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 호세아


9월 23일(화) 호세아 1-4장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네가 여호와를 알리라(호세아 2:20)

진실함으로 네게 장가들리니 네가 여호와를 알리라.
I will betroth you in faithfulness, and you will acknowledge the LORD.

호세아서의 주제는 변함없는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1장에서는 하나님은 호세아에게 고멜이라는 창녀와 결혼하라고 명령합니다.
이는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관계를 상징하는 것으로 이스라엘은 하나님과 언약을 맺었지만 하나님을 배신하고 다른 신들을 섬겼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죄로 인해 심판하실 것이지만, 여전히 그들을 사랑하신다는 사실을 보여 주시고자 합니다.

2장에서는 고멜은 호세아를 떠나 다른 남자와 관계를 가집니다. 
호세아는 고멜을 찾아가 다시 데려옵니다. 
이는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사랑하시고 회복시키시고자 하시는 마음을 보여 줍니다.

3장에서는 호세아는 고멜에게 이혼장을 주고, 그녀가 7년 동안 다른 남자와 함께 살도록 합니다. 
이는 이스라엘이 하나님과 맺은 언약을 파기하고, 다른 신들을 섬겼던 기간을 상징합니다. 
7년이 지난 후, 호세아는 고멜을 다시 데려옵니다. 
이는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징계하셨지만, 여전히 그들을 사랑하신다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4장에서는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죄를 책망하십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우상숭배하고, 거짓말과 살인과 간음과 도적질을 행했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심판하실 것입니다.

오늘 묵상 할 주제는 "네가 여호와를 알리라"
안다는 히브리 단어는 "야다"라고 합니다.
'야다'라는 단어는 지식으로 아는 것이 아니라 경험적으로 아는 것을 강조합니다.
사람을 안다고 말할 대 겉 사람을 아는 것이 아니라 속 사람을 아는 것을 의미합니다.
겉 사람이란 서로 이웃끼리 지내며 알고 지내는 관계라고 한다면 속 사람이란 결혼 후에 동거하며 함께 지내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러므로 여호와 하나님은 내가 네게 장가들어 하나님을 알게하실 것이라고 강조하셨습니다.

하나님은 호세아 선지자에게 창녀와 같은 여인 고멜을 아내로 맞이하라고 명령합니다.
그 이유는 이스라엘이 마치 창녀와 같이 우상을 숭배하며 여호와 하나님을 떠났다는 것을 깨우칩니다.

성경은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관계를 "부부관계"로 비유하셨습니다(사 54:5-8).

진실함(530. 에무나) 
- 흔들리지 않는 신뢰와 불변하는 성실, 충성을 뜻하는 단어로서 하나님과 이스라엘 사이에 맺은 언약의 견고함을 나타내준다. 이것은 이스라엘의 실패에도 불구하고 영속적인 성공을 보증하는 여호와의 신실성이다(J.Given).

네가 여호와를 알리라(3045. 야다) 
- '알다'의 히브리어 '야다'(*)는 단순한 객관적인 인식 이상의 것으로 주관적이고 경험적인 이해, 또한 인격적인 관계에 있어서의 참다운 깨달음을 말한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자신을 완전히 계시하리라는 약속인 동시에 하나님을 아는 마음을 그들에게 주신다는 뜻을 포함한다(M. Henry). 
또한 이는 이스라엘이 하나님과 특별한 언약 관계를 인정하고, 여호와께 충성과 복종의 태도를 보일 것을 시사한다(Chrisholm). 
결국 이 새로운 지식은 이스라엘을 하나님의 성품에 참여케 하고(벧후 1:3-7) 그와의 거룩한 사귐에 있게 할 것이다(요일 1:1-4).


내가 네게 장가 들리니 네가 여호와를 알리라(호세아 2:14~3:5) 

하나님의 사랑은 끝이 없습니다. 
의로우신 하나님이시기에 죄에 대해서는 매우 엄중하게 다루시지만, 그 죄에서 돌이켜 하나님께 돌아온다면 언제나 기꺼이 받아주시는 긍휼과 사랑의 하나님이십니다. 
그러한 사랑을 음란한 아내를 맞이한 호세아 선지자를 통해 선명하게 보여주시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을 저버리고 우상을 섬기며 죄악으로 가득하자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을 심판하시고 징계하시지만,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을 다시 회복시키시길 원하셨습니다. 
2장 14절부터 23절의 말씀은 이러한 하나님의 은혜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아골 골짜기(Valley of Achor)로 소망의 문을 삼아주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2:15). 
아골은 히브리어로 “아카르”(עָכַר)라는 단어에서 나온 “아코르”(עָכוֹר)인데, 아카르는 괴롭히다(to trouble), 혼란하게 하다(to disturb) 등의 의미를 가진 단어입니다. 
그래서 근심의 골짜기, 괴로움의 골짜기 등으로 번역하기도 합니다. 

아골 골짜기는 여호수아가 이스라엘 백성을 이끌고 여리고 성을 쳐서 승리한 후에 아간이 불순종하여 아이 성 침공에 처참하게 실패한 후에 아간의 죄를 드러나 아간이 돌에 맞아 죽은 장소입니다. 

이러한 괴로움의 골짜기가 오히려 소망의 문이 되게 하시겠다는 말씀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출애굽하여 하나님의 은혜로 가나안 땅을 차지하게 하셨듯이, 포로로 끌려가게 된 상황에서 다시 구원하여 회복시켜 주시겠다는 약속입니다(2:15). 
그리고 하나님께서 다시 이스라엘 백성에게 장가들어 영원히 살겠다고 말씀하시는데(2:19, 20), 그리하여 이스라엘 백성이 더 이상 바알을 비롯한 우상의 이름을 부르지 않게 하고, 오직 하나님만을 따르게 하겠다고 말씀하십니다(2:16, 17). 
이 땅에 있는 들짐승과 새와 곤충들과도 언약을 맺겠다고 하시는데(2:18), 더 이상 들짐승과 새와 곤충들로 인한 피해를 입지 않게 하시겠다는 약속이며, 전쟁에서도 자유롭게 되어 평안하게 될 것이라고 약속하십니다(2:18).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장가들겠다는 표현으로 이스라엘을 회복시켜서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되시겠다고 약속하시는데, 공의와 정의와 은총과 긍휼히 여김으로 이스라엘에게 장가드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2:19). 

공의(公義, Righteousness)는 “옳다”, “바르다”는 의미의 “체데크”(צֶדֶק)라는 히브리어에서 나온 “베체데크”(בְּצֶ֣דֶק)라는 히브리어가 사용되었고, 정의(正義, Justice)는 히브리어로 “우베미쉬파트”(וּבְמִשְׁפָּ֔ט)라는 단어가 사용되었는데, 이 단어는 “미쉬파트”(מִשְׁפָט)에서 나온 단어로 미쉬파트는 “법률에 의해 판단되는 옳음”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은총(恩寵, Lovingkindness)은 “우베헤세드”(וּבְחֶ֖סֶד)라는 히브리어 단어가 사용되었는데, 이 단어의 원형은 “헤세드”(חֶסֶד)로 은혜, 사랑, 긍휼, 자비 등 한국어 성경에서는 매우 다양하게 번역되는 단어입니다. 

그리고 긍휼(矜恤, Mercy)은 히브리어로 “우베라하밈”(וּֽבְרַחֲמִֽים)인데, 이 단어는 어머니의 자궁이나 사람의 내장을 의미하는 “라함”(רַחַם)에서 나온 단어로 속마음 깊숙한 곳에서 우러나오는 사랑을 의미하는 단어입니다. 

이 단어들을 살펴볼 때 하나님은 공의와 정의에서 벗어나지 않으시면서도 은총과 긍휼을 잊지 않고 균형을 잡으시고 있음을 알 수 있는데, 이 모든 것들이 한곳에 모여 성취되는 곳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대속(代贖)이 이 모든 것을 이루는 곳이 되었습니다. 할렐루야!

이렇게 하여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을 알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2:20). 2장 20절의 “네가 알리라”라는 단어는 히브리어로 “웨야다앗트”(וְיָדַ֖עַתְּ)인데, 이 단어의 원형은 “야다”(יָדַע)로서 “알다”, “이해하다” 등의 의미를 가진 단어로, 이 단어는 머리로만 아는 지식을 넘어서서 경험을 통해서 아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에 관하여” 아는 지식이 아니라,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의미합니다. 
공의와 정의와 은총과 긍휼히 여기심을 통해 우리를 다시 하나님의 신부(新婦)로 삼으시는 하나님을 경험하면서 비로소 하나님을 참으로 알게 되었다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의 진정한 사랑을 몸소 체험하여 알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가 하나님의 완전한 사랑을 경험하는 은혜가 주어졌음이 참 감사합니다.

그래서 이 세상의 모든 만물이 하나님의 사랑을 알게 되고(2:21, 22), 하나님께 긍휼히 여김 받지 못했던 자들[로루하마(לֹא רֻחָמָה)]이 하나님께서 긍휼히 여기는 자[루하마(רֻחָמָה)]들이 되고, 하나님의 백성이 아니었던 자[로암미(לֹא עַמִּי)]들이 하나님께서 “내 백성”[암미(עַמִּי)]이라고 불리게 되는 은혜를 받게 되었습니다(2:23). 
그래서 우리도 하나님을 향하여 “나의 하나님”[엘로하이(אֱלֹהָֽי)]이라고 부를 수 있게 되었습니다(2:23).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입니다.

호세아 3장에서는 이러한 하나님의 은혜를 호세아가 음란한 아내인 고멜을 값을 지불하고 다시 데려오는 퍼포먼스(Performance)를 통해서 보여주시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자손이 우상을 섬기며 건포도 과자를 즐길지라도 하나님은 여전히 그들을 사랑하신다고 말씀하시면서, 호세아에게 자신을 떠나 다른 남자의 품으로 간 아내를 다시 사랑하라고 말씀하십니다(3:1). 

건포도 과자는 우상에게 제물로 드리는 것에 관한 상징적 표현입니다. 
남편을 떠나 다른 남자에게 간 그 음란한 아내를 데려오기 위해 은 열다섯 개와 보리 한 호멜 반으로 값을 지불하고 다시 사 오라고 말씀합니다(3:2). 한 호멜(Homer)은 약 230ℓ이니 한 호멜 반이면 345ℓ이고, 무게로 환산하면 180kg 정도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 당시 노예의 몸값이 은 30세겔(Shekel)이었는데, 은 15세겔과 보리 한 호멜 반은 대략 은 30세겔의 가치라고 할 수 있습니다. 즉 노예를 사고파는 값을 지불하고 아내를 다시 데려오라는 말씀입니다. 그 음란한 아내가 집을 나가서 불륜을 저질렀으니 오히려 돌에 맞아 죽게 하도록 해도 되는데, 값을 지불하고 다시 사 오라는 말씀은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사랑을 그대로 보여주는 모습입니다. 죄로 인하여 죽을 수밖에 없는 우리를 위해 예수 그리스도께서 친히 십자가에 달려서 죽임당하심으로 우리의 죗값을 모두 지불하시고 우리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미리 보여주시는 장면입니다. 이렇게 다시 데려온 아내에게 더 이상 다른 남자를 따르지 말라고 말씀하시면서 다시 언약의 관계를 회복하겠고 말씀하십니다(3:3).

이스라엘 백성은 포로로 끌려가 있는 동안 왕도 없고, 지도자도 없었습니다(3:4). 그리고 하나님께 제사도 드릴 수 없었고, 그들이 우상으로 섬기던 주상(柱像, Sacred pillar)도 없었습니다. 주상은 히브리어로 “맛세바”(מַצֵּבָ֑ה)라는 단어가 사용되었는데, 이것은 특정한 장소에 세워진 기둥을 의미하는 단어입니다. 아마 우상을 의미하는 단어로 사용되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제사장이 입는 예복(禮服)인 에봇(Ephod)도 없었다는 의미는 하나님께서 명한 절기와 제사들을 주관할 제사장들도 없었다는 의미입니다. 그리고 드라빔(Teraphim)은 한 집을 수호하는 신으로 여기는 작은 크기의 우상을 의미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포로 생활을 하는 동안 번듯한 지도자도 없었고, 하나님을 향한 제대로 된 제사나 섬김도 없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포로 생활에서 다시 돌아온 후에는 하나님께서 다윗 왕의 계보(系譜)를 잇게 하실 것이며 하나님을 경외하며 하나님의 은총으로 나아가는 은혜가 있을 것을 약속하십니다(3:5). 그리고 이 모든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완전히 성취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끝이 없는 사랑으로 사랑하십니다. 자비와 긍휼을 베푸시고, 공의와 정의로 행하시되, 하나님의 은혜로 우리를 다시 구원하셔서 회복시키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우리는 마치 남편을 배신하고 불륜을 행하며 음란하게 살았던 고멜과 같았지만, 하나님은 그러한 우리를 위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의 모든 죗값을 지불하시고 우리를 구원하셔서 다시 하나님의 백성으로, 하나님의 자녀로 삼아주셨습니다. 이 사랑에 깊이 감사하며, 하나님께 우리의 마음과 뜻을 다해 우리 자신을 온전히 드리는 삶이 되길 소망합니다.


네가 여호와를 알리라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이 아닌 다른 신과 음행하는 이스라엘 백성을 향하여 너희가 바알들을 섬긴 시일대로 벌을 주겠다고 말씀하신 바가 있습니다. 
그러나 이 말씀은 자기 백성을 향한 사랑에 조금이라도 어떤 변화가 있어서가 아니라, 사랑에는 변함이 없지만 이스라엘 백성이 그의 신부라고 할 때 신랑에게 걸맞은 신부가 되도록 하기 위해서 벌을 주겠다고 하시는 겁니다. 
즉 벌을 주겠다고 말씀하셨지만 그 벌은 무엇을 위한 벌인가? 
그들의 마음을 돌이키도록 하기 위한 벌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벌을 주겠다고 하셨지만 내가 그를 타이르겠다, 거친 들로 데리고 가서 말로 위로 하겠다, 거기서 비로소 그의 포도원을 주고 아골 골짜기로 소망의 문을 삼아 주겠다고 말씀하셨던 겁니다.

심지어 하나님께서는 어렸을 때 그리고 애굽 땅에서 올라오던 날과 같이 노래하도록 만들겠다고 까지 하셨는데, 과거 출애굽의 역사처럼 지금도 동일한 하나님께서 그들을 죄악 된 자리에서 이끌어 내시겠다는 것입니다. 달리 말하면 이전에는 하나님이 남편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남편으로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이 아니라 바알을 남편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더 이상 바알을 남편으로 생각하지 못하도록 이끌어 내겠다는 것입니다. 쉽게 말해 하나님께서 하나님 자신과의 관계를 회복하도록 만들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될 때 어떤 일이 일어나는가? 파괴되었던 창조의 질서가 회복되게 됩니다. 본래 인간은 하나님을 섬기고 다른 모든 피조물에 대하여 다스려야 했지만, 죄는 이 관계를 파괴하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될 때 이런 창조의 질서가 회복된다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이웃과의 관계도 회복되는데, 율법의 정신처럼 하나님을 사랑할 뿐 아니라 이웃 또한 사랑할 수 있게 하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사랑이 파괴되었을 때 이웃 사랑이 아니라 전쟁의 역사였다면 하나님 사랑의 회복은 그런 전쟁의 역사도 그치고 평안의 때가 된다는 것입니다.

선지자는 계속해서 하나님이 자기 백성에게 어떻게 은혜를 베푸시는지에 대해 다시금 말하는데, 19절과 20절입니다. “내가 네게 장가 들어 영원히 살되 공의와 정의와 은총과 긍휼히 여김으로 네게 장가 들며 진실함으로 네게 장가 들리니 네가 여호와를 알리라” 본래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관계는 남편과 아내의 관계입니다. 그러나 아내가 다른 신으로 하여금 남편을 삼았습니다. 즉 남편과 아내의 관계가 한번 깨어져 버렸습니다. 이혼한 것과 다를 바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다시금 이스라엘에게 장가들겠다고 하십니다. 너를 내 아내로 삼겠다는 것입니다. 이 말은 비록 네가 잘못한 일이 있지만 그 잘못을 잊어버리겠다는 말입니다. 그 잘못을 지워버리겠다는 말입니다. 음행한 사실을 더 이상 생각하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렇게만 말씀하시는 게 아니라 ‘영원히 살되’라는 말을 덧붙이십니다. 방금도 말했지만 본래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관계는 남편아 아내의 관계입니다. 그러나 아내 쪽에서 잘못함으로 인해 한번 그 관계가 깨어져 버렸습니다. 그러나 그 관계를 다시금 회복하게 하실 때는 또 다시 헤어지는 일이 없도록 하겠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지난주에도 말씀을 드렸지만 하나님은 시작만 하시는 분이 아니라 시작과 함께 완성까지 하시는 분이십니다. 사도 바울이 말한 것처럼 너희 안에서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신다는 것입니다(빌1:6). 물론 그 과정 가운데 호세아서에서 말씀하고 있는 음행이 한번만이 아니라 반복적으로 있습니다. 한번의 실수로 끝나면 좋겠지만 우리의 부패한 본성은 끊임없이 음행을 저지릅니다. 하나님 한분만으로 만족하지 못하고 여기에도 기웃거리고 저기에도 기웃거립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한번만 용서하시는 것이 아니라, 두 번 세 번 베드로에게 말씀하신 것처럼 일곱 번을 일흔 번이라도 하십니다. 490번이 한계가 아니라, 하나님의 용서에는 한계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영원히 살겠다는 말씀을 하시는 겁니다. 달리 말하면 영원히 살게 될 때까지, 영원히 살 수 있는 수준이 될 때까지 하나님은 용서하고 또 용서하겠다는 것입니다. 그만큼 하나님은 우리에게 끊임없는 은총을 베풀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용서하심에 대하여 악용해서는 안 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은총을 베푸는 방식은 이어 설명하는 것처럼 세 가지 방식으로 진행되기 때문입니다. 우선 19절에 보면 공의와 정의가 먼저 나옵니다. 그리고 이어 은총과 긍휼이 나옵니다. 그리고 20절에서 진실함이 나옵니다. 즉 하나님은 공의와 정의를 통하여, 그런 다음 은총과 긍휼을 통하여, 그리고 그것을 진실함 혹은 성실함으로 행하신다는 것입니다.

이미 하나님께서는 14절을 통해 이스라엘 백성을 타이르되 거친 들로 데리고 가서 말로 위로하겠다는 말씀을 하셨는데, 거친 들로 데리고 가시는 것이 공의와 정의를 행사하시는 겁니다. 왜 거친 들로 데리고 가시는가? 호세아 2장 6절로 말하자면 왜 가시를 주시는가? 이스라엘 백성 쪽에서 잘못한 일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 잘못에 대하여 그냥 내버려두면 돌이킬 수 없는 지경에까지 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가시를 주십니다. 거친 들로 데리고 가십니다. 어려움을 주시는 것이고, 고난을 주시는 것이고, 잘못에 대한 징계를 행하시는 겁니다. 그것이 지금 공의와 정의입니다. 쉽게 말해 죄에 대한 벌 혹은 징계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지난주에도 말씀을 드렸지만 징계와 벌을 주신다고 해서 이스라엘이 행한 만큼의 징계와 벌은 아닙니다. 만약 이스라엘이 행한 만큼 징계와 벌을 받아야 한다면 누구도 구원을 받을 수 없습니다. 자범죄를 계산하지 않고 원죄만으로도 구원을 받을 수 없습니다. 여기에는 누구도 예외가 아닙니다. 그런데도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하겠다, 오늘 본문에서처럼 너희와 영원히 살겠다고 말씀하시는 것은 공의와 정의를 행하시되, 거기에 은총과 긍휼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하나님의 백성에게 행하시는 공의와 정의는 은총과 긍휼에 기초한 공의와 정의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렇게 말한다고 해서 하나님의 공의와 정의가 공의롭지 못하고 정의롭지 못하다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왜냐하면 택자 편에서는 그들이 받아야 할 벌만큼 주시지 않는 것이 사실이지만, 하나님 편에서는 그리스도에게 택자가 받아야 할 벌을 충분하게 내리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은 반드시 죄에 대하여 공의와 정의를 행사하시는데, 그 공의와 정의를 택자에게게 내리신 것이 아니라 택자의 모든 죄 짐을 그리스도에게 전가시켜 그에게 내리셨던 겁니다. 그리고 여기에 하나님의 은총과 긍휼이 있는 겁니다.

다만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죄 문제를 해결 받았다고 할 때 죄책이 제거된 것이지, 부패가 완전히 제거된 것은 아닙니다. 남아 있는 부패성, 그리고 그것으로부터 나오는 자범죄가 여전히 있기 때문에 하나님은 은총과 긍휼을 베푸시되 여전히 공의와 정의와 함께 자신의 은총과 긍휼을 베푸시는 겁니다. 달리 말하면 은총과 긍휼을 베푸신다고 해서 공의와 정의 없는 은총과 긍휼을 베푸시는 일이 없다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은총과 긍휼만으로는 저들이 하나님께로 완전히 돌아서는 일이 없기 때문입니다. 부패한 본성을 가지고 있는 이상 하나님은 죄의 길에서 돌아서도록 하기 위해 공의와 정의를 실행하실 수밖에 없습니다. 벌을 내리시되 필요한 만큼의 벌을 내리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측면에서 진실함이 추가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 진실함이란 신실함 혹은 성실함이라고도 할 수 있는데, 이런 공의와 정의, 은총과 긍휼을 베푸시는 일을 신실하게 성실하게 행하신다는 것입니다. 한번 행하고 그만 두는 것이 아니라 혹은 두 번, 세 번 정도만 행하시고 그만 두는 것이 아니라, 계속해서 계속해서 행하시겠다는 것입니다. 이런 방식을 통해 내가 네게 장가들어 영원히 살겠다고 말씀하실 수 있는 겁니다.

20절 마지막에 ‘네가 여호와를 알리라’는 말씀은 바로 이런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알게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친히 공의와 정의로 일하시며, 또한 은총과 긍휼로 일하시되, 진실함 성실함으로 일하실 때 너희는 여호와를 알게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역사로 말미암아 하나님을 아는 것이지, 우리 스스로가 하나님을 알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의 역사로 말미암아 하나님을 아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하나님의 역사란 단순히 일반계시의 차원이 아님도 아셔야 합니다. 하나님은 일반계시를 통해서도 자신을 알리셨지만 구원의 지식과 관련해서는 특별계시로만 알 수 있게 하셨습니다. 때문에 너희가 여호와를 알게 된다고 할 때는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에 있어서 외적 증거로써의 말씀이 반드시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14절에서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거친 들로 데리고 가서 말로 위로한다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은 실제로 우리 삶에 있어 공의와 정의를 행하시고, 은총과 긍휼을 베푸시되 신실하게 성실하게 행하시지만, 앞서 그의 말씀으로 이 사실을 알리신다는 것입니다. 그의 말씀으로 징계하시고 그의 말씀으로 위로하시는 일이 반복해서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끊임없이 죄를 나타내는 우리에게 하나님은 끊임없이 공의로 행하시되, 은총과 함께 신실함으로 행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동시에 말씀의 효력이 있다는 것은 그 말씀과 함께 일하시는 내적 증거로써의 성령의 일하심이 함께 있다는 것도 놓치지 말아야 할 사실입니다. 여호와를 안다는 것은 바로 이런 역사하심으로 말미암는 겁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구원을 위해서 하나님의 역사하심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역사하심은 어떤 방식으로 나타나는가? 그의 말씀과 그의 성령으로 나타납니다. 특별히 그의 말씀으로 나타난다고 할 때 거기에는 공의와 정의가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은총과 긍휼도 있습니다. 그리고 진실함, 성실함도 있습니다. 책망과 벌이 있는 것이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은총이 있는 것이고, 그 일을 성실하게 실행하시는 일이 있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시작하셨기 때문에 시작하신 그 일을 중도에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이루시기 위하여 지금도 일하고 계시는 겁니다.

그런 측면에서 교회는 무조건 사랑만 외치는 곳이 아닙니다. 사랑도 있지만 책망도 있습니다. 왜 책망이 있는가? 근본적으로 사람은 부패한 본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부패한 본성을 가지고 있는 이상 지상의 교회가 말씀으로 책망을 하지 않는다? 그리고 말씀으로 권징을 하지 않는다? 그 교회는 참된 교회라 할 수 없습니다. 책망이 있고 권징이 있는 교회가 참된 교회로 분류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참된 교회의 표지라고 할 때 말씀과 성례와 더불어 권징이 들어가는 겁니다. 권징 없는 교회, 책망 없는 교회를 참된 교회라고 할 수 있는가? 없습니다.

계속해서 오늘 본문 21절과 22절을 보시면 여호와를 알게 된 백성에게 하나님께서 하늘에서부터 응답하셔서 그들의 필요를 채우시는 것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그 날에 내가 응답하리라 나는 하늘에 응답하고 하늘은 땅에 응답하고 땅은 곡식과 포도주와 기름에 응답하고 또 이것들은 이스르엘에 응답하리라” 그러나 여기에 있는 22절은 앞선 말씀 20절의 내용 없이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많은 사람들이 행복에 대하여 땅에서 나는 것들을 충분히 먹고 마실 때 주어지는 것처럼 생각합니다. 그러나 행복의 시작은 거기에 있지 않습니다. 성경을 통해 알리시는 바는 하나님께서 인간을 자기 백성으로 삼아 주실 때 시작된다고 말씀합니다. 그것을 위해 인간의 죄를 제거하고 인간으로 하여금 자신의 아내로 삼을 때 참된 복이 시작된다고 알립니다. 이것으로부터 시작하지 않는 지상의 축복은 진정한 의미에서의 행복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그의 사랑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용납되고 우리와 거룩한 혼인이 맺어지고 또한 그가 우리의 아버지로서 우리를 보존하시며 우리가 그의 보호와 방어 아래 안전하고 평안하게 된다는 약속을 받을 때 거기에 진정한 행복이 있다는 것을 아셔야 합니다.

그러나 지금 선지자는 하나님을 아는 자들에게 하나님으로부터 공급되는 지상의 것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본래부터 하나님으로부터 공급되는 것들이었지만 그들은 하나님이 아닌 바알로부터 얻는 것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런 생각을 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서 그 모든 것을 끊어버리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알게 될 때는 다시금 지상에서 필요한 모든 것을 공급하겠다고 하시는데, 지난주 살핀 15절의 내용과 일치합니다. “거기서 비로소 그의 포도원을 그에게 주고...” 그러나 여기서는 좀 더 구체적으로 그 날에 내가 응답하리라고 하십니다. 그리고는 하늘에 응답하고 하늘은 땅에 응답하고 땅은 곡식과 포도주와 기름에 응답하고 또 이것들은 이스르엘에 응답하리라고 하십니다.

우선 응답한다는 것은 들어준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이 아닌 바알로부터 공급된다고 하는 모든 것을 끊어버리심으로 실제로는 바알로부터 공급되는 것이 아님을 알게 하십니다. 그럼 누가 공급하시느냐? 하나님이십니다. 이 사실을 알게 되자 이스라엘 백성들은 누구에게 공급해 주시기를 기도하느냐?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누가 주체인지 알게 하셨고, 누가 주체인지 알게 되자 주체이신 하나님께 기도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바로 그 기도에 하나님은 응답하시는 겁니다.

그러나 인간이 얼마나 무지한지 하나님으로부터 온다는 사실을 더욱 분명히 알리기 위해 하나님께서는 어떤 방식으로 그들에게 공급하시는지 순서를 따라 말씀하십니다. 그런 측면에서 뒤에서부터 생각해 보면 이스라엘 백성이 곡식과 포도주, 기름을 얻는 것은 땅으로부터 얻습니다. 그럼 땅만 있으면 되는가? 그렇지 않습니다. 하늘에서 땅에 필요한 것을 공급해야 합니다. 해가 있어야 하고, 비가 있어야 하고, 그 외 열매를 맺을 수 있도록 하는 여러 요소들이 하늘로부터 제공되어야 합니다. 그럼 하늘은 그 자체로 땅에 필요한 것은 공급하는가? 결코 그럴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하늘을 주관하셔야 합니다. 그런데 인간의 무지는 어떻게 나타나느냐? 주체를 빼 버리는 데 있습니다. 사람에게 필요한 것을 얻기 위해서는 땅으로부터 얻어야 한다는 것은 압니다. 또한 땅은 하늘로부터 공급 받아 제공한다는 것도 압니다. 그러나 딱 거기까지입니다. 하나님에게까지 올라가지 않습니다. 오히려 이방인들은 하나님이 아닌 다른 신들에게 그 영광을 돌립니다. 이방인만이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이 그러했던 겁니다. 그래서 그들의 무지를 깨우치기 위해 하나님은 하늘로부터 응답되는 것은 하나님께서 하늘에 응답했기 때문이라고 말씀하고 있는 겁니다.

특히 22절 마지막에 ‘이스르엘’이라는 단어를 주목해야 합니다. 왜 이스르엘입니까? 이미 호세아 1장에서 하나님은 너희의 이름은 이스라엘이 아니라 이스르엘이라고 하셨습니다. 이스라엘로 불릴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은 거룩하고도 영광스러운 이름인데, 더 이상 그 이름으로 불릴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 그들에게 공급하신다는 겁니다. 즉 너희가 바알로부터 얻는다고 생각하고 있던 때도 사실 내가 너희에게 공급했다는 사실을 더욱 분명하게 알리시고 있는 겁니다. 지금은 너희가 하나님을 아는 자로 있지만, 그래서 하나님께 공급해 주실 것을 기도하고 있지만, 너희가 알기 전부터, 이스라엘이 아니라 이스르엘로 불릴 때부터 사실은 하나님이 계속해서 공급해 주신 주체라는 사실을 더욱 강조하여 알리고 있는 겁니다. 때문에 결코 잊지 말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체인 것을 빼지 말라는 것입니다.

우리도 이 사실을 잊지 마셔야 합니다. 여러분이 가지고 있는 지상의 모든 것은 다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땅으로부터 얻는다고 해서 땅이 주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땅은 하늘로부터 공급 받는다고 해서 하늘을 주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여러분의 열심과 노력이 있습니다. 분명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의 열심과 노력이 주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과정이 있지만 궁극적으로는 하나님이 주체이십니다.

하늘에 있는 해로부터 빛을 주시고, 또한 구름을 통해 비를 내리시고, 그래서 땅을 적십니다. 그 결과 땅으로부터 싹이 나고 잎이 나고 열매를 맺게 하십니다. 열매를 위해 인간의 노력이 있는 것도 사실이지만, 그 모든 과정 속에서 결국 열매를 맺어 얻게 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달리 말하면 하나님을 빼고 생각하는 모든 것은 이스라엘이 아니라 이스르엘로 불릴 수밖에 없다는 것을 반드시 기억해야 합니다. 이스라엘이라는 거룩하고 영광스러운 이름이 그들에게 돌려질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단지 먹고 마시는 문제에만 적용되는 것이 아닙니다. 펠라기안주의에게도 적용되고, 반펠라기안주의에게도 적용됩니다. 당연히 알미니안주의에게도 적용이 됩니다. 쉽게 말해 하나님이 주체이신데, 하나님이 아닌 인간에게 영광을 돌리고자 하는 모든 자들은 감히 말씀드리지만 이스라엘로 불릴 수 없습니다. 아무리 그들이 그들의 주장을 한다 하더라도, 그래서 그들이 이스르엘로 불릴 수밖에 없다 해도 변함없는 사실은 하나님이 주체시라는 겁니다. 항상 그러했고, 지금도 그러하며, 앞으로도 그러할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로마서 11장에서 다음과 같은 고백을 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겁니다.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풍성함이여, 그의 판단은 헤아리지 못할 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 누가 주의 마음을 알았느냐 누가 그의 모사가 되었느냐 누가 주께 먼저 드려서 갚으심을 받겠느냐 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그에게 영광이 세세에 있을지어다 아멘”(롬11:33-36)

우리가 하나님을 안다고 말할 수 있는 것도 사실은 하나님이 주체가 되셔서 우리에게 알리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자신을 숨기시는데 누가 하나님을 알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을 안다는 것, 그리고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모든 부분에 있어 하나님으로부터 출발했다는 의미입니다. 출발만 하느냐? 과정도 하나님이 주체로 있는 것이고, 마지막도 결국 하나님의 주체임을 확인하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받아야 할 영광은 사실 하나도 없는 겁니다. 요한계시록에서는 우리가 받은 면류관을 다시금 돌려드리는 내용도 있는데, 바로 이 사실을 알리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날 천국에 가면 상급이 있다고 말하면서 그것을 공로로 말미암아 얻을 수 있는 것처럼 말하는 모든 사람들은 결코 하나님의 이름에 합당한 영광을 올려드리고 있는 게 아닙니다. 물론 천국에 가면 상급이 있을 것입니다. 성경이 상급을 말하고 있기 때문에 상급이 없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공로의 상급은 아닙니다. 결코 공로의 상급은 아닙니다. 하나님이 시작하시고 하나님이 마지막까지 이르게 하시기 때문에 공로의 상급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의 상급일 뿐입니다. 때문에 상급을 받을만한 무엇을 내놓았다면 여러분으로부터 출발한 게 아님을 알아야 하고, 그런 측면에서 교만이 아니라 겸손할 줄 알아야 합니다. 무엇을 했다고 해서 교만하다는 것은 공로주의의 결과이지 결코 성도의 합당한 열매가 아닙니다.

더불어 23절로 오시면 곡식과 포도주, 기름의 풍성함만이 아니라 그것을 먹을 수 있는 백성의 수 또한 많아질 것을 말씀합니다. “내가 나를 위하여 그를 이 땅에 심고 긍휼히 여김을 받지 못하였던 자를 긍휼히 여기며 내 백성 아니었던 자에게 향하여 이르기를 너는 내 백성이라 하리니 그들은 이르기를 주는 내 하나님이시라 하리라 하시니라” 호세아 1장 10절에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신 바가 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자손의 수가 바닷가의 모래 같이 되어서 헤아릴 수도 없고 셀 수도 없을 것이며 전에 그들에게 이르기를 너희는 내 백성이 아니라 한 그 곳에서 그들에게 이르기를 너희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들이라 할 것이라” 그러나 이 말씀의 뜻은 이사야 10장 22절의 의미라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이스라엘이여 네 백성이 바다의 모래 같을지라도 남은 자만 돌아오리니 넘치는 공의로 파멸이 작정되었음이라” 때문에 혈통으로만 볼 때는 그 수가 많지 않습니다. 회복의 말씀이 적용되는 대상은 남은 자들이기 때문에 육적 이스라엘 자손으로만 보면 그 수가 그렇게 많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을 마치 씨처럼 땅에 심겠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그들의 수를 많게 하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아브라함에게 하셨던 약속처럼 이스라엘 자손의 수를 바닷가의 모래와 같이 헤아릴 수 없도록, 셀 수 없도록 하실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는 겁니다. 그리고 이 때 이스라엘 자손의 수는 유대인만이 아니라 이방인까지를 포함합니다. 남은 자가 씨가 되어 이방인에게까지 확장되는 것을 여기서 말씀하고 있는ㄱ 버니다.

그리고 그들을 땅에 심는다고 할 때 그것은 이미 호세아 2장 1절에서 말씀하시던 방식과 같이 할 것이라고 하시는데, 간단히 말하면 루하마요 암미입니다. 본래는 로루하마요, 로암미입니다. 긍휼히 여김을 받지 못하였고, 내 백성이 아니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들의 죄 때문입니다. 그들의 음행 때문입니다. 하나님 한분만을 섬기지 못하고 우상을 섬겼기 때문입니다. 주체이신 하나님 자리에 우상을 올려놓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버리지 않으십니다. 이때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버리지 않는다는 것은 그들에게 어떤 가능성을 보고서 그렇게 하시는 게 아닙니다. 오히려 가능성은 없습니다. 찾아볼려고 해도 찾아볼 수 없을 정도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택하셨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사랑하기도 하셨기 때문에, 그들을 버리지 않으십니다. 그래서 긍휼을 베풀겠다고 말씀하시는 것이고, 내 백성이 되게 하겠다고 말씀하시는 겁니다. 당연이 이때도 유대인만이 아니라, 이방인까지를 포함합니다.

오늘 본문 23절 맨 처음에 나오는 ‘내가 나를 위하여’라는 말은 바로 이런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나타내는 말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이 하나님 자신을 위하는 것은 결코 이기적인 것이 아닙니다. 왜 우리더러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살아야 한다고 가르칩니까? 하나님이 이기적이기 때문입니까?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만약 하나님이 이기적일 것 같으면 굳이 우리를 구원하실 필요도 없습니다.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자기 아들까지 세상에 보내실 필요도 없습니다. 그 아들로 하여금 십자가 형벌을 받게 할 필요도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자신을 위하여 그렇게 하셨습니다. 즉 내가 너를 선택했기 때문에, 내가 너를 사랑하기로 했기 때문에, 무선 선이나 악을 행하지 아니한 때에 택하심을 따라 되는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 그렇게 하기로 했기 때문에 내가 나를 위하여 그 일을 이루겠다는 겁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신실하심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때문에 하나님은 한번 선택하신 백성을 버리시는 일은 결코 없습니다. 버림을 받았다면 그것은 처음부터 택한 자기 백성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다 아담 안에서 범죄한 그들의 죄로 말미암아 심판을 받게 되는 것이지, 하나님 탓할 이유는 어디에도 없습니다. 그러나 택자 역시 동일한 죄 가운데 있지만 하나님은 자기 자신을 위해서 정하신 바를 결코 변경함 없이 실행하십니다. 그래서 죄로 말미암아 긍휼히 여기지 않겠다고 하셨지만 내 백성이 아니라고 하셨지만 그들을 돌이키게 만든 후에 다시금 긍휼을 베풀겠다, 내 백성이 되리라고 하시는 겁니다. 그리고 이런 하나님의 역사로 말미암아 그때서야 비로소 주는 내 하나님이시라고 고백할 수 있도록 하시는 겁니다.

그러므로 주는 내 하나님이라고 고백하는 것은 결국 하나님의 일하심의 결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철저히 하나님 홀로 일하신 결과로 이렇게 고백할 수 있는 겁니다. 때문에 내가 하나님을 나의 하나님으로 고백한다고 할 때 그것은 나의 나 됨이 하나님의 은혜로 되었다고 말한 바울의 말처럼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았다고 말할 수밖에 없는 내용입니다.

실제로 하나님은 이 말씀처럼 남은 자를 통하여 이방인에게까지 복음을 증거 하게 하시고, 그 수를 많게 하셨습니다. 아브라함에게 하셨던 약속을 이루셨고, 지금도 이루고 계신 겁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께서 한번 말씀하신 것에 대하여 얼마나 신실하게 역사하시는지를 다시금 확인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자기 자신을 위하여 그가 하신 말씀을 반드시 이루십니다. 말씀하시고서 이루지 못한 것이 없습니다. 아직 이루어지지 않았다면 반드시 이루실 것입니다. 그만큼 신실하십니다.

그리고 놀랍게도 하나님이 자신을 위하시는 것은 그것이 곧 하나님의 백성에게 유익으로 있습니다. 하나님이 자신을 위하지 않고 어떻게 우리가 구원의 은혜를 누리겠습니까? 즉 하나님을 위한 것이 사실 하나님의 백성의 유익으로 있는 겁니다. 때문에 하나님은 우리에게 자신의 영광을 위해 살라고 말씀하실 수 있는 겁니다. 너를 위해 살지 말고 나를 위해 살라고 말씀하시는 이유가 바로 여기 있는 겁니다. 즉 그를 위하여 사는 것이 바로 우리가 가장 복된 길을 걸어갈 수 있는 길로 있는 겁니다.

여러분, 성도의 견인이라는 교리가 있습니다. 견인이라는 말 자체는 ‘인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지만, 신학에서 이 말이 의미하는 바는 영원한 구원에 이르게 된다는 뜻입니다. 즉 영원한 구원에 이르도록 하나님께서 지키시고 보호하시고 보존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내할 수 있는 겁니다. 우리는 인내를 말할 때 내 쪽에서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인내해야 한다고 권면할 때 여러분이 해야 한다는 측면에서도 분명 말합니다. 그러나 그때도 주체가 하나님이십니다.

그래서 바울은 어떤 확신을 합니까?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롬8:38-39) 만약 사람이 주체면 끊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사람은 너무나도 연약하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강한 사람이라 하더라도 자신의 구원을 위하여 단 1%라도 이바지할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런 사람이 구원에 이르게 된다면 그것은 100% 하나님께서 견인의 은총을 베푸셨기 때문입니다. 바로 자신의 이름을 위하여 그렇게 하시는 겁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신랑 되신 그리스도의 신부라면 철저히 그의 이름을 위하여 사는 것이 우리를 위한 것인 줄 알고 그런 방향으로만 나아가도록 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의 연약함을 생각할 때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바를 이루어주시도록 간구해야 합니다. 그리고 모든 것을 하나님이 하셨기 때문에 그분에게만 영광을 올려드려야 합니다. 이것이 긍휼을 입은, 그리고 하나님의 백성이라 불리는 자들의 마땅한 삶인 것입니다.


호세아 2:19~20

“내가 네게 장가 들어 영원히 살되 공의와 정의와 은총과 긍휼히 여김으로 장가 들며, 진실함으로 네게 장가 들리니 네가 여호와를 알리라”

​하나님은 우리 인간을 자기의 형상을 따라 하나님의 형상으로 인간을 지으셨습니다(창 1:27).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으셨다는 것은 하나님이 우리 인간에게 하나님의 마음(성품)을 주셨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피조물 중에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음 받은 것은 인간 뿐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에게 하나님의 형상 곧 당신의 마음과 성품을 주어 인간을 지으신 것은 우리를 당신의 사랑의 대상자로 삼으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늘의 천군과 천사들을 당신의 사랑의 대상자로 삼지 않으셨습니다. 
그들은 오직 당신의 종(사역자)으로 삼으셨을 뿐이었습니다(히 1:14).

​오늘 말씀에 하나님은 우리에게 진실함으로 장가들어 영원한 우리의 남편이 되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우리 인간은 그 하나님의 사랑을 거절하고, 하나님으로부터 독립을 선언하고, 스스로 하나님을 떠나 버렸습니다. 
그 때부터 죄가 세상에 들어왔고, 죽음이 시작되었고, 인간에게 큰 불행이 시작되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당신을 거절하고 떠나버린 인간을 포기하지 않으시고 독생자를 보내사 인간들의 죄를 위해독생자를 대신 화목제물로 십자가에 내어주시고, 그의 피로 말미암아 우리를 의롭다 하시고, 우리에 대한 자기의 변함이 없으신 사랑을 십자가로 확증하셨습니다. (롬 5:8)

이제 하나님의 사랑의 대상자는 자기 아들의 피로 거듭난 사람들임을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우리 인간들은 늘 하나님을 배반하고 사랑하지도 않는데, 하나님은 오늘도 우리를 짝사랑을 하고 계십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그 사랑을 입고 사는 거룩한 성도로 부르심을 입은 그리스도인들이(고전 1:2) 실제로 행복한 삶을 살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우리가 주님과 관계가 실제가 되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신앙이 바리새인들 처럼 형식적이고 율법적인 종교생활에 그치고 있기 때문입니다.
신앙은 어떤 지식이나, 사상이 아닙니다. 
신앙은 실제입니다. 
신앙의 실제는 너무 중요합니다.
살아계신 하나님은 실제입니다. 
우리는 매일 하나님의 도우심과 지키심으로 살아가는 것 이것 실제입니다.
하나님이 우리 아버지 되심도 실제입니다.
예수님도 실제입니다. 
그분의 십자가도 실제입니다. 
그의 피로 구원을 받은 것도 실제입니다.

성령님도 실제입니다. 
성령님이 지금 내 안에 내주해 계심도 실제입니다.
주님의 피로 성도된 내 이름이 하늘의 생명책에 기록된 것도 실제입니다.
천국도 실제입니다. 마귀도 실제요, 그의 종들인 귀신들도 실제입니다.

천국과 지옥은 어떤 동화나 지어낸 설화나 우화가 아닙니다.

오늘 내가 생을 마친다면, 내안에 영으로 내주해 계신 주님을, 내 눈으로 직접 뵈올 것도 실제인 것입니다.

이 진리가 여러분의 삶에 중심이 되셨습니까?

그렇다면 우리의 삶이 달라져야 하지 않겠습니까? (믿는 것도 아니고, 안믿는 것도 아닌 것에서)

그렇다면 예수를 믿는 일이 우리가 돈을 버는 것처럼 내 삶에 실제가 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신앙생활을 다른 종교인들이 하는 것처럼 나를 위한 종교생활이 되어서는 안되지 않겠습니까?

분명한 사실은 하나님은 우리를 실제로 좋아하시고, 진실로 변함없이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하나님은 실제로 우리를 당신의 연인으로 사랑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 모든 그리스도인은 주님을 믿는 신앙생활이 나의 삶의 전부가 되어야 하고 정말 실제가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성도된 우리가 자기 아들 예수를 미칠 것만큼 사랑하는 그런 신부가 되기를 원하십니다.

오직 예수만 생각하고, 예수만 사모하고, 예수만 갈망하고, 예수만 사랑하기를 원하시고 계십니다.
당신은 예수만 사랑하는 예수님의 연인이 맞습니까?


호세아 2:1-23

호세아 2장은 1장 10절과 11절에 이어 이스라엘의 회복에 대한 말씀으로 시작합니다.

1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너희 형제에게는 암미라 하고 너희 자매에게는 루하마라 하라”

사실 1장 6절에서 호세아와 고멜사이에서 태어난 딸의 이름은 로루하마, 즉 “불쌍히 여기지 않다” 였습니다. 또 1 장 9절에서는 호세아와 고멜의 둘째 아들의 이름은 로암미 즉, “나의 백성이 아니다” 였습니다.

그러나 2장 1절에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자손의 형제를 암미 즉 “나의 백성”이라 부르시고 그 자매들을 루하마 즉 “불쌍히 여기다”라고 부르신다는 겁니다.

여기서 중요한 한 가지를 발견합니다. 분명 이스라엘 백성들은 현재 하나님을 떠나 바알숭배에 빠져 있는 상태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그들에게 회복의 약속을 주고 있습니다. 다시 말하자면 이스라엘의 회복은 미래에 있지만 그 회복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은 현재에 주어진다는 겁니다.

사람은 현재 자기 자신의 상황과 형편이 좋지 않으면 앞날을 내다보며 소망을 가지기가 참 힘듭니다. 이것이 인간의 한계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렇지 않다는 것이죠.

가능성이라고는 손톱만큼도 찾아볼 수 없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행위로는 결코 암미나 루하마가 될 수 없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암미와 루하마로 부르시고 대접해 주신다는 겁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비록 우리의 모습 역시 로암미와 로루하마 이지만 하나님께서는 말씀을 통해 이미 우리를 암미와 루하마로 불려주십니다. 그러기에 신약성경 로마서 5장 8절은 이렇게 증거하지 않습니까?

"우리가 아직 죄인되었을때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우리가 아직 죄인되었을때, 즉 우리가 로암미와 로루하마 였을때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내놓으시고 우리를 암미와 루하마로 불러주신 것입니다.

2절부터 5절까지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고발하고 계십니다. 그 죄목은 간음입니다. 호세아와 고멜과의 결혼관계는 이스라엘과 하나님과의 관계를 비유적으로 나타내고 있습니다. 부정한 아내와 같은 이스라엘은 어리석고 생각이 없으며 기억을 잘 못합니다. 그러기에 심지어 8절을 보면 하나님이 주신 물질들도 마치 바알이 준 것처럼 착각을 합니다.

세상 사람들은 일이 잘 풀릴 때 단지 운이 좋았다고 말하지만 우리는 대신에 하나님의 은혜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우리 역시 과거에 하나님이 우리에게 베풀어 주신 은혜를 잘 기억하지 못하는 때가 얼마나 많습니까?

13절입니다. 부정한 여인이 남편의 보호를 받지 못하는 것처럼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보호를 받지 못해 결국은 앗수르에게 멸망을 당합니다. 그러나 그것으로 끝난 것은 아닙니다.

놀랍게도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회복으로 이끄십니다. 14절과 15절이 이렇게 증거합니다.

"그러므로 보라 내가 그를 타일러 거친 들로 데리고 가서 말로 위로하고 거기서 비로소 그의 포도원을 그에게 주고 아골 골짜기로 소망의 문을 삼아 주리니 그가 거기서 응대하기를 어렸을때와 애굽땅에서 올라오던 날과 같이 하리라"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물질적인 회복뿐만 아니라 아내된 이스라엘이 처음과 같이 하나님을 섬길수 있도록 내적인 변화를 주신다고 말씀하시는 겁니다. 사실 우리 자신의 내적인 변화도 우리로 말미암는 것이 아니라 우리 안에 거주하시는 성령께서 우리의 속사람을 변화시키는 것입니다.

16절과 17절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통하여 회복된 이스라엘은 예전의 나쁜 모습을 완전히 버리게 됩니다.

16절을 보면 " 그 날에 네가 나를 내 남편이라 일컫고 다시는 내 바알이라 일컫지 아니하리라" 고 말씀합니다. 내 바알이라고 번역된 "바알리"라는 단어는 "내 남편"이라는 뜻입니다. 그러기에 우상 바알과 이름이 같기에 다시는 이렇게 부르지 않는 다는 것입니다.

18절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남편되시는 하나님께서 그들과 언약을 맺으며 그들에게 다가오는 모든 위험에서 보호해 주신다고 약속하십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기댈 곳은 오직 하나님이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음받았기에 하나님께서는 우리 가운데 오직 하나님만이 채워 주실 수 있는 부분들을 남겨 놓으셨습니다. 그러기에 시편 139편에서 다윗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내가 주의 영을 떠나 어디로 가며 주의 앞에서 어디로 피하리이까 내가 하늘에 올라갈지라도 거기 계시며 스올에 내 자리를 펼지라도 거기 계시니이다 내가 새벽 날개를 치며 바다 끝에 가서 거주할 지라도 거기서도 주의 손이 나를 인도하시며 주의 오른손이 나를 붙드시리이다."

이러한 다윗의 하나님이 우리의 하나님이시기에 20절에서 또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진실함으로 네게 장가 들리니 네가 여호와를 알리라"

하나님을 안다는 것은 단순히 머리를 통해 지식을 얻는 것이 아니라 경험을 통해 몸으로 익힌 전인적인 깨달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자면 결코 하나님의 백성이 될 자격도 없고 긍휼히 여김을 받을 자격도 없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사랑을 체험하는 것입니다.

참다운 회복이란 마지막 날에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바르게 고백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암미와 루하마라 불러주실 때 우리 역시 23절의 마지막 구절처럼 "주는 내 하나님이시라"는 응답을 해야 할 것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로암미와 로루하마 같은 우리를 먼저 암미와 루하마로 부르시고 그렇게 우리를 만들어 가시는 아버지 하나님, 하나님의 그 사랑을 머리로 아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온몸과 마음으로 경험하여 온전히 깨달아 알게 하여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그리하여 오늘 우리에게 주어진 하루도 암미와 루하마로 살아가는 한 날이 될 수 있도록 인도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이는 너를 지으신 자는 네 남편이시라 그 이름은 만군의 여호와시며 네 구속자는 이스라엘의 거룩한 자시라 온 세상의 하나님이라 칭함을 받으실 것이며. 
    여호와께서 너를 부르시되 마치 버림을 입어 마음에 근심하는 아내 곧 소시에 아내 되었다가 버림을 입은 자에게 함같이 하실 것임이니라 네 하나님의 말씀이니라.
    내가 잠시 너를 버렸으나 큰 긍휼로 너를 모을 것이요.
  • 내가 넘치는 진노로 내 얼굴을 네게서 잠시 가리웠으나 영원한 자비로 너를 긍휼히 여기리라 네 구속자 여호와의 말이니라."

    외간 남자와 놀아난 여자를 다시 아내로 맞이할 수 있는 그 마음은 크고 넓고 높고 깊은 하나님의 사랑을 알려주신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 이스라엘의 영적 간음은 여호와 하나님을 버리고 우상숭배를 좋아하며 즐긴 것이었습니다.
    그렇다면 혹시 나에게는 영적 간음을 즐기던 이스라엘과 같은 잘못은 없었는지 살펴야 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향한 온전하고 순수한 사랑의 헌신으로 사랑의 위대함을 알려야 하겠습니다.

  • 참 하나님을 안다는 것—무엇을 의미하는가?

    1, 2. 이사야 2:3에 따르면, 마지막 날에 무슨 초대가 있으며, 누가 초대됩니까?

    마지막 날에 관한 이사야의 감동적인 예언은 모든 민족의 사람들에게 관심을 끄는 초대를 발합니다. 그 초대는 참 하나님을 개인적으로 알게 되라는 것입니다. “많은 백성이 가며 이르기를 오라 우리가 여호와의 산에 오르며 야곱의 하나님의 전에 이르자 그가 그 도로 우리에게 가르치실 것이라 우리가 그 길로 행하리라 하리[라.]”a이사야 2:3.

    2 이 예언을 보면, 마지막 날에 세계적으로 많은 민족의 사람들이 하나의 공통된 교훈의 근원으로 인도되어, 참 하나님을 알게 되도록 도움을 받을 것임을 알려 줍니다. 어떤 진리를 그들이 배움으로써 참다운 평화의 결속으로 연합하게 될 것입니까?

    3. 성서의 중요한 한 가지 특징이 어떻게 전통으로 인해서 거의 사라졌습니까?

    3 성서의 두드러진 특징 한 가지는, 전통으로 인해서 거의 사라지긴 했지만,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시며 창조주이신 하나님을 부를 때 그분의 이름을 사용함으로써 그분과 가장 친밀한 사이로 관계를 맺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귀한 벗이 있는데, 그의 이름을 사용하지 않거나 심지어는 누가 물어도 알려 주지 않으려고 할 사람이 누구이겠습니까? 대개는, 원수지간이라야 너무 싫은 나머지 상대방의 이름을 언급하는 일조차 하지 않으므로 그의 존재를 인정해 주고 싶지 않을 것입니다. 고대 이스라엘과 그들의 하나님 사이에 있었던 특별한 관계—그로 인하여 그들은 이름으로 그분을 알았음—가 고대 시편 필자에 의해서 이처럼 아름답게 표현되어 있습니다. “저가 나를 사랑한즉 내가 저를 건지리라 저가 내 이름을 안즉 내가 저를 높이리라.”—시 91:14.

    하나님의 이름을 사용해야 하는가?

    4, 5. 하나님의 이름의 의미는 무엇입니까?

    4 성서의 관점에서 볼 때, 참 하나님의 이름에 대해서 의문이 있은 적은 없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실 때, 그를 사용하여 이스라엘 민족을 애굽의 속박으로부터 인도해 내시겠다고 설명하시자, 모세는 이처럼 논리적인 질문을 하였습니다. “내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가서 이르기를 너희 조상의 하나님이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하면 그들이 내게 묻기를 그의 이름이 무엇이냐 하리니 내가 무엇이라고 그들에게 말하리이까.” 하나님께서는 이와 같이 대답하셨습니다.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같이 이르기를 나를 너희에게 보내신 이는 너희 조상의 하나님 곧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 여호와[히브리어, יהוה = YHWH = 야훼 또는 13세기 이후로, 여호와]라 하라 이는 나의 영원한 이름이요 대대로 기억할 나의 표호니라.”—출애굽 3:13, 15, 사체로는 본 책자에서.

    5 이 이름은 히브리어를 아는 사람이 보면 의미가 깊습니다. 그것은 “되다”를 의미하는 히브리어 어근 הוה 즉 h·w·h에서 나온 것입니다. 그러나 이 이름은 히브리어 문법에 의하면 사역형 즉 히필입니다. 그러므로 그 기본 의미는 하나님이 영원히 존재하심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그분께서 사물이 존재하게 또는 발생하게 하신다는 것을 가리킵니다. 이것은 특히 그분의 목적과 관련해서 독특한 면으로 참됩니다. 택하신 백성을 애굽의 속박으로부터 자유케 하시기로 목적하셨을 때, 그분은 그 일이 그렇게 되게 하셨습니다. 어떤 세력도 그분이 천명하신 의사를 가로막을 수 없었습니다. 여호와는 자신의 목적이 성취되게 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리하여 그분은 자신이 약속의 성취자가 되게 하십니다. 이 점은 자신의 백성을 바벨론 포로 상태로부터 자유케 하시려는 목적에 있어서도 사실이었습니다. 이 땅에 낙원 상태를 가져오실 목적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분의 이름 자체가 이러한 약속들에 대해 의미를 부여하고 보증이 됩니다.—이사야 41:21-24; 43:10-13; 46:9, 10.

    6-9. (ㄱ)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이름의 사용을 금하시지 않음을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ㄴ) 하나님의 이름의 사용 금지가 언제 어떻게 유대교의 일부가 되었습니까?

    6 그러나 십계명에서는 하나님의 이름을 발음하는 일을 금하지 않습니까?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세 번째 계명을 그런 식으로 해석하는 사람들이 많았지만, 「유대 백과 사전」의 이러한 설명에 유의해 봅시다. “YHWH라는 이름의 발음을 기피하는 현상은 ·⁠·⁠· 셋째 계명(출애굽 20:7; 신명 5:11)의 의미를 ‘너는 너의 하나님 YHWH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말라’로 오해함으로써 생겼다. 하지만 참 의미는 ‘너는 너의 하나님 YHWH의 이름으로 거짓 맹세하지 말라’는 것이다.”5 유의할 점은 하나님의 이름을 ‘일컫는’ 것 즉 발음하는 것을 이 성구가 금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비록 그것이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는 일을 의미한다 해도, 쾰러와 바움가르트너의 공저인 히브리어 고어 사전에서는 “헛되이”로 번역된 히브리어 용어(라슈샤우)를 “이유 없이 이름을 부르다 ·⁠·⁠· 이름을 오용하다”6로 설명한다는 점에 유의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계명이 금하는 것은 하나님의 이름의 사용이 아니라 그 오용입니다.

    7 그렇지만, 하나님의 이름이 “발음하기에는 너무 거룩하다”는 주장은 어떠합니까? 만약 하나님께서 자신의 이름을 사람이 발음하기에는 너무 거룩한 것으로 보셨다면, 처음부터 아예 계시하시지도 않았어야 이치적이 아니겠습니까? 히브리어 성경 원본에 하나님의 고유한 이름이 6800번도 넘게 나온다는 사실 자체가 알려 주는 바는,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이 자신을 알고 그 이름을 사용하기를 원하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불경 행위를 막기 위해 자신의 이름의 사용을 제한하시기는커녕 오히려 자신의 백성이 그 이름을 사용하고 또 알릴 것을 반복해서 격려하시고 심지어는 명령하기까지 하십니다. 그렇게 하는 것은 그분에 대한 사랑은 물론 그분과의 친밀한 관계의 증거이기도 하였습니다. (시 91:14) 예언자 이사야는 이 문제에 관한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분명히 밝히는 이러한 말을 하였습니다. “여호와께 감사하라 그 이름을 부르며 그 행하심을 만국 중에 선포하며 그 이름이 높다 하라.”—이사야 12:4. 또한 참조 미가 4:5; 말라기 3:16; 시 79:6; 105:1; 잠언 18:10.

    8 여호와께서는 사람들이 자신의 이름을 발음하는 것을 원하지 아니하셨다면 미리 명백히 그것을 금하실 수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성서 어디에서도 그분의 이름의 합당한 사용이나 발음을 금하지 않습니다. 성서 시대의 충실한 사람들은 그분의 이름을 자유롭게 사용하였습니다. (창세 12:8; 룻 2:4; 4:11, 14) 사실상,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백성으로 그분의 거룩한 이름을 잊어버리게 만드는 자들을 반복적으로 정죄하셨습니다.—예레미야 23:26, 27; 시 44:20, 21.

    9 이러한 금지 사항은 성서의 일부가 아님이 매우 분명한데, 어떻게 유대인 사상의 일부가 되었습니까? 랍비이자 「만인의 탈무드」(Everyman’s Talmud)의 저자인 A. 코헨 박사의 설명을 보면 이 전통이 여러 세기에 걸쳐 점차적으로 자리잡았음을 알 수 있습니다. 코헨 박사의 기록은 이러합니다. “성서 시대에는 일상 대화에서 그 이름을 사용하는 데 아무 거리낌이 없었던 것 같다. 개인들의 이름에 또는 야후를 붙이는 일이 유대인들 간에, 심지어 바벨론 유배 이후까지 지속된 것으로 보아, 이 네 글자 이름의 사용이 금지 사항이 아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초기 랍비 시대에 와서는 이 이름을 발음하는 것이 성전 봉사로만 제한되었다.” 이 시대에 더 진전된 일에 대해 그는 이와 같이 말한다. “그 이름은 JHVH 대신 회당 예배에서 아도나이(내 주)라고 불리었다. 그러나 원래의 발음은 현인들에 의하여 그 제자들에게 주기적으로—7년마다 한두 번씩—전수되었다고 전해지고 있다. (키두신 71) 그 관습조차도 잠시 후에는 사라져서, 그 이름의 발음법을 이제는 확실히 모른다.”7 바로 그것이 “사람의 계명”의 결과였습니다.—이사야 29:13; 신명 4:2; 참조 9면 15, 16항.

    이름을 지닌 자들에 대한 요구 조건

    10-14. (ㄱ)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이름을 지닐 사람들에게 무엇을 요구하십니까? (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 원하는 사람들에게 어떤 형태의 순결이 요구됩니까? (ㄷ) 어떤 외부의 이교 영향이 유대교에 깊은 흔적을 남겼습니까?

    10 분명히, 하나님의 이름을 알고 있거나 사용하기까지 한다 해도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데는 그것만으로 충분치 않습니다. 참 숭배자의 한 사람으로서 하나님의 이름을 지니는 것은 독특한 특권입니다. 예언자 예레미야가 이처럼 선포한 바와 같습니다. “나는 주의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는 자[이오니] ·⁠·⁠· 주의 말씀은 내게 기쁨과 내 마음의 즐거움이[니이다.]” (예레미야 15:16) 그러나 이 웅대한 특권에는 막중한 책임이 따릅니다. 여호와께서는 이방 나라의 왕들에게 이처럼 단언하셨습니다. “내가 내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는 성에서부터 재앙 내리기를 시작하[리라.]” (예레미야 25:29) 여호와께서는 이스라엘 민족을 70년 간의 바벨론 포로 상태로부터 석방시키시기 전에 이미 예언자 이사야를 통하여 그 백성에게 이와 같이 경고하셨습니다. “너희는 떠날찌어다 떠날찌어다 거기서 나오고 부정한 것을 만지지 말찌어다 그 가운데서 나올찌어다 여호와의 기구를 메는 자여 스스로 정결케 할찌어다.” (이사야 52:11) 오늘날 참 숭배자들, 가장 거룩하신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지닌 자들로서 정결케 하는 데는 즉 순결을 유지하는 데는 무엇이 포함됩니까?

    11 확실히, 숭배로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리기 원하는 사람이라면 행실, 특히 하나님 자신이 세워 놓으신 도덕 표준에 관한 행실에 있어서 순결을 유지하지 않으면 안 될 것입니다. 오늘날 사회의 방임적 표준과는 대조적으로 성경은 거짓말, 도둑질, 음행, 간음, 동성애, 살인 및 온갖 형태의 속임수에 대한 하나님의 정죄를 표현함에 있어서 해석상 의문의 여지를 남기지 않습니다. (출애굽 20:12-16; 23:1, 2; 레위 5:1; 19:35, 36; 20:13) 성경은 나쁜 행동 자체만 아니라 나쁜 행위로 인도하는 나쁜 생각까지도 정죄합니다.—출애굽 20:17; 레위 19:17; 시 14:1-5; 욥 31:1, 9-11.

    12 도덕적 순결에 더하여 종교적 순결도 여호와의 이름을 지닌 자들에게는 분명히 요구될 것이었습니다. 반복적으로, 여호와께서는 고대 이스라엘 민족에게 다른 신들을 숭배하는 이웃 나라들의 종교적 사상과 행위 그리고 관습으로부터 영향받지 말도록 경고하셨습니다. 사실상, 바로 이 조건—그들이 열국의 거짓 숭배를 모방하지 않는다는 조건—하에서만 그들은 약속의 땅에 머무를 수 있었습니다. (레위 18:24-30; 신명 12:29-31) 우상 숭배가 분명히 금지되었을 뿐 아니라 점성술, 영매술, 점, 마법 그리고 죽은 자에게 기도하거나 죽은 자에게 묻는 일과 같은 온갖 형태의 미신과 미신 행위도 금지되었습니다.—출애굽 20:3-5; 22:18; 레위 20:27; 신명 18:9-13; 이사야 8:19, 20; 47:13; 예레미야 10:2.

    13 종교적 순결과 밀접한 관계가 있는 문제는 교리적 순결입니다. 주변 나라들의 도덕과 숭배를 모방하지 말라는 경고는, 단지 이스라엘 나라가 가나안 사람들에게서 그 땅을 차지할 당시에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여호와께서는 이미 종교적 진리를 자신의 백성에게 계시하셨습니다. 그들만이 참 하나님 여호와를 숭배하였습니다. (출애굽 19:5, 6; 신명 4:32-37; 시 147:19, 20) 그들만이 이 하나님을 개인적으로 알았고, 그분의 증인들로서 다른 사람들에게 그분에 관해 가르칠 입장에 있었습니다. (이사야 43:9-12; 시 105:1) 이와는 반대로, 다른 나라들의 종교 관습과 행위에는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 기본적으로 없음이 드러났습니다.—이사야 60:2.

    14 그 좋은 시작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 민족은 반복적으로 외부 종교 사상의 유혹을 받았습니다. (사사 2:11-13; 열왕 상 18:21; 예레미야 2:11-13; 에스겔 8:14-18) 가나안 문화와 바벨론 문화가 지속적인 영향을 남긴 한편, 유대교가 직면한 전무후무한 큰 도전은 그리스 제국에 의한 헬레니즘 문화 시대에 닥쳐 왔습니다.b 기원전 4세기로부터 통용 기원 수세기까지에 이르는 그리스 문화의 장기간의 영향을 요약해서, 유대인 저술가 막스 디몬트는 이와 같이 평하였습니다. “플라톤의 사상, 아리스토텔레스의 논리 및 유클리드의 과학으로 견문을 넓힌 유대인 학자들은 새로운 도구를 가지고 토라 연구에 착수하였다. ·⁠·⁠· 그들은 결국 그리스의 이성을 유대인의 계시에 부가하였다.”

    인간에게 불멸의 영혼이 있는가?

    15-17. (ㄱ) 성서는 사망과 영혼에 대하여 무엇을 가르칩니까? (참조 22면 네모) (ㄴ) 성서는 죽어 간 사람들에게 무슨 희망을 제시합니까?

    15 유대교의 교리와 신앙도 이 시기에 영향을 받았습니까? 「유대 백과 사전」은 이처럼 솔직하게 시인합니다. “영혼불멸 교리가 유대교에 들어오게 된 것은 아마 그리스의 영향 때문일 것이다.”8 히브리어 성경에서는 하나님께서 원래 사람이 이 땅에서 완전한 건강 가운데 영원히 살게 하려는 의도를 가지셨음을 간단 명료하게 가르칩니다. (참조 11-12면, 2항부터 4항) 창세기 2:7을 보면 이러합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 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산 영혼”, 「신세」]이 된지라.” 이 성구에서는 사람이 영혼을 받았다고 하지 않고 영혼이 되었다고 명시하고 있음에 유의할 것입니다. 첫 사람 아담은 하나님께 불순종하여 반역하였기 때문에 사망 선고를 받았습니다. 그 결과 아담은 한 인간 영혼으로서 죽었습니다. 그의 어떤 부분도 다른 세계에서 계속 살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불멸의 영혼 개념은 성서의 가르침이 아닙니다.c 성서는 “범죄하는 그 영혼이 죽으리라”고 간명하게 말합니다.—에스겔 18:4.

    16 죽은 자의 상태에 관하여 성경에서 알려 주는 내용은 영혼이 죽는다는 성서의 가르침과 일치 조화합니다. 전도서 9장 5절과 10절을 보면 이러합니다. “무릇 산 자는 죽을 줄을 알되 죽은 자는 아무 것도 모르며 ·⁠·⁠· 네가 장차 들어갈 음부[스올, 인류의 일반 무덤]에는 일도 없고 계획도 없고 지식도 없고 지혜도 없음이니라.” (비교 시 146:3, 4) 사망은 하나님께서 형벌로 내리신 것이었습니다. (창세 2:17) 그것은 생명의 반대이지, 다른 형태의 생명이 아닙니다. 사실이 그러하기 때문에, 성경 어디에서도 지옥불(게 힌놈)에서 불에 타는 형벌에 대한 언급이 없다는 사실을 발견한다고 해서 놀랄 이유가 없는 것입니다. 이 역시 그리스 철학과 이교 교리에서 흡수된 개념입니다. 환생에 대한 유대인의 신화적 신앙에 관하여 「신 표준 유대 백과 사전」(The New Standard Jewish Encyclopedia)에서는 이와 같이 설명합니다. “그 관념은 인도에서 유래한 것 같다. ·⁠·⁠· 카발라[유대교의 신화 책들]에서는 「바히르」라는 책에 처음 나타나고, 다음 조하르부터는 신비주의자들에게 보편적으로 수용되어 하시드파의 신앙과 문헌에 중대한 기여를 하였다.”9

    17 사망은 생명의 반대이고 영혼은 다른 세계에서 계속 사는 것이 아닌데, 죽어 간 사람들에게 무슨 희망이 있습니까? 하나님께서 임명하신 메시야 왕의 개입에 의해서 지상 인류에게 낙원 상태가 회복된 다음에 죽은 자들 대부분이 생명으로 돌아올 것이라고 하나님의 말씀은 분명히 가르칩니다. 이러한 성서의 가르침을 가리켜 종종 ‘죽은 자의 부활’이라고 합니다. 부활될 사람들 가운데는 하나님을 충실히 섬겼던 사람들뿐만 아니라, 그분에 관하여 배우고 진리로 섬길 기회가 충분히 없었던 수많은, 아니 수십억이나 되는 사람들도 포함될 것입니다.—다니엘 12:2, 13; 이사야 26:19; 욥 14:14, 15.

    18, 19. 우리는 왜 참 하나님을 알게 되어야 하며,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18 땅에서 완전한 생명으로 부활된다는 이러한 성서의 희망은 모든 나라의 사람들에게 참 하나님을 찾아 알려는 강력한 동기를 갖게 하지 않습니까? 그러면 이사야 2:2, 3에 언급된 바와 같이, 이 마지막 날에 여호와로부터 나오는 교훈의 참 근원은 어디입니까? 누가 사람들을 여호와의 길로 교훈하여 “그 길로 행”하게 할 수 있습니까? 지금까지 살펴본 성서 지식에 비추에 볼 때, 유대교나 그리스도교국이 그러한 교훈을 베풀 수 있습니까?

    19 예언에 따르면, 순결한 가운데 여호와의 이름을 지닌 한 집단의 사람들, 참으로 그분의 증인인 동시에 나라들에게 영적 빛의 근원 역할을 할 사람들이 있을 것이었습니다.—이사야 60:2, 3.

    [각주]

    a 이 예언을 무심코 읽어 보면 마지막 날에 유대교로 대대적인 개종이 있을 것이라는 느낌을 받을 수 있다. 그러나 문맥 자체로 보거나 현재 사건들로 볼 때 그것은 정확한 견해가 아니다. 이 부분과 다음 부분에 나오는 설명은 이렇게 결론 내리는 이유를 이해하는 데에도 도움이 될 것이다.

    b 알렉산더 대왕의 통치 시기(기원전 336-323년)로부터, 그리스인들은 그들의 철학, 문화 및 언어를 그리스 제국의 영역 모든 나라에 확산시키고자 힘을 모았다. 그리스 문화와 사상을 받아들인 사람들은 그리스화된 것으로 간주되었다. 그리스 문화에 여타 문화를 예속시키려는 그러한 노력은 로마 제국 아래서도 끊이지 않았다. 그리스를 정복한 로마였지만 그리스의 문화와 철학에는 매료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그리스 영향의 사조에 저항해 보려고 표면상 열심히 투쟁한 많은 사람들 가운데서도, 그리스 철학의 사상, 논법 및 주의(主義)를 받아들인 증거는 역력하다.

    c “영혼”으로 번역된 단어는 성서 히브리어로 네페슈다. 그런데 오늘날 유대교에서는 종종 히브리어 단어 네샤마를 사후에 계속 존재하는 사람의 일부분으로 간주한다. 그러나 성경을 면밀히 연구해 보면 네샤마라는 단어는 결코 그러한 의미를 전달한 적이 없음이 밝혀진다. 그 단어는 단지 호흡 과정 또는, 사람이든 동물이든, 호흡하는 피조물을 가리킬 뿐이다.—창세 7:22; 신명 20:16; 여호수아 10:39, 40; 11:11; 이사야 2:22.

    [20, 21면 네모]

    성서에 나오는 하나님의 이름—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것

    “하나님이 또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같이 이르기를 나를 너희에게 보내신 이는 너희 조상의 하나님 ·⁠·⁠· 여호와[히브리어, יהוה = YHWH]라 하라 이는 나의 영원한 이름이요 대대로 기억할 나의 표호니라.”—출애굽 3:15, 사체로는 본 책자에서.

    “마침 보아스가 베들레헴에서부터 와서 베는 자들에게 이르되 여호와께서 너희와 함께 하시기를 원하노라 그들이 대답하되 여호와께서 당신에게 복 주시기를 원하나이다.”—룻 2:4.

    “여호와께 감사하라 그 이름을 부르며 그 행하심을 만국 중에 선포하며 그 이름이 높다 하라.”d이사야 12:4, 사체로는 본 책자에서; 시 105:1.

    “그 때에 내가 열방의 입술을 깨끗케 하여 그들로 다 나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며 일심으로 섬기게 하리[라.]”—스바냐 3:9, 사체로는 본 책자에서.

    “주를 알지 아니하는 열방과 주의 이름을 부르지 아니하는 열국에 주의 노를 쏟으소서.”—시 79:6, 사체로는 본 책자에서.

    탈무드에 나오는 하나님의 이름—사람들이 말한 것

    “사람은 친구에게 인사할 때 그 이름을 언급해야 하는 것으로 규정되었다.”—베라코트 9:5.

    “이와 같이 그[속죄일의 대제사장]는 말하였다. ‘오 JHVH여. 당신의 백성, 이스라엘 집이 당신 앞에 죄악을 범하고, 범과하고, 죄를 지었나이다. 당신께 JHVH의 이름으로 간청하나이다. ·⁠·⁠·’ 그러면 성전 뜰에 서 있던 제사장들과 백성들은, 대제사장의 입에서 낭랑하게 흘러나오는 그 거룩하고 존귀한 이름을 들을 때, 거룩함과 순결함 가운데 무릎을 굽히고 엎드려 얼굴을 땅에 대고 이렇게 외쳤다. ‘그분의 거룩하고 지존하신 이름을 영영히 송축하리로다.’”—요마 6:2.

    “성소에서는 그 이름을 기록된 대로 발음하였다. 그러나 그 경계 밖에서는 대치된 이름을 사용하였다.”—소타 7:6.

    “처음에는 대제사장이 그 이름을 큰소리로 포고하곤 하였다. 그러나 질이 나쁜 사람들이 많아지자 낮은 소리로 포고하였다.”—「예루살렘 탈무드」, 요마 40.

    “그 이름을 글자 그대로 발음하는 자[는 장차 올 세상에서 제외된 자들 가운데 속한다.]”—산헤드린 10:1.

    “그 이름을 입 밖에 내는 자는 누구를 막론하고 사형 죄에 해당한다.”—페식타 148.

    [각주]

    d “그 이름을 부르[라]”(히브리어, קראו בשמו)는 구절은 “그분을 이름으로 부르라”로도 번역될 수 있다. (비교 「신 영어 성서」) 같은 히브리어 구문이 “[아브람]이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더[라]”고 번역된 창세기 12:8에도 나온다.

    [22면 네모]

    사망과 영혼—무엇을 의미하는가?

    성경이 말하는 것: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 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산 영혼, 네페슈]이 된지라.” (창세 2:7, 사체로는 본 책자에서) 사람이 영혼을 받은 것이 아니라, 영혼이 것임에 유의해야 한다.

    “선악을 알게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창세 2:17) 첫 사람 아담에게 사망은 불순종에 대한 형벌로서만 언급되었음에 유의해야 한다.

    “네가 얼굴에 땀이 흘러야 식물을 먹고 필경은 흙으로 돌아 가리니 그 속에서 네가 취함을 입었음이라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창세 3:19.

    “이 민족들의 성읍에서는 호흡 있는 자[네샤마]를 하나도 살리지 말찌니[라.]”—신명 20:16.

    “그 성읍을 취하고 그것과 ·⁠·⁠· 그 중의 모든 사람[영혼, 네페슈]을 칼날로 쳐서 하나도 남기지 아니하였으니 그 성읍과 그 중의 모든 사람[영혼, 네페슈]을 진멸[하였더라.]”—여호수아 10:37.

    “그 가운데 모든 사람을 칼날로 쳐서 진멸하여 호흡이 있는 자[네샤마]는 하나도 남기지 아니하였[더라.]”—여호수아 11:11.

    “모든 영혼이 다 내게 속한지라 아비의 영혼이 내게 속함 같이 아들의 영혼도 내게 속하였나니 범죄하는 그 영혼[네페슈]이 죽으리라.”—에스겔 18:4, 사체로는 본 책자에서.

    “무릇 산 자는 죽을 줄을 알되 죽은 자는 아무 것도 모르며 ·⁠·⁠· 네가 장차 들어갈 음부[인류의 일반 무덤]에는 일도 없고 계획도 없고 지식도 없고 지혜도 없음이니라.”—전도 9:5, 10.

    랍비들이 말한 것:

    “제7하늘 아라보트에는 창조를 기다리는 영들과 영혼들이 간직되어 있다.”—하기가 12ㄴ, 탈무드.

    “안식일 전야에는 영혼이 하나 더 사람에게 주어졌다가, 안식일 종료 시에 그에게서 나간다.”—타아니트 27, 탈무드.

    “[사후] 만 12개월 동안 몸은 계속 존재하며, 영혼은 오르내린다.”—샤바트 152, 탈무드.

    “죽은 자에게 벌레가 고통스럽기는 산 자의 육체에 바늘이 꽂힌 것과 같다.”—샤바트 13, 탈무드.

    “죽은 사람의 이름으로 현세에서 무엇을 말하면, 그 사람의 입술이 무덤에서 움직인다.”—산헤드린 90, 탈무드.

    “유대교는 ‘몸의 사망 후 영혼의 불멸을 보장하는 종교’이다.”—쿠자리 1:103, 유다 할레비, 12세기 랍비.

    [23면 삽화]

    이스라엘, 디베랴(티베리아스)에 있는 이 고대 회당 바닥은 그리스 사상과 문화가 유대교에 미친 영향이 어느 정도인지를 보여 주는 한 예에 불과하다. 황도 12궁이 보이고 그 이름들이 히브리어로 쓰여 있다. 가운데 있는 그림은 태양신 헬리오스다



  • 리더스다이제스트사가 펴낸 <세계상식백과>에 있는 기록에 따르면, 
    피지 군도의 작은 섬 '베카'라는 곳에서는 '음베테'라고 불리는 고승과 그 제자들에 의해 불 위를 걷는 의식이 행해진다고 합니다.

    사람들은 직경 4.5 내지 6m 정도의 구덩이를 1 내지 1.5m 깊이로 파냅니다. 
    통나무를 그 안에 잔뜩 쌓고 그 속에 돌을 집어넣습니다. 
    통나무가 타들어 가면서 돌이 차곡차곡 쌓이게 됩니다. 
    준비가 완전히 끝나면 '음베테'는 돌 위에 마른 잎을 뿌려봅니다. 
    그러면 금방 불길이 일어납니다. 
    돌이 달구어진 것입니다. 
    이윽고 고승과 제자들은 돌 위를 천천히 걸어다니다가 나오는데 상처 하나 생기지 않습니다.

    이와 비슷한 의식이 스리랑카 콜롬보 북쪽의 작은 어촌에서도 매해 벌어진다고 합니다. 
    또한 남부 인도의 일부 촌락에서도 해마다 벌어지는데 특히 '우다이푸르' 마을이 유명하다고 합니다. 
    불구덩이- 보통 8㎡ 에 1m 깊이-에 불이 준비되면 어찌나 뜨거운지 구경꾼은 10m 안으로는 접근할 수가 없습니다.

    서양의 과학은 중화상을 입지 않고 어떻게 사람들이 불 위를 걸어다니는지에 대해 합리적으로 설명을 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의사들이 피지섬과 스리랑카에서 불 위를 걸은 사람들을 조사해 보았으나 발바닥에 화상은 전혀 없었으며 발바닥 피부의 감각도 정상이었다고 합니다.

    지금도 이런 일이 세계 어느 곳에서 일어나고 있다면 그 옛날 다니엘 때에도 있을 수 있었겠지요. 
    다니엘이 불구덩이를 태연히 거닐다가 상처 하나 없이 나왔다는 기록에 대한 입장을 다시 정리해야 할 것 같습니다. 
    사람이 불구덩이 속을 손끝 하나 상하지 않고 걸어다녔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과 그럴 수는 없다고 믿는 사람으로 말입니다. 
    글 앞쪽에서는 '믿는다'라고 했던 것이 이제는 '안다'가 되어 버렸고, '안다'고 했던 것이 '믿는다'가 되어 버렸습니다.

    예수께서 이 땅에 많은 기적을 베푸셨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눈으로 본 유대인들 중에도 믿지 않는 자가 많았습니다. 
    그들이 믿지 않은 것은 믿지 않으려는 마음을 갖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그들의 눈을 멀게 하셨다고 했습니다. 
    믿지 않으려는 마음을 가진 자에게는 보이지 않습니다. 
    그래서 그는 알 수가 없습니다. 
    믿지 않는 자에게는 앎이 허락되지 않는 것입니다. 
    안다는 것은 바로 믿는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 아는 만큼 보이고, 아는 만큼 믿을 수 있다. 
    You can see and trust as much as you know.

    신명기 7:9
    그런즉 너는 알라. 오직 네 하나님 여호와는 하나님이시요 신실하신 하나님이시라. 
    Know therefore that the LORD your God is God; he is the faithful God [NIV] <Deuteronomy 7:9>

    조나단 에드워즈(Jonathan Edwards)
    “인간은 자기들이 하나님을 아는 것 이상으로는 하나님을 믿을 수 없을 것이라.”
    (Men will trust in God no further than they know Him) 

  • 똑같은 것을 보아도 아는 만큼 보이고, 보는 만큼 알고, 더 아는 만큼 더 깊게 보게 되는 법이지요. 
    참된 신앙도 결국은 창조주 하나님을 알거나 알아가는 과정에서 일어나는 기적 같은 영혼의 변화입니다. 
    성경은 그것을 ‘거듭남’이나 ‘새로운 피조물’ ‘새 것’ 등의 단어로 표현하고 있고, 
    예수님 육신의 동생인 유다는 이를 ‘단 번에 주신 믿음의 도’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을 어디서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하나님이 인간들에게 자신을 나타내시는 수많은 것 중에서도 가장 정확하고 직접적인 것이 ‘그의 말씀’ 곧 성경입니다. 
    그래서 수많은 경건한 사람들은 성경연구에 시간과 노력을 쏟고 있지요. 
    때로는 믿는다는 사람들도 하나님에 대해 얼마나 바르게 그리고 많이 알고 있는지를 살펴봐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내가 알고 있는 모든 이들이 성경말씀을 통해서 창조주 하나님을 더욱 많이 알고, 그분을 더욱 깊이 신뢰하며 살아가기를 기도하는 시간입니다.

     


  • 예수님을 아는 것과 믿는 것은 다르다

    마태복음 16:15-17
    이르시되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여 이르되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   

    기독교 신앙의 기초에는 바른 신앙고백이 있습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을 가리켜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라고 고백했던 것처럼 예수님을 믿는 모든 사람들도 베드로와 같은 신앙고백을 하게 됩니다. 
    이것은 성경적인 바른 신앙고백입니다. 
    하나님께서 계시로 알려 주신 것입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베드로의 신앙고백은 아는 것이지 믿은 것은 아니었습니다. 
    아는 것에서 믿는 것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지식적으로 아는 것과 믿는 것은 다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알려 주신 신적지식인 베드로의 신앙고백에 머물러 있습니다. 
    그것이 전부인줄 알고 있습니다. 
    또한 그런 신앙고백을 한 것이 곧 예수님을 믿는 것으로 착각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베드로의 신앙고백은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 아는 것이지, 예수님을 온전히 신뢰하고 믿는 것이 아닙니다. 
    이제 성경을 통해서 믿는 것이 무엇인지 확인해 보면 드디어 아는 것의 한계가 무엇인지 깨닫게 될 것입니다.

    알게 하다아포칼립토 라고 하는데 덮개를 제거하다, 계시하다, 보여주다 라는 뜻으로 하나님께서 자신과 자신의 뜻을 사람들에게 스스로 알리실 때 사용되는 단어입니다. 

    ἀποκαλύπτω 스트롱번호 601

    1. 드러내다.  2. 폭로하다.  3. ἀ
    발음 [ apŏkalüptō ]

    어원 / 미래 ἀποκαλύψω, 제1부정과거 ἀ- πεκάλυψα, 제1부정과거 수동태 ἀπε- καλύφθην, 미래수동태 ἀποκαλυφ- θήσομαι, 575와 2572에서 유래

  • 관련 성경 /  드러나다(마 10:26, 눅 12:2), 나타내다(마11:25, 고전3:13, 갈1:16), 나타나다(눅17:30, 롬1:17, 살후2:6), 드러내다(눅2:35), 계시를 받다(눅10:22), 알게 하다(마16:17), 보이다 (고전2:10), 계시되다(갈3:23).

  • 흔히 계시라고 말합니다. 
    사람이 스스로 알 수 없도록 닫혀 있는 것을 하나님께서 열어서 깨닫게 해 주시는 것을 의미합니다. 
    성경말씀이 바로 계시입니다. 
    감추어진 것을 열어서 알게 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간접적인 지식이며 간접적인 경험입니다.

    우리가 영화관에서 영화를 보는 것과 내가 삶의 현장에서 직접 체험하는 것은 다른 것과 같습니다. 
    영화를 보게 되면 영화에 나오는 배우들의 경험들을 간접적으로 체험하게 됩니다. 
    그러나 영화를 보고 얻는 지식은 내가 직접 경험한 것이 아닙니다. 
    간접적인 경험과 지식에 불과합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 알게 해 주셔서 터득한 지식은 내가 직접 체험해서 믿는 것과는 다릅니다. 
    그것은 간접적인 경험이며 간접적인 지식입니다.

    그렇다면 믿는 것은 어떤 것입니까? 
    아는 것과 믿는 것에는 어떤 차이가 있을까요?

    먼저 믿는 것이 무엇인지 확인해 보면 자연적으로 아는 것이 무엇인지도 알 수 있습니다. 
    오늘은 아는 것과 믿는 것의 차이점에 대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이 말씀을 들으시고 나는 과연 믿는 사람인지 지식적으로 아는 사람인지 점검하는 시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1. 예수님을 믿는 것은 예수님을 내 마음에 주인으로 모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것이 무엇인지 성경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요한복음 1:12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믿는 것과 영접하는 것이 같은 내용이지만 사람들이 오해하지 못하도록 영접하다(인격적으로 받아들이다) 라는 단어를 믿는다는 단어보다 앞세웠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곧 예수님을 내 마음에 주인으로 영접하고 모셔 드리는 것입니다. 
    바로 그런 자에게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셔서 하나님의 모든 것을 상속받게 하십니다.

    예수님을 믿고 예수님을 마음에 주인으로 모시게 되면 예수님처럼 하나님의 자녀의 권세를 그대로 받아서 예수님과 동일한 자녀의 권세를 사용할 수가 있습니다. 
    예수님이 하셨던 일을 그대로 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예수님께서 하신 일보다 더 큰 일도 할 수 있습니다. 

    요한복음 14:12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를 믿는 자는 내가 하는 일을 그도 할 것이요 또한 그보다 큰 일도 하리니 이는 내가 아버지께로 감이라.

    나를 믿는 자는 내가 하는 일을 그도 할 것이요 또한 그보다 큰 일도 하리니 라고 했습니다. 
    이것이 예수 믿는 자에게 주어지는 특권이며, 축복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것은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내 마음에 주인으로 모셔 드리는 것입니다. 

    로마서 14:7-9
    우리 중에 누구든지 자기를 위하여 사는 자가 없고 자기를 위하여 죽는 자도 없도다.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  
    이를 위하여 그리스도께서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셨으니 곧 죽은 자와 산 자의 주가 되려 하심이라. 

    예수님을 내 마음에 주인으로 모셔 드린 사람은 죽어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나의 생명은 주님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은 자신이 생명의 주인이기 때문에 생명에 대한 애착이 강하여 죽음에 대하여 극도의 공포와 두려움을 느낍니다. 
    죽는 것을 너무나 싫어합니다. 
    그러나 부활의 예수님을 나의 주인으로 모시게 되면 생명의 주인은 내가 아니라 예수님이시기 때문에 사는 것도 죽는 것도 주님이 알아서 할 일이지 내가 염려하고 걱정할 필요가 없어집니다. 
    또한 죽어도 다시 살기 때문에 죽음은 두렵지 않습니다.

    죽음이 두려워서 벌벌 떨거나 죽음을 피하려고 도망간다면 그 사람은 아직 예수님을 주인으로 모셔 드리지 않았다는 증거입니다. 
    때문에 베드로를 비롯한 제자들이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실 때 죽음이 두려워서 다 도망갔다는 것은 그들이 예수님을 믿지 않았다는 결정적인 증거이며, 또한 생명을 자신의 것으로 생각했다는 불신앙을 단적으로 보여 준 사건입니다. 
    베드로의 신앙고백은 예수님을 아는 것이지 예수님을 믿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2. 참된 믿음은 확실한 증거를 가지고 믿는 것입니다.

    사도행전 17:31
    이는 정하신 사람으로 하여금 천하를 공의로 심판할 날을 작정하시고 이에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것으로 모든 사람에게 믿을 만한 증거를 주셨음이니라 하니라.

    하나님은 예수님을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으로 모든 사람에게 믿을 만한 증거를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공평하셔서 모든 사람에게 믿을 만한 증거를 주셨는데 그것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이 세상에 오셔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역사적인 사건입니다.

    예수님이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는 것을 보기 전까지는 믿을 만한 증거가 없었기 때문에 제자들은 예수님을 믿을 수가 없었습니다. 
    제자들이 예수님을 배반하고 도망가 버린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물론 그 전에도 부활의 예수님을 볼 수 있었던 사람들은 예수님을 믿었고 구원받았습니다. 
    우편 강도와 같은 사람입니다.

    제자들이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고 부활을 경험했을 때 드디어 주님 앞에 엎드려 나의 주, 나의 하나님이라고 고백하면서 즉시 예수님을 자신들의 주인으로 모셔 드렸습니다. 
    그런 이유 때문에 누구든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야 드디어 믿을 만한 증거를 가지고 예수님을 믿게 됩니다. 
    그전까지는 믿는 것이 아닙니다. 
    그냥 지식적으로 아는 것에 불과합니다. 

    요한복음 2:22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후에야 제자들이 이 말씀하신 것을 기억하고 성경과 예수께서 하신 말씀을 믿었더라.

    제자들이 언제 예수님의 말씀을 믿었다고 했습니까? 
    예수님이 죽으시고 부활하신 후에야 믿었다고 했습니다. 
    그전까지는 지적인 동의만 했습니다. 
    이렇게 지식적으로 아는 것의 한계는 삶에 변화를 주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지식은 사람을 변화시키지 못합니다. 
    예수님을 믿을 때 드디어 삶이 달라지고 변화됩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주인으로 모신 후에 삶이 획기적으로 변화된 사람이 있습니다. 
    그는 곧 예수님의 제자들이며, 사도 바울입니다. 사도 바울은 빌립보서를 기록하면서 이런 고백을 했습니다. 빌3:4-9/그러나 나도 육체를 신뢰할 만하며 만일 누구든지 다른 이가 육체를 신뢰할 것이 있는 줄로 생각하면 나는 더욱 그러하리니 5 나는 팔일 만에 할례를 받고 이스라엘 족속이요 베냐민 지파요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요 율법으로는 바리새인이요 6 열심으로는 교회를 박해하고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라 7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8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9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부터 난 의라/고 했습니다.

      사도 바울 만큼 예수 믿고 놀랍게 변화된 사람은 없습니다. 그가 예수 믿기 전에는 예수 믿는 자들을 핍박하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부활의 예수님을 만나고 나서 부활의 예수님을 전하다가 도리어 엄청난 핍박을 받았습니다. 또한 그 동안 자신이 보화처럼 여겼던 세상 것들을 배설물처럼 여기고 버리기 시작했습니다.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삶이 변화되지 않는 예수님을 믿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에 관해서 알고 있을 뿐입니다. 실제로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지식적으로 아는 것을 믿는 것으로 착각합니다. 그러나 아는 것과 믿는 것은 전혀 다른 것입니다. 물론 예수님을 아는 것도 하나님이 깨닫게 해 주셔야 가능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아는 데서 예수님을 믿는 데로 나아가야 합니다.

    3. 참된 믿음에는 반드시 삶과 행동이 따르게 됩니다.

    약2:14-17/내 형제들아 만일 사람이 믿음이 있노라 하고 행함이 없으면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 그 믿음이 능히 자기를 구원하겠느냐 15 만일 형제나 자매가 헐벗고 일용할 양식이 없는데 16 너희 중에 누구든지 그에게 이르되 평안히 가라, 덥게 하라, 배부르게 하라 하며 그 몸에 쓸 것을 주지 아니하면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 17 이와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 야고보 사도가 반복해서 강조하는 진리가 무엇입니까? 행함이 없는 믿음은 믿음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믿었는데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그러면 그것은 죽은 믿음이며 가짜입니다. 예수님을 믿게 되면 반드시 내적인 변화와 함께 외적인 변화가 일어나게 됩니다. 환경이 바뀌게 됩니다. 내가 바뀌고, 환경이 바뀌고, 주위 사람들이 바뀌게 됩니다.

      그래서 믿음이란 열매를 통해서 확인할 수 있고, 열매를 통해서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삶의 열매를 통해서 사람들을 알 수 있다고 했습니다. 마7:16-20/그들의 열매로 그들을 알지니 가시나무에서 포도를, 또는 엉겅퀴에서 무화과를 따겠느냐 17 이와 같이 좋은 나무마다 아름다운 열매를 맺고 못된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나니 18 좋은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을 수 없고 못된 나무가 아름다운 열매를 맺을 수 없느니라 19 아름다운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져지느니라 20 이러므로 그들의 열매로 그들을 알리라/고 했습니다. 삶의 열매를 보면 그 사람이 예수를 아는 자인지 예수님을 믿는 자인지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내 안에 들어오시면 예수님의 성품인 성령의 아홉 가지 열매를 맺히게 됩니다.

      공간복음을 통해서 제자들의 삶을 보시면 제자들은 위기를 만날 때마다 항상 불안해 하였고 두려움에 휩싸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항상 평안했습니다. 어떤 위기 앞에서도 불안해 하거나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항상 평안을 유지했습니다. 믿는 자가 맺게 되는 성령의 아홉 가지 열매는 위기나 죽음 앞에서 가장 분명하게 들어납니다. 부활의 예수님을 주님으로 모시고 믿으면 결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부활의 신앙으로 죽음을 초월합니다. 세상이 감당치 못하는 믿음이 됩니다! 히11:35-40/여자들은 자기의 죽은 자들을 부활로 받아들이기도 하며 또 어떤 이들은 더 좋은 부활을 얻고자 하여 심한 고문을 받되 구차히 풀려나기를 원하지 아니하였으며 36 또 어떤 이들은 조롱과 채찍질뿐 아니라 결박과 옥에 갇히는 시련도 받았으며 37 돌로 치는 것과 톱으로 켜는 것과 시험과 칼로 죽임을 당하고 양과 염소의 가죽을 입고 유리하여 궁핍과 환난과 학대를 받았으니 38 (이런 사람은 세상이 감당하지 못하느니라) 그들이 광야와 산과 동굴과 토굴에 유리하였느니라 39 이 사람들은 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증거를 받았으나 약속된 것을 받지 못하였으니 40 이는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여 더 좋은 것을 예비하셨은즉 우리가 아니면 그들로 온전함을 이루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 이들이야말로 믿는 자들이었습니다. 죽음 앞에서 두려워 떠는 자는 믿는 자가 아닙니다! 지식적으로 아는 자입니다. 지식적으로 아는 자는 행동이 따르지 않습니다. 마음은 원이지만 육신이 약해서 행동할 수가 없습니다. 마음은 뻔한데 몸이 따라 주지 않습니다. 그러나 믿는 자는 몸과 마음이 함께 움직입니다. 믿는 자는 죽음조차도 못 말립니다! 그래서 이런 사람은 세상이 감당하지 못하느니라고 했습니다. 믿음의 사람은 세상이 못 말리는 사람입니다.

    4. 믿는 것과 아는 것이 일치합니다.

    이런 사람이 곧 온전한 사람이며 예수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른 사람입니다. 
    예수님과 내가 하나가 된 사람입니다. 

    에베소서 4:13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리니.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는 것이 신앙생활의 최고의 목표입니다. 
    이 땅에서 예수님처럼 되는 것보다 더 큰 기대와 소망은 없습니다.

    예수님처럼 되는 방법은 이미 말씀드린 것처럼 예수님을 믿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베드로의 신앙고백과 같이 지식적으로 아는 것이 아니라 부활하신 예수님을 내 마음에 주인으로 모셔 드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과 내가 영적으로 연합하여 한 몸이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과 내가 나의 몸 안에서 함께 사는 것입니다. 

    요한계시록 3:20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더불어 먹고 그는 나와 더불어 먹으리라.

    밥을 먹을 때 예수님과 함께 먹습니다. 
    잠을 잘 때 예수님과 함께 잡니다. 
    예배드릴 때 예수님과 함께 예배를 드립니다. 
    기도할 때 예수님과 함께 기도합니다. 
    공부할 때 예수님과 함께 공부를 합니다.
     설교준비를 할 때 예수님과 함께 설교준비를 합니다. 
    직장생활 할 때도 예수님과 함께 직장생활을 합니다. 
    모든 것을 예수님과 함께 하는 것입니다.

  • 내가 예수님처럼 되었는지 알 수 있는 방법은 

    에베소서 4:13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리니.

    이 말씀처럼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는 것을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믿는 것과 아는 것이 하나 되지 않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자신은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는데 성경이 말씀하고 있는 진리의 지식과는 일치되지 않는 삶을 살고 있는 사람이 있습니다.

    성경은 원수를 사랑하라고 했는데 아직도 원수를 미워하고 있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은 믿는 것과 아는 것이 일치하지 않았습니다. 
    자신의 믿음과 성경말씀이 일치하지 않는 것입니다.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고 말씀했습니다. 
    예수님을 마음에 모시고 사는 사람은 마음이 항상 평안해야 합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어떤 문제 앞에서도 항상 평안해야 합니다.

    때로는 마음이 평안하다가도 어떤 문제를 만나고 삶의 파도를 만나게 되면 평안이 사라져 저립니다. 
    마음이 몹시 불안하고 두렵습니다. 
    이런 사람은 믿음과 지식이 일치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그러니까 아직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 아닙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마음에 주인으로 모시지 않았습니다. 

  • 이런 사람은 구원받은 것이 아닙니다. 
    천국에 들어갈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을 아는 사람입니까? 믿는 사람입니까? 
    만약 말씀을 통해서 자신이 예수님을 지식적으로 아는 사람이라면 빨리 예수 믿지 않는 것을 회개하고 부활의 주님을 마음에 주인으로 모시고 믿으시기 바랍니다. 



  •  
  • 9월 24일(수) 호세아 5-9장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여호와께로 돌아가자(6:1)

    오라 우리가 여호와께로 돌아가자 여호와께서 우리를 찢으셨으나 도로 낫게 하실 것이요 우리를 치셨으나 싸매어 주실 것임이라.
    Come, let us return to the LORD. He has torn us to pieces but he will heal us; he has injured us but he will bind up our wounds.

     

    오라, 우리가 여호와께로 돌아가자 여호와께서 우리를 찢으셨으나 도로 낫게 하실 것이요 우리를 치셨으나 싸매어 주실 것임이라







    호세아 13:7 
    그러므로 내가 저희에게 사자같고 길가에서 기다리는 표범 같으니라




    회복(恢復) /  넓을 회, 회복할 복
    - 원래의 상태로 돌아가는 것


    restoration
    미국∙영국[ˌrestəˈreɪʃn]
    • 1. (낡은 건물·그림 등의) 복원[복구] 
      2. (이전의 제도·법률 등의) 부활 
      3. (제자리·원 상태로의) 회복, (본래 주인에게로의) 반환
    1. 회심(悔心) 요엘 2:12

    여호와의 말씀에 너희는 이제라도 금식하며 울며 애통하고 마음을 다하여 내게로 돌아오라. 

    2. 관계(關係) 여호수아 24:15

    만일 여호와를 섬기는 것이 너희에게 좋지 않게 보이거든 너희 열조가 강 저편에서 섬기던 신이든지 혹 너희의 거하는 땅 아모리 사람의 신이든지 너희 섬길 자를 오늘날 택하라 오직 나와 내 집은 여호와를 섬기겠노라.

    3. 예배(禮拜) 요한복음 4:24 

    하나님은
    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찌니라. 

    4. 순종(順從) 사무엘상 15:22

    사무엘가로되 여호와께서 번제와 다른 제사를 그 목소리 순종하는 것을 좋아하심 같이 좋아하시겠나이까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것수양의 기름보다 나으니.


    너는 내일 일을 자랑하지 말라 하루동안에 무슨 일이 날는지 네가 알 수 없음이니라.

    שׁוּב 스트롱번호 7725

    1. 방향을 돌리다.  2. 회복하다.  3. 돌이키다
    발음    [ shûwb ]  
    구약 성경  /  1059회 사용


    어느 형제의 이야기입니다.
    저는 주님을 영접하기 전에는 좋지 않은 생활을 하였습니다.
    시간만 나면 친구들과 만나서 술을 마시고 다른 사람들에게 시비를 걸어 싸움을 하곤 하였습니다.
    그리고 제가 싫은 것은 거들떠보지도 않았습니다.
    제가 아는 사람 중에 소아마비로 인해 목발을 짚고 다니는 사람이 한 명 있었는데 그는 저를 무척 좋아했지만 저는 그가 소아마비라는 이유로 멀리 했습니다.
    작년 4월, 좀더 벌어 보자는 욕심 때문에 육지에 나가게 되었는데 진주에서 김천으로 가던 중 교통사고를 당했습니다.
    사고가 어떻게 났는지 기억이 나지 않지만 제가 100% 잘못한 것으로 판정이 났습니다.
    사고가 난 후 며칠 동안은 사경을 헤매다가 얼마 후 깨어난 저는 양쪽 다리의 심한 통증을 느꼈습니다.
    저는 그렇게만 믿고 며칠을 지냈는데 며칠 후 조금 고개를 들 수 있어서 제 다리를 보게 되었는데 왼쪽 다리는 절단된 상태이고 
    오른쪽 다리는 발목 부분이 뼈만 남아 덜렁거렸습니다.
    저는 자살을 하고 싶었지만 몸을 움직이지 못하니 자살도 못하고, 다른 사람들은 부모님을 생각해서라도 절대 나쁜 생각을 하지 말라고 했지만 그런 말은 귀에 들어오지 않았습니다.
    병원 진단 결과는 간 파열, 신장 파열, 좌 대퇴부 절단, 우 경골 및 비골 개방성 골절, 좌 비구 골절, 우족 관절이개, 우 하퇴부 다발성 연부조직 손상 등으로 크게 다쳤는데, 병원에서는 간과 신장만 살리고 남은 다리와 골반은 우리나라에서는 수술할 줄 아는 사람이 없으니 포기하라고 했습니다.
    결국 그 병원에서는 희망이 보이지 않아서 서울 영동 세브란스 병원에서 수술을 하게 되었습니다.
    다행히 수술이 잘되어 오른쪽 다리는 절단하지 않아도 되었습니다.
    그 후 약 3개월간 병원 생활을 하다가 퇴원해 집에 내려와 있었지만 고통의 연속이었습니다.
    저는 밤에는 불타는 지옥의 악몽에 시달렸고 낮에는 그 악몽 때문에 밥맛이 없었습니다.
    그렇게 악몽에 시달리던 어느 날, 여동생으로부터 아는 동생이 있는데 그녀는 신앙심도 깊고 또 저의 병원비까지 빌려주었다고 해서 고마운 마음에 만나게 되었습니다.
    저는 그 사람을 통해 주님의 말씀을 듣게 되었고 다음 날 제주 남문 교회의 두 형제님을 차례로 만나면서 주님을 더욱 알게 되었습니다.
    신기하게도 그 분들을 만난 후부터 악몽이 사라지고 성경 말씀을 듣고 난 후 즐거운 마음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구원을 받게 되었습니다.
    처음에는 구원의 참뜻을 몰랐지만 한 구절 한 구절 놀라운 성경 말씀을 듣고서야 진정 구원이 무엇인지 알았습니다.
    아직 저는 하나님을 많이 알지는 못하지만 다른 사람이 체험하지 못한 것을 체험하였고 지금의 저는 마음이 평안합니다. 

    많은 것을 잃었지만 온 천하보다 귀한 영생을 얻었습니다.
    "나같은 죄인 살리신 주 은혜 놀라와 잃었던 생명 찾았고 광명을 얻었네"
    이제는 주님의 뜻에 어긋나지 않는 삶이 되도록 열심히 살겠습니다.
    저를 거듭나게 하여 주시고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게 해주신 주님께 감사드립니다.

    호세아 6:1
    오라 우리가 여호와께로 돌아가자 여호와께서 우리를 찢으셨으나 도로 낫게 하실 것이요 우리를 치셨으나 싸매어 주실 것임이라

    사랑의 선지자 호세아는 하나님의 변함 없는 사랑을 깨닫고 그 사랑을 선포하고 음란한 이스라엘의 무절제한 죄를 지적하며 사랑의 하나님 여호와께로 돌아오라고 간절히 호소했습니다. 

    호세아가 말한 “여호와께로 돌아가자”에는 3가지 의미가 내포되어 있습니다.

    첫째, 거리의 개념 

    예배는 신앙생활의 출발입니다.
    예배를 삶의 우선순위에 두는 것이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표현이자 인생이 행복해지는 지름길입니다.
    요즘같은 비대면 예배라도 그리스도 중심의 예배를 드리고 있는지 아니면 나 중심, 내 편의 위주로 예배를 드리고 있지는 않은지를 돌아보며 교만의 높은 산에서 내려와 주님께 더 가까이 돌아가야 합니다.

    둘째, 시간의 개념

    [요엘 2:12] 여호와의 말씀에 너희는 이제라도 금식하고 울며 애통하고 마음을 다하여 내게로 돌아오라 하셨나니

    더 늦기 전에 '이제라도' 여호와께 돌아가자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의 음성이 더 이상 안 들리십니까?

    설교 말씀이 더 이상 은혜가 안되십니까?

    감사보다는 불평으로.. 사랑과 용서보다는 미움과 비난으로 남을 정죄하십니까? 

    술과 도박, 쾌락에 빠져 세상을 주인삼고 하나님과 멀어지셨나요?
    지금이라도.. 이제라도.. 주님께로 돌아가십시요.

    우리 주님은 우리의 실수와 죄를 탓하지 않으시고 다시 안아주실것입니다

    셋째, 관계의 개념

    사랑하는 사람과 여행을 간다면 그 어떤 길도 지루하지 않고 즐겁고 시간이 아쉬울 정도로 빨리 갈것입니다.
    그렇듯 사랑하는 우리 주님과 함께라면 그 어떤 고난과 힘든 길도 즐겁게 잘 감당할수 있습니다.
    여호와의 관계가 깨어지면 다른 관계들, 부부사이의 관계, 부모와 자식사이의 관계도 깨어집니다.
    물에서 멀어지면 마르듯이 생명의 주인인 하나님과의 관계가 깨어지면 아무것도 할수 없고 버려져 마르게 됩니다.
    우리 인생에서 가장 위대한 것은 힘써 여호와를 아는 것입니다.

    모든 것은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것에 달려있습니다.
    우리 모두 여호와께로 돌아가 믿음이 회복되고 거룩한 하나님 나라를 완성하는 선봉장이 되길 기도합니다.

    오늘도 나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 아버지!!
    언제 어디서든 어느 상황과 환경에서도 주님께 돌아가 나와 동행하시는 주님을 믿고 의지하게 하소서.
    하나님이 저에게 주신 가장 큰 축복인 임마누엘의 복에 감사하며 마음의 걱정과 불안, 두려움이 사라지게 하시고, 
    하나님과 함께 항상 기뻐하고, 범사에 감사하고 쉬지 말고 기도할 수 있는 신실한 일꾼이 되게 하소서.
    너무 늦기 전에 더 늦기 전에 교만의 높은 산에서 내려와 여호와께 돌아가게 하시고 하나님과의 뜨거운 사랑이 회복되어 
    무너진 가정과 사회 공동체를 온전히 회복시켜 주시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여호와께로 돌아가자
    호세아 6:1~3

    늘날의 시대를 바라보면서 참으로 풍족하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풍요로움 속에서 사람들은 더 많은 풍요를 추구하며 살아갑니다. 자족하는 비결을 깨닫지 못한 채,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보다 차원높은 부와 권력을 얻으려고 합니다. 부(富)를 추구하는 것 자체를 죄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믿음의 사람들도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하심 가운데서 날로 더욱 풍성한 부와 권력을 취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성경은 범사에 좋은 것을 취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시대와 이 시대의 사람들이 추구하는 부와 권력은 이기적입니다. 심지어는 퇴폐적이기까지 합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은 안중에도 없고, 도덕적인 선을 추구함도 없습니다. 무작정 많이 소유하면 된다는 식입니다. 물질적인 풍요를 추구하지만 정신세계는 얼마나 공허한지 모릅니다. 도덕적 가치가 사라졌습니다. 인륜이 짓밟히고 있고, 추악한 모습으로 세상은 점점 변해가고 있습니다. 이런 기류에 예수를 믿는 신앙인들도, 교회도 편승하고 있는 지경입니다. 세상적으로는 풍요롭기를 추구하지만, 그리고 어느 정도 그것을 이루었지만, 오늘날의 현실은 영적으로는 심히 빈곤하며,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인식은 거의 전무한 지경입니다.

    교회와 성도들은 부와 권력을 가질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그것에 집착해서는 안됩니다. 그것에 매여 종노릇하는 가운데 있어서는 안됩니다. 성경이 성도를 향해서, 그리고 교회를 향해서 부요한 자가 되라고 말씀하실 때에 부와 권력은 단지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님을 기억해야 합니다. 영적으로 풍요로울 수 있어야 합니다. 세상 권력을 탐닉하는 자가 아니라 하나님 나라에서 영광스러운 이름을 얻을 수 있는 자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저는 우리 교회와 성도들이 영육간에 풍요로운 삶을 살아갈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혹 세상의 것은 잃어도, 가난하고, 궁핍하며, 세상에서 아무런 권세는 없어도, 하나님께는 부요하며, 영적으로는 풍족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바로 이것이 축복입니다. 비록 이 시대의 사람들은 영적인 은혜를 구하지 않고, 영적 풍요를 대수롭지 않게 여긴다고 해도, 그들의 불신앙적인 모습을 따라 망하는 가운데 있지 말고, 오직 하나님을 구하며,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영적인 풍요와 영광을 얻을 수 있게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1. 호세아가 선지자로 활동하고 있던 시대는 풍요로운 시대였습니다. 당시에 북조 이스라엘은 여로보암 2세가 다스렸습니다. 그는 정치적인 능력이 있었습니다. 게다가 국제정세를 밝히 볼 수 있었고, 나라의 힘을 키워, 영토를 확장할 수 있었습니다. 이스라엘 곳곳에는 많은 물질로 부족함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 시대를 보시면서 개탄하고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모두가 만족하며, 왕이 정치를 잘한다고 칭찬하고 있을 때에 하나님은 여로보암 2세를 보시면서 탄식하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영적으로 빈곤했기 때문입니다. 세상적으로는 풍요롭고, 잘 사는 나라가 되었지만, 하나님 앞에는 무일푼의 노숙자와 같이 영적인 빈곤함을 드러내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세상에 아무리 많은 것을 가져도 영적으로 빈곤하다면 비극입니다. 주님께서는 라오디게아 교회를 책망하시면서 “너희가 부요하다고 생각하느냐 그러나 너희의 실상은 가난하다. 그러므로 너희는 금을 사서 부요하게 하고, 눈에 안약을 발라 보게 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영적인 빈곤은 하나님의 버림을 받을 수 밖에 없는 것이며, 결국 영원한 하나님의 심판을 받을 수 밖에 없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1.1.
    이스라엘 백성들이 영적인 은혜를 구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을 떠나고 물질만을 추구하게 되었습니다. 그 때에 하나님은 그들에게 진노를 선포하셨습니다. 그들에게 하나님의 백성이요, 하나님의 자녀됨의 신분을 박탈하셨습니다. 그리고 이방에 포로가 되게 하셨습니다. 영적인 것이 풍요롭지 못한 사람의 결국은 이럴 수 밖에 없습니다. 망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호세아 선지자를 통하여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여호와께로 다시 돌아오라고 권고하고 있는 것입니다. 본문 1 절 말씀을 함께 보겠습니다.

    오라 우리가 여호와께로 돌아가자 여호와께서 우리를 찢으셨으나 도로 낫게 하실 것이요 우리를 치셨으나 싸매어 주실 것임이라 (호세아 6:1)

    하나님의 진노 속에 망하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호세아 선지자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해서 여호와께로 돌아가자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께로 돌아가야 합니다. 세상의 풍요로움에 영적인 눈이 멀어 하나님을 바라보지 못하고, 하나님께서 허락하시는 영적인 축복을 외면하며 살던 자리에서 이제는 하나님께로 돌이켜야 하는 것입니다.

    저는 우리 시대를 바라보면서, 한국교회의 영적현상을 바라보면서 지금이 바로 호세아 시대와 같이 세상적으로는 풍요로우나 영적으로는 심히 빈곤한 가운데 있음을 고백하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진노로 인하여 온 나라 구석구석에 붕괴와 파멸이 찾아왔음을 고백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호세아 선지자가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우리도 하나님께로 돌이켜야 합니다. 하나님께 멀어졌던 우리의 마음을 돌이켤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이 시대의 교회와 성도들을 바라보시면서 세상을 향해, 세상의 풍요만은 구하는 어리석은 사람들이 되지 말고 하나님께로 돌이킬 수 있어야 한다고 말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께 돌이켜야 합니다. 본문에서 돌이키다는 말은 원문성경에서 슈브(bWv)라는 말을 사용합니다. 이 말은 “되돌아 가다.” “회복하다.”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전에 떠나왔던 자리로 되돌아 가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누구입니까?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백성입니다. 우상을 버리고, 세상의 온갖 핍박 가운데서도 하나님만 믿고 섬기기로 한 백성입니다. 그런데 그들이 영적인 축복의 의미를 상실하고 세상의 물질과 풍요에 눈이 멀고 마음이 빼앗기게 되었을 때에 하나님은 죄악된 자리에서 돌이켜 전심으로 하나님을 향하는 자리로 돌아오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가장 귀하게 여기던 자리로 다시 돌아오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은 그냥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돌아오라는 말씀은 “회복하다.” “회개하다”는 의미를 함축하고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 지난 날의 잘못을 회개하는 역사가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세상을 향하고, 하나님을 멀리 했던 것, 하나님의 은혜를 갈망하지 못하던 것을 회개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눈물로 회개하며 나아오게 될 때에 우리는 하나님께로 돌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은혜를 받고 축복을 받을 수 있는 길을 제시해 주고 있습니다. 어떻게 하면 하나님 앞에서 은혜를 받을 수 있습니까? 영적인 축복을 누리며, 영적으로 부요한 사람이 될 수 있습니까? 그것은 회개하는 심령이 되어야만 합니다. 성령충만을 받게 되는 것도 회개하는 자가 될 때에 가능합니다. 죄악을 가지고서는 절대로 하나님께 돌아갈 수도 없고, 하나님께서 주시는 축복을 마음껏 누릴 수도 없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세상을 사랑하며 살았던 우리의 모습을 주님 앞에 철저하게 내려놓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공급하시는 은혜의 가치를 대수롭지 않게 여기던 우리의 불신앙을 회개해야 합니다. 영적인 것에 풍요롭기를 위해서 헌신하고 수고해야 하는데, 그것에는 관심이 없고, 그저 세상에서 돈 많이 벌고, 출세하고, 성공하는 것에만 우리의 모든 마음을 빼앗겨 버린 것을 회개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구주와 하나님께로 우리의 마음을 온전히 돌이킬 수 있기를 바랍니다.

    1.2.
    호세아 선지자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해서 하나님께로 돌아가자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가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해서 하나님께 돌아가자고 한데는 몇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첫째는 하나님께 돌아가지 않으면 하나님의 진노가 계속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본문의 말씀에서 “여호와께서 찢으셨고, 치셨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은혜의 가치를 인식하고 못하고, 은혜를 구하기에 주저하는 사람들이 세상의 것만을 얻기 위해서 눈을 벌겋게 해서 살아가는 것을 보시면서 하나님은 그곳에 진노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치셨다는 것입니다. 이방 나라를 통하여 그들을 치셨고, 온갖 재난을 통해 그들에게 고통을 주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께 돌아가지 않는 실존입니다. 하나님께로 돌이키지 않으면 잠시는 큰 부요를 누리는 것같습니다. 여로보암 2세가 통치하고 있을 당시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크게 부요했습니다. 부족함이 없는 것같았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멸망의 전조일 뿐입니다. 영적으로 경각심을 갖지 못하게 되었을 때에 크게 망하게 됩니다. 앗수르의 공격 앞에 한 순간에 무너지게 되었습니다. 처참하게 일그러지게 되었고,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자긍심마저 잃어버리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을 잊고 세상을 구하며 살아가게 되면 하나님을 그들을 치십니다. 그들을 갈갈이 찢어버리십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법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심판하시는 하나님을 두려워 할 줄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영적인 부요함을 위해 헌신하지 못한 채, 세상의 것만을 간절히 추구하는 우리의 영적 자세를 바꾸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두려우신 심판을 피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둘째는 하나님은 회개하는 자에게 다시금 치료와 위로를 허락하시기 때문입니다. 본문에서는 “찢으셨으나 낫게하시고, 치셨으나 싸매신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로 돌이키고, 회개하는 자가 되어지면 그들이 어떤 죄악을 저질렀더라도 하나님은 다 용서하시는 분입니다. 그러므로 이사야 선지자는 말씀하십니다. “오라 우리가 서로 변론하자 너희 죄가 주홍 같을지라도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요 진홍 같이 붉을지라도 양털 같이 되리라.” 그렇습니다. 우리의 죄악이 아무리 더럽고 추한 것이라고 하나님께로 돌이키기만 하면 하나님은 복을 주십니다. 용서하십니다. 그 모든 죄악을 기억도 하지 않으십니다.

    탕자가 아버지께 큰 죄를 짓고, 세상으로 나갔습니다. 세상에서 온갖 고초를 겪었습니다. 헐벗고 굶주린 신세가 되어서 다시금 아버지께로 돌아왔습니다. 그 때에 아버지는 탕자를 외면하거나 박대하지 않으셨습니다. 아버지의 재산을 창기와 함께 탕진하고 돌아온 아들이었지만, 그가 돌아오게 되었을 때에 그의 모든 허물을 아버지는 감싸주었습니다. 그의 그의 굶주림과 헐벗음을 불쌍히 여겼습니다. 송아지를 잡아 잔치를 열어주었습니다. 새 옷으로 입히고, 금가락지를 끼워주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범죄한 사람이었고,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사모함이 없이 세상에 미쳐 살았다 할지라도 지금이라도 주님께 돌이키기만 하면 하나님은 우리에게 다시금 놀라우신 은혜를 허락하십니다. 용서해주실 뿐만 아니라 넘치는 축복으로 채워 우리의 삶을 영적으로 부요케 하시는 것입니다.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의 죄악을 하나님 앞에 내어놓고 회개할 수 있어야 합니다. 회개하면 능력의 역사가 나타납니다. 회개하면 질병에서 고침을 받을 수 있습니다. 회개하면 문제가 사라지고, 슬픔 중에 위로를 받을 수 이게 되는 것입니다. 회개하면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막혀있는 담이 허물어지고, 하늘로부터 임하는 놀라운 영적인 축복이 가득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지난 날 우리의 삶에 하나님의 은혜를 사모하지 못했거나, 은혜를 사모함에 게으르고 세상만을 추구하던 우리의 모습을 철저하게 회개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제는 하나님께로 우리의 전 생애와 삶의 방향을 되돌려놓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우리를 용납하시고, 영적으로 부요케 하시는 축복을 누릴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1.3.
    하나님은 우리가 하나님께로 돌아가기만 하면 치료와 회복의 은혜를 허락해 주십니다. 왜 그런 은혜를 주시는 것입니까? 본문 2절 말씀을 보겠습니다.

    여호와께서 이틀 후에 우리를 살리시며 제 삼일에 우리를 일으키시리니 우리가 그 앞에서 살리라 (호세아 6:2)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들이 돌아오게 될 때에 회복하시고, 싸매주신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본문에 보니 이틀 후에 살리시고, 제 삼일에 일으키신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은 하나님의 진노로 말미암아 멸망을 당한 이스라엘 백성이지만 기적같은 능력으로 불가능한 가운데서도 신속하게 구원을 얻게 한다는 말씀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본문 2절에 있는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사역을 암시하며, 그리스도의 구속사역으로 말미암아 영생을 얻게 된다는 사실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속하시는 것, 우리가 어떤 죄를 범했을지라도 하나님께서 용서하시고, 영생의 축복으로 더하여 주시는 것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 희생이 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성경이 말하는 구원을 싸구려 구원으로 생각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무조건 예수 앞에 나오기만 하면 구원함을 얻는다고 하니, 구원이 너무 쉽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구원 자체의 가치를 값싼 것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구원을 얻게 되는 것, 하나님께로 돌아가기만 하면 하나님께서 어떤 댓가를 요구하지도 않고, 또 어떤 조건을 제시하지도 않고, 풍성한 영적 축복을 허락하시는 것은 바로 구원이 싸구려고, 천국이 무가치한 것이기 때문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를 지시고 죽으신 엄청난 사건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생명을 지불하는 일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구원은 결코 싸구려가 아닙니다. 천하를 두고도 바꿀 수 없는 하나님의 아들의 핏값으로 주어진 것입니다. 그런 은혜가 있기에 우리는 하나님 앞에 언제든지 나아갈 수 있고, 그 은혜의 보좌 앞으로 가서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힘입을 수 있는 것입니다. 영적인 풍요를 마음껏 누릴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의 은총을 힘입어 살아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세상의 부귀나 영화를 취하기 위해서 살아가는 사람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힘입어 영적인 부요함을 추구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의 입술이 예수를 주로 고백하고,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나아오기만 하면 하나님은 우리의 모든 죄를 사하실 뿐만 아니라 하늘과 땅의 놀라운 축복을 더하여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항상 주 예수를 힘입어 하나님께로 나아오는 저와 여러분이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부탁을 드립니다.

    2.

    범죄한 이스라엘 백성들, 세상의 풍요로움만을 추구하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께 돌아오라고 권면하던 호세아 선지자는 하나님께로 말미암은 은혜에 풍성하게 되기 위해서 여호와를 알아야 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본문 3절 말씀을 보겠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여호와를 알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 그의 나오심은 새벽 빛 같이 일정하니 비와 같이, 땅을 적시는 늦은 비와 같이 우리에게 임하시리라 하리라 (호세아 6:3)

    하나님께로 돌아가게 되면 우리는 모든 죄에서 용서함을 받을 뿐만 아니라 주님의 치료하심과 위로하심을 얻을 수 있게 되어집니다. 그러나 하나님께 돌아가는 것만을 가지고서는 초보의 신앙, 유치한 은총을 받을 수 밖에 없습니다. 신앙은 성장해야 합니다. 보다 성숙한 신앙이 되어야 합니다. 은혜에 더욱 풍성한 가운데 있기를 위해서는 여호와를 알아야 합니다. 호세아 선지자는 하나님의 풍성한 은혜 가운데 거하기 위해서는 하나님께 돌이키는 차원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여호와를 알아야 한다고 권면합니다. 힘써 여호와를 알아야 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본문에서 여호와를 안다고 할 때에 “안다”는 말은 히브리어로 “야다([d'y)라고 합니다. 이 말은 객관적인 사건이나 정보를 많이 아는 것을 뜻하지 않습니다. 여기에 야다는 부부가 서로 한 마음과 한 뜻이 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다시 말하면 인격적 친밀관계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의 백성들이 하나님을 알기를 바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어떤 속성을 갖고 계시는지? 하나님께서 무슨 일을 하셨는지? 하는 것 등등을 알기를 바라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과의 친밀한 관계를 이룰 수 있기를 바라셨던 것입니다. 하나님과 그의 백성들이 서로를 사랑함과 신뢰함으로 두터운 인격적 친밀함을 유지할 수 있기를 바라셨던 것입니다.

    욥기에 보면 하나님은 동방의 장부 욥을 칭찬하셨습니다. 하나님은 그를 하나님의 회의에서 칭찬을 하셨습니다. 그리고 욥을 신뢰하셨습니다. 하나님과 욥 사이에는 긴밀한 인격적 교제가 있었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아브라함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과 인격적 친밀관계에 계셨습니다. 하나님이 하시고자 하는 일을 아브라함에게 숨기지 않았다고 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을 일컬어 하나님의 친구로 묘사하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성도들이 하나님과 이런 관계에 있기를 바라십니다. 하나님이 믿을 수 있는 사람, 하나님이 사랑함으로 모든 것을 숨기지 않는 사람, 우리가 그런 사람이 되고, 하나님과 모든 것을 나눌 수 있는 매우 친숙한 관계에 있기를 바라십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과 친밀하지 않았습니다. 우상을 숭배했습니다. 돈을 사랑했습니다. 쾌락을 추구했습니다. 결국 하나님과 멀어지게 되었고, 하나님도 이스라엘 백성들을 신뢰하지 못하고, 이스라엘 백성들도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았습니다. 결국 그들은 망할 수 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호세아 선지자는 증언합니다. “내 백성이 지식이 없어 망하는도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결국 망했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과 친밀한 인격적 관계를 갖지 않으면 하나님과 멀어지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면 망합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을 누릴 수가 없는 것입니다. 질투하시는 하나님께로부터 불이 나와서 우리를 삼키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호세아 선지자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영적으로 풍요롭게 되기 위해서는 하나님을 알아야 한다. 힘써 알아야 한다고 권면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하나님과 친밀한 관계를 이룰 수 있기를 바랍니다. 누구든지 친밀하게 되기 위해서는 자주 만나야 합니다. 많은 이야기를 나눠야 합니다. 함께 시간을 보내고, 같은 일을 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렇게 되면 친밀한 관계를 이룰 수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하나님과 친밀한 관계를 이루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하나님을 자주 만나고, 하나님과 많은 대화를 나눠야 합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예배를 통하여 말씀을 통하여 기도를 통하여 하나님과 만나야 합니다. 그렇게 되면 우리는 하나님과 친밀한 인격적 관계를 누릴 수가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호세아 성경은 여기에서 끝나지 않습니다. 하나님과 친밀하기 위해서는 하나님은 인애를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않으신다고 말씀하시면서 “사랑을 베풀어야 한다.”고 권면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사랑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거룩한 뜻을 향한 헌신의 역사가 우리를 통해서 이루어지게 될 때에, 우리가 사랑으로 하나님의 일에 동역자가 되어질 때에 하나님은 우리와 친밀하게 되시고, 크신 복으로 함께 해 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말씀과 기도로, 예배로 하나님과 친밀하게 되기를 시도해야 합니다. 그리고 주님의 사랑을 품고 주님의 일을 위해서 힘써 동역자가 되어 헌신함으로 주님과 친밀하게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렇게 되면 새벽빛같이 일정하신 하나님, 땅을 적시는 비와 같으신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에 빛을 비추시고, 풍성한 은총으로 우리의 메마른 영혼을 윤택하게 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그 은혜에 힘입어 하나님의 은혜의 보좌를 향해 우리의 믿음의 발걸음을 옮길 수 있기를 바랍니다. 세상의 욕심을 따라가던 우리의 옛 사람을 철저하게 포기하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힘입어 하나님의 은혜를 사모할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호세아가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해서 하나님께 돌이켜서 하나님을 알아야 한다고 했던 것을 기억하고, 이제는 세상과의 관계를 끊고 하나님과의 인격적 사랑의 관계를 회복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말씀을 묵상하고, 기도하고, 예배함으로 하나님을 가까이 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주께서 우리에게 맡기신 사명을 기억하고, 하나님의 거룩한 일을 위해 기꺼이 동역자로 헌신하는 삶을 살아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러므로 새벽빛 같이 일정하시고, 땅을 적시는 늦은 비와 같이 우리의 삶에 은혜로 충만케 하실 주님께서 빈곤한 영혼을 풍요롭고 건강하게 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영혼이 잘됨 같이 범사가 잘 되는 축복이 저와 여러분, 온 교회 위에 충만하게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여호와께로 돌아가자(return to GOD)

    연가시를 아는가? 

    수중에서 사는 기생충의 일종인데 이것이 1차 숙주인 모기나 하루살이, 또는 잠자리가 그 알을 먹으면 알이 속에서 숙주의 몸 속에서 부화하고 자란다. 
    그러다가 여치나 사마귀, 바퀴벌레가 그 1차 숙주를 잡아먹으면 이 연가시는 제 2숙주 속에서 양분을 다 가로채 먹으면서 대부분 10~15cm의 정도까지 자란다. 
    그리고 마침내 성충이 되고 숙주의 몸속에서 나와야 할 때가 되면 이 연가시 기생충은 생활하고 알은 낳는 곳이 물속이기 때문에 2차 숙주로 하여금 갈증을 유발시켜 물가로 가도록 해서 물에 빠져 죽게 한다. 
    그런 다음 연가시는 그 숙주의 몸 밖으로 나와 짝짓기를 하고 알을 낳는다. 
    그런데 이런 연가시의 특성을 변형시켜 만든 영화 <연가시>가 2012년 7월 상영되어 약 4백 5십만명의 관객을 동원했고 많은 화제를 낳았다고 한다. 
    그 내용 중 변종 연가시에 감염된 사람의 행태를 보면 연가시가 영양분과 수분을 다 먹고 흡수해 버리기 때문에 감염된 사람은 아무리 먹어도 포만감이 없어 계속 먹는데 큰 양푼에 가득한 밥을 먹기도 하고 밥통째로 먹고도 계속 먹으려고 한다. 
    그리고 물을 마셔도 마셔도 갈증이 해소되지 않고 큰 생수통의 물을 통째로 먹는가 하면 변기에 고여있는 물을 마시기도 하고 급기야는 바다나 강에 빠져 죽는다. 

    오늘 이 세대가, 이 사회가, 바로 내가 영적 변종연가시 기생충에 감염되어 있지나 않는가?

    만약 이런 영화 속의 일들이 실제로 일어난다면 어떨까? 소름 끼치는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런데 사실 이런 일들은 일어나고 있고 그것도 너무나 편만해져 있다. 오늘날 사람들이 얼마나 재물과 명예와 권력과 쾌락을 추구하고 있는가? 정부의 주요 직분을 맡을 후보자들을 청문회라는 과정을 통하여 자격과 능력을 검증한다. 그런데 청문회를 통해 많은 분들의 생활모습이 백일하에 드러나고 비난 받을 일들이 많이 드러난다. 그래서 어떤 후보자는 그 도가 지나쳐 임명을 취소하기도 하고, 또 어떤 사람은 일부 허물이 있어도 임명을 강행해 정쟁의 근원이 되기도 한다. 버닝썬 사태에서 시작된 일부 연예인들과 그들 주변 사람들, 그리고 재벌가문에서 자행되는 마약복용 등 끝이 없는 쾌락을 추구하던 사람들의 모습이 일부 드러나고 있다. 이 사회는 그렇다고 치고 교회는 어떠한가? 교회 또한 이 사회와 별반 다를 것이 없다. 대형교회의 세습문제, 도덕성 문제, 사이비 종파들의 이단적 가르침에 의해 생기는 불미스러운 사건 들로 인해 기독교의 사회적 신뢰도는 형편이 없다. 2017년 기독교윤리실천운동 본부가 발표한 "2017년 한국교회의 사회적 신뢰도 여론조사" 결과에 따르면 일반시민의 기독교신뢰도는 20.2%에 불과했다. 그런데 비기독교인으로서 기독교에 대한 신뢰도는 10.7%에 불과했다. 비그리스도인 10명중 9명은 교회를 신뢰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2016년 통계청 발표에 의하면 15,5%인 불교를 누르고 개신교 인구가 19.7%로 한국최대의 종교가 됐다. 그런데 사회는 어떤가? 성경의 가르침대로, 예수님의 모본을 따라 섬기며 봉사를 가르치는 그리스도인 숫자가 전체 인구의 20%를 차지하는데 왜 사회는 더 황폐해지고, 더 이기적이 되고, 각종 각종 범죄는 더욱 기승을 부리는가? 전체 인구의 80%가 비기독교인들인데 왜 그들의 기독교 신뢰도는 10%밖에 되지 않는가?

    이 책임은 누구에게 있는가? 예수님을 믿노라고 하는 여러분과 제게 있는 것이 아닌가?

    본론

    성경은 오늘 여러분과 제가 사는 이 세상의 모습을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이스라엘 자손들아 여호와의 말씀을 들어라 여호와께서 이 땅 주민과 논쟁 하시나니 이 땅에는 진실도 없고 인애도 없고 하나님을 아는 지식도 없고 오직 저주와 속임과 살인과 도둑질과 간음 뿐이요 포악하여 피가 피를 뒤이음이라" (호 4:1,2)

    사도 바울은 좀 더 직접적이고 자세하게 이 세상 끝의 사회적 현상을 설명한다. "너는 이것을 알라 말세에 고통하는 때가 이르러 사람들이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며 자랑하며 교만하며 비방하며 부모를 거역하며 감사하지 아니하며 거룩하지 아니하며 무정하며 원통함을 풀지 아니하며 모함하며 절제하지 못하며 사나우며 선한 것을 좋아하지 아니하며 배신하며 조급하며 자만하며 쾌락을 사랑하기를 하나님 사랑하는 것보다 더하며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니.."(딤후 3:1-5) (참조: 롬 1:28-31)

    오늘날의 사회상을 잘 설명하고 있나? 어떻게 2천년 전에 이 사회의 모습을 이렇게도 정확하게 묘사할 수 있을까? 왜 이렇게 되었나? 무엇이 이렇게 만들었나?

    하나님 없는 성공은 축복이 아니라 저주이다

    호세아 선지자가 북방 이스라엘을 위해 봉사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전할 때의 왕은 여로보암 2세였다. 
    선지자 호세아가 봉사한 기간은 대략 기원전 755년 부터 725년 까지 약 30년이었고 여로보암 2세는 기원전 793년 부터 753년까지 약 41년동안 왕으로서 통지하였다. 

    여로보암 2세의 통치기간 동안 북방이스라엘은 외형상으로는 다윗과 솔로몬 시대이래 그 어느 때보다 더욱 번성하였고 성공적인 나라였다. 

    북방이스라엘은 계속적으로 왕을 살해하여 왕위를 찬탈함으로 왕좌의 주인이 바뀌었고 무정부상태가 계속되었다. 
    그런데 여로보암 2세는 41년간 통치를 하였으니 정치적으로 안정이 되었고 그로 인해 그 당시의 영토는 다윗과 솔로몬 때와 비슷해졌다. 경제상황도 많이 나아졌고 다른 나라가 침략도 하지 않아 번영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 번영이 오히려 여로보암 2세와 북방이스라엘 백성에게는 축복이 아니라 저주가 되었다. 
    그들은 창조주 하나님 대신에 피조물을 숭배했다. 
    하나님의 율법과 규례는 완전히 무시되었다. 부정직과 불신과 기만이 팽배했다. 
    온갖 사치가 조성되었다. 
    가난한 자를 압제하고 불의한 재판이 성행했다. 
    음행이 종교에 도입되었고 신성모독과 회의주의가 편만했다. 
    그야말로 나라 전체가 퇴폐하고 부패해졌다. 

    호세아 4:7에 
    "저희는 번성할수록 내게 범죄하니 내가 저희의 영화를 변하여 욕이 되게 하리라"

    그들에게 하나님께서 침묵하시거나 숨어계시지도, 방임하시지도 아니하였다. 끊임없이 선지자들을 통하여 하나님의 규례와 율법을 상기시키고 순종하도록 호소했으며 계속해서 반역적인 삶을 살 때 그 결국은 멸망임을 경고하였다. 그러나 세속적 번영과 쾌락에 취해있던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 기별과 호소를 외면했다. 호 8:12 "내가 저를 위하여 내 율법을 만 가지로 기록하였으나 저희가 관계없는 것으로 여기도다"라고 한탄하는 하나님의 모습을 묘사한다.

    하나님 없는 번영,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순종 없이 오는 성공은 행복이 아니라 그 사람을 마침내 파멸로, 사망으로, 영원한 멸망으로 인도하는 길임을 잊지 말라!

    영적 연가시에 감염된 사람은 재물을 아무리 모아도 만족함이 없다. 재물에 대한 탐욕 때문에 끊임없이 재물을 모으는 일에만 몰두한다. 계속해서 성공에 대한 갈증에 목말라하는 사람들, 권력에 대한 탐욕, 쾌락을 추구하는 만족 없는 욕구들이 가득한 것이 오늘날 이 사회가 아닌가? 이것이 다 우리의 마음속 가득 찬 영적 연가시 때문이 아닌가?

    우리가 여호와께로 돌아가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

    게는 본성적으로 옆으로 걷는다. 아무리 바로 걸으려 해도 걸을 수 없다. 영적연가시 같은 탐욕과 교만이 마음속에 있는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고, 그 규례를 지켜 행할 수 없다. 이것은 노력의 문제가 아니다. 렘 13:23 "구스인이 그의 피부를, 표범이 그의 반점을 변하게 할 수 있느냐 할 수 있을진대 악에 익숙한 너희도 선을 행할 수 있으리라"고 말한다. 불가능하다는 말이다. 우리의 죗된 본성을 가지고는 하나님의 말씀과 율법과 심지어 사랑과 겸손의 마음조차도 가질 수가 없다. 그러면 어떻게 해결해야 할까? 이 영적 연가시를 몰아낼 방법은, 치료할 특효약은 무엇인가? 그것이 바로 오늘 본문의 말씀 호 6: 1,3절에 있다. "오라 우리가 여호와께로 돌아가자...우리가 여호와를 알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

    영적 연가시에 감염되어 끊임없는 탐욕과 만족되지 못한 욕심에 빠져있는 죗된 영혼의 치료책은

    첫째, 하나님께 돌아가는 것이다. 철저한 회개가 있어야 한다. 환자는 불편함을 느끼고 이상함을 느끼면 병원에 간다. 자신이 진단하고 처방하지 않는다. 병원에 가서 자신의 상태를 이야기 하면 의사가 진단하고 처방하거나 수술하여 낫게 한다. 하나님의 말씀에 소홀해지고, 기도가 등한시 되어지고 세상에 대한 욕심이 생기거나, 이기심이나 교만함이 생겨나면 영적 이상 징후이다. 즉시 큰 의원이신 여호와께 나아가야 한다. 시51:17에 다윗은 고백한다. "하나님께서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하나님이여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하지 아니하시리이다."

    사랑의 사도 요한도 말한다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그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라고!(요일 1:9)

    둘째는 힘써 여호와를 아는 것이다. 이 안다는 단어의 히브리어 원문(디아트 - 야다에서 유래)의 의미는 체험적으로 아는 것이다. 부닥쳐서 알고, 보아서 알고, 만져서 아는 경험적으로 아는 것이다. 지식적, 피상적, 관념적으로 아는 것이 아니다. 오직 여호와만이 우리의 치료자 임을 알아야 한다. "여호와께서 우리를 찢으셨으나 도로 낫게 하실 것이요 우리를 치셨으나 싸매어 주실 것임이라" (호 6:1)

    어렸을 때 양계장을 했다. 하루는 달걀 1개를 몰래 꺼내가지고 동네 만화방에 갔다. 만화방 주인에게 계란을 주면 만화책 몇 권을 읽을 수 있었다. 그런데 어머니께 들켰다. 종아리를 회초리로 맞았다. 무척 아팠고 멍이 들었다. 그 날 저녁에 어머님이 무슨 연고를 가지고 와서 많이 아팠지? 라는 한 말씀만 하신 채 다른 말씀 없이 상처 위에 발라주시고 마사지를 해 주셨다. 그 마사지 하시는 어머니의 손끝을 통해 전해지는 사랑이 나로 하여금 다시는 계란을 훔치는 일을 하지 않게 했다.

    하나님만이 우리를 치료하실 수 있다. 하나님의 동정과 연민과 사랑만이 우리가 가진 영적 연가시를 제거할 수 있다. 재물과 명예와 권력과 쾌락을 추구하는 끊임없는 욕망을 일으키게 하는 우리 안에 있는 이 연가시 같은 죄를 없애주실 수 있는 분은 하나님 한 분 밖에 없다.

    결론

    호세아 선지자를 통해 멸망을 앞둔 북방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간절히 호소했던 이 호소가 오늘 이 자리에 참석한 여러분과 저에게 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임을 믿는가? "오라 우리가 여호와께로 돌아가자, 우리가 여호와를 알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라는 애절하고도 간절한 호소가 우리의 마음속에 메아리치고 있다. 일어나자! 하나님께로 돌아가자!

    동화작가 권정생님의 ‘우리들의 하느님’ 이란 책에 나온 이야기입니다. 

    권정생 선생님은 어느 날 시내에 나갔다 돌아오려는데 버스비가 모자라 완행열차를 타게 되었다. 
    그 열차 안에서 만난 한 아주머니의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아주머니는 의성에 있는 시골교회 집사인데 십년 전 어느 날 바쁘게 집안일을 하고 있는데 거지가 구걸을 하러 왔다고 한다. 
    정신 없이 일에 몰두하던 아주머니는 귀찮은 생각에 거지를 내쫓았다. 
    그런데 돌아서 나가는 거지의 뒷모습을 보니 놀랍게도 예수님이었다는 것이다. 
    깜짝 놀란 아주머니는 하던 일을 멈추고 허겁지겁 쌀을 한 대접 퍼서 달려 나가 보았으나 거지는 어디론지 사라지고 보이지 않았다. 
    집으로 돌아온 아주머니는 주저앉아 통곡을 했다. 
    그때부터 아주머니는 십 년을 하루같이 만나는 사람을 모두 예수님으로 알고 대접을 한다는 것이다. 
    이야기를 다하고 나서 아주머니는, “세상 사람이 다 예수님으로 보이니까 참 좋아요. 내가 할 수 있는 건 다 해드리고 싶어 예”.

    권선생은 이야기 끝에 여태껏 들은 설교 중에 진짜 설교를 들었다고 덧붙였다. 
    예수 잘 믿어서 복 받고 잘살자는 이야기가 아니다. 
    예수님을 만나 삶이 변화된 이야기를 듣기 원한다. 
    여호와를 알고 힘써 여호와를 알아 여러분과 저의 삶이 변화되기를 기도한다.








    구체적인 방법 : 

    1. 진심으로 회개하고 마음을 다해 돌아가기(悔心) : 

    요엘서 2:12
     “이제라도 여호와의 말씀입니다. 
    돌아와라, 나에게로! 너희 마음을 다해, 금식하고 울고 슬퍼하면서

    - 금식하고 울며 마음을 다해 하나님께 돌아가야 합니다.

      잘못된 길에서 벗어나 신속히 결단하는 것이 중요하며, 늦었다고 생각할 때가 가장 적절한 때입니다. 

    2. 하나님을 알아가고 친밀한 관계를 회복하기(關係 恢復)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깊이 함으로써, 그분의 사랑과 은혜를 깨닫고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 온 마음을 드리는 예배와 기도를 통해 친밀함을 쌓아야 합니다. 

    3. 온 마음을 다해 예배하고 섬기기 

    형식적인 예배가 아니라 진실된 마음으로 예배하고 찬양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신뢰하고 의지하며 은혜와 복을 사모하는 마음으로 찬양해야 합니다. 

    4. 하나님께 감사하고 순종하기
    감사하는 것은 하나님께 되돌아가는 행위이며, 주님께 감사하는 마음을 표현해야 합니다. 


  •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의로운 소망을 따라 행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 본절에서 3절까지의 내용은 크게 두 가지 해석으로 나뉜다.

    1. 이스라엘 백성을 향한 호세아 선지자의 권면으로 보는 견해(Keil). 
    2. 회개의 날에 백성들 서로가 뉘우치며 권면하는 것으로 보는 견해(Lange, Wood, Chrisholm). 

    이상의 두 가지 견해 모두 타당성이 있다. 
    그러나, 아마 이것은 백성과 하나님 사이의 관계와 태도를 독백과 대화체의 형태로 표현한 것으로서 미래에 있을 백성들의 회개에 더 잘 부합되는 것 같다(Harper, Ewald, Cheyne).

    우리를 찢으셨으나 
    - '찢다'의 히브리어 '타라프'(*)는 사자가 먹이를 찢는 것처럼 심판이 가혹함을 암시한다(5:14; 시 50:22).

    낫게 하실 것이요 
    - 5:14에서 예언된 멸망과 형벌은 이미 성취된 것으로 언급된다. 
    그러나 진정한 회개가 있을 경우 심판의 자리에서 고침을 받게 될 것임이 선언된다. 
    이는 백성들을 치료하고 회복시켜 주시는 여호와의 사랑과 주권적인 섭리를 보여주고 있다(신 32:39). 
    한편 이것은 여호와의 부르심에 응답하는 백성들의 참된 회개를 전제하고 있다. 또한 이스라엘의 구원은 오직 여호와께 달려 있음을 상기시킨다.

    여호와께로 돌아가자(let us return to the LORD)


    7725. 돌아가다(슈브. shûwbשׁוּב

    1. 방향을 돌리다.  2. 회복하다.  3. 돌이키다 
    발음 [ shûwb ]
    구약 성경 / 1059회 사용  

    여호와께로 돌아가자

    호세아 6장은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을 찢고 상처 입히셨지만, 다시 살리시고 싸매어 주실 것이며, 그분께로 돌아와 자신을 알자고 촉구하는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의 불성실한 회개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은혜와 사랑으로 기회를 주시며 회복과 치유를 약속하시지만, 백성은 진실한 회개 대신 형식적인 제물만 드리는 것을 지적하고, 하나님을 아는 지식과 자비를 원하시는 하나님의 뜻을 강조합니다. 

    호세아 6장의 주요 내용
    • 하나님께로 돌아오라는 촉구 (1-3절)
       
      "오라 우리가 여호와께로 돌아가자"는 호소로 시작합니다.

    •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찢으셨으나 다시 낫게 하시고, 치셨으나 싸매어 주시며, 이틀 후에 살리시고 셋째 날에 일으키시겠다고 약속하십니다. 
      이는 하나님께 돌아가면 구원과 회복이 있을 것이라는 희망의 메시지입니다. 

  • 진실하지 않은 백성들의 회개 (11절, 13절)
    • 백성들의 회개가 "진실하지 않은" 것이라 지적합니다. 

  • 형식적인 희생 제사만 드리고 하나님을 진정으로 아는 지식과 자비로운 행동은 부족했음을 비판합니다. 

  • 하나님을 아는 지식의 중요성 (3절, 6절)
    • “우리가 주님을 알자”고 외치며, 진정한 예배는 희생 제사가 아니라 자비와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 있음을 강조합니다. 

  • "내가 기뻐하는 것은 희생 제사가 아니라 자비요, 번제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이라"는 6절의 말씀은 신약에서도 예수님이 인용하신 구절입니다. 

  • 하나님의 회복의 약속 (1-3절, 6절)
    •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의 죄에도 불구하고 긍휼히 여기시며 그들을 회복시키고자 하십니다. 

  • 이 모든 과정에서 하나님의 변함없는 사랑과 회복의 주권자 되심이 드러납니다. 

  • 12 <너희 마음을 바꾸어라> 여호와의 말씀이다. “지금이라도 너희의 온 마음을 다하여 내게 돌아오너라. 금식하고 울며 슬퍼하여라."
    13 옷을 찢지 말고 너희 마음을 찢어라.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로 돌아오너라. 그분은 은혜롭고 자비로우시다. 그분은 쉽게 노하지 않으시고 사랑이 많으시며 벌을 내리지 아니하신다.
    14 주께서 그 마음을 바꾸시며 너희에게 복을 주실지 누가 알겠느냐? 그래서 너희가 여호와께 곡식 제물과 부어 드리는 전제물을 바칠 수 있게 될지 누가 알겠느냐?" (쉬운성경)

    요엘 (Joel)은 남왕국 유다의 8대 왕 요아스 (Joash)가 왕으로 즉위하던 초기에 활약했던 예언자입니다. 그 때가 대략 B.C. 830년경쯤 됩니다. 요아스는 7살의 어린 나이에 왕이 된 사람입니다. 하지만, 제사장이었던 여호야다 (Jehoiada)가 옆에서 도와 주었기 때문에 별 문제 없이 나라를 통치했습니다. 오랫동안 방치되어 있었던 성전을 대대적으로 보수하는 등 나라를 잘 다스렸습니다. 그러다가 여호야다가 죽습니다. 정신적으로 의지할 곳이 없어진 요아스는 그 때부터 타락하기 시작합니다. 하나님을 버리고 우상숭배에 빠지게 됩니다. 보다 못한 여호야다의 아들 스가랴 (Zechariah)가 충고를 했지만 그 때문에 스가랴는 죽임을 당합니다. 그 때 요아스가 저질렀던 일이 얼마나 악했던지 예수님께서 요아스 때의 일을 말씀하실 정도였습니다. “따라서 의인 아벨의 피로부터, 성전과 제단 사이에서 살해당한 바라갸 (Barachiah)의 아들 스가랴의 피에 이르기까지, 너희는 세상에서 피를 흘린 의인에 대한 죄값을 치를 것이다.” (마태복음 23:35)

    하나님은 위기의 때에 거의 예외 없이 예언자들을 등장 시킵니다. 예언자들을 통하여 하나님의 메시지를 전달하십니다. 이 방법은 오늘날에도 똑 같습니다. 하나님은 그의 자녀들이 올바른 길을 가지 않을 때 경고를 하십니다. 소돔과 고모라를 심판하시려는 계획을 가지고 계셨던 하나님은 그 계획을 아브라함에게 알려 주셨습니다. “내가 지금 하려고 하는 일을 어떻게 아브라함에게 숨기겠느냐 (Should I hide my plan from Abraham., 창세기 18:17)?” 생각해 보면, 참 엄청난 일입니다. 하나님께서 그의 사랑하는 자녀들과 소통을 하신다는 것입니다. 이 소통의 채널 가운데 기도입니다. 그러니까 기도하지 않는 사람은 이 소통의 채널을 막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소통하시는 또 다른 채널이 있는게 그것이 성경입니다. 하나님은 시대를 초월해서 여전히 그 말씀을 읽는 사람들과 소통을 하십니다. 그런 의미에서 성경은 지금도 살아 있는 하나님의 강력한 말씀입니다 (The word of God is alive and powerful., 히브리서 4:12). 성경을 읽지 않는 사람은 또 다시 하나님께서 소통하시는 채널을 막는 사람입니다.

    안타까운 것은 요즘 사람들이 기도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잠시 하던 일을 멈추고 하나님께 생각을 집중하고, 나 자신을 돌아보고, 조용히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내적 음성 (God’s inner voice)을 들을 수 있는 마음의 여유가 없습니다. 성경을 읽는 것도 그렇습니다. 요즘 사람들은 책을 읽지 않습니다. 서점에서도 소설이나 교양서적들이 잘 팔리지 않습니다. 베스트셀러라는 말이 사라지고 있습니다. 아주 가벼운 읽을 거리 외에는 읽지 않습니다. 청년들은 그나마 종이 책들은 읽지 않습니다. 스마트 폰이나 online을 통해서, 혹은 SNS (Social Networking Service)를 통해서 몇 줄 안 되는 짧은 글들을 읽습니다. 그러니까 생각이 깊어지지 않습니다. 이런 시대적인 흐름이 성경을 읽는 데도 방해가 됩니다. 생각을 하지 않으니까 말씀을 읽고 그 말씀을 깊이 묵상하는 일이 시대 흐름과 맞지 않은 ‘out-of-date’ 된 일들이 되고 있습니다. 하지만, 저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아무리 시대 흐름이 그렇다고 해도, 우리는 기도하는 일과 성경 읽는 일을 게을리 하면 안 됩니다. 이 일을 게을리 하면 그 때부터 우리의 영적인 호흡이 정지됩니다. 하나님과 소통의 채널이 막히기 때문입니다. 힘들어도 기도하고 성경 읽어야 합니다. 단 몇 줄이라도 성경 읽고 그 말씀을 생각하는 일을 중단하면 안 됩니다. 

    다시 기원전 9세기 유다 왕국의 이야기로 돌아가 볼까요? 
    요아스 왕 한 사람이 우상숭배에 빠진 것 같은데, 결과적으로 그 한 사람 때문에 그가 통치하던 한 시대가 우상숭배에 빠지게 됩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이 시대를 쉽게 포기하지 않으십니다. 예언자를 통해 그의 메시지를 전달합니다. 이 때 하나님께서 사용하신 사람이 요엘입니다. “지금이라도 너희의 온 마음을 다하여 내게 돌아오너라. 금식하고 울며 슬퍼하여라 (Turn to me now, while there is time. Give me your hearts. Come with fast-ing, weeping, and mourning).” (12절) “내게로 돌아오라”는 말은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오라는 말입니다. 회개를 희랍어로 ‘메타노이아 (μετάνοια)’라고 합니다. 이 말을 성경에서는 ‘turning away from sin and turning to God’ 이런 뜻으로 사용합니다.

    하나님께서 우상숭배에 빠진 그 시대에게 회개하라는 메시지를 주신 것은 아직도 기회가 있다는 뜻입니다. 아직도 회개하면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할 수 있는 시간이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의 자녀들이 아무리 잘못해도 쉽게 포기하지 않고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갈 수 있는 기회를 주십니다. 이 말씀이 있기 때문에 우리는 언제라도 하나님께로 돌아갈 수 있습니다. 우리 앞에는 그 길이 항상 열려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포기하지 않으시는데, 우리도 하나님을 포기해서는 안 됩니다.

    그런 의미에서 누가복음 15장에 나오는 ‘탕자의 비유 (The Parable of the Prodigal Son)’는 우리에게 영원한 소망을 주는 말씀입니다. 자기 비지니스를 해 보겠다고 아버지 유산을 받아서 아버지를 떠났던 작은 아들을 다시 받아 주시는 아버지는, 회개하고 돌아오는 죄인을 받아 주시는 하나님의 사랑이 얼마나 깊고, 넓고, 높은 것인지를 우리에게 보여 줍니다. 이와 비슷한 이야기가 세계 각국에 조금씩 다른 버전으로 전해지고 있습니다. 제가 읽은 이야기는 태국에 있는 이야기인데, 집을 나간 아들을 어머니는 오늘도 기다립니다. 집으로 돌아 온 아들이 멀리서 어머니 집을 훔쳐 봅니다. 그런데, 어머니 방 방문이 열려 있습니다. 방문이 열려 있는 것을 본 아들은 용기를 내서 어머니에게 돌아갑니다 아들이 어머니에게 말합니다. "어머니, 이렇게 어머니 방문이 열려 있는 것을 보고 돌아올 용기를 냈습니다." 그랬더니, 어머니가 아들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아들아, 난 네가 떠난 후에 한번도 이 방문을 닫은 적이 없다!"

    오늘 말씀 14절에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하나님은 은혜롭고 자비로우시며, 쉽게 노하지 않으시며, 사랑이 많으시며, 벌을 내리지 아니하신다.” 이 말씀이 New Living Translation에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He is merciful and compassionate, slow to get angry and filled with unfailing love. He is eager to relent and not punish.” 이 말씀 중에 ‘compassionate’라는 말이 눈에 들어옵니다. 상대방의 처지에 deep sympathy를 가지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sympathy를 가지신 분입니다. 우리의 고통 (pas-sion)과 우리의 아픔, 우리의 약함을 잘 아십니다. 히브리서 말씀 읽을 때도 이런 말씀이 나왔습니다. “우리의 대제사장은 우리의 연약한 부분을 잘 알고 계십니다 (For we have a high priest who is able to sympathize with our weaknesses).” (히브리서 4:15)

    바로 이 말씀이 있기 때문에 우리에게는 언제나 하나님께로 돌아갈 수 있는 기회가 있고, 소망이 있습니다. 우리 앞에 하나님께로 돌아갈 수 있는 문이 항상 열려 있습니다. ‘탕자의 비유’에 나오는 작은 아들은 바로 우리 자신들입니다. 작은 아들처럼, 우리에게는 항상 하나님을 떠나 살고 싶은 유혹이 있습니다. 하나님 없이 살아도 얼마든지 살 수 있을 것 같은 유혹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간섭 없이 살고 싶은 유혹이 있습니다. 이런 유혹에 넘어갈 수도 있습니다. 그 때 여러분이 오늘 말씀을 기억하십시오. “나에게는 하나님께로 돌아갈 수 있는 문이 열려 있다!” 성경에 이런 말씀도 있습니다. “Your God is gracious and compassionate. He will not turn his face from you if you return to him (하나님은 은혜로우시며, 우리의 처지를 잘 이해하시는 분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로 돌아가면 그는 우리에게서 얼굴을 돌리지 않으십니다)." (역대하 30:9)

    그러나, 하나님께 돌아갈 때는 조건이 있습니다. 완전히 하나님께 마음을 드려야 합니다. 오늘 말씀에 “너희의 온 마음을 다하여 내게 돌아오너라 (12절)”고 했습니다. 이 말씀을 New Living Translation에서는 “Turn to me now, while there is time. Give me your hearts” 라고 번역했습니다. 같은 말씀이 NIV 성경에는 “Return to me with all your heart”라고 나와 있습니다. 하나님께 돌아가는 사람은 그의 온 마음을 하나님께 드려야 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을 섬기는 방식입니다. 온 마음으로 예배하고, 온 마음으로 찬양하고, 온 마음으로 순종하고, 온 마음으로 섬겨야 합니다.

    하나님은 무엇이든지 우리의 온 마음이 드리지 않는 형식적인 것을 싫어하십니다. 이사야 42:8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나는 여호와다. 이것이 내 이름이다. 나는 내 영광을 다른 것에게 주지 않겠고, 내가 받을 찬양을 우상들이 받게 하지 않겠다.” 많은 사람들이 이 말씀을 오해합니다. “아, 하나님은 우상을 찬양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구나!” 이 말씀을 이런 식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런데, 이 말씀은 하나님께서 우리의 온전한 찬양을 기쁘게 받으신다는 뜻입니다. 마음의 절반은 우상에게 빼앗기고 있으면서, 그 마음으로 하나님을 찬양하는, 그런 찬양은 하나님께서 받지 않으신다는 뜻입니다. 또 열왕기상 18:21에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여러분은 언제까지 바알과 여호와 둘 사이에서 머뭇거릴 것입니까? 여호와와 바알을 함께 섬기려고 하십니까? 여호와가 참 하나님이시면 여호와를 따르고 바알이 참 하나님이면 바알을 따르시오.”

    하나님을 믿으려면 온전한 마음으로 믿어야 합니다. 하나님 외에 다른 것에 절반은 마음을 빼앗기고, 절반의 마음으로 하나님을 믿는 것, 하나님께서 제일 싫어하시는 것입니다. 여러분,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들이 우상숭배에 빠졌다고 하니까 하나님을 완전히 버리고 우상을 섬기는 것 같지요? 그렇지 않습니다. 요아스 왕이 처음에는 하나님을 잘 섬기다가 제사장 여호야다가 죽자 우상숭배에 빠졌습니다. 그가 하나님을 버린 것 같지요? 아닙니다. 하나님을 버린 것이 아니라, 우상에게 절반은 빼앗긴 마음을 가지고 하나님을 섬겼던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제일 싫어하시는 것입니다.

    성 크리소스톰 (St. John Chrysostom, 347-407, Archbishop of Constantinople)의 이야기 입니다. 

    그가 자기 교구를 순방하던 중에 있었던 일입니다. 
    교구는 넓은데, 가는 곳마다 사제가 없었습니다. 
    그러던 중에 한 시골에 있는 교회를 순방하게 되었습니다. 
    이곳에도 역시 사제가 없었습니다. 
    이 교회를 떠나면서 그는 한 농부에게 교회에 대한 책임을 맡기고 돌아왔습니다. 
    그런데, 그 일이 자꾸 마음에 쓰였습니다. 
    “내가 괜한 일을 했구나! 
    그 자격 없는 농부가 어떻게 교회를 책임질 수 있겠어?” 
    불안 마음을 가지고 크리소스톰은 그 교회를 다시 가 보았습니다. 
    간다는 말도 하지 않고 몰래 그 교회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가 보고 싶었습니다. 
    크리소스톰은 기둥 뒤에서 몰래 예배 광경을 지켜 보았습니다. 
    지켜 보는 그의 눈에서 눈물이 흘렀습니다. 
    예배가 끝난 뒤에 크리소스톰은 그 농부 사제 앞에 무릎을 꿇고 자기를 위해서 기도를 해 달라고 했습니다. 
    농부 사제는 그 사람이 크리소스톰인 것을 알고 깜짝 놀라면서 무슨 소리냐고, 제가 기도를 받아야 할 터인데, 왜 이러시느냐고 만류를 했습니다. 
    그 때, 크리스스톰이 “나를 용서해 주시오. 나는 지금까지 당신처럼 가슴에 불을 안고 예배를 인도하는 사람을 보지 못했소.” 
    이 말을 들은 그 농부 사제가 당황하면서 “아니, 그러면, 그렇게 하지 않고 달리 하나님을 예배하는 방법이 있습니까?” 이렇게 물었다고 합니다.

    우리가 회개해야 할 것들이 참 많습니다. 

    그 중의 하나가 우리가 온전한 마음을 하나님께 드리지 않고 지금까지 하나님을 믿음생활을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제일 싫어하시는 일인데, 우리는 지금까지 하나님 그런 식으로 믿고 있었습니다. 
    이것은 차라리 하나님을 떠난 것보다 더 하나님께서 싫어하시는 일이었습니다. 
    절반은 우상에게 마음을 빼앗긴 채 절반의 마음을 가지고 하나님을 예배했고, 절반의 마음을 가지고 하나님을 찬송했고, 절반의 마음을 가지고 하나님을 섬겼습니다. 
    하나님께 우리의 ‘온 마음 (a whole heart)’ 드려야 합니다. 
    ‘whole food’에서 파는 식품이 organic 식품이라고 해서 값이 비싼 것처럼, 우리의 ‘whole heart’를 하나님께 드려야 합니다. 
    요엘은 자기 시대 사람들에게 “옷을 찢지 말고 너희 마음을 찢고 하나님께로 돌아오라 (13절)”고 했습니다. 
    이 말은 하나님께 우리의 진심을 보이라는 것입니다. 
    형식적이고, 가식적이고, 위선적인 마음을 찢어서 그 속을 다 하나님께 보여 드리라는 것입니다.

    “욥기를 어떻게 설교할까?” 하는 것이었습니다. 
    세미나를 마치고 모두들 유익한 시간이었다고 좋아했습니다. 
    지금 목사들의 생각이 “어떻게 하면 설교를 잘할 수 있을까?” 이 문제에 집중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저는 생각이 좀 달랐습니다. 
    지금 설교를 잘 하는 목사들은 많습니다.
    얼마든지 설교 잘하는 목사들의 설교를 들을 수 있고, 설교집을 사서 읽을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좋은 목사가 되려고 노력하는 사람들은 별로 찾아 볼 수 없습니다. 
    설교는 잘 하는데, 인격은 갖추지 못한 목사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입을 열면 그렇게 좋은 설교를 쏟아내는데, 왜 돈과, 명예와, 권력에 대한 욕심을 내려 놓지 못한 목사들이 그렇게 많습니까? 
    지금은 목사들이 설교를 잘하려고 노력하는 대신, ‘온 마음’을 하나님께 드리는 훈련을 해야 하는 때라고 생각합니다. 
    이런 목사가 없어서 교회가 시끄럽고, 이런 평신도가 없어서 교회가 세상에서 존재감을 상실해 가고 있는 것 아닙니까? 
     


    여호와께로 돌아가자(호세아 6:1-3)

    호세아가 활동할 당시 북 이스라엘의 상황에 대하여 성경은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열왕기하 14:25-27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의 종 가드헤벨 아밋대의 아들 선지자 요나를 통하여 하신 말씀과 같이 여로보암이 이스라엘 영토를 회복하되 하맛 어귀에서부터 아라바 바다까지 하였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의 고난이 심하여 매인 자도 없고 놓인 자도 없고 이스라엘을 도울 자도 없음을 보셨고 여호와께서 또 이스라엘의 이름을 천하에서 없이 하겠다고도 아니하셨으므로 요아스의 아들 여로보암의 손으로 구원하심이었더라.”

    호세아가 북 이스라엘의 선지자로 활동할 당시에 북 이스라엘을 다스렸던 왕은 여로보암 2세였는데(호 1:1) 그가 북 이스라엘을 다스릴 때 그 영토가 가장 넓게 뻗어 나갔습니다. 
    그 말은 여로보암 2세가 북 이스라엘을 다스릴 때 북 이스라엘이 그 어느 왕이 다스릴 때보다 부강한 나라가 되었다는 말입니다.

    오늘 본문은 바로 그런 시대적 상황 속에서 주어진 말씀입니다. 
    1절을 보도록 하겠습니다.

    1절. “오라. 우리가 여호와께로 돌아가자. 여호와께서 우리를 찢으셨으나 도로 낫게 하실 것이요. 우리를 치셨으나 싸매어주실 것임이라.”

    호세아 선지자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께로 돌아가자고 간절하게 호소하고 있습니다. 
    그 말은 지금 하나님의 백성인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멀리 떠나 있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금 전에 말씀 드렸듯이 북 이스라엘은 그 어느 왕이 북 이스라엘을 다스릴 때보다 더 번성하고 있었습니다.

    우리는 이 사실을 통하여 영적인 상태와 세상의 축복은 반드시 일치하지는 않는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북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멀리 떠나서 하나님과 아무 상관없는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북 이스라엘은 그 어느 때보다 번성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호세아서 4장에서는 그런 북 이스라엘의 모습을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호세아 4:1-2

    “이스라엘 자손들아. 여호와의 말씀을 들으라. 여호와께서 이 땅 주민과 논쟁하시나니 이 땅에는 진실도 없고 인애도 없고 하나님을 아는 지식도 없고 오직 저주와 속임과 살인과 도둑질과 간음뿐이요 포악하여 피가 피를 뒤이음이라.

    비록 겉으로는 정치, 경제, 군사, 문화 모든 면에서 번성하고 있었으나 속으로는 영적으로, 도덕적으로, 윤리적으로 곪아 터진 이 모습이 바로 여로보암 2세가 북 이스라엘을 다스릴 때의 이스라엘의 실제 모습이라는 것입니다.

    이 모습은 망하기 일보직전의 모습이며, 실제로 여로보암 2세가 죽은 지(B.C. 753) 31년 후(B.C. 722) 호세아 왕이 북 이스라엘을 다스릴 때 북 이스라엘은 앗수르에게 완전히 멸망을 당하고 맙니다.

    이와 같이 겉으로는 최전성기를 달리고 있던 북 이스라엘의 실제 모습이 망하기 일보직전의 모습이었기 때문에 호세아 선지자는 절박한 심정으로 자기 동족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이제 그만 하나님께로 돌아가자고 호소하였던 것입니다.

    이 북 이스라엘의 모습이 지금 우리의 모습과 비슷하지 않습니까? 지금 우리나라는 과거 그 어느 때보다 모든 면에 번성하고 있습니다. 과거에는 대한민국이라는 나라를 아는 나라들이 거의 없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웬만한 나라는 대한민국이라는 나라가 어떤 나라라는 것을 거의 다 알고 있습니다. 그만큼 우리나라의 위상이 커졌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이 지금 우리나라는 여로보암 2세가 다스렸던 북 이스라엘처럼 그 어느 때보다 번성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런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시고 계십니다.

    “오라. 우리가 여호와께로 돌아가자.”

    지금 우리의 겉모습이 아무 문제가 없이 모든 면에 부족함이 없이 풍족합니까? 
    그렇다고 해서 결코 안심해서는 안 된다고 하는 것입니다.
    최전성기를 달리고 있던 북 이스라엘이 고작 31년 후에 앗수르에게 완전히 망하고 말았습니다. 
    왜냐하면 겉으로는 그렇게 초고속으로 번성하고 있었지만 반대로 속으로는 영적으로, 도덕적으로, 윤리적으로 초고속으로 썩어 들어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만약 우리가 겉으로 아무 문제없이 모든 면에 부족함이 없이 풍족하더라도 속으로 북 이스라엘처럼 썩어 들어가고 있다면 우리는 조만간에 북 이스라엘처럼 망하고 말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혹시라도 북 이스라엘처럼 겉으로는 멀쩡하지만 속으로는 조금씩 썩어 들어가고 있을지도 모르는 우리에게 이 말씀을 주신 것입니다.

    “오라. 우리가 여호와께로 돌아가자.”

    이 말씀을, 우리를 지극히 사랑하시는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의 음성으로 들으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 어떤 일보다 이 일에 많은 비중을 두고 이 일의 중요성을 온 몸으로 느끼고 그 어떤 일보다 이 일에 최선을 다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럴 때, 즉 우리가 이 말씀대로 하나님께로 돌아갈 때 우리의 속사람은 영적으로, 도덕적으로, 윤리적으로 모든 면에 강건하게, 튼튼하게 자라가게 될 것입니다. 그럴 때 우리의 겉과 속이 함께 하나님께서 위로부터 부어주시는 은혜와 축복을 받아 누리게 되며 이 땅에서의 우리의 삶이 가면 갈수록 모든 면에 더욱 더 풍성해질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하나님께 돌아가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거기에 대하여 오늘 본문 3절에서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3절. “그러므로 우리가 여호와를 알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 
    그의 나타나심은 새벽 빛 같이 어김없나니 비와 같이, 이 땅을 적시는 늦은 비와 같이 우리에게 임하시리라 하니라.”

    3절에서는 우리가 하나님께 돌아가기 위해서는 하나님을 알아야 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것과 관련하여 호세아서 4:6에서는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내 백성이 지식이 없으므로 망하는도다. 네가 지식을 버렸으니 나도 너를 버려 내 제사장이 되지 못하게 할 것이요 네가 네 하나님의 율법을 잊었으니 나도 네 자녀들을 잊어버리리라.”

    여기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지식이 없어서 망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지식이 없기 때문에 맺혀진 결과를 성경은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호세아 4:11-13

    “음행과 묵은 포도주와 새 포도주가 마음을 빼앗느니라. 내 백성이 나무에게 묻고 그 막대기는 그들에게 고하나니 이는 그들이 음란한 마음에 미혹되어 하나님을 버리고 음행하였음이니라. 그들이 산꼭대기에서 제사를 드리며 작은 산 위에서 분향하되 참나무와 버드나무와 상수리나무 아래에서 너희 딸들은 음행하며 너희 며느리들은 간음을 행하는도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지식이 없기 때문에 맺혀진 결과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그들이 마땅히 섬겨야 할 하나님을 버리고 절대로 섬겨서는 안 되는 우상을 섬기는 것입니다. 결국 그 죄가 그들을 멸망으로 인도하고 말았습니다.

    그러면 여기서 말씀하고 있는 지식은 어떤 지식을 말하는 것일까요? 그 지식은 당연히 하나님에 대한 지식입니다. 하나님을 아는 사람과 모르는 사람은 이와 같이 하늘과 땅 차이라고 할 만큼 큰 차이가 나는 것을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먼저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 없어서 하나님을 전혀 모르는 사람은 아무리 교회를 오래 다녔어도 하나님이 아닌 다른 것들을 의지하거나 그것을 섬길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 있어서 하나님을 바로 아는 사람은 하나님 외에 그 어떤 것도 의지하거나 섬길 수 없습니다.

    이 우상숭배 죄를 범하지 않는 것은 우리 힘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 얼마만큼 있느냐?” 하는 것에 의하여 결정된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 지식이 의미하는 것이 무엇일까요? 이 지식을 원어로 “다트”라고 한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 “다트”라는 단어는 “야다”에서 유래되었다고 합니다.

    “야다”라는 단어는 설교에 자주 인용이 되는 단어입니다. “야다”라는 단어는 “안다.”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는데 머리로만, 지식적으로만 아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이 “야다”라는 단어는 그 사람을, 그 존재를 경험적으로 아는 것을 말합니다.

    즉 이 “야다”라는 단어는 아버지가 자녀를 알고 자녀가 아버지를 알듯이 아는 것을 의미하며, 남편이 아내를, 아내가 남편을 알듯이 아는 것을 의미하는 단어라는 것입니다. 반드시 누군가와 친밀한 관계를 맺고 계속해서 그와 함께 지내면서 알아가는 것을 가리켜서 “야다”라고 한다는 것입니다.

    호세아 4:6의 “지식”이라는 단어 “다트”“야다”에서 유래하였는데, 그러므로 백성들이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 없다는 말은 그들이 하나님과 친밀한 관계를 맺지 못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성경은 그 결과가 멸망이라고 단정을 짓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 멸망에서 벗어나는 길은 하나님을 아는 길 외에는 없기 때문에 오늘 본문 3절에서 이렇게 말씀한 것입니다.

