기쁠 때나 슬플 때나 언제든지 함께해주시겠다는 것입니다. 이보다 더 큰 복이 어디 있겠습니까?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지신 주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면 무엇이 겁날 것입니까?
          두려워할 것이 무엇입니까? 염려하고 근심할 것이 어디 있겠습니까?

          주님은 영원한 승리자이십니다. 할렐루야! 믿으시기 바랍니다. 항상 여러분과 함께하십니다. 모든 권세를 가지신 주님이 함께 하신다는 것은 이미 우리에게는 승리가 보장되어 있다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여러분에게는 이미 승리가 보장되어 있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모든 권세를 가지신 주님의 명령에 순종하기만 하면 모든 권세를 가지신 주님이 우리와 함께하시는 것을 통해 승리가 보장되는 것입니다.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염려하지 말고 낙심하지 마십시오.
          모든 권세를 가지신 주님께서 여러분과 항상 함께하실 것입니다. 이 약속을 신뢰하십시오. 영원한 승리가 우리에게 보장되어 있습니다. 담대히 복음 들고 나아가 세상 끝까지 주의 은혜를 선포하는 멋있는 전도자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당신에게는 예수님의 권세가 있습니다

          당신에게는 예수님의 권세가 있습니다.
          You Have The Authority Of Jesus

          “예수께서 나아와 말씀하여 이르시되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마 28:18-20)

          오늘의 본문구절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하늘과 땅에 있는 모든 권세가 그분께 주어졌다고 말씀하십니다.

          빌립보서 2:9-10은 말씀합니다.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에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예수님께 모든 권세를 주셨습니다.
          모든 권세를 합해서 예수님께 부여한 것은 세상의 모든 위정자들이 아니었습니다. 민주주의가 그렇게 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절대 주권적인 부름이었습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그런 일을 할 수 있으셨습니다. 이제 예수님께서는 지금 믿고 있는 자들인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권세에 근거해서 나는 너희에게 가서 복음을 전하고 모든 민족에게 가르치라고 명한다.” 예수님께서는 나가서 세상의 민족들을 제자와 학생으로 삼으며, 그들에게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가르치라고 교회에 그분의 권세를 위임하셨습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당신의 권세는 완전하고 절대적입니다. 당신이 모든 곳에서 복음을 담대하게 전할 때 어떤 악과 귀신들이나 어둠도 이를 막을 수 없습니다.

          마가복음 16:17-18은 말씀합니다. “믿는 자들에게는 이런 표적이 따르리니 곧 그들이 내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새 방언을 말하며 뱀을 집어 올리며 무슨 독을 마실지라도 해를 받지 아니하며 병든 사람에게 손을 얹은즉 나으리라 하시더라” 이것은 하나님의 절대 주권적인 선언입니다. 곧 영의 영역에 있는 법칙입니다. 당신이 예수 이름으로 말할 때, 이는 마치 예수님께서 친히 말씀하신 것과 같습니다.

          그러므로 예수 이름으로 모든 일을 하고 예수 이름의 권세로 사십시오. 마귀가 당신의 환경에서 날뛰지 못하게 하십시오. 마귀에 맞서서 그리스도 안에 있는 당신의 권세를 사용하십시오. 그러면 마귀는 도망칠 수밖에 없습니다. 할렐루야!

          사랑하는 아버지, 저에게 모든 이름 위에 있는 예수 이름을 사용할 특권과 권세를 주시니 감사합니다.
          예수 이름 앞에 마귀는 비틀거리고 사슬은 깨어지며 문은 열리고 산들은 무너집니다.
          그러므로 예수 이름의 능력과 권세로 오늘 저는 승리하며 나가서 환경을 다스리고 통치합니다.
          예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 부활하신 예수님은 지금 이 세상과 우주만물을 통치하는 권세를 받았음을 선포하십니다.
           * 예수님이 지금, 내가 살아가고 있는 이곳, 이 세상의 모든 것을 통치하고 계신다는 사실!!
           * 아니, 부활하셔서 하늘로 도로 가시고, 이 땅은 걍 내버려주신 게 아닌가욤? 주님이 다스리시는데 이 모양 이 꼴로 악이 활개치고 돌아다니도록 내버려두신다는 게 말이 되는 얘기냐고요..
           * 예수님 왈, “아냐! 난 지금 너희와 함께 있고, 또 지금 이곳을 컨트롤(통치)하고 있다고!! 단지 통치방식이 너희들이 기대하는 방식과 좀 다른 것뿐이야!!”

          3.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고, 가르치고, 지키게 하라
           * “내가 지금 이곳을 다스리는 방식은 말야... 너희를 통해서 하나님나라의 사랑과 정의와 평화, 공평을 이루어가는 거야. 그래서 너희를 지금까지 훈련했고, 지금 보내는 거야.”
           ① 전도, 제자삼기
           * 먼저,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들, 사람들을 제자로 삼아야 해!
           * 복음을 전하는 것 = 하나님나라가 지금 이곳에 펼쳐지고 있다는 것, 예수님이 지금 여기를 다스리고 있다는 걸 선포하고 보여주는 것, 그 나라에 참여하기 위해서 회개하라고 초청하는 것!!

           ②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 마태는 놀랍게도 우리가 삼위일체로 부르는 신학적 개념을 이 때 벌써 사용하고 있다는 사실!! 실은 신학적 개념정리(삼위일체)는 나중에 된 거죠. 제자들 모두는 걍 예수님의 가르침을 따르다보니 당근 아버지하나님, 아들 예수님, 그리고 오순절 이후 경험한 성령님이 한 분 하나님이시라는 걸 자연스럽게 알게 된 거죠^^
           * 세례 = 하나님나라 백성이 되었다는 증표. 도장 찍음. 특히나 물에 잠겼다가 다시 올라올 때 예수님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에 동참하는 그림이 펼쳐진다는~~^^

           ③ 가르쳐 지키게 하라
           * 하나님나라의 삶의 방식을 차근차근 가르쳐서, 삶으로 살아가도록 하라.
           * 예수님이 제자들과 3년간이나 동고동락하면서 삶을 통해 가르쳐주셨던 것처럼...

           * 예수님이 이곳을 지금 다스리시는 방식이 바로 우리들의 삶을 통해서, 전도라는 방식을 통해서 라는 게, 엄청 부담스럽게 다가오는데요...

          4. 봐라! 내가 세상 끝 날까지 함께 있겠다.
           * 예수님 왈, “그 부담스러운 거 다 안다.. 근데 말야, 너희가 잠깐 눈을 들어 내가 보고 있는 걸 같이 보렴! 그럼 부담 없이 그 길을 받아들이게 될 거야.”
           * 예수님이 보시는 것, 이 작은 갈릴리 동네에서 시작애서 복음의 들불처럼 번져서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게 복음의 파도가 일어나는 모습을~~
           * 모든 세상이 예수님의 발 아래 무릎 꿇고 세상의 주인이심을 고백하며, 그 심판을 받아들이는 마지막 때를~~
           * 이런 아름다운 모습을 볼 수만 있다면..,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 편만하게 이루어지는 그 아름다운 모습, 사자굴에 어린이가 손 넣고 장난쳐도 물지 않는, 사자와 어린양이 함께 뒹구는 그 아름다운 완성의 모습을 우리가 눈을 들어 바라보게 된다면, 우리는 하지 말라 해도 걍 한달음에 달려가서 이웃들에게 이 환상적인 모습을 전하지 않고는 못 배길 거라는~~~
           * 열 한 제자들과 초대교회 성도들 모두가 바로 이 예수님의 꿈, 예수님이 보시는 걸 보고, 느끼고 알았기에 그렇게 열심히 복음을 전할 수 있었구나... 라는 마음이 찾아옵니다.
           * “내 눈, 주의 영광을 보네. 우리 가운데 계신 주님
              그 빛난 영광, 온 하늘 덮고, 그 찬송 온 땅 가득해~
              주님의 얼굴은 온 세상 향하네, 권능의 팔을 드셨네..
              주의 영광 이곳에 가득해. 우린 서네 주님과 함께
              찬양하며 우리는 전진하리. 모든 열방 주 볼 때까지.
              하늘 아버지 우릴 새롭게 하사, 열방 중에서 주를 섬기게 하소서.
              모든 나라 일어나, 찬송 부르며 영광의 주님을 보게 하소서~”

           * 마지막으로, 주님은 말씀하시네요. “그래도 힘든 일은 많을 거야. 하지만 걱정 마! 내가 끝 날까지 너희를 떠나지 않고 함께 있을 거니까 말야..”
           * 임마누엘!! 아멘!!
           * 이 땅에 오시며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마1:23)하며 찾아오시더니, 마지막 때까지 임마누엘로 내 옆에 지금 이곳에 함께 계시는 주님. 만세!!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마태복음 27:45-66

                                                                                                성소 휘장(51절)


          1832. 조선을 방문한 최초의 선교사, 귀츨라프(K.F.A Gutzlaff,1803~1851. 네덜란드선교회).

          1832년 영국 암허스트 호 통역 겸 의사로 충청도 고대도에 도착한다.
          전도문서와 성경을 전하며 주민들과 접촉하다.
          감자심는 법을 가르쳐주며 주민들에게 약과 전도문서등을 전했다.
          관리들이 이를 금지시켰다.
          한달간 정박한후에 외국과 통상할수 없다는 통보로 인해 한국을 떠나야했다.
          항해기에는 이렇게 적고 있다.
          "어쨌든 조선방문은 하나님의 역사였다.
          이 땅에 뿌려진 하나님의 진리의 씨가 소멸되리라고 나는 믿지 않는다.
          하나님의 영원한 섭리로서 그들에게 하나님의 자비가 미칠 날이 오고야 말 것이다.
          우리는 이 날을 기다리고 있다.
          한편 이날을 오게 하기 위하여 십자가의 도를 애써 전파하지 않으면 아니될 것이다...
          우리는 한국땅에 광명의 아침이 찾아오기를 기다려야 한다.”

          귀츨라프의 방문이 선교와 직접적으로 연결은 되지 않았다 하더라도 그의 씨를 뿌리는 수고와 간절한 염원이 마침내 이루어졌음을 우리는 목도하고 있다.
          그 당시에 먹을 게 없었는데 그가 심은 감자가 유용하게 음식으로 쓰여졌다 전해진다.

          1866. 한국최초의 기독교순교자  - 로버트 토마스(Robert Jermain Thomas)

          귀츨라프가 한국을 다녀간 지 33년 후, 토마스선교사가 한국으로 들어온다.
          토마스는 중국 상해에서 선교활동을 하던 중 부인이 사망하고 그 충격으로 선교사의 임무를 그만두고 해관통역업무를 보았다.
          스코틀랜드 성서공회 총무 윌리암슨을 만나면서 한국선교에 대해 눈을 뜨게 되고 한국에서 온 두 명의 천주교 신자들을 만나서 성경을 전해줬을때 기뻐하는 그들을 보면서 한국선교를 소망하게 된다.
          그 당시 한국에는 천주교가 박해를 받고 있었고 어느 누구도 성경을 갖고 있지 않았다.
          두 달 반의 한국선교여행(황해도)을 하게 되고 성경배포를 하였다.
          주민들이 성경을 받아들고 기뻐하는 것을 보고 다시 들어갈 때를 기다렸다.

          1866년 미국의 무장된 상선 제너럴 셔먼호를 타고 대동강에 도착했지만, 배가 무장된 상선이었기에 병사들의 폭탄에 의해 좌초되고, 배에서 내리기 전까지 갖고 있던 성경을 한권 한권 뭍으로 던졌다.
          토마스와 일행들은 뭍에 끌려내리게 되고 군인들에 의해 모두 죽음을 당하게 된다.
          그의 나이 27세. 자신을 죽이려고 하는 병사에게 성경을 전해주며 예수를 믿으라고 외치고 이렇게 기도하였다 한다.

          “오! 하나님, 이 사람이 자기의 하는 일을 모르오니 이 사람의 죄를 용서하여 주소서.
          조선땅에 뿌린 복음의 씨앗이 헛되지 않게 하소서.
          내 영혼을 받아주소서…”

          아직도 복음을 알지 못하던 땅, 뒷날 그의 죽음 위에 수많은 교회가 세워질, 훗날 한국의 예루살렘이라고 불렸던 평양의 대동강변에서 순교의 피를 흘린 것이다.

          그 때 성경을 받은 병사가 훗날 예수를 믿게 되고 평양교회의 초대장로가 된 박춘권이란 사람이다.
          그의 말이다.
          “내가 서양사람을 죽이는 중에 한 사람을 죽인 것은 내가 지금 생각할수록 이상한 감이 있다.
          내가 그를 찌르려고 할 때에 그는 두 손을 마주잡고 무삼 말을 한 후 붉은 베를 입힌 책 을 가지고 우스면서 나에게 밧으라 권하였다.
          그럼으로 내가 죽이기는 하엿스나 이책을 밧지 않을 수가 없어셔 밧아왔노라"

          그에게 성경을 받은 이들 중에 훗날 평양의 유력한 신앙가문을 일으킨 이들이 많다.
          박춘권은 평양교회의 장로가 되었고, 장사포의 홍신길은 서가교회, 석호정 만경대의 최치량은 평양교회를 창설한 인물로 지목되고 있다. 성경을 뜯어 벽지를 바른 영문주사 박영식의 집은 널다리교회의 예배처소가 되었다 한다.
          하나님의 일은 결단코 성취되어진다. 

          1933년 9월 14일에 대동강변에 토머스기념 예배당이 세워졌다.
          이 제너럴 셔먼호사건으로 인해 미국이 보복하기 위해 군함을 보내어 신미양요가 일어나고, 얼마 후인 1882년 한,미수호통상조약이 체결되면서 미국교회가 한국에 대한 관심을 가지고 기도하게 된다.
          그리고 1885년 언더우드와 아펜젤러를 비롯한 많은 미국선교사들이 한국으로 들어오게 된다.
          하나님은 국제간의 통상등을 사용하셔서 복음의 문을 여셨다.
          하나님의 방법은 우리가 생각하는 그것과 다르다.
          어쨌든 이로써 조선은 복음의 씨앗을 받게 되었다.
          이때까지 어떠한 열매도 없었지만 분명히 복음의 씨앗은 뿌려졌다. 그것이 자라서 열매를 맺기까지 기다려야 하는 것이다.


          מָסָךְ   4539

          1. 너울.  2.  출 26:36이하.  3. 출 35:12
          발음 / 마사크(mâçâk)
          어원 / 5526에서 유래
          관련 성경 / 휘장(출 26:36, 40:8, 민 4:5), 휘장 문(출 26:37, 38:18, 민 4:25), 휘장(민 3:31), 덮개(시 105:39), 덮였던 것(사 22:8), 덮을 것(삼하 17:19).
          구약 성경 / 25회 사용

          * 5526. סָכַךְ 

          1. 엮다.  2. 막다.  3. 욥기 40:22
          발음 / 사카크(çâkak)
          관련 성경 / 가리다(출 40:3, 삿 3:24, 삼상 24:3), 덮다(출33:22, 왕상8:7, 시91:4, 겔28:14), 조직하다(시139:13), 가두다(욥38:8, 나2:5), 둘러싸이다(욥3:23), 격동하다(사19:2), 격동시키다(사9:11). [명] 보호(시5:11).
          구약 성경 / 19회 사용


          פֹּרֶכֶת  6532

          1. 성소로부터 지성소를 구분하는 휘장.  2. 출애굽기 26:31.  3. 레위기 16:2
          발음 / 포레게트(pôreketh)
          관련 성경 / 휘장(출 26:31, 레 4:17, 민 18:7).
          구약 성경 / 25회 사용

          καταπέτασμα, ατος, τό  2665

          1. 휘장.  2. 마태복음 27:51.  3. 마가복음 15:38
          발음 / 카타페타스마(katapĕtasma)
          어원 / 2596과 4095에서 유래
          관련 성경 / 휘장(마 27:51, 눅 23:45, 히 10:20)
          신약 성경 / 6회 사용

          * 2596. κατά 

          1. ~에서 내리.  2.  ~안으로.  3. 널리
          발음 / 카타(kata)

          * 4095. πίνω 

          1. 마시다.  2. 마태복음 6:25.  3. 히브리서 6:7
          발음 / 피노(pinō)
          어원 / 미완료 ἔπινον, 미래 πίομαι, 미래2인칭단수 πίεσαι, 제2부정과거 ἔπιον, 제2부정과거 명령 πίε, πιέτω, 제2부정과거 부정사 πιεῖν, 완료 πέπωκα, πίω의 연장형에서 유래
          관련 성경 / 마시다(마 6:25, 눅 1:15, 요 4:12, 13, 14, 고전 9:4), 흡수하다(히 6:7)
          신약 성경 / 73회 사용



          성소의 휘장(출애굽기 26:31-33)     

          성소에는 두 개의 휘장이 있습니다.

          첫번째 휘장은 성소로 들어가는 출입문과 같은 휘장입니다.
          이 휘장은 성소 밖과 안를 구분합니다.

          두번째 휘장은 지성소로 들어가는 휘장입니다.
          이 휘장은 대제사장이 일 년에 단 한 차례 지성소로 들어가기 위하여 지나야 하는 휘장입니다.
          두번째 휘장을 히브리서 기자는 예수님의 육체라고 설명합니다.

          "휘장"이라고 번역한 "카타페타스마(katapĕtasma. καταπέτασμα)"란 페르시아 말 "파르고트"라는 단어에서 유래한 것으로 하늘의 궁창과 땅의 궁창을 구분하는 벽을 의미합니다.

          성소에는 분향단이 있고 분향단 뒤에 휘장이 쳐 있으며 휘장 안에는 법궤가 놓여진 곳을 지성소라고 합니다.

          지성소는 하나님이 항상 임재하여 계신 곳을 상징합니다.
          따라서 지성소는 매우 거룩한 곳입니다.
          성소에서 하나님을 섬기는 제사장들도 함부로 지성소를 들여다보거나 접근하지 못하도록 휘장으로 가리웠던 것입니다.
          만약에 함부로 인간이 지성소를 들여다보거나 들어갔다가는 하나님의 진노를 사서 죽음을 면치 못했습니다.

          휘장은 거룩하신 하나님과 인간들과의 사이를 가로막고 있던 막으로 휘장은 하나님을 만나 뵙기 위한, 마지막 관문과 같습니다.
          지성소와 성소를 가로막은 휘장은 일년에 한번씩 출입하는 대제사장만이 열고 들어 갈 수 있던 곳입니다.
          일년에 한 차례 대제사장에 휘장은 열리고 대제사장만이 지성소 안에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지성소에는 하나님의 법궤와 시은좌가 모셔진 곳입니다.
          그러므로 지성소는 하나님의 보좌가 있는 하늘 나라를 상징합니다.
          지성소 안에 들어간다는 것은 하나님의 보좌앞에 서는 것과 같다고 하겠습니다.
          그러므로 대제사장도 일년에 한번 정한 기일에만 들어 갈 수가 있는 거룩한 곳이었습니다.

          예수께서 십자가 위에서 인간의 죄를 짊어지시고 대신 심판받아 운명하실 때 휘장의 한 가운데가 위로부터 아래까지 찢어지며 성소에서 지성소로 들어가는 길이 열렸습니다(마태 27:51).

          그러므로 지성소 안을 들여다보고, 들어갈 때에, 임할지도 모르는 죽음에 두려움에서 해방되게 되었던 것이다.
          당당히 들여다보고 당당히 들어갈 수 있게 되었던 것이다.

          휘장이 주는 영적 의미

          휘장은 그 자체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육체를 가리킵니다.

          히브리서 10:19~20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예수님의 피를 힘입어 새롭고 살아 있는 길로 지성소에 들어갈 담대함을 얻게 되었나니 이 길은 그분께서 우리를 위하여 휘장 곧 자기의 육체를 통해 거룩히 구분하신 것이니라.

          성막의 휘장이 가르쳐 주는 진리는 그것이 주님의 육체란 것입니다.

          주님께서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시고, 온 몸에서 피와 물이 쏟아졌을 때 성소와 지성소를 사이를 가로막고 있던 휘장이 위에서 아래로 갈라진 것입니다.

          마가복음 15:37~38
          예수님께서 큰 소리로 외치시고 숨을 거두시니라. 이에 성전의 휘장이 위에서 아래까지 둘로 찢어지니라.

          육체를 입고 오신 하나님께서 숨을 거두실 때 정확하게 성전의 휘장이 위에서 아래까지 둘로 찢어졌다는 것은 주님이 바로 휘장의 본체임을 말씀해 주시는 것입니다. 

          이제 더 이상 하나님이 거하시는 지성소로 들어가는 길이 휘장으로 막혀 있지 않습니다.

          주님은 자신의 몸으로 휘장을 제거하심으로써 믿는 자는 누구든지 주님께 나아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 언제든지 두려움 없이 나아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더 이상 접근을 막는 불 칼을 든 그룹들은 없습니다.

          대신 우리에게는 죄 없는 대제사장이 있습니다.

          히브리서 4:16
          그러므로 우리가 긍휼을 얻고 필요한 때에 도우시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왕좌로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

          우리는 나아갈 수 있는 믿음을 얻었습니다.

          에베소서 3:12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그분을 믿는 믿음을 통하여 담대함을 가지고 확신 있게 하나님께 나아감을 얻느니라.

          히브리서 6:19
          우리에게 있는 이 소망은 혼의 닻과 같아서 확실하고 굳건하여 휘장 안에 있는 곳으로 들어가나니.

          우리에게 있는 이 소망은 이스라엘의 소망이요, 성도들의 소망인데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히브리서 6:19- 20
          우리가 이 소망이 있는 것은 영혼의 닻 같아서 튼튼하고 견고하여 휘장 안에 들어가나니, 그리로 앞서 가신 예수께서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아 영원히 대제사장이 되어 우리를 위하여 들어 가셨느니라.    

          히브리서 10:20
          그 길은 우리를 위하여 휘장 가운데로 열어 놓으신 새롭고 산 길이요 휘장은 곧 저의 육체니라.

          히브리서 9:3
          또 둘째 휘장 뒤에 있는 장막을 지성소라 일컫나니.

          히브리서 6:19
          우리가 이 소망이 있는 것은 영혼의 닻 같아서 튼튼하고 견고하여 휘장 안에 들어 가나니.

          솔로몬 성전의 휘장의 크기 / 유대 랍비 전통 문헌에 의하면,
          솔로몬 성전의 휘장은 휘장의
          두께는 8~9인치 (약 20센티, 매우 두꺼운 천으로 만들어져 있다)
          높이는 60피트(약 18미터)
          넓이는 20피트(6 미터)

          이 무거운 휘장을 한번 설치하는 데는 유대인 제사장 3백 명이 한꺼번에 매달려야 했다고 합니다. 
          이렇게 휘장이 크고 무거운 이유가 무엇인가요?

          죄인들이 함부로 ‘거룩하신 하나님의 임재’에 접근하지 말라 입니다.

          광야의 성막 휘장은 그리 크지 않습니다.
          가로가 5 미터이고 길이가 5미터입니다.(10규빗)

          출애굽기 26:31-37
          너는 청색 자색 홍색실과 가늘게 꼰 베실로 짜서 장을 만들고 그 위에 그룹들을 공교히 수놓아서 금 갈고리로 네 기둥 위에 드리우되 그 네 기둥을 조각목으로 만들고 금으로 싸서 네 은받침 위에 둘지며 그 장을 갈고리 아래 드리운 후에 증거궤를 그 장 안에 들여 놓으라 그 장이 너희를 위하여 성소와 지성소를 구별하리라 너는 지성소에 있는 증거궤 위에 속죄소를 두고 그 장 바깥 북편에 상을 놓고 남편에 등대를 놓아 상과 대하게 할지며 청색 자색 홍색실과 가늘게 꼰 베실로 수놓아 짜서 성막문을 위하여 장을 만들고 그 문장을 위하여 기둥 다섯을 조각목으로 만들어 금으로 싸고 그 갈고리도 금으로 만들지며 또 그 기둥을 위하여 받침 다섯을 놋으로 부어 만들지니라.

          히브리서 10:19-29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나니 그 길은 우리를 위하여 휘장 가운데로 열어 놓으신 새롭고 산 길이요, 휘장은 곧 저의 육체니라. 또 하나님의 집 다스리는 큰 제사장이 계시매 우리가 마음에 뿌림을 받아 양심의 악을 깨닫고 몸을 맑은 물로 씻었으나 참 마음과 온전한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자 또 약속하신 이는 미쁘시니 우리가 믿는 도리의 소망을 움직이지 말고 굳게 잡아 서로 돌아보아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며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 오직 권하여 그 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더욱 그리하자, 우리가 진리를 아는 지식을 받은 후 짐짓 죄를 범한즉 다시 속죄하는 제사가 없고, 오직 무서운 마음으로 심판을 기다리는 것과 대적하는 자를 소멸할 맹렬한 불만 있으리라. 모세의 법을 폐한 자도 두 세 증인을 인하여 불쌍히 여김을 받지 못하고 죽었거든 하물며 하나님 아들을 밟고 자기를 거룩하게 한 언약의 피를 부정한 것으로 여기고 은혜의 성령을 욕되게 하는 자의 당연히 받을 형벌이 얼마나 더 중하겠느냐 너희는 생각하라.

          성막을 알아야하는 이유

          1. 성막은 예수그리스도를 계시

          구약성경은 오실 예수그리스도에 대한 예언이며, 신약성경은 오신 예수와 또 다시 오실 예수그리스도를 기록한 책으로, 성막은 3,500년 전에 하나님이 모세를 통해 계시해 주신 이 땅에 오실 예수그리스도의 정확한 모형이며, 성막안의 모든 기물들은 예수님의 인격과 사명을 담고 있어, 교회와 성도들의 삶과 직접연관 지어볼 수 있습니다.

          2. 성막은 하나님을 만나는 장소이며, 만나는 방법을 계시

          노아, 아브라함, 이삭, 야곱은 제단에서 하나님을 만났으나(창 6:20,15:12, 46:1), 모세 이후에는 성막에서 하나님을 만날 수 있었습니다.

          출애굽기 25:22

          거기서 내가 너와 만나고 속죄소 위 곧 증거궤 위에 있는 두 그룹 사이에서 내가 이스라엘 자손을 위하여 네게 명할 모든 일을 네게 이르리라.  

          3. 성막에 관한 성경의 말씀은 50장

          성막은 단일 주제로서 가장 많은 성경 장을 차지하며 50장이나 됩니다.
          출애굽기 13개 장.
          레위기에 18개 장,
          민수기에 13개 장,
          신명기에 2개 장,
          히브리서에 4개 장,
          도합 50개장 외에도 시편과 애가 등에 언급되었습니다.

          천지창조 11개 장,
          아브라함의 생애 14개 장 정도에 비해 월등히 많습니다.

          4. 성막을 통해 자신의 영적상태를 진단

          1) : 나는 동편으로 난 유일한 문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했는가?

          2) 번제단  : 나의 죄의 결과는?
                             예수그리스도의 피로 속죄함 받은 것을 확실히 믿는가?                     
                             용서 받은 의인이라는 확신이 있는가?

          3) 물두멍  : 나는 죄 사함을 받은 이후에도 지속적으로 성결 된 생활을 하고 있는가?                    
                             버리지 못하고 끌려 다니는 죄는 없는가?

          4) 촛대 :  진리의 빛 가운데 거하고 있는가?
                          빛 된 사명에 충성하고 있는가?

          5) 떡상 :  생명의 떡이신 예수그리스도를 일용할 양식으로 삼고 있는가?

          6) 분향단  : 기도를 쉬는 죄를 범하고 있지는 않는가?                         
                             날마다 하나님과의 대화를 하고 있는가?

          7) 법궤  : 속죄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임을 기억하고 있는가?                   
                         날마다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살려하는가?                       
                         죽은 나뭇가지에도 싹이 나게 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믿고 있는가?
                         장차 부활할 것을 믿고 있는가?

          5. 성막은 세상과는 구별된 곳

          성막은 문에서부터 지성소까지 세상과는 다른 구별된 곳이며, 한 장소에 모여 있고 성막은 세 구분으로 되어 있습니다.

          번제단과 물두멍이 있는 "뜰"입니다.
          동편문으로 성막안으로 들어가면 제일먼저 나타나는 곳은 "뜰"입니다.
          뜰에는 *번제단*과 *물두멍*이 있습니다.
          아직은 성소 안에 들어가지 못한 상태입니다.
          번제단에서 모든 죄를 사함받고 의롭다 함을 얻었습니다.
          그러나 아직 완전한 목표에는 도달하지 못했습니다.
          물두멍에서 수족을 씻어야 합니다.
          이것은 우리 구원받은 신자들이 날마다 회개하는 모습을 모형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의미가 있습니다.
          날마다 회개하고 회개하여야 합니다. 
          주님도 말씀하시기를 "애통하는 자가 복있다고 하셨습니다" (마 5:4)
          신자는 날마다 주님의 말씀으로 자신을 비추어 물두멍에 수족을 씻는 제사장처럼 십자가에서 흘리신 주의 보혈로 씻어야 합니다.

          떡상과 금촛대와 금향단이 있는 "성소"

          첫번째의 휘장

          성막에는 2 군데의 휘장이 있는데 뜰에서 성소로 들어가는 곳에 휘장을 만들어 가리라고 했고(출 26:36-37)
          이 휘장은 제사장이 날마다 성소를 드나들면서 하나님을 섬기는 일을 합니다(히 9:6)

          제사장이 하는 일은 뜰에서 하는 제사를 드리는 일이나 수족을 물두멍에 씻는 것처럼 일반 백성들을 위해서 하는 일들에 반하여, 성소 안에서 하는 일은 백성들을 위해서 하는 일반적인 일이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을 섬기는 일입니다.

          교회의 봉사와 헌신과 전도와 주일 성수를 하는 것과 심지어 헌금을 드리는 일까지도 남을 위하거나 스스로를 위하는 행위가 아니고, 오로지 제사장이 성소에서 하나님을 섬기는 것처럼 하나님을 섬기는 일로 이해해야 합니다.

          첫 번째 휘장의 중요성은 성소를 보호하는 일을 하기 때문에 중요합니다. 

          바람막이로 성소를 보호하고 짐승의 침입을 막기도 하고 불경건한 자가 들어오지 못하게 하는 휘장입니다.

          성도는 교회를 지켜야 하는 의무가 있습니다.
          성도는 첫번째 휘장입니다.
          세상의 풍조와 인본주의의 바람을 막아내야 합니다.

          두번째의 휘장

          이 휘장은 성소(The Holy Place)와 지성소(The Most Holy Place) 사이에 가로 막혀 있는 휘장을 말합니다.
          그 휘장의 재료는 첫 번째 휘장의 재료와 같습니다.
          청색, 홍색, 자색과 가늘게 꼰 베실로 혼방된 것입니다.
          이 두 번째 휘장의 원형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이 휘장을 가리켜서 "예수 그리스도의 육체" 라고 했습니다.
          성소에는 떡상과 금촛대와 금향단이 있습니다. 
          떡은 제사장의 몫입니다.
          제사장은 성소안의 떡을 먹을 수가 있습니다. 
          촛대의 불은 항상 밝혀져 있어야 합니다.
          향단에는 향연이 계속되는 곳이 성소입니다.
          이곳은 구원받은 성도들이 해야 할 의무와 사명을 발견 할수 있습니다.

          떡은 말씀입니다.
          촛대는 빛입니다. 
          향연은 기도입니다.

          말씀과 빛과 기도는 성들의 가장 기본적인 의무와 사명입니다.
          휘장은 육체를 가지고 오신 예수님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휘장의 의미

          주님은 성소 안에 휘장을 둠으로써 지성소와 성소를 나누셨습니다.
          하나님께서 휘장을 만들게 하셨는데 휘장의 의미는 분리입니다.
          제사장들이 들어갈 수 있는 곳은 휘장 밖 성소까지입니다.
          휘장을 기준으로 성막은 둘로 나누어지고, 성소를 첫째 성막, 휘장 안을 둘째 성막은 지성소라고 불렀습니다.
          제사장들을 항상 첫째 성막 안에서만 하나님을 섬기는 일을 수행했습니다.

          둘째 성막에는 일 년에 단 한번 대제사장이 피를 들고 들어가 속죄의 피를 뿌리는 것을 제외하고 누구도 들어갈 수 없습니다.

          레위기 24:3
          아론은 회중의 성막 안 곧 증거판의 휘장 밖에서 저녁부터 아침까지 주 앞에 계속해서 그것을 정비(整備)할지니 이것이 너희 대대로 영원한 법규가 될지니라.

          주님은 휘장을 두심으로써 제사장들은 휘장 밖에서 주님을 섬겨야 했습니다.
          주님의 얼굴을 마주 보며, 주님의 직접적인 임재 앞으로 나아가지 못한 채 주님을 섬긴 시대가 바로 구약의 율법시대입니다.
          하나님께서 휘장을 만들게 하신 것은 인간은 하나님과 분리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게 하신 것입니다.
          우리의 죄는 하나님 앞으로 나아갈 수 없는 휘장이 가로 막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 휘장을 걷어주시지 않는 이상 우리는 하나님 앞으로 나아갈 수 없습니다.
          하나님 역시 우리와 직접적으로 대면하시지 않으십니다.

          하나님께서 휘장을 만들게 하신 것은 하나님께서 거룩한 것과 속된 것을 분리하시고 구분하시는 하나님이심을 보여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분리와 구분의 하나님이십니다.
          이는 흔히 세속적인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은 통합과 연합의 하나님이라고 주장하는 것과 너무나 다릅니다.

          하나님은 혼합을 유난히 싫어하십니다.

          신명기 22:9~11
          포도원에 여러 가지 씨를 섞어 뿌리지 말지니 그리하면 네가 뿌린 씨의 열매와 포도원의 열매가 더러워질까 염려하노라.
          너는 소와 나귀를 함께하여 밭을 갈지 말지니라.
          너는 양털과 베실로 섞어 짠 것같이 여러 가지로 섞어서 짠 옷을 입지 말지니라.

          주님은 이스라엘의 생활 방식에서 조차도 혼합을 거부하도록 하셨습니다.
          구분과 경계를 두는 것은 순결과 거룩함의 첫째 요건입니다.
          오늘날 유전공학이라고 해서 여러 가지 종자의 성질을 혼합해서 변종을 만드는 것은 주님이 매우 가증스럽게 여기십니다.

          성경에 네피림이라고 있습니다. 
          창세기 6:4
          당시에 땅에는 네피림이 있었고 그 후에도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에게로 들어와 자식을 낳았으니 그들은 용사라 고대에 명성이 있는 사람들이었더라.

          네피림은 천사와 사람의 혼합 되어 탄생한 사람을 네피림이라 하였고 하나님은 이를 극히 싫어하시었고 가나안땅에도 네피림이 있었는데 그런 네피림을 멸절하기 위하여 가나온 족속을 어린아이까지 진멸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노아 홍수로 네피림을 진멸하였고 가나안 땅에서도 역시 네피림을 진멸하기 위하여 어린아이도 남기지 말고 다 죽이라고 명령하신 것은 하나님께서는 혼합된 인간을 싫어하시기 때문입니다.

          오늘날의 네피림은 유전 공학으로 DNA를 조작하여 Super 인간을 만드는 것입니다.
          오늘날 DNA를 조작하여 초능력 인간을 만들어 이미 30여명의 아이가 태어나 있다고도 합니다.
          하나님이 극히 싫어하는 일을 인간들이 자초하고 있으니 멸망할 때가 가까이 온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레위기 19:19
          너희는 내 규례를 지킬지어다 네 가축을 다른 종류와 교미시키지 말며 네 밭에 두 종자를 섞어 뿌리지 말며 두 재료로 직조한 옷을 입지 말지며.

          이와 같으신 하나님이신데 요사이 종교통합이라 하여 하나님과 우상과 이방신을 통합하여 WCC를 만들고, 이를 비판하는 글을 올리면, 나도 여러 차례 경고와 삭제를 당하고 있습니다.
          물론 동성 결혼지지 여부도 물어 보아야 하지요.
          하나님은 유대인들이 이방인들과 결혼하는 것을 극히 싫어하셨고, 가증이 여기셨습니다.
          하나님은 인종통합을 원치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그리스도인들이 세상과 연합하거나 세상 사람들과 멍에를 같이 메는 것을 결코 원치 않으십니다.

          고린도후서 6:14~18
          너희는 믿지 않는 자들과 공평하지 못한 멍에를 메지 말라. 의와 불의가 어찌 사귀겠으며 빛과 어둠이 어찌 친교를 나누겠으며 그리스도와 벨리알이 어찌 일치하겠으며 혹은 믿는 자가 믿지 않는 자와 어찌 한 몫을 나누겠으며 하나님의 성전과 우상들이 어찌 조화를 이루겠느냐? 이는 너희가 살아 계신 하나님의 성전이기 때문이라. 하나님께서 이르시되, 내가 그들 가운데 거하고 그들 가운데 거닐며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 백성이 되리라. 주가 말하노라. 그러므로 너희는 그들 가운데서 나와 너희 자신을 분리하고 부정한 것을 만지지 말라. 그리하면 내가 너희를 영접하여 너희에게 아버지가 되고 너희는 내 아들딸이 되리라. 전능자 주가 말하노라, 하셨느니라.

          신자가 불신자와 결혼하여 몸이 연합하는 것을 원치 않으시며, 그리스도인들이 믿지 않는 자들과 집회를 하면서 마음을 같이하는 것을 주님은 원치 않으십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분리를 명하십니다.
          성막에서 주님의 분리를 가장 잘 보여주는 한 가지가 바로 ‘휘장’ 입니다.
          휘장은 하나님과 인간을 분리합니다.
          휘장이 있는 한, 인간은 하나님 앞에 직접 나아갈 수 없습니다.

          휘장 재료와 크기

          솔로몬 성전의 휘장의 크기 / 유대 랍비 전통 문헌에 의하면,
          솔로몬 성전의 휘장은 휘장의
          두께는 8~9인치 (약 20센티, 매우 두꺼운 천으로 만들어져 있다)
          높이는 60피트(약 18미터)
          넓이는 20피트(6 미터)

          이 무거운 휘장을 한번 설치하는 데는 유대인 제사장 3백 명이 한꺼번에 매달려야 했다고 합니다. 
          이렇게 휘장이 크고 무거운 이유가 무엇인가요?

          죄인들이 함부로 ‘거룩하신 하나님의 임재’에 접근하지 말라 입니다.

          광야의 성막 휘장은 그리 크지 않습니다.
          가로가 5 미터이고 길이가 5미터입니다.(10규빗)

          출애굽기 26:31
          너는 청색 자색 홍색 실과 가늘게 꼰 베 실로 짜서 휘장을 만들고 그 위에 그룹들을 정교하게 수 놓아서 금 갈고리를 네 기둥 위에 늘어뜨리되 기둥을 조각목으로 만들고 금으로 싸서 네 은 받침 위에 둘지며.

          이 휘장은 네 가지 색깔로 직조한 위에다 그룹들을 공교히 수놓아서 만들었습니다.
          휘장에 그룹을 수놓은 것은, 지성소는 하나님의 법궤가 모셔진 곳으로 매우 거룩한 곳임을 말하여 주며, 또한 하나님의 존귀하심과 거룩하심을 말하여 줍니다.
          그룹들은 하나님의 보좌를 지키는 그룹들을 상징합니다.

          에스겔 9:3- 4
          그룹에 머물러 있던 이스라엘 하나님의 영광이 성전 문지방에 이르더니 여호와께서 그 가는 베 옷을 입고 서기관의 먹 그릇을 찬 사람을 불러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너는 예루살렘 성읍 중에 순행하여 그 가운데에서 행하는 모든 가증한 일로 말미암아 탄식하며 우는 자의 이마에 표를 그리라 하시고.   

          사람들은 그룹 앞에까지만 갈수 있습니다.
          성소에도 제사장은 그룹 앞에서 떡을 올리고 불을 켜고 분향 하는 일을 하였습니다.

          구약 시대에는 인간이 하나님을 보면 죽는 것으로 알고 있었고. 이사야 선지자는 환상 중에 하나님과 보좌와 그 주위에 있는 스랍들을 보고 "화로다 나는 망하게 되었도다" 라고 하였습니다. 
          휘장은 하나님과 인간을 분리합니다.

          휘장을 만든 재료는 4가지 청색, 자주색, 주홍색, 흰색(아마) 실로 가늘게 꼬아 만들고 그 위에 그룹들을 수놓아 만들었습니다.
          이는 마치 사복음서가 주님의 4가지 면을 조화롭게 보여 주듯이 주님의 인성과 신성을 골고루 보여 주고 있습니다.

          청색은 하늘의 색

          이 청색은 푸른 하늘의 색으로서 예수님은 하늘나라로부터 오신 하나님의 아들 되시는 신성을 나타냅니다.
          그리고 생명의 색깔로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는 그리스도를 의미합니다.
          예수님을 믿으면 하늘나라에 들어가게 됨을 의미합니다.
          하늘을 나타내는 색이 청색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늘에서 나신 분이시며, 하늘에서 오신분이십니다.

          요한복음 6:38
          이는 내가 내 뜻을 행하려고 하늘로부터 내려온 것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을 행하려고 내려왔음이니라.

          주님은 하늘로부터 내려 오셨습니다.
          이것이 청색이 상징하는 영적 의미입니다.

          주님은 하늘에서 오셨고, 하늘에 계신 분이셨습니다(요 3:13)
          주님은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이요, 하나님이심을 선포하셨는데, 청색은 사복음서 중 요한복음이 증거하는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킵니다.

          자주색은 왕으로 오신 예수님

          자주색은 왕이나 귀족들이 입던 고급 옷감에 사용되는 색입니다.
          존귀, 위엄, 부요의 색으로서 왕의 의복 색깔로 사용되었습니다.
          이 색의 의미는 만왕의 왕이신 그리스도를 의미합니다. 
          자주색은 부와 존귀를 상징합니다.
          그래서 성경의 왕들은 대부분 자주색 옷을 입었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기드온이 미디안을 쳐서 전리품을 취한 장면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사사기 8:26
          기드온이 요청한 금 귀고리의 무게가 금으로 천칠백 세겔이요, 그 외에 장식과 목걸이와 미디안 왕들이 입었던 자주색 의복과 또 그들의 낙타 목에 둘렀던 사슬이 있었더라.

          자주 색 옷이 왕복입니다.
          이는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부요하심과 왕권을 상징하는 색입니다.
          주님은 유대인의 왕이시며, 만왕의 왕이십니다.

          시편 8:6
          또 주께서 그로 하여금 주의 손으로 지으신 것들을 지배하게 하시고 모든 것을 그의 발 아래 두셨사오니.

          주님은 모든 것을 발아래 두신 지배자요 왕이십니다.

          요한계시록 17:14
          이들이 어린양과 전쟁을 하려니와 어린양께서 그들을 이기시리니 이는 그분께서 주(主)들의 주시요, 왕들의 왕이시며 또 그분과 함께 있는 자들이 부르심을 받고 선택받은 신실한 자들이기 때문이라, 하더라.

          이를 통해 볼 때 자주색은 왕되신 주님을 상징함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 주님은 빌라도의 법정에서 자주색 옷을 입고 이스라엘의 군중들 앞으로 불려 나오셨습니다.

          요한복음 19:2. 5
          군사들이 가시나무로 왕관을 엮어 그분의 머리에 씌우고 자주색 긴 옷을 입히고 이에 예수님께서 가시나무로 엮은 왕관을 쓰고 자주색 긴 옷을 걸치고 나오시니 빌라도가 그들에게 이르되, 이 사람을 보라! 하니. 

          주님이 입으실 옷은 사람들이 입혀 줄 수 없습니다.
          주님은 스스로 옷을 입으십니다.
          자주색은 사복음서 중에 마태복음이 증거하는 왕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합니다.

          홍색은 우리 구주 예수의 보혈

          홍색은 피의 색으로서 보혈을 흘리셔서 구원을 이루신 그리스도를 의미한다.

          그리스도께서 받으신 고난을 상징합니다. 마태복음에는 주님이 주홍색 옷을 입으신 것으로 나옵니다.

          그의 옷을 벗기고 홍포를 입히며 (마27:28). 홍색은 우리가 지은 죄의 색이기도 합니다.

          이사야 1장 18절   "주께서 이르시되, 이제 오라. 우리가 함께 변론(辯論)하자. 너희 죄들이 주홍 같을지라도 눈같이 희어질 것이요, 진홍같이 붉을지라도 양털같이 희어지리라."

          우리의 죄는 주홍 같으며, 진홍같습니다. 주님은 자신의 흘린 피로 이 죄를 씻기십니다.


          흰색은 성결하신 예수님을 의미합니다.

          순결의 색으로서 아무 죄가 없으신 그리스도를 의미합니다.
          그리고 백색은 승리의 색으로서 사망을 이기고 부활하신 승리의 그리스도를 의미한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입혀 줄 의의 옷이며, 주님께서 입으실 옷입니다.
          흰색은 순결과 의를 나타냅니다.
          흰옷은 이기는 자들이 입는 옷입니다.

          요한계시록 3:4-5
          사데에도 자기 옷을 더럽히지 아니한 몇 이름이 네게 있어 그들이 흰 옷을 입고 나와 함께 걸으리니 이는 그들이 합당한 자들이기 때문이라. 이기는 자 곧 그는 흰 옷을 입을 것이요, 내가 그의 이름을 생명 책에서 지워 버리지 아니하고 그의 이름을 내 아버지 앞과 그분의 천사들 앞에서 시인하리라.

          하늘에서 입게 될 옷이 모두 흰 옷입니다.
          흰 옷은 수치를 가리는 옷입니다.
          희다는 말은 깨끗하다는 뜻입니다.
          덕분에 그만큼 더러움을 쉽게 타고, 약간만 신경 쓰지 않으면 금방 얼룩이 지고, 때가집니다.
          이는 교회와 성도들 역시 조금만 부주의하면 금방 더러워진다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성도들에게 검은 색 옷을 입게 하셔서 때가 타도 먼지가 앉아도 보이지 않게 하신 것이 아닙니다.

          천사들이 입은 옷의 색도 흰 옷입니다.
          요한계시록 15:6
          일곱 재앙을 가진 일곱 천사가 그 성전에서 나오는데 순결하고 흰 옷을 입고 가슴에는 금띠를 띠었더라.

          하늘에 있는 군대들이 희고 깨끗한 고운 옷을 입고 흰 말을 타고 그분을 따르더라.(계 19:14).

          부활하신 예수님의 동굴에 있던 두 천사들 역시 흰 옷을 입고 있었습니다(막 16:5, 요 20:2).

          우리 주님이 입으신 옷도 흰 옷입니다. 주님은 변화산에서 이 모습을 보여 주셨습니다.

          그들 앞에서 모습이 변하사 얼굴이 해같이 빛나고 옷이 빛같이 희게 되었더라.(마 17:2).

          자주 빨래를 하고, 자신의 몸을 씻는 사람들처럼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씻음 받고 말씀의 물로 자신을 깨끗하게 해야 합니다. 죄를 씻기는 것은 피 밖에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이미 목욕한 자는 온 몸이 깨끗하니 발밖에 씻을 필요가 없느니라.(요13:10a).

          우리는 매일 발을 씻듯이 그렇게 자신을 깨끗하게 씻을 필요가 있습니다.

            고린도 후서7장 1절 “그러므로 지극히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이 약속들을 가졌은즉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가운데 거룩함을 완전히 이루어 육과 영의 모든 더러움에서 우리 자신을 깨끗하게 하자”

          자신을 깨끗하게 하면 주님께 귀한 그릇으로 쓰임 받게 됩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이런 것들로부터 자기를 깨끗하게 하면 귀하게 쓰는 그릇 곧 거룩히 구별되어 주인이 쓰기에 합당하며 모든 선한 일에 예비 된 그릇이 되리라.(딤후2:21).

          깨끗함을 입은 성도가 개가 자기가 토한 것으로 되돌아가 가고, 씻겨 진 돼지가 진창 속에서 뒹굴 듯이(벧후2:22)  옛 생활의 습관 속으로 돌아가서는 안 됩니다.

          제사장들이 매일 성소에 들어와서 지성소 앞에 가려진 휘장을 볼 때마다 이들은 이점을 상기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출애굽기 26:31
          너는 정교한 솜씨로 청색과 자주색과 주홍색 실과 가늘게 꼰 베실로 휘장(揮帳) 하나를 만들되 그룹들을 수놓아 그것을 만들지니라.”

          주님은 정교한 솜씨로 휘장 하나를 만들게 하셨습니다. 대충 만들어서는 안 됩니다.
          정교한 솜씨란 숙달된 기술자의 노련한 능력을 다 발휘해서 최상으로 만들라는 것입니다.
          정교한 솜씨로 만들라고 한 것은 휘장(앙장)과 흉패에만 사용한 말씀입니다.

          모든 것을 다 정교하게 만들어야겠지만 성막에서 주님은 이 두 가지에만 정교한 솜씨로 만들라고 특별히 명하셨습니다.  정교한 솜씨란 주님께서 지혜와 명철과 지식과 온갖 기술에서 하나님의 영으로 충만케 하심으로 일하게 하신 것을 말합니다.

          일을 할 때 주님께서 일을 할 수 있는 지혜와 명철과 지식의 영을 주시도록 구해야 합니다.

          성령은 단지 마음속에 영적 평안, 정신적인 기쁨, 추상적인 개념과 관념에만 역사하신다고 생각하면 큰 오산입니다.

          성령은 우리의 생활, 우리의 작업하는 일손에 직접 역사하십니다.

          창의력과 기술은 주님이 주시는 것입니다.

          무엇을 디자인을 하든, 몸에 침을 놓든, 사진을 찍든, 정원을 꾸미든, 페인트를 칠하든 모든 일에 주님의 영으로 충만할 때 놀라운 솜씨가 발휘되는 것입니다.

            출애굽기 35장 30~35절 “모세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르되, 보라, 주께서 유다 지파에 한 훌의 손자 우리의 아들 브살레엘을 지명하여 부르시고 지혜와 명철(明哲)과 지식과 온갖 기술에서 하나님의 영으로 그를 충만하게 하사 정교한 일들을 고안하여 금과 은과 놋으로 일하게 하시며 보석을 깎아 물리며 나무를 새겨서 온갖 정교한 것을 만들게 하셨고 또 그와 단 지파에 속한 아히사막의 아들 아홀리압의 마음 속에 가르칠 수 있는 능력을 넣어 주셨으며 마음의 지혜로 그들을 충만하게 하사 온갖 일을 하게 하시되 곧 조각하는 일과 정교한 일과 청색과 자주색과 주홍색 실과 고운 베실로 수놓는 일과 짜는 일과 그 어떤 일이라도 하게 하시고 또 정교한 일을 고안하게 하셨느니라.”

          주님은 휘장에 그룹들을 수놓게 하셨습니다.

          그룹들의 일차적인 의미는 무엇입니까?

          그룹은 늘 하나님과 동행하며 하나님은 그룹들 사이에 거하신다는 점에서 하나님의 임재를 표시하시기 위함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룹이 수 놓여 있다는 말은 그 안에 하나님이 계신다는 의미입니다.

          오색으로 수놓은 휘장은 주님을 나타낸다는 사실을 누구나 알 수 있었습니다.

          그룹은 인간이 타락하여 쫓겨난 에덴의 낙원을 지키는 천사들입니다.

          불 칼을 들고 인간들이 접근하지 못하도록 지키는 모습을 통해 죄악 된 인간이 나아갈 수 있는 곳이 그룹들 앞까지란 사실입니다.

          아담은 하나님이 자신을 지으셔서 두신 곳, 자신을 부르시던 곳에 다시 돌아가지 못했습니다. 그룹들이 지키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휘장에 수놓인 그룹들은 인간은 그룹들이 그 자리에서 철수하기 전에는 절대로 우리는 하나님께 나아갈 수 없습니다.

          휘장이 찢겨짐으로 수놓이 그룹들 역시 찢겨졌는데 더 이상 그룹들은 인간들이 하나님 앞으로 나오는 것을 막지 않는다는 것을 말해 줍니다. (참고 : 천사, 그룹, 스랍)

           

          출애굽기 26장 32절. “너는 시팀나무로 만들어 금을 입힌 네 기둥에 그 휘장을 걸고 기둥의 갈고리들은 금으로 만들어 은으로 만든 네 개의 밑받침 위에 둘지니라.“

          나무로 만들어 금을 입힌 네 기둥에 휘장을 걸었습니다. 휘장은 네 기둥에 걸리고 팽팽하게 고정되었습니다.

          그냥 펄럭이거나 접히거나 고이 보관된 것이 아닙니다. 네 기둥 역시 사복음서와 마찬 가지로 주님의 인성과 신성을 골고루 조화롭게 보여 주는 것입니다.

            출애굽기 26장 33절. “또 너는 그 휘장을 갈고리들 밑에 걸어 놓고 증거궤를 휘장 안에 들여 놓을지니 그 휘장이 너희를 위하여 성소와 지성소를 나누리라.”

          이로써 성소와 지성소는 완전히 분리되고 말았습니다. 히브리서 기자가 말하기를, 둘째 휘장 뒤에 있는 성막은 지성소라 일컬음을 받나니 (히 9 : 3)라고 한 그대로입니다.

          이곳은 거룩히 구분되었습니다.

           

          5. 휘장이 주는 영적 의미

          휘장은 그 자체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육체를 가리킵니다.

          히브리서 10:19~20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예수님의 피를 힘입어 새롭고 살아 있는 길로 지성소에 들어갈 담대함을 얻게 되었나니 이 길은 그분께서 우리를 위하여 휘장 곧 자기의 육체를 통해 거룩히 구분하신 것이니라.

          성막의 휘장이 가르쳐 주는 진리는 그것이 주님의 육체란 것입니다.

          주님께서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시고, 온 몸에서 피와 물이 쏟아졌을 때 성소와 지성소를 사이를 가로막고 있던 휘장이 위에서 아래로 갈라진 것입니다.

          마가복음 15:37~38
          예수님께서 큰 소리로 외치시고 숨을 거두시니라. 이에 성전의 휘장이 위에서 아래까지 둘로 찢어지니라.

          육체를 입고 오신 하나님께서 숨을 거두실 때 정확하게 성전의 휘장이 위에서 아래까지 둘로 찢어졌다는 것은 주님이 바로 휘장의 본체임을 말씀해 주시는 것입니다. 

          이제 더 이상 하나님이 거하시는 지성소로 들어가는 길이 휘장으로 막혀 있지 않습니다.

          주님은 자신의 몸으로 휘장을 제거하심으로써 믿는 자는 누구든지 주님께 나아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 언제든지 두려움 없이 나아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더 이상 접근을 막는 불 칼을 든 그룹들은 없습니다.

          대신 우리에게는 죄 없는 대제사장이 있습니다.

            히브리서 4장 16절 “그러므로 우리가 긍휼을 얻고 필요한 때에 도우시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왕좌로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

          우리는 나아갈 수 있는 믿음을 얻었습니다.

          에베소 3장 12절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그분을 믿는 믿음을 통하여 담대함을 가지고 확신 있게 하나님께 나아감을 얻느니라.”

          히브리서 6장 19절 “우리에게 있는 이 소망은 혼의 닻과 같아서 확실하고 굳건하여 휘장 안에 있는 곳으로 들어가나니”

          우리에게 있는 이 소망은 이스라엘의 소망이요, 성도들의 소망인데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가. 휘장 안은 지성소라 하여 그 안에는 언약궤, 시은좌 (은혜 베푸는 곳)가 있습니다.

          주님이 육신 안에 거하신 것을 나타냅니다.

          요한복음 1장 14절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휘장 안에는 하나님의 영광이 거하시듯 주님이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로 둘로 찢어졌습니다.

          사람이 찢었다면 아래서부터 위로 찢었겠지만 위에서부터 아래로 찢어진 것은 하나님께서 친히 성소의 휘장을 찢으신 증거입니다.

          마태복음 27장 50절 - 52절 “예수께서 다시 크게 소리지르시고 영혼이 떠나시다 이에 성소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까지 찢어져 둘이 되고 땅이 진동하며 바위가 터지고 무덤들이 열리며 자던 성도의 몸이 많이 일어나되 예수의 부활 후에 저희가 무덤에서 나와서 거룩한 성에 들어가 많은 사람에게 보이니라”

          휘장이 있는 동안은 죄인이 하나님께로 나아가는 길을 막고 있습니다. 죄인이 하나님께 나오면 죽임을 당합니다.

          휘장이 찢어짐으로 하나님께서 나아 오셔서 믿는 성도의 마음에 성전을 삼고 계시게 되었습니다.

           

          나. 찢어진 휘장 안에는 피범벅이 되어 있습니다.

          휘장 안에는 일년에 한차례씩 대 제사장이 양의 피를 들고 들어가서 피를 뿌리고, 붓고 하면서 하나님의 음성이 들릴 때까지 기다립니다.

          내 백성의 죄를 사했노라는 음성이 들릴 때까지 대 제사장은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 후에 한번도 피를 닦으러 청소하려 한번도 들어가지 못합니다.

          피 없이 지성소에 들어 올 때에는 죽임을 당하므로 아무도 청소를 한번 하려 들어가지 못합니다.

          매년 피를 뿌리고 부은 피가 마르고 붙어서 지성소 안은 피로 물들인 곳, 피가 찌든 곳입니다.

          피 흘림이 없이는 죄 사함이 없다는 말씀대로 예수님이 오실 때까지는 양의 피로 백성의 죄를 사함을 받았지만,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신 후로는 예수의 보혈을 믿음으로, 양의 피가 없이도 믿음으로 죄 사함을 받고 구원을 받게 되었습니다.

          죄인인 인간이 하나님께 나아가는 방법은 피 밖에 없습니다.

          예수의 피를 믿지 않고, 예수의 피를 말미암지 않고서는 하나님 앞에 도무지 나아갈 수가 없습니다.

           

          다. 휘장이 가로로 찢어지지 않고 세로로 찢어진 이유.

          각 개인에 따라서 다시 열리는 휘장을 의미합니다.
          휘장에 들어 갈 사람은 번제단, 물두멍, 금촛대, 떡상 향단을 거치고 많은 기도를 할 때에 휘장을 찢으신 하나님께서 내 몸에 좌정하시고 거처를 정하십니다.

          각 개인의 신앙에 따라서 하나님의 임재가 각기 다르게 임하는 것을 나타내고 있는 것입니다.

          라. 휘장은 하나님이 친히 찢으셨습니다.

          휘장은 위에서 아래로 찢었습니다.

          성소의 휘장은 솔로몬이 만든 때의 휘장입니다. 소 두 마리가 잡아 당겨도 (4마리) 찢어지지 않는 손바닥 두께만한 잘 짜여진 휘장입니다. 후에 찢어진 휘장을 수리하여 꼬매여 놓으면 터지고, 터지고 하여 결국 성전의 휘장 수리를 포기하였습니다.

          하나님이 열어 놓은 길은 사람이 막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구약 시대에는 하나님께서 성소에 계심으로 하나님을 만나기 위하여서는 지성소에 들어가야 하였지만, 신약 시대는 예수님으로 인하여 하나님께서 내 마음에 성령으로 직접 찾아 오셔서 내 마음에 좌정하여 계십니다.
          성령 충만이, 구약 시대에는 핌푸레미 성령 충만으로 사역을 위한 외적인 성령의 역사가 임하였지만 (Upon, With)
          신약 시대에는 푸레로 성령 충만으로 내 몸에 성령께서 좌정하여(In, Into) 내 몸을 성전 삼고 나와 함께 계십니다.

          고린도전서 3:16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거하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뇨.

          성전 휘장을 찢으시고 내 속에, 하나님께서 내 몸을 성전을 삼고 거하시는 사실을 깨닫고 감격하시고 감사하기를 바랍니다.

                 

          1. 천사들(angels)

          많은 사람들은 천사와 그룹이 같은 것으로 알고 있지만, 이 둘은 분명히 서로 다릅니다.

          성경에서 천사는 무수히 많다고 언급하지만(히 12:22), 그룹처럼 날개를 가진 천사는 하나도 없으며, 그룹처럼 여러 개의 얼굴을 가진 천사도 없습니다.

          천사는 몸이 없는 영적인 존재라 사람과 다르기는 하지만 기본적으로 사람과 같은 모습으로 나타납니다(창 18:2; 19:1, 5).
          "천사"에 해당하는 헬라어(앙겔로스)가 남성명사인 것처럼, 성경에 등장하는 천사는 주로 남성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성경에 등장하는 모든 천사는 날개 없는 젊은 남성의 모습으로 등장하고 있습니다.

          때로 천사들은 영적인 존재들이기 때문에 "신들"(gods)로 불려지기도 했고(시 82:1,6,8),

          "하나님의 아들들"로 불려지기도 했습니다(욥 1:6; 2:1; 38:7).

          2. 그룹(cherub, 체루빔-cherubim)

          그룹은 하나님의 보좌 주위에서 하나님과 함께하는 존재들로서, 하나님의 영광과 신성을 드러내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성막을 만들게 했을 때에도, 그룹의 위치는 지성소 안, 언약궤 위였습니다(출 25:20).

          솔로몬도 지성소 안에 두 그룹을 만들기도 했습니다 (왕상 6:23).  이것은 그룹들이 하나님의 보좌를 호위하는 모습을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구약 성경에서 하나님께서 거하시는 자리는 그룹들 사이였습니다 (왕하 19:15, 대상 13:6).

          이것은 하늘에 있는 것들에 대한 모형으로, 하늘에서의 모습을 반영해 주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시 80:1; 99:1, 겔 10:1). 그룹은 항상 하나님의 영광과 관계가 있습니다. (겔 10:4)은 그룹들과 함께 나타난 주의 영광으로 인해 성전에 주의 영광이 가득 찼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시편 기자는 하나님께서 그룹을 타고 다닌다고 말하고 있습니다(시 18:9,10). 또 온 백성들이 두려워 떨 만큼 위엄 있는 하나님의 통치에서도 그룹이 등장하고 있습니다(시 99;1).

          3. 스랍(세라핌-seraphim)

          스랍은 그룹과는 약간 다른 존재로서, 그룹에 대해서는 (사 6장)에서만 유일하게 나타나고 있습니다. 스랍은 여섯 개의 날개를 가진 것으로 묘사되고 있습니다(사 6:2). 성경에서 스랍들은 그룹처럼 하나님의 보좌 주변에서, 그분의 영광을 호위하면서(사 6:1,2)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찬양하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사 6:3).


          1.휘장의 재료(출 26:31)   

          휘장의 재료는 청색실, 자색실, 홍색실, 그리고 가늘게 꼰 베실로 짜서 만들었다. 여기서 각 색깔은 각각 다른 의미를 가지고 있다.

          청색은 하늘의 색으로 희망과 생명을 상징한다.  

          성경은 예수는 하늘에서 나신 분(고전 15:47),
          생명의 주(요 10:10),
          하늘에서 오신 분(요 3:31)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과 그분 안에 있는 영생을 암시한다.

          자색은 부요와 고귀를 상징한다.

          자색 옷은 왕이나 귀인들이 입는 옷으로 만유의 주시며 만왕의 왕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을 나타낸다.

          홍색은 희생을 상징한다.

          죄인들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십자가 위에서 못박혀 매달리셔서 붉은 피를 흘리심으로 인류의 죄를 속량하신 예수님의 희생을 나타낸다.

           흰색은 성결과 의를 상징한다.

           예수 그리스도는 무죄하시며 의로우신 분이시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하심은 그분의 의를 확증하셨다.  

          휘장의 모양

          휘장은 네 가지 색깔로 직조한 위에다 그룹들을 공교히 수놓아서 만들었다.
          휘장에 그룹을 놓은 것은, 지성소는 하나님의 벱궤가 모셔진 곳으로 매우 거룩한 곳임을 말하여 주며, 또한 하나님의 존귀하심과 거룩하심을 말하여 주는 것이다.
          이 그룹들은 하나님의 보좌를 지키는 그룹들을 상징하는 것이다(겔 9:3).

          그룹에 머물러 있던 이스라엘 하나님의 영광이 올라 성전 문지방에 이르더니 여호와께서 그 가는 베옷을 입고 서기관의 먹 그릇을 찬 사람을 불러.

          구약 시대에는 인간이 하나님을 보면 죽는 것으로 알고 있었다.
          이사야 선지자는 환상 중에 하나님과 보좌와 그 주위에 있는 스랍들을 보고 "화로다 나는 망하게 되었도다" 라고 하였다.

          하나님이 계신 하나님의 나라는 아무나 들어 갈 수 없는 곳이다.
          죄인은 갈 수 없는 곳이다.
          의인만이 가는 거룩한 곳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들어 갈 수 있는 곳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죄인인 저나 여러분이 하나님께 의롭다 함을 받기 때문에 들어 갈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사람이 하늘나라에 들어가려면 아무런 죄가 없어야 한다.
          이 세상에 죄가 없는 사람이 있을까?
          로마서 3장10절에서 "기록한 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라고 기록하고 있다.
          의인은 이 땅에는 없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가 아니고서는 천국에 들어 갈 수 없는 것이다.
          왜 그럴까요. 그곳은 매우 거룩하고 영광스러운 곳이기 때문이다.

          갈라진 휘장(마 27:50-53. 막 15:37-39. 히 10:19-23)

          지성소와 성소의 사이에 쳤던 휘장은 예수 그리스도의 육체를 상징하는 것이다.
          이 휘장 안에는 하나님의 법궤와 시은좌가 있는 지성소이다.
          지성소는 하나님이 임재하시는 곳이다.
          곧 하나님이 계신 곳이다.

          그러므로 구약시대 하나님을 직접 만나려면, 이 지성소에 들어가야 만날 수 있었다.
          그런데 레위기 16장의말씀을 보면, 이 지성소에는 일년에 일차씩 속죄일인 7월 10일에 제사장들 중에서도, 그해 대제사장으로 뽑힌 한 사람만 들어갈 수 있었다.
          그러니까 제사장으로써 성소에 출입을 하는 사람이라고 하여도, 지성소에는 들어갈 수가 없었다.
          지성소는 이렇게 거룩한 곳이다.

          이 당시에는 대제사장으로 뽑히어서 지성소를 출입할 수 있는 제사장은 개인으로는 큰 영광을 얻은 것이다.
          속죄일에는 제사장들이라도 백성들과 함께 성막(회막)밖에 서있어야 했고, 대제사장 혼자만이 성막안으로 들어가서, 대제사장의 옷을 벗고, 몸을 깨끗이 씻고, 고운 세마포 옷으로 갈아입고 나서, 대제사장 자신을 위하여 속제의 제물로, 수소 한 마리와 백성들을 위하여 속죄의 제물로, 수염소 두 마리를 준비하고, 또 번제물로 드릴 수양 두 마리를 준비하였다.

          그리고 수 염소 두 마리 중에 제비를 뽑아, 하나는 하나님을 위한 제물로 정하고 또 한 마리는 아세살을 위하여 준비하고 나서, 자신을 속죄의 제물인 수송아지를 대제사장의 권속들을 위하여 속죄하고, 그 수송아지를 잡고는, 향로를 취하여, 여호와의 단에 피운 불을 채우고, 두 손으로 곱게 간 향기로운 향을 채워 가지고, 수송아지의 피와 함께 가지고 휘장을 열고, 지성소 안으로 들어가서, 향연을 피워, 증거궤와 속죄소를 가리우게 하고, 또 수송아지의 피를 취하여 손가락으로 속죄소 동편에 뿌리고, 또 손가락으로 속죄소 앞에 일곱 번을 뿌리고 나서, 다시 성막 뜰로 나와서, 대제사장은 백성을 위하여 속제제 염소를 잡아 그 피를 가지고 지성소안에 들어가서, 수송아지의 피를 뿌린 것과 똑같은 방법으로 뿌려서, 이스라엘 백성의 부정과 모든 죄를 지성소를 위하여 속죄하고, 또 부정한 중에 있는 회막을 위하여 하였던 것이다.

          그리고 나서 대제사장은 성막의 뜰로 나와서 아세살을 위하여 준비된 수염소에게 안수하며, 이스라엘 자손의 모든 불의와 그 범한 모든 죄를 고하고, 그 죄를 염소의 머리에 두어, 미리 정하여 준비하고 있던 사람에게 염소를 맡기어 광야로 끌고 가서 무인지경에 이르거든 염소를 광야에 놓아주고 돌아왔던 것이다. 이 염소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모든 불의를 짊어지고 광야에 버려졌던 것이다.  

          이런 예식이 끝나고 나면, 대제사장은 다시 목욕을 하고, 대제사장의 예복으로 갈아입고, 수양 두 마리를 잡아 번제로 드리고 나면, 대 속죄제가 끝나게 된다.

          여기서 아사셀의 염소는 인간의 죄를 담당하시기 위하여, 친히 십자가를 지시고, 영문 밖, 골고다 언덕을 오르셔서, 십자가에서 대신 형벌을 받으신 예수님을 예표하는 것이다.

          예수님은 아세살의 염소처럼 인류의 죄를 대신 짊어지시고, 그 죄에 형벌을 대신 받으시기 위하여, 십자가를 지시고 영문밖 골고다 언덕에 오르셔서, 양발과 양 손이, 대못에 의해 십자가에 못 박히셔서 찢기시고, 피를 흘리시다가 운명하셨다.

          이때에 성전에 성소와 지성소 사이에 치어있던, 휘장 한 가운데가 위로부터 아래까지 찢어져 둘이 되었다.(마 27:51, 막 15:38, 눅 23:45)

          이때 상황을 누가복음 23장44-46절 말씀을 보면 "때가 제 육시쯤 되어 해가 빛을 잃고 온 땅에 어두움이 임하여 제 구시까지 계속하며 성소의 휘장이 한가운데가 찢어지더라. 예수께서 큰 소리로 불러 가라사대 아버지여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 하고 이 말씀을 하신 후 운명하시다" 기록하고 있다.

          여기에 대하여 히브리서 10장19, 20절에서는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나니, 그 길은 우리를 위하여 휘장 가운데로 열어 놓으신 새롭고 산길이요 휘장은 곧 저의 육체니라" 말씀하고 있다.

          성소와 지성소 사이에 치어진 휘장이 찢어졌다는 것은, 하늘 나라의 거룩한 하나님 보좌 앞에 인간이 나갈 수 있는 길이 열린 것이다. 얼마나 놀라운 일인가?.

             예수 그리스도께서 당신의 육체를 골고다 언덕의 십자가에서 못박혀 찢기시고, 죽기까지 내어 주심으로, 아담의 피를 받아 죄로 말미암아 저주받은 인생으로 태어났지만, 예수를 구주로 믿고 거듭난 모든 사람들에게 하늘나라 하나님의 보좌 앞에 당당히 나라 수 있는 길을 열어 놓으신 것이다. 이 얼마나 놀라운 은혜인가?

             예수님은 이래서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 14:6)고 말씀하셨던 것이다. 예수를 구주로 믿는 우리는 이 엄청난 은혜를 받은 사람들이다.

             계시록 7장9-12절의 말씀에 보면, 하늘나라에 대하여 기록하기를 "이 일 후에 내가 보니 각 나라와 족속과 백성과 방언에서 아무라도 능히 셀 수 없는 큰 무리가 흰옷을 입고 손에 종려 가지를 들고 보좌 앞과 어린 양 앞에 서서, 큰 소리로 외쳐 가로되 구원하심이 보좌에 앉으신 우리 하나님과 어린 양에게 있도다 하니, 모든 천사가 보좌와 장로들과 네 생물의 주위에 섰다가 보좌 앞에 엎드려 얼굴을 대고 하나님께 경배하여 가로되, 아멘 찬송과 영광과 지혜와 감사와 존귀와 능력과 힘이 우리 하나님께 세세토록 있을지로다 아멘 하더라" 고 한다.

             얼마나 놀라운 장면인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의 죽으심과 그 흘리신 보혈의 은총과 영광에 부활로, 이 대열에 저나 여러분이 서게 될 것이다. 얼마나 감사한 일인가? 할렐루야! 모든 영광을 주님께 돌리자. 아멘! 아멘! 아멘!

             그리고 계시록 21장3절에서 "보라 하나님의 장막이 사람들과 함께 있으매, 하나님이 저희와 함께 거하시리니, 저희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은 친히 저희와 함께 계셔서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씻기시매, 다시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는 있지 아니하리니, 보라 처음 것들이 다 지나 갔음이러라. 보좌에 앉으신 이가 가로되 보라 내가 만물을 새롭게 하노라..."고 한다.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 죄를 대신하여 지신, 십자가의 공로로 말미암아, 우리는 영광스러운 이곳에 가서 영원토록 하나님께 찬송하며 살게 될 것이다.   

           

          출 26:33/ 그 장을 갈고리 아래 드리운 후에 증거궤를 그 장안에 들여 놓으라 그 장이 너희를 위하여 성소와 지성소를 구별하리라


          여기서 "장"은 실내를 외부와 차단시키는 커어튼(curtain)이나 휘장(veil)을 가리킨다. 성소에는 이러한 커어튼이 두 개 사용되었는데 하나는 지성소와 성소를 구분하는 것이며(출 26:31-35절)다른 하나는 성소의 문을 가리기 위한 것이다(36, 37절).

          "그 장이 ...성소와 지성소를 구별하리라" - 성소에는 제사장이 매일, 그리고 안식일마다 제사를 드릴때 들어갔지만(27:21;30:7;24:3,8) 지성소에는 일년에 한 번 속죄일에 들어갔다(레16:1-34;히9:7). 이것은 성소와 지성소의 거룩함의 차이 때문이었다. 즉 성소에는 제사장들이 봉사하는 예물과 기구가 놓여 있었으나, 지성소에는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는 거룩한 언약궤(법궤,증거궤)가 놓여져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는 성소(코데쉬, קֹ֥דֶש)가 원어로 '거룩한 곳'이란 뜻인데 반해 지성소(코데쉬 하코다쉼, קֹ֥דֶש הַקֳּדָשִֽׁים)는 '거룩한 곳들 중의 거룩한 곳' 이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음에서도 분명히 드러난다. 그러나 이 두장소는 단지 휘장 하나로만 가려져 있을 뿐인데, 이 휘장은 예수 그리스도의 육체를 예표하는 것으로서, 따라서 훗날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운명하셨을 때 이 휘장은 둘로 찢겨졌다(마 27:51; 막 15:38)

          "이에 성소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까지 찢어져 둘이 되고 땅이 진동하며 바위가 터지고"(마 27:51)



          따라서 이제는 제사장과 일반인 사이의 구별이 없어지고 누구든지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이 가능해졌다(히 10:19-22).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나니 그 길은 우리를 위하여 휘장 가운데로 열어 놓으신 새롭고 산 길이요 휘장은 곧 저의 육체니라"(히 10:19-20)


          한편 등대가 있는 성소로부터 차단된 지성소는 빛이 없어 어두웠음에 틀림없었고(왕상 8:12), 따라서 안에 들어가는 대제사장은 자연히 조심스럽게 행동했을 것이다. 그런데 성경에는 때때로 '하나님의 그늘'이 구원과 보호의 장소로 언급되고 있는데(시 17:8;91:1), 하나님이 임재해 계신 지성소가 어두운 것도 이러한 의미와 관련이 있는 것 같다.

          "그 때에 솔로몬이 가로되 여호와께서 캄캄한데 계시겠다 말씀하셨사오나"(왕상 8:12)



          • 휘장을 거는 도구들
          "금 갈고리로 네 기둥 위에 드리우되" - 휘장을 거는 방법에 대한 설명으로 즉 기둥에 달린 금 갈고리에 휘장을 걸어서 아래로 늘어뜨리는 것을 뜻한다. 한편 성소와 지성소 사이의 휘장은 성소 입구에서 9m, 뒷면(서쪽 편) 끝에서 4.6m 에 해당하는 지점에 걸려 있었던 것같다. 왜냐하면 솔로몬 성전에서 성소와 지성소의 길이의 비율이 대략 2:1인 점으로 볼 때(왕상 6:16-20), 광야에서의 성막도 같은 비율일 것으로 추측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한편 성소와 지성소 사이에는 조각목으로 만든 기둥 넷이 있었는데 바로 이 기둥들에 여러색깔로 그룹들을 정교하게 수 놓은 휘장이 내리걸려 있었다. 이 휘장을 지성소 휘장이라 하는데 이 휘장 안쪽에는 법궤(증거궤,언약궤)가 안치되어 있었다. 또한 이 지성소 휘장은 항상 드리워져 있었으며 대제사장을 제외하고는 아무도 이 휘장 안으로 들어갈 수 없었다. 그러나 대제사장이라 할지라도 오직 일년에 한번 속죄일(7월 10일)에만 속죄의 피를 가지고서 들어갈 수 있었다.

          "칠월 십일은 속죄일이니 너희에게 성회라 너희는 스스로 괴롭게 하며 여호와께 화제를 드리고 이 날에는 아무 일도 하지 말것은 너희를 위하여 너희 하나님 여호와 앞에 속죄할 속죄일이 됨이니라"(레 23:27-28)


          • 성소의 휘장
          "성막 문을 위하여 장을 만들고" - 지성소의 휘장과 함께 성소에도 휘장이 쳐졌다. 그런데 지성소 휘장과 성소 휘장과의 차이점은 다음과 같다. (1) 지성소의 휘장에는 그룹이 수 놓아진 데 비해 성소의 휘장에는 그룹이 수놓아지지 않았다. (2) 지성소 휘장은 4개의 기둥에 드리워져 있으나 성소 휘장은 5개의 기둥에 드리워져 있다. (3) 지성소 휘장의 기둥 받침은 은으로 되어 있으나 성소 휘장의 기둥 받침은 놋으로 되어있다(아래 참조).

          "그 문장을 위하여 기둥 다섯을 조각목으로 만들어 금으로 싸고 그 갈고리도 금으로 만들찌며 또 그 기둥을 위하여 받침 다섯을 놋으로 부어 만들찌니라"(출 26:37)


          이성하의 일화

          1883년 이성하가 성경을 등에 지고 봉천을 떠났다.
          그는 압록강 건너편까지 이르렀으나 성경책을 그대로 가지고 무사히 들어설 것 같지 아니하여 잠시 밖으로 나가 주위의 사정을 살피기 시작하였다.
          이성하의 거동을 수상히 여긴 주막집 주인이 방안에 놓아 둔 짐짝을 풀어보니 그 속에 국가에서 금지하는 책이 있어 너무나 겁에 질린 집 주인은 일부는 불에 태워 없이하고 나머지는 전부 압록강 물에 내던지었다.

          뒤에 이 소식을 들은 로스 선교사는 "하나님의 말씀이 던져진 압록강물을 마시는 한국 사람들은 생명수를 얻게 될 것이고, 불에 탄 성경재는 한국교회를 자라게 하는 거름이 되리라"고 예언하였다.

          그 예언이 응하여 오늘날 한국교회는 세계속의 교회로 서게 된다.

          이성하는 한국인 최초로 세례받은 4인중의 한명이며, 로스를 도와 성서번역사업에 힘을 썼다.
          그는 성경을 몰래 숨기고 귀국하여 의주 서울 등지에서 비밀리에 전도를 하여 복음의 씨를 뿌렸다.
          그 후 그의 아내는 백홍준의 아내와 함께 서상륜의 중재로 압록강에서 행해진 언더우드의 세례식에서 세례를 받고 한국교회 최초의 여자세례교인이 되었다고 전한다.

          이성하

          의주 출신.
          1874년 이응찬 ·백홍준 ·김진기와 함께 중국 동북성으로 가서, 스코틀랜드 선교사인 J. 로스와 알게 되었고, 이어 로스의 처남인 J. 매킨타이어(한국명 馬勤奉) 선교사도 사귀게 되었다.

          1876년 마침내 이들 4인은 한국인으로서는 최초로 세례를 받고, 로스를 도와 최초의 성서 한글번역사업에 정열을 쏟았다.
          그는 이후 4복음서와 《사도행전》 등을 몰래 숨기고 귀국, 의주 ·서울 등지에서 비밀리에 전도를 하여 한국에 '복음의 씨'를 뿌렸다.
          그 후 그의 아내는 백홍준의 아내와 함께 압록강에서 행해진 H. G.언더우드 집례의 대세례식에서 세례를 받고 한국교회 최초의 여자세례교인이 되었다고 전한다.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마태복음 27:32-44

                                                                                                억지로(32절)

          마태복음 27:32
          나가다가 시몬이란 구레네 사람을 만나매 그에게 예수의 십자가를 억지로 지워가게 하였더라.

          마가복음 15:21
          마침 알렉산더와 루포의 아버지인 구레네 사람 시몬이 시골로부터 와서 지나가는데 그들이 그를 억지로 같이 가게 하여 예수의 십자가를 지우고.

          누가복음 23:26
          그들이 예수를 끌고 갈 때에 시몬이라는 구레네 사람이 시골에서 오는 것을 붙들어 그에게 십자가를 지워 예수를 따르게 하더라.


           구레네에서 예루살렘까지 대략 2,000Km.
           자동차를 이용할 경우 22시간
           하루동안 이동해야 하는 거리

          나가다가 시몬이란 구레네 사람을 만나매 그에게 예수의 십자가를 억지로 지워 가게 하였더라(마태복음 27:32)

          디아스포라는 원래 자기가 살던 땅에서 떠나 다른 나라에 흩어진 사람들이 공동체를 이루며 살아가는 것을 말하는데, 디아스포라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이들이 유대인일 겁니다.
          오늘날 이스라엘 땅에 사는 유대인들은 그 출신에 따라서 아쉬케나짐( אשכנזים ), 스파라딤(ספרדים ), 미즈라힘(מזרחים )으로 나뉩니다.

          중앙 유럽과 동부 유럽의 디아스포라 출신들을 아쉬케나짐,
          서부유럽 지역의 디아스포라 출신들을 스파라딤,
          그리고 중동 지역에서 살고 있던 사람들을 미즈라힘이라 부르는 거예요.
          그중 가장 많은 비율을 차지하는 사람들은 아쉬케나짐들로 이스라엘에 거주하는 유대인 인구의 60퍼센트 정도입니다.
          이 서로 다른 유대인들은 단지 출신지만 다른 것이 아니라 율법을 해석하고 이해하는 방법도 조금씩 다릅니다.

          많이 다르다고 한다면 많이 다르다고도 할 수 있고요.
          그래서 이들은 한 회당에서 섞여서 예배드리지도 않습니다.
          각각의 회당이 따로 있어요.
          마치 요즈음 한 동네에 감리교회, 성결교회, 장로교회, 침례교회가 각각 있듯이 유대인 동네마다 몇 개의 회당이 있습니다.

          간혹 TV에서 아쉬케나짐 랍비와 스파라딤 랍비가 율법 해석을 놓고 벌이는 설전을 볼 수도 있는데, 이와 같은 율법 이해에 대한 견해 차이는 서로 오래 떨어져서 살아왔기 때문에 생겨난 자연스러운 결과일지도 모릅니다.

          기원전 3세기부터 예수님 시대에 이르기까지 가장 컸던 유대인 디아스포라는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와시리아의 안디옥이었습니다.
          이들은 단지 규모만 큰 것이 아니라, 디아스포라 가운데서도 유대교의 신학과 성서 해석의 방법을 만드는 중심지였습니다.

          이 두 지역 외에도 셀 수없이 많은 디아스포라들이 있는데,
          그중에서 기독교인들에게 널리 알려진 지역은 바대, 메데, 엘람, 메소보다미아, 갑바도기아, 본도,브루기아, 밤빌리아, 구레네, 리비아, 로마, 그레데, 아라비아의 디아스포라 입니다(사도행전 2:9-11)

          디아스포라에 거주하던 예수님 시대의 사람들이 성전이 있는 유대아(Judea)와 완전히 분리된 것은 아니었습니다.
          모든 이스라엘 사람이라면 반드시 지켜야 하는 세 개의 명절(유월절, 칠칠절, 초막절)에 예루살렘을 순례했으니까요.
          디아스포라에서 유대인들이 순례를 위해서 예루살렘을 찾으면 제사는 성전 한곳에서 드리지만, 안식일이 되어 회당에 갈 때면 각각의 디아스포라의 회당을 찾아가기 마련입니다.

          마치 오늘날 이스라엘에서 아쉬케나짐과 스파라딤, 미즈라힘이 서로 다른 회당을 가듯이 말이지요.
          신약성경에서도 사도행전 6장에서 스데반과 논쟁을 벌이던 유대인들을 보면 9절, 구레네인, 알렉산드리아인,길리기아와 아시아에서 온 사람들의 각 회당에서 스데반의 반대자로 일어나 스데반을 몰아세우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디아스포라 중에서 구레네라는 곳은 지금의 리비아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기원전 3-2세기 프톨레미 시대의 기록을 보면, 구레네 지역에는 약 십만 명의 유대인들이 살고 있었다고 합니다.
          기원전 1세기 때에는 로마의 속주(屬州) 가운데서 북아프리카 지역의 중심지로 부상합니다.
          신약성경의 시몬이 바로 구레네 사람입니다.
          예수님께서 고난의 길(ViaDolorosa)을 걸어가실 때에 로마 병사들이 잡아다가 억지로 십자가를 끌고 가게 한 사람말이지요(마 27:32 ; 막 15:21 ; 눅 23:26).

          각각의 성경에서 단 한 절로만 구레네 사람 시몬에 대해 짤막하게 소개하고 있지만, 시몬에 대해서 말하려고 하면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으로서 창피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시몬에 대해서는 거의 알려진 바가 없습니다.
          구레네 사람이라고 하지만, 구레네에서 유월절 순례를 위해 예루살렘에 왔었는지, 아니면 그가 태생만 구레네이고 예루살렘 주변이나 유대 땅 어디에선가 살았던 사람인지, 그가 예수님을 따르던 사람들 중에 하나였는지, 아니면 그 고난의 길에서 예수님을 처음 만난 것인지 성경에는 이렇다 할 단서가 없습니다.

          신약성경에서 “구레네 사람 시몬이 누구인가?”에 대해서는 설명하지 않지만, 확실하게 말하는 것은 그가 자발적으로 십자가를 지고 간 것이 아니라 로마 병사들에 의해서 억지로 끌고 갔다는 겁니다.

          예수님께서 걸어가신 고난의 길에는 많은 사람들이 나와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고 통과하셨던 그 길은 십자가만을 위해서 만들어놓은 특별한 길이 아니라 시장통이었거든요.
          예수님의 주변에서 예수님을 향해 돌을 던지고 소리치던 많은 사람들 중에는 예수님께서 가시는 곳마다 좇아다니며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감동을 받았던 사람, 예수님의 기적을 눈으로 직접 본 사람, 기적의 당사자, 그리고 제자들이 있었을 겁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고 골고다 언덕을 향하여 올라갈 때에 그 누구도 채찍질하는 로마 병사들을 말리지 않았고, 예수님께서 쓰러지셨을 때에 어느 누구도 쓰러지신 예수님을 일으켜주는 사람이 없었다는 겁니다.


          다섯 번째 장소 :
          구레네 사람 시몬이 예수님의 십자가를 함께 지고 골고다 언덕을 향해 올라가기 시작한 곳을 기념하는 곳.
          이곳을 기념하는 작은 예배당으로 들어가는 입구의 오른쪽 벽에는 비틀거리시던 예수님께서 손을 짚으셨다고 전해져 내려오는곳이 있다. 순례객들은 예수님의 손과 포개어보기 위해서 이곳에 손을 대고 간다.

          그 구경꾼 가운데 구레네 사람 시몬도 있었습니다.
          보다 못한 로마 병사는 누군지도모르는 시몬을 붙들어다가 예수님의 십자가를 억지로 함께 지고 가게 하였습니다.
          십자가를 메고 가기 싫었고 예수님에 대해서 관심이 없었을지도 모르는 시몬이 알지도 못하는 예수라는 사람의 십자가를 아무런 감동과 슬픔도 없이 마지못해 억지로 끌고 갔다고 흉보지는 마세요.

          시몬 외에는 아무도 예수님의 고난의 길을 함께 걸어간 사람이 없었으니 말예요.

          불과 며칠 전까지만 해도 “호산나!”를 외치며 열광하던 무리들은 다들 욕설을 퍼붓고 돌을 던지고 예수님의 고난을 재미삼아 구경하고 있었고, 예수님의 제자라는 사람들은 죄다 도망갔는데 억지로라도 예수님의 십자가를 함께 끌고 갔다는 것이 얼마나 장한 일인가요?

          기대하지 않았고 예상치도 못했던 단 한번의 만남이었지만 시몬에게는 충격적인 만남이었고, ‘내가 십자가를 함께 져주고 있는이 ‘예수’라는 인물이 누군가?’ 하는 의문과 함께 예수님에 대해서 전혀 모르던 사람이 예수님을 전하는 사람으로 바뀌었습니다.

          스데반이 순교한 후에 예수님을 따르던 사람들이 소아시아 지방 여러 곳으로 흩어질 때에 구레네 사람 몇몇이 안디옥에 이르러 복음을 증거한 이야기가 사도행전에 전해지는데, 학자들 중에 일부는 그 구레네 사람들 중에 시몬이 있지 않았는가 추측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행 11:20).
          뿐만 아니라, 그의 두 아들 중 하나인 루포는 로마의 초대교회에서 바울과 함께 중요한 일을 하였습니다.
          바울은 구레네 사람 시몬의 부인이자 루포의 어머니를 “내 어머니”라고 부를 정도였으니 말이지요.


          알렉산더의 뼈 상자 : 고고학자들의 연구 결과, 70년 이전의 것으로 판명되었으며, 뼈 상자의 뚜껑에는 “구레네 사람 알렉산더” 그리고 상자의 옆면에는 “시몬(의 아들) 알렉산더”라고 기록되어 있다.
          기드론 골짜기 실완 남쪽에서 히브리대학교 교수 수케닉에 의해서 발굴되었다.

          또 다른 아들 알렉산더에 대해서는 성경에 제대로 나와 있지 않지만, 1941년부터 시작된 히브리대학교 고고학 발굴단에 의해서 그가 예루살렘에서 사역했다는 간접적인 증거를 찾아낼 수 있었습니다.

          실로암 연못 남쪽에 있는 기드론 골짜기의 오래된 무덤들을 발굴하던 중, “시몬의 아들 알렉산더”라는 1세기의 뼈 상자(Ossuary)가 발견된 것이지요.
          그 상자에는 주인인 알렉산더가 구레네 사람( קרנית )이라고 그 출신지까지 명확하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고고학자들은 이 뼈 상자의 주인이 신약성경에 나오는 구레네 사람 시몬의 아들 알렉산더라고 확인해주었습니다.

          유월절 즈음이 되면 유대인들은 이스라엘에서 명절을 보내려고 세계 각지에서 날아옵니다.
          엄청난 수의 기독교인들은 그 즈음에예루살렘에서 부활절을 보내려고 세계 각지에서 찾아오지요.
          온 예루살렘의 숙박 시설들은 이미 예약이 끝났고 유대인들과 기독교인들은 서로 다른 마음을 가지고 예루살렘성을 채울 겁니다.
          그때에 적어도 기독교인들이라면 구레네 사람 시몬도 함께 기억해주었으면 합니다.


          "억지로"라는 단어의 "부사"로 "이치나 조건에 맞지 아니하게 강제로"라는 뜻입니다.
          영어로는 "by force"라고 합니다.
          헬라어로는 "엥가류오(anggarĕuō. ἀγγαρεύω)" 라고 합니다.
          '엥가류오'의 뜻은 "강제로 봉사하게 하다, 강제하다, 억지로 가게 하다"입니다.

          "시몬(Simon)"이란 이름의 뜻은 "총"이라고 합니다.
          '시몬'은 억수로 재수 없는 사람입니다.
          유월절 절기를 맞아 그 먼 곳에서부터 예루살렘을 방문했을 때 마침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짊어지고 사형장으로 끌려가는 광경을 구경하게 되었습니다.

          "구레네"는 현재 아프리카 북부에 있는 리비아의 수도인 "트리폴리"라고 합니다.
          마치 촌놈의 행색이 로마 군병의 눈에 쉽게 들어왔겠지요.
          그때 마침 십자가를 짊어지고 가시던 예수님께서 지쳐 쓰러지므로 로마 군병은 수많은 군중들 가운데서 '시몬'에게 그 십자가를 짊어지게 한 것입니다.

          아마 '시몬'은 피부빛이 검은색이었을 것으로 추측합니다.
          왜냐하면 구레네 출신이라고 소개하였기 때문입니다.
          많은 군중 가운데서 얼굴빛이 다른 '시몬' 로마 군병의 눈에 다가왔을 것입니다.

          사랑하는 믿음의 동지들이여!
          '시몬'에게는 얼마나 수치스럽고 재수없는 순간이었을까요?
          그런데 '시몬'은 일생의 단 한번의 수치스럽고 재수없다고 생각한 그 순간이 일생의 삶을 주님을 위한 헌신의 삶을 살았던 기회가 되었습니다.

          그 이유는 "주 안에서 택함을 입은 루포와 그 어머니에게 문안하라. 그 어머니는 곧 내 어머니라." 라고 사도 바울은 극찬하였기 때문입니다(로마서 16:13).

          '루포'에 대해서 성경은 이렇게 증언합니다.
          "마침 알렉산더와 루포의 아비인 구레네 사람 시몬이 시골로서 와서 지나가는데 저희가 그를 억지로 같이 가게 하여 예수의 십자가를 지우고."(마가복음 15:21)

          마가복음은 복음서 가운데서 가장 먼저 기록된 말씀입니다.
          마가의 증언은 구레네 사람 시몬은 루포의 아버지라고 합니다.
          억지로 짊어질 수밖에 없었던 그 십자가로 인하여 구레네 시몬의 집안은 위대한 사도 바울로부터 가장 가까운 사이라고 인정을 받았던 것처럼 오늘날도 억지로 짊어진 무거운 짐 때문에 근심과 걱정에 붙잡힐 것이 아니라 은총의 기회가 될 것으로 믿고 순종하여 전혀 예상하지 못한 신앙의 명품 가족들로 회복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나가다가


          '시골에서' 올라온 구레네인 시몬과의 만남이 곧 있었던 것으로 보아(막 15:20, 21) '관정으로부터' 나갔다는 말이 아니라 '예루살렘 성 밖으로 나갔다'는 말로 보아야 할 것이다.

          한편 사형 집행이 성 밖에서 집행되었던 규정(레 24:14; 왕상 21:13)과 사람들이 많은 곳을 통과하여 형장에 이르게 하는 그 당시 관례에 따라 예수는 예루살렘 시민이 모두 목격할 수 있는 대로로 나아갔을 것이다.

          그런데 오늘날 예수께서 나아갔던 그 고난의 길을 가리켜 '비아 돌로로사'(Via doloro-ssa)라 명명하여 기념하고 있다.
          여하튼 예수께서는 당시 심한 매질로 인해 거의 기진했기 때문에(요 19:17) 혼자의 힘으로 형장에까지 완전히 나아갈 수 없었다(히 13:13).

          시몬이란 구레네 사람

          아마 그는 리비아 서북편에 위치한 구레네의 '디아스포라'란 큰 유대인 집단에(Jos.,Antiq.,XIV.7,2;Cont.Apion., 제 2권)소속된 일원이었던것 같다(행 11:22; 13:1).
          한편 구레네 거주자들은 예루살렘에 자기들의 회당을 갖고 있었던 것 같으며, 시몬은 이때 유월절 행사를 위해 예루살렘에 입경한 것으로 보인다.
          또한 그의 아들 알렉산더와 루포가 사도들에게 잘 알려진 사실로 미루어 볼 때에 (막 15:21; 롬 16:13), 시몬 역시 이 사건 이후부터 그리스도인이 되었음에 틀림이 없다.
          사실 경건한 유대인이라면 어느 누가 유월절과 안식일을 눈 앞에 두고 피 흘리는 십자가를 지고자 했겠는가마는 이때 구레네 시몬은 아무런 원망과 불평없이 예수의 고난에 동참하였다.
          비록 항거할 수 없는 로마의 군법에 따라 징발(徵發)되는 비운을 맞았으나 그는 피 흘리며 죽어가신 예수의 최후를 누구보다 생생히 목격할수 있었으며, 그후로 전가족이 구원얻는 크나큰 측복을 누리게 되었던 것이다.

          '억지로'(엥가류산)


          페르시아에서 유래한 말로서 마치 중앙정부로부터 특명을 받은 전령이 목적지로 가기 위해 강제로 말이나 사람을 차출해갔던 상황을 묘사한 것(5:14).
          여기서는 '징발하며'라는 말로 번역할 수 있다.

          여하튼 구레네 시몬은 '억지로' 십자가를 졌지만 결과적으로 '억지로'축복을 받은 격이 되었다.
          여기서 십자가에 대해서는 막 15:21-34의 강해를 참조하라.

          한편 본절은 성경 해석에 있어서 중대한 오해를 일으키는 구절이기도 하다.
          즉 제 2세기 영지주의의 이단자였던 바실리데스(Basilides)는 예수가 아니라 구레네 시몬이 도중에 바뀌치기 당해 십자가에 죽었다고 한다.
          더욱이 그는 34절의 '예수께'는 원문에 의하면 '그에게' 이고 따라서 본문상 '시몬에게'라고 이해할 수 있게 된다고 덧붙인다(31절 이후에는 원문상 예수라는 이름이 언급되지 않는다).

          그리고 35절의 '예수를 십자가에'도 원문에는 '그를 십자가에'라고 되어 있어 이 경우 역시 '시몬을 십자가에'라고 생각할 수 있다는 것이다.

          물론 바실리데스의 견해는 이 장면을 철저히 오해한 것이며, 이일로 인해 그는 이단자로 정죄되었다.
          사실 법적용에 있어서 철저했던 로마 당국자들과 또한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기 심히 원했던 유대지도자들이 이러한 실수를 용인할리 만무하다.

          그와 더불어 요한복음 19:17에 의하면 예수께서 '자기의 십자가를 지시고 골고다로 나가셨다'고 분명히 기술하고 있다.

          억지로(29) 엥가류오(anggarĕuō) ἀγγαρεύω 

          1. 강제로 봉사하게 하다.  2. 강제하다.  3. 억지로 가게 하다
          발음 / 엥가류오(anggarĕuō)
          어원 / 외래어에서 유래
          관련 성경 / 억지로 가게 하다(마 5:41, 막 15:21).
          신약 성경 / 3회 사용


          고린도후서 9:7
          각각 그 마음에 정한대로 할 것이요 인색함으로나 억지로 하지 말찌니 하나님은 즐겨 내는 자를 사랑하시느니라.

          성경에서 이름이 나오는 것은 큰 영광이라 생각한다.
          권력자도 아니고 뛰어난 업적을 쌓은 것도 아닌 구레네 사람 시몬의 이름이 성경 이곳 저곳에서 언급이 된다.
          억지로 예수님 대신에 십자가를 지었지만, 그는 하나님께서 택하신 기뻐하시는 사람이었다.

          이 말씀을 생각하며 주님께서 “자신을 따르기 위해서는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하신 말씀이 생각이 난다.
          마태복음 16:24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주님을 따르는 자들에게는 주님께서 각자에게 지워준 어려움과 문제들의 십자가가 있는데 그것을 온전하게 감당하기 위해서는 먼저 자신을 부인하고 주님을 따라야 한다고 제자들에게 가르치신다.

          이 말씀의 좋은 예가 시몬일 것이다.

          누가복음에는 표현되어 있지 않지만 마태복음 27:32과 마가복음 15:21을 보면 시몬은 ‘억지로’란 단어를 삽입하여 예수님의 십자가를 대신 지었다고 부연하여 분명하게 설명하고 있다. 
          시몬은 기꺼이 자신이 원해서 십자가를 대신 진 것이 아니라 자신의 뜻과는 상반되게 십자가를 억지로 지었다고 말하고 있다.


          우리는 이해할 수 없는 주님의 뜻

          시몬은 억지로 예수님의 십자가를 대신 지는 사건을 통하여 주님을 만났고 그 후에는 완전하게 변화된 삶을 살며 주님께서 계신 천국을 소망하는 축복받은 인생의 길을 가게 된다. 

          시몬이 대신 예수님의 십자가를 진 것은 구원을 얻게 하시는 이해 할 수 없는 주님의 전적인 은혜이다. 

          억지로 십자가를 대신 지었지만, 이 사건은 시몬은 이해할 수 없는 주님의 뜻이었던 것이다.
          구레네는 현재 아프리카 북부에 있는 리비아의 수도인 트리폴리이다. 
          무슨 일인지 시몬은 그곳으로부터 예루살렘에 오게 되었다.

          사도행전 13:1의 말씀에서 시몬을 니게르 시몬이라 말한다.
          ‘니게르’는 피부가 검은 아프리카인을 말한다.
          아마 시몬은 아프리카의 피를 이어받은 혼혈 유대인이며 유월절을 지키기 위해 예루살렘에 온듯 하다.
          그런데 마침 많은 사람들이 모여서 구경을 하고 있었다.
          피투성이의 처참한 몰골의 한 사내가 무거운 십자가를 지고 가다 너무나 힘이 들어 주저 앉아 있다.
          아무리 군사가 채찍을 내리쳐도 너무나 지치고 힘도 없어 꿈적도 하지 않는다.
          그러자 군졸 중의 하나가 갑자기 자신을 지목하여 끌어 내어 대신 억지로 십자가를 지게 한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고 가는 것을 구경하다가 전적으로 타인에 의하여 부지불식간에 예수님의 십자가를 대신 지게 된 시몬.  
          시몬은 자신이 자원해서 십자가를 대신 지고 가지 않았다.
          예수님이 불쌍하고 가엽게 보여서 십자가를 대신 진 것이 아니다.
          예수님의 복음을 듣고 변화 받아서 십자가를 대신 진 것이 아니다.
          예수님의 형제요 친척이여서 십자가를 대신 진 것이 아니다.
          예수님의 제자여서 십자가를 대신 진 것이 아니다.
          어쩌다가 그 시간에 그 자리에 있다가 뜻하지 않게 지목되어 십자가를 지게 되었다.
          주님을 만나는 것은 나의 뜻대로 내가 원해서 만나는 것이 아니다.
          내가 생각지도 못한 장소와 때에 뜻밖으로 주님을 만나게 된다.
          주님께서 나에게 베푸시는 은총이며 나를 택하신 주님의 뜻이다.
          자녀로 택하심은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이다.
          시몬은 자신의 뜻은 아니었지만 주님을 만났고 택함으로 구원을 입었다.
          시몬은 방관하며 구경하는 한 사람으로 피투성이가 된 예수님의 마지막 길을 보고 있다가 억지로 택함을 입었다.
          시몬의 선한 행위로 주님의 택함을 받아 십자가를 지고 구원을 받은 것이 아니다.  

          시몬과 같이 우리 역시 주님의 은혜로 값없이 속량함을 받아 주님의 자녀가 되었다.
          나의 어떤 선한 행위로 구원을 받은 것이 아닌 전전인 하나님의 은혜다.

          로마서 3
          :24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마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 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에베소서
          2:8-9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하지 못하게 함이라.


          삶의 전환점
          얼마나 축복을 받은 인생인가.
          예수님을 만나기 전과 만난 후의 삶은 전적으로 다른 삶을 살았던 구레네 사람 시몬. 


          시몬은 억지로 예수님의 십자가를 대신 지었다.
          십자가를 지고 가면서 불평하고 욕도 하였을 것이다. 그러면서 내가 대신 진 십자가에 달릴 예수님이 누구인지 궁금했을 것이고, 예수님을 간혹 쳐다 보았을 것이며 예수님 역시 자신의 십자가를 대신 지고가는 시몬을 쳐다 보았을 것이다.


          주님께서는 자신을 알고 싶어하는 자에게는 우리 인간이 이해하지 못하는 방법으로 누구인지를 알게 하신다.
          (눅19:3) 그가 예수께서 어떤 사람인가 하여 보고자 하되
          (눅19:5) 예수께서 그 곳에 이르사 쳐다 보시고 이르시되 삭개오야 속히 내려오라. 내가 오늘 네 집에 유하여야 하겠다 하시니
          (눅22:61-62) 주께서 돌이켜 베드로를 보시니 베드로가 주의 말씀 곧 오늘 닭 울기 전에 네가 세번 나를 부인하리라 하심이 생각나서 밖에 나가서 심히 통곡하더라.


          공통으로 사용된 단어는 “본다”가 사용되었다.
          예수님께서 누구인지를 보기를 원하는 자를 예수님께서 보실 때에 그에게는 축복이 임한다.


          예수님이 누구인지를 알고 싶었던 삭개오는 예수님을 만났고, 그 후의 그의 삶은 전적으로 바뀌었다.
          삭개오가 예수님이 누구인지를 보고자 해서 나무위에 올라가 있을때, 예수님께서 삭개오가 있는 나무 아래에 오셔서 삭개오를 보자 삭개오에게는 축복이 임했으며 그와 그의 집에는 구원이 임했다.


          주님을 세번 부인한 베드로는 주님께서 자신을 쳐다 보시자 비로서 참된 주님을 만나게 되어 전적으로 변화를 받아 주님의 제자로서의 사명을 감당하게 된다. 그전에는 무섭고 두려워서 사람들에게 주님을 모른다고 부인하였지만, 주님께서 쳐다 보시자 그는 변화를 받아 죽음도 두려워 하지 않는 주님을 복음을 전하는 주님의 제자로 바뀐다.


          성경에는 기록이 되어 있지는 않지만 주님께서는 분명 자신의 십자가를 대신 진 시몬을 보셨을 것이다.
          시몬은 그저 십자가를 지고 가는 사형수들을 구경하던 방관자의 하나였지만, 주님께서는 시몬을 자신의 십자가를 대신 지고 갈 자로 택하셨다.


          예수님을 만나기 전과 만난 후의 전적인 다른 삶을 살게 된 시몬.
          자신의 십자가를 대신 진 시몬을 바라 보신 예수님. 그는 전혀 생각지도 알지 못했지만 예수님의 십자가를 대신 진 사건은 그의 삶의 전환점이었던 것이다.  주님을 만난 시몬은 그 후 전적인 삶의 변화를 경험하며 초대교회의 귀한 초석이 되었으며, 그로 인해 지금의 나에게도 복음이 전하여졌다.  시몬이 억지로 십자가를 진 것은 그의 삶에서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축복이며 주님의 은혜였던 것이다.



          변화된 시몬
          주님의 십자가를 대신 진 시몬은 그 후 변화된 삶을 살게 된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대신 지었기에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기 까지 지켜 보았을 것입니다.
          온 하늘과 땅을 캄캄하게 뒤덮는 깊은 어둠의 두려운 신기한 현상을 보았고, 예수님께서 강도와 제자와 하나님과 말씀하시는 것을 들었으며, 군사들이 수군거리는 것을 들었고, 십자가에서 죽으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보았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고 돌무덤에 안치된 후 삼일 후에 예수님의 시체가 없어졌는데 더욱 놀라운 일은 예수님께서 부활하셨고 그 후에 제자들 앞에 나타나셨다는 믿을 수 없는 놀라운 소식이 들리며 내가 대신 십자가를 진 예수님은 누구이신가 더욱 알고 싶어졌을 것입니다.

          십자가를 대신 진 시몬을 제자들은 보기를 원했을 것입니다.
          시몬 역시 자신이 대신 십자가를 진 예수에 대하여 알고 싶어서 제자들에게 찿아갔을 것입니다.
          시몬은 주님의 제자들과 대화를 나누며 예수가 누구인지를 알게 되었고 예수당의 일원이 되었을 것이며 그 후에 초대교회의 귀한 일군이 될 수 있엇습니다.
          그후 시몬은 안디옥 교회를 섬기게 됩니다.

          사도행전 11:19-21
          그 때에 스데반의 일로 일어난 환난으로 말미암아 흩어진 자들이 베니게와 구브로와 안디옥까지 이르러 유대인에게만 말씀을 전하는데 그 중에 구브로와 구레네 몇 사람이 안디옥에 이르러 헬라인에게도 말하여 주 예수를 전파하니 주의 손이 그들과 함께 하시매 수많은 사람들이 믿고 주께 돌아오더라.

          예수님을 만나 변화된 시몬은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신대로 병든 자를 고치고 귀신들린 자를 고치고 주의 복음을 전파하는 전도자로서의 삶을 살았으며 많은 사람들이 주님의 품으로 돌아오게 되었고 안디옥교회의 초석이 되었습니다.
          시몬은 주님의 제자의 삶을 살았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듯이 주의 복음을 전파하며 포로 된 자들을 자유케 하였으며 병든 자들을 고치며 천국을 선포하였다.

          (
          눅4:18-19)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 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롭게 하고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
          행13:1에는 안디옥 교회의 사역자들을 소개하는데 곧 바나바, 구레네 사람 시몬과 루기오, 그리고 사울이 나온다. (행13:1) 안디옥 교회에 선지자들과 교사들이 있으니 곧 바나바와 니게르라 하는 시므온과 구레네 사람 루기오와 분봉 왕 헤롯의 마나엔과 및 사울이라.
          시몬은 안디옥 교회에서 선지자요 교사로서 바나바와 바울과 함께 섬겼다. 시몬은 사울과 바나바의 동역자였던 것이다.  사울은 이들과 친분을 가졌다.
          사도바울은 로마서에서 루포와 그의 어머니 곧 시몬의 아내를 소개한다.
          (롬16:13) 주 안에서 택하심을 입은 루포와 그의 어머니에게 문안하라. 그의 어머니는 곧 네 어머니니라.
          특히 로마교회의 성도들에게 루포의 어머니를 너의 어머니라 소개를 한다. 그만큼 시몬과 사도바울은 친구처럼 지냈으며 초대교회에서 주님께서 귀하게 쓰신 종이었다.  그의 아들들인 루포와 알렉산더 역시 교회의 중요한 일군이 되었다. 그래서 마가는 시몬을 알렉산더와 루포의 아버지라고 소개를 한다.
          (막15:21) 마침 알렉산더와 루포의 아버지인 구레네 사람 시몬이 시골로부터 와서 지나가는데 그들이 그를 억지로 같이 가게 하여 예수의 십자가를 지우고
          시몬은 성경에서 말씀하듯이 예수님의 십자가를 억지로 대신 지었지만, 예수님을 만났다.  그 후에는 전적으로 변화된 삶을 살아 초대교회의 중요한 초석이 되었다. 그 후 시몬은 천국에서 많은 영혼들에게 귀감이 되었을것이다.

          말씀을 정리하며,
          이해할 수 없는 주님의 은혜가 지금의 우리에게도 임한다.
          원하지 않는 십자가를 억지로 대신 지었는가?
          전혀 원하지 않는 십자가를 대신 지게 하심은 주님의 은혜이다.
          내게 억지로 지워진 십자가를 지고 앞으로 앞으로 나아가자. 언젠가는 골고다에 이를 것이지 않겠는가. 그곳에서 내게 지워진 십자가를 내려놓고 예수님께서 계신 곳으로 나아가자.

          그러면 우리가 믿겠노라(마태복음 27:42b)

          우화 중에 두려움 많은 겁 많은 생쥐에 대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태어날 때부터 겁 많은 생쥐 한 마리가 있었습니다.
          이 생쥐는 저 멀리서 걸어가며 울고 있는 고양이 소리만 들어도 오금이 저려서 자기 집에서 한 발짝도 나가지 못하는 겁쟁이였습니다.
          이렇게 해서 도저히 살수가 없습니다.
          잠도 잘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그가 하나님께 찾아가서 하나님 저를 제발 고양이로 만들어 주세요. 라고 청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불쌍히 여기셔서 그 생쥐를 고양이로 만들어 주었습니다.

          이제 고양이가 된 생쥐는 아주 활기 있게 사방을 뛰어다닐 줄 알았는데, 어느 날 하나님이 보니 고양이가 된 생쥐가 역시 겁에 질려 구석에 쪼그리고 앉아 있었습니다.
          ‘이제 고양이가 되었는데, 뭐가 그리 겁이나?’
          ‘예, 하나님 개가 겁이 나서 꼼짝을 할 수가 없습니다.’
          개가 어느 한 마리의 쥐를 잡아먹는 모습을 본 이 고양이가 된 생쥐는 개가 겁이 나서 자기 집에서 한 발짝도 나가지 못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다시 개로 만들어 줄 것을 부탁합니다.
          하나님께서 고양이가 된 생쥐를 다시 개로 만들어 주셨습니다.

          그런데 개가 되어서 사방을 멍멍 짖으며 재밌게 뛰어 다닐 줄 알았던 그 개가 여전히 자기 집에서 꼼짝을 못하고 앉아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다시 묻습니다.
          ‘이제 개가 되었는데 무엇이 그렇게 겁이 나서 재밌게 다니지 못하느냐’
          ‘하나님 호랑이가 겁이 나서 꼼짝을 할 수가 없습니다.’ 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그에게 말하기를 ‘얘야, 내가 아무리 애써도 네 마음이 생쥐라면 아무 소용도 없겠구나, 뭐 벌벌 떨 바에야 다시 생쥐로 돌아 가는게 낫겠다.’
          그래 다시 생쥐가 되었더랍니다. 

          사람도 마음에 변화가 없으면 외적 조건이 아무리 달라진다고 해도 매 한가지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사람들은 언제나 모든 책임을 환경에 돌리려고 합니다.
          물론 환경의 영향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지만, 환경과 나, 어느 쪽이 먼저입니까.
          내가 환경을 바꿀 수 있는 것입니까.
          아니면 환경이 나를 완전히 삼키는 것입니까.
          무엇이 진정 사람의 모습입니까.
          환경이 아무리 달라져도 마음이 달라지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환경에 대해서 뿐만 아니라 우리 속에 있는 욕망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속에 있는 끝없는 욕망, 우리는 그 욕망이 채워지면 될 것이라고 전제 합니다.
          그래서 집 없는 사람은 집이 있었으면 하고, 병든 사람은 건강했으면 하고, 직업 없는 사람은 직업만 있으면 아무 소원도 없을 것이라고 말을 합니다만, 그런 것이 다 채워져도 마찬가지입니다.
          욕심은 점점 더 커집니다.
          채울 수 없는 끝없는 욕망에 사로잡혀서 헤어나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근본적으로 이 욕망의 문제를 완전히 제어하고 자기 자신을 다스리지 못하는 사람이라면 물질로도 명예로도 그는 절대로 평안하거나 행복할 수 없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환경의 문제, 밖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내가 잘 이해하고 받아들여서 내 것으로 만드는 것이 더 중요한 문제라는 말씀입니다. 

          밖에서 일어나는 변화, 이건 내 힘으로 되는 것이 아니지요.
          그런데 밖에서 내 의지와 상관없이 일어나는 큰 일, 놀라운 일들이 일어나기를 바랍니다.
          이런 것을 우리는 신앙적으로 기적이라 말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 기적마저도 내 수준에서, 내 판단에다 딱 맞추어서 그 기적을 이해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이 있다는 것입니다.
          흔히 이것을 전문용어로 ‘Tunnel View’라고 합니다.
          우리나라도 요즘 터널이 굉장히 많습니다. 

          그런데 우리나라의 터널을 뚫는 기술이 굉장히 발달하여서 세계에서 1, 2위라고 합니다.
          아무리 큰 산도 양쪽에서 뚫기 시작하면 그 속에서 기차게 딱 들어맞는다고 합니다.
          그래서 요즘 고속도로를 내거나 하면 터널을 굉장히 많이 뚫고 굉장히 긴 터널들이 많이 생겼습니다.
          그런데 그 터널을 바라다보는 눈, 그런 뜻입니다.
          tunnel view. 밖이 아무리 맑고 아름다워도 터널을 들여다보면 긴 굴 저 끝에 구멍이 조그마하게 보입니다.
          그리고 아무것도 안 보입니다.
          내 앞에 있는 세계를 이렇게 ‘tunnel view’로, 꼭 굴을 들여다보듯이 보고 거기에다 맞추려고 합니다.
          여기에 맞지 않는 것은 뭐든지 내가 이해할 수도 없고, 받아들이지도 않습니다.
          바로 이런 내 방식, 내 방법대로, 내 세계관 안에서 하나님의 세계를 이해하겠다고 고집을 부립니다.
          사람의 이런 어리석음이 우리의 신앙생활 속에 있다는 말입니다. 

          기적은 있습니다.
          생각해보면 모든 것이 기적입니다.
          기적 아닌 것이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기적을 인정하려 하지 않습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면 우리가 믿겠노라’ 이게 무슨 말입니까.
          지금 십자가 밑에서 소리 지르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십자가에다 못 박아 놓고, 자기들이 못 박아놓고 하는 말이 ‘지금 십자가에서 내려올지어다.
          그러면 우리가 믿겠노라!’
          그렇습니까? 그렇게 되면 정말 믿을 것 같습니까?

          오늘 십자가 밑에서 소리 지르는 사람들을 보십시오.
          자기들이 십자가에 못 박아놓고는 ‘뛰어내려!’ 뛰어내리면 믿겠노라 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허구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미 많은 이적을 행하셨습니다.
          병자를 고치셨지요.
          장님의 눈을 뜨게 하셨지요.
          그리고 죽은 자를 살리셨지요.
          5천명을 먹이셨지요.
          예수님의 생애는 온 통 이적과 기사로 충만합니다만 이것을 바라보았던 바리새인, 서기관들이 예수님을 끈질기게 따라다니며 괴롭힌 것이 뭡니까.
          하늘로부터 오는 표적을 보이라는 것입니다.
          또 다른 표적, 지금 보인 것 말고, 다른 뭐 좀 화끈한 것, 천지개벽 같은 좀 기가 찬 그런 기적을 보이라고 재촉합니다.
          이렇게 보면 기적이 없어서가 아니라 기적을 깨닫지 못하는 것이 문제임에 틀림없습니다.
          결국 기적에 대한 ‘Reading Comprehension’ 기적을 이해하는 능력이 필요합니다.
          기적을 읽는 능력 다르게 말하면 기적을 기적으로 받아들이는 믿음이 필요한 것입니다. 

          우리의 주변을 바라보면, 우리가 생각하기를 건강한 것만, 기적이라고 생각하지만, 병이 드는 것도 기적일 수 있습니다. 건강한 사람이 갑자기 어느 날 병이 나, 병원에 가게 되어 병을 발견하고 수술하여 회복하게 되는 것, 병이 든 것 그것이 기적일 수 도 있습니다. 하루를 산 것도 기적이요. 여기와 예배 하는 것도 기적입니다. 하나님이 사람이 되신 것 기적입니다. 그가 십자가에 죽으시고 나 같은 죄인을 구원하신 것도 기적입니다. 그가 사흘 만에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난 것 역시 더 놀라운 기적입니다. 기적이 아닌 것이 없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들의 신앙생활에서 오늘 성경에 나와 있는 어리석은 이 사람들처럼 또 다른 기적을 보기 원하는 어리석은 성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이 보여주시고자 하는 기적은 ‘요나의 기적’이었습니다. 요나의 표적 밖에는 보일 것이 없도다. 이것은 죽었다 사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친히 말씀하셨습니다. ‘밀알 한 알이 떨어져 썩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썩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이렇게 말씀하실 때 예수님은 무엇을 생각하셨겠습니까? 내가 죽어야 열매를 맺느니라. 이 길 외에는 다른 길이 없음을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그것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지금 십자가에서 내려와 죽지 말고 살아라.’ 그것을 보여 달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믿겠다’는 것입니다. 십자가에서 내려와 사는 것만이 기적이라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믿음으로 바라보면 죽는 것이 더 놀라운 기적입니다. 하나님이 사람의 손에 의하여 십자가에 죽는 것이 사는 것보다 더 큰 기적입니다. 우리는 그것을 믿습니다. 

          이집트의 3천년이나 된 미라에서 몇 알의 밀알이 나왔습니다.
          바싹 마른 밀알이었습니다.
          사람들이 신기하여서 그것을 땅 속에 묻고 물을 주었습니다.
          그랬더니 거기서 싹이 나고 열매를 맺었습니다.
          믿거나 말거나 책에 있는 내용입니다.
          밀알이 죽은 사람의 손에 들려 있을 때, 3천년이 지나도 열매를 맺지 않았지만, 그것이 땅에 들어가 죽어서 썩으니까, 싹도 나고 열매도 맺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진리입니다. 

          요사이 새 정부가 새로움을 원하고 새로운 변화를 요구합니다. 옛것의 죽음, 옛 가치관의 매장, 완전히 죽고 사는 역사가 필요합니다. 그러나 바득바득 안 죽으려고 하니까 되는 일이 없습니다. 이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새로운 변화란 바로 죽음에서부터 시작됩니다. 아무도 공천에서 떨어지지 않으려 하고 새로운 변화는 바라고, 어쩌자는 것입니까. 이 진리를 제대로 깨달아 알아야 할 것입니다. 

          보십시오. 십자가 아래 있는 사람들이나 함께 못 박힌 강도들이 ‘니가 정말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지금 십자가에서 내려오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신도 구원하고 나도 구원해 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내려오지 않았습니다. ‘왜’ 입니까? 그는 십자가에서 내려 올 수 있는 능력이 없었습니까? 그것은 십자가에서 내려오는 것이 그들을 구원하는 길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을 구원하는 길은 ‘십자가에서 죽는 것’이었습니다. 죽음 자체에 의미나 능력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그들을 위해서 죽을 수 있는 사랑의 능력이었습니다. 

          독일의 작곡가 멘델스존의 할아버지가 모세 멘델스존인데 이 모세 멘델스존은 키가 작고 곱추였다고 합니다.
          곱사등이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돈 많은 상인의 집에 초대를 받아 갔다가 그 집의 프롬체라고 하는 딸을 보자마자 그만 순간적으로 사랑에 빠집니다.
          참을 수가 없어서 그녀의 방에 조용히 들어갔습니다.
          물론 그 아가씨는 본체도 하지 않습니다.
          말대꾸도 하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용기를 내어 이렇게 물어보았습니다.
          ‘아가씨, 아가씨는 하나님께서 남자와 여자로 부부관계를 맺어주신다는 것을 믿습니까?’
          ‘믿고 말고요. 당신은요? 그렇게 말하는 당신은요?’
          ‘저요, 저는 물론 믿지요. 

          그런데 이런 일이 있습니다.
          내가 어느 때 환상에서 이런 경험을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내게 예쁜 아가씨를 소개하면서, 이 여자와 네가 앞으로 살아야 되겠는데 그런데 세상에 태어날 때는 네가 한 평생 사랑해야 될 이 여자는 곱추로 태어날 것이다.
          너는 곱추와 살아야 할 것이다.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내가 아니올시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곱추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정 그러시다면 내가 곱추가 되겠습니다.
          내가 대신 곱추가 되겠습니다. 했지요.
          하나님께서 그러면, 네가 곱추가 되라. 합디다.
          그래서 내가 곱추가 된 것입니다.’
          프롬체는 다 듣고 나자, ‘그렇게 아름다운 사랑을 마음에 가지고 있나요?’ 하고 감동하였고, 마침내 둘은 결혼했다고 합니다. 

          내가 대신 곱추가 되겠습니다.
          과연 말할 수 있겠습니까?
          이런 사람이 감동을 시키고 이런 감동이 사람을 얻을 수 있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당장 내려오라고 아우성 쳤지만,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죽지 않으면 부활이 없고, 죽지 않으면 구원의 열매를 맺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죽지 아니하면 열매가 없고, 죽음이 없이는 새로움이 없다는 것입니다. 사는 것만이, 살아나는 것만이, 많은 것만이, 높은 것만이, 믿음의 길이라 고집하지 맙시다. 나도 죽을 수 있어야 합니다. 주님이 나를 위하여 죽으신 것처럼 그 주님 앞에서 나도 죽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진정한 그리스도인이라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제 그 모욕에도, 그 희롱과 고통에서도 묵묵히 사랑으로 대응하며 그들을 감동시키고 구원하신 주님을 바라보십시다. 그리고 ‘그러면 우리가 믿겠노라’고 말하며 주님을 다시 아프게 하는 어리석은 자들이 되지 맙시다. 지금까지 우리가 신앙생활하며 십자가 앞에서 기도하면서도 우리에게 무엇인가 또 우리에게 보여주시고, 주시면 그러면 믿겠노라 하여, 주님을 다시 한 번 십자가에 못 박고 아프게 하였던 우리의 잘못을 이제는 다시는 반복하지 맙시다. 이제는 주님의 십자가를 보기만 하여도 우리의 구원되심을 믿고 감사하는 성도들이 될 수 있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여,
          십자가를 지고 가는 예수님을 구경하던 구레네 사람 시몬은 주님의 택하심을 입었읍니다.
          십자가를 대신 지게 된 것은 자신의 뜻은 결코 아닌 타인의 뜻이었읍니다. 
          그렇지만 그것은 자신의 십자가를 대신 지게 하려는 주님의 뜻이었읍니다.
          무거운 십자가를 대신 억지로 지게 된 시몬은 불평하고 원망하며 십자가를 지었지만
          주님은 자신의 십자가를 대신 지고 힘들어 하는 시몬을 보시며 사랑을 베푸셨읍니다.
          시몬은 십자가를 골고다까지 대신 지고 올라가서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시는 모습을 가까이서 목격을 하였읍니다. 두 손과 발을 못박히고 가시면류관을 쓰시고 온 몸이 피 범벅인 되어 십자가에 달리신 주님의 모습은 참혹하였지만 그 가운데서 전해져오는 주님의 모습은 이해 할 수 없는 평온함과 권위가 있었읍니다.
          온 하늘이 캄캄하게 어두워 지는 것을 보며 두려운 마음으로 과연 이가 누구인데 이같은 일들이 일어나는가 의아해 하였읍니다. 그래서 시몬은 주님이 누구인지를 알고 싶어 했으며 결국 시몬은 주님을 만났읍니다.
          시몬은 주님께서 택하신 사람이었읍니다.
          그 후에 그는 변화를 받아 안디옥 교회의 귀한 일군이 되었읍니다.
          그가 전하는 주님의 복음으로 인해 많은 이들이 주님의 품으로 돌아갔으며,
          오늘의 저에게도 복음이 전하여져서 주님의 자녀가 되는 축복의 근원이 되게 하셨읍니다.
          시몬은 자신에게 억지로 지워진 십자가를 대신 지고 골고다에까지 지고 갔읍니다.
          자신이 원하지 않는 십자가를 억지로 대신 지었읍니다.
          그렇지만 그것은 시몬에게는 무엇과도 바꿀수 없는 비교할 수 없는 축복이었읍니다.
          저에게도 때로는 원치 않는 십자가가 억지로 지워집니다.
          하지만 억지로 제가 대신 지는 십자가는 주님께서 베푸시는 은총이며 축복입니다.
          억지로 진 십자가를 통하여 주님을 만나게 하옵서서.
          억지로 지워진 십자가를 달게 지고 가는 훈련을 잘 받기를 원합니다.
          저의 삶이 전적으로 변화받기를 원합니다.
          제게 지워진 십자가를 달게 지고 가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마침 알렉산더와 루포의 아버지인 구레네 사람 시몬이 시골로부터 와서 지나가는데 그들이 그를 억지로 같이 가게 하여 예수의 십자가를 지우고』     -마가복음 15:21

          예수를 데려다가 채찍질하더라 (요한 19:1)

          “로마의 태형은 무시무시하게 잔인한 형벌로 알려져 있죠 채찍은 보통 39개의 가닥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 그 채찍은 땋은 가죽으로 되어 있었고 그 안에는 쇠 구슬이 박혀 있었습니다. 채찍으로 몸을 때리면 구슬들 때문에 깊은 상처나 멍이 생겼고, 채찍질을 계속하면 상처 난 곳이 벌어지기 시작합니다. 또 채찍에는 날카로운 뼛조각들이 박혀 있었기 채찍질을 하면 살이 심하게 찢겨져 나갔습니다. 특히 등이 심하게 찢겨져 나가기 때문에 어떤 경우에는 척추의 일부가 드러나기까지 했습니다. 채찍질은 어깨에서부터 시작해서 그 아래에 있는 등, 엉덩이 그리고 정강이까지 계속 됩니다. 정말 끔찍했습니다. ..... 로마의 태형을 연구했던 한 의사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태형이 계속되면, 피부 밑에 있는 골격 근육까지 찢겨지게 되고 찢겨진 살은 피범벅이 된 채로 리본처럼 덜렁덜렁 매달려 있게 된다"

           

          많은 사람들이 십자가에 달리기도 전에 태형만 당하고서도 죽었습니다. 죽지는 않더라도 희생자는 극도의 고통을 느끼게 되고 저혈량성 쇼크(hypovolemic shock) 상태에 빠집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의 수평들보를 지고 갈보리 언덕으로 비틀거리면서 올라가셨습니다. 그때 예수님은 저혈량성 쇼크 상태에 있었습니다. 결국 예수님은 넘어지셨고 로마 군인들은 시몬에게 십자가를 대신 지라고 명령했죠.】

                                                                  -리 스트로벨LEE STROBEL의 "예수는 역사다" p 257~258

           




           

           

          리 스트로벨의 "예수는 역사다"에서 읽은 것처럼 예수님께서는 전 날 맞은 태형으로 더 이상 십자가를 지실 힘이 없으셨습니다. 그 때 로마병정들은 예수님의 십자가 길에 있었던 건장해 보이는 시몬에게 억지로 십자가를 대신 지게 한 것입니다.

           

          구레네에 살던 시몬은 가족과 함께 유월절을 지키기 위해서 잠간 예루살렘에 올라온 방문객이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로마 군인들에 의해 억지로 예수의 십자가를 대신 지고 골고다로 향했습니다.

          『지나가다가 시몬이란 구레네 사람을 만나매 그에게 예수의 십자가를 억지로 지워 가게 하였더라』  -마27:32

           

          그러나 이 일 후에.....

          구레네 시몬의 가족은 그리도인이 되었고 시몬의 아내는 사도 바울에게 ‘내 어머니’라고 칭해집니다.

           『주 안에서 택하심을 입은 루포와 그 어머니에게 문안하라 그 어머니는 곧 내 어머니니라』  -로마서 16:13

           

          ♣ 십자가를 지는 일, 비록 그 십자가를 억지로 진 것이라 할지라도 십자가를 진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최고의 행운이며 기회이며 축복이라는 것을 말씀을 통해 깨닫게 됩니다.



          퀴어(Queer)는 '기묘한' '괴상한' 등의 사전적 정의를 가지고 있다.
          하지만 최근에는 성소수자를 지칭하는 포괄적인 단어로 쓰인다.

          LGBT
          레즈비언(lesbian)
          게이(gay)
          바이섹슈얼(Bisexual)
          트랜스젠더(transgender)
          인터섹스(intersex)
          무성애자(asexual) 등을 두루 일컫는다.

          게이와 레즈비언은 자신과 같은 성별에 끌리는 성향을 가진 동성애자다.
          바이섹슈얼은 두 개 이상의 젠더에 끌리는 양성애자를 지칭한다.

          트랜스젠더는 신체적으로는 남성 또는 여성의 몸으로 태어났지만 본인은 타고난 자신의 성과 반대되는 성을 가졌다고 여기는 사람, 인터섹스는 남성· 여성으로 구분되는 특질과 다르게 태어난 사람으로 '간성'이라고 한다.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마태복음 27:1-31

                                                                                                피 값(6절)


          예수 그리스도의 피는 영원한 언약의 피(마 26:26-29, 히 13:20-21)

          베드로전서 1:18-19을 볼 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피는 ‘오직 흠없고 점 없는 보배로운 피’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피는 귀중한 피입니다.
          세상 어디서도 찾아볼 수 없는 희귀하고 존귀하고 값진 피입니다.

          히브리서 12:24에서는
          ‘아벨의 피보다 더 낫게 말하는 뿌린 피’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피는 왜 보배로운 피입니까?

          속량(贖良) / 속할 속, 어질 량

          • 1. (몸값을 받고) 종을 풀어 주어서 양민(良民)이 되게 함. 속신(贖身).
          • 2. 속죄(贖罪).
          • 3. 남의 근심과 재난(災難)을 대신(代身)하여 받음.




          예수 그리스도의 피는 만인간의 죄를 사해 주는 공의로운 피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피만이 살아 있는 피요, 만인간의 죄를 사해 주는 공의로운 피입니다.
          예수님의 피는 영원한 언약의 피이기 때문입니다(마 26:28, 막 14:24, 눅 22:20).

          베드로전서 1:18-19에서는 예수님의 피가 우리 죄를 구속했다고 말씀합니다.
          구속이란 값을 지불함을 의미합니다.
          그 값은 예수 그리스도가 흘리신 피값입니다.
          죄의 삯은 사망입니다(롬 6:23).
          그러나 예수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십니다(요일 1:7).
          원죄와 유전죄와 자범죄까지 완전히 깨끗케 하는 것입니다.

          ‘이 피는 죄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라고 말씀하셨고(마 26:28)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피로 말미암아 구속 곧 죄사함을 받았으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엡 1:7).
          이 피는 우리를 죄에서 해방시켰습니다(계 1:5). 

          죄에서 해방 받은 몸입니다.
          사망에서 영원하고 확실한 참된 해방을 받았습니다.
          이제는 죄의 원수가 잡아가지 못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피가 우리를 주께 가까이 다가가게 해주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제는 멀리 있던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워졌느니라’(엡  2:13)

          과거에 죄 지은 일이 있다 하더라도 걱정하지 마시길 바랍니다.
          신앙고백하는 순간 다 씻김을 받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과거를 묻지 않습니다.
          희고 깨끗하게 해주십니다(히 9:14, 계 7:14).
          정결하게 하는 근거는 예수 그리스도의 피 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의 피는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게 합니다(히 10:19-20).
          죄를 사하는 예수님의 공의로운 피를 믿고 날마다 주께로 가까이 가시기를 바랍니다. 

          예수 그리스도 피는 만인간을 행복하게 해주는 피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피가 우리에게 어느 정도의 기쁨, 어느 정도의 행복입니까?

          기억치 않는 행복입니다(예레미야 31:34)
          그들이 다시는 각기 이웃과 형제를 가리켜 이르기를 너는 여호와를 알라 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작은 자로부터 큰 자까지 다 나를 앎이니라 내가 그들의 죄악을 사하고 다시는 그 를 기억지 아니하리라 여호와의 말이니라.

          잘못 쓴 글을 지우개로 지우듯이 예수님의 피는 우리 죄를 영원히 지웠습니다.

          멀리 옮기셨습니다(시편 103:12)
          동이 서에서 먼 것 같이 우리 과를 우리에게서 멀리 옮기셨으며.

          주의 등 뒤로 던졌습니다(이사야 38:17)
          보옵소서 내게 큰 고통을 더하신 것은 내게 평안을 주려 하심이라 주께서 나의 영혼을 사랑하사 멸망의 구덩이에서 건지셨고 나의 모든 는 주의 등 뒤에 던지셨나이다.

          도말해 버렸습니다(이사야 44:22)
          내가 네 허물을 빽빽한 구름의 사라짐 같이, 네 안개의 사라짐 같이 도말하였으니 너는 내게로 돌아오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음이니라.

          이사야 43:2
          나 곧 나는 나를 위하여 네 허물을 도말하는 자니 내 죄를 기억치 아니하리라.


          도말이란 ‘완전히 빼버리다, 완전히 지워버리다’는 뜻입니다.
          우리의 죄를 완전히 지워 버렸기 때문에 예수님의 피는 우리를 행복하게 해주는 피라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주님이 우리의 죄를 기억하신다면 부끄러워서 어떻게 그 앞에 설 수 있습니까?

          미가 7:18-19에서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긍휼히 여기셔서 우리의 죄악을 발로 밟으시고 우리의 모든 죄를 깊은 바다에 던지신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의 죄를 발견하려고 해도 발견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예레미야 50:20에서 ‘그 날 그 때에는 이스라엘의 죄악을 찾을지라도 없겠고 유다의 죄를 찾을지라도 발견치 못하리니 이는 내가 나의 남긴 자를 사할 것임이니라’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복을 받았으니 기뻐하시기 바랍니다.
          시 32:1에 ‘허물을 사함을 얻고 그 죄의 가리움을 받은 자는 복이 있다’고 했습니다. 우리는 망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의 보배로운 피에 적심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용서받지 못할 죄가 없습니다. 영원한 넉넉함으로 용서를 받았습니다. 이렇게 만인간을 행복하게 만드는 예수님의 영원한 피를 날마다 찬양하시기 바랍니다. 

          요한복음 16:33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세상에서 승리하는 길은 예수님 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의 피는 마르지 않는 생명의 근원입니다.
          영원한 승리의 구원입니다.
          교회의 근원입니다(사도행전 20:28).
          너희는 자기를 위하여 또는 온 양떼를 위하여 삼가라 성령이 저들 가운데 너희로 감독자를 삼고 하나님이 자기 로 사신 교회를 치게 하셨느니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만인간의 죄를 사하시고 영원한 행복을 주시는 예수님의 피를 힘입어 날마다 기쁨의 생활을 누리시기 바랍니다. 주님의 보혈로 깨끗함을 받은 우리의 삶에 성령께서 함께 하실 줄로 믿습니다.


          사람 몸에 들어 있는 피의 양은 체중의 약 8% 정도다.
          사람마다 체중에 차이가 있으니 피의 양도 달라지며, 일반적으로는 보통 4~6리터의 피를 지니고 있다고 이야기한다.

          예를 들면 몸무게가 70kg의 경우 혈액의 양은 5.2리터


          예수 그리스도의 피값으로 세운 교회 

          바울은 그 교회를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교회'라고 설명하고 있지요.
          '하나님'이라 표기된 각주 1)에는 "어떤 사본에, 주께서"라고 되어 있지요.
          다시 말하면 주님께서 당신의 피로 교회를 사셨다는 뜻이지요.

          교회 어느 분이 물걸레를 헌신하셨지요.
          그걸 사려고 해도 대가를 치러야 하지요.
          아브라함도 자기 아내의 매장지를 위해 값을 주고 샀지요.

          히브리서 9장 22절에서도 "피 흘림이 없는 즉 사함이 없느니라"
          오늘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도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 피 값으로 우리를 사셨기에 가능한 일이지요.

          바울이 에베소 교회의 장로들을 향해, 에베소 교회를 주님이 자기 피로 사신 교회라고, 그리스도의 피 값으로 교회를 세우셨다고 강조하는 이유가 뭘까요?
          그것은 두 가지 차원이 있겠지요.
          그 하나는 교회란 건물이나 제도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모시는 사람들의 모임이지요.
          그렇듯이 교회의 주권은 그리스도의 피 값에 있는 것이지 사람이 좌지우지할 수 있는 게 아니라는 뜻이지요.
          교회는 인간을 위한 사교 모임이거나 명예욕을 채우기 위한 모임이 될 수 없다는 뜻이지요.
          오직 그리스도 예수의 피 값이 드러나는, 주님을 위한 교회여야 함을 강조하는 것이지요.

          교회는 피 흘림, 곧 헌신과 섬김을 통해 세워진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피 흘림을 통해 교회를 세우셨다면, 교회 공동체 사람들도 자기 피를 흘리기까지 주님의 몸을 세워 가야 함을 강조한 것임을 알 수 있지요.

          우리가 주님의 몸 된 교회를 사랑한다는 것은 그만큼 우리 스스로의 피 흘림, 곧 헌신과 섬김을 통해 가능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지요.

          아브라함과 롯은 삼촌과 조카 사이지요.
          소유의 넉넉함으로 목자들 사이에 다툼이 생겼지요.
          그래서 둘이 갈라졌고 롯이 아브라함 곁을 떠나 소돔으로 향했지요.
          그런데 그곳에서 롯이 이방 땅에 포로로 잡혀가지요.
          그때 아브라함은 롯을 외면하지 않고 집에서 기른 318명을 직접 데리고 가서 구출해 내지요.
          바로 자기 피 흘림을 각오하면서 말이지요.
          그런 삼촌의 모습을 본 롯이 얼마나 감격하겠습니까?

          그런데 그 일이 실은 우리를 위해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신 일이기도 하지요. 죄와 사망의 권세 아래에 놓여 있는 우리를 당신의 피로 사셨으니 말이지요. 십자가의 피 흘림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께서 친히 우리를 하나님의 아들로 삼아 주셨으니 말이지요.
          물론 주님께서 우리를 건져 주신 이유가 우리만 구원받고 천국 가게 하기 위함이 아니지요.

          베드로전서 2:9
          그러나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려 하심이라.

          주님께서 우리를 위해 피 흘려 교회를 세우셨듯이, 우리도 우리의 역량 속에서 우리 자신의 헌신과 섬김을 통해 다른 사람들에게 주님의 은혜를 흘려보내는 통로가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것이 에베소 장로들, 곧 주님의 동역자들이요 대표자들인 장로들에게 바울이 당부하고 있는 바지요.

          그도 그럴 것이 바울이 그와 같은 피 흘림의 각오로 헌신한 것을 3년이나 해 왔다고 31절에서 밝혀 주고 있고 금이나 은이나 의복을 탐한 일도 없이 제 수고로 그 일을 감당했다고 33절에 밝혀 주고 있기 때문이지요.

          오늘 우리도 그런 교회, 그런 주님의 교회를 세우도록 하십시다.
          세상 황제나 권력이나 금권이나 명예의 법칙을 따르는 교회가 아니라 남녀노소 빈부귀천을 막론하고 모두가 함께할 수 있는 교회를 이루어 나가십시다.
          세상의 논리가 아니라 오직 하나님 말씀의 법칙, 예수 그리스도의 법칙으로 교회를 세워 가도록 하십시다.


          이것은 피 값이라

          유다가 '예수의 피(4절)를 팔므로써 벌어들인 돈이라는 뜻이다.
          따라서 대제사장들이 이갈은 단정적 발언을 한 것은 적어도 유다의 행위가 사악한 자신들 의견시에서 볼 때도 옳지 못했다는 점을 간접 시인한 것이다.

          성전고에 넣어 둠이 옳지 않다 

          율법에 의하면서(신 23:18) 이런 피값으로 얻은 돈은 창기나 개같은 자의 돈과 같이 취급되어 여호와께서 미워하는 것으로 간주되었다. 대신 이런 류의 돈들은 자선과 구제 등의 대사회적인 용도로 사용되거나, 현금한 당사자에게 되돌려준 듯하다.
          따라서 제사장들이 유다의 돈을 성전 금고에 넣지 않은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한편 '성전고'로 번역된 헬라어 '코르바나스'는 거룩한 물건과 고르반 등을 보관하는 장소로서(15:5; Jos. Wars II,IX.4), 이곳의 재물들은 주로 각종 제사와 성전 관리를 해 활용되었다.
          그런 점에서 일전에 가룟 유다에게 주어진 은 삼십은 이곳에서 지출된 것이라는 추론(推論)이 가능하다.
          어찌되었든 대제사장을 위시한 유대 지도자들은 엄청난 불의를 자행했음에도 의식상으로는 깨끗하려는 위선을 떨치지 못했던 것이다(12:9-14; 15:1-9; 23:23).


          베드로전서 1:18-19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조상의 유전한 망령된 행실에서 구속된 것은 은이나 같이 없어질 것으로 한 것이 아니요.
          오직 흠 없고 점 없는 어린양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로 한 것이니라.

          예수님의 피가 우리 죄를 구속했다고 말씀합니다.
          구속이란 값을 지불함을 의미합니다.
          그 값은 예수 그리스도가 흘리신 피값입니다.
          죄의 삯은 사망입니다(로마서 6:23)


          오늘날 우리 인간들의 수명이 짧아졌나요?
          아니면 길어졌나요?
          1940년대, 50년대, 60년대, 70년대까지 만해도 60세 이상의 어르신네들을 뵈면 '허리는 꼬부라지고, 완전히 백발인데 다가 힘없는 노인들'이라 생각하곤 했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60대/ 70대 되신 분들은 청춘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정정하십니다.
          어떤 이들은 "인생은 60부터다"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이렇게 수명이 연장된 것은 영양학과 의학/ 유전공학의 발달로 육체의 건강과 생명의 보호에 도움을 주어서 짧아진 수명에 어느 정도 연장 가능성을 보여주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노아의 홍수(B.C. 2348)이전에는 인간의 수명이 훨씬 더 길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아담은 930세까지 살았고, 에녹의 아들 무드셀라(Methuselah)는 969세까지 건강하게 살면서 인생을 즐겼음을 알 수 있습니다.
          노아도 600세 되는 해에 홍수가 발생(창 7:11-12)하였는데, 노아의 홍수란 죄 많은 세상을 하나님께서 심판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노아의 홍수 이후에도 사람들은 계속해서 하나님을 배반하고, 죄 속에 태어나고, 죄 속에서 살다가, 죄 속에서 죽어가게 되었습니다.

          다시 말해서 인류의 무서운 범죄는 하나님의 아름다운 창조에 흠집을 내고, 하나님의 뜻에 어긋나는 결과를 초래하게 되었고, 그 결과로 세상 모든 사람들은 갖가지 질병과 수명의 단축이라는 대가를 치르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100살도 제대로 채우지 못하고 죽어가게 된 것입니다.

          질병은 우리 몸의 균형을 깨트립니다.
          죄와 질병은 인생을 늙게 만들고, 사람을 괴롭히고, 결국 죽음으로 몰아 붙입니다.
          질병은 육체의 병이고, 죄는 영혼의 병입니다.
          그래서, 질병은 육체를 괴롭히고, 죄는 영혼을 괴롭혀서 결국은 우리의 귀중한 삶을 파괴시키고 우리의 짧은 수명을 재촉합니다.
          성경의 가르침에 의하면, 인간의 영·육을 파괴하는 죄의 원인은 아담의 범죄에 있다고 하며, 아담의 죄가 대대손손 모든 인생에게 파급된다고 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아담은 어떻게 누구에 의해서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고 범죄하게 되었나요?
          아담을 범죄하도록 원인을 제공한 것은 뱀입니다.
          뱀이 하와를 유혹했고, 하와는 아담을 유혹하여 범죄의 통로를 만든 것입니다.
          그래서인지 몰라도, 뱀은 어쩐지 기분 나쁜 것이란 생각이 듭니다.
          사실 뱀이란 악어나 호랑이처럼 크지도 않고, 흉칙한 이빨을 가진 것도 아닙니다.
          그런데 왜 사람들은 이와 같이 작은 동물을 무서워하고 싫어할까요?
          그 이유는 간단합니다.
          그것은 이와 같이 보잘것없는 동물이지만 뱀은 인간에게 파괴적이고 고통스러운 결과를 가져오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뱀에게 유혹을 받고, 죄의 사슬에 매이게 된 것입니다.

          성경 말씀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우리 모든 인간은 누구나가/ 누구를 막론하고 모두가 뱀에게 물려 있다는 것입니다.
          뱀에게 물린 인간은 모두가 우리 몸의 피 속에 독액이 스며 들어서 우리가 알게/ 모르게 고통을 당하고 있습니다.
          우리들은 누구를 막론하고, 뱀에게 물려있어서 도덕적으로 혹은 영적으로 절음발이 상태입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로마서 3:9-12에서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인간 모두는/ 누구를 막론하고 모두 죄인이라고 말합니다.

          인간이 이토록 뱀에 물려서 독이 온 몸에 퍼져서 영적으로 고통을 당하고 있는데, 그렇다면, 이런 고통에서 벗어나야 되지 않겠습니까? 우리 피 속에 스며든 독을 제거해야 합니다.
          왜 입니까?
          독을 제거하지 않으면 독이 점점 온 몸에 퍼져서 죽고 말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치료를 받을 수 있나요?
          어떻게 독을 제거할 수 있나요?

          그 방법은 예수께서 우리에게 잘 알려 주셨습니다.
          요한복음 3:14-15, 16절에서 십자가를 쳐다보면, 십자가를 믿으면 치료받을 수 있다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모세
          광야에서 을 든것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그런데 왜 예수는 왜 십자가에서 죽어야 했나요?
          예수께서 왜 십자가에서 희생당해야 했나를 가장 종합적으로/ 신학적으로 표현한 곳이 오늘 본문의 말씀 마태복음 20:28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ransom)로 주려함이라"
          영어로 "A ransom for many"(배상금/몸값)이라고 하는데, 여기에서 "대속물"/"배상금"/"몸 값"이란 뜻은 무엇을 위한 대속물이고, 누구를 위한 배상금인가? 예수의 몸값은 누구를 위해서, 어떻게 지불하는가? 그리고 예수의 십자가상의 죽음이 어떻게 " 많은 사람의 대속물"이 될 수 있는가?

          "예수의 수난"(Passion of Christ)라는 영화를 생각해 보기를 원합니다.
          지금까지 예수에 대한 영화가 수없이 많이 발표되었습니다.
          그러나 이번 Mel Gibson감독이 만든 "예수의 수난"이란 작품은 여러 가지 면에서 특이합니다.
          이 영화의 특이한 점은 예수의 마지막 12시간을 기록한 것으로, 상상을 초월하는 최악의 고문/ 고통/ 수난을 잔인하게 묘사하였습니다. 영화 전체의 길이가 126분인데, 그 중 100분 이상이 예수의 '고문'으로 채워졌습니다.
          이 영화의 특이점 중 다른 하나는 그와 같은 무시무시한 고문을 받는 와중에 예수께서 흘리는 피입니다.
          쇠갈퀴 같은 회초리로 예수의 몸을 내리칠 때마다 살이 찢겨 나가며, 예수의 몸에서 흐르는 피, 온 몸 구석구석의 상처에서 흐른 피, 고문 장소가 예수의 피로 강물이 된 듯... 그뿐인가요?
          가시면류관을 무지막지하게 씌울 때 흐른 피, 십자가에 양손과 발을 못질할 때 홍수처럼 흐른 피...

          인간의 몸에서 피의 기능은 매우 중요합니다.
          피는 우리 몸의 모세혈관에서 흡수한 산소를 온몸의 조직세포에 운반하고, 음식을 먹어서 흡수된 영양분을 온 몸에 운반하며, 온 몸의 조직세포에서 생긴 노폐물을 배설기관까지 운반합니다.
          뿐만 아니라, 피는 우리 체온을 조절하고, 외부로부터 들어오는 각종의 이 물질이나 병균을 물리치는 중요한 역할을 한다.
          이토록 중요한 피를 예수는 그 모두를 모든 죄인들을 위해서 배상금으로 흘리신 것입니다.

          모든 인간은 뱀의 독이 온 몸에 스며들어서 우리 몸의 피 속에는 독소가 들어있는 것입니다.
          즉, 우리의 영혼 속에는 죄의 독소가 스며들어 있어서, 우리가 알게 모르게 고통을 당할 뿐만 아니라, 우리의 영혼이 점점 파멸되어 가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가 스스로를 치료할 수 없으며, 우리 속의 뱀의 독을 스스로 제거할 수도 없는 데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의 희생의 피가 필요한 것입니다.
          다시 말씀 드려서, 우리가 스스로를 구원할 수 없기 때문에 예수께서 죽기까지 희생하면서 우리를 구원하신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감옥에 갇혔습니다.
          이유는 남에게 빚진 것을 갚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 사람의 능력으로는 도저히 그 빚을 갚을 길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어느날, 그의 친구가 감옥에 찾아와서 그에게 그 엄청난 돈을 주면서 빚진 것을 갚으라고 주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친구가 공짜로 준 돈으로 빚을 청산할 수 있게 되어 감옥에서 풀려 나오게 되었습니다.
          누가 그의 빚을 갚아 주었나요?
          그의 친구입니다.
          그 결과 빚진 것을 갚게 되어, 무거운 죄책에서 벗어나 감옥에서 나오게 되고, 해방이 된 것입니다.
          그 죄수가 친구의 돈을 감사히 받는 순간 그는 자유인이 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께서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함"이라고 하신 이 말씀의 의미는 무엇이겠습니까?
          민수기 21장 이스라엘 백성이 뱀에게 물려 고통을 당하고 죽어가고 있을 때, 하나님의 지시에 따라 모세가 동으로 뱀을 만들어, 장대에 매어 달은 뱀을 쳐다보면, 뱀에게 물린 독이 없어지고 치유되어 건강을 회복하는 것처럼, 요한복음 3:14에서 예수께서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고 하십니다.

          예수의 십자가의 죽으심은 과연 무엇을 말하고 있나요?
          예수의 흘린 피 속에는 과연 무엇이 들어있나?
          그 피 속에는 모든 죄인들을 위한 해독제/ 새 언약이 들어 있다는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이 새 언약/ 해독제는 여러분과 저를 위한 것이며, 그것은 나를 위한 영원한 용서이며 구원인 것입니다.
          그것은 감옥에 갇혀있는 나를 해방시키기 위한 것이며, 뱀의 독이 내 몸의 피 속에 숨어있어서 내 영혼을 파멸시킴에서 해독하기 위한 것입니다.

          예수께서 흘리신 피는 우리에게 주신 장수할 수 있는 영생의 선물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요한복음 3:16)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마태복음 27:1-31

                                                                                                피 값(6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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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셀마 라겔뢰프 (문학부문 여성 최초 수상자)

          셀마 오틸리아 로비사 라겔뢰프(Selma Ottilia Lovisa Lagerlöf, 쎌마 라게를뢰프, 1858. 11. 20~1940. 3. 16)는 스웨덴의 작가이자 교사이다.

          1909년 노벨 문학상 부문에서 여성 최초 수상자로 등극한 여류 문학작가로,  1914년 스웨덴 한림원 회원으로도 등극한 최초의 여성이기도 하다.

          새들은 생김새나 우는 소리에 따라 별명을 가지기도 하고 이름을 짓기도 한다.
          또 그와 연관된 전설이나 이야기를 갖는 경우도 있다.
          검은등뻐꾸기는 뻐꾸기와 함께 두견이과에 속한다.
          뻐꾸기처럼 골 깊은 산골짜기 하나를 울리고도 남을만한 소리로, 골짜기마다 자신의 목소리를 심어놓기나 한듯이 구석구석 누비면서 네 음절로 우는 특징이 있다.
          사람들은 이 소리와 음절을 따라 흉내 내는 비슷한 음절의 말들을 만들어냈는데, 여기 지면에 쓰기는 민망스러운 내용이기에 그 중 한 가지만 소개한다면 경상도 음으로 ‘내캉 살자 내캉 살자’고 운다는 것이다.

          호반새는 몸 전체가 붉은 색을 가지고 있어서 ‘불새’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다.
          파랑새는 한 동화의 제목 때문에 행복의 상징이 되었고, 도요새(사실 도요새는 종류가 아주 많다)는 어떤 노랫말 때문에 가장 높이 나는 새로 알려져 그에 대한 질문도 많이 받는다.

          새들의 이야기 중에는 해학적인 야화들도 있는데 그 중 하나가 노래 잘하는 꾀꼬리와 까마귀 이야기이다.
          두 새가 노래시합을 했는데, 심판관인 두루미에게 개구리를 잡아다 바친 까마귀가 이겼다는 야화는 맛깔스럽고 제법 풍자적이다.
          제비는 또 어떠한가. 대한민국 사람이라면 다 아는 흥부와 놀부 이야기 때문에 대접받고 살아가는 새가 제비 아닐까?

          그리고 시어머니의 구박과 시집살이 때문에 피를 토하며 굶어 죽은 며느리가 소쩍새가 되었다는 유명한 전설도 있다.
          그 소쩍새가 세 음절로 ‘솥 작다, 솥 작다’하고 울면 풍년이 오고, 두 음절로 ‘솥탕, 솥탕’하고 울면 흉년이 온다는 이야기는 가난하고 배고픈 시절에 할머니가 손주들의 귀에 들려주는 영양가 높은 이야기 간식이었다.

          진홍가슴(진홍가슴새)의 이야기와 솔잣새의 전설을 알게 되면서, 이 두 새를 카메라에 담아보려고 애를 썼던 적이 있다.
          진홍가슴과 솔잣새는 바로 예수님의 십자가에 연관된 이야기와 전설의 주인공들이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에 드물게 찾아오는 겨울철새인 솔잣새.

          솔잣새는 우리나라에 드물게 찾아오는 겨울철새이다. 다행히도 솔잣새는 여기 지면에 내놓아도 될 만큼 좋은 사진을 담았는데, 진홍가슴의 사진은 지면에 내놓기가 어려울 정도여서 평소 친분이 있는 최동주씨에게 도움을 청했다.

          ‘진홍가슴새’ 이야기는 스웨덴의 여류 작가 셀마 라게를뢰프(Selma Ottilia Lovisa Lagerlöf, 1858~1940)의 동화이다.
          라게를뢰프는 1909년 노벨 문학상을 수상한 최초의 여성이기도 하다.
          이야기의 줄거리는 이렇게 전개된다.

          하나님께서 깊은 생각을 하신 후 잿빛 털을 가진 조그만 새 한 마리를 만드셨다.
          그리고는 ‘진홍가슴새’라고 이름을 붙여 주셨다.
          진홍가슴새는 자신에게 온통 잿빛 털 뿐인데 어찌 이름을 진홍가슴새라고 하셨는지 여쭈어 보았다.

          하나님은 진홍가슴새에게 “네가 참사랑을 베풀 수 있게 될 때에 그 이름에 합당한 깃털을 가지게 될 것이다”고 말씀하셨다.
          어느 날 진홍가슴새의 둥지 근처 언덕에 십자가가 세워졌고, 진홍가슴새는 그 십자가에 달린 사람의 이마에 박힌 가시를 하나씩 뽑기 시작하였다.
          그런데 가시를 뽑을 때마다 솟아나온 피로 인하여 온통 피투성이가 되었다.
          결국 그 사람은 숨을 거두었고 이 새의 가슴에는 핏자국이 남게 되었다.
          더욱 이상한 것은 새가 낳은 새끼들마다 모두 목덜미와 가슴에 선명한 진홍빛을 가진 털이 생겼다는 것이다.

          솔잣새의 전설은 조금 더 간략하다.
          솔잣새의 부리를 보면 아랫부리와 윗부리가 어긋나게 꼬인 것처럼 구부러져 있다.
          휘어지고 구부러진 부리는 솔방울이나 잣 열매를 좋아하는 솔잣새에게 주신 하나님의 선물이 아닐까?
          잣 열매 사이를 부리로 열어 씨앗을 빼 먹기에는 최적화 된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이러한 생김새로 인하여 전설이 생겨났는데, 바로 휘어진 부리와 수컷의 붉은 색 깃에 대한 이야기이다.

          솔잣새는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실 때에 손에 박힌 대못을 부리로 뽑으려다가 그만 부리가 휘어졌으며, 수컷의 붉은색 깃은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흘리신 피가 묻어서 그렇게 변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솔잣새의 부리가 진화론자의 눈에는 진화의 흔적으로 보이기도 했다.
          솔잣새를 ‘다윈의 핀치’라고도 부르는 이유이다.

          이처럼 새들의 외모나 우는 소리로 인하여 사람들이 만들어 낸 이야기들은 오랜 세월이 흘러 그냥 재미있는 전설로 남기도 하지만, 때때로 우리의 정서에 감동을 주며 삶의 비타민 같은 역할을 한다.

          독수리의 전설

          가끔은 새들에 관한 전설을 사실로 오해하는 경우도 있다.
          대표적으로 독수리의 결단과 인내에 대한 이야기이다.
          요지는 이렇다. ‘독수리는 70년을 살 수 있는데, 40살이 되면 부리와 발톱이 휘어져 버리고 깃털은 무거워 날 수도 없게 된다.
          독수리는 이때에 중요한 결단을 해야 한다.
          휘어진 부리와 발톱을 모두 뽑고, 150일을 기다려 새롭게 돋아난 부리와 발톱으로 제2의 삶을 산다’는 내용이다.

          이 이야기를 단지 교훈으로만 받아들이면 큰 감동이 되지만, 생태적 사실이 아닌 부분까지 실제 그런 것으로 오해하면 많은 문제가 생긴다.
          필자가 알기로도 독수리가 다른 새들에 비해 오랜 시간 먹지 않고 버틸 수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렇다고 일주일 이상 굶는 것은 아무리 독수리라도 치명적인 결과를 가져온다.
          또한 새들에게 체온유지는 무엇보다 중요한데, 몸의 털을 다 뽑아버리고 어떻게 버틸 수 있겠는가.
          전설은 그냥 전설로서 받아들여야 한다.


          진홍 가슴새

          최초로 여성 노벨 문학상을 받은 스웨덴의 라게를뢰프가 쓴 「진홍 가슴새」라는 동화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세상 만물과 동식물을 지으실 때 잿빛 털을 가진 조그만 새 한 마리를 만드시고 ‘진홍 가슴새’라고 이름붙여 주셨습니다.
          이 새가 하나님께 물었습니다.
          “저는 온통 잿빛 털을 가지고 있는데, 왜 ‘진홍 가슴새’라는 이름을 붙여 주셨죠?”
          그러자 하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네가 참 사랑을 베풀 수 있게 될 때, 그 이름에 합당한 깃털을 가지게 될 것이다.”
          그 후 오랜 세월이 흘렀습니다.
          진홍 가슴새의 둥지 근처 언덕에 십자가가 세워졌고, 그곳에 어떤 사람이 매달렸습니다.
          멀리서 지켜보던 진홍 가슴새는 그 사람이 불쌍하게 여겨져서 그 사람에게로 날아갔습니다.
          그 사람의 이마에 가시관이 씌워져 있는데, 그 가시마다 검붉은 피가 솟아나고 있었습니다.
          이 새는 조그만 부리로 그 가엾은 사람의 이마에서 가시를 하나하나 뽑아내기 시작했습니다.
          가시가 뽑힐 때마다 피가 솟아 나와서 이 작은 새는 온통 피투성이가 되고 말았습니다.
          이 새는 지칠 때까지 그 가시들을 뽑다가 자신의 둥지로 돌아왔습니다.
          왜냐하면 그 사람이 결국 숨을 거두고 말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자기 몸에 묻은 피가 도무지 깨끗이 지워지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결국 목덜미와 가슴에는 핏자국이 남게 되었는데, 더욱 이상한 것은 그 새가 낳는 새끼들마다 모두 목덜미와 가슴에 선명한 진홍빛을 가진 채 태어났다는 것입니다.
          이 진홍 가슴새 이야기는 하나님으로부터 부르심을 받은 모든 사람들의 이야기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피로 온통 덧입혀져서 죄 사함을 받았으며, 그분의 일꾼으로 부름받은 존재입니다.


          보혈의 능력(골로새서 1:20)

          "그의 십자가의 피로 화평을 이루사 만물 곧 땅에 있는 것들이나 하늘에 있는 것들을 그로 말미암아 자기와 화목케 되기를 기뻐하심이라"

          기독교를 피의 종교라고 합니다.
          그 이유는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의 흘리신 피에 의하여 죄인들이 하나님 앞으로 나갈 수 있는 문이 활짝 열려졌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의 보혈의 능력은 우리 인간과 하나님과의 사이에서 어떤 역활을 성취하는가를 말씀을 통해 상고하고자 합니다.

          1. 구속 곧 죄사함을 받습니다(에베소서 1:7)
          예수님은 자신의 몸을 인류을 위해 대속물로 주셨음(마20:28, 딤전1:15, 요3:17)

          2. 우리 죄를 사하시려고 십자가에 죽으심(엡 2:16, 빌 2:8, 골 2:14)

          3. 우리는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구속함을 얻음(히 13:12, 벧전 1:19-20, 엡 1:7)

          4. 그 피로 화목 곧 평화를 누리게 됨(골 1:20)

          원수되었던 우리를 자기 육체로 하나님과 화목케 하심(골 1:21-22, 엡 2:14-15, 롬 5:10)
          십자가의 피로 하나님과 화목 곧 화평을 누리게 하심((엡 1:10, 2:13-14), 골 1:20, 롬 5:11)
          하나님과 사람사이의 중보는 예수님 한 분 뿐이심(갈 3:20, 딤전 2:5, (히 8:6, 9:15)

          5. 그피로 영생과 생명을 얻게 하심(요6:54)
          예수로 말미암지 않고는 영생과 생명을 얻지 못함((요6:47-48, 63), 요11:25-26, 14:6)

          6. 예수의 피가 생명의 근원이 되심(마 26:27-28, 요 6:53-54, 56-57, 레 17:11)
          예수는 모든 믿는 자의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심(롬 6:23, 히 5:8-9, 10:10, 14)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는 죄로 죽었던 우리를 소생시켜 영원한 생명으로 인도하는 능력의 피임을 명심하고 사나 죽으나 항상 그리스도의 보혈의 능력 안에서 영원한 생명을 누리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예수의 피

          한 복음 전도자가 큰 도시의 슬럼가 모퉁이에 서서 복음을 증거하다가 갑자기 야유하는 군중들 틈에서 날아온 일격을 맞고 쓰러져 죽은 사람처럼 되었습니다.
          그러자 돌연한 공포가 군중들을 뒤덮었으며. 그 중에 누군가가 소리를 질렀습니다.
          “이 일을 저지른 사람은 교수형을 받게 될 것이다.”
          경찰이 오기 전에 군중들은 현장에서 허둥지둥 사라졌고, 전도자를 때렸던 사람은 공동주택의 음침한 자기 방에 숨어서 두려움에 떨었습니다.
          그 범죄자는 날카로워진 신경을 누그러뜨리기 위해 그의 은신처에서 한 소년을 보내 담배를 사오게 했습니다.
          “이 일을 저지른 사람은 교수형을 받게 될 것이다”라는 말이 그 다음날 하루 종일 그의 귓속에서 맴돌았습니다.
          그는 읽을 거리를 찾기 위해 초라한 방을 둘러보다가 짓구겨진 종이 조각을 발견했습니다.
          그것은 담배 가게 주인이 담배를 싸서 보냈던 종이였는데 한 장의 성경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종이의 맨 위에는 다음과 같은 말씀이 적혀 있었습니다.
          “피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느니라.”
          이 말씀은 그의 마음속에 죽음의 종소리처럼 울려 퍼졌습니다.
          “사함이 없느니라.”
          그 날 하루가 몹시 길게 느껴지자 그는 또 소년을 보내 담배를 사오게 했는데 담배가 도착하여 그것을 움켜쥐고 보았더니 담배는 또 한 장의 성경에 싸여 있었습니다.
          그는 다음의 말씀이 눈에 확 들어올 때까지 미친 사람처럼 성경 말씀을 읽었습니다.
          “그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이게 정말일까?
          하나님의 말씀으로부터 떨어져 나온 그 종이 조각들은 구원의 역사를 일으켰으며, 그는 그리스도 안에서 새사람이 되었습니다.
          구원의 능력은 말씀을 통하여 입니다.

          "저가 빛 가운데 계신 것같이 우리도 빛 가운데 행하면 우리가 서로 사귐이 있고 그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요한일서 1:7)


          그리스도의 피(Sanquis Christi. Blood of Christ)

          그리스도의 피는 십자가 상에서 예수 그리스도가 실제로 흘렸던 육체의 피를 말하며, 기독교에서 가르치는 인류 구원은 바로 이 피를 흘림으로써 이루어졌다.
          보혈
          (寶血) 또는 보배로운 피라고도 한다.

          가톨릭교회와 동방정교회에서 성찬례 때 사용하는 축성된 포도주는 성혈(聖血)이라고 하여,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상에서 흘렸던 피와 동일시하는 신학적 용어이기도 하다.

          가톨릭교회, 동방 정교회, 오리엔트 정교회 등은 성찬례에서 사제가 포도주를 축성하면 성령의 힘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변화한다고 가르친다.

          다시 말해 가톨릭교회, 동방 정교회, 오리엔트 정교회, 아시리아 동방교회 등은 포도주의 형상은 그대로 있으나 그 안에 육안으로 볼 수 없는 그리스도의 피가 실제로 존재한다고 보는 것이다.

          특별히 가톨릭교회에서는 빵과 포도주가 성령의 힘으로 그리스도의 몸과 피로 실체 변화하는 것을 ‘성변화’라고 부른다.

          반면 개신교에서는 이러한 실체 변화를 인정하지는 않지만 이를 기념한다는 의미에서 성찬을 거행한다.


          성경에서의 보혈


          히브리서 기자는 희생 제사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을 가리키는 것이라고 말씀한다. 구약의 속죄의 희생제물은 하나님의 어린양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킨다. 대제사장은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킨다. 희생 제사를 드리던 성전 뜰은 주님께서 죽으신 골고다 언덕을 가리킨다. 구약의 성막은 손으로 짓지 아니한, 창조에 속하지 아니한 완전한 성막, 즉 하나님의 영광스런 임재가 있는 영원한 천국을 가리킨다.

          오늘 성경은 예수님의 보혈의 능력을 세 가지로 말씀한다. (히브리서 9장 11-22절)

          1. 우리의 모든 죄를 다 속죄하신다. (12절) 우리의 모든 죄값을 완전히, 그리고 영원히 지불하신다.
          2. 우리를 하나님을 섬기는 새로운 생명으로 거듭나게 하신다. (14절)
          3. 영원한 기업을 약속으로 얻게 하신다. (15절) 예수님의 십자가 보혈로 죄사함을 입고 새 생명으로 거듭난 성도는 하나님의 나라에서 영광스럽고 풍성한 기업을 얻게 될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피(레위기 17:11, 골로새서 1:14)


          레위기 17:11
          "이는 육체의 생명이 피에 있으며 내가 그것을 너희에게 주어 제단 위에서 너희 혼들을 속죄케 하였나니 이는 혼을 속죄케 하는 것이 피이기 때문이라."

          골로새서 1:14
          "그 안에서 우리가 그의 보혈을 통하여 구속, 곧 죄들의 용서함을 받았느니라."

          모든 외과 의사들은 피와 생명은 동일하다고 증언합니다.
          피와 생명은 분리할 수 없는 것입니다.
          하나를 잃으면 둘 다 잃게 됩니다.
          성경은 살아 있습니다.
          성경은 피의 책입니다.
          성경을 칼로 베면 피가 툭 터져 나옵니다.
          여러분 어디를 베도 피가 나오듯 성경의 어느 부분을 베어도 피가 나옵니다.

          창세기 3:21에서 피가 흘러서 계시록에서는 그 피가 말고삐까지 차 오릅니다.
          말을 타신 주님의 옷이 피로 적셔 질 정도로 피가 흥건합니다.
          하나님은 성경에서 400회 이상 피란 단어를 사용하심으로써 우리에게 피에 대한 분명한 인식을 갖도록 하십니다.

          거짓 교사들의 특징 가운데 가장 큰 부류는 그리스도의 피의 대속에 대한 가르침을 거부하는 것입니다.
          그들은 피가 나오면 자꾸 회피합니다.
          신약 성경의 기자들은 "피"란 단어를 그리스도의 십자가란 단어보다 3배나 많이 사용하였으며, 죽음이란 단어보다 5배나 자주 사용하였습니다.

          I. 귀한 피(보혈) (베드로전서 1:18-19)

          이는 너희가 아는 바와 같이, 너희가 너희 조상들로부터 전통으로 이어받은 너희의 허망한 행실에서 은이나 금같은 썩어질 것들로 구속된 것이 아니라. 흠도 없고 점도 없는 어린 양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된 것이기 때문이니라.

          구원은 살 수 없습니다.

          구원받기 위해서 지불할 돈도 없습니다.
          이 피는 너무나 값이 비싸기 때문에 가격을 책정할 수 없습니다.
          '귀한 피'라고 하는 것은 값이 많이 나간다는 뜻이지 값이 안 나간다는 뜻이 아닙니다.
          저희들이 복음을 전할 때 '값없는 선물'을 자꾸 외치니까 사람들이 그저 얻는 줄로 생각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엄청난 값을 지불한 것입니다.

          흠도 없고, 점도 없다.

          오늘날 사람들은 수술을 할 때 피가 모자라면 급히 수혈을 받아야 합니다.
          그런데 피란 것이 또 사람마다 다른데다가 어떤 피는 혈소판이 부족하고, 어떤 피는 어떤 병균으로 감염되어 있습니다.
          수혈 받았다가 에이즈에 걸리는 사람도 있고, 수혈을 잘못 받아서 이상한 병에 걸리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피는 흠도 없고 점도 없는 피입니다.
          이 피는 누구에게나 적용되며, 이 피만 들어가면 그 사람의 몸이 아니라 그 사람의 혼을 완전히 정상으로 치유해 줍니다.
          한 줌의 피에도 5백만개의 적혈구가 있고, 30만개의 혈소판이 있으며 7천개의 백혈구가 있습니다.
          피 속에는 살아있는 생명체가 바다처럼 넘쳐 흐릅니다.

          II. 깨끗하게 하는 피 (히브리서 9:22)

          율법에 따르면 거의 모든 것이 피로써 정결케 되나니, 피 흘림이 없이는 죄사함이 없느니라.

          히브리서 1:3
          그는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시며 그 분의 인격의 정확한 형상이시고, 그의 능력의 말씀으로 만물을 붙들고 계시며, 친히 우리의 죄들을 정결케 하시고 높은 곳에 위엄 있는 분의 오른편에 앉으셨으니.

          우리를 사랑하시어 자신의 피로 우리의 죄들에서 우리를 씻기시고

          피의 중요한 기능 가운데 하나는 몸을 깨끗하게 해 주는 것입니다.

          피는 영양을 공급해 주며, 산소를 공급해 주고, 노폐물들을 제거해 주는 역할을 합니다.
          피는 심장에서 생성되어 몸의 구석 구석 마디마디를 돕니다.
          이 피가 여행하는 거리는 무려 60,000마일이나 됩니다.
          머리카락의 1/10보다 작은 모세 혈관을 통과하며 이산화탄소와 음식물의 노폐물 등을 걸러 냅니다.
          몸에 치명적인 독소는 체외로 내 보내기도 합니다.
          그렇게 해서 23초만에 한 바퀴를 다 돌고 다시 심장으로 들어가서 다시 돕니다.
          보통 적혈구는 이런 운동을 4개월 동안 50만 번 수행합니다.

          우리는 죄의 독으로 병들어 있습니다.

          죄는 단절을 가져 옵니다.
          죄는 우리를 하나님과 교제할 수 없도록 막습니다.

          "오직 너희 죄악들이 너희와 너희 하나님 사이를 나누었고 너희 죄들이 그의 얼굴을 너희로부터 가렸기에 그가 듣지 아니하심이라."(사59:2).

          "너희의 죄악이 이러한 일들을 쫓아버렸고, 너희의 죄들이 너희로부터 좋은 것들을 거두어 갔느니라."(렘 5:25).

          그러나 그리스도의 피는 이런 모든 것들을 정결케 해 줍니다.

          히브리서 9:14에서 말씀하시기를, "하물며 영원하신 성령을 통하여 흠 없는 자신을 하나님께 드린 그리스도의 피가 어찌 죽은 행실에서 너희 양심을 정결케 하여 살아 계신 하나님을 섬기게 하지 못하겠느뇨?"

          오직 피만이 죄를 깨끗하게 할 수 있습니다.
          먼지로 묻은 때를 씻는데는 물을 씁니다.
          기름 때는 기름을 써야 합니다.
          사람의 죄의 때는 피를 써야 합니다.
          죄를 깨끗하게 씻을 수 있는 유일한 물질이 있다면 그것은 피입니다.
          피도 짐승이나 사람의 피가 아니라 거룩하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피만이 죄를 씻을 수 있습니다.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시느니라."(요일 1:7).
          피는 붉은 색입니다.
          죄도 붉은 색입니다.
          성경은 죄의 색깔을 말씀해 줍니다.

          "이제 오라, 우리가 서로 변론하자. 주가 말하노니, 너희 죄들이 주홍 같을지라도 눈같이 희게 될 것이요, 진홍처럼 붉을지라도 양털같이 되리라."(사 1:18).

          여러분은 이 피로 깨끗함을 입었습니까?
          그렇다면 주님을 찬양하고 감사해야 합니다.
          평생을 수도하고, 고행하고 기도하고 선행을 베풀고, 냉수마찰을 아무래 해대도 깨끗하게 할 수 없던 여러분과 저의 죄를 예수 그리스도의 피가 깨끗하게 씻겼습니다.

          어제 지은 죄가 있습니까?
          그동안 은밀히 숨겨 놓은 죄가 있습니까?
          이 시간 주님께 자백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예수 그리스도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십니다.

          우리는 알고도 죄를 짓고, 모르고도 죄를 짓습니다.
          할 수 있는 일을 하지 않음으로 죄를 짓고, 하지 말아야 할 것을 함으로써 죄를 짓습니다.
          기도하지 않는 것이 죄인줄 알면서 우리는 기도를 게을리 했습니다.
          선을 행할 줄 알고도 행하지 않았습니다.
          탐심이 죄인줄 알고, 정욕이 죄인줄 알지만 시시때때로 마음 가운데 깊은 죄를 짓습니다.
          이 시간 모두 저희 모든 죄를 깨끗케 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피를 믿으시기 바랍니다.

          III. 화목케 하는 피 (로마서 3:24-25)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을 통하여 그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게 되었음이라. 하나님께서는 그를 그의 피에 대한 믿음을 통하여 화목 제물로 세우셨으니, 이는 하나님의 오래 참으심 가운데서 이전에 지은 죄들을 사하심으로 인하여 그의 의를 선포하려 하심이요. 

          우리는 본래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었습니다.
          우리는 본래 모두 진노의 자녀요, 하나님과 원수된 자들이었습니다.
          철학자들이나 종교인들은 모든 사람이 본래는 다 선하다느니, 모두가 불성이 있다느니, 사람이 곧 하늘이라느니...별의별 좋은 말을 다 하지만 주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에베소서 2:2-3
          전에는 너희가 그것들 가운데서 이 세상의 풍조를 따르고 공중 권세의 통치자, 곧 지금은 불순종의 자녀들 안에서 역사하는 영을 따라 행하였으니 그들 가운데서 우리 모두가 이전에는 우리 육신의 정욕대로 행하였으며 육신과 마음의 욕망을 이루어 다른 자들과 마찬가지로 본래 진노의 자녀였느니라. 

          이런 분명한 하나님의 말씀에도 불구하고 심지어 기독교인들조차도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은 선한 존재라고 하니, 어찌 구원을 받을 수 있겠습니까?
          사람들이 스스로 의롭다고 하고, 스스로 하나님의 자녀라고 한다면, 그는 구원받지 못합니다.
          주님은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노라."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의로우시고 거룩하신데, 인간은 죄로 더러워 졌고 악합니다.
          이렇게 극과 극으로 다른 둘을 화해하게 할 수 있습니까?
          무엇으로 화해하겠습니까?
          하나님께서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피를 화목 제물로 삼으셔서 그 피를 믿는 자들과 화해하셨습니다.
          그 피를 믿는 자들에게 진노를 거두셨습니다.
          피를 믿는 자들과 하나 되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피입니다.
          이제 여러분과저는 더 이상 진노의 자녀가 아닙니다.
          우리는 진노 아래 있지 않고 은혜 아래 있습니다.

          IV. 풍성한 피 (요한일서 2:2)

          그는 우리의 죄들을 위한 화목제물이시니, 우리뿐만 아니라 온 세상의 죄들을 위한 것이니라.

          주님의 피는 일시적이거나, 극히 제한적이 아닙니다.
          장로교인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예정된 사람들, 택함받은 사람들만을 위해 피를 흘리신 것이 아니라 온 세상의 죄들을 위해 흘리셨다고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주님의 피는 영원한 것입니다.
          그 효력도 영원하여 우리의 죄, 과거, 현재, 미래의 지을 모든 죄까지 근본적으로 해결 해 주신 피입니다.
          저와 여러분은 바로 이 피로 인해 마음 놓고 살 수 있는 것입니다.
          이 피의 은혜를 모를 때, 구원받은 사람이 구원을 잃어 버릴 수 있다거나, 믿음만으로는 안된다거나, 은총을 입지 않으면 구원받을 수 없다는 말이 나옵니다.
          우리가 구원받고 주님과 화평하게 사는 것, 우리가 두려움없이 주를 섬길 수 있는 것은 이 피가 영원토록 풍성한 은혜를 가져다주기 때문입니다.

          V. 능력있는 피(요한계시록 12:10-11)

          그들이 어린 양의 피와 자기들이 증거한 말로 그를 이겼으니, 그들은 죽기까지 자기들의 생명을 사랑하지 아니하였도다.

          주님의 피는 능력의 피요, 승리의 피입니다.
          마귀를 이길 수 있는 무기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말씀이 공격용 무기라면 피는 가장 강력한 방어용 무기입니다.
          피를 믿는 믿음이야 말로 성경에서 말한 "믿음의 방패"인 것입니다.
          피가 없으면 승리할 수 없습니다.
          죄를 이기려면 반드시 피를 믿는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피가 없는 제사가 아무런 소용이 없었듯이, 피를 믿지 않는 믿음은 종교요, 자기 의에 불과합니다.
          어린 양의 피가 없는 믿음은 하나님 보시기에 아무 것도 아닌 가증스런 마귀의 제사에 불과합니다.
          모든 이교도들의 제사를 보십시오.
          그들은 피가 없습니다.
          그들에겐 오직 땀만 있습니다.
          피가 있는 종교는 모두 더러운 컬트 집단들입니다.
          그들은 인신 공양을 드립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흘리신 피 외에 어떤 피도 주님은 받지 않으십니다.

          VI. 값주고 사신 피(사도행전 20:28)

          그러므로 너희 자신을 조심하고 모든 양떼에게도 그리하라. 이들을 위하여 성령께서는 너희를 감독자로 세우셨으며, 하나님께서 자신의 피로 사신 하나님의 교회를 돌보게 하셨느니라.

          주님의 피는 교회를 사는데 지불된 값진 피입니다.
          교회는 그냥 주어진 것이 아닙니다.
          우리 거듭난 모든 성도들은 하나님께서 피를 통해 사셨습니다.
          노예 시장이 열렸습니다.
          아주 총명하고 충성스럽게 생긴 한 노예를 발견한 사람이 그 노예를 사려고 했습니다.
          그래서, 주인에게 "이 노예는 얼마요?" 물었더니 "팔지 않습니다."
          "값을 듬뿍 쳐 드릴테니 파시오."
          "그 노예는 비쌉니다.
          돈으로 받지 않고 대신 당신 몸에 있는 피를 몽땅 준다면 팔겠소!" 아마 남의 종이나 노예를 돈이 아닌 피를 주고 살 사람이 있겠습니까? 그러나 주님은 그렇게 해서 사셨습니다.
          우리는 죄의 종이요, 마귀의 노예였습니다.
          하지만 주님께서 우리를 자유케 하시기 위해 오셨습니다.
          마귀는 하나님께 세상 영광이나, 권력이나 명예나 돈을 요구하지 않고 독생자의 피를 요구했습니다.
          하나님은 그 요구대로 자신의 피를 몽땅 내어 주고 우리를 사신 것입니다. 우리를 사신 주님을 찬양합니다.

          VII. 미리 예정하신 피(계 13:8, 벧전 1:18-20)

          베드로전서 1:18-20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조상의 유전한 망령된 행실에서 구속된 것은 은이나 같이 없어질 것으로 한 것이 아니요.
          오직 흠 없고 점 없는 어린양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로 한 것이니라.
          그는 창세전부터 미리 알리신바 된 자나 이 말세에 너희를 위하여 나타내신바 되었으니 .

          예수님이 흘리신 피는 사고도 아니요, 우연이 아닙니다.
          이는 이미 창세 전에 주님께서 예정해 두신 것입니다.

          요한계시록 13:8
          세상의 기초가 놓인 이래로 죽임 당한 어린 양의 생명의 책에 그들의 이름이 기록되지 못하고 땅에 사는 모든 자는 그에게 경배할 것이라. 

          예수님이 죽으셨다는 것이 전부가 아닙니다.
          피가 적용되어야 합니다.
          피를 거부하는 성경들이 속출하고 그 피를 인간의 피인 것처럼 교묘히 위장하는 가르침이 많은 이 마지막 세대에 우리는 더욱더 주님의 피를 믿는 바른 믿음이 있어야 하겠습니다. 피에 대한 바른 믿음이 없이는 우리의 신앙 생활은 승리할 수 없으며, 하나님을 바로 섬길 수도 없습니다. 주님의 피를 믿지 않는 사람들은 언젠가 주님께 짓밟혀 피를 튀기며 죽게 될 것입니다.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마태복음 26:5-75
                                                                                                          멀찍이 예수를 좇아(58절)


          베드로가 멀찍이 예수를 좇아 대제사장의 집 뜰에까지 가서 그 결국을 보려고 안에 들어가 하속들과 함께 앉았더라.
          But Peter followed him at a distance, right up to the courtyard of the high priest. He entered and sat down with the guards to see the outcome.

          신앙생활을 잘 하려면 초점을 잘 맞춰야 합니다.
          볼록렌즈와 검은 먹지를 이용하여 태양의 초점을 맞추며 검은 먹지에서 불꽃이 피어오릅니다.
          그러나 초점을 맞추지 못하면 검은 먹지에 아무런 변화가 없습니다.
          태양을 하나님, 볼록렌즈를 신앙, 검은 먹지를 세상이라고 생각해 봅시다.
          신앙이 초점이 맞을 때는 놀라운 변화를 일으킬 수 있습니다.

          가이사랴 빌립보 지방에서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라고 묻습니다.
          제자들은 '엘리야, 세례 요한, 예레미야' 라고 한다고 대답했지요.
          그러자 다시  묻습니다.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다른 제자들이 아무 말도 못할 때 베드로는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라고 고백합니다.
          베드로의 고백에 대한 예수님의 반응은 "이런 것을 알게 하신 이는 하늘에 계신 아버지"라고 하며 베드로라는 반석 위에 주님의 교회가 세워질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베드로의 고백이 있은 후 3년이 지났을 무렵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점점 더 가까이 다가 가셨을 때 베드로는 멀찍이 서 있었습니다.
          초점이 흐려지기 시작한 것입니다.
          초점이 흐려지면 너무 많은 것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열두 명만 있다면

          지금부터 대략 150년 전에 영국 런던에 위치한 메트로폴리탄 교회는 스펄전(Charles Haddon Spurgeon,1834-1892) 목사님이 목회하고 있었는데 당시 1866년에 소속 성도가 4천 3백 66명으로 세계에서 제일 큰 교회로 알려져 있었습니다.
          하루는 스펄전 목사님이 성도들에게 이런 말을 했다고 합니다.

          "사랑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주님을 향해서 가슴이 뜨거운 사람, 열 두명만 있다면 이 런던의 삭막하고 고독한 환경을 기쁨이 충만한 곳으로 바꿀 수 있습니다.
          그러나 4 천3백 66명이 있다고 할지라도 전부가 미지근한 성도라면 아무것도 할 수가 없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선택한 12명의 제자들 중에서 가룟 유다는 예수님은 은 30에 팔아넘겼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께서 붙잡혔을 때 멀찍이서 좇아 갔습니다.
          사순절의 시간을 보내고 있는 나는 지금 예수님을 어떻게 믿고 따르고 있습니까?

          신앙의 촛점을 맞추라

          베드로가 예수님을 멀찍이서 좇아갔다고 합니다.
          멀찍이의 반대는 무엇일까요?
          아주 가깝게 라고 생각하십니까?
          너무 가까운 것도 문제가 됩니다.
          적당한 거리를 유지해야 합니다.
          신앙의 적당한 거리를 "촛점(focus)"이라고 하겠습니다.
          렌즈의 촛점을 맞추는 것은 쉽지만 신앙의 촛점을 맞추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를 믿고 모든 일이 순조롭게 진행될 때는 촛점을 잘 맞춘것 같습니다.
          그런데 고난과 어려움과 고통이 끊임없이 다가오면 연약한 인간의 마음으로 촛점을 맞추기가 참 어렵습니다.

          멀찍이 주님을 따라가는 신앙이 아니라 직접 참여하는 신앙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공생애를 마치고 이제 예수님은 이 땅에서의 마지막 남은 일을 성취하실 시간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성취되는 과정이 참 힘들게 느껴집니다.
          사랑하는 제자의 손에 넘겨지는 배신을 당해야 합니다.
          신성모독(blasphemy)이라는 억울한 누명을 쓰고 로마의 군병들에 의해서 무력으로 체포되는 것도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이런 모든 과정에서도 예수님께서는 여전히 침묵 할 때는 침묵으로 수모를 당해야 할 때는 온갖 수치와 수모를 당합니다.

          하늘의 능력을 가졌으면서도 땅의 세력에 짓밟히는 것은 납득하기 어렵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신앙의 촛점입니다.
          아무나 이런 신앙의 촛점을 맞출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연약한 인간은 매일 촛점을 맞추지 않으면 당장 무너져버릴 것입니다.
          신앙의 촛점을 맞추는 비결은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로 거룩함을 유지하는 것입니다.
          오늘도 거룩함을 유지하기 위한 말씀과 기도의 통로를 믿음으로 잘 관리하시기 바랍니다.

          여하튼 그렇게 종교지도자들의 손에 잡혀갔다.
          그리고 이제 당시 대제사장(the high priest)이던 가야바에게로 끌려갔다.
          그곳에는 이미 많은 서기관들과 장로들이 모여 있었다.
          예수님을 심문하고 심판하기 위한 자리였다.

          사람이 사람을 심문하고 심판하는 것도 참 힘든 일이다.
          어찌 보면 우스운 일이다.
          다 같은 인간이며, 다같이 실수하고 연약한 존재인데 누가 누구를 심판하고 정죄하겠는가?
          예수님도 당시 사형이라 일컬어지는 죄인 간음하다 붙잡힌 여인에 대해,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요 8:7)고 말씀하시지 않았던가!

          그런데 하물며, 연약하고 허점투성이인 인간이 하나님의 아들을 심판하려고 모였다.
          물론 그 당시 그들의 마음은 올바른 신앙을 견지하고 사회와 종교의 질서를 바로 잡겠다는 일념이었을 것이다.
          표면적인 이유로는 말이다.

          우리도 그럴 수 있을 것이다.
          어떤 거창한 명분을 내세워 자신도 제대로 하지 못하는 것을 남에게 요구하고, 또 그것에 충실하지 못했을 때는 나름대로의 기준으로 정죄하기도 한다.
          교회 일에서도 그렇고 세상일에서도 그렇다.
          그러나 거창한 명분을 내세운 이면에는 자신의 이기적인 욕심이나 욕망, 혹은 숨기고 싶은 치부가 있기 마련이다.
          그것에 우리자신이 먼저 떳떳한 지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그렇게 예수님은 잡혀갔고 심판의 자리에 서게 되었다.
          이제 관심의 초점을 베드로에게로 돌려본다.
          베드로는 누구인가?
          예수님의 수제자로서의 역할을 감당했던 사람이다.
          그는 예수님께서 특별한 곳에 가려할 때 동행시켰던 사람이고, 자신의 가장 영광스러운 모습을 보인 제자이다.

          게다가 베드로는 바로 직전에 예수님의 죽으심에 대한 예고에서, 절대로 주님을 배신하지 않고 끝까지 지키겠다고 다짐했던 제자였다(마 26:33).
          그만큼 호언장담했던 제자였다.
          최소한 그 당시 그의 마음은 진실이었을 것이다.

          마침내 그의 말이 시험대에 오르는 순간이 왔다.
          예수님이 잡히시는 장면에서 그는 일차적으로 자신의 칼을 빼내어 말고의 귀를 잘랐다.
          나름대로 예수님을 떠나지 않으려는 행동의 표현이었을 것이다.
          물론 그는 예수님으로부터 한번 제지를 당한다.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그 과정(자신이 잡히는 과정)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어쨌든 예수님은 잡히셨다.
          이제 그는 예수님이 어떻게 되실까 궁금했다.
          그래서 예수님을 따라갔다.
          예수님을 잡은 자들이 도대체 어떻게 결말지을지 궁금했고 확인하고 싶었다(26:58).
          대제사장의 뜰까지 그는 예수님을 따랐다.
          멀찍이 떨어져서 말이다!

          어떻게 생각하면, 멀찍이 떨어져서 예수님을 쫓아가는 베드로의 모습은 지극히 인간적이다.
          잡혀가는 그 모습이 안쓰러웠을 수도 있고, 자신의 뜻과 달리 하나님의 뜻을 이루시려는 모습이 숭고해보였을 수도 있다.

          그러나 ‘멀찍이’의 신앙은 그리 권장할만한 것이 아니다.
          왜냐면, 이제 내일 살펴보겠지만, 그 ‘멀찍이’ 떨어진 것이 시험을 당하는 원인이 되었기 때문이다.
          예수님으로부터 멀찍이 떨어져있었기에 한 여종으로부터 예수님의 제자라는 질문을 받게 되고, 당황한 나머지 예수님을 부인하고 저주하는 결과를 초래했기 때문이다.

          가끔 우리는 멀찍이 신앙을 견지하는 경우가 많다.
          예배를 드릴 때도 직접 참여하는 것이 아니라, 멀찍이 어정쩡한 자세로 지켜보기만 한다.
          나도 그 무리 가운데 낄까 말까를 생각하면서 떨어져 있다.
          비단 예배뿐이겠는가?
          교회 내의 각종 행사와 관련된 것도 그렇고, 신앙생활 하는 전반적인 것이 모두 그렇다.
          적당한 거리를 두며 멀찍이(at a distance) 떨어져있다.
          언제라도 도망갈 수 있는 여지를 남겨두는 것이다.

          ‘멀찍이’라는 거리는 도망갈 수도 있고, 참여할 수도 있는 거리이다.
          그것은 다른 말로 표현하면, 이도저도 아닌 박쥐같은 삶이다.
          그런데 이런 삶은 잘 될 때는 별 문제가 없지만, 그렇지 못 할 때는 더욱 커다란 낭패를 당한다.
          바로 베드로가 여종으로부터 시험을 받은 것처럼 말이다.

          우리 신앙의 삶을 되짚어 봤으면 좋겠다.
          나는 과연 멀찍이 떨어져있는 신앙은 아닌가?
          그저 적극적으로 참여하지도 않고 기회를 봐서 하려는 마음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닌가?
          그러나 한 가지 기억해야 할 것은, 기회는 멀찍이 떨어진 자에게 오는 것이 아니라 그 가운데 직접 참여한 자에게 온다는 사실이다.
          멀찍이 떨어진 자가 기회인 것을 알고 뛰어가는 순간, 이미 그 가운데 직접 참여하고 있었던 자들이 그 자리를 차지한다.