    3절 上

    그러므로 우리가 여호와를 알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

    여기에 보면 “여호와를 알자.”라는 말을 두 번 반복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만큼 애가 타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바로 알기만 하면 멸망에서 벗어날 수 있는데 하나님을 몰라서 멸망으로 달려가고 있는 동족들의 모습이 너무 애가 타서 호세아는 “여호와를 알자.”고 반복해서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두 번째 말할 때는 “힘써”라는 말을 추가하였습니다. 이 말의 원래 뜻은 “추적하다.”라고 합니다. 우리가 영화 같은 데서 경찰이 범인을 추적하는 장면을 볼 때 쉬엄쉬엄 추적하는 경찰을 본 적이 있습니까? 그런 경찰은 없습니다. 범인을 추적하는 경찰은 젖 먹던 힘까지 다 쏟아 부어서 범인을 추적해서 결국 범인을 체포하고야 맙니다.

    호세아는 그렇게 하나님을 알아가자고 자기 동족들에게 호소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런 호세아 선지자를 통하여 그렇게 하나님을 알아가라고 우리에게 호소하시고 계십니다.

    부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하나님을 알아가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느끼게 해주시기를 간절히 소원합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 어떤 일보다 하나님을 알아가는 일에 우리의 모든 힘과 노력과 시간과 땀과 수고를 다 쏟아 부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을 경험적으로 실제적으로 인격적으로 알아가기 위하여 어떻게 하든지 하나님과의 관계가 가까워질 수 있도록 노력하시기를 바랍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가 어떤 사람과 가까워지기 위한 노력을 하나님께 그대로 하면 됩니다. 우리는 우리가 좋아하는 사람과 가까워지기 위하여 어떻게 합니까?

    그 방법은 어떻게 하든지, 무슨 수를 써서든지 그 사람과 함께 있는 시간을 많이 가지는 것입니다. 전화를 사용하든지, 메일을 사용하든지, 문자를 사용하든지, SNS를 사용하든지, 직접 만나서 밥을 사주든지, 그 사람을 찾아가서 그가 하는 일을 도와주든지, 취미생활을 같이 하든지 무슨 수를 써서든지 함께 있는 시간을 많이 가지면 그 사람과 가까워질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사람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아내서 그 사람이 원하는 것을 해줍니다. 거기에 내 시간과 내 물질과 내 땀이 투자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것입니다.

    왜 그렇게 손해 보는 일을 하는 것입니까? 그것은 우리에게는 그 사람과 가까워지는 것이 그 어떤 일보다 더 가치 있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바로 그 일이 하나님과 가까워지는 일입니다. 하나님과 가까워져서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경험적으로, 실제적으로 알고 나면 우리는 절대로 우상숭배 죄를 범하는 길로 갈 수 없습니다. 그 길로 가지 않는 우리를 그 어떤 것도 해할 수 없습니다. 이것이 우리가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호세아 선지자는 비록 겉으로는 번성하고 있지만 속으로 곪아터져서 언제 멸망할지 모르는 자기 동족들에게 정말 절박한 심정으로 “하나님께로 돌아가자.”고 호소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호세아를 통하여 우리에게도 똑같은 호소를 하시고 계십니다.

    비록 겉으로는 멀쩡하지만, 겉으로는 잘 되고 있는 것 같지만 속으로 영적으로, 도덕적으로, 윤리적으로 썩어 들어가고 있다면 우리는 조만간에 멸망하고 맙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돌아가자.”고 하는 호세아의 호소를 우리에게 하는 호소로 받아들이고 지금 즉시 하나님께로 돌아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러기 위하여 기도를 하든지, 하나님의 말씀을 읽든지, 예배에 참석하든지, 신앙서적을 읽든지, 설교를 듣든지, 전도를 하든지, 교회 봉사를 하든지 무슨 수를 써서든지 하나님과 친밀해지기 위하여 노력하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그런 우리를 도우셔서 하나님과 우리 사이가 계속해서 친밀하게 해주실 것입니다. 그럴수록 우리는 점점 더 하나님을 알아가게 되며 그럴수록 우리는 우리를 멸망으로 이끌어가는 우상숭배 죄와 멀어지게 될 것입니다.

    그 결과를 2절에서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2절

    “여호와께서 이틀 후에 우리를 살리시며 셋째 날에 우리를 일으키시리니 우리가 그의 앞에서 살리라.”

    이 말씀은, 하나님께서 육적으로뿐만 아니라, 영적으로도 반드시 우리를 회복시켜주실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돌아가는 일에 온 힘을 쏟아 부으시기를 바랍니다. 그러기 위하여 무슨 수를 써서든지 하나님과 가까워지시기를 바랍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하나님을 경험적으로 관계적으로 계속해서 더 많이 알아 가시기를 바랍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에게 속한 모든 것들이 멸망이 아니라 살아나고 일으켜지는 회복의 역사가 계속해서 일어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소원합니다.



    마지막 시대의 특징

    마태복음 24:12
    불법이 성하므로 많은 사람의 사랑이 식어지리라.
    Because of the increase of wickedness, the love of most will grow cold.

    누가복음 18:8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속히원한풀어 주시리라 그러나 인자가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 하시니.
    I tell you, he will see that they get justice, and quickly. However, when the Son of Man comes, will he find faith on the earth?





    9월 25일(목) 호세아 10-14장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너희 묵은 땅을 기경하라(10:12)

    너희가 자기를 위하여 의를 심고 긍휼을 거두라 지금이 곧 여호와를 찾을 때니 너희 묵은 땅을 기경하라 마침내 여호와께서 임하사 의를 처럼 너희에게 내리시리라.
    Sow for yourselves righteousness, reap the fruit of unfailing love, and break up your unplowed ground; for it is time to seek the LORD, until he comes and showers righteousness on you.

    잠언 4:23

    무릇 지킬만한 것보다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 



    묵은 땅(5215) 니이르(nîyr) /   נִיר

    1. 개간된 땅.  2. 새로 일군밭.  3. 잠 13:23
    발음 [ nîyr ] 
    어원 / 5214  
    구약 성경 /  3회 사용
    • 1. 명사 개간된 땅, 새로 일군밭, 잠13:23, 렘4:3, 호10:12.
    • 관련 성경 /  경작지, 밭을 경작함(잠 13:23), 묵은 땅(렘 4:3).

    5214. נִיר

    1. 땅을 갈아 엎다.  2. מָנוֹר
    발음 [ nîyr ] 
    어원 /  5216과 동일 어원에서 유래한 듯
    구약 성경 / 2회 사용 
    •  1. 동사 땅을[쟁기로] 갈아 엎다, 렘4:3, 호10:12.
      •  a. 동사 [주]מָנוֹר, 멍에, 농기구[쟁기].
    • 관련 성경  / 갈다(렘 4:3), 기경(起耕)하다(호 10:12).


    호세아 10장 12-15절

    묵은 땅을 기경하라

     

    가. 죄에는 하나님의 심판이 따른다.

    14절, “그러므로 너희 백성 중에 요란함이 일어나며 네 산성들이 다 무너지되 살만이 전쟁의 날에 벧아벨을 무너뜨린 것 같이 될 것이며 그 때에 어머니와 자식이 함께 부서졌도다.”

    * 본문의 말씀은 이스라엘 여로보암 2세가 왕으로 있을 때에 선지가 호세아를 통해 주신 하나님의 경고의 말씀이다. 하나님은 그의 백성이 죄에서 돌이켜 돌아오기를 원하신다. 그러나 회개하지 않고 돌아오지 아니하면 결국은 무서운 심판이 임하게 된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 성도는 하나님의 심판의 경고의 말씀을 가벼이 보면 안 된다. 여기서 “살만이 벧아벨을 무너뜨린 것 같이”(초토화)와 “어머니가 자식이 함께 부셔졌도다”라는 말은 심판의 심각성을 잘 보여주고 있다. 요나 시대의 니느웨는 모범적인 사례다. 그러나 소돔과 고모라는 아쉽게도 그렇지 못했다.

    * 15절에서 “너희의 큰 악으로 말미암아 벧엘이 이같이 너희에게 행하리니 이스라엘 왕이 새벽에 정녕 망하리로다”는 심판을 피하기 위해서 신앙생활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잘 보여준다. 여기서 ‘벧아벨’과 ‘벧엘’ 그리고 ‘새벽’은 단순히 교인이 아니라 참 신자가 되어야 한다는 것을 암시한다.

     

    나. 문제는 교만이다.

    13절, “너희는 악을 밭 갈아 죄를 거두고 거짓 열매를 먹었나니 이는 네가 네 길과 네 용사의 많음을 의뢰하였음이라.”

    * 이 말씀은 하나님의 심판을 받게 되는 직접적 또는 간접적 이유를 말하고 있다. 물론 심판의 직접적 이유는 “악을 밭 갈아 죄를 거두고 거짓의 열매를 먹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결과를 가져오는 간접적인 이유는 교만인데 이것이 더 심각한 문제다. 여기서 하나님은 “네가 네 길과 네 용사의 많음을 의뢰하였음이라”는 말씀을 통해 교만이 죄의 원인임을 밝히신다.

    * 사람이 자신의 길을 의뢰하는 것은 아주 위험하다. 자신의 길(데레크, 삶의 방식)을 의뢰하는(바타흐, 확신하다)는 것은 자신의 생각에 몰두하여 하나님보다 앞서 가는 것을 말한다. 하나님은 여호수아에게 법궤를 앞세우고 그것의 뒤를 따르라고 하셨다(수3:3참조). 그러나 사사시대에는 사람마다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고, 그때는 결국 암흑시대가 되었다(삿17:6참조). 사탄의 타락은 “가장 높은 구름에 올라가 지극히 높은 이와 같아지리라”한 것에 있었음을 참조하라(사14:12-14참조).

     

    다. 묵은 땅을 기경하라.

    12절, “너희가 자기를 위하여 공의를 심고 인애를 거두라 너희 묵은 땅을 기경하라.”

    * 교만은 죄를 가져오고, 죄는 심판을 불러온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하나님은 “너희 묵은 땅을 기경하라”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공의를 심어 인애를 거두라고 말씀하신다.

    * 여기서“묵은 땅을 기경하라”는 말씀이 강조하는 것은 “땅을 갈아엎으라”라는 것이다. ‘기경하다’(니르)는 ‘땅을 쟁기로 갈아엎다’라는 뜻이다. 땅을 쟁기로 갈아엎어야 잡초의 뿌리가 죽는다.

    * 묵은 땅(니루)은 단순히 ‘오래 묵은 땅’이나 ‘길가와 같이 딱딱한 땅’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마13:19 참조). 

    묵은 땅은 ‘기경한 땅’이지만 지금까지 계속하여 악을 심고 죄를 거두어들이던 땅을 의미한다. 
    따라서 묵은 땅은 악을 심고 죄를 거두는 일에 만성이 된 사람의 마음을 비유하는 것이다.

    * 죄를 짓는 일에 만성이 되면 결국은 감각을 잃는다. 
    바로가 강퍅하게 되는 단계는 첫째 ‘고집하다’(하자크 칼형)이고, 
    둘째는 ‘둔감해지다’(카베드 히필형)이며, 
    셋째는 ‘강퍅하게 하다’(하자크 피엘형)이다. 
    즉 고집부리다 보면 둔감해지고 결국 강퍅하게 되므로 계속 갈아엎어야 한다.






    אֶרֶץ 776 [’erets]

  • 1. 명사
  • 2. 명사 나라, , 출3:8, 13:5, 창21:32, 룻 1:7.
  • 3. 명사 [주] 복수 אֲרָצוֹת의 뜻은 ‘토지’[창26:3,4]로서 보통 정관사와 함께 쓰인다. 특히 후기 히브리어에서는

  • אֲדָמָה 127 [’ădâmâh]
    • 1. 여성형 명사
    • 2. 여성형 명사 흙[통곡하는 사람이 자기 머리에 먼지를 뿌릴 때 사용됨], 삼상4:12.
    • 3. 여성형 명사 들판[경작되는 곳], 창47:19, 시105:35, 사28:24.




    너희가 自己(자기)를 爲(위)하여 義(의)를 심고 矜恤(긍휼)을 거두라 지금이 곧 여호와를 찾을 때니 너희 묵은 땅을 起耕(기경)하라 마침내 여호와께서 臨(임)하사 義(의)를 비처럼 너희에게 내리시리라.



    호세아 8:7 

    갈라디아서 6:8 
    자기의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진 것을 거두고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두리라





    성경에서 땅 또는 밭은 사람의 마음을 의미합니다.

    성서와 땅 / 땅의 기본적 의미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하늘과 땅)를 창조하시니라”(창 1:1)

    “여호와 하나님이 동방의 에덴에 동산을 창설하시고 그 지으신 사람을 거기에 두시니라”(창 2:8)

    땅은 구약 이해에서 빠뜨릴 수 없는 중심 주제이다. 인간 자체가 땅의 흙으로 지어졌을 뿐 아니라, 삶과 역사가 땅이라는 공간 안에서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또한 그 땅은 하나님께서 인간을 만나시는 거룩한 장소이기에, 하나님 계시의 중심이기도 하다. 하나님께서 새로운 구원 역사를 위하여 아브라함을 부르실 때도, 자손 번성과 함께 땅의 소유를 약속하셨다. 그에 따라 출애굽 구원의 최종 목적지는 아브라함과 그의 후손에게 주시기로 약속한 가나안이었다.

    땅이 구약의 중심 주제인 것은 통계를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 
    구약에서 땅은 2504번이나 언급되고 있는데, 이것은 언약이 사용된 경우보다 더 많은 것으로서 땅이 중요한 주제임을 보여준다. 
    구약에서 땅은 상징성을 지니기도 하지만, 대부분의 경우 현실적이다. 즉 전쟁, 갈등, 횡포와 같은 무질서가 난무하는 삶의 현장이 땅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직접 내려오셔서 구원 역사를 이루시는 역사의 무대 역시 땅이다. 구약은 땅을 향한 하나님의 관심과 그 땅에서 하나님과 동행하며 살아가는 거룩한 사람들의 자서전적 기록이라고 볼 수 있다. 그래서 성경은 하늘을 담고 있는 땅의 이야기이다.

    성서 주제로서의 중요성에도 불구하고, 최근까지 땅에 관한 연구가 소홀히 취급되었던 것이 사실이다. 그것은 땅을 이원론적으로 다루었던 기독교 신학의 입장이 크게 작용한 것과 관련이 있다. 땅을 세속적이고 물질적인 것으로 구분하면서, 그 신학적 가치를 외면한 것이다. 광야를 세상으로 보고 가나안 땅을 천국으로 보는 것이나 가나안 정복과 입국을 은유적으로 해석하는 것은 그런 경향의 좋은 예이다. 그런 점은 교회가 즐겨 사용하는 찬송가 가사 내용에서도 쉽게 찾아 볼 수 있다. ‘요단강 건너가 만나자’에서 강조되는 것은 요단강 건너편은 실제의 땅이 아니라 죽음 너머의 천국을 지칭한다. 땅을 역사적 현실이 아닌 미래 천국에서 받게 될 영원한 유업으로 해석한 것이다. 땅에 대한 해석의 방향은 내세 지향적인 것으로 치우쳐, 구약의 본래적 의미를 무시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신학적 주제로서 땅에 대한 본격적인 연구는 1948년 이스라엘 독립과 무관하지 않다. 이스라엘의 독립이 있기 전까지 땅의 주제는, 이스라엘-아랍 영토권 문제와 복잡하게 얽혀 있었던 민감한 정치적 이슈였다. 구약에서 땅의 문제는 불가피하게 이스라엘의 영토 소유권을 지지하는 것으로 이해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스라엘이 독립하여 정치적 실체로 등장하면서 그런 부담감이 사라져 버렸다. 그에 따라 땅에 대한 연구 분위기도 자연스럽게 부각되기 시작하였다. 이것이 1960년대 이후 땅의 신학적 논의가 성서학계에 본격적으로 등장하게 된 배경이다.

    구약성경에서 땅을 의미하는 대표적인 용어는 ‘아다마’와 ‘에레츠’ 두 가지가 있다.

    ‘아다마’는 ‘붉다’(red)는 뜻의 히브리어 ‘아돔’에서 파생된 것으로, 붉은색을 띈 비옥한 토양을 의미한다. 
    특히 이스라엘에서는 산지에서 흘러내려와 아래쪽 골짜기에 쌓인 충적토가 유명하다. 
    지중해 연안지역에서는 이를 ‘테라로사’(terra rosa), 즉 ‘붉은 색의 흙’이라고 부른다. 
    그러므로 ‘아다마’는 경작이 가능한 땅, 경제적으로 높은 가치가 있는 땅, 곧 인간의 거주와 생존에 적합한 땅을 의미한다. 
    ‘아다마’의 반대 개념은 인간이나 생물의 생존이 어렵고 힘든 사막 혹은 광야이다.

    하나님께서 아담을 위하여 창조하신 에덴동산은 ‘아다마’의 땅이다. 토양 자체도 비옥하였지만, 네 개의 강으로 나뉘어 흘러 내려갈 정도로 많은 물이 솟아나는 샘 근원이 에덴동산 안에 자리하고 있었다. 비옥한 토양과 풍부한 물 근원, 그리고 그런 좋은 여건 속에서 잘 자라는 각종 과일나무들, 이 모든 것들이 에덴동산을 최고의 ‘아다마’로 만들었다.

    비옥한 땅 ‘아다마’와는 달리, ‘에레츠’는 조건과 관계 없이 창조와 우주적 관점에서 본 땅이다. ‘에레츠’는 하늘 혹은 바다와 반대되는 보다 큰 개념의 땅이다. 히브리적 사고에 의하면, 우주는 하늘과 땅으로 이등분되거나, 하늘과 바다와 땅으로 삼등분된다. 곧 ‘에레츠’는 하나님이 창조하신 거대한 우주의 한 부분을 이루는 중요한 요소이다. 태초에 하나님께서 하늘과 함께 창조하신 땅이 곧 ‘에레츠’이다(창 1:1).

    ‘에레츠’의 또 다른 이해는 정치적 개념으로서의 땅이다. 한 나라의 통치력이 미치는 영역이 곧 ‘에레츠’이다. ‘아다마’가 인간 생존에 적합한 좋은 환경으로서의 땅이라면, ‘에레츠’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드러내는 신앙적 개념의 땅이다. 그것은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 사이에 이루어진 계시의 현장으로서의 땅이기도 하다. 그런 면에서 성경에서 강조하는 땅은 ‘아다마’보다는 ‘에레츠’가 더 우선적이다. ‘에레츠’가 하나님과의 본질적 관계를 전제한다면, ‘아다마’는 주어진 ‘에레츠’ 안에서 누리는 복과 관련된다.

    ‘에레츠’와 ‘아다마’와 의미상으로 유사한 것이 ‘공간’(space)으로서의 땅과 ‘장소’(place)로서의 땅 구분이다. 
    ‘공간’으로서의 땅은 외부의 어떠한 압력도 받지 않고 완전히 자유로운 상태이다. 
    그런 ‘공간’은 어떤 책임도 존재하지 않는 공백 상태의 땅이다. 
    모든 부담을 벗어버리고 마음껏 휴식을 취하는 바캉스의 휴양지라고 할 수 있다. 
    반면에 ‘장소’로서의 땅은 역사적 의미가 있는 땅, 무엇인가 사건이 일어났고, 그 사건이 기억을 통하여 여러 세대에 걸쳐 역사의식으로 정착된 땅, 그곳에 살고 있는 자들에게 분명한 자기 정체성을 확립시켜주는 땅, 그것이 ‘장소’로서의 땅이다. 
    따라서 ‘공간’의 추구는 역사로부터의 도피이지만, ‘장소’의 소유는 역사 안으로 들어가려는 결단이다.

    역사적으로 이스라엘이 추구하였던 땅은 풍요를 보장받는 ‘아다마’가 아니라 하나님의 역사와 통치가 기다리고 있는 ‘에레츠’이다. 
    역사의 부름을 외면한 채 속 빈 ‘공간’ 속에 안주하려는 것은 영적 나태이다. 
    반면에 하나님과의 만남 그리고 그 부름의 의미로 가득 찬 거룩한 ‘장소’를 지향하는 뜨거운 열정, 그것이 성경이 강조하는 땅의 바탕색이다.

    흙은 뭔가를 바라지도 요구하지도 않는다. 
    그저 뭔가를 심으면 그것을 열심히 키워주고 성장시킨다. 
    물이 오면 그 물길을 만들어주고 땅속으로 스며들게 해준다. 
    태양이 비치면 따뜻하게 품어주고 눈이 오면 땅을 덮도록 놔둔다. 
    욕심이 없다. 
    자연의 흙은 그렇다.

    사람의 흙을 관할하는 토기운은 어떨까. 적당하면 무난하게 중도를 지키지만, 과다하면 <천하태평, 과유불급, 욕구불만, 자기위안>의 특징들이 드러난다. 
    토기운은 사람의 마음이다.

    사람의 마음이 너무 넓으면 어떨까. 땅이 너무 넓으면 무엇을 심을지 좀 막막하다. 
    그 넓은 땅을 경작하자니 왠지 힘들 것 같고, 경작을 안하자니 땅이 아깝고......그러다가 결국엔 <에라 모르겠다. 어떻게 되겠지>하는 천하태평이 마음속에 자리잡는다. 
    땅을 너무 많이 소유한 사람은 그 자체로도 마음이 든든할 것이다. 
    굳이 뭔가를 심거나 힘들게 경작하지 않아도 <내 땅인데 어디 가겠어?>라며 배만 두드리고 세월을 보낸다. 
    너무 많아도 탈이다. 
    자신이 능력껏 일굴 수 있을 정도의 적당한 크기의 땅을 가지면 열을 다해서 농사를 지을텐데, 너무 넓으면 오히려 손놓고 땅만 바라보고 살겠다고 한다. 
    그게 내 땅인데 하는 마음으로 에헴~ 하고 수염만 쓰다듬는다.

    땅은 속이지 않는다.  
    심는대로 키우고 나는 것이다. 
    그래서 토기운(土氣運)은 믿음이다. 
    자신을 믿는 것이다. 
    토기운이 적당하면 자신감도 좋고 남들에게도 너그러이 잘 퍼주는 장점으로 작용하는데.....토기운이 너무 과다하면 자만심으로 변질된다. 남에게도 잘 퍼주지만, 퍼주는 것 이상으로 더 받으려고 한다. 사람 마음이란 그런 것이다. 그래서 토기운이 과다하면 모든 것에서 욕심도 많아진다. 
    만족을 모른다. 
    욕구불만이 항상 따라다닌다. 
    만족할 정도로 뭔가 들어와도 욕심이 또 커진다. 
    이 정도로 만족할 수 없다. 
    그 불만족으로 불행하게 살아간다. 
    아주 크고 넓은 땅을 타고났는데 그것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제대로 활용하지 못하면, 오히려 그 넓은 땅을 짊어지고 살아가게되는.......무거운 삶을 자처하는 것이다.

    누구나 살아가면서 일이 잘 풀릴때도 잘 안풀릴때도 있다. 
    잘 안풀릴때는 어떤 점에서 잘못되었는지 반성하고 돌아볼 필요가 있다. 
    같은 실수와 실패를 겪지 않기 위해서는 당연히 자기 탓이 아닌가 생각해봐야 한다. 
    그런데 토기운이 과다하면 자만심으로 그렇게 돌아볼 반성을 묻어버린다. 
    <뭘 그 정도갖고 내가 나를 탓해! 다음에 다시 하면 되잖아! 쫀쫀하게 그렇게 살고 싶지 않아~~> 
    태평한 마음으로 자기를 너무 믿는 자기위안과 자가당착에 빠진다. 
    다음에 또다시 같은 실수와 시행착오를 겪어도 또 마찬가지로 속편하게 마음먹어 버린다. 
    마음을 먹어버린다. 
    넓은 땅에 묻어버린다.

    마음이란 이렇게 여러가지로 변할 수 있고 여러가지로 얼굴을 바꾼다. 
    토기운이 과다하면 그렇게 마음이 뻔뻔해지고 자기방식대로 속편한대로 생각하고 마음먹는다. 
    자신에게 솔직해지기는 커녕, 자기방식대로 자기마음대로 생각하기에 <나는 그게 솔직한거야>라는 착각에 빠질수도 있다. 
    문제가 있어도 문제가 있는 것조차 생각하지 못하고 사는게 더 큰 문제일수도 있다. 
    사람의 마음이란게 다 같은 마음이 아니다. 
    사람의 마음이란게 그리 정직한게 아니다. 
    마음을 믿을수도 없고, 안 믿을수도 없다. 
    자기 마음의 크기와 넓이를 아는게 먼저다. 
    땅은 너무 좁아도 너무 넓어도 문제다.
    욕심이 많은게 꼭 나쁜건 아니다.
     그 욕심 때문에 큰 일, 좋은 일, 남들이 하지 못한 일을 해낼수 있다.
    욕심을 버려라? 
    사람이 욕심없이 살수 있을까?
    다만, 자신이 감당할 수 있는 욕심인가를 봐야 할 것이다.
    욕심이 많다면 그 욕심만큼 남보다 더 열심히 살면 된다.
    그 욕심만큼 살지 못하니 그것이 불만이 되고, 하다가 팽개치는게 아닌가.


    좋은 땅과 같은 마음 밭(누가복음 8:15)

    좋은 땅은 길 가나 바위나 가시떨기가 없는 땅을 말합니다. 좋은 땅은 길 가와 같이 굳은 마음, 얇게 깔린 흙 밑에 깔린 바위와 같은 마음, 염려, 재물, 향락과 같은 말씀의 영양분을 빼앗아가는 가시떨기의 마음이 없는 마음 밭을 의미합니다. 이 마음을 가진 사람은 착하고 좋은 마음으로 말씀을 듣고 지키고 인내로 결실하는 자입니다. 그들은 복음에 대해 수용성이 있고 변화에 적응할 수 있는 탄력성이 있습니다. 

    누가복음 8:15

    15 좋은 땅에 있다는 것은 착하고 좋은 마음으로 말씀을 듣고 지키어 인내로 결실하는 자니라

    착하고 좋은 마음

    예수님은 씨앗이 좋은 땅에 있다는 것은 착하고 좋은 마음으로 말씀을 듣고 지키어 인내로 결실하는 자를 말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착하고 좋은 마음”은 in an honest and good heart( KJV, ESV, NASB95, RSV)로 ‘정직하고 착한 마음’을 말합니다. 
    좋은 땅과 같은 마음이 되려면 우선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정직해야 합니다. 
    투명한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외식하거나 자기를 포장해서는 안됩니다. 
    우리 삶이 열매를 맺으려면 사람 앞에서는 경건하게 보이는 척하지만 아무도 보지 않는 자리에서는 온갖 악행을 행하는 사람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착하고 좋은 마음”을 가진 자는 말씀을 듣고 지킵니다. 
    “듣는다”는 것은 복음의 수용성을 말합니다. 
    좋은 흙은 깊고 부드러우며 기름지고 깨끗합니다. 
    씨앗은 땅 속으로 잘 들어가야 하며, 거기서 씨앗은 영양분을 얻어, 자라서 풍성한 수확을 거두게 됩니다. 
    “지킨다”는 말은 hold it fast(ESV; NASB95; NRSV; RSV)로 ‘굳건히 붙잡다’는 뜻입니다. 
    헬라어 원어로는 katechō로 ‘소유하다, 붙잡다’는 뜻으로 자신의 소유물을 유지하는 것을 말합니다. 

    듣고 지키어

    “듣고 지키어”라는 구절은 사도행전에서 베뢰아 사람을 떠올리게 합니다. 
    베뢰아 사람은 데살로니가에 있는 사람들보다 더 너그러워서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고 이것이 그러한가 하여 날마다 성경을 상고하였습니다(행 17:11). 
    그들은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영접하였습니다. 
    그들은 감정적으로 은혜받는 것에 그치지 않고 이것이 그러한가 하여 날마다 성경을 상고하였습니다. 

    말씀을 듣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그것에 정말로 주의를 기울이고 그것을 이해하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그것을 실제 삶에 적용하려면 그것을 먼저 이해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맹목적인 믿음을 원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지성과 이성을 주셨고 논리적으로 추론하고 체계화시키면서 그의 말씀을 우리 마음에 견고히 하기를 원하십니다. 

    “좋은 마음”은 제자들처럼 비유의 뜻이 무엇인지 궁금해 하고 질문함으로 알고자 하는 소원이 간절한 마음을 가리킵니다. 그들은 씨앗 비유 뿐만 아니라 다른 비유에 대해서도 질문했습니다. 예수님의 가르치심은 일방적인 가르침이 아니라 문답식 교육이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 질문을 던질 수 있습니다. 의문을 갖고 질문을 던지는 것은 결코 불경건한 일이 아닙니다. 괜히 하나님의 말씀을 부인하려고 딴지를 거는 방식이 아니라면 우리는 마음껏 의문을 던지고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권위적인 사람은 질문을 하면 교만하다고 책망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마음이 너그럽고 온유하시며 누구에게나 열린 마음을 갖고 계십니다. 복음서를 보면 예수님은 제자들과 무리들과 묻고 답하는 식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고 교훈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해하기를 원하는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아는 것이 너희에게는 허락되었으나 다른 사람에게는 비유로 하나니 이는 그들로 보아도 보지 못하고 들어도 깨닫지 못하게 하려 함이라”(10). 질문을 던지고 하나님의 말씀을 이해하고자 간절한 마음을 가진 자는 하나님의 나라의 비밀을 아는 것이 허락되었습니다. 

    그러나 관심이 없는 사람에게는 보아도 보지 못하고 들어도 듣지 못하게 하셨습니다. 영적 소원이 없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말씀이 가치가 없습니다. 

    우리가 이해함으로 말씀을 받아들인다면 우리는 견고하게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 수 있습니다. “지킨다”는 말은 ‘굳게 붙잡다’는 뜻입니다. 말씀을 이해하고자 하는 사람은 예수님이 누구이신 줄 잘 알기 때문에 그의 말씀을 굳게 붙잡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말씀이 하나님의 말씀임을 이해했기 때문에 그것을 소중히 여깁니다. 

    좋은 마음 밭을 가진 사람들은 성경공부를 할 때나 설교 말씀을 들을 때 사람의 말로 받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습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통해 말씀하십니다. 특별히 말씀의 종으로 세우심을 받은 교회의 지도자들을 통해 말씀하십니다. 좋은 마음 밭을 가진 자는 이 말씀을 사람이 하는 말이 아닌, 하나님이 그를 통해 말씀하시는 것으로 영접합니다. 이렇게 유연하고 열린 마음을 가진 믿는 자에게는 하나님의 말씀이 놀랍게 역사합니다(살전 2:13). 하나님께서 주신 이 말씀은 좋은 마음 밭을 가진 사람들의 삶을 변화시키는 강력한 역사를 일으킵니다. 

    우리가 전하는 말씀은 아주 평범한 인간의 입술에서 나오지만 하나님의 말씀으로 영접하면 능력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좋은 마음 밭을 가진 자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그들 마음에 비추십니다(고후 4:6). 

    예수님의 제자들은 그의 말씀을 들으면서 예수님의 말씀이 “영생의 말씀”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떡을 기대하고 따르던 무리들은 예수님이 더이상 떡을 만드는 기적을 베풀지 않자 예수님을 떠났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다른 사람이 다 떠나도 그들은 “영생의 말씀”을 떠날 수 없었습니다(요 6:68). 그들은 예수님을 이 땅에 오신 “영생의 말씀”으로 영접했습니다(요 1:14). 

    인내로 결실하는 자

    “좋은 마음으로 말씀을 듣고 지키는” 사람은 인내로 결실하는 자입니다. 예수님은 두 번째 종류의 땅인 돌밭에서 말씀을 기쁨으로 받지만 뿌리를 깊게 내리지 않음으로 자라지 못하고 마르게 된 예를 드셨습니다. 그들의 문제는 시련이 닥칠 때 인내하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반면 좋은 마음 밭을 가진 사람은 말씀을 주의 깊게 듣고 그러한가 상고하고 제자들처럼 질문을 던짐으로 말씀의 뜻을 이해하고 그 결과 그 가치를 깨닫고 굳게 지키는 사람입니다. 그들은 시련이 닥쳐도 굳건히 설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아무리 가혹한 시련 속에서도 계속해서 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다. 

    “인내”는 원어로 ‘아래 머무르다’는 뜻으로 어떤 원칙에 자신을 복종시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 단어는 무거운 짐을 짊어지고 흔들리지 않고 씩씩하게 견디는 모습을 묘사할 때 쓰는 단어입니다. 또한 상황에 영향을 받지 않고 시련 속에서도 굴복하지 않는 성품을 묘사할 때 쓰는 단어입니다. 이 단어는 미래를 바라보는 능력, 압박하는 세력 너머에 있는 것에 집중할 수 있는 능력을 언급합니다. 

    예수님은 인내의 본을 잘 보여 주셨습니다. 히브리서 저자는 예수님께서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셨다고 기록했습니다(히 12:2). 

    사도행전에 나오는 교회는 인내로 결실하는 예를 보여줍니다. 유대인들이 교회를 박해할수록 교회는 더욱 성장했습니다. 박해가 심해질수록 하나님의 말씀이 점점 왕성하여 예루살렘에 있는 제자의 수가 더 심히 많아지고 허다한 제사장의 무리도 이 도에 복종하였습니다(행 6:7). 

    좋은 땅에 뿌려진 씨앗은 예외 없이 엄청난 양의 열매를 맺습니다. 좋은 땅에서는 어떤 씨앗은 열매를 맺고 어떤 씨앗은 열매를 맺지 못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수많은 씨 중에서 실패하는 경우가 있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으로 비유되는 씨앗은 그 생명력에 전혀 문제가 없습니다. 그 씨앗은 예외 없이 좋은 땅에 뿌려졌을 때 100% 열매를 맺습니다. 뿌려진 씨앗은 씨앗 하나에 하나의 열매를 맺는 것이 아니라 30배, 60배, 100배의 결실을 맺습니다(마 13:10-23; 막 4:13-20). 

    나중에 예수님께서 겨자씨 비유를 말씀하실 때, 말씀의 씨앗이 좋은 마음 밭에 심기어질 때 어떻게 자라는가 비유로 말씀하시면서 말씀의 생명력을 잘 이해하도록 하셨습니다. 겨자씨는 작지만 자라서 큰 나무가 됩니다. 새들의 쉼터가 될 만큼 규모가 커지게 됩니다. 우리는 가장 작은 씨앗 중 하나에서 그렇게 큰 나무가 나올 것이라고는 결코 기대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좋은 땅에 뿌려진 이 작은 씨앗이 다른 사람에게 유익을 주는 큰 식물을 자라는 것을 볼 때 놀라지 않을 수 없습니다.


    땅은 주님의 마음입니다

    “온유한 사람은 복이 있다. 그들이 땅을 차지할 것이다.” 예수님이 산상수훈에서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시편37편의 말씀 중 “온유한 사람들이 오히려 땅을 차지 할 것이다”라는 말씀을 인용하신 것 같습니다. 온유한 사람이 땅을 차지 한다는 말씀을 처음 접할 때는 온유하고 겸손한 사람들이 이 땅에서 많은 부동산을 소유한다는 말씀으로 들렸습니다. 그러나 현실은 많이 달랐습니다. 이 세상에서 부동산을 많이 차지하는 사람은 온유하고 겸손한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재테크에 강하고 탐욕스럽고 투기꾼적인 기질이 있는 사람들이 부동산을 많이 소유하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이 틀릴 때도 있다는 생각을 한 적도 있습니다. 그러나 요즘 예수님의 말씀은 절대로 틀린 적이 없다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시편37편을 암송하고 있습니다. 

    시편37편은 40절까지로 되어 있는 긴 성경입니다. 암송한다는 것이 보통 힘이 드는 것이 아닙니다. 몇 번을 포기할까 하다가 그래도 도전하였습니다. 반복해서 읽고 가슴에 새기고, 또 다시 읽고 새기고 하는 중에 지금까지는 관심을 두지 않았던 새로운 사실 하나를 발견하였습니다. 그것은 시편37편에 자주 등장하는 단어 하나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땅”이라는 단어였습니다. 대충 세어보니 9번인가 나오는 것 같습니다. “땅을 차지한다”, “땅을 물려받는다”, “땅에서 길이길이 산다”, “언제나 땅에서 산다”, “땅에서 끊어진다” 등 땅, 땅, 땅이 많이 등장합니다. 그런데 이 땅은 아무나 차지하는 것이 아니고, 주님을 기다리는 사람, 온유하고 겸손한 사람, 주님이 베푸신 복을 받은 사람, 악한 일 피하고 선한 일 힘쓰는 사람, 의인, 주님께서 높여주시는 사람들이 그 땅을 차지한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시편37장에서 말하는 땅을 차지하는 사람들은 모두 예수님의 마음을 닮아서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한 사람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을 믿은 후에 그들의 마음 가운데 남아 있는 악한 생각들을 정복하고 마음의 청결함을 얻은 사람들입니다. 마음이 청결한 사람들은 하나님을 봅니다. 그들의 마음에는 질투심이 없고, 분노가 없고, 자랑이 없고, 허영심이 없고, 교만이 없고, 탐욕이 없고, 정욕이 없고, 탐식이 없고, 게으름이 없습니다. 주님의 은혜를 받아 그런 악한 생각들을 정복한 사람들입니다. 이런 악한 생각들, 악덕들이 시편37장에는 다 들어 있습니다. 시편37장에서 말하는 ”악인들, 악한 자들“은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이라고 간단히 생각하면 안 됩니다. 나를 제외한 다른 악한 사람들이라고 간단히 생각하면 안 됩니다. 그 악인들, 악한 자들은 내 마음 속에 있는 악한 생각들일 수 있습니다. 옛 성인들은 우리 안에 악과 선이 동시에 존재하는데 악이 득세할 때는 나도 악인이 될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 내 안에 있는 악한 생각들이 힘을 얻을 때 나도 악인이 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믿는 사람도 악인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시편37장에 말하는 악인들, 악한 자들이 바로 저였습니다.


    하나님을 믿으면서 우리 안에는 얼마나 허영심이 많이 있는지요. 믿는 자라고 하면서 얼마나 교만한 마음이 많이 있는지요. 영적 지도자라고 하면서 얼마나 탐욕이 많이 있는지요. 자기가 행한 선을 자랑하고, 교인 숫자 자랑하고, 한국에서 제일 큰 교회, 세계에서 몇 번째 큰 교회라고 자랑하고, 자기가 이룬 업적 자랑하고, 어느 목사를 지칭하면서 차세대 한국 교회 대표주자, 세계적인 하나님의 종, 남다른 설교의 대가, 능력의 종, 권능의 종, 이 시대 최고로 쓰임 받는 종 등으로 표현한다면 그 모든 것이 허영심의 발로입니다. 어느 목사는 자기가 비행기를 탔는데 승객들을 향하여 ‘나 때문에 여러분은 다 안전합니다! ‘라고 선포하였다고 스스럼없이 말합니다. 교만의 극치입니다. 조심하여야 합니다. 허영심은 교만으로 직행하는 지름길입니다. 오늘날 한국 교회나 교계에서 허영심과 교만이 얼마나 큰 죄인가를 지적하지 않습니다. 허영심과 교만은 무서운 죄입니다. 땅, 즉 예수님의 마음을 본받지 못하게 하는 무서운 죄악입니다. 예수님의 마음인 온유와 겸손을 본받지 못하게 하는 죄 말고 더 큰 죄가 있을까요? 허영과 교만 말고도 다른 모든 악덕들은 예수님의 마음을 본받지 못하게 방해하는 악입니다.

    우리 안에 있는 악덕들을 주님의 은혜로 극복할 때 우리는 비로소 땅을 물려받게 됩니다. 그 땅은 바로 주님의 마음입니다. 예수님의 마음입니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바로 온유하고 겸손한 예수님의 마음입니다. 우리가 우리 속에 있는 악덕을 극복할 때 우리는 예수님의 마음을 물려받게 됩니다. 이때 우리의 마음에 평강과 기쁨이 임하고 어떠한 외풍에도 흔들리지 아니하고 어떠한 시련도 이기는 영적 힘이 하늘로부터 임하게 됩니다. 한국 개신교회 교인들이 예수님을 믿은 후에 바로 우리 안에 있는 여러 가지 악덕을 극복하는 영적전쟁을 배우고 훈련하였어야 하는데, 불행하게도 바로 3박자 축복부터 배우기 시작하였다고 생각합니다. 그 결과 한국 개신교회는 깊이 없는 교인들을 양산하게 된 것입니다.

    찬송가 “주님의 마음을 본받는 자 그 맘에 평강이 찾아옴은 험악한 세상을 이길 힘이 하늘로부터 임함이로다”를 작시 하신 분은 땅을 차지하는 경험을 하신 분이 틀림없습니다. 주님의 마음을 물려받은 분임에 틀림없습니다.


    농부의 마음

    가을이 찾아오면 농부의 마음을 생각한다. 가장 아름다운 마음은 농부의 마음이다. 농심은 천심이다. 예수님은 “내가 참 포도나무요 내 아버지는 그 농부라”(요 15:1)고 말씀하셨다. 농부의 마음을 읽으면 하나님의 마음을 읽을 수 있다. 농부는 하늘을 보고 산다. 농부는 위를 보고 살며, 하나님을 바라보며 산다. 농부는 혼자의 힘만으로 농작을 할 수 없음을 안다. 위에서 비를 주시고, 태양 빛이 있어야만 곡식이 자란다는 사실을 농부는 잘 안다.

    농부의 마음은 무릎을 꿇는 겸손한 마음이다. 농부는 무릎을 꿇고 산다. 땅을 경작하기 위해 무릎을 꿇고, 땅에 심은 곡식을 돌보기 위해 무릎을 꿇는다. 농부의 무릎을 꿇는 모습 속에서 기도하는 모습을 본다. 무릎을 꿇는 모습 속에서 겸손을 배운다. 농부를 보면 무릎으로 사셨던 예수님이 생각난다. 이 세상에서 가장 고귀한 것들은 모두 무릎을 꿇는 헌신을 통해서 나오는 것이 분명한 것 같다.

    농부의 마음은 정직하다. 농부는 심은 것을 거두고 심는 대로 거둔다는 사실을 안다. 농부의 마음은 기대하는 마음이다. 농부의 마음속에는 빛나는 설렘이 있다. 씨앗을 심는 농부의 가슴속에는 출렁거리는 가을이 담겨있다. 농부는 봄에 씨앗을 심으면서 오곡백과가 넘치는 논밭을 본다. 그러므로 농부는 비전의 사람이다.

    농부의 마음은 풍부한 마음이다. 농부는 비록 소박하고 검소한 삶을 살지만 풍부의식속에 산다. 자연의 풍부함을 안다. 생명의 풍부함을 안다. 농부는 씨앗 속에 담긴 가능성을 알고, 무한한 잠재력을 안다. 작은 벼를 한 알 심으면서, 그 한 알의 씨앗을 통해 수많은 곡식을 추수할 것을 안다. 농부는 땅을 사랑하고 자연을 사랑하고 곡식을 사랑한다.
    농부는 생명의 신비를 안다. 생명은 탄생하고 성장하고 성숙하고 열매를 맺는다. 또한 농부는 생명의 역설적인 능력을 안다. 생명이란 비바람을 맞으며 오히려 강해지며, 역경 속에서 더욱 순수하고 크게 자란다. 뜨거운 여름 태양빛 아래서 곡식은 알차게 여무는 것이다.

    농부의 마음은 가꾸는 마음이다. 가꾸는 마음은 아름답다. 가꾼다는 것은 돌본다는 것이다. 돌봄은 관심에서 시작하고 관심은 사랑에 있다. 결국 농부의 마음은 사랑하는 마음이다. 땅을 가꾸고, 곡식을 가꾸는 농부에게서 우리는 정성을 배운다. 성실을 배운다. 성실처럼 고귀한 성품은 없다. 살아가면서 배우는 것은 성실에는 황혼기가 없다는 사실이다. 그 보배로운 성품을 우리는 농부에게서 배운다.

    농부의 마음은 인내하는 마음이다. 기다리는 마음이다. 농부는 준비하며 기다리고, 가꾸며 기다리고, 추수 때를 기다린다. 모든 것은 인내를 통해 성취되고 열매를 맺는다. 거듭 기억하라. 농심은 천심이다. 그래서 농심을 갖고 사는 사람은 지혜롭다.


    천장지구(天長地久)

    하늘과 땅이 오래도록 변하지 않는다는 뜻으로, 사물이 오래오래 계속됨을 이르는 말이다.

    天 : 하늘 천(大/1)
    長 : 긴 장(長/0)
    地 : 땅 지(土/3)
    久 : 오랠 구(丿/2)

    (유의어)
    천양무궁(天壤無窮)

    출전 :
    ○ 노자(老子) 도덕경(道德經) 제7장
    ○ 백거이(白居易)의 장한가(長恨歌)

    하늘만큼 길고 땅만큼 오래되다. 

    하늘과 땅이 존재했던 시간만큼 길고 오래되다. (애정이) 영원히 변치 않는 것을 비유하여 이르는 말이다.

    天長地久. 天地所以能長且久者, 以其不自生, 故能長生.
    하늘과 땅은 영원무궁하다. 하늘과 땅이 장구할 수 있는 까닭은 스스로를 위해 살지 않기 때문에 그렇게 장생할 수 있는 것이다.

    是以聖人後其身而身先, 外其身而身存.
    이런 까닭에 성인은 자신을 남보다 뒤로 돌림으로써 남보다 앞에 나설 수 있게 되고, 자신을 잊고 남을 위함으로써 자신이 존재하게 된다.

    非以其無私耶. 故能成其私.
    이는 무사(無私)하기 때문이 아니겠는가? 그러므로 자신이 영원하고 완전한 존재로 이루어지게 되는 것이다.

    이 말은 '노자(老子)' 제7장에 나오는데, 여기에 나오는 '천장지구'는 성인을 비유하는 말이었다. 그런데 이 말이 하늘과 땅만큼 오래가고 영원히 변치 않는 애정을 비유하는 말로 쓰이게 된 것은 백거이(白居易)의 장한가(長恨歌)에서 유래한다.

    臨別殷勤重寄詞
    헤어질 무렵 은근히 거듭 전하는 말이 있었으니

    詞中有誓兩心知
    그 말에는 둘이서만 아는 맹서가 들어 있었지

    七月七日長生殿
    칠월 칠석 장생전(長生殿)에서

    夜半無人和語時
    깊은 밤 남몰래 속삭인 말

    在天願作比翼鳥
    하늘에서는 비익조(比翼鳥)가 되고

    在地願爲連理枝
    땅에서는 연리지(連理枝)가 되자

    天長地久有時盡
    장구한 천지도 다할 때가 있지만

    此恨綿綿無絶期
    이 한(恨)은 면면히 끊일 날 없으리라

    '장한가'는 120구, 840자로 이루어진 당현종(唐玄宗)과 양귀비(楊貴妃)의 슬프도록 아름다운 사랑 이야기이다.

    전단은 총 74구로, 현종이 양귀비를 만나 지극한 사랑을 나누다가 안녹산(安祿山)의 난으로 양귀비가 죽은 후 밤낮으로 그녀를 그리워하며 창자가 끊기듯 마음 아파하는 모습을 그렸다.

    후단 46구는 현종이 양귀비를 못 잊는 것을 안타깝게 여긴 한 도사가 선계로 가 선녀가 되어 있는 양귀비를 만나 그녀에게 들은, 현종을 그리워하는 양귀비의 마음과 두 사람이 나눈 사랑의 맹약으로 되어 있다.

    위에 예를 든 부분은 선녀가 된 양귀비가 도사에게 이야기해 준, 천보(天寶) 10년(751) 칠월칠석에 현종과 양귀비가 화청궁(華淸宮)에 거동하여 노닐며 장생전에서 나눈 사랑의 맹약으로, '장구한 천지도 다할 때가 있지만 이 한은 면면히 끊일 날 없으리라'는 구절에서 영원히 변치 않는 애정을 비유하는 말인 '천장지구'가 유래했다.

    '장한가'는 수많은 사람들에게 애창되었으며, 시가와 소설과 희곡으로 윤색되는 등, 중국 문학에 많은 제재를 제공했다.


    ◼ 천장지구(天長地久)

    하늘과 땅이 끝이 있을까. 하늘만큼 길고(天長) 땅만큼 오래(地久)라는 하늘과 땅이 처음 존재했던 때로부터의 시간만큼 길고 오래되었다는 무한의 뜻이다. 이 말이 귀에 익은 사람들은 홍콩의 느와르 명작영화를 먼저 떠올릴 것이다.

    1990년 유덕화(劉德華), 오천련(吳倩蓮)의 애틋한 사랑은 속편까지 나왔을 정도로 인기를 끌었다. 영화의 원제 천약유정(天若有情)도 당(唐)나라 시인 이하(李賀)의 시구에서 따왔다지만 우리나라서의 번역명은 더 잘 알려진 데서 나왔다.

    노자(老子)의 도덕경(道德經)에 실려 있고, 역시 장한가(長恨歌)로 유명한 백거이(白居易)의 사랑 표현에서 나왔기 때문이다.

    도덕경의 제7장 도광(韜光)장을 먼저 보자.

    天長地久. 天地所以能長且久者, 以其不自生, 故能長生.
    하늘과 땅은 영원무궁하다. 하늘과 땅이 능히 이런 것은 스스로를 위해서 살지 않기 때문에 장생할 수 있는 것이다.

    노자가 태고 때부터 영원한 존재인 하늘과 땅이 서로 경쟁하지 않았다는 당연한 사실을 말한 것은 이어지는 성인을 비유하기 위해서였다.

    성인은 자신을 위한 것을 뒤로 돌림으로써 남보다 앞에 나설 수 있고, 자신보다 남을 위함으로써 자신이 존재하게 된다. 성인뿐 아니라 천도의 무위자연을 본받아 사심 없이 대하면 누구나 훌륭하게 된다는 이야기다.

    이런 당연한 이치를 돌려 말한 노자에 비해 낙천(樂天)이란 자로 더 잘 알려진 백거이는 글자대로 하늘과 땅만큼 영원히 변치 않는 사랑을 노래했다.

    그의 장한가는 전체 4장에 120구, 840자나 되는 장편으로 당(唐)나라 6대 황제 현종(玄宗)과 미인의 대명사 양귀비(楊貴妃)의 비련을 그렸다.

    마지막 장에 성어가 나오는데 화목한 부부나 남녀관계를 말하는 비익연리(比翼連理) 구절부터 보자.

    在天願作比翼鳥
    在地願爲連理枝
    하늘에선 날개 붙은 비익조가 되고, 땅에선 가지 붙은 연리지 되길 원하네.

    天長地久有時盡
    此恨綿綿無絶期
    장구한 천지도 다할 때가 있건만, 이 한은 면면히 끊일 날 없으리라.

    하늘과 땅처럼 영원하도록 자기를 뒤로 하고 남을 앞세우는 훌륭한 사람이 본받을 일이다. 남을 위해 일을 하겠다는 지도층이 명심할 말이고 일반 사람들은 영원한 남녀의 사랑에 더 솔깃하다. 사랑하는 짝이 나타나면 누구나 자신의 사랑은 영원히 변치 않을 것이라며 상대에 진심을 알아 달라고 애탄다.

    사랑이 성공한 뒤에는 초기에 열렬한 만큼 쉬 식는 사람도 많다. 더 문제인 것은 적령기의 청춘들이 여건이 되지 않는다고 아예 사랑을 포기한다는 사실이다. 비익연리가 되고 하늘처럼 땅처럼 영원한 사랑이 많아져야겠다.


    ◼ 천장지구(天長地久)

    하늘은 길고 땅은 오래간다

    통행본 장 7장

    天長地久.
    하늘은 길고 땅은 오래간다

    天地之所以能長且久者, 以其不自生也, 故能長生.
    하늘과 땅이 길고 오래갈 수 있는 것은
    스스로 삶을 도모하지 않기 때문이니
    그 때문에 장생할 수 있다

    是以聖人退其身而身先, 外其身而身存. 不以其无私與.
    이 때문에 성인은 자신을 뒤로 물리면서도 자신이 앞에 있게 되고, 자신을 밖으로 내몰면서도 자신을 보존하게 되니 사사로움이 없기 때문이 아니겠는가.

    故能成其私.
    그러므로 결국 그 사사로움을 이룰 수 있다.

    ○ 天長地久.
    '노자'는 여기에서 하늘과 땅의 장구함을 말함으로써 사람을 깨우치려고 하였다. 남다른 통찰력으로 자연을 독해하여 교훈을 얻는 것은 '노자'의 주요한 어법이다.

    왜 하늘은 '길고' 땅은 '오래간다'고 하였는가? 길다는 것은 모양이고, 오래간다는 것은 시간이다. 원래 하늘은 시간을 기준으로 움직이기 때문에 모양에서 부족하다는 혐의가 있고, 땅은 모양으로 움직이기 때문에 시간에서 부족하다는 혐의가 있다. 그 혐의를 벗기 위해서 거꾸로 이야기한 것이다. 재미있는 설명이다.

    소철은 하늘과 땅도 형체를 가졌으므로 장구함에는 한계가 있고, 진정으로 장구한 것은 천지의 시작 같은 것이라고 하였다. 곧 천지의 시작 같은 형이상의 세계만 영원하다고 본 것이다. 이것이 송대의 분위기다. 상식적 정서로는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 곳에서 문제를 잡아내는 것을 보면 그 시대의 분위기를 대충 짐작할 수 있다.

    주겸지는 이것이 원래 옛말인데, '노자'가 인용하여 풀이한 것이라고 하였다. 이 글 전체가 "하늘은 길고 땅은 오래간다"는 금언을 풀이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 天地之所以能長且久者, 以其不自生也, 故能長生.
    하늘과 땅이 길고 오래갈 수 있는 것은 스스로 삶을 도모하지 않기 때문이니 그 때문에 장생할 수 있다.

    여기에서 '자생(自生)'이라는 말은 '자사(自私)'라는 말과 같다. 곧 "스스로 삶을 도모하지 않는다"는 것은 "허겁지겁 자기만 배부르기를 도모하고 사사로이 다른 사람 것을 빼앗아 자기에게 주지 않는 것"을 말한다.

    그렇게 하는 사람이 장생할 수 있는 이유는 "스스로 삶을 도모하면 사물(남)과 다투게 되고, 스스로 삶을 도모하지 않으면 사물과 함께 편안한 곳으로 돌아갈 수 있기" 때문이다.

    이미 '노자'는 스스로 삶을 도모하는 일의 폐해를 이야기한 바 있다. "백성들은 살고 또 살려고만 하니 몸을 움직여 사지로 가는 것이 또 십 분의 삼이다." "목숨을 더하려는 것을 요망하다고 한다." "무릇 살기 위해서 무엇인가를 하지 않는 것이 생명을 귀하게 잘 여기는 것이다." 지금 문장과 서로 참고하면서 보면 더 좋겠다.

    여기에서 '생(生)'자를 '태어난다' 또는 '태어나게 한다'는 뜻으로 푸는 경우도 있다. "죽지 않으면 태어남도 없다. 태어나지 않는 것이라야 능히 태어나고, 또 태어나게(生生) 할 수 있다. 하늘과 땅이 길고 오래갈 수 있는 이유는 스스로 태어나지 않기 때문이니 스스로 태어나지 않기 때문에 장생할 수 있다. 마치 골짜기의 신(곡신)과 같다."

    이런 해설은 '열자' 천서의 다음 문장에서 영향을 받은 것이다. "태어나지 않는 것만이 태어나고 또 태어나게 할 수 있고, 변화하지 않는 것만이 변화하고 또 변화하게 할 수 있다. (…) 사물을 태어나게 하는 것은 태어나지 않고, 사물을 변화하게 하는 것은 변화하지 않는다."

    이것은 "골짜기의 신은 죽지 않는다"는 말에 대한 '열자'의 해석이다. 이런 해석이 멋들어지게 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이런 해석을 택한다면 이 문장이 어떻게 뒤의 문장과 연결되는지 복잡하게 설명해야 할 것이다.

    ○ 是以聖人退其身而身先, 外其身而身存,
    이 때문에 성인은 자신을 뒤로 물리면서도 자신이 앞에 있게 되고, 자신을 밖으로 내몰면서도 자신을 보존하게 되니,

    앞의 문장을 부연한 글이다. 여기에서는 스스로 삶을 도모하지 않는 것이 무엇이며, 그를 통해 어떤 좋은 결과가 있는가를 설명한다.

    하상공에 따르면 "남을 먼저하고 나를 뒤로하면 천하가 그를 존경해서 먼저 어른으로 모신다. 자기를 박하게 하고 남을 후하게 하면 백성이 그를 부모처럼 사랑하고 신명은 그를 어린아이처럼 보우해서 몸을 항상 보존하게 된다."

    각기 다른 해설이 있지만 그 뜻은 크게 다르지 않다. "이 때문에 성인은 백성 위에 서려고 할 때는 반드시 그 말을 낮추고, 백성 앞에 서려고 할 때는 반드시 그 몸을 뒤로 한다"는 말과도 서로 통한다.

    '도응훈'은 이 말을 공자 시대의 인물인 공의휴(公儀休)의 고사에 빗대어 설명한다. 공의휴는 생선을 대단히 좋아했는데, 그가 노나라의 재상이 되었을 때 사람들이 좋은 생선을 갖다 바쳤으나 전부 거절했다는 것이다.

    그 제자가 까닭을 물었을 때 공의휴는 이렇게 대답했다. "오직 생선을 좋아하기 때문에 받지 않은 것이다. 생선을 받아서 재상직에서 쫓겨나게 되면 비록 생선을 좋아한다고 하더라도 생선을 자급해서 먹을 수 없을 것이고, 생선을 받지 않고 재상직에서 쫓겨나지 않으면 오랫동안 생선을 자급해서 먹을 수 있을 것이다."

    공의휴는 생선을 좋아하면서도 그 욕심을 내세우지 않고 선물로 들어오는 생선을 물리쳤으므로 자신을 뒤로 물린 것이고, 그렇게 해서 계속해서 생선을 먹을 수 있었으므로 결국 자신이 앞에 있게 되었다

    이 고사는 '한시외전' 권3에도 인용되어 있으며, 그곳에서도 역시 '노자'의 지금 문장을 소개한다. 단지 '한시외전'은 '노자'를 소개한 후 "생각함에 사특함이 없다(思無邪)"는 '시'의 정신도 이 고사와 관련되어 있다고 첨언했을 뿐이다.

    그런데 정말 공의휴의 고사는 "생각함에 사특함이 없다"는 '시'의 정신과 연결될 만한가? 철저한 도덕주의자가 본다면 공의휴는 도덕적인 인물이 아니다. 그는 이미 이익을 계산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중국의 공리주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이익에 대한 계산쯤은 누구나 다 하는 것 아닌가. 복을 바라고, 이익을 추구하는 게 잘못된 일은 아니지 않는가.

    어쨌거나 지금 '노자'의 문장은 궁극적으로 사사로움이 없는 삶의 태도(無私)를 요구한다. 그러므로 "생각함에 사특함이 없다"는 말과 연결된 것이다.

    여담이지만 공의휴의 고사는 원래 '한비자 외저설우하'에 나온다. '도응훈'은 한비자를 보고 그 고사를 가져온 것이 분명하다. '도응훈'의 '제자(弟子)'라는 말은 '외저설우하'에서는 '동생(弟)'으로 되어 있는데, '도응훈'이 고사를 가져올 때 약간 바뀐 것이다.

    그런데 이와 유사한 고사는 '안자춘추'에서 제나라의 현신 현장(弦章)의 일로 언급된다. 상황은 조금 다르지만 선물로 들어온 고기를 사양했다는 것이 이야기의 뼈대이다. 현장은 안자를 이어 경공(景公)을 도운 인물이므로 역시 공의휴처럼 공자와 동시대 인물이다. 여기에서도 같은 이야기가 주인공만 바뀌어 다른 곳에서 나타나는 중국 고사 전설의 패턴을 확인할 수 있다.

    ○ 不以其无私與. 故能成其私.
    사사로움이 없기 때문이 아니겠는가. 그러므로 결국 그 사사로움을 이룰 수 있다.

    이 문장은 예로부터 약간의 혐의가 있었다. "사사로움을 이룬다"는 말 때문이다. '사'는 '설문'에 '사(厶)'로 되어 있는데, 이 글자는 원래 간통하는 것을 나타낸다.

    중국은 위진남북조 시대에 개인을 가장 강조했지만 그래도 지금의 개인주의 하고는 거리가 멀고, 전시대를 통틀어 보면 멸사봉공의 막강한 공사 관념이 있었다. "사사로움을 이룬다"는 말에 혐의가 잔뜩 끼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래서 가령 "사사로운 이익을 계산하고 이익을 도모한 것이 아니라 일의 추세가 자연스럽게 그렇게 되는 것이니 마치 겸손히 있는데도 빛이 나고, 몸을 잊었는데도 장수를 누리는 것과 같다"는 식의 발명이 필요했다.

    이런 해설도 잘못된 것은 아니다. 그렇지만 그보다는 이 문장도 역시 앞에서 말한 '무위이무불위'의 말의 구조를 통해서 이해하면 쉽다.

    곧 앞의 사사로움과 뒤의 사사로움은 함의가 다르다. 뒤의 사사로움이라는 말은 "몸(身)을 두고 말한 것이지 공·사의 사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사사로움을 이룰 수 있다"는 말은 "자신이 앞에 있게 되고" "자신을 보존하게 되는" 것을 말한다.

    그런데 '노자'의 말의 구조는 좀더 복잡하다. "무위하면 하지 못하는 것이 없다"는 말에서 "하지 못하는 것이 없다"는 것은 '노자'의 본의에서 볼 때 무소불위한 능력을 가지게 된다는 말이 아닌데도 결국은 그런 느낌을 불러일으키는 것처럼 "그 사사로움을 이룰 수 있다"는 말 역시 이기적 욕망을 충족시킬 수 있다는 뜻은 아니지만 역시 그런 암시를 준다.

    경공이 안자에게 물었다. 
    "반듯한 정치를 해서 장구할 수 있다면 어떻게 행해야 하는가?" 
    안자가 대답하였다. 
    "그 행함은 물과 같은 것입니다." (안자춘추 내편 문하)

    ◼ 천장지구(天長地久)

    중국 영화 중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영화 제목 중에 '天長地久'란 영화가 있습니다. 
    우리말로 번역하면 '하늘은 길고 땅은 오래다'는 뜻인데요, 유덕화와 오천련이 주연으로 나온 이 영화는 '하늘과 땅처럼 사랑이 영원하리라'는 주제를 우리에게 잘 알려진 중국 영화입니다.

    이 영화의 제목 '천장지구'는 원래 노자의 도덕경에서 나온 것입니다. 
    노자 도덕경 7장에 나오는 천장지구의 원래 뜻은 이 영화에서 말하는 변치 않는 사랑의 의미와는 좀 다릅니다.

    하늘과 땅은 장구합니다(天長地久). 천지가 저토록 장구 할 수 있는 이유는(天地所以能長且久者는) 억지로 하려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以其不自生이라). 그래서 천지는 장구할 수 있는 것입니다(故로 能長生이라).

    이 구절에서 노자는 하늘과 땅이 수많은 세월동안 장구(長久)한 이유를 '부자생(不自生)'이라고 정의하고 있습니다. 자생(自生)은 스스로 만든다는 뜻입니다. 여기에 '부(不)'라는 부정어가 붙어 억지로 만들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하늘과 땅은 의지와 목적을 가지고 간섭하는 주체가 아니라는 겁니다. 자신들의 품안에서 자라는 세상의 모든 만물이 스스로 자랄 수 있도록 도와주는 주체일 뿐 강요하는 존재는 아니라는 뜻인데요.

    천지는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 풀 한포기 나무가 한그루마저도 스스로 자랄 수 있도록 돌봐주는 어머님의 마음을 가진 존재일 뿐입니다.

    노자는 이런 자연의 불간섭 원리를 그의 철학에 적용하였습니다. 리더는 천지의 마음을 가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인위적인 강요를 하지 않는 무위(無爲)의 리더십을 통해 사람들을 스스로 그렇게 되도록 만드는 자연(自然)의 결과를 내라는 것입니다. 일명 무위자연(無爲自然)이라는 역설적인 리더십입니다.

    노자철학에 의하면 리더는 간섭하는 존재가 아닙니다. 
    스스로 할 수 있도록 환경을 만드는 천지(天地)를 닮은 리더가 진정한 리더의 모습입니다. 
    관심이라는 명목으로 직원들에게 강요하지 말고, 자신의 생각과 신념을 직원들이 스스로 따를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주라는 것입니다. 결과적으로 강요하는 리더보다 오히려 장구(長久)하게 리더로 남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노자는 뒤이어 이렇게 말합니다. 
    "한 발짝 뒤로 물러서세요. 
    그러면 오히려 당신은 앞에 서게 될 것입니다(後其身而身先). 
    한 발짝 밖으로 비켜서세요. 
    그러면 오히려 당신은 안에 있게 될 겁니다(外其身而身存)."

    내가 리더로서 남보다 낫고 그들을 다스린다는 생각을 가지고 억지로 지도하려 할 때 오히려 그 자리를 보존하지 못하게 된다는 역설적인 리더십 철학입니다.

    억지로 간섭하지 않기에 오히려 장구할 수 있고, 군림하려 하지 않기에 결국은 위에 있을 수 있을 것이라는 노자의 이 기막힌 '역설의 리더십'을 저는 일명 '조용한 리더십'이라 정의하고 싶습니다.

    행복한 동행이란 글에 나오는 구절입니다. 
    "어느 때는 그냥 두세요. 아무 말도 하지 말고, 그냥 내버려 두세요. 우리가 힘들어 하는 것의 많은 부분은, '관심'이라는 간섭 때문입니다. (...) 사랑이란 일으켜 세워주고 붙드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일어나 자랄 수 있다고 믿는 것입니다."

    세상은 반드시 강요한다고 원하는 데로 되지 않는 것 같습니다. 때로는 말없는 가르침 '불언지교(不言之敎)'를 행해 보십시오. 섬기는 리더가 오히려 섬김을 받을 수 있다는 노자의 아름다운 철학을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하늘과 땅은 만물에게 간섭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그렇게 장구할 수 있는 것입니다. 
    '천장지구', 우리 가슴 속에 늘 채우고 살아야 할 삶의 화두입니다.


    톨스토이의 단편 소설 《사람에게 얼마나 많은 땅이 필요한가?》


    세계적으로 유명한 대문호 톨스토이의 단편 소설 “사람에게 얼마나 많은 땅이 필요한가”는 인간의 끝없는 욕망과 그로 인한 파멸을 강렬하게 그려낸 작품이다. 이 작품은 물질적 욕망이 인간을 어떻게 파멸로 이끄는지 보여주는 동시에 삶에서 가장 중요한 것, 사람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에 대한 질문을 던진다.

    《사람에게 얼마나 많은 땅이 필요한가》 줄거리

    이야기는 도시에 사는 언니와 시골에서 농부와 사는 동생의 대화에서 시작된다.

    언니는 상인과 결혼해 자신의 호화로운 도시 생활을 자랑한다. 
    이에 동생은 도시 생활은 악마의 유혹으로 가득 차 있으며, 농촌 생활이 훨씬 안정적이라고 주장한다. 
    언니와 동생의 이야기를 듣던 동생의 남편 ‘파홈’은 아내의 말에 동의하며 말한다.

    “우리 농부들은 어릴 때부터 땅을 벗 삼아 살아왔기 때문에 어리석은 생각에 빠질 틈이 없습니다. 
    다만 넓은 땅이 없다는 게 아쉽습니다. 원하는 만큼의 땅만 가질 수 있다면 악마도 무섭지 않을 텐데.”

    난로 뒤에서 이들의 대화를 모두 엿듣고 있었던 악마는 파홈의 말에 화가 치밀어 올랐다. 
    악마는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어디 한번 붙어보자. 내가 너에게 땅을 넉넉히 주겠다. 그리고 그 땅으로 널 홀리겠다.”

    첫 번째 땅을 소유한 파홈

    파홈이 사는 마을 근처에는 한 여성 지주가 많은 땅을 가지고 있었다. 그녀는 평소 소작인들과 좋은 관계를 유지했지만, 새로운 관리인이 들어오면서 관리인이 소작인들을 괴롭히기 시작했다. 이에 소작인들은 여지주에게 땅을 자신에게 팔아달라 요청했고, 이때 파홈도 15정보(약 5만 평)의 땅을 사게 된다.

    그는 자신의 땅에서 농사를 짓고, 수확을 얻으며 점점 안정적인 생활을 하게 되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자 이웃 농부들의 가축이 그의 땅을 침범하는 일이 발생했고, 파홈은 이웃들과 다투게 되었다. 땅으로 인해 소송을 걸고, 벌금을 매기고, 사람들의 원성을 들었지만 그는 오히려 더 많은 땅을 소유하고 싶다는 욕망을 느꼈다.

    더 넓은 땅을 찾아 떠난 파홈

    그러던 어느 날 파홈은 먼 지방에서 온 한 농부로부터 볼가강 너머의 기름진 땅에 대한 이야기를 듣게 된다. 그곳의 농부들은 조합을 통해 땅을 배분받아 풍족한 삶을 살고 있다는 것이다. 파홈은 자신이 가진 땅을 모두 정리한 후 가족들과 함께 그곳으로 이주했다.

    새로운 땅에서 그는 50정보(15만 평)의 땅을 분배 받았다. 땅이 넓어 만족스러운듯 했지만, 넓은 땅에 대한 욕망은 시간이 지나면서 또 다시 커져갔다. 그는 파산한 농부가 헐값에 내놓은 땅을 사기로 했다.

    땅값의 잔금을 준비하던 때, 파홈은 바시키르라는 마을에서 온 상인에게 솔깃한 정보를 듣게 된다. 바시키르족이 사는 마을에 가면 매우 싼 값에 땅을 살 수 있다는 것이다.

    파홈은 더 많은 땅을 얻을 기회라 생각하고, 일꾼 한 명을 데리고 바스키르족이 있는 마을로 향한다.

    바스키르족과의 거래

    바스키르족은 친절했다. 바스키르의 촌장은 파홈에게 원하는만큼 땅을 줄 수 있다고 했다. 그들이 땅을 파는 방식은 매우 특이했다. 땅값으로 1000루블을 지불한 뒤, 갖고 싶은 만큼의 땅을 하루 안에 걸어 표시하면 그 땅을 모두 주겠다는 것이다. 단, 해가 지기 전까지 출발 지점으로 돌아와야 한다는 것이 조건이었다.

    그날 밤, 파홈은 엄청난 땅을 얻을 생각에 설레서 좀처럼 잠들지 못했다. 뜬눈으로 밤을 지새우다 새벽녘에야 겨우 잠들었다.

    파홈은 잠결에 텐트 밖에서 나는 촌장의 웃음소리를 들었다. 밖을 내다보니 촌장이 배를 움켜잡고 기괴하게 웃고 있었다. 자세히 살펴보니 그는 촌장이 아니라 자신에게 바스키르를 소개해준 상인이었다. 상인에게 말을 걸려고 쳐다보자, 상인이 갑자기 악마로 변했다. 악마는 바닥에 쓰러진 한 남자를 보고 깔깔 웃었다. 바닥에 쓰러진 남자는 파홈 자신이었다.


    파홈의 눈이 번쩍 뜨였다. 날이 밝아오고 있었다. 파홈은 불길한 꿈을 꾸어 기분이 좋지 않았으나 서둘러 일꾼과 함께 촌장이 있는 곳으로 향했다. 촌장은 여우털 모자를 어느 땅에 내려놓고 파홈에게 이곳에서부터 출발해 돌아오라고 말했다.

    파홈은 삽을 메고 걷기 시작했다. 눈에 보이는 모든 땅이 비옥했다. 1km쯤 갔을 때, 그는 구덩이를 파서 잔디 조각을 놓아 자신의 땅이라고 표시했다.

    가면 갈수록 눈앞에 펼쳐진 탐스러운 땅으로 인해 파홈의 걸음은 빨라졌다. 중간에 몇 번씩 돌아갈까 고민했지만 아직 돌아가기는 이르고, 조금만 더 가면 더 넓은 땅을 가질 수 있다는 생각에 걸음을 멈출 수 없었다. 정오가 되어 그는 잠시 빵과 물로 끼니를 해결한 뒤 다시 한참을 들판을 걸어다녔다.

    정신차려보니 어느덧 해가 지고 있었다. 파홈은 출발점으로 돌아가기 위해 다급하게 뛰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미 멀리 와버린 탓에 지칠대로 지친 상태였다. 파홈의 숨이 가빠졌다. 온몸에 힘이 빠졌지만 여기서 포기하면 모든 것이 수포로 돌아가기에 그는 목숨을 걸고 출발 지점을 향해 뛰었다.

    출발 지점에 가까워졌을 때, 파홈은 언덕 위에서 자신을 보며 환호하는 사람들을 보았다. 언덕 위에는 아직 해가 빛나고 있었다. 그는 마지막 남은 힘으로 언덕을 올랐다. 촌장은 옆구리를 움켜 잡고 웃고 있었다. 마침내 출발 지점에 도착했다. 파홈은 다리에 힘이 풀려 그대로 고꾸라졌다. 그의 손이 여우털 모자에 닿았다.

    촌장이 소리쳤다.

    “아, 참으로 훌륭합니다. 진짜 좋은 땅을 차지했습니다.”

    일꾼이 달려가 쓰러진 파홈을 일으키려 했으나, 파홈은 이미 숨을 거둔 상태였다.

    일꾼은 파홈을 누일 수 있을만큼의 구덩이를 파, 파홈을 그곳에 묻었다.

    파홈이 묻힌 땅은 약 2m 정도가 전부였다.

    《사람에게 얼마나 많은 땅이 필요한가》가 주는 교훈

    톨스토이는 마지막 문장을 통해 인간에게 필요한 땅은 결국 죽어서 누울 작은 무덤의 크기뿐이라는 교훈을 전한다. 파홈은 처음에 작은 땅으로도 만족했지만, 욕심이 커질수록 더 많은 땅을 원했다. 결국 자신의 욕망이 스스로를 파멸로 몰고가는 비극적인 결말을 맞이했다.

    파홈의 수고는 모두 헛된 것이 되었다. 그가 죽었기 때문이다. 사람이 죽으면 소유하던 물질과 재산은 그와 전혀 상관이 없게 된다. 성경에도 이와 비슷한 이야기가 등장한다.

    파홈과 성경 속 어리석은 부자

    그리고 그들에게 비유를 하나 말씀하셨다. “어떤 부자가 밭에서 많은 소출을 거두었다. 그래서 그는 속으로 ‘내 소출을 쌓아둘 곳이 없으니, 어떻게 할까?’ 하고 궁리하였다. 그는 혼자 말하였다. ‘이렇게 해야겠다. 내 곳간을 헐고서 더 크게 짓고, 내 곡식과 물건들을 다 거기에다가 쌓아두겠다. 그리고 내 영혼에게 말하겠다. 영혼아, 여러 해 동안 쓸 많은 물건을 쌓아두었으니, 너는 마음놓고 먹고 마시고 즐겨라.’

    (새번역 누가복음 12:16~18)

    예수님의 비유에는 한 부자가 등장한다. 부자는 수확이 많아지자 창고를 더 크게 짓고, 앞으로 평안히 먹고 마시며 즐거이 살 계획을 세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이렇게 말씀하신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말씀하셨다. ‘어리석은 사람아, 오늘 밤에 네 영혼을 네게서 도로 찾을 것이다. 그러면 네가 장만한 것들이 누구의 것이 되겠느냐?’

    (새번역 누가복음 12:19)

    파홈은 더 많은 땅을 소유하면 행복할 것이라 믿었다. 부자 역시 부를 축적해두고 앞으로 행복할 일만 남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결국 죽으면 아무 의미가 없게 되는 것이 인생이다.

    또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목숨이 음식보다 중하고 몸이 의복보다 중하니라 까마귀를 생각하라 심지도 아니하고 거두지도 아니하며 골방도 없고 창고도 없으되 하나님이 기르시나니 너희는 새보다 얼마나 더 귀하냐

    (누가복음 12:22~24)

    아무리 돈이 많은 부자라도 당장 오늘 밤 하나님이 그의 영혼을 찾으시면 소용이 없으며, 더군다나 재산과 물질은 우리의 생명을 보장해주지 못한다.

    저희에게 이르시되 모든 탐심을 물리치라 사람의 생명이 그 소유의 넉넉한 데 있지 아니하니라 하시고

    (누가복음 12:15)

    “사람에게 얼마나 많은 땅이 필요한가” 이야기 속 파홈 그리고 비유 속 부자처럼, 오늘날 많은 사람들은 물질적인 풍요가 가장 큰 행복이라고 믿는다. 더 넓은 집, 더 좋은 차, 더 많은 재산이 목표가 되어 버린 시대다. 그러나 성경은 물질적인 풍요만을 삶의 목적으로 삼아서는 안 된다고 교훈한다. 그렇다면 우리가 바라보아야 하는 것은 무엇일까?

    솔로몬의 깨달음: 부와 권력을 가진 뒤에 깨달은 진정한 삶의 가치

    고대 이스라엘 왕국의 황금기를 이끈 솔로몬 왕은 명예와 권력은 물론이고 상상을 초월하는 부를 누린 왕이다. 솔로몬 시기, 주변국들은 솔로몬에게 엄청난 조공을 바쳤고, 해마다 약 23톤의 금이 솔로몬 왕의 궁으로 들어왔다. 그의 궁전에서 사용하는 모든 잔과 그릇은 순금으로 만들어졌으며, 예루살렘에서 은은 돌처럼 흔할 정도였다. 그러나 이 모든 부귀영화를 누렸던 솔로몬은 인생의 말년에 허무함을 이야기하며 전도서를 기록했다.

    다윗의 아들 예루살렘 왕 전도자의 말씀이라 전도자가 가로되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전도서 1:1~2)

    이 삶에서 진정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부나 명예 같은 세속적인 물질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솔로몬은 사람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 많은 땅, 돈 같은 부나 명예가 아니라 하나님의 존재를 기억하고, 하나님의 명령을 지키는 것이라고 하였다.

    육체가 원래 왔던 흙으로 돌아가고, 숨이 그것을 주신 하나님께로 돌아가기 전에, 네 창조주를 기억하여라.

    (새번역 전도서 12:7)

    할 말은 다 하였다. 결론은 이것이다. “하나님을 두려워 하여라. 그분이 주신 계명을 지켜라 이것이 바로 사람이 해야 할 의무다.

    (전도서 12:13)

    하나님을 기억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준행하라는 것은 무슨 뜻일까. 바로 영의 세계를 바라보라는 것이다. 우리가 영원히 살아야 할 세계는 바로 이 땅이 아니라 천국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에 따름으로써 영원한 생명을 얻고, 천국에 들어가 영적인 부요를 누릴 수 있다. 앞서 살핀 말씀처럼 재산이나 물질은 우리의 생명을 지켜줄 수 없지만,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를 영원한 생명으로 인도한다.

    기록된 바 눈으로 보지 못하고 귀로 듣지 못하고 사람의 마음으로 생각하지도 못한 것들을 하나님께서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을 위하여 예비하셨다 함과 같으니라

    (고린도전서 2:9)

    그래서 솔로몬은 이 땅에서 누리는 잠깐의 부요보다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라고 교훈한 것이다. 영적인 준비 없이 세상의 물질에만 집착하는 삶은 결국 허망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 죽음을 눈앞에 두고서도 땅을 얻기 위해 내달렸던 파홈처럼 말이다.

    사람에게는 얼마나 많은 땅이 필요한가. 육적인 삶만 바라보고 사는 이들이 차지할 땅은 한정되어 있다. 그러나 영의 세계를 바라보고 사는 사람이 차지할 땅은 다르다.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천국은 무한한 영광과 풍요로 가득하다.

    유한한 세상에서 잠깐의 만족을 위해 살 것인가?

    무한한 천국을 얻기 위해 영의 세계를 바라보고 준비할 것인가?

    이제 스스로의 선택에 달렸다.

    어느 날, 하나님께서 “오늘 밤 내가 네 영혼을 찾겠다” 말씀하신다면 당신은 어떤 반응을 보이겠는가.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땅에 쌓아두지 말라 거기는 좀과 동록이 해하며 도적이 구멍을 뚫고 도적질하느니라 오직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하늘에 쌓아두라 거기는 좀이나 동록이 해하지 못하며 도적이 구멍을 뚫지도 못하고 도적질 하지도 못하느니라 네 보물이 있는 그곳에는 네 마음도 있느니라

    (마태복음 6:19~21)



    사람에게는 얼마만큼의 땅이 필요한가?》(러시아어: Много ли человеку земли нужно? 므노고 리 첼로베쿠 제믈리 누즈노[*])는 1886년 출판된 레프 톨스토이단편 소설로, 톨스토이는 본 작품을 통해 인간의 욕심과 그로 인한 파멸을 경고하였다.

    필요한 만큼만 원하는 검소함을 자랑으로 여기던 러시아인 농부 파홈(Пахом, Pahom)[1]은 아내를 찾아온 처형에게 '농부의 삶은 땅만 충분하다면 악마도 두렵지 않다'고 호언장담한다. 그런데 악마 한 마리가 난로 뒤에 숨어 이들의 대화를 엿듣고 있었고, 속으로 선언한다.

    이후 파홈은 근면하게 일하는 동시에 여기저기서 돈을 끌어모아 원하는 만큼의 땅을 손에 넣는 데 성공하지만 악마의 계략과 이간질 그리고 소유한 땅이 넓어지면서 이웃들과 지속적인 트러블이 일어나 골머리를 앓는다.[2] 그러는 와중에도 소유한 땅을 불려가던 파홈이지만, 날이 갈수록 자신의 처지와 소유한 땅의 크기에 대해 불만을 느낀다. 그러던 어느 날 굉장히 넓은 땅을 거저나 다름없는 금액에 판다는 바시키르인 유목민의 소문을 듣고 파홈은 그들을 찾아간다.

    유목민들의 거래 조건은 지극히 간단한데, 해가 뜨고 나서부터 해가 지기까지 걸어서 이동한 뒤 시작 지점으로 되돌아오면 단돈 1000루블[3]걸었던 구간의 내부 면적만큼 땅을 받을 수 있다는 것. 하지만 시작 지점에 조금이라도 늦게 도착하면 선지불한 1000루블은 돌려받지 못하고 계약은 파기된다는 조건이다.

    조건을 승낙한 파홈은 바시키르인 마을에서 하룻밤을 자고 내일 아침에 출발하기로 하는데, 그날 밤에 자신이 무리를 한 나머지 쓰러져 죽게 되고 악마가 그런 자신을 보며 비웃는 꿈을 꾼다.

    이튿날 아침, 파홈은 악몽을 꾼 것을 찜찜해하면서도 땅을 차지하기 위해 출발한다. 하지만 걸으면 걸을수록 점점 더 기름진 토지들을 보게 되고, 이것들을 모두 차지하기 위해 욕심을 부리다가 결국 해가 지기 전에 도착하지 못할 위기에 처한다. 마지막 순간에 파홈은 거추장스러운 신발과 옷도 전부 벗어던지고 젖먹던 힘까지 내어 달려 시작 지점에 도착하는 데 성공하지만, 지나치게 몸을 혹사시킨 나머지 그대로 넘어져 피를 토하며 즉사한다. 그리고 이를 본 악마는 통쾌하게 웃는다.

    죽기 직전의 파홈에게 엄청난 땅을 얻었다고 축하를 해 주던 바시키르인 촌장을 옆에 둔 채, 파홈의 하인은 죽은 주인을 묻을 땅을 파기 시작한다. 그리고 소설은 다음의 해설과 함께 끝이 난다.

    누가복음 8:15
    개역개정,15 좋은 땅에 있다는 것은 착하고 좋은 마음으로 말씀을 듣고 지키어 인내로 결실하는 자니라.


    누가복음 8:15
    그 좋은 땅에 있다는 것은  착하고(정직하고) 좋은 마음으로 말씀을 듣고 지키어 인내로 결실하는 자니라.

    그(3588) 좋은 땅(테 칼레 게) 호 칼로스(2570) 게(1093)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 그 말씀을 듣고(191),
          지키어(2722), 인내로(5281) 결실하는 자(2592) 

    듣고(191) 아쿠오(akŏuōἀκούω

    1. 듣다.  2. 마 10:14
    발음 [ akŏuō ]  
    관련 성경  /  듣다(마2:3, 눅4:28). 들리다(계12:10).

    지키다(2722) 카테코(katĕchō)  κατέχω
    1. 제지하다.  2. 굳게 붙들다.  3. 차지하다
    발음 [ katĕchō ]

    어원  /  미완료 κατεῖχον, 제2부정과거 κα- τέσχον, 2596과 2192에서 유래
  • 관련 성경 /  만류하다(눅4:42), 지키다(눅8:15, 고전11:2, 15:2), 가다(눅14:9), 걸리다(요5:4), 들어가다(행27:40), 막다(롬1:18, 살후2:6), 얽매이다(롬7:6), 가지다(고후6:10), 취하다(살전5:21), 머물다(몬1:13), 잡다(히3:6,14, 10:23), 차지하다(마21:38).

  • 인내(5281) 후포모네(hüpŏmŏnē)  ὑπομονή, ῆς, ἡ     

    1. 인내.  2. 대망
    발음 [ hüpŏmŏnē ]

    어원  /  5278에서 유래
    • 1.  인내, 참음, 견딤, 견인불발, 눅21:19, 롬5:3.
    • 2.  대망, 기대, 계1:9.
    • 관련 성경  / 참음(롬2:7, 고후12:12), 견디는 것(고후6:4, 골1:11), 인내함(딛2:2), 인내(눅8:15, 살후3:5, 벧후1:6).


    결실하는 자(2592)  카르포포레오(karpŏphŏrĕō)  kαρποφορέω 스트롱번호 2592

    1. 열매를 맺다.  2. 막 4:28. 3. 마 13:23
    발음 [ karpŏphŏrĕō ]

    어원 / 미래 καρποφορήσω, 제1부정과거 ἐκαρποφόρησα, 2593에서 유래
    • 1. 열매를 맺다, 수확을 내다.
      • a.  [문자적] 막4:28.
      • b.  [비유적: 내적 생활의 결실로서의 실천적 행동] 마13:23, 막4:20, 눅8:15. 
    • 관련 성경  /  결실하다(마13:23, 눅8:15), 열매맺다(막4:28, 롬7:5, 골1:10).



    󰃨 착하고 좋은 마음 - '마음'에 해당하는 헬라어 '카르디아'(*)는 인간의 영적, 지적, 의지적인 요소가 집중되어 있는 전인적(全人的)인 좌소를 가리킨다. 한편 '착한'에 해당하는 헬라어 '칼레'(*)는 '칼로스'(*)의 변형으로 '카코스'(*)의 반대어이다. '카코스'는 '올바로 쓰이지 못하는 펜'이나비겁한 병사처럼 그 목적에 부합되지 못하는 어떤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카코스'의 반대말인 '칼로스'는 목적에 적합한 것을 뜻한다고 볼 수 있다. 돈벌이나 사리사욕과 같은 낮은 차원의 성취에 몰두하지 않고 지혜나 의로움 등의 숭고한 일을 획득하는 일에 열심인 태도를 묘사하는 말이다. 복음의 씨가 뿌려져서 좋은 열매를 맺기에 적합한 마음은 그 다음의 형용사 '좋은'이라는 단어에 의해 더욱 분명해진다. '좋은'에 해당하는 헬라어 '아가데'(*)는 숭고한 목적을 성취하기 위해 필요시에는 작은 것들을 과감하게 포기할 줄도 아는 내면 상태를 가리킨다. 이 단어도 반대어인 '포네로스'(*)와 비교할 때 그 의미가 더욱 분명해진다. '포네로스'는 '적극적으로 악한 것'이란 뜻이며 '가장 큰 피해를 끼치는 것'을 말한다. 따라서 '포네로스'의 반대어인 '아가데'는 선하고 유익한 것이라는 의미가 분명해진다.

    󰃨 듣고 지키어 인내로 결실하는 자니라 -
     '착하고 좋은' 마음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달리 말해서 말씀을 듣되 그 말씀을 듣는데 그치지 않고 지키는 사람이다. 
    이런 사람은 염려, 재물에 대한 욕심, 그리고 쾌락과 같은 마귀의 시험을 '인내'로 견디어내 마침내 백배의 결실을 맺는다. 
    '인내'는 모든 영적 열매가 발아(發芽)하고 지속적으로 생산되는 데 있어 없어서는 안되는 필수 요소이다.


    󰃨 가시떨기에...일락에 기운이 막혀 - 가시떨기와 같은 상태의 사람들은 어느정도 영적인 성장을 할 수 있는 잠재력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로서 상당한 정도의 신앙을 갖게되지만 궁극적인 것과 부차적인 것의 가치를 혼동함으로써 결국에는 실패하는 부류들이다. 마치 세례요한의 메시지에 대해 그것이 옳은 것임을 알지만 세상적인 지위와 부귀에 대한 미련 때문에 결국은 인정하지 않고 죄를 범했던 헤롯 안디바와 갈은 사람들이다. 이런 사람들에게는 다음의 세 가지가 문제가 된다. 첫째는, 이생의 염려이다. 마가는 '이생의' 대신에 '세상의'라고 표현했는데(막4:19), 지극히 세속적인 것에 대한 염려 때문에 신앙이 온전히 성장하지 못하게 됨을 말함에 있어서는 같은 뜻이다.이 염려는 신앙 생활에 매우 해로운 것으로 영혼의 저항력을 조금씩 약화시켜 마침내는 아무런 열매도 맺지 못하는 죽은 영혼이 되게 하는 것이다. 예수께서는 이런 것을 경계하여 염려하지 말 것에 대한 교훈을 주신 바 있다(12:22-34;마 6:25-34). 둘째는 재리(財利) 이다. 재물에 대한 지나친 열망 때문에 진리를 따르지 못한 예는 '어리석은 부자'(12:16-21), '부자 관원'(18:18-23)과 같은 이야기에 아주 잘 나타나고 있다. 셋째는 일락(逸樂) 즉 생의 향락이다. 일시적이고 표면적이며 충동적인 육체의 쾌락을 위해 영혼의 존귀한 가치를 망각하는 사람들은 의외로 많다. 숭고한 영혼을 조금씩 침식하여 마침내는 영생에 이르는 열매를(요 4:36) 맺지 못하게 하는 생의 향락은 크게 둘로 나누인다. 첫째는 그 자체가 죄악이 되는 술취함, 음란한 행위, 폭력 등이며둘째는, 그 자체는 죄악이 아니나 심하게 빠져들 경우 죄가 될 수 있는 유흥(amusement), 스포츠 등이다.

    󰃨 온전히 결실치 못하는 - 성경에는 온전한 신앙을 갖지 못한 자들을 열매 없는 나무에 비유하는 경우가 있는데, 호 10:1,2는 그 대표적인 예로서 이스라엘 민족 전체를 잎사귀만 무성한 포도나무로 비유한다.


    성서학자에 의하면 구약의 중심 주제가 "땅"이라고 합니다.
    따라서 땅은 구약에서 빠뜨릴 수 없는 중심 주제라고 하겠습니다.
    인간은 땅의 흙으로 지어졌을 뿐 아니라, 삶과 역사가 땅이라는 공간 안에서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또한 그 땅은 하나님께서 인간을 만나시는 거룩한 장소이기에, 하나님 계시의 중심이기도 합니다.
    하나님께서 새로운 구원 역사를 위하여 아브라함을 부르실 때도, 자손 번성과 함께 땅의 소유를 약속하셨습니다. 
    그에 따라 출애굽 구원의 최종 목적지는 아브라함과 그의 후손에게 주시기로 약속한 가나안 땅이었습니다.

    땅이 구약의 중심 주제인 것은 통계를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 
    왜냐하면 구약에서 땅은 2504번이나 언급되고 있는데, 이것은 언약이 사용된 경우보다 더 많은 것으로서 땅이 중요한 주제라는 것을 암시합니다.
     
    구약에서 땅은 상징성을 지니기도 하지만, 대부분의 경우 현실적입니다.  
    즉 전쟁, 갈등, 횡포와 같은 무질서가 난무하는 삶의 현장이 땅에서 일어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직접 내려오셔서 구원 역사를 이루시는 역사의 무대 역시 땅입니다.
    구약은 땅을 향한 하나님의 관심과 그 땅에서 하나님과 동행하며 살아가는 거룩한 사람들의 자서전적 기록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하늘을 담고 있는 땅의 이야기라고 하겠습니다. 

    성서 주제로서의 중요성에도 불구하고, 최근까지 땅에 관한 연구가 소홀히 취급되었던 것입니다.
    그것은 땅을 이원론적으로 다루었던 기독교 신학의 입장이 크게 작용한 것과 관련이 있습니다.
    땅을 세속적이고 물질적인 것으로 구분하면서, 그 신학적 가치를 외면한 것입니다.
    광야를 세상으로 보고 가나안 땅을 천국으로 보는 것이나 가나안 정복과 입국을 은유적으로 해석하는 것은 그런 경향의 좋은 예라고 하겠습니다.
    그런 점은 교회가 즐겨 사용하는 찬송가 가사 내용에서도 쉽게 찾아 볼 수 있습니다. 
    ‘요단강 건너가 만나자’에서 강조되는 것은 요단강 건너편은 실제의 땅이 아니라 죽음 너머의 천국을 말합니다.
    땅을 역사적 현실이 아닌 미래 천국에서 받게 될 영원한 유업으로 해석한 것입니다.
    땅에 대한 해석의 방향은 내세 지향적인 것으로 치우쳐, 구약의 본래적 의미를 무시하는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신학적 주제로서 땅에 대한 본격적인 연구는 1948년 이스라엘 독립과 무관하지 않습니다. 
    이스라엘의 독립이 있기 전까지 땅의 주제는, 이스라엘-아랍 영토권 문제와 복잡하게 얽혀 있었던 민감한 정치적 이슈였습니다. 
    구약에서 땅의 문제는 불가피하게 이스라엘의 영토 소유권을 지지하는 것으로 이해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이 독립하여 정치적 실체로 등장하면서 그런 부담감이 사라져 버렸습니다. 
    그에 따라 땅에 대한 연구 분위기도 자연스럽게 부각되기 시작하였습니다. 
    이것이 1960년대 이후 땅의 신학적 논의가 성서학계에 본격적으로 등장하게 된 배경입니다. 

    구약성경에서 땅을 의미하는 대표적인 단어는 ‘아다마’와 ‘에레츠’라고 하겠습니다.
    물론 본문에서 사용된 단어 "묵은 땅"은 "니이르(nîyr)"라고 합니다.

    아다마와 에레츠는  

     두 단어를  가지가 있다.

    ‘아다마’는 ‘붉다’(red)는 뜻의 히브리어 ‘아돔’에서 파생된 것으로, 붉은색을 띈 비옥한 토양을 의미한다. 
    특히 이스라엘에서는 산지에서 흘러내려와 아래쪽 골짜기에 쌓인 충적토가 유명하다. 
    지중해 연안지역에서는 이를 ‘테라로사’(terra rosa), 즉 ‘붉은 색의 흙’이라고 부른다. 
    그러므로 ‘아다마’는 경작이 가능한 땅, 경제적으로 높은 가치가 있는 땅, 곧 인간의 거주와 생존에 적합한 땅을 의미한다. 
    ‘아다마’의 반대 개념은 인간이나 생물의 생존이 어렵고 힘든 사막 혹은 광야이다.

    하나님께서 아담을 위하여 창조하신 에덴동산은 ‘아다마’의 땅이다. 토양 자체도 비옥하였지만, 네 개의 강으로 나뉘어 흘러 내려갈 정도로 많은 물이 솟아나는 샘 근원이 에덴동산 안에 자리하고 있었다. 비옥한 토양과 풍부한 물 근원, 그리고 그런 좋은 여건 속에서 잘 자라는 각종 과일나무들, 이 모든 것들이 에덴동산을 최고의 ‘아다마’로 만들었다.

    비옥한 땅 ‘아다마’와는 달리, ‘에레츠’는 조건과 관계 없이 창조와 우주적 관점에서 본 땅이다. ‘에레츠’는 하늘 혹은 바다와 반대되는 보다 큰 개념의 땅이다. 히브리적 사고에 의하면, 우주는 하늘과 땅으로 이등분되거나, 하늘과 바다와 땅으로 삼등분된다. 곧 ‘에레츠’는 하나님이 창조하신 거대한 우주의 한 부분을 이루는 중요한 요소이다. 태초에 하나님께서 하늘과 함께 창조하신 땅이 곧 ‘에레츠’이다(창 1:1).

    ‘에레츠’의 또 다른 이해는 정치적 개념으로서의 땅이다. 한 나라의 통치력이 미치는 영역이 곧 ‘에레츠’이다. 
    ‘아다마’가 인간 생존에 적합한 좋은 환경으로서의 땅이라면, ‘에레츠’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드러내는 신앙적 개념의 땅이다. 
    그것은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 사이에 이루어진 계시의 현장으로서의 땅이기도 하다. 
    그런 면에서 성경에서 강조하는 땅은 ‘아다마’보다는 ‘에레츠’가 더 우선적이다. 
    ‘에레츠’가 하나님과의 본질적 관계를 전제한다면, ‘아다마’는 주어진 ‘에레츠’ 안에서 누리는 복과 관련된다.

    ‘에레츠’와 ‘아다마’와 의미상으로 유사한 것이 ‘공간’(space)으로서의 땅과 ‘장소’(place)로서의 땅 구분이다. 

    ‘공간’으로서의 땅은 외부의 어떠한 압력도 받지 않고 완전히 자유로운 상태이다. 
    그런 ‘공간’은 어떤 책임도 존재하지 않는 공백 상태의 땅이다. 
    모든 부담을 벗어버리고 마음껏 휴식을 취하는 바캉스의 휴양지라고 할 수 있다. 
    반면에 ‘장소’로서의 땅은 역사적 의미가 있는 땅, 무엇인가 사건이 일어났고, 그 사건이 기억을 통하여 여러 세대에 걸쳐 역사의식으로 정착된 땅, 그곳에 살고 있는 자들에게 분명한 자기 정체성을 확립시켜주는 땅, 그것이 ‘장소’로서의 땅이다. 

    따라서 ‘공간’의 추구는 역사로부터의 도피이지만, ‘장소’의 소유는 역사 안으로 들어가려는 결단이다.

    역사적으로 이스라엘이 추구하였던 땅은 풍요를 보장받는 ‘아다마’가 아니라 하나님의 역사와 통치가 기다리고 있는 ‘에레츠’이다. 
    역사의 부름을 외면한 채 속 빈 ‘공간’ 속에 안주하려는 것은 영적 나태이다. 
    반면에 하나님과의 만남 그리고 그 부름의 의미로 가득 찬 거룩한 ‘장소’를 지향하는 뜨거운 열정, 그것이 성경이 강조하는 땅의 바탕색이다.






    마음 밭을 기경(起耕)하라(호세아 10:12)

    "너희가 자기를 위하여 의를 심고 긍휼을 거두라 지금이 곧 여호와를 찾을 때니 너희 묵은 땅을 기경하라 마침내 여호와께서 임하사 의를 비처럼 너희 에게 내리시리라"

    한 남자가 있었습니다. 그는 이제 막 감옥에 들어온 무기수였습니다. 언제 나가게 될지 어떻게 이 좁고 쾌쾌한 공간에서 지내야 할지 막막했던 그는 교도소장을 향해 간절한 청원을 한 가지 했습니다.
    "절대, 문제를 안 일으킬테니 교도소 마당 한 귀퉁이에 정원을 가꾸게 해주십시오."
    새로 부임한 교도소장은 그렇게 하도록 허락했습니다. 그리곤 그는 처음엔 손길이 많이 가지 않아도 잘 자라는 고추나 양파를 심었습니다. 씨를 심고 그것이 자라감에 따라 그는 작은 만족을 얻었습니다. 그래서 그 다음해에는 여러 종의 장미도 심어보고 작은 묘목의 씨앗도 뿌렸습니다. 그렇게 한 해 그는 정성스레 정원을 가꿨습니다. 그러면서 그는 작은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그래 비록 내가 지금은 자유의 몸이 아니지만 이 정원을 돌보듯 나 자신을 돌봐야겠구나. 또 이렇게 씨를 뿌린 다음 지켜보고 경작하고 결과를 추수하는 정원사의 일이 소박한 것이지만 얼마나 큰 보람과 기쁨을 주는가."
    교도소 마당의 작은 땅뙈기에 무언가를 심고 가꾸던 그는 이십칠 년 후, 감옥에서 나올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1993년 노벨 평화상을 수상하기도 했습니다. 그는 바로 남아프리카 최초의 흑인 대통령, 넬슨 만델라였습니다.


    당신의 마음 밭에는 어떤 새싹들이 자라고 있는지요? 악한 열매를 거둘 악한 새싹들이 자라고 있지는 않습니까? 교만, 거짓, 음란, 탐욕, 미움, 다툼, 시기, 우상숭배, 이기심, 험담, 판단 등이 당신의 마음 밭에서 무성하게 자라고 있지는 않은 지요? 그렇다면 당신의 마음 밭을 기경(起耕)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그 밭에 선한 씨를 파종하시기 바랍니다. 우리 집 정원에 흙만 있는 화분 두 개가 있었습니다. 꽃씨를 사다 심어야겠다고 생각했지만 미처 틈을 내지 못했는데 여름이 지날 무렵 두 개의 화분에서 모두 푸른 잎이 자라나고 있는 게 아닙니까? 한 화분에는 잡초가 무성하게 자라 있었고, 다른 화분에는 어떻게 심겼는지 참외 줄기가 자라나 납작 납작한 잎이 나서 화분의 흙을 덮어가고 있는 중이었습니다. 얼마 후 줄기에 동그란 열매가 달리더니 아기 주먹만한 참외 세 개가 노랗게 익어갔습니다. 향긋한 내를 풍기기 시작하여 보는 이들의 사랑을 듬뿍 받았지요. 똑같은 화분에 무엇이 심겨졌느냐에 따라 각기 다른 대접받는 것을 보면서 인간의 마음 밭을 생각해 보았습니다. 내 마음에는 무엇을 심어야 할까요?
    "악인의 삯은 허무하되 의를 뿌린 자의 상은 확실하니라"(잠11:18)
    영국의 성직자 칼렙 c. 콜턴은 말했습니다. "악을 뿌리뽑을 수 있는 힘을 가진 자는 그 자리에 덕을 심도록 하라. 그렇지 않으면 또 다시 수고를 해야 할 것이다. 잡초가 자랐던 억센 토양에 아무 것도 나지 않게 하는 데 드는 수고보다 훨씬 적은 수고로 밀이 나게 할 수 있을 것이다.(욥4:8, 9)
    마태복음 13:18-23에 보면 씨뿌리는 비유가 나옵니다.
    농부가 밭에 씨앗을 뿌리기 전에 알아야 하는 것이 있는데 바로 토양의 질을 알아내는 작업입니다. 또한 땅이 씨앗을 뿌리기에 적합한가를 알아내고 개간해야 합니다. 우리의 신앙도 마찬가지로 씨앗인 하나님의 말씀을 뿌리기 위해서 이를 심는 밭인 마음이 적합한가를 알아야 합니다. 자신을 알아야 신앙생활을 온전히 할 수 있습니다. 나는 어떤 밭인가를 바로 알아 개간하여 100배의 결실을 맺을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1. 길가 밭

    길가와 같은 굳은 땅입니다. 아마 두 가지 경우에 이런 땅에 씨가 뿌려졌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유대 땅에 가보면 밭이랑이 좁고, 길고, 밭과 밭 사이에는 작은 길이 있습니다. 길에 서서 씨를 뿌리기도 하는데 씨가 길에 떨어져 자라지 못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리고 또 다른 씨뿌리는 법이 있는데 나귀 뒤에다 씨 자루를 싣고, 자루 모퉁이를 잘라 구멍을 내고 이리 왔다, 저리 갔다 하며 뿌립니다. 그러니까 자연 길가에도 뿌려지게 됩니다. 그런데 길가에 뿌려지면 이어 새들이 와서 씨를 주워 먹어버리고 맙니다. 마찬가지로 어떤 사람의 마음은 기독교의 진리가 들어갈 수 있는 입구를 발견할 수 없습니다. 기독교의 진리가 어떤 사람에게는 아무런 의미가 없고, 오히려 적대시되는 경우가 있고, 어떤 사람은 그 진리에 아주 무관심합니다. 그들은 생각하기를 기독교의 진리는 우리 인간 생활에 적응 할 수 없다고 합니다. 기독교가 없이도 잘 살 수 있다고 믿기 때문에 오히려 귀찮은 존재로 생각 합니다. 물론 사람의 사는 것이 항상 쉽고 어떤 긴장이나 눈물이 없다면 문제될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사는 동안에 내 자신의 힘만으로는 어떻게 못할 경우, 다른 힘이 필요할 때가 있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런데 인간에게 가장 큰 비극은 많은 사람이 이 사실을 너무 늦게야 발견한다는 것입니다. 본래 인간에게는 악이 전혀 없었습니다.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되었고 생명의 숨, 하나님의 마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이브는 뱀을 친구로 사귀게 되었고 그로 인해 하나님의 명령을 거역하는 죄를 범하게 되었습니다. 죄의 정도는 점점 더 사악해 지게 되고 시대가 지날수록 악한 정도가 점점 더 심해져 가고 있었습니다. 지금 우리 주변에 일어나고 있는 사악한 범죄들은 과거에 저질러져 왔던 것보다도 심한 것을 부인 할 수 없을 것입니다. 인간의 마음은 묵은 땅이기 때문에 부패될 수밖에 없습니다. 강팍하여 자기 중심적이고, 이기적이며, 남에게 해를 끼치는 일에 익숙합니다. 이 일이 6천년 동안을 거듭해 온 까닭에 딱딱해져서 아무리 씨앗을 뿌리려 해도 심기워 지지 않습니다. 개간되지 않은 땅에는 아무리 좋은 씨를 부려도 결실을 맺을 수 없습니다. 묵은 땅을 개간해야만 합니다. 악은 어떤 모양이라도 삼가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기억하면서 끝없이 마음을 개간해야 합니다. 이 일을 위해 말씀 듣는 일을 소홀히 해서는 안됩니다. 예배드리는 일에 적극적이어야 합니다. 믿음을 통해서 행함이 나타나고, 행함 속에서 온유와 겸손이 드러나게 되어 있습니다. 인간은 누구나 교만을 지니고 있습니다. 이러한 묵은 교만을 좀 더 적극적이고 행함 있는 믿음을 통하여 개간해 가야 합니다.

    2. 돌 밭

    흙이 얇은 돌밭 같은 땅입니다. 물론 이 땅은 모두가 돌은 아닙니다. 흙이 얇은 밭에 돌 이 깔려 있는 땅입니다. 갈릴리 지방의 땅이 대개 그렇습니다. 여기 저기 바위가 나와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땅이 씨를 발아시킬 수 있습니다. 그러나 너무 땅이 얇기 때문에 뿌리가 내리지 못해서 양분을 땅에서 흡수하지 못하므로 결국 해가 날 때 말라 버리고 죽고 맙니다. 무슨 일이고 시작하기가 끝내는 것보다는 쉽습니다. 어떤 유명한 전도자가 '1백 명 가운데 5명은 그리스도에게로 완전히 이끌고, 나머지 95명은 교회 안에서 성숙할 때까지 돌보아주어야 한다'라고 말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크리스천의 생활을 시작하기는 합니다. 그런데 대개가 도중에 넘어집니다. 거기에는 두 가지 문제점이 있습니다. 그 하나는 도중에 실패할 때 그것이 뜻하는 바가 무엇이고, 그 값이 무엇인지를 생각하지 못했을 때 당하는 것입니다. 다른 하나는 수많은 사람들이 기독교에 대하여 많은 매력을 가지고 있지만 그 배후의 환경, 즉 기독교인의 생활 내용이 무엇인지를 몰라서 너무 쉽게만 생각하다가 당하는 문제입니다.
    하나님은 과거의 일들에 관하여는 묻지 않습니다. 지금 하나님 안에 속하여 얼마나 충성을 하고 있는 가에 관심을 가지고 계신 분입니다. 어떤 이들은 과거에 자신이 행한 일들에 대하여 자랑을 하면서도 현재는 행치 않는 것을 봅니다. 돌밭은 주로 이러한 자들이 많습니다. 말씀을 기쁨으로 받습니다. 앞으로 주의 일에 충성하고, 행하겠다고 다짐합니다. 그러나 그들의 마음이 개조되지 않았고, 행함이 따르지 않습니다. 말씀을 받되 영적인 믿음으로 와 닿지 않습니다. 이는 마음에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육신의 마음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옳다고 인정하면서도 영과 육이 서로 맞지 않기 때문에 결실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육신의 돌을 우리의 몸 안에서 빼내야 합니다. 주 안에서는 '내가'라는 말은 결실을 맺을 수 없는 가장 큰 장애물임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옛날 우리 동양 사람의 글귀에 선한 사람과 같이 있게 되는 것은 마치 지란지실(芝蘭之室)에 들어간 것과 같다 하는 말이 있습니다. 지란은 난초를 의미합니다. 좋은 향기가 나는 난초가 있는 방안에 들어가면 온 방안이 향기로 가득해서 자연히 향기에 도취되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심령이 하나님께로부터 은혜를 받을 때에는 우리의 심령이 향기를 피우게 되고, 우리의 생활이 향기를 풍기게 되며 무언의 감화를 줄 수 있는 높은 자리에까지 우리의 신앙이 올라가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에게 다 은혜를 내려주시기를 원하십니다. 그러나 우리의 마음이 길바닥 같거나 바윗돌처럼 굳으면 하나님의 은혜가 내릴 수 없습니다. 그러기에 예수님의 비유에 돌밭에 떨어진 씨는 열매는 못 맺는다고 하셨습니다. 마음이 부드러워야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에게 내립니다. 죄를 회개해야 은혜가 우리 마음속에 미치는 것입니다. 우리의 마음이 돌처럼 굳은 그대로 있으면 하나님의 은혜가 내리지를 못합니다. 강퍅한 마음이나 나만 옳다고 하는 독선적인 마음에는 하나님의 은총이 내릴 수 없습니다. 내 잘못을 깨닫고 돌이켜서 하나님 앞에 돌아오는 그 심령 위에만 하나님의 은혜가 내립니다. 여러분, 이슬이 어떤 곳에 많이 내리는지 아십니까? 산골짜기에 많이 내립니다. 깊은 골짜기에 가보면 거기는 산꼭대기보다 이슬이 더 많이 내립니다. 아마 신령한 은혜도 이와 비슷한 것 같습니다.

    3. 가시 밭

    가시로 가득 찬 땅입니다. 팔레스틴의 농부들은 퍽 게을러서 가시덩쿨을 윗 부분만 잘라서 불살라 버리기 때문에 얼핏 볼 때는 퍽 깨끗하게 보이지만 땅 밑에는 아직도 가시덩쿨의 뿌리가 남아 있기 때문에 때가 되면 가시덩쿨이 다시 성해집니다. 그런데 가시덩쿨은 곡식의 씨보다 더 빨리 자라기 때문에 씨의 생명을 막아 버립니다. 세상의 염려와 근심, 걱정의 넝쿨 때문에 그리스도인으로서 바로 성장하지 못하고 열매맺을 수 없다고 하였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축복을 받으며 살아가는 많은 사람들을 봅니다. 그들은 육신에 의한 결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열심히 있는 듯 보이지만 믿음이 없음을 보게 됩니다. 자기가 앞서가는 신앙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내 경험, 내 지식으로 살아가서도 안됩니다. 유대인들은 완벽한 생활을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으로부터 책망을 받았습니다. 그들은 잘못된 싹을 내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남을 판단하고, 마음대로 무시하는 어리석음을 범하고 있었습니다. 영적인 척 하면서 인간적인 삶을 살아가고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요나에게 니느웨로 가라고 명령하셨습니다. 명령을 들은 요나는 한참을 생각한 후 니느웨로 가지 않고 욥바로 향해 갔습니다. 하나님은 그를 바다에 던져 물고기 배에 넣으시고 그가 회개하자 그를 꺼내어 니느웨로 가게 하셨습니다. 왜 불순종했을까요? 하나님 명령에 순종하려면 자기 생각을 버리고 가야 하는데 자기 의를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생각은 이처럼 불순종을 낳습니다. 예수님께서 마리아의 집에 방문했을 때 마리아는 말씀을 듣고 마르다는 음식 준비를 하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마리아를 칭찬했습니다. 목사가 심방할 때 무엇을 주실 것인가를 기대해야 합니다. 대접하는 것보다 말씀 듣는 것을 소중히 여겨야 합니다. 우리는 때로 물질로 모든 문제를 해결하려 하는 자들을 보게 됩니다. 교회는 물질이 없어 운영이 안 되는 것이 아니라 순종하는 자가 없어 운영이 되지 않는 것입니다. 말씀을 사모하여 성령으로 마음을 개간하시기 바랍니다. 성도들에게 있어서 편견은 금물입니다. 모세가 구스 여자를 아내로 삼았습니다. 오늘날로 말하면 주의 종이 바람을 피웠습니다. 이를 본 아론과 미리암이 책망했습니다. 누가 보더라도 모세가 벌을 받아 마땅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아론과 미리암을 문둥병이 들게 하셨습니다. 심판은 하나님께 속한 것입니다. 편견을 버리고 밭을 개간하십시요.

    4. 좋은 땅

    열매 맺을 수 있는 좋고, 깊고, 깨끗한 땅입니다. 이 말씀은 기독교인이 가져야 할 세 가지를 생각하게 합니다.

     그 하나는 이 말씀을 들어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즉 마음에 말씀을 들을 준비가 없는 한 들을 수 없습니다. 
    우리의 경험, 지식, 의견이 너무나 많기 때문에 예수님의 말씀을 들을 마음의 준비가 없기 쉽습니다. 
    다른 하나는 우리는 그 말씀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 우리 마음으로 진실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가만히 보면, 우리의 몸은 현명하게 창조되었습니다. 가령 우리 눈앞에 무엇이 스치고 지나갈 때 눈은 자동적으로 감깁니다. 그것을 반사작용이라고 합니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마음에 원치 않는 무엇인가가 들려질 때에는 자동적으로 우리의 마음 문은 닫혀지고 잊어버리고 맙니다. 그런데 진리가 우리의 마음을 괴롭힌다면, 이것은 어떤 때 맛없는 약이나 괴롭히는 치료법이라도 우리의 건강을 회복시키기 위해서는 받아들이지 않으면 안 되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의 마음의 문을 꽉 닫아버려 진리가 길가에 떨어지면 이것은 인간에게 비극입니다. 그리고 한 가지 더 생각할 것은 말씀을 행동에 옮겨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비유에 보면 결실 하여 30배, 60배, 100배의 열매를 맺었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갈릴리와 같이 아주 메마른 땅에 서 이런 결실을 얻는다는 것은 놀라운 일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감동 받기를 원합니다. 
    감동 횟수가 잦을수록 삶의 질은 좋아집니다. 감동을 주는 것은 많습니다. 아름다운 자연과 음악, 좋은 글, 고전으로 자리잡은 모든 것 등 수없이 많습니다. 그러나 사람처럼 감동을 주는 존재는 없습니다. 사람의 아름다운 마음은 한 사람의 일생을 감동으로 붙잡기에 넉넉한 극상의 예술입니다. 만물 중에 가장 부패한 것이 인간의 마음이지만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한 인간의 심성에서 흘러나오는 마음씨는 비길 데 없이 아름답고 감동적입니다. 

    저는 살면서 많은 사람들을 만나보았는데 가시처럼 쿡쿡 찌르는 모진 마음도 만났지만‘사람의 마음이 저렇게 선하고 비단결처럼 고울 수 있을까’하고 목사인 저까지도 부끄럽게 만드는 온유하고 품위 있는 마음도 많이 만났습니다. 아름다운 마음, 아름다운 사람을 생각하자면 향수처럼 떠오르는 분이 있습니다 어릴 적 우리 동네에 집 한 채가 있었습니다. 그 집에는 서울 할머니라는 분이 홀로 사셨습니다. 그 옛날 서울서 공부하신 분이니 시골에서는 왕비처럼 귀해 보였습니다. 그 할머니의 동생 되시는 분이 그 당시 전북도지사 부인이면서 이화여대 교수였습니다. 여름과 겨울방학이면 도지사 부인께서는 아들과 함께 그 집에 내려와 열흘씩 쉬어 가셨습니다. 그러던 여름 어느 날, 우리 동네에서 잘 산다는 집에서 도지사 부인을 청하여 점심을 대접하게 되었습니다. 얼마나 정성을 다해서 차린 밥상이겠습니까. 구경꾼이 마당 안에 가득 찼습니다. 마침내 도지사 부인께서 첫술을 뜨셨습니다. 그런데 이 무슨 짓궂은 변인지, 수저 위에 얹혀진 하얀 쌀밥 틈에 통통하게 삶아진 파리 한 마리가 툭 불거져 나왔습니다. 순간 그를 지켜본 사람들은 오싹했습니다. 그런데 그 부인은 얼른 밥술을 입에 넣고 물을 마셔 꿀꺽 삼켜버렸습니다. 그리고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밥 한 그릇을 맛있게 비웠습니다. 그 부인의 이야기는 마리아가 옥합을 깨뜨려 예수님 발등에 부었던 나드향유 처럼 번져 갔습니다. 예수님이 수가성 우물가에서 부끄러운 여인과 대화합니다. “네 남편을 불러오라”“저는 남편이 없습니다”“네가 남편이 없다는 말이 옳도다. 네가 남편 다섯이 있었으나 지금 있는 자도 네 남편이 아니니 네가 남편이 없다는 말이 옳도다” 여자는 남편이 있는데 없다고 말합니다. 그러면 예수님은 당연히 여자를 꾸짖어야 했습니다. “네가 감히 나를 속이느냐? 다 속여도 나는 못 속인다. 남편을 다섯이나 갈아치우고도 누구 앞에서 뻔뻔스럽게 거짓말을 하느냐?”고 으름장을 놓을 법도 한데, 예수님은 그렇게 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그 부끄러운 여인의 입장이 되셔서 그녀의 수치스러운 마음을 미리 삼켜주신 것입니다 남의 허물에서부터 나를 상하게 하는 역겨운 일에 이르기까지, 나의 거슬림을 이날까지 삼켜주신 예수님을 바라보며 나도 삼켜야 합니다. 삼키는 일은 척박한 땅에 두엄을 묻어주는 일과 같습니다. 삼키는 일을 잘 해야 내 심령의 산성화를 막고 옥토가 되어, 남에게 감동을 주며 살아가는 마음 밭이 되는 것입니다. 

    이 시간, 내 마음의 밭이 어떤 상태에 있는가 살펴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묵은 땅에는 열매가 없습니다. 쓸데없는 땅입니다. 해도, 비도, 이슬도 다 받으면서 아무런 보답이 없습니다. 묵은 땅은 옆 밭에 장애를 줍니다. 묵은 땅과 같은 마음의 밭을 한번 생각해보세요! 오랫동안 하나님께 대한 의무를 게을리 하는 동안 그 마음이 굳어집니다. 좋지 못한 습관이 하나뿐 아니고 점점 더 생깁니다. 그 습관의 뿌리가 점점 더 깊어집니다. 여러 가지 잡초가 그 마음 밭에 나기 시작합니다. 세상 생각, 육신의 정욕, 이생의 자랑, 교만한 마음, 비열한 마음 등의 모든 잡초가 나기 시작합니다. 이렇게 묵은 밭 같은 마음에는 하나님의 빛도, 비도, 이슬도 소용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도 소용없습니다. 설교를 들어도 도덕적인 교훈을 들어도 그 마음이나 생활에 어떤 열매를 맺지 못합니다. 주님의 은혜를 헛되이 받는 사람입니다. 그러면 이 묵은 땅은 어떻게 하라고요? 묵은 땅을 갈라고 하였습니다. 무슨 씨를 심기 전에 먼저 예리한 보습을 넣어서 갈아서 굳은 흙을 파고 뒤집어 잡초를 뽑아 버려야 한다고 하십니다. 얕게 갈지 말고, 깊이 갈아 뿌리까지 뒤엎어야 합니다. 물론 묵은 밭을 가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너무 굳어서 처음에는 힘듭니다. 그러나 힘들어도 갈아야 합니다. 아픕니다. 그러나 아파도 갈아야 합니다. 묵은 땅을 갈기 전에 무슨 씨를 뿌릴 수 없습니다. 묵은 땅은 갈아야 합니다. 이것을 우리는 회개라고 합니다. 이 시간 우리 마음 밭을 보시고 우리 가운데 다만 몇 사람이라도 이런 마음을 가지고 계신 분이 있으면 성령의 보습으로 갈아주시기를 바랍니다. 세례 요한이 복음 전파할 때 제일 먼저 외친 말이 무엇입니까? 회개하라! 왜 우리가 교회에는 출석하고 예수를 믿는다고 하지만 좋은 열매를 맺지 못합니까? 왜 전에는 좋은 열매를 맺었던 분이 요사이는 좋은 열매를 맺지 못합니까? 묵은 땅이 되어 버려 그렇습니다. 묵은 밭에 씨뿌려야 소용없습니다. 아무리 애써 씨를 뿌려도 소용없습니다. 

    성도 여러분, 먼저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세요! 마음의 묵은 땅을 갈아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의 아름다운 성령의 열매를 맺으시기를 축원합니다.
    * 기도 : 우리의 마음을 감찰하시는 하나님, 악한 생각이나 부정적인 생각, 교만, 음란, 거짓, 탐욕, 시기, 미움, 분노의 생각이 우리 마음을 주장하지 못하게 하시고 묵은 땅을 기경하여 좋은 열매 맺는 마음 밭으로 변화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으로 채울 수 있도록 도와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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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장

    농촌에서 검소한 삶을 꾸려나가는 농부 파홈과 그의 아내는 도시에서 상인으로 활동하는 아내의 자매와 대화를 나눈다. 아내의 자매는 도시에서의 삶이 얼마나 좋은 지를 자랑하지만 이를 못마땅하게 여긴 파홈의 아내는 농민의 삶을 찬양하고 상인의 삶을 비하하여 두 사람 간에 작은 말다툼이 일어난다. 대화를 듣던 파홈은 넓은 땅만 있다면 악마조차도 두렵지 않다고 주장했고 난로 뒤에서 이를 엿듣던 악마는 땅과 목숨을 건 내기를 준비한다.

    2장

    마을 근처에 위치한 농민들이 공동으로 이용하는 농지의 관리인은 작은 실수에도 벌금을 부여했는데, 이로 인해 파홈은 어려움을 겪었다. 그러던 중 농지의 지주가 농지를 매각한다는 소식이 들려오고, 농민들은 농지를 나누어 구매하기로 한다. 파홈도 이에 따라 농지를 구입했고, 완전히 자신의 것이 된 농지에서 농작물을 수확하며 행복을 느낀다.


    85세의 갈렙 “이 산지를 내게 주소서”


    여호수아 14:6-15 
    6. 때에 유다 자손이 길갈에 있는 여호수아에게 나아오고 그니스 사람 여분네의 아들 갈렙이 여호수아에게 말하되 여호와께서 가데스 바네아에서 나와 당신에게 대하여 하나님의 사람 모세에게 이르신 일을 당신이 아시는 바라 7 내 나이 사십 세에 여호와의 종 모세가 가데스 바네아에서 나를 보내어 이 땅을 정탐케 하므로 내 마음에 성실한 대로 그에게 보고하였고 8 나와 함께 올라갔던 내 형제들은 백성의 간담을 녹게 하였으나 나는 나의 하나님 여호와를 온전히 좇았으므로 9 그날에 모세가 맹세하여 가로되 네가 나의 하나님 여호와를 온전히 좇았은즉 네 발로 밟는 땅은 영영히 너와 네 자손의 기업이 되리라 하였나이다 10 이제 보소서 여호와께서 이 말씀을 모세에게 이르신 때로부터 이스라엘이 광야에 행한 이 사십오 년 동안을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대로 나를 생존케 하셨나이다 오늘날 내가 팔십오 세로되 11 모세가 나를 보내던 날과 같이 오늘날 오히려 강건하니 나의 힘이 그때나 이제나 일반이라 싸움에나 출입에 감당할 수 있사온즉 12 그날에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이 산지를 내게 주소서 당신도 그날에 들으셨거니와 그곳에는 아낙 사람이 있고 그 성읍들은 크고 견고할지라도 여호와께서 혹시 나와 함께하시면 내가 필경 여호와의 말씀하신 대로 그들을 쫓아내리이다 13 여호수아가 여분네의 아들 갈렙을 위하여 축복하고 헤브론을 그에게 주어 기업을 삼게 하매 14 헤브론이 그니스 사람 여분네의 아들 갈렙의 기업이 되어 오늘날까지 이르렀으니 이는 그가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를 온전히 좇았음이며 15 헤브론의 옛 이름은 기럇 아르바라 아르바는 아낙 사람 가운데 가장 큰 사람이었더라 그 땅에 전쟁이 그쳤더라

    1. 에서의 자손이었던 갈렙

    가나안 땅을 분배한 장소는 길갈이었고 가장 먼저 나아온 지파는 유다였다. 그들은 전쟁에서 항상 먼저 나아간 용감하고 담대한 지파였다. 그들 가운데서도 갈렙이 먼저 와서 헤브론 땅을 요청했다. 갈렙은 그니스(Kenizzite) 사람인데, 그니스(겐) 사람이란 창세기 36장에 기록된 바 에서의 자손 중 그나스 족장의 자손이다(11, 15절). 그들은 이스라엘 가운데 거하다 출애굽 때 함께 떠난 잡종이었다(출 12:48).

    이러한 족속 사람인 갈렙은 이스라엘에 귀화할 때 유다 지파에 속하였고 모세가 가데스 바네아에서 열두 정탐꾼을 보낼 때 유다 지파의 대표로 선발됐다. 출신이 이방이요 잡종인 사람이 유다 지파의 대표가 될 수 있었던 것이나, 유일하게 두 사람―여호수아와 갈렙―만 가나안에 들어갈 특권을 갖게 된 것이 놀라울 뿐이다. 그리고 그가 제비를 뽑을 것도 없이 그 기업은 결정돼 있었다.

    2. 동년배였던 여호수아와 갈렙

    현재 그는 85세이고 가데스 바네아에서 정탐으로 파견됐을 때에는 40세 청년이었다. 여호수아와는 동년배이다. 출애굽 당시 그의 나이는 39세였던 것이다. 그는 45년 전에 약속된 기업의 분깃을 잊지 않고 있었다. 그는 잊지 않을 뿐 아니라 담대히 요청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약속의 땅에 이 두 위대한 인물만 들어가게 하고 나머지는 광야에서 쓰러져 죽게 하신 것에서 경고와 배움을 얻는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약속을 유업으로 받는 자들이 과연 누구이며 어떠한 자들인가를 분명히 알려주시는 것이다. 오직 갈렙과 여호수아 같은 믿음과 순종의 사람들만이 성공한다. 역대로 하나님은 동년배의 사람들을 들어 사용하시는 예가 많이 있다. 루터와 칼빈은 12년 정도 밖에 차이가 나지 않는다. 웨슬레와 휫트필드도 동년배들이요, 같은 학교 출신들이다. 다비와 함께 했던 한 무리의 사람들도 그러하다. 갈렙과 여호수아는 같은 년배로서 온전히 주님을 따른 좋은 본보기이다.

    우리도 갈렙처럼 온전히 주 하나님을 따르면 같은 결과를 얻을 수 있으리라 확신한다. 갈렙은 우리에게 인생의 좋은 비전을 주고 있다. 그는 85세가 됐어도 젊었을 때의 좋았던 신앙을 회상하며 사는 사람이 아니었다. 오늘날 어떤 사람들이 젊었을 때 위대한 업적을 쌓고서 노년에 가서는, 아니 중년부터도 그가 젊었을 때 이룬 큰 일을 회상하며 그 꿈을 되새기는 맛으로 사는 것을 본다. 그러한 모습은 전형적인 이기는 자의 모습이 아니다. 갈렙은 젊었을 때에나 늙었을 때에나 여전히 같은 영과 믿음을 소유했고 여전히 싸우며 전진하고자 했다. 그는 소위 은퇴를 모르는 사람이었다.

    우리는 이 하나님의 사람을 더 보기로 하자! 가데스 바네아에서 백성들이 애굽으로 돌아가자고 아우성치며 반역할 때 그는 여호수아와 함께 하나님과 하나님의 종 편에 섰다. 하나님께서는 갈렙에 대하여 이렇게 말씀하셨다. “오직 내 종 갈렙은 그 마음이 그들과 달라서 나를 온전히 좇았은즉 그의 갔던 땅으로 내가 그를 인도하여 들이리니”(민 14:24). 그는 그 후로도 결코 반역적인 무리 속에 낀 적이 없었다. 주님을 온전히 따르기 위해 확고한 목표를 가지고 전진한 사람이다.

    3. 내 마음에 성실한 대로, 온전히

    7절에서 그는 ‘내 마음에 성실한 대로’ 모세에게 보고했다고 했다. 70인 역에서는 ‘그의 마음에’로 번역했는데, ‘그의’란 ‘모세의’ 또는 ‘하나님의’로 읽을 수 있다. 따라서 그의 마음은 하나님과 모세의 마음과 일치됐다고 볼 수 있다. 다른 사람들은 그들의 참된 마음과 양심대로 보고하지 않았다. 그들은 그들의 양심에 하나님이 없었다. 그들은 가나안 땅을 하나님의 마음이나 모세의 영으로 보지 않고 그들의 위축되고 소심한 마음으로 보았다. 그러나 갈렙은 하나님을 믿는 믿음의 마음으로 보았기에 그의 본 것이 하나님의 마음으로 본 것이 될 수 있었던 것이다.

    열 정탐 중 혹 어떤 사람은 그들의 양심대로 보았다 하더라도 아우성치는 민중을 바라보면서 참되게 양심에 따라 보고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마음이 아니고 참다운 사람의 양심도 아니다. 그것은 대세에 기울어진 약하고 간사한 마음이다. 그러나 갈렙은 ‘내 마음의 성실한 대로’ 보고했다. 갈렙이 승리자의 특징을 지닌 것은 바로 이런 마음의 소유자이기 때문이다.

    14장 14절에서 갈렙이 헤브론을 기업으로 얻을 수 있었던 것은 그가 온전히(wholeheartedly) 좇았기 때문이라 했다. 14절 뿐만 아니라 이 ‘온전히’라는 말은 갈렙의 인생을 대표하는 말이 됐다(7, 8, 9, 14절). ‘온전히’란 마음을 다한다는 말이다. 이는 주 예수님의 첫째 되는 계명이기도 하다. 이기는 자 곧 하나님의 유업을 받는 그리스도인이 되려면 온 마음으로(with all heart) 섬기기를 배워야 한다. 온 마음으로 섬기는 자가 아니면 이기는 자가 아니다. 목숨을 다하여 섬기는 것이 아니면 이기는 자의 영이 아니다. 힘을 다하지 않는 것도 이기는 자의 태도가 아니다. 우리는 갈렙에게서 이러한 이기는 자의 전형을 볼 수 있음을 인해 감사한다.

    4. 갈렙의 단순한 성품

    여호수아서를 훌륭하게 강해한 레드파스나 몽고메리는 갈렙의 성품이 단순했다고 지적했다. 그리고 그들은 위대한 영적 인물들이 동일하게 이러한 성품의 소유자들임을 지적했다. 몽고메리가 한 몇 마디 말을 인용해보겠다. “위대한 사람들은 결코 복잡하지 않다. 복잡한 사람들은 심약한 사람들이다. 그들은 수많은 갈등과 동기들에 에워싸여 있으며 그것을 어떻게 모두 함께 해결할지를 모르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문제의 한 면만 보는 것이 아니라 다른 면까지 보았다. 그들은 하나의 행동에서 이 점을 보지만 그것을 달리 취하면 더 나아지리라는 것을 인정만 할 따름이다. 위대한 사람들은 이러한 사람들이 아니며 그들은 교활하지 않다. 그들은 여러 가지 문제가 복잡하더라도 취할 수 있는 다른 길이 있다는 것을 안다. 그러나 그들은 중요한 요인과 최선의 길을 보고 그것을 일관성 있게 따라가는 사람들이다.”

    그러면서 몽고메리는 교부 시대의 위대한 인물인 아타나시우스와 루터, 링컨 등을 예로 들었다. 그들은 어려움이 있었지만 끝까지 그들의 소명을 지키고 나아가 결국은 승리를 거둔 인물들이다. 교회 역사는 그들에 의해 엄청난 도움을 얻었음을 증명하고 있다. 결국 진리는 승리하고 역사는 그들의 정당성을 입증하였다.

    5. “나의 힘이 그제나 이제나 일반이라”

    그는 85세지만 여전히 싸울 것을 제의한다. 이 역시 이기는 자의 특징이다. “나의 힘이 그제나 이제나 일반이라 싸움에나 출입에 감당할 수 있사온즉”(11절). 실상 가나안 전쟁은 이미 종료됐다(11:23). 그러니 갈렙이 꼭 현재 싸워야 할 긴급한 필요가 있었던 것은 아니다. 그러나 여기서 헤브론을 갈렙에게 줄 때 반드시 마지막 전투가 있게 될 것임을 알 수 있다(15:13-19). 그는 약속된 그 땅을 얻자, 거기 있던 아낙의 소생, 세새와 아히만과 달매를 좇아내었고 드빌 거민을 쳤다. 드빌 곧 기럇세벨은 갈렙의 아우 그나스의 아들인 옷니엘이 취하자 갈렙이 약속대로 그의 딸 악사를 아내로 주었다.

    이러한 위대한 믿음의 사람의 주위에는 같은 믿음의 영을 가진 사람들이 생기게 마련이고 그들은 같이 동역하여 하나님의 역사를 승리로 이끄는 주역들이 된다. 이는 교회사의 많은 사실들이 증명한다. 교회사에 위대한 영적인 인물들이 나올 때마다 주위에 한두 명, 또 그 이상 매우 위대하고 귀한 조력자들이 있어왔던 것이다. 이는 매우 신기한 일이다.

    6. 85세에도 전쟁을 치뤄야 하는 땅을 원하다

    그는 85세지만 쉬려 하거나 피동적이 아니었다. 그가 얻으려는 땅은 전쟁을 치르지 않으면 얻을 수 없는 땅이었다. 그런 땅을 갈렙은 원했던 것이다. “이 산지를 내게 주소서 당신도 그날에 들으셨거니와 그곳에는 아낙 사람이 있고 그 성읍들은 크고 견고하다 할지라도 여호와께서 혹시 나와 함께하시면 내가 필경 여호와의 말씀하신 대로 그들을 쫓아내리이다”(12절). 15절에 의하면 갈렙에게 할당된 땅은 헤브론이며 “기럇 아르바라 하였는데 아르바는 아낙 사람 가운데 가장 큰 사람이었더라”고 한다.

    갈렙은 적극적인 보고를 하는 사람만이 아니었다. 그는 여호수아와 함께 “저들을 두려워하지 말라 그들은 우리의 밥이라”고 보고했을 뿐 아니라, 그가 믿은 대로 행한 사람이었다. 그는 노년에 가장 큰 아낙 사람들을 쫓아내는 위대한 일을 했다. 이기는 자의 한 가지 두드러진 특징은 그들이 믿고 말하는 바를 행하며 그러한 길을 일생토록 곧게 걸어간다는 것이다.

    7. 그가 원했던 땅, 헤브론의 뜻

    그가 구한 곳은 헤브론이었는데, 헤브론은 ‘교통(fellowship)’이라는 뜻이다. 그는 최상의 상태를 원했다. 그것은 하나님과의 교통 안에 머무는 것이다. 이곳은 아브라함이 영적 체험으로 말하자면 세겜(능력)과 벧엘(하나님의 집)을 거쳐 가장 최고봉에 이르렀던 장소이다. 믿음의 사람, 승리의 사람에게 주어진 최상의 기업은 하나님과의 간격 없는 교통이다. 이러 최상의 기업을 얻는 사람을 본보기로 보는 것은 매우 가치가 있는 일이다. 갈렙과 같이 단일하고 온 마음으로 하나님을 추구한 자만이 하나님과의 온전한 교통 안에 들어갈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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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나님을 안다는 것 

    성경적으로 '하나님을 안다'는 것은 단순히 지식적으로 아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개인적이고 친밀한 관계를 맺고 그분을 삶으로 인정하며 닮아가는 인격적인 경험을 의미합니다. 
    이는 하나님과의 대화를 통한 교제, 삶의 주인으로 인정하는 신뢰, 그리고 하나님을 닮아가는 변화를 포함합니다. 

    하나님을 안다는 것의 의미

    1. 개인적인 관계와 교제 


    어떤 사람을 아는 것이 개인적인 관계를 통해 깊어지듯이, 하나님을 아는 것은 그분과 친밀한 교제를 나누는 것입니다.

    2. 하나님을 아는 방법

    a. 말씀의 묵상과 기도 /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고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을 알아가는 과정에서 하나님에 대한 지각이 생겨 하나님을 닮아가게 됩니다. 
    하나님의 뜻에 동의하고 그분의 뜻대로 행하며, 어려움 가운데서도 하나님을 의지하고 신뢰하는 것이 하나님을 아는 중요한 방법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 삶의 생각, 말, 행동의 변화로 이어질 때, 그것이 진정으로 하나님을 아는 것입니다. 


  • b. 인격적이고 체험적인 앎 /
    하나님을 안다는 것은 뇌로 인지하는 지식 차원을 넘어, 하나님과 직접적인 사귐을 통해 체험적으로 아는 것을 의미합니다. 


  • c. 삶의 주인으로 인정 
    지식적인 앎을 넘어, 하나님을 삶의 주인으로 인정하고 그분을 신뢰하는 것을 포함합니다. 


  • d. 하나님을 닮아가는 변화
    하나님을 아는 것은 그분을 닮아가는 과정으로, 생각, 말, 행동이 점차 하나님과 같아지는 변화를 수반합니다. 


  • e. 영생의 시작
    요한복음 17장 3절 말씀에 따라,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 곧 영생이라고 합니다. 


  • 아는 것? 
    1. 신뢰와 순종
    2. 삶의 변화 

    하나님을 아는 것은 그분의 말씀을 통해 그분을 알고, 그분이 말씀하신 대로 행하는 것입니다.

    시편 119:11 
    내가 주의 말씀을 내 마음에 두어 주께 범죄하지 아니하려 하나이다."

    히브리서 4:12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활력이 있어 어떤 양날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판단하나니."

    예레미야 9:23-24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지혜로운 자는 그의 지혜를 자랑하지 말라 용사는 그의 용맹을 자랑하지 말라 부자는 그의 재물을 자랑하지 말라 자랑하는 자는 이것으로 자랑할지니 곧 명철하여 나를 아는 것과 내가 인애와 정의와 공의를 땅에 행하는 자인 줄 깨닫는 것이라 나는 이 일을 기뻐하노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디모데후서 3:16-17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하게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할 능력을 갖추게 하려 함이라."

    그리고 그를 아는 자는 사도들의 말을 듣고, 그를 아는 자는 그가 명령하신 것을 행하며, 그를 아는 자는 구원을 받습니다.

    요한1서 4:6-7 
    우리는 하나님께 속하였으니 하나님을 아는 자는 우리의 말을 듣고 하나님께 속하지 아니한 자는 우리의 말을 듣지 아니하나니 진리의 영과 미혹의 영을 이로써 아느니라.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으로부터 나서 하나님을 알고."

    시편 119:10 
    내가 전심으로 주를 찾았사오니 주의 계명에서 떠나지 말게 하소서!"

    요한복음 14:21 
    나의 계명을 가지고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니 나를 사랑하는 자는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요 나도 그를 사랑하여 그에게 나를 나타내리라."


    배려심 없고 이기적인 아이, 공감능력을 불어넣으려면?

    아이가 간식을 독점하려 하거나, 다른 아이의 부탁이나 도움을 들어주지 않는 행동은 보호자에게 걱정과 안타까움을 느끼게 한다. 

    하지만 사실 아이의 이기적인 행동은 자연스런 일이다. 
    이기적인 행동은 사회적 상호작용을 탐색하고 나눔의 개념을 이해하는 법을 배우는 많은 어린이에게 흔히 나타나는 발달 단계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행동이 지속되면 다른 사람과의 관계에 문제가 생길 수 있다. 
    따라서 보호자가 아이들이 공감 능력을 키우고 타인을 배려하는 사람이 되도록 돕는 것은 중요한 일이다. 
    하지만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지 고민이 된다면?

    시카고대 신경과학자이자 아동 심리학자인 장 데세티 박사는 평생동안 공감, 도덕성, 친사회적 행동과 이기적인 행동의 근원을 찾아 연구해왔다. 
    그의 연구는 이기심, 공감, 이타적 행동의 신경 메커니즘을 탐구하여 어린이의 이러한 특성의 발달과 사회적 상호 작용 및 관계에 대한 잠재적 영향을 밝히는 데 도움을 준다.

    다음은 데세티 박사가 제안하는 이기적인 성격의 아이들에게 이타심을 알게 하고, 공감을 배우도록 하는 방법들이다.

         시카고대 아동 심리학자 장 데세티 박사

    공감과 관대함

    아이들은 주변 사람들의 행동을 관찰하면서 배운다. 이타심을 가르치기 위해 부모와 보호자는 공감하고 관대한 행동을 일관되게 모델링해야 한다. 타인에 대한 친절과 배려를 보여주고, 자원을 나누고, 자선 활동에 참여한다. 긍정적인 모범을 보이면 아이들도 이러한 가치를 스스로 받아들일 가능성이 높아질 수 있다.

    관점 잡기

    아이들이 다른 사람의 감정과 관점을 이해하도록 돕는 것은 공감 능력 발달에 매우 중요하다. 자신의 행동이 다른 사람에게 어떤 영향을 미칠 수 있는지에 대해 대화를 나누고 다른 관점을 고려하도록 돕기 때문이다. 실제 상황이나 이야기를 통해 다른 사람의 감정을 생각하는 것의 중요성을 설명하는 것이 도움이 된다.

    경계와 결과 설정

    이기적인 행동에 대한 명확한 경계와 결과를 설정하는 것은 아이들에게 책임감을 가르치는 데 중요하다. 아이가 이기적인 행동을 보이면 차분하게 그 행동이 미칠 영향에 대해 설명하고 적절한 행동을 일깨워준다. 일관성이 핵심이므로 경계와 결과가 공정하고 균일하게 적용되도록 한다.

    나눔의 기술

    아이들이 이 기술을 연습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함으로써 나눔을 장려한다. 아이들이 과제를 완수하기 위해 장난감이나 자원을 공유해야 하는 놀이 시간이나 그룹 활동을 준비한다. 칭찬과 인정을 통해 긍정적인 공유 행동을 강화하고 협력의 이점을 상기시켜 준다.

    감사의 중요성

    아이들에게 자신이 가진 것에 감사하고 다른 사람의 친절에 감사를 표현하도록 가르치면 관대한 태도를 키울 수 있다. 아이들에게 감사 인사를 하거나 감사 노트를 쓰거나 봉사 활동에 참여하여 주변 사람들과 사물에 대한 감사를 표현하도록 격려한다.

    긍정적 강화

    이타적인 행동을 했을 때 이를 인정하고 칭찬한다. 긍정적 강화는 아이들이 공감과 관대함을 계속 발휘하도록 장려한다. 칭찬할 만한 특정 행동과 그 행동이 다른 사람에게 어떤 긍정적인 영향을 미쳤는지 강조하여 구체적으로 칭찬한다.

    친절한 행동 배우기

    자원 봉사, 이웃 돕기, 자선 단체 기부와 같은 친절한 행동에 자녀를 참여시키도록 한다. 이러한 경험은 아이들이 다른 사람을 돕는 것의 가치를 이해하고 지역사회에 대한 책임감을 키우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다.


    이타심이 기회 필요해

    이기적인 행동을 일관되게 다루고, 공감을 모델링하고, 이타심을 실천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함으로써 아이가 타인에 대한 공감과 배려심을 키울 수 있도록 도울 수 있다. 

    물론 변화에는 시간이 걸린다. 그러나 인내와 끈기야말로 아이들이 더 자비로운 사람으로 성장하도록 이끄는 중요한 열쇠라는 것을 기억하도록 하자.


    장 데세티(Jean Decety) 박사 연구팀은 14개국 1,170명의 어린이들을 대상으로 해서 종교가 그들의 가치관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를 연구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결과는 놀라웠습니다. 
    비종교적인 분위기에서 자란 아이들이 타인에 대해 더 관대했고 이타적인 생각을 갖고 있더라는 것입니다. 
    그 조사가 얼마나 신빙성 있는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그 연구결과를 액면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다면 오늘의 종교가 심각한 문제에 직면하고 있다고 말해야 할 것입니다. 
    믿음이 우리를 더 관대하고 따뜻한 사람으로 만들어주지 못한다면, 남을 더욱 배려하는 사람이 되도록 하지 못한다면 그 믿음은 작동하지 않는 믿음이라 해야 할 것입니다. 

    사실 이런 일은 어제 오늘의 일은 아닙니다. 
    이스라엘의 예언자들은 외적인 종교 행위에는 열심을 내면서도 정작 하나님이 관심하시는 바는 외면하는 이들의 위선을 신랄하게 꾸짖었습니다. 
    예수님도 율법학자들과 바리새인들의 신앙적 위선을 통렬하게 꾸짖으셨습니다.

    "너희는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는 드리면서, 정의와 자비와 신의와 같은 율법의 더 중요한 요소들은 버렸다. 그것들도 소홀히 하지 않아야 했지만, 이것들도 마땅히 행해야 했다."(마23:23)

    본과 말을 뒤집은 신앙생활은 일쑤 사람들을 위선으로 이끕니다. 다시 한번 말합니다. 하나님 안에 머무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처럼 사는 것입니다. 주님은 고통받는 이들에게 다가서셨고, 그들의 아픔과 슬픔을 당신의 몸으로 짊어지셨고, 그들 속에 생명의 숨결을 불어넣으셨습니다. "네 믿음이 너를 구했다." 병자들을 치유하면서 하신 이 말씀이 참 신비합니다. '내가 고쳐줬다'고 하지 않으십니다. 너의 절실함이, 너의 큰 신뢰가, 너의 사랑이 하나님의 마음을 움직였다는 것입니다.

    작동하는 믿음과 작동하지 않는 믿음

    선진국에서 제작한 최신의 기계를 도입하여 생산을 시작하려고 할 때 한국에서는 고사를 지냅니다.
    만일 고사를 지내지 않으면 기계가 원활하게 작동하지 않거나 인명 사고가 발생한다고 믿는 민간 신앙 때문에 반드시 그 기계를
    설치한 후에 고사를 지냅니다.
    심지어 어떤 사람은 자동차를 구입하고 자동차 앞에 돼지머리를 놓고 고사를 지내기도 합니다.


    야고보서 2:18
    혹이 가로되 너는 믿음이 있고 나는 행함이 있으니 행함이 없는믿음을 내게 보이라 나는 행함으로 내 믿음을 네게 보이리라
     

      야고보서 2:26
    영혼 없는 몸이 죽은것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니라 
     

      야고보서 2:17
    이와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 
     

      야고보서 2:20
    아아 허탄한 사람아 행함이 없는 믿음이 헛 것인줄 알고자 하느냐


    디도서 1:16
    저희가 하나님을 是認(시인)하나 行爲(행위)로는 否認(부인)하니 可憎(가증)한 者(자)요 服從(복종)치 아니하는 者(자)요 모든 善(선)한 일을 버리는 者(자)니라.




    요일 2:4 
    저를 아노라 하고 그의 계명을 지키지 아니하는 자는 거짓말하는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있지 아니하되


    딤전 5:8 
    누구든지 자기 친족 특히 자기 가족을 돌아보지 아니하면 믿음을 배반한 자요 부신자보다 더 악한 자니라


    딤후3:8 
    얀네와 얌브레가 모세를 대적한 것같이 저희도 진리를 대적하니 이 사람들은 그 마음이 부패한 자요 믿음에 관하여는 버리운 자들이라








    호세아 장별 요약

    호세아 1장

    하나님은 호세아에게 고멜이라는 창녀와 결혼하라고 명령하십니다. 
    이는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관계를 상징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과 언약을 맺었지만, 하나님을 배신하고 다른 신들을 섬겼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죄로 인해 심판하실 것이지만, 여전히 그들을 사랑하신다는 사실을 보여 주시고자 합니다.

    호세아 2장

    고멜은 호세아를 떠나 다른 남자와 관계를 가집니다. 
    호세아는 고멜을 찾아가 다시 데려옵니다. 
    이는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사랑하시고 회복시키시고자 하시는 마음을 보여 줍니다.

    호세아 3장

    호세아는 고멜에게 이혼장을 주고, 그녀가 7년 동안 다른 남자와 함께 살도록 합니다. 
    이는 이스라엘이 하나님과 맺은 언약을 파기하고, 다른 신들을 섬겼던 기간을 상징합니다. 
    7년이 지난 후, 호세아는 고멜을 다시 데려옵니다. 
    이는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징계하셨지만, 여전히 그들을 사랑하신다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호세아 4장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죄를 책망하십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우상숭배하고, 거짓말과 살인과 간음과 도적질을 행했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심판하실 것입니다.

    호세아 5장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죄로 인해 그들의 왕들이 멸망하고, 그들의 땅이 황폐해질 것이라고 경고하십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여전히 이스라엘을 사랑하시며, 그들을 회복시키시고자 하십니다.

    호세아 6장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회개하고 돌아오기를 촉구하십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의롭게 만드시고, 그들과 함께 영원한 언약을 맺으실 것입니다.

    호세아 7장

    이스라엘은 다시 하나님을 배신하고, 다른 신들을 섬깁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심판하실 것입니다.

    호세아 8장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고, 우상들을 섬깁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심판하실 것입니다.

    호세아 9장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들은 멸망하고, 그들의 땅은 황폐해질 것입니다.

    호세아 10장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배신하고, 다른 신들을 섬깁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심판하실 것입니다. 
    그들은 무성한 포도나무 같아 열마가 많은 많은 우상을 섬깁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악으로 바꾸는 자들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용서하지 않을 것입니다.

    호세아 11장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사랑하십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징계하셨지만, 여전히 그들을 구원하시고자 하십니다. 
    아무 힘이 없는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불러 내신 하나님은 그들을 붙드십니다. 
    하지만 그들은 하나님의 약속을 믿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계속하여 돌아오라 외치십니다.

    호세아 12장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신뢰하지 않고, 다른 신들을 섬깁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심판하실 것입니다. 
    바람과 동품을 먹듯 무의미한 애굽과 앗수르에 도움을 구합니다. 
    하지만 그들은 하나님께서 간사하고 불쌍한 야곱을 구한 것을 기억하지 못합니다. 
    애굽과 앗수르를 의지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의지해야 합니다.

    호세아 13장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배신하고, 다른 신들을 섬깁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심판하실 것입니다.  
    에브라임은 북지파의 가장 강력한 지파였지만 바알을 섬기는데 앞장섰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향하여 아침 구름 같이 이슬같이 사라질 것이라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의 심판은 누구도 막을 수 없을 것입니다.

    호세아 14장

    이스라엘이 회개하고 돌아오기를 촉구하십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용서하시고, 그들을 회복시키시고자 하십니다.
    호세아서는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관계를 상징하는 고멜과 호세아의 결혼을 통해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 그리고 이스라엘의 죄와 심판을 보여 줍니다.



    1차원, 2차원, 3차원, 4차원 개념에 대해 알아보자


    우리는 일상생활에서 3차원 공간에서 살아가며, 길을 걷고, 집을 지으며, 물건을 만듭니다. 
    하지만 우리의 세계는 시간이라는 차원도 함께 포함하고 있습니다. 
    4차원이란 개념을 알아보고, 시간을 넘어 공간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는지 쉽게 설명하겠습니다.

    1. 차원이란 무엇인가?

    "차원"이라는 용어를 이해하는 것부터 시작합시다. 
    차원은 공간의 특성을 설명하는 데 사용되는 개념으로, 우리가 살아가는 세계를 더 잘 이해하기 위한 도구입니다. 
    1차원, 2차원, 3차원, 그리고 4차원은 차원의 다른 수준을 나타냅니다.
     
    1차원 : 선

    1차원은 가장 기본적인 차원으로, 선 하나만으로 표현됩니다. 
    이것은 길이만을 나타내며, 방향은 없습니다.

     2차원 : 면

    2차원은 선이 두 번 겹치면 면이 됩니다. 
    이것은 길이와 너비를 가지며, 예를 들어 종이나 화면처럼 생각할 수 있습니다.

    3차원 : 공간

    3차원은 면이 깊이를 가지면서 공간을 형성합니다. 
    이것은 우리가 일상적으로 생각하는 공간이며, 길이, 너비, 높이를 포함합니다.

    4차원 : 시간

    4차원은 시간을 추가한 개념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지난, 현재, 미래를 경험하는 데 필요한 차원입니다. 
    시간이 추가되면 사건들은 일어나는 순서대로 나열됩니다.

    시간을 공간으로 표현하기

    우리가 4차원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는 한 가지 방법은 "시공간"이라는 개념을 사용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시간과 공간을 하나로 통합하여 사건들을 공간 내에서 이해할 수 있게 해 줍니다. 
    예를 들어, 우주와 시간을 하나의 공간으로 생각하면 우주와 시간이 공간 내에서 곡선을 그리며 이동하는 것처럼 생각할 수 있습니다.

    상대성 이론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은 4차원 시공간을 개념화한 중요한 이론 중 하나입니다. 
    이 이론에 따르면 시간과 공간은 상대적이며, 물체의 질량과 속도에 따라 공간과 시간이 왜곡됩니다.

    결론 :

    4차원은 시간을 포함한 공간을 설명하는 중요한 개념입니다. 
    시간과 공간을 함께 고려함으로써 우리는 우주와 우리의 존재를 더 깊이 이해할 수 있으며, 이는 물리학, 천문학, 철학 등 다양한 학문 분야에서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이 개념은 우리의 세상을 이해하는 데 새로운 시각을 제공합니다.


    차원이란 무엇인가? 1차원부터 4차원까지

    어떤 공간의 차원은 그 공간의 성분들 중에서 서로에게 영향을 미치지 않고 독립적으로 움직일 수 있는 성분들을 최대한 모아 놓았을 때, 그런 성분의 개수가 몇 개인지를 말하는 것이다. 우리가 사는 3차원 공간은 앞뒤, 좌우, 위아래의 3가지 방향으로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다. 그래서 3차원이다. 2차원 공간은 평면 위의 공간이다. 평면 위의 점을 생각해보면 점은 앞뒤, 좌우의 2가지 방향으로 움직일 수 있다. 따라서 평면은 2차원이다. 1차원 공간은 수직선 하나로 이루어진 공간이다. 수직선 위에 있는 점이 움직인다고 생각할 때, 이 점은 수직선을 따라 좌우로만 움직일 수 있다. 그래서 1차원인 것이다. 1차원 공간은 간단하게 수직선 하나로만 표시할 수 있지만, 2차원 이상의 공간을 표시하려면 위치를 정하는 다른 방법이 필요하다. 그것이 바로 데카르트 좌표계 혹은 직교좌표계라는 것이다. 2차원 공간은 2개의 서로 직각으로 교차하는 직선으로, 3차원 공간은 3개의 서로 직각으로 교차하는 직선으로 표시한다.

    1.일차원(One dimension)

    1차원은 기하학적으로 직선이나 곡선을 말한다.

    직선 위의 점의 위치는 그 위에 원점을 지정한 다음, 방향을 주고 단위의 길이를 지정하면, 직선 위의 점의 좌표인 하나의 실수로서 나타낼 수 있다. 또, 곡선 위의 점의 위치도 마찬가지로, 하나의 실수로 나타낼 수 있다. 따라서 직선과 곡선은 1차원 공간이다.

    2.이차원(Two dimension)

    2차원은 차원이 두 개인 것을 의미한다. 흔히 평면을 의미한다.

    2차원 평면에서 한 점의 위치를 결정하기 위해서는 두 개의 값(변수)이 필요하다. 2차원 좌표계로는 직교 좌표계(Cartesian coordinate)와 극 좌표계(polar coordinate)가 널리 사용되고 있다.

    3. 삼차원(Three dimension)

    삼차원은 세 개의 차원을 의미하며, 일반적으로 물리적 공간을 지칭한다.

    인간은 기본적으로 삼차원 공간을 인지할 수 있으며 물리적 공간은 좌우(가로), 전후(세로), 상하(높이)의 세 방향으로 표현된다. 이는 공간의 한 점이 세 개의 좌표로 나타낼 수 있음을 의미한다. 예를 들면 공간의 한 점의 좌표는 P = (x, y, z)로 표현할 수 있다. 좌표값을 표시한 방식으로 직교 좌표계, 원통 좌표계, 구면 좌표계가 있다.

    4. 사차원

    인간은 3차원 공간에 사는 생물이라서 4차원이 있다 하더라도 그것을 직접 느낄 수는 없다. 
    다만 2차원과 3차원 사이의 관계로부터 더 높은 차원을 유추해 볼 수는 있다.

    4차원 세계는 우리가 실제로 가 보질 않았기 때문에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른다. 
    우리의 경험이 3차원 공간에 갇혀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아무리 고차원이라고 해도 수학의 확실성과 엄밀성, 자연스러운 확장을 통해 우리는 고차원의 일부를 보고 느낄 수 있다.

    4차원은 수직선 4개가 서로 직교하는 공간이며, 5차원은 수직선 5개가 서로 직교하는 공간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이런 공간들은 우리가 평면 위에 그릴 수 없고 단지 머릿속으로 상상만 할 수 있을 뿐이다.









    실존적 세계의 4가지 차원


    1. 물리적 차원의 자연세계
    2. 사회적 차원의 인간세계
    3. 심리적 차원의 자기세계
    4. 영적 차원의 초월세계

    인간이 살아간는 세상을 3차원의 세계라고 한다면 하나님이 계신 곳을 4차원의 세계라고 합니다.
    3차원과 4차원은 마치 숫자 하나의 차이라고 생각되지만 사실은 3차원의 세계에서는 4차원의 세계를 도저히 생각할 수도 없는 곳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러므로 4차원에 거하시는 하나님께서 3차원에서 버둥거리는 인간들에게 하나님을 알려주지 않으면 인간은 도저히 하나님을 알 수도 없고 볼 수도 없는 불가항력적인 세계라고 하겠습니다.

     그런데 선지자 호세아는 4차원에 거하시는 하나님께서 3차원에 머물고 있는 인간들을 위하여 하나님이 인간에게 장가들어 인간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알게하시겠다고 합니다.

    결혼이란 세속적인 의미는 남자와 여자가 한 몸을 이루는 부부가 되는 것을 말합니다.
    이때 남자가 결혼한 후에 여자를 안다는 것과 남자가 결혼하기 전에 여자를 안다는 것은 질적으로 엄청난 차이를 말합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3차원에 머물고 있지만 하나님은 4차원의 세계에서 활동하시기 때문입니다.

    만일 하나님이 사람에게 장가들지 않으면 인간은 동물과 흡사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성경에서 하나님이 인간에게 '장가들다'는 표현은 인간의 신부인 교회 공동체와 하나님이 맺는 사랑과 헌신의 관계를 비유하는 것으로, 특히 구약의 호세아서에 나타나는 주요 주제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과의 언약 관계를 잃어버린 상태를 '음란한 아내'에 비유하며, 자신은 이스라엘에게 '장가들겠다'고 말씀하시며 그들을 사랑하고 회복시키겠다는 의지를 표현하십니다. 

    호세아를 통한 비유 

    • 이는 하나님께서 인간을 향한 깊은 사랑과 구원 의지를 보여주는 것이며, 언약 관계 안으로 되돌려 그들을 회복시키겠다는 약속입니다.
    요약
    '하나님이 인간에게 장가든다'는 표현은 인간(교회)을 향한 하나님의 헌신적인 사랑, 그리고 언약 관계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신학적인 비유입니다. 

  • 호세아서는 죄악으로 인해 하나님과의 언약 관계를 저버리고 다른 우상을 섬기는 이스라엘 백성을 '음란한 아내'에 비유합니다.


  • 하나님은 마치 신랑이 신부를 향한 사랑을 포기하지 않듯, 이스라엘 백성과의 관계를 포기하지 않으시고 그들을 다시 당신의 신부 삼아 사랑하시겠다는 의지를 '장가들겠다'는 표현으로 나타내십니다.




  • 본문 호세아서에 보면 BC 760년에 하나님께서 호세아 선지자를 통해서 말씀하시기를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장가를 든다고 말씀을 하셨는데 70년 후 북 이스라엘이 앗수르에게 멸망을 당한 뒤인 BC 690년에는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백성들과 유다백성들의 남편이라고 말씀을 하셨습니다(이사야54:5절) 

    얼마나 이스라엘백성들을 사랑하셨으면 우상을 섬기고 하나님을 떠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장가든다. 또는 남편이라고 표현을 하셨을까요? 청춘남녀가 사랑하면 결혼을 하지요. 결혼하면 서로 사랑하고 존중하며 배려하고 아끼고 끝까지 책임을 지고 서로 돌봐주어야지요. 하나님과 성도들의 관계는 성경 말씀에 의하면 상징적으로 아버지와 자녀 남편과 아내의 관계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1.하나님께서 장가드신다.

     

    BC 760년경에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과 장가들어 영원히 산다고 말씀을 하셨습니다(호세아2:19-20절)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백성들을 얼마나 사랑하셨으면 장가든다는 표현을 하셨겠습니까?

     

      

     

    2.하나님께서 남편이 되셨다.

     

    BC 760년에 호세아 선지자를 통해 장가드신다고 말씀하신 하나님께서 70년 후인 BC 690년경에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 하나님께서 나는 너희의 남편이라고 이스라엘백성들에게 말씀을 하셨고 또 BC 620년에는 영적으로 간음한 유다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창*녀(렘3:3)라는 표현까지 하시며 이혼증서(렘3:8)를 써주었다고 말씀하시며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오라 나는 너희의 남편이라고 하셨습니다(예례미야3:14절) 

     

      

     

    또 다시 BC 596년경에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북편 땅 앗수르에서 인도하시며 이스라엘 땅으로 돌아오며 나의 인도를 받을 것이며 나는 이스라엘의 아버지요 너희는 대적의 땅에서 돌아 올 것이며 하나님께서 남편이라고 표현을 하셨습니다(예례미야31:32절)

     

      

     

    3.예수님께서 신랑이시다.

     

    신약성경 마태복음9장15절, 마가복음2장20절, 누가복음 5장33-35절에 보면 예수님께서 성도들의 신랑이심을 비유로 암시를 하셨습니다. 찬송가 175장(통162)가사를 보면 마태복음 25장 6절 말씀을 근거로 해서 신랑 되신 예수께서 다시 오실 때 밝은 등불 들고 나갈 준비됐느냐? 우리 신랑 예수 오실 때 밝은 등불 손에 들고 기쁨으로 주를 맞겠네. 라는 가사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성도들의 영적인 신랑이시며 장가들며 남편이라고 표현하신 하나님께서 육신으로 성육신 하신 분입니다. incarnation[ˌɪnkɑːˈneɪʃn](예수님의 몸으로 이 땅에 오신 하나님의)현현(顯現), 성육신(成肉身)

     

      

     

    하나님께서 인류를 사랑하시고 구원하시려고 성령으로 잉태되어 성육신 하신분이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과 성도들 사이는 영적으로 상징적으로 신랑과 신부사이와 같습니다. 보아스와 룻과 같다고 볼 수가 있습니다. 보아스는 베들레헴의 유력자요 총각인데 흠 있는 과부 여인 룻을 아내로 맞이한 것처럼 예수님께서는 흠 있는 죄인인 우리들을 영적으로 신부로 맞이해 주셨습니다. 

     

      

     

    우리의 신랑 되신 예수님은 우리를 영원히 사랑하셔서 우리를 대신해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고 무덤(죽음)에서 부활하시고 승천하셨으며 언젠가는 하나님만 아시는 때에 신부들인 성도들을 데리러 오실 텐데 우리 모두 하나님의 어린양의 혼인잔치에 다 참예 하시기를 신랑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본문 말씀에 하나님께서 은총과 긍휼히 여김으로 장가를 들며 네가 여호와를 알리라.

    또한 이사야 54장5-8절 말씀을 들어보시기를 바랍니다. 
    너를 지으신 이가(하나님) 네 남편이며 구속자며 온 세상의 하나님이며 다시 모으며 영원한 자비를 베푸시는 하나님이시다.

    호세아 서론


    역사적 맥락 : 

    호세아는 북이스라엘 왕국 역사의 격동기인 기원전 8세기경에 예언했습니다. 
    그는 아모스, 이사야, 미가와 같은 선지자들과 동시대의 선지자였습니다. 
    왕국은 정치적 불안정, 우상 숭배, 도덕적 부패에 직면해 있었고, 호세아의 사역은 다가오는 아시리아의 위협을 배경으로 하고 있었습니다. 

    저자 : 

    호세아 라는 이름의 뜻은 "구원"이라고 합니다.
    호세아는 심판과 희망의 메시지를 전달하도록 하나님으로부터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그의 개인적인 삶은 이스라엘의 하나님께 대한 불충실함을 생생한 은유로 보여주었습니다.

    주제 :

    호세아서의 주요 주제에는 하나님의 변함없는 사랑, 불성실의 결과, 회개, 회복이 포함됩니다. 
    호세아의 메시지는 호세아와 그의 아내 고멜의 관계에 요약되어 있습니다. 
    이는 반복되는 불신앙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언약적 사랑을 반영합니다. 

    호세아의 구조

    1~3장 :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상징인 호세아의 결혼

     1장 : 하나님께서는 호세아에게 불성실한 여인 고멜과 결혼하라고 명령하십니다. 
             고멜은 우상 숭배를 통한 이스라엘의 영적 간음을 상징합니다.
     2장 : 호세아와 고멜의 관계는 이스라엘의 배신과 그들이 돌아오길 바라는 하나님의 간청을 반영합니다. 
             이는 심판과 미래의 희망을 대조합니다.
     3장 : 호세아는 고멜의 불충실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을 다시 되찾으시려는 하나님의 의지를 보여줌으로써 고멜을 구속합니다.

    4~14장: 이스라엘의 죄, 심판, 회개에 대한 촉구

     4~7장 : 이스라엘에 대한 비난 
     호세아는 지식의 부족, 불신앙, 우상 숭배 등 이스라엘의 죄를 비난합니다. 
     이 부분은 배신에 대한 강한 이미지를 통해 이스라엘이 어떻게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졌는지를 강조합니다.
     
     8~10장: 반란의 결과
     이스라엘은 심판의 확실성에 초점을 맞춰 자신의 행동의 결과에 대해 경고를 받습니다. 
     앗수르는 하나님의 형벌의 도구로 예언되었다.
     
    11~14장 : 하나님의 긍휼과 회복 약속

     11장 : 어조의 변화,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부모의 사랑을 강조함

     12~13장 : 이스라엘의 반역 역사에 대한 더 많은 성찰.

     14장 : 주님께로 돌아오는 사람들을 위한 회개와 회복의 약속을 촉구하는 마지막 요청입니다.

     주요 키워드 및 주제

    • 불성실함 : 
      호세아서의 중심 주제는 영적 간음입니다. 이스라엘은 우상 숭배와 외국 동맹을 통해 하나님과의 언약을 깨뜨리는 불충실한 배우자로 묘사됩니다.

      언약 : 
      호세아는 하나님과 이스라엘 사이의 언약 관계를 강조합니다. 이스라엘의 배신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그분의 언약을 지키셨습니다.

      심판 : 
      불순종의 결과가 생생하게 묘사됩니다. 심판은 최종적인 거부가 아니라 이스라엘을 하나님께로 다시 돌아오게 하기 위한 회개의 요청으로 묘사됩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 : 
      하나님의 사랑의 부드러움은 특히 11장에서 하나님을 사랑이 많은 아버지로 묘사하는 부분에서 두드러집니다. 이스라엘의 지속적인 실패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자비는 가능합니다.

      회개 : 
      회개에 대한 촉구는 호세아 메시지의 핵심입니다. 선지자는 이스라엘이 하나님께 돌아올 것을 간청하며, 그들이 그 부르심에 귀를 기울인다면 회복이 약속됩니다.

      하나님에 대한 지식 : 
      호세아는 하나님과의 진정한 관계에는 그분에 대한 ** 친밀한 지식**이 필요함을 강조합니다("나는 인애를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며 번제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을 원하노라" - 호세아 6:6 ).


    • 호세아서의 상징
      결혼에 대한 비유: 
      호세아와 고멜의 관계는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관계를 나타냅니다. 고멜의 불충실함은 이스라엘의 우상 숭배를 상징하는 반면, 호세아의 끈질긴 사랑은 하나님의 변함없는 헌신을 반영합니다.

      아이들의 이름:
       호세아의 아이들의 이름은 예언적인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이스르엘: 
      예후의 집에 임할 하나님의 심판을 상징합니다.
      Lo-Ruhamah ("사랑받지 못함"): 하나님의 자비를 거두심을 상징합니다.
      로암미("내 백성이 아님"): 하나님과 이스라엘 사이의 깨어진 관계를 상징합니다.

    • 핵심 구절
      호세아 2:19-20: "내가 영원히 네게 장가들어 정의와 공의와 사랑과 긍휼히 여김으로 네게 장가들리라."

      호세아 4:6: "내 백성이 지식이 없으므로 망하는도다."

      호세아 6:1: "오라 우리가 여호와께로 돌아가자 여호와께서 우리를 찢으셨으나 고치시리라."

      호세아 11:8: "에브라임아 내가 어찌 너를 버리겠느냐 이스라엘아 내가 어찌 너를 버리겠느냐... 내 마음이 속에서 변하고 내 모든 긍휼이 불타오르나니."

    • 호세아의 메시지 요약
      호세아는 이스라엘의 만성적인 불신실에도 불구하고 사랑이 지속되는 하나님을 묘사합니다. 
      이 책은 판단과 희망, 분노와 연민 사이를 오갑니다. 
      궁극적으로 호세아는 임박한 심판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궁극적인 소망은 자신의 백성이 그분께 돌아오기만 한다면 
      그들을 위한 회복과 치유임을 강조합니다.

    • 빠른 참조를 위한 키워드
      불성실(우상 숭배, 영적 간음)
      심판(결과, 아시리아)
      언약(결혼, 서약 파기)
      회복 (희망, 구원)
      하나님의 사랑 (부모의 긍휼)
      회개 (회개, 치유)
      하나님에 대한 지식(친밀함, 참 숭배)

      이러한 요소들이 호세아서를 하나님과 그분의 백성 사이의 관계를 생생하게 묘사하는 심오하고 설득력 있는 책으로 
      만들어 줍니다. 
      이 책은 복잡성과 깊은 사랑, 끊임없는 은혜로 가득 차 있습니다.


























































































    2025 다니엘


    동거(同居) 한가지 동, 살 거
    - 한 집에 같이 거주(居住)함.

    동식(同食) 한가지 동, 밥 식
    (밥이나 음식(飮食) 따위를)함께 먹음.

    동침(同寢) 한가지 동, 잘 침
    - 남녀(男女)가 잠자리를 같이함.

    동행(同行) 한가지 동, 다닐 행
    - 같이 길을 감.

    동일(同一)  한가지 동, 한 일
    - 둘이나 그 이상(以上)의 것이 서로 꼭 같음. 한결같음.


    다니엘서 전체 구조 요약

    • 1-6장 : 역사적 사건
      다니엘과 친구들이 바벨론과 메디아-페르시아 제국에서 신앙을 지키며 기적적인 구원을 받는 이야기. 7-12장: 예언적 환상
      세계 제국들의 흥망과 최후의 심판, 그리고 영원한 하나님의 왕국에 대한 예언.
    1. 역사적 이야기 : 다니엘과 친구들의 신앙과 시험 (1-6장)
    
    
    • 1장 : 다니엘과 세 친구의 바벨론 궁중 생활
    
    
    • 2장 : 느부갓네살의 꿈과 신상의 환상
    
    
    • 3장 : 금 신상과 풀무 불 속의 세 친구
    
    
    • 4장 : 느부갓네살의 꿈과 교만에 대한 심판
    
    
    • 5장 : 벨사살 왕의 연회와 하나님의 심판
    
    2. 예언적 환상 이야기 
    • 6장 : 다니엘과 사자굴 사건 

    • 7장 : 네 짐승의 환상과 인자 같은 이의 왕국

    • 8장 : 숫양과 숫염소의 환상

    • 9장 : 다니엘의 기도와 70이레의 예언

    • 10장 : 다니엘의 환상과 영적 전쟁

    • 11장 : 남방 왕과 북방 왕의 예언 

    • 12장 : 종말과 부활에 대한 약속


    다니엘 1장

    다니엘과 세 친구(사드락, 메삭, 아벳느고)는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옵니다. 
    그들은 왕궁에서 학문을 배워 왕을 섬길 자로 선택됩니다. 
    왕은 그들에게 왕의 음식과 포도주를 제공하지만, 이방 신에게 바쳐진 음식을 먹지 않기로 결심합니다(단 1:8). 
    그들은 채소와 물만 먹겠다고 제안하며, 시험을 받은 후 다른 사람들보다 더 건강해 보입니다(단 1:15). 
    하나님은 다니엘과 친구들에게 특별한 지혜와 능력을 주셔서, 왕의 어떤 신하들보다도 더 지혜롭게 만드셨습니다. 
    다니엘은 또 특별한 꿈 해석의 능력을 받습니다(단 1:17). 
    그들은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에게 인정받고, 그들의 신실함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립니다.

     

    다니엘 2장

    느부갓네살 왕이 꿈을 꾸고 이를 해석할 자를 찾지만, 아무도 꿈을 말하고 해석하지 못합니다. 
    왕은 이로 인해 모든 지혜자들을 죽이려고 하지만, 다니엘이 기도하여 하나님께 꿈의 의미를 알려달라고 간구합니다(단 2:18). 
    하나님은 다니엘에게 꿈을 계시하시고, 다니엘은 왕 앞에서 큰 신상에 관한 꿈을 해석합니다. 
    이 신상은 네 개의 제국을 상징하는데, 금은 바벨론, 은은 메디아-페르시아, 동은 그리스, 철은 로마를 나타냅니다(단 2:38-40). 
    다니엘은 마지막에 하나님의 왕국이 모든 왕국을 멸망시키고 영원히 설 것을 예언합니다(단 2:44). 
    이로 인해 느부갓네살 왕은 다니엘을 높이고,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다니엘 3장

    느부갓네살 왕은 금 신상을 세우고, 모든 백성에게 절하라고 명령합니다. 
    다니엘의 세 친구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는 하나님을 섬기며 이 명령을 거부합니다(단 3:12). 
    분노한 왕은 그들을 불타는 풀무에 던져 넣으라고 명령하지만, 하나님께서 그들을 불 가운데서 보호하셔서 머리카락 하나 타지 않게 하십니다(단 3:27). 
    왕은 그들이 죽지 않은 것을 보고 놀라며, 하나님의 능력을 찬양하고 그들을 높입니다. 
    이 사건은 하나님이 신실한 자를 보호하신다는 강력한 증거가 됩니다(단 3:29).

     

    다니엘 4장

    느부갓네살 왕은 꿈을 꾸고, 다니엘을 불러 해석을 요청합니다. 
    왕은 큰 나무가 자라 모든 생물이 그 그늘에 살았으나, 하늘의 명령에 의해 나무가 잘려 나간다는 꿈을 꿉니다(단 4:14). 
    다니엘은 이 꿈이 왕에게 해당하며, 왕이 교만으로 인해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짐승처럼 들에서 살게 될 것임을 경고합니다(단 4:25). 
    예언대로 느부갓네살은 7년간 광야에서 짐승처럼 살게 되지만, 그 후에 하나님을 인정하고 겸손히 돌아와 왕국을 회복하게 됩니다(단 4:34). 
    이 사건을 통해 느부갓네살은 하나님의 절대적인 주권을 인정합니다(단 4:37).

     

    다니엘 5장

    벨사살 왕은 큰 연회를 열고, 예루살렘 성전에서 가져온 금, 은 그릇을 사용하여 술을 마십니다. 
    갑자기 벽에 손가락이 나타나 글을 씁니다. 
    다니엘이 불려와 글을 해석하는데, 이 글은 ‘메네, 메네, 데겔, 우바르신’으로 하나님께서 벨사살의 왕국을 저울에 달아 부족하다고 판결하셨으며, 그 왕국이 메디아와 페르시아에 넘겨질 것임을 의미합니다(단 5:25-28). 
    그 밤에 벨사살은 죽임을 당하고, 메디아의 다리우스가 바벨론을 점령합니다(단 5:30-31). 이는 하나님의 심판이 속히 이루어진다는 교훈을 줍니다.
    BC 539년 10월 

     

    다니엘 6장

    다니엘은 메디아와 페르시아 왕 다리우스 밑에서 높은 지위를 얻게 됩니다. 
    다른 고관들은 다니엘을 질투하여 그를 모함할 계획을 세우고, 왕에게 다니엘이 기도하면 사자굴에 던져지도록 법령을 제정하도록 유도합니다(단 6:7-9). 
    다니엘은 이 법령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 기도하였고, 결국 사자굴에 던져집니다(단 6:16). 
    그러나 하나님은 사자들의 입을 막아 다니엘을 보호하십니다. 
    이로 인해 왕은 하나님을 두려워하게 되고, 다니엘을 구출하며 그를 모함한 자들을 사자굴에 던집니다(단 6:24). 
    다리우스 왕은 하나님을 높이고, 다니엘은 더욱 높임을 받습니다(단 6:26-28).

     

    다니엘 7장

    다니엘은 밤에 네 짐승에 대한 환상을 봅니다. 
    첫 번째 짐승은 사자 같고, 두 번째는 곰, 세 번째는 표범 같으며, 네 번째 짐승은 매우 무섭고 강력한 철 이빨을 가지고 있습니다(단 7:4-7). 
    이 짐승들은 바벨론, 메디아-페르시아, 그리스, 로마 제국을 상징합니다. 
    마지막 짐승은 열 뿔을 가지고 있으며, 이 중 한 뿔이 나머지 뿔들을 꺾으며 권세를 장악합니다. 
    그러나 다니엘은 ‘인자 같은 이’가 나타나 영원한 왕국을 세우는 장면을 봅니다(단 7:13-14). 
    이는 메시아의 왕국을 예언하며, 세상의 제국들은 멸망하겠지만 하나님의 왕국은 영원할 것임을 상징합니다.

     

    다니엘 8장


    다니엘은 숫양과 숫염소의 환상을 봅니다. 
    숫양은 두 뿔을 가진데, 하나는 다른 하나보다 큽니다. 
    숫염소는 큰 뿔을 가지고 숫양을 쳐서 이깁니다. 
    다니엘은 이 환상의 의미를 묻고, 가브리엘 천사가 나타나 해석해 줍니다. 
    숫양은 메디아와 페르시아 왕국을, 숫염소는 그리스 왕국을 상징합니다(단 8:20-21). 
    숫염소의 큰 뿔은 알렉산더 대왕을 나타내며, 그의 죽음 후 네 개의 작은 뿔이 나오는 것은 제국이 네 부분으로 나뉘는 것을 상징합니다. 이 예언은 장차 올 제국들의 흥망과 메시아 시대의 도래를 암시합니다(단 8:22-25).

     

    다니엘 9장

    다니엘은 예레미야서에서 예루살렘의 포로 생활이 70년간 지속될 것이라는 예언을 묵상하고, 이스라엘의 죄악을 회개하는 기도를 드립니다(단 9:2-19). 
    하나님은 가브리엘 천사를 보내 다니엘에게 70이레에 대한 예언을 해석해 줍니다. 
    이 예언은 예루살렘의 재건과 메시아의 도래, 그리고 메시아가 제거되는 사건을 포함합니다(단 9:24-26). 
    마지막 70번째 이레는 이스라엘의 남은 기간과 종말에 대한 예언으로, 성전이 파괴되고 대환난이 있을 것임을 나타냅니다. 
    이 장은 이스라엘의 회복과 메시아의 희생을 중심으로 한 구속 계획을 보여줍니다.

     

    다니엘 10장

    다니엘은 3주 동안 금식하며 기도하던 중, 큰 환상을 봅니다. 
    그 환상에서 천사가 다니엘에게 나타나, 앞으로 있을 일들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천사는 다니엘에게 바사 왕국과 헬라 왕국 간의 싸움을 설명하며, 그가 하늘에서 벌어지는 영적 전쟁에 대해 알립니다(단 10:13-14). 
    이 환상은 세상의 권세들이 겉으로보이는 대로가 아니라, 보이지 않는 영적 싸움의 결과라는 것을 보여줍니다. 
    다니엘은 매우 두려워했지만, 천사의 위로로 힘을 얻고 계속해서 비전을 받습니다(단 10:19).

     

    다니엘 11장

    이 장은 남방 왕(이집트)과 북방 왕(시리아)의 세력 다툼과 정복에 관한 매우 상세한 예언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 예언은 알렉산더 대왕의 죽음 후 그리스 제국이 네 부분으로 나뉜 후, 셀레우코스 왕조와 프톨레마이오스 왕조 간의 갈등을 예언합니다(단 11:4-20). 
    후반부는 셀레우코스 왕조의 안티오쿠스 에피파네스를 지칭하며, 그가 성전을 더럽히고 이스라엘 백성을 박해할 것을 예언합니다(단 11:31). 
    이 장은 최종적으로 북방 왕과 남방 왕의 최후 대결, 그리고 장차 다가올 영적인 충돌을 상징합니다.

     

    다니엘 12장

    다니엘서의 마지막 장은 종말에 대한 환상으로, 대환난의 시기가 다가올 것이며, 그때 하나님께 충성된 자들이 구원을 받을 것임을 예언합니다(단 12:1). 
    죽은 자들이 부활하여 영원한 생명에 들어갈 것인지, 아니면 영원한 수치에 들어갈 것인지 결정될 것입니다(단 12:2). 
    다니엘은 이 예언이 먼 훗날 성취될 것이라는 지시를 받으며, 환상을 봉인하고 마지막 때를 기다리라고 명령받습니다(단 12:4, 9). 
    다니엘서는 결국 하나님의 백성에 대한 약속과 희망으로 마무리되며, 최후의 구속과 부활을 기대하게 합니다(단 12:13).


    마지막을 기다리라
    마지막 때에 두 가지 모습으로 드러나게 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단 12:2).

    "땅속에서 잠자던 사람들 가운데서 많은 사람들이 깨어날 것이오. 
    한쪽 사람들은 영원한 삶을 누릴 것이고, 다른 쪽 사람들은 치욕을 겪고 영원히 기피 대상이 될 것이오."(새한글성경)

    한편 예수님께서는 마지막 때에 두 가지 모습을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마 25:46)

    "저희는 영벌에, 의인들은 영생에 들어가리라 하시니라."
    (Then they will go away to eternal punishment, but the righteous to eternal life.)

    다니엘서의 말씀과 예수님의 말씀을 종합하면 마지막 때에 나타날 두 가지 모습은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는 영원한 삶 즉 영생(永生. eternal life)
    둘째는 치욕의 삶 즉 영벌(永罰. eternal punishment)

    그렇다면 누가 영생을 누리고 또 누가 영벌에 들어가게 될까요?
    예수님께서는 마태복음 25장에서 아주 쉽게 가르쳐주셨습니다(25:31-33).

    "인자가 영광으로 모든 천사와 함께 올때에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으리니.

  • 모든 민족을 그 앞에 모으고 각각 분별하기를 목자가 과 염소를 분별하는것 같이 하여
  • 은 그 오른편에, 염소는 왼편에 두리라."

  • 오른편 즉 양의 무리에 속한 사람들을 향하여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25:34-40). 

  • "그 때에 임금이 그 오른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내 아버지께 복 받을 자들이여 나아와 창세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예비된 나라를 상속하.라
  •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였고.
  • 벗었을 때에 옷을 입혔고 병들었을 때에 돌아보았고 옥에 갇혔을 때에 와서 보았느니라.
  • 이에 의인들이 대답하여 가로되 주여 우리가 어느 때에 주의 주리신 것을 보고 공궤하였으며 목마르신 것을 보고 마시게 하였나이까?
  • 어느 때에 나그네 되신 것을 보고 영접하였으며 벗으신 것을 보고 옷 입혔나이까?
  • 어느 때에 병드신 것이나 옥에 갇히신 것을 보고 가서 뵈었나이까 하리니.
  • 이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반면에 왼편 즉 염소의 무리에 속한 사람들을 향하여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25:41-43).

    "왼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저주를 받은 자들아 나를 떠나 마귀와 그 사자들을 위하여 예비된 영영한 불에 들어가라.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지 아니하였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지 아니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지 아니하였고 벗었을 때에 옷 입히지 아니하였고 병들었을 때와 옥에 갇혔을 때에 돌아보지 아니하였느니라."

    양의 특징은 나도 모르게 선한 일을 행하지만 염소의 특징은 나를 강조하고 나를 드러내려고 합니다.
    선한 일을 의식적으로행하는 것과 나도 모르게 자연스럽게 행하는 것의 차이라고 하겠습니다.

    양심이 마비된 사람들은 선한 일에 관심이 없지만 착한 양심의 사람들은 선한 일에 관심을 갖고 집중할 수 있습니다.
    믿음의 사람이라면 선한 일에 마음을 쏟고 악한 일에는 마음을 닫을 줄 알아야 하겠습니다.








    9월 22일(월) 다니엘 10-12장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마지막을 기다리라(12:13)

    너는 가서 마지막을 기다리라 이는 네가 평안히 쉬다가 끝날에는 네 업을 누릴 것임이니라.
    As for you, go your way till the end. You will rest, and then at the end of the days you will rise to receive your allotted inheritance.

    마지막(케츠. qêts)  קֵץ

    1. 극단
    2. 끝없이 אֵין קִץ
    3. 파멸
    발음 [ qêts ]

    어원 / 112에서 유래한 압축형
    구약 성경 / 67회 사용

  • 관련 성경 /  지남, 끝(창8:6, 전12:12), 끝남(출12:41, 민13:25, 대하8:1, 겔7:2, 단11:27), 끝(창6:13, 신31:10, 왕하19:23), 마지막(욥6:11, 애4:18, 단11:40), 종말(시39:4, 합2:3), 끝날(단12:13).


  • 너는 가서 마지막을 기다리라 

    다니엘 10-12장은 다니엘의 마지막 환상을 기록한 책입니다. 
    10장에서 부터 시작된 큰 전쟁에 대한 환상을 보여 주셨습니다. 
    다니엘은 3주동안 슬퍼하고 금식하고 있을때에 주신 계시입니다. 
    11장 마지막에서 세상 권세자가 분노하여 많은 무리를 다 죽이며 멸망시키고자 할 것이요, 그가 장막 궁전을 바다와 영화롭고 거룩한 산 사이에 세울 것이나 그의 종말이 이르리니 도와 줄 자가 없으리라 말씀하셨습니다.

    이와 반대로 1절에서 "그 때에 네 민족을 호위하는 큰 군주 미가엘이 일어날 것이요" 말씀하십니다.

    큰 환란 가운데서 하나님은 천사장 미가엘을 보내셔서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들을 보호하십니다. 
    미가엘은 "여호와와 같은 이가 누구인가"라는 뜻으로 사단과 싸우고 하나님의 백성을 보호하는 천사장입니다.

    "그때에 네 백성중에 기록된 모든 자가 구원을 받을 것이니라" 말씀하시며 생명책에 기록된 자들, 예수님을 위해 핍박받고, 멸시와 천대 받으면서도 인내하고, 끝까지 믿음을 지킨 자들을 구원해 주십니다.

    2절에서 두 종류의 부활이 있음을 말씀해 주십니다. 
    "땅의 티끌 가운데에서 자는 자 중에서 많은 사람이 깨어나 영생을 받는 자도 있겠고 수치를 당하여 영원히 부끄러움을 당할 자도 있을 것이며" 말씀하십니다.

    죽는다고 죽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재림에 때에 부활하게 되고, 각각 그 행위를 따라서 영생을 받는자, 영원한 수치를 받는 자들로 나뉜다 말씀하십니다. 
    이때 영생을 얻는 자 중에서도 하나님께 인정받고 높임 받는 자들이 있습니다.

    3절 "지혜 있는 자는 궁창의 빛과 같이 빛날 것이요 많은 사람을 옳은 데로 돌아오게 한 자는 별과 같이 영원토록 빛나리라" 많은 사람을 옳은데, 즉 예수님께 돌아오게 한 자는 별과 같이 영원토록 빛날 것을 약속해 주십니다. 
    무엇이 옳고 그른지 몰라 방황하는 자들,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나름대로 알고 믿는 자들에게 지혜의 말씀을 전함으로 예수님께 그 마음과 중심을 돌이키도록 돕는자, 섬긴자들은 별과 같이 영원토록 빛나리라 말씀해 주십니다.

    4절에서 다니엘에게 마지막때까지 이 말을 간수하고 이 글을 봉함하라 하십니다. 
    많은 사람이 빨리 왕래하며 지식이 더하기 때문입니다. 
    많은 이들을 말씀을 지식적으로 알고자 합니다. 
    여기 저기서 좋은 말씀, 좋은 설교를 듣기 좋아하며, 이를 위해 빨리 왕래하고, 요즘에는 인터넷으로 실시간으로 유명한 말씀을 들으며 지식을 쌓습니다. 
    그러나 이는 자신을 교만하게 하는 지식지수만 높여 줄 뿐, 회개함도, 돌이킴도, 깨달음도 없는 그저 자랑하고, 거룩한척 하게 하는 말만 유창하게 하는 지식에 불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말씀을 봉함하고, 구하는자, 경외심으로 듣는자, 절대적으로 영접하는 자들에게 깨닫는 영을 허락하사 말씀에 감추인 보배를 얻게 하십니다.

    5-7절에서 "이 놀라운 일의 끝이 어느때까지냐" 묻습니다. 
    다른 이가 "반드시 한때 두때 반을 지나서 성도의 권세가 다깨지기 까지이니 그렇게 되면 이 모든 일이 다 끝나니라" 말씀하셨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때"에 관심이 많습니다. 
    언제, 어떻게.. 에 많이 궁금해 하고 알고자 합니다. 
    한때 두때 반은 3년 반으로서 많은 의미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다니엘도 이 말씀을 깨닫지 못해서 8절에 보면 "내가 듣고도 깨닫지 못한지라 내가 이르되 주여 이 모든 일의 결국이 어떠하겠나이까" 묻습니다.

    이에 하나님께서는 "다니엘아 갈지어다 이 말은 마지막때까지 간수하고 봉함할 것임이니라"하시며 다니엘의 질문에 분명하게 대답해 주지 않으시고 가라고 하십니다.

    10절 "많은 사람이 연단을 받아 스스로 정결하게 하며 희게 할 것이나 악한 사람은 악을 행하리니 악한 자는 아무것도 깨닫지 못하되 오직 지혜있는 자는 깨달으리라"

    마지막까지 하나님께서 봉한 말씀을 많은 사람들은 연단받고, 스스로 정결하게 하며, 회개하고, 경외함으로 받는 자, 순종과 믿음로 말씀을 존귀히 여기는 자들을 깨닫습니다. 
    그러나 악한 사람은 지식은 많을 지라도 악을 그치지도, 회개하지도, 돌이키지도 않으므로 지식만 많을 뿐 아무것도 깨닫지 못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오직 지혜있는자, 말씀을 경외하고, 순종하는자, 믿음으로 사는자만이 그 말씀의 뜻과 깊은 의미를 깨달아 알 수 있습니다.

    13절 "너는 가서 마지막을 기다리라 이는 네가 평안히 쉬다가 끝날에는 네 몫을 누릴 것임이라" 

    다니엘서 12장의 마지막 말씀입니다. 
    10대에 포로로 끌려와 80세가 넘을 때까지 이방땅에서 믿음을 지키고, 부와 명예와 권세를 떨칠지라도 한치의 변함없이 하나님을 사랑하고 경외하기를, 세상으로부터 더렵혀 지지 않기를 결단하고 지킨 다니엘에게 주시는 마지막 말씀입니다. 

    그가 지금까지 해 왔던 것 처럼 그가 변함없이, 깨달은 말씀 그대로 더렵혀지지 않고, 하나님만을 두려워하고, 그 앞에서 흠없는 자가 되기를 기도하는 그 모습으로 기다리라 하십니다. 
    마지막 날에 그의 믿음대로 몫을, 상급을 얻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많은 이들이 "때"와 "어떻게 될것"인가에 관심이 많습니다. 
    하나님은 다니엘서를 통해서 세계가 언제, 어떻게 움직일지, 어떤 일이 일어날지 분명하게 가르쳐 주셨고, 이루셨습니다.

    다니엘서를 통해서 이미 이루어진 일들을 하나씩 하나씩 확인해 가는 재미가 있었습니다. 
    이 말씀이 언제 어떻게 이루어졌고, 누구를 통해 이루어져 갔는지.. 하나씩 하나씩 체크하며 신기하고 재미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오늘 마지막 말씀을 묵상하며 이제는 하나님의 말씀이 언제, 어떻게 이루어질 것인가에 대한 관심보다, 내가 이 예수님을 어떻게 만날 것인가, 그때에 내가 어떤 모습으로 하나님앞에 서게 될 것인가에 더 집중하게 하셨습니다. 
    언제든, 어떤 모양으로 오시든, 내가 단독자로 서야할 예수님 앞에서 어떤 모습이어야 할지, 이것을 준비하고, 이것을 바라보며 매일 오늘을 살아야 함을 배웁니다.

    하나님은 어떤 자를 기뻐하는지 분명히 말씀해 주셔서 지혜로운 처녀들 처럼 준비할 시간, 회개하고 정결해질 시간, 깨달을 시간과 기회를 주십니다.

    10절 말씀처럼 "많은 사람이 연단을 받아 스스로 정결케 하며 희게 하라고 지혜있는 자들, 깨달을 수 있는 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다니엘 말씀을 묵상하며 깊이 배운 것은 "절대성"입니다. 
    다니엘이 뜻을 정해 자신을 더럽히지 않고자 타협하지 않았고, 풀무불 앞에서의 세 친구도, 사자굴 앞에서의 다니엘도 한치의 타협도, 합리화도, 변명도 없이 하나님만을 섬겨야 함을, 하나님과의 약속이 더 존귀함을 생명을 걸고 지켰습니다. 
    그때 하나님은 그들을 풀무불속으로, 사자굴 속으로 함께 들어오셔서 그들의 절대적인 믿음과 결단을 축복해 주시고 머리털 하나 상하지않게 보호해 주셨습니다. 

    한달쯤 기도를 쉬는것, 한번쯤 무릎을 꿇는 것이 뭐가 그리 대단하다고.. 생각하지 않고, 생명과 맞바꿀 만큼 소중하다고 여기고 지켰을 때 하나님은 다니엘을 세상이 바뀌고 왕이 바뀌어도 별처럼 빛나는자, 지혜로운자로 높여 주셨습니다. 
    높아져서도 그가 변하지 않을때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계획과 뜻, 그 은밀한 계획을 모두 풀어서 말씀해 주셨습니다. 

    다니엘의 절대성을 배울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현실의 상황과 조건, 사람들의 말과 보여지는 것들에 대한 판단으로 인해 하나님을 향한 그 사랑과 부르심의 은혜, 허락하신 사명을 내팽기치지 아니하고, 끝까지 견디는자, 마지막까지 예수님이 허락하신 그 자리, 그 은혜를 지키는 자가 되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나를, 우리 모임을 너무나 사랑하셔서 작은 죄라도, 조그만 허물이라도 깨닫게 하시고, 애통하게 하시고, 회개케 하시며, 연단하여 주시는 하나님을 인해 감사 찬양합니다. 
    질투하시는 하나님이 질투하지 않으시게 늘 하나님만 바라보고, 하나님이 주신 말씀생각, 사명생각, 하나님의 뜻을 생각하며 경외심으로 순종하며 따르는 주의 종이 되길 간절히 기도합니다. 
    그 때가 언제라도, 내일이라도. 두려움이 아닌 기쁨과 감사로 두팔벌려 예수님을 맞이 하는 주의 지혜로운 종이길 간절히 기도합니다.



    마지막을 기다리라

    다니엘이 힛데겔에서 보았던 환상(단 10:4)이 마지막 12장에도 이어진다. 
    안티오코스 4세로 표상되는 하나님의 대적자(적그리스도)가 멸망한 후, 성도들에게 하나님의 구원이 임한다. 

    그 때에 네 민족을 호위하는 큰 군주 미가엘이 일어날 것이요 
    또 환난이 있으리니 
    이는 개국 이래로 그 때까지 없던 환난일 것이며 
    그 때에 네 백성 중 책에 기록된 모든 자가 구원을 받을 것이라 (1절) 

    마지막 날에 가장 극심한 환난이 일어날 것이다. 
    그러나 그때가 이르면 성도들을 보호하는 미가엘이 일어날 것이요, 성도들은 모두 구원을 받을 것이다. 
    이 구절은 마지막 날에 구원자의 임재를 예언하는 구절로 유대인들 역시 메시아 시대에 대한 예언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성도의 부활 

    구약 성경에서 성도의 부활을 말씀하는 구절을 찾는다면, 본문이 대표적이다. 

    땅의 티끌 가운데에서 자는 자 중에서 
    많은 사람이 깨어나 영생을 받는 자도 있겠고 
    수치를 당하여서 
    영원히 부끄러움을 당할 자도 있을 것이며 (2절) 

    위의 구절은 부활 이후의 삶을 두 가지로 구분한다. 
    곧, 영생을 얻는 부활이 있고 영원한 수치를 당하는 부활이 있다. 
    신약 성경에서도 마지막 심판 때에 영생의 부활과 영벌의 부활이 있다고 가르친다. 
    본문은 계속해서 영생을 얻는 부활에 대해 더 자세히 묘사한다. 

    지혜 있는 자는 궁창의 빛과 같이 빛날 것이요 
    많은 사람을 옳은 데로 돌아오게 한 자는 
    별과 같이 영원토록 빛나리라 (3절) 

    위의 구절은 예수님께서 가라지의 비유를 말씀하며 인용하신다. 

    그 때에 의인들은 
    자기 아버지 나라에서 해와 같이 빛나리라 
    귀 있는 자는 들으라 (마 13:43) 

    이 세상에서의 삶이 전부가 아니요, 부활 이후의 삶이 있다는 성경의 가르침은 이 세상에서 비록 고난을 당할지라도 영생을 바라보며 인내할 수 있는 근거가 된다. 

    마지막을 기다리라 

    하나님의 대적자 즉 적그리스도에 대한 실체와 그의 종말, 나아가 성도의 구원까지 다니엘이 보았던 힛데겔 환상에는 모두 담겨 있었다. 
    이 정도면 하늘의 비밀이 다니엘에게 모두 펼쳐진듯하다. 
    그러나 모든 묵시가 끝나는 본문에서도 여전히 의문은 남는다. 

    그 중에 하나가 세마포 옷을 입은 자 
    곧 강물 위쪽에 있는 자에게 이르되 
    이 놀라운 일의 끝이 어느 때까지냐 하더라 (6절) 

    본문에는 이에 대한 대답이 여러 가지로 등장한다. 
    곧, "한 때 두 때 반 때를 지나서 성도의 권세가 다 깨지기까지"(7절), 
    "천이백구십 일"(11절), 
    그리고 "천삼백삼십오 일"(12절) 등이다. 

    다니엘서의 마지막에 등장하는 이 기한은 과연 언제를 의미하는가? 
    많은 사람들이 그 의미를 파헤치기 위해 노력했지만 그 가운데 만족스러운 대답은 찾아보기 어렵다. 
    오히려 그 의미를 완전히 깨닫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인정해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다니엘서의 결론은 마지막 날에 대한 현상과 시기를 정확히 예언하는 것이 아니다. 
    다니엘서의 결론은 사람이 하나님의 섭리를 모두 깨달을 수 없다는 것에 대한 분명한 선언이다. 
    그러니 성도들은 구원의 때까지 기다릴 뿐이다. 

    너는 가서 마지막을 기다리라 
    이는 네가 평안히 쉬다가 끝날에는 네 몫을 누릴 것임이라 (13절) 


    마지막을 기다리라(다니엘 12:1-13)

    북 이스라엘이 멸망 후 130년 쯤 지나서 남 유다는 바벨론 제국의 공격을 받습니다. 
    3차례에 걸친 침공에 의해 결국 멸망 당했습니다. 
    다니엘은 바벨론의 1차 침공 때 포로로 끌려갔는데 아마도 10세 전후의 어린이였다고 추정합니다.

    다니엘은 자기를 끌고간 바벨론 제국이 멸망당하고 바사(페르시아) 제국이 새롭게 세워지는 격동기를 지났지만 끝까지 살아 남았고, 오히려 다리오 왕(메대사람, 고레스왕의 외삼촌이자 장인, 고레스가 메대를 바사에 합병 후 상징적으로 장인을 왕위에 앉힘, 다리오가 2년 통치 후 고레스가 왕위에 올라 포로 귀환 명령함)때는 총리의 자리에까지 올랐습니다. 

    다니엘서에는 7장부터 네 가지 환상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7장에는 “네 짐승(사자, 곰, 표범, 열뿔 짐승) 환상”, 
    8장에는 “숫 양과 숫 염소 환상”, 
    9장에는 “일흔 이레 환상”, 
    그리고 10~12절에는 다니엘이 바사왕 고레스 3년에 “힛데겔 강가에서 본 환상”이 있습니다.

    이 네가지 환상에 대해서는 참 많은 억측과 오해가 있고 논란이 끊이지 않고 있습니다. 
    그 만큼 환상은 쉽게 해석하고 단정할 수 있는 말씀이 아닙니다. 
    수 많은 이단들이 이 환상이 이렇다, 저렇다 하면서 자신들의 말만 정답이라고 우기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다니엘이 본 네 번째 환상(힛데겔 강가에서 본 환상, 10~12장) 의 마지막 부분이며 종말의 때에 관한 내용입니다. 
    다니엘이 환상으로 본 마지막 때의 모습이 담긴 1~4절을 읽어 드립니다.

    “1. 그 때에 네 민족을 호위하는 큰 군주 미가엘이 일어날 것이요 또 환난이 있으리니 이는 개국 이래로 그 때까지 없던 환난일 것이며 그 때에 네 백성 중 책에 기록된 모든 자가 구원을 받을 것이라 
    2. 땅의 티끌 가운데에서 자는 자 중에서 많은 사람이 깨어나 영생을 받는 자도 있겠고 수치를 당하여서 영원히 부끄러움을 당할 자도 있을 것이며 
    3. 지혜 있는 자는 궁창의 빛과 같이 빛날 것이요 많은 사람을 옳은 데로 돌아오게 한 자는 별과 같이 영원토록 빛나리라 
    4. 다니엘아 마지막 때까지 이 말을 간수하고 이 글을 봉함하라 많은 사람이 빨리 왕래하며 지식이 더하리라”

    “그 때에” 라고 한 시점은 2절에서 보듯이 죽은 자가 깨어나 영생을 받기도 하고 영원히 부끄러움을 당하기도 한 다는 것을 볼 때 최후의 심판 날이 분명합니다. 
    그 때에 민족을 호위하는 미가엘이 나타난다고 합니다. 
    유다서에는 미가엘을 천사장으로 기록했습니다.

    천사장 미가엘이 민족을 호위한다고 했는데, 여기서 민족은 이스라엘만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온 세계 열방(All Nation)을 말합니다. 
    미가엘 천사장은 마지막 때에 하나님의 명령을 받아 사탄의 무리를 대적하는데 선봉에 설 것이고 모든 민족을 보살피는 역할을 하게 될 것입니다.

    그 때에는 개국이래로 그 때까지 없던 큰 환란이 일어난다고 했습니다. 
    이는 예수님이 마태복음 24장에서 예언하신 내용(마 24:21, 그 때에 큰 환난이 있겠음이라 창세로부터 지금까지 이런 환난이 없었고 후에도 없으리라)과 일치합니다.

    1절에, 듣도 보도 못하던 환난이 일어나게 될 것이고 “그 때에 네 백성 중 책에 기록된 모든 자가 구원을 받을 것이라”라고 했습니다. 
    이것 역시 “누구든지 생명책에 기록되지 못한 자는 불못에 던져지더라”(계 20:15)라는 요한계시록의 말씀과 일치 합니다.

    이렇듯 다니엘의 환상은 성경의 다른 예언, 특히 요한계시록의 말씀들과 정확히 일치합니다. 이단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그 때가 몇 년 몇 월 몇 일에 일어날 것이라고 말도 안되는 시한부 종말론을 내세우거나, 미가엘은 이 시대를 예언하는 자기(이단들의 우두머리) 자신을 가리킨다고 주장하거나, 환란은 무슨 상징을 가진다는 등 이런 미혹의 말에 휩쓸리지 않으셔야 합니다.

    말세에 이를수록 거짓 선지자와 자칭 그리스도라고 일컫는 자들이 무수히 등장할 겁니다. 예수님이 직접 그런 일들이 일어날 것이라고 예언하셨습니다. 우리가 걱정하고 점검해 가야 할 것은 내가 정말 생명책에 기록된 구원 받을 자0인가를 생각하며, 내가 믿음 안에 있는가를 날마다 확증하며 살아가데 집중해야 합니다.

    우리가 예수님 안에, 예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시지 않으면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지난 번 요한 복음 15장 말씀을 기억해 보시면, 우리가 무엇을 해야 생명책에 기록되어 구원에 이를 수 있는지 더 이상 설명이 필요 없을 겁니다.

    오직 하나님 앞에 날마다 서고, 오직 예수 이름을 앞세워 하루를 살고, 오직 성령이 말하시는대로 순종하며 살아가려고 애쓰고 수고하면 구원은 틀림 없이 우리에게 은혜로 주어질 것입니다. 서고, 살고, 순종하면 구원에 이릅니다.

    2절에서 그 때에 자는 자(죽은자)들이 일어나(부활) 영생에 들어가고, 또한 수치와 부끄러움(영벌)에 당할 자가 있다는 것은 이미 우리가 알고 있는 내용입니다. 영생과 영벌의 대조는 언제 들어도 무섭고 두려운 말씀입니다.

    3절에서 지혜 있는자(지혜되신 예수님과 온전히 하나가 된 자)와 많은 사람들을 옳은 데로 돌아오게 한 자(죽도록 헌신하고 충성을 다한 자)는 영원토록 빛날 것이라고 했습니다. 이 역시 어떤 자가 생명책에 기록될 자이며 누가 하늘의 상급을 받을 자인지 더 이상 설명이 필요 없게 하시는 말씀입니다.

    4절에서 “다니엘아 마지막 때까지 이 말을 간수하고 이 글을 봉함하라”라고 했는데, 이 말씀 역시 요한계시록에서는 “이 두루마리의 예언의 말씀을 인봉하지 말라 때가 가까우니라”(계 22:10)라고 일치 되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다니엘은 “봉함하라”고 했고, 사도 요한은 “인봉하지 말라”는 대조적인 기록을 했습니다. 이러한 차이는 무려 600여년의 시차를 두고 예수님의 재림과 심판이 완전히 공개되기 전과 후, 너무나도 다른 상황에서 말씀을 기록하였기 때문입니다.

    1~4절까지 다니엘이 본 환상은 “그 때에” 일어날 일들입니다. 이미 예수님의 오심, 죽으심, 부활, 그리고 요한계시록까지 알고 있는 우리에게는 이 내용이 어려울 것은 없습니다. 종말과 심판의 날이 무섭고 두렵기는 하지만 반드시 속히 일어날 일을 굳게 믿고 오히려 소망 중에 기다리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구원하심이 보좌에 앉으신 우리 하나님과 어린양께 있도다”(계 7:10)라는 찬양처럼 하나님만 경외하고, 예수님만 굳게 믿고, 성령님과 항상 동행을 요청하며 고단한 하루 하루를 묵묵히 지내다 보면 어느 새 그 때, 그 날에 이르게 될 것입니다.

    모든 성도는 그 날과 그 때를 기다리는 것이 유일한 소망이 되고, 기다리는 것이 살아가는 이유가 되고, 기다리는 것이 내게 주신 가장 큰 선물임을 깨닫고, 오직 그 때를 향하여, 하나님 나라를 향하여, 믿음의 길로 담대히 나아가시기를 축복합니다.

    계속해서 다니엘이 본 환상이 나오는 본문 5~9절을 읽어 드립니다. “5. 나 다니엘이 본즉 다른 두 사람이 있어 하나는 강 이쪽 언덕에 섰고 하나는 강 저쪽 언덕에 섰더니 6. 그 중에 하나가 세마포 옷을 입은 자 곧 강물 위쪽에 있는 자에게 이르되 이 놀라운 일의 끝이 어느 때까지냐 하더라 7. 내가 들은즉 그 세마포 옷을 입고 강물 위쪽에 있는 자가 자기의 좌우 손을 들어 하늘을 향하여 영원히 살아 계시는 이를 가리켜 맹세하여 이르되 반드시 한 때 두 때 반 때를 지나서 성도의 권세가 다 깨지기까지이니 그렇게 되면 이 모든 일이 다 끝나리라 하더라 8. 내가 듣고도 깨닫지 못한지라 내가 이르되 내 주여 이 모든 일의 결국이 어떠하겠나이까 하니 9. 그가 이르되 다니엘아 갈지어다 이 말은 마지막 때까지 간수하고 봉함할 것임이니라”

    다니엘은 두 사람과 세마포 옷을 입은 자가 대화를 나누는 장면을 환상으로 보았습니다. 세 마포 옷을 입은 자는 10장에서도 나오는데 이는 성육신 하기 전의 성자라고 추측이 되며, 두 사람으로 나온 존재는 천상에 존재하는 천사일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다니엘이 본 두 사람중 하나가 세마포 옷을 입은 자에게 “이 놀라운 일의 끝이 너느 때까지냐 하더라” 물었습니다. “어느 때 까지냐” 이런 어감은 반말로 들리고, 우리 나라 사람의 감정으로는 아니 천사가 성자에게 반말을 할 수 있냐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이건 단순히 번역상 그렇게 된 것이고, 우리말인 한글 문화에서나 존칭이 엄격하지 외국어는 그렇지 않습니다. 특히 이 주고 받는 언어가 천상의 언어 였을테니 “반말 아닌가?”라는 것은 대한민국 사람만이 느낄 수 있는 해프닝이죠.

    “이 놀라운 일일 어느 때 까지냐”라는 물음에서 “이 놀라운 일”은 무엇일까요? 이 일은 짧게 신구약 중간기 시대에 마카비 혁명을 일으키게 만든 장본인인 셀류커스 왕조의 “안티오코스 4세 에피파네스” 군주의 핍박을 지칭한다고 해석합니다. 왜냐하면 뒤에 나오는 대답이 명시된 기간을 암시해 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물음에 세마포 옷을 입은 자가 영원히 살아계시는 자를 향하여 좌우 손을 들어 맹세하며 “반드시 한 때 두 때 반 때를 지나서 성도의 권세가 다 깨지기까지이니 그렇게 되면 이 모든 일이 다 끝나리라”대답하였습니다.

    반드시 한 때, 두 때 반때 라고 기한을 명시했습니다. 한 때는 1년, 두 때는 1년, 반 때는 6개월이기 때문에, 총 3년 6개월, 마흔 두달이 됩니다. 이 기간 동안 고통 받으면 성도의 권세가 다 깨진다고 하셨습니다. 얼마나 극심한 핍박이 가해 질 것인지 상상조차 안 되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이 기간이 꼭 어떤 시점의 역사적 순간을 뜻하지만은 않습니다.

    요한계시록 에서는 “그들(이방인들)이 거룩한 성을 마흔 두 달 동안 짓밟으리라”(계 11:2) 라는 예언이 있고, 또한 “용이 짐승에게 권세를 주므로 ~ 마흔두 달 동안 일할 권세를 받으니라”(계 13:5)는 예언도 있습니다. 한 때 두 때 반 때, 즉 3년 6개월, 마흔 두달 이라는 기간이 종말의 심판 때에도 어김 없이 이런 식의 숫자로 등장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한 때 두 때 반 때는 이미 지나간(신약 중간기 시대) 핍박의 사건이기도 하지만 앞으로 종말에 임할 핍박의 예언기도 합니다. 얼마나 핍박이 극심한지는 “성도의 권세가 다 깨어지기까지” 라는 말씀을 보면 인간으로서는 견디기 힘든 극한의 고통과 공포가 임할 것임을 경고하는 예언입니다.

    이런 대화가 오고가는 장면을 환상속에서 보고 들었지만 다니엘 조차도 도대체 이 기한이 무슨 의미인지, 언제부터 언제 까지를 이야기 하는 것인지 도무지 알길이 없어서 직접 질문합니다. “내 주여 이 모든 일의 결국이 어떠하겠나이까”, 라고 묻자 “다니엘아 갈지어다 이 말은 마지막 때까지 간수하고 봉함할 것임이니라” 라는 대답의 음성이 들렸습니다.

    다니엘은 기한에 대한 속 시원한 해석을 듣지 못했습니다. 대신에 “네가 듣고 본 말(말씀)을 마지막 때까지 봉함(지켜라)하라”는 말씀만 들었습니다. 다니엘에게 환상을 보여 주신 것은 기한에 대해서 실체적으로 알려 주고, 그 기한을 다른 사람에게 설명 해 주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아직 예수님이 오시기도 수백년 전이기에 다니엘이 종말의 일까지 그 실체를 다 알 수도 없었고 하늘에서는 그러한 내용까지 다니엘에게 세세하게 설명해 주지 않았습니다. 다니엘의 임무는 자기가 보고 들은 것을 원형 그대로 명확하게 기록하고 훼손되지 않도록 잘 보관하여 후대에 물려주는 것이었습니다.

    후대의 사람들은 다니엘이 기록하고 보관하던 그 일들이 실제로 일어나는 것을 목격하면서, “맞아, 그렇구나, 먼 옛날 다니엘이 환상을 보고 기록했다고 한 그 말씀대로 진짜 다 이루어졌어, 하나님은 진실로 살아계신 분이셔, 하나님은 역사의 주관자이셔, 하나님은 약속하시고 말씀하신 모든 것들을 반드시 이루어 주시는 신실한 분이셔,” 이렇게 하나님을 찬양하며 영광 돌리게 될 것입니다.

    다니넬은 속 시원한 대답을 듣지는 못했지만 자신에게 맡겨진 임무를 충싱하게 이행 했습니다. 오직 자신의 자리에서 맡겨진 역할을 충실히 완수하며 하나의 디딤돌 역할을 한 사람들이 성경에 기록된 지도자요, 왕이요, 선지자요, 신약의 제자들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아주 작은 역할이지만 역사의 시간 안에서 디딤돌 하나를 놓게 하시려고 우리 각자는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우리가 이 시대의 다니엘입니다. 우리에게는 다니엘에게 말씀 하신 것처럼, 기록되어 보관된 말씀들을 끝까지 지켜내고(봉함) 전달해 주어야 하는 특별한 임무가 주어졌습니다.

    이 임무를 충실히 수행하려면, 우리에게는 두 가지가 필요합니다. 하나는 기록된 말씀이 그대로, 반드시, 속히 이루어 진다는 굳건한 믿음이 있어야 하고, 그리고 하나는 이 말씀이 이루어지는 그 날까지 끝까지 기다리며, 또 기다린다는 확고한 소망을 품는 것입니다. 믿음과 소망이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00교회 모든 성도는 성령안에서 살아가시면서, 환상도 보시고, 음성도 들으시고, 영광도 목격하시는 많은 체험들 속에서 살아가시기를 바라며, 내가 만난 구원자, 내가 경험한 하나님의 나라, 내게 깨달음을 주신 진리의 말씀을 보존하고 전파하는데 최선을 다하는 이 시대의 다니엘로 살아가시기를 축복합니다.

    다니엘이 본 환상 마지막 이야기 10~12절을 읽어 드립니다.

    “10. 많은 사람이 연단을 받아 스스로 정결하게 하며 희게 할 것이나 악한 사람은 악을 행하리니 악한 자는 아무것도 깨닫지 못하되 오직 지혜 있는 자는 깨달으리라 11. 매일 드리는 제사를 폐하며 멸망하게 할 가증한 것을 세울 때부터 천이백구십 일을 지낼 것이요 12. 기다려서 천삼백삼십오 일까지 이르는 그 사람은 복이 있으리라 13. 너는 가서 마지막을 기다리라 이는 네가 평안히 쉬다가 끝날에는 네 몫을 누릴 것임이라” 아멘.

    10절에는 “악한 자는 아무것도 깨닫지 못하고 오직 지혜(예수, 말씀, 진리, 믿음) 있는 자는 깨달으리라” 라고 했는데, 깨닫는 자와 깨닫지 못하는 자는 그 날(종말, 심판)의 때가 이를수록 뚜렷하게 구분되어 나타날 것입니다.

    11, 12절에는 또 알 수 없는 숫자가 나옵니다. 11절의 천이백구십일은 3년 7개월이고, 이는 앞섯 나온 한 때 두 때 반 때(3년 6개월) 보다 한 달이 많은 숫자입니다. 대부분 이 기간은 주님 오시기 전에 겪게 될 마지막 대 환난의 시간으로 이해 합니다.

    대 환란이 일어나는 시기에는 적 그리스도가 출현하여 11절에서처럼 “매일 드리는 제사를 폐하며 멸망하게 할 가증한 것을 세울 때”가 올 것입니다. 실제로 B.C 167~164년에 적 그리스도의 예표라고 말하는 셀류커스 왕조의 안티오코스 4세 에피파네스 시절에 예루살렘 성전이 훼손되어 파손 되엇고, 희생 제사를 못 드리도록 없애 버렸고, 제사장들은 죽임 당하고, 성전에 돼지 피를 뿌리는 등으로 거룩한 성전이 더럽혀지는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우리가 주목해서 볼 숫자는 12절에 나오는 천삼백삼십오일입니다. 이 숫자는 11절의 천이백구십일 보다 45일이 많습니다. 3년 반도 견디기 힘든데 45일이나 더해져서 “천삼백삼십오일까지 이르러야 복이 있으리라” 했습니다.

    이 복은 단순한 복이 아니라 구원에 이르는, 영생에 이르는 복을 말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환난의 시간, 더해지는 시간에는 극도의 환난과 핍박, 미혹과 시험이 들이 닥츨 것인데, 믿는 자들이라면 단단히 각오하고 무조건 끝까지 이기고 승리해야만 천국문에 이를 수 있다는 겁니다.

    이런 환난의 시간을 알려 준 다니엘은 자신이 기록한 12장의 책을 이렇게 마무리 합니다. “너는 가서 마지막을 기다리라 이는 네가 평안히 쉬다가 끝날에는 네 몫을 누릴 것임이라” 아멘.

    마지막 환난이 어떠할지 우리는 상상조차 하지 못하기 때문에, “너는 마지막을 기다리라” 라고 시작하는 이 문장이 어느 정도로 단단히 각오하라고 하는 것인지를 생각해 봐야 합니다.

    해상 전투 영화를 보면 구축함에서 잠수함을 탐색하면 폭뢰를 바다에 투하 하거가 어뢰를 발사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러면 잠수함에서는 폭뢰가 터지거나 혹은 어뢰에 맞기 전에 충격에 대비하라고 하면서 몸을 낮추고 잠수함 내에 있는 쇠붙이는 무엇이든지 꽉 붙잡는 장면이 나옵니다. 어뢰에 제대로 한 대만 맞아도 잠수함은 산산조각이 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저는 영화 장면에서 이런 엄청난 충격파를 대비하라는 것과 “너는 마지막을 기다리라”는 말씀이 교차되면서 생각을 해 봤습니다. 물론 비교가 안 되는 상상이겠지만, 아마도 죽을 만큼 견디기 힘들고 차라리 죽는 것이 낫다고 할 만큼 고통스러운 시간이 대 환난 일겁니다. 육체적, 정신적으로 가루와 같이 파괴되는 극심한 고통의 시간일 것이라고 저도 상상만 할 뿐입니다.

    는 말씀이 누가 누구에게 하시는 말씀인가요? 하늘에서 세마포 옷을 입은 자, 곧 입니다.

    인자 같은이 성자 예수 그리스도는 다니엘에게 여러 가지 환상을 보여 주시고, 직접 음성을 들려 주시면서, 너는 죽는 날까지 이 말씀을 기록하고, 보관하고, 전달하는 임무를 충실히 이행하라고 하셨고, 최종적으로 “너는 가서 마지막을 기다리라” 마지막 임무를 주셨습니다.

    이 임무는 우리에게도 동일하게 주신 임무입니다. 이 임무를 죽도록 충성하며 끝까지 완수한다면 “이는 네가 평안히 쉬다가 끝날에는 네 몫을 누릴 것임이라”는 약속의 말씀이 반드시 역사하게 될 것입니다.

    “다니엘아, 네가 마지막을 기다리는 동안 너는 평안히 쉬게 될거야, 환난을 끝까지 이기고 기다리기를 포기하지 않는다면 네 몫(영생 복랑을 누리는 생명의 면류관과 해 같이 빛나는 상급)을 누리게 될 거야” 라는 이 마지막 말씀으로 다니엘은 세상 모든 것을 다 가진자처럼 큰 기쁨가운데 하나님께 영광돌려 찬송을 했을 겁니다.

    너무나 아름답고 감격적인 결말입니다. 나도 제발 직접 말씀으로 듣고 싶고, 얻고 싶은 부러운 결말입니다. 다니엘에게 말씀 하신 마지막 12절은 온 인류에게 주시는 기다림의 소망을 주시는 강력한 은혜의 메시지입니다. 우리가 한 달 동안 이 말씀을 암송하고 묵상하고 기도하는 가운데 한 마디 한 마디가 우리 몸 안의 세포에 녹아 내리기를 바랍니다.

    우리의 삶이 아무리 고단하다고 힘들 지라도, 단 하루도 견디기 힘든 고통을 무려 1290일 씩이나 받고 견뎌야 하는 대 환난이 온다고 할 지라도, 추가로 45일이 더해져 충격적인 고통이 추가 된다고 할 지라도 “너는 가서 마지막을 기다리라”는 명령에 순종하는 것을 결코 잊지 않는 우리가 되기를 바랍니다.

    “기다리라 그리하면 네가 너를 평안으로 쉬게하고 네 몫을 누리게 할 것임이라”는 이 절대적인 약속의 말씀이 나에게 주신 일평생 소망의 말씀으로 역사하여 내가 있는 자리에서, 내가 믿는 믿음으로, 내게 주신 사명 감당하며, 비가오나 눈이 오나, 바람이 부나, 파도가 치나, 한결 같은 마음으로 마지막을 기다리고 또 기다리며 하나님 나라를 향하여 전진하시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간절히 축원하고, 축복합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에게 저희들의 연약한 마음 속에, 기다리라, 평안으로 쉬게 하리라, 네 몫을 누리리라 말씀해 주시니 감사합니다. 저희들의 인생의 시간을 붙들어 주셔서, 오직 약속의 말씀과 믿음을 앞세워 기다림을 온전히 이루어가도록 인도하여 주옵소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마지막을 기다리라

    다니엘 12장
    (1) 마지막 때에 있을 여러 현상들을 묘사하는 전반부(1-4절), 
    (2) 마지막 날에 있을 현상들의 구체적인 시기에 대한 물음과 답변을 소개하고 있는 중반부(5-7절), 
    (3) 다니엘의 재차 이어지는 질문과 답변을 묘사하고 있는 후반부(8-13절) 등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이러한 내용을 통하여 12장은 하나님께서 종말에 사탄의 세력을 완전히 파괴시키고, 세상과 사탄을 넘볼 수 없는 완전한 하나님 나라를 건설하신다는 점을 부각시키고 있습니다.

    한편 12장은 종말론적인 분위기가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습니다. 이러한 사실은 10장부터 전개되는 싸움의 흐름이 종교적인 성격을 띠고 있다는 점(11:8, 36), 전쟁에 대한 묘사 자체가 구체적이기보다는 암시적이며 예언적이라는 점 등을 통해서 이미 알려졌습니다. 더구나 12장에서 묘사되는 일련의 사건들은 신약에서 제시하는 마지막 때의 모습과 매우 유사합니다(12:1-3, 막 13:19, 20). 그러므로 11장부터 전개되는 전쟁과 그 결과는 종말론적인 사건에 대한 예표로 볼 수 있습니다. 특히 예수님께서 올리브(감람)산 강화에서 이 사건을 인용하신 것(마 24:21)은 이러한 사실을 뒷받침해 줍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현 교회 시대를 마감하도록 결정지을 마지막 때의 대환난과 관련하여 12장의 예언을 인용한 것입니다. 이상과 같은 12장은 인간의 참된 소망은 오직 하나님 나라에 있음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1. 마지막 날에 있을 일들(12:1-4)
    전 단락(11:20-45)에서 언급되었던 마지막 때의 일들은 주로 전쟁의 비참한 상황에 관한 환상이었습니다. 그러나 12장에서 나타나는 마지막 때의 상황은 이전의 모습들과는 질적으로 다른 내용입니다. 즉 전 단락의 내용이 마지막 때에 일어날 부정적인 양상을 묘사하고 있다면, 본 단락은 종국에 있을 긍정적인 양상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다니엘에게 하나님의 계시가 종결되는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이러한 사실은 하나님의 계시의 방법과 구원 역사의 방식을 보여줍니다. 즉, 하나님은 인간을 중개로 하여 자신의 뜻을 온 세상에 전하는 방법을 주로 사용하시며, 이러한 하나님의 뜻을 전하는 사람은 하나님에 대한 절대적인 믿음을 소유한 자라는 사실입니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본서는 다니엘의 신앙을 집중적으로 부각시키고 있는 것입니다. 다니엘은 자신에게 닥친 여러 가지 어려운 역사적 형편과 개인적으로 견디기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본연의 임무를 충실하게 수행하였습니다. 이는 다니엘이 오늘을 사는 성도들에게도 귀한 신앙적 모범이 되는 인물인 것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에 하나님은 마지막 이 계시의 말씀을 다니엘에게 위임하는 것으로 끝을 맺고 있는 것입니다(4절). 이처럼 종말론적 분위기를 강하게 풍기고 있는 본 단락은 ① 마지막 날에 있을 하나님의 구원과 심판을 묘사하는 전반부(1-3절), ② 다니엘에게 마지막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맡기는 장면을 묘사하고 있는 후반부(4절)등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한편, 본 단락의 내용 가운데서 나타나는 두드러진 신학적인 특징은 '부활 사상'(2절)입니다. 이러한 구약의 부활 사상에 대해 자유주의 학자들은 부정적인 견해를 취하여 왔는데, 주로 고대 이방 종교나 문화에서 비롯된 신화적인 이야기라고 격하합니다. 그러나 구약의 부활 사상은 본 단락에서만 나타난 것이 아니라, 다른 시대적 배경을 갖고 있는 성경에서도 동일하게 나타나고 있습니다. 이러한 점을 더욱더 분명히 하기 위해 아래의 구절들을 비교해 봅시다.

    단 12:2 –종말론적 상황, 장차 있을 하나 종말론적인 축,
    사 26:19 –종말론적 상황, 성령[성신]님의 역사를 통한 하나님의 백성들의 복을 보여줌.
    왕하 13:21 –역사적인 사건,  새로운 소망을 계시함.
    겔 37:9-10 –이스라엘 백성들에 대한 예언, 영생 증거함.

    이러한 여러

    성경적인 근거와 사례들을 보았을 때 구약에서 부활 사상이 나타납니다. 특히 구약의 부활 사상은 예수님 스스로 부활하심으로써 온전히 성취됩니다(막 8:31 “인자가 많은 고난을 받고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버린 바 되어 죽임을 당하고 사흘 만에 살아나야 할 것을 비로소 그들에게 가르치시되”). 이제 본 단락의 내용을 몇 단계로 나누어 살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① 미가엘의 등장(1a절) : 마지막 때에 있을 대대적인 전쟁이 거의 끝나갈 무렵 미가엘이 나타납니다. 미가엘의 등장은 환난을 당하는 하나님의 백성들을 위로하기 위함입니다. 결국 이는 하나님의 종말론적인 구원 운동의 전조를 가시적으로 보여주는 사건입니다.

    ② 하나님 백성들의 구원(1b절) : 미가엘 천사의 개입과 함께 환난이 오고, 하나님의 구원이 뒤이어 일어날 것입니다. 그런데 이 구원은 아무에게나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생명책에 기록된 사람에게만 이루어진다(출 32:33, 계 20:12). 이러한 사실은 인간의 역사를 하나님이 친히 다스리심을 보여주는 동시에 인간의 구원이 인간의 조건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주권에 있음을 강하게 나타내주고 있습니다.

    ③ 영생과 영벌(2절) : 마지막 날에 있을 하나님의 역사는 두 가지 극단적인 양상이 일어나게 되는데, 영생과 영벌로 나타납니다. 이 두 가지 대조적인 양상이 나타날 수 밖에 없는 가장 큰 이유는 하나님의 본성과 직접적인 관련이 있습니다. 즉 하나님의 공의는 심판의 양상으로, 하나님의 긍휼은 구원의 양상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롬 9:19-23).

    ④ 참 성도들에 대한 보상(3절) : 이 부분에서는 하나님이 진실된 백성들에게 있을 보상을 자세하게 소개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지혜 있는 자 be wise'와 '많은 사람을 옳은 데로 돌아오게 한 자 they that turn many to righteousness'는 동일한 사람의 두 가지 다른 표현입니다(동의어 반복법). 즉 지혜 있는 자가 많은 사람을 돌아오게 하는 것입니다. 천국에서 하나님의 진정한 보상을 받는 자는 단지 자신만의 성결을 유지하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이 아니라, 이웃에게 영향을 끼쳤던 자들입니다.


    2. 다니엘과 환상 속의 두 사람(12:5-13)
    사실 본장의 결론은 이미 전 단락(1-4절)에서 끝났다고 보아도 무방합니다. 최종적인 계시도 밝혀졌고 다니엘에 대한 마지막 부탁도 언급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뒤이어서 내용이 전개되는 이유는 10장부터 전개되었던 일련의 환상들을 최종적으로 정리하기 위한 의도가 있는 것입니다. 한걸음 더 나아가서 전 단락에서 밝혔던 마지막 날에 있을 여러 사건들의 시점을 밝히려는 의도도 두드러지게 나타납니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다니엘은 종말론적인 시점에 대하여 의문을 제기했던 것입니다. 즉 단락이 마지막 날에 있을 사건들에 관심하고 있다면, 본 단락에서는 마지막 날이 과연 언제인가라는 역사적 시점에 대해 집중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본 단락은 ① 환상 중에 두 사람의 대화를 묘사하고 있는 전반부(5-7절), ② 다니엘의 반복적 질문과 구체적인 답변을 묘사하는 후반부(8-13절) 등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한편, 본 단락은 종말론적인 기간에 대하여 집중하고 있는데, 그 기간이 '한 때 두 때 반 때'가 지나야 한다고 밝힙니다(7절). 사실 이 표현은 이전에도 언급되었던 표현이기도 합니다(7:25). 이러한 동일한 표현이 있게 된 배경을 비교하여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7:25 - 벨사살 원년, 다니엘 자신의 환상, 종말론적 시기(한 때 두 때 반 때)
    12:5 - 페르샤왕 고레스 삼 년(10:1), 환상 속의 두 사람간의 대화, 종말론적 시기(한 때 두 때 반 때)

    또한 본 단락에서 언급되고 있는 '일천 이백 구십 일'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은 여러 가지 견해가 있습니다. 즉 ① 문자적인 1290일, 43개월로 보아 다니엘의 70 이레의 후반기로 보는 견해, ② 예루살렘이 함락되어 매일 드리는 제사를 폐한 로마인이 등장한 때까지의 기간으로 보는 견해, ③ 안티오쿠스 에피파네스의 통치 기간으로 보는 견해, ④ 일천 이백 구십 일을 상징적인 날짜, 즉 하나님의 심판이라는 최종적인 상황이 도래하여 안티오쿠스 에피파네스와 그가 예표하는 적그리스도의 활동 기간으로 보는 종말론적인 견해 등입니다. 이 중에서도 환상 속에 나타난 내용이 상징적인 묘사라는 점을 감안할 때, 마지막 ④에 해당하는 종말론적인 기간으로 보는 견해가 가장 타당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날'에 대한 언급 자체가 종말론적인 일들과 관련되어 있으며 환상의 내용이 상징적인 성격을 갖고 있는데 유독 이 부분에서만 문자적인 해석을 취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와 같은 본 단락의 주도적인 내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① 환상 속에 나타난 두 초자연적인 인물들간의 대화(5-7절) : 이 둘의 대화의 중심은 마지막 시기에 관한 문제입니다(행 1:6). 한 사람의 이 질문에 대하여 처음 계시를 받을 때 있었던 세마포 입은 한 사람(10:5)은 '한 때 두 때 반 때'라고 대답합니다(7:25). 이 한 때 두 때 반 때가 구체적으로 어떤 날인가는 확실히 알 수 없으나, 해석의 단서를 제공해 주는 언급이 나타나는데, 바로 '성도의 권세가 다 깨지기까지'(7b절)라는 구절입니다. 즉 이 세상에서 성도의 힘이 소멸되는 그날에 세상의 종말이 성취된다는 것입니다. 결국 이 기간은 예수님의 초림으로부터 시작해서 재림으로 끝나는 전(全)종말론적인 시기입니다.

    ② 다니엘의 반복적인 질문과 대답(8-13절) : 다니엘의 질문은 두 가지 의문에 대한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 하나는 구체적인 시기에 관한 것이며, 다른 하나는 마지막 날의 최종적 상황을 묻는 것입니다. 그래서 세마포 입은 사람이 이 두 가지를 동시에 밝히고 있습니다. 우선 두 가지 극단적인 양상이 이 세상 속에서 극명하게 부각된다고 말합니다(10절). 즉 의인은 시험을 받을 때 회개함으로 스스로를 정결케 하는 반면, 악인은 자신의 악한 행동이 악인지조차 깨닫지 못하고 더욱 비뚤어진 길로 나가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연단을 위한 시험은 의인에게는 장차 누릴 승리와 영광의 증거가 되지만, 악인에게는 멸망과 심판의 증거가 됩니다. 

    또한 시기에 관한 언급을 이전보다 더욱 구체적으로 언급하는데, '일천 이백 구십 일'이고 밝히고 있습니다(11절). 이 기간이 구체적으로 알 수 없으나, 그 시점이 '멸망케 할 미운 물건을 세울 때부터'(11절)라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기 전 올리브산에서 가르치시기를 당신의 종말론적 상황들에 대한 밝히는 가운데 이 표현을 인용하고 있습니다(마 24:15). 결국 때와 시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마 24:36) 주님이 오실 때 세상이 종말이 이루어짐은 확실합니다.

    이상과 같은 12장은 하나님께서 이 세상의 역사를 주관하신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강조합니다. 성도는 아무리 어려운 상황이라 할지라도 하나님의 섭리를 믿으며 인내해야 합니다. 물론 세상의 불합리한 사건들과 모순된 상황 속에서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체험하면서 산다는 것이 쉽지만은 않지만, 기도하며 승리해야 하는 것입니다(합 2:4 “보라 그의 마음은 교만하며 그 속에서 정직하지 못하나 의인은 그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또한 성도는 하나님 중심적인 삶을 살아야 합니다(롬 14:7-8 “우리 중에 누구든지 자기를 위하여 사는 자가 없고 자기를 위해 죽는 자도 없도다. 우리가 살아도 주님을 위해 살고, 죽어도 주님을 위해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님의 것이로다”). 자기의 욕심과 자아를 버리고 오직 하나님의 쯧대로 살아갈 때 진정한 자유와 평화를 맛보게 되는 것입니다.


    3. 종말의 때 The Time of the End (단 12:1-4)
    (1) 그때에 네 민족을 호위하는 큰 군주 미가엘이 일어날 것이요, 또 환난이 있으리니 이는 개국 이래로 그때까지 없던 환난일 것이며, 그때에 네 백성 중 책에 기록된 모든 자가 구원을 받을 것이라. (2) 땅의 티끌 가운데에서 자는 자 중에서 많은 사람이 깨어나 영생을 받는 자도 있겠고, 수치를 당하여서 영원히 부끄러움을 당할 자도 있을 것이며 (3) 지혜 있는 자는 궁창의 빛과 같이 빛날 것이요, 많은 사람을 옳은 데로 돌아오게 한 자는 별과 같이 영원토록 빛나리라. (4) 다니엘아, 마지막 때까지 이 말을 간수하고 이 글을 봉함하라. 많은 사람이 빨리 왕래하며 지식이 더하리라.

    북방왕 안티오쿠스 4세 에피파네스의 악의적인 행적(11장)에 이어지는 12장은 이미 그를 통해 상징된 바 있는 종말 때의 적그리스도의 출현과 그로 인한 대환난의 정황, 그리고 그리스도의 재림을 통해 성취될 궁극적인 승리의 예언 기사가 역사적 성취의 실례를 통해 나타나고 있습니다. 따라서 12장은 본서에서 언급된 예언적 환상을 총괄하는 부분으로 다른 환상에 비해 종말에 일어날 일에 대한 확실한 예언의 말씀입니다.

    1절. “그때에 네 민족을 호위하는 큰 군주 미가엘이 일어날 것이요, 또 환난이 있으리니 이는 개국 이래로 그때까지 없던 환난일 것이며, 그때에 네 백성 중 책에 기록된 모든 자가 구원을 받을 것이라.” ‘그때에 בָעֵת הַהִיא at that time’ 는 11:40의 '마지막 때'와 동일한 말로 11장과 연관해서 이를 역사적 측면에서 해석할 경우, 이는 유대 민족에 대해 잔혹한 박해를 행했던 안티오쿠스 4세 에피파네스의 최후의 시기를 말합니다. 그러나 상징적으로는 다니엘의 70이레 예언 중 마지막 대환난 때인 7년 대환난의 후반 3년 반의 기간, 곧 적그리스도의 출현으로 성도들에게 극단적인 박해가 가해질 무서운 환난의 때를 말합니다(9:26-27 참조, 렘 30:5-7, 계 13장 이하). ‘네 민족을 호위하는 군주 미가엘이 일어날 것이요’ 이는 순차적으로 대환난의 시기('환난이...것이며') 뒤에 언급될 문장으로 곧 적그리스도가 어두운 활동이 최고에 달했을 때 하나님께서 천사 미가엘(מִיכָאֵל)을 보내셔서, 그 택한 백성을 보호하고 위로하며 성도들에 대한 최후의 구원을 준비하시리라는 의미입니다(10:13 참조)

     “그런데 페르샤 왕국의 군주가 이십일 일동안 나를 막았으므로 내가 거기 페르샤 왕국의 왕들과 함께 머물러 있더니 가장 높은 군주 중 하나인 미가엘이 와서 나를 도와주므로”). ‘환난이 있으리니...환난일 것이며’ 일차적으로는 이미 11장에서 언급된 안티오쿠스 4세 에피파네스의 가공할 이스라엘 핍박을 지시하는 것이나 상징적으로는 종말에 있을 7년 대환난에 성도들이 적그리스도에게 당할 엄청난 박해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는 예수님께서 올리브(감람)산에서 종말 교훈을 통해 종말에 있을 대환난의 정황을 바로 본 구절 1절에서 인용하신 사실로도 입증됩니다(마 24:21, 22). 한편 본 구절의 '개국이래'란 말은 일차적으로는 신정 국가로서의 이스라엘의 태동 이후라는 의미와 함께 이차적으로 종말론적 관점에서 세상 역사의 전영역을 포괄하는 말입니다. 

    ‘네 백성 중...구원을 받을 것이라’ 앞서 언급된 미가엘의 도움에 직접 연결되는 기사로 역사적으로는 11:35[또 그들 중 지혜로운 자 몇 사람이 몰락하여 무리 중에서 연단을 받아 정결하게 되며 희게 되어 마지막 때까지 이르게 하리니 이는 아직 정한 기한이 남았음이라]의 성취를 가리키나, 궁극적으로는 천사의 군주 미가엘의 보호를 통해 보존된 신실한 성도('책에 기록된 모든 자')들이 메시야의 도래로 영원한 구원을 획득하게 되라란 사실을 말합니다. 한편 '책에 기록된 모든 자'에서 '책'(סֵּפֶר, 세페르)은 하나님의 세세한 섭리의 기록인 10;21의 '진리의 글'과는 달리 신앙적 고난을 이겨내고 끝까지 여호와 신앙을 수호한 사람들의 이름이 기록된 '생명록'을 말합니다(시 69:28;말 3:16;빌 4:3;계 13:8).

    2절. “땅의 티끌 가운데에서 자는 자 중에서 많은 사람이 깨어나 영생을 받는 자도 있겠고, 수치를 당하여서 영원히 부끄러움을 당할 자도 있을 것이며” ‘땅의 티끌 가운데서...있을 것이며 And many of them that sleep in the dust of the earth shall awake’ 성경의 용례상 '잠'이 '죽음'의 상징으로 자주 나타난다는 점(욥 3:13, 시 13:3, 고전 15:6)과 '티끌'(-עָפָר, 아파르)이 인간의 육체가 다시 귀속되는 '무덤'의 의미로 쓰여졌다는 점(창 3:19, 욥 7:21, 시 22:30, 30:10)에서 본 구절은 성도들의 무궁한 구원이 성취되는 그때에 이미 죽은 자들 가운데서도 많은 자들(일부 학자들은 '모든 자'로 해석한다)이 영혼뿐 아니라 육체적('땅의 티끙에서')으로도 부활하게 될 것임을 말합니다. 한편 이렇게 부활한 자들은 백보좌 심판(계 20:11-15) 앞에서 이전의 신앙적 삶과 불신앙적 삶의 여부에 따라 영생[무궁]의 구원을 얻기도 하며('영생을 얻는 자도 있겠고') 영원한 형벌을 받기도 합니다(계 21:8 둘째 사망). 곧 본절은 구약에 있어서 그리스도의 재림 때에 의인과 악인이 함께 부활한다는 사실이 처음으로 언급된 곳입니다.

    3절. “지혜 있는 자는 궁창의 빛과 같이 빛날 것이요, 많은 사람을 옳은 데로 돌아오게 한 자는 별과 같이 영원토록 빛나리라. And they that be wise shall shine as the brightness of the firmament; and they that turn many to righteousness as the stars for ever and ever.” 기독교의 부활의 교리를 확증해주는 2절에 이어 3절은 의인에 대한 보상으로서의 영생의 교리를 증거해주고 있습니다. '지혜 있는 자'는 단 11:33, 35에 언급된 바 있는 신실하고 경건한 삶을 산 신앙의 사람들을 말합니다. 또한 '많은 사람을...돌아오게 한 자'는 곧 '지혜로운 자'와 동일한 말로, 그의 삶의 열매는 바로 그들을 통해 구원을 받게 된 새로운 신앙인들입니다('옳은 데로 돌아 온 많은 사람'). 따라서 본 구절은 일차적으로는 안티오쿠스 4세 에피파네스의 박해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여호와 신앙을 수호한 유대인들(하시딤 חסידים)이 누리게 될 참된 승리와 영광을 예언하는 것(11: 35 비교)인 한편, 상징적으로 종말에 있는 대환난때에 끝까지 그들의 신앙을 수호한 성도들이 최후 심판 때 상급으로 받을 영원한 생명과 영광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곧 이 경건한 성도들은 그리스도의 영광의 상징인 빛('궁창의 빛과 별')과 함께 영원한 천국의 삶을 보장받게 됩니다(출 24:10, 마 13:43, 계 2:28).

    4절. “다니엘아, 마지막 때까지 이 말을 간수하고 이 글을 봉함하라. 많은 사람이 빨리 왕래하며 지식이 더하리라. But thou, O Daniel, shut up the words, and seal the book, even to the time of the end: many shall run to and fro, and knowledge shall be increased.” ‘이 말을 간수하고 이 글을 봉함하라’ '간수하고 shut up'는 8:26[너는 그 환상을 간직하라.]을 에도 나옵니다. 한편 '간수하라'는 말에 덧붙여 '봉함하라'(חֲתֹם, 하톰 seal)란 말이 사용된 것은 고대 근동에 있어서 이러한 '봉인'은 비밀의 유지라는 뜻보다는 그 내용이 공식적으로 인정되고 결코 바뀔 수 없다는 사실을 부각합니다. 

    본서에 나타난 이러한 예언들이 일점 일획도 변경되지 않고 그 필연적인 성취를 이루게 되리란 뜻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많은 사람이...더하리라’ 여기서 '빨리 왕래하고'(שֹׁטְטוּ, 슈트 run fo and fro)는 원어상 '여행하다', '이리저리 뛰다', '열렬하다'(암 8:12), '주시하다'(대하 16:9, 슥 4:10)란 뜻을 함축하고 있는데, 현대 교통수단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많은 사람이 빨리 왕래한다'는 것은 곧 종말에 많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이 예언의 성취를 주시하며 그 예언의 참된 의미를 깨닫기 위해 열렬하게 노력할 것임을 말합니다. 또한 '지식이 더하리라'는 말은 그 노력의 대가로 하나님의 백성들이 그 예언의 진실을 깨닫게 되리란 의미입니다(Expositors Commentary). 한편 본절을 끝으로 10장 이하에서 계속 전개된 하나님의 계시가 종결됩니다.


    4. 이 모든 일의 결국은 어떠하겠나이까? What Shall be the End of These Things?: 종말에 대한 질문과 답변 First Q & A about the End  (12:5-7)
    (5) 나 다니엘이 본즉 다른 두 사람이 있어 하나는 강 이쪽 언덕에 섰고 하나는 강 저쪽 언덕에 섰더니 (6) 그 중에 하나가 세마포 옷을 입은 자 곧 강물 위쪽에 있는 자에게 이르되 ‘이 놀라운 일의 끝이 어느 때까지냐?’ 하더라. (7) 내가 들은즉 그 세마포 옷을 입고 강물 위쪽에 있는 자가 자기의 좌우 손을 들어 하늘을 향하여 영원히 살아 계시는 분을 가리켜 맹세하여 이르되 ‘반드시  한 때 두 때 반 때를 지나서 성도의 권세가 다 깨지기까지이니 그렇게 되면 이 모든 일이 다 끝나리라’ 하더라. 

    5절. “나 다니엘이 본즉 다른 두 사람이 있어 하나는 강 이쪽 언덕에 섰고 하나는 강 저쪽 언덕에 섰더니” 10장부터 12장 4절까지 이어진 계시의 종결에 이어 예언 성취의 시기(5-9절)가 천사들의 대화 속에서 재확인되고 있습니다(7:25). 곧 다니엘은 티그리스[힛데겔] 강가(10:4)에서 10:11 이후로 자신에게 계시를 말해주었던 '세마포 입은 자'(6절) 외에 다른 두 천사(5절)를 보게 됩니다.

    6절. “그 중에 하나가 세마포 옷을 입은 자 곧 강물 위쪽에 있는 자에게 이르되 ‘이 놀라운 일의 끝이 어느 때까지냐?’ 하더라.” 세마포 옷을 입은 자에 대해서는 10:5-6[그 때에 내가 눈을 들어 바라본즉 한 사람이 세마포 옷을 입었고 허리에는 우바스 순금 띠를 띠었더라. 또 그의 몸은 황옥 같고 그의 얼굴은 번개빛 같고, 그의 눈은 횃불 같고, 그의 팔과 발은 빛난 놋과 같고, 그의 말소리는 무리의 소리와 같더라]을 참조하면 됩니다. ‘놀라운 일의 끝the end of these wonders?’이란 일차적으로는 안티오쿠스4세 에피파네스의 박해(BC 171-164)가 끝나는 때를 가리키나 상징적으로는 종말에 있을 7년 대환난의 후 3년 반('한 때와 두 때와 반 때')이 지나고 그리스도의 재림이 이루어질 때를 말합니다.

    7절. “내가 들은즉 그 세마포 옷을 입고 강물 위쪽에 있는 자가 자기의 좌우 손을 들어 하늘을 향하여 영원히 살아 계시는 분을 가리켜 맹세하여 이르되 ‘반드시  한 때 두 때 반 때를 지나서 성도의 권세가 다 깨지기까지이니 그렇게 되면 이 모든 일이 다 끝나리라’ 하더라.” 세마포 입은 자의 대답은 7년 대환난의 후반 3년 반이 지난 후에 그 예언이 성취될 것이라고 말하는데, 이는 세상 종말의 정확한 때는 천사도 모르고 오직 성부 하나님께서만 아신다는 사실을 암시해줍니다(마 24:36 But of that day and hour knoweth no man, no, not the angels of heaven, but my Father only.개역이나 현대판 번역에는 ‘아들도 모르고’를 삽입하고 있으나 개혁자들의 성경에는 아들이 없음).

    ‘좌우 손을 들어 하늘을 향하여’ 히브리 개념상 극히 엄숙한 맹세의 외적 표현으로 이는 성경에서 '하나님'(신 32:40), '아브라함'(창 14:22). '천사'(계 10:5) 등이 행한 맹세시 하는 제스처입니다. ‘성도의 권세가 다 깨어지기까지니’ 일차적으로는 안티오쿠스4세의 박해로 수많은 변절자와 순교자가 나오게 됨으로써 외형상 언약 백성들이 완전히 패배한 것처럼 보일 때까지란 의미입니다. 궁극적으로는 수많은 성도들이 적그리스도의 가공할 핍박 앞에서 마치 패배하고 소멸되어가는 듯이 보일 때를 가리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처럼 절망적인 상황에서 극적으로 개입하셔서 적그리스도를 심판하시고 성도를 구원하십니다. 한 때 두 때 반 때는 1+2+0.5=3.5를 말하는데 7년의 절반이며, 42달이고, 1260일입니다.


    5. 다니엘의 재차 이어지는 질문과 답변 Second Q & A of Daniel(12:8-13절) 
    (8) 내가 듣고도 깨닫지 못한지라. 내가 이르되 ‘내 주님, 이 모든 일의 결국이 어떠하겠나이까?’ 하니 (9) 그가 이르되 ‘다니엘아 갈지어다. 이 말은 마지막 때까지 간수하고 봉함할 것임이니라. (10)  많은 사람이 연단을 받아 스스로 정결하게 하며 희게 할 것이나 악한 사람은 악을 행하리니 악한 자는 아무것도 깨닫지 못하되 오직 지혜 있는 자는 깨달으리라. (11) 매일 드리는 제사(the daily sacrifice)를 폐하며 멸망하게 할 가증한 것을 세울 때부터 천이백구십(1290) 일을 지낼 것이요 (12) 기다려서 천삼백삼십오(1335) 일까지 이르는 그 사람은 복이 있으리라. (13) 너는 가서 마지막을 기다리라. 이는 네가 평안히 쉬다가 끝날에는 네 몫을 누릴 것임이라.

    8절. “내가 듣고도 깨닫지 못한지라. 내가 이르되 ‘내 주님, 이 모든 일의 결국이 어떠하겠나이까?’ 하니” 8~13절까지는 이 모든 예언의 성취 때에 있을 궁극적인 승리를 위한 신앙적 인내의 필요성을 강조합니다.
    ‘이 모든 일의...어떠하겠나이까?’ 다니엘이 계시의 최종적인 성취 곧 택한 백성의 영생[무궁한 생명]의 구원과 적그리스도의 패배와 영원한 멸망을 깨닫지 못한 까닭에 던진 질문으로 그의 궁극적인 관심은 하나님의 택한 백성의 최종적인 운명입니다.

    9절. “그가 이르되 ‘다니엘아 갈지어다. 이 말은 마지막 때까지 간수하고 봉함할 것임이니라. And he said, Go thy way, Daniel: for the words are closed up and sealed till the time of the end.”‘다니엘아 갈지어다’ 여기서 '갈지어다 לֵךְ'란 말은 곧 다니엘에 대한 모든 계시의 완전한 종결을 의미하는 것으로 한편으로 이는 8절에 언급된 다니엘의 질문에 대한 대답을 완곡하게 거절하는 의도가 함축되어 있습니다. 또한 이 말속에는 10절에서도 보여지듯 그 종말적 정황이 아무나 알 수 있듯이 분명하게 제시되지는 않을 것이란 사실도 암시되어 있습니다.

    10절. “많은 사람이 연단을 받아 스스로 정결하게 하며 희게 할 것이나, 악한 사람은 악을 행하리니 악한 자는 아무것도 깨닫지 못하되 오직 지혜 있는 자는 깨달으리라.” 연단을 받고 정결케 되는 하시딤(경건한 사람들)은 일차적으로는 11:35[또 그들 중 지혜로운 자 몇 사람이 몰락하여 무리 중에서 연단을 받아 정결하게 되며, 희게 되어 마지막 때까지 이르게 하리니 이는 아직 정한 기한이 남았음이라]에서와 같이 신실한 유대인들이 에피파네스4세의 박해와 그로 인한 고난 속에서도 신앙적으로 더욱 정결케 되리란 의미입니다. 상징적으로는 마지막 대환난 때에 참된 신앙인과 거짓 신앙인이 가려지게 되며, 참된 신앙의 사람들은 그러한 적그리스도의 박해 속에서 궁극적인 승리와 구원을 대망하며 더욱더 신앙적으로 정결케 되리란 의미입니다.

    11절. “매일 드리는 제사(the daily sacrifice)를 폐하며 멸망하게 할 가증한 것을 세울 때부터 천이백구십(1290) 일을 지낼 것이요” ‘일천 이백 구십 일’은 7년 대환난의 후반 3년 반과는 30일의 차이를 나타내나, 여기서는 일차적으로 안티오쿠스 4세의 유대 민족 대박해 사건이 시작된 시점부터 그가 마카비 혁명(BC 167-164, 3년 반)으로 쫓겨나고 성전이 다시 정결케 될 때까지의 기간을 가리키는 것이며, 상징적으로는 적그리스도에 의한 7년 대환난에서 큰 박해가 시작된 시점(3년 반)부터 그리스도의 재림 때까지를 의미하는 것으로 보여집니다(8:14 “그가 내게 이르되 이천 삼백 주야까지니 그때에 성소가 정결하게 되리라”). 한편 이러한 구체적인 일수의 언급은 8:14의 경우에서와 같이 다양한 해석들을 야기시키나 그 근본적인 목적은 고난의 때에 대한 한정된 시한을 구체적으로 계시해줌으로써 대환난의 시기에 성도들에게 큰 소망과 위로를 주기 위함입니다(마 24:22 “그날들을 감하지 아니하면 모든 육체가 구원을 얻지 못할 것이나 그러나 택하신 자들을 위하여 그날들을 감하시리라”).

    12절. “기다려서 천삼백삼십오(1335) 일까지 이르는 그 사람은 복이 있으리라.” 1335일에 대하 많은 논란이 있습니다. 상당한 의문점을 지니는 난제에 속하는 일수로 이는 위에 언급된 1290일과 45일간의 차이를 가진다는 점에서 이 45일을 적그리스도에 의한 핍박이 끝나고 하나님의 나라, 곧 새 하늘과 새 땅이 건설되며 하나님의 축복 시대가 임하기까지의 짧은 기간으로 추측할 수밖에 없습니다. 한편 그때까지 기다리는 자에게 '복'이 있다는 예언은 곧 그들이 새 하늘과 새 땅에서 완전한 통치자이신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치리를 받는 천국 시민이 된다는 의미입니다(마 24:13;계 21:1).

    13절. 너는 가서 마지막을 기다리라. 이는 네가 평안히 쉬다가 끝날에는 네 몫을 누릴 것임이라. 
    But go thou thy way till the end be: for thou shalt rest, and stand in thy lot at the end of the days. 

    이 구절은 하나님의 충성된 종이었던 노령의 다니엘에 대한 위로와 축복의 말씀입니다.

    '평안히 쉬다가'(נוּחַ, 누아흐 shall rest)는 원어상 '머물러 쉬다', '정착하여 쉬다'란 뜻으로 ‘노아 Noah’의 뜻과 같습니다. 
    여기서는 일상적인 휴식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육신이 다시 부활하기까지 무덤 속에서 평안히 쉬게 될 것임을 의미합니다. 
    또한 '몫'(גֹרָלְ, 고랄)은 원어상 '분깃', '업'(시 16:5)을 의미한다는 점에서 다니엘이 그리스도의 재림으로 있을 부활을 통해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설 때 그에게 영생[무궁한 생명]의 구원과 함께 큰 하나님의 상급이 주어지게 된다는 점을 시사해줍니다(계 22:12).

    전장(11장)에서 기술된 남방 왕 간의 갈등은 단순한 국지전이 아니라, 세상의 역사가 어떠한 흐름을 갖고 있는가를 보여주는 상징적인 사건이었습니다. 
    저자는 이러한 점을 강조하기 위해 왕의 구체적인 이름이나 역사적 사실들을 밝히기보다 암시적인 표현을 사용한 바 있습니다. 
    이렇게 세상의 전쟁 이면에 있는 영적인 측면을 부각시키고 있는 전장(11장)에 이어서 12장은 전쟁의 결국에 대하여 묘사합니다. 
    이제까지 다양한 방법으로 하나님의 계시를 묘사하고 있는 이전의 장들(1-11장)에 대한 결론으로서 하나님의 주권적 구원 역사를 집중적으로 부각시키고 있습니다. 이러한 점은 본서 전체의 주체이신 하나님의 주권을 잘 나타내줍니다. 이스라엘의 역사상 하나님의 구원 역사에 대해 가장 심각한 회의를 불러일으켰던 어두운 시대적 상황 속에서 본서는 하나님의 주권을 선명하게 부각시키고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성도들은 그리스도의 재림 직전에 적그리스도에 의하여 환난과 핍박을 받게 됩니다. 
    그러나 시련을 이기고 승리하는 자에게는 영생[무궁한 생명]과 축복이 허락됩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백성들의 이름을 생명책에 기록하시고 구원해 주십니다. 
    특별히 인간의 연약함과 부패함을 헤아리시고 미가엘을 통하여 보호해 주십니다(유 1:9 ; 계 12:7). 
    그러므로 우리는 썩어질 이 세상에 미련을 갖지 말고 영광스러운 미래를 바라보며 믿음으로 살아나가야 합나다. 
    그리스도와 함께 종말 전쟁에 참여하면 반드시 진정한 승리가 보장될 것이며 최후의 승자가 될 줄 확신합니다.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신 하나님 아버지, 가정을 창조해 주시고 할아버지, 할머니, 아버지, 어머니, 형제, 자매, 손자, 손녀들을 주심을 감사드립니다. 
    말씀의 전수가 잘 이뤄지도록 우리 가정을 말씀과 기도와 찬양의 도구로 삼아주시고 사철에 봄바람이 부는 가정이 되게 하옵소서. 
    다니엘서 마지막 장을 주심을 감사드립니다. 
    인간이 다스리며 운영하는 세계는 마침내 망하고 하나님 나라가 임하실 것을 예언하신 말씀을 깊이 명심하여 “오 주님, 다스려 주옵소서” 천년왕국, 새하늘 새땅, 새예루살렘을 간절히 기다립니다. 
    마지막까지 반드시 기다리게 하옵소서. 
    다시 오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성경공부를 위한 질문들

    1. 종말에 이뤄지는 영적 전쟁에 누가 마지막으로 개입하는가? (12:1)
    2. 누가 최종 구원을 받는가? (12:1)
    3. 종말에 모든 사람들이 부활되어 심판대에 설 때 두 가지 부류로 나눠지는 것을 간단히 설명해 보자(12:2)
    4. 천국에서 전도 상을 받는 사람의 상급은? (12:4)
    5. 강물위에 세마포 옷을 입은 분께서 종말에 대해 하신 말씀은? (12:7)
    6. 모든 일의 결과를 설명한 내용을 요약해 보자(12:9-11)
    7. 다니엘에게 주신 마지막 종말 메시지는? (12:13)

    금주기도제목: ​
    1.예배를 회복하여 가정과 나라와 교회를 살게 하소서!
    2. 주님처럼 가르치며, 복음을 전파하며, 환우들을 치유하게 하소서!


    마지막을 기다리라



    5절, 주석과 해설

    다른 두 사람

    다른 두 사람이란 지금까지 계시를 말해 준 가브리엘 외의 두 존재를 뜻한다. 이 두 사람이 어떤 존재들인지 분명하게 알 수 없지만 다니엘에게 계시를 이해하도록 도와줄 천사들일 가능성이 많다.

    그 두 사람의 하나는 강 이쪽 언덕에, 다른 하나는 강 저쪽 언덕에 서있는 것을 다니엘은 보았다. 이 강은 힛데겔 강(티그리스, 단 10:4 참고)이다.

    6절, 주석과 해설

    세마포 옷을 입은 자

    여기의 세마포 옷을 입은 자는 10:4-6에 나오는 존재이다. 그분은 그리스도이셨다. 그리스도가 강물 위쪽에 있는 자로 묘사되었는데, “강물 위쪽에 있다”는 말은 문자적으로 “강물 위에 있다”는 뜻이다.

    강 양쪽 가에 서 있던 사람 중의 하나가 세마포 옷을 입은 자 즉 그리스도께 이 일이 어느 때까지 있을 것인지 물어본다. 이 질문은 단 8:13의 질문과 같은 의미라고 할 수 있다(단 8:13).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은 7절에서 듣게 된다.

    7절, 주석과 해설

    영원히 살아 계시는 이

    영원하신 하나님을 의미한다(단 6:26, 7:9).

    한 때와 두 때 반 때

    이 기간은 1260년의 기간으로써 538부터 1798년까지의 기간인 것은 이미 확인하였다(7:25 주석 참고). 그러므로 1798년은 마지막 때의 시작이 된다.

    8절, 주석과 해설

    내가 듣고도 깨닫지 못한지라

    다니엘은 10:1에서 그 환상을 깨달았다고 하였고, 10:14에서는 가브리엘이 온 것은 다니엘이 깨달을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었다고 하였다. 그러므로 다니엘은 10장과 11장의 예언적 사건들에 대해서는 거의 깨달았던 것 같다. 그렇지만 12장에 나오는 마지막 때의 계시에 대하여 충분히 깨닫지 못하였던 같다. 그는 8장의 계시에서도 깨닫지 못하였다(단 8:27). 사람은 하나님께서 공개해 주신 것만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사람은 하나님 앞에서 겸손해야 한다(신 29:29).

    9절, 주석과 해설

    갈지어다

    이 말은 “걱정하지 말라” 또는 “계속 하라”는 의미로 이해될 수 있다.

    마지막 때까지 간수하고 봉함할 것임이니라

    다니엘서의 마지막 때에 관한 예언은 마지막 때에 가서야 열릴 것이라는 말이다. 실제로 마지막 때가 되어서 다니엘에 대한 연구가 활발하게 이루어졌다.

    10절, 주석과 해설

    연단을 받아

    시험과 고난은 사람을 정결하게 하는 도구이다(욥 23:10, 벧전 1:7, 계 7:13-14).

    악한 사람은 악을 행하리니

    여기에서 “악한 사람”은 도덕적인 악한 사람도 포함되겠지만, 보다 근원적인 것은 종교적으로 악한 사람 즉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는 사람들을 가리킨다고 할 수 있다. 사실 도덕적으로 악한 사람보다 종교적으로 잘못된 확신 속에 사는 사람들이 구원 받기가 더 어렵다. 그들은 잘못된 확신 속에서 자만하기 때문이다(마 21:31-32).

    악한 사람은 한 순간에 악한 사람으로 고착된 것이 아니다. 그것은 그의 삶의 여정을 통하여 서서히 형성되었기 때문에 역시 어느 날 갑자기 고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오직 지혜 있는 자는 깨달으리라

    12:3의 지혜 있는 자와 같은 말이다. 즉 “신중한 자들”, “분별력 있는 자들”, “통찰력 있는 자들”로 번역할 수 있다. 옳게 분별하는 일은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 필수적으로 소유해야 할 특성이다. 왜냐하면 마귀가 우는 사자처럼 삼킬 자를 찾고 있기 때문이다(골 2:3, 딤후 2:15, 벧전 5:8).

    11절-12절, 주석과 해설

    1290일과 1335일

    • 11절과 12절에 나오는 1290 일과 1335 일에 대한 해석은 다음과 같은 견해로 나눌 수 있다.
    • 이 예언적인 기간에 대하여 해석할 수 있는 분명한 지침이 없기 때문에 현재로서는 해석이 불가능하다는 견해이다.
    • 이 예언적 기간은 미국에서 일요일 휴업령을 내리는 기간과 관련이 있다는 주장이다. 이렇게 해석하는 사람들은 여러 차례 일요일 휴업령이 내릴 날짜를 정했지만 모두 아무 일 없이 지나갔고, 현재도 일요일 휴업령이 내릴 날짜를 정하고, 예수님 재림 날짜도 정하는 사람들이 있다(신 18:22).
    • 1290 일과 1335 일은 모두 1290 년과 1335 년을 뜻하며, 이 두 기간의 기산점은 서기 508년이라는 견해이다. 이 견해에 의하면 1290 년의 끝은 1798년이며, 1335 년의 끝은 1843년이다. 

    13절, 주석과 해설

    마지막을 기다리라

    다니엘은 이제 마지막 때를 기다리라는 명령을 받는다. 
    그러나 다니엘이 죽을 때까지 세상의 마지막은 오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그는 평안히 쉬게 될 것이다. 
    마지막이 나의 시대에 오지 않을지라도 마지막을 기다리며, 소망을 가지고 사는 것은 모든 그리스도인의 특권이자 의무이다.

    네가 평안히 쉬다가 끝날에는 네 몫을 누릴 것임이라

    다니엘은 무덤에서 평안히 쉬다가 끝날 즉 예수님께서 오실 때에 부활하여 하나님께서 그를 위하여 준비하신 그의 몫을 누리게 될 것이다. 
    ‘몫’은 히브리어로 ‘고랄’인데, 이스라엘 백성들이 약속된 땅을 나눌 때에 배당한 소유와 상속 재산 등으로부터 유래되었다. 
    즉 분배 받은 토지와 재산과 사업 등을 가리킨다. 
    구원 받은 무리들은 하늘에서 하나님께서 준비하신 몫을 받고 영원히 누리게 될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먼저 이 땅에서 그들에게 맡겨진 일(몫)을 감당해야 할 것이다. 
    다니엘은 그에게 맡겨진 몫을 충성스럽게 감당하였기에 그에 합당한 상급(賞給)을 받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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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생의 물(요한복음 4:3~14)

    이 세상에는 두 가지 일이 있습니다. 
    하나는 살리는 일이고, 또 하나는 죽이는 일입니다. 
    사람을 살리는 일이 있는가 하면, 사람을 죽이는 일도 있습니다.

    1. 사람을 살리는 일

    안델센의 동화 가운데 ‘성냥팔이 소녀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 동화의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부모님이 일찍 돌아가신 한 가난한 소녀가 있었습니다. 그 소녀는 하루하루 성냥을 팔아 살아가고 있었는데 여기저기로 성냥을 팔러 다니다보니 너무 추워 손발이 꽁꽁 얼어붙었습니다. 추위를 견디지 못한 소녀는 팔던 성냥을 그어 불을 붙이고 바람에 불이 꺼질까봐 두 손으로 모읍니다. 불꽃 속에 돌아가신 어머니의 모습이 나타납니다. 그리고 이내 성냥불은 꺼지고 맙니다. 소녀는 다시 성냥불을 켭니다. 그렇게 소녀는 부잣집 담에 기대어 밤새도록 반복하다가 그만 얼어 죽고 맙니다. 이 이야기를 읽고 기상학자는 때가 겨울이기 때문에 얼어 죽었지, 만일 여름이었다면 죽지 않았을 것이라고 해석합니다. 지리학자는 그곳이 유럽의 추운 곳이기에 얼어 죽었지 만일 아프리카나, 하와이 같은 지역이었다면 얼어 죽지 않았을 것이라고 해석합니다. 경제학자는 부의 분배가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부가 골고루 분배되었다면 가난한 자들도 함께 따뜻한 겨울을 지냈을 것이고 소녀는 죽지 않았을 것이라고 해석합니다. 교육학자는 지나가던 어른이 이 소녀를 만났을 때 추운 날씨에 잠은 집에서 자야한다고 가르쳤더라면 아이는 죽지 않았을 것이라고 합니다. 물론 모두 틀린 해석은 아닙니다. 문제는 어느 누구도 이 소녀를 살리지 못했으므로 소녀가 죽고 말았다는 것입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낚시를 별로 좋아하지 않습니다. 낚시는 살아있는 고기를 낚아서 죽이기 때문에 좋지 않은 취미라고 생각합니다. 또 ‘마누라 죽이기’라는 영화가 있는데 저는 제목만 듣고 영화를 보지 못했기 때문에 내용은 잘 모르지만 마누라를 살려 두어야 양복도 다려주고, 와이셔츠도 빨아주고, 반찬도 만들어 주고, 살림도 해 주는데 왜 죽입니까? 근처의 식당에서 식사하다보면 주인이 저에게 “요즘 재미있습니까?”하고 물어봅니다. 저는 “예! 재미있습니다.”하고 대답합니다. 무엇을 하시는 분인데 사는 것이 재미있냐고 물으면 “저는 교회의 목사인데 사람을 살리는 일이 너무너무 재미있습니다”하고 대답합니다. 사람을 살리는 일이 얼마나 재미있고, 신바람 나는 일입니까? 성경에서 사람 살리는 재미로 살아가신 분이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은 일평생을 사람을 살리다가 가신 분입니다. 성령도 마찬가지로 사람을 살리는 영이십니다.

    2. 사람을 살리려면 시간을 투자해야 합니다

    예수님이 사마리아지역에 있는 수가성의 우물가를 찾아가셨습니다. 예수님이 그곳을 찾아가신 이유는 남편 다섯이 있던 한 여인을 만나기 위해서였습니다. 18절에 “네가 남편이 다섯이 있었으나 지금 있는 자는 네 남편이 아니니”라고 했는데 남편을 다섯 번이나 바꾸어 가면서 살았지만 행복하지 못하고 불행했던 한 여인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그곳을 일부러 찾아가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사람을 살리는 일에는 시간을 내야합니다. 4절에 “사마리아로 통행하여야 하겠는지라”고 했습니다. 유대에서 갈릴리로 가는 길은 세 가지가 있습니다. 예루살렘은 남쪽에 위치해 있고 갈릴리는 북쪽에 위치하고 있기 때문에 예루살렘에서 서쪽으로 나가 지중해 해안을 따라 올라가는 길이 있고, 예루살렘에서 동쪽으로 여리고로 내려가서 다시 북쪽 요단강을 따라 올라가는 길이 있고, 또 한 지름길이 있습니다. 그 길이 예루살렘에서 사마리아로 지나 갈릴리로 가는 길입니다. 문제는 유대인이 사마리아 사람들과 상종치 않는 것이었습니다.

    여기에서 잠깐 중앙일보 7월 28일자 신문을 보면 19면에「개미도 위험을 알릴 때 소리를 지른다」는 기사가 있습니다. 재목이 너무 재미있어서 읽어보니 개미의 허리 부분에 빨래판 같은 줄이 있어서 그 부분을 긁어서 위험을 알린다는 것입니다. 드르륵 소리를 내지만 사람들은 관심을 가지지 않기에 알아듣지 못할 뿐입니다. 자살하는 사람들도 자살하기 전에 누구에겐가 자신의 죽음에 관한 신호를 보낸다고 합니다. 가까운 친구에게나 가족들에게 “나 죽고 싶어”라든가 혹은 “살맛이 안나!”라든가 혹은 “모든 것을 정리하고 싶다”고 말하지만 주위 사람들이 관심을 가지지 않아서 모를 뿐입니다. 문제는 아무도 관심을 가지지 않겠기에 그의 죽음을 알지 못하고, 죽고 난 후에야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사람을 살리는 일에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예수님은 남편이 다섯이 있던 사마리아 여인에게 관심을 가졌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교회가 <비전 +1 전도축제>를 선포하고 영혼 구원하는 일을 힘쓰자고 외쳤습니다. 이것은 여러분이 관심을 얼마나 기울이느냐에 달려있습니다. 관심을 가지고 시간을 투자해야 사람을 살릴 수 있습니다.

    3. 사람을 살리려면 대화가 통해야 합니다

    ① 관심을 가지고 대화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사마리아 여인에게 말을 걸었습니다. 7절에 “예수께서 물을 좀 달라"고 하신 것입니다. 문제는 관심과 대화입니다. 대화가 통해야 사람의 영혼을 구원시킬 수 있습니다. 시간을 내고, 형편과 사정을 알아보고, 이해를 가지고 대화해야 합니다.

    전도하는 일도 마찬가지 입니다. 그가 지금 무엇을 하는지, 어떤 고민을 가지고 있는지 관심을 가지고 대화해야 합니다. 우리교회에서는 매주 토요일 ‘사랑의 동산 부부행복학교’를 운영하고 있습니다. 많은 가정들이 대화가 없이 살고 있습니다. 남편과 아내, 부모와 자녀간에 대화가 없습니다. 우리나라 가정의 하루 평균 TV시청시간은 2시간이면서도, 부부의 대화는 42초, 자녀와 대화는 37초밖에 되지 않습니다. 전문가들의 통계에 의하면 우리나라 부부들 대화 중에 남편들이 가장 많이 하는 말 56%가 “병신 육갑하고 있네.”이고, 아내들이 가장 많이 하는 말 48%가 “웃기고 있네!”입니다. 행복한 가정은 대화가 있는 가정입니다. 대화는 가정행복의 심장과도 같습니다. 심장이 멎으면 죽습니다. 대화가 끊어지면 그 가정이 위험합니다. 예수님은 물을 달라고 하시면서 이 여인과 대화를 시작했습니다. 한 영혼을 살리는 일은 대화에서부터 시작됩니다.

    ② 긍휼히 여겨야합니다

    예수님이 물을 달라고 했더니 이 여인은 유대인 남자인 당신이 왜 사마리아 여자인 나에게 물을 달라고 하느냐며 거절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 여인을 불쌍히 여겨 대화를 계속해 나갔습니다. 예수님은 네 남편을 불러오라고 했습니다. 17~18절에 “여자가 대답하여 가로되 나는 남편이 없나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가 남편이 없다 하는 말이 옳도다 네가 남편 다섯이 있었으나 지금 있는 자는 네 남편이 아니니 네 말이 참되도다.”고 했습니다.

    사람들은 남편을 다섯이나 바꾸어 가면서 사는 행실이 못 된 여자라고 비방하고 욕을 했지만 예수님은 이 여인을 불쌍히 여기며 긍휼히 여겼습니다. 사람의 영혼을 구원하는 일은 영혼을 불쌍히 여겨야 가능합니다. 보통 여인들이 물을 길러가는 시간은 아침 일찍 아니면 저녁 해질 무렵입니다. 그러나 이 여인은 제6시쯤(6절) 물을 길러왔습니다. 지금의 시간으로 오후3시쯤 되는 한낮의 뜨거운 시간입니다. 이 시간에 물 길러오는 여인은 이무도 없습니다. 우물가는 동네 아낙네들이 모여 물을 길으면서 앞뒷집 이야기를 나누고 동네 모든 소문들이 우물가를 통해 전달이 되는데 사마리아 여인은 사람들의 수군거리는 소리가 듣기 싫어 뜨거운 한낮에 물 길러 온 것입니다. 모두가 비방하는 여인을 예수님은 긍휼히 여기며 불쌍히 여겨 구원하기 위해 대화를 하신 것입니다.

    ③ 인내해야 합니다

    예수님이 사마리아 여자에게 물을 달라고 했더니 여자가 대답하길 “당신은 유대인으로서 어찌하여 사마리아 여자 나에게 물을 달라 하나이까 하니 이는 유대인이 사마리아인과 상종치 아니함이러라(9절)”고 했습니다. 예수님의 물 달라는 요구에 여인은 빈정거리면서 퉁명스럽게 거부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인내심을 가지고 물을 달라고 하셨습니다. 11절에 “여자가 가로되 주여 물길을 그릇도 없고 이 우물은 깊은데 어디서 이 생수를 얻겠삽나이까?”하고 또 거절합니다. 우리가 복음을 전할 때에도 사람들은 온갖 이유를 찾아서 거절합니다. 이때에 인내심이 필요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모두 예수님의 모습을 본받아 영혼 구원을 위해 최선을 다합시다.


    믿음에 관한 성경 구절 모음

    믿음은 기독교 신앙의 핵심 요소입니다. 
    성경에는 믿음에 관한 수많은 구절이 있으며, 이 구절들은 신앙생활에서 중요한 지침이 됩니다. 
    아래 표에는 성경의 주요 믿음 구절들을 정리했습니다.

    성경 구절 내용
    로마서 10:17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
    고린도전서 16:13 “깨어 믿음에 굳게 서서 남자답게 강건하라.”
    에베소서 3:12 “우리가 그 안에서 그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담대함과 확신을 가지고 하나님께 나아감을 얻느니라.”
    빌립보서 1:25 “내가 살 것과 너희 믿음의 진보와 기쁨을 위하여 너희 무리와 함께 거할 이것을 확실히 아노니.”
    골로새서 2:7 “그 안에 뿌리를 박으며 세움을 받아 교훈을 받은 대로 믿음에 굳게 서서 감사함을 넘치게 하라.”
    딤후 4:7 “나는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누가복음 17:19 “그에게 으르시되 일어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권하였느니라 하시더라.”
    로마서 1:8 “먼저 내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너희 모든 사람에 관하여 내 하나님께 감사함은 너희 믿음이 온 세상에 전파됨이로다.”

    믿음에 관한 이러한 구절들은 신앙인에게 중요한 지침을 제공하며, 삶의 방향을 제시합니다. 특히, 어려운 상황에서 믿음을 굳게 지키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상기시켜줍니다.

    기독교 신앙 예화 이야기

    기독교 신앙 예화는 신앙을 강화하고 믿음을 새롭게 다지게 합니다. 다양한 신앙 예화 중에서 몇 가지를 소개합니다.

    주님을 섬기는 마음

    주님을 섬기는 마음은 기독교 신앙의 핵심입니다. 그리스도를 바라보고 있으면 모든 근심과 걱정이 사라지며, 그리스도의 사랑을 느끼게 됩니다. 사도 바울은 많은 고난과 역경 속에서도 주 예수의 모습을 바라보며 힘을 얻었습니다.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는 일그러진 마음을 돌이킬 수 있습니다.

    기적을 체험한 어머니의 믿음

    어느 성가대원의 어머니는 아이의 맹장염 수술 후 창자에 생긴 혹을 발견했습니다. 의사는 재수술을 제안했지만, 어머니는 예수님께서 그 혹을 떼어주실 것을 믿고 기도했습니다. 설교 후 병자를 위한 기도 시간에 “내일 병원에 가서 수술하려는 사람 중에 뱃속에 혹이 난 사람은 오늘밤에 고침을 받았습니다”라는 말을 듣고, 어머니는 이를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였습니다. 다음 날 병원에서 엑스레이를 찍어보니 혹이 사라졌습니다. 예수님의 기적을 체험한 것입니다.

    믿음의 눈

    어느 교회 건축현장에서 세 벽돌공이 있었습니다. 
    그 중 한 명은 신실한 크리스천이었고, 기도 후 도시락을 먹으려 했습니다. 
    그러나 개가 도시락을 훔쳐갔고, 동료들은 그를 비웃었습니다. 
    하지만 웃음소리에 담장이 무너져 동료들이 다치게 되었습니다. 
    노아처럼 끝까지 하나님을 섬기는 삶이 필요합니다.

    링컨의 믿음

    아브라함 링컨은 대통령 취임식에서 “우리의 난관을 극복하려면 지혜, 애국심, 기독교 정신이 필요하며, 무엇보다도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 필요합니다”라고 말했습니다. 링컨의 믿음은 오늘날에도 큰 교훈을 줍니다.

    예화 제목 요약
    주님을 섬기는 마음 그리스도를 바라보며 힘을 얻고 근심을 떨쳐냄.
    기적을 체험한 어머니의 믿음 맹장염 수술 후 기도로 혹이 사라짐.
    믿음의 눈 신실한 크리스천이 동료들의 비웃음에도 끝까지 하나님을 섬김.
    링컨의 믿음 대통령 취임식에서 하나님을 믿는 믿음의 중요성 강조.

    이러한 신앙 예화들은 믿음을 새롭게 하고, 신앙 생활에서 힘을 얻을 수 있는 좋은 예시가 됩니다.

    성경 말씀과 함께하는 일상 생활의 적용

    성경 말씀은 우리의 일상 생활에서 큰 지혜와 지침이 됩니다. 믿음에 관한 구절들과 신앙 예화를 통해, 우리는 더욱 의미 있는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이번 섹션에서는 성경 말씀을 일상 생활에 어떻게 적용할 수 있는지 알아보겠습니다.

    성경 말씀을 통한 하루의 시작

    하루를 성경 말씀과 함께 시작하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성경 구절을 읽고 묵상하면 하루를 긍정적으로 시작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로마서 10:17을 통해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에서 나온다는 것을 상기하며 하루를 시작하면 좋습니다.

    기도와 묵상

    일상 생활에서 기도와 묵상은 신앙을 깊게 하는 중요한 방법입니다. 바쁜 일상 속에서도 잠시 시간을 내어 기도하는 습관을 가지면, 마음의 평안을 찾고 하나님과의 관계를 유지할 수 있습니다. 필립보서 4:6-7 구절을 묵상하며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하나님께 아뢰라”는 말씀을 실천해보세요.

    성경 말씀을 통한 대화

    가족이나 친구들과의 대화에서도 성경 말씀을 나누는 것이 필요합니다. 서로의 신앙을 격려하고 지지하는 것은 신앙 생활에 큰 도움이 됩니다. 에베소서 4:29에 나오는 “무릇 더러운 말은 너희 입 밖에도 내지 말고 오직 덕을 세우는 데 소용되게 하여 듣는 자들에게 은혜를 끼치게 하라”는 말씀을 기억하며 대화를 나누면 좋습니다.

    성경 구절을 삶에 적용하기

    성경 구절을 일상 생활에 직접 적용하는 것은 신앙의 성숙에 큰 도움이 됩니다. 
    예를 들어, 
    로마서 12:2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는 구절을 실천하는 것은 중요합니다. 
    세상의 가치관에 휩쓸리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삶을 사는 것이 신앙인의 목표입니다.

    일상생활 적용

    하루의 시작
    로마서 10:17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
    Consequently, faith comes from hearing the message, and the message is heard through the word of Christ.

    기도와 묵상
    빌립보서 4:6-7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Do not be anxious about anything, but in everything, by prayer and petition, with thanksgiving, present your requests to God.
    And the peace of God, which transcends all understanding, will guard your hearts and your minds in Christ Jesus.

    대화
    에베소서 4:29 /  무릇 더러운 말은 너희 입밖에도 내지 말고 오직 덕을 세우는데 소용되는대로 선한 말을 하여 듣는 자들에게 은혜를 끼치게 하라.
    Do not let any unwholesome talk come out of your mouths, but only what is helpful for building others up according to their needs, that it may benefit those who listen

    삶의 적용
    로마서 12:2 /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Do not conform any longer to the pattern of this world, but be transformed by the renewing of your mind. Then you will be able to test and approve what God's will is--his good, pleasing and perfect will.
















    성경 말씀을 일상 생활에 적용하는 것은 쉽지 않지만, 꾸준한 노력과 기도를 통해 가능합니다. 믿음의 구절들과 신앙 예화를 통해 우리는 더욱 깊은 신앙 생활을 할 수 있습니다.

    마치며

    기독교 믿음은 성경 말씀과 신앙 예화를 통해 깊어지고 강화됩니다. 우리는 성경 구절을 통해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신앙 예화를 통해 그 말씀을 실제 생활에 적용하는 방법을 배웁니다.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에서 나오기 때문에, 성경 말씀을 일상 생활에서 꾸준히 접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이 글에서는 믿음에 관한 성경 구절과 감동적인 신앙 예화를 소개했습니다. 또한, 성경 말씀을 일상 생활에 적용하는 방법에 대해 살펴보았습니다. 하루를 성경 말씀과 함께 시작하고, 기도와 묵상으로 하나님과의 관계를 유지하며, 가족과 친구들과 성경 말씀을 나누는 것이 신앙 생활에 큰 도움이 됩니다. 이러한 실천을 통해 우리는 더욱 깊은 신앙 생활을 할 수 있습니다.

    성경 말씀과 신앙 예화는 우리의 믿음을 강화하고, 신앙 생활을 더욱 풍성하게 만들어줍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항상 마음에 새기고, 일상 생활에서 실천해야 합니다. 여러분도 이 글을 통해 신앙 생활에 새로운 영감을 얻고, 더욱 의미 있는 삶을 살아가시길 바랍니다.




    부부의 믿음

    한 농부가 부인의 동의를 얻어 더 좋은 말과 바꾸려고 키우던 말을 끌고 시장으로 나갔다.
    가는 도중에 살진 암소에게 마음을 빼앗겨 말과 바꾸었다.
    또 길을 가다가 그 암소를 양과 바꾸었고, 조금 더 가다가 양을 거위와 바꾸었으며 또 그 거위를 붉은 벼슬을 가진 수탉과 바꾸었고 마지막으로 수탉을 썩은 사과 한 자루와 바꾸었다. 

    날이 저물어 여관방에서 만난 귀족 두 사람이 농부의 사연을 듣고는 “집에 돌아가면 부인이 화가 나서 당신을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오”라고 말했다.
    그러나 농부는 “참 잘했다고 할 것이오”라고 반박했다.
    그러자 귀족은 만약 그렇다면 자기가 가진 금화를 몽땅 주겠다고 했다.
    이튿날 집에서 그간의 사연을 들은 농부의 아내는“그러잖아도 식초를 만들기 위해 썩은 사과가 필요했는데 참 잘되었군요” 라고 말했다.결국 농부는 내기에 이겨 부자가 되었다. 

    부부관계에 있어서 가장 큰 축복은 배우자의 능력보다 하나님께서 주신 배우자를 존중하는 것이다.

    임을 일깨워주는 안데르센
    의 동화다.







    그리 아니하실지라도(다니엘 3:13-18)

    자신의 생명보다 하나님을 의지하는 귀한 믿음을 가진 다니엘과 세 명의 친구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라는 청년들이 등장합니다. 다니엘과 세 명의 친구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는 느브갓네살 왕의 사랑을 받고 있었으나, 왕이 만든 금신상 앞에 절하지 않아서 용광로 앞에서 “이제라도 엎드리어 절하면 살려주겠노라”고 타일렀습니다. 그러나 히브리 청년 세 명은 하나님 외에 다를 신에게 절하거나 우상 앞에서 절하는 행위는 그 무엇보다도 무서운 죄임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들은 하나님을 신뢰하는 마음으로 “우리를 극렬히 타는 풀 무불에 던진다 할지라도 하나님께는 능히 건져 내시겠고, 왕의 손에서도 건져 내시리이다. 그리 아니하실지라도 왕이여! 우리는 왕의 신에게 절하지 아니하겠고, 왕이 세우신 금신상에게 절하지 아니하겠습니다.”(16절)하였습니다.

    다니엘과 그 세 명의 친구는 극렬히 타는 용광로에 버림을 받는다할찌라도 하나님께서는 분명히 구해 주실 것이라는 믿음을 가졌습니다. 또한 그렇게 해 주시지 않더라도 왕이 섬기는 신과 왕이 세운 금신상에 절하지 않겠다는 고백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다니엘과 그의 세 친구가 고백한 뒷부분의 고백적인 말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그리 아니하실지라도 왕이여! 우리는 왕의 신에게 절하지 아니하겠고, 왕이 세우신 금신상에게 절하지 아니하겠습니다” 실로 대단한 믿음입니다. 오늘 이 말씀을 가지고 은혜를 나누려고 합니다.

    찬미예수(168장)을 같이 부르시겠습니다. ‘그리 아니하실지라도’입니다.

    1. 그리 아니하실지라도 감사해야 합니다.

    믿음 생활하는 우리들에게도 실패와 아픔으로 인해 좌절되는 상황이 있을 수 있습니다. 나의 생각대로 되질 않을 때가 있다는 것입니다. 또한 행복의 문을 통과하고 성장해가는 과정에서 어려움으로 시험의 때가 올 수 있습니다. 시험들 수밖에 없고, 불평할 수밖에 없고, 눈물을 지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 할지라도 감사해야 합니다. 그리 아니하실지라도 감사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통치를 의심치 마십시오. 하나님의 뜻이 있음을 믿으십시오, 실패와 아픔과 눈물 속에서도 하나님의 뜻이 있음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다니엘을 생각하면서 우리가 배워야 할 것은 그가 극한 어려움 속에서 성공자가 되었다는 것보다는 어려움 앞에서 전적으로 하나님의 보호하심을 의심치 않았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지키시는 분이십니다. 낮의 해와 밤의 달도 지키시고 보호하시는 손길 앞에서는 해할 수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지키십니다. 어려움가운데서도 하나님의 자비하신 손길을 체험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환난을 면케 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분은 분명히 우리를 지키십니다. 눈을 들어 천지지은신 여호와 하나님을 바라보세요.

    복음성가 찬미예수 90장을 같이 부르시겠습니다.

    2. 그리 아니하실지라도 확신에 찬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하나님을 믿는 그들의 신앙은 확신에 가득 찬 신앙이었습니다. 그들은 살아 계신 하나님을 믿었으며 그 하나님께서 함께하실 것이라는 것을 확신했습니다. 이 같은 태도는 그들이 얼마나 하나님과 가까이 교통하는 삶을 살았는가를 짐작할 수 있는 있는 것입니다. 그들의 태도 중 가장 절정의 것은 ‘그리 아니하실지라도’라는 표현에서 적나라하게 나타납니다. 즉 하나님께서 우리를 극렬히 타는 풀 무불에서 건져내시지 않는다 할지라도 우리는 금신상에 대해 절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는 하나님의 구원에 대한 의심이 아닌 그들의 신앙이 확고함을 가장 분명하게 드러내 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들의 신앙은 하나님이 그들에게 무엇을 베푸신다거나 그들을 보호하신다는 것에 근거한 신앙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의 신앙은 모든 섭리에 대한 주권을 전적으로 하나님께 돌리고 조건 없이 하나님을 신뢰하고 사랑하는 신앙이었습니다.

    우리는 어떠한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의 절대적인 주권을 믿어야 합니다. 합력하여 선을 이룰 것이라는 믿음을 가진 사도바울의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환난과 아픔 속에서도 하나님의 율례를 배웠다고 고백한 다윗의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실패와 낙망가운데서도 하나님을 보았노라도 고백한 욥의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죽음 앞에서도 사나 죽으나 하나님의 주권을 믿었던 다니엘의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이 세 청년이 왕의 특혜와 사랑을 받아들이기만 한다면 벼슬도 물질도 다 얻을 수 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세상의 보화나 큰 재물과 명예를 먼저 생각하기 보다는 후대에 상주시는 하나님을 바라보았습니다.
    우리 믿음의 사람들은 사실 하나님보다도 먼저 세상의 것(명예, 물질, 유혹, 인기)을 먼저 생각하고 그것들을 사랑할 때가 종종 있습니다. 그러나 마태복음 19장29절에 보면 가정의 식구들보다도 먼저 주님의 것을 먼저 생각하도록 권면하고 있습니다.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부모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는 영생을 상속하리라”는 말씀에 근거해서 우리들은 먼저 하나님의 것을 먼저 생각하여야 합니다.

    3. 그리 아니하실지라도 사랑해야 합니다.

    우리 믿음의 사람들은 먼저 세상을 사랑하지 말고, 하나님을 사랑하여야 합니다. 또한 세상의 사람을 먼저 두려워하기 보다는 하나님을 먼저 두려워하여야 합니다. “몸은 죽여도 영혼을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시는 자를 두려워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네 젊은이들이 이렇게 당당하게 설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의 사랑에 근거로 한 것입니다. 네젊은이들의 우정 속에 나타난 모습 속에서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랑이 기초로 이루어 진 것을 잘 알 수 있습니다. 사랑이 모든 삶의 기초가 될 때 행복이 더하게 되는 것입니다.

    베드로 전서 4장 8절에 보면 “무엇보다도 열심으로 서로 사랑할지니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고 하신 말씀이 있습니다. 우리가 확실히 알아야 할 것은 사랑의 근원은 하나님께로부터 온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며(요일4:8,16) 이 사랑은 예수그리스도를 통해 나타났으며(9-10), 이 사랑은 성령을 통하여 우리들에게 전달되었습니다.

    다니엘과 그의 친구 세 명이 같은 마음으로 죽음 앞에서 당당할 수 있는 것은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 없이는 불가능합니다. 네 명 모두가 믿음의 절개를 지킨 것같이 우리 모든 성도들도 한 사람도 제외 없이 주님오시는 그날까지 낙오되는 자 없이 신앙의 절개를 지킬 수 있기를 소원합니다.
    우리가 사랑을 할 때 조건 없이 사랑할 수 있다는 것은 그리 쉽질 않습니다. 이유 없는 죽음 앞에서 아니 억울한 죽음 앞에서 하나님께서 침묵하신다면 여러분들은 어떠한 마음이 들겠습니까? 그러함에도 주님을 사랑하실 수 있으십니까?

    사랑하셔야 합니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주님께서 세 번을 물으셨던 것은 아가페적인 조건 없는 사랑을 물으셨던 것입니다. 특별히 아가페적인 주님의 뜨거운 사랑을 가슴속 깊이 새기셔서 이 땅에 살면서 주변에 소외된 사람들을 사랑하셔야 합니다. 조금만 관심을 가지면 희망과 꿈을 같이 나눈다면 분명히 일어설 수 있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딤전6:17-19) "네가 이 세대에 부한 자들을 명하여 마음을 높이지 말고 정함이 없는 재물에 소망을 두지 말고 오직 우리에게 모든 것을 후히 주사 누리게 하시는 하나님께 두며 (18) 선한 일을 행하고 선한 사업에 부하고 나눠주기를 좋아하며 동정하는 자가 되게 하라 (19) 이것이 장래에 자기를 위하여 좋은 터를 쌓아 참된 생명을 취하는 것이니라 "

    (사58:10-11) "주린 자에게 네 심정을 동하며 괴로와하는 자의 마음을 만족케 하면 네 빛이 흑암 중에서 발하여 네 어두움이 낮과 같이 될 것이며 나 여호와가 너를 항상 인도하여 마른 곳에서도 네 영혼을 만족케 하며 네 뼈를 견고케 하리니 너는 물댄 동산 같겠고 물이 끊어지지 아니하는 샘 같을 것이라"

    사랑이 하나님의 가르침 속에서 가장 큰 명령입니다. 어느 율법학자가 예수님께 나아와 물었습니다. “선생님이여, 율법 중에 어느 계명이 크니이까?” 성경에서 나타난 모든 명령과 주께서 우리에게 가르쳐주신 것 중에서 가장 중요한 교훈을 물으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대답은 분명하고 확실하였습니다.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는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사랑하라”(마22:37-39)
    이 예수님의 가장 큰 계명은 사랑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사랑의 명령을 가리켜서 가장 위대한 주님의 명령이라고 합니다. 우리에게 가장 큰 사명은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는 것이지만(마28:19-20) 우리에게 가장 위대한 명령은 “네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입니다.
    사랑하고 살지 못할 때 인생은 존재의 가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고린도 전서 13장에서는 인간이 사랑하지 않고는 살아갈 수가 없는 존재임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인간은 실로 사랑하기 위해서 태어났으며 사랑이 없이는 실존의 모든 의미와 가치를 상실할 수밖에 없는 그런 존재입니다.
    산을 옮길 만한 믿음이 있어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불확실한 시대에서 믿음을 가진다는 것은 축복이 아닐 수 없습니다. 믿음 위에 사랑이라는 탑을 쌓지 못하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것도 일반적인 믿음이 아니라 구속사적인 믿음을 소유하여서 천국에 대한 확신과 그로 인하여 불확실한 이 시대에서 믿음으로 산다 할찌라고 사랑하지 아니하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믿음이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산을 옮길만한 모든 믿음이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니요”(고전13:2b)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다니엘과 그의 세 친구들과 같이 그리 아니하실지라도 사랑하고, 그리 아니하실지라도 믿음을 갖고, 그리 아니하실지라도 감사할 수 있는 자들이 될 수 있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고신복 목사)

    오늘 본문에 보면 자신의 생명보다 하나님을 의지하는 귀한 믿음을 가진 다니엘과 세 명의 친구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라는 청년들이 등장합니다. 다니엘과 세 명의 친구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는 느브갓네살 왕의 사랑을 받고 있었으나, 왕이 만든 금신상 앞에 절하지 않아서 용광로 앞에서 “이제라도 엎드리어 절하면 살려주겠노라”고 타일렀습니다. 그러나 히브리 청년 세 명은 하나님 외에 다를 신에게 절하거나 우상 앞에서 절하는 행위는 그 무엇보다도 무서운 죄임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들은 하나님을 신뢰하는 마음으로 “우리를 극렬히 타는 풀 무불에 던진다 할지라도 하나님께는 능히 건져 내시겠고, 왕의 손에서도 건져 내시리이다. 그리 아니하실지라도 왕이여! 우리는 왕의 신에게 절하지 아니하겠고, 왕이 세우신 금신상에게 절하지 아니하겠습니다.”(16절)하였습니다.

    다니엘과 그 세 명의 친구는 극렬히 타는 용광로에 버림을 받는다할찌라도 하나님께서는 분명히 구해 주실 것이라는 믿음을 가졌습니다. 또한 그렇게 해 주시지 않더라도 왕이 섬기는 신과 왕이 세운 금신상에 절하지 않겠다는 고백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다니엘과 그의 세 친구가 고백한 뒷부분의 고백적인 말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그리 아니하실지라도 왕이여! 우리는 왕의 신에게 절하지 아니하겠고, 왕이 세우신 금신상에게 절하지 아니하겠습니다” 실로 대단한 믿음입니다. 오늘 이 말씀을 가지고 은혜를 나누려고 합니다.

    찬미예수(168장)을 같이 부르시겠습니다. ‘그리 아니하실지라도’입니다.

    1. 그리 아니하실지라도 감사해야 합니다.

    믿음 생활하는 우리들에게도 실패와 아픔으로 인해 좌절되는 상황이 있을 수 있습니다. 나의 생각대로 되질 않을 때가 있다는 것입니다. 또한 행복의 문을 통과하고 성장해가는 과정에서 어려움으로 시험의 때가 올 수 있습니다. 시험들 수밖에 없고, 불평할 수밖에 없고, 눈물을 지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 할지라도 감사해야 합니다. 그리 아니하실지라도 감사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통치를 의심치 마십시오. 하나님의 뜻이 있음을 믿으십시오, 실패와 아픔과 눈물 속에서도 하나님의 뜻이 있음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다니엘을 생각하면서 우리가 배워야 할 것은 그가 극한 어려움 속에서 성공자가 되었다는 것보다는 어려움 앞에서 전적으로 하나님의 보호하심을 의심치 않았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지키시는 분이십니다. 낮의 해와 밤의 달도 지키시고 보호하시는 손길 앞에서는 해할 수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지키십니다. 어려움가운데서도 하나님의 자비하신 손길을 체험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환난을 면케 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분은 분명히 우리를 지키십니다. 눈을 들어 천지지은신 여호와 하나님을 바라보세요.

    복음성가 찬미예수 90장을 같이 부르시겠습니다.

    2. 그리 아니하실지라도 확신에 찬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하나님을 믿는 그들의 신앙은 확신에 가득 찬 신앙이었습니다. 그들은 살아 계신 하나님을 믿었으며 그 하나님께서 함께하실 것이라는 것을 확신했습니다. 이 같은 태도는 그들이 얼마나 하나님과 가까이 교통하는 삶을 살았는가를 짐작할 수 있는 있는 것입니다. 그들의 태도 중 가장 절정의 것은 ‘그리 아니하실지라도’라는 표현에서 적나라하게 나타납니다. 즉 하나님께서 우리를 극렬히 타는 풀 무불에서 건져내시지 않는다 할지라도 우리는 금신상에 대해 절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는 하나님의 구원에 대한 의심이 아닌 그들의 신앙이 확고함을 가장 분명하게 드러내 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들의 신앙은 하나님이 그들에게 무엇을 베푸신다거나 그들을 보호하신다는 것에 근거한 신앙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의 신앙은 모든 섭리에 대한 주권을 전적으로 하나님께 돌리고 조건 없이 하나님을 신뢰하고 사랑하는 신앙이었습니다.

    우리는 어떠한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의 절대적인 주권을 믿어야 합니다. 합력하여 선을 이룰 것이라는 믿음을 가진 사도바울의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환난과 아픔 속에서도 하나님의 율례를 배웠다고 고백한 다윗의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실패와 낙망가운데서도 하나님을 보았노라도 고백한 욥의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죽음 앞에서도 사나 죽으나 하나님의 주권을 믿었던 다니엘의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이 세 청년이 왕의 특혜와 사랑을 받아들이기만 한다면 벼슬도 물질도 다 얻을 수 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세상의 보화나 큰 재물과 명예를 먼저 생각하기 보다는 후대에 상주시는 하나님을 바라보았습니다.
    우리 믿음의 사람들은 사실 하나님보다도 먼저 세상의 것(명예, 물질, 유혹, 인기)을 먼저 생각하고 그것들을 사랑할 때가 종종 있습니다. 그러나 마태복음 19장29절에 보면 가정의 식구들보다도 먼저 주님의 것을 먼저 생각하도록 권면하고 있습니다.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부모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는 영생을 상속하리라”는 말씀에 근거해서 우리들은 먼저 하나님의 것을 먼저 생각하여야 합니다.

    3. 그리 아니하실지라도 사랑해야 합니다.

    우리 믿음의 사람들은 먼저 세상을 사랑하지 말고, 하나님을 사랑하여야 합니다. 또한 세상의 사람을 먼저 두려워하기 보다는 하나님을 먼저 두려워하여야 합니다. “몸은 죽여도 영혼을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시는 자를 두려워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네 젊은이들이 이렇게 당당하게 설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의 사랑에 근거로 한 것입니다. 네젊은이들의 우정 속에 나타난 모습 속에서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랑이 기초로 이루어 진 것을 잘 알 수 있습니다. 사랑이 모든 삶의 기초가 될 때 행복이 더하게 되는 것입니다.

    베드로 전서 4장 8절에 보면 “무엇보다도 열심으로 서로 사랑할지니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고 하신 말씀이 있습니다. 우리가 확실히 알아야 할 것은 사랑의 근원은 하나님께로부터 온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며(요일4:8,16) 이 사랑은 예수그리스도를 통해 나타났으며(9-10), 이 사랑은 성령을 통하여 우리들에게 전달되었습니다.

    다니엘과 그의 친구 세 명이 같은 마음으로 죽음 앞에서 당당할 수 있는 것은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 없이는 불가능합니다. 네 명 모두가 믿음의 절개를 지킨 것같이 우리 모든 성도들도 한 사람도 제외 없이 주님오시는 그날까지 낙오되는 자 없이 신앙의 절개를 지킬 수 있기를 소원합니다.
    우리가 사랑을 할 때 조건 없이 사랑할 수 있다는 것은 그리 쉽질 않습니다. 이유 없는 죽음 앞에서 아니 억울한 죽음 앞에서 하나님께서 침묵하신다면 여러분들은 어떠한 마음이 들겠습니까? 그러함에도 주님을 사랑하실 수 있으십니까?

    사랑하셔야 합니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주님께서 세 번을 물으셨던 것은 아가페적인 조건 없는 사랑을 물으셨던 것입니다. 특별히 아가페적인 주님의 뜨거운 사랑을 가슴속 깊이 새기셔서 이 땅에 살면서 주변에 소외된 사람들을 사랑하셔야 합니다. 조금만 관심을 가지면 희망과 꿈을 같이 나눈다면 분명히 일어설 수 있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딤전6:17-19) "네가 이 세대에 부한 자들을 명하여 마음을 높이지 말고 정함이 없는 재물에 소망을 두지 말고 오직 우리에게 모든 것을 후히 주사 누리게 하시는 하나님께 두며 (18) 선한 일을 행하고 선한 사업에 부하고 나눠주기를 좋아하며 동정하는 자가 되게 하라 (19) 이것이 장래에 자기를 위하여 좋은 터를 쌓아 참된 생명을 취하는 것이니라 "

    (사58:10-11) "주린 자에게 네 심정을 동하며 괴로와하는 자의 마음을 만족케 하면 네 빛이 흑암 중에서 발하여 네 어두움이 낮과 같이 될 것이며 나 여호와가 너를 항상 인도하여 마른 곳에서도 네 영혼을 만족케 하며 네 뼈를 견고케 하리니 너는 물댄 동산 같겠고 물이 끊어지지 아니하는 샘 같을 것이라"

    사랑이 하나님의 가르침 속에서 가장 큰 명령입니다. 어느 율법학자가 예수님께 나아와 물었습니다. “선생님이여, 율법 중에 어느 계명이 크니이까?” 성경에서 나타난 모든 명령과 주께서 우리에게 가르쳐주신 것 중에서 가장 중요한 교훈을 물으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대답은 분명하고 확실하였습니다.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는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사랑하라”(마22:37-39)
    이 예수님의 가장 큰 계명은 사랑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사랑의 명령을 가리켜서 가장 위대한 주님의 명령이라고 합니다. 우리에게 가장 큰 사명은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는 것이지만(마28:19-20) 우리에게 가장 위대한 명령은 “네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입니다.
    사랑하고 살지 못할 때 인생은 존재의 가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고린도 전서 13장에서는 인간이 사랑하지 않고는 살아갈 수가 없는 존재임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인간은 실로 사랑하기 위해서 태어났으며 사랑이 없이는 실존의 모든 의미와 가치를 상실할 수밖에 없는 그런 존재입니다.
    산을 옮길 만한 믿음이 있어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불확실한 시대에서 믿음을 가진다는 것은 축복이 아닐 수 없습니다. 믿음 위에 사랑이라는 탑을 쌓지 못하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것도 일반적인 믿음이 아니라 구속사적인 믿음을 소유하여서 천국에 대한 확신과 그로 인하여 불확실한 이 시대에서 믿음으로 산다 할찌라고 사랑하지 아니하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믿음이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산을 옮길만한 모든 믿음이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니요”(고전13:2b)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다니엘과 그의 세 친구들과 같이 그리 아니하실지라도 사랑하고, 그리 아니하실지라도 믿음을 갖고, 그리 아니하실지라도 감사할 수 있는 자들이 될 수 있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그러할지라도


    '그러할지라도'는 어떤 상황이나 조건을 전제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비록 그렇지만', '그렇다고 할지라도'와 같이 반대되거나 의외의 결과가 이어질 것임을 나타내는 말입니다. 주로 성경 구절에서 자주 사용되며, '그럼에도 불구하고'의 의미로 해석될 수 있습니다. 

    예시
    • "나를 죽게 하실지라도 위로와 기쁨을 말씀에서 찾는 것을 놓치지 않고 있다" (성경 구절), 여기서 '그러할지라도'는 죽음을 당하는 상황에서도 위로와 기쁨을 잃지 않겠다는 의지를 나타냅니다. 

    '그러할지라도'의 의미 분석
    • 그러할(그러하다):
      '그러하다'는 '그렇다', '그렇게 되다'라는 의미로, 앞선 어떤 상황이나 사실을 나타냅니다. 


  • "그리 아니하실지라도"는 '그렇게 되지 않더라도'라는 뜻이며, '그러할지라도'의 변형된 형태로 볼 수 있습니다. 

  • -ㄹ지라도:
    '-ㄹ지라도'는 어떤 사실이 실제로 일어나든, 또는 가능하든 간에 그러한 상황이 있음을 인정하면서도 뒤에 오는 내용이 그와 무관하게 성립됨을 나타내는 연결 어미입니다. 

  • 그러할지라도 나와 함께 계신 하나님

    그날에 그가 숫염소 중 얼룩무늬 있는 것과 점 있는 것을 가리고 암염소 중 흰 바탕에 아롱진 것과 점 있는 것을 가리고 양 중의 검은 것들을 가려 자기 아들들의 손에 맡기고(30:35) 
    자기와 야곱 사이를 사흘 길이 뜨게 하였고 야곱은 라반의 남은 양 떼를 치니라(36).....

    그러할지라도 내 아버지의 하나님은 나와 함께 계셨느니라(31:5).... 점 있는 것이 네 삯이 되리라 하면 온 양 떼가 낳은 것이 점 있는 것이요 또 얼룩무늬 있는 것이 네 삯이 되리라 하면 온 양 떼가 낳은 것이 얼룩무늬 있는 것이니(8)....라반이 네게 행한 모든 것을 내가 보았노라(12)....

    이기적이고 욕심 많은 라반은 야곱의 품삯이 되는 가축이 많이 생기지 않도록 특단의 계획을 세우지만 수포로 돌아갑니다. 단색 가축 떼를 얼룩덜룩하고 점이 있는 다른 떼와 멀찌감치 띄어놓기 위해 서로 사흘 길이 뜨게 하였지만, 그러할지라도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야곱은 매우 번창하게 된 것을 봅니다. 라반은 최초에 했던 약속을 일방적으로 변경할 것을 주장합니다. 그러나 라반의 변덕과 질투 속에서도 하나님은 놀라운 방법으로 야곱을 축복하는 것을 봅니다.

    기도:

    오늘도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우리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믿음의 백성 삼으신 하나님! 야곱의 날을 기억하셨듯이 우리 인생이 하나님 앞에 있음을 고백합니다. 야곱에게 말씀하시고 동행하시는 하나님의 역사가 우리의 체험이 되게 하옵소서. 오늘날 우리의 라반은 무엇인지요? 예기치 못한 어려움, 불편한 환경, 속이는 삶, 오늘날 라반이 우리를 어려운 지경으로 몰아갈지라도 함께 하시는 하나님께서 생각지도 못한 놀라운 방식으로 우리를 축복하실 것이라는 믿음의 확신을 갖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그러할지라도 하나님은 우리와 함께 하신다(창세기 31:1-16) 


    ‘그들에게 이르되 내가 그대들의 아버지의 안색을 본즉 내게 대하여 전과 같지 아니하도다 그러할지라도 내 아버지의 하나님은 나와 함께 계셨느니라(창31:5)’

    ‘나는 벧엘의 하나님이라 네가 거기서 기둥에 기름을 붓고 거기서 내게 서원하였으니 지금 일어나 이 곳을 떠나서 네 출생지로 돌아가라 하셨느니라(창31:13)’

    라반은 자신의 아들들에게서 야곱이 라반의 소유를 다 빼앗고 자신의 소유로 삼았다는 모함 가득한 소식을 듣습니다. 이후에 야곱이 외삼촌 라반의 안색이 변했다는 사실을 감지합니다. 이 상황을 두고 하나님은 야곱에게 나타나 고향 땅으로 돌아가라고 명령하십니다(창31:3). 야곱은 자신의 억울한 마음을 숨기지 않습니다. 안색이 변한 라반을 보고 불편함을 느낍니다.

    그러나 그는 곧 라반의 반응에 개의치 않습니다. 이미 여러 번 자신을 속인 라반에 대해 그 어떤 기대감도 없었기 때문이니다. 신뢰는 오래 전부터 무너졌습니다. 하지만 그가 라반의 거듭되는 배신에도 흔들리지 않을 수 있었던 이유가 있었습니다. 그의 고백처럼 ‘그러할지라도’ 하나님이 자신과 함께 하셨다는 사실을 알았고, 믿었으며, 경험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미련 없이 라반의 곁을 떠날 수 있었습니다. 그는 곧바로 가족들에게 이 사실을 전달합니다. 비록 갈등 가운데 좋지 않은 모습으로 떠나게 되었지만 그는 지난 날 함께 하시는 하나님, 벧엘의 하나님께서 자신의 앞길로 인도해주실 거란 사실, 그 약속을 확신했기에 아내들에게 이 약속을 붙들고 함께 떠나자고 강권하고 있는 것입니다.

    가족들도 그의 믿음의 고백에 동의하며 떠날 채비를 합니다. 앞으로의 미래가 어떻게 펼쳐질 지 모르는 상황 속에서 오직 믿음 밖에 붙잡을 것이 없습니다. 그러할지라도 하나님이 함께 하실 것임을 선언하며 믿음의 여정을 향한 발걸음을 내딛습니다. 이를 못마땅하게 여긴 라반이 그를 잡으려 추격해 오는 순간이 올지라도 약속의 땅을 향한 그는 믿음의 여정을 포기하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 인생 또한 그렇습니다. 붙잡을 수 있는 건 오직 하나님 밖에 없습니다. 그가 내미시는 손을 믿음으로 붙잡는 것 외에는 답이 없습니다. 그러나 이 유일한 버팀목이 가장 큰 능력이 됩니다. 지난 날 우리를 구원하시고자 제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셔서 그가 흘린 십자가의 보혈로서 우리를 용서하시고 영원한 삶을 이끄시겠다는 약속이 우리에게 주어졌습니다.

    이 벧엘의 약속, 벧엘의 하나님을 붙잡는다면 ‘그러할지라도’ 우리 인생은 숱한 고난과 역경 중에도 결코 무너지지 않을 것이요, 수많은 배반과 모욕으로 얼룩진 삶이라 할지라도 결코 죽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할지라도 하나님께서는 지금껏 우리와 동행하셨고, 지금도 동행하고 계시며, 앞으로도 동행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어제도 계셨고, 오늘도 계시며, 영원토록 함께 하실 하나님. 그러므로 오늘 우리의 삶은 구원의 시작, 벧엘의 하나님을 기억하며 그 은혜를 붙잡는 인생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을 인도하셨던 하나님, 그 하나님이 다름 아닌 우리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러할지라도"

    "아무리 그러하더라도" 

    "그럼에도 불구하고"라는 뜻으로, 어떤 조건이나 상황이 그러하더라도 그 상황에 굴하지 않고 다른 행동을 하거나 다른 마음을 품겠다는 의미를 나타냅니다. 주로 성경에서 인용될 때 사용되며, 긍정적이고 의지적인 태도를 표현하는 데 자주 쓰입니다. 

    의미와 용법
    • 그러할지라도의 뜻:
      어떤 일이 일어날 가능성이 있거나, 혹은 이미 그러한 상황일지라도. 

    예시
    • 욥기 6장 10절의 예시:
      "내가 죽게 하실지라도 위로와 기쁨을 말씀에서 찾는 것을 놓치지 않고 있다는 욥의 고백"에서 "그러할지라도"가 사용됩니다. 이는 고통스러운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의 말씀에서 위로를 찾는 굳건한 믿음을 나타냅니다. 


  • 문맥:
    '그럴지라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렇다 하더라도' 등의 의미로 쓰이며, 앞선 내용과 반대되는 혹은 상반되는 상황이 발생하더라도 자신의 입장이나 믿음을 굳건히 지키겠다는 의지를 표현합니다. 

  • 학개서 2장 3-4절의 예시:
    "오 스룹바벨아, 그러할지라도 이제 마음을 강하게 할지어다"는 표현은 현재 상황이 어렵더라도 의지를 다져야 한다는 뜻입니다




  • 그럼에 불구하고 

    ~에도 불구하고`는 영어 `in spite of`를 번역하면서 많이 
    쓰이는 영어 표현입니다. 
    따라서 `그럼에도 불구하고`는 `그런데도`, `그렇지만`이나 
    `그럼에도`로 바꿔 표현하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그러나 반드시 번역 투의 문장을 비문으로 본다는 것은 다소 어렵다는 관점임을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는 시비 대상입니다. 영어 ‘in spite of, despite, nevertheless…’ 등을 번역하는 과정에서 나온 번역어이기 때문이지요. 이런 번역어의 사용은 내용전달이 중시되는 객관적인 문장에서 사용하기엔 군더더기가 많은 어구라는 지적을 받습니다. 하지만 또 다른 반면에선 시와 노래의 제목으로까지 등장하게 된 ‘그럼에도 불구하고’는 경쟁력 있는 표현이 돼가고 있는데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용해도 괜찮은 걸까요?


    이중적 구조를 통해 의미를 강조해주는 ‘그럼에도 불구하고’의  경쟁력

    관용구는 관용적으로 두 개 이상의 단어가 결합한 구로, 특정한 뜻을 나타내는 형태를 말합니다. 국어사전에서는 이런 ‘그럼에도 불구하고’를 하나의 관용구로 처리해 놓았습니다. “그럼에도‘와 ’불구하고‘라는 두 표현을 합해 놓은 ‘그럼에도 불구하고’는 ‘비록 사실은 그러하지만 그것과는 상관없이’라는 이중적 구조의 뜻을 지녔습니다.

    ‘그는 아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일하러 나갔다.’
    ‘웃자고만 쓴 책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주를 향한 거듭되는 도전과 실패, 이를 극복하는 과정을 이야기하고 있다.’
    이처럼 ‘그럼에도 불구하고’는 기대와 다르거나 상반되는 내용이 뒤에 올 때 앞뒤 문장을 이어 주는 구실을 합니다. 그러면서 ‘강하고 단정적인 의도’를 추가하여 문장의 의미적 맥락을 경쟁력 있게 표현할 수 있도록 도와주지요. 따라서 ‘그럼에도 불구하고’를 다른 말로 대체하기란 쉽지 않습니다. 물론 시비를 거는 쪽의 말대로 ‘불구하다’를 빼도 뜻은 통하지만, 그렇게 되면 ‘강하고 단정적인 의도’는 담지 못하게 되기 때문이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의해서 사용해야하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렇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는 분명 의미를 강조해주는 경쟁력 있는 관용구이기는 하나, ‘그럼에도 불구하고’는 기사와 같은 객관적 글쓰기에서는 필요 없을 때가 많습니다. 특히 간결하고 객관적이어야 하는 스트레이트 기사에서 ‘불구하다’는 쓰지 않는 게 나아 보인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의견입니다. 왜냐하면 ‘그럼에도 불구하고’라는 관용구 자체가 ‘불구하고’라는 군더더기 어휘가 붙은 표현일 뿐만 아니라 이런 연결구의 군더더기는 문장의 간결성을 떨어트리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면 ‘방통위가 영업정지 처분을 내린 건 2004년 이후 처음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번 조치로….’ 이 기사 문장에서 ‘그럼에도 불구하고’는 ‘그럼에도’라고 해도 전혀 어색하지 않습니다. 간결한 표현을 바란다면 ‘그럼에도’만 쓰는 것이 더욱 문장의 간결성을 갖출 수 있지요. 

    ‘불구(不拘)하다’는 ‘-ㅁ(음)에도’ 외에 ‘-ㄴ데도’, ‘-에도’와 어울려 쓰입니다. ‘얽매여 거리끼지 아니하다’라는 뜻을 지니고 있습니다. 같은 뜻으로 ‘물구(勿拘)하다’라는 단어가 있는데요, 물구(勿拘)하다 역시 ‘-ㅁ(음)에도/-ㄴ데도/-에도’의 구성으로 사용됩니다. 한데 이때 문장 안에서 ‘에도’와 ‘불구하다’라는 같은 의미가 충돌하게 되어 문장의 간결성을 떨어트리게 합니다. 조사 ‘에도’는 ‘무엇에 얽매이지 않음’을 나타냅니다. 따라서 ‘불구하다’를 덧붙일 이유가 없을 때가 대부분인 것입니다. ‘정치권의 해묵은 과제임에도 불구하고 그동안 보수 여당의 완강한 반대로 늘 제자리걸음이었다.’ 여기서 ‘과제임에도 불구하고’는 ‘과제였는데도’, ‘과제였지만’이라고 해도 충분한 것입니다. ‘한겨울인데도 불구하고 포근한 날씨가 계속 되는 가운데’, ‘불황에도 불구하고 자전거 매출이 계속해서 증가하고 있다.’ 이 문장들에서 깔끔하지 않은 느낌을 받았다면 ‘불구하고’ 때문이다. 객관적이고 간결한 문장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그럼에도 불구하고’는 적절치 못한 관용구인 것 이지요.

    그렇지만 역시 앞서 설명했듯이 ‘그럼에도 불구하고’는 이중적 의미 구조로 내용을 강조하기 위한 관용구로서는 경쟁력 있는 표현입니다. 다만 글의 목적과 사용을 고려해서 적절한 기준을 가지고 ‘그럼에도 불구하고’를 효율적으로 사용하는 것이 훨씬 자연스러운 글쓰기에 유용하겠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가장 좋아하는 말은 '그럼에도 불구하고'다. 
    우리말에는 곱고 어여쁜 단어들이 많음에도 묘하게 번역투 같은 말을 좋아하는 이유는 그 뜻 때문이다. 
    사랑하지 않을 이유를 수십 가지라도 댈 수 있지만 사랑하지 않을 수 없는, 정말이지 말 그대로 '사랑'으로 밖에는 설명할 수 없는 관계를 떠올리게 하는 말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랑한다는 말과 달리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한다는 말이 주는 낭만이 있다. 
    물론 인간관계에서 이러한 낭만을 기대하는 것은 자기중심적이며 다소 유아적일 수 있음을 안다. 
    하지만 역시 차가운 인과를 담고 있는 접속사 '그래서' 보다는 뜨거운 숙명을 담고 있는 듯한 '그럼에도 불구하고'에 끌리는 건 어쩔 수 없다.

    인간관계 혹은 일 등 내 인생의 어떤 영역에서도 '그럼에도 불구하고'를 외칠만한 일은 별로 없다. 
    그나마 여름과 운동 정도. 싫은 건 싫은 거고, 좋은 건 좋은 게 인지상정이니 말이다. 





    9월 20일(토) 다니엘 7-9장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여호와의 은총(9:13)

    모세의 율법에 기록된 대로 이 모든 재앙이 이미 우리에게 임하였사오나 우리는 우리의 악을 떠나고 주의 진리를 깨닫도록 우리 하나님 여호와의 은총을 간구치 아니하였나이다.
    Just as it is written in the Law of Moses, all this disaster has come upon us, yet we have not sought the favor of the LORD our God by turning from our sins and giving attention to your truth.


    여호와의 은총(the favor of the LORD)

    다니엘서 9장에서 여호와의 은총에 대한 이해를 소개합니다.

    첫째는 여호와의 은총이란 죄악에서 떠나게 하는 것
    둘째는 여호와의 은총이란 주의 진리를 깨닫게 하는 것

    '여호와의 은총' 

    성경에서 하나님(여호와)께서 베푸시는 긍휼, 호의, 은혜를 의미하며, 특히 히브리어 단어 '하난'에서 유래하여 불쌍히 여기고, 베풀어주며, 받는 것을 뜻하는 '은혜'로 번역되기도 합니다. 

    '여호와의 은총으로 나아가라'는 호세아서에 나오는 구절로, 여호와께서 베푸시는 호의와 자비 아래 나아가 살아가는 신앙적 태도를 나타냅니다. 

    '여호와의 은총'의 의미
    • 성경적 의미 :
      '여호와의 은총'은 단순히 '하나님의 긍휼'이나 '은혜'를 의미하는 것을 넘어,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베푸시는 친절하고 자비로운 태도와 도움을 뜻합니다. 

    성경에서의 활용 예시
    "여호와의 은총으로 나아가리라"는 호세아 3장에 나오는 구절로, 여호와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긍휼과 사랑 아래에 머무르며 살아가는 삶을 강조합니다. 
    '여호와께 은총을 받는 자'는 하나님께 긍휼과 호의를 받는 사람을 의미하며, 이는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복을 받는 것을 나타냅니다. 


  • 어원 :
    '은총'에 해당하는 히브리어는 '하난'으로, '가까이하다', '호의를 베풀다', '불쌍히 여기다', '동정을 받다', '은혜를 받다' 등의 여러 의미를 지닙니다. 

  • 여호와라는 이름:
    '여호와'는 하나님(엘로힘)의 친밀하고 인격적인 이름으로, 능력을 나타내는 창조주이시면서 동시에 사람과 친밀한 관계를 맺는 분을 의미합니다. 

  • 여호와의 은총( 페네이 아도나이) פְּנֵי יְהוָה

    은총(6440) 파님(pânîymפָּנִים     스트롱번호 6440

    1. 얼굴.  2. 대면 ㉠ פָּנִים אֶל פָּנִים
    발음 [ pânîym ]
    어원 / 6437에서 유래
    구약 성경 / 2038회 사용

    6437. 파나(pânâh)  פָּנָה

    1. 돌다.  2. 창 18:22.  3. 향하게 하다
    발음 [ pânâh ]
    구약 성경  /  135회 사용 

    여호와(3068) 예호바( Yehôvâhיְהֹוָה 스트롱번호 3068

    1. 자존자.  2. 영원한 자 : 히브리인들이 최고의 하나님으로 여기는 신의 이름 ‘여호와’.
    발음 [ Yehôvâh ]
    어원 / 1961에서 유래
    구약 성경 / 7020회 사용
    • 1. 고유명사 자존자, 영원한 자:히브리인들이 최고의 하나님으로 여기는 신의 이름 ‘여호와’.

    • 관련 성경 /  여호와(출 20:7, 레 24:13)
    하난(chănan )   חֲנַן 스트롱번호 2604

    1. 긍휼히 여기다.  2.  힛파엘형: 탄원하다
    발음 [ chănan ]
    어원 /  아람어
    구약 성경 / 2회 사용
    • 1. 동사  긍휼히 여기다, 간구하다, 단 4:27.  
      동사 힛파엘형 : 탄원하다, 애원하다, 간구하다, 단6:11.

    • 관련 성경 /  긍휼히 여기다(단 4:27), 간구하다(단 6:11).

    다니엘 9장 요약

    다니엘 9장은 다니엘의 기도와 하나님의 응답을 다루고 있습니다. 
    다니엘은 예레미야의 예언을 통해 이스라엘의 70년 포로 생활이 곧 끝날 것을 깨닫고, 백성의 죄를 자백하며 하나님께 용서를 구하는 기도를 드립니다. 
    이후 천사 가브리엘이 나타나 다니엘에게 이스라엘의 미래에 대한 중요한 예언, 즉 "70 이레"에 대한 계시를 전합니다. 
    이는 이스라엘의 회복과 더불어 메시아와 종말에 대한 예언합니다.

    다니엘 9장의 구조

    다니엘의 기도 (1-19절)

    • 1-3절 : 다니엘이 예레미야의 예언을 읽고 기도하기 시작함.
    • 4-14절 : 다니엘의 죄와 백성의 죄에 대한 회개 기도.
    • 15-19절 : 하나님의 자비와 성소의 회복을 간구하는 기도.

    하나님의 응답 : 가브리엘의 계시 (20-27절)

    • 20-23절 : 가브리엘이 다니엘에게 나타나 계시를 전함.
    • 24절 : "70 이레"에 대한 예언의 시작.
    • 25-27절 : 메시아의 오심, 예루살렘의 회복, 종말의 사건들에 대한 구체적인 예언.

    1. 다니엘의 기도: 회개의 모범 (1-19절)

    다니엘의 기도는 이스라엘을 대신해 드리는 중보적 회개 기도로, 겸손과 철저한 자기 부정에서 비롯됩니다. 그는 자신과 백성이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지 못한 것을 고백하며, 하나님 앞에 자신의 죄와 이스라엘의 죄를 솔직하게 드러냅니다. 이 기도는 하나님의 공의와 자비를 동시에 강조하며, 회개와 구속의 필요성을 일깨워 줍니다. 다니엘은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말씀을 저버렸음을 고백하면서도, 하나님의 자비에 대한 확신을 가지고 그분의 용서와 회복을 간구합니다.

    다니엘은 매우 젊은 시기에 포로로 끌려와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는 유다의 종말을 보면서 죄를 범하면 하나님께서 그들을 결코 용서하지 않음을 알았습니다. 자신의 힘으로 아무 것도 할 수 없었음에도 민족의 죄를 끌어안고 회개의 기도를 했던 것입니다.

    다니엘의 기도에 대한 상세한 분석은 문서 하단에 따로 정리했으니 필요하신 분들은 참조하시면 됩니다.

    2. 가브리엘의 계시: 하나님의 구속 계획 (20-27절)

    다니엘의 기도에 대한 응답으로 천사 가브리엘은 이스라엘의 구속과 미래에 대한 "70 이레"의 예언을 전합니다. 여기서 "70 이레"는 하나님의 시간표로, 이스라엘의 죄 문제를 해결하고 궁극적으로 메시아를 통해 구속이 이루어질 것을 예언합니다.

    24절에서 가브리엘은 70 이레가 "죄악을 끝내고, 죄를 속하며, 영원한 의를 드러내며, 예언과 환상을 봉인하고, 지극히 거룩한 자에게 기름을 붓는" 기간이라고 설명합니다. 이는 메시아의 오심과 그의 속죄 사역을 예표하는 중요한 예언입니다.

    25-26절에서 언급된 "기름부음 받은 자"는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키며, 그는 예루살렘의 회복과 더불어 인류의 구원을 위한 메시아적 사명을 완성할 자로 묘사됩니다. 그러나 메시아는 "끊어질 것"이라는 예언대로, 그는 십자가에 달려 죽게 되며, 이는 구속사의 핵심 사건입니다.

    27절에서는 "일 주의 절반"에 대한 언급과 함께, 메시아의 사역과 그 이후의 사건들, 즉 마지막 심판과 종말론적 사건들이 포함됩니다. 이는 메시아의 사역이 단순히 과거에 머무르지 않고, 궁극적으로 종말의 완성을 향해 나아가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3. 구속사의 중심: 메시아와 하나님의 계획

    다니엘 9장은 이스라엘의 회복과 더불어 메시아적 예언이 핵심입니다. 다니엘은 예루살렘의 회복을 위해 기도했지만, 하나님의 응답은 그 이상을 넘어 인류의 구원을 위한 메시아의 사역을 예언합니다. 이는 다니엘의 기도가 단지 국가적 회복에만 머물지 않고, 영적 구속과 종말의 완성을 내다보는 중요한 계시를 포함하고 있다는 것을 뜻합니다.

    우리는 이 예언을 통해 하나님의 구속 계획이 시간과 역사를 초월해 이루어지고 있으며, 그 중심에 예수 그리스도가 있음을 깨닫게 됩니다. 하나님의 계획은 우리 죄를 끝내고, 영원한 의를 세우기 위한 구속의 계획입니다. 이 계획은 이미 그리스도를 통해 성취되었으며, 우리는 이 구속사의 일부로서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결론

    다니엘 9장은 회개와 구속, 그리고 메시아의 사역을 강조하는 중요한 장입니다. 다니엘은 철저한 회개의 기도를 통해 하나님의 자비를 구하고, 하나님은 그에게 메시아를 통한 구원의 계획을 보여 주십니다. 오늘날 우리도 이 말씀을 통해, 우리의 죄를 회개하며, 하나님께서 마련하신 구속의 은혜를 굳게 붙잡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구속 계획은 메시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이루어졌으며, 우리는 그분 안에서 회복과 구원의 확신을 가질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총을 크게 입은 자

    성경의 인물들은 기도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성경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믿음을 지키고 하나님을 붙든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이 믿음을 지킬 수 있었던 것은, 잘 될 때나 어려울 때나 쉬지 않고 기도했기 때문입니다. 
    지독한 고난 속에서도 욥은 하나님의 섭리를 찾으며 기도했습니다. 
    쫓겨 다니던 다윗은 언제나 하나님께 기도하며 물었습니다. 
    사무엘은 기도를 쉬는 죄를 범하지 않겠다고 했으며, 사도 바울은 쉬지 말고 기도하라고 말했습니다. 
    특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밤새도록 기도하셨고 붙잡히시기 바로 직전까지 기도하셨으며 십자가 위에서도 기도하셨습니다. 
    성경의 인물들은 모두 기도에 최선을 다했던 사람들입니다. 
    우리도 기도하는 사람이 됩시다.

    크게 은총을 입은 자, 다니엘

    오늘 본문의 주인공인 다니엘도 민족의 회복을 위해 하나님의 크신 긍휼하심을 의지하며 기도했던 기도의 사람입니다. 
    다니엘은 사자 굴 속에 던져질 것을 알면서도 믿음으로 기도했던 사람이었습니다. 
    오늘 본문은 다니엘이 어떻게 기도했던 사람이라고 기록하고 있습니까?

    1. 생명을 걸고 기도한 사람

    다리오가 왕이 된 해에 다니엘이 환상을 본 사건입니다. 
    이 때에 일어난 또 다른 일은, 다니엘을 시기하던 신하들이 다리오 왕 외에 다른 어떤 존재에게도 기도하지 못하게 하는 금령을 제안한 때입니다. 
    다리오 외에 다른 어떤 존재에게 기도하면, 사자 굴에 던지겠다는 법령이 선포된 때입니다. 
    이러한 상황들을 모두 알고 있었던 다니엘이지만, 생명을 걸고 하루 세 번씩 예루살렘을 향하여 기도했음을 우리는 다니엘 6장을 통하여 이미 살펴본 바가 있습니다. 
    다니엘 6장 10절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다니엘이 이 조서에 왕의 도장이 찍힌 것을 알고도 자기 집에 돌아가서는 윗방에 올라가 예루살렘으로 향한 창문을 열고 전에 하던 대로 하루 세 번씩 무릎을 꿇고 기도하며 그의 하나님께 감사하였더라.

    이때 다니엘의 기도 내용이 바로 다니엘 9장의 내용입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민족인 유다의 죄를 사해 달라고 다니엘은 기도했습니다. 
    그리고 예레미야에게 약속하신 대로 유다 민족이 하나님의 심판을 받고 70년 뒤에 반드시 회복시켜 달라고 기도했던 것입니다. 
    다니엘은 민족을 위하여 생명을 걸고 기도했던 사람입니다.

    2. 하나님의 은총을 입은 자

    이처럼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생명을 걸고 민족을 위해 기도한 다니엘을 향하여 가브리엘 천사는 무엇이라고 불렀습니까? 

    다니엘 9:23 
    곧 네가 기도를 시작할 즈음에 명령이 내렸으므로 이제 네게 알리러 왔느니라 너는 크게 은총을 입은 자라 그런즉 너는 이 일을 생각하고 그 환상을 깨달을지니라.

    천사가 다니엘에게 말한 "은총을 입은"이라는 말은 히브리어 원어 성경에 "חֶמְדָּה"(헤므다)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말은 "매우 귀하여 탐이 나고 꼭 가지고 다니고 싶은"이라는 뜻입니다. 
    생명을 걸고 믿음으로 민족을 위해 기도한 다니엘을 향하여 하나님께서는 은총을 입은 자이며 너무나도 귀하여 하나님께서 항상 함께 하고 싶은 사람이라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은총을 입은 그리스도인

    성도 여러분! 
    우리도 다니엘처럼 하나님께서 귀하게 여기시고 항상 함께 하고 싶은 사람이 되면 좋겠습니다. 
    우리도 다윗처럼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그리스도인이 되길 바랍니다. 
    우리도 예수님처럼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성도들이 되길 바랍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지금부터 더욱 힘을 내어 나라와 민족, 교회와 가정, 세계 복음화를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다니엘처럼 목숨을 걸고 기도하며 다윗처럼 항상 하나님의 뜻을 물어야 합니다. 
    우리 예수님처럼 이 땅을 떠나는 그 순간까지 기도를 놓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은총을 입은 우리 모두가 이 새벽에 쉬지 말고 기도하여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며 하나님의 은총을 입은 그리스도인이 됩시다.

    함께 하는 기도

    죽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시며 쉬지 않고 기도하신 예수님! 
    우리도 예수님을 따라 동이 트기 전의 새벽 시간에 주께 나와 기도합니다. 
    우리의 기도를 들어주시고 응답해 주옵소서. 
    이 시간 우리가 나라와 민족과 교회와 가정을 위해 기도할 때, 응답하여 주시고 참 평안과 만족을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함께 할 기도 

    예수님처럼 다니엘처럼 기도하는 성도가 되게 하소서.
    우리 나라와 민족을 붙들어 주시고 문제들이 해결되게 하소서.
    우리 교회와 가정에 은혜를 주시고 믿음 위에 서 있게 하소서. 
    복음 전해야 할 한 사람이 생각나게 하소서.









    다니엘의 중보 기도 /  우리의 죄악을...간구치 아니하였나이다 
    - 여기에 기록된 '주의 진리'에 대해 혹자는 축복의 언약이든 저주의 맹세든 간에 하나님의 언약에 대한 신실함으로 해석한다. 
    이에 따르면 본 구절은 백성들이 당하는 현재의 고난이 이미 제시된 언약 파기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적 결과라는 사실을 깨닫고 하나님의 구원의 은총을 얻기 위해 회개했어야함 했다는 의미를 내포한다(Hitzig, Thomson). 

    그러나 델리취(Delitzsch)는 좀더 희망적인 측면에서 '주의 진리'를 말씀 속에 나타난 하나님의 구원 계획으로 해석한다. 
    그러므로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의 징벌이 궁극적으로 온전한 구원을 성취하시기 위한 하나님의 구원 섭리임을 깨닫고, 구원의 조속한 성취를 위해 미리 회개했어야 한다는 주장이라고 본다.





    9월 19일(금) 다니엘 4-6장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그럴찌라도(5:17)

    다니엘이 왕에게 대답하여 가로되 왕의 예물은 왕이 스스로 취하시며 왕의 상급은 다른 사람에게 주옵소서 그럴찌라도 내가 왕을 위하여 이 글을 읽으며 그 해석을 아시게 하리이다.
    Then Daniel answered the king, "You may keep your gifts for yourself and give your rewards to someone else. Nevertheless, I will read the writing for the king and tell him what it means. 

    그럴찌라도(Nevertheless) even so

    그리아니하실찌라도(even if he does not) even if you don't

    다니엘 3:18
    그리 아니하실찌라도 왕이여 우리가 왕의 신들을 섬기지도 아니하고 왕의 세우신 신상에게 절하지도 아니할 줄을 아옵소서.
    But even if he does not, we want you to know, O king, that we will not serve your gods or worship the image of gold you have set up.

     
    다니엘서를 일다보면 두 가지 접속사 즉 "그리아니하실지라도"(3:18)와 "그럴찌라도"(5:17)가 눈에 아른 거립니다.
    그 이유가 무엇이었을까?

    대다수의 성도들은 내가 예수를 믿고 살아가는 동안 나에게는 절망적인 사건이 일어나지 않기를 기대합니다.
    그런데 다니엘은 절망적인 사건 앞에서도 당당한 신앙의 자세를 드러내고 있기 때문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럴찌라도(nevertheless. even so)'라는 접속사는 다니엘에게 많은 상급이 내려질지라도 나는 그와 같은 상급에 좌우되는 신앙이 아니므로 나를 위하여 예비된 상급은 모두 다른 사람들에게 주고 오직 나는 벨사살 왕이 원하는 것을 알려주겠다고 하는 것을 강조한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리아니하실찌라도(even if he does not)'라는 접속사는 절망적인 사건이 닥쳐왔을 때 전능하신 여호와 하나님은 그 사건 가운데서 나를 안전하게 지켜주시며 보호해 주실 것을 믿지만 만일 내가 원하는 것대로 이루어주시지 않을지라도 내 믿음은 결코 흔들림이 없을 것이라는 것을 강조한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만일 내가 다니엘과 같은 입장에 처했다면 나는 과연 무엇을 어떻게 고백했을까?
    솔직하고 냉정하게 나의 신앙을 살펴볼 수 있는 믿음의 안목이 필요할 뿐만 아니라 세속적인 것과 연관짓던 지난 날의 믿음을 성경적으로 확립해야 할 대가 되었다고 하겠습니다.

    왜냐하면 누구든지 좌파 정부가 요구하는 것에 동의하면 범죄자일지라도 그에게 높은 지위가 보장됩니다.
    그러나 좌파 정부가 계획하는 것이 부정한 것이며 잘못된 것이라고 쓴소리를 뱉으면 그 사람에게는 불이익 처분이 따라올 것이기 때문ㄴ입니다.

    22대 국회의원 300명 중에 87명이 기독교인이라고 합니다.
    87명은 대략 29%가 비율입니다.
    29%의 국회의원이 성경의 가르침에 따라 그들이 맡은 자리에서 소금과 빛이 된다면 자유대한민국은 절대로 죄편향으로 기울 수 없어야 합니다.
    그런데 자유대한민국은 지금 거의 좌편향 정부가 되고 말았습니다.
    삼권분립이라는 정치 구조가 이미 무너졌습니다.
    범법자가 권력을 장악하고 권력을 갖도록 손뼉치며 동조한 세력들 중에도 기독교인들의 분포가 25%라고 합니다.
    전체 인구 중에 1/4 즉 25%가 기독교인이라고 한다면 좌편향 정부로 낮아지는 것에 대해서 찬성하거나 지지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죄편향 정부에서는 종교를 인정하지 않으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기독교와 불교와 가톨릭 등을 결코 용인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왜냐하면 참된 종교인은 법과 질서를 존중할 뿐만 아니라 절대적 가치라고 확신하기 때문입니다.

    다니엘은 유능한 남 유다 왕국의 20, 30세대이었습니다.
    바벨론의 포로가 되었지만 여전히 왕국에서 제공하는 각종 산해진미과 고급 포도주를 제공받고 있었습니다.
    다니엘은 얼마든지 자기를 위하여 편한 생활을 누릴 수 있는 지위를 보장받고 있었지만 이런 지위보다는 여호와 하나님을 두려워할 줄 아는 신앙이 더 중요하다고 자신의 입장을 떳떳하게 밝힌 것입니다.

    다니엘의 신앙은 두 가지 접속사에 의해서 두드러지게 나타났습니다.

    "그리아니하실찌라도"
    평소보다 더 뜨거워진 풀무불 속에 더녀 넣을 때 전능하신 하나님이 나를 구해주실 것을 믿지만 만일 그렇게 하지 않을지라도 나는 하나님만 믿고 따르겠습니다.

    "그럴지라도"
    왕의 정책을 위한 하나님의 특별 계시를 다른 어떤 사람들도 알려주지 않을 때 다니엘을 통하여 그 비밀을 알려주시므로 그에 따른 보상과 상급과 지위와 명예는 그것을 원하는 사람들에게 나눠주시고 나는 오직 왕과 나라를 위하여 그 비밀을 알려 줄 것이라고 합니다.

    이러한 일꾼이 필요합니다.
    대한민국 땅에도 이러한 일군이 일어나야 하겠습니다.
    또한 이와 같은 일꾼들이 일어날 수 있도록 협력해야 할 것입니다.

    멸망의 큰 잔치(종말론)

    우리의 삶의 중심은 내가 아니라 바로 하나님이시다.

    1.고고학으로 밝혀진 성경의 권위
    2.위기에서 하나님을 의지 않고 우상을 섬기는 벨사살
    3.인간 세상을 다스리시는 주권은 하나님 이시다.
    4.성경 연구는 삶의 변화에 목적을 두어야 한다.
    5.우리 삶의  중심에는 하나님을 모셔야 한다.

    벨사살 왕은 그 정체가 분명하지 않았습니다.
     <벨사살 왕> 이 그 귀인 일천 명을 위하여 큰 잔치를  배설(排設)하고 그 일천 명 앞에서 술을 마시니라”
    이 벨사살 왕의 정체에 관해서 신학계에서는 오랫동안 논쟁을 거듭해 왔습니다. 
    논쟁의 발단은 일반(세속) 역사 책을 뒤져 보면 바벨론 역사 가운데 벨사살이라는 이름을 가진 왕이 나오지 않는다는 것이었습니다.
    “도대체 벨사살 왕은 누구인가?”

    다시 확증된 성경의 권위

    성경의 권위를 신뢰하지 못하고 그 권위를 약화시키는 방향으로 성경을 연구하는 자유주의 신학자들이 바로 이 벨사살 왕이 역사 속에 실존하지 않았던 인물이라는 사실에 근거해서 다니엘서 전체를 역사적 정확성이 결여된 책이라는 진단을 내렸던 적이 있습니다. 
    자신의 이름을 알리기 위해 성경의 권위에 도전하거나 혹은 성경의 명백한 교리를 뒤집는 불경건한 신학자들의 노름이 역사 속에는 항상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죽었다는 선언이 신학자들의 입술을 통해서 나오기도 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의 권위는 흔들리지 않고 있습니다.

    1854년 영국의 J.G. 테일러라는 사람이 고고학자 팀을 이끌고 이라크 남부 지방에서 고고학 탐사를 하는 가운데 고대 바벨론어로 새겨진 글귀 하나를 발견했습다. 

    그런데 그것은 나보니도스 왕과 그의 아들 벨사살을 위한 기도문이었습니다. 
    바벨론의 역사를 좀더 자세히 살펴보면 느부갓네살 왕이 죽은 후 세 명의 왕이 들어섰다고 합니다. 

    첫번째 왕은 메로다크 왕으로서 느부갓네살의 아들이었습니다. 
    메로다크는 2년 정도 바벨론을 통치하다가 느부갓네살 왕의 사위에 의해서 암살당합니다. 
    가족끼리 빚어진 비극이었습니다. 

    두번째 통치자는 네글리사 왕입니다. 
    이 사람은 4년쯤 통치를 하다가 물러났으며 네리글리사의 아들인 라바쉬말드크가 이어서 왕위에 등극합니다. 
    그러나 이 사람은 9개월밖에는 왕위에 머무르지 못했습니다.

    느부갓네살 왕이 죽은 후 네번째  통치자, 그러니까 곧 바벨론의  마지막 통치자가 바로 나보니도스였습니다. 
    이 사람은 느부갓네살의 딸과 결혼한 것으로 역사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가족끼리 복잡하게 얽힌 것이지요. 
    나보니도스가 느부갓네살의 딸과 결혼한 것은, 자기도 왕의 자리에 앉을 수 있는 합법적인 왕이라는 것을 증명하기 위한 정략적 이유에서였을 것이라고 역사학자들은 추정합니다. 

    그런데 본문의 벨사살이 바로 나보니도스의 아들이라는 사실이 1854년에 고고학자들의 발굴에 의해서 비로소 증명되었습니다. 
    비록, 왕위에 오른 일이 없는 벨사살에게 어떻게 왕이라는 칭호를 붙일 수가 있느냐는 문제가 남았기는 하지만 말입니다. 
    사실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면 아무 것도 아닌데, 복잡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이것을 문제 삼고 있는 것입니다.

    나보니도스의 통치 시기는 주전 556년부터 539년까지입니다. 
    주전 539년은 바로 바벨론 제국이 멸망한 해입니다. 
    나보니도스는 전쟁을 많이 한 왕이라고 합니다. 
    특별히 그의 마지막 10년 동안은 거의 매일같이 전쟁을 했습니다. 
    전쟁을 많이 하게 되니까 자연히 해외 원정을 많이 나갔습니다. 
    그렇다면 상식적으로 생각해서 이렇게 해외에 나가서 전쟁을 하고 있는 동안에 왕은 도대체 누구에게 통치권을 위임했겠습니까? 
    아들밖에 더 있었겠습니까? 
    즉, 나보니도스 왕이 해외에 출정 가 있는 동안 실제적으로 바벨론을 통치했던 사람은 그의 아들 벨사살이었으므로 당연히 그를 왕이라 부를 수 있는 것입니다. 
    마치 요즘 북한에, 위대하신 아바이 수령과 친애하는 지도자 김정일 동지 이 두 사람이 통치자로 있는 것처럼 그 당시에도 통치자가 둘이었던 것입니다.

    다니엘서 5장에 기록된 바벨론 제국의 멸망 직전에도 나보니도스 왕은 새롭게 일어나던 메대 바사 제국과 북아랍 지역에서 전쟁을 벌이고 있었습니다. 
    그러다 결국 패전하고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서 보리시파라는 곳으로 도망갔습니다. 
    이것은 그리이스의 역사가인 헤로도투스의 증언입니다. 
    그런 상황에서 메대 바사의 마지막 도전이 드디어 바벨론 제국에 임하여 왕궁에까지 적들이 쳐들어오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본문의 배경입니다.