          일을 이루는 사람은 직접 가담한 사람이다.
          참여한 사람이다.
          ‘미치지(狂) 않으면 미칠(及) 수 없다’ 내가 그 일 가운데 미치지 않으면 이룰 수 없는 법이다.
          공무원 사회를 비판하는 말 중에 복지부동이라는 말이 있다.
          적당히 그대만 견디면 된다는 말이리라.

          그러나 적당히 해서는 되는 것도 없다.
          오히려 나중에 실망과 후회만 남을 따름이다.
          후회 없는 삶을 위해서도 ‘멀찍이’의 신앙이 아니라, ‘직접 참여하는’ 신앙의 모습을 보여야겠다.

          예수님은 먼저 가야바의 집에서 심문을 받으십니다.
          공회를 대표하는 자들이 이미 그 곳에 모여 있었습니다.
          그러나 한밤중에 거짓 증인을 동원하고 불법으로 재판을 받는 것은 석연치 않습니다.
          61절, 거짓 증인은 ‘이 사람의 말이 내가 하나님의 성전을 헐고 사흘에 지을 수 있다 하더라’고 잘못된 진술을 합니다.

          이 말은 성전을 모독했다는 뜻입니다.
          62절, 대제사장이 이에 대해 예수님께 묻지만, 예수님은 아무 말씀도 하지 않으십니다.
          여기서의 잠잠함은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도록 하려는 예수님의 주관적 침묵입니다.

          63절, ‘네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인지 우리에게 말하라’ 며 이어지는 질문에 예수님은 네가 말하였다고 답하십니다.
          최후엔 너희들이 심판을 받을 것이라고, 구름타고 오시는 인자의 권능을 말씀합니다.(다니엘 7:13-14)

          65절, 대제사장은 예수님이 하나님과 같다는 말에  더 이상 용납할 수 없다고 말합니다.
          이 증거보다 합당한 것이 없으니, 증인도 필요 없게됩니다.

          66절, 그리고 사형에 해당한다고 생각하며 고독과 고통, 조롱을 주게됩니다.

          예수님은 인자의 권능을 가지셨는데도 이런 대우를 받으셨습니다.
          우리도 신앙으로 인해 잘못된 오해를 받을 때 남탓이나 불평을 하지 않고 묵묵히 나의 길을 가야 합니다.
          베드로는 비록 멀찌기 예수님을 좇았지만,  우리의 발걸음은 예수님과 가까워지면 좋겠습니다.
          멀찌기로는 이겨낼 수가 없습니다.
          우리 신앙에도 많은 거짓 증인이 나타나지만, 이 때 외롭고 힘들어도 예수님을 바짝 좇게되길 바랍니다.


          어떻게 하면 그리스도께 항상 초점을 맞출 수 있습니까?

          정신없이 돌아가는 세상에서는 하나님을 예배한다는 우리 인생의 참된 목적을 놓치기 쉽습니다.
          모든 신자들은 하나님께 집중하려고 분투하면서 나름대로 하나님을 중심에 두고 사는 방식을 가지게 됩니다.
          각자의 방식은 다릅니다.
          누군가는 매주 성경을 한 구절씩 암기할 수도 있고, 다른 사람은 아침마다 개인 성경 공부를 할 수도 있습니다.
          누군가는 복음을 매주 최소 한 사람에게 전하는 걸 목표로 삼을 수도 있습니다.
          이러한 것들은 모두 그리스도를 최우선으로 생각하게 해줍니다.

          또한, 이러한 활동들에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이 활동들은 신자가 마땅히 집중해야 할 영역에 집중하기 위해 할 수 있는 일들입니다.
          이것은 내어드림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하나님께 대한 내어드림입니다.
          자신의 온 인생을, 필요와 걱정과 고통과 기쁨과 찬송을 바치는 것입니다.
          신체적, 정서적, 정신적, 영적인 모든 걸 드리는 일입니다.
          다음 구절들을 생각해보십시오.

          로마서 12:1: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

          누가복음 9:23-24: “또 무리에게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구원하리라”.

          로마서 6:13: “또한 너희 지체를 불의의 무기로 죄에게 내주지 말고 오직 너희 자신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난 자 같이 하나님께 드리며 너희 지체를 의의 무기로 하나님께 드리라”.

          삶을 내어드리는 건 신뢰의 문제입니다.
          하나님께서 진정 여러분의 유익을 위하신다는 걸 신뢰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있는 그대로 믿고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을 신뢰하는 것입니다.
          내어드림은 자기 자신에게 집중하는 대신 그리스도께 집중하는 것이며, 이는 순종으로 입증됩니다.

          캘리포니아 레이크 포레스트에 있는 새들백 교회의 릭 워렌 목사는 이렇게 썼습니다.
          “내어드림은 삶의 최선의 방식이 아니라 유일한 방식이다.
          다른 방식은 제대로 돌아가지 않는다.
          다른 모든 접근은 좌절과 실망, 자기 파괴로 이어질 뿐이다.”
          신자로서 자신의 삶을 구주께 내어드리는 것보다 신앙생활에 집중하기에 더 좋은 방식은 없습니다.

          우리가 사는 이 세대의 특징중 하나는 상대적 가치관이 통한다는 사실입니다.
          이는 급변하는 세대이기 때문이며 따라서 변화하되 근본적으로 변하며 그 기초까지 흔들리는 세대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다변적이며 다원적인 세대가 되고 보니 그 어떤 것에도 절대란 있을 수 없다는 논리가 통하고 있습니다.
          절대란 절대로 없다는 말까지 우리 귀에 들려오고 있는 형편입니다.
          이 때문에 모든 가치관이 흔들리고 있으며 상대적인 가치 이외에는 어떠한 가치도 있을 수 없다는 결론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의 마음은 계속 절대자를 찾으려 하고 영원히 불변하는 그 어떤 가치를 추구할 뿐만 아니라 영원히 변치 않는 그러한 사랑을 계속 원하고 있습니다.
          그 무엇이나 흔들리는 것에 근거하고서는 어떠한 안정과 평안도 얻을 수 없는 것입니다.
          이렇듯이 모순된 현실 속에서 현대인은 고민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실상 진퇴양난의 입장과 희미한 일이 너무나도 많은 현실에 처해 있으면서 아무런 확신도 약속도 없는 암담한 미래로 치닫고 있는 것입니다.
          다만 불가피성에 몰려 살면서 그 어떤 보장도 없는 생을 "그 무엇에 끌려서" 그럭저럭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웅겔스마
          (Ungelsma)라는 심리학자는 "사람은 Being이 아니라 Becoming이다"라고 까지 말하고 있습니다.

          'To know self is to be known by another.'
          '내가 나를 안다는 것은 다른 사람에 의해서 알려진 나를 아는 것이다.'
          때문에 다른 사람과의 관계가 중요합니다.
          흔히들 군중 속의 고독을 운위하면서 세상에 나 혼자인 듯이 말합니다마는 생각해보십시오. 그것은 다 쓸쓸해서 하는 말이요, 역설적인 넋두리입니다. 어쩔수없이 우리는 다른 사람과의 관계 안에서 자기 존재를 확인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내 말이 다른 사람에게 통하지 않습니다. 더구나 내가 경험한 것, 내가 확실하게 본 것을 말하는 것인데도 불구하고 이 사실을, 이 증거를 받아들여주지 않습니다.

          이처럼 괴로운 일도 없습니다. 이 때문에 내 존재 자체에 대하여 고통을 느끼게 되고, 마침내는 자기 존재의 상실감마저 느끼게 됩니다.


          내가 살아가는 존재가 아니라 살아지는 존재라는 말입니다.
          신앙 생활에 있어서도 이처럼 희미하고 미분명한 점을 엿볼 수 있습니다. 어떤 신학자의 말에 "하나님이 있다고 하자니 희미하고, 없다고 하자니 불안하다는 것이 현대인의 신앙이라"고까지 말한 것을 읽었습니다. 앞으로 나가자니 앞이 보이지도 않고 아무 보장도 없으며, 뒤로 물러가자니 그 동안 지켜 온 과거의 업적을 져버리기가 아쉬워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시간에 끌려가는 막연한 인간상들을 볼 수 있습니다.


          신앙의 초점 (마태복음 16:13~20)


          2008년 오스 기니스(Os Guinness)는 그의 책 소명에서 미연방정부에서 많은 대통령들의 경제 자문관으로 활약했던 유대인 아더 번즈(Arthur Burns)의 기도를 소개합니다.

          1970년대의 어느 날 백악관의 비공식 기도모임에서 번즈는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주님, 유대인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알게 해주시기를 기도합니다.
          회교도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알게 해주시길 기도합니다.
          끝으로 주님, 그리스도인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알게 해주시길 기도합니다. 아멘.”

          깊은 통찰력을 가진 번즈의 기도는 명목상의 그리스도인과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신앙을 가진 참 그리스도인을 구별하고 있습니다.
          사실 이러한 구별은 이미 2천 년 전에 예수께서 하셨습니다.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7:21).

          ‘주여 주여’하는 명목상의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님 시대로부터 지금까지 줄기차게 성경적 신앙에 걸림돌이 되었습니다.
          지난 2천년 동안 성경적 신앙을 훼파해 온 것은 언제나 교회밖에 있는 어떤 것이기보다는 교회 안에 있는 어떤 것이었습니다.
          이 사실은 우리 신앙의 핵심이 무엇인지를 알고 그 초점에서 벗어나지 않도록 늘 점검할 필요가 있음을 말해줍니다.
          우리는 무엇을 믿어야 하며, 무엇을 전해야 할까요?

          본문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질문을 던지셨습니다.
          시기적으로는 갈릴리 사역이 끝나고 예루살렘을 향하여 올라가는 때였습니다.
          예수님은 3년 가까이 제자들과 함께 하시면서 많은 말씀들로 가르치셨고 많은 기적들을 보이셨습니다.
          그리고 이제는 제자 교육이 제대로 되었는지 점검하셨습니다.
          마치 졸업 시험과 비슷하다고 할 수 있겠지요.
          이 질문의 의미는 ‘너희가 나의 제자라고 하려면 이것만큼은 분명히 알아야 한다.
          이것이 제자 교육의 핵심이요 본질이다’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제자들의 신앙 수준을 모르셔서 알아보려고 하신 것은 아닐 것입니다. 다만 이 질문을 통해서 제자들 스스로가 참으로 알아야 할 것을 올바로 알고 있는지 돌아볼 수 있는 기회를 주신 것이겠지요. 아무튼 예수님의 질문은 예수님을 따르는 삶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본질이 무엇인지, 기독교 신앙의 핵심이 무엇인지, 신앙생활의 초점을 어디에 두어야 하는지를 점검할 수 있게 합니다. 

          먼저 예수께서 본문과는 다른 질문을 던졌다고 가정해봅시다. ‘너희는 나의 가르침 중에서 무엇을 가장 중요하게 여기느냐?’라고 질문하셨다면, 기독교 신앙은 예수님의 가르침에 초점을 두어야 했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가르침들 중에서 가장 중요한 가르침들을 찾고 또한 그 가르침을 핵심으로 해서 예수님의 가르침을 전파해야 했을 것입니다. ‘너희는 내가 행한 기적 중에 무엇을 가장 중요하게 여기느냐?’라고 질문하셨다면, 기독교 신앙은 예수께서 행하신 기적에 초점을 두어야 했을 것입니다. 예수께서 행하신 기적들을 체험하고 그 체험을 전수하는 일들을 핵심으로 삼아야 했겠지요. ‘너희가 나를 따르면서 받은 복중에 가장 큰 복이 무엇이냐?’라고 질문하셨다면, 기독교 신앙은 예수를 믿음으로서 받은 복에 초점을 두어야 했을 것입니다. 예수 믿고 무슨 복을 받았는지 어떤 복을 받을 수 있는지를 핵심으로 신앙이 전개되었겠지요. 그러나 예수님은 그렇게 질문하지 않으셨습니다. 

          기독교 신앙에 있어서 예수님의 가르침들과 기적들, 그리고 그분으로 말미암는 복은 매우 중요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께서 그것들과 관련된 질문을 던지지 않으셨다는 사실은 그것이 본질과 핵심은 아니라는 점을 말해줍니다. 사실 기독교인이 아닐지라도 예수님의 가르침을 따르는 사람들은 많습니다. 기독교인이 아니지만 예수님께서 행하셨던 기적들을 추구하는 사람들 또한 많습니다. 대표적으로 간디는 예수님의 산상보훈을 늘 머리맡에 두고 읽으며 그 사상을 실천하려고 했던 인물이었으나 기독교인은 아니었습니다. 오늘날 기독교 이단들이나 타 종교에서 예수께서 행하셨던 기적과 동일한 기적들을 일으키는 예도 허다합니다. 예수님 믿지 않고서도 여러 종류의 복들을 누리는 사람들 또한 많습니다. 

          이를 볼 때, 예수님의 가르침을 귀하게 여기며 그 가르침을 따라서 산다고 해서 참 기독교인이라고 단정할 수 없음을 알게 됩니다. 예수께서 행하신 기적들을 체험하며 엄청나게 기적들을 행할지라도 참 기독교인이 아닐 수 있음을 생각하게 됩니다. 또한 많은 복을 받았다고 해서 참 제자가 되었다고 말할 수 없음을 깨닫습니다. 가르침에 순종하는 것과 기적을 행하는 것과 복을 받은 사실들은 참 기독교인이 되었음을 점검하는 ‘기준’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초점이 되면 단지 ‘주여 주여’하는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배고픈 훈련병 시절에 초코파이를 먹고 싶어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자대에 배치 받으면 고참들의 눈초리를 벗어나서 잠시나마 자유를 누리고 싶은 욕구 때문에, 혹은 못다 잔 잠을 자려고, 혹은 하기 싫은 일을 피하려고 교회에 나오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것이 군대 교회를 다니는 자들에게 주어지는 일종의 ‘복’이었습니다. 하지만 그 복을 중심으로 교회를 다닌 자들은 고참이 되면서 서서히 교회를 떠납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기적을 많이 체험하고 많은 가르침을 알고 있지만 결국 교회를 떠나는 경우가 있습니다. 왜 그런 일이 발생할까요? 그들이 참 그리스도인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물론 초코파이를 먹으려는 동기로 교회에 왔다가, 혹은 위로 받으려는 마음에서 교회에 왔다가 참 그리스도인이 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런 경우는 교회에 머무는 기간 중에 반드시 알아야 할 신앙의 핵심을 알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이와는 달리 그 핵심을 모르면서 계속 다른 동기로 교회에 머무르고 있는 사람들로 인해 기독교 신앙은 왜곡되고 변질됩니다. 그 핵심을 모르면서 열심히 기독교 종교적인 일들을 하기 때문에 기독교 신앙은 더욱 빨리 부패해버립니다.

          그렇다면 참 그리스도인임을 점검할 수 있는 표지는 무엇일까요? 이제 예수께서 어떻게 질문하셨는지 본문을 살펴봅시다. “사람들이 인자를 누구라 하느냐?”(13).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15). 예수님은 사람들이든 제자들이든 ‘예수님을 누구로 알고 있는지?’ 점검하기 원하셨습니다. 이 질문은 우리의 신앙이 ‘예수님은 누구신가’를 아는데 초점을 두어야 함을 말해줍니다. 우리의 전도와 선교 역시 ‘예수님이 누구신지’를 전파하는 것에 초점이 있음을 알려줍니다. 기독교 신앙의 핵심은 ‘한 인격’에 대한 관심이지 ‘비인격적인 어떤 것’에 대한 관심에 있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가르치셨던 모든 가르침들과 행하셨던 모든 이적들은 ‘예수님이 누구신가’를 바르게 알도록 하기 위해 보조적인 역할을 합니다.
          신구약 성경 역시 ‘예수 그리스도’라는 한 분의 ‘인격’에 대해 증언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상고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거하는 것이로다”(요 5:39)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성경은 본질적으로 ‘어떤 사상’에 대한 것이 아니라 ‘어떤 인격’에 대한 것입니다.
          또한 예수님은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요 17:3)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영생도 ‘어떤 인격’에 관련되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기독교 신앙이 ‘한 인격’에 대한 초점에서 벗어나 일이나 가르침이나 기적이나 복과 같은 비 인격적인 어떤 것으로 옮겨질 때 변질 되었다고 평가할 수 있습니다.
          변질되었기 때문에 그러한 신앙은 반드시 부패를 가져옵니다.
          변질된 명목상의 기독교인들로 인해 괴로움을 당한 사람들은 ‘예수여, 저를 당신의 추종자들로부터 구원하소서’라는 티셔츠를 입을 수도 있겠지요.
          반면에 한 인격을 분명히 알고 있었던 초대 교회는 믿지 않는 자들로부터도 칭송을 받았었습니다.
          가르침과 기적이 풍성하면서도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으며 “주께서 구원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셨던 예루살렘 교회 공동체의 모습은 오늘날 사회로부터 지탄을 받고 있는 교회의 모습과 너무 상반되어 보입니다.

          기독교 신앙은 예수님의 가르침을 열심히 순종하고 있을 때나 기적을 체험했을 때나, 열심히 종교적인 일을 행하고 있을 때가 아니라, 그 모든 것을 통해서 ‘예수’라는 한 인격에 대한 깨달음이 있을 때 바르게 성장합니다.
          예수님을 안다고 해서 반드시 바르게 사는 것은 아니지만, 예수님을 바르게 알지 못하고서는 바르게 살아낼 재주가 없습니다.
          우리의 신앙에 변화와 성장이 있는 순간은 언제나 그분에 대한 새로운 깨달음이 있습니다.
          머리로는 늘 그분이 사랑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을지라도 그것이 가슴으로 깨달아졌을 때, 그분께서 나와 함께 하신다는 사실을 머리로는 알고 있었을지라도 그것이 실질적으로 깨달아졌을 때, 그 때 사람은 변하고 성장합니다. 

          예수님이 누구신지 진정으로 깨달아 졌을 때, 변화되지 않을 사람이 없습니다.
          운명주의자도 변하고 허무주의자도 변합니다.
          교만하고 완악한 자도 변합니다.
          게으르고 한심한 자도 변합니다.
          무기력한 자도 힘을 얻고, 무능한 자가 능력을 얻습니다.
          그렇다면 교회의 전도와 선교에 있어서 핵심 역시 ‘예수님은 누구신가’에 있어야 할 것입니다.
          우리 자녀들을 교육함에 있어서도 가장 중요한 것은 ‘예수님이 누구신가’를 바르게 알도록 돕는 일일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 신앙의 핵심이며 초점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본문에서 베드로는 예수님이 누구신지 바르게 알았습니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17).
          베드로는 그분이 온전한 사람이시면서 동시에 온전한 하나님이심을 고백했습니다.
          그분만이 성경에 기록된 ‘그 그리스도’이시며 유일한 구원자이심을 고백했습니다.
          예수님은 베드로의 고백을 들으시고 말할 수 없는 축복으로 축복하셨습니다.
          예수 믿고 복 받는 것은 아주 적은 복에 불과합니다.
          그보다는 예수님을 바르게 알고 바르게 고백할 수 있는 것이 참된 복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복은 내가 노력으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17)고 하셨습니다. 

          항상 신앙의 초점을 점검하며 본질이 왜곡되지 않는 신앙이 되기를 바랍니다.


          내 삶의 초점은 어디에 있는가?
          빌립보서 3:12~16

          참 목자이신 예수님께 초점을 맞추라!
          초점은 ‘관심이나 주의가 집중되는 중심 부분’입니다.

          사진에서 ‘초점을 ’OUT FOCUS’라고 하고, 이 과정을 ‘OUT-FOCUSING’이라고 합니다.
          우리 말로 풀면, 찍고자 하는 중심 부분이 아닌 것은 전부 ‘OUT시킨다’는 의미입니다.
          이렇게 찍으면 주요 피사체만 도드라지고 나머지는 배경으로 남습니다.
          그러나 이 배경도 참으로 중요한데, 피사체를 도드라지게 표현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아웃포커싱’을 잘해야 작품이 나옵니다.

          하나님에 초점을 맞추라!

          자신의 삶을 작품으로 만들고 싶으시다면 “하나님을 아웃 포커싱하라!”고 권하고 싶습니다.
          아웃 포커싱이 되지 않으면 주변의 잡다한 것들이 보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라고 세상 사람들이 겪는 고난이나 잡다한 일들로부터 자유로운 것은 아닙니다.
          똑같이 그 모든 일을 겪을뿐 아니라 때로는 신앙을 지키기 위해 보통의 사람들보다 더 어려운 상황을 만나기도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만 초점을 맞춤으로 하나님만 드러나는 것이 성숙한 신앙인의 삶입니다.
          환난과 고난 속에서도 하나님만 드러남으로 그 모든 것들은 하나님을 드러내는 배경으로 사용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 아름다운 삶을 살아갈 수 있는 것은 세상 사람들이 모두 겪는 문제들이 없기 때문이 아니라, 그런 문제에 초점을 맞추지 않고 하나님께 정확하게 초점을 맞추기 때문입니다.

          사진은 빛으로 그리는 그림이라고 합니다.

          빛을 얼마나 잘 조절하는지에 따라 사진이 달라집니다.
          빛을 조절하는 역할을 하는 것이 ‘조리개’인데, 조리개가 작아지면 빛이 조금씩 들어와서 한 장의 사진을 완성하는데 시간이 오래 걸립니다.
          시간이 오래 걸리는 대신에 많은 정보가 들어있고, 이 시간이 길어지면 눈으로 보는 것과는 다른 사진이 나옵니다.
          ‘장노출’이라는 기법인데 이렇게 사진을 찍으면 눈으로 보는 것과는 다른 사진이 완성됩니다.
          사진을 보시면 ‘파도’가 구름이나 안개처럼 보입니다.
          ‘파도’라는 현실을 제대로 볼 수 없습니다.

          시야가 좁아지면 제대로 볼 수 없습니다.

          갑작스러운 고난이나 시험, 어려운 일을 만나면 시야가 좁아진다고 합니다.
          그래서 힘든 일을 만나면 평상시와는 다르게 판단하고 행동하게 되는 것이지요.
          우리 삶의 초점을 세상일에 맞추고 살아가면 시야가 좁아집니다.
          시야가 좁아지면, 우리가 어떤 삶을 살아가야 할지 제대로 판단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에게 초점을 맞추면, 세상에서 살아가면서 겪는 아픔까지도 하나님을 도드라지게 하는 아름다운 배경이 될 수 있습니다.
          신앙적인 문장으로 바꾸면, 우리의 아픔과 고난도 하나님께 초점을 맞추면 걸림돌이 아니라 디딤돌이 되는 것입니다.

          푯대를 향하여

          빌립보서의 말씀은 우리에게 ‘푯대를 향하여 달려가라’고 권고합니다.
          ‘푯대’는 초점입니다.
          14절에서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이 초점임을 밝히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 푯대에 초점을 맞추고 열심히 달려갑니다.
          그러나 아직은 얻은 것도 아니고 이룬 것도 아닙니다.
          지금도 달려가는 중입니다.
          여기에만 집중하겠다는 것입니다.
          푯대를 향하여 달려가는 일에 집중하려면, 과거는 잊어야 합니다.
          신앙은 항상, 현재형이고 진행형입니다.
          그래서 ‘OUT – FOCUSING’입니다.

          우리는 모두 신앙의 목적지에 이른 것이 아니라, 푯대를 향하여 달려가는 중입니다.
          어떤 분은 과거의 신앙을 자랑하거나 후회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지나간 일이니 거기에 연연하지 말고 ‘지금 여기에’ 온 정성을 쏟으라는 것입니다.
          과거에 얽매이지 마십시오.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오늘’입니다.
          오늘 푯대를 향하여 달려가는가, 오늘 나의 삶이 그 푯대에 초점이 맞춰져 있는가가 중요합니다.
          이렇게 정확하게 우리 삶이 푯대에 초점이 맞춰지면, 우리 삶을 에워싸고 있는 수많은 어려움은 물론이고, 세상의 쾌락 같은 것은 희미해지고 보이지 않습니다.
          그런 것들은 배경이 될 뿐입니다.
          과거의 신앙을 자랑하거나 후회할 필요도 없고, 오늘 말고 내년에 신앙생활을 잘하겠다고 하지 말고 ‘오늘’ 푯대를 향하여 달려가는 것이 중요합니다.

          보이지 않는 것과 보이는 것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은 당장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보이지 않는다고 없는 것이 아닙니다.
          보이지 않는 것을 보는 것처럼 믿는 것, 그것이 ‘믿음’이라고 히브리서는 탁월한 정의를 내렸습니다.

          하나님께 초점을 맞추고 살아가면, 세상의 고난과 아픔과 쾌락은 흐릿해지고, 보이지 않던 하나님 나라는 선명해지고, 하나님만이 도드라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되어

          사도 바울이 온갖 고난을 받으면서도 푯대를 향하여 달려갈 힘은 어디에 있을까요?
          사도 바울은 복음을 전하는 과정에서 매도 맞고, 감옥에 갇히기도 하고, 살해의 위협도 당했습니다.
          이루 말할 수 없는 힘겨운 일들이 그를 에워싸고 있었지만, 그는 오직 주님에게만 초점을 맞췄기 때문에 그런 것들은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런 것들이 복음을 전하는 일에 걸림돌이 되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그 모든 것은 주님을 도드라지게 하는 것이 되었습니다.

          그렇게 할 수 있었던 것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바’ 되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일입니다.
          여러분은 누구에게 잡힌 바 되었습니까?
          세상의 많은 사람이 돈에 잡혀 살아가고, 명예나 권력에 붙잡혀 살아갑니다.
          거기에 삶의 초점이 맞춰져 있으니 다른 것은 보이지 않습니다.
          예수님도 보이지 않습니다.
          세상 것에 초점을 맞추고 예수님을 ‘OUT’시킨 것입니다.
          우리가 ‘OUT’시킬 것은 예수님이 아니라 세상적인 것들입니다.
          그러면, 세상살이하는 데 필요한 것들은 예수님을 도드라지게 하는 배경이 되도록 채워주시는 것입니다.

          필요한 것을 채워주시는 하나님

          우리는 이 세상에서 신앙생활을 하므로, 이 세상의 필요를 무시하고 살아갈 수 없습니다. 돈도 있어야 하고, 명예도 때로는 권력도, 세상의 성공도 이뤄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은 목적이 아니라 수단입니다.
          고난도 환난도 우리의 삶을 아름답고 돋보이게 하는 디딤돌로 만들어가야 합니다.

          예수님께 붙잡혀,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 푯대를 향하여 달려가는 사람들에게 필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채워주십니다.
          예수님에게 붙잡혀 살아가십시오.
          자신의 삶을 위해 필요한 것을 하나님께서 채워주시는 삶을 살아가십시오.
          하나님 없이 자기 삶의 필요를 채우고자 한다면, 우리의 눈은 작아질 수밖에 없습니다.
          눈이 작아지면, 이런저런 잡다한 것들이 모두 보이게 됩니다.
          그러면 집중을 할 수 없고, 어디에 포커스를 맞춰야 할지 난감하게 됩니다.
          게다가 초점을 맞췄지만, 셔터 속도가 늦어져서 흔들린 사진이 나올 수밖에 없습니다.
          의도적으로 흔들린 사진을 찍은 것과 초점을 잘 맞추고 싶었는데 초점이 맞지 않은 사진은 하늘과 땅 차이입니다.

          하나님께 초점을 맞추십시오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삶을 도우실 것이요, 여러분의 삶을 통해 자신이 영광 받으시길 원하시기에 필요한 모든 것들을 채워주실 것입니다.
          지금 그것이 보이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믿음을 가지고 사도 바울처럼 달려갈 뿐입니다.
          그리하면 하나님께서 이 모든 것을 우리에게 나타내실 것입니다(15).*



          본문 말씀에서 또 하나의 희미한 사람을 만나게 됩니다.
          이 사람은 예수님을 따른 지가 벌써 3년이나 된 베드로라는 사람입니다.
          모름지기 그는 예수를 따르던 자들의 대표자이며 특별히 그는 예수님의 사랑하는 12제자 중에서도 수제자였습니다.
          명실 공히 그는 수제자로 나타나고 있었습니다.
          그는 언제나 예수님의 물음에 누구보다 앞서서 먼저 대답하기를 좋아했으며 어느 곳에서나 주님 가까이 따랐습니다.
          또한 그는 예수님에 대한 바른 신앙고백을 함으로 칭찬과 더불어 마침내 "반석(베드로)"이라는 이름까지 갖게 되었을 뿐 아니라 천국 열쇠를 주신다는 귀한 허락까지도 받은 바 있는 수제자였습니다.

          그런데 그는 오늘 본문에서 보는 대로 너무나 나약하고 불투명하며 희미하고 비겁한 데가 있는 초라한 모습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처럼 열심히 따라가던 그의 선생이요, 주시며, 메시아요 하나님의 아들인 예수께서 고난을 당하시는데 그 순간에 와서 베드로는 "멀찍이 따라 갔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 태도가 너무나 섭섭합니다.
          함께 따라 가서 고난을 당했다고 하던지 아니면 도망하고 말았다던지 그도 아니면 차라리 배반하고 떠나 버렸다는 기록을 남겼어도 좋을뻔 하였다고 생각됩니다.
          따르든지 아니면 떠나거나 할 것이지 결국 따르지도, 도망도 못한 채 "멀찍이"가서 "그 결과를 보려고" 하였다는 점이 매우 유감스럽습니다.

          생각하여 보십시다.
          "결과를 보아서" 어찌 하겠다는 것입니까 만일에 예수님께서 심문을 받으시다가 큰 이적이라도 나타내시어 빌라도의 법정을 뒤엎고 영광스러운 왕위에 오르시면 그 때에는 "내가 예수님의 수제자요"하고 나타날 것입니까 아니면 그리스도께서 비참하게 수난을 당하시게 되면 그때에는 별 수없이 도망해 버리겠다는 심사입니까 어찌 이처럼 기회주의적이요, 회색적인 비겁한 모습으로 나타날 수 있단 말입니까 유감되기 그지없습니다.

          이같이 불확실하며 비겁하게 행하는 자에게는 반드시 더욱 큰 시험이 있기 마련입니다.
          아무도 베드로를 몰라보고 그에게 묻지만 아니하였더라면 그는 그처럼 초라해지지는 아니할 것이었는데 본문에서 보여주는 의외의 사건으로 인하여 베드로는 더욱 비겁한 자로 전락하게 된 것이 사실입니다.
          이럴까 저럴까 하면서 아무런 결정이 없는 일을 하게 되면 언제나 무기력해지는 법이요, 확실한 결심이 없는 일은 언제나 생각지 않는 함정에 빠지게 되기 마련입니다.

          본문에서 너무나도 넌센스 같은 베드로의 태도를 엿볼 수 있습니다. 베드로가 따라간 법정은 사람을 임의로 살리고 죽이는 권력을 행사하는 빌라도의 법정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끌려가셨고 베드로가 멀찍이 따라갔던 그 법정은 가야바의 법정입니다. 실상 법정이기보다는 공회 장소입니다. 이방인의 법정이 아니라 동족이며 유대인의 최고 종교 책임자인 대제사장 가야바의 공회 장소입니다. 이곳에서 비겁해질 것이 무엇입니까 또한 창검을 든 군인이 검을 가슴에 들이대면서 네가 예수의 제자가 아니냐고 물었기 때문이라면 인간의 하나 뿐인 목숨을 위해서 부인했다하더라도 동정할 여지가 있는 일일 것입니다. 그러나 본문에 나타난 바는 군인이 아닌 심부름하는 작은 계집애의 물음 앞에서 베드로는 예수를 부인하게 됩니다. 설사 법정에 앉은 재판장의 준엄한 심문이 두려워서 갈릴리의 한 어부가 예수를 모른다고 하였어도 유감된 일인데, 갈릴리 사람이란 말에 지레 겁을 내어 예수를 부인하였고 "함께 있었다", "사투리가 증명한다" 혹은 "그 당이다"라는 말에 미리 놀라서 그리스도를 부인하고 말았으니 참으로 나약하기 그지없는 사람이 되고 말았습니다.

          더욱 유감스러운 것은 간단한 말로 부인한 것이 아니라 처음에는 부인하고 두 번째에는 맹세하여 부인하였으며 세 번째에는 저주하며 맹세하였다는 것입니다. 어찌 그가 저주하며 맹세까지 할 수 있었단 말입니까 이는 본인도 예기치 못했던 일이거니와 이런 정도까지 전락되리라고는 전혀 상상도 못했을 것입니다. 이것이 곧 멀찍이 따라가는 자에게 있게되는 시험이며 뒤따르는 함정인 것입니다.
          무디 선생님은 누가복음 22:61에 "주께서 돌이켜 베드로를 보시니"라고 하신 말씀에 이렇게 설명한 것을 그의 글에서 읽을 수 있습니다.
          베드로를 보실 때 단순히 보신 것이 아니라 베드로의 눈과 예수님의 눈이 마주쳤을 때 예수님께서는 눈으로 말씀하셨다는 것입니다. "베드로야! 네가 나를 모른다니 사실이냐 내가 너를 갈릴리 바닷가에서 불렀고, 네가 믿음이 없어서 물에 빠져 들어갈 때에 내가 네 손을 잡아 끌어 올렸는데 네가 나를 모른다니 그게 사실이냐"고 물으셨다는 것입니다. 어쨌든 베드로는 멀리 따라 갔기 때문에 생각할 수 없었던 깊은 함정에 빠짐과 함께 또한 큰 시험에 들게된 것입니다. 언제나 소극적인 생활태도는 위험한 시험의 문이 되는 것입니다.

          "멀찍이"란 말에 무슨 뜻이 있는 것이겠습니까?

          애당초 베드로는 예수를 따르기는 하였으나 사실은 한번도 가까이 따른 일은 없다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숙식을 같이 한다고 가까운 것은 아닙니다.
          요는 마음과 마음의 문제입니다.
          서로 상대방을 완전히 이해하게 될 때에 비로소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서로 아는 일이 있어도 마음으로는 멀리 있는 것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변화산에 계실 때에 베드로는 잠잤었고, 잠에서 깨어난 그는 정신없이 헛소리 같은 말을 하였던 것입니다.
          겟세마네 동산에서도 그리스도께서는 피땀을 흘리시며 기도하고 계시는데 그는 계속 잠자고 말았습니다.
          이 어찌 가까이 따른 일이 되겠습니까 멀리 있었습니다.

          실은 신앙고백을 하였을 때에도 그는 고난의 메시아를 전혀 이해하지 못한 채 영광의 메시아로, 세속적인 영광만을 생각하며 "사람의 뜻"만을 생각하여 십자가를 만류하다가 "사탄아, 뒤로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하시는 주님의 책망을 듣게된 것입니다. 이로 보건데 베드로는 처음부터 계속 그리스도를 가까이 따른 바가 없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즉 멀리 따른다는 뜻은 첫째 무지 속에 따른다는 뜻입니다. 확실히 모르고 따르는 것을 의미합니다.
          베드로는 몸으로는 가까이 따랐으나 그리스도의 마음과 뜻은 모르고 따랐기 때문에 결국은 멀리 따른 것이 됩니다. 칸트(Kant)의 말 중에 "이성이 없는 종교가 있을 수는 있다. 그러나 그 종교는 오래 가지 못할 것이다"라고 말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사실입니다. 요한복음에서는 이와 같이 지식을 더욱 고조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믿고 알았습니다", "아는 것이 영생이다", "지금은 모르나 이후에는 알리라", "성령이 알게 하리라"등 안다는 문제를 강조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빌립보서 1장 9절에서 "너희 사랑을 지식과 모든 총명으로 점점 더 풍부하게 하사……"라고 기록하고 있으며 불학무식하다고 비난받던 베드로 자신도 그후에 깨닫고 그의 서신인 베드로후서 1장 5절에 "믿음에 덕을 덕에 지식을……공급하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모르고 하는 일은 언제나 무기력한 것이며 모르는 중에 내는 용기는 용기가 아니라 미련한 고집이 되는 것입니다. 그는 좀 더 분명하게 알아야 하였습니다. 썩어지는 밀 알의 비유를 알아야 했고, "대속물"로 오셨다는 귀한 말씀의 참 뜻을 알아야만 했던 것입니다. 언제나 정욕에 사로잡힌 눈은 흐려지며, 세속적인 명예욕에 빠지게 되면 귀가 어두워지게 마련입니다.
          그처럼 몇 번이고 말씀하셨건만은 그는 그리스도의 고난의 뜻을 끝내 몰랐던 것입니다. 누가복음 24:25에 "미련하고 선지자들의 말한 것을 마음에 더디 믿는 자들이여"라고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셨습니다. 그 뜻하는 바와 사실은 무지를 책망하는 말씀입니다. 깨달음이 없는 자를 꾸짖는 말씀인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모르고 하는 일은 힘이 듭니다. 같은 거리의 길도 갈 때보다 올 때에는 가까운 것입니다. 모르고 가는 길은 한없이 멀게 느껴지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더욱 겸손히 자신을 낮추며, 좀더 세속적인 욕망에서 벗어나 "들을 귀"를 가지고 그리스도가 "고난의 메시아"란 진리를 배웠어야 했으며, "좁은 길"의 결과와 "마시려는 잔"의 의미를 알아야 했던 것입니다. 천국은 십자가로 세워지며 영광은 수치와 수욕 후에 온다는 사실을 알아야 했고, 그리스도와 함께 고난에 참여하지 않고서는 그의 영광에 동참할 수 없음을 알아야만 했던 것입니다. 결과와 미래를 알며 그 미래가 주는 약속된 현실의 뜻을 분명히 알았었다면 그 같이 나약하고 비겁한 자가 되지는 아니했을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멍에란 죄짐이나 율법의 짐을 가르치는 말이 결코 아닙니다. 의인의 고난과 대신 당하는 고난을 뜻합니다. 그리스도께서 당하신 고난과 비슷한 그 어떤 고난을 조금이라도 경험하게 될 때만이 그리스도의 마음에 있었던 귀중한 뜻을 알 수 있고 배울 수 있는 것입니다.
          둘째는 자기 부정 없이 따르는 것이 곧 멀리 따르는 일이 되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직업을 버리고 따랐으며 가정도 버리고 따랐습니다. 그러나 그는 목숨을 버리고 따르지는 못했으며 자기를 사랑하는 마음을 지워버리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제 십자가를 지고 따르라"고 하셨고, 어떤 때는 자기 전토나 부모와 형제자매, 자기 목숨까지라도 미워해야 된다는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을 따르면서도 자기를 부인하지 못한 이유 때문에 예수님을 끝까지 따를 수가 없게 되고, 예수님께 욕만 돌리다가 마침내는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고 마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나 자신을 먼저 사도 바울처럼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아 버린 이후에 주님을 쫓아야 가까이 따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나는 날마다 죽노라"고 하였으며 마틴 루터는 신앙생활이란 곧 "매일 세례(Daily Baptism)"라고 말하였습니다. 벌써 자기는 죽었어야 하며 그리고 또한 계속 자기를 죽여야 하는 것입니다. 이미 죽었고 또 계속 죽여야 하는 것이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신앙생활입니다. 자기부정 없는 따름은 언제나 먼 거리에 있을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셋째, 기도 없이 따르는 일이 곧 멀리 따르는 일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미 겟세마네 동산에서 자신은 완전히 하나님께 바쳐 버렸습니다. "아버지의 뜻대로 하옵소서"라고 기도하시면서 완전히 하나님께 위탁해 버린 것입니다.
          먼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문제를 해결한 이후에 현실에 임했으며 하나님의 뜻을 먼저 묻고 확실하게 하나님의 뜻을 알아 그 뜻에 자신을 바쳐 버린 후에 현실적인 사건에 임했던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뜻을 알고 현실 안에서 부르시는 하나님의 구체적인 부름을 듣고 그 하나님의 뜻 앞에 자신을 위탁한 후 이제는 어떤 비난이 있고 조롱이 들리건, 채찍이나 십자가의 죽음이 와도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벌써 완전히 위탁하였기 때문입니다.
          적어도 그리스도인이라면 가장 나약한 때가 하나님의 뜻을 확실히 모를 때입니다. 구체적인 현실 안에서 하나님의 뜻이 어디 있는지 확실히 모를 때에 당황하게 되며 초조하고 불안해지는 것입니다. 또한 하나님께서 내 편에 계시다는 확신과 이 일에 대한 자신이 없을 때 비겁해지는 것입니다. 이러한 일들은 오직 기도로써 해결할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문제를 해결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문제의 해결을 완전히 보지 못하고 현실에 임했다는 것은 이미 그 자체가 실패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모르고 인간을 만났다는 것은 큰 잘못입니다. 기도 없는 모험은 그 자체가 어리석은 함정이 되는 것입니다. 먼저 기도해야 했고, 먼저 하나님의 뜻을 알았어야 했으며 먼저 기도로써 힘을 얻어야 하였던 것입니다.
          누구보다 더 가까이 따라가서 적어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옆에 있던 자가 하나는 강도라 하더라도 하나는 베드로이어야 했을 것이 아닙니까 어찌 십자가 옆에 있는 두 사람이 모두 강도들 이였단 말입니까
          결론을 내려야 하겠습니다. 영광의 길은 먼저 고난에서 시작되며 생명은 죽음에서 시작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영광을 얻기 위하여서는 먼저 고난을 함께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먼저 기도하고, 먼저 하나님께 생명을 위탁한 후, 그리고 따릅시다. 따르되 바울같이 가까이 따릅시다.

          그는 "사는 것이 그리스도"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산다고……" 내가 그리스도를 위해 사는 것이 아니라 사는 것 자체가 그리스도라고 하였습니다.
          완전히 그리스도와 동일시되며 연합된 생명을 말하고 있습니다.
          공동 운명에 들어가 하나 된 생명, 이것이 참 생명인 것입니다.
          마태복음 16장 24절에 "누구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쫓을 것이니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찰스 스펄전(Charles Haddon Spurgeon,1834-1892)은 누구인가?




          장차 영국의 ‘설교의 황태자’로 불리게 될 찰스 스펄전 (Charles Haddon Spurgeon, 1834-1892)은 1834년 6월 19일 에세스의 캘버던에서 태어났다.
          그는 그의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모두 조합교회 목사인 가정에서 그리고 영국 국교회에 반대하던 존 번연의 영국 침례교적 전통 속에서 자라났다.
          스펄전은 신앙 속에서 양육되었으며 기도하는 손에 의해 길러 졌으며 예수님에 관한 노래를 들으며 잠들곤 했다.
          그의 어머니는 특히 찰스 스펄전을 위해서는 “제 아들이 주님을 위해 살 수 있게 해주십시오”라고 기도했다.

          그는 어릴 때부터 신앙의 엄격한 교리와 경건한 칼빈주의자들과 청교도 신학과 신앙의 영향을 크게 받았다.
          스펄전은 17세기의 존 폭스의 ‘순교자의 책’과 존 오웬, 리처드 십스, 존 플라벨, 매튜 헨리, 리처드 백스터와 같은 위대한 청교도 작가들의 책을 읽고서 신학적 논의의 의미들을 파악하고 있었다.
          존 번연의 ‘천로역정’은 그가 죽기 전까지 무려 100번이나 읽었으며, 15살 된 스펄전의 상상력은 풍부했고 기억력이 뛰어 났고 그의 독서량은 엄청나게 많았다.

          스펄전의 회심

          15세의 스펄전은 자신이 죄인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용서 받을 수 있는 길을 알고 싶어 했다.
          어느날 주일 아침 스펄전은 눈보라 때문에 옆길로 빠져 어떤 작은 감리교 예배당 안으로 들어갔다.
          그날 본문은 이사야 45:22절 “땅 끝의 모든 백성아 나를 앙망하라 그리하면 구원을 얻으리라”는 말씀이었다.
          그는 설교했다.

          “여러분 중에는 자기 자신을 바라보는 이들이 많습니다. 하지만 자신 속에는 어떤 위안도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나를 앙망하라’고 말씀하십니다. 나를 보라, 나는 큰 핏방울들을 흘리고 있다. 나를 보라, 나는 십자가에 달려 있다. 나를 보라, 하늘로 올라간다. 나를 보라, 나는 하나님 우편에 앉아 있다. 오 가련한 죄인들아, 나를 보라! 나를 보라!”는 메시지가 스펄전의 영혼을 완전히 사로잡았다.

          그는 어두움으로부터 찬란한 빛으로, 죽음으로부터 생명으로 옮기워 졌고, 절망으로부터 구출되었고, 형용할 수 없는 기쁨을 소유하게 되었다. 그에게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결국 스펄전은 1850년 1월 6일 회심하였다. 1850년 5월 3일 라크강에서 침례를 받은 후 그는 일생동안 “그리스도께서 기뻐하시는 방식으로 그분의 일을 확장 시키겠다”고 서원한다.

          신학적 쇠퇴기였던 19세기의 영적상태 

          비국교도 교파들인 장로교, 침례교, 감리교, 조합교회 등은 18세기에 경험했던 부흥의 열기가 많이 침체되었고, 다소 형식주의가 교회에 팽배해 있었다. 그러나 1859년의 부흥으로 인해 다시 신앙적 열정이 일어났고, 복음주의 활동이 두드러지면서 교회는 크게 성장하였다. 하지만 비슷한 시기에 기독교 활동에 저항하는 세력들이 출현하였다. 1840년대에 시작된 현대주의 운동과 1859년 찰스 다윈의 진화론의 도전과 성경 고등비평 (Higher Criticism)이 들어와 기독교의 기초를 흔들어 놓았다. 이러한 ‘신 신학’ 또는 ‘신 사상’의 공격을 받으면서 칼빈주의적 신학과 신앙이 쇠퇴를 보이기 시작했고 그 변화는 급속하게 일어났다. 스펄전은 이러한 개혁 신학의 쇠퇴를 지켜 보면서 성경적인 교리가 회복되는 것만이 영국교회 부흥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이 될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워터비치 침례교회 부흥

          스펄전은 1851년 10월 17살 때 워터비치 한 오두막집에서 처음으로 설교를 했다.
          캐임브리지 근처 워터비치 (Waterbeach) 침례교회 에 모여든 그곳 주민들이 스펄전의 설교를 듣고 감명을 받아 자기네 교회 목사로 초청하여 1852년 1월에 부임했다.
          그가 설교하자 사람들이 회심하기 시작했고, 천국에 대한 소망을 품게 되었다.
          특별히 스펄전은 영적 혼란에 빠진 사람들을 돕는 능력을 보였고, 그 능력은 설교할 때 마다 나타났다.
          처음에 40명이던 교인수가 100명으로, 더 나아가 450명으로 급증했다.
          교인들은 스펄전을 사랑했고, 그가 대학으로 떠나지 않은 것을 기뻐했다.
          스펄전은 워터비치에서 2년간 목사로 사역한 후 “청년 설교자”로서의 그의 명성이 런던에까지 퍼져 나갔다.

          런던 부흥 - 메트로폴리탄 성전

          당시 열아홉 살이던 스펄전은 1854년 4월 런던에 있는 침례교회인 New Park Street Baptist 교회에 담임목사로 청빙을 받아 부임하게 되었다.
          스펄전이 런던으로 온 것은 1859-1860년에 이루어진 잉글랜드 부흥의 전조였다.
          매우 약해졌던 그의 교회는 시간이 갈수록 많은 성도수로 인해 넘치게 되었다.
          주일 예배 때가 되면 교회가 사람들로 가득차게 되어 곧 교회 증축을 할 수 밖에 없었다.

          엑서터 홀에서 드린 주일 예배에 매주 4,500명이 몰려왔다.
          또 좌석이 부족했다.
          이보다 더 넓은 뮤직 홀로 옮겨 예배드린 첫번째 주일에 무려 2만 2천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몰려왔다.
          그가 설교한 초창기 때 수 백명이 그의 설교를 듣고 복음을 영접했는데 장차 아내가 될 수산나 톰슨도 그 중 한사람이었다.
          교회는 청중을 사로잡는 놀라운 능력을 지닌 스펄전의 설교를 들으러 오는 청중들을 수용하기 위해 새 교회를 짓기로 결정했다.

          새로 지은 메트로폴리탄 테버네클 (Metropolitan Tabernacle) 교회는 1861년 3월에 문을 열었다.
          당시 국교회에 반대하는 신도들이 예배드리는 장소로는 가장 큰 교회로 5천명 이상을 수용할 수 있었다.
          스펄전이 사역하는 동안 평균 출석 교인의 수는 약 5천명 이상 넘었다.
          교인들의 수는 꾸준히 늘어나더니 1854년에 232명이던 교인수가 스펄전이 사망할 때 쯤에는 그 수가 5,307명으로 늘어났다.
          스펄전이 런던에서 설교한 이후로 거의 매 예배 때 많은 영혼들이 하나님을 찾았다.
          놀라운 영적 부흥이 일어났다.

          목회자 대학 (The Pastor's College) 설립

          많은 젊은이들이 스펄전의 설교를 듣고 그 영적인 열정에 감동되어 빈민학교나 길 거리에 나가서 설교했다.
          그들은 하나님을 향한 사랑과 복음의 열정이 강하였고 신학 수업을 받고 싶은 마음도 간절하였다.
          그래서 스펄전은 이러한 젊은 설교가들을 훈련시키는 목회자 대학 (The Pastor's College)을 설립하게 된다.
          이 칼리지에 대한 그의 비전은 학자를 길러내는 것이 아니라 강력한 설교자와 영혼구원에 열정을 가진 복음주의 사역자가 되도록 하는 것이었다.
          스펄전은 2년 교육과정을 마친 학생들은 교회가 없는 곳으로 가서 교회를 세우게 하였다.

          1866년에 런던에서만 스펄전 칼리지 학생들이 18개 교회를 개척하였다.
          그 후 새로운 건물이 세워졌고, 새로운 교회조직이 만들어지고, 오래되고 쇠퇴해가는 교회에 다시 부흥이 일어나기 시작하였다.
          스펄전 칼리지를 졸업한 80여명의 사역자들이 영국의 각 지역에서 목회활동을 하며 두각을 나타 내고 있었다.
          어떤 학생은 18명으로 줄어든 교회에 갔는데 몇 년 후 약 800명의 사람들에게 세례를 베풀었다.

          스펄전의 기도의 영성 - “스펄전의 기도는 신학적이다”

          스펄전의 영성은 예수 그리스도, 말씀, 기도, 교리, 은혜, 성령이다.
          그는 평생 동안 매일 아침 일찍 일어나 기도하고 성경을 읽었다.
          사도시대 이래로 스펄전의 강단 기도에 비길 만한 기도가 없었다.
          그의 강단기도는 하나님을 향한 헌신과 교우들을 위한 사랑과 격려, 축복, 그리고 심금을 울리는 표현들이 많다.
          스펄전의 기도는 신학적이다.
          그리고 그의 기도에는 진지함, 열정, 뜨거움, 창의적, 승리감이 가득하고, 하나님을 뜨겁게 사랑하는 마음과 영원한 언약의 피가 가득하다.
          그는 가끔 금식기도 기간을 정하든지 특별기도의 달을 마련하기도 했다.
          스펄전은 교회 모든 사역을 준비하기 위한 최선책은 개인 기도훈련이라고 가르쳤다.

          그리고 그는 교회에 생명력이 넘치려면 기도회를 살려야 하고 기도회를 살리면 교회와 성도 모두가 부흥한다고 강조했다. 스펄전은 주일 예배가 시작되기 전 전심으로 하나님께 기도한다. 잃어버린 영혼들에게 복음을 전파하는 막중한 책임감 때문이다. 그리고 예배가 끝나면 곧바로 개인 기도실로 돌아와 하나님 앞에서 그의 실패감을 한탄했다. 스펄전은 설교자의 능력을 얻는 조건은 뜨겁고 끈질긴 기도가 가장 급선무라고 강조하면서 능력의 비결이 무엇이냐고 묻는 사람에게 “무릎 꿇고 땀을 흘리는 것”이라고 말한 것이다. 

          스펄전의 설교 핵심 - “복음 설교”

          스펄전의 모든 설교는 복음설교이다. 복음의 핵심은 그리스도의 대속이다. 그의 설교는 주 예수 그리스도와 십자가로 가득 채워졌고, 성경과 죄의 타락성, 은혜 교리, 하나님을 향한 사랑, 구원의 영광이었다. 그의 설교는 권위있고, 열정적이며 우렁차고, 독창적이며, 감동적이고, 심오하고, 어휘 선택이 참신하고, 구체적인 적용사례들이 가득했다. 스펄전은 목회 주제는 예수 그리스도이고, 그의 사역 기간 동안 예배나 성례전보다는 설교와 회심에 더 큰 강조점을 두었다. 스펄전은 하나님의 말씀을 간명하고도 열정적으로 전했다. 그는 개혁주의 신앙고백의 핵심 사항들과 복음주의 신앙을 끝까지 사수했으며, 교리적으로는 칼빈주의를 고수하며 굽힐 줄 모르는 신학적 신념들이 강했다.

          마틴 로이드 존스는 스펄전에 대해 말하기를 “그는 영국이 낳은 가장 위대한 복음 전도자가 바로 이 사람인데 그는 칼빈주의자였다”고 말했다.
          스펄전은 한 편의 설교를 작성하기 위해 수백 권의 책을 참고했다.
          그의 서재에는 1만 2천권 정도 있는데 약 60-70%는 청교도 서적이다.

          내리막 논쟁 (Down Grade Controversy)과 생의 마감 

          칼빈주의 신학이 확고한 스펄전은 연합침례교 안에서 자유주의와 논쟁을 하게 된다.
          침례교 연맹을 분열시킬 뻔 했던 사건으로 1887년 교리적인 문제인 “내리막 논쟁”이 발생한다.
          이 논쟁은 당시 침례교 목사들과 교회 및 신학 대학들 가운데 현대 성경 비판이 퍼지고 있다는 사실을 비난했을 때 발생했다.
          스펄전은 새로 나온 자유주의 신학은 성경의 권위를 거부하고 그리스도의 신성을 부인할 뿐 아니라 칼빈주의 교리를 약화시킨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그는 검과 흙손 월간지에 청교도 입장을 옹호하며 “우리 믿음의 적들”을 공격하는 내용의 글을 발표하면서 그는 침례교 연맹을 탈퇴했다.
          비록 침례교로부터 지지를 받지 못했지만 복음주의 연맹 회의가 열려 스펄전을 지지할 뿐 아니라 복음의 기본적인 진리들을 증언하기 시작했다. 스펄전은 진리수호를 위해 싸웠고 은혜교리를 지키기 위해 어떤 희생도 불사했다.

          스펄전은 1892년 1월 31일에 예수 그리스도로 불타오르는 사역을 마치고 영원한 안식에 들어갔다.
          올리브 나무로 만든 스펄전의 관에는 이렇게 쓰여 있었다.
          “영원히 사랑하는 찰스 하돈 스펄전 목사를 기억하며, 1834년 6월 19일 캘베던에서 태어나 1892년 1월 31일 멘톤에서 예수님 품에 잠들다. ‘나는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갈 길을 마쳤으며 믿음을 지켰노라.’

          찰스 스펄전이 오늘날 우리에게 주는 교훈

          1. 예수 그리스도 중심적인(Christ-centredness) 삶

          스펄전은 스스로 고백하기를 "나는 내 스스로를 칼빈주의자라고 말한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았다.
          그는 나의 본질은 항상 '예수 그리스도' 라고 말한다.
          스펄전의 모든 고백과 신학 그리고 교리적인 관점은 그의 예수님 중심적인 생각과 삶에서 비롯되었다.
          믿음으로 예수님을 통해 구원을 받은 날 부터 스펄전에게 있어서 예수님은 전부가 되었다.
          만약 예수님을 향한 스펄전의 이 헌신을 이해하지 못한다면 스펄전의 삶을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2.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철저한 순종

          그는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았으며 순종하였다.
          또한 하나님의 도우시는 손길을 따라 성경에 기록된 모든 내용을 실천하며 설교하였다.
          성경은 스펄전의 가장 강력한 무기였다.
          스펄전은 사람의 시선을 인식하지 않고 어린 아이와 같은 믿음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붙잡고 하나님 앞에서 삶을 살았다.

          3.  목회자상

          그는 예수 그리스도의 양 떼들을 참 목자와 같은 마음으로 섬겼다.
          스펄전은 어디를 가든 어디서 설교를 하든 늘 목자와 같은 마음으로 설교를 한 것이다.
          그에게 있어서 인간의 영혼은 가장 중요하였으며 그 영혼을 먹이고 양육하는 것을 스펄전은 사랑하였다.
          스펄전의 설교의 가장 강력한 무기 중 하나는 영혼을 향한 목자의 마음과 사랑이었다.
          스펄전의 설교는 영혼을 살리는 설교가 되었으며 오늘날까지도 '설교의 황태자'라는 이름을 얻게 된 것이다.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사순절 특히 고난주간을 맞이하며 신앙의 관심을 십자가 즉 육체의 고통에 집착하려고 한다.
          그러나 기독교 신앙의 핵심은 육체의 고통이 아니라 말씀에서 멀어진 것을 회복해야 하는 것이다.

          예수님은 말씀이 육신이 되어 이 세상에 오셨다(요한 1:14)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마지막 로마의 군병들에 의해서 붙잡히신 사건도 말씀을 성취하는 것이었다(마태 26:56)
          그러나 이렇게 된 것은 다 선지자들의 글을 이루려 함이니라 하시더라 이에 제자들이 다 예수를 버리고 도망하니라.

          다니엘 7:13-14
          내가 또 밤 이상 중에 보았는데 인자 같은이가 하늘 구름을 타고 와서 옛적부터 항상 계신 자에게 나아와 그 앞에 인도되매
          그에게 권세와 영광과 나라를 주고 모든 백성과 나라들과 각 방언하는 자로 그를 섬기게 하였으니 그 권세영원권세라 옮기지 아니할 것이요 그 나라는 폐하지 아니할 것이니라.

          가룟 유다의 배신
          시편 41:9
          나의 신뢰하는바 내 떡을 먹던 나의 가까운 친구도 나를 대적하여 그 발꿈치를 들었나이다.

          은 30에 팔리실 것
          스가랴 11:12
          내가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가 좋게 여기거든 내 고가를 내게 주고 그렇지 아니하거든 말라 그들이 곧 은 삼십을 달아서 내 고가를 삼은지라.

          죄인들과 못 박히심
          이사야 53:12
          이러므로 내가 그로 존귀한 자와 함께 분깃을 얻게 하며 강한 자와 함께 탈취한 것을 나누게 하리니 이는 그가 자기 영혼을 버려 사망에 이르게 하며 범죄자 중 하나로 헤아림을 입었음이라 그러나 실상은 그가 많은 사람의 를 지며 범죄자를 위하여 기도하였느니라 하시니라.

          이사야 53:7
          그가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 때에도 그 입을 열지 아니하였음이여 마치 도수장으로 끌려가는 어린 과 털 깎는 자 앞에 잠잠한 같이 그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


          수족이 찔리심
          스가랴 12:10
          내가 다윗의 집과 예루살렘 거민에게 은총과 간구하는 심령을 부어 주리니 그들이 그 찌른바 그를 바라보고 그를 위하여 애통하기를 독자를 위하여 애통하듯 하며 그를 위하여 통곡하기를 장자를 위하여 통곡하듯 하리로다.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마태복음 26:47-56
                                                                                                          열두 영(53절)

          너는 내가 내 아버지께 구하여 지금 열 두 영 더되는 천사를 보내시게 할 수 없는 줄로 아느냐.
          Do you think I cannot call on my Father, and he will at once put at my disposal more than twelve legions of angels?

          (개역개정) 너는 내가 내 아버지께 구하여 지금 열두 군단 더 되는 천사를 보내시게 할 수 없는 줄로 아느냐
          (현대인) 내가 아버지께 청하기만 하면 12개 여단의 군대보다 더 많은 천사들을 당장 보내 주실 수 있다는 것을 너는 모르느냐?
          (새번역) 너희는, 내가 나의 아버지께, 당장에 열두 군단 이상의 천사들을 내 곁에 세워 주시기를 청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느냐?
          (공동번역) 내가 아버지께 청하기만 하면 당장에 열두 군단도 넘는 천사를 보내주실 수 있다는 것을 모르느냐?
          (NASB) Or do you think that I cannot appeal to My Father, and He will at once put at My disposal more than twelve legions of angels?
          (KJV) Thinkest thou that I cannot now pray to my Father, and he shall presently give me more than twelve legions of angels?

          로마의 군대조직의 가장 큰 단위는 군단이다. 
          당시 로마의 1개 군단약 6천 명 정도의 사병으로 구성되어있었는데 로마 제국 안에는 총 28개 정도의 군단이 있었다.
          한 개의 군단은 10개의 대대로 나뉘고 이 한 개의 대대는 여섯 개의 백인대로 나뉘었다.
          명칭상으론 백 명이 기준이 되지만 실질적으로 백인대는 80명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그리고 이 백인대를 이끄는 대장이 바로 백부장이다.
          백부장은 로마군의 가장 중요한 핵심이었다.
          백부장은 군에서 복무한 경험이 보통 15년이 되었을 때 오를 수 있는 자리였다.
          사병들 사이에선 그들이 꿈꿀 수 있는 가장 명예로운 직책이었다.
          그리고 군생활이 천국이 되느냐 지옥이 되느냐는 전적으로 자신이 속한 백인대의 백부장이 어떤 사람이냐에 달려있었다.
          병사들의 군기를 잡기 위해서 백부장은 갖은 기합을 통해서 두려움을 심어줘 군기를 잡으려 노력했다.

          타키투스의 『연대기』에 등장하는 한 백부장의 별명은 ‘다른 놈을 데려와’였다고 한다.
          아마도 군기를 잡기 위해서 병사들을 순번에 따라 앞에다 놓고 체벌을 가해 얻어진 별명일 것이다.



          열두 영이란?

          열 두 영의 천사란 천사들의 숫자가 열두 명쯤 되는 것이 아닙니다.
          한문 관주 성경에서 "열 두 영(營)"이라고 하여 "경영할 영(營)" 자를 사용합니다.
          영이란 로마군대의 조직 체계로부터 유래된 것입니다.
          한글 개역 개정과 새번역과 공동번역 성경에서 "열 두 군단" 이라고 번역합니다.
          현대인의 성경에서는 "열 두 여단" 이라고 합니다.
          영어성경(NIV, KJV, NASB)에서 "twelve legions(12 군단)"라고 번역합니다.
          헬라어 성경에서는 "레게온(λεγεών)" 이라고 합니다.
          12 영(레기오나스. λεγιῶνας)이란 36,000명을 말합니다.
          따라서 예수님께서 로마의 군병들에 의해서 붙잡히셨을 때 12영 더 되는 천사를 보낼 수 있다는 것은 지금 나를 체포하려고 동원된 로마의 군인들보다 훨씬 더 많은 천사들을 동원하여 막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그렇게 하지 않는 이유는 아버지의 원대로 이루어가는 과정이라는 것을 분명하게 보여주시는 순종의 모습이라고 하겠습니다.

          다른 복음서에서 베드로는 칼을 사용하여 대제사장의 종 말고의 귀를 잘랐다고 합니다.
          이때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에게 칼을 거두어라 칼을 사용하는 자는 칼로 망할 것이라고 하시며 오히려 말고의 귀를 다시 회복시켜 주셨다고 합니다.

          가장 불리한 상황에서도 최고의 사랑의 모습으로 모든 사람들을 깨우치셨던 예수님의 행동을 어떻게 생각하셨습니까?
          작은 불이익에도 화가 솟구쳐 흥분하기 쉬운 우리들의 모습과 대조하면 예수님의 행동은 온전한 인성과 온전한 신성을 겸비한 우리가 본받아야 할 태도라고 하겠습니다.

          성경에서는 시간을 두 가지 단어로 설명합니다.
          하나는 흘러가는 시간을 의미하는 크로노스(chronos. χρόνος)
          다른 하나는 특별한 시간을 의미하는 카이로스(Kairos. καιρός)

          사랑하는 교우들이여!
          무의미하게 흘러가는 크로노스의 인생을 즐기시렵니까?
          아니면 오늘이란 내게 마지막으로 주어진 기회의 시간 카이로스로 맞이하시렵니까?

          어제와 같은 오늘이 아니라 내일을 기대할 수 있는 기도의 사람이 되어 크로노스의 시간을 카이로스의 시간으로 다듬어가는 일에 성공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 오늘의 명언
          시간은 인간이 쓸 수 있는 것 중에서 가장 소중한 것이다.
          – 디오게네스 –



           

          마태복음 26:53
          너는 내가 내 아버지께 구하여 지금 열 두 영 더되는 천사를 보내시게 할 수 없는 줄로 아느냐?’

          영(λεγεών. 레게온)
          로마 군의 ‘군단’ 하스타티와 프린키페스는 120명 단위로 총 1,200명씩,
          최후미이자 예비대인 트리아리는 60명 단위로 총 600명을 편제하여 한개 군단병력을 3,000명 선에서 유지하였고,
          양익에는 300명의 기병대를 나누어 배치된다.
          군단 총원으로 세지 않는 벨리테스(Velites)들은 대열 중간에 나뉘어 배치된다.

          12 영(λεγιῶνας. 레기오나스) : 36,000명
          천사들(ἀγγέλων. 앙겔론)을 말합니다.
          로마의 군단들처럼 강하고 많음을 비교해서 말씀하심


          고대 그리스에서는 시간을 두 가지로 나누어 말했습니다.
          하나는 흘러가는 시간을 뜻하는 크로노스(chronos. χρόνος)
          다른 하나는 특별한 시간을 의미하는 카이로스(Kairos. καιρός)입니다.

          그저 흘러가는 인생은 크로노스의 시간입니다.
          그 인생에서 주어지는 기회의 순간은 카이로스의 시간입니다.

          기회를 기다리고만 있는 것이 아니라, 기회를 적극적으로 만들어 나간다면 크로노스의 시간인 평범한 여러분의 하루를
          특별한 카이로스의 시간으로 변화시킬 수 있을 것입니다.


          # 오늘의 명언
          시간은 인간이 쓸 수 있는 것 중에서 가장 소중한 것이다.
          – 디오게네스 –


          χρόνος, ου, ὁ  5550

          1. 시간,  2. 유예
          발음 / 크로노스(chrŏnŏs)
          어원 / 불확실한 파생어에서 유래
          관련 성경 / 때(마 2:7, 행 1:7, 벧전 4:2), 시대(행 17:30), 얼마간(행 19:22), 시간(히 11:32), 기회(계 2:21), 동안(막 2:19), 기한(눅 1:57), 시대(행 17:30), 항상(행 20:18), 날(행 27:9), 영세(롬 16:25).

          뜻풀이부

          • 명사 시간, 때, 마25:19, 눅8:27, 요7:33, 행8:11.
          • 2.
            명사 유예, 지체, 계2:21, 10:6.





          καιρός, οῦ , ὁ  2540
          1. 때,  2. 달가운 때,  3. 옳은 때
          발음 / 카이로스(kairŏs)
          어원 / 불확실한 유사어에서 유래
          관련 성경 / 때(마 8:29, 눅 8:13, 딤후 3:1), 날(마 16:3, 눅 1:20, 고후 6:2), 세월(골 4:5), 연대(행 17:26), 틈(행 24:25), 현재(롬 8:18, 히9:9), 기회(갈 6:10), 항상(엡 6:18).
          신약 성경 / 86회 사용

          뜻풀이부

          1.
          명사 때, 시점, 기간, 시기.
          • a.
            명사 [일반적으로] 달가운 때, 고후6:2, 어려운 때, 딤후3:1, 열매 맺는 때, 행14:17, 때때로, 정규적으로, 요5:4.
          • b.
            명사 옳은 때, 알맞은 때, 좋은 때, 제때에, 마24:45, 눅12:42, 행24:25.
          • c.
            명사 정한 때, 마13:30, 21:34, 막1:15, 행17:26, 갈4:10, 6:9, 딤전2:6, 딤후4:6, 딛1:3.
          • d.
            명사 [종말론적 숙어] 마8:29, 16:3, 눅21: 8, 고전4:5, 엡1:10, 계1:3, 22:10.

          1. '영'과 '군단'

          ​예수님이 로마 병정들에게 잡혀가실 때 베드로는 혈기를 참지 못하고 칼을 휘둘러 말고라는 병사의 귀를 잘랐다.
          이 장면은 워낙 유명해서 예수님의 일대기를 다룬 영화에도 종종 등장한다.
          이 사건은 사복음서에 모두 소개되는데, 기록자의 특징이 드러나 흥미롭다.

          ​그때에 시몬 베드로가 칼을 가졌으므로 그것을 뽑아 대제사장의 종을 쳐 그의 오른쪽 귀를 벴는데 그 종의 이름은 말고더라(요 18:10)

          ​사도 요한은 유일하게 귀를 자른 자와 잘린 자의 이름을 언급했다.
          베드로와 말고다.
          누가는 이름을 언급하지 않는다.

          ​그들 중의 한 사람이 대제사장의 종을 쳐 그의 오른쪽 귀를 베니 예수님께서 응답하여 이르시되, 너희는 이것까지도 허락하라, 하시고 그의 귀에 손을 대사 그를 낫게 하시더라(눅 22:50~51)

          ​말고의 귀를 예수님이 도로 고쳐주신 것은 누가만 기록했다.
          그가 의사였던 점을 생각나게 하는 지점이다.

          ​​아무튼 그 사고가 있었을 때 예수님이 베드로에게 하신 말씀이 있다.
          성경을 좀 읽는 사람이라면 익숙한 구절들이 있는데, 아마 이 말씀도 많이 귀에 익은 내용일 것이다.

          ​너는 내가 내 아버지께 구하여 지금 열두 영 더 되는 천사를 보내시게 할 수 없는 줄로 아느냐 (마 26:53, 개역한글)

          ​나도 어릴 때부터 그렇게 알았는데, 이 구절을 보면 당연히 영적 존재인 열두 천사를 말씀하시는 것으로 오해하게 된다.
          하지만 열두 영의 '영'은 '군단'이다.

          ​너는 내가 지금 내 아버지께 기도하여 당장이라도 그분께서 열두 군단(legions)이 넘는 천사들을 내게 주시도록 할 수 없는 줄로 생각하느냐?(마 26:53, 흠정역)

          ​열두 천사의 영(spirit)이 아니라 군단 수준의 하늘 군대를 보내실 수 있다고 말씀하신 것이다.
          legion(리전)은 '리전 오브...'로 시작하는 게임들이 떼 지어 전쟁을 벌이는 종류들인 것처럼 '군단'을 의미한다.
          미드, 게임, 소설 등에 '레기온'이라고도 종종 등장한다.

          ​군단이라고 하면 중대, 대대, 연대, 사단보다 더 큰 개념이다.
          예수님은 당시 사람들이 바로 알아들을 수 있는 로마 부대의 군단을 말씀하신 것인데, 보병과 말 타는 기병을 합쳐 5천~6천 정도의 병사들이 당시의 군단 규모다.
          열둘과는 비교할 수 없이 많은 수다.
          개역개정은 2012년 이후 이것을 군단으로 바로잡았다.

          ​너는 내가 내 아버지께 구하여 지금 열두 군단 더 되는 천사를 보내시게 할 수 없는 줄로 아느냐(마 26:53, 개역개정)

          ​그러면 왜 예전의 개역한글은 '군단'을 '영'으로 번역했을까?

          처음엔 이것을 '병영(兵營)'이라고 할 때의 '영(營)'으로 본 것인가 했는데, 그것도 아니고 명백한 오역이었다.
          왜 그랬는지는 모르겠지만 한자 개역한글판으로 보면 진짜 '영(靈, 영묘할 영)'으로 나온다.

          ​뭐지?? 아마도 번역 후 한자를 넣는 과정에서 당연하게 영(靈)으로 생각한 것 아닐까... 그것밖에는 가능성이 없다. 이 부분은 교리적으로나 큰 영향을 주는 것은 아니지만 성경의 정확성을 생각하면 아쉬운 부분이 아닐 수 없다.

          '군대 귀신'과 '군단 마귀'

          ​그런데 군단이 나오는 곳이 더 있다. 바로 마귀의 군단이다.
          가다라(거라사)의 마귀 들린 자에게 들어가 있던 마귀들로 흔히 '군대 귀신'이라고 부르는 악한 영들이다.
          그들은 예수님께 간청해 돼지 떼에 들어가는데, 돼지들은 호수로 내달아 죽게 된다.

          ​예수님께서 그에게 물어 이르시되, 네 이름은 무엇이냐? 하시매 그가 이르되, 군단이니이다, 하니 이는 많은 마귀들이 그에게 들어갔기 때문이더라. (눅 8:30, 흠정역)

          ​여기 군단도 리전(legion)인데 킹제임스 영어성경은 대문자 Legion으로 되어 있다.
          일반적 군단이 아니라 마귀들의 부대임을 특정한 것이다.

          ​그런데 개역성경은 같은 '리전'을 여기서는 군대로 번역했다.

          ​예수께서 네 이름이 무엇이냐 물으신즉 이르되 군대라 하니 이는 많은 귀신이 들렸음이라 (눅 8:30, 개역개정)

          ​군대는 더 포괄적인 말이다. 천사들은 하늘의 군대라고 불렸다.
          마귀의 천사들도 일부가 무리 지어 있으면 군단이지 군대는 아니다.

          ​그의 모든 천사여 찬양하며 모든 군대(hosts)여 그를 찬양할지어다 (시 148:2, 개역개정)

          ​그분의 모든 천사들아, 너희는 그분을 찬양하라. 그분의 모든 군대들(hosts)아, 너희는 그분을 찬양할지어다. (시 148:2, 흠정역)

          ​주의 모든 천사는 군대(host = army)이다.
          문제는 통일성이다. 군단과 군대의 구분은 킹제임스 성경만 그런 것이 아니고, 영어 현대역본들도 다르게 구분이 돼 있다. 오직 개역성경만 그저 '알아서' 제멋대로 번역했다. 단어의 뜻을 따라가는 것이 아니라 느낌을 따라가는 번역이다. 사실 '열두 군단' 같은 단어도 다른 성경들이 사용하고 나서 바뀐 것이다.

          ​"군단이면 어떻고 군대면 어떤가. 열둘이면 어떻고 더 많으면 어떤가. 뜻만 통하면 됐지."라고 할 수도 있다. 하지만 이런 비교적 사소한 단어들만 문제인 것이 아니라는 데 심각성이 있다. 귀중한 교리와 신학까지 좌우할 수 있는 단어들도 중구난방이다.

          ​성경을 여러 번 읽어도 뜻을 잘 알 수 없는 이유는 말 자체가 어려워서가 아니다. 쉬운 말 성경을 봐도 별반 달라지지 않는다. 성경은 사전이나 주석서 이전에 성경이 스스로 그 단어를 드러내는 책이다. 성경에 등장하는 용례들을 통해 뜻을 저절로 알 수 있다. 이때 가장 중요한 것이 일관성이다. 다른 곳에서 본 단어가 또 나올 때 저절로 깨닫게 하려면 같은 단어는 같게 옮겨야 한다는 것이다.









          에베소서 5:17
          주의 뜻이 무엇인지 이해하라

          이해하라(4920) συνίημι 

          1. 깨닫다.  2. 이해하다.  3. 통찰하다
          발음 / 수니애미(süniēmi)
          어원 / 미래 συνησω, 제1부정과거 συνῆ- κα, 제1부정과거 가정법 συνῆτε, συ- νῶσιν, 제2부정과거 명령 2인칭복수 σύνετε, 4862와 ἵημι ‘보내다’에서 유래
          관련 성경 / 깨닫다(마 13:13, 막 4:12, 롬 3:11), 이해하다(엡 5:17), 지혜가 있다(고후 10:12)
          신약 성경 / 26회 사용



          겟세마네의 기도 / 감람산 기도
          마태복음 26:36-46, 마가복음 14:32-42, 누가복음 22:39-46

          1. 습관적인 기도(habitual prayer)

           예수께서 나가사 습관을 좇아 감람산에 가시매
                                                        (누가복음 22:39) 

          습관(에도스,  ĕthŏs. 1485) ἔθος 

          1. 버릇,  2. 관습, 3. 유대인의 풍속
          발음 / 에도스(ĕthŏs)
          어원/ 1486에서 유래
          관련 성경 / 전례(눅 1:9, 2:42), 습관(눅 22:39, 히 10:25), 규례(행 6:14), 법(행 15:1, 25:16), 풍속(행 16: 21, 26:3), 관습(행 21:21, 28:17).신약 성경 / 12회 사용

          * 1486. ἔθω
          발음 / 에도(ĕthō)
          1. εἴωθα를 보라.
          관련 성경 / 전례대로 하다(막 10:1), 규례대로 하다(눅 4:16), 전례가 있다(마 27:15).

          설득의 3대 요소 - 에토스, 파토스, 로고스

          그리스의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Aristoteles는 인간을 ‘정치적 동물zoon politikon’이라고 평했다.
          인간은 개인으로서 존재하지만, 그 개인이 홀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타인과의 관계 속에서 존재한다는 것이다.
          한마디로 인간은 사회 속에 존재한다는 얘기다.
          그 사회의 구성원이 되려면 타인과 대화를 해야 하고, 대화를 풀어가려면 반드시 필요한 게 ‘설득’이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설득의 중요성을 설파한 것도 그래서다.

          《수사학Ars Rhetorica에서 강조한 설득의 3대 요소에토스Ethos(인품·인격), 파토스Pathos(감성), 로고스Logos(이성)다.
          이 중 가장 중요한 것은 에토스다.
          화자話者가 아무리 말을 잘한들 화자가 전하는 메시지의 신뢰성이 떨어지면 아무도 믿지 않는다.
          오히려 거부감이 든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이 화자의 인격이고 신뢰감이다.
          에토스가 ‘윤리학ethics’의 어원이 된 이유이기도 하다.

          파토스다.
          청중의 감정이나 욕구에 호소해 마음을 움직이는 설득 수단이다.
          먼저 청중의 심리적 상태나 욕구 등을 고려해 설득해야 한다는 얘기다.
          영어로는 ‘페이소pathos’다.
          파토스가 오늘에 와서 일시적인 감정적 흥분 외에 무엇에 대한 지속적인 정열과 정념 등의 뜻도 갖게 됐지만, 문자 자체로는 ‘고통’이라는 의미이며 ‘병病’을 나타내는 ‘패스path’의 어원이기도 하다.

          에토스와 파토스를 잘 이용한 대표적 인물은 아돌프 히틀러Adolf Hitler다.
          그는 나치 정권의 선전 장관이었던 파울 괴벨스Paul Joseph Goebbels를 등에 업고 독일인의 전폭적인 신뢰를 이끌어냈다.
          괴벨스는 예술과 뉴미디어를 통해 독일 대중이 히틀러를 사랑하게 만들었고, 독일 대중이 스스로 나치가 되어 전쟁에 자발적으로 참여하게 만들었다.
          그는 최후까지 히틀러에게 충성했으며, 히틀러가 자살한 다음 날 총리 관저 대피호에서 부인과 함께 자살했다.
          히틀러 스스로도 명연설가였다.
          어떤 집회에서나 청중이 듣고 싶어 하는 말을 했다. 본능적으로 이들의 동경과 욕구를 파악해 자신에게 유리하게 이끌어냈다.
          그 결과 청중은 광기에 가까운 충성심을 보인다.
          “지성은 2류, 기질은 1류”라고 평가받던 프랭클린 루스벨트Franklin Roosevelt가 미국 대통령에 당선된 이유 역시 친근감으로 무장한 그의 감성 능력 덕분이라는 분석이 나온다.

          에토스와 파토스에 이어 필요한 요소가 로고스다.
          논리적이고 이성적으로 자신의 주장을 설득하는 방법이다.
          객관에 바탕을 두고 있어야 한다.
          로고스가 ‘논리학logic’과 학문을 의미하는 ‘로지logy’의 어원이 된 것도 그래서다.
          병을 연구하는 학문인 ‘병리학pathology’은 병을 의미하는 파토스와 학문을 의미하는 로고스가 합쳐진 말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로고스가 파토스를 이길 수 없다고 생각했다. 인간은 입증된 사실보다 믿고 싶어 하는 사실에 더 이끌리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람을 설득함에 있어 그 중요성을 에토스 60, 파토스 30, 로고스 10의 비중으로 봤다.

          “국민의, 국민에 의한, 국민을 위한 정치”로 대표되는 에이브러햄 링컨Abraham Lincoln의 게티즈버그 연설이나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로 유명한 마틴 루서 킹Martin Luther King Jr.목사의 연설이 지금도 회자되는 것은 에토스, 파토스, 로고스를 잘 활용해 청중의 감동을 이끌어내고 뇌리에 남게 했기 때문이다.

          예수님의 기도(겟세마네 기도 - 감람산 기도)

          마태복음 26:36-46, 마가복음 14:32-42, 누가복음 22:39-46

          2. 친밀한 기도(intimate prayer)

            내 아버지여(마태복음 26:39, 42)
            아바 아버지여(마가복음 14:36) 
            아버지여(누가복음 22:42) 

          예수님의 기도(겟세마네 기도 - 감람산 기도)

          마태복음 26:36-46, 마가복음 14:32-42, 누가복음 22:39-46

          3.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기도
                                          (Prayer to fulfill God's will)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마태 26:39, 42)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마가 14:36)
          그러나 내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누가 22:42)

           
           뉴스페퍼민트 NewsPeppermint  

          지난 45억 년 동안 지구에는 수많은 생명체가 존재했습니다. 이들은 나타났다 사라지기를 반복했고, 다양한 차원에서 상호작용하며 커다란 시스템을 유지해 왔습니다. 우리는 이를 생태계라 부릅니다.
           
          인간 역시 생태계의 일원입니다. 그러나 인간과 생태계의 관계는 그리 간단하지 않습니다. 지구온난화가 말해주는 것처럼 인간은 생태계의 파괴자이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인간 때문에 지금까지 있었던 다섯 번의 대멸종에 맞먹는 여섯 번째 대멸종이 일어나고 있다는 주장도 있습니다.


          복잡한 생태계 : 항상성과 나비효과
          생태계는 매우 복잡한 시스템이며, 이는 두 가지 모순된 것처럼 보이는 사실을 이야기합니다. 하나는 생태계가 일종의 항상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는 어떤 외부 충격이 주어졌을 때 생태계가 스스로 이에 대응하며 안정된 상태로 돌아간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런 예들은 무수히 많이 찾을 수 있습니다. 다른 하나는 시스템에 생긴 어떤 문제가 나비효과를 일으켜 걷잡을 수 없이 큰 결과를 낳는 경우입니다. 여러 유명인의 말로 전해지는, 꿀벌이 사라질 때 일어날 일 같은 것이 여기에 해당할 것입니다.

          인간과 생태계의 복잡한 관계는 위의 두 가지 관점으로도 설명할 수 있습니다. 인간을 생태계의 일원으로 본다면, 문명의 발전 과정에서 발생한 지구 온난화를 다시 기술의 힘으로 되돌리려는 인류의 노력이 결국 하나의 커다란 생태계가 보여주는 자정작용이라 말할 수 있을 겁니다. 반대로 인간을 생태계의 파괴자로 본다면, 지금 이 순간 인간의 오만과 탐욕 때문에 여섯 번째 대멸종이 일어나는지도 모른다는 설명이 가능합니다.




          지난 16일, 뉴욕타임스에는 인간과 생태계의 이런 복잡한 관계를 알려주는 칼럼이 실렸습니다. 바로 지난 4억 5천만 년 동안 큰 진화 없이 형태를 유지해 온 투구게에 인간이 커다란 빚을 지고 있으며, 동시에 앞서 다섯 번의 대멸종을 이겨낸 투구게가 인간 때문에 멸종할지도 모른다는 것입니다. 물론 멸종을 막을 힘 또한 인간에게 있습니다.

          투구게는 다른 절지류처럼 푸른색 피를 가지고 있지만, 다른 절지류에서는 볼 수 없는 놀라운 특성이 하나 있습니다. 외부의 균에 대응하는 백혈구가 없는 대신 LAL(리물루스 아메보사이트 라이세이트)이라는 단백질이 피를 응고시키는 방식을 택하는 겁니다. 이 LAL은 인간에게 치명적인 내독소(endotoxin)에 반응하는 자연계의 유일한 물질이기 때문에, 투구게의 피는 주사 용액이나 의료용품의 안전성 검사에 쓰였습니다.

          문제는 인간이 안전성 검사에 쓸 피를 얻고자 투구게를 과도하게 사냥하면서 이들의 개체수가 줄어들고 있다는 것입니다. 만약 투구게가 멸종된다면, 인간은 저렴하고 안전한 내독소 검사 도구를 잃게 됩니다. 여기에 지난 5억 년을 멀쩡히 살아온 투구게를 인간이 멸종시켰다는 오명이 더 큰 문제일 겁니다.

          칼럼을 쓴 데보라 크라머는 투구게를 이용하지 않고, 화학적으로 이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을 소개합니다. 바로 재조합 C인자(rFC)라는 실험실에서 만들어낸 물질로 내독소 검사를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아직 이 물질을 사용하는 데 필요한 표준이 마련되지 않아 널리 사용되지 못하고 있다고 크라머는 지적합니다. 그러나 전문가와 제약회사가 모두 이 물질로 투구게(의 피)를 대체하기를 바란다면, 왜 20년 동안 재조합 C인자를 이용한 검사가 진척을 이루지 못했는지 좀 더 자세히 조명해 줬으면 좋았을 거란 아쉬움이 남습니다. 재조합 C인자가 정말로 투구게를 완벽히 대체할 수 있다면, 진작에 그렇게 진행되지 않을 이유가 없어 보이기 때문입니다. 어쨌든 미국과 유럽, 일본 등에서 표준이 마련되고 있다고 하니, 곧 투구게를 남획하지 않아도 되는 날이 오길 바랍니다.
           

          생태계 균형을 위협하는 인간의 필요
          다시 생태계 문제로 되돌아와 봅시다. 인간은 투구게 덕분에 더 번성할 수 있었습니다. 인간의 수명은 늘어났고, 투구게 덕분에 목숨을 건진 사람들도 무척 많을 겁니다. 아마도 투구게를 대신할 재조합 C인자를 만들어낸 이들도 투구게 덕을 봤다고 할 수 있을 겁니다. 인간만이 아니라, 과거 안전성 검사를 위한 동물실험에 이용되던 토끼나 설치류 역시 투구게 덕분에 수십만 마리가 희생되지 않을 수 있었습니다.

          생태계의 이야기로 시작했지만, 결국 동물실험이라는 주제가 나왔습니다. 오늘날 동물의 권리는 분명 신장되었고, 이는 보다 보편적인 생명의 가치를 확인한다는 점에서 분명한 하나의 진전입니다. 하지만 여전히 인간의 생명과 동물의 생명을 비교해야 하는 상황이 존재합니다. 동물실험이 대표적인 예죠.

          인간의 생명에 영향을 미치지 않는 한 동물의 생명도 소중히 할 수 있다면 가장 좋을 겁니다. 몇 가지 시도되고 시행 중인 기술들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 인공 장기를 이용한 실험이나 컴퓨터 시뮬레이션을 이용한 방법이 그렇습니다. 정말로 언젠가는 불쾌한 동물실험을 대체할 수 있을 것이고, 꼭 그렇게 되기를 바랍니다.


          5056. τέλος, ους, τό

          1. 끝.  2. 결말.  3. 마지막.
          발음 / 텔로스(tĕlŏs)
          어원 / 기본형 τέλλω ‘제한하다’에서 유래
          관련 성경 / 끝(마 10:22, 24:6, 막 13:13, 눅 21:9), 마지막(롬 6:21,22, 고전 15:24), 결말(마 26:58, 약 5:11), 결국(고후 3:13), 관세(마17:25, 롬 13:7), 마침(롬 10:4), 목적(딤전 1:5), 말세(고전 10:11).
          신약 성경 / 40회 사용

          telos 미국식 [ télɑs,tí:l- ]
          명사 (특히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에서) 목적인(目的因)

           

          내 삶을 향한 하나님의 뜻을 아는 방법은 무엇인가?

          하나님의 뜻을 아는 것은 중요한 일입니다.
          예수님은 아버지의 뜻을 알고 행하는 사람들이 예수님과 참된 관계를 맺는 자들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누구든지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이니라”(막 3:35).

          예수께서는 두 아들의 비유를 통해 아버지의 뜻을 따르지 않는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을 꾸짖습니다.
          특히 그들은 “끝내 뉘우쳐 믿지 아니하였도다(마 21:32)”

          첫째,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믿는 것

          가장 기본적인 하나님의 뜻은 우리가 죄를 회개하고 예수님을 신뢰하는 것입니다.
          만일 이 첫 단계를 밟지 않았다면 우리는 아직 하나님의 뜻을 받아들인 것이 아닙니다.

          둘째,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따르는 것

          믿음으로 그리스도를 영접해 하나님의 자녀가 되면(요 1:12) 하나님은 우리를 그분의 길로 인도하기를 원하십니다(시 143:10).
          하나님은 우리에게 자신의 뜻을 숨기지 않으시며 드러내기를 원하십니다.
          사실 이미 하나님은 우리에게 그분의 말씀을 통해 주의 뜻을 많이 알려주셨습니다.
          “범사에 감사하라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살전 5:18).
          선행을 해야 합니다(베드로전서 2:15). 
          "하나님의 뜻은 이것이니 너희의 거룩함이라 곧 음란을 버리라"(살전 4:3)

          셋째, 변화된 삶을 증거하라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알 수 있고 입증할 수 있습니다.
          로마서 12장 2절은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고 말합니다.

          이 구절은 우리에게 중요한 순서를 알려줍니다.
          하나님의 자녀는 세상을 본받기를 거부하고 성령으로 변화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역사하심에 따라 마음이 새로워지면 그는 하나님의 온전한 뜻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구할 때는 우리가 성경에 금지된 것을 구하는 건 아닌지 확인해야 합니다.
          예를 들면 성경은 훔치는 것을 금합니다.
          하나님이 도둑질에 대해 분명히 말씀하셨기 때문에 은행 강도가 되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닙니다.
          우리는 은행 강도가 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인지 알기 위해 기도할 필요조차 없습니다.
          또한 우리가 고려하고 있는 것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우리와 다른 사람들이 영적으로 성장하는 데에 도움을 주는지 확인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뜻을 아는 것은 인내가 필요하기 때문에 때로는 어렵습니다.
          당장 하나님의 뜻을 모두 알고 싶어하는 것이 인간의 자연적인 성향이지만 이는 일반적으로 하나님이 역사하시는 방법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한 번에 한 걸음씩 보여주시고 우리는 한 걸음씩 믿음의 길을 걸으면서 그분을 계속 신뢰합니다.
          중요한 사실은 우리가 다음 단계로 나아가길 기다리는 동안 이미 알고 있는 선을 행하기도 바쁘다는 것입니다(약 4:17).

          우리는 종종 하나님이 구체적인 것들을 알려주시기를 원합니다.
          어디에서 일해야 하는지, 어디에서 살아야 하는지, 누구와 결혼해야 하는지, 어떤 차를 사야 하는지 등을 말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선택하는 것을 허락하십니다.
          그리고 우리가 하나님을 의지하고 그분께 맡기면 우리가 그릇된 선택을 하지 않도록 막아주십니다(행 16:6-7).

          우리는 누군가를 알아갈수록 그가 바라는 게 무엇인지 더 잘 알게 됩니다.

          예를 들면 한 아이가 번화가를 가로질러 굴러간 공을 보지만, 그 공을 쫓아가지는 않습니다.
          ‘우리 아빠가 그렇게 하는 것을 원치 않는다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아이는 그의 아버지에게 모든 특별한 상황에 대한 조언을 일일이 구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 아이는 그의 아버지를 잘 알기 때문에 그의 아버지가 뭐라고 이야기할지 잘 알고 있으니까요.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도 이와 같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그분의 영(성령)을 의지하면서 주 하나님과 동행할 때 우리는 "우리가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졌다(고전 2:16)”는 것을 알게 됩니다.
          하나님이 그분의 뜻을 알 수 있도록 우리를 도와주신다는 것 또한 압니다.
          여러분은 언제든지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볼 수 있습니다.
          “완전한 자의 공의는 자기의 길을 곧게 하려니와 악한 자는 자기의 악으로 말미암아 넘어지리라”(잠 11:5).

          우리가 주 하나님과 가까이 동행하고 우리의 삶을 향한 그분의 뜻을 진정으로 갈망한다면 하나님은 자신이 바라시는 것들을 우리의 마음 속에 두실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 자신의 뜻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갈망하는 것입니다.
          "여호와를 기뻐하라 그가 네 마음의 소원을 네게 이루어 주시리로다”(시 37:4).


          하나님 아버지의 뜻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하나님은 완전한 지혜와 능력과 사랑을 가지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선하시고 온전하신 뜻을 갖고 계시며 그 뜻을 이루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뜻을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을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어야만 그 뜻이 이루어지기를 간절히 원하고 기도할 것이며 최선을 다하여 그 뜻대로 행하려 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은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인 신구약 성경에 계시되어 있습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하나님의 뜻은 각본처럼 짜여진 어쩔 수 없는 운명도 아니고 냉엄한 법칙이나 명령도 아닙니다.
          하나님의 뜻은 하나님의 인격과 성품에 조화되는 하나님의 목적과 계획인데,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를 구원하려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뜻은 우리가 안심하고 믿고 즐겨 순종할 수 있는 하나님의 기쁘신 뜻이요 소원이며 계획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은 우리의 구원과 관련된 것임을 알고 감사와 기쁜 마음으로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선하신 뜻을 가지시고 그 뜻을 이루시는 하나님 아버지를 전적으로 신뢰하는 가운데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게 하옵소서’ 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자녀인 우리는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할 수 있어야 합니다(롬 12:2).
          하나님 나라의 백성 된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행해야 합니다(마 7:21).
          신구약성경이 우리에게 알려주는 하나님의 뜻은 우리의 구원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우리의 유일한 중보자와 구원자로 하나님께서 그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신 것,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과 승천, 성령을 보내주신 것과, 교회를 세우시고 지금도 계속해서 구원 사역을 하시는 것은 하나님의 기쁘신 뜻인 구속 계획을 이루시는 것입니다.

          에베소서 1:3-14를 보면, 하나님의 기쁘신 뜻은 우리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그의 자녀들이 되게 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기쁘신 뜻을 따라 우리가 택하심을 받고 예정을 입어 그리스도 안에서 죄 사함과 영생을 얻은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것은 하나님의 구속 계획이 실현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구원이 잘 이루어지는 것이 하나님 우리 아버지의 뜻입니다.
               

          우리의 구원은 하나님의 뜻에 근거한 것입니다.

          “우리를 구원하신 거룩하신 부르심으로 부르심은 우리의 행위대로 하심이 아니요 오직 자기 뜻과 영원한 때 전부터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하심이라”(딤후 1:9).
          우리를 구원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세상에 오신 목적을 말씀하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하늘로서 온 것은 내 뜻을 행하려 함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려 함이니라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은 내게 주신 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이것이니라 내 아버지의 뜻은 아들을 보고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는 이것이니 마지막 날에 내가 이를 다시 살리리라 하시니라”(요 6:38-40).


          하나님의 뜻과 예수 그리스도
               
          예수님은 아버지의 뜻을 성취하기 위하여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하늘로서 내려온 것은 내 뜻을 행하려 함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려 함 이니라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은 내게 주신 자 중에 내가 하나라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이것이니라”(요 6:38-40).


          히브리서 10:7,9를 보면, 그리스도가 세상에 오신 것은 “하나님의 뜻”을 행하기 위해 오셨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좇아 그리스도께서 그의 몸을 단번에 제물로 드려 우리를 구속하셨습니다(히 10:10).
          예수 그리스도께서 성취하신 하나님의 뜻은 아버지께서 그에게 주신 자들을 구원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하기 위해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구약 성경에 예언된 메시아로 오셔서 메시아의 사역에 대한 구약 성경의 예언을 성취하셨습니다(사 61:12; 겔 34:15-16).
               
          하나님의 뜻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심으로써 자기 백성을 죄와 사망과 사탄의 지배에서 건져내어 영생을 얻을 수 있게 하는 것입니다(골 1:13-14; 요 6:40).

          예수님은 하나님의 뜻인 구속 성취를 위해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의 되셨고(요 1:29, 36), 많은 사람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단번에 희생 제사로 드렸습니다(사 53장; 갈 1:4; 히 10:9-10).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이루시려고 인성을 입으셨으며, 십자가에서 자신의 몸을 단번에 제물로 드려 우리를 구속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보내신 아버지의 뜻인 우리의 구원을 위해 거룩하고 순결하게 사셨으며,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기까지 순종하심으로써 우리의 죗값을 완전히 치르셨으며, 우리를 위해 영원한 의를 이루셨습니다.
          그리하여 예수님께서는 십자가 위에서 “다 이루었다”라고 하셨습니다(요 19:30).
          예수님은 아버지의 뜻인 우리 구원을 위하여 아버지께서 요구하시는 바를 다 이루셨습니다.

          하나님의 뜻과 그리스도인
               
          예수님은 그의 순종의 생애와 죽음을 통해 아버지의 뜻인 자기 백성의 구원을 이루셨습니다.
          이로써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셨고, 예수님 자신도 아버지의 우편에 앉아 만민을 다스리게 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아버지의 뜻을 다 이루심으로써 자기 백성에게 죄 사함과 영원한 의로움과 구원을 가져다 주셨습니다.
               
          예수님을 육신적으로, 세상적으로 보면, 그는 삼십년 남짓 짧은 지상 생애를 사셨으며, 극한 가난 중에 사시다가 마지막 십자가에 달려 죽는 사형에 처해졌습니다.
          그러나 그는 아버지의 뜻에 온전히 순종하셨고, 그 결과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하시는 일을 하셨습니다. 역사상 가장 위대한 일을 이루어 하나님 아버지께 영원토록 영광이 돌아가게 하셨습니다.
               
          우리도 오직 아버지의 뜻을 이루는 이 일에 온전히 헌신하신 예수님을 본받아 우리 각자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일에 나의 모든 것을 다 드릴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이 땅에 오래 머물지 못합니다.
          “내일 일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 도다 너희 생명이 무엇이뇨 너희는 잠간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니라”(약 4:14).
          “모든 육체는 풀과 같고 그 모든 영광이 풀의 꽃과 같으니 풀은 마르고 꽃은 떨어지되”(벧전 1:24).
          “이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가되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이는 영원히 거하느니라”(요일 2:17).
          “지금 이후로 주 안에서 죽는 자들은 복이 있도다 하시매 성령이 가라사대 그러하다 저희 수고를 그치고 쉬리니 이는 저희의 행한 일이 따름이라”(계 14:13).

          우리는 지능도 부족하고 도덕성도 부족하고 사용할 수 있는 여러 가지 자원도 부족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우리 각자에게 나누어 주신 달란트로 하나님의 뜻대로 잘 사용하면 됩니다.
          내가 가진 것이 아무리 보잘 것 없어도 주님의 뜻대로 잘 쓰면 됩니다.
          주님께서 심판하실 때에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작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으로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할지어다” 하시는 말씀을 들을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마 25:14-23).
                
          그리스도의 피로 구속 받은 그리스도의 것 된 우리도 주님의 지체로서 그리스도의 영 곧 성령을 좇아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것에 나의 모든 것(마음, 힘, 시간, 소유 등)을 다 기울여야 합니다.
          하나님의 기쁘신 뜻인 자타의 구원을 이루는 일에 어떤 희생과 고난이 따른다 해도 기꺼이 헌신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일에 헌신하는 사람은 실망하거나 후회하는 일은 결코 없을 것입니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뜻은 우리가 하나님의 구원을 잘 알고 구원의 복음을 더욱 굳게 믿고 소망하며 하나님의 구원의 그 크고 놀라운 사랑 안에 뿌리를 깊이 내리고 사는 것입니다.
          구원의 은혜를 인하여 믿고 감사해야 할 뿐만 아니라 복음을 전하고 다른 사람들을 복음의 신앙과 소망과 사랑 안에 굳게 세워주는 일을 해야 합니다.
          나와 다른 그리스도인들의 성화를 위해 더욱 힘써야 합니다.
          이것이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입니다(마 28:19-20; 갈 5:16-25; 살전 4:3; 빌 2:12-14).

          하나님과 하나님의 뜻을 더욱 잘 알아가고, 하나님을 더욱 신뢰하고, 하나님을 더욱 친근히 하고, 하나님을 더욱 사랑하고 더욱 잘 순종하는 그의 자녀가 되고, 그의 자녀답게 사는 것이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 우리 아버지의 뜻입니다.
          구원의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그를 이 세상에서, 그리고 영원히 즐거워하는 것이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뜻입니다(합 3:17-18).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마태복음 26:31-46
                                                                                                          아버지의 원대로(42절)

          다시 두번째 나아가 기도하여 가라사대 내 아버지여 만일 내가 마시지 않고는 이 잔이 내게서 지나갈 수 없거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
          He went away a second time and prayed, "My Father, if it is not possible for this cup to be taken away unless I drink it, may your will be done."

          원대로(2307) θέλημα, ατος, τό

          1. 뜻,  2.  뜻하는 바,  3. 마태복음 6:10(나라이 臨하옵시며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발음 / 데레마(thĕlēma)

          관련 성경 / 뜻(마 7:21, 눅 12:47, 고전 1:1, 엡 1:11), 원(마 26:42, 요 5:30), 원하는 것(엡 2:3)
          신약 성경 / 62회 사용

          -하나님의 뜻은 "데레마" "불래" 두 단어로 설명할 수 있다.


          βουλή, ῆς, ἡ  1012

          1. 뜻,  2. 결의,  3. 사람의 결정
          발음 / 불래(bŏulē)
          어원 / 1014에서 유래
          관련 성경 / 의견(행 27:12), 뜻(눅 7:30, 행 2:23, 고전 4:5), 결의(눅 23:51), 사상(행 5:38), 결심(행 27:42)
          신약 성경 / 12회 사용

          성경에서는 '하나님의 뜻'을 두 가지 단어로 소개합니다.

          첫째, 하나님의 절대적인 뜻 "불레(βουλή. bŏulē)"

          "불레"라는 뜻은 어느 누구도 바꿀 수 없는 하나님의 주권적인 뜻이며 절대적인 뜻을 말합니다.

          예를 들면 십자가 사건은 하나님의 불레와 같은 뜻입니다.
          겟세마네 동산에서 예수님께서 밤을 새워 기도하여도 그 뜻을 바꿀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기도하실 때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기도하셨습니다.

          둘째, 하나님의 소원적인 뜻 "델레마(θέλημα. thĕlēma)"

          "델레마"라는 뜻은 하나님의 허용적인 뜻이며 소원적인 뜻을 말합니다.

          예를 들면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 받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모든 사람들이 구원받지 않습니다.
          그 이유는 절대적인 뜻이 아니라 소원적인 뜻이며 허용적인 뜻이기 때문입니다(딤전 2:4).

          하나님은 선악과를 따 먹을 수 있는 완전한 존재로 인간을 창조하셨고 그들에게 선악과를 따먹지 않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렇게 소원했습니다.
          그러나 인간은 그것을  따먹었습니다.
          '델레마'는 인간이 저항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여기에는 반드시 책임있는 응답이 필요합니다.

          겟세마네 동산에서 십자가를 짊어져야 하는 고통의 시간을 생각하며 밤을 새워 기도하실 때 나의 원대로(델레마)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기도하셨습니다.
          십자가의 고통을 연약한 육체의 몸으로 감당하기 어렵고 힘들다는 것을 아셨기 때문에 이렇게 기도하셨겠지요?
          그렇지만 내 생각대로 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대로 이루어져야 할 길이기에 제자들이 잠든 것을 보시고 이제는 자고 쉬라고 하셨습니다.
          더 이상 기도로 해결할 문제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구하는 기도는 곧 자기를 부인하는 기도라고 하겠습니다.
          날마다 죽어야 응답이 가능한 기도입니다.
          그러므로 쉬운 기도가 아닙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을 구하며 그 뜻에 순종하기를 기도할 때 하나님께서 죽을 수 있는 힘, 내려 놓을 수 있는 믿음, 자기를 부인할 수 있는 은혜도 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기도할 때, 자기를 부인할 때, 주님의 뜻 가운데 죽어질 때 하나님의 완전하신 뜻이 가정과 교회와 이 땅 가운데 이루어 질 것입니다.

          요한복음 12:24 “내가 진정으로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서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열매를 많이 맺는다”


          성경에는 하나님의 뜻을 두 개의 단어로 표현합니다.

          첫째는 ‘불레(Boule) βουλή

          불래는 ‘하나님의 주권적인 뜻’ ‘절대적인 뜻’ ‘저항 불가능한 뜻’을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정해 놓으시면 아무도 거스를 수 없는 불가항력적인 하나님의 뜻입니다.
          하나님의 전능하신 능력으로 꼭 이루어지고 이루시는 하나님의 뜻입니다.

          둘째는 ‘델레마’(thelema) θέλημα

          델레마는 하나님의 소원적인 뜻을 말합니다.

          결정적인 뜻이 아니라 변경 가능한 뜻을 말합니다.
          우리가 받아들이고 순종할 수도 있고 거부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인 우리에게는 이처럼 절대적인 하나님의 뜻과 허용적인 하나님의 뜻이 주어진것은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배려입니다. 하나님의 절대적인 뜻이 있기에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절대적인 뜻이 없다면 어떻게 우리의 힘으로 구원을 받겠습니까? 하나님의 절대적인 보호하심의 뜻이 없다면 우리의 삶이 얼마나 위험하겠습니까? 반면 하나님의 주권적인 뜻만 있고 허용적인 뜻이 없다면 우리는 이 세상에 로봇이나 기계처럼 살게 됩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는 방법이 없는 것입니다. 허용적인 뜻이 있기에 우리의 자유의지로 우리 안에 있는 죄성을 이기고 하나님의 뜻에 믿음으로 순종하는 모습을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것입니다.

          호메로스와 사마천의 역사관은 인간과 하늘로 압축될 수 있다.
          호메로스의 역사는 하늘에 뜻을 따라 뭔가를 행하는 것이 아니라 고독하지만 스스로 결정해서 그 결과를 하늘에 통보하는 식의 역사관이다. 스스로 해결해나가는 오디세이아 류의 인간 중심 캐릭터다.

          사마천의 역사는 궁형을 당한 채 치욕 속에서 살아가지만 하늘을 믿고 하늘의 뜻에 맞는 세상을 만들려는 사마천 류의 하늘 중심 인간이다. 후자의 치명적인 약점이 있다.
          하늘의 뜻, 즉 천명이 애매하다는 것이다. 자작 천명을 만들어 유포할 위험이 있다.

          어떤 선택은 우리의 삶에 중대한 영향을 미친다.
          그리스도인들은 인생의 갈림길에서 어떻게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선택을 할 수 있을까. 직장사역국제연합 책임자 오스 힐먼(Os Hillman)에 의하면, 하나님과 수직적인 초점을 맞춰야 한다. 수직적인 초점을 맞춘다는 것은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온전히 거하며 친밀한 교제를 나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래야 하나님의 뜻을 들을 수 있고 행할 수 있다는 것을 뜻한다. 바울은 에베소에서 선교할 때 하나님과 수직적인 관계에 초점을 맞춘다. 2년을 하루같이 두란노서원에서 에베소 성도들이 하나님의 나라 백성이 되고 믿음이 성장해 가기 위해 반드시 알아야 할 것이 있음을 디테일하게 매일매일 짚어갔다. 구석구석 짚어가며 담대하게 선포하였다.

          전해야 할 것은 하나님의 뜻이다

          구약성경에서 하나님의 뜻을 나타내는 ‘에차’는 심사숙고해서 계획하신 ‘하나님의 의도, 계획’을 뜻한다.
          성경에는 ‘인간의 뜻’보다 ‘하나님의 뜻’에 대해 지대한 관심이 있다.
          시편 33:10-11에서 시인은 야훼께서 나라들의 계획, 즉 에차는 폐하시고 야훼의 에차는 영원히 선다고 노래한다.
          잠언 19:21에서 사람의 마음에 있는 많은 ‘생각 또는 계획’에 해당하는 ‘마하샤바’이고 야훼의 뜻은 에차이다.
          다니엘에서 나오는 아람어로서 이 의미로 가장 흔히 사용되는 동사는 ‘체바’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뜻하시고 소원하시는 것을 나타낸다.

          신약성경에서 나오는 명사는 ‘델레마(θέλημα)’와 ‘불레(βουλη)이다.
          전자는 하나님의 의향이고, 후자는 심사숙고하여 작정하신 하나님의 영원하신 계획과 뜻이다.
          전자는 주기도문에서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도록 기도하라고 말씀하셨는데,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실 때에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라고 기도하시므로 실제로 이를 예증하신다(마 26:42).

          하나님을 뜻, 즉 델레마를 행하는 자라야 예수님의 형제, 자매, 모친이 되리라고 말씀하셨다.

          바울은 하나님의 불레를 꺼림 없이 전할뿐만 아니라 ‘다’ 전하였다.
          하나님이 심사숙고하여 작정하신 영원하신 계획과 뜻을 대충 전할 수 없고, 사정이 변하여 중도에 그만둘 수 없는 것이다.
          바울이 왜 하나님의 뜻을 다 전하려고 애썼을까.
          어느 도시보다 어느 선교지보다 많은 열심을 품고 가르치는 사역에 전념한 이유가 무엇일까?
          에베소 교인들을 다시는 얼굴을 볼 수 없기 때문에 그랬을까(행 20:25).
          모든 사람의 피에 대해 전도자로서 깨끗하기 위해 그렇게 힘썼을까(행 20:26).
          아니면 바울이 떠난 뒤에 사나운 이리와 같은 이들이 에베소 교회에 침투해서 신앙을 흔들어 놓을 것을 사전에 예방차원에서 그렇게 했는가(행 20:29).
          이 모두가 이유가 된다면 부정적인 사유다.
          그러나 긍정적인 이유가 있다.
          하나님의 뜻과 계획 자체가 온전하고 영원히 서야 하기 때문이다(시 33:11).
          하나님의 자녀는 아버지의 뜻을 온전히 알아야 한다.
          영적 전쟁을 하는 사람답게 어떤 긴박한 사건이 생겨도 습관적으로 정확히 대처할 수 있도록 몸에 빼여 있어야 한다.
          운전하는 자가 돌발상황에 생각할 겨를이 없이 브레이크를 밟을 수 있어야 하고 핸들을 조작할 수 있어야 한다.
          훈련된 사람은 어떤 상황에서도 해야 할 바를 본능적으로 대처한다.
          하나님의 뜻을 다 알아야 하는 이유다.

          5W1H(육하원칙) 중 ‘How’는 다른 5개의 W와 차별되게 쓰인다.
          ‘어떻게’라는 질문에는 옳은 대답이 없다.
          어떠한 대답이 나오더라도 틀렸다 할 수 없고, 여러 가지로 다르게 나와도 전혀 문제 되지 않는다.
          바울이 두란노 서원에서 날마다 거침없이 하나님의 뜻을 어떻게 전하였느냐고 할 때 ‘다’라고 할 수 있다.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뜻이라는 의미에서 그 뜻을 알고 있었지만(롬 2:18), 예수님의 가르침을 받는 자들만이 진정으로 그것을 인식하였다(눅 13:47-48).
          그리하여 바울은 회심할 때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다.
          “하나님이 너를 택하여 너로 하여금 자기 뜻을 알게 하시며”.
          새로운 하나님의 뜻을 깨닫는다(행 22:14).
          성령은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의 원대로 행동할 수 있는지를 가르치신다(비교. 엡 5:17).

          에베소서 5:17
          그러므로 어리석은 자가 되지 말고 오직 주의 뜻이 무엇인가 이해하라.
          - 주의 뜻(델레마)
          Therefore do not be foolish, but understand what the Lord's will is.


          반도체를 만드는 핵심 기술은 세 가지다.
          소재· 장비· 제조다.
          한국은 제조 기술에 온 화력을 집중했다.
          나머지는 국제 분업 시스템에 따라 수입했다. 같은 재료와 소재를 써도 더 효율적인 제품을 더 많이 생산하는 기술에 집중했다. 반도체 중에서도 변화 주기가 빠른 메모리 반도체에 집중했다.
          기술이 뛰어났기에 세계 1위를 자랑할 수 있다.
          그런데 소재가 공급이 안 되면 최첨단 장비가 있고 탁월한 기술이 있어도 제품을 만들 수 없다.
          바울의 선교도 마찬가지다.
          장비에 해당하는 훌륭한 선교팀과 후원체계, 바울의 생명을 조금도 아끼지 않는 열정이 있어도 반도체를 만드는 소재에 해당하는 하나님의 나라의 복음이 없다면 소리만 요란한 빈 깡통에 불과한 것이다.

          “바울이 에베소에서 이교도의 책을 불사르다”

           하나님의 뜻은 다 전해야 한다

          바울은 에베소 선교 사역을 할 때 가장 중점을 둔 사역은 하나님의 뜻을 온전히 전하는 것이었다.
          하나님의 뜻을 다 전했다는 말은 무슨 뜻인가?
          이는 구약성경 속에 도도히 흐르는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구원계획 전체에 대해 세세하게 가르쳤다는 말이다.
          하나님의 말씀 가운데 어떤 부분은 인기가 없거나 어렵다고 싶으면 건너뛰거나 생략하기 싶다.
          바울이 지난 2년동안 두란노 서원에서 가르칠 때 그런 일은 없었다는 말이다. 로마 운명의 여신 포르투나(Fortuna)는 자신에게 주어진 임무에 최선을 다하지 않는 사람을 ‘오만한 자’라고 불렀다. 오만한 자는 장님이 돼 자신에게 다가오는 불행을 인식할 수 없다. 자신이 자초한 불행의 희생자가 된다. 바울은 장님이 되기 싫어서, 열심히 가르치지 않았다는 소리를 듣기 싫어서가 아니다. 하나님의 뜻은 영원히 서야 하기 때문이다. 바울은 세상에서 가장 크고, 가장 멀리 나는 알바트로스(Albatross)를 닮았다. 세상에서 가장 멀리, 가장 높이 나는 새, 한 번도 쉬지 않고 먼 거리를 날 수 있는 비결이 있다. 바람 타기의 명수이기 때문이다. 바람과 파도를 이용한 역동적 활공법을 구사한다. 동양에서는 알바트로스를 신천옹(信天翁)이라 불렀다. ‘하늘의 뜻을 믿는 노익장’이다. 바울이 하나님의 뜻을 다 펼친 두란노 서원은 우리나라 순천향 병원을 상기시킨다. 순천향(順天鄕)이란 이름을 풀이하면 ‘하늘의 뜻을 받들어 인술을 펼치는 고향마을’이다.
          알바트로스, "하늘을 믿고 날아 오르는 노익장"의 의미로 동양에서는 이 새를 "신천옹(信天翁)"이라 부른다

          성경에는 하나님의 뜻이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대해 거의 언급되고 있지 않다.
          바울 역시 꺼림 없이 하나님의 뜻을 다 전하였다고 하면서 구체적으로 하나님의 뜻이 무엇이었는지에 대한 보충 설명을 생략한다.
          이는 그 뜻을 독자들이 이미 알고 있는 것으로 가정하기 때문이다.
          거룩한 삶과 감사가 하나님의 뜻이기도 하고, 위정자들에 대한 복종이 하나님의 뜻이며, 우리 자신을 하나님께 바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다(고후 8:5).
          신약성경에서 ‘하나님의 뜻’은 하나의 주제다.
          특히 누가-행전에서 그러하다.
          다윗은 하나님의 뜻에 의해 죽었고, 바리새인들은 선지자 요한을 반대함으로서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였고(눅 7:30), 예수님은 하나님의 확고한 계획에 의해 넘겨진 바 되셨다.
          하나님의 뜻, 즉 하나님의 불레는 사도들의 메시지의 내용이다(20:27).
          바울에게 하나님의 뜻과 칭기스 칸의 하늘의 뜻은 다르다.
          몽골 부족을 통합하고 몽골국의 최고 통치자가 된 Činggis Qan은 자신의 성공이 결국 하늘의 뜻이라고 확신한다.
          이 신념은 올바른 종교의 길을 가지 않는 모든 나라를 정복하여 하늘의 뜻을 알려야 한다는 사명감으로 발전한다.
          자신의 확신의 산물이다.

          바울은 에베소에서 선교할 때 두란노 서원에서 2년동안 하루도 빼먹지 않고 매일같이 하나님의 나라를 열정적으로 가르쳤다(참조. 19:9-10). 왜 그랬을까. 바울이 그렇게 열심히 하나님의 나라에 대해 전하려고 애쓰고 힘썼을까. 바울이 하나님 나라와 그의 뜻을 전하지 않음으로 인해 앞으로 교리적으로 또는 도덕적인 오류가 생겼을 때 가르치는 자에게 책임이 돌아온다. 그래서 자신은 책임이 없는 이유를 제시하면서 하나님의 뜻의 그 어떤 부분도 꺼리지 않고 다 전했다고 말하고 있다. 시에스타 시간을 이용했다면 냉방시설도 제대로 갖추지 않는 공간에서 수면이나 휴식을 희생하면서 2년을 하루같이 열정을 쏟은 까닭이다. 하나님의 나라에 대해 할 말이 많다는 뜻도 되겠지만 진리를 전해 듣지 않고서는 성장이란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뜻을 온전히 알지 못하면 결국 자신의 뜻이나 세상의 뜻을 앞세울 것이 뻔하기 때문이다.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듣고 싶은 것만 듣는 경향을 확증편향(confirmation bias)이라고 한다.
          마음속으로 결정을 내리고 나서 자신의 결정을 뒷받침할 수 있는 증거들만 선택하는 인지적 오류를 말한다.
          사람이라면 누구나 이런 경향을 갖고 있다.
          화자가 아무리 좋은 말을 해도 청자가 듣고 싶은 말만 듣고 나머지는 걸려 버리면 통전적 지식을 갖지 못하고 인지적 오류를 범하게 된다.
          바울은 결과에 구애받지 않고 하나님의 나라를 ‘다’ 전하였다.
          ‘다’에 해당하는 ‘파스’는 모두를 말한다.
          장소는 공중과 각 집이다.
          대상은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다.
          장소와 대상에 따라 내용이 달라진다면, 전하는 자의 임의에 따라 뺄 것은 빼고 더할 것은 더한다면 진리가 아니다.
          장소와 청중에 상관없이 하나님의 나라의 복음을 그대로 몽땅 전하는 것은 정말 중요한 일이다.
          환경과 청중에 따라 전달하는 내용이 분량이나 시간 그리고 핵심이 가변적일 가능성이 있는데 바울은 오히려 장소가 바뀌든 대상이 많든 적든 또는 달라지든 전파하는 내용은 다 전하는데 전념했다.







          언약(言約)

          성경에서 말하는 언약(covenant)은 모든 아브라함의 종교들이 중요하게 여기는 성경적 언약이다. 
          언약의 원어는 '베리트'인데 '바라'(자르다, 끊다, 새기다)에서 왔다.
          주로 모세 오경 또는율법이나 모세 오경인 처음 다섯 권 창세기, 출애굽기,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에서 발견된다.
          다른 언약들이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들 사이에 맺어진 것에 반하여 노아 언약은 모든 인류에게 적용되는 유일한 언약이다.
          예레미아 31:30-33은 새 언약을 약속하는데 바로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집을 세울 것이라는 것이다.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보라 날이 이르리니 내가 이스라엘 집과 유다 집에 새 언약을 맺으리라
          이 언약은 내가 그들의 조상들의 손을 잡고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던 날에 맺은 것과 같지 아니할 것은 내가 그들의 남편이 되었어도 그들이 내 언약을 깨뜨렸음이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그러나 그 날 후에 내가 이스라엘 집과 맺을 언약은 이러하니 곧 내가 나의 법을 그들의 속에 두며 그들의 마음에 기록하여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 백성이 될 것이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구약에서 언약

          아브라함과 할례로서 언약을 맺었고(창 17:9-14), 노아와는 무지개로 언약을 맺으셨다(창 9:8-17).
          이외에도 성경에는 이삭(창 26:24), 야곱(창 28:13,14) 등과 맺은 언약이 나오는데 이것들은 모두 구속사에 있어서 최고의 정점인 예수 그리스도 및 그의 구속사역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1]
          하나님께서 노아 개인과 언약을 맺으셨으나 그로 인해 가족과 동물까지도 생명을 보존할 수 있었던 것은 대표 원리가 적용되었기 때문이다.
          즉 아담의 타락으로 전인류와 피조계가 함께 저주를 받은 것과 마찬가지로(창 3:17) 노아의 의로움이 동물에게까지 그 영향력을 미쳤던 것이다.
          이러한 대표 원리는 그리스도에게서 그 절정을 이루었는 데 곧 그분 한분이 대속의 죽음을 죽으심으로 모든 인류가 그 공로를 힘입어 속죄함을 받은 것이다(롬 5:17-19).

          구약성경에는 세 가지의 언약 형태를 볼 수 있는데, 양쪽이 동등한 입장에서 맺는 언약(삼상 18:3-4), 유력한 쪽에서 일방적으로 맺는 언약(겔 17:13-14), 하나님께서 맺으신 언약 등이다.

          이 중하나님과 사람 간에 맺는 언약은 하나님께서 주권적으로 행하시는 피로 맺은 은혜로운 약정이었다.
          그 주도권은 언제나 하나님께 있고 사람은 수혜자가 되는 형태로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일방적으로 세우시는 약속이었다.
          예레미야가 언급했던 새 언약은 마음에 기록되며(렘 31:33), 하나님의 용서에 기초한 언약이었다(렘 31:32).
          신약에서 언약이란 말은 '디아데케'(diatheke)로 헬라 세계에서는 '의지, 뜻, 서약, 유언'이란 뜻으로 쓰였다.

          신약의 새 언약

          구약의 베리트는 신약에서 '디아데케'(diatheke)로 번역었는데 신약시대에는 '의지, 뜻, 서약, 유언'이란 뜻으로 쓰였다.
          새 언약의 성취는 예수 그리스도로 완성되었다.
          최후의 만찬에서 예수께서는 "이 잔은 내 피로 세우는 새 언약이니 곧 너희를 위하여 붓는 것이라"(눅 22:20)고 하셨다.
          새 언약은 예수를 통해 새롭게 시작한, 하나님과 그의 백성들이 맺은 언약이었다.
          이제 새 언약의 성취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마다 죄사함을 받고(행 10:43, 롬 11:27) 죄악이 기억되지 않으며 구원을 받는다(사 43:25, 요 5:24, 요일 1:9).

          언약의 의미

          히브리어 - 베리트

          ‘언약’이란 히브리어로 ‘베리트’로서, 계약 당사자들이 상호 동의하는 것을 나타냅니다.
          그러나 하나님과 하나님의 백성들과의 언약은 하나님의 일방적이고 주권적인 언약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창조주요, 인간은 그의 피조물로서, 본질적으로 하나님과 인간은 상호 동등한 존재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너와는 내가 내 언약을 세우리니...”라는 창세기 6:18 말씀에도 언약을 세우시는 분은 하나님이시요, 언약의 소유주도 하나님이십니다.

          또한 히브리어 ‘베리트’는 ‘쪼갠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옛날 근동 지방에서 파기되어서는 안 되는 아주 중요한 계약을 맺을 때에 짐승을 죽여서 쪼개어 양쪽으로 나누어 놓은 데서 유래된 말입니다(창 15:10, 렘 34:18).
          이것은 만약 계약자들이 약속을 지키지 않을 때에는 짐승처럼 쪼갬을 당한다는 의미입니다.

          헬라어 - 디아데케(διαθήκη)

          LXX(70인경)에서는 ‘베리트(언약)’를 대부분 ‘디아데케(διαθήκη)’로 번역하고 있습니다.
          ‘디아데케’의 어원은 ‘디아(δια: 둘)’와 ‘티데미(τίθημι: 두다, 배열하다)’라는 두 단어가 합성된 것으로 ‘둘 사이에 두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언약’이란 두 상대방, 즉 하나님과 그의 백성 사이에서 이루어진 것을 말합니다.
          그런데 ‘디아데케’는 신약 성경에서 절반 정도가 ‘유언’이라는 의미로 사용되고 있습니다(히 9:16-17).
          언약은 보통 두 사람의 관계 속에서 이루어지는 것이지만, 유언은 죽는 사람이 남은 가족들에게 일방적으로 남기는 것으로, 하나님의 언약이 하나님의 일방적인 주권 속에서 이루어졌음을 뜻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언약’의 어원적 의미를 종합해 볼 때, 하나님과의 언약을 체결한다는 것은 결국 하나님 자신과 그 언약의 상대인 인간이 하나로 결속되어 인격적인 관계가 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언약’을 도구로 구속사를 진행하시는 것은,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과 구원의 의지가 얼마나 강력하신지를 잘 나타내고 있는 것입니다.

          언약(Covenant)

          두 당사자가 서로를 위해 어떤 일을 하기로 합의하여 이루어진 협약이다.
          구약에서 언약으로 번역된 히브리어 ‘베리트’(berith)는 ‘끊는다’는 어원을 가지는데, 이는 계약을 맺을 때 짐승을 둘로 절단하여 엄숙한 의식을 행한 데서 유래된 말이다.

          구약성경에는 세 가지의 언약 형태를 볼 수 있는데,

          양쪽이 동등한 입장에서 맺는 언약(삼상 18:3-4),
          유력한 쪽에서 일방적으로 맺는 언약(겔 17:13-14),
          하나님께서 맺으신 언약 등이다.

          이 중 하나님과 사람 간에 맺는 언약은 하나님께서 주권적으로 행하시는 피로 맺은 은혜로운 약정이었다.
          그 주도권은 언제나 하나님께 있고 사람은 수혜자가 되는 형태로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일방적으로 세우시는 약속이었다.
          하나님과 인간이 맺는 언약은 초자연적인 의식으로 엄숙하게 거행되었다.

          그 예로는

          아브라함과 할례로서 맺은 언약(창 17:9-14),
          노아와 무지개로 맺은 언약(창 9:8-17),
          시내 산에서 맺은 언약 등이 있다.
          특별히 시내 산에서의 언약은 피(출 24:8; 슥 9:11)로 맺은 것인데,

          스가랴 9:11
          또 너로 말할진대 네 언약를 인하여 내가 너의 갇힌 자들을 없는 구덩이에서 놓았나니.

          이는 하나님 한 분을 믿는 이스라엘 신앙의 근본이 되었으며 여러 선지자들이 계속하여 이 언약을 상기시켰다(렘 7:23; 호 8:1).

          인간 상호 간에 맺는 언약은 개인 간에(창 21:27), 족속 간에(출 23:32; 신 7:2),

          왕과 백성 간에(왕하 11:4; 대하 23:16) 이루어졌다. 이런 때는 대개 선물이나 악수,

          입맞춤, 식사 혹은 제사를 드림으로써 맺어졌다(겔 17:18; 삼하 3:17-21; 창 31:44).

          신약에서 언약이란 말은 ‘디아데케’(diatheke)로 헬라 세계에서는 ‘의지, 뜻, 서약,

          유언’이란 뜻으로 쓰였다. 성경에 나오는 언약들은 다음과 같다.

          아브라함 언약 :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고 하시면서(창 12:1)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케 하리니 너는 복의 근원이 될찌라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를 인하여 복을 얻을 것이니라” (창 12:2-3)고 약속하셨다.

          또 “내가 이 땅(가나안)을 네 자손에게 주리라”(창 12:7)고 하셨다. 이 약속은 피의 언약을 통해 확증되었는데, 당시 언약의 당사자들이 쪼갠 제물 사이로 지나갔던 것과 달리 아브라함과의 언약에서는 하나님만 쪼갠 고기 사이로 지나가셨다(창 15:17). 하나님 편에서 아무런 조건 없이 아브라함과 언약을 맺으셨고 약속을 지킬 것을 보여 주신 것이다.

          아브라함 언약의 특징을 살펴보면

          첫째,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택하셨다는 점에서 하나님의 은혜가 전제된 은혜의 언약이었다.
          둘째, 언약은 하나님의 절대적인 권능에 의해 성취되었다.
          죽은 것 같은 사라의 몸을 통해 상속자 이삭을 낳게 하셨기 때문이다(롬 4:19).
          셋째, 하나님의 택하심을 받은 자는 그 부름에 합당한 생활을 살아야 할 것을 가르쳐 준다(창 18:19).
          넷째, 아브라함 언약은 아브라함을 택하신 것이 아브라함 자신과 후손뿐 아니라 땅의 모든 족속을 위한 것임을 분명히 밝혀준다(창 12:3).

          모세 언약 :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시내 산에 도달한 후 모세에게 “너희가 내 말을 잘 듣고 내 언약을 지키면 너희는 열국 중에서 내 소유가 되겠고 너희가 내게 대하여 제사장 나라가 되며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출 19:5-6)고 하셨다. 이에 백성들이 “여호와의 명하신 대로 우리가 다 행하리이다”(출 19:8)라고 대답했다. 많은 학자들은 모세 언약이 고대 중동에서 행해지던 종주간의 협정 형태를 띠고 있다고 본다.

          종주간의 협정 순서는
          첫째, 통치자와 그의 지위를 밝힌다(출 20:1-2; 신 1:1-5)
          둘째, 그의 백성들을 위한 통치자의 업적들을 열거한다(출 19:4-5; 신 1:6-4:49)
          셋째, 양자 간의 관계들을 다스릴 원리들을 진술한다(출 20:2-7; 출 21:1-23; 신 5-26장)
          넷째, 순종해서 얻게 될 축복과 불순종으로 인해 얻게 될 형벌을 진술한다(출 23:20-33)
          다섯째, 통치를 받는 자들이 언약을 받아들임을 기록한다(출 24:1-8; 신 31-33장)

          이는 도덕적인 규칙뿐 아니라 시민법, 범죄에 대한 규정은 물론 종교적인 규칙을 담고 있다.

          모세와의 언약은 비조건적이었던 아브라함과의 언약과는 달리 조건적이었다(창 12:2-3 참고).
          즉 이스라엘이 율법을 지킨다면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지키시고 축복하시지만, 순종하지 않는다면 이스라엘을 징계하시며 징벌하신다는 것이었다. 따라서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관계는 이스라엘의 순종 여부에 달려 있었다.

          모세 언약의 특징은

          첫째, 하나님의 뜻을 외적으로 보이는 글로 표현하여 성문화한 것을 들 수 있다.
          이전에 단편적으로 명령하셨다면(창 1:28; 9:6), 모세 때에는 뜻을 요약해서 율법으로 계시해 주셨기 때문이다.
          둘째, 율법의 언약이라는 점이다. 이는 하나님께서 백성들을 사랑하셔서 거룩한 백성이 되게 하려고 주신 것이었다(출 19:4-6).

          다윗 언약 :

          다윗이 성전을 짓기 원했을 때 하나님은 이를 거절하셨으나 나단 선지자를 통해 한 약속을 주셨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첫째, 다윗의 이름을 세상에서 존귀케 만들 것이다(삼하 7:9)
          둘째, 한 곳, 즉 예루살렘을 정하여 이스라엘 백성을 그곳에 거하게 하여 다시 옮기지 않으며 대적으로부터 해를 받지 않게 할 것이다(삼하 7:10).
          셋째, 여호와께서 다윗을 위하여 한 집을 세우실 것이다. 여기서 다윗을 위한 집은 다윗 왕조를 일컫는 것이다(삼하 7:11).
          넷째, 다윗의 아들이 하나님의 전을 세울 것이고 하나님은 다윗의 후손의 나라를 견고케 할 것이다(삼하 7:13).
          다섯째, 하나님께서 다윗의 후손의 아비가 되고 다윗의 후손은 하나님의 아들이 될 것이다(삼하 7:14).
          “네 집과 네 나라가 네 앞에서 영원히 보전되고 네 위가 영원히 견고하리라”(삼하 7:16; 시 89:2-4 참고)는 말씀은 선지자들에 의해 예언된 메시아가 다윗의 자손 중에서 나온다는 것으로, 신약에서 성취되었다(마 1장; 눅 3장 예수님의 족보 참고).

          새 언약 :

          새 언약은 예레미야(렘 31:31-34)가 언급했다.
          예레미야 당시는 계속된 우상숭배와 죄의 결과로 인해 이미 북왕국 이스라엘은 앗수르에 의해 멸망당했고 남왕국 유다도 바벨론으로부터 굉장한 압박을 당하고 있을 때였다.
          유다 역시 곧 멸망할 것이라는 경고 속에서 예레미야는 “날이 이르리니 내가 이스라엘 집과 유다 집에 새 언약을 세우리라”(렘 31:31)는 새 언약을 선포했다. 새 언약의 내용은 하나님의 말씀이 마음속에 새겨져서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과 개인적인 교제를 나누게 되며(렘 31:33) 백성들의 죄가 용서받고 기억도 되지 않으리라(렘 31:34)는 것이었다.

          예레미야가 언급했던 새 언약은 마음에 기록되며(렘 31:33), 하나님의 용서에 기초한 언약이었다(렘 31:32).
          새 언약은 AD 30년경 예수님에게서 이루어졌다.
          십자가에 달리시기 전 마지막 식사를 하실 때 예수님은 “이 잔은 내 피로 세우는 새 언약이니 곧 너희를 위하여 붓는 것이라”(눅 22:20)고 하셨다.

          새 언약은 예수님을 통해 새롭게 시작한, 하나님과 그의 백성들이 맺은 언약이었다.
          이제 새 언약의 성취자이신 예수님을 믿는 자마다 죄사함을 받고(행 10:43; 롬 11:27) 죄악이 기억되지 않으며 구원을 받는다(사 43:25; 요 5:24; 요일 1:9).

          새 언약(New covenant)

          옛 언약이 이스라엘 백성들이 시내 산에서 하나님과 맺은 언약을 말한다면 새 언약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로 인해 성취된 언약을 말한다(히 9:15).

          옛 언약이 이스라엘 백성들의 죄와 불순종으로 인해 깨져 버리자(렘 11:1-9; 31:32) 하나님은 다시 그들과 새 언약을 세우시겠다고 약속하셨다(렘 31:31). 하나님이 약속하신 새 언약은 옛 언약과 같지 않을 것이라고 말씀하셨다(렘 31:32).

          예레미야를 통해 말씀하신 새 언약 말씀이 사람들의 마음 속에 새겨진다(렘 31:33):

          옛 언약이 돌비에 새겨졌고 언약 체결의 표시로 몸에 할례를 행했지만 새 언약은 사람들의 마음에 새겨져(시 40:8; 겔 11:19-20; 고후 3:3) 하나님을 알고 개인적인 교제를 나누게 될 것이라고 하였다. 이것은 믿는 자들에게 성령이 임하셔서(욜 2:28-32; 고후 3:1-3) 부패한 죄성과 불순종하는 심령의 요소들을 제거하여 자원하는 마음과 성령의 능력으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게 된다는 뜻이다(롬 8:2; 빌 1:6).
          즉 하나님의 말씀을 돌판에 새기지 않아도 어린아이든 어른이든 모두 하나님을 친밀하게 알게 되는 새로운 인격으로 재창조하신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이처럼 옛 언약이 외적이고 임시적인 데 비해 새 언약은 내적이고 영원한 것을 말하는 것이었다. 옛 언약에는 형벌을 담보로 강제적인 이행이 강요되었으나 새 언약은 심령의 변화가 생겨 자원하는 마음으로 순종할 수 있게 되는 것을 뜻한다.

          백성들의 죄가 용서받을 뿐 아니라 기억되지도 않을 것이다(렘 31:34):

          인생의 근본적인 문제는 죄의 문제이며 죄의 권세로부터 해방 되는 것이었다. 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을 통해 인생의 죄 문제를 완전히 해결해 주실 것을 약속하신 것이 새 언약이었다. 약속 그대로 예수님은 백성들의 죄를 용서하시고 기억지 않으시겠다는 새 언약을 완벽하게 성취하셨다(마 26:28; 요 19:30).

          한편 옛 언약과 새 언약은 모두 하나님에 의해 주어진 선물이라는 것과 하나님이 언약을 주도하신다는 점에서 둘 사이의 연속성과 공통점이 있다.


          출애굽기 24:8
          모세가 그 를 취하여 백성에게 뿌려 가로되 이는 여호와께서 이 모든 말씀에 대하여 너희와 세우신 언약니라.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마태복음 26:14-30
                                                                                                          언약의 피(28절)

          이것은 죄 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바 나의 언약니라.
          This is my blood of the covenant, which is poured out for many for the forgiveness of sins.

          죄를 짓게 되면 반드시 죽음을 면할 수 없습니다(로마서 6:23).
          "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우리 주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이니라."

          가죽옷(창세기 3:21)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과 그 아내를 위하여 가죽옷을 지어 입히시니라.

          아담과 하와가 범죄하였을 때 가죽옷을 지어 입히셨다는 것은 짐승의 피가 아담과 하와의 죽음을 면할 수 있도록 보호하셨다는 증거가 됩니다.

          피는 생명을 상징합니다.
          그러므로 고기를 피채 먹지 말라고 하셨습니다(창세기 9:4)
          "그러나 고기를 그 생명 되는 피 채 먹지 말 것이니라."

          신명기 12:23
          "오직 크게 삼가서 그 피는 먹지 말라 피는생명인즉 네가 그 생명을 고기와 아울러 먹지 못하리니."

          피는 용서를 상징합니다(히브리서 9:22)
          "율법을 좇아 거의 모든 물건이 피로써 정결케 되나니 피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느니라."

          예수님께서는 마지막 유월절 식탁의 자리에서 떡과 잔을 갖고 최초의 유월절의 의미를 깨우쳐주셨습니다.
          최초의 유월절은 애급에서 시작되었습니다(출애굽기 12:1-14).
          마지막 유월절은 예수님께서 떡을 그의 몸으로 포도주를 그의 피로 제자들에게 주시며 이것을 먹고 마심으로 영원한 언약의 피가 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26절. 떡을 가지사 축복하시고(유로게오)

          εὐλογέω 2127

          1. 좋게 말하다,  2. 축복하다,  3. 누가복음 24:50
          발음 / 유로게오(ĕulŏgĕō)
          어원 / 미완료 ηὐλόγουν, εὐλόγουν, 미래 εὐλογήσω, 제1부정과거 εὐλόγη- σα, 완료 εὐλόγηκα, 완료수동분사 εὐ- λογημένος, 미래 수동태 εὐλογηθή- σομαι, 1095와 3056의 합성어에서 유래
          관련 성경 / 축복하다(막 10:16, 고전 10:16), 축사하다(마 14:19, 막 6:41, 눅 24:30), 찬송하다(마 23: 39, 막 11:9, 눅 2:28), 복을 받다(갈3:9), 복이 있다(눅 1:42), 복을 주다(행 3:26, 히 6:14), 복을 빌다(히 7:6, 벧전 3:9).
          신약 성경 / 42회 사용

          27절. 또 잔을 가지사 사례하시고(유카리스테오)

          εὐχαριστέω  2168

          1. 감사하다,  2. 감사를 돌리다,  3. σὺ εὐχαριστεῖς: 너는 감사의 기도를 드린다
          발음 / 유카리스테오(ĕucharistĕō)
          어원 / 제1부정과거 εὐχαρίστησα, 제1부정과거수동태가정법단수3인칭 εὐχα- ριστηθῇ, 2170에서 유래
          관련 성경 / 축사하다(마 15:36, 막 8:6, 행 27:35), 감사 기도하다(마 26:27, 눅 22:19), 감사하다(눅 18:11, 요 11:41, 고전 10:30).
          신약 성경 / 38회 사용

          성찬을 이해할 때, 우리는 성찬의 몇 가지 학설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첫째, 화체설(化體說, transubstantiation)

          화체설은 성찬을 시행할 때 신부의 축사를 통해서 빵과 포도주가 실제 예수님이 살과 피로 변한다는 미신적(迷信的) 주장이다.

          로마교회의 견해(transsubstantiatio)

          로마 교회는 성례적 연합을 물질적 의미로 생각했다.
          그러나 이와 같은 의미의 성례적 연합 이론은 정당화되기 어렵다.
          그 표현에 따르면, 적절한 의미의 연합이란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표징은 의미하는 것과 결합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위해 길을 터주기 때문이다.
          사제가 “이것은 내 몸이라”(hoc est corpus meum)는 예전문을 낭독할 때 빵과 포도주가 그리스도의 몸과 피로 변화된다고 로마 교회는 말한다.
          물론 이와 같은 변화가 일어난 후에도 빵과 포도주의 모양과 맛은 변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이것들의 본질은 변할지라도 속성은 그대로 남는다.
          빵과 포도주의 형태로 예수 그리스도의 육체적 임재인 몸과 피가 임재한다.

          이에 대한 성경적 근거는 “이것이 내 몸이니”라는 성찬 제정의 말씀과 요한복음 6:50이하에서 발견된다.
          그러나 앞구절은 요한복음 14:6, 15:1, 10:9등과 같이 비유적인 표현임이 분명하며, 뒷구절은, 문자적으로 이해하면, 성찬을 먹는 자마다 하늘에 가지만 성찬을 먹지 못하는 자는 누구도 영생을 얻지 못한다는 것을 가르치는 것이 되어(53, 54절)
          로마 교회 자체도 허용할 수 없는 것이 될 것이다.
          더욱이 63절은 분명히 영적인 해석을 지칭한다.
          뿐만 아니라 예수께서 떼신 떡을 그 떡을 다루는 몸과 동일시하는 것은 전적으로 불가능한 해석이다.
          뿐만 아니라 성경은 본질이 변화된 것으로 가정된 떡까지도 그대로 떡이라고 부른다(고전 10:17, 11:26-28).
          이와 같은 로마 교회의 견해는 인간의 감각에도 맞지 않는다.
          실체와 속성의 분리를 믿는 것과 물리적인 몸이 동시에 여러 곳에 임재하는 것은 인간의 이성에 반하는 것이다.
          따라서 성체를 높이고 숭상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둘째, 공재설(共在說, coexistentialism), 임재설

          공재설은 마틴 루터가 주장한 것으로 떡과 포도주는 있는 그대로 남아 있으나, 성만찬의 빵과 포도주의 안에, 밑에, 함께(in, under, along with) 그리스도께서 임재한다는 주장이다.

          공재설의 핵심은 성찬의 신비를 지켜내고 가톨릭의 미신을 제거하려는 데 있었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로마 가톨릭의 미신을 완전히 극복하지 못한 것으로 평가받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둘의 차이가 있다면 천주교는 집례 하는 사람(신부)의 영적상태나 받는 사람(신자)의 신앙에 관계없이 성례전 집례와 동시에 은혜가 기계적으로 주입된다고 주장한다면, 루터는 받는 사람의 신앙(믿음)이 필수라 할 수 있다.

          루터파의 견해(consubstantiatio)

          루터는 화체설(transsubstantiation)을 거부하고 그것을 공재설(consubstantiation)로 대체했다.
          루터에 의하면, 떡과 포도주는 아무런 변화가 없이 남아있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찬에는 떡과 포도주 안에, 그리고 그 아래, 그리고 그것들과 함께, 몸과 피를 포함하는 그리스도의 전인격이 신비스럽고 기적적인 방법으로 임재한다고 한다.
          루터와 그의 추종자들은 그리스도의 육체적인 몸과 피가 성찬시에 장소적으로 임재(local presence)한다고 주장한다.
          루터파는 때때로 자신들이 성찬시에 그리스도께서 장소적으로 임재한다고 가르친다는 사실을 부인하면서, 장소적(local)이라는 단어를 달리 해석한다.
          그리스도의 육체적 본질이 장소적으로 임재한다는 말은 모든 다른 몸들이 같은 공간으로부터 배제된다는 뜻이 아니며, 그리스도의 인성이 어디에나 있지 않다는 것, 예컨대 하늘에는 없다는 의미도 아니다.
          그것은 다만 자성이 자석 안에 장소적으로 임재하고 영혼이 육체 안에 장소적으로 임재하는 것처럼 그리스도의 육체적 본질이 성찬 안에 장소적으로 임재한다는 말이다.

          따라서 그들은 소위 입으로 먹는 것(manducatio oralis)을 가르치고 있는 셈이다.
          이 말의 의미는 성찬시의 빵과 포도주에 참여하는 자들은 단순히 믿음을 통하여 주의 몸과 피를 자기의 것으로 소유하는 것만이 아니라 그것들을 신체의 입으로 먹고 마신다는 것이다.
          합당하지 않은 자도 성찬을 받으나 그에게는 정죄밖에 안 된다.
          이 견해는 로마 가톨릭 교회의 견해와 별반 다른 것이 없는 견해이다.
          이 견해가 속성의 변화없는 본질의 변화의 반복적인 기적을 포함하지는 않지만 말이다.
          그러나 속성의 변화가 수반되지 않은 채 본질만이 변화하는 기적이라는 것은 있을 수 없다.
          예수님의 말씀을 ‘이것이 내 몸에 동반한다“는 뜻으로 해석하는 것은 정당성이 없다.
          더욱이 이 교리는 주의 영광스러운 인성이 편재한다는 불가능한 교리를 가르치게 되는데, 이 점은 루터파들도 부인하는 교리이다.


          셋째, 기념설(記念設. memorial)

          기념설은 쯔빙글리(Zwingli, 1484 1531)의 주장으로 가톨릭의 미신에 대해 극단적 반대로 간 나머지 성찬의 신비까지 완전히 사라지게 만든 주장이다.
          기념설 성찬에는 어떤 신비도 없다.
          단지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을 감상적으로 기념하는 정도로 끝난다.
          애석하게도 상당수의 장로교가 칼빈이 아닌 쯔빙글리의 기념설을 따르고 있다.

          츠빙글리의 견해

          츠빙글리의 성찬론에는 아주 결함이 많다는 것이 지배적인 생각이고, 이와 같은 생각이 전혀 근거가 없는 것은 물론 아니다.
          그는 성찬이란 하나의 표징 또는 상징으로서, 영적인 진리와 복을 비유적으로 표현하고 상징하는 것에 지나지 않으며, 그 상징들을 받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죄인들을 위하여 행하신 일을 단순하게 기념하는 그리스도인의 신앙 고백의 표(badge)에 지나지 않는다고 가르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이 같은 생각은 이 스위스의 개혁자를 잘못 이해한 것이다.
          그가 한 말 가운데 일부는 그에게 있어서 성례란 단순한 기념의식으로서 신자들이 서약하는 표지와 상징일 뿐이라는 사상을 전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그의 저서에는, 보다 깊은 성찬의 의미를 전달하고 성찬을 하나님께서 신자들을 위하여 하시는 일에 대한 인 또는 보증(pledge)으로 간주하고 있는 내용이 들어 있다는 사실을 놓쳐서는 안 된다.
          사실상 시간이 지나면서 그는 자기의 생각을 조금씩 바꾸어 간 것 같다.
          이 문제에 대하여 그가 생각했던 내용을 정확히 결정하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그가 성찬론에서 모든 반지성적인 신비주의를 제거하고, 소박하고 단순하게 성찬을 표현하려는 경향으로 과도하게 기울어졌던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그는 종종 성찬은 단지 주의 죽으심을 상징하고 기념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고 말했다.
          그는 성찬은 인 또는 보증이라고 말하기도 했지만, 이 같은 생각을 충분히 전개하지는 않았던 것 같다.
          뿐만 아니라 그에게는 성례에서 하나님이 보증하신 것보다는 신자들이 서약한 것이 더 중요했다.
          그는 그리스도의 몸을 받아 먹는 것과, 그를 믿고 그의 죽으심을 의지하는 것을 동일시했다.
          그는 그리스도께서 육체적으로 성찬시에 임재 하신다는 사실은 부인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영적으로 신자의 믿음에 임재 하신다는 사실은 부인하지 않았다.
          그리스도는 다만 그의 신성으로만, 그리고 성찬에 참여한 신자들의 이해에만 임재하실 뿐이다.


          개혁파의 견해(praesentia spiritualis sive virtualis)

          칼빈은 다음과 같은 이유로 츠빙글리의 성찬론을 반대했다.
          1. 이 견해는 성례에 나타난 하나님의 선물을 희생시키면서 신자들의 행위를 강조한다.
          2. 이 견해는 또한 그리스도의 몸을 먹는 것을, 그의 이름을 믿고 그의 죽으심을 의지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 것으로 본다.

          칼빈에 의하면 성찬은 단순히 그리스도의 과거의 사역 곧 (츠빙글리가 생각하는 바와 같이) 죽으신 그리스도와 관련이 있을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의 현재의 영적 사역 곧 영광 중에 살아계신 그리스도와도 관계가 있다.
          칼빈은 그리스도께서 물론 육체적으로 그리고 장소적으로 성찬시에 임재 하시지는 않지만, 몸과 피를 포함하는 전인으로서 임재하시며 또한 향유된다고 말한다.
          그는 신자들과 구주의 전인격과의 신비적인 연합을 강조한다.
          그의 표현은 아주 명료하지는 않다.
          그러나 그가 전하고자 하는 뜻은, 그리스도의 몸과 피가 성찬에 임재하지 않고 오직 하늘에만 장소적으로 임재할지라도, 신자가 성찬에서 빵과 포도주를 받을 때 생명을 주는 감화를 그에게 전달한다는 것이다. 이 감화는 실재적인 것이면서도, 육체적인 것이 아니라 영적이며 신비적이요, 성령을 매개로 하여 전달하는 것이며, 그리스도의 몸과 피를 상징적으로 받는 믿음의 행위를 조건으로 하여 전달되는 것이다.

          이와 같은 그리스도와의 친교(communio)를 가능케 하는 방식은 두 가지로 표현된다. 한편으로는 수찬자가 믿음을 통하여 자신이 마음을 그리스도께서 계신 하늘로 들어올리는 것으로 표현되고, 다른 한편으로는 성령이 그리스도의 몸과 피의 감화를 수찬자에게 내리는 것으로 표현된다. Dabney는 마치 수찬자가 성찬시에 그리스도의 몸과 피 자체를 받아 먹은 것처럼 말한 칼빈의 표현을 단호히 거부한다. 이것은 분명히 칼빈의 표현에서 애매한 부분이다. 어떤 때는 문자적인 의미의 육체적인 몸과 피를 지나치게 강조하는 것 같은 인상을 준다. 그러나 아마도 그의 말은 성례적으로 곧 비유적으로 이해하지 않으면 안 될 것 같다. 이와 같은 칼빈의 견해는 우리의 신앙 고백서에서 발견된다(비교- 벨기에 신앙고백 35조;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75,76문;성찬집례모범). 이와 같은 칼빈의 교리에 대한 가장 보편적인 해석은 그리스도의 몸과 피가 다만 실질적으로(virtually) 임재한다는 것이다. Hodge 박사의 말을 빌리면 “십자가에 달려 희생된 구주의 몸이 가져오는 덕과 효과는, 자신의 주권적인 뜻에 따른 도구로서 성찬을 사용하시는 성령의 권능을 통하여, 합당한 수찬자에게 임하고 전달된다”.


          넷째, 영적 임재설(靈的 臨在設, spiritual presence)

          영적 임재설은 성찬의 신비를 결코 상실시키지 않으면서 가톨릭의 미신을 정확하게 극복한 교리다.
          그러므로 칼빈은 영적 임재설을 설명하면서 두 가지 오류에 빠지지 않도록 다음과 같이 경계했다.

          “첫째로 표징에 대해서 주의를 게을리 하는 나머지 표징이 나타내는 신비를 표징과 완전히 분리시켜서는 안 된다.
          둘째로 표징 자체를 지나치게 추켜세우는 나머지 그 속에 담긴 신비를 조금이라도 흐리게 만들어서도 안 된다는 것이다.”

          이처럼 성경적인 성찬은 신비는 살리고 미신은 철저히 제거하는 것이 돼야 한다.

          그러면 신자가 성찬에 참여할 때, 어떻게 그리스도의 임재라는 신비를 경험하면서 미신에 빠지지 않으면서 믿음에 유익을 얻을 수 있을지 구체적으로 살펴보자.

          첫 번째는 영적 임재설이 가르치는 바를 바르게 이해해야 한다. 영적 임재설은 바로 앞에서 언급했던 것처럼 예수님의 십자가 고난을 기념하거나 묵상하는 것이 아니다. 여기엔 성찬의 신비가 들어갈 자리가 없다. 단지 예수님의 십자가 수난에 대한 감사와 애통이 주를 이룬다. 예수님께서 재정하신 성찬의 핵심은 예수 그리스도의 살과 피를 성도의 영적 양식으로 삼도록 하는 신비한 예식이다. 칼빈은 성찬의 이러한 사실을 아주 잘 지적해준다.

          “요컨대, 떡과 포도주가 육체의 생명을 지탱시키고 유지시켜 주는 것과 똑같은 방식으로 그리스도의 살과 피가 우리의 영혼에게 양식이 된다는 것이다.”

          이 고백과 직결된 성경구절이 바로 신명기 8:3의 말씀이다.

          “너를 낮추시며 너를 주리게 하시며 또 너도 알지 못하며 네 조상들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네게 먹이신 것은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줄을 네가 알게 하려 하심이니라”

          신명기의 이 말씀을 성찬과 관련하여 구체적으로 말씀하신 사건이 바로 요한복음 6장의 오병이어 기적이다. 예수님은 광야에서 오병이어의 기적을 행하신 후에 자신이 광야에서 만나를 베풀었던 모세와 같은 메시아라고 스스로를 입증하셨다. 그리고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떡이니 사람이 이 떡을 먹으면 영생하리라 내가 줄 떡은 곧 세상의 생명을 위한 내 살이니라”(6:51)고 선언하신다. 광야의 만나는 그림자에 불과하며 실체는 예수님 자신이라는 말이다. 그리고 더 나아가 “내 살은 참된 양식이요 내 피는 참된 음료로다”(요 6:55)고 선언하시면서 성찬의 의미를 명확하게 가르치셨다.

          이 말씀은 구속의 은총을 받은 성도라면, 오로지 예수 그리스도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만을 양식으로 삼아야 하며, 결코 애굽의 양식(옛적 삶의 방식)을 추구하지 말아야 할 것을 가르친다. 이것은 구약의 성례로서 생명나무의 실과와 선악을 아는 실과의 이미지를 떠올린다.

          여기서 영적 임재가 강조된다. 성도는 손으로 떡과 포도주를 잡는 것을 통해 믿음으로 그리스도를 붙잡는 것을 묵상한다5). 믿음으로(성령의 은총을 힘입어) 빵을 입에 넣고 씹으며 삼키면서 양식을 먹으면 그 양식이 살과 피가 되는 것처럼, 주님의 말씀을 믿음으로 소화 할 때, 내 영혼이 예수 그리스도의 살과 피에 연합됨(신비적 결합)을 경험하게 된다. 성령께서 믿음으로 성찬에 참여하는 성도에게 임재 하여(빵과 잔에 임재 하는 것이 아니다) 그리스도의 살에 연합시킴으로 믿음을 견고케 한다.

          두 번째로 성찬이 말씀과 기도처럼 은혜의 방편으로 여겨지려면, 성찬이 보이는 말씀이라는 점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6). 성경이 읽는 말씀, 혹은 듣는 말씀이라고 한다면, 성찬은 보이는 말씀이다. 보이는 말씀이란 글이나 음성으로 성도들에게 인식하도록 하는 성경과 다르다. 눈으로 봄으로써 복음을 인식하게 한다는 말이다. 성찬은 오감을 통해 하나님의 말씀이 어떻게 우리의 살과 피가 되는지 깨닫게 한다. 빵을 냄새 맡고, 입으로 맛있게 씹어 먹으며, 그 후에 삼켜 소화를 시켜야 하는 것처럼, 하나님의 말씀도 주린 영혼에게 구미를 당기게 하는 향기를 내며 먹음으로 즐겁게 소화를 하여 살과 피가 된다. 그러므로 신약의 교회는 하나님의 말씀을 보기만 하고 먹지 않으면 소용없음을 깨닫게 한다. 칼빈의 주장을 들어보자.

          “떡이 보는 것으로는 안 되고 반드시 먹어야만 몸에 영양이 공급되는 것처럼, 영혼도 그리스도께 진정으로 깊이 참여하져야만 비로소 그의 능력으로 살리심을 얻게 되는 것이다7)”

          개혁파 교회는 성찬을 집례 할 때마다 설교를 통해서 성찬의 이러한 신비한 유익을 설명해 주어야 한다. 그리고 이러한 성찬의 유익이 보이는 말씀이 되어 성도들에게 말씀처럼 유익이 되고 궁극적으로 말씀에 복종하도록 해야 한다. 왜냐하면 퍼킨스의 주장처럼 “성찬의 결과는 하나님의 뜻에 복종하는 것”이기 때문이다8).

          마지막 세 번째로 성찬이 말씀과 기도처럼 은혜의 방편으로 여겨지려면 성찬을 통해서 성도가 한 몸이라는 점을 기억하게 해야 한다. 성찬은 우리가 그리스도의 한 몸과 한 피에 같이 참여한다는 점을 가르친다.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성찬을 하실 때, 하나의 빵을 찢어서 나누신 것은 성찬에 참여하는 모든 성도가 그리스도의 한 몸에 참여함, 혹은 연합됨을 가르친다. 이 가르침은 사도신경에서 “성도가 서로 교통하심을 믿사오며”라는 고백과 관련을 맺는다. 그러므로 성찬에 참여할 때, 성도들은 모두가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는 한 몸임을 고백하며 참여해야 한다. 그러나 이것이 단순히 심리적 하나 됨으로 그치지 않도록 하기 위해, 성도들은 반드시 성령의 임재를 간절히 구해야 한다. 이렇게 강력한 성령의 임재 가운데 성찬에 참여하는 성도는 성령의 하나 됨을 경험함으로써 인간이 스스로 고안해 낸 종교적 프로그램보다 탁월한 교회의 일치를 일구어 낸다.

          이제 글을 마무리하자. 칼빈은 성찬에 대하여 말하기를 “성찬의 약속들이 그리스도를 제시하는 것은 그저 겉모양과 단순한 지식에 머물러 있도록 하기 위함이 아니라, 그리스도께 참여하는 것을 진정으로 누리도록 하기 위함”이라 했다. 성찬은 은혜가 성도에게 주어지도록 주님께서 만들어주신 은혜의 방편이다. 성찬의 은혜가 주어지는 방식은 퍼킨스의 말처럼 “하나님의 뜻에 복종하는 것”이다. 매번 성찬에 참여하면서도 그리스도께 복종하는 열매가 명확하게 나타나지 않는다면 성찬의 효력이 나타났다고 할 수 없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오웬의 주장을 하나만 더 인용하자.

          “우리가 [성찬] 규례에 가치를 별로 부여하지 않고 성찬을 통해 그리 유익을 얻지 못하는 한 가지 이유는 성찬에서 그리스도와 갖는 특별한 교제의 본질에 대해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스위스의 개혁자인 쯔빙글리(Zwingli, 1484 1531)는 성만찬을 기념설이라고 정의합니다.

          "이것을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고전 11:24)는 것이 예수님의 명령이라고 하여 다른 말로 상징설(象徵說)이라고 합니다.

          "이것은 내 몸이니라"하신 예수님의 말씀에 따라 성만찬의 떡과 포도주는 기도를 통해 그리스도의 살과 피로 변한다고 하는 견해가 화체설(化體說, Transubstantiation)입니다.
          예루살렘의 시릴(Cyril of Jerusalem), 니사의 그레고리(Gregory of Nyssa), 크리소스톰(Chrysostom or John of Antioch), 알렉산드리아의 시릴(Cyril of Ale.andria), 다메섹의 요한(John of Damascus) 등이 화체설을 주장하였고 중세 기독교의 제4차 라테란회의 (The Fourth Lateran Council, 1215)에서 화체설이 천주교의 공식 교리로 채택되었습니다.

          칼빈은 성만찬은 영적 행위이지만 그리스도의 살과 피에 실제적으로 참여함을 의미한다고 합니다.
          "그리스도는 성찬의 실체(實體)요 기초로서 떡과 포도주라는 기구를 통하여 자신의 살과 피를 주신다"고 합니다. 
          칼빈의 성찬론은 그의 명저 "기독교 강요" 제4편 17장에서 표현되고 있는데 "우리는 그리스도의 영에 참여할 뿐 아니라 그의 살과 피에도 참여한다. 그리스도의 몸이 거기에 현실적으로 임재하는 것이다"라고 말함으로 그리스도의 살과 피가 실제로 성만찬의 떡과 포도주에 임재한다고 하는 실재설(實在說)을 주장합니다.
          칼빈의 실재설은 루터의 공재설과 쯔빙글러의 기념설을 조화, 절충하는 뜻에서 주장한 학설이다.


          <꼴찌박사>
          건국대 조명환 교수의 신앙 간증
          그는 어린 시절에 별명이 형광등이고, 고등학교때 반에서 꼴찌도 했습니다.
          그런데 대학교수가 되고, 아시아 태평양 에이즈 학회 회장이요, 세계적인 학자가 되었습니다.
          그는 부모님이 6.25때 월남하셔서 너무 가난했습니다.
          이 사실을 알게 된 미국에 한 여성이 45년 동안 그에게 매달 15달러씩 편지와 함께 송금해 주었습니다.
          Edna Elson이란 분이었습니다.
          편지 마지막에는 항상 세 마디가 적혀 있었습니다.

          “God loves you”
          “Trust his love”
          “I pray for you”

          나중에 조명환이 교수가 되어 Edna 할머니를 찾아갔습니다.
          그 분은 미국 중부 네브라스카주에 작은 시골 마을 세인트 폴에 사는 독신여성이었습니다.
          평생 비행기 한 번 타 본 적 없는 평범한 할머니였습니다.
          조 교수가 너무 감사해서 물어 보았습니다.

          “어떻게 얼굴도 한번 본 적이 없는 한국 학생을 위해서 45년 동안 편지와 후원금을 보낼 수 있으셨어요?”
          그 할머니는 대답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너무나 사랑하셔서 독생자까지 보내 주셨잖아요.
          이 하나님의 사랑을 받았는데 나는 자네를 위해 지극히 작은 일을 한 것 뿐이라네”
          그게 답의 전부였습니다.
          이름 없는 한 여인이 45년 동안 한 학생을 위해서 기도하고 진심을 쏟아 부었을 때 꼴찌를 세계적인 학자요, 훌륭한 믿음의 거장으로 키워낸 것입니다.

          우리도 예수님의 십자가 사랑으로 거듭난 자들입니다.
          우리가 빚진 자의 심정으로 주님께 나의 진심을 쏟아 부을 때 주님이 기뻐 하시고 귀하게 받으십니다.

          자신의 살과 피를 내어 주신 예수님

          “다 앉아 먹을 때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중의 한 사람 곧 나와 함께 먹는 자가 나를 팔리라 하신대”
          제자들 중에 한 사람이 예수님을 판다는 것입니다.
          청천벽력과도 같은 말씀입니다.
          예수님을 사랑해서 모든 것을 버리고 지금까지 예수님을 따른 제자들입니다.
          그런 제자들 중에 한 사람이 예수님을 판다니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그래서 제자들은 근심하며 하나씩 예수님께 물었습니다.
          “나는 아니지요?”
          “설마 나를 염두에 두고 말씀하신 것 아니지요?”
          “제 얼굴을 보세요”
          “그럴 리가 있습니까?”
          그러나 예수님은 정색을 하며 말씀하셨습니다.
          “열 둘 중에 하나 곧 나와 함께 그릇에 손을 넣는 자니라”
          예수님은 가룟 유다를 암묵적으로 지칭하시고 그가 회개하도록 말씀하셨습니다.

          “인자는 자기에 대하여 기록된 대로 가거니와 인자를 파는 그 사람에게는 화가 있으리로다 그 사람은 차라리 나지 아니하였더라면 자기에게 좋을 뻔하였느니라 하시니라”

          자기가 힘들어서 예수님을 떠나는 것은 그래도 이해가 됩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팔아서 유익을 얻고자 하는 것은 정말 이해하기 힘듭니다.

          마태복음 26:15절에 보면 가룟 유다가 예수님을 은 삼십에 팔고자 대제사장들과 거래를 합니다.
          은 삼십은 당시 노예 한 사람의 몸값이라고 합니다.
          이름 없는 한 여인은 예수님을 영화롭게 하기 위해 삼백 데나리온이 넘은 향유를 깨뜨려 부어 드리는데 예수님의 제자인 자가 겨우 은 삼십에 예수님을 팔고자 합니다.
          얼마나 안타깝습니까?
          물질에 대한 욕심 때문에 그는 결국 사탄의 도구로 전락하고 말았습니다.
          야고보서 1:15절에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 했습니다.

          예수님은 이제 성만찬 의식을 행하셨습니다.
          22-24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그들이 먹을 때에 예수께서 떡을 가지사 축복하시고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며 이르시되 받으라 이것은 내 몸이니라 하시고 또 잔을 가지사 감사기도 하시고 그들에게 주시니 다 이를 마시매 이르시되 이것은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떡을 떼어 주시며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내 몸이니라” 예수님은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게 됩니다. 그때 찢겨지는 예수님의 살이 우리의 양식이 됩니다.

          예수님은 또 잔을 나눠 주시며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보배로운 피를 흘리시게 됩니다.
          그 피는 우리의 진홍같이 붉은 죄를 눈 같이 희게 하는 신기한 능력이 있습니다.

          히브리서 9:13, 14절은 말합니다.
          “염소와 황소의 피와 및 암송아지의 재를 부정한 자에게 뿌려 그 육체를 정결하게 하여 거룩하게 하거든 하물며 영원하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흠 없는 자기를 하나님께 드린 그리스도의 피가 어찌 너희 양심을 죽은 행실에서 깨끗하게 하고 살아 계신 하나님을 섬기게 하지 못하겠느냐”

          구약시대 유월절에 뿌려지는 짐승의 피는 한계가 있습니다.
          사람의 내면을 깨끗케 할 수는 없습니다.
          아무리 많은 짐승을 잡아 검붉은 피를 뿌려도 죄로 오염된 영혼과 양심을 깨끗케 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보혈은 우리의 양심을 깨끗케 합니다.
          영혼을 새롭게 합니다.
          죄의 묵은 때를 벗겨내고 새로운 피조물이 되게 하는 놀라운 능력이 있습니다.

          사람이 살아가면서 얼마나 많은 죄를 짓습니까?
          내가 다른 사람에게 상처를 주기도 하고 상처를 받기도 합니다.
          내가 남을 미워하기도 하고, 미움을 받기도 합니다.
          이 세상이 거대한 죄의 스모그로 가득하기 때문에 누구도 죄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이런 우리 죄인들을 위해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보배피를 흘려주십니다.
          그 피는 능히 우리의 죄를 씻고 정결하게 할 수 있습니다.

          베드로전서 1:18, 19절에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조상이 물려 준 헛된 행실에서 대속함을 받은 것은 은이나 금 같이 없어질 것으로 된 것이 아니요 오직 흠 없고 점 없는 어린 양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된 것이니라” 했습니다. 오직 거룩하신 예수님의 보배피만이 우리를 죄악된 행동에서 구원하시고 거룩한 새 삶을 살게 하십니다.

          영국의 폴 리치 목자가 마태복음 9장 “죄인을 부르러 오신 예수님” 메시지를 전했습니다.
          그는 어려서 아버지의 돈을 500만원이나 훔쳤습니다.
          그리고 그 사실이 발각되자 친한 친구 탓으로 돌렸습니다.
          그는 그때 당시는 모면했지만 가장 친한 친구를 배신했다는 죄의식에 시달렸습니다.
          자신이 가룟 유다와 같은 자라는 양심의 송사에 시달렸습니다.
          또 한 여자와 동거하며 무절제한 삶을 살았습니다.
          그는 영국의 명문대 법대를 나온 변호사였지만 자신의 죄문제는 어찌할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그의 죄를 위해 십자가에서 보혈을 흘려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Paul, your sins are forgiven”
          “폴, 네 죄사함을 받았느니라”
          그가 예수님의 보혈로 죄 사함을 받았을 때 죄의식과 수치심에서 자유케 되었습니다.
          지금은 누구보다 헌신적으로 양들을 섬기는 훌륭한 목자가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보혈의 능력은 참으로 놀랍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흘리신 피로서 언약을 맺기 원하셨습니다. “이제 너는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너는 거룩하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느니라” “거룩한 신부가 되었느니라” 라며 언약을 맺으십니다. 구 언약은 행위언약이요, 율법언약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새 언약은 은혜언약이요, 믿음언약입니다. 짐승의 피가 아니라 예수님의 피로 맺은 언약입니다. 이제 주님과 나의 관계는 피로 맺어진 생명의 언약관계입니다. 누구도 이 언약을 깨뜨릴 수 없습니다.

          신랑과 신부가 결혼식 할 때 언약을 맺습니다.
          옛날에 보면 어떤 사람들은 거울을 반으로 쪼개서 언약의 징표로 삼았습니다.
          화살을 분질러서 의형제의 언약을 맺기도 했습니다.
          새끼 손가락을 깨물어 혈서를 써서 언약을 삼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자신의 피를 온통 다 쏟아서 생명을 내어 주심으로 언약을 맺으셨습니다.
          예수님의 언약은 피의 언약이 때문에 변개할 수 없습니다.

          로마서 8:35-39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박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기록된 바 우리가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하게 되며 도살 당할 양 같이 여김을 받았나이다 함과 같으니라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예수님은 우리 죄인들을 위해 살을 떼어주시고, 피를 흘려주셨습니다.
          이로서 우리의 죄를 사하시고 우리와 생명의 언약을 맺으셨습니다.
          이제 주님과 나의 관계는 피로서 맺혀진 언약관계입니다.








          내 안의 죄를 해결하는 떡과 잔으로 받아들이자!

          인간은 관계 속에서 살아가는 존재입니다.
          인간은 관계 안에서 태어나고 관계 안에서 세상을 떠납니다.
          관계를 떠난 인생은 없습니다.
          인생의 행복과 불행은 언제나 관계와 긴밀한 연관이 있습니다.
          세상을 살면서 가장 힘든 일 중 하나가 바로 인간관계입니다.

          15~16세기 이탈리아 르네상스를 대표하는 화가이자 조각가이며 발명가인 인물이 바로 레오나르도 다빈치(1452~1519)입니다.
          밀라노에 있는 산타 마리아 델레 그라치에 수도원에 걸린 최후의 만찬(1498년)은 불후의 명화 중 하나죠.
          1495년에 그리기 시작해 1498년에 완성했는데 그 과정에서 숱한 어려움이 많았습니다.

          한번은 최후의 만찬을 그리기 시작했을 때 가까이 지내던 친구 화가와 심한 논쟁을 벌였습니다.
          도저히 그 친구를 용서할 수 없었습니다.
          가슴에 분노가 타올랐죠. 화가 너무 난 나머지 복수를 결심하고 자신이 그리고 있는 최후의 만찬에 등장하는 배신자 가롯 유다의 얼굴을 그 친구의 얼굴로 그려 넣었습니다.

          그러나 그 이후 다빈치가 작품에 그리스도를 그리려 하자 도저히 그리스도의 형상이 떠오르지 않았습니다.
          좌절감에 사로잡혀 방황하다 결국 붓을 던져 버렸죠.
          뒤늦게 자신의 문제가 무엇인지 알게 됐습니다.
          친구를 용서하지 못하고 친구의 얼굴을 가롯 유다의 얼굴로 그려 넣은 자신의 복수가 문제였다는 걸 알게 됐습니다.
          가슴 속 깊은 곳에서 친구에 대한 복수심이 타오르는 한 도저히 그리스도의 형상이 떠오르지 않았던 것이었습니다.

          결국 다빈치는 주님 앞에서 친구를 용서하지 못했던 자신의 허물을 회개했습니다.
          그런 후 유다의 얼굴에서 친구의 얼굴을 지워버렸습니다.
          그러자 그렇게 떠오르지 않던 주님의 형상이 살아나기 시작했습니다.
          불후의 명작인 최후의 만찬에 그려진 예수님의 얼굴은 그렇게 그려졌습니다.

          아름다운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언제나 용서가 필요합니다.
          마태복음 18장에 등장하는 한 종의 비유가 바로 용서의 가치에 관해 말합니다.
          자신은 자신의 주인으로부터 무려 1만 달란트의 빚을 탕감받았으면서도 정작 자신에게 100데나리온(1달란트=6000데나리온) 빚진 자를 용서하지 못한 종에 관한 비유입니다.

          우리는 모두 용서에 빚진 자입니다.
          감당할 수 없는 죄를 용서받은 사람들입니다.
          예수님 오시기 700년 전 이사야 선지자는 대속의 은총을 이렇게 예언했습니다.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 하나님께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이사야 53:4~6).

          용서는 하나님만 할 수 있습니다.
          신의 영역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만 의로우신 존재여서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우리에게 용서할 수 있는 자격을 허락해 주셨습니다.
          그것 자체가 놀라운 은총의 사건입니다.

          주님은 이렇게 기도하라 가르쳐 주셨습니다.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같이 우리의 죄를 사하여 주옵소서”.
          일곱 번씩 일흔 번이라도 용서하라 말씀하신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용서는 남을 용서하는 행위가 아니라 바로 나를 용서하는 행위입니다.
          용서의 은총 안에서 아름답고 행복한 관계를 만들어가는 축복이 있기를 소망합니다.

           


          출애굽기 24:8
          모세가 그 피를 취하여 백성에게 뿌려 가로되 이는 여호와께서 이 모든 말씀에 대하여 너희와 세우신 언약의 피니라.

          스가랴 9:11
          또 너로 말할진대 네 언약의 피를 인하여 내가 너의 갇힌 자들을 물 없는 구덩이에서 놓았나니

          히브리서 13:20
          양의 큰 목자이신 우리 주 예수를 영원한 언약의 피로 죽은 자 가운데서 이끌어 내신 평강의 하나님이




          언약의 피

          예수님께서는 마지막 유월절을 지키시면서 떡을 떼어 축복하시고, ‘받아 먹으라 이것은 내 몸이니라’ 하시고, 잔을 가지사 감사 기도하시고, ‘너희가 다 이것을 마시라 이것은 죄 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라고 하셨습니다.
          따라서 예수님의 죽으심은 "언약의 죽으심" 이고, 예수님의 피는 "언약의 피" 입니다.

          언약의 피란 원죄의 모든 저주에서 완전히 해방될 수 있는 것이며 사탄의 머리를 깨트리고 승리하는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약속의 피를 말합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보혈을 언약으로 잡은 자는 반드시 그 영혼과 인생이 저주에서 나오며, 사탄을 꺾고 정복할 수 있고, 영원히 하나님을 누릴 수 있습니다.

          구약에서 메시아로 예언된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삼중직을 갖고 오셨습니다.

          첫째는 예수님은 이 세상에 왕으로 오셨습니다.
          둘째는 예수님은 이 세상에 대제사장으로 오셨습니다.
          셋째는 예수님은 이 세상에 선지자로 오셨습니다.

          삼중직을 갖고 오신 예수님께서 그의 생명을 속죄제물로 바치시기 전에 제자들에게 떡과 잔을 갖고 그의 몸과 피를 나눠주므로 언약관계를 확증하셨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과의 언약을 사람은 온전하게 지킬 수 없었기 때문에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피의 언약으로 우리들을 보증하신 것입니다.

          이와 같은 언약은 애급에서 나올 때에 양의 피를 문설주에 바른 것에서 시작합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그들의 힘으로 애급에서부터 자유를 누릴 수 없었기 때문에 하나님과의 약속에 따라 어린 양의 피를 문설주에 바름으로 애급에서 나올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도 언약의 피에 참여하므로 자유를 얻을 수 있게 된 것처럼 오늘날도 주님께서 세우신 언약에 따라 떡과 잔을 받는 백성들의 믿음은 자유를 얻게 될 것입니다.





          즉 피는 곧 생명이라 생명을 주시기 위하여 피라는 방법을 쓰셨다는 뜻이며, 피를 특별하게 구별하셨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피는 음식이 아니라는 뜻이며, 히브리서 9:22에는 피 흘림이 없은 즉 사함이 없다고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모든 동물이 피로 인하여 생명을 유지하도록 만드시고, 그 피를 통하여 그리스도의 보혈을 설명하고, 거기서 생명을 얻게 하려는 창세전의 계획이었다는 뜻 입니다.

          출애굽기 24:1-11 사이에 보면 모세가 하나님의 말씀을 기록하고, 이른 아침에 번제와 화목제를 드리고, 그 피를 반으로 나누고, 반은 제단에 뿌리고 반은 백성들에게 뿌려 하나님의 언약서에 대한 하나님의 보증을 선언하면서 그 피를 하나님의 언약의 피라고 말했습니다.

          하나님은 모든 약속을 피로서 하시고, 창세기 3:21부터 이 언약의 피 제사를 행하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주님께서 이 언약의 피를 십자가에서 완성하셨습니다.
          이제는 그것을 믿기만 하면 언약의 피의 효과가 우리에게 임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지금은 믿음의 시대입니다.

          언약의 피 안에서 해방을 누리고, 정복을 하고, 하나님을 누리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마음으로 그리스도를 고백하면 이 언약의 피가 역사하고, 사탄이 무너지고, 영적 문제에서 해방이 되며, 인생의 많은 육신 문제에서도 해방이 되는 길이 열릴 것입니다.




          성찬을 통해 주님을 깊이 만나는 체험에 대한 간증도 있고, 또 그것을 기념함으로 인해 내 자신을 다시 돌아 보는 의미도 있기에 어떠한 주장이 더 옳다고 얘기하는 것은 큰 의미는 없다고 본다. 문제는 어떠한 주장에 편승함으로 인해 앞서 말한 본질에서 멀어질 수 도 있다는 것이다. 

          고린도전서 11:28

          사람이 자기를 살피고 그 후에야 이 떡을 먹고 이 잔을 마실지니

          성찬은 예수님께서 알려 주신 가장 소중한 예식이다. 어떤 이론이나 주장을 떠나, 자신이 믿음과 회개로 죄사함 받았는가, 거듭난 자로서 말씀을 지키고 자신의 죄를 멀리는 자신을 살피는 모습으로 살고 있는가를 돌아 볼 수 있는 것이 성찬 예식이다. 





          성찬식의 중요한 의미

          고린도전서 11:23-26

          내가 너희에게 전한 것은 주께 받은 것이니 곧 주 예수께서 잡히시던 밤에 떡을 가지사, 축사하시고 떼어 이르시되 이것은 너희를 위하는 내 몸이니 이것을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 하시고 식후에 또한 그와 같이 잔을 가지시고 이르시되 이 잔은 내 피로 세운 새 언약이니 이것을 행하여 마실 때마다 나를 기념하라 하셨으니 너희가 이 떡을 먹으며 이 잔을 마실 때마다 주의 죽으심을 그가 오실 때까지 전하는 것이니라.

          예수님을 구주로 믿는 사람들에게 가장 의미 있는 날(기간)은 부활절 (구약의 유월절-종려주일, 무교절 기간), 성령강림절 (구약-칠칠절), 그리고 추수감사절 (구약의 초막절, 실제 미국의 추수감사절기 보다 한국의 추석이 절기상 더 가까움)로 볼 수 있다.  

          * 성경에는 크리스마스 (명확하지 않은 예수님 탄생일)를 기념하는 내용은 없으며, 또 사순절 (부활절 이전 40일 기간)에 대한 내용도 없다. 또한 부활절을 영어로는 "Easter" 라 표현하는데 이는 다산의 상징인 이스터 여신을 이르는 말로 (그래서 부활절에 계란을 주는 행사가 있다), 이것은 이교도적인 표현이며 정확한 표현은 "Resurrection day" 가 맞다.

          그러나 위의 기념일들 외에 예수님께서 특별히 기념하라고 하신 것이 있는데 그것이 바로 예수님께서 잡혀가시기 직전의 만찬에서 알려 주신 '성찬' 이다. 따라서 믿음 있는 신앙인에게 있어 성찬은 무엇 보다 중요한 의식이다. 

          그러나 이 성찬도 현재는 본질을 많이 잃어 버린 것 같다. 

          고린도전서 11장에 나오는 바와 같이 성찬의 핵심은 떡 (예수님의 몸)과 포도주 (예수님의 피) 이다. 

          예수님께서 고난 당하실때 있었던 째찍 (살점이 떨어져 나감)과 가시면류관 (피를 흘리심)이 예수님의 살과 피흘림으로 죽으시는 과정을 표현한다. 

          따라서 바울은 떡과 잔이 곧 나를 위해 죽으신 그리스도 예수를 뜻하므로 이를 예수님께서 다시 오실 때까지 지속될 가장 중요한 의식으로 표현한 것이다. 

          사도행전 2:41-42

          그 말을 받은 사람들은 세례를 받으매 이 날에 신도의 수가 삼천이나 더하더라, 그들이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서로 교제하고 떡을 떼며 오로지 기도하기를 힘쓰니라

          초대교회 시대에는 이것을 명확히 인식하고 모일때 마다 교제 (나눔)와 떡을 떼는 것을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기억함) 쉬지 않았던 것이다. 

          마태복음 26:26-28

          그들이 먹을 때에 예수께서 떡을 가지사 축복하시고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며 이르시되 받아서 먹으라 이것은 내 몸이니라 하시고 또 잔을 가지사 감사 기도 하시고 그들에게 주시며 이르시되 너희가 다 이것을 마시라 이것은 죄 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

          그러나 현대 교회에서는 성찬이 구원과 직접적인 관련이 있으며 이것이 죄 사함을 주시는 예수님의 징표임을 강조하는 경우는 드물다. 

          성찬은 예수님의 죽으심을 알려 줄 뿐만 아니라, 예수님의 죽으심으로 우리에게 죄사함을 얻게 하신다는 것과 우리에게 영생을 주시는 언약임을 또한 알려 주고 있다. 

          요한복음 6:51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떡이니 사람이 이 떡을 먹으면 영생하리라 내가 줄 떡은 곧 세상의 생명을 위한 내 살이니라 하시니라

          따라서 성찬은 예수님의 대속으로 인한 죄 사함의 징표임과 동시에, 그 떡 (예수님의 살)을 먹은 자들은 영생한다는 징표인 것이다. 

          그렇다면 성찬은 누가 참여할 수 있는가의 문제가 발생하는데, 여기서 현대 교회의 문제가 크게 나타난다. 

          교단을 막론하고 대부분의 교회에서는 세례 받은 교인을 성찬에 참여할 수 있는 기준으로 삼는다. 그렇다면 문제는 교회에서 세례 받은 것이 곧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에 참여한, 다른 말로 말하면 거듭난 사람들인가에 대한 문제가 발생하는 것이다. 본질적으로 성찬에 참여한다는 의미는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에 참여하여 구원 받아 그 길을 걷고 있는 자에게 적용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고린도전서 11:27-30

          그러므로 누구든지 주의 떡이나 잔을 합당하지 않게 먹고 마시는 자는 주의 몸과 피에 대하여 죄를 짓는 것이니라, 사람이 자기를 살피고 그 후에야 이 떡을 먹고 이 잔을 마실지니, 주의 몸을 분별하지 못하고 먹고 마시는 자는 자기의 죄를 먹고 마시는 것이니라, 그러므로 너희 중에 약한 자와 병든 자가 많고 잠자는 자도 적지 아니하니

          고린도전서 11장에는 성찬에 합당치 않은 자가 참여 했을 때 (구속의 은혜가 없는 사람들, 하나님을 따르기로 결심하지 않은 사람들, 죄의 문제를 매우 소홀히 여기는 사람들) 이는 예수님을 다시 십자가에 못박는 행위이며 이로 인해 자신의 죄를 먹고 마셔 오히려 상황이 악화 될 수 있음을 경고하고 있다.

          따라서 건강한 교회라면 세례를 남발하여 구원 받았다는 착각 속에서 성찬에 참여하게 하는 것이 옳은 가에 대한 깊은 고민이 있어야 할 것이다. 초대 교회에서도 이미 구원을 행위로 대치하려는 사탄의 시도가 성경 곳곳에서 발견되고 있는데, 세례로 구원을 갈음하거나 믿음의 사람으로 갈음하려는 모습도 바울 서신에서 목격되고 있다. 

          고린도전서 1:14-15

          나는 그리스보와 가이오 외에는 너희 중 아무에게도 내가 세례를 베풀지 아니한 것을 감사하노니, 이는 아무도 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다 말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라

           

          성찬의 또다른 의미는 내가 예수 그리스도께서 머리되신 교회의 온전한 몸이 되어가고 있는가에 대한 검토이다. 

          고린도전서 11:26

          주 예수께서 잡히시던 밤에 떡을 가지사, 축사하시고 떼어 이르시되 이것은 너희를 위하는 내 몸이니

          예수님께서 떡에 축사하실 때 하나의 떡을 떼어서 사도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이것이 상징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몸 하나에서 구원 받은 성도 하나 하나가 나와 다시 교회의 몸을 이룬 다는 것을 상징한다. 

          에베소서 1:23

          교회는 그의 몸이니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하게 하시는 이의 충만함이니라

          따라서 성찬은 구원 받은 성도들이 예수님의 살 (떡)을 먹어 비로소 예수 그리스도께서 머리되는 교회의 몸을 이룬다는 것을 뜻하며, 피 (잔)을 마심으로 인해 교회를 통해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을 받아 교회의 성도로서 영생에 참여하게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성찬은 교회의 몸을 이루는 구원의 증거 (사실 사람이 판단 할 수 있는 문제는 아니므로, 적어도 예수님을 알아가려는 열망이 나타나는 사람들에게 적용되는 것이 옳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가 나타나는 사람들이 성찬에 참여하는 것이 옳다고 볼 수 있다. 

          마태복음 16:18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교회의 반석은 예수님 이시며 (머리로도 표현됨) 이 예수 그리스도의 터전위에 세워진 교회 (예수님의 살과 피를 먹은 사람들의 모임)를 통해 사탄의 권세를 결국 꺾고 주님께서 통치하시는 나라가 세워질 것임을 뜻하고 있다. 

          따라서 성찬은 개개인에게는 구원을 날마다 기념 (이루어 감)하는 것이며 이는 혼자 이루어 갈 수 없음 (혼자 하는 신앙은 반드시 미혹의 영에 사로잡히게 되어 있다)을 깨닫고 성도 들과 함께 교회의 몸의 되어 음부의 권세를 이기겠다는 결단인 것이다. 

           

          개인적으로는 성찬은 개인구원과 교회를 통한 구원의 징표임을 깨닫는 것으로 충분하다고 본다.

          그러나 성찬 마저도 때로는 교리 논쟁에 빠지는 것을 보게 된다. 예를 들면 카톨릭은 화체설을 주장하여 떡과 포도주가 실제 예수님의 살과 피로 변한다고 한다거나 (신비주의적 요소를 가미), 칼빈은 영적 임재설을 통해 성찬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께서 영적으로 임재하신다고도 하며 (예배 시에도 주님의 임재가 있으므로 근거가 없다고 말할 수는 없음, 그러나 항상 그렇다고 볼수도 없음), 쯔빙글리는 기념설을 주장하여 다시 성찬을 기념하는 것으로의 의미가 있다 (일반적이겠지만 지나치면 행사 이상의 의미로 받아들여 지지 않을 수 있음)고 말하고 있다. 

          성찬을 통해 주님을 깊이 만나는 체험에 대한 간증도 있고, 또 그것을 기념함으로 인해 내 자신을 다시 돌아 보는 의미도 있기에 어떠한 주장이 더 옳다고 얘기하는 것은 큰 의미는 없다고 본다. 문제는 어떠한 주장에 편승함으로 인해 앞서 말한 본질에서 멀어질 수 도 있다는 것이다. 

          고린도전서 11:28

          사람이 자기를 살피고 그 후에야 이 떡을 먹고 이 잔을 마실지니

          성찬은 예수님께서 알려 주신 가장 소중한 예식이다. 어떤 이론이나 주장을 떠나, 자신이 믿음과 회개로 죄사함 받았는가, 거듭난 자로서 말씀을 지키고 자신의 죄를 멀리는 자신을 살피는 모습으로 살고 있는가를 돌아 볼 수 있는 것이 성찬 예식이다. 


           



          죄 사함을 얻게 하려고

          - 구약 제사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요체(要諦) 죄용서를 얻게 하는 대속 제물의 '피'였다.
          실로 피 없이는 하나님께 속죄받을수 없었다(히 9:22) . 그러나 안타깝게도 이 짐승으로서의 대속 제물은 임시적이요, 단편적이며, 불완전한 효능을 가지고 있어 인간을 죄악에서 완전히 자유롭게 할 수 없었다.
          따라서 이제 주께서는 그 대속제물의 궁극적 완성자요 영원한 표상으로서 친히 십자가 제단에 오르시려 하신 것이다(요일 1:7).
          정녕 당신의 죽음은 인류의 죄를 용서하시는 유일하고도, 가장 확실한 근거이다.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바

          - 히브리 관용구에 의하면 '많은 사람'은 '모든 사람'을 뜻한다.
          즉 예수께서 어떤 특정한 '많은 사람'들을 위해서 죽었으며, 그 외의 다른 사람들을 위해서는 죽지않았다는 의미가 아니라 그 죽음은 본질적으로 세상 모두를 위해서 죽었다는 의미이다(20:28).
          그러나 이 죽음의 선한 영향력이 각자의 믿음 여하에 달려 있다는 점은 간과할 수 없는 사실이다.
          한편 '흘리는 바'에 해당하는 원어 '에크퀸노메논'은 현재수동태 분사를 취한 단어로서 당신의 대속적 죽음이 확정적 사실이며, 지금부터 영원토록 흘려질(상징적임) 당신의 피흘림으로 인해 그 대속의 효력이 영속할 것임을 드러내고 계신다.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

          - 예수의 이같은 선인은 구약의 출 24:8; 렘 31:31-34; 슥 9:11과 깊은 관계를 가진다.

          출애굽기 24:8
          모세가 그 를 취하여 백성에게 뿌려 가로되 이는 여호와께서 이 모든 말씀에 대하여 너희와 세우신 언약니라.

          예레미야 31:31-34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보라 이 이르리니 내가 이스라엘 집과 유다 집에 새 언약을 세우리라.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이 언약은 내가 그들의 열조의 을 잡고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던 에 세운것과 같지 아니할 것은 내가 그들의 남편이 되었어도 그들이 내 언약을 파하였음이니라.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그러나 그 후에 내가 이스라엘 집에 세울 언약은 이러하니 곧 내가 나의 법을 그들의 속에 두며 그 마음에 기록하여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 백성이 될것이라.
          그들이 다시는 각기 이웃과 형제를 가리켜 이르기를 너는 여호와를 알라 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작은 자로부터 큰 자까지 다 나를 앎이니라 내가 그들의 죄악을 사하고 다시는 그 를 기억지 아니하리라 여호와의 말이니라. 

          스가랴 9:11
          또 너로 말할진대 네 언약를 인하여 내가 너의 갇힌 자들을 없는 구덩이에서 놓았나니.


          특히 바울과 누가는 내 피로 세우는 새 언약'이라는 말을 사용함로써 렘 31:31-34의 내용과 긴밀히 연관시키고 있다(눅 22:19; 고 전 11:25).

          한편 본문에 언급된 '언약'(테스디아데케스)이란 말은 '둘'(디아) 사이에 무엇을 '세우는 것'(티데미), 곧 둘 사이에 맺어진 계약을 뜻한다. 그런데 유대인들의 개념에 있어서 이 언약(계약)은 피흘린 생명을 근거로 맺는 그야말로 전존재론적 약속을 의미한다(창 24:5-8; 히 8:6-13).

          이제 예수께서는 당신의 피, 곧 십자가 회생을 담보로한 새로운 계약을 맺으시고 계신 것이다.
          즉 그 옛날 이스라엘이 출애굽한 직후 '시내산'에서 짐승의 피로 맺었던 '옛 언약'의 시대를 마감하시고(출 24:5-8; 히 8:6-13), 이제 그 옛 언약이 상징하는 바 '갈보리 십자가'에서의 당신의 피흘림을 통해 온 인류와 교회 앞에 본질적으로 '새로운 언약'을 수립하셨다.
          따라서 성찬에 참여하여 이 예수의 흘린 피를 마시는 자는 개별적으로 내밀(內密)하게 이 새 언약에 참여하는 영광을 누리게 되는 것이다.

           


           

          우연은 없다

          우주에 있는 모든 피조물에게 일어나는 것은 전부 하나님의 계획입니다.
          그렇다면 모든 것은 필연적이고, 절대적입니다.
          유월절을 어떻게 준비해야 되겠느냐고 질문하는 제자들에게 주님이 답을 주셨는데, 성안에 들어가 아무에게나 말하면 그가 준비할 것 이라고 하셨습니다.

          제자들이 가서 정말로 그렇게 하였더니 이미 준비되어 있는 사람이 있었고, 아무에게나 생각나는 대로 말했더니 그 사람이 그 사람이었다는 말입니다. 참 놀라운 일이고, 하나님 아니면 절대로 못할 일입니다.

          같은 내용을 기록한 마가복음 14:13-15과 누가복음 22:10-13 에는 ‘너희가 성내에 들어가면 물 한 동이를 가지고 가는 사람을 만나리니 그를 따라 가서 그 집주인에게 말하면 그가 자리를 마련한 큰 다락방을 보이리니 거기서 준비하라’ 하셨는데 실제로 그렇게 되었습니다.

          제자들이 성내에 가면 물 한 동이를 가지고 가는 사람을 딱 만나게 시간이 조정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절대 오차 없이 그를 만나고 그를 따라 가서 모든 것이 주님 말씀대로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 인생도 이렇게 인도하고 계신다는 것을 우리는 인정해야 할 것입니다.
          지금 있는 어려움이나 기쁨이나 슬픈 일이 전부 하나님의 계획을 따라 필연적으로 되어진 일이며, 이런 다양한 것을 통하여 우리 인생을 종합적으로 인도하고 계신 것을 우리는 전부 인정해야 할 것입니다.

          가룟 유다 이야기입니다.
          ‘인자는 자기에 대하여 기록된 대로 가거니와 인자를 파는 그 사람에게는 화가 있으리로다 그 사람은 차라리 태어나지 아니하였더라면 제게 좋을 뻔하였느니라’ 라고 하셨습니다.

          주님은 당신에 대하여는 구약에 기록된 대로 가신다고 하셨습니다.
          당연히 가룟 유다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세상에 우연은 없습니다.
          우리뿐 아니라 불신자에게도 우연은 없습니다.
          전부 필연적이고, 절대적입니다.
          이 사실은 우리가 많은 근본적인 생각을 하게 하고, 하나님의 중대한 메시지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절대주권을 인정하여야 하고 우연은 절대 없고, 항상 반드시 일어나야 할 필연적인 것이었으며, 절대적인 것 이었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합니다.

          어려움 중에 있어도 하나님의 절대 주권과 당연 필연 절대의 사실을 받아들인다면 오히려 더 희망이 있습니다.
          거기가 오히려 역전의 발판이 됩니다.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기고 담대히 믿음으로 기도할 수 있는 자리인 것입니다.
          반드시 일어날 것이 일어난 것에 불과하니까요.
          그리고 약속의 그 날, 승리를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주님이 기록된 대로 가셨다면 우리는 어떻겠습니까!
          하나님도 기록 된 대로 가시는 데 말입니다.
          단지 우리의 것에 대한 것은 성경에 직접 기록되지는 않았습니다.
          우리도 당연히 하나님의 기록된 계획대로 되어지는 것입니다.
          말씀을 중심으로 우리의 모든 인생을 하나님께 맡기고, 기도하고 언약을 잡으며, 하나님의 소원에 인생을 맞추는 축복이 우리 모두에게 있기를 바랍니다.

          우연은 없고, 그리스도의 보혈은 언약의 보혈입니다. 반드시 육신적 저주에서도 해방될 것이며, 음부의 권세는 절대로 우리를 이기지 못할 것이요, 우리에게도 24시 하나님을 누리는 축복이 있을 것입니다. 다시 한 번 그리스도를 언약으로 잡고 다시 한 번 그리스도를 언약으로 고백하는 주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구약의 제사에는 피가 사용된다.
          제사에서 피는 죄를 속죄하는 기능을 가지고 있어서(히브리서 9:22) 제사장이 제단에 피를 뿌리므로 정결케 하는 의식을 수행했다.

          제사를 드리러 온 자가 자기가 가지고 온 희생제물이 희생되어 그 피가 제단에 뿌려졌을 때 그로 인해 코를 진동하는 피 비린내를 맡으며 자신의 죄가 얼마나 끔찍한가를 깨달았다는 것은 지난 번에 살펴 보았다.

          그런데 왜 하필 피 뿌림이 정결케 하는 수단이 되었을까? 피는 성경적으로 어떤 의미가 있기에 그런 기능을 하는 것일까?

          법규에 합당한 음식 – 코셔푸드

          ‘코셔푸드’는 레위기 11장 1절-43절, 17장 10절-16절과 신명기 14장 3절-21절 등에 기록된 음식규례에 따라 만들어진 음식을 말한다.
          구약에는 정결한 동물과 부정한 동물을 구분하고 음식으로 사용할 수 있는 동물은 반드시 정결한 동물에서 취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이런 내용이 포함된 음식법규를 ‘카샤룻’이라고 하는데 ‘코셔’는 ‘적당한’또는 ‘합당한’이란 뜻으로 이런 법규에 합당한 음식이라는 의미이다.

          그런데 여기서 특이한 것은 레위기 17장 10절의 “이스라엘 집 사람이나 그들 중에 거류하는 거류민 중에 무슨 피든지 먹는 자가 있으면 내가 그 피를 먹는 그 사람에게는 내 얼굴을 대하여 그를 백성 중에서 끊으리니”라는 대목이다. 정결한 동물이라도 피와 함께 먹지 말라는 규정이다.

          그래서 동물을 도살할 때 ‘카샤룻’ 법규에 따라 행하도록 교육되고 자격이 주어진 종교적 도살자 ‘쇼헷’에 의해서 도살된 동물만 코셔 인증을 받을 수 있는데 ‘쇼헷’은 도살한 동물에 소금을 뿌려 그 삼투압을 이용해 가능한 한 피를 모두 제거한다.

          피에 관한 성경적 의미

          성경에서 피 채 먹지 말라는 규정의 이유는 이어지는 레위기 17장 11절과 17장 14절에 기록되어있다.

          “육체의 생명은 피에 있음이라 내가 이 피를 너희에게 주어 제단에 뿌려 너희의 생명을 위하여 속죄하게 하였나니 생명이 피에 있으므로 피가 죄를 속하느니라.”

          “모든 생물은 그 피가 생명과 일체라 그러므로 내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르기를 너희는 어떤 육체의 피든지 먹지 말라 하였나니 모든 육체의 생명은 그것의 피인즉 그 피를 먹는 모든 자는 끊어지리라.”

          피에는 속죄의 기능이 있는데 이는 육체의 생명이 피에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성경에서 피는 동물의 생명을 의미한다.
          음식규정에서 동물을 음식으로 취할 때 피를 제하고 먹으라는 것은 그 동물의 육체(고기)는 음식으로 취하지만 생명은 취하지 말라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사실만 가지고는 이미 그 동물의 생명을 취해서(도살해서) 음식으로 만들었는데 피 채 먹지 않았다는 사실로 생명을 취하지 않았다고 말할 수 있을까? 여기에는 더 깊은 성경적 고찰이 필요하다.

          네페쉬

          레위기 17장 11절의 육체의 생명은 피에 있다는 말씀 중 ‘생명’에 사용된 히브리어 단어는 ‘네페쉬’이다.
          이 ‘네페쉬’라는 히브리어는 레위기에서는 생명으로 번역되어 있고 창세기 2장 7절(“여호와 하나님이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되니라.”)에서는 생령으로 번역된 단어 속에 포함되어 있다.

          히브리어 ‘네페쉬’라는 단어는 존재, 또는 육신과 정신, 또는 영혼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는데 넓은 의미로 ‘네피쉬’는 영혼이 포함된 그 존재 자체를 의미한다.

          우리가 한 생명체를 바라볼 때 그 외향으로만 알지 않고 식성, 성격, 태도 등(사람에게는 인격이 포함되지만) 이 모든 것을 포함한 것으로 그 존재를 인식하는데 이러할 때 이 ‘네피쉬’라는 단어를 사용한다.

          바꾸어 말하면 동물을 피 채 먹는다는 것은 그 동물의 존재 전체를 취한다는 의미가 되며, 비록 하나님께서 홍수사건 이후 육식을 허락하셨지만 하나님이 창조하신 동물을 음식으로 취하면서도 피 채 먹지 않음으로 그 생명의 가치를 귀하게 생각하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그래서 속죄를 위해서는 한 생명의 영혼이 포함된 존재 전체로서만이 가능하며 이는 예수님의 육체만이 아닌 예수님 전체로서 우리에게 속전으로 드린 것을 상징하기도 한다.

          성만찬에서의 떡과 포도주의 의미

          여기에서 우리는 성만찬에 포함된 의미도 함께 살펴 볼 수 있다.
          성만찬에는 떡과 포도주를 함께 먹는다.
          떡은 예수그리스도의 육체를 상징하며 포도주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흘리신 피 곧 언약의 피를 상징한다(마태복음 26:26-29, 고린도전서 11:23-25).

          떡과 포도주를 함께 먹는다는 것은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 전체로서의 존재에 함께 하나가 되었음을 기념하는 것이며 모세와 세운 구 언약에 따라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던 이스라엘이 하나님과의 계약을 지키지 못함으로, 다시 말해 율법을 지키지 못함으로 깨져버린 구 언약을 대신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신 언약에 참여한 자라는 것을 기념하는 것이다.

          모세를 통해 세운 첫 언약(옛 언약, 구 언약)에도 생명 전체의 존재로서의 피가 언약에 사용되었다.

          히브리서 9:18 이러므로 첫 언약도 피 없이 세운 것이 아니니

          9:19 모세가 율법대로 모든 계명을 온 백성에게 말한 후에 송아지와 염소의 피 및 물과 붉은 양털과 우슬초를 취하여 그 두루마리와 온 백성에게 뿌리며

          9:20 이르되 이는 하나님이 너희에게 명하신 언약의 피라 하고

          9:21 또한 이와 같이 피를 장막과 섬기는 일에 쓰는 모든 그릇에 뿌렸느니라

          9:22 율법을 따라 거의 모든 물건이 피로써 정결하게 되나니 피 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느니라
          그러나 그리스도인은 송아지나 염소의 피가 아닌,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의 피로 세운 언약에 참여한 자이며, 속죄를 위해 영원한 제사를 드린 대제사장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 아래 있는 자이다.


          언약의 피
          히브리서 9:16-22


          유언은 유언한 자가 죽어야 되나니 유언은 그 사람이 죽은 후에야 견고한즉 유언한 자가 살았을 때에는 언제든지 효력이 없느니라 이러므로 첫 언약도 피 없이 세운 것이 아니니 모세가 율법대로 모든 계명을 온 백성에게 말한 후에 송아지와 염소의 피와 및 물과 붉은 양털과 우슬초를 취하여 그 책과 온 백성에게 뿌려 이르되 이는 하나님이 너희에게 명하신 언약의 피라 하고 또한 이와 같이 피로써 장막과 섬기는 일에 쓰는 모든 그릇에 뿌렸느니라 율법을 좇아 거의 모든 물건이 피로써 정결케 되나니 피 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느니라.
           
          대개 사람들은 십자가에서 자신의 구원을 생각하게 됩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나는 구원을 받게 되었다’는 것이 십자가가 외치고 있는 내용이라고 믿기에 예수님의 피로 구원 받았음을 믿는 것이 곧 십자가를 믿는 것이라고 여깁니다.
          물론 십자가가 유일한 구원의 길이며, 십자가를 믿음으로 구원 받는 것은 사실입니다. 또한 우리의 믿음은 분명 예수님이 피흘리신 십자가가 되어야 합니다. 하지만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은 십자가를 생각한다고 해서 모두 신자라 할 수 없고 구원받는다고 단정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저는 십자가를 믿게 되는데 있어서 많은 갈등과 고민이 있었습니다. 내가 고민하고 갈등하면서 그것을 해결함으로 십자가를 믿게 되었다는 말이 아니라, 즉 내 스스로 문제를 해결하고 십자가를 믿는다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는 그만큼 여러 가지의 문제를 안겨주면서 나에게 다가왔다는 것입니다. 십자가가 나에게 요구한 것은 내가 뜻하고 있고, 목표하고 있고, 소원하고 있는 것들을 포기하는 것이었습니다. 목사로서 원하는 것을 포기해야 한다는 것이 무척 어려웠던 것입니다.

          하지만 십자가에 담겨 있는 깊은 의미를 알아 가면 알아갈수록 나의 포부와 욕심을 포기하지 않은 채 십자가를 외치는 것은 거짓임을 깨닫게 될 뿐이었습니다. 그래서 십자가는 한때 나에게는 크나큰 고민거리였던 것이고 지금도 때때로 나에게 고민을 안겨주기도 합니다.

          그런데 십자가를 아무런 고민도 없이 아주 쉽게 받아들이고 믿는 있는 분들을 보면 의아스러울 따름입니다. 내가 알고 있는 십자가는 무엇이고, 저들이 알고 있는 십자가는 무엇이기에 이리 차이가 있는지 많은 생각을 하게 합니다. 그리고 내려지는 결론은 ‘걸림이 될 만한 부분을 모두 빼 버린 십자가이기에 그렇지 않는가?’하는 것입니다.

          십자가는 내가 어떤 존재인가를 보여주는 거울입니다. 예수님이 흘리신 피가 나에게 외치고 있는 것은 ‘너는 구원 받았다’가 아니라 ‘네가 바로 형벌을 받고 죽어야 할 존재다’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십자가에서 이 외침을 듣지 않습니다. 단지 ‘구원’이라는 외침만 들으려고 함으로써 자신의 악함은 외면한 채 십자가만 말하면 구원을 얻는 것으로 여기는 것입니다.

          믿음이 무엇인가는 ‘내가 죽어야 할 죄인’임을 외치는 예수님의 피의 소리를 들음으로 깨달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피의 소리를 듣지 못함으로 믿음이 무엇인지를 모른 채 무작정 ‘믿자 믿자’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제 여러분은 이러한 맹목적이 믿음에서 벗어나서 십자가에서 주님의 외침을 들으며 믿음에 대해 깊은 생각을 가져야 할 것입니다.

          항상 드리는 말씀이지만 ‘나는 예수 믿고 있다’라는 답을 가지고 있으면 여러 가지 문제에 대해 ‘나는 상관없음’이라는 결론을 가지고 지나쳐 버릴 것입니다. 이러한 어리석음을 범하지 않기 위해 신자는 항상 자신이 믿음 없는 존재임을 길이 자각하고 주님께 나와야 하는 것입니다. 그럴 때 주님의 소리를 들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피는 성경의 중심 사상입니다.
          그러므로 피의 의미를 모르고서는 성경을 안다고 할 수 없고 예수님을 안다고 할 수 없으며 바른 신앙의 길을 갈 수 없습니다.
          따라서 오늘날 현대 교회가 잘못되어 있다면 그것은 피를 말하면서도 피가 중심이 아니며 관심 또한 피에서 멀어져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18-22절을 다시 보면 “이러므로 첫 언약도 피 없이 세운 것이 아니니 모세가 율법대로 모든 계명을 온 백성에게 말한 후에 송아지와 염소의 피와 및 물과 붉은 양털과 우슬초를 취하여 그 책과 온 백성에게 뿌려 이르되 이는 하나님이 너희에게 명하신 언약의 피라 하고 또한 이와 같이 피로써 장막과 섬기는 일에 쓰는 모든 그릇에 뿌렸느니라 율법을 좇아 거의 모든 물건이 피로써 정결케 되나니 피 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느니라”고 말합니다.

          모세가 율법대로 모든 계명을 온 백성에게 말합니다. 그러면 그 다음에는 어떤 말을 하면 되겠습니까? ‘이 말씀을 열심히 지키며 사세요’라는 말이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모세는 책과 백성에게 피를 뿌렸다는 것입니다. 계명을 말한 후에 그 계명이 기록되어 있는 책과 백성에게 피를 뿌린다는 것, 이 의미를 깨닫는 것이 피의 의미를 아는 중요한 열쇠가 될 것입니다.

          출애굽기 24:7절을 보면 “언약서를 가져 백성에게 낭독하여 들리매 그들이 가로되 여호와의 모든 말씀을 우리가 준행하리이다”고 말합니다. 모세가 하나님의 말씀을 낭독하자 이스라엘 백성들은 ‘여호와의 모든 말씀을 우리가 그대로 준행하겠습니다’라는 반응을 보인 것입니다. 이것이 자연스런 반응이 아니겠습니까? 백성이 이런 반응을 보이면 모세는 어떻게 나와야 할 것 같습니까?

          교회에서 목사가 하나님의 말씀을 외칩니다. 말씀을 들을 교인들이 말씀에 감동이 돼서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 그대로 열심히 지켜 행하겠습니다’라고 외친다면 목사는 어떤 마음이 될까요? 말씀을 지켜 행하겠다는 교인들의 반응에 감동하면서 무척 고무된 마음이 되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예 말씀에 은혜를 받으셨군요. 감사합니다. 그대들이 진정 믿음이 있는 분들입니다’ 뭐 이런 식의 반응을 보이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모세는 어떻게 합니까? “모세가 그 피를 취하여 백성에게 뿌려 가로되 이는 여호와께서 이 모든 말씀에 대하여 너희와 세우신 언약의 피니라”(출 24:8) 피를 뿌린 것입니다. 언약서에 피를 뿌린 것은 없지만 본문과 같은 내용임을 알 수 있습니다.

          과연 모세가 여호와의 말씀을 준행하겠다고 다짐하는 백성들에게 피를 뿌린 이유가 무엇일까요? 또한 모세가 행한 이것은 오늘날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앞서 예로 든 것처럼 목사의 설교에 대해 이스라엘 백성과 같은 반응을 보이는 교인들에게 어떻게 하는 것이 모세처럼 피를 뿌리는 것이 될까요?

          흔히 알고 있는 것처럼 피를 뿌린 것이 죄사함을 의미하는 것이 전부라면 하나님의 말씀을 낭독할 이유가 없이 피만 뿌리면 되지 않겠습니까? 이왕 피로써 죄사함 받고 구원을 얻는 것이라면 굳이 말씀을 낭독해야 할 이유가 있느냐는 것입니다. 물론 ‘피로써 죄사함을 얻었으니 죄사함을 받은 신자답게 살기 위해서 말씀을 지켜 행해야 한다’는 생각을 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율법은, 하나님의 말씀은 구원 얻은 자들이 구원 얻은 자답게 살게 하기 위해 내려진 하나의 생활 지침서가 되는 것입니까?

          먼저 간과하기 쉬운 것 중 하나는 피가 죽음의 의미를 담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피에서 자기 구원만을 보려고 하지만 사실 피는 죽음을 담고 있습니다. 나의 죽음을 대신한 죽음이 있음을 외치는 것입니다. 따라서 모세가 백성들에게 피를 뿌리는 것은 단순히 ‘너희는 죄사함 받고 구원을 얻었다’는 것이라기보다는 ‘너희는 죽은 자다’는 의미가 강하다고 봐야 합니다.

          죽은 자라는 것은 의를 행하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준행할 능력이 없음을 뜻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계명을 지켜 행할 수 있는 자질이 없습니다. 이것이 피 뿌림의 의미입니다. 이렇게 볼 때 모세가 책에도 피를 뿌린 것은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계명에 대해 죽은 존재임을 선포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이처럼 피로 인해서 자신이 죽은 존재임을 알게 될 때, 그리고 피 흘리신 주님을 바라볼 때 그는 피로써 죄사함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언약의 피’

          언약은 이스라엘이 성취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성취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독생자의 피를 흘리시면서 까지 언약을 기어코 성취하시는 하나님이심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자는 언약의 피 앞에서 우리의 실천 의지를 내세울 수 없습니다.
          그 실천 의지까지 몽땅 무너져야 하는 것이 십자가를 믿는 것입니다.

          16-17절을 보면 “유언은 유언한 자가 죽어야 되나니 유언은 그 사람이 죽은 후에야 견고한즉 유언한 자가 살았을 때에는 언제든지 효력이 없느니라”고 말합니다.
          유언은 유언한 자신의 죽음 이후의 일을 미리 선포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유언은 유언한 자가 죽은 후에 그가 살았을 때의 권위를 그대로 지닌 채 그 효력을 발생하게 됩니다. 그러나 유언한 자가 살았을 때는 그 효력이 없습니다.

          이처럼 예수님의 말씀은 예수님이 죽으심으로 더욱 견고하게 되어 그 효력을 가지고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죽으시면서 예수님의 일을 우리에게 맡겼다는 생각은 잘못된 것입니다. 말씀이 예수님이 살아계셨을 때보다 더욱 견고하게 되어 그 효력을 발생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신자는 여전히 예수님의 말씀의 효력 안에서 살아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이 하늘에 계시는 지금 예수님을 믿는 신자가 일을 해야 한다고 하는 것은, 예수님의 말씀의 왕성한 활동과 그 효력을 인정하지 않는 것일 뿐입니다.
          신자는 스스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존재입니다.
          예수님의 피는 이러한 우리를 보게 하고 예수님의 활동만을 의지하게 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여전히 살아서 왕성하게 활동하고 계심을 선포하게 합니다.
          이것이 언약의 피를 믿는 신자입니다.
          그러므로 ‘말씀을 지켜 실천하겠다’고 나서는 신자가 있을 때 그들에게 피를 뿌리는 것은 ‘인간의 죽음’을 선포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오직 예수님의 피가 우리의 생명이며 말씀이 살아서 활동하고 계심을 외쳐야 합니다. 



          성찬, 언약의 피

          출 24:1-8 / 마 26:26-28

          [성례에 대하여]

          성례는 세례와 성찬 두 가지의 거룩한 예식을 의미한다. 예수님께서 친히 하라고 명령하신 것 예식입니다.

          세례는 마 28장(18-20절)에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줄 것을 명령하셨습니다.

          성찬은 고전 11장(25-26절)에 기록되어 있듯이 주께서 잡히시던 밤에 제자들에게 베푸시면서 제정하신 것입니다.

          이 두 가지 성례는 하나님께서 자신의 백성들에게 특별한 증표로 주신 것입니다. 즉 이미 구원하신 하나님의 백성에게 주신 것이지 이것을 통해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닙니다. 언약의 표증입니다.

          성례와 말씀은 어떤 관계가 있을까?

          공통점

          차이점

          1. 제정하신 분이 하나님

          2. 중심내용은 그리스도

          3. 믿음으로 받아야 하는 것임

          1. 말씀은 구원에 절대적으로 필요하지만 성례는 그렇지 않음

          2. 말씀은 믿음을 일으키기도 하고, 보강해주기도 하지만 성례는 믿음을 전제로 공급되는 것

          3. 말씀은 온 세계로 퍼져 나가는 반면 성례는 오직 교회 안에 있는 이들에게만 제공됨.

          성례의 필요성

          성례는 죄인의 구원에 절대로 필요한 것은 아니지만 그것은 하나님께서 내리신 명령으로서 우리에게는 의무적인 것이다.

          성례의 유익 – 은혜의 수단

          1. 눈에 보이는 역할을 통해 성령께서 믿음으로 받는 백성들에게 믿음의 보강을 허락하신다.

          2. 예수 그리스도를 더욱 묵상하고 기억하게 함으로 복음에 대한 확신을 심어준다.

          이상 <김홍전, ​성례란 무엇인가> 참조.

          [출애굽기 시내산에서의 언약식]  출 24:1-11

          언약체결식으로서의 피뿌림(3-8)

          유월절에 행하여진 피뿌림이 새로운 의미로 부각되고 있다.

          20-23장에서 하나님은 십계명을 비롯하여 이스라엘 백성들의 삶의 규범, 곧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를 보여준 규범을 제시하신 후 이 율법을 기록하게 하셨다. 하나님께서는 이것을 기념하기 위하여 이스라엘을 상징하는 열두 기둥을 세우고 단을 쌓게 한 후 번제와 화목제를 드리게 하셨다. 이 과정에서 모세는 피를 취하여 반은 여러 양푼에 나누어 담고 반은 그 단에 뿌렸다. 그리고 언약서를 낭독하여 백성들이 듣게 하였다. 이스라엘은 그 내용을 다 들은 후 그 율법을 승인한다. 모세는 피의 절반을 백성들에게 뿌리며 ‘언약의 피’로 선언하였다.

          ‘언약의 피’는 하나님과 이스라엘 사이에 언약이 체결되었음을 의미했다. 고대 근동 지방에서 언약체결자들이 짐승을 반으로 쪼개고 그 사이를 지나가는 이유는 언약을 지킬 것이라는 맹세의 서약이다. 만약 언약을 어길 경우 그 짐승이 쪼개어지고 피를 흘려 죽은 것처럼 언약 위반자 역시 그와 같이 죽음을 당할 것이라는 의식이었다. 즉 죽음으로써 언약을 지키겠다는 약속을 서로 굳게 세우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피를 취하여 반은 하나님의 단에 뿌리고 반은 백성에게 뿌린 것은 하나님과 이스라엘 사이에 언약이 체결되었음을 선언하면서 죽음을 담보로 맺은 언약식임을 알려준다.

          유월절의 피뿌림은 이스라엘을 그동안 억압하던 바로의 세력에서 벗어나 이스라엘이 자유인으로서의 신분을 회복하고 하나님 나라를 세울 수 있는 새생명을 발휘할 수 있는 위치로 옮겨짐을 상징한다.

          반면 시내산에서의 피뿌림은 자유인으로서 자기의 위치를 각성한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나라와 그 문화를 세워 새로운 나라를 구현하고 그 나라의 백성으로서 살겠다는 의지를 가지고 하나님과 언약을 체결하는 언약의 표였다.

          그러므로 유월절의 피뿌림은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자격을 인정받기 위함이었고, 시내산에서의 피뿌림은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겠다는 신앙 고백의 의미가 있다.

          공동운명체로서의 이스라엘(9-11)

          당시 사회에서 음식을 함께 먹는다는 것은 그 사람들간에 원수가 아닌 인생의 동반자 관계가 형성되었음을 나타내었다. 더 나아가 함께 음식을 먹는다는 것은 함께 유업을 받을 사람들임을 상징하는 까닭에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유월절 음식은 이 점과 깊은 연관을 가지고 있다. 왜냐하면 유월절 음식을 먹을 수 있는 사람들과 먹을 수 없는 사람들이 구별되어 있기 때문이다. 아무나 그 자리에 참석하는 것이 아니라 할례를 받고 하나님의 언약 백성임을 고백한 사람만이 그 음식을 먹을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음식을 먹은 사람은 하나님의 자녀로서 장차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을 사람이었다.

          반면에 시내산에서 언약 체결식이 끝난 후 이스라엘을 대표한 모세와 제사장들, 70명의 장로들이 하나님 앞에 나아가 음식을 먹은 것은 또 다른 의미를 가지고 있다. 유월절에는 하나님의 백성으로 구별되어 장차 하나님 앞에 나아가기 위한 음식을 나누어 먹고 그날을 소망했다면 시내산에서는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겠다는 언약을 맺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만나뵙고 그 앞에서 음식을 먹게 되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 앞에서 음식을 먹게 된 것은 유월절에서 소망한 하나님의 유업을 받았음을 상징하기 때문에 유월절이 완성되었음을 의미한다.

          이 자리는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들에게만 베풀어 주신 잔치였다. 그들이 음식을 먹었다는 것은 하나님 나라의 권속이 되었음을 의미한다. 이것은 하나님의 백성들만이 가지는 교제의 고유한 의미이다.

          이처럼 시내산에서 완성된 유월절을 체험한 그들은 장차 하나님 앞에 음식을 먹겠다는 것을 소망하고 가나안을 향하여 출발한 것이 아니라 이미 하나님 앞에서 음식을 나누어 먹었고 기업을 받았음을 기억하고 가나안에 들어가야 하는 것이다. 즉 이미 받은 기업을 실제로 들어가 누리고 건설하기 위해 가나안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그리고 그 기업 위에 하나님의 나라와 문화를 건설하기 위해 이미 그들은 헌신하였던 것이다. 이런 점에서 이스라엘은 공동 운명체로서 하나의 사명을 가지고 있는 민족 공동체였다.

          결국 공동 식사는 하나님 앞에서 친밀감과 기쁨을 누리는 축제의 의미를 갖는다. 하나님의 현존하심 안에서 그분의 은총을 깊이 체험하고 공동체의 일치와 화해를 다짐하는 식사이다. (성찬식의 예표)

          이런 언약체결식에서 행해졌던 언약의 피는 결국 언약에 대한 책임을 지는 백성들에게는 어겼을 시 죽음과 심판을 상징하는 피가 된다. 그런데 그 속에 흐르는 참된 의미는 유월절에서 보여주는 어린 양의 피로 시내산에서 뿌려지는 언약의 피가 완성할 그 무엇을 비추고 있다.


          [마태복음 유월절 만찬에서의 언약의 피] 마 26:26-28

          예수님께서는 십자가 죽음을 앞두시고 제자들과의 마지막 만찬 자리에서 유월절 식사를 시작하셨다.

          그러면서 시작되는 예수님의 말씀은 최초의 만찬식이 된다.

          우리가 흔히 이 자리를 최후의 만찬으로 기억하지만, 어떤 면에서 이 자리는 최초의 만찬이다. 즉, 예수님께서 새롭게 제정하시는 새언약의 비준식이 된다.

          예수님께서는 따르는 제자 중 열둘을 택하사 그들을 사도, 즉 보냄을 받은 자들이라 칭하시고, 그들과 함께 하셨다. 그리고 이제 십자가 지실 일을 앞두고 예수님께서 유월절 만찬을 준비하라 하셨다.

          유월절.. 출애굽 때 하나님의 구원을 보여주신 놀라운 사건. 어린 양의 피를 바른 집을 넘어가는 유월을 기념하며 절기가 시작된다. 이 절기를 행할 때마다 자녀들이 식사 때마다 물으면 하나님의 구원을 이야기 해 준다. 그리고 일년, 이년, 십년, 백년, 천년이 지나면서 유월절은 실패를 거듭했으나 하나님께서는 영원한 제사를 약속하셨다. 다시는 거듭해도 되지 않을 단번의 제사 말이다. 이 유월절 식사, 의식은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기 전날까지 약 1400-1500년 동안 행해오던 의식이었다.

          유대인들이었던 사도들도 이 절기만 되면 부모님과 둘러앉은 식탁에서 출애굽의 이야기를 들었다. 나이가 들면서 어떤 사도는 누군가에게 유월절 식탁에서 출애굽 이야기를 해주기도 했을 것이다. 유월절 식탁에서의 의식은 그들에게 익숙한 것이었다. 그리고 지금 예수님과 함께 유월절 식사 자리를 준비하여 둘러앉아 있다.

          제자들은 이제 출애굽에 대한 이야기를 예수님의 입을 통해 듣게 될 것이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하시는 말씀은 충격이다.

          유월절 식사에 대한 감사 기도를 하신 예수님께서 떡을 떼어 나누시면서 “이것은 너희를 위하여 주는 내 몸”이라고 하신다. 그리고 잔을 나누시면서 “이 잔은 내 피다”라고 말씀하시는 것이 아닌가?

          전통을 따라 1400여년동안 전해오던 출애굽의 말씀, 하나님의 구원사에 대한 이스라엘의 이야기가 아니라 오늘 예수님께서는 떡을 몸으로, 잔을 피로 말씀하고 있다. 유월절을 따라 예수님께서 이제 하나님 나라에서 이루기까지 다시는 먹지 아니할 최후의 만찬이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따라 구원을 이룬 단번에 제사를 드리게 될 예수님께서 최초의 만찬을 이루고 계신 장면이다.

          유월절 마지막 식사에서 행해졌던 일이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시는 일과 제자들이 서로 누가 크냐 하며 다툼이 일어난 일도 있다. 참 복잡한 식사 자리였다. 하지만 지금 떡과 잔을 들고 하나님께 감사기도를 드리시고 나서 예수님께서 행하시는 만찬은 폭풍 속의 고요함처럼 잔잔함 속에 1400년의 전통이 가리키던 어린양, 그림자였던 그 의식에 참된 주인이신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양으로서 자신의 몸과 피를 알려주시는 것이다.

          그리고 이는 단순히 뿌려지는 피가 아니라 예수님께서는 시내산에서 언약 체결을 염두에 두시고 자신의 피를 가르키면서 ‘언약의 피’라고 말씀하셨다.

          [새언약으로서의 피]

          시내산에서의 언약식을 이어가는 것이 아니라 누가복음은 이렇게 기록한다.

          눅 22:20

          이 말씀은 예레미야의 말씀과 연결이 된다.

          렘 31:31-34

          시내산 언약은 개혁이 필요하다. 그것은 시내산 언약이 문제가 있어서가 아니라 그 언약에 참여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문제가 있기 때문이었다. 즉 죄인인 살람이 문제이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다시는 사람에 의해서 지켜지는 언약식이 아니라 오직 자신의 피로 마음에 새겨질 새언약의 피로 완성하시는 것이다.

          히9:11-22

          이런 의미를 가지고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셨다.

          고전 11:23-26

          너희가 이를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

          ‘기념하다’는 헬라어 ‘아남네시스’는 ‘회상, 기억’을 의미한다. 제자들을 두고 십자가를 지실 일을 앞두신 주께서 그동안 제자들에게 당부하며 설명했던 성령의 오심과 하나님 나라를 준비하시고 다시 오실 주님의 재림의 시간 사이에 살아야 하는 제자들에게 성찬식을 몸소 행하신 것이다. 제자들이 모일 때마다 성찬식을 통해 예수님의 몸과 피를 기억할 것을 일러 주신 것이다.

          이 예식을 통해 하나님의 총애를 더 받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이 성찬식을 통해 하나님께 더 감사를 표하는 것이며 그리스도의 놀라운 사랑에 다시 한번 감격하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가 가야 할 표지를 바르게 인식하는 것이다.

          성찬식을 행할 때 떡과 포도주가 실제적으로 예수님의 살과 피로 변하는 것은 아니지만 우리는 사실 예수님의 몸과 피를 먹는 것이다. 이것이 논리적으로 설명이 되지는 않지만 성찬식을 통해 우리가 자랑할 수 있는 것은 그 성찬식에 보여주는 바 오직 우리의 죄를 사하신 십자가의 예수 그리스도이다.

          나를 부르신 그 사랑은 확인하는 자리가 성찬식이다. 나를 부르신 예수님의 십자가, 그 찢으신 몸과 흘리신 피를 기억할 수 있는 자리가 바로 성찬식의 자리이다.

          그래서 우리는 성찬식을 앞두고 자신을 돌아보아야 한다.

          고전 11:27-29

          자신의 죄를 회개하고, 나를 용서하신 그리스도의 몸과 피를 마시면서 다시 감사드리며 시간적으로는 과거의 십자가 사건이 오늘이 되고, 미래에 다가올 주님의 나라, 그 영원한 나라가 오늘이 되는 것이다.

          그렇게 될 때 주님을 기념하는 성찬식은 단순히 머리로 기억하는 자리가 아니라 현존하시며 실재하시고, 지금 우리와 함께 하시는 그 자리가 된다.

          그래서 과거에 우리를 위해 십자가 지시고 교육으로 남아있는 예수님이 아니라 우리와 지금 동행하시는 예수님을 기억하게 된다. 또한 미래에 다시 오실 예수님을 배우면서 머리 속에 기억하는 예수님이 아니라 지금 여기에 승리하신 하나님 나라, 예수 그리스도가 실재하며 기억하게 된다.

          새언약의 피로 새롭게 제정하신 예수님의 선언, 그 언약의 피는 언약을 지키지 못했을 때 우리에게 임한 죽음과 심판을 상징하는 것이 아니라 이제는 우리의 죽음과 심판을 대신 지신 완전한 대제사장이며, 완전한 속죄제물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하는 것이 된다.

          그래서 이제 우리는 성찬식을 행하여 기념할 때마다 반드시 기억해야 한다.

          1. 주의 죽으심을 기억해야 한다. 주께서 왜 피를 흘리셨는지, 왜 제물이 되셨는지 묵상하며 주님의 살과 피를 먹고 마셔야 한다.

          2. 공동 식사의 의미를 제대로 알고 하나님 앞에서 친밀감과 기쁨을 누리는 축제의 자리가 되어야 한다. 하나님의 현존하심 안에서 그분의 은총을 깊이 체험하고 공동체의 일치와 화해를 다짐하는 성찬의 자리가 되어야 한다.

          그래서 이 일은 우리를 주님의 몸과 피로 하나되게 하심에 감사하면서 서로를 용납하고 안아주며 용서하고 이해하는 자리로 가게 한다.

          예수님의 십자가 사랑이 나의 사랑이 되며, 우리의 사랑이 된다. 그것을 잊고 살아가다가도 성찬식 앞에 우리는 무릎을 꿇게 되고 서로를 이어주신 그리스도의 몸과 피를 기억하면서 현재 우리가 한 몸으로 다시 서게 한다. 지금 여기 함께 계시는 예수님으로 인해.

          우리가 행하는 성찬식이 의식으로만 남아있어서는 안된다. 단순히 기념하라고 했으니 하는 것이라는 생각으로 그 깊으신 의미를 삶 속에서 누리며 살아가지 못하지 우리의 잣대가 되어서는 안된다.

          주님께 더 감사할 수 있어야 한다. 그분의 살과 피를 기억하면서.

          성도들을 더 사랑할 수 있어야 한다. 그분의 살과 피를 기념하면서.

          세상을 더 품을 수 있어야 한다. 그분의 살과 피를 기념하면서.

          더 전할 수 있어야 한다. 그분의 놀라운 살과 피를 기억하면서.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마태복음 26:1-13
                                                                                                          저를 기념하라(13절)


          * 관점(觀點, View of Point)을 바꾸라!
           
           요셉의 관점
           다윗의 관점
           정탐꾼의 관점
           욥의 관점
           스데반의 관점
           


          예수님 시대의 장례문화

          유대인들의 죽음에 대한 생각은 어떠할까?
          그들은 우선 죽음을 ‘생명의 끝’으로 보지않는다.
          영혼은 ‘죽음’이라는 길을 통해서 그 사람의 몸에서 다른 곳으로 이전하는 것으로 이해했다.
          즉 내세에 대한 믿음이 있는 것이다.
          그래서 유대인의 장례 문화 속에는 내세에 대한 가치관이 깊게 녹아있다.
          죽음 이후에도 그들은 다른 장소, 즉 오직 죽음을 통해서만 들어갈 수 있는 새로운 집에서 여전히 사는 것으로 믿는 것이다.

          크리아(Kriah)

          사람이 죽으며, 죽는 순간부터 ‘크리아’(Kriah)라고 불리는 애곡 의식이 있었다.
          매장하러 나가기 전까지 옷의 윗부분을 찢어가면서 슬퍼하고 목소리를 높여 곡하는 것이다.
          임종의 순간을 지켜보지 못한 유족들도 사망 소식을 처음 접하는 순간 옷을 찢어가면서 애곡한다.
          ‘크리아’에 의무적인 사람들은 배우자, 아버지, 어머니, 아들, 딸, 형제, 자매이다.

          성경에서 크리아를 여러 곳에서 볼 수 있다.
          사라가 죽었을 때, 아브라함이 사라를 위해서 슬퍼하며 애통하였다(창 23:2).
          야곱이 그의 아들 요셉이 악한 짐승에 의해 죽었다고 생각하여 자기 옷을 찢고 굵은 베로 허리를 묶고 오래도록 애통하였다(창 37:34).
          다윗은 사울 왕과 그의 친구 요나단이 죽었다는 말을 들었을 때, 자기 옷을 찢었고 함께 있었던 사람들도 옷을 찢었고 저녁때까지 슬퍼하며 울며 금식하였다(삼하 1:11,12).
          욥은 자녀들이 죽었다는 말을 듣고 겉옷을 찢고 머리털을 밀었다(욥 1:20).

          오네인(Onein)

          가까운 가족 관계 즉 부모, 배우자, 형제, 자매, 자녀가 죽으면 그 가족은 매장 전까지 오네인(Onein)이 된다.
          오네인은 시체를 씻고, 수의를 입히고, 시체를 매장할 무덤을 준비하는 등의 장례절차를 책임져야 한다.

          타하라(Tahara)

          타하라(Tahara)는 매장 전에 시체를 씻는 의식이다.
          시체를 깨끗하게 하기 위해서 기름을 바르기도 하고, 물로 씻기도 한다.
          씻을 때는 머리부터 발끝까지 씻어야 하고, 입은 물에 들어가지 않도록 막는다.
          시체는 깨끗한 천으로 감싼다.
          이런 ‘타하라’ 의식을 사도행전의 다비다의 죽은 사건에서 볼 수 있다.
          “다비다가 병들어 죽으매 시체를 씻어 다락에 누이니라.”(행 9:37)

          타크리킴(Tachrichim)

          시체를 씻었으면 그 다음으로 타크리킴(Tachrichim)을 행한다.
          ‘타크리킴’은 시체에 입히는 수의를 말한다.
          그 수의는 100% 아마(Linen)로 만들어 진다.
          하얀색을 사용하는 이유는 죽은 이의 순결과 품위를 상징하기 때문이다.
          그런 이유에서 죽은 이의 몸을 매우 품위있게 다루었다.
          예수님께서 돌아가셨을 때, 아리마대 요셉은 예수의 시체를 가져다가 정한 세마포로 쌌다(마 27:59).
          나사로의 경우는 얼굴은 수건에 싸였고, 손과 발은 베로 감싸있었다.(요 11:44)

          탈무드에 따르면 이렇게 하얀 세마포로 싸는 이유는 부활 사상에 기인한다.
          즉 하얀 세마포를 입고, 깨끗한 양말과 신발을 신고, 손과 발을 싸고 누이는 것은 메시아가 오실 때에 그를 따라갈 준비를 하기 위함인 것이다.
          메시아가 오실 때에 시체가 일어난 다는 것은 구약성경에서도 말하고 있다.
          “주의 죽은 자들은 살아나고 우리의 시체들은 일어나리이다. 티끌에 거하는 자들아 너희는 깨어 노래하라”(사 26:19).
          “내 백성들아 내가 너희 무덤을 열고 너희로 거기서 나오게 한 즉 너희가 나를 여호와인줄 알리라”(겔 37:13)

          이런 사건이 예수의 죽음의 순간에 일어났음을 마태는 전하고 있다.
          “무덤들이 열리며 자던 성도의 몸이 많이 일어나되 예수의 부활 후에 저희가 무덤에서 나와서 거룩한 성에 들어가 많은 사람에게 보이니라”(마 27:52-53).

          상여

          우리가 흔히 알고 있듯이 이집트에서는 시체를 미이라로 만든다.
          미이라로 만드는 것은 방부처리를 하는 것이다.
          반면에 이스라엘은 시체를 방부 처리를 하지 않는다.
          그냥 깨끗이 씻고 하얀 천으로 감싼 다음 관에 넣어서 매장지까지 운반한다.
          아브넬이 죽었을 때, 이렇게 관에 넣어서 운반하는 상여를 다윗 왕은 따라갔다.
          나인성의 과부의 아들이 죽었을 때, 예수님은 상여 가까이에 오셔서 그 관에 손을 대셨다(눅 7:14).
          누가복음 7장 나인성 과부의 아들을 예수님께서 살려주시는 사건은 상여를 매고 매장지로 가는 중에 일어났다.

          상여에는 피리 부는 자가 있었고, 애곡하는 자들도 있었다(마 9:23).
          피리 부는 자들과 애곡하는 자들은 모두 직업적인 사람들로 장례를 위해서 고용된 사람들이다.
          피리 부는 자들은 맨발로 상여 제일 앞에 서서 상여꾼들을 인도한다.
          피리 부는 자들 뒤로는 역시 맨발로 애곡하는 여인들이 따른다.
          여인들의 하는 일은 매우 슬프게 우는 것이다.
          그래서 장례식에 참여한 사람들은 이 여인이 슬피 울며 곡하는 소리에 함께 눈물을 흘리면서 울게 된다.
          이런 모습을 예레미야서에서 잘 표현하고 있다.
          “곡하는 부녀를 불러오며 또 보내어 지혜로운 부녀를 불러오되 그들로 빨리 와서 우리를 위하여 애국하게 하여 우리의 눈에서 눈물이 떨어지게 하며 우리 눈꺼풀에서 물이 쏟아지게 하라”(렘 9:17,18)

          사람들의 눈에서 눈물을 쏟아내게 할 만큼 이들의 우는 기술은 뛰어났고, 그 기술은 그녀의 딸에게 혹은 그 직업을 갖고자 하는 사람에게 전수되었다.

          “너희 딸들에게 애곡을 가르치며 각기 이웃에게 애가를 가르치라”(렘 9:20)
          미쉬나에서는 아무리 가난한 사람이라 할 지라도 적어도 두 명의 피리 부는 사람과 한 명의 애곡하는 전문적인 여성이 있어야 함을 기록하고 있다.

          매장

          예수님 시대의 매장은 크게 두 종류가 있었다.
          하나는 바위를 깎아서 만든 무덤인데 주로 부자들이 사용하였고, 또 하나는 땅바닥을 파서 만든 무덤인데 이것은 가난한 사람들과 부랑자들이 사용하였다.

          구약에서는 이 가난한 자들의 무덤을 ‘평민의 무덤’이라고 표현하고 있고(열하 23:6, 렘 26:23), 기드론 골짜기에 있었다.

          바위를 파서 만든 동굴 무덤에는 돌 선반 위에 시체가 놓여진다.
          엄청난 부를 갖고 있는 사람의 경우, 석관을 사용하기도 하지만, 일반적으로는 ‘로쿨리’(Loculi)라고 불리는 조그만 동굴에 시체가 놓요진다.
          그리고 바위 무덤 입구를 큰 돌로 막는다.

          쉬바(Shivah)

          쉬바(Shivah)는 7이라는 의미이다.
          애도자들은 죽음이 발생되고 난 이후 7일 동안 슬퍼한다.
          이 7일 동안에는 일, 목욕, 화장, 성관계 등을 금하고 있다. 사울 왕이 죽자 길르앗 야베스 사람들이 그를 위해 장사를 지내고 7일 동안 금식하였다(삼상 31:13).
          야곱이 죽었을 때 그의 아들 요셉은 그를 위해서 7일 동안 애곡하였다(창 50:10).

          쉴로쉼(Sheloshim)

          쉴로쉼이라 하는 것은 30이라는 뜻이다.
          쉬바를 마치고 난 이후로 30일을 애도하는 것이다.
          쉬바를 마치면 애도자들은 정상적인 사회생활을 할 수 있다.
          그러나 쉬바 이후 30일 동안에는 몇 가지 지켜야 할 규정들이 있다.
          30일 동안 수염이나 머리카락을 자를 수 없고, 어떠한 잔치 자리에 참여할 수 없다.
          30일이라고 하는 숫자는 아론과 모세의 애도에서 찾을 수 있다.
          아론이 죽자 이스라엘 온 족속이 삼십일을 애곡하였다(민 20:29).
          이스라엘 자손이 모세를 위하여 30일을 애곡했다(신 34:8).
          이렇게 쉴로쉼을 지키는 사람은 아버지, 어머니, 남편, 아내, 형제, 아들, 딸이다.

          2차 매장

          매장 즉 시체를 무덤에 묻고 난 이후 가족은 1년 뒤에 다시 그 무덤으로 간다.
          굳이 1년이라는 기간을 두는 이유는 그 1년 동안 시체가 완전히 부패하기 때문이다.
          몸이 부패되었다면, 이제 남은 것은 뼈들이다.
          가족은 그 뼈들을 모아서 ‘오슈아리’라고 하는 조그만 석회암 상자에 넣는다.
          이런 의식을 가리켜 2차 매장이라고 부른다.

          예수님 시대의 장례 문화와 구약 시대의 장례 문화를 비교해 볼 때, 가장 크게 차이 나는 것이 바로 이 부분이다.
          구약에는 이 ‘오슈아리’라는 상자가 사용되지 않는다.
          하지만 예수님 시대의 매장 문화에 있어서 아주 특이한 문화 중의 하나라고 할 수 있다.




          마가복음 14:3-9, 누가복음 7:36-39, 요한복음 12:1-8

          사복음에서 모두 기록된 내용은 매우 중요하다는 것을 암시합니다.
          그런데 이제까지 우리들이 듣고 기억한 내용들은 잘못된 정보들로 혼합된 것입니다.
          예를 들면 향유를 부은 여인의 이름은 "마리아"이었고 그녀는 죄가 많은 여자 즉 "창녀" 이었다고 하는 것입니다.
          먼저 이와 같은 것들을 바르게 정리해야 합니다.

                                           장소
          마태   베다니 문둥이 시몬의 집(6)      향유 한 옥합     머리에  부으니   좋은 일  내 장사를 위함   저를 기념하리라

          마가   베다니 문둥이 시몬의 집(3)   향유 나드 한 옥합  머리     300데나리온   좋은 일   장사를 미리 준비  저를 기념하리라

          누가   바리새인의 집   죄인인 한 여자 향유 한 옥합  발   머리털로 씻고   선지자라면 이 여자가 누구인줄 알았으리라

          요한    베다니      마리아   향유 나드 한 근(330g)  발 머리털로 씻으니  장사할 날을 위하여 이를 두게 하라


          마태, 마가, 장소는 베다니 문둥이 시몬의 집
          누가는 바리새인의 집
          마태, 마가는 향유를 예수님의 머리에 부었다. - 왕, 선지자, 제사장에게 기름을 붓는 의식과 같다
          누가, 요한은 발에 향유를 부었다. - 장례를 위한 것과 같다.

          유대 풍속은 신부아 결혼을 위하여 반드시 준비해야 할 혼수품 향유는 첫날밤 신랑의 머리에 향유를 한 방울 떨어트린다.
          그리고 향유를 보관하였다가 신랑이 죽은 후에 그 향유를 장례를 위하여 시신에 바르기 위하여 사용한다.
          따라서 마태와 마가의 머리에 향유를 부은 것은 마치 왕과 제사장과 선지자로서 오신 메시아를 위한 향유를 부은 것과 같다고 하겠다.
          누가와 요한이 발에 향유를 부은 것은 장례를 위한 것이라고 하겠다.
          그런데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는 이 여인의 행한것이 기념될 것이라고 하셨다.
          (개정) 기억될 것이다
          (현대인) 기억에 남을 것이다
          (새번역) 기억하게 될 것이다
          (공동번역) 기억하게 될 것이다

          기념하게 될 것이라는 말씀은 기억하는 것을 의미한다.
          어떻게 기억되는가?
          향유를 부었다는 것은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으심으로 교회가 시작되고 교회가 시작됨과 동시에 성도들은 그리스도의 신부로 등장하므로 신랑을 맞이할 준비를 하게 된다.


          여자가 힘을 다하여 예수의 몸에 향유를 부어 장사를 미리 준비하였다고 합니다.

          마리아는 지극히 비싼 향유 곧 순전한 나드 한 근을 가져다가 예수의 발에 붓고 자기 머리털로 그의 발을 닦으니 향유 냄새가 집에 가득하더라.

          관점(觀點, view of point)이란 "볼 관(觀)" "점찍을 점(點)"이란 훈으로 "사물(事物)을 관찰(觀察)하거나 고찰(考察)할 때, 그것을 보거나 생각하는 각도." 로 "견지(見地)" 라고도 합니다.


          믿음의 사람들은 믿음의 관점을 항상 유지해야 합니다.
          예수님의 제자들마저 세속적인 관점으로 여자의 행동을 보았기에 기념될 만한 일을 남길 수 없었다고 하겠습니다.
          오늘 이 하루가 주님께서 기념 할 만한 일을 남길 수 있는 그 무엇인가를 생각해 봅니다.

          믿음이란 하나님의 관점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것을 말합니다.
          예를 들면 가나안 땅을 40일 동안 정탐했던 12명의 정탐꾼들은 모두 똑같은 장소를 보고 돌아왔습니다.
          그런데 말하는 방식이 달랐습니다.
          왜 말이 달랐을까요?
          관점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믿음은 언어와 행동을 결정합니다.
          우리가 그냥 행동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믿음에 따라 행동이 결정됩니다.
          믿음이 있는 사람과 믿음이 없는 사람은 행동의 차이가 있습니다.
          믿음이 우리의 행동을 결정하는데, 믿음이 행동을 결정하기 이전에 우리의 생각을 바꾸어놓습니다. 믿음은 우리의 생각을 바꿉니다. 생각이 변하면, 행동이 변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에 따라 살면 생각이 자연스레 바뀌고, 생각이 바뀜에 따라 행동의 변화가 일어나게 됩니다.
          그런 관점에서 보면, 믿음은 우리 삶의 동력(動力)입니다. 우리의 삶을 움직여나가는 엔진과 같은 역할을 합니다. 그러므로 믿음은 우리의 삶 전체를 바꾸어놓을 수밖에 없습니다.

          믿음이 있느냐 없느냐에 따라 행동의 차이가 현격하게 나타납니다. 믿음이 있다고 해도 강한 믿음과 약한 믿음에 따라 행동의 차이가 나타납니다.

          로마서 14장 1절과 15장 1절에 보면, 믿음이 연약한 자와 믿음이 강한 자에 관한 이야기가 기록되어있습니다. 로마 교회에서도 재물로 올려진 고기를 먹어도 되는가, 먹으면 안 되는가가 문제시되었던 것 같습니다. 바울은 재물로 올려진 고기를 먹느냐 먹지 않느냐의 문제보다 믿음으로 행하는가 그렇지 않은가에 초점을 맞춰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바울은 “믿음을 따라 하지 아니하는 것은 다 죄니라”라고 말했습니다. 행동의 핵심 요인이 믿음으로 행하였는가, 그렇지 않은가가 중요하다는 의미입니다. 행동의 근원적 요인이 무엇인가에 따라 행동의 모든 것이 결정된다는 의미입니다. 만약 믿음으로 한 행동이라면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지만, 믿음에 따라 한 행동이 아니라면 죄가 될 수 있다는 의미입니다.

          신자는 믿음을 따라 행해야 합니다. 일어난 상황 자체보다 자신이 믿음에 따라 행동하고 있는가를 점검해야 합니다.
          그러면 믿음을 따라 행하는 것은 어떤 것입니까? 행동의 동기가 믿음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무엇이든 뿌리가 중요합니다. 뿌리에서 모든 것이 나옵니다. 그러므로 뿌리가 결정적입니다. 뿌리가 살아있으면, 모든 것이 살아있습니다.

          우리 신앙의 출발지점에 믿음이 있는가 없는가에 따라 모든 것이 달라집니다.
          스타트 라인(start line)에 무엇이 있는가가 중요합니다.
          본문에서 바울이 지적하는 것은 어떤 일에 믿음으로 출발했는가, 아니면 불신앙으로 시작했는가를 중요하게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믿음의 강화(强化)는 뿌리의 변화를 말하는 것입니다. 믿음이 강하다는 것은 뿌리가 깊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뿌리가 깊으면, 웬만한 외적인 충격에도 흔들리지 않습니다. 믿음이 깊으면, 삶 속에서 요동하지 않습니다.
          믿음을 가진 사람과 믿음이 없는 사람은 동일한 상황에 마주쳐도 전혀 다른 반응을 보입니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날까요? 그것은 관점의 차이 때문입니다.

          믿음은 우리의 생각을 바꿉니다. 바뀐 생각은 우리의 행동을 바꿉니다. 그리고 믿음은 우리의 관점을 바꿉니다. 중요한 것은 관점의 변화입니다.

          삶의 변화는 관점의 변화로부터 시작됩니다. 자신이 아무리 노력해도 관점이 변하지 않으면, 삶이 바뀌지 않습니다. 결국 믿음의 강화를 통해 우리의 삶에 일어나는 것은 사물과 사건을 바라보는 관점의 변화입니다.

          똑같은 사물과 상황이지만, 우리가 믿음으로 접근하면, 전혀 다르게 바라보게 됩니다. 왜 그렇습니까? 관점이 변했기 때문입니다. 사물과 상황을 보는 눈이 변했기 때문입니다. 다르게 이야기하면,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view), 시각이 달라졌기 때문입니다.

          남다른 인생을 살아가는 사람은 무엇인가 다른 관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남들이 보는 관점과 다른 관점을 가지고 접근하면, 다른 인생을 살게 됩니다.
          남다른 인생을 살아가는 사람의 특징은 바라보는 관점이 다르다는 것입니다. 그 관점은 믿음으로 인하여 일어나는 현상입니다.

          이스라엘의 장수(將帥)들과 다윗의 차이가 무엇입니까? 흔히 믿음이라고 이야기하지만, 더 깊이 들어가 보면, 관점의 차이입니다. 골리앗을 바라보는 다윗의 관점과 이스라엘 장수들의 관점이 전혀 달랐습니다.

          가나안 정탐꾼 열두 명이 똑같이 가나안에 갔다 왔지만, 전혀 다른 반응을 보였습니다. 그 이유는 관점이 달랐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일반적으로 믿음의 차이라고 말하지만, 정확하게 말하면 믿음이 만들어낸 관점의 차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생각을 많이 하면 좋은 결론을 얻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하지만, 관점이 잘못되어있는 사람은 생각을 아무리 많이 해도 좋은 결론이 나오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생각을 많이 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바라보는 관점입니다. 관점이 다르면, 똑같은 곳에 서있어도 전혀 다르게 봅니다. 똑같은 곳에 갔다 온 두 사람의 이야기가 전혀 다릅니다. 똑같은 사물과 사건이 있는데, 사람들마다 전혀 다르게 이야기하는 이유는 관점의 차이 때문입니다.
          어떤 사람은 보았는데, 어떤 사람은 보지 못했습니다. 전혀 다른 관점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같이 보았지만, 다른 관점으로 본 것입니다.

          쥐가 런던에 갔다 와서 이야기합니다.
          그런데 이야기의 주제는 고양이 뿐입니다.
          쥐는 “런던에 갔는데 런던에도 지하철에 고양이가 많더라.”라고 이야기합니다.
          쥐의 관심사는 고양이였기 때문입니다.

          믿음은 우리의 눈을 열어줍니다.
          여러분의 눈이 활짝 열리기를 바랍니다.
          여러분의 관점에 변화가 일어나기를 바랍니다.
          관점의 변화가 일어나야 실제적인 믿음의 삶이 시작됩니다. 이전에 보지 못했던 것들을 보기 시작합니다. 사물과 사건이 다르게 보이기 시작하면, 그때 비로소 믿음의 삶이 시작됩니다.
          전에 보이던 것과 다르게 보입니다. 예전에는 돈이 돈으로밖에 보이지 않았는데, 믿음의 관점으로 보면 돈이 돈으로 보이지 않고, 다른 것으로 보일 수 있습니다.
          직장이 생존의 현장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 다른 면으로 보이기 시작합니다. 이전에는 돈을 위해 직장에 다녔는데, 이제는 직장이 다른 의미로 다가옵니다.
          고통이 예전에는 고통에 불과했지만, 다른 관점으로 해석되기 시작합니다. 겉으로 드러난 것이 아니라, 이면을 보는 눈이 생겼기 때문입니다.

          믿음이 무엇입니까? 관점의 변화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관점의 변화를 일으키는 것이 믿음입니다. 그러면 믿음이 어떻게 관점을 변화시킵니까?
          우리가 믿음을 크게 두 가지로 정의할 수 있습니다. 믿음이란 우리의 삶에 하나님을 모셔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관점의 변화가 일어납니다.
          이전에는 나 홀로 살아온 인생이지만, 믿음으로 하나님의 존재를 우리의 삶에 모셔오면, 이제는 나 홀로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함께하는 삶입니다. 나의 능력이 아니라, 나의 능력을 넘어선, 하나님의 역사(役事)를 바라보는 관점으로 사물을 바라보게 됩니다.
          우리의 삶의 모든 것과 모든 생각 속에 하나님이 찾아오십니다. 하나님을 계산하며 사건과 사물을 바라보게 됩니다.

          하나님을 플러스하면, 관점이 완전히 달라집니다. 세상의 사람들이 보는 관점과 달라질 수밖에 없습니다. 교회에 다니지만 관점이 변하지 않았다면, 믿음이 작동되지 않을 가능성이 많습니다.
          믿음의 훈련은 다른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안목으로 바라보는 훈련입니다. 모든 것을 하나님의 관점으로 바라보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내 삶의 사건 속에 찾아오시기 때문에 하나님이 바라보시는 시각으로 만물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리처드 도킨스(Richard Dawkins)는 생물학자인데, 무신론자입니다.
          이 사람은 하나님이 안중에 없습니다.
          하나님을 부인하는 일에 앞장서는 사람입니다. 그에게 하나님은 철저히 배제되어있는 존재로, 그가 모든 사고와 지식의 세계를 끌어갑니다. 그는 ‘하나님이 없다’라고 확신하며 이 세상 모든 사람들에게 하나님이 없음을 가르치는 일에 있어 전도사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사람이 모든 사물과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 가운데에는 하나님이 없습니다. 그는 하나님이 없는 것에서부터 모든 사고와 논리의 체계를 끌어갑니다.

          이 사람이 쓴 <이기적 유전자(The Selfish Gene)>에 보면, 그는 인간을 생존을 목적으로 하는 기계로 여깁니다. 그래서 그는 “성공한 사람들은 성공할 만한 유전자를 가지고 있는 잔인한 이기주의자이다.”라고 주장합니다.

          무신론적 유물론자들은 사람과 사물을 이상한 관점으로 봅니다. 하나님이 플러스되지 않은 사람들에게는 신의 섭리 같은 이야기가 끼어들 수 없습니다. 이들은 모든 것을 우연이라고 생각합니다. 인간을 기계와 동물과 같은 존재로 전락시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믿음으로 살아가는 우리는 우리의 삶에 누가 절대적으로 존재한다는 것을 믿습니까? 하나님이십니다. 우리는 모든 것이 하나님의 존재와 능력 아래 움직이고 있다는 사실을 믿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삶에 일어나는 모든 일이 하나님의 섭리 안에 있음을 믿습니다.

          참새가 떨어지는 것도 하나님의 주권 속에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주 만물을 통치하시고, 섭리하실 뿐 아니라, 개인의 삶에도 아주 섬세하게 역사하시는 분이십니다.

          왜 우리가 작은 일에도 감사합니까? 아무리 작은 사건이라도 하나님의 섭리와 손길 속에 이루어진 일인 줄 믿습니다. 작은 일들 속에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존재와 역사를 우리가 믿기 때문에 아주 작은 일들 속에서도 감사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어디에서든 하나님의 일하시는 손길을 봅니다.

          요셉이 그러했습니다. 요셉은 자신의 삶에 일어난 크고 작은 일들 속에 하나님의 손길이 없었던 적이 없다는 하나님의 절대적 섭리를 믿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삶 속에서 상처 입지 않고, 넓은 가슴으로 형들을 받아들일 수 있었습니다.

          어디에서든 하나님의 손길이 플러스된 것을 보는 사람들에게는 새로운 관점이 생깁니다. 여러분이 믿음으로 하나님의 존재를 확신한다면, 역사의 만물이 하나님의 통치 아래에 있음을 믿는다면, 우리의 삶에 일어나는 크고 작은 모든 일들이 하나님의 섬세한 손길 안에 있음을 믿는다면, 우리에게 새로운 관점이 열린 것입니다.

          모든 것은 우연히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일하고 계심을 우리가 알고, 그런 관점으로 세상의 만물을 바라볼 때, 우리는 낙심할 만한 사건 속에서도 낙심하지 않습니다. 새로운 관점이 열렸기 때문입니다.

          비록 지금은 고통스러운 일이 일어나고 있지만, 하나님이 섭리하시는 손길 속에서 이 일이 다루어지고 있는 과정을 보며 하나님의 백성이 낙심하지 않는 이유는 새로운 관점이 열렸기 때문입니다.

          믿음이라는 말을 풀어서 이야기하면, 새로운 눈이 열린 것입니다. 여러분의 눈이 새롭게 열리게 되기를 바랍니다. 믿음은 세상 사람들과 전혀 다르게 보는 것입니다.

          요셉을 비롯한 믿음의 사람들은 새로운 관점(view), 전혀 다른 관점으로 사물과 사건을 보는 눈이 열렸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현실에 빠져들지 않고, 승리할 수 있었습니다.

          여러분이 기도하실 때에 “눈을 활짝 열어주시옵소서. 새로운 관점을 주시옵소서.”라고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사도 바울은 “범사에 감사하라”라고 말했습니다(살전 5:18). 범사는 모든 것(everything)을 말합니다. 좋은 것, 힘든 것, 어려운 것 등 모든 것을 말합니다.

          여러분 중에 힘든 일을 겪고 있는 분이 있을 것입니다. 그것도 바울이 말한 범사에 포함됩니다.
          바울이 “범사에 감사하라”라고 말한 이유가 무엇일까요? 우리는 일이 잘 되고 있을 때에 감사하다고 말하지만, 극심한 고난과 어려움 가운데에 있는 것도 바울이 말한 ‘범사’에 포함되는 이유는 모든 것이 하나님의 손길 속에 다루어지고 있음을 바라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삶에 일어나는 어떤 일도 감사의 대상일 뿐입니다.

          우리의 삶과 삶 속에 일어나는 사건 가운데 하나님을 늘 모시고 살기 때문에 우리는 근본적으로 다른 길을 걷고 있고, 사물을 바라보는 우리의 관점이 근본적으로 변화되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플러스 알파 하나님을 바라보는 관점을 가진 믿음의 삶을 살아가시기를 축원합니다. 하나님의 관점으로 세상을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삶이 달라집니다.
          감사가 넘쳐흐르고, 찬양이 흘러넘치게 된다면, 일이 변화되었거나 상황이 달라졌기 때문이 아니라, 관점이 달라졌기 때문인 줄 믿습니다. 관점이 변하면 기적이 일어나게 될 줄 믿습니다. 하나님은 관점이 변화된 사람을 사용하십니다.

          믿음은 보이지 않는 것을 보이는 것처럼 여기는 것입니다. 이전에는 보이지 않던 세계가 보이는 것이 믿음입니다.
          관점의 변화입니다. 이전에는 당면한 현재만 보였는데, 이제는 눈이 열려서 다가오지 않은 미래까지 보이는 것이 믿음입니다. 여러분에게 그 은혜가 있기를 바랍니다.
          눈이 열려서 지금만 보이는 것이 아니라, 미래가 보입니다. 장래의 일이 보입니다. 바울이 말한 믿음의 이야기는 바로 이것입니다. 장래의 소망이 현실에 닥친 상황보다 더 강력하게 보이는 것입니다.

          우리는 결론을 알고 있습니다. 결론은 승리하는 것입니다.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룰 것이라는 것을 우리가 말씀을 들어 알지만, 마음으로 믿어지지 않을 때, 우리는 낙심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라는 말씀을 머리로는 알지만, 현실적으로 파고들지 않으니까 그 말씀을 붙들고도 힘이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새로운 관점이 열리면, 그 말씀이 지식으로만 믿어지는 것이 아니라, 현실에 와닿습니다. 미래형이 아니라, 현재형으로 와닿습니다. 지금 일어난 상황보다 더 구체적으로 와닿아 보이지 않는 것이 보이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미래가 보이면, 현재를 보는 관점도 달라집니다. 그러면 다르게 살게 됩니다. 이전에는 실패한 것만 보였는데, 이제는 가능성이 보입니다. 이전에는 부정적인 관점이 자신을 많이 주장했는데, 이제는 긍정적인 관점이 열렸습니다. 절망보다는 희망이 더 우세한 것을 경험했다면, 새로운 관점이 열린 것입니다.
          이전에는 단면만 보았습니다. 수평에서 일직선으로 사물을 바라보았습니다. 제가 단상에서 여러분을 바라보는 것과 여러분이 여러분의 옆을 바라보는 것은 완전히 다릅니다. 단상에 있으면, 다 보입니다. 놀랍게도 굉장히 많은 것이 보입니다. 그런데 은혜홀 3층에서 은혜홀 2층을 바라보는 것은 또 다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종합적으로 보는 것과 수평에서 일직선으로 사물을 보는 것은 다릅니다.
          사물과 사건을 바라볼 때 다양한 앵글(angle)로 보는 눈이 생기는 것, 믿음이 바로 그런 것입니다. 90°만 보는 사람이 있고, 180°를 보는 사람이 있고, 360°를 보는 사람이 있습니다. 보는 앵글에 따라 전혀 다른 인생을 살게 됩니다.

          우리의 삶에 어려운 일이 닥쳤을 때에도 마찬가지입니다. 한 부분만 보면, 헤어나기가 힘듭니다. 어려운 문제 가운데서 헤어나지 못하고, 절망 속에 탄식하는 사람들은 시각이 너무 좁기 때문입니다. 단면만 보기 때문입니다. 지금 일어난 상황 외에는 전혀 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믿음의 눈이 열린다는 것은 보이지 않는 것을 보이는 것처럼 보는 것인데, 드러난 현상 뿐만 아니라, 이면도 보고, 90°, 180°만 보는 것이 아니라, 360°를 다 보는 것입니다. 전체를 보는, 종합적인 눈을 가지게 되는 것입니다.

          전체적으로 바라보면, 모든 사물을 해석하는 능력이 달라집니다. 일어난 어려움을 두고 자신의 문제를 자기의 눈으로 바라보면, 문제를 해석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믿음의 사람들이 하나님의 관점에서 바라보면, 주변 사람들이 볼 수 없는 것을 보게 됩니다.

          가장 안타까운 삶을 사는 사람들은 삶의 앵글이 좁은 사람들입니다. 모든 것을 원 웨이(one way)로, 막힌 벽으로 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어린 아이들이 그러합니다. 바닷가에서 자기 무릎 정도 높이의 파도에 부딪쳐 넘어졌는데, 죽는다고 야단입니다. 일어서면 되는데, 죽는다고 야단입니다. 어른들이 보기에는 우습기만 합니다.
          그런데 어른인데도 영적으로 미성숙하면,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있습니다. 절대 죽지 않는데, 절대 망하지 않는데, 망하는 줄 생각합니다. 그것밖에 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물에 머리를 쥐어박으니 물밖에 보이지 않습니다. 고개를 들면, 온 세상이 다 보일 텐데…. 앵글이 좁기 때문입니다. 드러난 표면만 보고, 이면을 보는 눈이 없습니다. 보이는 것이 없다고, 죽겠다고 야단입니다.

          나사로 사건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나사로의 가족들은 나사로가 죽는다고 야단이었지만, 주님은 느긋하셨습니다. 성경을 보면, 하나님은 늘 느긋하십니다. 나사로가 죽지 않는다는 것을 아시기 때문입니다. 현재와 미래를 다 아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미래에 무슨 일이 다가올지 종합적으로 360°, 이면까지 다 보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하나님의 관점을 가지면, 느긋해질 수 있습니다.

          조급함은 불신앙입니다. 영적으로 병들면, 시야가 자꾸 좁아집니다. 영적으로 병들면, 멀리보지 못합니다. 앵글이 좁아집니다. 결국 당장 일어난 일에 확대경을 대고 죽는다고 합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확대경을 던져버려야 합니다. 믿음의 날개를 펴고 하나님과 함께 날아올라 다른 세계를 보는 은혜가 열려야 합니다.
          우리는 죽겠다고 야단인데, 하나님은 “이것은 너를 죽이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이것이 너에게 얼마나 축복이 되는지 아느냐? 눈을 떠봐라. 일어서봐라. 나와 함께 날아올라보자.”라고 말씀하십니다.

          요셉은 360° 앵글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자기 앞에 일어난 일에서 하나님이 일하시는 손길을 보았습니다. 그는 당황하지 않고, 자신이 해야 할 일을 성실히 감당했습니다. 자신이 해야 할 일을 성실하게, 꾸준히 할 수 있는 것, 그것이 믿음입니다.
          요셉의 주변에서 야단법석이 일어났는데도 요셉은 어떻게 조금도 요동하지 않고 자신이 해야 할 일을 성실하고 꾸준하게 할 수 있었습니까? 눈이 열려있었기 때문입니다. 관점의 변화가 일어났기 때문입니다.
          요셉은 주변에서 사람들이 어떻게 하는가에 관심이 없었습니다. 요셉은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보는 눈이 열려있었기 때문에 느긋했습니다.
          요셉은 감옥에 있을 때에도 느긋했습니다. 느긋하신 하나님과 느긋하게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하나님의 뜻을 이루실 것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믿음은 숨어있는 그림을 찾는 능력이 생기는 것입니다. 눈이 열린다는 것은 대단한 일입니다. 믿음은 눈이 열리는 것입니다. 관점의 변화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이전에는 돈 밖에 보이지 않았는데, 믿음의 눈이 열리면, 관점이 변하게 되면, 돈만 보는 것이 아닙니다. 눈이 열리면, 돈의 액수보다 가치를 보게 됩니다. 이것은 완전히 다른 세계입니다. 이런 눈이 열리면, 돈 때문에 눈이 뒤집어지는 일은 일어나지 않습니다.

          눈이 열린다는 것은 관점의 변화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관점의 변화가 일어난다는 것은 분별력이 생겼다는 것입니다. 분별력이 생겼다는 것은 앵글이 굉장히 넓다는 것입니다.
          분별력이 있는 사람은 돈에 휘둘리지 않습니다. 돈의 가치를 정확하게 판단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가치에 따라 움직입니다. 돈의 액수 때문에 흔들리지 않습니다. 돈의 가치에 따라 어떻게 행동할 것인지 판단력이 생기기 때문입니다.
          눈앞의 이익에 현혹되지 않고, 멀리 바라보며 절대가치를 소중히 여기며 살아가는 사람은 사기 당할 이유가 없습니다.
          눈이 밝아진다는 것은 분별력과 판단력이 생긴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렇게 되면 어리석은 투자를 하지 않습니다. 가치를 발견한 사람은 돈에 속지 않습니다.

          세상에는 거짓된 이야기들이 많이 떠돌아다닙니다. 자칫 잘못하면 덫에 빠지게 됩니다. 신자들도 자칫 잘못하면 세상이 만들어놓은 거짓된 문화 안에서 수없이 많은 덫에 빠져 한순간에 모든 것을 날려버릴 수 있습니다.
          눈에 보이는 것을 중요시하는 물질주의 속에서 물질주의적 관점을 가지고 살면, 물질의 덫에 빠지게 됩니다.
          그러나 믿음으로 새로운 관점을 갖고 있는 사람들은 가치를 추구하기 때문에 세상의 거짓에 빠지지 않는 판단력이 생깁니다.

          그러면 믿음을 따라 행할 때, 우리의 삶에 어떤 일이 일어날까요?

          첫째, 적극적인 삶을 살게 됩니다.

          믿음의 사람들에게는 거칠 것이 없습니다. 믿음이 없으면 행동의 제약이 많고, 소극적인 삶을 살게 됩니다. 그러나 믿음의 삶에는 추진력이 생깁니다.
          이전에는 부정적이었던 사람들에게 믿음이 생기면 긍정적인 사람이 됩니다. 긍정적인 사람이 되면, 삶에 추진력이 생기고, 삶이 적극적이고, 활달하고, 진보적입니다.

          믿음은 지금까지 가졌던 관점을 해체해버립니다. 이전과는 다른 생각을 하게 되고, 고정관념이 깨어지는 역사가 일어납니다.
          우리에게는 많은 고정관념이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기 전에 있던, 이 세상이 만들어준 신화에 감염되어 많은 고정관념이 우리를 둘러싸고 있습니다. 편견의 두꺼운 벽이 우리를 두르고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은 한 번 만들어진 고정관념의 집에서 살아갑니다. 이것을 ‘정신적 감옥’이라고 말합니다.
          사고의 틀이 잡히면, 아주 무섭습니다. 믿음의 세계에 들어왔는데도 노력하지 않으면 옛날과 똑같이 살아갑니다. 그것이 내가 이전에 가졌던 고정관념 때문입니다.

          어떤 틀로 만들어졌는가에 따라 모든 것이 달라집니다. 국수는 국수틀에서 나옵니다. 국수틀의 모양에 따라 국수의 모양과 굵기가 결정됩니다. 틀에 따라 모든 것이 결정됩니다.
          따라서 틀을 먼저 바꾸어야 합니다. 말씀을 묵상하고, 기도하는 가운데 믿음을 강화하면, 어느 순간 관점이 변하게 됩니다. 자신도 모르게 긍정적 관점, 적극적 관점을 갖게 됩니다.
          그러므로 믿음의 삶은 이전의 고정관념의 틀을 깨뜨리는 삶입니다. 고정관념을 깨야 삶이 달라집니다.

          우리 안에는 많은 고정관념이 있습니다. 사람들이 “안 된다”라고 말할 때, 믿음의 사람들은 무조건 동의해서는 안 됩니다. 세상 사람들이 안 된다고 말하는 그 지점에서 “왜 안 되지?”라고 질문해보세요.
          많은 사람들이 자신이 만든 편견의 감옥 안에 갇혀있습니다. 기도하는 사람들 중에도 ‘기도하긴 하지만, 될까?’라는 생각을 갖고 있는 사람이 있습니다.
          다른 사람이 안 된다고 말한다고 안 되는 것일까요? 모두 안 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해볼 만하지 않겠습니까. 사람들이 안 된다고 말하기 때문에 안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안 된다고 말하기 때문에 안 되는 것입니다.

          믿음으로 생각한다는 것은 무슨 의미입니까? ‘그래, 나는 안 된다. 그러나 내가 못한다고 해서 하나님이 못하시는 것은 아니잖아. 나는 안 되지만, 하나님은 하실 수 있다.’라고 생각하는 것이 믿음입니다. 이것이 믿음의 출발점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부정적으로 생각하고 절망하고 결론내린 지점에서 하나님의 백성들은 이상하게도 호기심이 치밀어 올라야 합니다. 이것이 정상입니다.
          기도하는 가운데 자신이 그동안 결론 맺었던 것을 재해석하시고, 하나님의 관점으로 바라보시고, 하나님께 물어 답을 얻는 역사가 있기를 바랍니다.

          하나님 안에서 믿음의 눈이 열린 사람은 긍정적인 사람이 됩니다. 움츠려있었다면, 다시 시도해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전에는 길을 돌아갔다면, 이제는 정면 승부하시기 바랍니다. 괜히 돌지 마세요. 벽이 앞에 가로막고 있어도 벽 때문에 돌아가지 말고, 벽을 뚫고 가시기 바랍니다. 벽을 뚫으면, 그곳이 출입구가 됩니다.

          믿음을 가진 사람들은 어려운 문제에 대해 의외로 쉬운 답을 만들어냅니다. 어려운 것이 어떤 면에서는 더 쉬울 수 있습니다.
          믿음의 사람들과 얘기하면 시원시원합니다. 말이 복잡하게 꼬이지 않습니다. 굉장히 간단하고, 단순합니다.
          그런데 무지해서 그런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사람으로 믿음의 삶을 살아오며 자신의 내면에서 모든 사건과 사물을 바라보는 관점에 대한 결론을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믿음의 삶을 살아가는 사람은 앞으로 나아가는 것을 좋아합니다. 과거로 돌아가 추억의 오솔길을 거닐며 훌쩍거리지 않습니다. 믿음의 삶은 적극적입니다. 그럴 수밖에 없습니다.

          여러분 안에 있는 부정적인 생각들이 떠나는 역사가 있기를 바랍니다. 복잡하게 생각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관점으로 사물을 바라보면, 생각이 굉장히 단순해지는 역사가 일어납니다. 그때 추진력이 생기게 됩니다. 하나님은 그런 사람을 사용하십니다.

          둘째, 삶이 풍성해집니다.

          로마서 14장 2절에 보면, “어떤 사람은 모든 것을 먹을 만한 믿음이 있고 믿음이 연약한 자는 채소만 먹느니라”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재미있는 표현입니다.
          똑같은 음식을 두고서도 믿음에 따라 다른 반응을 보입니다. 믿음이 있는 사람은 “모든 것은 먹을 만하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믿음이 연약하여 스스로 거리끼는 사람은 거리끼는 상태로 먹는 것은 죄를 짓는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자신의 믿음이 연약하기 때문에 속되다고 여기는 것은 어쩔 수 없습니다. 채소만 먹어야 합니다. 그것은 믿음의 문제이지, 음식이 문제인 것은 아닙니다.

          로마서 14장 20절에 보면, “음식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업을 무너지게 하지 말라 만물이 다 깨끗하되 거리낌으로 먹는 사람에게는 악한 것이라”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이방인의 제단에 제물로 바쳐진 고기를 먹는 문제로 이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거리끼면서 먹는 것은 죄입니다. 그런데 믿음으로 먹으면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디모데전서 4장 4절에 보면, “하나님께서 지으신 모든 것이 선하매 감사함으로 받으면 버릴 것이 없나니”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믿음이 연약하면, 많은 제약을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믿음의 세계 안으로 들어가면, 모든 것을 재해석하게 됩니다. 모든 것은 하나님이 지으신 것이고, 그 어떤 것도 금할 이유가 없습니다. 다만 감사함으로 받아 누리기만 하면 됩니다.

          율법주의적 사고에서 벗어나지 못한 사람들은 먹는 문제로 인하여 깨끗하여지고, 먹는 문제로 인하여 더럽혀진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우리가 더러워지고 깨끗해지는 것은 먹는 것에 좌우되는 것이 아니라, 진리로 거룩하여진다고 했습니다. 디모데전서 4장 5절에 보면,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로 거룩하여짐이라”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먹는 것으로 인해 우리의 몸이 더러워지는 것은 아닙니다.

          율법주의가 유대인들에게 얼마나 강하게 뿌리내리고 있는지, 유대인들은 모든 일에 까다롭게 접근하고, 행동에 장애를 일으켰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하나님이 주신 선한 것들을 마음대로 누리지 못하고, 행동의 제약을 받으며, 날마다 넘어졌습니다.
          바울은 이렇게 날마다 넘어지는 연약한 자들에 대해 지적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믿음이 연약하면, 모든 것에 눌리고, 제약을 많이 받고, 행동이 위축됩니다. 우리가 교회에 나왔을 때에도 믿음이 연약한 단계에 있을 때에는 애가 좀 아파도 ‘내가 교회에 다녀서 그런가.’라고 생각합니다.
          옛날 우리나라는 미신을 많이 섬겼던 나라입니다. 지금도 그런 모습이 많습니다만, 미신을 많이 생각하는 불신자들을 보면, 대단히 민감합니다. 그들은 수없이 많은 미신들과 우상들 때문에 마음대로 행동하지 못합니다. 점을 얼마나 많이 치는지 모릅니다.
          알고 보면, 별 것 아닌데, 사람들의 마음에 두려움이 있기 때문입니다. 믿음이 약하기 때문에, 믿음이 없기 때문에 어떤 것에도 두려움을 느낍니다.

          하나님이 지으신 것은 다 선합니다. 창세기에 보면, 하나님께서 하나씩 만드실 때마다 “보시기에 좋았더라”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마가복음 7장에 보면, 예수님께서는 “무엇이든지 밖에서 사람에게로 들어가는 것은 능히 사람을 더럽게 하지 못하되 사람 안에서 나오는 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니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막 7:15~16).
          베드로 역시 율법이 정한 속된 것에 대한 구별의식이 강하여 하나님의 성령이 말씀하시는데도 쩔쩔매면서 거부했습니다. 베드로는 성령의 은혜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고정관념에서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잘못된 선입견이 얼마나 강력한지를 우리에게 보여줍니다.

          문제는 먹고 사용하고 다루는 사람의 태도에 있습니다. 돈도 마찬가지입니다. ‘더러운 돈’이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는데, 돈이 왜 더럽습니까? 자신의 손이 더러운 것입니다. 더러운 사람이 만졌을 뿐입니다.
          “오늘 비가 오니 느낌이 좋지 않다.”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렇게 말하여 다른 사람의 기분까지 상하게 합니다. 비가 오는 것과 기분이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우리가 행동하는 기준은 믿음, 단 하나뿐입니다. 믿음으로 행동해야 합니다. 느낌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일어난 상황도 중요하지 않습니다.
          믿음으로 받아들이면, 걸릴 것이 없습니다. 우리의 삶에 주어진 모든 것을 믿음으로 바라보면 누릴 수 있습니다. 눌릴 이유가 없습니다.

          제가 아는 분 중에 일본에 자주 다니시는 분이 계십니다. 일본에만 가면 무언가에 눌린다고 합니다. 그만큼 일본에는 귀신이 많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단단히 무장해서 가는데, 돌아올 때에는 늘 아파서 돌아옵니다. 그리고 일본에 가면 우울하다고 합니다. ‘일본에 귀신이 많으니 귀신의 역사인가보다’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일본에 가는 모든 사람 그런 경험을 하게 될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그렇게 생각하고 가는 사람은 일본에 가기 전부터 이미 눌려있습니다.
          모든 것을 연관 지어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만들어놓은 생각의 덫에 갇혀있기 때문입니다. 알고 보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아무것도 아닌데, 믿음이 연약하여 거리낌을 느끼고, 자기 스스로 족쇄를 채우고 감옥에 갇혀있는 분들이 있다면, 자유하시기 바랍니다.

          자신이 만들어놓은 고정관념, 사람들이 만들어놓은 문화와 이 세상의 거짓된 속삭임에 감염되어 스스로 자신의 삶과 행동을 제약할 때, 얼마나 많은 것들을 잃게 되는지 모릅니다.
          믿음이 클수록 받아들이는 용량이 커집니다. 용량이 클수록 자유가 옵니다. 자유가 주어지면, 그만큼 활동범위가 넓어지고, 삶은 풍성해집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믿음으로 살아가는 사람은 이 세상의 풍속이나 문화에 매여 살아갈 이유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율법주의로부터 자유함을 얻고, 복음 안에서 풍요로운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우리에게 은혜를 주셨습니다.

          믿음으로 살아가면, 삶은 풍성해집니다. 믿음으로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그때 매이는 것이 없어집니다. 더 이상 종의 삶을 살아갈 이유가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신앙생활을 하는 분들은 과거 예수님을 믿지 않았을 때, 미신을 섬겼을 때, 수없이 많은 것들에 매였던 삶을 생각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 우리는 자유롭습니다. 우리를 얽어맬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때 우리의 삶이 풍요로워집니다.

          그러므로 매사에 까다롭게 살지 마시기 바랍니다. 사소한 것까지 따지는 사람은 인생이 피곤해집니다. 자신이 정해놓은 룰에 자신이 갇혀 살지 마시기 바랍니다. 세상이 만든 신화에 빠져 손해 보는 삶을 살지 마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스케일이 크신 하나님의 품 안에서 살아가는 백성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좀 더 대범하게 살아가기를 원하십니다.
          무엇을 하느냐, 하지 않느냐, 할 것인가, 하지 않을 것인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행하고 있는가가 중요합니다.
          깨끗하게 살려고 애쓰는 것도 좋지만, 하나님을 위해 보다 적극적이고, 창의적인 삶을 살아가는 은혜가 있기를 바랍니다.

          달란트 비유에 보면, 한 달란트를 받은 사람은 ‘괜히 사업하다가 사고 치면 어떡하나, 그러다가 주인 돈까지 다 빼앗기는 건 아닌가’하는 생각으로 땅에 묻어뒀습니다. 그래서 그는 소극적인 삶을 살았습니다.
          그러나 두 달란트, 다섯 달란트를 받은 사람들은 장사를 하다가 실수를 하고, 손해를 보고, 주인의 돈을 잃어버리더라도 적극적으로 살았습니다.
          그러므로 얼마나 남겼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것으로 무엇을 했는가라는 적극적인 삶이 중요합니다. 얼마나 남겼는가는 그 다음의 문제입니다.
          마태복음 25장의 달란트 비유는 삶의 태도를 강조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믿음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은 삶이 적극적이어야 하고, 우리를 얽어매는 모든 구습으로부터 자유로워야 합니다. 그때 우리의 삶에 풍요가 찾아오게 됩니다. 그것은 우리의 믿음의 눈이 열릴 때에 일어나는 현상입니다.

          믿음의 눈이 열려 세상을 다르게 보고 살아가다 보면, 의외의 곳에서 기적을 체험하게 됩니다. 의외의 상황에서 하나님의 크신 역사를 맛보게 됩니다. 믿음으로 과감하게 도전하시고, 움츠러들지 마시기 바랍니다.
          나이 때문에 움츠러드는 분이 계십니다.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는 말을 많이 합니다. 나이로 인해 움츠러들지 마세요. 돈 때문에 움츠러드는 분이 계십니까? 왜 돈 때문에 움츠러듭니까? 잘 나가는 친구 때문에 움츠러드는 분이 계십니까? 그럴 만한 이유가 없습니다. 실패로 인해 움츠러들지 마세요.

          중요한 것은 믿음입니다. 믿음이 우리의 생각을 바꾸고, 관점을 바꾸면, 우리의 행동이 달라집니다. 여러분의 삶에 하나님을 플러스하시기 바랍니다.
          관점이 달라지는 것, 그것이 믿음의 삶입니다. 보이지 않는 것들이 믿음에 의해 보이는 변화가 여러분에게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보이지 않는 것을 보게 되는 눈이 열리기만 한다면, 보이는 것만 추구하는 사람과는 게임이 되지 않습니다. 이미 승리한 것입니다. 새로운 세계가 열립니다.

          이전에 겁을 잔뜩 먹고, 엄두내지 못했던 것들이 있다면, 그것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여리고 성이 그러했습니다. 여리고는 거대한 철옹성과 같은, 견고한 성이었지만, 손 하나 대지 않고 무너졌습니다. 믿음의 삶이 그런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만 믿고 도니까 손 하나 대지 않고 무너졌습니다.
          오늘날 우리의 삶에도 그런 일들이 굉장히 많이 일어납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거대한 성과 같고, 꼼짝하지 않을 것 같은데, 믿음으로 행동하면, 손 하나 댈 필요 없이 해결되는 역사가 일어날 줄 믿습니다. 그런 일이 오늘날도 일어나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의 믿음의 삶이 얼마나 신나는 삶인지 알 수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세상 사람들과는 전혀 다르게 살아가는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바라보고, 평가하는 대로 함께 춤추지 않기를 바랍니다. 기도하는 가운데 믿음의 눈이 열려서 전혀 다른 관점, 새로운 관점이 활짝 열리게 되기를 축원합니다.


          성경은 믿음의 관점으로 세상을 바라보라고 합니다.
          성경은 소망의 관점으로 세상을 바라보라고 합니다.
          성경은 사랑의 관점으로 세상을 바라보다고 합니다.
          절망적인 세상에서 소망이 보일 것입니다.
          믿음이 찾아낼 것입니다.
          소망이 붙잡을 것입니다.
          사랑이 이루어 낼 것입니다.



          마리아가 옥합을 깨트린 사건은 4복음서의 아래 장,절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마태복음: 26장 6절~13절 (8개 절)

          마가복음: 14장 3절~9절 (7개 절)

          누가복음: 7장 36절~50절 (15개 절)

          요한복음: 12장 1절~8절 (8개 절)



          1​세기 유대인​들​은 시신​을 매장​할 때 어떤 준비​를 했습니까?

          유대인​들​은 사람​이 죽으면 시신​을 신속​히 매장​했고 대개 당일​을 넘기지 않았습니다.
          그처럼 시신​을 빨리 처리​한 데​는 두 가지 이유​가 있었습니다.

          첫째​로, 중동 지역​은 날씨​가 무더웠기 때문​에 시체​가 빠른 속도​로 부패​했습니다.
          둘째​로, 당시​에는 시신​을 매장​하지 않은 채 여러 날 방치​해 두는 것​이 고인​과 유족​에게 수치​스러운 일​로 여겨졌습니다.

          복음서​들​과 사도행전​에는 사망 당일​에 시신​을 매장​한 사례​가 적어도 네 차례 언급​됩니다.
          마태 27:57-60
          사도 5:5-10, 7:60-8:2

          그​보다 여러 세기 전​에는 야곱​이 가족​을 이끌고 여행​을 하던 중 그​의 사랑​하는 아내 라헬​이 사망​하는 일​이 있었습니다.
          그때 야곱​은 라헬​의 시신​을 가지고 가족 매장지​로 가는 대신 “베들레헴​에 이르는 길”에 있는 무덤​에 매장​했습니다.
          창세기 35:19, 20, 27-29

          장례 절차​에 관한 성서 기록​을 보면 유대인​들​이 매장​을 위해 시신​을 준비​하는 데 세심​한 주의​를 기울였다는 점​을 알 수 있습니다.
          유족​과 친지​들​은 시신​을 씻은 뒤 향료​와 좋은 기름​을 바르고 천​으로 감쌌습니다.
          요한 19:39, 40.
          사도 9:36-41

          이웃​과 그 밖​의 사람​들​은 와서 고인​의 죽음​을 애도​하고 유족​을 위로​했습니다.
          마가 5:38, 39

          예수​께서는 일반적​인 유대인​의 관습​에 따라 매장​되셨습니까?

          대부분​의 유대인​들​은 가족​이 죽으면 이스라엘 여러 지역​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부드러운 바위​를 깎아서 만든 무덤​이나 동굴​에 시신​을 매장​했습니다.
          그렇게 하는 것​은 족장​들​이 남긴 선례​를 따른 것​이었습니다.
          예​를 들어 아브라함, 사라, 이삭, 야곱​을 비롯​한 몇몇 사람​이 헤브론 근처​의 막벨라 동굴​에 매장​되었습니다.
          창세기 23:19,  25:8-9,  49:29-31,  50:13

          예수​께서는 바위​를 깎아서 만든 무덤​에 매장​되셨습니다
          마가 15:46
          그러한 무덤​에는 일반적​으로 폭​이 좁은 입구​가 있었습니다.
          무덤 내부​에는 바위​를 깎아 만든 벽감 즉 선반 모양​의 공간​이 여러 개 있어서 사망​한 가족​의 시신​을 안치​해 둘 수 있었습니다.
          예수 시대​에는 시체​가 부패​된 뒤​에 마른 뼈​들​을 거두어서 석재 상자 즉 유골함​에 넣어 두는 것​이 관습​이었습니다.
          이러​한 방법​으로 가족​은 무덤​에 앞​으로 더 매장​할 공간​을 마련​할 수 있었습니다.

          모세 율법​은 안식일​을 지킬 것​을 규정​했기 때문​에 그 날​에 유대인​들​은 장례​와 관련​된 일​을 할 수 없었습니다.
          예수​께서 안식일​이 시작​되기 세 시간 전​에 돌아가셨으므로 아리마대​의 요셉​과 그 밖​의 사람​들​은 매장 전​에 하는 시신 준비 작업​을 제대로 마치지 못한 채 시신​을 무덤​에 뉘었습니다.
          누가 23:50-16
          그래서 예수​와 가깝게 지내던 몇몇 사람​은 안식일​이 지난 뒤 절차​를 마무리​하기 위해 무덤​에 갔습니다.
          마가 16:1,  누가 24:1



          관점은 생각을 움직이고 삶을 움직이는 힘이 있다.
          관점(觀點)이란 무엇을 바라보는 방식이다.

          바라본다는 것은 이렇게도 볼 수 있고 또는 저렇게도 볼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예를 들면 가나안 땅을 40일 동안 정탐했던 12명의 사람들은 모두 같은 장소에서 같은 것을 바라보았다.
          그런데 바라 본 후에 생각하고 말하는 것은 전혀 다른 것으로 나타났다.
          왜 이런 차이가 나타난 것일까?
          그것은 믿음의 차이라고 하겠다.
          믿음과 의심의 차이가 전혀 다른 언어로 표현하게 된 것이다.

          고통의 시간을 지나면서 어떤 언어로 표현하느냐에 따라 욥과 같은 의로운 시인이 되기도 하고 욥의 아내와 같은 불평의 처세술인이 되기도 한다.


          대통령을 친구로 둔 출판없자가 잘 팔리지 않는 책을 보내주면서 서평좀 해달라고 부탁했습니다. 대통령은 형식적으로 ‘괜찮다’고 했더니 그는 ‘대통령이 좋아한 책’이라고 광고했습니다. 결국 이 책은 대박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이번에는 다른 책을 또 보내면서 한마디 해달라 부탁했습니다. 지난번 소식을 들은 대통령은 이번에 ‘엉터리 책이다’고 혹평합니다. 그러나 ‘대통령도 싫어한 책’이라는 광고로 이번에도 베스트셀러가 됩니다. - 최필규 저 ‘머리에서 가슴까지 30센티 마음 여행’

          관점이란, 사물이나 현상을 관찰할 때, 보고 생각하는 태도나 방향을 의미합니다. ‘창의적 사고’란 모두 다 허덕이고 있는 구덩이를 헤쳐 나올 수 있는 신선하고 새로운 관점을 의미합니다. 믿음이란, 하나님의 관점으로 만물과 현실을 보는 눈을 의미합니다. 믿음이 세상을 이깁니다! 그 출판업자가 또 다른 신간을 대통령에게 보내자, 대통령은 이번에 아무 말도 하지 않습니다. 다른 출판업자들의 불만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번에도 대박을 터뜨리게 됩니다. ‘대통령이 읽고 아무런 이야기도 못한 책’

           

          무릇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마다 세상을 이기느니라, 세상을 이기는 승리는 이것이니 우리의 믿음이니라 – 요한일서 5장 4절









          기념하라(3422) 므네모쉬논(mnēmŏsü- nŏn) μνημόσυνον, ου, τό 

          1. 기념,  2. 기념 예물
          발음 / 므네모쉬논(mnēmŏsü- nŏn)
          어원 / 3421에서 유래
          관련 성경 / 기억(마 26:13, 막 14:9), 기억하신 바(행 10:4)
          신약 성경 / 3회 사용

          * 3421. μνημονεύω 

          1. 기억하다,  2. 누가복음 17:31
          발음 / 므네모뉴오(mnēmŏnĕuō)
          어원 / 미완료 ἐμνημόνευον, 제1부정과거 ἐμ νημόνευσα, 3420의 파생어에서 유래
          관련 성경 / 깨닫다(마 16:9), 기억하다(막 8:18, 눅 17:32, 행 20:35, 갈 2:10, 살전 2:9), 생각하다(계 2:5), 기억나다(요 16:4), 말하다(히11:22).
          신약 성경 / 21회 사용


          이 여인을 기념하라!
          마가복음 14:1-9

          인도의 창조 신화에 보면, 하나님께서는 남자를 먼저 지으신 다음, 연못 속에 피어 있는 연꽃을 가지고 아름다운 여자를 창조했습니다. 그리고 그 여자가 살집을 지어 주시기 위해 창조주 하나님이 물으셨습니다.
          "저 연못가에 용궁과 같은 아름다운 집을 지으면 어떻겠는가?"
          여자가 연못 속을 들여다보았습니다.
          그리고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고개를 흔들었습니다.
          이유인즉 연못 속에는 이상한 도깨비 같은 것과 물뱀들이 살고 있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여자를 넓은 광야로 데리고 갔습니다.
          그리고 물었습니다.
          "저렇게 밝고 넓은 들에서 살고 싶지 않니?"
          여자는 또 고개를 가로 저으며 말하기를 "저는 연약한 여성이에요. 비바람이 몰아치는 거친 들에서는 살 수 없어요."
          이번에는 하나님이 그 여자를 동굴로 데리고 갔습니다.
          "비바람이 없는 따뜻한 동굴은 어떠냐?"
          여자는 "저는 저렇게 좁고 음침한 동굴 속은 싫어요." 또 거절했습니다.
          그때 마침 하나님께서 제일 먼저 창조한 남자가 씩씩하게 걸어 나왔습니다.
          하나님은 여자에게 제안을 했습니다.
          "너는 저 남성의 가슴에 안겨 그와 함께 살면 어떻겠니?"
          그러자 여자가 기쁜 발걸음으로 남자에게 다가갔습니다.
          그리고 남자의 가슴속을 들여다보고는 질겁하며 소리쳤습니다.
          "하나님 저렇게 무서운 곳에서 어떻게 살란 말입니까?
          남자의 가슴속에는 연못과 같은 음침함이 들어 있고, 광야와 같은 비바람이 몰아치고 있으며 동굴과 같은 편협하고 어두움이 모두 들어 있습니다."
          그러자 하나님은 여자에게 말씀하시기를 "이 세상에 문제없는 곳을 찾으려면 너는 어떤 곳에서라도 살 수 없단다. 너는 남자의 가슴속에 들어가 힘을 합하여 문제를 해결하며 살도록 하라! 만일 네가 사는 곳에 연못의 음침함이 있거든 너는 진주가 되어 빛을 내거라! 만일 네가 사는 곳에 광야의 황무함이 있다면 너는 백합화가 되어 향기를 발하거라! 만일 네가 사는 곳에 동굴의 어두움이 있다면 너는 작은 태양이 되어 밝은 빛을 주어라."

          여러분, 여성의 역할이 큽니다.
          세상에서도, 가정에서도, 교회에서도 여자들의 역할이 대단히 큽니다.

          여자 성도님 여러분, 진주가 되어 빛을 내십시오!
          백합화가 되어 향기를 발하십시오!
          작은 태양이 되어 밝은 빛을 주십시오!

          예수님이 예루살렘 성에 입성하실 때 주님 앞에 헌신한 한 사람이 나옵니다.
          그 사람의 헌신을 한번 생각해 보고 본문으로 들어갑시다.

          마태복음 21:2-3
          예수께서 제자에게 이르시되 너희 맞은편 마을로 가라 곧 매인 나귀와 나귀 새끼가 함께 있는 것을 보리니 풀어 내게로 끌고 오너라 만일 누가 무슨 말을 하거든 주가 쓰시겠다 하라 그리하면 즉시 보내리라 하시니.

          주께서 보잘 것 없는 나귀새끼를 쓰시겠다고 하십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작고 보잘 것 없다고 생각하며 겸손히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들과 함께 하십니다.

          오늘 이 자리에 부족하다고 생각하는 분이 나오셨습니까?
          주님이 은혜로 세우시면 한 세대 크게 들어 쓰실 것입니다.
          오늘 이 자리에 가난한 사람이 나오셨습니까?
          천국이 당신의 것입니다.
          오늘 이 자리에 인생을 비관하는 분이 있습니까?
          성령의 불만 밭기만 하면 세상에 주인공이 될 것입니다.
          그러니 무능하다고 자책하지 마시고 가진 것이 없다고 포기하지 마시고 인생살이에 조금 뒤졌다고 열등의식이나 실패의식을 가지지 마시고 예루살렘의 나귀새끼처럼 당신의 등위에 예수님을 태우시고 호산나를 외치며 앞을 향해 나가시기를 바랍니다.

          나귀 주인에 대해서 생각해 봅시다.
          이 사람은 누구입니까?

          이름도 없는 충성자입니다.
          이 사람에 대해서는 성경 사복음서에서 다 언급을 하고 있습니다.
          마태도 말했고, 마가도 말했고, 누가, 요한도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어디를 보아도 이 사람의 이름이 기록된 곳이 없습니다.
          이 사람은 끝까지 무명인으로 남아 있습니다.
          그래서 이 사람이 무명의 충성자입니다.

          빛도 없는 충성자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어쨌거나 영광스런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의 제자였다고 하는 이름과 명예와 빛이 있습니다.
          "내가 예수님의 제자 중의 한 사람이었다."
          이 얼마나 영광스러운 경력입니까?
          그런데 여기 이 나귀 주인은 이름도 없고 빛도 없습니다.
          그가 누구인지 알 길이 없습니다.
          그저 예수님의 화려한 예루살렘 입성 뒤에 숨겨져 보이지 않는 시골 사람에 불과할 뿐입니다.

          보상도 없는 충성자입니다.
          옛날 우리나라 농촌 마을에서 소 한 마리는 큰 재산입니다.
          그래서 농촌 사람들은 소를 기르느라고 수고를 많이 합니다.
          그렇게 키운 소 한 마리를 선뜻 내어놓는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이 나귀 주인도 분명히 나귀 한 마리가 큰 재산이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소중하게 길렀을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쓰시겠다고 하니까 두말하지 않고 보냈습니다.
          그 나귀가 자기에게 다시 돌아온다는 보장이 없습니다.
          주께서 쓰시겠다고 하니까 그저 만족스럽게 바침으로써 기뻐했을 뿐입니다.
          내가 지금까지 정성껏 기른 나귀를 주께서 요긴하게 쓰신 다니 그것으로 보람과 기쁨을 느낀 것입니다.

          무조건의 충성자입니다.
          "가서 주께서 쓰시겠다 하라."
          '주께서 쓰시겠다'고 하니 아무 말 없이 나귀를 풀어 주었습니다.
          그래서 이 사람이 무조건의 충성자입니다.
          하나님이 '네 인생이 필요하다.' 하시면 우리는 하나님이 사용하시도록 내놓아야 합니다. 그것이 우리의 사명입니다. '내 시간, 내 물질, 내 인생', 주님이 필요하시다 하면 내놓아야 합니다.

          참 기쁨을 아는 사람입니다.
          참 기쁨과 보람이 어디에서 나옵니까? 그것은 우리가 주님 앞에 쓰임 받을 때입니다. 순교자는 자기의 목숨을 하나님께 바칠 때 그곳에서 만족을 얻고 기쁨을 얻습니다. 헌신 자는 자신의 인생이 하나님을 위해서 쓰여 질 때 기쁨과 보람을 얻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은 자기의 마음과 모든 것을 상대방에게 줄 때 기쁨을 얻는 것입니다. 이것이 봉헌의 기쁨입니다.
          나귀의 주인은 자신이 귀하게 기른 나귀 한 마리를 주께 드림으로써 보람을 얻었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행위를 통해 마침내 슥9:9절의 '보라 네 왕이 나귀를 타나니 나귀의 작은 것 곧 나귀새끼니라'고 한 예언이 이뤄지게 되었습니다. 얼마나 큰 영광입니까?
          오늘 본문의 주인공도 바로 이런 헌신의 삶을 살았던 여인입니다.

          사람들에게는 자기 이름을 이 세상에 남기고 싶은 욕망이 있습니다. 그것을 '공명심'이라고 말하기도 하고, '명예욕'이라고도 말합니다. 산에 가면 나무껍질에 자기 이름을 파 놓고 가는 사람들의 흔적을 곧잘 보게 됩니다. 또는 그 탄탄하고 억센 바위 위에 '0년 0월 0일 아무개 다녀가다'라고 새겨 놓는 바위도 많이 보게 됩니다.
          이러한 공명심은 인간이 모여 사는 세계면 어느 곳에나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명예욕이 뜻대로 안될 경우에는 힘으로 돈으로라도 이름을 얻고 권력을 쟁취해서 누리려고 합니다. 그래서 '매관매직'이란 말도 생겨난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본문에서 좀 색다른 주인공을 보게 됩니다. 본문 9절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온 천하에 어디서든지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는 이 여자의 행 한 일도 말하여 저를 기념하리라 하시니라"
          요즘 말로 하면 예수님께서 입에 침이 마르도록 칭찬과 선전을 해 주셨습니다. 온 천하에 어디서든지 동서양을 막론하고 복음이 전파되는 곳곳마다 이 여인의 행한 일도 전파되어 이 여인의 일을 기념하라고 했습니다.
          그러면 이 여인은 어떤 여인입니까? 나폴레옹 같은 영웅입니까? 시저와 같은 정치가입니까? 잔다르크, 유관순 같은 애국 여인입니까? 아니면 당시 빌라도 총독이나 헤롯왕의 영부인입니까?

          아닙니다. 평범한 한 여성입니다.
          본문에는 이름이 나와 있지 않지만 요12:2절에 의하면 베다니 마을에서 마르다와 나사로와 함께 살고 있는 의로운 삼남매 중에 하나인 마리아라고 합니다.
          이 기사는 4복음서가 공통으로 다루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 평범한 한 여인의 이름이 왜 이토록 하늘의 별처럼 높이 빛날 수가 있었습니까? 그것은 한 마디로 말해서 '내가 주를 높이면 주께서도 나를 높여주신다고 하는 평범한 진리' 그대로입니다. 잠8:17절 "나를 사랑하는 자들이 나의 사랑을 입으며 나를 간절히 찾는 자가 나를 만날 것이니라" /할/ 이 여인은 가난했지만 주님을 위해서는 아낌없이 자신의 귀한 것을 바쳤습니다.

          사랑의 낭비라는 말이 있습니다.
          '오 헨리'의 '박사의 선물'이라는 단편집의 이야기를 보면 지극히 사랑하는 가난한 두 남녀가 있었습니다. 그들은 사랑했기 때문에 돌아올 성탄절에 무슨 선물을 할까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남자는 조상 때부터 물려받은 금시계를 팔아 여인의 머리핀을 샀고, 여인은 20년간 길러온 자신의 머리카락을 잘라 시계 줄을 샀습니다. 성탄절 이브 때, 남자가 사랑하는 여인의 머리핀을 꽂아 주려고 하니 머리카락이 없고, 여인은 자기가 사온 시계 줄을 남자에게 채워주려고 하니 이미 시계가 없었습니다.

          자초지경을 한 연인들은 더욱 더 사랑의 맹세를 굳게 했다는 내용입니다. 사랑은 이처럼 자신의 모든 기쁨으로 희생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여인은 주님을 위해 옥합을 깨뜨려서 값비싼 향유를 주님께 쏟아 바쳤습니다.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자기의 희생과 헌신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배경을 보면 예수님은 이틀이 지나면 유월절이 되고 유월절이 지나면 죽음이 자신을 기다리고 있음을 아셨습니다. 1-2절을 보면 예수님의 예언처럼 죽음은 긴박하게 예수님 주위로 몰려오고 있었습니다. 대제사장들과 국민의 대표기관인 장로들이 모여서 예수를 어떻게 잡아 처형할 것인가를 의논하고 있습니다. 이런 숨 가쁘게 돌아가는 상황 속에서도 우리 예수님은 그 날에 일정에 들어가셨습니다. 즉 베다니 시몬의 집에 심방을 가신 것입니다.

          본문에서 세 종류의 사람을 살펴보려고 합니다.
          첫째는 향유를 부은 여인
          둘째는 모여 있는 구경꾼들
          셋째는 향유를 부음 받은 예수님
           
          첫째는 향유를 부은 여인

          요한복음 12장 3절에서 이 여인은 나사로의 누이 동생 마리아라고 합니다.
          반면에 누가복음 7장에서는 큰 죄인이라고도 합니다.
          또 어떤 사람은 간음하다 잡힌 여인이라고 하지만 확실하지는 않습니다.
          그녀가 누구냐 하는 것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다만 그녀의 행동입니다.
          그녀가 공개적으로 향유를 부었다는 사실입니다.
          '베다니 문둥이 시몬의 집에서 식사하실 때' 라고 합니다.
          시몬은 전에 문둥병자이었으나 주님 앞에서 깨끗이 치료받은 후에 주님을 모시고 식사 대접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곳에는 집주인 외에도 제자인 가룟 유다와 다른 제자들이 있었고, 마을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녀는 그 사람들이 모두 지켜보는 가운데 값비싼 향유를 부었습니다.
          가룟 유다는 이 향유의 값을 300 데나리온이라고 합니다.
          당시의 화폐 가치로 장정이 1년 동안 일해서 받은 노임에 해당하는 금액입니다.
          이 돈은 오병이어 때 빌립이 모인 무리를 먹일 양식을 계산한 금액이 200데나리온인데 비해 100데나리온이 더 많은 돈의 액수입니다.
          이 향유는 상당히 귀한 물건임이 틀림이 없습니다.
          당시 이스라엘 사람들의 결혼 풍속가운데 혼수 준비물로서 가장 귀한 것이 옷과 향유라고 말합니다.
          아마 마리아의 어머니가 세상을 떠날 때 딸에게 혼숫감으로 이 귀한 향유를 물려주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마리아가 부은 이 향유는 자신이 가진 것 중에 가장 귀한 것으로 그것을 주님께 바친 것으로 사랑의 극치를 드러내고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예배입니다.
          예배란 나를 사랑하셔서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게 하셨던 하나님께 내가 드릴 수 있는 최선의 것을 드리는 것입니다.
          한 여자가 한 남자에게 그렇게 했다면 세상에서는 그것을 사랑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한 사람이 하나님께 그런 행위를 했다면 그것은 예배가 되는 것입니다.
          오늘날 교회의 위기는 예배의 위기입니다. 진정한 예배가 없다고 뜻 있는 사람들은 말하고 있습니다. 극장에 오듯이 성가대가 찬양을 얼마나 잘하나? 목사가 설교를 얼마나 잘하나? 내가 아는 사람이 왔나 안 왔나를 살핍니다.
          예배를 드리러 오는 사람보다 보러 오는 사람이 더 많습니다. 여러분, 여기에 무슨 사건이 이루어지고 어떤 영적인 변화가 일어나겠습니까? 백날 천 날 예배드려도 하나님은 끄덕도 안 하십니다. ▶이 여인이 드리고 있는 것이 예배입니다. 최상의 존재에게 나의 최상의 것을 아낌없이 쏟아 바치는 것입니다. 이 여인의 기쁨과 감사와 감격을 이 여인만이 아는 것입니다.

          독일의 신학자 '본회퍼' 목사는 '하나님의 은혜를 값싼 것으로 취급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솔직하게 말하면 우리는 하나님 앞에 값으로 칠 수 없는 은혜를 받고 살면서도 우리는 하나님께 싸구려 향유를 부어서 갚노라고 할 때가 많습니다.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불치의 성인병으로 사경을 헤매던 서울대 박 모 교수는 최근 미국에서 그 분야의 최고 권위를 가지고 치료하던 전문의를 만나서 치료받고 6개월만에 완치했다고 합니다. 박 교수는 병원 입원비, 수술비, 약값 등 엄청난 비용을 이맛살 한번 찡그리지 않고 병원 수납계에 지불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퇴원하는 날 너무 기쁘고 감사해서 자신을 치료해준 의사에게 정성어린 물질의 사례를 드렸고, 또 6개월 동안 자신의 병상을 드나들며 치료하고 간호해준 간호사들과 끼니때마다 식사를 날라주었던 사람들에게까지 정성껏 사례를 했다고 합니다. 그는 돈이 아깝지 않았고, 만나는 사람이 다 새롭고 가진 것을 주고 싶은 흥분과 감격으로 귀가했다고 그의 병상일기에서 적었습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하나님의 은혜로 지옥 갈 내가 구원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그뿐입니까? 하나님의 은혜로 오늘날까지 살고 있습니다. 이 은혜를 깨달은 사람은 하나님께 감사하며 삽니다.
          오늘 본문의 값비싼 향유는 단순한 물량적인 의미만을 지닌 것이 아닙니다. 마리아가 값비싼 향유를 드린 것은 그것보다 몇 천만 배 더 값비싼 사랑과 축복과 은혜를 하나님께 받았기 때문입니다. 이 헌신은 '저 영원한 천국 하나님의 나라의 가치를 발견하고 깨달은 자'의 헌신입니다.

          순전한 나드를 주님께 드렸습니다.

          나드향은 인도에서만 나오는 최고급 향유라고 합니다. 그러나 나드에 다른 것을 배합하면 본래의 향이 나지 않는다고 합니다. 지금 향수로 유명한 것은 블란서의 샤넬 향수가 단연 최고라고 합니다. 그런데 같은 샤넬 향수지만 No.5와 No.9는 다르다고 합니다. 그리고 둘을 한데 섞어 놓으면 전혀 다른 매력 없는 향이 된다고 향수전문가가 말합니다.
          마리아가 드렸던 향유는 순전한 '나드 향'입니다. 그것은 마리아의 순전한 사랑과 마음을 의미합니다. '헬'어의 '순전한'이란 말은 '믿을 수 있는'이란 뜻을 가진 단어에서 유래된 것입니다. 그러니까 순전이란 말은 믿음이란 말과 동의어로 해석해도 무리가 아닙니다. 제 아무리 큰일을 하고 큰 봉사를 해도 그 동기가 순수해야 하고 믿음으로 해야 합니다.

          향유를 깨뜨렸습니다.

          3절'하'반절에 보면 '그 옥합을 깨뜨리고 예수의 머리'에 부었다고 했습니다. 그녀가 깨뜨린 옥합은 이집트의 '알라바스트론' 지방에 있는 산에서만 나오는 돌로 만든 것으로 주로 향유 병을 만드는데 그 돌을 사용했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병도 비싼 병이고 향유도 비싼 순전한 것인데 그것을 깨뜨렸습니다.
          ▶왜 그냥 선물로 쇼핑백 같은 것에 담아드리지 않고 깨뜨렸을까요? 몇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⑴그것은 자신을 깨뜨려 드리는 헌신의 상징입니다.
          ⑵너무나 고가의 향유이기 때문에 깨뜨리지 않으면 항상 그것에 대한 미련과 아쉬움을 지닌 체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⑶주님의 죽음의 장사를 위해 미리 부어 드린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머리에 기름을 붓는 몇 가지의 관습이 있습니다.
          ⑴자기 집을 방문한 손님의 머리 위에 향유 몇 방울을 떨어뜨리는 관습이 있고, ⑵왕이 즉위할 때, ⑶제사장의 성별의식을 위해, ⑷선지자를 세울 때, ⑸장례식 때 시신 위에 기름을 부었습니다.
          ▶마리아는 우물쭈물하면 마음이 변할지 모르므로 순식간에 옥합을 깨뜨렸습니다. 여러분, 사람이 오래오래 두고두고 생각하면 마음이 변합니다. 우리가 배운 사도행전 5장의 아나니아와 삽비라 부부를 보십시오! 신앙에는 결심과 결단이 절대 필요합니다. 봉사하는 일도, 기도하는 일도, 전도하는 일도, 헌금하는 일도, 주일 성수하는 일도 결단이 필요합니다.
          아무리 좋고 귀한 것을 가지고 있으면 뭘 합니까? 깨뜨려서 드려야 합니다. 어떤 사람은 입으로만 오만가지 것을 깨뜨리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나 정작 옥합을 깨뜨리지는 못합니다. 어떤 사람은 훗날 깨뜨린다고 상담하고 약속만 합니다. 그러나 실천을 하지는 않습니다. 왜 그런지 아십니까? 하나님의 나라의 가치를 깨닫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천국의 소중함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의 마리아는 죄 사함의 은혜를 아는 자요, 구원의 감격을 가진 자요, 천국의 가치를 발견한 사람입니다. 그래서 미련 없이 그 귀한 옥합을 깨뜨려 주님께 받쳤더니 주님이 이 여인을 축복하셨습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온 천하에 어디서든지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는 이 여자의 행한 일도 말하여 저를 기념하리라" 여기 '여자가 행한 일'이란 예수님에게 옥합을 깨뜨려서 '향유를 부은 것'을 의미합니다. 이 사건으로 이 여인은 온 천하에 향수를 뿌린 여인이 되었습니다.

          세상에는 '기념될 만한 말'이 있습니다.

          <너 자신을 알라> '소크라테스'가 한 이 말은 온 천하가 다 알고 있습니다.

          <내 사전에는 불가능은 없다> '나폴레옹'이 한 이 말도 온 천하가 다 알고 있습니다.

          심지어 중이 한 말도 우리나라 사람은 다 알고 있습니다.
          무슨 말인가?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이다.> 또 우리나라 사람 치고 이 말을 모르는 사람도 없습니다.

          <대통령 못 해 먹겠다.>
          이같이 온 천하를 휩쓸고 있는 '기념비적인 말'이 있습니다. 그런데 온 천하에 알려진 '기념비적인 행동'도 있습니다. ▶손 양원 목사님이 자기 아들을 죽인 공산당 청년을 아들로 삼았습니다. 이 행동을 '사랑의 원자탄'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강재구 소령 이야기도 다 알고 있습니다. 훈련병들이 수류탄 훈련을 하다가 수류탄을 떨어뜨렸습니다. 다 죽게 되었습니다. 순간적으로 엎어져 그 수류탄을 끼어 안았습니다. 그의 몸이 산산조각이 나고 말았습니다. 혼자 죽었습니다. 육사 교정에 그의 동상이 우뚝 세워져 있습니다. 온 천하가 다 알고 있는 행동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의 마리아의 헌신은 '온 세상이 기념'할만한 그런 일입니다. 예수님의 이 여인을 '동서양을 막론하고 복음이 전파되는 곳곳마다 이 여자의 행한 일이 함께 전파되어 이 여인의 믿음을 기념하라'고 하셨습니다. 오늘 우리가 드리는 성찬식도 주님을 기념하는 예식입니다.

          ▶눅22장에 보면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기 전날 밤에 제자들과 마지막으로 만찬을 하시면서 그 자리에서 떡을 떼어 주시고 포도주 잔을 돌리면서 말씀하시기를 '이것은 내 몸이라 받아먹어라, 이것은 내 피니라 받아 마시라 그리고 이를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니까 성찬식의 목적은 '예수님을 기념'하는데 있습니다. 신앙인은 예수님을 기억하고 기념하고 살아가는 삶이 중요합니다.

           






          ▶성찬은 몇 가지 정신이 있습니다.
          ①성찬식은 주님의 고난과 죽으심을 생각하고 기념하는 것입니다. '나를 기념하라. 이를 행하라'는 말씀은 '떡을 들고 잔을 마실 때마다 나 위해 십자가에 돌아가신 주님을 생각'하라는 말씀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때를 따라 성찬 상을 베풀고 떡과 잔으로 주님의 죽으심과 그 고통을 기념하는 것은 나 때문에 죽으셨고 나 때문에 고통을 당하셨기 때문입니다.
          ②성찬을 땔 때 중요한 것은 '자기를 살펴야' 합니다(고전11:27-29).
          "주의 떡이나 잔을 합당치 않게 먹고 마시는 자는 주의 몸과 피를 범하는 죄가 있느니라" 이 말씀을 초대교회 교부였던 '크리소스톰'은 '회개하지 않고 성찬을 먹는 것이 합당치 않게 먹고 마시는 것'이라고 했고, '벵겔'은 '자기 성찰 없이 먹고 마시는 것'이라고 했고, '앨 포드'는 '주의 죽으심에 대한 올바른 이해나 믿음 없이 먹고 마시는 것이라'고 해석했습니다.
          "사람이 자기를 살피고 그 후에야 이 떡을 먹고 이 잔을 마실지니라." 성찬식은 먹고 마시고 즐기는 만찬이나 회식이 아닙니다. 자기를 살피고 주를 생각하며 먹고 마시는 거룩한 예식인 것입니다. '자기를 살피고'라는 말씀은 '자기 죄를 회개하고, 자기를 다듬고' 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29절의 '주의 몸을 분변하라'는 말씀은 '주님의 희생과 그 고통을 깊이 이해하라'는 것입니다.

          ④마라아의 헌신은 어떤 헌신인가? 우리가 바로 배워야 합니다.
          ⑴능동적인 헌신입니다. 그 누구도 마리아에게 헌신을 강요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이들은 마리아의 헌신을 비방했습니다. 마리아는 능동적으로 자원하여 헌신했습니다. 이 헌신이 우리 주님을 기쁘시게 합니다.
          ⑵최선을 다하는 헌신입니다. 신앙생활은 하나님께 최선을 다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최선을 다한다는 의미를 '임산부가 애를 낳을 때 쓰는 힘'이라고 표현을 했습니다.
          ⑶비방을 이긴 헌신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일을 하다가 보면 헐뜯고 비방하고 무시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거기에 시험 들지 마시기 바랍니다. 주님의 평가를 기대하시기 바랍니다.
          ⑷이미 받은바 은혜에 감사하는 헌신입니다. 오라비가 죽은 지 4일이나 되었는데 예수님께서 살려주셨습니다. 마리아는 미래에 어떤 축복이나 은혜를 위해서가 아니라 이미 받은 은혜, 지난날에 받은 은혜에 보답하고 감사하여 헌신했습니다. 이 헌신은 어떤 조건을 내건 헌신이 아니라 받은바 은혜에 감사하여하는 순수한 헌신입니다.

           

          2. 구경꾼들의 반응을 보자!

           

          ①집 주인 시몬을 한번 생각해 보자!
          그는 문둥이로 소개되고 있습니다. 그 때나 지금이나 문둥병자는 세상에서 버림받은 존재입니다. 격리되어 있어야 하고, 예배에도 참석을 못합니다. 집주인 시몬은 그런 문둥병에서 예수님께 치유 받은 사람입니다.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그래서 예수님을 모시고 식사대접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에서는 자기 집에 손님이 오면 다음과 같은 방법으로 환영합니다. ▶평안을 기원하며 입을 맞춥니다. ▶발을 씻겨 주거나 발 씻을 물을 줍니다. ▶향을 피우거나, 향을 머리에 부어 발라 줍니다. 그런데 이 시몬은 예수님이 오실 때 위에서 말씀드린 세 가지 중에 그 어떤 한 가지도 했다는 기록이 없습니다.
          똑같은 배경의 눅7:44-46절에 보면 그 당시 예수님이 집주인 시몬을 책망한 말씀이 나옵니다. "시몬에게 이르시되 이 여자를 보느냐 내가 네 집에 들어오매 너는 내게 발 씻을 물도 주지 아니하였으되 이 여자는 눈물로 내 발을 적시고 그 머리털로 씻었으며 너는 내게 입맞추지 아니하였으되 저는 내가 들어올 때로부터 내 발에 입맞추기를 그치지 아니하였으며 너는 내 머리에 감람유도 붓지 아니하였으되 저는 향유를 내 발에 부었느니라" 이런 사람은 천국의 가치를 모르는 불쌍한 영혼입니다. 믿음을 형식과 의식으로만 채워져 있는 사람입니다.
          ②제자들과 가롯유다를 조명해 보겠습니다.
          제자들의 반응은 다음과 같았습니다. ▶분을 내었습니다. 화를 내었습니다. "어찌하여 향유를 이렇게 허비하는가"라고 말하며 분을 내었습니다. ▶책망했습니다. 비난했습니다. 나무랐습니다. 4절 "어떤 사람들이 분 내어 서로 말하되 무슨 의사로 이 향유를 허비하였는가" 요12:4를 보면 가롯유다가 나선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가롯유다의 논리는 그럴 듯하고 교양적이고 설득력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300데나리온에 팔아 가난한 자들을 구제할 일이지 왜 낭비하느냐?'는 것이 그의 주장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가롯유다의 잘못이 무엇인가를 분명히 찾아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도 그 죄에 빠져서는 아니 됩니다. ▶그럼 유다의 잘못이 무엇인가?
          ⑴다른 사람의 의로운 일을 시비하고 나셨습니다. 남의 일을 간섭하고 시비하는 사람은 자기 할 일을 못하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남이 하는 좋은 일을 질투하는 사람은 그 질투심 때문에 늘 마음이 편하지 못합니다.
          ⑵영적 가치를 돈으로 계산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가롯유다의 발상은 지옥 갈 사람을 건져내는 교회의 선교를 '왜 돈을 쓰느냐? 우리 교회도 어렵지 않느냐?'와 같습니다. 여러분 지옥 갈 영혼들을 구원해 내는데 필요한 돈이라면 우리 주님이 가장 기뻐하시는 물질입니다. 우리 모두 선교 비를 드립시다.
          지금 세계는 천문학적인 돈을 들여 사들이는 마약 때문에 썩고 병들어 죽어가고 있습니다. 수많은 영혼들이 지옥으로 굴러 떨어져가고 있습니다. 그들은 어서 빨리 구원해야 합니다. 그러나 가롯유다같은 발상이나 정신으로는 아무것도 못합니다.
          ⑶동기가 불순했습니다. 요12:6절 "이렇게 말함은 가난한 자들을 생각함이 아니요 저는 도적이라 돈궤를 맡고 거기 넣는 것을 훔쳐 감이러라."
          마리아는 순전한 마음으로 나드향을 깨뜨려 드렸습니다. 가롯유다는 불순한 마음으로 향유를 헌금화하여 구제하자고 불평했습니다. 문제는 그토록 구제 열이 불타고 이론이 정연했던 가롯유다가 어떻게 되었습니까? 결국 은30에 눈이 어두워 스승 예수님을 팔아 넘겼고 결국 그는 자결하고 말았습니다.
          ▶유다의 논리대로라면 마리아의 옥합을 깨뜨리는 것은 낭비였습니다. 그러나 지금도 그 마리아의 낭비 때문에 그의 신앙을 본받은 무리가 많고 또 세상에는 그런 낭비 때문에 어둠이 걷히고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어리석은 낭비 자들은 동양에서도 있었고, 서양에서도 있었습니다. 그중 한 사람이 인도의 '무저항주의'를 부르짖은 '간디'였다고 봅니다. 그는 영국에서 최고의 학부를 나왔고, 자기만 원한다면 많은 재산을 모으고 법률가로서 일등 국민의 특권과 자유를 마음껏 누릴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이런 안일과 행복한 생활을 집어 던지고 냄새나고 문화의 혜택도 받을 수 없는 조국 인도로 돌아가 인생을 무명옷을 입고 굶으며 옥중에서 온갖 고초와 학대를 받으면서 인생을 허비했습니다.
          그러다가 마침내 동족의 흉탄에 맞아 자신의 인생을 무참히 허비하고 낭비했습니다. ▶이런 어리석은 바보가 독일에서도 한 사람 살고 있었습니다. 그가 바로 다름 아닌 히틀러의 나찌 정권과 항거하여 싸우다 순교한 '본회퍼' 목사님입니다.
          그는 40이 되도록 결혼도 못하고 노총각으로 약혼만 해 놓고 옥중에서 이리 끌리고 저리 끌려 다니다가 마침내 1945년 나치에 의해 사형 대에 올랐습니다. 만일 '본회퍼'가 당시 다른 지성인들이나 성직자들처럼 진실이나 정의를 말하지 않고 나치에 아부하고 협력만 했다면 그렇게 고생하고 처참하게 사형을 당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역사는 이런 사람들 손에서 움직여지고 있고, 세워지고 빛나고 있습니다. 누가 이 사람들의 삶을 낭비했다고 하겠습니까?
          ▶미국 뉴욕 항 앞 '리버티' 섬에는 유명한 '자유의 여신상'이 오른손에는 횃불을 들고, 왼손에는 미국 독립선언서를 들고 서있습니다. 이는 '자유는 세계를 비춘다.'를 상징하고 있습니다.
          이 자유의 여인상은 프랑스 국민이 미국의 독립 100주년을 기념하기 위하여 선물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 조각상은 'F. A. 바르톨디'라는 조각가가 만들었습니다. 그는 이 여신상을 무려 20년 에 걸려 완성했다고 합니다. 이 조각상의 제작을 요청 받은 '바르톨디'는 '자유'라는 이미지를 잘 표현할 수 있는 모델을 찾아 헤매는데 엄청난 세월이 걸렸다고 합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모델 감을 추천해 주었습니다. 그러나 마음에 들지 않았습니다. 역사상 많은 영웅들을 사진들도 모조리 검토해 보았습니다. 그러나 '이것이다.'라고 부딪치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몹시 고민하고 있던 어느 날 그의 머리에 번개처럼 스치고 지나가는 모델이 하나 떠올랐습니다. 그토록 찾았던 자유의 여신상 모델은 바로 그의 어머니가 되었습니다. 우리는 가까운 곳에서 가장 훌륭한 모델을 찾아야 합니다. 사랑의 대상은 바로 내 곁에 있습니다. 옥합을 깬 마리아는 예수를 사랑했습니다. 곁에 게신 분이었습니다. 그러나 가룟 유다는 멀리 있는 가난한 자를 찾고 있었습니다.

           

          3. 예수님의 반응입니다.

           

          ⑴마리아에 대한 예수님의 반응은 무엇인가?(8)
          "저가 힘을 다하여 내 몸에 향유를 부어 내 장사를 미리 준비하였느니라" 마26:10절 "너희가 어찌하여 이 여자를 괴롭게 하느냐 저가 내게 좋은 일을 하였느니라." 예수님은 그 여자가 한 일을 '아주 좋은 일'이라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그러면 그 좋은 일이란 무엇입니까? "이 여자가 내 몸에 이 향유를 부은 것은 내 장사를 위하여 함이니라." 여기서 우리는 놀라운 진리 하나를 발견하게 됩니다. 참된 예배는 십자가를 향하여! 예배의 중심은 십자가라는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이 여인은 쓰고 남은 것을 드린 것이 아닙니다. 힘을 다해 준비한 향유였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주님의 죽음을 위해 미리 부어 드렸습니다. 유대인은 장사 때 시체에 기름을 바르곤 합니다. 주님은 마리아의 행위로 자신의 죽음을 미리 예비한 것으로 칭찬하였습니다.
          ▶어느 여 집사님이 하루는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폐품을 모아 팔아서 성전 건축 헌금으로 바치기로 했습니다. 그리고 몇 년 동안 폐품을 모아 팔았는데 상당한 액수의 헌금이 모아져서 하나님께 드렸습니다.
          그 날밤 집사님의 꿈에 주님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천사의 안내로 예수님 계신 천국을 찾았는데 온갖 폐품으로 지어진 거지같은 집이었습니다. 그녀는 그 집에 들어가기가 망설여졌습니다. 천국은 황금보석으로 꾸민 집으로 알았는데 이런 거지 집이 천국이라 생각하니 기가 막혔습니다.
          그때 천사가 말하기를 '그대가 정성으로 지은 천국의 집은 폐품으로 지은 집이니라'고 할 때, 창피하고 부끄러워 어쩔 줄 모르다가 꿈을 깼답니다. 집사님은 잠자리에 일어나 무릎을 꿇고 회개했습니다. 값비싼 보화는 장롱 속에 두고 폐품을 모아 바친 인색한 마음을 회개하고 새롭게 믿음 생활을 시작했는데 '그가 가장 귀하게 여긴 물질과 금은보화를 주님께 드리지 않으면 황금보석의 집을 쳐다 볼 수가 없겠구나!' 생각하고 드렸답니다. 물론 예화입니다만 주님은 정성을 다해 최선의 것을 드릴 때, 아벨의 산 제사처럼 받으시고 하나님의 축복을 주실 줄 믿습니다.
          ⑵가롯유다에 대한 예수님의 반응입니다.
          한마디로 일고의 가치도 없는 궤변으로 일축해 버렸습니다. 길을 가는데 사람이 '여보세요' 부르면 우리는 걸음을 멈추고 말상대를 해주어야 합니다만 개가 짖는다면 그냥 가던 길을 가야합니다. 개가 짖는데 돌아서서 '개님 왜 짖습니까? 소원이 무엇입니까?' 개소리를 듣고 너스레를 떨고 있다면 그 사람은 제 정신을 가진 사람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세상에 가난한 자들과 비교되어질 수 없는 분이십니다. "가난한 자들은 항상 너희와 함께 있으나 나는 너희와 항상 함께 있지 아니하리라" 세상에는 일할 사람도 많고 구제할 사람도 많습니다. 그러나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사람은 주님의 머리에 향유를 부을 사람입니다.

          2천년 교회사는 주님의 머리에 향유를 부은 사람들을 통하여 복음이 전파되어 가고 있습니다.
          오늘날도 이 여자처럼 하나님의 일을 위해 아낌없이 헌신한 사람들이 수없이 많습니다.
          눈에 띄게 헌신한 남자들도 많지만, 남몰래 헌신한 여자들은 더욱 많습니다.
          이들의 눈물어린 헌신과 아낌없는 희생이 없었더라면, 오늘의 한국교회가 존재하지 못하였을 것입니다.
          그리고 오늘날에도 이런 행동을 비난한 사람들이 주위에 수없이 많이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옥합을 깨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사람들을 '기념'하라고 하십니다.

          옥합헌금 / jade box offer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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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태복음의 종말론(24장, 25장)

          1. 연구의 목적

          본 연구는 마태복음 24, 25장에 나타난 종말론을 신약신학적인 관점에서 탐색하고 마태복음의 종말론의 독특성을 밝히는데 그 목적이 있다.


          2. 연구의 방법

          성경의 각 책은 각각의 공동체가 직면하고 있는 상황들과 관련하여 기록되었다.
          그러므로 본 연구는 마태의 공동체가 직면한 상황을 파악하고 그 상황과 관련하여 저자가 기록하고 있는 마태복음의 종말론의 핵심을 이해하려 하였다.

          본문연구를 통해 마태복음 24장과 25장을 해석하고, 이 기록의 배경이 되는 23장을 살펴 본 후 다른 복음서 및 바울 서신과의 비교를 통하여 마태복음 종말론의 독특성을 알아 보고자 하였다.

          3. 마태복음 24장의 구조

          24장은 두가지 질문에 대한 두 가지 답변으로 구성되어 있다.
          하나는 예루살렘이 언제 멸망할 것인가 라는 질문에 대한 답변이고 또 하나는 세상 마지막에 될 일들에 대한 답변이다.
          이 둘은 서로 별개의 사건이긴 하지만 서로 긴밀한 상관관계를 가지고 있다.
          왜냐하면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예루살렘의 멸망은 세상 마지막에 일어나는 종말적 사건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24장에서는 종말의 심판의 일부로 진행되는 예루살렘의 멸망과 세상 마지막날에 이루어질 일들에 대한 징조들을 잘 구별하여 읽되 예루살렘의 멸망을 통해 비춰지는 종말에 대한 교훈을 서로 잘 연결하여 읽어야 할 필요가 있다.

          1) 예수님의 예루살렘 성전 파멸예고(1-2절)

          2) 제자들의 질문(3절)

          (1) 어느 때에 예루살렘이 파멸되겠습니까?

          (2) 또 주의 재림과 세상 끝에는 어떤 징조가 있겠습니까?

          3) 종말의 시작에 관한 말씀(4-8절)

          (1) 적그리스도들이 나타날 것이다(5절)

          (2) 전쟁과 내란이 있을 것이다(6-7절 상)

          (3) 처처에 기근과 지진이 있을 것이다(7절 하)

          4) 예수의 제자들에 관한 말씀(9-28절)

          (1) 제자들의 박해와 복음전파의 시작(9-14절)

          (2) 예루살렘의 멸망과 제자들의 준비(15-28절)

          5) 세상 마지막 날의 임박한 징조(29-36절)

          (1) 우주적 변화(29절)

          (2) 하늘에서 보이는 재림의 징조(30절 상)

          (3) 그리스도의 영광스러운 재림(30절 하-31절)

          (4) 하나님의 백성들이 함께 모임(31절 하)

          (5) 그 때에 대해서는 알 수 없음(32-36절)

          이후 25장 까지는 종말을 기다리며 사는 그리스도인의 삶이 어떠해야 하는가를 교훈하는 내 용이 이어지고 있다.

           

          4. 예루살렘 성전 파멸의 의미

          마태복음 23장은 24장에서 나오는 예루살렘 성전에 대한 심판의 배경을 설명하고 있다.
          종말론을 다루고 있는 24장과 25장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 전문맥인 23장의 내용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어떤 이들은 23장에서 25장의 내용을 하나의 단위로 묶어서 보기도 한다.
          그러나 23장은 특히 서기관과 바리새인들 즉 유대체제를 대표하는 사람들에 대한 심판의 선포인 반면 24, 25장은 제자들에 대한 사적인 가르침이라는 면에서 23-25장까지를 하나의 단위로 묶는 것은 무리가 있다.
          그러나 반면에 23장의 내용을 이해하지 않고는 24장의 내용을 제대로 이해할 수 없다.
          왜냐하면 예루살렘의 심판에 대한 배경이 되는 것이 바로 23장의 내용이기 때문이다.
          마태가 바라 본 예루살렘은 서기관과 바리새인들로 대표되는 전통적인 유대체제를 상징한다.
          23장은 당시 유대체제의 핵심부에 있었던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의 위선을 통렬하게 비판하시는 예수님의 언설들이 제시되고 있다.
          더 나아가 23장 마지막 부분에 가서는 자신을 거부한 예루살렘에 대한 예수님의 심판 선언이 나타나고 있다.
          37-39절을 보면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선지자들을 죽이고 네게 파송된 자들을 돌로 치는 자여 암탉이 그 새끼를 날개 아래 모음 같이 내가 네 자녀를 모으려 한 일이 몇 번이냐 그러나 너희가 원치 아니 하였도다 보라 너희 집이 황폐하여 버린 바 되리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제부터 너희는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할 때까지 나를 보지 못하리라 하시니라’ 고 기록되어 있다.

          즉 마태가 바라 본 예루살렘은 유대체제의 지배계층들의 위선의 집합소요 부패의 온상이었으며 이스라엘을 왜곡된 길로 인도하는 세력이었다.
          하나님을 알려주고 백성들을 바른 길로 인도하여야 했으나 오히려 하나님의 사람인 선지자들을 죽였다.
          더 나아가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죽였다.
          그들을 향한 하나님의 심판은 자명한 것이었다.
          하나님의 뜻을 저버리고 예수를 거부한 예루살렘은 심판을 받는다.

          요세푸스에 의하면 셀롯당원들이 제사장들을 학살함으로써 성전을 더럽혔고 그 결과 로마군과의 충돌이 일어났다.
          이 사건 이후 그리스도인들은 예루살렘을 피해 흩어지게 되었다.
          초대 교회 역사가들은 그리스도인 선지자들이 유대 그리스도인에게 이 때에 예루살렘을 떠나 피신하도록 경고했다고 한다.
          성전은 주후 70년에 로마군에 의해서 멸망되었다.
          로마군은 성전에 불을 지르고 그 자리에 자신들의 군기를 세웠다.
          이 군기에는 로마황제의 휘장이 새겨져 있었는데 당시 로마황제는 신으로 섬겨지고 있었다.
          그들은 예루살렘 정복 후 이 기장에 제물을 드렸다. 요세푸스에 의하면 예루살렘이 포위되자 상황이 너무 어려운 나머지 일부 여인들은 자식을 먹기 까지 했다고 한다.
          겨울철은 더욱 어렵다.
          겨울엔 계곡의 물줄기가 불어나 건너가기가 어려웠다.
          예루살렘을 빠져나간 피난민 중 일부는 실제로 겨울에 로마군의 공격을 피하려다 계곡의 물줄기에 막혔고 시간을 끌다가 살해를 당하기고 했다.
          안식일은 통행수단의 사용이 제한되었고 통행거리도 제한을 받았다.
          그리고 셀롯당의 광적인 애국자들은 예루살렘을 빠져나가도록 허락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렇다면 마태가 그리고 있는 환난과 심판의 대상은 누구인가?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거절한 예루살렘이다.
          즉 예루살렘 성전 멸망의 교훈은 비그리스도인에게는 회개를 그리스도인들에게는 복음 전파의 시급성을 깨닫게 해준다.
          마태복음 24장은 예루살렘의 멸망을 통해 최후의 심판 날에 대한 무서운 결과 즉 예수님을 거절한 예루살렘이 당하게 될 재앙들을 보여줌으로써 마지막날에 예수그리스도를 거절한 사람들이 당하게될 무서운 심판을 보여주고 있다.

          마태의 공동체는 이 기록을 읽고 복음 전도의 시급성을 깨달았을 것이다.
          이는 24장 이후 25장의 내용을 읽어 보면 더욱 확연하게 드러난다.
          마태복음의 종말론에서 보여지는 환난과 재앙들의 1차적 대상은 그리스도인이 아니다.
          오히려 그리스도인들은 그러한 환난의 때에 보호받는다. (22:24)
          또한 복음은 위축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온 세상에 전파된다. 종말에 대한 두려움을 조장하는 것이 마태복음의 종말론의 목적이 아니다.
          그것은 이 후 종말론의 맥락에서 이어지는 일련의 비유들을 통해 선명하게 드러날 것이다.

          마태복음 24장에 나타난 종말론의 핵심 메시지는 이미 시작된 종말의 시대 가운데에서 그리스도의 제자들이 어떠한 ‘삶’을 살아가야 할 것인가 하는 것이다.

          첫째 종말은 예루살렘의 파멸과 더불어 시작되었다.
          예루살렘의 파멸은 유대전통의 파멸을 의미한다.
          그것은 복음을 가진 공동체가 더 이상 유대체제 안에 머물러 있을 수 없으며 새로운 시작이 전제 되어야 함을 말해준다.
          유대 그리스도인들은 기존의 유대체제와는 결별을 선언하여야 했다.

          둘째 복음은 전 세계를 향해 전파되어야 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왜냐하면 복음이 온 세상에 전파되어야 주님이 오실 것이기 때문이다.
          유대체제와 결별을 선언한 기독교 공동체는 유대체제 안에 더 이상 머물러 있으면 안된다.
          복음은 이제 유대를 넘어 온 세계로 전파되어야 한다.

          셋째 예루살렘의 파멸이 우리에게 보여주는 것은 그리스도를 거부한 사람들이 겪게될 마지막 날 심판의 고통이다.
          이는 제자들로 하여금 복음전도의 사명을 일깨운다.

          넷째 심판의 대상은 그리스도인이 아니라 복음을 믿지 않고 받아 들이지 않은 사람들에 대한 것이다.
          하나님은 심판의 와중에 그리스도인들을 보호하실 것이다.
          그러므로 말세의 심판 가운데에서 두려워 하지 말라.
          여호와께서 보호하실 것이다.


          5. 종말을 기다리는 제자의 삶

          마태복음 24장과 25장의 말씀은 하나의 독립된 수사단위이다.
          이들은 종말에 대한 내용을 다루고 있다.
          그러므로 25장의 달란트 비유를 포함한 모든 말씀들은 종말론적 관점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25장의 내용을 보면 마태의 공동체 안에 예루살렘 성전의 파괴로 말미암은 여러 부류의 생활양식들이 출현했음을 알 수 있다.
          일상생활에 매여 자신의 직무에 최선을 다하지 않고 있는 사람들(24:37-51), 주님 오실 날이 언제 일지 자기 나름대로 확신을 갖고 재림이 지체될 경우를 대비하지 않고 있는 사람들(25:1-13), 복음을 듣고 신앙 공동체로 나아왔으나 대가를 지불하지 않고 있는 사람들(25:14-30), 자신의 재산을 움켜쥐고 가난한 사람을 돌보고 있지 않는 사람들이다(25:31-46).

          노아 홍수 때의 비유(24:37-51)는 그 때와 시를 알 수 없다는 점을 강조하기 위해 기록되었다.(36절)
          홍수 때에 멸망당한 이들은 자신들에게 임박해있는 분명한 심판의 징조에도 불구하고 먹고 마시고 시집가고 장가가는 일상에 매여 하나님의 심판을 깨닫지 못하고 죽어 갔다.
          마태복음은 일상을 거부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한 사람은 구원을 얻고 다른 한 사람은 심판을 받는 장소가 똑 같이 일상적인 삶의 영역인 ‘밭’과 ‘매’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마태복음은 일상의 노예가 되어 하나님의 왕국에서의 자신의 직무를 다하지 않는 제자의 삶을 엄중히 경계한다.
          일상의 삶을 살면서도 어떤이는 깨어서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는 삶을 살고 어떤 이는 일상의 노예로 산다는 것이다.
          이것은 충성되고 지혜있는 종의 비유로 이어지는데 여기에서는 자신의 직무를 다하지 않는 종이 등장한다.
          그 때와 시를 알 수 없기 때문에 우리는 제자로서의 직무를 다하여야한다.
          주인이 다시 와서 자신의 직무를 다하고 있는 지를 불시에 확인하실 것이기 때문이다.
          본문이 우리에게 제시하는 깨어있는 제자의 삶이란 ‘때를 따라 양식을 필요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는 일’ 즉 사람을 섬기고 양육하는 일이다.
          우리는 그 시와 때를 알 수 없기 때문에 일상의 삶을 살며 그것을 초월하여 하나님의 왕국의 직무 즉 사람을 섬기고 양육하는 일에 깨어 있어야 한다.

          열 처녀 비유 역시 강조점은 ‘그 시와 때’를 알 수 없다는 것이다.
          시와 때를 알 수 없다는 점을 근거로 하여 이 비유를 해석하면 어리석은 다섯 처녀가 기름을 준비하지 않은 이유는 신랑이 그들의 예견대로 ‘속히’ 올 것이라고 예단했기 때문이다.
          아마도 이들은 주님이 곧 오실 줄 알고 자신의 모든 소유를 팔았거나 직업을 때려 치운 사람들일 것이다.
          기름의 의미는 다양하게 해석되지만 본문에서는 신랑이 더디 오더라도 맞이 할 수 있는 ‘준비되어 있는 삶’이라고 보는 것이 정당할 것이다.
          즉 종말을 살아가는 제자의 삶은 단기전이 아니라 장기전으로 준비되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그 때와 시를 알 수 없기 때문이다.

          달란트 비유는 앞의 두 비유와는 조금 다른 강조점을 가진다.
          앞의 두 비유는 ‘시와 때’를 알 수 없다는데에 그 강조점이 있지만 달란트 비유는 ‘오랜 후에’(19절) 주인이 필연적으로 돌아와 결산한다는데 그 강조점이 있다.
          그러므로 제자들은 자신이 받은 능력에 상관없이 결산을 요구받게 될 것이다.
          자신은 그 만한 능력을 부여받지 못했기 때문에 하나님의 왕국을 위해 살 수 없었다거나 시간과 재물이 없어서 하나님을 위해 열매를 맺지 못했다는 핑계를 아무도 할 수 없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아무리 적게 받은 사람도 금 한 달란트 이상을 받았기 때문이다. 이는 당시 노동자가 일만일을 일하여 번 임금의 양이었다. 즉 아무리 적게 받은 사람이라도 하나님의 왕국을 위해 일할 수 있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왕국은 그 자체로 매력적이다. 많은 이들이 복음과 기독교 공동체를 접하고 교회의 구성원이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 중에는 하나님의 왕국 가까이에는 왔지만 대가를 지불하지 않는 사람들, 헌신하지 않는 이들이 있었다. 마태는 그들에게 그들의 삶은 반드시 주인 앞에서 결산하게 될 것이라고 경고하고 있다.

          마지막으로 양과 염소의 비유도 종말을 기다리며 살아가는 제자의 삶이 어떠해야 하는 가를 말해주고 있다. 여기서도 중요한 것은 시와 때에 대한 것이 아니다. 중요한 것은 주님을 섬기는 일인데 우리는 가난하고 소외된이들을 섬김으로 주님을 섬기는 삶을 살 수 있다는 것이다. 종말을 기다리며 사는 제자는 이 땅의 약자들을 위해 삶을 헌신해야 한다는 것이다.

          초대교회 공동체는 예수님의 임박한 재림을 믿었다. 그런데 종말의 상징으로 여겨졌던 예루살렘 성전의 파멸에도 불구하고 주님은 오시지 않았다. 이에 따라 기독교 공동체안에는 여러 가지 혼란스러운 일들이 발생했다. 복음서의 기록자들은 예수님의 종말에 관한 말씀들을 다시 정확하게 이해해야 했다. 그리고 그 말씀들이 의미하는 바를 그들의 공동체에 설명해야 했을 것이다. 마태복음은 이러한 ‘지연된 종말’을 예수님의 공생애 기간 동안의 가르침으로 이해시키려는 시도를 하고 있다. 종말론에 관한 마태의 기록은 원래 예수님의 가르침인가? 아니면 후대에 복음서 기자에 의해 창작된 것인가? 원래 예수님의 가르침이었는데 마태의 시대에 가서야 보다 더 정확하게 이해된 것이라고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 예루살렘 파멸에 관한 예언 기사는 공관복음 모두에서 발견되기 때문이다. 특히 마태복음의 기록은 다른 복음서들과 비교해볼 때 매우 조직적이며, 더욱 교훈적이다. 그 이유는 아마도 마태복음의 기록연대와 관련이 있을 것이다. 마태복음의 예루살렘 성전 파괴에 대한 자세한 기록은 성전 파괴 이 후에 기록된 것으로 보아야 할 듯 하다. 이러한 혼란의 와중에 마태복음 25장은 그리스도의 제자들이 이미 시작된 종말과 아직은 오지 않은 종말의 사이에서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 가를 제시한다.

          첫째, 예수의 제자들은 일상의 노예가 되어 자신의 직무를 소홀히 해서는 안된다.
          예수의 제자들은 ‘때를 따라 양식을 그 집 맡은 사람들을 위해 나누어 준다“.

          둘째, 예수의 제자들은 주님이 오시는 날을 속단해서는 안된다.
          예수의 제자들은 그들이 원하는 때에 오시지 않더라도 맞을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 우리는 지금 ‘계속’ 준비되어 있어야 하는 것이다.

          셋째, 예수의 제자들은 자신의 능력, 재물, 시간의 부족으로 하나님의 왕국을 위해 열매 맺는 삶을 살지 못했다고 핑계할 수 없다.
          주인은 충분히 그 분을 위해 살 수 있을 만큼의 능력을 주신다. 마지막 날에 우리는 우리가 받은 것으로 하나님의 왕국을 위해 무엇을 했는 지 결산하게 될 것이다. 제자는 하나님의 왕국을 위해 기여한다.

          넷째, 예수의 제자들은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을 위해 헌신하는 사람들이다.
          주님이 오시는 그 날 까지 제자들은 가난한고 소외된 사람을 섬김으로 주님을 섬긴다. 주님이 계시지 않는데 어떻게 주님을 섬기는가? 가난하고 헐벗고 굶주린 사람들을 섬기므로 우리는 주님을 섬길 수 있으며, 그 분과 함께 있을 수 있다. 주님은 그들의 모습으로 우리와 함께 계신다.


          6. 다른 복음서와의 비교

          마태복음이 인용하고 있는 마가의 기록과 마태복음의 병행구절을 비교해보자.

          마가복음 13장 1-37절은 마태복음 24, 25장과 동일한 예수님의 말씀을 기록하고 있다.
          (누가복음도 비교적 마가의 순서를 따르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므로 본고에서는 마가복음과의 비교를 통해 마태복음의 종말론의 독특성을 드러내 보이겠다.) 그러나 전 후 문맥과 그 강조점에서 볼 때 마태복음의 그것과는 확연한 차이를 보인다. 이 차이점들은 마태복음의 종말론을 독특한 것으로 만들어 주고 있다.

          첫번 째 차이점은 마태복음에서는 예루살렘의 파멸이 부패한 유대전통과 예수님을 거부한 것에 대한 심판이라는 맥락에서 설명되고 있는 반면 마가복음에서는 그러한 전 문맥의 설명적 진술이 결여되어 있다는 점이다.
          이는 마태가 예루살렘에 대한 심판이 부패한 유대전통, 유대지배 체제에 있다는 점을 분명히 하고 있다는 것을 말해준다.

          두번 째 차이점은 마가복음에서는 종말에 대한 예수님의 말씀 이 후에 관련된 교훈적인 비유가 이어지지 않는다.
          마가복음 13장 이후 14장 1, 2절을 보면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예수님을 잡아 죽일 계략을 꾸미는 장면이 이어지고 있다.
          즉 마가복음에서는 예수님의 유언과도 같은 말씀으로 제시되고 있는 반면 마태복음에서는 종말을 살아가는 그리스도의 제자로서의 삶이 강력하게 제시되고 있는 것이다.

          7. 바울서신과의 비교

          바울서신에서의 종말론은 주로 공동체 내부에서 발생한 문제들과 관련이 있다.
          바울의 종말론은 고린도 전, 후서, 데살로니가 전,후서를 통해 살펴 볼 수 있다.
          고린도 전, 후서에서의 종말과 관련된 진술들을 살펴보면 주로 죽은 자의 부활과 관련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고린도 전서 15장은 신자의 부활을 부인하는 어떤 사람들에 대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사건으로 신자의 부활을 증거하는 내용으로 구성되어 있다.
          고린도 후서에서도 바울은 후패한 몸을 벗고 새로운 생명의 몸을 덧입게 될 것을 소망하고 있다.(고후 4:16-5:10)
          바울에게 종말은 소망의 대상이며 기다림의 대상이다.
          바울은 종말을 ‘기다리며’ 현재를 ‘산다’.
          그러나 마태복음에서 제자들은 종말을 ‘살며’ 주님의 오심을 ‘기다린다’.

          종말에 관한 데살로니가 전후서에서의 강조점은 신자들이 종말에 관한 거짓된 가르침에 현혹되지 말 것을 당부하는 것이다.(살후 2:1-12)
          바울의 주된 관심은 성도들에게 종말에 대한 바른 관점을 가지게 하여 미혹되지 않게 하는데 있었다.
          종말에 관해서 바울은 ‘바르게 아는 것’을 더욱 강조 하였다면 그에 비해 마태의 관심은 종말의 시대를 ‘바르게 사는 가’에 관심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8. 결론

          위의 연구를 토대로 마태복음 종말론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마태복음 종말론은 특히 예루살렘 성전의 파멸과 깊은 관계가 있다.

          예루살렘은 하나님의 뜻을 거부하고 선지자들과 예수 그리스도를 거부하고 죽인 전통적인 종교지배체제를 의미한다.
          예루살렘의 파괴는 그러한 유대체제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다.
          마태복음의 공동체였던 유대 그리스도인들은 더 이상 전통적인 유대체제 안에 머물러 있을 수 없었다.
          그들은 심판받은 유대체제를 넘어서 복음을 들고 온 세계로 나아가는 선교적 공동체가 되어야 했다.
          그런 의미에서 마태복음의 종말론은 선교적이다.

          둘째, 마태복음의 종말론은 이미 시작된 종말의 시대를 ‘오늘’ ‘여기서’ 어떻게 살 것인가에 주요한 관심이 있다.

          예루살렘 성전은 파괴되었고 주님은 다시 오시지 않았다.
          그렇다면 지금 우리는 여기에서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에 대한 답변이라는 것이다.
          그 삶은 일상의 삶을 살되 일상의 노예가 되지 않고 하나님의 왕국의 일꾼으로서 열심히 말씀을 전파하고 맡은 사람들을 돌보는 삶이다. 또한 그 삶은 종말을 의식하며 살되 늘 준비된 것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삶은 오실 주님을 기다리며 기꺼이 헌신의 대가를 지불하는 삶을 사는 것이며 주님 오시는 그날 까지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을 돌보며 사는 삶이라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마태복음의 종말론적 삶은 철저하게 종말이 현재화된 삶인 것이다.

          셋째, 마태복음의 종말론은 제자로서의 ‘삶’에 강조점을 둔다.

          우리는 우리의 삶과 행위로 주님이 다시 오시는 신앙을 나타내 보여 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가 종말론적 신앙를 가졌다면 그것은 오늘 우리의 삶에 영향을 미치는 것이어야 한다.
          우리는 참으로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오시는 종말을 믿으며, 그 종말을 의식하며 사는가?.


          참고문헌

          France, R. T. Tyndale new testament commentary: Matthew.: Grand Rapid: IVP,1987.

          Keener, Craig s. The ivp bible background commentary. IVP. 1993. 「IVP성경배경주석 신약」. 정옥배외 역 서울: IVP.1998.





          마태복음 24장은 "묵시강화, 소묵시록"으로 불리는 장으로,

          이 내용은 신약성경의 다른 묵시적인 내용들 안에서,

          더 넓게는 B.C 200-100년 사이에 셀류커스 왕조의 핍박으로 인해

          왕성하게 일어났던 유대 묵시문학이라는 틀 안에서 읽는 것이 좋다.

          마태복음이 기록되던 시기에 대해서 의견이 갈리지만, 

          대체로 A.D 70-80년 사이에 기록된 것으로 본다.

          잘아는대로 A.D 70년경 로마군에 의해 예루살렘이 멸망되었고, 예루살렘 성전이 파괴되면서

          초대교회의 자리인 유대 땅은 혼란스러운 격변기의 상황에 처하게 된다.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예루살렘 성전 파괴는 하나님의 심판으로 이해되어 왔다.

          바울에 의해서 이방인 선교가 활발하게 진행되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기독교인들은 여전히 유대인이었다는 점에서

          예루살렘 멸망과 성전 파괴에 대해 재해석이 필요하던 시기였다.

          이러한 시기에 마태는

          구약성경에 예언되어진 종말에 대한 말씀을 토대로

          예수님께서 예언하셨던 말씀들을 그의 복음서에 기록하면서

          이 대격변기의 시기에 교회와 성도가 가져야할 신앙 태도에 대해 권면하고 있다. 



          이 묵시록의 초점은 천국의 비밀이나, 재림의 날짜를 드러내려는 것이 아니다.

          (재림의 날짜는 예수님도 몰랐고, 천사장도 모르며 오직 하나님이 아시는 것이다.

          그러니 성경의 구절을 나름 연구하여 재림 날짜를 알아내려는 시도는 잘못된 것이다.)

          이 묵시록의 초점은 환난과 박해의 시기에 처한 교회와 성도들에게

          예수님께서 오셔서 그들을 구원해 주실 것이라는 소망을 불어 넣어 주고,

          신실한 신앙으로 환난과 박해를 견디며 이기도록 격려하기 위한 것으로 본다. 

          물론 이 묵시록이 당시의 상황에 대한 예수님의 예언 말씀인 동시에

          언젠가는 일어날 예수님의 재림과 심판을 동시에 예언하는 의미도 품고 있다. 

          먼저 24장은 예루살렘 멸망이라는 혼란을 틈타

          메시아를 자청하며 백성들을 미혹하는 불법의 상황에 대해 이야기 한다.

          이들은 모두 거짓 메시아이며, 이 일은 환난의 시작일 뿐이라고 하셨고,

          유혹과 박해에 넘어가지 말고 끝까지 견디라고 격려하셨다.

          "멸망의 가증한 것'은 마카비 왕조의 혁명을 불러온 성전 우상과

          칼리큘라 황제가 예루살렘에 세우려고 했던 우상과 같은 것들이다.

          거룩한 예루살렘 성전이 이러한 우상으로 유린당할 때 깨달은 것은

          곧 전쟁이 일어나 큰 환난이 닥칠 것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때에 예루살렘에 미련두지 말고

          산(공격당하는 도시보다 안전한) 곳으로 도망하라고 경고하셨다.

          이런 상황도 영원히 지속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택하신 자들을 위해 그 날을 감해 주신다고 하셨다.

          이러한 혼란과 박해의 상황에서 여전히 거짓 그리스도들이 일어날 것인데,

          분명히 알 것은 인자 즉 예수님의 재림은 부분적인 한 지역의 현상이 아니라,

          온 지구의 사람들과 우주가 볼수 있고 깨달을 수 있는 우주적인 현상이라고 하셨다.

          그러니 지구의 한 구석에서 일어나는 재림주는 다 거짓인 것이다.


          이 묵시록의 마지막 부분은 재림의 시기에 관한 것인데,

          무화과나무의 잎 비유를 통해 이 일이 분명하게 일어나는 것이라 하시면서도

          그 때는 아무도 모르고, 하나님 아버지만 아시는 것이라 하셨다.

          (이 일은 예수님도, 천사장도 몰랐으니, 하물며 사람들이 어찌 알수 있을까?)

          다만 예수님의 재림은 우리가 전혀 기대하지 않는 때에 분명히 일어날 일이니

          재림이 지연된다고 해서 방자하게 살지 말라고 경고하셨다.

          준비하지 않은 때에 오셔서 홀연히 사람들을 갈라 놓으실 것을 경고하시면서

          충성되고 지혜로운 종과 어리석고 악한 종의 비유를 주셨다.

          위임받은 종(교회의 지도자들)은 다시 오실 예수님의 재림을 사모하면서도

          때를 따라 양식을 나눠주는 일(목양하는 일)을 게을리해서는 안된다.

          예수님께 다시 오실 때에 충성스럽게 목양하는 지도자들을 복을 받아 누리지만,

          재림이 지연된다고 방자하게 살던 지도자들은 혹독한 심판을 받을 것이다.


          재림에 대한 거짓 사건들이 여러번 지나갔다.

          아마도 또 다른 재림주들이 등장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성경 말씀은 미래의 재림 사건에 초점을 맞추지 않고,

          오늘 우리의 신앙적인 삶에 초점을 둔다.

          마태복음 24장을 읽으면서

          박해와 환난의 종류는 다르나

          신앙으로 살아가기 만만치 않은 환경이 지속되는 이 땅에서 

          우리를 구원하셨을 뿐 아니라,

          지금도 우리와 동행하시는 다시 오실 주님을 사모하는 동시에

          이 땅에서 당당한 신앙으로 살아가도록

          격려하시며 지지하시는 말씀으로 이해할 수 있으면 좋겠다.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마태복음 25장
                                                                                                영벌과 영생(46절)


          천국과 지옥의 식사 시간 풍경

          어떤 사람이 천국과 지옥에서 식사하는 풍경을 구경하게 되었습니다.
          음식이나 환경이 전혀 다를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이상하게도 천국과 지옥에서 먹는 음식은 모두 같았습니다.
          그리고 굉장히 긴 젓가락을 쓰는 것도 같았습니다.
          밥 먹는 시간이 되자 드디어 천국과 지옥의 차이점이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지옥에서는 밥을 먹으려고 긴 젓가락으로 음식을 각자 자기 입에 넣으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긴 젓가락 때문에 먹을 수가 없어 서로 짜증을 내며 아우성이었습니다.
          그런데 천국에서는 그 긴 젓가락으로 맞은 편에 앉아 있는 사람을 다정하게 먹여 주면서 식사하는 것이었습니다.
          보기에도 너무도 평화롭고 즐거운 식사시간이었습니다.

          이 이야기는 나보다 다른 사람을 먼저 생각하고 행동할 때 행복의 기초가 세워짐을 말해 줍니다.


          세상에는 눈물뿐이고 고통만 닥쳐와도
          내 심령은 예수님으로 기쁜 찬송 부르네
          나는 예수님으로써 참 만족을 누리네
          세상 영광 다 준대도 주님과 못 바꾸네

          한숨 쉬는 불행이 변해 기쁜 찬송 부르니
          괴로움을 주던 환경이 천국으로 변했네
          나는 예수님으로써 참 만족을 누리네
          세상 영광 다 준대도 주님과 못 바꾸네

          금은보화 다 준다 해도 예수님만 못하며
          명예 지위 훌륭한 대도 주님만은 못하다
          나는 예수님으로써 참 만족을 누리네
          세상 영광 다 준대도 주님과 못 바꾸네

          속지 마라 세상 허영에 마음 뺏기지 마라
          세상 것은 일장의 춘몽 물거품과 같도다
          나는 예수님으로써 참 만족을 누리네
          세상 영광 다 준대도 주님과 못 바꾸네



          러시아의 대문호 톨스토이의 단편 중 ‘사랑이 있는 곳에 신이 있다’라는 소설이 있습니다.
          소설의 주인공 마틴은 아내와 자녀를 먼저 보내고 외로운 인생을 살고 있었습니다.
          어느 날 마을 노인의 격려를 듣고 성경을 읽던 중 ‘내일 거리를 내다보아라. 내가 너에게 가겠다.’라고 말씀하시는 예수님의 음성을 듣게 됩니다.

          다음 날 마틴은 늙은 청소부와 함께 차를 마시고, 아기를 안은 젊은 여인에게 식사를 대접했고, 할머니와 소년이 다투는 것을 화해시켰지만 정작 오겠다던 예수님은 만나지 못합니다.

          잠들기 전 성경을 편 마틴의 눈에 예수님이 나타납니다.
          마틴은 ‘오늘 왜 안 오셨어요?’라고 묻습니다.
          그러자 낮에 만났던 청소부와 여인과 소년의 모습이 눈 앞에 나타나며 다음과 같은 예수님의 음성이 들려옵니다.
          “마틴, 내가 세 번이나 너를 찾아갔는데 아직도 나를 못 알아 보겠느냐?”
          그때 마틴이 펼쳐 둔 성경에 오늘 말씀의 요절인 마태복음 25장 40절이 적혀 있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재림하신 후에나 만나게 될 수 있을까요?
          아니요. 어쩌면 예수님은 이미 수 없이 우리를 찾아오셨는지도 모릅니다.
          다만 우리에게 알아차릴 눈이 없었는지 모릅니다.

          “인자가 자기 영광으로 모든 천사와 함께 올 때에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으리니(31)”
          예수님께서 처음 세상에 오실 때는 어떤 모습으로 오셨습니까?
          연약한 한 아기의 모습으로 아무도 모르게 조용히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머리 둘 곳 없는 가난한 삶을 사셨습니다. 종이 되어 섬기는 인생을 사셨습니다.
          예수님이 오신 목적이 우리의 구원에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 다시 오실 때는 어떤 모습으로 오실까요?
          재림하실 예수님은 초림 때와 전혀 다른 모습으로 오십니다.
          큰 나팔소리와 함께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오실 것입니다. 그리고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으실 것입니다. 이 보좌는 임금의 보좌이며 동시에 심판하는 재판장의 보좌입니다. 심판의 대상은 모든 민족입니다. 그들을 자기 앞에 모으시고 각 사람을 목자가 양과 염소를 구분하듯 하실 것입니다(32). 여기서 말씀의 제목인 양과 염소의 비유가 나왔습니다. 양은 한 곳으로 몰려드는 습성이 있다고 합니다. 이 때문에 서로 부딪치거나 걸려 넘어지는 일들이 자주 생기기 마련입니다. 반면 염소는 누가 가까이 있는 것을 싫어해 밀쳐냅니다. 그래서 목자는 양떼들 사이 사이에 염소를 섞어 흩어지게 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밤이 되면 양과 염소를 각각 분리해 양은 밖에 두고 염소는 안으로 들였습니다. 왜냐하면 양은 서늘한 곳을 좋아하는 반면 염소는 추위에 약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사람을 양과 염소로 나눈 후 양은 오른편에, 염소는 왼편에 두신다고 하십니다. 여기서 오른쪽은 영광스럽고 존귀한 자리를, 왼쪽은 저주와 수치의 자리를 뜻합니다. 그래서 당시 공회에서 판결할 때 무죄인 사람은 오른쪽에, 유죄인 사람은 왼편에 세웠다고 합니다. 재림하신 예수님도 재판장으로서 모든 사람에게 누가 의인인지, 누가 악인인지 판결을 내리실 것입니다. 양 아니면 염소, 오른쪽 아니면 왼쪽입니다. 중간은 없습니다. 이 판결은 온 우주의 최고 법정에서 존엄하신 재판장이 내린 최후의 판결이기 때문에 번복될 수 없고 재심의 여지도 없습니다.

          최근에 법무장관과 검찰총장 간의 대립이 점점 더 심각해지고 있습니다. 양측은 저마다 다 자신이 정의의 편에 서 있고 상대방이 불법과 편법을 저지르고 있다고 비난하고 있습니다. 이 입장에서 서로 조금도 물러설 뜻이 없어 보입니다. 양쪽의 지지자들이 아무리 우리가 옳다고 목소리를 높여봐야 소용이 없습니다. 결국 이 싸움의 승패는 ‘법원에서 누구의 손을 들어주느냐’에 따라 갈리게 되어 있습니다. 사람들은 저마다 다 내 생각이 맞고 내가 가는 길이 옳은 길이라고 주장합니다. 똑 같은 것을 놓고 어떤 사람은 검다고 하고 어떤 사람은 희다고 합니다. 이 둘 중에 누가 맞는지 끝까지 따져서 결론을 내보자 하는 것이 모더니즘입니다. 아무리 따져도 결론이 안 나고 싸움만 커졌습니다. 그래서 너도 맞고 나도 맞고 모두가 다 맞은 것으로 하자는 것이 포스트 모더니즘입니다. 우리는 포스트 모더니즘의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참과 거짓의 경계가 애매모호하고 의와 불의를 상대적으로 생각합니다. 어디가 오른쪽인지 왼쪽인지 모르겠고 양과 염소가 마구 뒤섞여 있습니다. 이 시대의 특징은 판결을 내려줄 재판장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말씀은 의로우신 재판장이 세상에 오실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 재판장은 바로 예수님입니다. 누구도 이 심판을 피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우리 각 사람의 인생 전체를 종합적으로 보시고 판결하실 것입니다. 예수님의 판결은 지극히 공정하고 오류가 전혀 없을 것입니다. 단호하고 명확할 것입니다. 이 판결에 따라 양이냐 염소냐 오른쪽이냐 왼쪽이냐 영생이냐 영벌이냐 우리의 영원한 운명이 결정됩니다. 재판에서 중요한 것은 재판장이 판결을 내리는 기준이 무엇인가를 아는 것입니다. 열심히 산다고 전부가 아닙니다. 열심히 산 것이 의로움을 보증하지 않습니다. 판결 기준도 모르고 엉뚱한 곳에 노력을 기울여 봐야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시험을 잘 보려면 출제자의 의도를 파악해야 하는 것처럼 우리가 정말 인생을 잘 살고 싶다면 재판장이신 예수님의 판결 기준이 무엇인지를 알아야 합니다. 그러면 최후의 심판대 앞에서 예수님의 판결 기준이 무엇일까요?

          최후 심판 날에 임금이 그 오른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렇게 선포합니다. “내 아버지께 복 받을 자들이여 나아와 창세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예비된 나라를 상속받으라(34)” 요즘 같은 세상에서 서울에서 아파트 한 채라도 상속을 받으면 대박 난 것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하나님께서 창세로부터 그들을 위해 맞춤형으로 예비하신 나라를 상속받게 되다니 참 놀랍습니다. 오른편에 있는 자들이 이런 큰 복을 받게 된 이유가 무엇입니까?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였고 헐벗을 때에 옷을 입혔고 병들었을 때에 돌보았고 옥에 갇혔을 때에 와서 보았느니라(35,36)” 이에 의인들은 어떻게 대답했습니까? “이럴 줄 알았습니다. 다 예상했던 바입니다.” 이렇게 말했나요? 아닙니다. 그들의 반응은 다음과 같습니다. “주여 우리가 어느 때에 주께서 주리신 것을 보고 음식을 대접했으며 목마르신 것을 보고 마시게 하였나이까 어느 때에 나그네 되신 것을 보고 영접하였으며 헐벗으신 것을 보고 옷입혔나이까 어느 때에 병드신 것이나 옥에 갇히신 것을 보고 가서 뵈었나이까(37-39)” 이 말이 자신들이 누군가를 돌본 적이 전혀 없다는 뜻은 아닙니다. 다만 주님을 직접적으로 섬긴 기억은 없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너무 의외라는 반응입니다.

          이에 대해 예수님은 어떻게 답변하셨습니까?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40)” 여기서 예수님은 지극히 작은 자 한 사람과 자기 자신을 동일시하고 계심을 분명히 나타내셨습니다. 마치 작은 자 한 사람을 자신 몸의 일부분인 것처럼 말씀하고 계십니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 것은 여기가 처음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어린 아이 하나를 영접하면 곧 나를 영접함이라고 하신 적이 있습니다(18:5). 또 사도행전 9장에 보면 예수님은 바울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나는 네가 박해하는 예수라” 여기서도 예수님은 박해 받는 교회를 자신과 동일시하셨습니다. 왜 이처럼 예수님은 지극히 작은 자와 자신을 동일시하셨을까요?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처음 오실 때 지극히 작은 자로 오셨기 때문입니다. 태어나실 때부터 사람들에게 이리 저리 치여 결국 마구간 구유 위에서 탄생하셨습니다. 갈릴리 나사렛 출신 촌 사람이라고 무시당하고 가방 끈이 짧다고 인정받지 못하는 수모를 겪으셨습니다. 마침내 억울하게 고발당하시고 십자가에서 죽임을 당하셨습니다. 본래 지극히 크신 분이 이렇게 스스로 지극히 작은 자가 되어 그들의 고통에 동참하셨습니다. 또한 그들을 돌보고 섬기셨습니다.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식사하시고 나병환자, 중풍병자, 귀신 들린 자를 불쌍히 여기시고 고쳐 주셨습니다. 지금 예수님은 어디 계십니까? 승천하여 하나님 보좌 우편에 계십니다. 우리는 우리 주님의 고생은 다 끝났고 더 이상 고통도 눈물도 없는 곳에서 마음 편히 계신 줄로 여기기 쉽습니다. 주님은 하늘에 계시기에 이 땅의 성도들이 아무리 주리고 목마른 상태에 있어도 그것은 우리 문제일 뿐 주님과는 상관이 없다고 여기기 쉽습니다. 그러나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여전히 이 땅의 지극히 작은 자들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들이 주릴 때 주님도 배고픔을 느끼십니다. 그들이 목마를 때 주님도 목마름을 느끼십니다. 그들이 병에 걸려 신음할 때 주님도 고통을 느끼십니다. 그때 누군가 그들에게 다가가 먹이고 목을 축이게 하고 옷 입히고 영접해 준다면 그때 주님의 심정은 어떻겠습니까? 무척 고맙게 여기실 것입니다. 매우 기특하게 보실 것입니다.

          그러면 ‘너희 가운데 지극히 작은 자’는 구체적으로 누구를 가리킬까요? 
          첫째는 교회 공동체 안에 어려움에 처한 신자들을 가리킵니다. 물질이 없어 가난한 사람들, 일정한 거처가 없이 떠돌아다니는 나그네들, 병든 사람들, 옥에 갇힌 신자들입니다. 이들은 세상 어느 곳에서도 환영을 받지 못합니다. 곁에 있는 곳조차 부담스럽게 여깁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들을 무시하고 따돌립니다. 반면에 부자들은 어디를 가나 환영을 받습니다. 학식이 많고 지위가 높은 사람들은 존경을 받습니다. 사람들은 이런 사람들을 환영하고 잘 대접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인정하시고 칭찬하는 사람은 누구입니까? 지극히 작은 자들을 돌본 사람들입니다. 재판장이신 예수님의 판결 기준이 무엇입니까? 작은 자들, 어려움에 처한 자들을 관심을 가지고 돌봐 주었느냐 그렇지 않느냐 입니다.
          둘째는 주와 복음을 위하여 스스로 지극히 작은 자가 된 사람들입니다. 이들은 선교사와 복음 전도자와 사역자들을 가리킵니다. 이들은 얼마든지 세상에서 큰 자가 될 수 있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주님이 주신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서 또 복음을 전하기 위해 스스로 작은 자가 되기로 결심한 사람들입니다. 사립 명문 휘튼 대학을 수석으로 졸업하고 나서 에콰도르 아우카 부족에게 복음을 전하러 갔던 짐 엘리엇 선교사, 미시시피에서 공주처럼 살 수 있었지만 한국 대학생들에게 성경을 가르치기 위해 단칸방에서 김치를 드셨던 사라 베리 선교사님, 모스크바, 오뎃사, 인도네시아 등등 세계 각 지역에 나가 계신 우리 선교사님들, 동역자들도 없이 외로이 고군분투하고 계시는 개척 센터의 스텝 목자님들이 바로 작은 자들입니다. 그들의 고통은 곧 주님의 고통이요 그들이 흘리는 눈물은 주님이 흘리는 눈물입니다.

          예수님은 이 모든 작은 자들을 향한 베풂과 나눔과 섬김을 냉수 한 그릇까지 하나도 빠트리지 않고 다 기억하십니다. 그리고 다시 오시는 날 반드시 보상해 주실 것입니다. 이 일을 행한 자들을 축복하시고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로 인도해 들이실 것입니다. 그런데 자칫 이 말씀을 행위로 구원을 얻게 된다는 뜻으로 오해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다 알다시피 구원은 행위로 얻는 것이 아닙니다. 구원은 오직 믿음으로 얻습니다. 그와 동시에 믿음은 반드시 행함의 열매를 맺습니다. 신자의 선한 행실은 참된 믿음을 가졌다는 외적인 증표입니다. 우리는 아무 자격이 없는 죄인인 나를 대신해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셨음을 믿습니다. 이런 믿음으로 구원 얻은 사람은 그 마음에 주님의 은혜와 긍휼에 대한 감동이 있습니다. 과거 이기적이고 심령이 메말랐던 사람도 이웃에 대한 사랑과 긍휼의 마음이 샘솟습니다. 그 마음 때문에 주리고 목마르고 나그네 되고 헐벗고 병들고 옥에 갇힌 사람들을 도저히 그냥 지나치지 못하고 돌보는 수고를 감당하게 됩니다. 자연스럽게 그렇게 되었기 때문에 이것이 선행이라는 자각도 없이 그런 삶을 실천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최후 심판 때 오른 편에 서게 될 사람들이 바로 이런 사람들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이 그렇게 하셨던 것처럼 지극히 작은 자들을 사랑하고 돌보는 삶을 살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주님께 받은 사랑으로 어려움에 처한 동역자들과 선교사님들을 사랑하고 섬길 수 있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그러면 다음으로 왼편에 있는 자들에게 임금은 어떤 선포를 했습니까? “저주를 받은 자들아 나를 떠나 마귀와 그 사자들을 위하여 예비된 영원한 불에 들어가라(41)” 그들은 앞서 창세로부터 예비된 나라에 들어가게 될 복 받을 자들과 대비가 됩니다. 그들은 왜 이런 심판을 받게 되었습니까?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지 아니하였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지 아니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지 아니하였고 헐벗었을 때에 옷 입히지 아니하였고 병들을 때와 옥에 갇혔을 때에 돌보지 아니하였느니라(42,43)” 이에 대해 왼편에 있는 자들이 반발했습니다. “주여 도대체 우리가 언제 그랬습니까? 한 번도 우리 앞에 나타나신 적도 없으면서 왜 그런 말을 하십니까?” 이에 대해 예수님께서 어떤 답변을 주십니까? “이에 임금이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하지 아니한 것이 곧 내게 하지 아니한 것이니라 하시리니(45)” 이번에도 예수님은 지극히 작은 자와 자신을 동일시하십니다. 지극히 작은 자에게 하지 아니한 것은 곧 내게 하지 아니한 것이라고 못을 박으셨습니다.

          사람들은 흔히 나쁜 짓을 저지른 사람이 지옥에 간다고 생각합니다. 예를 들자면 어제 교도소에 출소한 조두순 같은 사람은 반드시 지옥 갈 사람으로 여깁니다. 맞는 말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절반의 진실입니다. 오늘 말씀에서 왼편 사람들이 왜 저주를 받아 영원한 불에 들어가게 되었습니까? 어떤 악행을 저질렀기 때문이 아닙니다. 마땅히 해야 할 바를 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를 가리켜 법에서는 부작위의 죄라 부른다고 합니다. 우리 나라 형법에서도 처벌 대상이 됩니다. 예를 들어 의사가 환자를 보고도 정당한 사유 없이 진료를 거부하면 1년 이하의 징역이나 500만원 이하의 벌금에 처해지게 되어 있습니다. 이처럼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서는 부작위의 죄는 작위적인 죄와 마찬가지로 심각한 죄로 간주됩니다. 하나님 편에서 보면 하지 말라고 한 것을 한 것이나 하라는 것을 하지 않은 것은 다 똑 같은 죄입니다. 둘 다 하나님의 계명을 거스른다는 점에서 같습니다. 누가 복음에 부자와 거지 나사로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한 부자가 있어 자색 옷과 고운 베옷을 입고 날마다 호화롭게 즐겼습니다. 그런데 나사로라 이름하는 한 거지 거지가 헌데 투성이로 그의 대문 앞에 버려졌습니다. 이때 부자는 나사로를 그대로 방치해서 결국 죽음에 이르게 하였습니다. 죽은 뒤 나사로는 아브라함의 품에 안겼습니다. 반면 부자는 죽은 뒤 음부에서 고통을 받게 되었습니다. 부자는 크게 후회했지만 이미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너 버린 뒤였습니다. 이를 통해 우리는 지극히 작은 자 한 사람을 돌보는 것이 신자의 의무라는 사실을 배우게 됩니다. 가급적 하면 좋고 안 해도 그만인 선택 사항이 아닙니다. 우리가 정말 신자라면 강도 만난 사람을 보고도 그냥 지나쳤던 제사장이나 레위인처럼 되어서는 안 됩니다. 기름과 포도주를 상처를 싸매 주고 주막에 데려가 지극정성으로 간호하고 돈을 주면서 돌봐 주도록 부탁했던 사마리아 사람처럼 행해야 마땅합니다.

          “그들은 영벌에 의인들은 영생에 들어가리라 하시니라(46)” 24장부터 시작된 재림과 종말에 관한 예수님의 가르침은 최후의 심판에 대한 비유로 이렇게 막을 내렸습니다. 이 땅에서 우리 삶은 계속 엎치락뒤치락 합니다. 성공할 때도 있고 실패할 때도 있습니다. 사람들로부터 좋은 평가를 받을 때도 있고, 별로 또는 최악이라는 평가를 받을 때도 있습니다. 우리 삶에 참 중요한 부분들입니다. 그러나 궁극적인 것도 아니고 영원한 것도 아닙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최후의 심판에서 재판장이신 예수님으로부터 어떤 평가를 받느냐는 것입니다. 그때 우리는 양일까요? 염소일까요? 오른편에 서게 될까요? 왼편에 서게 될까요? 복을 받아 창세로부터 예비된 나라를 상속하게 될까요? 저주를 받아 예비된 영원한 불에 들어가게 될까요? 누가 영생 또는 영벌에 들어가게 될 것인지는 신비에 속해 있습니다. 우리들의 상식과 통념이 정반대로 뒤집어 지는 경우가 얼마든지 생길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 말씀에서 예수님은 우리에게 기준 한 가지를 명백하게 제시해 주셨습니다. 지극히 작은 자 한 사람을 대하는 것이 곧 예수님을 대하는 것입니다. 작은 자와의 관계가 곧 주님과의 관계입니다. 받은 달란트로 장사하는 것은 지극히 작은 자 한 사람을 섬기고 사랑하는 것입니다. 이제 곧 성탄절입니다. 성탄절은 지극히 작은 한 아기의 모습으로 비천한 구유에 오신 아기 예수님의 탄생을 기념하는 절기입니다. 이 성탄절이 작은 자와 함께 하는 성탄절이 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어려움에 처한 선교사님, 동역자들과 양들, 그리고 우리 주변의 이웃을 적극적으로 돌아보고 섬기는 성탄절이 될 수 있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영벌(永罰)과 영생(永生)의 차이는 예수님을 믿었느냐?
          아니면 예수님을 영접하지 않았느냐에 따라 나누어질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것은  예수님을 영접함으로 시작합니다. 
          예수님을 영접한 사람은 예수님의 마음으로 주린 자와 목마른 자와 나그네 된 자를 섬기는 것으로 표현합니다.

          예수님이 우리 앞에 나타나시면 누구든지 그 분을 섬길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우리 앞에 때로는 굶주린 자로 때로는 목마른 자로 때로는 나그네로  오신다면 그 사람을 섬길 수 있을까요?

          부지중에 천사를 대접한 아브라함의 이야기를 통하여 우리는  모든 일을 하되 주께 하듯하라는 가르침을 따라야 합니다. 

          영생을 얻으려고 의도적으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영생을 받은 자가 그 은혜가 너무 감사하고 고마와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도움이 필요한 자들을 마음에 품고 손과 발로 사랑해야 합니다. 

          지극히 작은 자를 섬김으로 예수님을 섬길 수 있습니다.
          섬김의 삶을 발전시켜야 합니다.
          섬기는 태도에서 온전하고 순전한 마음으로 주께 하듯 최선을 다하여 하겠습니다.
          영생은 훗날 천국에서 누릴 은혜가 아니라 이 세상에서 가장 작은 자와 함께 누려야 할 은혜라고 하겠습니다.

          영벌이란 영원한 형벌로 지옥에서 죄인들이 받는 벌을 말합니다. 
          그러나 지옥에서만 받는 벌이 아니라 이 세상에서 도움을 받아야 할 가장 작은 형제가 도움을 받지 못할 때 도움을 받지 못한 형제가 이 세상에서 지옥과 같은 아픔을 경험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 경험은 잠깐 이지만 훗날 심판 때에 도움을 주지 못한 사람은 영원한 영벌을 받아야 하지만 세상에서 아픔을 경험한 형제는 위로를 받게 될 것이라고 성경은 부자와 거지 나사로의 비유에서 분명하게 깨우치고 있습니다.

          영생(永生, eternal life)

          일반적으로 생명이라고 하면 죽음을 안고 있는 자연적인 생명을가리킨다.
          여기서 죽음은 인간이 겪는 당연한 것이 아니고 죄에 대한 결과로 이해해야 한다.
          따라서 참 생명이란 하나님께로부터 난 죽음에서 탈피된 불멸의 생명이다.
          이는 단순히 영원히 죽지 않는다는 차원이 아니라 죄의 문제로부터 해방된 구원의 생명을 가리킨다.
          구약에서 생명과 죽음은 하나님께로부터 유래되며, 생명은 하나님의 축복이요 교제이나, 죽음은 하나님으로부터의 단절로 이해되었다(참고, 출 32:32. 38:18),
          참된 생명은 장수와 행복을 누리며,이는 율법이나 지혜에 순종함으로써 영위할 수 있는것이었다.
          후대에 와서는 점차로 영생이 하나님의 선물인 영원한 생명이요, 죽음에 대한 승리로 이해되었다(시 49:15).
          신약에서 죽음은 죄에 대한 심판이요, 참 생명은 미래적이며 불멸하기 때문에 영원하고 구원과 결부된다(막 10:17. 롬 2:7. 갈 6:8).
          즉, 영생이란 인간이 그리스도를 믿고서 하나님과 새로운 관계에 들어가는 일로(요 17:3. 롬 5:21) 새로운 생명임과 동시에(요 5:24. 롬6:11. 요일 1:1-3) 마지막 날에 완성되는 것이다(요 6:40). '영생'이란 단어는 특히 요한이 사용한 표현에서 많이 언급되는데, 요한은 그리스도는 부활이요 생명이므로 그를 믿는 자들은 이미 믿음으로 생명을 소유하였고, 죽음에서 생명으로 옮겨졌다고 말한다(요 5:24-25).






          인생길에는 항상 갈림길이 있습니다.
          선택에 따라서 가는 길과 삶의 모습이 달라집니다.
          복된 길이라고 해서 평탄하고 저주의 길이라고 해서 걸림돌이 많은 것이 아닙니다.

          저주의 길에도 유혹하는 각가지 미끼로 일시적으로 형통한 것 같이 생각되어 질 때도 있다. 그래서 시작은 순탄하지만 중도에 도사리고 있는 각가지 걸림돌(사단의 올무)들 때문에 힘들어 하는 일들이 얼마나 많은가? 어느 종교에서는 고행의 길을 말한다. 참된 진리에 가르침을 받고 따라가는 것은 복된 길이며 기쁘게 순종하면서 따라가는 것이기에 결코 어떤 종교에서 가르치는 것과 같이 고행이 아니고 기쁨이 넘치고 소망의 길이다.

           

           

          어떤 종교에서는 고행을 강조한다. 생명의 종교는 결코 고행이 아니다. Daum 백과사전에서 (1)고행(苦行)이란 깨달음을 얻기 위해 또는 원망(願望)을 달성하기 위해 괴로운 수행을 하는 것이라고 했다. 즉 육체적 욕망을 없애고, 최고의 정신생활을 실현하기 위한 준열한 육체적 가책을 말한다고 했다.

           

          (2)고행이란 자기의 몸을 괴롭게 하고, 육체의 욕망을 억제하며 견디기 어려운 여러 가지 수행을 하는 것이며 이는 주로 외도들이 천상에 나기 위하여, 혹은 깨닫기 위하여, 또는 소원을 성취하기 위하여 행하는 정인(淨人)을 말한다고 했다.

           

          구약성경 시편에는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시 23:4)라고 한 표현에서 그리스도인들도 어둡고 힘든 골짜기와 같은 길로 가기도 한다. 신불신간에 사람들이 살아가는 길에는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와 같은 곳이다. 그러나 참된 신앙인들은 해(害)를 두려워하지 않는 배후에는 임마누엘의 신앙심 때문에 인내로 모든 문제를 극복하면서 살아간다.

           


          영벌(永罰, Eternal punishment)이란 한글 사전에서 "지옥에서 받는 영원한 벌" 이라고 정의합니다.
          토마스 아퀴나스에 의하면, 지옥의 영벌은 세상에서 지은 죄에 상응해야 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죄란 하나님을 등지고 하나님 외의 다른 것들을 마치 최후 목적인 양 추구하는 것으로 하나님을 잃어버린 형벌뿐 아니라 다른 것들로부터도 해(害)를 받는 형벌을 당해야 하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양과 염소’의 비유에서 염소는 ‘영벌’에, 양은 ‘영생’에 들어가라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마 25:46).
          요한일서에서는 두려움에 형벌이 있으며, 사랑은 이 두려움을 내어 쫓는다고 합니다(요일 4:18).
          영벌에 대한 다른 표현으로 ‘영원한 불’(마 18:8; 25:41; 유 1:7), ‘영원한 죄’(막 3:29), ‘영원한 결박’(유 1:6), ‘영원한 멸망’(살후 1:9) 등은 모두 비슷한 개념들로 표현합니다.

          영벌에 대해서 사람들이 가지는 정신적 혹은 신앙적으로 어떤 태도를 가져야 할 것인가를 간접적으로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그래서 윤리도덕과 관계되는 삶의 모습을 조심하라는 경고라고 생각되어 진다. 모든 사람들은 종교를 가지고 종교들이 가르치는 삶의 교훈에 귀를 기울이고 있다. 언행을 비롯해서 마음관리와 신앙의 바른 태도를 유지하기 위해서 종교행위를 바르게 가져보려고 노력하고 있다.

           

          아무리 종교심을 발휘해서 노력해도 분명한 것은 영벌(지옥)이 있고 하나님의 심판도 있다. 그 형벌을 피 할 수 있는 길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이시며 그 분만이 생명의 길이 되어 주시며 그 분 안에 복음을 통해 연합될 때 영생이 있다는 것이 중요한 것이다.

          영생(Eternal life)이란 단어는 신약성경에 47번 소개됩니다.
          영생에 대해서는 마음에 평안을 주는 용어로 들려진다.
          그리고 영생이란 영원한 생명의 축약형이라는 것임을 이해해야 할 것이다. 이 말은 일반적으로 ‘생명’을 의미하는 ‘조에’(zoe)와 ‘영원한’의 뜻을 가진 ‘아이오니오스’(aionios)를 번역한 것으로, 신약성경 전반에 걸쳐 나타나 있다.

          영생은 살아있는 것이 끝난 후의 단순한 시간 연장이 아니라 영원한 하나님의 생각 속에서 그 시작을 갖기 때문에(엡 1:4) 끝이 없는 지속성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영생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안에 계시된 하나님의 생명과 질적으로 같다(요일 5:11-12)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의 영생이 하나님의 목적 안에서 예정하심과 선택하심에 있다 해도, 영생에 관한 우리의 경험은 우리의 참된 영생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알고 믿을 때에(요 17:2-3; 갈 2:20) 얻는 거듭남과 함께 시작되는 것이다.

          모든 종교인들이 두 단어에 귀를 기울이고 마음에 새기고 언행심사에 적용해보려고 힘쓰고 있다. 인간으로 태어난 사람들은 모두가 종교성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짐승의 세계는 종교성이 없다. 창조주 하나님은 자기의 형상대로 창조한 사람들에게 주신 것 중에 종교성에 대한 내용가운데 ‘나’(하나님) 외에 다른 신을 두지 말고 섬기지 말라는 계명까지 주셨다.

          그러나 모든 종교가 주는 내용은 어디까지나 복이고 저주가 아니라는 것을 전재로 하고 있다. 저주아래 살고 있는 사람들이 깨닫지 못하고 있다. 깨닫지 못하는 사람을 비유해서 짐승 같다고 했다(시 49:20). 심지어 복을 받지 못하도록 담을 쌓고 방해하는 방법으로 사단의 무기인 죄라는 것으로 유혹하고 있다. 죄 가운데서 불신앙 혹은 우상숭배로 피조물이 피조물을(롬 1:25) 하나의 신으로 생각하고 경배하도록 유혹해서 결국은 영벌에 처하게 되고 마는 슬픔 현장이 세상이다.

          모든 사람들이 길을 가고 있다. 어느 방향으로 목적지를 향하여 가느냐? 영벌의 세계인 지옥인가? 아니면 영생의 세계인 천국인가? 살아있는 동안 종교라는 태두리 안에서 ‘신앙’과 ‘행위’라는 선택을 통해서 오른쪽인가? 왼쪽인가? 로 갈라지게 될 것이다. 영벌, 왼쪽 편에 서지 않는 참된 신앙자로 모두 영생의 길로 함께 살아갔으면 하는 마음이다.

          예수님을 믿는 신앙인들이 목적하고 소망하는 것은 천국에 들어가서 영원히 죽지 않고 사는 영생이다.
          만약 이것이 아니라면 믿지 않는 가족이나 세상 사람들로부터 온갖 비판과 핍박을 당하면서 그토록 많은 시간과 물질과 헌신을 드려 신앙할 아무런 이유가 없다.