    자유주의 신학자들의 다니엘서의 정확성에 대한 의심을 뒤집고 나아가 성경이 얼마나 권위 있는 책인가에 대한 놀라운 증거가 본문 7절에 나와 있습니다. 
    하나님을 모욕하고 우상을 찬양하는 잔치가 한창이던 순간을 기록한 5, 6절을 먼저 보십시오.
    “그때에 사람의 손가락이 나타나서 왕궁 촛대 맞은편 분벽에 글자를 쓰는데 왕이 그 글자 쓰는 손가락을 본지라 이에 왕의 즐기던 빛이 변하고 그 생각이 번민하여 넓적다리 마디가 녹는 듯하고 그 무릎이 서로 부딪힌지라”기이한 일을 보고 놀라 벌벌 떨던 왕은 이것이 도대체 무슨 뜻인가 그 해석을 요구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계속되는 말씀을 보십시오.
    “왕이 크게 소리하여 술객과 갈대아 술사와 점장이를 불러오게 하고 바벨론 박사들에게 일러 가로되 무론 누구든지 이 글자를 읽고 그 해석을 내게 보이면 자주옷을 입히고 금 사슬로 그 목에 드리우고 그로 나라의 <셋째 치리자>를 삼으리라 하니라”(7절). 
    이 <셋째 치리자>라는 단어가 아주 흥미롭습니다.
    “이것을 해석하는 사람은 세번째 통치자를 삼겠다”
    왜 하필이면 세번째 치리자일까요? 
    그것은 나보니도스와 그의 아들인 벨사살 자신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결국 셋째 치리자란 왕의 바로 아래 사람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번에는 본문 16절을 보십시오.
    “내가 네게 대하여 들은즉 너는 해석을 잘하고 의문을 파한다 하도다 그런즉 이제 네가 이 글을 읽고 그 해석을 내게 알게 하면 네게 자주옷을 입히고 금 사슬을 네 목에 드리우고 너로 나라의 <셋째 치리자>를  삼으리라”<셋째 치리자를 삼겠다>는 말이 또 한번 나옵니다. 
    결국 세속 역사가가 벨사살의 정체를 밝히기 전에 이미 성경이 정확하게 이 왕의 정체에 관해서 증언해 놓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대단히 중요한 발견입니다. 
    왜냐하면 이 사실이 밝혀짐으로써 세속 역사에 벨사살의 이름이 나타나지 않았다는 이유로 성경의 권위를 의심하던 사람들이 깜짝 놀라게 되고 성경의 위대한 권위와 정확성이 드러났기 때문입니다.

    주전 539년 10월, 바벨론 최후의 날에 흥겨운 잔치가 벌어집니다. 
    그리고 이미 메대  바사의 다리오의 군대는 바벨론 궁중을 포위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 상황 속에서 5장의 이야기가 시작됩니다.
    “벨사살 왕이 그 귀인 일천 명을 위하여 큰 잔치를 배설하고 그 일천 명 앞에서 술을 마시니라”(1절). 
    적군이 쳐들어오면 전쟁 준비를 해야지 왜 잔치를 벌입니까? 
    그 이유에 대해서는 세 가지로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첫째, 나의 왕국은 절대로 망하지 않는다는 벨사살의 자존심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벨사살은 자기 나라를 수호하는 신들의 능력을 굳게 믿고 있었던 것입니다.

    둘째, 고고학자들의 증언에 의하면 그 당시 바벨론 궁중의 성벽은 굉장히 견고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벨사살에게는 <설마 누가 성벽을 넘어뜨릴  수 있겠는가>라는 자부심이 있었습니다.

    셋째, 민심을 무마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즉, 제 아무리 적군이 쳐들어와도 우리는 까딱없다는 것을 백성들에게 보여 주기 위해서 벨사살은 그날밤 굉장한 잔치를 배설하고 일천 명 앞에서 술을 마셨을 것임이 틀림없습니다.

    “벨사살이 술을 마실  때에 명하여 그 부친 느부갓네살이 예루살렘 전(殿)에서 취하여 온 금, 은 기명(器皿)을 가져오게 하였으니 이는 왕과 귀인들과 왕후들과 빈궁들이 다 그것으로 마시려 함이었더라” 하필이면 유다가 망할 때 예루살렘 성전에서 가지고 온 기구들을 잔칫상에 대령하게 했습니다.

    계속되는 말씀을 보십시오.
    “이에 예루살렘 하나님의 전 성소 중에서 취하여 온 금 기명을 가져오매 왕이 그 귀인들과 왕후들과 빈궁들로 더불어 그것으로 마시고 무리가 술을 마시고는 그 금, 은, 동, 철, 목, 석으로 만든 신들을 찬양하니라”(3,4절). 

    벨사살은 바벨론의 우상 신들을 찬양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그 순간 놀라운 일이 벌어집니다.
    “그때에 사람의 손가락이 나타나서 왕궁 촛대 맞은편 분벽에 글자를 쓰는데 왕이 그 글자 쓰는 손가락을 본지라”(5절). 
    자기 나라의 최후를 목전에 둔 급박한 상황에서도, 살아 계신 하나님을 찾을 생각은 하지 않고 오히려 그분을 모독하며 우상 신들의 축제에 참여하고 있던 벨사살 왕과 귀족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왕궁의 분벽에 홀연히 한 손가락이 나타나서 글씨를 쓰기 시작한 것입니다. 
    이것은 심판의 메시지였습니다.

    벨사살 왕의 범죄

    물론 1-4절에서 벨사살 왕의 범죄가 드러났긴 하지만 다시 다니엘은 벨사살 왕의 죄를 조목조목 정리하여 그에게 선포하였습니다. 
    본문 22절 이하를 보십시오.“벨사살이여 왕은 그의 아들이 되어서 이것을 다 알고도 오히려 마음을 낮추지 아니하고 도리어 스스로 높여서 하늘의 주재를 거역하고 그 전 기명을 왕의 앞으로 가져다가 왕과 귀인들과 왕후들과 빈궁들이 다 그것으로 술을 마시고 왕이 또 보지도 듣지도 알지도 못하는 금, 은, 동, 철과 목, 석으로 만든 신상들을 찬양하고 도리어 왕의 호흡을 주장하시고 왕의 모든 길을 작정하시는 하나님께는 영광을 돌리지 아니한지라”(22, 23절). 
    이것이 다니엘이 벨사살 왕에게 지적해 준 범죄의 내용입니다. 

    이  내용은 다시 세 가지로 분류됩니다.

    첫째. 의도적 범죄

    “왕이여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이 왕의 부친 느부갓네살에게 나라와 큰 권세와 영광과 위엄을 주셨고 그에게 큰 권세를 주셨으므로 백성들과 나라들과 각 방언하는 자들이 그의 앞에서 떨고 두려워하였으며 그는 임의로  죽이며 임의로 살리며 임의로 높이며 임의로 낮추었더니 그가 마음이 높아지며 뜻이 강퍅하여 교만을 행하므로 그 왕위가 폐한 바 되며 그 영광을 빼앗기고 인생 중에서 쫓겨나서 그 마음이 들짐승의 마음과 같았고 또 들나귀와 함께 거하며 또 소처럼 풀을  먹으며 그 몸이 하늘 이슬에  젖었으며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이 인간 나라를 다스리시며 자기의 뜻대로 누구든지 그 위에 세우시는 줄을 알기까지 이르게 되었었나이다”(18-21절). 

    다니엘은 이렇게 말한 후에 즉시 “벨사살이여 왕은 <그의> 아들이 되어서 이것을  알고도... ”(22절)라고 덧붙였습니다. 
    <그의  아들>에서 <그>는 느부갓네살을 가리킵니다. 
    이렇게 히브리 사람들은 몇 대 위의 선조라도 전부 아버지라고 불렀습니다. 
    벨사살은 조상 느부갓네살이 하나님 앞에서 교만했다가 징계를 받아 왕에서 쫓겨난 후 짐승처럼 울부짖는 정신병자가 되어 7년 동안 고생했던 일을 알고도 똑같은 범죄를 되풀이한 것입니다. 
    사람들이 지나간 역사를 통해서 아무 것도 배우지 못한다는 사실은 참으로 애석한 일입니다. 
    조상의 실수가, 선배의 실수가 계속하여 답습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주권>이 다니엘서를 지배하는 가장 중심되는 사상임을 이미 말씀드렸습니다.
    <역사의 진정한 주인은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이 세상을 다스리신다> 

    다니엘서 2:21  
    “그는(하나님은) 때와 기한을 변하시며 왕들을 폐하시고 왕들을 세우시며 지혜자에게 지혜를 주시고 지식자에게 총명을 주시는도다” 

    왕을 세우기도 하고 폐하기도 하며 한 민족을 흥하게 하기도 하고 쇠하게도 하는 일을 하나님께서 하십니다. 
    눈에 보이는 통치자가 실세를 쥐고 있기 때문에 그에게 아부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없지 않아 있습니다. 
    그러나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5장 21절에서도 다니엘은 벨사살 왕에게 똑같은 사실을 다시 선포합니다.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이 인간 나라를 다스리시며... .” 

    이것이 다니엘서의 위대한 역사 철학입니다. 
    이 사실을 느부갓네살 왕은 얼마나 무서운 대가를 지불하면서 뼈아프게 배웠습니까? 

    7년간 미치광이처럼 들판을 기어다니는, 하나님의 참담한 심판과 징계를 맛보고 나서야 비로소 자신이 아니라 하나님이 세상을 다스린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벨사살 왕은 느부갓네살의 전철을 밟지 않을 수도 있었습니다. 
    이렇게, 알고도 범한 죄이기 때문에 심판이 더욱 중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성경은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이것을 다 알고도 오히려 마음을 낮추지 아니하고”(22절). 
    알고도 행하지 않는 것은 더 커다란 범죄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성경을 배울 때 항상 조심해야 합니다. 
    즉, 성경공부의 목적을 하나님께 순종하여 내 삶을 바꾸는 데 두어야 하며 단순한 지식을 위한 성경 연구를 경계해야 합니다. 
    지식만 늘려 가는 성경공부 만큼 위험한 것은 또 없기 때문입니다.

    마태복음 11장에서 예수님은 알고도 행치 않는 자들에게 더 큰 심판이 있으리라는 경고를 하셨습니다.
    “예수께서 권능을 가장 많이 베푸신 고을들이 회개치 아니하므로 그때에 책망하시되 화가 있을진저 고라신아 화가 있을진저 벳새다야 너희에게서 행한 모든 권능을 두로와 시돈에서  행하였더면 저희가 벌써 베옷을 입고 재에 앉아 회개하였으리라”(20, 21절). 
    실제 팔레스타인에 가보면 고라신이라는 마을이 문자 그대로 폐허임을 확인하게 됩니다. 
    주님은 갈릴리 근처의 고라신과 벳새다 등지에서 많은 기사와 이적을 행하시며 말씀을 가르치셨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주의 기적을 보고도, 하나님의 영광을 맛보고도, 주의 말씀을 듣고도 회개치 않았습니다. 
    예수께서는 이들에 대한 경고를 통해 의도적인 범죄가 하나님 앞에서 얼마나 큰 책망의 대상인가를 우리에게 가르쳐 주신 것입니다.

    둘째. 교만

    교만은 모든 사람의 기본적인 범죄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천사장이 사단이 된 것도 자신을 하나님보다 높이려는 유혹에 넘어갔기 때문입니다. 21절에서 다니엘은 느부갓네살 왕에 대한 이야기를 하면서 하나님을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이라고 묘사합니다. 하나님에 대한 그 많은 표현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다니엘서에는 이 표현이 제일 많이 등장합니다.“지극히 높으신 하나님” 다니엘은 하나님 홀로 진실로 높으신 분이시며 그 누구도 그분의 자리에 설 수 없다는 사실을 천명한 것입니다. 본문 22절 이하를 다시 한번 보십시오.“벨사살이여 왕은 그의 아들이 되어서 이것을 다 알고도 오히려 마음을 낮추지 아니하고 도리어 스스로 높여서 하늘의 주재를 거역하고...”(22,23절). 자기 신격화, 이것은 무서운 교만입니다. 여기에서 다니엘은 자기 조상이었던 느부갓네살과 똑같은 교만을 답습한 벨사살의 범죄상을 지적하는  것입니다.

    셋째. 우상 숭배

     23절 하반절을 보십시오.“... 그 전 기명을 왕의 앞으로 가져다가 왕과 귀인들과 왕후들과 빈궁들이 다 그것으로 술을 마시고 왕이 또 보지도 듣지도 알지도 못하는 금, 은, 동, 철과 목, 석으로 만든 신상들을 찬양하고 도리어 왕의 호흡을 주장하시고 왕의 모든 길을 작정하시는 하나님께는 영광을 돌리지 아니한지라” 벨사살이 예루살렘 성전의 거룩한 그릇을 가지고 야훼 하나님을 모독했던 행위의 배후에는 자기 조상을 비웃으려는 의도가 있었을지도 모릅니다.“우리 조상 느부갓네살은 이렇게 해서 야훼에게 굴복했을지 모르지만 그러나 나만은, 아무도 나의 능력과 나의 영광을 초월할 수 없다” 자기 나라가 망하기 일보 직전에까지도 자기를 높이려는 이 뿌리 깊은 유혹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는 벨사살의 모습을 보십시오.

    벨사살의 범죄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

    야훼 하나님을 모독하고 우상을 찬양하던 바로 “그때에 사람의 손가락이 나타나서 왕궁 촛대 맞은편 분벽에 글자를 쓰는데 왕이 그 글자 쓰는 손가락을 보았습니다”(5절). 

    이것은, 하나님의 영광을 막고 그분의 자리에 자신을 세우고 있던 벨사살에게 심판의 메시지를 전달하려는 하나님 자신의 극적인 방법이었습니다. 손가락이 나타나서 무엇을 썼습니까? 그 내용이 24절 이하에 기록되어 있습니다.“이러므로 그의 앞에서 이 손가락이 나와서 이 글을 기록하였나이다 기록한 글자는 이것이니 곧 메네 메네 데겔 우바르신이라”(24,25절). 뭔가 심상치 않은 일이 일어날 전조(前兆)인 것 같은데 글자의 뜻을 통 알 수 없어서 답답하여 미칠 지경이었습니다. 그리하여 다시 다니엘이 등장하게 됩니다. 이것을 해석할 수 있는 자가 아무도 없었기 때문입니다. 이때의 다니엘은 세월이 상당히 흘러서 80세는 족히 되었을  나이입니다. 그러나 그는 여전히 하나님의 사람이었습니다. 저는 이 5장을 연구하면서 나이 80세가 되어서도 조금도 변함이 없는 순수함으로 하나님 앞에 섰던 다니엘의 모습에서 커다란 감명을 받았습니다.

    왕은 그 글자를 해석하여 달라고 하면서 별 소리를 다합니다. 우선  세번째 통치자로 삼겠다고 말합니다. 뿐만 아니라 굉장히 많은 뇌물을 주겠다고까지 했습니다. 16절 이하를 보십시오.“내가 네게 대하여 들은즉 너는 해석을 잘하고 의문을 파한다 하도다 그런즉 이제 네가 이 글을 읽고 그 해석을 내게 알게 하면 네게 자주옷을 입히고 금 사슬을 네 목에 드리우고 너로 나라의 셋째 치리자를 삼으리라”이에 대해 다니엘은 이렇게 대답합니다.“다니엘이 왕에게 대답하여 가로되 왕의 예물은 왕이 스스로 취하시며 왕의 상급은 다른 사람에게 주옵소서 그럴지라도 내가 왕을 위하여 이 글을 읽으며 그 해석을 아시게 하리이다”(17절). 다니엘은 황금에 관심이 없었습니다. 권세에도 관심이 없었습니다. 바벨론의 권력 구조의 상층부에 속해 있으면서도 여전히 다니엘은 오직 하나님의 사람이었을 따름입니다. 다만 하나님의 사람으로 그분의 메시지를 전달하는 일에 쓰임 받기를 원하는 일념으로 80년을 살아온 이 순수한 청년. 그는 나이만 들었지 여전히 젊은 사람이었습니다.

    이제 다니엘이 해석을 합니다.
    “메네 메네 데겔 우바르신”
    『메네』는 “숫자를 세다”를, 
    『데겔』은 “저울로 달아 본다”  
    『우바르신』은 “나누다”를 뜻합니다.

    26절 이하를 보십시오.
    “그 뜻을 해석하건대 메네는 하나님이 이미 왕의 나라의 시대를 세어서 그것을 끝나게 하셨다 함이요”(26절).
    “당신이 얼마 동안 통치할 것이며 얼마 동안 살 것인가를 결정하는 것은 하나님의 주권에 달렸소” 
    다니엘은 하나님께서 한 나라와 문명의 연한(年限)을 정하신다는 것을 선포한 것입니다. 
    계속되는 말씀을 보십시오.
    “데겔은 왕이 저울에 달려서 부족함이 뵈었다 함이요”(27절).
    “저울에 달아보니 당신은 안 되겠습니다. 하나님의 표준으로 보았을 때 당신은 도저히 더 이상 왕의 자리에 있어서는 안 될 사람입니다”
    이것은 심판에 대한 메시지입니다. 
    28절을 보십시오.
    “베레스는 왕의 나라가 나뉘어서 메대와 바사 사람에게 준 바 되었다 함이니이다”
    <베레스>의 복수형이 “우바르신”입니다. 
    즉, 이것은 바벨론이 두 조각으로 나뉘어 메대 바사의 지배를 받게 될 것이라는 예언입니다.

    손가락이 나타나서 심판의 메시지를 기록하는 동안에 벨사살 왕은 이미 초죽음이 되어 버렸습니다. 
    이제 그의 최후를 보시기 바랍니다.
    “그 날밤에 갈대아 왕 벨사살이 죽임을 당하였고 메대 사람 다리오가 나라를 얻었는데 그때에 다리오는 육십이 세였더라”(30, 31절). 
    이것이 메대 바사가 일어나고 바벨론이 넘어지던 순간입니다. 
    벨사살이 열었던 잔치는 문자 그대로 멸망의 잔치였던 것입니다. 
    이 교만한 왕에게 멸망은 갑작스럽게 찾아왔습니다. 
    하나님의 심판은 서서히 오지 않습니다. 
    어떤 때는 한순간에 다가옵니다. 
    잠언서 기자의 증언처럼 “악인에게는 그 재앙이 갑자기 임한즉 도움을 얻지 못하고 당장에 패망합니다”(잠 6:15). 
    인간이 쌓아 올린 모든 영광은 눈깜짝할 새에 무(無)로 돌아갈 수 있습니다. 
    이때 이래로 바벨론 제국의 최후는 성경에서, 인류 역사의 최후의 모델로 사용되어 왔습니다.

    요한계시록에 묘사된 인류 역사의 마지막 모습은 마치 바벨론 제국의 패망 모습과도 같습니다. 
    그렇기에 다니엘서를 이해하지 않고는 요한계시록을 이해할 수 없다고 하는 것입니다. 

    요한계시록 18:1-2 
    “이 일 후에 다른 천사가 하늘에서 내려오는 것을 보니 큰 권세를 가졌는데 그의 영광으로 땅이 환하여지더라 힘센 음성으로 외쳐 가로되 무너졌도다 무너졌도다 큰 성 바벨론이여 귀신의 처소와 각종 더러운 영의  모이는 곳과 각종 더럽고 가증한 새의 모이는 곳이 되었도다”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수 없는 이 세상의 모습은 진정 바벨론에 비유될 수 있을 것입니다. 
    요한계시록의 계속되는 말씀을 보십시오. 
    그 음행의 진노의 포도주를 인하여 만국이 무너졌으며 또 땅의 왕들이 그로 더불어 음행하였으며 땅의 상고(商)들도 그 사치의 세력을 인하여 치부하였도다 하더라(3절)

    .“그와 함께 음행하고 사치하던 땅의 왕들이 그 불 붙는 연기를 보고 위하여 울고 가슴을 치며 그 고난을 무서워하여 멀리 서서 가로되 화 있도다 화 있도다 큰 성, 견고한 성 바벨론이여 일시간에 네 심판이 이르렀다”(9, 10절). 
    한순간에 무너지는 인류의 바벨탑의 운명을 묘사한 극적인 장면입니다.

    교훈 두가지

    첫째, 우리 각자의 삶은 하나님의 손 안에 있습니다. 

    하나님이 역사를 다스리십니다. 이 이야기를 추상적으로 받아들이지 마십시오. 하나님은 나를 다스리십니다. 나를 세우고 나를 폐하시는 분이십니다. 본문 23절에서 다니엘 선지자가 벨사살에게 선포한 심판의 메시지 가운데 하나가 무엇이었습니까?“왕의 호흡을 주장하시고 왕의 모든 길을 작정하시는 하나님께는 영광을 돌리지 아니한지라”누가 당신의 호흡을 주장합니까? 이 순간 호흡이 끊어지면 모든 것이 끝장납니다. 심장의 고동 소리를 들어보십시오. 내가 살아 있다는 사실을 확인해 보십시오. 우리는 내 호흡을 주장하시는 하나님 때문에 이렇게 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우리 인생은 자꾸만 하나님을 망각합니다.

    둘째, 우리의 삶의 목적은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것입니다. 

    본문 23절에서 다니엘은 벨사살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지 아니한 것을 죄라고 지적합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그리스도인의 삶의 진정한 목적을 배울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나로 호흡하게 하시고 살아 움직이게 하시며 나로 인생의 작정된 길을 걷게 하시는 궁극적인 이유는 바로 그분이  영광을 받으시기 위함입니다.

    인생이란, 삶의 중심에 나를 놓느냐 아니면 하나님을 놓느냐 하는 끊임없는 싸움입니다. 
    우리의 본능적인 부패성은 자꾸만 자기 자신을 삶의 중심에 두고 싶어합니다. 
    내가 영광을 받고 내가 내 삶의 초점이 되고 나를 드러내고자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은 그것이 아닙니다. 
    이처럼 우리가 끊임없이 싸워야 할 전쟁터는 바로 내 안에 있습니다. 
    우리는 나로 호흡하게 하시는 그 하나님께 영광과 찬송을 드리기 위하여 그분을 우리 삶의 중심에 모시고자 애써야 합니다.

    벨사살은 자신의 자존심을 위해서, 자신의 권력을 과시하기 위해서 먹고 마셨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먹고 마시고 해야 할 진정한 이유는 하나님의 영광이었어야 했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을 무시했을 때 그들의 잔치는 멸망을 부를 잔치가 되었습니다.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전 10:31). 
    바울은 같은 고린도전서 11장에서 성찬식에 관해 이야기하면서 “멸망의 큰 잔치 이렇게 종말을 대비하라”
    “주의 몸을 분변치 못하고 먹고 마시는 자”(29절)를 하나님께서 징계하신다고 했습니다. 
    바울이 여기에서 먹고 마신다는 이야기를 왜 했겠습니까? 
    그것은 겉으로 드러나는 현상적인 삶의 모습이 바로, 먹고 마시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무엇을 위해서 먹고 마셔야 합니까?  
    다시 말해 우리는 무엇을 위해서 살아야 합니까? 
    하나님을 위해서입니까? 아니면 나 자신만을 위해서입니까?

    하나님을 위해서 먹고 마시고, 하나님을 위해서 정치도 하고 장사도 해야 할 우리가, 그 하나님을 망각하고 그 하나님을 무시하고 나를 위하여 먹고 마시고 욕심을 낼 때 하나님은 심판을 내리신다는 것이 “마지막 잔치”의 진정한 메시지인 것입니다.

    “메네 메네 데겔 우바르신”(25절).
    제게 주어진 인생의 남은 날을  당신만을 위해서 살 수 있도록 하나님, 언제나 당신이 제 삶의 중심이 되시기를 원하나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불구하다'를 써서 '그럼에도 불구하고'로도 표현할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이 쓰이는 '불구하다'가 사전에 아래와 같이 실려 있으니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불구하다 「동사」 【…에】 【-음에】 ((‘-에도/음에도 불구하고’ 구성으로 쓰여))((‘-음에도’ 대신에 ‘-ㄴ데도’가 쓰이기도 한다))얽매여 거리끼지 아니하다.

    몸살에도 불구하고 출근하다.

    우리 삶의 이상도 끝내는 도달할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서로의 무지를 이용해 거짓말을 하고 또 속는 것이나 아닐까?≪이문열, 시대와의 불화≫

    일정 기간 동안 간기를 빼야 농사를 지을 수 있는 땅인데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그 질펀하게 펼쳐진 땅을 보는 것만으로도 배불러하고 넉넉해했다.≪조정래, 태백산맥≫

    영어식 표현 in spite of에서 유래한 것으로 ....에도 불구하고
    그런데도, 그렇지만, 그럼에도 

    친구임에도 불구하고, 친구이지만, 친구임에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런데’는 앞과 상반되는 말을 할 때도 종종 쓰인다. 

    “그가 웃었다. 그런데 나는 슬펐다”처럼. ‘-는데’도 ‘그런데’와 비슷한 구실을 한다. 
    그리고 다음처럼 두 문장을 이어 준다. “그가 웃었는데 나는 슬펐다.”

    이렇게 상반되는 상황의 ‘그런데’와 ‘-는데’에는 ‘도’를 붙이는 일이 흔하다. 
    그러면 이 말들이 강조된다. 
    마치 목소리를 높인 것 같은 느낌을 준다. 
    “그가 웃었다. 그런데도 나는 슬펐다.” 
    “그가 웃었는데도 나는 슬펐다.” 이처럼 ‘도’가 들어가면 느낌이 달라진다.

    ‘그럼에도’도 비슷하다. 
    ‘그런데도’나 ‘-는데도’처럼 ‘그럼에도’도 뜻을 강하게 드러낸다. 
    ‘그런데도’와 ‘-는데도’가 일상의 대화에서나 글에서도 자유롭게 쓰인다면 ‘그럼에도’는 주로 글에서 쓰인다. 
    이 말들은 ‘불구하다’와 때때로 어울리는데, 이때는 거의 글에서 나타난다. “그가 웃었다. 그런데도(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슬펐다” “그가 웃었는데도(웃었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슬펐다”는 주로 글에서나 볼 수 있는 문장이다. 말로 할 때는 굳이 ‘불구하다’를 넣어 문장을 늘리지 않는다. 글에서도 ‘불구하다’를 넣으면 조금 더 강조하는 느낌을 줄 수 있다. 그렇지만 문장의 간결성은 떨어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는 간결성을 넘어 하나의 관용구가 됐다. ‘불구하고’를 지우면 뭔가 빠진 듯한 느낌을 줄 때도 있다. 그렇더라도 ‘불구하고’를 빼면 문장은 더 간결해진다. “그가 웃었다. 그럼에도 나는 슬펐다”를 보면 알 수 있다. ‘얽매여 거리끼지 않는다’는 말 ‘불구하다’를 어찌 해야 할지 쉽지 않다.


     


    그리 아니하실지라도(하박국 3:16-19)


    다니엘 3:18]
    그리 아니하실찌라도 왕이여 우리가 왕의 신들을 섬기지도 아니하고 왕의 세우신 금 신상에게 절하지도 아니할 줄을 아옵소서.


    수탉이 물을 먹을 때에 물그릇 속에 주둥이를 넣어서 물을 주둥이에 머금은 다음 고개를 들어 뒤로 젖힌 뒤 삼킵니다. 이렇게 물을 먹고 있는 닭을 보고 있던 한 인 도주의자가 저렇게 고개를 내렸다 올렸다 하려면 굉장히 힘들거야하면서 혀를 찼 습니다. 그러자, 옆에서 듣고 있던 현실주의자가 아, 목구멍이 포도청이라고 다 먹 고 살자면 할 수 없죠. 목을 안들면 그나마 한 방울이라도 목구멍으로 넘어 가겠습 니까라고 말했습니다. 이럴때에 같이 있던 한 그리스도인이 두 분의 말씀이 맞군 요. 하지만 저 수탉은 한 모금의 물을 마실 때마다 하늘을 쳐다보며 하나님께 감사 하고 있는 것입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이렇게 감사하는 마음은 똑같은 사물을 볼찌라도 그 생각을 밝게 해주며, 그 삶을 더욱 풍성하게 해 줍니다. 사람이 좋은 일을 당할 때에는 감사하기 쉽습니다. 그러 나 고난과 시련이 겹칠 때에 감사하기란 쉽지 않습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의 독특한 심성 가운데 한(한)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이별의 한 그리움의 한 원한 한 맺힌 삶 등등, 한에 대한 용어들이 우리들 사이에서 친 숙하게 사용됩니다.

    그런데 이 한을 깊이 연구한 학자들에 의하면 이것이 생기는 원인이 억울함이 라고 합니다. 원하는 대로 정상적으로 이루어져야 할 일이 억울하게 풀려 나갈 때에 생긴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한이 많다는 것은 억울한 일이 많다는 이야기입니다.

    우리 민족이 반도에 위치한 연고로 수없이 많은 외세의 침략이 많았습니다. 그 결 과 온갖 원한과 억울한 일들이 많았습니다. 이렇게 하여 세월이 흐르다보니 이것이 하나의 문화가 되어버렸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고유 문화 속에는 온갖 한이 서려 있 는 흔적을 쉽게 찾아 볼 수 있습니다.

    억압과 수난을 많이 당하여 한이 많은 민족일수록 전해 내려오는 민속 음악들이 거의 단조 곡의 암울한 분위기에 가사 또한 구구절절 가슴을 도려내는 듯한 아픔이 베여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 국악의 곡조와 가사가 대개 그런 경향이 있습니 다. 흑인 노예들의 애환이 깃든 흑인영가나 이스라엘 민속 음악에서 그러한 분위기 를 느낄 수 있습니다.

    이렇게 억울한 일, 불행한 일을 당할 때, 모든 자연인들은 한을 품게 됩니다. 그 러나, 구원받아 자연인의 구습에서 해방된 성도들을 향하여 하나님께서는 명령하십 니다. (살전5:18) 범사에 감사하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 님의 뜻이니라 그렇습니다. 우리 한민족의 핏속에 흘러 내려오던 이 억울함의 어두운 쓴 뿌리와 항상 피해 의식의 사고방식에 묶여 있던 구습에서 벗어나 축복의 사람이 되는 비결 은 바로 범사에 감사!!하는데 있습니다.

    이 범사에 감사하는 것은 좋은 일이나, 기쁜 일 뿐 아니라 슬픈 일, 궂은 일, 억 울한 일 앞에서도 감사하라는 뜻입니다. 좋은 일이 있을 때 감사하기란 그리 어렵지 않습니다. 그러나, 시련이 겹치고 전혀 소망의 여지가 없어 보이고 절망적일 때에 감사하기란 참으로 어려운 일입니다. 오늘 맥추감사절을 맞이하여 어려울 때에도 감 사할 수 있는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바로, 오늘 본문에 나타난 하박국 선지자가 바로 그러한 사람입니다.

     1.하박국 선지는 고난과 어려움도 하나님의 뜻임을 깨달았기에 감사하였습니다.

     하박국 선지가 유다 요시야 왕 말기에 유다 나라에 만연한 불의를 보고, 백성들의 이같은 불신앙을 어찌하여야 될찌, 탄식하며 기도할 때에 하나님의 계시와 응답이 왔습니다.

    이제 곧 하나님께서는 이웃 나라 갈대아인들을 징계의 채찍으로 들어서 불신앙과 불의를 심판할 것임을 응답하십니다.

    그런데 그 심판이 얼마나 두려운 것이었던지, 하박국의 창자가 떨리고, 입술이 떨 렸습니다. 앞으로 이 백성들이 당할 심판을 생각할 때에 그 뼈가 썩어 내려 앉는 것 같았습니다.

    ( 잠 15:30)눈의 밝은 것은 마음을 기쁘게 하고 좋은 기별은 뼈를 윤택하게 하느 니라고 했습니다. 과연 사람의 심령 상태가 편안하고 즐거우면 뼈가 윤태하게 되지 만, 근심과 걱정에 빠지면 뼈가 마르게 됩니다. ( 잠 17:22) 마음의 즐거움은 양약 이라도 심령의 근심은 뼈로 마르게 하느니라

    성도는 하나님의 특별한 섭리와 간섭을 받는 사랑의 대상입니다. 마치 부모가 훌 륭한 자녀로 키워 내기 위하여 때로는 잘했다고 칭찬과 선물을 주는가 하면 때로는 잘못된 길로 나가는 자녀를 위하여 더 깊이 나쁘게 빠지기 전에 경고와 사랑의 매로 다스리듯이 우리들을 다스리심을 믿어야 합니다. 그리고 때로는 아무런 잘못한 것도 없는데도 욥과 같이 고난을 겪게도 하십니다. 다시말해, 더 견고한 신앙과 단련되고 연단된 믿음의 사람으로 빚어 내시기 위하여 억울함을 당하게도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들이 하나님의 섭리와 뜻이 아닌 것이 없습니 다. 그러기에 하나님께서는 범사에 감사하라시는 것입니다.

    하박국 선지도 처음에는 다가올 민족이 당할 시련과 고난을 생각 할 때에 염려와 근심에 떨리며 어찌할 바를 몰랐으나, 곧 그 모든 것이 하나님의 뜻임을 깨달았습니 다.

    불신앙과 불의로 치닫는 백성들에게 하나님께서 징계의 채찍을 가하심으로 회개하 여 모든 불신앙과 우상을 버리고 하나님만 바라는 거룩한 신앙의 사람으로 바꾸어 놓기 위한 하나님의 거룩한 섭리와 뜻임을 깨닫고 믿었을 때에 오히려 감사할 수 있 었던 것입니다.

     범사에 하나님의 뜻임을 믿는 신앙은 곧 하나님을 의뢰하는 것입니다. 무슨 일을 만나도 절대 하나님을 의심치 않고 의지하는 믿음이 하나님의 뜻을 믿는 신앙입니다 무슨 일을 만나도 절대 하나님만 신뢰하였던 믿음의 선배들의 기록이 단3:8-20절 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때는 바벨론이 세계를 제패한 시대였고, 이스라엘은 바벨론에게 억울하게 포로로 잡혀간 때였습니다. 당시 바벨론 왕이었던 느부갓네살 왕은 그 권세가 하늘 높은줄 모르고 치솟고 있을 때였습니다. 그의 교만은 극에 달해 금신상을 세워 예배하게끔 하는데 까지 이르렀습니다. 서릿발 같은 명령을 누가 감히 어길 수 있겠습니까 그 러나 여기에 항거한 세 사람의 믿음의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모두 다니엘의 친 구로서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였습니다. 이들은 살아계신 하나님만 의지하는 진실 한 신앙인들이었습니다. 그러므로 당연히 우상숭배를 거절하였습니다. 이 사실이 느 부갓네살 왕에게 알려지자 왕은 사형에 처하도록 명했습니다. 하나님을 잘 믿으려고 하는 자에게 사형이라니, 참으로 억울하고도 한 맺힐 일입니다. 그러나 이들은 조금 도 불평해 하지 않았습니다. 이들이 하나님을 의지하고 신뢰하는 믿음은 절대적이었 습니다. 어떤 일을 만나더라도 하나님의 뜻이 있음을 이들은 굳게 믿었습니다. 마침 내 형장의 풀무불은 7배나 더 뜨겁도록 만들어졌고, 이들 세 사람은 불 속으로 던져 지기 위하여 밧줄에 꽁꽁 묶였습니다. 이제 다시 느부갓네살 왕은 우상의 신상 앞에 무릎을 꿇고 살아날 수 있는 마지막 기회를 허락합니다.

     (단 3:13-18) 느부갓네살 왕이 노하고 분하여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를 끌어 오라 명하매 드디어 그 사람들을 왕의 앞으로 끌어온지라 느부갓네살이 그들에게 물어 가로되 사드락,메삭,아벳느고야 너희가 내 신을 섬기지 아니하며 내가 세운 그 신상에게 절하지 아니하니 짐짓 그리하였느냐 이제라도 너희가 예비하였다가 언제든지 나팔과 피리와 수금과 삼현금과 양금과 생황과 및 모든 악기 소리를 듣거 든 내가 만든 신상 앞에 엎드리어 절하면 좋거니와 너희가 만일 절하지 아니하면 즉시 너희를 극렬히 타는 풀무 가운데 던져 넣을 것이니 능히 너희를 내 손에서 건 져 낼 신이 어떤 신이겠느냐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가 왕에게 대답하여 가로되 느부갓네살이여 우리가 이 일에 대하여 왕에게 대답할 필요가 없나이다 만일 그럴 것이면 왕이여 우리가 섬기는 우리 하나님이 우리를 극렬히 타는 풀무 가운데서 능히 건져 내시겠고 왕의 손에서도 건져내시리이다 그리 아니하실지라도 왕이여 우 리가 왕의 신들을 섬기지도 아니하고 왕의 세우신 금 신상에게 절하지도 아니할 줄 을 아옵소서!

    전적으로 하나님을 의뢰하다가 죽는 일을 당할지라도 그것마저 하나님의 뜻임을 믿는 신앙이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의 믿음이었습니다. 이것이 그리아니하실지라 도의 믿음이요 감사입니다. 바로 이러한 신앙을 가질 때만이 범사에 감사할 수 있습 니다.

    이러한 담대함은 나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의심치 않는 믿음에서 나옵니다.

     (롬 8:38-39)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수 없으리라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도저히 감사 못할 억울한 일이 있습니까 하나님을 의뢰하 기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사랑, 그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나의 영생을 위하여 내어주신 그 큰 하나님의 사랑을 바라보십시오! 그러면 범사에 감사 할 수 있을 것 입니다. 그리고 그 감사는 마침내 우리의 선 자리를 축복의 자리로 바꾸어 놓을 것 입니다.

     2.하박국 선지의 감사는 환경을 초월한 감사였습니다(17-19)

    본문 (합 3:17-18)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치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식물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나는 여호와를 인하여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을 인하여 기뻐 하리로다고 하였습니다.

    무화과 나무, 포도나무, 감람나무들은 하박국 선지가 살고 있던 그 팔레스틴 지역 에 있어서 가장 유용한 과목들이었습니다(신6:11 욜1:7 미6:15). 그리고 양은 식용( 삼상25:18)과 희생제물로(창4:4출29:19-22레5:14-16) 사용되었고, 소는 농사를 지을 때에 없어서는 안될 짐승이었습니다. 만일 이러한 것들이 없다면 당장 생계가 어려 워지게 될 것입니다. 이럼에도 불구하고 여호와 하나님으로 인하여 감사하는 것이 성도의 하박국 선지의 감사요, 그리아니하실지라도의 감사입니다. 오늘날 성도들의 감사입니다.

    오늘 이 본문을 현대적인 의미로 바꾸어 보면, `사업이 부도로 망하고, 재산을 다 날리고, 직장도 잃고, 마땅한 일자리도 구하지 못하여 처자식이 배고파 할찌라도 감 사하는 것이 그리아니하실지라도의 감사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아니하실지라도'의 감사는 세상도 감당키 어려운 `환경을 초월한 감사'인 것입니다. 그러면 왜 성도들이 최악의 환경 속에서도 감사할 수 있을까요 그것은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고전10:13) 사람이 감당할 시험 밖에는 너희에게 당한 것이 없나 니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치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지 아니하시고 시 험 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고 하셨습니 다.

    그렇습니다! 도무지 감당키 어려운 시험과 고통이라 할지라도 하나님의 뜻과 손길 은 결국, 능히 당하게 하시고 감당하게 하셔서 훨씬 더 나은 축복으로 인도하실 것 이기 때문에 환경을 초월한 믿음으로 그리아니하실지라도의 감사를 드리는 것입니다

    3.하박국 선지의 감사는 결코 절망하지 않는 감사입니다.

     어려운 일 억울한 일을 당할 때, 우리는 쉽게 절망합니다. 그러나 항상 절망은 문 제 해결에 있어서 어려운 일 그 자체 보다도 더 큰 방해가 됩니다. 중국 속담에 `배 가 뒤집히지도 않았는데 물 속으로 투신하려고 한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난관에 부딪쳤을 때에 가장 큰 문제란 난관 그 자체라기 보다, 쉽게 절망해 버리는 것임을 꼬집는 속담입니다.

    하박국 선지는 민족의 앞날에 어두운 먹구름이 기다리고 있었지만 절망하지 않고 먹구름이 비가 되고 뇌성 벽락이 되어 내리고 나면 밝고 맑은 화창해질 그 날을 바 라 보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절망적인 상황에서 오히려 절망 저 건너편의 소망을 바 라보고 감사드렸던 것입니다.

    범사에 감사할 때에 절망 중에서도 희망이 보이는 법입니다. 낙담만 하고 체념만 하고 있으면 아무런 변화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 어려움 앞에서 그리하니 하실지라도의 감사를 하게 될 때에 그 어려움을 극복할 가능성은 열리게 되는 것입 니다.

    성도 여러분! 견디기 어려운 일을 당했습니까 억울한 일을 당했습니까 범사에 감사하십시오! 그러면 하나님께서 가능성을 열어 주실 것입니다. 할렐루야!!

    4.하박국 선지는 찬송과 기도로 감사드렸습니다.

     감사는 감사를 드리고자 하는 대상이 있어야 합니다. 다시말해 감사하는 자는 하나님을 인정할 수 밖에 없어집니다. 그러므로 감사하는 자는 항상 하나님의 존 재와 그분의 은혜 베푸심에 대하여 인정하는 언행을 계속하게 됩니다. 하나님께 범 사에 감사한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항상 우리에게 은혜를 베풀어 주시고 계시다는 것 을 인정하는 것을 전제로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감사하는 자에게는 항상 하나님의 베푸시는 은혜에 대한 찬송이 있고, 앞 으로 더 많은 은혜를 베풀어 주실 것을 간구하는 기도가 따르기 마련입니다.

    믿음으로 드리는 감사 찬송과 기도는 하나님의 축복을 담는 그릇입니다. 지금도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풍성한 생명의 축복을 받기를 원하십니다. 그런데 그 축복은 감사로 드리는 찬송과 기도의 그릇에만 담을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지금 여러분에게 맺힌 한이 있습니까 억울함이 있습니까 하나님의 뜻이 분명히 있음을 믿고 이제부터는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여러분의 운명은 바뀔 것입니 다. 창조적인 삶을 살게 될 것입니다.

    ( 합 3:17-18)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치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 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식물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 지라도 나는 여호와를 인하여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을 인하여 기뻐하리로 다 이와같은 그리 아니하실지라도의 감사를 드리는 축복의 사람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그럴지라도 

    1. [이사야 9:17]
    이 백성이 각기 설만하며 악을 행하며 입으로 망령되이 말하니 그러므로 주께서 그 장정을 기뻐 아니하시며 그 고아와 과부를 긍휼히 여기지 아니하시리라 그럴지라도 여호와의 노가 쉬지 아니하며 그 손이 여전히 펴지리라

    2. [이사야 9:21]
    므낫세는 에브라임을, 에브라임은 므낫세를 먹을 것이요 또 그들이 합하여 유다를 치리라 그럴지라도 여호와의 노가 쉬지 아니하며 그 손이 여전히 펴지리라

    3. [이사야 10:4]
    포로 된 자의 아래에 구푸리며 죽임을 당한 자의 아래에 엎드러질 따름이니라 그럴지라도 여호와의 노가 쉬지 아니하며 그 손이 여전히 펴지리라

    4. [이사야 29:5]
    그럴지라도 네 대적의 무리는 세미한 티끌 같겠고 강포한 자의 무리는 불려 가는 겨 같으리니 그 일이 경각간에 갑자기 이룰 것이라

    5. [예레미야 3:3]
    그러므로 단 비가 그쳐졌고 늦은 비가 없어졌느니라 그럴지라도 네가 창녀의 낯을 가졌으므로 수치를 알지 못하느니라






    9월 18일(목) 다니엘 1-3장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뜻을 정하여(1:8)

    다니엘은 뜻을 정하여 왕의 진미와 그의 마시는 포도주로 자기를 더럽히지 아니하리라 하고 자기를 더럽히지 않게 하기를 환관장에게 구하니.
    But Daniel resolved not to defile himself with the royal food and wine, and he asked the chief official for permission not to defile himself this way.

    다니엘은 왕족들과 귀족들과 더불어 바벨론 1차 포로가 될 때 바벨론 땅으로 끌려갔습니다.
    포로가 된 사람은 그 나라의 법과 제도에 무조건 따라야 합니다.

    그러나 다니엘은 뜻을 정했습니다.

    다니엘의 뜻은 왕실에서 제공하는 각종 음식과 포도주를 마시지 않겠다고 다짐한 것입니다. 
    포로의 몸으로 좋은 음식과 좋은 음료를 제공받는다는 것은 그만큼 특별 대우를 받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포로가 특별 대우를 받을지라도 특별 대우를 따르지 않으려는 것은 몸을 더럽힐 수 없다는 생각과 믿음 때문이었다고 합니다.
    다니엘은 이러한 믿음의 사람이었습니다.

     



    뜻을 정한 사람을 도우시는 하나님(다니엘 1:8-16)


    하나님은 기도하는 사람의 하나님이십니다. 
    기도는 하나님의 일하시는 원리입니다. 
    기도는 하나님의 법칙입니다. 
    기도하는 손처럼 긴 손은 없습니다. 
    기도는 일평생 동안 배워야 합니다. 
    다니엘이 기도의 손을 들었을 때 그 손은 하나님의 보좌에 이르렀습니다. 
    그가 기도의 손을 들면 하늘의 보좌가 움직였고, 하나님이 명하신 천사들이 바쁘게 움직였습니다. 
    그가 기도할 때마다 하나님께서 천사들을 동원해 주셨습니다. 
    그가 기도할 때 하나님의 천사가 사자 굴에서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가 기도할 때 천사 가브리엘이 기도 응답을 가지고 그에게 찾아왔습니다. 
    그의 기도 응답을 돕기 위해 하나님은 천사 미가엘을 보내셔서 사탄의 세력을 물리쳐 주셨습니다. 
    다니엘은 기도를 생명처럼 여겼습니다. 
    아니, 기도를 생명보다 귀하게 여겼습니다. 
    그는 기도하면서 사자 굴에 던져져 죽임을 당하는 것을 알고도, 전에 행하던 대로 기도했습니다.

    단 6:10절, “다니엘이 이 조서에 왕의 도장이 찍힌 것을 알고도 자기 집에 돌아가서는 윗방에 올라가 예루살렘으로 향한 창문을 열고 전에 하던 대로 하루 세 번씩 무릎을 꿇고 기도하며 그의 하나님께 감사하였더라.” 다니엘의 기도는 거룩한 습관이었습니다. 그는 하루에 세 번씩 일평생 기도했습니다. 그의 기도의 자세는 하나님 앞에서 무릎을 꿇는 겸손한 자세였습니다. 그의 기도하는 자세가 그의 성품과 인격을 보여 줍니다. 그는 감사며 기도했습니다. 죽을 것을 알고도 감사 기도를 드렸습니다. 그의 기도는 감사의 기도였고, 그의 감사 기도는 기적을 창조했습니다.

    다니엘에게 위기와 유혹이 찾아왔습니다. 그러나 기도의 사람은 위기에서 뜻을 정하는 사람입니다. 성령 충만한 기도는 위기를 초월하는 인물로 만듭니다.

    저는 어려운 상황을 이겨낸 사람에 대한 관심이 많습니다. 어려운 상황을 초월해서 비상하는 삶을 살았던 인물은 우리에게 영감을 줍니다. 위인이란 위기를 수없이 극복하고 승리했던 사람을 가리킵니다. 성경에 나오는 인물 가운데 다니엘은 위기를 수없이 통과한 사람입니다. 그가 포로가 되어 바벨론으로 끌려간 자체가 그가 직면했던 큰 위기였습니다. 그런데 다니엘은 포로의 신분에서 바벨론의 재상이 되어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습니다. 그는 독수리처럼 비상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독수리는 태풍이 오면 그 바람을 이용하여 더 높이 날아오른다고 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더욱 관심을 가져야 할 분은 다니엘의 하나님이십니다. 포로로 끌려갔던 다니엘을 비상하게 만드셨던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다니엘의 인물 연구는 다니엘에게만 집중해서는 안 됩니다. 다니엘의 하나님, 우리 하나님에게 집중해야 합니다. 다니엘을 다니엘이 되도록 도와주셨던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동시에 우리는 왜 하나님이 다니엘을 그토록 사랑하셨고, 큰 은총을 베푸셨는지도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우리는 다니엘을 통해 그가 하나님의 특별한 사랑을 받고, 승리하는 삶을 살았던 비밀을 발견할 수 있어야합니다.

    다니엘의 삶의 비밀을 압축한 단어로 묘사한다면 말씀 충만, 성령 충만, 그리고 기도 충만입니다. 그 핵심에 성령 충만이 있습니다. 다니엘의 세친구도 훌륭했습니다. 그들도 말씀을 따라서 살았습니다. 기도의 삶을 살았습니다. 그런데 그들 안에는 성령님이 충만하게 거하신 기록이 없습니다. 이렇듯 다니엘과 세 친구의 차이를 만들어 낸 것은 성령 충만이었습니다.

    다니엘은 바벨론 포로로 끌려갔습니다. 그는 모든 어려운 상황을 초월한 인물입니다. 모든 장애물을 뛰어넘어 비상하는 삶을 살았던 인물입니다. 그는 죽음의 고비를 여러 번 넘깁니다. 고난의 능선을 넘어 넘습니다. 수많은 위기에 직면했지만, 그 모든 위기를 기회로 만들 수 있었습니다. 그 비밀이 성령 충만에 있었습니다. 놀라운 사실은 성령 충만을 받았다는 사실을 자신도 알았지만 그가 섬겼던 왕들도 알아보았다는 것입니다.

    우선 다니엘이 성령 충만했다는 사실을 보여 주는 말씀에 주목해야 합니다. 다음의 말씀들 속에서 강조되는 것은 다니엘 안에 거룩한 신들의 영이 있다는 것입니다.

    먼저 느부갓네살 왕이 다니엘 안에 성령님이 거하고 계심을 알았습니다.

    단4:18절, “나 느부갓네살 왕이 이 꿈을 꾸었나니 너 벨드사살아 그 해석을 밝히 말하라 내 나라 모든 지혜자가 능히 내게 그 해석을 알게 하지 못하였으나 오직 너는 능히 하리니 이는 거룩한 신들의 영이 네 안에 있음이라.”

    둘째, 벨사살 왕의 왕비가 다니엘 안에 성령님이 거하고 계심을 알았습니다. 단5:11-12절, “왕의 나라에 거룩한 신들의 영이 있는 사람이 있으니 곧 왕의 부친 때에 있던 자로서 명철과 총명과 지혜가 신들의 지혜와 같은 자니이다 왕의 부친 느부갓네살 왕이 그를 세워 박수와 술객과 갈대아 술사와 점쟁이의 어른을 삼으셨으니 /왕이 벨드사살이라 이름하는 이 다니엘은 마음이 민첩하고 지식과 총명이 있어 능히 꿈을 해석하며 은밀한 말을 밝히며 의문을 풀 수 있었나이다 이제 다니엘을 부르소서 그리하시면 그가 그 해석을 알려 드리리이다 하니라.”

    셋째, 벨사살 왕이 다니엘 안에 성령님이 계심을 알았습니다. 단5:14절, “내가 네게 대하여 들은즉 네 안에는 신들의 영이 있으므로 네가 명철과 총명과 비상한 지혜가 있다 하도다.”

    이처럼 다니엘이 소유했던 명철과 총명과 비상한 지혜가 바로 신들의 영이신 성령님께로부터 왔던 것입니다. 우리는 성령 충만한 삶을 살았던 다니엘을 공부하면서 그 삶의 비밀을 배워야 합니다. 그는 어떻게 포로에서 바벨론 나라의 제 2인자가 되었으며, 정권이 여러 번 바뀌었지만, 어떻게 형통한 삶을 살 수 있었을까요? 다니엘이 어떻게 우상숭배를 하는 바벨론에서 하나님을 신뢰하는 신앙을 지킬 수 있었을까요? 하나님이 수많은 포로 가운데 다니엘에게 큰 은총을 베푸신 까닭은 무엇일까요? 우리는 그 비밀을 다니엘서를 보면서 함께 살펴볼 것입니다.

    기도의 사람 다니엘에게도 위기와 유혹이 찾아왔습니다. 그러나 기도의 사람은 위기에서 뜻을 정하는 사람입니다. 성령 충만한 기도는 위기를 초월하는 인물로 만듭니다. 다니엘의 삶의 비밀을 압축한 단어로 묘사한다면 말씀 충만, 성령 충만, 그리고 기도 충만입니다. 그 핵심에 성령 충만이 있습니다. 다니엘의 세친구도 훌륭했습니다. 그들도 말씀을 따라서 살았습니다. 기도의 삶을 살았습니다. 그런데 그들 안에는 성령님이 충만하게 거하신 기록이 없습니다. 이렇듯 다니엘과 세 친구의 차이를 만들어 낸 것은 성령 충만이었습니다.

    다니엘의 성령충만은 느브갓네살 왕이 잘 알고 있었습니다. 또한 시대가 바뀌었는데도 벨사살 왕의 왕비가 알고 있었으며, 벨사살 왕도 다니엘의 성령충만을 알고 있었습니다. 우리는 성령 충만한 삶을 살았던 다니엘을 공부하면서 그 삶의 비밀을 배워야 합니다. 그는 어떻게 포로에서 바벨론 나라의 제 2인자가 되었으며, 정권이 여러 번 바뀌었지만 어떻게 형통한 삶을 살 수 있었을까요? 다니엘이 어떻게 우상숭배를 하는 바벨론에서 하나님을 신뢰하는 신앙을 지킬 수 있었을까요? 하나님이 수많은 포로 가운데 다니엘에게 큰 은총을 베푸신 까닭은 무엇일까요? 우리는 그 비밀을 다니엘서를 보면서 함께 살펴볼 것입니다.

    하나님은 뜻을 정한 사람을 도우십니다.

    다니엘 1장에서 가장 강력하게 눈에 띄는 다니엘의 삶의 비밀은 뜻을 정한 삶을 살았다는 것입니다. 
    그는 왕이 제공해 주는 음식과 포도주로 자기를 더럽히지 않기로 뜻을 정했습니다. 
    오늘 본문 8절을 보십시오. 
    “다니엘은 뜻을 정하여 왕의 음식과 그가 마시는 포도주로 자기를 더럽히지 아니하리라 하고 자기를 더럽히지 아니하도록 환관장에게 구하니” 다니엘은 뜻을 정했습니다. 

    입지(立志) 즉 뜻을 세운 것입니다
    그리고 뜻을 이루어 갔습니다. 
    그가 처한 상황을 이해하면 그가 뜻을 정한 삶을 살았다는 것이 얼마나 놀라운 일인가를 알게 됩니다. 
    다니엘은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간 청년입니다. 
    그의 이야기는 유다의 멸망으로부터 시작됩니다.

    단1:1-2절을 볼까요? 
    “유다 왕 여호야김이 다스린 지 삼 년이 되는 해에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이 예루살렘에 이르러 성을 에워쌌더니 /주께서 유다 왕 여호야김과 하나님의 전 그릇 얼마를 그의 손에 넘기시매 그가 그것을 가지고 시날 땅 자기 신들의 신전에 가져다가 그 신들의 보물 창고에 두었더라.” 다니엘이 청년을 성장할 당시 바벨론이라는 나라는 세계를 재패하고 강하게 일어섰습니다. 그리고 유다를 침략하여 멸망을 시킵니다. 또한 성전에 있는 그릇을 가져다가 신들의 보물 창고에 둡니다. 바벨론은 어느 나라를 정복하면 그 나라의 우상 신을 가져다가 신들의 보물창고에 두었습니다. 우상을 섬기는 나라인 바벨론은 침략한 나라의 우상을 보물로 여긴 것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우상을 섬기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우상이 아니십니다. 그래서 성전에 있는 그릇을 가져다가 신들의 보물 창고에 둔 것입니다.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은 유다를 정복한 다음에 청년들 가운데 인재들을 포로로 데려 갑니다. 
    그는 인재의 소중함을 알았던 왕입니다. 
    왕족이나 귀족 가운데 인재가 될 만한 인물을 포로로 데려다가 교육을 시켜서 그들을 등용하는 정책을 폈습니다. 
    3-5절을 읽어볼까요? 
    “왕이 환관장 아스부나스에게 말하여 이스라엘 자손 중에서 왕족과 귀족 몇 사람 /곧 흠이 없고 용모가 아름다우며 모든 지혜를 통찰하며 지식에 통달하며 학문에 익숙하여 왕궁에 설 만한 소년을 데려오게 하였고 그들에게 갈대아 사람의 학문과 언어를 가르치게 하였고 /또 왕이 지정하여 그들에게 왕의 음식과 그가 마시는 포도주에서 날마다 쓸 것을 주어 삼 년을 기르게 하였으니 그 후에 그들은 왕 앞에 서게 될 것이더라.”

    느부갓네살 왕은 이방 왕이지만 인재를 귀히 여겼던 사람입니다. 
    또한 교육의 중요성을 알았던 인물입니다. 
    그는 인재를 키우는데 자원을 투자하고, 시간을 투자했습니다. 3년 동안 교육을 시킨 다음 그들 가운데서 인재를 골라 사용하려고 했던 것입니다. 조금 더 엄밀히 말하면 바벨론 은 앗수르와 다른 정책을 펼쳤습니다. 그런데 앗수르 제국은 민족 혈통 혼혈 정책을 펼쳤습니다. 그런데 앗수르 제국이 망하자 새로운 제국 바벨론은 패망한 앗수르가 실행했던 정책과는 다른 정책을 선택합니다.

    바벨론의 정책은 정복한 각 나라에서 뛰어난 청년들을 데려다가 먼저 바벨론식 교육을 시키는 것이었습니다. 바벨론 사람으로 교화시킨 것입니다. 그 후에 그들은 정복지로 돌려보내 바벨론 제국의 2등 민족화를 이끌 지도자로 세우려했던 것입니다. 결국 바벨론의 모든 속국들을 영원히 바벨론 제국 아래 두겠다는 정책이었습니다. 성경은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온 청년들 가운데 네 명의 청년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6-7절을 보십시오. “그들 가운데는 유다 자손 곧 다니엘과 하나냐와 미사엘과 아사랴가 있었더니 /환관장이 그들의 이름을 고쳐 다니엘은 벨드사살이라 하고 하나냐는 사드락이라 하고 미사엘은 메삭이라 하고 아사랴는 아벳느고라 하였더라.”

    느부갓네살 왕이 포로들에게 가장 먼저 한 일은 그들의 이름을 바벨론 식으로 바꾼 것입니다. 사실 다니엘과 그의 세 친구 하나냐와 미사엘과 아사랴의 이름 속에는 하나님을 믿는 신앙이 담겨 있었습니다. 그들의 이름은 하나님 중심적인 이름입니다. 다니엘은 “하나님은 나의 심판관이시다.” 하나냐는 “야훼는 은혜로우시다.” 미사엘은 “하나님은 누구신가?” 아사랴는 “야훼는 돕는 자시다.” 라는 뜻을 갖고 있습니다.

    그런 신앙적인 의미를 가진 이름을 바벨론 말로 개명한 것입니다. 개명한 이름 속에는 바벨론의우상 신들의 이름이 담겨 있습니다. 다니엘의 이름을 벨드사살로 고쳤는데, 그 뜻은 ‘벨이여! 왕을 보호하소서.’입니다. 벨은 바벨론 신의 봉사자와 예배자를 뜻하는 이름입니다. 하나냐는 사드락, 즉 ‘바벨론의 신 아쿠의 명령’이라는 뜻의 이름으로 개명되었습니다. 미사엘은 메삭으로 바뀌었는데, ‘바벨론의 땅의 여신 아쿠와 같다.’는 의미입니다. 아사랴는 아벳느고로 바뀌었고, ‘바벨론의 신 느고의 종이다.’ 라는 의미를 갖습니다.

    왕의 환관장이 그들의 이름을 개명했지만 그들의 신앙은 바꿀 수가 없었습니다. 다니엘과 세 친구는 뜻을 정하여 거룩한 삶을 살기로 결정했습니다. 그렇다면 다니엘이 뜻을 정했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첫째, 다니엘은 말씀을 따라 살기로 뜻을 정했습니다.

    다니엘이 뜻을 정해서 왕의 음식과 그가 마시는 포도주로 자기를 더럽히지 않기로 결단했습니다. 왜 왕의 음식과 포도주를 마시지 않으려고 했을까요? 그 이유는 왕이 제공해 주는음식은 우상에게 바친 고기였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우상에게 바친 고기를 삼갔습니다. 특별히 돼지고기는 먹지 않았습니다. 신약에서도 고리도 전서를 보면 우상에게 바친 제물을 먹는 문제가 심각한 이슈가 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구약성경은 하나님이부정하다고 말씀하신 고기나 음식을 먹으면 부정하게 된다고 가르쳤습니다.

    성별된 것을 먹는 것과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습니다. 아담과 하와도 선악과를 따먹음으로 저주를 받았습니다. 그들은 생명나무 대신에 선악과를 따먹음으로써 비극적인 결과를 초래했습니다. 우리가 먹는 것이 우리를 만들어 간다는 사실을 아십니까? 우리가 먹는 것이 우리가 누구인가를 말해 줍니다. 우리가 먹는 것이 우리를 거룩하게 하기도 하고 더럽히기도 합니다.

    예수님은 생명의 떡으로 오셨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통해서 하나님의 생명을 받았습니다. 그런 까닭에 생명의 떡이신 예수님을 먹고 생명의 말씀을 먹는 것입니다. 영적으로나 정서적으로 우리가 읽는 것을 먹는 것으로 비유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읽는 것이 우리를 만들어 갑니다.” 그런 면에서 우리가 어떤 책을 가까이하느냐는 매우 중요합니다. 우리가 먹는 음식이 우리의 몸을 만들어 간다면 우리가 읽는 책이 우리의 정신을 만듭니다. 우리가 영혼에 영향을 끼치는 것입니다.

    다니엘과 세 친구는 비록 바벨론 땅에 포로로 끌려 왔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살기로 뜻을 정했습니다. 왜 다니엘과 세 친구가 포도주를 삼갔을 까요? 포도주가 그들을 무디게 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포도주에 탐닉하게 되면 판단력이 흐려지고, 훨씬 더 쉽게 유혹에 빠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호4:11절은 말씀합니다. “음행과 묵은 포도주와 새 포도주가 마음을 빼앗느니라.” 잠언20:1절에서는 “포도주는 거만하게 하는것이요 독주는 떠들게 하는 것이라. 이에 미혹되는 자마다 지혜가 없느니라.”

    다니엘은 지혜와 총명이 탁월했습니다. 그는 숱한 지혜를 흐리게 만들고, 총기를 무디게 만드는 것임을 알았습니다. 그는 우상의 제물을 먹지 않고 포도주를 마시 않는 대신에 생명의 떡인 하나님의 말씀을 먹었습니다. 성령님의 생수를 포도주 대신 마심으로써 성별된 삶을 산 것입니다.

    둘째, 하나님을 전적으로 섬기고 의지하기로 뜻을 정했습니다.

    다니엘과 세 친구가 왕이 내려 주는 진미와 포도주를 거부한다는 것은 위험한 일이었습니다. 목숨을 잃을 수도 있는 일이었습니다. 그렇지만 그들은 하나님을 전적으로 섬기고 의지하기로 뜻을 정했습니다. 그들은 바벨론에 살면서 바벨론 왕을 섬겨야 했습니다. 물론 그들은 바벨론에 살면서 바벨론 왕을 섬겨야 했습니다. 물론 그들은 최선을 다해 왕을 섬겼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이 땅의 왕보다 더 위대하신 왕을 섬기고 의지하기로 뜻을 정했습니다. 그 왕은 역사를 주관하시고 열방을 통치하시는 하나님이었습니다. 섬긴다는 것은 예배하는 것입니다. 그들은 바벨론 왕이 숭배하는 우상을 숭배하지 않기로 뜻을 정했습니다. 오직 하나님만 예배하기로 뜻을 정했습니다.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지하며 사는 삶은 모험입니다. 또한 자신들뿐만 아니라 환관장까지도 위험에 처하게 할 수 있는 일이었습니다. 10절을 보십시오. “환관장이 다니엘에게 이르되 내가 내 주 왕을 두려워하노라 그가 너희 먹을 것과 너희 마실 것을 지정하셨거늘 너희의 얼굴이 초췌하여 같은 또래의 소년들만 못한 것을 그가 보게 할 것이 무엇이냐 그렇게 되면 너희 때문에 내 머리가 왕 앞에서 위태롭게 되리라 하니라.”

    다니엘은 이 모든 상황을 알고도 말씀을 의지하고,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지하기로 뜻을 정했습니다. 우리는 다니엘서 전체를 읽으면서 그들이 뜻을 정한 후 그 뜻을 끝까지 지켰음을 보게 됩니다. 특별히 다니엘3장을 보면 느부갓네살이 금신상을 세우고, 그 신상에 절하지 않으면 풀무 불에 던져 넣기로 작정한 내용이 나옵니다. 그런 상황에서도 사드락 메삭과 아벳느고는 금신상에 절하지 않았습니다. 왕의 명령보다 하늘의 왕이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한 것입니다. 우상에게 절하지 않고 하나님을 경배하기로 결정한 것입니다. 마침내 하나님께서는 느부갓네살의 명령을 거역하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한 그들을 풀무 불 가운데서 건져 주십니다. 그 놀라운 광경을 지켜보았던 느부갓네살이 그들의 신앙을 다음과 같이 증언합니다.

    3:28절을 보십시오. “느부갓네살이 말하여 이르되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의 하나님을 찬송할지로다 그가 그의 천사를 보내사 자기를 의뢰하고 그들의 몸을 바쳐 왕의 명령을 거역하고 그 하나님 밖에는 다른 신을 섬기지 아니하며 그에게 절하지 아니한 종들을 구원하셨도다.” 다니엘 6장에서 다리오 왕은 그를 사자 굴에 던져 넣습니다. 그러면서 아주 놀라운 말을 합니다. 그 놀라운 말은 다니엘의 신앙을 대변해 주는 말입니다.

    단6:16절을 보십시오. “이에 왕이 명령하매 다니엘을 끌어다가 사자 굴에 던져 넣는지라 왕이 다니엘에게 이르되 네가 항상 섬기는 너의 하나님이 너를 구원하시리라 하니라.” 하룻밤이 지난 후에 다리오 왕이 사자 굴에 던져진 다니엘을 찾아와서 소리 질러 그에게 묻습니다. 6:20절을 보십시오. “다니엘이 든 굴에 가까이 이르러서 슬피 소리 질러 다니엘에게 묻되 살아 계시는 하나님의 종 다니엘아 네가 항상 섬기는 네 하나님이 사자들에게서 능히 너를 구원하셨느냐 하니라.”

    다니엘의 신앙은 초지일관의 신앙입니다. 초지일관이란 처음에 먹은 마음을 끝까지 밀고 나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다니엘은 하나님을 항상 섬기고 의지했습니다.

    셋째, 기도하며 살기로 정했습니다.

    다니엘은 기도의 사람이었습니다. 다니엘의 세 친구도 기도의 사람이었습니다. 다니엘 2장에서 다니엘이 어려운 일을 만났을 때 세 친구에게 기도를 부탁합니다. 단2:17-18절을 보십시오. “이에 다니엘이 자기 집으로 돌아가서 그 친구 하나냐와 미사엘과 아사랴에게 그 일을 알리고 /하늘에 계신 하나님이 이 은밀한 일에 대하여 불쌍히 여기사 다니엘과 친구들이 바벨론의 다른 지혜자들과 함께 죽임을 당하지 않게 하시기를 그들로 하여금 구하게 하니라.” 다니엘은 중보기도의 능력을 알았던 사람입니다. 우리가 다니엘과 세 친구를 통해 반복해서 배울 수 있는 것은 일고나성입니다. 아주 중요한 것에 뜻을 정한 다음에 그 뜻을 끝까지 지켜 나가는 것입니다. 또한 우리는 다니엘에게서 거룩한 습관을 배웁니다. 그것은 기도하는 습관입니다.

    다시 단6:10절을 보십시오. “다니엘이 이 조서에 왕의 도장이 찍힌 것을 알고도 자기 집에 돌아가서는 윗방에 올라가 예루살렘으로 향한 창문을 열고 전에 하던 대로 하루 세 번씩 무릎을 꿇고 기도하며 그의 하나님께 감사하였더라.”

    그는 하루 세 번 씩 무릎을 꿇고 기도했습니다. 그의 인생에 위기가 찾아왔습니다. 그것도 기도하면 죽임을 당하는 위기가 찾아왔습니다. 그런데 그때에도 다니엘은 전에 행하던 대로 세 번씩 기도를 했습니다. 기도란 무엇입니까?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의탁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뜻을 정한 사람을 도우십니다. 하나님은 뜻을 정한 사람과 더불어 일하십니다. 하나님은 뜻을 정한 사람을 통해 영광을 받으십니다. 그렇습니다. “뜻을 정하는 것은 뜻을 세우고 성취한다는 것입니다.” “뜻을 정한다는 것은 한 방향을 선택하고 다른 방향을 포기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뜻을 정한다는 것은 집중하고 지속하는 목표를 정했다는 것입니다. “뜻을 정한난 것은 상황에 따라 살지 않고 말씀을 따라 살기로 결정한 것입니다.”

    많은 사람이 뜻을 정하지 않은 채 살고 있습니다. 뜻을 정하지 않고 삶은 표류하는 삶입니다. 방황하는 삶입니다. 방황하는 삶입니다. 반면에 뜻을 정한 인생은 방향이 분명하고 목표가 분명하고, 목표가 분명하기 때문에 놀라운 열매를 맺게 됩니다. “풍성한 열매는 집중과 지속의 결과입니다.” 뜻을 정하십시오. 우리가 뜻을 정하지 않으면 뜻을 정한 사람들에 의해 끌려 다니게 됩니다. 우리가 우리 삶의 주인이 되지 않으면 다른 사람이 우리의 주인이 되어 우리를 끌고 다닐 것입니다. 존 애킨슨은 “당신이 자기 삶의 주인이 되지 않으면 다른 사람이 주인이 된다.” 고 말했습니다. 우리가 뜻을 정하지 않으면 다른 사람이 정해 준 뜻을 따라 살게 됩니다. 그것은 우리 인생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인생을 살아가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는 뜻을 정할 때 우리 마음대로 정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해서 뜻을 정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말씀을 통해 하나님의 뜻을 보여 주시지만 우리를 대신해서 뜻을 정한 다는 것은 선택한다는 것입니다. 결단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공급해 주시지만 하나님이 우리를 대신해서 뜻을 정해 주시거나 결단해 주시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자원해서 주도적으로 뜻을 정한 삶을 살기를 원하십니다. 우리가 뜻을 정한다는 것은 우리가 우리 삶의 주인이라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존 애킨슨의 말은 한편으로 일리가 있지만 위험한 말입니다.

    다니엘은 스스로 삶의 주인이 되지 않았습니다. 다니엘은 하나님을 자신의 삶의 주인으로 삼았습니다. 중간 지대는 없습니다. 하나님을 우리의 주인으로 모시지 않으면 마귀가 주인 행세를 하려 들 것입니다. 가장 안전하고, 가장 풍성한 삶은 하나님을 주인으로 모신 삶입니다.

    사람을 하나님처럼 의지하거나 상황에 따라 살면 수치를 당하게 됩니다. 반면에 오직 하나님을 의지하고, 말씀을 따라 살면 결코 수치를 당하지 않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믿는 자는 결코 수치를 당하지 않으리라.”고 약속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뜻을 정한 사람의 길을 열어 주십니다.

    다니엘이 뜻을 정했을 때 하나님께서 환관장의 마음을 움직여서 그에게 은혜와 긍휼을 얻게 하십니다. 9절을 보겠습니다. “하나님이 다니엘로 하여금 환관장에게 은혜와 긍휼을 얻게 하신지라.” 다니엘과 세 친구가 뜻을 정하고 왕이 주는 진미와 포도주 대신에 채식을 먹기로 했을 때 하나님은 그들의 얼굴을 다른 소년들보다 윤택하게 해 주신 것을 볼 수 있습니다. 11-16절을 다시 볼까요? “환관장이 다니엘과 하나냐와 미사엘과 아사랴를 감독하게 한 자에게 다니엘이 말하되 /청하오니 당신의 종들을 열흘 동안 시험하여 채식을 주어 먹게 하고 물을 주어 마시게 한 후에 /당신 앞에서 우리의 얼굴과 왕의 음식을 먹는 소년들의 얼굴을 비교하여 보아서 당신이 보는 대로 종들에게 행하소서 하매 /그가 그들의 말을 따라 열흘 동안 시험하더니 /열흘 후에 그들의 얼굴이 더욱 아름답고 살이 더욱 윤택하여 왕의 음식을 먹는 다른 소년들보다 더 좋아 보인지라 /그리하여 감독하는 자가 그들에게 지정된 음식과 마실 포도주를 제하고 채식을 주니라.”

    우리는 위기에 처하면 앞이 잘 보이지 않습니다. 길이 잘 보이지 않습니다. 믿음을 선택하고 하나님을 의지하기로 선택할 때 그 결과를 당장 예측할 수 있으면 좋지만 그렇지 않을 때가 많습니다. 풀무불에 던져지고, 사자 굴에 던져지는 순간에도 하나님을 의지하고, 뜻을 정한대로 산다는 것은 굉장한 모험입니다. 그렇지만 그런 환경 속에서도 정한 뜻을 굽히지 않고 하나님을 의지하며 살아가면 놀라운 경험을 하게 됩니다. 우리가 할 일은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지하는 것입니다.

    시37:5-6절을 볼까요? “네 길을 여호와께 맡기라 그를 의지하면 그가 이루시고 /네 의를 빛 같이 나타내시며 네 공의를 정오의 빛 같이 하시리로다.” 상황이 힘들어 보인다고 자포자기하지 마십시오. 어떤 상황에서도 올바로 선택하고 결단하고 무엇인가 시도하면 길이 열리게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은 가만히 있는 자에게는 길을 열어 주시지 않습니다. 믿음으로 홍해 바다를 향해 거어 들어 갈 때 길이열립니다. 요단강도 마찬가지입니다. 시도하지 않으면 성공도 없습니다. 아무것도 결정하거나 선택하지 않으면 시간만 지나갑니다. 어떤 일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뜻을 정하지 않고 미루는 것도 어떤 면에서 뜻을 정하기로 선택한 것입니다. 선택하지 않는 것도 선택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길을 열어 주시지만, 길을 선택하고 뜻을 정하고 결정하는 것은 우리 자신입니다. 다니엘과 세 친구는 자신들에게 열흘 동안 채식을 주어 시험해 보라고 부탁했습니다. 모험하고 시도할 때, 이전에 전혀 경험하지 못했던 경험들을 하게 됩니다. 하나님이 길을 열어 주시는 것을 경험하게 됩니다. 새롭게 뜻을 정하십시오. 새로운 일을 시도하십시오. 성경을 읽으십시오. 기도를 하십시오. 전도하십시오. 책을 읽으십시오. 아이디어를 실험해 보십시오. 사람들을 찾아가서 구하십시오. 실패를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아무 것도 하지 않는 것이 가장 큰 실패입니다.


    다니엘의 뜻을 정한 신앙(단 1:8-21)

    르호봇
    8~11분

    다니엘과 세 친구는 바벨론에 끌려 와서 이름을 바꾸어야 했습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이름에서 우상을 섬기는 이름으로 바꾸어야 합니다. 나라를 잃은 슬픔이며 서러움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을 유다 백성이 버렸기 때문에 하나님은 유다 백성을 바벨론에 끌려오게 하셔서 신앙을 새롭게 하려고 합니다. 단단한 신앙으로 바꾸어가고 있습니다. 환난과 핍박을 통해서 여호와의 신앙으로 바뀌게 됩니다. 다니엘과 세 친구는 고기를 먹으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이것은 우상에게 드렸던 음식이었기 때문입니다. 다니엘과 세 친구는 신앙의 정조를 지키려고 자신들을 시험에 보라고 했습니다.

    바벨론으로 끌려와 노예의 삶을 사는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을 섬기는데 제약을 받게 됩니다. 사탄은 이렇게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을 섬기지 못하도록 방해를 하고 억압을 합니다. 그러나 다니엘과 세 친구들은 하나님께 뜻을 정하여 신앙을 지켜나갑니다. 쉽지 않은 행동이지만 그들의 마음에는 하나님을 섬기는 믿음으로 가득 차 있기 때문에 육신의 고통은 두려워하지 않는 것입니다. 다니엘과 세친구의 신앙의 절개를 통해 우리의 믿음을 돌아보아야 합니다.

    8절 바야셈 다니엘 알 리보 아쎄르 로 이트가알 비파트바그 하멜렉크 우베예인 미쉐타이브 바예바케쉬 미사르 하사리심 아쎄르 로 이트가알

    (단 1:8) 다니엘은 뜻을 정하여 왕의 음식과 그가 마시는 포도주로 자기를 더럽히지 아니하리라 하고 자기를 더럽히지 아니하도록 환관장에게 구하니

    사탄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먹는 음식을 먹지 못하게 하고 부정한 음식을 먹을 것을 권했습니다. 이것이 정한 백성들을 타락시키는 방법이기 때문입니다. 부정한 음식을 먹으면 하나님께 부정한 자가 되어 하나님과 멀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다니엘은 먹는 음식을 거부했습니다. 바벨론 왕이 먹는 음식과 포도주를 거부했던 것입니다. 이것으로 자신을 더럽힐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다니엘이 정한 신앙의 절개입니다.

    ‘뜻을’이라는 단어는 (레브 3820) 마음, 심중, 정신, 의지, 라는 뜻입니다. 다니엘이 뜻을 정한 것은 마음을 지켰다는 것입니다. 마음속에 하나님을 향한 은혜를 알았고 부정한 음식을 먹으면 하나님께서 기뻐하지 않는 것을 깨달았으며 이미 다니엘의 정신 속에 주를 섬기는 마음이 있고 사랑하는 마음과 주님께 영광 돌리는 마음이 다니엘은 있었던 것입니다.

    ‘정하여’라는 단어는 (숨 7760 CW.VQIMZS 와우접속사 동사 칼(능동태) 미완료 남성 3인칭 단수) 정하다, 임명하다, 확립하다, 라는 뜻입니다. 다니엘은 왕의 명령이 떨어지고 나서 즉시로 자신의 마음을 정한 것입니다. 확실히 정립하여 바벨론 왕이 먹는 음식을 먹지 않겠다고 다짐한 것입니다. 이것은 마음 깊은 곳에서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다른 사람들은 먹는다 하더라도 자신만큼은 절대 먹지 않겠다고 결심하는 것입니다. 나의 믿음과 신앙이 이렇게 마음에 확실한 결단이 있어야 합니다.

    ‘자기를 더럽히지’라는 단어는 (가알 1351 VTIMZS 동사 히트파엘(강조재귀) 미완료 남성 3인칭 단수) 더럽다, 더럽히다, 부정하게 여기다, 라는 뜻입니다. 다니엘은 자신을 하나님 앞에서 더럽히지 않으려고 산해진미를 거부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세상의 음식을 좋아하여 먹음으로 부정해지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음식을 먹으면 하나님이 기뻐하지 않기 때문에 포도주도 먹지 않고 기름진 고기도 먹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이런 모든 것들이 이미 우상에게 드려진 음식이기 때문입니다. 바벨론은 많은 신전이 있고 우상의 제단이 많았던 곳입니다. 우상에게 드려지는 음식들을 자신은 먹을 수 없고 하나님이 정해주신 음식만 먹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신앙의 절개입니다.

    ‘환관장에게 구하니’에서 ‘구하니’라는 단어는 (바카쉬 1245 CW.VPIMZS 와우접속사 동사 피엘(강조능동) 미완료 남성 3인칭 단수) 찾다, 요구하다, 원하다, 라는 뜻입니다. 다니엘은 자신을 더럽히지 않기 위해서 환관장에게 간절히 요청하고 있습니다. 절대 이 음식을 먹지 않겠다고 다짐하면서 자신의 목숨을 담보로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왕의 명령이 떨어지자마자 즉시로 다니엘은 행동에 옮겼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세상의 음식을 먹어도 자신은 절대 먹지 않겠다는 것을 말합니다. 나도 하나님이 기뻐하지 않는 음식을 먹어서는 안 됩니다. 술과 담배 같은 이런 것을 먹고 피우므로 거룩하지 못한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육신적으로는 건강에 좋은 것을 골라먹으면서 내 영혼이 살찌우는 이런 복음의 말씀은 먹지 않습니다. 부정한 비 복음을 먹음으로 죽게 됩니다. 이제 나는 결단하여 거룩한 하나님의 음식을 영육으로 먹어야 할 것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9절 바이텐 하엘로힘 에트 다니엘 레헤세드 우레다하밈 리페네 사르 하사리심

     

    10절 바요메르 사르 하사리심 레다니엘 야레 아니 에트 아도니 하멜렉크 아쎄르 미나 에트 마아칼르켐 베에트 미쉐테켐 아쎄르 라마 이르에 에트 페네켐 조아핌 민 하옐라딤 아쎄르 케길르켐 베히야브템 에트 로쉬 라멜렉크

    (단 1:9-10) 하나님이 다니엘로 하여금 환관장에게 은혜와 긍휼을 얻게 하신지라 환관장이 다니엘에게 이르되 내가 내 주 왕을 두려워하노라 그가 너희 먹을 것과 너희 마실 것을 지정하셨거늘 너희의 얼굴이 초췌하여 같은 또래의 소년들만 못한 것을 그가 보게 할 것이 무엇이냐 그렇게 되면 너희 때문에 내 머리가 왕 앞에서 위태롭게 되리라 하니라

    하나님께서는 다니엘의 마음을 알았습니다. 부정해지지 않기 위해서 노력하는 마음을 아시고 환관장으로부터 은혜와 긍휼을 얻게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즉시로 다니엘에게 은혜를 주셨는데 환관장의 마음을 바꾸어 놓으신 것입니다. 다니엘의 신앙의 절개를 보시고 환관장에게 감동을 주신 것입니다. 이것은 먼저 다니엘이 하나님의 마음을 감동시켰기 때문에 이런 일이 일어난 것입니다. 그렇다면 나도 먼저 주님을 감동시켜야 합니다. 믿음의 정절을 지키면서 세상의 부정한 것들을 먹지 않고, 보지 않고, 듣지 않는, 신앙을 가지려고 하면 주님은 나의 기도에 응답해 주시는 것입니다.

    환관장은 느부갓네살의 왕의 명령을 어겨야 하는 상황입니다. 잘못하면 환관장이 죽을 수도 있는 이런 상황에서 다니엘의 말을 허락한다는 것은 절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왕의 명령을 어긴다는 것은 죽음과 똑같은 것입니다.

    ‘지정하셨거늘’이라는 단어는 (마나 4487 VPAMZS 동사 피엘(강조능동) 완료 남성 3인칭 단수) 계산하다, 지정하다, 준비하다, 라는 뜻입니다. 느부갓네살은 명령을 내렸는데 이 명령을 어기는 자는 처형에 처할 정도로 엄중하게 명령을 내렸습니다. 이 명령을 어기는 환관장과 사람들은 죽게 됩니다. 환관장은 왕의 명령을 어기는 것을 두려워했던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환관장의 마음을 돌려놓으시고 다니엘에게 긍휼을 베풀어 주십니다. 이것이 신앙을 지키려고 할 때에 하나님께서 보호해 주시는 은혜입니다.


    11절 바요메르 다니엘 엘 하멜르차르 아쎄르 미나 사르 하사리심 알 다니엘 하나느야 미솨엘 바아자르야

     

    12절 나스 나 에트 아바데이카 야밈 아사라 베이트누 라누 민 하제로임 베노켈라 우마임

    13절 베예라우 레파네이카 마르에누 우마르에 하옐라딤 하오켈림 에트 파트바그 하멜렉크 베카아쎄르 티르에 아세 임 아바데이카

    (단 1:11-13) 환관장이 다니엘과 하나냐와 미사엘과 아사랴를 감독하게 한 자에게 다니엘이 말하되 청하오니 당신의 종들을 열흘 동안 시험하여 채식을 주어 먹게 하고 물을 주어 마시게 한 후에 당신 앞에서 우리의 얼굴과 왕의 음식을 먹는 소년들의 얼굴을 비교하여 보아서 당신이 보는 대로 종들에게 행하소서 하매

    다니엘은 간청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왕의 음식을 먹지 않아도 절대 왕 앞에 가서도 초췌하지 않는다는 것을 확신시켜주고 있습니다. 다니엘의 확신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면 절대 얼굴이 초췌해지지 않고 더 좋아진다는 것을 다니엘은 믿었습니다. 이것이 믿음 있는 사람들의 행동입니다. 그러면서 당당하게 열흘 동안 자신들을 시험해 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시험하여’라는 단어는 (나사 5254 VPMMYS 동사 피엘(강조능동) 명령법 남성 2인칭 단수) 시험하다, 유혹하다, 시도하다, 라는 뜻입니다. 다니엘은 당당하게 환관장에게 명령하여 말합니다. 우리를 시험하여 보라고 그것도 확실히 채식만 먹을 수 있도록 하라고 명령합니다. 이런 당당함이 어디에서 나옵니까? 바로 주님이 나와 함께 하고 있다는 것을 믿기 때문입니다. 신앙인들을 어떠한 어려운 상황에서도 주님을 의지하고 나가면 세상의 사람들 앞에서도 당당하게 말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다니엘은 두려울 것이 없습니다. 이미 자신이 뜻을 정하여 주님의 뜻대로 나가기 때문입니다. 나에게도 이런 믿음과 정절의 신앙이 있어야 합니다.

    ‘먹게 하고’라는 단어는 (아칼 398 VQICXP.Ch 동사 칼(능동태) 미완료 공성 1인칭 복수. 연장형) 먹다, 삼키다, 라는 뜻입니다. 다니엘은 당당하게 우리에게 채소만 먹게 하여 열흘을 지켜보라는 것입니다. 왜 열흘을 지켜보라고 했을까요? 10의 의미는 질서의 완전, 책임, 증거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다니엘은 열흘 동안 하나님의 말씀이 완전하게 이루어질 것을 믿었고 책임져 주실 것을 생각했으며 자신을 통해 하나님의 놀라우신 기적을 증거 하기 위한 뜻이 있습니다. 이렇게 다니엘은 하나님의 격려하는 것을 믿었고 친구들을 격려했으며 자신 스스로 권면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다니엘은 열흘이 지난 다음에 왕의 음식을 먹은 자들과 채소만 먹은 우리들을 비교하여 보시고 그다음에 환관장 마음대로 처분해도 좋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런 당당함 속에 환관장도 허락하는 것입니다. 주님이 나와 함께 하고 있다는 사실만 믿으면 세상 사람들 앞에서도 당당해지는 것입니다. 이것은 자신의 신념이 아니라 진정한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14절 바이쉐마 라헴 라다바르 하제 바예나셈 야밈 아사라


    15절 우미케차트 야밈 아사라 니르아 마르에헴 토브 우베리에 바사르 민 콜 하옐라딤 하오켈림 에트 파트바그 하멜렉크


    16절 바예히 하멜르차르 노세 에트 파트바감 베예인 미쉐테헴 베노텐 라헴 제르오님

    (단 1:14-16) 그가 그들의 말을 따라 열흘 동안 시험하더니 열흘 후에 그들의 얼굴이 더욱 아름답고 살이 더욱 윤택하여 왕의 음식을 먹는 다른 소년들보다 더 좋아 보인지라 그리하여 감독하는 자가 그들에게 지정된 음식과 마실 포도주를 제하고 채식을 주니라

    ‘시험하더니’라는 단어는 (나사 5254 CW.VPIMZS.MZP 와우접속사. 동사 피엘(강조능동) 미완료 남성 3인칭 단수. 남성 3인칭 복수) 시험하다, 유혹하다, 시도하다, 라는 뜻입니다. 다니엘을 감독하는 자가 즉시로 열흘 동안 채소만 먹게 하기 위해 시험에 들어갑니다. 이 시험은 다른 음식은 절대 들어가지 않고 오직 채소만 들어가는 것을 말합니다. 부정한 음식은 먹지 않고 정결한 음식만 먹어도 정말 산해진미를 먹은 자들보다 더 좋아지는지를 알아보는 시험입니다. 만약에 채소만 먹어서 영양실조에 걸렸다면 하나님이 수치를 당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절대 뜻을 정한 믿음의 사람을 놔두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는 것입니다. 다니엘은 당당했습니다. 절대 부정한 왕의 음식을 주시지 말고 오직 채소만 달라고 했습니다. 이 시험은 하나님과 함께 하는 시험이며 주님의 영광을 나타내는 시험이었기 때문입니다.

    ‘좋아 보인지라’라는 단어는 (라아 7200 VNAMZS 동사 니팔(수동태) 완료 남성 3인칭 단수) 보다, 바라보다, 조사하다, 라는 뜻입니다. 열흘 동안 시험하고 나서 다니엘과 친구들을 보니 왕의 음식을 먹었던 자들보다 더 아름답고 얼굴이 윤택해진 모습이었습니다. 이것은 더 나아 보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다니엘과 친구들의 모든 근본적인 모습들을 바꾸어 놓았기 때문입니다. 자신들이 한 것 같지만 하나님께서 100% 만지신 것입니다. 수동을 사용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자신들은 믿음을 가지고 채소만 먹었을 뿐입니다. 그런데 얼굴과 몸은 더 좋았습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함께 하신 증거였습니다. 이 시험이 끝나고 나서 절대 왕의 음식을 먹지 않아도 됩니다. 하나님이 승리하신 것입니다. 먹는 것으로 사탄은 부정하게 만들려고 했지만 뜻을 정한 믿음을 통해 주님이 승리하셨습니다. 이것은 사탄이 예수님을 죽이면 끝이 난 것처럼 생각했지만 골고다 언덕에서 주님이 죽고 부활하셔서 완전한 승리를 이루신 것입니다. 죽기를 각오한 믿음 안에 진정한 자유가 있습니다.


    17절 베하옐라딤 하엘레 아르바에탐 나탄 라헴 하엘로힘 마다 베하세켈 베콜 세페르 베호크마 베다니엘 헤빈 베콜 하존 바할로모트

    (단 1:17) 하나님이 이 네 소년에게 학문을 주시고 모든 서적을 깨닫게 하시고 지혜를 주셨으니 다니엘은 또 모든 환상과 꿈을 깨달아 알더라

    다니엘과 친구들이 믿음으로 승리하고 나니 하나님께서 이들에게 지혜와 학문을 주시는 놀라운 은혜를 받게 됩니다. 이것이 믿음의 시험을 통과한 자들에게 주시는 상급입니다.

    ‘지혜를 주셨으니’라는 단어는 (사칼 7919 VHNA 동사 히필(사역능동) 부정사절대형) 지혜롭다, 총명하다, 지혜롭게 행하다, 라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다니엘에게 지혜를 주셨는데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는 지혜를 주시고 하나님의 뜻을 아는 지혜를 하나님께서 직접 주셨습니다. 또한 하나님이 다니엘의 삶에 개입하셔서 계속 함께 하시겠다는 강조를 하고 있습니다. 다니엘이 믿음을 지키기로 뜻을 정하여 사니까 주님께서 함께 하시는 것입니다.

    ‘깨달아 알더라’라는 단어는 (빈 995 VHAMZS 동사 히필(사역능동) 완료 남성 3인칭 단수) 식별하다, 분별하다, 지각하다, 이해하다, 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셔서 다니엘은 환상과 꿈을 깨닫고 분별하며 이해할 수 있는 능력을 받은 것입니다. 그래서 느부갓네살 왕이 꾸었던 꿈도 듣지 않고 알 수 있었습니다. 이것은 전적인 하나님께서 함께 하심으로 알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제 완전하게 함께하셔서 많은 사람들 앞에서 다니엘을 높여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함께 하고 있다는 증거들을 나타내 주고 있습니다.


    18절 우레미케차트 하야밈 아쎄르 아마르 하멜렉크 라하비암 바예비엠 사르 하시리심 리페네 네부카드네차르


    19절 바예다베르 이탐 하멜렉크 베로 니므차 미쿨람 케다니엘 하나느야 미솨엘 바아자르야 바야아메두 리페네 하멜렉크 

     

    20절 베콜 데바르 호크마트 빈나 아쎄르 비케쉬 메헴 하멜렉크 바이므차엠 에세르 야도트 알 콜 하하르투밈 하아솨핌 아쎄르 베콜 말쿠토

    21절 바예히 다니엘 아드 쉐나트 아하트 레코레쉬 하멜렉크

    (단 1:18-21) 왕이 말한 대로 그들을 불러들일 기한이 찼으므로 환관장이 그들을 느부갓네살 앞으로 데리고 가니 왕이 그들과 말하여 보매 무리 중에 다니엘과 하나냐와 미사엘과 아사랴와 같은 자가 없으므로 그들을 왕 앞에 서게 하고 왕이 그들에게 모든 일을 묻는 중에 그 지혜와 총명이 온 나라 박수와 술객보다 십 배나 나은 줄을 아니라 다니엘은 고레스 왕 원년까지 있으니라

    이제 다니엘은 느부갓네살 왕 앞에 나가게 됩니다. 이제 다니엘과 친구들은 모든 것이 완벽하게 준비가 되었습니다. 영적으로 육적으로 완전하게 준비된 상태에서 세상의 왕 앞에 나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믿음 안에서 이미 준비가 되어 세상에서 쓰임 받게 되는 것입니다. 믿음을 지키고 나가니 세상의 많은 박수와 술객보다 십 배나 더 능력이 나타났으며 인정받는 자들이 된 것입니다. 이렇게 다니엘은 바벨론에서부터 페르시아 왕 고레스까지 쓰임 받게 되는 아주 긴 수명을 살면서 세상을 통치하고 다스리는 직분을 맡아 세상 나라에서 주님을 나타내는 자가 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지금까지 어떠한 믿음을 가지고 살았습니까? 다니엘은 세상나라에 포로로 끌려갔지만 신앙과 믿음을 버리지 않았습니다. 죽음을 각오하고 뜻을 정하여 우상에게 드려졌던 음식을 거부하고 거룩한 하나님 백성으로서 정한 음식만 먹겠다고 다짐했으며 독주를 마시지 않았습니다. 이렇게 신앙을 지키며 나가려고 할 때에 많은 육체적 고통과 조롱이 따라오지만 두려워하지 않고 주님을 향한 열정으로 죽기를 각오하고 믿음을 지켰더니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풀어 주시고 지혜와 명철을 주시는데 열 배나 주셨습니다. 세상나라에서 크게 쓰임 받는 자가 되게 하셨습니다.

    오늘 나는 어떠한 뜻을 정했습니까? 주님의 나라를 위해 살기로 작정했습니까? 더 이상 세상의 음식을 먹지 않겠다고 정했습니까? 이제 나는 주님을 위해 뜻을 정해야 합니다. 오직 주님만을 섬기기로 작정해야 합니다. 세상과 주님 안에서 한 발씩 들여놓고 좋은 것만 취하려고 하는 이런 것들을 버리고 이제 주님께 쓰임 받기 위해 나의 뜻을 정하여 나가야 할 때입니다. 사탄은 나의 믿음과 신앙을 나태하게 하여 열정을 무너트리고 영성을 죽이고 있습니다. 환경 속에서 신앙을 잘하지 못하도록 달콤한 것들을 선물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이런 육체적인 달콤함 속에 빠져 죽어가고 있는지도 모르는 것이 안타까울 따름입니다. 꿀 속에 빠진 벌레를 상상해 보십시오. 꿀의 달콤함에 정신없이 먹다가 결국은 꿀 속에서 죽어가는 것입니다. 내가 세상의 육신적 쾌락에 빠져 살다가 내 영혼이 죽는지도 모르고 있다면 얼마나 비참한 삶을 살고 있는 것입니까? 주님의 백성들은 이제 거룩한 음식을 먹어야 합니다. 이 음식을 먹기로 뜻을 정할 때에 주님도 함께 하시는 것입니다. 오늘 이 말씀을 통하여 다시 한번 주님께 뜻을 정하시는 성도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다니엘 1장 1 하나님을 향하여 뜻을 정하다 / 단 1:1-9

    다니엘서는 포로시대의 신앙 영웅인 다니엘의 생애의 주요 사건과 그가 받은 주요 묵시에 관해 기록한 책입니다. 좀 더 부연하면, 하나님의 징계로 야기된 포로시대(B.C. 586-538)를 전후하여 포로 출신이라는 정치적 한계와 다신교 사상의 이방 제국의 황실이라는 종교 문화적 한계를 극복하고, 바벨론, 메대-바사, 바사 등 이방 재제국의 몰락과 발흥을 거듭하는 가운데서 일사각오의 신앙으로 일관한 다니엘의 파란만장한 생애와 역동적 사건들이 제시됩니다. 그리고 이 와중에 다니엘이 직간접적으로 받은 대제국의 흥망사를 배경으로 하는 종말론적인 묵시들이 소개됩니다.

    다니엘서 강해는 한홍 목사님의 책을 인용해서 작성했습니다.

    유다의 멸망

    “유다 왕 여호야김이 다스린 지 삼 년이 되는 해에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이 예루살렘에 이르러 성을 에워쌌더니”(1절)

    여호야김은 요시야 왕의 아들로 주전 609년에 남왕궁의 왕이 되었습니다. 이미 그때는 유다 왕국의 운명이 기울어진 때였습니다. 오랜 세월 동안 중동의 패권을 장악해온 애굽과 신흥 강국 바벨론이 차례로 유린한 탓에 당시 유다 왕국은 말할 수 없는 어려움에 처해 있었다. 여호야김의 형제인 여호아하스가 왕위에 오른 지 3개월 만에 애굽 왕에 의해 폐위되고, 대신 여호야김이 새로운 왕이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선지자 예레미야를 통해서 여호야김에게 바벨론과 유화정책을 펴라는 메시지를 주셨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것을 무시했습니다. 오히려 자신을 세워준 애굽에 충성을 맹세했고, 애굽에 조공을 바치기 위해 백성의 고혈(膏血)을 짜내는 정책을 폈습니다. 그 결과로 그가 왕이 된 지 3년 만에 바벨론의 느부갓네살 왕이 대군을 이끌고 예루살렘을 포위했습니다.

    느부갓네살은 세계 최대의 제국이었던 앗수르와 드로아, 그리고 아프리카의 애굽까지 정복하여 메소포타미아를 포함한 고대 근동 지역 전체를 장악한 대제국 바벨론을 만든 인물이었습니다. 군사적 영웅이었을 뿐 아니라 정치·문화적으로도 엄청난 업적을 남긴 지도자였습니다. 그는 아시아와 아프리카를 잇는 전략적 요충지인 유다 왕국을 점령함으로써 애굽을 정복하고, 유다 왕국을 세계 제국을 향한 자신의 야망의 디딤돌로 삼으려 했습니다. 그러나 유다 왕 여호야김은 어리석게도 이 급변하는 세계정세의 판도를 읽지 못하고 나라의 패망을 자초했습니다.

    “주께서 유다 왕 여호야김과 하나님의 전 그릇 얼마를 그의 손에 넘기시매 그가 그것을 가지고 시날 땅 자기 신들의 신전에 가져다가 그 신들의 보물 창고에 두었더라”(2절)

    유다는 성전(聖殿)이 자신들을 지켜줄 것이라고 믿었지만, 바벨론 군대는 그 성전을 약탈하고 성전의 기물들을 자신들의 신전에 가져다가 그 신들의 보물 창고에 둠으로써 유다 백성과 하나님을 모독했습니다. 고대에는 전쟁의 승패가 도시 국가가 섬기던 신들의 승패라고 믿었습니다. 그래서 바벨론은 자신들이 믿는 신이 유다의 하나님을 굴복시켰다고 과시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런 수치까지 감내하시면서 패역한 유다 백성들을 징계하셨습니다.

    바벨론으로 가다

    느부갓네살 왕은 점령한 각 속국을 보다 효율적으로 통치하기 위해 그 지역의 왕족과 귀족의 자제들 중 몇 명을 선출해 바벨론으로 데려와서 교육을 받게 했습니다.

    “왕이 환관장 아스부나스에게 말하여 이스라엘 자손 중에서 왕족과 귀족 몇 사람 곧 흠이 없고 용모가 아름다우며 모든 지혜를 통찰하며 지식에 통달하며 학문에 익숙하여 왕궁에 설 만한 소년을 데려오게 하였고 그들에게 갈대아 사람의 학문과 언어를 가르치게 하였고”(3, 4절)

    그들은 왕족과 귀족의 자제들 중에서도 까다로운 선발 기준으로 뽑은 인재들이었습니다. 그중에서도 다니엘과 친구들은 어떤 학문을 가르쳐주면 금방 깨우칠 정도로 지혜롭고 총명했습니다. 또한 모든 지혜를 통찰하며 학문에 익숙해 모든 지식을 체계적으로 소화했습니다. 느부갓네살은 이런 인재들을 바벨론으로 데려와서 “갈대아 사람의 학문과 언어”를 배우게 했습니다.

    바벨론제국이 제3세계의 인재들을 데려와서 교육시킨 데는 두 가지 목적이 있었습니다. 첫째, 제3세계의 차세대 지도자들의 실력을 최대한 뽑아내서 바벨론제국을 만들어갈 핵심 두뇌로 사용하려고 했습니다. 둘째, 바벨론 사상으로 무장한 이들을 훗날 자기 나라로 돌려보내 다스리게 함으로써, 점령지마다 친(親)바벨론 정치 세력을 심어놓으려는 생각이었습니다.

    “또 왕이 지정하여 그들에게 왕의 음식과 그가 마시는 포도주에서 날마다 쓸 것을 주어 삼 년을 기르게 하였으니 그 후에 그들은 왕 앞에 서게 될 것이더라”(5절)

    또한 왕은 왕궁에서 선별된 음식과 포도주를 각국의 영재들에게 날마다 공급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3년 동안 여러 분야에서 강도 높은 훈련을 받은 후에 바벨론 왕 앞에 세워져 나랏일을 했습니다. 인재 확보와 육성은 강대국을 만드는 핵심 전략입니다. 마찬가지로 교회도 이 정도의 정성으로 사람을 세워야 합니다. 요즘 한국 교회들은 하나님의 은혜라는 명목으로 지도자들을 쉽게 세우는 경우가 많은 것 같아 가슴이 아픕니다.

    남은 자를 통해 일하시는 하나님

    드디어 다니엘과 세 친구인 하나냐와 미사엘과 아사랴가 등장합니다.

    “그들 가운데는 유다 자손 곧 다니엘과 하나냐와 미사엘과 아사랴가 있었더니”(6절)

    유다왕국은 망했지만 하나님의 나라가 망한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분의 말씀대로 살기로 결단한 다니엘 같은 ‘남은 자’들을 통해서 하나님 나라의 위대한 역사를 이어가십니다. 바벨론은 힘으로 유다를 무너뜨렸지만 다니엘을 통해 흘러나가는 하나님의 영적 권위에는 바벨론의 최고 권력자인 느부갓네살 왕도 무릎을 꿇게 됩니다. 눈에 보이는 역사만 가지고 모든 것을 판단해선 안 됩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의 섭리를 봐야 합니다.

    포로로 끌려간 각국의 인재들에게는 바벨론 식의 새 이름이 주어졌습니다.

    “환관장이 그들의 이름을 고쳐 다니엘은 벨드사살이라 하고 하나냐는 사드락이라 하고 미사엘은 메삭이라 하고 아사랴는 아벳느고라 하였더라”(7절)

    다니엘이란 이름은 ‘하나님은 나의 재판장이시다, 나를 판단할 자이시다’란 뜻입니다. 그의 친구 하나냐는 ‘하나님은 은혜로우시다’, 미사엘은 ‘누가 하나님과 같은가’, 아사랴는 ‘하나님은 나의 도움이시다’란 뜻입니다. 이렇게 좋은 뜻의 이름들을 바벨론 왕실에서는 순식간에 다른 이름으로 부르게 했습니다.

    유다의 이름들이 하나님과 연관되어 있듯이 바벨론의 이름들 또한 그들의 신들과 관련이 있었습니다. 다니엘에게 준 ‘벨드사살’이란 이름은 바벨론이 섬기는 신(神)인 벨을 찬양하는 이름으로서 ‘벨이여, 내 생명을 보존하소서’란 뜻입니다. 나머지 세 친구들에게 주어진 이름들도 비슷합니다.

    신앙의 마지노선

    그러나 세상 속의 크리스천에게는 물러설 수 없는 신앙의 마지노선을 분명히 그어야 할 시점이 반드시 옵니다.

    “다니엘은 뜻을 정하여 왕의 음식과 그가 마시는 포도주로 자기를 더럽히지 아니하리라 하고 자기를 더럽히지 아니하도록 환관장에게 구하니”(8절)

    다니엘은 “왕의 음식과 그가 마시는 포도주로 자기를 더럽히지 아니하리라”라고 했습니다. 그렇게 말한 데는 두 가지 이유가 있었습니다.

    첫째는 하나님의 율법에 피가 섞인 고기를 먹는 것을 금하고 있었습니다. 바벨론 왕이 먹던 음식과 포도주는 단지 좋은 음식이 아니고, 모두 바벨론의 신에게 바친 뒤에 내려지는 우상의 제물이었습니다. 그래서 그 음식을 먹으면 자신도 그 우상을 섬기는 게 되는 것입니다.

    둘째는 바벨론의 왕은 우상들에게 바쳐졌던 음식을 자기와 바벨론의 지도층들이 먹음으로써 자신들의 건강과 전쟁의 승리와 축복을 보장받는다고 믿었습니다. 따라서 다니엘이 그 음식을 먹게 되면 자신의 인생을 바벨론 왕과 그 우상 신들이 결정한다고 고백하는 것이 됩니다.

    배가 항해 중일 때, 물이 배 안으로 들어오게 되면 배는 침몰하고 맙니다. 바벨론 학문을 배우고 바벨론 식의 이름을 받는 것까지는 배가 물 위에 있는 것이지만, 우상의 음식을 먹는 것은 물이 배 안으로 들어오게 하는 것과 같습니다. 다시 말해 음식을 먹으면 어두운 권세와 그 하수인인 우상들의 영향력이 내 안으로 들어오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몸을 정결하게 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강조하십니다.

    다니엘은 단호하게 그 유혹을 떨쳐버렸습니다. 비록 십대의 어린 나이였지만 그 끝이 무엇인지를 알았습니다. 하나님의 사람이 가야 할 길이 아님을 안 순간 그는 벌떡 일어섰습니다. 노예로 끌려와 몸은 어떻게 할 수 없었지만 영혼까지 팔수는 없었습니다. 그리고 더 이상은 바벨론이 휘두르는 대로 끌려가선 안 되겠다고 판단했습니다.

    뜻을 정한 자를 도우시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을 위해 살기로 뜻을 정한 인생에 그 뜻을 이룰 수 있는 길을 열어주십니다. 다니엘에게 하나님이 열어주신 길의 디딤돌은 왕궁 살림을 총괄하던 환관장이었습니다. 다니엘은 용감했지만 무모하지는 않았습니다. 먼저 자신의 결심을 실천에 옮길 수 있는 여러 가지 방법을 기도하며 모색한 다음, 마침내 환관장의 도움을 받기로 합니다.

    사실 환관장에게 있어서 다니엘의 요청은 상식적으로 받아들일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당장이라도 일이 잘못되면 자신의 안위가 위협받을 수 있는 상황에서 포로로 끌려온 소년의 신앙 양심을 지켜주자고 예외를 줄 수는 없었습니다. 다니엘이 뇌물을 준 것도 바벨론의 명문가 자제도 아니기 때문에 환관장에게는 이익이 될 일도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다니엘의 말에 그의 마음이 움직였습니다.

    “하나님이 다니엘로 하여금 환관장에게 은혜와 긍휼을 얻게 하신지라”(9절)

    환관장이 다니엘에게 “은혜와 긍휼”이 생겼습니다. 쉽게 말해 괜히 좋은 마음, 불쌍해서 도와주고 싶은 마음이 우러난 것입니다. 그리고 성경은 환관장에게 그런 마음이 우러나게 하신 분이 하나님이심을 분명히 밝힙니다.

    하나님은 믿지 않는 사람을 통해서도 그분의 뜻을 이루십니다. 환관장은 온갖 추악한 권력의 암투가 가득한 바벨론 왕궁의 살림을 책임지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셈이 빠르고 정치 감각이 뛰어난 사람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다니엘을 살리기 위해 그를 사용하셨습니다.

    죽음을 각오한 선택

    다니엘의 결심은 포로로 끌려간 노예로서 절대 권력자인 왕의 명령을 거역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는 죽음을 각오한 선택이었습니다.

    바벨론으로 끌려간 다니엘이 하나님을 위해 살기로 결심한 나이는 겨우 15세였습니다. 요즘으로 치면 중학교 3학년에 불과한 나이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신앙에 기초한 분명한 인생관을 가졌습니다. 당시 조국의 지도자들은 하나님을 버리고 우상을 섬겼고, 결국 나라가 망했는데도 말입니다. 더욱이 포로로 잡혀간 땅에서는 그를 영적으로 인도해줄 사람들이나 교회도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이 어린 소년은 하나님 말씀대로 살기로 뜻을 정했습니다. 이렇듯 하나님을 위한 뜻을 정할 때, 하나님께서 엄청난 축복과 능력을 부어주십니다.

    우리의 인생은 어떤가요? 상황에 따라 이리저리 휘둘리는 인생인가, 아니면 결코 타협할 수 없는 믿음의 길을 가기로 뜻을 정한 인생인가요? 지금 우리의 아이들에게 마땅히 가르쳐야 할 것은 하나님을 위해 살기로 뜻을 정하게 하는 일입니다. 다니엘처럼 확실한 영적 마지노선을 긋고 살아야 합니다. 결코 늦지 않았습니다. 지금부터 우리가 서 있는 지점에서 각자 하나님이 주시는 방법대로 하기로 결심합시다.

    <묵상과 나눔>

    1. 내 인생의 바벨론은 어디입니까?

    2. 나의 신앙의 마지노선은 무엇입니까?

    3. 나는 무엇에 뜻을 정했나요?



    뜻을 정하여 (다니엘 1:8-21)

    다니엘은 지혜가 뛰어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매우 잘생기고 인물이 출중한 사람이었습니다. 다니엘서 1 장 3~4 절을 읽어보면, 다니엘이 왕족 또는 귀족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다니엘은 머리도 똑똑하고, 인물도 잘 생기고, 게다가 부잣집에서 태어났습니다. 그에게는 약속된 미래, 보장된 성공, 그리고 행복한 인생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다니엘의 인생 전체를 바꾼 끔찍한 사건이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이스라엘과 바벨론 사이에 전쟁이 벌어졌습니다. 당시 전 세계의 패권을 가진 바벨론은 이스라엘 전역을 폐허와 쑥대밭으로 만들어 버렸습니다. 전쟁의 결과, 다니엘은 하루 아침에 모든 것을 잃어버렸습니다. 그의 집과 고향은 불타 없어졌습니다. 그는 더 이상 부모, 형제와 함께 살 수 없었습니다. 다니엘은 고아처럼 지내야 했고, 그의 조국 이스라엘은 지도에서 사라져 버렸습니다. 가장 두려운 사실은 다니엘이 전쟁포로이며, 노예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바벨론 사람들이 다니엘을 자신들의 나라로 끌고 갔습니다. 가족의 생사도 모르는 판에 인물이 좋아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조국이 망하고 평생 노예로 살게 되었는데 남들보다 머리가 조금 더 똑똑한 것이 무슨 도움이 되겠습니까? 이 모든 불행이 그에게 일어났을 때 다니엘의 나이는 십대 청소년 즈음 되었을 것입니다.
    비록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갔으나 다니엘은 변함없이 하나님의 말씀을 지킬것과 이방 사람들이 섬기는 우상으로 자신을 더럽히지 않을 것이라 굳게 결심했습니다. 다시 말해 그는 주님의 말씀대로 살아가기로 뜻을 정했습니다. 8 절 말씀을 보겠습니다. ” (단 1:8) 왕이 말한 대로 그들을 불러들일 기한이 찼으므로 환관장이 그들을 느부갓네살 앞으로 데리고 가니” 왜 다니엘은 산해진미로 가득한 왕의 음식을 먹기를 거절했습니까? 다니엘의 마음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지금 바벨론 사람들이 무슨 일을 꾸미고 있는지 볼 수 있어야 합니다. 바빌로니아 사람들은 다니엘을 자기 나라로 끌고 간 후에, 그의 이름을 바꾸었습니다. 본래 다니엘이란 이름은 “하나님은 나의 재판관이시라”는 뜻입니다. 다니엘이란 이름은 그가 하나님의 사람이라는 정체성을 보여줍니다. 그러나 바빌로니아 사람들은 그에게 “벨드사살”이란 새로운 이름을 붙였습니다. 그 이름의 뜻은 “벨티스가 왕을 지키다”는 뜻입니다. ‘벨티스’는 바빌론 사람들이 섬기는 신의 이름이었습니다. 바빌로니아 사람들은 다니엘에게 이처럼 새로운 이름을 부여함으로 그가 가진 하나님을 섬기고자 하는 태도와 사고 방식을 버리고, 바벨론 신과 왕을 섬기도록 종 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다니엘은 자신의 참 신이 누구인지를 잊지 않았습니다. 비록 바빌로니아 사람들이 자신의 이름을 바꾸려고 시도하고 그들의 거짓 신에게 봉사하도록 새로운 정체성을 부여했지만, 다니엘은 끝까지 이스라엘의 하나님만 섬길 것을 결심했습니다.
    바벨론 제국의 왕 느부갓네살은 다니엘에게 최상의 음식을 제공해 주었습니다. 왕이 먹는 최고 수준의 와인과 등급 좋은 고기들을 그에게 준 것이죠. 노예가 되어 바벨론에 끌려온 다니엘은 고기도 먹고 싶을 터이고, 배가 무척 고팠을 것입니다. 그도 왕의 진미를 먹고 싶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성경 말씀에서 본 것처럼, 다니엘은 이 모든 왕의 진미를 먹고 마시기를 단칼에 거절했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이 당시 바벨론에서 왕들에게 바쳐진 음식은 그들이 섬기는 신들에게 희생 제물로 사용되었던 것들입니다. 즉 우상에게 바쳐진 음식을 다니엘에게 준 것이죠. 따라서 다니엘이 볼 때 왕의 음식을 먹는 것은 하나님의 율법을 어기고 부정한 동물을 먹는 것과 동일 했습니다. 이 사실을 깨달은 다니엘은 그 질 좋고 맛있는 왕의 음식들을 모조리 다 거부했습니다. 그는 이러한 부정한 음식을 먹음으로써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영혼을 더럽히지 않을 것을 다짐 한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음식일 뿐이잖아? 고기 하나 먹는다고 해서 무슨 큰 일은 일어나겠습니까?” 그러나 다니엘에게 이것은 더 이상 음식을 먹느냐 마느냐의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그에게 이 사안은 하나님과의 관계에 관한 문제였습니다. 다니엘은 하나님의 말씀을 어기고 자신을 더럽히지 않을 것이라고 뜻을 정했습니다. 왕의 진미를 먹는 것은 우상에게 바쳐진 음식을 먹는 것임으로 그는 왕이 하사한 산해진미를 모두 거절하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갈 것을 선택했습니다. 다니엘은 뜻을 정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지킴으로써 하나님 보시기에 중요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말씀에 순종하는 삶을 살아가기로 뜻을 정한 다니엘에게 하나님은 풍성하게 복을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어기지 않고, 죄악으로 자신의 영혼을 더럽히지 않을 것을 결단하기를 바랍니다. 말씀대로 살아가는 자, 하나님께서는 그의 삶을 눈 여겨 보시고, 어디를 가든지 무엇을 하든지 그 사람을 보호해 주십니다. 주님의 말씀대로 따른다면 주님께서는 여러분을 인도하여 푸른 초원과 쉴만한 물가로 인도하실 것입니다. 말씀대로 살아가는 것, 그것이 다니엘이 하나님께 크게 쓰임 받은 비밀입니다. 하나님은 그런 다니엘에게 큰 복을 내려 주셨습니다.

    17 절 말씀을 보시기 바랍니다. “(단 1:17) 하나님이 이 네 소년에게 학문을 주시고 모든 서적을 깨닫게 하시고 지혜를 주셨으니 다니엘은 또 모든 환상과 꿈을 깨달아 알더라” 하나님께서는 다니엘에게 모든 학문에 대한 지식과 기술을 주셨습니다. 다니엘은 지혜를 얻었고 모든 환상과 꿈을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전국에 다니엘보다 현명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다니엘은 대학도 가지 않았고, 박사학위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20 절을 보면 다니엘은 바빌론의 모든 박사들보다 열 배 더 지혜로웠습니다. 다니엘은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살았고 하나님의 율법을 어기지 않기 위해 힘썼기 때문에 하나님은 풍성하게 다니엘을 축복하셨습니다. 졸업생 여러분, 다니엘의 발자취를 따르십시오. 그렇게 한다면 여러분이 바로 차세대 다니엘이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세상이 줄 수 없는 하늘의 지혜와 명철을 더해 주실 것입니다.
    다니엘은 노예의 신분으로 바벨론에 왔습니다. 그러나 그는 훗날 바벨론 제국을 다스리는 자 중 왕 다음 가는 통치자가 되었습니다. 당시 많은 사람들이 이스라엘에서 끌려 온 한 노예 소년이 온 제국을 다스리는 대신이 되었다는 것을 눈으로 보고도 믿지 못했습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 했을까요? 다니엘이 머리가 좋고 영리했기 때문입니까? 그가 단순히 운이 좋았기 때문에 바빌론의 두 번째 통치자의 자리까지 올라 갔을까요? 아니면 그에게 특별한 재능이 있었기 때문에 이 모든 일이 가능 했을까요? 아닙니다. 다니엘이 놀랍게 하나님의 복을 받은 이유는 그가 어디 있었는지 또는 그가 누구와 함께 있든지, 언제나 하나님 중심, 말씀 중심의 삶을 살았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날 ‘세상’이라고도 불리는 ‘또 다른 바벨론’은 여러분의 그리스도인이란 신앙의 정체성을 빼앗아 가려고 끊임없이 시도할 것입니다. 세상은 할 수 있는 대로 여러분을 유혹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버리고 세상이 주는 쾌락을 누리며 살도록 만들 것입니다. 그 교묘한 함정에 빠지지 마십시오. 세상이 여러분의 삶에 왕이 되도록 내버려 두지 마십시오.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에 따라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참된 왕이 되도록 하십시오. 그렇게 함으로써 주님은 선한 분이시고 여러분은 놀랍도록 복된 삶을 살 수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다니엘처럼 뜻을 정합시다(다니엘 1:8-16)

    다니엘은 어린 시절 바벨론이 예루살렘을 침공하였을 당시에 포로로 끌려온 왕족 중에 한 사람입니다. 그 다니엘은 심지가 굳은 사람이었습니다. 그 당시 바벨론의 임금이었던 느부갓네살은 세계 각국에서 똑똑한 소년들을 모두 끌고 왔습니다. 그리고 그들을 궁중학교에 입학시켜 3년 동안 집중적으로 훈련을 시켰습니다. 거기다 자기가 먹는 진미와 포도주를 제공했습니다. 온갖 특혜를 다 부여한 것입니다. 그의 목적이 무엇이었습니까? 그들을 훈련시켜 자기 사람으로 만들어서 자기에게 충성케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아마도 세상 적으로 보면 그들은 출셋길이 열렸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낯설고 물 설은 타국 땅에 와서 이런 대접을 받는다는 것은 정말 큰 축복이었습니다. 그런데 다니엘에게는 고민거리가 아닐 수 없었습니다. 왕이 주는 그 기름진 음식들이 바로 우상의 제물이라고 하는 사실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우상숭배 하는 것을 금하셨으며, 우상의 제물을 먹는 것조차도 싫어하셨습니다. 여러분 같으면 어떻게 했으면 좋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싫어하시든 말든 출세하고 돈만 벌면 된다고 하면서 그것을 먹겠습니까? 아니면 출세도 좋고 돈을 버는 것도 좋지만 하나님을 슬프게 해 드리고 내 신앙을 더럽힐 수는 없다고 하면서 그것을 거절하시겠습니까?

    여기서 다니엘은 뜻을 정했습니다. 왕의 진미와 포도주로 자기를 더럽히지 않도록 결단했습니다. 말하자면 신앙의 절개를 지키기 위해서 세상의 부귀와 안일함과 모든 명예를 분토와 같이 여겨버린 것입니다. 세상의 권력보다도 물질보다도 하나님을 더욱 신뢰하였다는 말씀입니다. 결국 하나님을 위해서, 신앙의 절개를 지키기 위해서 뜻을 정했던 다니엘을 하나님께서 축복하시고 더 놀라운 은혜를 주심으로 그의 삶을 책임져 주셨습니다. 그리고 나라가 바뀌고, 왕이 바뀌어도 다니엘은 변함없이 귀하게 쓰임 받는 인물이 되었습니다. 오늘 이 말씀을 드리는 것은 저와 여러분들도 어떤 환경과 여건을 만나든지 그 상황과 환경에 굴복하지 말고 다니엘과 같이 뜻을 정하여 신앙을 지키고 믿음을 지키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일사각오를 가지고 신앙을 지키고 믿음을 지킨다면 하나님께서 저와 여러분들의 삶을 책임져 주시고 더 큰 은혜를 경험하게 하실 줄 믿습니다.

    1. 첫째로 생각해 볼 것은 다니엘이 뜻을 정했다는 사실입니다.

    8절 말씀을 다 같이 보시겠습니다. “다니엘은 뜻을 정하여 왕의 진미와 그의 마시는 포도주로 자기를 더럽히지 아니하리라 하고 자기를 더럽히지 않게 하기를 환관장에게 구하니” 다니엘이 위대한 삶은 바로 여기서 시작했습니다. 만일 다니엘에게 단1:8이 없었다면, 그 이후 그의 삶도 없었을 것입니다. 다니엘이 일생 동안에 받았던 수많은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은 당연한 결과라고 보아도 좋을 것입니다. 뜻이 있는 곳에 길이 있습니다. 그러나 뜻이 없다면 길도 없습니다.

    오늘도 예배시간에 늦게 오신 분들이 없지 않아 있습니다. "내가 예배시간은 꼭 지키리라. 지각하지 아니하리라." 이런 뜻을 정하고서 노력을 해야지 예배시간을 지킬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배시간에 늦어도 상관없는 것처럼 생각해 버리면 늘 지각할 수밖에 없습니다. 창세기에 보면 에녹이라는 사람이 있습니다.(창5:21,21) 그의 나이 65세에 아들 므두셀라를 낳았습니다. 므두셀라는 성경에 나오는 인물 가운데 제일 오래 산 사람입니다. 에녹은 자기 아들을 낳기 전까지는 아무렇게나 살았습니다. 그러나 아들을 낳고서 키워보니까 아버지의 심정을 알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깨달았습니다. "내가 이렇게 살아서는 안 되겠구나! 이제부터라도 내가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야지,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아야지!" 그는 결심을 했습니다. 그 이후로 에녹은 삼백년 동안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그 결과 그는 죽음을 맛보지 않고 승천했습니다. 하나님이 그를 데려가신 것입니다. 이러한 결단이 우리에게 있어야 합니다.

    누가복음 15장에 보면 탕자의 비유가 나옵니다. 늘 아버지의 집에서 고생을 모르고 살았는데 아버지가 잔소리 하는 것이 싫다고 아버지 없는 세상에 나가서 한 번 마음껏 살아 보겠다고! 아버지 없는 세상에 나가서 살면 얼마나 좋을까? 그래서 아버지의 집을 떠난 사람이 탕자가 아닙니까? 그러나 아버지의 집을 떠나고 나니 자유가 아니라 슬픔이 오고 부요가 아니라 빈곤이 오고 허랑방탕히 오고 말았습니다. 그 삶이 너무나 비참하였습니다. 돼지나 먹는 쥐엄열매로 배를 채우고자 하여도 주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탕자는 그제야 깨달았습니다. "내가 아버지에게 너무나도 잘못했구나. 아버지에게 불효막심한 죄를 지었구나!" 그는 잘못을 뉘우쳤습니다. 그러나 그것으로 끝나지 않았습니다. 그는 결심을 했습니다. "내가 이제라도 아버지 집으로 돌아가야지. 그리고 아버지에게 내 잘못을 고하면서 용서를 구해야지!" 그는 그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습니다. 그리고 아버지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그 결과가 어떻게 되었습니까? 아버지는 그를 반갑게 맞아주었습니다. 더러운 옷을 다 벗기고 깨끗한 옷을 입혀주었습니다. 손에는 가락지를 끼워주었고, 발에는 신발을 신겨주었습니다. 살찐 송아지를 잡았습니다. 그리고 아들의 모든 지위를 다시금 회복시켜 주었습니다.

    오늘 우리에게도 이러한 결단이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내가 이제부터는 하나님의 말씀대로 한 번 살아보리라! 지금까지는 그렇게 살지는 못하였을지만 이제부터는 무슨 일이 있더라도 믿음의 순결을 지키리라! 먹고 마시는 문제 때문에 내 몸을 더럽히지 아니하리라! 사람들의 눈치 때문에 하나님을 섭섭하게 하지는 않으리라! 버릴 것은 버리고, 끊을 것은 끊고, 포기할 것은 깨끗하게 포기하리라!" 결단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그 결단을 실행에 옮기시기 바랍니다. 이렇게 뜻을 정하고 그 자리에서 일어나면 하나님께서 다니엘을 책임지시고 그를 도와 주셨던 것처럼 여러분들을 책임지시고 도와주실 줄 믿습니다.

    2. 둘째로 생각할 것은 다니엘은 뜻을 굽히지 아니했다는 사실입니다.

    우리가 뜻을 정하는 것은 대단히 중요한 일입니다. 그러나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뜻을 굽히지 않는 것입니다. 아무리 내가 확고하고도 바르게 뜻을 정했다 할지라도, 작심삼일이 되어버리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어떠한 형편에서도 그 뜻을 굽히지 않고 지켜나가는 것이 더 중요한 줄 압니다.

    다니엘은 우상의 제물은 먹지 아니하리라 하고 뜻을 정한 후에 자기의 뜻을 환관장에게 말했습니다. 만일에 환관장이 자기의 말을 들어 주지 아니하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너 때문에 내 목이 달아나게 생겼는데 너 책임지겠느냐?”하며 안 된다고 하는데 다니엘이 어떻게 하였습니까? “어쩔 수 없지 뭐. 해도 안 되는걸 어떻게 해!”그랬습니까? 그가 이렇게 쉽게 포기했습니까? 아닙니다. 다니엘은 뜻을 굽히지 아니했습니다. 감독자를 찾아갔습니다. 그리고 설득했습니다. 사정을 했습니다. 열흘만이라도 시험적으로 한 번 해보자고 졸랐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뜻을 세우면 길이 열립니다. 하나님께서 감독자의 마음을 감동시켜 주셨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이 책임지시고 선한 길로 인도해 주신 것입니다. 다니엘은 우상제물인 왕의 진미로 자기를 더럽히지 아니하여도 되었습니다.

    또한 외국인인 다니엘이 왕의 사랑을 받고 총리로 발탁이 되고 재주가 탁월하니 시기하는 사람도 많았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하든지 다니엘을 숙청하려고 온갖 궤계를 다 꾸밉니다. 다니엘이 하루에 세 차례씩 예루살렘을 향한 창문을 열어 놓고 기도하는 것을 빌미로 다니엘을 해치고자 했습니다. 그래서 메대 사람 다리오가 왕이 되었을 때에 시기하는 사람들은 왕을 부추겨서 이상한 법령을 만들었습니다. 앞으로 30일 동안에 누구든지 왕 이외에 어떤 신에게나 다른 사람에게 무엇을 구하면, 사자 굴에 집어넣는다는 것이었습니다. 다니엘을 해치기 위해서 만든 악법이었습니다. 왕도 이 사실을 모르고 도장을 찍은 것입니다.

    다니엘이 어떻게 했습니까? 이런 악법이 있음을 알면서도 다니엘은 전에 하던 대로 하루에 세 번씩 창문을 열어 놓고 기도하는 것을 멈추지 아니하였습니다. 사자굴 속에 던져진다 해도 그는 하나님께 기도하는 일을 멈추지 아니하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자기의 신앙의 절개를 지키기 위해서, 믿음의 순결을 지키기 위해서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결국 다니엘은 사자 굴에 떨어지는 신세가 되고 말았습니다. 다니엘이 어떻게 되었습니까? 굶주린 사자의 입을 봉하여 주심으로 다니엘의 몸이 상하지 아니하도록 보호하여 주신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단3:1-18)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고난은 잠깐입니다. 그러나 영광은 무한합니다. 잠시잠깐의 고난을 이기지 못하고 믿음의 순결을 꺾어버리고 포기하면 두고두고 후회하게 됩니다. 우리 대선의 성도들은 다니엘처럼 말씀대로 살려고 뜻을 정하신 후에 어떤 일이 있어도 뜻을 굽히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3. 끝으로 생각할 것은 다니엘이 받은 은혜입니다.

    9절 말씀을 함께 보시겠습니다. “하나님이 다니엘로 환관장에게 은혜와 긍휼을 얻게 하신지라.”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그리고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자기의 몸을 우상의 제물로 더럽히지 않으려고 뜻을 정하였을 때에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푸시고 긍휼을 얻게 하여 주신 줄 믿습니다.

    다니엘은 뜻을 굽히지 않고 자신들을 시험해 보라고 요청했을 때에 하나님은 감독자의 마음을 움직이셨습니다. 열흘 동안 시험을 했습니다. 그 결과가 어떻게 되었습니까? 기름진 우상의 제물을 먹은 사람들 보다 다니엘과 그 친구들이 더 건강하고 더 아름다워졌습니다. 15절을 함께 읽도록 하시겠습니다. “열흘 후에 그들의 얼굴이 더욱 아름답고 살이 더욱 윤택하여 왕의 진미를 먹는 모든 소년보다 나아 보인지라”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합니까? 진미와 포도주보다도 채식과 물이 건강식품이어서 그렇습니까? 콜레스테롤 수치가 낮아서 그렇습니까? 다이어트 식품이라서 그렇습니까? 아닙니다. 이유는 한 가지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이 축복하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은혜와 긍휼을 베풀어 주셨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주님의 교회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뜻을 정하면 하나님께서 어떤 방법을 사용하든지, 또는 어떤 사람을 통해서라도 은혜를 베푸시고, 긍휼을 베푸시는 줄 믿습니다.

    또 17절 말씀을 함께 읽으시겠습니다. “하나님이 이 네 소년에게 지식을 얻게 하시며 모든 학문과 재주에 명철하게 하신 외에 다니엘은 또 모든 이상과 몽조를 깨달아 알더라.” 3년의 교육기간이 모두 끝났습니다. 다니엘과 세 친구의 학문은 다른 소년들보다도 뛰어났습니다. 그 일이 어떻게 가능합니까? 이렇게 뜻을 정하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살겠다는 이들을 하나님께서 은혜를 주시고 축복하셨기 때문인 줄 믿습니다. 신앙의 절개를 지키기 위해서 뜻을 정하고 그 뜻을 굽히지 않았던 다니엘을 하나님은 축복해 주신 것입니다. 뜻을 정하고 그 뜻을 굽히지 아니하면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고, 그 걸음을 인도하여 주신다는 것을 오늘 확신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모쪼록 말씀을 맺으면서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은 우상이 들끓는 바벨론 시대의 문화와 같은 시대입니다. 죄악의 물결이 홍수를 이루고 있습니다. 이러한 때일수록 하나님의 말씀 안에 굳게 서서 온갖 죄악의 유혹을 이겨야 하겠습니다. 특별히 이번 주간은 한가위 중추절을 맞이하게 됩니다. 먹고 마시는 문제 때문에 우리의 몸과 마음을 더럽히지 않게 되기를 바랍니다. 혹 부득이하게 제사 문제 때문에 핍박을 당할지라도 하나님의 말씀이 생각나기를 바랍니다. 다니엘을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고난은 잠깐이지만 받을 영광은 무한합니다. 부디 다니엘의 결단이 우리의 결단이 되기를 바랍니다. 부디 하나님께서 다니엘에게 베풀어 주셨던 은혜와 긍휼을 우리에게도 베풀어 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뜻을 정한 다니엘(다니엘 1:8~16)

    미국의 풍자 문학가인 마크 트레인이 쓴 소설 중에 왕자와 거지라는 소설이 있습니다. 17세기 영국런던의 어느 가정에 두 아이가 태아 납니다. 한 아이는 아주 허름한 빈민의 집에 태어납니다. 톰 캔디라는 아이인데 이 아이는 자라서 소매치기가 되고 거지가 됩니다. 한 아이는 그 당시 영국왕의 아들로 태어난 에드워드라는 아이입니다. 이 아이들이 우연한 기회에 만나게 됩니다. 이 거지인 톰이 소매치기를 하고 도망간다는 것이 왕국으로 들어가 버렸습니다. 깜짝 놀라서 숨을 곳을 찾다가 왕자 에드워드의 방으로 들어갔습니다. 걸인 소년과 왕자는 서로 마음이 맞았습니다.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서로를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이 걸인 소년은 “나는 아이스크림을 한번 실 컷 먹어봤으면 좋겠어! 좀 좋은 침대에서 자봤으면 좋겠어.” 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왕자는 거지가 부럽다고 했습니다. “너는 가고 싶은 곳을 마음껏 다닐 수 있잖아. 나는 왕궁에 갇혀서 가고 싶은데도 갈수도 없다. 답답해서 못살겠다.”고 했습니다. 장난기가 발동해서 서로 옷을 바꾸어 입기로 했습니다. 왕자는 거지행세를 하고 거지는 왕자 행세를 했습니다. 거지가 된 왕자는 거지 옷을 입고 궁 밖으로 나갔습니다. 왕자 옷을 입은 거지는 궁에서 생활을 했습니다.

    여러분 신나는 일입니다. 여러분이 보시기에는 누가 더 힘들겠습니까? 우리의 생각에는 “ 거지가 된 왕자가 더 힘들겠지?”라고 생각을 합니다. 다른 사람은 “왕자가 된 거지가 힘들거야.” 이렇게 대답할 것입니다. 문제는 왕자가 된 거지입니다. 밖에서는 아무렇게나 생활을 했는데 손을 씻어야 됩니다. 예의를 지켜야 됩니다. 공부를 해야 됩니다. 시간대로 규칙적으로 생활을 해야 됩니다. 보통 복잡한 것이 아닙니다. 저는 이 이야기를 생각할 때마다 이것이 우리 그리스도인들과 똑 같다고 생각 할 때가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도 죄의 종으로 살았습니다. 세상 적으로 이야기를 하면 신분적으로 거지와 같은 존재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예수님을 만나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왕자가 된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베드로전서 2장을 보면 “오직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이요, 거룩한 나라요.”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우리의 신분이 달라졌습니다. 이제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다고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여기에 있습니다. 왕자가 되었고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지만 과거의 습관이 우리에게 남아있다는 것입니다.

    집사가 되었지만 아직도 술집 앞을 지날 때면 목이 칼칼한 것입니다. 옛날 먹던 습관이 남아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지만 과거의 언어, 과거의 생각을 가지고 살아가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이건 왕자가 된 거지도 마찬가지입니다. 자기의 과거를 빨리 잊어버리고 새로운 생활의 적응해야 되는데 적응이 힘든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날마다 말씀과 기도의 훈련을 해야 될 필요성이 있습니다.

    여러분 이 왕자의 삶이나 그리스도인의 삶이나 아무렇게나 살 수 없습니다. 과거의 본능이나 하고 싶은 데로 살수가 없습니다. 사람들은 자신의 행동을 무엇으로 결정할까요? 대부분의 사람들은 유행을 따라 삽니다. 누가 치마를 미니 스커트를 입으면 미니스커트를 입고, 롱 커트를 하면 롱 커트를 하는 것입니다. 누가 부동산 투기를 통해서 돈을 벌었다고 하면 나도 해야지 하며, 유행과 세속주의를 따라 갑니다. 또 한 부류는 집단의식에 끌려갑니다. 사람을 나눌 때 내편을 나눕니다. 네 가 아군이냐 적이냐를 나누는 것이죠. 그래서 그 사람이 내 그룹에 속하면 아무리 틀려도 옳은 것입니다. 상대가 아무리 옳은 말을 해도 내편이 아니면 틀린 것입니다. 꼭 정치인들의 모습 같습니다. 그룹의식, 갱 의식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사람을 만나면 어디 출신이냐? 어느 학교 출신이냐? 를 묻습니다. 이것도 저속한 문화입니다. 또 다른 사람들은 자기의 행동을 자신의 이익에 둡니다. 이러한 사람들은 나에게 이익이 돌아와야 합니다. 교회 봉사도 이익을 따집니다. 손해 볼 것 같으면 하지 않습니다. “나는 못합니다. 그런 것” 딱 잡아뗍니다. 가려서 합니다. 나에게 조금이라도 이익이 되어야 합니다. 이런 분들은 물질에 대해서 아주 사리가 밝습니다. 때로는 물질의 노예가 되어서 따라 갈 때가 많습니다. 이익이냐 손해냐 그것이 판단의 기준입니다.

    좀 더 성숙한 사람들은 이것이 선이냐 악이냐에 따라 행동합니다. 남들이 다 틀렸다고 하더라도 이것이 선이고 정의이면 따르는 것입니다. 아브라함 링컨 같은 사람입니다. 흑인들을 노예로 불이는 것 이것은 악이라고 생각하고 그 악과 싸웁니다. 동족 간에 남북이 전쟁을 하더라도 선을 지키기 위해서, 정의를 위해서 행동합니다. 좀 더 발전된  분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행동의 기준이 어디에 있습니까? 우리의 기준은 하나님의 뜻이냐 아니냐에 있습니다. 우리가 무슨 일을 기준할 때 거기에 따라야 합니다. 때로는 손해가 되도 하나님의 뜻이면 따라야 합니다. 내 모든 가족이 반대해도 하나님의 뜻이면 나 혼자라도 그 길을 가야 합니다. 로마서 12장 1절에 보면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라.” 하나님의 선하시고 온전하신 뜻을 물어야 합니다. 누가 의견을 이야기 하느냐? 누가 주장하느냐? 이것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뜻이냐? 아니냐? 로 결정을 합니다. 이런 하나님의 뜻을 쫒아 살았던 사람이 성경에 나옵니다.

    누구입니까? 바로 다니엘입니다. 다니엘은 뜻을 정하였다고 오늘 본문은 말하고 있습니다. 다니엘은 주전 7C 에 남 왕국 유다 출신입니다. 그 당시 남 왕국 유다는 18대 여호야김이라는 왕이 다스리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은 친 애굽 정책을 펴고 있었습니다. 그당시 바벨론과 애굽이 전쟁을 하고 있었습니다. 유명한 갈그미스 전투를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전쟁에 바벨론이 승리했습니다. 애굽을 후원하던 유다가 미움을 샀습니다. 바벨론은 많은 군사들을 데리고 와서 예루살렘 성을 함락시켰습니다. 바벨론은 예루살렘 성에 살고 있던 왕족들과 귀족들, 성경에 보니 흠 없고 잘생기고 똑똑한 소년들을 데리고 갔습니다. 유대인들이 반란을 일으키는 것을 막기 위해 똑똑한 사람들을 다 데려가서 자기 사람들을 만들어 버린 것입니다. 또 하나는 바벨론에 인재들이 많이 필요하니까 똑똑한 사람들을 데리고 가서 자신의 신하로 만들어 버린 것입니다. 또 다른 이유는 똑똑한 사람들을 데리고 가서 유대인들을 바벨론화하기 위해서 이었습니다.

    여기에 다니엘과 세 친구들도 포로로 끌려가게 되었습니다. 그가 원하던 환경이 아니었습니다. 불행이 그의 앞에 다가 온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결코 불행하다고 주저앉지 않았습니다. 포로로 끌려 왔지만 바벨론의 느부갓네살 왕은 그들을 왕궁으로 불러 들였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이름을 바꾸고, 왕이 먹는 음식을 먹이고, 왕이 입는 옷을 입혔습니다. 이름을 바꾼다는 것은 그들의 정체성을 변질하기 위해서입니다. 다니엘의 엘은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벨드사살에 벨드는 바벨론의 우상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특혜를 베풀고 맛있는 음식과 좋은 환경을 제공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젊은이들을 회유시키는 하나의 전략입니다.

    역사 속에서 그리스도인들이 견디기 어려웠던 것이 무엇일까요? 고난과 핍박일까요? 그런데 그럴 때면 그리스도인들이 신앙으로 무장해서 더 잘 이겨내고 순교도 불사했습니다. 그런데 잘 해주고 회유하고 친절하게 해주고 늘어지게 잠자게 해주면 하나같이 신앙이 병들어 버린 것입니다. 다 세속주의에 물든 것입니다. 어찌 보면 지금 그것을 노리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왕의 진미와 포도주를 먹게 했습니다. 그런데 왕의 진미와 포도주는 다니엘이 놓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 진미는 우상에게 드린 것입니다. 그 당시 유대인의 율법은 우상에게 드린 음식을 먹을 수 없는 것입니다.  엷은 포도주는 마셔도 독주는 마실 수 없는 것입니다. 여기에 다니엘의 갈등이 주어집니다. 바벨론은 포로 생활 중에서도 바벨론의 총리가 되었습니다. 놀랍게도 왕과 나라가 계속 바뀌었지만 그는 계속 총리였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그만큼 훌륭하고 총명하고 인격이 뛰어났던 것입니다.

    포로 생활 중에 다니엘이 총리가 되는 놀라운 승리를 경험할 수 있었던 비결은 무엇이었을까요? 어떻게 인생의 변화가 가능했을까요?

    첫째는 그가 뜻을 정하였다는 것입니다.

    본문 8절을 한번 읽어 보도록 하겠습니다. “다니엘은 뜻을 정하여 왕의 진미와 그의 마시는 포도주로 자기를 더럽히지 아니하리라 하고 자기를 더럽히지 않게 하기를 환관장에게 구하니.” 다니엘은 뜻을 정했습니다. 어떤 뜻을 정했습니까? 더러운 우상 제물로 자신의 몸을 더럽히지 않기로 뜻을 정했습니다. 다시 말하면 자기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살기로 다짐을 했습니다. 고린도 전서 10장 31절에서처럼 먹든지 마시던지 무엇을 하던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하기로 뜻을 정했습니다. 인생의 위대한 일을 한 사람은 분명한 뜻을 정해야 합니다. 뜻을 정한다는 것은 내 인생의 가치관을 정하는 것입니다. 내 인생의 가치관을 정하는 것입니다. 내 인생의 목적을 정하는 것입니다. 뜻을 정하면 뜻을 정한 곳에 길이 있습니다. 포로 소년에게 이런 특혜와 환대가 주어지면 얼마나 고마웠겠습니까? 그러나 다니엘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이 우상 제물에 손을 대지 않겠다는 뜻을 정하는 것입니다.

    뜻을 정한다는 것은 우리의 인생의 목적을 정한다는 것과 똑 같습니다. 그래서 우리 선배들은 독립운동을 하려고 뜻을 정하는 분이 있고, 나라를 위해서 뜻을 정하는 분이 있습니다. 뜻을 정한다는 것은 인생의 목적을 정하는 것입니다. 뜻이 있는 사람들은 당황하지 않습니다. 운전을 하다보면 갈림길에서 이리 갈까? 저리 갈까? 고민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여러분 인생에 분명한 비전과 목적이 없다면 그는 방황하게 됩니다.

    이사야 49장에 보면 “내가 헛되어 수고 하였으며 무익히 공연히 내 힘을 다하였다 하였도다”라고 하였습니다. 목적이 분명하지 않으면 힘만 낭비하게 됩니다. 가야 할 방향이 분명한 사람은 옆눈길을 돌리지 않습니다. 오직 목표만 향해서 나아가기 때문입니다. 목적이 있는 것입니다. 내가 살아야 하는 이유가 존재하는 것입니다. 또한 그는 그의 일에 집중하게 됩니다.

    사도바울도 빌립보 3장에 “형제들아 아직 나는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 쫒아가노라.” 라고 했습니다. 초점이 맞추어진 삶입니다. 초점을 맞춘다는 것은 중요합니다. 어떤 목적을 두고 그곳에 온 마음과 정신과 시간과 물질을 맞추면 강력한 힘이 들어 납니다. 우리가 안경을 쓸 때 초점이 맞지 않으면 사물이 흐릿하게 보입니다. 그러나 초점이 맞으면 잘 보이게 됩니다. 우리의 인생도 그렇습니다. 뜻을 정한 사람 목표가 분명한 사람은 위대한 일에 쓰임을 받습니다. 

    여러분 다윗을 보십시오. 사도행전 13장 36절을 보면 “다윗은 당시 하나님의 뜻을 쫒아 섬기다가 잠들었다.”고 합니다. 그는 하나님의 뜻을 쫒아 섬기는 사람이었습니다. 에베소서 5장 7절에 보니 “그러므로 어리석은 자가 되지 말고 오직 주의 뜻이 무엇인가 이해하라.”고 합니다. 너희를 향한 하나님의 뜻이 어디 있는가를 분별하는 사람이 지혜로운 사람입니다.

    예수님도 하나님의 뜻을 물었습니다. 누가복음 22장 예수님도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할 때 “아버지여 만일 아버지의 뜻이거든 이 잔을 내게서 옮겨 주옵소서. 그러나 내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그 말은 아버지의 뜻대로 하라는 의미입니다. 예수님도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아갔습니다.

    얼마 전에 우리가 목적이 이끄는 40일 캠페인을 했습니다. 그 첫 번째 주제가 무엇입니까? “우리는 하나님의 기쁨을 위해서 준비되었다 입니다.” 정말 내 인생이 하나님께 기쁨을 드리고 영광을 드리는 삶을 살고 있느냐는 것입니다. 그곳에 우리 인생의 목적이 있습니다. 특별히 다니엘 당시의 음식 문화속에서는 어떤 사람이 주는 음식을 먹는다는 것은 그 상을 차려주는 주인에게 내가 복종한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애굽의 바로가 주는 빵과 고기 덩어리를 떠날 때 그들이 독립이 되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입니다. 바로가 주는 그 고기와 떡에 관심을 가지고 있다면 그들은 여전히 애굽의 노예로 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들이 그것을 떠나고 돌아설 때 그리고 광야에서 하나님이 주시는 메추라기와 만나를 먹을 때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다니엘은 그것을 거부한 것입니다. 다니엘은 그래서 바벨론이 주는 음식을 거부하고 하나님의 땅에서 나는 채소를 먹겠다는 것입니다.

    단지 밥 한끼를 먹고 먹지 않겠다는 것이 아니라 그곳에는 깊은 신앙적인 고백이 있습니다. 그는 하나님을 내 주인으로 내 삶의 구주로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보면 모든 것이 그렇습니다. 우리가 주일날 예배드리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시간의 주인은 바로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과의 약속을 지키지 못하고 다른 일에 분주하다면 그것은 우리가 세상의 노예가 된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가 약속된 시간에 하나님을 예배한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나의 주인이라는 신앙의 고백이 담겨있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서 물질의 문제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열의 하나를 드리는 십일조는 어떤 의미가 있습니까? 그것은 하나님이 물질의 주인이라는 의미입니다. 열의 하나를 돌려드린다는 것은 이 물질은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라는 고백입니다. 이 물질의 주인이 하나님이라는 것입니다. 다시생각하면 내 삶의 주인이 하나님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내 인생의 주인으로 고백하는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새해를 시작하면서 뜻을 정하였으면 좋겠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사는 것입니다. 먹는 문제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사는 것입니다. 시간을 지키는 문제, 물질의 노예가 되지 말고 하나님을 위해서 이 물질을 드릴 수 있는 신앙의 고백이 중요한 것입니다. 여러분이 아름다운 뜻을 정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두 번째 다니엘이 이렇게 변화된 삶을 위해서는 직접 행동했다는 사실입니다.

    뜻만 정하고 행동으로 옮기지 않으면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생각은 많이 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누워서 머릿속에서 고래 등 같은 집을 열채를 지었다 부수었다합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한 채도 짓지를 못합니다. 행동하는 신앙이 진정 변화를 경험 할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요단강을 건너려고 할 때 요단강은 그때가 추수철이었기에 물이 많이 흘렀습니다. 그들이 요단강 물에 발을 담그는 순간 물이 줄어들고 마른 땅같이 되었습니다. 만약 그들이 물이 줄어들기를 기다렸다면 그들은 결코 그 강을 건널 수 없었습니다. 하나님이 약속하시는 것을 믿고 행동했을 때 그들은 가나안에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여러분들이 행동하는 신앙, 실천하는 신앙인이 되시기 바랍니다.

    내일부터는 이렇게 해야지, 내년부터는 이렇게 해야지 생각하는 것만으로 충분하지 못합니다. 당장 오늘부터 실천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얼마나 많은 좋은 생각들이 실천되지 못하고 머릿속에만 머무는지 모릅니다. 왜냐하면 행동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믿는 대로 행동하는 것이 신앙의 능력입니다. 오늘 다니엘은 자기가 믿는 대로 뜻을 새운 데로 행동했습니다. 그는 환관장에게 가서 “나는 이것을 먹을 수 없습니다.” 라고 행동했습니다. 신앙은 믿는 대로 행동하는 것입니다.

    어떤 유수한 은행에서 아주 요직에 부장 한명을 특채했습니다. 부장을 특채해서 환영회를 하는 시간에 전무가 술을 한잔 따라서 부장에게 권하는 것입니다. 그때 부장이 “나는 그리스도인이기에 술을 먹지 않습니다.” 라고 했습니다. 그러자 전무가 화를 내면서 “옆에 있는 이 상무는 장로야. 장로는 술을 얼마나 잘 먹는데. 당신은 집사도 아닌 것이 술을 안 먹어.”라고 했습니다. “누가 그렇다고 하는 것과 나와는 상관없고 나는 그리스도인이기에 술을 먹지 않습니다.”라고 했습니다. 분위기가 썰렁해졌습니다. 옆에 있던 총재가 “내가 주는 술은 거절하지 않겠지?” 다시 술을 따라 주었습니다. 부장이 “주시는 것은 자유이지만 저는 양심상 이것만은 하지 않겠습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다른 사람들이 저 부장 오래 일하기 힘들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총재의 안색이 변하더니 한마디를 하는 것입니다. “자내가 진짜네. 나는 자네를 신뢰하겠어. 내가 예수 믿는 많은 사람들을 받는데 당신이 진짜네.” 라고 했습니다.  그 후부터 이 총재는 중요한 일이 있으면 이 부장을 불러서 상의를 했습니다. 왜냐하면 그 사람은 신앙 양심을 가지고 정직하게 행동하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 은행에 중직에 오르고 총재의 신임을 많이 받았다고 합니다.

    오늘 많은 사람들이 거꾸로 생각합니다. 예수 믿는 것이 사회생활을 하는데 방해된다고 생각합니다. 여러분이 정말 전능하신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십시오. 여러분이 그리스도인이라는 것을 선언하시고 공개하시기 바랍니다. 그것이 잘 되는 일입니다. 그것이 승리하는 길입니다. 숨기고 다니는 것은 참 어리석은 일입니다. 그는 행동에 옮겼습니다. 그리고 다니엘은 하나님을 신뢰하였습니다. 그런데 이제 다니엘은 자기들을 관리하는 감독관에게 가서 요구합니다. “내가 환관장에게 요구를 했더니 왕이 보고 우리 얼굴이 초췌해 지면 자기가 위험할까봐 허락하지 못한다고 하는데 내가 감독관에게 다시 말씀드립니다. 열흘 동안만 저희가 채식을 하게 해주세요. 열흘 후에 우리 얼굴이 초췌하면 왕의 진미를 먹겠습니다. 그러나 저희 얼굴에 윤기가 흐르면 저희를 그냥 채식을 먹게 해주세요.” 그렇게 허락을 받았습니다. 그렇게 실험을 했는데 어떤 결과가 있었나요.

    성경 14절-16절을 보겠습니다. “그가 그들의 말을 좇아 열흘을 시험하더니 열흘 후에 그들의 얼굴이 더욱 아름답고 살이 더욱 윤택하여 왕의 진미를 먹는 모든 소년보다 나아 보인지라 이러므로 감독하는 자가 그들에게 분정된 진미와 마실 포도주를 제하고 채식을 주니라.”여러분 보세요. 열흘 동안 채식만 했는데 오히려 그들의 얼굴이 건강하고 윤기가 나고 아름다워 보였던 것입니다. 어떻게 이런 실험을 할 수 있었을까요? 하나님을 신뢰하였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축복의 하나님이시고 믿는 자에게 은혜를 주시는 분임을 알았기 때문에 이런 도전을 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다니엘 3장을 보면 왕이 금 신상을 만들어 놓고 절하게 합니다. 그러나 다니엘의 세친구들은 이것을 거절합니다. 그래서 그들은 칠배나 뜨거운 풀무불에 던저지게 됩니다. 그들은 말합니다. “우리가 던저질지라도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실 것이고 비록 그리 아니 하실지라도 우리는 우상에게 절할 수 없다.”고 했습니다. 결국 어떻게 되었습니까? 하나님이 천사를 보내셔서 그들을 풀무불에 머리털 하나 상하지 않게 하셨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정말 하나님을 믿는다면 믿는 대로 행동하라는 것입니다. 그곳에 신앙의 진가가 있습니다. 그 후로 다니엘 총리를 시기하는 자들이 그를 모함해서 왕 외에 다른 누구에게 기도하는 사람은 사자굴에 던져 넣기로 조서를 썼습니다. 다리오왕은 그것을 알지 못하고 도장을 찍었습니다. 다니엘은 사자굴에 던져지지만은 하나님은 사자들의 입을 막으셨습니다. 그 다음날 다니엘을 모함하던 무리들이 다 사자굴에 던져졌습니다.

    여러분 진정으로 하나님을 믿는 것은 무엇입니까?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이야기합니다. “주일날 문 닫으면 장사 안 되는데?” 가게의 문을 닫고 주일날 봉사하는 사람들 보면 금요일 토요일 하나님이 다 채워 주시는 것을 보았습니다. 걱정하지 마세요. “아유 목사님 지금도 부족한데 십일조하면 우리 다 굶어 죽어요.”라고 말합니다. 그럼 한번 해보세요. 진짜 굶어 죽는지. 그래도 망하게 되면 오세요. 돌려 드릴게요. 신앙은 시험해 보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렇게 말하십니다. “너희가 나를 시험해보라. 너희가 온전한 십일조를 내게 들여서 내 창고에 양식이 있게 하라. 그것 때문에 내가 너를 쌓을 곳이 없도록 붙지 아니하나 나를 시험해 보라.”고 말라기 3장 8절 이하에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어떤 신앙을 가지기 원하십니까?

    하나님은 오늘 말씀하시는 진정한 다니엘의 충성스러운 신앙을 우리가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어떤 교회 고등학생이 주일이면 열심히 교회에서 봉사를 합니다. 새벽부터 저녁까지 봉사를 하니까 늘 집에 돌아가면 늦게 됩니다. 그런데 이아이가 고3이 되었습니다. 아버지가 교회를 나오지 않았기 때문에 아들을 이해를 못합니다. 가끔 술을 먹으면 술에 취해서 목사님께 전화를 해서 “우리 아이 잡아먹으려고 하십니까? 고3이 교회만 가서 살면 대학은 누가 붙여줍니까?”하고 말을 했습니다. 아이가 이 사실을 알고 왜 목사님께 전화 하냐고 반문을 합니다. 아버지가 “야 이놈아! 네가 우리 집 장남인데 대학도 못 들어가면 어떻게 하냐?”라고 말을 합니다. 이 아이가 기도를 하다가 이런 결정을 내렸습니다. “아버지 저하고 약속을 하십시다. 제가 주일날은 마음대로 교회에 봉사하고 예배하게 해주세요. 대신 월요일에서 토요일까지 열심히 공부하겠습니다. 두 달 동안만 시험해 보셔서 제가 성적이 떨어지면 제가 교회를 끊겠습니다. 만약 성적이 올라가면 저의 예배를 방해하지 마세요.” 이 아이가 주일날은 열심히 봉사를 합니다. 그리고 그 학교는 매일 시험을 보는데 월요일은 주일날 공부를 못했기 때문에 15등으로 떨어집니다. 그런데 화요일은 12등, 수요일은 10등, 목요일은 7등, 나중에 토요일은 1등으로 올라가는 것입니다. 나중에 두 달 후에는 전교에서 1등을 하는 것입니다. 집중력을 가지고 기도하고 열심히 공부할 때 하나님은 그에게 곱절의 은혜를 주십니다. 하나님을 믿고 신뢰하는 자에게 하나님은 복을 주십니다.

    오늘 본문 말씀 17절 말씀을 보겠습니다. “하나님이 이 네 소년에게 지식을 얻게 하시며 모든 학문과 재주에 명철하게 하신 외에 다니엘은 또 모든 이상과 몽조를 깨달아 알더라.” 하나님이 복을 주시는 학문과 재주에 명철을 주셨습니다. 그것만이 아닙니다. 20절 말씀 “왕이 그들에게 모든 일을 묻는 중에 그 지혜와 총명이 온 나라 박수보다 십배나 나으니라.” 하나님이 지혜와 총명을 주는데 다른 박사들보다 10배나 총명하게 하신 것입니다. 이것이 다니엘을 향한 하나님의 축복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한해를 시작하면서 뜻을 새워보시기 바랍니다.
    “올해는 내가 정결한 삶을 살겠다.” “믿는 자의 합당한 삶을 살겠다.” “내가 하나님과 약속한 예배시간을 지키겠다.” “내가 주일 성수를 하겠다.” “내가 온전히 십일조 생활을 하겠다.” 한번 뜻을 새워보시기 바랍니다. 뜻을 새우면 길을 열어주시고 하나님의 축복이 그곳에 임할 줄로 믿습니다. 여러분 거지로 사시겠습니까? 왕자로 사시겠습니까? 여러분 거지의 신분을 벋어 버리세요. 하나님의 자녀의 왕자의 생각을 하세요. 왕자처럼 생각하시고, 왕자처럼 말하시고, 왕자처럼 걸어가시고, 왕자처럼 품위 있게 사세요. 그렇게 할 때 하나님의 축복이 그곳에 임하실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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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유다의 멸망과 바벨론의 1차 2차 3차 4차 포로의 역사  

    이스라엘은 북방 강대국 앗수르와 바벨론, 남방 강대국 애굽 사이에 낀 약소 국가였습니다. 
    남 유다의 제 16대 왕 요시야 당시는 세계 최강국이던 앗수르가 쇠퇴기에 접어들었고, 
    바벨론이 신흥 세력으로 부상하고 있었습니다.

    1. 므깃도 전투와 갈그미스 전투

    애굽은 앗수르를 도와 바벨론의 남하를 막기 위하여 갈그미스에서 바벨론과 싸우려고 하였습니다. 
    애굽 왕 느고는 갈그미스로 가기 위해 팔레스타인 지역을 통과해야 했는데, 
    이때 반 앗수르 입장이었던 요시야 왕은 북진하는 애굽과 전쟁을 하게 되었습니다.

    애굽 왕 느고는 사자를 보내어 화친을 요청하며, 
    이 일은 하나님의 명령이고 자신이 싸우려는 대상은 요시야 왕이 아님을 분명히 했습니다(대하 35:21). 
    그러나 요시야 왕은 듣지 않고 변장까지 하면서 전쟁터에 남기를 고집하였습니다(대하 35:21-22). 
    전쟁터에서 애굽의 궁수가 쏜 화살에 중상을 입은 요시야는 예루살렘에 돌아와 죽고 말았습니다(대하 35:23).

    요시야는 종교 개혁을 통해 영적 내리막길로 곤두박질하던 남 유다에 일시적으로나마 제동을 걸었지만, 
    요시야가 죽은 이후 남 유다의 국운이 갑자기 쇠약해지고 순식간에 멸망의 길로 치닫게 되었습니다.

    ​이후 애굽과 바벨론이 맞서는데, 이것이 갈그미스 전투(주전 605년)입니다. 
    이 전투에서 승리한 바벨론은 당시 근동 지방을 장악하였고, 
    애굽은 다시 일어나지 못했습니다(왕하 24:7).

    바벨론의 느부갓네살 왕갈그미스 전투에서 승리한 후, 
    아프리카 대륙과 근동 아시아 지역을 잇는 전략적 요충지인 남 유다 왕국마저 정복하기 위하여 예루살렘을 공격하였고, 
    3차에 걸쳐 유다 왕과 백성들을 바벨론으로 끌고 갔습니다.

    3차에 걸친 바벨론 포로의 과정은 성전 파괴의 과정과 다름없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바벨론을 들어서 가장 아끼는 성전을 파괴하심으로써 이스라엘을 철저하게 징계하셨습니다(왕상 9:7-9).

    바벨론 제1차 포로

    1. 포로 시기 – 주전 605년 / 여호야김 제 3(혹은 4)년, 느부갓네살 원년

    이때는 여호야김 왕 제 3년(단 1:1)이었습니다. 
    그런데 예레미야 46:2은 이때를 여호야김 4년이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두 기록에 1년 차이가 나는 이유는 열왕기하 23:34을 통해 해명할 수 있습니다. 

    열왕기 기자는 여호야김이 그의 동생 여호아하스를 대신하여 왕이 되었다고 기록하지 않고, 
    여호야김이 그의 아버지 요시야를 대신하여 왕이 되었다고 기록하였습니다. 

    역사적으로는 요시야(주전 640-609b년), 여호아하스(주전 609b-608년), 여호야김(주전 608-597년) 순으로 왕이 되었지만(왕하 23:3-0, 34, 대하 36:1-4), 요시야 다음에 바로 여호야김이 왕이 된 것처럼 기술한 것은, 
    3개월의 짧은 통치 기간 동안 악을 일삼았던 여호아하스를 왕으로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왕하 23:31-32). 
    이러한 관점에 따르면 제 1차 바벨론 포로로 끌려간 주전 605년여호야김 제 4년이 되는 것입니다.

    2. 포로 대상과 당시 상황

    제 1차 바벨론 포로 때에는 다니엘을 포함한 왕족과 귀족들이 끌려갔습니다(단 1:3). 
    여호야김은 처음 3년은 바벨론을 섬기다가 다시 애굽과 동맹하여 반(反)바벨론 정책을 펼쳤고(왕하 24:1), 
    주전 602년 쇠사슬로 결박당하여 바벨론으로 끌려갔으며 성전 기구들을 약탈당하였습니다(왕하 24:2, 단 1:1-2, 5:2).

    바벨론 제2차 포로

    1. 포로 시기 – 주전 597년 / 여호야긴 즉위년, 느부갓네살 8년

    여호야긴주전 597년에 즉위하여 3개월 10일을 통치하고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갔습니다(왕하 24:8-12, 대하 36:9-10). 
    바벨론 역대기에 따르면, 티쉬리월(7월)로 시작되는 달력을 기준할 때 여호야긴이 왕이 딘 것은 주전 597년 불월(8월)이며, 3개월 10일이 지나 왕위에서 쫓겨난 것은 주전 597년 아달월(12월) 2일입니다. 
    바벨론이 예루살렘을 포위한 후 얼마 동안의 시간이 경과한 다음에(왕하 24:10-11) 느부갓네살 왕이 예루살렘 성에 이르러 주전 597년 아달월(12월) 2일에 마침내 예루살렘 성을 점령한 것입니다. 

    이때 왕위에서 쫓겨난 여호야긴은 주전 597년* 니산월(1월) 10일에 바벨론으로 끌려가게 됩니다(대하 36:10). 
    * 남유다 통치 연도는 티쉬리월 기준이므로 해가 바뀌지 않음.

    2. 포로 대상과 당시 상황

    바벨론은 여호와 전의 모든 보물과 왕궁 보물을 집어내었으며 또 이스라엘 왕 솔로몬이 만든 것 곧 여호와의 전의 금기명을 다 훼파하였습니다(왕하 24:10-13, 대하 36:10).

    그리고 여호야긴 왕과 왕의 모친과 왕의 아내들과 내시와 나라의 권세 있는 자들이 포로로 끌려갔습니다(왕하 24:12, 15). 
    이때 용사 7천 명을 포함하여 방백과 백성 총 1만명, 그리고 공장과 대장장이 1천 명이 끌려갔는데, 그들은 모두 강장하여 싸움에 능한 자였습니다(왕하 24:14-16). 
    반란의 구심점이 될 소지가 있는 최고 지도자들과 탁월한 인물들을 모두 뽑아서 끌고 감으로 ‘빈천한 자’ 외에는 그 땅에 남은 자가 없도록하여 남 유다를 철저히 무력화 시킨 것입니다. 

    여기에는 에스겔 선지자와 에스더의 사촌 모르드개의 조상도 포함되어 있었습니다(겔 1:1-3, 에 2:5-6).

    바벨론 제3차 포로

    1. 포로 시기 – 주전 586년 / 시드기야 11년, 느부갓네살 19년

    시드기야는 바벨론에게 항복하라는 예레미야 선지자의 권면(렘 27:12)을 듣지 않고 반(反)바벨론 정책을 고집하였고(왕하 24:20, 렘 27:12-13, 37:2), 
    바벨론은 시드기야 제 9년 10월 10일부터 예루살렘을 포위하였습니다(왕하 25:1, 렘 39:1, 52:4). 
    시드기야가 애굽에 원군을 요청하여 바벨론 군대가 떠났다가 애굽 군대가 즉각 퇴각하자 다시 바벨론 군대가 예루살렘을 침공하여(렘 37:5, 11, 겔 17:15) 시드기야 11년까지 약 30개월 동안(티쉬리 기준 달력) 예루살렘 성을 에워쌌습니다(왕하 25:1-2, 대하 36:11-20, 렘 37:7-10, 겔 17:12-21). 
    마침내 주전 586년 시드기야 제 11년 4월 9일에 예루살렘 성이 함락되고 말았습니다(왕하 25:1-3, 렘 39:1-2, 52:4-6).

    2. 포로 대상과 당시 상황

    예루살렘이 포위되어 있는 동안 기근이 극심하여 자녀를 잡아먹을 정도로 비극적 참상이 빚어졌는데(애 2:20, 4:10, 사 9:20, 겔 5:10), 
    이는 모세의 예언대로(레 26:28-29, 신 28:53-57)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한 결과였습니다. 
    결국 BC 586년, 남 유다는 바벨론에 의해 완전히 멸망하였고, 예루살렘 성이 함락된 4월 9일은 유다인들에게 바벨론 유수 기간 내내 금식과 애통의 날로 지켜졌습니다(슥 7:5, 8:19).

    성이 함락되던 때 시드기야는 밤에 도망하다가 갈대아 군대에게 잡혀 하맛 땅 립나로 끌려가 바벨론 왕에게 신문을 당하였습니다. 
    바벨론 왕은 시드기야의 목전에서 그 아들들을 죽이고, 시드기야의 두 눈을 빼고 사슬로 결박하여 바벨론으로 끌어다가 죽는 날까지 옥에 가두었습니다(왕하 25:4-7, 렘 39:4-7, 52:7-11).

    ​예루살렘이 함락된 지 한 달 만인 5월 10일에 바벨론 시위대장관 느부사라단이 와서 여호와의 전과 왕궁과 예루살렘의 모든 집을 귀인의 집까지 불사르고 사면 성벽을 헐었습니다(왕하 25:8-12, 대하 36:18-19, 렘 39:8-10, 52:12-16). 
    그리고 성전의 두 놋기둥(야긴과 보아스)과 받침들과 놋바다를 깨뜨려 그 놋을 바벨론으로 가져갔고, 또 가마들, 부삽들, 불집게들, 숟가락들과 섬길 때에 쓰는 모든 놋그릇을 다 가져갔으며, 또 금물의 금과 은물의 은을 가져갔고, 솔로몬이 여호와의 전을 위하여 만든 두 기둥과 한 바다와 그 받침들을 취하였습니다(왕하 25:13-17, 대하 36:18-19, 렘 52:17-23).

    그리고 대제사장 스라야와 부제사장 스바냐와 전 문지기 세 사람을 잡고, 군사를 거느린 장관(내시) 하나와 왕의 시종 칠 인(혹은 다섯 사람)과 군대장관의 서기관 하나와 국민 육십 명을 잡아갔으며, 립나에서 그들을 쳐 죽였습니다(왕하 25:18-21, 렘 52:24-27).

    한편, 예레미야 52:28-30에는 바벨론에 항복하지 않고 끝까지 항거하다 소규모로 잡혀간 자들이 총 4,600명이 있음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제 이스라엘 민족은 포로로 끌려간 자와 고국 땅에 남겨진 자, 그리고 재난을 피하여 주변국으로 도망친 자 등으로 나뉘어, 민족 전체가 갈기갈기 찢기고 그 존재가 점점 사라지는 최악의 비극적 상황에 처하게 되었습니다.

    선민 유다 백성이 하나님 없는 이방 나라 바벨론으로 포로 되어 끌려간 것은 하나님의 진노로 말미암은 최대의 비극이요 수치였습니다. 이는 우상을 숭배하고 안식일과 안식년을 지키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고 그 거룩하신 뜻을 멸시한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징계와 진노의 표현이었습니다(대하 36:21, 참고-렘 34:8-16).

    그러나 절대로 망하지 않을 것만 같던 바벨론이 하나님의 주권 역사로 메대와 바사의 연합군에 의해 멸망하게 하시고(참고-렘 50:3, 9, 41-46장, 51장) 이스라엘 백성이 귀환하도록 하셨습니다(대하 36:22-23, 스 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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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바벨론 포로의 원인

    이스라엘 백성들이 본토 이스라엘에서 멀리 1,500km나 떨어진 바벨론 땅으로 포로가 되어 끌려간 것은, 율법적 관점에서 ‘언약의 땅에서 쫓겨나게 된 것’을 말합니다. 
    레위기에서는 이를 “땅이 그 거민을 토해내는 것”으로 말씀하고 있습니다(레 18:24-25).

    레위기 18:27-28 
    너희의 전에 있던 그 땅 거민이 이 모든 가증한 일을 행하였고
    그 땅도 더러워졌느니라 너희도 더럽히면 그 땅이 너희 있기 전 거민을 토함 같이 너희를 토할까 하노라.

    이것은 땅을 더럽히는 자가 받는 공통적인 심판의 원리로써, 출애굽 때 가나안 거민의 죄를 심판하고 그들을 토해내는 도구로 이스라엘을 사용하셨던 하나님이 이제 이스라엘의 죄를 심판하고 그들을 토해내는 도구로 바벨론을 사용하신 것입니다. 

    예레미야 2:13에서 예레미야 당시에 이스라엘 백성이 행한 근본적인 두 가지 악을 말씀하고 있는데, 이것이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가게 된 원인이었습니다. 
    첫 번째 악은 “생수의 근원 되는 하나님을 버린 것”
    두 번째 악은 “스스로 웅덩이를 판 것” 곧 다른 신을 섬기는 우상숭배의 죄를 뜻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권면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하고 경멸하며 ‘욕으로’ 여길 정도로 타락하고 말았습니다(렘 6:10). 
    그렇게 하나님을 버린 결과, 우상숭배하는 죄와 안식일‧안식년을 범하는 죄에서 돌이키지 못하고 바벨론에게 망하고 말았던 것입니다.

    1. 우상숭배의 죄

    남 유다가 망하기 직전 활동했던 예레미야 선지자는 그들의 죄를 지적하면서, 우상숭배에 대하여 여러 차례 경고하였습니다(렘 1:16-17, 5:19, 13:10, 25:6-7, 44:5-6 등). 
    당시 유다 백성들은 우상숭배에 골몰하여, 그 섬긴 우상의 수가 그들이 거한 성읍의 수와 같을 정도였습니다(렘 2:28, 11:13).



    하나님께서는 예레미야에게 힌놈의 아들의 골짜기에서 오지병을 깨뜨리게 하심으로써, 우상숭배한 범죄의 대가로 이스라엘이 반드시 패망할 것을 경고하셨다(렘 19:1-15, 참고-렘 7:30-34)

    예레미야 16:11-13 
    너는 그들에게 대답하기를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너희 열조가 나를 버리고 다른 신들을 좇아서 그들을 섬기며 그들에게 절하고 나를 버려 내 법을 지키지 아니하였음이라.
    너희가 너희 열조보다 더욱 악을 행하였도다
    보라 너희가 각기 악한 마음의 강퍅함을 따라 행하고 나를 청종치 아니하였으므로 내가 너희를 이 땅에서 쫓아내어.
    너희와 너희 열조의 알지 못하던 땅에 이르게 할 것이라
    너희가 거기서 주야로 다른 신들을 섬기리니 이는 내가 너희에게 은혜를 베풀지 아니함이라 하셨다 하라.
     

    유다의 심각한 우상숭배의 죄악을 깨우쳐 회개케 하시려고,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종 선지자들을 ‘부지런히’ 보내어 말씀을 전하셨지만 그들은 듣지 않고 무시했으며(대하 36:14-16, 렘 7:25, 25:4, 26:5, 29:19, 35:15, 44:4),  
    하나님의 실존을 불신하면서 선지자들을 거짓 선지자로 매도하고 죽이는 데 앞장섰습니다(렘 5:12-13). 
    그리고 회개할 기회를 주어도 회개치 않았습니다(렘 19:1, 10-13). 
    심지어 하나님의 성전 안에까지 우상을 갖다놓고 섬김으로써, 바벨론에 의해 성전이 파괴되기 전 이미 그들 스스로가 성전을 더럽혔던 것입니다(렘 32:34, 겔 8:1-18, 22:4).