          우리가 신앙하는 목적은 천국에서 영생을 누리는 것이기도 하지만, 믿지 않거나 혹은 잘 못 믿어서 끔찍한 영벌에 들어가는 것을 피하기 위함이기도 한 것이다.

          창세기 때 첫 사람 아담에게 주신 복은 무엇이었는가?

          창세기 때 하나님께서는 흙과 같은 아담에게 생기(살리는 기운)를 불어 넣어 생령(산영)이 되게 하셨다(창 2:7).
          그리고 에덴동산을 창설하신 후 아담을 그곳으로 인도하시고 생육, 번성, 충만하여 땅을 정복하고 다스리는 복을 주셨다(창 1:26~28).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아담에게 동산 중앙에 생명나무와 선악나무가 있으니, 동산에 있는 모든 나무의 실과를 임의로 먹되 다만 먹으면 정녕 죽는 선악나무의 실과를 먹지 말라고 명하셨다(창 2:15-17).

          그러므로 아담은 하나님께서 명하신 대로 먹으면 죽는 선악나무의 실과를 먹지 않고 먹으면 영생하는 생명나무의 실과만을 먹었더라면 하나님과 함께 에덴동산에서 영생하는 복을 받았을 것이었다.

          사람의 죄는 무엇인가?

          영생의 복을 약속받았던 아담은 대단히 안타깝게도 동산에 침입한 뱀(사단)의 미혹을 받고, 하나님께서 먹으라고 명하신 영생하는 생명나무 실과를(창 3:22) 외면하고, 하나님께서 금하신 뱀(사단)이 주는 선악나무의 실과를 먹고 생령이었던 아담이 흙으로 돌아가서 죽게 되었다(창 3장).

          그 일로 인하여 죄와 사망이 세상에 들어오게 되었고 모든 사람이 아담처럼 죄를 짓고 죽음에 이르게 된 것이라고 한다(롬 5:12).

          결국 사람의 죄는 하나님처럼 되고자 했던 아담의 욕심을 모든 사람이 물려받았기 때문이었고, 그 욕심이 죄를 낳고 그 죄가 장성해서 사망에 이르게 되었기 때문이라고 한다(약 1:15, 롬 6:23)

          그러므로 사람들이 세상에서 짓는 각종 범죄도 죄이지만 그 죄의 본질은 사람이 자기를 지어주신 하나님과 그 말씀을 배도(배반)하고 떠나버린 죄로부터 시작되었음을 확실하게 알아야 죄의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도 알 수 있는 것이다.

          죄의 문제는 어떻게 해결 되는가?

          죄인들과 함께 하실 수 없는 하나님께서는 죄악 세상에서 떠나가시면서 사람의 수명을 120세로 정해버리셨다(창 6:3).
          그리고 떠나가신 하나님은 사람의 죄와 사망의 문제를 해결해주시기 위해서 2천 년 전에 죄가 없는 독생자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주시고 십자가 희생으로 사람의 죄를 해결할 수 있는 길을 열어주신 것이다(요일 4:9~10). 

          그리고 예수님은 나를 믿다가 죽은 자들은 마지막 날 부활의 때 다시 살아날 것이며, 부활의 때에 살아서 나를 믿는 자들은 영원히 죽음을 보지 않을 것이라고 신약에 예언하셨다(요 11:24~26).

          또한 마지막 나팔이 불리면 죽은 자들이 죽지 않을 신령한 몸으로 부활하고, 그 때 살아 있는 자들은 썩지 않고 죽지 않음을 입고 신령한 몸으로 변화되어 생명이 사망을 이김으로 영생하게 된다는 것이다(고전 15:51~54).

          우리가 죄 사함 받고 영생하려면 어떤 조건들이 충족되어야 하는가?

          우리가 죄 사함 받고 영생을 얻을 수 있는 조건은 예수님의 십자가의 피로 세우신 새 언약을 생각과 마음에 기록하여 하나님을 온전히 알아야만 우리의 죄가 사해질 수 있으며(히 8:10-12), 우리를 미혹하여 죄와 사망으로 인도하는 사단마귀를 세상에서 없애는 일이다.

          그런데 예수님의 십자가 대속은 2천 년 전에 이루어졌으나 지금까지 죄와 사망이 사람에게서 떠나가지 않았던 원인은 사람을 미혹하여 죄와 사망의 구덩이로 몰아넣는 사단마귀가 이 세상에서 아직 소멸되지 않았기 때문이었던 것이다.

          죄 사함과 영생은 언제 이루어지는가?

          그 때가 곧 신약 계시록의 예언이 성취되는 마지막 주 재림 때이며, 그 때가 오면 하나님께서 사단과의 최종 전쟁에서 승리하심으로 하늘에서 보내신 천사에 의해 사단마귀가 붙잡혀 무저갱(지옥)에 갇혀 천년동안 인봉되었다가 결국 영원한 유황불 못으로 들어가게 된다는 것이다(계 20:1~3, 계 20:12~15).

          그리하여 사단이 주관하던 죄와 사망의 세상은 물러가고 예수님의 피로 죄 사함 받고 새 언약을 지킨 자들이 처음익은 열매로 추수되어 하나님과 예수님의 인을 맞고 12지파로 이루어진 새 하늘 새 땅에 영계의 하나님 나라인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이 임하여 와서 하나가 되므로 하나님께서 통치하시는 눈물도 사망도 고통도 없는 영원한 천국을 이루게 된다는 것이다(계 11:15, 계 21:1~6).

          이때 이 엄청난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를 믿지 않는 자들이나 이러한 실상을 전하는 자들을 오히려 핍박하고 비난하는 자들은, 구더기도 죽지 않는 유황불 못에 던져져서 세세토록 고통을 당하는 둘째 사망 곧 영벌에 이르게 된다고 하므로 모두가 말씀에 깨어 근신하며, 다시 오시는 예수님을 맞이할 준비를 해야 할 것이다(막 9:47~49, 계 20:12~15).

          영생은 구원받는 우리에게 상상조차 못할 최고의 복락을 영원히 안겨주지만, 영벌은 구원받지 못한 자들에게 도저히 견딜 수 없는 최악의 고통 속에 영원히 던져진다는 것을 마음에 깊이 아로새기고 하나님과 예수님 앞에서 인정받을 수 있는 참 된 신앙을 해야 할 것이다.

          이제 주님은 '착하고 충성된 종들'로서 성도들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지 말씀하십니다.
          모든 사람들은 '양과 염소'로 양분됩니다.
          성도들은 양과 같은 자들로, 목자의 음성을 알고 그 음성을 들으며 그 뒤를 따르는 자들입니다(요 10:1-5).
          그들이 나타내는 사랑과 순종은 "지극히 작은 자들에게 선을 베푸는 삶"으로 나타납니다(40절).
          이는 물론 '일반적인 선행'이 아니라, 그리스를 믿는 믿음에 합당한 선을 행하는 삶을 가리킵니다.
          그들의 믿음은 '교회 안에서의 신앙'만이 아니라 손님을 극진히 영접했던 아브라함처럼 '목마른 사람, 굶주린 자들, 헐벗은 자들'을 돌아보았던 자들이었습니다.

          염소와 같은 불신자들은 반대의 삶을 나타냅니다.
          물론 그들이 가난하고 헐벗은 이웃들을 사랑하고 섬기는 훌륭한 인격의 소유자들이라고 할지라도 그 행위는 '주님을 향한 사랑과 믿음의 열매'가 아니기 때문에 주님과는 아무 상관이 없는 것입니다.
          그가 무엇을 하든 이들의 마음과 행위 안에는 '주를 공양하는 마음'이 없습니다(44절).
          나의 선을 행하는 근거는 무엇입니까?
          서로를 돌아보며 사랑하고 존귀히 여기는 것은 참 성도들만의 표시입니다(시 16:3).

          영원한 분리(46절)

          주님은 마지막 날에 양과 염소가 정확한 판단에 따라 구분될 뿐 아니라 각각 '영생'과 '영벌'로 들어갈 것임을 확증하십니다.
          영생과 영벌은 주님이 말씀하신 진리로 누구도 그것을 약화시켜서는 안되며, 그것을 진지하게 생각하는 것을 소홀히 여겨서도 안됩니다. 주님은 주를 신실하게 사랑하고 순종하는 백성들에게는 "창세로부터 … 예비된 나라"가 주어질 것이라 증거하시고(34절), 반대편 무리들을 향해서는 "마귀와 그 사자들을 위하여 예비된 영영한 불"로 떨어질 것이라 증거하십니다.
          여기 인생의 참된 복과 가장 두려운 저주가 있습니다(34, 41절).
          참 복과 저주는 이 세상에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 땅에서 얻는 복과 고통은 영원 속에서 직면하게 될 영생과 영벌의 그림자들에 불과할 뿐입니다.
          주님은 참 복은 천국에서의 영원한 영광을 누리는 것이요, 진정 두려워해야 할 저주는 지옥의 형벌이라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을 하신 분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무엇을 참된 복으로 여기십니까?
          영생 얻은 자로서 합당한 사랑과 순종을 주님께 나타내고 있습니까?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마태복음 24장
                                                                                                  무슨 징조(3절)

          예수님은 누구에게 오셨는가?
           -
           로마서 15:8-9 /
           내가 말하노니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진실하심을 위하여 할례의 추종자가 되셨으니 이는 조상들에게 주신 약속들을 견고하게 하시고.  
          이방인들도 그 긍휼하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 하심이라 기록된 바 그러므로 내가 열방 중에서 주께 감사하고 주의 이름을 찬송하리로다 함과 같으니라.

           갈라디아서 4:4-5 /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 율법 아래에 나게 하신 것은.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을 속량하시고 우리로 아들의 명분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히브리서 9:16-17 /
           유언은 유언한 자가 죽어야 되나니
           유언은 그 사람이 죽은 후에야 유효한즉 유언한 자가 살아 있는 동안에는 효력이 없느니라.

           마태복음 10:5-8 /
           예수께서 이 열둘을 내보내시며 명하여 이르시되 이방인의 로도 가지 말고 사마리아인의 고을에도 들어가지 말고.
           오히려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에게로 가라
           가면서 전파하여 말하되 천국이 가까이 왔다 하고
           병든 자를 고치며 죽은 자를 살리며 나병환자를 깨끗하게 하며 귀신을 쫓아내되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라.

          로마서 13:10
          사랑은 이웃에게 악을 행하지 아니하나니 그러므로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니라.


          예수님은 어느 시대에 사셨는가?
           - 구약? 신약?






          성전에서 나온 제자들은 예수님을 따라 감람산에 도착할 때까지 성전 파괴 예언에 대한 충격이 가시지 않았기에 예수님께 조용히 와서 질문을 했습니다.
          제자들의 관심은 성전 파괴의 이유보다는 그 시기에 있었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은 ‘주의 임하심’을 유대인의 왕으로 등극하는 시기로, ‘세상의 끝’을 성전파괴와 예루살렘의 멸망으로 이해하고 예수님께 질문을 했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죽기 전까지 여전히 세상의 왕국을 꿈꾸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생각을 하고 있는 제자들에게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재림과 세상 종말의 징조에 대해서 알려주셨습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가 사람의 미혹을 받지 않도록 주의하라.
          많은 사람이 내 이름으로 와서 이르되 나는 그리스도라 하여 많은 사람을 미혹하리라."

          예수님께서는 종말의 징조를 요구하는 제자들에게 답변하시기 전, 먼저 주의해야할 사항을 말씀해 주셨습니다.
          그것은 미혹을 받지 말라는 것입니다.
          ‘미혹하다’로 번역된 원문은 3인칭 단수 능동태이기에 미혹하는 사람이 적극적으로 대상을 미혹하는 것입니다.
          이 단어는 미혹하는 사람이 지식과 분별력이 없는 사람을 멸망으로 이끌 때 사용하는 동사입니다.
          미혹의 내용은 예수님의 이름으로 와서 ‘나는 그리스도라’고 말한다는 것입니다.
          시대가 암울할수록 거짓 예수가 등장했습니다.
          과거에도 있었고 지금도 자칭 예수라고 말하며 사람들을 미혹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안타깝게도 여기에 미혹당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주의사항을 잊지 않고 미혹에 넘어가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예수님은 미혹에 주의하라는 말씀에 이어 종말의 징조를 말씀해 주셨습니다.

          최근에 소위 ‘보이스피싱’(voice phishing)이라는 전화금융사기 사건의 기승을 부리고 있다고 합니다. 경찰청 발표를 보면 작년 한 해 동안 피해 건수가 5,709건에 피해금액이 무려 595억원이나 된다고 합니다.

          이 보이스피싱은 사람들의 허를 찌르는 속임수를 씁니다. 자녀를 납치했다거나 자녀가 사고를 당했다고 부모를 속여, 돈을 요구합니다. 국세청을 사칭해서 세금을 환급한다고 속여, 정보를 알아냅니다. 신용카드사나 은행을 사칭해서 신용카드가 도용되었다고 속여, 신용카드 번호를 알아냅니다. 백화점이나 가전회사를 사칭해서 경품행사에 당첨됐다고, 은행계좌번호를 알아냅니다. 대학입시에 추가 합격했다며, 등록금을 입금토록 합니다.

          이런 보이스피싱의 수법은 한마디로 ‘미혹’이라 할 수 있습니다. 전화를 받고 미혹되는 사람은 큰 피해를 보게 됩니다. 그러나 전화를 받고도 미혹되지 않는 사람은 피해를 면하게 됩니다. 그래서 금융당국은 여러 경로를 통해 대국민 메시지를 전합니다. 그 메시지를 한 마디로 정리하면 ‘미혹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 3절을 보면 같은 메시지가 기록되어있습니다. “너희가 미혹되지 말라!” 이 메시지는 바울이 데살로니가 교인들에게 간곡하게 전하고 있는 메시지입니다.
          이 메시지의 내용을 자세하게 살펴보겠습니다. 오늘 우리에게 주는 영적 교훈이 크기 때문입니다.

          데살로니가후서 2:3 “누가 어떻게 하여도 너희가 미혹되지 말라 먼저 배교하는 일이 있고 저 불법의 사람 곧 멸망의 아들이 나타나기 전에는 그 날이 이르지 아니하리니” (Don't let anyone deceive you in any way, for that day will not come until the rebellion occurs and the man of lawlessness is revealed, the man doomed to destruction. NIV)


          미혹은 무엇에 홀려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것이나, 정신이 헷갈리어 갈팡질팡 헤매는 것을 말합니다. 창세기 3장 말씀을 기초로 보면, 사탄이 사람의 마음에 욕심을 심은 이래로, 사람 속에는 타락한 본성이 된 욕심이 자리하게 되었습니다. 이런 사람은 욕심을 채워줄 것 같은 무엇으로 유혹하면 쉽게 미혹이 됩니다. 어떤 사람은 권력에, 어떤 사람은 돈에, 어떤 사람은 남자나 여자에 미혹되어 정신을 못 차립니다. 청소년들은 롤(LOL) 게임이나, 판타지 소설, 만화 등에 미혹이 되기도 합니다. 그래서 공부를 해야 하는데 정신을 못 차리고 중고 시절 많은 시간을 보내기도 합니다.

          그런데 모든 미혹 중에 가장 치명적이고 악한 미혹이 바로 영적인 미혹입니다. 영적인 미혹은 사탄이 그 배후에 있는 미혹입니다. 이런 미혹은 사람을 영원히 멸망하게 하는 미혹입니다. 이런 미혹은 여러 가지 일로, 여러 가지 방법으로 찾아옵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데살로니가의 성도들에게는 ‘주의 날’과 관련해 미혹의 역사가 있었습니다. 이런 미혹은 신자라고 하면서도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받아 굳건하게 지키고 있지 않는 무늬만 신자들이 주된 타겟입니다. 이들은 미혹을 받을 때 그것이 어떤 미혹인지 분별할 줄 모르고, 이길 힘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탄의 미혹의 역사를 생각하면,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사랑하고, 하나님의 말씀의 진리 위에 굳건하게 서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 모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에베소서 6장 11절 말씀을 통해 ‘마귀의 간계를 능히 대적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으라’고 하셨습니다.





          미혹하는 자들

          본문을 보면 바울은 당시 데살로니가 교인들을 미혹하는 자들이 있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2-3절을 보면 “영으로나 또는 말로나 또는 우리에게서 받았다 하는 편지로나 주의 날이 이르렀다고 해서 쉽게 마음이 흔들리거나 두려워하거나 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라. 누가 어떻게 하여도 너희가 미혹되지 말라”

          이 말씀 속에서 분명하게 확인할 수 있는 것은 당시 데살로니가 교회에 미혹하는 자들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미혹된 사람들이 많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당시 멀리 떨어져 있던 바울이 그 소식을 듣고 편지를 쓰지 않을 수 없을 정도로 사태가 심각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런 미혹하는 자들이 당시 데살로니가 교회에만 있었던 것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요이 1:7을 보면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미혹하는 자가 세상에 많이 나왔나니 이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오심을 부인하는 자라 이런 자가 미혹하는 자요 적그리스도니” 미혹하는 자가 세상에 많이 나왔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세상에는 그리스도인들을 영적으로 미혹하는 자들이 곳곳에 많다는 말씀입니다.

          마 24:4-5를 보면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가 사람의 미혹을 받지 않도록 주의하라 많은 사람이 내 이름으로 와서 이르되 나는 그리스도라 하여 많은 사람을 미혹하리라”장차 주님 오실 날이 가까울 때 미혹하는 자들이 많이 나타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니까 미혹하는 자들은 태초부터 있었지만 주님이 재림하실 날이 가까울수록 미혹하는 자들이 더욱 많이 나타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을 영적으로 미혹하는 자들은 태초부터 있어왔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때가 가까울수록 그리스도인들을 영적으로 미혹하는 자들은 더욱 많이 나타날 것입니다. 물론 마지막이 점점 가까워오고 있는 오늘, 그리스도인들을 영적으로 미혹하는 자들이 도처에서 기승을 부리고 있습니다.
          그러면 미혹하는 자들은 누구일까요? 저들의 정체는 무엇일까요? 한 마디로 말하면 미혹의 영에 사로잡힌 자들입니다. 미혹의 영의 사주를 받아 미혹하는 자가 된 것입니다.

          요 1서 4:6을 보면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속하였으니 하나님을 아는 자는 우리의 말을 듣고 하나님께 속하지 아니한 자는 우리의 말을 듣지 아니하나니 진리의 영과 미혹의 영을 이로써 아느니라.”진리의 영이 있고 미혹의 영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진리의 영을 따르는 자들이 있고 미혹의 영을 따르는 자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딤전 4:1을 보면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성령이 밝히 말씀하시기를 후일에 어떤 사람들이 믿음에서 떠나 미혹하는 영과 귀신의 가르침을 따르리라” 진리의 영을 따르던 자들 가운데 믿음에서 떠나 미혹의 영을 따르는 자들도 있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성경을 보면 이런 일들이 많이 기록되어있습니다. 대표적으로 베드로의 경우입니다. 마 16장을 보면 베드로는 성령의 도우심으로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라고 저 놀라운 고백을 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고난과 부활을 말씀하실 때 어처구니없는 말을 했습니다. “주여 그리 마옵소서 이 일이 결코 주께 미치지 아니하리이다” 이 때 주님께서 이렇게 책망하셨습니다.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베드로가 미혹의 영인 사탄의 사주를 받았다는 말씀입니다.

          그렇습니다. 같은 사람도 진리의 영을 따르다가도 미혹의 영을 따를 수 있습니다. 이렇게 미혹의 영을 따르게 되면 자신이 미혹을 당하는 것은 물론이고, 다른 사람을 미혹하기까지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영적으로 긴장해야 합니다. 혹시라도 미혹의 영을 따르지 않도록 영적으로 허리띠를 동여야 합니다.

          벧전 1:13을 보면 이렇게 권면하고 있습니다. “너희 마음의 허리를 동이고 근신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에 너희에게 가져다주실 은혜를 온전히 바랄지어다.” 마음의 허리를 동이라는 것입니다. 영적 긴장의 끈을 풀지 말라는 것입니다.

          아주머니보다 아가씨들이 아름다운 이유가 있습니다. 아가씨들은 미니스커트를 입고 하이힐을 신고 늘 긴장하고 있지만, 아주머니들은 긴장의 끈을 풀고 있기 때문입니다. 아저씨들보다 사관생도들이 멋있는 이유가 있습니다. 사관생들은 제복을 입고 늘 긴장하고 있지만, 아저씨들은 긴장의 끈을 풀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영적인 긴장의 끈을 풀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오늘도 우리 주변에는 영적으로 우리를 미혹하려는 자들이 넘쳐나기 때문입니다.

          미혹의 내용

          오늘 본문을 보면 미혹하는 자들이 데살로니가 교인들을 미혹했던 내용이 두 가지입니다.

          첫째는 종말이 왔다는 것입니다.

          2절을 보면 “주의 날이 이르렀다고 해서”라고 되어있습니다. 미혹하는 자들이 찾아와서 이미 예수님께서 재림하셨다고 미혹하는 자들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데살로니가 교인들 가운데 저들에게 미혹되어서 마음이 흔들린 사람들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말에 미혹되어 두려워 떠는 사람들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미혹하는 자들이 주로 사용하는 미혹의 주제는 때입니다. 종말이 임박했다거나 때로는 이미 종말이 임했다고 주장하는 것입니다.

          한국교회는 1992년의 아픈 기억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장림이란 자가 나타나 1992년 10월 28일 주님이 재림하신다고 주장하여 큰 미혹이 일어났습니다.
          이 때 6만여 명의 성도들이 미혹되어 휴거소동에 휘말렸습니다.
          직장을 그만둔 사람들, 학교를 자퇴한 학생들, 가정을 포기한 사람들... 많은 교회들이 이 소동에 휘말렸던 때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일찍이 한국교회 안에는 이런 잘못된 때에 대한 주장으로 사람들을 미혹하는 일들이 있어왔습니다.
          황국주, 문선명, 박태선을 위시해서 용화교, 동방교, 장막성전, 구인회, 안상홍 증인회, 영생교 등입니다.
          그리고 최근 물의를 일으키고 있는 신천지도 재림일시를 예언했다가 거짓으로 판명된 일도 있었습니다.
          안타깝게도 정말 많은 성도들이 저들에게 미혹되어 끌려갔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말씀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 날과 그 때는 아무도 모르나니 하늘의 천사들도 아들도 모르고 오직 아버지만 아시느니라.”(마 24:36)
          “때가 이르리니 너희가 인자의 날 하루를 보고자 하되 보지 못하리라 사람이 너희에게 말하되 보라 저기 있다 보라 여기 있다 하리라 그러나 너희는 가지도 말고 따르지도 말라 번개가 하늘 아래 이쪽에서 번쩍이어 하늘 아래 저쪽까지 비침같이 인자도 자기 날에 그러하리라”(눅 17:22-24)

          그렇습니다.
          그 때는 하나님만 아십니다.
          그래서 때에 대해 말하는 사람들 모두가 미혹하는 사람들이라고 보면 됩니다.

          둘째는 신이라고 주장하는 것입니다.

          본문 4절을 보면 이렇게 기록되어있습니다. “그는 대적하는 자라 신이라고 불리는 모든 것과 숭배함을 받는 것에 대항하여 그 위에 자기를 높이고 하나님의 성전에 앉아 자기를 하나님이라고 내세우느니라”당시 로마 황제는 자신을 신격화하여 자기를 숭배하라고 강요했습니다. 그리고 당시에도 자신을 재림주로 자칭하던 자들이 있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자신을 재림주라고 자신을 하나님이라고 주장하는 자들이 있었습니다. 안타까운 것은 거기에 속아 저들을 하나님으로 섬기고 따르는 자들이 있어왔다는 것입니다.
          한국교회는 짧은 역사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참 많은 하나님과 재림주를 가지고 있습니다. 현대종교에서 펴낸 [한국의 신흥종교]라는 책을 보면 현재 ‘자칭 하나님’이라고 주장하는 자들이 20여명이 활동하고 있고, 또한 ‘자칭 재림주’라고 주장하는 자들이 50여명이 활동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웃지 못 할 일은 자칭 하나님이라고 하던 자들, 자칭 재림주라고 하던 자들이 죽어 무덤 속에 누워있다는 것입니다.
          대표적인 사람들이 천부교 박태선, 하나님의 교회의 안상홍, 통일교의 문선명, 영생교의 조희성 등입니다.
          저들은 죽어서도 여전히 추종자들에게 추앙을 받고 있습니다.

          최근에 물의를 일으키고 있는 신천지의 이희성이라는 자를 주목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이만희는 자신의 책 [요한계시록의 실상], [계시] 등에서 보혜사, 약속의 목자, 대언의 증인이라고 자처했으며, [성도와 천국], [계시록의 진상]에서는 마지막 때 하나님 나라를 창설하는 구원자라고 주장해 신도들은 이렇게 믿어왔습니다.

          그런데 최근에 이단 전문가를 대상으로 한 명예훼손 소송 중에서 이만희는 자신이 낸 소장에서 분명하게 “자신은 보혜사도 아니고 그렇게 가르친 적도 없다”고 진술한 것이 밝혀졌습니다.
          그러니까 이만희라는 자는 자신이 재림주요 보혜사라고 그렇게 가르치고 주장해 오다가 법적으로 자신이 불리해 지니까 가르쳤던 것도 부인하는 자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주변에는 이토록 미혹하는 자들이 많습니다. 그리고 저들에게 미혹되는 자들도 많이 있습니다. 우리가 영적으로 깨어 미혹되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미혹의 방법

          오늘 본문을 보면 미혹하는 자들이 데살로니가 교인들을 어떻게 미혹했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2절을 보면 “영으로나 또는 말로나 또는 우리에게서 받았다 하는 편지로나”라고 되어있습니다.

          첫째, 영으로 미혹했습니다.

          영으로 미혹했다는 것은 당시 하나님의 직통 계시를 받았다고 주장하며 미혹했다는 것을 말합니다. 구약의 선지자들처럼 하나님의 직적접인 계시를 받았다고 주장하는 자들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최근 한국교회에 경계의 대상으로 부상하고 있는 큰 믿음교회의 변승우 목사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한국의 주요교단에서 이단으로 규정을 받은 사람입니다.
          이 사람은 자신이 사도라고 주장하고 있고 자기가 받은 예언이 성경의 저자들이 받은 영감과 같다고 가르칩니다.
          그리고 자기가 받은 예언이나 성경해석은 전혀 틀림이 없는 완벽한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오늘도 꿈으로 환상으로 특별한 음성으로 하나님의 직접 계시를 받는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물론 성령의 특별한 감동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모든 영적 현상은 모두가 다 하나님의 말씀 아래에 있어야 하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검증을 받아야 합니다. 

          둘째, 말로 미혹했습니다.

          말로 미혹했다는 말은 교묘한 말로 해괴한 논리로 사람들을 미혹하는 것을 말합니다. 당시에 데살로니가 교회에 사도 바울이 가르쳤던 것과 다른 아주 교묘한 가르침으로 그리스도인들을 미혹하는 일이 있었습니다.

          오늘도 이런 일이 비일비재합니다. 2003년에 발표된 댄 브라운의 [다빈치코드]와 같은 주장들, 2007년에 출판된 리처드 도킨스의 [만들어진 신]이라는 책의 주장, 그리고 2010년에 출판된 스티븐 호킹이 쓴 [위대한 설계]라는 책에서 우주는 신이 창조하시 않았다는 주장 등. 이런 주장들은 현재 최고의 지성들이 쏟아낸 주장들이어서 수많은 현대인들을 미혹하여 불신앙의 자리로 이끌어 가고 있습니다.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도 이런 책을 보면서 믿음이 흔들리고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우리가 이런 미혹에 흔들리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셋째는 조작된 문서들입니다.

          2절을 보면 “우리에게 받았다 하는 편지로나”라고 되어있습니다. 바울에게서 받았다는 조작된 문서로 데살로니가 교인들을 미혹했다는 것입니다.

          오늘도 고대 문서들을 왜곡해서 엉뚱한 주장을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 캐런 킹이라는 하버드대 신학부 교수가 고대 파피루스 조각을 발견했는데 거기에 예수님의 말씀 가운데 “나의 아내”라는 표현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예수님은 결혼했고 아내는 마리아라는 것입니다. 그가 발견한 파피루스 조각은 명함보다 크지 않은 작은 조각에는 4세기의 것으로 거기에 네 단어가 적혀있다는 것입니다.

          이런 정체불명의 문서로 허튼 이론을 주장하는 자들이 있고 이에 미혹되는 자들이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말씀드린 대로 지금 미혹의 영이 활개를 치고 다닙니다. 그리고 미혹의 영에 사로잡혀 미혹하는 자들이 도처에서 설쳐댑니다. 그래서 자칫 미혹되기가 쉽습니다. 

          오늘 본문의 소중한 경고를 마음에 담아야 하겠습니다. “미혹되지 말라!” 그러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10절을 보면 진리의 사랑을 받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즉 진리를 사랑하는 마음을 가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잠 4:6 말씀도 같은 뜻입니다. “지혜를 버리지 말라 그가 너를 보호하리라 그를 사랑하라 그가 너를 지키리라” 하나님의 말씀을 마음에 깊이 간직하고 그 말씀을 사랑하면 그 말씀이 우리를 보호하고 우리를 지킨다는 말씀입니다. 

          영적으로 미혹이 넘쳐나는 이 때 우리가 더욱 말씀을 사랑하여 미혹되지 않기를 바랍니다.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마태복음 23장
                                                                                             너희 지도자(10절)


          또한 지도자라 칭함을 받지 말라 너희 지도자는 하나이니 곧 그리스도니라.
          Nor are you to be called 'teacher,' for you have one Teacher, the Christ.

          지도자. 카데게테스(kathēgētēs)  καθηγητής, οῦ, ὁ  2519

          1.  교사,  2. 스승,  3. 마태복음 23:10
          발음 / 카데게테스(kathēgētēs)
          어원 / 2596과 2233에서 유래
          관련 성경 / 선생(마 23:8), 지도자(마 23:10)
          신약 성경 / 2회 사용

          예수님 당시 1세기 경 하나님을 잘 섬긴다는 그룹들을 "유대인" 이라고 불렀다.
          그들 중에서도 하나님을 가장 절 섬긴다는 핵심  두 그룹은?

          1. 학자들 - "서기관"(에스라)
          2. 학자가 아닌 행정 및 관리들 -  "바리새인"

          예수님께서는 서기관들을 먼저 부르셨다는 것은 그만큰 서기관들을 더 높이 인정하였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종려주일 : 예루살렘 성 입성
          고난주간 월요일 : 마태복음 21장, 무화과나무에 대한 저주
          고난주간 화요일 : 마태복음 22장, 23장, 24장, 25장
             22장, 혼인잔치 비유
             23장, 지도자론(서기관, 바리새인) - 성전 뜰에서 강론하는 말씀 
             - 교계에 잘못된 지도자들이 등장한다 마치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처럼.....
             - 마지막 시대에 거짓 선지자들이 등장할 것을 예고하신 것
             24장, 감람산 강론(3절, 감람산 위에 앉으셨을 때에)
             25장,  감람산 설교




          마태복음 23장에 소개된 일곱 가지 화

          첫번째 저주 선언(13절)

          13. 화 있을찐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는 천국 문을 사람들 앞에서 닫고 너희도 들어가지 않고 들어가려 하는 자도 들어가지 못하게 하는도다.

          화 있을진저(3759) 우아이(
          ŏuai) οὐαί 
          1. 화로다,  2. 누가복음 21:23,  3, 누가복음 6:25
          발음 / 우아이(ouai)
          관련 성경 / 화 있을진저(마 11:21, 고전 9:16, 계 8:13), 화가 있도다(마 18:7), 화로다(눅 17:1), 화가 있을 것이로다(고전 9:16)
          신약 성경 / 47회 사용

          - 헬라어 '우아이'는 '오, 슬프다', `아이고'하는 탄식어로 사용되기도 하고, '저주가 있을지어다'라는 저주를 선언하는 뜻으로 사용되기도 한다.

          여기서는 저주를 내리는 선언문이다.
          그런데 이 저주는 2중적 심판 선언으로 볼 수 있다.
          현재적이며(24:1, 2) 또한 종말적(미래적)이다(계 20:7-15)

          마태복음 24:1-2


          예수
          께서 성전에서 나와서 가실 때에 제자들이 성전 건물들을 가리켜 보이려고 나아오니.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가 이 모든 것을 보지 못하느냐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고 다 무너뜨리우리라.

          요한계시록 20:7-15


          천년이 차매 사단이 그 옥에서 놓여.
          나와서 의 사방 백성 곧 과 마곡을 미혹하고 모아 싸움을 붙이리니 그 수가 바다 모래 같으리라.
          저희가 지면에 널리 퍼져 성도들의 진과 사랑하시는 성을 두르매 하늘에서 불이 내려와 저희를 소멸하고.
          또 저희를 미혹하는 마귀가 불과 유황 못에 던지우니 거기는 그 짐승과 거짓 선지자도 있어 세세토록 밤낮 괴로움을 받으리라 .
          또 내가 크고 흰 보좌와 그 위에 앉으신 자를 보니 하늘이 그 앞에서 피하여 간데 없더라.
          또 내가 보니 죽은 자들이 무론 대소하고 그 보좌 앞에 섰는데 책들이 펴 있고 또 다른 책이 펴졌으니 곧 생명책이라 죽은 자들이 자기 행위를 따라 책들에 기록된대로 심판을 받으니.
          바다가 그 가운데서 죽은 자들을 내어주고 또 사망과 음부도 그 가운데서 죽은 자들을 내어주매 각 사람이 자기의 행위대로 심판을 받고.사망과 음부도 불못에 던지우니 이것은 둘째 사망 곧 불못이라.
          누구든지 생명책에 기록되지 못한 자는 불못에 던지우더라.





          여기서부터는 계속하여 헬라어 '우아이'로 시작되는 저주문이 7가지로 이어진다.

          이러한 저주 선언문을 흔히 7화(禍)선언이라 한다.

          7화 선언은 예수의 신적 인격이 총동원될 만큼 중엄하며, 결코 감정적이지 않은 조용하고도 진실한, 그리고 궁극적으로 상대의 자숙(自肅)과 회개를 촉구하며 상대를 압도하는 권위에 찬 선언이었다(Lenski).

          예수께서는 이 7화의 대상'외식(外飾)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임을 말한다.

          마태 6:2, 구제 할 때
          마태 6:5, 기도할 때
          마태 6:16, 금식할 때

          외식이라는 말은 가면을 쓰고 무대에 나와 연극하는 자를 의미하는 말인 헬라어 '휘포크리타이'라는 말을 번역한 것으로서 공동번역 성경에서는 '위선자'로 번역 되어 있다.

          속과 겉이 다른 모습
          이중인격자의 모습

          ὑποκριτής, οῦ, ὁ  5273

          1. 위선자,  2. 사칭자,  3. 마태복음 6:2
          발음 / 후포크리테스(hüpŏkritēs)
          어원 / 5271에서 유래
          관련 성경 / 외식하는 자(마 6:2, 15:7, 23:23,29, 눅 6:42)
          신약 성경 / 18회 사용

          * 5271. ὑποκρίνομαι 

          1. 가장하다,  2 ~같이 꾸미다,  3. 속이다
          발음 / 후포크리노마이(hüpŏkrinŏmai)
          어원 / 제1부정과거 ὑπεκρίθην, 5259와 2919에서 유래
          관련 성경 / ~체하다(눅 20:20).
          신약 성경 / 1회 사용

          서기관(scribe) 그람마튜스(gramma- tĕus)  γραμματεύς, έως, ὁ 1122

          1. 서기관  2. 신약시대 유대인들 가운데서 율법 전문가
          발음 / 그람마튜스(gramma- tĕus)
          어원 / 1121에서 유래
          관련 성경 / 서기관(마 2:4, 막 1:22, 행 6:12), 서기장(행 19:35), 선비(고전 1:20)
          신약 성경 / 64회 사용

          바리새인(Pharisee)  - 보수그룹, 정치그룹. 파리사이오스(Pharisaiŏs) Φαρισαῖος, ου, ὁ 5330

          1. 바리새인,  2. 마태복음 3:7.  3. 마가복음 3:6
          발음 / 파리사이오스(Pharisaiŏs)
          어원 / 히브리어 6567에서 유래
          관련 성경 / 바리새인(마 3:7, 막 3:6, 눅 5:21, 행 23:6)
          신약 성경 / 99회 사용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에게 내린 호칭은 '위선자'라는 아주 모욕적인 언어이다.
          이같은 과격한 말은 6:2, 5,16;7:5에 그리고 22:18에도 나온다.
          이렇게 위선자라고 단정짓는 이유는 앞부분(2-7절)에서 열거한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의 이율배반적인 모습 때문이다.

          천국 문을 사람들 앞에서 닫고

          - 여기서는 위선자들의 행위가 구체적으로 다른 사람들에게 어떻게 영향을 주었는지를 밝히고 있다.

          천국 문

          - 천국에 들어가는 표현을 '천국 문'으로 표현한 것은 7:7,8,13,14; 25:10에도 나타난다.
          평행구절인 눅 11:52에서는 "너희가 지식의 열쇠를 가져가고 너희도 들어가지 않고 또 들어가고자 하는 자도 막았느니라"라고 서술한다.

          1.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진리에 대한 지식을 독점하고 있다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다.
          따라서 그들은 지식의 만용을 부려 율법에 무지한 사람들에게 어려운 법을 만들어 내어 사람들에게 짐을 지워주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3, 4절).

          2. 진리를 독점(獨占)하고 있으면서 실천을 하지 않아, 자신 마저도 천국 문을 열지 못하고 있다. 뿐만아니라 그들이 열쇠를 독점하여 들어 가고자하는 다른 사람까지도 못 들어가게 방해한다.

          3. 위선자들의 위선적인 행위는 간접적인 방해가 아닌 적극적으로 천국으로 행하는 사람들을 실족시키는, 곧 그들의 천국 문까지 닫아버리는 행위라는 것이다.

          실로 오랜 교회 역사를 통해, 교회 문을 막는 사람들은 교회 밖에 있는 사람이 아니라 교회 안에 있는 사람, 특히 신앙이 좋다고 자처하는 사람들이었다는 사실은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하겠다.

          * 14절이 없음
          주 1에 의하면 마가복음 12:40, 누가복음 20:47과 유사한 구절이 있음

          마가복음 12:40
          저희는 과부의 가산을 삼키며 외식으로 길게 기도하는 자니 그 받는 판결이 더욱 중하리라 하시니라.

          누가복음 20:47
          저희는 과부의 가산을 삼키며 외식으로 길게 기도하니 그 받는 판결이 더욱 중하리라 하시니라.

          두번째 저주 선언(15절)

          15. 화 있을찐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는 교인 하나를 얻기 위하여 바다와 육지두루 다니다가 생기면 너희보다 배나 더 지옥 자식이 되게 하는도다.

          교인 하나 지옥 자식이 되게

          역시 저주의 대상은 위선적인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다.
          여기서 먼저 '바다와 육지를 두루 다니다가'란 13절의 소극적인 면과는 대조적으로 적극적인 활약상을 암시한다.
          한편 당시 유대교인들은 선교에 적극성을 띠었다고 전한다(Josephus, Antiq. XX 2,4; Calvin, Bengel).
          물론 그들 유대인들의 전도 활동은 이방인들로 하여금 자기들이 갖는 파당적인 종교적 성격을 추종하도록 만드는 일이었다.
          한편 여기 교인(프로세뤼토스)이란 공동번역 성경과 같이 '개종자'로 이해해야 되는데 그 개종자들은 할례를 받고 성전세를 내는 등의 바리새인들이 가르치는 모든 전통과 규범을 따름으로써 유대화해야만 했다.

          이런 절차상의 문제에서 절대적인 권한을 지녔던 당시 바리새인들은 율법에 무지한 이방사람을 끌어들여 자신들의 잘못된 생각을 가르쳤다.
          그 때문에 그들은 잘못된 진리를 배운 사람들을 더 지독한 지옥의 자식으로 만들어 버리는 것이다.
          여기서 '지옥'은 헬라어로 '게엔나'라고 표기되어 있다.
          아람어로는 '게힌남' 히브리어로는 '게힌놈'이라고 음역되는데 이는 '힌놈 골짜기'(Valley of Hinnom)라고도 말한다.
          이 골짜기는 예루살렘 남쪽에 있는 계곡으로서 유대의 후기신앙은 최후의 심판이 그곳에서 있을 것이라고 믿는다.
          복음서에서는 이 말이 죽음 이후에 벌을 받는 곳으로 묘사된다.
          그래서 지옥으로 번역되기도 한다(33절; 5:22).
          한편 본문에서는 더 지독한 위선자를 생산하는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의 사악함을 강조 하기 위해 개종한 자들을 '지옥의 자식'으로 표현하고 있다.

          실로 그 개종자들은 자신들의 이교적 습속(習俗)에다 바리새인들의 잘못된 신앙관을 덧입힘으로써 구원과는 거리가 먼 상태로 전락하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본문의 개종자가 '배나 더' 지옥의 자식이라는 표현은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의 사악함을 비교하여 상대적으로 개종자들이 더 악하다는 의미가 아니라 더욱 완고한 위선자들을 생산하는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에 대한 저주를 강조한 것이다.

          오늘날 교회가 전도를 위해 노력하지만 참으로 전도할 대상에게 사랑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우월감을 갖고 나간다거나 섬김의 자세 보다는 '선생'이라는 의식을 갖고 나간다면 도리어 교회 문을 막는 결과가 될 뿐 아니라 피 전도자가 비록 교인이 된다 하여도 잘못 배워 잘못된 신앙으로 다른 이에게 해를 끼칠 위험이 있다.
          잘못된 성경관과 신앙은 제거되어야지 재생산 되어서는 안된다.

          세번째 저주선언(16절)

          16. 화 있을찐저 소경된 인도자여 너희가 말하되 누구든지 성전으로 맹세하면 아무 일 없거니와 성전의 으로 맹세하면 지킬찌라 하는도다.

          소경된 인도자여

          -  저주의 대상은 13절이나 15절과는 달리 '소경된 인도자'로 지목되고 있다.
          그러나 이 표현 역시 진리에 눈이 먼 완고한 무지자들인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을 가리키는 것이 분명하다(10절; 15:14).
          자신들의 행실도 온전치 못하면서 자기를 따르라 하는 지도자는 자기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까지도 지옥으로 빠뜨린다.

          성전으로 맹세(盟勢)하면 아무 일 없거니와

          - 이 말은 성소나 지성소 또는 제단등의 건물로서의 성전을 근거로 맹세하면 이를 기필코 지켜야 하는 의무가 없다는 것이다.
          이는 맹세의 구속력을 무시하는 처사인 동시에 성전으로 상징되는 하나님의 권위를 모독하는 가르침이다.

          성전의 금으로 맹세하면 지킬지라

          - 여기서 '성전의 금'이란 성전에 바치는 예물로서의 금이라고 볼 수도 있고, 성전 안에 비치된 금장식 또는 성전 금고에 간직된 금이라고 볼 수도 있다.
          여하튼 본문은 제사나 하나님보다 성전 제물에 더 큰 관심을 지닌 바리새주의자들(교권주의자들)의 실상을 적나라하게 드러내어 준다. 그러나 실로 율법의 근본적인 가르침은 하나님과 맹세했을 경우에 반드시 지켜야 하는 것이다(민 30장).
          그러나 바리새인들은 돈을 두고 맹세한 것만 효력(效力)이 있음을 말한다.
          따라서 거짓 지도자들은 하나님을 황금보다 낮추어 보는 결과를 초래하고 말았다.
          이러한 사실을 일찍이 간파하셨던 예수께서는 그런 것이라면 하늘을 두고도 땅을 두고도 맹세하지 말고 예루살렘을 두고도 맹세하지 말라고 하셨다(5:33-37).
          예수께서는 인간의 탐욕과 공명심에 근거하여, 실천 의지가 전혀 깃들지 않은 맹세를 철저히 거부해야 할 것으로 말한다.

          네번째 저주선언(23절)

          23. 화 있을찐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가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를 드리되 율법의 더 중한바 의와 인과 신은 버렸도다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찌니라.

          박하와 십일조를 드리되

          - 그 저주의 대상이 13절과 15절의 형식과 똑같이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로 지목(指目)된다.
          비판의 내용은 그들이 사소하고 세분된 규정과 전통에는 아주 민감하나 그보다 더 중요한 근본적인 율법 정신에 대해서는 무관심하다는 것이다.

          십일조

          - 소출의 10분의 1을 바치는 율법의 규정으로서 그 기원은 족장 시대에 두고 있었는데(창 14:20; 28:22) 모세의 계명에서 법제화되었다(레 27:30; 신 14:22-27).

          이 십일조의 근본 취지(趣旨)는
          1. 자신의 소유에 대한 전적인 하나님의 주권 인정과
          2. 이웃 사랑(구제) 및 성전 운영이었다.
          그러나 바리새인들은 이것을 자발적 사랑의 예물로서가 아닌 강제적 의무 규정으로 고착화 시켜, 이것을 통해 유대인됨과 율법 완수자됨의 규준(規準)으로 삼았다.

          박하

          - 헬라어로 '헤뒤오스몬'이라고 하는 독특한 향내를 지닌 채소(mint)이다.
          이는 유월절 쓴나물의 양념으로 쓰였으며(출 12:8) 그 향내로 인해 회당의 방향제(芳香劑)로 쓰였다고 한다.

          회향은 헬라어로 '안네돈'이라고 부른다.
          이것은 미나리과의 식물이며 양념에 사용되는 식물로서(anise, dill) 약품과 향료에도 사용된다.

          근채는 '퀴미논'이라고 부르는 식물로서 이 역시 미나리과에 속하며 향기로운 열매를 맺는데 그 열매는 양념이나 약품으로 사용된다.

          근채를 다른 말로 구민초(cumin)라고도 한다.

          이상에서 나열한 식물 종류는 이스라엘의 농작물 중 매우 사소한 수확물이다.
          따라서 이와같이 사소한 종류를 나열한 것은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레위기 27:30의 규례(規例)에 따라 얼마나 십일조에 철저했던가를 보여주고 있다.

          예수의 비판은 이렇게 세세한 십일조 생활을 비판하려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다음에 나오는 그들의 행실에 대한 비판을 강조하기 위하여 대비적으로 그들의 십일조 생활을 강조한다.

          율법의 더 중한 바

          - 여기서 '더 중한 바'란 '더 어려운 일이나 `더 힘든 일'(De Wette)이 아니라 지엽적(枝葉的)이거나 사소한 일과 대조되는 '더 중심적이거나 결정적인 일'(Ridderbos) 또는 '더 중요한 일'(Meyer, NIV)을 가리킨다.

          이런 관점에서 공동번역 성경에서는 '아주 중요한 율법'으로 번역되어 있다.
          따라서 이 말은 율법 중에서 더 중요한 것이 있고 덜 중요한 것이 있음을 암시한다.
          그러나 여기서는 차등(差等)적인 율법 내용을 강조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앞에 나온 사소한 십일조 행위와 대비시킴으로써 더욱더 중요한 율법을 소홀히 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의 어리석음을 강조하고 있다.

          의(義)

          - 헬라어로 '크리시스'라고 부르는 이 말은 종말적 심판의 의미를 나타내기도 하고 재판, 판단을 의미하기도 한다.
          또 옮음(right)와, 공의(justice), 의(righteousness)를 나타내는 말이기도 하다.
          본문에서의 '의'는 정당하고 공정한 뜻으로서 '정의'라는 의미와 더불어 실천적 측면에서의 인간 관계의 올바름이라는 의미도 함께 지닌 것으로 번역하는 것이 이해를 분명하게 하도록 돕는다(신 16:19;사 1:17;렘 5:13).

          인(仁)

          - 헬라어로 '엘레오스'라고 하는데 공동번역에서는 '자비'(mercy)로 번역되어 있다.
          이런 '자비'라는 말은 하나님의 사람에게, 또는 사람이 사람에게 베푸는 것으로 사용된다.
          이 단어는 22:37-40의 내용을 참고하여 이해하는 것이 도움이 된다.
          즉 하나님에 대한 사랑과 사람에 대한 사랑의 행위를 말하고 있는 것이다.

          신(信)

          - 헬라어 `피스티스'는 믿음, 신뢰, 신용(faith, truth), 약속, 서약, 증거, 담보, 보증, 확신 등의 뜻을 나타내는 말이다.
          이런 관점에서 믿음이란 하나님에 대한 신뢰(히 11:6)와 이웃에 대한 신뢰(시 15:3, 4)를 나타내는 것을 말한다.

          이와 같은 세가지 종류의 단어, 의(義), 인(仁), 신(信)의 개념은 설명할 수 있거나 객관화시킬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 속에서 실천을 통해서만 보여줄 수 있는 것이다.
          즉 십일조는 객관적으로 분명하게 드러내보일 수 있지만 의(義), 신(信), 인(仁)은 삶을 통해서 사람과 사람, 사람과 하나님 사이에서 몸으로 보여주어야 하는 것이다.

          버렸도다

          -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이것을 '버렸다'로, 공동번역은 '대수롭지 않게 여긴다'로 번역하고 있다.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지니라

          - 여기서 예수의 치밀함을 엿보게 된다.
          예수께서 보신 유대인의 십일조 행습(行習)은 무조건 비판을 가할게 아니었다.
          중요한 것이든 사소한 것이든 모두 지켜야 할 것들이었다.
          이와 같은 의미는 율법을 폐하러 온 것이 아니라 완전케 하려 함이라고 하는 예수의 선언(5:17)과 같은 맥락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그래서 공동번역 성경에서는 "십분의 일세를 바치는 일도 소홀히 해서는 안되겠지만 정의와 자비와 신의도 실천해야 하지 않겠느냐?"라고 반문하는 형태로 번역되어 있다.
          매우 적절한 번역이라고 할 수 있다.

          다섯 번째 저주선언(25절)

          25. 화 있을찐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잔과 대접의 겉은 깨끗이 하되 그 안에는 탐욕과 방탕으로 가득하게 하는도다.

          잔과 대접의 겉은 깨끗이 하되

          여기서는 당시의 랍비들에 의해 제정될 의식적(儀式的) 정결에 관한 것과 관계가 있다.
          여기서 '잔과 대접'은 먹고 '너는 그릇을 통칭(通稱)한 말인데, 이것을 정결히 한다함은 곧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의 표면적이고 가식적인 율법적 청결을 빗대어 묘사한 것이다.

          실제로 잔과 대접을 깨끗하게 하는 이유는 종교적 의식(儀式)보다는 음식을 깨끗하게 담기 위함이다.
          따라서 물론 안팎을 모두 깨끗이 해야 되지만 우선적으로 깨끗이 해야 할 부분은 그릇 안쪽일 것이다.
          그런데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은 그릇 안을 탐욕과 방탕으로 채웠다.
          다시 말해 정작 중요한 것은 속마음인데 겉으로는 거룩하고 깨끗한 척하면서 속마음은 탐욕과 방탕으로 채웠던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네번째 저주 선언문인 23, 24의 내용과 비슷하다.

          탐욕과 방탕으로

          - 탐욕'은 헬라어로 '하르파게'라고 하는데 '강탈', '약탈', '도둑질'이라는 뜻을 가졌다.
          이는 주로 물질적인 측면의 죄악을 암시한다.

          '방탕'은 헬라어로 '아크라시아'인데 그 뜻은 '자제력 상실', '무절제'이다.

          이는 주로 윤리적 측면의 범죄를 암시한다.
          한편 이 내용과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수 있는 구절이 7:15의 "거짓 선지자들을 삼가라 양의 옷을 입고 너희에게 나아오나 속에는 노략질하는 이리라"이다.
          이와 같은 내용은 마음 속에 있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사람 사이에서 일어나는 일이다.
          즉 남의 것을 소유하려는 욕심은 실제로 남의 것을 착취하게 된다는 말이다.
          따라서 이 구절의 강조점은 악한 마음과 동시에 그 악독한 마음에서 비롯된 그들의 행위를 비판하는데 있다고 하겠다.

          여섯 번째 저주 선언(27절)

          27. 화 있을찐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회칠한 무덤 같으니 겉으로는 아름답게 보이나 그 안에는 죽은 사람의 뼈와 모든 더러운 것이 가득하도다.


          회칠한 무덤

          - 무덤은 들판이나 길 옆에 있는 가난한 자들의 무덤을 가리킨다.
          이와 같은 무덤은 겔 39:15에 근거한 랍비들의 명령에 따라 우기(雨期)가 지난 유월절 전 아달월 15일에 회가루를 뿌려 하얗게 칠한다. 그 이유는 치장을 위해서가 아니라 길가는 사람들(특히 유월절 순례자들)이 쉽게 식별하여 피해가도록 유도하기 위함이다.
          왜냐하면 율법에 의해 시체나 무덤을 만진 사람은 7일동안 부정하게 되기 때문이다(민 19:16).
          한편 행 23:3에서 바울은 이와 유사하게 대제사장을 '회칠한 벽'이라고 비판하고 있는데 그 당시 바울은 이 말을 통해 대제사장의 위선에 대하여 비판하고 있었다.
          여기서 예수께서 '회칠한 무덤'이라는 상징어법으로 나타내려한 의도를 두가지로 나누어 생각할 수 있다.

          1. '회칠한 무덤'이란 그들의 내면적이고 본질적인 죄악성은 뒤로 하더라도 사람만을 의식하는 그들의 허영적이고 위선적인 신앙 형태에 대한 극히 독설적인 책망이다.

          2. 바리새인을 '회칠한 무덤'에 비유하는 것은 그들이 의식적으로 극히 부정하다고 단죄(斷罪)하는 율법 조항에 의해 비판받게 하여 그들에게 지독한 모욕감과 수치감을 주고자 함이었다.

          실로 그들은 회칠한 '무덤'에 비교될 만한 무가치하고 반신앙적 인물들이었다.
          한편 예수께서는 회칠한 무덤에 대한 상세한 설명을 곧이어 함으로써 이해를 보충시키고 있다. 즉 '겉'과 '안'을 대조(對照)시키고 다시 '아름답게'와 '모든 더러운 것'으로 대조시켜 위선자의 양면성을 밝힌다. 27절의 내용은 사실 25절의 저주 선언문에 대한 보충이라고 할 수 있다.

          죽은 사람의 뼈와 모든 더러운 것

          - 인간의 죽음은 죄의 결과로 인한 필연적인 산물이었다(창 3:9; 요일 3:14,15).
          따라서 주검은 율법에 의해 부정한 것으로 간주되었으며 누구든지 그것과 접촉하면 역시 부정에 전염(傳染)된다고 규정하였다(민 5:2;6:6).
          한편 그러한 주검이 안장되어 있는 유대인의 무덤 속에는 송장의 뼈와 시체의 악취와 기타 오물로 가득하여 의식적으로서만이 아니라 위생학적으로도 더럽고 추한 몰골을 형성하였다.
          실로 바로 이것이 바리새인들의 숨겨진 실체요 내면의 부정이었던 것이다(행 23:3).
          한편 인위적이고 과도한 경건은 독선과 가식의 겉포장일 수 있다.

          일곱 번째 저주 선언(29절)

          29. 화 있을찐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는 선지자들의 무덤을 쌓고 의인들의 비석을 꾸미며 가로되.
          30. 만일 우리가 조상 때에 있었더면 우리는 저희가 선지자의 를 흘리는데 참예하지 아니하였으리라.

          선지자들의 무덤을 쌓고

          - 추앙(推仰)받은 사람이나 영웅을 위해 무덤을 만들고 비석을 세우는 일은 유대교의 전통적 관습이었다.
          더욱이 성전 금고의 일부분이 그 일에 사용될 만큼 전국민의 관심사였다.
          그런 까닭에 유대 사회에는 자연 무덤 예술이 발달하게 되었으며, 특히 예루살렘 주변에는 많은 기념비와 무덤들(스가랴, 압살롬, 여호사밧, 야고보 등)의 흔적이 발견된다고 한다.
          그렇게 무덤을 만들고 비석을 세운 근본적인 동기는 그 선열들의 발자취를 좇고 자신들의 그릇된 행위를 고쳐나갈 목적으로서가 아니라 위선된 자신들의 신앙을 드높이려는 교만에서 비롯되었다.

          시편 118:21-26
          주께서 내게 응답하시고 나의 구원이 되셨으니 내가 주께 감사하리이다.
          건축자의 버린 돌이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나니.
          이는 여호와의 행하신 것이요 우리 눈에 기이한 바로다.
          은 여호와의 정하신 것이라 이 에 우리가 즐거워하고 기뻐하리로다.
          여호와여 구하옵나니 이제 구원하소서 여호와여 우리가 구하옵나니 이제 형통케 하소서 .
          여호와의 이름으로 오는 자가 복이 있음이여 우리가 여호와의 집에서 너희를 축복하였도다.






          사람들은 누구나 다른 사람들보다 더 나은 사람이 되려고 합니다.
          그리고 누구나 남을 부리고 가르치는 것을 좋아합니다.
          이러한 성향은 모든 사람들이 갖는 공통점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랍비 곧 선생이라 칭함을 받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를 믿는 모든 사람들은 형제이며 선생은 오직 유일한 그리스도 밖에 없다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라는 것은 하나의 정체성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그리스도의 정체성이 온전히 육신이 되신 예수님을 칭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그렇다는 것은 어떤 사람이라도 그리스도라는 정체성이 자신의 삶을 주관하는 삶을 온전하게 실천한다면 그 사람은 곧 세상의 소금과 빛이 될 것입니다.

          하지만 사람이 그리스도가 될 것이 아니면 예수님이 우리와 같은 사람으로 오실 이유가 없다. 물론 사람이 그리스도가 된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가 된다는 것이 아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그리스도의 성품을 가진 모든 사람의 표상이고 기준이다. 그래서 영어로 표시할 때는 the Christ가 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 그리스도의 성품을 가진 모든 인생은 또한 그리스도(a christ)이다.


          이것은 신앙적 타락이나 변질이 아니다. 그러니까 사람이 그리스도가 된다는 것은 인간의 신격화와 같은 이단 논리가 아니라는 것이다. 오히려 이것은 온전한 복음이다. 모든 사람이 자신의 삶을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기름 부음을 받은 왕이요 제사장과 같은 삶이되기를 바라신 하나님의 뜻이 이 땅에 이루어지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모든 사람이 하나님이 바라시는 대로 그리스도의 성품을 가지고 사는 또 하나의 그리스도요 하나님의 아들이 되기를 바라시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그리스도이신 것은 하나님의 그 뜻(LOGOS)이 육신이 되셨기 때문이다. 즉 육신을 가진 예수님은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두신 창조 목적을 육신으로 나타내셨기 때문에 그리스도이시고 하나님의 아들이신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예수님께서 이 땅에 몸소 오셔서 그것을 보이신 것은 예수님과 같이 육신을 가진 모든 인생이 또한 그렇게 되기를 바라셨기 때문인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이 그리스도의 성품으로 사는 그리스도가 되는 것은 이단 논리가 아니라 진정한 복음인 것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는 유일한 지도자인 것이다. 지도자란 따르는 사람에게 바른 것을 제시할 수 있는 존재를 말하기 때문이다. 즉 그리스도라는 것은 모든 사람의 존재 목적과 삶의 의미이기 때문에 그것을 좇는다는 것은 너무 당연한 것이기에 그리스도는 모든 인생에게 하나 밖에 없는 지도자인 것이다. 즉 예수님께서 보이신 그리스도의 정체성이 자신의 정체성이 되고, 자기 삶의 목적이 되는 것이 모든 사람의 존재 목적이고 삶의 의미고 따라가야 할 방향이라는 것이다.


          그 지도자이신 그리스도는 일반적으로 사람들이 생각하는 지도자와는 전혀 다른 정체성을 가진 분이신 것을 예수님께서 전하셨고 또 보이셨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랍비라 칭함을 받지 말고 그리스도의 정체성을 가지는 사람이 되라는 말씀을 제자들에게 하신 것이다. 그러니까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지도자', '선생', 그러면 떠오르는 이미지를 가진 선생이나 지도자가 되지 말고, 오직 너희 삶이 그리스도의 정체성을 가지도록 하라는 말씀을 하고 계시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보이신 그리스도의 정체성은 정말로 사람들이 생각하는 지도자의 정체성과는 사뭇 다른 모습이었다. 지도자나 선생은 결국은 대접을 받고 가르친다. 그리고 자신이 다른 사람의 앞에 있다는 것에 조금만 심취하면 따라오지 못하거나 알아듣지 못한다 싶을 때 훈계나 질책하기도 한다. 만약 그리스도의 정체성도 그렇고 예수님도 그런 지도자였다면 예수님의 제자들은 눈만 뜨면 예수님께 혼났어야 할 것이다.


          예수님의 제자들의 모습은,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는 그 순간까지, 아니 부활하셔서 변화된 몸을 보이셨음에도 예수님께서 보이신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의 정체성에 대하여 온전히 알지 못했다. 그런데도 예수님께서는 책망보다는 몸소 보이심으로 제자들의 마음 안에서 그들이 본 예수님의 모습과 들은 말씀이 땅에 심긴 씨앗이 싹이 나서 열매를 맺는 것처럼 깨달아지도록 기다리고 몸소 보이시는 모습을 보이신 것이다.


          예수님의 바로 그런 모습이 남을 섬기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섬김을 받고자 한다면 섬기는 사람이 되라고 하신 것이다. 그것은 사람들이 바라는 지도자의 모습을 보이고 싶다면 모든 사람이 지향해야 하는 모습인 그리스도의 성품을 가진 자가 되라는 말씀인 것이다. 그리스도는 사람을 섬기는 존재이고, 또 반면에 그리스도는 모든 인생이 섬기고 따라야 할 표상이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그리스도의 정체성은 모든 사람의 지도자이고, 그리스도의 성품은 사람을 섬기는 것이라는 것이다.


          생각해보면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전하시고자 하는 하나님의 뜻에 대하여 예수님보다 잘 아는 사람은 없다. 그런데 정작 예수님은 하나님을 모독했다고(모른다고) 사형을 당하셨다. 그것이 그리스도의 정체성의 단면이다. 하지만 지금은 어떤가? 예를 들어 목사와 성경에 대하여 논쟁하다 목사로부터 모르겠다는 말을 들어본 사람이 얼마나 있을 것 같은가? 정말로 목사가 성경에 대하여 다 알아서 그런 것이 아니다. 그건 목사는 성경을 잘 아는 사람으로 인정받아야 한다는 생각 때문이다. 그렇지 않으면 신앙이라는 것이 무너진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건 정말로 회칠한 무덤 같은 논리이다. 말은 그럴 듯하지만 무덤과 같이 죽고 의미 없는 말이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목사라는 신분은 성경에 대하여 모르는 사람 취급 받으면 안 된다고 하는 그 성경이 전하는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뜻에 대하여 가장 잘 알면서 하나님을 모독했다고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분이라는 것을 기록한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얼마나 모순인가?


          그것은 비단 목사만의 이야기는 아니다. 누구라도 하나님에 대하여 아노라 하면 하나님을 모른다는 심판으로 죽어 나가는 모습을 수용할 마음으로 사람을 섬기지 않는다면 다 잔치의 상석과 회당의 상좌와 시장에서 문단 받는 랍비와 예수님께서 듣지 말라고 하는 선생이라는 칭함을 받는 사람일 뿐 그리스도의 제자나, 성경을 가르치는 온전한 선생의 모습은 전혀 아닌 것이다. 그리스도의 성품이 없는 사람이라는 것은 말할 필요도 없는 것이다.


          사람을 섬긴다는 것은 발을 씻어 주는 행위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을 섬긴다는 것은 그 사람이 옳다고 주장하는 것에 나를 맡기는 것입니다.

          그것이 얼마나 엄청난 것인지 모른다. 그러니까 누구나 쉽게 할 수 있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전혀 아무나 할 수 없는 것이라는 것이다.


          횡단보도에서 내려서 있는 할머니가 있었다. 유모차처럼 생긴 보행 보조기를 손에 잡고 힘들게 서 있었다. 그런데 횡단보도 밑에 내려서 계셨기 때문에 차가 지나갈 때 불편했다. 그때 어떤 차는 조심스럽게 속도를 죽이고 맞은편에 차가 오는지 살피면서 피해갔다. 그런데 어떤 차는 큰소리로 경적을 오래 울리면서 빠르게 할머니 앞을 지나갔다. 왜 그런 차이가 있는가? 그것은 다른 사람이 자기가 편하고 자기가 옳다고 주장하는 것을 수용하는 것의 차이다. 조심스레 지나간 차는 남을 섬기는 것이다. 반면에 경적을 울린 차는 남을 가르치는 사람이다. 바로 예수님께서 칭함을 받지 말라는 선생의 모습이 그것이다.


          사람을 섬긴다는 것은 해보면 별게 아니다. 다만 자존심 상하고, 내가 옳다고 생각하는 것을 주장하지 못하는 분함이 있기는 하다. 하지만 그게 산을 옮기고 바다를 가르는 능력이 필요한 것이 아니다. 그냥 육신을 가지고 있으면 할 수 있는 것인데 다만 내가 생각할 때 그러면 안 된다고 생각하는 딱 그것 하나로 인해서 그러고 싶지 않고, 그러면 안 되고, 그러면 내가 불편한 것이다. 바로 그것이 선악과다. 내가 선과 악의 기준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것 때문에 화평과 안식이 없는 것이다.


          반면에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이 주장하는 옳고 그런 것 중에 가장 큰 하나님의 뜻에 대하여 알지 못하는 이들이 예수님께 주장하고 결박하여 십자가에 못 박는 것은 순종하신 분이다. 그것이 그리스도의 정체성이기 때문이다. 즉 선악과를 먹고 자신이 옳다고 주장하는 이들에게 자신을 바치는 것이다. 그랬을 때 예수님을 못 박은 사람, 자기가 옳다고 주장한 사람들이 그것이 아님을 알게 된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인생이란 예수님과 같아야 한다고 생각하시므로 예수님을 죽은 자 중에서 살리셨기 때문이다. 그것이 바로 육신 가진 예수님께서 보이신 섬기는 그리스도의 정체성이다. 하나님께서 사람들에게 육신을 주신 것은 바로 그런 것에 쓰라고 주신 것이다.


          더 알고, 더 밝은 것은 무식하고 어두운 자들을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심과 같이 내어주고 섬기기 위한 것이 아니라면 무의미 한 것이다. 그러니까 '나 이런 사람이야!'라는 것을 인정받기 위한 것 외엔 아무 것도 아니라는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자신을 내 보이는 것이 다 하나님과 같이 되려는 마음이라는 것은 꿈에도 모를 것이다. 섬기는 그리스도, 그 정체성은 더 알기에 죄인이 되고 모르는 이들을 섬기는 것, 그것에 있는 것이다.






          예수님에게 "지도자"라는 호칭이 가능한가?

          2.1. 신약성서에서 "지도자"(a leader) 혹은 "지도하다"(to lead)에 해당하는 어휘들을 대략 찾아보면 다음과 같다. 명사형으로 "지도자"는 a*rchgoV", h&gouvmeno", o&dhvgo", e*pivskopo", e*pivtropo", e*pistavth", prwtostavth", paidagwnov", kaqhghthv", 혹은 e*piskophv 등이며, 동사형으로 "지도하다"는 h&neomai, o&dhnevw, poimaivnw 등이다. 논의에 앞서, 구체적으로 위의 어휘들에 대한 용례를 먼저 살펴보고자 한다.

          1) 아르케고스(a*rchgoV")­이 말은 칠십인 역에서 통상 백성들의 정치적 혹은 군사적 지도자를 의미했다. 신약성서에서는 단 4회 사용되는데, 행 3:15은 "생명의 주"(a*rchnoV" th'" zwh'"), 행 5:31은 "임금과 구주"(a*rchnoVn kaiV swth'ra), 히 2:10은 "구원의 주", 히 12:2은 "믿음의 주" 등이다. 이는 초기교회가 이 말을 변증적 설교의 맥락에서 죽음에서 부활하여 보좌에 오르신 "그리스도"를 가리키도록 사용했음을 알게 한다.

          2) 헤구메노스(h&gouvmeno")­이 말은 신약성서에서 8회 사용된다(마 2:6, 눅 22:26, 행 7:10, 14:12, 15:22, 히 13:7, 17, 24). 이 말을 마태는 2:6에서 미가 5:1, 3와 왕하 5:2을 결합해 종말론적 왕으로서 백성의 선한 지도자로 이해하며, 행전과 히브리서에서도 공동체의 지도자로서 책임을 맡은 목회자들이나 신앙의 모범자들로 이해한다. 특히, 막 10:43-44("누가 큰 자인가")을 자료로 하여, 누가는 눅 22:26에서 "지도자"는 "섬기는 자"이어야 함을 말한다(눅 22:26, 27b, 막 10:43, 45 참조).

          3) 호데고스(o&dhvgo")­이 말은 칠십인 역에 거의 나오지 않지만, 신약에서는 "지도자"나 "안내자"로 사용한다. 행 1:16에서 예수님을 대적자들에게 안내한 가룟유다에게 적용하며, 마태 23장(16, 24, 참조. 15:14)에서는 소경 인도자인 바리새인을 가리킨다. 특히 요 16:13에 "인도하다"(o&dhnevw)는 말을 통해 요 14:26의 "보혜사 성령"(paravklhto")과 관련하여, 지상의 예수 자신도 참 인도자로 그 제자들을 가르치며 지도했음을 말한다.

          4) 에피스코포스(e*pivskopo")­이 말은 성서 밖의 헬라어와 유대교에서는 하나님, 감독자인 인간, 견유학파 사람, 혹은 어떤 직책의 이름으로 자주 사용된다. 그러나 신약성서에는 단 5회만이 사용된다. 벧전 2:25에는 '그리스도' 자신을 그렇게 불렀고, 나머지 구절에서는 대체로 초기교회 내의 '지도자'를 가리킨다(행 20:28, 빌 1:1, 딤전 3:2, 딛 1:7). 아마도 이 말은 교회의 발전 과정 속에서 "장로"와 같이 책임있는 자를 가리키다가, 목회서신의 교회에 와서는 구별된 직책으로 말해졌을 것이다.

          5) 에피스타테스(e*pistavth")­이 말은 세속 헬라어에서 높은 지위에 있는 '지도자'를 주로 가리켰다. 그러나 신약성서에는 누가복음에서만 호격(e*pistavta)으로 7회 사용된다(눅 5:5, 8:24, 45, 9:33, 49, 17:13). 복음서 기자 누가는 다른 복음서의 "랍비"(r&abbiv), "교사"(didavskale), "주님"(kuvrie)에 대신하여 이 말을 편집 삽입어로 사용한다. 누가는 제자 공동체를 지도한 지상의 예수님을 회상하며, 역시 지금도 그가 교회 공동체의 참 지도자(a true leader)임을 말한다.

          6) 카데게테스(kaqhghthv")­이 말은 신약성서에서 마 23:10에서만 2회 사용되었다. 물론 이 말이 "교사"나 "(길)안내자" 등을 가리키지만, 마태 23장의 맥락에서 마태는 예수님만이 제자들에게 "유일한 지도자"일 수 있음을 나타낸다. 따라서 예수님은 "지도자라 칭함을 받지 말라. 너희 지도자는 하나니 곧 그리스도니라"로 말한다.

          2.2. 우리는 이미 신약성서에서 예수님을 "지도자"로 인식하고 있었음을 살펴보았다. 막스 베버(M. Weber)의 지도자론에 따르면, 지도력(leadership)이란 지도자와 추종자들 모두가 그 가치들, 동기들, 희망들을 구체화 시키기 위해 어떤 추상적인 목표들을 향해 행동하도록 유도하는 과정으로 정의된다. 그런데 초기교회는 바로 자신들의 교회적 지도력을 예수 그리스도에서 찾으려 했으며 지상의 예수님을 참 지도자로 이해하며 따라야 할 모범으로 생각했던 것이다. 더구나 이런 이해의 뿌리는 지상의 예수님에서 출발해야 함이 사회학적으로 타당하다. 결국 예수님의 지도력은 그 자신의 기독론적 혹은 종말론적 이해의 지평과 더불어 초기교회의 신앙 고백적 선포 안에 자리 잡고 있으며, 더 나아가 그것은 일반적인 카리스마적 지도자라는 개념의 테두리를 넘어서 '구원자'라는 신적 인간의 성격을 띄게 되는 것이다.

          2.3. 초기교회는 예수 그리스도를 자신들의 주님으로서만 아니라, 참된 지도자로 이해했으며, 교회 공동체인 자신들은 그를 따르는 선택된 무리 혹은 제자들로 이해했음을 알 수 있다. 특히 누가의 이해는 분명하다. 누가는 제자들의 입을 통해 예수님을 "e*pistavta"로 부르도록 하며, 눅 22:24-33에서는 그런 예수님의 지도자적 모습이 제자들과의 관계로 더욱 구체화되어 드러난다. 즉, 유월절 만찬(14-23)에 이어서, 제자들은 누가 더 크냐?로 다툰다(24-30). 이런 제자들에게 예수님은 "지도자는 섬기는 자"(26절)라 말하면서, 바로 그 자신이 "섬기는 자로 너희 중에 있다"고 말한다(27). 이런 맥락에서 누가는 예수님을 제자들의 지도자(o& h&gouvmeno", '두목')로 이해한다. 더불어, 편집구인 28-33절에서 누가는 이 맥락을 더 확대시킨다. 즉, 예수님이 제자들의 모범으로 수난의 길을 갔듯이, 지금 제자 공동체들도 종말론적인 심판과 "그 나라"를 소망하며 그들 자신도 다른 "형제들"을 지도해야 함을 말한다. 결국 누가는 교회의 지도력이 주님의 말씀에 있었고 지상의 예수님이 교회 지도자의 원형(proto-type)이었음을 회고하며, 동시에 누가교회의 지도자들을 향해서는 행전의 베드로와 바울처럼 역시 우리도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아야 함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이해는 요 16:13에서도 동일하다.

          2.4. 이러한 검토로, 우리는 이미 초기 교회로부터 지상의 예수님은 교회 공동체를 이끌고 안내하며 지도하는 제자들의 참 지도자로 이해했음을 보게 된다. 물론 예수님에 대한 기독론적인 몇몇 호칭들과는 달리, 예수님이 지상 활동에서 위의 호칭들이 그 분에게 직접 사용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부활을 경험한 초기 교회에 얼마간 시간이 경과한 이후에, 교회 안에 지도력의 대두라는 교회의 자리에서 참 지도자였던 지상의 예수님을 자연스레 회고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런 이해는 실제로 예수님 자신이 이미 언급한 호칭들로 자신을 말한 적이 없다는 점에서 더욱 분명해 진다. 예수님은 그를 따르는 무리들의 "지도자"였다. 12명의 제자들이, 혹은 다른 이들이 그를 누구로 이해하고 불렀던지 간에, 그는 새로운 목표와 이상을 제시하며, 그의 추종자들을 모으고 하나님 나라를 이루는 일에 앞서 나가며 자신의 지도력을 생명으로 바친 참 지도자였다(요 10:11-18 참조. 막 8:27 이하).

          3. 신약성서에 나타난 예수님의 지도자론

          만약 초기교회가 지상의 예수님을 회고하면서 그를 자신들의 참 지도자로 이해한 것이 사실이라면, 그렇다면 예수님 자신은 자기를 어떻게 이해했을까? 이를 위해 우리는 먼저 마 23:8-12의 맥락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이 단락의 전승의 문제에도 불구하고, 사실 예수님은 그의 제자들이 "랍비"나 "지도자"로 불려지는 것을 허락치 않았다(마 23:8,10). 마 23:8-11에 따르면, "랍비", "아비"(일종의 스승), "지도자" 등으로 칭함을 받지 말라고 한다. 왜냐하면 그런 호칭은 그리스도처럼 '섬기는 자'에게만 가능하기 때문이다. 더 적극적으로는 오직 한 분 - 그리스도 - 만이 그런 호칭을 받아야 마땅하다. 그러므로 마태는 "랍비"(r&abbiv)­"아비"(pathvr)­"지도자"(kaqhghthv")­"그리스도"(Cristov")­"섬기는 자"(diavkono")라는 도식을 통해, 섬김의 참 지도자인 그리스도를 마태 교회의 모범으로 회상시키고 있는 것이다(참조. 마 23:8-9). 그러면, 이런 호칭의 사용이 전적으로 초기교회로만 돌려져야 하는가? 그렇지는 않다.

          3.1. 참 지도자로서의 권위

          사실 예수님 당시에 유대 종교 지도자들은 그들의 지도력의 바탕을 예루살렘 성전과 제의 율법에 두고 있었다고 생각된다. 물론 에세네파나 제롯당은 그러한 기존의 세력이 이끄는 지도력에 반대하거나 대항했던 자들이었지만, 사두개파나 바리새파를 포함한 그들 모두는 자신들의 지도력이 이스라엘 대중에 보다 더 영향력 있기를 원했다. 그러나 예수님은 어떠했나? 예수님은 영향력있는 지도자였나? 그렇지 못했다. 사실 그의 지도력은 결과적으로 대중적이지 못했다. 오히려 공관복음서는 하나님 나라의 성취를 이루기 위해 고난의 길을 걸어간 예수님의 인격으로­즉, 그의 말씀과 행위로­예수님의 지도력을 나타낸다. 예를 들어, 복음서에 나오는 성전청결 사건(막 11:15-19)과 그에 따른 권위에 관한 논쟁 이야기(막 11:27-33)는 이를 잘 보여준다. 수난의 맥락에서 이런 예수님의 도발 행위는 메시아적 상징을 띤 선지자적 행위이다. 이로써 예수님은 모든 이들을 위한 자신의 대속적 죽음을 스스로 촉발시키며 새로운 성전(공동체)의 회복을 뜻하는 종말론적 상징행위를 행한다. 이로 보건대, 예수님은 자신의 지도력을 의식적으로 십자가의 죽음과 연관시키고 있으며 하나님과 인간의 화해를 위한 "자기 중심적" 중재자로 자신을 이해하며 하나님 나라를 선포했던 것이다. 이것이 바로 지도자로서의 새로운 권위였다(참조. 막 1:27, 2:10, 28, 4:41, 11:18, 27-33).

          3.2. 삶의 자리

          3.2.1. 예수님의 삶의 자리는 곧 모든 이들을 이끄는 현장을 의미한다. 물론 예루살렘 성전을 중심으로 당시에 팔레스틴 지역에는 많은 회당이 있었고 여기서 많은 대중들은 율법을 만나고 안식일 예배에 참석할 수 있었을 것이다(참조. 눅 4:20). 이런 맥락에서 예수님도 예외는 아니었다. 요한의 연대기를 고려해 볼 때, 복음서도 예수님의 활동의 자리를 우선은 예루살렘 성전과 여러 회당으로 정했다고 생각할 수 있다. 이는 기존의 제도와 전통의 틀에 바탕하여 자신의 입지를 마련해 가는 예수님의 모습인 것이다. 더구나 예수님의 체포와 수난이 예루살렘 성 안에서 진행되었다는 사실은 그것을 잘 말해준다. 이와 같이 그의 지도력의 경로는 얼마간 일반 지도자와 다를 바가 없다. 막 14:49에서 예수님은 자신을 체포하러 온 자들에게 "내가 날마다 너희와 함께 성전에 있어서 가르쳤으되 너희가 나를 잡지 아니하였도다"고 말한다. 이는 그의 지도력이 성전과 밀접한 연관을 맺고 있음을 가리키는 것으로,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그의 지도력의 우선성이 사회적 적법성을 유지코자 하는데에 있었다고 보아야 한다.

          3.2.2. 그러나 우리는 한번 예수님이 머리 둘 곳도 없이 이리저리 떠돌았던 유랑자적인 카리스마이기도 했음을 생각해 보아야 한다(눅 9:58, 마 8:20). 사실 그 당시의 종교 지도자들인 사제들, 랍비들, 서기관들은 정해진 장소에서 백성을 가르치고 지도했던 반면에, 예수님은 제한된 대중이나 닫혀진 공간이 아니라 열려진 공간에서 모든 이들을 찾아나서며 복음을 선포하고 가르쳤던 것이다. 그렇다고 예수님이 그 당시 있던 에세네파의 쿰란처럼 금욕적 은둔생활을 강요하거나, 제롯당처럼 어떤 정치적, 군사적 혁명운동을 부추기지도 않았다. 오히려 그는 때를 분별하며 임박한 하나님 나라를 자기 인격 안에서 화해와 섬김의 복음으로 선포했던 것이다(막 1:15, 눅 4:18-19). 그런가 하면 예수님은 당시 유대교에 의해 소외된 자들­세리, 죄인, 간음한 여자, 각색 병든 자, 소경, 문둥병자, 여자들, 가난한 자들, 귀신들린 자 등­을 찾아 다니며 그의 말씀과 행위를 통해 그들을 하나님 나라에 초대하기도 했다(막 2:15-17 참조). 이렇게 본다면, 예수님의 삶의 자리는 이 마을 저 마을을 유랑하며 닫힌 사회적, 종교적 공간을 의도적으로 깨트리고 종말론적 하나님 나라의 새 질서를 세우는 운동에 있었다.

          지도자론

          예수님은 자신을 추종하는 많은 무리들 중에서 그의 말과 행위를 모범으로 삼고 배우려는 자들을 자신의 제자로 삼으셨다(막 3:13-19). 그러나 제자들을 부름이 오직 예수 자신의 주도권에 의해 이루어진다. 배타적으로 그들에게 당시의 다른 지도자와 어떤 관계도 허락지 않았다(마 23:8-10). 이는 예수님의 지도자 의식에서 비롯되었을 것이다. 사실 그는 하나님 나라, 율법의 해석, 일상생활 규범, 자신의 공동체에 대한 활동규칙 등에 대해 자신의 말과 행위를 통해 철저히 가르치려 했으며 역시 자신의 제자들을 다시 세상에 파송하면서 사명을 주고 행동 지침을 주어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전파하려 했다(막 6:6-13, 마 10:1, 5-15, 눅 9:1-6, 10:1 이하). 유대교의 지도력이 율법에 대한 결의론적 해석에 치중한 유대교의 자의적이고 편파적인 법 해석에 기반을 둔데 반하여, 그의 지도력은 보다 인간 중심적인 법의 정신과 그의 종말론적 지평에 의해 이끌어졌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은 당시의 지도 세력들과 갈등을 야기시킬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3.3.1. 지도력의 동기들

          예수님은 천편일률적으로 상대방을 고려치 않고 자기만을 중심으로 해서 말하거나 행한 것은 아니다. 그는 항상 상대방의 처해진 상황을 염두에 두고 말했다. 자신의 생각에만 몰입하는 황당무개한 지도자가 아니라, 너와 나의 만남으로 이뤄진 공통된 상황의 일치점을 중심 주제로 하여 사건을 판단하고 해석하며 그것을 다른 이들에게 주장했던 것이다. 그러면 그런 예수님의 지도력은 전적으로 천부적이었나? 꼭 그렇지만은 않다. 복음서는 그의 여러 가지 경험을 말한다. 복음서는 예수님의 결정적 경험으로 요단강에서 세례요한에게 받은 수세사건을 들고 있다(막 1:9-11 및 병행구절). 예수님은 '하늘이 열리는' 것을 보고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는 소리를 듣는다. 이런 영적 체험은 구약에서 선지자들이 경험한 그런 소명에 따른 환상 이야기와는 다르다. 그럼에도 대부분의 학자들이 동의하듯이 예수님의 확실한 자기 소명의식은 이 때 시작되었을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그것을 통해 예수님에게 어떤 자의식(自意識)이 비로소 확정되었었는지를 살펴보아야 한다. 왜냐하면 그것은 예수님의 지도력의 중요 동기들일 것이기 때문이다.

          1) 먼저는, 하나님으로부터 "파송된 자"라는 자의식(自意識)이다(막 1:38 병행, 10:45 병행, 마 5: 17, 15:24, 10:34-35, 눅 12:49). 이는 "나는 …이다"(e*gwv ei*mi)는 예수님의 독특한 말투에서도 잘드러난다. 그런데 이런 자기 정체성이 신적인 필연성에 의해 정해진 삶의 자리에서 일시적으로 체득되었다기 보다는, 점진적이며 다양한 삶의 경험에 의해 연속적으로 획득된 것이라 생각된다. 예를 들어, 세례요한과의 만남, 수세사건, 마귀와의 시험사화, 각계각층과의 만남과 인간관계, 제자 파송, 율법에 대한 논쟁, 죄용서의 선포 등등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파송된 자라는 지도자 의식을 체득하도록 했던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파송된 자로서의 다양한 삶의 여정을 경험하며 고난의 길을 스스로 밟아 나가는 지도자였다.

          2) 둘째는, 그의 "(그) 선지자" 의식이다(눅 13:33, 마 23:31 이하, 37-39 병행, 막 6:4 및 병행구절). 예수님은 자신이 하나님의 영을 소유했다고 주장했다(막 3:28 이하, 마 12:28, 사 61:1 참조). 이는 그의 선지자적 권위와 연관한다. 역시 백성들도, 제자들도, 심지어 바리새인도 그를 선지자로 이해한다. 그는 사 61:1의 영의 약속을 자신에게 적용시키며, "끊어진 영"에 대한 공유로 종말론적 회복을 제자들에게 기대했다. 이 종말론적 하나님의 영은 아버지­아들­따르는 자의 관계를 새롭게 설정하도록 하며 그를 따르는 자들에게 "아들"의 자격을 부여한다. 이런 창조적 관계를 드러내는 말이 부름말 "아바"이다. 이처럼 예수님은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를 율법적 권위가 아닌, 가족적 사랑으로 이해하도록 했다. 이것은 그의 종말론적 지평과 더불어 기존의 제도권에 대한 도전으로 비쳐지게 되었을 것이다. 따라서 예수님은 당연히 새로운 이단적 지도자로 등장하게 되었을 것이다(참조. 막 1:22, 27, 2:10, 11:27-33).

          3) 셋째는, 그의 메시아적 "인자" 의식이다. 수세사건(막 1:11)과 시험사화(막 1:12-13)를 통해 이미 세례요한에 의해 예고된 인자-메시아로서 예수님은 자신을 새롭게 인식한다(참조. 막 1:7 병행). 이런 "최초의 결단"을 통해 그는 점진적으로 메시아적 인자의 길을 하나님의 뜻에 대한 엄격한 "아들됨의 순종"(A. Schlatter)으로 걸어가도록 하며 겟세마네 동산에서 "최종적인 결단"에 이른다. 이처럼 예수님은 홀로 하나님에게 순종하는 아들과 인자-메시아로 나아갔고 또 가기를 원했던 것이다. 이 때, 예수님 자신은 "가난한 자"에 대한 극진한 헌신(cf. 사 61:1-2), 사랑의 섬김(눅 19:10, 막 10:42-45, 요 13:2-17), 또한 자신의 대속적 고난을 통해, 새롭게 자신을 이스라엘과 일치시키려 한다.

          3.3.2. 지도 방법론

          우리는 지금까지의 논의를 통해, 지도자로서 예수님의 자의식과 그것의 성격을 살펴보았다. 이제 그런 예수님이 어떻게 다른 이들을 지도하려 했고 또 지도했는지를 알기 위해, 여기서 어떤 체계적인 방법론을 추출 해내기 보다는 일괄적으로 예수님의 특징적 활동을 염두에 두고 그것을 살펴보려 한다.

          1) 복음서에 따르면, 예수님이 선포한 하나님 나라는 종말론적이지만 비유적이어서 그 성격상 제한된 자들에게만 이해될 수 있는 영역이었다(참조. 막 4:11-12). 그는 이스라엘의 모든 자를 자신의 자리에 초대했지만, 세리, 죄인, 가난한 자, 종 등과 같은 하층민들이 그 초대에 응할 뿐이었다(참조. 눅 14:7-14, 4:18 이하, 마 11:5, 참조. 막 2:17b), 그의 초대에 응한 자들은 속옷조차도 빼앗기며, 이리저리 끌려 다녀야만 하는 형편에 놓여 있었다(마 5:40-41). 한편, 지도층 인사들은 율법과 제사는 원하면서 이웃에 대한 자비는 원치 않았다(마 12:7, 참조. 막 2:23 이하). 화려한 궁전과 쌓이는 재물에 정신이 팔려 그것들을 의인의 축복과 평안으로 오해했다. 이런 사회적 갈등이 결국 자신들의 자멸임을 깨닫지 못했다. 그들에게는 가난한 자들의 종교적, 경제적 "빈곤의 악순환"이 당연한 현실이었다. 이 때, 갈릴리 나사렛 출신 예수님이 이스라엘 사회에 등장했던 것이다.

          2) 예수님은 자신의 인격을 통해 사회적 현실이 역전되기 시작하는 하나님 나라의 미래를 약속했다. 이 약속은 이스라엘을 향한 새로운 비존이며 새로운 지도력이었다. 그 약속은 물질의 만족을 넘어서서 "하나님 자녀로서의 확신"을 체험케 하는 종말론적 사건이었다. 그런 새로운 확신의 자리는 예수님의 복음이 선포되며 행동으로 옮겨지는 현장이기도 했다. 그 현장은 말하는 자와 듣는 자가 하나의 비젼(the vision)을 통해 서로가 만나는 삶의 자리였다. 예수님은 랍비들이나 율법학자들처럼 율법에 대한 문자의 해석과 행위적 모범이라는 차원에 머무르지 않았다. 그는 모든 이들에게 새로운 질서의 세계를, 혹은 새로운 신율의 나라를 경험하도록 무리들을 초대하고 지도했다. 그렇기 때문에 저 밖에 있던 자들은 예수님이 새로운 왕국을 꿈꾸며 자신의 지도력을 이 땅에 확장시켜 나간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심지어 가까이 있던 제자들도 양을 위해 목숨을 버리는 "선한 목자"(요 10:11, 마 26:31b 참조)를 보기 보다는, 열 두 군단이나 더 되는 천사를 부릴 수 있는 그런 지도자(마 26:53)로 생각했을 뿐이었다.

          3) 그러나 예수님은 섬김의 지도자였다. 이는 남을 자유케 하는 고난의 섬김을 뜻한다. 예수님은 병자를 치유하고 귀신을 붸아내며(막 1:32-34, 21-28, 3:1-6, 5:1-43), 세리나 죄인들과 식탁교제를 의도적으로 한다(막 2:15-17, 마 9:10-13). 그런 일들을 통해 예수님은 하나님이 베푸는 용서의 샬롬에 그들을 동참하게 함으로, 상처난 자리를 싸매고 병치유의 자리에 들게 한다. 이렇게 사회 속에 함께 나눔의 자리를 공유하는 것이 하나님 자녀가 누려야 할 정상적이고 인간적인 아름다움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그는 친히 그것을 몸으로써 보여 주었다. 즉, 그는 하나님과 인간의 중재자로서 메시아적 하나님 나라의 잔치에 있을 용서와 화해를 그 초대의 현장에서 종말론적으로 경험케 한다. 그러므로 그의 말씀과 행위 앞에는 의인과 죄인, 정결과 부정, 부자와 빈자라는 이분법적 차별이 없어진다. 그는 율법의 행위 규범으로 인간을 파악하지 않고 믿음의 법인 섬김과 사랑으로 모두를 파악했던 것이다.

          4) 더 나아가 예수님의 섬김은 여기에 머무르지 않는다. 막 10:45에서 그는 예루살렘에서 맞이 할 수난을 앞두고 대속적 죽음을 각오한다. 이것은 단순히 예수님이 지도자나, 선지자, 혹은 모범자로 이해하고 부르는 것을 거부케 한다. 예수님의 섬김은 일반적 범주를 넘어서 오히려 고난 당하는 자들과 그 현장을 자신의 인격에 일치시키며 새롭게 자유와 생명을 해산하는 창조적 행위였다. 이를 우리는 최후의 만찬에서 알게 된다. 그는 유월절을 앞두고 자신의 사명과 제자들의 책임을 가르쳤다. 그는 단순히 떡과 잔을 통해 자신의 제자 공동체가 '하나'이어야 함을 가르치며 죄용서 받은 기쁨의 '새 계약 공동체'가 그의 인격으로부터 시작되고 있음을 이해시켰다. 역시 부활후에 초기교회는 이런 것들을 기억하며 새롭게 기독론적으로 해석하였던 것이다.

          예수님의 지도자론은 "십자가의 길" 그 자체였다.
          그는 지도자로서 성경을 풀어 주기도 하고, 비유 말씀을 통해 제자들의 상상력을 키워주며, 종말론적 신앙의 능력을 보여주고, 자신의 말씀 앞에 제자들을 결단하도록 이끌며, 눈물을 흘리는 자와 함께 흘리며, 기쁨에 넘치는 자와 함께 기뻐하며, 그렇다고 유대교의 지도자들처럼 자기를 내세우지 않고, 오히려 온유와 겸손을 통해 자기를 드러내며, 사랑과 화해의 정신으로 남을 자기처럼 여기며, 하나님과 인간의 중재자로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전하되 십자가에서 죽기까지 섬김과 화해의 지도자로 자신을 내던졌던 고난의 종이었다. 그리하여 의인보다는 죄인을 찾아 다니며, 일등보다는 꼴찌를 사랑하며, 종말론적 하나님 나라의 주인이 누구인지, 그 나라의 새질서는 무엇인지를 깨닫게 했다. 그 뿐인가? 예수님은 타락한 성전 예배를 반대하며 성전을 청결케 하며, 율법의 원래적 정신에 어긋난 비인간적 독소 조항을 철저히 비판하며, 또한 그것들을 자신의 안위에 이용하는 종교 지도자들을 훼파하려 했으며, 개혁하지 못하는 안일한 기존의 체제를 향해 메시아적 선지자로서 저주를 선포했으며, 그렇기 때문에 결국에는 하나님을 알고 신뢰한다는 자들에게 오히려 하나님을 모욕했다는 죄명으로, 기존의 체제를 비판하고, 민중 봉기를 획책하여 반란을 도모했다는 국역 죄인으로, 예수 그리스도는 십자가에 못박혀 돌아 가셨던 것이다. 어느 누가 이렇게 되기를 원하겠는가? 그러므로 예수님은 겟세마네 동산에서 "최후의 결단"을 통해 스스로 고난의 길을 자초하며 하나님 나라의 모범을 보이신 하나님 아들이었다.

          초기교회는 자신들의 지도력을 예수 그리스도에서 찾으려 했다.
          부활한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은 지상의 예수님을 회상하므로 자연스럽게 예수 그리스도는 교회 공동체의 참 지도자의 원형으로 이해되었다.
          그러나 이런 이해가 초기교회의 것으로만 돌릴 수는 없다.
          물론 예수님의 지상 활동에서 "지도자"라는 호칭이 직접적으로 불려지지는 않았지만, 초기교회의 이런 이해의 바탕은 지상의 예수로부터 나왔다는 데에 거부해야 할 하등의 이유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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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페스티나 랑테(Festina lente)!”

          ‘페스티나 랑테(festina lente)!’
          ‘천천히 서두르라’는 뜻의 라틴어 명언이다.
          로마의 최초황제 아우구스투스(케사르 옥타비아누스)가 즐겨 쓰던 말이었다.
          곧 좌우명이자 인생훈이었다.
          그 새김은 모든 일에 성급함이란 금물이며 그렇다고 두손 놓고 태평세월하지 마라는 뜻이지 싶다.

          지금도 여러 사람들에게 자주 사용된다. 요즘 식으로는 ‘천천히 그리고 빨리’가 된다. ‘천천히 서두르라’는 말은 그 자체로 논리적 모순이다. 말 그것만으로는 앞뒤가 안 맞는다. 천천히 하면 서두를 수 없고, 서두르다 보면 천천히 할 수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둘이 결합돼서 ‘천천히 서두른다’는 새로운 개념이 빚어졌다. 모순어법(oxymoron)이다.

          아우구스투스는 아마도 훌륭한 지도자상에 대해 많은 고민과 반성을 했던 인물이었던 모양이다. 그는 뛰어난 지도자가 되려면 성급함은 금물이라고 여겼다. 때문에 그걸 경계하는 뜻에서 이 말을 자주 사용했다. 로마 역사학자 수에토니우스의 해석에 따른다면 그렇다. 이런 아우구스투스를 위해 주조된 금화 뒷면에 이 말을 상징하는 게와 나비의 그림이 새겨져 있었다고 한다. 게나 나비 하면 어떤 느낌이 드는가. 게나 나비가 민첩하고 재빠르게 움직이는 동물은 아니다. 뭔가 꾸물꾸물 느리게, 그러나 늘상 이리저리 움직인다는 느낌을 준다. 그래서 주변사람들이 아우구스투스를 황제로서 깨어있도록 주목시키기 위한 동물로 삼은 것 아닐까 한다.

          천천히 가는 사람은 실수 없이 간다

          옥타비아누스가 이런 생각에 마음을 쏟았던 이유는 뭔가. 그는 휘하 장군들에게 조급하게 훈련을 시키기보다는 서두르지 않고 강하게 훈련을 시키는 장군이 되라고 강조했다. 그래서 언제나 장군들에게 “천천히 서두르라”고 훈시했다. 왜 그랬을까. 대담하고 성급하기보다 안전하고 강한 사령관이 일을 더 잘해낼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 아닐까. 그는 공화정이던 로마를 제정으로 바꿔놓은, 로마제국의 첫 번째 황제였다. 사실 생전에 그는 절대로 스스로를 '황제'라고 부르지 않고 '제1 시민'이라고 불렀다. 진정으로 로마시민에 겸손했는지 통치기법상 그랬는지는 역사가 평가하겠지만 말이다.

          페스티나 랑테! 여기서 그 의미를 잠자코 음미해보자. 고요하면서도 묵중한 가르침이 새겨지지 않는가. 참으로 명언이다. 누구나 다 알고 있듯 어떤 행동이든지 서두르다 보면 실수가 따르게 마련이다. 그러니 일이 그릇됨이 없도록 찬찬히 균형과 중심을 잡으라는 말이겠다. 지나치게 무리하면서 서두르면 실수가 생기고 장기적으로 볼 때도 결코 긍정적이라고 하기 어렵다.

          삶을 살아가며 인간사를 깊게 느낀 이들의 지혜가 만든 명언들은 많다. 그 중 하나가 “천천히 서두르라” 이다. ‘천천히 가는 사람은 실수 없이 간다. 실수 없이 가는 사람은 멀리 간다.’ 라는 이탈리아 속담도 같은 맥락이다. 인간의 삶이란 짧은 듯해도 일생이란 그리 간단하지가 않다. 긴 안목으로 멀리 보는 삶은 그래서 주목받는다.

          이런 멋진 격언들이 어찌하여 부각됐겠는가. 그만큼 많은 공감을 얻었기 때문이 아닐까. 예부터 전해오던 이런 명언들을 새겨보면 예전의 문제와 해결 방법론들의 오늘날과 크게 다르지 않구나 하고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예나 지금이나 사람 사는 방식이나 지혜는 모두 같구나 하고 공감한다. 그래서 숱한 삶 속에서 얻은 지혜와 교훈은 격언이나 명언으로 남아 우리를 일깨워 준다.

          뽕잎이 비단이 되려면 인내가 필요

          이제 우리는 ‘시간과 인내가 뽕잎을 비단으로 만든다’는 잠언을 되새길 필요가 있다. 인내는 힘이다. 시간과 인내는 뽕잎을 비단으로 만든다.

          아무리 비단이 좋다 한들 뽕나무를 키워서 누에를 기르고 네 번의 잠을 재워 고치를 얻고 명주실을 뽑지 않으면 비단의 아름다움은 얻을 수 없다. 뽕잎이 없어도 안되고 누에치기의 노력과 오랜 기다림이 없어도 뜻을 이루기 어렵다. 여기에 필요한 것은 뭐라 해도 시간을 기다리는 인내이다. 그런데 조급함으로 서두른다면 무엇을 얻겠는가.

          목적지로 가는 길에 도사리고 있는 두 번째 함정은 서두름이다. 무슨 일이든지 서둘러 하면 실패하기 십상이다. 아무리 급해도 바늘허리에 실을 매어 쓸 수는 없다. 현대인은 점점 속도가 빨라지는 시대에 살고 있다. 옛날에는 밥을 한번 하려면 장작불 피우고 쌀을 씻어 밥이 되기까지 한 시간 이상 걸렸다. 그러나 지금은 1분이면 즉석밥을 먹는다. 그렇다고 해서 일처리에서조차 서둘러서는 내실있는 성과를 얻기 어렵다.

          중국에 가면 제일 먼저 배우는 말이 ‘만만디(천천히)’라는 말이다.
          반면 외국인이 한국에 오면 가장 먼저 익히는 말이 ‘빨리빨리’ 다.
          심지어 외국인들은 우리 한국 사람을 ‘미스터 빨리빨리’ 라고 부르기까지 한다.

          중국인들은 무슨 일을 하든지 결코 서두르는 법이 없다.
          그야말로 만만디이다. 만만디라는 말이 나오게 된 유래가 재미있다.
          양자강 상류에서 배를 타고 하류로 내려가는 사람이 있었다.
          그 사람은 배에 오리알을 싣고 유유히 유람을 하면서 강을 따라 내려갔다.
          그런데 유람을 하는 사이에 오리알에서 새끼가 태어났다.
          배에서 부화된 오리 새끼는 배 위에서 자라나 어미오리가 되어 또 알을 낳았다.
          그 오리 알이 오리 새끼가 되고, 또 자라서 어미 오리가 되고, 알, 새끼오리, 어미오리… 이렇게 반복했다. 배가 양자강 하류에 도착을 했을 때는 배 안에 오리가 가득하게 됐다.
          그는 오리와 알을 모두 팔고 다른 물건들을 샀다.
          그리고 또 다시 양자강을 유람하면서 상류로 올라왔다.
          이런 식으로 양자강을 세 번 왕복하자 그의 일생이 끝이 났다.
          바로 이 사람 이름이 '만만디' 였다.
          여기에서 만만디라는 말이 생겼다고 한다.
          중국인의 여유와 느긋함을 보여주는 일화다.

          그런데 한국인은 이와 정반대다.
          너무나 조급하다.
          우물가에서 숭늉을 달라는 식으로 급하기 짝이 없다.

          성마른 판단은 일을 그르친다

          잠시 알렉산더 대왕 얘기로 넘어가자, 대왕은 친한 친구로부터 귀한 선물을 받았다. 바로 잘 훈련된 사냥개 두 마리였다. 알렉산더는 사냥을 즐겼던지라 매우 기뻐했다. 어느 날 왕은 사냥개를 데리고 토끼사냥에 나섰다. 그런데 개들은 사냥할 생각이 전혀 없는 듯 했다. 달아나는 토끼를 물끄러미 바라보며 빈둥빈둥 누워 있었다. 왕은 화가 나서 사냥개들을 모두 죽여 버렸다. 그리고는 사냥개를 선물한 친구를 불러 호통을 쳤다. “토끼 한 마리도 잡지 못하는 보잘것없는 개들을 왜 내게 선물했는가? 그 쓸모없는 사냥개들은 내가 모두 죽여 버렸네!” 친구는 대왕의 말을 듣고 매우 실망스런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말했다. “대왕이시여, 그 사냥개들은 토끼를 잡기 위해 훈련된 개들이 아닙니다. 호랑이와 사자를 사냥하기 위해 오랜 시간 훈련받은 값비싼 개들입니다.”

          친구의 말을 듣고 알렉산더 대왕은 땅을 치며 후회했다. 천하의 알렉산더도 이건 매우 성급했다.

          ‘성격이 급한 사람’은 성급하게 행동하는 사람을 말한다. 성급하게 일을 처리하면 실수를 하고, 따라서 후회를 하게 된다. 그러므로 시간을 두고 신중히 생각하여 일을 결정하고 처리하는 습관이 필요하다.

          불교의 선문집 벽암록(碧巖錄)에는 ‘줄탁동기(啐啄同機)’란 화두가 나온다. 닭은 병아리를 부화하기 위해 알을 품는다. 때가 되면 병아리가 알 안에서 껍질을 톡톡 쪼게 되는 것을 줄(啐), 그 소리를 듣고 밖에 있던 어미닭이 밖에서 동조해 껍질을 쪼아주는 것을 탁(啄)이라고 한다. 이 두 행위가 같은 시점에 일어나야 병아리가 비로소 알에서 나올 수 있게 된다.

          그러나 아직 때가 이르지도 않았는데 어미닭이 밖에서 쪼게 되면 병아리는 아직 채 제대로 부화가 되지 않았기 때문에 죽고 만다. 때가 되어 병아리가 알을 깨고 나오려고 해도 어미닭의 도움이 없으면 세상 밖으로 나오는 것이 쉽지 않다. 이처럼 알을 깨고 나오는 부화에도 모두 때가 있는 법이다. 그런 때를 못 맞추면 일은 그르치게 된다. 병아리가 ‘줄’할 때를 기다리는 어미 닭의 기다림과 인내가 그만큼 중요한 요체다.

          아무리 급하다고 이삭을 뽑아 올려서야

          맹자가 제자들에게 열심히 수양하라고 권하면서 다음과 같은 예를 들었다. 어리석은 농부가 살았다. 그 농부가 어느 날 자기 논에 나가 보니 논의 벼키가 다른 논의 벼보다 작았다. 고민 끝에 농부는 자기 논의 벼 줄기를 일일이 뽑아 올려놓았다. 노인은 만족한 듯이 집에 돌아와 말했다. "오늘은 참 피곤하구나. 벼의 싹을 뽑아 올려놓고 왔더니만…”

          농부는 아내에게 벼의 늦게 자라서 싹을 뽑아 놓았다고 말했다. 깜작 놀란 아내가 다음 날 논으로 달려갔다. 모든 벼는 이미 다 말라 죽어 있었다.

          이게 바로 ‘알묘조장(揠苗助長)’이다. 줄여서 ‘조장’이라고 한다. 벼 이삭은 시간이 지나면 자라게 돼 있다. 그동안 김을 매주고 물을 잘 대주면 스스로 자란다. 이것을 공연히 조바심을 내서 서두르다 보면 오히려 농사를 망친다.

          공자도 이와 비슷한 말을 했다. ‘욕속즉부달(欲速則不達)’이다. “너무 빨리 가려다 오히려 이르지 못한다”라는 뜻이다. 공자의 제자 자하가 거부라는 고을 태수가 되자 스승을 찾아가 어떻게 하면 정치를 잘 할 수 있겠느냐고 물었다. 공자가 타일렀다. "빨리 하려고 서둘지 말고 작은 이익을 꾀하지 말라. '빨리 하려 하면 일이 잘되지 않고' 작은 이익에 구애되면 큰 일이 이루어지지 않느니라."

          정책의 실효가 빨리 나타나기를 안달하지 말고 원대한 계획을 세웠으면 눈앞의 작은 이익을 노리지 말라는 공자의 가르침이다. 빨리 성과가 나타나 나쁠 건 없지만 전후좌우를 살피지 않고 빠르기만 추구한다면 부실하거나 일을 그르칠 수 있다는 말이다. 속담에도 ‘급할수록 돌아가라’는 말이 있듯이 빨리 서두르면 도리어 상황이 더욱 악화된다, 아무리 바느질이 급해도 바늘허리에 실을 묶어 쓸 수는 없는 법이다.

          서두르면 성공하지 못하고, 작은 이익에 눈을 팔면 큰일을 이루지 못한다. 대어(大魚)를 낚으려는 낚시꾼 일수록 기다림이 익숙하고, 먼 길을 떠나는 나그네일수록 서둘러 신발 끈을 매지 않는다.

          지식은 쌓아지는 것이고, 지혜는 깨닫는 것이다. 지식은 사람의 경험이 근원이기에 익힌 자의 결과를 중요시 한다. 그러나 지혜는 진리가 근원이기에 알지만 깨달아야 한다. 결과가 눈에 쉽게 보이지 않는다. 기업이나 조직, 한 나라를 발전시키는 원동력이 무엇이라는 것은 누구나 지식으로 알 수 있다. 하지만 이를 실천할 수 있는 힘은 지혜이기에 누구나 이룩할 수는 없다.

          빠른 개혁 보다 바른 개혁 이뤄야

          지금 한반도는 격랑에 휩싸여 있다. 만약 한참 진행 중인 비핵화 협상이 실패한다면 한반도의 운명은 이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대혼란에 빠지게 된다. 보고 싶은 현실만 보는 대부분의 사람과 달리 책임있는 지도자는 보고 싶지 않은 현실까지도 직시해야 한다.

          또한 운명과 상황이 달라지면 그에 맞게 적절히 변화하는 임기응변으로 대처해야 한다. 부디 한미정상이 북한의 상황변화에 맞는 현명한 대책을 마련하여 한반도에 '핵 없는 평화'가 이뤄지기를 기대한다. 혹여 비핵화라는 열망을 지나치게 갈망한 나머지 앞뒤 헤아림도 없이 허겁지겁 협상타결만을 서두른다면 생각지도 못한 파국을 맞을 수도 있다. 이럴 때일수록 시간을 재촉함 없이 조목조목 짚고 따지면서 북한의 태도변화를 이끌어야 한다.

          요즘 우리나라의 법체계가 거의 무너진 상태로 복원조차 힘든 상태인 것처럼 보일 지경이다. 지난 시절 BBK특검은 물론이고 일개 정무수석의 손에 놀아난 대법원장이라는 작자의 행태 또한 있을 수 없는 범죄행위였다. 뿐만 아니라 지난 시절 독재정권에 아부하느라 거짓 수사와 허위판결을 일삼은 자들이 출세가도를 달리며 여전히 중책을 맡고 우리사회를 주름잡고 있다. 참으로 기가 찰 노릇이다.

          정치 경제 외교 모든 게 힘든 상황이다. 소위 과거 정권들이 저질러 놓은 온갖 적폐를 쓸어내고 새로운 미래를 꾸려가려면 해결해야할 과제들이 산적해 있다. 그럴수록 천천히 하나씩 다지면서 나아갈 때다. 급하게 서둘지 말고 조바심이 나더라도 조금 더 참고 기다리며 철저하고 꼼꼼하게 청소해야 한다. 그러니만큼 천천히 서두르자는 주장이 딱 들어맞는다.

          시중에 ‘무식’은 중세병이고 ‘속단’은 현대병이라는 말이 퍼져있다. 정보의 시대에 무식해서는 경쟁에서 살아남기 어렵고 속단 즉, 빠른 판단은 빠른 속도로 변화하는 시대에 생존기술이기도 하다. 속도감은 생리적이라기보다는 문화적인 감각이다. 지난날 세계가 시속 60km 정도로 움직였다고 한다면, 오늘날 세계는 그 열 배의 속도로 움직인다. 100년 전 사람들은 시속 30km에도 어지럼증을 느꼈지만, 현대인들은 그 속도에 짜증을 낸다. 남보다 먼저 판단하고 남보다 먼저 움직여야 성공할 수 있다는 건 현대의 상식이다. 그렇게들 살다 보니 기다림은 곧 짜증을 유발하는 행위가 돼버렸다. 속단의 짝이 조급증이다.

          새 정부가 출범한 지 1년 반 정도 지나니, 여기저기에서 개혁 속도가 더디다는 불만이 터져 나오고 있다. 그런데 막상 개혁의 방향과 청사진에 대해서는 별다른 관심이 없는 듯하다. 수십, 수백 년 묵은 적폐를 5년이나 2~3년만에 청산하는 건 불가능하다. 그럼에도 국민은 5년 내에 모든 적폐를 청산하라고 요구하고, 정부는 그 중 5년 내에 마무리할 수 있는 것만 생각한다. 그러다 보니 정말 중요한 장기 개혁 과제는 사람들의 관심에서 멀어지고 있다.

          현재 정치여건 아래서는 10년짜리 개혁 과제를 고민하는 것도 도에 넘치는 오버라는 비난을 받기 십상이다. 그렇다고 해서 오랜 시간이 필요한 개혁을 포기할 수도 없다. 당장 눈앞의 효과만을 노릴 것이 아니라 정부가 실현가능한 계획을 만들고 성실하게 이행하도록 해야 한다. 더구나 시간이 걸리더라도 다음 정부까지 가더라도 그 개혁안을 실천해야 성과를 거둘 수 있다. 빠른 개혁에 마음을 빼앗겨 바른 개혁이 무산돼서는 안된다. 천천히 서두를 과제다.

          나팔꽃의 개화생리가 바로 세상의 원리

          나팔꽃은 먼동이 틀 때 피어나는 꽃이다. 어둠이 가고 햇살이 돋아오를 때 피는 꽃은 낮이면 시들어 버린다. 그러나 요즈음 이런 상식을 뒤엎는 연구 결과가 나왔다. 한 식물학자가 나팔꽃을 연구했다. 24시간 빛을 쬐게 했다. 아예 어둠을 박탈한 것이다. 그랬더니 나팔꽃은 피지 않았다. 나팔꽃을 피게 하는 것은 빛이 아니라 어두움이라는 사실을 밝혀낸 것. 어느 정도의 어둠과 추위가 나팔꽃을 피게 했다는 사실이다. 이 나팔꽃의 개화생리가 바로 온 세상의 원리다. 사람이 살아가는 데는 일하는 낮만 아니라 잠자는 밤도 필요하다. 일손을 놓고 일을 잊어버리는 밤도 있어야 한다.

          예술작품의 경우에도 그런 경우가 많다. 얼개와 밑그림을 차분히 준비하지 않으면 원하는 멋진 작품을 얻기란 기대난이다. 꼼꼼히 준비하지 않으면 작업을 진행하다 덧칠하고 개칠하는 경우가 생긴다. 이런 때는 차라리 아예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는 것만 못하다.

          서두르면 실패한다. 서두른다고 일이 되는 것이 아니다. 서두르면 실수하기 쉽다. 서두름은 땀 흘리는 과정을 밟지 않고 살려는 편의주의이다. 서두름은 기다림을 모르는 조급함이다. ‘천천히 빨리’라는 말이 있다. 서두름은 성취를 얻는데 함정이다.

          자제하고 기다리며, 인내할 줄 알아야 한다. 바로 ‘호시우행(虎視牛行)’의 자세다. 호랑이의 눈빛을 간직한 채 소 걸음으로 간다. 늘 예리하게 눈을 뜨고 있으면서도 행동은 소처럼 끈기 있게 하는 모습이다.

          급히 먹는 밥이 체한다고 했다. 아무리 밥이 좋은 것이라 한들 체하면 무슨 소용이 있나. 비핵화도 적폐 청산도 정치개혁도 경제살리기도 모두 마찬가지다. 조바심 나더라도 참고 기다릴 줄 알아야 한다. “천천히 서두르라” 이 말의 속마음도 천천히 서둘러 새겨졌길 바란다. 정부에게 하는 말이지만 모든 독자들에게도 전해드리고자 한다.





          어르신과 원로, 뒷방 늙은이


          모스크바에서 남쪽으로 약 160㎞ 떨어진 야스나야 폴랴나(Yasnaya Polanya)는 톨스토이의 고향이다. ‘빛나는 공터’라는 뜻에 걸맞게 자작나무 숲길을 따라 올라가면 흰색 2층 목조주택이 나타난다. 바로 톨스토이의 생가다. 이곳 그의 서재에는 2만 2천권의 책이 있다. 고스란히 톨스토이의 지적 편력을 보여준다.

          러․일전쟁이 터지자 톨스토이는 80세의 나이에 일본어 공부를 시작했다. 우리 식으로 말해 뒷방 늙은이 되기 딱 알맞은 나이에 배움이라. 이미 10개 국어를 익혔던 그였다. 그럼에도 또다시 배움을 택한 그는 평생 공부하기를 멈추지 않았다.

          그래서인지 “우리에게 기쁨을 주는 것은 진리 그 자체가 아니라 진리에 도달하기 위해 우리가 기울이는 노력”이라고 말했던 톨스토이의 심경에 충분히 공감이 간다. 배움에는 나이가 없다고 하지 않던가. 배우려는 욕구는 사람만이 가진 사람만의 특성이다. 만일 톨스토이에게서 지적 욕구가 없었다면? 여든 살의 나이에 배우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 것, 이것이 곧 늙음을 잊을 수 있는 길 아닐까.

          10개 국어 능통한데도 80세에 일본어 배우기 시작한 톨스토이

          흔히 유명한 사람이 늙으면, 늙었다는 이유 하나로 그저 원로라고 불린다. ‘원로’라고 남발돼 불리는 이 말은 기실 복잡한 속성을 갖는다. 무엇보다 누가 그런 자격을 부여할 것이냐는 문제다. 어떤 사람에게는 원로로 보일지 몰라도 다른 사람에게는 전혀 그렇지 않은, 겉모습만 원로인 이들이 있기 때문이다.

          단지 이름이 널리 알려졌을 뿐, 진정 당대의 현실을 걱정하고, 미래를 헤아려 빛을 밝혀준 참 원로가 과연 얼마나 있었던가? 저마다의 주장이 넘치다 못해 분분한 논쟁으로 지금처럼 혼란스러운 시대라면 더욱 잣대가 엄격해질 수밖에 없다.

          그저 나이가 많은 이를 대접하려는 뜻에서라면 굳이 원로라고 부르지 말아야 한다. 다른 호칭도 얼마든지 가능하기 때문이다.

          늙음에 대한 확고한 존경의 표현으로는 앞에 ‘노(老)’라는 접두어를 붙이면 된다. 정치인이라면 노정치인, 사업가면 노사업가, 시인이라면 노시인, 교수라면 노교수 하면 된다. 그런 것을 지나치게 높여주다 보니 웬만하면 원로고 어지간하면 어른이다.

          어떤 분야의 정상을 부르는 지칭은 약간씩 결이 다르다. 물론 거기에는 나이와 적절히 연관돼 있다. 학식이나 어떤 전문적인 분야에서 뛰어난 사람은 거벽(巨擘)이라고 한다. 거장의 뜻이라고 보면 된다. 또 세상 사람으로부터 가장 존경을 받는 사람을 태두(泰斗)라 이른다. 이들은 주로 전문성을 위주로 나누는 평가다. 반면 나이가 많아 덕망이 높고 경험이 풍부한 사람은 기숙(耆宿)이라고 부른다. 원로와 뜻이 상통한다.

          증자(曾子)는 “조정에서는 벼슬만한 것이 없고 시골 마을에서는 나이만한 것이 없으며 세상을 돕고 백성들의 어른 노릇하기에는 덕(德)만한 것이 없다(朝廷莫如爵 鄕黨莫如齒 輔世長民莫如德)”고 했다. <맹자(孟子)> 공손추(公孫丑) 하편에 나온다.

          우리가 흔히 나이다툼을 할 때 ‘향당이 막여치’야 하고 내세우는 밑바탕이다. 하기는 요즘엔 ‘노슬아치’라는 말도 나와 있다. 노인에 벼슬아치를 합성한 말이다.

          나이 얘기가 나온 만큼 한 가지 더. “나이가 배가 되면 아버지 같이 섬기고(年長以倍則 父事之), 10년이 위이면 형님으로 모시고(十年以長則 兄事之), 5년이 많으면 어깨를 나란히 해서 따른다(五年以長則 肩隨之)”고 했다. <예기(禮記)> 곡례(曲禮)에 나오는 말이다. 이것이 나이로 상대방을 대접하는 기준이 돼서 이어져 내려왔다. 지금껏 나이가 벼슬처럼 인정받는 근거다. 수평적 평등사회가 아닌 나이를 매개로 하는 수직적 상하구조를 만드는 데는 나이가 이렇게 힘을 발휘했다

          연장자 식견·경륜 존중하는 존년상치(尊年尙齒)

          나이 든 분들을 존경하고 그분들의 식견과 경륜을 존중해야 한다는데 토를 달 사람은 없다. 이른바 존년상치(尊年尙齒)다. 중국 당나라 초기의 명신 영호덕분(令狐德棻·583~666) 등이 지은 주서(周書) 무제상(武帝上)편이 출처다.[尊年尙齒 列代弘規 序舊酬勞 哲王明范] 존로상치(尊老尙齒)로도 알려져 있다. 동양권 문화에서 나이대접에 소홀했다가는 기본 매너가 없는 사람으로 외면당하기 딱 알맞다.

          연장자를 대우하는 이런 관습은 퍽 오래됐다. 3대 유리왕부터 16대 흘해왕 때까지 썼던 신라 왕호 ‘이사금’은 이가 많은 사람, 즉 연장자는 성스럽고 지혜로운 사람[聖智人]이라고 한 데서 유래된 치리(齒理)라는 말이다. 유리왕과 탈해왕이 서로 왕위를 양보하다가 이가 더 많은 유리왕이 먼저 즉위한 다음부터 왕을 이사금으로 불렀다는 설화가 전해내려 온다.

          조선시대에는 나이 많은 임금이나 현직에 있는 70세가 넘는 정2품 이상의 문관들이 모여서 놀도록 기로소(耆老所)를 운영했다. 60세를 기(耆), 70세를 노(老)라 한다. 또 국왕이나 왕비 대비 대왕대비 등이 예순 살 또는 일흔 살이 됐을 때, 60 또는 70세 이상자만을 대상으로 기로과(耆老科) 또는 기로정시(耆老庭試)라는 과거도 실시했다. 대표적인 존노상치 제도다. 최초의 기로과는 영조 32년이던 1756년 대비 인원왕후의 70세 때 실시됐다. 53년간 재위하면서 83세까지 살았던 영조는 기로과를 자주 열었다. 왕의 나이가 여러 선비들에게 기회를 늘려준 셈이다. 영조 나이 70, 즉위 40년이 된 1763년에는 대증광시(大增廣試)에 이어 70세 이상을 대상으로 기로과도 열었다. 그 뒤엔 별로 없었다.

          추어탕 한 대접일망정 노인 모시고 상치잔치판 벌이는 마을공동체

          전남 담양 출신 농부 시인 고재종의 시 ‘한바탕 잘 끓인 추어탕으로’를 보자.

          “·……그 벌건, 그 걸쭉한, 그 땀벅벅 나는, 그 입에 쩍쩍 붙는 추어탕으로 상치(尙齒)마당이 열렸는데, 세상에, 원 세상에, 그 허리가 평생 엎드렸던 논두렁으로 휜 샛터집 영감도, 그 무릎이 자갈밭에 삽날 부딪는 소리를 내는 대추나무집 할매도, 그 눈빛이 한번 빠지면 도리 없던 수렁 논빛을 띤 영대 씨와, 그 기침이 마르고 마른 논에 먼지같이 밭은 보성댁도 내남없이, 한 그릇 두 양품씩을 거침없이 비워 내니

          봉두난발에, 젓국 냄새에, 너시에, 반편이로 삭은 사람들이, 세상에, 원 세상에, 그 어깨가 눈 비 오고 바람 치는 날을 닮아 버린 그 어깨가 풀리고, 그 핏줄이 평생 울분과 폭폭증으로 막혀 버린 그 핏줄이 풀리고, 그 온몸이 이젠 쓰러지고 떠나 버린 폐가로 흔들리는 그 온몸이 풀리는지, 모두들 얼굴이 발그작작, 거기에 소주도 몇 잔 걸치니 더더욱 발그작작해서는, 마당가의 아직 못 따 낸 홍시알들로 밝았는데,

          때마침 안방 전축에선, 쿵짝 쿵짝 쿵짜자 쿵짝 네 박자 속에 사랑도 있고 눈물도 있고 이별도 있다고 하며, 한번 놀아 보장께. 기필코 놀아 보장께, 누군가 추어대곤, 박수 치고 보릿대춤 추고 노래 부르고 또 소주 마시니, 세상에, 원 세상에, 늦가을 노루 꼬루만 한 해 넘어가는 줄도 모르고 한바탕 잘 노니, 아 글쎄, 청천하늘의 수만 별들도 퉁방울만 한 눈물 뗄 글썽이며, 아 글쎄, 구경 한번 잘 하더라니!”

          읽으면 절로 흥이 나고 즐거운 이 시에 ‘상치(尙齒)마당’이 나온다. 상치란 이(齒) 즉, 나이를 받들어 모시는 것이니 나이든 노인들을 위해 베푼 잔치마당을 말한다. 가을철 미꾸라지 보양식으로 한데 어우러져 흥겹게 한때를 보내는 풍경이라니. 여기에 등장하는 농군들은 하나같이 가난에 찌들고 농삿일에 지쳤으되 한 대접 추어탕 잔치에 흥을 맡기고 흐드러지는 농투성이들이다. 그러나 존로상치 전통으로 마을공동체의 따뜻한 인심을 나누고 함께한다.

          ‘이가 다 빠졌으니 이제 아플 일도 없다’고 달관한 선인

          지금은 의술이 발달해 치아를 때우고 새로 해 넣고 교정하는 일이 얼마든지 가능하지만 예전엔 이가 빠지면 그저 잇몸으로 살아야 했다.

          “지난해 어금니 한 개 빠지더니/올해는 앞니 한 개가 빠졌다/어느새 6, 7개가 빠졌는데/그 기세가 줄어들지 않는구나.” 당송 팔대가 한유(韓愈)의 시 ‘낙치(落齒)’ 중 일부다. 마지막은 이렇게 돼 있다. “어떤 사람은 말하네/이가 빠지는 건 수명이 다한 거라고/나는 말하네. 인생은 유한한 것/장수하든 단명하든 죽는 건 마찬가지.”

          시인은 이가 빠지는 것을 두고 인생의 끝을 읽고 있다.

          여섯 수로 이뤄진 다산 정약용의 시 ‘노인일쾌사(老人一快事)’에도 이(齒) 이야기가 나온다. 다산은 첫째 시에서 “늙은이 한 가지 유쾌한 일은/ 민둥머리가 참으로 유독 좋아라”라고 눙을 친다. 이어 둘째 수에서 “늙은이 한 가지 유쾌한 일은/치아 없는 게 또한 그 다음이라”고 너스레다. 다산은 마지막에 “유쾌하도다. 의서(醫書) 가운데에서/치통이란 글자는 빼버려야겠네”라고 자위한다. 이가 다 빠졌으니 이제 아플 일도 없다는 말이다.

          나이 들어 이 빠지는 게 유쾌할 리 없건만, 이렇게 달관과 해학적인 태도로 세상을 살아가는 것도 좋지 않겠는가. 이(齒)는 건강과 노화, 두 가지를 가늠해 볼 수 있는 잣대다. 노(老)를 쇠퇴나 쇠약이 아니라 애써 노숙과 노련으로 해석하려 하지만 빠진 이가 새로 날 수 없고 만든 이가 온전히 내 이와 같을 리 없다.

          오랜 신산스런 세월을 한국인들은 참 악착같이 살아왔다. 악착도 이와 관련된 말이다. 작은이 악(齷)과 이 마주 붙을 착(齪)이 합쳐진 게 ‘악착’이다. 이게 변해 ‘억척’이 됐다. 본뜻은 ‘작은이가 꽉 맞물린 상태’ ‘앙다물어 이가 맞부딪히는 상태’를 가리킨다. 그렇게 우리는 이를 앙다물고 악물고 살아온 게 아닐까?

          하지만 나이 많은 것을 밝히기 꺼린 것은 동서양 모두 마찬가지인 모양이다. 미국의 명사 뉴컴 차리라는 사람은 생전에 자기 나이를 숨겨왔다. 그가 세상을 떠나자 관에 명찰을 붙여야 했는데 명찰에 써 넣어야 할 그의 나이를 아는 사람이 없었다. 친구들 역시 “아마 79세일거야”, “아마 그보다 아래일거야”라고 미심쩍어 해서 결론이 나지 않았다. 듣고 있던 장의사가 “저승길에 거짓말을 하면 안됩니다. 정확한 나이를 모르면 ‘초상당한 노인’이라고 쓰겠습니다”고 말했다.

          덕망과 위엄을 함께 갖춰야 존경과 대접받아

          우리는 예로부터 덕의 기준을 명시하고 그 기준에 따라 행동하는 사람을 존경하고 따른다. 윗사람이나 어른이 갖춰야 할 덕목은 ‘덕위상제(德威相濟)’다. 즉 글자대로 풀면 “덕과 위엄으로 서로 건진다”가 된다. 다시 말해 덕은 위엄으로 건지고, 위엄은 덕으로 건진다는 말이다.

          덕과 위엄은 조직을 이끌어 나가는 사람이 갖춰야 할 중요한 덕목이다. 덕만 있으면 사람 좋다는 소리야 들을 수 있겠지만, 위엄이 서지 않는다. 반대로 위엄만 내세우고 덕이 없어도 안 된다. 겉으로는 어쩔 수 없이 견뎌도 속으로는 반발한다. 결국 바른 말 하는 사람은 떠나고 아첨하는 사람만 남는다. 다시 말해 어른으로서 인정받는 원로들이 갖춰야 할 덕목이기도 하다.

          그런데 원로라고 하기엔 낯간지러운 사람들이 꼭 원로대접을 받겠다고 설친다. 무엇보다 원로다우려면 출처진퇴를 잘 헤아릴 줄 알아야 한다. 시도 때도 없이, 되나 못되나, 나설 자리 안 나설 자리 가리지 않고 얼굴을 내미는 인사는 원로가 아니다. 그저 체면이나 염치도 모르고 뻔뻔함을 무기로 내세우는 약방의 감초일 따름이다. 그럼에도 노추(老醜)함으로 뭉쳐진 우중충하고 추레한 늙은이들까지 설쳐댄다. 그들이 모두 원로일 수는 없다. 더더구나 단지 나이가 많다는 이유로 상석에 앉을 수는 있을지 몰라도 시민 모두의 존경까지 받아야 할 이유는 없다는 얘기다. 그런데도 조용히 있으면 호호야(好好爺)란 평판이라도 얻으련만 다들 무엇이 그리 자랑스럽다고 설쳐대는지 도무지 모를 일이다. 그러니 젊은이들로부터 손가락질 받는다.

          원로들에 대한 존경과 믿음은 어디서 오는가. 오랜 경륜에서 우러나오는 언행이 신뢰감을 주기 때문이다. 원로는 연륜만큼 믿음을 주고 내일을 내다보는 역사의식이 있어야 한다. 또 자신의 말과 행동 하나하나가 자신의 이익과는 관계 없이 다른 이들에게 어떠한 영향을 줄 것인지를 헤아려야 한다. 더구나 자신의 처지와 다른 공동체 구성원들의 아픔이 무엇인지 알고 고통을 함께 나눌 줄 알아야 한다. 이처럼 모든 것을 갖추고 존경받고 덕망을 받는 이가 바로 원로다.

          무조건 나이나 기득권만으로 원로행세 하려고 달려드는 꼴불견들이 곳곳에 적지 않다. 하지만 원로란 단순히 세월을 헤쳐 온 연장자만을 말하는 게 아니다. 그렇기에 ‘참 어른’은 더더욱 찾아보기 어렵다. 정치 과잉의 시대, 비정치 분야의 원로들이 스스로 몸을 더럽히지 않으려는 이유도 있겠다. 그렇지만 멀리서 바라만 봐도 힘이 되고 그저 마음속에 떠올리기만 해도 든든한 위안이 되는, 거목과 같은 원로는 분명 우리사회에 꼭 필요하다 .

          조직이나 나라가 제대로 움직이려면 원로의 역할이 중요하다. 학식과 덕망, 경륜을 갖춘 원로의 말과 행동은 국민들에게 많은 영향을 미친다. 원로가 제대로 처신해야 사회가 건강해지고 나라가 바로 선다. 누구보다 열심히 땀 흘리고 고민했던 원로들은 이제 정신적 지주로서 사회의 ‘멘토’로서 할 일이 많다. 국가가 위기에 처하거나 반목과 갈등이 심할수록 곧고 바른 발언은 의견 통합과 문제 해결에 큰 역할을 한다.

          모름지기 원로라면 <장자(莊子)>의 천도(天道)편에 나오는 착륜옹(斲輪翁)처럼 직언을 마다하지 말아야 한다. 그는 제환공의 으름장에도 전혀 굽힘없이 자신의 소견을 내놨다. 원로란 권력자에게 달콤한 말보다는 꼬장꼬장한 주견으로 거침없이 말할 수 있어야 한다. 오로지 아집으로 똘똘 뭉쳐 제 이익에만 눈멀고 아첨의 말과 글로 세상을 혼탁하게 하는 노회(老獪)한 영감태기들과는 품격이 달라야 한다.

          ‘루틴’ 갖추는 등 ‘노인의 기술’로 ‘꺼리’ 만들어야

          노인의 ‘지혜’는 풍부하다. “두 마리 말 중 어미와 자식을 구분해 보라”는 물음에 “풀을 줘서 먼저 먹는 쪽이 새끼”라고 답하는 게 노인이다. 노인의 슬기를 보여주는 사례는 많다. 자주 인용되는 ‘상속의 지혜’가 그중 하나다. 한 노인이 소 17마리를 남기고 죽으면서 큰아들 1/2, 작은아들 1/3, 막내에게 1/9을 가지라고 유언했다.

          아무리 나눠도 답이 나오지 않자 아들들은 동네 어르신에게 답을 구했다. 그는 “1마리를 빌려줄 테니 18마리 중 각각 9마리, 6마리, 2마리를 갖고 남은 1마리는 다시 날 주게”라고 했다. 사람의 판단력과 지혜는 청년기보다 사회경험이 많은 노년기에 더 성숙해진다. 연륜이 쌓일수록 깊어지는 노년의 지혜는 우리 사회의 희망이자 등불이다. 물론 나이 든 사람이라고 해서 모두가 지혜로운 것은 아니다. 늙어서 탐욕을 부리는 노욕이나 노탐으로 인해 시대에 뒤떨어져 ‘꼰대’ 소리를 듣는 것도 무척이나 딱하고 안타까운 일이다. ‘노인의 지혜’ 만큼이나 중요한 것이 ‘지혜로운 노인’이 되려는 노력이다. 그래야 젊은이들에게 희망이 될 수 있다.

          언제 부터인가 우리사회에 존경받는 어른이 없다는 말을 자주 듣게 된다. 나이 들어 희망의 등불은 되지 못할지언정 정녕 ‘꼰대’ 소리를 듣지 않으려면 나이가 들어 갈수록 젊은이들과 함께 호흡하며 공감력을 키워가야 한다.

          노후생활에서 가장 무서운 적은 무엇일까. 그것은 바로 무료(無聊)다. 지루하고 심심함해서 외롭고 쓸쓸해진다. 사람은 죽는 날까지 할 일이 있어야 한다. ‘산송장’ 이 안되려면 자기일이 있어야 된다. 돈 버는 일만 일은 아니다. 취미도 좋고 레저도 좋고 ‘꺼리’가 있어야 한다. 이를테면 ‘노인의 기술’이라고나 할까. ‘루틴’이 있어야 한다. 사회적 시스템도 중요하지만 루틴을 스스로 만들어내는 것이 곧 자신을 살리는 길이다. 노후의 ‘자기일’ 은 삶의 질을 결정하는 중요한 요소다.

          텔레비전 리모콘을 쥐고 소파에 누우면 인생은 종친 것이나 마찬가지다. 오직 늙어 죽기만을 기다리는 인생이 된다.

          노인은 노인다워야, 대접받을 수 있어

          <논어> 안연편을 보자. 제 경공이 정치에 대해서 공자에게 묻자, 공자가 답하길 “군주는 군주답고, 신하는 신하답고, 아버지는 아버지답고, 자식은 자식다워야 합니다.(君君 臣臣 父父 子子)”





          이팝나무의 꽃말 : 영원한 사람

          이 나무에는 부모의 애틋한 마음이 담겨 있다.
          꽃 피는 시기가 예전 같으면 가장 배고픈 고통에 시달렸던 보릿고개 즈음이다.
          그래서 춘궁기에 굶어 죽은 자식의 무덤가에 이 나무를 심어놓고 죽어서라도 흰 쌀밥을 마음껏 먹기를 빌었다.
          그러니 그냥 꽃이 아니라 밥꽃이다.

          이팝나무와 쌀밥에 얽힌 또다른 이야기도 애달프다.
          시어머니 구박을 받던 착한 며느리가 어느 날 조상의 제사를 모시기 위해 귀한 쌀밥을 지었다.
          그러다가 뜸이 들었는지 알아보려고 밥알 몇 개를 떠먹는 것을 때마침 부엌에 들어온 시어머니가 봤다.
          시어머니는 조상 제사 올리기 전에 며느리가 먼저 퍼먹었다고 더욱 더 구박했다.
          구박을 견디다 못한 며느리, 뒷산에 올라가 목을 매어 죽고 말았다.
          이 며느리가 묻힌 무덤 가에 흰 꽃이 수북하게 피는 나무가 있었다.
          사람들은 쌀밥에 한이 맺혀 죽은 며느리가 환생한 것이라고 해서 이 나무를 이팝나무라고 불렀다고 한다.

          이밥을 닮았다 해서 ‘이팝나무’다.
          벼농사가 잘되면 쌀밥(이밥)을 먹는다고 해서, 또 입하 무렵에 꽃이 피기 때문에 이팝이라 했다는 설도 있다.

          먹을 것이 풍성하지 않았던 옛날에는 이팝나무 꽃이 많이 피면 풍년이 들 걸로 여겼고 그렇지 않으면 흉년이 든다고 여겼다고 한다.
          지난날에는 꽃이 얼마나 잘 피는지, 이팝나무의 꽃피는 모습을 보고 한 해 벼농사의 풍흉을 짐작했다.
          치성을 드리면 그해 풍년이 든다며 신목(神木)으로 받들기도 했다.

          이팝나무의 꽃말이 영원한 사랑이다.
          자식을 위한 사랑인지, 부모를 위한 사랑인지, 여하간에 영원하다니 값진 사랑임에는 틀림없다.



          그것이 인생이지(C'est la Vie)’

          쎄라비!
          이 말대로 산다는 것은 모든 일들이 자연스럽고 우연하게 흘러가도록 내버려둔다는 것이다.
          이것저것 잘못됐다고 자책하거나 탓하지 말자. 인생은 그런 것이니.
          그렇다고 ‘이래도 흥! 저래도 흥!’ ‘풍타죽낭타죽(風打竹浪打竹)’ 바람불면 바람부는 대로 물결치면 물결치는 대로는 아니다. 인위적이고 억지스럽게 거스르는 것이 인생이 아니라는 말이겠다.
          매사에 다 흐르는 결이 있고 풀리는 가닥이 있는 것 아니던가.
          그래서다. ‘Such is life! 사는 게 다 그런 거지!’가 넉살맞지만 그럴싸하다.

          “느림은 무엇보다 사랑과 잘 맞는다. 전쟁에서 가장 중요한 덕목은 빠름이지만 사랑에서 그리고 평화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느림이다.”

          독일 뮌헨대 칼 하인츠 A 가이슬러 교수가 쓴 책 ‘시간’에 나오는 구절이다.
          빠름을 이기는 것은 더 빠름이고 더 빠름을 이기는 것은 더 더 빠름이 아니라 느림이다.
          느림에는 사랑 여유 인내가 있다.
          나태가 아무것도 하지 않고 방치하는 게으른 상태라면 느림은 삶의 매 순간을 구석구석 느끼기 위해 속도를 늦추는 적극적인 선택이다. 느린 달팽이가 풍경을 본다고 했다.

          또 느림의 미학자 피에르 상소는 이렇게 말했다.
          “느림이란 시간을 급하게 다루지 않고 시간의 재촉에 떠밀려 가지 않겠다는 결심이며 나 자신을 잊어버리지 않을 수 있는 능력과 세상을 받아들일 수 있는 능력을 키우겠다는 확고한 의지에서 비롯하는 것이다.”

          이런 느림 예찬론자들의 사색을 빌려와 원용해 본다면 인생도 느림이란 덕목을 필요로 한다. 매사 빠른 것만이 능사가 아니다. 때로 느리게 기다리는 것이 더 이익을 가져올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인내와 성찰이 우리에게 얼마나 큰 평화와 안정을 가져다 주는 지 익히 알지 않는가. 빠른 인내, 빠른 성찰이 가능할 수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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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불교'는 친근하고
          가톨릭은 '호감'이 가지만
          개신교는 '거리감'이 느껴지는 종교

          기독교윤리실천운동이 지난 16일 한국교회100주년기념관에서 발표한 '2023 한국교회의 사회적 신뢰도 여론조사' 결과 가장 친근감 있는 종교에 대하여 불교가 23.2%로 가장 높았고 가톨릭 19.9%, 개신교 19.6% 순으로 드러났다.

          가장 호감가는 종교에 대해서는 가톨릭이 가장 높은 24.7%, 불교 23.4%, 개신교는 16.2%로 드러났다.
          또 가장 신뢰하는 종교 역시 가톨릭이 21.4%로 가장 많았고 개신교 16.5%, 불교 15.7%였다.

          친근감과 호감은 비슷한 표현이지만 친근감은 이미 형성되어 있는 이미지라면 호감은 더 가까이 다가가고 싶은 감정이다.
          이런 점에서 불교가 일반 국민들에게 이미 가까이 와 있는 종교이고 가톨릭이 가까이 다가가고 싶은 종교라면, 개신교는 두 가지면에서 모두 가장 거리감을 느끼는 종교라는 결과가 드러났다.
          특히 무종교인들에게 개신교의 친근감은 가톨릭에 대한 친근감의 4분의 1수준인 4.2%에 그쳤다.
          다른 종교인들보다 무종교인을 일차적인 전도의 대상으로 본다면, 전도의 가능성이 매우 낮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한국교회 신뢰도는 여전히 낮은 것으로 나타났다.
          한국교회의 신뢰도에 대하여 '신뢰한다'는 응답이 21.0%에 그친 반면 '한국교회를 신뢰하지 않는다'는 응답은 70.4%로 조사돼 국민의 5명 중 1명만 한국교회를 신뢰하고 있는 것으로 드러났다.
          이는 지난 2020년과 비교했을 때보다 10.8%p가 더 낮아진 결과다.
          지난 2020년 조사가 진행된 시점이 2020년 1월로 코로나 사태가 본격적으로 시작되기 전임을 감안했을 때 코로나 사태를 경험한 3년 사이에 한국교회 신뢰도는 더 나빠진 것으로 보인다.

          무엇보다 개신교를 제외한 모든 종교와 전체 응답자 54.7%가 '한국교회를 신뢰하지 않는다'고 답했으며, 무종교인의 교회에 대한 신뢰도는 10.6%에 불과했다.

          '기독교 목사의 말과 행동에 믿음이 간다'에 대해서도 부정적인 응답이 74.6%로 기독교 신뢰도와 거의 같은 결과를 나타냈다.
          '기독교인의 말과 행동도 신뢰하지 않는다'는 응답은 75.2%, '신뢰한다'는 응답은 20.6%로 2020년 32.9%보다 더 하락했다.
          한국교회는 물론 한국교회를 구성하는 목회자와 성도들 조차 신뢰를 잃고 있는 현실이다.

          한국교회의 사회기여도에 대한 인식도 낮았다. 한국교회가 우리 사회에 기여하고 있는지에 대한 질문에 '기여하고 있지 않다'는 응답이 70.8%로 다수였으며 무종교인들은 80.4%가 부정적으로 답했다.
          한국교회는 교회 밖의 비판 여론을 수용할 준비가 되지 않았으며(80.0%), 특히 '부패방지' '사회통합' '남북화해'에 대한 영역에서 도움이 되지 않는 응답이 80% 안팎으로 높게 나온 것으로 보아 교회가 이러한 영역에서 도움보다는 오히려 장애가 된다는 인식이다.

          또한 한국교회는 사회 공익을 중시하지 않는 '교회 이기주의' 단체로 인식했다.
          공공성과 관련해 사회 공동의 이익과 종교 신년이 충돌할 때 한국교회는 '공익보다 교회의 교리를 추구할 것'이라는 대답이 60.0%로 나타났다.
          국민의 절반이상이 한국교회는 사회공익이나 공공성보다 교리를 더 중시하는 종교로 평가했다.
          무종교인의 19.6%만 한국교회가 '사회 공동 이익을 추구할 것'이라고 응답한 것은 공공성에 관련해 한국교회에 대한 인식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결과이다.

          실제로 한국교회의 신뢰도를 높이기 위해 가장 먼저 개선되어야 할 부분에 대해 '교회 이기주의'가 34.2%를 차지했으며, 교회 지도자들의 삶(19.6%) 불투명한 재정 사용(17.9%) 타 종교에 대한 태도(17.3%)가 언급됐다.
          아울러 무종교인들은 개신교인이 신뢰받기 위한 개선점에 대해서 '나만 옳다는 자세'를 개선하기를 원하는 비율이 종교인들보다 높아서 특별히 '개신교인들의 배타적인 태도를 고쳐야 한다'는 인식을 나타냈다.

          여론조사 전문기관 지앤컴리서치에 의뢰해 이번 설문조사는 만 19세 이상 남녀 1000명을 대상으로 지난달 11일부터 15일까지 전국 성인 남여 1000명을 대상으로 5일동안 온라인으로 진행됐다.
          표본오차는 95% 신뢰수준에 ±3.1%포인트다.
          기윤실이 2008년부터 3년마다 실시해 온 '한국교회의 사회적 신뢰도 여론조사'는 이번이 7번째다.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마태복음 22장
                                                                                           혼인 잔치(23절)

                                                                     


          천국 혼인 잔치
          는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말씀하신 비유로서 성도들이 구원 받아 영원한 천국에 들어가야 할 것을 말씀한 것입니다.
          혼인이 일생일대에 중대하고 경사스러운 일인 것처럼 천국 또한 그렇습니다.
          천국을 혼인 잔치로 비유한 또 다른 목적은 신부를 드러내기 위한 것입니다.
          신랑, 신부, 하객으로 이루어지는 혼인 잔치를 통해 구원을 이루시는 하나님의 놀라운 섭리와 사랑에 대해서 깨달아야 합니다.


          어느 자리든 격식에 맞는 복장을 갖추어야 합니다.
          결혼식에 초청받은 하객이라면 그 예식을 축하하는 옷을 입어야 하듯이 천국 혼인 잔치에 참여하려면 반드시 예복을 입어야 합니다.
          혼인 잔치의 주빈이 되신 임금이 손님들을 영접하려고 나왔을 때 예복을 입지 않은 한 사람을 보고 가로되 "친구여 어찌하여 예복을 입지 않고 여기 들어왔느냐?" 하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그 사람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때 임금은 사환들에게 "그 수족을 결박하여 바깥 어두움에 내어 던지라."고 하셨습니다.

          예복을 준비하지 못한 사람이 잔치 자리에서 쫓겨나는 것처럼 마지막 혼인잔치 자리에 참여할 수 있는 예복을 준비하고 있습니까?
          사도 요한 그 예복을 "세마포'라고 합니다(계 19:8)

          "그에게 허락하사 빛나고 깨끗한 세마포를 입게 하셨은즉 이 세마포는 성도들의 옳은 행실이로다."

          세마포를 성도들의 옳은 행실이라고 하셨는데 옳은 행실은 곧 어린 양의 피로 말미암은 죄 사함에서 얻어진 은총이라고 하겠습니다(계 7:13-14)

          "장로 중에 하나가 응답하여 내게 이르되 이 흰옷 입은 자들이 누구며 또 어디서 왔느뇨, 내가 가로되 내 주여 당신이 알리이다 하니 그가 나더러 이르되 이는 큰 환난에서 나오는 자들인데 어린양의 에 그 옷을 씻어 희게 하였느니라."

          종교 지도자들과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잔치에 자신의 노력과 힘으로 들어갈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잔치는 하나님의 힘을 덧입어야 들어가는 곳이기에, 하나님께서 주시는 예복을 입어야 합니다.
          오늘 하루도 하나님을 자신의 힘으로 삼고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음으로 우리 삶의 자리에서 하나님의 잔치를 맛보는 복되고 행복한 하루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요한계시록 19:9
          천사가 내게 말하기를 기록하라 어린 양의 혼인 잔치에 청함을 입은 자들이 복이 있도다 하고 또 내게 말하되 이것은 하나님의 참되신 말씀이라.


          혼인 잔치의 비유

          예수님은 천국을 비유로 설명하셨다. 좋은 씨를 뿌린 사람,[1] 겨자씨 한 알,[2] 밭에 감추인 보화,[3] 좋은 진주,[4] 물고기를 모는 그물,[5] 종들과 회계하는 임금,[6] 포도원의 품꾼들,[7] 신랑을 기다리는 열 처녀,[8] 주인의 달란트를 맡은 종들[9]  등 여러 가지 비유가 복음서에 기록돼 있다. 비유로 말씀하시는 까닭을 묻는 제자들에게, 예수님은 "천국의 비밀을 아는 것이 너희에게는 허락되었으나 저희에게는 아니되었다"며 "하나님 말씀을 보고 듣고 깨닫는 자가 복이 있다"고 말씀하셨다.[10]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알려주신 천국의 비밀 가운데 하나가 '혼인 잔치의 비유'다. 성도들이 구원받아 천국에 들어가는 것을 예수님은 혼인 잔치에 참예하는 것으로 비유하셨다.

          예수께서 다시 비유로 대답하여 가라사대 천국은 마치 자기 아들을 위하여 혼인 잔치를 베푼 어떤 임금과 같으니 ... 종들이 길에 나가 악한 자나 선한 자나 만나는 대로 모두 데려오니 혼인 자리에 손이 가득한지라 ... 청함을 받은 자는 많되 택함을 입은 자는 적으니라

          천국 혼인 잔치의 구성원

          혼인 예식이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신랑, 신부, 하객이 필요하다. 혼인 잔치는 성도들이 구원받아 들어갈 천국을 비유하는 만큼, 신랑과 신부와 하객이 각각 누구를 뜻하는지 아는 것은 구원과 직결된다.

          신랑(아버지 하나님)

          신랑은 하나님의 아들로 오신 예수님을 가리킨다.[11] 그러나 2000년 전, 3년이라는 짧은 공생애를 마치고 승천하신 예수님은 신부가 없었다. 예수님 승천 이후 기록된 요한계시록에는 어린양의 아내가 예비함으로 혼인 기약이 이르게 될 것이 예언되어 있다.[12] '어린양'은 그리스도를 지칭하는 표현이다. 따라서 신부가 예비되어 마침내 이루어질 천국 혼인 잔치의 신랑은 재림 그리스도를 뜻한다.[13][14]

          하객(성도)

          천사가 내게 말하기를 기록하라 어린양의 혼인 잔치에 청함을 입은 자들이 복이 있도다 하고 또 내게 말하되 이것은 하나님의 참되신 말씀이라

          - 요한계시록 19:9

          어린양의 혼인 잔치에 손님을 청한다는 것은 천국 혼인 잔치에 나아갈, 구원받을 사람들을 모은다는 뜻이다. 그래서 혼인 잔치에 청함을 입은 자들이 복이 있다고 했다. 일각에서는 신부가 성도라 주장하기도 하나, 이는 잘못된 해석이다. 신부가 성도라면 청함을 입은 자는 누구를 뜻하는지 설명할 수 없다. 신랑과 신부는 손님을 초청하는 입장이므로, 신부와 손님은 근본적으로 다르다. 예수님은 혼인 잔치의 비유를 말씀하실 때 외에 다른 가르침을 주실 때에도 제자들을 한결같이 혼인집 손님으로 비유하셨다.[15] 따라서 천국 혼인 잔치의 하객 즉, 청함을 입은 자는 성도들이다.

          하객은 '청함을 받은 자'만 아니라 '택함을 입은 자'로도 표현되어 있다. '택함을 입은 자', '택하심을 따라 남은 자가 있느니라'[16] 했으니 하객은 성도를 뜻하는 것이 분명하다.

          신부(어머니 하나님)

          천국 혼인 잔치의 신부는 청함을 입은 성도와 근본적으로 다르다

          마태복음 22장에 기록된 '혼인 잔치의 비유'에는 혼인 잔치에 마땅히 있어야 할 주인공인 신부가 언급되지 않는다. 이는 신부가 없어서가 아니라 예수님 당시에는 아직 등장할 때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언젠가 등장할 신부가 있으므로 예수님이 천국을 혼인 잔치에 비유하신 것이다.

          우리가 즐거워하고 크게 기뻐하여 그에게 영광을 돌리세 어린양의 혼인 기약이 이르렀고 그 아내가 예비하였으니

          - 요한계시록 19:7

          사도 요한은 신부가 등장할 것을 계시로 보고 기록했다. 2000년 전 예수님 당시 등장하지 않았던 신부는 어린양으로 비유된 재림 예수님과 함께 등장한다. 신부의 등장을 예언한 요한계시록에는 신부의 실체에 대해서도 기록되어 있다.

          일곱 천사 중 하나가 나아와서 내게 말하여 가로되 이리 오라 내가 신부 곧 어린양의 아내를 네게 보이리라 하고 성령으로 나를 데리고 크고 높은 산으로 올라가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는 거룩한 성 예루살렘을 보이니

          - 요한계시록 21:9-10

          요한은 천사들에게 이끌려 신부 곧 어린양의 아내를 계시로 보았다. 그가 본 신부는 하늘에서 내려오는 예루살렘이었다. 그 예루살렘에 대해 갈라디아서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위에 있는 예루살렘'은 '하늘에서 내려오는 거룩한 성 예루살렘'으로, 그 실체는 구원받을 성도들의 어머니시다. 천국 혼인 잔치의 신랑은 재림 예수님 곧 아버지 하나님이고, 신부는 어머니 하나님인 것이다.

          생명수 주시는 성령과 신부

          천국 혼인 잔치는 마지막 때 하늘 아버지와 어머니가 등장하여 하객으로 비유된 자녀들을 구원으로 인도하심으로 그 예언이 성취된다. 요한계시록에는 그에 대한 예언이 생명수를 주시는 모습으로도 묘사되어 있다.

          성령과 신부가 말씀하시기를 오라 하시는도다 듣는 자도 오라 할 것이요 목마른 자도 올 것이요 또 원하는 자는 값없이 생명수를 받으라 하시더라

          - 요한계시록 22:17

          요한계시록 19장과 21장에는 어린양과 아내 또는 어린양과 신부라고 하였는데 22장에서는 성령과 신부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이 말씀도 아버지 어머니께서 마지막 때 함께 나타나신다는 예언이다. 마지막 날에 아버지와 어머니께서 나타나시는 목적은 생명수를 주시기 위함이다. 생명수는 영생 곧 구원을 의미한다. 신부이신 어머니의 등장으로 성도들이 생명수를 받아 영원한 생명을 얻어 천국에 들어가게 된다. 그래서 혼인 잔치에 참여하는 성도들이 복이 있는 것이다. 어머니의 자녀들을 가리켜 성경은 '약속의 자녀'라 명명했다.[17]성령과 신부아버지 하나님과 어머니 하나님을 영접하여 믿고 따르는 자들이 혼인 잔치에 택함을 입은 약속의 자녀로서 천국의 영광을 얻게 된다.

          nowiki  더 자세한 내용은 성령과 신부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천국 혼인 잔치의 예복

          어느 자리든 격식에 맞는 복장을 갖추어야 합니다.
          결혼식에 초청받은 하객이라면 그 예식을 축하하는 옷을 입어야 하듯이 천국 혼인 잔치에 참여하려면 반드시 예복을 입어야 합니다.
          혼인 잔치의 주빈이 되신 임금이 손님들을 영접하려고 나왔을 때 예복을 입지 않은 한 사람을 보고 가로되 "친구여 어찌하여 예복을 입지 않고 여기 들어왔느냐?" 하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그 사람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때 임금은 사환들에게 "그 수족을 결박하여 바깥 어두움에 내어 던지라."고 하셨습니다.

          예복을 준비하지 못한 사람이 잔치 자리에서 쫓겨나는 것처럼 마지막 혼인잔치 자리에 참여할 수 있는 예복을 준비하고 있습니까?
          사도 요한 그 예복을 "세마포'라고 합니다.

          요한계시록 19:8
          그에게 허락하사 빛나고 깨끗한 세마포를 입게 하셨은즉 이 세마포는 성도들의 옳은 행실이로다.




          예복을 입지 않은 사람은 결국 쫓겨나고 만다. 청함을 받았지만 택함은 받지 못한 사람이 바로, 예복을 입지 않은 사람이다. 예복은 혼인 잔치에 참여하기 위한 필수 조건인 것이다. '누구든지 그리스도와 합하여 침례를 받은 자는 그리스도로 옷 입었느니라'[18] 기록되었으므로, 예복은 하나님의 언약인 침례를 받아 그리스도의 생애를 따르고 실천하며 살아가는 바를 의미한다. 그리스도의 본을 따라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며 올바른 언행과 품성으로 거듭날 때, 하나님의 자녀로 택함 받아 천국에 들어갈 수 있다. 아울러 신부이신 하늘 어머니의 영광이 된다.[19][20]

          예수님이 혼인 잔치에 빗대어 말씀하신 또 다른 교훈으로 '열 처녀의 비유'가 있다.[8] 천국은 마치 등을 들고 신랑을 맞으러 나간 열 처녀와 같다고 하셨다. 신랑이 더디 오자 기다리던 사람들이 다 졸며 자는데 밤중에 신랑을 맞으러 나오라는 소리가 들렸다. 기름을 넉넉히 예비한 다섯 처녀는 신랑을 영접하여 혼인 잔치에 들어갔으나, 등에 기름이 떨어진 다섯 처녀는 끝내 혼인 잔치에 들어가지 못했다.
          비유에서 등은 하나님의 말씀 곧 '진리'를 뜻하고,[21] 기름은 '믿음'을 뜻한다. 마지막 시대의 구원자이신 하늘 아버지와 어머니를 영접하여 그 가르침대로 행하며 끝까지 믿음을 지키는 자들이, 혼인 잔치에 들어간 슬기로운 다섯 처녀와 같이 천국에 들어갈 자들이다.



          어린 양의 혼인 잔치란 무엇인가요?


          요한계시록 19:7-10에서 요한은 환상을 통해 하나님께 찬양을 올려 드리는 천상의 군중들을 보고 그들의 소리를 들었습니다.
          어린 양의 혼인 축제, 말 그대로 “혼인 잔치”가 곧 시작될 것이기 때문이었습니다.
          혼인 잔치의 개념은 그리스도 시기의 혼인 관습에 비추어 볼 때 좀 더 정확하게 이해될 수 있습니다.

          당시의 혼인 풍습에는 세 가지 주요 과정이 있었습니다.

          첫째, 신랑 신부 부모가 혼인 계약서에 서명

          신랑 당사자나 신랑의 부모는 신부나 신부 부모에게 지참금을 지불했습니다.
          이렇게 오늘날의 약혼과 마찬가지인 정혼 기한이 시작되었습니다.
          마리아가 아이를 잉태한 것을 알았을 당시 요셉과 마리아도 이 정혼 기한에 속해 있었습니다 (마태복음 1:18, 누가복음 2:5).

          둘째, 보통 일년 후 신랑이 자기 친구들을 동반하고 자정에 신부 집에 찾아가면서 거리에 횃불 행진을 벌이는 행사

          신부는 이 행사가 일어날 것을 미리 알고 있기 때문에, 다른 처녀들과 함께 준비합니다.
          그들이 모두 이 행진에 참여하고 신랑의 집에서 행사가 마무리됩니다.
          이 관습은 마태복음 25:1-13의 열 처녀 비유의 바탕이 되는 것이기도 합니다.

          셋째, 혼인 잔치

          요한복음 2:1-2에 나온 가나의 혼인 잔치로 알 수 있는, 며칠간 이어지곤 했던 혼인 잔치였습니다.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요한의 환상이 보여주는 것이 바로 이 세 번째 절차인 어린 양 (예수 그리스도)과 그의 아내 (교회)의 혼인 잔치입니다.

          이는 이미 앞의 두 단계가 끝났음을 함축합니다.
          첫 번째 단계는 각 개인이 그리스도를 구원자로서 믿음으로써 완수되었습니다. 신랑의 부모 (아버지 하나님)가 지불하는 지참금은 신부를 위해 흘려진 그리스도의 피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오늘날 이 땅의 교회는 그리스도와 “약혼”을 한 것이고, 비유에 나온 지혜로운 처녀들처럼 모든 믿는 자들은 신랑이 올 때 (재림)를 위해 준비하고 기다려야 할 것입니다. 두 번째 단계는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당신의 신부를 데리고 아버지의 집으로 가는 교회의 휴거를 상징합니다. 혼인 잔치는 그래서 세 번째이자 마지막 단계입니다. 휴거와 그리스도의 재림 (이 땅에서의 환난 중) 사이에 어린 양의 혼인 잔치가 베풀어진다는 것이 우리가 보는 관점입니다.

          혼인 잔치에는 그리스도의 아내인 교회뿐만 아니라, 다른 자들도 함께 합니다. 이 “다른 자들”은 구약성경의 성도들을 포함합니다. 그들이 아직 부활하지는 않았지만 그들의 영혼/영은 천국에서 우리와 함께 있을 것입니다. 천사가 요한에게 다음과 같이 쓰라고 했듯이 말입니다. “기록하라 어린 양의 혼인 잔치에 청함을 받은 자들은 복이 있도다 하고 또 내게 말하되 이것은 하나님의 참되신 말씀이라” (요한계시록 19:9). 어린 양의 혼인 잔치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영광스러운 축제가 될 것입니다.

          1. 주님은 혼인잔치의 비유를 말씀하십니다(1~14).

          임금은 아들의 혼인잔치에 많은 사람을 청하지만, 청함을 받은 사람들은 거절할 뿐 아니라, 왕의 종들을 능욕하고 죽이기까지 합니다.
          있을 수 없는 일들이 일어난 것입니다.
          결국 왕은 진노하여 그들을 심판하고, 그 잔치에 참여하는 권리는 악함과 선함의 구별 없이 모든 사람에게 주어집니다(10).
          다만 왕이 손님들을 만나러 들어올 때 중요한 것은 선악의 문제가 아니라, 예복을 입었는가의 문제였습니다(12).
          예복을 입지 않은 자는 쫓겨났습니다.
          왜냐하면 보통 왕의 잔치에 참여하면 왕이 제공하는 의복을 입어야 했는데, 이들은 왕이 제공하는 의복을 무시한 것입니다.
          이 의복은 잔치에 참여할 자격이 없는 자들을 합당하게 여겨주시는, 하나님의 선물로 주어지는 예수 그리스도의 전가된 의를 가리킵니다.

          내게서 초청의 자격이 있는 것이 아니라, 왕에게서 받은 것으로 자격이 주어지기 때문입니다.
          이 비유의 초점은 많은 사람이 초청을 받아도, 그 자리에 앉도록 택함을 받은 사람은 적다는 것입니다.
          복음은 모든 사람들에게 주어지지만 복음에 응답하여 천국에 들어가는 사람은 적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어린 나귀를 타시고, 예루살렘으로 입성하셨습니다.
          사람들은 자신들의 옷을 벗어서 양탄자처럼 길에다 펴고, 종려나무 가지를 꺾어서 길에다 깔았습니다.
          그리고 있는 힘을 다해서 “호산나(제발 구원하소서)”를 소리를 질렀습니다.
          그 소리는 지축이 뒤흔들릴 정도였지만, 그 모습의 실상은 우스꽝스럽기 짝이 없었습니다.
          마치 예수님께서 덮개가 열린 자동차를 타고서 카퍼레이드를 하시는 것이 아니라, 어린아이가 타는 세발자전거를 타고 예루살렘으로 들어가시는 것과 같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성전 안에서 매매하는 모든 사람을 내쫓으시고, 일반화폐를 성전화폐로 바꾸어 주는 사람들의 상과 비둘기를 파는 사람들의 의자를 둘러 엎으셨습니다.

          그리고 유대 종교지도자들의 실상을 아셨던 예수님께서는 열매가 없고 잎사귀만 무성한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심으로 아무런 열매가 없는 유대 종교지도자들과 유대인들에게 심판을 경고하셨습니다.

          그 모습을 본 유대 종교지도자들이 예수님께 무슨 권위로 이런 일을 하는지를 물었을 때, 예수님께서는 3가지 비유로 그들의 불순종과 강퍅함을 지적하셨습니다.

          첫 번째는 ‘두 아들 비유’(21:28-32)
          두 번째는 ‘포도원 농부 비유’(21:33-41)
          세 번째는 '혼인 잔치 비유'(22:1-14)
          (2) 천국은 마치 자기 아들을 위하여 혼인 잔치를 베푼 어떤 임금과 같으니

          고대에는 지금처럼 먹거리와 볼거리가 많았던 시대가 아니었습니다. 우리나라도 먹고 사는 것이 어느 정도 나아진 것이 그렇게 오래되지 않았습니다. 4000년이 넘는 우리나라 역사 중에서 보릿고개를 벗어나기 시작한 것도 불과 50년 전부터입니다. 또한 100년 전의 사진을 보면, 거리에 있는 사람 중에 신을 신고 있는 사람이 별로 없습니다.
          그래서 먹을 것이 풍성한 혼인 잔치는 이 땅에서 누릴 수 있는 최고의 장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나라도 잔치, 특히 혼인 잔치와 같은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3) 그 종들을 보내어 그 청한 사람들을 혼인 잔치에 오라 하였더니 오기를 싫어하거늘

          예수님 당시에 잔치 참석은 두 번의 초대로 이루어졌습니다. 주인(임금)은 잔치를 열 날짜를 정하고 -이때에는 시간은 정하지 않았습니다- 초대할 사람들을 정해서, 종들을 보내 그날 참석할 수 있는지를 확인했습니다. 그래서 참석할 사람들의 숫자가 파악되면, 그 수에 알맞은 양의 음식을 준비했습니다. 그렇게 해서 잔치 당일 주인은 음식 준비가 끝나는 대로 다시 종들을 보내어서 처음에 초대한 사람들을 불러오곤 했습니다. 그래서 본문은 주인이 종들을 두 번째 보낸 것입니다. 물론 주인은 그들이 당연히 잔치에 참여하리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처음에 응하겠다고 했던 사람들이 오기 싫다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초대하는 사람에 대한 심한 모욕이었습니다.

          (4) 다시 다른 종들을 보내며 이르되 청한 사람들에게 이르기를 내가 오찬을 준비하되 나의 소와 살진 짐승을 잡고 모든 것을 갖추었으니 혼인 잔치에 오소서 하라 하였더니

          임금은 종들을 다시 보내어서, 오찬을 준비했으니 꼭 오시라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소와 살진 짐승, 그리고 모든 것이 갖추어졌다고 했습니다.
          600kg짜리 소 한 마리를 도축하면, 약 1,500명 이상이 먹을 수 있습니다. 본문의 ‘소’는 단수(單數)가 아니라 복수(複數)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두 마리 이상을 잡은 것입니다. 두 마리를 잡았다면 3,000명, 세 마리를 잡았다고 하면 4,500명이 나누어 먹을 수 있습니다. 만약 10마리를 잡았다고 하면 15,000명이 나누어 먹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소만 잡은 것이 아니라 ‘살진 짐승’도 잡았습니다. 양이나 염소, 닭 등을 가리킬 것입니다. 이 단어 역시 복수입니다. 게다가 ‘모든 것이 다 준비되었다’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임금이 아들의 혼인 잔치를 얼마나 풍성하게 준비했는지, 또 얼마나 많은 사람을 초대했는지, 부족한 것이 조금도 없을 만큼 얼마나 세심하게 준비했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하나님 나라의 잔치를 풍성하게, 또 완벽하게 준비해 놓으시고 사람들을 초대하신 것입니다.

          그럼에도 사람들의 반응이 이러하였습니다.
          (5-6) 그들이 돌아보지도 않고 한 사람은 자기 밭으로, 한 사람은 자기 사업하러 가고 그 남은 자들은 종들을 잡아 모욕하고 죽이니

          ‘돌아보지 않다’의 문자적인 의미는 ‘무시하다’, ‘소홀히 여기다’입니다. 히브리서에 우리가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큰 구원을 등한히 여기면 심판을 받는다는 말씀이 있는데, ‘등한히 여기다’가 ‘돌아보지 않다’와 같은 단어입니다. 이것을 요즘 하는 말로 표현하면, 임금의 초대를 받은 사람들이 그 초대를 완전히 ‘개무시’하는 것입니다.
          초대의 거부 이유가 한 사람은 ‘자기 밭’ 때문이었고, 또한 사람은 ‘자기 사업’ 때문이었습니다. 이들은 자신들의 인생을 탕진하거나, 세속적 쾌락을 누리기 위해서, 또 악한 일을 저지르기 위해서 참석하지 않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모두 일상생활과 자신이 감당해야 할 일 때문에 참석하지 못한다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소유물들을 잘 관리하고, 일터와 학교에서, 가정에서 모두 우리는 진실하고 신실해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을 신뢰하기보다 ‘하나님께서 주신 것’을 신뢰하게 될 때, 그것이 우리의 발목을 잡을 수 있고, 우리의 눈을 ‘영원’이 아니라 ‘세상’에만 머물게 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 잊지 않으셔야 합니다. 그리고 그것들이 우리의 인생을 책임져 줄 것 같이 느껴져도 오히려 그것 때문에 진리를 살지 못하고, 자기 욕망에 사로잡혀 살게 될 수도 있습니다.
          또 어떤 사람은 종들을 ‘잡아서’ ‘모욕하고’ ‘죽이기’까지 했습니다. ‘잡다’, ‘모욕하다’, ‘죽이다’라는 점점 그 폭력의 강도가 심해지는 동사를 사용해서 적나라한 유대인들의 죄를 지적하고 있는 것입니다. 즉 그들은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구원으로, 하나님의 나라로 초대하는 선지자들에게 폭력을 행사하고, 죽음의 구렁텅이로 몰아넣은 악행을 저질렀던 것입니다.

          이에 대한 임금의 반응이 이러하였습니다.
          (7) 임금이 노하여 군대를 보내어 그 살인한 자들을 진멸하고 그 동네를 불사르고

          유대인들이 ‘잡다’, ‘모욕하다’, ‘죽이다’라는 3개의 동사로 악을 행한 것을 표현했었는데, 임금도 ‘보내다’, ‘진멸하다’, ‘불사르다’의 3개의 동사로 심판의 강도가 점점 커 짐을 표현합니다.

          이 예언은 A.D. 70년, 로마 제국의 티투스 장군에 의해 예루살렘이 함락당하므로 이루어졌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 이후로 그들은 1,900여 년의 세월을 나라 없는 백성으로 살아야 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로 초대하는 그리스도의 복음을 거부하고,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인 결과였습니다.

          임금의 말씀은 이렇게 이어집니다.
          (8-9) 이에 종들에게 이르되 혼인 잔치는 준비되었으나 청한 사람들은 합당하지 아니하니 네거리 길에 가서 사람을 만나는 대로 혼인 잔치에 청하여 오라 한대

          처음에 임금은 사람들을 초대할 때 아주 예의를 갖추어서 했습니다.
          초대할 사람들에게 미리 종들을 보내서 참석 여부를 확인하고, 잔치 준비가 끝났을 때 다시 보냈습니다.
          그러나 이번에는 달랐습니다.
          정식으로 초대하는 것이 아니라, 그저 자리를 채울 사람들을 데리고 오라고 하십니다.
          그들의 의견이 어떤지, 잔치가 마음에 드는지, 참석할 의사가 있는지를 묻지 않습니다.
          어떻게 보면 불손하기까지 합니다.
          마치 ‘해 놓은 음식 처리하게나 하자’라고 생각하는 정도의 느낌이 들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문학적인 풍자(諷刺)에 해당합니다.
          한 사람의 꺾어짐이 다른 사람에게 하나님의 은총이 넘어가게 했다는 것을 비유로 표현하는 것입니다.

          (10) 종들이 길에 나가 악한 자나 선한 자나 만나는 대로 모두 데려오니 혼인 잔치에 손님들이 가득한지라

          이번에 초대될 사람들은 ‘악한 자’에서 ‘선한 자’까지입니다.
          그 안에 모든 사람이 다 들어갑니다.
          이 초대에서 제외되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처음에 정식으로 초대를 받은 사람들이 잔치에 참석하기를 거절했기 때문에, 하나님 나라의 잔치는 모든 사람에게 열린 문이 되었습니다.

          본문의 비유에서 처음에 초대를 거절했던 사람들은 당시로 보면, 하나님께서 본래 말씀하신 그 의미를 상실한 채 조상들이 해석해 준 율법을 가지고 자신들이 의롭다고 고집을 피우며 끝까지 예수님을 거부했던 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을 비롯한 종교지도자들과 그들에게 동조하는 유대인들을 가리킵니다.
          그리고 잔치에 참석했던 사람들은 당시에 죄인으로 여김을 받았던 사람들과 사람 취급도 받지 못했던 이방인들을 의미합니다.


          예복을 입지 않은 사람들(11-14절)
          11-14절은 임금이 초대한 잔치에 들어왔는데, 예복을 입지 않았다고 쫓겨나는 한 사람의 이야기입니다.
          이 부분이 앞의 이야기에 이어지는 내용으로 보기도 하고, 다른 비유로 보기도 합니다.
          두 비유라고 하는 이유 중의 하나는 1절에는 ‘비유로 대답하여’에서 ‘비유’가 복수형으로 되어있기 때문입니다.

          (11) 임금이 손님들을 보러 들어올새 거기서 예복을 입지 않은 한 사람을 보고

          고대 중동의 잔치에서는 잔치 호스트가 처음부터 배석해 있지 않고, 잔치가 본격적으로 시작될 때에 나왔다고 합니다.
          손님이 가득한 잔치에 임금이 등장했다는 것은 잔치가 본격적으로 시작됨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의 나라에 아무리 좋은 것이 많아도 거기에 하나님이 계시지 않으면 하나님의 나라일 수가 없듯이, 임금이 초대한 잔치에 임금이 계시지 않는다면, 임금의 잔치가 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임금이 보니 예복을 입지 않은 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장례식에는 장례식에 어울리는 옷이 있고, 등산을 할 때는 산에 어울리는 옷이 있습니다.
          이 사람은 결혼 잔치에 어울리지 않은 옷을 입고 있었습니다.

          임금은 그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12) 이르되 친구여 어찌하여 예복을 입지 않고 여기 들어왔느냐 하니 그가 아무 말도 못하거늘

          당연하게 임금은 왜 예복을 입지 않고 있는지를 물었지만, 그는 유구무언(有口無言), 입은 있으되 아무런 말을 하지 못했습니다.
          얼핏 생각하면, 길에서 갑자기 초대를 받았는데, 예복을 입지 않은 것이 당연하지 않은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런데 길에서 초대받은 사람이 이 사람 혼자가 아니라 많은 사람이 초대를 받고서 왔는데, 한 사람만 예복을 입지 않고 있는 것이 더 의아하지 않습니까?

          고대 이스라엘 왕궁에는 왕궁을 찾아온 사람에게는 입혀 주는 예복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예복을 담당하는 관리가 있었습니다.
          거리에서 초대받은 사람 중에 이 사람만 예복을 입지 않았던 것은, 그는 나눠 받은 예복을 입지 않고 들어왔던 것입니다.
          그것은 그 잔치로 초대한 임금을 무시하는 것과도 같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아무런 대답을 할 수 없었습니다.
          물론 우리가 하나님 나라에 갈 때 입을 옷은 ‘예수 그리스도라는 옷’입니다

          (13-14) 임금이 사환들에게 말하되 그 손발을 묶어 바깥 어두운 데에 내던지라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갈게 되리라 하니라 청함을 받은 자는 많되 택함을 입은 자는 적으니라.

          하나님의 형벌은 영원한 형벌임을 강조합니다.
          하나님의 잔치에 들어가는 유일한 조건은 ‘예수 그리스도라는 예복’을 받아 입는 것입니다.
          유대의 종교지도자들과 유대인들은 그것을 거부했습니다.
          그것을 거부한 사람은 슬피 울며 이를 갈게 될 것이라고 예수님께서 강조해서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22

          Korean Living Bible

          천국이란?

          22 예수님은 다시 비유로 이렇게 말씀하셨다.

          “하늘 나라는 자기 아들을 위해 결혼 잔치를 베푸는 어떤 왕과 같다.

          왕은 종들을 시켜 잔치에 초대한 손님들을 불렀으나 그들은 오지 않았다.

          왕은 또 다른 종들을 초대한 사람들에게 보내 ‘살진 소를 잡아 모든 음식을 푸짐하게 준비해 놓았으니 어서 잔치에 오십시오’ 하라고 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들은 척도 않고 어떤 사람은 자기 밭으로 가고 어떤 사람은 장사하러 가고

          또 다른 사람들은 그 종들을 잡아 모욕하고 죽여 버렸다.

          그러자 왕은 화가 나서 군대를 보내 살인자들을 죽이고 마을을 불태워 버렸다.

          그러고 나서 왕은 종들에게 말하였다. ‘잔치는 준비되었으나 초대받은 사람들은 자격이 없다.

          그러니 너희는 길거리에 나가 만나는 사람마다 잔치에 초대하여라.’

          10 “그래서 종들이 나가 좋은 사람이건 나쁜 사람이건 만나는 대로 데려오자 잔치 자리가 가득 찼다.

          11 왕이 손님들을 보려고 들어갔다가 예복을 입지 않은 한 사람을 보고

          12 ‘그대는 어째서 예복도 입지 않고 여기 들어왔는가?’ 하고 묻자 그는 아무 대답이 없었다.

          13 그때 왕은 종들에게 ‘이 사람의 손발을 묶어 바깥 어두운 곳에 던져라. 거기서 통곡하며 이를 갈 것이다’ 하였다.

          14 이와 같이 초대받은 사람은 많지만 선택받은 사람은 적다.”

          15 그때 바리새파 사람들이 어떻게 하면 말로 예수님을 함정에 빠뜨릴 수 있을까 하고 의논한 후에

          16 자기들의 제자들을 헤롯 당원들과 함께 예수님께 보내 물어 보게 하였다. “선생님, 우리가 알기에 선생님은 진실하시고 진리대로 하나님의 교훈을 가르치시며 사람의 겉모양을 보지 않으시기 때문에 누구에게도 거리낌이 없으십니다.

          17 그래서 선생님의 의견을 듣고자 합니다. [a]로마 황제에게 세금을 바치는 것이 옳습니까, 옳지 않습니까?”

          18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의 간교한 생각을 아시고 “위선자들아, 왜 나를 시험하느냐?

          19 세금으로 바치는 돈을 내게 보여라” 하고 말씀하셨다. 그들이 예수님께 [b]데나리온 하나를 가져오자

          20 예수님은 “이 초상과 글이 누구의 것이냐?” 하고 물으셨다.

          21 그들이 “황제의 것입니다” 하고 대답하자 예수님이 “황제의 것은 황제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쳐라” 하고 말씀하셨다.

          22 이 말씀을 듣고 그들은 말문이 막힌 채 가 버렸다.

          23 바로 그 날 부활이 없다고 주장하는 사두개파 사람들이 예수님께 와서 물었다.

          24 “선생님, 모세는 형이 자식 없이 죽으면 동생이 형수와 결혼하여 형의 대를 이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25 우리 이웃에 일곱 형제가 있었는데 맏이 결혼하여 살다가 자식 없이 죽고 그 동생이 형수와 살게 되었습니다.

          26 그러나 둘째도 자식 없이 죽었고 셋째에서 일곱째까지 모두 그렇게 되었으며

          27 끝내는 그 여자도 죽었습니다.

          28 이렇게 일곱 형제가 모두 한 여자와 살았으니 부활 때 그 여자는 누구의 아내가 되겠습니까?”

          29 그래서 예수님은 그들에게 이렇게 대답하셨다. “너희는 성경과 하나님의 능력을 모르기 때문에 잘못 생각하고 있다.

          30 부활하면 장가도 시집도 안 가고 다만 하늘에 있는 천사들과 같이 된다.

          31 너희는 죽은 사람들의 부활에 대하여 하나님이

          32 [c]‘나는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다’ 라고 하신 말씀을 읽어 보지 못했느냐? 하나님은 죽은 사람들의 하나님이 아니라 살아 있는 사람들의 하나님이시다.”

          33 그러자 군중들은 예수님의 가르치심에 감탄하였다.

          34 바리새파 사람들은 예수님이 사두개파 사람들의 말문을 막으셨다는 말을 듣고 다 함께 모였다.

          35 그들 중에 한 율법학자가 예수님을 시험하려고

          36 “선생님, 모세의 법 중에 가장 큰 계명은 어느 계명입니까?” 하고 물었다.

          37 그래서 예수님은 이렇게 대답하셨다. “[d]‘네 마음을 다하고 정성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38 “이것이 제일 중요한 계명이다.

          39 그 다음은 [e]‘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는 계명이다.

          40 모든 율법과 예언자들의 가르침은 이 두 계명에서 나온 것이다.”

          41 바리새파 사람들이 모였을 때 예수님은 그들에게

          42 “너희는 그리스도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하느냐? 그는 누구의 후손이냐?” 하고 물으셨다. 그들이 “다윗의 후손입니다” 하고 대답하자

          43 예수님은 다시 그들에게 물으셨다. “다윗이 성령님의 감동으로

          44 [f]‘하나님이 나의 주님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네 원수들을 네 발 앞에 굴복시킬 때까지 너는 내 오른편에 앉아 있거라’ 고 하지 않았느냐?

          45 다윗이 이렇게 그리스도를 주라고 불렀는데 어떻게 그리스도가 다윗의 후손이 되겠느냐?”

          46 그러자 한마디도 대답하는 사람이 없고 그 날부터 예수님께 묻는 사람도 없었다.

          Footnotes

          1. 22:17 원문에는 ‘가이사에게’
          2. 22:19 한 데나리온은 하루의 품삯.
          3. 22:32 출3:6
          4. 22:37 신6:5
          5. 22:39 레19:18
          6. 22:44 시110:1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마태복음 21장
                                                                                                      무슨 권세(23절)

          무슨 권세(23절)


          예수께서 성전에 들어가 가르치실쌔 대제사장들과 백성의 장로들이 나아와 가로되 네가 무슨 권세로 이런 일을 하느뇨 또 누가 이 권세를 주었느뇨.
          Jesus entered the temple courts, and, while he was teaching, the chief priests and the elders of the people came to him. "By what authority are you doing these things?" they asked. "And who gave you this authority?"

          권세(1849) 에쿠시아(ĕxŏusia)  ἐξουσία, ας, ἡ 

          1. 선택의 자유,  2. 능력,  3. 사도행전 1:7 - 가라사대 때와 기한은 아버지께서 자기의 권한에 두셨으니 너희의 알바 아니요.
          발음  / 에쿠시아(ĕxŏusia)
          어원 / 1832 ‘능력’의 의미에서 유래
          관련 성경 / 권위(마 7:29, 눅 4:6), 군사(마 8:9), 권능(마 10:1, 행 8:19), 권한(막 13:34, 행 1:7), 병사(눅 7:8), 관할(눅 23:7), 마음(행 5:4), 권리(고전 7:37, 9:5, 12, 살후 3:9), 자유(고전 8:9), 힘(계 9:19).
          신약 성경 / 102회 사용

          * 마태복음 28:18 - 모든 권세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18-20절에서 특기할 만한 사실은 `모든'이라는 말이 강조되고 있다는 점이다.
          이 `모든'이란 말이 본 문단을 단단히 묶고 있다(모든 권세, 모든 족속, 모든 것, 모든 날<항상>).
          한편 여기서 권세에 해당하는 헬라어 `에쿠시아'는 능력, 힘, 절대적 권세를 뜻하는데 예수께서는 이러한 권세로 가르치고(7:29),
          병을 고치며(8:1-13), 죄인을 용서하셨다.

          마태복음 7:29
          이는 그 가르치시는 것이 권세 있는 자와 같고 저희 서기관들과 같지 아니함일러라.

          마태복음 9:6
          그러나 인자가 세상에서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는 줄을 너희로 알게 하려 하노라 하시고 중풍병자에게 말씀하시되 일어나 네 침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라.

          마태복음 10:1 - 권능




          이제 복음서의 마지막에 이르러 예수는 자신이 지상에서의 권세 뿐 아니라 온 우주의 권세가졌음을 확정적으로 선언하고 있다.
          그런데 이 선언을, 부활로 인해 십자가 사건 이전에 가졌던 권세와는 비교할 수 없는 권세가 예수께 주어졌다고 보는 것은 타당치 않다. 그리고 또 예수께서 죽기 전에 가르치고 행한 것들이 부활후 지금 말하고 행하는 것들보다 권세면에 있어서 조금 낮은 것이라고도 할 수 없다.
          진정 부활 이전의 사역기간 동안에 행하신 그분의 말씀은 신적 권위가 있는 것이었고(24:35), 또 성부 하나님과 동일한 권위를 지니시었다(9:6).
          따라서 그의 권세는 부활 전이나 후나 모두 절대적인 권세있다. 단지 차이점이 있다면, 부활후에는 `하늘과 땅의 모든 것', 즉 우주의 모든 권세가 그분에게 주어졌다는 것이다.
          이 권세는 아버지께서 주신 것이다.
          그러므로 아버지는 아들에게 종속하지 않는다(고전 15:27, 28).
          이제 아버지의 모든 권세는 아들을 통해서만 행사된다.
          결국 예수는 중보자적 왕이신 것이다.
          이러한 권세는 그분의 지극한 겸비(兼備)에 대한 보상으로 주어진 것이다(빌 2:5-11).
          이로 말미암아 구속사의 대전환점이 도래했으니 곧 메시야 `왕국'(그분의 왕적 통치, 그분의 구원하는 신적 권세의 행사; 3:2; 13:37-39)이 새로운 전능으로 임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단 7:13,14에 이미 암시되어 있던 터였다(France, Jesus pp.142-143).
          어쨌든 한때 비하와 고난을 당하신 `인자', 곧 예수는 온 우주의 권세를 받으시고 이제 당신의 형제들에게 선교 지상명령을 하달하고 계신 것이다.

          * 요한복음 1:12 - 자녀 되는 권세

          - 1832. 에케스티( ĕxĕsti) ἔξεστι  

          1. ~은 적합하다,  2. 마태복음 12:2,  3. 마태복음 20:15
          발음 / 에케스티(ĕxĕsti)
          관련 성경 / 옳다(마 12:10, 12, 막 12:14, 눅 6:9, 20:22), 가하다(고전 6:12), 합당하다(눅 14:3), 권한이 없다(요 18:31).
          신약 성경 / 32회 사용

          능력 - 두나미스(1411)(dünamis) δύναμις, εως, ἡ 

          1. 힘,  2. ἰδίᾳ δύναμις ~의 권능으로,  3. ἐν δύναμις. : 권능으로
          발음  / 두나미스(dünamis)
          어원 / 1410에서 유래
          관련 성경 / 권세(마 6:13, 행 4:7), 권능(마 7:22, 막 6:5, 행 1:8), 능력(마 13:54, 눅 1:17, 롬 1:4), 재능(마 25:15), 권능자(막 14:62), 뜻(고전 14:11), 힘 (고후 1:8, 8:3, 히 11:11), 세력(히 11:34).
          [동] 능하다(막 9:39, 눅 19:37), 강하다(고전 15:43), 힘있다(계 1:16)
          신약 성경 / 119회 사용

          - 1410. 두나마이(dünamai) δύναμαι

          1. ~할 수 있다,  2. 마태복음 6:24,  3. δύ- νασθαι... εἰ σελθεῖν
          발음 / 두나마이(dünamai)
          어원 / 수동. 디포넌트. 현재2인칭단수 δύ- νῃ와 δύνασαι, 미완료 ἠδυνάμην과 ἐδυνάμην, 미래 δυνήσομαι, 제1부정과거 ἠδυνήθην과 ἠδυνάσθην, 불확실한 유사 어에서 유래
          관련 성경 / 할 수 있다, 능히 하다(마 3:9, 10:28, 막 2:7, 9:28, 눅 1:20, 3:8).
          신약 성경 / 210회 사용




          무슨 권세로 이런 일을 하느냐?(마태복음 21:23-27)

          예수님은 어떤 경우에도 사람이나 환경에 이끌리지 않으시고 주님이 하실 일과 가실 길을 묵묵히 가셨습니다.
          또한 자신이 누구신지를 알게 하기 위하여 어떤 능력이나 권능을 행하지 않으셨습니다.

          1. 예수님은 공생에 마지막 며칠을 앞두고서도 성전에서 가르치셨습니다.

          그 이유는 가르침을 통해서 아버지의 뜻을 세상에 전하기 위해서입니다.
          특별히 많은 가르침을 예루살렘에서 하신 것은 예루살렘에서 많은 선지자들이 죽었고 자신도 죽으실 것을 아시지만 한 말씀이라도 더 전하여 그들을 돌이키고 살리시고 싶으셨기 때문입니다.
          또한 예루살렘이 장차 멸망할 것을 아셨기 때문입니다.
          그래도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말씀을 가르치신 것은 하나님의 도성인 예루살렘을 사랑하고 계셨기 때문입니다.
          결국 예수님이 예루살렘에서 죽으시지만 부활 후에 복음이 예루살렘에서 시작하여 전 세계로 전파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2. 대제사장들과 백성의 장로들은 예수님께 무슨 권세로 성전에서 가르치느냐고 물었습니다.

          그것은 많은 백성들이 예수님의 가르침을 듣는 것이 못마땅하였기 때문입니다.
          또한 자신들의 기득권을 백성들로부터 빼앗길까 하는 조바심 때문이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가르침이 자신들의 잘못에 대하여 말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자신들이 성전의 주인인데 자신들의 허락을 받지 않고 가르치고 있다고 생각을 했기 때문입니다.
          또한 예수님을 잡아 죽일 구실을 찾고자 했기 때문입니다.

          3. 예수님은 그들의 잘못되고 오만한 질문에 대항 하거나 하나님의 아들로서 행할 수 있는 능력과 권세를 사용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어떤 경우에도 악과 맞서거나 다투지 않으셨습니다.
          또한 자신이 어떤 권세로 가르치시는지 마땅히 자신의 권세를 보여 주실 수도 있지만 결코 사용하지 않으셨습니다.
          그것은 무익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후일에 아버지께서 예수님이 어떤 권세와 능력을 가르치셨는지 알게 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들에게 무슨 권세로 가르치시는지 말해도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 대신 주님은 그들에게 질문을 하셔서 그들 스스로 질문에 대답할 수 없게 하심으로 더 이상 말하지 못하도록 입을 닫게 하셨습니다.
          이것이 악과 맞서지 않고도 그들에게 질문을 하셔서 그들 스스로 질문에 대답할 수 없게 하심으로 더 이상 말하지 못하도록 입을 닫게 하셨습니다.
          이것이 악에 맞서지 않고도 그들에게 대답하시는 주님의 지혜요, 권세요, 능력입니다.





          '하나님의 권세'는 세상의 약한 것을 들어 강한 것을 폐하시는 권세입니다.

          산헤드린 공회원들은 베드로가 그 재판소에서 기탄없이, 지극히 당당하고 유창하게 대답하는 것을 듣고 완전히 뒤통수를 얻어맞은 꼴이 됐습니다. 게다가 그들은 그런 예상외의 펀치를 한 방 맞고도 어떻게 대꾸할 말조차 찾을 수 없었습니다. 병 나은 사람이 그들과 함께 섰는 것을 보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전에 예수와 함께 있던 사람들이 지금 앉은뱅이를 고쳐 놓고 그것이 바로 ‘예수 이름’ 때문이라고 기탄없이 외치는데 그에 대한 너무나도 명백한 증거까지 자기네들 눈앞에 있으니 도무지 힐난할 말, 무슨 트집거리조차 전혀 찾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할 수 없이 그들은 사도들을 일단 “공회에서 나가라”고 명했습니다. 말하자면 자기네들끼리 일종의 밀실회의를 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다들 함께 머리를 맞대고 그 난관을 빠져나갈 궁리를 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들은 “이 사람들을 어떻게 할꼬”하고 완전 진퇴양난에 빠졌습니다. 무작정 체포해 오고 재판을 벌였는데, 오히려 그들 앞에 제시된 증거와 그 변론된 사실은 자기네들 말로도 “우리도 부인할 수 없는”, 실로 명백하기 이를 데 없었기 때문입니다.

          고민과 궁리 끝에 그들은 겨우 한 가지 결론에 도달했습니다. 그것은 곧 “저희를 위협하여 이 후에는 이 이름으로 아무 사람에게도 말하지 말게 하자”는 것입니다. 산헤드린 공회의 권한을 최대로 사용하여 그들을 협박하자는 것입니다. 산헤드린 공회는 당시 로마제국이 유대사회에 허용해 준 자치권을 행사하는 기관입니다. 그들은 그 어떤 사람이든지 마음대로 체포하고 심문할 뿐 아니라 사형을 제외하고는 그 어떤 형벌이라도 마음대로 줄 수 있었습니다. 즉 산헤드린 공회는 적어도 유대사회에 있어서는 신분적으로 최상류 사회였을 뿐 아니라 정치적으로도 최고의 실권을 가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들은 바로 그 권한의 공포감을 십분 활용하여 사도들의 입을 막아 보고자 했던 것입니다.

          하지만 그 시도 역시 또 한 번의 뜻밖의 반격에 의하여 완전히 참패를 당하고 말게 됩니다. 19절로 22절 말씀. 산헤드린 공회원들은 마치 자기네들이 모든 사람들 위에 최고의 권력을 마음대로 휘두를 수 있는 듯이 생각하고 행동하고 있었습니다. 예수가 부활을 했든지 말든지, 앉은뱅이가 고침을 받았든지 아니든지 간에 그런 것을 전파하는 것이 자기네들의 이익과 사상에 거치는 것이기만 하면 무조건 마음대로 처벌하고 금지시킬 수 있다고 교만해 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실상 그들은 그처럼 인간적인 권력을 마음껏 누리던 중에 바로 자기네들 위에 하나님이 살아 계심을 잊고 있던 자들이었습니다.