    2. 안식일과 안식년을 이행하지 않은 죄

    1) 안식일의 불순종
    안식일 준수여부는 율법에 대한 순종과 불순종을 나누는 기준이며 축복과 저주를 가름하는 분기점입니다(렘 17:19-27). 
    이는 안식일이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거룩하게 하시는 여호와인 줄 알게 하는 영원한 표징이기 때문입니다(출 31:13, 겔 20:12, 20). 
    하나님께서는 안식일을 지키지 않으면 성문에 불을 놓아 예루살렘 궁전을 삼키게 하겠다고 예레미야를 통해 엄중하게 경고하셨는데(렘 17:27),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를 지키지 않음으로, 바벨론 포로의 직접적인 원인이 되었습니다.

    에스겔 22:8 
    “너는 나의 성물들을 업신여겼으며 나의 안식일을 더럽혔으며”

    에스겔 22:26 
    “그 제사장들은 내 율법을 범하였으며 나의 성물을 더럽혔으며 거룩함과 속된 것을 분변치 아니하였으며 부정함과 정한 것을 사람으로 분변하게 하지 아니하였으며 그 눈을 가리워 나의 안식일을 보지 아니하였으므로 내가 그 가운데서 더럽힘을 받았느니라”
      


    2) 안식년의 불순종
    안식년의 규례는 ‘제 7년에 땅을 쉬게 하라’는 것과 ‘동족 히브리 사람 종을 7년째 자유케 하라’는 내용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레 25:2-7, 신 15:12-18).

    ① 6년 동안 땅에 파종하고, 제 7년에는 그 땅을 쉬게 하라(출 23:10-11, 레 25:1-7, 26:34-35)
    이스라엘 백성은 언약의 땅 가나안에 들어간 이후로는 7년째 되는 그 해에는 그 땅에 파종해서는 안되었으며(레 25:2-4), 
    스스로 난 곡물이나 열매라 할지라도 거두지 말고 땅이 안식하도록 해야 했습니다(레 25:5). 
    그리고 안식년을 지키면 제 6년에 3년 소출을 주심으로 제 7년 안식년 뿐만 아니라 제 8년과 제 9년 까지도 부족함이 없게 해 주신다고 약속하셨습니다(레 25:21, 렘 25:22). 
    이로써 모든 것이 하나님의 것이요, 하나님으로부터 말미암는다는 사실을 알도록 하셨습니다(레 25:23).


    그러나 유다 백성들은 욕심으로 인하여 제 7년에도 파종함으로 안식년을 지키지 않았습니다. 
    이에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가게 하심으로 땅이 안식하게 하셨던 것입니다(레 26:43).

    역대하 36:21 
    “이에 토지가 황무하여 안식년을 누림 같이 안식하여 칠십년을 지내었으니 여호와께서 예레미야의 입으로 하신 말씀이 응하였더라” 

    ② 종이 동족 히브리 사람이면 6년 동안 부리다가 7년째는 자유케 하라(출 21:2-6, 신 15:12-18)
    율법에는 히브리 종인 경우 종이 된 지 7년째 되는 해에 반드시 놓아 자유하게 하도록 규정했습니다(출 21:2, 신 15:12). 
    그리고 자유의 몸이 된 종을 빈손으로 보내서는 안되며(신 15:13-14), 
    노예의 몸값을 받지 않고 조건 없이 해방시켜 주도록 규정하였습니다(출 21:2, 신 15:18).


    그러나 유다 백성들은 안식년의 규례를 어기고 종들의 자유를 빼앗았습니다(렘 34:8-14). 
    이에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바벨론에 끌려가게 하시어 그들도 자유를 빼앗기게 하셨던 것입니다. 

     예레미야 34:17 
    “그러므로 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너희가 나를 듣지 아니하고 각기 형제와 이웃에게 자유를 선언한 것을 실행치 아니하였은즉 내가 너희에게 자유를 선언하여
    너희를 칼과 염병과 기근에 붙이리라 나 여호와의 말이니라 내가 너희를 세계 열방 중에 흩어지게 할 것이며”

    유다 백성은 무수한 죄 때문에 피 흘린 성읍이 되었고, 두껍게 녹슬어 버린 가마같이 되고 말았습니다(겔 24:6). 
    하나님께서는 유다를 ‘바벨론 포로 생활 70년’이라는 풀무 속에 집어넣고, 하나님의 노와 분을 쏟아서 유다의 죄악을 정결케 하셔야만 했습니다(렘 29:10-11, 겔 22:21-22, 24:12-14).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을 바벨론에 포로로 보내셨으나, 70년이라는 긴 시간 동안 영적 암흑 상태로 방치해두지 않으시고 말씀을 보내어 철저하게 회개케 하시어 새로운 백성이 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예레미야를 통해 그들이 포로로 흩어진 상태에서도 하나님에 의해 구원 받을 수 있다는 희망의 메시지를 전하게 하셨습니다(렘 29:11-14). 
    정복자 바벨론에게 복종하고 그 땅에서 적응하며 그 역경 속에서 회개하여 정결케 됨으로써, 마침내 하나님의 정의와 구속 경륜을 확실히 깨닫고 믿게 하기 위함이었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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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차귀환

    이스라엘 백성은 주전 605년, 597년, 586년 세 차례에 걸쳐서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갔으나, 하나님께서는 무조건적인 은총을 베푸사 약속하신 대로 이스라엘 백성이 다시 예루살렘으로 돌아오도록 허락하셨습니다(렘 29:14). 이스라엘 백성의 귀환은 이사야 선지자의 예언(사44:28, 45:1-3)과 예레미야 선지자의 예언(렘 25:11-12, 29:10, 14)대로, 바사(페르시아)왕 고레스가 귀환을 허락하는 칙령을 발표함으로 시작되었습니다(대하 36:22-23, 스 1:1-4). 이때부터 바사(페르시아) 제국 각처에 흩어져 있던 유다 포로들은 포로생활을 청산하고 3차에 걸쳐 돌아오게 됩니다. 제 1차 귀환은 주전 537년에 이루어졌습니다.

    1. 귀환 목적과 시기

    (1) 목적

    바사왕 고레스는 주전 538년에 귀환 조서를 내려 “하늘의 신 여호와께서 세상 만국으로 내게 주셨고 나를 명하사 유다 예루살렘에 전을 건축하라 하셨나니 ... 너희 중에 무릇 그 백성 된 자는 다 유다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서 거기 있는 여호와의 전을 건축하라”라고 공포했습니다(스 1:2-3, 참고-대하 36:22-23). 이에 유다와 베냐민 족장들과 제사장과 레위 사람들을 비롯하여 하나님의 감동을 받아 성전을 건축하고자 하는 자들이 다 일어났습니다(스 1:5).

    하나님께서 고레스의 마음을 감동시키시어 성전 건축을 명하게 하신 것은 “여호와께서 예레미야의 입으로 하신 말씀을 응하게 하시기 위한” 것이었습니다(스 1:1). 바벨론 포로 귀환에 대하여 예레미야는 성전 회복과 그것을 통한 예배의 회복을 자세히 예언하였습니다. 이방인에게 성전이 짓밟히는 수치를 당한 것(렘 51:51)을 하나님께서 보수하시고(렘 50:28, 51:11), 다시 성전에서 제사를 드리게 될 것이라고 예언하였습니다(렘 33:10-11, 18). 바벨론에서 돌아온 귀환민들의 최우선 과제는, 성전을 재건하고 성전을 중심하여 하나님께 예배드림으로써 선민으로서의 정체성을 회복하는 것이었습니다.

    (2) 시기

    하나님께서는 예레미야 선지자를 통해 바벨론 포로 생활이 70년이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는데(렘 25:11-12, 29:10), 이에 대해 역대하 36:21에서는 “이에 토지가 황무하여 안식년을 누림같이 안식하여 칠십 년을 지내었으니 여호와께서 예레미야의 입으로 하신 말씀이 응하였더라”라고 말씀하였습니다. 이스라엘의 불순종으로 안식하지 못했던 토지가 안식년을 누림같이 안식하게 된 것입니다.

    바벨론 포로 기간 ‘70년’은 실제 포로로 잡혀 간 때와 귀환하여 성전 건축을 시작한 때를 중심으로 볼 때 말씀대로 정확히 성취되었습니다. 제 1차 포로는 여호야김 3(혹은 4)년(느부갓네살 원년), 곧 주전 605년입니다(왕하 24:1, 렘 25:1, 참고-단 1:1-2). 제 1차 포로 귀환령이 내려진 것은 고레스 원년인 주전 538년으로, 귀환조서를 내린 다음(스 1:2-3), 이 명령을 따라 얼마 동안 귀환준비를 한 유대 민족은 1년 뒤인 주전 537년 마침내 예루살렘으로 돌아오게 되었습니다(스 1:5, 11, 3:1). 그리고 성전 건축을 시작한 것은 주전 536년 2월(시브월)입니다(스 3:1, 8). 그러므로 제 1차로 바벨론에 끄렬간 주전 605년에서 성전을 짓기 시작한 주전 536년까지 햇수로 70년이 정확히 성취된 것입니다.

    2. 귀환자와 귀환 당시 상황

    (1) 귀환자

    제 1차로 귀환할 때의 지도자는 스룹바벨과 예수아(여호수아)였으며, 총 49,897명이 귀환했습니다(스2:64-66).

    귀환자

    총인원

    49,897명

    회중 42,360명 (스 2:1-64, 느 7:5-66)

    지도자 11명, 평민 15,604명(가계별), 평민 8,540명(지역별), 제사장 4,289명,

    느디님 사람과 솔로몬 신복의 자손 392명, 레위인 341명,

    종족과 계보가 불명확한 자 652명,

    계수에 포함되지 않은 사람 12,531명

    노비 7,337명 (스 2:65, 느 7:67)

    노래하는 남녀 200명 (스 2:65, 느 7:67. 245명으로 기록)

    또한 에스라와 느헤미야는 제 1차 귀환자 명단을 기록하면서, 귀환할 때 가지고 온 짐승들의 숫자까지 자세히 기록하였는데, 말 736마리, 노새 245마리, 약대 435마리, 나귀 6,720마리로 모두 8,136마리였습니다(스 2:66-67, 느 7:68-69). 이 짐승들의 수치를 귀환자 중 ‘온 회중’의 숫자(42,360명. 스 2:64, 느 7:66)와 비교해 보면, 대략 다섯 사람에 짐승이 한 마리 정도입니다(5인 기준 한 가족 당 1마리).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할 때에도 “양과 소와 심히 많은 생축”이 함께하였습니다(출 12:38). 하나님께서는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올 때도 짐승들과 같이 오게 하심으로 하나님께 제물을 드릴 뿐만 아니라 일상생활에서도 어려움이 없도록 지극한 사랑으로 돌보아 주셨습니다. 이렇게 귀환민들 뿐 아니라 각 생축들의 숫자까지도 정확하게 기록된 것은 귀환의 모든 과정에 하나님의 손길이 구석구석 미치지 않은 곳이 없으며, 하나님께서 만물을 하나하나 빠짐없이 주관하시고 섭리하셨음을 나타냅니다(롬 11:36).

    (2) 귀환 때 가지고 나온 재물

    유다인들이 귀환할 때, 그들이 거하는 주변의 이웃들이 은 그릇, 황금, 기타 물건, 짐승, 보물로 도와주었으며, 그 외에도 그곳 주민들이 하나님께 자원하는 예물을 드리기까지 하였습니다(스 1:4, 6).

    또 고레스 왕은 옛적에 느부갓네살 왕이 예루살렘에서 옮겨다가 자기 신들의 당에 두었던 여호와의 전 기명을 돌려보냈는데, 유다 목백(牧伯) 세스바살이 그 기명들을 가지고 돌아올 때 금반 30, 은반 1,000, 칼 29, 금대접 30, 그보다 차(次)한 은대접 410, 기타 기명 1,000으로 도합 5,400이었습니다(스 1:7-11). 이는 제 1차 귀환자들이 신분에 관계없이 최선을 다해 하나님의 선전 건축 역사를 위해 몸과 마음을 다해 헌신하였음을 말해 줍니다.

    (3) 귀환 계기

    다니엘 선지자는 당시 세계의 패권을 쥐고 있던 강대국 바사의 총리로 있으면서 메대 왕 다리오 시대뿐만 아니라 바사 왕 고레스의 시대까지 형통하였습니다(단 6:28). 이 말씀을 볼 때, 다니엘이 정치적으로 바사 제국의 기틀 확립에 영향을 끼쳤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다니엘은 메대의 다리오 통치 원년에 “예루살렘의 황무함이 칠십년 만에 마치리라”라고 했던 예레미야 선지자의 예언의 말씀을 깨달았으므로(단 9:2), 귀환 1년 전(주전538년) 고레스가 유다인의 해방을 공포한 일에 간접적으로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추정됩니다(대하 36:22, 스 1:1, 5:13).

    한편 다니엘 선지자는 고레스 왕 3년에도 바사 제국에 남아 활동하고 있었습니다(단 10:1). 그런데 다니엘 1:21에서는 다니엘의 최종활동 시기를 고레스 3년이라고 하지 않고 “다니엘은 고레스 왕 원년까지 있으니라”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 기록 또한, 고레스가 귀환 조서를 발표(스 1:1-4)하는데 다니엘이 어떤 영향력을 행사한 것임을 능히 추정케 합니다.

    (4) 성전 건축의 과정

    출애굽 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우선적으로 성막을 완성한 것처럼, 바벨론에서 귀환한 백성도 오직 성전 건축을 열망하였습니다.

    주전 537년 귀환한 백성들은 옛 성전이 있던 터 위에 단을 세우고(스 2:68, 3:3) 아침 저녁으로 번제를 드리고 초막절을 지키고 성전 지을 준비를 하였습니다(스 3:1-7).

    주전 536년 2월에 마침내 성전의 지대를 놓고 성전 건축 역사를 시작하였습니다(스 3:8-13). 그러나 사마리아인들이 집요하게 성전 재건을 방해했기 때문에 성전 건축은 중단되고 말았습니다. 왕에게 조언을 하던 자들(모사)이 사마리아 사람들에게 뇌물을 받고 유다인들을 참소했던 것입니다(스 4:5).

    그 후 성전 건축은 약 16년 동안 중단되었다가(주전 536-520년), 주전 520년 하나님께서 학개 선지자와 스가랴 선지자를 통해, 스룹바벨과 여호수아를 비롯한 백성들의 마음을 감화하여 흥분시키므로, 다리오 왕 제 2년 6월 24일에 재개되었습니다(스 5:1-2, 학 1:14-15, 참고-슥 4:6-10). 이 시기에 스가랴 선지자는 성전 건축의 진정한 의미가 ‘메시아의 도래와 그의 왕국을 맞이하는 데 있음’을 밝히면서(슥 9-14장) 유다 백성의 바른 신앙 회복을 촉구하였습니다.

    성전은 주전 516년(다리오 왕 제 6년) 아달월(12월) 3일, 약 4년 5개월 만에 마침내 완성되었습니다(스 6:15). 이것은 주전 586년에 예루살렘 성전이 파괴된 후 무려 70년만의 일로, ‘70년’만에 귀환한다는 예언이 어김없이 성취된 것입니다(렘 25:11-12, 29:10).

    바벨론 포로 1차 귀환

    이스라엘 백성은 주전 605년, 597년, 586년 세 차례에 걸쳐서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갔으나, 하나님께서는 무조건적인 은총을 베푸사 약속하신 대로 이스라엘 백성이 다시 예루살렘으로 돌아오도록 허락하셨습니다(렘 29:14). 이스라엘 백성의 귀환은 이사야 선지자의 예언(사44:28, 45:1-3)과 예레미야 선지자의 예언(렘 25:11-12, 29:10, 14)대로, 바사(페르시아)왕 고레스가 귀환을 허락하는 칙령을 발표함으로 시작되었습니다(대하 36:22-23, 스 1:1-4). 이때부터 바사(페르시아) 제국 각처에 흩어져 있던 유다 포로들은 포로생활을 청산하고 3차에 걸쳐 돌아오게 됩니다. 제 1차 귀환은 주전 537년에 이루어졌습니다.

    1. 귀환 목적과 시기
    (1) 목적
    바사 왕 고레스는 주전 538년에 귀환 조서를 내려 “하늘의 신 여호와께서 세상 만국으로 내게 주셨고 나를 명하사 유다 예루살렘에 전을 건축하라 하셨나니 ... 너희 중에 무릇 그 백성 된 자는 다 유다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서 거기 있는 여호와의 전을 건축하라”라고 공포했습니다(스 1:2-3, 참고-대하 36:22-23). 이에 유다와 베냐민 족장들과 제사장과 레위 사람들을 비롯하여 하나님의 감동을 받아 성전을 건축하고자 하는 자들이 다 일어났습니다(스 1:5).


    하나님께서 고레스의 마음을 감동시키시어 성전 건축을 명하게 하신 것은 “여호와께서 예레미야의 입으로 하신 말씀을 응하게 하시기 위한” 것이었습니다(스 1:1). 바벨론 포로 귀환에 대하여 예레미야는 성전 회복과 그것을 통한 예배의 회복을 자세히 예언하였습니다. 이방인에게 성전이 짓밟히는 수치를 당한 것(렘 51:51)을 하나님께서 보수하시고(렘 50:28, 51:11), 다시 성전에서 제사를 드리게 될 것이라고 예언하였습니다(렘 33:10-11, 18). 바벨론에서 돌아온 귀환민들의 최우선 과제는, 성전을 재건하고 성전을 중심하여 하나님께 예배드림으로써 선민으로서의 정체성을 회복하는 것이었습니다.

    (2) 시기
    하나님께서는 예레미야 선지자를 통해 바벨론 포로 생활이 70년이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는데(렘 25:11-12, 29:10), 이에 대해 역대하 36:21에서는 “이에 토지가 황무하여 안식년을 누림같이 안식하여 칠십 년을 지내었으니 여호와께서 예레미야의 입으로 하신 말씀이 응하였더라”라고 말씀하였습니다. 이스라엘의 불순종으로 안식하지 못했던 토지가 안식년을 누림같이 안식하게 된 것입니다.
    바벨론 포로 기간 ‘70년’은 실제 포로로 잡혀 간 때와 귀환하여 성전 건축을 시작한 때를 중심으로 볼 때 말씀대로 정확히 성취되었습니다. 제 1차 포로는 여호야김 3(혹은 4)년(느부갓네살 원년), 곧 주전 605년입니다(왕하 24:1, 렘 25:1, 참고-단 1:1-2). 제 1차 포로 귀환령이 내려진 것은 고레스 원년인 주전 538년으로,  귀환조서를 내린 다음(스 1:2-3), 이 명령을 따라 얼마 동안 귀환준비를 한 유대 민족은 1년 뒤인 주전 537년 마침내 예루살렘으로 돌아오게 되었습니다(스 1:5, 11, 3:1). 그리고 성전 건축을 시작한 것은 주전 536년 2월(시브월)입니다(스 3:1, 8). 그러므로 제 1차로 바벨론에 끄렬간 주전 605년에서 성전을 짓기 시작한 주전 536년까지 햇수로 70년이 정확히 성취된 것입니다.

    2. 귀환자와 귀환 당시 상황
    (1) 귀환자
    제 1차로 귀환할 때의 지도자는 스룹바벨과 예수아(여호수아)였으며, 총 49,897명이 귀환했습니다(스2:64-66).

    귀환자
    총인원
      49,897명  

     회중 42,360명 (스 2:1-64, 느 7:5-66)
     지도자 11명, 평민 15,604명(가계별), 평민 8,540명(지역별), 제사장 4,289명,
     느디님 사람과 솔로몬 신복의 자손 392명, 레위인 341명,

     종족과 계보가 불명확한 자 652명,  
     계수에 포함되지 않은 사람 12,531명 

     노비 7,337명 (스 2:65, 느 7:67)

     노래하는 남녀 200명 (스 2:65, 느 7:67. 245명으로 기록)

    또한 에스라와 느헤미야는 제 1차 귀환자 명단을 기록하면서, 귀환할 때 가지고 온 짐승들의 숫자까지 자세히 기록하였는데, 말 736마리, 노새 245마리, 약대 435마리, 나귀 6,720마리로 모두 8,136마리였습니다(스 2:66-67, 느 7:68-69). 이 짐승들의 수치를 귀환자 중 ‘온 회중’의 숫자(42,360명. 스 2:64, 느 7:66)와 비교해 보면, 대략 다섯 사람에 짐승이 한 마리 정도입니다(5인 기준 한 가족 당 1마리).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할 때에도 “양과 소와 심히 많은 생축”이 함께하였습니다(출 12:38). 하나님께서는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올 때도 짐승들과 같이 오게 하심으로 하나님께 제물을 드릴 뿐만 아니라 일상생활에서도 어려움이 없도록 지극한 사랑으로 돌보아 주셨습니다. 이렇게 귀환민들 뿐 아니라 각 생축들의 숫자까지도 정확하게 기록된 것은 귀환의 모든 과정에 하나님의 손길이 구석구석 미치지 않은 곳이 없으며, 하나님께서 만물을 하나하나 빠짐없이 주관하시고 섭리하셨음을 나타냅니다(롬 11:36).

    (2) 귀환 때 가지고 나온 재물
    유다인들이 귀환할 때, 그들이 거하는 주변의 이웃들이 은 그릇, 황금, 기타 물건, 짐승, 보물로 도와주었으며, 그 외에도 그곳 주민들이 하나님께 자원하는 예물을 드리기까지 하였습니다(스 1:4, 6).


    또 고레스 왕은 옛적에 느부갓네살 왕이 예루살렘에서 옮겨다가 자기 신들의 당에 두었던 여호와의 전 기명을 돌려보냈는데, 유다 목백(牧伯) 세스바살이 그 기명들을 가지고 돌아올 때 금반 30, 은반 1,000, 칼 29, 금대접 30, 그보다 차(次)한 은대접 410, 기타 기명 1,000으로 도합 5,400이었습니다(스 1:7-11). 이는 제 1차 귀환자들이 신분에 관계없이 최선을 다해 하나님의 선전 건축 역사를 위해 몸과 마음을 다해 헌신하였음을 말해 줍니다.

    (3) 귀환 계기
    다니엘 선지자는 당시 세계의 패권을 쥐고 있던 강대국 바사의 총리로 있으면서 메대 왕 다리오 시대뿐만 아니라 바사 왕 고레스의 시대까지 형통하였습니다(단 6:28). 이 말씀을 볼 때, 다니엘이 정치적으로 바사 제국의 기틀 확립에 영향을 끼쳤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다니엘은 메대의 다리오 통치 원년에 “예루살렘의 황무함이 칠십년 만에 마치리라”라고 했던 예레미야 선지자의 예언의 말씀을 깨달았으므로(단 9:2), 귀환 1년 전(주전538년) 고레스가 유다인의 해방을 공포한 일에 간접적으로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추정됩니다(대하 36:22, 스 1:1, 5:13).


    한편 다니엘 선지자는 고레스 왕 3년에도 바사 제국에 남아 활동하고 있었습니다(단 10:1). 그런데 다니엘 1:21에서는 다니엘의 최종활동 시기를 고레스 3년이라고 하지 않고 “다니엘은 고레스 왕 원년까지 있으니라”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 기록 또한, 고레스가 귀환 조서를 발표(스 1:1-4)하는데 다니엘이 어떤 영향력을 행사한 것임을 능히 추정케 합니다.

    (4) 성전 건축의 과정
    출애굽 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우선적으로 성막을 완성한 것처럼, 바벨론에서 귀환한 백성도 오직 성전 건축을 열망하였습니다.


    주전 537년 귀환한 백성들은 옛 성전이 있던 터 위에 단을 세우고(스 2:68, 3:3) 아침 저녁으로 번제를 드리고 초막절을 지키고 성전 지을 준비를 하였습니다(스 3:1-7).


    주전 536년 2월에 마침내 성전의 지대를 놓고 성전 건축 역사를 시작하였습니다(스 3:8-13). 그러나 사마리아인들이 집요하게 성전 재건을 방해했기 때문에 성전 건축은 중단되고 말았습니다. 왕에게 조언을 하던 자들(모사)이 사마리아 사람들에게 뇌물을 받고 유다인들을 참소했던 것입니다(스 4:5).


    그 후 성전 건축은 약 16년 동안 중단되었다가(주전 536-520년), 주전 520년 하나님께서 학개 선지자와 스가랴 선지자를 통해, 스룹바벨과 여호수아를 비롯한 백성들의 마음을 감화하여 흥분시키므로, 다리오 왕 제 2년 6월 24일에 재개되었습니다(스 5:1-2, 학 1:14-15, 참고-슥 4:6-10). 이 시기에 스가랴 선지자는 성전 건축의 진정한 의미가 ‘메시아의 도래와 그의 왕국을 맞이하는 데 있음’을 밝히면서(슥 9-14장) 유다 백성의 바른 신앙 회복을 촉구하였습니다.


    성전은 주전 516년(다리오 왕 제 6년) 아달월(12월) 3일, 약 4년 5개월 만에 마침내 완성되었습니다(스 6:15). 이것은 주전 586년에 예루살렘 성전이 파괴된 후 무려 70년만의 일로, ‘70년’만에 귀환한다는 예언이 어김없이 성취된 것입니다(렘 25:11-12, 29:10).



    바벨론 포로시대의 연대

    B.C

    722. 북이스라엘 멸망(앗시리아)

    605. 바벨론 1차 포로(다니엘, 귀족들)

    597. 바벨론 2차 포로(여호야긴, 에스겔, 기술자)

    586. 바벨론 3차 포로/ 예루살렘의 완전한 멸망

    539. 10월 고레스의 바벨론 점령

    538/7 1차 포로 귀환(세스바살, 스룹바벨): 에스라 1-6장

    520 학개, 스가랴 선지자의 활동

    515 제2성전 완공

    492. 1차 페르시아 전쟁(다리오1세, 헬로도토스에 따르면 아토스 곶에서 폭풍을 만나 300척의 전함과 2만명의 군사를 잃음)

    490. 2차 페르시아 전쟁(다리오 1세, 마라톤 평야에서 아테네의 중장병 밀집대전술에 패함)

    480. 3차 페르시아 전쟁(크세르크세스, 살라미스 해전에서 패배)

    465. 궁정 쿠데타로 크세르크세스 사망

    465. 크세르크세스의 아들 아닥사스다 1세 집권(느헤미야가 술맡은 관원)

    461. 이집트가 페르시아 제국에 반기

    458 2차 포로 귀환(에스라): 에스라 7-10장/ 1차 신앙운동

    444/5 3차 포로 귀환(느혜미야): 느헤미야서/ 성벽재건 공사와 2차 신앙운동

    바벨론의 유다 왕국 1차, 2차, 3차 침공 정리하기
     

    각각의 침공은 유다 왕국의 상황과 바벨론 제국의 정책에 따라 다른 결과를 초래했으며,
    궁극적으로 유다 왕국의 멸망으로 이어졌습니다.

    (1) 1차 침공 (기원전 605년)

    배경:

    바벨론의 왕 느부갓네살 2세가 갈그미스 전투에서 이집트를 물리친 직후,
    유다 왕국을 포함한 팔레스타인 지역을 장악하려는 전략의 일환으로 예루살렘을 침공했습니다.

    결과:

    이때 바벨론은 예루살렘을 공격하지는 않았지만, 유다 왕국을 바벨론 제국의 속국으로 삼고 조공을 요구했습니다.
    다니엘과 같은 귀족 청년들이 바벨론으로 끌려갔습니다.

    (2) 2차 침공 (기원전 597년)

    배경:

    기원전 597년, 유다 왕국의 왕 여호야김이 바벨론에 반란을 일으켰다가 실패하고, 그의 아들 여호야긴이 왕위를 이어받았습니다.
    그러나 여호야긴도 바벨론의 공격에 직면하여 항복하게 되었고, 바벨론의 왕 느부갓네살 2세는 여호야긴과 함께 많은 유다의 귀족들, 군사 지도자들, 기술자들을 포함해 약 10,000명을 포로로 바벨론으로 끌고 갔습니다.
    이때 에스겔도 함께 끌려갔습니다.

    결과:

    바벨론 군대는 예루살렘을 포위하고, 여호야긴과 함께 많은 유다의 귀족들과 기술자들을 포로로 바벨론으로 끌고 갔습니다.
    이는 첫 번째 주요 바벨론 유수로 이어졌으며, 여호야긴 대신 시드기야가 바벨론에 의해 유다 왕국의 왕으로 임명되었습니다.

    * 참고(시작)
    에스겔의 활동 에스겔은 바벨론의 포로로 끌려간 후, 바벨론에서 예언자로서의 활동을 시작했습니다.
    그의 예언 활동은 주로 바벨론에 있는 포로들 사이에서 이루어졌으며,
    그들은 바벨론 강가에 거주하면서 에스겔의 예언을 들었습니다.

    에스겔은 바벨론에서 이스라엘의 죄악을 꾸짖고, 예루살렘의 멸망을 예언하며, 나중에 회복될 이스라엘의 미래에 대해 예언했습니다. 그의 예언들은 후에 "에스겔서"로 집대성되었으며, 구약 성경의 중요한 부분을 차지합니다.
    * 참고(끝)

    (3) 3차 침공 (기원전 586년)

    배경:

    시드기야 왕이 바벨론에 반란을 일으키자, 느부갓네살 2세는 다시 예루살렘을 침공했습니다.

    결과:

    바벨론 군대는 예루살렘을 철저히 포위하고 결국 성을 함락시켰습니다.
    예루살렘 성전(솔로몬의 성전)이 파괴되었고,
    시드기야 왕은 체포되어 그의 자식들이 처형된 후 바벨론으로 끌려갔습니다.
    이 침공으로 유다 왕국은 완전히 멸망했고, 대부분의 유대인들이 바벨론으로 포로로 끌려가게 되었으며, 이는 바벨론 유수의 절정이 되었습니다.

    요약

    1차 침공: 기원전 605년
    2차 침공: 기원전 597년
    3차 침공: 기원전 586년

    이 세 차례의 침공을 통해 유다 왕국은 점차 바벨론 제국에 완전히 흡수되었고, 유다 왕국의 독립적인 정치체는 완전히 사라졌습니다.

    다른 자료 참고함

    (2) 2차 바벨론 유다 침공 (기원전 597년)

    2차 바벨론 유다 왕국 침공기원전 597년에 발생한 사건으로,
    이 침공은 신바빌로니아 제국의 왕 느부갓네살 2세(Nebuchadnezzar II)가 이끄는 군대에 의해 수행되었습니다.

    배경

    유다 왕국은 이집트와 바벨론 사이에서 외교적 줄타기를 하며 자주 이들 강대국의 지배를 받게 되었습니다.
    당시 유다의 왕이었던 여호야김(Jehoiakim)은 바벨론에 조공을 바치고 있었지만,
    이집트의 지원을 받아 바벨론에 반란을 일으키기로 결정했습니다.
    이 반란은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 2세의 분노를 불러일으켰습니다.

    기원전 597년, 느부갓네살 2세는 유다 왕국을 응징하기 위해 군대를 이끌고 침공했습니다.
    바벨론 군대는 유다의 수도 예루살렘을 포위했으며, 이 과정에서 여호야김이 사망하고
    그의 아들 여호야긴(Jehoiachin)이 왕위에 올랐습니다.
    그러나 여호야긴은 바벨론의 압도적인 군사력에 맞서 싸울 수 없음을 깨닫고 결국 항복하게 되었습니다.

    결과

    느부갓네살 2세는 여호야긴을 폐위시키고 그와 함께 유다의 귀족들, 기술자들, 그리고 엘리트 계층 약 10,000명을 포로로 바벨론으로 끌고 갔습니다.
    이는 유다 왕국에서 일어난 첫 번째 주요 포로 이주 사건으로, 나중에 "바벨론 유수"라고 불리는 유대인들의 대규모 이주와 유배의 시작을 알렸습니다.

    이와 함께 바벨론은 여호야긴의 삼촌 시드기야(Zedekiah)를 유다 왕으로 세웠지만, 이는 바벨론의 꼭두각시 왕에 불과했습니다.
    유다는 바벨론의 속국이 되었고, 시드기야는 바벨론에 조공을 바쳐야 하는 상황에 처하게 되었습니다.

    1차 바벨론 유다 왕국 침공은 유다의 독립성을 크게 훼손시켰으며,
    이로 인해 유다 왕국은 점점 더 바벨론의 통제 하에 놓이게 되었습니다.
    결국, 이 침공은 이후 2차, 3차 바벨론 침공으로 이어져, 기원전 586년에는 예루살렘이 완전히 파괴되고 유다 왕국이 멸망하게 되는 결과를 초래했습니다.

    (3) 3차 바벨론 유다 왕국 침공 (기원전 586년)

    3차 바벨론 유다 왕국 침공은 기원전 586년에 발생한 사건으로, 이 침공은 유다 왕국의 완전한 멸망과 예루살렘 성전의 파괴로 이어진 중요한 역사적 사건입니다.
    이 침공은 바벨론 제국의 왕 느부갓네살 2세(Nebuchadnezzar II)에 의해 주도되었으며, 유다 왕국의 마지막 왕인 시드기야(Zedekiah)의 반란을 진압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배경

    2차 바벨론 침공(기원전 597년) 이후, 바벨론은 유다 왕국의 통제권을 장악하고 여호야긴(Jehoiachin)을 폐위한 뒤 그의 삼촌 시드기야(Zedekiah)를 왕으로 세웠습니다.
    시드기야는 바벨론에 조공을 바치는 속국의 왕으로서 즉위했으나, 시간이 흐르면서 그는 바벨론의 지배에 불만을 품고 반란을 일으켰습니다.
    이집트의 지원을 믿고 바벨론에 대항했지만, 이는 유다 왕국의 운명을 결정짓는 치명적인 실수로 이어졌습니다.

    시드기야의 반란에 대응하여 느부갓네살 2세는 유다 왕국에 대규모 군대를 보내 예루살렘을 포위했습니다.
    포위전은 기원전 586년에 시작되어 18개월간 지속되었습니다.
    예루살렘 주민들은 이 기간 동안 극심한 기근과 고통에 시달렸습니다.

    결국, 바벨론 군대는 예루살렘을 함락시키고 시드기야를 체포했습니다.
    시드기야는 포로로 잡혀 바벨론으로 끌려갔으며, 그의 아들들은 그의 눈앞에서 처형당하고 시드기야 자신은 눈이 멀게 되는 끔찍한 운명을 맞았습니다.

    결과

    바벨론 군대는 예루살렘을 철저히 파괴했습니다.
    성벽은 허물어졌고, 특히 솔로몬이 지은 제1성전(솔로몬 성전)이 불타 파괴되었습니다.
    이로써 유다 왕국의 독립적인 존재는 완전히 사라지게 되었으며, 유다 지역은 바벨론의 한 지방으로 전락했습니다.

    많은 유대인들이 바벨론으로 끌려갔고, 이는 유대인 역사에서 중요한 사건인 바벨론 유수(Babylonian Exile)로 이어졌습니다. 유대인들은 이 기간 동안 바벨론에서 포로 생활을 하게 되었으며, 이는 그들의 신앙과 문화에 깊은 영향을 미쳤습니다.

    3차 바벨론 침공은 유다 왕국의 종말을 의미하며, 이후 약 50년간 유대인들은 바벨론에서 유배 생활을 하게 되었습니다.
    이 사건은 유대교의 역사뿐만 아니라 중동 지역의 정치적 지형에도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참고자료:
    https://blog.naver.com/samhoung/222069461208



    ​바벨론 포로 귀환 

    ​B..C 722년에 북이스라엘이 멸망합니다.
    136년 후 B.C. 588년에 남유다가 멸망합니다.
    남유다가 망한 연도는 B.C. 586년이 아니고, B.C. 588년임이 밝혀졌습니다.

    ​바벨론 포로는 B.C. 605년부터 B.C. 588년까지 3차례에 걸쳐 이루어졌습니다.

    첫번째 포로는 유다왕 여호야김 왕 때 였습니다.

    이때 다니엘과 그의 3친구들이 끌여갔습니다.

    바벨론은 여호야김 왕을 폐위하고 그의 아들 여호야긴을 세웠습니다.

    여호야긴 왕은 요시야 왕의 손자이자 여호야김 왕의 아들로,

    B.C. 598년에 아버지가 죽은 후 18세의 나이에 왕위에 올랐습니다.

    당시 유다는 바벨론 제국과 이집트 사이에서 힘겹게 버티고 있었고,

    여호야김 왕​​은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에게 조공을 바치며 신하의 입장을 유지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여호야김 왕이 바벨론에 반기를 들고 이집트와 동맹을 맺으려 하면서,

    유다는 다시 바벨론의 침략을 맞게 됩니다.

    여호야긴 왕의 통치는 단 3개월 정도밖에 되지 않았습니다.

    그는 즉위하자마자 바벨론 제국의 강력한 압박을 받았고,

    결국 느부갓네살 왕이 직접 예루살렘을 공격해 왔습니다.

    여호야긴 왕은 당시 바벨론의 군사적 압력에 대항할 수 없었으며, 결국 항복하게 됩니다.

    느부갓네살은 예루살렘을 점령한 후 여호야긴 왕과 그의 가족,

    그리고 유다의 지도층 인사들을 바벨론으로 끌고 갔습니다.

    이 사건이 바로 유다 왕국의 첫 번째 바벨론 포로 사건으로 기록됩니다.

    바벨론으로 끌려간 여호야긴 왕은 유다 왕으로서의 지위를 잃었고,

    바벨론에서 포로 생활을 하게 되었습니다.

    여호야긴 왕과 함께 끌려간 사람들은 유다의 귀족, 장인, 군사 지도자들이었으며,

    이는 유다 왕국이 사실상 바벨론의 지배하에 들어가게 되는 중요한 역사적 사건이었습니다.

    이후 유다에는 여호야긴 왕의 삼촌인 시드기야가 바벨론의 괴뢰 왕으로 세워지게 되지만,

    그는 또한 바벨론에 반기를 들고 결국 예루살렘의 완전한 파괴와 두 번째 포로 사건을 초래하게 됩니다.

    여호야긴 왕은 바벨론에서 약 37년 동안 포로로 지냈습니다.

    바벨론의 왕이 바뀌면서 그의 처지가 조금 나아졌습니다.

    에윌므로닥이 바벨론의 왕이 되었을 때,

    그는 여호야긴을 감옥에서 풀어주고 그에게 왕처럼 대접했습니다.

    성경은 여호야긴이 바벨론 왕의 식탁에서 음식을 먹었고,

    일정한 생활비를 받으며 비교적 좋은 대우를 받았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열왕기하 25:27-30, 예레미야 52:31-34).

    이는 당시 여호야긴이 비록 포로였지만,

    유다의 왕족으로서 명예를 유지하고 있었음을 보여 줍니다.

    이 사건은 여호야긴 왕의 왕권이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음을 상징하며,

    결국 하나님의 백성에게 회복의 희망을 암시하는 요소로 해석되기도 합니다.

    그의 포로 생활 이후 운명에 대해서는 구체적인 기록이 없지만,

    그는 바벨론에서 여생을 보냈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B.C. 597년에 2번째 포로가 이루어집니다.

    이때 유다의 귀족, 관리, 군인, 기술자 등 1만명이 끌여갔습니다.

    B.C. 588년에 3번째 포로가 이루어집니다.

    유다왕 시드기야 때 였습니다.

    바벨론은 예루살렘을 함락하고 성전을 불태우고, 시드기야의 눈을 뽑고, 쇠사슬에 묶어 끌고 갔습니다.

    바벨론 포로와 귀환로

    바벨론 포로는 70년간 지속되었습니다.

    B.C. 538년에 바벨론을 정복한 고레스는 B.C. 537년에 포로를 1차로 석방합니다.

    스룹바벨을 중심으로 석방된 이스라엘 백성은 예루살렘으로 돌아와 성전과 성벽을 재건하기 시작합니다.

    그러나 대적 사마리아인들의 방해로 성전공사가 중단됩니다.(B.C. 534-B.C. 520 -- 16년간)

    B.C. 458년 2차 석방이 이루어집니다.

    페르시아 아닥사스다 왕 때였습니다.

    에스라를 중심으로 석방됩니다.

    에스라는 학사로 백성들에게 율법을 가르치고 성전 재건에 앞장섭니다.

    B.C. 455년에 3차 석방이 이루어집니다.

    느혜미아를 중심으로 석방됩니다.

    페르시아 아닥사스다왕의 허락으로 귀환한 느혜미나와 백성들은 성벽 재건을 이루어냅니다.


    ‘유대인들의 70년 포로귀환과 성전 중건’

    부제> ‘유대민족 엑서더스· 다니엘의 70이레’

    다니엘 선지자 ‘예레미야’의 70년 예언 깨닫아

    BC 606년 포로 ‘고레스 칙령’ BC 536년 귀환

    ‘이사야’ 태어나지도 않은 이방 왕, 고레스예언

    중건은 여러번 ‘고레스 다리오 아닥사스다’시기

    ‘니산월’ 바벨론 포로 이후 히브리 월력의 첫달

    유월절은 니산월에 ‘출애굽 기념하는’ 최대명절

    다니엘 9장

    1. 메대 족속 아하수에로의 아들 다리오가 갈대아 나라 왕으로 세움을 받던 첫 해

    2. 곧 그 통치 원년에 나 다니엘이 책을 통해 여호와께서 말씀으로 선지자 예레미야에게 알려 주신 그 연수를 깨달았나니 곧 예루살렘의 황폐함이 칠십 년만에 그치리라 하신 것이니라

    21. 내가 기도할 때에 이전에 환상 중에 본 그 사람 가브리엘이

    22. 다니엘아 내가 이제 네게 지혜와 총명을 주려고 왔느니라

    23. 그런즉 너는 이 일을 생각하고 그 환상을 깨달을지니라

    24. 네 백성과 네 거룩한 성을 위하여 일흔 이레를 기한으로 정하였나니… 죄악이 용서되며, …지극히 거룩한 이가 기름 부음을 받으리라

    25. 그러므로 너는 깨달아 알지니라. 예루살렘을 중건하라는 영이 날 때부터 기름 부음을 받은 자 곧 왕이 일어나기까지 일곱 이레와 예순두 이레가 지날 것이요 그 곤란한 동안에 성이 중건되어 광장과 거리가 세워질 것이며

    26. 예순두 이레 후에 기름 부음을 받은 자가 끊어져 없어질 것이며, 장차 한 왕의 백성이 와서 그 성읍과 성소를 무너뜨리려니와 그의 마지막은 홍수에 휩쓸림 같을 것이며 또 끝까지 전쟁이 있으리니 황폐할 것이 작정되었느니라

    27. 그가 장차 많은 사람들과 더불어 한 이레 동안의 언약을 굳게 맺고, 그가 그 이레의 절반에 제사와 예물을 금지할 것이며, 또 포악하여 가증한 것이 날개를 의지하여 설 것이며, 또 이미 정한 종말까지 진노가 황폐하게 하는 자에게 쏟아지리라 하였느니라 하니라.(다니엘서 9장)

    ▲ 남유다 70년의 포로 기간은 바벨론의 느부갓네살 왕의 예루살렘 침입으로 인해 제1차로 포로가 되어 끌려간 BC 606년부터 스룹바벨의 인도로 제1차로 귀환한 BC 536년까지의 기간을 가리킨다.    

    ● ‘70년 포로생활’ 구약성경 다니엘 9장

    구약성경의 다니엘 9장은 세계사의 관점에서 폭넓게 볼 때 역사서라 칭하기 보다는 미래 진행형의 대분수령을 이루는 핵심 축이라 할만하다. 단지 유대인을 향한 일획일점의 오차도 허용하지 않은 현미경적 예언뿐만 아니라 이들 민족을 둘러싼 고대제국의 흥망성쇠, 그리고 현시점의 지구촌 인류에게도 섬뜩한 적색 경고음을 연신 정조준하고 있기 때문이다.

    구약성경의 다니엘 9장의 예언을 함축하면 다음과 같다. 예언서의 핵심은 포로된 이스라엘 백성의 귀환과 예루살렘 성전의 재건축, 이어 메시아의 탄생과 죽음, 성전파괴와 이스라엘 국가의 멸망에 관한 것이다. 그리고 적그리스도의 등장과 세계정부의 수립에 이어, 최종적으로는 메시아(그리스도)의 제국의 종결점으로 일대 파노라마를 형성한다.

    다니엘서 9장의 서두는 선지자 ‘예레미야’의 70년 예언을 깨닫는 것으로부터 시작된다.(1-2절) 다니엘은 다리오(Darius) 왕 원년인 BC 538년에 70년 포로의 기간이 마무리되고 있음을 인지하였다.


    ▲ 유대 포로귀환과 연이은 예루살렘성 중건은 하루아침에 된 것이 아니었다. “바사 왕 고레스와 다리오와 아닥사스다의 조서를 따라 성전을 건축하며 일을 끝내되”(에스라 6장 14절)   

    이어 다니엘이 기도할 때에 천사가 와서 미래에 일어날 일을 예언한다. 이 역사적 대사건인 다니엘의 70이레의 꿈은 BC 538년 메대족속 아하수에로(Ahasuerus)의 아들 다리오가 바벨론을 멸망시키고 첫해에 본 환상이다.(21-27절)

    여기에서 한 이레는 7년이다. 구약성경의 중요 사건들에는 1일은 1년으로 계산한 사례가 다수 발견된다. 단적인 실례를 찾아본다. 구약성경에는 하나님께서는 가나안 땅을 40일 정탐하고 나서 돌아와 불평했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광야생활을 내리시는데 1일을 1년으로 계산하여 40일을 40년으로 계산하여 40년간의 광야생활을 내리셨다.(민수기 14:34)

    다니엘이 먼저 깨달은 예루살렘의 황폐함이 종식될 것에 대한 예레미야의 예언을 살펴본다.

    다니엘은 “이 민족들은 칠십 년 동안 바벨론의 왕을 섬기리라. 바벨론에서 칠십 년이 차면 내가 너희를 돌보고 나의 선한 말을 너희에게 실행하여 너희를 이 곳으로 돌아오게 하리라(예레미아 25:11-12, 29:10)는 말씀을 회상하기 시작한다.

    예레미아의 말씀은 ‘에스라’에서도 동시 확증된다. “여호와의 천사가 대답하여 이르되 만군의 여호와여 여호와께서 언제까지 예루살렘과 유다 성읍들을 불쌍히 여기지 아니하시려 하나이까 이를 노하신 지 칠십 년이 되었나이다.”(에스라 1:12)

    유다 백성들이 바벨론의 포로에서 본토로 귀환하게 된 대사역은 언제 극적으로 성취되었을까? 2년 뒤 장인이요 외숙부인 ‘다리오’가 죽고 ‘고레스(Cyrus)’가 BC 537년 집권하게 된다. 이 역사적 사건을 성경은 이렇게 기록하였다.


    ▲ 고레스의 마음을 감동시키시매…나를 명하사 유다 예루살렘에 전을 건축하라 하셨나니  

    "바사 왕 고레스 원년에 여호와께서 예레미야의 입으로 하신 말씀을 응하게 하시려고 파사 왕 고레스의 마음을 감동시키시매…나를 명하사 유다 예루살렘에 전을 건축하라 하셨나니…너희 중에 무릇 그 백성 된 자는 다 유다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서 거기 있는 여호와의 전을 건축하라”(에스라 1:1-3)

    예레미야의 예언 가운데서 백미는 바벨론 멸망(예레미야 25장, 29장)이었다. 그렇다면 이 고레스는 누구인가? BC 539년 고레스는 바벨론 왕 벨사살이 연회를 베풀던 밤에 바벨론 제국을 멸망시키고(다니엘 5:30) 바사 제국을 창건했다.

    “고레스는 해방자로 자처하며, 바벨론에 남겨 두었던 신상들을 원래 있던 성읍에 되돌려 보냈고, 포로 된 사람들을 귀향시키는 선정을 베풀었다. 그 결과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갔던 유다 백성들은 본토로 귀환하여 성전을 재건할 수 있었다.”(역대하 36:22-23)


    ▲ 유다 백성들이 바벨론의 포로에서 본토로 귀환하게 된 대사역은 언제 극적으로 성취되었을까? 2년 뒤 장인이요 외숙부인 ‘다리오’가 죽고 ‘고레스(Cyrus)’가 BC 537년 집권하게 된다. 유물은 고레스 칙령.    

    ● BC 586년 바벨론에 의해 최종 멸망

    이미 다니엘은 느부갓네살왕(Nebuchadnezzar)의 꿈을 통하여 바벨론 이후에 일어날 약 1천년 제국에 대해서 예언한 바 있다. 생생한 실례는 바벨론과 페르시아, 헬라, 로마시대를 거쳐 열국시대까지 정확하게 이미 역사에서 실현되었다.

    ▲ 이미 다니엘은 느부갓네살왕(Nebuchadnezzar)의 꿈을 통하여 바벨론 이후에 일어날 약 1천년 제국에 대해서 예언한 바 있다. 생생한 실례는 바벨론과 페르시아, 헬라, 로마시대를 거쳐 열국시대까지 정확하게 이미 역사에서 실현되었다.

    이들 백성들이 바벨론에 끌려가게 된 역사적 사건을 살펴본다. 솔로몬의 아들, 르호보암 때에 이스라엘은 남과 북으로 분열된다. 북이스라엘은 BC 721년에 앗수르에 의해 멸망하게 된다.

    남유다도 BC 586년에 바벨론에 의해 최종 멸망하게 된다. 남유다는 바벨론의 단번의 침공에 의해 망한 것이 아니라 총 세 차례의 침공으로 멸망했다. 첫 번째 침공은 BC 606년이다.

    이에 남유다 70년의 포로 기간은 바벨론의 느부갓네살 왕의 예루살렘 침입으로 인해 제1차로 포로가 되어 끌려간 BC 606년부터 스룹바벨의 인도로 제1차로 귀환한 BC 536년까지의 기간을 가리킨다. 최종 3차까지 귀환한다.

    이에 이스라엘은 BC 536년에 1차 포로귀환을 하게 된다. 남유다가 포로로 잡혀간 때는 BC 606년이니 70년 만에 귀환하게 된다. 대부분의 학자들은 바벨론의 1차 침입이 시작된 BC 606부터 고레스의 칙령으로 인한 1차 귀환 시점인 536년으로 계산한다.

    ▽ BC 536년 제1차 포로 귀환, 바사 왕 고레스 원년에 스룹바벨 등이 일차로 귀환(에스라 1-6장) ▽ BC 458년, 에스라의 제2차 귀환(에스라 7-10장) ▽ BC 445년, 제3차 귀환, 느헤미야의 주도(느헤미아 1-2장)


    ▲ 다니엘이 포로로 잡혀간 연대가 BC 606년이라고 할 때, 다니엘이 예언서를 읽을 때는 70년이 거의 끝날 시기였을 것이다.    

    다니엘이 포로로 잡혀간 연대가 BC 606년이라고 할 때, 다니엘이 예언서를 읽을 때는 70년이 거의 끝날 시기였을 것이다.아마도 포로생활 69년이 지나간 때인 듯하다. 그러므로 다니엘은 민족의 귀환에 대한 예레미야의 예언이 성취되기까지 불과 1년이 남은 시점에서 하나님의 섭리를 깨닫고 기도한 것이다.

    다니엘의 예언서로부터 약 200년 전을 소급하여, 하나님께서는 이사야를 통해서 태어나지도 않은 이방 왕, 고레스에 대해 이렇게 예언하셨다.

    분명 “다니엘이 고레스 왕 원년까지 있으니라”(다니엘서 1장 21절)는 말씀처럼, 다니엘은 이사야서 44장을 고레스왕에게 보여주었을 것이고 자기 이름이 분명 예언된 내용을 보고 소스라치게 놀랐을 것이 틀림없다.

    “고레스에 대하여는 이르기를 그는 나의 목자라 나의 모든 기쁨을 성취하리라 하며 예루살렘에 대하여는 이르기를 중건되리라 하며 성전에 대하여는 이르기를 네 기초가 세움이 되리라 하는 자니라.(이사야 44:28)

    고레스 왕이 포로 된 이스라엘 백성들을 귀환하도록 허락한 중대한 사건이요, 유대 민족 역사의 새로운 이정표가 되었다.

    ● 유대인 포로 3차례에 걸쳐 귀환

    유대인들이 본토로 귀환하게 되었고 예루살렘 성을 중건하라는 명은 ‘70이레의 시간표’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기에 성전중건의 예언의 시점을 다시 세밀히 규명하여 본다.

    성전 중건에 대한 예언은 ‘에스라 느헤미아 예레미아 다니엘’서를 심층적으로 분석할 필요가 대두된다. 예루살렘 성을 중건하라는 영이 난 것이 언제인지는 크게 2가지이다. 그리고 유대 포로귀환과 연이은 예루살렘성 중건은 하루아침에 된 것이 아니었다.


    ▲ 이스라엘은 BC 536년에 1차 포로귀환을 하게 된다. 남유다가 포로로 잡혀간 때는 BC 606년이니 70년 만에 귀환하게 된다.     

    “유다 사람의 장로들이 선지자 학개와 잇도의 손자 스가랴의 권면을 따랐으므로 성전 건축하는 일이 형통한지라 이스라엘 하나님의 명령과 바사 왕 고레스와 다리오와 아닥사스다의 조서를 따라 성전을 건축하며 일을 끝내되”(에스라 6장 14절)

    이제부터는 유대인의 70년 포로 생활 종식에 이어, 예언의 중핵인 70이레에 대해 본격 규명해 보기로 한다.

    앞서 살펴본 것처럼, 고레스 칙령이 일대 분기점이 된 것이 너무 확실하다. 또 하나는 ‘아닥사스다왕’(Artaxerxes)때이다. 이 시점은 후에 상술하겠지만 다니엘 70이레의 대예언 중 예수님의 탄생과 사역, 십자가 처형과 가장 일치한다.

    ▲ 성전 중건에 대한 예언은 ‘에스라 느헤미아 예레미아 다니엘’서를 심층적으로 분석할 필요가 대두된다.     

    아닥사스다는 두 번째, 세 번째 유다인 귀환을 허락했고 예루살렘 성전 재건을 잠시 중단시키기도 했었다.(에스라 4:7-24) 두 번째 귀환은 아닥사스다왕 칠년에 일어났다. “아닥사스다왕 칠년에…예루살렘으로 올아올 때에”(에스라 7:7)

    세 번째는 아닥사스다왕 20년 재위 때이다. 유대인의 세 번째 귀환 느헤미아의 기록이 집중조명 받는다. 유대인의 포로 귀환공동체를 인솔하여 난관에 봉착한 에스라의 개혁을 돕기위해 왕의 재가를 얻어 예루살렘을 찾아와 고락을 같이했다.

    포로 잡혀갈 때 세 번에 나누어서 잡혀 갔는데 돌아올 때도 세 번에 나누어서 돌아오게 된다. 느헤미야는 에스라와 동시대에 활동했고 바벨론에서 출생했다. 느헤미야는 총독이었고 세 번째 포로귀환의 인솔자였다.


    ▲ 느헤미야는 선지자 에스라와 동시대에 활동했고 바벨론에서 출생했다. 느헤미야는 총독이었고 세 번째 포로귀환의 인솔자였다.  

    유대인의 세 번째 귀환인 BC 445년 아닥사스다왕 20년의 조서를 살펴본다. 아닥사스다왕은 이십년 ‘니산월’에 왕의 술을 맡은 관원은 느헤미야이다. 예루살렘 성문이 불에 탄 채로 남아 있고 성읍이 여전히 황폐되어 있다는 소식으로 근심에 빠져있는 느헤미야에게 예루살렘으로 돌아가 성을 중건하도록 허락하는 조서를 내린다.(느헤미아 2:1-9)


    ▲ 언제 공격해 올지 모르는 주변 국가의 위협을 받고 한쪽 손에는 공사에 필요한 쟁기를, 또 한쪽 손에는 이방 민족의 침략을 저지할 무기를 들고 공사를 진행해야 했다. (느헤미아 4:16-18)    

    예루살렘을 중건하라는 명령이 내려 유대인들은 예루살렘으로 귀환한다. 그러나 이 공사는 경제적인 여건이나, 인원동원 등의 문제뿐 아니라 이웃 민족의 방해 공작 때문에 아주 어렵게 공사를 진행하였다. 언제 공격해 올지 모르는 주변 국가의 위협을 받고 한쪽 손에는 공사에 필요한 쟁기를, 또 한쪽 손에는 이방 민족의 침략을 저지할 무기를 들고 공사를 진행해야 했다.

    이 때의 형편을 성경은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내 수하 사람들의 절반은 일하고 절반은 갑옷을 입고 창과 방패와 활을 가졌고… 성을 건축하는 자와 짐을 나르는 자는 다 각각 한 손으로 일을 하며 한 손에는 병기를 잡았는데…건축하는 자는 각각 허리에 칼을 차고 건축하며”(느헤미아 4:16-18)


    ▲ 예루살렘을 중건하라는 명령이 내려 유대인들은 예루살렘으로 귀환한다. 그러나 이 공사는 경제적인 여건이나, 인원동원 등의 문제뿐 아니라 이웃 민족의 방해 공작 때문에 아주 어렵게 공사를 진행하였다.    

    니산 월이 매우 주목을 받는다. 여기에서 유월절을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유월절의 절기와 다니엘서의 예언은 볼트와 너트처럼 뗄레야 뗄 수 없는 불가분의 관계에 있기 때문이다.

    ‘니산 월’(the month of Nisan)은 유대인들이 바벨론 포로가 이후, 사용된 히브리 월력의 첫 번째 달이다. 니산 월 14일은 유월절로 지켜졌다. 유월절은 유대의 최대 명절이다. 출애굽기가 기원이다.

    야훼는 이집트가 히브리 노예들을 풀어주도록 하기 위해 이집트에 열 가지 재앙을 내린다. 마지막 재앙은 이집트에서 태어난 모든 첫 아이(가축도 포함된다)들의 죽음이다.

    모세는 히브리인들에게 문설주에 어린 양의 피를 발라두면 밤에 야훼가 보낸 죽음의 사자가 그 집을 그냥 지나칠 것이라고 말한다. 이것이 유월절의 시작이다. 이 첫 유월절은 무교병(발효시키지 않은 빵)의 축제라고도 부르는데, 출애굽기 12장에 상세히 설명되어 있다.




    히브리인들은 서둘러 이집트를 떠나야 했으므로 신은 준비하는 데 시간이 걸리는 발효된 빵이 아니라 발효시키지 않은 빵을 만들라고 명했다. 유대인들은 유월절을 충실히 지켰다. 유월절 축제 기간은 7~8일 정도다. 이때 무교병을 먹는 게 전통이다


    성경의 남북 분단 시대

    북이스라엘이 BC 722년에 앗수르에 의해 멸망당할 때까지 약 208년간이나 지속되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역사(history)와 하나님의 역사(working)는 하나님의 주권이며 사람과의 협력의 역사이다. 베데스다 못가의 서른여덟 해 된 병자를 고쳐 주신 일을(요 5:1-9) 생각하며, 38선에 의해 분단된 이 나라를 낫게 해 달라고 기도하는 사람들도 있다. 분단된 지 70년, 이를 성경의 바벨론 포로 생활과 일치시키는 것이 적절한지 의문이다. 그러나 유의미한 시도임에는 분명하다. 그리고 현 시점을 영적으로 바벨론 포로 종결로 보아야 할지, 시작으로 보아야 하는가에 따라 관점의 차이는 크다

    한국의 분단과 통일의 기간이 바벨론 포로기와 같이 70년과 동일한지, 애굽 430년 기간이 될지, 광야 생활 40년의 기간이 될지, 아직 바벨론 포로의 전 단계인지, 성경의 기준과 무관한 역사적 통일의 해가 전개될지 인간의 지혜로 판단할 수가 없다. 다만 한국의 역사나 분단과 유사한 이스라엘을 통해서 영적인 교훈과 의미를 찾자는 것이고, 당위성을 주장하는 것에 불과할 수도 있다. 그러나 하나님의 계획에 대한 인간의 응답과 순종, 이를 대비한 준비는 이 땅의 크리스천들의 몫이라 생각한다.

    이스라엘의 통합과 분열

    사울 왕 이후에 다윗 시대(BC 1010~970)에도 통일 왕국을 유지해 왔으나, 40년 뒤인 솔로몬 사후에 이스라엘이 분열하게 된다. 이스라엘의 통일 왕국(120년)은 사울(40년), 다윗(40년), 솔로몬(40년)을 말한다. 이스라엘은 사울-다윗-솔로몬 시기의 통일 왕국에 이어, 솔로몬의 아들 르호보암 왕, BC 931년에 남유다와 북이스라엘로 갈라졌다. 솔로몬의 우상숭배로 인한 하나님의 징계로 나라가 분열되어 분열 왕국 시대라 한다.

    분열의 근원적인 원인은 솔로몬에게서 찾을 수 있다. 솔로몬은 율법을 거역하고 이방 여인들을 취하였다. 그리고 그들의 유혹으로 인하여 우상숭배에 빠졌다. 하나님은 이와 같은 죄를 범한 솔로몬에게 나라를 빼앗아 그의 신복에게 주실 것을 말씀하셨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의 아비 다윗을 생각하여 그 나라를 모두 빼앗지는 않고 예루살렘을 위하여 한 지파를 남겨 두고 그것을 그의 후손들에게 주실 것을 말씀하셨다(왕상 11:11, 12). 하나님은 솔로몬이 하나님의 법도를 떠나 이방 신전을 짓고 이방신을 섬기자 에돔 사람 하닷을 일으켰으며 마지막에는 솔로몬의 심복 중 한 사람인 여로보암을 대적하게 하셨고 12지파 중 10지파와 많은 땅을 차지하게 하셨다.

    주전 930년 남북으로 갈라진 분단 국가가 되었다. 722년 북쪽 이스라엘이 앗수르의 군대에 의해 먼저 망할 때까지 208년 동안 북쪽에는 하나님을 섬기는 통치자가 한 명도 없었다. 남유다에도 겨우 6명뿐이었다. 남북의 적대 관계는 계속되었다.

    솔로몬의 아들인 르호보암이 왕위에 오를 당시 이스라엘은 정치, 경제, 문화적으로 번영과 부를 누리는 시대였지만, 내적으로는 각 지파들 간의 갈등의 심화와 솔로몬 때부터 쌓였던 세금과 부역 등으로 인한 수많은 불평들이 백성들 안에 잠재해 있었으며, 우상숭배와 하나님에 대한 반역과 진리를 떠난 죄악, 정치, 사회적, 종교적 타락으로 인한 결과로 민족 분열을 겪게 된다.

    결국에는 남쪽에는 예루살렘을 수도로 한 솔로몬의 아들 르호보암이 다스리는 유다왕국이 섰고, 북쪽에는 세겜을 중심으로 하여 솔로몬의 신하였던 여로보암이 왕이 된, 북이스라엘이 들어섰다(왕상 11, 12장). 여로보암은 에브라임 지파에 속한 자였고, 솔로몬의 심복이었다. 그는 다윗 성의 무너진 곳을 보수할 때 그의 성실함이 솔로몬에게 인정되어 그의 심복이 된 것이다(왕상 11:26, 28).

    하나님은 솔로몬의 부패가 극에 달하였을 때 선지자 아히야를 보내어 여로보암에게 다윗 집에서 열 지파를 떼어 주실 것을 말씀하셨다. 이리하여 이스라엘의 통일 왕국은 120년 만인 BC 931년에 무너지고 말았다. 이때부터 이스라엘 역사는 남북 왕조로 나뉘어 진행된다. 남쪽은 유다 지파와 베냐민 두 개 지파로 구성되었고, 북쪽은 나머지 열 지파로 구성되었다. 그러나 후에 레위 지파는 우상숭배에 반발하여 남쪽으로 이주하게 된다.

    남유다는 르호보암의 즉위로부터 바벨론에 패망할 때까지(BC 931~586) 약 345년간 존속하고, 북이스라엘은 여로보암으로부터 앗수르에 의한 패망까지(BC931~722) 남북 분단 시대는 북이스라엘이 BC 722년에 앗수르에 의해 멸망당할 때까지 존속한다.

    유다는 북이스라엘이 멸망하고 나서 약 135년 후, 바벨론 포로로 간다. 그리고 70년 동안 그곳에서 포로 생활(BC 586~444)을 하게 된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본토 이스라엘에서 멀리 1,500km나 떨어진 바벨론 땅으로 포로가 되어 끌려간 것은, 율법적 관점에서 '언약의 땅에서 추방되게 된 것'을 의미한다.

    바벨론 포로기와 이스라엘의 회복

    이스라엘이 망하기 전에 하나님께서 많은 선지자들(엘리야, 미기야, 엘리사, 요나, 호세아, 아모스, 이사야, 미가)을 통해 회개하도록 선포한 것으로 알 수 있으며, 유다가 망하기 전에는 나훔(BC 686~612), 스바냐(BC 640~621), 예레미야(BC 626~584), 훌다(BC 621), 하박국(BC 608~598), 에스겔(BC 593~571) 등도 회개하고 하나님께 돌아오라고 외쳤으나 반역을 행하고 불순종한다.

    그 결과 강대국인 앗수르와 바벨론의 포로 생활을 거치게 된다. 이방 강대국가의 강점기를 거친다. 본토의 백성들, 외국에 포로 생활로 '남은 자'들로 백성들은 고통과 신음으로 힘든 세월을 보내게 된다. 그리고 70년, 하나님의 때가 차자 조국 이스라엘로 귀환하게 된다. 성전이 재건되며 예배가 회복되고, 말씀이 회복된다. 새롭게 영적 이스라엘, 선민으로서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며 하나님이 통치하고 다스리는 민족국가로 자리매김하게 된다.

    선민 유다 백성이 하나님 없는 이방 나라 바벨론으로 포로 되어 끌려간 것은 하나님의 진노로 말미암은 최대의 비극이요 수치였다. 이는 우상을 숭배하고 안식일과 안식년을 지키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고 그 거룩하신 뜻을 멸시한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징계와 진노의 표현이었다(대하 36:21, 렘 34:8-16).

    포로 후 바벨론에서까지도 선지자들, 다니엘(BC 586), 오바댜(BC 580), 요엘(BC 539~531), 학개(BC 520), 스가랴(BC 520~514), 에스라, 느헤미야, 말라기(BC 500~450)를 통해서 이스라엘을 다시 회복시키겠다는 것을 예언하게 하신 것을 보아 알 수 있다. 다니엘과 에스겔서는 하나님나라가 재건된다는 메시지를 담고 있다.

    인간의 눈으로는 영원할 것 같았던 강대국인 바벨론이 하나님의 주권적 역사로 멸망하게 하시고(50:3,9, 41-46, 51), 이스라엘 백성이 본토로 귀환하도록 하셨다. 바벨론 왕국은 느부갓네살의 손자인 벨사살 때에 메대와 바사의 연합군에게 멸망하고 만다. 앗수르는 주전 612년에 바벨론에게 멸망을 당한다. 남북 왕국 모두 바벨론에게 멸망을 당한 것이다. 하나님의 예언에 따라 바벨론은 메대, 바사 연합국(페르시아)에 의해 멸망당한다. BC 538년에 고레스 칙령에 의해서 바벨론 포로로부터 귀환한 공동체는 BC 515년에 성전을 건축하고, BC 445년에는 예루살렘 성벽을 건설한다.

    바벨론 느부갓네살 왕은 자신이 잡아 온 이스라엘 백성들을 돌려보내지 않았고 그의 왕가는 70년이라는 짧은 기간 동안만 통치하게 된다. 메대 사람 다리우스는 바벨론을 정복하고 나이가 많음으로 바사의 고레스에게 왕권을 넘겨주게 되었다. 하나님께서는 예레미야를 통하여 예언하신 것처럼 70년이 되어서, 이스라엘을 자신의 땅으로 돌아가게 하기 위하여 고레스를 택하시고 그에게 오늘 이스라엘을 돌려보내도록 하신 것이다.

    70년 바벨론 포로기와 한국의 현실

    1945년 8월 15일 광복이 되자, 국내에서 민족주의자와 공산주의자들의 대립이 첨예해 갈 때에 미소 양군이 각기 북위 38도선을 경계로 삼아 남북으로 갈라서 1945년 9월 한반도에 진출했다. 2015년은 광복-분단 70주년, 건국 67주년이 되는 역사적인 해다. 70년은 완전수이며, 성수(聖數)인 7의 10배수인 70은 하나님의 특별한 일을 기대할 의미 있는 숫자이다. 하나님의 카이로스, 포커스와 타이밍은 중요하다.

    한민족은 676년 신라가 외세(당나라)를 한반도에서 축출한 이후, 1945년 광복까지, 후삼국 35년을 제외한 1,000여 년 동안 단일민족을 형성해 왔다. 세계 역사상 드문 통일국가의 역사이며 통일은 한민족의 정체성이다.

    세계사를 보면 이 70년은 의미가 있는 사건이 있다. 바로 1917년 볼셰비키 혁명으로 시작된 공산주의가 70년 후인, 1987년 고르바초프의 개혁 개방 정책으로 사실상 막을 내린 사건이다. 소련의 공산주의가 무너지고 세계 질서와 구도가 변했듯이, 독일의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듯 한반도에도 휴전선이 사라지길 소원하고, 역사를 주관하시는 하나님께서 한국을 돌이켜 보시고 긍휼히 여기셔서 분단과 외세라는 바벨론 포로의 해방과 통일의 기쁨을 주시기를 간구한다. 평화적 민족 통일이 완성되기를 간절히 바란다. 죄악으로 왜곡된 분단의 중심 가치의 전복과 새로운 복음화 통일의 가치 창조가 올바른 통일 운동이다.

    바벨론 포로기는 오늘을 사는 크리스천들에게 많은 교훈과 지혜를 제공해 준다. 조지 바나는 사회와 국가를 이끌어 갈 영적 리더십이란, 첫째, 사람을 이끌도록 하나님께 부름받은 자(소명), 둘째, 예수 그리스도의 성품으로 이끄는 자(성품), 셋째, 리더십을 위해 기능적 능력과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는 자(능력)라고 한다. 통일 시대를 대비하고 이를 실천하고 하나님나라 건설의 사명을 다하기 위해서는, 소명과 함께 예수 그리스도의 성품과 복음으로의 무장과 성령의 역사, 탁월한 실력과 안목도 겸비해야 이상적인 크리스천 리더십을 발휘할 수 있다는 점이다.

    성경의 텍스트와 현존하는 이스라엘의 역사 통해서 국가를 치리하시는 하나님의 주권, 국제정치와 민족국가와 열강 간의 역학 관계, 경제·사회·역사적 문제까지 아는 것이 중요하다. 이러한 다양한 지혜와 신앙의 원칙과 경험을 통해서 과거를 아는 지혜, 현재를 통찰하고 미래를 여는 하나님의 주권과 섭리, 사람이 해야 할 사명과 그 방향을 깨달을 수 있다. 그리할 때 자기 시대를 개혁하고, 자기 시대의 부흥을 체험할 수 있는 은혜를 누리게 될 것이다.

    애굽의 430년간 노예 생활, 바벨론 70년간 포로 생활, 로마의 티토 장군에게 AD 70년에 멸망하고 약 2,000년에 이르는 유랑 생활, 2차 세계대전 때 독일의 나치에 의해 600만 명이 학살당한 사건 등, 이루 헤아릴 수 없는 고난의 역사였다. 그러나 이들은 이런 역사를 통해서 하나님의 주권과 섭리를 알고 믿음으로 행했기에 오늘날 이스라엘을 유지하고 발전시키게 되었다.

    바벨론 포로는 이사야가 예언한 '남은 자'(the remnant) 사상이 구현되었다. 이사야의 '남은 자' 사상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언약의 파기와 불순종으로 인한 민족의 파국 상황에도 하나님의 은총과 자비하심을 베풀고, 소수의 '남은 자'를 구해 주시고, 이를 통해서 존속하게 하신 것을 말한다. 하나님의 최종 목적이 파멸이 아닌 자기 백성의 구원이며, 정화와 회복을 통하여 미래를 준비하는 백성들로 선택한 것을 말한다. 사도바울은 환난과 역경 중에도 끝까지 믿음을 지키며 구원을 대망하는 자를 가리켜 '남은 자'로 정의했다(롬 9:27).

    이스라엘은 바벨론 포로와 귀환 이후에도 이방 국가의 지배를 받게 된다. 이스라엘의 역사는 페르시아, 그리스, 로마의 지배를 받게 되고 로마의 지배 아래 있을 때 잠시 독립하였으나(마카비 시대), 다시 로마의 통치하에 있게 된다. 이때 예수 그리스도가 탄생한다. 이스라엘의 완전한 독립이 안 이루어지는 이유는 무엇일까? 의문이 있다. 이러한 문제에 대한 해답은 영적 이스라엘과 예수 그리스도와 복음에 있다.

    지상 국가의 한계이다. 이스라엘의 성전이 무너진 것도 마찬가지이다. 건물인 교회도 영원하지 않다. 복음만이 영원하다. '이미' 도래한 하나님의 나라와 '아직' 완성되지 않은 하나님나라의 긴장 관계에 있는 것이 영적인 현실이다. 구원받은 하나님의 백성을 통한 구속사적 진행, 어거스틴이 말한 '하나님의 도성'과 그 완성이 온전한 하나님나라이기 때문이다. 하나님나라는 영토적 개념에 국한되기보다는 이보다 더 포괄적인 영적 개념임을 알 수가 있다. 재림 예수님의 지상 출현이 온전한 하나님나라의 완성으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영적 바벨론과 한국교회

    요한계시록 17장과 18장에서는 바벨론 패망과 하나님나라 완성의 자세한 과정을 언급하고 있다. 음녀 바벨론, 오늘날 타락한 도시 문명은 영혼들의 사냥터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계시록에서는 바벨론을 큰 음녀, 어미, 귀신의 처소, 가증한 것, 더러운 영이 모이는 곳, 음녀와 연합한 땅의 임금들, '음행'과 '사치' 등으로 묘사하였다. 이것은 정신적, 도덕적, 문화적, 사회적, 영적 타락상을 의미한 것이다. 계시록에서 말한 바벨론은 구약성경의 지상 국가인 바벨론과는 다른 차원의 영적 비밀이 있다. 계시록은 '문자+상징'을 융합해서 조명해야 한다.

    하나님의 때와 방법을 인간이 전부 알기에는 한계가 있다. 오늘날 한국교회는 먼저 어떤 영적 바벨론 포로에 잡혀 있는지에 대한 자기 성찰과 회개도 요구되어 진다. 교회의 맘몬이즘, 성경 말씀 훼손과 소멸, 헌금 강요와 빚으로 얼룩진 매머드 교회 건물, 교회의 영적 권위 상실과 교회 내 폭력과 하나님 경시 풍조, 교권주의와 분열, 교회의 정치권력화, 목회자들의 타락, 세속화의 포로, 그리고 통일을 가로막는 남북 갈등에 못지않은 동서 갈등, 정치적 패권주의와 죄악과 부패, 소수의 부의 집중과 경제적 불평등, 사회적 죄악인 사치와 방종이나 타락 등이 한국교회와 국가와 시대를 사로잡고 있는 영적인 바벨론 포로기일 수도 있다.

    바벨론 포로 70년은 개인과 민족적 회개의 시기였다. 한국교회도 과거 일제시대 신사참배와 우상숭배, 교권 다툼과 자기 역할 상실 이후에 전쟁과 분단을 겪었다. 이러한 시대를 보고 성경적 교훈을 삼아야 한다. 개인과 집단, 한국교회도 전적으로 하나님의 뜻을 알고, 실천하는 거룩한 백성들로 현시대에도, 한반도의 통일 시대에도 귀하게 쓰임받길 소원한다.

    다니엘은 조상들의 죄악을 회개했다. 동일시 회개인 것이다. 다니엘은 BC 605년 당시 강대국이었던 바벨론 왕 느브갓네살이 유다나라를 제1차 침공했을 당시 포로로 끌려간 사람들 중 한사람이었다. 그때 그의 나이 15세였다. 나중에 바벨론의 국무총리가 된다. 다니엘서 9장에서 다니엘은 말씀을 묵상하며 기도하던 중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포로로 끌려온 지 70년 만에 해방이 되리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자신들이 포로로 끌려오던 때에 하나님의 사람 예레미야가 한 말이 기억났다. 예레미야는 남유다가 바벨론에 의해 멸망하여 70년간 포로 생활을 하는 것과(렘 25:11,12), 하나님의 은혜로 유다 땅으로 다시 돌아올 것(렘 29:10)을 예언했다. 예레미야의 말씀을 응하게 하신 것이다. 예레미야의 시간(Jeremiah's Time)이다.

    "다리오 통치 원년에 나 다니엘이 책을 통해 여호와께서 말씀으로 선지자 예레미야에게 알려 주신 그 연수를 깨달았나니 곧 예루살렘의 황폐함이 칠십 년 만에 그치리라 하신 것이니라"(단 9:2).

    이렇게 이스라엘이 바벨론에서 예루살렘으로 귀환한 것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였음을 알 수 있다. 다니엘은 바벨론 포로를 예언하였고, 동시에 바벨론의 멸망과 이스라엘의 귀환도 예언하여(단 25:12) 포로 된 백성들에게 그의 예언은 유일의 소망이 되었던 것이다(단 9:2).

    다니엘에게 임한 기도 응답이 지금 한반도에서 드리는 우리의 기도에도 응하기를 소망한다. 해방 70년, 분단 70년이 되는 올 해에 통일 한국으로 가는 길이 열리게 되기를 기도한다.

    세계는 소통(communication)과 융합(convergence)을 중심으로 끊임없이 발전해 가고 있다. 사유 없는 지식, 통찰 없는 이성, 메마른 지성이나 향방 없는 신학적 지식과 교회는 통일 시대를 감당할 수 없다. 전략적 민첩성도 요구되어진다. 급변하는 상황에 능동적으로 대처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교회의 세속화와 종교다원주의나 혼합주의는 경계해야 한다. 통일 운동은 영적 전투이다. 그래서 한국의 크리스천들은 교회 내에서 통일을 위한 기도나 준비도 중요하다. 더 나아가서 하나님의 말씀으로 무장하고 성령의 권능으로 충만해서 교회, 국가와 시대를 이끌어 나가야 한다.

    미국 풀러신학대학원 교수인 클링턴은 "리더십이란, 하나님의 사람이 하나님께서 주신 능력을 가지고, 하나님의 백성을 하나님의 목적으로 나아가도록 영향을 끼치는 역동적인 과정이다"라고 한다. 하나님의 선명한 목적은 선교의 명령이다. 2015년, 한국교회에 평화적 통일과 북한복음화 사명을 감당하는 결단의 중요한 터닝 포인트가 되길 기대한다.

    황준배 / 신학박사, <카리스마적 리더십> 저술

    (간증:70년 포로생활 끝나게 하신 것이 하나님의약속(성경다니엘서에약속),북한 동포에게 신년을 주셨다. 주님께서 그림 한장으로 주님의 개입(은혜)하셨다는 것을 보여주셨다.예레미야 70년>은 예레미야의 사역을 통해 이스라엘 포로 생활 70년의 의미를 재조명하고, 다시 귀환한 뒤 다니엘, 에스겔, 에스더, 느헤미야와 같은 열매를 맺는 기쁨까지 한 권에 연결한 책이다.

    2018.4.29김에스겔 목사)

    바벨론 포로생활 70년은 위대한 섭리의 멍에였다”<와우! 예레미야 70년> 펴낸 조병호 목사

    박용미 기자승인 2016.04.01

    “하나님 예비하신 징계·교육·안식의 시간” 재조명

    ▲ <와우! 예레미야 70년>을 출간한 조병호 목사.

    <성경과 5대제국> <성경과 고대전쟁> <성경과 고대정치> 등으로 교계는 물론 일선 문화계에서도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던 조병호 목사(성경통독원 원장)가 또 다시 성경을 바라보는 새로운 시각을 제시했다. 이번엔 예레미야다. <와우! 예레미야 70년>(통독원)은 이스라엘 백성의 바벨론 포로 생활 70년이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징계, 교육, 안식의 시간이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3월 31일, 서울 장충동 그랜드앰배서더에서 열린 출간 기자간담회에서 조병호 목사는 기자들에게 대뜸 성경에서 가장 어려운 챕터가 무엇인지부터 물었다. 가장 먼저 나온 대답은 역시 레위기. 조 목사는 그 이유를 “스토리가 생략되어 있어서”라고 대답했다. 두 번째 대답은 센스 있게(?) 예레미야였다. 그는 “담고 있는 메시지가 애매해서”라고 설명했다.

    “예레미야서의 메시지는 ‘지는 게 이기는 것’이라고 정리할 수 있다. 사람들이 쉽게 이해하기 어렵다. 여호수아, 기드온, 사무엘, 다윗, 이사야까지 성경에는 승자 이야기가 많고, 하나님을 의지하면 승리한다는 명확한 교훈을 주지만 예레미야는 그렇지 않다. 포로로 끌려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지는 게 이기는 거라는 이야기를 끊임없이 하고 있다.”

    적대적 관계에 있는 사람에게라면 할 수 없는 이야기다. 그만큼 이스라엘 백성들을 사랑하는 마음을 가진 사람이 예레미야였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 하느냐”고 질문하셨을 때 세례요한, 엘리야와 함께 거론됐을 정도로 예레미야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크게 각인된 존재였다. 대대적인 구국성회 중에 줄과 멍에를 들고 와 “70년 동안 바벨론의 포로가 되어야 한다”고 말했던 ‘퍼포먼스’가 당대 사람들에게 매우 강렬하게 남았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등장하는 멍에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은 남유다에 대한 심판을 뜻하는 ‘징계’의 의미를 담고 있기도 하지만, 하나님이 주시는 멍에가 쉽고 가볍다는 것을 깨닫는 ‘교육’을 뜻하기도 한다. 조 목사는 “포로 생활 70년은 백성들이 예레미야의 편지를 통해 받는 ‘제사장 나라 거룩한 시민 재교육’을 거쳐, ‘하나님께서 주시는 징계를 달게 받는 것은 쉽고 가벼운 나무 멍에를 메는 것이지만 저항하는 것은 세상이 주는 무겁고 힘든 쇠 멍에를 메는 것’이라는 진리를 배우는 시간”이라고 해석했다.

    또 이 70년은 그동안 죄악으로 마치 녹슨 가마와 같이 되어 버렸던 예루살렘 땅을 ‘안식’하게 하는 시간이기도 했다. 바벨론 군인들이 부수고 불태웠던 그 상태에서 한 걸음도 나아가지 못하고 사람이 살 수 없는 황폐한 곳이 되어 땅은 완벽하게 휴식을 누린 것이다.

    이쯤에서 조병호 목사는 예레미야에 대한 오해 한 가지를 꺼내들었다. 예레미야가 바벨론의 평화를 위해 기도하라고 했다는 점에서 그가 친바벨론주의자가 아니냐는 의심을 받고 있다는 것이다. 조 목사는 “바벨론이 전쟁에 휩싸이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총알받이가 된다. 그것을 막은 사람이 예레미야”라며 “그는 제국이 세계를 경영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제국을 도구로 사용하시며 온 세계를 경영하신다는 사실을 전하려고 했다”고 설명했다. 또한 “우리나라도 미국이나 중국 등 강대국들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살아가는데, 하나님께서 제사장 나라를 세우기 위해 주변 제국들을 어떻게 사용하시는지 교훈을 얻을 수 있다”고 덧붙였다.

    이렇게 <와우! 예레미야 70년>은 예레미야의 사역을 통해 이스라엘 포로 생활 70년의 의미를 재조명하고, 다시 귀환한 뒤 다니엘, 에스겔, 에스더, 느헤미야와 같은 열매를 맺는 기쁨까지 한 권에 연결한 책이다.

    “예레미야가 이렇게 가슴 뛰는 이야기였는지 성도들에게 알리고 싶고, 우리 자녀들이 어렵게 생각하는 성경을 쉽게 이해할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이 책을 썼다. 독자들이 바벨론 포로 생활에 숨겨진 하나님의 섭리와 계획을 볼 수 있기를 기대한다,

    (간증:70년 포로생활 끝나게하신것이하나님의약속(성경다니엘서에약속),북한 동포에게 회년을 주셨다. 주님께서 그림한장으로 주님의개입하셨다는것을보여주셨다.예레미야 70년>은 예레미야의 사역을 통해 이스라엘 포로 생활 70년의 의미를 재조명하고, 다시 귀환한 뒤 다니엘, 에스겔, 에스더, 느헤미야와 같은 열매를 맺는 기쁨까지 한 권에 연결한 책이다.2018.4.29.김에스겔목사.)

    이스라엘의 포로생활 70년과 역사이해

    김성욱 교수 (웨스트민스터신학대학원대학교 역사신학)

    1. 들어가면서

    이스라엘 역사에 있어서 중요한 사건들을 언급하자면, 천지창조, 아브라함의 소명, 출애굽, 다윗왕조의 흥왕(興旺)과 몰락 그리고 이스라엘의 바벨론 포로생활과 그 귀환 등이 될 것이다. 그 동안의 논의를 볼 때 많은 설교와 논의는 주로 앞부분에 관한 것에 집중되고 있으며, 이스라엘의 바벨론 포로와 그 귀환의 역사적 의미는 그 중요성에 비하여 사뭇 간과되지 않았는가 하는 느낌을 받는다.

    본 논고를 통하여 이스라엘의 바벨론 포로기와 그 의미에 관하여 잘 분석하고 이해한다면, 그것은 구약이해와 성경이해 더 나아가 역사이해를 위해서 귀중한 실마리가 될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 역사적 사건에 관한 이해나 평가가 단순치 않다. 왜냐하면 이 부분에 관한 자료들이 서로 혼합되어 있으며 제대로 분류되지 않은 것도 한 이유이지만, 더 큰 이유는 이스라엘의 바벨론 포로기간이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듯이 정확하게 70년으로 맞아떨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성경에 수차례 언급된 이스라엘의 포로생활 70년을 어떻게 이해하느냐 혹은 그것의 역사성을 인정하면서도 객관적인 70년으로 수용하지 않고 상징적인 의미로 해석해야만 하는가 라는 문제에 부딪히게 된다. 이러한 문제에 관하여 심도있게 다루면서 더 나아가 한국교회와 관련하여 우리가 풀어야할 문제에 관하여 함께 생각해보고자 한다.

    2. 이스라엘의 포로기

    이스라엘의 포로시기를 살펴보려면, 그 역사의 전후를 조사하여 정리하는 것이 필요하다. 왜냐하면 북왕조 이스라엘의 멸망 후(B.C.722년)로부터 남왕조 유다가 멸망당할 즈음의 역사가 간단치 않으며 또한 열왕기와 역대기 외에도 여러 선지서자들의 글들이 중첩되어 나타나기 때문에, 당시의 국제정세와 함께 그 정황을 분석하는 것이 필요하다.

    앗수르의 바니팔(오스납발, B.C.668-632, 대하 33:11-13; 스 4:10) 왕이 죽은 이후, 앗수르에서는 온 나라를 내란으로 몰고가는 큰 혁명이 일어났다(B.C.627-624). 그리고 이 혁명은 결정적으로 앗수르의 파멸을 초래하였으며 당시의 바벨론은 이러한 혼란 상태를 이용하여 독립을 되찾았다. 북왕조 이스라엘이 무너진 지 110년이 지난 후 유브라데스 강변의 신흥국가인 바벨론이 결국 메데제국을 몰락시키고 세계 정세에 있어서 패자로 등장하게 되었다. 그 후 바벨론은 B.C. 612년에는 앗수르의 수도인 니느웨를 함락시키면서 결국 구약성경의 중심 배경이 되는 가나안 즉 팔레스타인 지역은 애굽과 바벨론의 세력 각축장이 되고 말았다. 즉 고대로부터 계속이어져 오던 근동지역의 패자인 애굽의 세력과 신흥 바벨론의 힘 간의 정치적 역학관계는 당시 국제정세를 흔드는 두 축이 되었다.

    비록 예전의 최고 강국이었던 앗수르가 신흥 바벨론과 메데 연합군에 의하여 멸망을 당하였으나(B.C.612), 아직도 앗수르 지역에는 앗수르의 잔류군이 남아 있었으며 또한 바벨론도 아직 본격적으로 자신의 세력을 확장하지는 않았다. 이 틈을 타서 고대 근동의 전통적인 강국인 애굽은 팔레스타인 지역에 대한 자신의 지배권을 회복하기에 가장 적절한 시기로 알아 앗수르의 나머지 세력을 치려하였다. 그러자 앗수르의 남은 백성들은 하란으로 모여서 전력을 재정비하였고 애굽과 대항하기에 앞서 자신들의 거점을 확복하기 위하여 두 차례에 걸쳐 바벨론에 항거하며 하란을 탈환하려 하였다. 이 때 바벨론의 바포폴리살 왕은 이를 감지하고 군대를 이끌고 앗수르의 나머지 세력들을 쳤을 뿐만 아니라, 애굽의 바로 느고의 군대마저 격퇴하였다. 이 전쟁을 통하여 세계 패권(覇權)의 윤곽이 완연하게 드러나게 된다. 바로 이 사건에서 남왕조 유다의 요시야 왕은 애굽 군대가 오는 것을 막기 위하여 나갔다가 전사하고 만다(B.C.609). 이러한 상황은 B.C. 605년까지 계속이어 오고 있었다. 바벨론의 느부갓네살은 갈그미스(Carchemisch) 전쟁에서 애굽의 주력 부대를 완전히 격파하였고, 또 이스라엘 백성 중 일부를 포로로 잡아가고 애굽의 하수까지 남하하였다(왕하 24:7). 따라서 이 전쟁을 계기로 바벨론은 명실공히 고대 근동의 세계 최강국으로 부상하게 된 것이다.

    이 사건을 이스라엘 역사와 연결하여 설명하는 것이 필요하다. 왜냐하면 이 갈그미스 전쟁 중에 바벨론에 의하여 이스라엘의 1차 포로가 이루어지기 때문이다(B.C.605년). 성경에서는 분명히 유다가 완전한 멸망에 이르기 전에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여러 징조들을 보이셨는데, 그 중의 하나가 바로 B.C.605년의 제1차 이스라엘의 바벨론 포로이다. 하나님께서는 계속하여 예레미야를 통해 바벨론에 항복하라고 말씀하셨고 70년 동안 포로가 될 것이라 하셨다. 그럼에도 그들은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않고 계속적으로 자신의 길을 걸어 결국 멸망을 당하게 되었다.

    바벨론의 활동으로 인하여 팔레스타인의 세력 판도가 달라짐에 따라 애굽왕 바로느고의 봉신이었던 여호야김은 다시 메소포타미아의 세력권 안에 놓이게 되었다. 그러던 중에 B.C. 601년 여호야김은 바벨론에 항거하는 반란을 일으켰으나(왕하 24;1), 이로 인하여 B.C. 598년 12월에 다시금 바벨론 군대가 팔레스타인으로 진격해 왔다. 그 결과 유다의 여호야김 왕은 죽고, 이어서 18세인 그의 아들 여호야긴이 왕위에 계승한다. 그러나 여호야긴왕의 통치도 오래가지 못한다. 그가 왕이 된지 3개월 만에 예루살렘은 함락되었고, 느브갓네살은 여호야긴 왕을 비롯한 유다 백성을 바벨론으로 포로로 잡아갔으며(B.C. 597년), 시드기야(B.C. 597-587년)를 왕으로 세운다. 시드기야는 이스라엘의 마지막 왕으로 그의 통치 기간 동안 계속하여 바벨론에 항거하였는데, 결국 B.C. 586년에 느브갓네살의 친위 대장 느부사라단에 의해 예루살렘이 완전히 멸망되었다. 결국 예루살렘이 무너지고 온 이스라엘은 바벨론의 각 곳으로 뿔뿔이 흩어지게 된다.

    이 역사를 정리해보자면 B.C. 605년의 갈그미스 전쟁에서 바벨론은 유다를 치고 많은 유대인들을 포로를 잡아갔는데, 이때 우리가 잘 아는 다니엘과 세 친구를 포함한 상류층의 인사들이 함께 끌려간 것으로 보는데(단 1:1-6) 이것이 이스라엘의 제1차 바벨론포로가 된다. 제2차 바벨론포로는 B.C. 597년에 일어났는데, 이 당시에 끌려간 유대인 중의 대표적인 인물로는 에스겔 선지자를 언급할 수 있다. 그리고 이스라엘의 종말과 관계되는 제3차 바벨론 포로는 B.C. 586년에 이루어졌다. 선지자 예레미야의 예언대로 이스라엘은 바벨론에게 짓밟히게 되고 또한 예루살렘성전은 시드기야 9년에 포위되어 결국 시드기야 11년(B.C. 586년 7월)에 완전히 함락되고 만다. 이 때 시드기야 왕은 몰래 도망을 치다가 잡혀 느부갓네살에게 끌려갔으며, 자신의 아들들은 그의 목전에서 죽임을 당하고, 시드기야왕은 두 눈을 뽑히고 또한 많은 이스라엘 백성들은 바벨론으로 붙잡혀 갔다. 이런 일련의 사건 중에서 가장 중요한 사실은 400여년 전통을 이어온 솔로몬성전이 완전히 파괴된 것이었다.

    결국 이스라엘은 산지사방으로 흩어지고 포로생활을 하면서 이 때부터 디아스포라 개념이 등장하게 된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선지자를 통하여 약속한 기한이 차게 되어, 그들이 포로 잡혀간 지 약70년만에 이스라엘로 돌아오도록 허가를 받았다. 마치 이스라엘이 바벨론의 포로가 되는 것이 세 차례(B.C.605, 597, 586)에 걸쳐 진행되었듯이 이스라엘이 포로에서의 귀환하는 것도 세 차례에 걸쳐 이루어졌다. 이 바벨론 포로에서의 귀환은 하나님의 말씀이 얼마나 구체적으로 성취되었는가를 확인시켜 준다. 제1차 귀환은 B.C.538년에 왕통의 후손인 스룹바벨을 중심으로 그의 인도 하에 이루어졌으며, 49,897명이 귀환하였다(1:5-2:70). 일반적으로 바벨론 포로에서의 귀환은 바로 이 사건을 두고 말하는 것이다. 제2차 포로귀환은 그로부터 약 80년 후인 B.C. 457년(아닥사스다왕 7년)에 일어났는데, 에스라의 인도 하에 1,754명이 귀환하였다(스 8:1-14). 그리고 제3차 귀환은 그로부터 13년 후인 B.C. 444년에 느헤미야의 인도 하에 귀환하였다.

    3. 포로생활 70년에 대한 해석의 가능성

    이스라엘의 포로생활과 그 귀환에 관하여서는 성경의 여러 곳에서 언급하고 있다. 다니엘서 9:1-2에서는

    “메대 족속 아하수에로의 아들 다리오가 갈대아 나라 왕으로 세움을 입던 원년 곧 그 통치 원년에 나 다니엘이 서책으로 말미암아 여호와의 말씀이 선지자 예레미야에게 임하여 고하신 그 년수를 깨달았나니 곧 예루살렘의 황무함이 칠십년 만에 마치리라 하신 것이니라”

    라고 하여 이스라엘의 바벨론 포로생활을 70년으로 언급한다. 이것은 이스라엘의 포로 귀환에 관한 역사를 기록하는 에스라서에도 동일하게 나타난다.

    “바사 왕 고레스 원년에 여호와께서 예레미야의 입으로 하신 말씀을 응하게 하시려고 바사 왕 고레스의 마음을 감동시키시매 저가 온 나라에 공포도 하고 조서도 내려 가로되 바사 왕 고레스는 말하노니 하늘의 신 여호와께서 세상 만국으로 내게 주셨고 나를 명하사 유다 예루살렘에 전을 건축하라 하셨나니” (스1:1-2)

    여기에 등장하는 고레스는 B.C.559-530년까지 페르시아 제국의 기초를 닦은 왕으로 B.C.538년에 조서를 내려 유대인들의 귀환을 허락하였다. 그러나 이상에서 살펴본 바에 의하면 이스라엘의 포로는 아무리 많이 잡아도 B.C.605-538년이므로 67년이다. 그리고 당연한 귀결로 제2차 혹은 제3차 바벨론 포로로부터 바벨론포로 기한을 규정한다면, 그 기간은 훨씬 더 많이 줄어들게 된다. 그렇다면 성경에서 수차례 강조하고 있는 이스라엘의 바벨론 포로생활 70년이란 것은 과연 어떻게 이해해야 할 것인가?

    이스라엘의 바벨론 포로생활에 관한 많은 글들을 살펴보면, 이 부분에 관하여서는 간과하고 넘어간 것으로 여겨진다. 그렇지 않은 경우에도 이 문제를 다음과 같은 세가지 경향으로 설명하거나 이해하고 지나간다. 첫째, 실제로 67년이지만 마치 70년으로 생각하며 이스라엘의 역사를 이해하는 것이다. 어떤 이들에게는 67년이나 70년 별 차이가 없고 그것을 명확하게 구분하는 것이 구태의연한 작업인 듯이 보일지 몰라도, 이 부분을 한번 고려해 보는 것이 좋을 것이다. 왜냐하면 구약연구에 있어서 자료의 빈곤과 풀리지 않는 다른 많은 문제들 속에 파묻혀 슬쩍 넘어가는 모습을 보이기 때문이다. 둘째는 바벨론 포로의 70년이란 것은 상징적인 수로 인식하며 그 해석을 첨부한다. 이것은 나름대로 다음과 같은 성경적 근거를 제시한다. “이에 토지가 황무하여 안식년을 누림같이 안식하여 칠십년을 지내었으니 여호와께서 예레미야의 입으로 하신 말씀이 응하였더라” (대하 36:21). 더 구체적으로 언급하자면 이스라엘의 달력에 따르자면, 매 7년이면 안식년이고 또 이런 안식년의 10번(완전수)을 곱하는 것(7X10=70)으로 설명한다. 즉 이스라엘이 바벨론 포로를 통하여 충분한 안식을 취한 후에 바벨론에서 귀환하는 것으로 설명한다. 세 번째의 설명으로는 그 동안 이스라엘이 안식년을 제대로 지키지 않은 만큼 안식을 취하게 하였다는 주장이 있기는 하지만, 그 근거와 타당성이 미흡하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견해를 종합하고 발전시켜 정리하면, 다음과 같은 두 가지 입장으로 이스라엘의 포로기에 대한 전체적인 이해를 정리할 수 있다. 먼저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당한 심판 중에 가장 혹독한 심판으로 철저한 징벌의 기간이라고 할 수 있다.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축복의 땅에서 뽑혀 이방의 땅으로 그리고 각처로 뿔뿔이 흩어지는 것은 이스라엘 백성의 생존권과 관련된 것으로 결국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심판사상과 관계된다. 두 번째 입장은 이것에 더 나아가 대하 36:21에서처럼 ‘안식의 기간’이라고 할 수 있다. 분명히 이스라엘에게 있어서 포로생활 70년은 심판의 때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새로운 사건을 위한 준비기간으로 본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저들을 심판의 자리에 영원히 버려두시지 않고 회복시키는 분명한 소망을 보이셨기 때문이다. 이것은 황무한 토지가 70년 동안 안식을 누리며 새로운 경작을 준비하듯이, 하나님의 백성인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역사 심판을 통하여 정화되고 정결케되어 새로운 시대 메시아의 도래를 대망하며 소망을 가지는 기간으로 볼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견해에 동의를 표한다고 하더라도 또 다른 가능성에 대한 연구와 분석이 여전히 남는다. 왜냐하면 분명하게 이스라엘의 바벨론 포로생활 67년을 70년으로 주장하기에는 그 마음이 강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또 다른 가능성을 다음 단락에서 다루고자 한다.

    4. 성전 재건과 이스라엘의 사명

    이스라엘의 바벨론 포로생활 70년에 대한 또 다른 해석의 가능성을 학개서에서 찾아보고자 한다. 사실 ‘학개’라고 하면 이스라엘의 바벨론 포로나 혹 그곳에서부터의 포로귀환과는 별 상관이 없어 보인다. 그렇기 때문에 학개서를 염두에 둔다면, 그것은 다만 제2성전건축과 관련이 있는 것으로 여긴다. 그러나 이 성경을 앞에서 언급한 역사적 사실과 연관하여 생각해 볼 것이 있다.

    먼저 학개서의 역사적 배경을 살펴보자. 포로이후의 역사에 관하여 여러 자료들을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B.C.539년에 고레스는 페르시아를 완전히 정복하였고, 그 이듬해에 모든 유대인들은 고국에 돌아가도록 선포하였다. 당시에 약 5만 가량의 이스라엘이 포로에서 귀환하여 열정과 의욕을 가지고 황폐한 땅에 돌아와 정착하였다. 그들은 자신의 일을 열심히 감당하면서 성읍들도 다 재건하여 사람들이 사는 곳처럼 만들고 또한 무너진 성전을 다시 수축하고자 하였다. 그래서 스룹바벨을 중심으로 먼저 제단을 쌓아 번제를 드렸고(에스라 3장) B.C.536년에 이르러서는 성전재건 작업이 시작되었다. 그러나 사마리아에서 온 사람들의 방해로 성전의 기초만 공사하고(B.C.534년) 더 이상의 진척이 없었다.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시간이 흘러 B.C.520년이 되었다. 다리오가 왕으로 등극한 그 다음 해인 당시까지도 제2성전 공사에는 아무런 진척이 없었다. 이스라엘의 부호들은 안락한 대궐을 짓는데 많은 투자를 하지만 성전은 돌보지 않았고(학 1:4), 일반 백성들은 또한 여러 재해와 어려운 일 때문에 마찬가지로 이 공사에 엄두가 나지 않았다(학 1:6).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여러 재난과 농사일에 대한 실패를 통하여 이스라엘에게 경고하며(학 1:10-11) 이것이이 주의 성전 건축을 게을리 한 그들의 죄라고 지적하고 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그 사실을 수용하기 보다는 자신의 삶에 너무나 바빴다(학 1:9). 이 때 하나님께서 학개에게 나타나셔서 이스라엘로 성전 건축을 하라고 명령하신다.

    결국 학개와 스가랴의 권고와 이스라엘의 지도자인 스룹바벨의 영도 하에 성전재건 공사는 다시 재개되었으며 결국 B.C.516년에 제2예루살렘 성전이 완공하게 된다. 새롭게 완성된 성전이 비록 예전의 솔로몬 성전과 같은 위용이나 웅장함이 없으나 더 영광스러울 것을 말씀하시며 이 부분에 관하여 하나님께서는 놀라운 위로와 은혜와 감격의 말씀으로 부어주신다.

    물론 학개나 스가랴 선지자의 등장이 B.C. 520년 이전이나 혹은 그 이후에 나타날 수도 있었을 것이다. “다리오왕 이년 유월 곧 그 달 초하루에 여호와의 말씀이 선지자 학개로 말미암아 스알디엘의 아들 유다 총독 스룹바벨과 여호사닥의 아들 대제사장 여호수아에게 임하니라 가라사대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여 이르노라 이 백성이 말하기를 여호와의 전을 건축할 시기가 이르지 아니하였다 하느니라” (학 1:1-2) 그러나 여기에 나타나는 학개나 스가랴 선지자의 등장에 대하여 많은 학자들이 동의하듯이, 하나님께서 이 시기에 나타나셔서 이스라엘을 권면하는 것은 분명하게 하나님의 역사개입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이 부분에 관하여 우리의 사고를 더 확대해보자.

    이스라엘의 포로생활 70년이라고 하였으나, 그 년수가 실제적으로는 완전히 일치하는 것이 아님을 보았다. 그러나 예루살렘의 무너지고 성전이 재건되기까지의 기간을 따져보면 공교롭게도 70년이 된다(B.C.586-516). 만일 이 문제를 우연에 의한 70년으로 보지 않고, 그 역사적인 의미를 생각한다면 어떻게 이해하며 무엇을 말할 수 있을까? 그것은 성전이 훼파되고 성전이 재건되는 이 기간이 70년이 되는 것이다. 이 주제에 관하여 들어가기 전에 먼저 구약에서 이스라엘을 어떻게 규정하고 있는지를 살펴야 할 것이다. 물론 이스라엘의 역사에서 강조되는 개념 중의 하나가 “남은 자 사상”이기에 이 부분을 언급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이스라엘의 바벨론 포로 이전 혹은 이후의 역사에서도 여전히 강조되는 것은 혈연적 이스라엘이 혹은 아브라함의 자손이면 선민이 되는 것은 아니다.

    성경에서 이스라엘이라고 할 때, 그것은 지역적으로 혹은 혈연적으로 한정되는 그룹에 대한 규정은 아니다. 오히려 구약의 많은 본문을 볼 때, 이스라엘이라고 하면 그것은 이스라엘의 본질과 관계된 것으로, 특별히 하나님을 예배하고 하나님을 섬기는 예배 공동체로서 이스라엘을 말하는 것이라고 하겠다. 그래서 성전에 들어가는 자들에 대한 범위와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자에 대한 자세한 설명과 선포 등이 언급되고 있으며, 특히 이방인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 예배드리며, 더 나아가 진정한 이스라엘로 등장하는 것을 많이 발견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스라엘의 정체성이라고 한다면 하나님께 예배하며 하나님을 섬기는 공동체인 것이다. 곧 하나님으로부터 시작되고 진행된 나라의 백성으로 예배 공동체는 이스라엘 백성의 본질을 규정하는 중요한 기준 중의 하나이다.

    이 문제를 생각할 때, 또 다른 하나의 중요한 관점이 필요하다. 우리가 이스라엘이라고 할 때, 그 이스라엘은 혈연이나 지연에 의한 이스라엘은 아니다. 물론 혈연과 지연을 외면하는 것은 아니지만, 성경이 지속적으로 강조하는 것은 아브라함의 후손 즉 피를 물려받은 후손이 아니라 하나님을 섬기며 하나님을 예배하는 대상으로서의 이스라엘인 것이다. 그렇다고 한다면, 이스라엘 역사에 있어서 중요한 것 중의 하나가 바로 성전이 된다. 하나님을 만나는 장소, 범죄한 이스라엘이 하나님께 직접 나아갈 수는 없지만 제사를 통하여 하나님께서 그들을 만나 주시는 장소인 것이다.

    그렇다면 70년이 가지는 의미로, 이스라엘이 멸망하고 포로되는 것도 생각해 볼 수 있겠지만, 이 문제가 이스라엘의 본질과도 밀접한 관련되는 것으로 본다면 이스라엘에게 있어서 성전과 관계된 것으로 인식하는 것도 중요할 것이다. 즉 역사의 주인되시는 하나님께 예배드리며 살아야 하는 것이 바로 이스라엘이요 그분의 간섭과 인도와 은혜 가운데 살아가는 것이 이스라엘인데, 이들에게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성전이 없었다는 것은 너무나 큰 절망의 시기인 것이다. 그래서 이스라엘에게는 이 기간은 성전이 없어서 떠돌아다니던 영적인 방황의 시기라고 할 수 있는데 이 기간이 바로 70년이다.

    이러한 성전의 문제는 구약으로 끝나지 않고 신약에서도 중요한 논쟁으로 나타나는데, 그 대표적인 것이 예수님께서 자신이 성전되심을 말씀하는 것과 사도행전 7장에 나타나는 스데반 집사의 설교가 그것이다. 물론 신약시대에 와서는 보이는 건물이 성전이 아니라는 것을 말하고 있지만, 구약시대의 사고에서 생각해 보면, 하나님을 만나며 또 그분으로 인하여 살아가는 이스라엘의 삶의 중심에는 항상 성전이 있었던 것이다. 성전 개념에 있어서 기초가 되는 회막을 보아도 그것은 언제나 이스라엘 진중에 있었다. 더 분명하게 말하자면, 회막은 평상시에는 이스라엘의 중앙에 있어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과 함께하시며(임마누엘사상) 또 그들을 다스리는 상징이기에, 결국 그것은 이스라엘에게 있어 가장 본질적임을 나타내고 있었다. 또한 회막은 이스라엘의 이동시에는 온 백성보다 앞장서서 나가기에 이스라엘을 이끌고 나아가는, 즉 이스라엘의 인도자 되신 하나님의 임재를 분명하게 드러내 보였다. 따라서 이스라엘에게 있어서 성전이란 결국 이스라엘의 정체성과도 분명히 연관이 있다고 말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포로에서 귀환한 이스라엘은 자신의 정체성을 회복하지 못하고 바쁘다는 핑계를 통하여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을 하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바로 이런 상황에서 하나님의 역사 개입이 전개되는 것이다. 그래서 성전을 지으라는 말씀과 함께 이스라엘의 회복을 위하여 자신에 대한 분명한 인식을 촉구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제 나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노니 너희는 자기의 소위를 살펴 볼지니라 ....... 나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노니 너희는 자기의 소위를 살펴 볼지니라”(학 1:5-7)

    5. 하나님의 영광으로서의 교회

    이사야의 예언이 있은 지 약 100여년 후에 바벨론의 침입이 있었고 또 그로부터 약 20년 후에는 견고하던 예루살렘 성이 무너지고 예루살렘 성전도 훼파된다. 이스라엘 백성에게 있어서 가장 큰 자랑이며 거룩하고 장엄하고 찬란하게 여기던 성전, 하나님께서 이곳에 계시기 때문에 온 천하가 다 무너져도 살아계신 이 하나님이 계신 이 성전은 결코 무너지거나 패함이 없을 것이고 세상에서 제일 안전할 것이라고 하며, 수많은 선지자들이 외치며 확신하며 보증하며 보장했던 그 성전(렘 7:1-10)이 이방인의 손에 의해 무참히 무너져 버렸다. 그곳에서 하나님께 제사를 지내기 위해 사용되던 그릇과 모든 것들은 이제 이방신들을 섬기는데 이용되게 되었고, 하나님을 대표하여 이스라엘 백성들을 다스리던 왕은 눈이 뽑히고 목배임을 당하였다. 그 동안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자부하던 그 이스라엘과 왕족들은 또 노예처럼 이방 땅으로 끌려가게 되는데, 사실 이들은 하나님을 섬긴다고 자부하며 이방 사람들을 개나 돼지처럼 인식하며 대하였는데, 이제는 다 그들의 포로가 되어 세계 각 곳으로 흩어지게 되는 상황이었다.

    그 힘든 포로 생활을 끝내고, 페르시아왕 고레스에 의하여 포로에서 돌아온 이스라엘에게는 그 기간 역시 여전히 힘든 기간이며 시련의 시기였다고 할 수 있다. 언제나 이스라엘 중심에 있어 그 백성들을 하나로 묶으며 이끌던 성전이 없어진 지 오래며 또 그 성전을 재건하자니 방해도 있고 또한 각자의 일들이 많아 그 일은 더욱 외면당하고 있던 상황이었다. 이런 시기에 학개 선지자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성전의 참된 의미를 깨우쳐 주었으며 또 그와 함께 활동하였던 스가랴와 함께 이스라엘에게 있어서 가장 본질적인 것의 회복 곧 성전의 재건을 무엇보다 먼저 촉구하고 있는 것이다.

    이 문제를 분명히 하는 의미에서 학개의 등장을 살펴본다면, 그것은 분명하게 하나님의 역사개입으로 설명 가능할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신의 일 때문에 혹은 하나님께서 수차례 경고로 주신 어려움 가운데서 그 어려움의 의미를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고 있었고 더더욱 성전 건축에 대하여서는 아무런 준비가 되지 않았으며 그 진척 또한 시키지 못하고 있는 시기에, 하나님께서는 학개를 들어 이스라엘 백성을 권고하시는 것이다. 더 분명히 말하자면,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70년 즉 이스라엘의 바벨론 포로 곧 그들이 성전이 없이 지내야만 하는 70년의 기한이 다가오고 있음에도, 그 성전재건의 일을 담당해야 할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것을 자각하지 않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특별히 학개 선지자를 통하여 이것을 일깨우시는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사실 이 제2성전은 구속사에서 중요한 역할을 감당한다. 결국 이것을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을 잘 보여주기 때문에 학개 2:9에서의 “이 전의 나중 영광이 이전 영광보다 크리라”라는 예언과 축복의 말씀을 성취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 일은 옛 조상 다윗이 많은 돈으로 준비해서 웅장하고 화려하게 국가적인 정책으로 대대적으로 해야 할 일이라기보다는 이스라엘 백성 개개인이 스스로를 자각하며 또 아무리 바쁜 중에라도 감당해야 할 일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그들에게 요구된 것은 솔로몬의 성전과 같이 백향목이나 은금과 같은 호사스러운 재료가 아니라 주위에 있는 산에서 나무를 가져다가 전을 건축하는 것이었다(학 1:8a). 즉 그들이 순종할 마음만 있으면 언제든지 그리고 즉시 시행할 수 있는 것을 명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결국 그 외형에 있어서 솔로몬의 성전과는 비교가 되지 않을 것이 너무나도 분명하지만, 하나님께서는 놀라운 위로의 말씀으로 은혜를 더하신다: “내가 그로 인하여 기뻐하고 또 영광을 얻으리라”(학 1:8b), “이 전의 나중 영광이 이전 영광보다 크리라”(학 2:9).

    이 성전의 재건이란 단순하게 무너졌던 솔로몬 성전의 재건의 의미가 아니다. 그리고 무너진 옛 다윗 왕권의 회복이나 그 영화의 회복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더 나아간다. 만약 그런 의미라면 솔로몬 성전과 같거나 비슷한 재료로 짓도록 명령하였을 것이다. 그런 것이 아니기 때문에 이것은 스가랴서나 신약성경과 연관하여 볼 때, 장차 도래할 메시아 시대에 대한 전초 작업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즉 다시 세워진 성전 곧 회복된 시온과 예루살렘에 그 나라를 다스릴 왕이 찾아오시는 것을 성경은 분명히 말하고 있다.

    6. 적용: 한국교회사에서의 바벨론 포로생활 70년

    교회사를 정리하다 보면 여러 사건에 대하여 “바벨론 포로”라는 표현을 사용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물론 그 기간이 이스라엘 역사에 있었던 것과 같은 그런 포로는 아니지만, 이런 용어가 실제로 사용되었다. 그 대표적인 예로는 13세기 말부터 세속권력에 의하여 교황이 로마에 있지 못하고 프랑스에 체류한 ‘교황의 바벨론 유수’를 들 수 있겠다. 또 다른 유명한 예가 바로 루터에게서 발견된다. 루터는 1520년에 “독일 크리스천 귀족에게 고함”, “교회의 바벨론 포로”와 “크리스천의 자유에 관하여”라는 세편의 작품을 저술하였는데, 그 중에 등장하는 제목이 바로 “교회의 바벨론 포로”이다. 그는 이 책을 통하여 카톨릭의 성만찬론에 대하여 비판하면서 세 가지 교회의 잘못된 모습을 ‘바벨론 포로’ 상태로 묘사하고 있다.

    이와 문맥을 같이하여 한걸음 더 나아가도록 하자. 현시국에서 많은 사람들의 입에 회자되는 주제 중의 하나가 바로 “북한” 혹은 “북한교회”에 관한 문제일 것이다. 이 부분은 첨예한 주제여서 논자가 감히 화두를 던지기가 쉽지 않으나, 역사를 전공하는 자로서 역사이해에 관한 조심스러운 시도를 펼쳐 보이고자 한다. 우리는 북한의 실정을 여러 통로를 통하여 듣고 또 북한교회가 당하는 핍박과 고통을 안다. 이런 상황도 “교회의 바벨론 포로의 시기”라고 규정할 수는 없겠는가?

    만약 이렇게 ‘한국교회의 바벨론 포로의 시기’라고 규정할 수 있다면, 그렇게 명명함에 있어서 여러 가지 사건들을 고려할 수 있을 것이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났는가라는 그 원인 분석에 관한 것인데, 우리는 쉽게 북한의 공산당을 큰 원인의 하나로 설정하게 될 것이다. 물론 이것이 타당성을 가지며 중요한 원인이 되기도 하지만, 우리의 주된 관심이 ‘교회(敎會)’라는 것을 고려하면서 한국교회사를 다시금 짚어보고자 한다.

    오늘의 논지와 관련하여 논자는 1938년 9월9일 평양의 서문밖교회에서 열린 제27회 총회를 언급하고자 한다. 물론 당시의 상황을 말하자면, 삼엄한 경비 곧 193명의 총대들 틈에서 약 100명의 경찰들이 그 총대들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한 가운데 각본대로 진행된 총회였다. 그러나 어찌되었던 한국교회는 교회 스스로가 신사참배를 국민의식으로 가결하고 말았다. 물론 일제시대에 일본의 핍박 가운데 벌어진 일이라고 치부할 수도 있다. 그러나 한국교회는 이 문제에 관하여 아직도 시원하게 해결하지 않고 있다. 주기철 추모사업 등 여러 행사들이 있었음에도, 그 동안 한국교회는 아직까지도 총회의 신사참배 가결에 대하여 총체적이며 근본적인 회개를 하지 않고 있는 지도 모른다. 그러던 중에 벌써 상당한 시간이 흘렀다. 물론 나중에 남북이 분단되고 공산당의 억압과 핍박이 있었던 것이 사실이지만 ‘교회’라는 영적인 단체를 고려한다면, 교회가 교회의 정체성을 곧 교회의 교회됨을 스스로 무너뜨린 이 사건은 한국교회에 있어서 너무나 중요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서문밖교회에서의 신사참배 가결이 있은 지 벌써 66년이 지나고 있다. 얼마 후면 70년이 될 것이다. 그럼에도 한국교회는 교회의 정체성에 관한 중요한 문제를 해결하지 않은 채 우리의 관심을 다른 곳으로 돌리고 있다. 물론 남북한의 문제 통일문제 등에 관하여 고려해야할 시기이며 또 여전히 북한을 위하여 여러 가지 물질로 혹은 다른 무엇으로 돕고 선교를 위하여 준비하며 실천해야 하는 것이 현실이다. 그러나 한국교회사를 생각하면서 현재 한국교회가 제일 먼저 풀어야 할 과제는 과연 무엇이겠는가? 그것은 신사참배에 대한 회개의 문제를 넘어서 마치 학개서에 선지자를 통하여 이스라엘에게 주신 말씀처럼 교회의 정체성을 바로 회복하는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곧 “자신의 소위를 돌아보라”라는 말과 같이 우리의 모습과 과거사를 추억하며 하나님의 말씀에 먼저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여야 할 것이다.

    교회가 교회답게 서기 위하여 우리의 과거를 청산하고, 먼저 한국교회가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를 회복하며, 하나 된 교회를 이루어가고자 노력한다면, 하나님께서는 예전에 평양에 대하여 “동방에 예루살렘”이라고 불렸던 그 명성과 영화보다 더 큰 영광과 위로와 은혜로 한국교회 위에 부어주실 것을 확신하며 소망 중에 기다린다.

    (간증:70년 포로생활 끝나게 하신 것이 하나님의 약속(성경다니엘서 약속),북한 동포에게 회년을 주셨다. 주님께서 그림 한장으로 주님의개입(은혜)하셨다는 것을 보여주셨다. 예레미야 70년>은 예레미야의 사역을 통해 이스라엘 포로 생활 70년의 의미를 재조명하고 다시 귀환한 뒤 다니엘, 에스겔, 에스더, 느헤미야와 같은 열매를 맺는 기쁨까지 한 권에 연결한 책이다.2018.4.29)










    다니엘 전체 해석 요약 정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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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나님의 주권 앞에 선 믿음의 사람

    본문 요약

    다니엘서는 바벨론 포로로 끌려간 유다 청년 다니엘과 세 친구가 이방 제국 한복판에서도 하나님을 향한 믿음을 지켜나간 이야기와 하나님의 주권 아래 세상의 나라들이 흥망하는 역사를 예언한 책입니다. 절대 권력을 가진 왕들 앞에서도 진리를 저버리지 않은 신앙인의 삶과 하나님 나라에 대한 종말적 비전이 교차되며, 시대를 초월한 믿음과 소망의 메시지를 전달합니다.

    본문의 구조

    1. 바벨론에서의 신앙과 기적 (1~6장)
    2. 이상과 계시를 통한 하나님의 주권 (7~12장)
    3. 종말과 구원의 확신 (전장 통합)

    바벨론에서의 신앙과 기적 (1~6장)

    다니엘과 세 친구는 예루살렘이 바벨론에 의해 침략당한 후 포로로 끌려온 유다의 귀족 출신 청년들이었습니다. 바벨론은 그들에게 왕의 음식과 이름, 문화와 교육을 주입하며 정체성을 바꾸려 했습니다. 그러나 다니엘은 뜻을 정하여 왕의 음식으로 자신을 더럽히지 않기로 결단하고 채식만 먹으며 하나님께 신실하게 서기로 합니다. 하나님은 그들의 결단에 지혜와 명철을 더하시고, 다니엘에게는 환상과 꿈을 해석하는 특별한 능력을 주십니다. 이는 타협하지 않는 믿음이 하나님의 은혜를 부르는 통로가 됨을 보여줍니다.

    2장에서는 느부갓네살 왕이 꾼 꿈을 해석함으로 다니엘의 지혜가 온 제국에 드러납니다. 아무도 꿈의 내용조차 알 수 없었지만, 다니엘은 친구들과 함께 기도하고 하나님께서 계시해 주신 것을 바탕으로 해석합니다. 금, 은, 동, 철, 그리고 흙과 철이 섞인 다섯 부분의 신상은 각각 제국들의 흥망을 나타내며, 마지막에는 사람의 손으로 하지 않은 돌이 그 모든 나라를 쳐서 무너뜨리고 영원한 하나님 나라가 세워짐을 보여줍니다. 이는 세상 권세가 아무리 강해 보여도 하나님의 나라는 그 위에 있으며 반드시 완성된다는 분명한 선언입니다.

    3장에서는 세 친구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가 금신상에게 절하지 않음으로 풀무불에 던져지지만 하나님께서 직접 그들과 함께하심으로 머리카락 하나 그을리지 않고 살아납니다. 하나님께 대한 절대적인 충성과 세상의 위협 사이에서 그들은 선택했고, 하나님은 그 믿음을 존귀하게 여기셨습니다. 4장에서는 느부갓네살 왕 자신이 교만하여 짐승같은 형벌을 받게 되지만, 회개하고 하나님을 높이는 장면이 등장합니다. 이는 세상 통치자라 할지라도 하나님의 통치를 벗어날 수 없다는 사실을 드러냅니다.

    5장에서는 벨사살 왕이 하나님의 성전 기구로 잔치를 벌이다가 손가락의 글씨로 하나님의 심판을 선고받습니다. 다니엘은 그 글을 해석하며 왕의 나라가 끝났음을 선포하고, 그 밤에 벨사살은 죽고 바벨론은 메대와 바사 연합군에 의해 멸망합니다. 6장에서는 다리오 왕 아래에서도 다니엘이 모함을 받아 사자굴에 던져지지만, 하나님이 사자의 입을 막으시고 구원하십니다. 그는 기도하는 자였고, 권력을 두려워하기보다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지키는 사람이었습니다.

    이상과 계시를 통한 하나님의 주권 (7~12장)

    7장부터는 다니엘이 본 환상과 그에 대한 해석이 중심이 됩니다. 첫 번째 환상은 네 짐승의 환상입니다. 각각의 짐승은 바벨론부터 시작해 페르시아, 헬라, 로마로 이어지는 제국들을 상징하며, 마지막에는 하나님께서 심판하시는 장면이 이어집니다. 이때 인자 같은 이가 하늘 구름을 타고 오셔서 영원한 권세를 받는 모습이 등장하는데 이는 메시아의 예표로 이해되며, 신약에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과 연결되어 해석됩니다.

    8장에서는 숫양과 숫염소의 환상이 나옵니다. 이것은 메대와 바사, 헬라의 충돌과 그 과정 속에서 성전을 더럽히는 한 작은 뿔의 등장을 예고합니다. 이는 역사적으로는 안티오쿠스 에피파네스로 이해되며, 신약적으로는 종말에 나타날 적그리스도의 모형으로 받아들여집니다. 다니엘은 이러한 계시 앞에서 심히 기진하며 두려워하지만, 하나님은 여전히 그에게 세상 끝에 있을 구원의 약속을 주십니다.

    9장에서는 다니엘이 예레미야의 글을 읽고, 포로 기간이 70년이 될 것이라는 것을 깨닫고 금식하며 기도합니다. 그는 자신의 죄와 백성의 죄를 자백하며 하나님의 긍휼을 구합니다. 그 기도에 대한 응답으로 가브리엘 천사가 나타나 70이레의 계시를 전합니다. 이는 예루살렘의 회복과 함께 메시아의 오심과 죽으심, 그리고 종말에 있을 사건들을 함께 내다보는 복합적인 예언으로서, 구속사의 흐름을 상징적으로 보여줍니다.

    10장부터 12장까지는 마지막 환상이 이어집니다. 다니엘은 또다시 금식과 기도 가운데서 하나님의 계시를 받고, 미래의 많은 전쟁과 핍박, 그리고 종말의 날에 있을 일들을 듣게 됩니다. 북방왕과 남방왕의 싸움, 성도의 고난, 궁극적인 부활과 상급에 대한 말씀이 선포됩니다. 의인은 영생으로, 악인은 수치를 당할 것이라는 선언은 구약 속에서 부활의 개념을 분명하게 드러내는 중요한 본문입니다. 하나님은 마지막 날까지 다니엘에게 네 길로 가라 하시며 그 끝에 상급이 있을 것을 약속하십니다.

    종말과 구원의 확신 (전장 통합)

    다니엘서 전체는 하나님의 주권에 대한 절대적 선언입니다. 눈에 보이는 제국들이 번성하고 권세를 자랑하는 시대였지만, 그 모든 역사의 흐름은 하나님의 손 아래 있었고, 하나님의 때에 따라 흥하고 망했습니다. 다니엘은 이러한 현실 속에서 결코 타협하지 않았고, 언제나 기도하는 자리에서 하나님의 뜻을 구했습니다. 그는 권력자 앞에서도 흔들리지 않았고, 세상의 위협 속에서도 하나님의 주권을 신뢰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 믿음을 통해 민족에게 희망을 주셨고, 모든 시대를 향해 구원의 메시지를 전하셨습니다.

    다니엘의 환상은 단지 시대의 사건을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역사의 마지막에 도래할 하나님의 나라를 바라보게 합니다. 이 나라는 결코 흔들리지 않으며, 거룩한 자들이 영원히 누릴 나라입니다. 지금은 고난과 핍박이 있어도, 그 끝에는 하나님이 모든 것을 회복하시고 심판하시며 완전한 통치를 이루실 것이라는 약속이 다니엘서의 중심에 있습니다.

    결론

    다니엘서는 포로 시대라는 절망의 시간 속에서도 하나님께 붙든 자가 어떻게 시대를 넘어 하나님 나라를 바라보며 살아갈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책입니다. 다니엘과 세 친구는 권력 앞에서도 믿음을 지켰고, 하나님은 그들을 통해 살아계심을 드러내셨습니다. 그리고 환상을 통해 역사 속에서 일어날 모든 일을 예고하시고, 그 모든 과정이 결국 하나님 나라로 향하고 있음을 선포하셨습니다.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시대도 어쩌면 다니엘이 처했던 바벨론과 다르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동일하시며, 그분의 나라는 여전히 세워져 가고 있습니다. 믿음을 지키며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자에게는 결국 하나님의 손이 함께 하며, 그 끝에는 영원한 상급이 기다리고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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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니엘 장별 요약 정리 

    하나님께 신실한 사람, 다니엘

    1장 – 뜻을 정한 다니엘

    다니엘과 세 친구는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가 왕궁 교육을 받지만, 하나님의 율법을 지키기 위해 왕의 음식을 거부한다. 하나님은 그들에게 지혜를 주셨고, 그들은 바벨론 박수들보다 열 배나 뛰어난 자로 인정받는다.

    2장 – 느부갓네살의 꿈 해석

    느부갓네살 왕이 신상에 대한 꿈을 꾸지만 아무도 해석하지 못한다. 다니엘은 하나님께 기도한 후 꿈을 밝히고, 바벨론 제국이 무너지고 하나님의 나라가 세워질 것을 예언한다. 왕은 다니엘을 높여 총리로 세운다.

    3장 – 풀무불 속의 세 친구

    느부갓네살은 금 신상을 세우고 절을 강요하지만,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는 거부한다. 그들은 풀무불에 던져지지만 하나님의 보호로 살아남고, 왕은 하나님을 찬양하며 그들을 높인다.

    4장 – 느부갓네살의 교만과 낮아짐

    느부갓네살은 자신의 권세를 자랑하다가 하나님께 징계를 받아 짐승처럼 살게 된다. 시간이 지난 후 회개하고 하나님을 찬양하며 왕위로 회복된다.

    5장 – 벨사살 왕의 최후

    벨사살 왕이 성전 기물로 잔치를 벌이다가 벽에 나타난 손가락 글씨를 본다. 다니엘이 글을 해석하며 왕의 몰락을 예언하고, 그날 밤 바벨론이 멸망한다.

    6장 – 사자 굴 속의 다니엘

    다리오 왕이 다니엘을 신임하자 관리들이 음모를 꾸며 기도 금지령을 만든다. 다니엘은 여전히 하나님께 기도하다가 사자 굴에 던져지지만, 하나님의 보호로 살아난다. 왕은 하나님을 경외하게 된다.

    7장 – 네 짐승의 환상

    다니엘이 네 짐승의 환상을 보며 세계 제국의 흥망과 마지막에 세워질 하나님의 영원한 나라를 깨닫는다. 인자 같은 이가 권세를 받는 장면이 등장한다.

    8장 – 숫양과 숫염소의 환상

    다니엘이 바사(페르시아)와 헬라(그리스)의 흥망성쇠를 예언하는 환상을 본다. 작은 뿔이 나와 성소를 더럽히지만, 결국 하나님의 정하신 때가 되어 회복된다.

    9장 – 예레미야의 예언과 70이레

    다니엘은 예레미야의 예언을 읽고 회개 기도를 드린다. 가브리엘 천사가 나타나 70이레에 대한 계시를 주며, 장차 메시아가 오고 속죄가 이루어질 것을 예언한다.

    10장 – 하늘에서 온 사람의 환상

    다니엘이 기도하던 중, 하나님께로부터 온 천사가 나타나 앞으로 일어날 영적 전쟁과 하나님의 계획을 보여준다.

    11장 – 남방 왕과 북방 왕의 예언

    다니엘은 장차 일어날 강대국들의 대립과 이스라엘의 고난을 예언하는 말씀을 듣는다. 세상 권세자들은 흥망성쇠하지만, 끝에는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진다.

    12장 – 마지막 때와 부활의 약속

    최후의 심판과 의인의 부활이 예언된다. 환난이 있겠지만, 하나님을 믿는 자들은 영원한 생명을 얻고, 하나님은 다니엘에게 끝까지 믿음을 지키라고 말씀하신다.

    결론

    다니엘서는 하나님의 주권과 신실한 자들에게 베푸시는 보호와 지혜를 강조한다. 다니엘과 그의 친구들은 어떤 상황에서도 신앙을 지키며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았고, 하나님은 그들에게 지혜와 능력을 주셨다. 또한, 세상의 권세는 결국 하나님의 뜻대로 흘러가며, 마지막에는 하나님의 나라가 영원히 세워질 것임을 선포한다. 이를 통해 성도들은 현실의 어려움 속에서도 하나님을 신뢰하며 끝까지 믿음을 지킬 것을 배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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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니엘 개론

    제목 / 

    본서의 명칭은 저자이며, 주인공인 '다니엘'의 이름을 따라 붙여진 것으로, 그 이름의 뜻은 '하나님은 나의 심판자' '하나님은 나의 심판'이다. 
    한편 본서는 헌신과 충성이 담긴 빛의 책으로 어두운 세력에서 밝은 빛을 발하는 빛된 자의 행실과 그 빛을 다루시는 하나님의 섭리가 담긴 책이다.

    중심 인물의 이름을 따라 책명을 붙이는 구약의 관습은 여호수아, 사무엘, 에스더, 욥기등의 책들에 의해서도 나타난다. 
    그러한 책명이 반드시 그 책의 저자됨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물론 다니엘서의 경우처럼 저자가 그 책명 속에 포함될 수도 있다.

    저자 /
    본서의 저자에 대해서는 본서 자체가 다니엘이라고 증거하고 있다(9:2; 10:2). 
    예수께서도 이 책의 저자를 다니엘이라고 인정하셨다. 
    이 책은 B.C. 539년 고레스에 의해 바벨론이 함락된 직후인 B.C. 530년경에 완성된 것으로 보인다.

    유대인들이나 그리스도인들의 전통적 견해는 다니엘서가 B.C. 6세기에 기록되었고, 이 책의 저자는 다니엘이라는 것이다. 이 전통적 견해가 옳다는 것을 지지하는 증거들은 다음과 같다.
     (1) 다니엘서의 주장.
     선지자 다니엘은 여러 구절들(단 8:1-7, 13-19, 27; 9:2-22; 10:2-5)에서 제 1인칭을 사용하고 있다. 그는 이 책을 간수하라는 거룩한 명령을 개인적으로 받았다고 진술한다(단 12:4). 저자가 자신을 제 3인칭으로 언급하고 있는 부분들이 있다는 사실(단 1:6-11, 17, 19, 21; 2:14-20)로 인하여 이상하게 생각할 필요는 없다. 왜냐하면 고대의 저술들 가운데서 그러한 어법을 자주 볼 수 있기 때문이다(스 7:28 참조).
     (2) 다니엘서의 저자는 역사를 잘 알고 있다.
     B.C. 6세기의 사람으로서 바벨론의 사건들에 정통한 사람만이 이 책속에 나타나는 역사적 사실들을 제시할 수 있었다. 이러한 사실들에 대한 지식이 B.C. 6세기 이후에는 잃어버린바 되었는데, 그 이유는 그러한 사실들이 그 시대 이후 고대의 다른 문헌 속에 기록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비교적 최근의 고고학적 발견들로 인하여 이 사실들이 한번 더 밝혀지게 되었다.
     (3) 예수 그리스도의 증거.
     다니엘서로부터 한 구절을 인용함으로써, 예수 그리스도는 다니엘을 이 책의 저자로 언급하신다(마 24:15). 모든 그리스도인 신자에게 있어서 이 증언은 결정적 증거가 될 것이다.
     이 책은 아주 명백하게 두 부분으로 나눠진다. 첫 부분(단 1-6장)은 주로 역사이며 둘째 부분(단 7-12장)은 주로 예언이다. 그러나 이 책은 문학적 구성 단위(literary unit)로 되어있다. 다음의 논리들은 그러한 통일성(unity)을 지지하는 것으로서 열거될 수 있다.
     (1) 이 책의 여러 부분들은 상호 연관되어 있다. 성전 기명들이 벨사살의 잔치에 사용된 일은 그 기명들이 어떻게 바벨론에 옮겨져 왔는지를 보여주는 기록에 비춰 이해할 수 있다(단 1:1, 2; 5:3). 단 3장12절은 단 2장 49절에 처음으로 묘사된 느브갓네살의 정치적 조치를 언급하고 있다. 단 9장21절에는 앞서 받은 묵시가 언급되고 있다(단 8:15, 16).
     (2) 역사적 부분에는 이 책의 후반부(7-12장)에 나오는 예언들의 주제와 매우 밀접한 예언(2장)이 내포되어 있다. 제 7장에는 제 2장에서 제시된 주제가 더 발전된 형태로 나온다. 또한 역사적 요소와 예언적 요소 사이의 관계가 역력하다. 역사적 부분(1-6장)은 한 나라, 곧 바벨론에 대한 하나님의 취급 방법과 그 나라가 하나님의 계획 속에서 취할 역할에 대한 이야기가 다루어져 있다. 이 이야기는 하나님께서 모든 나라를 어떻게 다루시는가에 대한 하나의 예증으로서 나타날 것이다.
     바벨론과 같이 이 책의 예언 부분에 그림같이 묘사된 바벨론 이후 연이어 일어날 제국들도 하나님의 뜻을 알고, 또 거기에 협력할 수 있는 기회가 부여되었다. 각 제국들은 하나님의 목적을 성취하는 데서 보인 충성으로 평가될 것이었다. 그러므로 예언 부분에 묘사된 나라들의 흥망성쇠는 바벨론의 사례에서와 같이 역사 부분에서 제시된 원칙들에 의거하여 이해하여야 한다. 이러한 사실이 이 책의 두 부분을 하나의 단위로 묶어 놓으며 바벨론 이후에 일어날 세계의 각 제국들로 말미암아 연출될 역할을 이해하기 위한 기초를 놓아 준다.
     (3) 이 책의 문학적 구성 단위가 매우 잘 증명될 수 있기 때문에 대다수의 학파의 대표자들이 그 사실을 인정한다. 구성, 곧 사고의 전반적인 방향과 두 가지 언어로써 사용된 표현법은 이 책 전반에 공통됨으로 이 책의 어떤 부분은 한 저술가가 쓰고 다른 부분은 다른 저술가가 썼다고 하는 사람들의 주장이 무색해진다.
    제 1 쿰란(Qumran)굴에서 발견된 수백 사본 조각 가운데 세개는 다니엘서 사본 조각이다. 이것들은 바르텔레미(D. Barthelemy)와 밀리크(J.T. Milik)에 의하여 “유대 제1 사막 쿰란 제 1 동굴에서 발견물”(Oxford, 1955, 150-152)이라는 책에 발표되었다. 그 사본 조각들은 두 서기관들에 의하여 쓰여졌는데 그것은 따로따로 된 두 두루마리에 속하든지 아니면 제 1장과 제 2장은 한 서기관이 쓰고, 제 3장은 다른 서기관이 쓴 같은 두루마리에 속하든지 할 것이다. 그 사본 조각들은 다음에 나오는 22절들의 부분들이 포함되어 있다. 단 1:10-17; 2:2-6; 3:22-30. 이 절들과 마소라 사본과를 비교해 볼 때, 거기엔 16가지의 차이점들이 있다. 그러나 그 중 어느 하나도 구절의 의미에는 아무런 영향을 주지 못한다. 16가지 중 9가지는 철자상의 차이이고, 그 철자가 미치는 영향도 고작 한 문제에 불과하다. 아홉 중에서 둘은 철자의 오기인 것같고, 나머지 일곱은 마소라 사본에서까지도 여러가지로 철자되어 있다. 네 가지의 첨가된 것이 있는데, 하나는 접사 “그리고”이며, 하나는 “만약”이라는 말 앞에 있는 “경우”라는 불변화사요, 나머지 두 단어에는 모음이 첨가되었다. 마소라 사본에 있는 모음 글자가 조각에는 없는 경우가 한번 있다. 두개의 동사 어미는 기록상의 잘못인 것같다. 마소라 사본과 사해 사본 조각들과의 차이점을 비교해 보면 그 차이가 극히 미미하기 때문에 번역상 별 문제가 되지 않을 것같다. 이것은 다니엘서의 히브리어 사본은 실질적으로 적어도 그리스도 당시에 있었던 것과 동일한 형태의 것이라는 강력한 증거이다.
     다니엘 2장의 사본 조각에 히브리어에서 아람어로 바뀌어지는 구절이 포함되어 있다는 사실은 참으로 흥미로운 일이다(단 2:4). 바로 그곳에는 히브리어의 마지막 단어와 아람어의 처음 단어 사이에 공백이 남겨져 있어 두 언어 사이의 구별을 뚜렷이 해 놓았다. 이 사본 조각들은 위경서에 나오는 “세 아이들의 노래”가 포함되어 있지 않다는 점에서 마소라 사본과 일치한다(단 3:23).

    기록연대 / 
    본서는 부분적으로 1인칭으로 기록된 것을 보아 기술된 당시의 사건과 동시대에 구성된 것이거나, 적어도 그 다음 세대를 넘지 않는 것으로 보여진다. 
    이 책은 B.C.2세기까지는 알려지지 않았는데, 이는 천사가 다니엘에게 비밀을 간수하고 봉함하라고 명령했기 때문이었다(단 12:9). 
    본서가 B.C.2세기에 집필되었다고 주장하기도 하지만 본서에 기록되어진 예언 등은 이 책이 그 이전에 기록되었음을 증거하여 준다. 
    쿰란 교단에서 다니엘서는 정경으로 받아들여졌고, 신약 기자들에게도 본서가 예언서로 받아들여졌으며, 얌니아의 랍비들에 의해서도 6세기의 저술로 받아들여졌다.

    배경 /
    B.C. 626년 앗수르 제국에 반기를 든 바벨론은 612년에 앗수르의 수도 니느웨를 함락시켰다. 
    또한 B.C. 605년에는 애굽마저 정복함으로써 명실공히 강대국으로 부상하였다. 
    바벨론 포로로 끌러간 다니엘은 줄곧 선지자와 정부의 관리로서 활동하였으며 그의 이런 활약은 바벨론이 메대와 바사에 의해 정복될 때까지도 계속되었다.

    역사적 배경
     다니엘서는 바벨론 시대의 유대인 포로였던 다니엘과 그의 세 친구들의 생애에서 일어난 어떤 역사적 사건들에 대한 기록, 느부갓네살 왕이 꾸었고 다니엘이 해석했던 예언적 꿈에 대한 기록과 다니엘 자신이 받았던 이상에 대한 기록을 함께 싣고 있다. 비록 다니엘서가 포로 기간 동안과 그 직후에 바벨론에서 기록되었다 할지라도, 그 목적은 유대 민족의 포로 역사나 다니엘의 전기를 기록하려는 것이 아니다. 이 책은 정치가이자 예언자인 다니엘과 그의 세 친구들의 경험 중 가장 중요한 점들을 말하고 있고, 특별한 목적을 염두에 두고 편찬되었다.
     먼저 다니엘은 그가 왜 바벨론 왕의 공무에 임하게 되었는지의 사유를 간략히 서술하고 있다(단 1장). 느부갓네살왕의 제1차 시리아 원정 때, 즉 B.C. 605년 제1차 포로로서 바벨론으로 잡혀갔을 때, 왕족의 피를 받은 다니엘과 다른 귀공자들이 정부의 직무를 위하여 훈련받도록 선택되었다. 다니엘이 바벨론에 체류한 첫 19년은 바벨론의 속국으로 있었을찌라도, 유다가 한 나라로서 존속할 수 있었던 마지막 해들이었다. 유다의 말년에 있었던 왕들의 빈번한 반바벨론 정책의 결과로써 재난들이 유다 국민에게 꼬리에 꼬리를 물고 덮쳤다.
     다니엘이 포로로 붙잡혀 갈 당시 유다를 통치했던 여호야김왕은 몇년 간은 바벨론에 충성하였다. 그러나 점차적으로 그는 친이집트파의 정책에 동의하여 반역하였다. 그 결과로서 유다는 군대의 침략을 받았고, 그 백성들은 그들의 자유를 빼앗기고 포로로 붙잡혀 갔고, 왕은 그 생명을 잃어 버렸다. 그의 왕위를 계승한 그의 아들 여호야긴은 겨우 석달의 짧은 통치 후, 그의 불충성으로 인하여 응징하러 온 바벨론 군대를 맞게 되었다. 그와 함께 수천명의 유다 상류 계급 사람들이 B.C. 597년에 포로로 붙잡혀 갔다. 여호야긴의 뒤를 이은 시드기야왕은 분명히 바벨론에 충성하고자 노력하였다. 그러나 그의 연약성과 우유부단함 때문에 그는 애굽의 제안과 그의 주요 보좌관들의 반바벨론 감정을 오래 지탱할 수 없었다. 그 결과 팔레스틴에서 계속적인 반역에 지친 느부갓네살 왕은 유다 왕국을 멸망시키기로 결심하였다. 2년 반 동안 바벨론의 군대는 유다를 약탈하고, 그 성전과 그 왕궁들과 함께 예루살렘을 포함한 도시들을 점령하고 파괴하고, B.C. 586년에 유다 주민들의 대부분을 포로로 잡아갔다.
     다니엘은 이 다사다난한 때에 바벨론에 있었다. 그는 바벨론 군대가 그의 고국 땅을 치려고 몇번 출발하는 것을 보았을 것이며, 바벨론 군대의 승리의 개선과 포로된 유대인들의 도착을 목격하였을 것이다. 그 포로들 중에는 그의 가족을 동반한 젊은 여호야긴왕과(왕하 24:10-16), 나중에는 눈 먼 시드기야왕이(왕하 25:7) 있었다. 이러한 때에 다니엘은 포로된 유대인들 중에서 꾸며지고 있던 정치적 소동도 알았을 것이다. 이 소동의 결과로 느부갓네살은 그 주모자들 중 몇을 태워 죽였다. 바로 이 소동 때문에 예레미야는 포로된 그의 동포들에게 바벨론에서 조용히 평화롭게 지내라고 촉구하는 편지를 보내게 되었다(렘 29장).
     이 모든 시기 동안 다니엘과 그의 세 친구들은 관리로서, 그 나라의 신민으로서 잠잠히 그리고 충성스럽게 그들의 직무를 수행하였다. 그들은 학문적 수련을 쌓은 후, 박사라고 불리는 상류 그룹의 일원이 되었는데, 그들은 왕의 고문으로 봉사하였다. 다니엘이 미래의 제국들에 대한 꿈을 느부갓네살왕에게 해석할 특별한 기회를 얻었던 때는 바로 이때였다(단 2장). 그 결과 다니엘은 수년간 재직하였을 것으로 보이는 아주 높은 지위에 임명되었다. 이 지위는 다니엘에게 그와 그의 친구들이 섬기는 하늘과 땅의 하나님의 권세를 왕에게 알릴 기회를 제공하였다. 다니엘이 얼마동안 이 지위에 있었는지는 알려져 있지 않다. 아마도 B.C. 570년 전에 그 지위를 상실한 것같다. 왜냐하면 그의 이름이 당시의 느부갓네살 정부의 관직을 맡은 고관들의 이름을 기록한 설형문자(쐐기문자)로 기록된 현존하는 “왕궁 정부 연감”의 목록에 없기 때문이다. 느부갓네살의 통치에 대한 이외의 왕궁 정부 연감은 현존하지 않는다.
     사실상, 다니엘의 이름이 현재로서는 성서 밖의 자료에서는 언급되어 있지 않다. 이 문서에 다니엘의 이름이 없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다니엘이 얼마 동안 공직에 있었는지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느부갓네살의 통치 기간 중에 있은 사건들 중 네가지 중요한 사건들만이 다니엘서에 기록되어 있고, 그 중 세 사건에서 다니엘이 활약하고 있다. 그 네 사건들은, 느부갓네살의 즉위년을 포함한 그의 통치 첫 3년 동안의 유대 왕족들의 교육(1장), 왕의 치세 제2년에 있은 느부갓네살의 꿈 해석(2장), 연대가 확실치 않은 어느 해에 두라 평지에 신상을 세운 일과 그 결과로 다니엘의 친구들이 당한 경험들(3장), 아마도 왕의 말년에 일어났을 것으로 짐작되는 것으로서, 왕이 7년간 미쳐서 쫓겨나 고생할 것을 선고하는 그의 꿈을 다니엘이 해석함(4장)등이다.
     느부갓네살이 실각되어 있는 시기 동안의 다니엘의 활동에 대하여는 알려져 있지 않다. 또한 느부갓네살이 권세와 왕위를 복권한 후에 다니엘이 무엇을 하였는지, 느부갓네살을 계승한 왕들­아멜마르둑(Amel-Marduk: 성경상의 에윌므로닥), 네르갈샤르우수르(Nergal-shar-usur), 라바쉬마르둑(Labashi-Marduk), 나보니더스(Nabonidus)­의 통치 기간 동안에도 그의 봉직이 요청되었는지에 대해 알지 못한다. 그러나 느부갓네살의 강대한 제국이 이전 왕들을 시살(弑殺)한 왕들의 통치하에서 도덕적으로 약하여지고 부패하는 것을 관찰하는 일이 허락되었다. 또한 그는 동방의 페르시아에서 고레스 왕이 혜성같이 나타나는 것을 지대한 관심을 가지고 보았을 것이다. 왜냐하면 이스라엘의 해방자로서 고레스라는 이름이 예언 중에 언급되어 있었기 때문이다(사 44:28; 45:1). B.C. 553년(고레스가 메대 제국의 정복자가 되었을 것으로 추측되는 해), 나보니더스는 아라비아의 테마(Tema)를 정복하기 위하여 출발하면서, 바벨론을 그의 아들 벨사살이 다스리도록 임명하는 것을 다니엘은 보았을 가능성이 있다. 다니엘에게 큰 이상들이 주어지고(단 7, 8장), 지금까지는 단순히 꿈과 이상의 해석자로만 알려졌던 그가 모든 시대의 위대한 예언자들 중의 한 사람이 되었던 것은 바로 벨사살의 통치 첫 3년 동안에 있었던 것이다.
     B.C. 539년 바벨론이 망하던 그 밤에 벨사살의 잔치가 베풀어지고 있던 홀의 벽에 손으로 쓰인 운명의 글을 읽고 해석하라고, 바벨론 사람들은 다니엘의 봉사를 한번 더 요청하였다. 페르시아 사람들이 바벨론과 그 제국을 정복한 다음, 새 통치자들은 전대(前代)의 노 정치가의 재능들과 경험을 이용하였다. 다니엘은 또 다시 왕궁의 고문관장이 되었다. 이사야의 예언들을 왕으로 알게 한 사람은 다니엘이었을 것이다. 그 예언들은 페르시아 왕이 유대인들의 포로 생활을 끝나게 하고 그들의 성전과 그 땅을 회복하게 하는데 영향을 미쳤다. 다니엘의 이 후기의 공직 기간 동안, 그를 시기하는 동료들에 의해 생명의 위협을 받았으나, 주께서 놀라운 방법으로 개입하셔서 그의 종을 구원하셨다(6장). 다니엘의 생애의 말년에 중요한 이상들을 추가로 받았는데, 그 처음 것은 메대왕 다리우스 때에 받았고, 그 다음은 고레스 왕 때에 받았다(10-12장).
     (1) 다니엘서의 역사성
     다니엘서의 역사성에 대한 첫 주요 공격이 신플라톤 철학자 폴피리(Porphyry:A.D. 233-304?)에 의해 있었던 이후로, 이 책은 처음에는 간혹 있었으나 지난 2세기 동안에는 계속적으로 비평의 불길에 휩싸여 왔다. 그 결과로 오늘날의 대다수의 그리스도인 학자들은 다니엘서가 B.C.2세기의 마카비 반란 시대에 살았던 무명의 저자에 의해 생긴 것으로 보고 있다.
     이 학자들이 다니엘서의 연대를 그렇게 늦게 잡는 데는 두가지 주요 이유들을 들고 있다. 첫째, 그들의 주장대로 어떤 예언은 안티오쿠스 4세 에피파네스(Antiochus Ⅳ Epiphanes:175-163 B.C.?)를 가리키고 있다. 그들의 개념에 따르면, 대부분의 예언들­적어도 정확히 성취되었다고 증명되어 온 예언들­은 묘사된 사건들이 일어난 후에 기록되었을 것이기 때문에 다니엘서의 연대는 안티오쿠스 4세의 통치 후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둘째, 저들의 논리에 의하면, 다니엘의 역사 부분은 입수할 수 있는 자료들에서 알려진 역사적 사실과 일치하지 않는 어떤 사건들이 기록되어 있기 때문에 이 불일치점에 대하여는 그 저자가 실제적인 사건과 시간상, 공간상 너무 떨어져 있었으므로 B.C. 7세기와 6세기, 곧 400년 전에 실제로 일어난 것에 대하여 한정된 지식밖에 가질 수 없었다고 가정함으로써 최선의 설명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두가지 논쟁들 중 첫번째의 것은 고대의 영감받은 선지자들이 역사의 진로에 대하여 실제로 정확한 예언을 하였다는 것을 믿는 사람들에게는 아무런 타당성이 없다. 두번째의 것은 보다 세심한 주의를 기울일만한 가치가 있는데, 그것은 다니엘서에는 역사적 부정확성, 시대 착오와 오인이 포함되어 있다는 주장의 심각성 때문이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다니엘서의 역사적 신빙성에 대한 간략한 논의를 다음에 제시한다.
    다니엘서가 오늘날이라 할찌라도 입수할 수 있는 고대의 문헌적 자료들에 의하여 증명될 수 없는 몇몇 사건들을 기술하고 있다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한 사건 중의 하나가 느부갓네살 왕이 미친 이야기인데, 현존하는 고대의 어떠한 기록들 가운데서도 찾아볼 수 없다. 신바벨론 제국의 가장 위대한 왕의 일시적 실각에 대한 입증할만한 자료가 없는 것은 왕실의 실록에는 오로지 칭송할 만한 것만 기록한 그 당시의 상황에 비추어 볼 때, 조금도 이상한 일이 아니다(단 4:36). 또한 메대 왕 다리우스도 수수께끼 같은 인물인데, 역사상 그의 참 위치가 성경 외의 믿을만한 자료들에 의하여 입증되지 못하고 있다. 그의 신분에 관한 암시가 헬라 저술가들의 저서 속에서, 그리고 설형 문자로 된 자료로부터 단편적 정보는 찾을 수 있다.
     다니엘서의 보수적 주석가들을 당혹하게 만든 그 외의 역사적 난점들은 근대에 고고학에 의한 역사적 지식의 증가로 말미암아 해결되었다. 지금은 해결된 문제들 중 중요한 몇가지를 열거하면 다음과 같다.
     ① 다니엘 1:1; 예레미야 25:1 사이의 상상적 연대 차이-학자들이 일반적으로 동의하는 바와 같이, 믿을만한 역사적 출처가 되는 예레미야는 유다 왕 여호야김 4년을 바벨론의 느부갓네살의 원년과 같다고 하였다. 그러나 다니엘은 느부갓네살의 첫 예루살렘 정복의 해가 여호야김 제3년이라고 말함으로써 느부갓네살의 원년과 여호야김의 제3년과 같은 해임을 암시하고 있는 것같다. 고대 왕들의 통치년을 산출하는 여러가지 제도에 대한 그 당시의 기록들을 발견하기 전에는 언듯 보기에 서로 모순되는 것같은 이 문제를 주석가들은 설명하는 일에 어려움을 느꼈다. 그들은 느부갓네살과 그의 아버지 나보폴라사르와의 동시 집권으로 추측함으로써, 그리고 예레미야는 유다 제도를 따르고 다니엘은 바벨론의 제도를 따르는 서로 다른 계산법에 따라 사건들의 연대를 매겼다고 추정함으로써, 이 난제를 풀려고 애썼다. 두가지 설명은 다 오늘날 낡은 것이 되었다.
     모든 어려움들은 그 당시의 유대 왕들과 같이 바벨론의 왕들도 그들의 통치 연대를 “즉위년” 방식에 계산하였다는 것을 발견함으로써 풀리게 되었다. 바벨론 왕이 왕위에 오른 그 해는 왕의 공식적 첫 해로 계산하지 않고, 다만 그의 즉위년으로 계산했다. 그의 원년은 그가 처음 맞는 만 일년을 의미하며, 종교적 의식으로서 그가 바벨론의 신 벨(Bel)의 손을 잡는 때인 정월 초하루 이후에야 이 원년이 시작되었다.
     우리는 요세푸스가 인용한 대로(아피온에 반대하여 1권 19), 베로수스(Berosus)에게서 느부갓네살이 그의 군사 원정 중 애굽 국경에 있을 때, 그의 아버지가 죽고 그가 왕에 올랐다는 것을 알게 된다(2권 95, 96, 161; 3권 91). 그러므로 다니엘과 예레미야는 서로가 완전히 일치한다. 예레미야는 느부갓네살의 첫 통치년을 여호야김 제4년과 같은 해로 보고 있고, 반면 다니엘은 느부갓네살 즉위년에 포로로 잡혀 갔는데, 그 해를 여호야김 제 3년이라 하였다.
     ② 바벨론의 위대한 건축가 느부갓네살-헬라 역사가들에 의하면, 느부갓네살은 고대 역사의 사건에서 별로 중요한 역할을 하지 못했다. 그는 결코 위대한 건축가로 또는 더 큰 바벨론의 건설가로 언급되어 있지 않다. 이러한 영광이 바벨론의 역사상 탁월한 위치에 있었던 세미라미스(Semiramis) 여왕에게 돌려진다는 사실을 헬라의 고전 역사를 읽는 사람들이라면 분명히 알 수 있다.
     그러나 지난 수 백년에 걸쳐 고고학자들에 의하여 발굴된 그 당시의 설형 문자의 기록들은 고대 저술가들에 의한 양상을 크게 변화시켰다. 그 설형 문자의 기록들은 “이 큰 바벨론”(단 4:30)의 건설을 느부갓네살에게 돌리는 다니엘서의 기사를 확증하였다. 이 일은 이제서야 발견된 사실인데, 설형 문자 비문에 삼무-라마트(Sammu-ramat)라 불리는 세미라미스는 앗시리아의 모후(queen mother)였고 그는 그의 어린 아들 아다드니라리 3세의 섭정이었고 고전 문헌이 주장하는 것같이 바벨론을 통치한 여왕이 아니었다. 바벨론에서 아무런 건축 활동도 하지 않았다는 것이 드러났다. 반면 느부갓네살의 무수한 건물 비문은 그가 궁전들과 신전들과 도시의 신전탑을 재건하고, 새로운 건물들과 방어 성벽들을 다시 세움으로써, 어떤 의미에서 신바벨론의 창시자가 되었다는 것을 증명한다.
     신바벨론 시대의 기자 외의 그 어느 누구도 이러한 정보를 얻을 수 없었다. 왜냐하면 그것이 헬라 시대에 이르러서는 완전히 없어졌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실이 다니엘서에 있음으로 해서 다니엘이 6세기에 기록된 것이 아니라 2세기에 기록되었다고 믿는 비평 학자들이 당황하게 되었다. 그들의 난처한 입장을 말해 주는 전형적 실례가 다음에 나오는 하바드 대학의 파이퍼(R.H.Pfeiffer)의 말 중에 나온다: “예측컨대 우리는 우리 저자가 발굴이 증거한 대로, 신바벨론은 느부갓네살이 건설한 줄 어떻게 알았는지 결코 알아낼 수 없을 것이다”(구약 입문, 뉴욕, 1941, 758, 759 페이지).
     ③ 바벨론 왕 벨사살-나보니더스(Nabonidus)가 페르시야가 정복하기 전의 바벨론 마지막 왕으로 언제나 등장하는 것에 반해, 벨사살의 이름이 성경 외의 어떠한 고대의 저술들 중에도 없다는 사실은 다니엘서의 역사성을 반박하는 가장 강력한 논쟁들 중의 하나로 정규적으로 사용되었다. 그러나 지난 수 백년에 걸쳐 나온 발견물들은 이 점에 있어서의 다니엘에 대한 모든 비평들을 반박하였고, 그 예언자의 벨사살에 관한 역사적 진술에 신빙성이 있음을 아주 인상깊게 변호하였다.
     (2) 다니엘서의 언어들
     에스라서와 같이 다니엘서는 일부는 히브리어로, 일부는 아람어로 기록되었다. 에스라서의 경우 두 가지의 언어가 사용된 것은 저자가 역사적 기술이 포함되어 있는 아람어 문서를 택하여, 그 부분을 그의 책 속에 써 넣고, 그렇지 않은 때는 그의 백성의 모국어인 히브리어로 기록하였을 것이라고 추정함으로써 설명하려는 사람들도 있다. 그러나 아람어 부분이 2장 4절에서 시작되어 7장 마지막 절에서 끝나는 다니엘서의 경우엔 이러한 해석이 맞지 않다.
     다음에 나오는 것은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여러 학자들이 제시한 여러 설명들 가운데 일부인데, 괄호 안에 있는 것은 이러한 설명들의 타당성에 이의를 제기하는 말들이다.
     ① 저자가 역사 이야기는 아람어로 말하는 사람들을 위하여 썼고, 예언은 히브리어를 말하는 학자들을 위하여 썼다(그러나 아람어로 된 2장, 7장은 모두 대 예언들이므로 이 견해가 틀렸음을 말해준다).
     ② 두 가지의 언어는 두 가지의 자료를 가리킨다(이 견해가 옳지 못한 것은 여러 과격한 비평가들까지도 시인한 사실로서 이 책은 강력한 통일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③ 이 책이 원래는 히브리어나 아람어로 기록되었지만, 그 부분들이 후에 번역되었다(이 견해는 왜 한 부분만 다른 언어로 번역되고 전체가 번역되지 않았느냐에 대한 의문을 답하지 못하고 있다).
     ④ 저자는 모든 계급의 사람들이 읽을 수 있도록 하기 위해, 하나는 히브리어로 하나는 아람어의 두 판으로 출판하였다. 마카비안의 박해 기간에 이 책의 부분들이 상실되어, 두 판에서 남은 부분들을 아무런 변경도 없이 연결했다(이 견해는 정확하다고 증명할 수 없으며, 너무나 많은 불확실한 점들을 다루고 있다는 사실로 불리한 입장에 있다).
     ⑤ 저자는 갈대아 사람들이 “갈대아 방언(Syriack: 정확히 말하면 아람어)으로 왕에게”(단 2:4)라는 이 부분에서 아람어로 기록하기 시작하여 그 당시 그가 기록하고 있는 동안은 이 언어로 계속하다가 다시 쓰기 시작했을 때는 히브리어(단 8:1)로 기록했을 것이라는 것이다.
     마지막 견해가 바른 방향으로 인도하는 것같다. 왜냐하면 이 책의 여러 부분이 같지 아니한 때에 기록된 것같기 때문이다. 훈련받은 정부의 관리로서 다니엘은 여러 언어로 말하고 기록했다. 그가 어떤 역사적 사건들과 이상들은 히브리어로, 어떤 것은 아람어로 쓴 것같다. 이러한 가정에 기초하여 제 1장은 히브리어로 아마도 고레스 원년에 기록된 것같고, 제 3-6장의 이야기들은 아람어로 같지 않은 때에 기록된 것같다. 제 7장이 아람어로 기록된 것 외에는 대부분의 예언적 이상들은 히브리어로 기록되었을 것이다. 미래의 왕국들에 대한 느부갓네살왕의 꿈 이야기는(2장) 갈대아인들의 말이 인용되는 데까지(2:4)는 히브리어로 기록되었고, 여기서부터 이 이야기가 끝나는 데까지 아람어로 되어 있다.
     다니엘이 그의 말년에 그의 모든 저술들을 한 책으로 모았을 때, 그는 자기 독자들의 대부분이 두 나라 말에 통하는 것을 알고 - 다른 문헌들로 보아 명백한 사실이다- 이 책을 언어상 통일을 기하기 위하여 어떤 부분도 번역할 필요를 느끼지 않았을 것이다.
     다니엘서에 두 언어가 사용되었다고 해서, 그것이 이 책의 기원을 늦게 잡는 논쟁거리가 될 수 없다. 다니엘의 기원을 B.C. 2세기로 잡는 사람들은 왜 마카비 시대의 히브리 저자가 그 책의 일부는 히브리어로, 일부는 아람어로 기록했는지에 대해 설명을 해야 하는 문제에 직면하고 있다.
     철자법상 다니엘서 아람어의 특이점들은 3-4세기에 서부 아시아에서 쓰이던 아람어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는 것도 사실이다. 이것은 대부분의 히브리 성경에서 볼 수 있는 특징으로서 언어의 현대화 때문인 것같다. 철자법이 기록 연대를 나타낼 수 없는 것은 마치 가장 최근의 영어 성경 개정판이 성경은 원래 20세기에 기록되었거나 번역되었다는 증거로 채택될 수 없다는 것과 같다. 철자법상의 특징은 기껏해야 언제 철자의 최근 교정이 있었는지를 암시할 뿐이다.
     사해 사본 가운데는 B.C. 2세기의 다니엘서 사본 조각들이 여러개 있다. 그 가운데 적어도 두 개가 히브리에서 아람어로 바꾸어진 그 부분을 보존하고 있는데, 그것은 그 당시 그 책에 두 가지 언어로 된 특징들이 있었음을 매우 명백히 보이고 있다.

    주제
     다니엘서는 역사와 예언의 안내서라고 부르는 것이 적절하다. 장래를 말하는 예언은 역사를 미리 보는 것이 되며, 역사는 장래를 예고한 예언이 눈에 보이게 지나가는 것이다. 예언에는 하나님의 백성으로 하여금 시간의 일들을 영원한 빛에 비추어 볼 수 있게 하고, 적절한 때에 효과적인 활동을 할 수 있도록 깨우치게 하고, 최후의 위기를 위하여 개인으로 준비하게 하고, 성취된 예언 위에 믿음의 굳건한 기초를 놓게 하는 요소가 있다.
     다니엘서의 예언의 네 중요 부문에는 세계 역사의 배후에 대하여, 다니엘 시대로부터 세상 끝날에 이르기까지의 하나님의 백성들의 경험들이 간략히 제시되어 있다. “장막이 걷히고 모든 인간의 흥미와 능력과 감정의 활동과 반동을 위와 뒤와 속으로 전능하신 분의 힘이 그분 자신의 계획들을 묵묵히 참을성 있게 실현시키시는 것을 우리는 본다.” 네 분야의 예언은, “하늘의 하나님이”, “영원히 망하지…아니할” 한 나라를 세우실 때(단 2:44), “인자”가 “영원한 권세”(단 7:13, 14)를 받을 때, “만왕의 왕”에 대한 반역이 “사람의 손으로 말미암지 않고 깨어”질 때(단 8:25), 그리고 하나님의 백성이 저들의 압제자들에게서 영원히 해방될(단 12:1)때에 각기 그 절정에 달한다. 이렇게 하여 다니엘의 예언들은, 위태로운 때와 영원히 끝없는 바닷가를 연결하는 다리, 곧 다니엘과 같이 마음 속으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분에게 봉사하기로 작정한 사람들이 믿음으로 현실 생활의 불확실과 곤혹에서 영원한 생활의 평화와 안정으로 건너가는 하나님께서 놓으신 한 다리를 준비한다.
     다니엘의 역사 부분은 가장 현저한 방법으로 참된 역사 철학을 드러낸다. 이 부분은 예언 부분의 서론에 위치한다. 한 나라, 곧 바벨론에 대한 하나님의 취급 방법을 자세히 이야기 함으로써 이 책은 우리로 하여금 이 책의 예언 부분에 요약되어 있는 기타 나라들의 흥망성쇠의 의미들을 깨달을 수 있게 해 준다. 하나님의 계획 속에 내포되어 있는 바벨론의 역할이 보여주는 역사 철학을 분명히 깨닫지 못하고서는 예언적 이상의 영사막 위에 나타난 바벨론을 뒤이어 일어난 다른 나라들의 역할도 충분히 깨닫거나 인식하지 못한다.
     이 책의 역사 부문에서 우리는 당대의 하나님의 사람인 다니엘이 이방 세계의 천재 느부갓네살과 대면하여 왕에게 다니엘의 하나님, 곧 역사의 중재자를 알리고 협력할 기회를 얻게 한 것을 본다. 느부갓네살은 당대의 가장 위대한 나라의 군주이었을 뿐만 아니라 탁월한 지혜를 가진 사람이었고, 또한 정의와 공의에 대한 천부적인 판단력이 있었다. 사실상 그는 하나님의 계획 속에 있는 특별한 역할을 위하여 권좌에 오른 “열국의 능한 자”(겔 31:11)요, 이방 세계의 지도적 인물이었다. 그에 대하여 하나님께서는 “이제 내가 이 모든 땅을 내 종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의 손에 주고”(렘 27:6)라 하셨다. 유대인들이 바벨론으로 포로로 붙잡혀 갔을 때, 그들이 엄하나 잔인하지 않은 손아래 붙들리는 것이 바람직한 일이었다. 느부갓네살의 왕국에서의 다니엘의 사명은 왕의 의지를 하나님의 뜻에 굴복시켜, 그로 하여금 하나님의 목적을 깨닫게 하는 것이었다. 역사의 극적인 이 순간에 하나님께서는 위대한 두 인물을 등장시키셨다.
     다니엘의 첫 네 장들은 하나님께서 느부갓네살의 충성을 획득하시게 된 방편들을 진술하고 있다. 먼저 하나님께서는 바벨론 왕궁에서 하늘의 원칙들과 정책들을 대표할 만한 한 적절한 인물을 필요로 하셨다. 그리하여 하나님께서는 그분의 개인적 대사로서 다니엘을 선택하여서 느부갓네살에게로 보내셨다. 포로인 다니엘로 하여금 느부갓네살의 호의를 사게 한 하나님의 방법, 느부갓네살로 먼저는 다니엘 그 다음에 다니엘의 하나님께 확신을 갖게 한 방법은 오늘날 세상에서 당신의 뜻을 성취하시기 위하여 사람들을 사용하시는 하나님의 방법을 예증한다.하나님께서 다니엘을 사용하실 수 있었던 것은 그가 원칙의 사람이요 믿을 수 있는 성품의 사람이요 하나님을 위하여 사는 것을 생애의 첫째 가는 일로 삼은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다니엘은 하나님의 계시된 모든 뜻과 일치된 삶을 살기 위하여 “뜻을 정하”(단 1:8)였다. 먼저, 하나님께서는 그로 하여금 바벨론 관리들의 “은혜와 긍휼을 얻게”(9절)하셨다. 이것은 제 2단계, 곧 다니엘과 그의 친구들의 신체적 탁월성을 증거하는 일을 위한 길을 준비하였다(12-15절). 그 다음에는 지적 우월성을 증거하게 되었다. 하나님이 저들에게 “지식을 얻게 하시며 모든 학문과 재주에 명철하게 하신”(17절) 결과로서 저들은 저들의 경쟁자들보다 “십배나 나은 줄”(20절)을 알게 되었다. 그리하여 다니엘은 인격에 있어서나, 육체와 지능에 있어서 그의 동료들보다 월등하다는 것이 증명되었고, 그것으로 말미암아 느부갓네살의 신임과 존경을 받게 되었다.
     이러한 사건들은 느부갓네살로 하여금 다니엘의 하나님을 대면하도록 준비시켰다. 일련의 극적인 경험들-2장의 꿈, 3장의 풀무불로부터의 인상적인 구출, 4장의 꿈-은 다니엘의 하나님의 권위와 권세와 지식을 왕이 만족하도록 증명하였다. 2장의 경험 가운데 나타난 인간의 지식의 열등성은 느부갓네살로 다니엘에게 “너희 하나님은 참으로 모든 신의 신이요 모든 왕의 주재시요 모든 은밀한 것을 나타내시는 자시로다”고 시인하게 하였다(단 2:47). 그는 솔직하게 하나님의 지혜는 인간의 지혜보다 나을 뿐 아니라 자신의 신들의 추측된 지혜보다 월등하다는 것을 시인하였다. 금 우상과 불타는 풀무불의 사건들은 하늘의 하나님이 “그의 종들을 구원”(단 3:28)하셨다는 사실을 느부갓네살로 시인하게 만들었다. “이같이 사람을 구원할”수 있는 다른 신이 없다는 사실로 보아, 그의 온 나라 안에서 아무나 히브리인의 “하나님께 설만히 말하”(29절)지 않아야 한다고 그는 결론을 내렸다. 이제 느부갓네살은 하늘의 하나님은 지혜로우실 뿐만 아니라 권세가 많으신 분이라는 것과 전지하실 뿐만 아니라 전능하신 분임을 시인하였다. 세번째의 경험-그의 자만했던 지혜와 권세가 일시적으로 제거되었던 7년간-은 “지극히 높으신 자”(단 4:32)는 지혜와 권세가 있을 뿐만 아니라 그것을 인간 나라를 다스리기 위하여 쓰신다는 사실을 왕에게 가르쳤다. 그분은 지혜와 권세와 능력을 가지고 계신다. 느부갓네살의 이성이 되돌아 온 다음 그가 행한 최초의 행동은 “하늘의 왕을 찬양하며 칭송하며 존경”하고 그가 오랫동안 했던 것같이 “교만하게 행하는 자”를 하나님이 “능히 낮추심”을 시인하게 된 사실은 중요한 일이다.
     그러나 수년에 걸쳐 느부갓네살이 개인적으로 배운 교훈들은 그를 이어 바벨론의 왕위에 오른 사람들에게는 아무런 유익을 주지 못하였다. 바벨론의 마지막 왕인 벨사살은 그가 느부갓네살의 경험을 잘 알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22절), 하늘의 하나님을 공공연히 모독하였다(단 5:23). 하나님의 계획과 조화되게 일하는 대신, “바벨론은 … 교만하고 잔인한 압제자가 되었”고, 하늘의 원칙들을 거절함으로써 파멸을 자초하게 되었다. 그 나라는 저울에 달아보니 부족하게 되었고(단 5:25-28),세상 통치권이 페르시아로 넘어가 버렸다.
     사자굴에서 다니엘을 구출하심으로써 하나님께서는 이전에 바벨론의 통치자들 앞에서 그리하셨던 것처럼 페르시아 제국의 통치자들 앞에서 그의 권위와 권세를 증명하셨다(단 6:20-23). 메대 왕 다리우스의 조서는 “사시는 하나님”을 인정하였고, “영원히 변치 않으실”것을 시인하였다(26절). “메대와 바사의 변개치 않는 규례”(8절)조차, “인간 나라를 다스리시는”, “지극히 높으신 자”(단 4:32)의 명령 앞에 굴하지 아니할 수 없었다. 고레스는 사자굴로부터 다니엘을 구출함에 있어서 나타난 하나님의 기적적 능력의 증거로 말미암아 좋은 인상을 받았다. 예루살렘과 성전을 재건하는 일에 그가 행할 역할을 말한 예언들 역시 그에게 깊은 감동을 주었다. 그의 마음은 깊이 감동되어 그는 하나님께서 맡기신 그의 사명을 완수하기로 결심했다.
     이렇게 하여 다니엘서는 하나님의 목적을 마지막으로 성취할 나라들의 역사를 통하여 하나님의 지혜와 권능과 권위가 행사될 원칙들을 제시하고 있다. 하나님께서는 그분의 목적을 성취하시려고 바벨론을 높이셨다. 바벨론은 시험기를 거쳤으나, 결국 실패하고 그 영광은 쇠하고 그 권력은 떠나고 그 지위는 다른 나라로 말미암아 점령되었다.
     다니엘서의 네 이상들은 모두 그리스도의 영원한 나라를 세우기까지 다니엘 때로부터 지상에 있을 선악의 세력들 사이의 투쟁과 관련이 있다. 사단은 하나님의 계획을 방해하고, 하나님의 백성을 멸망시키기 위하여 지상의 세력들을 사용하려 하고 있기 때문에 이 이상들은 그 세력들을 알려주고 있는데, 사단은 이 세력들을 통하여 맹활약하고 있다.
     첫째 이상(2장)은 주로 정치적 변화를 다루고 있고, 이 이상의 주요 목적은 느부갓네살에게 바벨론 통치자로서의 그의 역할을 나타내 주며, 그에게 “이 일후에 일어날 일”(29절)을 그에게 알리는 것이었다.
    마치 첫째 이상을 보충하려는 듯, 둘째 이상(7장)은 첫 이상 중에 언급된 세력들의 통치 기간 동안의 하나님의 백성이 당할 경험들을 강조하고 있다. 또한 성도들이 마침내 승리하게 될 것과 하나님의 심판이 그들의 원수들 위에 임하게 될 것을 예언하고 있다(14, 18, 26, 27절).
     셋째 이상(8-9장)은 둘째 이상을 보충하는 것으로서, 그리스도의 백성과 종교를 없이하려는 사단의 시도에 강조점을 두고 있다.
     넷째 이상(10-12장)은 앞의 이상들을 요약하면서, 그 앞의 어떤 이상들보다 더 세부적으로 망라하고 있다. 이것은 둘째와 셋째 이상의 주제를 확대시키고 있다. 이것의 강조의 촛점은 “말일에 네 백성의 당할 일”과 “이 이상은 오랜 후의 일”(단 10:14)이라는 것, 그리고 “큰 전쟁에 관한 것”이다(1절). 11장 2-39절에 망라된 역사 이야기는 “말일”(단 10:14)과 “마지막 때”(단 11:40)에 일어날 사건들에까지 미친다.
     다니엘의 예언들은 계시록의 예언들과 밀접히 연관되어 있다. 대체로 계시록은 다니엘과 동일한 범위를 다루고 있으나, 하나님의 택한 백성들로서의 그리스도 교회의 역할을 특별히 강조하고 있다. 그러므로 다니엘서의 애매한 부분들은 종종 계시록과 비교해 봄으로써 분명해진다. 마지막 때와 관련된 예언, 곧 마지막 때까지 간수하고 봉함하라는 명령을 다니엘이 받은 이 예언의 부분은, 부지런한 연구를 통하여 말세에 그 의미에 대한 “지식”이 “증가”할 것이다(단 12:4). “말세와 관련된 다니엘의 예언의 이 부분”이 인봉되었다 할찌라도(단 12:4), 요한은 “때가 가까우므로” 그의 책의 “예언의 말씀을 인봉하지 말라”(계 22:10)는 특별한 지시를 받았다. 그러므로 모호한 경향이 있는 다니엘서의 어떤 부분들을 보다 명확히 해석하기 위하여 우리는 어둠을 몰아내는 빛을 위하여 계시록을 주의깊이 연구하여야 한다.