          그래서 사도 베드로와 요한은 그 산헤드린 공회의 엄한 경고가 떨어지지 마자 “하나님 앞에서 너희 말 듣는 것이 하나님 말씀 듣는 것보다 옳은지 아닌지 너희들 스스로 한번 판단해 보아라”고 되받아쳤습니다. 즉 사도들은 산헤드린 공회보다 훨씬 더 높은 권위를 두려워했던 것이었습니다. 사도들은 진짜 높으신, 진짜 권세 잡으신 하나님을 세상의 그 어떤 힘 있는 자들보다도, 그 어떤 권위 있는 기관보다도 훨씬 더 두려워하며 받들어 복종하는 자들이었기 때문입니다. 산헤드린 공회가 아무리 유대사회에서는 최고 권력을 자랑하더라도 그것과는 비교도 못될 진짜 권력이 어디에 있는지를 잘 알고 있던 까닭에 그 사도들은 세상 권력 앞에서 조금도 겁내거나 머리를 수그리지 않은 것입니다.

          사도들에게 있어서는 자기네들이 “보고 들은 것” 즉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과 그 행하신 일들을 전한다는 것은 그 높으신 하나님께서 명령하신 사명에 순종하는 행위일 뿐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특별히 열두 명만을 뽑아서 삼년 동안이나 그들의 눈을 통하여 보게 해 주시고 귀를 통하여 듣게 해 주신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말하지 않는다는 것’은, 그 하나님의 권위를 아는 자로서는 도무지 엄두도 내지 못할 일이었습니다. 결국 산헤드린 공회원들은 또 한 번 창피스런 꼴을 당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자기네들의 권위가 땅에 떨어지는 발언을 그 공회석상에서 들으면서도 옴짝달싹하지 못하고 그들을 그저 다시 한 번 “위협하고” 즉 그저 경고 사면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실로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폐하시는’ 하나님의 놀라운 복음 역사가 여기서 그대로 나타나고 있지 않습니까? 본인은 약해도 그 사람이 어떤 강력한 것을 소유하거나 그것과 줄이 닿아 있으면 그 힘을 고스란히 입을 수 있습니다. 아무리 빼빼마른 사람 혼자 있다 해도 그 손에 권총이 들려 있으면 건장한 사람 여럿이라도 함부로 덤빌 수 없습니다. 겉보기에는 보통 사람인 줄 알았는데 품속에 있던 마패를 꺼내들면 모든 관리들이 그 앞에 벌벌 떨면서 엎드릴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여기서도 문제는 그 권력과 어떻게 연결되어 있는가 하는 점입니다. 민간인은 권총을 소지할 수 없지만, 경찰은 치안이라는 중대한 사명을 수행하기 위해서 합법적으로 그것을 차고 다님으로써 범죄자들을 제압합니다. 청와대를 사칭함으로써 사람들을 협박하고 돈을 뜯어내는 자들은 다 쇠고랑을 찰 수밖에 없지만, 대통령으로부터 정식 임명을 받은 국무총리나 장관이나 청와대 직원들은 자신의 업무수행을 위한 권한 역시 위임을 받게 됩니다. 결국 권력이라는 것은 그것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임명해 주는 직위와 부여해 주는 사명을 통하여 활용될 때, 정당하면서도 효과 있게 사용될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권력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그 지극히 높은 권위와 무한한 능력은 그 하나님께로부터 복음 전파를 위한 직분과 함께 따라오는 것이고 그 사명을 수행하는 자의 삶 속에서 크게 역사하게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전파하는 일에 전력투구하지 아니하는 사람에게 하나님께서 당신의 힘을 아깝게 낭비하실 이유가 없습니다. 교회를 통하여 받은 사명에 충성하는 일에 쓰지 않을 사람에게 하나님께서 더 많은 달란트와 더 큰 고을의 권세를 허비하실 아무 까닭이 없는 것입니다.

          성도의 용기와 힘은 오직 하나님의 권세를 높이 받들고 그 사명을 순종함으로써 절로 얻게 됩니다. 그런 신자에게 있어서 하나님 두려워하지 않는 자들의 권세라는 것은 제아무리 높아 보이고 제아무리 강해 보여도 조금도 두려울 것이 없게 됩니다. 그러므로 죽도록 충성하는 신자는 아무리 불신 사장이 핍박을 해도 주일성수에 조금도 굴하지 않습니다.

          실로 세상의 가장 귀하고 높은 산헤드린 공회는 예수 그리스도 앞에서 패했고 사도들 앞에서 연이어 창피를 당했으며 오늘날의 기독신자들 앞에서도 여전히 무색하고 무력한 것입니다. ‘믿는 구석이 있는’ 사람은 그 어떤 상황에서도 조금도 꿀리지 아니합니다. ‘예수 이름’을 확실히 알고 ‘하나님의 권세’를 두려워할 줄 아는 신자는 그야말로 세상이 감당치 못할 사람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무슨 권세와 뉘 이름으로 복음을 믿고 전하고 있는지 질문 받을 때마다 이처럼 “기탄없이” 예수 그리스도를 높이는 멋진 복음의 전도자들, 하나님의 주권에 크게 영광을 돌릴 줄 아는 충성된 증인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예수께서 어느 날 성전에서 백성을 가르치시며, 복음을 전하고 계실 때에 대제사장들과 율법학자들이 장로들과 함께 예수께 와서, "당신은 무슨 권한으로 이런 일을 합니까? 누가 이런 권한을 당신에게 주었습니까? 어디 우리에게 말해 보십시오" 하고 말하였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나도 너희에게 한 가지를 물어 보겠으니, 나에게 대답해 보아라. 요한의 세례가 하늘에서 온 것이냐? 사람에게서 온 것이냐?" 그들은 자기들끼리 의논하여 말하였다. "'하늘에서 왔다'고 말하면 '어찌하여 그를 믿지 않았느냐'고 할 것이요, '사람에게서 왔다'고 말하면, 온 백성이 요한을 예언자로 믿고 있으니, 그들이 우리를 돌로 칠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요한의 세례가 어디에서 왔는지를 모른다고 대답하였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나도 내가 무슨 권한으로 이런 일을 하는지를 너희에게 말하지 않겠다." (눅20: 1-8)

          미국 국방부 정보담당 부차관인 윌리엄 보이킨 중장이 아랍인을 사탄에 비유하며, 우상숭배적 이교도 집단인 이슬람에 맞서 성전을 벌여야 한다고 주장했다고 합니다. 오사마 빈 라덴과 사담 후세인, 김정일이 미국을 싫어하는 이유는 미국이 하나님의 나라이기 때문이며 자신은 하나님의 왕국을 지키는 전사로서 군 상관이 아닌 하나님에게서 명령을 받는다고 그는 말했습니다.

          보이킨 중장은 미 최정예 특수부대인 델타포스 출신으로 1980년 이란에서 실패로 끝난 미국인 인질 구출작전을 진두지휘한 것을 비롯해, 그레나다·파나마 침공, 콜롬비아 마약왕 파블로 에스코바르 체포작전 등 미국의 특수전을 현장에서 이끌어왔던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보이킨 중장의 주장대로 오사마 빈 라덴과 후세인이 미국을 싫어하는 이유가 미국이 하나님의 나라이기 때문이라면, 예전에 그러니까 오사마 빈 라덴과 후세인이 미국과 밀월 관계에 있던 때는 미국이 사탄의 나라였기에 그들이 미국을 친구로 여겼던 것일까요?

          이란과의 전쟁 시 후세인은 미국의 친구 아니었던가요? 게다가 오사마 빈 라덴 가문은 미국 대통령을 둘씩이나 배출한 부시 가문과 사업상으로도 절친한 사이로서 집으로 초청해 식사도 함께 했다는데, 정말 헷갈립니다. 아마도 보이킨 중장은 자신의 상관인 부시 대통령의 명령을 받지 않고 직접 하나님의 명령을 받고 있기에(그가 주장한 대로) 이런 혼동이 생겼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미국 대통령은 취임식 때 성경에 손을 얹고 선서를 합니다. 정말 겉보기에는 하나님의 나라다운 풍경이지요. 뿐만 아니라 부시 대통령의 강력한 지도로 백악관 내 사람들이 성경공부에 열을 올리고 있다는 얘기도 들립니다. 아마 모든 회의가 기도로 시작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듭니다. 부시가 열심 있는 신앙인 임을 보이기 위해서라도 당연히 그래야 하겠지요.

          부시와 그의 추종 세력들은 스스로를 하나님의 전사로 생각하고 있는 듯합니다. 그리고 자신들의 눈에 거슬리는 대상들, 즉 그들의 요구와 이익에 반하는 무리들을 사탄의 자식으로 간주하기를 주저하지 않고 있습니다.

          보이킨 중장은 무슨 근거로 자신을 하나님의 전사라 칭하며 이슬람을 향한 전쟁을 외치는 것일까요. 이라크를 침공하여 후세인 정권을 몰락시키고 이라크의 석유 산업에 눈독을 들이고 있는 미국의 행태가 과연 하나님에게서 온 것일까요. 미국의 부시 패거리는 그렇다고 주장합니다.

          하지만 세계의 여론은 미국의 오만한 행동이, 핵무기를 비롯한 대량 살상 무기를 가장 많이 보유한 초강대국 미국의 무력에서 온 것이라 믿고 있습니다. 하늘에서 온 것이 아니라 땅에서 온 것이라는 말입니다.

          '당신은 무슨 권한으로 이런 일을 합니까?'

          당시 유대 권력자인 대제사장과 율법학자들이 예수께 던진 질문입니다. 그들은 확실히 믿고 있었습니다. 자신들의 말과 행동은 하늘에서 온 것이며 이는 자신들이 갖고 있는 신분을 통해 입증된다고 말입니다. 성전과 회당을 중심으로 형성된 유대의 종교 체제가 그들에게는 하늘이 주신 권세의 근거였습니다. 그들은 유대의 종교의식을 주관하고 있었으며 예루살렘 성전과 회당은 그들의 삶의 터전이었습니다. 제사와 율법과 기도 등 그들의 삶에 담겨 있는 내용들은 그들로 하여금 자신들이야말로 하나님의 권세를 위임받고 있는 자라는 주장을 하고도 남을 만한 소재들입니다.

          그런데 예수는 도대체 무엇입니까. 갈릴리라는 볼품없는 동네의 출신인데다, 권력과의 연관성도 전혀 없어 보이는 지방 청년입니다. 그는 유대의 지도자들이 속해 있던 종교 조직의 권세에 전혀 의존하지 않는 인물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예수를 따릅니다. 예수가 하는 말과 예수가 행한 일들이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습니다.

          유대 지도층도 지닌 종교적 권세와 무관한 예수에게 사람들이 몰리니 그들로서는 불안하기도 했을 것입니다. 자신들을 지탱해주는 권세와 무관한 새로운 권세가 나타난 게 아닙니까. 그러니 네가 무슨 권세로 이런 일을 하느냐는 질문을 던질 만도 합니다.

          그러자 예수께서는 그들에게 되묻습니다. 세례요한의 세례가 하늘에서 온 것이냐 사람에게서 온 것이냐. 이 말에 유대의 권력자들이 고민합니다. 하늘에서 온 것이라 답하면 왜 그를 믿지 않느냐는 질책이 따를 것이요, 사람에게서 온 것이라 말하면 백성들이 분노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당시 일반 백성들은 세례 요한의 세례가 하늘에서 온 것임을 믿고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제사장 무리들이 세례 요한의 세례를 인정할 수 없었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요.

          세례요한은 유대의 종교 조직이 주는 권세에 전혀 의존하지 않았던 인물입니다. 그는 사람들이 지닌 종교적 배경이나 경제적 능력이나 정치적 권력 따위를 전혀 고려하지 않은 채 말하고 행동하였습니다. 그의 삶은 세상의 논리를 넘어서 있었습니다. 광야에 머물던 그는 도시에 있는 유대 권력자들이 맛보는 안락한 세계와는 거리가 먼 삶을 살았습니다.

          그는 경제적 배경도, 정치적 권력도, 군사적 무력도 갖지 못한 세상적으로는 나약한 존재였습니다. 적어도 유대 권력자들이 판단하기에는 그랬습니다. 하지만 세례요한의 말은 힘이 있었고 자신감에 넘쳤습니다. 유대 권력자들이 소유한 경제력도, 정치력도, 군사력도 그는 개의치 않았습니다. 유대 권력자들이 애지중지하는 삶의 조건(부드러운 잠자리와 풍족한 음식)도 그를 유혹할 수 없었습니다.

          그는 오직 하늘의 외침을 전하였습니다. 그가 지닌 정치·사회적 배경이나 경제적 조건은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다만 자신의 말과 행동이 하늘의 뜻에 합당함을 알뿐입니다. 힘없는 청년 예수에게는 고개를 숙였지만, 힘있는 왕 헤롯을 향해서는 서슴지 않고 죄를 추궁할 수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의 권세는 주어도 주어도 마르지 않는 샘물입니다. 나는 죽고 하나님이 살아 있기에 그렇습니다. 모든 것이 거덜나고 바닥이 보이는 것 같아도 거기에 하나님이 계시기에 결코 마를 수가 없는 영원의 샘입니다. 하지만 세상의 권세는 채워도 채워도 새는 밑 빠진 독입니다.

          아무리 부어도 부족함은 멈추지 않습니다. 끝없이 남의 그릇을 넘보며 자신이 남보다 더 가져야 한다는 욕망에 매어 삽니다. 창고를 채워 놓고도 언제 자신의 그릇이 빌지 모른다는 두려움에 시달립니다. 하나님은 죽고 나는 살았기에 그렇습니다. 결코 영원할 수 없는 인간이기에 무얼 소유해도 빈 강정처럼 허무하게 부서지고 맙니다.

          무적의 로마군단이 하나님의 권세가 아니었듯이 가공할 파괴력의 미국 신무기도 하나님의 권세가 아닙니다. 부드러운 옷을 입은 자들은 궁중에 있었고 하나님의 소리를 외치는 세례요한은 광야에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권세는 최첨단 신무기와 경제적 풍요와 초고속 승진과 복권 당첨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는 세상의 권세요 요행일 따름입니다.

          세상의 권세는 비교를 통한 상대적 우위를 부단히 추구합니다. 잠시라도 밀리면 안 된다는 강박증을 마음에 품고 삽니다. 무시당하지는 않았나, 남들보다 손해 보지는 않았나, 좀더 차지할 수는 없나 갖가지 계산으로 번잡한 삶은 밑 빠진 독처럼 불안스럽기만 합니다. 남과 자신을 비교하며 주머니 계산을 하느라 주변 사람들을 잠재적인 적으로 만들어 버립니다. 그럼으로써 사면초가의 상황에 스스로를 가두고 맙니다. 그러니 항상 공격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의 권세 앞에서는 내가 죽습니다. 내가 없기에 이해득실에 대한 초조함도 없습니다. 모든 존재를 향해 순수한 호의로 대할 수 있습니다. 나의 궁극적 힘은 하나님이며 이는 영원히 마르지 않는 샘이기에 그렇습니다. 그 누구와 비교할 수 없는 무한 영역에 속해 있기에 남과 비교하며 계산할 필요도 없습니다.

          있는 그대로 드러내고, 해야 할 말을 하고, 행할 바를 행할 뿐입니다.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지에 대한 반성만이 유일한 제어장치입니다. 결과에 대한 계산은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못합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영역이니까요.



          무슨 권세로 이런 일을 하느냐 :누가복음 20:1-26

          산헤드린 공회에서 파견된 그들은 예수님께 두 가지 질문을 합니다. 첫째는, 예수님이 무슨 권세로 이런 일을 하느냐 하는 것이고, 두 번째는 이런 권세를 누가 주었는가 하는 것입니다. 2절을 다시 보면 “말하여 가로되 당신이 무슨 권세로 이런 일을 하는지 이 권세를 준 이가 누구인지 우리에게 말하라”고 했습니다. 그들은 먼저 당신이 무슨 권세로 이런 일을 하는지 자신들에게 말하라고 합니다. 여기서 ‘이런 일은’ 가장 가까이는 예수님께서 나귀새끼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 하신 후에 성전에 들어가셔서 장사하는 자들을 내어 쫓으시고 그들을 책망하신 일을 가리킵니다. 그런데 산헤드린 공회에서 파견된 자들이 문제를 삼는 것은 예수님이 무엇을 했느냐가 아니라 무슨 권세로 그런 일을 했는지에 관한 것입니다.

           

          그런데 산헤드린 공회 대표자들이 예수님께 와서 이와 같은 질문을 했다는 것은 그들이 예수님의 권위를 인간의 권위를 능가하는 것으로 인식했음을 의미합니다. 실제로 예수님께서 이전에 행한 사건에 대해서 무리 중 어떤 이들은 그의 권위가 귀신의 능력에 의해서 주어진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누가복음 11:14-15절에 보면 “예수께서 한 벙어리 귀신을 쫓아내시니 귀신이 나가매 벙어리가 말하는지라. 무리들이 기이히 여겼으나 그 중에 더러는 말하기를 저가 귀신의 왕 바알세불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낸다 하고”라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한 벙어리 귀신을 쫓아내었을 때 무리들이 기이히 여겼습니다. 그런데 그 중에 더러는 귀신의 왕 바알세불을 힘입어 쫓아낸다고 비난했습니다. 이들의 논리에 따르면 만일 예수님이 행한 능력이 인간의 내제적인 것이 아니라면 그런 능력은 인간에서 나올 수 없는 것입니다. 곧 예수님의 권위는 인간의 권위를 능가한 것입니다. 산헤드린 공회에서 파견된 대표자들도 예수님의 권위가 인간의 권위를 능가하는 것으로 인식했던 것입니다.

           

          두 번째 그들은 ‘누가 이 권세를 네게 주었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들은 이 권세를 준 이가 누구인지 자신들에게 말하라고 했습니다. 이 두 번째 질문은 첫 번째 질문과 관련이 있습니다. 그런데 ‘누가 이 권세를 네게 주었느냐?’는 이 질문은 신성모독죄로 고발당할 수 있는 질문입니다. 만일 예수님이 자신의 권위를 신적 권위로 주장한다면 신성모독죄로 고발당할 수 있습니다. 신성모독의 죄는 예수님이 죄를 용서해 준 사건에서 이미 거론되었습니다. 누가복음 5:21절을 보면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의논하여 가로되 이 참람한 말을 하는 자가 누구뇨. 오직 하나님 외에 누가 능히 죄를 사하겠느냐”고 했습니다. 사람들이 한 중풍병자를 메고 왔는데 많은 무리들 때문에 예수님 앞에 나가지 못하자 그들은 지붕에 올라가 기와를 벗기고 예수님께 달아 내렸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는 저희 믿음을 보시고 “이 사람아 네 죄사함을 받았느니라”고 하셨습니다. 이 모습을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보고 오직 하나님 외에 누가 능히 죄를 사하겠느냐고 하며 예수님을 참람한 말을 하는 자라고 정죄한 것입니다. 이와 같이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의 권위에 대한 질문의 핵심은 하나님의 위치에서 말하고 행동하는 예수님의 행위와 관련이 있습니다.

           

          그러면 이들의 질문에 대한 예수님의 대답이 무엇입니까? 오늘 본문 3-4절을 보면 “대답하여 가라사대 나도 한 말을 너희에게 물으리니 내게 말하라. 요한의 세례가 하늘로서냐 사람에게로서냐”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질문에 바로 답하지 아니하시고 그들에게 되물으셨습니다. “나도 한 말을 너희에게 물으리니 내게 말하라. 요한의 세례가 하늘로서냐 사람에게로서냐”(4). 예수님은 랍비의 전통이나 성전이나 토라와 같은 유대교의 중요한 원천들을 권위의 근거로 삼지 않고 ‘요한의 세례가 하늘로서냐? 사람에게로서냐?’고 하셨습니다. 곧 ‘신적 권위인가? 인간의 권위인가?’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예수님은 근본적인 방식으로 이슈를 전개함으로써 예수님은 산헤드린의 결정을 요구합니다. 이 결정은 그들이 권위의 원천으로 삼는 토라나 곧 모세 오경이나 성전이나 로마의 권위로 답할 수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여기에 대해서 답하면 자신도 무슨 권세로 이렇게 하는지 답하겠다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의 질문과 의도를 모르실 리가 없습니다. 예수님은 신성모독죄로 몰아가고자 하는 그들의 의도를 파악하고 그들에게 역공을 하신 것입니다.

           

          오늘 본문 5-8절을 보면 “저희가 서로 의논하여 가로되 만일 하늘로서라 하면 어찌하여 저를 믿지 아니하였느냐 할 것이요, 만일 사람에게로서라 하면 백성이 요한을 선지자로 인정하니 저희가 다 우리를 돌로 칠 것이라 하고 대답하되 어디로서인지 알지 못하노라 하니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도 무슨 권세로 이런 일을 하는지 너희에게 이르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의 역 질문을 받은 그들은 당황해서 서로 의논했습니다. 만일 하늘로부터 온 것이라고 하면 왜 믿지 않느냐고 할 것이고, 사람으로부터 온 것이라고 하면 모든 사람들이 요한을 선지자로 알고 있었기 때문에 백성들이 돌로 칠지도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진퇴양난에 빠졌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산헤드린 공회가 요한을 잘 알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4절의 “요한의 세례가 하늘로서냐 사람에게로서냐”는 예수님의 질문은 산헤드린 공회가 요한을 뚜렷이 알고 있었다는 것을 전제로 합니다. 그들은 대답하기를 “어디로서인지 알지 못한다”고 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도 “나도 무슨 권세로 이런 일을 하는지 너희에게 이르지 아니하리라”고 하셨습니다. 사실 예수님께서는 이미 답하셨습니다. 예수님의 권세가 세례요한이 증거 한 권세입니다.

           

          그러면 세례요한이 예수님에 대해서 무엇을 증거 했습니까? 누가복음 3:7-13절을 보면 세례요한은 백성들에게 회개하라고 외쳤습니다. 아브라함의 자손이라 여기며 자신들은 의롭다고 여기는 자들을 향해서 거침없이 독사의 자식들이라고 외치며 회개하라고 하였습니다. 도끼가 나무뿌리에 놓였다고 합니다. 이 회개의 소식을 백성들은 받아들입니다. 군인들도 회개합니다. 세리들도 회개합니다. 그러나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은 세례요한의 물로 베푸는 세례를 받지 않습니다. 세례를 받는다는 것은 자신들이 죄인임을 인정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당시 모든 백성들이 다 세례요한을 하나님의 선지자로 보았습니다. 그러므로 이 세례요한의 세례가 어디로부터 온 것이냐의 질문에 그들은 답을 할 수가 없었습니다. 세례요한을 하늘로부터 온 선지자로 인정한다면 세례요한이 증거한 예수님의 권위가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임을 인정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또한 누가복음 3:16-17절을 보면 “요한이 모든 사람에게 대답하여 가로되 나는 물로 너희에게 세례를 주거니와 나보다 능력이 많으신 이가 오시나니 나는 그 신들메를 풀기도 감당치 못하겠노라. 그는 성령과 불로 너희에게 세례를 주실 것이요, 손에 키를 들고 자기의 타작마당을 정하게 하사 알곡은 모아 곡간에 들이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우시리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에 보면 세례요한은 자기 뒤에 오시는 이 곧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가를 증거합니까? 자신은 물로 세례를 주지만 예수님은 성령과 불로 세례를 주시는 분이라고 증거합니다. 자신은 그분의 신발끈 풀기도 감당치 못하는 자라고 합니다. 예수님을 심판의 주로 증거하였습니다. 세례요한은 예수님을 죄사함의 권세를 가지신 분이요, 심판의 주로 증거합니다. 곧 세례요한은 예수님을 하나님의 메시아로 증거 한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누가복음 3:21-22절에 보면 예수님께서 세례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시고 기도하실 때 하늘이 열리며 성령이 형체로 비둘기 같이 그의 위에 강림하였습니다. 그리고 하늘로서 소리가 나기를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세례요한에게 세례를 받을 때 하늘로서 하나님의 아들로 권위를 부여 받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친히 아들로 인정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세례요한을 인정하면 예수님을 인정해야 합니다.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해야 합니다. 그러나 그들은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오늘 본문 5-6절에 보면 “만일 하늘로서라 하면 어찌하여 저를 믿지 아니하였느냐 할 것이요, 만일 사람에게로서라 하면 백성이 요한을 선지자로 인정하니 저희가 다 우리를 돌로 칠 것이라”고 하며 서로 의논했습니다. ‘의논했다’는 말은 원문으로 보면 ‘쉴로기조마이’(sullogivzomai)인데 이 단어는 70인역에서는 네 번 사용되지만 신약에서는 이곳에서만 사용됩니다. 이 단어는 어떤 문제와 관련된 여러 가능성을 의논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들은 세례요한의 세례가 하늘로서라고 할 수도 없었고 사람에게서라고도 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어떻게 대답해야 하는지 의논한 것입니다. 그들은 외통수에 걸렸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어디로서인지 알지 못한다”고 했습니다(7). 그러나 그들의 이와 같은 대답은 거짓이었습니다. 그들은 알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알고 싶지 않았습니다. 아니 인정하기 싫었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그들에게 “나도 무슨 권세로 이런 일을 하는지 너희에게 이르지 아니하리라”고 하셨습니다(8). 사실 예수님께서는 이를 통해서 자신의 권위가 하나님으로부터 왔음을 분명히 선언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권위가 하늘로부터 왔음을 선언하신 후 그들에게 포도원 농부 비유를 말씀해 주셨습니다. 오늘 이 비유는 공관복음에 다 나오는데 구약의 그림을 사용합니다. 이스라엘의 선지자들을 종으로 묘사하는 것(암 3:7; 슥 1:4-6)과 이스라엘을 하나님의 유업으로 설명하는 것(시 2:8), 그리고 비유의 핵심 주제인 이스라엘을 포도원으로 묘사하는 것도 구약적 소재입니다. 시편 80:8-13절을 보면 출애굽 사건을 하나님께서 애굽에서 포도나무를 가지고 오는 그림으로 묘사합니다. 무엇보다도 이스라엘을 포도원으로 비유하는 말씀은 이사야 5장입니다. 이사야 5:1-7절을 보면 “내가 나의 사랑하는 자를 위하여 노래하되 나의 사랑하는 자의 포도원을 노래하리라. 나의 사랑하는 자에게 포도원이 있음이여 심히 기름진 산에로다. 땅을 파서 돌을 제하고 극상품 포도나무를 심었었도다. 그 중에 망대를 세웠고 그 안에 술틀을 팠었도다. 좋은 포도 맺기를 바랐더니 들 포도를 맺혔도다. 예루살렘 거민과 유다 사람들아 구하노니 이제 나와 내 포도원 사이에 판단하라. 내가 내 포도원을 위하여 행한 것 외에 무엇을 더할 것이 있었으랴. 내가 좋은 포도 맺기를 기다렸거늘 들포도를 맺힘은 어찜인고. 이제 내가 내 포도원에 어떻게 행할 것을 너희에게 이르리라. 내가 그 울타리를 걷어 먹힘을 당케 하며 그 담을 헐어 짓밟히게 할 것이요 내가 그것으로 황무케 하리니 다시는 가지를 자름이나 북을 돋우지 못하여 질려와 형극이 날 것이며 내가 또 구름을 명하여 그 위에 비를 내리지 말라 하리라 하셨으니 대저 만군의 여호와의 포도원은 이스라엘 족속이요 그의 기뻐하시는 나무는 유다 사람이라. 그들에게 공평을 바라셨더니 도리어 포학이요 그들에게 의로움을 바라셨더니 도리어 부르짖음이었도다”고 했습니다.

           

          오늘 본문 9-18절을 보면 한 사람이 포도원을 만들어 농부들에게 세로 주고 타국에 가서 오래 있다가 때가 되어 포도원의 소출 얼마를 받게 하려고 한 종을 보냈습니다. 그런데 농부들은 세를 주기는커녕 세를 받으러 온 주인의 종을 심히 때리고 거저 돌려보냈습니다. 이에 주인은 다른 종을 다시 보냈습니다. 그런데 농부들은 그에게도 똑같이 심히 때리고 능욕하고 보냈습니다. 주인은 세 번째 종을 다시 보냈습니다. 그런데 이때도 그들은 종을 때리고 상하게 하고 내어 쫓았습니다. 이에 주인은 ‘어찌할꼬’라고 묻습니다. 이 말은 포도원 주인의 독백입니다. 그런데 이 독백은 독자들로 하여금 주인의 마음 안으로 들어오게 하는 역할을 합니다. 독자의 입장에서 보면 반역하는 농부들을 어떻게 해야 한다고 생각하겠습니까? 당장 군사를 보내 그들을 진멸하고 포도원을 다른 사람들에게 맡겨야 한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그런데 주인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자신의 사랑하는 아들을 보내고자 했습니다. 이는 농부들이 아들은 혹 공경할 것이라고 기대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어떻게 했습니까? 농부들은 아들을 보고 서로 의논한 후 “이는 상속자니 죽이고 그 유업을 우리의 것으로 만들자”하고 포도원 밖에 내어쫓아 죽였습니다. 농부들이 아들을 죽인 것은 상속자인 것을 알고 죽인 것입니다. 곧 상속자인 아들을 죽이고 그 포도원을 자신들이 차지하고자 한 것입니다. 그런즉 주인이 어떻게 하겠느냐고 합니까? 16절에 보면 “와서 그 농부들을 진멸하고 포도원을 다른 사람들에게 주리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다른 사람’이 누구인지 오늘 본문에서는 구체적으로 말하고 있지 않습니다. 누가의 시대에 ‘다른 사람’은 분명히 이방인을 포함했을 것입니다. 포도원을 다른 사람들에게 주어질 것이라는 말씀을 들은 사람들은 하나님이 금하신다고 외쳤습니다. 16b절을 보면 “사람들이 듣고 가로되 그렇게 되지 말아지이다”고 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이 비유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아들었습니다. 이스라엘의 유업이 이방인들에게 주어질 뿐 아니라 이스라엘에서 빼앗을 것이라는 사실로 그들은 분노했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그들에게 무엇이라고 합니까? 17-18절을 보면 “저희를 보시며 가라사대 그러면 기록된바 건축자들의 버린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느니라 함이 어찜이뇨. 무릇 이 돌 위에 떨어지는 자는 깨어지겠고 이 돌이 사람 위에 떨어지면 저를 가루로 만들어 흩으리라 하시니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시편 118:22절과 이사야 8:14-15절 말씀을 인용하여 말씀하셨습니다. 시편 118:22절을 보면 “건축자의 버린 돌이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나니”라고 했습니다. 또한 이사야 8:14-15절을 보면 “그가 거룩한 피할 곳이 되시리라. 그러나 이스라엘의 두 집에는 거치는 돌, 걸리는 반석이 되실 것이며 예루살렘 거민에게는 함정, 올무가 되시리니 많은 사람들이 그로 인하여 거칠 것이며 넘어질 것이며 부러질 것이며 걸릴 것이며 잡힐 것이니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시편과 이사야서를 인용하여 건축자들의 버린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이 쓸모없다고 버린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어 다른 집이 세워지는 것입니다. 이것은 여호와께로 말미암아 된 신기할 일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이사야 선지자의 예언은 이 돌 위에 걸려 넘어질 것을 말씀합니다. 이 돌이 심판을 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이 버림받은 돌을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아니합니다. 베드로전서 2:6절을 보면 “경에 기록하였으되 보라 내가 택한 보배롭고 요긴한 모퉁이 돌을 시온에 두노니 저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치 아니하리라 하였으니”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모퉁이 머릿돌은 유대인들로부터 버림받아 십자가에 죽은 예수님을 말합니다.

           

          오늘 본문 19-26절을 보면 예수님의 비유의 말씀을 사람들이 알아듣습니다. 특히 서기관들과 대제사장들이 자기들을 향한 말씀인줄 알아듣습니다. 그들은 즉시 예수님을 잡고자 했습니다. 하지만 백성들 때문에 그렇게 하지 못하고 총독의 치리와 권세아래 붙여 죽이고자 사람을 보내 유도질문을 합니다. “선생님이여! 우리가 아노니 당신은 바로 말씀하시고 가르치시며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참으로서 하나님의 도를 가르치시나이다”(21). 그들은 스스로 의인체하면서 예수님을 치켜세우며 예수님의 말을 책잡고자 질문합니다. “우리가 가이사에게 세를 바치는 것이 가하니이까 불가하나이까”(22). 이것은 예수님께서 어떻게 대답해도 책잡히도록 질문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세금을 내라고 하면 이방 왕에게 세금을 내라고 하였으니 참선지자가 아니라고 할 것이고, 내지 말라고 하면 로마의 반역자로 몰아 총독의 권세에 붙여 죽이고자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간계를 아시고 “데나리온 하나를 내게 보이라”고 하셨습니다. 보이자 “누구의 화상과 글이 있느냐”고 물으셨습니다. 가이사의 것이라고 대답하자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고 하셨습니다. 이에 26절에 보면 저희들은 백성 앞에서 능히 책잡지 못하고 예수님의 대답을 기이히 여기며 잠잠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를 통해서 자신의 권세가 하나님으로부터 왔음을 선포하셨습니다. 포도원 주인이 아들을 보냄같이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보내셨습니다. 예수님의 권위는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입니다. 성령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사 예수님의 권위가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임을 알게 하여 주시기를 원합니다. 예수님을 우리 구원의 반석으로 믿고 우리의 왕 되신 예수님께 경배하는 자들이 되게 하여 주시기를 원합니다. 그리하여 우리가 멸망의 자식들이 아니라 주님의 구원에 참예하며 하나님께서 주시는 참된 평안을 누리는 복된 자들이 되게 하여 주시기를 원합니다. 아멘!


          세상에는 두 종류의 권세가 있음을 봅니다.

          하나는 세상 권세입니다.
          자기가 주인되어 자기를 위해 살아가면서 사용하는 권세들입니다.
          돈과 권력과 자신의 이름 사용하는 권세인 것입니다.

          또 다른 하나는 하나님 나라의 권세입니다.
          하나님을 위해 살고, 이웃을 위해 사는 이가 가지는 권세입니다.
          돈과 권력과 자신의 이름을 사용하는 권세가 아닌 섬김과 오래 참음과 하나님과 동행함으로 말미암아 주어지는 권세입니다.
          교회와 성도가 추구해야 할 권세는 큰 예배당과 많은 무리가 모여 들기 때문에 있게 되는 권세가 아니라 말씀대로 살아가는 것을 인해, 이웃과 하나님을 생각하는 것을 통해 주어지는 권세이어야 할 것입니다. 

          ​무슨 권세로 이런 일을 하느냐?
          세상 권세와 하나님의 권세

          27 그들이 다시 예루살렘에 들어가니라 예수께서 성전에서 거니실 때에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과 장로들이 나아와

          28 이르되 무슨 권위로 이런 일을 하느냐 누가 이런 일 할 권위를 주었느냐

          29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도 한 말을 너희에게 물으리니 대답하라 그리하면 나도 무슨 권위로 이런 일을 하는지 이르리라

          30 요한의 세례가 하늘로부터냐 사람으로부터냐 내게 대답하라

          31 그들이 서로 의논하여 이르되 만일 하늘로부터라 하면 어찌하여 그를 믿지 아니하였느냐 할 것이니

          32 그러면 사람으로부터라 할까 하였으나 모든 사람이 요한을 참 선지자로 여기므로 그들이 백성을 두려워하는지라

          33 이에 예수께 대답하여 이르되 우리가 알지 못하노라 하니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도 무슨 권위로 이런 일을 하는지 너희에게 이르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포도원 주인과 농부들 그리고 하나님의 나라가 되어야 할 포도원]

          1 예수께서 비유로 그들에게 말씀하시되 한 사람이 포도원을 만들어 산울타리로 두르고 즙 짜는 틀을 만들고 망대를 지어서 농부들에게 세로 주고 타국에 갔더니

          [세상을 산 농부들]

          2 때가 이르매 농부들에게 포도원 소출 얼마를 받으려고 한 종을 보내니

          3 그들이 종을 잡아 심히 때리고 거저 보내었거늘

          4 다시 다른 종을 보내니 그의 머리에 상처를 내고 능욕하였거늘

          5 또 다른 종을 보내니 그들이 그를 죽이고 또 그 외 많은 종들도 더러는 때리고 더러는 죽인지라

          6 이제 한 사람이 남았으니 곧 그가 사랑하는 아들이라 최후로 이를 보내며 이르되 내 아들은 존대하리라 하였더니

          7 그 농부들이 서로 말하되 이는 상속자니 자 죽이자 그러면 그 유산이 우리 것이 되리라 하고

          8 이에 잡아 죽여 포도원 밖에 내던졌느니라

          9 포도원 주인이 어떻게 하겠느냐 와서 그 농부들을 진멸하고 포도원을 다른 사람들에게 주리라

          [건축자들이 버린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됩니다]

          10 너희가 성경에 건축자들이 버린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나니

          11 이것은 주로 말미암아 된 것이요 우리 눈에 놀랍도다 함을 읽어 보지도 못하였느냐 하시니라

          12 그들이 예수의 이 비유가 자기들을 가리켜 말씀하심인 줄 알고 잡고자 하되 무리를 두려워하여 예수를 두고 가니라

          ​예수께서 성전에 거니실 때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과 장로들이 예수께 왔습니다.
          그러면서 묻습니다. "무슨 귄위로 이런 일을 하느냐 누가 이런 일 할 권위를 주었느냐" 이들의 이 말의 의미는 성전에 관한 권세는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데 지금 누구 허락을 받아서 성전에서 가르치며 성전에서 매매하는 것을 금하는 일을 하느냐는 것입니다. 로마에 아는 사람이 있느냐는 것입니다.

          그러자 주님은 이들에게 되묻습니다. "요한의 세례가 하늘로부터냐 사람으로부터냐" 이렇게 주님이 묻자 생각해 보고는 모르겠다고 합니다. 세례 요한을 백성들이 참 선지자로 알고 있기 때문에 사람으로부터 온 권세라 할 수 없고 하늘로부터라고 하면 왜 그를 믿지 않느냐고 할 것이라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러자 주님은 나도 무슨 권세로 이런 일을 하는지 말하지 않겠다고 하시면서 포도원 비유를 말씀하십니다. 사실상 이 비유를 통해 주님은 누구의 권위로 일하시는지를 말씀하셨고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 그리고 장로들이 어떤 위치에 있는 사람들인지를 분명히 밝히셨습니다.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 그리고 장도들은 주님의 비유를 통해 자신들은 심판 받을 농부들이란 사실을 들었습니다. 그리고 그 사실을 알았습니다(12절) 하지만 그들은 예수님을 잡고자 했습니다. 진리의 말씀을 듣고도 그들은 회개하지 않았습니다. 정말 비유의 농부들처럼 행동을 한 것입니다.

          예수님의 포도원 비유를 자세히 살펴 봅시다. 먼저 등장 인물 가운데 포도원 주인이 나옵니다. 포도원 주인은 포도원을 만들었습니다. 산울타리도 만들었습니다. 즙 짜는 틀도 만들고 망대도 지었습니다. 다시 말해서 포도원은 부족한 것이 없도록 모든 것이 잘 갖추어진 포도원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주인은 그 포도원을 농부들에게 세로 주고 타국에 갑니다. 여기서 포도원 주인은 하나님이신 것이 틀림없습니다.

          그리고 등장 인물 가운데 농부가 나옵니다. 여기서의 농부는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 그리고 장로들이 분명합니다. 12절에서 이들은 예수께서 자신들에게 하신 말씀인 줄을 알았다고 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포도원은 이스라엘 나라인 것이 확실합니다. 주님께서 이스라엘을 포도원으로 비유한 것은 이스라엘은 하나님 나라의 열매를 맺어야 할 나라이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을 하나님께서 부르셔서 자손과 땅을 주시겠다고 하신 것은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시겠다고 하신 것이고 그 나라의 성격은 모든 백성들에게 복덩어리가 되는 나라였습니다(창12:1-3)

          그런데 2절부터 9절까지를 보면 포도원을 관리하던 농부들은 자신만을 생각합니다. 주인에게 돌려야 할 포도원의 소출 얼마를 주인에게 줄려고 하지 않습니다. 모든 것을 자신들이 소유하고자 한 것입니다.

          농부는 포도나무의 열매가 잘 맺도록 하고 그 열매의 일부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했었습니다. 하지만 농부들은 열매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지 않는 이가 되었습니다. 다시 말해서 복덩이로 살고자 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주인은 당신의 종를 보냅니다. 자기를 위해 세상을 살지 말고 하나님을 위해 이웃을 위해 살아야 한다는 메시지를 전하는 종들을 보낸 것입니다. 선지자들을 보낸 것입니다. 하지만 이스라엘의 지도자들은 하나님의 선지자들을 핍박합니다. 그리고 자신만을 위해 살아가는 삶을 포기하지 않습니다. 다시 말해서 탐욕을 쫓아살아가는 삶을 계속해서 살아갑니다. 자기 멋대로 할 수 있는 물질과 권세와 명예를 가진 삶을 꿈꾸며 거대한 저택과 하인을 가진 이로 살고자 하였습니다.

          이제 마지막으로 주인은 아들까지 보냅니다. 당신의 아들을 말구유에 태어나게 하시고 나사렛 동네에서 자라게 하셨으며 젊은 나이에 십자가에 죽게 하심으로 세상이 추구하는 삶은 의미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하셨습니다. 하지만 농부들은 하나님께 세를 내고자 하지 않습니다. 땅의 모든 족속이 이스라엘로 말미암아 복을 받아야 하는데 이스라엘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자신들만을 위해 살았습니다.

          "서로 사랑하라"는 메시지를 전하신 예수님을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 그리고 장로들이 이제 영문 밖으로 끌고가 십자가에 못 박을 것입니다. 주님은 이 사실을 아시고 "이에 잡아 죽여 포도원 밖에 내던졌느니라"(8절) 합니다.

          포도원 주인인 하나님은 이런 자기만을 위해 사는 농부들 곧 세상을 사는 농부들을 진멸하고 포도원을 다른 사람에게 주실 것이라 하십니다.

          오늘날 포도원은 교회입니다.
          교회는 마땅히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과 이웃을 위해 살아야 합니다.
          복덩이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오늘날 교회들이 어디에 헌금을 사용하고 있습니까?

          ​유럽의 교회들이 왜 지금 어려움을 당하고 있습니까?
          유럽의 교회들이 교회당을 짓는데 거의 모든 물질을 사용하였고 카톨릭의 신부들과 교회의 목사들이 자신들의 안위만을 위해 다시 말해서 교회만을 위해 물질과 시간들을 사용했기 때문입니다.

          다시 교회들을 돌아보면 좋겠습니다.
          어디에 물질을 사용하고 있고 어디에 교회의 에너지를 투입하고 있는지를 돌아보면 좋겠습니다.

          ​세상을 사는 사람들이 버린 돌이 있습니다.
          세상을 살고 자신의 나라를 세우는데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을 것 같은 그래서 가치가 없다고 생각하는 것들을 내버리는 것입니다.
          이것이 세상을 사는 지혜인 것입니다.

          ​하지만 자신을 위해 살고 세상을 세우는 지혜는 참 지혜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세상을 사는 사람들이 버린 돌을 곧 가치 없다고 생각하는 것들을 통해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시기 때문입니다.

          ​돈과 명예와 웰빙과 세상의 성공을 위한 지혜가 아니라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의 열매를 맺으며 항상 기뻐하고 범사에 감사하며 쉬지 않고 기도하는 복된 삶을 살아내는 것이 곧 하나님과 동행하는 지혜가 참 지혜이며 바로 이 지혜로 하나님의 나라가 세워지고 우리의 삶은 참된 행복을 누리게 된다는 것입니다.

          ​참된 행복은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고 나를 둘러싸고 있는 모든 이가 행복할 때 주어진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성경이 계속해서 주장하고 있는 세상은 무너질 것이고 오직 하나님의 나라만이 남게 될 것이라는 것과 죽음 후에는 반드시 심판이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웰 비잉(Well Being)과 더불어 웰 다잉(Well Dying) 이 동시에 준비되어야 합니다.
          웰빙(well-being)과 웰다잉(well-dying)

          세계보건기구(WHO)는 육체적 질병이 없을 뿐만 아니라 정신적, 사회적, 그리고 영적으로 온전한 상태를 건강한 웰빙 상태로 정의하고 있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 사회에서는 웰빙이란 의미가 육체적 건강을 유지하는 대명사처럼 남용되어 쓰이고 있다.

          필자는 병을 치료하는 의사로서 대학병원과 기독병원에 근무한 후 사회적으로 병든자들을 교정하는 교도소에서 수년간 의무관으로 근무하다가 최근 수원에서 말기 환자들을 돌보는 호스피스 사역을 하고 있다. 따라서 육체의 병듬과 치료, 정신적 파멸과 회생의 과정, 그리고 말기 환자들의 안락사 현장을 보면서 진정한 건강과 삶이 무엇인지 조금은 이해할 것 같아 이 글을 쓰게 됐다.
          사실 안락사 부분은 일선 의료인들의 영역으로 알았는데 최근 총회 신학부에서 개최한 안락사 공청회에 참석했다가 조금이나마 신학적 이해의 폭을 더 넓힐 수 있었고 임종의 중요성을 재인식 할 수 있었다.
          잠언 3장에 “천하에 범사가 기한이 있고 날 때가 있고 죽을 때가 있으며…”라는 말씀은 인간이 만물의 영장이라지만 태어나고 성장하고 노년이 되어 반드시 임종의 길에 이른다는 인간의 진로를 명시하고 있다. 인간의 삶은 그때그때 현재의 삶이 가장 중요하지만 결국 마지막에 가서는 어떻게 임종을 맞느냐가 가장 중요한 의미를 갖게 된다고 할 수 있다. 웰다잉은 건강하게 잘 사는 것 보다 건강한 죽음을 의미한다. 웰다잉의 단계인 호스피스 사역은 그래서 요즘 관심 사역의 하나로 부각되고 있다. 호스피스(Hospice)란 병원(Hospital)의 라틴어로 ‘손님’이란 뜻에서 유래된 말이다. 즉 오갈데 없는 손님을 맞이하는 곳으로 호텔처럼 쉬는 장소를 의미한다. 그러나 오늘날은 병원에서 치유 불가능한 인생 말기 환우가 마지막 머무는 곳으로 완화의학적 차원에서 웰다잉 하도록 환우와 가족들을 보살피는 케어 호스피스의 의미로 쓰이고 있다.
          현대의학이 발전했다고 하지만 도저히 회복이 불가능한 질병이나 노환에 대해서는 한계가 있다. 회복이 불가능하고 고통이 심할 경우 환자나 혹은 가족들 중에서 생명을 종결시켜 달라고 요구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그러나 병원에서는 약물투여 등 적극적 안락사는 살인 혹은 살인방조 행위가 되고 환자 자신도 자살행위가 될 수 있어 가능한 피하고 자연사 할 수 있는 여건을 만들어 임종에 이르게 하는 소극적 안락사 방법을 택하기도 한다.
          실제 임상경험상 안락사는 완화의학적 측면에서 생명의 존엄사로 평가하기도 한다. 즉 인공적으로 생명을 연장하는 의료행위는 바람직하지 못할 때도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안락사는 인간의 생명을 인위적으로 조작하는 행위로 죄악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다.
          결국은 환자 자신이 편안한 마음을 유지하고 임종을 맞이하는게 가장 행복한 죽음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런 상황이 되기 위해서는 하늘에 소망을 두고 예수님과 함께하는 신앙적 임종이 웰다잉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웰빙하는 삶이 곧 웰다잉으로 이어진다는 사실을 인식하고 순간순간 주어진 삶에 최선을 다하는 것이 우리 크리스천들의 기본적인 삶의 자세가 아닐까.


          웰 빙, 웰 다잉, 웰 에이징(Well being, Well dying, Well aging)

          사람이 사람답게 사는 것을 웰 비잉(Well Being)
          사람이 사람답게 죽는 것을 웰 다잉(Well Dying)
          그리고 사람이 사람답게 늙는 것을 웰 에이징(Well Aging) 이라고 합니다.
          사람의 연령에는 자연 연령과 건강연령 , 정신연령, 영적연령 등이 있습니다.



          영국의 노인 심리학자 브롬리(D. B. Bromley)는 인생의 4분의 1은 성장하면서 보내고, 나머지 4분의 3은 늙어가면서 보낸다고 하였다. ​

          사람이 아름답게 죽는다는 것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보다 어려운 것은  아름답게 늙는 것이다. 행복하게 늙어가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웰빙.웰다잉.웰에이징-(福生 - 善終 - 黃金老年)

          ​아름답게 늙어가기 위해서는 일과의 관계가 중요하다. 나이가 들수록 열정을 잃지 않도록 해야 한다. 나이가 들면서 4대 고통이 따른다. 질병, 고독감, 경제적 빈곤, 그리고 역할 상실이다. 점점 의욕과 열정을 잃어가게 된다.

          노년을 초라하지 않고 우아하게 보내는 비결은 사랑, 여유, 용서, 아량, 부드러움 등이다. 특히 핵심적인 요소는 열정이다. 모세는 80세에 민족을 위해 새로운 출발을 하였다. 노년기에 열정을 가지면 위대한 업적을 남길 수 있다. ​​세계 역사상 최대 업적의 35%는 60-70대에 의하여 성취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23%는 70-80세 노인에 의하여, 그리고 6%는 80대에 의하여 성취되었다고 한다. 

          결국 역사적 업적의 64%가 60세 이상의 노인들에 의하여 성취되었다. 소포클레스가 ‘클로노스의 에디푸스’를 쓴 것은 80세 때였고, 괴테가 '파우스트’를 완성한 것은 80이 넘어서였다.

          다니엘 드 포우는 59세에 ‘로빈슨 크루소’를 썼고, 칸트는 57세에 ‘순수 이성비판’을 발표하였고, 미켈란젤로는 로마의 성 베드로 대성전의 돔을 70세에 완성했다.

          베르디, 하이든, 헨델 등도 고희의 나이를 넘어 불후의 명곡을 작곡하였다.

          ​인간관계가 매우 중요하다. 나이가 들면서 초라하지 않으려면 대인관계를 잘 하여야 한다. 즉 인간관계를 ‘나’ 중심이 아니라 믿음 중심으로 가져야 한다.

          미국 카네기멜론 대학에서 인생에 실패한 이유에 대하여 조사를 했는데, 전문적인 기술이나 지식이 부족했다는 이유는 15%에 불과하였고, 나머지 85%는 잘못된 대인 관계에 있다고 하였다. 사람답게 살고 늙고 죽음. 그만큼 인간관계는 살아가는데 중요한 부분을 차지한다는 것이다. 나이가 들면서 사람은 이기주의가 강해진다. 노욕(老慾)이 생긴다.

          모든 것을 자기중심적으로 생각한다. 그러면서 폭군 노릇을 하고, 자기도취에 몰입하는 나르시시즘 (narcissism)에 빠질 수 있다.

          또는 염세적이고 운명론적인 생각이 지배하는 페이탈리즘(fatalism) 에 빠질 수도 있다. 이런 사람의 대인관계는 결국 초라하게 될 수밖에 없다.

          결국 인간관계는 중심축이 무엇이냐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 △물질 중심의 인간관계를 갖는 사람은 나이들 수록 초라해지고 △일 중심이나 ‘나’ 중심의 인간관계를 갖는 사람도 역시 마찬가지로 초라해진다.

          ​△타인 중심의 인간관계를 갖는 사람은 나이가 들면서 찾아오는 사람이 많고, 따르는 사람도 많다.
          △가장 좋고 풍요로운 인간관계를 갖는 것은 믿음 중심의 인간관계다. 변함없는 가치관을 갖는 믿음 중심의 대인관계를 웰에이징(wellaging)이라 한다.

          웰에이징을 위해서는 대신관계(對神關係)가 중요하다. 나이가 들면 신앙의 여부가 삶의 질을 확연
          하게 바꾸어 놓는다.

          나이가 들면 들수록 인간을 의지하기보다는 믿음을 의지해야 한다. 믿음과 가까이하면 정신연령과 영적연령은 더욱 젊어진다. 우리는 결승점에 가까워질수록 더욱 최선을 다해 뛰어야 한다.

          후반전의 인생은 여생(餘生)이 아니라, 후반생(後半生)이다. 인생의 주기로 보면 내리막길 같지만 내세(來世)을 향해 새 인생을 시작할 때다.

          어려울 수도 있지만 우리들 마음의 깊은 각오는 가능하다고 판단해 본다. wellbeing 인생은 결국 wellaging 하다가 welldying으로 마쳐야 한다.


          2012년 세계인구보고서(한국어판)에 따르면 우리나라 여성의 평균수명은 84.0세로 세계 8위, 남성은 77.3세로 세계 26위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와 같이 평균수명이 80대로 진입하면서 사람답게 살아가는 ‘웰빙(Well being)', 사람답게 죽는 ‘웰다잉(Well dying)'과 함께 사람답게 늙어가는 것을 의미하는 '웰에이징(Well aging)'이라는 말이 풍미하고 있습니다.

          영국 리버풀대학의 노인 심리학자 브롬리(D. B. Bromley)는 우리의 삶에서 '인생의 4분의 1은 성장하며 보내고, 나머지 4분의 3은 늙어가며 보낸다.'라고 했습니다. 평균수명을 80년으로 볼 때 60년을 늙어가며 보낸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평생의 시간을 어떻게 소비하며 지내는 것일까요?

          영국의 타블로이드 신문 '더 선(The Sun)'지에 평균수명을 80년으로 보았을 때 일생동안 어떤 일에 얼마의 시간을 소비하며 지내는지 활동별로 비교한 기사가 게재된 바 있습니다. 이는 영국 사람들을 대상으로 한 결과로 문화가 많이 다른 우리 일상과 일치하지 않는 부분이 많을 수 있고, 세대에 따라 소비하는 시간의 패턴도 크게 다를 수 있지만 그 경향을 살펴보는 것은 무척 흥미 있는 일이라 생각됩니다.

          평균수명 80년은 시간으로 계산해보면 701,280시간이 됩니다. 이는 24시간(하루)X365일X80년 = 700,800시간에 윤달인 해 20년의 24시간 X 20년 = 480시간을 더하면 그리됩니다.

          보도에 따르면 <표>에서처럼 일로 지내는 시간이 26년(227,760시간)으로 가장 길게 나타났고, 아침에 깨어날 때마다 부족하다고 느끼는 잠자는 시간은 평균 25년(239,000시간)으로 2위였습니다. 일하는 시간과 잠자는 시간을 합쳐보면 평생 시간의 64% 가까이 됩니다. 이는 하루 24시간에서 15시간 반이 넘는 시간으로 우리가 하루에서 쓸 수 있는 나머지 시간은 8시간 반 정도라는 것을 알려주기도 합니다.

          TV를 보는 시간이 10년으로 하루 시간으로 따지면 3시간 이상으로 3위로 나타났고, 생명 유지에 필수적인 양분의 공급을 위한 식사나 간식을 하는 시간이 52,560시간(6년)으로 4위에 자리하고 있습니다.

          전화 통화 시간이 4년으로 그 뒤를 잇고 있는데, 이는 하루 중 1.2시간을 전화통을 잡고 지내는 것을 보여줍니다. 스마트폰 사용이 확산되고 있는 현실에서 그 시간은 훨씬 더 길어질 것으로 예상이 됩니다.

             
          화장실에 가는 시간이 3년으로 6위로 나타났으며, 특별한 생각 없이 지내는 시간과 화를 내며 지내는 시간이 2년으로 같게 나타난 것도 재미있는 현상입니다.

          남성과 여성에서 차이를 보이는 것은 우선 부엌에서 일하는 시간으로 여성이 2년 5개월, 남성은 1년 3개월로 차이를 보였습니다. 우리나라의 경우 문화적 차이에 따라 그 시간은 여성이 영국보다 더 길 것으로 추정이 됩니다.

          흥미로운 사실은 외모를 가꾸는 몸단장 시간(거울을 보는 시간)이 여성의 경우 평생 136일로 남성의 46일에 비해 3배 가까이 높은 것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그에 비해 좋아하는 이성을 바라보는 데 평생 들이는 시간은 남성이 1년인 데 비해 여성은 0.5년으로 2배의 차이를 보이는 것도 흥미로운 사실입니다.

          아쉽게도 조사 항목 중 미소 짓는 시간은 88일로 꼴찌로 나타났습니다. 미소 짓는 시간을 하루에 10분씩 더 가진다면 1년에 3,650분, 약 60시간으로 2.5일 정도가 됩니다. 이는 40세인 사람이라면 80세까지 약 100일로 조사에서 나타난 평생의 시간보다도 더 많은 시간이 됩니다.

          이렇듯 우리 삶은 평소의 시간 관리에 대한 마음가짐에 따라 크게 변할 수 있습니다. '행복하기 때문에 웃는 것이 아니라 웃기 때문에 행복해진다.'는 말도 있습니다. 진정으로 행복한 삶을 위해서는 자신을 진정으로 사랑하고 주변을 배려하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그리고 인생 80년의 시간에서 그동안 지내온 시간에 집착하지 않고 앞으로 맞이할 시간의 효율적인 관리에 대해 계획을 세우고 실천하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웰빙과 웰다잉은 반대 개념 아닌 삶의 한 묶음

          웰빙(well-being)에 대한 대중의 관심이 넘치는 사회에서 내놓고 얘기하기도 꺼리는 웰다잉(well-dying)에 천착하는 이가 있다. 중앙일보 편집국장·논설고문을 지낸 원로 언론인 최철주(72)씨다. 현재는 호스피스와 웰다잉 강사로 활동 중이다. 그는 웰빙과 웰다잉에 대해 “대척점에 있는 게 아니라 웰빙 안에 웰다잉이 존재한다”며 “몇 년 전 딸과 아내를 잇따라 암으로 잃은 것을 계기로 웰다잉에 관심을 갖게 됐다”고 말했다.

          2004년 자궁암 환자이던 딸은 말기 상태에 들어가면서 수술을 마다했다. 중환자실에 들어가는 것도 완강히 거부해 가족들을 자주 울렸다. 딸은 메모지에 “더 치료할 방법도 없는 상태에서 중환자실에 가는 것은 지옥으로 가는 고통이나 마찬가지”라고 적었다. 당시 32세이던 딸은 직장을 그만두고 아기를 기다리는 평범한 주부였다. 이런 딸이 너무 일찍 죽음을 맞게 된 상황을 그는 이해할 수 없었다. 딸은 아빠에게 호스피스 아카데미 교육을 받아보라고 권했다.

          웰다잉 강사 교육에 50대 여성 몰려
          그가 6개월 과정인 호스피스 교육을 받던 중 딸은 세상을 떠났다. 장례식이 끝난 다음 날에도 그는 호스피스 교육에 참석했다. 죽음 교육을 잘 받겠다는 딸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였다.

          “집사람은 슬픔을 이겨내지 못했고, 그게 독이 됐다. 딸이 숨진 지 4년 뒤 아내도 암에 걸려 모녀 관계는 참 특별하다고 느꼈다.” 그의 눈이 촉촉해졌다. 부인은 항암제 치료를 거부하고 호스피스 센터를 나와 8개월간 집에서 머물다 임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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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는 요즘 말기 환자들이 편안한 죽음을 준비할 수 있도록 돕는 웰다잉 강사로 활동 중이다. 웰다잉 강사 양성을 위한 교육에도 적극적이다. 보통 10주 동안 진행되는 강좌인데 그는 이 중 한 강좌를 맡는다. 수강생은 80명 정도. 큰 일을 치른 뒤 삶에 대한 회의를 느낀 여성 수강생이 많단다. 50대 이후 여성이 수강생의 70% 이상을 차지한다고 했다.

          그의 부인은 웰다잉 전도사가 되려는 남편과 함께 다른 나라 호스피스 병동을 방문했다. 투병 중에도 남편이 웰다잉 강사로 나가는 일을 적극 권하기도 했다가 어느 때는 씁쓸한 표정을 짓기도 했다. 병이 심해질수록 감정의 기복이 커졌다.

          웰다잉 강사에게도 ‘좋은 죽음이란 무엇인가’는 선뜻 답하기 힘든 질문이다. 답을 구하기 위해 그는 아내와 함께 미국·일본 등의 호스피스 병동을 방문하고 죽음을 앞둔 30여 명의 말기 환자를 만났다. 현역에서 은퇴한 원로기자가 다시 취재수첩을 들고 ‘좋은 죽음’과 ‘그렇지 못한 죽음’의 차이를 찾아 나선 것이다. 그 결과물이 2008년 출간된 『해피엔딩-우리는 존엄하게 죽을 권리가 있다』란 책이다.

          부인이 딸의 죽음을 받아들인 것도 미국의 호스피스 병동에서 삶을 아름답게 마무리하는 많은 환자를 보고 나서였다. 그 후 부인은 “딸이 편안하게 갔다. 그것도 제 복이지”라고 자주 중얼거렸다.

          연명 치료 거부한 소설가 최인호
          죽음을 앞둔 환자들이 그의 취재에 순순히 응해줬을까.

          “한국에선 힘들었다. 열에 여덟·아홉 사람은 자신의 말년을 남에게 드러내길 꺼렸다. 기자나 언론에 대한 불신이 깊어 저널리스트의 한 사람으로서 부끄럽기도 했다. 그러나 미국의 말기 환자들은 달랐다. 기타 치고 노래 부르고 담소하고 죽음을 평화로운 상태에서 받아들이는 것 같았다. 질문에도 잘 답변해줬다.”

          그는 웰다잉을 실천한 저명인사로 고(故) 최종현 SK 회장을 먼저 꼽았다.

          “죽음을 앞둔 최 회장을 직접 만난 건 아니다. 현역 기자 시절부터 최 회장의 죽음에 대해선 관심이 많았다. 돈·명예·권력을 모두 가졌던 최 회장이 대학병원에서 치료 받다 어느 날 집으로 돌아가 6개월 동안 통증 치료를 받다가 세상을 떠난 이유가 궁금해서였다. 당시 나는 중앙일보 도쿄총국장이었는데 일본 기자들이 오히려 최 회장의 죽음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깊게 취재했다. 나중에 최 회장의 동반자였던 SK텔레콤 손길승 명예회장으로부터 죽음의 과정을 전해 들었다. 손 회장에 따르면 최 회장은 폐암 수술 뒤 암이 재발하자 항암제와 방사선 치료를 거부했다. 통증이 심해지면 통증 완화제를 맞으면서 호흡 훈련을 하며 자기 마음을 추스르기 시작했다. 새 항암제를 써보자는 주변의 권유도 뿌리치고 조용히 죽음을 받아들였다. 최 회장이 생을 마감한 당시(1998년)만 해도 토장(土葬)을 당연시하는 분위기였다. 하지만 최 회장은 자신을 화장해 자연에 뿌려줄 것을 당부했다. 그의 유언은 우리나라의 화장 문화를 바꾸는 중요한 전환점이 된다.”

          유명 작곡자이자 바이올린 연주자인 조념씨의 죽음도 그에겐 진한 기억으로 남아 있다.

          “경기도 포천의 한 호스피스 센터에서 조 선생을 만난 것은 2008년 그가 숨지기 닷새 전이었다. 그는 지인들이 마지막 눈도장을 찍기 위해 병원을 찾는 것을 피곤해하고 나중엔 다 거부했다. 그러던 분이 내 책을 보고 공감했다면서 나를 위해 문둥이 시인 한하운의 ‘보리피리’를 직접 연주해줬다. 지금 생각해도 눈물이 난다.”

          그는 소설가 최인호씨도 임종 전에 만나고 싶었지만 뜻을 이루지 못했다.

          “여러 번 인터뷰를 요청했으나 나를 만나는 것을 부담스러워했다. 최 작가의 친구로부터 ‘그가 죽음을 앞두고 두려움을 갖기 시작했으며 계속 글을 쓰고 싶지만 죽음이란 운명은 어쩔 수 없다’는 말을 했다고 전해 들었다. 그는 연명 치료를 거부했다.”

          그럼 죽음을 앞둔 가족이나 지인들에겐 어떤 위로의 말을 건네야 할까. 그는 자연스러운 대화를 권한다.

          “병문안 와서 자신도 모르게 살아 있는 우월감을 드러내는 경우가 많다. 환자에게 위로는커녕 마음의 상처를 주지 않으려면 역지사지(易地思之)하는 마음을 가져야 한다. ‘천당 가실 거다’ ‘극락왕생 하실 거다’ 같은 말은 환자의 상처를 덧나게 한다. 하느님·성경·화엄경·금강경 등 종교와 관련된 말도 너무 많이 하는 건 피하는 것이 좋다. 신앙을 지닌 환자들도 종교 얘기를 하는 것은 싫어했다. ‘우리 지난 봄에 놀러갔을 때가 생각난다. 그런 행복한 시절이 다시 왔으면 좋겠다’ ‘약간 괜찮아지면 차나 한 잔 마시자’ ‘커피향 좋지’ ‘장미가 참 예쁘지’와 같이 평소처럼 가벼운 대화를 나누는 것이 더 큰 위로가 된다. 시인 이해인 수녀에게 들은 얘기가 인상 깊다. 같은 병원에 입원했던 김수환 추기경이 ‘잠깐 오라’고 했단다. 자신을 종교적으로 위로할 것으로 예상했는데 김 추기경은 종교 언어 하나 쓰지 않고 ‘이해인 수녀, 대단하다! 정말 대단하다!’ 하며 인간적인 말로 자신을 위로했다고 했다. 김 추기경이 가난하고 마음이 아픈 사람들을 옆에서 지켜보면서 터득한 위로의 말일 것으로 이해인 수녀는 말했다.”

          미국에선 초등학교 때부터 죽음 교육 시작
          질병으로 여명이 제한돼 있는 이들은 어떻게 삶을 마감하는 것이 웰다잉일까. 그는 “죽음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받아들이지 않으면 고통스럽다. 받아들이면 마음이 편안해지고 생명도 연장될 수 있다”고 답했다. 평온한 죽음, 즉 평온사(平穩死)에서 답을 찾자는 것이다.

          “웰다잉은 인간으로서의 존엄을 지키며 삶의 마지막을 맞는 것이다. 생존 가능한 시간을 주치의에게 미리 알려달라고 요청한 뒤 남은 시간에 마무리해야 할 일, 하고 싶은 일을 다 하고 떠나는 것이 웰다잉의 좋은 예다. 영화 ‘버킷리스트’에서처럼 죽기 전에 꼭 해야 할 일을 실행하는 것도 방법이다. 말기 환자 중엔 해외여행을 떠나는 사람도 있다. 멀리는 못 가지만 일본·중국 등 가까운 나라를 여행한다. 이들은 진통제를 처방받아 통증이 심해지는 상황에 대비한다. 배낭을 메고 가족과 함께 국내 여행을 하거나 서예 등 취미 활동을 하는 사람도 있다.”

          하지만 환자에게 여명을 말해주지 않는 의사가 꽤 많은 게 현실이다. 나중에 있을지 모를 환자나 보호자들의 항의를 꺼려서라고 한다.

          “의료진이 예상하는 이상으로 오래 사는 환자들도 꽤 많다. 나는 주치의가 여명을 말해주지 않으면 담당 레지던트에게 물어볼 것을 권한다. 의사가 죽음을 모르고 환자를 치료하는 것은 난센스다. 의사라면 환자의 치료(cure)와 관리(care)를 함께 할 수 있어야 하는데, 국내 의대에선 죽음 교육이 거의 이뤄지지 않아 안타깝다. 지난해 가을부터 울산대 의대가 전국 최초로 죽음학 강의를 시작한 것은 그나마 다행이다.”

          서구에선 어릴 때부터 죽음에 대한 교육을 실시한다. 그는 미국의 예를 들면서 초등학교 때 그런 교육을 시작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미국에선 초등 교사가 테이블 위에 화분을 놓고 삶과 죽음의 개념을 가르친다. 꽃은 열흘이면 시드는데 그게 꽃의 인생이란 것을 가르치기 위해서다. 아이들이 가족처럼 대하는 애완견도 10∼20년이면 떠난다는 사실을 알려준다.”

          인터뷰를 마치고 헤어지면서도 그는 “웰빙의 삶을 살려면 웰다잉을 알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인간 수명 증가로 인해 지금까지의 삶에서 웰빙·Well Being(참살이)이 화두이었다면 앞으로는 웰다잉·Well Dying(인간다운 죽음)이 화두가 될 것이다. 요즈음 주위를 아우러 보면 100세 시대가 도래했음을 실감할 수 있다. 얼마 전 한창 추위가 기승을 부릴 때 따뜻한 나라 한 지방으로 지인들과 골프 여행을 갔다. 그때 70대 후반에 들어선 많은 노부부 그룹들이 피한 골프 운동을 즐기는 모습을 목도하고 100세 시대가 오래전에 우리에게 와 있었는데 나만 모르고 웰빙을 자각하지 못한것 같아 겸연쩍어 한 경험이 있다. 그래서 다시한번 웰빙의 삶을 다시 조직해 봐야겠다고 다짐을 했다.

          우리의 삶이 60대 중반에 서면 은퇴라 하여 현업을 떠나고 앞으로의 삶을 휴식년이라 생각하고 일하고는 떨어져 남은 세월을 즐기는 쪽에만 두고 바쁘게 시간을 보내거나, 그래도 놀 수만은 없으니까 지금까지 하지 못했던 자기가 좋아하는 것을 이룩해 보려고 다시 뭔가를 시작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또 한편에서는 지나면 후회스러운 목적없이 시간만 보내는 사람 등 여러 부류의 사람들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이러한 사람들의 부류에 따라 웰빙의 개념도 다를 수 있어 웰빙의 참 뜻을 환기 해보려 한다. 사람마다 살아온 환경이 다 같을 수는 없지만 대부분의 시간을 먹고 사는데 즉 부를 축적하는데 소비하면서 정신적 건강은 소흘히 할 수 밖에 없었다. 자연히 육체적 정신적 건강의 조화를 통해 행복하고 아름다운 삶을 추구하는 삶의 방식이나 문화가 웰빙이라 늦게나마 조화로운 삶으로 전환하려고도 한다.

          우리나라가 해방 후 가난에서 벗어나 산업고도화로 인한 물질적 풍요가 2000년 이후 부터가 아닌가 싶다. 이때부터 웰빙이라는 말을 쓰기 시작한 것 같다. 많은 사람들이 웰빙을 추구하는 부류로 육체적으로 질병이 없는 건강한 상태로 직장이나 공동체에서 느끼는 소속감이나 성취감의 정도, 여가생활이나 가족 간의 유대, 심리적 안정 등 다양한 요소들을 웰빙의 척도로 삼는다. 몸과 마음, 일과 휴식, 가정과 사회, 자신과 공동체 등 모든 것이 조화를 이뤄 어느 한 쪽으로 치우치지 않는 삶 바로 웰빙의 삶이다. 이런 웰빙의 삶은 고기보다 생선과 유기농산물을 즐기고 단전호홉, 요가 등 심신을 안정시키는 운동을 하며 외식보다는 가정에서 만드는 슬로우 푸드를 즐겨먹고 여행, 등산, 독서 등 취미생활을 즐긴다. 이와같이 물질적 부가 아니라 삶의 질을 강조하는 생활 방식이다. 이제 우리가 사는 것은 건강하게 살고 어렵지 않게 살고 여유롭게 살면 하는게 우리들의 바람이요 희망이다. 더 나아가 이러한 웰빙에는 잘 먹고 잘 사는 문제만이 아니고 행복한 죽음, 즉 웰다잉도 포함되어야 한다.

          웰다잉이란 지금까지 살아 온 날을 아름답게 정리하는, 편안한 삶의 마무리를 일컫는 말이다. 삶의 마지막이자 가장 중요한 길이라 할 수 있는 죽음을 스스로 미리 준비하는 것은 자신의 인생을 뜻깊게 보낼 뿐 아니라 남아있는 가족들에게도 도움이 되는 일이다. 그러나 부정적인 면으로 고령화에 따른 질병의 증가, 가족해체와 1인 가구의 확산으로 급증하고 있는 고독사 등 슬프고 불행한 '맞이하는 죽음'이 아닌 '당하는 죽음'으로 우리를 슬프게 우울하게 하는 경우도 많이 본다. 그러나 이런 부정적인 측면보다 웰다잉에 대한 관심을 높히면서 '맞이하는 죽음'을 위한 '웰다잉 10계명'에도 관심을 가졌으면 좋겠다. 웰다잉 십계명은 첫째 버킷리스트 작성하기, 둘째 건강 체크하기, 셋째 법적 효력 있는 유언장 작성하기, 넷째 고독사 예방하기, 다섯째 장례계획 세우기, 여섯째 자성의 시간 갖기, 일곱째 마음의 빚 청산하기, 여덟째 자원 봉사하기, 아홉째 추억물품 보관하기, 열째 사전의료의향서 작성하기 등이다.

          얼마 전 TV를 보다가 '임종체험 재발견'이라는 프로그램에서 참가자들이 스스로 수의를 입고 입관하는 장면을 보고 깜짝 놀란 적이 있었다. 참가자가 수위를 입고 스스로 입관하여 관두껑이 닫히면서 깜깜한 암흑 속에서 하늘 나라를 체험하는 모습에서 참가자가 말하는 가족의 재발견과 가족의 중요성을 새삼 깨달았다는 체험담이 가슴에 오랫동안 남게 되었다. 나중에 확인해보니 한화손해보험에서 죽음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이고 노년을 보다 건강하고 즐겁게 보내는 동기를 마련하자는 취지에서 2009년 부터 '하늘 소풍 이야기'이라는 웰다잉 준비 프로그램을 실시하고 있다. 그리고 강원 웰다잉 연구소는 2013년 1월부터 '인생 100세 시대, 행복한 삶, 아름다운 마무리'를 주제로 매월 두차례씩 장례계획 세우기, 유언과 상속, 장기기증, 나의 묘비명, 나의 사망기 등을 노인이 직접 작성 체험토록 하는 프로그래을 운영하고 있다.

          한편 얼마 전 대한노인병학회 조사에 따르면 우리나라 노인들은 기대수명과 건강수명에 큰 차이를 보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기대수명은 82.4세로 건강하게 살 수 있는 건강수명(유병기간을 제외한 기대수명)은 65.4세로 무려 17년이나 차이가 나면서 건강수명 연장이 노인문제에서 새로운 화두가 되었다. 이러한 조사에서도 볼 수 있듯이 틈틈이 건강수명을 연장할 수 있는 운동을 하고 인간다운 죽음을 맞이할 수 있도록 웰다잉을 준비하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하겠다. 인간은 누구나 죽음과 마주하게 된다. 피할 수 없는 죽음을 미리 준비하는 웰다잉은 가족은 물론 주변 사람이나 친구들에게도 편안한 이별을 할 수 있도록 해주어 매우 바람직한 것이다.

          2009년 2월 선종한 고 김수환 추기경은 생명 연명 치료를 거부하고 자연스런 죽음의 과정을 받아들임으로서 아름답고 존엄한 죽음을 몸소 실천해 보였다. 평소 존엄사를 긍정적으로 인정해 온 고 김수환 추기경은 병세가 악화되기 시작한 2008년 말부터 인공호홉기와 같은 기계적 치료에 의한 무의미한 생명 연장을 거부해 왔다. 나의 부친이 17년 전 중국에 있는 자식을 보러 오셨다. 이곳 저곳 구경도 다니시면서 잘 잡수시고 잠도 잘 주무시고 하며 보름동안 보내시고 귀국하셔서 일주일을 잘 지내시다 몸이 불편하시다 하시면서 병원에 입원하시고 사흘만에 돌아가셨다. 평소에 지병 있으신것도 아니고 항상 건강하시어 말년에는 서예로 소일하시며 잘 지내셨는데 중국에 갔다오고 싶다고 하셔서 모친이 모시고 오셨는데 가시기전에 정리하시는 차원에서 아들도 보고 가시겠다고 하신 것 같다. 너무나 깨끗하게 죽음을 받아 들이신것이다. 나도 깨끗한 죽음을 받아들일 수 있도록 웰다잉의 준비를 우선 건강부터 지키는 것을 최우선으로 해야겠다. 100세 시대를 맞이해서는 일생을 건강하게 사는 웰빙도 중요하지만 우리 모두 편안한 죽음을 맞이할 수 있도록 미리미리 웰다잉 준비도 게을리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마태복음 21 Korean Living Bible

          예루살렘으로 가심

          21 그들이 예루살렘 가까이 와서 감람산 기슭 벳바게에 이르렀을 때 예수님이 두 제자를 보내시며 이렇게 말씀하셨다.

          “너희는 맞은편 마을로 가거라. 거기에 가면 나귀 한 마리가 나귀 새끼와 함께 매여 있을 것이다. 그 나귀들을 풀어서 끌고 오너라.

          누가 무슨 말을 하면 주님께서 쓰신다고 하여라. 그러면 곧 보내 줄 것이다.”

          이것은 다음과 같은 예언자의 예언을 이루기 위해서였다.

          [a]“시온 사람들에게 말하라. ‘보라! 너희 왕이 오신다! 그가 겸손하여 나귀를 탔으니 어린 나귀, 곧 나귀 새끼이다.’ ”

          제자들이 가서 예수님이 명령하신 대로

          나귀와 그 새끼를 끌어와서 자기들의 겉옷을 나귀 등에 펴자 예수님이 올라타셨다.

          많은 군중이 겉옷을 벗어 길에 펴기도 하고 나뭇가지를 꺾어 길에 깔기도 했다.

          그리고 예수님을 앞뒤로 에워싸고 가는 군중들은 “다윗의 후손에게 [b]호산나!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분에게 찬양을!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 하고 환호성을 올렸다.

          10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들어가시자 온 시내가 떠들썩하며 “이분이 누구요?” 하고 물었다.

          11 그러자 군중들은 “갈릴리 나사렛에서 오신 예언자 예수님이십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12 예수님은 성전에 들어가 거기서 매매하는 사람들을 다 쫓아내시고 돈 바꿔 주는 사람들의 상과 비둘기 파는 사람들의 의자를 둘러엎으셨다.

          13 그리고 그들에게 “[c]‘내 성전은 기도하는 집이다’ 라고 성경에 쓰여 있는데 너희는 이 집을 강도의 소굴로 만들었다” 하고 말씀하셨다.

          14 성전 안에 있던 소경들과 절뚝발이들이 예수님께 나아오자 예수님은 그들을 고쳐 주셨다.

          15 그러나 대제사장들과 율법학자들은 예수님이 하시는 신기한 일과 성전에서 “다윗의 후손에게 호산나!” 하고 외치는 아이들을 보고 화가 나서

          16 “이 아이들이 하는 말을 듣고 있소?” 하고 예수님께 물었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들에게 “그렇다. 너희는 [d]‘어린 아이와 젖먹이의 입에서 나오는 찬송을 완전하게 하셨다’ 라고 한 성경 말씀을 읽지 못하였느냐?” 하시고

          17 그들을 떠나 성 밖 베다니에 가셔서 밤을 보내셨다.

          18 다음날 이른 아침, 성으로 들어가실 때 예수님은 시장하셨다.

          19 마침 길가에 한 그루의 무화과나무가 있는 것을 보시고 가까이 가셨으나 잎사귀만 무성하고 열매가 없었다. 예수님이 그 나무를 향해 “네가 다시는 열매를 맺지 못할 것이다” 하시자 나무가 곧 말라 버렸다.

          20 제자들이 이것을 보고 놀라 “어떻게 무화과나무가 갑자기 말라 버렸습니까?” 하고 물었다.

          21 그래서 예수님은 이렇게 대답하셨다. “내가 분명히 말하지만 너희가 의심하지 않고 믿기만 하면 내가 그 무화과나무에게 한 일을 너희도 할 수 있다. 그뿐 아니라 이 산을 향하여 ‘땅에서 들려 바다에 빠져라’ 하여도 그대로 될 것이다.

          22 너희가 기도할 때 무엇이든지 믿고 구하는 것은 다 받을 것이다.”

          유대인의 올무

          23 예수님이 성전에서 가르치고 계실 때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이 와서 “당신은 무슨 권한으로 이런 일을 하고 있소? 누가 당신에게 이런 권한을 주었소?” 하고 따져 물었다.

          24 그때 예수님이 대답하셨다. “나도 한 가지 묻겠는데 너희가 대답하면 내가 무슨 권한으로 이런 일을 하는지 말하겠다.

          25 요한의 [e]세례가 어디서 왔느냐? [f]하나님에게서 왔느냐, 아니면 사람에게서 왔느냐?” 그러자 그들은 “만일 하나님에게서 왔다고 하면 ‘왜 그를 믿지 않았느냐?’ 할 것이고

          26 그렇다고 사람에게서 왔다고 하자니 모든 사람들이 요한을 예언자로 여기고 있으므로 백성들이 두렵다” 하고 서로 의논하다가

          27 “우리는 모르겠소” 하고 대답하였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들에게 “나도 무슨 권한으로 이런 일을 하는지 말하지 않겠다” 하고 다시 이렇게 말씀하셨다.

          28 “너희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어떤 사람에게 두 아들이 있었다. 그가 먼저 맏아들에게 ‘얘, 오늘 포도원에 가서 일하여라’ 하였으나

          29 그는 [g]‘예, 가겠습니다’ 하고는 가지 않았다.

          30 그가 둘째 아들에게도 가서 같은 말을 했는데 그는 [h]‘싫습니다’ 하고 거절하였으나 뒤에 뉘우치고 갔다.

          31 이 둘 중에 누가 아버지에게 순종하였느냐?” 그들이 “둘째입니다” 하고 대답하자 예수님이 말씀하셨다. “내가 분명히 말해 두지만 세무원과 창녀들이 너희보다 먼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간다.

          32 요한이 와서 [i]올바른 길을 가르쳤으나 너희는 믿지 않았고 세무원과 창녀들은 믿었다. 그리고 너희는 보고도 끝내 뉘우치지 않고 그를 믿지 않았다.

          33 “또 다른 비유를 들겠다. 어떤 사람이 포도원을 만들었다. 그는 포도원 둘레에 울타리를 치고 그 안에 포도즙틀을 놓고 망대를 세운 후 농부들에게 세로 주고 멀리 여행을 떠났다.

          34 포도철이 되어 주인은 자기 몫의 포도를 받아오라고 종들을 소작인들에게 보냈다.

          35 그러자 소작인들은 종들을 잡아 하나는 때리고 하나는 죽이고 다른 하나는 돌로 쳤다.

          36 주인은 처음보다 더 많은 종들을 다시 보냈으나 소작인들은 그들에게도 똑같이 하였다.

          37 마지막으로 주인은 자기 아들을 보내며 ‘그들이 내 아들은 존경하겠지’ 하였으나

          38 소작인들은 아들을 보자 ‘이 사람은 상속자이다. 자, 죽여 버리고 그가 받을 유산을 우리가 차지하자’ 하고 서로 말하며

          39 아들을 포도원 밖으로 끌어내 죽였다.

          40 그러니 포도원 주인이 돌아오면 그 소작인들을 어떻게 하겠느냐?”

          41 그러자 그들이 대답하였다. “그 악한 사람들을 무참히 죽이고 포도원은 제때 열매를 주인에게 바칠 다른 농부들에게 맡길 것입니다.”

          42 그래서 예수님은 그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너희는 [j]‘건축자들이 버린 돌이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으니 이것은 주께서 행하신 것이요 우리 눈에 신기한 일이다’ 라고 한 성경 말씀을 읽지 못했느냐?

          43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해 둔다. 너희는 하나님 나라를 빼앗기고 [k]그 나라에 합당한 생활을 하는 백성이 그 나라를 얻을 것이다.

          44 이 돌 위에 떨어지는 사람은 깨어질 것이며 이 돌이 사람 위에 떨어지면 그를 가루로 만들어 버릴 것이다.”

          45 대제사장들과 바리새파 사람들은 이 비유가 자기들을 두고 한 말인 줄 알고

          46 예수님을 잡아가려고 하였으나 군중이 예수님을 예언자로 여기기 때문에 두려워서 잡지 못하였다.

          Footnotes

          1. 21:5 슥9:9
          2. 21:9 ‘구원하소서’ 라는 의미로 여기서는 찬양의 외침이다.
          3. 21:13 사56:7
          4. 21:16 시8:2
          5. 21:25 또는 ‘침례’
          6. 21:25 원문에는 ‘하늘에서’
          7. 21:29 어떤 사본에는 ‘가고 싶지 않습니다 … … 그러나 그는 뒤에 뉘우치고 갔다’ 로 되어 있음.
          8. 21:30 어떤 사본에는 ‘예, 가겠습니다 … … 그러나 그는 가지 않았다’ 로 되어 있음.
          9. 21:32 또는 ‘의의 도’
          10. 21:42 시118:22, 23
          11. 21:43 또는 ‘그 나라의 열매 맺는 백성’


          대속물(代贖物마가복음 10:45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마태복음 20장

                                                                                                대속물(代贖物)(28절)

          인자가 온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just as the Son of Man did not come to be served, but to serve, and to give his life as a ransom for many.

          대속물 代贖物 : 지은 죄에 대한 벌을 받거나 속죄를 하기 위해 바쳐진 물건이나 사람.
          대신할 대, 바칠 속, 만물 물

          대속물(代贖物) 3083. 루트론(lütrŏn) λύτρον, ου, τό

          1.속전,  2. 석방금
          발음 / 루트론(lütrŏn)
          어원 / 3089에서 유래
          관련 성경 / 대속물(마 20:28, 막 10:45)
          신약 성경 / 2회 사용

          마가복음 10:45
          인자의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욥기 33:24
          하나님이 그 사람을 긍휼히 여기사 이르시기를 그를 건져서 구덩이에 내려가지 않게 하라 내가 대속물을 얻었다 하시리라.

          초림(初臨)의 예수님은 섬김과 대속물이 되시려고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대속물이 되시려고 최후의 만찬 자리에서 제자들의 발을 씻겨주셨습니다.
          섬김의 본은 보여주신 것입니다.
          이와 같은 모습을 묵상하며 목회 현장에서 목사를 하나님의 종이라고 하면 교인들은 하나님의 자녀들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상한 현상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어떻게 자녀들에게 종을 섬겨야 한다고 강요할까요?
          차라리 목사는 하나님의 아들 교인은 하나님의 종이라고 불러야 한다면 모르지만...............
          잘못된 현상부터 바로 잡아야 합니다.

          재림(再臨)의 예수님은 영광을 받으시려고 오실 것입니다.
          영광을 받으시기 위하여 반드시 심판하실 것입니다.
          무엇을 심판하실까요?
          질서를 파괴한 것부터 심판하실 것입니다.
          자녀들에게 종을 섬기라고 강요한 괘씸죄를 다스리지 않을까 두렵습니다.

          재림의 예수님은 아무에게나 영광을 받는 것이 아니라 영광을 드릴 수 있는 자격이 있는 사람들로부터 영광을 받게 될 것입니다.
          영광을 드릴 자격이 있는 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의  은혜를 힘입은 거룩한 사람들이라고 하겠습니다.

          대속의 은혜를 받은 사람들은 예수님처럼 섬김을 즐거워 할 것입니다.
          예수님처럼 자기 희생과 헌신을 좋아할 것입니다.
          섬김과 대속의 은혜가 회복될 때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영원한 생명을 얻습니다.
          그 생명을 약속받았기 때문에 삭막한 세상에서 생명을 보여주고 가르치고 전해야 하는 것이 예수를 믿는 믿음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신 것은 섬김과 자기 목숨을 대속물로 주려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섬김과 대속의 길을 선택하겠다는 결단이라고 하겠습니다.
          화려한 옷을 입고 섬김의 길을 갈 수 있을까요?
          거대한 행렬을 거느리고 대속의 길을 갈 수 있을까요?

          입술로는 예수님을 닮아야 한다고 외치면서도 몸은 더 화려하게 더 크고 웅장하게 치장하므로 좁은 문 보다는 넓은 문으로 좁은 길 보다는 넓은 길로 갈 수밖에 없는 과부화 상태가 언제까지 유지될지 아무도 모릅니다.
          왜냐하면 갑자기 팽창하여 스스로 터져버릴 그 날이 다가오고 있다는 굉음을 듣지 못하기에 '귀 있는 자는 들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은 한 분이시요 또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중보도 한 분이시니 곧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라 그가 모든 사람을 위하여 자기를 대속물로 주셨으니 기약이 이르러 주신 증거니라 이를 위하여 내가 전파하는 자와 사도로 세움을 입은 것은 참말이요 거짓말이 아니니 믿음과 진리 안에서 내가 이방인의 스승이 되었노라. (디모데전서 2:5‭-‬7)

          예수 그리스도는 철저히 사람의 몸으로 오셨습니다.
          사람이기에 더 힘들었을 십자가의 무서운 처형과 고통과 아픔과 수치를 마다하지 않으시고 감당하심에 더욱 감사할 뿐입니다.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중보가 되시려고 자신의 몸을 대속물로 내어주신 우리의 주가 되시는 예수님!
          그 복음을 위하여 이방인의 전도자가 되어 고난의 길을 선택했던 사도 바울이라도 본 받아야 합니다. 

          대속(代贖)이란 무엇인가?

          대속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죄인들을 위해 대속물로 죽으신 것을 말합니다.
          성경은 모든 사람들이 죄인이라고 가르칩니다(롬 3:9-18, 23).
          죄의 대가는 죽음입니다.
          로마서 6장 23절은 “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이니라”고 말합니다.

          그리스도가 없다면, 우리는 죽을 것이고 우리의 죄에 대한 대가로 지옥에서 영원을 보낼 것입니다.
          성경에서 사망은 ‘분리’를 뜻합니다.
          모든 사람은 죽을 것이지만, 어떤 사람은 주님과 함께 영원히 천국에서 살 것이고, 다른 사람들은 영원히 지옥에서 살게 될 것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사망은 지옥에서의 삶을 가리킵니다.
          그러나 이 구절이 가르치는 두 번째 내용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영생이 가능하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이 그분의 대속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처형되셨을 때 우리를 대신하여 죽으셨습니다.
          우리는 죄악된 삶을 사는 자들이기 때문에 마땅히 십자가위에 놓여졌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대신하여 형벌을 받으셨습니다.
          그분께서는 친히 우리를 대신하여 우리가 마땅히 받아야 할 형벌을 받으셨습니다.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이를 우리를 대신하여 죄로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그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고후 5:21).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이는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는 나음을 얻었나니” (벧전 2:24).

          우리는 여기서 다시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죄값을 치르시기 위해 우리가 지은 죄를 담당하신 것을 보게 됩니다.
          몇 구절 뒤에서 우리는 “그리스도께서도 단번에 죄를 위하여 죽으사 의인으로서 불의한 자를 대신하셨으니 이는 우리를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려 하심이라 육체로는 죽임을 당하시고 영으로는 살리심을 받으셨으니”(벧전 3:18)라는 내용을 접합니다.

          이 구절은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대속물이 된 사실 뿐만 아니라 사람의 죄악에 합당한 형벌을 치르기 위해 속죄물이 되신 사실도 가르칩니다.

          대속에 관해 말하는 또 다른 구절은 이사야 53장 5절입니다.
          이 구절은 우리의 죄를 위해 십자가에서 죽기 위해 오시는 그리스도를 말합니다.
          이 예언은 매우 상세하며, 십자가의 처형은 예언된 그대로 이루어졌습니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

          대속을 주목하십시오.
          여기서도 또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대가를 치르신 것을 보게 됩니다.

          우리는 영원토록 지옥에서 형벌을 받으며 그곳에 있어야만 우리 자신의 죄값을 치를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값을 치르기 위해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분께서 우리를 위해 이 일을 하셨기 때문에, 우리는 지금 죄 사함을 받을 수 있는 기회 뿐만 아니라 주님과 영원히 함께 할 기회도 가지게 되었습니다.
          이를 위해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행하셨던 일을 믿어야 합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들을 구원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우리를 대신할 대속물이 필요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은 대속적인 속죄입니다.

          1. 왜 인간에게 대속이 필요합니까?

          인간이 하나님께로부터 멀리 떨어지게 된 것은 인간의 죄, 하나님의 뜻에 집요하게 불순종한 때문입니다. 성경은 인간이 하나님과의 관계를 바로잡을 필요성이 있으며 인간 자신은 이 일에 속수무책이라고 말합니다. 자연 상태의 인간은 하나님께로부터 멀어진 상태에 있습니다.

          인간들은 ‘악한 행실로 멀리 떠나 마음으로 원수가 되고’(골 1:21), ‘세상에서 하나님도 없는 자이며’(엡 2:12), ‘하나님의 생명에서 떠나’(엡 4:18) 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원수’(롬 5:10)이며, ‘하나님의 법에 굴복하지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롬 8:7)고 합니다. 죄의 결과로 두려운 형벌이 정해져 있습니다. 이 형벌의 법칙은 하나님의 진노하심이 뜻하는 것의 일부이며 하나님의 진노는 회개하지 않는 죄인 위에 머물며(롬 1:18), “죄의 삯은 사망이라”(롬 6:23)는 엄숙한 경고로 표현되고 있습니다. 참으로 죄인은 이미 “허물과 죄로 죽은 자”(엡 2:1)입니다. 그리고 긴박한 어려움에 처해 있다고 말합니다.


          2. 대속의 수단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뿐입니다.

          성경에서는 죄에 대한 하나님의 끊임없으신 반대와 죄에 수반될 두려운 결과, 즉 하나님이 정하신 가공할 결과를 솔직하게 그리고 완강하게 선언합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죄인을 싸늘한 시선으로 멸시하며 그로부터 초연히 서 있거나 풀 길 없는 감정을 품으시고 죄인으로부터 돌아서지 않습니다. 그 분은 몇 번이고 인간에게 오셔서 인간을 파멸시키고 있는, 그리고 인간을 하나님께로부터 멀어지게 하고 있는 이 악에서 건지려고 노력하셨습니다. 특별히 그 분은 자기 아들 예수를 통하여 사랑과 자비의 마지막 손짓을 하시며 오셨습니다.

          “인자가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눅 19:10)고 말씀하심으로 그분이 오신 목적은 잃은 자를 찾아 구원하시기 위해서였습니다. 이 목적을 성취하는 가운데 그 분은 ‘죄인의 친구’로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그 분은 땅 위에 오사 겸손히 사람들 사이에서 비천하게 사시며 선행과 악에게 억눌림 당하는 모든 자의 치료에 열중하셨습니다. 그 분은 인간을 위하여 죄 많은 사람들의 손에 죽으셨습니다.

          대속(代贖)이란 말은 ‘Redemption’ 혹은 ‘Atonement’라는 단어를 사용하는데, 그 뜻은 ‘대신하여 갚아 준다’, ‘값을 주고 되찾아 준다’는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대속이란, 죄 때문에 마귀의 종이 되고, 영원한 지옥 형벌을 받을 수밖에 없는 우리 인생들을 위하여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 대신 피 흘려 죄 값을 치러 주시고, 마귀와 죄와 사망 권세에서 우리를 해방시켜주시고 구원해 주신 것을 말합니다. 죄로 말미암아 사단에게 매여 죄의 종이 된 인간을 위해 죄 없는 그리스도께서 죄인의 모습으로 십자가에서 처형되어 그 죄의 값을 대신 치르신 것을 의미합니다.

          인간은 그리스도의 십자가 대속을 통해서만 하나님과 화목할 수 있는데 이것은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합당한 화목제물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께서도 단번에 죄를 위하여 죽으사 의인으로서 불의한 자를 대신하셨으니 이는 우리를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려 하심이라”(벧전 3:18) 그로 말미암아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구속을 통하여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맺게 되었습니다.


          3.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의 효력은 무엇입니까?

          예수님께서 우리의 죄를 위해 대신 죽으셨으므로 그 속전을 통해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속죄의 은총을 누릴 수 있습니다. 따라서 더 이상 죄에 매여 사는 어두움의 자녀가 아니라, 빛의 자녀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 거하는 기쁨을 누리게 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십자가상에서 “다 이루었다”(요 19:30)라고 선언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의 효력은 먼저 죄에 대하여 죽게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죄에 대하여 죽게 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죄가 없으신 분임에도 하나님의 공의를 만족시키기 위해 친히 희생제물이 되셨습니다. 즉 죄인을 대신하여 제물로 하나님께 드려졌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친히 피 흘려 우리 각 사람을 구속하여 값을 치르고 사신 바 되었으니 이제 우리는 더 이상 우리 자신의 것이 아닙니다. 흑암의 권세에 매여 종노릇 하던 우리가 주님의 피 값으로 사신 바 되었으며, 또한 그로 말미암아 영생을 얻었으니 주님 안에서 그분이 기뻐하시는 대로 자원하여 순복하는 삶을 살아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의에 대하여 살게 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상에서 희생제물이 되신 두 번째 목적은 우리로 하여금 의에 대하여 살게 하기 위함입니다. 율법의 행위를 통해서는 구원받을 육체가 없습니다(갈2:16). 그러나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그 믿음을 통해 하나님은 우리를 의롭게 여겨 주십니다. 즉 인간은 불의하지만, 인간의 의로서가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의롭게 됩니다.

          우리의 옛사람은 십자가에서 주와 함께 죽었고 이제는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에 거하시므로 의인의 옷을 입은 새사람으로 살게 됩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께 대하여 산 자로서 우리의 지체를 의의 병기로 하나님께 드리는 삶을 살아야 하겠습니다. 성도에게 있어 더 이상 죄가 주관하지 못하는 것은 이제는 그리스도의 대속의 죽음을 통해 구속함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그로 인해 죄에서 해방되어 의의 종이 되었습니다. 우리 성도들은 그리스도의 대속 사역을 성령의 인도하심으로 받아들이고 의의 종으로 거룩함에 이르기를 힘쓰는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이사야 53:10
          여호와께서 그로 상함을 받게 하시기를 원하사 질고를 당케 하셨은즉 그 령혼을 속건 제물로 드리기에 이르면 그가 그 씨를 보게 되며 그 날은 길 것이요 또 그의 손으로 여호와의 뜻을 성취하리로다

          다니엘 9:26
          육십 이 이레 후에 기름부음을 받은 자가 끊어져 없어질 것이며 장차 한 왕의 백성이 와서 그 성읍과 성소를 훼파하려니와 그의 종말은 홍수에 엄몰됨 같을 것이며 또 끝까지 전쟁이 있으리니 황폐할 것이 작정되었느니라

          요한복음 10:15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 같으니 나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노라

          요한복음11:51
          이 말은 스스로 함이 아니요 그 해에 대제사장이므로 예수께서 그 민족을 위하시고

          로마서 4:25
          예수는 우리 범죄함을 위하여 내어줌이 되고 또한 우리를 의롭다 하심을 위하여 살아나셨느니라

          갈라디아서 1:4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곧 우리 아버지의 뜻을 따라 이 악한 세대에서 우리를 건지시려고 우리 죄를 위하여 자기 몸을 드리셨으니

          갈라디아서 2:20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디모데전서 2:6
          그가 모든 사람을 위하여 자기를 속전으로 주셨으니 기약이 이르면 증거할 것이라

          디도서 2:14
          그가 우리를 대신하여 자신을 주심은 모든 부법에서 우리를 구속하시고 우리를 깨끗하게 하사 선한 일에 열심하는 친 백성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베드로전서 1:18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조상의 유전한 망령된 행실에서 구속된 것은 은이나 김같이 없어질 것으로 한 것이 아니요.

           

          대속물(代贖物마가복음 10:45

          마가복음 14:24
          가라사대 이것은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

          이사야 53:11
          가라사대 그가 자기 령혼의 수고한 것을 보고 만족히 여길 것이라 나의 의로운 종이 자기 지식으로 많은 사람을 의롭게 하며 또 그들의 죄악을 친히 담당하리라.

          히브리서 2:10
          만물이 인하고 만물이 말미암은 자에게는 많은 아들을 이끌어 영광에 들어가게 하시는 일에 저희 구원의 주를 고난으로 말미암아 온전케 하심이 합당하도다.

          히브리서 9:28
          이와 같이 그리스도도 많은 사람의 죄를 담당하시려고 단번에 드리신 바 되셨고 구원에 이르게 하기 위하여 죄와 상관 없이 자기를 바라는 자들에게 두 번째 나타나시리라.

          로마서 5:15
          그러나 이 은사는 그 범죄와 같지 아니하니 곧 한 사람의 범죄를 인하여 많은 사람이 죽었은즉 더욱 하나님의 은혜와 또는 한 사람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말미암은 선물이 많은 사람에게 넘쳤으리라.

          요한계시록 5:9
          새 노래를 노래하여 가로되 책을 가지시고 그 인봉을 떼기에 합당하시도다 일찍 죽임을 당하사 각 족속과 방언과 백성과 나라 가운데서 사람들을 피로 사서 하나님께 드리시고.


          마태복음 20 Korean Living Bible

           “하늘 나라는 이렇게 비유할 수 있다. 어떤 포도원주인이 있었는데 아침 일찍 일꾼을 구하려고 나갔다.

          그는 일꾼들에게 하루 한 데나리온씩 주기로 약속하고 그들을 포도원에 들여보냈다.

          [a]시쯤 되어 다시 나가 보니 일거리가 없어 장터에서 놀고 섰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래서 주인이 ‘너희도 내 포도원에 가서 일하라. 일한 것만큼 삯을 주겠다’ 하자 그들이 포도원에 갔다.

          주인은 [b]12시와 오후 [c]3시에도 나가서 그렇게 하였다.

          오후 [d]5시에도 나가 보니 여전히 일거리가 없어 섰는 사람들이 있었다. ‘너희는 어째서 하루 종일 여기서 놀고 섰느냐?’ 하고 주인이 묻자

          ‘우리를 쓰는 사람이 없습니다’ 하고 그들이 대답하였다. 그래서 주인은 ‘너희도 내 포도원에 가서 일하라’ 하였다.

          “날이 저물자 주인은 포도원 감독에게 ‘일꾼을 불러 나중 온 사람부터 차례로 품삯을 주어라’ 하고 말하였다.

          오후 5시에 온 사람들이 와서 한 데나리온씩 받기에

          10 먼저 온 사람들은 좀더 많이 받을 줄로 생각했으나 그들도 한 데나리온밖에 받지 못했다.

          11 그래서 그들은 품삯을 받고 주인에게 불만을 털어놓기 시작했다.

          12 ‘나중에 온 사람들은 한 시간밖에 일하지 않았는데 종일 더위에 시달리며 수고한 우리와 똑같이 대우해 줍니까?’

          13 “그러나 주인은 그들 중 한 사람에게 이렇게 대답하였다. ‘내가 네게 잘못한 것이 없다. 네가 나와 한 데나리온으로 약속하지 않았느냐?

          14 네 것이나 가지고 가거라. 나중에 온 이 사람에게 너와 똑같이 주는 것은 내 마음이다.

          15 내 것을 가지고 내 마음대로 못한단 말이냐? 내 너그러움이 네 비위에 거슬리느냐?’

          16 “이와 같이 앞선 사람이 뒤떨어지고 뒤진 사람이 앞설 것이다.”

          높은 자리에 앉고자 하는 사람

          17 예수님이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실 때 열두 제자를 따로 데리고 가시면서 도중에 이렇게 말씀하셨다.

          18 “지금 우리는 예루살렘으로 올라가고 있다. 거기서 [e]나는 대제사장들과 율법학자들의 손에 넘어갈 것이다. 그들은 나에게 사형 선고를 내린 다음

          19 나를 이방인들에게 넘겨 조롱하고 채찍질하고 십자가에 못박게 할 것이다. 그러나 나는 3일 만에 다시 살아날 것이다.”

          20 그때 세베대의 아내가 두 아들을 데리고 예수님께 와서 절하였다.

          21 예수님께서 물으셨다. “네가 원하는 것이 무엇이냐?” “저의 이 두 아들을 주님의 나라에서 하나는 주님의 오른편에, 하나는 주님의 왼편에 앉게 해 주십시오.”

          22 “너희는 구하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있다. 내가 곧 마시게 될 [f]고난의 쓴 잔을 너희도 마실 수 있겠느냐?” “마실 수 있습니다.”

          23 “너희가 정말 내 잔을 마실 것이다. 그러나 내 오른편과 왼편에 앉는 것은 내가 정하는 것이 아니라 내 아버지께서 미리 정해 놓으신 사람들의 것이다.”

          24 듣고 있던 열 제자가 두 형제를 보고 화를 내자

          25 예수님이 그들을 가까이 불러 이렇게 말씀하셨다. “너희가 아는 대로 세상의 통치자들은 백성을 권력으로 지배하고 고관들은 세도를 부린다.

          26 그러나 너희는 그럴 수 없다.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게 되고 싶은 사람은 남을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하고

          27 으뜸이 되고 싶은 사람은 남의 종이 되어야 한다.

          28 [g]나는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으며 많은 사람의 [h]죄값을 치르기 위해 내 생명마저 주려고 왔다.”

          29 그들이 여리고를 떠나갈 때 많은 군중이 예수님을 따랐다.

          30 그런데 두 소경이 길가에 앉아 있다가 예수님이 지나가신다는 말을 듣고 큰 소리로 “다윗의 후손이신 주님, 우리를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 하고 외쳤다.

          31 군중들이 그들을 꾸짖으며 조용히 하라고 했으나 그들은 더 큰 소리로 “다윗의 후손이신 주님, 우리를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 하고 외쳤다.

          32 예수님이 걸음을 멈추시고 그들을 불러 “왜 그러느냐?” 하고 물으시자

          33 그들은 “주님, 우리 눈을 뜨게 해 주십시오” 하고 대답하였다.

          34 예수님이 그들을 불쌍히 여겨 눈을 만지시자 그들은 곧 눈을 뜨고 예수님을 따라갔다.

          Footnotes

          1. 20:3 헬 ‘제3시’
          2. 20:5 헬 ‘제6시’
          3. 20:5 헬 ‘제9시’
          4. 20:6 헬 ‘제11시’
          5. 20:18 원문에는 ‘인자’ (사람의 아들)
          6. 20:22 원문에는 그냥 ‘잔’
          7. 20:28 원문에는 ‘인자’ (사람의 아들)
          8. 20:28 또는 ‘몸값’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마태복음 19장
                                                                                               바늘 귀(24절)


          예수님 당시 부자에 대한 생각을 이해하여야 낙타가 바늘 구멍으로 들어가는 것보다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 더 어렵다는 가르침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부자는 하나님의 축복을 받은 사람입니다.
          따라서 부자는 믿음이 좋은 사람입니다.

          이렇게 생각하는 풍토에서 예수님은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 마치 낙타가 바늘 구멍으로 들어가는 것이 더 쉬운 일이라고 말씀하신 것은 당시 부자에 대한 생각을 완전히 뒤지버 엎는 매우 충격적인 말씀이었습니다.

          그러면 왜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을까요?

          예수님이 말씀하신 부자는 재물이 많은 사람이 아니라 부자 청년을 말합니다.  
          부자 청년은 모든 계명을 철저히 지켰다고 자신있게 예수님께 ‘영원한 생명’을 구했습니다. 
          부자 청년은 자기처럼 철저히 계명을 지킨 사람은 마땅히 ‘영원한 생명’을 받을 자격이 있다고 판단했던 것 같습니다. 
          그는 자기의 착한 행실의 대가로 ‘영생’을 얻으리라고 자신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네게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눠 주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은 그 누구라도 순종하기 어려운 명령입니다.
          당연히 부자 청년은 근심하며 돌아갔습니다. 
          그 때 제자들에게 하신 주님의 말씀이 ‘부자가 하늘 나라에 들어가기는 매우 어렵다’는 이야기였습니다. 

          앞뒤 문맥을 고려하지 않을 때, 주님의 말씀은 마치 ‘모든 세상의 부자들은 아무도 하늘 나라에 들어가기 어렵다’는 말처럼 들립니다. 
          그러나, 예수님과 부자청년과의 대화를 처음부터 끝까지 전체 문맥을 고려하면, 예수님의 의도는 ‘부자가 하늘나라에 들어가기가 어렵다’는 내용이 전혀 아니었음을 알게 됩니다. 
          예수님은 단지, 영생은 ‘사람의 노력이나 공로의 대가로 얻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주어지는 것이’라는 사실을 부자청년에게 보여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무릇 사람이 할 수 없는 것을 하나님은 하실 수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구원과 영생은,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주어지는 선물이라는 말씀입니다. 
          사람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오해했지, 원래부터 영생과 부자는 아무 상관도 없는 개념이었던 것입니다. 
          주님 앞에는 빈부귀천이 없습니다. 
          모두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고 영생을 얻습니다.

          만약 부자가 정말 영생을 얻지 못한다면, 성경에 나오는 많은 부자 그리스도인들에 대한 설명이 불가능합니다. 
          주님이 칭찬한 삭개오는 부자였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장례 비용을 마련한 아리마대 요셉도 성경은 부자라고 말씀합니다. 
          또한 120문도가 한자리에 모였던 오순절 다락방도 역시 예수님의 제자 중 부자가 아니었다면 마련되지 못했을 것입니다. 
          돈을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는 것’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는 것이지, 돈 자체는 선도 아니고 악도 아닙니다. 
          그래서 예수 이름으로 가난한 자가 ‘물질 축복’을 구하는 것은 기복 신앙도 아니고, 이단도 아닙니다. 
          물질 축복은 오히려 하나님께서 주실 수 있는 선물 중의 하나요, 물질을 이웃과 나누지 않고, 주님의 영광을 위해서 사용하지 않는 것이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모두 물질 축복을 받아, 천국에 가는 부자도 되고 심령이 가난하여 천국을 소유한 부자가 되시기 바랍니다.

          어떤 몽골 교회에서 예배후에 기도제목을 나누던 중, 한 몽골 청년이 ‘부자되게 해 달라’고 기도제목을 부탁하자, 오랜 신앙생활을 했던 몽골분이 그 청년을 나무라더라는 것입니다. 
          신자가 ‘영적인 것’을 추구해야지 ‘육적인 돈’을 추구하는 것은 잘못이라는 말이었습니다. 
          신자가 ‘예수 이름으로 돈 많이 벌어 부자 되기를 바라는 것’은 ‘기복 신앙’이요, 죄라는 것입니다. 

          대부분의 신자들이 이렇게 생각하게 된 배경은 누가복음 18장에, 예수님께서 한 부자청년과 나눈 대화때문입니다. 
          예수님은 그 부자 청년에게, ‘약대가 바늘귀로 나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막 10:25).



          바늘 귀에 대한 이해를 마치 바늘 구멍으로 생각했습니다.
          물론 바늘 구멍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예수님 당시 문화적 배경을 생각할 때 "바늘 귀 문"이라고 이해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하겠습니다.
          왜냐하면 예루살렘 성으로 들어가는 문은 두 종류가 있었습니다.
          낮 시간에는 큰 문 즉 많은 사라들과 가축들이 자유롭고 편하게 드나들 수 있는 문을 이용합니다.
          그러나 해가 떨어진 후에는 아주 작은 문을 이용하기 때문에 짐을 실은 낙타가 그 문으로 들어가려면 등에 실었던 짐을 모두 내려야 하고 심지어 낙타가 발을 굽혀야만 지나갈 수 있느 작은 문이었다고 합니다.

          약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

          부자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는 부정적인 견해를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부자가 영생을 얻기 어렵다고 하는 내용을 강조하기 위하여 사용된 비유라고 하겠습니다.

          영국의 주경 신학자 바클레이(W. Barclay)는 바늘귀란 '작은 문'을 가리키는 것이라고 합니다.
          흔히 성곽을 두르고 있는 도시에는 문이 두개가 있었는데, 그중의 큰 문은 낮에 사람이나 짐수레 등이 다니는 것이며 작은 문은 밤에 사용되는 것으로서 사람이 서서는 들어갈 수 없을 정도로 작은 것으로 흔히 '바늘귀 문'(門)이라고 불렀다고 합니다.

          따라서 이 비유는 당시의 이스라엘 사람들이 가장 큰 짐승 낙타(camel)가 이 작은 문으로 통과하려는 것처럼 어려운 일을 가리킨다고 해석되었습니다.

          종교개혁자 칼빈(Calvin)은 낙타를 가리키는 헬라어가 "카멜로스(κάμηλος)"이며 배에서 사용되는 밧줄(rope)은 "카밀로스καμιλος)"라는 것으로 낙타가  아니라 밧줄이 바늘 귀에 통과하기 어렵다고 해석합니다.

          그러나 바늘귀가 '바늘귀 문'이며 약대가 '밧줄'이라고 하더라도 역시 약대는 바늘 문으로 통과할 수 없으며, 밧줄은 바늘귀에 매어쓸수 없는 것은 확실합니다.

          따라서 이 비유를 완곡하게 표현하려는 학자들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그 불가능성의 정도는 좀처럼 줄어들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왜 예수님께서는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 이렇게 어렵다고 하셨을까요?
          예수님 당시 부자들은 단연히 천국에 들어간다고 생각했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세상에서 부를 누릴 수 있는 것이 하나님의 축복을 받은 증거라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매우 파격적인 선언을 하셨습니다.

          부자는 현세욕에 사로잡혀 있기 때문에 천국을 바라보는 것이 어렵습니다.
          그러므로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 매우 어렵다고 하신 것입니다.
          따라서 보물을 하늘에 쌓을 수 있는 마음의 여유를 갖고 현세욕에서 벗어날 때 부자도 당당하게 천국을 소유할 수 있습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라.

          현세욕을 버린 부자가 되든지
          아니면 믿음의 부자가 되어 날마다 천국의 삶을 즐기며 살아가시기를 기도합니다.


          사도 바울이 ‘로마서’에서 “죄의 삯은 사망이요”(로마서 6:23)
          아우구스티누스가 ‘신국론’에서 “육체가 혼을 떠나면 죽는 것처럼 영혼이 신을 떠나면 죽는다”
          사망이란 ‘존재 상실’을 의미한다.
          기독교 신학에서 신은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존재’를 상실한 ‘존재물’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빈 것’ ‘헛것’ ‘없는 것’이 아닌가? 신을 떠난 인간이 바로 그렇다.

          프랑스 철학자이자 성서해석학자인 폴 리쾨르(1913~2005)는 그의 ‘악의 상징’에서 구약성서에 이에 대한 ‘매혹적 상징’이 있다고 했다. ‘바람(風)’이 그것이다.
          리쾨르는 “김, 바람, 먼지 같은 물질의 영상은 가벼움, 텅 비어 있음, 불안정함, 쓸모없음 따위의 분위기를 풍겨 ‘버림받은’ 인간의 모습을 단번에 적나라하게 드러낸다”라고 설명했다.

          예컨대 “사람은 바람과 같고 그의 날은 지나가는 그림자와 같다”(시편 114:4),
          “아담의 자녀들은 헛되고 사람의 자녀들은 거짓되니 저울에 달면 모두 해야 바람보다 가볍다”(시편 62:9)라는 구절들에는 죄인으로서의 인간의 ‘헛것’ ‘헛됨’의 성격이 잘 표현되어 있다. 특히 이사야 40장 17절에는 “주의 존전에서는 모든 열방은 아무것도 아니라 그는 그들을 없는 것같이 여기시느니라”라고 신을 떠난 죄인이 가진 ‘없음의 성격’, 곧 존재의 무의미성과 무가치성을 분명히 보여준다. 바로 이것이 신에게서 돌아선 죄인으로서의 인간이 받는 형벌이다. 그러나 그것은 단 한 가지 측면, 곧 죄의 ‘소극적 측면’일 뿐이다. 영혼이 사망하자마자 죄는 곧바로 ‘적극적 측면’을 드러낸다.

          영혼의 사망이 무한한 욕망을 낳는다

          죄의 적극적 측면이란 인간이 자기 자신과 세상을 향해 갖는 ‘무한한 욕망’을 말한다. ‘신에게서 돌아섬’이라는 죄는 동시에 ‘자기 자신에게로 돌아섬’ 또는 ‘세상을 향해 돌아섬’이라는 새로운 방향성을 갖는다. 신에게서 돌아서는 죄가 인간을 ‘자기중심주의’ ‘현세중심주의’에 빠지게 한다는 뜻이다. ‘존재에 대한 관심의 상실’은 동시에 ‘존재물에 대한 관심의 획득’으로 나타나기 때문이다. 요컨대 영혼의 사망은 자기 자신과 세상을 향해 갖는 ‘무한한 욕망’으로 나타난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이것을 ‘콘큐피스켄치아(concupiscentia)’라고 불렀다. 그리고 두 가지로 설명했다. 하나는 넓은 의미로서, 세상에 대한 인간의 탐심, 곧 현세욕이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좁은 의미로서 성욕이다. 요컨대 인간이 신에게서 돌아서면 성욕을 비롯한 온갖 현세욕의 노예가 되어 시달릴 수밖에 없다는 말이다. 바로 이것이 죄의 적극적 측면으로서 우리가 ‘죄의 삯’으로 받는 2차적인 형벌이다.

          리쾨르는 인간이 자신과 세상을 향해 갖는 무한한 욕망을 ‘우상(偶像)’이라는 개념을 통해 설명했다. ‘우상’은 좀 더 정교한 신학적 반성으로 ‘실존적인 헛됨’을 ‘거짓-신’으로 형상화시킨 것이다. 거짓-신도 그것을 믿는 사람들에게는 신적인 힘을 갖기 때문이다. 그 결과 죽은 영혼에게서 일어나는 콘큐피스켄치아, 곧 성욕과 현세욕에 대한 우리의 무한한 욕망은 더 이상 바람보다 가벼운 ‘헛것’이 아니다. 그것은 죽음에 대한 욕망을 불러일으킬 정도로 강렬한 마성을 지니고 우리를 노예로 삼는다. 신학자 폴 틸리히는 그것이 프로이트의 ‘리비도(libido)’에 비할 만하다고 했다. 구약성서에 등장하는 예언자들의 설교 속에는 이처럼 막강한 죄의 마성에 대한 체험들이 잘 나타나 있다. “음행의 영이 저희를 미혹시켜 저희가 하느님(하나님)을 버리고 음행을 하느니라”(호세아 4:12)나 “너는 광야에 익숙한 들암나귀들이 그들의 성욕이 일어나므로 헐떡거림 같았도다 그 발정기에 누가 그것을 막으리요”(예레미야 2:24) 등이 그 표현들이다. 그렇다! 바로 이것이 예수를 찾아왔던 부자 청년이, 그리고 당신과 내가 재물에 대한 탐욕을 결코 버리지 못하는 까닭이다.

          잡으면 살 것 같고 놓으면 죽을 것 같아

          여기에서 우리들 자신을 위한 변론을 하나 하자! 낙원에서 쫓겨난 아담의 앞에 무엇이 놓여 있었던가? 가시덩굴과 엉겅퀴가 뒤덮인 저주받은 땅, 무의미한 노동, 그리고 언젠가는 다가올 죽음이 아니었던가? 카뮈, 사르트르, 하이데거를 비롯한 20세기 실존주의자들이 신랄하게 고발했던 ‘내던져짐(Geworfenheit)’이라는 끔찍한 상황이 아니었던가? 아담이 누구인가? 일찍이 철학자 키르케고르가 언급한 대로, 아담은 “그 자신이자 동시에 인류”가 아니던가? 그가 마주한 상황이 곧 우리 모두가 당면하는 실존적 상황이 아니던가? 그렇다면 뭘 더 바라는가! ‘버림받음’의 감정, ‘쓸모없음’에 대한 인식, ‘사망의 느낌’ 속에서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이 과연 무엇이라 생각하는가! 자기 자신을 챙기고, 저주받은 땅이라도 움켜쥐어야만 하는 것이 아니던가! 그것이라도 ‘잡으면 살 것 같고 놓으면 죽을 것 같아’ 붙들고 움켜쥐는 것이 아니던가! 바로 이것이 자기중심주의, 현세중심주의의 본질이 아니던가! 우리가 갖는 무한한 성욕, 재물욕, 현세욕의 근거가 아니던가! 이것이 인간 실존의 가련함이 아니던가!

          백번 옳은 이야기다. 그런데 기독교의 생각은 다르다. 리쾨르를 비롯한 기독교 신학자들에 의하면, 인간이 가진 ‘버림받음’의 감정, ‘쓸모없음’에 대한 인식, ‘사망의 느낌’과 같은 자신의 존재에 대한 무의미성과 무가치성, 그리고 불안은 공연히 생긴 것이 아니다. 그것은 신에게서 돌아섬, 신을 떠남, 존재상실이라는 ‘원초적 분리’에서 왔다. 때문에 그것으로부터 벗어나는 길은 오직 하나, 다시 ‘신에게로 돌아감’ 곧 ‘존재회복’뿐이다. 원초적 분리는 원초적 결합에 의해서만 회복된다. 그럼에도 인간은 그 반대로 치닫고 있다. 그래서 신은 선지자들의 입을 통해 “내가 다시 말하기를 너희가 나를 나의 아버지라 하고 나를 떠나지 말 것이라 하였노라”(예레미야 3:19), “그들의 등을 내게로 돌리고 그들의 얼굴을 내게로 향하지 아니하다가 그들이 환란을 당할 때에는 이르기를 일어나 우리를 구원하소서 하리니”(예레미야 2:28) 등과 같이 ‘돌아서지 말 것’ ‘떠나지 말 것’ ‘돌아올 것’을 요구했다.

          예수도 마찬가지로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요한복음 15:4),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저가 내 안에 내가 저 안에 있으면 이 사람은 과일을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이라”(요한복음 15:5)라고 재결합을 요청했다. 이 재결합이 예수가 말하는 ‘구원’이다. 그리고 그 결과로 맺는 ‘과일’이 구원받은 사람에게 나타나는 징표이자 축복이다. 예수는 이 말을 “그들의 열매로 그들을 알지니 가시나무에서 포도를, 또는 엉겅퀴에서 무화과를 따겠느냐 이와 같이 좋은 나무마다 아름다운 열매를 맺고 못된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나니”(마태복음 7:16~17)라고 교훈했는데, 바울은 그 열매가 바로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갈라디아서 5:22)라고 가르쳤다.(이 열매들이 지난 호에서 미룬 물음인 ‘구원받아 의인이 되면 뭐가 좋은가’에 대한 답이기도 하다.)

          자, 여기에서 이 회장의 질문에 답하자. 천국에는 죄인이 아니라 의인이 들어간다. 죄인이란 신에게서 돌아섬으로써 자기 자신과 세상을 향한 무한한 욕망을 가진 사람이다. 반면에 의인은 다시 신에게로 향함으로써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를 향유하는 사람을 가리킨다. 때문에 어떤 사람이 부자이든 가난한 자든 자기 자신과 세상을 향한 무한한 욕망을 갖고 있다면 그는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 그런데 대부분의 부자들이 그것을 가졌다. 그래서 예수가 “부자는 천국에 들어가기가 어려우니라”라고 교훈한 것이다. 부자들이 모두 악인이기 때문에 한 말이 아니라는 뜻이다. 부자라고 해도 자기 자신과 세상을 향한 무한한 욕망을 갖고 있지 않다면 천국에 들어갈 수 있다는 의미도 된다. 이미 여러 번 밝혔듯이, 구원은 본질적으로 선과 악이 아니라 의와 죄에 연관된 문제다. 그렇다면 이제 우리가 물어야 할 것은 ‘기독교에서는 사람이 재물에 대해 어떤 태도를 취해야 옳다고 하는가’일 것이다.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하늘에 쌓아두라

          기독교는 신구약성서가 제시한 재물에 대한 인간의 태도를 크게 두 가지로 해석해 왔다. 하나는 ‘재물이라는 거짓-신의 마성’을 피하기 위해 그것을 되도록 멀리하는 것이 옳다는 입장이다. 중세 가톨릭교회와 동방정교회, 그리고 프로테스탄트 가운데 루터교가 취하는 입장으로 다분히 소극적이며 현실도피적이다. 이들은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땅에 쌓아두지 말라 거기는 좀과 동록이 해하며 도둑이 구멍을 뚫고 도둑질하느니라”(마태복음 6:19)라는 예수의 가르침과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라는 사도 바울의 교훈 등을 근거로 삼는다. 성서에는 이러한 입장을 지지하는 구체적 실천 요강들도 숱하게 들어 있다. 예컨대 과도한 소비(잠언 21:20), 빚(잠언 6:5, 22:7), 이자(출애굽기 22:25, 시편 15:5, 에스겔 18:8, 13, 17), 뇌물(잠언 15:27, 에스겔 22:12), 투기(잠언 28:19~20), 사기(잠언 13:11, 20:10, 23) 등을 금하는 가르침들이 그것이다. 하지만 이 방법은 예레미야가 “누가 그것을 막으리요”라고 한탄했듯이 재물이 가진 마성을 이기지 못해 결국 실패했다.

          다른 하나는 재물을 오히려 적극적으로 지배하고 관리하는 방법이다. 상당수의 프로테스탄트 교회들이 취하는 입장으로, 다분히 칼뱅주의 내지 청교도적 방법이다. 이들의 주장에 의하면, 시편 기자가 “세계와 거기에 충만한 것이 내 것임이로다”(시편 50:12)라고 읊었듯이 세상의 모든 재물은 신의 소유다. 또한 신명기에 “네 하느님(하나님) 여호와를 기억하라 그가 네게 재물 얻을 능력을 주셨음이라”(신명기 8:17)고 기록되었듯이, 인간은 신의 계획을 세상에서 실현하기 위한 도구로서 각각 ‘특정한 부름’을 받아 재물을 관리하는 ‘청지기’이다. 이 같은 구조에서 보면 부자란 더 많은 관리가능성을 지닌 청지기이며 신으로부터 더 많은 축복을 받은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바로 이것이 오늘날 많은 프로테스탄트 교인들의 오해를 불러일으키고 있지만, 그 사람은 자기의 재물을 자신의 욕망을 위해 쓸 수 없다. 오직 신의 뜻에 합당하게 사용해야 한다. 그런데 역사가 증명하듯이 이 방법 역시 재물이 가진 놀라운 마력 때문에 결국 실패했고, 오히려 기독교와 자본주의가 야합하는 부작용마저 낳았다.

          이로써 한 가지는 분명해졌다. 우리가 ‘잡으면 살 것 같고 놓으면 죽을 것 같아’ 붙들고 섬기는 우상인 재물의 마성으로부터 해방되는 길이 그것으로부터의 ‘도피’도 아니고, 그것의 ‘장악’도 아니라는 사실이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나? 난감한 문제지만, 해답은 이미 2000년 전에 주어졌다. 한마디로, 땅위의 보물이 아니라 하늘의 보물을 사랑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는 “오직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하늘에 쌓아두라 거기는 좀이나 동록이 해하지 못하며 도둑이 구멍을 뚫지도 못하고 도둑질도 못하느니라 네 보물이 있는 그곳에 네 마음도 있느니라”(마태복음 7:20~21)라는 준칙을 제시했다. 이어 바울은 “네가 이 세대에서 부한 자들을 명하여 마음을 높이지 말고 정함에 없는 재물에 소망을 두지 말고 오직 우리에게 모든 것을 후히 주사 누리게 하시는 하느님(하나님)께 두며 선을 행하고 선한 사업을 많이 하고 나누어주기를 좋아하며 너그러운 자가 되게 하라 이것이 장래에 자기를 위하여 좋은 터를 쌓아 참된 생명을 취하는 것이니라”(디모데전서 6:17~19)라고 구체적 실천 방안도 내놓았다. 물론 이 가르침들을 받아들여 실행하느냐, 마느냐는 오직 우리 자신에게 달려 있다.







          그 이유는 부자는 세상에서 만족하기 때문입니다.
           

          1924   the eye of a needle             -  - -

          1924

          부자 청년은 누구인가?

          마태복음 19:16
          어떤 사람이 주께 와서 가로되 선생님이여 내가 무슨 선한 일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마가복음 10:17
          예수께서 길에 나가실쌔 한 사람이 달려와서 꿇어 앉아 묻자오되 선한 선생님이여,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누가복음 18:18
          어떤 관원이 물어 가로되 선한 선생님이여,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누가복음 10:25
          어떤 율법사가 일어나 예수를 시험하여 가로되 선생님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공관복음서를 종합하여 볼 때 부자 청년은

          1. 부자(세습적인 부자)
          2. 관원(아르곤) : 지도자
          3. 신앙적 관심 : 영생을 얻을 수 있을까?
          4. 예수님을 선한 선생으로 인식 : 랍비

          * 관원(758) 아르콘(archōn)  ἄρχων, οντος, ὁ 

          1. 지배자,  2. 관원,  3. 유대관원, 대제사장
          발음 / 아르콘(archōn)
          관련 성경 / 관리(마 9:18, 23), 왕(마 9:34, 막 3:22, 눅 11:15), 집권자(마 20:25), 회당장(눅 8:41), 법관(눅 12:58), 지도자(눅 14:1), 당국자(요 7:26, 48), 임금(요 12:31, 14:30), 권세 잡은 자(엡 2:2).
          신약 성경 / 37회 사용


          바늘귀()
          바늘(4476)  ῥαφίς, ίδος, ἡ 

          1. 바늘,  2.  마태복음 19:24,  3. 마가복음 10:25
          발음 / 라피스(rhaphis)
          관련 성경 / 바늘(마 19:24, 막 10:25, 눅 18:25).
          신약 성경 / 2회 사용


          귀(5169)  τρύπημα, ατος, τό  

          1. 뚫린 것,  2. 구멍,  3. 바늘귀
          발음  / 트루페마(trüpēma)
          어원 / 5168의 파생어에서 유래
          관련 성경 / 바늘귀(마 19:24).
          신약 성경 / 1회 사용


          * 낙타(2574)  κάμηλος, ου, ὁ and ἡ  

          1. 낙타,  2. 약대
          발음  / 카메로스(kamēlŏs)
          어원 / 히브리어 1581에서 유래
          관련 성경 / 낙타(마 19:24, 막 10:25, 눅 18:25)
          신약 성경 / 6회 사용

          * 밧줄(4979) σχοινίον, ου, τό 

          1. 밧줄,  2. 끈,  3. 요한복음 2:15
          발음 / 스코이니온(schŏiniŏn)
          관련 성경 / 노끈(요 2:15), (거룻) 줄(행 27:32).
          신약 성경 / 2회 사용

          * 낙타(1581) 가말(gâmâl) גָּמָל 

          1. 낙타,  2. 이 단어는 페니키아어와 셈어에서 뿐 아니라 그리스어와 라틴어 심지어는 애굽어에서도 발견된다.
          발음 /  가말(gâmâl)
          어원/ 혼성. 복수 גְּמַלִּים, 1580에서 유래한 것으로 보임
          관련 성경 / 낙타(창 12:16, 삿 7:12, 슥 14:15).
          구약 성경 / 54회 사용

          밧줄과 낙타

          부자가 천국에 가는 것은 '낙타'가 바늘귀를 빠져나가는 것보다 어렵다는 표현이 오역이란 얘기를 처음 접한 것은 '상식의 오류사전'이란 책에서였습니다.
          즉, 아람어의 밧줄이 gamta인데, 이를 필사하는 과정에서 gamla로 잘못 옮겼다는 얘기였답니다.
          아람어는 모르니 패스지만, 재밌는 것은 그리스어에서도 밧줄과 낙타는 철자가 비슷합니다.

          낙타 - kamelos (καμηλος, 카멜로스)
          밧줄 - kamilos (καμιλος, 카밀로스)



          랑게(Lange)에 의하면 육중한 몸무게의 약대가 부자를 상징하고 있고, 눈으로 볼 수 있는 가장 작은 통로인 바늘 구멍이 하늘나라로 가는 영적통로를 상징하고 있다고 함으로써 문자 그대로의 의미를 찾으려 하고 있다.

          적어도 본문은 이같은 문자 그대로의 의미로 이해하는 것이 예수께서 가르치시고자 하는 진의(眞意)를 더욱 확실히 해 줄 것이다.

          한편 이와 비슷한 격언으로 바벨론 탈무드에는(B. Berakoth 55b) '약대' 대신 '코끼리'가 사용되었는데, 그 이유는 바벧론에서는 코끼리가 흔하고, 가장 큰 동물로 여겨졌기 때문이다.

          이와 유사하게도 이슬람교의 코란경에는 '약대가 바늘 귀로 지나갈 때까지 천국 문은 악인에게 닫혀있다'라고 가르치고 있다.

          아마 이는 이 복음서에서 빌어 쓴 듯하다.

          여하튼 구원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은 문'인데, 더구나 교만(驕慢)과 자기 만족으로 살지운 사람이 들어가기에는 더욱 더 좁은 것이다.
          이 비유가 영생의 불가능성을 이야기하는 만큼 영생을 허락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는 그 만큼 더 놀라운 것이며 감사한 것임을 깨닫게 한다.


          마태복음 19 Korean Living Bible

          19 예수님은 이 말씀을 마치시고 갈릴리를 떠나 요단강 건너편 유대 지방 으로 가셨다.

          그때 많은 군중이 따르므로 예수님은 거기서도 병자들을 고쳐 주셨다.

          결혼과 이혼

          바리새파 사람들이 예수님을 시험하려고 와서 “구실만 있으면 남편이 아내를 버려도 좋습니까?” 하고 물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렇게 대답하셨다. “너희는 사람을 창조하신 분이 처음에 남자와 여자를 만드시고

          [a]‘그러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 자기 아내와 합하여 두 사람이 한몸이 될 것이다’ 라고 하신 말씀을 읽지 못하였느냐?

          그렇게 되면 두 몸이 아니라 한몸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할 것이다.”

          “그렇다면 왜 모세는 ‘이혼 증서를 써 주고 아내와 이혼하라’ 고 했습니까?” 하고 그들이 묻자

          예수님은 이렇게 대답하셨다. “그것은 너희가 고집이 세고 악하기 때문에 아내와 이혼하는 것을 허락한 것이지 처음부터 그랬던 것은 아니다.

          [b]그래서 내가 너희에게 말하지만 음행한 일도 없는데 자기 아내와 이혼하고 다른 여자와 결혼하는 사람은 간음죄를 짓는 것이다.”

          10 제자들이 예수님께 “남편과 아내의 관계가 그런 것이라면 차라리 결혼하지 않는 것이 더 낫겠습니다” 하자

          11 예수님이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모든 사람이 다 이 말대로 할 수는 없고 하나님이 허락하신 사람들만 그렇게 할 수 있다.

          12 처음부터 결혼할 수 없는 몸으로 태어난 남자도 있고 [c]불구자가 되어서 결혼할 수 없는 남자도 있으며 하늘 나라를 위해 스스로 결혼을 포기한 사람도 있다. 이 교훈을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은 받아들여라.”

          13 그때 사람들이 손을 얹어 축복해 달라고 어린 아이들을 예수님께 데려왔으나 제자들이 그 사람들을 꾸짖었다.

          14 그래서 예수님은 “어린 아이들이 나에게 오는 것을 막지 말아라. 하늘 나라는 이런 어린 아이와 같은 사람들의 것이다” 하고 말씀하셨다.

          15 그러고서 예수님은 어린 아이들의 머리 위에 손을 얹어 축복하시고 그 곳을 떠나셨다.

          부자 청년

          16 한 청년이 예수님께 와서 물었다. “선생님, 제가 영원한 생명을 얻으려면 어떤 선한 일을 해야 합니까?”

          17 “어째서 선한 일을 나에게 묻느냐? 선한 분은 한 분밖에 없다. 네가 영원한 생명을 얻으려면 계명을 지켜라.”

          18 “어느 계명입니까?” “[d]‘살인하지 말아라. 간음하지 말아라. 도둑질하지 말아라. 거짓 증언하지 말아라.

          19 네 부모를 공경하라.’ 그리고 [e]‘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는 계명이다.”

          20 “저는 이 모든 계명을 다 지켰습니다. 아직 저에게 부족한 것이 있다면 무엇입니까?”

          21 “네가 완전한 사람이 되려면 가서 네 재산을 다 팔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어라. 그러면 네가 하늘에서 보물을 얻을 것이다.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

          22 그러나 그 청년은 재산이 많으므로 이 말씀을 듣고 근심하며 가 버렸다.

          23 그때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내가 분명히 너희에게 말한다. 부자는 하늘 나라에 들어가기가 매우 어렵다.

          24 내가 다시 말하지만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낙타가 바늘귀로 통과하는 것이 더 쉽다.”

          25 제자들이 이 말씀을 듣고 몹시 놀라 “그렇다면 누가 구원받을 수 있겠습니까?” 하고 물었다.

          26 예수님은 제자들을 바라보시며 “사람의 힘으로는 할 수 없지만 하나님께서는 다 하실 수 있다” 하고 대답하셨다.

          27 그때 베드로가 예수님께 “우리는 모든 것을 버리고 주님을 따랐으니 무엇을 받겠습니까?” 하고 묻자

          28 예수님은 이렇게 대답하셨다. “내가 분명히 말한다. [f]새 시대가 되어 [g]내가 나의 영광스러운 보좌에 앉을 때 너희도 열두 보좌에 앉아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를 심판할 것이다.

          29 또 나를 위해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h]부모나 자녀나 논밭을 버린 사람은 누구든지 [i]여러 갑절의 상을 받을 것이며 영원한 생명을 얻을 것이다.

          30 그러나 지금 앞서도 나중에 뒤떨어지고 지금은 뒤떨어져도 나중에 앞설 사람이 많을 것이다.”

          Footnotes

          1. 19:5 창2:24
          2. 19:9 고대 사본에는 9절 끝에 ‘또 이혼한 여자와 결혼하는 사람은 간음죄를 짓는 것이다’ 가 더 있음.
          3. 19:12 원문에는 ‘사람이 만든 고자’
          4. 19:18 출20:12-16, 신5:16-20
          5. 19:19 레19:18
          6. 19:28 원문에는 ‘그 세대에’
          7. 19:28 원문에는 ‘인자’ (사람의 아들)
          8. 19:29 어떤 사본에는 ‘부모나’ 다음에 ‘아내나’ 가 더 있음.
          9. 19:29 많은 사본에 ‘백 배’ 로 되어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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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013. 낮추다 ταπεινόω 

          1.  낮게 하다,  2. 산을 낮추다,  3. 천하게 하다
          발음 / 타페이노오(tapĕinŏō)
          어원 / 미래 ταπεινώσω, 제1부정과거 ἐ- ταπ είνωσα, 완료 수동태 분사 ἐταπεί- νωσα, 제1부정과거수동태 ἐταπεινώ- θην, 미래수동태 ταπεινωθήσομαι, 5011에서 유래
          관련 성경 / 낮추다(마 18:4, 고후 12:21, 약 4:10), 낮아 지다(눅 3:5, 18:14), 겸손하다(벧전 5:6), 비천에 처하다(빌 4:12).
          신약 성경 / 14회 사용

          * 5011. ταπεινός, ἡ, όν 

          1. 낮은 지위의,  2. 비굴한, 3. 겸손한
          발음  / 타페이노스(tapĕinŏs)
          어원 / 불확실한 어원에서 파생
          관련 성경 / 겸손한(마 11:29, 약 4:6, 벧전 5:6), 비천한(눅 1:52, 고후 7:6), 낮은(롬 12:16, 약 1:9), 유순한(고후 10:1).
          신약 성경 / 8회 사용





          교회의 권징(勸懲)에 관하여 성경은 어떻게 말하는가?


          권징(勸懲) / 권할 권(勸), 징계할 징(懲)
          권선징악의 준말


          교회의 권징은 교회를 보호하고, 죄 지은 자를 다시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로 회복시키며, 교회 지체들 사이에 교제를 새롭게 하기 위한 목적으로, 지역 교회의 지체들 간에 발생한 죄된 동을 바로 잡는 과정입니다.

          교회의 권징에는 다섯 종류가 있습니다.

          1.  권고(勸告)

          "네 형제가 죄를 범하거든 가서 너와 그 사람과만 상대하여 권고하라 만일 들으면 네가 제 형제를 얻은 것이요(마 18:15)." 이 말씀처럼 개인 간의 범죄는 개인적으로 다루어야 하지만, 그것이 잘 해결되지 않을 때는 교회적인 도움이 필요하다.

          2. 권계(勸戒)

          "형제들아··· 규모 없는 자들을 권계하며(살전 5:14)"
          여기서 규모 없는 자란 지역 교회에서 무질서하며 분열을 일으키는 자를 말한다.
          이러한 자들은 교회적으로 권계해야 한다.

          형제들아 너희를 권면하노니 규모 없는 자들을 권계하며 마음이 약한 자들을 안위하고 힘이 없는 자들을 붙들어 주며 모든 사람을 대하여 오래 참으라.
          And we urge you, brothers, warn those who are idle, encourage the timid, help the weak, be patient with everyone.

          3. 경계(警戒)

          "너희가 배운 교리에 역행하여 분쟁을 일으키거나 실족하게 하는 자들을 주목하고 그들을 피하라(롬 16:17)."

          형제들아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교훈을 거스려 분쟁을 일으키고 거치게 하는 자들을 살피고 저희에게서 떠나라.
          I urge you, brothers, to watch out for those who cause divisions and put obstacles in your way that are contrary to the teaching you have learned. Keep away from them.

          이 말씀처럼 교리를 거슬려 분쟁을 조장하는 자는 교회적으로 경계해야 한다.

          4. 경고(警告)

          "이단에 속한 사람을 한두 번 훈계한 후에 멀리하라(딛 3:10)." 이 말씀처럼 이단에 속한 자들을 경고하고 거절해야 한다.

          이단에 속한 사람을 한두번 훈계한 후에 멀리 하라.
          Warn a divisive person once, and then warn him a second time. After that, have nothing to do with him.


          5. 출교(黜敎)

          징계의 최종적인 단계는 지역 교회로부터의 출교이다. 이 징계는 음행하는 자, 탐욕을 부리는 자, 우상 숭배하는 자, 모욕하는 자, 술 취하는 자, 속여 빼앗는 자 등에게 적용된다(고전 5:11~13).

          13. 외인들은 하나님이 판단하시려니와 이 악한 사람은 너희 중에서 내어 쫓으라.
          God will judge those outside. "Expel the wicked man from among you.




          어떤 경우에는, 교회의 권징이 출교에까지 이를 수도 있는데, 그것은 한 개인을 교회의 회원에서 공식적으로 제거하고, 그 개인으로부터 비공식적으로 분리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마태복음 18:15-20은 교회가 권징을 위해 어떤 권한을 가지고 있고, 또한 어떻게 실천해야 하는지 그 절차를 알려줍니다.
          예수께서는 피해를 입은 사람이 가해자를 먼저 개인적으로 만나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만일 가해자가 자신의 죄를 인정하지 않고 회개하지 않으면, 그 상황의 상세한 내용을 확인하기 위하여 2-3 명의 다른 사람들과 함께 갑니다.
          그럼에도 여전히 회개하지 않는다면, 그는 이미 회개할 수 있는 두 번의 기회에도 불구하고 죄를 고집하는 상태이기 때문에, 그 문제를 교회에 알립니다.
          이제 가해자는 죄를 회개하고 그의 죄된 행동을 버릴 수 있는 세 번째 기회를 가집니다.
          만일 교회의 권징이 진행되는 동안 아무 때라도 죄 지은 그 사람이 회개한다면, “형제를 얻은 것” (마태복음 18:15) 입니다.
          하지만 세 번째 절차가 진행될 때까지 죄 지은 자가 긍정적인 반응을 보이지 않는다면, 예수님은 “이방인과 세리와 같이 여기라” (마태복음 18:17)고 말씀하십니다.

          아버지가 자녀를 징계할 때에 결코 즐겁지 않은 것처럼, 교회의 권징 과정은 결코 유쾌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때때로 교회의 권징이 필요합니다.
          교회 권징의 목적은 죄 지은 자를 향해 멸시하는 마음 자세를 취하거나 영적인 우월감을 갖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교회 권징의 목표는 한 개인을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고, 다른 신자들과 온전히 교제할 수 있도록 회복시키는 것입니다.
          권징은 개인적으로 다루기 시작하여, 그 후 점차적으로 공개해야 합니다.
          권징은 개인을 향한 사랑을 가지고 하나님께 순종하면서, 교회의 다른 지체들을 위하는 경건한 두려움 가운데 이루어져야 합니다.

          교회 권징에 관한 성경의 가르침은 교회 회원제의 필요성을 암시합니다.
          교회와 목회자는 도시의 모든 사람들이 아닌, 특정 그룹의 사람들 (지역 교회의 구성원들)의 영적 안녕을 책임지고 있습니다.
          바울은 교회 권징의 맥락에서 “밖에 있는 사람들을 판단하는 것이야 내게 무슨 상관이 있으리요마는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이야 너희가 판단하지 아니하랴” (고린도전서 5:12) 라고 묻습니다.
          교회의 권징을 받아야 하는 자는 교회 “안에” 있어야 하며, 교회 앞에서 자신의 행동에 대해 변론할 수 있는 자라야 합니다.
          치리를 받게 되는 자는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을 고백하면서도 부인할 수 없는 맹백한 죄를 지속하는 자입니다.

          성경은 고린도교회 (고린도전서 5:1-13)를 통해, 지역 교회에서의 권징의 예를 보여줍니다. 이 경우 치리는 출교에까지 이르렀는데, 사도 바울은 치리를 해야 하는 몇 가지 이유를 제시합니다. 하나는 죄는 누룩과 같다는 것입니다; 만일 죄를 허용되면, “적은 누룩이 온 덩어리에 퍼지는 것” (고린도전서 5:6-7)처럼 죄가 주변으로 퍼질 것입니다. 또한 바울은 예수께서 우리를 구원하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죄로부터 멀어져서 “누룩 없는 자”가 되거나, 또는 영적으로 부패시키는 것들로부터 자유로운 자가 되도록 하려는 것이라고 설명합니다 (고린도전서 5:7-8). 자기의 신부인 교회를 향해 그리스도께서 바라시는 것은 교회가 거룩하고 흠이 없게 되는 것입니다 (에베소서 5:25-27). 불신자들 앞에서 그리스도 예수 (와 그의 교회)을 증거하는 것도 중요합니다. 다윗이 밧세바와 죄를 범하였을 때, 그 죄의 결과들 중 하나는 참되신 한 분 하나님의 이름이 하나님의 원수들에 의해 모독을 받은 것이었습니다 (사무엘하 12:14).

          교회가 회원에 대해 취하는 징계 조치들이 경건한 슬픔과 진정한 회개를 가져오는데 효과적이기를 소망합니다. 회개를 하게 되면, 그 개인은 다시 교제를 나눌 수 있게 됩니다. 고린도전서 5장 본문에 나오는 사람은 회개하였고, 나중에 바울은 교회가 그를 받아들여 교회와 온전한 교제를 할 수 있게 하라고 격려하였습니다 (고린도후서 2:5-8). 불행하게도, 치리 조치가 사랑 안에서 올바르게 수행되더라도, 회복을 가져오는데 항상 성공하는 것은 아닙니다. 교회의 권징이 회개를 이끌어내지 못하는 경우에라도, 세상에서 선한 증거를 유지하는 등의 여러 다른 선한 목적들을 성취하기 위하여 치리는 여전히 필요합니다.

          일관된 징계 없이 제멋대로 하도록 방치된 젊은이들의 행동을 우리 모두 목격한 적이 있을 것입니다.
          그 광경은 보기에 흉합니다.
          지나치게 관대한 부모의 사랑은 아이를 제대로 인도하지 못함으로써 그 아이의 장래를 암담하게 만들어 놓습니다.
          징계를 받지 않고 자라난 아이는 통제되지 않는 행동을 하기 때문에, 어디에서나 의미 있는 관계를 맺지 못하며 제대로 적응하지 못합니다.
          교회에서의 권징도 결코 즐겁거나 쉬운 일은 아니지만, 때때로 필요한 것입니다.
          사실, 권징은 사랑입니다.
          권징은 하나님이 명령하신 것입니다
          .


          오늘날 한국 개신교회는 그 이미지와 신뢰도가 땅에 떨어질 대로 떨어져 기독교가 아닌 개독교로 불리기까지 한다.
          "예로부터 신학교들은 학생들이 아니라 교수들이 타락시켜 왔고, 교회는 성도들이 아니라 목사들이 타락시켜 왔다"는 말이 있다.
          이처럼 국내의 개신교도 자질 부족인 교수들과 목사들이 망쳐 놓았으므로 그 책임이 매우 크다고 할 수 있다.

          한국 개신교의 타락의 주역으로 특히 목사들을 지목하는 데에는 그 이유가 있다.
          국내 개신교회의 적지 않은 저명한 목사들이 간음, 성추행, 사기, 공금 횡령, 배임, 교회 세습, 부정 선거, 학력 위조, 폭행 등등의 죄상으로 세간에 알려졌다.
          이들이 저지른 범죄 행위는 교회 개혁을 위한 국내 기독교 인터넷 신문인 <뉴스앤조이>나 <당당뉴스> 등에서 살펴보면 일반인들의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그들의 범죄 행위가 크고 많다는 것을 살펴볼 수 있다.

          그런데 이런 자들이 교회나 교단의 징계를 받고 쫓겨났는데도 불구하고 그 죄과를 뉘우치거나 반성하기는커녕, 버젓이 다른 지역에 자기네 잔존 세력들을 규합하여 다른 이름으로 교회 간판을 달고 담임목사로 활동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이들이 과연 하나님을 믿는 자들이며 예수님을 믿는 크리스천이 맞는지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

          서두에 언급한 삼일교회 전 목사의 성추행 사건과 또 그와 유사한 담임목사들의 온갖 범죄행위 때문에 한국 개신교가 수많은 비기독교인들에게 온갖 지탄을 받을 뿐만 아니라, 자기네 교인들도 경악하거나 실족하여 교회를 옮기거나 심지어 교회를 떠난 사람들도 부지기수다. 이런 삯꾼 목사들과 타락한 목사들이 하루라도 빨리 기독교계에서 사라져야 기독교가 초대교회처럼 올바로 부활할 것이다.

          이제는 국내의 수많은 개신교 교단의 헌법이나 내부 규정에 따른 교회의 징계에 대해서가 아니라, 신약성경에 나타나 있는 교회의 징계란 무엇이며 또 그것이 어떻게 나타나 있는지 구체적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신약성경에는 예수님께서 지역 교회에 대해 최초로 언급하신 마태복음 18장에는 지역 교회 안의 죄에 대한 치리 문제를 다루고 있다. 즉 어떤 형제가 다른 형제에게 죄를 범했을 때 피해를 당한 형제가 피해를 준 형제에게 그의 잘못을 뉘우칠 것을 권면했는데도 회개하지 않으면 한두 명을 더 데리고 가서 말하고, 그래도 뉘우치지 않으면 교회에 말하게 되고, 교회의 말도 듣지 않으면 출교하라고 되어 있다(마 18:15~17).

          상기와 같이 마태복음 18장에는 지역 교회에서 범죄한 사람의 징계에 대해 이야기하는데, 여러 서신서에 나오는 하나님의 교회에서도 마찬가지다. 예컨대, 고린도전서 1장에 "고린도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고전 1:2)"라는 구절이 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의 교회'라는 용어가 신약성경에 모두 13번 정도 나오는데, 이 용어는 지역 교회를 가리킬 때 사용된다. 이 '하나님의 교회'라는 이름은 그 교회가 하나님이 거룩하신 것처럼 거룩하다는 특성을 나타내고 있다(벧전 1:16).

          그 실례로 고린도전서 3장 16~17절에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계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 누구든지 하나님의 성전을 더럽히면 하나님이 그 사람을 멸하시리라 하나님의 성전은 거룩하니 너희도 그리하리라"고 쓰여 있다. 이 말씀처럼 지역 교회는 하나님의 거룩한 성전이며, 거룩하신 성령님께서 거하시는 성전이다. 여기서 성전이란 교회의 건물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고, 영적으로 거듭난 신자들의 무리를 말한다.

          지역 교회인 하나님의 교회는 거룩하므로, 이 교회 안에는 세상적인 가치관이나 아이디어가 스며들어 와서는 안 된다. 지역 교회는 인간적인 생각과 세속적인 방법 등, 세상적인 물결로부터 철저하게 보호되어야 한다. 하나님의 교회의 거룩함과 순결함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지역 교회는 하나님의 거룩한 성전이므로 이곳에 부도덕이나 잘못된 교리가 들어와서는 안 된다. 도덕적인 악이나 교리적인 악이 지역 교회에 들어오면 교회는 엄청난 손실을 입기 때문에 불가피하게 징계라는 조치를 취하게 되고, 그로 인해 성도들은 큰 고통과 타격을 입게 된다. 그러므로 신자들은 늘 깨어 기도와 말씀으로 무장하여 도덕적인 문제와 교리적인 문제에 있어서 거룩함과 순결함을 유지할 수 있도록 책무를 다해야 할 것이다.

          여기서는 지역 교회의 징계에 대하여 여러 가지를 구체적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즉 징계의 목적, 징계의 예방, 징계의 원칙, 징계의 대상, 징계의 종류, 징계의 결과 등에 대해 알아보자.

          첫째, 징계의 목적에 대해 알아보자.

          징계의 조치에는 세 가지의 중요한 목적이 있다.

          1. 자칭 크리스천이라고 하지만 사실상 영적으로 거듭나지 않은 자들을 드러내고 퇴출시키기 위함이다(요일 2:19).

          2. 범죄한 신자를 징계함으로써 마침내 회개하고 주님께로 돌이키며, 지역 교회의 교제를 회복시키기 위함이다.
          신자에 대한 징계는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언제나 영적인 회복을 목적으로 하는 수단일 뿐이다(고전 5:7).

          3. 지역 교회의 거룩을 유지하기 위함이다.
          하니님의 교회는 거룩하며 힘써 이 거룩을 지켜야 하기 때문에 징계를 통해 거룩을 유지해 가는 것이다(고전 3:17).

          둘째, 징계의 예방에 대해 살펴보자.

          항상 치료보다는 예방이 우선이다.
          징계해야 할 범죄가 일어나지 않도록 사전에 방지하는 것이 필요하다.

          1. 개인적인 경건의 생활화이다.
          하나님은 신자가 거룩하게 살기를 원하시므로, 이러한 거룩한 삶은 항상 하나님 말씀과 기도로만 유지될 수 있다(딤전 4:5).
          따라서 신자 개인이 갖는 규칙적인 성경 공부와 기도 생활은 범죄를 예방하는 지름길이다.

          2.  교회적인 가르침의 체계화이다.
          지역 교회는 신자들이 거룩하게 살아가도록 하나님의 말씀을 잘 가르쳐야 한다.
          말씀을 올바르게 체계적으로 가르침으로써 지역 교회는 신자를 범죄로부터 보호할 수 있을 것이다.

          셋째, 징계의 원칙에 대해 알아보자.

          1.  확실한 증거
          "나의 형제들아 글로에의 집 사람들에 의하여 너희 가운데 다툼이 있다는 너희에 관한 것이 내게 밝히 드러났기 때문이라(고전 1:11)."
          이 말씀처럼 사도 바울은 그에게 전해 온 사람의 이름을 항상 밝히면서 명백히 드러난 증거를 제시했다.
          그리고 "장로에 대한 고발은 두세 증인이 없으면 받지 말 것이요(딤전 5:19)"
          이 말씀처럼 두세 증인에 의한 증거가 있어야 한다.

          2. 공명정대함
          징계 문제를 처리함에 있어서 혈연이나 지연 등에 얽매이지 말고 공평하게 시행해야 한다(신 1:17).

          넷째, 징계의 대상에 대해 살펴보자.

          1. 교리적으로 타락한 신자
          성경의 명백한 교리에 반하는 다른 교리를 인정하거나 옹호하거나 추종하는 신자는 이미 교리적인 면에서 이탈된 자이다(딤후 2:17~18). 이들은 발견되는 즉시 사실을 확인하여 경고하고 돌이키지 않을 때에는 징계해야 한다(딤전 1:19~20).

          2).도덕적으로 타락한 신자
          죄의 유혹을 이기지 못하고 육신의 정욕을 따라 살면 도덕적인 범죄를 저지르게 된다. 이때 돌이키고 회개하지 않으면 계속 반복하여 죄를 짓게 된다. 이런 신자는 영적 분별력이 마비되고 돌이키기 힘든 상황에서 빠져나올 수 없다. 이런 신자들은 교회적으로 엄중한 징계를 가할 수 밖에 없다(고전 5:11~13).

          다섯째, 징계의 종류(단계)에 대해 알아보자.

          지역 교회는 완벽하지 않기 때문에 이리가 들어올 수 있고(행 20:29), 사탄이 교회를 부패시킬 수 있다(고후 11:3).
          그로 인해 지역 교회는 불가피하게 징계를 하게 되는데, 징계는 그 정도(경중)에 따라 몇 가지 단계가 있다.

          1.  권고
          "네 형제가 죄를 범하거든 가서 너와 그 사람과만 상대하여 권고하라 만일 들으면 네가 제 형제를 얻은 것이요(마 18:15)." 이 말씀처럼 개인 간의 범죄는 개인적으로 다루어야 하지만, 그것이 잘 해결되지 않을 때는 교회적인 도움이 필요하다.

          2. 권계
          "형제들아··· 규모 없는 자들을 권계하며(살전 5:14)" 여기서 규모 없는 자란 지역 교회에서 무질서하며 분열을 일으키는 자를 말한다. 이러한 자들은 교회적으로 권계해야 한다.

          3. 경계
          "너희가 배운 교리에 역행하여 분쟁을 일으키거나 실족하게 하는 자들을 주목하고 그들을 피하라(롬 16:17)." 이 말씀처럼 교리를 거슬려 분쟁을 조장하는 자는 교회적으로 경계해야 한다.

          4. 경고
          "이단에 속한 사람을 한두 번 훈계한 후에 멀리하라(딛 3:10)." 이 말씀처럼 이단에 속한 자들을 경고하고 거절해야 한다.

          5. 출교
          징계의 최종적인 단계는 지역 교회로부터의 출교이다. 이 징계는 음행하는 자, 탐욕을 부리는 자, 우상 숭배하는 자, 모욕하는 자, 술 취하는 자, 속여 빼앗는 자 등에게 적용된다(고전 5:11~13).

          여섯째, 징계의 결과에 대해 살펴보자.

          1. 하나님의 거룩하심에 참여함
          "그들은 잠시 자기의 뜻대로 우리를 징계하였거니와 오직 하나님은 우리의 유익을 위하여 그의 거룩하심에 참여하게 하시느니라(히 12:10)." 이 말씀처럼 징계는 하나님의 거룩하심에 참여케 한다.

          2. 의와 평강한 열매를 맺음
          "무릇 징계가 당시에는 즐거워 보이지 않고 슬퍼 보이나 후에 그로 말미암아 연단받은 자들은 의와 평강한 열매를 맺느니라(히 12:11)." 이 말씀처럼 징계는 의와 평강한 열매를 맺게 한다.

          지금까지 지역 교회의 징계와 관련하여 성경에 나타나 있는 여러 가지 사항들을 살펴보았다.
          이처럼 성경에 나타나 있는 대로 징계에 대한 내용을 올바로 적용하고 실행하기만 하면, 초대교회처럼 지역 교회는 거룩함을 유지할 수 있고, 믿지 않는 자들에게도 기독교의 좋은 본을 보여 그리스도인들에 대한 좋은 평판을 얻을 수 있다.

          그러나 상술했듯이 오늘날 국내의 개신교회는 일반 교인이 아닌, 자질이 부족한 담임목사들이 솔선수범하여 온갖 범죄를 저지르고 있으니 기가 찰 노릇이다. 국내의 개신교회가 개혁되고 정화되려면 무엇보다 일반 신자들이 정신을 차리고 성경을 제대로 공부하여, 부패하고 타락한 목사들을 징계하고 교회에서 과감히 퇴출시켜 두 번 다시 발을 붙이지 못하도록 해야 한다. 그리고 영적으로나 도덕적으로 올바른 자격을 갖춘 인도자를 내세워 하나님의 성전인 지역 교회의 거룩성을 지키고 유지시켜 나가야 할 것이다.

          교회의 징계 순서

          마태복음 18: 15~16

          15또 네 형제가 네게 죄를 짓거든 가서 너와 그 사람만 있을 때 그에게 그의 잘못을 일러주라.
                만일 그가 네 말을 들으면 너는 네 형제를 얻은 것이라.
          16그러나 만일 그가 네 말을 듣지 아니하면 너 외에 한두 사람을 더 데리고 가서 두세 증인의
               입으로 모든 말을 입증하게 하라.

          15절: 첫 번째 순서는 자신에게 죄를 지은 형제를 찾아가서 그의 잘못됨을 알려 주는
                 것으로 당사자 간에 문제된 일을 직접 해결 해야 하는 것으로 그 문제를 다른
                 사람에게 먼저 이야기 하거나 뒤에서 이야기 한다면 그 일은 해결 되지 못하고  
                 돌아오지 못할 강을 건너게 되는 결과를 가져오고, 형제를 잃게 된다.

          16절: 15절과 같이 직접 형제를 찾아가서 그의 잘못을 알려 주었는데도 자신의 잘못함을
                 인정하지 않고 잘못된 자기 주장으로 고집을 피운다면 다른 형제, 자매를 동행
                 하여서 다시 한 번 그 형제의 잘못을 설명하고, 있었던 일들을 입증 하는 것이
                 두 번째 징계 순서이다.

          그래도 듣지 않을 때 세 번째 순서로

          마18: 17

          그래도 그가 말을 듣지 아니하거든 교회에다 말하고, 교회의 말도 듣지 아니하거든 그 사람을 이교도나 세리와 같이 여기라.

          교회에다 공개적으로 말하고(목자) 이도 듣지 않으면 이교도나 세리와 같이 여기는 것으로 이는 형제 자매와 같이 대하지 말라는 것이다.

          이렇게 성도간 개인적으로 교회 내에서 문제가 발생하였을 때 이런 순서대로 행하고 만약 세 번째까지 듣지 않을 때는 공개적으로 교회에서 징계를 행하는 것이다,

          이러한 예를 성경에서 찿아 보면…

          고전5: 1~13 음행하는 자가 교회 안에 있자~

          1너희 가운데 음행이 있다는 것은 다 알려진 바로되 즉 어떤 자가 자기 아버지의 아내를
             취하였다는 것이니 그러한 음행은 이방인들 가운데도 없는 일이라
          2그런데도 너희가 통곡하기는커녕 교만해져서 이런 행위를 한 자를 너희 가운데서 쫓아내지 
             아니하는도다.
          3내가 참으로 몸으로는 떠나 있으나 영으로는 함께 있어서 이런 행위를 한 그 자를 내가 마치
              거기에 있는 것처럼 이미 판단하였느니라.
          4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너희와 나의 영이 함께 모인 것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5그러한 자를 사탄에게 넘겨주어 그 육신은 멸망케 하여도 그 영은 주 예수의 날에 구원받게

              하려 함이라
          6너희의 자랑하는 것이 좋지 아니하도다. 너희는 적은 누룩이 온 반죽을 부풀게 하는 것인 줄
             알지 못하느냐?
          7그러므로 묵은 누룩은 떼어내 버리라. 그래야 너희가 누룩을 넣지 않은 새 반죽이 되리라.
              우리의 유월절 양이신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희생되셨으므로
          9내가 너희에게 쓴 편지에는 음행하는 자들과 사귀지 말라고 하였으나
          10이는 이 세상의 음행하는 자들이나 탐욕하는 자들이나 약탈하는 자들이나 우상 숭배하는
                자들과 전혀 함께하지 말라는 것이 아니니 그렇게 하려면 너희가 세상 밖으로 나가야 할
                것이니라.
          11그러나 이제 내가 너희에게 쓰는 것은 만일 형제라고 하는 어떤 자가 음행을 하는 자거나
                탐욕하는 자거나 우상 숭배하는 자거나 욕설하는 자거나 술 취하는 자거나 약탈하는
                 자이거든 사귀지도 말고 그런 자와는 함께 먹지도 말라는 것이라.
          12밖에 있는 자들을 판단하는 것이야 내게 무슨 상관이 있으리요마는 안에 있는 사람들이야
               너희가 판단하지 아니하겠느냐?
          13밖에 있는 자들은 하나님께서 판단하시나니 그러한 악한 사람은 너희 가운데서 쫓아내라.

          이 구절은 교회의 명예가 상처를 받는 것으로 개인적인 일이 아닌 공적인 경우의 일로서 교회에서 판단하고 그 사람을 징계하여야 하는데 바로 행하지 못함을 보고 바울이 책망하고 있는 구절로서 교회의 징계에 대하여 잘 알 수 있는 구절이다.

          1절: 믿지 않는 자들인 이방인 가운데도 없는 아버지의 아내를 음행하는 일이 발생.

          2절: 교회라 하면서 이방인들이 하지 않는 일이 발생하였음에도 이를 반성하고 통곡하기는
                커녕 교만해져서, 음행한 자를 교회에서 쫓아 내지 않고 있는 모습
                (지금처럼 사랑을 운운 하면서 자신들이 사랑이 많은 자처럼 교만하여 심판치 못함)

          3절: 바울은 멀리 떨어져 있으나 음행한 자를 이미 판단함(판단치 않고 감싸는 등의
                행위는 잘못된 일임을 지적.)

          4~5절: 교회의 법칙은 세상의 법보다 더 엄격하여 무서운 법으로/ 죄를 지어 3번의
                  권고에도 불구하고 이를 듣지 않아 공개적으로 징계하는 (이방인과 같이 여기고,
                  교회에서 쫓아 냄)것은 물론 기도로써 그 사람을 사탄에게 넘긴다(사탄에게
                  넘긴다는 것은 그 사람의 육신이 더 죄를 짓지 않게 하기 위하여 그의 육신의
                  죽음을 뜻한다)

          6~7절: 적은 누룩이 온 반죽을 부풀게 하는 것이기에 묵은 누룩을 떼어 내는 징계를 하는
                  것으로 이렇게 징계를 함으로써 순수하게 교회를 지키라는 것(새 반죽이
                  되도록)으로 죄를 덮어 주는 것이 아니다.(묵은 누룩을 떼어 내야 하는 것이다)
          9~10절: 4절에서 7절과 같이 교회 내에서 판단하고 징계하라고 하는 말씀이지 “ 죄 
                   가운데 있는 세상의 사람들과도 상관치 말라는 것이 아니다”라는 것을 예를
                   들면서 말씀.

          11절: 형제(믿는 자인 성도)가  죄를 지으면 사귀지도 함께 먹지도 말라고 다시 한번
                 구분하여 말씀하시고

          12~13절: 교회 안에서는 당연히 판단하는 것이 옳은 것이고 세상의 사람들 곧 믿지 않는
                    자들은 하나님께서 판단하심을 말씀.

          교회 밖에서 교회를 공격하는 것을 막는 것은 쉬운 일이나, 교회 내에서 교회를 공격하는 것을 막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기에 “교회의 규칙”대로  행하여서 교회의 순수성을 잃지 않아야 함이다.

          교회 내의 문제 중에서 개인적인 문제 발생으로 개인간 권고와 책망을하는 일들은(징계의 순서 중 1~2번째) 지역교회 목사는 거론하지 않으나 공개적으로 교회를 비방하고 공격하는 일들은 지역교회 목사가 공개적으로 거론 하고 징계를 하는 것은 성경적임을 알 수 있다.




          교회 권징의 핵심

          교회의 권징을 위한 모델은 우리 하늘 아버지께서 자녀들에게 행하시는 권징입니다. 히브리서는 "주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를 권징하시고 그의 받으시는 아들마다 채찍질하심이니라 하였으니"(히 12:6)라고 말씀합니다. 또한 권징의 목적은 의로움입니다. "무릇 징계가 당시에는 즐거워 보이지 않고 슬퍼 보이나 후에 그로 말미암아 연달한 자에게는 의의 평강한 열매를 맺나니."(히 12:11)

          권징의 중심은 그리스도를 믿는 신자들이 서로를 돌보는 한 방법입니다. 그것은 사랑 속에서 진실을 말하는 것입니다. 또한 예수 그리스도를 모욕하는 심각하고 회개하지 않은 죄로부터 교회를 보호하는 방법이기도 합니다.

          I. 두 종류의 권징

          교회 안에서 두 가지 종류의 권징이 있습니다.
          형성적(formative) 권징 견책적(corrective) 권징입니다.

          형성적 권징

          "형성적 권징"이 훨씬 더 자주 시행됩니다.
          사실 형성적 권징은 모든 교인에게 항상 행해집니다.
          이것은 긍정적인 지도와 가르침을 통해 그리고 형성(formaiton)을 통해 그리스도 안에서 사람들을 성숙하게 양육해 가는 과정일 뿐입니다.
          설교 말씀을 듣고 죄를 깨닫게 될 때, 또는 그리스도인이 서로를 격려할 때, 이것이 형성적인 권징입니다. (예를 들어 에베소서 4:11~12, 히브리서 10:24~25, 골로새서 3:16 참조) 이러한 권징은 하나님께서 견책적 권징이 필요한 죄를 막기 위해 사용하시므로 중요합니다. 교회가 형성적 훈련에 의해 더욱 주님의 모습을 닮아갈수록, 견책적 권징이 덜 필요합니다.

          견책적 권징

          "견책적 권징"은 특정 교인의 죄에 대한 구체적인 훈계 또는 견책입니다.

          때로는 견책적 권징은 비공식적입니다. 한 교인이 다른 교인에게 "이봐, 톰, 그건 잘못된 거 같아."라고 하는 식입니다. 때로는 공식적입니다. 전체 성도들이 함께 이렇게 말합니다. "메리, 우리는 당신이 자신을 기독교인이라고 주장하는 것을 압니다. 그러나 거짓말하는 것을 멈추지 않으므로 당신을 비기독교인처럼 대해야 합니다 "

          "신중한 교회(Deliberate Church)"에서 마크 디버(Mark Dever)와 폴 알렉산더(Paul Alexander)는 다음과 같이 두 가지 유형의 권징 사이의 관계를 설명합니다. "우리가 육체의 훈련을 위해 그리스도의 몸에서 권징을 비교한다면 형성적 권징은 제대로 먹고 운동을 하는 것이라면, 견책적 권징은 마치 수술과 같은 것입니다."

          II. 견책적 권징의 이점

          오늘 우리는 이 두 종류의 권징 중 견책적 권징에 집중할 것입니다. 견책적 권징의 이점은 무엇입니까? 몇 가지가 있습니다.

          • 첫째, 견책적 권징은 권징받는 사람의 유익을 위한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사랑을 베푸는 것이 아니라는 이유로 권징을 반대합니다. 그러나 사실 권징은 죄의 위험에 대해 경고하고 회개할 것을 요구하는 것입니다.
          • 둘째, 견책적 권징은 다른 크리스천들에게도 도움이 됩니다. 교회가 죄에 대항하여 말하고 행동할 때 전체 회중은 죄의 심각한 성격과 그 결과를 알게 됩니다.
          • 셋째, 견책적 권징은 교회 전체에 도움이 됩니다. 교회 권징은 도덕적 붕괴로부터 개교회를 보호함으로써 순결을 유지해 줍니다. 또한 교회에 다툼과 갈등을 가져오는 죄를 해결합니다.
          • 넷째, 견책적 권징은 교회의 공동체적 증거(corporate witness)에 유익하며, 따라서 비 기독교인들에게도 유익합니다 .견책적 권징은 전도 시 공동체적 증거를 강력하게 보호합니다. 왜냐하면 세상과 다른 삶을 사는 신자들의 온전한 공동체가 있을 때 사람들은 알아차리기 때문입니다. 변화된 사람들의 공동체, 즉 비 기독인들에게 사람들이 진정으로 변화될 수 있다는 희망을 주는 공동체를 만들어내는 데 도움이 됩니다.
          • 마지막으로, 그리고 아마도 가장 중요한 유익은 견책적 권징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라는 점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우리 자신이 아닌 하나님이 높아지시게 하려고 부름을 받았습니다. 우리의 삶은 세상에서 하나님의 성품을 그대로 보여주며,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세상의 눈에서 볼 때 빛나시기를 원합니다. 그중 한 가지 중요한 부분은 그분의 위대한 이름에 먹칠을 하게 될 죄를 교회에서 다루어야 할 책임입니다.

          교회 권징이 필요할 때, 어떻게 실행해야 합니까? 또한 어떻게 그리스도를 높이면서 동시에 연합을 증진하는 방법으로 권징을 할 수 있습니까? 성서는 여러 상황에서 권징의 적절한 사용에 대한 지침을 줍니다.

          III. 당신에게 개인적으로 죄를 지은 사람이 있다면?

          첫째, 누군가가 당신에게 죄를 지으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어떻게 반응해야 합니까? 거리낌 없이 상대에게 말한 다음, 더 이상 상대와 말하지 않습니까?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몇 년 동안 원한을 품고 있습니까? 아닙니다. 그런 방식은 성경에서 주어진 옵션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마태복음 18장 15~17절에서 이 질문에 답하고 계십니다.

          '네 형제가 죄를 범하거든 가서 너와 그 사람과만 상대하여 권고하라. 만일 들으면 네가 네 형제를 얻은 것이요. 16 만일 듣지 않거든 한 두 사람을 데리고 가서 두 세 증인의 입으로 말마다 증참케 하라. 17 만일 그들의 말도 듣지 않거든 교회에 말하고 교회의 말도 듣지 않거든 이방인과 세리와 같이 여기라.'

          예수님께서는 이 상황에서 그리스도인이 따라야 할 최소한의 세 단계를 구체적으로 설명하십니다. 첫째, 가서 죄를 범한 형제와 이야기하십시오. 둘째, 형제가 듣지 않을 경우, 한 두 명의 다른 사람들을 데리고 가서 다시 이야기하십시오. 셋째, 그가 여전히 듣기를 거부한다면 교회에 말하십시오. 그가 회개하기를 거부하면 교회는 결국 그를 내쫓을 수 있습니다.

          1단계: 가서 형제에게 잘못을 보여주십시오.

          첫 단계에 대해 자세히 생각해 봅시다. 대부분의 경우, 죄를 범한 사람과 이야기하면 다른 사람이 개입하지 않아도 분쟁을 해결할 수 있습니다. 사실 이것이 우리 형제를 얻기 위해 우리가 희망해야 하는 상황입니다. 이 점을 감안할 때, 우리는 이런 상황에서 상대와 마주하기 전에 자신의 마음과 생각을 준비하는 데 시간을 할애해야 합니다.

          마음 준비하기

          켄 산드(Ken Sande)는 자신의 저서 '피스메이커(The Peacemaker')에 이렇게 하는 방법에 대한 몇 가지 제안을 합니다.

          • 먼저 대면할 사람을 위해 기도하십시오. 하나님께서 그 사람을 영적으로 성장시키시도록, 그가 하나님을 더 알기 원하도록 기도하십시오. 이렇게 하면 이야기를 준비할 때 그 사람을 향한 당신의 마음이 부드러워질 것입니다.
          • 둘째, 죄를 범한 사람에게 가야 할 정당한 이유가 있는지 확인하십시오. 우리의 마음은 매우 기만적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형제나 자매에게 갈 성경적 근거가 있는지를 신중하게 기도하고 생각하십시오. 또한, 기도하는 마음으로 이 분쟁에서 당신이 이 사람으로부터 용서를 구해야 하는 잘못이 있는지 생각하십시오. 마태복음 7장 5절에서 예수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외식하는 자여 먼저 네 눈속에서 들보를 빼어라 그 후에야 밝히 보고 형제의 눈속에서 티를 빼리라."
          • 셋째, 자신의 마음을 점검해보십시오. 당신의 동기가 적절한지, 그리고 분노, 복수, 교만 또는 다른 죄가 되는 태도에서 죄를 범한 사람에게 가려는 것이 아닌지 확인하십시오(로마서 12:19). 대신, 당신의 목표가 그 형제와 자신 모두의 유익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화해인지 확인하십시오. 자신의 마음 속에 있는 불편함을 없애고 싶은 것입니까, 아니면 형제가 죄에서 벗어나도록 섬기고 돕기 위한 것입니까?
          • 넷째, 단순히 자기 기분이 좋아지려고, 또는 공감하고 들어줄 사람을 만들려고 형제의 죄를 다른 사람들과 이야기하지 마십시오. 죄를 범한 형제에게 접근하는 방법에 대한 지혜가 필요하거나 실제로 죄를 저지른 것인지 확실하지 않은 경우에는 다른 사람과 상황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이 좋습니다. 그러나 분노를 분출하려고 대화를 사용하는 것은 수군거림입니다. 그것은 화합을 약화시키고 마태복음 18장을 위반하는 것입니다. 사실, 다른 사람으로부터 조언을 구할 때조차도, 죄를 범한 사람의 이름을 언급하지 않은 채 조언을 얻을 수 있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 다섯째, 가해자와 대면할 때 온유와 겸손, 사랑의 정신으로 행동하고 말하는 것을 잊지마십시오. "유순한 대답은 분노를 쉬게 하여도 과격한 말은 노를 격동하느니라" (잠 15:1).

          마태복음 18장에 설명된 과정의 두 번째 단계로 넘어가기 전에 두 가지만 더 짚어 보겠습니다.

          모든 허물을 다루어야 합니까?

          먼저, 자신에게 이렇게 자문하고 있을지 모릅니다. "모든 작은 허물에 대해서도 형제에게 가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일까? 물론 아닙니다. 잠언은 허물을 용서하는 것은 인내와 참을성을 보여주는 영광스러운 것이라고 말합니다(잠 19:11). 베드로는 사랑이 허다한 죄를 덮는다고 알려줍니다(벧전 4:8).

          허물로 인해 두 사람 사이에 불화의 상태가 생긴 경우 또는 죄를 범한 사람에게 위험이 될 때만 형제 또는 자매에게 가야 합니다. 날마다 그 허물이 생각납니까? 그 사람을 용서하기가 어렵습니까? 그 죄가 얼마나 크든 작든 상관없이 그 삶이 그리스도를 주변 세계에 나타낼 수 있는 능력을 위태롭게 할지도 모릅니까? 그 죄로 인해 더 큰 어려움이 생길 것이라는 사인이거나 그렇게 될 가능성이 있습니까? 그러한 질문에 대한 답이 "예"라면 형제나 자매를 만나야 할 것입니다.

          화해는 당신이 죄를 지은 것이든 아니든 간에 당신의 책임입니다.

          둘째로, 마태복음 18장은 잘못으로 피해를 본 사람이 죄를 지은 사람과 화해하도록 요구하고 있지만, 마태복음 5장 23~24절은 죄지은 사람이 화해를 구하도록 요구합니다.

          그러므로 예물을 제단에 드리다가 거기서 네 형제에게 원망 들을만한 일이 있는줄 생각나거든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

          그리스도인 사이의 좋은 관계는 너무 중요하기 때문에 예수님은 죄를 범한 사람에게 예배의 행위를 중단하고라도 화해를 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두 구절이 함께 제시하는 그림은 얼마나 놀라운가요! 두 명의 기독교 형제 사이에 갈등이 있을 때, 둘 다 화해를 시작해야 할 의무가 있습니다. 그들은 화해를 위해 서로 달려 가야 합니다!

          2단계: 한두 명을 증참케 하라

          죄를 범한 사람이 듣지 않는다면, 예수님은 우리에게 한두 명의 다른 사람을 데려가서 그와 이야기하라고 가르치십니다. 이것은 두 가지 효과가 있습니다. 첫째, 죄를 범한 사람은 자신이 죄를 범한 대상보다 제삼자의 말을 들을 가능성이 더 높습니다. 둘째, 권징 과정이 다음 단계로 진행될 경우 추가적인 인원이 회중의 증인 역할을 합니다.

          이 단계에서 자신이 잘못을 당한 사람인 경우, 두 가지를 명심하십시오.

          • 첫째, 죄가 얼마나 객관적인지를 고려하십시오. 결국 의견이나 관점의 문제인 것으로 형제와 마주하고 있습니까? 예를 들어, 그 형제가 너무 많은 돈을 지출하고 있다고 생각하거나, 또는 너무 교만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상대방을 마주하고 있습니까? 그것들은 정당한 우려일 수도 있지만, 교회 앞에서 입증될 수 있는 문제는 아닙니다. 이런 우려에 대해 당신이 그 사람과 이야기했고 그들과 당신이 의견이 맞지 않았다면, 그 문제를 내려놓고 성령의 깨닫게 하시고 회복시키시는 역사를 위해 기도하는 것이 가장 좋습니다. 교회 권징의 과정은 구체적이고 쉽게 입증되는 문제에 대한 것입니다.
          • 둘째, 당신이 데려가는 사람들이 신뢰할 수 있고, 신중하고, 공평하며, 훌륭한 판단력을 가졌는지 확인하십시오. 죄를 범한 사람은 그런 이들의 말을 들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 셋째, 죄를 범한 사람에게 하기 전에 당신이 하려고 하는 바를 알리십시오. 교회 권징에 대한 예수님의 지시를 따르고 있다는 바로 그 인식 때문에 그 사람이 더 신중하게 생각하고, 마음을 바꾸고, 회개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 마지막으로, 증인이 자신의 편을 들도록 로비하지 않게 조심하십시오. 그것은 수군거림 또는 중상모략일 수 있습니다.

          3단계: 교회에 알리기

          죄를 범한 사람이 여전히 듣기를 거부한다면, 이 문제는 교회로 가져가고, 그가 회개를 거부하면 교인 자격이 취소됩니다.

          마태복음 18장의 예수님의 가르침은 최대치의 표준이 아니라 최소치라는 점에 유의할 필요가 있습니다. 다시 말해, 예수님이 명령하신 것보다 더 많은 것을 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단지 덜 해서는 안 됩니다. 예를 들어, 예수님은 전체 교회에 문제를 맡기기 전에 장로들에게 이야기하는 것을 언급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전형적으로 취하는 적절한 단계입니다.

          마태복음 18장의 패턴을 아셨습니까? 단계마다 더 많은 사람이 도움을 주기 위해 참여합니다. 최종 단계에 이르러 그 사람이 교회에서 나가 세상에 던져진다고 하더라도, 말하자면, 세상조차도 하나님의 뜻이라면 회개케 하기 위해 섭리적으로 사용됩니다.

          IV. 만약 당신이 한 교인이 다른 교인에게 죄를 짓는 것을 보게 된다면?

          마태복음 18장은 누군가가 우리에게 죄를 짓는 경우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대한 가르침을 줍니다. 그러나 형제나 자매가 죄를 지은 것을 알았지만, 그 죄가 당신에 대한 것이 아니라면 어떻게 될까요? 어쩌면 다른 기독교인을 상대로 죄를 지었을 수도 있고, 아니면 그의 죄가 전혀 어떤 개인에 대한 것이 아닐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그 사람과 그 죄에 대해 이야기 할 성경적 의무가 있습니까?

          대답은 '예'이지만, 자격이 있을 경우에 한해서입니다.

          갈라디아서 6장 1절은 우리에게 다음과 같이 알려줍니다. "형제들아 사람이 만일 무슨 범죄한 일이 드러나거든 신령한 너희는 온유한 심령으로 그러한 자를 바로잡고." 그리고 누가복음 17장 3절에는 "만일 네 형제가 죄를 범하거든 경계하고 회개하거든 용서하라."고 말합니다.

          다른 한편으로 성경은 다른 사람들의 잘못을 지적할 기회를 찾는 일만 만드는 자(busybodies)가 되지 말라고 경고합니다. (데살로니가후서 3:11에 '일만 만드는 자들'이 되는 것에 대한 경고와 베드로전서 4:15에 '남의 일을 간섭하는 자(meddlers)'에 대한 경고 참조) 우리는 모두 죄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목격한 모든 죄에 주의를 기울이는 것은 비생산적입니다. 우리가 형제나 자매에게 죄에 대해 접근하는 것이 적절한 때를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여기에는 어떤 엄격하고 확고한 규칙이 없으며, 하나님이 각 상황에서 주시는 지혜에 달려 있습니다. 그러나 도움이 될만한 몇 가지 질문이 있습니다.

          • 첫째, 이 죄가 하나님을 공개적으로 모욕하는 것입니까? 외인들이 그것을 보고 있습니까? 그리고 그 죄가 하나님에 관한 거짓을 말해서 그리스도인에 대한 외인들의 인식에 영향을 줍니까?
          • 둘째, 다른 사람을 해치는 죄입니까? 다른 그리스도인들이 유혹을 받게 하거나 나쁜 예를 만들고 있습니까?
          • 셋째, 죄가 그리스도의 몸 안에서 불화와 분열을 일으킬 수 있습니까?
          • 또는 마지막으로 죄가 심각하게 죄를 지은 사람을 해치고 있습니까? 그가 하나님과 맺는 관계에 해를 끼치고 있습니까?

          그러한 질문에 "예"라는 답이 나온다면, 그 죄에 대해 죄를 범한 사람과 이야기하는 것이 적절할 것입니다.

          V. 누군가가 교회 전체에 대해 공개적으로 죄를 짓는다면?

          지금까지 우리는 개인적인 죄에 대해 이야기해왔습니다. 단지 극소수의 사람들만 죄에 대해 알고 있거나 죄의 영향을 받는 경우입니다. 그러나 교인의 죄가 공개적이고 중대한 경우, 교회 회중 내에서 또는 심지어 공동체 밖에서조차 공개적으로 알게 된 문제일 경우 어떻게 됩니까?

          우리는 고린도전서 5장 1~11절에서 바울이 아버지의 아내와 불륜을 저지른 심각한 범죄에 대해 해당하는 사람을 추방하라고 회중에게 권고하는 상황을 봅니다.

          그런 공개적인 죄로 인해 바울은 마태복음 18장의 처음 두 단계를 따르도록 교회에 권고하지 않습니다. 단순히 죄를 범한 사람을 추방하라고 권고합니다. (고린도전서 5:4~5, 11, 23, 데살로니가후서 3:6, 로마서 16:17 참조) 사실 교회가 이러한 상황에서 행동을 취하지 않으면 교회는 직무 태만입니다.

          바울은 적어도 두 가지 이유로 교회가 이 사람을 파문시키기를 바랐습니다.

          • 첫째, 그것은 그 사람의 이익을 위해서였습니다. 그를 교회에서 추방하는 것은 그의 신앙 고백이 거룩하지 못한 삶에 의해 훼손되었다는 것을 그에게 분명하게 해줍니다.
          • 둘째, 교회가 아무 것도 하지 않았다면, 심각하면서도 회개하지 않는 죄에 대해 대중적으로 승인하는 것이 되며, 그리스도께서 죄에 관심을 두지 않는다는 메시지를 주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그리스도의 명성이 보존될 수 있도록 행동할 것을 교회에 권고합니다.

          VI. 교회 지도자가 죄를 짓는다면?

          마지막으로, 교회 지도자들 사이에서의 죄에 대해 성경이 말한 것을 생각해보겠습니다.
          그러한 상황을 위한 지도 구절은 디모데전서 5:19~20절입니다.

          장로에 대한 송사는 두 세 증인이 없으면 받지 말 것이요 범죄한 자들을 모든 사람 앞에 꾸짖어 나머지 사람으로 두려워하게 하라

          여기서 바울의 목표는 거짓 공격과 비난으로부터 장로들을 보호하는 것입니다. 장로를 상대로 어떤 권징 조치가 취해지기 전에는 그 죄에 대한 두세 명의 증인이 있어야 합니다. 이 구절이 지혜롭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교회 지도자들은 근거 없는 비난을 받을 수 있는 상황에 자주 연관되므로 보호받을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좋습니다.

          이 구절을 염두에 두고 두 가지 상황을 살펴보겠습니다. 당신이 장로를 비난하는 소문이 듣게 된다면? 그리고 당신이 개인적으로 죄 가운데 있는 장로를 만나게 된다면?

          당신이 장로의 죄에 대한 소문을 들을 경우

          어떤 사람이 장로에게 죄에 있다고 말하는 것을 들으면 어떻게 될까요? 당신의 책임은 무엇입니까? 다음과 같은 간단한 한 가지 규칙이 있습니다. 수군거림 및 중상모략의 당사자가 되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소문을 얘기한 사람에게 그 장로와 이야기하고, 당신에게 얘기하지 말라고 하십시오. 적극적으로 그 장로에 대한 비방을 퍼뜨리지 못하도록 하고, 대신 상황을 성경적인 방식으로 다루십시오.

          당신이 죄를 짓는 장로를 목격하는 경우

          장로가 당신에게 개인적으로 죄를 짓거나 아니면 장로가 죄를 짓는 것을 목격한다면 어떨까요? 그다음은 어떻게 하나요? 다음은 몇 가지 지침입니다.

          먼저 그분에게 이야기하십시오. 물론, 실제 상황은 당신이 생각하는 것과 다를 수 있음을 명심하십시오. 겸손하게 행동하십시오. 그분이 교회에서 책망할 것이 없다고 인정받아서 장로의 위치에 있다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장로에게 무죄 추정의 원칙을 적용하십시오.

          둘째, 혼자 상황을 처리해야 한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교회에서 다른 개인(또 더 좋은 방법은 다른 장로)에게 당신의 우려에 대해 말해 보는 것이 좋습니다. 최소한의 인원으로 이 문제를 조용하고 신중하게 유지하려는 의도가 있다면, 디모데후서 5:19의 의도를 위반하지 않습니다.

          이 본문의 특정 단어가 여기서 유익합니다. "장로에 대한 송사를 받지 않는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다른 사람의 도움을 요청할 수 없거나 당신의 말은 듣지 못하도록 금지한다는 뜻입니까? 아닙니다. '송사를 받는다(그리스어 paradechomai)'라는 말은 단순히 무엇을 듣거나 고려하는 것이 아니라 "사실로 받아들이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장로에 대한 송사는 두 세 증인이 없으면 사실로 받아들이지 말 것이요."라고 이 구절을 번역할 수도 있습니다.

          따라서 장로가 당신에게 죄를 지었고 그에 대해 도움이 필요하다면, 다른 교인이나 장로에게 도움을 청할 수 없다거나 또는 그들이 도움 주는 것이 금지된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그것은 단순히 다른 사람이 당신의 주장이 사실인지 아닌지를 신중하게 조사하지 않고, 맹목적으로 고발을 사실로 받아들이지 않아야 함을 의미합니다. 그것이 사실이라고 판단되면, 그는 디모데후서 5:19에서 요구되는 '증인' 중 하나가 됩니다.

          셋째, 교회 지도자가 당신과 만났을 때 회개하지 않으려 한다면, 그 문제를 계속할지를 신중히 결정하십시오. 다시 말하지만, 해당 사안이 객관적인 문제인지 또는 의견이나 관점의 문제인지의 여부를 결정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후자의 경우 사안을 포기하는 것이 가장 좋습니다. 그러나 객관적 문제, 예를 들어 횡령이나 간통 같은 경우, 하나님 앞에서 계속해서 딤전 5:19을 수행하는 것이 당신의 책임입니다. 죄를 목격한 다른 사람들과 이야기하고 당신과 함께 장로와 대면하도록 요청하십시오. 필요한 경우 다른 장로들에게 이 일을 말하십시오. 디모데후서 5장 19절에 언급된 증인의 역할을 하게 될 것입니다.

          넷째, 권징 절차가 시작되면, 잘못을 당한 사람은 그와 함께 공동 기소자가 될 한 명 이상의 개인을 데려 와야 합니다. 눈으로 직접 본 사람이 아니라고 할지라도 문제를 신중하게 조사했다면 디모데전서 5:19의 증인의 역할을 수행할 수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장로가 범한 죄는 매우 심각하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바울은 교회에 죄를 지은 장로를 공개적으로 책망하도록 명령합니다. 즉, 죄악의 성격에 관한 어떤 진술이 교회에 이루어져야 함을 의미합니다. 신뢰를 깨뜨린 지도자는 적절한 공개적 대응이 있을 때만 복귀될 수 있습니다. 분명히 리더십은 더 큰 짐을 지니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장로의 죄가 교회에 더 큰 상처를 입히기 때문입니다.

          VII. 결론

          교회로서 우리는 그리스도의 거룩함과 순결을 나타내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리스도의 명성을 지키도록 힘써야 하며, 이를 위해서 우리는 교회 권징이라는 아이디어를 받아들이게 되는 것입니다. 참으로 우리는 예수님의 이름을 아주 소중하게 생각해야 하며, 이를 위해 우리의 죄로 인해 교회가 더럽혀지지 않도록 어떤 권징도 받기를 원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에 대한 이런 종류의 열정의 살아있는 예를 19세기 버지니아의 기록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교회의 원로이며 탁월한 교인이 알코올 중독이 되었습니다. . . . 그는 자신을 교회에 신고하고 자신의 죄를 후회하며 홍수 같은 눈물로 회개를 표시했지만, 교회가 그 의무를 이행하여 자신의 비행으로 인해 교회가 받을 비난으로부터 보호하라고 촉구했습니다. 이 남자의 깊은 고통은 모든 이의 가슴 속에서 동정을 일으켰고, 교회 전체가 눈물을 흘렸습니다. 교인들의 마음이 모여서 그 죄를 사하고 해당 사건을 마무리하자는 제안이 이루어졌습니다. 그리고 많은 사람이 그 의견에 즉시 동조했습니다. 단 하나의 떨리는 목소리가 그것을 반대했습니다. 그 목소리는 바로 죄를 지은 사람 자신의 목소리였습니다. 드디어 지식과 인정받은 경건함을 갖춘 목사님이 일어나셨습니다. 모든 사람이 매우 걱정된 눈으로 목사님을 응시했습니다. 목사님은 그 형제의 불행에 대한 자신의 유감을 표했으며, 모두가 공감했습니다. . . 그러나 목사님은 죄를 지은 형제가 교회의 명예를 위해서 교회는 가장 단호한 방식으로 그가 지은 죄의 행동에 대해 허가하지 않음을 표현해야 하고 죄를 지은 사람을 출교시켜야 한다는 생각에 동의한다고 결론을 내렸습니다. . . 교회는. 마지 못해서 목사와 죄를 지은 사람의 일치한 견해에 순종했습니다. 죄를 지은 사람은 출교되었지만, 1~ 2개월 후 복귀했습니다. 그는 우리가 아는 한 그 이후로는 구주의 이름을 욕되게 하는 일을 한 적이 없습니다(Joseph S. Baker, "교회 권징", Polity , Mark Dever 편, 266쪽)

          우리 모두는 개교회에서 그리스도의 이름에 대한 이런 열정을 갖기를 바랍니다.








          마태복음 18장은 다양한 주제를 소개합니다.

          1-14. 어린 아이에 대한 교훈과 경고.
          1-6. 천국에서 큰 자. 소자를 실족케 하는 화.
          7-10. 죄의 유혹과 죄에 대한 단호한 태도와 처치.
          11-14. 길 잃은 양을 찾는 비유.
          15-18. 죄를 범한 형제를 취급하는 방법.
          19-20. 일치의 기도.
          21-35.  사람을 용서하는 일, 그 예.