    특징 / 
    본서는 역사적 진술(1~6장)과 묵시문학적 자료(7~12장)로 구성되어 있다. 
    후자는 신학적 내용에 있어서 주로 종말론적이며 상징적이고 환상적이고 예언적인 문학 작품을 가리킨다. 
    묵시문학은 기본적으로 하나님의 백성을 격려하기 위한 것이다. 
    당시의 선지자들의 사역의 급선무는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언약을 상기시킴으로써 낙심치 않게하는 것이다.

    목적 / 
    다니엘은 바벨론 궁정에서 거하면서 체험한 경험들과 그가 받은 환상과 계시들을 기록하였다. 
    이 기록의 목적은 이방 신들에 대한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의 우월성과 유일성을 증거하기 위함이었다. 
    또한 이스라엘이 하나님께 범죄하여 징벌을 받아 이방의 포로가 되었지만 결국 이스라엘은 회복되고 이스라엘을 압제하던 세상 권세들은 사라질 것임을 예언하기 위함이었다. 
    특히 다니엘이 목격한 환상에 대한 기록은 장차 메시야가 임하여 자기 백성을 구원하며 하나님의 영광과 권능이 밝히 드러나게 될 것임을 예고함으로써 하나님의 구속 계획을 증거하려 했던 것이다.

    구조 / 
    다니엘서는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누어 지는데, 
    첫째 부분(1~6장) - 역사적 사실
    둘째 부분(7~12장) - 환상과 그 해석으로 분류할 수 있다. 
    그래서 전반부는 주로 역사적인 것, 즉 여섯 가지 역사적 이야기들이 나오고 후반부에서는 주로 예언들, 즉 네 가지 환상들이 나옵니다. 이것을 서로 대조하면 전반부는 암흑의 역사이고 후반부는 광명의 역사이다. 
    내용으로 볼 때 전반부는 다니엘이 다른 꿈들을 해석하고, 후반부는 천사가 다니엘의 꿈을 해석한다. 
    여기서 전반부에는 이방인들이 하나님의 능력을 깨닫고, 후반부에는 유대인들이 하나님의 목적을 깨닫다.


    개요
    Ⅰ. 역사 부분 1:1-6:28
         1. 다니엘과 그의 친구들의 교육 1:1-21
           (1) 유다에서 바벨론까지의 제1차 포로 이송 1:1, 2
           (2) 왕의 봉사를 위하여 훈련 받도록 선택된 다니엘과 그의 친구들 1:3-7
           (3) 다니엘이 자기 법에 따라 살도록 허락을 얻음 1:8-16
           (4) 성공적 교육과 왕에게 봉사하도록 용납됨 1:17-21

         2. 큰 신상에 관한 느부갓네살의 꿈 2:1-49
           (1) 느부갓네살이 꿈으로 인하여 번민함 2:1-11
           (2) 박사에 대한 사형 집행 명령과 취소 명령 2:12-16
           (3) 다니엘이 지식을 받고 감사함 2:17-23
           (4) 다니엘이 왕에게 꿈을 전함 2:24-35
           (5) 다니엘이 꿈을 해석함 2:36-45
           (6) 느부갓네살이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시인함 2:46-49

         3. 다니엘의 친구들이 무서운 풀무불에서 구출됨 3:1-30
           (1) 느부갓네살이 신상을 세우고 그것에 경배하기를 요구함 3:1-7
           (2) 신실한 히브리 사람들이 경배를 거절함 3:8-18
           (3) 하나님의 개입으로 풀무불에서 건짐을 받음 3:19-25
           (4) 느부갓네살의 고백과 조서, 히브리사람들의 승진 3:26-30

         4. 느부갓네살의 두번째 꿈, 그의 겸비와 회복 4:1-37
           (1) 하나님의 지식과 능력에 대한 느부갓네살의 고백 4:1-9
           (2) 꿈에 대한 묘사 4:10-18
           (3) 다니엘의 꿈 해석 4:19-27
           (4) 느부갓네살의 쇠잔과 회복 4:28-36
           (5) 느부갓네살이 하늘의 하나님을 칭송함 4:37

         5. 벨사살의 잔치와 나라의 상실 5:1-31
           (1) 벨사살이 성전 기명을 모독함 5:1-4
           (2) 분벽 위에 손으로 쓴 신비한 글씨 5:5-12
           (3) 다니엘의 해석 5:13-28
           (4) 다니엘이 영예를 얻음 바벨론의 멸망 5:29-31

         6. 사자굴에서 다니엘이 구출됨 16:1-28
           (1) 다니엘의 승진과 그의 동료들의 시기 6:1-5
           (2) 기도를 금지한 다리우스의 조서 6:6-9
           (3) 다니엘의 조서 위반과 그 정죄 6:10-17
           (4) 다니엘의 놓임과 고소자들의 처벌 6:18-24
           (5) 다니엘의 하나님의 위대하심에 대한 공인 6:25-28

    Ⅱ. 예언 부분 7:1-12:13
         1. 다니엘의 두번째 예언적 기별 7:1-28
           (1) 네 짐승과 작은 뿔 7:1-8
           (2) 인자의 심판과 영원한 통치 7:9-14
           (3) 한 천사의 이상 해석 7:15-27
           (4) 다니엘이 받은 이상 7:28

         2. 다니엘의 세번째 예언적 기별 8:1-9:27
           (1) 수양과 뿔들 8:1-8
           (2) 작은 뿔과 그의 간교성 8:9-12
           (3) 성소 정결에 관한 시간적 예언 8:13, 14
           (4) 가브리엘이 이상의 첫부분을 해석함 8:15-26
           (5) 이상을 본 결과로 다니엘이 앓음 8:27
           (6) 다니엘이 회복을 위하여 기도하며 그의 백성의 죄를 자복함 9:1-19
           (7) 가브리엘이 이상의 남은 부분을 해석함 9:20-27

         3. 다니엘의 네번째 예언적 기별 10:1-12:13
           (1) 다니엘의 금식 10:1-3
           (2) “한 사람”의 나타남과 다니엘에게 생긴 결과 10:4-10
           (3) 그 사람과 다니엘과의 예비적 대화 10:11-11:1
           (4) 장래의 역사적 사건들에 대한 이상 11:2-12:3
           (5) 기사가 계속되는 동안 다니엘에게 개인적인 약속을 함 12:4-13


    내용 / 
    에스겔이 포로가 된 백성들을 성전에 대한 기대로써 격려하고 있었을 때, 다니엘은 바벨론의 왕가의 권세가들에게 이방인들에 대한 하나님의 계획을 나타내고 있었다. 
    불신자들은 다니엘서의 네 개의 세계 제국 [바벨론, 바사, 헬라 및 로마]에 대한 예언에 대해서 많은 비평을 해 왔다. 
    비록 이방인들이 팔레스타인을 한때 지배했었을지라도 하나님께서는 이방인들을 실제로 지배하셨었으며 지금도 지배하고 계십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권세는 우리들의 인생에 대한 하나님의 계획도 이루어 나갈 것이다.

    교훈 /

    역사적인 교훈 : 
    본서의 예언은 포로된 이스라엘 백성에게 그들의 나라가 회복될 것이라는 소식을 전함으로서 그들을 위로하기 위해 기록되었다. 
    즉 유다 백성들로 하여금 환경이 아무리 어렵더라도 하나님앞에 진실하게 설 것을 가르쳐 주고 있는 것이다.

    교리적인 교훈 : 
    본서의 가르침에는 두 가지가 있다. 
    즉 세상에 현존하는 권세자들을 정죄하고 동시에 이 세상에 하나님의 왕국을 세우기 위한 하나님의 주권적인 계획을 전달하는 것이다.

    기독론적인 교훈 : 
    본서에서 예수 그리스도는 이 세상 왕국을 부수는 거대한 돌로(2:34, 45), 인자로(7:13), 옛적부터 계시는 자로(7:22), 기름부음 받은 자(9:26) 등으로 묘사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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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니엘 장별 요약

    다니엘 역사와 개론

    다니엘은 이스라엘 왕국 시대의 마지막과 포로 시대의 인물이다. 
    죄를 범하여 하나님께 버림을 받은 이스라엘은 바벨론에 의해 멸망을 당하게 됩니다. 
    세 차례에 걸쳐 포로로 잡혀갑니다. 
    마지막 세 번째는 남유다 왕국이 완전히 멸망하고 성전이 파괴되어 성전의 모든 기물이 바벨론에 옮겨 가게 됩니다.



    다니엘 1장 요약

    1-3절 여호야김 삼 년에 성전 기물을 가져와 시날 신전에 둠

    포로는 3차에 의해 일어난다. 다니엘은 1차 포로 때이다. 이 때는 남유다가 완전히 멸망하지 않을 때이다.

    4-7절 포로 중에서 지혜로운 자를 가르치게 함

    8-21절 다니엘과 세 친구가 환관장에게 구함

    [이스라엘의 3차 포로 시간과 사람들]

    • 1차 포로 / 기원전 605년, 다니엘을 비롯한 여러 귀족들
    • 2차 포로 / 기원전 597년 에스겔과 여호야긴의 온 집안 1만 여명이 포로 잡혀감
    • 3차 포로 / 기원전 588-486년 바벨론이 예루살렘을 3년 동안 포위하여 멸망 시킨다. 왕과 귀족, 부자들이 포로가 되어 끌려 가고 가난한 사람들이 남게 된다.

    다니엘 2장 요약

    1-23절 느부갓네살 왕의 꿈과 위기

    24-49절 다니엘이 꿈을 해석함

    다니엘 3장 요약

    1-7절 느부갓네살이 두라 평지에 금신상을 세우고 절하게 함

    8-18절 다니엘의 세 친구를 참소하여 절하게 하나 거절함

    19-30절 그들을 풀무불에 던지나 죽지 않고 살아 나옴

    다니엘 4장 요약

    1-18절 느부갓네살 왕의 꿈

    19-27절 다니엘이 꿈을 해석함

    28-37절 꿈처럼 느부갓네살이 쫓겨나 떠돌게 됨

    다니엘 5장 요약

    1-9절 벨사살 왕이 성전 기물로 술을 마시자 손가락이 나타나 벽에 글씨를 씀

    10-16절 벨사상 왕 앞에 다니엘이 불려 나옴

    17-29절 다니엘이 꿈을 해석하고 그대로 됨

    30-31절 메대 사람 다리오가 바벨론을 정복함(바벨론이 망하고 메대-페르시아 왕국이 시작됨)

    다니엘 6장 요약

    1-9절 총리가 된 다니엘을 시기하여 함정을 만듦

    10-15절 절하지 않는 다니엘을 고소함

    16-28절 살아나온 다니엘과 고소한 자들의 죽음

    다니엘 7장 요약

    1-14절 다니엘이 네 짐승의 꿈을 꿈

    15-28절 꿈의 해석

    다니엘 8장 요약

    1-14절 벨사살 왕 삼 년의 숫양과 숫염소에 대한 환상

    15-27절 환상의 해석

    다니엘 9장 요약

    1-2절 예레미야의 예언 70년을 알게 됨

    예레미야는 남유다가 멸망하여 칠십 년 동안 바벨론을 섬길 것이라 예언한다.(렘 25:12, 29:10) 다니엘은 예레미야의 책을 읽고 칠십 년 포로 생활이 끝날 것은 알게 된다.

    3-19절 다니엘의 기도

    이스라엘이 망한 이유는 모세의 율법을 지키지 않아서다. 다니엘은 하나님께 과거를 회상하며 민족들의 죄를 자복한다.

    20-27절 천사 가브리엘이 예언함

    다니엘이 기도하자 환상 중에 가브리엘이 와서 앞으로 일어날 일을 예언한다.

    다니엘 10장 요약

    1-9절 거대한 신상 대한 이상

    고레스 제삼년에 전쟁에 관한 환상을 보게 된다. 거대한 신상에 대한 환상을 보고 다니엘은 죽은 것처럼 깊이 잠이 든다.

    10-21절 미가엘이 찾아옴

    전쟁의 천사인 미가엘이 다니엘에 오려했으나 이십일 동안 막혀 지체하나 와서 환상을 해석한다.

    다니엘 11장 요약

    1-45절 신상에 대한 해석

    바사에서 세 왕이 일어난다. 그가 헬라 왕국을 칠 것이다. 한 왕이 큰 권세로 행할 것이다. 남방 왕은 강할 것이다. 얼마 후에 남방 왕의 딸이 북방 왕과 화친한다. 그러나 버림을 당할 것이다. 하지만 공주에게서 난 한 사람이 북방을 쳐서 이긴다. 금과 보물들을 가지고 애굽으로 돌아간다. 북방 왕과 남방 왕이 다시 싸우게 된다.

    다니엘 12장 요약

    1-13절 마지막 때에 대한 예언

    마지막 때에 미가엘이 일어나고 환난이 있다. 책에 기록된 자만 구원을 얻는다.  많은 사람은 연단을 받고 성결하게 되나 악한 자는 더욱 악해질 것이다. 너는 마지막을 기다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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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다니엘서의 특징

    *히브리 성경에서는 성문서로 분류

    *구약의 묵시문학 (신약에는 요한계시록)

    2. 다니엘서의 구조

    3. 묵시문학의 특징

    *이원론적인 시간이해: 현재의 때와 오는 때의 구분

    *윤리적인 이원론: 악인과 의인의 구분

    *다양한 상징과 비유: 숫자, 기호, 암호, 비유 등

    *운명론적 역사의식이 아닌 하나님의 주권에 대한 강한 믿음

    4. 다니엘서의 상징 이해

    *형상 - 큰 신상, 뜨인 돌, 키가 하늘에 닿은 거대한 나무, 메네 메네 데겔 우바르신 등

    *숫자 - 이천 삼백 일, 칠십 이레, 한 때와 두 때와 반 때, 1290일, 1335일 등

    *구체적(x) - 암시적, 직설적(x) - 비유적, 추상적

    5. 메시아와 인자

    *뜨인 돌(2) - 하나님의 최종승리, 예수님을 돌에 비유한 신약성경 (눅 20:9-18, 벧전 2:4-10)

    *신들의 아들(3-6) - 세 친구와 함께 불속에 있던 존재, 사자굴에 함께 있던 천사

    *인자(7-8) - 옛적부터 항상 계신 자에게서 나옴, 왕적인 존재, 예수님의 자기계시

    *세마포를 입은 사람(10-12) - 대제사장의 옷으로 메시아를 상징

    6. 다니엘서를 읽을 때 주의할 점

    *상징적인 표현과 숫자에 지나치게 풀이하면 안 된다.

    *화이부동 낭중지추의 관점으로 읽는다.

    *하나님의 주권을 믿으며 오늘을 살아가는 힘으로 삼는다.

    *기도의 자세를 배운다.








    다니엘서 개론, 저자와 저작 연대

    책의 명칭 

    다니엘은 이 책에 기록된 사건들 가운데 등장하는 주요 인물이다. 예수께서는 이 책의 예언들을 "선지자 다니엘이 말한 바"(마 24:15; 막 13:14)라고 말씀하셨다. 주님의 증거는 이 책의 명칭이 단순히 다니엘의 이름을 따라 지어졌다는 것 뿐만 아니라 그 예언들이 다니엘에 의해 선포되었다는 것을 나타낸다. 복음주의 학자들은 일반적으로 이 책의 저자를 에스겔서에(14:14, 20; 28:3) 노아와 욥과 함께 의인의 표본으로 등장하는 다니엘과 동일한 인물로 본다.

    이에 반하여 다니엘의 이러한 역사성을 부인하는 사람들은 에스겔서에 나오는 다니엘이 "홍수 이야기에 나오는 노아와 같이 고대 세계에 보편적인 전설상의 한 인물이다"(Montgo-mery, Ice, p. 2)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에스겔서에 나오는 노아와 욥은 고대 세계에 널리 알려진 인물이 아니라 성서 상의 인물이다. 그러므로 우리도 에스겔서에 나오는 다니엘을 다니엘서의 저자라고 보아도 좋을 것이다.

    저자와 저작연대 

    몇몇 학자들이 다니엘서의 역사성을 부인하는 근본적인 이유는 그들이 묵시적 예언의 가능성을 받아들이지 않기 때문이다(J. E. H. Thomson저, Danie1 in Pulpit Commentary, p.93을 보라). 이러한 견해는 일반적으로 인정되지 않은 것이지만 때때로 액면 그대로 받아들여진다(E. G., Ro-bert H. Pfeiffer, Introduction to the old T-estaIIlent,p.775).

    이러한 부정적인 견해를 뒷받침하기 위해 제시된 주장들은 다음과 같다. 

    1)저자는 역사상의 문제에 있어서 과오를 범하고 있다.
    2)다니엘서에 나타난 히브리어와 아람어는 6세기 훨씬 이후의 형태들이다.
    3)여기에 사용된 몇몇 용어들은 6세기의 유대인 저자로서는 알 수 없었던 바사어와 헬라어들이다.
    4)이 책은 구약성경의 세번째 부분(성문서, W-ritings or Hagiographa)에 속해 있으므로 예언서가 끝난 후 기록되었음을 알 수 있다.
    5)다니엘서가 주후 2세기 이전에 존재했다는 외적 증거는 없다.
    6)이 책의 신학사상이 6세기의 것이라고 보기에는 너무나 진보적이다.
    7)서술된 내용이 환상적이고 비역사적이며 비현실적이다.
    8)다니엘서는 계시문학의 한 실례인데, 계시문학은 헬레니즘 시대가 거의 다 지나서야 나타났다(Montgomery,Icc,p.80).

    다니엘서의 역사성을 옹호하는 현대 변증가들의 주장은 다음과 같다. 

    1)다니엘서의 증언에 대한 확실한 증거가 있다.
    2)다니엘서를 정경으로 받아들였다는 것은 기독교시대 이전의 유대인들이 그 역사성을 믿었다는 사실을 증명하는 것이다.
    3)주님께서 친히 말씀하신 것을 포함하여 신약성서가 한결같이 증거하고 있다.
    4)고대의 직접적인 외적 증거가 있다(겔 14:14, 20; 28:3; 마카비일서 2:59,60. 그리고 요세푸스의 몇몇 귀절들).
    5) B.C.165년 이전에 다니엘서의 영향력에 대한 증거가 있다.
    6)다니엘서의 사상과 역사에 관한 부정적인 견해를 반박할 수 있는 근거가 있다.


    이러한 근거를 뒷받침하는 강력한 증거는 특히 고고학에서 발견되었다.

    이 책의 역사성을 부인하는 대부분의 반대들은 Charles Boutflower의 In and Around the book of Daniel과 R.H. Dougherty의 Nabonidus and Eel Shaz-zer에 의해 잠잠해졌다. 특히 올바른 이해를 방해하는 Montgomery의 견해를 받아들이는 문제도 주의하지 않으면 안된다(Ice, p. 72, 2 nd full parsgraph).

    역사적 배경 

    에스겔서와 다니엘서는 포로기에 쓰여졌는데, 이때는 느부갓네살에 의해 유대인의 성전과 도성이 파괴되고 재산을 빼앗긴 후 유대인들이 잡혀가던 시기였다. 이러한 파괴는 세 번에 걸쳐 진행되었다.


    첫번째 B.C. 605년,

    느부갓네살 왕이 여호야김을 굴복시키고 포로로 잡아갔는데, 그들 중에는 다니엘과 그의 세 친구들도 있었다(단 1:1-6).

    두번째 B.C. 597년,

    느부갓네살의 팔레스틴 원정 중에 유다왕 여호야김과 여호야긴이 모종의 반역을 도모하여 처벌을 받게 되고, 느부갓네살이 다시 예루살렘을 점령하게 되었다. 느부갓네살은 만명의 포로들을 끌고갔는데, 그들 중에 여호야긴왕과 젊은 예언자 에스겔도 끼여있었다(겔 1:1-3: 참조, 대하 36:10; 왕하 24:8-20).

    세번째 B.C. 587년,

    오랜 포위 공격 후에 느부갓네살은 도성과 성전을 파괴하고 전 유대사회를 파괴하였다(왕하 25:1-7; 렘 34:1-7; 39:1-7; 52:2-11).


    B.C.583년 바벨론의 정복자이며 메대 -

     바사제국의 새 왕인 고레스가 유대인들이 귀환해도 좋다는 포고령을 내렸을 때 유대의 재건은 시작되었다(대하 36:22, 23; 스1:1-4).

    예루살렘에 거주하는 것이 금지되었던 포로생활의 기간은 불과 48년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B.C. 587년에 파괴된 성전은 70년이 지난 B.C. 515년이 되어서야 비로소 재건되었다(스 6:15).

    그러나 "70년"이라는 예레미야의 예언은 바벨론 포로기간을 가리키는 것이며(렘 25:11), 이것은 유다 뿐만 아니라 그 인접 국가도 포함하는 말이다(B.C.605년에서 538년까지의 "70년"은 대략적인 수: 참조단 9:1,2절에는 B.C.539/538년으로 되어 있음).

    포로생활로 인해 유대인들에게 일어 난 문화적, 종교적 변화는 다음과 같다.

    즉 성전에서 예배를 드리는 대신에 회당에서 드리게 되었으며, 제 2의 언어인 아람어(또한 시리아어나 갈대아어라고도 불렸다)를 채택하여 쓰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증거들은 아브라함이 사용한 언어가 원래 아람어였음을 밝혀준다.

    성서의 난외주를 읽어 보면(신26:5; 창31:47) 아브라함, 이삭, 야곱의 조상들이 아람어를 사용했음을 알 수 있다.

    고고학적 증거들은(참조, 모암 비석, 라스 샴라 호판) 가나안 사람들이 히브리어와 거의 동일한 언어를 사용했음을 보여 준다.
    바벨론에 있을 때 유대인들은 아람어를 상업어로 사용했으며, 때로는 그것이 외교어가 되기도 했다(참조, 사 36:11, 12).

    히브리어와 동일하지는 않지만 유대인들은 히브리어와 유사한 아람어를 사용했다(왕하 18:26).

    그리고 얼마 동안은 두 개의 언어를 병행하여 사용하기도 했다.

    다니엘서의 전반에 해당하는 처음 6장이 히브리어로 쓰여졌다는 사실 뒤에는 분명히 이러한 상황이 깔려 있다.

    4. 계시의 해석 

    계시를 해석하는 데에는 해석자가 최선의 노력을 다하고 겸손히 하나님께 의지하는 것이 필요하다.

    계시 문학을 다루기 위한 어떤 특별한 성서해석학적 규칙들이 아직 정립되어 있지는 않다.

    그러나 비성서적 계시문학의 해석에 적용되는 규칙들이 성서적 계시문학을 해석하는데 무비판적으로 도입 적용되어서는 안된다는 사실에 큰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다니엘서(내용분해)

    1장 / 다니엘과 그의 세 친구
    2장 /
    느부갓네살의 신상에 대한 꿈과 그 해석
    3장 / 풀무불에 던져진 다니엘의 세 친구
    4장 / 느부갓네살의 큰 나무에 대한 꿈
    5장 / 벨사살의 연회
    6장 / 사자굴에 던져진 다니엘
    7장 / 네 짐승의 우상
    8장 / 수소와 수염소의 이상
    9장 / 70이레에 대한 이상
    10장 / 다니엘의 마지막 이상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1장 / 다니엘과 그의 세 친구

    1. 사로잡혀 감(1:)
    사로잡혀 온 때 (1:1).


    2. 선택됨(1:3-6)


    3. 이름의 변경(1:7)


    4. 다니엘의 결심과 시험(1:8-16)
    1)다니엘의 뜻을 정함(1:8-11).
    2)시험 기간(10일)(1:12-14).
    3)시험의 결과(1:15,16)


    5. 하나님의 축복과 저들의 지혜(1:17-21)

    2장 / 느부갓네살의 신상에 대한 꿈과 그 해석(2:1-49).

    6. 느부갓네살의 꿈(2:1-13)
    1)느부갓네살이 꿈을 꾸었으나 잊어 버림 (2:1).
    2)갈대마 술사들이 왕궁으로 불려 들어감(2:2).
    3)느부갓네 살의 요구(2:4-9).
    4)박사들의 무력 (2:10,11)
    5)느부갓네살의 진노와 박사들의 운명 (2:12, 13).


    7.다니엘의 해몽(2:14-45)
    1)다니엘의 현명한 간원(2:14-18).
    2)다니엘에게 그 잊혀진 꿈이 계시됨(2:19).
    3)다니엘이 하나님을 찬양함(2:20-23).
    4)다니엘이 왕께로 인도됨(2:24, 25).
    5)다니엘이 왕에게 꿈을 주신 목적을 말함(2:26-30).
    6)다니엘이 왕의 꿈(큰 신상의 꿈)을 말함(2:31-35).
    7)다니엘의 해몽(2:36-45).


    8.왕이 다니엘을 존귀케 함(2:46-49)
    1)왕이 다니엘에 절하고 하나님을 찬미함(2:46,47)
    2)왕이 다니엘을 높여 바벨론 온 도를 다스리게 함(2:48, 49).

    3장 / 풀무불에 던져진 다니엘의 세 친구(3:1-4:3)

    9. 느부갓네살의 교만과 금신상(3:1-6)
    1)금신상을 만들어 세움(3:1)
    2)금신상에게 경배하게 함(3:2-5).
    3)금신상을 경배하지 않은 자에 대한 형벌(3:6).
    4)모든 백성이 금신상에게 경배함(3:7).


    10.다니엘의 세 친구가 금신상에 절하지 않음
    1)다니엘의 세 친구를 고발함(3:8-12).
    2)느부갓네살왕의 신문과 명령 (3:13-15).
    3)다니엘의 세 친구의 거절(3:16-18)


    11.다니엘의 세 친구가 풀무불에 던져짐(3:19-27)
    1)풀무불에 던져짐 (3:19-23).
    2)천사의 보호(3:24, 25)
    3)구출(3:26, 27).


    12.느부갓네살의 하나님에 대한 찬양과 조서(3:28-4:3)
    1)하나님께 찬양(3:28).
    2)느부갓네살이 조서를 내림 (3:29, 30).
    3)느부갓네살이 천하에 조서를 내림 (4:1-3)

    4장 / 느부갓네살의 큰 나무에 대한 꿈(4:4-4:37)

    13.느부갓네살이 꿈을 꾸고 그 해몽을 요구함(4:4-9)
    1)느부갓네살이 큰 나무에 대한 꿈을 꾸다(4:4, 5).
    2)느부갓네살이 해몽을 요구함(4:6-9).


    14.꿈과 그해석(4:10-27)
    1)왕과 꿈 이야기를 함(4:10-17).
    2)다니엘에게 해몽을 부탁함(4:18)
    3)다니엘이 해몽함(4:19-27).


    15. 꿈의 성취와 왕의 회복(4:28-37)
    1)왕의 정신이상(4:28-33).
    2)왕이 하나님을 찬양함(4:34, 35).
    3)왕의 회복과 고백(4:36, 37).

    5장 / 벨사살의 연회(5:1-31)

    16. 연회의 개최(5:1-4)
    1)벨사살왕이 일천명의 귀인을 위한 연회를 개설함(5:1)
    2)예루살렘 성전의 기명으로 술을 마심(5:2, 3).
    3)우상(신들)을 찬양함(5:4).


    17. 벽에 쓰여진 글(5:5-29)
    1)손가락이 나타나서 분벽에 글을 씀(5:5).
    2)왕이 큰 충격을 받음(5:6).
    3)박사들이 해석을 못함(5:7-9).
    4)여왕의 충고(5:10-12).
    5)다니엘이 부름을 받음(5:13-16).
    6)다니엘이 왕을 책망함(5:17-25).
    7)다니엘이 그 글을 해석함(5:26-28).
    8)왕이 다니엘에게 보상함(5:29)


    18.글의 성취(5:30, 31)

    6장 / 사자굴에 던져진 다니엘(6:1-28)

    19. 매대 - 바사에서의 다니엘의 형통(6:1-3)


    20.다니엘의 시련(6:4-24)
    1)총리와 방백들의 음모와 왕의 조서 (6:4-9).
    2)다니엘의 확고부동함(6:10)
    3)다니엘을 범법자로 고발함(6:11-13)
    4)왕이 다니엘을 구하려고 노력함(6:14, 15).
    5)다니엘을 사자굴에 던짐 (6:16, 17).
    6)하나님이 다니엘을 구원하심 (6:18-22).
    7)음모자들을 벌함(6:24).


    21.다리오왕의 조서와 다니엘의 형통(6:25-28)
    1)다리오가 하나님을 인정함(6:25-27).
    2)다니엘의 형통(6:28).

    7장 / 네 짐승의 우상(7:1-28)

    22. 다니엘의 꿈(7:1-3)


    23.다니엘이 본 이상(7:4-27)
    1)다니엘이 본 네 짐승(7:4-8).
    2)다니엘이 본 하늘의 모습(7:9-14).
    3)다니엘의 번민(7:15, 16).
    4)이상의 해석(7:17-28).

    8장 / 수소와 수염소의 이상(8:1-27)

    24.이상(8:1-14)
    1)때(8:1,2)
    2)수양(8:3, 4).
    3)수염소(8:5).
    4)수양과 수염소의 싸움(8:5-7).
    5) 네 뿔(8:8).
    6)작은 뿔(8:9-14).


    25. 이상의 해석(8:15-27)
    1)하늘의 해석자(8:15, 16).
    2)성취의 때(8:17-19).
    3)수양(8:20).
    4)수염소(8:21)
    5) 네 뿔(8:22).
    6)작은 뿔, 한 왕(8:23).
    7)이 왕의 권세와 성도들에 대한 도전(8:24).
    8)이 왕의 높아짐과 메시야와 싸움(8:25).
    9)이상의 때(8:26, 27).

    9장 / 70이레에 대한 이상(9:1-27)

    26. 이상을 볼 때까지
    1)때(9:1,2)
    2)다니엘의 기도(9:3-19).


    27.이상(9:20-27)
    1)가브리엘의 출현(9:20-23).
    2)70주에 대한 설명(9:24-27).

    10장 / 다니엘의 마지막 이상(10:1-12:13)

    28.이상(10:1-21)
    1)역사적 배경(10:1).
    2)계시를 위한 준비(10:2-9)
    3)천사와의 대화(10:10-21)


    29. 이상의 해석(11:1-12:4)
    1)바사와 희랍(11:1-4)
    2)수리아와 애굽(11:5-20).
    3)이스라엘을 박해한 수리아왕(11:20-35).
    4)자기 뜻대로 행하는 왕에 대한 예언(11:36-45).


    30. 대환란(12:1-4)


    31.종말의 예언(12:5-13)

    다니엘서(설교자료)

    [1] 왕궁에서 일하는 자의 자격
    [2] 다니엘과 요셉의 비슷한 경우
    [3] 다니엘의 인격
    [4] 크게 은총을 입은 다니엘
    [5] 하나님을 찬송한 이유
    [6] 하나님의 응답이 주어질 이유
    [7] 다니엘의 하나님
    [8] 느부갓네살의 꿈
    [9] 신상의 해석
    [10] 하늘에 계신 하나님이 세우신 왕국
    [11] 사람의 손으로 되지 아니 하는 것
    [12] 계시의 결과
    [13] 낙성식에 모인 8가지 계층의 사람들
    [14] 느부갓네살의 고백
    [15] 다니엘의 4번째 예언
    [16] 느부갓네살왕이 배운 것
    [17] 권세와 권능
    [18] 느부갓네살의 회복과 축복
    [19] 다니엘에 대한 증거
    [20] 벨사살왕의 죄
    [21] 다리오왕의 명령
    [22] 하나님에 대한 사실
    [23] 적그리스도에 대한 4가지 사실
    [24] 다니엘이 본 네 짐승의 이상
    [25] 하나님의 축복을 받기 위한 3가지 보증
    [26] 하나님에 대한 진리
    [27] 다니엘의 간구
    [28] 이스라엘의 죄
    [29] 전쟁의 이상
    [30] 메시야에 대한 8가지 묘사
    [31] 다니엘에게 미칠 영향
    [32] 다니엘 10-12장에 나타난 10가지 목적
    [33] 적그리스도와 신들

    [1] 왕궁에서 일하는 자의 자격

    1.왕이 명한 8가지 자격(1:3, 4)
    1)왕족이나 귀족이어야 함(3절).
    2)소년이어야 함(4절).
    3)육체적으로 흠이 없어야 함(4절).
    4)용모가 아름다와야 함(4절).
    5)모든 재주를 통달해야 함(4절).
    6)지식을 구비해야 함(4절).
    7)학문에 익숙해야 함(4절).
    8)왕궁에서 일할 수 있도록 갈대아 사람들의 학문과 방언을 교육받아야 함(4절).

    [2] 다니엘과 요셉의 비슷한 경우

    2.자기 민족으로 인해 포로가 됨
    창 37장.


    3. 체포자로부터 은혜와 긍휼을 받음
    창 39:21; 단 1:9.


    4.꿈의 해석
    창 37:5-11; 41:1-45; 단 1:17.


    5.왕에 의해 높임을 받음
    단 2:46-49, 5:29; 6:26; 창 41장.


    6. 거룩한 생활
    창 39:12; 단 1:8.

    [3] 다니엘의 인격

    7. 왕이 요구한 세가지 자격 요건
    1)출생 - 왕족(단 1:3).
    2)용모- 흠없고 아름다운 자(단1:4)
    3)두뇌(지력)- 지혜와 지식을 겸비하고 학문에 익숙한 자(단 1:4).


    8. 세가지 목적
    1)하나님의 목적, 왕의 앞에 모셔 서게 하려함이다(단 1:5)
    2)악마의 목적, 그들의 마음과 입과 그리고 그들의 행위를 통하여 스스로 더럽게 하기 위함이다(단 1:1-10)
    3)다니엘의 목적, 자기 스스로를 더럽히지 않기 위함(단1:8)


    9.다니엘 성격의 세가지 특성
    1)자기 자신을 더럽히지 않으려는 그의 신념(단 1:8).
    2)환관장에게 구하는 용기 (단1:8)
    3)"당신의 종들을 시험하여 왕의 진미를 먹는 자들과 비교하소서"하고 말하는 그의 정중함(단 1:12, 13).

    [4] 크게 은총을 입은 다니엘(단 1:1-8)


    다니엘이란 말의 의미는 "하나님은 나의 심판주이시다" 라는 뜻이다.

    10. 다니엘의 세가지 이름
    1)히브리 이름- 다니엘,
    2)갈대아 이름- 벨드사살(단 1:6, 7).
    3)하늘의 이름- 크게 은총을 입은 자(단 9:23; 10:11-19).


    11.다니엘의 세 영역의 생활
    1)개인생활- 목적이 확고부동한 생활(단 1:8)
    2)공적생활- 공무수행에 있어서 과실이 없는 생활(단 6:4).
    3)기도생활- 열렬한 기도생활(단 9:3).


    12. 다니엘의 세가지 탁월한 특성
    1)성자와 같은 신실함(단 1장).
    2)현자로서 두려움이 없는 대담무쌍함(단 2,4,5장).
    3)정치 인으로서 흠잡을데가 없음(단 6장)

    [5] 하나님을 찬송한 이유

    13. 하나님을 찬송한 15가지 이유(단 2:20-23).
    1)지혜가 그에게 있음(20절).
    2)권능이 그에게 있음(20절).
    3)때를 변하게 함(21절).
    4)기한을 변하게 함(21절).
    5)왕들을 폐함(21절).
    6)왕들을 세움(21절).
    7)지혜자에게 지혜를 줌(21절).
    8)지식자에게 총명을 줌(21절).
    9)깊은 일을 나타내심 (22절)
    10)은밀한 일을 나타내심 (22절)
    11)어두운데 있는 것을 앎(22절)
    12)빛이 그와 함께 있음(22절, 딤전 6:16).
    13)그는 나에게 지혜를 줌(23절).
    14)그는 나에게 능력을 줌(23절).
    15)우리가 주께 구한 바 일, 곧 왕의 일을 보이심(23절).

    [6] 하나님의 응답이 주어진 이유

    14. 다니엘에게 하나님의 응답이 주어진 12가지 이유(2:18-45)
    1)다니엘과 그의 친구들의 생명을 구하기 위해서(18,30절)
    2)바벨론의 모든 박사나 술객들보다 하나님이 더욱 위대하심을 보이기 위해서 (27, 28절).
    3)하나님이 그를 의지하는 사람의 기도에 응답하심을 보이기 위해서(18-23절).
    4)하나님이 모든 나라의 통치자임을 보이기 위해서(19-23, 39-45절).
    5)하나님은 지금도 인생사를 인도한다는 사실을 보이기 위해서(19-23절)
    6)하나님은 지혜와 지식이 무한하심을 증명하기 위해서(21-23절; 롬 11:33).
    7)하나님이 예언의 주관자임을 보이기 위해서 (23-45절)
    8)하나님만이 유일한 참된 신이심을 보이기 위해서(20-30절).
    9)참된 신은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심을 보이기 위해서 (23절)
    10)계시를 받은 사람이 하나님의 참된 자녀인지 아닌지를 증명하기 위해서(29, 30, 45절)
    11)사람의 마음으로 생각하던 것을 알게 하기 위해서 (30절)
    12)다니엘 시대부터 영원한 시대까지의 하나님의 계획을 알려 주기 위해서(29-45절)

    [7] 다니엘의 하나님(단 2:28).


    "하늘에 하나님이 계시다"

    15. 다니엘의 하나님은
    1)자기의 뜻을 은밀히 나타내시는 하나님 (단 2:28)
    2)세상을 통치하시는 하나님 (단 2:28).
    3)보응하시는 하나님 (단 5:23-26).
    4)자신의 경륜을 통하여 보호해주시는 하나님 (단 6:22)
    5)다니엘은 하나님을 절대적으로 신뢰하며 조금도 의심하지 않았다(단 6:23).

    [8] 느부갓네살의 꿈

    16. 느부갓네살이 신상에 관한 꿈을 꿈(2:31-35)
    1)큰 신상.
    2)광채가 특심함.
    3)신상은 왕의 앞에 서있음.
    4)그 모양이 심히 두려움(31절).
    5)그 우상의 머리는 정금임.
    6)가슴과 팔들은 은임.
    7)배와 넓적다리는 놋임 (32절).
    8)종아리는 철임.
    9)발은 얼마는 철이요, 얼마는 진흙임 (33절).
    10)사람의 손으로 하지 아니하고 뜨인 돌이 신상의 철과 진흙의 발을 쳐서 부숴뜨림(34절)
    11)철과 진흙과 놋과 은과 금이 다 부숴져 여름 타작마당의 겨같이 되어 바람에 불려 간 곳이 없음(34절).
    12)우상을 친 돌은 태산을 이루어 온 세계에 가득함(35절)

    [9] 신상의 해석(2:38)


    왕이 꿈에서 본 5가지 물질로 만들어진 큰 신싱은 다섯 제국을 나타낸다. 이들은 바벨론, 메대-바사, 헬라, 로마, 그리고 10개의 나라로 구성된 로마이다(2:44, 45; 7:23, 24; 계 17:12-17).


    17. 금으로 된 머리 (32, 35, 39절)
    큰 신상의 금머리는 다섯 나라 중 첫번째 나라를 나타낸다- 바벨론 곧 느부갓네살의 나라(37, 38절; 렘 15:4, 24:9; 25:1-12; 29:18).
    다섯 나라는 이스라엘을 벌하는 하나님의 계획을 성취한 후에는 곧 다른 나라에 그 임무를 넘겨주었다. 이 다섯 나라는 모두 이방인의 시대에 이스라엘을 벌하기 위하여 사용될 때까지만 존재하였고, 이스라엘에 대한 그들의 임무를 수행한 후에는 각각 다음 나라에 멸망되었다. 바벨론은 느부갓네살 원년, 곧 기원전 616년 경에 이스라엘을 정복하여 70년 동안 계속 지배했다(9:2; 렘 25). 느부갓네살이 43년을 통치하고 그 후 에윌므로닥이 계승했다(왕하 25:27; 렘 52:31). 그리고 바빌론이 멸망될 때까지 함께 통치했던 나보니두스와 벨사살이 그 뒤를 이었다(단 5장). 바벨론 제국은 70년 동안(기원전 616-546) 이스라엘을 지배했다(렘 25장).


    18.은으로 된 가슴과 팔(32, 35, 39절)
    신상의 이 부분은 메대 - 바사 제국을 상징하는데 이 나라는 70년 동안 유대인을 지배했던 바벨론을 계승했다. 이것은 이방인의 시대에 이스라엘을 압박하기 위한 두번째 나라이다(2:39; 5:1-31, 8:20; 9:1; 10:1; 11:1; 대하36:22; 스1:1-3).
    두 개의 팔은 두 개의 나라 곧 메데와 바사 이중 제국을 상징한다. 이 나라는 은으로 되었으므로 금으로 만들어진 바벨론 제국보다는 못하다. 이 나라가 바벨론을 정복했으므로 힘에 있어서는 열등하지 않으나, 정부의 형태, 부, 사치품, 그리고 영광의 면에서는 바벨론 보다 못하다(사 13:19). 바벨론에서 왕은 절대 권력을 가지고 있었으나(단 5:19) 메데-바사의 법은 왕보다도 높아서 왕이라 하더라도 자기 백성의 이익을 위해서 법을 변경시킬 수는 없었다(단 5:19). 마찬가지로 3번째와 4번째 나라도 정부의 형태, 부, 영광은 바벨론 보다 못하다. 바벨론은 이스라엘을 포로로 잡아갔고 메데 - 바사는 그들을 해방시켰다(사 44:28; 45:1-5; 스 1:1-4; 6:1-14).
    메데-바사는 고대 헬라제국을 세운 알렉산더 대왕 때까지 존속했다(기원전 334년).


    19. 놋으로 된 배와 넓적다리 (32, 35, 39절)
    신상의 이 부분은 이방인의 시대에 이스라엘을 지배했던 세번째 나라인 알렉산더 대왕 치하의 헬라제국을 상징한다(2:39; 8:20, 21; 11:1-34). 이 세번째 제국은 처음 세 나라 중에서 가장 영토가 넓다. 알렉산더는 헬라와 마케돈(Macedon)으로부터 시작해서 앞의 두 나라의 영토 뿐만 아니라 인도의 일부까지도 정복했다. 헬라 제국은 알렉산더의 죽음과 더불어 쇠퇴하기 시작해서 그의 방대한 영토는 우리가 다니엘 8장을 연구할 때 본 것처럼 네 나라로 나뉘었다.


    20. 철로 든 다리 (33-35, 40절)
    신상의 이 부분은 헬라 제국에 이어서 이스라엘을 지배했던 고대 로마제국을 상징한다. 이 나라는 이방인의 시대에 이스라엘을 지배했던 네번째 나라이다(2:40; 7:23, 24; 9:26; 눅2:1; 20:20-24; 요11:48; 마24:1, 2; 행 16:21; 22:25-29). 이 나라는 철이 금, 은, 놋 보다 강하듯이 앞의 모든 나라보다도 더 강력했다. 비록 네번째 나라라 할지라도 이것이 이방인의 시대에 이스라엘을 박해하기 위한 이방 세계의 마지막 나라는 아니었다. 이스라엘 사람들을 구원하고 이 땅에 영원히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기 위하걱 그들의 메시야가 오기 전에 이스라엘을 지배할 두개의 나라가 있을 것이다. 철로 만들어진 두 개의 다리는 고대 로마제국이 동서로 나누어지는 것을 의미한다.


    21. 철과 진흙으로 된 발과 발가락 (33-35, 44절)
    신상의 이 부분은 미래의 새 로마제국(revised R-oman Empire), 곧 이방인의 시대에 이스라엘을 억압하게 될 다섯번째 나라를 의미한다 (2:31-43; 7:23-25; 계 17:12-17). 신상의 마지막 부분인 이 부분은 하늘에서 뜨인 돌에 의해 산산조각이 날 것이다. 새 로마제국은 발과 발가락이 철과 진흙의 두 물질로 만들어졌음을 볼때 일부분은 강하고, 일부분은 약한 제국으로 분리될 것이다. 진흙은 일반 백성에 의한 지배를 뜻하며, 철은 왕들에 의한 지배를 뜻한다. 이러한 정부의 두 형태는 철과 진흙이 혼합되지 않듯이 공존할수는 없을 것이다. 마지막으로는 철이 우세하여 승리할 것이다. 왕들이 다시 로마 제국의 영토를 통치할 것이다. 10개의 나라가 거기에 세워질 것이며, 10명의 왕들이 그것을 다스리게 될 것이다(44, 45; 7:7, 8, 23, 24). 10개의 발가락으로 나타내는 10개의 나라는 그리스도가 오시기 전의 마지막 때까지 존재하나 그가 오실 때는 멸망될 것이다(계 17:8-17; 19:11-21). 이스라엘 사람들은 70번째 이레의 처음 삼년 반동안 10명의 왕들에 의해 통치받고 그 후 마지막 삼년 반 동안은 적그리스도에 의해 통치받을 것이다(2:44, 45; 7:7-14; 7:17-25; 계 13:1-18; 17:8-17; 살후 2:1-12). 성서학자들에 의하면 이 10개의 나라가 다니엘 7장과 요한계시록 17:12-17에 언급된 새 로마제국을 형성할 것이라고 한다.


    22.신상을 부숴뜨린 돌
    이것은 재림하여 이 세상 나라들을 멸망시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는 하늘나라를 상징한다(35, 44, 45; 7:13-27; 마 24:29-31; 25:31-46; 슥14:1-21; 살후1:7-11; 2:4-8; 유 14; 계 11:15; 19:11-20:7).
    그리스도 자신은 "돌"(stone)이라고 불리운다(시 118:22; 마21:44; 엡 2:19-22; 벧전2:6-8). "손으로 하지 아니 하고"(without hen-ds)라는 구절은 인간의 힘에 의하지 않고 전력으로 하나님의 행위에 의한 것임을 강조한다(2:45, 8:25; 욥34:20; 애4:6). 바벨론이 세계제국의 세번째 나라이고, 메데-바사는 4번째, 헬라는 다섯번째, 로마는 여섯번째, 그리고 새 로마제국은 일곱번째 나라라는 것을 성서 본문의 윤곽에서 알게 될 것이다. 이것이 의미하는 것은 이방인의 시대에 이스라엘을 지배하는 여덟 나라 중 세번째에서 일곱번째 나라까지라는 것이다. 두 제국, 즉 첫번째 나라인 애굽과 두번째 나라인 앗수르는 바벨론 이전에 이스라엘을 지배했다.
    여덟번째 나라는 적그리스도의 나라이다(계 17:9-11). 이러한 다섯 나라가 다니엘서에서는 첫번째, 두번째, 세번째, 네번째, 다섯번째 나라로 나타나고, 요한계시록 17:8-11에서는 세 번째, 네번째, 다섯번째, 여섯번째, 일곱번째 나라로 나타난다.

    [10] 하늘에 계신 하나님이 세운 왕국(단 2:44).

    23.하나님이 세우신 왕국
    1)불멸성 -"영원히 망하지도 아니할 것이요"
    2)궁극적인 확정성 -"다른 백성에게로 돌아가지도 아니할 것이요"
    3)우주적 우위성 -"이 모든 나라를 쳐서 멸하고"
    4)영원성-"영원이 설것이요"

    [11] 사람의 손으로 되지 아니한 것

    24. 사람의 손으로 되지 아니하는 것
    1)우리의 할례는 유대의 할례처럼 사람의 손으로 한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할례를 받았다(골 2:11).
    2)우리의 신성한 하늘의 성소는 사람의 손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참 하나님에 의해 이루어진 것이다(단 9:24).
    3)우리에게는 땅에 있는 우리의 장막집이 무너진다고 할지라도 사람의 손으로 되지 아니한 영원한 하늘의 집이 있다(고후 5:1).
    4)그리스도는 사람의 손으로 되지 아니한 산에서 뜨인 돌이다(단 2:45).
    5)적그리스도는 사람의 손을 말미암지 않고 깨어지리라(단 8:25).
    ("주님은 그 입의 기운으로 저를 죽이시고 강림하시리라") (살후 2:8).

    [12] 계시의 결과

    25.계시의 7가지 결과(2:46)
    1)왕이 엎드려-다니엘에게 절하고 명하여 예물과 향품을 그에게 줌(46절).
    2)하나님에게 영광을 돌림 (47절).
    3)다니엘을 높임 (48절).
    4)다니엘에게 많은 선물을 줌(48절)
    5)다니엘을 세워 바벨론 온 도를 다스리게 함(48절).
    6)다니엘을 바벨론 모든 박사의 어른이 되게 함(48절).
    7)다니엘의 친구인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를 높임 (49절).

    [13] 낙성식에 모인 8가지 계층의 사람들

    26.방백
    항상 왕에게 가까이 있었던 총독이나 개인 고문(3:2, 3, 27; 6:1-7).


    27.수령
    여러 도의 부총독, 총독대리, 귀족(2:48; 3:2-3,27; 6:7).


    28. 도백, 파샤(문무고관의 존칭)
    1)변경지역의 부총독(3:2, 3, 27; 6:7).
    2)군대의 지도자(왕상 20:24; 렘 51 23, 28, 57; 겔23:6, 12, 23).


    29. 재판관
    왕을 보좌하여 법률을 제정하는 사람(3:2).


    30. 재무관
    국고를 담당하는 사람(3:2, 3).


    31.모사
    법률관, 재판관(3:2, 3).


    32.법률사
    행정 장관(3:2, 3).


    33. 각 도의 관원
    문관과 여러 현인들(3:2, 3).

    [14] 느부갓네살의 고백

    34.느부갓네살왕이 고백한 5가지 사실(3:28)
    1)하나님이 그의 사자를 보내신다.
    2)하나님은 그를 의지한 사람들을 구원하신다.
    3)하나님께서 왕의 명을 거역하게 하신다.
    4)유대인들이(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 하나님을 섬기기 위하여 몸을 버린다.
    5)하나님 외에는 이와 같이 구원할 수 있는 다른 신이 없다.

    [15] 다니엘의 4번째 예언(4:10-16; 성취됨).

    35. 예언 나무의 이상
    1)땅의 중앙에 한 나무가 있다.
    2)높이가 매우 높다(10절)
    3)그 나무는 자란다.
    4)그 나무는 견고하여진다.
    5)나무의 높이는 하늘에 닿았다.
    6)땅끝에서도 그 나무를 볼 수 있다(11절).
    7)잎사귀는 아름답다.
    8)열매가 매우 많다.
    9)열매는 많아서 만민의 식물이 된다.
    10)들짐승이 나무의 그늘로 찾아든다.
    11)공중의 새들이 나뭇가지에 깃든다(12절)
    12)한 순찰자, 곧 한 거룩한 자가 하늘에서 내려왔다(13절).
    13)그는 소리질러 다음과 같이 외쳤다.
    -나무를 베라,
    -가지를 찍어라.
    -잎사귀를 떨어라.
    -열매를 헤쳐라(열매를 따라).
    -짐승들로 나무아래서 떠나게 하고 새들은 그 가지에서 쫓아내라(14절).
    -그 뿌리의 그루터기를 땅에 남겨두라,
    -하늘 이슬에 그 나무를 젖게하라.
    -들짐승과 더불어 풀이나 뜯게 버려두어라(15절).
    -그 마음은 변하여 인생의 마음같지 아니하고 짐승의 마음을 받게하라.
    -일곱 때를 지나리라(16절).
    -이것은 순찰자들의 결정으로 이루어진 명령이다.
    -이것은 거룩한 자들의 명령으로 내려진 판결이다.
    -인생으로 지극히 높으신 자가 인간나라를 다스리신다.
    -자기의 뜻대로 그것을 누구에게든지 주신다
    -지극히 천한 자로 그 위에 세우신다(17절).

    [16] 느부갓네살왕이 배운 것

    36. 느부갓네살왕이 배운 20가지 사실
    1)하나님을 찬양해야 한다(4:37)
    2)하나님은 하늘의 왕이시다(4:37).
    3)하나님의 일은 진실하다(4:37).
    4)그의 행하심이 의로우시다(4:37).
    5)교만하게 행하는 자를 그가 능히 낮추신다(4:37)
    6)하나님은 모든 왕의 주재이시다(2:47).
    7)하나님은 일한 것을 나타내신다(2:47).
    8)하나님은 그를 의뢰하는 사람들을 보호하기 위해 그의 사자들을 보내신다(3:28).
    9)하나님은 왕의 명을 거역하게 할 수 있다(3:28).
    10)참된 하나님의 종들은 어떤 다른 신도 섬기지 않는다(3:16-18,28).
    11)하나님 외에는 사람을 구원해 줄 수 있는 다른 신이 없다(3:29).
    12)어떤 신도 하나님처럼 기적을 행할 수는 없다(3:25-29; 4:3).
    13)하나님의 나라는 영원하다(4:3, 34).
    14)하나님의 권병은 대대에 이른다(4:3).
    15)하나님의 영은 인간 안에 거할 수 있다(4:8, 9, 18).
    16)하나님은 땅위에서 지극히 높으시다(4:17, 34).
    17)하나님은 자기의 뜻대로 나라를 누구에게든지 주신다(4:17, 32).
    18)땅 위의 지혜자들(박수와 술객 등) 인간의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2:2-13; 4:4-8).
    19)죄에는 댓가가 있다(4:27-33).
    20)자만심은 몰락의 원인이다(4:28-37).

    [17] 권세와 권능(단 4:25)


    우주를 지배하는 네가지 큰 법칙.

    37. 하나님의 주권
    "왕중의 왕"
    1)단 2:37.
    2)단 4:25.


    38. 사탄의 대항(대적)
    1)공중의 권세잡은 자(엡 2:2; 6:11)
    2)세상의 임금(요 14:30).
    3)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들을 참소하는 자로서 모든 땅의 재판관 앞에 나타난다(욥 1:6, 2:1; 슥 3:1).


    39. 천사의 활약
    1)구원얻을 후사를 위하여 섬김 (히 1:14).
    2)인간의 도덕적 상태를 분별함(단 4:16).
    3)하늘의 합법적인 재판소를 형성함(단 4:17).


    40. 하늘에 있는 사악한 영들의 반항(엡 6:12)
    1)하늘의 사자를 -해하는 자들(단 10:12, 13).
    2)하나님의 천사들을 대적하기 위해 모인 자들(단10:20)
    3)땅위의 사건에 관여하는 자들(단 4:8).

    [18] 느브갓네살의 회복의 축복

    41. 느부갓네살의 7가지 회복의 축복(4:36)
    1)그의 총명이 다시 돌아옴(34절).
    2)그의 이성이 다시 돌아옴(36절):개역성서에는'총명'으로 번역됨.
    3)그의 나라의 영광이 회복됨.
    4)그의 위엄과 광명이 다시 돌아옴.
    5)그의 모사들과 관원들이 다시 그를 모심 (36절).
    6)그가 그의 나라에서 다시 세움을 받음.
    7)지극한 위세가 그에게 더해짐.

    [19] 다니엘에 대한 증거

    42. 다니엘에 대한 7가지 증거(5:11,12)
    1)그는 거룩한 신들의 영을 가지고 있음(11절)
    2)그는 비범한 능력을 가지고 있음(12절).
    3)그는 지식이 많음(12절).
    4)그는 매우 총명함(12절).
    5)그는 꿈을 해석하는 재주가 있음(12절).
    6)그는 은밀한 말을 밝힘(12절)
    7)그는 모든 의문을 파할 수 있음(12절).

    [20] 벨사살왕의 죄

    43. 벨사살 왕의 죄(5:22, 23)
    1)스스로 마음을 낮추지 아니함.
    2)하나님께서 그의 아버지(느부갓네살)에게 행한 일을 알고도 받아들이지 않음(22절).
    3)스스로 높여서 하늘의 주재를 거역함(23절).
    4)하나님의 집에서 쓰던 성전 기구들을 더럽힘(23절).
    5)신상들을 찬양함(23절).
    6)모든 사람에게 생명을 준 참 하나님을 찬양하지 않음(23절)

    [21] 다리오왕의 명령

    44. 다리오 왕의 7가지 명령(6:24)
    1)모든 사람들은 다니엘의 하나님 앞에서 떨며 두려워해야 한다(26절)
    2)그는 살아계신 하나님이시다(26절).
    3)그는 영원히 변치 않으실 분이다(26절).
    4)그의 나라는 영원하다(26절; 2:44, 45; 7:13-14,18,27; 계11:15; 22:4, 5).
    5)그는 위험에서 건져 내신다(27절).
    6)그는 이적과 기사를 행하신다(27절)
    7)그는 다니엘을 구원하여 사자의 입에서 벗어나게 하셨다(27절, 히 11:33).

    [22] 하나님에 대한 사실

    45. 하나님에 대한 15가지 사실:심판(7:9)
    1)심판 보좌가 놓임 (9절)
    2)하나님은 인간의 눈에 보임.
    3)하나님은 왕좌 위에 앉아 계시는데, 이것은 하나님은 사람이 앉아 있는 것과 같이 몸을 가지고 있음을 의미함(9절)
    4)하나님은 사람들과 같이 옷을 입고 있음(9절).
    5)그의 옷은 눈과 같이 희다(9절).
    6)그는 사람과 같은 머리를 가지고 있음(9절)
    7)그는 머리털을 가지고 있음(9절)
    8)그의 머리털은 깨끗한 양의 털같이 희다(9절).
    만약 그가 머리와 머리털을 가지고 있고 옷을 입었다면, 그는 몸을 가지고 있음에 틀림이 없다(요 4:24를 참조하라).
    9)그의 보좌는 불꽃 같음.
    10)보좌의 바퀴는 붙는 불 같음(9절; 겔1:15-20, 25-28; 10:9-13).
    11)불이 강처럼 흘러 그 앞에서 나옴(10절).
    12)수많은 사람들이 그의 앞에서 수종듬(10절).
    13)수많은 사람들이 그 앞에 서 있음(10절).
    14)심판을 베품(10절).
    15)책들이 펴놓여 있음(10절).

    [23] 적그리스도에 대한 4가지 사실(7:11)

    46. 그는 큰 말을 할 것이다
    1)8, 11, 20, 25절.
    2)8:23-25.
    3)11:36.
    4)계 13:5.


    47.그는 학살당할 것이다
    단 1:11; 8:25; 11:45; 사11:4; 살후2:8; 계19:20.


    48. 그의 몸이 상할 것이다
    단7:11; 비교, 마10:28; 눅12:5.


    49. 그의 몸이 유황불에 던져질 것이다
    단11절:계 19:20; 20:10.

    [24] 다니엘이 본 네 짐승의 이상

    50. 다니엘의 35가지 이상-네 짐승(7:2-14)
    1)하늘의 네 바람이 큰 바다로 몰려 불어옴(2절)
    2)큰 짐승 넷이 바다에서 나왔는데 그 모양이 각각 다름(3절).
    3)첫째 짐승은 사자와 같음(4절)
    4)두번째 짐승은 곰과 같음(5절).
    5)세번째 짐승은 네 개의 날개와 네 개의 머리를 가진 표범과 같음(6절).
    6)네째 짐승은 모습은 나타나지 않으나 무섭고 놀라우며 극히 강함(7절).
    7)네째 짐승은 철 이가 있어서 먹고 부숴뜨리고 그 나머지를 발로 밟음(7절).
    8)네째 짐승은 이전의 모든 짐승과 다름(7절).
    9)네째 짐승은 10개의 뿔이 있음(7절).
    10)또 다른 작은 불이 10개의 뿔 사이에서 자람(8절).
    11)작은 뿔이 자람에 따라 10개의 뿔 가운데 3개가 뿌리채 뽑힘(8절).
    12)작은 뿔에는 사람의 눈같은 눈이 있고 또 입이 있어 큰 말을 함(8절).
    13)왕좌가 놓이고 옛적부터 항상 계신 이가 좌정해 있음(9절).
    14)그의 옷은 희기가 눈같음(9절).
    15)그의 머리털은 깨끗한 양털 같음(9절).
    16)그의 보좌는 불꽃 같음(9절).
    17)그 바퀴는 타는 불 같음(9절).
    18)불이 강처럼 흘러 그 앞에서 나옴(10절)
    19)수많은 사람들이 그를 시중들고 또한 수많은 다른 사람들이 심판받기 위하여 그 앞에 서 있음(10절).
    20)심판을 베품(10절)
    21)책들이 펴 놓여 있음(10절)
    22)작은 뿔이 큰 소리로 말함(11절).
    23)짐승이 마침내 죽임을 당함(11절).
    24)짐승의 시체가 상한바 되어 타는 불에 던져짐(11절).
    25)남은 모든 짐승들은 그 권세를 빼앗김 (12절).
    26)이 짐승들이 죽임을 당하기 전에 목숨만은 얼마동안 부지함(12절).
    27)인자가 하늘 구름을 타고 옴(13절).
    28)인자가 옛적부터 항상 계신 자에게 나옴(13절).
    29)인자가 옛적부터 항상 계신 자 앞에 인도됨(13절).
    30)인자에게 권세를 줌
    31)인자에게 영광을 줌
    32)인자에게 나라를 줌.
    33)모든 백성과 나라들이 그를 섬김
    34)그의 권세는 영원함
    35)그의 나라는 결코 멸망하지 않음(14절).

    [25] 하나님의 축복을 받기 위한 3가지 보증

    51. 기도와 죄의 고백
    단 9:3, 4-6, 17, 20.


    52. 죄악을 떠남
    단 9:13; 사55:7.


    53. 진리에 대한 이해와 복종
    단 9:4-10, 13. 요8:32-36; 롬1:16.

    [26] 하나님에 대한 진리

    54. 하나님에 대한 7가지 진리(9:4-9)
    1)그는 크신 하나님이시다(4절).
    2)그는 두려워할 하나님이시다.
    3)그는 자기를 사랑하는 자를 위하여 언약을 지키시고 인자를 베푸신다(4절).
    4)그는 그의 계명을 지키는 사람을 위하여 언약을 지키시고 인자를 베푸신다(4절).
    5)그는 공의의 하나님이시다(7, 14, 16절).
    6)그는 심판의 하나님이시다(7, 13, 14, 16절).
    7)그는 자비의 하나님이시다(9절).

    [27] 다니엘의 간구

    55. 다니엘의 10가지 간구(9:16-19)
    1)주의 분노를 예루살렘과 시온 산에서 떠나게 하옵소서 (16절).
    2)나의 기도를 들으소서 (17, 18, 19절).
    3)나의 간구를 들으소서 (17절)
    4)주의 얼굴 빛을 주의 성소에 비추소서 (17절).
    5)귀를 기울여 들으소서(18절).
    6)당신의 눈을 뜨소서 (18절).
    7)우리의 황폐된 상황을 보소서 (18절)
    8)우리의 죄를 용서하소서 (19절).
    9)주여 들으시고 행하소서 (19절).
    10)지체하지 마옵소서 (19절).

    [28] 이스라엘의 죄

    56. 이스라엘의 12가지 죄(9:5-14)
    1)범죄함(5,11,15,16절).
    2)패역함(5절).
    3)행악함(5절)
    4)주의 법도를 떠남(5절).
    5)주의 규례를 떠남(5절).
    6)주의 종, 선지자들의 말을 듣지 않음(6절)
    7)주께 죄를 범함(7절).
    8)주께 패역함(9절).
    9)하나님의 목소리를 청종치 아니함(10절).
    10)주의 율법을 행치 아니함(10절).
    11)주의 율법을 범함(11절)
    12)하나님의 목소리를 청종치 아니함(11, 14절).

    [29] 전쟁의 이상(10장)

    57. 가브리엘과, 그를 사로 잡아 그로 하여금 다니엘에게 이 전쟁의 이상을 보여주지 못하게 한 사탄과 같은 바사 군주 사이의 전쟁
    단 10:12, 13, 20.


    58. 바사군(君)과 헬라군(君) 사이의 전쟁
    단 1O:20, 21; 11:2,3; 8:20, 21.


    59. 바벨론군과 메대-바사군 사이의 전쟁
    단 11:1; 5:25-31.


    60. 알렉산더 대왕의 제국을 차지하려다가 그것을 4나라로 나눈 그의 부하 장군들 사이의 전쟁
    단 1:4; 8:8, 22.


    61.알렐산더제국의 4부분중 2부분인 수리아와 애굽 사이의 전쟁
    단11:5.


    62. 수리아와 애굽 사이의 두번째 전쟁
    단 11:7-9.


    63.수리아와 애굽 사이의 3번째 전쟁
    단 11:10-12.


    64. 수리아와 애굽 사이의 4번째 전쟁
    단 11:13-16.


    65.수리아와 애굽 사이의 5번째 전쟁
    단 11:17.


    66. 수리아와 헬라 그리고 로마 사이의 전쟁
    단 11:18, 19.


    67. 수리아와 이스라엘 사이의 첫번째 전쟁
    단 11:20.


    68. 수리아와 이스라엘 사이의 두번째 전쟁
    단 11:21-24.


    69. 수리아와 애굽 사이의 6번째 전쟁
    단11:25-27


    70. 수리아와 이스라엘 사이의 3번째 전쟁
    단 11:28.


    71. 수리아와 애굽 사이의 7번째 전쟁
    단11:29-31


    72. 수리아와 이스라엘 사이의 4번째 전쟁
    단 11:32-34.


    73.수리아와 하나님 사이의 전쟁
    단 11:36-39.


    74. 수리아와 애굽 사이의 8번째, 곧 마지막 전쟁
    단 11:40-42.


    75. 수리아와 이스라엘 사이의 5번째 전쟁
    단 11:41.


    76. 수리아와 다른 나라들 사이의 전쟁
    단 11:41.


    77. 수리아와 리비아, 구스 사이의 전쟁
    단 11:43.


    78.수리아와 그에게 예속된 10나라, 러시아, 고대 로마 제국의 동쪽과 북쪽 나라들 사이의 전쟁
    단 11:44.


    79. 수리아와 이스라엘 사이의 6번째, 곧 마지막 전쟁
    단 11:45; 슥14:1-5, 14.


    80. 수리아와 재림하신 그리스도 사이의 전쟁
    단11:45; 7:21, 22, 25-27; 8:23-25; 9:27


    81. 미가엘로 그의 사자들과 사탄 및 그의 사자들 사이의 하늘의 전쟁
    단 12:1; 계 12:7-12.

    [30] 메시야에 대한 8가지 묘사(10:5)

    82. 그의 옷은 빛나는 세마포임
    단 1O:5; 12:6, 7; 비교; 계 1:13; 19:8; 출28:4-12.


    83. 그의 허리에는 정금 띠를 두름
    단 10:5; 비교 계 1:13.


    84.그의 몸은 황옥 같음
    단 10:6; 비교 계 4:3.


    85. 그의 얼굴은 번갯빛 같음
    단 10:6; 비교 1:16; 10:1.


    86. 그의 눈은 횃불 같음
    단 10:6; 비교 계 1:14; 19:12.


    87. 그의 팔은 빛난 놋과 같음
    단 10:6; 비교 계 1:14, 19;12.


    88. 그의 발은 빛난 놋과 같음
    단 10:6; 비교 계 1:14, 10:1.


    89. 그의 말소리는 무리의 소리와 같음
    단 1O:6; 비교, 계 1:14, 8:5; 10:2-4; 11:15; 14:2; 16:17, 18; 19:6; 시 29편.

    [31] 다니엘에게 미친 영향(10:8)

    90. 10가지 영향
    1)몸에 힘이 빠짐(8절).
    2)나의 아름다운 빛이 변하여 썩은듯 함(8절)
    3)얼굴을 땅에 대고 깊이 잠들었음(9절).
    4)한 손이 나를 어루만져서 손으로 땅을 짚고 무릎을 꿇고 일어남(10절).
    5)나는 그 후 떨며 일어섬(11절).
    6)나는 크게 두려워함(12절).
    7)나는 다시 땅굴을 땅에 대고 엎드림 (15절)
    8)나는 벙어리가 됨 (15절).
    9)천사가 나의 입술을 만지니 나는 다시 힘이 없어졌고 호흡이 남지 아니하였음을 호소함(16, 17절).
    10)나는 다시 강건하게 되어 계시를 받을 수 있게 됨(18절-12:13).

    [32] 다니엘 10-12장에 나타난 10가지 목적

    91. 마지막 날에 이스라엘에 일어날 일을 알려 주기 위함
    단10:14.


    92. 적그리스도가 어디서 나올 것인지에 대한 계시를 완성하기 위함
    단 11:2-45.


    93. 그리스도의 재림 이전에 이스라엘을 억압할 세계적인 이방 제국들 가운데서 다니엘서의 계시를 완성하기 위함
    단 2:37-45; 7:17-27; 8:20-25.


    94. 작은 뿔 혹은 적그리스도에 대하여 알려 주기 위함
    단11:36-12:7.


    95. 적그리스도를 북방 왕과 동일시하기 위함
    단11:36-45.


    96. 새 로마 제국과 새 헬라 제국에 대한 계시를 완성하기 위함
    단 2:40-43; 7:23, 24.


    97.지리적으로 다니엘 2장과 7장의 10나라와 다니엘의 8장의 4나라로부터 이 나라들 중 하나인 수리아로 적그리스도의 도래지를 제한하기 위함
    단 7:23, 24, 8:9-14, 20-25; 11:36-45.


    98.적그리스도가 언제, 왜, 어떻게 올 것인지를 더욱 잘 설명하기 위함
    단 7:23, 24; 8:9-14, 20-25; 9:27; 11:36-45.


    99. 마지막 날의 전쟁에 대한 계시를 완성하기 위함
    단 2:40-45; 7:23,24; 8:9-14, 20-25; 11:40-45.


    100. 이 세상 나라들을 지배하는 사탄의 능력을 보이기 위함
    단 10:12-21; 11:1; 12:1.

    [33] 적그리스도와 신들

    101.적그리스도와 그의 신들에 대한 7가지 사실(단11:37)
    단 10:12-21; 11:1; 12:1
    1)그는 열조의 하나님, 곧 참 하나님을 공경하지 않음(37절; 요5:43).
    2)여자들이 사모하는 신들을 돌아보지 아니함(37절).
    3)아무 신이든지 돌아보지 아니함(37절)
    4)스스로 높여 모든 신보다 크다하며 심지어 참 하나님 보다도 높다고 함(36, 37절, 살후 2:4)
    5)그의 열조가 알지 못하던 신을 공경함(38절).
    6)세력의 신을 공경함(38절).
    7)이방 신을 공경함(38, 39절)






























































    통화 스와프 / 대륙세력과 해양세력



    통화 스와프(currency swap) / 통화교환협정 

    통화에 대한 스왑을 의미한다. 
    스왑이란 두 거래자가 두 개의 금융자산을 서로 교환하고 이를 일정시간 동안 활용한 후에 다시 바꾸는(돌려주는) 금융계약이다.

    통화 스왑은 외화자금시장 참가자간의 통화 스왑과 국가들의 중앙은행간의 통화스왑으로 나뉘고, 이들은 서로 차이점이 있다. 
    외화자금시장의 통화 스왑은 흔히 낮은 이자율을 얻기 위해 하고 중앙은행간 통화스왑은 효율적인 외환확보를 위해서 한다.

    이 문서의 내용은 구분없이 중앙은행간 통화 스왑에 대해서 설명하고 있으니 혼동하지 말 것.

    통화교환협정이라고도 한다. 

    국가 간의 통화 스와프 협정은 필요할 때 두 나라가 자국 통화(예: 원화)를 상대국 통화(예: 캐나다 달러화)와 맞교환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진다. 
    스와프 종류에 따라 다르지만, 스와프 시 무이자 거래가 아닌 약간의 수수료가 붙는다.

    이게 국가간의 통화스와프가 처음 등장한 것은 미국은 1959년 독일연방은행과 미국 달러화와 독일 마르크화간의 교환거래 협정이 있고 나서이다.

    우리나라가 최초로 국가간 통화스와프를 한 것은 아래 쪽에도 나와있지만 2001년에 일본과의 20억 미 달러화 기준 통화협정이다.

    미래의 경제학적 리스크를 대비하기 위해서 하는 경우가 많다.

    외화는 물건처럼 시장에 나와 있기 때문에 아무 때나 살 수 있는 것이 아니다.[1] 다른 나라에 물건을 팔고 외화(예: 달러화)를 받거나 또는 다른 나라가 가진 외화와 자국 통화를 교환해야 하는데, 예를 들어 한국의 원화는 쓸 수 있는 곳이 제한되므로[2] 다른 나라가 굳이 달러화로 바꾸어 줄 이유가 없다. 이것을 국가 간에 '필요할 때 정한 금액만큼 바꾸어 준다'고 약속하는 것이 통화 스와프 협정.

    본질적으로 기축통화국과 비 기축통화국이 맺게 된다. 다만 아주 경제적 거리가 가까운 비 기축통화국 국가들끼리 서로 가지고 있는 범위 내에서나마 소액의 통화 스와프 협정을 맺는 경우도 있다. 동남아시아 외환위기처럼 한 나라에서 일어난 외환위기가 이웃 나라로 퍼져나가기 십상이니 최대한 일어나기 전에 막아보자는 목적.

    무역흑자가 나고 가진 자산이 많아도 자국 통화(한국의 경우 원화)가 기축 통화가 아닌 한 계약한 금액을 지불한다거나 하는 등 외화가 필요할 때 그 외화가 없을 경우 민간 기업으로 치면 흑자도산과 유사한 사태가 일어날 수 있다. 반면 외환보유고가 크면 외부의 경제적 충격에는 강하지만 그만큼 자본이 묶인 상태가 되는 것이나 마찬가지이므로 유연성은 떨어지게 된다. 이 외환보유고의 적정 수준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한데, 한국은 외환위기 트라우마 때문에 필요량을 무척 크게 잡는 편이고 이것을 실물 화폐로 손에 쥐고 있는 것은 상술한 바와 같이 비효율적이다.

    그런데 타국과 통화 스와프 계약을 맺어두면 외화가 필요할 때 해당하는 한도 안에서 자국 통화(예: 원화)를 상대국 통화(예: 달러화)로 교환할 수 있다. 따라서 지나치게 많은 외화를 외환보유고로 묶어두지 않고도 유사시 불을 끌 정도의 외화를 구할 수 있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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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부, 대미투자 조건으로 '무제한 통화스와프' 제안

    한국 정부가 3500억달러(약 485조원) 규모 대미 투자펀드 조성을 위해 한·미 통화스와프를 미국 측에 제안한 것으로 알려졌다. 
    펀드 조성 시기와 방식을 둘러싸고 한·미 간 이견차가 좁혀지지 않아 우리 측 입장이 반영될지 불확실하다는 관측이 나온다.

    14일 대통령실과 기획재정부 등에 따르면 한국 정부는 한·미 관세 후속 협상 과정에서 미국 재무부에 한·미 중앙은행 간 무제한 통화스와프 체결을 제안했다. 
    정부는 대미 투자펀드를 조성하기 위해 외환보유액 등에서 달러를 지속적으로 꺼내 쓰면 외환시장에 미치는 영향이 크다고 판단해 통화스와프 체결을 요구한 것으로 알려졌다. 
    미국 정부가 요구하는 대미 펀드 규모는 지난달 말 기준 외환보유액 4162억9000만달러의 84%에 달한다.

    기재부 관계자는 이날 한·미 통화스와프와 관련해 “대미 투자 협상 과정에서 외환시장 영향을 최소화하기 위한 다양한 방안을 협의하고 있다”며 “다만 한·미 간 협의 중인 사항에 대해 구체적인 내용을 확인해드릴 수 없다”고 말했다.

    김용범 대통령실 정책실장도 지난 9일 방송기자클럽 토론회에서 “일본은 기축통화국이고, 외환보유액이 한국의 세 배에 달하며 미국과 무제한 통화스와프도 체결하고 있지만 우리는 그렇지 않다는 근본적인 한계가 있다”며 “근본적으로 외환시장에 미칠 충격을 같이 고민하고, 미국이 도와줄 부분에 대해서는 해답을 달라고 말했다”고 밝혔다.

    통화스와프 체결 여부를 두고선 전문가 사이에서도 관측이 엇갈린다. 
    한·미 통화스와프는 2008년과 2020년 각각 300억달러, 600억달러 규모로 체결됐다. 
    당시엔 글로벌 금융위기와 코로나19 사태로 국제 금융시장이 요동쳐 미국 중앙은행(Fed)이 외환시장에 개입할 필요성이 있었다. 
    또 한국뿐 아니라 다른 국가들과 외환스와프 협정을 함께 맺었다. 
    정부 고위 관계자는 “미국 Fed는 기본적으로 한 국가와 통화스와프를 체결하는 데 부정적 입장인 것으로 알고 있다”고 전했다.

    ‘3500억달러 대미 투자’와 관련한 한·미 간 입장차는 좁혀지지 않은 것으로 알려졌다. 
    산업통상자원부에 따르면 미국 뉴욕을 방문한 김정관 장관은 이날 새벽 인천공항을 통해 입국했다. 
    10일 미국으로 출국한 김 장관은 12일 하워드 러트닉 미국 상무장관과 뉴욕 모처에서 만나 관세협상 대가로 한국이 약속한 3500억달러 규모 대미 투자 이행 방안에 관해 집중 논의했다.

    양국은 관세협상 타결 이후 협상 내용의 ‘문서화’를 놓고 실무 협의를 벌이고 있다. 대미 투자펀드의 구조, 투자 방법, 이익 배분 방식 등을 두고 견해차가 큰 것으로 알려졌다. 
    통상당국과 정치권에 따르면 러트닉 장관은 미국 내에 특수목적법인(SPC)을 세우고 3500억달러를 현금으로 넣는 방안을 요구하는 것으로 전해졌다. 
    정부는 유럽연합(EU)이 미국과 합의한 대로 보증 및 대출 형식의 투자를 원하고 있다.

    정부 안팎에선 협상 교착 상태가 길어질 것이라는 우려가 크다. 
    이재명 대통령은 11일 취임 100일 기자회견에서 관세협상과 관련해 “국익에 반하는 결정은 절대 하지 않을 것”이라며 “앞으로 한참 더 협상해야 한다”고 말했다. 
    러트닉 장관은 같은 날(현지시간) CNBC에 출연해 “한국이 협정을 수용하지 않으면 관세(상호관세 25%)를 내면 된다”고 압박했다.

    이런 가운데 미국에 수출되는 일본산 자동차의 관세율은 16일부터 15%로 낮아진다. 
    한국산은 협상 문서화가 끝나기 전까지 25% 관세를 부과받는다. 
    당분간 미국 시장에서 한국 자동차의 가격 경쟁력이 크게 떨어질 것이라는 우려가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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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륙세력과 해양세력에 관한 이론적 고찰

    이승준(콤스텍(주) 수석전문위원, 忠南大學校 國家安保融合學部 겸임교수) 
    작성일19-06-27 16:07 조회4,654회 댓글0건

    본문

          

    목    차

    Ⅰ. 인류 문명의 탄생과 대륙·해양세력의 형성
    Ⅱ. 대륙세력과 해양세력의 상관성
    Ⅲ. 대륙세력과 해양세력에 관한 이론적 발전
       1. 대륙세력 이론(Land Power Theory)
       2. 해양세력 이론(Sea Power Theory)

    ​1. 인류 문명의 탄생과 대륙·해양세력의 형성

    인류의 문명이 태어난 것은 지금으로부터 2만 년에서 1만 년 전이었으며 그 후 발전을 거듭하여 오늘날에 이르고 있다. 
    인류는 그들이 살고 있는 곳에 독특한 문명을 탄생시켰는데 그 중에서 제일 먼저 태어난 것은 기원전 3,500년경에 시작된 메소포타미아 문명과 이집트 문명이다. 
    메소포타미아는 서남아시아의 티그리스 강과 유프라테스 강 사이에 있는 아르메니아 고원에서 페르시아 만에 걸친 지역을 말하며, 이집트는 나일 강 하류에 자리 잡고 있다. 
    이 두 지역 사이에 펼쳐져 있는 동부 지중해 연안에는 ‘기름진 초승달’지역이라는 곳이 있으며, 여기에서 최초의 도시가 탄생됐고, 이와 함께 최초의 문명도 시작되었다. 그리고 두 문명에 뒤를 이어 인도의 인더스 강 유역과 중국의 황하 유역에서도 새로운 문명이 시작되었다. 이들 4대 문명지는 모두 지구의 북반구로서 큰 강을 끼고 있었고, 또 인간이 살기에 좋은 기후와 함께 기름진 토양을 갖추고 있었다. 이들 문명은 점차 넓은 지역으로 번져 나가서 기원전 1천 년 무렵에는 오리엔트 및 아시아 전역으로 확산되었다(세계사편찬회, 2017).
    이 과정에서 인간은 언제 부터인가 동족의식을 지니고 집단을 형성하면서 자연스럽게 자신의 생존공간인 영토 의식을 갖게 되었다. 그리고 인간은 생존과 번영을 위해 토지를 둘러싸고 서로 빈번하게 싸움을 벌였다. 인간 집단은 민족이나 국가라는 조직으로 발전하면서 자신이 소속된 조직의 이익을 위해 행동하는 사회적 특성을 띠게 되었다. 이 과정에서 국가는 ‘더 넓고, 더 좋은 영토’를 차지하기 위하여 수많은 전쟁을 해왔다. 그러므로 인류가 수행한 일련의 전쟁들은 영토라는 지리적 조건(지정학적 요인)과 깊은 연관성이 있을 수밖에 없다(다카하시 요이치, 2018).
    인간의 사고와 행동에 공간이 영향을 미치고 있다고 믿는 지정학(geopolitics)은 육지(land) 및 공중(the air space)과 더불어 바다(sea)라는 공간에 관한 지식을 어떻게 하면 정치지도자들을 위해 지적 능력으로 변경시킬 수 있을 것인가를 고찰하는 학문으로 볼 수 있다(전웅, 1999).
    고대 그리스의 아리스토텔레스 이래 근세의 쟝 보뎅과 몽테스키외, 현대의 지정학을 발전시킨 라첼, 첼렌, 마한, 맥킨더 등은 한 나라의 국민성, 정치제도 및 행위형태가 그 나라의 위치, 지형, 규모, 기후 등 지리적인 요소들과 밀접한 관계가 있음을 경험적 사실로 입증하였다. 정치지리학은 국가의 성쇠를 영토라는 지리학적 환경 이론 관점에서 논하고 있는데, 독일의 지리학자인 프리드리히 라첼(Friedrich Ratzel, 1844~1904)에 의해서 체계화되었다. 그 후로는 O. 마울 등 독일의 지리학자를 중심으로 연구가 진전되었다. 그리고 스웨덴의 정치학자 첼렌(J. R. Kjellen, 1864~1922), 독일의 군인이며 지리학자인 하우스호퍼((Karl Ernst Haushofer, 1869~1946) 등에게 계승되어 지정학(地政學)으로 발전하였다. 하우스호퍼는 역사의 25%가 지리적 요소에 의해 결정된다고 주장한 바 있다. 그러므로 지정학은 정치지도자들에게 국가의 성장, 번영, 그리고 안보에 사활적이라고 생각되는 가치와 목표를 일깨워주고 그것을 달성할 수 있는 공간관리의 지식과 기술을 제공하고자 하였다.
    지정학은 여러 이미지들을 불러내는 용어이다. 어떤 의미에서 이 용어는 전쟁, 제국, 외교에 관한 착상을 불러일으킨다. 지정학은 영토를 통제하고 쟁취하고자 하는 국가들의 행위라 할 수 있다(Colin Flint, 2009). 전통적으로 지정학은 ‘세계가 움직이는 방식’, 즉 역사적 변동의 추동력, 국가 간 전쟁의 원인, 어떤 나라의 강대국 부상 여부를 결정하는 요인 등에 대해 중립적이고 완벽한 이론을 제시할 수 있다고 주장해왔다(Colin Flint, 2009).
    지정학은 ‘지리적인 조건이 한 나라의 정치나 군사, 경제에 끼치는 영향을 생각하는 학문’이다. 여기서 지리적인 조건이란 영토나 그 주변 지역을 뜻한다. 영토에는 그것을 빼앗기 위한 국가와 국가의 싸움, 즉 전쟁이 따른다. 그러므로 지정학은 곧 전쟁의 역사를 배우는 학문이라고 할 수 있다(다카하시 요이치, 2018).
    지정학을 현대세계에 대한 비판적 분석을 제공하기 위한 관점에서 정의해보면 다음과 같다. “지정학은 영토전략의 실행과 표상이다.” 국가들이 영토와 그에 속한 자원들을 차지하기 위해 어떻게 경쟁하는가에 주목해보면, 19세기 말 유럽 열강은 아프리카에서 자국의 식민통제를 확대하기 위하여 상호 간에 치열한 쟁탈전을 벌였다. 20세기 초 제1차 세계대전 시에는 영국·프랑스·러시아 등의 연합국과 독일·오스트리아의 동맹국이 양 진영의 중심이 되어 싸웠다. 21세기에 들어서는 테러에 대한 전쟁에 대처하기 위하여 국가들은 동맹을 체결했으며, 아프가니스탄, 이라크, 그리고 중앙아시아 기지에 군대를 배치하였다. 이라크와 아프가니스탄에서의 전투의 실행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는 것은 ‘악’에 대한 투쟁, ‘민주주의’의 확산 등과 같은 표상의 역할이다(Colin Flint, 2009).
    지리적으로 보면 지구표면은 육지가 약 3분의 1이고, 나머지는 바다이다. 조금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지구표면의 72%(3억6,500만㎢)가 광활한 바다인 반면, 28%(1억4,450㎢)는 대륙들과 도서들로 구성된 협소한 육지이다. 역사적으로 볼 때 지구표면은 인류생존의 근거지로서 문명과 과학기술이 발전함에 따라 그 가치가 변화되어 왔다. 대륙과 해양은 인류가 국가를 건설하고 오늘날의 국제사회로 발전해오는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해왔다. 이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대륙세력과 해양세력이 형성되었으며 양 세력은 서로 경합을 벌이면서 인류의 역사를 주도하게 되었다.

    ​2. 대륙세력과 해양세력의 상관성

    ​문명의 발상지가 된 큰 강들은 바다로 흘러들고 있어 곧 해양으로 접근하는 통로의 역할을 하게 된다. 
    대륙을 연결하는 통로가 된 해양은 고대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문물의 교역로 역할뿐만 아니라 국가 간의 전쟁에서는 해상기동로로 빈번히 활용되기도 하였다. 
    문명이 발달함에 따라 해양탐험이 활발히 진행되고 해양이 개척되기 시작하면서 세계사의 중심에 해양이 자리 잡게 되었다.

    대륙세력과 해양세력은 세계질서를 만들어 가는 과정에서 깊은 상관성을 띠고 있다. 
    즉 한 세력이 부상하면, 다른 세력은 침강하는 특성인데 이는 결국 두 세력 간의 패권경쟁으로 이어진다. 
    두 세력은 적절히 균형을 이루고자 노력하지만 그것이 여의치 않으면 전쟁을 촉발시키기도 한다는 것이다.

    새롭게 등장한 해양세력은 대륙세력이 주도하는 기존의 세계질서를 거부하고 새로운 질서를 새우기 위해 노력하였다. 
    이로 인해 대륙세력이 주도해왔던 세계질서는 커다란 변화를 맞이하였다. 
    서유럽 국가들이 해양세력으로 부상하자 유럽의 다양한 민족과 세력의 경쟁과 각축이 격화되어 갔다. 
    1500년대 유럽대륙 한가운데를 무대로 30년전쟁의 참화와 이 전쟁을 수습한 베스트팔렌조약은 유럽의 크고 작은 세력들에게 획정된 영토와 그 안에서의 배타적 주권을 행사하는 국민국가(Nation State) 체제, 그리고 이에 기반한 세력균형 질서를 만들어냈다. 각 세력 간 힘의 균형을 통해 공존을 추구하는 세력균형 질서의 핵심은 압도적인 패권국가의 출현을 막는 것이었다. 각 세력 간에는 패권을 둘러싼 치열한 경쟁이 전개되었고 이는 여러 차례의 전쟁으로 이어졌다.

    베스트팔렌체제 전후로 유럽 지역의 질서는 영국, 독일, 프랑스의 세력에 의해 조율되고 있었는데 특히 독일의 세력을 관리하는 것은 세력균형을 유지하는데 있어 핵심적인 사안이었다. 독일은 유럽 대륙 내에서 동서로 팽창하기 유리한 지정학적 이점과 이 경우 주변국의 집중 견제라는 제약을 동시에 안고 있는 국가이다. 이러한 지정학적 이유로 인해 유럽 지역에서는 독일이 분열되거나 약화되면 그 주변국은 부상하였고, 반면 강해지면 독일의 패권국가화가 추구되었다. 오스트리아 주도 합스부르크제국의 확대는 30년전쟁을, 독일의 분열과 약화는 프랑스의 부상을 통한 나폴레옹전쟁을, 독일 통일은 두 차례의 세계대전을 초래한 바 있다.
    영국은 유럽 대륙과 바다로 격리된 지리적 이점 때문에 대륙의 분쟁에서 비교적 자유로웠으며 해양 진출에는 유리한 상황이었다. 덕분에 영국은 이 세력균형 질서의 수호자 역할을 수행할 수는 있었지만, 유럽을 전쟁의 참화로부터 벗어나게 하지는 못하였다(Henry A. Kissinger, 2014).

    동북아시아에서도 이와 같은 해양세력과 대륙세력의 상관성은 잘 드러나고 있다. 역사적으로 16세기 중반까지, 한반도에 건립된 국가들에게는 바다보다 육지에 관심을 갖는 것이 현명한 생존 전략이었다. 왜냐하면 유라시아 동부 평원에는 기마 문명이 발달한 여러 세력이 있어서 이들의 침략을 막는 것이 국가 생존에 필수적인 것이었기 때문이다. 고려는 명나라에 대항하여 전쟁을 불사했지만, 조선은 명나라와의 전쟁보다는 화친을 통해 생존과 번영을 누릴 수 있었다.

    반면 바다에서 유일하게 경계해야 할 일본은 항해 및 선박건조 능력이 미흡하여 크게 경계해야 할 필요가 없었다. 당시 고려와 조선은 대륙과 접한 북쪽에 군사력을 집중하고 해안에는 소규모 왜구의 출몰에 대비하고 있었다. 한반도에 위치한 국가들은 반도의 특성상 육상과 해상으로부터의 침략을 동시에 대비해야 하는 상황에서 선택과 집중 전략을 적절히 구사함으로써 효과적으로 안보를 달성할 수 있었다(김시덕, 2015).

    그러나 16세기 말에 들어서면서 일본이 유럽 상인과 선교사를 통해 해양세력 중심의 세계질서에 눈을 뜬 후 해양국가로서 국력을 결집하여 조선과 명나라를 정복하려고 하자 이런 전략은 수정이 불가피해졌다. 임진왜란(1592~1598)을 통한 일본의 야욕은 조선과 명이라는 대륙세력에 의해 좌절되었지만, 이와 같은 해양세력의 발흥은 중국 대륙에서 명나라가 청나라로 대체되는 결과를 낳게 하였다.
    20세기에 들어 해양세력으로 성장한 일본은 ‘대동아공영권’을 표방하면서 한국과 중국을 침략하였다. 일본은 1910년 대한제국을 강제 병합함으로써 한반도와 만주지역을 포함한 동아시아로 세력을 확장시켜 나갔다. 해양세력의 부상이었다. 이후 제2차 세계대전에서 패망한 일본은 중국과 소련의 대륙세력에 밀려 한반도에서 축출되었지만, 일본을 이용하여 대륙세력의 팽창을 차단하기 위한 미국의 전략에 의해 재기할 수 있었다. 그리고 현재까지 한반도에서는 한·미·일 3국의 해양세력과 북·중·러 3국의 대륙세력 간의 갈등과 충돌이 지속되고 있다. 유럽에서와 마찬가지로 한반도에서도 해양세력과 대륙세력은 서로 깊은 상관성이 있음을 알 수 있다.

    ​대륙세력과 해양세력에 관한 이론적 발전

     1. 대륙세력 이론(Land Power Theory)

    ​지정학은 사상과 실천 간의 관계와 마찬가지로 국가와 국민국가가 지배적인 정치제도에 의해 수립되는 것과 연결된다. 
    특히 지정학의 발전은 19세기 말과 연관되는데, 이 시기는 열강 사이에 경쟁이 증대되던 시기였다. 그 당시의 지정학은 국가 간의 갈등영역으로 이해되면서 서구 열강들이 약소국을 지배하는 데 있어 이론적 근거를 제공하였다(Colin Flint, 2009).
    과거에 있어 역사란 로마제국, 중국제국, 그리고 러시아제국과 같은 대륙의 지배에 기초한 거대 육상세력들의 어떤 형태를 설명해 주는 것이었다. 
    이와 같은 과거의 역사를 설명하는데 있어 지정학은 설득력을 지니고 있었다.

    그런데 19세기 말에 출현한 핼퍼드 매킨더(Halford J. Mackinder, 1861~1947)는 지정학자로서 기존의 지정학의 영역을 확장시키는 데 기여하였다. 그의 핵심사상은 레이건 대통령의 핵정책을 정당화하는 데 사용되었다. 다른 학자들과 정책결정자들은 계속해서 ‘심장지역’(Heartland) 이론의 장점에 관해서 말하고 있었지만, 매킨더는 이외에도 지정학의 다양한 정치적 맥락을 연구하여 주장하였다.
    매킨더는 지구정치학을 하나의 ‘닫힌 체계’로 보고 상이한 국가들의 행동은 필연적으로 연관되어 있고, 갈등의 주요 축은 대륙세력과 해양세력 사이에 존재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는 1904년 대륙세력의 지리학과 역사를 설명하면서, 유라시아의 핵심부를 추축지역이라고 정의하였다. 이 지역이 추축지역이라고 불린 이유는 매킨더의 유럽 중심적 시각에서 볼 때, 세계사는 이 추축지역으로부터 일련의 침략과정을 통해 해양으로 뻗어나간 것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알프레드 마한(Alfred Thayer Mahan, 1840~1914) 의 영향을 받았던 매킨더는 과거에 해양세력이 유리하다고 믿었으나, 철도의 도입으로 인해 대륙세력이 유리해졌다고 보았다(Halford J. Mackinder, 1962).
    매킨더는 동부 유럽을 지배할 가능성이 높은 독일의 도전에 직면한 영국의 세계적 우위를 지키기 위해 1924년 독·소동맹에 맞서 미국과의 ‘중위권대양동맹’(Midland Ocean Alliance)을 제창하기도 하였다. 그는 소련 영토의 중심부에 해당하는 ‘심장지역’에 대한 이론을 발전시켰고, 동맹의 중요성을 강조함으로써 냉전 전략가들과 NATO 지지자들의 이론적 기초를 제공하였다(Colin Flint, 2009).
    대륙세력의 대표적인 사례를 들면 다음과 같다.

    첫째, 로마제국

    로마는 전설에 의하면 아이네스가 기원전 1180년에 테베레 강 근처에 와서 딸의 이름인 로메(Rhome, 그리스어로 ‘힘’이라는 뜻)를 따서 로마를 건국했다고 한다. 가장 널리 전해지는 전설에 의하면 로물루스가 로마를 세웠다고도 한다(Jean Yves Boriaud, 2007). 그렇지만 공식적인 건국 시기는 기원전 720년이다.
    초기 로마는 로물루스를 초대왕으로 왕정을 시작하여 수대를 거치는 동안 라틴족의 정복과 식민지의 확대 등을 통해 육지와 바다로 영역을 확장해 나갔다. 기원전 4세기말이 되자 로마는 반도에서 가장 강력한 세력이 되었고 기원전 272년에는 이탈리아 남부인 타렌툼을 손에 넣으면서 이탈리아 반도를 통일하였다. 이후 로마는 영토 확장을 위해 지중해로 진출하면서 전쟁을 계속하여 지중해의 패권을 장악한 후 카르타고의 과거 영토였던 지역을 아프리카라는 속주로 귀속시켰다(Jean Yves Boriaud, 2007).
    기원전 133년에는 아틸라 왕으로부터 페르가몬 왕국을 넘겨받으면서 아시아에서도 속주를 차지하게 되었다. 이어서 기원전 31년 악티움해전을 통해 클레오파트라와 마르쿠스 안토니우스가 연합한 함대를 격파하고 그리스와 이집트를 제압하였다. 이로써 로마는 지중해 일대와 페르시아 만에 이르는 광활한 영토를 확보하게 되었다.
    이후 로마는 기원전 27년 옥타비아누스가 아우구스투스라는 이름으로 제1대 로마황제로 등극하면서 로마제국 시대를 열었다. 로마제국은 대륙세력과 지중해를 중심으로 한 해양세력을 규합하여 효과적으로 운영함으로써 오랜 기간 동안 제국을 유지할 수 있었다.

    둘째, 중국제국

    중국은 춘추전국 시대를 거쳐 진나라의 시황제가 최초로 중국 대륙을 통일한 이래 한족(漢族)이 중심이 되어 이를 지배해왔다. 한족은 자신들이 주변의 다른 민족보다 우월하다는 생각을 바탕으로 중화사상을 탄생시켰다. 그리고 한족은 중화사상을 기반으로 주변의 다른 민족에 대해 상하관계를 명확히 하는 책봉·조공 체제를 수립하고자 주력하였다.
    중국 대륙은 17세기 중엽 한족의 명나라가 멸망하고 그 뒤를 이어 만주족이 중심이 된 청나라가 세워졌다. 청나라는 조선, 류큐, 타이완, 베트남, 타이, 미얀마, 네팔, 티베트, 몽골에 이르는 주변지역 국가들을 직할령, 조공국 등으로 만들면서 세력을 확대하였고, 유럽 국가들과 교역을 통해 경제적인 번영을 이룩하였다. 이때가 중국이 가장 번성했던 전성기라고 할 수 있다. 당시 청나라가 세력을 확대한 지역을 살펴보면 대부분의 지역이 내륙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이와 같이 중국은 전통적으로 내륙중심의 세력 확대를 중시해왔다는 것이다.

    셋째, 러시아제국

    러시아는 9세기 말에 동슬라브인이 주축이 되어 현재의 우크라이나 수도 주변에 키예프 공국을 세웠다. 키예프 공국은 10세기 말까지 번성했으나, 13세기 전반에 몽골의 침입을 받아 정복당하여 몽골제국의 일부인 킵차크 칸국으로 거듭났다. 1480년 몽골로부터 독립한 모스크바 대공국은 주변 지역을 통합해 나가면서 1721년에는 러시아 제국으로 발전하였고, 19세기 중반에 이르러서는 유라시아 대륙의 북반부를 모두 차지할 정도로까지 팽창하였다. 광활한 지역을 차지했음에도 불구하고 비옥한 대지와 부동항(不凍港)을 원했던 러시아는 남쪽지역에 대한 야심을 갖고 있었다(다카하시 요이치, 2018).
    러시아는 1917년 혁명을 통해 세계 최초의 사회주의 국가인 소련으로 재탄생하였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소련은 미국이나 서유럽과는 다른 이데올로기로 대립한 채 오래전부터 계속되어 온 남하 정책을 추진하면서 동유럽 국가들을 위성국으로 만들었다. 또한 부동항 확보를 위해 극동지역인 블라디보스토크 지역으로 진출을 시도하였다. 냉전체제가 해체되면서 소련이 붕괴된 이후에도 러시아는 서유럽 국가들과 힘겨루기를 계속하고 있다. 이와 같이 러시아 또한 전통적으로 내륙중심의 세력 확대를 중요시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상의 사례와 같이 중국, 러시아 등은 내륙의 강대국들로서 주로 대륙세력 이론을 바탕으로 그들의 영역을 확장하고 세력을 키워나갔다. 단지 로마는 대륙세력과 해양세력을 통합함으로써 오랜 기간 동안 거대한 제국을 건설하고 유지할 수 있었으나, 해양세력에 대한 주도권을 상실(지중해에 대한 제해권 상실)하면서 결국 무너지게 되었다(전웅, 1999).


     2. 해양세력 이론(Sea Power Theory)

    역사적으로 대륙세력 이론과 대조되는 해양세력 이론은 16세기 이후 대양항해술의 발전과 신대륙의 발견으로 소위 해양시대가 개막된 데서 시작되었다. 
    해양세력으로 분류되었던 대표적인 나라에는 스페인, 포르투갈, 네덜란드가 있다. 
    이들 해양세력 국가들은 대항해시대를 맞이하여 대양으로 진출하면서 경쟁적으로 해외식민지 개척에 나섰다. 
    바야흐로 국제사회는 해외식민지 경영을 통해 국가이익을 증대하려는 해양세력이 대두하기 시작한 것이다.

    강대국들에서는 흔히 대륙이익과 해양이익이 서로 충돌하게 마련이고 결국 어느 한쪽이 승자가 된다. 
    영국은 18세기 이후에야 극히 점진적으로 해양대국의 요소들을 발전시켰다. 즉 영국에서는 1701~1714년에 이르는 스페인 왕위계승전쟁 기간 해양이익과 육상이익 간의 갈등이 여전히 나타나고 있었다. 
    영국은 국내 정치적으로 해안지역과 무역도시를 기반으로 한 자유당(Whigs)과 반대로 구토지귀족들을 대변하는 보수당(Torries) 사이에서 당파적 갈등이 계속 되었다. 
    그러나 근대 영국은 결국 해양정책이 대륙정책을 압도하면서 해양국가로 발돋움하게 되었다. 하지만 이러한 갈등은 아직도 소영국 대 대영국의 논쟁 속에서 반복되고 있다(전웅, 1999).

    19세기에 들어 해양국가들이 증가하면서 대륙세력과 해양세력을 구분하여 비교하던 구시대의 관행은 더 이상 존재할 수 없게 되었다. 새로 등장하는 해양세력들 중에는 과거 대륙세력이었던 국가들이 많이 포함되고 있다. 오늘날 ‘강대국들’이라는 개념을 대륙세력 국가들에게 적용하는 것은 시대에 뒤떨어진 것이다. 앞으로 세계적인 강국이 되기 위해서는 대륙적 동기와 해양적 동기가 결합된 거시적인 정책을 추구해야 할 것이다. 해양세력의 궁극적인 목표는 대륙팽창이기 때문이다. 결국 해양은 목적이 아니고 수단으로 작용한다.
    대륙적 국면과 해양적 국면 모두를 지니고 있는 국가에서는 두 세력의 대조가 현저하게 나타나며, 양 국면은 정책적으로 번갈아 가며 바뀔 수 있다. 그 한 예로서, 유럽지역에서 프랑스가 국가이익의 방향을 지중해나 또는 대서양으로 돌릴 때마다 유럽대륙내의 인접 국가들은 안도하였다. 하지만 프랑스가 멕시코와 미국의 남부 연방을 자국의 영향권에 편입시키고자 기도했을 때는 독일과 이태리의 동맹을 촉진시켰다. 또한 프랑스의 나폴레옹 1세는 영국이 자신을 바다에서 몰라내자 유럽대륙을 석권하였다. 아부키르(Aboukir)와 트라팔가(Trafalgar)에서 프랑스의 해양력이 붕괴되자 대륙의 아우스터릿츠(Austerlitz), 예나(Jena) 그리고 바그람(Wagram)에서 프랑스의 육상세력이 오스트리아와 프러시아군을 패배시켰다.

    근대적 해양세력 이론의 발전은 미국의 알프레드 마한(Alfred T. Mahan, 1840~1914)과 영국의 콜벳(Julian S. Corbett, 1854~1923)에 의해 이루어졌다고 볼 수 있다(Alfred T. Mahan, 1895). 학술적으로 ‘해양세력’을 체계적으로 설명한 학자는 미국의 알프레드 마한(Alfred T. Mahan, 1840~1914)이다. 마한의 해양세력 이론은 19~20세기 서구 열강들의 해군력 증강에 큰 영향을 미쳤으며, 그가 제시한 해양력(Sea power)과 제해권(Command of the Sea)의 개념은 근대 해양세력 이론 정립의 기초가 되었다.

    마한은 제해권을 장악하여 자국의 해상교통로를 보호하고 적의 해상교통로를 위협하여, 해양에서 이루어지는 적의 경제활동을 질식시킴으로 적의 전쟁 지속력 파괴를 주장하였다. 또한 함대결전을 통해 적의 함대를 해상에서 격퇴시켜야 한다고 보았으며, 국가에 유익한 사업으로서 뿐만 아니라 세계적인 차원의 함대작전에 절대적으로 필요한 식민지 확보의 필요성을 강조하였다. 그는 바다에서 국력의 발전을 기도하는 정부의 최우선 임무 중의 하나가 식민지든 군사기지든 해외기지를 확보하여 전선들에게 연료를 공급하고 정박지를 제공하도록 하는 것이라고 주장하였다(Alfred T. Mahan, 1895).

    마한이 국가적 차원에서 해양력을 정의하고 그 역할을 강조하였다면, 콜벳은 해전의 이론을 더욱 체계화하였다고 볼 수 있다. 콜벳 또한 바다를 경제활동의 중요한 영역으로 보고 해군의 존재를 국가 해양이익 보호를 위한 것으로 인식하였으나, 해양력과 제해권에 대한 이해는 마한과 달랐다. 콜벳은 해양력을 국력을 구성하는 일부로 보고, 바다에 대한 국가의 이익을 주로 연안지역에 한정하여 육군과 해군의 상호관계를 중요시하였다. 특히 제해권을 시·공간적으로 상대적인 개념으로 인식하고, 함대결전을 통한 제해권 확보보다는 전쟁목표 달성을 위해 필요한 만큼의 해양사용만 보장하는 해양통제(Sea Control) 개념을 제시하였다. 이를 위해 결전, 봉쇄, 현존함대 등 다양한 방법이 있음을 주장했다.

    마한과 콜벳의 해양전략에 대한 개념은 주로 미국이나 영국 등 전통적인 서구 해양강국 중심의 해양세력 이론의 기반이라고 할 수 있다. 이에 반해 약소국들의 해양전략사상은 제해권이나 해양통제보다는 해양봉쇄와 해양거부 개념을 중심으로 발전해왔다. 즉, 전시 함대결전을 회피하여 상대 해군의 고립을 유도하고, 전력집중으로 순간적인 우세 달성과 적극적 공세를 통해 적을 격파하는 전략이다(박창희, 2012).

    오늘날 해양은 해전을 위한 전장이나 단순한 수송의 매개체 뿐 아니라 경제, 과학, 심지어 정치ㆍ외교적인 행위까지 수행되는 공간으로 발전하고 있어, 해양의 인류와 국가에 대한 영향력의 범위와 크기가 점점 확대되어 가고 있다.

    결론적으로 해양국가가 늘어나고 이들의 국제사회에 대한 영향력이 커지면서 해양세력 이론은 국제사회의 또 하나의 중요한 이론으로서 공감대를 형성해가고 있다.


    참 고 문 헌

    김시덕. 『동아시아, 해양과 대륙이 맞서다』. 서울: 메디치미디어, 2015.
    세계사편찬회. 『교양 세계사』. 서울: 문지사, 2017.
    전웅. 『지정학과 해양세력이론』. 서울: 해양전략연구소, 1999.
    박창희. “강대국 및 약소국 해양전략사상과 한국의 해군전략.” 『국가전략』 제18권 4호(2012).
    다카하시 요이치 저. 김정환 역. 『전쟁의 역사를 통해 배우는 지정학』. 서울: 시그마북스, 2018.
    Boriaud, Jean Yves. Histoire de Rome. 박명숙 역. 『로마의 역사』. 서울: 궁리출판, 2007.
    Weatherford, Jack. Genghis Khan and the Making of the Modern World. 정영목 역. 『칭기스칸,  잠든 유럽을 깨우다』. 서울: 사계절출판사, 2005.
    Corbett, Julian S. Some Principles of Maritime Strategy. 김종민ㆍ정호섭 역. 『해양전략론』.
     서울: 한국해양전략연구소, 2009.
    Flint, Colin Introduction to Geopolitics. 한국지정학연구회 역. 『지정학이란 무엇인가』. 서울:
      도서출판 길, 2009.
    Mahan, Alfred T. The Influence of Sea Power upon History 1660-1783. 김주식 역. 『해양력이   역사에 미치는 영향1, 2』. 서울: 책세상, 1999.
    Kissinger, Henry A. World Order. Penguin Publishing Group, 2014.
    Mahan, Alfred T. The Influence of Sea Power upon History 1660-1783. Boston: Little & Broun,   1895.
    Mackinder, Halford J. “The Geographical Pivot of History.” in Democratic Ideals and Reality.   New York: W. W. Norton, 1962. 












    바벨론 포로 귀환





    바벨론 포로 귀환 연도 정리


    바벨론 포로와 귀환의 역사

    ​예수 그리스도 족보 제 3기에 해당하는 시기에서 남 유다가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가는 과정과 거기에서 돌아오는 과정이 가장 중요한 사건들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상숭배의 죄’(렘 2:28, 32:29-35), ‘안식일과 안식년을 이행하지 않은 죄’(대하 36:21, 렘 17:27, 34:8-22) 등 남 유다 전체에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죄가 가득차자 ‘바벨론 포로생활’이라는 징계를 내리셨습니다. 3차에 걸친 포로 과정에서 성전이 파괴되고 왕궁을 비롯한 예루살렘성이 훼파되었으며 왕과 지도자들로부터 빈천한 자를 제외한 모든 백성들이 바벨론으로 끌려갔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결코 버리지 않으시고 포로에서 귀환하게 하셨습니다. 포로 귀환은 B.C. 538년, 바사 왕 고레스가 귀환을 허락하는 칙령을 발표하고 B.C. 537년에 귀환함으로 시작되어 3차에 걸쳐 이루어졌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포로에서 귀환한 백성들이 스룹바벨 성전을 건축하고 신앙 공동체를 회복하기 위하여 노력하는 가운데, 마침내 예루살렘 성벽을 재건하여 국가적인 면모를 갖추도록 역사하셨습니다.

    자료출처 / 나채운박사 

    ​https://blog.naver.com/PostView.nhn?blogId=soul1150&logNo=222263251491&photoView=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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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유다의 멸망과 바벨론의 1차 2차 3차 4차 포로의 역사

    BHCE연.. | 블로그
    5~6분

    [역사] 남유다의 멸망과 바벨론의 1창 2차 3차 4차 포로의 역사

    이스라엘은 북방 강대국 앗수르와 바벨론, 남방 강대국 애굽 사이에 낀 약소 국가였습니다. 남 유다의 제 16대 왕 요시야 당시는 세계 최강국이던 앗수르가 쇠퇴기에 접어들었고, 바벨론이 신흥 세력으로 부상하고 있었습니다.

    1. 므깃도 전투와 갈그미스 전투

    애굽은 앗수르를 도와 바벨론의 남하를 막기 위하여 갈그미스에서 바벨론과 싸우려고 하였습니다. 애굽 왕 느고는 갈그미스로 가기 위해 팔레스타인 지역을 통과해야 했는데, 이때 반 앗수르 입장이었던 요시야 왕은 북진하는 애굽과 전쟁을 하게 되었습니다.

    애굽 왕 느고는 사자를 보내어 화친을 요청하며, 이 일은 하나님의 명령이고 자신이 싸우려는 대상은 요시야 왕이 아님을 분명히 했습니다(대하 35:21). 그러나 요시야 왕은 듣지 않고 변장까지 하면서 전쟁터에 남기를 고집하였습니다(대하 35:21-22). 전쟁터에서 애굽의 궁수가 쏜 화살에 중상을 입은 요시야는 예루살렘에 돌아와 죽고 말았습니다(대하 35:23).

    요시야는 종교 개혁을 통해 영적 내리막길로 곤두박질하던 남 유다에 일시적으로나마 제동을 걸었지만, 요시야가 죽은 이후 남 유다의 국운이 갑자기 쇠약해지고 순식간에 멸망의 길로 치닫게 되었습니다.

    이후 애굽과 바벨론이 맞서는데, 이것이 갈그미스 전투(주전 605년)입니다. 이 전투에서 승리한 바벨론은 당시 근동 지방을 장악하였고, 애굽은 다시 일어나지 못했습니다(왕하 24:7).

    바벨론의 느부갓네살 왕은 갈그미스 전투에서 승리한 후, 아프리카 대륙과 근동 아시아 지역을 잇는 전략적 요충지인 남 유다 왕국마저 정복하기 위하여 예루살렘을 공격하였고, 3차에 걸쳐 유다 왕과 백성들을 바벨론으로 끌고 갔습니다.

    3차에 걸친 바벨론 포로의 과정은 성전 파괴의 과정과 다름없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바벨론을 들어서 가장 아끼는 성전을 파괴하심으로써 이스라엘을 철저하게 징계하셨습니다(왕상 9:7-9).

    Flight of The Prisoners 19세기 프랑스의 화가 티소(James Tissot)가 그린

    불타는 예루살렘과성전, 그리고 바벨론 군대에 포로로 끌려가는 유다 백성들

    2. 바벨론 제 1차 포로

    1) 포로 시기 – 주전 605년 / 여호야김 제 3(혹은 4)년, 느부갓네살 원년

    이때는 여호야김 왕 제 3년(단 1:1)이었습니다. 그런데 예레미야 46:2은 이때를 여호야김 4년이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두 기록에 1년 차이가 나는 이유는 열왕기하 23:34을 통해 해명할 수 있습니다. 열왕기 기자는 여호야김이 그의 동생 여호아하스를 대신하여 왕이 되었다고 기록하지 않고, 여호야김이 그의 아버지 요시야를 대신하여 왕이 되었다고 기록하였습니다. 역사적으로는 요시야(주전 640-609b년), 여호아하스(주전 609b-608년), 여호야김(주전 608-597년) 순으로 왕이 되었지만(왕하 23:3-0, 34, 대하 36:1-4), 요시야 다음에 바로 여호야김이 왕이 된 것처럼 기술한 것은, 3개월의 짧은 통치 기간 동안 악을 일삼았던 여호아하스를 왕으로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왕하 23:31-32). 이러한 관점에 따르면 제 1차 바벨론 포로로 끌려간 주전 605년은 여호야김 제 4년이 되는 것입니다.

    2) 포로 대상과 당시 상황

    제 1차 바벨론 포로 때에는 다니엘을 포함한 왕족과 귀족들이 끌려갔습니다(단 1:3). 여호야김은 처음 3년은 바벨론을 섬기다가 다시 애굽과 동맹하여 반(反)바벨론 정책을 펼쳤고(왕하 24:1), 주전 602년 쇠사슬로 결박당하여 바벨론으로 끌려갔으며 성전 기구들을 약탈당하였습니다(왕하 24:2, 단 1:1-2, 5:2).

    3. 바벨론 제 2차 포로

    1) 포로 시기 – 주전 597년 / 여호야긴 즉위년, 느부갓네살 8년

    여호야긴은 주전 597년에 즉위하여 3개월 10일을 통치하고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갔습니다(왕하 24:8-12, 대하 36:9-10). 바벨론 역대기에 따르면, 티쉬리월(7월)로 시작되는 달력을 기준할 때 여호야긴이 왕이 딘 것은 주전 597년 불월(8월)이며, 3개월 10일이 지나 왕위에서 쫓겨난 것은 주전 597년 아달월(12월) 2일입니다. 바벨론이 예루살렘을 포위한 후 얼마 동안의 시간이 경과한 다음에(왕하 24:10-11) 느부갓네살 왕이 예루살렘 성에 이르러 주전 597년 아달월(12월) 2일에 마침내 예루살렘 성을 점령한 것입니다. 이때 왕위에서 쫓겨난 여호야긴은 주전 597년* 니산월(1월) 10일에 바벨론으로 끌려가게 됩니다(대하 36:10). * 남유다 통치 연도는 티쉬리월 기준이므로 해가 바뀌지 않음.

    2) 포로 대상과 당시 상황

    바벨론은 여호와 전의 모든 보물과 왕궁 보물을 집어내었으며 또 이스라엘 왕 솔로몬이 만든 것 곧 여호와의 전의 금기명을 다 훼파하였습니다(왕하 24:10-13, 대하 36:10).

    그리고 여호야긴 왕과 왕의 모친과 왕의 아내들과 내시와 나라의 권세 있는 자들이 포로로 끌려갔습니다(왕하 24:12, 15). 이때 용사 7천 명을 포함하여 방백과 백성 총 1만명, 그리고 공장과 대장장이 1천 명이 끌려갔는데, 그들은 모두 강장하여 싸움에 능한 자였습니다(왕하 24:14-16). 반란의 구심점이 될 소지가 있는 최고 지도자들과 탁월한 인물들을 모두 뽑아서 끌고 감으로 ‘빈천한 자’ 외에는 그 땅에 남은 자가 없도록 하여 남 유다를 철저히 무력화 시킨 것입니다. 여기에는 에스겔 선지자와 에스더의 사촌 모르드개의 조상도 포함되어 있었습니다(겔 1:1-3, 에 2:5-6).

    4. 바벨론 제 3차 포로

    1) 포로 시기 – 주전 586년 / 시드기야 11년, 느부갓네살 19년

    시드기야는 바벨론에게 항복하라는 예레미야 선지자의 권면(렘 27:12)을 듣지 않고 반(反)바벨론 정책을 고집하였고(왕하 24:20, 렘 27:12-13, 37:2), 바벨론은 시드기야 제 9년 10월 10일부터 예루살렘을 포위하였습니다(왕하 25:1, 렘 39:1, 52:4). 시드기야가 애굽에 원군을 요청하여 바벨론 군대가 떠났다가 애굽 군대가 즉각 퇴각하자 다시 바벨론 군대가 예루살렘을 침공하여(렘 37:5, 11, 겔 17:15) 시드기야 11년까지 약 30개월 동안(티쉬리 기준 달력) 예루살렘 성을 에워쌌습니다(왕하 25:1-2, 대하 36:11-20, 렘 37:7-10, 겔 17:12-21). 마침내 주전 586년 시드기야 제 11년 4월 9일에 예루살렘 성이 함락되고 말았습니다(왕하 25:1-3, 렘 39:1-2, 52:4-6).

    2) 포로 대상과 당시 상황

    예루살렘이 포위되어 있는 동안 기근이 극심하여 자녀를 잡아먹을 정도로 비극적 참상이 빚어졌는데(애 2:20, 4:10, 사 9:20, 겔 5:10), 이는 모세의 예언대로(레 26:28-29, 신 28:53-57)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한 결과였습니다. 결국 BC 586년, 남 유다는 바벨론에 의해 완전히 멸망하였고, 예루살렘 성이 함락된 4월 9일은 유다인들에게 바벨론 유수 기간 내내 금식과 애통의 날로 지켜졌습니다(슥 7:5, 8:19).

    성이 함락되던 때 시드기야는 밤에 도망하다가 갈대아 군대에게 잡혀 하맛 땅 립나로 끌려가 바벨론 왕에게 신문을 당하였습니다. 바벨론 왕은 시드기야의 목전에서 그 아들들을 죽이고, 시드기야의 두 눈을 빼고 사슬로 결박하여 바벨론으로 끌어다가 죽는 날까지 옥에 가두었습니다(왕하 25:4-7, 렘 39:4-7, 52:7-11).

    예루살렘이 함락된 지 한 달 만인 5월 10일에 바벨론 시위대장관 느부사라단이 와서 여호와의 전과 왕궁과 예루살렘의 모든 집을 귀인의 집까지 불사르고 사면 성벽을 헐었습니다(왕하 25:8-12, 대하 36:18-19, 렘 39:8-10, 52:12-16). 그리고 성전의 두 놋기둥(야긴과 보아스)과 받침들과 놋바다를 깨뜨려 그 놋을 바벨론으로 가져갔고, 또 가마들, 부삽들, 불집게들, 숟가락들과 섬길 때에 쓰는 모든 놋그릇을 다 가져갔으며, 또 금물의 금과 은물의 은을 가져갔고, 솔로몬이 여호와의 전을 위하여 만든 두 기둥과 한 바다와 그 받침들을 취하였습니다(왕하 25:13-17, 대하 36:18-19, 렘 52:17-23).

    그리고 대제사장 스라야와 부제사장 스바냐와 전 문지기 세 사람을 잡고, 군사를 거느린 장관(내시) 하나와 왕의 시종 칠 인(혹은 다섯 사람)과 군대장관의 서기관 하나와 국민 육십 명을 잡아갔으며, 립나에서 그들을 쳐 죽였습니다(왕하 25:18-21, 렘 52:24-27).

    한편, 예레미야 52:28-30에는 바벨론에 항복하지 않고 끝까지 항거하다 소규모로 잡혀간 자들이 총 4,600명이 있음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제 이스라엘 민족은 포로로 끌려간 자와 고국 땅에 남겨진 자, 그리고 재난을 피하여 주변국으로 도망친 자 등으로 나뉘어, 민족 전체가 갈기갈기 찢기고 그 존재가 점점 사라지는 최악의 비극적 상황에 처하게 되었습니다.

    선민 유다 백성이 하나님 없는 이방 나라 바벨론으로 포로 되어 끌려간 것은 하나님의 진노로 말미암은 최대의 비극이요 수치였습니다. 이는 우상을 숭배하고 안식일과 안식년을 지키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고 그 거룩하신 뜻을 멸시한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징계와 진노의 표현이었습니다(대하 36:21, 참고-렘 34:8-16).

    그러나 절대로 망하지 않을 것만 같던 바벨론이 하나님의 주권 역사로 메대와 바사의 연합군에 의해 멸망하게 하시고(참고-렘 50:3, 9, 41-46장, 51장) 이스라엘 백성이 귀환하도록 하셨습니다(대하 36:22-23, 스 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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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바빌론 포로와 귀환 도표

     

    바빌론 포로와 귀환

    ✡ 포로

     

    시기

    포로/ 탈취/ 파괴

    성전 관련

    1차

    BC605

    ‧ 바빌론 느부갓네살 2세 1년

    (렘25:1-3)

    ‧ 유다 여호야김 3(4)년

    (렘25:1, 46:2, 단1:1-6)

    cf. 이사야의 예언

    (왕하20:14-19)

    ‧ 왕족, 통치자들

    (단1:1-3)

    ‧ 다니엘

     

    ‧ 성전 기구들 중 일부를 가져다가 바빌론의 신당에 보관함

    (대하36:6-7, 단1:2)

     

    2차

    BC597

    ‧ 느부갓네살 8년

    (왕하24:8-15)

    ‧ 유다 여호야긴 1년

    (대하36:9-10)

    ‧ 1차 포로 8년 후

    ‧ 왕, 통치자, 왕의 어머니, 아내들, 직무 수행자들, 권세 있는 자들, 강한 용사 7천명, 기술자와 대장장이 1천명, 가난한 자를 제외한 모든 자들 (건강하여 싸움에 능한 모든 자)

    (왕하24:14-16)

    ‧ 에스겔

    (겔1:1-2)

    ‧ 성전의 보물과 왕궁의 보물을 가져가고 성전의 금 기구들을 산산조각 냄

    (왕하24:13, 대하36:10)

     

     

    3차

    BC586

    ‧ 느부갓네살 19년

    (렘32:1, 왕하25:1-15)

    ‧ 유다 시드기야 11년

    (렘39:1-15, 52:4-6)

    ‧ 2차 포로 11년 후

    (총 20년 정도에 걸쳐서 포로로 사로잡혀 감)

    ‧ 왕, 가난한 자들을 제외한 모든 자들

    (왕하25:7, 11-12, 렘39:5-10, 52:8- 11)

    ‧ 왕궁과 위대한 자의 집과 예루살렘의 모든 집을 불태우고 좋은 그릇들을 부수며 예루살렘의 성벽을 허뭄.

    (왕하25:8-10, 대하36:19, 렘39:8, 52:13-14)

    ‧ 남 유다 멸망

    ‧ 성전의 모든 기구와 보물을 가져감

    (대하36:18)

    ‧ 성전의 두 놋 기둥과 받침대들과 놋 바다를 부수어 가져감

    (왕하25:13-17)

    ‧ 솔로몬 성전(제1성전)의 완파

     

    ✡ 귀환

     

    시기

    주도자

    귀환자

    임무/ 성과

    1차

    BC536

    ‧ 페르시아 고레스 2세 1년

    (대하36:22-23, 스1:1-4)

    ‧ 606년-70년=536년

    (바빌론 1차 포로 70년 후)

    - 3차 포로 50년 후

    ‧ 스룹바벨, 예수아

    (스2:1-2, 학1:1, 14)

     

    ‧ 총 49,897명

    (스2:1-65, cf. 느7:5-67)

    ‧ 예루살렘 성전의 재건

    (스1:2-7)

    실제 완공은 BC516년

    - 1차 귀환 20년 후

    - 솔로몬 성전 파괴 70년 후

    (516년-586년=70년)

    2차

    BC458?

    ‧ 아닥사스다 1세 7년

    (스7:7-9)

    (1차 귀환으로부터 78년 후)

    - 바빌론 1차 포로 148년 후

    - 2차 포로 139년 후

    - 3차 포로 128년 후

    (성전 재건 50년 후)

    ‧ 에스라

    (스7:1-10)

     

    ‧ 남자만 1,700여명

    (스8:1-10)

     

    ‧ 성전에 필요한 물건들 보충

    (스7:14-20)

    ‧ 성전에서 섬길 레위인들 보충

    (스8:15-20)

    ‧ 유대교에 기반한 행정과 사법 시스템 복구와 율법의 재교육

    (스7:25-26, 10)

    3차

    BC445?

    ‧ 아닥사스다 1세 20년

    (느1:1, 2:1)

    (1차 귀환으로부터 91년 후)

    - 2차 귀환으로부터 13년 후

    - 바빌론 1차 포로 161년 후

    - 2차 포로 152년 후

    - 3차 포로 141년 후

    ‧ 느헤미야

    (느2:1-8)

     

    ‧ 느헤미야 (명단 없음)

    (느2:1-10)

     

    ‧ 예루살렘 성벽의 재건

    (느2:5-8)

    ‧ 귀환한 이스라엘 백성들의 영적인 삶의 재건

    (느8-10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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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포로시대 전후의 역사 정리 도표

    포로시대 전후의 역사 

    BC721년 BC609년 BC605년 BC597년 BC587년 BC538년 BC520년 BC516년 BC457년 BC445년
    북방
    이스라엘멸망
    애굽/
    바벨론
    1차전쟁


    (무승부)
    애굽/
    바벨론
    2차전쟁
    (바벨론승)


    다니엘
    포로
    바벨론
    유다침공.


    에스겔
    포로
    남방유다멸망.


    3차포로
    1차귀환.성전재건


    예수아/
    스룹바벨
    학개/
    스가랴,


    성전건축격려
    성전완공 에스라
    와 함께


    2차귀환
    느헤미야와 함께


    3차귀환

     

    포로시대에 등장하는 ‘기록 선지자’의 목록

       

    기록선지자
    (예언자)
    활 동 비 고
    에 스 겔 ►남 유다의 여호야긴, 시드기야왕
    ►바벨론의 느부갓네살왕 때
    597년 바벨론에
    포로가 됨
    다 니 엘 ►남 유다의 여호야김, 여호야긴. 시드기야왕
    ►바벨론의 느부갓네살왕, 바사의 고레스왕 때
    605년 바벨론에
    포로가 됨
    학 개 ►바사의 고레스 이후 다리오1세 때
    (1차 포로귀환 후)
    바벨론 땅에서
    출생
    스 가 랴 ►바사의 고레스 이후 다리오1세 때
    (1차 포로귀환 후)
    바벨론 땅에서
    출생
    말 라 기 ►바사 다리오왕 2세 때(3차 포로귀환 후)
    (느헤미야와 동시대 선지자이나 계속 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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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바벨론 포로 (바빌론 유수)

    바벨론 포로(Babylonian Captivity)는 남 유다 백성들이 하나님의 경고를 무시하고 그 율법을 배반한 결과 포로가 되어 바벨론(신바빌로니아)으로 이주한 사건을 말한다. 바빌론 유수(Babylon 幽囚)라고도 한다.
    기원전 7세기경, 남 유다 왕국앗수르에 멸망당한 북 이스라엘의 전철을 답습하고 있었다. 부패할 대로 부패한 제사장들과 지도자들은 이방 신을 섬기는 데 열과 성을 다했고, 백성들은 회개를 촉구하며 임박한 심판을 선포하는 선지자의 말을 귀담아듣지 않았다. 예레미야 선지자는 범죄한 유다 백성이 70년 동안 바벨론에서 포로 생활을 할 것이라 예언했다.[1] 또한 예레미야보다 100여 년 앞서서 사역한 이사야 선지자는 동방의 고레스(키루스 2세)가 바벨론을 징벌하고 포로 된 이스라엘 백성들을 놓아주어 예루살렘 성전을 건축하게 할 것이라 예언했다.[2] 하나님의 말씀은 시대를 초월하여 역사 속에서 놀랍게 성취되었다.

    바벨론 포로기와 포로 귀환(도표)

    분류 구분 연대(B.C.) 지도자 관련 성구
    바벨론
    포로기
    1차 포로 606년경 여호야김 3년, 느부갓네살 원년
    단 1:1-6
    2차 포로 597년경 여호야긴 원년, 느부갓네살 8년
    왕하 24:10-17
    3차 포로 586년경 시드기야 제11년, 느부갓네살 19년
    왕하 25:1, 8-9
    바벨론
    포로 귀환
    1차 귀환 537년경 고레스 원년 스룹바벨 에스라 1장
    2차 귀환 457년경 아닥사스다 7년 에스라 에스라 7장
    3차 귀환 444년경 아닥사스다 20년 느헤미야 느헤미야 1-6장

    바벨론 포로기

    주변 열강의 정세와 남 유다 왕국

    기원전 10세기경부터 약 300여 년간 세계를 지배하던 앗수르(신아시리아)는, 기원전 612년경 바벨론 왕 나보폴라사르가 이끄는 군대의 니느웨 침공으로 국운이 기울었다. 신흥 강대국인 바벨론의 세력 확장에 위기를 느낀 애굽(이집트) 왕 느고(네코 2세)는 앗수르 재건을 돕고 북방에 대한 영향력을 확대하기 위해 갈그미스로 북진했다. 당시 반 앗수르 정책을 펴던 남 유다 왕국의 요시야왕은 므깃도에서 애굽 왕 느고와 교전을 벌이다 전사한다. 이때부터 남 유다는 애굽의 내정간섭을 받게 된다.

    〈다니엘이 느부갓네살의 꿈을 해석하다〉, 프란츠 폰하우슬라브 작.

    바벨론 1차 포로(B.C. 606년경)

    요시야왕이 전투에서 죽은 후 애굽의 속국이 된 유다는 하나님의 법도와 규례를 버리고 죄악의 길로 돌아섰다. 예레미야가 하나님 말씀을 듣지 않으면 재앙과 멸망이 임할 것이라 경고했지만 백성들은 귀담아듣지 않았다. 애굽 왕 느고가 요시야의 아들 여호아하스를 애굽으로 끌고 가고, 요시야의 다른 아들 엘리야김을 왕으로 세우고 이름을 여호야김으로 고쳤다.
    얼마 후,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네부카드네자르 2세)이 애굽을 격퇴시키며 유다를 침공하여,[3] 다니엘을 포함해 일부 왕족과 귀족을 바벨론으로 끌고 갔다(B.C. 606년경).[4] 여호야김은 바벨론에 항복하고 3년을 섬겼으나 4년째 되는 해에 바벨론을 배반했다.

    바벨론 2차 포로(B.C. 597년경)

    여호야김이 죽고 여호야긴이 유다 왕이 되었다. 그해 느부갓네살왕은 예루살렘을 다시 공격해 성전의 모든 보물과 기명, 왕궁의 보물까지 훼파하고 빼앗아 갔다. 예루살렘의 백성과 방백들, 공장과 대장장이는 바벨론으로 사로잡아 가고 빈천한 자들만 남겨 농사를 짓게 했다.[5] 여호야긴왕이 바벨론 포로로 잡혀갈 때 선지자 에스겔도 함께 끌려갔다. 여호야긴에 이어 시드기야(본명: 맛다니야)가 남 유다 왕이 되었다.

    바벨론 3차 포로(B.C. 586년경)

    유다 왕국 마지막 왕인 시드기야는 바벨론에게 항복하라는 하나님의 경고도 무시하고 즉위 후 친애굽파와 결탁하여 바벨론에 대항했다. 상황이 불리해지자 하나님께 기도해 달라고 예레미야에게 부탁했으나, 예레미야는 바벨론 왕을 섬기도록 예정하신 하나님의 뜻을 전하며 항복을 권했다.[6][7] 하지만 거짓 선지자 하나냐는 하나님께서 2년 안에 바벨론을 물리칠 것이라며 맞섰다.[8]
    기원전 586년경, 하나님의 말씀을 저버리고 예레미야의 경고도 무시하던 남 유다는 바벨론에 멸망했다. 성전과 왕궁은 불탔고 모든 성전 기구는 약탈당했다. 수백만의 백성이 죽고 수십만이 포로로 끌려갔다. 시드기야왕도 두 눈이 뽑힌 채로 바벨론에 끌려가 최후를 맞았다.[9] 이처럼 거짓 선지자에게 미혹되어 참 선지자의 말을 무시했던 자들은 모두 처참한 결말을 맞았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에 순응한 사람들은 무사히 지내며 때로는 육신의 성공을 거두기도 하고, 포로 생활을 끝내고 귀국해서는 성전과 성을 재건하는 기쁨도 누렸다.

    포로 귀환

    바벨론의 패망과 유다 민족의 해방

    바벨론은 메대(메디아)와 함께 앗수르를 멸망시켰고, 느부갓네살(B.C. 605-B.C. 562년경) 때 최고의 전성기를 누렸다. 남 유다의 멸망도 느부갓네살왕 시대에 이루어졌다. 하지만 바벨론의 영화는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예레미야 선지자를 통해 약속하신 70년[1]이 지나자 하나님은 바사(페르시아) 왕 고레스를 일으켜서 바벨론을 응징하고, 바벨론에 잡혀갔던 유다 백성들을 해방시키셨다(B.C. 537년경).[10][11] 고레스에 관한 이사야 선지자의 예언이 170여 년 후에 정확히 이루어진 것이다.[2]

    1차 귀환과 스룹바벨(B.C. 537년경)

    바사 왕 고레스는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 있던 유다 백성을 놓아주고 무너진 하나님 성전을 건축하라는 조서를 내렸다. 바벨론에 빼앗겼던 예루살렘 성전 기명은 물론 성전 건축에 필요한 재화도 아낌없이 내주었다.[12]
    이스라엘 포로 중 약 5만 명이 유다 총독 스룹바벨과 대제사장 예수아를 따라 본국으로 귀환했다. 이들은 성력 7월에 예루살렘에 모여 옛 제단 터에 단을 쌓고 초막절을 지켰다.
    귀환 이듬해, 스룹바벨의 지도하에 성전 건축이 시작되었다.[13] 하지만 성전 건축에 참여하려다 거절당한 사마리아인들의 극심한 방해로 중단되어[14] 성전 지대만 놓인 채 약 15년의 세월이 흘렀다.[15] 하나님은 선지자 학개스가랴를 통해 백성들의 심령을 일깨웠고, 스룹바벨과 예수아가 공사에 앞장서자 백성들도 힘을 보탰다. 총독 닷드내는 성전 재건의 합법 여부를 확인하려고 바사 왕 다리오에게 편지를 보냈다. 다리오 왕은 선왕인 고레스가 성전 재건을 허락한 포고령을 확인하고 성전 건축을 적극적으로 지원했다.
    다리오왕 제6년(B.C. 516년경) 아달월(성력 12월) 3일, 마침내 예루살렘 성전이 완공되자 모든 백성은 한데 모여 기쁜 마음으로 봉헌식을 행했다. 이듬해, 성력 정월 14일에는 유월절을 지키고 이어서 이방 왕의 마음을 돌이켜 성전을 역사케 하신 하나님께 감사하며 무교절을 지켰다.[16]

    2차 귀환과 에스라(B.C. 457년경)

    남 유다 백성들의 1차 귀환이 있은 지 80년이 지난 기원전 457년경, 에스라의 인솔로 2차 귀환이 이루어졌다. 에스라는 대제사장 아론의 16대손으로 율법에 통달한 학사 겸 제사장이었다. 그는 바사 왕 아닥사스다로부터 두터운 신임을 받았는데, 그런 그가 본국에 돌아가려 했던 이유는 여호와의 율법을 연구하고 준행하며 율례와 규례를 백성들에게 가르치기로 결심했기 때문이었다.[17]
    왕은 에스라의 귀향을 허락하면서 이스라엘 백성 중에 예루살렘으로 돌아갈 뜻이 있는 자는 누구든지 에스라와 함께 가도 좋다는 조서를 내렸다. 또 하나님의 성전에서 쓰일 예물을 에스라에게 주어 가져가게 하고, 제사장들을 비롯하여 하나님의 성전에서 일하는 사람들에게는 세금을 징수하지 말며, 하나님의 율법에 따라 백성들을 재판하고 가르쳐서 하나님의 명령과 왕의 명령을 따르지 않는 자를 처벌하라고 했다.
    하나님의 도우심 속에 에스라는 귀환 의사가 있는 백성들을 모으고 성전에서 쓰일 예물과 기명들을 가지고 본국으로 향했다. 예루살렘으로 떠나기 전 2차 귀환자들 가운데 성전에서 봉사할 레위인이 없는 것을 안 에스라는 레위 자손을 찾아와 귀환에 동참케 했다. 제사장과 다윗 왕조의 후손, 레위인 그리고 백성으로 구성된 2000여 명의 일행이 귀환 길에 올랐다. 그들은 안전하게 예루살렘까지 도착할 수 있도록 금식으로 하나님의 보호를 간구했고, 하나님이 기도에 응답해 주심으로 평안하게 예루살렘에 도착할 수 있었다.[18]

    3차 귀환과 느헤미야(B.C. 444년경)

    바사 왕 아닥사스다 제20년. 바사 제국의 술 관원이었던 느헤미야는 예루살렘성이 훼파되고 성문들은 불탔으며 백성들은 큰 환난과 능욕을 받고 있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다. 느헤미야는 아닥사스다왕에게 성벽 중건을 위해 자신을 예루살렘으로 보내달라고 간청했다. 아닥사스다는 느헤미야의 청을 허락하며 그를 유다 총독으로 임명했고, 예루살렘성 재건을 위한 자재를 공급받을 수 있도록 조서까지 내렸다.[19]
    기원전 444년경, 예루살렘에 도착한 느헤미야는 밤에 예루살렘 성벽을 둘러보았다. 성벽은 다 무너지고 성문은 불타버린 상태였다. 느헤미야는 제사장과 귀인과 방백들을 불러 모으고 하나님께서 왕의 마음을 움직여 성벽 재건을 위해 자신을 보내셨으니, 성벽을 중건해 지금 당하는 수치를 다시는 당하지 말자고 설득했다.[20] 느헤미야의 말을 들은 백성들은 마음을 모아 예루살렘 성벽 중건에 나섰다.
    그러나 공사는 이내 장애에 부딪혔다. 공사 소식을 들은 호론 사람 산발랏과 암몬 사람 도비야 그리고 아라비아 사람 게셈 등 여러 대적자들이 예루살렘성의 건축을 방해하고 나선 것이다. 그들은 백성들이 쌓고 있는 성벽은 여우가 올라가도 무너질 것이라는 말로 조롱하고, 어떻게든 공사가 진척되지 못하도록 방해하는 것은 물론 협박도 서슴지 않았다. 그러나 느헤미야와 백성들은 개의치 않고 성 건축에 전념했다. 성벽이 절반쯤 쌓아 올려지자, 이 소식을 들은 대적자들은 불시에 공사 현장에 쳐들어가 백성들을 죽이고 공사를 중단시킬 계획까지 세웠다. 이를 알게 된 느헤미야는 적을 두려워하지 말고 하나님을 기억하자며 백성들을 독려했다.[21] 백성들은 예루살렘 안에 거하며 밤에는 보초를 섰고, 낮에는 성 건축을 계속해 나갔다. 또 한 손으로는 일을 하고 다른 손으로는 무기를 들어 경계를 더욱 철저히 했다.[22] 느헤미야는 총독의 보수를 위해 백성들에게 부과되었던 세금을 거두어들이지 않는 등 자신의 권리마저 포기한 채 예루살렘 재건에 몰두했다.[23]
    온갖 훼방 속에서도 52일 만에 예루살렘 성벽이 완공되었다. 이 소식을 들은 대적들과 이방 사람들은 두려워하며 낙담했다. 모든 역사를 하나님이 이루셨다는 사실을 그들도 느꼈기 때문이었다.[24]
    예루살렘 성곽 낙성식이 열렸다. 제사장과 레위 사람들이 몸을 정결히 하고, 백성과 성문과 성벽을 정결케 하는 예식을 행했다. 예루살렘에서 즐거워하는 소리가 멀리까지 울려 퍼졌다.

    교훈

    하나님을 저버리고 이방 신들을 섬기던 북 이스라엘이 앗수르 제국에 멸망한 후에도 남 유다는 히스기야, 요시야 등 하나님의 언약을 소중히 여긴 일부 왕들의 노력으로 유월절을 지키고 하나님의 보호를 받아 기원전 586년경까지 명맥을 이어왔다. 그러나 남 유다도 하나님의 법을 온전히 지키지 못하고 이내 우상 숭배로 돌아섰기에 때로는 다른 나라의 침략을 받고 괴로움을 당했다. 하나님은 백성들에게 부지런히 선지자를 보내 그들의 죄를 일깨우시고 사는 길로 돌아오라고 말씀하셨으나 유다는 하나님의 언약을 저버림으로 결국 바벨론의 침략을 받아 망하고, 예루살렘은 함락되고 많은 백성이 포로로 잡혀가서 예레미야의 예언대로 70년이 차기까지 지루한 포로 생활을 지냈다.[1][25] 그 와중에 예레미야, 에스겔 등 참 선지자의 말을 듣고 실행한 사람들은 무사히 지내며 때로는 육신의 성공을 거뒀고 끝날에 가서는 귀국하여 성전과 성을 재건하는 등 기쁨과 즐거움 속에서 노력했다. 그러나 하나냐와 같은 거짓 선지자의 예언을 믿고 노력하지 않은 사람들은 다 멸망하고 말았다.
    성경은 영적 바벨론에 포로 된 하나님의 백성들이 있다고 알려준다. "내 백성아, 거기서 나와 그의 죄에 참예하지 말고 그의 받을 재앙들을 받지 말라"[26] 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해, 바벨론에서 나와 영적 시온으로 돌아오는 이들이 하나님의 언약을 지키며 구원의 기쁨을 누리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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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바벨론 포로와 귀환


    1차귀환

    이스라엘 백성은 주전 605년, 597년, 586년 세 차례에 걸쳐서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갔으나, 하나님께서는 무조건적인 은총을 베푸사 약속하신 대로 이스라엘 백성이 다시 예루살렘으로 돌아오도록 허락하셨습니다(렘 29:14). 이스라엘 백성의 귀환은 이사야 선지자의 예언(사44:28, 45:1-3)과 예레미야 선지자의 예언(렘 25:11-12, 29:10, 14)대로, 바사(페르시아)왕 고레스가 귀환을 허락하는 칙령을 발표함으로 시작되었습니다(대하 36:22-23, 스 1:1-4). 이때부터 바사(페르시아) 제국 각처에 흩어져 있던 유다 포로들은 포로생활을 청산하고 3차에 걸쳐 돌아오게 됩니다. 제 1차 귀환은 주전 537년에 이루어졌습니다.

    1. 귀환 목적과 시기

    (1) 목적

    바사왕 고레스는 주전 538년에 귀환 조서를 내려 “하늘의 신 여호와께서 세상 만국으로 내게 주셨고 나를 명하사 유다 예루살렘에 전을 건축하라 하셨나니 ... 너희 중에 무릇 그 백성 된 자는 다 유다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서 거기 있는 여호와의 전을 건축하라”라고 공포했습니다(스 1:2-3, 참고-대하 36:22-23). 이에 유다와 베냐민 족장들과 제사장과 레위 사람들을 비롯하여 하나님의 감동을 받아 성전을 건축하고자 하는 자들이 다 일어났습니다(스 1:5).

    하나님께서 고레스의 마음을 감동시키시어 성전 건축을 명하게 하신 것은 “여호와께서 예레미야의 입으로 하신 말씀을 응하게 하시기 위한” 것이었습니다(스 1:1). 바벨론 포로 귀환에 대하여 예레미야는 성전 회복과 그것을 통한 예배의 회복을 자세히 예언하였습니다. 이방인에게 성전이 짓밟히는 수치를 당한 것(렘 51:51)을 하나님께서 보수하시고(렘 50:28, 51:11), 다시 성전에서 제사를 드리게 될 것이라고 예언하였습니다(렘 33:10-11, 18). 바벨론에서 돌아온 귀환민들의 최우선 과제는, 성전을 재건하고 성전을 중심하여 하나님께 예배드림으로써 선민으로서의 정체성을 회복하는 것이었습니다.

    (2) 시기

    하나님께서는 예레미야 선지자를 통해 바벨론 포로 생활이 70년이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는데(렘 25:11-12, 29:10), 이에 대해 역대하 36:21에서는 “이에 토지가 황무하여 안식년을 누림같이 안식하여 칠십 년을 지내었으니 여호와께서 예레미야의 입으로 하신 말씀이 응하였더라”라고 말씀하였습니다. 이스라엘의 불순종으로 안식하지 못했던 토지가 안식년을 누림같이 안식하게 된 것입니다.

    바벨론 포로 기간 ‘70년’은 실제 포로로 잡혀 간 때와 귀환하여 성전 건축을 시작한 때를 중심으로 볼 때 말씀대로 정확히 성취되었습니다. 제 1차 포로는 여호야김 3(혹은 4)년(느부갓네살 원년), 곧 주전 605년입니다(왕하 24:1, 렘 25:1, 참고-단 1:1-2). 제 1차 포로 귀환령이 내려진 것은 고레스 원년인 주전 538년으로, 귀환조서를 내린 다음(스 1:2-3), 이 명령을 따라 얼마 동안 귀환준비를 한 유대 민족은 1년 뒤인 주전 537년 마침내 예루살렘으로 돌아오게 되었습니다(스 1:5, 11, 3:1). 그리고 성전 건축을 시작한 것은 주전 536년 2월(시브월)입니다(스 3:1, 8). 그러므로 제 1차로 바벨론에 끄렬간 주전 605년에서 성전을 짓기 시작한 주전 536년까지 햇수로 70년이 정확히 성취된 것입니다.

    2. 귀환자와 귀환 당시 상황

    (1) 귀환자

    제 1차로 귀환할 때의 지도자는 스룹바벨과 예수아(여호수아)였으며, 총 49,897명이 귀환했습니다(스2:64-66).

    귀환자

    총인원

    49,897명

    회중 42,360명 (스 2:1-64, 느 7:5-66)

    지도자 11명, 평민 15,604명(가계별), 평민 8,540명(지역별), 제사장 4,289명,

    느디님 사람과 솔로몬 신복의 자손 392명, 레위인 341명,

    종족과 계보가 불명확한 자 652명,

    계수에 포함되지 않은 사람 12,531명

    노비 7,337명 (스 2:65, 느 7:67)

    노래하는 남녀 200명 (스 2:65, 느 7:67. 245명으로 기록)

    또한 에스라와 느헤미야는 제 1차 귀환자 명단을 기록하면서, 귀환할 때 가지고 온 짐승들의 숫자까지 자세히 기록하였는데, 말 736마리, 노새 245마리, 약대 435마리, 나귀 6,720마리로 모두 8,136마리였습니다(스 2:66-67, 느 7:68-69). 이 짐승들의 수치를 귀환자 중 ‘온 회중’의 숫자(42,360명. 스 2:64, 느 7:66)와 비교해 보면, 대략 다섯 사람에 짐승이 한 마리 정도입니다(5인 기준 한 가족 당 1마리).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할 때에도 “양과 소와 심히 많은 생축”이 함께하였습니다(출 12:38). 하나님께서는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올 때도 짐승들과 같이 오게 하심으로 하나님께 제물을 드릴 뿐만 아니라 일상생활에서도 어려움이 없도록 지극한 사랑으로 돌보아 주셨습니다. 이렇게 귀환민들 뿐 아니라 각 생축들의 숫자까지도 정확하게 기록된 것은 귀환의 모든 과정에 하나님의 손길이 구석구석 미치지 않은 곳이 없으며, 하나님께서 만물을 하나하나 빠짐없이 주관하시고 섭리하셨음을 나타냅니다(롬 11:36).

    (2) 귀환 때 가지고 나온 재물

    유다인들이 귀환할 때, 그들이 거하는 주변의 이웃들이 은 그릇, 황금, 기타 물건, 짐승, 보물로 도와주었으며, 그 외에도 그곳 주민들이 하나님께 자원하는 예물을 드리기까지 하였습니다(스 1:4, 6).

    또 고레스 왕은 옛적에 느부갓네살 왕이 예루살렘에서 옮겨다가 자기 신들의 당에 두었던 여호와의 전 기명을 돌려보냈는데, 유다 목백(牧伯) 세스바살이 그 기명들을 가지고 돌아올 때 금반 30, 은반 1,000, 칼 29, 금대접 30, 그보다 차(次)한 은대접 410, 기타 기명 1,000으로 도합 5,400이었습니다(스 1:7-11). 이는 제 1차 귀환자들이 신분에 관계없이 최선을 다해 하나님의 선전 건축 역사를 위해 몸과 마음을 다해 헌신하였음을 말해 줍니다.

    (3) 귀환 계기

    다니엘 선지자는 당시 세계의 패권을 쥐고 있던 강대국 바사의 총리로 있으면서 메대 왕 다리오 시대뿐만 아니라 바사 왕 고레스의 시대까지 형통하였습니다(단 6:28). 이 말씀을 볼 때, 다니엘이 정치적으로 바사 제국의 기틀 확립에 영향을 끼쳤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다니엘은 메대의 다리오 통치 원년에 “예루살렘의 황무함이 칠십년 만에 마치리라”라고 했던 예레미야 선지자의 예언의 말씀을 깨달았으므로(단 9:2), 귀환 1년 전(주전538년) 고레스가 유다인의 해방을 공포한 일에 간접적으로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추정됩니다(대하 36:22, 스 1:1, 5:13).

    한편 다니엘 선지자는 고레스 왕 3년에도 바사 제국에 남아 활동하고 있었습니다(단 10:1). 그런데 다니엘 1:21에서는 다니엘의 최종활동 시기를 고레스 3년이라고 하지 않고 “다니엘은 고레스 왕 원년까지 있으니라”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 기록 또한, 고레스가 귀환 조서를 발표(스 1:1-4)하는데 다니엘이 어떤 영향력을 행사한 것임을 능히 추정케 합니다.

    (4) 성전 건축의 과정

    출애굽 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우선적으로 성막을 완성한 것처럼, 바벨론에서 귀환한 백성도 오직 성전 건축을 열망하였습니다.

    주전 537년 귀환한 백성들은 옛 성전이 있던 터 위에 단을 세우고(스 2:68, 3:3) 아침 저녁으로 번제를 드리고 초막절을 지키고 성전 지을 준비를 하였습니다(스 3:1-7).

    주전 536년 2월에 마침내 성전의 지대를 놓고 성전 건축 역사를 시작하였습니다(스 3:8-13). 그러나 사마리아인들이 집요하게 성전 재건을 방해했기 때문에 성전 건축은 중단되고 말았습니다. 왕에게 조언을 하던 자들(모사)이 사마리아 사람들에게 뇌물을 받고 유다인들을 참소했던 것입니다(스 4:5).

    그 후 성전 건축은 약 16년 동안 중단되었다가(주전 536-520년), 주전 520년 하나님께서 학개 선지자와 스가랴 선지자를 통해, 스룹바벨과 여호수아를 비롯한 백성들의 마음을 감화하여 흥분시키므로, 다리오 왕 제 2년 6월 24일에 재개되었습니다(스 5:1-2, 학 1:14-15, 참고-슥 4:6-10). 이 시기에 스가랴 선지자는 성전 건축의 진정한 의미가 ‘메시아의 도래와 그의 왕국을 맞이하는 데 있음’을 밝히면서(슥 9-14장) 유다 백성의 바른 신앙 회복을 촉구하였습니다.

    성전은 주전 516년(다리오 왕 제 6년) 아달월(12월) 3일, 약 4년 5개월 만에 마침내 완성되었습니다(스 6:15). 이것은 주전 586년에 예루살렘 성전이 파괴된 후 무려 70년만의 일로, ‘70년’만에 귀환한다는 예언이 어김없이 성취된 것입니다(렘 25:11-12, 29:10).


    바벨론 포로시대의 연대

    B.C

    722. 북이스라엘 멸망(앗시리아)

    605. 바벨론 1차 포로(다니엘, 귀족들)

    597. 바벨론 2차 포로(여호야긴, 에스겔, 기술자)

    586. 바벨론 3차 포로/ 예루살렘의 완전한 멸망

    539. 10월 고레스의 바벨론 점령

    538/7 1차 포로 귀환(세스바살, 스룹바벨): 에스라 1-6장

    520 학개, 스가랴 선지자의 활동

    515 제2성전 완공

    492. 1차 페르시아 전쟁(다리오1세, 헬로도토스에 따르면 아토스 곶에서 폭풍을 만나 300척의 전함과 2만명의 군사를 잃음)

    490. 2차 페르시아 전쟁(다리오 1세, 마라톤 평야에서 아테네의 중장병 밀집대전술에 패함)

    480. 3차 페르시아 전쟁(크세르크세스, 살라미스 해전에서 패배)

    465. 궁정 쿠데타로 크세르크세스 사망

    465. 크세르크세스의 아들 아닥사스다 1세 집권(느헤미야가 술맡은 관원)

    461. 이집트가 페르시아 제국에 반기

    458 2차 포로 귀환(에스라): 에스라 7-10장/ 1차 신앙운동

    444/5 3차 포로 귀환(느혜미야): 느헤미야서/ 성벽재건 공사와 2차 신앙운동

    2014 GSC 새벽 큐티 설교 <에스라 1:1-5, 2:1-2>

    제목 : <에스라1:1-5, 2:1-2> 다시 세우시는 예배공동체

    [에스라1장1절-5절]

    1. 바사 왕 고레스 원년에 여호와께서 예레미야의 입을 통하여 하신 말씀을 이루게 하시려고 바사 왕 고레스의 마음을 감동시키시매 그가 온 나라에 공포도 하고 조서도 내려 이르되

    2. 바사 왕 고레스는 말하노니 하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세상 모든 나라를 내게 주셨고 나에게 명령하사 유다 예루살렘에 성전을 건축하라 하셨나니

    3.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참 신이시라 너희 중에 그의 백성 된 자는 다 유다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서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의 성전을 건축하라 그는 예루살렘에 계신 하나님이시라

    4. 그 남아 있는 백성이 어느 곳에 머물러 살든지 그 곳 사람들이 마땅히 은과 금과 그 밖의 물건과 짐승으로 도와 주고 그 외에도 예루살렘에 세울 하나님의 성전을 위하여 예물을 기쁘게 드릴지니라 하였더라

    5. 이에 유다와 베냐민 족장들과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과 그 마음이 하나님께 감동을 받고 올라가서 예루살렘에 여호와의 성전을 건축하고자 하는 자가 다 일어나니

    [ 에스라 2장 1절-2절 ]

    1. 옛적에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에게 사로잡혀 바벨론으로 갔던 자들의 자손들 중에서 놓임을 받고 예루살렘과 유다 도로 돌아와 각기 각자의 성읍으로 돌아간 자

    2. 곧 스룹바벨과 예수아와 느헤미야와 스라야와 르엘라야와 모르드개와 빌산과 미스발과 비그왜와 르훔과 바아나 등과 함께 나온 이스라엘 백성의 명수가 이러하니

    출처: https://ever-flowingstream.tistory.com/227 [마르지 않는 샘 같으리]

    제목 : 100년동안 다시 세우시는 예배 공동체

    지난주간까지 <에스더서>가 끝나고 이번주부터 <에스라서>본문이 시작되었습니다. 오늘은 에스라서의 전체적인 개관적인 흐름을 이해하는 1장과 2장의 내용을 살펴보고자 합니다.

    출처: https://ever-flowingstream.tistory.com/227 [마르지 않는 샘 같으리]

    흔히 < 에스라 느헤미야 에스더 >는 동시대의 상황을 배경으로 각기 다른 하나님의 사람들을 통해서 일하시는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를 살펴볼수 있는 말씀입니다.

    이 < 에스더 느헤미야 에스더 >를 연대기적으로 배열한다면 < 에스라 - 에스더 - 느혜미야 >로 재배열할수 있을 것입니다.

    주로 이 세가지 말씀은 이스라엘의 1,2,3차 포로귀환이 진행되었던 5세기에 일어난 사건들을 중심으로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원래 히브리 원문 성경에는 < 에스라와 느헤미야 >가 한 권으로 책으로 만들어져 있습니다. bc 538년-433년까지 약 100년의 이야기를 담아내고 있습니다.

    바사왕 고레스왕부터 캄비아스, 다리오, 아하수에로, 아닥사스다왕까지의 여러대의 걸친 페르시아 제국의 세속의 역사와 함께 쓰여지고 있는 이야기입니다.

    출처: https://ever-flowingstream.tistory.com/227 [마르지 않는 샘 같으리]

    에스라와 느헤미야의 주된 이야기와 사건들의 배경은 <3번에 걸친 바벨론 포로 귀환>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이미 잘 알다 시피 이스라엘과 유다백성들이 이방나라 <앗수르와 바벨론>에 멸망합니다.

    이 멸망은 하나님의 준엄한 심판이었습니다.

    나중에는 앗수르 마져도 바벨론 대제국앞에 무릎을 꿇고 그 사이에서 이스라엘과 유다백성들은 3번에 걸쳐서 포로로 잡혀갑니다.

    그리고 바벨론은 바사나라 곧 페르시아 대 제국에 의해서 멸망하게 됩니다.

    바벨론에서 70년의 포로생활을 한후에 3번에 걸쳐서 포로귀환이 이루어집니다. 1차귀환은 < 스룹바벨 >과 함께, 2차 귀환은 < 에스라 >와 함께, 3차 귀환은 <느헤미야>와 함께 돌아오게 됩니다.

    우리는 3번에 걸쳐서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 간것은 < 바벨로 유수 >라고

    말합니다.

    출처: https://ever-flowingstream.tistory.com/227 [마르지 않는 샘 같으리]

    3번에 걸쳐서 바벨론에서 돌아온것을 < 바벨론 포로 귀환 >이라고 말합니다. 공교롭게도 3번에 걸쳐서 잡혀가고 3번에 걸쳐서 돌아옵니다.

    출처: https://ever-flowingstream.tistory.com/227 [마르지 않는 샘 같으리]

    이렇게 이스라엘과 유다백성이 구사일생으로 70년의 포로 생활을 마치고 돌아올수 있는 것에는 놀라운 하나님의 손길과 구원의 역사가 있었습니다.

    역대기서를 보면 바벨론왕 느부갓네살의 예루살렘의 파괴와 바벨론 포로로 잡혀가는 장면으로 이스라엘의 역사를 끝맺고 있습니다.

    역대하 36:21-23

    21. 이에 토지가 황폐하여 땅이 안식년을 누림 같이 안식하여 칠십 년을 지냈으니 여호와께서 예레미야의 입으로 하신 말씀이 이루어졌더라

    22.바사의 고레스 왕 원년에 여호와께서 예레미야의 입으로 하신 말씀을 이루시려고 여호와께서 바사의 고레스 왕의 마음을 감동시키시매 그가 온 나라에 공포도 하고 조서도 내려 이르되

    23. 바사 왕 고레스가 이같이 말하노니 하늘의 신 여호와께서 세상 만국을 내게 주셨고 나에게 명령하여 유다 예루살렘에 성전을 건축하라 하셨나니 너희 중에 그의 백성된 자는 다 올라갈지어다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함께 하시기를 원하노라 하였더라

    이 역대하 마지막장 마지막절은 고스란히 에스라 1장 1절-3절에 다시 반복하고 있습니다.

    1. 바사 왕 고레스 원년에 여호와께서 예레미야의 입을 통하여 하신 말씀을 이루게 하시려고 바사 왕 고레스의 마음을 감동시키시매 그가 온 나라에 공포도 하고 조서도 내려 이르되

    2. 바사 왕 고레스는 말하노니 하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세상 모든 나라를 내게 주셨고 나에게 명령하사 유다 예루살렘에 성전을 건축하라 하셨나니

    역대기 기자는 유대인들이 바벨론을 떠나 귀환하는 문제를 미결상태로 남겨놓은 반면에 에스라는 그 귀환을 구체적으로 어떻게 이루어지고 있는지? 말해주고 있습니다.

    이러한 모든 과정속에는 약속에 신실하신 하나님의 섭리와 손길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미 예레미야를 통해서 자신의 백성이 돌아올 것을 예언하셨습니다.

    예레미야 25:11-13

    11. 이 모든 땅이 폐허가 되어 놀랄 일이 될 것이며 이 민족들은 칠십 년 동안 바벨론의 왕을 섬기리라

    12.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칠십 년이 끝나면 내가 바벨론의 왕과 그의 나라와 갈대아인의 땅을 그 악으로 말미암아 벌하여 영원히 폐허가 되게 하되

    13. 내가 그 땅을 향하여 선언한 바 곧 예레미야가 모든 민족을 향하여 예언하고 이 책에 기록한 나의 모든 말을 그 땅에 임하게 하리라

    예레미야 29:10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바벨론에서 칠십 년이 차면 내가 너희를 돌보고 나의 선한 말을 너희에게 성취하여 너희를 이 곳으로 돌아오게 하리라

    그리고 이사야 45장 1절에는 이스라엘 백성이 돌아오는 일에 < 여호와의 기름부음 받은 종 >의 역할을 바사 나라 < 고레스왕(Cyrus) >이 감당할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사야 45:1 여호와께서 그의 기름 부음을 받은 고레스에게 이같이 말씀하시되 내가 그의 오른손을 붙들고 그 앞에 열국을 항복하게 하며 내가 왕들의 허리를 풀어 그 앞에 문들을 열고 성문들이 닫히지 못하게 하리라

    출처: https://ever-flowingstream.tistory.com/227 [마르지 않는 샘 같으리]

    출처: https://ever-flowingstream.tistory.com/227 [마르지 않는 샘 같으리]


    오늘 에스라서에 기록되어 있는 바벨론 포로 귀환의 사건은 갑자기 일어나는 행운같은 일이 아닙니다. 이미 하나님의 약속이 있었고 그것을 이루어가시는 구속의 역사와 성취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세속의 시간표가 구속의 시간표로 바뀌는 장면입니다.

    실패의 시간표가 은혜의 시간표로 바뀌는 역사입니다.

    우리는 에스라서속에 담겨있는 < 하나님의 구속의 역사와 성취 >를 주목해서 보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어떻게 세속의 역사속에서 자기 백성을 끝까지 보호하시고 끝까지 자신이 하신 약속을 지키시는지를 우리는 주목해서 보아야 합니다.

    에스라서 1장 1절을 읽으면서

    1. 바사 왕 고레스 원년에 여호와께서 예레미야의 입을 통하여 하신 말씀을 이루게 하시려고 바사 왕 고레스의 마음을 감동시키시매 그가 온 나라에 공포도 하고 조서도 내려 이르되

    < 바사왕 고레스 원년에 >에는 대목은 세속의 역사적인 배경을 설명해줍니다. 그러나 < 여호와께서 예레미야의 입을 통하여여 하신 말씀을 이루게 하시려고 >라는 대목에서 이 세속의 역사를 도구삼아 자신의 구속의 역사를 써내려 가시는 하나님의 구속의 손길과 계획을 주목해서 보아야합니다.

    바로 이 대목이 세속사가 구속사가 바뀌는 대목입니다. 세속의 주인공이 하나님의 선한 일에 주인공이 되는 대목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에게 일어나는 <일상적인 시간과 일어나는 사건들 그리고 상황들>은 그냥 세상적인 시간과 사건들이 아님을 명심해야합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그리스도를 알고 믿고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받았다면 우리에게 <일상처럼 주어진 시간과 일어나는 사건들 그리고 상황들>을 구속의 은혜와 고백으로 바꿔내는 능력이 있어야합니다.

    우리의 일상을 구속의 묵상으로 바꾸는 능력

    우리의 시간을 구원의 시간으로 바꾸는 능력

    우리의 상황을 구원의 감격으로 바꾸는 능력

    이것이 바로 우리의 삶을 구속사로 다시 써내려가는 능력입니다.

    에스라서는 바로 그냥 이스라엘백성들에게 일어나는 포로 귀환의 사건들만 다루고 있지 않습니다. 포로 귀환을 통해서 일하시는 하나님의 구속의 역사를 기록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의 바벨론의 포로 유수의 70년의 시간, 그리고 그들이 자신에게 약속했던 그 약속의 땅으로 돌아오기까지 100년의 시간을 어떻게 우리는 바라보아야 할까요?

    먼저 우리는 왜 ? 이스라엘 백성들이 포로로 잡혀가고 심판을 당했나를 생각해보아야합니다. 그들이 그렇게 철저하게 하나님께 버림 받는 심판의 고통을 당했던 무엇입니까?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바로 그것은 < 그들이 하나님을 예배하는 일에 실패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실패한 예배공동체였습니다. 실패한 예배자들이었습니다. 결국 그들이 자부했던 예배의 처소인 성전도 철저하게 파괴되고 맙니다.

    그들이 범죄와 가증한 태도로 하나님만을 예배하지 않았습니다. 이방나라를 의지하고 이방신을 섬기고 이방사람들과 교제하는 이들이 하나님이 참을수 없는 심판을 만들게 된것입니다. 스스로 웅덩이를 판격이 되었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의 실패는 바로 < 예배의 실패 >였습니다. 제사장들이 타락하고 지도자들이 앞장서서 우상을 섬겼고 가증한 일을 행했습니다. 실제로 포로로 잡혀갈때보면 대부분이 < 제사장들과 지도자들, 귀족들이었습니다.> 철저하게 하나님께서 이들을 심판하십니다.

    그러한 70년의 고통과 고난의 시간이 지나고 그들이 돌아오게 됩니다.

    그렇다면 왜? 하나님은 그들 다시 돌아오게 하셔야 했을까요?

    바로 그 이유는 < 그들이 다시 하나님을 예배하는 일에 보기 원

    하셨기 때문입니다. >

    하나님께서는 바사왕 고레스의 호의와 조서를 통해서 하나님의 백성을 하나님이 오래전부터 약속하고 주었던 땅으로 돌아가게하십니다.

    그 주된 이유는 < 다시 예배공동체를 세우셔서 다시 하나님만을 예배하는 예배자들로 세우기 위함 >이었습니다.

    스룹바벨과 에스라, 느헤미야가 돌아와서 가장 먼저한 일은 바로 < 성전을 재건 >하는 일이었습니다. 이것이 무엇을 의미합니까? 바로 예배 공동체를 다시는 세우는 일입니다.

    실제로 에스라1장에 보면 바사왕 고레스(키루스)가 < 성전 재건을 허락하고 지원하고 있습니다. > 이것은 있을수 없는 일입니다. 이방신 말둑을 섬기고 있는 바사왕이 자신의 신도 아닌 다른 나라 신을 섬기도록 허락하는 일은 가히 상상할수 없는 일입니다.

    하나님은 바사왕 고레스의 유화적인 정책과 태도를 사용하십니다. 고레스의 자비로운 통치의 이면에는 < 하나님의 감동 >이 있었습니다.

    출처: https://ever-flowingstream.tistory.com/227 [마르지 않는 샘 같으리]




    오늘 에스라 1장은 분명히 그것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바사왕 고레스왕의 이면에 일아하시는 하나님의 역사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예루살렘이 성전이 재건되고 제사가 재확립됩니다.

    그리고 에스라 1장 마지막 절을 보면 놀랍겠도 빼앗겼던 성전기물들을 가지고 가게하고 성전을 건축하는 자금을 지원받게 됩니다. 어찌 이런일이 ... 세상에 이런일이... 믿거나 말거나 ... 같은 일이 일어납니다.

    이것 역사 하나님이 이루시는 구원의 역사입니다.

    그리고 에스라 2장에 언급되어 있는 포로귀환자 명단을 면밀히 보면 < 제사장들, 제사에 수종드는 자들, 그리고 성전에 허드렛일을 하는 이방족속 느디니사람들 >이 주된 사람들 42,350명이 돌아오게 됩니다. 이들은 하나님이 성전건축과 제사를 회복하시는 일에 주도적인 역할을 감당할 사람들 입니다.

    출처: https://ever-flowingstream.tistory.com/227 [마르지 않는 샘 같으리]



    그러한 사람중에 < 아론의 16대손, 스라야의 아들, 학사겸 제사장인 에스라 >를 통해서 그 일들을 주도하게 하십니다. 바로 에스라를 통해서 예루살렘의 성전을 재건할 뿐아니라 이스라엘 다시금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예배공동체로 재건하십니다.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다.

    이스라엡 백성의 실패는 < 예배의 실패 >에서 시작되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의 회복은 < 예배의 재건>에서 시작되고 있습니다.

    우리가 에스라서를 통해서 주목해서 묵상해야할 것은

    1/ 하나님이 어떻게 자신이 기뻐하는 새성전을 다시 세우고 계시는가?

    2/ 하나님이 어떻게 자신이 원하는 예배를 받기 위해 남은 예배자들를 구원하시는가?

    3/ 하나님이 어떻게 자신이 원하시는 예배공동체를 세우시는가?

    이것을 주목해서 보아합니다.

    다시 세우는 성전 재건

    다시 모으시는 예배자들

    다시 일으키시는 예배공동체

    이것이 에스라서를 묵상하는 핵심방향입니다.

    우리는 반대로 우리는 이렇게 적용질문을 만들어 볼수 있습니다.

    1/ 나에게 무너져있고 실패하고 있는 성전은 없는가?

    2/ 나는 마지막까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예배자인가?

    3/ 나의 가정과 교회가 하나님이 원하시는 예배공동체가 되고 있는가?

    출처: https://ever-flowingstream.tistory.com/227 [마르지 않는 샘 같으리]














    2025 에스겔





    구약 성경의 측량단위 (규빗, 척, 뼘, 장대, 손바닥, 손가락)

    by news222 2025. 3. 10.

    에스겔 성전 척량에 사용된 단위 자세히 알아보기

    에스겔 40:3-5

    3 나를 데리시고 거기에 이르시니 모양이  같이 빛난 사람 하나가 에 삼줄과 측량하는 장대를 가지고 문에 서 있더니

    4 그 사람이 내게 이르되 인자야 내가 네게 보이는 그것을 눈으로 보고 귀로 들으며 네 마음으로 생각할지어다 내가 이것을 네게 보이려고 이리로 데리고 왔나니 너는 본 것을 다 이스라엘 족속에게 전할지어다 하더라

    5 내가 본즉 집 바깥 사방으로 담이 있더라 그 사람의 에 측량하는 장대를 잡았는데 그 길이가 팔꿈치에서 가락에 이르고 한 바닥 너비가 더한 자로 여섯 척이라 그 담을 측량하니 두께가 한 장대요 높이도 한 장대며

    1. 규빗  cubit

    • '암마'
    • 45.6cm
    • 여섯 손바닥
    • 가장 많이 사용된 단위
    • 노아방주 ( 창세기 6:15-16) 
    • 성막 (출애굽기 25:10,17, 23) 
    • 스룹바벨 성전 (에스라 6:3)

    2. 척  long cubit

    • 암마'
    • 53.2cm
    • 큰 규빗 
    • 7 손바닥
    • 1척 = 1규빗 + 1손바닥 
    • 에스겔 성전을 측량하는 기본 단위 (에스겔 40:5, 43:13)

    3. 뼘  span

    • '제레트'
    • 22.8cm
    • 1/2규빗
    • 3손바닥
    • 엄지 손가락에서 새끼손가락까지 최대한 펼친 길이 (출애굽기 28:16, 39:9, 사무엘상 17:4)
    • 에스겔 성전에서는 한 뼘이 1/2척 (26.6cm) (에스겔 43:13)

    4. 손바닥  handbreadth

    • 토파흐
    • 7.6cm
    • 1/6규빗
    • 4손가락
    • 출애굽기 26:25, 열왕기상 7:26, 역대하 4:5, 시편 39:5, 에스겔 40:5, 43, 43:13

    5. 손가락  finger

    • 에츠바
    • 1.9cm
    • 1/24규빗
    • 1/4손바닥
    • (예레미야 52:21) "그 기둥은 한 기둥의 높이가 십팔 규빗이요 그 둘레는 십이 규빗이며 그 속이 비었고 그 두께는 네 손가락 두께이며"

    6. 장대  rod

    • 카네
    • 3.192m
    • 6척
    • 6 long cubit
    • 에스겔 40:3, 5
    • '갈대'라는 뜻의 히브리어 '카네'
    • 주로 직선거리를 재기 위해 사용
    • 칠십인경에서 '칼라모스'(갈대)로 번역





    성전(聖殿)  솨케드(שקד)






    의 출입문들이 12지파의 이름으로 명명되었다는 것은 곧 그 성읍이 온 이스라엘의 공동의 소유인 것을 암시하는데, 이러한 성읍이 '여호와 삼마'(여호와께서 거기 계시다)로 명칭되었다는 것은 여호와께서 새 이스라엘 공동체와 항상 함께하시리라는 사실을 시사하는 한편 에스겔의 사역이 절정에 달했음을 보여준다.

    󰃨 그 날 후로는(*, 미욤) - 여기서 '그 날'은 하나님의 모든 구원 사역이 완성되는 이스라엘의 온전한 회복의 날인 동시에 본서에 기술된 모든 예언과 규정과 지침들이 완전하게 성취되는 때를 가리킨다.

    󰃨 그 성읍의 이름을 여호와 삼마라 하리라 - 원전상 본서는 '여호와께서 거기에 계시다'란 뜻의 '여호와 삼마'(*)라는 단어로 종결되는 바, 이는 에스겔 선지자의 전사역을 함축하는 본서의 총괄적인 주제라고 말할 수 있다. 곧 에스겔 선지자가 환상 중에 목격한 여호와의 영광의 떠나심(10:18-22;11:22-24)과 다시 돌아오심(43:4)은 궁극적으로 하나님께서 그 새 성전에 거하시면서 다시는 당신의 백성을 떠나지 않으시리라 하신 약속으로 귀결되며(43:7) 결과적으로 그 모든 사역이 이 '여호와 삼마'로 종결되는 것이다. 한편 여기서 '삼마'는 원어상 '저기에', '거기에'라는 뜻을 모두 함축하고 있는 바, 혹자는 여호와의 처소가 이 성읍이 아니라 그 지역과 엄밀하게 구분되는 성전이라는 점에서 이를 '저기에'로 해석한다(Havernick, Schroder). 그러나 이 성읍이 12지파, 곧 전이스라엘의 공동 소유란 점에서, 단순하게 여호와의 처소를 지칭하는 말이라기보다는 새 이스라엘과 그 백성들에 대한 하나님의 영원한 임재라는 보다 포괄적이고 궁극적인 의미로 쓰여진 것으로 보아야 하므로, '거기에'라는 해석이 더 적절하다(Delitzsch).





    성전(聖殿)이란 무엇인가?
    성전은 여호와(יהוה) 하나님이 거하시는 집이다.
    세상에서 말씀하는 성전의 의미는, 구약시대 때 있었던 성막(회막)으로부터 지작 되었다.(레 1:1~9)


    레위기 1장
    1. 여호와께서 회막에서 모세를 부르시고 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2. 이스라엘 자손에게 말하여 이르라 너희 중에 누구든지 여호와께 예물을 드리려거든 가축 중에서 소나 양으로 예물을 드릴지니라
    3. 그 예물이 소의 번제이면 흠 없는 수컷으로 회막 문에서 여호와 앞에 기쁘게 받으시도록 드릴지니라
    4. 그는 번제물의 머리에 안수할지니 그를 위하여 기쁘게 받으심이 되어 그를 위하여 속죄가 될 것이라
    5. 그는 여호와 앞에서 그 수송아지를 잡을 것이요 아론의 자손 제사장들은 그 피를 가져다가 회막 문 앞 제단 사방에 뿌릴 것이며
    6  그는 또 그 번제물의 가죽을 벗기고 각을 뜰 것이요
    7. 제사장 아론의 자손들은 제단 위에 불을 붙이고 불 위에 나무를 벌여 놓고
    8. 아론의 자손 제사장들은 그 뜬 각과 머리와 기름을 제단 위의 불 위에 있는 나무에 벌여 놓을 것이며
    9. 그 내장과 정강이를 물로 씻을 것이요 제사장은 그 전부를 제단 위에서 불살라 번제를 드릴지니 이는 화제라 여호와께 향기로운 냄새니라


    성막은 하나님이 인도하시는 곳으로 옮겨 다니며 설치하였다.
    성막 안에는 성소와 지성소가 있는데, 지성소 안에는 아무도 들어갈 수 없는 거룩한 곳이었다.
    대제사장만 일 년에 한 번씩, 백성들의 죄를 씻기 위해 들어갔다.


    솔로몬 시대에 와서는 예루살렘에 성전을 건축하였다. 목재와 튼튼한 재료로 아름답게 건축하였으며, 옮길 수 없는 성전이 되었다.
    그러다가 예수 그리스도가 오신 후 성전은 허물어지고, 예수가 성전 되게 하셨다.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를 지심으로 인하여, 예수를 성전 되게 하신 것이다.
    이는 여호와(יהוה) 하나님이 예수를 [구세주]로 보내셨기 때문이다.


    여호와(יהוה)께서는 그의 아들 예수를 [구세주]로 삼으시고, 예수를 성전의 모퉁잇돌이 되게 하셨다. 또 예수를 중심으로 사역한 선지자와 사도들은 성전의 기초석이 되게 하셨다.
    그리고 성전의 기초 위에, 구원받은 그의 백성들이 성전 되어가게 하신 것이다.(계 21:22~24)


    에베소서 2장
    20. 너희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우심을 입은 자라 그리스도 예수께서 친히 모퉁잇돌이 되셨느니라
    21. 그의 안에서 건물마다 서로 연결하여 주 안에서 성전이 되어 가고
    22. 너희도 성령 안에서 하나님이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느니라


    고린도전서 3장
    16. 너희는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계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


    이처럼 성전의 형태는 변천하였다.
    옮겨 다니던 회막(천막)에서 고정된 건축물로, 고정된 건축물에서 사람의 몸으로 변천한 것이다.
    그러면 새 하늘과 새 땅이 이루어진 후에도 성전이 필요할까?
    하늘나라에는 성전이 필요하지 않다. 하늘나라 자체가 성전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과 어린양 예수를 성전으로 비유하였다.


    요한계시록 21장
    22. 성 안에서 내가 성전을 보지 못하였으니 이는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와 및 어린양이 그 성전이심이라
    23. 그 성은 해나 달의 비침이 쓸데없으니 이는 하나님의 영광이 비치고 어린양이 그 등불이 되심이라
    24. 만국이 그 빛 가운데로 다니고 땅의 왕들이 자기 영광을 가지고 그리로 들어가리라


    세상에 성전이 있었듯이, 새 하늘과 새 땅이 이루어진 후에는, 하나님이 성전의 역할을 하신다.
    그런데 어린양 예수를 성전이라 말씀하는 것은, 여호와(יהוה)께서 그의 아들 예수에게 성전의 역할을 하도록 모든 권세를 맡기셨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마지막 날에는 예수가 받은 모든 권세를, 하나님 아버지께로 다시 돌려드린다.(고전 15:24)


    고린도전서 15장
    24. 그 후에는 마지막이니 그가 모든 통치와 모든 권세와 능력을 멸하시고 나라를 아버지 하나님께 바칠 때라


    그런데 하나님은 왜, 세상 사람들에게 나타나셔서 사사건건 간섭하셨을까?
    모세를 불러 성막을 짓게 하시고, 나중에는 그의 아들 예수를 세상에 보내어 성전 되게 하셨을까?
    사람들의 영혼은, 본래 천사들이었기 때문이다. 천사가 타락하여 하늘나라를 떠났기에, 타락 천사들을 죄에서 구원하려고 세상을 창조하셨던 것이다.
    그러므로 에덴동산에서 타락 천사의 생기를 사람의 육체에 불어넣어, 본질상 진노의 자식으로 태어나게 하셨다.(창 2:7~8, 에녹 3서)


    창세기 2장
    7. 여호와 하나님이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되니라
    8. 여호와 하나님이 동방의 에덴에 동산을 창설하시고 그 지으신 사람을 거기 두시니라


    [에녹 3서]
    9. 종말과 재생
    -중략-
    천사의 영혼을 지닌 지식의 짐승들, 그것이 내가 새로이 창조하려는 인간의 모습이니라


    하나님은 본질상 진노의 자식들을 죄에서 구원하기 위해, 그의 천사들도 세상에 보내어 사람으로 태어나게 하신 것이다. 사람으로 태어난 자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비롯하여 선지자와 사도들이다.(롬 8:3, 에녹 3서)


    로마서 8장
    3. 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은 하시나니 곧 죄로 말미암아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 육신에 죄를 정하사


    [에녹 3서]
    11. 인류 탄생
    -중략-
    그러자 저 높은 곳에서 하느님의 목소리가 내려왔다.
    물론 지금 지옥(땅)에 있는 타락 천사들은 죄를 짓고 인간이 될 운명에 처해 있지만 내 그들을 가엾이 여겨 다시 한번 천사가 될 기회를 주려 한다.
    그래서 너희들을 내가 선택하여 지옥(땅)으로 내려보내노라.
    윤회의 틀을 돌고 돌아 인간으로 태어나면 너희들은 나의 말을 듣고 나의 뜻을 행해야 하는 예언자들이 되어야 한다.


    하늘나라의 비밀을 본 사도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가 어떻게 인자(사람의 아들) 되셨는지, 그 비밀을 다음과 같이 밝히었다.(히 1:4~5, 13)


    히브리서 1장
    4. 그가 천사보다 훨씬 뛰어남은 그들보다 더욱 아름다운 이름을 기업으로 얻으심이니
    5. 하나님께서 어느 때에 천사 중 누구에게 너는 내 아들이라 오늘 내가 너를 낳았다 하셨으며 또다시 나는 그에게 아버지가 되고 그는 내게 아들이 되리라 하셨느냐
    -중략-
    13. 어느 때에 천사 중 누구에게 내가 네 원수로 네 발등상이 되게 하기까지 너는 내 우편에 앉아 있으라 하셨느냐


    예수께서도 자신의 정체성을 다음과 같이 밝히셨다.(계 22:16)


    요한계시록 22장
    16. 나 예수는 교회들을 위하여 내 사자를 보내어 이것들을 너희에게 증언하게 하였노라 나는 다윗의 뿌리요 자손이니 곧 광명한 새벽 별이라 하시더라


    새벽별 천사들은 하나님의 아들들이다.
    하나님은 사탄의 미혹에 넘어간 타락 천사들을 땅으로 쫓으셨다. 땅으로 쫓겨난 저들은 하나님과 같은 신이 되고자 하였다. 그때 하나님은 땅을 황폐하게 하여, 공허한 폐허로 만드셨다.(에녹 3서)
    하나님은 그의 아들들(새벽 별들)과 함께 폐허가 된 지구를 새롭게 창설하셨다. 에덴동산을 새롭게 창설하실 때, 타락 천사들을 사람으로 지으시면서 기뻐 소리치셨다.(욥 38:47, 창 1:26~27)


    욥기 38장
    4. 내가 땅의 기초를 놓을 때에 네가 어디 있었느냐 네가 깨달아 알았거든 말할지니라  
    5. 누가 그것의 도량법을 정하였는지, 누가 그 줄을 그것의 위에 띄웠는지 네가 아느냐
    6. 그것의 주추는 무엇 위에 세웠으며 그 모퉁잇돌을 누가 놓았느냐
    7. 그때에 새벽 별들이 기뻐 노래하며 하나님의 아들들이 다 기뻐 소리를 질렀느니라


    창세기 1장
    26. 하나님이 이르시되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들로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가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
    27.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말씀을 정리하면, 여호와(יהוה)께서는 그가 지으신 타락 천사들을 죄에서 구원하기 위해, 죄 없는 천사들을 세상에 보내셨다.
    죄 없는 천사들도 죄 있는 육신을 입고 태어나 선지자와 사도들이 되게 하신 것이다.
    선지자와 사도들 중 예수를 맏아들로 삼으시고,  세상을 구원하는 [구세주]가 되게 하셨다.(롬 8:29~30)


    로마서 8장
    29.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을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30.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예수를 맏아들로 삼으신 이유는, 하나님의 하나뿐인 첫째 아들 사타나엘이 그의 품을 떠났기 때문이다.(에녹 3서)


    [에녹 3서]
    7장 짐승의 지식.
    -중략-
    천국에 하나뿐인 대 천사장 사타나엘.
    너는 내 명령을 어기고 천국 밖으로 나가
    금지된 세계와 금단의 지식을 맛보았다.
    나는 너를 용서치 않기에
    너의 모든 것을 파멸로 돌이킬 수 있는
    영원한 형벌을 내리노라.
    너는 대 천사장의 지위에서 박탈되어
    천국에서 쫓겨나게 될 것이다.
    그리고 반드시 죽게 될 것이다.


    여호와(יהוה) 하나님은 본질상 진노의 자식들을 구원하기 위해, 그의 아들들을 불러 성전을 짓게 하였고, 거기에 계셨다.
    그러다가 마지막에는 맏아들 예수를 보내어 [구세주]가 되게 하신 것이다.
    여호와(יהוה)의 사자들은 성전의 모퉁잇돌과 기초석의 역할을 하게 하였고, 타락 천사들은 죄를 회개하고 구원받아서 하늘나라의 백성들이 되게 하신 것이다.


    여호와(יהוה)께서는 하늘나라의 성전을, 그의 아들들 스스로가 이루어 가도록 맡기신 것이다.
    맡기시되 그냥 맡기신 것이 아니라, 성령의 권능을 입고 사역하게 하였다.
    그러므로 선지자와 사도들은 홍해를 가르고 죽을 자를 살리며, 앉은뱅이를 일으키는 등, 세상이 감당할 수 없는 능력으로 다스렸다.
    하나님은 그의 아들들에게 성령의 권능을 주어, 뿔뿔이 흩어진 타락 천사들을 다시 모으게 하신 것이다.


    하나님은 그의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 말씀하셨다. 이는 하나님이 성전이시듯, 너희도 성전이 되라는 말씀이셨다.(벧전 1:15~16)


    베드로전서 1장
    15. 오직 너희를 부르신 거룩한 이처럼 너희도 모든 행실에 거룩한 자가 되라
    16. 기록되었으되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 하셨느니라


    성전이 다 이루어지는 그날, 하나님은 큰 잔치를 베푸신다.
    맏아들 예수를 신랑으로 비유하였고, 선지자와 사도들은 신부로 비유하였다.
    그리고 혼인 잔치에 청함을 받은 자들은, 구원받은 하나님의 백성들로 비유하였다.(계 19:1~10)
    혼주는 여호와(יהוה) 하나님이 되신다.


    성경 속 '성전', 그 깊은 의미를 찾아서 

    '성전'(聖殿). 성경을 읽다 보면 자주 마주치는 단어입니다. 우리는 흔히 성전이라고 하면 예루살렘에 있던 웅장한 건물을 떠올립니다. 물론 그것도 성전이 맞습니다. 하지만 성경에서 말하는 '성전'의 의미는 단순히 건물에만 국한되지 않습니다. 시대에 따라, 그리고 하나님의 구속 계획 안에서 그 의미는 더욱 깊고 풍성하게 발전해 왔습니다. 오늘은 성경 전체를 통해 '성전'이라는 단어가 어떻게 사용되었고, 그 의미가 어떻게 변화하며 심화되었는지 함께 따라가 보려 합니다. 성전의 참된 의미를 알아가는 여정을 통해, 오늘날 우리에게 주시는 메시지를 발견할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1. 시작 : 하나님의 임재의 장소, 성막

    성전 이야기의 시작은 광야 시대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이집트를 탈출하여 약속의 땅으로 가는 동안, 하나님께서는 그들 가운데 거하실 특별한 장소를 만들라고 명령하셨습니다. 그것이 바로 '성막'(聖幕)입니다.

    “내가 그들 중에 거할 성소를 그들이 나를 위하여 짓되” (출애굽기 25:8)

    성막은 이동이 가능한 텐트 형태였습니다. 이는 광야를 이동하는 이스라엘 백성과 하나님께서 함께 하신다는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줍니다. 성막의 구조와 기물 하나하나에는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백성과의 만남, 그리고 죄 사함을 위한 제사에 대한 의미가 담겨 있었습니다. 성막의 가장 깊은 곳, 지성소에는 언약궤가 있었고, 그 위에 하나님의 영광이 임재하셨습니다. 즉, 성막은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 가운데 가시적으로 임재하시는 장소였습니다. 백성들은 성막을 중심으로 진을 치고 생활하며, 하나님과의 관계를 유지했습니다.

    2. 발전 : 견고한 하나님의 집, 솔로몬 성전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 땅에 정착하고 왕정 시대가 열리면서, 다윗 왕은 하나님의 집을 짓고자 하는 열망을 품었습니다. 비록 다윗은 전쟁에서 피를 많이 흘렸기에 성전 건축을 허락받지 못했지만, 그의 아들 솔로몬이 그 뜻을 이어받아 마침내 예루살렘에 웅장하고 화려한 성전을 건축합니다. 이것이 바로 '솔로몬 성전'입니다.

    솔로몬 성전은 성막의 기본 구조를 따르면서도 훨씬 크고 견고하게 지어졌습니다. 최고의 재료와 기술이 동원되었고, 그 화려함은 당시 세계적으로도 유명했습니다. 이 성전은 이제 이스라엘 왕국의 중심이자, 하나님께서 이스라엘과 함께 하신다는 영원한 언약의 상징처럼 여겨졌습니다.

    “내가 이미 이 성전을 거룩하게 구별하여 내 이름을 영원히 그 곳에 두며 내 눈길과 내 마음이 항상 거기에 있으리니” (열왕기상 9:3)

    하나님께서는 솔로몬의 기도에 응답하시며 성전에 임재하실 것을 약속하셨습니다. 하지만 이 약속에는 중요한 조건이 있었습니다. 바로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의 명령과 규례를 지켜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만약 그들이 하나님을 떠나 우상을 숭배하면, 하나님께서도 그 성전을 버리실 것이라고 경고하셨습니다. 안타깝게도 이스라엘은 이 경고를 무시했고, 결국 바벨론에 의해 예루살렘이 함락되면서 솔로몬 성전은 완전히 파괴되고 맙니다.

    3. 재건과 변질 : 스룹바벨 성전과 헤롯 성전

    바벨론 포로 생활에서 돌아온 유대인들은 무너진 성전을 재건하기 시작했습니다. 스룹바벨의 주도로 세워진 이 성전을 '스룹바벨 성전' 또는 '제2 성전'이라고 부릅니다. 비록 이전 솔로몬 성전의 화려함에는 미치지 못했지만, 이 성전은 포로 귀환 공동체에게 신앙의 중심이자 희망의 상징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학개 선지자를 통해 이 성전의 나중 영광이 이전 영광보다 클 것이라고 약속하시기도 했습니다 (학개 2:9).

    시간이 흘러 예수님 시대에는 헤롯 대왕이 유대인들의 환심을 사기 위해 스룹바벨 성전을 대대적으로 증축하고 화려하게 꾸몄습니다. 이를 '헤롯 성전'이라고 부릅니다. 외형적으로는 매우 웅장했지만, 안타깝게도 당시 성전은 종교 지도자들의 부패와 형식주의로 인해 본래의 의미를 많이 잃어버린 상태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성전을 보시고 안타까워하시며 정화하시는 모습을 보여주셨습니다.

    “기록된 바 내 집은 기도하는 집이라 일컬음을 받으리라 하였거늘 너희는 강도의 소굴을 만드는도다 하시니라” (마태복음 21:13)

    예수님은 성전이 더 이상 하나님을 만나는 거룩한 장소가 아니라, 인간의 욕심과 위선이 가득한 곳으로 변질된 것을 질타하셨습니다. 그리고 이 헤롯 성전 역시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고 무너질 것이라고 예언하셨는데 (마태복음 24:2), 이 예언은 주후 70년 로마 군대에 의해 예루살렘이 함락되면서 그대로 이루어졌습니다.

    4. 전환점 : 예수 그리스도, 참된 성전

    성전의 파괴는 유대인들에게 엄청난 충격이었지만, 성경은 이미 새로운 성전의 시대를 예고하고 있었습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 자신이 참된 성전이 되신다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 유대인들이 이르되 이 성전은 사십육 년 동안에 지었거늘 네가 삼 일 동안에 일으키겠느냐 하더라 그러나 예수는 성전된 자기 육체를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 (요한복음 2:19-21)

    예수님께서는 헤롯 성전을 헐면 자신이 사흘 만에 다시 세우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람들은 건물을 두고 하신 말씀으로 이해했지만,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실 자신의 몸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 이제 하나님을 만나는 길은 더 이상 예루살렘의 특정 건물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열리게 되었습니다. 예수님 자신이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유일한 중보자이자, 하나님의 임재가 온전히 거하는 참된 성전이 되신 것입니다.

    5. 확장 : 성령의 전, 우리 몸과 교회

    예수님의 승천 이후, 성령 강림 사건은 성전의 의미를 더욱 확장시켰습니다. 이제 하나님의 영, 즉 성령께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모든 성도 안에 거하시게 되었습니다.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 자신의 것이 아니라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고린도전서 6:19-20)

    이 말씀은 놀라운 진리를 선포합니다. 이제 우리 각자의 몸이 바로 '성령의 전', 즉 하나님이 거하시는 성전이라는 것입니다! 더 이상 특별한 건물이나 장소에 가야만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성령께서 내주하시는 우리 자신이 바로 움직이는 성전, 살아있는 성전이 된 것입니다. 이는 우리가 얼마나 존귀한 존재이며, 우리의 삶을 얼마나 거룩하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깊은 깨달음을 줍니다.

    뿐만 아니라,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성도들의 공동체, 즉 교회 또한 하나님의 성전이라고 말합니다.

    “너희도 성령 안에서 하나님이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느니라” (에베소서 2:22)
    “너희는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계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 (고린도전서 3:16)

    개개인의 성도들이 성령의 전이듯, 이들이 함께 모여 이루는 교회 공동체 역시 하나님께서 거하시는 거룩한 성전입니다. 교회는 건물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여 서로 연결되고 함께 세워져 가는 유기적인 공동체입니다. 이 공동체 안에 하나님께서 임재하시고, 이 공동체를 통해 세상에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십니다.

    6. 완성 : 새 하늘과 새 땅, 하나님 자신이 성전

    성전 이야기의 마지막은 요한계시록에 나타난 새 하늘과 새 땅에서 완성됩니다. 놀랍게도 새 예루살렘 성 안에는 성전이 보이지 않습니다.

    “성 안에서 내가 성전을 보지 못하였으니 이는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와 및 어린 양이 그 성전이심이라” (요한계시록 21:22)

    궁극적으로 완성될 하나님 나라에서는 더 이상 어떤 건물이나 매개체로서의 성전이 필요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 아버지와 어린 양 예수 그리스도께서 직접 자기 백성과 함께 거하시며, 그분 자신이 성전이 되시기 때문입니다. 이는 하나님과의 완전하고 직접적인 교제, 그 어떤 가림막도 없는 온전한 임재의 상태를 의미합니다. 구약의 성막에서 시작된 성전의 개념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전환점을 맞고, 성령 안에서 우리 몸과 교회로 확장되었다가, 마침내 하나님 자신과의 온전한 연합으로 완성되는 것입니다.

    결론 : 오늘, 우리는 살아있는 성전입니다

    성경에서 '성전'의 의미는 이처럼 역동적으로 변화하고 심화되어 왔습니다. 시작은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는 유형의 건물(성막, 솔로몬 성전 등)이었지만,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그 의미는 전환점을 맞이했습니다. 이제 성전은 더 이상 특정 장소가 아니라, 십자가와 부활로 구속의 길을 여신 예수 그리스도 자신입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 성령께서 내주하시는 우리 각자의 몸과 성도들의 공동체인 교회가 바로 오늘날의 살아있는 성전입니다.

    이 진리는 우리에게 큰 위로와 동시에 거룩한 책임감을 줍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거하신다는 사실은 우리가 얼마나 존귀하고 사랑받는 존재인지를 깨닫게 합니다. 동시에, 우리의 몸과 삶을 통해, 그리고 우리가 속한 교회 공동체를 통해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영광을 드러내야 할 책임이 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오늘, '나는 하나님의 성전이다'라는 사실을 다시 한번 마음에 새기며, 우리의 말과 행동, 생각 하나하나가 하나님께서 기뻐 거하실 만한 거룩한 산 제사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우리의 삶과 교회가 이 땅에서 하나님의 임재를 보여주는 참된 성전으로 굳건히 서 가기를 기도합니다.



    성전을 청결케 하신 예수

    예루살렘 성전은 유대교의 예배와 삶의 중심이었다. 성전은 이스라엘 역사를 통해서 백성들이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고 제사를 드리는 처소였다. 그런데 예수 당시 성전은 율법주의에 빠진 이스라엘이 속죄를 위하여 타성적으로 제사를 드리기 위해 제물을 사고 파는 종교적 장사터로 변질됐다. 성전은 경건의 영과 헌신의 정신 없이 단지 형식적인 율법적 제사를 드리기 위하여 각종 번제물을 사고 파는 장사터로 변모하였다. 예수는 이 사실을 보고 진노하셨고 성전을 청결케 하신 것이다. 그런데 당시 제사장 신분도 아니고 갈릴리에서 올라온 무명 랍비였던 예수의 성전 청결은 그의 메시아 의식에서 바르게 조명될 수 있다. 예수께서 성전 청결시에 하신 말씀 -이 성전을 허물면 사흘 만에 짓겠다- 은 나중에 예수가 산헤드린에서 재판을 받을 때 성전 모독의 죄목으로 고발된다.

    구약의 성전 : 가시적 성전

    구약 출애굽 광야시절 하나님은 장막에서 그의 백성들을 만나셨다. 장막의 지성소는 하나님의 임재의 처소였고, 가장 거룩하였다. 성소에서는 속죄물을 바침으로써 백성들의 죄가 속함을 받았다. 지성소에는 대제사장이 1년에 한 번씩 들어가 희생의 제물을 바침으로써 자신과 백성들의 죄를 속죄하였다. 성막에는 하나님의 법궤와 만나와 아론의 지팡이가 진설(陳設)되었다. 성막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였다. 모세는 이 성막에서 하나님을 대신하여 백성들을 만났다.

    이스라엘이 약속의 땅으로 들어간 후에는 솔로몬 왕에 이르러 비로소 예루살렘 성전이 건립된다. 이 솔로몬 성전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게 된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의 율법을 지키지 않음으로 이 성전은 바벨론에 의하여 훼파되고 하나님의 전(殿)의 집기들은 바벨론으로 옮겨가게 된다. 구약 역사서인 역대하서는 이 사실을 기록하고 있다: “여호야김이 왕위에 오를 때에 나이가 이십오세라. 예루살렘에서 십일년 동안 다스리며 그의 하나님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하였더라.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이 올라와서 그를 치고 그를 쇠사슬로 결박하여 바벨론으로 잡아가고, 느부갓네살이 또 여호와의 전 기구들을 바벨론으로 가져다가 바벨론에 있는 자기 신당에 두었더라”(대하 36:5-7). 그리고 다니엘서 서문에 이 사실이 기록되어 있다: ”유다 왕 여호야김이 다스린지 삼 년이 되는 해에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이 예루살렘에 이르러 성을 에워쌌더니, 주께서 유다 왕 여호야김과 하나님의 전(殿) 그릇 얼마를 그의 손에 넘기시매 그가 그것을 가지고 시날 땅 자기 신들의 신전에 가져다가 그 신들의 보물 창고에 두었더라”(단 1:1-2). 그리하여 무너진 성전은 70년 후에 에스라와 학개와 스룹바벨이 바벨론에서 귀환하여 보잘것 없는 모습으로 복구되고, 헤롯 시대에 와서 성전은 다시 확장 신축된다.

    성전 청결

    복음서 저자 요한은 복음서 앞부분에 예수의 성전 청결을 기록하고 있다. 다른 공관복음서에서는 복음서 끝부분에 기록되고 있는데, 요한복음에서는 성전 청결이 가나 혼인 잔치와 같이 복음서 서두에 놓여 있다. 성전 되신 예수의 메시아성을 강조하려는 저자의 편집 의도가 부각되어 있다. 유대인의 유월절 절기에 예수는 예루살렘에 올라 가신다. 성전은 내뜰과 외뜰이 있다. 외뜰은 내뜰로 들어가는 것이 금지된 이방인 방문자들에게 열려 있었다. 아브라함의 하나님을 경배하러온 이방인 경외자들은 외뜰에서 경배해야만 했다. 이방인 경외자들은 방문시 히브리 제사장을 통해서 하나님의 약속을 받도록 도움을 받았다. 그래서 이사야는 예언하였다: “내 집은 만민의 기도하는 집이라고 일컬어지게 될 것이다”(사56:7).

    그런데 시간이 흐름에 따라서 성전은 기도의 집에서 종교적 장사터로 변질돼 갔다. 짐승들은 성전에서 제사를 드릴 때 희생제물로 사용되었다. 짐승들은 제사드리는 자들에게 상품처럼 팔렸다. 그런데 이것이 관례가 되어 버림으로써 하나님의 전(殿)은 장사터로 변질된다. 외뜰이 파는 짐승으로 채워져서 이방인들이 하나님을 경배할 공간까지 빼앗았다. 예수는 “성전 안에서 소와 양과 비둘기 파는 사람들과 돈 바꾸는 사람들이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노끈으로 채찍을 만드사 양이나 소를 다 성전에서 내쫓으시고 돈 바꾸는 사람들의 돈을 쏟으시며 상을 엎으신다”(요 2:14-15). 그리고 비둘기 파는 사람들에게 이르신다: “이것을 여기서 가져가라. 내 아버지의 집으로 장사하는 집을 만들지 말라”(요 2:16).

    이러한 예수의 성전 청결을 요한은 다음과 같이 해석한다: “주의 전을 사모하는 열심이 나를 삼키리라”(요 2:17). 요한과 제자들은 이 사건을 통하여 예수의 메시아적 사명에 관하여 언급하고 있다. 복음서 저자 마태는 이 성전을 청결한 예수의 행위가 나중에 예수를 십자가 죽음에 이르게 한 고발거리를 제공한 것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예수가 나중에 예루살렘에서 체포되어 공회에서 재판을 받게 되었을 때 두 사람이 와서 성전 청결시(時) 예수가 한 말을 고발하고 있다: “이 사람의 말이 내가 하나님의 성전을 헐고 사흘 동안에 지을 수 있다 하더라”(마 26:61). 유대인들의 사고에 의하면 성전은 하나님의 집이기 때문에 성전을 허문다는 것은 하나님의 이름을 손상하는 것이며, 참람의 죄를 짓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예수의 메시아 의식

    유대인들은 예수의 성전 청결에 대하여 항의하면서 이에 대한 표적을 보이라고 요구한다: “네가 이런 일을 행하니 무슨 표적을 우리에게 보이겠느냐.”(요 2:18). 이에 대하여 예수는 대답한다: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요 2:19).

    이 성전 청결은 예수의 메시아 의식과 관련하여 이해될 수 있다. 당시 제사장 신분도 아니고 변두리 지역인 갈릴리에서 올라온 무명 랍비에 불과한 예수가 예루살렘 성전 청결을 시도한 것은 그의 메시아적 자의식에서 나온 것이다. 성전 청결은 선지자적 표적 행위 이상의 것이었다. 우리는 구약의 전통에서 이사야나 에스겔 등 예언자들에게서 타락한 제의(祭儀)에 대한 비판적 예언을 찾아 볼 수 있다. 그런데 랍비 예수가 몸소 채찍을 들고 성전을 청결하게 하였다는 것은 예언자적 비판을 넘어선 역사적 예수에게서만 찾아 볼 수 있는 독특한 행위이다. 이것은 메시아적 표적 행위였다.

    복음서 저자 요한은 이러한 예수의 메시아적 자의식을 “주의 전을 사모하는 열심이 나를 삼키리라”는 구약 시편 69장 9절의 말씀을 인용하여 설명하고 있다. 예수는 장사터로 변한 성전의 불결해진 모습을 보면서 성전 자체가 되시는 자신의 몸을 청결케 하여야 한다는 성전(聖殿)사모의 열정을 느꼈을 것이다. 예수의 인성이 그 안에 계시는 신성을 느끼고 있는 것이다. 그의 몸인 새로운 영적 성전을 지으시기 위하여 돌로 지어지고 의식(儀式)으로 집전되는 옛 성전을 헐겠다는 것이다. 이러한 그의 말씀에는 그의 메시아적 사역의 핵심 사상이 들어 있다.

    성전에서 사고 파는 행위를 금지한 이유는 당시 성전 제사가 타락한 것을 지적할 뿐 아니라 성전 제사가 자신이 몸으로 드릴 종말론적 제사에 의하여 능가될 것을 예표하신 것이다. 또한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만에 짓겠노라”는 예수의 말씀은 메시아로서의 자신의 대속적 죽음을 촉발하게 하는 의도가 담겨 있는 말이었다. 예수는 자신의 죽음이 무엇보다도 이스라엘의 죄를 속하고 그들을 하나님께 화해시키는 진정한 의미와 목적을 종말론적으로 성취한다고 생각했던 것이다(김세윤, “예수와 성전.” 『예수와 바울』, 참말, 1993, 119-165 ).

    신약의 성전 : 예수의 몸

    유대인들은 예수의 이 말씀 -내가 삼일 만에 이 성전을 지으리라- 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예수를 힐난한다: “이 성전은 사십육 년 동안에 지었거늘 네가 삼 일 동안에 일으키겠느냐”(요 2:20). 예수의 이 말씀은 자신의 대속적 죽음을 통해서 새 성전을 지으실 것을 공포하신 것이다.

    헤롯 왕은 주전 20년/19년에 화려한 성전 확장공사를 시작하여 실질적으로는 성전을 새로이 건축하였다. 그러므로 이 사실을 아는 유대인들에게 예수의 말씀은 전혀 이해가 되지 않는 허튼 소리가 되어 버린 것이다. 그러나 복음서 저자 요한은 “삼일 만에 성전을 일으키리라”는 예수의 말씀을 신령하게 해석하고 있다: “그러나 예수는 성전된 자기 육체를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후에야 제자들이 이 말씀하신 것을 기억하고 성경과 예수께서 하신 말씀을 믿었더라”(요 2:21-22).

    이 성전 청결은 예수의 십자가와 부활 사건과의 연관 속에서만 바르게 해석될 수 있다. 복음서 저자 요한은 성전이란 예수의 몸이라고 말하고 있다. 유대인들은 성전인 예수를 헐어 버리고자 했다. 말하자면, 성전이신 예수를 죽이고자 했다. 몸을 지니신 예수는 십자가 상에서 돌아가셨다. 그러나 그는 장사된지 사흘 만에 다시 사셨다. 대속적 죽음을 통해서 예수는 그의 몸으로 새로운 성전을 지으신 것이다. 몸을 지닌 예수는 부활하신 후, 성령의 임재 안에서 새로운 성전이 되신다. 이제 신령한 성전이신 예수(교회)는 우리가 하나님 만나는 처소가 된다.

    성도의 몸인 성전

    역사적 예수는 제자들에게 다른 보혜사인 진리의 영을 보내어 주겠다고 약속하였다. 복음서 저자인 요한은 예수의 말씀을 잘 기록해 주고 있다: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리니, 그는 진리의 영이라. 세상은 능히 그를 받지 못하나니 이는 그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라. 그러나 너희는 그를 아나니 그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요 14:16-17). 예수가 보내실 다른 보혜사란 희랍어 ‘파라클레토스’로서 “변호사/조력자/ 원조자”를 의미한다. 다른 보혜사는 위로자이다. 예수는 그가 부활하신 후에 위로자인 성령을 보내어 주시겠다고 하신 약속에 따라서 오순절 이후에 믿는 자의 마음 속에 위로자 성령을 보내어 주셔서 신자들의 마음 속에 내주하고 계신다.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를 모신 신자들의 몸이 하나님의 성전이라고 하였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교회 신자들에게 보이는 성전이 아니라 성령의 전에 관하여 말하고 있다: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 자신의 것이 아니라”(고전 6:19). 신자의 몸이 성령의 전인 것은 “주와 합하는 자는 한 영”(고전 6:17)이기 때문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영이 신자의 마음 속에 인격적으로 내주하기 때문이다.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고전 6:20)

    여기서 사도 바울은 보이지 않는 교회를 하나님의 성전이라고 말하고 있다. 오늘날 이스라엘의 예루살렘에 가보면 솔로몬의 성전도 헤롯의 성전도 더 이상 남아있지 않다. 예수의 성전 청결 사건 이후 40년 만인 주후 70년, 역사적으로 예루살렘 성전은 로마군에 의하여 훼파된다. 그 후로 돌로 지어진 성전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게 된다. 옛날 성전 자리에 남아 있는 것은 이슬람이 세운 황금 성전 모스크이다. 보이지 않으신 하나님은 더 이상 가시적 성전 속에 계시지 않으시다는 것을 말해준다. 그러나 기독교 복음의 전파를 통하여 복음 자체이신 그리스도는 신자들의 마음 속에 영으로 내주하심으로써 성전을 이루고 계신다.

    새 하늘과 새 땅의 성전

    요한복음의 저자인 요한은 그의 계시록에서 다시 성전을 언급하고 있다. 여기서 요한은 새 하늘과 새 땅에서 이루어지는 성전에 관하여 언급하고 있다. 요한은 종말론적으로 다가오는 새 하늘과 새 땅의 비전을 본다: “또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보니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이 없어졌고 바다도 다시 있지 않더라. 또 내가 보매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이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니 그 준비한 것이 신부가 남편을 위하여 단장한 것 같더라”(계 21:1-2). 이 종말론적인 새 하늘과 새 땅에는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이 하늘에서 지상으로 내려온다. 그리하여 보이지 않는 하나님은 인간 가운데 거하신다. 하나님이 거처를 인간의 거처 가운데 정하신다: “내가 들으니 보좌에서 큰 음성이 나서 이르되 보라 하나님의 장막이 사람들과 함께 있으매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계시리니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은 친히 그들과 함께 계셔서”(계 21:3).

    종말론적 현실에서 새 예루살렘 안에 성전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요한은 증언한다: “성 안에서 내가 성전을 보지 못하였으니 이는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와 및 어린 양이 그 성전이심이라”(계 21:22). 하나님과 어린 양 그리스도가 성전이시기 때문이다. 해와 달도 필요없다, 하나님과 어린 양 그리스도가 새 하늘과 새 땅의 등불이 되시고 하나님의 영광이 온 누리에 편만하기 때문이다: “그 성은 해나 달의 비침이 쓸 데 없으니 이는 하나님의 영광이 비치고 어린 양이 그 등불이 되심이라”(계 21:23).

    종교의 완성으로서 예수 그리스도

    옛 예루살렘 성전이나 신약의 교회당은 하나님의 임재의 처소였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신 이후 그의 성령을 보내어 주신 이래(以來) 하나님은 이제 그의 성도들의 마음 속에 내주하신다. 그러나 바울은 아직도 우리는 하나님을 희미하게 본다고 말했다: “우리가 지금은 거울로 보는 것 같이 희미하나 그 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 지금은 내가 부분적으로 아나 그 때에는 주께서 나를 아신 것 같이 내가 온전히 알리라”(고전 13:12). 세상의 종말에 이르러 우리는 하나님을 얼굴과 얼굴을 대면하여 보며, 주님이 우리를 아신 것 처럼 우리도 주님을 알게 된다. 이 장면을 계시록의 저자 요한은 계시록 21장에 환상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새 하늘과 새 땅에는 성전이 없다: “성 안에서 내가 성전을 보지 못하였으니 이는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와 및 어린 양이 그 성전이심이라”(계 21:22). 성전이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종교는 완성되기 때문이다. 성전이란 하나님의 임재의 상징이다. 그곳에서 하나님의 백성들은 하나님을 만난다. 그 때 하나님의 장막이 인간들 가운데 계셔서 하나님이 친히 인간들의 하나님이 되실 것이다. 그 때 우리는 하나님을 얼굴과 얼굴을 대면하여 보게 될 것이다. 



    성경 속 성전

    성경 속 성전의 역사는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는 장소로서, 이스라엘 백성과의 관계에서 중심적인 역할을 합니다. 성전은 시대별로 다른 모습과 기능을 가지고 있으며, 그 역사를 간략하게 정리해 봤습니다. 시대와 특징은 학자마다 견해가 있으니 대략적인 내용들은 거의 일치합니다.

    목차: 성경 속 성전의 역사

    1. 모세의 성막 (광야 시대, 약 B.C. 1446~1400)
    2. 솔로몬의 성전 (통일왕국 시대, 약 B.C. 960~586)
    3. 스룹바벨의 성전 (바벨론 포로 귀환 이후, 약 B.C. 516~20)
    4. 헤롯 성전 (신약 시대, 약 B.C. 20~A.D. 70)
    5. 영적 성전 (성령 강림 이후, A.D. 1세기 이후)
    6. 천상 성전 (종말과 새 하늘과 새 땅, 미래의 완성)

    성경속 성전에 대한 대략적인 이해

    먼저 성경 속에서 어떤 성전이 있었는지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가정 먼저는 광야에서 모세에 의해 만들어진 성막이 있습니다. 성막을 천과 가죽으로 임시 텐트로 만들어져 있기 때문에 '성막'이라고 표현합니다. 이후 솔로몬이 정신적으로 돌과 나무로 성전을 만듭니다. 이후의 모든 성전은 솔로몬 성전터 위에 세워집니다.

    솔로몬 성전은 바벨론에 의해 파괴되고 무너집니다. 후에 스룹바벨에 의해 재건축 됩니다. 이때 스룹바벨의 성전은 솔로몬 성전의 터에 완전히 새롭게 건축되기 때문에 솔로문 성전과는 무관합니다. 이후에 헤롯이 유대를 지배하면서 유대인들의 환심을 사기 위해 초라한 스룹바벨 성전은 화려하게 증축하는데 이것을 '헤롯 성전'이라 부릅니다. 헤롯성전은 기원후 70년경 디토 장군에 의해 유대가 다시 정복되면서 완전히 파괴되고 이후 회복되지 않습니다. 현재 남아 있는 성전은 이전의 헤롯 성전의 벽 일 부분입니다.

    • 모세의 광야 성막
    • 솔로몬의 성전
    • 스룹바벨의 성전
    • -헤롯 성전(증축)

    이렇게 이해하면 될 것 같습니다. 에스겔이나 예루살렘 나오는 성전은 상징와 상상 속의 성전입니다.

    1. 모세의 성막 (광야 시대)

    • 시대: 출애굽 후 광야 생활 (~기원전 1400년경)

    특징

    • 하나님이 모세에게 지시하신 이동식 성전(출애굽기 25-27장).
    • 성막은 지성소와 성소로 구분되었으며, 법궤를 보관하는 거룩한 장소로 사용됨.
    •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에서 하나님께 예배하고, 죄를 속죄하기 위한 희생 제사를 드리던 장소.
    • 의미: 하나님이 백성과 함께 거하심을 상징.

    2. 솔로몬의 성전 (통일왕국 시대)

    • 시대: 솔로몬 왕 통치기 (~기원전 960년경)
    • 특징:
      • 다윗이 설계하고 솔로몬이 건축한 이스라엘 최초의 고정된 성전(열왕기상 6장).
      • 성전은 웅장한 규모와 화려한 장식으로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
      • 지성소에 법궤를 두었고, 제사와 예배가 중심이 됨.
    • 파괴: 바벨론에 의해 기원전 586년경에 완전히 파괴됨.
    • 의미: 이스라엘의 국가적 정체성과 하나님께 드리는 중심 예배의 상징.

    3. 스룹바벨의 성전 (바벨론 포로 귀환 이후)

    • 시대: 포로 귀환 이후 (~기원전 516년경)

    특징

    •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온 유대인들이 재건한 성전(에스라 3-6장).
    • 솔로몬 성전에 비해 규모와 화려함이 감소.
    • 여호와께 예배를 드리는 중심지로 복원되었으나, 하나님의 임재에 대한 강력한 상징성은 감소.
    • 의미: 포로 생활에서 회복된 이스라엘 공동체의 믿음과 헌신.

    4. 헤롯 성전 (신약 시대)

    • 시대: 헤롯 대왕 치세 (~기원전 20년경 건축 시작)

    특징

    • 스룹바벨의 성전을 대규모로 확장하고 아름답게 재건.
    • 예수님 시대에 사용되었으며, 유대인의 종교와 정치의 중심지 역할.
    • 예수님은 이 성전에서 가르치고, 상인들을 내쫓으며 정결케 하심(마태복음 21:12-13).
    • 파괴: 로마에 의해 기원후 70년에 완전히 파괴됨.
    • 의미: 예수님의 사역과 연관되며, 성전의 의미가 점차 영적인 차원으로 변화됨.

    5. 영적 성전 (신약 교회와 성도)

    • 시대: 성령 강림 이후 (사도행전 시대)

    특징

    • 예수님의 희생으로 물리적 성전의 역할이 끝나고, 교회와 성도들이 영적 성전이 됨(고린도전서 3:16-17, 에베소서 2:19-22).
    • 성령이 거하는 장소로서의 교회와 성도의 삶 강조.
    • 의미: 하나님과의 관계가 물리적 건물에서 벗어나 믿음과 성령의 임재로 전환.

    6. 천상 성전 (종말론적 성전)

    • 시대: 종말과 새 하늘과 새 땅

    특징

    • 요한계시록에서 언급되는 새 예루살렘에는 성전이 없으며, 하나님과 어린 양이 성전 역할을 함(요한계시록 21:22).
    • 하나님과 인간이 직접 교제하는 상태.
    • 의미: 성전의 궁극적 완성은 하나님과의 완전한 연합.

      결론

    성전의 역사는 하나님의 임재와 인간과의 관계를 상징적으로 보여줍니다. 시대마다 형태와 기능은 다르지만, 중심 메시지는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거하심과 그들에게 예배와 교제를 요청하시는 하나님의 뜻을 나타냅니다. 오늘날 성도는 성령의 거처로서 영적 성전의 역할을 감당하며, 종말에는 하나님과의 완전한 연합을 이루게 될 것입니다.



    당신의 몸은 하나님의 성전(고린도전서 6:19)

    바울 사도의 편지 중 하나인 고린도전서는 초대 교회 성도들의 다양한 문제들에 대한 그의 가르침을 담고 있습니다. 그중에서도 오늘 우리가 함께 묵상할 구절은 고린도전서 6장 19절입니다. 이 짧은 구절 안에 담긴 깊고 놀라운 메시지를 함께 살펴보고자 합니다.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 자신의 것이 아니라

    이 구절은 우리에게 두 가지 중요한 사실을 분명하게 알려줍니다. 첫째, 우리의 몸은 우리 안에 계신 성령님의 전이라는 것입니다. 둘째, 우리는 우리 자신의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속한 존재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몸, 성령님의 전

    바울 사도는 고린도 교인들에게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라고 묻습니다. 이 질문은 당시 고린도 사회에 만연했던 잘못된 성 관념과 방탕한 생활에 대한 강력한 도전이었습니다. 고린도 사람들은 몸을 그저 쾌락을 위한 도구 정도로 여기는 경향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바울은 그들의 몸이 단순히 물질적인 존재가 아니라, 거룩하신 성령님이 거하시는 성전이라고 선언합니다.

    성전은 예로부터 하나님이 특별하게 임재하시는 거룩한 장소를 의미했습니다. 구약 시대에는 성막과 성전이 하나님의 영광이 머무는 곳이었으며, 백성들은 그곳에서 하나님께 예배를 드렸습니다. 신약 시대에 이르러 바울은 놀랍게도 우리의 몸이 바로 그 성전과 같다고 말합니다. 이제 하나님의 영은 건물이나 특정한 장소가 아닌,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우리 안에 거하신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 몸에 대한 우리의 생각을 완전히 바꾸어 놓아야 할 중요한 진리입니다. 우리는 흔히 몸을 단순히 '나'를 담는 그릇이나, 혹은 필요에 따라 마음대로 사용해도 되는 대상으로 여기기 쉽습니다. 하지만 성경은 우리의 몸이 성령님의 거룩한 처소라고 말씀합니다. 마치 성전이 함부로 다루어져서는 안 되는 존귀한 곳인 것처럼, 우리의 몸 또한 존중하고 거룩하게 지켜야 할 책임이 우리에게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먹고 마시는 것, 우리가 하는 행동, 우리가 생각하는 것까지, 우리의 몸을 통해 드러나는 모든 것은 성령님의 전으로서 합당해야 합니다. 우리의 몸을 더럽히거나 훼손하는 모든 행위는 성령님을 모독하는 것과 같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우리의 몸을 건강하게 유지하고, 정결하게 보존하며,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도구로 사용해야 합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것이 아니라

    바울은 이어서 "너희는 너희 자신의 것이 아니라"라고 단언합니다. 이 말씀은 우리가 우리 스스로를 소유하고 있는 독립적인 존재가 아니라, 하나님께 속한 존재라는 사실을 강조합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피조물이며,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값을 치르고 사신 하나님의 소유입니다.

    우리가 우리 자신의 것이 아니라는 사실은 우리의 삶의 목적과 방향을 새롭게 정의합니다. 우리는 더 이상 우리 자신의 욕망과 만족을 위해서만 살아갈 수 없습니다. 우리의 삶의 주인은 바로 하나님이시며, 우리는 그분의 뜻을 따라 살아가야 할 의무가 있습니다.

    마치 종이 주인의 명령에 순종해야 하는 것처럼, 우리 또한 우리의 주인이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해야 합니다. 우리의 시간, 재능, 에너지, 심지어 우리의 몸까지도 모두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사용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우리 자신의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을 때, 우리는 비로소 진정한 자유와 평안을 누릴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삶의 짐을 우리 스스로 지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가장 잘 아시고 사랑하시는 하나님께 맡길 수 있기 때문입니다.

    메시지의 깊이

    고린도전서 6장 19절은 단순히 개인의 도덕적인 삶에 대한 권면을 넘어, 우리 존재의 근본적인 의미를 드러내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되었고,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구원받았으며, 성령님의 내주하심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우리의 몸은 이 놀라운 구원 역사의 증거이며, 하나님과 우리를 연결하는 거룩한 통로입니다.

    이 구절을 묵상하면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질문들을 스스로에게 던져볼 수 있습니다.

    • 나는 나의 몸을 성령님의 전으로서 존중하고 있는가?
    • 나는 나의 몸을 통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있는가?
    • 나는 나의 삶의 주인이 누구라고 생각하는가?
    • 나는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며 살아가고 있는가?

    이러한 질문들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하고 답을 찾아가는 과정 속에서, 우리는 고린도전서 6장 19절이 우리에게 전하는 메시지의 깊이를 더욱 깨닫게 될 것입니다.

    결론

    우리의 몸은 단순한 육체의 덩어리가 아니라, 거룩하신 성령님이 거하시는 하나님의 성전입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값진 소유입니다. 이 놀라운 진리를 기억하며, 우리의 몸과 삶 전체를 하나님께 온전히 드리는 삶을 살아가도록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성전의 의미

    내 안에 깃든 고요한 숨결
    성령의 빛으로 채워진 공간
    나 홀로 존재하는 듯 했으나
    주님의 거처, 거룩한 성전이었네

    내 뜻대로 움직이던 발걸음
    나만을 위해 쓰여진 시간들
    이제는 주님 향한 예배의 길로
    주님의 영광 드러내는 도구로

    나의 것이라 여겼던 이 몸
    주님의 사랑으로 빚어진 작품
    더 이상 나만의 소유가 아닌
    영원한 생명 담는 존귀한 성전







    서론: 우리의 몸은 누구의 것인가?

    세상은 "내 몸은 내 것"이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성경은 우리의 몸이 하나님의 것이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 위해 살아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고린도전서 6:19-20은 우리의 몸이 성령의 전이며, 값으로 산 것이므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한다고 말씀합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몸이 성령의 전이라는 의미는 무엇일까요?
    우리는 어떻게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을까요?
    함께 살펴보겠습니다.


    본론: 하나님의 성전인 우리의 몸

    1️⃣ 우리의 몸은 성령의 전이다

    성경은 우리의 몸이 성령이 거하시는 성전이라고 말씀합니다.

    📖 에베소서 2:22
    *"너희도 성령 안에서 하나님이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느니라."*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거하신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임재를 존중하며 살아야 합니다.
    우리가 성령의 전으로서 깨끗하고 거룩한 삶을 살아갈 때, 하나님께서 기뻐하십니다.


    2️⃣ 우리는 값으로 산 존재이다

    우리의 몸은 우리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 값을 치르고 사셨기 때문입니다.

    📖 베드로전서 1:18-19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조상이 물려준 헛된 행실에서 대속함을 받은 것은 은이나 금 같이 없어질 것으로 된 것이 아니요, 오직 흠 없고 점 없는 어린양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된 것이니라."*

    예수님의 보혈로 인해 우리는 구원받았고, 이제는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야 합니다.


    3️⃣ 우리의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자

    우리는 어떻게 우리의 몸을 통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을까요?

    📖 로마서 12:1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

    깨끗한 삶을 유지하세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행동을 하세요.
    우리의 몸을 주님을 섬기는 도구로 사용하세요.


    결론: 하나님을 위해 살아가자

    고린도전서 6:19-20은 우리의 몸이 성령의 전이며, 하나님께서 값으로 사셨으므로 우리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우리의 몸은 성령이 거하시는 성전이다.
    우리는 예수님의 보혈로 값 주고 사신 존재이다.
    우리의 몸과 삶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한다.

    혹시 지금 나의 몸과 삶을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 어렵다고 느껴지시나요?
    하나님은 우리의 작은 결단도 기쁘게 받으십니다.

    💡 "주님, 저의 몸과 삶을 온전히 주님께 드립니다!"





    토비아(Tobias)와 토비트(Tobit)

    구약성서 외경의《토비트서(Book of Tobit)》중의 인물. 토비트(Tobit)는 B.C. 8세기경 납탈리 지파의 히브리인으로 아시리아인들의 임금 살만에세르 시대에 니네베로 유배되었다. 이곳은 북왕국 이스라엘이 멸망한 후 이스라엘 백성이 귀양을 오는 곳이다.

    성서에 토비트는 평생토록 진리와 선행의 길을 걸었으며, 이국으로 추방당해서도 신앙을 지킨 인물로 묘사되었다. 토비트는 지나가는 뜨거운 참새의 똥에 눈을 맞아 시력을 완전히 잃고 말았다. 그는 신에게 도움을 청하는 기도를 올린다. 기도에 대한 답으로 하느님은 대천사 라파엘을 지상에 보낸다.

    토비트는 죽음이 가까워짐을 느끼고, 아들 토비아(Tobias)를 불러 예전에 메디아의 라게스(Ragae)에 사는 친척, 가브리의 아들 가바엘에게 맡겨 두었던 돈을 받아오도록 시킨다. 늙은 토비트는 아들의 여행길에 동행할 사람을 구해오도록 한다. 토비아는 대천사 라파엘을 만나는데, 라파엘은 자신이 천사임을 숨긴다. 토비트와 안나에게 작별인사를 한 후, 둘은 길을 떠난다.

    길을 가던 두 사람은 첫날밤 티그리스 강에서 야영을 하다가 토비트의 발을 삼키려고 하는 이상한 물고기를 만나게 된다. 라파엘은 그 물고기를 잡아 쓸개와 염통과 간을 빼내어 잘 간수하도록 한다. 이후 이 장기들은 악마를 퇴치하고 눈병을 치료하는데 쓰인다.

    메디아에 들어선 이들은 토비트의 먼 친척인 라구엘(Raguel)의 집에 묵는다. 라구엘의 딸 사라(Sara)는 일곱 번 결혼 했지만, 결혼 첫날 밤 매번 악마가 남편을 죽였다. 라파엘은 토비아에게 사라와 결혼하라고 말한다. 토비아는 일말의 공포감이 없지는 않았으나 라파엘이 시키는 대로 결혼한다. 결혼 첫날밤, 그가 물고기의 염통과 간을 태우자 신부를 괴롭히던 악마는 달아난다.

    토비아와 사라는 니네베로 돌아오고, 토비아는 물고기에서 꺼낸 쓸개즙으로 아버지의 시력을 회복시킨다. 토비트의 이야기는 고난 가운데서도 성서의 가르침에 충실한 자에게 하느님의 복이 내린다는 지혜 문학 전통을 본받은 대중적 설화이다.

    서양미술에서는 토비아와 토비트의 이별, 토비아와 라파엘의 여행, 토비아의 결혼, 토비아의 귀환 등의 장면이 묘사되며, 그중에서도 개를 데리고 야외를 대천사 라파엘과 같이 걷는 여행 장면이 많이 그려졌다. 폴라이우올로의 《토비아와 라파엘》(1465)에서는 여장의 토비아가 손에 물고기를 들고, 라파엘의 손에 이끌려서 걸어간다. 또한 렘브란트는 친밀한 정서가 담긴 이야기를 좋아해, 생애에 6점의 토비트 그림을 제작했는데 그중에서도《토비트와 처 안나와 염소》(1626), 《아들 토비아에 치료받는 눈 먼 토비트》(1636), 라파엘이 최후에 모습을 나타내서 토비아의 곁에서 사라지는 장면을 그린《토비트와 안나 곁에서 날아가는 천사 라파엘》(1637)이 유명하다.

    토비아와 물고기, 4세기경, 유리, 코닝 유리박물관, 뉴욕

    토비아와 천사, 1220, 석조, 샤르트르 대성당 북측문

    Rembrandt (1606~1669), 눈먼 토비트 (detail), 1651, 에칭화

    Rembrandt (1606~1669), 토비트와 처 안나와 염소, 1626, 염소를 훔쳤다고 토비트에게 질책당하는 안나

    피에로 델 폴라이우올로, 토비아와 천사, 1465, 목판, 187 x 118 cm

    페루지노, 대천사 라파엘과 어린 토비아, 1499, 목판에 유채, 126 x 58 cm

    조반니 바티스타 카라촐로, 토비아와 천사, 1615

    Jan Steen(1625~1679), 사라와 토비아의 결혼, 1668-70

    쿠에틴 마사이스, 아버지를 치료하는 토비아, 1550

    베르나르도 스트로치, 아버지를 치료하는 토비아, 1635

    Rembrandt (1606~1669), 토비아의 가족을 떠나는 대천사, 1637, 68 x 52 cm






    하나님의 성전인 우리의 몸(고전 3:16-17)

    16 너희는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계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 

    17 누구든지 하나님의 성전을 더럽히면 하나님이 그 사람을 멸하시리라 하나님의 성전은 거룩하니 너희도 그러하니라.

    맹인이 된 토비트

    1. 에살하똔왕 때에 나는 집으로 돌아 와 내 아내 안나와 아들 토비아를 되찾게 되었다. 과우러절로부터 칠 주간 후에 거룩하게 지키는 우리의 명절 즉 오순절에 나를 위하여 큰 잔치가 베풀어져 나는 그 자리에 가 앉았다.

    2. 내 앞에 있는 식탁에는 여러 가지 음식이 즐비하게 놓여져 았었다. 그 때에 나는 아들 토비아에게 이렇게 말하였다. "얘야, 니느웨에 잡혀 온 우리 동포 중에 신심으로 하느님을 공경하는 가난한 사람이 있을 터이니 가서 찾아 내어 이리로 데려 오너라. 그러면 내가 그와 함께 이 음식을 나누도록 하겠다. 네가 돌아 올 때까지 기다리마."

    3. 토비아는 이 말을 듣고 우리 동포 중에 가난한 사람을 찾으러 나갔다가 황급히 돌아 와서 "아버지!"하고 소리를 질렀다. "무슨 일이냐?"하고 묻자 그가 대답하였다. "아버지, 우리 동포 한 사람이 살해되었습니다."

    4. 이 말을 듣고 나는 음식에 손도 대지 않고 벌떡 일어나 뛰쳐 나갔다. 그리고 큰 거리에서 그 시체를 들어다 어떤 헛간에 감추어 두었다. 해가 진 후에 그 시체를 매장할 생각이었다.

    5. 이렇게 시체를 감추어 둔 다음 집에 돌아 와서 몸을 깨끗이 씻고 슬픔에 싸인 채 음식을 먹었다.

    6. 나는 예언자 아모스의 말이 생각나서 울었다. 일찌기 아모스는 베델을 두고 이렇게 말하였던 것이다.

            "너희의 잔치는 변하여 울음바다가 되고

            너희의 모든 노래는 변하여 통곡이 될 것이다."

     

    7. 해가 진 후에 나는 나가서 무덤을 파고 그 시체를 묻었다.

    8. 이웃 사람들은 나를 비웃으며 이렇게 말하였다. "이 사람은 지난번에도 이런 일 때문에 사형감으로 수배되어 도망을 갔었는데 이제 또다시 죽은 사람을 묻어 주다니, 겁이고 뭐고 다 없어진 모양이지?"

    9. 그 날 밤 나는 몸을 깨끗이 씻고 뜰 안으로 들어 가 담 옆에 누워서 잠을 잤다. 너무나도 더워서 얼굴을 가리지 않았다.

    10. 내 옆에 있는 담 위에 참새들이 있는 것을 나는 몰랐다. 그 때에 뜨거운 참새 똥이 바로 내 눈에 떨어져서 내 양쪽 눈에는 흰막이 생기게 되었다. 나는 의사를 찾아 가 치료를 해 보았지만 약을 아무리 발라도 소용이 없었고 내 눈은 그 흰막 때문에 점점 시력이 약해져서 마침내는 시력을 왕전히 잃고 말았다. 이렇게 눈이 먼 채 사 년을 지냈다. 내 모든 친족이 나 때문에 슬퍼하였고 아히칼은 자기가 엘리마이스로 갈 때까지 이 년 동안 나를 돌보아 주었다.

     

    11. 그 때에 내 아내 안나는 여자들의 손으로 할 수 있는 일에 품을 팔았다.

    12. 내 아내는 자기가 일하여 만든 ㅁ루건을 주인들에게 갖다 주고 삯을 받곤 하였다. 디스트로스월 즉 삼월 칠일 내 아내는 자기가 짠 베를 끊어 가지고 그 주인에게 갖다 주었다. 그랬더니 주인은 삯을 다 지불할 뿐 아니라 자기 염소 중에 새끼 염소 한 마리를 주면서 잡아 먹으라고 하였다.

    13. 내 아내가 집으로 돌아 올 떄 그 새끼 염소가 울기 시작하였다. 그래서 나는 아내를 불러 이렇게 말하였다. "이 새끼염소는 어디서 난 거요? 혹 훔친 것은 아니오? 어서 그놈을 주인에게 돌려 주시오. 우리에게는 남의 것을 훔쳐먹을 권리가 조금도 없소."

    14. 그러나 내 아내는 "이것은 품삭에다 덤으로 얹어 받은 것입니다"하고 대답하였다. 그래도 나는 아내를 믿지 못하여 그 염소 새끼를 돌려 주라고 재촉하며 이 일로 인해서 아내를 향하여 얼굴을 붉혔다. 그러자 내 아내는 "당신이 베푼 사선으로 얻은 것이 무엇입니까? 당신이 쌓은 덕행으로 얻은 것은 무엇입니까? 당신이 지금 이 꼴이 되었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은 없습니다"하고 말했다.

     


    외경인 토비트 2장에 이런 기사가 실려 있다고 합니다. 
    토비트라는 사람이 날씨가 너무 더워서 목욕을 하고, 얼굴을 덮지 않고 담 옆에서 잠을 자고 있는데, 새들이 담 위로 날아가다가 뜨거운 똥을 토비트의 눈에 누고 가버려서, 토비트가 양쪽 눈을 잃게 되었다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런데 그 토비트는 그런 것으로 유명한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들이 포로가 되었을 때 이방 민족의 음식을 먹었지만, 그는 단호하게 그런 음식을 거절했던 사람, 즉 자신이 하나님의 사람이라는 절개를 지키고, 자기의 몸을 소중하게 간직했던 경건한 사람으로 유명합니다.

    신을 두려워하며 부유하게 살던 유대인 토비트가 동포의 장례를 도운 죄로 몰락한 후, 실명까지 당해 어렵게 지내고 있었다. 
    가족의 생계는 아내 안나가 어렵게 꾸려가는 중이었다. 
    나중에 토비트는 친구에게 빌려준 돈의 차용증을 찾게 되어, 아들인 토비아에게 이를 받아오도록 한다. 
    토비아는 이들을 돕기 위해 하나님께서 파견한 대천사 라파엘의 도움으로 돈도 돌려받고, 아버지의 실명을 치유할 약도 얻게 되는데다, 악마에게 시달리던 여인을 구해내어 부유한 집안과 결혼까지 하게 된다. 
    결국 고난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잃지않고, 정직하게 살던 토비트는 자신의 재산을 회복하고, 다시 눈을 뜨게 된다는 이야기라고 한다.

    ​렘브란트가 정경도 아니고, 특히 네덜란드에서 믿는 개신교에서는 외경으로 취급하는 토비트의 이야기를 기초로 왜 이렇게 많은 그림을, 그것도 오랫동안 그렸는지는 알 수 없다 (이유가 있겠지만, 자료를 찾지 못했다). 하지만 그는 토비트의 이야기를 많이 그렸다.


    맨 위의 그림은 가난해진 토비트가 집에서 들려오는 양의 매에헤하는 소리에, 혹시 아내가 가난을 견디지 못하고 양을 훔친 것이 아닌가 의심을 하는 장면이다. 실명을 하였기에 상황을 정확히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이 새끼양은 생계에 도움을 받기 위해 아내 안나가 맡아서 키우고 있던 것으로, 아내는 황당한 표정으로 새끼양을 들고, 남편의 의심에 항의를 하고 있다. 이 그림은 렘브란트가 독립하여 자신의 공방을 연지 얼마되지 않는 1626년에 그른 그림이다. 20세의 파릇파릇한 렘브란트가 그린 그림으로, 당시대로 과정되어 보일 정도로 감정이 과하게 보이지만 디테일이 살아있는 그림을 그려냈다.

    아래 두 그림은 가난해진 상황에서 집안에 차분히 앉아있는 토비트와 아내 안나를 그린 그림이다. 아래 세번째 그림은 명상중인 철학자라는 제목으로도 불리우지만, 오른쪽 아래 구석에 그려진 노파의 모습을 안나라고 생각하면 토비트의 그림이 된다.

    맨 아래 그림은 아들이 아버지가 빌려준 돈을 받아오는 과정에서 안내인으로 변신해 아들을 도왔던 대천사 라파엘이 임무를 끝낸 후, 다시 천사로 변신하여 토비트의 가족을 떠나는 장면을 그린 그림이다. 토비트와 아들 토비아는 놀라, 떠나는 대천사를 경배하고 있다. 시어머니 안나 곁에는 이번 퀘스트를 통해 새로 얻게된 토비아의 아내 사라도 함께 손을 모으고 있다. 이 그림은 파리의 루브르 미술관에 소장이 되어 있는데, 그래서인지 상징주의의 대가 오딜롱 르동이 젊은 시절, 이 그림 중 천사가 날고 있는 부분을 모사한 그림이 남아 있다 (이 그림은 현재 암스테르담의 반고흐 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다).

    어찌보면 네 점의 그림이 마치 다른 사람들이 그린 그림처럼 스타일과 디테일이 다른 것은 대가인 렘브란트도 여러차례의 스타일 변화를 겪었음을 볼 수 있는 재미있는 세트의 그림들이다.



     

    구약성경에도 보면 이와 비슷한 기사가 나오는 것을 볼 수 있는데, 바벨론의 포로로 잡혀갔던 다니엘은, 우상에게 바쳐졌던 왕의 진미대신 채소만 먹고서도, 그 나라의 고기를 먹는 소년들보다 더 건강한 몸을 유지했던 기사를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우리는 자신의 몸을 소중하게 간직한 사람들을 귀하게 여깁니다. 

    자신의 몸을 소중하게 여긴 사람이란, 자신의 몸을 깨끗하게 목욕하는 사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몸을 소중하게 간직하고 죄와 더러운 것에 물들지 않는 사람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흔히 나라를 위해 절개를 지켰던 정몽주나, 한 임금을 섬기기 위해 충절을 지켰던 사육신과 같은 사람들을 소중하게 생각하는 것이며, 열녀나 충신을 칭송하는 것입니다. 

    오늘은 본문 말씀을 중심해서 “하나님의 성전인 우리의 몸”이란 제목으로 함께 은혜를 사모하고자 합니다. 부제목으로 “하나님의 성전을 더럽히지 말라”고 잡아보았습니다. 

    사도 바울은 교회를 가리켜, 하나님의 집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의 집인 교회의 터는 예수 그리스도라고 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교회의 유일한 기초라는 것은, 성경에 나타난 일관된 사상입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 이외의 다른 터 위에 세워진 교회는, 이미 교회가 아니라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천하사람 중에, 예수 그리스도 외에 구원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으며, 교회는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값 주고 사신 것이기 때문입니다. 

    교회의 기초는 어떤 사람이나, 조직이나, 철학이나, 그 어떤 것도 될 수 없습니다. 철학도 흔들리는 기초이며, 과학도 불완전한 기초입니다. 그러므로 이 땅위의 인간적이고 세상적인 것에는, 우리의 인생을 마음 놓고 세울만한 반석이 없습니다. 교회의 기초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 한 분 밖에 없다고 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교회의 유일한 기초가 되실 뿐만 아니라, 또한 이 세상 모든 것의 기초가 되신다고 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외에 그 어떠한 터도, 곧 사람에 의해 닦여진 사상이나 업적에 의한 그 어떤 것들도, 참다운 기초가 될 수 없습니다. 소련은 20세기 초 마르크스의 공산주의 사상을 기초로 하여, 레닌이 제정 러시아를 쓰러뜨리고 건설한 공산국가라고 했지요? 한 때는 세계 최초로 우주선을 쏘아 올리며 전 세계를 놀라게 했고, 미국과 경쟁하며 세계를 양분하여 지배하던 초강대국이었습니다. 

    하지만 때가 되자 허망하게 붕괴되고 말았습니다. 소련이라는 거대한 제국을 세웠던 레닌의 동상은 이제 거의 모두 철거되어, 공원 한구석에 거적으로 덮여있는 신세가 되고 말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일찍이 다니엘을 통해 말씀하셨던 것처럼, 인간의 터 위에 세워진 것은 제아무리 강대해 보이는 나라라도, 결국 무너지게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이는 비단 한 나라 뿐만 아니라, 각 사람의 인생에서도 마찬가지라고 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인생의 기초로 삼지 않는 사람들 역시, 제아무리 화려하게 성공한 것처럼 보여도, 결국 때가 되면 무너지게 마련인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인생의 기초로 삼지 않은 자들은, 장차 마지막 심판 날에 자신이 세운 모든 공적이 무너지는 것을 볼 것이며, 그 자신도 영원한 멸망에 처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삶을 그 어떤 다른 기초에 두지 말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에게만 두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만이 죄와 사망을 이기고 부활하사, 우리를 요동치 않게 하실 영원한 반석이 되심을 믿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교회를 가리켜 ‘하나님의 집’이라고 했던 사도 바울은, 오늘 본문에서 교회를 가리켜 ‘하나님의 성전’이라고 하였습니다. 16절에 “너희는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계신 것을 알지 못하느냐?”고 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고리도 교회의 성도들을 향해, 그들이 곧 하나님의 성전이라고 선언하였습니다. 물론 이것은 비단 고린도 교회 성도들에게만 해당되는 말씀이 아니라, 만 세대 모든 성도들에게 해당되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선언은 유대인들에게는 충격 그 자체요, 그들에 대한 정면 도전이 아닐 수 없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성전은 오로지 예루살렘에 있는 돌로 지은 성전 한 곳 이외에는 있을 수 없다고 믿었을 뿐만 아니라, 그곳은 자신들조차도 함부로 접근할 수 없을 만큼 너무나 거룩한 곳이어서, 이방인들은 일정한 한계를 절대로 넘어서는 안 된다고 굳게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유대인들이 이렇게 제한적으로만 성전 접근을 허락하던 이방인들에게, 성전의 출입을 허락한 정도가 아니라, 아예 그들이 성전 그 자체라고 선언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유대인들의 입장에서 보면, 이방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의 성전이라 전파하고 다니는 사도 바울을 가리켜, 절대로 살려둘 자가 아니라고 흥분하며 티끌을 날렸던 것도 무리는 아니었습니다.

    그렇다면 사도 바울은 무슨 근거로, 성도 한 사람 한 사람을 가리켜, 하나님의 성전이라고 말하는 것일까요? 그것은 바로 성도 안에 계시는 성령의 내주하심에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되면, 그 순간 성령께서 각 성도의 심령에 들어와 내주하십니다. 그러므로 성도 한 사람 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전이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성령이 누구십니까? 삼위 하나님 가운데 제 3위시요, 하나님의 영이십니다. 그 때문에 하나님의 영이 내주하시는 성도 역시, 하나님의 성전이 되는 것은 당연한 일인 것입니다. 즉 구약 시대의 성전에 하나님의 영광이 임재하신 것과 같이, 신약 시대에는 하나님의 영이신 성령께서 각 성도 안에 내주하심으로, 각 성도는 하나님의 성전이 된다는 말씀입니다. 그러한 의미에서 각 성도들의 집합체인 교회 역시, 하나님의 성전임에 틀림이 없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이처럼 성도나 교회를 구약의 성전에 비유한 까닭이 무엇입니까? 사도 바울이 성도나 교회를 하나님의 성전에 비유한 것은, 교인들이 나뉘어 분쟁하는 것이 교회를 부패시키고 파괴하는 것이므로, 하나님의 심판을 면치 못할 중대한 죄악임을 경고하기 위함입니다. 율법에 의하면 성전을 더럽히는 자들은 사형에 처하거나, 하나님의 선민 공동체에서 추방하도록 규정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성전을 더럽히는 행위는, 곧 하나님을 모독하고 도전하는 행위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율법은 성전을 더럽히는 자에 대해서는, 사형에 처하거나 선민 공동체에서 추방하도록 규정하고 있습니다. 실제로 성경을 보면 성전을 더럽힌 자들을, 하나님께서 친히 징벌하신 사례가 나옵니다. 예를 들면 하나님은 율법에 지시되지 않은 불로 분향함으로써, 성소를 더럽혔던 나납과 아비후를 즉시 불로 심판하셨으며, 제사장이 아니면서도 스스로 하나님께 제사했던 사울 왕과 웃시야 왕을 심판하기도 하셨습니다. 

    이 모든 일들은 성전을 더럽히는 일이, 얼마나 두렵고 무서운 일인지를 잘 보여줍니다. 이처럼 돌로 지어진 성전을 더럽히는 자에게조차, 엄중한 형벌을 내리도록 규정하신 하나님께서, 영적 성전인 교회 공동체를 더럽히는 자들을 멸하실 것은 너무나 자명한 사실이므로, 분쟁을 그치고 교회를 거룩하게 유지하라는 것이 곧 사도 바울의 교훈인 것입니다. 

    그래서 17절에 “누구든지 하나님의 성전을 더럽히면 하나님이 그 사람을 멸하시리라.”고 했습니다. 특별히 이 말씀은 두 가지 측면에서 오늘날 우리에게 경종을 울립니다. 먼저 하나님의 성전인 교회를 더럽히는 일에 대한 경고가 됩니다. 이미 말씀드린 대로 교회는 하나님의 성전인 성도들의 공동체입니다. 따라서 교회 역시 하나님의 성전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교회를 더럽히면, 하나님의 심판을 피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고린도 교회 안에는 파당을 만들어 분쟁함으로써, 교회를 더럽히고 파괴하는 자들이 있었습니다. 이러한 자들은 하나님의 거룩한 성전을 더럽히고 파괴하는 자들로서, 하나님의 심판을 면치 못할 자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오늘날에도 교회 안에는, 간혹 자기의 이기적인 탐심을 위해, 교회를 나누고 더럽히는 자들이 있습니다. 이들 역시 결단코 하나님의 심판을 면할 수 없을 것입니다.

    다음으로 성도 자신을 더럽히는 일에 대한 경고가 됩니다. 이미 여러 번 언급한 대로, 성도 한 사람 한 사람은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는 성전입니다. 그러므로 성도 각자는 스스로 죄와 불의를 멀리함으로써, 하나님의 성전인 우리의 몸을 깨끗하게 간직해야 합니다. 만일 성도가 자기 몸을 죄 가운데 두며 회개하지 않고 계속해서 불의를 행하면, 심판을 면할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 교회의 표어 중 첫 번째는 ‘순결한 신앙 공동체’입니다. 그것은 먼저 우리 교회가 신학적으로 영적으로 너무도 혼란한 이 시대에, 순수 복음 신앙을 간직한 순결한 신앙 공동체가 되자는 것입니다. 다음으로는 소돔과 고모라를 훨씬 능가하는 성적으로 타락한 이 시대에, 육체적으로도 순결한 신앙 공동체가 되었으면 하는 바람에서 정한 표어입니다. 

    벌써 수십 년 전에 현시대를 가리켜 3S 시대라고 했습니다. Science, Sports, Sex, 이 세 가지는 확실히 현대인의 우상이라 할 만합니다. 오늘날 우리는 성문화와 성을 찬미하는, 소위 성의 혁명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현대의 가장 강력한 종교는 성의 종교라고도 했습니다. 이 성의 종교는 가장 많은 숫자의 신도들을 거느리고, 우리의 세계에 군림하고 있습니다. 여러 해 전 미국의 ‘패인’ 제단에서, 유명한 교육자들을 통하여 영화를 연구케 한 일이 있습니다. 

    그들은 1500편의 영화를 검열한 후, 대부분의 영화 주제가 성문제였다고 보고했습니다. 이미 우리의 청소년들도 이와 같은 음란한 영상물을 보며 자라고 있습니다. 수많은 잡지와 T. V의 노골적이고 선정적인 화면, 컴퓨터의 사이버 포르노 등, 도처에서 성문화가 홍수처럼 범람하고 있는 시대에,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것입니다.

    엘톤 트루불러드(Elton Trueblood)는 말하기를 “문명의 부패는 잘못된 성 모럴의 미화에 있다.”고 했습니다. 우리는 한 시대 한 문화 한 사회가 몰락하기 이전에, 그 사회가 성의 문제를 어떻게 취급했는가를 주의해서 볼 필요가 있습니다. 잘못되고 부패한 성모랄 성도덕을, 오히려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기 시작할 때, 그 사회는 언제나 멸망으로 치닫고 말았습니다. 소돔과 고모라의 멸망의 원인은, 말할 것도 없이 음행이라는 범죄 때문이었습니다. 폼페이의 최후와 로마의 멸망은, 음란과 간음의 죄가 가져온 무서운 최후였습니다. 어떤 역사가는 이러한 로마의 멸망사를 취급하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로마는 희랍을 정복했지만, 희랍의 다신 문화와 오염된 섹스 문화는 마침내 로마를 정복하고 말았다.”고 증언했습니다. 로마는 희랍을 정복했지만, 희랍의 썩고 부패한 성문화까지 정복할 수 있는 거룩한 능력이 그들의 속에는 없었던 것입니다. 마침내 이 강대국은 부패한 성도덕 때문에 무너지고 말았습니다. 부도덕을 정복하지 못하면, 그 사회는 결코 오래 갈 수 없습니다. 그것은 개인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역사에서 배울 수 있는 교훈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 사회의 가공할 성도덕의 타락상을 보십시오. 아담과 하와가 타락한 이후에, 모든 사람들 속에 내재한 타락성이, 말과 행동으로 표출되는 현상이 성적인 타락입니다. 그런데 현시대의 성적 타락상은, 가히 말로 다할 수 없을 정도입니다. 요즘 젊은 세대를 향해 혼전순결을 이야기한다는 것은, 시대착오적인 메시지로 들릴 지경이 되었습니다. 여러 해 전 인터넷 뉴스를 보니까, 미국의 한 여대생이 학비를 마련하기 위하여, 자신의 처녀성을 경매에 내놓았다고 합니다. 그런가하면 국내에서만도 하루 평균 500개씩의 음란 사이트가 생성되고 있다고 하며, 이 사이트들을 통해 배포되는 국내외 음란 동영상은, 하루에 1,000건이나 된다고 합니다. 온 나라가 음풍이 가득하게 되었습니다.

    성적 타락은 청소년 문제만이 아닙니다. 대부분의 T. V 드라마는 불륜을 소재로 하여 안방을 침투하고, 간음을 조장하여 이 사회를 온통 병들게 하고, 가정을 파괴시키고 있습니다. 수많은 가정들이 불륜으로 깨어지고, 이런 면에서 기독교인들의 가정도 예외는 아닙니다. 오늘날 우리 사회는 소돔과 고모라를 훨씬 능가하는,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되고 말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사람들은 이러한 세태를 탓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당연한 것으로 여기고, 부끄러움을 간직해야 할 처녀들까지도, 야한 모습이나 옷차림을 즐기며 섹시하다면서, 옛날 같으면 입에 올리지도 못할 말을 예사롭게 합니다. 

    전국의 모든 경치 좋은 곳에는 러브호텔이 즐비하고, 도시에도 모텔들이 교회당보다 더 많아 보이는 현실인가 하면, 사회 일각에서는 끊임없이 간통죄 폐지를 주장하고 있습니다. 남여가 합의해서 하는 성행위는 죄가 아니므로, 처벌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 사회는 폰팅이니 채팅이니 원조 교제니 해서, 얼마나 많은 청소년들과 가정들이 무너져가고 있는지 모릅니다. 우리나라의 이혼율은 갈수록 높아만 가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이제 마치 나비가 이 꽃에서 저 꽃으로 훨훨 날아다니고, 새들이 이 나뭇가지에서 저 나뭇가지로 옮겨 다니듯이, 이 남편에서 저 남편으로 이 아내에게서 저 아내에게로 옮겨 다닙니다. 

    급기야는 ‘스와핑 클럽’이라는 것까지 생겨나서, 회원들은 모임이 있을 때 부부가 꼭 동반해서 가는데, 거기에 가서 남편과 아내를 바꾸어 쾌락을 즐긴다는 것입니다. 이렇듯 세상은 이제 갈 데까지 간 것 같습니다. 세상은 온통 타락한 성문화의 범람으로, 소돔과 고모라처럼 멸망 직전에 이르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입니다. 이미 인류는 핵전쟁, 자원 고갈, 혹은 공해 같은 문제로 멸망 직전에 있지만, 전술한 바와 같은 타락한 성도덕 때문에 마침내 하나님의 심판을 받게 되고야 말 것입니다. 

    이렇듯 악한 시대에 본문 말씀은 우리에게 실로 소중한 경종을 울려줍니다. “너희는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계신 것을 알지 못하느냐? 하나님의 성령이 그 안에 임재해 계시는 성도의 몸은 성전이라고 했습니다. 또한 성령을 모신 성도들의 공동체인 교회 역시 하나님의 성전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하나님의 성전을 더럽히면 하나님이 그 사람을 멸하시리라.”고 경고했습니다. 우리는 무슨 일이 있어도 하나님의 교회를 더럽히는 죄를 범해서는 안 됩니다. 교회를 불평으로 오염시키고, 교회를 나누고 분열시키고, 파당을 만들어 분쟁함으로써, 교회를 더럽히고 파괴하는 자들이 되면 절대로 안 됩니다. 

    다음으로 성도는 하나님의 성전인 몸을 더럽히면 안 된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성전인 몸을 더럽히는 죄 가운데 하나가 곧 간음입니다. 성도덕이 참으로 무섭게 타락한 시대, 성 문화가 홍수처럼 범람하고 있는 시대, 예술과 문학이 아무리 성을 예찬하고 미화시킬지라도, 인본주의자들이 아무리 간통죄의 폐지를 주장할지라도, 성경은 분명히 간음은 죄라고 말씀합니다. 이 죄의 대부분이 은밀한 중에 행하여지기 때문에, 혹 사람의 정죄는 받지 않을 수 있으나, 하나님의 심판은 절대로 피할 수가 없다고 했습니다. 우상 숭배하는 자나 간음하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하리라고 했습니다. 

    간음죄에 대한 성경의 경고를 들어보십시오. 욥 31:11에 “이는 중죄라. 재판장에게 벌 받을 악이요 멸망하도록 사르는 불이라.”고 했고, 잠 6:27-29절에 “사람이 불을 품에 품고야 어찌 그 옷이 타지 아니하겠으며, 사람이 숯불을 밟고야 어찌 그 발이 데지 아니하겠느냐. 남의 아내와 통간하는 자도 이와 같을 것이라. 무릇 그를 만지기만 하는 자도 죄 없게 되지 아니하리라.”고 했으며, 고전 6:9-10절에 “불의한 자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줄을 알지 못하느냐.. ...음행하는 자나....간음하는 자나, 탐색하는 자나, 남색하는 자나....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하리라.”고 했고, 레 20:10절에 “누구든지 남의 아내와 간음하는 자 곧 그 이웃의 아내와 간음하는 자는, 그 간부와 음부를 반드시 죽일지니라.”고 했습니다. 

    계시록에 보면 간음하는 자들은, 믿지 아니하는 자들, 살인자들과 함께,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에 참여하리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제롬은 말하기를 “순간적인 쾌락을 얻고, 영원한 고통을 대신 얻는다.”고 했습니다. 

    사랑하는 송정 중앙 교회 성도 여러분! 우리 모두 “하나님의 성전은 거룩하니 너희도 그러하니라.”는 말씀대로, 하나님의 성전인 우리 교회와, 우리의 몸을 더럽히지 말고, 거룩하고 성결하게 간직하는 순결한 그리스도의 신부들이 되어서, 예수님의 사랑을 듬뿍 받고 살게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하나님의 성전 된 우리의 몸(고린도전서 6:12-20)

    12 모든 것이 내게 가하나 모든 것이 유익한 것은 아니요 모든 것이 내게 가하나 내가 아무에게든지 제재를 받지 아니하리라.

    13 음식은 배를 위하여 있고 배는 음식을 위하여 있사나 하나님은 이것저것을 다 폐하시리라 그러나 몸은 음란을 위하지 않고 오직 주를 위하며 주는 몸을 위하시느니라.
    14 하나님이 주를 다시 살리셨고 또한 그의 권능으로 우리를 다시 살리시리라.
    15 너희 몸이 그리스도의 지체인 줄 알지 못하느냐 내가 그리스도의 지체를 가지고 창기의 지체를 만들겠느냐 결코 그럴 수 없는이라.
    16 창기와 합하는 자는 그와 한 몸인 줄 알지 못하느냐 일렀으되 둘이 한 육체가 된다 하셨나니.
    17 주와 합하는 자는 한 영이니라.
    18 음행을 피하라 사람이 범하는 죄마다 다른 이에게서 몸 밖에 있거니와 음행하는 자는 자기 몸에게 죄를 범하느니라.
    19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 자신의 것이 아니라.
    20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성경 말씀 요약

  • 모든 것이 가하나 유익한 것은 아니다(12절)
  • 음식과 배, 그리고 음란과 몸의 관계(13절)
  • 그리스도의 부활과 우리의 몸(14절)
  • 그리스도의 지체로서의 우리의 몸(15-17절)
  • 음행을 피하라(18절)
  • 성령의 전된 우리의 몸(19-20절)
  • 서론

    여러분, 오늘은 고린도전서 6:12-20의 말씀을 중심으로 우리의 몸이 하나님의 성전임을 기억하고, 그에 맞게 살아가야 할 책임에 대해 나누고자 합니다. 고린도 도시는 당시 문화적으로 혼돈과 부도덕이 만연한 곳이었으나, 사도 바울은 이 가운데서도 성도들이 그리스도의 몸 된 신앙 공동체로서 깨끗한 삶을 살아야 함을 강조했습니다. 그의 가르침은 단순한 도덕적 규범을 넘어, 우리 몸이 그리스도의 지체라는 사실을 기반으로 하고 있습니다.

    1. 모든 것이 가하나 유익한 것은 아니다 (고린도전서 6:12)

    바울은 고린도전서 6장 12절에서 ‘모든 것이 내게 가하나 모든 것이 유익한 것은 아니요’라고 말합니다. 이 말씀은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로 자유로워졌지만, 그 자유가 무제한적인 것이 아님을 상기시킵니다. ‘모든 것이 가하나’라는 표현은 당시 고린도 교회 일각에서 ‘자유를 누린다’는 명목으로 방종과 음행을 허용하는 잘못된 신념을 지적한 것입니다.

    자유는 책임과 절제를 수반합니다. 예를 들어, 우리가 건강을 위해 적절한 운동을 선택할 자유가 있습니다. 그러나 이 자유가 지나쳐 몸을 혹사하게 된다면, 이는 우리에게 유익하지 않음을 명심해야 합니다. 우리의 자유는 우리의 유익을 위한 것이며, 그리스도 안에서의 유익은 신앙의 성숙과 영적 성장에 있습니다. 우리의 선택이 우리 자신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에게 미치는 영향을 생각하며 행동해야 합니다.

    2. 음식과 배, 그리고 음란과 몸의 관계 (고린도전서 6:13)

    13절에서 바울은 ‘음식은 배를 위하여 있고 배는 음식을 위하여 있사나 하나님은 이것저것을 다 폐하시리라’고 말합니다. 이는 음식 섭취와 같은 육신의 행위들이 일시적인 것임을 상기시키며, 그것들이 궁극적인 목적이 아님을 강조합니다. 그러나 이어서 바울은 ‘몸은 음란을 위하지 않고 오직 주를 위하며 주는 몸을 위하시느니라’고 덧붙입니다.

    우리의 몸은 그저 육체적 욕구를 충족하기 위한 도구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몸을 거룩하게 사용하라고 부르셨습니다. 예를 들어, 우리의 몸은 다른 사람을 돕고 사랑을 나누기 위해 사용되어야 합니다. 또한, 우리 몸을 올바르게 돌보고, 건강을 유지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주신 선물에 대한 감사의 표현이 됩니다.

    3. 그리스도의 부활과 우리의 몸 (고린도전서 6:14)

    바울은 14절에서 ‘하나님이 주를 다시 살리셨고 또한 그의 권능으로 우리를 다시 살리시리라’고 선언합니다. 이 구절은 예수님의 부활이 우리의 부활을 보증하는 중요한 근거임을 강조합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와 연합할 때, 우리는 그의 부활에 참여하며, 이는 우리 몸이 단순히 육체적인 존재를 넘어서 영원한 가치와 의미를 가진 존재임을 의미합니다.

    그리스도의 부활은 우리의 몸이 일회용이 아닌, 하나님께서 영원한 계획 안에서 사용하실 중요한 도구임을 상기시킵니다. 예를 들어, 우리의 몸을 통해 하나님의 사랑을 실천하고, 복음을 전하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우리의 존재는 일상 속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는 생활을 통해 의미를 얻게 됩니다.

    4. 그리스도의 지체로서의 우리의 몸 (고린도전서 6:15-17)

    고린도전서 6장 15절에서 17절까지, 바울은 우리의 몸이 그리스도의 지체라고 말합니다. ‘너희 몸이 그리스도의 지체인 줄 알지 못하느냐 내가 그리스도의 지체를 가지고 창기의 지체를 만들겠느냐 결코 그럴 수 없는이라.’ 이는 우리의 몸이 그리스도와 깊이 연합되어 있음을 상기시킵니다.

    우리 몸이 창기의 지체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이 경고는 단순한 도덕적 훈계가 아닌, 우리의 몸이 신성한 목적을 위한 도구임을 강조합니다. 예를 들어, 우리의 손과 발이 하나님의 사랑을 실천하고, 우리의 입이 복음을 전하며, 우리의 모든 행동이 그리스도를 나타내는 도구가 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지체로서, 우리의 모든 행동과 선택이 하나님께 영광이 되도록 해야 합니다.

    5. 음행을 피하라 (고린도전서 6:18)

    바울은 6장 18절에서 ‘음행을 피하라 사람이 범하는 죄마다 다른 이에게서 몸 밖에 있거니와 음행하는 자는 자기 몸에게 죄를 범하느니라’고 말합니다. 이는 음행의 죄가 다른 죄와 달리 우리의 몸 자체를 훼손하고, 성령의 전인 우리의 몸을 더럽히는 심각한 죄임을 강조합니다.

    음행을 피하는 것은 성도로서의 기본적인 책임입니다. 예를 들어, 현대 사회에서 음란물을 피하고, 순결한 삶을 살아가는 것은 우리의 몸을 거룩하게 지키는 중요한 행위입니다. 우리의 몸을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도구로 사용하기 위해, 우리는 모든 형태의 음행을 피하고, 거룩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결론

    오늘 우리는 고린도전서 6:12-20의 말씀을 통해 우리의 몸이 하나님의 성전임을 다시 한 번 확인했습니다. 우리의 몸은 그리스도의 지체로서, 우리의 모든 행동과 선택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을 살아야 할 책임이 있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합니다. 우리의 몸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사용될 때, 우리의 삶은 진정한 자유와 유익을 경험하게 됩니다.

    여러분, 우리의 몸을 하나님의 성령이 거하시는 거룩한 성전을 인식하며, 우리의 행동과 선택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을 살아가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묵상과 나눔

  • 내 삶에서 모든 것이 가하나 유익하지 않은 것들이 있다면 무엇일까요?
  • 내가 그리스도의 지체로서 살아가기 위해 더 깊이 생각하고 실천해야 할 부분은 무엇입니까?
  • 내 몸을 성령의 전으로 알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삶을 살아가기 위해 어떤 결단을 내릴 수 있을까요?
  • 기도문

    사랑과 은혜의 하나님, 오늘도 우리에게 귀한 말씀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우리의 몸이 하나님의 성전이며, 성령님께서 우리 안에 거하심을 깨닫게 하시니 감사를 드립니다. 주님, 우리의 몸을 거룩하게 사용하며, 우리의 모든 행동이 하나님께 영광이 되기를 원합니다.

    주님, 우리의 삶 속에서 모든 것이 가하지만 유익하지 않은 것들을 분별하는 지혜를 주시옵소서. 우리의 선택이 우리의 유익을 넘어, 다른 사람들에게도 유익이 되며, 하나님께 영광이 되기를 원합니다. 주님, 우리의 몸을 음란에 사용하지 않고, 오직 거룩하게 주를 위하여 사용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주님, 우리를 그리스도의 부활에 참여하게 하신 것을 감사드립니다. 우리의 몸이 이 땅에서뿐만 아니라 영원한 하나님의 계획 안에서 사용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우리의 모든 행동과 선택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며, 우리의 몸이 그리스도의 지체로서 하나님의 사랑을 실천하는 도구가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주님, 우리의 몸이 성령의 전임을 잊지 않게 하시고, 우리의 몸을 돌보며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삶을 살게 하여 주시옵소서. 주님께서 주신 우리의 몸을 귀하게 여기며, 이를 통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을 살 수 있도록 도와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에스겔 - 에스겔 성전 (40장~48장)



















    에스겔 성전 (40장~48장)

    40장. 앞으로 세워질 성전

    1-4 새 성전 환상

    우리가 사로잡힌지 이십 오년이요 성이 함락된 후 십 사년 정월 십일 곧 그 날에 여호와의 권능이 내게 임하여 나를 데리고 이스라엘 땅으로 가시되 하나님의 이상 중에 나를 데리고 그 땅에 이르러 나를 극히 높은 산 위에 내려 놓으시는데 거기서 남으로 향하여 성읍 형상 같은 것이 있더라 나를 데리시고 거기 이르시니 모양이 놋 같이 빛난 사람 하나가 손에 삼줄과 척량하는 장대를 가지고 문에 서서 있더니 그 사람이 내게 이르되 인자야 내가 네게 보이는 그것을 눈으로 보고 귀로 들으며 네 마음으로 생각할찌어다 내가 이것을 네게 보이려고 이리로 데리고 왔나니 너는 본 것을 다 이스라엘 족속에게 고할찌어다 하더라

    1월 10일 - 출애굽한 날, 이스라엘 나라가 세워진 날, 이스라엘 무너진 후 에스겔 성전 환상을 보여준 날

    극히 높은 산 - 하나님의 성산

    남으로 향하여 성읍 형상 같은 것 - 에스겔 성전

    놋 같이 빛난 사람 - 놋(율법,여호와의 말씀,하나님의 공의), 하나님의 공의(말씀)로 믿음을 측량하는 하나님의 사자

    삼줄 - 삼을 꼬아 만든 측량줄, 주로 긴 거리를 측량하는데 사용

    척량하는 장대 - 길이를 재는데 사용하는 장대

    < 에스겔 성전 >

    1)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지어진 몸 된 교회를 상징

    2) 이 교회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어떻게 지어져 가야 하는가

    3) 교회인 우리가 어떠한 신앙을 가져야만 구원을 얻을 수 있는가

    5-16 장대의 길이

    내가 본즉 집 바깥 사면으로 담이 있더라 그 사람의 손에 척량하는 장대를 잡았는데 그팔꿈치에서 손가락에 이르고 손바닥 넓이가 더한 자로 육척이라 그 을 척량하니 두께가 한 장대요 고도 한 장대며

    척량하는 장대의 길이 = 6척

    < 바깥 뜰 >

    1) 7층 계단 -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올라갈 수 있는 계단

    2) 육신에 속한 그리스도인

    3) 문지기 방

    4) 마지막 때 마흔 두달 이방인들에게 짓밟히는 기간 - 교회가 양육되는 기간 - 시련을 이겨내지 못한 그리스도인

    또 내게 지팡이 같은 갈대를 주며 말하기를 일어나서 하나님의 성전과 제단과 그 안에서 경배하는 자들을 척량하되 성전 밖 마당척량하지 말고 그냥 두라 이것을 이방인에게 주었은즉 저희가 거룩한 성을 마흔 두달 동안 짓밟으리라 (요한계시록 11:1-2)

    6-16 바깥 동향한 문

    그가 동향한 문에 이르러 층계에 올라 그 문통을 척량하니 장이 한 장대요 그 문 안통의 장도 한 장대며 그 문간에 문지기 방이 있는데 각기 장이 한 장대요 광이 한 장대매방 사이 벽오척이며 안 문통의 장이 한 장대요 그 앞에 현관이 있고 그 앞에 안 문이 있으며 그가 또 안 문의 현관을 척량하니 한 장대며 안 문의 현관을 또 척량하니 팔척이요 그 문벽은 이척이라 그 문의 현관이 안으로 향하였으며 그 동문간의 문지기 방은 좌편에 셋이 있고 우편에 셋이 있으니 그 셋이 각각 한 척수요 그 좌우편 벽도 다 한척수며 또 그 문통을 척량하니 광이 십척이요 장이 십 삼척이며 방 앞에 퇴가 있는데 이편 퇴도 일척이요 저편 퇴도 일척이며 그 방은 이편도 육척이요 저편도 육척이며 그가 그 문간을 척량하니 이 방 지붕 가에서 저 방 지붕 가까지 광이 이십 오척인데 방 문은 서로 반대되었으며 그가 또 현관을 척량하니 광이 이십척이요 현관 사면에 뜰이 있으며 바깥 문통에서부터 안 문 현관 앞까지 오십척이며 문지기 방에는 각각 닫힌 창이 있고 문 안 좌우편에 있는 벽 사이에도 창이 있고 그 현관도 그러하고 그 창은 안 좌우편으로 벌여 있으며 각 문 벽 위에는 종려나무를 새겼더라

    17-19 박석 깔린 땅

    그가 나를 데리고 바깥 뜰에 들어가니 뜰 삼면에 박석 깔린 땅이 있고 그 박석 깔린 땅 위에 여러 방이 있는데 모두 삼십이며 그 박석 깔린 땅의 위치는 각 문간의 좌우편인데 그 광이 문간 길이와 같으니 이는 아래 박석 땅이며 그가 아래 문간 앞에서부터 안 뜰 바깥 문간 앞까지 척량하니 그 광이 일백척이며 동편과 북편이 일반이더라

    박석 깔린 땅 위에 30개의 방

    문간의 넓이 = 25척 길이 = 50척

    문간 앞에서 안 뜰 바깥 문간 앞까지 거리 = 100척

    세로 길이 500척 = 북문간 50척 + 문간거리 100척 + 안 북문간 50척 + 뜰 100척 + 안 남문간 50척 + 문간거리 100척 + 남문간 50척

    가로 길이 500척 = 성전 300척 + 안 동문간 50척 + 문간거리 100척 + 동문간 50척

    20-23 바깥 북향한 문간

    그가 바깥 뜰 북향한 문간의 장광을 척량하니 장이 오십척이요 광이 이십 오척이며 문지기 방이 이편에도 셋이요 저편에도 셋이요 그 벽과 그 현관도 먼저 척량한 문간과 같으며 그 창과 현관의 장, 광과 종려나무가 다 동향한 문간과 같으며 그 문간으로 올라가는 일곱 층계가 있고 그 안에 현관이 있으며 안 뜰에도 북편 문간과 동편 문간과 마주 대한 문간들이 있는데 그가 이 문간에서 맞은편 문간까지 척량하니 일백척이더라

    24-27 바깥 남향한 문간

    그가 또 나를 이끌고 남으로 간즉 남향한 문간이 있는데 그 벽과 현관을 척량하니 먼저 척량한 것과 같고 그 문간과 현관 좌우에 있는 창도 먼저 말한 창과 같더라 그 문간의 장이 오십척이요 광이 이십 오척이며 또 그리로 올라가는 일곱 층계가 있고 그 안에 현관이 있으며 또 이편, 저편 문 벽위에 종려나무를 새겼으며 안 뜰에도 남향한 문간이 있는데 그가 남향한 그 문간에서 맞은편 문간까지 척량하니 일백척이더라

    < 안 뜰 >

    1) 8층 계단 -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완전히 거듭난 심령이 되었을 때 올라갈 수 있는 계단

    2) 온전한 믿음이 아직 부족한 육적인 그리스도인

    3) 제사장 방

    28-47 안 뜰 남문

    그가 나를 데리고 남문으로 말미암아 안 뜰에 들어가서 그 남문간을 척량하니 척수는 장이 오십척이요 광이 이십 오척이며 그 문지기 방과 벽과 현관도 먼저 척량한 것과 같고 그 문간과 그 현관 좌우에도 창이 있으며 그 사면 현관의 장은 이십 오척이요 광은 오척이며 현관이 바깥 뜰로 향하였고 그 문 벽 위에도 종려나무를 새겼으며 그 문간으로 올라가는 여덟 층계가 있더라

    32-34 안 뜰 동문

    그가 나를 데리고 안 뜰 동편으로 가서 그 문간을 척량하니 척수는 장이 오십척이요 광이 이십 오척이며 그 문지기 방과 벽과 현관이 먼저 척량한 것과 같고 그 문간과 그 현관 좌우에도 창이 있으며 그 현관이 바깥 뜰로 향하였고 그 이편, 저편 문 벽 위에도 종려나무를 새겼으며 그 문간으로 올라가는 여덟 층계가 있더라

    35-37 안 뜰 북문

    그가 또 나를 데리고 북문에 이르러 척량하니 척수는 장이 오십척이요 광이 이십 오척이며 그 문지기 방과 벽과 현관이 다 그러하여 그 좌우에도 창이 있으며 그 현관이 바깥 뜰로 향하였고 그 이편, 저편 문 벽 위에도 종려나무를 새겼으며 그 문간으로 올라가는 여덟 층계가 있더라

    38-43 북문 벽 곁에 문이 있는 방

    그 문 벽 곁에 문이 있는 방이 있는데 그것은 번제물을 씻는 방이며 그 문의 현관 이편에 상 둘이 있고 저편에 상 둘이 있으니 그 위에서 번제와 속죄제와 속건제의 희생을 잡게 한 것이며 그 북문 바깥 곧 입구로 올라가는 곳 이편에 상 둘이 있고 문의 현관 저편에 상 둘이 있으니 문 곁 이편에 상이 넷이 있고 저편에 상이 넷이 있어 합이 여덟 상이라 그 위에서 희생을 잡는 소용이며 또 다듬은 돌로 만들어서 번제에 쓰는 상 넷이 있는데 각 장이 일척 반이요 광이 일척 반이요 고가 일척이라 번제의 희생을 잡을 때에 쓰는 기구가 그 위에 놓였으며 현관 안에는 길이가 손바닥 넓이만한 갈고리가 사면에 박혔으며 상들에는 희생의 고기가 있더라

    번제물을 씻는 방 - 성령으로 씻기어 짐

    손바닥 넓이 만한 갈고리가 사면에 박혔으며 - 십자가를 상징

    44-47 안 뜰에 있는 방

    안 문안 안 뜰에는 방 둘이 있는데 북문 곁에 있는 방은 남으로 향하였고 남문 곁에 있는 방은 북으로 향하였더라 그가 내게 이르되 남향한 이 방은 성전을 수직하는 제사장들의 쓸 것이요 북향한 방은 제단을 수직하는 제사장들의 쓸 것이라 이들은 레위의 후손 중 사독의 자손​으로서 여호와께 가까이 나아가 수종드는 자니라 하고 그가 또 그 을 척량하니 장이 일백척이요 광이 일백척이라 네모 반듯하며 제단은 전 앞에 있더라

    남향한 방 - 성전 수직하는 제사장들의 방

    북향한 방 - 제단을 수직하는 제사장들의 방

    성전 안 뜰 장 = 100척, 광 = 100척

    48-49 성전 현관

    그가 나를 데리고 전문 현관에 이르러 그 문의 좌우 벽을 척량하니 광이 이편도 오척이요 저편도 오척이며 두께가 문 이편도 삼척이요 문 저편도 삼척이며 그 현관의 광은 이십척이요 장은 십 일척이며 문간으로 올라가는 층계가 있고 문 벽 곁에는 기둥이 있는데 하나는 이편에 있고 하나는 저편에 있더라

    문 좌우 벽 - 광 5척, 두께 3척

    성전 현관 - 광 20척, 장 11척

    솔로몬 성전의 야긴과 보아스 기둥 처럼 에스겔 성전에도 기둥 두 개가 있다.



    41장. 성소의 내부

    < 성소 >

    1) 솔로몬 성전과 달리 금향단, 떡상, 금촛대가 없음

    2) 6척의 벽 - 가증한 것을 구별하는 벽, 예수 그리스도의 장막

    3) 하나님의 영에 인도함을 받는 영적 그리스도인

    4) 환란과 시련 속에서 인내와 믿음으로 이겨낸 자

    내가 가로되 내 주여 당신이 알리이다 하니 그가 나더러 이르되 이는 큰 환난에서 나오는 자들인데 어린양의 피에 그 옷을 씻어 희게 하였느니라 (요한계시록 7:14)

    장로 중에 하나가 내게 말하되 울지 말라 유대 지파의 사자 다윗의 뿌리가 이기었으니 이 책과 그 일곱 인을 떼시리라 하더라 (요한계시록 5:5)

    < 지성소 >

    1) 솔로몬 성전과 달리 언약궤가 없음

    2) 성소와 지성소 사이의 7척의 벽

    1-11 성소와 지성소

    그가 나를 데리고 성소에 이르러 그 문벽을 척량하니 이편 두께도 육척이요 저편 두께도 육척이라 두께가 이와 같으며 그 문통의 광이 십척이요 문통 이편 벽의 광이 오척이요 저편 벽의 광이 오척이며 그가 성소를 척량하니 그 장이 사십척이요 그 광이 이십척이며 그가 안으로 들어가서 내전 문통의 벽을 척량하니 두께가 이척이요 문통이 육척이요 문통의 벽의 광이 각기 칠척이며 그가 내전을 척량하니 장이 이십척이요 광이 이십척이라 그가 내게 이르되 이는 지성소니라 하고 전의 벽을 척량하니 두께가 육척이며 전 삼면에 골방이 있는데 광이 각기 사척이며 골방은 삼층인데 골방 위에 골방이 있어 모두 삼십이라 그 삼면 골방이 전 벽 밖으로 그 벽에 의지하였고 전 벽 속은 범하지 아니하였으며 이 두루 있는 골방이 그 층이 높아갈수록 넓으므로 전에 둘린 이 골방이 높아갈수록 전에 가까와졌으나 전의 넓이는 아래 위가 같으며 골방은 아랫층에서 중층으로 윗층에 올라가게 되었더라 내가 보니 전 삼면의 지대 곧 모든 골방 밑 지대의 고가 한 장대 곧 큰 자로 육척인데 전을 의지한 그 골방 바깥 벽 두께는 오척이요 그 외에 빈 터가 남았으며 전 골방 삼면에 광이 이십척 되는 뜰이 둘려 있으며 그 골방 문은 다 빈 터로 향하였는데 한 문은 북으로 향하였고 한 문은 남으로 향하였으며 그 둘려 있는 빈터의 광은 오척이더라

    현관 - 장 11척, 광 20척

    문통 - 광 10척

    문통 양 쪽 문벽 - 두께 6척, 광 10척

    성소 - 장 40척, 광 20척

    지성소 - 장 20척, 광 20척

    12-17 성전의 크기와 내부 장식

    서편 뜰 뒤에 건물이 있는데 광이 칠십척이요 장이 구십척이며 그 사면 벽의 두께가 오척이더라 그가을 척량하니 장이 일백척이요 또 서편 뜰과 그 건물과 그 벽을 합하여 장이 일백척이요 전 전면의 광이 일백척이요 그 앞 동향한 뜰의 광도 그러하며 그가 뒷뜰 뒤에 있는 건물을 척량하니 그 좌우편 다락까지 일백척이더라 내전과 외전과 그 뜰의 현관과 문통 벽과 닫힌 창과 삼면에 둘려 있는 다락은 문통 안편에서부터 땅에서 창까지 널판으로 가리웠고 (창은 이미 닫히었더라) 문통 위와 내전과 외전의 사면 벽도 다 그러하니 곧 척량한 대소대로며

    서편 뜰 뒤 건물 - 광 70척, 장 90척, 벽 두께 5척 - 가로 80척, 세로 100척

    18-20 두 그룹과 종려나무

    널판에는 그룹들과 종려나무를 새겼는데 두 그룹 사이에 종려나무 하나가 있으며 매 그룹에 두 얼굴이 있으니 하나는 사람의 얼굴이라 이편 종려나무를 향하였고 하나는 어린 사자의 얼굴이라 저편 종려나무를 향하였으며 온 전 사면이 다 그러하여 땅에서부터 문통 위에까지 그룹들과 종려나무들을 새겼으니 성전 벽이 다 그러하더라

    두 그룹 - 여호와의 거룩하심

    종려나무 하나 - 의와 승리, 예수 그리스도

    그룹에 두 얼굴 1)사람 - 지혜 2)어린 사자 - 용기, 사자이신 예수님의 권세를 입은 어린 사자

    < 사람과 사자의 두 얼굴을 가진 두 그룹 사이의 종려나무 하나 >

    1) 하나님의 지혜와 용기로 의와 승리의 성자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

    2) 두 그룹 사이는 하나님의 임재를 나타냄

    3)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도록 돕는 두 천사

    4) 하나님의 권세를 누릴 수 있는 성도

    종려나무 가지를 가지고 맞으러 나가 외치되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이 곧 이스라엘의 왕이시여 하더라 (요한복음 12:13)

    그 두루마기를 빠는 자들은 복이 있으니 이는 저희가 생명 나무에 나아가며 문들을 통하여 성에 들어갈 권세를 얻으려 함이로다 (요한계시록 22:14)

    21-26 나무 제단

    외전 문설주는 네모졌고 내전 전면에 있는 식양은 이러하니 곧 나무 제단의 고가 삼척이요 장이 이척이며 그 모퉁이와 옆과 면을 다 나무로 만들었더라 그가 내게 이르되 이는 여호와의 앞의 상이라 하더라

    나무 제단(여호와의 앞의 상) - 고 3척, 장 2척

    < 나무 제단 - 향단,촛대,떡상>

    1) 하나님 앞에 있는 십자가를 상징 - 중보하시는 예수님

    나의 자녀들아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씀은 너희로 죄를 범치 않게 하려 함이라 만일 누가 죄를 범하면 아버지 앞에서 우리에게 대언자가 있으니 곧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시라 (요한일서 2:1)

    2) 향단(기도) - 중보하시는 예수님

    책을 취하시매 네 생물과 이십 사 장로들이 어린 양 앞에 엎드려 각각 거문고와 이 가득한 금 대접을 가졌으니 이 향은 성도의 기도들이라 (요한계시록 5:8)

    3) 금촛대(하나님의 빛) - 빛이신 예수님

    다시 그에게 물어 가로되 금 기름을 흘려내는 두 금관 옆에 있는 이 감람나무 두 가지는 무슨 뜻이니이까 가로되 이는 기름 발리운 자 둘이니 온 세상의 주 앞에 모셔 섰는 자니라 하더라 (스가랴 4:12,14)

    내가 나의 두 증인에게 권세를 주리니 저희가 굵은 베옷을 입고 일천 이백 육십 일을 예언하리라 이는 이 땅의 주 앞에 섰는 두 감람나무와 두 촛대니 (요한계시록 11:3-4)

    4) 떡상(진설병) - 생명의 떡이신 예수 그리스도

    23-26 내전과 외전의 문

    내전과 외전에 각기 문이 있는데 문마다 각기 두 문짝 곧 접치는 두 문짝이 있어 이 문에 두 짝이요 저 문에 두 짝이며 이 성전 문에 그룹과 종려나무를 새겼는데 벽에 있는 것과 같고 현관 앞에는 나무 디딤판이 있으며 현관 좌우편에는 닫힌 창도 있고 종려나무도 새겼고 전의 골방과 디딤판도 그러하더라

    내전과 외전(성소와 지성소) 사이의 문


    42장. 성전 곁의 건물들

    < 제사장 >

    1) 예수 그리스도 안에 거하는 왕 같은 제사장이 되는 그리스도인

    오직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데서 불러 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자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베드로전서 2:9)

    2) 거룩한 방에서 지성물(예수 그리스도의 피와 살)을 먹을 수 있는 그리스도인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인자의 살을 먹지 아니하고 인자의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 속에 생명이 없느니라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영생을 가졌고 마지막 날에 내가 그를 다시 살리리니 (요한복음 6:53-54)

    3) 안뜰에서 입을 수 있는 세마포 - 믿음으로 그리스도의 의의 옷을 입은 빛 가운데 행하는 자

    내가 너를 권하노니 내게서 불로 연단한 금을 사서 부요하게 하고 흰 옷을 사서 입어 벌거벗은 수치를 보이지 않게 하고 안약을 사서 눈에 발라 보게 하라 (요한계시록 3:18)

    그러므로 너희는 하나님의 택하신 거룩하고 사랑하신 자처럼 긍휼과 자비와 겸손과 온유와 오래 참음을 옷입고 (골로새서 3:12)

    4) 회개할 때 입는 굵은 베옷 - 복음을 증거하는 그리스도의 증인들(영적인 눈을 가진 시대를 분별하는 예언자적인 거룩한 자)

    내가 나의 두 증인에게 권세를 주리니 저희가 굵은 베옷을 입고 일천 이백 육십 일을 예언하리라 (요한계시록 11:3)

    1-14 북편 거룩한 방들

    그가 나를 데리고 밖으로 나가 북편 뜰로 가서 두 방에 이르니 그 두 방의 하나는 골방 앞 뜰을 향하였고 하나는 북편 건물을 향하였는데 그 방들의 자리의 장이 일백척이요 광이 오십척이며 그 문은 북을 향하였고 그 방 삼층에 툇마루들이 있는데 한 방의 툇마루는 이십척 되는 안 뜰과 마주 대하였고 한 방의 툇마루는 바깥 뜰 박석 깔린 곳과 마주 대하였으며 그 두 방 사이에 통한 길이 있어 광이 십척이요 장이 일백척이며 그 문들은 북을 향하였으며 그 상층의 방은 제일 좁으니 이는 툇마루들을 인하여 하층과 중층보다 상층이 더 줄어짐이라 그 방이 삼층이라도 뜰의 기둥 같은 기둥이 없으므로 그 상층이 하층과 중층보다 더욱 좁아짐이더라 그 한 방의 바깥 담 곧 뜰의 담과 마주 대한 담의 장이 오십척이니 바깥 뜰로 향한 방의 장이 오십척임이며 성전 앞을 향한 방은 일백척이며 이 방들 아래에 동편에서 들어가는 통행구가 있으니 곧 바깥 뜰에서 들어가는 통행구더라

    10-12 남편 거룩한 방들

    남편 골방 뜰 맞은편과 남편 건물 맞은편에도 방 둘이 있는데 그 두 방 사이에 길이 있고 그 방들의 모양은 북편 방 같고 그 장광도 같으며 그 출입구와 문도 그와 같으며 이 남편 방에 출입하는 문이 있는데 담 동편 길머리에 있더라

    13-14 거룩한 방과 거룩한 예식

    그가 내게 이르되 좌우 골방 뜰 앞 곧 북편 남편에 있는 방들은 거룩한 방이라 여호와를 가까이 하는 제사장들이 지성물을 거기서 먹을 것이며 지성물 곧 소제와 속죄제와 속건제의 제물을 거기 둘 것이며 이는 거룩한 곳이라 제사장의 의복은 거룩하므로 제사장이 성소에 들어갔다가 나올 때에 바로 바깥 뜰로 가지 못하고 수종드는 그 의복을 그 방에 두고 다른 옷을 입고 백성의 뜰로 나갈 것이니라 하더라

    지성물 먹는 곳, 거룩한 음식을 저장하는 곳, 성소에서 수종드는 의복을 두는 곳

    15-20 성전의 바깥 담

    그가 안에 있는 전 척량하기를 마친 후에 나를 데리고 동향한 문 길로 나가서 사면 담을 척량하는데 그가 척량하는 장대 곧 그 장대로 동편을 척량하니 오백척이요 그 장대로 북편을 척량하니 오백척이요 그 장대로 남편을 척량하니 오백척이요 서편으로 돌이켜 그 장대로 척량하니 오백척이라 그가 이와 같이 그 사방을 척량하니 그 사방 담 안 마당의 장과 광이 오백척씩이라 그 담은 거룩한 것과 속된 것을 구별하는 것이더라

    성전 장 = 500척, 광 = 500척

    < 거룩한 방 >

    1) 바깥 뜰 - 겉사람, 안 뜰 - 속사람

    2) 두개의 방 - 북편 방, 남편 방

    3) 옷을 갈아입고(정결함) 지성물(하나님의 말씀)을 먹는 방 - 성도의 마음과 생각

    43장. 여호와의 영광이 나타나다

    1-5 되돌아온 하나님의 영광

    그 후에 그가 나를 데리고 문에 이르니 곧 동향한 문이라 이스라엘 하나님의 영광이 동편에서부터 오는데 하나님의 음성이 많은 물소리 같고 땅은 그 영광으로 인하여 빛나니 그 모양이 내가 본 이상 곧 전에 성읍을 멸하러 올 때에 보던 이상 같고 그발 하숫가에서 보던 이상과도 같기로 내가 곧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렸더니 여호와의 영광이 동문으로 말미암아 전으로 들어가고 성신이 나를 들어 데리고 안 뜰에 들어 가시기로 내가 보니 여호와의 영광이 전에 가득하더라

    6-12 여호와의 영원히 거하실 처소

    들은즉 누구인지 전에서 내게 말하더니 사람이 내 곁에 서서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이는 내 보좌의 처소, 내 발을 두는 처소, 내가 이스라엘 족속 가운데 영원히 거할 곳이라 이스라엘 족속 곧 그들과 그 왕들이 음란히 행하며 그 죽은 왕들의 시체로 다시는 내 거룩한 이름을 더럽히지 아니하리라 그들이 그 문지방을 내 문지방 곁에 두며 그 문설주를 내 문설주 곁에 두어서 그들과 나 사이에 겨우 한 담이 막히게 하였고 또 그 행하는 가증한 일로 내 거룩한 이름을 더럽혔으므로 내가 노하여 멸하였거니와 이제는 그들이 그 음란과 그 왕들의 시체를 내게서 멀리 제하여 버려야 할것이라 그리하면 내가 영원토록 그들의 가운데 거하리라

    한 담 - 우리의 죄악

    10-12 전의 법을 지켜 행하게 하라

    인자야 너는 이 전을 이스라엘 족속에게 보여서 그들로 자기의 죄악을 부끄러워하고 그 형상을 측량하게 하라 만일 그들이 자기의 행한 모든 일을 부끄러워하거든 너는 이 전의 제도와 식양과 그 출입하는 곳과 그 모든 형상을 보이며 또 그 모든 규례와 그 모든 법도와 그 모든 율례를 알게 하고 그 목전에 그것을 써서 그들로 그 모든 법도와 그 모든 규례를 지켜 행하게 하라 전의 법은 이러하니라 산 꼭대기 지점의 주위는 지극히 거룩하리라 전의 법은 이러하니라

    < 전의 법 >

    1) 에스겔 성전을 이스라엘 족속에게 보여라 - 자신의 죄악을 깨달아 부끄러워하게 하심

    2) 회개하거든 전의 모든 법도와 규례를 지켜 행하게 하라

    3) 산 꼭대기 지점의 주위는 지극히 거룩하다 - 예수님의 십자가 희생

    13-17 제단과 번제단

    제단의 척수는 이러하니라 (한 자는 팔꿈치에서부터 손가락에 이르고 한 손바닥 넓이가 더한 것이라) 제단 밑받침의 고가 일척이요 그 사면 가장자리의 광이 일척이며 그 가으로 둘린 턱의 광이 한 뼘이니 이는 제단 밑받침이요 이 땅에 닿은 밑받침 면에서 아랫층의 고가 이척이요 그 가장자리의 광이 일척이며 이 아랫층 면에서 이층의 고가 사척이요 그 가장자리의 광이 일척이며 그 번제단 윗층의 고가 사척이며 그 번제하는 바닥에서 솟은 뿔이 넷이며 그 번제하는 바닥의 장이 십 이척이요 광이 십 이척이니 네모 반듯하고 그 아랫층의 장이 십 사척이요 광이 십 사척이니 네모 반듯하고 그 밑받침에 둘린 턱의 광이 반척이며 그 가장자리의 광이 일척이니라 그 층계는 동을 향하게 할찌니라

    제단 밑받침 : 고 - 1척, 가장자리 광 - 1척, 광 - 아랫층 16척 + 가장자리 2척 = 18척, 둘린 턱 - 1뼘

    아랫층 : 고 - 2척, 가장자리 광 - 1척, 광 - 이층 14척 + 가장자리 양쪽 광 2척=16척

    이층 : 고 - 4척, 가장자리 광 - 1척, 광 - 14척, 둘린 턱 - 반척

    번제단 윗층 : 고 - 4척, 바닥 광 - 12척, 바닥에서 솟은 뿔이 넷(예수님의 십자가)

    18-27 제단 봉헌의 규례

    그가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나 주 여호와가 말하노라 이 제단을 만드는 날에 그 위에 번제를 드리며 피를 뿌리는 규례가 이러하니라 나 주 여호와가 말하노라 나를 가까이 하여 내게 수종드는 사독의 자손 레위 사람 제사장에게 너는 어린 수송아지 하나를 주어 속죄 제물을 삼되 네가 그 피를 취하여 제단의 네 뿔과 아랫층 네 모퉁이와 사면 가장자리에 발라 속죄하여 제단을 정결케 하고 그 속죄 제물의 수송아지를 취하여 전의 정한 처소 곧 성소 밖에서 불사를찌며 다음 날에는 흠 없는 수염소 하나로 속죄 제물을 삼아 드려서 그 제단을 정결케 하기를 수송아지로 정결케 함과 같이 하고 정결케 하기를 마친 후에는 흠 없는 수송아지 하나와 떼 가운데서 흠 없는 수양 하나를 드리되 나 여호와 앞에 받들어다가 제사장은 그 위에 소금을 쳐서 나 여호와께 번제 드릴 것이며 칠일 동안은 매일 염소 하나를 갖추어 속죄 제물을 삼고 또 어린 수송아지 하나와 떼 가운데서 수양 하나를 흠 없는 것으로 갖출 것이며 이와 같이 칠일 동안 제단을 위하여 속죄제를 드려 정결케 하며 봉헌할 것이요 이 모든 날이 찬 후 제 팔일에와 그 다음에는 제사장이 제단 위에서 너희 번제와 감사제를 드릴 것이라 그리하면 내가 너희를 즐겁게 받으리라 나 주 여호와의 말이니라 하시더라

    제단을 만드는 날 제단과 제사장을 위한 정결의식(피 뿌리는 규례)을 행한다

    제단 만드는 날 - 어린 수송아지 속죄제, 흠 없는 수염소 속죄제, 흠 없는 수송아지 번제, 흠 없는 수양 번제

    7일간 - 염소 속죄제, 어린 수송아지 속죄제, 흠 없는 수양 속죄제

    제 8일 - 백성들을 위한 번제와 감사제

    < 제사 - 성전에 들어가기 위한 정결의식 >

    1) 제단의 네 뿔과 모통이와 가장자리에 피를 발라 속죄 - 예수 그리스도의 의만 드러나는 산 제물

    2) 소금 - 하나님의 소금 언약 - 변하지 않는 언약을 믿을 때 의의 병기가 될 수 있음

    너희 을 항상 은혜 가운데서 소금으로 고루게 함같이 하라 그리하면 각 사람에게 마땅히 대답할 것을 알리라 (골로새서 4:6)

    3) 7일간의 속죄제 - 완전수 7, 완전하게 자신을 내어드리는 진정한 속죄

    4) 제8일 감사제 - 진정한 속죄를 통해 구원받았을 때 구속의 진정한 감사를 느낄 수 있다

    44장. 성전 출입에 관한 규례

    1-3 닫혀진 동편 출입문

    그가 나를 데리고 성소 동향한 바깥 문에 돌아오시니 그 문이 닫히었더라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이 문은 닫고 다시 열지 못할찌니 아무 사람도 그리로 들어 오지 못할 것은 이스라엘 하나님 나 여호와가 그리로 들어 왔음이라 그러므로 닫아 둘찌니라 은 왕인 까닭에 안 길로 이 문 현관으로 들어와서 거기 앉아서 나 여호와 앞에서 음식을 먹고 그 길로 나갈 것이니라

    하나님만이 출입하시는 그 동편 문은 단혀지고 왕만 안 쪽 현관으로 그곳에 들어갈 수 있다

    왕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지 않고는 하나님과 교제할 수 없다

    < 동문 >

    1) 동문 = 양문 = 희생제물을 데리고 들어가는 문

    2) 예수님께서 나귀를 타고 들어가신 문이 동문, 희생 제물이 될 수 있는 분은 예수님 한 분 뿐이며 예수님이 들어가신 이후 그 문은 닫힌다

    3) 희생 제물이신 예수님의 옆구리에서 흘러나온 물과 피로만 우리가 죄사함을 얻을 수 있으며 우리의 아무런 희생 없이 예수님에 대한 믿음만으로 동문이 아닌 옆문으로 들어갈 수 있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다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나는 양의 문이라 나보다 먼저 온 자는 다 절도요 강도니 양들이 듣지 아니하였느니라 내가 문이니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들어가면 구원을 얻고 또는 들어가며 나오며 꼴을 얻으리라 (요한복음 10:7-9)

    4-9 마음과 몸의 할례

    그가 또 나를 데리고 북문을 통하여 전 앞에 이르시기로 내가 보니 여호와의 영광이 여호와의 전에 가득한지라 내가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린대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너는 전심으로 주목하여 내가 네게 말하는바 ​여호와의 전의 모든 규례와 모든 율례를 귀로 듣고 또 전의 입구와 성소의 출구를 전심으로 주의하고 너는 패역한 자 곧 이스라엘 족속에게 이르기를 주 여호와의 말씀이 이스라엘 족속아 너희의 모든 가증한 일이 족하니라 대저 너희가 마음과 몸에 할례 받지 아니한 이방인을 데려오고 내 떡과 기름과 피를 드릴 때에 그들로 내 성소 안에 있게 하여 내 전을 더럽히므로 너희의 모든 가증한 일 외에 그들이 내 언약을 위반케 하는 것이 되었으며 너희가 내 성물의 직분을 지키지 아니하고 내 성소에 사람을 두어 너희 직분을 대신 지키게 하였느니라 나 주 여호와가 말하노라 이스라엘 족속 중에 있는 이방인 중에 마음과 몸이 할례를 받지 아니한 이방인은 내 성소에 들어오지 못하리라

    < 이방인의 할례 >

    1) 그리스도의 할례

    또 그 안에서 너희가 손으로 하지 아니한 할례를 받았으니 곧 육적 몸을 벗는 것이요 그리스도의 할례니라 너희가 세례그리스도와 함께 장사한바 되고 또 죽은 자들 가운데서 그를 일으키신 하나님의 역사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 안에서 함께 일으키심을 받았느니라 (골로새서 2:11-12)

    2)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다시 살아나는 영적 부활, 거듭남을 의미한다

    너희도 이것을 정녕히 알거니와 음행하는 자나 더러운 자나 탐하는 자 곧 우상 숭배자는 다 그리스도와 하나님 나라에서 기업을 얻지 못하리니 (에베소서 5:5)

    10-14 축소된 레위인들의 직무

    이스라엘 족속이 그릇하여 나를 떠날 때에 레위 사람도 그릇하여 그 우상을 좇아 나를 멀리 떠났으니 그 죄악을 담당하리라 그러나 그들이 내 성소에서 수종들어 전문을 맡을 것이며 전에서 수종들어 백성의 번제의 희생과 및 다른 희생을 잡아 백성 앞에 서서 수종들게 되리라 나 주 여호와가 말하노라 그들이 전에 백성을 위하여 그 우상 앞에서 수종들어서 이스라엘 족속으로 죄악에 거치게 하였으므로 내가 내 손을 들어 쳐서 그들로 그 죄악을 담당하여 내게 가까이 나아와 제사장의 직분을 행치 못하게 하며 또 내 성물 곧 지성물에 가까이 오지 못하게 하리니 그들이 자기의 수욕과 그 행한바 가증한 일을 담당하리라 그러나 내가 그들을 세워 전을 수직하게 하고 전에 모든 수종드는 일과 그 가운데서 행하는 모든 일을 맡기리라

    15-27 사독계 제사장의 금기사항

    이스라엘 족속이 그릇하여 나를 떠날 때에 사독의 자손 레위 사람 제사장들은 내 성소의 직분을 지켰은즉 그들은 내게 가까이 나아와 수종을 들되 내 앞에 서서 기름과 피를 내게 드릴찌니라 나 주 여호와의 말이니라 그들이 내 성소에 들어오며 또 내 상에 가까이 나아와 내게 수종들어 나의 맡긴 직분을 지키되 그들이 안 뜰 문에 들어올 때에나 안 뜰 문과 전 안에서 수종들 때에는 양털 옷을 입지 말고 가는 베 옷을 입을 것이니 가는베 관을 머리에 쓰며 가는베 바지를 입고 땀 나게 하는 것으로 허리를 동이지 말 것이며 그들이 바깥 뜰 백성에게로 나갈 때에는 수종드는 옷을 벗어 거룩한 방에 두고 다른 옷을 입을찌니 이는 그 옷으로 백성을 거룩케 할까 함이니라 그들은 또 머리털을 밀지도 말며 머리털을 길게 자라게도 말고 그 머리털을 깎기만 할 것이며 아무 제사장이든지 안 뜰에 들어갈 때에는 포도주를 마시지 말 것이며 과부나 이혼한 여인에게 장가 들지 말고 오직 이스라엘 족속의 처녀나 혹시 제사장의 과부에게 장가 들 것이며 내 백성에게 거룩한 것과 속된 것의 구별을 가르치며 부정한 것과 정한 것을 분별하게 할 것이며 송사하는 일을 재판하되 내 규례대로 재판할 것이며 내 모든 정한 절기에는 내 법도와 율례를 지킬 것이며 또 내 안식일을 거룩케 하며 시체를 가까이하여 스스로 더럽히지 못할 것이로되 부모나 자녀나 형제나 시집 가지 아니한 자매를 위하여는 더럽힐 수 있으며 이런 자는 스스로 정결케 한 후에 칠일을 더 지낼 것이요 성소에 수종들려하여 안 뜰과 성소에 들어갈 때에는 속죄제를 드릴찌니라 나 주 여호와의 말이니라

    양털 옷 - 제사장 직분을 나타내는 옷, 세상에서는 양털 옷

    가는 베옷 - 거룩한 의의 옷, 세마포 옷, 성전 안뜰에서는 가는 베옷

    우리가 즐거워하고 크게 기뻐하여 그에게 영광을 돌리세 어린 양의 혼인 기약이 이르렀고 그 아내가 예비하였으니 그에게 허락하사 빛나고 깨끗한 세마포를 입게 하셨은즉 이 세마포는 성도들의 옳은 행실이로다 하더라 (요한계시록 19:7-8)

    오직 너희를 부르신 거룩한 자처럼 너희도 모든 행실에 거룩한 자가 되라 (베드로전서 1:15)

    28-31 제사장들의 기업

    그들은 기업이 있으리니 내가 곧 그 기업이라 너희는 이스라엘 가운데서 그들에게 산업을 주지 말라 나는 그 산업이 됨이니라 그들은 소제와 속죄제와 속건제의 제물을 먹을찌니 이스라엘 중에서 구별하여 드리는 물건을 다 그들에게 돌리며 또 각종 처음 익은 열매와 너희 모든 예물 중에 각종 거제 제물을 다 제사장에게 돌리고 너희가 또 첫 밀가루를 제사장에게 주어 그들로 네 집에 복이 임하도록 하게 하라 무릇 새나 육축의 스스로 죽은 것이나 찢긴 것은 다 제사장이 먹지 못할 것이니라

    45장. 하나님의 땅

    1-8 거룩한 땅

    너희는 제비 뽑아 땅을 나누어 기업을 삼을 때에 한 구역을 거룩한 땅으로 삼아 여호와께 예물로 드릴찌니 그 장은 이만 오천척이요 광은 일만척이라 그 구역 안 전부가 거룩하리라 그 중에서 성소에 속할 땅은 장이 오백척이요 광이 오백척이니 네모 반듯하며 그 외에 사면 오십척으로 뜰이 되게 하되 이 척량한 중에서 장 이만 오천척과 광 일만척을 척량하고 그 가운데 성소를 둘찌니 지극히 거룩한 곳이요 그 땅의 거룩한 구역이라 여호와께 가까이 나아가서 성소에서 수종드는 제사장에게 돌려 그 집을 위하여 있는 곳이 되게 하며 성소를 위하여 있는 거룩한 곳이 되게 하고 또 장 이만 오천척과 광 일만척을 척량하여 전에서 수종드는 레위 사람에게 돌려 그들의 산업을 삼아 촌 이십을 세우게 하고 구별한 거룩한 구역 옆에 광 오천척과 장 이만 오천척을 척량하여 성읍의 기지를 삼아 이스라엘 온 족속에게 돌리고 드린바 거룩한 구역과 성읍의 기지 된 땅의 좌우편 곧 드린바 거룩한 구역의 옆과 성읍의 기지 옆의 땅을 왕에게 돌리되 서편으로 향하여 서편 국경까지와 동편으로 향하여 동편 국경까지니 그 장이 구역 하나와 서로 같을찌니라 이 땅으로 왕에게 돌려 이스라엘 중에 기업을 삼게 하면 나의 왕들이 다시는 내 백성을 압제하지 아니하리라 그 나머지 땅은 이스라엘 족속에게 그 지파대로 나눠 줄찌니라

    거룩한 땅 : 장 25,000척, 광 10,000척

    성소 : 장 500척, 광 500척

    뜰 : 성소 사면 50척

    성읍의 기지 : 광 5,000척, 장 25,000척

    왕의 땅을 주어 백성들을 압제하지 못하게 한다

    < 거룩한 땅 >

    1) 거룩한 곳, 거룩한 구역, 예물로 드려진 땅, 예수 그리스도

    2)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그를 믿는 그리스도인도 하나님의 예물로서 산 제물이 되어야 한다

    3) 세상과 구별된 땅, 성소가 세워지는 땅, 우리가 거룩한 땅이며 그 위에 성소가 세워질 때 우리는 제사장이 될 수 있다

    4) 거룩한 땅으로부터 생명수의 강이 흘러넘치는 것 - 말씀이 우리를 지배할 때 성령이 충만하게 된다

    또 저가 수정 같이 맑은 생명수의 강을 내게 보이니 하나님과 및 어린 양의 보좌로부터 나서 길 가운데로 흐르더라 강 좌우에 생명 나무가 있어 열 두가지 실과를 맺히되 달마다 그 실과를 맺히고 그 나무 잎사귀들은 만국을 소성하기 위하여 있더라 (요한계시록 22:1-2)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리라 하시니 이는 그를 믿는 자의 받을 성령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 (예수께서 아직 영광을 받지 못하신 고로 성령이 아직 저희에게 계시지 아니하시더라) (요한복음 7:38-39)

    9-12 이스라엘 치리자들의 법도

    나 주 여호와가 말하노라 이스라엘의 치리자들아 너희에게 족하니라 너희는 강포와 겁탈을 제하여 버리고 공평과 공의를 행하여 내 백성에게 토색함을 그칠찌니라 나 주 여호와의 말이니라 너희는 공평한 저울과 공평한 에바와 공평한 밧을 쓸찌니 에바와 밧은 그 용량을 동일히 하되 호멜의 용량을 따라 밧은 호멜 십분지 일을 담게 하고 에바도 호멜 십분지 일을 담게 할 것이며 세겔은 이십 게라니 이십 세겔과 이십 오 세겔과 십 오 세겔로 너희 마네가 되게 하라

    공평과 공의로 백성들을 다스려라

    13-17 예물과 제사

    너희의 마땅히 드릴 예물이 이러하니 밀 한 호멜에서는 에바 육분지 일을 드리고 보리 한 호멜에서도 에바 육분지 일을 드리며 기름은 정한 규례대로 한 고르에서 밧 십분지 일을 드릴찌니 기름의 밧으로 말하면 한 고르는 십 밧 곧 한 호멜이며 (십 밧은 한 호멜이라) 또 이스라엘 윤택한 초장의 떼 이백 마리에서는 한 어린 양을 드릴 것이라 백성을 속죄하기 위하여 이것들로 소제와 번제와 감사제물을 삼을찌니라 나 주 여호와의 말이니라 이 땅 모든 백성은 이 예물로 이스라엘 왕에게 드리고 왕은 본분대로 번제와 소제와 전제를 절기와 월삭과 안식일과 이스라엘 족속의 모든 정한 절기에 드릴찌니 이스라엘 족속을 속죄하기 위하여 이 속죄제와 소제와 번제와 감사제물을 갖출찌니라

    18-25 절기들에 관한 규례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정월 초하룻날에 흠 없는 수송아지 하나를 취하여 성소를 정결케 하되 제사장이 그 속죄제 희생의 피를 취하여 전 문설주와 제단 아랫층 네 모퉁이와 안 뜰 문설주에 바를 것이요 그 달 칠일에도 모든 그릇 범죄한 자와 부지중 범죄한 자를 위하여 역시 그렇게 하여 전을 속죄할찌니라 정월 십 사일에는 유월절 곧 칠일 절기를 지키며 누룩 없는 떡을 먹을 것이라 그 날에 왕은 자기와 이 땅 모든 백성을 위하여 송아지 하나를 갖추어 속죄제를 드릴 것이요 또 절기 칠일 동안에는 그가 나 여호와를 위하여 번제를 갖추되 곧 칠일 동안에 매일 흠 없는 수송아지 일곱과 수양 일곱이며 또 매일 수염소 하나를 갖추어 속죄제를 드릴 것이며 또 소제를 갖추되 수송아지 하나에는 밀가루 한 에바요 수양 하나에도 한 에바며 밀가루 한 에바에는 기름 한 힌씩이며 칠월 십 오일 절기 칠일 동안에도 이대로 행하여 속죄제와 번제며 그 밀가루와 기름을 드릴찌니라

    46장. 안식일과 월삭

    1-10 안식일과 월삭

    나 주 여호와가 말하노라 안 뜰 동향한 문을 일하는 육일 동안에는 닫되 안식일에는 열며 월삭에도 열고 왕은 바깥 문 현관을 통하여 들어와서 문 벽 곁에 서고 제사장은 그를 위하여 번제와 감사제를 드릴 것이요 왕은 문통에서 경배한 후에 밖으로 나가고 그 문은 저녁까지 닫지 말 것이며 이 땅 백성도 안식일과 월삭에 이 문통에서 나 여호와 앞에 경배할 것이며 안식일에 왕이 여호와께 드릴 번제는 흠 없는 어린 양 여섯과 흠 없는 수양 하나라 그 소제는 수양 하나에는 밀가루 한 에바요 모든 어린 양에는 그 힘대로 할 것이며 밀가루 한 에바에는 기름 한 힌씩이니라 월삭에는 흠 없는 수송아지 하나와 어린 양 여섯과 수양 하나를 드리되 모두 흠 없는 것으로 할 것이며 또 소제를 갖추되 수송아지에는 밀가루 한 에바요 수양에도 밀가루 한 에바며 모든 어린 양에는 그 힘대로 할 것이요 밀가루 한 에바에는 기름 한 힌씩이며 왕이 올 때에는 이 문 현관을 통하여 들어오고 나갈 때에도 그리할찌니라 그러나 모든 정한 절기에 이 땅 거민이 나 여호와 앞에 나아올 때에는 북문으로 들어와서 경배하는 자는 남문으로 나가고 남문으로 들어오는 자는 북문으로 나갈찌라 들어온 문으로 도로 나가지 말고 그 몸이 앞으로 향한대로 나갈찌며 왕은 무리 가운데 있어서 그들의 들어올 때에 들어오고 그들의 나갈 때에 나갈찌니라

    사람의 출입이 안되는 동문이 안식일과 월삭에는 열리고, 하나님, 왕(예수 그리스도), 백성(성도들)의 교제가 이루어지게 된다

    백성은 북문으로 들어오면 남문으로, 남문으로 들어오면 북문으로 하여 앞으로 향한대로 나가게 한다

    오직 나의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또한 뒤로 물러가면 내 마음이 저를 기뻐하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 우리는 뒤로 물러가 침륜에 빠질 자가 아니요 오직 영혼을 구원함에 이르는 믿음을 가진 자니라 (히브리서 10:38-39)

    11-15 기타 제사에 관한 규례

    절기와 성회 때에 그 소제는 수송아지 하나에 밀가루 한 에바요 수양 하나에도 한 에바요 모든 어린 양에는 그 힘대로 할 것이며 밀가루 한 에바에는 기름 한 힌씩이며 만일 왕이 자원하여 번제를 갖추거나 혹 자원하여 감사제를 갖추어 나 여호와께 드릴 때에는 그를 위하여 동향한 문을 열고 그가 번제와 감사제를 안식일에 드림 같이 드리고 밖으로 나갈찌며 나간 후에 문을 닫을찌니라 아침마다 일년 되고 흠 없는 어린 양 하나로 번제를 갖추어 나 여호와께 드리고 또 아침마다 그것과 함께 드릴 소제를 갖추되 곧 밀가루 에바 육분지 일과 기름 힌 삼분지 일을 섞을 것이니 이는 영원한 규례를 삼아 항상 나 여호와께 드릴 소제라 이와 같이 아침마다 그 어린 양과 밀가루와 기름을 갖추어 항상 드리는 번제를 삼을찌니라

    16-18 왕의 기업에 관한 규례

    나 주 여호와가 말하노라 왕이 만일 한 아들에게 선물을 준즉 그의 기업이 되어 그 자손에게 속하나니 이는 그 기업을 이어 받음이어니와 왕이 만일 그 기업으로 한 종에게 선물로 준즉 그 종에게 속하여 희년까지 이르고 그 후에는 왕에게로 돌아갈 것이니 왕의 기업은 그 아들이 이어 받을 것임이니라 왕은 백성의 기업을 취하여 그 산업에서 쫓아내지 못할찌니 왕이 자기 아들에게 기업으로 줄 것은 자기 산업으로만 할 것임이니라 백성으로 각각 그 산업을 떠나 흩어지지 않게 할 것이니라

    19-24 희생물을 삶는 부엌

    그 후에 그가 나를 데리고 문곁 통행구로 말미암아 제사장의 북향한 거룩한 방에 들어가시니 그 방 뒤 서편에 한 처소가 있더라 그가 내게 이르시되 이는 제사장이 속건제와 속죄제 희생을 삶으며 소제 제물을 구울 처소니 그들이 이 성물을 가지고 바깥 뜰에 나가면 백성을 거룩하게 할까 함이니라 하시고 나를 데리고 바깥 뜰로 나가서 나로 뜰 네 구석을 지나가게 하시는데 본즉 그 뜰 매 구석에 또 뜰이 있는데 뜰 네 구석에 있는 그 뜰에 담이 둘렸으니 뜰의 장이 사십척이요 광이 삼십척이라 구석의 네 뜰이 한 척수며 그 작은 네 뜰 사면으로 돌아가며 부엌이 있고 그 사면 부엌에 삶는 기구가 설비되었는데 그가 내게 이르시되 이는 삶는 부엌이니 전에 수종드는 자가 백성의 제물을 여기서 삶을 것이니라 하시더라

    47장. 성전에서 흘러 나오는 물

    1-2 성전에서 흘러 나오는 물

    그가 나를 데리고 전 문에 이르시니 전의 전면이 동을 향하였는데 그 문지방 밑에서 물이 나와서 동으로 흐르다가 전 우편 제단 남편으로 흘러 내리더라 그가 또 나를 데리고 북문으로 나가서 바깥 길로 말미암아 꺾여 동향한 바깥 문에 이르시기로 본즉 물이 그 우편에서 스미어 나오더라

    성전에서 흘러 나오는 물은 성령을 의미한다

    3-5 점점 깊어지는 성전 물

    그 사람이 손에 줄을 잡고 동으로 나아가며 일천척을 척량한 후에 나로 그 물을 건너게 하시니 물이 발목에 오르더니 다시 일천척을 척량하고 나로 물을 건너게 하시니 물이 무릎에 오르고 다시 일천척을 척량하고 나로 물을 건너게 하시니 물이 허리에 오르고 다시 일천척을 척량하시니 물이 내가 건너지 못할 강이 된지라 그 물이 창일하여 헤엄할 물이요 사람이 능히 건너지 못할 강이더라

    1천척 - 발목 높이의 강

    2천척 - 무릎 높이의 강

    3천척 - 허리 높이의 강

    4천척 - 사람이 건너지 못할 강

    하나님께서 계신 동편을 향하여 나아가면 처음 발목 높이 정도의 성령으로 채워지다가 점점 높아져서 사람으로서는 스스로 건너지 못할 만큼의 높이의 강을 만나게 된다

    우리의 신앙 또한 성령 하나님의 충만함이 발목 높이 만큼 얕아서 우리의 의지로 움직일 수 있는 정도가 아닌 건너지 못할 강 만큼 차 올라 우리의 뜻이 아닌 충만한 성령 하나님의 뜻대로 인도하심을 받아야 한다

    6-12 생명을 소성케하는 성전 물

    그가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네가 이것을 보았느냐 하시고 나를 인도하여 강 가로 돌아가게 하시기로 내가 돌아간즉 강 좌우편에 나무가 심히 많더라 그가 내게 이르시되 이 물이 동방으로 향하여 흘러 아라바로 내려가서 바다에 이르리니 이 흘러 내리는 물로 그 바다의 물이 소성함을 얻을찌라 이 강물이 이르는 곳마다 번성하는 모든 생물이 살고 또 고기가 심히 많으리니 이 물이 흘러 들어 가므로 바닷물이 소성함을 얻겠고 이 강이 이르는 각처에 모든 것이 살 것이며 또 이 강 가에 어부가 설 것이니 엔게디에서부터 에네글라임까지 그물 치는 곳이 될 것이라 그 고기가 각기 종류를 따라 큰 바다의 고기 같이 심히 많으려니와 그 진펄과 개펄은 소성되지 못하고 소금 땅이 될 것이며 강 좌우 가에는 각종 먹을 실과나무가 자라서 그 잎이 시들지 아니하며 실과가 끊치지 아니하고 달마다 새 실과를 맺으리니 그 물이 성소로 말미암아 나옴이라 그 실과는 먹을 만하고 그 잎사귀는 약 재료가 되리라

    13-20 새 땅의 지계

    나 주 여호와가 말하노라 너희는 이 지계대로 이스라엘 십 이 지파에게 이 땅을 나누어 기업이 되게 하되 요셉에게는 두 분깃이니라 내가 옛적에 맹세하여 이 땅으로 너희 열조에게 주마 하였었나니 너희는 피차 없이 나누어 기업을 삼으라 이 땅이 너희의 기업이 되리라 이 땅 지계는 이러하니라 북방은 대해에서 헤들론 길로 말미암아 스닷 어귀까지니 곧 하맛과 브로다며 다메섹 지계와 하맛 지계 사이에 있는 시브라임과 하우란 지계 곁에 있는 하셀핫디곤이라 그 지계가 바닷가에서부터 다메섹 지계에 있는 하살에논까지요 그 지계가 또 극북방에 있는 하맛 지계에 미쳤나니 이는 그 북방이요 동방은 하우란과 다메섹과 및 길르앗과 이스라엘 땅 사이에 있는 요단강이니 북편 지계에서부터 동해까지 척량하라 이는 그 동방이요 남방은 다말에서부터 므리봇 가데스 물에 이르고 애굽 시내를 따라 대해에 이르나니 이는 그 남방이요 서방은 대해라 남편 지계에서부터 맞은편 하맛 어귀까지 이르나니 이는 그 서방이니라

    21-23 이방인에게도 기업

    그런즉 너희가 이스라엘 모든 지파대로 이 땅을 나누어 차지하라 너희는 이 땅을 나누되 제비 뽑아 너희와 너희 가운데 우거하는 외인 곧 너희 가운데서 자녀를 낳은 자의 기업이 되게 할찌니 너희는 그 외인을 본토에서 난 이스라엘 족속 같이 여기고 그들로 이스라엘 지파 중에서 너희와 함께 기업을 얻게 하되 외인이 우거하는 그 지파에서 그 기업을 줄찌니라 나 주 여호와의 말이니라

    48장. 일곱 지파의 땅 분배

    1-12 북쪽 땅의 분배

    모든 지파의 이름대로 이 같을찌니라 극북에서부터 헤들론 길로 말미암아 하맛 어귀를 지나서 다메섹 지계에 있는 하살에논까지 곧 북으로 하맛 지계에 미치는 땅 동편에서 서편까지는 단의 분깃이요 단 지계 다음으로 동편에서 서편까지는 아셀의 분깃이요 아셀 지계 다음으로 동편에서 서편까지는 납달리의 분깃이요 납달리 지계 다음으로 동편에서 서편까지는 므낫세의 분깃이요 므낫세 지계 다음으로 동편에서 서편까지는 에브라임의 분깃이요 에브라임 지계 다음으로 동편에서 서편까지는 르우벤의 분깃이요 르우벤 지계 다음으로 동편에서 서편까지는 유다의 분깃이요 8-12 거룩한 땅(제사장의 땅)

    유다 지계 다음으로 동편에서 서편까지는 너희가 예물로 드릴 땅이라 광이 이만 오천척이요 장은 다른 분깃의 동편에서 서편까지와 같고 성소는 그 중앙에 있을찌니 곧 너희가 여호와께 드려 예물로 삼을 땅의 장이 이만 오천척이요 광이 일만척이라 이 드리는 거룩한 땅은 제사장에게 돌릴찌니 북편으로 장이 이만 오천척이요 서편으로 광이 일만척이요 동편으로 광이 일만척이요 남편으로 장이 이만 오천척이라 그 중앙에 여호와의 성소가 있게 하고 이 땅으로 사독의 자손 중 거룩히 구별한 제사장에게 돌릴찌어다 그들은 직분을 지키고 이스라엘 족속이 그릇할 때에 레위 사람의 그릇한 것처럼 그릇하지 아니하였느니라 이 온 땅 중에서 예물로 드리는 땅 곧 레위 지계와 연접한 땅을 그들이 지극히 거룩한 것으로 여길찌니라

    13-14 레위의 땅

    제사장의 지계를 따라 레위 사람의 분깃을 주되 장이 이만 오천척이요 광이 일만척으로 할찌니 이 구역의 장이 이만 오천척이요 광이 각기 일만척이라 그들이 그 땅을 팔지도 못하며 바꾸지도 못하며 그 땅의 처음 익은 열매를 남에게 주지도 못하리니 이는 나 여호와에게 거룩히 구별한 것임이니

    15-20 속된 땅(성읍의 기지)

    이 이만 오천척 다음으로 광 오천척은 속된 땅으로 하여 성읍을 세우며 거하는 곳과 들을 삼되 성이 그 중앙에 있게 할찌니 그 척수는 북편도 사천 오백척이요 남편도 사천 오백척이요 동편도 사천 오백척이요 서편도 사천 오백척이며 그 성의 들은 북으로 이백 오십척이요 남으로 이백 오십척이요 동으로 이백 오십척이요 서으로 이백 오십척이며 예물을 삼아 거룩히 구별할 땅과 연접하여 남아 있는 땅의 장이 동으로 일만척이요 서으로 일만척이라 곧 예물을 삼아 거룩히 구별할 땅과 연접하였으며 그 땅의 소산은 성읍에서 역사하는 자의 양식을 삼을찌라 이스라엘 모든 지파 중에 그 성읍에서 역사하는 자는 그 땅을 기경할찌니라 그런즉 예물로 드리는 땅의 도합은 장도 이만 오천척이요 광도 이만 오천척이라 너희가 거룩히 구별하여 드릴 땅은 성읍의 기지와 합하여 네모 반듯할 것이니라

    21-22 왕의 땅

    거룩히 구별할 땅과 성읍의 기지 좌우편에 남은 땅은 왕에게 돌릴찌니 곧 거룩히 구별할 땅의 동향한 그 지계 앞 이만 오천척과 서향한 그 지계 앞 이만 오천척이라 다른 분깃들과 연접한 땅이니 이것을 왕에게 돌릴 것이며 거룩히 구별할 땅과 전의 성소가 그 중간에 있으리라 그런즉 왕에게 돌려 그에게 속할 땅은 레위 사람의 기업 좌우편과 성읍의 기지 좌우편이며 유다 지경과 베냐민 지경 사이에 있을찌니라

    23-29 남쪽 땅의 분배

    그 나머지 모든 지파는 동편에서 서편까지는 베냐민의 분깃이요 베냐민 지계 다음으로 동편에서 서편까지는 시므온의 분깃이요 시므온 지계 다음으로 동편에서 서편까지는 잇사갈의 분깃이요 잇사갈 지계 다음으로 동편에서 서편까지는 스불론의 분깃이요 스불론 지계 다음으로 동편에서 서편까지는 갓의 분깃이며 지계 다음으로 남편 지계는 다말에서부터 므리바가데스 물에 이르고 애굽 시내를 따라 대해에 이르나니 이것은 너희가 제비 뽑아 이스라엘 지파에게 나누어 주어 기업이 되게 할 땅이요 또 이것들은 그들의 분깃이니라 나 주 여호와의 말이니라

    30-35 성읍의 출입구

    성읍의 출입구는 이러하니라 북편의 광이 사천 오백척이라 그 성읍의 문들은 이스라엘 지파들의 이름을 따를 것인데 북으로 문이 셋이라 하나는 르우벤 문이요 하나는 유다 문이요 하나는 레위 문이며 동편의 광이 사천 오백척이니 또한 문이 셋이라 하나는 요셉 문이요 하나는 베냐민 문이요 하나는 단 문이며 남편의 광이 사천 오백척이니 또한 문이 셋이라 하나는 시므온 문이요 하나는 잇사갈 문이요 하나는 스불론 문이며 서편도 사천 오백척이니 또한 문이 셋이라 하나는 갓 문이요 하나는 아셀 문이요 하나는 납달리 문이며 그 사면의 도합이 일만 팔천척이라 그 날 후로는 그 성읍의 이름을 여호와삼마라 하리라

    여호와삼마 - 여호와가 거기 계신다, 어느 때나 그곳에 함께 계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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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창세기 2:7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 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된지라.


    the LORD God formed the man from the dust of the ground and breathed into his nostrils the breath of life, and the man became a living being

    개역개정,7 여호와 하나님이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되니라

    * 땅의 흙으로(עָפָר מִן־הָאֲדָמָה - 아파르 민 하아다마)

    여기서 '땅'(아다마)은 '붉다'(애 4:7; 나 2:3)란 뜻이 있는 '아담'에서 유래한 단어이다. 이는 기본적으로 땅이 붉음을 우리에게 알려주는 표현이다. 또한 '흙'(아파르)은 '재'(민 19:17), '진토'(삼상 2:8), '가루'(왕하 23:15)로도 번역되며, 동사로 사용될 때는 '부스러지다'(왕상 20:10)는 뜻도 지닌다. 따라서 사람은 하나님이 주시는 생기가 없다면 흙과 같이 부스러지기 쉬운 보잘것 없는 존재이며 결국은 흙으로 돌아갈 존재이다.

    * 사람(הָאָדָם - 하아담)

    성경에서 히브리어 '아담'이라는 단어는 약 560회 가량 나온다. 그런데 이 단어는 본절에서와 같이 '사람'(man)을 뜻하기도 하고, 19절 이하에서 계속 반복되는 것과 같이 최초의 사람인 '아담'(Adam)이란 특정한 인물의 이름을 뜻하기도 한다. 

    이 단어의 어원과 거기 담긴 뜻이 정확히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견해가 있다. 
    첫째, '아담'이 '땅'을 의미하는 '아다마'에서 유래했다는 주장이다. 이는 하나님이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셨다는 본절의 기록과 일맥 상통하며, 보편적으로 받아들여지는 견해이다. 

    둘째, '만들다'(make), '짓다'(build)란 뜻을 지닌 앗수르어 '아다무'에서 유래했다는 주장이다. 즉 아담이란 뜻은 사람이 '지음을 받는 존재' 즉 피조물임을 강조하는 이름이라는 견해이다.  

    셋째, 히브리어 첫번째 알파벳인 '알렙'과 '물' 혹은 세계의 끝을 상징한다고 볼 수 있는 '바다'를 의미하는 히브리어 알파벳 '멤' 그리고 두 글자 사이에 '중심'을 의미하는 히브리어 알파벳 '달렛'을 사용하여, 처음과 끝이 의미하는 모든 피조 세상의 중심에 사람이 위치함을 보여 준다는 견해이다.  

    넷째, 하나님을 의미하는 '엘로힘'의 히브리어 알파벳 '알렙'과 짐승이란 뜻을 지닌 '베헤마'의 히브리어 알파벳 '멤'사이의 존재가 사람임을 보여 준다는 주장이다. 이는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된 신적 요소를 지닌 반면 육체의 정욕대로 살 때는 짐승과 같은 존재로 타락할 수도 있다는 견해이다.  

    다섯째, '빛이 나다'라는 의미가 있는 아람어에서 유래하여 사람이 다른 피조물과 구별되는 존귀한 존재임을 나타낸다는 견해이다.

    여섯째, '결합시키다'라는 의미가 있는 아람어에서 유래하여 인류의 시조인 아담이 모든 시대와 모든 장소에서 살았던 전 인류를 하나로 결합시키는 자임을 나타낸다는 견해이다.  

    일곱째, '붉다'라는 말에서 유래하여, 사람의 피부 빛을 반영하고 있다는 견해이다.  

    이 중에 가장 보편적으로 받아들여지는 견해는 첫 번째 견해라고 할 수 있지만 다른 견해들을 통해서도 우리는 사람이 어떤 존재인지를 다양하게 생각해 볼 수 있다. 

    창세기 1:26-27절은 사람을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드셨다는 전인격적인 창조에 관한 기술이라면 본문은 특별히 사람의 육신의 창조에 관한 기술이라고 할 수 있다.

    * 생기를(נִשְׁמַת חַיִּים - 니쉬마트 하임)

    본문의 '생기'는 '숨'(왕상 17:17), '호흡'(신 20:6), '기운'(욥 4:9), '영혼'(잠 20:17) 등으로도 번역되는 '네솨마'의 연계형 '니쉬마트'와 '살다'(23:1), '활발하다'(시 38:19) 등에서 유래해 '생명'(1:30; 신 28:66)으로 번역되는 '하이'의 복수형인 '하임'이 결합된 말이다. 
    따라서 본문을 직역하면 '생명들의 기운'이며, 곧 생명력이라고 할 수 있다. 
    다른 동물들과는 달리 사람의 생명은 하나님께서 직접적인 방법으로 부여하신 '생기'로부터 유래되었음을 보여 주는 표현이다. 

    * 생령(לְנֶפֶשׁ חַיָּה - 레네페쉬 하야)

    '숨', '호흡'을 뜻하는 '네페쉬'와 '생존', '존재'를 의미하는 '하야'가 합해서 된 말로 '살아 있는 존재'란 뜻이다. 물론 '네페쉬'가 다른 곳에서 '혼'(Soul) 또는 '영혼'(Spirit)을 가리키는 뜻으로도 쓰였으나 여기서는 '호흡'(breath)이란 뜻으로 사용되었다. 따라서 '생령'이라는 말은 사람이 '영혼'을 지닌 존재임을 직접적으로 증거하는 구절은 아니다. 사람의 영혼은 오히려 1:26의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이란 말에 강력히 암시되어 있다. 그런데 번역 성경에서는 왜 동일한 단어를 일반 짐승을 가리킬 때는 '생물'(RSV, living creature)로, 사람을 가리킬 때는 '생령'(KJV, living soul)으로 번역했을까? 이러한 차이는 히브리어 단어 때문이 아니라 문맥의 차이를 반영하여 번역함으로써 생겨난 것이다. 즉 하나님께서 짐승들은 말씀을 통하여 육체와 생명을 동시에 창조하신 반면 특별히 사람만은 그 육체를 흙으로 지으시고 그 생명은 하나님께서 친히 그 코에 생기를 불어 넣으심으로 있게 하셨다. 이러한 독특한 방법을 사용하여 창조된 사람은 살아 숨쉰다는  점에서 '네페쉬 하야'인 다른 동물들과 차이가 없으나, 하나님의 특별한 애정으로 그 형상에 따라 지음을 받았다는 점에서는 '생령'이라 불릴 수 있는 것이다(1:27).



    여호와 의미

    여호와는 히브리어 יהוה (YHWH)에서 유래했으며, 뜻은 ‘독립적인 존재’ ‘스스로 있는 자’이다. 
    이것을 자존이라 부른다. 
    여호와는 자존자이시다. 
    출애굽기 3:14에서 ‘나는 스스로 있는 자이니라’의 표현이 ‘야훼’이다.

    • 출 3:14 하나님이 모세에게 이르시되 나는 스스로 있는 자이니라 또 이르시되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같이 이르기를 스스로 있는 자가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하라
    • ויאמר אלהים אל־משה אהיה אשר אהיה ויאמר כה תאמר לבני ישראל אהיה שלחני אליכם׃
    출 3:14의 ‘나는 스스로 있는 자이니라

    구약에서 가장 많이 나타나는 하나님의 이름은 ‘엘’ 과 ‘엘로힘’이다. 
    엘과 복수형인 ‘엘로힘’은 창조주 하나님으로서의 능력과 위험을 나타낸다. 
    하지만 여호와는 구원과 심판의 의미가 강하다. 
    종종 ‘야훼 엘로힘’ 처럼 ‘여호와 하나님’으로 함께 나타날 때가 많다.

    יהוה는 자음만 존재하다. 
    원래 히브리어는 모음 없는 자음만 존재한다. 
    2세기 이후 랍비들이 예루살렘이 파괴되고 디아스포라 시대가 되면서 히브리음을 잊을 수 있다는 염려 때문에 모음을 표기하여 지금이 이른 것이다. 
    그러니까 그것이 정확한 발음인지도 사실 알지 못한다.

    히브리어 자음 네 개로 이루어진 יהוה는 테트라그라마톤으로 불리며 신성시 되고 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주님이란 뜻으로 아도나이(אֲדֹנָי)로 표기하고 읽었다. 
    יהוה를 야훼(Yahweh)로 발음할지, 여호와(Jehovih)로 발음할지는 아직도 논쟁 중이다.

    여호와는 이름인가?

    많은 사람들이 착각하는 것의 하나가 하나님의 이름이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이것은 이름이 갖는 속성을 전혀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신에게 이름은 존재하지 않는다. 
    존재하는 순간 신이 아니다. 
    다만 인간의 인지 능력으로 이해할 수 없기 때문에 소위 ‘이름’이란 이름으로 하나님은 자신을 계시하시는 것이다.

    • 사사기 13장 18절 
      여호와의 사자가 그에게 이르되 어찌하여 내 이름을 묻느냐 내 이름은 기묘자라 하니라
    • 이사야 9장 6절 
      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는데 그의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그의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 것임이라

    일반적으로 ‘하나님의 이름’으로 표기를 하지만 그것은 대명사이지 고유명사가 아니다. 
    여호와 엘로힘 엘룐 등은 아버지 선생인 사장님이지 ‘김소똥’ ‘박개똥’이 아닌 것이다.




  • 그 사면의 도합이 일만 팔천척이라 그 후로는 그 성읍의 이름을 여호와삼마라 하리라.
    The distance all around will be 18,000 cubits. "And the name of the city from that time on will be: The LORD is There.

    여호와 삼마(The LORD is There)


     여호와 삼마(Jehovah Samma)

    여호와 삼마는 '여호와께서 여기에 계신다'는 뜻입니다. 

    에스겔서의 마지막 부분에 위치하고 있으며,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는 이름입니다. 

    • 에스겔  48:35 그 사방의 합계는 만 팔천 척이라 그 날 후로는 그 성읍의 이름을 여호와삼마라 하리라

    여호와 삼마 (Jehovah-shammah)

    에스겔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벨론으로 끌려갔을 때를 배경으로 합니다. 에스겔은 두 가지를 바로 잡을 필요가 있었습니다. 하나는 곧 예루살렘으로 돌아간다는 헛된 희망이고, 다른 하나는 하나님은 바벨론의 신에게 졌다는 잘못된 신앙관입니다. 이것을 바로 잡기 위해 에스겔서는 기록되었습니다. 

    헛된 소망을 버려라

    먼저는 칠십 년이 차기까지는 절대 예루살렘으로 돌아가지 않는다는 것을 말합니다. 
    다른 하나는 하나님은 이방신과 싸워서 진 것이 아니라 '너희 죄로 인해 징계한 것'이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땅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포로로 끌려온 이곳에도 함께 하신다는 것을 말하기 위해 '여호와 삼마'라 불렀습니다. 

    하나님은 택하신 백성들을 버리지 않습니다. 
    징계하십니다. 그것은 사랑이며, 공의를 세우시는 하나님의 방법입니다. 
    그리고 다시 찾아오시며 그들을 안아 주십니다. 

    여호와의 삼마의 절정은 독생자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 주심으로 사람들과 함께 거하시는 것이니다. 
    성육신의 의미가 '장막을 치다'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함께 거하신다는 말입니다.

    요한복음 1:14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σκηνόω
    스트롱번호 4637

    1. 살다.  2. 거주하다.  3. 계 13:6
    발음 [ skēnŏō ]  
    어원  /  미래 σκηνώσω, 제1부정과거 ἐσκή- νωσα, 4636에서 유래
    • 1. 살다, 거주하다, 계 13:6, 21:3, 요 1:14.
    • 관련 성경
      거하다(요 1:14, 계 13:6, 21:3), 장막을 치다(계 7:15).


    말씀이 육신이 되어 
    - 본문은 9절에 서술한 성육신 사건을 다시 언급하는 내용이다. 
    여기서 '육신'(*, 사르크스)은 육체적 존재를 의미한다(갈 4:13). 
    따라서 '그리스도가 인간으로 오신 것처럼 보였으나 육체로 오시지 않았으며 그의 수난도 하나의 가상(假像)이었다'고 주장했던 영지주의의 가현설(Docetism)을 본문은 '육신'이라는 한 단어로 여지없이 붕괴시킨다. 
    한편 '사르크스'는 일반적으로 '몸'을 의미하는 '소마'(*)와는 다른 뉘앙스로 쓰였다. 
    즉 '사르크스'는 주로 부패하고 도덕적으로 연약한 육신을 의미한다. 
    바울도 이 용어를 하늘이나 영의 영역과 반대되는 개념으로 쓰고 있다(롬 1:3,4). 
    즉 하나님의 지혜와 육체의 지혜, 하나님의 권능과 육체의 무기는 서로 반대되며 서로 대적한다(고전 1:24-31; 고후 10:4). 
    그리고 하나님의 약속과 '육체'는 결코 부합 될 수 없다(롬 9:8). 
    그러나 이 용어가 그리스도에 대해 쓰일 경우에는 부패하고 도덕적으로 연약한 '육체'를 의미하지 않으며(고후 5:21), 단지 인간적인 한계성과 연약성을 지닌 존재임을 나타낸다(히 4:15). 
    이는 그리스도의 완벽한 성육신을 나타낸다. 
    이에 대한 구체적인 예증으로서 본서는 그리스도의 인성을 잘 보여준다. 
    (1) 피곤(4:6) 
    (2) 갈증(4:7) 
    (3) 하나님께 의존(5:19) 
    (4) 슬퍼 눈물을 흘리심(11:35) 
    (5) 분노하심(11:38) 
    (6) 갈등(12:27) 
    (7) 수난과 죽으심(18, 19장) 등.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 '우리 가운데'(*, 엔 헤민)라는 표현은 10절의 '그가 세상에'라는 말과 내용상 일치한다. 
    즉 그리스도의 성육신은 이 세상에서 이루어졌으며, 우리 인간들 속에서 발생한 역사적인 사건이다. 
    그러므로 요한은 '천막을 치다'란 뜻의 동사 '스케노오'(*)의 부정과거 능동태인 '에스케노센'(*)을 사용함으로써 그리스도의 성육신의 역사성을 실증한다. 
    따라서 본절은 마1:18-2:23과 죽 2:1-20의 성육신 기사를 함축적으로 요약한 말씀이다. 
    한편 '에스케노센'이란 표현에 대한 해석은 여러 가지가 있다. 
    이러한 해석은 시내산에서의 하나님의 현현(顯現) 장면과 본문의 전후 내용을 비교해 볼 때 상당한 설득력을 제공해 준다.
    (1) 성육신하신 예수께서 '임시적으로' 이 땅에 계셨음을 가리킴. 
    (2) '하나님의 임재'를 상기시킴. 유대인들이 광야에서 방랑할 때 하나님이 거주하시는 곳으로 정해진 곳이 바로 '장막'이었으며, 특히 요한이 곧이어 '영광'에 관해서 언급한 사실도 이 해석을 뒷받침한다. 
    왜냐하면 영광과 장막은 서로 밀접한 관계가 있기 때문이다(출 40:34이하). 
    (3) 모세에게 주어졌던 계시가 예수에 의해 확연히 밝혀졌음을 보여줌.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 '보니'에 해당하는 헬랑어는 '놀라운 광경을 보다'라는 뜻의 '데아오마이'(*)의 부정 과거 중간태로서 '놀라운 상태에서 실제로 목격했다'라는 의미를 포함한다. 
    이는 아마도 저자 요한이 예수님의 변모*Transfiguration, 마 17:2-8;막 9:2-8;눅 9:28-36)에 대한 회상을 기초로 하여 사용한 용어인 것 같다. 
    그때 예수는 거룩한 광채와 함께 나타나 보이셨으며, 하나님의 사랑스런 아들이심을 나타내셨다. 
    이는 시편 기자의 '주의 영광를 저희 자선에게 나타내소서'(시 90:16)라는 간구를 연상테 한다. 
    더 나아가 그리스도의 성육신과 공생애와 부활은 그 자체로서 어둠 속에서 빛이 환하게 비치듯이 놀랍고도 영광스러운 사건으로서 우리 성도들의 영광을 위하여 예정된 것이었다(고전 2:7; 벧전 5:4).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 
    - 저자 요한은 그리스도의 영광의 근원이 인성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신성에 있음을 재천명한다. 
    즉 1절에서 그리스도의 영원성, 인격성, 신성을 나타냈듯이 본문에서도 '...같이', '...만큼'이란 뜻을 지닌 부사 '호스'(*)를 사용함으로써, 그리스도의 영광이 영원하신 성부 하나님의 영광과 대당함을 보여주고 있다. 
    특히 '독생자'(공동번역, '외아들')라고 번역된 '모노게누스'(*)는 '모노스'(*, '유일한')와 '게노스'(*, '종류', '혈족')의 합성어로서 누가 복음과 히브리서에서 '외아들'(눅 7:12;9:38;히 11:17) 또는 '외동딸'(눅 8:42)을 지칭한다. 
    그러나 요한에게 있어서 이 용어는 오직 그리스도를 가리키고 있으며(3:16, 18;요일 4:9), 누가복음과 히브리서에서 보다 더 심오한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 
    즉 그리스도는 
    (1) 하나님의 자녀(12절 주석 참조)중 하나가 아니며, 오히려 하나님과 하나님의 자녀들 사이에서 중보자적 사역을 담당하시는 유일하신 분(3:17;갈3:26)이며, 
    (2) 하나님과 친밀한 인격적인 관계를 지니신 대등하신 분(1절 주석 참조;3:18;5:18;10:30;17:5, 24)이며, 
    (3) 이 세상에 하나님을 완벽하게 계시하신 유일하신 분(14:9;빌 2:6, 7)이라는 의미를 나타낸다. 한편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을 부인하는 일부 학자들은 1:1-3절의 내용을 무시하고, '하나님께로서 나신 자'라는 요일5:18의 내용을 증거로 하여 '그리스도란 하나님에 의해 창조된 존재'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하나님께로서 나신 자'라는 표현은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됨을 나타내기위해서 사용한 것일 뿐이다(요일 5:18 주석 참조)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 '은혜와 진리'(*,카리스 카이 알레데이아)란 구약성경에서 하나님의 성품을 나타내는 용어로 쓰였다(삼하 2:6). 
    사도 요한은 앞 문장에서 하나님의 영광과 그리스도의 영광이 대등하고 등질적(等質的)임을 묘사한 후에 곧 이어서 하나님의 성품인 은혜와 진리가 바로 말씀이신 그리스도의 성품과 일치함을 보여준다. 
    이는 성육신하신 그리스도가 그의 지상사역을 통해서 하나님의 본성을 드러내셨음을 시사한다(10:30). 
    특히 기독교적 측면에서 '은혜'라는 말은 하나님이 인류 구속을 위해 독생자를 보내주신 그 일방적인 행위와 밀접하게 연관되는 것이다. 한편 '가득차서 넘치는'이란 뜻의 헬라어 서술적 형용사 '플레레스'(*)는 은혜와 진리의 역동성을 보여준다. 
    다시 말해서 그리스도께 속한 은혜와 진리는 고정된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로부터 차고 넘치게 흘러 나와 성도들에게 임하여 역사(役事)한다는 것이다.