          형제가 죄를 범하거든 그 사람에게 권고하라고 합니다.
          만일 듣지 않을 경우에는 두 세 사람의 증인을 데리고 가서 권고하되 그래도 듣지 않으면 이방인과 세리와 같이 여기라고 합니다.

          "권고(眷顧)"란 한자의 훈(訓)은 "돌볼 권(眷)" "돌아볼 고(顧)"라고 하여 "돌보아 줌" 또는 "정을 두고 돌봄"을 의미합니다.

          권고하다는 헬라어는 "에렝코(ĕlĕngchō, ἐλέγχω)"라고 합니다.
          '에렝코'는 "빛으로 가져오다, 증명하다, 견책하다" 라는 뜻입니다.


          교회는 거룩한 공동체이므로 거짓된 것과 부정한 것 그리고 죄악된 것을 용납할 수 없다는 교훈입니다.

          그러나 교회 부흥과 성장이 목표가 된 이후에 이와 같은 교훈은 무너지고 말았습니다.
          왜냐하면 동일한 지역에서 어느 한 교회에서 권고를 받은 교인이 다른 교회로 옮기면 오히려 그 교회에서는 두 손을 들고 환영하기 때문에 권고하는 교회는 그 지역에서 성장할 수 없는 교회가 되기 때문입니다.




           
           


           



          권고하라(1651) 에렝코(ĕlĕngchō) ἐλέγχω 

          1. 빛으로 가져오다,  2. 증명하다,  3. 견책하다
          발음 / 에렝코(ĕlĕngchō)
          어원 / 미래 ἐλέγξω, 제1부정과거명령 ἔ- λεγξον, 제1부정과거부정사 ἐλέγξαι, 제1부정과거수동태 ἠλέγχθην, 불확실한 유사어에서 유래
          관련 성경 / 권고하다(마18:15), 드러나다(요3:20), 책 망하다(요16:8, 딛1:9, 계3:19), 책잡다(요8: 46), 꾸짖다(딤전5:20, 딛1:13), 정죄하다(약2:9), 경책하다(딤후4:2), 꾸지람을 받다(히12:5), 책망을 받다(눅3:19, 엡5:13), 가책을 느끼다(요8:9).
          신약 성경 / 17회 사용

          권고(眷顧) / 돌볼 권(眷), 돌아볼 고(顧)
          - 돌보아 줌. 정(情)을 두고 돌봄.

          살후 3:15,  그러나 원수와 같이 생각지 말고 형제같이 권하라
          딛 3:10,  이단에 속한 사람을 한 두번 훈계한 후에 멀리 하라
          약 5:19,  내 형제들아 너희 중에 미혹하여 진리를 떠난 자를 누가 돌아서게 하면
          레 19:17,  너는 네 형제를 마음으로 미워하지 말며 이웃을 인하여 죄를 당치 않도록 그를 반드시 책선하라


          교회의 권위는 교인이 잘못했을 때에 그 잘못에 대하여 꾸짖거나 징계하므로 다시는 같은 실수를 교회 내에서 미연에 방지할 수 있는 제도가 실천될 수 있었을 때에 가능합니다.
          그런데 어느 때부터 이런 제도가 실천될 수 없게 된 것은 징계가 솜방망이처럼 그 효력을 기대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A교회에서 징계를 받은 교인이 같은 지역의 B교회로 옮겨간 후에 그 교회에서 활동하며 직분을 맡아 지역 사회에서 그 이름을 드러내게 되면 마치 A교회가 멀쩡한 사람을 죄인 취급한 것처럼 인식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한국교회 초기에는 징계를 받은 교인은 철저하게 회개하며 신앙생활에 이전보다 더 열심으로 자신을 희생하고 헌신하므로 모든 교인들로부터 인정을 받은 후에 다시 직분을 받고 충성하므로 교회의 권위가 세워질 수 있었습니다.

          징계에는 직분을 맡기지 않거나 심지어 교회에 나오지 못하도록 출교하기도 했습니다.
          어떤 교인은 출교를 명받고 끝까지 자기 자리를 지키며 성실하게 신앙생활을 하므로 모두에게 신임을 받아 훗날 신앙의 귀감이 되는 사례도 있었습니다.



           
          징계 한다는 것은 교회안에 잘못된 가르침이나 주장에 대하여 그리고 교훈에 대하여 교회는 권세를 행하여 그들을 매는 것입니다.
          맨다는 것은 금지하는 것입니다.
          또한 출교하는 것입니다.
          출교란 교회에서 쫓아 이방인 같이 여기는 것입니다.
          푼다는 것은 징계를 받았던 자가 회개하고 돌아서면 다시 형제를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그래서 21절부터 용서에 대한 말씀이 나오는 것입니다.      

          즉 이 구절들은 합심기도의 능력이나 모임 숫자의 많고 적음에 대한 문제가 아닙니다.
          교회에 대한 권세가 무엇인지와 그 권세가 어떻게 시행이 되는지에 대한 말씀인 것입니다. 이제 우리가 생각해야 되는 것은 왜 이런 권세가 교회에 필요한가 하는 것입니다. 권징 즉 권고와 징계가 교회에 필요하며 그것이 사람이 세운 것이 아닌 주님께서 교회에 주신 권세이며 이 권세에 대하여 하나님은 승낙하시며 그것을 승인하십니다. 또한 주님도 그들 가운데 계시기 때문에 교회의 결정은 권세가 있는 결정이 되는 것입니다. 왜 교회에 이런 권세가 필요합니까? 무엇을 위해서 입니까? 언제 그리고 누구에게 이러한 교회의 권세가 시행되어야 하는 것을 살펴보면 이것을 주신 목적을 우리가 이해할 수 있습니다.

                   신앙적으로 약한 자들을 미혹하여 잘못된 가르침으로 신앙을 왜곡시키거나 범죄하게 만드는 경우에 권징은 시행이 됩니다. 성도로써 온전하지 못하며 큰 죄를 범하였을 때 교회는 권징을 시행하여 왔습니다. 고린도전서 5:2절을 봅시다. 이 말씀에 바울은 너희 중에 물리치지 아니하였다고 합니다. 물리치지 아니하였다는 말은 쫓아내지 않았다는 말이며 출교를 의미합니다. 이유는 아비의 아내를 취하여 음행 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자에 대하여 교회가 비통하기는 커녕 내버려 두었다는 것입니다. 또한 11절에서 언급된 자들과는 사귀지도 말고 함께 먹지도 말라는 것은 또한 출교에 해당하는 징계입니다. 교회가 이런 징계를 해야 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교회의 순결성 때문에 그렇습니다. 교회의 순결성을 생각할 때 이것을 주님이 직접하시지 않고 교회에 권세를 주셨다는 사실이 가리키는 것은 우리 스스로 자정하는 능력이 있어야 하며 순결함을 유지해야 할 노력이 있어야 됨을 말하는 것입니다. 교회는 거짓된 복음과 속임수에서 자신을 지키며 순결함을 유지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바른 말씀 위에 세워져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는 무엇이 거짓이며 잘못된 것이며 교회를 세속화 시키는 것인지에 대한 분별력이 없음으로 순결함을 잃어 버리고 세상에 함몰되고 마는 것입니다.






















































































































































































































































          선교사 이야기


          토마스 선교사(Robert Jermain Thomas, 1840-1866)


          16세기 독일의 위대한 화가였던 알브레히트 뒬러(Albrecht Durer, 1471-1528)는 ‘그림’(painting)에는 두 가지 목적이 있는데,
          첫째는 교회를 위해 봉사하는 것
          둘째는 죽은 자를 기억하는 것

          오늘 우리의 ‘기념(commemorate)'에도 두 가지 목적이 있다고 생각한다.

          첫째는 교회와 성도들에게 유익을 주는 일
          둘째는 토마스 목사가 걸어갔던 믿음의 길을 기리는 일

          이 목적을 위해 우선 토마스 목사가 살아갔던 삶의 여정을 간략하게 소개하고자 한다.
          이를 통해 우리들의 신앙과 삶, 그리고 오늘의 교회 현실을 성찰해 보는 기회가 되기를 바란다.

           
          1. 출생과 가정 배경, 학교교육

          로버트 저마인 토마스(Robert Jermain Thomas, 1840-1866)는 로버트 토마스(Robert Thomas, 1810-1884)와 메리 윌리암스(Mary L. Williams, 1817-1895)의 6남매 중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아버지 로버트 토마스는 당시 웨일즈의 위대한 설교가이자 웨일즈 부흥을 주도한 윌리엄 윌리엄스의 제자인데, 중부 웨일즈에 있는 신학교에서 수학했다.

          1837년 4월 18일 목사 안수를 받은 그는 1839년 여름 라야더(Rhayader)의 터바나클 교회 부임했는데, 바로 이곳에서 둘째 아들 저마인 토마스가 출생했다.

          로버트 토마스 목사가 이곳에서 사역하는 동안 강력한 성령의 역사 일어났고 교회 부흥의 역사를 경험하였다. 이곳에서 목회하면서 1795년에 창립된 런던선교회에 후원금을 보내기 시작하는데, 후에 그의 아들이 런던선교회의 파송으로 중국으로 향하게 된 것은 흥미로운 관련이 아닐 수 없다.

          로버트 토마스 목사는 1848년에는 몬머스셔(Monmouthshire)의 하노버교회로 이동하게 된다.
          이때 저마인 토마스는 8살이었다. 토마스는 이곳 하노버에서 청소년기를 보내게 된다.

          토마스의 교육에 대한 정확한 기록은 남아 있지 않으나 최초의 공교육이 이루어 진 곳은 란도버리(Landovery) 칼리지에 3년간 공부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때 그는 헬라어와 라틴어, 그리고 프랑스어를 공부했는데 이때부터 다른 아이들에 비해 언어능력이 탁월했다고 한다. 그가 언어에 재능이 있었다는 점은 그 이후의 다른 기록에서도 확인되고 있다. 그후 토마스는 오스포드대학교 지저스 칼리지에 장학생으로 공부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으나 나이 어리다는 이유로 입학이 보류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토마스는 도제식 의학교육을 받았다고 한다. 스텔라 프라이스(Stella Price)에 의하며 토마스는 외과의사가 되는 교육을 받으라는 주변의 권고를 받고 워터만(Waterman) 의사 휘하에서 2년간 의학 교육을 받았다고 한다. 당시에는 왕실의사면허 시험 제도가 있어 공인된 의사 밑에서 훈련을 받고 시험에 합격하면 의사가 될 수 있었다고 한다. 그가 2년여 이런 교육을 받았으나 적성에 맞지 않았고, 육신의 치료자보다는 영혼의 치유자가 되고 싶었다. 그러든 중 잉글랜드 노스헴톤 지역 온들(Oundle)에 있는 알프레드 뉴스 학교(Alfred Newth’s school) 보조교사로 부름을 받고 약 1년간 일하게 된다. 이 학교 교장 알프레드 뉴스는 중국선교를 준비했던 사람으로 로버트 모리슨에게 중국어를 배운 인물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토마스는 알프레드 뉴스를 통해 중국에 대한 관심을 가지게 된다. 이곳에서 지내는 동안 토마스는 또 한 사람을 만나게 되는데, 그가 캐를라인 갓프리(Caroline Godfrey)였다. 토마스는 주일에는 온들 회중교회에 다녔는데 주일학교 교사로 봉사하던 중 존 갓프리의 외동딸 캐를라인 갓프리를 만나게 된 것이다. 이 여성은 토마스보다 2살 연상으로 후일 아내가 된다.
          일 년 간의 교사생활을 마감한 토마스는 고향 하노버로 돌아갔고, 이때 아버지 청으로 교회에서 설교를 했는데, 그것이 히브리서 13장 8절의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다”는 본문의 설교였다. 아마도 이것은 자신의 신앙고백이었을 것이다. 토마스는 1857년에는 런던대학교 뉴칼리지에 입학했다. 온들에 있을 때 교장이었던 알프레드 뉴스의 친형인 새무엘 뉴스가 당시 학장이었다. 이곳에서 2년만에 학사학위를 받았고, 이후 3년간 최고의 금액인 밀스장학금을 받았다. 이 시기가 웨일즈의 영적 부흥기였는데 토마스는 교수드르이 만류에도 불구하고 일 년 간 휴학했는데, 휴학기간동안 지역교회에서 설교활동을 한 것으로 보인다. 다시 복학한 그는 중국선교에 대한 조바심으로 학교에 조기 졸업을 요청하는 편지를 보냈다고 한다. 그가 선교의 이상을 갖게 된 데는 귀츨라프의 영향 또한 없지 않았다. 토마스는 1832년 충청남도 보령시의 고대도와 조선 해안을 방문했던 귀츨라프의 항해기를 읽은 것으로 보이는데, 귀츨라프가 서해안을 따라 여행하면서 성경을 보급했듯이 후일 토마스도 동일한 방법을 선택했다. 1859년 10월 토마스는 런던선교회 소속의 록하르트(Lockhart) 선교사의 설교 듣고 큰 감명을 받는데, 그의 설교 또한 선교사의 길에 영향을 주었을 것이다. 록하르트는 1861년에는 영국공사관의 공의로 베이징에서 활동하게 된다.
           
          2. 선교사로의 길

          토마스는 1863년 5월 뉴칼리지 졸업했다, 휴학기간을 포함하여 6년이 소요되었다. 졸업 후인 5월 29일에는 런던의 회중교회에서 온들에서 만난 캐롤라인 갓프리와 결혼했다. 이때 토미스는 23세, 아내는 25세였다. 결혼 6일 후인 6월 4일에는 목사안수 및 선교사 파송식이 거행되었다. 이로부터 7주 후인 7월 21일 토마스 부부는 그레이브센드(Gravesend) 항구 떠나 상해로 출발했다. 그가 중국으로 가게 된 것은 몇 가지 연쇄적 영향도 없지 않았지만 당시 중궁은 인도와 더불어 가장 중요한 선교지였고, 가장 많은 선교사가 파송된 지역이었다.

          토마스는 영국을 떠난지 4개월 만인 1863년 12월 첫주 상하이(上海)에 도착했다. 런던선교회 상하이 지부장 무어헤드(William Muirhead)의 충심의 영접을 받았으나 두 사람 간의 친밀한 관계는 오래 지속되지 못했다. 상하이 도착 2개월 후인 1864년 2월 4일 자로 부모님께 보낸 편지가 남아 있는데 이 문서에는 당시 정황을 헤아리게 해 주는 중요한 문서라고 할 수 있다.
          중국 도착 4개월 후인 1864년 3월 11일 런던선교회의 그리피스 존(Griffith John) 선교사가 사역하고 있는 한커우(漢口)로 갔는데 그 기간동안 임신 중이던 부인은 유산하고 바이러스에 감염되어 1864년 3월 24일 26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토마스는 타지에서 아내의 죽음을 맞게 되었고, 이 일로 큰 충격에 휩싸이게 된다. 사별의 아픔이치유되기도 전에 토마스는 또 다른 고뇌에 빠졌는데, 상하이지부장 무어헤드와의 갈등이었다. 선교관의 차이에서 유래한 갈등은 토마스에게는 심각한 현실이었다. 상하이에 주제하는 영국인을 위해 목회했던 무어헤드는 상하이가 선교 중심이어야 한다고 보았으나 토마스는 자국민보다 중국인 선교가 우선해야 된다고 보았고, 한커우로 가고 싶어 했다. 토마스에게 신설되는 학교 교장직 요청을 받았으나 성경을 가르치는 것이 금지되어 있었음으로 이 사역은 그에게 매력적이지 못했다. 결국 토마스는 런던선교회를 사임하게 된다. 1864년 12월 7일이었다. 곧 이 일을 경솔한 행동이었다고 후회하게 되지만 토마스에게는 성급함과 무모함이 없지 않았다. 고무송 박사는 토마스에게는 모험정신, 강한 의무감, 무모함, 성급함, 엘리트 의식 등 몇 가지 기질 혹은 특징이 있다고 보았는데, 적절한 지적이라고 생각된다. 런던 선교회를 사임한 그는 현제 엔타이(煙臺)라고 불리는 지푸(Chefoo)로 이동하여 이곳 세관의 통역 및 감독관으로 일했다. 이때부터 1865년 8월 31일까지 약 8, 9개월간 일했다.
           
          3. 제1차 조선 방문 1865년 9월 4일

          지푸는 산동성 북부의 해안도시로서 조선과 가장 가까운 거리에 있는데, 당시로 볼 때 외국과의 무역을 허용한 유일한 항구였다.
          이곳에서 토마스는 두 사람의 한국인을 만나게 된다.
          이곳의 스코틀랜드성서공회 소속 알렉산더 윌리암슨(Alexander Williamson)은 두 한국인을 만나게 되는데, 김양선에 의하며 그 두 조선사람 김자평(金子平)최선일이라고 한다.
          윌리암슨은 이들을 저녁식사에 초대했는데, 토마스도 함께 초대되었고, 이들을 통해 한국의 상황을 듣게 된다.
          한국의 로마 가톨릭 신자는 5만 명에 이르고, 11명의 신부들이 비밀히 활동하고 있다는 점을 알게 된다.

          이런 접촉을 통해 토마스는 조선 선교를 자원하게 되고, 스코틀랜드성서공회 대리인 자격으로 1865년 9월 4일 ‘허락되지 않는 땅’(terra incognito) 조선으로 향하게 된다.

          이것이 제1차 조선방문인데, 윌리암슨으로부터 한문성경과 기독교 서적을 보급 받았고 또 약간의 경비 지원도 받았다.
          이때 김자평이 동행했고, 중국인 우웬타이가 항해를 맡았다.
          그 달 13일에는 황해도 해안에 도착했는데, 이곳이 황해도 옹진 자라리(紫羅里) 근포(近浦)였다.
          이곳에서 성경을 나누어 주며 전도했고 한양까지 가려했으나 배가 파선되어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조선을 떠난 그는 만주의 피쯔워 항구를 거쳐 도보와 말을 타고 여행하여 1866년 1월 4일 혹은 5일 베이징에 도착했다.
          지푸를 떠난지 4개월 만이었다.
          조선에 체류한 기간은 2달 반 정도였고, 체류한 곳은 서해안, 곧 황해도나 평안도에 속한 도서지방이었다.

          김양선 교수의 지적처럼 토마스를 인도했던 김자평이 황해도의 ‘육도’였기 때문에 자기가 잘 아는 지역으로 안내했을 가능성이 높다. 이곳에서 성경책과 기독교 문서를 배포했다.
          이점은 토마스가 두 번째 조선으로 향하기 일주일 전에 런던선교회 지부장에게 보낸 편지에서 구체적으로 언급되고 있다.
          베이징으로 돌아온 토마스는 런던선교회 선교사로 재가입 되었고 근무지는 베이징 지부로 결정되었음을 통보 받았다.
          즉 재가입된 것은 1865년 9월에서 11월 사이로 판단되는데 이 점은 토마스가 런던선교회 소속으로 조선을 방문했다는 점을 의미한다. 토마스가 런던 선교회 티드만 회장에게 보낸 조선방문 보고는 당시의 사정을 헤아릴 수 있는 소중한 정보를 제공한다(스텔라, 100).
           
          4. 제2차 조선 방문 / 1886년

          고종 3년인 1866년은 우리나라 최대의 천주교 박해인 병인박해가 있었던 해였고 이때 대원군은 천주교를 금압했을 뿐 아니라 약 8천명의 천주교인이 죽임을 당했다.

          이 때 조선에서 활동하고 있던 베르뇌(Berneux) 주교를 비롯하여 9명의 프랑스 주교들이 참수되었다.
          천주교도를 색출하기 위해 오가작통법으로 감시했고 해안은 봉쇄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토마스는 두 번째 조선을 방문하게 된다.
          토마스는 조선에서의 천주교 박해에 대해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시 조선행을 시도했다.
          그러든 중 프랑스 해군사령관 로즈 제독으로부터 통역관으로 조선으로의 동행을 요청했다.
          로즈 제독은 베이징의 프랑스 대사관을 방문했는데, 프랑스 대리공사 벨로네(Bellonet)에게 조선에서 일어난 천주교 박해 소식, 특히 프랑스인의 처형 소식 알려주었다.
          벨로네는 로즈에게 조선 진격을 요구했고, 약간의 조선어를 알고 있는 토마스에게 로즈 제독의 통역관으로 조선 동행을 요청한 것이다.
          주저되는 바가 없지 않았으나 토마스는 조선으로 갈 수 있는 기회라는 생각에서 텬진에서 로즈 제독과 합류하여 지푸를 거쳐 조선으로 갈 예정이었다.
          그런데 로즈 제독은 베트남 사이공에서 일어난 소요를 진압하기 위해 그리로 가게 됨으로 원래 계획이 취소되었다.

          토마스는 조선으로 갈 길을 찾기 위해 일단 지푸로 갔다.
          여기서 필요한 경비도 마련할 계획이었다.
          여기서 다시 윌리암슨과 한국인 김자평을 만났는데 이들을 통해 조선방문의 도움을 얻을 수 있었다.
          그러든 중 1884년 7월 29일 지푸에 커다란 선박이 나타났다.
          그것이 미국 상선 제너럴 셔먼호였다.

          원래 이 배는 1861년 영국에서 건조한 범선으로 ‘프린세스 로얄’호로 불렸으나 1863년 1월 미국으로 넘겨져 미 해군에서 사용하였고, 1865년에는 경매에 넘겨져 상선으로 개조되었다.

          남북전쟁 당시 위력을 떨친 남군의 장군 셔먼으로 이름을 따 제너럴 셔먼으로 개칭되었으나 더 이상 해군 함정이 아니라 영국의 메도우 사(Meadows Company) 소속 상선이었다.

          이 배는 조선에서 팔릴만한 비단, 유리그릇, 천리경, 자명종 등을 싣고 텬진항을 거쳐 지푸로 온 선박이었다.
          토마스가 어떻게 이 배에 승선하게 되었는가는 분명하게 알려져 있지 않으나 조선행을 의도했던 토마스에게는 조선행의 호기였다.
          그 배가 어떤 성격의 배인지, 조선 방문의 목적이 무엇인지는 따질 겨를이 없었을 것이다.

          토마스는 베이징을 떠난지 26일 만인 1866년 8월 9일 제너럴 셔먼호에 승선했고, 이날 셔먼호는 조선으로 향했다.

          알렉산더 윌리엄슨으로부터 상당히 많은 양의 한문성경과 기독교 서적을 공급받았다.
          제너럴 셔먼 호는 무장한 상선으로 승선인은 선주 미국인 프레스턴(W. Preston)을 비롯하여 항해사 윌슨(Wilson), 선장 페이지(Page), 화물관리인 영국인 호가스(G. Hogarth), 토마스 선교사, 두 사람의 중국인 이팔행 등 항해안내원, 그리고 중국인과 말레시아인 선원 등 24명으로 파악된다.

          후의 일이지만 고종실록에는 프레스톤을 보래돈(普來敦)으로, 페이지를 파사(巴使)로, 호가스를 하갈특(何噶特)으로, 토마스를 최란헌(崔蘭軒)으로 표기했다.
          물론 최란헌이라는 표기가 토마스를 표기한 것이 맞느냐에 대한 논란이 없지 않다.

          지푸를 떠난 제너럴 셔먼호의 첫 경유지는 백령도의 두무진 항이었다.
          이곳에서 토마스는 성경을 나눠주었고, 이때 제너럴 셔먼호를 목격했던 한 조선인의 목격담이 스텔라 프라이스는 자신의 책에서 소개하고 있다(124쪽).

          곧 백령도를 떠나 돛섬으로 향했는데, 여기서 중국인 선장 우웬타이(Yu-Wen-Tai) 만나게 된다.
          그는 여러 차례 조선의 해안을 왕래하며 장사했던 중국인이었다.
          다시 배는 대동강 안쪽으로 행진했다.
          외국선박의 입항이나 접촉을 금지했던 조선의 사정을 알고 있던 선원들은 안전을 위해 더 이상 진출 우려했으나 선장과 선주는 우웬타이의 경고를 무시했다.
          조선 사정이 밝은 우웬타이는 더 이상 안내할 수 없다며 지푸로 돌아갔다.
          그러나 셔먼호는 자만했다.
           
          5. 대치상황과 제너럴 셔먼호의 최후

          8월 16일에는 용강면 다미면 주용포항에, 8월 17일 금요일에는 황주 송산에 정박했다.
          예상되는 바이지만 강둑에는 이양선을 보기 위해 조선인들이 몰려들었고, 조선관리는 긴급 회합하여 선박의 철수를 요구했으나 셔먼호는 입항을 고집했다. 고종 3년, 곧 1866년 음력 7월 15일자 고종실록에는 당시의 상황이 언급되어 있다. 배는 더 진행하여 8월 20일에는 평양 초리방 사포구에 이르렀다. 이곳에서도 서양 선막은 구경꺼리였다. 많은 이들이 구경하러 몰려왔다. 오문환에 의하면 홍신길이라는 소년도 작은 배로 셔먼호 근처로 접근했고, 토마스는 갑판에서 그를 맞이하여 방으로 데리고 기독교 문서를 주고 그에게 케이크를 맛보게 했다고 한다. 그리고 이곳에서 처음으로 감자를 보았다고 한다. 또 그날 밤에는 인근 쑥개마을에서 장인국 지달수 지달체 지택구 지택붕 지택주 장용국 지달해 표명보 등 아홉 사람이 토마스를 찾아갔다고 한다. 이 들 중 장용국 외에는 천주교 신자들인데 천주교 신자들을 보호해 줄 프랑스 선박을 기다리고 있던 중 셔먼호로 찾아간 것이다. 토마스는 자기는 천주교 신자도 프랑스 함대도 아니라고 말하고 개신교 선교사라고 자신을 소개하고 성경과 기독교 문서, 그리고 빅토링여왕 얼굴이 새겨진 동전까지 주었는데, 천주교신자들은 성모 마리아상으로로 오인했다고 한다. 오문환 장로 기록의 정확성은 확인할 수 없으나 조선인과의 접촉의 사례로 제시되고 있다. 얼마 후 지달수와 지달해는 서양인 접촉했다는 이유로 참수되었다고 한다.
          다음날 조선관리가 선박의 철수를 요구했을 때 셔먼호는 교역을 원한다며 비단, 유리, 망원경, 자명종을 조선의 쌀, 인삼, 종이, 호랑이 가죽 등과 교환하자고 했다. 그러나 교역을 금하는 정책에 따라 이를 거절했다. 거듭된 경고를 무시한 것은 제너널 셔먼호의 오만이었고 신중치 못한 처신이었다. 대치상황은 약 2주일간 계속되었다. 조선 관리들의 거절에도 불구하고 제너럴 셔먼호는 평양행을 고집하고 8월 21일에는 평양 신장포에 도착했다. 이곳에서도 구경꾼들이 몰려오았고, 토마스는 성경책 나눠주었다. 토마스로서는 어떤 상황에서든 자신의 의무를 다한다면 된다고 생각한 것으로 보인다. 이때 성경 받은 김영섭은 후에 기독교신앙을 받아드렸고, 두 아들 김종권과 김성집은 후일 장로가 되었다고 한다. 이곳에서도 조선 관리 김낙수는 선박의 도래경위를 조사하고 철수를 요구했다. 8월 22일 셔먼호는 평양 만경대의 작은 선 두로도에 닻을 내렸다. 토마스 이곳에서 100권의 성경 배포했다고 한다. 평양감사 박규수는 셔먼호의 공격에 대비하여 만경대를 둘러싸는 방어선 구축 지시했다. 그럼에도 셔먼호 대동강으로 계속 진입했다. 8월 27일에는 보다 심각한 사건이 일어났다. 셔먼호 승무원들이 순시대장 중군(中軍) 이현익을 억류한 것이다. 조선에 무단 침입했을 뿐 아니라 퇴거를 거부하고 조선관리를 억류한 일은 심각한 일이었다. 셔먼호의 자신의 안전을 보장받기 위해서 혹은 물이나 식량, 연료를 공급받기 위한 것이라는 설이 없지 않으나 방자한 행동이었다. 선원 중 한 사람은 이현익의 관원 명찰을 빼앗은 일을 더욱 그러했다.
          이현익의 억류소식을 접한 주민들은 셔먼호에 돌을 던졌고, 석방을 요구했다. 관군은 사격을 가했다. 셔먼호 측에서도 발포했다. 이런 와중에서 박춘권(朴春權)이 혼자 배를 저어 가 이현익을 구출했다고 한다. 오문환에 의하면 그가 후에 평양의 장로교회 첫 인물이 되었다고 하지만 이에 대한 반대 의견도 있다. 셔먼호가 수세에 몰리자 더욱 낙폭하게 대응했다. 8월 28일 발포를 시작했고, 8월 31일에는 조선인 7명 사살되고 5사람 중경상을 입었다. 사태는 심각하게 전개되었다. 고종의 허락에 따라 평양감사 박규수는 셔먼호 공격을 지시했다. 9월 3일이었다. 박규수는 실학자 박지원의 손자로서 개방론자였으나 셔먼호의 무단접근은 용인될 수 없었다. 곧 강 수위는 낳아졌고 배는 좌초되었다. 9월 4일 달빛도 없는 그믐밤이었다. 결국 선원은 쑥섬에 갇힌 신세가 되었다. 작은 거룻배에 나무를 싣고 불을 붙여 셔먼호로 접근시켜 셔먼 호 불태웠다. 선원들 불길을 피해 강밖으로 헤엄쳐 나왔으나 강변에 정렬해 있는 군인들에 의해 창에 찔려 주임을 당했다. 토마스 목사도 남은 성경책을 안고 배에서 띄어 내렸다. 강가로 끌려나온 그는 모래사장에 머리를 숙이고 기도했다. 그리고는 마지막 성경을 관군에게 내밀었다. 관군의 칼은 토마스의 가슴을 내리쳤고 토마스는 9월 5일 대동강 쑥섬 모래사장에서 26세의 젊은 나이로 생을 마감했다. 토마스의 시신은 대동강변에 묻혔다.
           
          6. 토마스의 순교 이후

          토마스의 최후에 대해서는 상이한 기록이 남아 있다.
          배가 불타고 선원들이 죽임을 당할 때 토마스는 뱃머리에서 홀로 야소(耶蘇)를 외치고 남은 성경을 뿌렸다는 기록이 있는가하면, 한석진 목사는 토마스가 순교한지 26년이 지난 1892년 당시 목격자로부터 제널 셔먼호가 불탈 때 토마스가 성경을 던지며 ‘야소’를 외치는 것을 들었다는 증언을 남겨주고 있다.

          그런가하면 백기를 흔들며 목숨을 외국인도 한 두명 있었다고 한다.
          그 한 사람이 토마스였을 것으로 말하는 이도 있다.
          기록의 정확성을 검증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사실을 균형 있게 판단하는 지혜도 필요하다.
          토마스의 죽음과 관련한 흥미로운 이야기도 전해지고 있다.

          제너럴 셔먼을 구경하라 갔던 소년 최치량(崔致良, 1854-1930)에 관한 이야기가 그것이다.
          그는 12살 때 숙부와 함께 1866년 9월 3일 토마스 순교장면을 목격하였고, 토마스 목사가 뿌린 한문성경 3권을 주었다고 한다.

          책 소지자에 체포 명령이 내려 대부분 성경을 소각하거나 강변에 버렸다.
          최지량도 이 성경을 집으로 가져 오지 못하고 영문주사(營門主事) 박영식(朴永植)에게 주었다고 한다.
          박영식은 이 성경을 가져와 찢어 벽지로 사용했다.
          오랜 후 최치량은 사업에 성공하여 물상객주(物商客主)가 되어 평양 대동문 안에 집을 사 여관을 운영하게 되었는데, 그 여관의 전 주인이 박영식이었다. 최치량은 이 벽지로 사용된 성경을 읽고 또 한석진의 전도로 회심하였고, 평양에서 최초로 마펫에게 세례를 받고 평양지역 교회의 초석이 되었다고 한다. 그는 널다리골의 홍종대(洪鐘大)의 집을 사서 예배처소로 사용했는데, 이것이 평양장대현교회의 시작이었다고 한다.

          제너럴 셔먼호 사건은 서구와의 불행한 접촉이었으나 그 이후 역사는 흥미롭게 전개되었다. 이 사건은 조선과 미국간의 외교문제로 발전하였고, 널리 알려진 바처럼 이 일이 신미양요(辛未洋擾, 1871. 6)의 원인이 되었다. 이런 대결과 접촉이 후일에는 조미 양국 간의 통상조약(1882)으로 발전하여 외국인의 조선 거주를 보장 받게 된다. 결국 1884년에는 알렌이 입국하게 되는데, 토마스 순교 18년 후의 일이었다. 이런 점에서 박용규 교수는 토마스의 순교는 한국교회의 보이지 않는 이정표가 되었다고 말한다. 오문환은, 토마스의 피가 뿌려진 대동강 물을 마신자마다 예수를 믿었고 평양은 동방의 예루살렘이라고 불릴 만큼 한국교회의 거룩한 도성이 되었다고 했다.
           
          7. 남은 문제 : 토마스는 순교자인가 침략자인가?

          토마스 목사는 오랫동안 잊혀진 인물로 남아 있었다.
          그가 죽임을 당하고 60년이 지난 1926년 평양의 오문환 장로는 토마스 목사의 생애와 죽음에 대한 소책자를 발간했다.
          그것이 토마스의 생애와 조선 기독교사의 분수령이 되는 양란(洋亂)에 대한 기록이었다. 1927년에는 토마스 기념회가 조직되었고, 1927년 5월 8일 토마스 목사가 묻힌 쑥섬에서 토마스 목사 순교 60주년 기념예배가 거행되었는데, 이때 1천명이 참석했다고 한다. 1932년 9월 14일에는 대동강변에 토마스기념예배당을 건립했는데, 1933년 10월 14일 봉헌예배를 드렸다고 한다.
          그런데 최근 10여년 이래로 토마스를 순교자로 볼 수 없다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그래서 그 의 죽임을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에 대한 논란이 일고 있다. 감리교의 존스(G. H. Jones) 이래로 초기 선교사들은 토마스 목사를 순교자로 이정해 왔고, 설사 게일의 경우처럼 순교자라는 말은 사용하지 않았다고 하더라고 복음을 위한 그의 숭고한 죽음을 기리고 있고, 그를 정치적 희생자라든가 침략자로 말하지 않았다. 그런데 최근에는 토마스를 순교자로 볼 수 없다거나 심지어는 침략자에 불과하다고 말하기도 한다.
          이들이 제기하는 문제는 다음의 몇 가지로 정리될 수 있다. 첫째 토마스는 무장상선을 타고 입국했기 때문에 순교자로 볼 수 없다고 주장한다. 그런가 하면 조선에 와서 아무 일도 하지 못하고 죽었기 때문에 순교자로 칭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 또 그가 죽은 이유가 기독교 복음 때문에 죽은 것이 아니라 제너럴 셔먼호의 부당한 처신과 횡포에 기인하는 정치적인 죽임이라고 주장하다. 일견 고려할 점이 전무한 것은 아니지만 1860년대 상황에서 해석하는 일이 필요하다. 토마스가 복음의 열정, 곧 조선 선교의 이상을 가진 점은 부인하지 못할 것이다. 당시로는 조선 입국 방법이나 경로를 선택할 여지가 없었다. 설사 무장상선이라 할찌라도 셔먼호 승선이 조선으로 진출할 수 있는 유일한 방도였다. 제너럴 셔먼호의 신중치 못한 점은 충분히 공감하지만 셔먼호로 입국했기 때문에 순교자로 볼 수 없다는 주장은 타당성이 없다. 선교사가 내한 한 이후 무엇을 했는가가 중요할 수 있다. 그러나 토마스는 1863년 이래로 선교사 신분이었고, 이미 조선을 방문하바 있고 선교사역을 감당했다. 그가 내한 즉시 죽임을 당했다고 해서 순교자로 볼 수 없다는 주장은 타당성이 없다. 그의 죽음이 복음전도 때문이 아니라 정치적 이유 때문이라는 주장도 고려할 점이 없지는 않다. 그러나 기독교가 금압된 당시 상황에서 서양인의 죽음, 특히 서양선교사의 죽음을 비종교적 행동으로만 취급할 수 없다. 1866년 병인양요 때의 프랑스 선교사들은 죽음은 정치적 성격이 강했고, 외세에 의한 침략세력으로 간주되었다. 그 누구도 프랑스 신부의 죽음을 순교가 아니라고 부정하지 않는다. 기독교가 금지된 상태에서 ‘선교사의 현존’ 자제가 정치적 행위일 수 있고, 정치적 침략세력으로 해석될 수 있다. 이렇게 볼 때 토마스의 죽음을 순교로 볼 수 없다는 주장에 동의할 수 없다. 토마스 목사가 제너럴셔먼호로 입국한 일이나 셔먼호의 부당한 혹은 불법적인 행위는 지탄받을 수 있지만 토마스 목사는 조선인에게 기독교 복음을 전파하려는 선한 의지는 부정될 수 없을 것이다. 그래서 토마스가 죽임을 당한 후 초기 선교사들을 시작으로 한국교회는 토마스를 순교자로 간주하고 그의 죽음의 의미를 기념해 왔다. 150년의 세월이 지났지만 토마 목사의 삶과 죽음을 통해 오늘우리의 모습을 성찰해 보는 기회가 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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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광복 선교사 이야기

          한 젊은 선교사(프랑크 윌리엄스) 부부가 미국 선교부에서 한국으로 파송을 받았다. 이 젊은 선교사 부부는 공주를 기반으로 선교하기 시작했다. 먼저 1907년 인천에서 첫아들을 낳았다. 프랑크 윌리엄스 선교사는 첫아들의 이름을 한국의 광복을 기원하는 의미에서 한국명으로 우광복(禹光復, George Z. Williams, 1907~1994)이라고 지었다. 

           

          그 후 프랑크 선교사는 올리브라는 딸을 낳았다. 그리고 이듬해 2월경 논산지방에서 부흥회를 인도하고 돌아오다가 상여 집에서 비를 피해 잠시 쉬게 되었다. 그런데 바로 그 전날 장티푸스로 죽은 사람을 장례하고 그 장례용품을 보관하였던 터라 프랭크 선교사는 즉시 감염이 되어 세상을 떠나게 된다.

           

          졸지에 프랑크 선교사 사모는 과부가 되어 고향인 미국으로 돌아간다. 놀라운 사실은 2년 후 두 자녀를 데리고 다시 공주에 돌아왔다. 그리고 공주에 교회들을 세우는데 기여를 하고 47년 간 선교사역을 하였다. 그런데 딸인 오리브가 풍토병에 걸려서 죽고 말았다. 우광복의 여동생 올리브(1908~1919)는 11살에 죽어서 영명동산에 묻혔다.

           

          그런데 우광복은 초등학교, 중학교를 마치고 미국으로 가게 되었다. 그러나 얼마 후 다시 한국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인천에서 태어난 우광복(조지 윌리엄스)은 공주 영명학교 졸업 후에 조부모가 있는 미국 콜로라도주 덴버로 가서 고등학교와 의과대학을 마치고 돌와왔던 것이다.  

           

          그때가 바로 일제로부터 해방되어 하지 장군이 군정 책임자로 한국을 다스릴 때였다. 바로 1945년경이었다. 하지 장군은 영어와 한국말을 능통하게 하는 사람이 필요했는데, 우광복(조지 윌리엄스)이 하지 장군의 참모가 되어 정부수립에 관여하게 된다. 그때 하지 장군이 우광복에게 '자네가 한국 실정을 잘 아니 앞으로 한국을 이끌어 갈 인재 50명을 추천해 달라'고 하였다. 그러자 우광복은 어머니와 이 일을 상의하였고, 우광복의 어머니는 즉각 금식기도에 돌입하였다. 그리고 기도하면서 50명 중 48명의 명단을 작성하였다. 물론 그 명단 안에는 믿음의 사람들이요 하나님의 사람들이 적혀 있음은 두말 할 나위가 없다. 

           

          그 명단을 받아 든 하지 장군은 미군 정부 요소요소에 그들을 임명하였다. 그래서 대한민국은 믿음의 기독교인들이 곳곳에 들어가서 나라를 세우게 된 것이다. 특히 문교부 장관을 기독교인이 맡아서 미신 타파를 시작했다. 또 국방부장관에도 기독교인이 맡아서 군대안에 군선교의 토대를 마련하였고, 하나님의 군대로 만들었다. 그리고 제헌 국회의 국회의원들이 거의 기독교인들이었다.  

           

          지금도 우리나라 제헌국회 속기록 첫 장을 열면, 기도로 국회를 개회하였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1948년 5월 30일 이승만 대통령은 이윤영 목사에게 기도로 국회를 개회할 것을 다음과 같이 주문하였다.

           

          "대한민국 독립민주국 제1차 회의를 여기서 열게 된 것을 우리가 하나님에게 감사해야 할 것입니다. 나는 먼저 우리가 다 성심으로 일어서서 하나님에게 감사를 드릴 터인데 이윤영 의원 나오셔서 하나님에게 기도를 올려 주시기를 바랍니다."

           

          그 때 이윤영 의원의 기도문은 다음과 같다.

           

          "이 우주와 만물을 창조하시고 인간의 역사를 섭리하시는 하나님이시여, 이 민족을 돌아보시고 이 땅을 축복하셔서 감사에 넘치는 오늘이 있게 하심을 주님께 성심으로 감사하나이다.  오랜 시일동안 이 민족의 고통과 호소를 들으시사 정의의 칼을 빼서 일제의 폭력을 굽히시사 하나님은 이제 세계 만방의 양심을 움직이시고 또한 우리 민족의 염원을 들으심으로, 이 기쁜 역사적 환희의 날을 이 시간에 우리에게 오게 하심은, 하나님의 섭리가 세계 만방에 성시하신 것으로 저희들은 믿나이다. 하나님이시여, 이로부터 남북이 둘로 갈리어진 이 민족의 어려운 고통과 수치를 신원하여 주시고 우리 민족 우리 동포가 손을 같이 잡고 웃으며 노래 부르는 날이 우리 앞에 속히 오기를 기도하나이다."

           

          이때 우리나라 전체의 기독교인이 전국민의 1% 도 안 되는 때 였다. 그런데 윌리엄스 사모가 추천해준 48명의 기독교인들이 각 분야에 들어가서 영향을 미친 결과 20년 만에 5백만 성도가 되고, 30년 만에 1천만 성도를 헤아리는 기적이 일어난 것이다. 이 기적이 어떻게 가능했는가? 미군정 시절 우광복 Geroge Williams이 추천한 48명으부터 시작했다. 우광복의 48명을 누가 추천했는가? 바로 우광복의 어머니 윌리엄스 사모이다. 이역만리 타국에서 남편을 잃어버리고 (Frank Williams)  딸을 잃어 버렸는데도(Oliver Williams) 다시 한국으로 돌아와 한 알의 밀알이 된 사모 때문이다. 

           

          우광복은 1994년 87세의 일기로 소천했는데, 마지막으로 유언하기를 "11살에 죽은 내 동생 올리브가 공주 영명동산에 묻혀 있는데, 내 동생 올리브 옆에 나를 묻어 달라."고 했다. 공주 영명학교는 영원한 광명(eternal light)이란 뜻이며, 아버지 프랭크 윌리엄스가 1906년에 세운 학교이다. 이 학교의 모태는 명선학당인데, 그 설립자는 엘리스 하몬드이며, 이 학당에서 유관순이 1913년부터 공부했다. 엘리스 선교사 밑에서 배웠던 것이다. 우광복이 이렇게 유언한 것은 아마도 한평생 동안 한국에서 풍토병으로 죽은 동생이 가슴에 있었던 것 같다. 그래서 지금 우광복의 묘가 동생 앨리스의 묘 옆에 나란히 있다.

           

          공주시 영명중학교 연역에 보면, 1906년 10월 15일에 윌리엄스 선교사가 이 학교를 설립했다고 나와 있다. 그 뒷산에 가보면 우광복 선교사의 묘를 볼 수 있다. 그는 비록 정식 선교사로 파송 받지는 않았지만, 선교사의 자녀로서, 또한 하나님의 소명을 받은 평신도 선교사로서 특히 해방 후 한국 건국기에 기둥과 같은 역할을 했던 한국정부와 한국교회의 산 증인이다.

           

          이런 의식있는 신앙인들이 많이 나와서 자기가 서 있는 자리에서 각자 자기 역할을 충실히 감당해 줄 때 이 땅에 하나님의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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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여선교회 역사 -농촌 계몽가 최용신 

           

          “이 사회는 무엇을 요구하며 또 누구를 찾는가? 사회는 새 교육을 받은 새 일꾼을요구한다. 여기에 교육받은 여성들이 자진하여 자기들의 책임의 분을 지고 분투한다면비로소 완전한 사회가 건설될 줄로 믿는다.

          이제 그 활동의 첫 계단은 무엇보다도 농촌여성의 지도라고 믿는다. 중등교육을 받은 우리가 화려한 도시 생활만 동경하고 안일의생활만 꿈꾸어야 옳을 것인가? 농촌으로 돌아가 문맹 퇴치에 노력해야 옳을 것인가?

          거듭말하노니 우리는 손을 서로 잡고 농촌으로 달려가자.”

          배운자로서 그 어느곳보다도 배움이 절실한 농촌을 외면할 수 없었던 최용신, 가난과무지 속에 갇힌 농촌을 계몽하는 것이 완전한 사회로 가는 기본임을 알리며 짧은 생을불살랐던 그녀의 결의가 돋보이는 글귀이다.

          농촌 계몽가 최용신, 우리에겐 소설 상록수의 여자주인공으로 잘 알려진 그녀는 1909 년일찍이 서양문물과 기독교가 유입된 개항장 함경북도 덕원에서 태어났다.

          그녀의 조부는 학교를 세우고 교육을 통해 구국의 길을 찾으려 노력한 교육 운동가였으며 아버지도 교육에 종사하였다.

          교육자 집안에서 태어난 최용신은 어릴 때부터 주일학교에 다니며 기독교 신앙 속에서 성장하였다. 1918 년 고향의사립학교에서 원산의 루씨여자 보통학교로 전학한 그녀는 농촌계몽 운동에 일생을 바치겠다고 다짐하게 된다.

          1928 년 루씨여자고등보통학교를 최우등으로 졸업한 그녀는 협성여자신학교에 입학하여 애국부인회 사건으로 옥고를 치른독립운동가 황애덕 교수를 만나게 되면서 일생의 전환점을 맞게 된다. 미국 컬럼비아대학에서 석사학위를 받은 후펜실베니아주립대학에서 농촌사업과 관련된 공부를 한 황애덕 교수는 협성여자신학교에서 ‘농촌사업지도교육과’ 과목을

          가르치고 있었다. 한국 농촌의 실상을 강의하며 학생들에게 농촌으로 돌아갈 것을 강조한 황 교수의 가르침을 받은 최용신은여름 방학에 농촌 현장 실습을 지원하였다. “제까짓 여자가 우리를 가르치러 왔느냐”며 그녀를 무시하고 마음의 문을 열지않는 현실 속에서도 농촌을 향한 신념은 더욱 확고해졌다.

          신학 수업을 중단한 최용신은 YWCA 의 지원을 받아 1931 년 10 월, 경기도 화성군 반월면 샘골로 마침내 농촌운동의첫걸음을 내딛게 된다. 샘골에 도착한 순간 그녀는 ‘나의 몸과 마음을 남김없이 태워 이 마을을 밝히도록 해 주소서’라고기도하였다.

          처음에는 교회 부속의 야학에서 어린이들을 가르치기 시작했는데 그녀의 헌신과 노력으로 이듬해에는정식으로 강습소 인가를 받을 수 있었다. 학생 수도 점점 늘어 오전반, 오후반으로 나누어 운영되었고 밤에는 부녀자들을

          모아 한글과 산수, 그리고 재봉과 수예를 가르쳤다.

          강습소 신축에 대한 그녀의 설득에 주민들은 자발적으로 건축발기회를 조직하였고 마을의 유지가 기증한 뒷동산 솔밭이터가 되어 1933 년 1 월 천곡학원이 완공되었다. 샘골은 나날이 활기찬 분위기 속에서 변화해 갔다. 생활 개선, 농가 부업장려를 위한 부녀회가 조직되었고 공동생산을 늘려가며 공동체적인 경제 토대를 구축하기에 이른다.

          샘골에서의 농촌 계몽 운동이 성공적으로 정착될수록 최용신은 새로운 지식과 구상이 더욱 절실해졌다. 샘골을 농촌 운동의한 도화선으로 만들겠다는 신념을 가지고 유학을 결심한 그녀는 1934 년 3 월 일본 고베여자신학교 사회사업과에입학하였다.

          일본 유학 중인 약혼자 김학준을 만나 약혼한 지 10 년이 되는 1935 년 4 월부터 민족을 위하여 같이 계몽운동을 약속하기도 하였다. 약혼자 김학준과 최용신은 교회를 중심으로 사회 활동을 하면서 결혼을 약속한 사이이다. 그녀의농촌 활동에 대한 열정으로 결혼이 늦어졌지만 둘은 신뢰와 사랑으로 결속되어 있었다.

          미래에 대한 부푼 꿈을 안고 시작된 유학 생활이었지만 갑작스레 각기병에 걸려 그녀의 유학 생활은 6 개월 만에중단되었다. “누워만 있어도 곁에 있어 달라” 는 샘골 주민들의 간청으로 최용신은 샘골로 돌아왔다. 그러나 몸을 어느 정도추스려 그녀가 다시 일을 시작하려는 시점에 YWCA 로부터 지원이끊기게 되는 상황을 맞이하게 된다.

          “도시의 여러분이여! 당신들의 생활은 얼마나 행복스럽고 얼마나안락 하십니까? 우리 농촌의 아이들은 자라기에 배가 고프고 배움에목이 마릅니다. 곡식을 심으면 일 년의 계가 되고 사람을 심으면100 년의 계가 된다고 하였거든 이 강산을 개척하고 이 겨레를 발전시킬농촌의 어린이들을 길러주소서” 도움을 요청하며 그녀가 한 잡지에기고한 글이다. 하지만 반응은 냉담했다. 악조건 속에서도 굴하지 않고마지막까지 불꽃을 태우던 그녀는 결국 누적된 과로로 쓰러져 1935 년1 월 23 일, 27 세의 꽃다운 나이에 생을 마감한다.

          그녀의 유언대로천곡학원이 바라다보이는 언덕에 영원히 잠들었다. 암울한 일제 강점기시대에 농촌 계몽을 위해 청춘을 바친 최용신, 모두가 외면한 가난하고

          무지한 농촌을 향한 그녀의 헌신은 그리스도의 사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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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송해붕선교사

           
           고촌 제자들과 강당 앞에서 송해붕 선교사.


           
          1952년 7월. 14세 소녀 송해숙은 천주교 선교사였던 오빠 송해붕의 시신을 찾기 위해 천등고개를 올랐다. 경기도 김포군 고촌면(현재는 김포시 고촌읍) 소재지에서 서쪽으로 1km 가니 천등고개가 나왔다. 높지는 않은 곳이지만 한여름이라 일행들의 얼굴은 땀으로 번질거렸다.

          김포 천등고개에서 숱한 사람들이 죽었다는 소문은 진작 있었지만 학살 당시인 1950년 10월에는 시신을 수습할 엄두도 내지 못했다. 빨갱이가 죽어 묻혔다는 인식에다 고촌지서의 감시 때문이었다.

          그날 송해숙 가족과 천주교 고촌공소 신자, 송해붕의 제자 약 200명이 시신 수습에 나설 수 있었던 것은 지난달 재판 덕분이었다. 즉, 1952년 6월 28일 서울지방법원 인천지원의 '송해붕 외 5인 살해 및 사체유기' 재판에서 치안대원 및 고촌지서 순경이 실형을 선고받았기 때문이다.

          그로 인해 송해붕이 불법적으로 학살당했다는 것이 증명되었고, 가족과 관련자 들이 시신 수습에 나설 수 있었다. 그런데 시신수습에는 난관이 도사리고 있었는데 학살 지점을 명확히 모른다는 것이다.

          고촌성당에 묻힌 송해붕 선교사
           
           선교사 송해붕


           
          송해붕을 학살해 실형을 선고받은 임OO 등의 치안대원들은 법정에서도 학살 장소를 이실직고하지 않았다. 결국 장소는 확인되지 않았고, 학살지를 찾는 것은 유가족의 몫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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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행은 십여 명씩 나뉘어져 천등고개 이곳저곳을 삽과 곡괭이, 가래로 파헤치기 시작했다. 한 시간쯤 지났을까. 송해숙이 있는 곳에서 "아"하는 탄식이 터졌다.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구덩이에서는 여성으로 보이는 유해가 나왔다. 살은 썩었지만 머리카락, 옷가지 등은 그대로였다. 잔인하게도 머리카락은 전깃줄로 위로 묶여 있었고, 두개골 주변에는 핏자국이 널려 있었다. 주변에는 피가 묻은 돌멩이가 보였다. 

          고촌지서에서 전깃줄로 머리카락을 위로 묶어 고문을 가하다가 천등고개에서 총으로 쏜 다음 그것으로도 모자라 돌멩이로 머리를 짓찧은 것이었다. 참혹한 모습에 사람들은 모두 입을 가리고 울음을 터뜨렸다. 하지만 누구의 시신인지 알 수 없어서 수습을 하지는 않고 다시 흙으로 묻었다. 이후에도 여기저기서 시신이 발견되었지만 송해붕의 시신은 나오지 않았다.

          한나절(약 4시간)쯤 지났을 때 "여기 선교사님이 있어요!"라는 외침이 터져나왔다. 소리를 들은 사람들이 모여든 곳에는 구덩이가 있었는데 그 아래로 신학생복이 보였다. "오빠", "요한아", "선교사님"을 외치는 목소리가 동시에 터졌다. 요한은 송해붕의 세례명이었다. 송해붕의 윗주머니에서는 묵주가 나왔고, 평소에 찼던 허리밴드도 그대로 있었다. 2년 가까이 천등고개에 묻혀있던 진실이 밝혀지는 순간이었다.

          1950년 10월 12일 새벽 0시에 학살된 시신이 세상의 빛을 본 때는 1952년 7월경이었다. 이날은 시신을 인근에 가매장했는데 경황이 없어 시신 매장지를 미리 마련하지 못한 탓이다. 

          송해붕의 유해가 안착할 수 있었던 것은 그로부터 4년이 지난 1956년 6월 15일의 일이었다. 계양 선산으로 이장을 하던 날, 소복을 입은 여성과 천주교 고촌공소 어린 제자들이 뒤를 따랐다. 하관미사를 때 송해붕의 부친 송희진은 십자가를 붙잡고 있었고 참석자들은 통곡을 했다. 이후 송해붕의 유해는 1999년 4월 김포성당 묘지로 이장했다가 2004년 3월 9일 고촌성당 동산에 이장해 현재에 이르고 있다.
           
           고촌성당 내에 있는 송해붕의 묘


           
          인민군 사격연습했는데...

          경기도 김포는 3.8선 접경지역으로 전쟁 3일 만에 북한군에게 함락됐다. 마을에 들이닥친 인민군들은 집집마다 다니며 밥을 해달라고 했고 부상당한 군인들은 길거리에 아무렇게나 쓰러져 있었다. 1950년 7월 인민군은 의용군 모집을 시작했다. "김일성대학에 보내준다"는 말에 자발적으로 참가한 이도 있었지만 적지 않은 수가 강제적으로 끌려갔다. 송해붕의 동생 송해용(1929년생)은 후자의 경우로, 7월 10일 강제로 끌려갔다.

          동생이 끌려가자 송해붕은 천주교 고촌공소 강당 옆에 굴을 팠다. 그래도 안심이 안 된 송해붕은 밤에는 산언덕 콩밭으로 가 바위틈에 숨어 잠을 잤다. 또 송해붕은 김포군 양촌면 누산리로 피신을 하기도 했다. 

          독실한 천주교 신자이자 선교사였으며 김포군 고촌공소 창립자였던 송해붕은 자신의 신앙에 비추어봤을 때 북한군에게 협조할 순 없다고 생각했다. 1950년 9월 말 연합군이 인천상륙작전 후 서울 탈환 전투를 벌일 즈음 송해붕은 고촌의 한 굴에 있었다. 송해붕의 5촌 조카 송영식의 증언이다.

          "인공 때 동네 수수밭에서 국군이 버리고 간 MI 총 세 자루와 칼빈 총 한 자루를 주웠어요. 공깃돌(小石. 송해붕의 아호) 선생한테 그 말을 했더니, 고촌으로 가지고 오라고 하더군요. 나는 그것을 대빗자루 만드는 대싸리 잎새 사이에 잘 숨겨가지고 걸망으로 메고 갔지요. 지름길로 가면 빠르겠지만 일부러 한적한 길로 돌아서 갔어요.

          선생님은 그 총으로 제자 몇을 데리고 굴속에서 사격 연습을 하셨지요. 국군들이 일선에서 싸우고 있으니, 우리도 후방에서 싸울 수 있으면 싸우도록 준비를 하자는 거였어요. 그런 분이 웬 공산당입니까? 환도 후 너무 억울하니까 그냥 있을 수 없다며 당숙 댁에서는 임○○ 씨 등을 상대로 재판을 걸었지요.(안영, 『스물넷, 못다 사른 불꽃』)"

          천주교 신자(황〇〇)의 집 벽장에 숨어 낮에는 굴에서 사격연습을 하던 송해붕은 1950년 10월 10일 오후 3시 치안대에게 발각되어 끌려갔다. 고촌면사무소 양곡창고에 구금되었는데, 그곳엔 이미 수십 명이 있었다.

          창고 안은 연일 비명소리로 아우성이었다. 송해붕의 제자 임병열도 연행됐다가 창고 안에서 송해붕을 만났다. 임병열은 치안대원과 지서 경찰들에게서 "송해붕을 따르지 마라"고 강요당하며, 창고에서 3일 동안 거꾸로 매달리는 고문을 당했다. 그는 다른 주민들이 전깃줄로 손이 묶인 채 거꾸로 매달려 물고문을 당하는 것도 목격했다.(진실화해위원회, 『2008년 하반기 조사보고서』)

          그렇다면 송해붕은 치안대에 왜 연행됐을까? 당시 치안대와 경찰은 송해붕이 '고촌면 면장 암살을 기도하고, (고촌면 천주교) 신자에게 적기가 등을 가르쳤다며 그가 공산주의자라고 주장했다.(1952년 6월 28일, 서울지방법원 인천지원 형사합의부, <임OO 외 판결문>, 형공 제351호)

          하지만 송해붕은 공산주의자가 아니었고 인민군을 상대로 교전도 감수하겠다는 의지가 있었다. 그는 또 수복하는 국군을 환영하려 제자들과 감자로 태극 문양을 만들어 태극기를 만들기도 했다.

          이러한 송해붕이 치안대에 공산주의자로 밀고된 데에는 여러 이유가 있었다. 기존에 개신교를 믿던 고촌면의 한 성씨 지도자들(지역 유지 그룹)은 6.25 전부터 천주교 선교사였던 송해붕을 질투하고 질시했다. 특히 젊은 세대들이 송해붕의 야학과 선교에 관심을 갖고 지역의 지도자로 받들자 그들은 송해붕을 제거할 기회를 호시탐탐 엿보고 있었다. 

          그런데 송해붕을 학살한 이들은 훗날 재판을 받고 실형까지 선고 받았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했을까? 1951년 연합국 일원이었던 벨기에 군인들이 계양초등학교 운동장에 주둔했다. 이들은 학교에서 군종신부 주관으로 미사를 했는데 이 과정에서 송해붕 선교사 사건을 접하게 됐다.

          사병 조지가 이 경악스러운 이야기를 군종신부(중령)에게 전했는데 이후 군종신부는 고촌지서와 김포경찰서에 가 항의하고 조사를 촉구했다. 군종신부는 송해붕의 가족에게 경찰서에 진정을 넣도록 권유했다고 알려졌다. 이렇게 해서 가족은 진정서를 제출했고 인천지검이 정식으로 기소해 형사재판에 이를 수 있었다.

          가난한 이들을 위한 배움터 열어

          송해붕은 계양국민학교와 인천공립직업학교를 졸업한 후 성직자의 길을 가기 위해 1944년 원산 덕원신학교에 입학했다. 여기에는 우여곡절이 있었다. 당시엔 신학교에 입학하려면 해당 교구 주교의 추천서를 받아야 하는데, 노기남 주교는 송해붕에게 "너는 장남이고 가계를 이어야 하니 취업을 하라"고 했다. 성직자의 길을 포기할 수 없었던 송해붕은 경성(서울) 명동성당 주교관 앞에서 다섯 시간 무릎 꿇고 있었다. 다음날 노기남 주교는 송해붕의 부모를 만나 최종 허락했다.

          하지만 신학교에서의 배움은 쉽지 않았는데 라틴어가 너무 어려웠던 것이다. 그러다 1945년 8월 15일 해방이 됐고, 방학이라 집에 왔던 송해붕은 3.8선이 그어지는 바람으로 신학교가 있는 원산으로 돌아갈 수 없었다.

          결국 송해붕은 성직자가 아니라 천주교를 전파하는 선교사의 길을 걷기로 결심한다. 그는 계양면 굴현리에서 야학을 시작했는데 1949년에는 고촌에 공소강당 겸 야학교사를 건립했다. 그의 열정은 주민들을 감화시켰고 어린이부터 노인까지 천주교의 문을 두드렸다.

          "억울하게 죽은 오빠, 복자가 되기를"

          1997년 7월 김포군 고촌성당 초대 주임신부로 부임한 차동엽(노르베르또) 신부는 50년 전 고촌 토박이들에게 신앙의 씨를 뿌렸던 스물네 살 청년 송해붕을 알게 됐다. 고촌 어느 마을을 가던 송해붕, 송해붕 하는 것이었다.

          송해붕은 고촌 사람들에게 가톨릭 신앙을 전파한 죄로 스물네 살에 천등고개에서 공산주의자로 몰려 순교했다. 차동엽 신부는 송해붕 선교사를 복자(천주교에서 공경할 만한 성도에게 붙이는 존칭)로 추대(시복)하기 위해 동분서주했지만 쉽지 않았다. 성직자가 아닌 일반 신자가 복자 자리에 오르는 것은 드물었다. 시복은 교황이 신앙이나 순교로 이름 높은 사람을 복자품(福者品)에 올리어 특정 지역의 교회에서 그를 공경하도록 선언하는 것을 말한다.

          송해붕의 여동생 송해숙(85세, 인천광역시 계양구 계산동)은 "오빠가 복자가 되고, 나중에는 성인이 되었으면 한다"고 말했다. 전쟁 때 억울하게 죽은 송해붕이 진실규명되긴 했지만 한 발 더 나아가서 역사의 순교자로 자리매김되기를 기원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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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민로아(F. S. 밀러) 선교사

          밀러(Miller)라는 이름(姓)으로 한국에서 활동한 선교사는 여러 사람이 있다.

          첫 번째, 프레드릭 S. 밀러(Frederick S. Miller)선교사는 1892년 미국 북장로회 소속으로 내한하여 민로아(閔老雅)라는 한국 이름으로 서울에서 예수교 학당 장과 연동교회의 기초를 마련하고 충북 청주지역에 최초로 복음을 전한 선교사이다.

          두 번째, 휴 밀러(Hugh Miller)선교사는 1899년 영국에서 내한하여 민휴(閔休)라는 한국 이름으로 성서공회에서 성서의 편찬과 반포사업을 주도하면서 우리 나라 성서보급에 크게 기여한 인물이다.

          세 번째, 에드워드 H. 밀러(Miller, Edward H.) 선교사는 1901년 미국 북장로회 소속으로 내한하여 밀의두(密義斗)라는 한국 이름으로 경신학교장과 연희전문학교 교수를 역임하고 서교동교회 등에서 교역자로서 여러 해 동안 활동한 선교사이다. 이밖에 한국에서 활동한 밀러 선교사는 더 있다.

          양화진 묘역에는 프레드릭 S. 밀러의 부인 "안나 S. 밀러(Anna R. Miller)" 선교사를 제1묘역 사-16 위치에 안장하였다. 안나 밀러는 1892년 11월 15일 남편과 함께 미국 북장로회 선교사로 내한하였으며 1903년 6월 17일 38세의 나이로 서울에서 별세하였다.
          그리고 밀러 부부의 첫 아들 프레드 밀러(Miller, Fred S., 18980∼1899)가 1898년 11월 7일 출생한지 8개월만에 사망하여 양화진에 묻혔다(사-17에 위치). 또한 그들의 둘째 아들 프랭크 밀러(Miller, Frank, 1902∼1902)도 1902년 3월 7일 출생한지 하루만에 사망하여 양화진(사-18)에 묻혔다.

          양화진 제2묘역에는 가문이 다른 에드워드 H. 밀러(Miller, Edward Hughes, 密義斗)의 가족(나-8에 위치)도 안장되어 있으며 이들에 관한 상세한 내용은 별도로 기술할 예정이다.

          ◇ 충북지방 최초 선교사 밀러(Miller, 閔老雅,1866-1937)


          프레드릭 S. 밀러(Miller, Frederick Scheiblim, 閔老雅 1866-1937)는 미국 펜실베이니아에서 1866년 출생하여, 피츠버그대학(1889)과 유니언 신학교(1892)를 졸업하였다. 그는 1892년 11월 15일 부인(Anna Reinecke)과 함께 미국 북장로회 선교사로 한국에 왔다.

          1893년 서울에서 예수교학당(경신학교) 책임자가 되어 교명을 민로아 학당으로 고치고 자신의 교육 방침대로 발전시켰다. 안창호(安昌浩)선생을 길러내는 등 기독교 교육에 힘썼다.

          1895년 연동교회의 기초를 마련하였으며, 청주지역에서 44년간 선교활동을 하였다. 1902년에는 장로회·감리회 연합의 찬송가 제정을 위한‘통합공의회 찬송가위원회’위원으로 활동하였으며, 1905년 찬송가 307장 "공중 나는 새를 보라"를 작곡하였다. 이밖에도 94, 294, 379 516장 등이 현재 찬송가에 실려있다. 1911년에는 조선예수교장로회 경기·충청 노회장으로 활동하였다.

          1894년 밀러는 현재의 양화진 묘역 주변에 언더우드 선교사와 에비슨 선교사 등과 공동으로 별장용지를 구입하여 각기 방갈로를 짓고 여름철에는 이곳에서 지낸 일이 있어 양화진과는 관계가 깊은 인물이다. 첫 부인 안나 밀러가 별세한 후 F. S. 밀러는 1904년 제3대 정동여학당장 도티(Doty, Susan A.)와 재혼하였다. 1931년 도티와 사별한 뒤 딘(Dean M. Lillian)과 다시 재혼하였다.

          그가 설립하였거나 시무한 교회로는 충북에서 가장 먼저 기독교를 전파한 청주 신대교회, 청원 북일의, 묵방리교회, 북일 화죽리교회(1921), 송파교회(1922) 등이 있다.
          그는 1936년 정년 은퇴후 필리핀 중국을 여행하고 청주로 다시 돌아왔으며 1937년 별세하였다.




          한국인보다 한국을 더 사랑했던 한 선교사 이야기
          - 아버지 윌리암 얼 쇼, 아들 해밀턴 쇼 대위



          서울 마포구 합정동에 있는 양화진에는 외국인 선교사 묘원이 있습니다.
          1890년 미북장로교 소속 의료선교사로 조선 땅을 밟았던 J. W. 헤론(Heron 1850-1890)선교사가 전염병으로 소천하면서 묻히게 된 이후로 이 땅에 그리스도의 사랑을 전하기 위해 헌신한 선교사들과 그들의 가족들 145명을 비롯하여 총 15개국 415명의 외국인들이 안장된 곳입니다.

          그곳 ‘제 2 묘역 라-6’에 가면 우리 국군의 군목제도를 만드는데 산파 역할을 했던 숨은 공로자 윌리엄 얼 쇼(한국명 서위렴, William Earl Show 1890~1967)선교사와 그의 아내 아델린(Adeline H. Show 1895-1971)선교사, 그리고 그의 아들 윌리엄 해밀턴 쇼(William Hamilton Shaw, 1922~1950)의 묘지가 있습니다. 
            

          윌리엄 얼 쇼 선교사는 1890년 8월 22일 미국 시카고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는 1916년 오하이오 웨슬리안 대학교를 졸업하고 컬럼비아대학원 중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자원입대하여 유럽 전선에서 군목으로 종군했는데 의무병으로 입대하여 군목으로 제대한 특별한 이력의 소유자였습니다.

          전쟁이 끝난 후 미국 컬럼비아대학원에서 공부를 마치고 1921년 아내 아델린(1919년 결혼)과 함께 미국 감리교회 선교사를 자원하여 우리나라에 옵니다.

          감리회 소속으로 남편 윌리엄은 평양 광성학교에서, 아내 아델린은 숭덕학교에서 교육선교사로 활동을 시작했습니다.
          이후 만주와 연해주 지방까지 다니며 선교 사역에 몰두하다 1938년에 제임스 무어(James Z. Moore) 와 함께 평양요한학교를 설립했고, 평양 보이스카우트 연맹 단장으로도 활동했습니다. 
            

          그러던 1941년, 일제에 의해 강제 추방돼 잠시 필리핀에서 활동하다가 해방 후 1947년에 다시 한국으로 돌아옵니다.
          한국에서 오랫동안 활동하며 한국을 누구보다 사랑했고 한국인들에 대해 잘 알았던 그는 6·25전쟁이 일어나자 주한미군 군목으로 자원입대하여 종군합니다.

          당시 연합군의 가장 큰 어려움 중 하나는 일반인들로부터 용공 분자들을 구분해야 하는 것이었는데, 윌리엄 얼 쇼 목사는 피난민들이 용공 분자로 몰려 학살되는 일이 없도록 힘썼다고 합니다.

          또한, 그는 대한민국 국군에도 군목사역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피난 시절 부산에서 이승만 대통령을 만나 군목제도의 중요성을 수차례 역설하여 결국 승낙을 받게 됩니다.

          그러던 중에 해군 대위로 자원입대하여 인천으로 상륙해 서울 탈환 작전에도 참여하고 있던 외아들 해밀턴이 녹번리 전투에서 전사했다는 비보를 접하게 됩니다. 슬픔에 잠긴 아버지는 부산에서 서울로 올라와 아들을 양화진에 묻었습니다.

          당시 미국에서도 아들 해밀턴 대위의 전사를 애도하는 물결이 일어나 5,925명의 사람들이 1만 4500달러를 모금해 아버지에게 보냈는데, 아버지는 그것을 현재 목원대학교의 전신인 대전감리교신학원에 기부하였고 학교 측은 이 모금액으로 아들 윌리엄 해밀턴 쇼를 기념하는 기념 채플과 한국 목회자들의 재교육을 위해 목자관을 건립하였습니다.

          윌리엄 얼 쇼 선교사는 전후에도 계속 한국에 남아 목원대학교에서 교수로 활동하며 인재양성에 힘썼고, 1961년 은퇴 후 미국으로 돌아간 그는 1967년 10월 5일 캘리포니아 스탠퍼드 병원에서 78세의 나이로 소천하게 됩니다.

          그의 유해는 생전에 유언을 따라 양화진에 먼저 묻혀 있는 아들, 윌리엄 해밀턴 쇼 옆에 안장되었습니다.
           

          아들 윌리엄 해밀턴 쇼는 그의 아버지가 한국에 들어온 이듬해인 1922년 6월 5일에 평양에서 출생했습니다.
          고등학교까지 한국에서 자라난 그는 1939년 미국으로 건너가 아버지의 모교인 오하이오 웨슬리안 대학교에서 공부하였고 1943년 졸업 후 해군 장교에 지원한 그는 1944년 1월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하여 독일군 함대의 이동 상황과 해안 정찰 등 특수임무를 수행했는데, 이 공로로 미 정부로부터 퍼플 하트(Purple Heart) 메달을 받을 정도로 인정받는 유능한 장교였습니다.

          1946년 9월 1일 해군 중위로 제대한 그는 이후 미 군정으로부터 한국에서 활동해 줄 것을 요청받게 됩니다.
          한국에서 어린 시절을 보내 평양 사투리를 구수하게 구사할 정도이며 한국의 실정을 잘 알고 있었던 그는 미 군정의 요청을 받아들여서 1947년 다시 한국 땅을 밟게 됩니다. 
            

          한국으로 돌아온 그는 해군사관학교의 전신이라 할 수 있는 해양경비대 사관학교에서 항해술과 함정 운항술 민간인 교관으로 활동하며 초기 해군 간부들을 교육해 대한민국의 해군의 태동기를 이끌었을 뿐 아니라, 대한민국 정부 수립 시기에는 경제협력청(ECA) 관리로 일하면서 미국의 원조를 이끌어내 대한민국의 탄생과 새로운 정부 수립에도 기여했다. 
            

          이후 극동 문제에 관심을 갖게 된 그는 그 분야의 전문가가 돼 한국인들을 위해 봉사하는 삶을 살기로 결심하고 미국으로 돌아가 하버드대학 박사과정에 진학해 동아시아 연구를 시작합니다. 그러나 연구에 전념한 지 얼마 되지 않아 한국전쟁 발발 소식을 전해 들은 그는 해군 대위로 자원하여 재입대를 하게 되고 세 번째 우리 땅을 밟게 됩니다. 

          그는 이전에 한국에서 근무할 당시 한국 해안에 매설된 기뢰 제거작업을 지도한 실전 경험자였고, 또 한국 해안 경비 상황과 지리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미군 장교 중 하나였습니다. 그런 경력으로 인해 그는 인천상륙작전 계획팀의 특별참모로 임명돼 맥아더 장군을 최측근에서 보좌하며, 여러 가지 전장 상황상 성공 가능성이 1/5000이라고 했던 1950년 9월 15일 인천상륙작전 성공에 기여하게 됩니다.

          작전 성공 후 미 해병대는 서울로 진격했는데, 당시 미군의 최대 문제는 공산군과 일반인을 구별할 수 있는 인원이 사실상 전무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평양 사투리를 사용하는 해밀턴 대위는 미 해병 5연대에 배속이 되어 서울 탈환 작전에 참여하였고 최전선을 따라 이동하면서 일반인들과 공산군을 구별하는 위험한 일에 자원하여 김포반도, 행주산성, 신촌 노고산 전투를 승리를 견인합니다.

          그러던 9월 22일 임무를 수행 중 녹번리 부근에서 숲속에 매복하고 있던 적의 흉탄에 전사합니다.
          그의 나이 29세.
          그는 김포공항 근처에 가매장됐다가 소식을 듣고 달려온 아버지에게 인계돼 서울 수복 후인 9월 28일 양화진 선교사 묘역에 안장되었습니다. 
            

          한국을 한국인보다 더 사랑했던 아버지 윌리엄 얼 쇼 선교사와 자신의 사랑하는 친구인 한국을 위해 생명을 바친 아들 윌리엄 해밀턴 쇼 대위 부자

          한국전쟁에 자원입대하는 아들을 걱정하던 부모에게 해밀턴 대위는 1950년 6월 “아버지, 어머니! 지금 한국인들은 전쟁 중에 자유를 지키려고 분투하고 있는데 만약 제가 이를 도우려 흔쾌히 가지 않고 전쟁 후 평화시에 선교사로 돌아가려 한다면 그것은 제 양심상 도저히 허락되지 않는 일입니다.”라는 편지를 쓰고 한국전쟁에 참여합니다.

          또한 전사하기 1주일 전, 인천상륙작전에 함께 했던 당시 한국 해군 PC-703호 함장 이성호 중령(이후 제5대 해군참모총장 역임)과의 대화에서 “나도 한국에서 태어났으니 한국사람입니다. 내 조국에 전쟁이 났는데 어떻게 마음 편하게 공부만 하고 있겠어요. 내 조국에 평화가 온 다음에 공부해도 늦지 않아요.”라는 말을 남겼다고 합니다. 
            

          녹번리 전투에서, 한국 땅에서 30년간 활동한 선교사 아들의 전사 6주년이었던 1956년 9월 22일 해밀턴 대위가 전사한 곳에 친지들에 의해 전사기념비가 건립되었습니다.

          비문에는 그로 하여금 한국전쟁참전을 결심하도록 도전했던 요한복음 15장 13절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보다 더 큰 사랑이 없나니’라는 말씀이 새겨져 있습니다.

          이후 2001년 10월 20일 해밀턴대위의 제자이자 친구였던 해군사관학교 2기생들에 의해 ‘숭고한 한국 사랑과 거룩한 희생을 추모하며’라고 새겨진 좌대석이 더해졌고, 6·25전쟁 60주년인 2010년 6월 22일에는 은평구 녹번동 은평 평화공원이 조성되어 그곳에 윌리엄 해밀턴 쇼 대위의 동상이 세워집니다.

          또 2014년에는 해군사관학교에, 작년인 2018년 9월 20일 그의 아버지 윌리엄 얼 쇼 선교사에 의해 건립된 대학 채플에 그의 흉상이 건립되었습니다. 
            

          이 가문의 한국사랑은 이것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아들 해밀턴 쇼 대위의 젊은 미망인 주아니타(Juanita Robinson Show, 한국명 서화순)선교사는 1956년 두 아들과 함께 한국으로 돌아와 서울 외국인학교 교사로 봉직하였고 1963년 이화여대 사회학과 교수를 지내며 세브란스병원에 의료사회봉사학과를 신설하는데 기여하였고 지금은 공직에서 은퇴한 후 오하오주에서 머물고 있으며 양화진의 남편묘역에 예약이 되어 있습니다.

          대위의 장남인 윌리엄 로빈슨 쇼(William Robinson Show)는 서울대학교 법대 초빙교수로 재직한 바 있으며, 그의 아내 캐롤 쇼(Carole Cameron Show)는 작가로 미 한국대사관 기록보관소에서 근무하면서 한국 근대사 연구에 소중한 자료가 된 ‘The Foreign Destruction of Korea Independence’를 출간했습니다.

          대위의 손녀 줄리는 1990~1991년 오산의 공군기지에서 장교로 근무하기도 했습니다. 

          우리는 지구상 유일의 분단국가인 한반도에서 살면서도 오늘 누리고 있는 번영에 사로잡혀서 우리의 평화와 자유가 어떻게 지금까지 지켜져 왔는가에 대해 무감각할 수가 있습니다.
          오늘의 대한민국이 있기까지 조국의 광복과 자유를 위해 목숨을 걸고 헌신하신 분들, 한강의 기적을 열기 위해 밤낮없이 뛰었던 이들, 그리고 조국을 위해 늘 깨어 눈물로 부르짖었던 한국 교회와 성도들의 기도를 잊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그리고 윌리엄 얼 쇼 선교사의 가문처럼 그리스도의 사랑의 강권하심에 순종하여 한국인보다 한국을 더 사랑하였던 이들의 헌신도 꼭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기억(Think)하는 사람만이 감사(Thank)합니다.

          감사가 살아있는 사람에게 하나님은 오늘을 감당할 힘과 내일을 바라볼 소망을 함께 허락해 주실 줄 것입니다.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여수룬(Jeshurun)(4회) 신명기 32:15, 33:5, 26, 이사야 44:2


          여수룬(Jeshurun) : 곧은 자, 옳은 자

          이스라엘에 대한 시명 또는 별명이다.
          모세가 이스라엘 총회에 읽어 드린 노래와 축복중에 있는 명칭인데 이스라엘의 대명사로 사용한 듯하다.


          신명기 32:15
          그러한데 여수룬이 살찌매 발로 찼도다 네가 살찌고 부대하고 윤택하매 자기를 지으신 하나님을 버리며 자기를 구원하신 반석을 경홀히 여겼도다.

          신명기 33:5
          여수룬에 왕이 있었으니 곧 백성의 두령이 모이고 이스라엘 모든 지파가 함께한 때에로다.

          신명기 33:26
          여수룬이여 하나님 같은 자 없도다 그가 너를 도우시려고 하늘을 타시고 궁창에서 위엄을 나타내시는도다.

          이사야 44:2
          너를 지으며 너를 모태에서 조성하고 너를 도와줄 여호와가 말하노라 나의 종 야곱, 나의 택한 여수룬아 두려워 말라.


          모세는 그의 120년 생애를 마무리하고  출애굽 이후 광야 40년을 마무리하는 신명기 마지막 부분에서 이스라엘을 애칭 '여수룬'이라고 불러 그 호칭으로 잊어던 하나님의 정과 사랑을 기억하게 하고 있습니다.

          '여수룬'이라고 불려 덕 좀 본 것 있을까요?
          아니 '여수룬'-의로운 자라는 애칭답게 살기나 한 것일까요?
          사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불평도 참 많았던 민족이었습니다.
          힘들다고 늘 아우성쳤습니다.
          부추와 생선을 먹고 싶다고 그것을 못먹어서 힘들다고 아우성쳤습니다.

          민수기 1:5
          ..우리가 애굽에 있을 때에는 값없이 생선과 오이와 참외와 부추와 파와 마늘을 먹은 것이 생각나거늘..'

          그들은 음식이 혀를 통해 목구멍으로 넘어가는 그 몇분의 쾌락과 그 몇 cm의 쾌락을 만족시키지 못한다고 불평했습니다.
          물론 그 몇 분과 몇 cm가 중요한 것이긴 합니다만 그것이 이스라엘의 행복의 측정지수였습니다.
          그 정도 인생들이었습니다.

          그런가하면 그들은 좀 잘 살게되고 걱정이 없게 되면 또 하나님을 발로 찼습니다.

          신명기 32:15
          그런데 여수룬이 기름지매 발로 찼도다.
          네가 살찌고 비대하고 윤택하매 자기를 지으신 하나님을 버리고 자기를 구원하신 반석을 업신여겼도다.

          히브리어 '바아트'는 실제로 Kick-발로 찼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모세는 그런 이스라엘에게 너는 행복자라고 선언!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이여 너는 행복한 사람이로다!

          개역성경에서 11번 나타나는 '행복'이라는 단어는 한국어 번역자들의 신학이 들어간 것입니다.
          히브리어로는 주로 '토브'가 '행복'으로 가장 많이 번역되었습니다. 
          사실은 그냥 복있다고 해도 될 것이요, 축복받았다고 해도 될 것이며, 부요함이라고 해도 되는 데 성경번역하시는 분들은 아마도 행복이라는 단어가 원 문맥이 의도하는 뉘앙스(nuance-미묘한 차이)에 가장 근접한 단어라고 생각한 것 같습니다.
          그래서 저도 우리가 이해하고 인지하고 상식적으로 쓰는 '행복'이라는 단어를 쓰겠습니다.) 

          한해를 보내시며 나는, 행복하다고 생각하십니까?

          '뭐가 되기를' 정말 바란 것은 맞습니까?

          그리고 그랬다면 분명히 행복했을까요? 이 부분은 좀 생각해보고 깊이 대답하셔야합니다.

          또 하나님께서 그렇게 해준 것도 없고 내가 하나님 믿고 된 것도 없는 것은 또 사실이요, 진실인가요?

          하나님은 우리에게 아무 기적도 능력도 베풀지 못한 것인가요? 그것도  대답해야합니다.

           

          물론 믿음이 좀 있는 분들은 이렇게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내게  기적도 능력도 베푸신 것을 부정하지 않겠습니다만

          그러나 내가 정말 원하고 되고 싶은 것을 다 해주지는 않았습니다.

          그렇다면 생각해 볼 일입니다.

          정말 그대는 뭐가 되기를 원했고 뭘 해주기를 원했습니까? 그리고 그것을 바란 이유는 무엇이었습니까?

           

          사람들이 그리 현명하지 않습니다. 된 것이 없고 해준 것이 무엇이냐고 불평하면서도 막상 뭐가 되기를 진심으로 원했으며 무엇을 해주기를 진심으로 바랐느냐고 물으면 그리 잘 대답하지 못합니다.

          우리의 행복이란 참 얇습니다. 남편만 잘만났으면, 부모만 잘만났으면 잘살았을 것이라고 믿는 아이큐들도 많습니다.

          그리고 그나마의 행복도 과거 때문에 오늘을 망치며 살아가는 사람도 많습니다. 오늘의 행복을 스스로 박탈합니다.
          미래의 걱정 때문에 오늘을 망치며 사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오늘의 행복을 스스로 잃어버립니다.
          남들이 나를 어떻게 볼까만 신경쓰다가 정작 자기 자신의 내면의 행복을 잃어버리고 사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비교의식 때문에 늘 신경이 곤두서서 행복을 잃어버리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나는 행복한 사람이다.
          나는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있음을 믿기 때문이다.

           그런데, 여수룬은 그렇게 불평하면서도 원망하면서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하나님을, 엄밀히 말하자면 '하나님 의식'을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불평은 하면서도 하나님은 살아계시고 그들을 지켜보신다는 것을 의식적으로, 무의식적으로 인식하며 살았습니다.
          하나님 의식-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살아계시다는 믿음, 이것이 여수룬-이스라엘 백성들의 축복이었을까요 짐이었을까요?

           

          남들은-무신론자들은- 세상 사람들은- 하나님을 믿지 않아도, 하나님이라는 분은 없다하면서도  잘만 사는 듯 한데  왜 나는 내게 뿌리박힌 이 의식, 그 끈질긴 생각들이 나를 이것도 저것도 못하게 할까라고 탄식해보셨습니까?  그 숙명론적 인식의 끈 때문에 고민해보셨습니까?

           

          도대체 하나님이 나를 지켜보고 있다는 평생 버리지 못하고 따라다니는 이 생각은,  또는 믿음은, 어디에서 온 것일까요?  교회에서 또는 부모에게서 주입된 것일까요, 세뇌교육 탓일까요 영적본능일까요?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꼭 편치만은 않았을 그 생각을 뿌리치지 못하고 그 의식을 지닌 채 살아갔습니다.

          그것은 또 행복이었을까요 불행이었을까요?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운명론적 섭리론적 그 사랑의 끈, 부담스럽고 힘들다고 아우성 치면서도 떠나지 못했습니다. 아니 떠나지 않았습니다.  왜? 떠나지 못했을까요? 남들은 안믿고도 잘 사는데 왜 나는 믿고 이렇게 마음 고생을 할까?  그런데도, 그런데도 이상하게도 그들의 마음 속에 떠나지 않는 것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살아계시다는 생각이었고 그 하나님께서 나를 지켜보고 계실 것이라는 생각이었고 무엇보다 나는 하나님께서 나를 알고 계신다는 생각이었습니다. 다른 말로 하자면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하신다!라는 의식이었습니다.

          바로 그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믿음-그 생각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지켰습니다. 부담스럽고 힘들고 어려웠지만 그것이 그들을 인도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맞았습니다. 긴 세월을 살며 세상 모든 것들의 거품이 사라지면 다시 이 믿음 하나가 남았습니다.

           

          하나님과 함께 하는 그 자체가 행복이었다는 고백을 하는 데 아마도 모세에게는 120년이 걸렸겠고 이스라엘 광야생활에서도 40년이 걸린 고백이 되었습니다. 오늘 감사한 것은 이 행복을 찾아낸 모세의 깊은 경지입니다.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이 행복이 가나안 땅에 들어갔기 때문에 나온 고백인가요? 아닙니다. 그냥 광야에서 나온 고백입니다. 내면에서 우러나오는 고백이요, 삶을 새롭게 이해하고 바라보면서 나오는 고백인 것입니다. 그래도 나는 행복한 사람입니다 라고 고백할수 있어서 그는 행복한 사람이었습니다. 
          당신은 사랑받은 사람입니다.
          당신은 사랑받는 사람입니다.
          당신은 사랑을 받을 사람입니다.

          마음에 새겨야할 문신
          나는 하나님의 것입니다!

          이사야 44장은 43장의 어려움을 겪은 끝에도 그러나 믿음을 다시 회복한 이스라엘 백성 즉 여수룬의 신앙고백을 기록하고 있습니다.그런데 다시 그들 즉 여수룬은 '나는 하나님의 것'이라고  문신을 새깁니다.

          이사야 44:2
          너를 만들고 너를 모태에서부터 지어 낸 너를 도와 줄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나의 종 야곱, 내가 택한 여수룬아 두려워하지 말라

          이사야 44:5
          그 때에는 "나는 주의 것이다"하고 말하는 사람도 있고, "야곱"의 이름을 써서 그의 자손임을 자칭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며, 팔에다가 "나는 주의 것"이라고 쓰는 사람도 있을 것이며, "이스라엘 사람"이라고 불리는 것을 영광으로 여기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새번역 성경]

          자기가 야훼의 것임을 자랑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야곱의 후손이라 불리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도 있으리라. 손에 '야훼의 것' 이라고 문신을 새기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이스라엘의 후손이라 불리는 것을 기뻐하는 사람도 있으리라. (공동번역)

           


           









          전도서(01 / 14 / 2023 -01 / 27 / 2023)


          탈무드의 지혜 예화  
          저주받은 첫날밤  

          *어느 마을에 말할 수 없이 착하고 성실한 유태인이 살고 있었다.
          그 사람은 부자이면서 또한 인자하기로 유명한 토비아라는 사람이었다.
          그는 가난한 사람에게 많은 자비를 베풀어 주었고, 장사지내줄 사람이 없이 죽은 자를 만나면 관례를  따라 정성껏 장례를 치러주곤 했다.

          그런데 이 마을에는 착한 유태인들을 시기하는 사람들 또한 많이 살고 있었다.
          이들은 유태인들이 하나님의 축복 아래 선을 베풀며 행복하게 잘 살고 있는 것이 샘이 났다.
          그리하여 이들은 왕에게 유태인들에 대해 모함을 했다.
          "왕이시여, 유태인들을 벌하시옵소서.
          그들은 우리 조상들의 묘를 파헤쳐 죽은 자의 뼈를 파내고 있습니다.
          시체를 불태워 마법에 쓰이는 약가루를 구하기 위해서 그런 짓을 한다는 것입니다."
          그 말이 모함인지 알지 못하는 왕은 무척 노여워하며 유태인에게 보복하는 명령을 내렸다.
          "만일 유태인이 죽으면 장례를 치르지 말고, 성밖의 구덩이에 갖다 버리도록 해라.
          만일 장례를 치른다던가 하면 교수형을 각오해야 할 것이다."
           
          어느 날, 다른 지역에서 살던 유태인이 이 나리에 왔다가 갑작스러운 병에 걸려 죽었다. 그
          런데 이 나라에선 아무도 장사를 지내줄 사람이 없었다.
          그때 믿음이 깊은 토비아가 썩 나서서는 시신을 염하고, 옷을 입혀 장사를 지내 주었다.
          이것을 본 주민들은 토비아를 끌어다가 재판관에게 데려갔다.

          "이자를 교수형에 처하십시오. 왕의 지시를 어기고 유태인을 묘지에 묻었습니다."
           
          그리하여 토비아는 교수형을 선고 받았다.
          토비아가 사형을 당하게 된 날, 토비아는 교수대 앞에 서게  되었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 일어났다.
          토비아를 교수시키기 위해 교수대에 올라서는 사형집행인마다 모두 갑자기 장님이 되어 버려 토비아를 처형할 수 없게 되곤 했다.
          마침내 토비아는 무사히 집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그는 친척과 주위의 사람들을 모두 불러서는 자기 몸을 일어났던 주님의 은총에 대해 얘기했다.
          토비아의 얘기를 듣고 난 유태인은 그 신비로움에 감탄했고, 앞으로도 하나님의 축복이 계속하기를 기원했다.
           
          한편 그 나라의 왕은 유태인인 토비아를 처형하려고 했을 때 일어났던 기적을 보고 받았다.
          왕은 유태인들에 대한 두려운 마음마저 들었다.
          잠시 후 그는 온 나라에 다시 포고를 내렸다.
          "유태인이 죽은 자를 정중히 장사지내는 것을 허락한다.
          유태인을 모함하거나 해를 입히는 자는 귀천에 관계없이 교수형에 처하겠다."
           
          그후부터 왕은 유태인을 귀하게 여겼다.
          눈이 멀었던 사형 집행인들도 다시 시력을 회복하게 되었다.
          어느 날 아침, 토비아가 침대에서 일어나 창가로 다가가 보
          니 제비가 집을 짓고 있는 것이 보였다.
          토비아는 그 모양이 신기해서 제비집 가까이 얼굴을 갖다대었다.
          그러자 바로 그 순간 제비의 똥이 그만 눈에 떨어졌다.
          토비아의 눈앞이 갑자기 캄캄해지더니 아무것도 보이지 않게 되었다.
          눈동자에 하얀 꺼풀이 덮여버린 것이다.
          졸지에 앞을 못 보는 장님이 되어버린 토비아는 어느 날 하나밖에 없는 아들을 불러 일렀다.
          "내가 장사를 하고 다닐 적에 인도에 간 적이 있었다.
          그곳에서 장사로 많은 돈을 벌었는데, 돌아오는 길이 안전하지 못해서 그곳에 있는 내 친구 페루 하스먼에게 그때 번 돈을 맡겨 놓았다.
          이제 나는 벌을 받아 앞을 볼 수 없게 되었구나.
          아들아, 그러니 내 대신 인도로 가서 그 친구를 찾아가 보아라.
          네가 나의 서명을 든 편지를 보이면 그 친구는 내가 맡긴 돈과 보물을 돌려줄 것이다."
           
          아버지의 말을 듣고 아들은 인도까지 길 안내를 해줄 사람을 구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며칠 후, 인도의 지리와 사정을 훤히 알고 있는 남자를 발견하여 아버지에게 데리고 왔다.
          "아버지, 이 사람은 인도의 거리거리를 손바닥 들여다보듯 잘 알고 있다고 합니다."
           
          토비아는 그 사람의 인사를 받고 나서 물었다.
          "인도의 투바르란 거리를 아시오?"
          "네, 압니다. 그 거리는 대단히 크고 번화하지요. 또 현자들이 많이 살고 있기도 하구요."
          "내 아들을 그곳까지 데려다 주시오. 비용은 얼마든지 낼 테니까."
           
          토비아는 아들을 시켜 인도의 친구에게 보내는 편지를 대신쓰게 하고 끝에 서명을 했다.
          그리고는 아들을 껴안고 말했다.
          "잘 다녀오너라. 조상들이 너를 지켜봐 주실 것이다."
           
          젊은이는 안내자와 함께 투바르로 떠났다.
          안내자는 조금의 실수도 없이 그를 목적지까지 데려다 주었다.
          젊은이는 아버지가 말했던 페루 하스먼의 집을 물어 물어 찾아갔다.
          "어른께서 페루 하스먼이란 분이신 지요?"  
          "그렇소만, 젊은이가 어떻게 내 이름을 아는가?"  
          "저의 부친의 존함은 토비아라고 하는데, 부친께서 저보고 어른을 찾아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토비아의 아들은 그렇게 말하고 부친의 말을 받아 적은 편지를 내보였다.
          페루 하스먼은 그 편지와 서명을 보고, 젊은이의 얼굴을 유심히 살펴보더니 친구의 아들로 믿게 되었다.
          그는 젊은이를 껴안으며 반가워했다.
          그리고는 맛있는 음식을 푸짐하게 차려 대접해 주었다.
          "그래, 자네 부친께서 평안하신가? 자네를 보니 정말 반갑네."
          "부친께선 편안하게 잘 계십니다."
          "정말 다행이구나. 먼 길을 오느라 피곤할 테니 자네는 이제 푹 쉬게. 십여 일 내 곁에 머물면서 그 동안 자네 부친이 살아가는 얘기를 내게 들려주지 않겠나?"
           
          그러나 젊은이는 정중하게 거절을 했다.
          "대단히 고마우신 말씀이십니다. 하지만 전 고향으로 빨리 돌아가 봐야 할 것 같습니다. 연로하신 부친을 남겨두고 떠난 지라 걱정이 됩니다. 아시다시피 부친께선 저밖에 자손이 없기 때문에 제가 곁에 없으면 많이 허전해  하십니다."
           
          젊은이의 말을 듣고 있던 페루 하스먼은 그 효성스러운 마음에 감동을 하였다. 그리하여 토비아가 맡겨 두었던 보물을 그의 아들에게 넘겨주고, 그 이외에도 옷과 값진 선물을 따로 마련해서 젊은이에게 가져가도록 했다.
          그리고 두 사람의 장정을 보내어 도중까지 길을 안내하도록 하였고 풍악을 울려 전송을 했다.
          토비아의 아들과 안내자가 길을 떠나서 해변의 모래 길을 걷고 있는데 물고기 한 마리가 파도에 휩쓸려 나와 숨을 헐떡이고 있었다.
          안내자는 물고기를 잡아 배를 가르고 창자와 담낭을 끄집어 내고는 정작 고기는 버렸다.
          "왜 고기를 가져가지 않으십니까?"
          의아스럽게 생각된 젊은이가 물었다.
           
          "이 창자와 담낭에는 특별한 효능이 있어서 좋은 약이 되기 때문입니다. 앞이 안 보이는 사람에게 이 담즙을 짜서 바르면 눈이 뜨여 다시 앞을 볼 수 있게 됩니다. 그리고 이 창자를 태워 연기를 내면 악마가 접근을 못하게 되어 집안 사람들에게 해를 끼치지 못하게 합니다."
           
          안내자의 설명을 들은 젊은이는 그 창자와 담낭을 줄 수 없겠느냐고 부탁했다. 안내자는 순순히 수락을 했고, 젊은이는 그 두 가지를 소중히 간수하였다.
          몇 달 후, 젊은이는 무사히 집으로 돌아왔다. 아들을 기다리고 있던 토비아는 무척 반가워하였다. 그는 안내인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하였다.
          "돈을 바꾸는 곳에 가서 너를 안내해 준 사람에게 그 사람이 원하는 대로 사례를 해드리려무나."
           
          아버지의 말에 따라 젊은이는 안내자와 함께 집을 나섰다.
          그런데 밖에 나오자마자 안내자는 어디론가 자취를 감춰버리고 말았다. 여기 저기를 둘러보다가 아들은 다시 집으로 들어와 아버지에게 그 사실을 말씀드렸다.
          "아들아, 아마 하나님께서 우리를 도와주시려고 그 사람을 보내셨던가 보다. 그 사람은 예언자 엘리야였던게 틀림없다. 그리고 나서 아들은 해변 모래사장에서 얻은 담즙과 창자의 이야기를 아버지에게 말씀드렸다.
          "엘리야께서 그렇게 말씀하셨다면 그 두 가지 물건은 참으로 소중한 것이다."
           
          토비아는 아들로부터 담즙을 받아 눈에 발랐다. 그러자 막혔던 시야가 트이면서 다시 밝은 세상을 볼 수 있게 되었다.
          "아들아, 하나님께서 우리를 돌보시는가 보다. 너를 무사히 인도까지 갔다오게 하시고, 이렇게 내 눈까지 낫게 해 주시니...."
           
          토비아와 아들은 다시 밝은 세상에서 행복한 날들을 보내게 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토비아가 아들에게 말했다.
          "아들아, 내가 하는 말을 귀담아 듣기 바란다. 내 여동생에게 딸이 하나 있는데 그 딸아이와 네가 결혼했으면 싶다.
          그 아이는 무슨 운명을 타고났는지 세 번씩이나 결혼을 했지만 그때마다 첫날밤을 지내기도 전에 남자들이 시체가 되고 마는구나."
           
          "하지만 아버님, 만일 제가 그 사촌과 결혼했다가 다른 세 남자들처럼 죽으면 어떻게 합니까?"
           
          "그 세 남자가 목숨을 잃은 것은 분명히 악마가 그들의 혼을 빼앗아갔기 때문일 것이다. 널 안내했던 그분의 말씀대로 물고기의 창자를 태워서 집안에 연기가 가득 차도록 해라.
          하나님을 깊이 믿고 있으면 하나님은 우리를 악마로부터 돌봐주실 것이다."
           
          젊은이는 마음을 굳게 먹고 아버지가 시키는 대로 따랐다.
          이윽고 결혼식이 끝나고 밤이 되었다. 젊은이는 창자를 태워 집안밖에 연기를 피웠다. 그리고 신혼 방에 들어가 첫날밤을 맞이하였다.
          늙은 아버지는 밤새도록 눈물을 흘리며 주님께 아들 내외를 지켜달라고 빌고 또 빌었다.
          드디어 날이 밝았다. 모든 사람들은 불안과 근심으로 조바심을 내면서 과연 젊은이가 살아서 방문 앞으로 나설 것인지 아니면 시체가 되지는 않을런지 걱정을 하며 기다렸다.
          잠시 후 방에서 나온 젊은이는 건강한 모습 그대로였다.
          그 이후, 이 부부는 아무 걱정거리 없이 많은 자손들을 거느리고 오래도록 행복하게 살았다. 
          부부가 진정으로 사랑하고 있다면 칼날 폭 만큼의 좁은 침대에서도 누워 잘 수 있지만, 서로가 미워하기 시작하면 폭이 10미터나 되는 침대로도 비좁다.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어느 곳에 주님을 열심히 섬기며 살아가는 수도사가 있었다.
          선하고 신앙이 깊은 사람인지라 하나님도 그를 깊고 아끼고 있었다.
          어느 날, 그 수도사가 강변에 앉아 휴식을 취하고 있는데 독수리 한 마리가 날아오더니 억센 발톱 사이에서 쥐 한 마리를 떨어뜨리는 것이었다.
          상처를 입은 채 벌벌 떨고 있는 그 쥐가 가엾게 생각되어 수도사는 외투자락으로 감싸주었다.
          그리고 집에 데려가 치료를 해주고 싶었으나 집안 식구들이 더럽다고 반대할 것 같아 여자아이로 변하게 해 달라고 하나님께 기도를 드렸다.

          하나님은 신앙이 깊은 그의 기도를 들어주셔서 그 쥐를 예쁜 소녀로 변신시켜 주었다.
          수도사는 그 소녀를 집으로 데리고 가서는 마치 친딸처럼 예쁘게 키웠다.

          어느덧 세월이 흘러 그 소녀가 열두 살이 되었다.

          "너도 이젠 나이가 찼으니 시집을 가야지? 너는 어떤 사람을 남편으로 삼고 싶으냐?"
          "저는 세상에서 가장 강한 자에게 시집을 가고 싶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강한 자라.... 내 생각엔 세상에서 가장 강한 것이 태양인 것 같다. 우리, 태양에게 결혼을 부탁해 보는 것이 어떠하겠느냐?"

          수도사는 몸을 청결히 하고 태양에게 호소했다.

          "태양이시여, 만물을 자라게 하는 강한 자여! 당신에게 부탁이 있습니다. 저의 딸이 세상에서 가장 강한 자에게 시집을 가고 싶어하기에 , 제가 그 뜻을 전하려 합니다."

          수도사의 호소를 듣고 태양이 응답하였다.

          "주님께서도 그대의 기도에 기꺼이 응답을 하시는데 내가 어찌 그대를 빈손으로 돌아가게 하겠는가. 내가 진실을 말하겠노라. 나는 그렇게 강한 자가 못되네. 나보다 강한 자가 있다네."

          "그분은 누구십니까?"

          "구름의 대왕이지. 그가 구름을 피우기 시작하면 나는 그 속에 갇히게 되고 이 세상은 암흑에 되어 버린다네."

          수도사는 태양이 가르쳐준 대로 구름이 생성되어 퍼지는 곳으로 가서는 구름의 대왕을 불렀다.
          수도사의 이야기를 들은 구름 대왕은 대답했다.

          "그대의 이야기를 잘 들었노라. 물론 나도 강하긴 하지.
          하지만 나보다 강한 자가 있어 나도 그에게는 꼼짝 못한다네."

          "그 분이 누구십니까?"

          "바람이네. 바람은 나를 이 끝에서 저 끝으로 날려보내기를 식은 죽먹기처럼 하네. 바람에게만은 맥을 못 추겠거든."

          수도사는 바람을 찾아가서 구름의 대왕이 했던 똑같은 말을 했다.

          "물론 나는 강한 힘을 가졌지. 하지만 나도 어쩔 수 없는 강한 상대가 있네. 그대는 그자에게 가서 부탁해 봄이 어떤가?"

          "그가 누구입니까?"

          "산이네. 내가 아무리 강한 바람을 보내도 산이 가로막으면 난 힘을 못 쓰거든."

          수도사는 산에게로 가서 또 딸의 이야기를 했다.

          "물론, 내가 강한 것은 사실이네. 하지만 나에게도 두 손을 들게 하는 상대가 있으니 그자를 가르쳐 주겠네. 바로 쥐일세. 쥐는 내 배 가운데에 구멍을 뚫는 놈이네."

          수도사는 쥐를 찾아갔다.

          "당신에게 내 딸을 시집보내고 싶은데 어떻게 하겠소?"

          "거대한 산을 구멍을 뚫을 수 있는 자는 우리 쥐들밖에 없긴 할 것입니다. 하지만 저는 쥐이기 때문에 땅속에 살아야 합니다. 그런데 어떻게 인간과 결혼할 수 있겠습니까?"

          수도사는 다시 딸에게 돌아갔다.

          "내가 여태 돌아다녀 보았지만 결국 쥐가 제일 강하다는 결론이 났다. 쥐에게 시집가겠니? 네가 그러길 원한다면 주님께 부탁드려서 원래의 네 모습인 쥐가 되도록 하겠다."

          "네, 알겠습니다. 그렇게 하겠습니다."

          소녀는 다시 쥐가 되었다.
          수도사는 소녀 쥐를 쥐구멍으로 데리고 가서 결혼식을 올려 주었다.

          인간의 본질은 변하지 않는다는 교훈이라고 생각합니다.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전도서 12장

          1월 27일(금)

          사람의 본분(전도서 12:13)

          일의 결국을 다 들었으니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 명령을 지킬찌어다 이것이 사람의 본분이니라.
          Now all has been heard; here is the conclusion of the matter: Fear God and keep his commandments, for this is the whole duty of man.

          본분(3605)  כֹּל  

          1. 전체,  2. 모두,  3. 온통
          Pronunciation / 콜(kôl)
          Etymology / 3634에서 유래
          Old Testament / 5408회 사용

          *3634. 카랄kâlal)  כָּלַל       

          1. 완성하다,  2. 왕관을 쓰다
          Pronunciation / 카랄(kâlal)
          Bible verse / 온전하게 하다(겔 27:4, 11)
          Old Testament / 2회 사용

          사람의 본분 -
          이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칼 하아담'( - )은 문자적으로는 크게 두 가지로 이해될 수 있다.
          1. '사람의 모든 것'(the whole of the man, M.A.Eaton),
          2. '모든 사람'(every man, W.J. Deane).

          (1)을 취할 경우 본절은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사람의 행할 의무 전체(the whole duty of man, KJV, NIV, RSV)라는 뜻이 되며,
          (2)를 위한 경우는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분의 명령을 지키는 것이 모든 사람에게 적용되어져야하는 모든 사람의 의무(the duty of all men, RSV난하주)라는 뜻이다.


          본분(本分)

          창세기 38:8, 아우의 본분
          유다가 오난에게 이르되 네 형수에게로 들어가서 남편의 아우의 본분을 행하여 네 형을 위하여 씨가 있게 하라.

          욥기 32:17,
          나도 내 본분대로 대답하고 나도 내 의향을 보이리니 .

          에스겔 45:17
          왕은 본분대로 번제와 소제와 전제를 절기와 월삭과 안식일과 이스라엘 족속의 모든 정한 절기에 드릴찌니 이스라엘 족속을 속죄하기 위하여 이 속죄제와 소제와 번제와 감사제물을 갖출찌니라.
          하나님은 ... 선악간에 심판하시리라 -

          이는 3:7;11:9의 반복이다.
          이와 같은 말씀을 본서의 제일 끝에 언급한 것은 근본적으로 아담 안에 있는 모든 인생이 정죄된 죄인이며(롬 5:16-21), 하나님을 떠난 인간의 모든 일, 이세상에서의 모든 것이 헛된 것인 바 인간이 하나님을 떠나 매사를 스스로 도모하지 말고 또한 하나님을 거역하거나 불순종하지 말고 하나님을 경외하며 그분의 명령을 지키면서 의롭게 살 것을 촉구하기 위함이다.

          인생을 연극에 비유할 때 몇 막 몇 장이냐고 표현합니다.
          제 경우 74살이므로 7막 4장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런데 연극 무대가 몇 막 몇 장인지 나는 알지 못합니다.
          연극을 연출하는 연출가 하나님께서 알려주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지금 몇 막 몇 장의 무대 위에 올려져 있습니까?
          앞으로 몇 막 몇 장이 더 올려질는지 예측하십니까?
          얼마나 더 무대위에 올라야 할지 모르기에 오늘도 내게 주어진 무대 위에서 최선을 다하는 것만이 내가 할 수 있는 역할이라고 하겠습니다.

          전도서를 마감하는 12장에서 너의 창조자를 기억하라는 말씀을 생각해 봅시다.

          3. 그런 에는 집을 지키는 자들이 떨것이며 힘 있는 자들이 구부러질 것이며 맷돌질 하는 자들이 적으므로 그칠 것이며 창들로 내어다 보는 자가 어두워질 것이며
          4. 길거리 문들이 닫혀질 것이며 맷돌 소리가 적어질 것이며 새의 소리를 인하여 일어날 것이며 음악하는 여자들은 다 쇠하여질 것이며
          5. 그런 자들은 높은 곳을 두려워할 것이며 에서는 놀랄 것이며 살구나무이 필 것이며 메뚜기도 짐이 될 것이며 원욕이 그치리니 이는 사람이 자기 영원한 집으로 돌아가고 조문자들이 거리로 왕래하게 됨이라
          6. 은줄이 풀리고 금 그릇이 깨어지고 항아리가 샘 곁에서 깨어지고 바퀴가 우물 위에서 깨어지고
          7.은 여전히 으로 돌아가고 신은 그 주신 하나님께로 돌아가기 전에 기억하라

          3~6절은 인간의 육신이 점점 쇠약해질 것을 시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월터 카이저 2세(Walter C. Kaiser Jr.)의 설명입니다.

          월터 카이저 (Walter C. Kaiser Jr. 1933. 4. 11 ~ )
          미국의 복음주의 구약 학자, 저술가 및 교육자
          고든 콘웰 신학교 구약학자
          2006년 6월 30일 은퇴하였다.
          카이저는 1933년 독일침례교도인 부모님인 월터 크리스챤 카이저와 이스텔 자워스키 카이저 사이에서 펜실베니아 폴크로프트에서 태어났다.
          휘튼 칼리지에서 AB ,
          휘튼 대학원에서 BD
          브랜다이스 대학교 MA 및 지중해 연구로 Ph.D.를 취득했다.
          2006년까지 그는 고든 콘웰 신학교의 학장으로 재직했다.


          인생을 지혜롭게 잘 사는 길은 전도자에 의하면 죽을 날을 생각하고 창조자를 기억하는 것이다(1~2). ‘기억한다’(종종 ‘생각하다’로 번역된)는 단어는 단순히 잊었던 것을 떠올리는 것이 아니라, 의지적 결단, 결정적 행동을 수반하는 적극적이고 동적인 동사다. 가령, 하나님께서 한나를 생각하셨다(삼상 1:19)는 말은 한나를 잊었다가 기도를 듣고 다시 그녀를 기억하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한나를 위해 일하시겠다고 결정하셨다는 의미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기억하시고 생각하신다는 말씀은 엄청난 은혜의 표현이다. 이와 같이 전도자가 아직 죽음이나 몸이 노쇠할 것도 생각하지 않고 살아가는 청년(넓은 의미로 대부분의 사람을 포함한다)에게 창조자 하나님을 기억하라고 하는 말은 힘이 있을 때 창조자를 섬기고 그분의 영광을 위해서 힘써 살아가라는 권고다. 죽음이 오기 전에, 육신이 마음대로 움직여지지 않는 날이 오기 전에 말이다. 2절이 이런 죽음의 날을 설명한다(2).

          2. 인간의 육신은 점점 약해질 것이다(3~7). 3~6절은 인간의 육신이 점점 쇠약해질 것을 시로 표현하고 있다. 월터 카이저 2세(Walter C. Kaiser Jr.)의 설명이다.

          집을 지키는 자들이 떤다(3)노년에 중풍 또는 쇠약함으로 수족이 떨린다.
          힘있는 자들이 구부러진다(3)쇠약해서 허리와 다리가 굽고 무릎이 흔들거린다.
          맷돌질하는 자들이 적으므로 그칠 것이다(3)이가 음식을 씹을 힘을 잃는다.
          창들로 내다 보는 자가 어두워질 것이다(3)눈의 시력을 잃고 동공의 수축 이완이 잘 되지 않는다.
          길거리 문들이 닫혀질 것이다(4)입술이 이가 없으므로 입안으로 오므라든다.
          맷돌소리가 적어질 것이다(4)이가 없으므로 부드러운 음식만 먹을 수 있다.
          새의 소리로 말미암아 일어날 것이다(4)아침에 들리는 아주 작은 소리에도 잠을 깬다.
          음악하는 여자들은 다 쇠하여 질것이다(4)음악과 노래를 만들어 즐길 수 있는 능력도 쇠할 것이다.
          그런 자들은 높은 곳을 두려워할 것이며 길에서는 놀랄 것이다(5)그는 고공공포증에 시달리며 전에 자주 다니던 골목길을 더듬거리며 다니지 않을까 두려워한다.
          살구나무가 꽃이 필 것이며(5)머리가 나이와 함께 백발로 변한다.
          메뚜기도 짐이 될 것이며(5)노인이 지팡이를 짚고 걸을 때 절뚝거리는 걸음걸이를 묘사하는 것이다.
          정욕이 그치리니(5)모든 성욕과 욕망을 상실한다.
          조문객들이 거리로 왕래하게 됨이라(5)말 그대로이다.
          은 줄이 풀리고(6)두뇌와 척수를 연결해주는 척수가 창백해져 은빛처럼 된다.
          금 그릇이 깨지고(6)그 모양과 색깔로 보건대 두뇌를 지칭하는 것 같다.
          항아리가 샘 곁에서 깨어지고(6)절망한 마음, 즉 항아리 모양의 그릇이 부서지고 깨어지고 지탱해주는 모든 피가 흐르지 않는다.
          바퀴가 우물 위에서 깨지고(6)양수기처럼 끊임없이 피를 전신으로 운반하는 정맥과 동맥의 전체계가 심장이 멈추자 중단된다.

          이런 날이 불현듯 올 것을 알지 못하고 살아가는 사람은 창조자를 위해서 살아갈 시간을 가지지 못할 것이다. 그의 미래는 위험하고 비참할 것이다. 결국 몸은 썩어서 흙이 되고 그 영혼은 하나님을 뵙게 될 것이다(7). 마지막 날에 하나님께서는 오직 하나님을 경외한 영혼들에게 부활의 영광스러운 몸을 주시고 영생하게 하실 것이다.

          3. 그러므로 인생을 헛되이 낭비하지 말고 하나님을 경외하라(8~14). 이 사실을 알지 못하고 살아가는 수많은 인생은 얼마나 어리석고 헛된가! 전도자는 다시 한 번 그런 인생의 헛됨을 표현한다(8). 전도자는 자신을 3인칭으로 묘사하면서 지혜롭다고 하고 그가 참된 지식을 가르쳤고 또 그 지식을 묵상하고 연구하였다고 말한다(9). 자신 또한 진리의 말씀을 추구하였다(10). 그는 허무주의나 염세주의나 쾌락주의를 부추기려고 하지 않는다. 지혜자가 전해주는 진리의 말씀은 마치 찌르는 채찍 같고 잘 박힌 못과 같다(11). 이것은 당시 목자들이 소들을 채찍으로 움직이게 하고 텐트를 치기 위해서 못을 땅 속에 깊이 박는 것을 비유한 말이다. 진리의 말씀은 사람을 움직이게 하고(창조자를 위해서 살게 하고), 그들의 인생관을 확실하게 조여주는 못의 역할을 한다. 또한 진리의 말씀은 경계(충고와 훈계)의 역할을 한다(12). 많은 책과 지식은 사람을 피곤하게 하지만, 진리의 말씀은 사람을 경계하여 옳은 길을 선택하도록 지도한다. 전도자가 주고 싶은 교훈은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 명령을 지키라는 것이다. 이것이 사람의 마땅한 본분이다(13). 하나님이 주신 삶을 즐거워하고 그 삶에 주신 선물들을 즐기며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살아가고 결국 언젠가는 하나님 앞에 서게 될 날이 올 것과 하나님 앞에서 모든 행위와 은밀한 일이 드러나게 될 것을 알고 살아가는 것이다(14). 이것은 우리 인생을 고통스럽게 하는 것이 아니라 인생을 제대로 즐기고 살게 하는 힘이다.

          “참 좋으신 하나님 아버지, 저희 인생이 죄로 말미암아 고통과 염려와 슬픔이 끊이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주께서 주신 인생을 즐기며 살아가도록 허락하옵소서. 늘 창조자 하나님을 기억하고 경외하며 그 명령을 지키고, 하나님의 영광을 구함과 동시에 하나님께서 주신 인생을 기쁨으로 살게 하옵소서.”


          집을 지키는 자들이 떤다(3) - 중풍 또는 파킨스 등으로 수족이 떨린다.

          힘 있는 자들이 구부러진다(3) - 허리와 다리가 굽고 무릎이 흔들거린다.

          맷돌질하는 자들이 적으므로 그칠 것이다(3) - 풍치로 인하여 이가 흔들려 음식을 먹을 힘을 잃는다.

          창들로 내다보는 자가 어두워질 것이다(3) - 눈의 시력을 잃고 동공의 수축 이완이 잘 되지 않는다.

          길거리 문들이 닫혀질 것이다(4) - 입술이 이가 없으므로 입안으로 오므라든다.

          맷돌소리가 적어질 것이다(4) - 이가 없으므로 부드러운 음식만 먹을 수 있다.

          새의 소리로 말미암아 일어날 것이다(4) - 아침에 들리는 아주 작은 소리에도 잠을 깬다.

          음악하는 여자들은 다 쇠하여 질것이다(4) - 음악과 노래를 만들어 즐길 수 있는 능력도 쇠할 것이다.

          그런 자들은 높은 곳을 두려워할 것이며 길에서는 놀랄 것이다(5) - 그는 고공공포증에 시달리며 전에 자주 다니던 골목길을 더듬거리며 다니지 않을까 두려워한다.

          살구나무가 꽃이 필 것이며(5) - 머리가 나이와 함께 백발로 변한다.

          메뚜기도 짐이 될 것이며(5) - 노인이 지팡이를 짚고 걸을 때 절뚝거리는 걸음걸이를 묘사하는 것이다.

          정욕이 그치리니(5) - 모든 성욕과 욕망을 상실한다.

          조문객들이 거리로 왕래하게 됨이라(5) - 말 그대로이다.

          은 줄이 풀리고(6) - 두뇌와 척수를 연결해주는 척수가 창백해져 은빛처럼 된다.

          금 그릇이 깨지고(6) - 그 모양과 색깔로 보건대 두뇌를 지칭하는 것 같다.

          항아리가 샘 곁에서 깨어지고(6) - 절망한 마음, 즉 항아리 모양의 그릇이 부서지고 깨어지고 지탱해주는 모든 피가 흐르지 않는다.

          바퀴가 우물 위에서 깨지고(6) - 양수기처럼 끊임없이 피를 전신으로 운반하는 정맥과 동맥의 전체계가 심장이 멈추자 중단된다.

           

          4. 세상 모든 사람이 이런 날을 만나게 될 것인데, 이 날이 불현듯 올 것을 알지 못하고 살아가는 사람은, 결코 창조자를 위해서 살아갈 시간을 가지지 못할 것입니다. 그의 미래는 위험하고 비참할 것입니다. 결국 몸은 썩어서 흙이 되고, 그 영혼은 하나님을 뵙게 될 것입니다(7). 마지막 날에 하나님께서는 오직 하나님을 경외한 영혼들에게 부활의 영광스러운 몸을 주시고 영생하게 하실 것입니다.

          146,000명을 전도한 제너(Genor)

          단 12:3 많은 사람을 옳은 데로 돌아오게 한 자는 별과 같이 영원토록 비취리라
          ●행 1:8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로키 산맥 해발 3000m 높이에 수목 한계선이 있다.

          이 지대의 나무들은 매서운 바람으로 인해 곧게 자라지 못하고 무릎을 꿇고 있는 모습을 한 채 서 있다.
          이 고지대의 나무들은 매서운 바람과 싸우며 생존을 위해 무서운 몸부림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세계적으로 가장 공명이 잘 되는 명품 바이올린은 바로 이 ‘무릎을 꿇는 나무’로 만들어진다.

          낮엔 따뜻하고 밤엔 추운 날씨가 계속될 때 가장 선명한 단풍이 만들어지듯 우리 인간도 고난을 통과하면서 하나님이 쓰시기에 합당한 사람으로 다듬어진다.

          성경을 보라.
          연단을 받지 않고 쓰임받는 사람이 있는가?
          모세도 쓰임받기 전에 미디안 광야에서 40년의 훈련을 받았다.
          다윗 왕도 광야의 훈련을 받고난 다음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자로 쓰임받았다.

          아름다운 영혼을 갖고 인생의 절묘한 선율을 내었던 사람들은 아무런 고난 없이 좋은 조건에서 살아온 사람이 아니라 온갖 역경과 아픔을 겪어온 사람이다.



          40년간 호주의 번화가인 George Street에서 “선생님, 구원받으셨습니까? 만약 오늘 저녁에 죽는다면 천국에 갈 수 있습니까?”라는 똑같은 전도방법으로 최소한 146,000명을 전도한 Genor씨는 과거 호주 전투함을 타고 있을 당시 형편없이 타락한 삶으로 인해 인생의 큰 위기에 봉착해 있었는데 그때 소책자를 주며 도와준 동료를 통하여 주님을 영접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 이후 그의 인생은 완전히 바뀌었고, 하나님의 은혜가 너무도 감사해서 ‘주님, 하루에 최소한 열 명에게 이런 방법으로 전도하겠습니다’라고 약속을 했다고 합니다. 그때부터 40년이 넘도록 전도를 했는데 간혹 몸이 아파 전도를 못한 날은 다른 날에 보충을 하면서까지 매일 전도했다는 것입니다.

           

          직장에서 은퇴한 이후에는 시드니에서 가장 번화한 George Street 거리가 최고의 전도장소라 생각되어 그곳에서 계속 소책자를 나누어주며 전도했습니다. 40년 넘게 전도를 해 왔었지만, 지금까지 그 어느 누구도 이 전도로 인해 주님을 영접했다고 직접 그에게 찾아와 말한 사람은 없었는데, 세계 각 곳의 수많은 목사 선교사 성도들이 Genor씨의 복음 메시지를 통해 주님을 영접했다고 간증했다고 합니다. 전도는 주님께서 주신 지상명령입니다.

          주님! 전도를 통해 천국에서 빛나는 사람 되게 하소서.
          당신은 매일 몇 명에게 전도하십니까?

          광야를 읽다
          이진희지음

          20대 30대를 살 때에는 인생을 마치 산에 오르는 것처럼 생각합니다.
          그들에게 인생은 확실해 보입니다.
          노력하면 다 할 수 있을 거라고 여깁니다.
          무엇인가 해내고 말겠다는 의지로 정상을 향해 올라가는 투지를 불태웁니다.
          정상에 서 보겠다는 야망을 갖습니다.
          그리고 자신 있게 정상에 오를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그런데 40대 50대가 되면 인생이 달리 보이기 시작합니다.
          인생은 정상을 향해 오르는 것이 아니라 언제 끝이 보일지 모르는 사막을 지나가는 것과 같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무엇인가를 성취하기 위해 사는 것이 인생이 아니라 살아남기 위해 사는 것이라는 것을 절감하게 됩니다.
          점점 깊은 사막 한 가운데로 들어가고, 험준한 산도 넘어갑니다.
          때로는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지나고, 맹수가 공격하는 수많은 삶의 위기들을 만나게 됩니다.
          늘 불안하고 쫓기는 삶을 삽니다.
          인생의 캄캄한 어두운 밤을 만나기도 하고, 인생의 거친 풍랑이 엄습해 옵니다.
          이런 과정을 통과하면서 인생은 정복하는 것이 아니라 견뎌내는 것이라는 것을 배우게 됩니다.

          우리는 지금까지 인생을 산에 오르는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어떻게 하면 더 높은 산에 오를 수 있을까?’‘어떻게 하면 남이 올라가지 못한 산에 올라갈 수 있을까?’를 놓고 고민을 했습니다. 그런데 인생은 실상 산에 오르는 것보다 광야를 지나는 것과 더 많이 닮았습니다. 결혼하는 것이 산에 오르는 것이라면 결혼생활은 광야를 통과하는 것입니다. 아이를 낳는 것이 산에 오르는 것이라면 아이를 키우는 것은 광야를 통과하는 것입니다. 직장에 들어가는 것이 산에 오르는 것이라면 직장생활은 광야를 통과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인생의 대부분은 광야를 지나는 것에 가까움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여전히 산에 오를 것처럼 등산복과 등산화, 등산장비를 등에 지고 갑니다. 만약 우리 인생에 광야가 더 많이 펼쳐져 있다는 사실을 미리 안다면 사람들은 더 높은 곳을 향해 오르기 위해 발버둥을 치지 않을 것입니다. 더 빨리 오르려고 애쓰는 것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지도 않을 것입니다. 오하려 광야에서 생존하기를 더 힘쓸 것입니다. 허탄하고 허무한 일에 지나치게 에너지를 낭비하지 않을 것입니다. 지금 여기에서 진정한 인생의 의미를 발견하고자 할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 2015년 마지막 주일예배를 드리고 있습니다. 새해를 맞이한 지가 바로 며칠 전인 것 같은데 어느덧 한해가 화살처럼 날아갔습니다. 우리 인생도 그렇습니다. 여기 앉아계신 연로하신 분들도 지난 일들을 돌이켜 볼 때마다 인생의 영화와 부귀가 한갓 봄날의 꿈과 같다는 사자성어 ‘일장춘몽’을 상기하게 될 것입니다. 이런 인생을 진지하게 대면하도록 도와주는 책이 구약성경 전도서입니다.

          우리는 전도서하면 먼저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나 모든 것이 헛되도다”말을 떠올리게 됩니다. 이 말은 주머니에 송곳을 집어넣어 감추려 해도 감출 수 없듯이 우리 인생의 허무한 단면을 노골적으로 적나라하게 표현해 주고 있습니다. 그래서 얼핏 전도서는 인생에 대한 지독한 염세주의, 비관주의를 가르치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전도서의 진정한 목적은 이런 허무를 넘어서 인생의 참 의미와 목적을 발견하도록 우리를 이끌어 주는데 있습니다. 하나님 없는 허무한 인생과 하나님 있는 참 인생의 가치를 한 눈에 볼 수 있도록 돕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경외하는 인생이 얼마나 소중하고 값진 것인지를 강력하게 말씀해 줍니다.

          1절을 보십시오. “너는 청년의 때 곧 곤고한 날이 이르기 전, 나는 아무 낙이 없다고 할 해가 가깝기 전에 너의 창조자를 기억하라.” 우리 인생에 곤고한 날이 찾아옵니다. 아무 낙이 없는 때가 옵니다. 무엇보다도 인생의 가장 큰 시련 죽음의 순간을 맞이하게 됩니다. 죽음은 그 누구도 피해갈 수 없습니다. 그래서 그런 날이 오기 전에, 즉 청년의 때에 창조자 하나님을 기억하라고 전도자는 우리에게 권면합니다. 하나님을 기억하고 그분을 경외하는 것, 이것이 전도서의 결론이고 전도자가 모든 인생에게 하고자 하는 말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유한한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모두 노도질풍과 같은 시기 청년의 때가 잠간이고 어느덧 인생 황혼이 찾아옵니다. 2절부터 6절까지는 우리 인생에 결국 맞이하게 되는 노년기를 묘사한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먼저 2절입니다. 여기서 해와 빛과 달과 별들이 어둡다는 것은 우리의 얼굴과 뺨, 그리고 눈이 쇠해짐을 의미합니다. 비 뒤에 구름이 다시 일어난다는 것은 많은 눈물을 흘린 다음에 또 근심거리가 생기는 것을 말합니다.

          이어서 3절과 4절을 보십시오. “그런 날에는 집을 지키는 자들이 떨 것이며 힘 있는 자들이 구부러질 것이며 맷돌질하는 자들이 적으므로 그칠 것이며 창들로 내어다 보는 자가 어두워질 것이며 길거리 문들이 닫혀질 것이며 맷돌 소리가 적어질 것이며 새의 소리를 인하여 일어날 것이며 음악하는 여자들은 다 쇠하여질 것이라”

          ‘집을 지키는 자들이 떤다’는 것은 자기 몸을 지키는 손과 팔, 그리고 다리가 떨리는 현상을 지적하고, ‘힘 있는 자들이 구부러지는 것’은 우리의 등과 무릎이 구부러지고 약해지는 것을 말합니다. ‘맷돌질하는 자들이 적으므로 그치는 것’은 이가 많이 빠져서 음식을 잘 씹지 못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창들로 내어다 보는 자가 어두워지는 것’은 눈이 어두워 침침해지는 것을 말합니다. ‘길거리 문들이 닫혀지고 맷돌 소리가 적어진다는 것’은 우리 귀가 어두워지고 입의 말수도 적어진다는 것입니다. ‘새의 소리를 인해 일어난다’것은 잠이 적어져 새 소리에도 쉽사리 잠을 깨는 것을 뜻합니다. ‘음악하는 여자들이 다 쇠하여진다’는 것은 우리 목소리가 쇠해지는 것을 말합니다.

          5절에서도 우리 인생이 쇠락해 가는 모습을 잘 묘사해 주고 있습니다. “그런 자들은 높은 곳을 두려워할 것이며 길에서는 놀랄 것이며 살구나무가 꽃이 필 것이며 메뚜기도 짐이 될 것이며 원욕이 그치리니...”

          ‘높은 곳을 두려워한다’는 것은 연로한 자들이 높은 곳에 오르기를 두려워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길에서 놀라는 것’은 길을 걸을 때도 쉽사리 놀라게 된다는 것입니다. ‘살구나무가 꽃이 피는 것’은 머리가 백발이 되는 것을 뜻합니다. 또 ‘메뚜기도 짐이 되는 것’은 기력이 없어 작은 일도 힘들어한다는 것입니다. ‘원욕(願慾)이 그치는 것’은 식욕이 없어지고 의욕이 줄어드는 는 것을 말합니다.

          이어서 5절과 6절에서 “이는 사람이 자기 영원한 집으로 돌아가고 조문자들이 거리로 왕래하게 됨이라. 은줄이 풀리고 금 그릇이 깨어지고 항아리가 샘 곁에서 깨어지고 바퀴가 우물 위에서 깨어지리라”고 말씀합니다. 이것은 사람이 죽으면 조문객들이 방문하게 됨을 말합니다. 또 ‘은줄이 풀리는 것’은 사람에게 가장 중요한 신경조직이나 근육이 약해지는 것을 말하고, ‘금 그릇이 깨어지는 것’은 사람의 두뇌가 기능을 잘 발휘하지 못하는 것을 가리킵니다. 또 ‘항아리가 샘 곁에서 깨어지고 바퀴가 우물 위에서 깨어진다’는 것은 좌우 심방을 가진 심장과, 동맥, 정맥의 혈관이 그 기능을 그치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다시 젊어질 수 없습니다. 매일 매일 늙어가고 있습니다. 운동하고 식단조절하고, 각종 건강식품과 성장호르몬의 투여하여 우리의 노화현상을 일시적으로 더디게 할 수는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고 영원히 노화를 막을 수 있는 방법은 이 세상에 없습니다. 나이가 들면 우리에게 정신적, 육체적 퇴화가 찾아오는 것이 지극히 정상적입니다. 그런데 노화를 정상적으로 받아드려도 인생 최후의 시련이 찾아옵니다. 죽음입니다.

          7절 “흙은 여전히 땅으로 돌아가고 신(영)은 그 주신 하나님께로 돌아가기 전에 기억하라”고 말합니다. 흙이 여전히 땅으로 돌아가고 영이 그 주신 하나님께로 돌아간다는 것은 죽음을 가리킵니다. 죽음은 영혼과 육체의 분리, 영혼이 육체를 떠나는 현상을 말합니다. 이렇게 우리 인생에 죽음이 찾아오기에 삶이 얼마나 허무한지를 이렇게 전도자는 말합니다. 8절입니다. “...헛되고 헛되도다 모든 것이 헛되도다”

          성경은 아주 현실적입니다. 노년에 맞이하게 될 우리 인생의 연약함을 적나라하게 표현합니다. 그리고 결국 죽음의 종말에 이르게 될 것을 엄연한 현실로 받아드립니다. 이런 면에서 성경은 현실을 도피하거나 부정하지 않습니다. 인생에게 찾아오게 될 허무를 담담히 진술합니다.

          “호주와 하와이 사이에 나우루라는 작은 섬으로 된 국가가 있습니다.
          그 섬이 얼마나 작은가 하면 울릉도의 3분의 1 정도의 크기이고, 인구는 1만 3천명입니다.
          산호초에 둘러싸여있는 섬인데 오랫동안 새들의 천국이었습니다.
          새가 똥을 싸면 산호충들과 화학작용을 일으켜 인광석으로 변했습니다.
          그런데 인광석은 화학비료를 만드는 아주 중요한 재료입니다.
          나우루 섬은 식민 국가들이 통치를 하다가 1968년 정식국가로 독립했습니다.
          동시에 인광석 광산이 국가소유로 되었습니다.
          전통적으로 농부와 어부, 아니면 외국 자본들의 공장 인부로 살던 사람들에게 돈벼락을 안겨주었습니다.
          1980년대에 이미 국민소득이 2만 불이나 되었습니다.
          무료로 교육과 의료 서비스가 제공되었고, 나우루 사람들은 전세기를 타고 주변 국가들을 쇼핑하고 스포츠를 관람했습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습니다.
          인광석이 무궁무진한 것이 아니어서 이내 바닥이 났습니다.
          국민들 또한 일하지 않고 먹기만 해서 많은 국민들이 비만과 당뇨 등으로 심각한 건강 문제가 발생겼습니다.
          나우루는 2003년 인광석이 바닥났음을 공식적으로 선포했고, 2005년에 국가파산을 했습니다.
          돈 잔치를 시작한지 30년 만에 폭삭 망한 것입니다.

          나우루 섬과 인광석 이야기를 축소하면 우리 개인의 인생과 똑같습니다.
          사람들은 저마다 생명이라는 인광석이 무궁무진하리라 착각합니다.
          사람들은 아무리 나이가 들어도 자기는 천년만년 살 것 같이 착각합니다.
          나이가 들어 이제 죽어야지 하는 사람일수록 죽음 이후를 대비해야 한다고 하면 화를 냅니다.
          죽음에 대해서는 자기는 예외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세상에서 자신의 욕망을 채우기 위해서 천하보다 더 귀한 자기생명을 자꾸 깎아 먹습니다. 그러다가 어느 날 코끝에 호흡이 멈추면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게 됩니다. 우리의 생명은 나오루 섬의 인광석처럼 언젠가는 고갈됩니다. 다만 그 시기를 알지 못할 뿐입니다. 그래서 우리 그리스도인은 오늘 창조주 하나님을 기억하고, 그분을 경외하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우리 자신이 유한한 존재임을 인정하고 무한하신 하나님을 수용하는 것이 지혜입니다.”

          대부분 살아 있을 때, 특히 젊은 시절, 건강할 때 이 사실을 깨닫지 못합니다. 큰 시련을 겪고서 비로서 깨닫게 됩니다. 특히 죽음의 고비까지 갔던 분들은 이것을 확실히 깨닫습니다.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전도서 11장

          1월 26일(목)

          네 식물을 물 위에 던지자(전도서 11:1)  

          너는 네 식물을 물 위에 던지라 여러 후에 도로 찾으리라.
          Cast your bread upon the waters, for after many days you will find it again.

          식물(3899) 레헴(lechem) לֶחֶם          

          1. 음식,  2. 레위기 3:11,  3. 레위기 21:8

          Pronunciation / 레헴(lechem) 
          Etymology / [여] 3898에서 유래
          Bible verse / 먹을 것(창 3:19, 출 16:22, 삼상 9:7), 떡(창 14:18, 출 16:8, 수 9:5), 양식(창 28:20, 출 16:32, 왕하 25:3), 음식(창 37:25, 삼하 12:20, 시 102:4), 먹는 음식(창 39:6), 곡식(창 45:23, 잠 28:3, 사 28:28), 몫의 음식(레 22:13), 기념물(레 24:7), 식사(삼상20:27, 34, 왕상 21:4), 음식물(왕하 4:8), 녹(느 5:14, 18), 걸식(시 37:25), 잔치(전 10:19), 열매(렘 11:19).
          [동] 먹다(창 43:25, 시 147:9, 잠 28:19), 잡수시다(삼하 12:21).
          Old Testament / 297회 사용

          너는 네 식물을 물 위에 ... 찾으리라 -
          이에 대한 해석은 다양하다.

          1. 상업적인 말로서 배가 먼 항해를 마치고 그 이윤을 얻어 돌아 올때까지 인내심을 가지고 상품(물품)들을 계속 (바다에) 띄우라는 뜻이다(Hitzig, Delitzsch, Mendelssohn, Wildeboer).
          2. 농업에 관한 말로서 곡식의 씨앗을 촉촉한 땅에 뿌려 추수 때에 풍요로운 결실을 얻는 것을 뜻한다(Palm, Baur, Leale).
          3. '식물'을 인간 생명의 '씨앗'으로 볼때 성적으로 방종한 자에 대해 경계하는 뜻으로 볼 수 있다(Graetz).
          4. 하나님께 대한 믿음과 신뢰를 굳세게 지님으로 인생의 진정한 즐거움을 얻으라는 뜻이다(M.A.Eaton).
          5. 자선 또는 구제 생활을 권면하는 말로서 남을 위해 선을 베풀고 쌓으면 이내 그것을 좋은 결과로서 자기 자신에게 돌아온다는 뜻이다(Leupold, Lange, Ginsburg, Wright).

          여러 견해 중에서 자선과 구제 생활을 위한 것이라는 것이 가장 바람직한 해석이라고 하겠다.
          전도자는 앞에서 자연, 지혜, 인생 등의 허무를 언급한 후여기서는 사람의 사는 인생 동안 남을 위해 선한 일을 행할 것을 촉구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 모티브(motif)면에서는 (1)의 뜻을 빌린 것일 수도 있다.
          한편 구약에서는 가난한 자에 대한 구제를 촉구하는 말씀이 여러 곳에 나오며(신 15:10; 잠 11:24, 25; 28:27), 바울도 이와 유사한 맥락에서 선행을 행할 때 때가 되면 그 결실을 얻으므로 결코 낙심하지 말 것을 언급한 바 있다(갈 6:7-10).

          던지라(7971) שָׁלַח 

          1. 창세기 38:17,  2. 창세기 43:8,  3. 창세기 37:13

          발음 / 샬라흐(shâlach) 

          요한복음 6:48
          내가 곧 생명의 떡이로라.

          하나님은 그의 아들 생명의 떡을 세상이라는 물 위에 던져버렸습니다.
          철학자 하이덱거는 이것을 가리켜 사람은 이 세상에 던져진 존재(Das Ding)라고 정의합니다.
          마치 세상에 버려진 것과 같은 생명의 떡이신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절규하실 때 그 처참한 외침을 전능하신 하나님은 듣고 있었습니다.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그런데 하나님이 아들을 세상에 던져버리셨을 때 다시 찾을 것이 무엇인지 아셨습니다.
          본문에서 분명하게 말씀하셨습니다.
          너는 네 식물을 물 위에 던지라 여러 후에 도로 찾으리라.

          얼마나 많은 성도들이 지구상에 흩어져 있습니까?


          내던져진 존재(Geworfenheit, 被投掷性存在)     

          하나님께서 세상으로 내 던져버린 아들은 마지막 절규를 이렇게 외쳤습니다.

          엘리 엘리 라마사박다니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독일의 철학자 하이데거(M. Heidegger 1889 - 1976)는 인간을 이 세상에 내던져진 존재라고 말했다.

          히틀러에 협조했기 때문에 그가 과연 철학자로서 논리적인 사고를 했느냐는 비판을 받는 하이데거는, 실존주의와 존재론 및 인식론에 빛나는 업적을 남긴 철학자다.

          하이데거에 의하면 인간은 창조된 것도 아니고 태어난 것도 아니다.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우연히 어떤 시간과 공간에 내던져졌을 뿐이다.
          그런데 세계에 ‘내던져진(Gewortenheit) 존재’인 인간은 ‘내던지는(Antwortenhein) 존재’가 될 수 있으므로 자신을 어디로 어떻게 던지느냐에 따라서 자기 존재를 실현할 수 있다.

          이런 하이데거의 사상은 ‘신은 죽었다’라고 선언한 니체의 철학에 맥이 닿아 있으며 이천년간 서구를 지배한 기독교와 이성중심주의에 반기를 드는 현상학적 실존주의로 분류된다.

          만약 신이 죽었다면 인간은 정신적으로 고독한 존재이며 사상적으로 고립된 고아이다. 하지만 인간은 허무하고 자유로우면서도 신의 응답을 바라는 역설적인 존재이기도 하다. 또한 인간은 자유의지를 가지고 자기를 던질 수 있는 존재이면서 그 존재가 무엇인가를 사유할 수 있고, 의지를 가지고 무엇을 성취하고자 하는 존재이다. 아울러 감각적으로 반응하면서 다른 존재들과 끊임없이 소통하고 관계하는 존재이다. 그런 점에서 하이데거는 인간은 자신을 던져서 자기 스스로 무엇인가 이루어가는 현존재(Dasein)라고 말했던 것이다.

          인간을 포함한 모든 존재는 그냥 있는 것이 아니고 어떤 시간과 공간 속에서 ‘그 무엇’ 또는 ‘그 어떤’ 속성을 가진 존재로 ‘있는’ 것이다. 하이데거는 존재와 존재자를 구분했다.
          ‘지금’과 ‘여기’에 현존하는 것이 존재(existensia)이고 '무엇이나 어떤'이 본질(essentia)인 존재자다.
          또한 내던져졌다는 의미에서의 현존재[Da - Sein]는 ‘거기(there) 있는(being)’ 존재라고 할 수 있으며 존재자와 존재는 같을 수도 있고 다를 수도 있다.
          이처럼 내던져진 인간은 허무를 깊이 깨우치고 자신을 던져서 실현하기 때문에 실존(實存)하는 것이고 실존하기 때문에 현존재인 것이다.
          이처럼 하이데거는 존재자와 다른 존재는, 현실이라는 시간과 공간 속에 내던져졌기 때문에 자기 존재는 전적으로 자기의 책임이라고 보았다.

          한편 하이데거에 의하면 죽음을 불안하게 생각하고 무서운 공포감을 가지는 것이야말로 실존을 이해하는 길이며 죽음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길이다. 죽음에 대한 불안을 통하여 허무가 실존으로 바뀌며 억압이 자유로 바뀌기 때문이다. 그리고 허무라는 이름의 죽음에 자신을 내던지면 자유로운 존재가 될 수 있다. 하이데거의 철학은 사르트르를 포함한 실존주의 철학에 큰 영향을 미쳤지만 그는 사르트르가 실존의 개념을 잘못 이해했다고 말한 바 있다.
          반면 많은 철학자들이 하이데거의 철학을 거짓명제, 철학적 독약, 언어의 폭동, 철학의 죽음 등으로 비판한다.

          전도서 11:10
          그런즉 근심으로 네 마음에서 떠나게 하며 악으로 네 몸에서 물러가게 하라 어릴 때와 청년의 때가 다 헛되니라.

          청년의 때라는 문구에 아라비아 숫자 1자가 난외에서 "새벽"이라고 번역합니다.

          새벽이란 신앙인에게 매우 중요한 시간입니다.
          새벽의 의미를 살펴봅니다.

          잠언 1:28
          그 때에 너희가 나를 부르리라 그래도 내가 대답지 아니하겠고 부지런히 나를 찾으리라 그래도 나를 만나지 못하리니.

          부지런히 라는 단어에 아라비아 숫자 2자는 난외에서 "이른 아침에"

          김정은, 왜 주한미군 필요하다 했나?
          폼페이오 회고록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중국에 대한 불신감을 드러내면서 주한미군이 철수하면 한반도가 중국의 변방지역이 된다는 의견을 미국 측에 피력한 것으로 알려졌다.

          마이크 폼페이오 전 미국 국무장관은 24일(현지시간) 발간한 회고록 '한 치도 물러서지 말라, 내가 사랑하는 미국을 위한 싸움'에서 역사적인 평양 방문과 북미정상회담 등의 후일담을 자세히 기록했다.

          차기 미국 대선 출마를 저울질하면서 내놓은 국내 정치용 회고록이지만 모두 17개장으로 구성된 책에는 1장부터 17장까지 북한 관련 내용이 곳곳에 상당량 기술돼 있다.
           
          이 가운데 제2장에는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과의 첫 북미정상회담을 열기로 김정은 위원장과 합의한 2018년 3월 30일 첫 만남 당시 상황이 상세히 나와 있다.
           
          해당 부분에는 '독재자와의 대화'라는 소제목이 붙어 있다.
           
          당시 김 위원장은 'CIA국장으로서 평양을 방문한 폼페이오의 방문 목적을 정확히 이해한다'면서 자신은 북한을 더 자급자족하는 국가로 만들겠다고 말했다고 한다.
           
          그러자 폼페이오는 김 위원장에게 '핵과 대량살상무기를 포기하면 북한의 경제가 숨통이 트이고 외국의 투자가 뒤따를 것'이라는 논리로 받아쳤다고 한다. 
           
          폼페이오는 그러면서 두 가지를 중점적으로 설파했다고 한다.
           
          김 위원장이 비핵화의 길을 걷는다면 이라크의 사담 후세인과 리비아의 무아마르 카다피와는 다르게 살아남을 수 있다는 점,
          비핵화된 북한은 번영할 것이고 북한 체제도 유지될 것이라는 점이다.
           
          이어 중국과 관련해서도 두 사람은 심도 있는 대화를 이어갔다.
           
          폼페이오는 "과거 중국이 한반도를 지배했던 기억은 북한의 마음속에 깊이 불타오르고 있으며, 오늘날까지도 중국은 880마일에 달하는 북한과의 국경을 따라 상당한 규모의 군사력을 유지하고 있다. 우리가 논의하는 동안, 김 위원장은 미국이 한국과 일상적으로 실시하는 합동 군사 훈련에 대한 문제를 제기했다"고 적었다. 
           
          그러면서 "나는 또한 미군이 철수하면 북한을 기쁘게 할 것이라고 중국이 미국 측에 말해왔다고 그(김 위원장)에게 전했다"고 서술했다.
           
          그러자 "김 위원장이 중국은 거짓말쟁이라고 외쳤다"고 한다.
           
          폼페이오는 "김 위원장은 중국으로부터 북한을 보호하기 위해 주한 미군이 필요하다, 중국 공산당은 미군이 철수하면 한반도를 티베트와 신장처럼 다룰 것이다고 말했다"고 전했다. 
           
          폼페이오는 이 대목에서 "정책 입안자들이 알아야 한다"면서 "한반도에서 미국의 미사일과 지상 능력을 확대하는 것은 북한 사람들을 전혀 괴롭히지 않을 것이다"고 적었다.
           
          폼페이오는 당시 김 위원장이 세 가지를 약속했다고 소개했다. 
           
          핵무기가 북한 경제적 부담이면서 국제사회에도 북한을 장애물로 인식하게 하는 것인 만큼 완전히 없애겠다, 핵과 미사일 프로그램을 중단하겠다, 트럼프 대통령을 만나겠다는 것이다. 
           
          자신 역시 트럼프 대통령의 회신을 가지고 평양을 재방문하겠다고 약속했다고 한다.
           
          이어 8장에는 두 번째 평양 방문과 1, 2차 북미정상회담 뒷이야기가 자세히 서술돼 있다.
           
          1차 싱가포르 정상회담 과정을 설명하면서는 북한의 비핵화에 대한 결정권한은 김 위원장에는 없고, 중국이 배후에서 행사하고 있다는 취지로 서술했다.
           
          또 1차 정상회담에서 김 위원장과 존 볼턴 국가안보보좌관간의 첫 만남에 대해서도 기술했다.
           

          폼페이오는 당시 "존 볼턴이 회담 내내 트럼프 대통령이 가게를 통째로 내줄까 봐 조바심을 냈다"고도 회고했다.
           
          폼페이오는 2차 하노이 정상회담을 소개하면서는 김 위원장이 싱가포르 합의정신을 깨면서 협상이 결렬됐다는 취지로 주장하며 책임을 김 위원장에 떠넘겼다.
           
          협상이 깨지자 통역이 말을 옮기지는 않았지만 김 위원장이 욕설을 하는 것처럼 들리기도 했다고 주장했다. 
           
          폼페이오는 회고록의 마지막장인 제 17장에서는 2019년 6월 판문점에서 열린 미국, 한국, 북한 3자 정상 간 만남이 성사된 과정을 소개했다.
           
          그는 트럼프 대통령과 시각이 달랐던 볼턴 보좌관을 제외한 모든 사람이 이 역사적 만남에 참여하고 싶었다면서 특히 문재인 대통령이 폼페이오에게 여러 차례 직접 전화했다고 밝혔다.
           
          폼페이오는 김 위원장이 트럼프 대통령만 만나고 싶어 한다고 문 대통령에게 설명했지만 문 대통령은 이를 달갑게 여기지 않았다고 회고하기도 했다.
           
          폼페이오의 이번 회고록은 역사적인 북미간 정상회담의 성사, 진행, 결렬 과정과 관련된 이면의 이야기들이 들어있어서 꽤나 유용성이 있어 보인다. 
           
          그러나 회고록의 제목에서부터 읽히듯이 이 책은 악마화된 북한에 물들어있는 미국 독자들을 겨냥한 '북한팔이용'으로 기획됐다는 비판도 뒤따를 것으로 보인다.
           
          제목의 '한 치도 물러서지 말라'는 표현은 2차 하노이 정상회담에서 북한에 양보하지 않았음을 설명하기 위해 그가 회고록 본문에서 사용한 문구다.
           
          북한 핵문제를 풀기 위해서는 기본적으로 '주고받는', 즉 '양보'가 필요한 협상과정을 거쳐야 한다는 평범한 진리조차 부인하는 그의 비외교적 인식을 그대로 보여주는 제목이다.
           
          더욱이 그의 회고록에는 북한에 대한 각종 조롱과 경멸, 빈정거림이 반복적으로 나타난다.
           
          북한과의 협상을 "뉴욕의 지하철 바닥을 핥는 것만큼이나 즐거운 일"이라고 하는가 하면, 김정은에 대해서는 "피에 굶주린 두꺼비"(bloodthirsty toad), 김영철 북한 노동당 부위원장에 대해서는 "내가 만난 가장 고약한 사람"이라고 묘사하기도 했다.
           
          북한과의 협상에서 그가 과연 얼마나 진지한 자세로 임했는지 의심케 하는 내용들이다.



          진주는 인어의 눈물, 달의 눈물  

          진주는 인어의 눈물, 달의 눈물이라고 하는 별칭을 가지고 있습니다.
          아픔과 고통을 통해 탄생하는 눈물의 보석이기 때문입니다.
          모든 보석은 모양과 빛깔에 따라 어울리는 곳이 있고 어울리지 않는 곳이 있습니다.
          하지만 진주는 사람의 도움없이 스스로 그 찬란한 빛깔을 만들어 내는 유일한 보석이라 할 수 있습니다.
          한 마리 진주 조개가 잠간 입을 벌리고 먹이를 찾는 동안 날카로운 모래알이 조갯살로 파고 듭니다.
          모래는 부드러운 조갯살을 찢게 되고 그 때마다 조개는 자기 몸속에 들어온 이물질을 감싸기 위해 조개의 피라고 할 수 있는 탄화칼슘을 분비시킵니다.
          수천 수만번 이 이물질을 감싸는 동안 영롱한 하나의 진주가 탄생하게 됩니다.
          그러나 모든 조개가 다 진주를 만드는 것은 아닙니다.
          바다에는 103,000종류의 조개가 있다고 합니다.
          그중 진주가 생길 수 있는 조개는 15,000종류, 보석으로 가치있는 진주를 만드는 조개는 1,300종류. 약 1%정도입니다.
          인생살이도 마찬가지입니다.
          인생을 살아가다보면 누구나 아픔과 고난의 순간을 경험하게 됩니다.
          이 고난으로 인해 망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반대로 새롭게 태어나 차원높은 인생을 살아가는 사람도 있습니다.
          실패의 순간, 고난과 고통의 시간으로 인해 나와 이웃에게 지울 수 없는 상처를 남기고 인격이 찌그러지고 자학하며 불평하고 원망하는 마음을 안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오히려, 고난의 순간에, 아픔의 순간에 자신의 인생을 역전시켜서 영롱한 진주로, 보석처럼 자신의 삶을 가꾸어 살아가는 걸작품 인생들도 있습니다.
          고난을 좌절로 끝맺지 말고, 고난을 통해 지혜를 얻으며 더 나아가 축복의 자리로 모두 나아가길...

          촛불의 밝기는 어두워야 구별된다.

          촛불의 밝기는 어두워야 구별된다



          성도들의 받은 은혜와 믿음도 댓가를 치루어야 하는 시험앞에서 드러나게 마련이다.
          강같은 은혜인지?
          늪같은 은혜인지?
          하나님은 우리에게 장마비 같은 은혜와 축복을 조건없이 부어 주신다.
          그리고는 반드시 때가 되면, 우리가 받은 은혜를 시험 하신다.
          혹독하게 흔들어 보신다.
          그 시험에 패스하지 못하면 우리는 재수, 삼수하게 된다.
          마치 학생들이 공부한 후에 반듯이 시험을 보는 것처럼 말이다.
          학생들의 실력이 시험에서 드러나듯, 하나님의 흔드심에서 우리의 영력은 들통이 나고 만다.

          동굴과 터널

          동굴과 터널

          처음에 들어갈 때는 비슷해 보이지만, 나올 때는 전혀 다른 두 길이 있습니다.
          그것은 동굴과 터널입니다.
          동굴은 들어가면 들어갈수록 어두워질 뿐 아니라, 반대편으로 뚫려 있는 곳이 없기 때문에 다시 들어갔던 곳을 찾아 나와야만 합니다.
          왔던 길을 제대로 못 찾으면, 동굴 안에서 길을 잃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터널은 다릅니다.
          끝이 보이지 않는 긴 터널일지라도 한 발 한 발 계속 앞으로 전진하기만 하면, 반드시 출구가 보입니다.
          터널을 다 나와 뒤를 돌아보면, 걸어서 넘기에는 너무 힘겨운 높고 험한 산을 터널을 통해 직통으로 지나올 수 있었음을 깨닫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허락하신 고난은, 이러한 터널에 비유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고난은, 이유 없이 들어갔다가 고생만 하고 다시 나와야 하는 동굴과 같은 것이 결코 아닙니다.
          때로는 우리가 위를 쳐다보지 못해 터널이 왜 있어야 하는지 깨닫지 못할지라도, 우리는 그 터널을 통해 도저히 넘을 수 없는 크고 험한 산을 지나온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터널을 지날 때 믿음을 가질 수 있습니다.
          끝이 보이지 않고 앞으로 갈수록 어두워질지라도 계속 나아가면 출구가 있다는 믿음 말입니다.

          요한 크리소스톰은 안디옥 태생의 교부로 주후 4-5세기에 걸쳐 활약한 대 설교가이다.
          그는 콘스탄티노플의 왕후 유독시아의 미움을 사 유배 길을 떠날 때에 행한 마지막 설교에서 말하였다.

          “내가 무엇을 두려워하리요,
          저가 내 목숨을 찾는다면 죽어 줄 것이니 이 생명은 주님이 주셨음이요,
          저가 내 소유를 다 빼앗는다 해도 불만이 없을 것은 본래 가지고 온 것이 없음이니라.
          저가 나를 쫓아내면 나는 엘리야같이 될 것이요,
          구덩이에 던지면 예레미야같이 될 것이요,
          바다에 던지면 요나같이 될 것이요,
          매로 때리면 사도 바울같이 되리라.
          아무 두려움이 없도다.
          내가 당하는 모든 사건,
          모든 고난을 통하여 하나님은 높임을 받을 것이요,
          나는 그 환난 중에 주시는 영광을 누리게 될 것이니라!”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전도서 10장

          1월 25일(수)

          지혜자의 마음(전도서 10:2)

          지혜자의 마음은 오른 편에 있고 우매자의 마음은 왼편에 있느니라.
          The heart of the wise inclines to the right, but the heart of the fool to the left.

          지혜자의 마음은 오른편에 있고 ... 있느니라 -
          일반적으로 성경에서 '오른편(쪽)'은 의, 능력, 보호 등을 상징적으로 암시한다(시 16:8; 110:5; 121:5; 사 41:13; 마 25:31-46).
          그리고 '왼편'은 이와 반대로 불의, 연약함 등을 상징적으로 나타낸다(삿 3:21; 마 25:41).

          멕가이버 나이프라는 도구가 있습니다.
          아주 작은 주머니 칼로 여러 가지 기능을 갖습니다.
          예를 들면 톱, 칼, 병 따개, 깡통 따개, 가위, 송곳, 바늘.....등
          맥가이버는 무기를 가지고 다니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가 가지고 있는 재료를 이용하여 모든 일을 합니다.
          사람들은 이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좋아합니다.
          사람들은 상상력이 구현되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상상력으로 현실의 불가능을 극복해 나갑니다.
          이런 멕가이버와 같이 불가능한 것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 바로 지혜입니다.

          전도서 10장은 지혜와 우매의 차이를 선명하게 드러낸다.

          참 지혜는 사람들의 멸시를 받기도 합니다(9장).
          하지만 죽은 파리들이 비싼 향기름을 악취 나게 만들 듯이, 우매함은 지혜와 존귀를 난처하게 만드는 악한 영향력이 큽니다(1).
          지혜자의 마음이 오른쪽에 있다는 것은 지혜가 사람을 옳은 길로 가도록 지켜주고 보호해준다는 의미입니다.
          지혜가 비록 업신여김을 받아도 결국에 사람을 지켜주고 보호하는 것은 지혜뿐이라는 것입니다.

          우매자는 자신이 지혜롭다고 생각하지만, 그의 어리석음을 말과 행동으로 드러내게 되어 있습니다.
          ‘온유한 자가 복이 있다’는 주님의 말씀과 같이, 지혜는 폭군의 분노를 참아내게도 합니다(4).
          정부에 일어나는 많은 부조리한 일 중 대표적인 것이 합당하지 않은 사람(어리석은 사람)이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는 것입니다(6~7).

          이런 현상이 세상에 많지만 지혜자는 이런 것들로 희락을 빼앗기지 않아야 합니다.
          불의한 세상을 살아가는 성도가 명심할 원리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하나님의 정의의 관점을 버리고 적당히 타협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그 관점을 가지고 살되, 그것이 우리를 분노하고 낙심하고 좌절하고 비통하게 함으로써 하나님께서 주신 희락 자체를 빼앗겨서는 안 될 것입니다.

          지혜와 우매함은 다른 결과를 가져옵니다(8~11).
          우매한 사람은 남을 넘어뜨리려고 판 함정에 자기가 빠지고, (어떤 이익을 보려고) 허문 담으로 들어온 뱀에게 자기가 물리고, (자기를 위해서) 돌을 떠내다가 돌에 상하며, 나무를 쪼개다가 그것 때문에 위험을 당하게 됩니다.
          어리석은 사람은 무딘 연장으로 열심히 일하니 힘만 들 뿐입니다.
          뱀에게 물린 뒤에야 뱀을 다루는 사람을 부름으로써 도움을 얻지도 못합니다.
          이것들이 다 어리석은 사람들의 행위입니다.
          우매함은 언제나 사후약방문과 같아서, 합당한 시기를 놓치고 정상적인 방법을 버립니다.
          그러나 지혜로운 사람은 부족한 부분을 미리 예측하여 대비합니다.

          지혜와 우매함은 언어생활에서도 구별됩니다(12~15).
          지혜자의 말은 은혜로워서 사람을 기쁘게 하지만, 우매자의 말은 자기를 삼키고(12) 사람들을 피곤하게 합니다(15).
          자기 말에 자신이 걸려 넘어지는 것은, 미래의 일을 전혀 예상하지 않고, 말을 앞세워 말로 자기를 들어내려는 욕심이 작용하기 때문입니다.
          어리석은 정치인들의 행태가 비슷합니다.
          어리석은 사람은 처음부터 어리석고 극단적인 말을 할 뿐 아니라, 말이 많으며(13~14) 자신도 모르는 것을 말하는 사람입니다.
          당신의 언어생활은 어떻습니까?
          당신의 말은 사람을 피곤하게 하지는 않습니까?
          아니면 은혜로워서 기쁨을 주고 있습니까??

          지혜와 우매는 정부의 영역에서도 나타납니다(16~20).
          철부지가 왕이 되면, 대신들은 아침부터 먹고 즐기는 형국이 됩니다(16).
          이런 나라는 지붕이 무너지고 집이 새는 나라입니다(18).
          그들은 때를 알지 못하고 먹고 마시고 희락을 추구하며 그들의 해결책은 언제나 돈 뿐입니다(19).
          그러나 좋은 나라는 왕이 자격에 합당하고, 대신들은 먹을 때와 마실 때를 분별할 줄 알고, 왜 먹는지를 아는 자들입니다.
          그러니 나라가 복을 누리게 됩니다(17).
          비록 세상 정부에서 부조리와 악을 볼지라도, 하나님께서 세우신 권위를 함부로 저주하거나 악담을 하지 않는 것도 지혜입니다(20).
          그것은 결국 우리 자신을 위해서입니다.

           

          고대 히브인들에게 보통 오른쪽은 의, 능력, 보호 등을 그리고 왼쪽은 불의, 연약함 등을 상징한다고 합니다. 따라서 지혜로운 사람의 마음은 바른 쪽으로 쏠리지만 어리석은 사람의 마음은 그릇된 쪽으로 치우친다는 뜻입니다. 보통 지혜는 마음을 의미합니다. 여기서 지혜는 마음의 지, 정, 의 중에서 특히 지적인 면을 강조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우매한 자는 길을 갈 때에도 자기의 우매한 것을 말한다’ 라는 말은 우매한 자가 자신이 어리석다고 스스로 고백한다는 것이 아닙니다. 자신이 지혜롭지 못함에도 불구하고 스스로 똑똑하다고 말하고 남들을 가리키려고 함으로써 그의 어리석음을 드러낸다는 말입니다. 말은 그 사람의 사람 됨과 마음에 있는 것을 겉으로 드러내는 통로가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잠언에 "미련한 자라도 잠잠하면 지혜로운 자로 여기우고 그 입술을 닫히면 슬기로운 자로 여기우느니라"라는 말이 있는 것 같습니다.

           함정을 파는 자는 거기 빠질 것이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함정은 악한 마음을 품고 다른 사람을 해치려는 목적으로 파는 구덩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그 말은 그런 자는 스스로 자기가 넣은 덫에 걸려 위험에 빠진다는 말입니다. 담을 허는 자는 뱀에게 물린다고 했습니다. 여기서 담을 허는 자는 건축을 하기 위해 담을 허는 것도 될 수 있지만 이어 나오는 문장으로 본다면 좋지 않은 의도로, 즉 다른 사람의 농작물이나 창고의 물건들을 도둑질하려고 벽을 허무는 자라고 볼 수 있습니다. 대개 곡물들과 유실수 들은 인가에서 떨어져 있는 한가한 밭에서 재배되고 그런 곳에 창고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 경우 비록 사람이 감시는 하고 있지는 않지만 담 밑에 살고 있던 뱀에게 공격을 받는다는 말입니다. 

           돌들을 떠내는 자는 그것으로 인해 상할 것이라고 했습니다. ‘돌을 떠내는 자’는 직업적으로 그런 일들을 하는 채석공이라고도 할 수 있으며 구약 시대 있었던 기업의 경계를 정하기 위해 일정 장소에 세워 두었던 지계석 혹은 경계석을 옮기는 자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전자의 경우는 돌을 캐다가 돌에 치이는 안전사고라고 볼 수 있으며 후자의 경우는 하늘의 징벌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주술을 하기 전에 뱀에게 물렸으면 술객은 소용없다고 했습니다. 여기서 주술은 뱀에게 주문을 외어 마법을 거는 행위를 말하는 것으로서 고대 근동 지방에서 흔히 있었던 술법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보통 주술사들은 그런 술법을 행하여 뱀으로 하여금 점을 치게 해서 복채를 챙겼다고 합니다. 하지만, 그런 술객이라고 하더라도 뱀에게 먼저 물린다면 아무 소용이 없다는 말로 아무리 훌륭한 것이라도 원래 목적과 의도로 하지 않으면 백해무익하다는 의미입니다.

           또 하나의 재난은 주권자에게서 나오는 허물로, 우매한 자가 높은 자리에 부자가 낮은 곳에 앉고 종들은 말을 타고 고관들은 걸어 다니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 말은 통치자의 실수와 관련된 한 가지 악을 말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매자’와 ‘부자’는 단순히 어리석은 자와 돈이 많은 자를 말하는 것이 아니고, 현명하지 못해서 높은 자리에 오르지 못하는 자와 그럴 자격과 실력이 되어 당연히 그런 자리에 오르리라고 기대되는 자를 말합니다.

           고대 히브리 사회에서 말은 매우 비싸고 귀한 동물이었습니다. 주로 외국에서 수입해 왔기 때문인데 그런 이유로 귀족들도 나귀나 노새를 타고 다녔습니다. 그런 말을 종들이 탄다는 것은 말도 되지 않는 말입니다. 그렇게 비천한 자가 존귀한 위치에 처하고 귀하게 여겨질 사람이 낮은 자리에 처한다는 것으로 사회적 모순을 지적한 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 모든 것이 나라의 통치자의 하자로 기인되었다는 것입니다. 세상이 공평하지 않고 정의롭지도 않은 것은 옛날이나 지금이나 별다르지 않은 것 같습니다.

           ▶

           세상이 아무리 불합리하고 거꾸로 간다고 하더라도 우리는 제대로 살아야 하고 정도를 걸어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인들로 하나님을 믿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을 창조하신 그 분께서 원래의 만들었던 세상을 곧 회복하시기 때문입니다. 이른 바 새 하늘과 새 땅입니다. 이제 우리 예수님께서 오시면 그렇게 될 것을 우리는 성경을 통하여 확신합니다. 그것에 대한 변치 않는 믿음이 우리에게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세상의 빛과 소금이라고 말씀했습니다. 그 말씀은 세상 사람들이 본이 되라는 뜻일 것입니다. 한편, 하나님 나라가 올 것이니까 맥 놓고 있을 수 없다는 뜻으로 해석 할 수도 있습니다. 따라서 그 말씀에는 이 땅을 먼저 회복해야 하는 사명이 우리에게 있다는 교훈도 있다고 봅니다. 이미 그런 권세가 우리에게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 각자에게 재능이 있는 것은 바로 그 이유 때문일 것입니다. 그 재능을 잘 갈고 닦아야 할 것입니다. 그것으로 죄로 더럽혀진 이 세상을 비록 완전하지는 못하더라도 원래 아름답게 창조된 세상으로 회복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도끼가 무뎌서는 나무를 쪼갤 수 없습니다.
          칼이 잘 들지 않으면 음식물을 솜씨 있게 만들 수 없습니다. 아무리 도끼가 믿음직스럽더라도 칼이 유용하더라도 무디고 날카롭지 못하면 제 구실을 할 수 없습니다. 우리의 재능을 연마하고 훈련해야 합니다. 그것이 지혜라고 봅니다. 그것은 마치 타이핑을 잘 하기 위해 손톱을 다듬듯이, 잘 뛰기 위해 미리 몸을 푸는 것과 흡사합니다. 우리는 세상 사람들보다 더 열심히 살아야 할 것입니다. 더 치열하게 노력해야 한다고 봅니다.

          우리 모두에게는 기꺼이 달성해야 할 사명이 있습니다.
          항해는 출발되었습니다.
          최선을 다해 우리 주님이 기다리고 계실 항구까지 즐겁게 항해하는 우리들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전도서 9장

          1월 24일(화)

          음부(陰府)(전도서 9:10)

          무릇 네 이 일을 당하는대로 힘을 다하여 할찌어다 네가 장차 들어갈 음부에는 일도 없고 계획도 없고 지식도 없고 지혜도 없음이니라.
          Whatever your hand finds to do, do it with all your might, for in the grave, where you are going, there is neither working nor planning nor knowledge nor wisdom.

          음부(7585) שְׁאוֹל       

          1. 무덤,  2. 지옥,  3. 구덩이
          Pronunciation / 스올(sheʼôwl)
          Etymology / 7592에서 유래
          Bible verse / 스올(창 37:35, 시 6:5, 호 13:14, 시 89:48, 아 8:6, 욘 2:2)
          Old Testament / 65회 사용

          * 7592. שָׁאַל 
          1. 문의하다,  2. 시편 2:8,  3. 사무엘상 8:10
          발음 / 솨알(shâʼal)

          무릇 네 손이 일을 ... 다하여 할지어다 -
          이는 인생의 행복이 수고하는 가운데 낙을 누리는 것인 바(2:24; 3:13, 22) 진정 낙을 누리고자 한다면 맡겨진 일에 최선을 다할 것을 촉구하는 말씀이다.

          음부에는 ... 없음이니라 -
          '음부'(스올, 쉐올)란 일반적으로 죽은 모든 사람들이 가는 사후의 장소로 여겨졌다(창 37:35; 시 31:17; 사 38:10).
          고대 히브리인들은 하늘과 땅, 땅 아래 등 우주가 세 구분으로 나뉘어졌다고 여겼는데, 이중 땅 아래를 음부로 보았다(민 16:30, 33; 겔 31:15; 암 9:2).
          그리고 이들은 이 음부를 생명이 활동하는 이 세상과는 달리 어둡고 그늘진 장소(욥 10:21, 22; 시 143:3). 침묵의 장소(시 94:17; 115:17), 망각의 장소(시 88:12) 등으로 여겼다.
          그러나 이런 히브리인들의 음부 개념은 신구약 중간 시대에 이르러서는 음부에서도 선인과 악인이 구별된다는 사상으로 바뀌었으며, 이는 다시 신약에 이르러서는 음부란 이 땅에서 죽은 악인들이 최후의 백보좌 심판을 받을 때까지 일시적으로 거하는 사후 중간 처소인 것으로 제시되어졌다(눅 16:19-31; 계 20:11-15).
          한편 전도자가 여기서 이를 언급한 것은 이 세상에 살아있는 동안 최선을 다해 수고하는 가운데 낙을 누리라는 뜻을 강조하기 위함이다.


          11세기 독일에 살았던 왕 하인리히 3세는 어느 날 왕궁 생활에 대한 깊은 회의와 허무를 느껴 수도사가 되기로 결심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수도원을 찾아가 수도원장에게 수도사가 되기를 원한다고 말했습니다.
          수도원장은 그가 수도사가 되려는 동기가 올바르지 않다며 한가지 질문을 던졌습니다.

          “폐하, 수도사가 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지켜야할 규율이 있는 데 그것은 바로 절대적인 순종입니다.
          수도사가 되려면 폐하도 이 규율을 지켜야 합니다. 하나님의 어떠한 명령에도 절대적으로 순종할 수 있습니까?”

          “그렇소!”

          “우리 수도원에서 말하는 하나님께 대한 순종이라는 것은 구체적으로 이 수도원 원장인 저와 이 수도원에서 지도하는 모든 스승들에 대한 절대적인 순종을 요구합니다. 거기에도 순종할 수 있습니까?”

          “알겠소. 그렇게 하겠소.”

          “그러면 이제 첫 번째 명령을 내리겠습니다. 폐하는 다시 왕궁으로 돌아가셔서 백성 다스리는 일을 잘 하시기 바랍니다. 백성을 잘 다스리지 못하는 자는 하나님을 위한 수도사가 될 수 없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삶의 자리에서부터 인내하고 하나님을 신뢰하고 살아간다면 장차 우리에게 어떠한 환경이 찾아오더라도 승리할 수 있습니다.



          성경에서 우리 주님은 지옥에 관해 세 가지 개념을 말씀하셨다.

          첫째, 지옥은 실재한다

          지옥은 모든 사람들에게 거부되는 말이지만 지옥은 실재한다.
          언어학적으로 말하면 단어가 있다는 것은 그것이 존재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지옥의 실재를 믿지 않는다. 주님의 재림을 부정하듯이 지옥을 부정한다. 그 이유는 부도덕한 삶을 포기하기 싫고 진리의 말씀에 순종하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그들은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며 살고 싶어 하기 때문에 지옥의 영원한 형벌을 면할 수 없다.

          둘째, 지옥은 고통의 장소

          지옥의 특성은은 고통과 긍휼이 없는 곳이다.
          그 곳은 슬픔만 있다. 더 안타까운 사실은 영원히 하나님과 분리 된 곳이다. 그 곳에서 하는 기도는 어떤 내용이든 영원히 응답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그곳은 소망이 없는 곳이다.

          셋째, 지옥 시민 

          천국에 시민권이 있듯이 지옥에도 지옥시민이 있다.

          누가 지옥 시민인가? 성경은 분명히 그 대답을 주고 있다. 거짓과 광신주의 종교인들이며, 거역하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을 하며 귀신을 쫓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한 사람들로서 그들은 주 예수님을 주라고 부른 사람들이다(마 7:22~23). 그리고 두려워하는 자들이며 믿지 않는 자들과 흉악한 자들과 살인자들과 행음하는 자들과 술객들과 우상 숭배하는 자들과 거짓말하는 자들이다(계 21:8). 사탄은 끊임없이 우리에게서 지옥의 두려움을 희석시키려 한다.

          오히려 그리스도인들 보다 불신자들이 지옥을 더 많이 말하고 있다. 입시지옥, 교통지옥 등등 지옥은 그런 곳이 아니다. 현대 그리스도인들은 지옥의 메시지를 애써 외면하고 증거 하지 않으려 한다. 그리고 현대인들은 죽음 저편에 있는 지옥을 믿지 않는다. 그러나 지옥은 우리 주님께서 증거 하신 곳이기에 아무리 불편하고 매력 없는 메시지일지라도 구원의 복음과 함께 증거 되어야 할 메시지이다.

          시간에 대한 놀라운 사실 28가지

          1. 우리는 일평생 25년을 잔다.
          2. 우리는 일평생 10.3년을 일한다.
          3. 우리는 일평생 48일 동안 섹스를 한다.
          4. 여자는 일평생 17년을 다이어트 한다.
          5. 우리는 일평생 9.1년간 TV를 본다.
          6. 우리는 일평생 2년간 광고를 본다.
          7. 우리는 일평생 1.1년간 세탁을 한다.
          8. 우리는 일평생 2.5년간 요리를 한다.
          9. 우리는 일평생 3.66년간 밥을 먹는다.
          10. 우리는 일평생 4.3년간 운전한다.
          11. 우리는 일평생 3개월 동안 교통체증에 갇혀있다.
          12. 우리는 일평생 1.5년을 화장실에 간다.
          13. 우리는 깨어있는 시간의 70%를 디지털 기기 앞에서 보낸다.
          14. 우리는 일평생 29만번 크게 웃는다.
          15. 우리는 일평생 16만KM 를 걷는다.
          16. 우리는 일생의 90%를 실내에서 보낸다.
          17. 우리는 일평생 약 5천리터의 술을 마신다.
          18. 우리는 일년에 2천번의 꿈을 꾼다.
          19. 우리는 일평생 40만번 방귀를 뀐다.
          20. 우리는 일평생 14일간 키스를 한다.
          21. 우리는 일평생 1.2만잔의 커피를 마신다.
          22. 여자는 일평생 1년간 옷을 고른다.
          23. 남자는 일평생 1년을 여자에 한눈을 판다.
          24. 여자는 일평생 8년간 쇼핑을 한다.
          25. 여자는 일평생 1.5년을 머리를 하는데 쓴다.
          26. 사무직 종사자는 일평생 5년을 책상앞에서 보낸다.
          27. 우리는 일평생 2년을 회의에 참석한다.
          28. 우리는 일평생 2백만번의 다짐을 한다.


          포스트모더니즘(Post Modernism)

          역사학자 아놀드 토인비(Arnold Toynbee)가 최초로 쓰기 시작한 말 가운데 포스트모더니즘(Post Modernism)이란 말이 있습니다.
          포스트모더니즘이란 후기현대주의 또는 탈현대주의를 말하는데 이는 절대가치나 권위를 부정하고 모든 것을 상대적이고 다원적이고 자기중심적으로 생각하는 극도의 인본주의 이론입니다.

          이러한 포스트모더니즘은 신앙에도 영향을 미쳐 절대자이신 하나님과 그 진리인 성경을 부정하고 미래나 내세에 대한 관심보다는 먹고 마시고 즐기는 데만 관심하는 세속주의나, 동성애나 근친이나 소아 및 수간까지도 인정해 달라는 도덕적 가치관의 파괴, 그리고 나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인가 보다 무엇이 내게 유익하고 내가 원하는 것인지를 추구하는 어리석은 자아중심으로 나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진리를 몰라도 너무나 모르고 스스로 비극적 인생이 되기를 자처하는 불행한 모습이 아닐 수 없습니다.


          신약성경에는 “음부(하데스)”라고 하는 말과 ”지옥(게헨나)”이라고 하는 말이 확연히 구별되지 않은 채, 그냥 죄인들이 죽어서 들어가는 고통스러운 곳으로 혼용되는 것으로 보여 진다.

          요한계시록 20:13
          바다가 그 가운데에서 죽은 자들을 내주고 또 사망과 음부도 그 가운데에서 죽은 자들을 내주매.
          - 음부는 죄인들이 마지막에 들어가는 장소가 아니라 것을 알 수 있다.

          마태복음 10:28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서 멸하실 수 있는 이를 두려워하라
          - 지옥은 영혼만 가는 곳이 아니라 몸과 영혼이 함께 들어가 멸망 받는 곳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음부는 죄인들이 최종 심판을 받기 전까지 영으로 갇혀 있는 구치소라고 한다면, 지옥은 마지막 흰보좌 심판이 끝난 다음 부활체로 몸과 영혼이 함께 형벌을 받는 감옥소라고 할 수 있다.
          게헨나라고 부르는 지옥은 천국과 반대가 되는 곳으로, 부활한 성도가 들어가 영생을 누리게 될 “새 하늘과 새 땅“과 대비되는 곳이라고 말할 수 있다.

          마태복음 10:28에 나오는 “지옥”의 히브리 원어는 “힌놈의 아들의 골짜기”(수 15:8)라고 하는 말에서 유래되었는데, 이곳은 불경건한 자들이 마지막 심판을 받은 후에 가게 될 영벌(永罰)의 장소를 가리키는 예표가 되는 곳이다.

          원래 “힌놈의 골짜기”라는 뜻을 가지고 있는 구약의 “게헨나(gehenna)”는 히브리어로 골짜기를 뜻하는 “게”(ge)와 인명 “힌놈”(Hinnom)이 합성되어 생긴 말로, 예루살렘 남쪽 비탈 아래의 계곡을 가리키는 지명이다.

          구약에서는 이곳에 대해 “힌놈의 아들 골짜기에 도벳 사당을 건축하고 그 자녀를 불에 살랏나니~“(예레미야 7:31)라고 하였는데, 이 골짜기는 그 후에 재앙이 내려 살육의 골짜기가 되었다.

          그리고 예수님이 오신 후에는 사람의 시체나 죽은 짐승들을 그 곳에 버리고 유황을 뿌려 항상 불이 타게 하여 그곳은 구더기가 들끓고 냄새가 진동하는 저주받은 골짜기가 되었다.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있어서 “힌놈의 골짜기”는 저주와 살륙을 의미하는 장소였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그 비유로 그렇게 예를 들어 설명하신 것이다.

          예수님이 삼년 반 동안 하나님의 말씀을 전파하실 때 바리새인들에게 “뱀들아 독사의 새끼들아 너희가 어떻게 지옥의 판결을 피하겠느냐”(마 23:33)라고 하시고, 또 “~두 눈을 가지고 지옥에 던져지는 것보다 나으니라. 거기에서는 구더기도 죽지 않고 불도 꺼지지 아니하느니라.”(막 9:47~48)고 하셨는데, 이 지옥은 게헨나라고 하는 흰놈의 골짜기를 지칭하신 것이다.

          음부의 권세란 무엇입니까?

          음부의 권세” 또는 “지옥의 문”이라는 문구는 성경 전체에서 단 한 번, 마태복음 16:18에만 나오는 표현입니다.
          이 구절에서 예수님은 예수님의 교회를 세우시는 것을 언급하고 계십니다.
          “또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마태복음 16:18).

          그 당시는 아직 예수님께서 교회를 세우기 전이셨습니다.
          이 구절에서 신약 성경에서 처음으로 교회라는 단어가 등장합니다.
          예수님께서 사용하신 교회라는 단어는 헬라어 에클레시아에서 파생되었으며, 이 단어는 "불러냄" 또는 "집회"를 의미합니다.
          즉, 예수님께서 당신의 교회라고 부르시는 교회는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세상에서 불러낸 사람들의 모임입니다.

          성경학자들은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라는 구절의 실제 의미에 대해 논쟁합니다.
          이 구절의 의미에 대한 더 나은 해석 중 하나는 다음과 같습니다.
          고대 도시는 성문이 있는 성벽으로 둘러싸여 있었고, 전투가 벌어질 때 도시의 이런 성문은 일반적으로 적들이 가장 먼저 공격한 곳이었습니다.
          이는 도시의 안전이 성문의 튼튼함이나 힘에 의해 결정되었기 때문입니다.

          “음부의 권세” 또는 “지옥의 문”은 음부의 힘을 의미합니다.
          "지옥(하데스)"이라는 이름은 원래 죽은 자의 영역을 다스리는 신의 이름이었으며 따라서 이런 영역을 종종 "하데스의 집"이라고도 불렀습니다.
          이런 영역이 지칭하는 장소는 이 세상을 떠나는 모든 사람이 자신의 도덕적 상태에 관계없이 내려가는 곳이었습니다.
          신약에서 하데스는 죽은 자의 영역이며, 이 구절에서 하데스 또는 음부는 그 장소의 힘을 나타내는 성문이 달린 강력한 도시로 표현됩니다.

          예수님은 여기서 자신의 임박한 죽음을 언급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 못 박히고 장사되시겠지만, 이내 죽은 자 가운데서 일어나 교회를 세울 것입니다.
          예수님은 사망의 힘이 자신을 붙잡을 수 없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계십니다.
          음부의 권세에도 불구하고 교회는 세워질 것이며, 이러한 권세를 이기고 교회는 번성할 것입니다.
          세대에 세대를 거듭하며 신체는 계속 죽어 죽음의 권세에 굴복하더라도, 교회는 결코 실패하지 않을 것입니다.
          다른 세대가 또 일어나 교회를 이어갈 것입니다.
          이러한 일은 예수님께서 명령하신 대로 지상에서의 사명을 완수할 때까지 계속될 것입니다.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마태복음 28:18-20).

          예수님께서는 죽음이 하나님의 백성을 사로잡을 힘이 없다고 분명하게 선언하신 것입니다.
          음부의 권세는 하나님의 교회를 제압하고 옥에 가둘 힘이 없습니다.
          주님은 죽음을 이기셨습니다(로마서 8:2, 사도행전 2:24).
          그리고 “사망이 다시 그를 주장하지 못”하기 때문에(로마서 6:9), 사망은 더 이상 예수님께 속한 사람들을 지배하지 않습니다.

          사탄은 사망의 힘을 가지고 있으며, 항상 그 힘을 사용하여 그리스도의 교회를 파괴하려고 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예수님께서 “불러내신” 교회가 이기리라는 약속을 가지고 있습니다.
          “조금 있으면 세상은 다시 나를 보지 못할 것이로되 너희는 나를 보리니 이는 내가 살아 있고 너희도 살아 있겠음이라”(요한복음 14:19).

          구약의 음부 개념의 이해

          히브리인들의 음부의 개념을 올바로 이해하기 위해 우리가 먼저 유념해 두어야 할 것이 있다.

          첫째 구약에 나타난 음부(히, 스올)는 신약의 음부(헬, 하데스)는 그 개념이 서로 다르다.
          즉 구약의 음부는 단순히 사자(死者)의 처소로만 언급한 반면,
          신약의 음부는 보다 구체적으로 악인들이 세상 끝날 최후 심판으로 지옥에 가기 전에 머무는 형벌의 중간기 처소로서, 낙원(헬, 파라다이스)과 대조되는 개념이다.

          그러나 이는 계시의 점진성에 따라 구약시대보다 신약 시대에 사후 세계에 대한 계시가 더욱 명료히 주어졌기 때문에 생긴 차이이며, 서로 상치되는 일은 아니다.

          둘째 구약의 음부 개념은 일차적으로 구약시대 히브리인들이 이해하기 쉽도록 하기 위해 그들 자신의 음부 개념을 반영하는 표현을 그대로 사용하고 있기는 하나 양자가 완전히 일치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즉 히브리인 자신들은 그 당시 고대 이방 문화권의 영향을 받아 그릇된 음부 개념도 가지고 있었을 것이나  구약 성경은 신약과 서로 모순되지 않은 범위 안에서 하나님의 특별한 역사에 의해 기록되었기 때문에 결코 그릇된 것이 없다.

          따라서 여기는 구약 성경 가운데 자주 나타나는 음부의 개념에 대해서 다루며 신구약 중간기를 거쳐 신약 시대에 보다 확립된 음부의 개념에 대해서는 ‘사후의 중간기 처소’에서 다시 기록하기로 한다.

          1. 음부의 원어적 의미

          구약에서 ‘음부’ 라고 번역된 히브리어는 ‘스올(쉐올)’이며 모두 65회 사용 되었다.
          이 단어의 문자적 의미에 대해서는 다소 견해가 엇갈리거나 이에 대한 유력한 견해를 살펴 보면 다음과 같다.

          이 단어는 ‘묻다’(to ask)라는 의미를 가진 ‘솨알’에서 유래했다고 보는 견해가 있다.
          이는 죽은 자가 음부에서 엄중하게 문책을 받는다는 사상의 반영으로 보는 것이다.

          또한 동일한 히브리어 ‘솨알’이 히브리어로 ‘요청하다’ 는 의미도 지닌 것에서 착안하여 이 명칭은 음부가 죽은 자를 끊임없이 요청하는 곳이라는 사상을 반영하는 것으로 보기도 한다.

          * 솨알(문의하다) 7592. שָׁאַל 

          1. 문의하다,  2. 시편 2:8,  3. 사무엘상 8:10
          발음 / 솨알(shâʼal)


          그러나 ‘음부’ 즉 ‘스올’ 이란 단어가 ‘움푹 꺼지다.’(to be hollow)라는 의미와 관련된 것으로 보아 음부가 땅 밑의 움푹 패어진 장소에 있음을 반영하는 것으로 보기도 한다.

          이는 이 단어가 영어 성경에서는 ‘움푹한 구덩이’를 의미하는 ‘pit'로 번역되는 근거가 되기도 한다.

          또한 음부를 ’어두침침하다‘ (make dim). ’황폐하게 하다‘(crash) 라는 뜻이 있다.
          ’솨아‘에서 유래한 것으로 보아 음부가 흑암의 세력이 지배하는 어둡고 횡폐한 곳임을 반영한다는 견해도 있다.

          שָׁחַר  7835

          1. 어둡다,  2. 검다, 3. 욥기 30:30
          발음 / 솨하르( shâchar)
          관련 성경 / 검어지다(욥 30:30)
          구약 성경 / 1회 사용

          이 가운데 어느 것이 사실에 근접하는 것인지는 확실치 않으나 모두 나름대로 구약시대 사람들의 음부에 대한 관념이 어떠했는지를 암시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2. 음부에 대한 구약의 묘사

          구약 성경은 음부를 선한 자나 악한 자나 구분 없이 모든 죽은 자들이 가서 머무는 곳으로 본다.
          그리고 그곳은 어둡고 그늘진 곳이며(욥 10:21-22, 시 143:3). 아름다움과 (시 49:14), 만족함과(잠 27:20). 하나님에 대한 찬양이 없는 (사 38:18), 침묵의 장소이며(시 31:17). 오히려 고통과 (시 116:3), 잔혹스러움이 있는(아 8:6). 흑암의 장소(욥 10:22). 로 설명되고 있다.

          이처럼 구약시대 사람들은 인간이 죽음으로 영원히 멸절하는 것이 아니라 음부라는 실존의 장소에서 삶을 영위하는 것으로 생각 했으며, 이곳 역시 하나님의 능력이 역사하는 영역으로 여겼다(욥 26:6, 시 16:10-11).
          따라서 구약의 성도들은 이러한 암울한 음부로부터 하나님께서 건져 주실 것을 간구하기도 하였다(시 89:48).

          3. 음부의 위치에 대한 구약의 언급

          죽은 자가 거하는 처소라는 가장 소박한 음부의 개념에 의거하여 일차적으로 음부를 죽은 사람의 시체가 묻히는 무덤이란 뜻으로 사용되기도 했다(시 141:7).

          따라서 KJV는 음부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스올’을 31번이나 ‘무덤’(the grave)으로 번역하기도 했다.

          그러나 음부의 보다 보편적인 용례는 사후(死後)에 육체와 분리된 영혼이 가는 이 세상과 별개의 처소를 가리킨다.

          히브리인의 우주관에 의하면 세계는 하늘(天), 땅(地), 땅 아래(地下)로 나누어지며, 죽은 자의 영혼이 머무는 음부는 땅 아래 지하 세계에 있는 것으로 보았다(민 16:30,33, 겔 31:17, 암 9:2) . 이곳에 있는 자는 다시 지상으로 갈 수 없는 것으로 생각되어졌으며 (삼하 12:21, 시 26:14), 음부에 있는 자와 교통을 시도하는 자는 하나님의 질서를 범하는 것으로 여겨져 정죄 되었다(신 18:11, 사 8:9).

          또한 이곳은 태양 아래 깊은 물 가운데 있으며, 문을 가진 집단 거주지의 형태를 취하고 있는 것으로 상장되기도 하였다(요일 1 :26:5, 38:17-18, 사 38:9-10).

          17. 보옵소서 내게 큰 고통을 더하신 것은 내게 평안을 주려 하심이라 주께서 내 영혼을 사랑하사 멸망의 구덩이에서 건지셨고 내 모든 를 주의 등 뒤에 던지셨나이다.
          18. 스올이 주께 감사하지 못하며 사망이 주를 찬양하지 못하며 구덩이에 들어간 자가 주의 신실을 바라지 못하되.

          9. 유다 왕 히스기야가 병들었다가 그의 병이 나은 때에 기록한 글이 이러하니라
          10. 내가 말하기를 나의 중년에 스올의 문에 들어가고 나의 여생을 빼앗기게 되리라 하였도다



          한편 구약 성경에 나온 음부에 대한 이런 표현은 당시 히브리인들의 사상을 반영한 것으로 신약의 음부 개념과는 배치된다. 그러나 이때에는 사후 세계에 대한 정확한 정보보다는 사후 세계의 존재 자체를 말하는데 비중을 두고 있었기 때문에 다소 은유적 , 비유적인 표현들을 이용하여 음부에 대해 당대의 사람들이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하나님이 성경 저자들을 인도 하셨다고 볼 수 있다. 

          4. 의 의

          혹자들은 구약에 나온 음부에 대한 묘사를 고대 근동의 다른 이방 문화에서도 찾아 볼 수 있는 사후 세계에 대한 관념과 유사한 신화적 상상의 소산으로 보기도 하였다.

          또한 사후의 중간기 처소로서 의로운 자가 거하는 낙원과 대치되는 음부에 대한 신약성경의 묘사와 구약에 나오는 음부의 묘사는 계시의 점진성에 따라 아직 확실한 계시가 주어지지 않았을 때 구약시대 사람들이 가진 관념을 사실 그대로 반하되 구약성경 특유의 회화적 묘사나 특히 시가서에서 발견 할 수 있는 문학적 표현이 가미된 것이라고 모아야 한다.

          따라서 그 표현상 다소 혼란을 일으키기는 하나 성경 전체의 계시와 근본적으로 모순되는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신약과 근원적인 동질성을 갖는 음부에 대한 기록을 대할 때 인간의 삶이 이 세상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사후에도 영원히 지속됨을 깨닫고 하나님을 의지하며 그의 뜻에 따라 사는 진지한 삶의 자세를 다시 한 번 다짐하게 된다.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전도서 8장

          1월 23일(월)

          얼굴(전도서 8:1)

          지혜자와 같은 자 누구며 사리의 해석을 아는 자 누구냐 사람의 지혜는 그 사람의 얼굴에 광채가 나게 하나니 그 얼굴의 사나운 것이 변하느니라.
          Who is like the wise man? Who knows the explanation of things? Wisdom brightens a man's face and changes its hard appearance.

          얼굴(6440) פָּנִים  

          1. 얼굴,  2. 대면 ㉠ פָּנִים אֶל פָּנִים
          Pronunciation / 판님(pânîym)
          Etymology / 6437에서 유래

          * 6437. פָּנָה 

          1. 돌다,  2. 창세기 18:22, 3. 향하게 하다
          Pronunciation / 파나(pânâh) 

          지혜자(2450) חָכָם 
          1. 능숙한,  2. 지혜로운,  3. 신명기 4:6
          발음 / 하캄(châkâm)
          어원 / 2449에서 유래

          * 2449. חָכַם 
          1. 현명해지다,   2.  피엘형: 지혜롭게 만들다,  3. 푸알형: 지혜로워진
          발음 / 하캄(châkam)

          해석(6592) פֵּשֶׁר 
          1. 해석, 2. 이치,  3. 전도서 8:1
          발음 / 페쉐르(pêsher)
          관련 성경 / 이치(전 8:1)
          구약 성경 / 1회 사용

          미켈란젤로가 성 제롬이 번역한 라틴어 성경(Vulgate)을 의존했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제롬은 히브리어로 ‘빛나다’는 뜻의 ‘콸렌qalen’을 ‘뿔’이라는 뜻의 ‘콸란qalan’으로 읽었습니다.
          그래서 이 대목을 ‘모세의 머리에 뿔이 났다’는 뜻으로 옮겼던 것입니다.

          빛나다(7160) קָרַן   
          1. 빛나다,  2. 히필형 : 뿔이 나다
          발음 / 카란(qâran)
          관련 성경 / 광채가 나다(출 34:29, 30, 35). [명] 뿔(시 69:31).
          구약 성경 / 4회 사용


          뿔(7162) קֶרֶן  
          1. 뿔,  2. 다니엘 3:5,
          발음 / 케렌(qeren)
          어원 / 아람어
          관련 성경 / 뿔(단 7:7, 20, 24)
          구약 성경 /14회 사용

          믿음이란 높은 뜻 관심이다!
          높은 곳에서 보면 모두 보인다.
          바라는 것들의 실상 - 이루어지고 있는 과정 중에 있구나!

          지혜자(智慧者)
          - 사리의 해석(사물의 이치)을 아는 자
          * 사리(다바르. דָּבַר)
          -말씀을 해석하는 자

          하캄(châkâm.  חָכָם) 능숙한, 지혜로운
          - 사리의 해석(사물의 이치)을 아는 자
          * 사리(다바르. דָּבַר) 말씀
                          * 해석(페쉐르. פֵּשֶׁר) 해석, 이치
          - 말씀을 해석하는 자

          격물치지(格物致知)
          격식 격(格), 물건 물(物), 이를 치(致), 알 지(知)
          사물의 이치를 구명하여 자기의 지식을 확고하게 함.


          모세의 머리에 솟은 뿔은 미켈란젤로가 의도적으로 만든 것입니다.
          그는 피렌체 최고의 명문 가문인 메디치가에 속한 로렌초의 후원을 받고 있었는데, 그리스 철학과 신화에 익숙했던 그는 눈에 보이는 물질이나 형상을 통해 눈에 보이지 않는 가치를 드러내는 것을 예술적 이상으로 삼고 있었습니다.

          고대 신화에서 ‘뿔’은 대개 ‘영적인 힘’을 상징합니다.
          그래서 미켈란젤로는 모세 像에 뿔을 덧붙임으로써 모세를 하나님의 현존 앞에 선 사람, 하나님과 하나 됨을 경험한 이상적 인간으로 제시하고 있는 것입니다.

          성경은 모세의 얼굴에 빛이 나타난 까닭을 간명하게 밝히고 있습니다.
          “주님과 함께 말씀을 나누었으므로 얼굴에서 그렇게 빛이 났으나, 모세 자신은 전혀 알지 못하였다.”
          그 빛은 결국 하나님과의 만남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빛’은 어떤 것일까요? 창조의 첫날 “‘빛이 생겨라’ 하시니, 빛이 생겼다. 그 빛이 하나님 보시기에 좋았다”(창1:3) 했던 그 빛일까요? 세상에 와서 모든 사람을 비춘 참 빛이었을까요? 무엇을 의미하든 빛은 하나님과 연관됩니다. 진리가 마치 섬광처럼 우리 삶을 비출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경청하다보면 어떤 빛이 섬광처럼 우리 삶 전체를 관통하는 것처럼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육체적 욕구와 사회적 관습에 따라 살아가는 우리들의 삶이 고스란히 드러나고, 하나님을 등지고 살던 삶을 부끄러워하게 만드는 빛 말입니다. 평생토록 한 번도 그 빛을 보지 못하고 어둠 속에서 방황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깨닫지도 못하고, 분별력도 없이, 어둠 속에서 헤매고만 있으니, 땅의 기초가 송두리째 흔들렸다.”(시 82:5)

          불쌍한 인생들입니다. 강 하구에서 썩은 물고기를 차지하기 위해 다투는 갈매기들은 높이 그리고 빨리 날기 위해 피나는 연습을 하는 동료 갈매기를 이해하지 못합니다. 세상의 인력에 끌려 하늘을 잊고 사는 이들은 가련한 존재들입니다. 그들은 유다서의 표현대로 “불만에 싸여서 불평을 늘어놓는 사람들이요, 자기들의 욕심대로 사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입으로 허풍을 떨다가도, 이익을 챙기기 위해서는 남에게 아첨을 합니다."(유1:16) 길 잃고 떠도는 별들인 그들을 위해 마련된 것은 짙은 어둠입니다. 하지만 진리의 조명을 자주 받아 거의 밝음 속에서 살아가는 이들도 있습니다. 우리는 그들을 일러 성자라 합니다. 모세의 얼굴에 드러난 환한 빛은 하나님을 만난 이가 맛본 기쁨과 경외심이 외적으로 드러난 것입니다. 출애굽기 34장의 앞부분에는 구름에 싸여 내려오시는 주님께서 모세에게 자신을 소개하는 말씀이 나옵니다.

          “주, 나 주는 자비롭고 은혜로우며, 노하기를 더디하고, 한결같은 사랑과 진실이 풍성한 하나님이다. 수천 대에 이르기까지, 한결같은 사랑을 베풀며, 악과 허물과 죄를 용서하는 하나님이다. 그러나 나는 죄를 벌하지 않은 채 그냥 넘기지는 아니한다. 아버지가 죄를 지으면, 본인에게 뿐만 아니라 삼사 대 자손에게까지 벌을 내린다.”(출 34:6-7)



          전도서 8장의 개요

          8:1 지혜자의 얼굴
          8:2∼9 왕의 명령 앞에서
          8:10∼15 모순된 현실 앞에서
          8:16∼17 이해할 수 없는 일 앞에서

          솔로몬은 지혜자를 가리켜 "사리의 해석을 아는 자"라고 합니다.
          지혜로운 사람은 사리의 해석을 알기 때문에 말과 행동이 사리에 맞는 것만 합니다.
          그러나 우매자는 그렇지 못합니다.
          어리석은 사람은 사리의 해석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무모하게 처신하기 쉽습니다.

          지혜자에게 나타나는 특징은 얼굴에 광채가 난다고 합니다.

          스데반은 돌에 맞아 순교를 당하는 자리에 이르렀습니다.
          그때 스데반 집사가 눈을 들어서 하늘을 우러러보았습니다.
          하늘 문이 열리면서 예수님이 하나님 우편에 서 계신 것을 보았습니다.
          스데반은 잠시 잠깐 후면 예수님이 두 팔을 벌리시고 자기를 품에 안으시며 위로해 주실 것을 생각했습니다.
          그때 스데반 집사의 얼굴이 광채로 빛나기 시작했습니다.
          그 얼굴이 천사의 얼굴처럼 환하게 빛나기 시작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지혜로운 자의 얼굴입니다.

          지혜로운 사람은 형통한 일을 맞을 때는 하나님의 은혜인 줄 알고 감사하면서 기뻐합니다.
          그리고 곤고한 일을 당했다고 해서 낙심하거나 불평하지 않습니다.
          그 속에도 반드시 하나님의 선하신 뜻이 있음을 생각하면서 마음의 평화를 잃지 않습니다.
          그러니 무슨 환경에서든지, 어떠한 처지에서든지 그 얼굴이 환하게 빛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어리석은 사람은 다릅니다.
          우매자의 특징은 마음이 급하여 성급하게 노를 발합니다(전 7:9)
          그러므로 우매한 사람은 적은 일에도 쉽게 얼굴이 일그러질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풍성하게 받아 누리며 그 은혜가 지혜로운 자의 얼굴처럼 환하게 은혜롭게 광채로 빛나게 되시기 바랍니다.
          사나운 표정은 그 모양이라도 흉내내지 마세요.
          근심, 걱정, 어두운 그늘이 여러분의 얼굴에서 다 사라지고 언제나 은혜가 충만하고, 덕스럽고, 밝게 웃는 얼굴이 다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곧이어 솔로몬은 2절 이하에서 지혜로운 사람이 사리에 맞게 처신하는 모습을 세 가지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첫째, 왕이 명령을 내릴 때는 어떻게 처신해야 하는가?

          왕이 옳지 못한, 그릇된 명령을 내릴 경우도 있을 것입니다.
          그럴 때 신하로서 어떻게 처신하는 것이 지혜로운 길인지 2∼9절에서 일깨워주고 있습니다.

          둘째, 우리가 모순된 현실을 바라보면서 어떻게 처신해야 하는가?

          우리는 이 땅에서 의롭게 사는 사람이 잘되고, 또 악인들은 잘못되어야 마땅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의로운 사람이 고통을 당하고, 악인은 오히려 형통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모순된 현실입니다.
          이런 모순된 현실에서 지혜로운 사람은 어떻게 처신하는가?
          이것에 대해 10∼15절에서 일깨워주고 있습니다.

          셋째, 하나님의 섭리를 생각하라

          우리가 살아가다 보면 우리의 머리로 이해되지 않는 일들을 많이 당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섭리를 생각해보세요. 하나님은 하늘에 계시고, 우리는 땅에 있습니다.
          하나님과 우리 사이는 하늘과 땅이 차이입니다.
          그러니 이 작은 머리로 어찌 하나님께서 하시는 모든 일들을 이해할 수 있겠습니까?
          이와 같이 이해할 수 없는 일을 당할 때 지혜로운 자는 어떠한 마음으로 살아가는가?
          이것이 16∼17절 말씀에 나옵니다.

          잠언 15:13
          마음의 즐거움은 얼굴을 빛나게 하여도 마음의 근심은 심령을 상하게 하느니라.

          나다니엘 호손의 '큰 바위 얼굴'이라는 글이 있습니다.
          산의 한 쪽에 강하고 위엄 있고도 친절하며 존경스럽게 보이는 그 얼굴을 매일 바라보며 기뻐하는 어네스트라는 소년이 그 마을에 살고 있었습니다.
          언젠가는 그 마을에 큰 바위 얼굴과 똑같은 사람이 나타날 것이라는 전설이 있었기 때문에 그 소년은 그를 기다리며 살았습니다.
          그리고 세월이 많이 흘렀습니다.
          어느 날 마을 사람들이 모여 그 전설에 대하여 담소하고 있을 때 드디어 어떤 사람이 외쳤습니다.
          "보십시오 어네스트가 바로 큰 바위 얼굴입니다."
          우리가 진정 누굴 닮기 원합니까?
          우리가 진정으로 닮아가기를 원하는 사람이 있다면, 매일 간절한 마음으로 소원하며 바라볼 때 우리도 그의 성품을 조금이라도 닮아가지 않겠습니까?
          크리스천이 된다는 것은 예수를 조금이라도 닮아 가는 일이 아닐까요,


          믿음의 얼굴

          가난한 사람은 적게 가진 사람이 아니라 많이 원하는 사람입니다.
          교만한 사람은 비둘기처럼 더불어 사는 게 아니라 공작새처럼 과시하고 사는 사람입니다.
          외모를 과시하고 돈의 권력을 과시하며 명예에 굶주리는 인간이 얼마나 많은 세상인지요.
          신앙을 가진 사람은 얼굴을 중요시해야 합니다.
          참다운 신앙은 하나님과 직결되어 있습니다.
          사람의 얼굴은 과거의 이력서요, 현재의 현황판이요, 오늘을 알리는 게시판입니다.
          그러므로 얼굴에 신앙이 나타나 있어야 합니다.
          이렇게 된다면 공작새의 깃털이든, 비둘기의 눈이든 무엇인가를 닮게 마련이겠죠.
          비오는 날도 아름답게, 바람 부는 날도 감사하게 항상 주를 찬양할 수 있는 힘은 참 신앙에서 비롯되는 것입니다.
          신앙이란 자기 얼굴에 책임을 질 줄 아는 것입니다.


          장래 일(전도서 8:7)

          사람이 장래 일을 알지 못하나니 장래 일을 가르칠 자가 누구이랴.
          Since no man knows the future, who can tell him what is to come?


          돌고래를 죽인 기생충

          얼마 전 미국 해안지방에 돌고래 떼가 밀려 왔다.
          과학자들이 '죽음을 자초'한 이 어리석은 돌고래들의 집단이탈에 대하여 원인을 분석하였다.
          그 결과 돌고래는 음파를 이용하여 물의 깊이를 재는 능력이 귀에 있는데 그만 귓속에 기생충이 생겨 청각 장애를 일으켰던 것으로 밝혀졌다.
          작은 기생충의 서식으로 물의 깊이를 잘 알지 못했던 돌고래들은 해변을 깊은 물로 착각했고 죽음을 향해 스스로 돌진했던 것이다.
          우리 인생도 마찬가지이다.
          우리 삶에 큰 어려움이나 시련은 아주 큰 재난으로부터 오기보다는 작은 미혹에 있다고 볼 수 있다.
          나의 판단을 흐리게 하는 기생충은 무엇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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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믿음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단어는 에무나(emunah. אֱמוּנָה) 라고 합니다.
          '에무나'의 의미는 "확고함, 안전, 신뢰성" 이라고 합니다.

          이 단어는 예를 들어 하박국 2:4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에 나타나는데, 기본적인 뜻은 신실, 충성, 한결같음이다.
          이런 가치는 기본적으로 그 주체가 시간과 비용을 들여야 얻을 수 있는 것이다.
          아브라함을 보라.
          하나님을 향한 믿음을 지킨다는 것은 평생을 한결같이 살아내는 여정을 통해 이루어진 것이다.

          신약성서에 사용된 믿음에 대한 그리스어는 피스티스(pistis. πίστις)라고 합니다.
          이 단어의 뜻 역시 신실함, 충성, 헌신이다.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의 의"를 살아냄으로 하나님에 대한 신실함을 보여주신 분이다(롬 3:21-26).
          바울 역시 그리스도의 발자취를 따라 하나님에 대한 신실함을 보여주었다.
          그리스도를 따르는 이들이 믿는자들이라면, 이들 역시 아브라함과, 그리스도처럼 하나님에 대한 신실함을 보여야 한다.

          믿음에 해당하는 라틴어는 fides인데 기본적인 뜻은 신뢰, 보호, 의존이다.
          믿음(faith)에 해당하는 이런 단어들은 어떤 일이 사실인지 아닌지를 믿는 인식론적 동의를 뜻하지 않는다는 공통점이 있다.

          성경이 말하는 믿음(faith)은 그러한 인식론적인 믿음(belief)에 행동이 더하여진 개념이고, 한번 그렇다고 생각하는 것에 그치는 믿음(belief)이 아니라 평생 일관되게 사는 삶을 뜻한다.

          믿음(faith)을 영어로 번역하는데 어려운 점은 이 단어를 동사로 표현할 때 거기 알맞는 영어 단어가 없다는 점이다.
          믿음에 대한 그리스어 동사는 피스튜오(pisteuo, πιστεύω)인데 여기 해당하는 영어 단어가 없다는 말이다.
          가장 가까운 영어 단어는 "믿음을 실천하다" "믿는대로 살다"라는 뜻을 지닌 faithize가 아닐까 싶다.
          영어 성경은 그리스어 동사 pisteuo를 "to believe"로 번역한다.

          그런데 이 동사는 belief의 동사이지 faith의 동사는 아니라는 것이 문제이다.
          그리스어 pisteuo를 표현할 수 있는 적절한 영어동사가 없기 때문에 여러 문제가 발생했는데, 그 중 하나는 "믿음"을 인간이 하나님에 대해 갖는 지속적인 신뢰 관계를 표현하는 원래 의미를 잃어버리고, 특정 교리나 가르침을 받아들이는 의미로 이해되는데 그친 것이다.
          적어도 그리스어 pisteuo를 "believe"가 아니라 "faithize"로만 이해한다 하여도, 이러한 번역상의 위험성을 많이 줄일 수 있다.
          물론, "faithize"조차도pisteuo의 의미를 충분히 살린 단어라고는 볼 수 없지만, pisteuo에 정확하게 대응하는 단어가 없는 상황에서는 그나마 대안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제2바울서신이나 목회서신에서 사용된 pistis나 pisteuo는 여기서 말하고 있는 faith이 아니라 belief의 의미로 사용되어, 어떤 교리나 가르침을 받아들인다는 뜻으로 사용된 것을 볼 수 있다.
          이런 용법은 분명 복음서나 바울의 진정성 있는 서신에서 사용된 용법과는 다르다.
          그렇기 때문에 제2바울서신이나 목회서신에 나타난pistis는 belief로 번역해도 무방하다.


          http://m.pckworld.com/article.php?aid=9655611232



          성경의 큰 숲과 분위기를 파악하기 위해 성경 66권을 물고기 모양(익투스) 위에 7개 트랙으로 그려서 구분했다.
          로마 제국의 박해를 받던 시기에 익투스가 기독교인들을 확인하는 서로의 고백이 됐듯이, '통 7트랙'그림이 성경 전체를 역사순으로 이해하는 데 유용하게 활용되면 좋겠다.

          '통 7트랙'은
          1. 모세5경
          2. 왕정 500년
          3. 페르시아 7권
          4. 중간사 400년
          5. 4복음서
          6. 사도행전 30년
          7. 공동서신 9권이다.

          7개 트랙은 각각 다른 분위기 속에서 이야기가 전개되지만 결국은 하나의 이야기,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수렴된다.

          첫 번째 트랙은 '모세5경'이다.

          모세5경은 하나님이 온 우주 만물을 창조하신 이야기부터 아브라함 한 사람을 부르시고 그의 후손으로 제사장 나라를 삼으신 이야기를 기록하고 있다.
          모세5경을 또 다른 말로 축약한다면, 구약의 제사장 나라의 중요한 키워드인 율법과 선지자 중 '율법'을 말한다.
          즉 하나님이 모세를 통해 언약을 맺은 아브라함의 후손들에게 '제사장 나라의 법'을 주셨는데, 이는 예수님이 십자가를 통해 하나님 나라를 완성하기까지 1500년을 유지하는 데 꼭 필요한 기준이었다.
          그리고 모세5경 트랙에 여호수아, 사사기, 룻기까지 포함해 하나의 트랙으로 구분한다.
          왜냐하면 '왕정 500년'은 다른 분위기로 시작하기 때문이다.

          두 번째 트랙은 '왕정 500년'이다.

          왕정 500년은 사울 왕에서 시작해 시드기야 왕까지 이스라엘이 왕의 통치를 받은 약 500년을 말한다.
          이 기간을 크게 세 단계로 보면,
          1단계 120년은 통일왕국으로 사울, 다윗, 솔로몬이 각각 40년씩 나라를 다스린 시기이며,
          2단계 200년은 이스라엘이 한 민족 두 국가가 되어 북이스라엘과 남유다로 분단된 시기이다.
          그리고 북이스라엘이 앗수르 제국에 멸망함으로
          3단계 150년 동안 남유다만 남게 되지만, 남유다도 결국 바벨론에게 멸망하게 된다.
          왕정 500년간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우상을 섬기고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질 때마다 선지자를 보냈는데, 사무엘부터 예레미야 선지자까지 많은 선지자들을 보내 자신의 뜻과 세계 경영을 깨닫게 했다.

          세 번째 트랙은 '페르시아 7권'이다.

          페르시아 7권은 구약성경 가운데 페르시아 제국과 깊은 관련이 있는 책으로 다니엘, 에스라, 학개, 스가랴, 에스더, 느헤미야, 말라기다. 페르시아 7권 트랙에 에스겔을 포함하는데, 에스겔 선지자가 바벨론 포로로 끌려간 남유다 백성들을 설득해 제사장 나라를 다시 세울 '유대인'으로 훈련시키고 격려하는 일을 감당했기 때문이다.

          예레미야의 예언대로 바벨론 제국이 70년 만에 멸망하고, 페르시아가 새로운 제국의 주인으로 역사에 등장한다.
          페르시아 제국은 바벨론 제국이 각 나라로부터 데려온 포로들을 돌려보내는 정책을 펼쳤는데, 그 정책으로 남유다 백성들도 예루살렘으로 3차에 걸쳐 귀환하게 된다.

          네 번째 트랙은 '중간사 400년'이다.

          중간사 400년은 구약과 신약 사이, 즉 말라기와 마태복음 사이의 400년 역사다.
          400년 동안 세계 역사는 페르시아, 헬라, 로마 제국으로 변동했다.
          이 기간에 모세오경이 헬라어로 번역돼 세계화됐으며, 유대에는 바리새파, 사두개파, 에세네파 등 분파가 생겨나기 시작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이 시기를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시기 위한 준비 기간으로 사용하셨다는 것이다.

          다섯 번째 트랙은 '4복음서'이다.

          4복음서는 예수님에 관한 기록으로 마태복음, 마가복음, 누가복음, 요한복음을 말한다.
          성경은 요약과 압축의 책이다.
          그런데 하나님은 우리 예수님의 행적만큼은 무려 네 명의 저자를 동원해 풍성하게 알려주셨다.
          이것은 예수님의 행적이 그만큼 중요하다는 뜻이다.
          예수님은 공생애 3년 동안 먹이고, 고치고, 가르치고, 용서하고, 기도하는 삶을 사셨고, 때가 차매 십자가에서 우리의 죄를 대속하셨고, 부활 승천하심으로 제사장 나라를 하나님 나라로 완성하셨다.

          여섯 번째 트랙은 '사도행전 30년'이다.

          사도행전 30년은 예수님을 '신성모독자, 성전모독자, 자칭 유대인의 왕, 부활을 속이는 자'라고 주장하며 복음 전파를 방해한 산헤드린공회 세력과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 성전의 주인, 만왕의 왕, 부활의 첫 열매'라고 증거하는 사도들 간의 '30년 전쟁사'라고 할 수 있다.

          또한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 승천 사건에서부터 로마 대화재 사건이 일어나기 전까지 30년은 유대교 유대인들의 지독한 복음 전파 방해에도 불구하고 지상명령인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복음을 전하기 위한 성령의 역사가 일어난 기간이다.

          일곱 번째 트랙은 '공동서신 9권'이다.

          기독교가 A.D.64년 로마 대화재 사건의 방화범으로 지목된 이후 성도들을 향한 로마 제국의 핍박과 박해가 점점 더 강해졌다.
          게다가 거짓 교사들이 교회에 들어와 믿음이 연약한 성도들을 혼란하게 하는 일까지 더해지자 당시 교회를 책임지고 있던 복음 1세대 지도자들이 이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 복음 2세대에게 쓴 편지가 '공동서신 9권'인 히브리서, 야고보서, 베드로전·후서, 유다서, 요한 일·이·삼서, 요한계시록이다.
          이 책들은 시기적으로 보면 A.D.64년 이후에 로마와 기독교가 대결하는 가운데 주로 쓰인 책이다.
          물론 야고보서는 그 이전에 쓰였지만, 내용상 '공동서신 9권'에 포함한다.

          새해 복 많이 받으시기 바랍니다.

          우리 나라에서 전통적으로 생각하는 복은 이른바 오복(五福)으로서 부귀(富貴) 장수(長壽) 강령(康寧) 유호덕(攸好德) 고종명(考終命)입니다.
          주로 물질적이고 육신적인 복입니다.
          물론 하나님이 주시는 복 가운데 물질과 육체와 자손에 관한 것도 있습니다(창 13:14-16, 신 28:1-14).
          하지만 본문에서는 본질적으로 다른 차원의 복을 말하고 있습니다.

          '복 있는 사람'에 해당하는 '아쉬레 하이쉬'(האיש אשרי)는 직역하면 '사람의 복들'이라 할 수 있습니다.
          사람에게 있어서 본질적으로 가장 크고 가치있는 복들에 대해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복들'에 해당하는 '아쉬레'의 기본형 '에쉐르'입니다.
          히브리어에서 '복'이라는 단어는 '바라크'와 '에쉐르'가 있습니다.
          '바라크'(ברך)는 하나님이 주시는 물질과 육체와 자손에 관한 육신적인 복을 말하고,
          '에쉐르'(אשר)는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누리는 영적인 복을 말합니다.

          본문에서 말하는 복은 '에쉐르'(אשר)로서 하나님 나라에서 하나님과의 관계를 통해 누리는 행복감을 말하는 것입니다.
          사람에게 있어서 복들이 많이 있습니다.
          기쁨과 행복감을 주는 것들이 많이 있습니다.
          물질과 육체와 자손이 잘되는 것도 기쁨을 줍니다.
          하지만 그 보다 더 크고 가치있는 기쁨과 행복감을 주는 것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얻는 기쁨과 행복감입니다.

          1.악인의 삶을 살지 않는 것입니다. 

          1절에 "복 있는 사람은 악인들의 꾀를 따르지 아니하며 죄인들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라고 했습니다.

          여기에서 '악인' '죄인' 오만한 자'는 모두 악인에 대한 동일한 의미의 다른 단어들을 나열한 것입니다.
          여기에서 '악인' '죄인' 오만한 자'는 윤리적인 기준이 아니라 신앙적인 기준에서 말한 것입니다.
          성품이나 행동이 못된 나쁜 사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 죄인으로 드러난 자를 말합니다.
          곧 하나님을 부정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조롱하고 자기 욕망과 방식대로 살아가는 세속적인 사람들을 말합니다.
          곧 불신자를 말합니다.

          복은 소극적인 면에서 보면 악인들의 꾀를 따르지 않는 것입니다.
          악인은 생각하고 계획하고 도모하는 것마다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고 자기의 욕망을 채우려는 것입니다.
          그런 악인들의 생각을 부러워하거나 추구하지 않는 것이 복입니다.
          또한 죄인들의 길에 서지 않는 것입니다.
          죄인들은 행동하는 것마다 하나님 말씀을 거부하고 자기의 방식대로 하려 합니다. 그런 죄인들의 행동에 함께 동조하거나 동행하지 않는 것이 복입니다. 또한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지 않는 것입니다. 오만한 자는 하나님 말씀을 비웃고 조롱하며 자기의 방식대로 살아가는 자들입니다. 그런 오만한 자들과 함께 패거리가 되어 함께 거하지 않는 것이 복입니다.

            그 이유는 그들의 삶은 가치가 없고 결과가 비참해지기 때문입니다. 4절에 "악인들은~ 오직 바람에 나는 겨와 같도다"고 했습니다. '겨'는 곡식에서 알맹이를 제거한 쭉정이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농부가 곡식을 거두어 타작마당에서 곡식을 떱니다. 그리고 그 떤 곡식을 바람이 불 때 공중으로 날리면 알맹이는 땅에 떨어지고 겨는 바람에 날라 갑니다. 그렇게 해서 알맹이는 거둬 들이고 쭉정이는 모아 불을 지피는데 사용합니다. 악인은 그 인생이 참으로 무가치하고 비참합니다. 악인의 삶은 그 얻은 것으로 잠깐 기쁨을 얻기는 하지만 그 기쁨은 잠깐이고 불만족과 불평과 분노가 더 많아집니다. 그래서 사는 동안 평생에 행복감이 없습니다. 인생이 마칠 때에는 아무 것도 가져가지 못하고 그 남은 것을 다른 사람이 사용합니다. 가치있는 것을 전혀 하지 못해서 허무하게 죽고 맙니다. 죽은 후에 누구도 그의 인생을 가치있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죽은 다음에는 그렇게 없다고 주장했던 지옥 불에 떨어지고 맙니다 (마3:12, 25:31-46, 계20:11-15, 눅16:19-31).  

           2.의인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2절에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도다"고 했습니다.

            복은 적극적인 면에서 보면 복은 적극적인 면에서 보면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 하고 그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것입니다. '율법'은 하나님 말씀을 말합니다. 율법을 즐거워 한다는 것은 하나님 말씀을 깨달아 즐거워 하는 것을 말하고, 율법을 주야로 묵상한다는 것은 하나님 말씀을 적용하기 위해 되새김하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 말씀에는 하나님의 뜻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이 누구이며 하나님이 어떻게 사랑하시며 하나님이 무엇을 주시며 하나님이 어떤 목적을 가지고 계시며 하나님이 어떻게 경륜하시는지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가 어떻게 살기를 원하시는지 우리가 어떻게 살면 행복을 얻을 수 있는지 기록되어 있습니다 (딤후3:15-17). 그 하나님 말씀을 접하면서 그 의미를 깨닫게 되면 기쁨과 소망이 생깁니다. 그 말씀을 적용하기 위해 되새김질을 할 때 확신과 능력이 생깁니다 (시19:10). 예) 에쉐르(אשר)-마카리오스(μακαρισμοs)-블레씽(blessing←bleed)   

            그 이유는 그 삶이 행복하기 때문입니다. 3절에 "그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철을 따라 열매를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으니 그가 하는 모든 일이 다 형통하리로다."고 했습니다. 시냇가에 심은 나무는 가뭄과 상관없이 뿌리가 물을 흡수하기 때문에 잎이 마르지 않고 풍성한 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다. 시냇가에 심긴 나무는 물을 흡수하여 잎을 푸르게 하고 열매를 맺게 하는 일이 형통하게 이루어집니다. 오직 하나님의 말씀을 좇아 사는 자는 하나님 말씀에서 계속 힘을 공급받기 때문에 그 삶 자체가 행복합니다. 삶에서 의인에게도 악인들과 마찬가지로 고난이 있고 어떤 면에서는 더 많을 수도 있습니다 (시34:19, 119:71, 살후1:5, 딤후3:12).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신뢰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의 뜻대로 살기 위해 하나님의 말씀을 가까이 하는 자는 기쁨이 있고 그 말씀을 적용하는 데에 있어서도 행복을 얻게 됩니다. 그 행복감은 세상 어떤 기쁨과 비교할 수 없는 만족을 주며 고난으로 인한 고통을 뛰어 넘는 만족을 줍니다. 예) 몰핀(morphine)과 엘돌핀(endorphin)과 다이돌핀(didorphin). (욥23:10, 빌2:17-18, 4:12, 고후12:9-10, 고후6:9-10).

          우리에게 복은 무엇입니까?
          가장 큰 복은 무엇입니까?
          어떤 상황에서도 행복감을 누릴 수 있는 가치있는 복은 무엇입니까?
          오직 하나님을 필요로 하고 하나님을 신뢰하고 하나님 말씀을 인정하고 하나님 말씀대로 사는 열심에 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선택과 목적 안에 들어있는 자라는 것을 확신하게 될 것이고 하나님의 보호와 섭리와 간섭과 인도가 있다는 것을 경험하면서 이 세상 무엇으로도 얻을 수 없는 행복감을 얻어 누리게 될 것입니다.
          올 한 해에 그런 행복감으로 승리하길 위해 주일에 집중하고 말씀에 집중하시기 바랍니다.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전도서 7장

          1월 21일(토)

          아름다운 이름(전도서 7:1)

          아름다운 이름이 보배로운 기름보다 낫고 죽는 이 출생하는 보다 나으며.
          A good name is better than fine perfume, and the day of death better than the day of birth.

          인도의 간디가 외쳤던 말
          왜 너희들은 예수님의 가르침을 따라가지 못하느냐?

          유명한 인도의 간디가 “예수의 교리도, 예수의 교훈도, 예수의 가르침도 훌륭한데 너희 예수 믿는 그리스도인들은 왜 예수님의 가르침을 따라가지 못하느냐? 그렇기 때문에 나는 예수님을 믿지 않겠다.”고 고백을 했다합니다.

          내가 사관학교에 잠깐 들어갔다가 나왔다고 내가 군인이 되는 경우는 없습니다.
          내가 의과대학에 잠시 다니러 갔다가 왔다고 해서 의사가 되는 것이 아닌 것처럼 오늘 우리가 교회에 들락날락 했다고 해서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에 대한 정의는 성경을 찾아봐야 됩니다.
          어떤 새 신자가 성경을 두 번 통독하고 난 다음에 먼저 믿는 신자에게 교회사 책을 빌려달라고 했습니다.
          “왜 그러냐?”라고 물으니 “읽어봐야 되겠다.”고 해서 “왜 읽으려고 하느냐?”고 다시 물으니 “언제부터 그리스도인들이 전혀 그리스도를 닮지 않는 모습으로 살기 시작했는지 궁금해서 교회사를 한번 읽어보려고 한다.”라고 했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그 명칭에 걸맞는 삶을 살아야 그리스도인이라고 불릴 수 있습니다.
          내 삶에 그리스도가 전부인 삶을 살아갑시다.
          우리의 신앙생활이 부업이 아니라 전업이 되도록 합시다.

          사람을 찾습니다!

          어느날 이솝의 주인이 말했다.
          "얘, 이솝아 , 목욕탕에 가서 사람의 많은지 보고 오너라"
          이솝은 목욕탕으로 갔다.
          그런데 목욕탕 문 앞에 끝이 뾰족한 큰 돌이 땅바닥에 박혀있는 것이었다.
          그래서 목욕탕으로 들어갔던 사람이나 목욕하고 나오는 사람 모두가 그 돌에 걸려 넘어질 뻔 하였다.
          어떤 사람은 발을 다치기도 하고 어떤 사람은 코가 깨질 뻔 했다.
          "에잇, 빌어먹을!"
          사람들은 돌에 대고 욕을 퍼부었다.
          그러면서도 누구 하나 그 돌을 치우는 사람은 없었다.
          '사람들도 한심하지, 어디, 누가 저 돌을 치우는가 지켜봐야지'
          이솝은 목욕탕에서 그것만 지켜보고 있었다.
          "에잇! 빌어먹을 놈의 돌멩이!"
          여전히 사람들은 돌에 걸려 넘어질 뻔하고는 욕설을 퍼부으며 지나갔다.
          얼마 후에 한 사나이가 목욕을 하러 왔다.
          그 사나이도 돌에 걸려 넘어질 뻔 하였다.
          이솝은 여전히 그 사나이를 지켜보고 있었다.
          "웬 돌이 여기 박혀 있담!"
          그 사나이는 단숨에 돌을 뽑아냈다.
          그리고 손을 툭툭 털더니 목욕탕 안으로 들어갔다.
          이솝은 그제야 일어서더니 목욕탕의 사람수를 세어보지도 않고 그냥 집으로 달려갔다.
          이솝은 주인에게 이렇게 말했다.
          " 선생님, 목욕탕 안에 사람이라곤 한 명밖에 없습니다."

          가장부유한 사람은

          인간은 배우는 동물이다.
          요람에서 무덤에 갈 때까지 인간은 배워야 한다.
          특별히 인간은 감사의 철학을 배워야 한다.

          "행복은 감사 속에 있고 감사는 만족 속에 있으며,
          만족의 나무에 감사의 꽃이 피고,
          감사의 꽃에 행복의 열매가 열린다"는 말이 있다.

          행복이란 무엇인가?
          흐믓한 정신적인 만족감이다.
          그래서 인간이 행복하기를 원하시는 주님께서는 사도 바울을 통하여 항상 기뻐하고 범사에 감사하라고 가르치신 것이다.

          우리는 유대인의 다음 명언을 마음에 새길 필요가 있다.

          1. 이 세상에서 가장 현명한 사람은 누구인가?
          - 모든 사람에게 항상 배우는 사람이다.

          2. 이 세상에서 가장 강한 사람은 누구인가?
          - 자기 자신을 이기는 사람이다.

          3. 이 세상에서 가장 부유한 사람은 누구인가?
          - 자기가 가진 것으로 만족하는 사람이다.

          우리는 자기의 가진 것에 대하여 감사할 줄 알아야 한다.

          18세기에 독일에서 훌륭한 목회를 했던 진 프레드릭 오버린 목사가 모처럼 겨울 여행을 떠났습니다.
          그런데 여행을 하던 도중 심한 눈보라를 만나 길을 잃게 되었고, 꼼짝없이 얼어죽을 수밖에 없는 상황에 놓이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때마침 마차를 타고 가던 어떤 사람이 오버린 목사를 발견하고는 마차에 태워 인근 마을까지 데려다 주었습니다.
          게다가 편히 쉴 수 있는 따뜻한 방까지 마련해 주었습니다.
          오버린 목사는 무척 고마워하면서 그 사람에게 이름을 물었습니다.
          그러자 그 사람은 "당신은 목사님이시죠? 그렇다면 선한 사마리아 사람의 이름을 아시나요? 저는 목사님이 선한 사마리아 사람의 이름을 아실 때까지 제 이름을 밝히지 않겠습니다" 하고 말했습니다.

          참으로 아름다운 이야기입니다.
          아귀다툼으로 얼룩져 있는 이 시대에 한 겨울의 모닥불과 같은 사람!
          당신도 되어 보지 않으시겠습니까?

          주님, 오직 주님의 이름만을 드러내며 살고 싶습니다. 저희도 이름 없는 자가 되고 싶습니다.

          아름다운(2896) 이름(8034)이 보배로운 기름보다 낫고 ... 나으며 -

          히브리인들에게 있어서 '이름'이란 어떤 살마에 대한 단순한 외적인 회칭이 아니라 그 사람의 인격 자체를 대변하는 것으로도 쓰였던 바, '아름다운 이름'이란 그 사람에 대한 훌륭한 '명성'을 가리킨다(Luther, M.A.Eaton, Lange, G.A.Barton, T.H. Leale).
          히브리인들은 자신의 이름이 오래도록 기억되는 것을 대단히 명예로운 일로 간주했다(8:10; 욥 18:17; 잠 10:7).

          그리고 '기름'이란 일반적으로 팔레스틴 지경의 감람나무 열매에서 채취하는 식물성 기름을 말하는데, 이는 그 용도 면에서 여러 가지로 유용하게 사용되었다.
          1.  식용(출 29:2,23; 레 2:1,2,4-7),
          2.  등화용(출 25:6; 27:20),
          3.  의료용(사 1:6),
          4. 화장품용(삼하 14:2; 시 23:5),
          5. 향유용(눅 23:56) 

          특히 이는 팔레스틴 지역과 같이 건조한 기후 여건 속에서는 그 몸에 기름을 발라 향기를 내는 데 유용하게 쓰여진 것으로 보인다(룻 3:3;삼하 12:20;시 45:7,8;암 6:6 참조).
          또한 본절 후반절의 '죽는 날이 출생하는 날보다 나으며'란 전반절의 의미와 연관되는 듯이 보인다.
          즉 이는 사람이 이 세상에서 좋은 명성을 쌓으며 살다가 죽는 것이 어리석고 우매한 가운데 고통과 고난을 당하며 살지도 모르는 삶의 시작이 날보다 낫다는 것이다(D.R. Glenn).
          그러나 전도자는 삶보다 죽음을 더 애찬하는 염세주의자로서 말한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전도자는 인간의 모든 삶의 축복의 근원을 하나님께 두고(3:13;5:!8), 인간의 본분을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 계명을 지키는 것으로 언급하고 있기 때문이다(12:13).
          단지 여기서는 이 세상에서 진정한 명성을 얻는 지혜로운 삶을 강조하려고 하는 것으로 보인다.


          전도서 7장 흐름 정리

          지혜의 유익과 가치를 가르치는 내용이다.
          원래 사람은 정직한 존재로 지음 받았으나 스스로 간사한 꾀를 많이 낸다(29절).
          그러므로 온갖 탐욕과 죄악 가운데서 일생을 보내느니 차라리 죽는 편이 더 낫다.
          초상집에 가는 것이 잔칫집에 가는 것보다 더 나은 이유는 인생의 비극을 통해 진지하게 삶을 돌아볼 기회를 가질 수 있기 때문이다(2절). 한평생을 살아가면서 슬픈 일도 만나고 기쁜 일도 만난다.
          하나님이 이 두 가지 일들을 번갈아 겪게 하시는 것은 이러한 갖가지 일들을 통해 지혜롭게 대처하는 법을 배우게 하시기 위함이다(14절).
          물론 이 지혜는 얄팍한 인간의 지혜가 아니라 하나님을 경외함으로써 얻게 되는 신령한 지혜를 가리킨다.

          전도서 7장 줄거리

          1. 헛된 삶을 값진 삶으로 바꾸어 놓는 아름다운 이름과
          2. 금욕과
          8. 인내와
          11. 지혜를 갖는 것임.
          23. 지혜자가 되는 어려움.


          전도자는 7장에서 보다 나은 인생을 위해 무엇에 유념해야 할지를 말하고 있습니다.

          첫 번째는 아름다운 죽음을 준비하라는 것입니다(1-4).

          아름다운 이름이 값비싼 향유보다 낫습니다.
          사람의 죽는 날이 태어나는 날보다 중요합니다(1).
          초상집에 가서 자기도 돌아갈 인생의 결국에 대해 생각하는 것이 잔칫집에서 즐기는 것보다 낫습니다(2).
          자기 인생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하는 것이 생각 없이 웃고 사는 것보다 좋습니다(3).
          마음이 인생 종말의 순간에 가 있느냐 쾌락을 즐기는데 가 있느냐는 지혜와 우매를 가르는 시금석이 됩니다(4).
          하지만 많은 사람들은 덧없는 세상의 값비싼 기름을 아끼느라 예수님이 주시는 아름다운 이름을 포기하고 있으며, 죽음의 날에 가장 후회할 것이 많은 삶을 살고 있습니다.

          두 번째는 항상 책망을 들을 귀를 준비하라는 것입니다(5-7).

          어리석은 자는 칭찬의 노래 듣기를 좋아합니다.
          하지만 우매자의 웃음소리는 솔 밑에서 타는 가시나무 소리처럼 요란하지만 일순간에 사라지는 것일 뿐입니다.
          이와 반대로 지혜로운 자는 책망 듣는 것이 좋습니다.
          책망은 잠시 심령을 아프게 하지만 자기를 되돌아보게 하고 자기를 온전케 하는 것의 기쁨은 훨씬 더 큰 것입니다.
          그런데 만약 지혜자가 책망 듣기를 그치고 도리어 자기를 책망하는 사람을 향해 학대할 궁리를 하게 된다면 그 순간부터 그의 지혜는 어리석은 것으로 변질 될 것이며, 또 총명한 사람이 뇌물을 받고 바른 말을 굽히게 된다면 결국은 망하는 길로 이끌려 가게 됩니다.
          충고를 들을 줄 아는 시간의 길이는 그의 지혜의 길이입니다.


          지혜자의 태도(1-7절)

          12장으로 된 전도서는 1-6장에서는 해 아래에서 하나님을 떠난 삶은 허무한 것임에 대해서,
          7-12장은 하나님을 경외함을 통해 해 위를 구하는 삶에 대해 증거합니다.

          오늘 본문은 해 위를 구하는 삶의 문을 엽니다.
          또 전도서의 본론 부분에는 4개의 설교(강화)가 있는데, 세 번째 것이 6:1-8:14까지입니다.
          6장이 해 아래서의 삶의 허무함에 관한 한숨이었다면,
          7:1-8:14은 그 한숨을 어떻게 생명의 숨인 하나님의 숨으로 바꾸어 가는지에 대해서 증거합니다.

           본문 1-7절은 ‘지혜자의 태도’에 대해서 증거합니다.

          좋은 이름이 좋은 기름보다 낫고 죽는 날이 출생하는 날보다 나으며

          ‘좋은 기름’은 감람(올리브)나무에서 추출한 감람유(올리브유)입니다. 이 기름은 식용으로 사용된 것은 물론, 피부의 건조함을 막는 의약품과 화장품으로도 사용되었고, 잔치와 장례에도, 성전에서 불을 밝기는 용도로도 사용되었습니다. 또한 왕궁의 보물목록에도 포함되었습니다. 그래서 기름은 ‘재산’이나 ‘재능’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우리말로는 ‘이름’과 ‘기름’이 끝 자가 같지만, 히브리어로는 첫 글자가 같습니다. 그래서 이름과 기름을 비교하고 대조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인생길에서 기름(재산, 재능)과 이름 중 무엇이 더 필요하고, 더 중요한지를 저울질을 하면 언제나 ‘기름’ 쪽으로 천칭이 기웁니다. 종종 “이름이 밥 먹여주나?”라고 이름을 비웃기도 합니다. 그런데 인생을 살아갈수록, 살아있는 날이 얼마 남지 않았을수록 ‘이름’이 중요하다는 사실을 깨닫곤 합니다. 지나온 세월동안 ‘기름, 기름, 기름’하며 살았던 세월이 부끄럽기도 하고, 후회가 되기도 합니다.

          (2-4) 초상집에 가는 것이 잔칫집에 가는 것보다 나으니 모든 사람의 끝이 이와 같이 됨이라 산 자는 이것을 그의 마음에 둘지어다 슬픔이 웃음보다 나음은 얼굴에 근심하는 것이 마음에 유익하기 때문이니라 지혜자의 마음은 초상집에 있으되 우매한 자의 마음은 혼인집에 있느니라

          마음이 편하기로 하면 장례식장보다 결혼식장이 훨씬 낫습니다. 장례식장에서는 많은 사람들이 울지만, 결혼식장에서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웃습니다. 무엇보다도 결혼식장에는 먹을 것이 풍성합니다. 과거 가난한 시절에 결혼식은 평소에 먹지 못한 음식을 배불리 먹을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습니다.
          그러나 장례식장에도 음식이 많이 있기는 하지만 그것으로 배불리려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90년 100년 동안 살며 장수를 누리고 세상을 떠나면 그래도 낫지만, 어린 자녀들을 둔 가정에서 아버지나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게 되면, 남아 있는 가족들은 삶의 궤도가 완전히 달라집니다. 또 부모는 돌아가시면 뒷산에 묻지만 자녀는 죽으면 가슴에 묻는다는 말이 있듯이, 자녀를 잃은 장례식에 조문을 가면 목회자도 마음이 눌립니다. 또한 아주 가까이 지내던 지인이나 친한 친구가 갑자기 세상을 떠나게 되면, “내가 지금 이렇게 살고 있는 것이 잘 살고 있는 것이 맞는가?”, “나에게도 불현 듯 죽음이 찾아오는 것은 아닌가?”하고 잠을 잘 이루지 못하기도 합니다.
          사람은 확실히 결혼보다는 죽음(장례) 앞에서 인생을 깊이 생각하고 영원을 생각하게 됩니다. 그래서 지혜자의 마음이 초상집에 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5-7) 지혜로운 사람의 책망을 듣는 것이 우매한 자들의 노래를 듣는 것보다 나으니라 우매한 자들의 웃음 소리는 솥 밑에서 가시나무가 타는 소리 같으니 이것도 헛되니라 탐욕이 지혜자를 우매하게 하고 뇌물이 사람의 명철을 망하게 하느니라

          꾸지람이나 책망을 좋아하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사실 꾸지람과 책망을 들을 때는 이미 마음이 많이 상해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기 때문에 상대가 말하는 것이 거의 들리지가 않습니다. 그러나 책망의 내용은 틀린 경우가 거의 없기 때문에, 그 말을 중심으로 듣고 자신에게 적용하면 이전과는 다른 삶을 살 수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탐욕이 지혜로운 사람을 어리석게 만드는 것은, 탐욕은 사람의 눈을 멀게 하는 능력이 있기 때문입니다. 전도자(솔로몬)가 이 고백을 하는 것은 자신이 산 증인이기 때문입니다. 솔로몬에게는 최고의 지혜가 있었지만, 국력을 더 크게 하고, 자신을 세상에 더 드러내게 하려는 탐욕이 그의 눈을 멀게 했습니다. 그래서 최고의 지혜자였던 그는 나라를 두 동강나게 한 원인제공자가 되었습니다. 뇌물에게도 사람이 판단력을 흐리게 하는 강력한 힘이 있습니다. 뇌물에 오염이 되고나면, 명철은 사라지고 맙니다.


          더 나은 선택(8-14절)
          8-14절은 ‘더 나은 선택’에 대해서 증거합니다.
          (8) 일의 끝이 시작보다 낫고 참는 마음이 교만한 마음보다 나으니
          (10) 옛날이 오늘보다 나은 것이 어찜이냐 하지 말라 이렇게 묻는 것은 지혜가 아니니라

          중학교 때의 성적은 고등학교에 갈 때에 필요하고, 고등학교 때의 성적은 대학교 갈 때에 필요합니다.
          물론 대학교 때의 성적은 대학원이나 취직할 때에 필요합니다.
          지금 직장에서 은퇴할 때가 다 되었는데, 초.중.고등 시절의 성적이나 받은 상장을 자랑한다면 정말 미련한 것입니다.
          독일 속담에 ‘끝이 좋아야 모든 것이 좋다(Ende gut, alles gut)’는 말이 있습니다.
          바른 끝맺음은 이전의 삶을 아름다운 의미로 승화시키는 힘이 있습니다.
          또한 참는 마음이 교만한 마음보다 나은 것은 더 설명할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와 사람들 앞에서 조심해야할 1번이 교만이고, 2번도 교만이고, 3번도 교만입니다. 물론 99번도, 100번도 교만입니다.

          우리에게 과거를 떠올리는 것이 유익한 경우는 비록 지금 삶에 크고 작은 어려움이 있을지라도 과거에 함께하신 하나님께서 지금도 함께 하심을 확신하기 위한 경우입니다. 과거에 받은 은혜를 발판삼아 현재를 새롭게 수용할 때는 유익하지만, 현재를 직면하려고 하지 않고, 낙심과 절망에 있게 하는 것이라면 과거를 떠올리는 것은 무익합니다.
          이스라엘 자손들이 광야를 지날 때에 끊임없이 애굽에서 있었던 일, 특히 거기서 값없이 먹었던 생선, 오이, 참외, 부추, 파, 마늘 등을 떠올리며 불평했습니다. 그것이 죄가 되는 것은 지금 함께하시는 하나님을 믿지 못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12) 지혜의 그늘 아래에 있음은 돈의 그늘 아래에 있음과 같으나, 지혜에 관한 지식이 더 유익함은 지혜가 그 지혜 있는 자를 살리기 때문이니라

          (표준새번역. 12) 돈이 사람을 보호하듯 지혜도 사람을 보호한다. 그러나 지혜를 깨우쳐 아는 지식이 더 좋은 까닭은 지혜가 그 사람의 목숨을 살려 주기 때문이다.

          돈과 지혜가 사람을 함께 보호하지만, 목숨을 살려내는 것은 지혜라고 합니다. 돈이 사람을 보호해 줄 수 있는 것의 거의 대부분은 외적인 것입니다. 그 외적인 것이 내적인 것에도 많은 도움을 줄 때가 없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인생의 궁극적인 문제와 질문 앞에서는 결코 답을 줄 수 없습니다. 그 때는 반드시 지혜가 동원되어야 합니다. 오직 그 지혜만 우리를 궁극적으로 살릴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지혜는 오직 위로부터만 옵니다. 그래서 야고보 사도는 “너희 중에 누구든지 지혜가 부족하거든 모든 사람에게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 구하라 그리하면 주시리라(약 1:5)”고 했습니다.

          (14) 형통한 날에는 기뻐하고 곤고한 날에는 되돌아 보아라 이 두 가지를 하나님이 병행하게 하사 사람이 그의 장래 일을 능히 헤아려 알지 못하게 하셨느니라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삶에 ‘형통한 날’과 ‘곤고한 날’을 함께 두셨다고 말씀하십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무능하시기 때문이거나 우리를 외면하셨기 때문이 아닙니다. 오히려 정반대의 이유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그 어떤 상황에서도 최선으로, 또 최상으로 충분히 인도하실 수 있습니다. 우리의 미래를 안다면, 우리가 더 바르게, 더 신실하게, 더 의미 있게 살 수 있겠습니까? 아닐 것입니다. ‘섭리’의 ‘섭(攝)’자가 ‘당기다. 쥐다’의 뜻입니다. 그 한자에는 ‘손 수(手)’ 변에 ‘귀 이(耳)’ 자가 3개나 있습니다. 믿음은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일을 듣고, 듣고, 또 듣는 것입니다. 그 듣는 것을 귀로 듣고, 마음으로 듣고, 삶으로 듣는 것이고, 과거를 듣고, 현재를 듣고, 미래를 듣는 것입니다. 그것이 신앙의 깊은 지혜입니다.

          절제와 바른 선택(15-22절)
          15-22절은 절제와 바른 선택에 대해서 증거합니다.
          (18) 너는 이것도 잡으며 저것에서도 네 손을 놓지 아니하는 것이 좋으니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는 이 모든 일에서 벗어날 것임이니라

          인생을 살아가다보면, 이해가 되지 않는 일이 많이 있습니다. 15절에 있는 것처럼 의롭게 살아도 망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악하게 살아도 망하지 않고 오랫동안 장수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사실 우리가 의로운 삶과 악한 삶을 왔다 갔다 합니다. 그래서 어떤 날은 지킬박사인데, 어떤 날은 하이드처럼 여겨지기도 합니다.
          또 의롭게 사는 사람이 그렇게 사는 것은 굉장히 칭찬을 받아야 하는데, 그가 자신의 의로움을 과도하게 내세우다가 다른 사람들로부터 외면을 당하는 경우를 종종 봅니다. 또 악하게 사는 것만 해도 바르지 않는데, 그렇게 사는 것이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더 과도하게 악한 일을 행하다가 자기가 행한 악에게 무너지는 사람도 참 많습니다.

          우리가 살아온 세월의 길이가 길어질수록, 또 인생의 연륜이 깊어질수록 더욱 더 분명해지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하나님을 목적으로 삼고 사는 것에는 후회함이 없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말씀과 하나님은 영원하시기 때문입니다.


          지혜의 무궁함(23-29절)
          23-29절은 ‘지혜의 무궁함’에 대해서 증거합니다. 전도자는 궁극적인 지혜를 찾는 것이 정말로 어렵다고 말합니다. 지혜를 찾으려고 하면 할수록 더욱 오히려 미궁에 빠지는 것과 같다고 합니다. 그것은 지혜가 우리 사람이 만든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만든 것은 결코 영원할 수 없습니다. 유한한 존재가 영원한 것을 만들 수 없기 때문입니다. 영원하신 분만 영원한 지혜를 만드실 수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근본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전도자가 인생에 대해서 깨달은 것을 이렇게 고백하며 오늘 본문의 막이 내립니다.
          (29) 내가 깨달은 것은 오직 이것이라 곧 하나님은 사람을 정직하게 지으셨으나 사람이 많은 꾀들을 낸 것이니라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창조하시고, ‘한 길-진리와 생명의 길’을 가도록 하셨습니다. 그것이 하나님께서 사람을 정직하게 지으신 것입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죄를 범한 이후로 언제나 ‘여러 길’을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것이 사람들이 꾀를 낸 것입니다. 우리가 짓는 죄도 다르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바른 길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우리가 그것을 모르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끊임없이 우리가 생각하는 제 3의 길, 제 4의 길을 제시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그것이 아니라고 말씀하셔도, 우리는 그것이 더 낫겠다고 우기곤 합니다. 하지만 지나고 되돌아보면 하나님의 길이 더 옳았다고 인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우리 앞에는 언제나 인간의 지혜 또는 나의 지혜와 하나님의 지혜가 놓여 있습니다. 무엇을 선택할지는 우리의 자유지만, 그 결과도 우리의 삶에 고스란히 남습니다.
           
          하나님께서 마음과 정성을 다하여 심어주신 삶의 자리에서 하나님께서는 언제나 하나님과 하나님의 말씀을 선택하고 굳게 잡으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삶의 자리에서 하나님과 하나님의 말씀을 굳게 잡음으로 진정한 새해로 엮어지기를 축복합니다.


          우리는 언제나 장례식보다는 결혼식을 더 좋아하고, 지혜보다는 재물을 선택하고, 형통할 때는 즐거워서 아무런 생각을 하지 못하고, 곤고한 날에는 비관과 절망으로 아무 것도 생각하지 못하는 존재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길이 무엇인지를 잘 알면서도 우리 나름대로의 길을 선택하곤 합니다.
          그럼에도 우리가 여기까지 올 수 있었음은 하나님의 긍휼하심과 인도하심으로 인함임을 고백합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에 언제나 우리의 귀를 열게 하여주시옵소서.
          그리하여 우리의 과거와 현재와 미래가 모두 하나님의 손 위에 올려지게 하여주시옵소서.
          진정한 새해가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전도서 6장

          1월 20일(금)

          폐단(弊端, 7451)(전도서 6:1)

          내가 아래서 한가지 폐단 있는 것을 보았나니 이는 사람에게 중한 것이라.
          I have seen another evil under the sun, and it weighs heavily on men:


          폐단 폐(弊),  끝 단(端) - 단정할 단

          7451. 라( raʽ)  רַע
          1. 나쁜,  2. 사악한,  3. 해로운

          어원 / 7489에서 유래  רָעַע

          1. 깨뜨리다,  2. 악하게 되다,  3. 히필형 הֵרַע
          발음 / 라아(râʽaʽ) 

          큰 폐단( 라아 홀라) -
          문자적으로는 '고통스러운 악'(a sore evil, KJV; a frievous evil, RSV, NASB)이란 뜻이다.
          특히 '폐단'으로 번역된 '라아'는 '상하게 하다', '해(害)하다', '악하게 행하다' 등에서 유래된 말로 '악(한)', '해(로운)' 등을 뜻한다.
          본서에서 이는 ''(2:21)로도 여러번 번역되었으며 본 구절에서도 이 뜻으로 본다.

          오늘 말씀은 “내가 해 아래서 한 가지 불행한 일이 있는 것을 보았나니”라는 말씀으로 시작하고 있습니다.
          여기 “불행한 일"이라는 말은 본래 재앙’이라는 뜻으로 흔히 사용되는 말입니다만, 오늘 말씀에서는 “우리의 삶으로 하여금 의미를 잃어버리게 하는 것, 허무하게 만드는 것”이라는 뜻에 가깝습니다.
          전도자는 해 아래서 살아가는 일을 허무하게 하는 어떤 일, 마음이 무거워 살아갈 힘도 이유도 발견하지 못하게 하는 일에 대해서 말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먼저 아무리 많은 부를 가졌다고 하더라도, 그 부요함과 재물을 다 누리지는 못한다고 말합니다(2절). 뼈 빠지게 일하고 수고한 그 사람은 아무것도 누리지 못하는 반면에, 손 하나 까딱하지 않은 엉뚱한 사람이, 아무 관계도 없는 사람이 다 차지하고 마음대로 쓰며 누리는 것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흔히 사용하는 말 중에, “버는 사람 따로, 쓰는 사람 따로”라는 말입니다. 온갖 계획과 재주와 노력과 가진 것을 다 투자하여 이루어 놓았는데, 엉뚱한 사람이 나타나서 가로채 가기도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아무리 수고하여 재산을 축적하여도 그 모든 것이 허무한 것이 될 수 있다는 말입니다. 우리는 오늘 도대체 무엇을 위하여 수고하는 것입니까?

          전도자는 백 명의 자녀를 낳으면서 장수한다고 하여도, 평생 마음에 낙이 없이 살다가 죽고, 또 죽을 때는 제대로 무덤에 묻히지도 못하고 인생을 끝낸다면, 이런 인생보다는 차라리 태어나지 못하고 낙태된 자가 더 낫지 아니하냐고 묻습니다(3절). 자녀가 백 명이어도 그 마음에 즐거움을 주지 못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낙태된 자는 모태에서 생겨났으나 태어나지 못하고 죽으니 그 인생이 헛되다 할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낙태된 자는 뼈 빠지게 일하고서도 남 좋은 일만 시킨 사람의 인생보다는, 조용하고 편한 인생을 살다가 간 것이니 더 낫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6절의 말씀처럼, 천년의 갑절을 산다고 해도, 엄청난 부를 쌓는다고 하더라도, 백 명의 자녀가 있다고 하더라도, 우리가 살아가는 인생에서 아무 즐거움을 누려 보지 못한다면 얼마나 불행한 것인가 말합니다. 사람이 열심히 일하는 것은 수고하여 얻은 것으로 먹고 즐기고자 함인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무도 자기가 원하는 만큼 즐기거나 만족을 얻을 수 없습니다. 우리 인생에 대한 식욕은 결코 채워지지가 않습니다(7절).

          그러나 전도자는 우리 인생에게 매우 중요한 질문을 던집니다. “진정한 낙이 무엇인줄 아는가?”(12절) 묻습니다. 하나님 보시기에 선한 것, 옳은 것, 가치 있는 것, 의미 있는 것을 분별할 줄 알며, 무엇이 불행이며, 무엇이 가치 있는지 분별하실 수 있는가? 묻는 것입니다.

          이 질문은 우리로 다른 관점을 가지도록 유도합니다. 아버지의 수고로, 아버지는 먹지 못하나 아내와 자식이 배불리 먹게 되듯이, 왕의 자신을 돌보지 않는 다스림과 열심과 섬김으로 한 나라와 백성이 평안하듯이, 정작 자신에게는 돌아오지 않더라도, 그러한 삶이 진정한 낙이며, 의미이며, 가치가 아니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수고하여 모든 것을 자기 것으로 만들고자 하는 세상에서, 수고하여 다른 사람을 먹이고자 하는 진정한 의미를 발견하는 것, 그것이 진정한 “낙”이며, “기쁨”이며, “가치”이지 않겠습니까?

          1. 6:1∼2 인생의 첫번째 폐단
          2. 6:3∼6 인생의 두번째 폐단
          3. 6:7∼9 인생의 세번째 폐단
          4. 6:10∼12 인생살이에 폐단이 생기는 이유와 그 해결책

          전도서 6장에서 해 아래 인생들, 특히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인생들이 겪어야 하는 세 가지의 대표적인 폐단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폐단이라고 하는 것은 인생들이 당하는 불행, 고통스러운 일을 말합니다.

          폐단이란 단어가 사용된 것은 전도서에서 4구절에 사용됩니다(5:13, 16, 6:1, 10:5)

          한국인의 오복(五福)

          1. 수(壽)
          2. 부(富)
          3. 유호덕(攸好德)
          4. 강녕(康寧)
          5. 고종명(考終命)

          속담에도 ‘복’에 관련된 것은 많이 보여진다.
          ‘보고들이 온 날 문 닫는다’,
          ‘복 없는 놈이 가루 장사하려니까 골목 바람이 내분다’,
          ‘복은 쌍으로 안 오고 화는 홀로 안 온다’,
          ‘복 있는 과부는 앉아도 요강 꼭지에 앉는다’ 등 참으로 포복절도하고 남을 만큼 기발한 속담으로 많다.
          그러나 이 뜻을 보면 그 어느 것도 인간의 힘으로는 불가능한 것이니 신의 영역이라 말할 수 있지 않을까.

          복이란 한자는 원래 ‘시(示)’와 ‘복畐’의 회의문자(會意文字)이다.
          ‘시’는 하늘[天]이 사람에게 내려서 나타낸다는 신의(神意)의 상형문자이고, ‘복’은 복부가 불러 오른 단지의 상형문자라 한다.
          ‘복’의 한자 어원도 역시 복의 뜻이 가지는 두 함축, 곧 사람의 힘을 초월한 운수라는 뜻과 오붓하고 넉넉하다는 뜻의 함축을 풀이해 주고 있는 것으로 볼 수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참조)

          복(福) = 보일 시(示) + 항아리 복(畐)<가득할 복>
          복(福) = 보일 시(示) + 한 일(一)  + 입 구(口) + 밭 전(田)     



          어리석은 부자 - 어리석은 신앙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영원한 삶을 약속한 것을 확신하는 것이다.
          영원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영원이 아니라 땅의 것에 집착하며 땅에 살려고 몸부림을 치는가?

          솔론의 명언

          말이란 행위의 거울이 되게 하라
          . ​
          부당한 이득에는 늘 재앙이 뒤따른다.
          타인의 행복을 ​시기하지 말라

          어리석은 부자(푸념)

          어리석은 부자의 푸념

          푸념 : 마음에 품은 불평을 말하는 것

          “또 내가 내 영혼에게 이르되 영혼아 여러 해 쓸 물건을 많이 쌓아 두었으니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자 하리라 하되 하나님은 이르시되 어리석은 자여 오늘 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준비한 것이 누구의 것이 되겠느냐 하셨으니 자기를 위하여 재물을 쌓아두고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하지 못한 자가 이와 같으니라”(눅 12:19-21)

          본문의 주인공은 부러움의 대상인 부자이다.
          부자는 사회적으로 성공한 사람이다.
          요즈음과 같이 경제를 우선시하는 시대에는 존경받는 인물이기도 하다.
          부자는 아무나 되는 것이 아니다.
          남이 알지 못하는 숨은 노력과 경영의 지혜가 있어야 하고, 운과 기회도 따라야 될 수 있다.

          본문의 부자는 자연환경이 열악한 이스라엘에서 농사로 큰 부자가 되었다.
          그만큼 주인공은 뛰어난 인물임이 분명하다.
          그에게는 적어도 세 가지의 돋보이는 지혜가 있었다.

          “밭의 소출이 풍성하였다”는 것은 경영의 지혜를 의미한다.

          “더 큰 곡간을 지어 생산한 농작물을 잘 보관하였다”는 것은 관리의 지혜가 있음을 말한다.

          그는 또한 쌓아 놓기만 하는 부자가 아니라 즐길 줄도 아는 소비의 지혜도 있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를 ‘어리석은 자’로 규정하셨다.
          어느 민족보다 지혜를 귀중하게 여기는 유대인들에게 어리석다는 것은 가장 큰 모욕이다.

          형제에게 ‘라가’(바보)라 하는 자는 지옥 불에 던져진다고 하였다(마 5:22).
          여기에서 ‘라가’는 아람어 ‘레카’를 음역한 것인데, ‘속이 텅 비어 있음’을 의미한다.
          우리말로는 속이 빈 멍청한 바보라는 뜻이다.
          바보같다는 비하 발언만으로도 큰 욕이 되며 지옥 불에 던져질 정도의 큰 죄가 된다는 것은 그만큼 지혜를 중요시하였음을 보여준다.
          외형적으로는 크게 성공한 것처럼 보인 부자가 하나님 앞에서 실패자로 전락하였다.

          마태복음 5:22b
          형제를 대하여 라가라 하는 자는 공회에 잡히게 되고 미련한 놈이라 하는 자는 지옥 불에 들어가게 되리라.

          라가(4469, 라카)
          - '텅빈(무가치한)', '우둔한', '어리석은', '멍청한'이라는 의미의 아람어 '레카'를 음역한 것
          상대의 인격을 매우 경멸할때 사용하던 일종의 욕이다.

          ῥακά 스트롱번호 4469

          1. 욕설적인 말, 2. 아람어로 - 텅빈 사람, 3. 바보

          발음 / 라카(rhaka) 
          어원 / 히브리어 7386에서 유래
          관련 성경 / 라가(마5:22).
          신약 성경 /1회 사용

          미련한 놈(3474, 모레)
          - '라카'와 거의 같은 뜻의 모욕이다.
          헬라인에게는 '모레'가 '어리석다'는 의미를 갖지만 히브리어를 하는 사람들에게는 이 헬라어가 히브리어 '모레'를 연상시키게 하는데,
          이 말은 도덕적 배신, 반란, 악이라는 의미를 갖는다(시 78:8<70인역 77:8>; 렘 5:23).
          한편 혹자는(Bruce)는 이 양자의 차이에 대해 '라카'는 '어리석은 놈'이라는 뜻으로서 그 지적 수준이 아주 저급한 것을 꼬집는 말이며,
          '미련한 놈'은 '추악(醜惡)한 녀석'이라는 뜻으로서 그 인격과 마음이 매우 천박한 상태를 지적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두 용어 모두 상대방의 인격에 참혹한 상처를 안기는 욕임에 틀림없다

          μωρός, ά, όν 스트롱번호 3474

          1. 3466의 어간에서 유래한 듯 : 어리석은
          2. 마 5:22
          3. 막 7:13
          발음 / 모로스(mōrŏs)
          관련 성경 / 미련한(마 5:22), 어리석은(고전 1:25, 4:10, 딤후 2:23, 딛 3:9).
          [명] 어리석은 맹인(마 23:17), 미련한 자(마 25:3), 어리석은 자(고전 3:18).
          신약 성경 / 12회 사용

          * 3466. μυστήριον, ου, τό 
          1. 비밀,  2. 신비,  3. 마태복음 13:11

          발음 / 무스테리온(müstēriŏn)
          어원 / μύω ‘입을 다물다’에서 유래
          관련 성경 / 비밀(마 13:11, 눅 8:10, 살후 2:7).
          신약 성경 / 28회 사용


          왜 하나님께서 이 부자를 어리석은 실패자로 규정하셨을까?

          무엇보다도 그는 자기중심적 인물이었다.
          누가복음 12:17-19 3절에는 ‘’라는 단어가 무려 6번이나 언급되고 있다.
          부자는 오직 자신만을 앞세우는 이기적 인물이었다.
          이기주의는 인격적으로 미성숙한 단계에 있음을 의미한다.
          이기적인 사람에게 나타는 두 가지 대표적인 현상이 있다.

          첫째, 감사의 대상인 하나님이 없다.

          자신이 삶의 주인이기에 누구에게도 감사할 수가 없다.
          물이 절대적으로 부족한 이스라엘에서 농사를 지으려면 적절한 때에 비가 내려야 한다.
          그것은 하나님의 도우심 없이는 농사지을 다른 방도가 없음을 의미한다.
          부자가 부자가 된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도우심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자는 하나님이 안중에 없었고, 감사는 더더구나 있을 수 없었다.

          둘째, 함께 살아갈 이웃이 없다.

          당시 이스라엘에는 가난으로 고생하는 많은 이웃들이 있었다.
          그런데도 부자의 눈에는 그런 이웃이 보이지 않았다.
          재산이 아무리 많아도 그것을 함께 나눌 대상이 없었다.
          당시 농사는 노동집약적이었기 때문에 이웃사람들의 직간접적인 도움이 필요했다.
          노동에 대한 대가야 지불했겠지만, 그 외의 다른 배려는 찾아 볼 수가 없었다.

          부자는 영혼의 주인이 누구이며 자신의 생명을 어떻게 관리해야 하는지를 알지 못했다.
          영혼과 생명에 관한 한 그는 백치였다.
          그러면서 그는 “자기를 위하여 재물을 쌓아두고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치 못한 자”였다.
          물질은 삶을 유지하기 위하여 필수적으로 필요한 요소이며 요긴한 수단이다.
          그러나 하나님과 상관이 없게 되면, 물질은 수단에서 목적으로 바뀐다.
          하나님 이외의 다른 것을 목적으로 삼으면, 그것이 곧 우상이다.
          부자의 쌓아 놓은 재산은 그의 삶을 지탱시키는 우상이었다.
          그는 물질이 생명을 유지하거나 연장시킬 수 있다고 생각했고, 영혼의 평안과 즐거움을 보장해 줄 수 있다고 착각하였다.
          그런 물질만능주의는 갖가지 위험성을 안고있다.
          곧 물질을 모든 가치의 척도로 삼는 가치관의 도착, 이기주의, 지나친 경쟁, 관계성의 파괴, 하나님의 상실과 쾌락주의 등이다.

          물질 의존적 삶의 마지막 도착지는 쾌락을 행복으로 혼동하는 향락주의이다.
          행복과 쾌락은 비슷하지만 전혀 다른 가치관이다.
          행복이 영속성을 지닌 보람으로 삶의 창조적 원동력이며 미래에 대한 희망이라면, 쾌락은 일시적이고 감각적이며 인간의 정상적인 사고를 마비시켜 인간을 향락의 노예로 삼는 마력이 있다.

          “어리석은 자는 그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없다 하는도다”(시 14:1)
          지혜와 어리석음의 차이는 하나님이 계신가 아닌가에 달려 있다.
          지혜로운 자는 자신의 실존 속에 임재하시는 하나님 때문에 자신을 절대화시킬 수 없다.
          오히려 마음 중심의 왕좌를 하나님께 내어드리고, 그 하나님께 감사하는 삶, 이웃과 나누는 삶, 물질 우선적 가치관을 버리고 영혼을 귀하고 아름답게 가꾸는 삶, 그것이 하나님 앞에서 지혜로우면서도 행복하게 사는 삶이다.


          어리석은 부자는 4무(四無)의 인생을 살았습니다.
          오늘 이 시대에도 물질적으로는 차고 넘치지만 성경의 부자처럼 인생을 살고 있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어리석은 부자에게 없었던 네 가지는 무엇이었을까요?

          첫째, 이웃을 향한 나눔이 없었습니다.

          혼자 잘 먹고 잘살면 무슨 재미가 있습니까. 그 넓은 토지와 큰 창고와 많은 곡물은 혼자의 힘으로 얻은 것이 아닙니다. 수많은 하인들이 땀 흘리며 고생했기 때문에 얻을 수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부자는 자기만 생각할 것이 아니라 함께 고생한 사람들을 배려했어야 하고 또 가난한 이웃들과 나누며 살았어야 합니다. 그러나 그는 그렇게 살지 못했습니다.

          둘째, 돈은 많았으나 지혜는 없었습니다.

          돈을 버는 방법을 잘 알았는지 모르지만 하나님을 아는 지식은 없었습니다.
          주님은 그를 어리석은 자라고 하셨습니다.
          지금 세상에도 이런 어리석은 사람들이 많습니다.
          하나님 없는 부자들이 많습니다.

          셋째, 생명의 주인을 알지 못했습니다.

          물질의 주인도, 생명의 주인도, 시간의 주인도 하나님입니다.
          물질도 거둬가시면 하루아침에 다 잃어버리게 됩니다.
          생명도 거둬가시면 모든 것을 다 두고 떠나야 합니다.
          그것이 인생입니다.

          넷째, 천국에 대한 준비가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너희 보물이 있는 곳에는 너희 마음도 있느니라.” 부자의 마음은 오직 이 세상에 있었습니다. 부자는 농토를 늘리고, 창고를 넓혔지만 영적으로는 헐벗고 가난한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은 농토에 농토를 더하고, 가옥에 가옥을 더하는 그 사람에게는 화가 있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하늘에 쌓아두는 재물이야말로 썩지 않는 재물입니다. 어리석은 부자의 4무 인생을 4유(四有) 인생으로 바꾸어 가는 삶이 되기를 바랍니다.

          하나님, 땅과 육에 속하고자 하는 유혹을 이기고 하늘에 속한 영의 사람으로 살아갈 수 있도록 날마다 성령님의 도우심을 허락하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부자가 되는 재주와 어리석은 자가 되는 재주


          재산을 모을 수 있다는 것은 운도 따라야지만 특히 오늘과 같은 과학적 산업시대에서는 하나의 재주라고 할 수 있다.
          다시 말하면 아무나 재산을 모을 수는 없다는 일이다.
          그렇기 때문에 복음서에서는 재산에 대한 태도가 늘 문제시되고 예수께서는 이에 대한 적절한 교훈을 내리신다.

          "부자가 천국에 들어 가기보다는 낙타가 바늘 귀를 뚫고 나가는 것이 더쉽다"(마태 19:24 : 마르 10:25)
          "가난한 사람이 행복하다"(루가 6:20)

          마치 성경은 부자가 되는 것 자체가 불행하고 나쁜 일인 것처럼 들리지만 복음성서의 교훈은 반드시 그런 것만은 아니다.

          복음서에서 경고하는 부자는 탐욕스러운 부자, 돈에만 모든 것을 걸고 있는 인생관의 소유자를 규탄한다.
          그래서 『마음으로 가난한 이는 행복하다』고 하였고 특히 제자된 사람들은 가난의 정신으로 살 것을 권고하였다.
          오늘 대목에서 바로 그 가난의 정신이 무엇인지를 「어리석은 부자」의 비유로써 설명한다.
          한마디로 인생을 돈에 걸지 말고 하느님께 걸라는 종교적 교훈이 그 가난의 정신이다.

          부자에는 세가지 종류의 부자를 들 수 있다.

          1. 악한 부자 (탐욕스러운 부자)
          2. 어리석은 (바보) 부자
          3. 똑똑한 부자

          가난뱅이에도 세가지 종류를 꼽을 수 있다

          1. 악한 가난뱅이
          인생을 악하게 살면서 무책임하게 방탕하는 자를 가리킨다

          2. 무능한 가난뱅이
          게을러서 제 밥을 찾아먹지 못하는 자를 말한다.

          3. 마음으로 가난한 이
          마음으로 가난한 것은 복음서의 용어이지만 돈이나 재물에 집착하지 않고 그 보다 더 귀중하고 높은 가치를 바라보며 사는 사람을 말한다.

          우리의 개념으로는 마음으로 부자이다.
          없어도 아쉬워하지 않는 사람이다.
          물론 똑똑한 부자는 아니다.

          오늘의 이야기는 어리석은 부자를 놓고 말한다.
          비유 이야기의 도입구로서 군중의 어떤 사람이 예수께 유산분배에 개입해 줄 것을 요청하는 사건으로 시작된다.

          이 이야기는 누가복음서에만 있는 것으로 지금까지 위선자가 되지 말고 하느님의 섭리에 굳게 의지할 것을 제자들에게 훈시하는 대목으로 이어지다가 느닷없이 재산문제가 끼어드는 것이 좀 이상지하만 위의 문맥과는 상관없이 세상살이하는 지혜를 가르쳐주시는 독립적인 단화로 생각하면 될 것이다.

          유산분배에 관하여서는 유대아인들은 라삐들을 법적인 판결자로 생각하고 있었다.
          그들은 전통적으로 모세율법을 해석하는 법관이나 다름없었다.
          모세법에 따르면 유산분에는 형이 두몫을 가지고 남은 몫을 동생에게 주도록 되어 있었다 (신명 21:7).

          예수께 호소하는 사람은 이 법을 이행하지 않는 자기 형을 타일러서 자기 몫을 가지게 해달라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그는 예수를 라삐라고 불렀다.
          아마 유대아인들의 라삐들이 판결을 불공정하게 했기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예수님을 난처하게 만들려는 잔꾀였을까.

          하여튼 이 세상 재물이 인생의 가치를 둘 만한 것이 못된다는 것을 설파하러 오신 예수께 이런 청을 하는 것은 잘못된 요청이었다는 것을 예수님의 대답에서 알 수 있다.

          예수는 그에게 자기가 요청하는 것 이상의 것을 제공하고 있다.
          성 아우구스띠노의 말대로 『이 사람은 세상 재산의 절반을 찾아 달라고 요청했지만 주님은 그에게 천국의 재물전체를 제공하셨다』라는 해석을 음미할 필요가 있다.
          『누가 나를 너희의 재판관이나 재산분배자로 세웠단 말이야』. 예수의 이 대답은 동족끼리 싸우는 히브리인들을 책망하는 모세를 보고 그 싸움꾼이 던졌던 말과 비슷하다 (출애 2:14).

          예수께서 임명받은 일은 가난한 이에게 복음을 전하고 죄인들을 불러 사하여 주고 (루가5, 32) 길 잃은 이를 도와주고 (루가19, 10), 많은 사람들을 위하여 목숨을 바쳐 (마태10, 45) 이 세상에 생명을 주어(요한 6, 33) 사람들이 그 생명을 더욱 풍성하게 가지게 하려고 오셨다 (요한 10, 10).

          세상 사람들은 우선 오래 살려고 애쓴다. 장수를 바라는 만큼 물질생활의 기본이 되는 재물에 무관심할 수는 없다.
          그러나 재물은 어디까지나 살기 위한 수단이지 삶의 목적일수는 없다. 이러한 뜻에서 예수께서는 사람들에게 물욕에 빠져 들지 말라고 조심시켰다.

          사람이 제아무리 부요하다 하더라도 재물로써 제 생명을 어떻게 달리 할 수는 없다. 재산이 생명을 보장해 주지 못한다는 것은 웬만한 지성인이면 다 알고 있는 진리이다.

          『너희들이 조바심을 한다고 수명을 한 자라도 늘릴수 있느냐』(마태 6:27: 루가 12:27) .
          재물뿐이랴. 사람들이 그토록 탐하는 명예, 권력, 이 모든 것은 결국 생명을 단축시킬지언정 생명을 보장하지 못한다.
          결국 재물ㆍ명예등이 사는데 어느 정도는 필요할지모르나 끝내주는 사항은 못된다.

          전도서의 지혜는 이 진리를 가르치고 있다.

          『헛되고 헛되다. 세상만사 헛되다. 하늘 아래서 치르는 모든 수고가 결국은 사람에게 무슨 이익이 있을 손가…보고 싶은 것 다 보아도 실컷 보지 못하고 듣고 싶은 것 다 들어도 만족이 없으니, 세상만사 속절없이 되풀이 되어 하늘아래 새것이란 있을 리 없다』



          첫번째 폐단, 1∼2절

          내가 아래서 한가지 폐단 있는 것을 보았나니 이는 사람에게 중한 것이라.
          어떤 사람은 그 심령의 모든 소원에 부족함이 없어 재물과 부요와 존귀를 하나님께 받았으나 능히 누리게 하심을 얻지 못하였으므로 다른 사람이 누리나니 이것도 헛되어 악한 병이로다.

          부요와 재물과 존귀를 받기는 받았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누리지 못하는 폐단입니다.
          예컨대 어떤 사람이 고생해서 먹고살 만하게 되니까 그만 병들어서 죽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얼마나 불행합니까?
          폐단이지요.

          두번째 폐단, 3∼6절

          사람이 비록 일백 자녀를 낳고 또 장수하여 사는 이 많을찌라도 그 심령에 낙이 족하지 못하고 또 그 몸이 매장되지 못하면 나는 이르기를 낙태된 자가 저보다 낫다 하노니
          낙태된 자는 헛되이 왔다가 어두운 중에 가매 그 이름이 어두움에 덮이니
          햇빛을 보지 못하고 알지 못하나 이가 저보다 평안함이라
          저가 비록 천년의 갑절을 산다 할찌라도 낙을 누리지 못하면 마침내 다 한곳으로 돌아가는 것뿐이 아니냐

          이 사람은 많은 자녀를 두었습니다.
          일백 자녀를 두었습니다.
          그만큼 건강하다는 것입니다.
          또 장수했습니다.
          그런데 심령에 낙이 없습니다.
          아무리 오래 산들 죽지 못해 억지로, 마지못해 살아간다면 그것이 무슨 행복이겠습니까?
          불행한 일입니다.
          또 아무리 자녀가 많아도 자기가 죽었을 때 장사지내 줄 자식이 없다면 일백 자녀가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역시 불행한 것입니다.
          그래서 무자식이 상팔자라는 말이 나온 줄 압니다.

          세번째 폐단, 7∼9절

          사람의 수고는 다 그 입을 위함이나 그 식욕은 차지 아니하느니라
          지혜자가 우매자보다 나은 것이 무엇이뇨 인생 앞에서 행할줄을 아는 가난한 자는 무엇이 유익한고
          눈으로 보는 것이 심령의 공상보다 나으나 이것도 헛되어 바람을 잡으려는 것이로다

          아무리 수고하고 애써도 그 욕구를 충족시키지 못합니다.
          만족을 누리지 못하는 폐단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인간의 욕망은 끝이 없기 때문입니다.
          뛰다 보면 걷고 싶고, 걸으면 서고 싶고, 서면 앉고 싶고, 앉으면 눕고 싶은 것이 인간의 심리입니다.
          그 한이 없는 욕구를 무슨 수로 충족시킬 수 있겠습니까?
          그러면 왜 해 아래 인생들이 이와 같은 폐단을 당하면서 살아야 하는지 솔로몬은 오늘 본문의 결론 부분인 10∼12절에서 그것을 밝히고 있습니다.
          한 마디로 말해서 인생의 무지와 무능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우리 인생은 무지하기 때문에 무엇이 우리에게 행복을 가져다줄지 알지 못합니다.
          또 우리는 무능합니다.
          그래서 행복을 목표로 삼고 아무리 그것을 잡으려고 애를 써도 결코 잡히지 않습니다.
          솔로몬의 결론은 분명합니다.
          창조주 하나님 아버지의 뜻대로 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사는 것이 바로 행복의 비결이라는 말씀입니다.
          이것이 오늘 우리가 살펴보고자 하는 전도서 6장의 줄거리입니다.
          이제 한 절씩 본문의 말씀을 읽어가면서 구체적으로 의미를 살펴보겠습니다.


          인생의 첫번째 폐단

          첫번째 폐단이 1∼2절에 나옵니다.
          1절 말씀입니다.
          "내가 해 아래서 한 가지 폐단 있는 것을 보았나니 이는 사람에게 중한 것이라."
          솔로몬이 본 첫번째 폐단은 해 아래 인생들에게 중한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만큼 많은 사람들이 이 폐단을 겪으면서, 이 불행을 당하면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폐단의 구체적인 내용은 무엇입니까? 2절 말씀입니다.
          "어떤 사람은 그 심령의 모든 소원에 부족함이 없어 재물과 부요와 존귀를 하나님께 받았으나."
          얼마나 놀라운 복입니까? 재물과 부요와 존귀를 하나님께 넉넉하게 받았습니다. 마음에 더 이상 부러운 것이 없다고 했습니다. 여기까지는 얼마나 좋습니까?
          그러면 도대체 무엇이 폐단입니까? 문제가 그 다음에 나오고 있습니다.
          "능히 누리게 하심을 얻지 못하였으므로."
          불행의 원인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아무리 재물과 부요와 존귀를 많이 받았다 해도 그것을 누리려면 건강해야 합니다. 병들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장수해야 합니다.
          오래 살아야 합니다. 일찍 죽으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설상가상으로 이 사람을 더욱더 불행하게 만든 요인이 있습니다.
          "다른 사람이 누리나니."
          자기와는 전혀 관계없는 엉뚱한 사람, 알지 못하는 제삼자가 그것을 누리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것도 헛되어 악한 병이로다."
          그 사람 입장에서 보면 헛수고만 한 것입니다. 헛고생한 것입니다. 또 얼마나 자신을 고통스럽게 만드는 병폐입니까?
          솔로몬의 부친이었던 다윗 왕 때에 실제로 이런 일이 있었습니다. 다윗이 사울 임금에게 쫓겨다닐 때였습니다. 그때 다윗은 자기를 따르는 무리들과 함께 광야에 거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니 형편이 얼마나 어려웠겠습니까? 때마침 그 근처에 살고 있는 나발이라는 부자의 집에서 양털을 깎는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양털을 깎을 때는 으레 주인이 일꾼들을 위해서 큰 잔치를 열기 마련이었습니다. 다윗은 자기 수하의 부하 열 사람을 그에게 보냈습니다. 먹을 것과 쓸 것을 나누어달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나발은 일언지하에 거절하였습니다. 그리고는 다윗의 부하들 앞에서 이런 말로, 저런 말로 다윗을 심하게 모욕을 주었습니다.
          그 이야기를 다윗이 전해 듣고 분개했습니다. 그래서 부하 400명을 이끌고 나발을 죽이기 위해서 올라왔습니다. 그때 나발의 아내였던 아비가일이 그 소식을 듣게 되었습니다. 아비가일은 대단히 지혜로운 여인이었습니다. 그는 부랴부랴 떡과 포도주와 고기를 충분히 준비해서 다윗을 맞이하러 왔습니다. 그것을 주면서 아비가일은 남편 나발 대신 다윗에게 용서를 구했습니다. 그제야 다윗의 마음이 누그러졌습니다. 그래서 그것을 받고 오던 길로 되돌아갔습니다.
          그 다음날 나발은 아비가일을 통해서 다윗이 자기를 죽이기 위해서 400명을 이끌고 왔었다는 사실을 듣게 되었습니다. 그때부터 겁에 질려서 나발이 부들부들 사시나무 떨 듯이 떨기 시작했습니다. 그로부터 열흘동안 시름시름 앓다가 죽었습니다. 성경에 보면 그 이유를 "여호와께서 나발을 치시매 그가 죽으니라"고 했습니다(삼상 25:28). 하나님이 그를 치셨다고 했습니다. 무슨 뜻입니까? "내가 너에게 재물과 부요와 존귀를 주었지만 너는 그것들을 누릴 자격이 없어. 이리와." 그러면서 하나님이 그의 영혼을 불러가 버리신 것입니다. 그 결과 어떻게 되었습니까? 아비가일은 다윗의 아내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나발이 가지고 있던 그 많은 재물과 부요와 존귀가 다 다윗의 수중에 들어갔습니다. 다윗이 대신 누리게 되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주신 복을 여러분이 능히 누리기를 원하십니까? 그러면 나발처럼 움켜쥐고만 있으면 안됩니다. 필요할 때는 손을 펼 줄 알아야 합니다. 베풀면서 살아야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주신 복을 여러분이 누리면서 살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여러분에게 물론 재물과 부요와 존귀를 주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아울러 그것을 능히 누릴 수 있는 복도 주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인생이 두번째 폐단

          두번째 폐단이 3∼6절에 나옵니다.
          3절 말씀을 보시기 바랍니다.
          "사람이 비록 일백 자녀를 낳고 또 장수하여 사는 날이 많을지라도."
          이 사람은 2절에 언급된 사람이 받지 못한 복을 다 받았습니다. 일백 자녀를 두었습니다. 자녀의 복을 받았습니다. 그만큼 건강했을 것입니다. 또 장수의 복도 받았습니다.
          그런데 무엇이 문제입니까? 그 다음에 나옵니다.
          "그 심령에 낙이 족하지 못하고."
          아무리 오래 산들 마음속에 평안이 없으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그것은 행복이 아니라 불행입니다.
          또 "그 몸이 매장되지 못하면"이라고 했습니다. 자녀들에게서 공경을 받고 효도를 받아야지요. 죽었는데 그 몸 하나 제대로 거두어서 장사지내 줄 자녀가 없다면 일백 자녀를 두었다 한들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아무 소용없습니다.
          솔로몬은 그 사람에 대해서 이렇게 평가하고 있습니다. 3절 마지막 부분을 보세요.
          "나는 이르기를 낙태된 자가 저보다 낫다 하노니."
          오히려 낙태된 자보다 더 불행하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낙태된 자가 얼마나 불행합니까? 솔로몬은 4∼5절에서 낙태된 자의 불행을 다섯 가지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첫째는 4절 말씀을 보니까 "낙태된 자는 헛되이 왔다가"라고 했습니다. 낙태된 자가 이 세상에 와서 한 일이 무엇입니까? 무엇을 소유해보았겠습니까? 무엇을 누려보았겠습니까? 헛되이 왔을 수밖에 없습니다.
          두번째는 "어두운 중에 가매"입니다. 어머니 뱃속에 있다가 그대로 어두운 땅속에 파묻혀 버리고 말기 때문입니다.
          세번째 "그 이름이 어두움에 덮이니"입니다. 사람들이 그의 존재조차도 까마득하게 잊어버립니다. 즉시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완전히 사라지고 맙니다. 기억해주는 사람이 없습니다.
          네번째 5절 말씀에 보니까 "햇빛을 보지 못하고"라고 했습니다. 이 세상에 태어났어야 햇빛을 볼 수 있지요. 하루라도 살았어야 햇빛을 보지요.
          다섯번째, "알지 못하나"라고 했습니다. 이 세상의 되어 가는 일을 전혀 알 수가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낙태된 자가 더 나은 이유가 있습니다. 5절 하반부입니다.
          "이가 저보다 평안함이라."
          왜냐하면 해 아래서 인생들이 겪어야 하는 폐단, 당해야 하는 불행을 낙태된 자는 겪을 필요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낙태된 자가 더 평안하다는 것입니다.
          마음의 평안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솔로몬은 6절에서 다시 한번 강조하고 있습니다.
          "저가 비록 천 년의 갑절을 산다 할지라도 낙을 누리지 못하면 마침내 다 한 곳으로 돌아가는 것뿐이 아니냐."
          천 년의 갑절은 얼마입니까? 2천 년입니다. 구약 성경에 보면 제일 오래 산 사람이 므두셀라였습니다. 그는 969년을 살았습니다. 2천 년은 므두셀라가 산 것의 두 배가 넘는 기간입니다. 그처럼 오래 산다고 한들 낙이 없으면 아무 소용이 없다는 것입니다. 2천 년이 아니라 3천 년을 살아도 죽음을 피할 수 없습니다. 결국은 무덤으로 가야 합니다. 그러니 오래 산다는 것이 고생만 실컷 더 하다가 가는 것이 되지 않습니까? 죄만 더 많이 짓다가 가는 셈이 되지 않습니까? 하나님 앞에 서서 받을 형벌만 더 쌓는 결과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이 여러분에게 건강의 복을 주시기 원합니다. 장수의 복을 주시기 원합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그것에 더해서 평강의 복을 주시기 바랍니다.
          마음에 평강이 없으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단 하루를 살더라도 주님 안에서 평안을 누리면서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자녀의 복을 주시기 원합니다. 아울러 여러분의 자녀들이 여러분에게 효도하고 여러분을 공경하는 자녀가 되기를 바랍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 자신이 부모님을 공경하고, 부모님께 효도하는 본을 보여주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의 가정이 주님 안에서 더욱더 복되고 아름다운 가정이 다 되기를 바랍니다.

          인생의 세번째 폐단

          세번째 폐단이 7∼9절에서 소개되고 있습니다.

          7절 말씀을 보시기 바랍니다.
          "사람의 수고는 다 그 입을 위함이나 그 식욕은 차지 아니하느니라."
          먹어야 삽니다. 살기 위해서는 누구나 먹어야 합니다. 지혜자도 먹어야 하고, 우매자도 먹어야 합니다. 부자도 먹어야 하고, 가난한 사람도 먹어야 하고, 누구나 다 먹어야 사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먹어도 식욕은 차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오늘 잔뜩 먹었다고 내일부터 안 먹고 살 수 있습니까? 내일이면 또 먹어야 합니다. 인간의 욕구는 식욕뿐이 아닙니다. 다 끝이 없습니다. 그러니 무슨 수로 그 욕구를 채울 수 있겠습니까?
          8절 말씀을 보시기 바랍니다.
          "지혜자가 우매자보다 나은 것이 무엇이뇨."
          지혜자도 먹어야 살고, 우매자도 먹어야 삽니다. 다를 바가 없습니다. 지혜자나 우매자나 아무리 수고해도 욕구를 충족시키지 못하는 것도 똑같습니다. 지혜자라고 해서 더 나을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8절 하반부를 보시기 바랍니다.
          "인생 앞에서 행할 줄을 아는 가난한 자는 무엇이 유익한고."
          이 사람은 비록 가난하지만 인생 앞에서 행할 줄 안다고 했습니다. 그만큼 지혜롭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지혜자가 아무리 자기의 지혜를 다 짜내고 아무리 고생하고 수고해서 원하는 것을 손에 쥔들 그것이 무엇이 그리 유익하냐는 것입니다. 또다시 다른 욕구가 생기기 때문입니다. 결코 만족할 수 없습니다. 9절 말씀을 보시면 좀더 쉽게 이해가 되실 것입니다.
          "눈으로 보는 것이 심령의 공상보다 나으나 이것도 헛되어 바람을 잡으려는 것이로다."
          소유해서 손에 쥐고 눈으로 보는 것이 없어서 심령으로 공상하는 것보다 낫기는 낫습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입니다. 또 다른 욕구가 생기게 됩니다. 충족시킬 수 없습니다. 예를 들어서 생각해봅니다. 사글세방에 사는 사람은 마음에 소원이 있습니다. "전세방이라도 하나 있으면 좋겠는데." 전세방을 가지기 전에는 마음에 만족이 없습니다. 손에 쥐지 못했기 때문에 늘 마음에 전세방을 그리면서 공상을 합니다. 수고하고, 고생합니다. 그렇게 해서 전세방을 손에 쥐게 되었습니다. 눈으로 보게 되었습니다. 그것으로 행복합니까? 만족도 잠시입니다. 또 다시 마음에 새로운 공상이 생깁니다. "열세 평 짜리 아파트라도 좋다, 내 것이 있으면 좋겠다." 그러면서 또 고생합니다. 또 수고합니다.
          그것을 얻기까지는 행복이 없습니다. 드디어 열세 평 짜리 아파트가 손에 쥐어졌습니다.
          그것으로 만족합니까? "좀더 큰 평수, 화장실 두 개 짜리 아파트!" 그렇지 않습니까?
          눈으로 보는 것이 심령의 공상보다 낫지만 이것도 헛되다고 했습니다. "바람을 잡으려는 것이로다." 바람은 아무리 쥐려고 해도 손에 잡히지 않습니다. 인간의 욕구도 아무리 애쓰고 충족하려고 해도 차지 않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사람은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떡을 삶의 목표로 삼지 마세요. 행복 그 자체를 삶의 목표로 삼으면 안됩니다. 그러면 비참해집니다.
          예수님이 요 4:34에서 무엇이라고 말씀하셨습니까? "나의 양식은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며 그의 일을 온전히 이루는 이것이니라."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것이 예수님의 삶의 목표였습니다. 여러분의 삶을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일에 헌신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야 우리의 마음속에 비로소 참된 만족이 찾아오는 것입니다. 주님이 주시는 충만한 기쁨과 영원한 즐거움을 맛볼 수 있는 길이 바로 내 삶의 목표를 하나님의 영광에 두는 것입니다.

          인생살이에 폐단이 생기는 이유와 그 해결책

          이제 우리는 결론 부분에 이르렀습니다.
          왜 해 아래 인생들이 이와 같은 폐단을 겪으면서 살아야 하는가?
          그 폐단을 극복할 수 있는 길이 무엇인가?
          어떻게 하면 우리가 해 아래서 좀더 행복하게 살 수 있는가?
          이것을 솔로몬이 결론 부분에서 일깨워주고 있습니다.
          10절 말씀을 같이 읽겠습니다.
          "이미 있는 무엇이든지 오래 전부터 그 이름이 칭한 바 되었으며 사람이 무엇인지도 이미 안 바 되었나니 자기보다 강한 자와 능히 다툴 수 없느니라."
          이미 있는 무엇이든지 오래 전부터 그 이름이 칭한 바 되었다고 했습니다. 누구에 의해서 칭한 바 된 것입니까? 하나님이십니다. 언제부터였습니까? 오래 전부터, 천지가 창조된 때부터였습니다.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실 때 첫째 날에 무엇을 창조하셨습니까?
          빛을 창조하셨습니다. 그리고 빛을 무엇이라고 칭하셨습니까? 낮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어둠은 밤이라고 칭하셨습니다. 그때부터 빛은 낮입니다. 어둠이 될 수가 없습니다. 어둠은 밤입니다. 하나님이 정하신 질서이기 때문에 이것은 누가 바꿀 수 없습니다.
          사람을 창조하시고 그 이름을 칭하신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 흙으로 사람을 빚으셨습니다. 코에 생기를 불어넣어 사람을 만드셨습니다. 만드시고 난 뒤에 사람의 이름을 무엇이라고 칭하셨습니까? 아담이라고 칭하셨습니다. 왜냐하면 흙에서 왔기 때문입니다. 아담이라는 이름의 뜻이 흙에서 왔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사람은 자기의 본질이 무엇인지 잊지 말아야 합니다. 기억하면서 살아야 합니다. 흙에서 왔으니까 흙으로 갈 수밖에 없는 존재입니다. 그만큼 약한 존재입니다.
          그래서 10절 중반부에 보면 "사람이 무엇인지도 이미 안 바 되었나니"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피조물입니다. 흙으로 만들어진 존재입니다. 그러니 어찌 피조물인 우리 인간이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면서 창조주 하나님과 감히 다툴 수 있겠습니까? "자기보다 강한 자와 능히 다툴 수 없느니라." 하나님은 우리를 만드신 창조주이십니다. 우리는 피조물입니다. 하나님은 하늘에 계시고, 우리는 땅에 있는데 감히 우리가 어찌 하나님과 다툴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해 아래 인생들 가운데는 어리석게도 하나님과 다투려고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11절 말씀을 보세요.
          "헛된 것을 더하게 하는 많은 일이 있나니 사람에게 무엇이 유익하랴."
          피조물인 인간이 하나님의 뜻을 거역해서 무엇이 그리 유익하겠습니까? 되는 일이 무엇입니까? 다 헛될 뿐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담과 하와에게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그러면서 생명나무 실과를 비롯해서 각종 나무의 실과를 다 아담과 하와에게 주셨습니다.
          그런데 아담과 하와가 어떻게 했습니까? 먹으면 하나님같이 될 것이라는 뱀의 유혹에 빠졌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고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고 선악과를 따먹었습니다. 행복해졌습니까? 오히려 불행해졌습니다.
          우리 인간은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면 절대로 행복해질 수 없습니다. 오른쪽으로 가라고 하나님이 말씀하시면 오른쪽으로 가는 것이 바로 행복의 비결입니다. 그 길이 비록 좁은 길이고 힘들고 고통스러워 보이지만 그 길로 가는 것이 바로 행복입니다. 왼쪽으로 가면 행복해질 것 같지요? 그렇지 않습니다. 어리석은 부자가 농사가 잘되어 창고를 새로 짓고 잔뜩 쌓아놓았습니다. 일시적으로 행복한 것 같았습니다. 그러나 바로 그날이 그에게는 가장 불행한 날이었지 않습니까? 마찬가지로 인간의 생각으로는 일순간 행복해 보일는지 모르지만 하나님의 뜻을 거역한 인생은 결코 행복해질 수 없습니다.
          마지막 12절 말씀을 보겠습니다.
          "헛된 생명의 모든 날을 그림자같이 보내는 일평생에 사람에게 무엇이 낙인지 누가 알며 그 신후에 해 아래서 무슨 일이 있을 것을 누가 능히 그에게 고하리요."
          솔로몬은 인간의 생명은 헛되다고 표현했습니다. 일평생의 모든 날을 그림자같이 보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야고보 사도가 무엇이라고 했습니까? "내일 일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너희 생명이 무엇이뇨 너희는 잠깐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니라."
          덧없는, 잠시 잠깐 있다가 지나가 버리는 생명입니다.
          그러니 이와 같이 무지하고 무능한 우리 인생이 행복이 무엇인지 어떻게 알겠습니까? 무엇이 행복을 가져다줄지 우리 인생은 알 수 없습니다. 하나님만이 아십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따라가는 것이 바로 행복의 비결이라는 것입니다.
          아울러 "그 신후에 해 아래서 무슨 일이 있을 것을 누가 능히 그에게 고하리요"라고 했습니다. 인간의 장래에 대해서 누가 능히 고할 수 있겠습니까? 점쟁이가 알려주겠습니까? 역술가가 알려주겠습니까? 아무도 알 수 없습니다. 내일 일을 알지 못하는 것이 인생입니다. 한치 눈앞도 내다볼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아십니다. 그러니 하나님이 말씀하신 그대로 따르는 것이, 그 뜻을 따라 사는 삶이 행복한 삶입니다.

          18세기 초의 영국의 유명한 문필가였던 조셉 애디슨(Joseph Addison)이 우리에게 잘 알려진 이런 말을 남겼습니다.
          "The grand essentials to happiness in this life are something to do, someone to love, and something to hope for."
          무슨 말입니까?
          인생에서 행복한 삶을 살기 위해서는 세 가지 요소가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첫째는 "something to do," 뭔가 해야 할 일이 있고,
          두번째로, "someone to love," 누군가 사랑해야 할 사람이 있고,
          세번째로, "something to hope for," 뭔가 바라는, 기대할 것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 세 가지 요소를 다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의 삶의 목표는 분명합니다.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합니다.
          우리에게는 사랑해야 할 대상이 분명합니다. 우리는 내 마음과 뜻과 정성을 다해서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면서 살아가야 할 존재입니다. 우리에게는 소망이 있습니다. 해 아래 이 세계에 집착해서 사는 것이 아니라 해 위의 세계, 영원한 세계를 소망 가운데서 바라보면서 살아가고 있지 않습니까? 그러니 우리가 바로 주님 안에서 행복한 사람입니다. 이것을 잊으면 안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행복을 목표로 삼지 마십시오. 그러면 절대로 행복해지지 않습니다. 오히려 비참해집니다. 왜냐하면 행복은 부귀와 영화에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건강하다고 행복한 것이 아닙니다. 장수한다고 행복한 것이 아닙니다. 자녀가 많다고 행복한 것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행복을 잡겠다고 내가 애를 써도 행복은 잡히지 않습니다. 하나님 제일주의로 살아야 합니다. 신앙 제일주의로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드리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행복의 비결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무엇이라고 말씀하셨습니까?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자동적으로 행복이 절로 따라오는 것입니다. 따라오게 만들어야 합니다. 내가 잡으려고 하면 절대로 잡히지 않습니다.
          하나님 제일주의로 사셔서 여러분의 남은 생애가 주님 안에서 복되고 아름답게 되시기를 바랍니다. 무엇보다도 하나님께서 여러분 모두에게 마음의 평강, 심령의 낙을 허락해 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여러분의 가정이 평안하고, 자녀들로부터 효도 받고, 공경 받는 화목한 가정이 다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전도서 5장

          1월 19일(목)

          우매자(전도서 5:1)

          너는 하나님의 전에 들어갈 때에 네 발을 삼갈찌어다 가까이 하여 말씀을 듣는 것이 우매자의 제사 드리는 것보다 나으니 저희는 악을 행하면서도 깨닫지 못함이니라.

          우매자(愚昧者)(3684) כְּסִיל - 어리석고 어두운 사람

          1. 바보,  2. 어리석은 사람,  3. 백치

          발음 / 케실(keçîyl)
          어원 / 3688에서 유래
          관련 성경 / 무지한 자(시 49:10), 미련한 자(잠 1:22, 17:24, 26 : 1). 어리석은 자(잠 14:16, 19:29, 29:11), 우매자(전 2:14, 5:3, 10:12), 별 무리(사 13:10), [형] 미련한(잠 10:1, 17:12, 19:13).
          구약 성경 / 4회 사용

          * 카살(3688) כָּסַל 
          1. 살찌다,  2. 강하게 하다,  3. 무기력하게 하다

          발음 / 카살(kâçal) 
          관련 성경 / 어리석다(렘 10:8).
          구약 성경 / 1회 사용

          우매(愚昧) : 어리석을 우(愚), 어두울 매(眛)

          한글 개역 성경에서 우매자라는 단어가 전도서에서만 21구절에 사용됩니다.

          2:14, 15, 16, 19
          4:5
          5:1, 3, 4
          6:8
          7:4
          7:5, 6, 9, 17
          9:17
          10:2, 3, 6, 12, 14, 15,

          전도서 5:1
          너는 하나님의 전에 들어갈 때에 네 발을 삼갈찌어다 가까이 하여 말씀을 듣는 것이 우매자의 제사 드리는 것보다 나으니 저희는 악을 행하면서도 깨닫지 못함이니라.

          (새번역) 하나님의 집으로 갈 때에, 발걸음을 조심하여라. 어리석은 사람은 악한 일을 하면서도 깨닫지 못하고, 제물이나 바치면 되는 줄 알지만, 그보다는 말씀을 들으러 갈 일이다.

          우매자 즉 어리석은 사람은 악한 일을 하면서도 깨닫지 못하면서 제물을 바치면 만사형통할 것이라고 합니다.

          '말씀을 듣는 것'

          그 말씀을 들을 뿐 아니라 순종한다는 뜻까지 내포하는 말이다(Lange, M.A. Eaton, G.A. Barton).
          이럴 경우 본 구절의 의미는 선지자 사무엘이 말한 바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수양의 기름보다 낫다"(삼상 15:22)라는 말씀과 유사하다(시 50:7-15; 잠 21:3; 사 1:11; 렘 7:21-23; 호6:6).
          그리고 본 구절은 한편으로 형식적 신앙 생활의 무익함을 경계하는 반면 내실있는 신앙 생활, 즉 말씀에 입각하여 순종하는 신앙 생활의 복됨을 제시하고 있다.

          '우매자의 제사 드리는 것'

          이사야 선지자 시대에 타락한 백성들이 하나님의 성전 마당만 밟으며 형식적으로 제사드리고 마음은 하나님에게서 멀리 떨어져 있었던 것과 이로 인해 그들이 하나님으로부터 심한 책망을 받은 사실을 생각케 한다(사 1:10-17).
           

          전도서 5:3
          일이 많으면 이 생기고 말이 많으면 우매자의 소리가 나타나느니라.

          (새번역) 걱정이 많으면 이 많아지고, 말이 많으면 어리석은 소리가 많아진다.

          일이 많으면 ... 나타나느니라
          -

          원문을 직역하면 '왜냐하면 꿈은 많은 일로 인해 생기고 우매자의 소리는 많은 말로 인해 생기기 때문이다'(For the dream comes through much effort, and the voice of a fool through many words, NASB)의 뜻이다.

          이는 '꿈'과 '우매자의 말'이 주어로 되어 많은 일과 많은 말로 인해 생기는 부작용의 결과를 언급한 말이다.
          즉 사람이 너무 많은 일에 분주할 경우 정신이 혼란스럽고 복잡하여 번민함으로 잠을 잘 때 꿈을 꾸게 되며, 말이 많을 경우에도 부주의하게 됨으로 헛된 말을 하게 된다는 것이다.

          특히 본서에서는 이런 꿈을 '헛된 것'으로(7절), 6:9의 심령의 공상을 '무익한 것'으로 규정하고 있는데, 이는 위와 같은 것들이 현실 세계에서 전혀 유익하지 못하고 정신만 혼란스럽게 만들기 때문이다.


          전도서 5:4
          네가 하나님께 서원하였거든 갚기를 더디게 말라 하나님은 우매자를 기뻐하지 아니하시나니 서원한 것을 갚으라.

          (새번역) 하나님께 맹세하여서 서원한 것은 미루지 말고 지켜라. 하나님은 어리석은 자를 좋아하지 않으신다. 너는 서원한 것을 지켜라.

          서원하였거든 ... 말라 -

          '서원하였거든'의 히브리어 기본형 '나다르'(5087)는 '약속하다', '맹세하다'의 뜻을 함축한다.

          서원하다(5087)(나다르, nâdar) נָדַר 

          1. 맹세하다,  2. 창세기 31:13,  3. 미완료형  יִדֹּר

          발음 / 나다르(nâdar)

          관련 성경 / 서원하다(창 31:13, 신 23:23, 삼상 1:11), 맹세하다(시 132:2).
          [명] 서원(신 12:17, 23:22, 욘 2:9), 서원자(레 27:8).
          구약 성경 / 31회 사용

          이 서원은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께서 주신 은혜와 축복에 대해 감사하는 뜻에서 또는 은혜와 축복을 받기 위하여 행해졌으며(창 28:20-22; 삿 11:30-40; 삼상 1:11), 율법 규정에서 반드시 지켜져야 할 것으로 언급되어 있다(민 30:2; 신 23:21-23).

          서원은 일반적으로 셋 또는 네 가지의 종류가 있는데 다음과 같다.

          1. 하나님의 축복을 요구하고 그 대가로 헌신하겠다는 쌍무적 서원(삿 11:30, 31)
          2. 서원자가 자발적으로 무조건 헌신하겠다는 일방적 서원(시 132:2-5),
          3.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감사의 서원(시 56:12, 13, 66:13-15)
          4. 신앙 공동체의 유익을 위한 각성과 절제를 위한 서원(삼상 14:24)

          이런 배경을 갖고 있는 본절은 특히 모세의 율법 중 민 30:2; 신 23:21-23 등에 근거하여 언급되어진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이는 문맥상 2, 3절과 맥을 같이 하는 것으로서 하나님을 경시하지 말며 그분을 경외하는 신신한 삶을 권고하는 내용이며 본서의 최종 목적인 하나님 경외 사상과 일맥 상통한다 하겠다(12:13).


          이솝 이야기에 바람과 햇님이란 이야기를 기억하시나요?
          어느 날 나그네가 웅크리고 길을 가고 있었지요.
          날씨가 몹시 추웠습니다.
          나그네가 외투를 뒤집어 쓰고 길을 걷자 바람과 햇님이 누가 저 나그네의 외추투를 벗길 수 있을까?
          서로 내기를 시작합니다."먼저 바람이 더 강한 바람으로 나그네를 향하여 바람을 불어대자 나그네는 더 웅크리고 외투를 감싸쥡니다.
          바람이 계속하면 할 수록 나그네는 외투를 벗을 수 없었지요.
          이제 햇님이 나서서 강한 햇빛으로 나그네를 공격합니다.
          그러자 나그네는 외투를 벗어들고 갑니다.

          어리석은 사람은 분위기 파악을 못합니다.
          지혜로운 사람은 분위기 파악을 잘 합니다.

          내가 돌이켜 아래서 행하는 모든 학대를 보았도다 오호라 학대 받는 자가 눈물을 흘리되 저희에게 위로자가 없도다 저희를 학대하는 자의 손에는 권세가 있으나 저희에게는 위로자가 없도다.

          하나님께서 아름답고 선한 계획을 가지고 계시며 모든 것을 주권적으로 섭리하신다는 것에 대하여 많은 반론들이 있을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하나님의 주권과 통치하심과 자연의 섭리에 대해 우리가 감히 반론도, 토론도, 요구도 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라는 것을 늘 놓치고 있습니다.

          어줍지 않은 지식과 정보로 우리는 하나님을 함부로 재단하고 있지는 않을까요?
          하나님을 정죄하고 비판하고 있지는 않을까요?

          우리는 하나님이 이렇게 저렇게 하셔야 한다고 말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닙니다. 전도자는 이러한 관계 설정을 분명히 하면서, 우리는 하나님의 집에 들어갈 때 발을 삼가야 하는 존재라는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1). 하나님 앞에서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권위와 엄정함을 알고서, 하나님께 무엇을 따지거나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겸손히 들어야 합니다(1~2).

          겸손하지 않은 인간의 여러 모습 중에서 대표적으로 인간의 서원을 예로 듭니다.
          서원은 내 욕망을 채우기 위해 하나님을 매수하는 수단이 될 수 없습니다.
          아마 ‘급한 마음으로 말을 내는’ 것은 경솔한 서원을 가리키는 말일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맹세와 서원은 반드시 갚아야 하는 것이니, 서원할 때에는 경솔하게 해서는 안 됩니다.
          참된 경건은 하나님의 선하심을 믿지 못하게 만드는 모든 인생의 부조리함들 속에서도 하나님께 불평과 원망을 쏟아내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끝까지 인정하는 자세입니다.

          전도자는 정의가 시행되지 못하는 법정의 문제나 학대가 일상화되어 있는 사회의 부조리에 대해서 한 마디 합니다. “너는 어느 지방에서든지 빈민을 학대하는 것과 정의와 공의를 짓밟는 것을 볼지라도 그것을 이상히 여기지 말라 높은 자는 더 높은 자가 감찰하고 또 그들보다 더 높은 자들도 있음이니라(8).”

          부와 수고의 문제도 계속해서 다룹니다.
          인간의 욕망은 결코 자기가 소유하고 있는 부로 만족할 줄 모릅니다(10).
          부가 쌓이면 그것을 관리하기 위한 사람들이 필요하기 때문에 입도 늘어나는 법입니다(11).
          이것은 부의 증가가 즐거움을 보장하기보다, 도리어 근심(해)을 더한다는 것을 가르쳐 주는 좋은 예입니다(13).
          사업이 번창하는 것을 경험한 사람이라면, 이것이 부담을 증가시킨다는 것을 경험했을 것입니다.

          가진 부가 많지 않은 노동자는 늘 잠을 잘 잘 수 있지만, 부자는 자신의 부를 잃어버리지 않을까 하는 염려와 두려움이 불면증을 가져올 수 있습니다(12).
          재물은 언제라도 잃어버릴 수 있습니다(14).
          아무리 부자라도 어머니 뱃속에서 가지고 나온 것이 없듯, 우리는 모든 것을 벗어버리고 창조주 하나님께로 돌아가야 합니다(15).
          이 본문은 디모데전서 6장의 교훈과 동일합니다(딤전 6:3~10).
          결론은 같습니다(18~20).
          부를 추구하지 말고(딤전 6:10) 희락을 추구하라는 것입니다.
          디모데전서 6장 11절은 의와 경건과 믿음과 사랑과 인내와 온유를 추구하라고 말씀합니다. 전도자가 희락을 추구하라는 말은 전도서의 서론에서 말했듯이, 에피큐로스 학파가 추구하던 쾌락이 단연코 아닙니다. 이들처럼 쾌락을 추구하여 평생을 수고하는 사람은 불행할 뿐이고, 결코 원하는 기쁨을 얻을 수 없습니다.

          희락은 하나님께서 아름답고 선하신 계획안에서 우리에게 주신 선물입니다.
          인간의 행복이나 희락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선하고 아름다운 계획과 방법에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것은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 곧 영생입니다. 이것이 영원을 아는 지식으로 우리를 인도합니다(3:11).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만이 이 희락을 누리며 인생을 삽니다. 겸손한 자만이 하나님께서 주시는 희락을 누립니다.

          7대 죄악(七大 罪惡, Seven Deadly Sins)


          ​7대 죄악(七大 罪惡, Seven Deadly Sins, Capital Vices, Cardinal Sins, Seven Arc, 라틴어 septem peccata capitalia)

          ​성경에 나오는 7가지 죄의 씨앗을 말한다.
          보통 7대 죄악, 7죄악 등으로 불리지만, 공식 명칭은 칠죄종(七罪宗, 라틴어 septem peccata capitales, 7가지 근원적인 죄)이다.
          이 개념은 6C 교황 그레고리오 1세(Papa Gregorio I)가 만들었다고 알려져 있다.

          1. 교만(驕慢, Pride, 라틴어 superbia)

          잘난 체하며 겸손하지 않고 방자히 행함.

          능력을 과시하며 자기를 최고로 자랑하는 행위.

          성경에서 교만은 하나님의 은혜와 도움을 부인하는 최고의 죄악으로 간주하고 있다(시 18:27; 잠 29:23; 렘 50:31).

          2. 시기(猜忌, 질투, 嫉妬, Envy, 라틴어 invidia)

          시기하고 증오하는 마음.

          분쟁의 원인이 되며 당파심을 야기시킨다(욥 5:2; 고전 3:3; 고후 12:20).

          성경은 시기의 무서운 파괴력을 경고하여 이르기를 ‘질투는 스올(음부) 같이 잔인하다’(아 8:6) 하였고,

          ‘투기 앞에 설 자는 아무도 없다’(잠 27:4)고 하였다.

          또 시기는 뼈를 썩게 하며(잠 14:30), 분쟁을 일으키고(고전 3:5),

          궁극적으로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하게 한다(갈 5:19-21).

          3. 분노(憤怒, Wrath, 라틴어 ira)

          분하여 몹시 성을 냄. 사람의 분노는 죄의 원인이 되며, 파멸로 이끌기도 한다.

          그래서 성경에서 분노를 삼가고 마음을 지키도록 경고한다(잠 14:17, 29; 16:32; 27:4; 29:22).

          그러나 불의를 향한 분노, 곧 하나님의 공의를 이루는 의로운 분노는 선한 것으로 여겨진다(출 32:19; 레 10:16; 민 31:14; 삼하 12:5; 왕하 13:19; 요 11:33, 38; 행 17:16).

          4. 나태(懶怠, Sloth, 라틴어 pigritia seu acedia)

          게으름, 해태(懈怠).

          성 베네딕도 수도 규칙에 “게으름은 영혼의 적이다”라고 규정했다(48장).

          일해야 된다는 것은 인간 본성의 법이며 동시에 하느님의 법이다(창세 2, 15; 3, 19).

          인간은 불완전하게 창조되었지만 일할 기능이 주어졌다.

          스스로 노력해 자신을 가꾸어야 된다.

          게으름은 바로 이 일의 위협이 된다.

          이러한 뜻에서 게으름은 어떤 죄라고는 할 수 없지만 모든 덕행의 결여를 초래한다.

          5. 탐욕(貪慾, Greed, 라틴어 avaritia)

          지나치게 많은 욕심(시 119:36).

          부당하게 탐하는 욕망.

          예수께서는 탐욕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인간의 일반적인 속성이라고 가르치시고(막 7:22),

          사람의 생명이 소유의 넉넉함에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탐욕을 물리치라고 권면하셨다(눅 12:15).

          나아가 성경은 빛의 자녀로서 탐욕은 그 이름이라도 멀리해야 하고(엡 5:5),

          탐욕에 단련된 자는 저주의 자식이라고 선언한다(벧후 2:14).

          특히 교회의 직분자들의 기본 요건으로 탐욕이 없어야 한다는 사실이 강조된다(딤전 3:2-3; 3:8-9; 딛 1:7).

          6. 식탐(食貪, Gluttony, 라틴어 gula)

          탐식(貪食), 탐도(貪饕), 탐람(貪婪).

          식음과 향락 수단의 무질서한 욕심.

          절제, 금욕과 반대됨.

          절제와 현명의 결여에서 오는 것으로 이성적인 고상한 욕구와 저질의 충동적인 욕구와의 불균형,

          정신과 육체의 무질서를 초래한다.

          탐도는 욕심이 본능을 이루는 동물적인 생활로 인도하는 저질의 것이다(시편 49, 21).

          성서는 탐욕자를 “배를 하느님으로 삼는 자”(필립 3, 19; 로마 16, 18)라고 했고,

          이교도의 표라고 했다(로마 13, 12~13; 에페 5, 18; 루까 21, 34: 대림 1주 서간).

          탐욕의 결과는 낭비, 빈궁, 사음(邪淫), 정신박약, 불건전한 정신, 부정(不正), 종교적으로는 우상숭배에 흐른다.

          7. 색욕(色慾, Lust, 라틴어 luxuria)

          주체할 수 없이 강렬한 성적 욕망을 가리킨다(살전 4:5).

          또 ‘색욕거리’(헬, 아셀게이아)란 원어로 ‘짐승 같은’이란 뜻인데,

          짐승같이 본능적인 쾌락을 추구하며 지나치게 성을 탐닉하는 행동을 가리킨다(유 1:4).

          이는 하나같이 하나님을 모르는 불신 이방인의 특징이다(살전 4:5).



          성경 전도서에 보면 이러한 말씀이 있습니다.

          “아름다운 이름이 보배로운 기름보다 낫고 죽는 날이 출생하는 날보다 나으며 초상집에 가는 것이 잔치집에 가는 것보다 나으니 모든 사람의 결국이 이와 같이 됨이라 산 자가 이것에 유심하리로다 슬픔이 웃음보다 나음은 얼굴에 근심함으로 마음이 좋게 됨이니라 지혜자의 마음은 초상집에 있으되 우매자의 마음은 연락하는 집에 있느니라”

          우매자는 돌아가신 후에 후해하고 지혜자는 살아계실 때 효도합니다.
          우매자와 지혜자의 차이를 한번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지혜자는 사리에 밝아 자기를 보존합니다.
          상대방이 적인지 아군인지도 모르고 전쟁을 했다가는 반드시 패하고 자기 생명까지도 잃게 됩니다.
          이 세상을 살아가는데 있어서도 지금 내 앞에 서 있는 사람이 누군가를 정확히 분별을 해야 합니다.
          내가 어디에 서 있는가를 알아야 합니다.
          또한 내가 가고 있는 길이 바른가를 늘 점검을 해야 하고 혹시라도 내 영혼의 문제가 있지는 않은가를 늘 생각해야 합니다.
          지금 현재보다는 미래를 생각해야 하고 이생의 삶보다는 내세를 생각하는 성도가 되어야 자기 영혼을 보존할 수 있습니다. 우매자는 어리석고 사리에 어두운 자입니다. 교회에 나와서 우매자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지혜를 얻기 위해 그 지혜로 말미암아 내세를 가기 위해서 교회에 나왔는데 내가 다니는 그 교회가 우매함에 빠져 있다면 그것은 너무도 불행한 일입니다. 많은 사람을 사리를 분별하지 못하고, 교회를 분별하지 못하고 있으면서도 자기는 지혜롭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우매한 자는 지혜가 없으면서도 자기 스스로가 지혜가 있다고 착각을 하고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내가 알고 예수 그리스도가 실제 예수 그리스도와는 너무도 다르다고 한다면 그것은 우매자이고 또 그런 일은 개인에게 있어 너무도 불행한 일이기도 합니다. 내가 알고 있는 예수가 성경에서 말씀을 하고 있는 예수와 다르다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우매자는 모릅니다.

          그리고 우매자의 특징은 남이 배를 보고 사과라고 우기면 사과에 대해서 찾아보지도 않고 그냥 사과라고 받아들입니다.
          그것이 사과인가 아닌가를 사전이나 기타 다른 자료를 찾아 볼 생각을 하지 않고 사과라고 믿어 버리고 있습니다. 만약 그것이 죽고 사는 문제라면 그렇게 하겠습니까? 이 과일을 먹으면 죽을 수도 있다고 한다면 과연 그가 주는 과일을 아무 의심도 하지 않고 그냥 받아먹겠습니까? 혹시 죽을 수 있다고 생각을 하면 절대로 먹지를 않고 확실하게 안 다음에 그 과일을 먹든지 안 먹든지 결정을 할 것입니다 하나 뿐인 생명이 죽는 일과 결부되어 있다면 당연히 조심을 하고 또 확인을 하면서 그 과일을 먹을 것입니다. 그런데 신앙은 다릅니다. 내가 지금 어떤 행위를 한다 해도 당장 죽지를 않으니까 사람들은 영혼에 대해서 너무도 쉽게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당장 죽는 것도 아니니 천천히 알아도 된다고 생각을 합니다. 바로 이런 모습이 우매자의 모습이고 이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교인들의 모습입니다. 어떻게 그렇게 태평합니까? 당장 내가 이 과일을 먹으면 죽을 수 있는데 어떻게 그것을 주는 사람의 이야기만 듣고 그것을 덥석 깨물 수 있다는 말입니까? 만약 이 과일에 대해서 가르쳐 주는 사람이 없고 도무지 알지 못하는데 정말 이 과일 밖에는 먹을 것이 없다면 하늘을 보면서라도 간절히 구할 것입니다 그토록 자기 육체의 생명에는 철저한 사람들이 영혼에 대해서는 독이 든 과일을 줘도 그것을 살펴보려고 하지도 않고 그냥 깨물어 먹고 있습니다. 당장 안 죽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믿지 않는 세상 사람들도 너무도 잘 살고 있는데 하물며 자기들일까 생각을 합니다. 그래도 자기들은 교회에 나오고 있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입술로 고백을 하고 있고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데 설마 내가 지금 독이 든 과일을 먹고 있겠는가 안심에 안심을 하고 있기 때문에 절대로 의심을 하지 않습니다. 성경은 감추어져 있습니다.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 조상들이 이미 하나님으로부터 선택을 받았고 또 자기들 역시 그 자손으로 어려서부터 성경을 배운 이스라엘이 어떻게 되었는가를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들이 우리보다 우매하여서 하나님으로부터 버림을 받았다고 생각을 합니까? 이스라엘은 절대로 우매하지도 않고 또 그들이 얼마나 지혜로운가를 이미 세상에 증명을 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았다면 이 시대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거절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인 것 같이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거절하고 있습니다. 자기가 바른 행위를 하고 있는지 또 바른 길을 가고 있는지 전혀 분별을 못하고 있고 사람들이 시키면 시키는 대로 또 다른 사람들이 그렇게 하고 있으니까 자기도 맹목적으로 그렇게 따라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독이 든 과일인지 아니면 생명의 과실인지를 전혀 분별을 하지 못하고 무엇을 먹이든지 자기는 잘 모르니까 저 사람이 잘 아니까 염려할 것 없다고 덥석 깨물고 있습니다. 죽는다고 생각을 하면 그렇게 하겠습니까? 만약에 자기 육신이 당장 죽는다면 아마 성경을 보고 또 보고 그가 말하는 것이 정말 맞은가 살펴보면서 아멘으로 대답을 할 텐데도 그저 맹목적으로 아멘이라고 대답을 하고 있고 자기 눈에 너무도 좋게 보이는 그것을 따라가고 있습니다. 마치 하와가 선악과를 처음 본 것같이 먹음직스럽고 보암직하기 때문에 덥석 깨물고 있습니다. 내가 무슨 일을 해도 당장 안 죽으니까 더 걱정할 필요가 없고 오히려 이렇게 말하면 이상하다고 생각을 합니다. 경계의 말을 하면 오히려 교회를 비판한다고 하고 있고 또 사상이 이상하니까 무조건 비판을 한다고 생각을 하면서 점점 더 우매에 빠져 들어가고 있습니다. 인생은 멀리 여행하는 것과 같습니다. 여행을 하려면 여러가지 준비를 잘해야 여행의 즐거움을 만끽 할 수가 있는데, 영원한 여행을 위하여 철저히 준비해야 합니다. 우매자는 영원한 여행을 준비하지 않고, 지혜자는 영원한 여행을 위하여 철저히 준비합니다. 우리 모두는 죽음이 우리 문턱에 다가오게 됩니다. 모쪼록 영원을 위하여 준비하시는 지혜자가 다 되시길 바랍니다.



          신학의 역사에서 행복을 주제로 삼은 이가 바로 어거스틴이다.
          그는 그의 고백록에서 "무엇이 행복한 삶인가"를 질문하고 있다.
          위의 노래와 같이, 행복은 주님으로 말미암아 오는 것이라 고백한다.
          "행복한 생활이란 주님을 구하여 주님으로 말미암아 주님을 위해 기뻐하는 일" (22, 32)이라고 정의한다.
          그것은 곧 다른 말로 말해 "진리를 기뻐하는 일"(23,33)이다.
          "하나님, 그리고 이 기쁨은 진리이며, 나의 빛이며, 내 얼굴의 구원이며 내 하나님이신 주님께 대한 기쁨"(23, 33)이다.
          그는 '행복한 삶(de beata vita)'이란 저술에서도 이와 유사하게 답변한다.
          "행복한 삶이란 우리를 진리로 이끄시는 하나님을 믿음으로 그리고 완전하게 아는 것이다.
          그럼으로써 인간은 진리를 온전히 기뻐하게 될 것이다."(4, 35)

          복음은 우리를 죄와 불행과 슬픔으로부터 해방이며 위로이며 기쁨의 소식인데 우리는 복음을 진정으로 이해하고 있는가 하는 고민 때문이었다.

          신학은 아름다운 학문이며 기쁨의 학문인데 우리가 가지고 있는 긍정적인 가치관, 즉 희망과 용서와 사랑과 신뢰와 감사와 은총과 기쁨과 행복에 관한 연구는 거의 찾아보질 못했기 때문이다. 이와 아울러 행복과 기쁨, 즉 우리가 가지고 있는 신앙과 신학의 긍정적 요소들을 연구하면서 발견한 긍정심리학의 도전 때문이기도 했다. 조직신학을 연구하는 필자에게는 매우 흥미로운 발견이었다. 깊은 관심을 갖고 조사한 결과, 최근 들어 영미 권에서 긍정심리학과 신학과의 대화가 매우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이런 상황을 접하면서 본 연구자에게는 많은 질문들이 생겨났다. 어거스틴에게서 본대로, 행복이라는 주제가 기독교의 핵심 주제인데도 왜 신학은 왜 행복과 기쁨을 말하지 않는가, 기독교야말로 진정한 기쁨의 종교이며 복음은 근본적으로 기쁜 소식임이 분명한데 왜 이 주제가 신학에서 소외되어 왔는가, 기쁨이라는 단어와 기뻐하라는 명령이 성경에 수없이 등장하는데 왜 현재의 신학은 이 주제들에 무관심하거나 이것 들을 신학적 논의에서 배제하였는가, 왜 기독교 신학은 기쁨과 긍정의 분위기보다는 우울한 색채를 가진 신학이 되었는가 하는 물음들이었다.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전도서 4장


          1월 18일(수)

          위로자(전도서 4:1)

          위로자(慰勞者) comforter
          5162. 나함(
          nâcham) נָחַם

          1. 니팔형 ׃ נִחַם
          2. 슬퍼하다,  3. 불쌍히 여기다
          발음 / 나함(nâcham)
          관련 성경 / 한탄하다(창 6:6,7), 후회하다(삼상 15:11, 35, 렘 4:28), 위로받다(삼상 13:39, 겔 14:22, 시 77:2), 회개하다(욥 42:6), 뜻을 돌이키다(시106:45, 렘18:8, 욜2:14), 뉘우치다(렘31:19, 슥8:14), 변개하다(삼상15:29), 돌아오다(시90:13), 변하다(시110:4), 보응하다(사1:24), 위로하다(룻2:13, 사51:3, 렘16:7), 안위하다(창5:29, 슥1:17), 조상하다(삼하10:2, 대상19:2), 긍휼히 여기다(시135:14),풀다(창27:42). [명] 위로(창24:67, 겔16:54),위안(시119:76), 조객(삼하10:3), 조문사절(대상19:3), 위로자(욥 16:2, 전 4:1), 안위(사 54:11), 후회(민23:19).
          구약 성경 /107회 사용

          욥기 16:1-2
          욥이 대답하여 가로되
          이런 말은 내가 많이 들었나니 너희는 다 번뇌케 하는 안위자로구나.


          전도자 4장의 내용 분해

          4:1∼3 학대받는 인생
          4:4∼6 경쟁심에 사로잡힌 인생
          4:7∼12 남과 어울릴 줄 모르는 인생
          4:13∼16 세상 권력에 집착하는 인생

          전도서 1장에서는 해 아래에서는 인생이 아무리 수고를 해도 그 수고가 유익을 주지 못한다는 말씀이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해 아래의 수고, 다시 말해서 육신을 위한 수고에 집착하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그 수고는 해보았자 헛될 뿐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수고를 주 안에서의 수고로 바꾸어야 합니다.
          주님을 위한 수고는 결코 헛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전도서 2장에서는 인생의 행복이 과연 어디에 있느냐 하는 것이었습니다.
          솔로몬은 인생의 행복을 찾기 위해서 쾌락의 나라에도 가보았고, 지혜의 나라에도 가보았고, 재물의 나라에도 가보았습니다.
          그러나 그 어디에서도 참된 행복을 찾을 수 없었습니다.
          그뒤에 솔로몬은 행복이 멀리 있지 않고 언제나 가까이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무엇을 먹든지, 무엇을 마시든지, 무슨 일을 하든지, 심령에 낙을 누리면서 살아가는 것이 바로 행복이라는 것을 일깨워주었습니다.

          전도서 3장에서는 천하에 범사가 모든 일에는 다 정한 때가 있다고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모든 일에 때를 정해놓으셨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그때를 어떻게 정하셨습니까?
          사람들을 골탕먹이기 위해서, 괴롭히기 위해서 정해놓으신 것이 아니라, 우리를 위해서 모든 때를 아름답게 정하셨습니다.
          적절하게 정하셨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를 어디로 인도하시든지 간에 장래 일에 대해서 염려할 필요가 없습니다.
          다 하나님께서 알아서 때를 정하시고 우리의 발걸음을 선하게 인도해주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매일매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어떠한 일을 맡겨주셨든지 간에 그것은 하나님의 깊은 경륜에서 우리에게 맡겨주신 가장 적합한 일이라는 믿음을 가지고 기쁨을 누리면서 최선을 다해서 그 일에 임해야 할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인생의 분복입니다. 타고난 복입니다.
          우리가 매일의 삶 속에서 누리고 즐겨야 할 복입니다.

          전도서 4장에서는 네 종류의 사람을 말합니다.

          1. 학대받는 인생(4:1∼3)

          학대(6217) 아슈크( ʽâshûwq) עָשׁוּק    

          압박, 상해 ☞학대(욥 35:9, 전 4:1), 학대함(암 3:9).

          학대를 받으며 사니까 무슨 심령에 낙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1절에서 내가 돌이켜 해 아래서 행하는 모든 학대를 보았도다."
          모든 학대(아슈크)를 보았다고 했습니다.

          누가 누구를 학대하는 지는 명확하게 나타나지 않았지만 사람들이 모여 살아가는 곳에는 힘을 가진자가 힘이 없는 자를 학대하는 경향이 자주 나타납니다.

          특별히 믿음의 사람들을 괴롭히는 학대는 죄에 시달리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죄가 괴롭히지 않을 때는 욕망의 시기심이 나를 짓누르며 괴롭힙니다.
          2절에서  "그러므로 나는 살아 있는 산 자보다 죽은 지 오랜 죽은 자를 복되다 하였으며."

          3절에서 "이 둘보다도 출생하지 아니하여 해 아래서 행하는 악을 보지 못한 자가 더욱 낫다 하였노라."
          차라리 태어나지 않았더라면 이 세상에서 자행되는 악은 아예 보지도 않았을 것이니까 그것이 더 낫지 않았겠느냐는 말씀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해 아래 인생이 있는 곳에는 어디에나 악이 있고, 학대가 있고, 그에 따른 인생의 무거운 짐이 다 있기 마련입니다. 여러분은 힘든 일을 당할 때, 어렵고 억울하고 슬픈 일을 당할 때 어디에서 위로를 찾으십니까? 해 아래 인생은 어느 누구도 우리의 참된 위로자가 될 수 없습니다.

          2. 시기심에 사로잡힌 인생(4:4∼6)

          시기(7068) 키나(qinʼâh) קִנְאָה

          질투, 시기, 열심





          마음속에 시기심, 다른 사람에 대한 경쟁심으로 가득 채우고 있습니다.
          그러니 그의 심령에 무슨 낙을 누릴 수 있겠습니까?
          4절 말씀을 보시겠습니다. 이 사람들이 가진 특징이 두 가지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내가 또 본즉 사람이 모든 수고와."
          첫째는 수고를 아끼지 않는 사람입니다. 부지런한 사람입니다. 아주 열심히 일합니다.
          얼마나 좋습니까? 또 두번째 특징이 있습니다.
          "여러 가지 교묘한 일로 인하여."
          재주가 좋습니다. 그래서 무슨 일을 하든지 간에 절대로 실패하는 일이 없습니다. 항상 성공합니다.
          여기까지는 참 좋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 사람이 열심히 수고해서 성공한 동기가 무엇이냐는 것입니다.
          "이웃에게 시기를 받으니."
          우리말 성경은 번역이 조금 잘못되어 있습니다. 내가 열심히 일해서 성공한 결과로 이웃 사람들의 시기를 받는 것으로 번역되었는데 그것은 문맥에 적합하지 못한 번역입니다. 내가 열심히 일해서 성공했는데 다른 사람이 시기한다면 그것은 시기하는 사람의 잘못이지 내 잘못은 아니지요?
          원문의 뜻은 그렇지 않습니다. 이 사람이 열심히 모든 수고를 아끼지 않아서 성공을 했는데, 그 동기가 이웃에 대한 시기심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동기가 불순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바른 동기에서 열심히 일하면 얼마나 좋습니까?
          그런데 이 두번째 인생은 옳지 않은 동기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에게는 이웃 사람에 대한 시기가 있습니다. 다른 사람이 나보다 잘되면 안된다는 것입니다. 이웃이 잘되는 꼴이 보기 싫습니다. 그래서 이웃을 짓밟기 위해서 무리하게 경쟁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그 동기가 옳지 못하지 않습니까? 그렇게 해서 성공한들 결과가 무엇입니까?
          "이것도 헛되어."
          하나님이 그런 성공을 기뻐하시겠습니까? 인정해주시겠습니까? 그러니 헛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바람을 잡으려는 것이로다."
          여러분, 지나가는 바람을 손으로 잡아보십시오. 잡힙니까? 잡아도 잡아도 손에는 아무것도 남지 않습니다. 이 세상에 나보다 나은 사람이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예를 들어 내가 어떤 사람과 경쟁해서 이겼습니다. 그러면 그것으로 끝납니까? 나보다도 나은 사람이 또 생기기 마련입니다. 그러면 또 그 사람과 경쟁해야 합니다. 그러니 그 일이 끝이 없습니다. 잡히지 않는 바람을 잡으려고 하는 것처럼 경쟁이라는 것도 그렇다는 말씀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 반대되는 삶을 살아서는 안되겠습니다. 어떤 삶입니까? 5절 말씀을 보시기 바랍니다.
          "우매자는 손을 거두고 자기 살을 먹느니라."
          남과 다투기 싫다고, 경쟁하기 싫다고 손을 거두어 버리고 아예 일하지 않는 사람은 게으른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이 되어서도 안된다는 것입니다. 솔로몬이 그런 사람을 가리켜 무엇이라고 했습니까? "우매자"라고 했습니다. 바보라는 것입니다.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자기 살을 먹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일을 하지도 않는데 누가 먹을 것을 줍니까? 자기 살을 먹을 수밖에 없습니다. 굶어죽을 수밖에 없습니다. 파멸의 길을 걸어갈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이 두 가지 양극단을 피해야 합니다. 다 잘못입니다. 언제나 균형 있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것이 6절에 있는 말씀입니다.
          "한 손에만 가득하고 평온함이 두 손에 가득하고 수고하며 바람을 잡으려는 것보다 나으니라."
          이 사람은 그래도 한 손에는 가득하지 않습니까? 우매자처럼 손을 거두고 굶어죽는 사람은 아닙니다. 필요하면 열심히 일합니다. 그래서 한 손은 가득하지 않습니까? 그렇다고 해서 다른 사람과 과도한 경쟁을 하지도 않습니다. 뼈빠지게 일하고, 스트레스 받고, 긴장이 쌓이지 않습니다. 마음속에 평온함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이 두 손에 가득하고 수고하며 바람을 잡으려는 사람보다 낫다는 것입니다. 두 손에 가득하면서도 만족할 줄 모르고 잡히지도 않는 바람을 잡으려고 애쓰는 것처럼 죽도록 고생만 하는 사람보다는 낫지 않습니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인생은 피조물입니다. 피조물인 우리 인생의 삶의 본분은 무엇입니까? 창조주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고전 10:31에서 무엇이라고 했습니까?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
          우리가 수고하고, 사업을 하고,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하는 일이 되어야 합니다. 이웃 잘되는 꼴이 보기 싫어서, 또는 내가 이웃보다 더 나아지기 위해서 하는 일이 되어서는 안될 것입니다. "내가 이 일을 하면 하나님이 기뻐하실까?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실까?" 이것이 늘 우리 마음에 자리잡고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저 사람이 나보다 잘되면 안돼. 어떻게 하든지 저 사람을 이겨야 해." 그런 마음에서 하면 하나님이 기뻐하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무슨 일을 하든지 늘 하나님의 영광만을 생각하시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리할 때 세상 사람들이 알지 못하는 평강, 우리 하나님만이 주시는, 이 세상의 그 어떤 것도 주지 못하는 평온함이 비로소 우리 마음에 넘치게 되는 것입니다. 수평적인 관계, 즉 나와 너와의 관계를 생각하기에 앞서서 수직적인 관계, 즉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가 바로 될 수 있도록 늘 힘쓰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3. 다른 사람들과 어울릴 줄 모르는 인생(4:7∼12)

          다른 사람과 조화롭게 지내지 못하는 사람의 특징은 자기 교만, 자아 도취의 삶에 붙잡힌 인생입니다.

          예수님도 비유 가운데 말씀하셨습니다.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강도를 당했습니다.
          있는 것을 다 빼앗기고 실컷 얻어맞고 거의 죽을 뻔했습니다.
          이처럼 광야 길을 혼자 여행하는 것은 아주 위험합니다. 그것이 12절 말씀입니다.
          "한 사람이면 패하겠거니와 두 사람이면 능히 당하나니 삼겹 줄은 쉽게 끊어지지 아니하느니라."
          삼겹 줄은 쉽게 끊어지지 않습니다. 숫자가 많으면 많을수록 더 안전합니다. 뭉치면 사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물질 위주로 살아갑니다. 그래서 세상 사람들이 흔히 쓰는 말이 있습니다. "뭐니뭐니해도 머니(money)가 최고다." 무슨 말입니까? 뭐니뭐니해도 돈이 최고라는 것입니다. 그저 물질이 제일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자녀들은 다릅니다.
          우리는 물질 제일주의가 아니라 하나님 제일주의로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물론 물질이 중요합니다. 그러나 그것보다는 이웃이 더 소중합니다. 우리는 물질에 집착하지 말고 이웃의 소중함을 알고 함께 협력하면서 더불어서 인생길을 걸어가야 합니다.
          예수님의 비유 가운데 나오는 어리석은 부자가 있습니다. 그해 농사가 잘 되었습니다. 어떻게 했습니까? 창고를 새로 지었습니다. 그 창고에 곡식을 가득가득 쌓아놓았습니다. 주변에 가난한 사람들이 많이 있었을 텐데 그것을 나누어주면 얼마나 좋습니까?
          그런데 그렇게 하지 못하고 잔뜩 쌓아놓고 좋아했습니다. 그러나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하나님이 그날 밤에 그 영혼을 불러가 버리셨습니다.
          물질에 목적을 두지 마세요. 물질에 목적을 두었을 때, 돈을 많이 벌기는 벌어도 쓰지 않고 채워놓기만 하면 인생의 목적이 달성된 것이지 않습니까? "됐어? 너 이리와."
          하나님이 불러가십니다. 목적을 달성했으니까 다 산 것입니다.
          우리가 안심하고 이 땅에서 오래 살 수 있는 비결이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물론 형편이 되시는 대로 인삼도 드시고, 녹용도 드시고, 보약도 드세요. 그러나 그것보다 확실한 비결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물질을 하나님의 뜻대로 선하게 이웃을 위해서 많이 쓰는 것입니다. 그 일은 끝이 없습니다. 해도해도 끝이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도 자꾸 주십니다. 주시는 대로 값있게 쓰면 됩니다. 사명이 있는 사람은 죽지 않습니다. 오래 삽니다. 이웃을 소중히 여길 줄 아는 사람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리해서 모든 교우님들에게 하나님께서 복을 주셔서 건강하시고, 오래오래 사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4. 세상 권력에 집착하는 사람(4:13∼16)

          세상 권력에 집착하는 사람들입니다. 13절 말씀을 보시기 바랍니다. 13절을 우리 같이 읽어보겠습니다.
          "가난하여도 지혜로운 소년은 늙고 둔하여 간함을 받을 줄 모르는 왕보다 나으니."
          여기에 두 사람이 있습니다. 서로 비교해봅니다. 우선 왼편에 있는 사람은 가난한 사람입니다. 반면에 오른편에 있는 사람은 왕입니다. 신분이 서로 다릅니다. 아울러 왼편에 있는 사람은 소년입니다. 상대적으로 나이가 어립니다. 오른편에 있는 왕은 늙었습니다. 상대적으로 나이가 많습니다. 이 두 가지 요소만 살펴보면 누가 더 낫습니까? 오른편에 있는 사람이 월등히 낫습니다.
          그런데 이 두 사람을 결정적으로 바꿔놓는 제 3의 요소가 있습니다. 지혜입니다. 왼편에 있는 사람은 지혜가 있습니다. 그러나 오른편에 있는 사람은 둔하다고 했습니다. 지혜가 없습니다. 그 예를 보여주는 것이 무엇입니까? 간함을 받을 줄 모른다고 했습니다. 여기에는 그런 분이 안 계신 줄 압니다만 사람이 나이가 들면 고집만 세어집니다.
          다른 사람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습니다. 자기 나름대로의 철학이 고정되어 있어서, 분명히 자기가 틀렸는데도 옳은 소리에 귀를 기울이지 않습니다. 나이 드신 분들은 그 점을 조심하셔야 합니다. 다른 사람의 말에 귀를 기울일 줄 알아야 합니다. 바로 이것이 두 사람의 위치를 바꾸어 버렸습니다. 왼편에 있는 사람이 더 낫다는 것입니다. 과연 그런지 14절 말씀을 보시겠습니다.
          "저는 그 나라에서 나면서 가난한 자로서 옥에서 나와서 왕이 되었음이니라."
          "저는"은 왼편에 있는 사람입니다. 그는 가난하게 태어났습니다. 심지어는 옥에서 나왔다고 했습니다. 무슨 일인지 모르지만 감옥에까지 갔었습니다. 어려운 역경에 있었지만 그 모든 역경을 지혜로 극복하고 나중에 왕이 되었습니다. 권력을 차지했습니다. 그러니 왼편에 있는 사람이 더 나은 것입니다.
          그런데 이야기가 여기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15절 말씀을 보세요.
          "내가 본즉 해 아래서 다니는 인생들이 왕의 버금으로 대신하여 일어난 소년과 함께 있으매."
          소년이 왕이 되었습니다. 처음에는 소년이고, 가난하지만 지혜로워서 좋았는데 왕이 되니까 지혜로웠던 소년도 또 둔해집니다. 간함을 받을 줄 모르는 사람으로 변해갑니다.
          세월이 흐르면서 소년도 그 이전의 왕과 똑같은 모습이 되어갔습니다. 그러면서 백성들의 마음도 제3의 또 다른 새롭게 일어난 소년에게 쏠리게 되었습니다. 인생의 권력이라는 것도 일시적이고 덧없지만, 인기와 명성도 다 그렇습니다. 영원하지 못합니다.
          그 다음에는 또 어떻게 됩니까? 제3의 소년이 왕이 됩니다. 그것으로 끝납니까? 권력은 영원하지 않습니다. 그러니 그 결과가 뻔하지 않습니까? 16절 말씀을 보시기 바랍니다.
          "저희 치리를 받는 백성들이 무수하였을지라도 후에 오는 자들은 저를 기뻐하지 아니하리니 이것도 헛되어 바람을 잡으려는 것이로다."
          백성들의 마음은 제4의, 제5의 소년에게로 자꾸 가게 됩니다. 그러니 이것도 헛되어 바람을 잡으려는 것에 지나지 않는 것이 아닙니까?
          인생의 권력, 인기, 명성 등은 다 헛된 것입니다. 일시적인 것입니다. 영원하지 못합니다. 그러니 이런 일시적이고, 임시적인 것에 우리가 어찌 우리의 인생을 걸 수 있겠습니까? 그런 것에 집착하지 말아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다고 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의 영원한 소망으로 삼고, 그 한 분만을 우리의 목적으로 삼고 살아가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의 인생이 헛되지 않고 의미 있는 삶, 가치 있고 보람있는 삶이 될 것입니다.

          전도서 4장에서 세상 사람들이 왜 심령에 낙을 누리지 못하는지를 일깨워주었습니다.

          첫째로, 세상 사람들에게는 위로자가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자녀인 우리는 다릅니다. 우리에게 어려운 일이 있다 할지라도 주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면서 우리의 무거운 짐을 대신 져 주시고, 우리의 눈에서 흐르는 눈물을 닦아주십니다.

          둘째로, 세상 사람들은 시기심에 사로잡혀서 살아갑니다.
          그러나 우리는 다릅니다. 우리는 무슨 일을 하든지 하나님의 영광을 생각하면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리려는 마음으로 살아갑니다. 그리할 때 하나님이 주시는, 세상 사람들이 알지 못하는 평강이 우리 마음속에 있게 됩니다.

          세번째로, 세상 사람들은 물질 제일주의로 살아갑니다.
          그러나 우리는 다릅니다. 우리는 하나님 제일주의로 살아갑니다. 물질이 소중합니다. 그러나 그것보다도 이웃이 더 소중합니다. 우리는 이웃을 사랑하면서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새 계명, 곧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는 말씀을 생각하면서 늘 계명을 지키기 위해서 애를 씁니다.

          네번째로, 세상 사람들은 덧없는 일시적인 것에 집착하면서 살아갑니다.
          권력에 집착하고, 인기에 집착하고, 명예에 집착하면서 살아갑니다. 그러나 우리는 다릅니다. 우리는 영원토록 변함없으신 예수 그리스도를 소망으로 삼고, 그분을 삶의 목적으로 삼고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오늘 이 시간 하나님께서 여러분 모두에게 심령의 낙을 허락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여러분의 여생이 주님 안에서 더욱더 행복하게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1월 18일(수)

          오늘 읽어야 할 말씀 : 전도서 4:1∼16
          묵상을 위한 주제 : 위로자(1절)
          성구 : 내가 돌이켜 해 아래서 행하는 모든 학대를 보았도다 오호라 학대 받는 자가 눈물을 흘리되 저희에게 위로자가 없도다 저희를 학대하는 자의 손에는 권세가 있으나 저희에게는 위로자가 없도다.

          “위로자(慰勞者, nâcham. נָחַם)”
          전도서 4장에서는 세상 사람들이 왜 심령에 낙을 누리지 못하는지를 소개합니다.

          첫째, 위로자가 없기 때문
          그리스도인의 위로자는 보혜사 성령님입니다(요 14:16, 26).
          따라서 하나님의 자녀는 성령으로부터 위로를 받습니다.
          하나님의 자녀에게 어려운 일을 때에 주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면서 무거운 짐을 대신 짊어져 주시고 눈에서 흐르는 눈물을 닦아주심으로 위로자가 되십니다.

          둘째, 시기심에 붙잡혔기 때문
          믿음의 사람은 무슨 일을 하든지 하나님의 영광을 생각하면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마음으로 살아갑니다(롬 14:8).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세상 사람들이 알지 못하는 평강이 항상 마음에 자리를 잡기 때문에 수시로 시기심에서 벗어나도록 자극하십니다.

          셋째, 물질 제일주의 때문
          그리스도인은 하나님 제일주의로 살아갑니다. 물론 세상살이를 위해서 물질도 필요합니다.
          그러나 물질이 우선이 아니라 사람이 우선입니다. 따라서 이웃을 사랑하면서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새 계명, 곧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는 말씀을 생각하면서 늘 계명을 지키기 위해서 힘써야 합니다.

          넷째, 일시적인 것에 집착하기 때문
          세상 사람들은 세상 권력에 집착하고, 인기에 집착하고, 명예에 집착하면서 살아갑니다.
          그러나 믿음의 사람들은 영원토록 변함없으신 예수 그리스도를 소망으로 삼고, 영원한 하나님 나라를 바라보며 살아가므로 세상 것에 집착할 수 없습니다.
          복잡하고 어지러운 세상에서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세상이 줄 수 없는 심령의 낙을 허락해 주시기를 소망하며 오늘도 주 안에서 참된 행복과 기쁨을 누리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주와 동행 365 제18일 읽어야 할 말씀
          창세기 43∼45장, 마태복음 12:24∼50

          ♪ 찬양 / 나 어느 곳에 있든지

          예수 내 구주!
          예수 내 생명!
          예수 내 권세!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전도서 3장


          1월 17일(화)

          기한(전도서 3:1)

          천하에 범사가 기한이 있고 모든 목적이 이룰 때가 있나니.

          천하의 만사가 다 때가 있다.

          나 아(我) = 손 수(手) + 창 과(戈)
          手(수)와 창과(戈  창, 무기)部를 합(合)한 글자라고 생각하였으나 옛 모양은 톱니 모양의 날이 붙은 무기(武器)인 듯하다.
          나중에 발음(發音)이 같으므로 나, 자기의 뜻으로 쓰게 되었음.

          我자는 ‘나’라는 뜻을 가진 글자이다.
          我자는 톱니 모양의 날이 달린 창을 그린 것이다.
          이것은 서유기(西遊記)에서 저팔계가 가지고 다니던 삼지창과도 같다.
          我자는 이렇게 삼지창을 그린 것이지만 일찍이 ‘나’를 뜻하는 1인칭 대명사로 쓰이고 있다.
          갑골문이 만들어졌던 은상(殷商) 시기에도 我자를 ‘나’라는 뜻으로 사용한 것을 보면 본래의 의미는 일찌감치 쓰이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我자가 왜 ‘나’를 뜻하게 됐는지에 대한 명확한 해석은 없다.
          다만 서로 같은 무기를 들고 싸웠다는 의미에서 ‘나’나 ‘우리’라는 뜻을 가지게 되었다는 추측만이 있을 뿐이다.
          한자에는 余(나 여)나 吾(나 오), 朕(나 짐)자처럼 본래는 ‘나’와는 관계없던 글자들이 시기에 따라 자신을 뜻하는 글자로 쓰였었기 때문에 我자도 그러한 예 중 하나였던 것으로 보인다.


          * 창을 들고 있는 나를 다른 사람이 만난다면 힘이 들다.
            왜냐하면 내가 너무 강하고 무섭기 때문이다.

          1. 나, 2. 우리, 3. 외고집(固執 : 자기의 생각을 굽히지 아니하는 일), 4. 나의, 5. 아집을 부리다, 6. 굶주리다

          기한(2165) זְמָן 정해진 시간 

          1. 때,  2. 정한 때,  3. 느헤미야 2:6

          발음 / 제만(zemân)
          어원 / 2163에서 유래
          관련 성경 / 기한(느 2:6, 에 9:31, 전 3:1), 정해 놓은 때(에 9:27).
          구약 성경 / 4회 사용

          * 2163. זָמַן 

          1. 임명하다,

          발음 / 자만(zâman) 
          관련 성경 / 정하다(느 10:34, 13:31). [명] 기한(스 10:14).
          구약 성경 / 3회 사용

          때(6256) עֵת 어떤 시간 

          1. 시간,  2. 정한 시간,  3. 어떤 시간 

          발음 / 에트(ʽêth) 
          어원 / 어미활용 עִתִּי, 복수 עִתּוֹת ,עִתִּים,5703에서 유래
          관련 성경 / 때(창 21:22, 욥 39:1, 렘 3:17), 철(레 26:4), 당시(왕하 16:6), 시세(대상 12:32), 역사(대상 29:30), 기한(스 10:14, 느 10:34, 렘27:7), 전례(에 1:13), 시대(사 33:6), 기회(시 32:6), 날(사 17:14), 낮(렘 27:7).
          [부] 아무 때나(레 16:2), 때때로(대하 24:11), 당장(스 8:34), 항상(시 106:3, 잠 5:19, 전 9:8).
          구약 성경 / 294회 사용

          * 5703(아드, ʽad)  עַד

          1. 지나감,  2. 진행,  3. 지속

          발음 / 아드(ʽad)
          어원 / 5710에서 유래
          관련 성경 / 영원무궁(출 15:18, 시 10:16, 111:8), 영원히(대상 28:9, 시 22:26, 사 26:4, 욥 19:24, 시 48:14, 사 64:9), 예로부터(욥 20:4), 영원토록(시 21:6), 항상(암 1:11, 미 7:18), 영원(단 12:3), 영구하게(시 89:29), 영원한(시 21:4, 45:6), 영원히(사 45:17, 합3:6).
          구약 성경 / 1269회 사용

          * 5710(아다, ʽâdâh)  עָדָה

          1. 지나다가,  2. 잔인하게 공격하다,  3. 가로 건너가게 하다

          발음  / 아다(ʽâdâh) 
          관련 성경 / 지나가다(욥 28:8), 단장하다(겔 23:40, 사 61:10, 렘 4:30, 욥 40:10), 장식하다(렘 31:4, 겔 16:13, 호 2:13), 채우다(겔 16:11), 벗다(잠 25:20).
          구약 성경 / 9회 사용

          전도서 3~5장은 전도서의 두 번째 내용에 해당됩니다.
          이 부분은 인간의 모든 수고와 노력에 합당하게 결과가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어찌할 수 없는 환경의 지배와 영향을 받는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결국 사람은 환경을 주관하시는 하나님 앞에서, 자기 능력과 노력에 대해 교만할 수 없으며, 오히려 겸손하게 현재의 기쁨과 즐거움을 누리는 것이 합당하며 지혜라고 말합니다.

          “범사에 기한이 있고 천하 만사가 다 때가 있다”는 말씀은, 인간의 모든 활동이 다 하나님께서 가지고 계시는 커다란 계획안에서 이루어진다는 두 번째 단락의 결론을 보여줍니다(1). 하나님의 계획은 너무나 광대하고 포괄적이며, 선하고 아름답지만 인간은 그저 자기 자신만 알고 이 세상에서의 필요를 채우기에 급급하기에, 그 계획을 알 수도 없고 좋아할 수도 없는 존재입니다. 사람은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게 될 때(구원받아 거듭나게 될 때), 비로소 하나님의 계획을 알고 그 계획의 아름다움과 선함을 인정할 수 있게 됩니다(11).

          하나님께서는 모든 시대, 모든 사람, 모든 활동을 포괄하는 계획을 가지고 계십니다(1~15).
          하나님께서 모든 일에 기한(때)을 두셨습니다(1).
          이것을 2~8절에서 14쌍의 대구법으로 표현하여, 모두 28번의 “때”를 언급하고 있습니다.

          하늘의 수 3, 땅의 수 4
          3+4=7, 3X4=12 - 완전 수(7, 12)
          14개의 긍정과 부정의 때란 무한한 때가 있을 것을 강조한 것이라고 하겠다.

          시간의 두 개념
          하늘의 신 우라노스와 대지의 신 가이아의 결혼하여 아들을 낳는다(크로노스)
          누이 레아롸 결혼하여 자식을 많이 낳은다
          크로노스의 두려움은 자식 가운데 누가 반란을 일으켜 크로노스의 권력을 빼앗을 것이라는 두려움
          아이를 잡아 먹는다.
          크로노스가 자식을 삼킨다는 것은 시간의 폭력성을 강조한 것이다.

          카이로스(2540) καιρός, οῦ , ὁ  

          1. 때,  2. 달가운 때, 3. 옳은 때

          Pronunciation / 카이로스(kairŏs)

          크로노스(5550)  χρόνος, ου, ὁ 

          1. 시간, 2. 유예

          Pronunciation / 크로노스(chrŏnŏs)

          시간을 지배할 줄 아는 사람은 인생을 지배할 줄 아는 사람이다.
          시간의 걸음걸이에는 세 가지가 있다.
          미래는 주저하면서 다가오고, 현재는 화살처럼 날아가고, 과거는 영원히 정지하고 있다.
          짧은 인생은 시간의 낭비에 의해 더욱 짧아진다.


          2. 날 때가 있고 죽을 때가 있으며 심을 때가 있고 심은 것을 뽑을 때가 있으며
              - 출생, 죽음                               - 식물을 위한 것, 인간은 파종하는 존재이며 동시에 추수하는 존재
                                                               * 불화를 심어 전쟁을 일으킬 수 있다.
                                                               * 미움을 심어
             * 태어나는 순간 죽을 만큼 충분하게 늙었다!
             * 태어남은 되돌아감의 시작이다!

          3. 죽일 때가 있고 치료 시킬 때가 있으며 헐 때가 있고 세울 때가 있으며
              - 체르노빌 원전 사고                            - 집을 짓기 위한 것
             * 가축을 데리고 갈 수 없어 방호복을 입은 사람들이 모두 죽여버린다.
             * 전쟁 상황

          4. 울 때가 있고 웃을 때가 있으며 슬퍼할 때가 있고 춤출 때가 있으며
              - 회개, 성령의 은사                    -

          5. 돌을 던져 버릴 때가 있고 돌을 거둘 때가 있으며 안을 때가 있고 안는 일을 멀리 할 때가 있으며
              - 밭을 일굴 때, 우물에 돌을 던져 넣는다(전쟁시)

          6. 찾을 때가 있고 잃을 때가 있으며 지킬 때가 있고 버릴 때가 있으며
              - 사람, 물건 이외에 주님께 돌아오는 것

          7. 찢을 때가 있고 꿰맬 때가 있으며 잠잠할 때가 있고 말할 때가 있으며
              - 회개와 다짐, 상처는 봉합해야 한다,  - 침묵하여 현명한 사람과 수다를 떨어 무지한 사람

          8. 사랑
          할 때가 있고 미워할 때가 있으며 전쟁할 때가 있고 평화할 때가 있느니라


          11절. 하나님이 모든 것을 지으시되 때를 따라 아름답게 하셨고 또 사람에게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느니라 그러나 하나님의 하시는 일의 시종을 사람으로 측량할 수 없게 하셨도다.

          영원(5769) 올람(ʽôwlâm) עוֹלָם 

          1. 영원,  2. 오랜 시간이 지남,  3. 일생동안

          Pronunciation / 올람(ʽôwlâm)

          선물(4991) מַתָּת 

          1. 선물,  2. 잠언 25:14,  3. 전도서 3:13

          Pronunciation / 마타(mattâth)

          Bible verse / 예물(왕상 13:7) 선물(전 3:13, 5:19). [동] 선물하다(잠 25:14).
          Old Testament / 6회 사용
          하나님의 선물
          죄인된 인간은 하나님의 선물은 무조건 좋은 것만을 생각하려고 한다.
          그러나 하나님은 때로는 나쁜 것도 선물로 허락하신다.
          왜냐하면 나쁜 것을 먼저 주심으로 미리 깨닫고 돌아서게 하려고 하시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범사에 감사할 수 있다. 

          하나님의 선물이라면 때로는 나쁜 것도 좋은 것이라고 생각해야 하는 것이 은혜라고 하겠습니다.
          그 좋은 예가 욥의 고백에서 찾아봅니다.

          욥기 2:10
          그가 이르되 그대의 말이 한 어리석은 여자의 말 같도다 우리가 하나님께 복을 받았은즉 화도 받지 아니하겠느냐 하고 이 모든 일에 욥이 입술로 범죄하지 아니하니라.

          다니엘 3:16-18
          사드락
          메삭아벳느고가 왕에게 대답하여 가로되 느부갓네살이여 우리가 이 일에 대하여 왕에게 대답할 필요가 없나이다.
          만일 그럴 것이면 왕이여 우리가 섬기는 우리 하나님이 우리를 극렬히 타는 풀무 가운데서 능히 건져내시겠고 왕의 에서도 건져내시리이다.
          그리 아니하실찌라도 왕이여 우리가 왕의 신들을 섬기지도 아니하고 왕의 세우신 신상에게 절하지도 아니할 줄을 아옵소서.

          섭리(攝理)
          다스릴 섭. 다스릴

          1. 신(神)이나 정령(精靈)이 인간(人間)을 위(爲)하여 세상(世上)을 다스리는 일.
          2. 자연계(自然界)를 지배(支配)하고 있는 이법(理法).

          뜻을 나타내는 재방변(扌(=手) ☞ 손)部와 음(音)을 나타내는 동시(同時)에 「모으다」의 뜻( ☞ 聚(취))을 나타내는 글자 聶(섭)으로 이루어짐. 손으로 옷자락을 「걷어 올려 잡다」의 뜻. 널리 한 손으로 휘몰아 일을 처리하다(處理--) ☞ 「잡다」 ☞ 「겸하다」의 뜻을 나타냄.

          攝자는 ‘당기다’나 ‘거느리다’, ‘다스리다’라는 뜻을 가진 글자이다.
          攝자는 手(손 수)자와 聶(소곤거릴 섭)자가 결합한 모습이다.
          聶자는 귀를 중복해서 그린 것으로 작은 소리로 소곤거린다는 뜻을 갖고 있다.
          소곤거리는 소리는 가까이하지 않으면 잘 들리지 않기에 여기에 手자를 결합한 攝자는 잘 들리지 않아 손으로 끌어당긴다는 뜻을 갖게 되었다.
          귓속말은 옳지 못한 일로 누군가를 꾀어내는 모습을 연상케 한다.
          그래서 攝자는 ‘꾀어내어 끌어들이다’라는 뜻도 파생되어 있다.

          섭,접
          소곤거릴 섭, 칠 접
          聶 소곤거릴 섭(聶)
          칠 접(聶)

          11절. 하나님이 모든 것을 지으시되 때를 따라 아름답게 하셨고 또 사람에게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느니라 그러나 하나님의 하시는 일의 시종을 사람으로 측량할 수 없게 하셨도다.

          아름답게 하셨다 - 보기에 좋은 모양이 아니라 적절하게 하셨다.

          아름답게(3303) 야페(yâpheh) יָפֶה 

          1. 아름다운,  2. 창세기 12:14,  3. 창세기 41:2

          발음 / 야페(yâpheh) 
          어원 / 3302에서 유래
          관련 성경 / 아리땁다(창 12:11, 왕상 1:3, 욥 42:15), 아름답다(삼상 16:12, 잠 11:22, 암 8:13), 곱다(에 2:7), 어여쁘다(아 1:15, 4:1, 6:4). [명] 어여쁜자(아 1:8, 2:10, 5:9), 아름다움(전 5:18)
          구약 성경 / 42회 사용


          13절. 사람마다 먹고 마시는 것과 수고함으로 낙을 누리는 것이 하나님의 선물인 줄을 또한 알았도다.


          시간에 대한 어거스틴의 명언

          과거의 현재는 기억,
          현재의 현재는 목격,
          미래의 현재는 기대(소망), 근심


          인간은 나면서 죽기까지 모든 삶이 하나님의 계획안에 있습니다(2a).
          심고 뽑는 것이나(2b) 헐고 세우는 것은(3b) 나라와 민족의 흥망에 대한 비유적 표현들입니다(렘 18:7; 습 2:4).
          물론 정부가 하나님의 형상인 생명의 존엄을 위하여 사형을 집행할 때도 있고, 사람을 치유하여 살려야 할 때도 있습니다(3).
          나면서 죽을 때까지 사람은 쉼 없이 슬픔과 기쁨을 경험하는데, 이것도 하나님의 섭리 안에 있는 일입니다(4).

          또 조건과 시기에 따라서 귀중했던 것이 무가치하게 될 때가 있고, 그 반대의 경우도 있습니다(5).
          그러므로 우리는 자신에 대해서 지나치게 우쭐하거나 낙심할 필요가 없습니다. 솔로몬 시대에 사람들은 슬픈 일이 있을 때 슬픔을 표시하기 위해 옷의 앞부분을 찢었고(삼하 13:31), 슬픔이 해결되면 다시 옷을 꿰매곤 했는데, 7절은 그것을 보여주는 말입니다.
          여기 2~8절에서 열거되는 때들은 나면서 죽기까지, 인간이 경험하는 모든 슬픔과 기쁨을 포함하는 말입니다.
          모든 것에 기한이 있고, 하나님께서 이것을 주관하신다면, 일하는 자가 그 수고로 인하여 얻는 유익이 무엇이겠습니까?(9)

          전도자는 다시 1:3절의 질문을 제기합니다.

          분명히 하나님은 인생에게 노고를 주셨습니다(10).
          하지만 우리는 단지 그것만을 보면 안 되고, 하나님의 관점에서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아름답게 지으셨고, 섭리하신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11).
          하나님께서는 인간에게 이런 역사의 수수께끼를 알고 싶어 하는 마음(이것을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이라고 했는데 역사의 수수께끼는 영원 속에서만 깨달아질 것이다)을 주셨습니다.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은 하나님의 관점을 추구하는 마음입니다.
          인간이 이것을 현재의 시간에 다 알 수는 없습니다.
          인생과 인생의 선한 것들은 다 하나님이 주시는 선물입니다(13~15).
          고로 하나님을 인정하고 경외하는 사람만 삶의 모든 것을 자족함으로 누릴 수 있습니다(14).
          하나님의 이런 선한 계획과 의도에도 불구하고 인간에게 노고를 주신 이유는 오직 하나님을 경외하게 하려는 것입니다(14).
          하나님의 목적과 계획은 변하지 않습니다(15).
          하나님은 이미 지난 것(과거)을 다시 찾아 미래의 평가에 관련시키실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계획이 아름답고 선하다는 것에 대한 반론은 만만치 않습니다.
          전도자가 제시하는 첫 번째 반론은 정의가 시행되어야 할 법정에조차 악이 있다는 것입니다(16).
          그러나 하나님은 결국 이 모든 판결들까지도 심판하실 것입니다(17).

          죽음도 하나님의 아름다운 계획을 의심하게 만드는 불평거리입니다(19).
          죽음이란 짐승에게나 사람에게나 차이 없이 찾아옵니다.
          그러나 차이가 있기는 합니다(18~21).
          짐승의 혼은 아래로 내려가지만 인간의 혼은 위로 올라갑니다(20).
          인간은 하나님의 심판을 기다려야 하는 존재라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은 죽음을 준비해야 합니다.
          이것이 지혜입니다.
          이것이 허무함으로 끝나지 않는 인생입니다.

          범사에 하나님의 뜻이 있고, 만사에 하나님의 때와 계획이 있다는 것을 믿고 신뢰하는 저희들이 되게 하옵소서.
          오늘 굽어진 것 같고, 돌아가는 것 같을지라도, 반드시 하나님의 뜻과 하나님의 계획이 준비되어 있음을 믿고,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며, 오늘 있는 곳에서 순종하고 감사하며 성실하게 살아가는 지혜를 주옵소서.
          조급해하거나 불안해함으로, 오늘 하루를 두려움으로 살지 않게 우리를 지켜주옵소서.


          젊은 나이에 벌써 성공의 길에 들어선 영국의 한 변호사가 있었습니다.
          어느 날 그는 영국 의사당 앞에서 비중 높은 변호를 하기로 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 일에 대해 많은 긴장과 부담감을 가진 나머지 지나친 스트레스로 인하여 그만 쓰러지고 말았습니다.
          그 이후 출세가도를 달리던 그의 인생은 점차 망가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정신착란 증세로 정상적인 생활을 유지할 수 없었습니다.
          급기야 그는 자신이 더럽고 추한 무가치한 존재라고 자학함으로써 자살까지 하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주변에 그를 불쌍히 여기며 관심을 가진 그리스도인들을 통해서 복음을 알게 되었고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게 됩니다.
          자신의 존재를 쓸모없다고 여기며 자살하려 했던 그가 죽음의 쇠사슬로부터풀려 나오는 데는 10년이라는 긴 시간이 필요했습니다.
          그는 주님께서 자신의 죄를 담당하여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심으로써 더럽고 추한 자신의 삶이새로운 삶으로 변했다고 믿었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변한 삶의 모습과 그 사랑의 감격을 시로 고백하기 시작합니다.

          "샘물과 같은 보혈은 임마누엘피로다
          이 샘에 죄를 씻으면 정하게 되겠네
          저 도적 회개하고서 이 샘에 씻었네
          저 도적 같은 이 몸도 죄 씻기 원하네
          속함을 얻은 백성은 영생을얻겠네
          샘솟듯 하는 피 권세 한없이 있도다"

          이 찬송가는 윌리엄 카우퍼(William Cowper)의 간증입니다.
          그는 영국 문학사에 있어서 고전 문학가로 손꼽힐 만한 인물입니다.

          스가랴서 13:1
          그 날에 죄와 더러움을 씻는 샘 이라는 구절을 읽다가더러움을 씻는 샘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흘리신 보혈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던 것입니다.

          골로새서 3:10
          새사람을 입었으니 이는 자기를 창조하신자의 형상을 좇아 자식에까지 새롭게 하심을 받는 자니라.

          죽음 교육이 가져다 주는 유익 

          일반적으로 죽음, 그러면 벌써 재수 없다는 생각부터 하게 됩니다.
          하지만 죽음을 구체적으로 떠올리고 생각하면 삶의 질이 달라진다는 연구결과가 있어 눈길을 끕니다.

          먼저 미주리대의 심리학자인 케네스 베일의 주장이다.
          그는 ‘죽음이 삶에 유익할 때(When Death is Good for Life)’라는 논문 (월간 ‘인성과 사회심리학 평론’ 온라인 판(2012년 4월 5일) 을 통해 이렇게 주장합니다.

          “죽음에 대해 숙고하면 오히려 공격적인 행동을 삼가게 되고, 운동을 열심히 하는 등 건강을 더 돌보게 되며, 남을 돕고 싶은 마음이 생길 뿐만 아니라 흡연율과 이혼율도 감소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또 하나의 글은 컬럼비아 칼리지의 심리학자인 마이클 위더맨의 ‘사이언티픽 아메리칸 마인드’ 7·8월 호에 기고한 에세이입니다.

          “사람이 갑자기 죽음에 직면하면 삶의 의미를 되새기게 되고, 그런 사람일수록 죽음의 공포를 좀 더 쉽게 이겨낼 수 있다. 지진 발생 지역-수천 명이 죽거나 다친-병원 직원들에게 몇 가지 인생 목표의 중요성을 평가하도록 요청한 결과 지진으로 생명의 위협을 생생하게 느낀 사람일수록 돈이나 감투 따위의 세속적 성공보다 가정의 화목이나 이타적인 사회활동 같은 정신적 가치를 훨씬 더 소중히 여기게 되는 것으로 나타났다.”

          '죽음을 모르는 사람은 경박할 수밖에 없다. 때문에 성숙한 사회로 나아가라면 죽음교육을 통해 인문학적 성찰로 거듭나야 한다'는 저의 외로운 외침, 이제는 힘을 받게 되지 않았나요?

          이 세상의 모든 일에는 정해진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정하신 때입니다.
          우리 인간은 그것을 거역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는 그저 정해진 때 안에서 순응하면서 살아갈 뿐입니다.
          솔로몬이 오늘 전도서 3장에서 우리에게 일깨워 주는 바가 바로 그것입니다. 천하 모든 일에는 다 하나님께서 정하신 때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때를 거역하지 말고 때에 순응하면서 선한 목자 되신 하나님께서 어디로 인도하시든지 간에 하루하루의 삶에 만족을 누리면서 기쁜 마음으로 살아가라는 것입니다.

          편의상 전도서 3장의 말씀을 세 대지로 나누어서 살펴보기로 하겠습니다.

          첫째, 1∼10절

          천하에 모든 일이 정해진 때가 있다고 했습니다. 솔로몬은 그것을 입증하기 위해서 14가지의 실례를 들고 있습니다. 여러분, 성경에서 완전수가 무엇입니까? 7입니다. 14가지니까 완전수 7의 두 배가 되는 숫자입니다.
          그러니 이것만 보아도 천하의 모든 일이 예외 없이 다 정해진 때가 있다는 것이 충분하게 입증이 되지 않습니까?

          둘째, 11∼15절

          하나님께서 때를 정하셨다고 하는데 어떤 식으로 때를 정하셨겠습니까?
          인생들을 괴롭히려고, 골탕먹이려고 때를 정하셨습니까? 아닙니다. 하나님은 때를 정하시되 아름답게 정하셨습니다. 적절하게 정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선한 목자 되신 하나님께서 인도하시는 대로 모든 발걸음을 맡기고 하루하루 매일 기쁜 마음으로 살아갈 수가 있을 것입니다.

          셋째, 16∼22절

          하나님은 인생의 모든 삶에 대해서 반드시 심판을 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한 순간 한 순간 최선을 다해서 우리의 인생을 아름답게 살도록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이것이 오늘 우리가 생각해 보고자 하는 전도서 3장의 내용입니다.
          그러면 한 절씩 읽어 가면서 말씀의 구체적인 의미를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1. 천하 범사에 기한이 있음

          3:1 말씀입니다.
          "천하에 범사가 기한이 있고 모든 목적이 이룰 때가 있나니."
          하늘 아래 모든 일에는 예외 없이 기한이 있다고 했습니다. 정해진 때가 있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 정하신 때입니다. 그리고 일이 지향하는 목적도 이룰 때가 있다고 했습니다. 인생이 해 아래서 아무리 수고하고 애쓴다 해도 그 목적이 아무때나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정하신 때가 되어야만 이루어진다는 말씀입니다.
          과연 그런지 솔로몬은 2절 이하에서 구체적인 실례를 제시하고 있습니다. 2절 말씀을 보시기 바랍니다.
          "날 때가 있고 죽을 때가 있으며."
          솔로몬은 우리의 삶 자체를 예로 들어서 설명을 합니다. 사실 사람이 태어나는 때와 죽는 때는 우리 인생 스스로가 결정하지 못합니다. 예컨대 태아가 어머니 뱃속에서 열 달이 되었는데도, 여기가 편안하고 좋으니까 여기에 그냥 있겠다고 하면서 안 나올 수 있습니까? 하나님이 정하신 때 열 달이 되면 나오기 싫어도 나와야 합니다. 죽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세상이 좋으니까 나는 한 300년 정도 살겠다고 한다고 사람이 300년을 살 수 있습니까? 하나님께서 정하신 때가 되면 가기 싫어도 가야 하는 것 아닙니까?
          농부가 농사를 짓는 것을 보면 더 확실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2절 하반부를 보시기 바랍니다.
          "심을 때가 있고 심은 것을 뽑을 때가 있으며."
          예컨대 농부가 봄이나 여름철이 되면 밭에 나가서 배추씨를 뿌립니다. 그리고 가을철이 되어서 통통하게 살이 오르면 그것을 뽑아 냅니다. 농부는 이미 정해진 계절에 따라서 행동할 뿐입니다. 하나님이 정하신 계절 자체를 바꿀 수는 없지 않습니까? 인간의 모든 행동이 다 그렇습니다. 

          3절 말씀을 보시기 바랍니다.
          "죽일 때가 있고 치료시킬 때가 있으며 헐 때가 있고 세울 때가 있으며."

          전쟁이 터졌습니다. 그러면 어쩔 수 없이 내가 살기 위해서는 적을 죽여야 합니다. 적군이 살고 있는 성읍을 허물어 버려야 합니다. 그러나 전쟁이 끝나고 평화가 찾아왔습니다. 그러면 부상자들을 찾아서 다 치료해야 합니다. 그리고 허물어진 성읍을 다시 세워야 합니다. 이처럼 인간의 행동은 정해진 때에 따라서 이루어질 뿐입니다.
          인간의 행동뿐만이 아니라 감정도 마찬가지입니다. 내 감정이라고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4절 말씀을 보시기 바랍니다.
          "울 때가 있고 웃을 때가 있으며 슬퍼할 때가 있고 춤출 때가 있으며."
          초상집에 가면 나도 모르게 마음이 슬퍼지지 않습니까? 눈물이 절로 흐릅니다. 반대로 흥겨운 잔칫집에 가면 마음이 즐거워서 절로 웃음이 나오지 않습니까? 덩실덩실 춤을 추고 싶어집니다. 이와 같이 인간의 감정도 정해진 때에 따라서 순응하면서 나올 뿐입니다.
          부부 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5절 말씀을 보시기 바랍니다.
          "돌을 던져 버릴 때가 있고 돌을 거둘 때가 있으며 안을 때가 있고 안는 일을 멀리 할 때가 있으며."

          남편이 아내를 안을 때가 있지 않습니까? 잠자리에 들 때가 있습니다. 그것을 돌을 던진다는 말로 은유적으로 표현을 했습니다. 그러나 율법에 보면 여인은 한 달에 한 번씩 부정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그때는 안는 일을 멀리해야 합니다. 잠자리에 들 수가 없습니다. 돌을 던질 수가 없습니다. 이처럼 부부 생활도 모든 것이 다 정해진 때 안에서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물질을 소유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6절 말씀을 보시기 바랍니다.
          "찾을 때가 있고 잃을 때가 있으며 지킬 때가 있고 버릴 때가 있으며."

          골곤다 광산을 예를 들었습니다만, 하나님께서 허락하시니까 전혀 엉뚱한 사람이 그것을 찾게 되지 않습니까? 그러나 억지로 찾고자 하니까 오히려 때를 잃어버리고 말았습니다. 부동산도 마찬가지입니다. 한때 우리 나라에 땅을 가진 사람이 제일인 줄 알았습니다. 그래서 은행에서 대출을 받아 큰 빌딩을 마구잡이로 많이 지었습니다. 그러나 이 나라에 IMF 사태가 터질 줄 누가 알았겠습니까? 요즘은 빌딩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얼마나 머리가 아픕니까?

          이와 같이 물질도 지킬 때가 있고 버릴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인간은 그때를 알지 못합니다. 그저 정해진 때에 따라서 순응하면서 살아갈 뿐입니다.
          인간의 언어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7절 말씀을 보시기 바랍니다.
          "찢을 때가 있고 꿰맬 때가 있으며 잠잠할 때가 있고 말할 때가 있으며."

          옛날 사람들은 슬픈 일을 당하면 옷을 찢었습니다. 그리고 입을 다물고 침묵을 지켰습니다. 욥이 곤경을 당했을 때 멀리서 욥의 세 친구가 찾아왔습니다. 욥의 비참한 모습을 보고 그들이 어떻게 했습니까? 각각 자기들의 겉옷을 찢었습니다. 그리고 욥과 더불어서 7일 동안 땅바닥에 앉아서 입을 다물고 침묵을 지켰습니다. 슬픈 일이 다 끝났습니다. 그때는 옷을 찢은 것을 다시금 꿰매야 하겠지요? 다시 입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다물었던 입을 열어서 다시금 말을 하게 되겠지요.
          개인의 일뿐만이 아니라 나라 사이의 일도 마찬가지입니다. 8절 말씀을 보시기 바랍니다.
          "사랑할 때가 있고 미워할 때가 있으며 전쟁할 때가 있고 평화할 때가 있느니라."
          나라 사이에 전쟁이 벌어졌습니다. 어쩔 수 없이 서로 미워하고 대적할 수밖에 없습니다. 전쟁이 끝나고 평화가 왔습니다. 그러면 우호적인 감정을 가지고 서로 사랑하면서, 도와가면서 살게 되지 않습니까? 이와 같이 천하에 모든 일이 다 때가 있기 마련입니다.
          우리는 그때를 거역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는 그저 정해진 때에 따라 순응하면서 살아갈 뿐입니다.
          그러면 여기에서 한 가지 의문이 생기게 됩니다. 어떤 의문입니까? 9절 말씀을 보시기 바랍니다.
          "일하는 자가 그 수고로 말미암아 무슨 이익이 있으랴."
          모든 것이 정해진 때에 따라서 이루어진다면 해 아래서 인생이 아무리 수고해 보았자 그 결과가 뻔할 텐데, 구태여 그러면 수고해 보았자 무슨 유익이 있겠냐는 것입니다. 당연히 있을 수 있는 질문입니다. 여기에 대해서 솔로몬이 무엇이라고 대답했습니까? 10절 말씀입니다.
          "하나님이 인생들에게 노고를 주사 애쓰게 하신 것을 내가 보았노라."
          우리 인생은 어쩔 수 없이 태어날 때부터 늙어 죽을 때까지 애쓰며 살아가도록 되어 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이 인생들에게 노고를 주셨기 때문입니다. 언제 노고를 주셨습니까?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고 선악과를 따먹었을 때, 그때부터 인생들은 어쩔 수 없이 평생토록 노고 가운데 애쓰면서 살아가도록 되었습니다.

          2. 하나님은 때를 아름답게 정하셨음

          그런데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하는 중요한 것이 하나 있습니다. 우리 하나님은 진노 가운데서라도 긍휼을 베푸시는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입니다. 그것을 솔로몬이 두번째 대지인 11∼15절에서 우리에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1) 하나님이 인생에게 베푸신 은혜
          우선 솔로몬은 11절에서 하나님께서 우리 인생들에게 베푸신 세 가지 은혜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어떠한 은혜를 베푸셨는지 11절 말씀을 보세요.

          첫번째 은혜입니다.
          "하나님이 모든 것을 지으시되 때를 따라 아름답게 하셨고."

          하나님께서 범사에 때를 정하셨다고 하셨는데 어떤 식으로 정하셨다는 것입니까? 인생들을 골탕먹이시려고, 괴롭게 하시려고 정하신 것이 아니라 모든 때를 아름답게 정하셨다고 하셨습니다. 적절하게 정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께 모든 것 맡기고 기쁜 마음으로 살아갈 수 있습니다.

          두번째 베푸신 은혜는 무엇입니까?
          "또 사람에게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느니라."
          하나님은 우리의 마음속에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비록 이 땅에 애쓰면서 노고 가운데 살아가지만, 우리는 해 아래 이 세상에 집착하지 아니하고, 해 위에 있는 영원한 세계를 사모하면서 소망 가운데 살아갈 수가 있습니다.

          세번째 베푸신 은혜는 무엇입니까?
          11절 끝부분을 보시기 바랍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하시는 일의 시종을 사람으로 측량할 수 없게 하셨도다."

          하나님께서 때를 정하셨지만 인생들로 하여금 그 정하신 때를 측량할 수 없게 하셨습니다. 모르는 것이 하나님의 은혜라는 말씀입니다. 여러분, 예컨대 사람이 자기가 죽을 때를 정확하게 미리 안다고 한번 생각해 보세요. 그것이 복된 삶이겠습니까? 죽을 때가 되면 자기뿐만 아니라 온 가족이 불안에 떨면서 일이 제대로 손에 잡히지 않을 것입니다. 죽을 때를 알지 못하기 때문에, 정해진 때를 알지 못하기 때문에 우리가 죽음을 잠시 잊어버리고 사는 것이 아닙니까? 알지 못하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은혜라는 것입니다.

          (2) 솔로몬의 깨달음

          솔로몬은 하나님께서 인생들에게 베푸신 세 가지 은혜에 기초해서 자기가 깨달은 것을 12절 이하에서 기록을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인생에 첫번째 베푸신 은혜가 모든 때를 아름답게 정하신 것이라고 했습니다. 거기에 대해서 솔로몬이 깨달은 것이 12절 말씀입니다.
          "사람이 사는 동안에 기뻐하며 선을 행하는 것보다 나은 것이 없는 줄을 내가 알았고."
          하나님께서 모든 때를 적절하게 아름답게 정하셨으므로 우리는 하나님이 인도하시는 대로 우리의 발걸음을 다 맡기고 불안에 떨지 않고 기쁘게 살아갈 수 있지 않습니까? 아울러 하나님이 아름답게 때를 정하신 것처럼 우리도 우리의 인생을 아름답게 살아야 합니다. 선을 행하면서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두번째로 하나님께서 우리 인생들에게 베푸신 은혜는 우리의 마음속에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신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이 땅에 너무 집착하지 말고, 무엇을 먹든지 무엇을 마시든지 무슨 일을 하든지 심령의 낙을 누리면서 살아야 합니다. 그것이 13절에 나오는 말씀입니다.
          "사람마다 먹고 마시는 것과 수고함으로 낙을 누리는 것이 하나님의 선물인 줄을 또한 알았도다."
          없는 것을 따지면서 불평하지 말고, 하나님께서 주신 것을 감사하면서 기쁜 마음으로 살아가라는 것입니다.

          영국의 유명한 설교가 윌리암 생스터(William Sangster) 목사님의 일화입니다.
          갑자기 이분에게 근육이 마비되는 증세가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병원에 가서 전문가의 진단을 받아 보았습니다. 결과는 불치병이라고 했습니다. 고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때 생스터 목사님은 기도하는 가운데 네 가지를 결심했습니다. 그리고 일평생 동안 자기가 결심한 그 네 가지를 반드시 지켰다고 합니다.

          첫번째, "I will never complain." 결코 불평하지 않겠다는 말입니다.

          두번째, "I will keep the home bright." 가정을 밝게 유지하겠다는 것입니다.
          그는 자기 때문에 가족들이 우울해지는 것을 원치 않았습니다. 그래서 언제나 가정의 분위기를 밝고 명랑하게 유지하고자 노력했습니다.

          세번째, "I will count my blessings." 내게 없는 것 따지면서 불평하지 아니하고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복들을 생각하면서 그것을 세어보겠다는 것입니다.

          네번째, "I will try to turn it to gain." 내가 당하고 있는 시련이 내게 유익이 될 수 있게 바꾸는 노력을 하겠다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솔로몬이 오늘 본문 13절에서 우리에게 일깨워 준 삶의 스타일일 것입니다. 없는 것을 생각하면서 불평하지 말고, 무엇을 먹든지 무엇을 마시든지 무슨 일을 하든지 심령의 낙을 누리면서, 모든 것이 하나님께서 주신 선물이라고 생각하면서 감사한 마음으로 살아가자는 것입니다.

          세번째로 하나님이 우리 인생에게 베푸신 은혜는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을 인간이 측량할 수 없게 하신 것이었습니다. 거기에 따라서 솔로몬이 깨닫게 된 것이 14절에 나오는 말씀입니다.
          "무릇 하나님의 행하시는 것은 영원히 있을 것이라 더할 수도 없고 덜할 수도 없나니 하나님이 이같이 행하심은 사람으로 그 앞에서 경외하게 하려 하심인 줄을 내가 알았도다."
          왜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인간들이 측량할 수 없도록 만드셨습니까?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을 가지도록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우리 인생이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측량해서 마음대로 변경할 수 있다고 생각해 보세요. 그러면 우리 마음에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이 생기겠습니까? 인간들이 교만해져서 하나님보다 높아지려고 설칠 것입니다. 그것을 막기 위해서 하나님은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인생들이 모르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솔로몬은 지금까지 한 말을 15절에서 이렇게 요약하고 있습니다.
          "이제 있는 것이 옛적에 있었고 장래에 있을 것도 옛적에 있었나니 하나님은 이미 지난 것을 다시 찾으시느니라."

          해 아래 새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뜻입니다. 과거나 현재나 미래나 언제나 똑같은 일이 계속해서 반복될 뿐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께서 이미 지난 것을 다시 찾으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정해 놓으신 그대로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과거에도 태아는 열 달이 되면 어머니 뱃속에서 나와야 합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앞으로도 그 정한 때는 변동이 없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세상에서 어떻게 살아가야 하겠습니까? 매일매일 기쁘게, 선을 행하면서 살아야 합니다. 불평하지 말고, 하나님께서 주신 것을 감사하면서 살아가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을 가지고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3. 하나님은 인생의 삶을 심판하심

          이제 마지막 세번째 대지에 이르렀습니다.
          하나님께서 모든 때를 정하셨다고 했는데, 그런 후에 하나님은 그저 인생들이 그 안에서 무슨 짓을 하든지 그대로 방관하고 내버려두십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사람들의 모든 삶을 반드시 심판하십니다.

          16절 말씀을 보시기 바랍니다.
          "내가 해 아래서 또 보건대 재판하는 곳에 악이 있고 공의를 행하는 곳에도 악이 있도다."
          재판하는 곳이 어떤 곳입니까? 공의가 세워져야 할 곳입니다. 공의를 가지고 의인과 악인을 바르게 구분하는 곳이 바로 재판하는 곳입니다. 그런데 공의로워야 할 재판하는 장소에서조차도 악이 존재하더라는 것입니다. 공의가 땅에 떨어지고, 의인이 억울하게 죄인 취급을 당하기고 하고, 악인이 또 반대로 부당하게 의인 대접을 받는 경우가 생기더라는 것입니다.
          왜 그런지 솔로몬이 깊이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깨달은 진리를 두 가지로 우리에게 말씀해주고 있습니다. 17절 말씀입니다.
          "내가 심중에 이르기를 의인과 악인을 하나님이 심판하시리니."
          인간의 법정에서는 공의가 땅에 떨어지는 한이 있다 할지라도 하나님이 심판하실 때는 공의를 다시금 세우신다는 것입니다. 억울함을 당하고 있는 의인을 회복시켜 주십니다. 또 악인이 일시적으로는 창성한 것 같지만 하나님이 심판하시는 그날 하나님의 심판에 의해서 멸망당하고 말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언제 심판하십니까? 17절 하반부를 보시기 바랍니다.
          "이는 모든 목적과 모든 일이 이룰 때가 있음이라 하였으며."
          하나님이 정하신 때에 그것이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정하신 때가 언제인지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분명히 아는 것이 하나 있습니다. 하나님은 모든 때를 아름답게 정하셨기 때문에 적절한 때에 반드시 하나님의 심판이 나타날 것입니다.
          솔로몬이 두번째 깨달은 것이 있습니다. 18절 말씀입니다.
          "내가 심중에 이르기를 인생의 일에 대하여 하나님이 저희를 시험하시리니."
          하나님이 인생에 악이 있는 그 일을 통해서 인생을 시험하신다는 것입니다. 학교에 가면 학생이 시험을 치릅니다. 그 시험을 통해서 자기의 수준이 어느 정도인지 알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 악을 통해서 인생의 수준을 깨닫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악을 멀리하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가면 우리의 수준이 그만큼 높아집니다. 그러나 악을 가까이 하고 죄악의 생활을 계속하다 보면 그 수준이 떨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어디까지 떨어집니까? 18절 하반부입니다.
          "저희로 자기가 짐승보다 다름이 없는 줄을 깨닫게 하려 하심이라 하였노라."
          이 세상에서 짐승처럼 살다가 짐승처럼 죽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물론 우리 인생이 짐승과 같은 점이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그러나 인생은 짐승과는 근본적으로 달라야 합니다. 먼저 솔로몬은 인생과 짐승의 같은 점을 19∼20절에서 두 가지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인생에게 임하는 일이 짐승에게도 임하니 이 둘에게 임하는 일이 일반이라 다 동일한 호흡이 있어서 이의 죽음같이 저도 죽으니 사람이 짐승보다 뛰어남이 없음은 모든 것이 헛됨이로다."
          인생이나 짐승이나 그 코에서 호흡이 떠나면 똑같이 죽습니다. 그리고 죽고 나면 다 원점으로 돌아갑니다. 그것도 똑같습니다.

          20절입니다.
          "다 흙으로 말미암았으므로 다 흙으로 돌아가나니 다 한 곳으로 가거니와."

          사람도 짐승도 죽으면 원점인 흙으로 다 돌아가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인생에 짐승과 본질적으로 다른 것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이 21절의 말씀입니다.
          "인생의 혼은 위로 올라가고 짐승의 혼은 아래 곧 땅으로 내려가는 줄을 누가 알랴."

          세상 사람들은 그것을 모른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의 자녀들인 우리들만큼은 그것을 잊지 말고 꼭 알아야 합니다.
          짐승은 흙에서 왔기 때문에 죽으면 그 혼도, 그 몸도 땅으로 내려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사람은 다릅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흙으로 만드셨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그 코에 생기를 불어넣으셨기 때문에 사람이 생명, 곧 살아 있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사람은 죽으면 육신은 흙으로 돌아가고, 혼은 위로 하나님께로 되돌아가게 되어 있습니다. 그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세상에서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서 우리의 육신을 떠날 때 우리의 혼이 위로, 하나님이 계신 천국으로 올라가야 합니다. 짐승처럼 살다가 짐승처럼 죽어서 아래로, 음부로, 지옥으로 떨어지는 인생길이 되어서야 되겠습니까?
          솔로몬은 오늘 말씀의 결론을 22절에 이렇게 맺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내 소견에는 사람이 자기 일에 즐거워하는 것보다 나은 것이 없나니 이는 그의 분복이라 그 신후사를 보게 하려고 저를 도로 데리고 올 자가 누구이랴."
          사람이 자기 일에 즐거워하는 것보다 나은 것이 없다고 했습니다. 매일매일 자기에게 주어진 일을 즐거운 마음으로 최선을 다해서 하는 것이 최고의 삶이라는 것입니다. 우리 각자가 교회에서 맡은 일도 있고, 가정에서 하는 일도 있고, 또 사회에서 맡은 일도 있습니다. 무슨 일을 하든지 간에 그 일을 억지로 하지 말고, 부득이한 마음으로 하지 맙시다. 즐거운 마음으로, 감사한 마음으로 최선을 다해서 충실하게 그 일을 하도록 합시다.
          바로 그것이 최고이 삶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이는 그의 분복이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타고난 복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복입니다. 지금 우리가 하고 있는 일은 하나님의 영원하신 섭리와 경륜 속에서 우리에게 맡겨 주신 일입니다. 그러니까 그 일에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기쁜 마음으로 그 일을 해야 합니다.
          두번째 이유가 있습니다.
          "그 신후사를 보게 하려고 저를 도로 데리고 올 자가 누구이랴."
          몸 신(身)자, 뒤 후(後)자, 일 사(事)자입니다. 우리 인생은 한번 가면 끝입니다. 다시 되돌아 올 수 없습니다. 그러니 순간 순간을 가장 귀하게 여기면서 최선을 다해서 살아가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탈무드에 보면 이런 유명한 말이 있습니다. "오늘이 내 인생 최초의 날이라 생각하며 살고, 아울러서 오늘이 내 인생 최후의 날이라 생각하면서 살아라." 하루하루 매순간마다 자기가 하는 일을 소중히 여기면서 즐거운 마음으로 최선을 다하는 삶이 되라는 것입니다. 한 번밖에 없는 인생이니까 좀더 애착을 가지고 잘 살아야 마땅하지 않겠습니까?

          적절하게 때를 정하셨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선한 목자 되신 하나님께서 우리의 발걸음을 어디로 인도하시든지 간에 우리의 발걸음을 다 맡기고 기쁜 마음으로 순종하면서 나아갈 수가 있을 것입니다. 아울러서 하나님의 영원한 경륜과 섭리 속에 우리 각자에게 맡겨주신 일을 소홀히 하지 말고 모든 일에 즐거운 마음으로 최선을 다하시는 여러분 되시기를 바랍니다.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전도서 2장


          1월 16일(월)

          분복(分福)(전도서 2:10)

          무엇이든지 내 눈이 원하는 것을 내가 금하지 아니하며 무엇이든지 내 마음이 즐거워하는 것을 내가 막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나의 모든 수고를 내 마음이 기뻐하였음이라 이것이 나의 모든 수고로 말미암아 얻은 분복이로다.

          1절. 나는 내 마음에 이르기를 자, 내가 시험적으로 너를 즐겁게 하리니 너는 낙을 누리라 하였으나 본즉 이것도 헛되도다.

          여피(yuppie, ˈjʌpi)는 "젊은 도시 전문직(young urban professional)"의 약자로서, 대도시 또는 그 인근을 거주 및 직장으로 삼으면서 대학 수준의 학력을 갖추고 고소득 직업에 종사하는 젊은 성인으로 정의된다. 대략 그들의 나이가 20대  초반부터 40대 초반 사이의 사람들이라고 합니다.

          도시 문화에 익숙하지만 일상생활이 권태롭기 때문에 새로운 문화에 쾌락을 느끼며 살아가므로 사회적 물의를 일으키는 사례가 나타나고 있습니다.

          한 예로 "스와핑(Swapping)"이라는 것이 은밀하게 성행하고 있다고 합니다.
          원래 스와핑(Swapping)이란 교환이라고 합니다.
          1960년대 미국에서 유행한 중고품 교환 장터에서 사용하던 용어이었으나 근자에는 성적 파트너를 서로 바꾸어 즐기는 사회악으로 등장하고 있다고 합니다.
          문제는 이런 것을 은밀하게 즐기는 사람들이 도시의 전문직에 종사하는 사람들이라고 합니다.

          쾌락주의(Hedonism, 快樂主義)는 쾌락이 인생의 목적이며 최고의 선이라 하여, 쾌락을 추구하고 고통을 피하는 것을 도덕원리(道德原理)로 삼는 윤리설이다.

          고대 그리스어 "헤도네(ἡδονή)(만족)"에 주의, 사상을 뜻하는 접미어 "-ism"이 붙은 단어이다.


          11절. 그 후에 본즉 내 손으로 한 모든 일과 수고한 모든 수고가 다 헛되어 바람을 잡으려는 것이며 아래서 무익한 것이로다.

          신앙적 좌절이란 세속적인 목표를 위하여 최선의 노력을 다한 후에 그 정상에 올라갔으나 그 위에서 참 기쁨과 만족을 누리지 못하고 심각한 고민과 갈등에 빠져 허덕이는 상태를 말합니다.
          세상적인 좌절은 노력하였으나 실패한 때를 말합니다.


          12절. 내가 돌이켜 지혜와 망령됨과 어리석음을 보았나니 왕의 뒤에 오는 자는 무슨 일을 행할꼬 행한지 오랜 일일 뿐이리라.

          16절. 죽음은 동일하다
          지혜자나 우매자나 영원토록 기억함을 얻지 못하나니 후일에는 다 잊어버린지 오랠 것임이라 오호라 지혜자의 죽음이 우매자의 죽음과 일반이로다.

          수의에는 주머니가 있다? 없다? - 없다!

          이름을 남기려는 죄인의 본성이 강하기 때문에 유명 관광지에 자기 이름을 새겨 넣는 흔적들을 찾아 볼 수 있다.

          18절. 르호보암 아들에게 대를 물려주려 할 때 깨달은 것
          내가 아래서 나의 수고한 모든 수고를 한하였노니 이는 내 뒤를 이을 자에게 끼치게 됨이라.

          26절. 오직 하나님만이 나의 기쁨
          하나님이 그 기뻐하시는 자에게는 지혜와 지식과 희락을 주시나 인에게는 노고를 주시고 저로 모아 쌓게 하사 하나님을 기뻐하는 자에게 주게 하시나니 이것도 헛되어 바람을 잡으려는 것이로다.

          남아프리카에 가면 골곤다라고 하는 세계 제일의 유명한 다이아몬드 광산이 있습니다.
          영국의 왕실을 비롯해서 세계 각국의 왕이나 왕비가 쓰는 왕관에는 어김없이 여기에서 나온 다이아몬드가 박혀 있다고 합니다.
          유명한 골곤다 광산이 어떻게 개발이 되었는지 그 배경에는 기막힌 사연이 전해지고 있습니다.
          골곤다 다이아몬드 광산이 개발 되기 전에는 목장 지대였다고 합니다.
          목장 주인은 큰 부자는 아니었지만 비교적 넉넉한 삶을 영위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나라에 영국 사람이 들어와서 갑자기 다이아몬드 붐이 일어나기 시작했습니다.
          곳곳에서 다이아몬드 광산이 발견되면서 벼락부자들이 생겨났습니다.
          그러다 보니까 목장 주인의 마음속에 급한 생각이 들기 시작을 했습니다.
          꾸물거리다가는 자기만 손해를 볼 것 같았습니다.
          다른 사람들에 비해서 상대적으로 자기가 자꾸 가난해지는 것 같은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그 목장 주인도 다이아몬드에 대해서 관심을 가지고 여러 가지를 알아보았습니다.
          먼저 그는 다이아몬드가 어떠한 곳에서 나오는지를 조사해 보았습니다.
          그랬더니 해답이 간단하게 나왔습니다.
          지형적으로 주변이 산으로 빙 둘러 있고, 그 가운데는 시내가 흐르고, 그리고 시내에 의해서 모래사장이 형성되어 있는 곳이 확률적으로 다이아몬드가 나올 가능성이 많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는 즉시 자기 목장을 팔았습니다.
          그리고 전국을 누비면서 그런 곳을 찾기 시작했습니다.
          비슷한 지형이 나오면 무조건 닥치는 대로 다 사들였습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그때마다 번번이 실패를 했습니다.
          다이아몬드를 찾기 시작한 지 어언 10년이 흘렀습니다.
          이제는 수중에 있던 돈도 다 떨어지고 빈털터리가 되고 말았습니다.
          결국 그는 깊은 절망감을 이기지 못하고 바다에 자기 몸을 던지고 말았습니다.
          스스로 목숨을 끊어 버리고 만 것입니다.
          그런데 기막힌 일은 바로 그 사람에게서 목장을 산 사람이 어느날 자기 목장을 돌아다니다가 우연히 검은 색이 나는 이상한 돌 하나를 발견하였습니다.
          그것을 집어들고 호기심을 가지고 깨뜨려 보았습니다.
          그러자 그 안에서 번쩍번쩍 빛나는 광채가 나기 시작했습니다.
          틀림없는 다이아몬드 원석이었습니다.
          얼른 그 주변을 파 보았습니다.
          손으로 파기만 해도 그 속에서 다이아몬드 원석이 엄청나게 쏟아져 나왔습니다.
          그렇게 해서 개발된 곳이 바로 세계 제일의 다이아몬드 광산인 골곤다입니다.
          원래의 목장 주인은 행복의 파랑새가 바로 자기 곁에 있었는데도 그것을 알지 못했습니다.
          괜히 멀리서 찾다가 결국은 찾지도 못하고 허무한 죽음을 맞이하고 말았습니다.
          급한 마음 가지지 말고 자기에게 주어진 분복, 타고난 복, 하나님께서 주신 복을 누리다 보면 언젠가 때가 되면 자기가 원하던 다이아몬드를 손에 넣을 수가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억지로 그때를 만들려고 하니까 때를 만들지도 못하고 오히려 자기에게 주어진 복을 놓쳐 버리고 만 것입니다.


          캘리포니아에서 한창 황금 노다지 골드러시(Gold rush)가 일고 있었던 때, 당시 영국령 남 아프리카(지금의 남아 공화국)의 골곤다라는 마을에는 큰 농장을 경영하는 알리 하베트라는 사람이 살고 있었다.

          당시 남아프리카 영국식민지에는 신부님들이 부족하여 신부 한명이 여러 마을을 돌면서 미사를 집전하고는 했는데 언젠가 이 골곤다 마을에 오던 신부님이 그만 길을 잃었다.
          그래서 며칠을 정글에서 헤맨 끝에 겨우 농장을 찾아온 신부님, 농장 주인 하베트는 “얼마나 고생하셨냐?”고 위로하고 신부님은 “이래 저래 헤맸다” 말씀을 하시다가 갑자기 신부님이 생각이 난듯 주머니에서 돌멩이 둘을 꺼내 보였다.
          오던길 어디 쯤에서 토인들 마을을 지나는데 그곳 이이들이 가지고 노는 돌이 반짝이는 것이 하도 신기해서 얻어 왔다는 것이다.

          주인은 그 돌맹이를 조심스럽게 살펴보았다.
          놀랍게도 그것은 다이아몬드 원석이 분명했다.
          “그 토인 마을이 어디쯤 됩니까?”
          주인은 마른침을 삼키며 물었다.
          “여기서 멀지 않습니다. 한 사나흘 길 거리인데, 거기에는 높은 산이 있고 맑은 물이 흐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하도 헤매다 와서 어딘지 잘 모르겠습니다.”
          안타깝게도 신부님은 장소를 기억하지 못했다.

          신부님이 돌아간 후 농장 주인은 깊은 생각에 잠겼다.
          마침 남 아프리카에서는 다이아몬드 광산이 여기 저기 발견되던 시절이다.
          광산을 발견하기만 하면 하루 아침에 천문학적인 부자가 되는 것이다.
          자기가 비록 큰 부농이기는 하지만 그런 사람들과 비교하니 그야말로 새발의 피 밖에 안되는 것이다.
          “내가 이까짓 농장을 백날 해 봐야 무슨 발전이 있겟는가? 다이아몬드 광산 하나 제대로 발견한다면 그야말로 운명이 바뀌지 않겠는가?” 하는 생각에 어느날 아예 자기 농장을 팔아 치우고 다이아몬드를 본격적으로 찾아 나섰다.

          인근 산이라는 산은 다 오르고 골짜기 마다 다 뒤지고 토인들 마을 마다 다 찾아가서 수소문하였으나 다이아몬드가 있는 곳은 알 수 없었다.
          그간 풍문에 어디서 다이아몬드 광산을 발견되고 또 어디서는 금광이 터졌다고 하는데 자기는 온 나라를 다 훝고 심지어 다른 나라까지 가서 찾아 헤매어도 노다지를 찾을 수 없는 것이다.

          달이 가고 해가 가더니 그렇게 찾아 헤맨지 5년이 가고 10년이 흘렀다.
          그동안 아내와 자식들은 친척집으로 뿔뿔이 흩어졌고, 농장을 판 돈도 다 없어졌다.
          남은 것은 굵게 패인 얼굴의 주름, 험하게 갈라진 손과 발, 그리고 몸에 걸친 남루한 누더기.
          그는 어느듯 망망대해가 보이는 절벽 위에 섰다.
          “이제 나에게 남은 것도 없고 더 갈 곳도 없구나!” 깊이 절망한 그는 절벽 아래로 몸을 던져 생을 마감하였다.

          그런지 얼마후, 알리 하베트에게서 농장을 산 러셀이라는 새 농장주가 말에 물을 먹이려고 농장을 가로 지르는 시냇물에 다가 섰을 때, 물속에서 영롱하게 반짝이는 무언가를 보았다.
          세계 최대의 다이아몬드 광산 골곤다가 발견되는 순간이었다.
          골곤다 농장 바로 그 땅이 세계 최대의 다이아몬드 광산이었는데 전 주인이었던 알리 하베트는 그것도 모르고 엉뚱한 곳, 먼 곳에서만 다이아몬드를 찾아 헤매며 고생한 것이다.

          나는 참으로 재물의 축복인 ‘富’라는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여러 수백가지 축복 중에 하나 일 뿐이고 재물이라는 것은 우리가 살아가면서 중요하게 사용되어야 할 한 수단일 뿐, 우리 인생을 송두리째 바쳐야할 목적은 절대 아님을 나는 살 수록 깨닫는다. 어떤 사람에게 엄청 큰 부(富)를 안겨 주신 것은 하나님의 선한 목적이 있어서 그렇게 하신 것이다. 골곤다 농장주 알리 하베트는 그냥 농장만 갖고 있었어도 부자로 잘 살 수 있는 사람이었는데…더 큰 재물을 위해 욕심을 부리다가 신세 망치고 목숨까지 버린 것이다.

          또 하나, 우리 인생의 다이아몬드 광산을 생각한다.
          인생의 소중한 보물은 꼭 재물 뿐이 아니다.
          보물은 산 높고 물 좋은 저 멀리 있는 것이 아니라 손을 뻗으면 다로 닿을 가까운 곳에 있는데 우리의 눈과 귀가 욕심에 사로 잡혀서 그 소리를 듣지 못하고 그 빛깔을 보지 못할 뿐이다.
          나에게 가장 소중한 사람은 내 가족 그리고 일상 보고 만나는 내 이웃과 친구들이고 나에게 소중한 물건은 내가 매일 가까운 곳에 두고 쓰는 일용품일 뿐이다.

          누구나 성경을 갖고 있습니다.
          문제는 그 성경을 어떤 눈으로 읽고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남아프리카 최대의 다이아몬드 골곤다 광산의 원주인 "알리 하베트"는 목장을 팔아버리고 광산을 찾아 헤매고 다녔으나 새 농장주가 된 "러셀"은 우연히 시냇물 속에서 반짝이는 돌을 찾아내어 그것에서 다이아몬드 원석을 발견하여 최고의 부를 누릴 수 있게 되었다고 합니다.



          전도서 1장에서 계속되는 말씀으로 헛됨(헤벨)의 사례들을 나열합니다.
          전도자(코헬렛)는 몸과 마음을 즐겁게 하는 온갖 쾌락을 즐겨보았고 술로 흥을 돋워보기도 했으며 큰 사업을 일으켜 그 누구보다 더한 부귀를 누려보았다고 합니다(1~11절).
          하지만 그런 것들이 허무한 마음을 채워주지는 못했습니다.
          또한, 그토록 자랑스럽게 여겼던 지혜를 소유한 자신도 우매한 자들과 마찬가지로 죽으면 한 줌 흙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것이 허무할 뿐이라고 합니다(12~17절).
          그래서 얻은 결론은 하나님을 인정하고 하나님 안에서 경건한 삶을 살아가는 것이 만족스러운 일이라고 합니다(24~25절).

          "분복(分福)"이란 현대인의 성경에서는 "댓가" 라고 하였고, 새번역과 개역 개정 성경에서는 "몫"이라고 하였으며, 공동번역에서는 "보람"이라고 번역합니다.

          분복에 대한 시편 기자의 고백은 "네가 네 손이 수고한대로 먹을 것이라 네가 복되고 형통하리로다." 라고 합니다(시편 128:2)

          사람이 수고한대로 그 댓가를 얻을 수 있다는 것은 복된 삶의 시작입니다.
          그러자 저소득 국가에서는 아무리 수고하여도 수고한 것만큼 댓가를 받지 못합니다.
          일주일 동안 부지런히 일을 해여 겨우 의식주 문제를 해결하는 사회와 주 5일만 근무하면서도 의식주 문제를 충분히 해결하고 여가를 즐길 수 있는 사회는 분명히 다른 사회라고 하겠습니다.

          인간은 자기 힘으로 영원한 행복을 보장해 줄만한 어떤 것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세상에서 찾아볼 수 있는 그 어떤 선한 것들 속에서도 인생의 목적은 발견할 수 없습니다.
          소위 건강, 부, 소유, 지위, 감각적 쾌락, 명예, 명성 같은 것들은 다 하나님의 선물이라는 관점으로 받아들여질 때에만 ‘제대로’ 즐기고 그것들로부터 만족을 얻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당신을 경외하는 자들에게 하나님의 선물들을 제대로 즐기는 능력을 주십니다.
          오직 “하나님 안에서”만 유용하고 유익이 있을 뿐입니다.

          오직 하나님 안에서만 참된 유익을 누리며 즐거움과 기쁨을 누릴 수 있다는 것을 잊지 말게 하옵소서.
          따라서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을 수 있는 믿음으로 매일의 삶이 계속될 수 있는 변함이 없는 마음과 믿음을 주옵소서.

          주 안에서의 즐거운 삶을 누리므로 세상의 즐거움에 시달리는 사람들을 일깨워 자유로운 은혜의 길로 인도할 수 있도록 지혜를 더하여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걸림돌과 디딤돌

          길을 가다가 돌이 나타나면 약자는 그것을 걸림돌이라 하고 강자는 그것을 디딤돌이라고 말한다.
          - 토마스 카알라일


          세상을 살아가면서 우리는 하루에도 몇 번씩 수 많은 삶의 돌을 만납니다
          그때마다 그 돌을 대하는 마음가짐에 따라 결과는 달라지는데요
          그 돌을 어떤 사람은 걸림돌이라 말하고 또 어떤 사람은 디딤돌이라고 말합니다

          삶에서 오는 모든 장애를 불평과 원망의 눈으로 보는 것과
          또 그것을 발판으로 재기와 도약의 발판으로 삼는 것과는 분명 큰 차이가 있을 겁니다

          오늘도 장애의 요소와 같은 돌을 곳곳에서 만나게 되겠지요
          그런 돌들은 생활에 무수히 널려 있습니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깔려있는 돌이 아니라
          우리 마음의 자세가 아닐까 싶습니다

          나를 힘들게 하고 뒤쳐지게 하는 것들이라고 생각해온 모든 걸림돌을 디딤돌로 삼을 수 있다면 우리에게 더욱 큰 소망이 있고, 발전하고 성숙할 수 있겠지요.


          특히 2:24~26은 1, 2장의 소결론이라 할 수 있습니다.

          사람이 자신 안에 선한 것이 없기 때문에 먹고 마시고 수고하는데서(외부적인 것들) 즐거움을 얻게 되는데, 이 조차도 하나님의 손에서 주어지는 선물들이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24).

          하나님을 떠나서는 즐거움을 노래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기뻐하는 자에게는 지혜와 지식과 희락을 주시지만, 죄인에게는 노고를 주시고, 그가 모아서 쌓아놓은 것도 하나님을 기뻐하는 자에게 주게 하십니다(26).
          인간은 나름대로 스스로 인생을 즐긴다고 하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먹고 마시고 수고하는 것이 필연적으로 희락을 가져오지 않기 때문입니다.
          희락은 다만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하나님은 기뻐하는 자에게 선물로 지혜와 지식과 희락을 주십니다.  

          예전에 전도자는 이런 지혜와 지식과 희락이 그 자체로 인생의 의미와 만족을 주는 줄 알았었고(1:16~17; 2:1) 하나님의 선물로 이해하지 않았기 때문에 결국 ‘바람을 잡는 일’(1:17)이고 ‘헛된 것’(2:1)이 되고 말았다고 말합니다.
          죄인이 하나님을 알지 못하면, 이런 지혜와 지식과 희락을 즐기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죄 가운데 거하면 결국 이 모든 것(지혜와 지식과 희락)을 다 상실하고 말 것입니다.

          이런 결론이 어떻게 도출되는 것입니까?
          솔로몬은 재산 축적과 사업과 건축 계획에 있어서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사람입니다.
          또한 자신이 인생에 낙이라고 생각하는 모든 것들을 거의 다 해보았습니다.
          하지만 거기서는 전혀 만족을 얻지 못했습니다.
          전도자가 얻은 결론은 이렇듯 자신의 경험에서 얻은 결론입니다.

          그러나 지혜자나 우매자나 죽음에는 차이가 없습니다(15).
          죽으면 다 잊혀지기는 마찬가지입니다(16). 그렇다면 인생 자체는 신기루나 망상이 아닐까요?(17) 지혜가 아무리 뛰어나다고 해도, 그것을 얻으려고 수고를 해도, 결국에는 헛될 뿐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혹시 자식에게 축적된 재산을 물려주는 것은 의미가 있을까요?(18~21) 그렇게 애써 모아 물려준 재산이 지혜롭게 사용될지 누가 어떻게 알겠습니까? 결국 열심히 수고하여 얻은 소득도 유익을 줄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22).



          좌절과 절망 속에서도 사우디 아라비아는 유목민족이었다.

          그들은 양을 치면서 생계를 유지하였다.
          그런데 하루는 양들이 샘물을 먹고 다 죽었다.
          그 주인은 자신의 생계유지 수단인 양들이 다 죽게 되자 어찌할 바를 몰라했다.
          '우리 이제 굶어 죽었구나!'하는 생각에 좌절과 절망 속에 빠져버렸다.
          그는 양을 살려낼 능력도 없었고 또 다른 양들을 살 수 있는 돈도 없었다 그는 죽고 싶은 심정뿐이었다.
          그런데 그의 머리 속에 스쳐가는 생각이 있었다.
          죽을 때 죽더라도 자기의 양들을 죽게 한 원인이 무엇인가 알고 싶었다.
          그래서 그 샘물을 떠다 연구소에 의뢰하였다.
          바로 그 샘물에서 나온 걸죽한 액체는 석유의 원료였다.
          살 길이 없는 줄 알았는데, 그는 살길을 찾았다.
          살 길을 찾은 정도가 아니라, 그 액체 원료로 인해 세계적인 거부가 되었다.
          좌절과 절망 속에 있는 사람에게 예수님은 새로운 축복의 살 길이다 .

          나는 살았는가?

          오클라호마市의 위대한 흑인 목사 페리 박사(Dr. E. W. Perry)는 부활을 다음과 같이 말씀했습니다.
          큰 뱀이 물 속을 헤엄쳐 다니다가 아직 살아 있는 작은 물고기들을 집어삼켰습니다.
          그리고 곧, 이어서 날카로운 지느러미가 달린 좀 더 큰 물고기를 집어삼켰습니다.
          뱀의 밥통 속에서 큰 물고기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어두운 곳을 좋아하지 않는다.
          나는 여기서 밖으로 나가야겠어..'
          물고기는 날카로운 지느러미를 사용해서 뱀의 배를 가르고 밖으로 나와 자유롭게 되었습니다.
          배가 갈라진 뱀은 죽었고, 큰 물고기가 밖으로 헤엄쳐 나가자 다른 물고기들도 큰 물고기를 따라 헤엄쳐 나갔습니다.
          그렇습니다.
          뱀은 괴물이요 사망입니다.
          대대로 죽음은 하나님의 백성을 삼켜왔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죽음은 예수님을 삼켰습니다.
          예수님은 무덤 속에서 '나는 이렇게 어두운 곳은 싫다.
          그래서 밖으로 나가야겠다'고 하셨습니다.
          성령의 능력으로 예수님은 죽음을 정복하시고 영생으로 나오셨습니다.
          이제 예수님을 믿는 자들은 죽은 자라 할지라도 모두가 예수님을 따라 영생에 참여할 것입니다.
          예수님이 사셨기 때문에 우리도 살 것입니다.

          아름답습니다!

          대성리 강변 새터 호반에서 고등부 동계 수련회를 가졌다.
          교사들과 약속을 하였다.
          이번 수련회 때에는 자기를 위한 기도는 한 마디도 하지말고, 오직 학생들만을 기쁘게 할 수 있도록 하고, 학생들의 영적 성장을 위해서 열심으로 기도하자고 다짐하였다.
          한 시간 한 시간 지나가면서 남학생, 여학생, 교사들 모두 기쁨이 충만하였다.
          성령님이 우리들 가운데 충만하게 거하심을 몸으로 느낄 정도였다.
          대표 기도를 드리는 여학생의 진실되고 깨끗한 기도 속에서 성령님은 역사하셨다.
          말씀에 부딪친 후 자신은 부족함을 고백하는 형제의 겸손함 속에서 성령님은 뜨겁게 역사하셨다.
          강줄기 같이 흐르는 찬양 속에서 성령님은 기뻐하셨으며, 나보다 학생들이 잘되기를 바라는 교사들의 중보기도 속에 성령님은 강하게 역사하셨다.
          너무나도 은혜가 충만해지자 설교자는 한 마디도 놓치지 않으려고 열중하고 있는 학생들에게 "여러분의 모습이 너무도 아름답습니다."고 하였다.
          실로 10대의 젊은 학생들이 하나님을 찬양하고 섬기는 모습은 티가 없이 맑고 풍성하였다.
          그 이후에 우리들의 입에서는 "아름답습니다"가 인사말이 되었다.
          자고 일어나서도 "형제님, 아름답습니다. 자매님, 아름답습니다. 선생님, 아름답습니다." 공부에 찌들있던 학생들, 숨막히는 생활의 틀을 벗어나서 예수님의 사랑을 고백하고, 성령님의 은혜를 사모하고, 잃어버린 기도의 줄을 회복하였을 때, 그들은 잃어버렸던 생명력을 찾을 수 있었다. 놀라운 사실은 교회에 돌아와서도 만나는 사람들에게, "성도님 , 아름답습니다. 집사님 , 아름답습니다. 권사님, 장로님, 아름답습니다 목사님 , 아름답습니다." 이제는 교회 전체가 "아름답습니다" 병에 걸리고 말았다. 예수님을 순수하게 사랑하는 소수의 무리들이 결국 교회전체를 아름다운 천국으로 바꾸어 놓았던 것이다. 이제는 교회 구석구석 어두웠던 부분들도, 어두운 얼굴을 지었던 성도들도, 새로운 생명력을 갖게 되었다.

          주님을 사랑하기에 강도사 시절에 어느 부흥사가 이 교회는 교역자가 금요일마다 철야하면 부흥한다는 소리에 사실상 기분이 좋지 않았다.

          그 목사님의 설교를 들어보니까 엉성했다.
          그런 사람이 매주 철야기도를 해야만 부흥한다고 말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실상은 꼭 철야기도를 해야만 부흥한다는 말 자체를 신앙적으로, 신학적으로 동의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바쁜 사회에서 철야보다는 잠을 푹 자고 다음날 열심히 일을 하는 것이 더 성경적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지금은 그렇지 않다.
          이제 내가 못할 일은 아무 것도 없다.
          어떤 일이라도 주님 사랑하는 마음으로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고백도 달라졌다 .
          "주님을 사랑하기에, 매주 금요일 철야기도를 하겠습니다.
          주님을 사랑하기에, 집집마다 전도도 하겠습니다.
          주님을 사랑하기에, 형제의 문제를 위해 금식도 하겠습니다.
          주님을 사랑하기에, 십자가를 피해가지 않겠습니다.
          주님을 사랑하기에, 주님을 위해 어떤 일이라도 기쁨으로 하겠습니다."
          주님을 사랑하기 전과 후의 고백에 차이가 생겼다

          돌아온 탕자 젊은 처녀가 교회에 찾아 왔다.

          다음 주에 교회 등록할 테니까 자기 집에 심방 좀 해 달라는 것이었다.
          집에 가보니까 그녀의 아버지가 누워 계셨다. 집에 들어서자 집안 공기가 냉하였다. 오래 전에 기쁨과 소망이 사라진 집안 같았다. 그녀의 아버지는 완전히 뼈만 앙상하게 남아 있었다. 그의 병명은 위암이었다. 그는 반가워 하며 어렵게 어렵게 눈물을 흘리며 한마디씩 하였다. "목사님, 제가 목사님을 청했습니다. 죽기 전에 저의 가족을 목사님께 맡기려고 합니다. 저의 형님은 장로님이고 저도 어릴 때부터 교회에 나갔습니다. 그런데, 돈 좀 벌려고 서울 나갔다가 이렇게 신앙을 잃어버리게 되었습니다. 재산도 수술 두 번에 모두 다 잃어 버렸습니다. 저에게 남은 것이라고는 조그만 가게 하나와 다 죽게 된 몸뚱이뿐입니다. 이제 저희 식구 모두를 신앙 안에서 책임 맡아 주십시오." 그는 마치 죽기 전에 하나님께 최후의 고백을 하는 것과도 같이 진지했다. 그는 그 말을 한 후에 너무도 기뻐하였다. 이제 자기의 영혼을 하나님께 맡겼다는 생각에서인 것 같았다. 심방대원들은 찬송을 하고 말씀을 증거하고 합심하여 그의 병을 낫게 해 달라고 간절히 기도하였다. 그는 그 후 2주일정도 후에 하나님께로 갔다. 나는 이제까지 많은 성도들이나 학생들에게서 고백을 많이 들었다. 그러나 그 중에서 암 환자가 마지막 죽기 전에 하나님께 돌아와서 자신의 죄를 회개하고 자신의 가족에게 무슨 일이 있어도 하나님 떠나지 말고 신앙으로 살아가라는 고백과 목사에게 자기 가족을 맡아 달라고 했던 돌아온 탕자의 눈물과 고백은 평생동안 잊을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못내 아쉬워 한마디 해 본다. '그 고백을 10년만 일찍 했더라도 좋은 삶을 살 수 있었을 텐데...'

          무헌신 무상급 일생동안 그리스도께 충성하고 현재 퇴임한 한 그리스도인이 한 늙은 목사와 관련된 전설의 영향을 받았다고 고백하였다.

          이 전설에 따르면, 한 늙은 목사가 천사를 만났는데, 그 천사는 창고에서 수없이 많은 다이아몬드로 휘황찬란한, 비교할 수도 없이 아름다운 면류관을 가지고 나왔다. "이것은 당신이 젊었을 때, 당신을 위해 만든 면류관이오. 하지만 당신은 당신의 삶을 주님께 완전히 바치기를 거부했기 때문에 이 면류관은 이제 당신 것이 아니오." 천사는 되돌아가서 여전히 아름답지만 보석이 조금 밖에 없는 다른 면류관을 가지고 나왔다. "이것은 당신이 중년일 때 만든 면류관이오.. 하지만, 당신은 당신의 삶 일부를 세상적인 추구에 사용했기 때문에 이것을 받을 수 없게 되었어" 다시 한번 그 천사는 창고로 되돌아갔다. 이번에는 보석이 하나도 없는 개털모자를 가지고 왔다. "이것이 당신의 노년 때 면류관이오 영원히 당신 것이오"라고 천사가 말했다는 것이다.

          **헌금 한 선교사가 뉴 헤브라이즈 군도(New Hebride지에서 몇몇 원주민들이 돼지들을 잡는 것을 보았니다. 이 원주민들은 돼지의 꼬리를 잘라내서 그것들을 쌓아 놓았습니다. 그 선교사가 원주민들에게 왜 그렇게 하느냐고 묻자, 그들은 "고기는 우리를 위한 것이고 이 꼬리들은 우리의 신들을 위한 것이라."고 대답했습니다. 어떤 기독교인들은 꼭 그와 같은 어리석고 죄스러운 짓을 합니다. 그들은 모든 것을 자신들을 위해 먼저 취하고 혹, 남는 것이 있다면 그 찌꺼기를 하나님께 들입다. 이것은 옳지 않은 일입니다. 그것은 하나님께 대한 죄스럽고 사악한 불순종이요. 하나님의 것을 탈취하는 것입니다. 어떤 집사님이 한 교인에게 교회에 헌금할 것을 요청했습니다. 그 사람은 "교회는 항상 무엇인가 부족하군요 "라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집사님은 "저에게는 귀한 아들이 있었습니다. 그 애는 매우 귀한 자식이었습니다. 저는 그 애에게 옷, 신발 책 등 수많은 것들을 사 주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어느 날 밤 그는 불행하게도 죽고 말았습니다. 지금 내 아들은 저에게 한 푼의 돈을 요구하지 못하고 있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교회가 살아있는 한, 교회가 건재하면서 세상을 축복하는 한, 교회는 움직이기 위해 무엇인가를 요구할 것입니다. 교회가 죽고 나면 여러분의 아무런 도움도 필요로 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동시에 교회는 여러분에게 아무런 도움도 될 수 없을 것입니다. 교회가 살아 있어서 여러분들과 제가 교회의 유지를 도울 수 있는 특권을 가졌다는 사실에 대해하나님께 감사합니다. 헷셀포드의 (헌신) 강해에서

          의사 입장에서 볼 때 의사 입장에서 볼 때,

          기분 나쁜 환자와 기분 좋은 환자가 있다.
          기분 나쁜 환자는 아는 척하는 사람, 의사를 믿지 못하는 사람, 이 병원 갔다 저 병원 갔다 하는 사람이다.
          그들은 공통적으로 치료 효과가 약하고, 돈과 시간을 이중적으로 소비하고, 정신적 고통까지 가중된다.
          그러나, 그와는 반대로 기분 좋은 환자는 모든 것을 의사에게 맡기고 하라는 대로 순하는 사람이다.
          특히, 틀니를 해 넣을 경우 같은 때에도 입 속에서 쇠가 왔다 갔다 해도 의사를 믿고 가만히 있는 환자는 치료가 잘 된다.
          그런 사람은 돈, 시간, 정신적 고통 등도 절감된다.
          당신은 예수님 앞에 어떤 환자인가?
          모든 것을 예수님께 맡기고 가만히 있는 환자인가? 왜 당신의 삶 속에 열매가 맺히지 못했었는가?

          **어머니의 신앙 22세 청년이 병으로 죽어가고 있다. 병명도 모른 채 하루하루 지나갔다. 너무나 말라서 뼈만 앙상하게 남았다. 그 동네에 유명한 무당이 있었다. 무슨 병이든 그 무당을 불러다가 굿을 하면 다 나았다. 그래서 동네 사람들은 그 청년 어머니에게 그 무당을 데려다가 굿을 하면 나을 것이라고 하였다. 그의 어머니는 교회 집사였다. 그는 하나님을 섬기는 집사로서 굿을 할 수가 없었다. 이번에는 친척들이 그러다가 아들 죽이겠다고 하면서 그 무당을 권했다. 역시 이번에도 그 어머니 집사는 응하지 않았다. 이번에는 그의 남편이 그 무당을 권했다." 여보, 신앙도 좋지만 아들 먼저 살려놓고 봅시다. 당신 고집 때문에 아들 죽이겠소." 그 남편의 마지막 권면에도 그 어머니 집사는 요동하지 않았다. 아, 그런데 이제는 방에 누워있던 아들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앉더니, 눈을 크게 뜨면서 크게 쳤다. "어머니, 그 무당 좀 데려다 굿 좀 하세요. 그러면 내가 나을 것 같아요." 그 어머니 집사는 당황하였다. 그녀는 자기 아들의 손을 꼭 붙들고 말했다. "얘야, 무당을 불러다 굿을 한다면 너하고 나는 이제부터 하나님과는 영원히 끝나는 것이다. 나는 너를 잃어도 하나님은 잃고 싶지 않다. 하나님이 살아 계신데, 어떻게 굿을 할 수 있니? 난 그렇게 할 수 없다." 그리고 그녀는 뒷동산으로 올라가 나무를 붙들고 울기 시작하였다. "하나님, 이럴 때는 제가 어떻게 해야 합니까? 하나님, 나는 무당을 부를 수 없습니다. 하나님, 저를 불쌍히 보시고 내 아들 좀 고쳐 주시옵소서" 그 순간 집에서 기적이 일어났다. 병석에 누워있던 아들의 입을 통해 사탄이 소리를 지르면서 쫓겨나는 것이었다. "아이고, 신앙도 꺾지 못하고, 죽이지도 못하고, 억울하다. 억울하다 " 그녀는 집에 돌아와 아들의 손을 잡고 하나님께 감사기도를 올렸다. 바로 그 어머니 집사의 끝까지 인내하는 신앙으로 인하여 그 아들을 포함해서 4명의 아들이 한국교회를 대표하는 목회자가 되어 수만 명, 수십만 명의 영혼을 목양하고 있다. **오병이어 예수님은 물고기 2마리와 보리떡 덩어리 5개를 놓고 감사하셨다. 그리고 십자가를 앞에 두고 감사하며, 살이 찢기고, 물과 피를 다 쏟으면서 감사하셨다. 고전 11:24에 성찬시 자기 몸을 상징하는 떡을 때어주면서 감사기도하셨기 때문에, 그는 억지로 죽으신 것이 아니다. 분명코 감사하는 마음으로 죽으셨던 것이다. 죽으면서도 감사하는 예수님의 감사정신이 사도 바울을 평생 감사 충만한 전도자로 만들었다. 사도 바울은 연약한 성도들을 위하여 감사하고, 그들 가운데 조그만 신앙이 있어도 그것을 칭찬하여 감사하였고, 또, 목숨까지도 바치는 동역자들의 사랑을 감사하였고, 죽음을 맛보는 고통 속에서도 감사하였고, 3번씩 기도한 병(病)기도가 응답되지 않았을 때에도 감사했다. 나는 지금 감사가 충만한가? 나는 구체적으로 무엇을 감사하고 있는가? 나는 얼마나 열정적으로 감사하고 있는가? **감사의 기도 감사할 때 기적이 일어나고, 감사 기도해야 기도가 응답된다는 설교를 들은 어느 女집사가 한숨을 내쉬고 있었다. 그녀의 남편은 매일 같이 술이 만취되어 늦게 귀가하는 술 고래형이었기 때문이다. 그 女집사는 나도 남편문제로 인해 감사 기도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고 한숨을 내쉰 것이다. 그 날도 인사불성이 되어 집 앞에 쓰러진 남편을 힘들게 끌어다가 겨우 눕혔다. 그 부인이 잠자리에 들기 전에 기도를 하려고 하니 자기 신세가 처량하여 하나님께 기구한 자기의 팔자타령만 하였다. "하나님, 나는 왜 이런 남자와 결혼해서 이런 고생을 해야 합니까?"하며 훌쩍훌쩍 울었다. 그러는 중에 감사 기도해야 응답이 온다는 목사님 설교가 떠올랐다. 그러나 감사조건을 찾으려고 노력해도 감사조건을 찾을 수가 없어서 "하나님, 감사조건 없는 것을 감사드립니다. "고 기도하였다. 그래도 계속 감사조건을 찾으니, 참으로 감사한 일이 있기는 있었다. 옆에서 코 골며 자는 남편을 쳐다보니 그래도 과부보다는 낫고, 언젠가는 좋은 남편이 될 가능성이 있어서 감사하고, 저토록 술에 취했어도 다른 데 안가고 집을 찾아오니 감사하고, 토요일은 술을 더 많이 마셔서, 주일 날 집 지켜줘서 감사하고, 주일 날 계속 자니 교회 나오는 데 불편하지 않아 감사하고...그 부인은 계속해서 기쁨으로 감사하였다. 갈증을 느낀 남편이 잠을 깨고 보니, 부인이 웃으며 기도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놀란 남편은 "여보, 한밤 중에 잠은 안자고 미친 사람처럼 뭐 하는 거야. 뭐가 좋아서 그렇게 싱글싱글 웃는 거야?" "여보, 당신하고 사는 것이 너무 감사해서 그래요." 부인은 이제껏 자기가 기도했던 감사조건을 남편에게 모두 말했다. 그랬더니 남편에게서 기적이 일어났다. "여보, 내가 예수 믿는 게 그렇게 소원이면, 오늘부터 예수 믿어 줄께" 10년 동안 기도해도 이루어지지 않던 소원이 단 한 번의 감사기도로 이루어 졌다..그래서 女집사는 더 기쁜 감사기도를 하나님께 드렸다고 한다.

          예수님의 아가페 사랑 예수님의 사랑은 아가페이다.

          아가페는 오래 참는 사랑이며 온유한 사랑이며 자랑하지 않는 사랑이며 교만하지 않는 사랑이며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않는 사랑이며 성내지 않는 사랑이며 악한 것을 생각치 않는 사랑이며 진리와 함께 기뻐하는 사랑이며 모든 것을 믿는 사랑이며 모든 것을 소망하는 사랑이다 나의 말 속에 아가페가 있는가? 나의 삶 속에 아가페가 있는가?

          로마 40병사의 순교

          주후 32년경 어느 겨울.. 로마 황제가 군인들을 포함하여 모든 공무원에게 이교 신전에서 제사 드리지 않으면 그 직분을 잃게 되는 칙령을 내렸다고 한다. 300년 동안 무적의 사단이었던 12사단의 대장은 모여 있는 군사들에게 그 칙령을 읽어 주었다. 그리고 다음과 같이 말했다. "12사단 군사들이여, 여러분은 여러 전투에서 용기를 보여 주었습니다. 이제 우리는 황제의 법에 복종함으로써 제국의 가이사에게 충성한다는 사실을 보여 줍시다. 내일 우리는 신들에게 제사를 드릴겁니다." 나중에, 두 명의 군인이 장군의 천막에 와서 말하기를, 이 사단에는 40명의 그리스도인이 있는데 그들은 이교 신에게 제사를 드리지 않을 것이라고 하였다. 장군은 화를 내며 대답하였다. "그들에게 말하시오, 만약 제사에 참여하면 괜찮거니와 만약 그러지 않는다면, 무기를 압수 당하고 그 직책에서 쫓겨날 것이며, 큰 고통을 당할 것이오, 깊이 생각하고 좋은 쪽을 선택하라고 하시오" 그날 밤 진영에서 40명의 그리스도인들은 시편을 읽고 찬송을 불렀다. 다음 날 아침 제사 참여를 거부하자 그들을 처형하라는 장군의 명령이 떨어졌다. 팔과 목이 묶인 채 제사를 거부한 사람들은 얼어붙은 호수 근처로 끌려갔다. 그리고 해가 지자 그들은 벌거벗긴 채 호수 한가운데로 끌려갔다. 이들의 훌륭한 전과(戰果) 때문에 그들에게는 자신들을 주장을 철회할 기회가 주어졌다. 호수 옆에는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을 부인하고 제사를 드리기로 작정한 사람을 위해 따뜻한 목욕탕이 준비되었다. 어둠 속에서 이들이 호수 가운데로 끌려가자 차가운 바람이 얼어붙은 호수 위로 불었다, 목욕탕을 지키고 있던 보초병은 호숫가에서 장작불을 피워 몸을 녹이고 있었다. 그 보초병은 그리스도인들이 얼어붙은 호수 가운데에서 찬송을 부르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그러나 밤이 깊어가자 찬송소리가 약해졌다. 그 보초병은 그리스도인들의 중얼거리는 기도소리 위로 천사의 목소리가 나는 것을 들었다. "그리스도의 좋은 군사 40명, 순교자 40명, 그리고 40개의 면류관이로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 일어났다. 천사의 찬송소리가 바뀌었다. "그리스도의 좋은 군사 39명, 순교자 39명, 그리고 39개의 면류관이로다 " 그때, 그 보초병은 발자국 소리를 들었다. 한 사람이 따뜻한 목욕탕이 있는 호숫가로 걸어 나오는 것이었다. 즉시 그 보초병은 무기를 놓은 채 소리 질렀다. "여기 내 옷을 입으시오. 내가 당신을 대신하겠소!" 그 보초병은 자기 옷을 벗고, 벗은 채로 얼어붙은 호수 가운데를 향해 뛰어갔다. 뛰어가면서 그는 노래를 불렀다. "그리스도의 좋은 군사 40명, 순교자 40명, 그리고 40개의 면류관이로다." 다음날 아침 장군은 죄수들을 끌어내라고 하였다. 얼어 죽은 시체들이 호수 한가운데 쌓여 있었다. 그 가운데는 보초병의 시체도 있었다. 그가 주님을 안 것은 그 짧은 순간밖에 되지 않았지만 그는 주님을 위하여 자신의 목숨을 바칠 정도로 깊이 사랑하여, 주님의 품으로 들어간 것이다.

          가장 행복한 사람 가장 행복한 사람은 자기 속에 있는 최고, 최선의 것을 항상 끌어 내어서 사용하는 사람입니다.

          행복과 미덕은 서로 보충합니다. 최선의 사람이 반드시 가장 행복한 사람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가장 행복한 사람은 보통 성공자로서 생활상의 기술에 있어서 최선의 사람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에게 최고, 최선입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빛과 진리와 미를 가지고 표현하십시오. 그렇게 하면 당신은 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 중의 한 사람이 될 것입니다. 당신 속에는 무서운 힘이 숨어 있습니다. 이 힘에 대한 굳은 믿음을 가질 때 행복은 당신을 찾아옵니다. 그렇게 하면 당신의 모든 꿈은 실현될 것입니다. 아침에 눈을 뜨면 당신 스스로에게 이렇게 말하십시오 "나는 오늘 행복을 택한다. 나는 오늘 성공을 택한다. 나는 모든 사람에게 사랑과 선의를 택한다. 나는 오늘 평화를 택한다." 이 긍정적인 말에 믿음으로 행할 때 행복은 스스로 얻게 될 것입니다. **가 정 유명한 불란서의 농민 화가였던 밀레가 그린 "만종"이라는 그림이 있습니다. 원래 70달러밖에 되지 않는 물감과 종이를 들여서 그린 것인데, 나중에 어느 미국인이 12만 5천달러에 사 갔습니다. 얼마 후에 불란서 사람들이 이 명화를 다시 본국으로 찾아와야겠다는 생각에서 15만 달러를 주고 사다가 르부르 미술관에 걸어 놓았습니다. 밀레의 "만종"은 어느 젊은 부부가 하루 종일 땀 흘려 일하다가 멀리 예배당의 종소리가 들려 올 때에, 괭이와 삽을 놓고 두 손을 모으고 하나님께 기도 드리는 모습을 그린 것입니다. 이 명화 속에 세 가지 신성함이 있는데 첫째는, 가정의 신성함이요, 둘째는, 노동의 신성함이요, 셋째는, 종교의 신성함이라는 것입니다. **무너진 도덕 이슬람교에서는 법적으로 5명~7명의 아내를 두는 것을 허락하고 있습니다. 일곱의 아내를 거느리고 있는 사람은 매일 한 아내씩 돌아가면서 한 주일에 한번 꼴로 집에 와서 살게 됩니다. 돈이 좀 있는 사람은 한 500불 정도의 위자료를 주면 언제든지 이혼할 수 있습니다. 어떤 돈 많은 부자는 73년을 세상에 살면서 25번 결혼을 했고, 그 자녀가 83명이었으며, 세상을 떠나기까지 결혼한 부인은 13명이었습니다. 이슬람교의 사회가 이러합니다. 아버지가 아들을 위하여 며느리 감을 보러 갔다가 마음에 들면 자기가 결혼해 버리고, 어떤 때는 아버지는 언니를 부인으로 맞고, 아들은 그 집 동생을 부인으로 맞는 생활을 합니다. 완전히 도덕의 질서가 무너진 사회로 전락해 버린 것입니다. 이슬람교의 사회입니다. **비극적인 삶 미국의 한 가정에 남자 아이가 태어났습니다. 어머니는 몹시 거친 여자로서 세 번 결혼했는데, 두 번째 남편이 마누라에게 매 맞기가 싫다며 헤어지고 세 번째 결혼하여 살고 있는 것입니다. 이 아이의 아버지는 아이가 태어나기 며칠 전에 심장마비로 죽었습니다. 어머니는 자기 생활에 바빠 아이를 돌보지 못했고,아이는 사랑다운 사랑을 못받고 자랐습니다. 13세 때 지도교사는 "이 소년은 사랑이란 말조차 모르는 아이와 같다"는 심한 평을 학생카드에 남겼습니다. 소년시절 여학생과는 사귀지 못하고 남학생과는 자주 싸웠습니다. I.Q가 상당히 높았으나 성적은 낙제점이었습니다. 고등학교를 중퇴하고 해병대에 들어갔는데 여기서도 쫓겨났습니다. 절망에 빠진 청년은 외국에 가서 살며 사생아인 어느 여자를 만나 결혼을 했고 미국으로 돌아와 두 아이를 낳았습니다. 그러나 이 여자도 남편이 싫어져 집에서 내쫓고 말았습니다. 남편은 부인 앞에 무릎을 꿇고 빌었으나, 청년의 고약한 성격을 너무나 잘 아는 여자는 끝내 함께 살 것을 거절했습니다. 오기에 찬 청년은 돈 벌 결심을 하고 이튿날부터 일을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그것도 며칠가지 않았습니다. 1963년 11월22일 평화스럽게 행진하던 케네디 대통령을 쏘아 죽였습니다. 이것은 오즈왈드(L.H.Oswald)의 비극적인 24년간의 생애입니다. **가짜 시장이나 가게 앞을 지나다 보면 다음과 같은 글귀를 종종 보곤 합니다. "정말, 순, 진짜 참기름..." 참기름이란 상품명 위에 형용하는 말이 셋이나 붙어 있었습니다. "정말, 순, 진짜" 오죽 가짜가 많이 나와 돌면 이런 말이 생겼겠습니까? 우리 사회에 가짜가 섞이지 않은 곳이 거의 없습니다. 가짜 식품, 가짜 화장품, 가짜 청심환, 가짜 공무원, 가짜 경찰, 가짜 스님...가짜 전도사도 있다고 들립니다. 상점에 들어가서 물건을 사더라도 미국 사람은 "돈을 얼마나 내야 그 물건을 살 수 있느냐?" 영국 사람은 "그 물건이 얼마나 질기냐?" 프랑스 사람은 "최신 유행이냐, 아니냐" 일본 사람은 "이 물건 갖다 팔면 얼마의 이익이 남느냐" 한국 사람은 "이 물건 진짜냐, 가짜냐"를 먼저 묻고 난 다음 물건의 값을 흥정한다고 하는 웃기는 일화까지 있다고 합니다.

          "래리 에르진"이란 배가 해상에서 파선되어 가라앉을 때 많은 사람들이 물에 빠져 죽게 되었다고 합니다.
          저마다 날 좀 살려 달라고 아우성을 쳤으나 모든 사람들은 자기 하나 살기에 바빠 그들을 도외시하였습니다.
          그때 "스펜서"라는 젊은 학생이 물 속에서 허우적거리는 사람들을 한 명, 한 명 건져내어 모두 17명을 구출하였다고 합니다.
          스펜서가 노인이 되었을 때 어떤 사람이 묻기를 "선생님은 해상사고에서 17명을 건졌다지요, 선생님에게 몇 사람이 찾아와 감사하다고 했는지요?" 하고 물으니 대답하기를 "한 사람도 없었습니다."라고 침통하게 대답했습니다.
          "열 사람이 다 깨끗함을 받지 아니하였느냐 그 아홉은 어디 있느냐?"(눅 17:17)

          대재벌 하이네

          하이네라는 사람은 미국 10대 재벌가운데 한 사람입니다. 이 사람이 한때 사업이 잘 되어서 돈을 많이 벌었지만 하나님께 감사를 모르는 사람이었습니다.
          기고만장하여 높아만 가던 그에게 어려운 시련이 몰아치니까 사업이 무너지기 시작했습니다.
          일이 년 내에 완전히 망해버리고 말았습니다.
          빚더미 위에 올라 앉았습니다.
          이 사람은 아무도 모르게 돈 천만원을 갖고 있다가 자기가 감옥에 들어가면 가족들이 잠시나마 생계를 유지할 수 있도록 숨겨 두었습니다.
          감옥에 들어갈 날이 가까워오자 하나님이 두려워지기 시작했습니다.
          이때 불 같이 기도할 마음이 생겨나서 성전 들어가 지난 날 축복해 주셨을 때 감사하지 않은 것을 눈물로 회개했습니다.
          숨겨놓은 돈 천만원을 가족에게 주지 않고 하나님께 감사헌금으로 바쳤습니다.
          하이네가 실패한 사실은 온 세상이 알고 교회가 알고 있는데 돈 천만원을 헌금한 것을 보고 당회가 열렸습니다.
          그를 불러서 사연을 물으니까 울면서 사실을 고백했습니다.
          당회에서는 그를 살려내기로 결정했습니다.
          빚쟁이들의 명단을 써 달라고 해서 그들을 만나 시간을 연장해 주면 우리 모두 힘을 합쳐 갚아줄테니, 감옥에 들어가게 만은 하지 말아 달라고 부탁했습니다.
          사람들이 사정 이야기를 다 듣고 요구를 다 들어 주었습니다.
          그로부터 하이네는 뜨거운 성금으로 모여진 돈을 가지고 조그만 사업을 시작했습니다.
          이제부터는 내 사업이 아니라 주님의 사업이라는 확신을 가지고 감사와 감격에 넘쳐 피땀을 흘려 노력한 결과 세계적인 대 재벌이 되었다고 합니다.

          감사의 차이
          어떤 사람은 자기의 가는 평탄한 길에 조그마한 구렁텅이만 있어도 하나님을 원망하고 사람을 망한다. 어떤 사람은 자기의 가는 험하고 캄캄한 길에 조그마한 빛만 비쳐도 하나님의 주시는 자비로우신 빛이라 하여 감사의 기도를 드린다. 화려한 궁전에 살면서도 삶이란 왜 이렇게 괴로우며, 기쁜 일은 하나도 없느냐고 얼굴을 찡그려 불평하는 사람이 있으며, 작은 오막살이에 살면서도 우리를 지키시는 하나님 아버지의 한없는 은혜와 사랑을 진심으로 감사하는 사람이 있다. **겸 손 프랑스 소르본느 대학에 라비스 박사가 그 대학 강당에서 박사의 교육 50주년 기념식이 열렸을 때 많은 손님들이 입추의 여지가 없이 모여 기념식을 성대히 거행하게 되었다. 그때 라비스 박사는 답사를 하러 강단에 올라서 보니 학생들이 앉은 자리에 로앙가니 프랑스 대통령이 학생들과 함께 앉은 것을 보고 너무 황송히 생각되어 단상으로 모시려 하였으나, 대통령은 거절하며 말하기를 "나는 선생님께 배운 제자로서, 오늘 이 영광스러운 식전에 대통령의 자격으로 온 것이 아니라, 제자의 자격으로 축하하러 왔습니다." 그러자 라비스 박사는 다시 말하기를 "우리가 이렇게 겸손하신 대통령을 모시었으니 앞으로 우리나라는 크게 부강하리라."라고 하였습니다. **머리를 숙이시오 어느 날 벤자민 프랭클린이 이웃집에 갔었는데, 방문이 끝난 후 그 이웃 사람이 집 밖으로 나가는 지름길을 가르쳐 주었습니다. 그 쪽에는 나즈막한 들보 하나가 중간에 있었습니다. 주인은 "머리를 숙이세요"라고 외쳤지만 너무 늦어서 프랭클린은 그만 머리를 부딪히고 말았습니다. "젊은이, 자네가 이 세상을 살아갈 때 머리를 자주 숙이면 숙일수록 그 만큼 부딪히는 일이 없을 걸세" 이 말은 프랭클린의 마음속에 깊이 새겨졌고, 항상 이 말을 기억하고 머리 숙일 것을 생각했다고 합니다. **조만식 장로님 주기철 목사님의 스승이고, 주기철 목사님 교회의 장로로 시무하시던 조만식 장로님의 이야기입니다. 조 장로님은 오산학교에서 교장으로 있을 때, 주 목사님을 가르쳤습니다. 어느 주일...조 장로님이 예배 시간이 다 되도록 손님과 이야기 하다가 예배에 조금 늦게 들어왔습니다. 주 목사님은 설교를 하다가 "조 장로님, 오늘은 의자에 앉지 마시고 서서 예배를 드리시오"하고 호령을 했습니다. 이럴 때 보통 사람 같았으면 그냥 나가든가, 의자에 앉아서 목사에게 욕을 하며 험한 얼굴을 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조 장로님은 그대로 서서 예배를 드렸다고 합니다. 나중에 주 목사님이 설교를 마치고는 "서 계시는 조 장로님, 기도해 주십시오"하니 기도하시는데 "하나님, 나의 죄를 용서해 주옵소서. 거룩한 주일에 하나님 만나는 것보다 사람 만나는 것을 더 중요시한 죄를 용서하옵소서... ... 주의 종의 마음을 상하게 함을 용서하여 주옵소서..." 기도를 드리는 모습과 서서 예배를 드린 장로님을 본 교우들은 큰 감동을 받았고 회개하는 기도에 울음바다가 되었다고 합니다. 겸손한 장로님의 신앙을 우리는 본 받아야 하겠습니다. 그 당시 얼마나 자존심과 인격의 손상을 느꼈을까요? 그러나, 기도와 순종으로 극복했을 때 역사의 위대한 인물로 빛날 수가 있었습니다.

          타이타닉의 교훈 영화로 더 잘 알려진 영국은 "타이타닉"은 세계에서 가장 호화스러운 배로 "가라앉지 않는 차"를 만들었다고 자랑했습니다.

          이 배가 미국을 향해서 갈 때 유럽의 많은 귀족들, 장관들, 그리고 훌륭한 사람들이 밤새도록 무회를 열었습니다. 그 배가 대서양 한 복판에 도착했을 때 여객선 타이타닉호의 침몰사고가 일어났습니다. 이 사고로 말미암아 1972년에 1516명이 바다에 장사되었습니다. 도저히 침몰하지 않을 것 같이 아름다운 배가 킨스다운을 출항한지 3일 후에 항로에 빙산이 있다는 경고신호가 들어왔습니다. 그러나, 무선사는 이 전문을 무시했던 것입니다. 이 배는 침몰할 수 없는 배라는 말을 항상 들어왔던 입니다. 즉 고정관념이 철저히 배여 있었습니다. 얼마 후에 두 번째 경고신호가 꼭 같은 전문으로 어 왔습니다. 무선사는 그 전문을 받았으나 그것을 메모하지 않았습니다. 세 번째 전문이 들어왔습니다. 이번에는 무선사가 그 전문을 메모해서 선장에게 전달했습니다. 선장은 전문을 읽고 아무 말도 없이 그것을 화이트 스트라인 회사의 전무에게 전했고 그는 그것을 읽고 휴지통에 던져 버렸습니다. 한 시간 후에 4번째 경고신호가 들어왔습니다. 이번에도 선장은 이게 말했습니다. "빙산이 나타나는지 잘 살펴보라고 말하라" 모두 그것뿐이었습니다. 타이타닉호는 어둠 속을 22노트의 전속력으로 항진했던 것입니다. 다섯 번째 경고신호가 그 날 저녁 9시 30분에 들어왔습니다. 그래도 배의 속력을 줄이지 않고 22노트로 전진하고 있었습니다. 밤 11시 10분에 다른 배의 부서지는 소리가 무선실에 들어왔습니다. "여보세요 여기는 캘리포니안 입니다. 나는 당신을 잘 모릅니다. 그러나 우리가 빙산지대에 갇혔다는 것은 확실합니다." 이 때 타이타닉호의 무선사는 이렇게 소리쳤습니다. "입 닥쳐, 우리 항로에 혼선을 일으키지 말아" 그리고는 그와의 연락을 끊어 버렸습니다. 10분후 파수꾼이 소리쳤습니다. "빙산이다" 그러나 이제는 아무런 조치를 취할 수가 없었습니다. 너무 늦었던 것입니다. 결국 이 배는 침몰하고 말았습니다. "예수, 믿으세요!" 우리에게 이런 경고의 메시지는 항상 날아옵니다. 그러나 그것을 무시해 버리는 일이 많습니다. 안타깝게도 많은 사람들은 지옥에 이르러서야 그것을 깨닫습니다.

          고요한 밤 거룩한 밤

          1818년 12월 23일오스트리아의 조그만 마을 오베른 도르프에 있는 한 예배당에 이상한 일이 일어났다.
          그것은 다름 아닌 생쥐 한 마리의 장난이었다.
          생쥐는 예배당에 있는 풍금에 달려들어 바람통을 갉아 먹은 것이다.
          때마침 성탄절 성가를 찬미하러 12명의 성가대원들이 모였는데 반주자가 풍금을 타려 하였으나 생쥐에게 바람통을 뚫린 풍금에서는 소리가 나오지 않게 된 것이다.
          하는 수 없어서 반주자 구르버 선생은 모르 목사님의 성시 한 구절을 임시변통으로 작곡하여 기타에 맞추어 이튿날 성탄 축하 찬양을 가까스로 하게 되었다.
          그 찬양이 바로 유명한 109장 찬송 "고요한 밤 거룩한 밤"이다.
          그런데 이 성탄 노래는 한 장의 휴지로 사라질 뻔하였는데, 얼마 후 풍금을 고치러 왔던 악기 수리사 마우리처에 의해 재평가되어 다시 애창되고, 이 동네 저 동네, 성가 애창곡이 되고, 또 국경을 넘어 다시 독일 사람들이 애창하여 오늘날 전 세계 그리스도인들에게 제일 많이 불려지는 성탄 명곡이 되었다고 한다.
          이렇게 유명한 성탄 찬송을..한 마리의 생쥐 장난을 통해서 이 세상에 애창곡이 되었다는 것은 하나님의 기적이 아니고서야...


          밀레니엄 전쟁준비

          1945년 8월 6일 히로시마에 인류 최초의 원자탄이 떨어졌습니다.
          그 피해를 보면 히로시마의 시민이 55만으로, 그 자리에서 죽은 자의 수가 10만이며, 54년이 지난 지금에도 원자병 환자가 2만명이나 됩니다.
          그리고 그 폭심을 준비한 반경 2km는 그대로 보존하여 그 당시 죽은 10만명의 시체를 그대로 묻어 놓고 "푸른 평화의 공원"이라 명명해 놓았습니다.
          물론 폭심지대를 제외하고 다른 데는 다 복구했습니다.
          그리고 8월 6일에서 15일 사이에 세계평화대회라는 대회는 모두 그곳에서 합니다.
          그 공원 입구에 모자상이 있는데 어머니 품안에 안겨있던 애기가 그 당시 살아났다는 것입니다.
          원자박물관, 원자기념관이 있는데 그 곳에는 너무 비참한 장면을 다 그대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렇게 무서운 원자탄인데, 핵을 융합해서 만든 수소 폭탄은 그보다 몇 만 배의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수소폭탄과 히로시마에 떨어진 원자탄을 비교하면 원자폭탄은 딱총에 불과합니다.
          미국이 보유한 핵분열성 물질의 총량이 1.3비치로서1비치는 TNT(다이나마이트) 3조 톤에 해당하는 폭발력을 가지고 있다고 합니다. 이것은 지금 세계 인구를 50억으로 치면 1인당 TNT 1,000톤씩 할당되는 숫자로서 한 사람당 트럭 200대 분의 탄약이 돌아간다는 계산이 나옵니다. 그 만큼의 폭탄을 세계인구가 짊어지고 있습니다.





          미국 조지아대학의 토머스 스탠리(Thomas Stanley) 교수는 베스트셀러 《백만장자 마인드(The Millionaire Mind)》에서 20년에 걸쳐 미국의 '알짜 부자'를 연구한 흥미로운 통계자료를 보여준다.

          그는 미국의 백만장자 733명을 대상으로 표본 조사와 대면 인터뷰를 진행했다.
          그가 이 조사를 진행한 1990년대 중반에는 미국 가정의 약 4.9%만이 100만 달러 이상의 순자산을 가지고 있었다.
          우선 그는 백만장자들에게 어떤 기준으로 자신의 일을 골랐는지 물었는데 무려 81%가 적성과 능력, 즉 흥미와 재능에 부합하는 일을 선택했다고 답했다.
          그렇다면 그들은 어떻게 흥미와 재능에 맞는 일을 발견할 수 있었을까?
          흥미롭게도 소위 '유망 직종'을 선택해 성공했다고 답한 이들은 단 5%에 불과했다.
          그에 비해 '우연히' 천직을 발견했다는 응답이 29%에 달했고, 27%는 '시행착오'를 거쳐서 천직을 찾았다고 답했다.
          이전 직업과의 관련성을 통해서 천직을 발견한 사람은 12%를 차지했다.
          흔히 성공하려면 자신이 좋아하고(흥미), 잘할 수 있는(재능) 일을 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위의 연구 결과도 이를 뒷받침하고 있지요.
          그런데 문제는 어떤 일이 자신이 좋아하고 잘할 수 있는 일인지, 다시 말해 자신의 천직이 무엇인지 알기가 쉽지 않다는 데 있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너는 청년의 때에 너의 창조주를 기억하라 곧 곤고한 날이 이르기 전에, 나는 아무 낙이 없다고 할 해들이 가깝기 전에 해와 빛과 달과 별들이 어둡기 전에, 비 뒤에 구름이 다시 일어나기 전에 그리하라" (전도서 12:1-2)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전도서 1장

          1월 14일(토)

          모든 것이 헛되도다(전도서 1:2)

          전도자가 이르되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3절. 사람이 아래서 수고하는 모든 수고가 자기에게 무엇이 유익한고.

          빌 허(虛) - 虛虛虛虛虛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핫되도다!

          사람 인(人) - 人人人人人
           사람이면 다 사람이냐 사람이 사람다워야 사람이지!

          헛됨(헤벨) : 유익(有益, 이트론)


          6953. 전도자(코헬렛. qôheleth) קֹהֶלֶת

          1. 소집자,  2. 전도자
          어원 / 6950에서 유래한 능동태 분사 여성형
          관련 성경 / 전도자(전 1:1, 2, 12, 7:27, 12:8, 9, 10, 행 21:8, 딤후 4:5).
          구약 성경 / 7회 사용

          * 6950. 함께 모으다 /  카할(qâhal)  קָהַל
          1. 함께 모으다,  2. 히필형 : 모으다
        1. 관련 성경 / 모이다(레 8:4, 대하 20:26, 에 9:18), 함께모이다(에 8:11), 모여들다(렘 26:9), 모으다(민 1:18, 신 4:10, 대상 13:5), 모아놓다(민 16:19), 소집하다(왕상 8:1, 대상 28:1, 대하 5:2),잡아 가두다(욥 11:10).

        2. 구약 성경 / 39회 사용

          1892. 헛되다(헤벨. hebel) הֶבֶל

          1. 숨,  2. 입으로 하는 호흡,  3. 이사야 57:13
          어원 / 1891에서 유래
          관련 성경 / 허무한 것(신 32:21, 왕하 17:15, 렘 14:22), 헛된 것(왕상 16:13, 전 1:2, 애 4:17), 무익한 사람(욥 27:12, 시 31:6, 슥 10:2), 망령됨(잠 13:11), 기운(사 57:13), 안개(잠 21:6), 헛것(욥 7:16,시 144:4, 렘 10:15).
          구약 성경 / 73회 사용

          * 1891.  하발(hâbal) הָבַל
          1. 숨을 내쉬다,  2. 행하다,  3. 히필형 : 허영에 빠지도록 유혹하다. 숨을 내쉬다, 호흡하다, 증발하다

          관련 성경 / 허망하다(왕하 17:15, 시 62:10), 무익하다(욥 27:12), 헛되다(렘 2:5, 23:16).
          구약 성경 / 5회 사용

          3504. 유익(이트론. yithrôwn) יִתְרוֹן

          1. 소득,  2. 탁월함

          발음 / 이트론(yithrôwn)

          어원 / 3498에서 유래

          관련 성경 / 유익(전 1:3, 5:16, 10:10), 뛰어남(전 2:13), 소용(전 10:11), 이익(전 3:9, 5:9).

          구약 성경 / 10회 사용

          뜻풀이부

          • 1.  명사, 남성 소득, 이익, 수당, 보수, 전 1:3, 2:11, 3:9, 5:8(9),15(16), 10:10
          • 2. 명사, 남성 탁월함, 걸출함, 뛰어남, 전 2:13.

           

          헛되고 헛되며 ... 헛되도다 -

          '
          헛되고'의 히브리어 '헤벧'(헤벨. hebel) הֶבֶל)은 '숨', '증기', '공허함', '속이 텅빔' 등을 뜻한다.
          그리고 '하벧 하벧림'(헛되고 헛되며, )은 문자적으로 '헛된 것들 중의 헛된 것'(vanity of vanities)이다.
          이것은 '헛됨'을 최상급으로 강조하는 히브리인들의 관용구적인 표현이다.

          이와 같은 관용구적인 표현은 이외에도 '지성소'(the holy of holies, 출 26:33), '아가'(song of songs, 아 1:1), '만왕의 왕'(King of kings, 계 19:16), '만주의 주'(Lord of lords, 계 19:16) 등이 있다.

          한편 본절에서 솔로몬과 같이 지혜롭고(1:16) 부유하며(2:4-8), 수많은 첩들을 둔 자가 '모든 것이 헛되다'라고 한 것은 그가 한때 이방 여인과 연락(宴樂)하다가 하나님의 책망을 받고, 하나님을 떠난 인생의 허무함을 절실히 느낀 자로서 이를 고백한 것으로 보인다.

          전도서의 저자는 "솔로몬(שְׁלֹמֹה Solomon. 평화)"입니다. 
          전도자는 해 아래 있는 모든 것이 헛되어서 인생을 사는 것이 무슨 유익이 있는지 묻고 있습니다.

          여기 헛됨과 유익(남는 것)이라는 두 가지 개념이 있습니다.
          헛되다는 것은 문자적으로 ‘사라져버리는 숨' 또는 '바람’인데 로마서 8:29에서 “피조물이 허무한데 굴복하여”라고 말하는 것과 같은 개념이라고 하겠습니다.

          허무한 이유는 궁극적으로 아무 것도 남는 것(유익)이 없기 때문입니다.
          유익이라는 말은 주님께서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라고 하셨을 때 사용한 '유익'과 같은 개념입니다(막 8:36).

          전도자는 먼저 자연계의 네 가지인 땅, 해, 바람 그리고 강들에 관심을 보입니다.
          인간은 한 세대가 가고 한 세대는 오지만, 땅도 그대로 있고 해와 바람과 강들도 그 존재가 유지됩니다.
          여기서 전도자는 자신의 의미에 대한 어떤 증거를 발견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모든 만물이 피곤하다는 것(무상함)을 사람이 말로 다 말할 수는 없나니 눈은 보아도 족함이 없고 귀는 들어도 가득 차지 아니하도다”라고 결론을 내립니다.
          자연계에 있는 만물의 존재는 영원하고 그 진로는 예외 없이 규칙적이고 일정합니다.
          여기에 새로운 것은 없습니다.
          그러면 새롭다고 말하는 사람들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인간이 기억력이 약해서 이전의 것들을 기억하지 못하기 때문에 그렇게 말할 뿐입니다.
          정말 그러하다면 지루하기 짝이 없는 인생이 무슨 의미가 있는 것일까요?
          수고해서 남는 것이 무엇일까요?
          전도자는 계속해서 질문을 던집니다.

          전도자는 자신의 상황에 대한 일반적 묘사뒤에 상세한 언급을 하고 있습니다.
          전도자는 자기의 지혜로 모든 것을 관찰하고 연구해보았지만, 하나님께서 인생들에게 주신 일이 한낱 견딜 수 없는 고통이라는 사실을 발견했을 뿐입니다.
          이것은 타락한 인간의 실존에 대한 정확한 묘사입니다.
          또 세상이 제시할 수 있는 선이나 유익이 있다면, 그것도 다 헛되어 바람을 잡으려는 것과 같다고 말합니다.
          이 세상은 인간의 죄와 함께 타락하여 허무함에 굴복하게 되었습니다.
          인간은 자기 힘으로 구부러진 것을 곧게 할 수 없고 모자란 것을 셀 수 없는 존재입니다.

          전도자는 자신이 얻은 결론을 더욱 확증하기 위하여, 자신이 얻은 지혜와 지식을 언급합니다.
          결국 하나님을 경외함으로부터 오지 않는 지혜는 유익과 평안을 주지 못하고 도리어 근심만 더할 뿐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타락한 세상에 사는 타락한 인간이 가진 지혜의 한계와 본질입니다.

          전도자의 관찰과 결론에 동의하지 않을 수 있을까요?
          이러한 무의미함과 유익 없음이 우리 인생에 피곤과 근심을 더하고 있다는 것을 누가 부인할 수 있을까요?
          타락한 인생의 의미는 오직 하나님 앞에 나올 때, 하나님의 형상이 회복될 때, 하나님께서 의미를 부여해주실 때에만 회복될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실로 하나님 없이 살아가는 세상의 모든 사람들을 향해서 우리가 복음을 전해야 할 이유입니다.
          하나님만이 우리 인생의 유일한 의미와 가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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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월 27일(금)

          사람의 본분(전도서 12:13)


          죽음이 당신을 덮치기 전에 하나님을 기억하라

          인생을 지혜롭게 잘 사는 길은, 죽을 날을 생각하고 창조자를 기억하는 것이라고 전도자는 말합니다(1~2). ‘기억한다.’(종종 ‘생각하다’로 번역된)는 단어는 단순히 잊었던 것을 떠올리는 것이 아니라, 의지적 결단, 결정적 행동을 수반하는 적극적이고 동적인 동사입니다. 가령, 하나님께서 한나를 생각하셨다(삼상 1:19)는 말은 한나를 잊었다가 기도를 듣고 다시 그녀를 기억하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한나를 위해 일하시겠다고 결정하셨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기억하시고 생각하신다는 말씀은 엄청난 은혜의 표현인 것입니다.

          전도자가 아직 죽음이나 몸이 노쇠할 것도 생각하지 않고 살아가는 청년(넓은 의미로 대부분의 사람을 포함한다)에게, 창조자 하나님을 기억하라고 하는 말은 힘이 있을 때 창조자를 섬기고, 그분의 영광을 위해서 힘써 살아가라는 권고인 것입니다. 죽음이 오기 전에, 육신이 마음대로 움직여지지 않는 날이 오기 전에 말입니다. 2절이 이런 죽음의 날을 설명합니다(2).

          인간의 육신은 점점 약해질 것입니다(3~7). 3~6절은 인간의 육신이 점점 쇠약해질 것을 시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월터 카이저 2세(Walter C. Kaiser Jr.)의 설명입니다.

          집을 지키는 자들이 떤다(3)- 노년에 중풍 또는 쇠약함으로 수족이 떨린다.

          힘 있는 자들이 구부러진다(3)- 쇠약해서 허리와 다리가 굽고 무릎이 흔들거린다.

          맷돌질하는 자들이 적으므로 그칠 것이다(3)- 이가 음식을 먹을 힘을 잃는다.

          창들로 내다보는 자가 어두워질 것이다(3)- 눈의 시력을 잃고 동공의 수축 이완이 잘 되지 않는다.

          길거리 문들이 닫혀질 것이다(4)- 입술이 이가 없으므로 입안으로 오므라든다.

          맷돌소리가 적어질 것이다(4)- 이가 없으므로 부드러운 음식만 먹을 수 있다.

          새의 소리로 말미암아 일어날 것이다(4)- 아침에 들리는 아주 작은 소리에도 잠을 깬다.

          음악하는 여자들은 다 쇠하여 질것이다(4)- 음악과 노래를 만들어 즐길 수 있는 능력도 쇠할 것이다.

          그런 자들은 높은 곳을 두려워할 것이며 길에서는 놀랄 것이다(5)- 그는 고공공포증에 시달리며 전에 자주 다니던 골목길을 더듬거리며 다니지 않을까 두려워한다.

          살구나무가 꽃이 필 것이며(5)- 머리가 나이와 함께 백발로 변한다.

          메뚜기도 짐이 될 것이며(5)- 노인이 지팡이를 짚고 걸을 때 절뚝거리는 걸음걸이를 묘사하는 것이다.

          정욕이 그치리니(5)- 모든 성욕과 욕망을 상실한다.

          조문객들이 거리로 왕래하게 됨이라(5)- 말 그대로이다.

          은 줄이 풀리고(6)- 두뇌와 척수를 연결해주는 척수가 창백해져 은빛처럼 된다.

          금 그릇이 깨지고(6)- 그 모양과 색깔로 보건대 두뇌를 지칭하는 것 같다.

          항아리가 샘 곁에서 깨어지고(6)- 절망한 마음, 즉 항아리 모양의 그릇이 부서지고 깨어지고 지탱해주는 모든 피가 흐르지 않는다.

          바퀴가 우물 위에서 깨지고(6)- 양수기처럼 끊임없이 피를 전신으로 운반하는 정맥과 동맥의 전체계가 심장이 멈추자 중단된다.

           

          세상 모든 사람이 이런 날을 만나게 될 것인데, 이 날이 불현듯 올 것을 알지 못하고 살아가는 사람은, 결코 창조자를 위해서 살아갈 시간을 가지지 못할 것입니다. 그의 미래는 위험하고 비참할 것입니다. 결국 몸은 썩어서 흙이 되고, 그 영혼은 하나님을 뵙게 될 것입니다(7). 마지막 날에 하나님께서는 오직 하나님을 경외한 영혼들에게 부활의 영광스러운 몸을 주시고 영생하게 하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인생을 헛되이 낭비하지 말고 하나님을 경외하십시오(8~14). 이 사실을 알지 못하고 살아가는 수많은 인생은 얼마나 어리석고 헛된 인생입니까! 그리고 전도자는 다시 한 번 그런 인생의 헛됨을 표현합니다(8). 전도자는 자신을 3인칭으로 묘사하면서 지혜롭다고 하고 그가 참된 지식을 가르쳤고 또 그 지식을 묵상하고 연구하였다고 말합니다(9). 자신 또한 진리의 말씀을 추구하였습니다(10). 그러나 그는 허무주의나 염세주의나 쾌락주의를 부추기려고 하지 않습니다.

          지혜자가 전해주는 진리의 말씀은 마치 찌르는 채찍 같고 잘 박힌 못과 같습니다(11). 이것은 당시 목자들이 소들을 채찍으로 움직이게 하고 텐트를 치기 위해서 못을 땅 속에 깊이 박는 것을 비유한 말입니다. 진리의 말씀은 사람을 움직이게 하고(창조자를 위해서 살게 하고), 그들의 인생관을 확실하게 조이는 못의 역할을 합니다.

          진리의 말씀은 경계(충고와 훈계)의 역할을 합니다(12). 많은 책과 지식은 사람을 피곤하게 하지만, 진리의 말씀은 사람을 경계하여 옳은 길을 선택하도록 지도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전도자가 주고 싶은 교훈은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 명령을 지키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사람의 마땅한 본분입니다(13).

          하나님이 주신 삶을 즐거워하고, 그 삶에 주신 작은 선물이라도 즐거워하며, 모든 순간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살아가야 합니다. 또한 언젠가는 하나님 앞에 서게 될 날이 올 것을 알고, 또한 하나님 앞에서 모든 행위와 은밀한 일이 드러나게 될 것을 알고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14). 이것은 우리 인생을 고통스럽게 하는 것이 아니라 인생을 제대로 즐기며 살게 하는 힘이 됩니다.

           

          저희 인생이 죄로 말미암아 고통과 염려와 슬픔이 끊이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주께서 주신 인생을 즐기며 살아가도록 허락하옵소서. 늘 창조자 하나님을 기억하고 경외하며, 그 명령을 지키고, 하나님의 영광을 구함과 동시에 하나님께서 주신 인생을 기쁨으로 살게 하옵소서. 비록 고통 가운데, 시험 가운데 있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을 향한 믿음이 흔들거리지 않도록 영원토록 은혜로 지켜주옵소서.




          1월 26일(목)

          청년의 때(전도서 11:10)

          청년의 때에 아라비아 숫자 1자의 난외 주석을 참조하면 "새벽" 이라고 합니다.
          청년의 때는 다른 말로 새벽이라고 하겠습니다.

          불확실한 미래에 대한 두려움 가운데서도, 현재를 기쁨으로 사는 것.

          ‘먹을 것을 물 위에 던지라’고 말합니다(1절).
          먹을 것을 물에 던졌으니, 마땅히 그것을 되돌려 받으리라는 기대감을 가지기가 어렵습니다. 그러함에도 여러 사람들에게 나누어 베푸는 인생이 되라고 하시는 것입니다(2절).이 말씀은 지금 당장 보상을 받을 수 있는 일이 아닐지라도, ‘만사를 성취하시는 하나님’을 인식하면서, 주변 사람들에게 오늘 은혜를 베푸는 삶을 살라는 권면입니다.

          이런 일은 하나님께 대한 인식과 신뢰가 없이는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이 말씀들을 기억하십시오. “가난한 자를 불쌍히 여기는 것은 여호와께 꾸이는 것이니 그 선행을 갚아주시리라(잠 19:17).”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불의의 재물로 친구를 사귀라 그리하면 없어질 때에 저희가 영원한 처소로 너희를 영접하리라(눅 16:9).”

          4~6절은 환경을 탓하는 사람들과 확실한 결과나 조건을 고집하는 사람들을 책망합니다. 비구름을 지나치게 염려하여, 파종조차 하지 못하는 농부는 어리석은 자입니다. 이런 자는 만사를 성취하시는 분이 하나님이심을 알지도, 믿지도 못하는 자입니다. 믿음을 가진 사람의 삶은 성공과 실패의 결과를 하나님께 맡기고, 파종을 하는 사람입니다. 신자는 미래가 불확실한 상황에서도 결코 주저앉아있지 않으며, 성실하게 맡은 일을 감당하는 사람입니다. 당신은 실패와 성공의 결과를 하나님께 맡기고 날마다 씨를 뿌리고 있습니까? 아니면 낙심하여 주저앉아있습니까?

          빛이 있고 해가 있다는 것, 햇살을 볼 수 있다는 것은 실로 놀라운 경이가 아닐 수 없습니다(7). 우리는 경이로운 빛 아래서, 현재를 즐거워하면서 살아야 하지만, 항상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이 있는데, 캄캄한 날들, 즉 우리가 무덤에 들어갈 날이 반드시 온다는 사실입니다(8). 그 때 우리는 심판자이신 그리스도 앞에 모두 서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청년은 젊은 시절을 즐거워하고 원하는 대로 행함으로 즐거움을 누릴 수 있지만, 하나님이 모든 것을 심판하실 것이란 사실도 함께 기억하면서 살아야 합니다(9). 이 세상에서 하나님이 누리게 하시는 것들의 한계를 인식하고, 그 즐거움을 주신 분이 하나님이심을 기억하고 살라는 말씀입니다.

          전도서가 가르치는 참된 행복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현재를 즐거워하면서(희락을 누리면서) 동시에 미래를 내다보는 것입니다. 미래를 바라본다는 것은, 만사를 성취하시는 하나님을 기억하고, 현재와 미래의 불확실한 상황 가운데서도, 오늘 하나님이 주시는 기쁨과 즐거움(여기에는 노동의 즐거움도 포함되어 있다)을 누리라는 것입니다. 미래에 대한 두려움과 불확실성에 대한 염려가 당신의 현재의 즐거움을 앗아가지 못하게 하십시오. 하나님이 주신 미래의 불확실성은 믿음을 강화하기 위해 주신 것이지, 염려를 강화하기 위해서 주신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현재를 즐기되 미래를 바라보고 사십시오(7~10). 믿음으로 말입니다.

          불확실한 미래에 대한 두려움으로 오늘을 염려와 걱정으로 살지 않게 하옵소서. 안개와 같이 불투명한 상황 중에도, 밝은 해와 같은 하나님의 은혜가 비추면 그 안개가 걷히게 될 것을 믿음으로 바라보면서, 오늘도 미리 기뻐하고, 미리 감사할 수 있는 믿음의 삶이 되게 하옵소서. 오늘도 주님으로 인해 많이 웃고 행복한 날 되게 하옵소서.

          제임스 패커는 <하나님을 아는 지식>
          11장에서 전도서에서 얻는 교훈을 아래와 같이 정리했다.

          1.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 명령을 지키라(12:13).

          2. 하나님을 신뢰하고 순종하라, 경외하라, 예배하라, 하나님 앞에 겸손하라, 기도할 때 말을 삼가라(5:1-7).

          3. 선을 행하라(3:12).

          4. 하나님이 언젠가 당신을 심판한다는 것을 기억하라.
          그러므로 은밀한 중에도 하나님의 심판대에서 부끄러울 일은 삼가라(11:9; 12:14).

          5. 현재에 살며, 그것을 철저히 즐겨라(7:14; 9:7-10; 11:9-10).
          현재의 즐거움은 하나님이 주시는 선물이다.
          전도자는 경박함은 비난하지만(7:4-6) 교만하거나 너무 경건해서 웃거나 흥겨워하지 못하는 지나치게 영적인 사람들을 또한 싫어한다.

          6. 인생의 문제들은 하나님께 일임하라.
          하나님께서 그 궁극적 가치를 판단하시게 하라. 당신이 할 일은 주어진 분별력과 진취성을 이용해 앞에 놓여있는 기회들을 이용하는 것이다(11:1-6).

          7. 이것이 지혜의 길이다.
          또한 믿음의 삶의 한 측면이다.
          믿음으로 우리는 비록 지금 당장은 자신의 손을 감추고 계시다 해도 자신이 하고 계시는 것을 알며, ‘매사를 잘 처리하시는’ 하나님을 확신할 수 있다.


          1월 25일(수)

          지혜자의 마음(전도서 10:1)

          지혜와 우매의 큰 차이.

          참 지혜는 사람들의 멸시를 받기도 합니다(9장). 하지만 죽은 파리들이 비싼 향기름을 악취 나게 만들 듯이, 우매함은 지혜와 존귀를 난처하게 만드는 악한 영향력이 큽니다(1). 2절의 지혜자의 마음이 오른쪽에 있다는 말씀은 지혜가 사람을 옳은 길로 가도록 지켜주고 보호해준다는 의미입니다(2). 지혜가 비록 업신여김을 받아도 결국에 사람을 지켜주고 보호하는 것은 지혜뿐이라는 것입니다.

          우매자는 자신이 지혜롭다고 생각하지만, 그의 어리석음을 말과 행동으로 드러내게 되어 있습니다(3). ‘온유한 자가 복이 있다’는 주님의 말씀과 같이, 지혜는 폭군의 분노를 참아내게도 합니다(4). 정부에 일어나는 많은 부조리한 일 중 대표적인 것이 합당하지 않은 사람(어리석은 사람)이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는 것입니다(6~7).

          이런 현상이 세상에 많지만 지혜자는 이런 것들로 희락을 빼앗기지 않아야 합니다. 불의한 세상을 살아가는 성도가 명심할 원리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하나님의 정의의 관점을 버리고 적당히 타협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그 관점을 가지고 살되, 그것이 우리를 분노하고 낙심하고 좌절하고 비통하게 함으로써 하나님께서 주신 희락 자체를 빼앗겨서는 안 될 것입니다.

          지혜와 우매함은 다른 결과를 가져옵니다(8~11). 우매한 사람은 남을 넘어뜨리려고 판 함정에 자기가 빠지고, (어떤 이익을 보려고) 허문 담으로 들어온 뱀에게 자기가 물리고, (자기를 위해서) 돌을 떠내다가 돌에 상하며, 나무를 쪼개다가 그것 때문에 위험을 당하게 됩니다. 어리석은 사람은 무딘 연장으로 열심히 일하니 힘만 들 뿐입니다. 뱀에게 물린 뒤에야 뱀을 다루는 사람을 부름으로써 도움을 얻지도 못합니다. 이것들이 다 어리석은 사람들의 행위입니다. 우매함은 언제나 사후약방문과 같아서, 합당한 시기를 놓치고 정상적인 방법을 버립니다. 그러나 지혜로운 사람은 부족한 부분을 미리 예측하여 대비합니다.

          지혜와 우매함은 언어생활에서도 구별됩니다(12~15). 지혜자의 말은 은혜로워서 사람을 기쁘게 하지만, 우매자의 말은 자기를 삼키고(12) 사람들을 피곤하게 합니다(15). 자기 말에 자신이 걸려 넘어지는 것은, 미래의 일을 전혀 예상하지 않고, 말을 앞세워 말로 자기를 들어내려는 욕심이 작용하기 때문입니다. 어리석은 정치인들의 행태가 비슷합니다. 어리석은 사람은 처음부터 어리석고 극단적인 말을 할 뿐 아니라, 말이 많으며(13~14) 자신도 모르는 것을 말하는 사람입니다. 당신의 언어생활은 어떻습니까? 당신의 말은 사람을 피곤하게 하지는 않습니까? 아니면 은혜로워서 기쁨을 주고 있습니까??

          지혜와 우매는 정부의 영역에서도 나타납니다(16~20). 철부지가 왕이 되면, 대신들은 아침부터 먹고 즐기는 형국이 됩니다(16). 이런 나라는 지붕이 무너지고 집이 새는 나라입니다(18). 그들은 때를 알지 못하고 먹고 마시고 희락을 추구하며 그들의 해결책은 언제나 돈 뿐입니다(19). 그러나 좋은 나라는 왕이 자격에 합당하고, 대신들은 먹을 때와 마실 때를 분별할 줄 알고, 왜 먹는지를 아는 자들입니다. 그러니 나라가 복을 누리게 됩니다(17). 비록 세상 정부에서 부조리와 악을 볼지라도, 하나님께서 세우신 권위를 함부로 저주하거나 악담을 하지 않는 것도 지혜입니다(20). 그것은 결국 우리 자신을 위해서입니다.


          잘 먹고 잘 사는 것이 우리 인생의 목적이 아니게 하옵소서. 못 사는 것에서 벗어나는 것이 오늘 하루를 열정으로 사는 이유가 되지 않게 하옵소서. 땅을 밟고 살아가는 일상 가운데서도, 하늘의 지혜를 사모하게 하시고, 말씀대로, 지혜대로 살게 하옵소서. 하늘의 지혜로 인해 오늘도 복된 기쁨과 행복을 누리게 하옵소서.






          1월 24일(화)

          하나님의 손(전도서 9:1)

          세상이 멸시하는 지혜를 귀히 여기라

          사람의 외적인 형편과 모습을 가지고서, 그 사람이 하나님의 사랑의 대상인지, 미움의 대상인지를 판단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1), 그 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마음을 읽을 수 없습니다(6장). 욥의 세 친구들이 고통 받는 욥을 보고 욥이 하나님과 문제가 있다고 판단을 한 것이 옳지 않았던 것과 같이 말입니다. 믿음으로 사는 성도라고 할지라도, 하나님이 자신을 사랑하신다는 객관적이고 외적인 증거를 발견하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전도자는 하나님 앞에서 그 사람이 어떠한가에 상관없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은 모두 ‘일반’이라고 말합니다. 선인에게 뿐만 아니라, 악인에게도 해가 비추이고, 비가 내리듯이 말입니다. 어쩌면 이것이 엄청난 모순일 수 있지만, 또 한편 이것은 엄청난 하나님의 은혜이기도 합니다. 선인에게만 은혜를 베푸신다면 오늘 우리가 누리는 은혜의 파편들을 설명할 길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살아있다는 것 그 자체가 얼마나 소중한 기회이겠습니까? 생명이 있다는 것은 아직도 하나님을 만날 기회가 있다는 차원에서 소중하다는 것이 전도자의 논지입니다(4~6). 비록 지금 고난 속에서 살아가고 있을지라도 살아있다는 것은 이미 놀라운 기회의 연속인 것입니다. 이것이 1~6절에 말하는, 고난 속의 소망과 기쁨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인생을 무가치하게 여기시거나 무관심한 분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사람에게 기쁨을 주고, 안식하게 하시고, 누리게 하시려고 창조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믿음으로 사는 자는 하나님께서 자신의 삶에 대해서 무관심하지 않을까 염려할 이유가 없습니다. 사는 동안 하나님의 선물들을 누리는 것은 바람직한 일입니다. 인생에 하나님이 주신 선물들이 식물과 포도주이며, 좋은 의복과 머리에 바르는 향이고, 아내와 함께 하는 삶입니다. 기독교는 결코 금욕주의가 아닙니다. 전도자는 하나님의 선물을 누리는 인생을 살라고 말합니다(7~9).

          아직 기회가 있을 때 모든 가능성이 열려있을 때, 하나님을 섬기고 일하여야 합니다(10~12). 성공은 사람이 가진 능력에 의해 결정되지 않습니다. 빠른 경주자, 용사, 지혜자, 명철자, 그리고 지식인은 모두 자기 능력을 드러내지만, 그것이 그 인생의 성패를 결정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인생에는 각기 하나님이 정하신 때가 있고 좋지 않은 사건들이 찾아오기도 합니다. 시기와 기회(11)는 장래의 성공의 불확실성을 보여주는 말입니다. 인간은 자기 장래에 일어날 결과를 스스로 통제할 수 없습니다. 마지막 날은 능력에 관계없이 우리 모두에게 홀연히 찾아옵니다. 그러므로 아직 기회가 있을 때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을 섬겨야 합니다.

          그러므로 마땅히 지혜가 중요합니다(13~18). 전도자는 힘 있는 왕이 성을 포위하고 공격할 때, 한 가난한 사람의 지혜가 그 성을 구했다는 이야기를 전해줍니다. 비록 가난한 지혜자를 아무도 기억해주지 않았지만 그의 지혜는 결코 무익하지 않았습니다. 이 이야기는 중요한 신앙의 원리를 전해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지혜는, 세상에서 존경과 인정보다, 멸시와 업신여김을 받겠지만 결코 가치 없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목소리크고 영향이 있는 사람의 말이 아니라, 지혜자의 작은 목소리에 귀를 기울일 줄 알아야 합니다(17). 지혜를 무시하면 많은 선이 무너집니다(18). 지혜를 더욱 사모하고 귀히 여기십시오.

          세상 사람들이 우리의 신앙을 무시하고, 세상이 하나님을 아는 지식과 지혜를 멸시한다고 해도, 저희는 중심을 분명히 잡고, 허망한 것을 쫓아 살지 않게 하옵소서.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더하시고, 지혜를 추구하며, 지혜를 쌓아가는 인생이 되게 하옵소서.



          미국에 토니 캠폴로(Tony Campolo)라는 목사님이 오레곤에 있을 때, 어느 날, 한 교인이 암이 낫게 해달라는 기도를 요청했습니다. 캠폴로 목사님은 그의 치유를 위해 담대하게 기도했습니다. 그리고 일주일쯤 후에 목사님은 그분의 아내로부터 전화를 받았습니다.


          “여보세요! 목사님이 저번에 제 남편의 암을 위해 기도해주셨지요?”

          암이 나은 얘기인가 하고 잔뜩 기대했는데 그녀가 말했습니다.


          “남편이 죽었어요!”

          목사님은 그 여자가 따지려고 한 전화인 줄 알고 가만히 있자 그녀가 계속 말했습니다.


          “목사님! 너무 언짢게 생각하지 마세요. 그때 제 남편은 분노로 가득 차 있었고, 자녀와 손자들의 성장을 보지 못하고 58세에 죽을 생각을 하니 너무 억울하다고 가끔 하나님을 저주했어요. 그 모습을 볼 때마다 주위 사람들도 함께 있는 것이 너무 괴로웠어요. 그런데 목사님이 기도해준 후에 제 남편에게 평화와 기쁨이 생겼어요. 목사님! 지난 3일 동안은 우리의 삶에서 가장 행복한 시간이었어요. 우리는 노래했고, 웃었고, 성경을 읽었고, 기도했어요. 저는 목사님이 남편을 위해 기도해준 것에 대해서 감사하려고 전화했어요.”


          여전히 어리둥절해 하는 목사에게 그녀는 이렇게 덧붙이는 것이었습니다.

          “남편은 치료되지는 않았지만 치유되었어요.”(He was not cured, but he was healed).


          1월 23일(월)

          얼굴(전도서 8:1)


          세상의 부조리 속에서도 자신을 지키라

          왕은 하나님께서 세우신 정의의 대행자입니다(2~5). 전도자는 신약의 가르침과 같이, 사람은 왕과 나라의 권위를 인정하고 복종해야 한다고 말합니다(롬 13:1~7; 딛 3:1; 벧전 2:13~18). 왕이 존재하는 목적은 공의의 시행입니다. 비록 인간이 주어진 권세와 지위를 남용해서 악을 행하는 일도 일어나지만(9) 그것이 불복종의 충분한 이유가 되지는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러한 불의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목적은 역사가운데서 성취되어 가기 때문입니다.

          중요한 것은 시기와 판단을 분별하고(5), 하나님의 때를 헤아리는 지혜입니다. 하나님의 계획과 기한에 대한 무지는 인간의 불행을 증가시킵니다(6~8). 비록 세상에는 권력의 남용과(9), 악한 자가 영예로운 장례식을 치르고(10) 악한 일에 대한 공의가 제대로 시행되지 않는(11) 부조리가 있지만(혹은 넘쳐 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그 가운데서도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는 형통할 것이 분명합니다(12). 이런 부조리한 세상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은혜로 인해 먹고 마시고 즐거운 일을 누리고 있습니까? 그러한 희락이 있다면 그것은 하나님께서 주신 복입니다(15절).

          여전히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에는 해결할 수 없는 신비들이 존재합니다. 해 아래서 이루어지는 일들을 다 설명할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17). 욥도 그 지혜를 추구하고 알고자 했지만(욥 28:13) 오직 하나님만이 그 길을 아신다고 고백했습니다(욥 28:23). 그러므로 “주를 경외함이 곧 지혜요, 악을 떠남이 명철”인 것입니다(욥 28:28). 인간은 오직 하나님께서 계시하여 주신 만큼만 알 수 있을 뿐입니다.

          우리는 세상에 나타나는 부조리함의 모든 이유를 다 이해할 수 없습니다. 또 그런 부조리와 인간의 악함 속에서도 당신의 목적과 계획을 이루시는 하나님의 방법을 다 알 수도 없습니다. 그러나 그 속에서도 자신의 영역을 지키고,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주신 복을 누리는 것을 빼앗기지 않고 살아갈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람,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은 말입니다.

           

          우리는 환경의 영향을 많이 받는 존재입니다. 세상에서 일어나는 수많은 이해할 수 없는 일들에 대해서 많이 분노하고 괴로워합니다. 불의하고 탐욕스러운 정치 지도자들을 보면서 심판자처럼 교만해지지 않게 하옵소서. 많은 부조리함 속에서도 주께서 은혜로 주신 것들을 누릴 줄 아는 지혜도 저희에게 허락하여 주옵소서.





          1월 21일(토)

          아름다운 이름(전도서 7:1)


          형통한 날에 기뻐하고 곤고한 날에 생각하라

           

          전도자는 이제 불행이나 재난이 반드시 나쁜 것, 즉 하나님이 미워하시는 증거는 아니라고 말합니다(1~15). 오히려 불행이 번영보다 더 나은 선이 될 수 있습니다.

          이름(명예)을 지키는 것이 보배로운 기름, 곧 부유함보다 낫고 죽는 날이 출생의 날 보다 낫습니다(1). 죽는 날에 사람은 지속적인 영향력을 남길 수 있지만, 이제 태어나는 사람의 삶이야 어찌 될지 누가 알겠습니까? 초상집에 가는 것이 잔칫집에 가는 것보다 낫고(2) 슬픔이 웃음보다 낫습니다(3). 지혜자의 책망을 듣는 것이 우매자의 노래를 듣는 것보다 낫습니다(5). 뇌물로 재판관의 마음을 자기 원대로 움직일 수 있겠지만 그것은 망하는 길입니다(7). 일의 끝이 시작보다 낫고,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며 참는 마음이 초조해 하는 것보다 낫습니다(8~9). 좋았던 과거를 현재의 상황과 비교하면서 그리워하는 것은 지혜로운 일이 아닙니다(10). 지혜는 유산이나 돈 보다 유익합니다(11~12). 언제나 순간적인 것들 보다 영구적인 것이 나은 것입니다. 이것을 분별해야 합니다.

          전도자가 우리에게 도전하는 본격적인 내용은 고통조차 불운이 아니라, 하나님의 정하신 뜻이라는 것입니다(13~14). 하나님이 굽게 하신 것이란 고통과 역경의 상황을 말합니다. 이러한 인생의 모순은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것인데, 궁극적으로 이렇게 굽게 하신 일들이나 고통조차도, 하나님을 철저하게 신뢰하고 의존하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에게서 오는 번영과 선한 것들에 대하여 감사하고 기뻐할 일이지만, 역경과 고난의 때에도 절망하고 낙심만 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과 일하심을 돌아보고 생각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모든 일을 통해서 당신의 선하심을 우리 안에서 성취하시기 때문입니다.

          16~17절은 오해하기 쉬운 말씀입니다. 이는 경건의 이름으로 조금만 다르면 과도히 판단하고 비판하는 자기 의의 위험에 대한 경고입니다(16). 물론 그 반대로 가는 것도 위험합니다(17). 전도자는 거짓 경건에 대하여 날을 세우고 있습니다. 거짓 경건과 거짓 지혜는 하나님의 섭리에 대해서도 쉽게 판단함으로 결국 하나님의 심판을 받을 것입니다. 실제로 인간은 말과 행실에 오류가 없을 수 없습니다(20~22). 사람들이 자신에 대해서 하는 말을 지나치게 귀 기울여 들으려고 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입니다(21~22).

          본래 하나님께서 사람을 정직하게 지으셨지만, 타락하여 자기 꾀를 좇아 행하는 존재가 되었습니다(29). 전도자는 자신이 지혜를 간절히 구하였으나, 그 지혜는 이를 수 없을 만큼 멀리 있음을 알았습니다(23~25). 26절에 언급된 ‘여인’은 잠언에 묘사된 음녀와 같은 의미를 가집니다. 인생 중에는 늘 이런 유혹이 도사리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모든 일이 하나님의 선하신 뜻 안에서 일어나는 것임을 알고, 형통할 때는 기뻐하고 곤고할 때는 돌아보는 지혜를 얻어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손을 벗어나서 일어나는 일은 없다는 것이 하나님의 자녀들의 신앙의 내용이며, 이 신앙은 절망의 상황 속에서도 신자의 마음에 평안을 줍니다.

           

          절망 할 수밖에 없는 고통스러운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의 선하심과 끝없는 자비하심을 돌아보고 생각할 수 있는 은혜를 주옵소서. 절망 속에서도 소망을 발견하되, 선하신 하나님의 무한하신 지혜와 능력으로 하나님의 영광과 자녀들의 유익을 위해서 일하실 주님을 기대하는 믿음을 더하여 주옵소서.



          1월 20일(금)

          폐단(전도서 6:1)


          받는 것보다 주는 것이 더 행복한 신자의 삶

           

          오늘 말씀은 “내가 해 아래서 한 가지 불행한 일이 있는 것을 보았나니”라는 말씀으로 시작하고 있습니다. 여기 “불행한 일"이라는 말은 본래 재앙’이라는 뜻으로 흔히 사용되는 말입니다만, 오늘 말씀에서는 “우리의 삶으로 하여금 의미를 잃어버리게 하는 것, 허무하게 만드는 것”이라는 뜻에 가깝습니다. 전도자는 해 아래서 살아가는 일을 허무하게 하는 어떤 일, 마음이 무거워 살아갈 힘도 이유도 발견하지 못하게 하는 일에 대해서 말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먼저 아무리 많은 부를 가졌다고 하더라도, 그 부요함과 재물을 다 누리지는 못한다고 말합니다(2절). 뼈 빠지게 일하고 수고한 그 사람은 아무것도 누리지 못하는 반면에, 손 하나 까딱하지 않은 엉뚱한 사람이, 아무 관계도 없는 사람이 다 차지하고 마음대로 쓰며 누리는 것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흔히 사용하는 말 중에, “버는 사람 따로, 쓰는 사람 따로”라는 말입니다. 온갖 계획과 재주와 노력과 가진 것을 다 투자하여 이루어 놓았는데, 엉뚱한 사람이 나타나서 가로채 가기도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아무리 수고하여 재산을 축적하여도 그 모든 것이 허무한 것이 될 수 있다는 말입니다. 우리는 오늘 도대체 무엇을 위하여 수고하는 것입니까?

           

          전도자는 백 명의 자녀를 낳으면서 장수한다고 하여도, 평생 마음에 낙이 없이 살다가 죽고, 또 죽을 때는 제대로 무덤에 묻히지도 못하고 인생을 끝낸다면, 이런 인생보다는 차라리 태어나지 못하고 낙태된 자가 더 낫지 아니하냐고 묻습니다(3절). 자녀가 백 명이어도 그 마음에 즐거움을 주지 못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낙태된 자는 모태에서 생겨났으나 태어나지 못하고 죽으니 그 인생이 헛되다 할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낙태된 자는 뼈 빠지게 일하고서도 남 좋은 일만 시킨 사람의 인생보다는, 조용하고 편한 인생을 살다가 간 것이니 더 낫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6절의 말씀처럼, 천년의 갑절을 산다고 해도, 엄청난 부를 쌓는다고 하더라도, 백 명의 자녀가 있다고 하더라도, 우리가 살아가는 인생에서 아무 즐거움을 누려 보지 못한다면 얼마나 불행한 것인가 말합니다. 사람이 열심히 일하는 것은 수고하여 얻은 것으로 먹고 즐기고자 함인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무도 자기가 원하는 만큼 즐기거나 만족을 얻을 수 없습니다. 우리 인생에 대한 식욕은 결코 채워지지가 않습니다(7절).

           

          그러나 전도자는 우리 인생에게 매우 중요한 질문을 던집니다. “진정한 낙이 무엇인줄 아는가?”(12절) 묻습니다. 하나님 보시기에 선한 것, 옳은 것, 가치 있는 것, 의미 있는 것을 분별할 줄 알며, 무엇이 불행이며, 무엇이 가치 있는지 분별하실 수 있는가? 묻는 것입니다.

           

          이 질문은 우리로 다른 관점을 가지도록 유도합니다. 아버지의 수고로, 아버지는 먹지 못하나 아내와 자식이 배불리 먹게 되듯이, 왕의 자신을 돌보지 않는 다스림과 열심과 섬김으로 한 나라와 백성이 평안하듯이, 정작 자신에게는 돌아오지 않더라도, 그러한 삶이 진정한 낙이며, 의미이며, 가치가 아니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수고하여 모든 것을 자기 것으로 만들고자 하는 세상에서, 수고하여 다른 사람을 먹이고자 하는 진정한 의미를 발견하는 것, 그것이 진정한 “낙”이며, “기쁨”이며, “가치”이지 않겠습니까?

           

          내가 오늘 수고하여 다른 사람을 유익하게 하는 삶을 살게 하옵소서. 배워서 남에게 주는 인생, 땀 흘려 가족을 섬기는 사랑으로 오늘도 살게 하옵소서. 이기적이며 개인적인 세상에서, 이타적인 삶을 사는 것은 허망한 것이라고 핀잔을 받더라도, 받는 것보다 베풀고 주는 삶을 살기를 선택하는, 하나님의 자녀다운 삶을 살도록 은혜 베풀어 주옵소서.





          1월 19일(목)

          우매자(전도서 5:1)


          겸손한 자만이 희락을 누린다.

           

          하나님께서 아름답고 선한 계획을 가지고 계시며 주권적으로 섭리하신다는 것에 대하여, 많은 반론들이 있을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3:16~4:16). 그러나 그 하나님의 주권과 통치하심과 자연의 섭리에 대해 우리가 감히 반론도, 토론도, 요구도 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라는 것을 늘 놓치고 있습니다. 어줍지 않은 지식과 정보로 우리는 하나님을 함부로 재단하고 있지는 않을까요? 하나님을 정죄하고 비판하고 있지는 않을까요?

          우리는 하나님이 이렇게 저렇게 하셔야 한다고 말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닙니다. 전도자는 이러한 관계 설정을 분명히 하면서, 우리는 하나님의 집에 들어갈 때 발을 삼가야 하는 존재라는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1). 하나님 앞에서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권위와 엄정함을 알고서, 하나님께 무엇을 따지거나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겸손히 들어야 합니다(1~2).

          겸손하지 않은 인간의 여러 모습 중에서 대표적으로 인간의 서원을 예로 듭니다. 서원은 내 욕망을 채우기 위해 하나님을 매수하는 수단이 될 수 없습니다(4~6). 아마 ‘급한 마음으로 말을 내는’ 것은 경솔한 서원을 가리키는 말일 것입니다(2). 하나님 앞에서 맹세와 서원은 반드시 갚아야 하는 것이니, 서원할 때에는 경솔하게 해서는 안 됩니다. 참된 경건은 하나님의 선하심을 믿지 못하게 만드는 모든 인생의 부조리함들 속에서도 하나님께 불평과 원망을 쏟아내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끝까지 인정하는 자세입니다.

          전도자는 정의가 시행되지 못하는 법정의 문제나 학대가 일상화되어 있는 사회의 부조리에 대해서 한 마디 합니다. “너는 어느 지방에서든지 빈민을 학대하는 것과 정의와 공의를 짓밟는 것을 볼지라도 그것을 이상히 여기지 말라 높은 자는 더 높은 자가 감찰하고 또 그들보다 더 높은 자들도 있음이니라(8).”

          그리고 부와 수고의 문제도 계속해서 다룹니다. 인간의 욕망은 결코 자기가 소유하고 있는 부로 만족할 줄 모릅니다(10). 부가 쌓이면 그것을 관리하기 위한 사람들이 필요하기 때문에 입도 늘어나는 법입니다(11). 이것은 부의 증가가 즐거움을 보장하기보다, 도리어 근심(해)을 더한다는 것을 가르쳐 주는 좋은 예입니다(13). 사업이 번창하는 것을 경험한 사람이라면, 이것이 부담을 증가시킨다는 것을 경험했을 것입니다.

          가진 부가 많지 않은 노동자는 늘 잠을 잘 잘 수 있지만, 부자는 자신의 부를 잃어버리지 않을까 하는 염려와 두려움이 불면증을 가져올 수 있습니다(12). 재물은 언제라도 잃어버릴 수 있습니다(14). 아무리 부자라도 어머니 뱃속에서 가지고 나온 것이 없듯, 우리는 모든 것을 벗어버리고 창조주 하나님께로 돌아가야 합니다(15). 이 본문은 디모데전서 6장의 교훈과 동일합니다(딤전 6:3~10). 결론은 같습니다(18~20). 부를 추구하지 말고(딤전 6:10) 희락을 추구하라는 것입니다. 디모데전서 6장 11절은 의와 경건과 믿음과 사랑과 인내와 온유를 추구하라고 말씀합니다. 전도자가 희락을 추구하라는 말은 전도서의 서론에서 말했듯이, 에피큐로스 학파가 추구하던 쾌락이 단연코 아닙니다. 이들처럼 쾌락을 추구하여 평생을 수고하는 사람은 불행할 뿐이고, 결코 원하는 기쁨을 얻을 수 없습니다.

          희락은 하나님께서 아름답고 선하신 계획안에서 우리에게 주신 선물입니다. 인간의 행복이나 희락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선하고 아름다운 계획과 방법에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것은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 곧 영생입니다. 이것이 영원을 아는 지식으로 우리를 인도합니다(3:11).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만이 이 희락을 누리며 인생을 삽니다. 겸손한 자만이 하나님께서 주시는 희락을 누립니다.


          하나님의 통치와 다스림에 대하여, 함부로 판단하거나 불평하는 입술을 가지지 않도록, 우리의 심령을 보호하여 주옵소서. 언제나 하나님의 말씀과 인도하심에 순종하는 저희가 되게 하시며, 선한 길로 인도하심을 신뢰하게 하옵소서. 이 세상의 썩어질 것을 더 많이 쌓는 것에 마음과 시간을 쏟기보다는, 하나님과 교제하고 사귀는 기쁨을 더 많이 누리게 하옵소서.





          1월 18일(수)

          위로자(전도서 4:1)

          인생의 허무함 앞에서, 홀로가 아닌 함께.

          하나님께서 아름답고 선한 계획을 가지고 계시다는 것에 대한 또 다른 반론은, 지금까지의 역사와 사회 속에 있어왔던 수많은 학대의 현실입니다(1~3). 학대받는 자들에게는 권세자들만 있지, 위로자가 없습니다. 위로자 없이 학대를 받는 것은 죽음만도 못하다고, 학대를 받는 인생보다, 태어나지 않은 것이 차라리 낫다고 말합니다(2~3). 사람이 사람을 이용하고 그 가진 권위로 누르려고 합니다. 그러나 그 사람됨으로 인하여 위로하고 격려하여 함께 울고 웃는 모습을 기대하기 힘든 세상입니다. 다만 사람은 오직 하나님의 성소에 들어갈 때, 비로소 참 위로와 격려를 누리게 되고, 은혜의 회복을 경험하게 됩니다(시 73:17).

          사람들은 불필요하게 경쟁함으로써 서로에게 잔인해지며 시기를 경험하고는 합니다(4). 이런 현실도 하나님께서 아름답고 선한 계획을 가지고 계시다는 것에 대한 치명적 반론이 될 수 있습니다. 이런 사회에서 과연 열심히 일할 필요가 있을까? 라는 질문을 던질 수 있겠지만, 다만 그것이 게으르게 적당히 살아도 된다는 핑계가 될 수는 없습니다(5). 도리어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은 자족함을 배워야 합니다(6; 딤전 6:6; 잠 15:16~17; 16:8).

          경쟁 사회에서 도피하여 산으로 피하는 것이 해결책은 아닙니다(7~12). 왜냐하면 사람을 피해 산으로 갔어도, 이제는 외로움과 싸워야 하기 때문입니다. 가족도 친구도 없으면, 그는 자기가 땀 흘리고 수고해야 할 대상을 찾을 수 없어서 더 고통스러울 것입니다. 두 사람이 한 사람보다 나은 것은(9) 고독보다 관계가 낫고, 독신보다 결혼이 낫다는 말인데, 그 이유는 여기에 도움과(10) 위로와(11) 대응책이(12) 있기 때문입니다.

          “가난하여도 지혜로운 젊은이가, 늙고 둔하여 경고를 더 받을 줄 모르는 왕보다 나으니(13)”라는 말씀은 잠언 말씀을 생각하게 합니다. 여기에는 인간의 명예와 권력에 대한 무상함이 있습니다. 왕이지만 늙고 둔하여 정신이 혼미해진 경우가 있는가 하면(13), 가난하게 태어났고 감옥에 수감되었지만 왕이 되기도 합니다(14). 사람들은 왕이 통치하는 동안에는 수많은 백성이 그를 떠받들다가도, 시대가 바뀌면 그를 비난하기도 합니다(16). 우리가 인생에서 추구하거나 경험하는 명예나 권력은 영원하지 않은 것입니다.

          전도자는 인생의 많은 부조리를 열거함으로써, 하나님께서 선하고 아름다운 계획을 가지고 계시다는 것을 믿는 믿음을 시험하며 질문을 던지고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많은 사람들이 도달한 결론처럼 무신론으로 마침표를 찍어야 할까요? 아닙니다. 결코 그럴 수 없습니다. 이제 전도자는 5장에서 그 대답을 줄 것입니다.

          인생의 허무함, 삶의 경쟁과 치열함에, 도망가서 홀로 살고 싶어 하는 우리의 연약함을 불쌍히 여겨주옵소서. 혼자서는 설 수 없는 인생의 전쟁터에서, 함께 고민하고, 함께 싸울 수 있는 믿음의 동지를 단 몇 사람이라도 허락해 주옵소서. 귀한 믿음의 친구들을 허락하셔서 세 겹의 단단한 줄을 묶이게 하시며, 끊어지지 않는 신앙의 연대를 이루는 복된 삶을 살게 하옵소서. 나 또한 누군가의 동역자로 함께 서서, 서로를 세우고 격려하고 이끌어주는 복된 연합을 이루게 하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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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 교회사역자가 도자기 공장 지대에 사는 한 사람을 방문하였다.
          그 사람은 젊었을 때는신앙을 갖지 않은 사람이었다.
          전도사는 그 집에 도착하여 유리 상자 속에 든 두 개의 좋은 꽃병을 보고 감탄하여 말했다.

          "야! 참 멋있군요. 아주 귀한 것이겠지요?"
          "그렇습니다."
          "얼마면 파시겠습니까?"
          주인은 고개를 휘저으며 전도사에게 말했다.
          "이 세상 돈을 다 준다 해도 저 두 개의 꽃병은 절대로 팔 수 없습니다."

          그리고는 이렇게 말했다.

          "저는 몇년 전만 해도 술주정뱅이에다 노름꾼이었지요. 말하자면 마귀에게 영혼을 맡겨 놓고 다녔던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친구의 권유로 교회의 집회에 참석하고 집에 돌아오는 길에 우연히 쓰레기 더미에서 흙 한 무더기를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누군가가 쓸 데가 없어서 버린 것이었지요. 나는 그걸 집에 가져와 반죽을 하고 모형을 만들어 구워 보았습니다. 결국 나는 쓸모 없던 흙으로 두 개의 아름다운 꽃병을 만들었습니다. 그 날 저는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내가 이런 일을 할 수 있다면 하나님께서도 나를 가지고 똑같은 일을 하실 수 있을 거야!'

          그때부터 저는 제 자신을 하나님의 손에 내맡기고 하나님께서 저를 새 사람으로 만들어 주시길 바랐습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께서 그 쓰레기장의 흙 무덤 같은 나를 아름다운 꽃병으로 만들어 주신 것입니다."


          전도서

          "Vanitas vanitatum, dixit Ecclesiastes, vanitas vanitatum et omnia vanitas"
          헛되고 헛되다, 설교자는 말한다, 헛되고 헛되다. 세상만사 헛되다.

          전도서(傳道書), 코헬렛. קהלת, Ἐκκλησιαστής, Ecclesiastes)

          코헬렛의 어원은 카알(모으다)이다.
          동사인 ‘카알’의 분사형태가 ‘코헬렛’이다.
          직역하면 ‘모으는, 소집하는’ 그런 의미가 되겠다.
          그렇다면 무엇을 모으고 소집하는 것일까?
          문맥으로 보아 코헬렛의 목적이 되는 것은 ‘격언’이거나, 지혜를 구하는 ‘청중’이다.
          이렇게 코헬렛은 차츰 ‘모으는 사람’을 뜻하게 되었고 나중에는 ‘모임에서 말하는 자’라는 의미로 발전했다.
          히브리어 성경 이름이 ‘코헬렛’으로 정착된 것도 그런 이유다.
          성경의 내용을 ‘코헬렛의 설교’로 받아들인 것이 바로 전도서라는 이름을 붙인 이유인 것.

          그리스어 성경인 70인역에서는 ‘에끌레시아스테스(Ekklēsiastēs)’라 했다.
          직역하면 ‘불러 모으는’이란 형용사다.
          원형은 에끌레시아(ekklēsia)로 ‘소집된 모임’이란 뜻이다.
          고대 그리스의 도시 국가에서는 민중들의 모임인 ‘민회’를 ‘에끌레시아’라 했고 민회가 열린 장소를 ‘아고라(agora)’로 불렀다.
          후대에는 장소 뿐 아니라 모임 자체도 그렇게 불렀다.
          우리가 사용하는 ‘교회’라는 말 역시 엑끌레시아의 번역이다.
          ‘부름받고 나온 이들의 모임’이란 의미다.

          원어, 그리스어, 한자, 그리고 코헬렛의 각종 해석을 합치면 "섭리를 전달하는 현자(지혜자)가 청중을 에클레시아로 불러 모으는 책" 쯤으로 번역할 수 있다.

          코헬렛을 전도자, 전파자, 조언자, 현자, 도인, 설교자, 발언자 등 무엇으로 해석하든 절대 "포교자"라는 뜻은 나오지 않는데, 전도라는 말이 사실상 포교와 동일어로 쓰이는 상황이라 전도서를 종종 포교서(...)로 해석하는 경우가 종종 나온다.
          물론 전도서의 내용은 기독교 교리의 뿌리가 되는 내용을 담고 있는 섭리 전달의 시작과 같은 내용이지만, 이 책은 하느님을 믿으라고 조언할 뿐, 기독교나 유대교 같은 "종교"를 믿으라 포교하는 내용을 담고 있지는 않다.

          기독교와 유대교에서 사용하는 구약 성경의 책이다.

          전도서의 저자는 자신을 다윗의 아들이며 이스라엘의 왕인 전도자(코헬렛)라 밝히고 있으며 책의 제목은 여기에서 나온 것이다.
          전도서는 삶의 허무함과 삶의 최선의 방법들을 이야기하고 있다.

          유대교 전승에 의하면 전도서는 노년의 솔로몬이 쓴 것이다.
          그러나 역사학자들은 고대 페르시아어에서 온 외래어와 아람어가 사용되기 때문에 기원전 450년 이후에 작성되었다고 보며,
          기원전 180년경에 작성되었다고 보기도 한다.

          그리스어 제목인 '에클레시아스테스(Ἐκκλησιαστής)'는 히브리어로 된 미상의 저자 '코헬렛(קהלת)'에 대한 70인역의 번역어다.
          코헬렛의 어근인 '카알(קהל)'은 "모으다"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따라서 코헬렛은 모으는 사람, 특히 단어의 문법적 구성에 의해 여성을 의미하는 것으로 추정된다. 
          문맥상으로 코헬렛이 모으는 것은 격언이거나, 지혜를 구하는 회중이 될 수 있다.

          오늘날 학계에서는 코헬렛을 '회중 앞에서 말하는 자'로 이해한다.
          이에 따라 개약한글판에서는 코헬렛을 전도자로 번역하여 이 책의 제목은 전도서로 붙여졌다.
          이를 따라 개역성경과 표준새번역 성경에서는 책의 제목은 전도서로, 저자는 전도자로 번역하고 있으며, 공동번역 성경과 쉬운 성경에서는 책의 제목은 마찬가지로 전도서로 번역하며, 저자는 "설교자"로 번역하고 있다.
          그러나 설교자 역시 히브리어 원어의 의미를 완전히 반영하지 못하는 것으로 여겨진다.
          천주교 새번역 성경에서는, 원어를 음역하여 제목과 저자 모두 "코헬렛"으로 번역하고 있다.

          저자

          전도서 1장 1절에서 저자는 자신을 다윗의 아들이며 예루살렘의 왕이라 밝히고 있으며, 1장 12절에서는 예루살렘에서 이스라엘의 왕이라 밝히고 있다.
          예루살렘에서 통치하였던 솔로몬 왕의 후손들은 유다만을 통치하였으므로, 이는 솔로몬왕에게만 해당되는 것으로 추정되었고, 따라서 히스기야와 휘하의 학자들이 이사야, 잠언, 아가, 전도서를 서술했다는 일부 학자들의 이론을 제외하고 대부분의 유대교와 초기 기독교, 그리고 개신교에서는 전도서의 저자를 노년의 솔로몬왕으로 여겼다.

          그러나 과거부터 이 책이 바빌론 유수 이전에 쓰이지 않았을 것이라는 지적이 여럿 있어왔다.
          니사의 그레고리우스는 이 책의 저자가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솔로몬왕이 아니라 동명이인인 다른 솔로몬일 것으로 보았다.
          디디모스는 반면 단일 저자가 아니라 여러 저자에 의해 쓰여졌다고 보았다.

          현대 학계에서는 이 책이 바벨론 유수기에 저술되었다고 본다.
          특히 고대 페르시아어에서 온 외래어와 아람어가 대놓고 사용되기 때문에 기원전 450년 이후로 보는데에는 이론의 여지가 없다.
          페르시아 제국의 지배를 받았을 때 유다와 이스라엘의 언어는 페르시아의 영향을 받아 새로운 어휘를 여럿 갖게 되었는데, 전도서에서 사용된 페르시아계 단어는 다음과 같다.

          • 낙원(파르데스 : פַּרְדֵּס pardēs)
          • 소식(피트감 : פִּתְגָם pitgām)

          기원전 180년에 집회서의 저자인 헬레니즘 유대인 벤 시라가 전도서를 인용했기 때문에 늦어도 기원전 180년 이전에는 서술되었다는 것이 중론이다.
          논란의 중심이 되는 부분은 이 책이 아케메네스 제국 통치기에 서술되었는지, 혹은 헬레니즘 제국 통치기에 서술되었는지 여부이다. 아케메네스 통치기(450~330 BC)를 주장하는 학자들은 전도서에 그리스 문화의 영향이 전혀 없다고 주장하며,  헬레니즘 통치기(330~180 BC)를 주장하는 학자들은 그리스 사상과 사회상이 전도서에 녹아있다고 본다.헬레니즘 통치기에 기록되었다고 할 때 예루살렘이 아닌 알렉산드리아에서 제작되었다고 보기도 한다.

          이 책의 저자가 과연 1장에 등장하는 인물인 전도자와 동일인물인지도 확실치 않다.
          전도서에는 전도자의 말을 제3자의 것처럼 인용하는 부분이 있는 한편, 본인의 말처럼 1인칭 화법을 사용하는 부분도 나타나기 때문이다.

          전도자의 말을 제3자가 수집하여 엮었으며, 이후 새로운 저서에 유명한 현자의 이름을 붙여 저서에 무게를 싣는 당시의 풍습을 전도서의 저자가 사용한 것으로 보는 시각이 우세하다.
          이런 관점에서 12장 8~14절의 내용은 전도자가 아닌 저자가 별도로 서술한 것으로 본다.

          전도서의 저자에 대하여

          전도서(Ecclesiastes)는 잠언, 욥기, 시편과 같은 성경에 수록된 지혜 문학 중의 하나입니다. 히브리어의 원제는 코헬렛(koheleth) 즉 ‘설교자’라는 뜻인데, 우리 성경에서 도를 전하는 책이라는 뜻으로 전도서(傳道書)라고 이름을 붙인 듯합니다.  

               

           

          이 책의 저자로 등장하는 설교자는 자신을 다윗의 아들 즉 솔로몬이라고 밝히고 있습니다. 그러나 전도서를 기록한 언어를 살펴보면, 페르시아 제국 시대의 언어들이 등장하는 것으로 보건데,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빌론 포로 생활로부터 다시 귀환한 이후에 쓰인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 BC 3세기경에 쓰인 것으로 추정합니다. 즉 솔로몬 왕(BC 970-931)이 BC 10세기의 왕이었으니, 전도서의 저자가 솔로몬 왕이 되기에는 시기적으로 큰 차이가 있습니다.  

          성서학자들에 따르면 중동에서 지혜 문학은 중요하고 인기가 많은 장르였고, 왕과 귀족의 자녀들을 가르치기 위한 책이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 지혜서들을 기록한 다양한 익명의 저자들은 책의 권위를 높이기 위해서, 책의 저자를 지혜로운 왕의 대명사인 솔로몬 왕에게 돌리는 것이 일반적이었다고 합니다.
          따라서 전도서에 저자가 자신이 다윗의 아들 솔로몬임을 분명히 밝히고 있는 것은 지혜서의 저자를 솔로몬 왕에게 돌리는 고대의 일반적인 관행에서 비롯된 것이지, 솔로몬이 직접 썼다는 역사적 사실은 아니라고 추정합니다.  

          전도서는 ‘이 세상의 모든 것이 헛되다‘라는 염세주의적인 시각으로 유명한데, 이는 성경의 다른 지혜서들과는 상충되는 시각이라고 합니다.
          염세주의와 함께 그 날을 즐기는 것을 권하는 쾌락주의적 요소도 가지고 있는데, 이는 이집트와 메소포타미아의 지혜서들, 그리스의 스토아 철학 및 에피쿠로스 철학과의 영향 관계를 추정하게 합니다.
          시기적으로 BC 4세기에서 BC 3세기에 페르시아 제국과 그리스 제국이 각각 유대를 지배했기 때문에 이 같은 추측을 하는 것입니다. 

          다른 한편으로 성서학자들은 전도서가 구약성경의 정경에 포함된 이유에 대해서 의아해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히브리 구약성경의 공통 주제가 하나님이 선택한 백성을 구원하신다는 내용인데, 전도서에는 이런 주제가 전혀 언급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전도서가 극단적인 염세적인 전통에 속하기는 하지만,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나 그 선하심을 부정하는 부분이 없기 때문에 구약의 정경으로 포함될 수 있었다고 추측하는 정도입니다.
          하지만 본질적으로 학자들은 전도서가 정경에 포함된 분명한 이유와 그 경위는 아직도 알 수 없다고 말합니다.
          그렇지만 전도서가 정경으로 들어감으로서 구약 성경은 더욱더 풍요롭고 아름다워졌다는 사실도 확실합니다.

          구성

          전도서의 일부 구절들은 구약 성경의 다른 부분들과 모순된 것처럼 보이기도 하며, 심지어는 전도서 안에서도 모순처럼 보이는 부분들이 있다.
          탈무드는 이러한 까닭에 전도서를 다룰 때는 조심해야하고 만일 자신이 충분히 성숙하지 않다고 생각되면 읽는 것을 한 번 생각해보아야 한다고 적는다.

          상기했듯 전도서 속에서는 자기모순적인 부분이 많이 발견된다.
          대표적으로 죽은 자가 살아있는 자보다 낫다(4:2) 하는 부분도 있는 반면, 살아있는 개가 죽은 사자보다 낫다(9:4) 하는 부분도 있다.
          근심이 웃음보다 낫다(7:3) 하는 부분도 있는 반면, 근심은 어리석은 자들에게 생긴다(7:9) 하는 부분도 있다.
          이와 같은 각 구절의 긴장관계를 해소하는 것이 성서학자들의 주된 과제 중 하나였다.

          이러한 모순에 대한 해결방안으로 여러 이론이 제기되었다.
          대표적으로 모제스 멘델스존과 페르디난트 히치히가 도입하고 레비와 고르디스가 발전시킨 이론인 인용 이론이 있다.
          여기서는 전도서의 모든 내용이 전도자의 주장이 아니라, 비정통적인 주장에 대한 전도자의 반박으로 구성되었다는 해석을 제기한다. 즉 마치 욥기처럼 여러 명의 이야기가 인용되어있음에도 불구하고 욥기에서는 각 주장이 누구의 것인지 명시한 반면 전도서는 그렇지 않다는 이야기이다.
          디들렘 미헬(Diethelm Michel), 노르베르트 로흐핑크(Norbert Lohfink), R. N. 화이브레이가 이 주장을 더욱 발전시켰는데, 이들은 이러한 모순을 긴장 관계로 보고 전도자가 염세주의적이고 비정통적인 부분을 반박하는 구조로 작성되었다고 본다.

          더 나아가서 해석 이론 역시 제기되었다.
          이 이론에서는 전도자가 정말 존재했던 어떤 반대자의 의견을 인용한 것이 아니라, 가상적인 반대파를 설정하고 이에 반박하는 형식인 디아트리베의 양식을 따른다고 본다.
          이와 같은 양식비평적 접근은, 왜 전도서에서 각 주장을 하는 인물을 명시하지 않는지에 대한 질문을 해결한다.
          디아트리베 형식은 주로 학교에서 많이 사용되었다.
          하나의 중심 사상이 서두에서 제기되고 후에 본격적으로 이를 설파하는데, 전도서의 구조를 이에 맞춰 해석하기도 한다.

          주제

          인간은 자기 성취를 위해 줄기차게 달려가지만 결국 공허함만을 발견하게 된다. 이것이 바로 종종 쾌락주의의 역설이라고 일컬어 진다. 우리가 진정으로 살 수 있는 것은 자신에 대해, 자아에 대해 죽을 경우만이며, 우리가 참된 즐거움을 알게 되기 시작하는 것은 오직 인간이 하나님의 은혜로 하늘을 향해 인간의 눈을 들때 비로소 가능하게 된다.

          전도서의 주제에 대해 여러 의견이 존재한다. 개중에는 이 책이 긍정적인 시각으로 삶을 바라본다고 하는 학자도 있는 반면, 비관적으로 바라본다고 하는 학자들도 있다.
          주제가 일관적인지 비일관적인지, 정통적인지 급진적인지에 대해서도 의견이 다르며, 심지어 전도자의 주장을 그대로 옮긴 것인지 아니면 전도자가 범한 오류를 지적하는 글인지에 대한 시각도 다르다.

          어느 정도 통용되는 전도서의 주제를 말하자면 세상에 만연한 왜곡과 불평등, 인간 야망의 무용성, 세속적 지혜와 정의의 한계를 관찰하고 명상함으로써 발생하는 고통과 좌절이라고 할 수 있다.
          "해 아래(개역개정)"라는 문구는 이러한 내용과 함께 총 29번 사용된다.
          이는 주권자인 신의 힘과 공의, 그리고 예측 불가능성을 인정하는 것이다.

          전도서가 지식과 논리에 대한 의문을 던진다고 생각하며 읽을 것을 제안하는 사람들도 있다.
          전도서의 결말은 11-12장에서 나타난다고 할 수 있는데, 결국 전도자는 어떤 객관적인 사실을 결론으로 전달하는 것 보다도 개개인의 성찰과 경험을 강조하는 것 처럼 보인다.

          코헬렛(전도자)의 일성(一聲)은 ‘헤벨’(הֶבֶל)이라는 단어를 다섯 번이나 반복합니다.
          이 ‘헤벨’이 무엇인지 파악하는 것이 전도서를 이해하는 핵심입니다.
          우리말과 외국어 번역 성경들을 보면 크게 세 가지 정도의 의미로 이 ‘헤벨’을 번역합니다.

          1. “이해할 수 없는, 말이 안 되는” :

          영어의 “absurd”는 불합리와 부조리를 뜻하는 말로, 합리적인 설명이 불가능하다는 점을 강조한 번역입니다.
          우리말 번역 중에는 이러한 의미를 담아 번역한 성경은 없어 보입니다.

          2. “쓸 데 없는, 소용 없는” :

          “useless”나 “futility”라는 번역이 여기에 해당하는데, 아무런 효용가치가 없다는 점을 부각시킵니다.
          현대인의성경의 “무가치하며”와 “아무것도 소중한 것이 없구나”라는 번역이 이러한 의미를 반영하고 있습니다.

          3. “공허한, 텅 빈 > 무의미한” :

          대다수의 번역 성경이 이 해석을 따릅니다.
          개역과 공동번역, 새번역, 쉬운성경 등이 “헛되다”라고 번역하고 있으며, 가톨릭성경과 우리말성경은 “허무”라고 번역합니다.
          영어 번역의 “vanity”와 “meaningless”가 이에 상응하는 번역으로 볼 수 있습니다.

          합리적 설명을 강조하는 이성주의(理性主義)와 효용가치를 강조하는 실용주의 및 근대 회의주의(懷疑主義)사상을 모두 겪은 서양인들에게는 위의 세 가지 번역이 다 드러나는 반면, 불교의 공(空)사상에 익숙한 우리는 ‘비어 있음’을 나타내는 “허(虛)”와 “무(無)”라는 번역이 압도적입니다.


          ‘헤벨’의 원어적 의미

          “이해할 수 없고, 쓸모 없고, 무의미하다”는 번역은 그러나 히브리어 원어를 바탕으로 한 것이라기 보다는 어원에서 파생된 의미들입니다.
          ‘헤벨’은 원래 입김이나 수증기를 뜻하는 단어입니다.
          시편 62편 9절의 “아, 슬프도다 사람은 입김이며 인생도 속임수이니 저울에 달면 그들은 입김보다 가벼우리로다”에서 “입김”으로 번역한 단어가 ‘헤벨’입니다.
          추운 날 숨을 내쉬면 하얗게 잠시 나타났다 사라지는 것, 혹은 새벽녘 풀잎에 잠시 맺혔다가 없어지는 아침 이슬이나, 해가 뜨면 사라지는 아침 안개 같은 것을 가리킵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잠깐 있다가 사라지는”이라는 속성입니다.
          “태고”나 “영원” 등 아주 오랜 시간을 가리키는 히브리어 ‘올람’(עוֹלָם)의 반대 개념입니다.

           “내일 일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너희 생명이 무엇이냐 너희는 잠깐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니라(야고보서 4:14)”는 구절은 이 “잠깐 보이다가 없어지는” ‘헤벨’의 속성을 풀어서 설명한 것입니다.

          ‘헤벨’은 성경 인물의 이름이기도 한데, 과연 누구일까요?
          아벨입니다.

          잠깐 이 땅에 생존해 있다가 형 가인에 의해 죽음을 맞는 그 사람입니다.
          어찌 보면 이름대로 된 것이죠.

          ‘헤벨’을 “이해할 수 없고 쓸모 없고 무의미한 것”으로 정의하는 것과 “잠깐 있다가 사라지는 것”이라는 의미로 이해하는 것은 근본적인 차이가 있습니다.
          좋고 나쁨의 가치판단이 개입되어 있느냐(value judgment), 아니면 단순히 현상을 묘사하는 것이냐(descriptive)의 차이입니다.
          물론 잠깐 존재했다 없어지는 것을 “덧없다”고 판단할 수는 있지만, 그것은 현상에 대해 가치(value)를 부여한 것입니다.
          잠시 존재하는 모든 것이 헛되고 무의미한 것은 아닙니다.
          이슬과 안개, 수증기와 입김은 잠깐 눈에 보였다가 사라지지만, “무가치하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모든 것이 무의미하다”라는 말과 “모든 것은 잠깐 있다 사라지는 것이다”라는 표현은 의미의 차원이 전혀 다른 진술입니다.
          전도서를 이해하기 위해 제가 제안하는 방법은 가치판단을 보류하고 이 ‘헤벨’을 현상에 대한 묘사로 이해하자는 것입니다.

          이 ‘헤벨’을 “헛됨”으로 번역해야 할지, 아니면 “잠깐 있다가 사라지는 순간”으로 이해할지, 어느 해석이 더 나은 지를 잘 보여주는 구절은 전도서 9장 9절입니다.
          개역개정의 번역에서 히브리어 ‘헤벨’이 들어간 자리만 공란으로 놓고 보면,

          네 [ 헤벨의 ] 평생의 모든 날 곧 하나님이 해 아래에서 네게 주신 모든 [ 헤벨의 ] 날에 네가 사랑하는 아내와 함께 즐겁게 살지어다.
          그것이 네가 평생에 해 아래에서 수고하고 얻은 네 몫이니라.

          이 괄호 안에 1) “헛된”과 2) “잠깐 있다 사라지는”이라는 두 개의 형용어 중에 어떤 것을 대입할 때 더 적절한 의미가 될까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생명을 “헛된 날”이라고 과연 말할 수 있을까요?
          그보다는, 잠시 머물다 갈 이 세상의 짧은 삶 동안 사랑하는 이와 행복하게 사는 것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몫이라고 이 구절을 이해하는 것이 훨씬 적절합니다.

          만약 모든 것이 무가치하고 쓸모 없다면 대체 왜 전도자는 무엇이 좋은 것이고 어떠한 태도로 살아야 하는지에 대해 그토록 길게 말을 하는 것일까요?
          그것도 다 소용 없고 헛된 것일 뿐일 텐데요.
          헤벨을 “헛되다”로 번역하는 순간, 전도서 전체를 헛된 것으로 만들어 버립니다.
          전도서에 대한 전통적인 이해는 첫 단추부터 잘못 끼운 듯 합니다.

          전도서는 이 땅의 삶의 ‘헛됨’을 말하는 지혜서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시간인 ‘영원(올람, עוֹלָם)'의 관점에서 인간의 삶은 마치 바람이 스쳐가는 것처럼 아주 짧다는 것을 인식하며 사는 것이 지혜라는 가르침입니다.
          그리하여 초상집에 가는 것이 잔칫집에 가는 것보다 나은 것이며(전 7:2), 지혜자의 마음은 초상집에, 우매자의 마음은 혼인집에 있는 것입니다(7:4).
          자신의 생명이 언제 끝날 지 모른다, 지금 당장이라도 죽을 수 있다는 가능성을 항상 염두에 두고 사는 사람은 미래에 가치를 두지 않고 지금 살아있는 이 순간에 집중하게 됩니다. 

          지금 이 순간의 삶이 의미가 있는 것은 죽음이 가까이 있기 때문입니다.
          죽음은 결코 삶을 헛된 것으로 만들지 않습니다.
          사형대로 끌려가는 도스토예프스키가 그 순간 바라보는 모든 것을 하나하나 소중히 눈에 담고 싶어했던 것처럼, 죽음을 인식하는 것은 모든 찰나의 순간(‘헤벨’)에 생명을 불어 넣습니다.
          순간을 살아라(carpe diem)"라는 전도서의 ‘긍정의 신학’은 바로 “죽음을 기억하라(memento mori)"에 바탕을 두고 있습니다.
          지금 자신에게 주어진 것에 만족하고 주위에 있는 사람을 사랑하며 사는 것이 지혜입니다(전 9:9).
          이 지혜는 크신 하나님 앞에서 인간의 한계성을 자각하는 겸손한 신앙인의 자세를 요청합니다.

          정경성

          구약 성경의 정경 목록에 전도서가 들어있는 것이 부적절하다는 주장이 예전부터 제기되어왔다.
          책의 저자인 전도자가 노년에 신앙을 잃었다고 해석할 수 있는 부분이 있기에 이러한 주장은 힘을 잃지 않고 계속 제기되어올 수 있었다.
          따라서 책의 내용을 해석하는 데에 총의를 모으는 것이 얌니야 회의 등 초대 교회의 핵심 주제 중 하나였다. 당시에 찬성측에서 사용한 논거 중 하나는 전도자로 추정되는 솔로몬의 저작이기 때문에 정경으로 둘 권위가 충분하다는 것이었다.

          또 다른 논거로는 책의 결말부에서 '신을 두려워하며 그의 명령을 지키라'는 교훈이 주어지기 때문에 충분히 유익하다는 것이 있었다. 그러나 책의 나머지 부분에서 정경성을 찾으려는 모든 시도는 힘을 잃었다.

          위치

          전도서는 캐투빔 중 다섯 메길롯으로 분류된다.
          유대교에서 메길롯간 배열 순서는 다음의 두 가지가 있다.

          히브리력의 순서에 따라 배치되어, 아가 - 룻기 - 애가 - 전도서 - 에스더

          중세 시대에 상정한 형성 순서에 따라 배치되어, 룻기 - 아가 - 전도서 - 애가 - 에스더

          그러나 고대에는 케투빔에 대한 다른 분류법이 있어서, 전도서는 잠언과 아가 사이에 위치했었다.
          이후 70인역이 번역될 때 이 전통을 따랐고, 현대 기독교의 정경도 이 순서로 배열한다.
          이를 두고 전도서가 잠언의 여러 구절을 인용하며 또한 비판적으로 다루고 있기 때문에 고대에 이러한 순서로 배열했다고 보는 견해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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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도서는 잠언과 이어지면서도 다른 점이 있다.

          전도서를 기록한 자를 전도자라고 하는데, 전도자란 깨달은 자 또는 지혜자 라고 이해하면 된다.

          잠언은 지혜가 줄 영광을 말하고 있다.
          지혜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데서 오며,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는 부와 명예와 생명을 얻는다(잠언 22:4).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은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일이요,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자는 원수와도 평화를 누린다(잠언 16:7).

          그러나 전도서는 모든 것이 헛되며, 지혜도 헛되고, 지혜가 가져올 영광도 헛되다고 말한다.
          “지혜가 많으면 번뇌도 많으니 지식을 더하는 자는 근심을 더하느니라.”(전도서 1:18)
          이 구절은 노자의 도덕경의 한 구절을 보는 듯하다.
          아는 게 많을 수록 마음이 복잡해지고 모든 것이 상대화되어 갈 길을 잃고 생동감과 실천력이 약해짐은 인생의 경험을 통해 잘 알 수 있다.
          어른이 될수록 아는 게 많아지고 그래서 새로운 것을 기대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많이 알수록 단순한 마음을 잃으면 안 된다.
          동아시아에서 허허실실을 말한 것도 그래서이다.

          서양의 철학자 베르그송단순함(simplicity)을 중시했는데, 그가 말한 단순성은 아무 것도 몰라서 단순한 것이 아니라 많은 것을 알면서도 단순해지는 것을 가리킨다.
          그 단순함으로 많은 걸 포용할 수 있다.

          전도서는 지혜도 헛되다고 말하고, 그 지혜가 가져올 영광도 헛되다고 본다.
          “하나님은 그를 기쁘게 하는 자에게 지혜와 지식과 행복을 주시나, 죄인에게는 노고를 주시고 그가 모아 쌓게 하사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자에게 주시지만 이것도 헛되어 바람을 잡는 것과 같다.”(2:26)

          전도자가 모든 것을 헛되게 보는 이유는 누구나 결국 죽고 사라질 것이기 때문이다.
          죽으면 아무도 기억해 주지 않는다.
          “지혜자도 어리석은 자처럼 오래 기억되지 않을 것이니, 훗날에는 모두 잊혀지리라.
          지혜자나 어리석은 자나 모두 죽어 없어질 것이니 말이다.”(2:16)

          “인생은 풀과 같고, 인생의 영광은 들의 꽃과 같으니, 풀은 시들고 꽃은 떨어지노라. 바람이 불매 모두 사라지고 그 있던 자리도 그것을 기억하지 못하노라.”(시편)

          그러나 허무한 중에서도 전도자는 인생의 기쁨과 의미를 찾는다.
          3장 11절부터 13절까지이다.
          13절부터 거슬러 올라가 11절에 이르러 궁극적으로 도달한 의미의 세계를 보여준다.
          13절.  먹고 마시고 열심히 일해 이룬 것에서 만족감을 갖는 것. 이것은 일상의 일반적인 기쁨인데, 전도자는 이것도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본다.
          맛있게 잘 먹고 일하고 자기 일에 보람을 느끼는 것은 인생의 축복이다.

          그러나 그것보다 더 의미 있는 것은 선을 행하는 일이다.
          12절에 나온다.
          “사람들이 사는 동안에 기뻐하며 선을 행하는 것보다 더 나은 일이 없는 줄 알았다.”
          13절이 자기를 이롭게 하는 것 또는 자기성취와 관련된 것이라면 12절은 도덕적인 것 곧 남들에게 잘 하고 세상에 유익을 미치는 일이다.

          도덕보다 좀 더 의미 있는 차원은 종교이니 11절의 말씀이다.
          “하나님이 모든 것을 지으시되 때를 따라 아름답게 하셨고 또 사람들에게는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느니라.
          그러나 하나님이 하시는 일의 시종을 사람이 알 수 없게 하셨느니라.”
          영원을 사모하는 사람은 자기의 한계를 알고 아름답게 된다.
          모든 것이 때가 있으니 때를 잘 맞추어 자기 자리를 지키면 아름답게 된다.
          전도자는 인생이 영원하신 하나님의 때의 한 부분을 차지했다가 가는 것이라고 보는 것 같다.
          그렇다면 의미는 영원에서 나온다.
          그 영원은 인간이 소유할 수 없는 것이니 오직 부분적으로 참여할 수 있을 뿐이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의 시종을 사람이 알 수 없다”고 한 것은 그 뜻인 것 같다.
          교부들과 중세 신학자들 그리고 종교개혁자들은 한결같이 하나님의 본질을 알 수 없다고 했는데, 같은 말이다.

          그러므로 구약성서에서 하나님은 경외의 대상이다.
          “하나님이 이렇게 행하심은 사람들이 그를 경외하게 하려 하심임을 내가 알았도다.”(전도서 3:14) 얼마 전에 예수회 신부가 요즘 예배에 경외심이 없어졌다고 한 말이 기억난다.
          그것은 단지 예배의 문제가 아니라 현대 문명의 문제일 것이다.

          경외심은 인간이 자유롭게 되기 위한 전제이니, 그래서 공자도 “신을 경외하되 멀리하라”(敬鬼神而遠之)고 햇던 것 같다.
          신을 멀리하라는 것은 동양 인문주의의 아버지인 공자의 모습이고, 그러면서도 어떤 우주적 도에 대한 경외심을 지켜야 인간이 자기에 걸려 넘어지지 않고 자유로워질 수 있다고 공자는 생각했던 것 같다.
          한대 이후 유학의 수양방법에는 성誠 외에도 경敬이 중시되었고, 주자와 퇴계는 누구보다도 경을 진리도달의 핵심으로 삼았다.

          성서의 전도자에게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 도덕과 일상에 의미를 부여한다.
          하나님을 경외할 때에 먹고 마시고 자기 일에서 만족함을 얻는 일상사가 충만해진다.
          그래서 그런 일도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한 것이다.(2:13).
          그리고 하나님을 경외할 때에 자기 뿐 아니라 모두를 유익하게 하는 대로로 갈 수 있다.
          살면서 기쁘게 선을 행한다는 말(3:12)이 그 뜻이다.
          자기와 모두를 유익하게 할 줄 아는 게 지혜이니, 결국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시작이요 지혜를 얻는 길이다.
          그 점에서 전도서는 잠언과 연속성을 갖는다.

          지혜가 많을 수록 근심도 많아진다는 것(1:18)도 지혜를 소유하려고 할 때에 그렇게 되는 것이다.
          잠언은 “스스로 지혜롭다고 생각하지 말고 하나님을 경외하라”(3:7)고 말한다.
          소유된 지혜가 아니라 하나님의 지혜에 참여하여 활동하는 지혜는 근심을 늘리지 않는다.

          1. 표제

          책명은 히브리어로 코헬렛(Qoheleth)인데 전도자란 뜻이다.
          전도서의 논술자는 1:12에서 이 제목을 자기에게 적용시켰다.
          코헬렛은 대개 모임의 “소집자” 또는 그런 모임에서의 공식적인 “연설자,” “설교자”의 뜻을 가지고 있다.
          코헬렛이란 단어의 여성형과 7:27에서 여성 동사를 사용한 것으로 볼 때 전도자란 솔로몬과 그를 통해 말씀하시는 거룩한 지혜자를 지칭하는 것 같다.
          상징적으로 지혜가 백성들에게 말한다고도 했다(잠 1:20).
          이와같이 코헬렛은 거룩한 지혜와 교통하는 대리자로 표현되기도 하고 지혜를 의인화해서 표현되기도 한다.

          “지혜자의 말씀은 찌르는 채찍같고 회중의 스승의 말씀은 잘 박힌 못 같다”(전 12:11)고 말했다.
          12:9에는 “전도자가 지혜로우므로 여전히 백성에게 지혜를 가르쳤다”고 했다.
          열왕기상 4:32, 33에는 “말했다”(spake)라는 단어가 세번 반복되어 있다.
          이는 기록된 문장이 아니고 모인 무리 앞에서 말씀했음을 뜻하는 것이다.
          성령은 말씀하시기를 솔로몬의 교훈은 전 시대와 장소를 통해서 하나님의 교회 즉 “큰 회중”(great congregation)을 위한 것이라고 했다(시 22:25; 49:1-4).

          헬라어나 라틴어 제목은 코헬렛을 “전도서”(Ecclesiastes)라고 번역했다.
          그 뜻은 어느 정도 비슷하다.
          코헬렛(Qoheleth)은 히브리어 카할(qahal) - “회중을 모으다”-에서 온 단어인데, 그것의 명사형은 “모임,” 또는 “회중”의 뜻이다.
          헬라어의 경우 “회중”은 “부르다”의 뜻인 동사형 칼레오(kaleo)에서 나온 것이고, “교회”는 명사형인 “에클레시아”(ekklesia)에서 나온 것이다.
          이와같이 영어 단어 “성직자”(ecclesiastic) 또는 “성회의”(ecclesiastical)는 에클레시아로부터 따온 단어들이다.

          2. 저자

          오래 전부터 전도서의 저자가 솔로몬 왕이라는 것은 공인된 사실이다.
          “예루살렘왕 다윗의 아들”(전 1:1)이란 히브리어 표현은 솔로몬의 저자설을 충분히 뒷받침하는 것으로 생각된다.
          마틴 루터가 비공식적인 담화 중에 처음으로 솔로몬의 저자설에 관해 의심을 던졌다.

          고대로부터 마틴 루터 시대까지 전도서를 연구하는 모든 사람들에 있어서 잠언, 전도서, 아가서의 저자는 동일인이라는 의견이 공통적이었다.
          그러나 문체가 다르다는 사실은 지적되었다.
          그렇지만, 전도서를 잠언과 아가서와 비교해 볼 때 문체의 차이가 있는 것은 솔로몬의 생애의 말년에 사물에 대한 주제의 차이와 사고 방식의 성숙함으로 인한 차이로 간주할 수 있을 것이다.
          아가서는 하나님께 대한 솔로몬의 첫사랑의 시기에, 잠언은 후기에, 전도서는 그의 노년에 기록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전도서의 저자에 대해서는 현대의 모든 연구가들이 그런 것처럼 솔로몬이라고 믿을 수 밖에 없다.
          어떤 그럴듯한 견해를 가지고도 다른 인물을 저자로 결정할 수 없는 것이 확실하다.
          이런 견해로 볼 때 전 1:1의 “전도자”는 솔로몬의 “심령과 능력으로”(눅 1:17)라고 기록한 바로 그 인물임에 틀림없다.

          전도서의 기록 시기를 정확하게 알아내는 것은 정말 불가능한 것이다.
          현대 학자들은 일반적으로 B.C. 3세기에 기록되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솔로몬 왕은 B.C. 931-930년에 사망했는데, 만일 그가 저자라고 한다면 기록시기는 그의 사망 직전이 될 것이다.

          히브리 경전의 배열에 있어서 전도서의 위치는 오늘날 우리가 가지고 있는 성경의 경우처럼, 이 책이 경전에 삽입된 연대를 추측하는데 도움을 줄 수 있을 것 같다.

          첫째로 전도서는 “메길롯”(Megilloth)이라는 5권의 기타 “두루마리”에 포함되는데, 아가, 룻, 예레미야, 애가, 전도서, 에스더의 순으로 되어 있다.

          두번째로, 전도서는 히브리 경전이 형성될 때 마지막 5권의 책 중 하나인데, 이들은 전도서, 에스더, 다니엘, 에스라-느헤미야, 역대서등이다.

          이 두 경우에서 전도서는 에스더 바로 앞에 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사실로서 우리는 다음과 같이 추측할 수 있다.
          즉, 이 두 책이 거의 동시대에 경전으로 된 것 같다.
          전도서가 경전이 되기 수년 전, 심지어는 수세기 전에 이미 기록되어 읽혀졌을 가능성이 짙다.

          3. 역사적 배경

          전도서의 배경은 이 책 자체에 명백히 나타나 있다.
          처음 열 한절의 서론 부분 다음에 솔로몬 자신의 간명한 언급이 나오는데 “나 전도자는 예루살렘에서 이스라엘 왕이 되어”(전 1:12)라고 했다.
          히브리어 동사 “나는 되었다”는 완료 시제인데, 솔로몬이 그의 노년에 회중 앞에서 말할 때 자주 사용하던 바로 그 형태이다.
          그는 왕으로서 자기 자신의 경험을 이야기했다.
          청중들이 익히 알고 있는 역사적인 사건보다는 행복에 관해 자기 자신이 연구한 바를 더 많이 언급했다.

          4. 주제

          솔로몬은 히브리 나라의 다른 왕들에 비해 지혜와 재산이 월등하게 많았지만, 그는 이 모든 것들이 영구적이고 진정한 행복을 얻는 데는 쓸모 없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럼 사람이 어떻게 행복을 얻을 수 있었는가?
          창조주 하나님과 연합하므로, 자기를 존재하게 하신 거룩한 목적을 깨달아야 한다.

          전도자는 인생 행복의 무상함을 생각할 때, 세상에 편만한 불행을 볼 수 있게 되었다.
          “지혜자”는 사회적인 불공평과 불평등을 해결하는 방법으로서, 재난으로 꽉찬 이 세상이 어떤 종류의 “복지국가”가 되는 것을 제안하지 않았다.
          이 전도자는 자기의 말씀을 끝맺으면서 일련의 실제적인 제안을 했다.
          개인적으로 우리들은 가난하고 고통당하는 자들에게 우리가 줄 수 있는 도움을 주어야 한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것은 우리의 마음과 애정을 하나님께 바치고 그분께 복종함으로 마지막 심판을 위해 준비하는 것이다.
          이와같이 전도서는 깊은 인생 철학과 인간의 존재 목적, 인생의 임무와 운명에 관해 언급하고 있다.

          솔로몬은 자기 자신의 경험을 말하므로 다른 사람들을 하나님을 믿는 믿음의 길로 인도하려고 노력하고 있다.
          그는 창조주에 대한 신앙을 손상시킬지도 모르는 불법과 실망, 그리고 세상에 편만한 포학을 하나 하나씩 열거하고 있다.
          그러나 최후의 심판의 날은 무시될 수도 없고 무제한으로 연기될 수도 없다.
          비록 불공평한 일들이 잠시동안 지속된다고 할지라도 이런 것들은 본래 징계의 수단일 뿐이다.
          그러므로 인간의 본분과 궁극적인 행복은 기회를 포착하고 이것을 최선의 방법으로 활용하기 위해 결심하는 생애, 바로 거기에 있는 것이다.

          전도서에서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한 것은 선민의 개념이 아니고 코헬렛(전도자)의 지도력 아래 함께 모인 회중의 한 개인의 의미를 지니고 있다.
          회중 가운데 있는 논쟁은 한 단체의 구성원으로서 하나님께 대한 직접적이고 개인적인 관심사에 중요성을 두고 있다.
          따라서 전도서는 혈통적인 이스라엘로부터 영적인 이스라엘로 옮겨가는 적절한 과도기를 마련하고 있다.
          이스라엘 왕 솔로몬은 그 이름의 뜻은 “평화”이지만 그가 고령이 되기까지는 자기 자신의 생애에서 평화를 찾지 못했다.
          유대인들은 구약 성서의 마지막 부분, 즉 고대에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을 취급하신 방법을 통해서 예시하신 인생 철학의 절정이 기록된 이 부분에, 솔로몬의 설교를 상당히 포함시켰다.

          솔로몬이 하나님의 은혜로 자기에게 주어진 지혜와 영광과 능력의 근원을 잃어 버렸을 때 본래의 성향이 이성을 지배하게 되었다.
          하나님께 대한 확신과 거룩한 인도하심에 대한 신뢰는 저절로 무너지고 자기 신뢰와 자기가 하고자 하는 대로 선택하려는 경향이 커졌다.
          이성이 점점 더 기분에 지배되므로, 솔로몬의 도덕적인 감수성은 둔해지고, 그의 양심은 마비되고, 그의 판단은 왜곡되었다.
          무신론적 회의와 불신이 그의 마음을 완고하게 하고, 도덕적인 원칙을 약화시키고 그의 생애를 타락시켜서 결과적으로 완전한 배교에 이르게 되었다.
          수년 동안 그는 파멸로 이끌어 갈 어리석은 행위로부터 돌이키려는 노력이 헛되므로 괴로워했다.

          그러나 그의 생애가 끝나려고 할 때 드디어 양심은 소생되어 솔로몬은 참된 빛으로 어리석은 행위를 보기 시작하고, “늙고 둔하여 간함을 받을 줄 모르는 왕”(전 4:13)이라고 하나님께서 자기를 보시는 것처럼 자기를 보게 되었다.
          그가 죽을 시간이 가까이 올 때, 자기의 낭비한 생애를 반성하면서 기쁨을 찾을 수가 없었다(전 12:1).
          방종의 결과로 그의 마음과 몸은 이미 쇠약해졌다(전 12:2-5).
          그는 진심으로 회개하고 제멋대로 행한 과거의 발자취를 돌아보려고 애썼다. 영혼을 순화시키고, 지치고 목이 갈한 그는 세상의 깨어진 물통에서 돌이켜 다시 한번 생명의 샘에서 물을 마시고자 했다.

          하나님의 은총을 회복하려고 했으나, 오랫동안 낭비한 신체적 정신적인 능력을 기적적으로 되찾지는 못했다.
          “죄로 인해 인간의 모든 기관은 교란되고, 정신은 타락하고, 상상력은 부패했다”(치료 451).
          그리고 솔로몬의 뉘우침이 “자기가 뿌린 악의 결실을 막지 못했다”(교육 49).
          “그는 죄의 무서운 결과로부터 피할 것이라고 결코 기대할 수 없었다”(부조 78).
          그럼에도 불구하고 솔로몬은 자기가 어리석은 행위를 추구함으로 그렇게도 무모하게 내버린 지혜를 어느 정도 회복했었다.
          경험을 통해서 그는 “이 세상에서 가장 좋은 것을 추구한 생애가 허무하다는 것을 배우게 되었다”(선지 76).
          점차적으로 그는 자기 생애의 악함을 깨닫고 자기가 거쳐온 쓰라린 경험으로부터 다른 사람을 보호하기 위해 경고의 음성을 높이 발할 수 있는 방법을 모색했다.
          그렇게 함으로 자기의 어리석은 행위의 영향을 제거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던 것이다.
          따라서 솔로몬은 성령의 영감으로 자기가 낭비한 수년 동안의 역사를 후세대에게 경고의 교훈으로 기록했다.
          전도서는 “그의 어리석음과 회개에 대한 기록”(선지 85)이며, “하나님의 가장 훌륭한 선물들을 무가치한 것을 위해 낭비하도록 만든 잘못”(선지 80)에 관한 묘사이다. 그것은 “경고로 가득차 있”고(선지 82), 따라야 할 모본을 영감적으로 기록하려고 시도하기 보다는 엄숙한 경고의 내용을 담고 있다. 자기가 쾌락과 인기, 재물과 권력을 추구한 사실을 생생한 언어로 묘사하고 있다. 그러나 그의 마음 속에서 일어나는 자기의 잘못된 행위를 변명하려는 비뚤어진 사고 방식에 대한 솔로몬 자신의 분석이 슬픈 이야기들을 묶는 띠의 역할을 하고 있다. 그의 반역한 수년 동안의 경험과 논증을 기술한 이 부분들을 성령의 목적과 뜻을 표현한 것으로 간주하지는 않는다. 그렇지만 그 말씀들은 그때 그가 실제로 생각하고 행한 것에 대한 영감적인 기록이며, 그 기록은 잘못된 생각과 행위에 대한 진정한 경고로 구성되어 있다. 예를 들면 2:17과 4:2과 7:1, 28에 묘사된 인생에 대한 냉소적인 태도는 그리스도인들에게 모본이 되기보다는 그 반대의 경우이다(전 1:17; 2:1, 3, 12). 이와같은 성경절들은 그 문맥에서 억지로 떼내어 하나님께서 교훈을 주기 위해 의도하시지 않은 상상적인 진리를 가르치려고 해서는 안된다.

          그러므로 전도서를 연구함에 있어서 솔로몬이 말하는 교활하고 비뚤어진 논리와 그의 회개에서 나오는 명석한 통찰력을 구별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문맥을 보면 솔로몬이 그전 생애의 잘못된 논리를 전개하는지, 아니면 그의 회개의 날 동안에 순화된 사상을 피력하는지를 알 수 있다. 그전 생애의 비뚤어진 사상과 태도의 묘사는 가끔 다음과 같은 표현으로 소개되었다. 즉 “나는 보았다,” “나는 말했다,” “나는 궁구했다,” “나는 만들었다,” “나는 마음을 썼다”등이다(전 1:13-2:26). 반면에 생애의 경험으로부터 나오는 진정한 결론들은 가끔 “나는 안다” 또는 “내가 보았노라”등으로 소개되었다(전 3:10-14; 5:13, 18 참조). 또 냉소적이고 부정적인 기록은 그전 생애의 사상으로 구분한다(전 1:18; 2:11, 14-20; 4:2, 3; 6:12; 7:1-3, 27, 28; 9:11). 반면에 인생 말년에 사려깊은 판단이 반영된 결론들은 그 논조가 적극적이며(전 5:1, 10; 9:11; 11:1; 12:1) 언급된 원칙들은 성경 여러 곳에서 확증되었다(전 5:10, 13; 6:7; 8:11; 11:9; 12:7, 13, 14).

          솔로몬은 “지혜”라는 단어를 세상적인 지혜와(전 1:18; 7:12), 참된 지혜(전 7:19; 8:1; 10:1) 양쪽에 모두 사용했음을 주목해야 한다. 쾌락과 어리석은 일을 추구하기 시작했을 때 그는 죄악적인 모든 쾌락도 즐기고 동시에 자기의 지혜와 건전한 판단력도 손상시키지 않고 유지하려고 작정했다(전 2:3). 어리석게도 자기 자신을 지혜롭다고 생각했으나(전 2:9) 여러 해가 지나갈 때까지 이 치명적인 자기 기만을 깨닫지 못했으며, 탕자처럼(눅 15:17) 더욱 슬프고 더욱 지혜로운 사람으로 의식을 회복했다(전 7:23). 마치 하와가 자기의 원통함과 비통한 실망을 깨달은 것처럼 죄의 기만성은 그와 같은 것이다(창 3:5-7참조).

          5. 개요

          Ⅰ. 서론: 인생의 헛됨 1:1-11
               1. 세대가 오고 가는 것이 헛되게 보임 1:1-4
               2. 자연의 순환이 끝이 없고 무의미하게 보임 1:5-8
               3. 무슨 “새로운 것”이 있으며 생존에 어떤 위대한 목적이 있는가? 1:9-11

          Ⅱ. 솔로몬의 행복에 대한 질문 1:12-2:26
               1. 지식이 더할수록 실망이 커짐 1:12-18
               2. 쾌락, 환락, 물질적 소유의 헛됨 2:1-11
               3. 죽으면 지혜로운 자와 어리석은 자가 같음 2:12-17
               4. 지혜로운 자는 자기 노력의 결과에 만족하지 않음 2:18-23
               5. 만족은 하나님에게서만 온다 2:24-26

          Ⅲ 범사가 기한이 있음 3:1-4:8
               1. 여러가지 인간 활동을 위한 때 3:1-15
               2. 거룩한 심판을 위해 3:16-22
               3. 인간의 불의가 허용된 때 4:1-8

          Ⅳ. 네가지 이상 4:9-5:9
               1. 우정의 가치 4:9-12
               2. 지혜의 가치 4:13-16
               3. 경건의 가치 5:1-7
               4. 공의의 가치 5:8, 9

          Ⅴ. 인생의 헛됨 5:10-6:12
               1. 물질주의의 헛됨 5:10-12
               2. 고통을 이해할 수 없음 5:13-17
               3. 수고의 헛됨 5:18-6:12

          Ⅵ 생애를 위해 가치있는 것들 7:1-22
               1. 신망과 품성의 형성 7:1-10
               2. 하나님과의 관계를 이해하는 지혜 7:11-14
               3. 인생에 대한 올바른 견해 7:15-18
               4. 완전한 것은 없음 7:19-22

          Ⅶ. 지혜를 탐구함 7:23-12:7
               1. 지혜가 주는 실망 7:23-29
               2. 지혜의 모순을 해결함 8:1-15
               3. 측량할 수 없는 하나님의 방법 8:16-9:6
               4. 생애의 변화 가운데서 만족함 9:7-10:6
               5. 모든 행위와 마땅한 보상 10:7-11:10
               6. 생애의 마지막 12:1-7

          Ⅷ 결론: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기대 12:8-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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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도서 1:1-2
          다윗
          의 아들 예루살렘 왕 전도자의 말씀이라.
          전도자가 가로되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

          전도서 12:14

          하나님은 모든 행위와 모든 은밀한 일을 선악간에 심판하시리라.

          전도서'는 무엇이 행복인가, 우리가 사는 인생 가운데 행복이라고 할 것이 있는가, 질문하고 답하는 책입니다.
          전통적인 철학적 지혜는 사람의 행복과 성공이 그 사람의 행동에 달렸다고 생각합니다. 열심히 살면, 바르게 살면, 힘을 얻으면, 돈이 많으면 행복하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전도서'는 이를 정면으로 부정합니다. 지식과 지혜도, 부와 권세도, 향락도 모두 누려도 행복하지 않으며, 심지어 바르게 열심히 살아도, 현실에서는 모두 잘되지도 바르게 되지도 행복하지도 않다는 것입니다. 때로 잠깐 행복을 느낄 수 있으나 해 아래 어떤 사람도 지속적으로 행복을 누릴 수 없고 죽어서야 모든 것이 끝난다고 말합니다. 죽음만이 공평하다고 합니다.

          '전도서'는 앞에만 보면 이게 무슨 성경인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무슨 허무주의, 염세주의 철학책 같기도 하고, 어찌 보면 인생은 정해져 있다는 숙명론이나 운명론을 역설하는 것 같습니다.

          '전도서'는 끝까지 읽어 봐야 그 주제와 내용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결론이 뒤에 있습니다. '전도서'는 사람이 이 세상에서 추구하며 이루는 것이 헛되다는 것을 깨달은 사람이 하나님을 만나게 되고, 영원한 것, 신적인 것, 참가치가 있는 것을 찾게 된다는 것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해 아래 새것은 없다.
          그러면…

          '전도서'의 책 제목은 '디브레 코헬렛'으로 우리말로는 '사람을 불러 모아 말하는 사람', '회중의 스승(12:11)'이란 뜻입니다. 사람을 모아 인생을 가르치고, 참가치를 가르치는 책이라는 것입니다. 책 제목을 '전도서' 그러면 너무 딱딱하고 의미도 잘 전달이 안 되니 '솔로몬의 인생론' 정도 하면 어떨까 싶습니다.

          1장 1절은 이 글의 저자, 또는 배경이 '다윗의 아들 예루살렘의 왕 전도자의 말씀'이라며 시작합니다. 다윗의 아들이고, 예루살렘의 왕의 말씀이니 거창하고 희망차고 대단한 말이 있을 것으로 기대됩니다. 그런데 1장 2절은 뜻밖의 말로 시작합니다.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얼마나 헛되면 이 짧은 말에 헛되다는 말을 5번이나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글들을 읽다 보면 도대체 인생에 무슨 희망이 있나, 무슨 행복이 있나 오히려 절망감을 줍니다.

          솔로몬은 '해 아래' 새것이 없다고 선언합니다. 솔로몬은 "무엇이든지 내 눈에 원하는 것을 금하지 아니하며, 마음이 즐거워하는 것을 막지 않고(2:10)" 희락도 즐길 만큼 즐겨 보고, 술도 먹을 만큼 먹고, 사업도 크게 하고, 남녀 종들이나, 각종 금은보화로 부귀도 누리고, 처첩도 많이 두었는데 해 보니 별거 아니고 아무것도 아니라고 이야기합니다.

          한마디로 '해 아래' 모든 것이 헛되다는 것입니다. 세대는 오가지만 땅은 여전히 그곳에 있고, 해도 떴다 지고, 바람도 불었던 곳으로 돌아가고, 강물도 바다도 그저 하염없이 흐르고 있다는 것입니다. "모든 만물이 피곤하다는 것을 사람이 말로 다할 수 없나니 눈은 보아도 족함이 없고 귀는 들어도 가득 차지 아니하도다(1:8)." 사람의 욕심과 만족은 끝이 없다고 한탄합니다.

          이스라엘의 가장 부강한 때 왕으로서 모든 것을 다 누리고, 가장 지혜로운 왕이라는 솔로몬의 고백이니 흘려들을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듣고 있다 보면 그럼 도대체 희망도, 행복도 없는 인생을 무엇 때문에 왜 그렇게 열심히 살아야 하는가? 열심히 공부해 지식을 쌓고 학문적 업적을 이루고, 지혜롭게 무언가를 세우는 것도 결국 뒤에 사람 좋은 일만 시키는 것이라고 합니다.

          산 자들보다 죽은 자들이 더 복되다 하고, 선한 자나 악한 자나 지혜자나 우매자나 모두 죽는 것은 매일반이라 냉소합니다. 불교에서 이야기하는 인생은 '고통'이고 그저 고통을 벗어나기 위해 모든 일상, 속세를 떠나 면벽수도라도 해야 하나 그런 허탈감이 생깁니다.

          '전도서'가 말하는 행복

          그러나 '전도서'는 곳곳에 그래서,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무엇이 행복인가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첫째, 주어진 가정에 감사하고 소박하게 삶을 살아가는 것이 행복이라는 것입니다. "네 헛된 평생의 모든 날 곧 하나님이 해 아래에서 네게 주신 모든 헛된 날에 네가 사랑하는 아내와 함께 즐겁게 살지어다. 그가 네가 평생에 해 아래에서 수고하고 얻은 네 몫이니라(9:9)."

          인생을 40살 이상 살다 보면, 전도서에서 말하는 '헛됨'을 조금은 깨달을 수 있습니다. 무언가 목표를 향해, 정의롭게, 성실하게, 꿈을 키우며, 세상이 모두 나를 중심으로 돌아가는 것 같이 살아왔지만, 실상 세상 속에 나란 존재는 그저 그런 평범한 한 사람일 뿐이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세상이 나를 중심으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내가 세상의 일부분이 되어 내게 주어진 삶을 사는 것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평범한 것, 그것이 얼마나 소중하고 아름다운 것인지요.

          둘째, 작은 선을 행하며 사는 것이 행복입니다. "하나님이 모든 것을 지으시되 때를 따라 아름답게 하셨고 또 사람들에게는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느니라…(중략)…사람들이 사는 동안에 기뻐하며 선을 행하는 것보다 더 나은 것이 없는 줄을 내가 알았고(3:11~12)."

          뭐 거창하고 큰 것 아닙니다. 내 가족, 내 이웃, 내가 늘 만나는 그저 그렇고 그런 사람들을 따뜻하게 대하고, 작은 도움을 주고, 내게 주신 재물과 작은 권력을 통해 작은 선을 나누며 사는 것. 그것에 행복이 있다는 것입니다.

          셋째, 서로 돕고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두 사람이 한 사람보다 나음은 그들이 수고함으로 좋은 상을 얻을 것임이라. 혹시 그들이 넘어지면 하나가 그 동무를 붙들어 일으키려니와 홀로 있어 넘어지고 붙들어 일으킬 자가 없는 자에게는 화가 있으리라(4:9~10)."

          마음을 나누고, 삶을 나누고, 어려운 일이 있을 때, 외로울 때 함께 나눌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우리가 바로 그런 사람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길동무, 말동무가 되어 주고, 삶을 조금 거들어 주는 동무가 되어 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험한 세상에 조금씩 지지대가 되어 주고, 한 겹줄 연결해 주는 것입니다. "한 사람이면 패하겠지만 두 사람이면 맞설 수 있나니 세 겹줄은 쉽게 끊어지지 아니하느니라(4:12)."

          넷째, 창조자 하나님을 기억하고 그를 경외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같이 행하심은 사람들이 그의 앞에서 경외하게 하려 하심인 줄을 내가 알았도다(3:14)." "꿈이 많으면 헛된 일들이 많아지고 말이 많아도 그러하니 오직 너는 하나님을 경외할지니라(5:7)."

          전도자가 말합니다. 청년이 어리다고 젊다고 기뻐하며 마음에 원하고 눈에 보이는 대로 행하라, 그러나 한 가지 잊지 말 것은 이 모든 것에 '심판'이 있다는 것이다(11:9), 하나님은 모든 행위와 모든 은밀한 일을 선악 간에 심판하신다(12:14)는 것입니다.

          그러니 청년의 때, 나는 아무것도 아니고, 아무 낙도 없다고 하기 전에 소망도 희망도 없이 절망 가운데 빠져 살기 전에 "너의 창조자를 기억하라(12:1)"는 것입니다. 창조자를 기억하고 그를 경외하고 그의 명령을 지키는 것, 그것이 사람의 본분이라(12:13)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전도서는 허무주의나 염세주의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저것 누려 본 왕이 '해 아래' 이 땅의 모든 삶에 새것이 없고 헛되지만, '해 위에'는 하나님이 계시고, 영원한 삶이 있고, 심판이 있다는 것을 알려주는 것입니다.

          그러니 인기, 권력, 명예 등에 인생을 팔지 말고 인간의 참된 본분을 돌아봐야 한다는 것입니다. 주어진 삶에 감사하며 소박한 삶을 살고, 겉으로 볼 때 너무나 평범하고 뻔한 것 같은 삶이지만, 바로 우리에게 주신 삶이며, 우리가 살아가야 할 삶인 것입니다.

          그러나 영화 '써니'가 각자에게 주어진 일상의 삶을 살아가는 것에서 진정한 행복을 찾는다 말한다면, 전도서는 성경은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의 명령과 말씀을 따라 살아가는 것! 그의 인도하심을 따라 살고, 그의 심판이 있음을 생각하고, 그의 말씀과 명령을 따라 살아가는 것. 그래서 이 땅에서의 삶만이 아니라 영원한 하나님나라를 바라보고 사모하며 사는 삶이 있음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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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 아래 인생 - 헛되고 헛되니(1:1-11)

          이스라엘 백성들은 솔로몬왕이 젊은 시절에 아가서를 기록하였고, 장년기에 잠언서를, 그리고 젊은 시절 많은 여인들과 결혼하며 우상숭배를 하였던 죄를 회개하고서 노년기에 전도서를 기록하였다고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잠언 1:1
          다윗의 아들 이스라엘 왕 솔로몬잠언이라 .

          아가서 1:1
          솔로몬의 아가라.

          전도서 1:1
          다윗의 아들 예루살렘 왕 전도자의 말씀이라.

          전도서는 처음부터 인생의 허무함을 노래합니다.
          전지전능하시고 자비하신 하나님에 대해서 증거하고, 우리 인생사용설명서로 주신 하나님의 말씀에 이렇게 허무함을 읊조리는 내용을 담고 있어도 될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하지만 역설의 진리를 담고 있는 전도서에는 인생의 깊은 회의 끝에 하나님을 꼭 붙든 전도자에 대해서 잘 그려주고 있습니다.
          마치 전도서는 신실한 그리스도인의 가정에 태어난 아주 총명한 자녀가 하나님 없이도 인생의 업적을 이룰 수 있고,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지 않아도 보란 듯이 성공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발버둥을 치다가, 결국 자신의 능력으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을 알고 하나님 앞으로 돌아와 쓰는 참회록과 같습니다.

          전도서는 모두 12장으로 구성이 되어 있습니다.
          1-6장은 ‘해 아래에서의 삶’에 대해 증거하는데, 그것은 곧 하나님을 떠난 삶이고, 그 결과는 허무함인 것을 강조합니다.
          7-12장은 ‘해 위를 구하는 삶’에 대해서 증거하는데, 인간은 하나님을 경외해야 하는 존재임을 강조합니다.

          본문 1-11절은 전도서 전체의 서론입니다.
          (1) 다윗의 아들 예루살렘 왕 전도자의 말씀이라

          전도자는 자신을 ‘솔로몬’이라고 말하지 아니하고, ‘다윗의 아들 예루살렘의 왕’이라고 고백합니다. 이것은 자신이 하나님의 신실한 종이었던 다윗왕의 혈통을 이어받은 정통성 있는 신정왕국의 통치자인 것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솔로몬이 기록한 책이 잠언, 전도서, 아가서인데, 그 중에 잠언과 아가서에서는 자신의 이름이 솔로몬임을 밝히는 반면에 전도서에서는 밝히지 않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 특별한 은총을 받았음에도, 많은 이방여인들과 결혼하고, 우상숭배를 한 지난 삶에 대한 참회의 기록이기 때문에, 여기에 자신의 이름을 쓰는 것은 온당하지 않다고 여겼기 때문일 것입니다.

          전도자는 해 아래의 삶을 아주 적절하게 이렇게 표현합니다.
          (2) 전도자가 이르되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직역하면 이러합니다. “전도자가 말하되, 헛된 것들 중에 헛되구나, 헛된 것들 중에 헛되구나, 모든 것이 헛되구나”입니다. ‘헛된 것들 중에 헛되다’는 ‘헛되다’의 최상급 표현입니다. ‘바보들 중에 바보’가 가장 바보인 것과 비슷합니다.
          이 한 절에 ‘헛되다’는 말이 5번이나 나옵니다. 그런데 ‘헛되다’는 ‘숨’을 뜻하는 말입니다. 만약 손등에다 ‘후-’하고 바람을 불면 뭔가 느낌이 잠깐 있었는데 이내 사라지고 맙니다. 그래서 ‘헛됨’은 ‘짧음’과 ‘의미없음’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인간의 ‘숨’은 언제나 ‘한숨’입니다. 이 구절의 의미를 살리면 네 번의 한숨을 쉬고, 마지막은 숨을 모아서 다시 크게 한숨을 쉬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숨’은 곧 ‘생명’입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지으시고, 그 코에 생기를 불어 넣자 생명체가 되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숨과 인간의 숨의 차이입니다.

          또 3절이 이렇게 증거합니다.
          (3) 해 아래에서 수고하는 모든 수고가 사람에게 무엇이 유익한가

          의문문으로 되어 있습니다. 해 아래에서-하나님 없이 하는 수고는 사람에게는 정말로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뜻입니다.
          시편 150편 중에 솔로몬의 시가 딱 2편이 있는데 그 중에 하나가 127편입니다. 1-2절이 이렇게 증거합니다.
          여호와께서 집을 세우지 아니하시면 세우는 자의 수고가 헛되며 여호와께서 성을 지키지 아니하시면 파수꾼의 깨어 있음이 헛되도다 너희가 일찍이 일어나고 늦게 누우며 수고의 떡을 먹음이 헛되도다 그러므로 여호와께서 그의 사랑하시는 자에게는 잠을 주시는도다

          파수꾼이 성을 최선을 다해서 지킵니다. 자신의 지킴에 그 성 안에 있는 사람들의 생명이 달려 있기 때문입니다. 그처럼 우리 모두는 참 열심히 삽니다. 아침 이른 시각부터 늦은 시각까지 일을 해야 하는 사람들도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잠을 자지 못할 정도로 인생을 열심히 산다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지켜주지 않는 인생은 헛되다고 합니다. 이 말씀을 우리는 겸허하게 인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인생을 진지하게 살면 살수록, 또 인생을 오래 살면 살수록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다는 것이 아무 것도 없다는 것을 저절로 고백하게 됩니다.

          (5-8) 해는 뜨고 해는 지되 그 떴던 곳으로 빨리 돌아가고 바람은 남으로 불다가 북으로 돌아가며 이리 돌며 저리 돌아 바람은 그 불던 곳으로 돌아가고 모든 강물은 다 바다로 흐르되 바다를 채우지 못하며 강물은 어느 곳으로 흐르든지 그리로 연하여 흐르느니라 모든 만물이 피곤하다는 것을 사람이 말로 다 말할 수는 없나니 눈은 보아도 족함이 없고 귀는 들어도 가득 차지 아니하도다

          자연 현상, 그 중에서도 태양과 바람과 강물의 헛됨을 말합니다. 태양이 새벽에 수평선이나 지평선 위로 떠오르는 모습이 굉장히 웅장한 것 같아도, 이내 저녁이 되면 반대편으로 사라지고, 다음날 아침 또 웅장한 것 같아도 저녁이 되면 또 사라지고 하여, 매일 똑 같은 일이 반복이니 그것이 헛되게 여겨진다는 것입니다.
          또 바람이 불면 무슨 일이 일어난 것 같고, 특히 세찬 바람이 불면 모든 것을 다 날릴 것 같아도 그렇지 못하고, 어제 불었던 바람이 오늘도 불고, 오늘 불었던 바람이 내일도 불 것이기에 헛되게 여겨진다는 것입니다.
          강물도 마찬가지입니다. 땅에 있는 많은 강들이 끊임없이 바다로 흘러가보지만, 정작 바다에 들어가는 순간 그 엄청나게 넓은 바다 앞에서 강물은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마는 것이 강물에 입장에서 보면 헛된 것처럼 여겨진다는 것입니다.
          사람 역시 무엇을 보아도, 무엇을 들어도 처음에는 특별한 것이 있는가 생각이 되지만, 나중에 남는 것은 피곤함 밖에 없어 헛되다는 것입니다.

          (9-10) 이미 있던 것이 후에 다시 있겠고 이미 한 일을 후에 다시 할지라 해 아래에는 새 것이 없나니 무엇을 가리켜 이르기를 보라 이것이 새 것이라 할 것이 있으랴 우리가 있기 오래 전 세대들에도 이미 있었느니라


          ‘역사는 반복된다’고 합니다. 뿐만 아니라 개인의 삶도 반복됩니다. 인간의 출생과 성장, 성숙, 노화, 죽음은 모든 사람들이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1000년 전에 살았던 사람도 2000년 전에 살았던 사람도, 그 전에 살았던 사람들이 동일한 길을 갔습니다. 앞으로 100년 후의 사람도, 1000년 후의 사람도, 10000년 후의 사람도, 주님께서 재림하실 때까지 동일한 길을 걸어갈 것입니다.


          해 아래 인생-허무한 인간의 지혜(12-18절)
          12-18절은 허무한 인간의 지혜에 대한 전도자의 설교입니다.
          (13-14) 마음을 다하며 지혜를 써서 하늘 아래에서 행하는 모든 일을 연구하며 살핀즉 이는 괴로운 것이니 하나님이 인생들에게 주사 수고하게 하신 것이라 내가 해 아래에서 행하는 모든 일을 보았노라 보라 모두 다 헛되어 바람을 잡으려는 것이로다

          솔로몬이 기브온에서 일천번제를 드렸을 때, 하나님께서 그의 꿈에 나타나서 소원이 무엇인지를 물었습니다.
          솔로몬은 백성들의 수효를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은데, 그들의 재판을 정성을 다해서 감당해야 했기에, 백성들을 바르게 재판할 수 있도록 ‘듣는 마음’을 주시기를 기도드렸습니다.
          그 기도가 하나님의 마음에 꼭 들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솔로몬에게 주신 것을 열왕기상 3:12이 이렇게 증거합니다.
          내가 네 말대로 하여 네게 지혜롭고 총명한 마음을 주노니 네 앞에도 너와 같은 자가 없었거니와 네 뒤에도 너와 같은 자가 일어남이 없으리라

          하나님께서 솔로몬에게 지혜롭고 총명한 마음을 주시겠다고 말씀하시며, 솔로몬 이전에도 그런 사람이 없었고, 이후에도 없을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전무후무한 지혜를 주신 것입니다.
          그런 솔로몬이 하나님을 떠나자 그 지혜가 그를 지켜 주지 못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솔로몬의 모든 영광이 들의 백합화 보다 못하다고 하셨습니다.
          들의 백합화는 미천하기 짝이 없지만 하나님을 신뢰하니까 하나님께서 책임져 주십니다.
          솔로몬이 지혜가 아무리 뛰어나다고 한들, 그 지혜가 자신을 지켜 주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16-18) 내가 내 마음 속으로 말하여 이르기를 보라 내가 크게 되고 지혜를 더 많이 얻었으므로 나보다 먼저 예루살렘에 있던 모든 사람들보다 낫다 하였나니 내 마음이 지혜와 지식을 많이 만나 보았음이로다 내가 다시 지혜를 알고자 하며 미친 것들과 미련한 것들을 알고자 하여 마음을 썼으나 이것도 바람을 잡으려는 것인 줄을 깨달았도다 지혜가 많으면 번뇌도 많으니 지식을 더하는 자는 근심을 더하느니라

          하나님께로부터 전무후무한 지혜를 받은 솔로몬은 그것으로 여러 사람들과 지혜대결을 벌여 진 적이 없었습니다.
          또 그 지혜로 똑똑한 것과 어리석은 것, 지혜로운 것과 얼빠진 것을 구별해 보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잡을 수 없는 바람을 잡는 것 같았고, 그 지혜는 기쁨과 감사보다, 번뇌와 걱정을 안겨다 주었습니다.
          그 이유는 그 지혜를 주신 하나님을 목적으로 삼지 않고, 지혜를 목적으로 삼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보다 하나님께서 주신 것을 목적으로 삼으면, 그 인생은 헛되게 여겨집니다.

          이스라엘 역사상 가장 넓은 영토를 차지했을 때가 솔로몬 때였습니다.
          주변국가에서 조공을 바치고, 경제 사정이 얼마나 좋았으면 사람들이 은을 돌처럼 여길 정도였습니다.
          지금의 사람들이 그렇게 목말라하는 시대입니다.
          직장이 없는 사람이 한 명도 없고, 또 직장인들이 모두 가족들이 충분히 사용할 만큼의 봉급을 받고, 사업을 하는 사람들은 만든 물건들이 날개 돋친 듯 팔리는 시대입니다.

          그런 시절을 백성들에게 제공했던 사람이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며 한 숨을 쉬고 있습니다.
          만약 솔로몬이 왕도 아니고 지극히 평범한 사람이 이런 말을 했다면 아무도 주목하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나라나 세계최고의 부자가 “돈은 아무 것도 아닙니다.
          가진 돈의 무게만큼이나 그 돈으로부터 짓눌림을 당합니다”라고 말을 했다면, 그 말은 그 다음날 바로 신문기사화 되고, 많은 사람들은 고개를 끄덕일 것입니다.
          “부자인줄로만 알았더니 겸손하기까지 하네”라고 말할지 모릅니다.
          만약 제가 “돈은 아무 것도 아닙니다. 가진 돈의 무게만큼이나 그 돈으로부터 짓눌림을 당합니다”라고 동일하게 말을 하고, 제 옆에 신문기자가 있었다해도 신문에 나는 일을 없습니다.
          아마 사람들은 “네가 많은 돈을 가져보기는 했어? 돈이 없으면 말을 하지도 말어”라고 면박을 줄지 모르겠습니다.

          동일한 말을 할지라도 누가 하느냐에 따라서 말의 무게가 달라집니다.
          전도서를 통해서 호소하는 사람이 최고의 지혜자이자, 최고의 왕이기 때문에 우리도 그를 통해서 들려지는 말에 더욱 귀를 기울입니다.

          또한 전도서가 우리 가슴을 치는 것은 우리 역시 솔로몬처럼 하나님을 힙입지 않고, 세속적 가치관을 힘입어서 떠나서 뭔가를 이루고 싶은 욕망에 사로잡혀 있기 때문입니다.
          만약 태어나서 한 번도 하나님을 외면하고 산 적이 없는 것은 물론, 오직 하나님의 영광만을 위해서 산 사람이 있다면, 또 세상의 것에는 전혀 의미가 느껴지지 않는 사람에게는, 그가 가진 성경에서 전도서를 빼도 될 것입니다.
          그 사람에게는 전도서가 전혀 의미가 없는 것이 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심어주시고, 하나님께서 내려 주신 것으로 가득하다 할지라도 하나님을 힙입지 않고, 세속적 가치관을 힘입으려고 하면, 우리의 삶은 언제나 헛되고, 한숨이 깊이 쉬어질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힘입는 것만큼 더 나은 삶이 없다는 것을 중심으로 수용하게 되면, 우리 인생의 전도서는 “의미있고 의미있으며, 의미있고, 의미있으니 모든 것이 의미있도다”로 시작될 것이며, 우리의 매일 매일은 대림절을 넘어 성탄의 빛이 가득하게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