    σῶμα, ατος, τό 스트롱번호 4983

    1. 몸.   2. 신체.  3. 시체
    발음 [ sōma ]

    어원  /  4982에서 유래
    • I.  몸.
      • 1.
        [사람이나 동물의] 신체, 몸.
        • a.
          시체, 마14:12, 27:52,58,59, 막15: 43,45, 눅17:37, 23:52,55, 24:3, 23, 요19:31,38, 행9:40, 히13:11, 유1:9.
        • b.
          산 몸, 마5:29, 6:22, 26:12, 막5: 29, 14:8, 눅11:34, 요2:21, 롬1:24, 고전6:18.
      • 2.
        [복수로] 종들, 노예들, 계18:13.
      • 3.
        [그림자를 만드는 것] 실재, 사물, 자체, 골2:17.
      • 4.
        그리스도의 공동체, 교회, 롬12:5, 고전10:17, 12:12,27, 엡1:23, 2:16, 4: 4,12,16, 5:23,30, 골1:18,24, 2:19, 3:15.

    연관 단어

    • 관련 성경
      몸(마5:29, 눅11:34, 고후4:10), 시체(마14:12, 요19:31, 유1:9), 주검(눅17:37), 육체(요2:21, 히13:11), 형체(고전15:37,38,40), 종(계18:13).


    σάρξ, σαρκός, ἡ 스트롱번호 4561

    1. 육체.  2. 인간이나 동물의 뼈를 덮고 있는 물질을 총칭. 3. 몸
    발음 [ sarx ]
    어원  /  4563의 어간에서 유래한 듯함

    • 1.
      육체.
      • a.
        [문자적으로] 인간이나 동물의 뼈를 덮고 있는 물질을 총칭, 살, 고전15:39, 계19:18, 눅24:39, 약5:3.
      • b.
        몸, 신체, 행2:31, 2:26, 고전5:5, 고후7:1, 히9:13, 벧전3:21, 히10:20, 벧전3:18.
      • c.
        육신, 혈육을 가진 인간, 마16:17, 24: 22, 막13:20, 눅3:6, 요17:2, 행2:17, 롬3:20, 고전1:29, 갈1:16, 2:16, 엡6:12, 벧전1:24.
      • d.
        인간성, 세상적 혈통, 고전10:18, 롬4:1, 8:3, 히9:8, 11:14, 5:7, 12:9.
      • e.
        유형성, 구체성, 육체적 제한성, 이 세상 생활, 고전7:28, 고후10:3, 갈2:20, 빌1:24.
      • f.
        생의 외부적인면 [인간적 표준에 의하여], 외부적 환경, 고전1:26, 고후1:18.
      • g.
        [바울 사상에 있어서] 육신[육신은 죄를 의도하는 기관으로 육신이 있는 곳에는 죄가 있다, 즉 육신대로 살면 좋은 것이 없다], 롬7:18, 7:25, 갈5:13, 골2:23.
      • h.
        [성적 충동의 근원으로서] 육체, 요1:13.

    연관 단어

    • 관련 성경
      몸(마19:5, 막10:8), 육체(마24:22, 요8:15, 고후1:17), 육신(마26:41, 롬1:3, 딤전3:16), 살 (눅24:39, 요6:55,56), 육정(요1:13), 육(요3:6, 6:63, 고전15:50), 골육(롬11:14).










    우리는 여호와 삼마라는 이름을 통해 사랑의 하나님을 만날 수 있고, 공의 하나님을 직면하게 됩니다. 공의와 사랑은 양날선 검과 같이 서로 다르지만 하나입니다.

     

    여호와 삼마 (Jehovah Shammah)

    - 여호와 삼마 뜻 : 그곳에 계시는 하나님

    - 성경 말씀 : (에스겔 48:35) 그 사방의 합계는 만 팔천 척이라 그 날 후로는 그 성읍의 이름을 여호와 삼마라 하리라.

    기반 이야기 : 
    에스겔은 바벨론 포로 생활 중에 하나님의 새로운 예루살렘 성전에 대한 환상을 보았습니다. 
    이 성전은 완전한 평화와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는 곳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 성전에 항상 함께 계실 것을 약속하셨고, 에스겔은 이 성읍의 이름을 여호와 삼마라 했습니다.

    신앙적 교훈 : 
    이 이야기는 하나님이 항상 우리와 함께 계신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우리는 그분의 임재를 느끼며 그분의 인도하심을 받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결코 떠나지 않으시며, 우리와 항상 함께 계십니다.


    여호와 삼마(Jehovah-Shammah)

    여호와는 하나님을 의미하며, 뒤에 나오는 삼마(Shammah)는 히브리어로, 하나님께서 거기에 계신다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어떠한 맥락에서 이 말이 나왔는지 매우 궁금하실 겁니다. 
    여호와 삼마의 출전을 바로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에스겔서 48장 35절에 나오는 부분입니다.

    35 그 사방의 합계는 만 팔천 척이라 그 날 후로는 그 성읍의 이름을 여호와삼마라 하리라
    - 에스겔서 48장 35절 - 

    딱 요 부분만 놓고 보면 어떤 의미인지 전혀 추측하기가 어렵지요. 
    먼저, 에스겔서는 구약성경의 3대 예언서 중에 하나로 예언자 에스겔의 예언에 관한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에스겔은 선지자로서 네 가지의 환상을 보게 되고, 그것을 예언합니다. 
    그리고 48장 부분은 4가지 중에서 마지막 예언이자, 마지막 환상이라고 할 수 있는데요.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은 바벨로의 포로로 끌려가서 온갖 고초를 당하게 됩니다. 자신의 땅을 잃은 것은 물론이거니와, 심지어 포로로 끌려간 상태였습니다.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들은 당시에 하나님을 마음 속에서 지우고 잊은 상태였습니다.

    이런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은 에스겔(가톨릭으로는 에제키엘)이라고 하는 선지자를 보내게 되지요. 

    그리고 그 선지자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게 되는데요. 48장의 핵심은 이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의 땅을 회복시켜주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회복된 그곳의 명칭은, '하나님께서 거기에 계신다'는 의미의 여호와삼마라고 부를 것이라고 말씀하시지요.

    엄청난 위기를 겪고 있지만 그들에게 이 말씀은 매우 큰 위로가 됩니다.

    잊고 살았던 자신들의 신앙을 돌아보게 되었고,

    멀리 있다고 생각하고 아예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했던 그들에게 반성과 다시금 하나님을 생각하게 되는 계기를 만든 겁니다. 

    세상에서 참 많은 시험을 당합니다.

    신이 존재하지 않는 것 같기도 하고, 나를 외면하는 것 같기도 하지요. 

    에스겔서에서는 그런 사람들에게 메시지를 줍니다. 

    하나님은 늘 거기에 계신다고요. 

    이 메시지를 온전히 마음 속으로 받아들일지 거부할지는 결국 자신의 선택이지만 성경은 늘 한결 같은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마치며

    오늘은 하나님의 또 다른 별명이라고 할 수 있는 여호와삼마에 대해 알아보았는데요. 하나님께서 거기에 계신다는 의미였습니다. 


    여호와 삼마 : 히브리어로 "여호와께서 거기 계시다"는 뜻

    여호와 삼마는 히브리어로 "여호와께서 거기 계시다"는 뜻으로, 성경 에스겔서 48장 35절에 등장하는 이름입니다. 이 단어는 하나님의 임재와 영원한 동행을 상징하며, 믿는 이들에게 큰 위로와 소망을 제공합니다.

    여호와 삼마의 뜻과 배경

    히브리어 어원과 의미

    • "여호와 삼마"는 히브리어 יְהוָה שָׁמָּה(YHWH Shammah)에서 유래했습니다.
    • 이는 하나님의 이름인 "여호와"와 "그곳에 있다"는 의미의 "삼마"를 결합한 표현입니다.
    • 하나님의 임재를 강조하며, 신의 거룩함이 특정 장소에 머무는 것을 상징합니다.

    에스겔서의 맥락

    • 에스겔서 48장 35절에서 새 예루살렘 성의 이름으로 여호와 삼마가 선언됩니다.
    • 이는 하나님의 백성에게 임재하시는 약속의 표시로 이해됩니다.
    • 당시 이스라엘 백성의 유배 상황에서, 하나님의 동행과 회복의 약속을 전달합니다.

    현대적 적용

    • 여호와 삼마는 단순히 지리적 위치를 의미하지 않습니다.
    • 이는 믿는 자의 삶과 공동체, 교회에서 하나님이 함께하신다는 상징적 표현입니다.
    • 이 개념은 현대 신앙인들에게 하나님의 임재와 가까움을 상기시킵니다.

    여호와 삼마와 하나님의 임재

    하나님의 동행

    • 여호와 삼마는 하나님께서 자신의 백성과 동행하신다는 약속을 나타냅니다.
    • 이는 인간의 외로움과 고난 속에서도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할 수 있다는 믿음을 심어줍니다.
    • 어려움 속에서도 신의 사랑과 보살핌을 확신하게 합니다.

    성막과 성전의 상징

    • 구약 성경에서 성막과 성전은 하나님의 임재의 장소로 여겨졌습니다.
    • 여호와 삼마는 이 전통을 이어받아 하나님의 거룩함과 임재를 확증합니다.
    • 이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모든 믿는 이들이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할 수 있음을 예표합니다.

    개인적인 신앙적 의미

    • 개인의 신앙생활에서도 여호와 삼마는 하나님의 동행을 느끼게 합니다.
    • 삶의 모든 순간, 특히 어려움 속에서도 하나님의 손길을 체험하게 합니다.
    • 이는 신앙인들에게 위로와 힘을 제공합니다.

    여호와 삼마와 새 예루살렘

    새 예루살렘의 상징

    • 여호와 삼마는 새 예루살렘의 이름으로 언급되며, 이는 이상적인 도시를 상징합니다.
    • 이 도시는 하나님의 거룩함과 평화가 충만한 장소로 묘사됩니다.
    • 모든 고난과 슬픔이 끝나고 하나님의 완전한 통치가 이루어지는 곳을 뜻합니다.

    종말론적 의미

    • 새 예루살렘과 함께 여호와 삼마는 하나님의 종말론적 약속을 강조합니다.
    • 이는 믿는 이들에게 궁극적인 희망과 영생에 대한 확신을 줍니다.
    • 신약 성경의 요한계시록에서도 이와 유사한 개념이 등장합니다.

    신앙 공동체의 희망

    • 여호와 삼마는 신앙 공동체가 하나님과의 영원한 교제를 기대하도록 돕습니다.
    • 이는 교회와 믿는 이들이 세상을 치유하고 회복하는 사명을 상기시킵니다.
    • 하나님의 거룩함을 반영하며 이웃 사랑을 실천하는 공동체를 이루는 데 도움을 줍니다.

    여호와 삼마와 우리의 삶

    삶 속에서 임재 체험하기

    • 여호와 삼마는 하나님이 모든 순간에 함께하신다는 확신을 줍니다.
    • 믿는 이는 기도와 예배, 봉사 등을 통해 하나님의 임재를 느낄 수 있습니다.
    • 이는 삶의 방향을 바로잡고, 신앙적 안정감을 제공합니다.

    고난 속의 소망

    • 여호와 삼마는 고난 중에 있는 사람들에게 큰 위로를 줍니다.
    •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하신다는 믿음은 역경을 이겨낼 힘을 줍니다.
    • 이는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도 희망을 잃지 않도록 돕습니다.

    공동체에서의 실천

    • 신앙 공동체는 여호와 삼마의 의미를 중심으로 화합과 사랑을 실천해야 합니다.
    • 서로를 위해 기도하고 돌보며, 하나님의 임재를 공동체 내에서 경험할 수 있습니다.
    • 이는 교회와 사회를 치유하고 회복시키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결론

    여호와 삼마는 단순한 지명이 아니라 하나님의 임재와 동행의 약속을 상징하는 강력한 메시지입니다. 
    이 개념은 개인과 공동체, 세계적으로 하나님과의 관계를 심화시키고 희망을 부여합니다. 
    믿는 이들은 여호와 삼마의 의미를 삶에 적용하며 하나님의 사랑과 임재를 경험할 수 있습니다.


    여호와 삼마 - 하나님께서 거기 계시다

    겔 48:35

     구약성경에 보면 하나님의 성품을 알려 주는 이름들이 많이 나옵니다. ‘여호와 샬롬’(여호와는 평강), ‘여호와 닛시’(여호와는 나의 깃발), ‘여호와 이레’(여호와께서 준비하심), ‘여호와 라파’(치료하시는 하나님) 등, ‘여호와’라는 이름에 다른 단어를 붙여서 만든 이러한 합성어는 하나님의 성품과 속성을 잘 드러내 주고 있습니다. 이러한 이름들 가운데서도 특별히 ‘여호와 삼마’는 ‘거기에 계시는 하나님’이라는 뜻으로, 백성들과 함께해 주시는 하나님의 속성을 말해 주고 있습니다.

     오늘 주시는 말씀을 통해서, 에스겔 선지자가 목격한 예루살렘성의 이름이 ‘여호와 삼마’가 되었듯이 성도님들의 모든 거처 또한 하나님께서 함께하시는 곳 ‘여호와 삼마’가 되기를 바라겠습니다.

    1. 여호와 삼마--하나님의 존재하심을 나타내는 축복의 말씀

     ‘여호와 삼마’라 할 때, ‘삼마’라는 말은 히브리어 ‘샴’에서 유래한 말로, ‘거기에, 그곳으로, 그때에’ 등의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여호와 삼마’라는 말은 신약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별칭으로 사용된 ‘임마누엘’과 일맥상통하기도 합니다. 둘 다 성도들의 삶 속에 함께하시는 하나님의 축복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본문에서 에스겔 선지자는, 바벨론 유수로 인해 절망과 비탄으로 암흑의 나날을 보내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여호와 삼마’의 하나님을 선포함으로써 소망과 용기를 심어 주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자기들을 버리셨다는 절망에 빠진 백성에게 ‘여호와께서 살아 계시다, 하나님께서 바벨론의 이방 땅에서도 함께 계신다’는 사실을 알려 주는 것만으로도 이스라엘 백성에게는 큰 위로가 되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당하는 침략과 망국의 아픔을 씻어 주고, 하나님은 영원토록 세계와 역사의 창조주로, 통치자로 존재하신다는 사실을 깨우쳐 주는 말씀--그것이 바로 ‘여호와 삼마’였던 것입니다. 

     역사는 가고 오지만, 그러나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하신 분입니다. 그래서 영원하신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이 어디에 있든지, 어떠한 형편과 처지에 있든지 늘 함께해 주시는 ‘여호와 삼마’의 하나님이십니다.

    2. 여호와 삼마--구원을 베푸시는 하나님의 자기 존재의 명칭

     ‘여호와 삼마’라는 명칭은 구약에서 항상 구원사적인 의미로 사용되었습니다. 즉, 하나님의 자기 존재, 영원한 존재를 드러내시는 가운데 하나님의 구원 역사를 의미하는 용어로 사용되어 왔던 것입니다.

     노아 때 홍수 심판의 역사 속에서도, 하나님은 ‘여호와 삼마’의 하나님으로 노아와 그 식구들과 함께해 주셨습니다. 방주를 짓고, 방주 안에서 홍수 심판의 기간을 보낼 때도 ‘그곳에’ 하나님은 늘 함께해 주셨던 것입니다. 멸망하는 소돔, 고모라에서 롯을 구원하신 하나님께서 당신의 존재를 증명하신 것도 ‘여호와 삼마’의 역사였습니다. 멸망 당하는 여리고성의 함락에서 기생 라합과 그의 가정이 체험한 구원의 은총도 ‘여호와 삼마’의 축복이었습니다. 여리고성의 다른 모든 사람은 성이 이스라엘에게 함락당하여 죽임을 당하는데, 기생 라합은 ‘그곳에’ 거하셨던 하나님의 존재로 인해 유일하게 구원을 받았던 것입니다. 

     블레셋 장수 골리앗의 침노에서 다윗이 승리하였던 것도 여호와 삼마의 은혜였습니다. 칼과 창을 들고 나서는 골리앗에게 다윗은 ‘만군의 주 여호와의 이름’으로 맞섰습니다. 그러한 다윗의 믿음에 하나님은 그와 함께해 주시는 것으로 보응하셨습니다. 바로 ‘여호와 삼마’의 하나님이셨던 것입니다. 

     다니엘의 세 친구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가 풀무 불 속에서 체험한 것도 여호와 삼마 하나님의 은혜였습니다. 평소보다 7배나 뜨거운 풀로 인해 그들을 집어넣은 병사들이 타죽을 정도로 뜨거운 풀무 불 속에서도 그들이 머리털 하나 상하지 않고 보호받을 수 있었던 것은, 풀무 불 속에서까지 그들과 함께해 주셨던 여호와 삼마 하나님의 은혜였던 것입니다(단 3:24-27). 이처럼 하나님의 사랑은 놀랍습니다. 뜨거운 풀무 불 속--그곳에도 하나님은 계셨습니다. “하나님이 안 계시는 천국은 원치 않고 하나님이 계시는 지옥이라도 나는 가겠습니다”라고 고백했던 어느 목사님의 신앙고백처럼, 아무리 지옥 같은 풀무 불이라도 하나님께서 거하실 때 그곳이 바로 천국이요, 축복의 장소가 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나와 홍해 앞에 섰을 때, 여호와 삼마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을 받았습니다. 이스라엘의 앞에서 백성을 인도하던 하나님의 사자가 급히 진 뒤로 옮겨갈 때 구름기둥도 함께하여, 밤새도록 애굽의 군대가 접근하지 못하도록 방어해주고 있는 현장--그곳에서도 하나님은 백성과 함께해 주셨던 것입니다(출 14:15-20). 이스라엘 백성이 거하는 곳에는 광명이요, 애굽의 군대가 있는 곳에는 캄캄한 흑암만 있었다는 것은 여호와 삼마의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이 거하는 곳에 함께하셔서 그들을 지켜 보호해 주고 계심을 말해 주고 있습니다.

    결 론 : 
    ‘여호와 삼마’의 축복은, 이스라엘에서 볼 수 있듯이 하나님께서 선택한 민족과 나라를 통해서도 역사하지만, 한 개인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됩니다. 
    한 개인의 건강과 형통도 여호와 삼마의 축복이 없으면 불가능합니다. 
    하나님께서 함께하시지 않는 사람이 어찌 건강할 수 있으며, 형통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국가적으로뿐만 아니라 성도 개개인 한 사람마다 ‘늘 계시고 한번 말씀하시면 변치 아니하는 영원불변하신 여호와 삼마의 하나님’을 온전히 마음 가운데 모시고 사는 성도들은 변함이 없습니다. 
    영육 간에 형통의 복을 받게 됩니다.


    데살로니가전서 5:23
    평강의 하나님이 친히 너희로 온전히 거룩하게 하시고 또 너희 온 영과 혼과 몸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강림하실 때에 흠없게 보전되기를 원하노라.
    May God himself, the God of peace, sanctify you through and through. May your whole spirit, soul and body be kept blameless at the coming of our Lord Jesus Christ





    히브리서 4:12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하나니.
    For the word of God is living and active. Sharper than any double-edged sword, it penetrates even to dividing soul and spirit, joints and marrow; it judges the thoughts and attitudes of the heart.

  • 헬라어 성경 σώμα(소마)와 σaρξ(사르크스)의 차이는 무엇인가요?

  • 둘은 종종 혼용해서 사용하는 어휘로 그 사이에 크게 두드러지는 차이는 없습니다.  
    하지만 엄밀하게 구분하자면

    σώμα(소마)는 영혼 정신 등과 대비되는 신체를 일컬을 때 사용하며

    σaρξ(사르크스)는 신체에서 뼈, 살, 피 등을 이야기할 때 ‘살’을 가리킵니


    성경에서 몸을 지칭하는 단어는 '소마, 사륵스'로 구분되어 사용되었다. 헬라어 '소마'(Soma)는 육체적 몸뿐만 아니라 인격적 구성체 등을 포함하는 의미로 쓰였다. '사륵스'(Sarx)는 육체적 연약성, 영과 대립하는 죄성 등의 의미로 사용되었다.

    그런데 성경이 한글로 번역되는 과정에서 ‘몸, 육체, 육신’이라는 세 가지의 단어로 혼용되면서 몸을 지칭하는 ‘소마와 사륵스’의 각각 다른 의미를 구별하는 것이 어려워졌다.

    어느 날 주일, '소마'(Soma)의 의미로 쓰인 대표적인 성경구절인 로마서 12장 1절을 ‘산 제물’(Living sacrifices)이라는 제목의 설교를 들었다.

    "그러므로 형제들이여, 내가 하나님의 자비하심으로 여러분에게 권합니다. 여러분의 몸을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십시오. 이것이 여러분이 드릴 영적 예배입니다"(롬 12:1).
    'Therefore, I urge you, brothers, in view of Gods mercy, to offer your bodies as living sacrifices, holy and pleasing to God -- this is your spiritual act of worship.'


    로마서 12장 1절에서 거룩한 산 제물(living sacrifices)로 드리라고 하는 '몸'은 우리의 영, 혼, 육을 모두 다 포함한다.

    신명기 6장 5절에서 말하는 '너는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고 하는 것처럼 ‘나의 모든 것을 다하여 하나님께 드리라는 것’과 일맥상통한다.

    몸을 드린다는 것은 나의 전부를 드리는 것과 같다. 우리 인간은 나의 모든 것이 몸 안에 들어있고, 몸으로 존재하며 소통한다.

    그래서 하나님을 경험하고, 그 기쁨과 감격을 표현할 때에도 몸을 사용하지 않고는 불가능하다. 몸은 나의 육체, 육신, 껍데기만이 아니라 하나님이 이 땅에 허락하신 삶을 살아가는 나, 그 자체다.

    로마서 12장 1절에서 ‘몸을 드리는 것’이 '우리가 마땅히 드려야 할 영적 예배'라고 말한다. 우리의 몸이 영과 분리된 것이 아니라는, 악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해 주고 있다.

    고린도전서 6장 20절 역시,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Soma)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고 말한다.

    몸이 악하고 정신, 혼, 영 보다 못한 것이라면 어찌 감히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을까. 여기서 말하는 몸 역시 우리의 영혼육을 모두 포함한 '나'라는 존재 자체를 말한 것일테다.

    나의 관심사와 시간, 나의 애정과, 나의 생각까지, 나의 몸을 드린다는 것은 ‘나의 전부를 드리는 것’이다.


    인간의 몸은 단순히 육체, 껍데기, 썩어 없어질 것, 정신보다 못한 것이 아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몸을 그렇게 경히 여기지 않으셨다.

    그분은 직접 피조물을 만드셨고 보기에 좋다 하셨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이 땅의 모든 물질들을 인간에게 좋은 것이라 하셨다. 그리고 우리는 몸으로 그것들을 감각하고 누리며 더욱 충만하게 하나님의 사랑을 느낀다.

    태초에 지으신 의미에서 변질된 것이 있다면 그것을 버리는 것이 아니라 원래의 의미로 되돌려야할 것이다(예술과 영혼 중).

    하나님이 지으신 몸에 대한 원래의 선한 의미를 이분법으로 나누어 비하할 수는 없다. 몸은 논의하기 껄끄러운 대상이 아니라 회복해야 할 대상이다.




  • 9월 16일(화) 에스겔 40-43장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척량하는 장대(40:3, 5)


  • 나를 데리시고 거기 이르시니 모양이 같이 빛난 사람 하나가 에 삼줄과 척량하는 장대를 가지고 문에 서서 있더니. 
    He took me there, and I saw a man whose appearance was like bronze; he was standing in the gateway with a linen cord and a measuring rod in his hand.

    내가 본즉 집 바깥 사면으로 담이 있더라 그 사람의 에 척량하는 장대를 잡았는데 그 장이 팔꿈치에서 가락에 이르고 한 바닥 넓이가 더한 자로 육척이라 그 담을 척량하니 두께가 한 장대요 고도 한 장대며. 
    I saw a wall completely surrounding the temple area. The length of the measuring rod in the man's hand was six long cubits, each of which was a cubit and a handbreadth. He measured the wall; it was one measuring rod thick and one rod high.


    '척량하는 장대'는 주로 성경 에스겔서에 등장하는 용어로, 환상 속에서 측량 도구를 들고 있는 사람의 손에 들린 막대기를 의미합니다. 
    이 장대는 '놋 같이 빛나는 사람'이 가지고 있으며, 에스겔이 환상으로 본 새 성전을 측량하는 데 사용됩니다. 
    • 측량 도구 :
      척량하는 장대는 성경에서 사용된 측량 장대를 가리키며, 바벨론 포로 시기에 에스겔이 본 새 성전의 구조를 측정하는 데 사용되었습니다. 

    요약 :
    '척량하는 장대'는 에스겔서에 등장하는 성전 측량 도구로, 놋 같이 빛난 사람이 새 성전의 규격을 측정하는 데 사용한 장대를 지칭합니다


  • 상징적 의미 :
    이 장대는 하나님의 성전이 얼마나 정확하고 완전하게 측정되었는지를 보여주며, 하나님의 뜻과 계획을 나타내는 상징으로 이해될 수 있습니다. 


  • 성경적 맥락:
    에스겔 40장 3-5절에 "모양은 놋 같이 빛난 사람 하나가 손에 삼줄과 척량하는 장대를 가지고 문에 서 있더니"라고 묘사됩니다. 


  • 구조 및 흐름

    • 40:1-4: 에스겔이 환상 중 성전으로 인도받아 측량에 참여함
    • 40:5-16: 성전 외벽과 동쪽 문에 대한 상세한 치수
    • 40:17-27: 바깥 뜰과 북쪽, 남쪽 문에 대한 설명
    • 40:28-47: 안뜰의 남쪽, 동쪽, 북쪽 문과 주위 방들의 소개
    • 40:48-49: 성전 현관에 대한 측량

    전체적으로 성전의 구조와 방, 문, 뜰 등이 구체적으로 측량되고 소개되고 있으며, 질서와 거룩함이 강조됩니다.

    상징적 의미

    에스겔이 본 성전 환상은 단순한 건축 양식의 소개를 넘어, 하나님과 이스라엘 민족의 회복된 관계, 하나님의 임재, 그리고 새로운 질서와 거룩함을 상징합니다.

    이 환상적 묘사를 통해 하나님은 다시 이스라엘 가운데 거하시고, 백성들이 올바른 예배와 삶을 살아가길 원하신다는 뜻이 담겨있습니다.

    묵상포인트

    •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세밀하게 측량하시고 질서 있게 세우시는 분임을 생각해 봅니다.
    • 회복의 약속이 때로는 구체적인 현실, 구조, 질서로 나타난다는 점에서 나의 삶과 신앙이 어떠한 구조와 질서를 갖고 있는지 묵상합니다.

    나에게 적용해보기

    • 나 자신과 내 신앙생활, 공동체를 하나님 앞에 점검해 보고, 부족하거나 무너진 부분을 회복하기 위한 구체적 계획을 세울 수 있습니다.
    • 하나님이 정하신 거룩한 질서 안에서 신앙생활을 살아가고 있는지, 내 일상과 예배를 돌아봅니다.


    Ⅰ. 성전의 환상〔1〕 40:1-4
    (1) 이환상을 본 시기에 대해서 기술되어 있다. 그때는 에스겔이 포로로 잡혀간지 25년째 되는 해였다. 어떤이들은 이때가 처음 포로로 잡혀간지 33년째라고 계산하고 있으나 본문에는 '성이 함락된후 십사년' 되는해라고 기록되어 있다. 그날에 여호와의 권능이 내게 임하여 나를 데리고 이스라엘땅으로 가시되. 선지자는 멸망당해 황폐해지고 버려진 예루살렘으로 이끌려갔다. 이것은 선지자에게 매우 비참하게 보였을 것이다.
    (2) 선지자는 '하나님의 이상중에' 이스라엘땅으로 이끌려갔다(2절). 이번에는 예루살렘의 영광에 즐거운 광경을 보기위하여 간 것이다. 그는 '극히 높은 산위에' 세워졌다. 이는 흡사 모세가 비스가산 정상에 섰던 것과 마찬가지로, 현재 두번째의 '약속의 땅'이 된 그땅을 보기 위해서였다. 이 산꼭대기에서 그는 '성읍의 형상같은 것'을 보았는데 그성읍은 그대로 하나의 성전이었다. 그것은 사람들이 거주하기 위한 성읍이면서 동시에 하나님께서 거하시기 위한 성전이었다. 왜냐하면 지상의 교회안에서는 하나님이 인간들과 같이 거하시며 하늘의 교회에서는 인간이 하나님과 함께 거하기 때문이다.
    (3) '모양이 놋같이 빛난사람 하나', 곧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성읍의 자세한 부분은 보여주신다(3절). 그리스도를 통해야만이 우리는 하나님과 관계를 맺고 하나님전의 온갖 유익과 특권을 누릴수 있게되는 것이다. '놋같이 빛나는' 그의 외모는 그가 광채되시는 것과 강한 분이시라는 점을 암시해 준다.
    (4) 이성읍 혹은 성전의 규모는 '삼줄과 척량하는 장대' 혹은 막대기로 척량되어졌다(3절).
    (5) 선지자는 여호와께로부터 이계시를 받아 교회에 완전하고 완벽하게 전달하라는 임무를 받는다(4절).

    Ⅱ. 성전의 환상〔2〕 40:5-26
    척량하는 자의 손에 들려있는 '척량하는 장대'에 대해서는 3절에 이미 언급되었다. 여기서 우리는 그장대의 정확한 길이를 알게된다(5절). 그길이는 여섯척(규빗)이었는데 여기서 사용된 척은 보통척이 아니고 성전을 재는 척으로, 보통척보다 '손바닥 넓이'(약 4인치)가 더 긴 척이었다. 보통척은 18인치였는데 여기 쓰이는 척은 22인치였던 것이다(참조. 겔 43:13). 어떤학자들은 이장대가 여섯 보통척에다가 전체길이에 한손바닥 넓이만 더한 것이라고 해석하지만 전자가 더타당해 보인다. 이제 자세한 설명이 나온다.
    (1) 집바깥 사면에 담이 있었다. 그담은 온집에 빙둘러 있었는데 이는 세상에 교회의 분리를 의미한다.
    (2) 방이 붙어있는 여러문에 대한 설명이 나온다.
    1) 척량자는 '동향한 문'에서부터 일을 시작하였다. 왜냐하면 그분은 성전의 가장 낮은 끝으로 들어갈때 일상적으로 사용되던 문이기 때문이었다. 반면 지성소는 서쪽끝에 있었다. 이제 이문에 대한 설명중 다음사항들을 주목하도록 하자.
    ① 그는 '층계를 올라갔다'(6절). 왜냐하면 하나님께 예배하려 할때 우리는 위로 올라가야만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요한계시록 4:1절의 부름에서도 이와같은 말씀을 하셨다.
    ② 그문에 붙어있는 방들은 가로 세로가 각6척씩 되는 작은 방들이었다(7절). 이방들은 그 전에서 제사드리는 일에 봉사하는 사람들이 거하는 방이었다.
    ③ 이방들은 네모반듯하고 한쪽변의 길이가 각각 한장대씩으로, 이는 그곳에서 봉사하는 사람들사이에 평등이 유지되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듯하다.
    ④ 이방들은 매우 많았다. 이는 '내아버지 집에 거할곳이 많도다'(요 14:2)라는 말씀과 일치한다. 이것은 하늘에 있는 집과 땅위에 있는 집이 모두 마찬가지이다. 어떤이들은 이 작은방들이, 거대한 교회 곧 전우주적인 교회의 일부분을 이루는, 성도들의 특별한 모임들을 의미한다고 주장한다.
    ⑤ 그는 현관을 척량하였다(14절).
    ⑥ 이현관은 60척이었다. 어떤이들은 고레스왕이 예루살렘의 성전을 재건하라는 칙령에서 전의 높이를 60척, 즉 약30야드 남짓하게 하라는 명령을 내렸을때 이것이 문자그대로 성취되었다고 생각한다(스 6:3).
    ⑦ 작은방들과 문과 현관에는 창이 있었고(즉 아래에 있는 회랑을 향한 창문이었다) 그둘레에는 창이 있었다(16절). 이것은 하늘로부터 오는빛이 교회를 환히 비추는 것을 상징한다. 그 작은방에도 희미하게나마 빛이 있었다. 그러나 그창문들은 좁은 창문이었다. 지상의 교회가 발견하는 사실들은 나중에 다음세상에서 볼수 있는 것에 비하면 무척이나 좁은것에 불과하다.
    ⑧ 여러뜰에 대하여 설명되었다. 가장 외곽의 것으로부터 그안쪽의 뜰과 오로지 제사장만이 드나들수 있는 가장 안쪽의 뜰까지 설명되었다. 이 뜰들은 각기 현관 혹은 둘레에 회랑이 있었다. 이는 성전에 봉사하는 사람들을 바람이나 기타 나쁜 일기로부터 보호하기 위함이었다.
    ⑨ 문기둥 위에는 종려나무가 새겨져 있었다(16절). 이는 하나님의 전 뜰에서 '의인이 종려나무같이 번성함'을 의미하는 것이다(시 92:12). 이들은 마치 종려나무처럼, 고난의 짐에 눌리면 눌릴수록 더욱 단단하게 자랄 것이다.
    ⑩ 뜰안의 박석깔린 땅에 대한 설명이 나온다(17,18절). 이것은 반석으로 포장된 것을 의미하는데 그색깔은 불타는 석탄같았다. 왜냐하면 우리가 하나님께로 나아갈때 이세상의 가장 빛나는 영광이 우리 발밑에 깔리기 때문이다.
    2) 북향한 문간(20절)과 남향한 문간(24절)은 '먼저 척량한 동향한 문'과 같았다(21절). 이성전에는 부와 지혜로 유명한 동방자손들을 받아들이기 위한 동향한 문만 있었던 것이 아니라 북쪽과 남쪽을 향한 문들도 있었는데 이는 가난하고 덜 진보한 민족들도 받아들이기 위한 것이었다. 새예루살렘에는 열두문이 있어서 동서남북 각방향으로 세개씩 향하고 있다(계 21:13). 이는 '동서로부터 많은사람이 이르러' 그곳에 앉을 것이기 때문이다(마8:11).

    Ⅲ. 성전의 환상〔3〕 40:27-38
    안뜰에 대하여 기술되어 있다. 안뜰의 척량은 남쪽문에서부터 시작하여(27절) 동쪽문을 지나(32절), 북쪽문으로(37절) 진행되어 간다.
    (1) 안뜰로 들어가는 이문들은 바깥뜰에 있는 문들과 꼭 같다. 초신자였던 사람이 성숙한 기독교인이 된다하더라도 은혜의 역사는 본질적으로 똑같은 것이다.
    (2) 바깥뜰로 들어서는 각문간에는 일곱층계가 있었으나, 안뜰로 들어서는 각문간에는 여덟층계가 있었다. 이것은 하나님께로 점점더 가까이 갈수록 우리는 이세상과 그중에 있는 것들로부터 더욱 높이 올라가야 한다는점을 특별히 나타내 준다(31,34,37절). 바깥뜰에서 예배하는 사람들은 보통사람들보다 일곱층계를 더올라가야 하지만 안뜰에서 제사를 드리는 제사장들은 그들보다도 여덟층계를 더올라가야만 한다.

    Ⅳ. 성전의 환상〔4〕 40:39-49
    (1) 안뜰로 들어가는 문현관에 있는 상들에 대한 설명이 기술되어 있다. 본문에는 '여덟상'에 대하여 언급되어 있는데, 이는 '그위에서 희생을 잡는 소용'으로 쓰이는 것들이었다(41절). 그상들은 복음시대에 하나님의 전에 드려져야할 수많은 영적희생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상들은 제사에 쓰일 고기들을 잡는 곳이었으며(43절) 또한 번제의 희생을 씻는 곳이었다(38절). 이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제단에 가까이 나아가기전에 손과 마음 즉 영적 희생물들을 씻어야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2) 이미 언급된 작은방들의 용도에 대하여 설명되어 있다.
    1) 그중 몇개는 노래하는 자들을 위한 것이었다(44절). 시편을 노래하는 것은 복음시대에 예배를 드릴때도 여전히 계속되어야만 하는 것이다. 기독교인들은 모두 노래하는 자가 되어야 한다.
    2) 나머지는 제사장들을 위한 것이었다. 여기서 제사장이라함은 '성전을 수직하는 제사장들' 즉 성전을 깨끗이 하고 유지보존하는 임무를 띤 제사장들과(45절), '제단을 수직하는 제사장들'을 모두 의미하는 것이다(46절).
    (3) 제사장들만 들어갈수 있는 안뜰은 가로와 세로가 각 백척씩이었다(47절). '절앞에 있는' 제단은 안뜰의 중앙에 놓여있었다. 그리스도는 우리의 제단이시며 희생이시다. 따라서 우리는 하나님께 나아갈때면 언제나 믿음을 가지고 그리스도를 바라보아야 한다.
    (4) 그 전에 있는 현관에 대하여 설명되어 있다. 그현관은 우리에게, 하나님전에 나아갈때 성급하고 무모하게 서두르지 말것을 가르치고 있다. 오직 엄숙하고 장중하게 바깥뜰을 지나 안뜰을 통과한후 현관을 거쳐 나아가야만 한다.

    # 핵심
    40:1-49
    이스라엘의 회복을 성전회복과 직결시키면서, 하나님과의 관계회복이 이스라엘을 향한 축복의 본질임을 상기시킨다.

    # 묵상
    선지자의 포로와 예루살렘 함락시기 ( 40:1 )
    본문에서 선지자는 자신이 사로잡힌지 25년이 경과했으며, 또한 예루살렘성읍이 함락된때로부터는 14년이 지났다고 하였습니다. 이 시기는 에스겔 선지자가 소명을 받은지 20년이 경과한 때였습니다. 이처럼 선지자가 유다역사에서 중요한 사건들을 언급하면서 그시기와 연대들을 첨부하는 것은, 자신의 소명이나 예언내용이 분명히 역사적 사실가운데서 이루어진 진실임을 강조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이상 ( 40:2 )
    꿈이나 황홀경 등 초자연적인 방법으로 신비한 것을 보는것인데, 그것은 단순히 신기한 현상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전해주는 것입니다. 에스겔 등 많은 선지자들이 이상을 통해서 민족의 앞날에 대한 하나님의 계획을 미리 알수 있었습니다.
    성전척량에 대한 이상 ( 40:5-14 )
    에스겔은 이상중에 손에 척량하는 장대를 가지고 성전을 척량하는 한사람을 보았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천사가 이상중에 성전을 척량한 것은, 에스겔에게 폐허가 된 예루살렘 성전대신 지을 새성전의 크기를 알게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이런환상은 결국 파괴된 성전의 복구를 암시하며, 나아가 이스라엘의 회복을 예언해줍니다.
    성전의 각 문벽위에 새긴 종려나무 ( 40:16 )
    종려나무는 신성함과 생명력 그리고 영광을 상징하는 나무로서 성전조각에 자주 사용되었습니다. 이러한 종려나무(Palm tree)는 대추가 열리는 대추야자나무로 아라비아 사람들의 생존에 절대적으로 필요한 나무였고, 더욱이 용도가 다양했기때문에 매우 귀하게 여겨졌습니다. 이나무는 일반적으로 번영(시92:12)과 아름다움(아7:7,`8)의 상징이었기 때문에 유대사람들은 성전과 회당, 그리고 돌에 이 종려나무를 새겼던 것입니다. 또한 이나무는 승리의 상징으로써 예수님이 예루살렘성에 입성하실때 사람들이 이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어 호산나를 외치기도 했습니다(요12:13).
    문간으로 올라가는 여덟층계 ( 40:31 )
    이는 하나님앞에 나아가는 자는 누구나 감사와 찬송으로 영광돌려야 함을 의미합니다. 외부에서 성전의 바깥뜰로 들어오는데 일곱계단이 있고, 그곳에서 다시 안뜰로 올라오는데 여덟계단이 있는데, 이 계단의 수를 합하면 15입니다. 이는 성전에 올라가는 시편의 숫자와 일치합니다(시120-134편). 그래서 층계마다 한편의 시를 노래하며 하나님의 전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참으로 하나님앞으로 나아가는 자의 모습은 이러해야 합니다. 실로 사람의 근본되는 목적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며 영원토록 그분만을 즐겁게 해드리는데 있음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그래서 바울은 사람이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오직 하나님의 영광만을 위하여 하라고 가르쳤습니다(고전10:31).
    속건제 ( 40:39 )
    속건제는 하나님의 성물을 범하거나 이웃에게 재산상의 손해를 끼쳤을때 이를 용서받기 위한 것으로써, 희생제물을 드리는 이외에 벌금을 물고 또 손해배상을 해야하며 제사장에게 배상액의 2할을 지급해야 했습니다. 이러한 속건제는 범죄한 것에 대해서 사함받기 위한 제사라는 점에서 속죄제와 같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자기몸을 드려 속죄제물과 속건제물이 되심으로써 우리를 죄에서 해방시키셨습니다. 우리는 씻김받을 필요없는 순결한 속죄제물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적 죽음으로인해서 의롭다고 여김을 받은 것입니다.
    새성전의 제사장의 자격 ( 40:46 )
    제사장의 직무를 수행할 사람으로는 레위의 후손중 사독의 자손들이 선택되었습니다. 솔로몬이 반역에 가담한 아비아달 대신에 사독을 대제사장으로 삼은후부터(왕상1:8; 2:26,35) 마카비시대까지 사독의 후손이 성전을 관할하는 대제사장이 되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에스겔 역시 사독후손을 유일한 정통제사장 가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한편 오늘날의 성도는 각각 하나님의 성전인 우리몸을 관리하는 청지기이며, 모두가 하나님을 섬기는 제사장입니다(고전3:16).

    # 해설
    새성전 척량 ( 40 )
    에스겔 1장은 서론이며 2-32장은 범죄한 이스라엘과 이방의 멸망을, 33-39장은 이스라엘의 회복을, 40-48장은 회복된 이스라엘이 누리게될 거룩한 삶을 예언하는 내용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본장은 40-48장 부분을 여는 첫장으로서 거룩한 이스라엘 백성의 생활중심이 되는 성전의 크기와 의미를 척량이라는 상징적 행동을 통해 말해주는 부분입니다.
    1. 바깥뜰과 문의 척량
    1) 동문부터의 척량
    에스겔이 바벨론 포로로 잡혀간 때로부터 이십오년이 지난해 정월십일에 에스겔은 새성전에 관한 환상을 보게 되었습니다. 환상가운데 천사가 새성전을 척량하였는데, 그천사는 성전으로 들어가는 네 문가운데 동문부터 척량하였습니다. 동문은 태양이 뜨는곳에 위치한 문으로서 하나님의 영광이 출입하는 거룩한 문입니다 (참조, 겔9:19;겔43:4). 또한 그문은 지성소로 곧장 들어가는 문입니다. 이러한 이유로 천사는 성전 바깥문중 동문을 가장먼저 척량했습니다.
    a.동문으로 나가심(겔10:19)
    b.동문으로 들어오심(겔43:4)
    2) 일곱계단
    동문 척량때에는 언급되어 있지 않으나 나머지 다른 세문인 북문, 남문, 서문을 척량할때에 그문으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일곱계단을 올라가야 한다는 언급이 있습니다. 일곱은 완전수이며 거룩수입니다. 하나님께서 칠일동안 이세계를 창조하신 것에서 그수의 의미가 드러납니다(참조, 창2:1-3). 이렇게 볼때 이계단은 성전으로 들어가는 자가 하나님앞에 거룩하고 완전해야 한다는 것을 암시적으로 말해줍니다.
    a.제칠일의 거룩성(출20:11)
    b.일곱교회(계1:20)
    3) 종려나무 장식
    바깥뜰 문으로 들어가면 좌우에 세개씩의 방이 있고 그다음으로는 안으로 들어가는 현관이 있었습니다. 그현관 문벽위에는 종려나무 문양이 새겨져 있었습니다. 종려나무는 생명력과 풍요, 그리고 영광과 승리를 상징합니다. 이것으로 볼때 성전으로 들어가는 문에 이무늬가 새겨져 있다는 것은 성전으로 들어가는 자가 종려나무와 같이 자신의 모든것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바쳐야 한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a.종려나무 형상(왕상6:29)
    b.종려나무(요12:13)
    2. 안뜰과 문의 척량
    1) 여덟계단
    바깥뜰 문으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일곱계단을 올라가야 했으나 안뜰 문으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여덟계단을 올라가야 했습니다. 이것은 지성소에 점점 가까워지기 때문에 바깥뜰에서 안뜰로 들어가는 자는 더욱더 거룩해지고 온전해져야 한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한편 그 두계단을 합하면 15가 되는데, 성전에 올라가면서 읊는 시의 편수도 15입니다(참조,시120-시134). 이로 보건대 이계단은 그편수와 맞춘 것으로 보여지며, 이것은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누구나 감사와 찬송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것을 교훈해줍니다.
    a.온전하라(마5:48)
    b.거룩한 자가 되라(벧전1:15)
    2) 여덟제단 상
    성전 안뜰문에 들어가면 여덟개의 제단상이 있었습니다. 이것은 솔로몬성전과 다른 형태입니다. 솔로몬성전에는 이처럼 많은 제단상이 있지 않았던 것입니다. 옛성전에 비해 새성전에 이처럼 많은 제단상이 있다는 것은 하나님께 드려지는 영적제사가 많은것과 드려지는 영적제물도 많을것임을 상징적으로 나타내줍니다. 신약시대에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누구나 하나님앞에 나아가 제사를 드릴수 있게되는 것입니다.
    a.신령과 진정으로 드리는 예배(요4:24)
    b.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음(히10:19)
    3) 수직하는 자들의 방
    성전안에는 성전을 수직하는 자들의 방이 마련되어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성전은 거룩한 장소입니다. 따라서 그곳은 관리되어야할 필요가 있었던 것입니다. 오늘날 하나님의 성전은 성도된 우리의 몸입니다(참조, 고전6:19). 따라서 우리는 우리몸을 거룩하게 관리해야 합니다. 관리를 위해서는 항상 깨어 우리자신들이 죄의 길로 빠지지않도록 경계해야만 합니다.
    a.몸을 거룩한 산제사로 드림(롬12:1)
    b.살아계신 하나님의 성전(고후6:16)
    3. 새성전 척량의 목적
    1) 거룩성 회복
    하나님께서 새성전을 척량하는 형식으로 에스겔에게 보여주신 목적은 크게 세가지입니다. 그가운데 첫째것은 하나님의 백성으로하여금 거룩성을 회복하게 만드시기 위함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거룩한 성전을 세밀히 보여주심으로 자기백성들이 그성전과 같이 거룩히 되기를 요청하시는 것입니다.
    a.진리로 거룩하게 하심(요17:19)
    b.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심(엡1:4)
    2) 제사회복
    성전은 하나님께 나아가 제사를 드림으로 하나님과 올바른관계를 유지하도록 하기위해 세워졌습니다. 옛성전에서는 그역할이 온전히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이제 새성전의 모습을 자세히 보여주시는 것은 옛성전에서 이루지못한 그역할을 바로 감당케 하기 위함입니다. 바른제사를 통해 하나님과의 관계를 온전히 하시려는 것입니다.
    a.열납된 아벨의 제사(창4:4)
    b.참으로 드리는 예배(요4:23)
    3) 하나님의 백성됨의 회복
    하나님과의 바른관계 회복은 궁극적으로 하나님과 그의 백성들이 하나님은 하나님되시고 백성들은 백성되게 하는것을 의미합니다. 성전은 그중심 무대인 동시에 핵심 무대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새성전을 보여주시는 것은 이제 하나님의 백성들이 온전히 하나님의 백성됨의 관계속에 있게 되었다는 것을 선포해주는 것입니다.
    a.아들됨(롬8:14)
    b.하나님과 함께하는 그백성들(계21:3)
    결론
    옛성전은 보이는 성전이요, 불완전한 성전이었습니다. 그성전을 통해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께 나아가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새성전은 보이지 않는 성전이요, 완전한 성전입니다. 이성전을 통해 우리는 하나님께 바로 나아갈수 있습니다. 이성전은 큰의미에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지칭하며, 작은의미에서는 우리의 몸을 지칭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께 나아가야 하며 우리의 몸을 거룩하게 지켜야 합니다.

  • 에스겔 40장은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집니다.

    1. 
    나는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의 회복 계획을 신뢰하며 소망을 품고 있는가?
    2. 내 삶의 중심에는 무엇이 있으며, 그것은 하나님의 임재를 위한 공간이 되고 있는가?
    3. 나는 세상과 구별된 거룩한 삶을 살기 위해 어떤 노력을 하고 있는가?
    4.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민감하게 반응하며 그 뜻을 따라 살아가고 있는가?

    에스겔 40장은 오랜 심판의 메시지 이후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어진 새로운 희망의 서곡으로, 선지자 에스겔이 환상 중에 본 새 성전의 외부 구조를 상세하게 측량하는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놋같이 빛나는 사람'의 인도를 따라 삼줄과 측량 장대로 정밀하게 측정되는 성전의 담, 문들, 뜰, 방들의 모습은 단순한 건축 설계를 넘어, 하나님의 임재 회복과 이스라엘의 영적 재건에 대한 하나님의 확고한 의지와 계획을 보여줍니다. 
    이 '측량' 행위는 파괴된 질서의 회복, 하나님의 소유권 확증, 그리고 거룩한 공간의 창조를 상징하며, 절망에 빠진 포로민들에게 미래에 대한 구체적인 소망과 하나님의 신실하심에 대한 확신을 심어주었습니다. 
    성전 구조에 나타난 질서와 대칭, 그리고 거룩함의 단계들은 하나님의 완전하심과 그분께 나아가는 길의 경외로움을 강조합니다. 
    결국 에스겔 40장의 새 성전 환상은 폐허 위에서도 새로운 시작을 약속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보여주며, 오늘날 우리에게도 삶의 절망적인 순간에 하나님 중심의 회복을 꿈꾸고, 그분의 계획을 신뢰하며 거룩하고 질서 있는 삶을 추구하도록 도전하고 있습니다.

    현대적 적용 또는 실존적 질문 : 우리 삶의 '새 성전'을 세우다

    에스겔 40장의 새 성전 환상은 먼 과거의 이야기가 아니라,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여전히 깊은 영감과 도전을 주는 메시지를 담고 있습니다.

    우리 삶의 '폐허' 위에 어떤 '새 성전'을 소망하고 있습니까? 
    개인적인 실패와 좌절, 관계의 깨어짐, 혹은 공동체의 위기와 상실감 등 우리는 각자의 삶에서 다양한 형태의 '폐허'를 경험합니다. 
    에스겔의 환상은 이러한 절망 속에서도 하나님께서는 새로운 시작과 회복을 계획하고 계심을 보여줍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어떤 미래를 꿈꾸고, 그 중심에 무엇을 두려 하느냐입니다. 
    에스겔의 새 성전은 하나님의 임재를 중심으로 한 공동체의 회복을 지향했습니다. 
    오늘날 우리에게 '새 성전'은 물리적인 건물을 넘어,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고 그분의 뜻이 이루어지는 삶의 모든 영역을 의미할 수 있습니다.

    '측량'의 의미를 오늘날 어떻게 적용할 수 있을까요?

    삶의 기준과 질서 회복 :
     
    혼란스럽고 무질서한 삶 속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기준으로 삼아 삶의 우선순위를 정하고, 건강한 영적 질서를 세워나가는 것을 의미할 수 있습니다. 
    "과연 내 삶은 하나님의 기준에 맞게 '측량'되고 있는가?"라는 질문을 던져보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계획에 대한 신뢰 :
     
    때로는 우리의 미래가 불확실하고 혼란스러워 보일지라도, 하나님께서는 모든 것을 정확하게 계획하고 인도하고 계심을 신뢰하는 것입니다. 
    새 성전의 정밀한 측량은 하나님의 계획의 확실성을 보여줍니다.

    거룩함과 구별됨의 추구 :
     
    세상의 가치관과 방식에 휩쓸리지 않고,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구별된 삶, 거룩한 삶을 살아가려는 노력을 의미합니다. 
    우리 삶의 모든 영역에서 '성전 담'을 세워 부정한 것들을 막아내야 합니다.

  • 철학적 존재론적 상징 해석 : 측량 행위와 새 성전의 의미

    에스겔 40장의 상세한 성전 측량은 단순한 건축 지침을 넘어, 깊은 신학적, 철학적, 존재론적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첫째, '측량'이라는 행위 자체의 상징성

    고대 근동에서 측량은 종종 창조, 소유권 주장, 질서 부여, 회복과 재건의 의미를 가졌습니다. 
    '놋같이 빛나는 사람'이 삼줄과 장대로 성전을 측량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이 새로운 공간을 당신의 소유로 확정하시고, 이전의 혼돈과 파괴를 넘어 새로운 질서와 거룩함을 부여하시겠다는 의지의 표현입니다. 
    이는 마치 창세기 1장에서 하나님께서 혼돈 가운데 질서를 창조하시는 모습과도 유사합니다. 
    이 측량 행위는 포로 생활로 인해 모든 것을 잃고 정체성의 혼란을 겪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계획이 여전히 살아있으며, 그들의 미래가 하나님의 정확하고 변함없는 약속 위에 세워질 것이라는 확신을 주었을 것입니다. 
    철학적으로 볼 때, 측량은 무한하고 파악 불가능해 보이는 신적 영역에 인간이 이해할 수 있는 구체적인 형태와 구조를 부여함으로써, 신과 인간 사이의 소통과 만남의 가능성을 여는 행위로도 해석될 수 있습니다.

    둘째, 새 성전의 구조가 강조하는 '거룩함과 구별됨'

    성전은 외부 담으로 둘러싸여 세상과 구별되며, 바깥뜰과 안뜰, 그리고 지성소로 이어지는 다층적인 구조는 거룩함의 등급을 시각적으로 보여줍니다. 
    특히 문마다 있는 문지기 방들은 성전에 들어오는 자들을 통제하고 부정한 것의 유입을 막는 기능을 합니다. 
    이러한 구조는 하나님의 절대적인 거룩하심과 그분께 나아가기 위해 요구되는 정결함을 강조합니다. 
    이는 프랑스의 사회학자 에밀 뒤르켐(Émile Durkheim)이 종교의 본질을 '성(sacred)'과 '속(profane)'의 구별에서 찾았던 것과 유사한 맥락입니다. 
    새 성전은 바로 이 '성스러움'이 회복된 공간,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 가운데 특별히 임재하시는 장소로서의 정체성을 회복하는 것을 목표로 합니다.

    셋째, 성전 건축에 나타난 '질서와 대칭'

    동쪽, 북쪽, 남쪽 문들이 거의 동일한 구조와 크기를 가지며, 뜰의 크기가 정확하게 측정되는 모습은 하나님의 창조 세계에 내재된 질서와 조화를 반영합니다. 
    이러한 수학적 정밀함과 대칭성은 혼란과 무질서 상태에 빠졌던 이스라엘 사회에 새로운 안정감과 예측 가능성을 제공하며, 모든 것이 하나님의 완벽한 계획과 통제 하에 있음을 시사합니다. 
    이는 고대 그리스 철학자들이 우주(코스모스)에서 발견하고자 했던 로고스(이성, 질서)와도 연결될 수 있습니다. 
    새 성전은 바로 이 신적 질서가 회복된 이상적인 공간을 상징합니다.

    넷째, '놋같이 빛나는 사람'과 그의 역할

    신비로운 존재는 천사 또는 특별한 신적 사자로 해석되며, 그의 빛나는 모습은 신적 영역에서 왔음을 암시합니다. 
    그가 에스겔을 인도하며 성전을 측량하고 설명하는 것은, 인간의 지혜로는 온전히 파악할 수 없는 하나님의 계획을 계시하고 이해시키는 중재자 역할을 합니다. 
    에스겔은 이 안내자를 통해 새 성전의 비전을 보고 듣고 마음에 새겨 이스라엘 백성에게 전달해야 했습니다. 
    이는 하나님의 계시가 인간 중재자를 통해 전달되는 방식을 보여주며, 그 메시지를 정확히 이해하고 전달하는 것의 중요성을 강조합니다.


    에스겔 40장, 폐허 위에 새 성전이 열리다: 희망의 측량과 회복의 서곡

    오랜 심판과 멸망의 예언 끝에, 에스겔서는 40장에 이르러 마침내 새로운 희망의 서광을 비춥니다. 이 장은 폐허가 된 예루살렘과 파괴된 성전을 배경으로, 선지자 에스겔에게 계시된 장엄하고도 정교한 새 성전의 환상을 상세하게 묘사하기 시작합니다. 놋같이 빛나는 안내자와 삼나무 측정기를 통해 하나하나 측량되는 성전의 문들과 담, 그리고 각종 방들의 모습은 단순한 건축 설계를 넘어, 하나님의 임재 회복과 이스라엘의 영적 재건에 대한 갈망과 약속을 담고 있습니다. 이 새로운 시작의 환상 속으로 들어가 그 의미를 탐구해 보겠습니다.



    시대적 배경과 맥락 소개

    에스겔 40장의 새 성전 환상은 기원전 573년, 에스겔이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온 지 25년째 되는 해, 그리고 예루살렘 성이 함락된 지 14년째 되는 해의 정월 초열흘날에 주어졌습니다. 오랜 포로 생활과 조국의 완전한 멸망이라는 깊은 절망 속에서, 이 환상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상상조차 하기 어려운 놀라운 희망의 메시지였습니다. 이전 장들(1-39장)이 주로 이스라엘의 죄악에 대한 심판과 예루살렘 멸망의 불가피성을 다루었다면, 40장부터 시작되는 마지막 부분(40-48장)은 회복과 새로운 시작에 대한 비전을 제시합니다. 특히 성전은 이스라엘 신앙의 중심이자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는 장소였기에, 새 성전의 환상은 단순한 건물 재건을 넘어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 언약의 갱신, 그리고 국가적·영적 정체성의 회복을 의미했습니다. 당시 포로민들은 모든 것을 잃고 이방 땅에서 절망적인 나날을 보내고 있었을 것입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주어진 새 성전의 비전은 그들에게 미래에 대한 소망을 심어주고, 하나님의 신실하심과 그분의 궁극적인 구원 계획을 다시 한번 확신하게 하는 역할을 했습니다. 이 이야기가 오늘날 우리에게 중요한 이유는, 아무리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께서는 새로운 시작과 회복을 계획하고 계심을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또한, 참된 회복은 외적인 조건의 변화뿐 아니라, 하나님의 임재를 중심으로 한 영적인 재건에서 비롯됨을 깨닫게 합니다.

    핵심 사건 또는 본문 요약: 새 성전의 외부 구조 측량

    에스겔 40장은 선지자 에스겔이 하나님의 영에 이끌려 이스라엘 땅의 매우 높은 산 위에 이르러, 그곳에서 남쪽으로 성읍 형상 같은 것을 보는 장면으로 시작합니다(겔 40:1-2). 그곳에서 그는 "모양이 놋 같이 빛나는 사람 하나가 손에 삼줄과 측량하는 장대를 가지고 문에 서 있더니"(겔 40:3) 그를 만납니다. 이 신비로운 안내자는 에스겔에게 "인자야 내가 네게 보이는 그것을 눈으로 보고 귀로 들으며 네 마음으로 생각할지어다 내가 이것을 네게 보이려고 이리로 데리고 왔나니 너는 본 것을 다 이스라엘 족속에게 전할지어다"(겔 40:4)라고 말하며, 앞으로 보게 될 모든 것을 주의 깊게 관찰하고 전하라고 명령합니다.

    이후 40장 전체는 이 '놋같이 빛나는 사람'이 에스겔을 데리고 다니며 새 성전의 외부 구조, 특히 동쪽, 북쪽, 남쪽을 향한 바깥뜰 문들과 안뜰 문들, 그리고 그 주변의 담과 방들을 매우 상세하게 측량하고 설명하는 내용으로 채워져 있습니다. 측량은 '장대' (한 장대는 여섯 큰 규빗, 한 큰 규빗은 보통 규빗에 한 손바닥 너비를 더한 것)와 '규빗'을 단위로 하여 매우 정밀하게 이루어집니다.

    주요 측량 대상과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모든 문은 유사한 구조를 가짐):

    • 성전 담 (5절): 성전 전체를 둘러싼 담의 두께와 높이를 측량합니다.
      • 두께와 높이가 각각 한 장대 (여섯 규빗).
    • 동쪽을 향한 바깥뜰 문 (6-16절):
      • 문 통로, 문지기 방들 (양쪽에 각각 세 개씩), 현관, 문 벽 등이 상세히 측량됨.
      • 문지기 방의 크기, 방 사이 벽의 두께, 문 통로의 너비와 길이, 현관의 크기 등이 기록됨.
      • 문 벽에는 종려나무 조각이 새겨져 있음.
    • 바깥뜰 (17-19절):
      • 동문으로 들어가면 바깥뜰이 나오고, 박석 깔린 땅과 그 가장자리에 있는 방 서른 개가 묘사됨.
      • 아래 문에서부터 안뜰 바깥 문 앞까지의 너비가 백 규빗임.
    • 북쪽을 향한 바깥뜰 문 (20-23절):
      • 동쪽 문과 동일한 구조와 크기로 측량됨.
      • 이 문에서 안뜰 문까지의 거리도 백 규빗임.
    • 남쪽을 향한 바깥뜰 문 (24-27절):
      • 동쪽, 북쪽 문과 동일한 구조와 크기로 측량됨.
      • 이 문에서 안뜰 문까지의 거리도 백 규빗임.
    • 남쪽을 향한 안뜰 문 (28-31절):
      • 바깥뜰 문들과 유사한 구조를 가지며, 문지기 방, 벽, 현관 등이 측량됨.
      • 이 문으로 들어가면 안뜰이 나옴.
    • 동쪽을 향한 안뜰 문 (32-34절):
      • 남쪽 안뜰 문과 동일한 구조와 크기로 측량됨.
    • 북쪽을 향한 안뜰 문 (35-37절):
      • 남쪽, 동쪽 안뜰 문과 동일한 구조와 크기로 측량됨.
    • 제물 준비를 위한 방들과 상들 (38-43절):
      • 안뜰 문 현관 곁에 번제물을 씻는 방과 번제물, 속죄제물, 속건제물을 잡는 상들이 있음.
      • 상들의 재료(다듬은 돌)와 크기, 용도가 설명됨.
    • 제사장들의 방들 (44-47절):
      • 안뜰에 노래하는 제사장들의 방과 성전 직무를 맡은 제사장들의 방이 있음.
      • 사독의 자손 제사장들이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가 수종드는 자들로 언급됨.
      • 안뜰의 크기가 길이와 너비 각각 백 규빗인 네모반듯한 모양이며, 제단은 성전 앞에 있음.
    • 성전 현관 (48-49절):
      • 마지막으로 성전 본체의 현관이 측량됨. 문 벽, 문의 너비, 현관의 너비와 길이가 기록됨.
      • 현관으로 올라가는 층계와 문 곁의 기둥 둘이 언급됨.

    이처럼 에스겔 40장은 매우 구체적이고 반복적인 측량 기록으로 가득 차 있으며, 이는 새 성전의 질서와 거룩함, 그리고 하나님의 계획의 확실성을 강조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 9월 15일(월) 에스겔 37-39장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마른 뼈들아(37:4)

  • 또 내게 이르시되 너는 이 모든 뼈에게 대언하여 이르기를 너희 마른 뼈들아 여호와의 말씀을 들을찌어다.
    Then he said to me, "Prophesy to these bones and say to them, 'Dry bones, hear the word of the LORD!


    또 내게 이르시되 너는 이 모든 뼈에게 代言(대언)하여 이르기를 너희 마른 뼈들아 여호와의 말씀을 들을지어다.


    겔 6:2 인자야 너는 이스라엘 산을 향하여 그들에게 예언하여


    요 5:28 이를 기이히 여기지 말라 무덤 속에 있는 자가 다 그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마른 뼈가 살아나려면(에스겔 37:1-10)

    때는 기원전 600년경입니다.  
    유대나라는 바벨론의 침략으로 멸망당했습니다.  
    바벨론 군대가 성전의 보물들과 왕궁의 보물들은 죄다 빼앗아 갔습니다.  
    그리고 수 많은 젊은이와 귀족들을 바벨론으로 끌어갔습니다.  
    성전도 불태워지고 군대는 해산되고 모든 기술자와 쓸모있는 사람은 다 잡아가고 유대땅에는 아주 힘없는 이, 늙은이, 장애가 있는 이들외에는 남은 자가 없었습니다. 

    에스겔은 이처럼 비참하기 짝이 없는 조국의 현실을 눈으로 목도하며 스물 다섯살이라는 젊은 나이에 바벨론으로 끌려갔습니다. 
    '이제는 다 끝났다. 내 꿈도 사라지고 조국의 미래도 없다. 
    우리 조상을 애굽에서 이끌어 내셨다는 그 하나님은  정말로  살아계신 것일까?  
    그분은 과연 전능하신가? 그분은 우리가 바벨론에서 겪는 수치와 절망을 아실까?  
    정말 하나님은 바벨론에서도 우리와 함께 하실까? ' 하는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졌습니다. 
    그렇게 흔들리고 절망하는 에스겔에게 하나님께서 찾아 오셨습니다. 
    그리고 그의 손을 잡아 이끌며 엄청난 비젼을 보여 주셨습니다. 
    바로 그때 에스겔이 본 비젼이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에스겔 37장의 말씀입니다. 

    오늘 우리는 에스겔이 절망의 밤에 본 비젼을 함께 보기를 원합니다.  
    그리고 그 비젼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오늘 우리에게 약속하시는 것을 깨닫게 되기를 원합니다.  
    에스겔이 본 것은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 에스겔에게 보여준 것을 통해서 말슴하시려는 것은 무엇일까요?  
    이시간 에스겔이 본 것을 중심으로 하나씩 살펴보며 함께 하나님의 뜻을 찾아 보겠습니다. 

    1. 골짜기에 가득한 마른 뼈들이 있습니다.(1-2)

    에스겔 37:1-2 
    여호와께서 권능으로  내게 임하시고 그의 영으로  나를 데리고 가서 골짜기 가운데 두셨는데 거기 뼈가 가득하더라 나를 그 뼈 사방으로 지나게 하시기로 본즉 그 골짜기 지면에 뼈가 심히 많고 아주 말랐더라

    하나님께서 에스겔 선지자를 사람의 죽은 뼈들이 있는 골짜기로 인도하여 뼈들을  보게 하셨습니다. 
    그 골짜기 지면에 뼈들이 심히 많음을 보여 주셨습니다. 
    그뼈가 사방에 널려 있고 골짜기에 가득찼고 아주 말랐습니다.

    이 모습을 통하여 하나님의 백성들인 이스라엘의 영적 상태를 보여 주었습니다. 

    에스겔 37:11
    또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이 뼈들은 이스라엘 온 족속이라 그들이 이르기를 우리의 뼈들이 말랐고 우리의 소망이 없어졌으니 우리는 다 멸절되었다 하느니라.

    이스라엘은 죽었습니다.  
    나라가 망했으니 죽은 것입니다.  
    왕도 없고, 군대도 없고,  인물도 없고, 젊은이도 없고, 주권도 없고 남은 것이 거의 없었습니다.  
    다시 재건할 수 있는 가능성도 없었습니다.  
    바벨론이 보물들을 다 빠앗아가고 사람들은 잡아가고 가져가지 못할 것은 불태워버리고 농사지을 땅도 돌을 던져 황폐하게 만들어 버렸습니다.  
    이제는 완전히 나라의 운명이 끝났습니다.  
    마른 뼈는 그런 조국의 현실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의 운명은 나라가 그렇게 멸망하기 훨씬 전에 죽은 것입니다.  그것은 그들이 영적으로 죽었기 때문입니다.  왕과 지도자들과 백성이 하나같이 타락하여 하나님을 버리고 우상숭배하고 부도덕하게 살며 죄를 지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했습니다.  주께서 하나님의 사람들을 수없이 보내어 돌이키도록 경고했으나 소용없었습니다. 오히려 바른 말하는 하나님의 사람들을 미워하고 잡아 죽였습니다.  그리고는 하나님이 없는 것처럼 그들 마음대로 부패한 삶을 살았습니다. 그대 이미 그들은 죽어 썩어서 말라버린 뼈와같이 생명을 잃어버린 모습이 된 것입니다. 

        오늘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오늘 우리 나라의 현실은 어떻습니까?   오늘 여러분의 가정의 모습은 어떻습니까?  혹 마른 뼈와 흡사하지는 않습니까?   생명이 사라져 생동감있게 움직이지 못하고 생명력이 없이 죽은 사람처럼 굳어져서 무감각하고 무기력하며 말라가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이런 자들이 온 세상에 심히 많고 가득합니다. 그리고 그 상태는 아주 말라 있습니다.  죽은 상태로 날마다 말라가고 있습니다. 아무 소망도 되는대로 삽니다. 삶의 목적도 없이, 생명력을 상실한채 비참하게 죽어가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특히 구원받지 못한 사람들은 숨이 붙어 있어도 영적으로 마른뼈와 같은 존재입니다. 영생이 없기에 잠시 잠간 있다가 죽음앞에 무릎꿇고 마른 뼈가 되어 모두에게 다 잊혀진 존재가 되고 말 것입니다.

       에덴동산에서 하나님이 아담에게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 열매를 먹지 말라 먹으면 죽는다고 하셨습니다. 아담과 하와과 선악과를 먹었습니다. 그런데 죽지 않았습니다. 말도 하고, 움직이고, 자식도 낳고 할 것 다했습니다. 하나님이 거짓말을 하신 것입니까? 아닙니다. 영적인 죽음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선악과를 먹은 후 영적으로 죽었습니다. 하나님과의 친밀한 교제가 단절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생명이 그들을 떠난 것입니다.  오늘 이처럼 영적으로 죽은채 육적인 생명만이 전부인줄 알고 사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마른 뼈 같은 존재들입니다. 마른 뼈는 무가치하고 무의미한 존재들입니다. 

    하나님께서 에스겔  선지자에게 이렇게 죽어 마른 뼈를 보여 주신 것은 마른 뼈를 다시 살리시려는 계획이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는 마른 뼈같은 이스라엘을 다시 살리시고 회복하시려는 놀라운 계획이 있으셨습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는 마른 뼈같이 소망없이 살아가는 인생을 회복시키시려고 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마른뼈같이 생명이 없이 사라져가는 인생들에게 영적인 생명을 불어 넣어 다시 살리시려고 하십니다. 생명력으로 충만한 사람으로 변화시키시려고 하십니다. 여러분에게 오늘 하나님의 생명력이 충만하게 임하기를 축원합니다. 

    2. 하나님은 마른 뼈들을 말씀으로 살리십니다(3-5)

       (겔37:4) 또 내게 이르시되 너는 이 모든 뼈에게 대언하여 이르기를  너희 마른 뼈들아 여호와의  말씀을 들을지어다 (겔37:5)  

       도무지 살 것  같지 않는 죽어서 오래 된 아주 메마른 뼈들이 능히 살 수 있겠느냐?고 하나님께서 에스겔에게  질문하십니다. 에스겔 선지자는  "여호와여, 주께서 아시나이다."하고 대답했습니다.  못 삽니다. 하자니 믿음없는 것 같고 삽니다. 삽니다. 하자니 도무지 황당하고 불가능하게 여겨져서 애매하게 대답을 한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모르는 사람들에게 전도하려고 하면 막막함을 느낍니다. 하나님의 존재를 부정하는 사람들에게 말씀을 전하는 것은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내가 전도한다고 해서 그 말을 알아듣고 믿을 것 같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마른 뼈같이 영적으로 죽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라고 하십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내가 전하는 말을 듣고 예수 믿을 것 같지 않는데 하나님께서 감동을 주십니다. 여기에 그리스도인의 갈등이 있습니다. 아무 소용도 없는 일을 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그래서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전도를 포기하고 삽니다. 그렇지만 하나님께서는 마른 뼈도 살리시는 분입니다. 어떻게 살리십니까? 

       @  하나님의 마른 뼈를 말씀으로 살립니다.(4)

    (겔37:4) 또 내게 이르시되 너는 이  모든 뼈에게 대언하여 이르기를 너희 마른 뼈들아 여호와의 말씀을 들을지어다

    "마른 뼈들아 여호와의 말씀을  들을지어다"   하나님은 에스겔에게 말씀을 대언하라고 하십니다.  그랬더니 소리가 나고 뼈가 움직이더니 이 뼈, 저 뼈가 들어 맞아서 뼈들이 서로 연결되었습니다.  또한 그 뼈에 힘줄이 생겼습니다. 살이 차 오르기 시작합니다.  그 위에 피부가 덮여집니다. 사람의 형태가 제대로 갖추어졌습니다.  이런 놀라운 일이 어떻게 가능합니까?  하나님께서는 말씀으로 기적을 행하셨습니다.  말씀으로 죽은 자를 살리십니다. 

       죽어서 사흘이나 되어 썩어서 냄새나는 나사로 무덤 앞에 가서 우리 주님께서 나사로야 나오라고 말씀하실 때 즉시 살아서 나왔습니다.  죽어서 메고 가는 관에다 손을 대고 청년아 일어 나라고 말씀하시자 죽어서 관에  메어 가는 나인성 과부의 아들이 즉시  살아 났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죽은 자도 살릴 수 있습니다.  전혀 죽은 자처럼 듣지 못하는 자들도 하나님의 말씀은 전파되어야 합니다.

       요한복음 5장 25절에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죽은 자들이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듣는 자는 살아나리라'  말슴으로 세상을 지으신 하나님이 말슴으로 죽은 자를 살리십니다. 말씀을 들으면 살아납니다. 오늘날도 절망중에 있던 사람들이 말씀을 듣고 소망으로 충만해집니다. 죽어가던 사람들이 말씀을 듣고  다시 살아납니다. 마귀같이 무서운 사람도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면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합니다.  

       저는 사실 이런 기적을 주일마다 경험하는 사람입니다. 어떤 날은 완전히 공동묘지에서 설교하는 느낌이 듭니다. 설교가 시작과 함께 졸기 시작하는 교인들이 여럿 눈에 들어옵니다. 죄송하지만 마른뼈를 앞에 놓고 설교하는 기분이예요. 그래도 사명이 주의 말씀을 선포하는 것이니 전할 수 밖에요.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말씀 선포가 진행되면서 사람들이 살아나는 것이 보입니다. 숙인 머리가 들립니다. 얼굴에 생기가 돌아옵니다. 눈에 광채가 나기 시작하고 어떤 분의 눈에서는 눈물이 흘러내립니다. 입에서 아멘 하는 소리가 힘차게 울려퍼집니다. 살아나고 있는 것입니다.  예배당에 들어 올 때와 전혀 다른 모습으로 걸어 나가며 제 손을 꼭 잡는 것입니다. 그 얼굴에 기쁨이 가득합니다. 걸음걸이에는 새 힘이 담겨 있습니다. 입술에 찬양이 흐르고 있습니다. 부활의 능력이 함께하고 있습니다.  기적이 일어난 것입니다. 그 기적은 말씀의 능력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말슴을 대언 즉 대신 선포하면 여러분도 그런 기적을 체험하게 됩니다. 마른 뼈처럼 보여도 하나님께 순종하여 선포하십시다. 도무지 알아 들을 것 같지 않게 느껴져도 내가 아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면 영적으로 죽은 사람이 살아납니다. 영적으로 마른 뼈같이 무가치한 존재도 유익한 사람이 되고 아름답게 변화됩니다. 

    3. 하나님은 마른 뼈를 성령으로 살립니다(5)

    주 여호와께서 이  뼈들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생기를 너희에게 들어가게 하리니 너희가 살아나리라.

    "내가 생기를 너희에게  들어 가게 하리니 너희가  살아나리라"(5하)  
    생기란 말은 히브리어로 루아흐입니다. 
    이 말은 영, 바람 같은 말로 번역되고 있습니다.  
    생기가 들어가서라는 말씀은 성령이 들어가서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심히 마른 뼈같은 사람도 하나님의 말씀이 전파되고 하나님의 성령이 들어 가면 살아 납니다. 
    말씀이  전파되고 성령의 생기가 들어 갈 때 살아 나게 됩니다. 
    그래서 말씀과  성령이 같이 할 때 역사가 일어 납니다.  

    요한복음 6:63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이 영이요 생명이라.

    하나님은 말씀으로 살릴 뿐 아니라 성령으로 살리십니다. 
    성령이 역사하는 자리에 온갖 놀라운 능력이 역사합니다. 병든 자가 치유받습니다. 귀신 들린 자에게 귀신이 떠나갑니다. 알콜 중독, 마약 중독, 게임 중독 온갖 악한 영의 역사가 다 떠나고 거룩한 사람으로 변화됩니다.  따라서 우리는 성령의 강력한 역사를 위해 간구해야 합니다. 

         (겔37:9) 또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너는 생기를 향하여 대언하라 생기에게 대언하여 이르기를 주 여호와의 말씀에  생기야 사방에서부터 와서 이 사망을 당한 자에게 불어서 살게 하라 하셨다 하라

       생기가 사망당한 자에게 불어 지면  살게 됩니다. 그러므로 죽은 자와 같은 자들을 살리려면 사망에서 생기가  불어 오도록 기도하여야 하고  생기인 하나님의 성령께서 들어 가시기만 하면 살게 된다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지난 달 침례를 받고 몇 분이 간증을 하였습니다. 그중에 한 자매가 새신자인데 하나님을 만나고 싶어 40일 새벽기도를 작정을 했습니다. 새벽기도 시작한지 5일만에 혼자서 성령체험을 했습니다. 성령님께서 붙잡으시니까 기쁨이 충만해졌습니다. 감사가 충만해졌습니다. 감동이 밀려왔습니다. 미움이 사랑으로 바뀌었습니다. 예전같으면 조금만 어려운 일이 생겨도 부부간에 싸우고 원망했을텐데 이제는 남편을 위로하고 격려하게 되었습니다. 안믿는 형제들이 안타깝게 여겨져 구원받도록 기도하기 시작했답니다. 할렐루야! 이처럼 새신자도 성령받으면 살아나고 아름답게 변화됩니다. 여러분 모두 성령받으시기 바랍니다. 성령으로 충만하게 되기 바랍니다. 

       여러분의 인생이 혹 마른 뼈와 같이 아무 소망이 없다고 좌절하고 있지 않습니까?  여러분의 가족중에 마른 뼈와 같은 인생때문에 낙심이 되고 있지는 않습니까?  오늘 하나님께서 보여주시는 비전을 붙잡으시기 바랍니다. 오늘 하나님께서 들려주시는 말씀을 붙잡으시기 바랍니다. 오늘 하나님께로부터 불어오는 성령님의 생기를 받아들이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의 인생에 마른 뼈가 큰 군대로 변하는 놀라운 기적이 일어나게 될 것입니다.


    에스겔서 37장 - 투데이바이블

    에스겔 37장은 두 가지 주요 환상으로 구성됩니다. 
    첫 번째(1-14절)는 유명한 '마른 뼈의 골짜기' 환상으로, 하나님의 능력에 의해 죽은 뼈들이 살아나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두 번째(15-28절)는 두 개의 막대기를 하나로 합치는 상징 행위를 통해, 이스라엘 백성의 회복과 통합을 예언합니다. 
    전체적으로 포로기 이스라엘에게 절망 속의 소망, 죽음 속의 생명, 분열 속의 연합을 약속하는 장입니다.

    마른 뼈를 살리시는 하나님” 

    에스겔 선지자 B.C 597년 바벨론의 2차 침공 때 여호야긴 왕과 함께 바벨론으로 포로로 잡혀갔습니다. 
    그러나 에스겔은 바벨론의 그발 강가에서 소명을 받고 포로 된 유다 백성을 향해 회복의 소망을 선포하며 용기와 위로를 주었습니다.

    1. 마른 뼈를 보여주셨습니다(1-3).

    하나님께서 에스겔 선지자를 데리고 한 골짜기로 가셨습니다. 
    그런데 그 골짜기에는 뼈가 가득하였습니다.
    그 뼈들은 심히 많고 아주 말랐습니다.

    1. 여호와께서 권능으로 내게 임재하시고 그의 영으로 나를 데리고 가서 골짜기 가운데 두셨는데 거기 뼈가 가득하더라.
    2. 
    나를 그 뼈 사방으로 지나가게 하시기로 본즉 그 골짜기 지면에 뼈가 심히 많고 아주 말랐더라.

    ​하나님께서 에스겔 선지자에게 보여주신 마른 뼈가 의미하는 것은 무엇일까요?
    11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11. 또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이 뼈들은 이스라엘 온 족속이라 그들이 이르기를 우리의 뼈들이 말랐고 우리의 소망이 없어졌으니 우리는 다 멸절되었다 하느니라​.

    ​하나님께서 에스겔에게 보여주신 마른 뼈는 당시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 와서 종살이하고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이었습니다. 
    그들은 마른 뼈와 같았습니다. 
    아주 마른 뼈들이었습니다.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은 아무 소망 없이 살아갔습니다.
    내일도 없고 희망이라고는 하나도 없었습니다. 
    당시 유대 백성들은 바벨론에 두 번이나 침략을 당했습니다.
    성전은 불에 타고 군대는 해산되었습니다.
    성전의 보물들과 왕궁의 보물들은 다 빼앗기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수많은 젊은이와 귀족들은 바벨론으로 끌려가고 말았습니다.
    나라를 다시 일으킬 젊은이라고는 하나도 남지 않았습니다.
    모든 기술자와 쓸모있는 사람은 다 잡혀가고 말았습니다.
    당시 유대 땅에는 힘없는 노인들과 장애를 가진 사람들만 남아있었습니다.
    에스겔은 이처럼 비참하기 짝이 없는 유대 나라의 현실을 두 눈으로 똑똑히 목격했습니다. 
    이제는 다 끝난 것처럼 보였습니다.
    마치 에스겔 골짜기의 마른 뼈와 같았습니다.
    소망이라고는 하나도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다 멸절된 것 같았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에스겔에게 “이 뼈들이 능히 살겠느냐”고 물으셨습니다. 

    3. 그가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이 뼈들이 능히 살 수 있겠느냐 하시기로 내가 대답하되 주 여호와여 주께서 아시나이다

    ​여러분 같으시면 뭐라고 대답하시겠습니까? 
    못 산다고 대답하자니 믿음이 없는 것 같고, 또 산다고 하자니 도무지 황당하고 불가능할 것 같습니다. 
    에스겔은 “주 여호와여 주께서 아시나이다”라고 대답했습니다. 
    하나님은 바벨론에 포로 잡혀 와서 지금은 마치 마른 뼈처럼 아무 소망이 없지만, 다시 그들을 살리기 원하셨습니다. 
    여러분, 오늘날도 하나님은 우리들에게 똑같은 질문을 하십니다. 
    이 뼈들이 능히 살 수 있겠느냐” 
    한국교회는 마치 에스겔 골짜기의 마른 뼈처럼 되어 버렸습니다. 

    영적인 신앙생활의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5절)을 보시면 “너희가 살아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5. 주 여호와께서 이 뼈들에게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내가 생기를 너희에게 들어가게 하리니 너희가 살아나리라. 

    그럼 어떻게 해야 에스겔 골짜기의 마른 뼈와 같은 한국교회가(우리가) 살아날 수 있을까요?

    2.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할 때 살아납니다(4).

    에스겔 골짜기의 마른 뼈들이 살리기 위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하라고 하셨습니다.

    ​4. 또 내게 이르시되 너는 이 모든 뼈에게 대언하여 이르기를 너희 마른 뼈들아 여호와의 말씀을 들을지어다.

    ​하나님은 에스겔에게 “이 모든 뼈에게 대언하라”고 하셨습니다.
    너희 마른 뼈들아 여호와의 말씀을 들을지어다”라고 대언하라고 하셨습니다.

    ​7. 이에 내가 명령을 따라 대언하니 대언할 때에 소리가 나고 움직이며 이 뼈, 저 뼈가 들어 맞아 뼈들이 서로 연결되더라.

    에스겔이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 대언할 때 마른 뼈들이 소리가 나고 움직이기 시작했습니다.
    이 뼈, 저 뼈가 들어맞아 뼈들이 서로 연결되었습니다. 
    오늘날도 우리들의 죽은 신앙이 다시 살아나려면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해야 합니다.

    한국교회는 주로 프로그램을 갖고 운영을 하고 있었습니다. 
    좋은 프로그램이 많은 교회를 좋은 교회라고 생각했습니다.
    프로그램이 우리를 다시 살리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할 때 마른 뼈와 같은 우리의 신앙이 다시 살아날 수 있습니다. 
    소리가 나고 움직이고 이 뼈, 저 뼈가 들어맞아 뼈들이 서로 연결되게 됩니다.

    ​요한복음 5:25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죽은 자들이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듣는 자는 살아나리라. 

    ​요한복음 11:43-44 
    죽은 지 나흘이나 돼서 냄새가 나는 나사로를 향해서 예수님께서 “나사로야 나오라”고 말씀하실 때 죽은 나사로가 다시 살아서 걸어 나오는 이적이 나타났습니다.

    ​43. 이  말씀을 하시고 큰 소리로 나사로야 나오라 부르시니
    44. 죽은 자가 수족을 베로 동인 채로 나오는데 그 얼굴은 수건에 싸였더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풀어 놓아 다니게 하라 하시니라.

    여러분, 아무리 죽은 지 나흘이 돼서 냄새가 나도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면 다시 살아날 수 있습니다. 
    에스겔 골짜기의 아주 마른 뼈들도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면 다시 살아납니다.  
    하나님의 말씀만이 우리들을 다시 살릴 수 있습니다.

    왜 하나님의 말씀만이 우리들을 다시 살릴 수 있을까요?

    ​창세기 1장을 보시면 하나님께서 온 우주 만물울 창조하실 때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으셨기 때문입니다.
    온 우주 만물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창조하신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말씀으로 마른 뼈를 다시 살리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본문을 자세히 보시면 “너희가 살아나리라”라는 말씀이 두 번이나 나옵니다.

    ​에스겔 37:5-6 
    주 여호와께서 이 뼈들에게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내가 생기를 너희에게 들어가게 하리니 너희가 살아나리라
    너희 위에 힘줄을 두고 살을 입히고 가죽으로 덮고 너희 속에 생기를 넣으리니 너희가 살아나리라 또 내가 여호와인 줄 너희가 알리라 하셨다 하라.

    ​아무리 마른 뼈라고 해도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면 다시 살아날 수 있습니다. 
    여러분, 세상의 유명한 의사라고 해도 살릴 수 있는 것이 있고, 살릴 수 없는 것이 있습니다.
    이 세상을 정치인들이 살릴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만이 우리를 살립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들을 다시 살릴 것을 믿습니다.

    3. 생기가 들어가야 살아납니다(5)

    5. 
    주 여호와께서 이 뼈들에게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내가 생기를 너희에게 들어가게 하리니 너희가 살아나리라.

    아무리 마른 뼈들도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면 다시 살아납니다.
    그런데 더 중요한 것이 하나 있습니다.
    하나님의 생기가 들어가야 됩니다. 
    여기서 말씀한 생기는 ‘루하흐’라고 합니다.
    ‘루하흐’는 우리말로 하면 성령을 말합니다.

    ​14. 내가 또 내 영을 너희 속에 두어 너희가 살아나게 하고 내가 또 너희를 너희 고국 땅에 두리니 나 여호와가 이 일을 말하고 이룬 줄을 너희가 알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여기서 “내가 내 영을 너희 속에 두어 너희가 살아나게 하고”라는 말씀에서 “영”이라는 말도 ‘루하르’라는 단어입니다. 
    에스겔 골짜기의 마른 뼈들이 다시 살아나려면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야 한다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고전 8:1)에서 “지식은 교만하게 한다”라고 했습니다.

    ​고린도전서 8:1 
    우상의 제물에 대하여는 우리가 다 지식이 있는 줄을 아나 지식은 교만하게 하며 사랑은 덕을 세우나니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만 듣고, 기도하지 않으면 지식은 사람을 교만하게 만듭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함께 언제나 성령님께서 함께 역사하셔야 합니다.
    방금 하나님께서 우주 만물을 만드실 때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으셨다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런데 (창세기 2:7)을 보면 “하나님이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되었다”라고 했습니다.

    창세기 2:7
    여호와 하나님이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되니라.

    ​요한복음 20:22
    이 말씀을 하시고 그들을 향하사 숨을 내쉬며 이르시되
    성령을 받으라.

    ​하나님의 말씀과 함께 성령을 받아야 합니다.
    여러분, 성령은 언제 받습니까?
    죄를 회개하고 예수님을 믿을 때 성령을 받습니다.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습니다.

    ​고린도전서 12:3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알리노니 하나님의 영으로 말하는 자는 누구든지 예수를 저주할 자라 하지 아니하고 또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

    우리는 이미 성령을 받았습니다. 

    그러면 성령을 또 받아야 할까요? 
    이제는 날마다 성령의 충만을 받아야 합니다.

    ​에베소서 5:18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으라.

    ​성령이 충만하면 어떠한 시험도 이길 수 있습니다.
    성령으로 충만해서 우리 교회가, 한국교회가 다시 살아날 줄로 믿습니다. 

    에스겔 골짜기의 마른 뼈들이 다시 살아났습니다. 
    마른 뼈가 이제는 하나님의 큰 군대가 되었습니다.

    ​10. 이에 내가 그 명령대로 대언하였더니 생기가 그들에게 들어가매 그들이 곧 살아나서 일어나 서는데 극히 큰 군대더라. 

    지금은 나라를 잃고 아무 소망도 없이 바벨론에서 포로 생활하는 그들이지만, 에스겔 선지자를 통해서 들려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성령의 충만을 사모하며 기도할 때 하나님은 그들에게 생기를 불어넣어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으로 무장한 그들은 이제 하나님의 큰 군대가 되었습니다.
    여러분, 군대가 하는 일이 무엇인지 아시지요? 
    군대는 나라를 지킵니다. 
    전쟁이 일어나면 목숨을 바쳐서 나라를 위해, 백성을 위해서 싸웁니다. 
    여러분, 우리 모두는 십자가의 정병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서 목숨 바쳐 싸우는 이 시대의 하나님의 군대입니다.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으로 한국교회를 다시 살리실 줄로 믿습니다.
    시험을 이기고, 마귀를 이기고, 어떤 어려움도 싸워 이기는 하나님의 큰 군대가 되게 하실 줄로 믿습니다.


    마른 뼈 환상과 하나님의 생기(에스겔 37:1 ~ 6)


    마른 뼈가 다시 살아나는 이 환상은 에스겔서의 클라이맥스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에스겔의 환상은 죽은 자의 부활을 예시하는 그야말로 그날의 일들을 다시 한 번 우리에게 미리 보여주시는 그런 메시지라고 할 수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15:52
    나팔 소리가 나매 죽은 자들이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아나고 우리도 변화하리라 

    부활의 신앙을 갖게 되기를 바랍니다.

    ​그것을 예수님께서는 이렇게도 표현하셨습니다.

    요한복음 5:28-29
    이를 놀랍게 여기지 말라 무덤속에 있는 자가 다 그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

    선한 일을 행한 사람은 생명의 부활, 악한 일을 행한 사람은 심판의 부활로 이 말은 이 땅에서 심은 것이 헛되지 않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부활 신앙은 미래와 천국이 오늘 이 지점과 함께 연결되어 우리는 결국 영혼 속에 살아갑니다.

    ​예수 생명 안에 영원한 삶이 하나님이 주시는 영생의 은혜를 누리며 사는 복 있는 믿음의 삶을 살길 주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스펄 전 목사님이 성도에게 편지를 받았습니다. 
    그 편지에 이렇게 쓰여 있었습니다.

    "목사님 설교에 은혜를 많이 받았습니다. 그래서 다시 그리스도를 붙잡을 힘을 얻었습니다. "

    ​그 편지가 스펄 전 목사님 마음에 얼마나 기쁨이 됐는지 "세상이 무엇보다도 이런 기쁨이 없을 것이다." 라고 그의 설교에 쓰면서 오늘 본문인 에스겔 37장의 말씀을 그 설교문에 쓰고 있습니다.

    ​뼈들처럼 죽고 메마른 자들에게 하나님의 성령이 임하여 다시 하나님을 찾게 되는 은혜가 임하기를 바랍니다. 
    이것이 부활 신앙입니다.

    ​25살에 유배되어 5년간 지났지만 아무런 희망을 바랄 수 없는 이스라엘 공동체 속에 연약한 한 청년 에스겔은 에스겔서 1장 1절 서른째 해 넷째 달 초닷새에 내가 그발 강가 사로잡힌 자 중에 있을 때에 하늘이 열리며 하나님의 모습이 내게 보이니

    하늘이 열리고 불의 전차를 동원해서 하늘의 보좌가 자기에게로 다가오는 그 하나님의 임재를 환상을 통해 에스겔을 불러 이 조국과 미래에 대한 비전을 선포하게 하시는 내용이 바로 에스겔서의 내용이고 에스겔이 받은 소명입니다.

    ​에스겔이 비전을 선포하는 내용은 절망감과 패배감에 찌들어 있는 이 백성에게 하나님께서 새 언약을 맺으신다. 고 하는 언약을 선포하고 상처받고 고통받아 신음하고 있는 이들에겐 회복과 치유의 소망을 심어주고, 교회와 성도가 나아갈 방향과 비전을 제시하는 것이 에스겔이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소명이고 하나님을 만난 자에게 하나님께서 주신 임무였습니다.

    본문 에스겔 37장은 마른 뼈들이 다시 살아나는 환상을 보여주심으로 말미암아 그 비전의 절정을 이루고 있습니다. 
    37장 1절 여호와께서 권능으로 내게 임재하시고 그의 영으로 나를 데리고 가서 골짜기 가운데 두셨는데 거기 뼈가 가득하더라
    2절 나를 그 뼈 사방으로 지나가게 하시기로 본즉 그 골짜기 지면에 뼈가 심히 많고 아주 말랐더라

    ​하나님의 영이 왜 에스겔을 마른 뼈 골짜기 사방을 두루두루 여기 저기 다 세세히 보도록 그곳으로 밀어 넣으셨을까요? 
    절망의 골짜기를 가로질러 가본 사람만이 하나님의 마음과 관심을 알고 공감해야만 무엇을 해야 할지를 발견하는 것이 소명입니다.

    ​생명을 건지려면 죽음의 현장으로 뛰어들어야 합니다. 
    물에 빠진 사람을 건지려면 구조 대원은 그 물속으로 자신의 몸을 던져야 그를 살려낼 수 있습니다.

    ​역설적이긴 하지만 부활의 희망은 어디서부터 나타나느냐? 
    죽음의 한복판에서 일어난다는 사실입니다. 
    죽음의 현장을 목도하고 체험하지 못한다면 결코 부활의 메시지를 공감할 수 없고 체험할 수 없습니다.

    ​가난을 경험해 보지 못한 사람에게 가난은 그저 배고픈 일, 불편한 일 정도일 겁니다. 
    아픔과 상처를 경험해 보지 못한 사람들에게 응급실에서 중환자실에서 저 암 병동 호스피스에서 생과 사를 가르는 현장의 절규는 그저 아련한 동정이나 애처로운 정도일 것입니다.

    ​그 절망과 죽음의 현장에서만이 우리가 다시 그리스도를 붙잡을 때 부활의 역사와 하나님의 기적을 체험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도저히 회복될 것 같지 않은 절망의 어둠 속에서 바로 부활의 소망이 일어남의 역사가 나타나게 될 것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다시 그리스도를 붙잡을 수 있는 힘과 은혜가 여러분 가운데 성령으로 임재하시기를 간절히 소원하고 축복합니다.

    ​하나님께서 에스겔에게 그것이 보이시고서는 느닷없이 이렇게 물어보십니다.

    ​3절 그가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이 뼈들이 능히 살 수 있겠느냐 하시기로 내가 대답하되 주 여호와여 주께서 아시나이다

    ​에스겔은 인자야 이 뼈들이 능이 살 수 있겠느냐라고 하시는 하나님의 질문에 이렇게 대답합니다. 
    주께서 아시나이다
    저로서는 알 수 없는 일이지만 주님만 아시지 않습니까라고 하는 반문이기도 하고, 주님만 하실 수 있습니다. 
    주님만 이루실 수 있습니다. 고 하는 믿음의 고백이기도 합니다.

    ​이 믿음이 필요합니다.

    믿음은 우리의 태도와 자세로 규정됩니다. 
    믿음을 가지고 어떻게 사느냐 믿음을 가지고 이 문제들을 어떻게 다가가는가의 태도와 자세의 문제입니다.

    ​예루살렘의 멸망은 에스겔에게 그야말로 충격 그 자체였습니다. 
    실제로 심한 충격으로 에스겔은 실어증에 걸립니다. 
    에스겔서 3장에서부터 33장까지 에스겔의 말문이 막혀 혀가 입천장에 붙었습니다.

    ​성전이 훼손되고 그 성이 무너지자 그리고 왕국으로부터 백성들에 이르기까지 쇠사슬 결박에 묶여서 포로로 다 잡혀 끌려간 그 충격에 말문이 막힌 에스겔에게 하나님께서는 33장까지 이스라엘의 죄악상을 낱낱이 보여주십니다.

    ​그러나 오늘 이 뼈들이 능히 살 수 있겠니라고 하시는 하나님의 물음 앞에 드디어 입을 열어 이렇게 대답하는 겁니다. 
    주께서 아시나이다. 
    주님만 하실 수 있습니다.

    ​그 대답을 들으시고는 4절 또 내게 이르시되 너는 이 모든 뼈에게 대언하여 이르기를 너희 마른 뼈들아 여호와의 말씀을 들을지어다 이제 마른 뼈에게 내 말을 대언하라고 명령하십니다.

    ​그리고 그는 그 입을 열어 하나님의 말씀을 담대히 전합니다. 
    마른 뼈들아 살아가라 생기야 들어가라 대언합니다. 
    여러분!! 능력은 하나님께만 있습니다. 
    믿으십시오 권능은 오직 여호와께만 있음을 믿기를 바랍니다.

    ​이 시간에도 설교는 제가 하지만 저를 보지 마시고 하나님의 음성을 듣기를 바랍니다. 
    저는 스피커일 뿐입니다. 
    거기서 나오는 음성을 들어야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시기를 바랍니다. 
    이 뼈들아 살아나라 생기야 들어가라 명령하시면서 저들을 일으키시기 원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기 바랍니다.

    여러분의 삶의 현장에서 다시 하나님의 은혜를 붙들고 일어설 수 있는 힘을 이 말씀을 통해 얻게 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그 말씀을 내가 받고 그 음성을 내가 듣고 그 말씀을 대언하며 살아가는 하나님의 나라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들이 되시기를 간절히 소원하고 축복합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들이 바로 부흥입니다. 
    하나님의 부흥이 당장 눈 앞에 속히 내가 원하는 방향과 뜻대로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해서 실망만 하지 말고 간절히 바라고 원하고 기도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누군가는 그 일들을 미리 준비하고 꿈꿔야 합니다. 
    그것이 그리스도인들에게 주신 하나님의 사명 아니겠습니까 한국에 선교사가 파송돼서 대한민국을 새롭게 완전히 개조하고 일으켰습니다.

    ​역사학자들이 추적해 봤어요. 
    어디서부터 이 한국 선교가 시작됐을까 그랬더니 기원으로 기원으로 기원으로 올라갔는데 한 가지 굉장히 놀라운 점을 발견했습니다. 
    저 캐나다의 들판에 대학생 다섯 명이 들판에 나가 기도하는데 소나기가 쏟아지자 그 비를 피하려고 건초더미 속으로 들어가서 하나님이 주시는 감동을 가지고 아시아에 한국, 조선이라는 나라를 위해서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거기서 했던 기도가 한 대학생 집에, 한 학생의 집의 부엌에서도 이어졌습니다. 
    그 기도가 그 마을에 이어졌습니다. 
    그 기도가 그 마을의 교회로 이어졌습니다. 
    그리고 그 교회가 또 그 교회가 속한 교단으로 이어졌습니다.
    5명의 캐나다 청년의 꿈들이 그 기도가 이루어지듯이 누군가는 하나님의 나라의 부흥과 하나님 일하심의 역사를 기도하고 준비해야 할 것입니다. 
    그 사명이 오늘 우리에게 있다면 우리는 오늘에 실망하지 아니하고 다시 일어나 하나님의 은혜를 붙들 수 있는 힘을 갖게 될 줄로 믿습니다.
    그렇게 하나님의 말씀이 임하고 주의 영이 우리에게 임하실 때에 우리는 하나님의 군대로 일어나 나아갈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이게 도대체 방법이 없다. 이제 끝났다. 참담한 것들이 있을 줄 압니다. 
    사업 때문에 가정의 문제로 건강의 문제로 물질의 문제로 관계의 문제로 가정의 문제로 자녀들 때문에 곳곳에 혹은 도대체 뭐가 뭔지 뭐가 문제인지도 모르겠는데 내 마음이 힘들어 죽겠기에 무너져버린 마음들...

    ​그저 오늘 우리의 인생의 곳곳에 마른 뼈와 같은 골짜기를 오늘 우리가 지나가고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내 마음이 지옥이고 내 삶이 아골 골짜기라고 호소하며 안타까워하는 이들도 많이 있는 줄로 압니다.

    ​그러나 사랑하는 여러분 믿음을 가지시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너무 자주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망각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을 살리기 위해서 홍해 바다를 열어 길을 내신 우리 하나님은 우리의 웨이 메이커가 되셔서 만나와 메추라기로 불기둥과 구름 기둥으로 저들을 보호하신 분은 우리의 영원한 공급자가 되어 주시는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믿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그 믿음으로 다시 일어나서 하나님의 은혜 그리스도를 붙잡을 수 있는 하나님의 은총이 여러분에게 임하게 되기를 간절히 소원하고 기도합니다.

    ​우리에게도 이렇게 물어보시지 않을까요?
    이 뼈들이 능히 살 수 있겠냐? 세상의 반응은 여전히 차갑고 부정적이고 냉소적일 것입니다. 주께서 하시나이다. 주님 하실 수 있다고 대답할 때 사람들은 조롱과 야유를 퍼부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때는 예수님을 생각하십시오. 예수 부활의 기적이 바로 사람들의 야유와 조롱 속에 일어났다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그리고 예수 부활은 이 세상에 부정적인 것과 조롱하는 것과 차가운 것과 냉소적인 것을 다 잠재우신 하나님의 위대한 승리라는 사실을 기억하기를 바랍니다.

    ​우리에게 이렇게 물어보시지 않을까요?
    이 민족이 다시 살 수 있겠니 다시 하나가 될 수 있겠니 우리에게 이렇게 물어보시지 않을까요?
    이 나라가 선진 복지국가가 될 수 있겠니? 우리에게 이렇게 물어보시지 않을까요?
    우리 사회가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어 갈 수 있겠느냐 교회가 그 역할들을 등이 감당할 수 있겠느냐 우리 가정이, 우리 자녀들이 하나님의 군대로 다시 일어설 수 있겠느냐 라고 물어보신다면 우리는 무엇이라고 대답할 수 있겠습니까?

    주께서 아시나이다. 주님만 하실 수 있습니다.

    마가복음 9장 23절 예수께서 이르시되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히 하지 못할 일이 없느니라 하시니라고 이미 선포하신 예수님께서 우리와 함께하실 때
    다시 일어나 그리스도를 붙잡을 수 있는 힘을 가지고 담대히 나아가는 하나님 나라의 거룩하고 복된 자녀들 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하나님의 비전과 소망을 허락하여 주셔서 그 꿈을 가지고 기도하며 나아갈 수 있게 하여 주옵소서. 
    다시 일어나 그리스도를 붙잡을 수 있는 힘을 얻는 주의 백성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이 땅에 우리의 삶과 가정에 우리가 행하는 모든 것에 부활의 역사가 나타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기도하옵나이다.

    9월 13일(토) 에스겔 33-36장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새 영과 새 마음(36:26-27)

  • 33장 : 파수꾼의 책임
  • 34장 : 선한 목자와 악한 목자
  • 35장 : 에돔의 심판
  • 36장 : 새 마음과 새 영

  • 또 새 을 너희 속에 두고 새 마음을 너희에게 주되 너희 육신에서 굳은 마음을 제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줄 것이며
  • 또 내 신을 너희 속에 두어 너희로 내 율례를 행하게 하리니 너희가 내 규례를 지켜 행할찌라.
  • I will give you a new heart and put a new spirit in you; I will remove from you your heart of stone and give you a heart of flesh.
  • And I will put my Spirit in you and move you to follow my decrees and be careful to keep my laws.
  • 새 영과 새 마음(에스겔 36:22-31)

    해마다 부활절 휴가철이 되면 미국의 남부 Florida 해변에는 수천 명의 대학생들이 몰려들어 청춘을 즐긴다. 한 번은 그 중 여섯 명의 대학생이 동네를 너무 소란하게 했다는 죄로 경찰에 연행되었다. 다음 날 즉결재판에 넘긴다는 말을 듣고 학생들은 매우 겁이 났다. 그러자 그 중 한 학생이 경찰관에게 전화를 한 통 쓰고 싶다고 했다. 그가 전화를 하고 돌아오자 친구들은 조금 용기를 얻었다. 그가 자기 부모나 변호사에게 도움을 요청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30분 후에 이 학생 앞으로 피자 두 판이 배달되었다. 그는 이 중요하고 긴장된 순간에 어떻게 배고픈 것을 먼저 해결할 생각을 했을까? 그의 마음이 잘못 되었기 때문이다. 그는 잘못된 마음을 가진 미숙한 인격의 소유자였다. 잠언 23:7 “무릇 그 마음의 생각이 어떠하면 그의 사람됨도 그러하니.” 

    사람의 모든 말과 행동은 그 사람의 마음에서 나온다. 그가 어떤 마음을 가지고 있고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가에 따라서 그의 입에서 나오는 말과 그의 행동이 결정되는 것이다. 아무 생각 없이 한 행동이나 전혀 내 마음이 아닌 행동이라는 것은 있을 수 없다. 무의식중에라도 그런 생각이 들어 있었다. 그래서 예수님은 “입으로 들어가는 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 아니라 입에서 나오는 것이 사람을 더럽게 한다”고 하셨다. 사람의 마음에 품은 더럽고 악한 생각들이 그 사람의 입술을 통해서 더럽고 악한 말로 나온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인생이 달라지고 믿음이 달라지기 위해서는 우리의 마음이 먼저 달라져야 한다. 병을 제대로 고치기 위해서는 병의 증상만 고칠 것이 아니라 병의 원인을 바로잡아야 하듯이, 우리의 행동이 달라지고 말이 달라지고 삶이 달라지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우리의 마음이 먼저 달라져야 한다.

    에스겔서는 하나님께 범죄해서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에스겔 선지자를 통해서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이다. 에스겔 선지자는 제사자의 아들로 성전에서 봉사하다가 바벨론으로 끌려갔고 거기서 선지자로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는다. 하나님께서는 에스겔 선지자를 통해서 하나님을 배반한 유다나라에 임할 심판과 주위 여러 나라들에게 임할 심판에 대해서 예언한다. 그러나 후반부에서는 이스라엘의 회복과 구원에 대해서 말씀하시고 회복될 이스라엘 나라와 예루살렘 성전에 대해서 환상을 보여주시고 말씀하신다.

    오늘 본문 바로 다음인 37장에는 마른 뼈가 큰 군대가 되는 환상이 기록되어 있다. 즉 하나님께서 마른 뼈 같이 타락하고 힘을 잃고 죽은 것 같게 된 이스라엘이라도 다시 살리셔서 큰 군대를 만드실 것을 보여주신 것이다. 그리고 에스겔에게 이 놀라운 환상을 보여주시기 전에 36장의 말씀을 먼저 해주셨다. 

    36장의 주제는 이스라엘의 회복이다. 35장에서 이스라엘을 괴롭히던 에돔이 하나님의 심판을 받는 것과는 대조적으로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은혜로 회복될 것을 말씀한다. 29절 “내가 너희를 모든 더러운데서 구원하고 곡식으로 풍성하게 하여 기근이 너희에게 임하지 아니하게 할 것이며 30 또 나무의 실과와 밭의 소산을 풍성케 하여 너희로 다시는 기근의 욕을 열국에게 받지 않게 하리니.” 34절 “전에는 지나가는 자의 눈에 황무하게 보이던 그 황무한 땅이 장차 기경이 될지라 35 사람이 이르기를 이 땅이 황무하더니 이제는 에덴동산 같이 되었고 황량하고 적막하고 무너진 성읍들에 성벽과 거민이 있다 하리니.”

    그런데 이 회복의 약속의 말씀 앞에 오늘 본문의 말씀이 나온다. 26절 “또 새 영을 너희 속에 두고 새 마음을 너희에게 주되 너희 육신에서 굳은 마음을 제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줄 것이며.” 하나님의 은혜와 복의 회복보다 먼저 와야 할 것은 새 영과 새 마음을 가지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바벨론에서 돌아오게 하시고 예루살렘 성전을 다시 세우게 하시고 풍성한 복과 은혜를 주시기 전에 그들에게 새 영을 주고 새 마음을 주시겠다고 하셨다. 그들에게서 굳은 마음을 없애고 부드러운 마음을 주시겠다고 했다. 왜인가? 그래야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며 살 수 있기 때문이다. 27절 “또 내 신을 너희 속에 두어 너희로 내 율례를 행하게 하리니 너희가 내 규례를 지켜 행할지라.” 

    마음이 달라지지 않고는 하나님의 명령을 지킬 수 없다는 것이다. 마음이 새로워져서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지 않으면 잃어버린 하나님의 은총이 회복될 수 없다는 것이다. 포로생활에서 고국으로 돌아오고 잃어버린 나라를 다시 찾고 무너진 성전을 다시 세우기 전에 필요한 것은 새 마음을 가지는 것이다.

    에스겔 18:31 “너희는 범한 모든 죄악을 버리고 마음과 영을 새롭게 할지어다 이스라엘 족속아 너희가 어찌하여 죽고자 하느냐 32 나 주 여호와가 말하노라 죽는 자의 죽는 것은 내가 기뻐하지 아니하노니 너희는 스스로 돌이키고 살지니라.” 마음을 새롭게 해야 살 수 있다는 것이다. 마음을 새롭게 하지 않으면 하나님의 진노를 받아 죽게 된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그렇게 죽는 것을 기뻐하지 않으신다고 하시면서 마음을 새롭게 하라고 강력하게 권고하셨다. 마음을 새롭게 하지 않는 그들에게 “너희가 어찌하여 죽고자 하느냐“고 하셨다. 마음을 새롭게 하지 않은 것은 스스로 죽고자 하는 것이다. 로마서 12:2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마음을 새롭게 해야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고 올바르게 살 수 있다.

    그러면 새 마음이란 어떤 마음인가? 새 마음이란 부드러운 마음이다. 26절 “또 새 영을 너희 속에 두고 새 마음을 너희에게 주되 너희 육신에서 굳은 마음을 제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줄 것이며.” 여기서 ‘굳은 마음’이란 ‘돌 같은 마음’이란 뜻이다. 그리고 ‘부드러운 마음’이란 ‘고기 같은 마음’이다. 즉 얼린 고기가 아닌 생고기처럼, 또는 사람의 살갗이나 몸의 살처럼 부드러운 것을 가리킨다. 이런 마음을 가져야만 하나님의 말씀을 잘 지킬 수 있다는 것이다. 그렇게 부드러운 마음을 가져야 하나님의 은총이 다시 회복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면 돌 같이 굳은 마음과 고기처럼 부드러운 마음은 어떤 특징과 차이가 있는가? 첫째로, 마음이 굳었다는 것은 아무 감각이 없다는 것이다. 교만과 고집으로 돌처럼 딱딱하게 굳어 있는 마음이다. 그래서 어떤 자극이나 도전에 대해서 전혀 감각이나 느낌이 없다. 반대로 부드러운 마음이란 감각이 예민한 마음이다. 어떤 도전이나 자극에 대해서 분명한 깨달음이 있고 느낌이 있다.

    둘째로, 굳은 마음은 아무런 반응이 없는 마음이다. 감각이 없기 때문에 어떤 자극이나 도전에 대해서 반응하지 않는다. 아무리 건드려도 그대로 가만히 있고 움직이지 않는다. 그러나 부드러운 마음은 감각이 예민하고 느낌이 있고 깨달음이 있기 때문에 외부의 자극이나 도전에 대해서 즉시 반응한다.

    셋째로, 굳은 마음은 꽉 닫혀 있는 마음이다. 이기적이고 독선적이고 자기중심적이어서 다른 것들을 받아들이지 않고 새로운 것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다른 사람을 받아들이지 않고 다른 사람의 생각도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러나 부드러운 마음은 활짝 열려 있는 마음이다. 마음이 활짝 열려 있어서 모든 것을 이해하고 또 모든 것을 다 받아들일 수 있다. 다른 사람을 마음을 열고 받아들여서 교제하고 다른 사람의 생각이 나와 다르더라도 얼마든지 받아들인다. 

    그래서 굳은 마음을 가진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지 않고 자신의 죄와 허물과 잘못을 깨닫지도 못하고 회개하라는 경고에 반응하지도 않고 하나님의 말씀을 잘 지키지도 않는다. 그러나 부드러운 마음을 가진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을 잘 받아들이고 자신의 죄와 허물을 잘 깨닫고 회개하라는 경고에 즉시 반응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잘 지킨다. 얼마나 큰 차이를 보이는가?

    이 두 종류의 각기 다른 마음을 가진 사람 중에서 누가 하나님이 주시는 복과 은혜를 받으며 살 수 있을까? 어떤 마음을 가진 사람에게 하나님께서 잃어버린 은총과 복을 회복시켜 주실까? 굳은 마음을 가진 사람인가 부드러운 마음을 가진 사람인가? 여러분은 마음의 상태는 지금 어떠한가? 여러분의 마음은 지금 돌처럼 굳어 있는 마음인가, 살처럼 부드러운 마음인가? 

    우리가 잃어버린 행복을 찾기 위해서는 새 마음을 가져야 한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은혜와 복이 회복되기 위해서는 부드러운 마음을 가져야 한다. 하나님은 반드시 우리에게 새 영과 새 마음을 주신 후에 복과 은혜를 회복시켜 주신다. 우리의 마음과 영이 새로워지지 않고는 삶과 믿음이 새로워질 수 없다.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우리 마음을 새롭게 할 수 있을까? 어떻게 우리가 굳은 마음을 버리고 부드러운 새 마음을 가질 수 있을까? 첫째, 깨끗케 하심을 받아야 한다. 24절 “내가 너희를 열국 중에서 취하여 내고 열국 중에서 모아 데리고 고토에 들어가서 25 맑은 물로 너희에게 뿌려서 너희로 정결케 하되 곧 너희 모든 더러운 것에서와 모든 우상을 섬김에서 너희를 정결케 할 것이며.”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을 옛 조국으로 다시 데리고 들어가셔서 제일 먼저 그들을 깨끗케 하시겠다고 하셨다. 그렇게 하신 후에 그들에게 새 영과 새 마음을 주시고 그런 후에 그들의 삶을 풍성케 해주시겠다고 하셨다.

    여기서 맑은 물로 뿌려서 정결케 하는 것은 구약에서 부정한 것을 깨끗케 하는 방법이었다. 제사장이 하나님의 성소에 들어갈 때에는 물로 손과 발을 씻어야 했고(출애굽기 30:20), 부정한 것에 닿은 그릇들을 정결케 하기 위해서는 깨끗한 물에 담가서 씻어야 했고(레위기 11:32), 죽은 시체를 만진 사람에게 물을 뿌리고 옷을 빨고 물로 몸을 씻어야 정결케 된다고 했다(민수기 19:19,20).

    이처럼 우리가 하나님께 나아가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서는 먼저 우리 자신을 깨끗하게 씻어야 한다. 하나님의 은총과 축복이 회복되고 잃어버린 것을 다시 찾을 수 있기 위해서는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정결케 해야 한다. 여호수아 3:5 “여호수아가 또 백성에게 이르되 너희는 스스로 성결케 하라 여호와께서 내일 너희 가운데 기사를 행하시리라.” 우리 자신을 깨끗하고 거룩하게 해야만 거룩하신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고 능력을 베푸실 수 있는 것이다.

    물로 씻어 깨끗케 하는 것은 무엇을 어떻게 하는 것인가? 먼저 나의 죄를 하나님께 고백하고 회개하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의 십자가의 보혈로 내 죄를 씻음 받고 용서를 받아야 한다. 나에게 회개하지 않은 죄가 있으면 내 마음도 새로워질 수 없고 하나님의 은총과 복을 받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내 마음 속에 있는 잘못된 생각과 더러운 생각과 옳지 않은 감정들을 다 내버려야 한다. 디모데후서 2:22 “또한 네가 청년의 정욕을 피하고 주를 깨끗한 마음으로 부르는 자들과 함께 의와 믿음과 사랑과 화평을 좇으라.” 내 마음에 가득 찬 욕심과 정욕을 버려야 한다. 물질에 대한 욕심, 명예에 대한 욕심, 육체의 쾌락을 좇아가는 정욕을 버리라. 다른 사람에 대한 미움과 분노, 원망과 불평, 시기와 질투, 편견과 선입견을 버리고 마음을 깨끗하게 하라. 

    그리고 잘못된 삶의 습관을 과감하게 끊고 버리고 돌아서야 한다. 로마서 12:2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하나님께 나아가 나 자신을 하나님께 드리고 하나님께 맡기라. 하나님께서 나에게 정한 물을 뿌리셔서 나를 깨끗케 해주시기를 구하라. 예수님의 십자가의 보혈로 몸과 마음과 육체와 삶을 정결하게 씻음 받고 새 마음을 받으라.

    둘째, 하나님께서 새 영과 새 마음을 주시기를 구하라. 새 영과 새 마음은 하나님이 주신다고 하셨다. 하나님께서 나에게서 돌 같이 굳은 마음을 제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주신다고 했다. 사람이 스스로 굳은 마음을 버리고 부드러운 마음을 가질 수 있다면 무슨 문제가 되겠는가? 사람이 스스로 악한 마음을 버리고 선한 마음을 가질 수 있다면 사람이 왜 스스로 변화되지 못하겠는가?

    그러나 오늘 말씀은 분명히 하나님께서 새 영과 새 마음을 주신다고 하셨다. 우리 스스로는 굳은 마음을 버리고 부드러운 새 마음을 가질 수 없다는 것을 아시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나에게 새 마음을 주시기를 구해야 한다. 아무리 하나님이 약속하셨어도 내가 하나님께 구하지 않으면 주시지 않는다. 37절 “나 주 여호와가 말하노라 그래도 이스라엘 족속이 이와 같이 자기들에게 이루어 주기를 내게 구하여야 할지라.” 우리에게 약속을 주신 하나님은 우리가 하나님께 기도하고 구하기를 기다리고 계신다. 하나님의 약속을 붙들고 그 약속의 말씀대로 이루어 달라고 구하기를 기다리고 계신다. 이사야 30:18 “그러나 여호와께서 기다리시나니 이는 너희에게 은혜를 베풀려 하심이요.” 

    우리를 기다리시고 우리의 기도를 기다리시는 하나님께 나아가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새 영과 새 마음을 주시고 부드러운 마음을 주시기를 간구하라. 하나님께서 나의 잃어버린 것들을 회복시켜 주시고 쫓겨난 곳으로 다시 돌아오게 하시고 삶과 믿음을 풍성하게 해주시기를 하나님께 간절히 구하라. 그러면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대로 나의 마음을 부드럽게 하시고 새롭게 해주실 것이다. 

    셋째, 새 마음보다 먼저 새 영을 주시기를 구하라. 새 마음보다 새 영을 먼저 구하는 것이 순서이다. 26절 “또 새 영을 너희 속에 두고 새 마음을 너희에게 주되.“ 우리가 새 영을 받지 않으면 새 마음을 가져보아야 또 다시 더러워지고 굳어지게 될 것이다. 내 영이 먼저 변화되어야 마음도 삶도 달라진다. 

    새 영을 받는다는 것은 성령 충만을 받는 것을 말한다. “새 영을 너희 속에 두고.” 성령 충만을 받아야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갈 수 있다. 27절 “또 내 신을 너희 속에 두어 너희로 내 율례를 행하게 하리니 너희가 내 규례를 지켜 행할지라.” 새번역 “27 너희 속에 내 영을 두어, 너희가 나의 모든 율례대로 행동하게 하겠다. 그러면 너희가 내 모든 규례를 지키고 실천할 것이다.”

    그리고 성령께서 내 안에 계셔야 내 마음이 새롭게 될 수 있다. 성령께서 나의 굳은 마음을 녹여주셔야 나의 마음이 부드럽게 될 수 있다. 성령께서 굳은 나의 마음 밭을 부숴주시고 곱게 갈아주셔야 내 마음 밭이 부드러운 옥토가 될 수 있다. 그럴 때에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살고 바른 길을 갈 수 있다.

    성령 충만이란 하나님의 영으로 내 마음이 충만한 상태를 말한다. 그래서 하나님의 영이 내 마음과 생각을 주장하시고 하나님의 영이 나의 말과 행동을 주장하시고 하나님의 성령이 나의 가는 길을 인도하시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의 뜻과 하나님의 말씀에 기꺼이 순종하며 따라가는 믿음의 상태이다. 

    그러므로 먼저 새 영을 받아야 한다. 하나님께서 내 속에 하나님의 새 영을 주셔야 한다. 성령 충만을 받기를 구하고 성령 충만한 삶을 살기를 힘쓰라. 그래서 굳은 마음이 부드럽게 바뀌고 새 마음을 가진 사람이 되라. 그래서 이제는 옛 생활로 돌아가지 않고 오직 믿음 안에서 주를 위해 사는 삶이 되라.

    넷째, 하나님께 나를 맡기라. 오늘 말씀의 특징은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무엇을 하라고 요구하시는 것이 하나도 없다는 것이다. 모든 것을 하나님께서 해주시겠다고 했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쫓겨났던 고국으로 데리고 돌아오시고, 하나님께서 맑은 물로 그들을 깨끗하게 씻기시고,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새 영과 새 마음을 주시고, 하나님께서 그들에게서 굳은 마음을 제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주신다고 하셨다. 왜 하나님께서 이렇게 하시는가? 그들 스스로 죄를 깨닫고 회개해야 하지 않는가? 그것은 그들이 마음이 굳어져서 자신의 죄를 깨닫지도 못하고 회개할 줄도 모르기 때문이다. 스스로 자신을 새롭게 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그들을 끌어다가 깨끗케 하시겠다는 것이다. 

    그러면 왜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새 마음을 주시고 은총과 복을 회복시켜 주시는가? 그것은 그들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 때문이라고 하셨다. 22절 “이스라엘 족속아 내가 이렇게 행함은 너희를 위함이 아니요 너희가 들어간 그 열국에서 더럽힌 나의 거룩한 이름을 위함이라 23 열국 가운데서 더럽힘을 받은 이름 곧 너희가 그들 중에서 더럽힌 나의 큰 이름을 내가 거룩하게 할찌라 내가 그들의 목전에서 너희로 인하여 나의 거룩함을 나타내리니 열국 사람이 나를 여호와인줄 알리라 나 주 여호와의 말이니라.” 하나님의 택한 백성인 이스라엘이 하나님께 범죄하여 하나님의 진노를 받아 망하게 되자 다른 민족들이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버리셨다고 비웃었다. 그래서 이스라엘 주위의 모든 나라들에게서 하나님의 이름이 더럽혀졌다. 그래서 하나님의 이름의 영예를 회복하시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직접 포로 된 그들을 고국으로 다시 돌아오게 하시고 새 영과 새 마음을 주시고 복과 은혜를 회복시켜 주시겠다는 것이다. 

    스스로 돌이킬 수 없고 스스로 새롭게 할 수 없는 연약하고 무능한 우리를 친히 새롭게 하시고 회복시켜 주시는 이 놀라우신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에 진심으로 감사하라. 나는 그럴 자격이 없지만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우리를 새롭게 하시고 은총을 회복시켜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라. 그리고 그 하나님께 나를 맡겨드리라. 하나님께서 나를 마음대로 만드시고 고치시고 새롭게 하시도록 하나님께 나를 온전히 맡겨드리라. 그러면 나의 마음을 새롭게 해주신다.

    지난 주간 모 신문에 두 가지에 전혀 다른 기사가 같은 면에 이어서 나왔다. 하나는 어떤 사람이 전국의 고위공무원들에게 전화를 걸어서 1억 원이 넘는 돈을 뜯어냈다가 잡혔다는 내용이다. 이 사람은 작년 1월부터 모 여관에 자리를 잡고 전국의 시장, 군수, 도지사를 포함한 전국의 단체장과 고위공무원 600여 명에게 수 천 번의 전화를 걸어서 “당신이 여자와 함께 여관에 들어가는 모습을 몰래 찍었다”고 하면서 돈을 보내지 않으면 이 사실을 폭로하겠다고 협박했다고 한다. 그랬더니 그중에 53명이 즉시 100-500만원을 보내왔고 그렇게 무려 1억 3000만원을 뜯어냈다고 한다. 왜 이런 일들이 일어나는가? 그들의 마음이 잘못 되었기 때문이다. 마음이 더러워졌기 때문이다. 오늘 우리 사회에서 일어나는 크고 작은 모든 문제는 다 우리의 마음에서 비롯된 것이다.

    또 하나의 기사는 경찰서에서 거짓진술을 한 아들을 다시 경찰서로 돌려보낸 한 어머니의 이야기이다. 광주에 사는 한 고등학생이 친구와 싸운 일 때문에 경찰서에 가서 조사를 받았다. 그는 친구를 때린 적이 없다고 말하고 풀려나서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자기 엄마에게 사실은 경찰관에서 거짓말을 했다고 하면서 친구를 폭행한 사실을 털어놓았다. 집에서 아들에게 자초지종을 들은 어머니는 이틀 뒤에 아들을 경찰서로 다시 보냈다. 그리고 아들에게 엄마의 심정을 담은 편지를 쥐어 보냈다. 이 편지에서 이 어머니는 “내 아이는 절대 그럴 리가 없다고 생각한 어리석은 부모가 되어서 부끄럽다”고 하면서 “털끝만큼도 거짓이 없이 있는 그대로 말하도록 시켰으니 아들이 절름발이 어른으로 성장하지 않을 수 있는 소중한 기회가 되도록 도와달라”고 썼다. 담당 경찰관은 “부모의 심정으로 자기 아들의 잘못을 감싸들려고 할 텐데, 거짓말을 한 아들을 꾸짖어서 경찰서로 돌려보낸 어머니의 결심이야말로 살아 있는 교육이 아니겠느냐”고 말했다. 우리가 이런 마음을 품고 살아야 하지 않겠는가? 

    삶이 회복되기를 원하는가? 마음과 영을 새롭게 하라. 우리의 마음이 새로워지지 않고는 삶이 회복될 수 없고 달라질 수 없다. 생각이 바뀌면 삶이 바뀐다. 마음이 새로워지면 삶이 새로워진다. 하나님 앞에서 굳은 마음을 버리라. 닫힌 마음을 열라. 하나님이 주시는 새 영과 새 마음을 받으라. 하나님께서 나를 정결케 하시고 내 마음을 새롭게 해주시기를 간구하라. 새 마음을 얻기 위해서 성령 충만을 구하라. 하나님께 나 자신을 맡기라. 그래서 성령 안에서 우리의 마음이 새로워지고 부드러워져서 잃어버린 복과 은혜가 회복되기 바란다.


  • ◆ 하나님의 이름을 위하여

    "그러므로 너는 이스라엘 족속에게 이르기를 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이스라엘 족속아 내가 이렇게 행함은 너희를 위함이 아니요. 너희가 들어간 그 여러 나라에서 더럽힌 나의 거룩한 이름을 위함이라"(22)

    이스라엘 족속이 다시 고국으로 돌아올 수 있음은 그들이 자격을 갖추었기 때문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자기 이름을 위하여 하신 일이다.

    그러나 은총을 받는 백성의 입장에서는 하나님의 이름을 위하여서 하시는 이 일이 얼마나 감사한지 모른다. 자기 능력으로는 영원히 기대할 수 없는 것이 하나님의 이름을 위하여 이루어지고 있다. 이것이 하나님이 자기 이름을 두신 백성의 복이다.

    다윗은 시편에서 이렇게 고백했다.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도다"(시 23:3)

    우리가 예수의 증인으로서 삶을 살 때, 우리에게는 예수의 이름이 따른다. 우리는 예수의 이름으로 기도하고, 예수의 이름으로 이것저것을 행한다. 그럴 때 주님께서는 자기 이름을 위해 우리를 더 높은 곳으로 이끄신다.

    이제 우리는 주님의 명예에 신경을 써야 한다.

    차라리 내가 손해를 보고, 차라리 내가 죽을지언정 주님의 이름이 모욕을 당하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한다. 그것이 성도의 마땅한 바다.

    ◆ 새 언약

    25절부터 28절까지는 새 언약이다.

    그리스도의 법이 어떤 것인지를 시사해주는 말씀이며 성도에게 주시는 약속이다. 모든 성도는 이 말씀을 주의 깊게 살펴야 한다.

    ① "맑은 물을 너희에게 뿌려서 너희로 정결하게 하되 곧 너희 모든 더러운 것에서와 모든 우상 숭배에서 너희를 정결하게 할 것이며"(25)

    그리스도께서 그의 피로써 우리의 죄를 씻으시고, 정결케 하셨다. 사도들은 이 말씀이 그리스도를 통해서 성취되었음을 명확히 했다(딛 2:14, 요일 1:7). 우리는 완전한 죄 사함을 얻었다. 그리고 믿음 안에서 계속 용서되고 있다.

    ② "또 새 영을 너희 속에 두고 새 마음을 너희에게 주되 너희 육신에서 굳은 마음을 제거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줄 것이며"(26)

    새 영과 새 마음은 변화된 성도를 가리키시는 말씀이다. 거듭난 성도의 변화는 놀랍다. 한 사람이 거듭나는 순간 그는 세계관, 가치관만이 바뀌는 것이 아니라 인격도 변한다. 자기 고집을 내려놓고 겸손해진다. 이런 변화가 어디로부터 오는가? 이것은 자기 의지나 결심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성령의 역사다.

    ③ "또 내 영을 너희 속에 두어 너희로 내 율례를 행하게 하리니 너희가 내 규례를 지켜 행할지라"(28)

    하나님께서는 성도들에게 성령을 부어주신다.

    성령께서 성도들에게 역사하시는 방법은 매우 독특하다. 상당 부분이 갈망에서 비롯된다(갈 5:16-18). 말씀이 꿀처럼 달고, 예배를 드리고자 하는 갈망이 생기며, 형제들을 사랑하게 된다. 구주 예수 의지함이 심히 기쁜 일이라는 찬송(새 542)이 이해된다.

    그것이 갈망에서 비롯되기 때문에 의지가 약한 자도 놀라운 수준으로 거룩한 삶을 살 수 있게 된다. 사람들은 자기가 좋아하는 일을 할 때는 제법 끈기와 인내를 가진다. 그런데 예수 믿고 그를 따르는 일이 즐거운 일이 된다!

    율법은 오로지 인간의 의지와 결단만을 요구하지만, 그리스도의 법은 성령으로 말미암아 새로운 갈망으로 우리를 이끄신다. 이것은 놀라운 세계다.

    이렇게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는 자는 더는 자기 의를 자랑하거나 자기 의에 빠지지 않는다(갈 5:18).

    그러나 우리는 종종 이러한 성령의 갈망이 사라진다.

    원인은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가장 큰 것은 믿음으로 행하지 않고 내 고집, 내 욕심으로 행하는 것이 많아지면서이다. 성령의 인도하심이 아닌 내 의지로 행한 것은 결국 자기 의가 되고 내 자랑이 된다. 아무리 내 딴에는 귀한 사역을 한다고 하지만 사실은 내 자랑, 내 야망에 불과하다.

    정결함, 새 영, 새 마음, 하나님의 영…. 이 모든 것을 하나님께서 약속하셨다. 그리고 이 약속이 바로 우리에게 성취되었다. 할렐루야! 우리는 이러한 새 언약 백성이다.

    빈들에 마른 풀같이 시들은 나의 영혼, 주님의 허락한 성령 내게도 주옵소서. 가물어 메마른 땅에 단비를 내리시듯 성령의 단비를 부어 새 생명 주옵소서.


    에스겔 36:26에 대한 질문


    1. 에스겔 36:26에서 말하는 '새 마음'과 '새 영'은 무엇인가요?


    새 마음은 하나님을 향한 순종과 사랑의 마음
    새 영은 성령님의 역사하심을 통해 변화된 영혼을 의미


    2. 우리는 왜 굳은 마음을 가지게 되나요?

    죄와 세상의 유혹, 상처와 아픔 등이 우리를 강팍하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3. 하나님의 새 영을 받으면 무엇이 달라지나요?

    죄를 미워하고, 하나님을 더욱 사랑하게 되며, 삶의 목적과 방향이 바뀝니다.


    4. 어떻게 하면 새 마음과 새 영을 받을 수 있을까요?


    하나님께 마음을 열고, 회개와 순종의 태도로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구해야 합니다.



  • 하나님이 주시는 새 마음과 새 영


    1. 굳은 마음을 변화시키신다(에스겔 36:26)

     "또 새 영을 너희 속에 두고 새 마음을 너희에게 주되 너희 육신에서 굳은 마음을 제거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줄 것이며."

    굳은 마음이란, 하나님의 뜻을 거부하고, 자기 생각대로 살아가려는 강팍한 마음을 의미합니다.
    반면, 부드러운 마음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순종하는 마음입니다.

    "그러므로 성령이 이르신 바와 같이 오늘 너희가 그의 음성을 듣거든
    광야에서 시험하던 날에 거역하던 것 같이 너희 마음을 완고하게 하지 말라."
    (히브리서 3:7-8)

    우리의 완고한 마음을 내려놓고, 하나님의 뜻에 귀 기울여야 합니다. 

    2. 새 영을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에스겔 36:26)

    하나님은 단순히 우리의 마음을 바꾸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 안에 새로운 영을 주십니다.
    이는 성령님께서 우리 안에 거하시며, 하나님의 뜻을 따를 수 있도록 도와주신다는 의미입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요한복음 3:5)

    새 영을 받으면, 우리는 이전과 다른 삶을 살게 됩니다.

    • 죄의 길에서 돌이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을 살게 됩니다.
    • 이전에는 하나님을 멀리했다면, 이제는 하나님과 더욱 친밀해집니다.
    • 삶의 목적이 바뀌고, 하나님을 향한 사랑과 순종이 깊어집니다.
    3.  어떻게 새 마음과 새 영을 받을 수 있을까?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새 마음과 새 영을 주시기를 원하시지만, 우리가 먼저 하나님께 나아가야 합니다.

    하나님께 마음을 열어야 합니다(예레미야 29:13).
    '너희가 온 마음으로 나를 구하면 나를 찾을 것이요 나를 만나리라."  

    회개하고 하나님의 용서를 구해야 합니다(요한일서 1:9)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그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구해야 합니다.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리니." (요한복음 14:16)

     하나님께 나아가 우리의 마음을 드릴 때, 하나님은 새 마음과 새 영을 허락하십니다.


    3. 결론 : 새 마음을 받은 자로서 살아가자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새 마음과 새 영은 단순한 변화가 아니라, 완전히 새로운 삶으로의 초대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굳은 마음을 변화시키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성령을 부어 주셔서, 새로운 삶을 살도록 인도하십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따르며, 성령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9월 12일(금) 에스겔 29-32장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구름의 날(30:3)

    29~32장 : 애굽의 심판

    이 가까왔도다 여호와의 이 가까왔도다 구름일 것이요 열국의 때이리로다.
    For the day is near, the day of the LORD is near-- a day of clouds, a time of doom for the nations.

    여호와의 날( the day of the LORD)
    구름의 날(a day of clouds)
    열국의 때(a time of doom for the nations) 

    새한글 / 날이 가깝기 때문이다. 여호와의 날이 가깝기 때문이다. 그날은 구름의 날, 민족들이 망할 때가 될 것이다.

    그 날이 가까왔도다 여호와의 날이 가까왔도다 구름의 날일 것이요 列國(렬국)의 때이리로다.


    ㅏ여호와의 날 

    에스겔 7:7 
    이 땅 거민아 정한 재앙이 네게 임하도다 때가 이르렀고 날이 가까왔으니 요란한 날이요 산에서 즐거이 부르는 날이 아니로다

    에스겔 7:12 
    때가 이르렀고 날이 가까왔으니 사는 자도 기뻐하지 말고 파는 자도 근심하지 말 것은 진노가 그 모든 무리에게 임함이로다

    요엘 1:15 
    오호라 그 날이여 여호와의 날이 가까왔나니 곧 멸망같이 전능자에게로서 이르리로다

    요엘 2:1 
    시온에서 나팔을 불며 나의 성산에서 호각을 불어 이 땅 거민으로 다 떨게 할찌니 이는 여호와의 날이 이르게 됨이니라 이제 임박하였으나

    스바냐 1:7 
    주 여호와 앞에서 잠잠할지어다 이는 여호와의 날이 가까왔으므로 여호와가 희생을 준비하고 그 청할 자를 구별하였음이니라

    ㅑ 구름의 날 

    에스겔 34:12 
    목자가 양 가운데 있는 날에 양이 흩어졌으면 그 떼를 찾는 것 같이 내가 내 양을 찾아서 흐리고 캄캄한 날에 그 흩어진 모든 곳에서 그것들을 건져낼지라

    5절까지 계속해서 2절에 나타난 통곡의 이유를 제시하고 있다. 

    가까왔도다 
    -
    이 말의 반복적 사용은 실제적 시기의 급박한 도래를 예고하는 것이거나 아니면 단지 심판의 엄중성과 확실성을 강조하기 위한 상징적 표현으로 여겨진다. 

    여호와의 날 
    - 전제된 심판 선언에 이어 구체적인 하나님의 공의의 심판이 시행되는 날, 곧 형벌과 살육의 날(Kliefoth)을 가리킨다(사 13:6-9; 욜 1:15;옵 1:15; 습 1:7, 14). 구름의 날일 것이요 열국의 때이리로다.
      
    여기서 '구름의 날'과 '열국의 때'는 모두 앞서 언급된 '여호와의 날'을 설명하고 있다. 
    곧 하나님의 심판이 임하는 '여호와의 날'은 어둡고 음울하며 작은 위로의 빛도 비치지 않는 '구름의 날'과 같을 것이며(18절: 34:12; 욜 2:2; 습 1:15), '열국의 때'란 이방인들이 그들의 이단 행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진노의 심판을 받아 그 세력이 궤멸되는 때를 가리킨다(22:3; 사 2:12; 13:22).
     
    한편 혹자는 본 구절을 '구름의 날인 열국의 때'란 하나의 문장으로 번역해 '구름의 날'이 직접적으로 '열국의 때'를 수식하는 것이라는 견해를 피력하기도 하나(De Wette), 이는 성경의 용례상 '구름의 날'이 대부분 직접 '여호와의 날'을 수식하고 있다는 점과 '열국의 때'란 말이 당시의 정황에 비추어 애굽의 동맹국들을 지칭하는 말로 특별하게 언급되었다는 점에서 타당치 않다(Delitzsch). 
    이런 점에서 본 구절은 일차적으로는 애굽과 그 동맹국들에 대한 심판의 도래를 예고하는 것이지만 이차적으로는 사탄의 세력이 궤멸되는 궁극적인 하나님 심판의 날이라는 종말론적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마 25:13; 눅 17:30; 계 9:6).

    이 구절에서 에스겔은 하나님의 심판이 애굽(현재의 이집트)뿐만 아니라 그것과 연합한 여러 민족들에게도 미칠 것임을 경고하고 있습니다. 
    구스(현재의 에티오피아), 붓(북아프리카의 리비아), 룻, 굽 그리고 동맹한 땅의 백성들이 모두 같은 운명을 맞게 될 것이라고 예언합니다. 
    이는 하나님의 공의와 심판이 단지 한 국가에 국한되지 않고, 그와 연합하여 악을 행하거나 불순종하는 자들에게도 임한다는 것을 강조하는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 모든 민족을 공평하게 다스리심과 그분의 주권적인 통치를 상기시키는 중요한 메시지입니다.

    '구름의 날'

    문맥에 따라 두 가지 의미로 해석될 수 있습니다. 

    첫째, 성경에서 재앙이나 심판의 날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입니다(에스겔 30:3). 

    둘째, 9월 5일은 세계 구름 감상의 날(International Cloud Appreciation Day) 
    구름을 관찰하고 감상하는 것을 기념하는 날입니다. 

    1. 성경 속 '구름의 날' 

    에스겔 30장 3절에 "그 날이 가까웠도다. 여호와의 날이 가까웠도다. 
    구름의 날일 것이요 열국의 때이리로다"라는 구절이 나옵니다. 
    여기서 '구름의 날'은 단순히 하늘에 구름이 끼는 날이 아니라, 구름처럼 재앙이나 고통, 심판이 임할 날을 뜻하는 문학적 표현입니다. 
    이는 '여호와의 날', 즉 하나님의 심판이 임하는 날을 설명하는 것입니다. 

    2. 세계 구름 감상의 날 
    • 날짜 : 매년 9월 5일.
    • 목적 : 전 세계 사람들이 하늘의 구름을 관찰하고 감상하며 그 아름다움과 신비로움을 공유하는 날입니다.
  • 에스겔 30장 3절에 언급된 '구름의 날'은 여호와의 날, 즉 하나님의 심판이 임하는 날을 상징하는 표현으로, 빛이 없어 절망적이고 암울한 고통의 날, 황폐함과 패망의 날을 의미합니다. 
    이 날은 애굽과 그 동맹국들이 하나님 앞에서 심판받는 날이며, 바벨론 군대를 통해 애굽이 멸망하고 고통받는 것을 가리킵니다. 
  • '구름의 날'의 의미

    여호와의 날의 심판 : 
    이 날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뜻을 펼치시며 심판을 행하시는 날입니다. 

    에스겔 30장 내용 요약
    • 에스겔은 여호와의 날이 가까왔다고 선포하며, 그날이 '구름의 날'이자 '열국의 때'가 될 것이라고 예언합니다. 

  • 절망과 어둠 :

  • 구름이 빛을 가리듯, 이 날은 희망의 빛이 없는 어둡고 절망적인 날을 상징합니다. 

  • 고통과 황폐 :

  • 애굽의 멸망을 통해 드러나는 극심한 고통과 황폐함을 의미하며, 전무후무한 큰 고통이 있을 것이라고 예고합니다. 

  • 열국의 때 :

    애굽뿐만 아니라 그 동맹국들까지 함께 심판받는 시기를 가리키며, 하나님이 세상 만물을 주관하심을 보여줍니다. 
  • 하나님은 바벨론을 사용하여 애굽을 심판하시며, 애굽의 힘과 교만을 꺾고 그들의 신상들을 부수어 흩으실 것입니다. 
  • 애굽의 심판은 그들의 죄를 드러내고, 애굽과 그 동맹국들이 하나님을 알게 되는 계기가 될 것입니다. 
  • 여호와의 구름의 날

    얼마 전만 해도 구약에 여호와 하나님을 성부 하나님으로 알고 그리고 신약의 주님을 성자 하나님으로 알고 그렇게 규정짓는 신학자가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여호와 하나님이 구름을 타고 오실 것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1. 여호와의 강림

    이사야 13:6 
    너희는 애곡할지어다 여호와의 날이 가까왔으니 전능자에게서 멸망이 임할 것임이로다

    에스겔 30:3 
    그 날이 가까왔도다 여호와의 날이 가까왔도다 구름의 날일 것이요 열국의 때이리로다

    2. 주님의 강림

    마태복음 24:30
    그 때에 인자의 징조가 하늘에서 보이겠고 그 때에 땅의 모든 족속들이 통곡하며 그들이 인자가 구름을 타고 능력과 큰 영광으로 오는 것을 보리라

    요한계시록 1:7 
    볼지어다 구름을 타고 오시리라 각인의 눈이 그를 보겠고 그를 찌른 자들도 볼 터이요 땅에 있는 모든 족속이 그를 인하여 애곡하리니 그러하리라 아멘



    여호와의 날 
    - 전제된 심판 선언에 이어 구체적인 하나님의 공의의 심판이 시행되는 날, 곧 형벌과 살육의 날(Kliefoth)을 가리킨다(사 13:6-9; 욜 1:15;옵 1:15; 습 1:7, 14).

    구름의 날일 것이요 열국의 때이리로다 
    - 여기서 '구름의 날'과 '열국의 때'는 모두 앞서 언급된 '여호와의 날'을 설명하고 있다. 
    곧 하나님의 심판이 임하는 '여호와의 날'은 어둡고 음울하며 작은 위로의 빛도 비치지 않는 '구름의 날'과 같을 것이며(18절: 34:12; 욜 2:2; 습 1:15), 
    '열국의 때'란 이방인들이 그들의 이단 행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진노의 심판을 받아 그 세력이 궤멸되는 때를 가리킨다(22:3; 사 2:12; 13:22). 

    한편 혹자는 본 구절을 '구름의 날인 열국의 때'란 하나의 문장으로 번역해 '구름의 날'이 직접적으로 '열국의 때'를 수식하는 것이라는 견해를 피력하기도 하나(De Wette), 이는 성경의 용례상 '구름의 날'이 대부분 직접 '여호와의 날'을 수식하고 있다는 점과 '열국의 때'란 말이 당시의 정황에 비추어 애굽의 동맹국들을 지칭하는 말로 특별하게 언급되었다는 점에서 타당치 않다(Delitzsch). 
    이런 점에서 본 구절은 일차적으로는 애굽과 그 동맹국들에 대한 심판의 도래를 예고하는 것이지만 이차적으로는 사탄의 세력이 궤멸되는 궁극적인 하나님 심판의 날이라는 종말론적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마 25:13; 눅 17:30; 계 9:6).


    에스겔 30장 깊이 읽기 : 왜 애굽의 모든 자랑은 재앙으로 변해야 했나?

    에스겔서에서 애굽을 향한 심판의 메시지는 30장에 이르러 더욱 격렬하고 광범위하게 확장됩니다. 
    이 장은 임박한 '여호와의 날'을 선포하며, 애굽뿐만 아니라 그를 의지하던 동맹국들(구스, 붓, 룻, 모든 잡족, 굽 등)까지도 함께 멸망의 소용돌이에 휘말릴 것을 예고합니다. 
    바로의 팔이 꺾이고 바벨론 왕의 칼이 애굽 땅을 휩쓰는 이미지는 하나님의 심판이 얼마나 철저하고 무서운지를 생생하게 보여줍니다. 이 장은 인간 제국의 허망함과 하나님의 절대 주권, 그리고 죄악에 대한 공의로운 보응이라는 주제를 강력하게 드러냅니다.

    시대적 배경과 맥락 소개

    에스겔 30장의 예언은 29장과 마찬가지로 기원전 6세기 초, 바벨론 제국이 중근동의 패권을 장악해 가던 시기를 배경으로 합니다. 
    애굽은 여전히 과거의 영광에 기대어 주변 국가들에게 영향력을 행사하려 했고, 특히 바벨론에 대항하는 세력의 중심축 역할을 하기도 했습니다. 
    유다를 비롯한 팔레스타인 지역의 많은 소국들은 강대국 애굽의 힘을 의지하여 바벨론의 위협에서 벗어나고자 했습니다. 
    그러나 에스겔은 이러한 인간적인 동맹과 군사력이 하나님의 심판 앞에서는 아무런 효력이 없음을 분명히 합니다. 
    '여호와의 날'이라는 개념은 구약 성경에서 종종 하나님의 심판과 개입이 극적으로 나타나는 날을 의미하는데, 에스겔 30장은 바로 이 '여호와의 날'이 애굽과 그 동맹국들에게 임박했음을 강조합니다. 
    이는 단순한 전쟁의 패배를 넘어, 하나님의 공의가 실현되고 그분의 주권이 만방에 드러나는 우주적인 사건으로 묘사됩니다. 
    이 예언은 당시 애굽의 힘을 믿고 의지했던 자들에게는 절망적인 소식이었을 것이며, 동시에 하나님의 공의로운 통치를 기다리던 이들에게는 역설적인 위로가 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이 이야기가 중요한 이유는, 인간이 세운 어떤 제국이나 동맹도 영원할 수 없으며, 오직 하나님의 뜻만이 역사의 궁극적인 방향을 결정한다는 진리를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또한, 강한 자를 의지하는 대신 공의를 행하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 참된 지혜임을 깨닫게 합니다.

    핵심 사건 또는 본문 요약 : 애굽과 동맹국에 임할 '여호와의 날'

    에스겔 30장은 '여호와의 날'이 임박했음을 알리는 슬픈 외침으로 시작하여, 애굽과 그 주변 국가들이 겪게 될 파멸의 구체적인 양상을 상세히 묘사합니다. 

    임박한 여호와의 날과 애굽의 슬픔 (1-9절) : 

    하나님께서 에스겔에게 "슬프다 이 날이여!"(겔 30:2)라고 부르짖으며 예언하라고 명령하심. '여호와의 날'이 가까웠으며, 이는 구름의 날이요 여러 나라의 때(심판의 때)가 될 것임.  

    칼이 애굽에 임하고 구스(에티오피아)에 큰 근심이 있을 것임. 애굽에서 죽임 당한 자들이 엎드러지고 그 무리가 끌려가며 그 기초가 헐릴 것임.  

    애굽의 동맹국들, 즉 구스와 붓(리비아)과 룻(리디아)과 모든 잡족(아라비아 용병 등)과 굽(아마도 애굽 내 외국인 용병)과 및 동맹한 땅의 백성들이 다 애굽과 함께 칼에 엎드러질 것임.  

    애굽을 지탱하는 자들이 엎드러지고 그 교만한 권세가 그치며, 믹돌에서부터 수에네까지 백성들이 칼에 죽을 것임.

    그 땅이 황무한 땅 같이 황무하게 되고 그 성읍들이 황폐한 성읍 같이 될 것임. 하나님께서 애굽에 불을 일으키시며 그 모든 돕는 자를 멸하실 때, 그들이 하나님을 주 여호와인 줄 알게 될 것임. 

    그날에 사자들이 하나님 앞에서 배를 타고 나아가 평안한 구스 사람을 놀라게 할 것이며, 애굽의 재앙의 날과 같이 그들에게도 큰 근심이 이를 것임.  

    바벨론 왕에 의한 애굽 파괴 (10-19절) :  

    하나님께서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의 손으로 애굽의 무리(부와 권세)를 끊으실 것임.  

    느부갓네살과 그의 군대, 즉 여러 나라 중 강포한 자들이 와서 그 땅을 멸망시킬 때 칼을 빼어 애굽을 쳐서 죽임 당한 자로 땅에 채울 것임.  

    하나님께서 강들을 말리시고 그 땅을 악인의 손에 파시며, 타국 사람의 손으로 그 땅과 그 가운데 있는 모든 것을 황폐하게 하실 것임. 

    하나님께서 애굽의 우상들을 부수고 신상들을 없애시며, 애굽 땅에서 다시는 통치자가 나지 않게 하시고 그 땅에 두려움이 있게 하실 것임.  

    바드로스를 황폐하게 하며 소안에 불을 놓고 노(테베)를 심판하실 것임. 애굽의 견고한 성읍 신(펠루시움)에 분노를 쏟고 노의 무리를 끊으실 것임.  

    애굽에 불을 일으키시면 신이 심히 근심할 것이며, 노는 찢겨 나누어지고 놉(멤피스)은 날마다 대적이 있을 것임. 아웬(헬리오폴리스)과 비베셋(부바스티스)의 장정들은 칼에 엎드러지고 그 성읍 주민들은 사로잡힐 것임.  

    하나님께서 드합느헤스에서 애굽의 멍에들을 꺾고 그 교만한 권세를 그치게 하실 때, 날이 어둡고 구름이 그 땅을 덮을 것이며 그 딸들은 사로잡힐 것임. 
    이같이 애굽을 심판하시면 그들이 하나님을 주 여호와인 줄 알게 될 것임.  

    바로의 꺾인 팔과 바벨론 왕의 강한 팔(20-26절) : 

    이 부분은 다른 시기(열한째 해 첫째 달 일곱째 날)에 주어진 예언임.  
    하나님께서 애굽 왕 바로의 팔을 이미 꺾으셨는데, 그 팔을 싸매거나 약을 붙여 칼을 잡을 힘이 있게 하지 못하였음 (과거 애굽의 군사적 패배를 암시).  
    하나님께서 애굽 왕 바로의 두 팔, 즉 성한 팔과 이미 꺾인 팔을 다 꺾으시어 칼을 그의 손에서 떨어뜨리실 것임.  
    애굽 사람들을 여러 나라 가운데로 흩으며 여러 민족 가운데로 헤치실 것임.  
    대대로 바벨론 왕의 팔은 견고하게 하시고 하나님의 칼을 그의 손에 넘겨주시어 애굽 땅을 치게 하실 것임.  
    하나님께서 바벨론 왕의 팔을 견고하게 하시고 바로의 팔은 내려뜨리실 때, 그들이 하나님을 주 여호와인 줄 알게 될 것임. 애굽 땅이 바벨론 왕의 손에 넘겨지고 그가 칼로 그 땅을 치면, 애굽 사람들은 흩어질 것임.  

    애굽과 그 동맹국에 대한 심판의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심판의 대상 / 주제 주요 내용 및 결과
    '여호와의 날' 임박     슬픔과 근심의 날, 구름의 날, 여러 나라 심판의 때.
    애굽과 동맹국 (구스, 붓, 룻 등)     함께 칼에 엎드러짐, 황폐화, 돕는 자 멸망.
    바벨론 왕의 역할     하나님의 도구로서 애굽을 파괴하고 황폐하게 함.
    애굽의 주요 도시들 
    (소안, 노, 신, 놉, 아웬, 비베셋, 드합느헤스)
        구체적으로 언급되며 심판과 파괴가 선포됨. 우상과 신상 파괴.
    바로의 권세     이미 꺾였고, 남은 팔마저 꺾여 칼을 잡을 힘을 잃게 됨.
    심판의 목적     애굽과 모든 민족이 하나님을 주 여호와인 줄 알게 함.

    철학적 / 존재론적 상징 해석 : 여호와의 날과 꺾인 팔

    에스겔 30장의 심판 예언은 인간 제국의 유한성, 역사의 주관자이신 하나님의 공의, 그리고 인간의 의지처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을 던집니다.

    첫째, '여호와의 날'이라는 개념은 역사가 단순히 인간의 계획이나 우연의 연속이 아니라, 하나님의 개입과 심판이 이루어지는 결정적인 순간이 있음을 시사합니다. 
    이 날은 '구름의 날'로 묘사되어 어둠과 두려움, 그리고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며, 여러 나라가 동시에 심판받는 우주적인 사건으로 그려집니다. 이는 마치 고대 신화에서 신들의 전쟁이 세상의 질서를 뒤흔드는 것처럼, 하나님의 심판이 기존의 국제 질서와 인간의 모든 자랑을 무너뜨리는 파괴적인 힘을 가짐을 보여줍니다. 그러나 이 파괴는 단순한 종말이 아니라, 새로운 질서와 하나님의 통치가 드러나는 계기가 되기도 합니다. 이는 역사철학에서 논의되는 '역사의 종말'이나 '새로운 시대의 도래'와 같은 개념과도 비교해 볼 수 있으며, 궁극적으로는 하나님의 정의가 실현되는 날에 대한 소망을 담고 있습니다.

    둘째, 애굽의 동맹국들이 함께 멸망하는 모습은 '의지하던 것의 허망함'을 극명하게 보여줍니다. 
    구스, 붓, 룻 등 애굽을 의지하고 그 힘에 편승하려 했던 나라들은 결국 애굽과 함께 심판의 칼날을 피하지 못합니다. 이는 마치 거대한 나무가 쓰러질 때 그 그늘에 의지하던 작은 풀포기들도 함께 뽑히는 것과 같습니다. 인간 사회에서 강한 자에게 의존하는 것은 생존 전략일 수 있지만, 그 의지하는 대상이 하나님이 아닌 유한하고 불완전한 존재일 경우, 그 몰락과 함께 운명을 같이할 수밖에 없음을 경고합니다. 이는 국제 관계뿐 아니라 개인의 삶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굳게 믿고 의지했던 사람, 조직, 이념 등이 무너질 때 우리는 함께 절망의 나락으로 떨어질 수 있습니다. 참된 반석이신 하나님만을 의지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셋째, 바로의 '꺾인 팔'과 바벨론 왕의 '견고한 팔'의 대조는 인간 권력의 이동과 하나님의 주권적인 개입을 상징적으로 보여줍니다. 
    바로의 팔은 이미 한 번 꺾였고(과거의 군사적 패배), 이제 남은 팔마저 꺾여 칼을 잡을 힘조차 없게 될 것입니다. 반면, 하나님께서는 바벨론 왕의 팔을 견고하게 하시고 당신의 칼을 그의 손에 쥐여주어 심판의 도구로 사용하십니다. 이는 세상 권력의 흥망성쇠가 궁극적으로는 하나님의 손안에 있음을 의미합니다. 아무리 강력해 보이는 인간의 힘도 하나님께서 허락하지 않으시면 한순간에 무너질 수 있으며, 반대로 하나님께서 사용하시고자 하면 미약한 존재라도 강한 힘을 발휘할 수 있습니다. 이는 마치 사무엘상에서 다윗이 골리앗을 이기는 장면처럼, 인간의 힘이 아닌 하나님의 능력으로 역사가 움직인다는 신앙적 통찰을 제공합니다.

    현대적 적용 또는 실존적 질문: 우리 시대의 '여호와의 날'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에스겔 30장의 엄중한 심판 메시지는 오늘날 우리에게도 깊은 성찰을 요구하며, 우리가 살아가는 방식과 의지하는 대상에 대해 근본적인 질문을 던집니다.

    오늘날 우리에게 '여호와의 날'은 어떤 모습으로 다가올 수 있을까요? 그것은 전 지구적인 팬데믹, 걷잡을 수 없는 기후 변화로 인한 대재앙, 경제 시스템의 붕괴, 혹은 예기치 않은 국제 분쟁과 전쟁일 수도 있습니다. 어쩌면 개인의 삶에서는 갑작스러운 질병, 관계의 파탄, 직장의 상실 등 감당하기 어려운 시련으로 나타날 수도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이러한 '날'이 닥쳤을 때, 우리가 그것을 단순한 불운이나 우연으로 치부할 것인지, 아니면 그 이면에 있는 하나님의 경고와 메시지를 읽어내려 노력할 것인지입니다. "슬프다 이 날이여!"라는 에스겔의 외침은 우리에게 안일함에서 깨어나 시대의 징조를 분별하고 하나님 앞에 겸손히 엎드릴 것을 촉구합니다.

    우리는 무엇을 '지탱하는 자'로 삼고 있으며, 그 '교만한 권세'에 안주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애굽은 자신의 군사력, 경제력, 오랜 역사와 문화를 의지했지만, 그것들은 '여호와의 날'에 모두 꺾이고 말았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무엇을 믿고 의지하며 살아가고 있습니까? 높은 학력, 안정된 직업, 많은 재산, 사회적 지위, 혹은 특정 이념이나 정치 세력일 수도 있습니다. 이러한 것들이 일시적인 안정감을 줄 수는 있지만, 영원한 피난처가 될 수는 없습니다. 오히려 그것들에 대한 지나친 의존과 교만은 우리를 더욱 위험한 상황으로 내몰 수 있습니다.

    "여호와를 의지하는 자는 시온 산이 흔들리지 아니하고 영원히 있음 같도다" (시편 125:1). 진정한 안전은 오직 변치 않는 하나님께만 있습니다.

    '바로의 꺾인 팔'은 우리에게 무엇을 말해줄까요? 한때 세상을 호령했던 권력도 영원하지 않으며, 인간의 모든 계획과 노력은 하나님의 주권 아래 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가 아무리 철저하게 계획하고 노력할지라도, 예상치 못한 변수와 한계에 직면하게 됩니다. 이때 우리는 좌절하고 절망하기보다, 오히려 우리의 연약함을 인정하고 하나님의 더 큰 계획과 능력을 신뢰하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꺾인 팔은 실패와 상실을 의미할 수도 있지만, 동시에 우리의 교만을 꺾고 하나님을 더욱 의지하게 만드는 겸손의 기회가 될 수도 있습니다.

    에스겔 30장은 우리에게 묻습니다:

    • 나는 내 삶과 우리 사회에 임박한 위기의 징조들을 민감하게 느끼고 있는가?
    • 내가 굳게 믿고 의지하는 것들이 과연 '여호와의 날'에도 나를 지켜줄 수 있는가?
    • 나의 힘과 지혜를 과신하며 교만하게 행하고 있지는 않은가?
    • 궁극적인 심판과 역사의 주관자이신 하나님 앞에서 나는 어떤 모습으로 서게 될 것인가?

    결론 요약

    에스겔 30장은 임박한 '여호와의 날'을 선포하며, 애굽과 그를 의지했던 동맹국들이 맞이할 처절한 파멸을 생생하게 예고합니다. 칼과 불, 그리고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이라는 하나님의 도구를 통해 애굽의 교만한 권세는 철저히 꺾이고, 그 땅은 황폐해지며 백성들은 흩어질 것입니다. 애굽의 주요 도시들과 우상들은 파괴되고, 다시는 이전과 같은 영광을 누리지 못할 운명임이 선포됩니다. 바로의 팔이 꺾이고 바벨론 왕의 팔이 견고해지는 대조를 통해, 세상 권력의 흥망성쇠가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주권 아래 있음을 강조합니다. 이 엄중한 심판의 메시지는 오늘날 우리에게도 인간적인 힘과 동맹의 허망함을 깨닫게 하고, 오직 하나님만이 참된 의지처가 되심을 일깨웁니다. 또한, 교만하게 자신을 높이는 모든 세력은 결국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을 피할 수 없다는 경고를 통해, 겸손히 하나님을 경외하며 그분의 뜻을 따르는 삶의 중요성을 역설하고 있습니다.








    암몬 족속과 이스라엘 : 적대 관계 속에서 발견하는 교훈

    암몬 족속은 성경에서 자주 언급되는 이스라엘의 적대적 민족으로, 그들의 역사는 갈등과 하나님의 섭리로 가득 차 있습니다. 
    이스라엘과의 관계 속에서 나타나는 암몬 족속의 행동은 성경적 교훈을 깊이 이해하는 데 중요한 요소가 됩니다.

    이 글에서는 암몬 족속의 기원, 역사, 그리고 이스라엘과의 갈등을 중심으로 살펴보겠습니다.

    암몬 족속의 기원과 역사

    암몬 족속은 롯과 그의 딸 사이에서 태어난 벤암미의 후손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롯이 소돔과 고모라의 멸망 후 딸들과 동굴에서 거주하게 된 사건에서 암몬 족속의 기원이 시작되었습니다.

    이러한 기원은 암몬 족속의 존재를 성경적 이야기의 중요한 일부로 만듭니다. 
    이들의 주요 거주지는 현재 요르단에 해당하는 지역으로, 고대 암몬의 수도 라빠 암몬은 오늘날 암만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암몬 족속은 몰렉이라는 주신을 섬겼으며, 몰렉 숭배는 우상 숭배의 가장 극단적인 형태로 여겨졌습니다.

    몰렉 숭배는 인신공양과 같은 끔찍한 의식을 포함하여 성경에서 반복적으로 비난받았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이러한 암몬의 우상 숭배를 금지하도록 하나님의 명령을 받았습니다. 
    암몬 족속은 이스라엘과의 갈등 외에도 모압, 에돔, 아람 등 주변 민족들과 다양한 관계를 맺으며 지역 내 중요한 세력으로 자리 잡았습니다.

    그들은 종종 이들 민족과 동맹을 맺거나 전쟁을 벌이며 역사적 갈등의 중심에 있었습니다. 
    이러한 관계는 성경에서 지역적 정치와 종교적 갈등의 배경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단서를 제공합니다.

    암몬과 이스라엘의 갈등

    암몬과 이스라엘의 관계는 대부분 영토와 신앙 문제에서 비롯된 갈등으로 점철되었습니다. 출애굽 당시 이스라엘 백성이 약속의 땅을 향해 이동할 때, 암몬 족속은 그들이 자신들의 땅을 지나가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이는 신명기와 민수기에서 언급되며, 이 사건은 이스라엘과 암몬 사이의 초기 갈등의 시작을 보여줍니다. 사사 입다 시대의 전쟁은 암몬 족속과 이스라엘 간의 충돌에서 가장 잘 알려진 사건 중 하나입니다. 암몬 족속은 이스라엘의 영토를 요구하며 전쟁을 일으켰고, 입다는 이에 대응하여 그들과 싸웠습니다. 입다는 암몬 족속의 주장에 대해 과거의 역사적 정당성을 들어 반박하며,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이들을 물리쳤습니다. 이 사건은 하나님의 심판과 구속의 손길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예로 기록됩니다. 또한, 사무엘상과 사무엘하에서는 사울과 다윗 시대에 암몬 족속이 이스라엘을 지속적으로 침략하고 약탈했던 기록이 나옵니다. 다윗 왕은 암몬과의 전투에서 승리하며 그들의 위협을 잠재웠지만, 솔로몬 왕 시대에는 암몬 여인들이 이스라엘로 들어와 우상을 퍼뜨리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이는 결국 이스라엘의 신앙적 타락으로 이어졌으며,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심판하시는 원인 중 하나가 되었습니다.

    암몬과 이스라엘 갈등에서 배우는 영적 교훈

    암몬과의 갈등은 믿음과 순종의 중요성을 가르쳐주는 대표적인 사례로, 이스라엘의 역사를 통해 하나님의 도우심 없이는 승리가 불가능함을 반복적으로 증명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암몬 족속과의 싸움에서 물리적인 능력이나 군사력으로 승리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의지하고 기도할 때 승리할 수 있었습니다. 이는 오늘날 우리에게도 삶의 도전과 싸움에서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해야 한다는 진리를 가르칩니다. 암몬 족속의 우상 숭배는 하나님의 백성이 신앙에서 멀어질 때 겪을 수 있는 위험을 경고합니다. 몰렉 숭배와 같은 죄악은 단순히 도덕적 타락을 넘어 하나님과의 관계를 파괴하는 결과를 초래했습니다. 이 경고는 우리에게 오늘날의 우상, 즉 물질주의나 자기중심적인 삶의 태도를 멀리하라는 도전을 줍니다. 적대적 관계 속에서도 하나님의 정의와 자비가 동시에 나타납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보호하고 암몬의 죄악을 심판하시면서도, 이 과정을 통해 이스라엘이 순종과 믿음의 삶으로 돌아올 기회를 제공하셨습니다. 따라서 이 이야기는 우리가 신앙의 길을 잃었을 때 하나님의 정의뿐 아니라, 회복의 은혜도 기대할 수 있음을 상기시켜줍니다. 이 갈등의 이야기는 현대의 신앙 여정에서도 동일한 교훈을 줍니다. 삶의 어려움 속에서도 우리는 하나님께 의지하고, 우리의 행동과 선택이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하도록 해야 합니다. 또한, 하나님의 심판과 은혜를 기억하며 죄악의 길을 떠나야 한다는 점도 강조됩니다.

    입다와 암몬의 전쟁

    사사기 11장은 입다와 암몬 족속 간의 갈등을 통해 하나님의 신실함과 인간의 책임을 조명합니다. 
    입다는 길르앗의 아들로, 그의 가족에게 쫓겨난 후 외로운 삶을 살았지만, 암몬 족속의 위협이 커지자 이스라엘 백성은 그를 지도자로 선택했습니다. 
    입다는 지도자로서의 책임을 다하며 암몬 족속과의 전쟁을 준비하기 전, 먼저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그의 기도는 단순히 도움을 요청하는 것을 넘어, 자신이 하나님께 완전히 의지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행동이었습니다. 
    입다는 암몬 왕과의 협상에서 과거의 역사적 사실을 들어 암몬 족속의 영토 주장이 부당함을 논리적으로 반박했습니다. 
    그는 이스라엘이 출애굽 당시 암몬 족속의 땅을 점령하지 않았으며, 현재의 영토는 하나님의 허락하심으로 주어진 것임을 강조했습니다. 이러한 태도는 지도자로서의 지혜와 하나님에 대한 신뢰를 동시에 보여줍니다. 결국, 하나님의 영이 입다에게 임하심으로, 그는 암몬 족속을 물리칠 수 있었습니다. 이 승리는 단순한 군사적 승리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자신의 백성을 지키고 계심을 입증하는 사건이었습니다. 그러나 입다는 전쟁 후 자신이 했던 서원으로 인해 딸을 희생하게 되는 비극적인 결과를 맞이했습니다. 이 사건은 서원의 중요성과 그에 따르는 책임, 그리고 인간의 약속이 하나님의 뜻과 조화를 이루어야 함을 강조합니다.

    예언자들의 암몬에 대한 경고

    암몬 족속의 죄악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은 구약의 여러 예언서에서 반복적으로 언급됩니다. 
    예레미야, 에스겔, 아모스와 같은 예언자들은 암몬 족속이 저지른 우상 숭배, 폭력, 그리고 이스라엘에 대한 적대 행위를 질타하며, 그들에게 다가올 하나님의 심판을 선포했습니다. 
    예레미야 49장에서는 암몬 족속이 이스라엘의 영토를 차지하려는 탐욕스러운 행위를 질책하며, 그들이 결국 멸망할 것을 예언합니다. 이는 하나님의 공의가 모든 민족에게 동일하게 적용된다는 점을 보여줍니다. 
    하나님은 암몬의 죄를 간과하지 않으셨고, 그들의 죄악에 합당한 심판을 내리셨습니다. 
    에스겔서에서는 암몬 족속이 이스라엘의 멸망을 조롱하고 기뻐했던 죄를 지적하며, 그들의 교만과 악행이 심판을 초래했다고 말합니다. 이러한 예언은 모든 죄악은 하나님의 눈앞에 드러나며, 그에 따른 책임이 따를 것이라는 교훈을 줍니다. 
    암몬 족속의 멸망은 하나님의 말씀의 신실함을 증명하는 사건이었습니다. 
    예언자들의 경고는 단순히 암몬에게만 적용된 것이 아니라, 오늘날 우리에게도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을 때 경험하게 될 결과를 경고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언제나 성취되며, 우리는 그 말씀 안에서 경고와 희망을 모두 발견할 수 있습니다.


    암몬 족속과 신약적 관점

    신약에서는 암몬 족속이 명시적으로 등장하지 않지만, 그들의 이야기가 전달하는 신학적 메시지는 신약의 핵심 주제들과 연결됩니다. 
    구약에서 암몬과 이스라엘 사이의 갈등은 하나님의 공의와 은혜의 원리를 드러내며, 이 원리는 신약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을 통해 완전한 화해로 확장됩니다. 
    암몬 족속과 이스라엘의 충돌은 인간의 죄악과 하나님의 심판이라는 주제를 상징합니다. 
    암몬 족속의 우상 숭배와 죄악은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을 불러왔으며, 이는 하나님이 죄를 미워하신다는 사실을 강조합니다. 
    신약에서는 이러한 하나님의 공의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궁극적으로 성취됩니다. 
    예수님은 모든 죄를 대신 짊어지심으로써 하나님의 심판을 담당하셨고, 인류를 위한 구원의 길을 열어주셨습니다. 
    암몬 족속과 이스라엘의 갈등이 보여주는 하나님의 공의는 신약에서 은혜와 회복의 이야기로 완성됩니다. 
    암몬 족속과 같은 이방 민족의 심판 이야기는 신약에서 모든 민족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계획과 연결됩니다. 
    복음은 이스라엘만이 아니라 모든 민족에게 열려 있으며, 이는 구약에서 암시된 하나님의 섭리를 완전히 실현합니다. 
    특히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의 메시지는 과거 이방 민족이 겪었던 심판이 단지 끝이 아니라 회복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희망을 전달합니다. 
    이는 에베소서 2장에서 “멀리 있는 자들을 가까이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 잘 설명됩니다.

    암몬과의 갈등과 예수 그리스도의 화해 사역

    암몬 족속과 이스라엘의 대립은 죄악으로 인한 인간의 갈등과 분열을 상징적으로 나타냅니다. 
    그러나 신약에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이러한 갈등과 분열이 화해와 연합으로 변하는 모습이 강조됩니다. 
    예수님의 사역은 적대적인 관계를 회복시키고 모든 민족을 하나로 묶는 화평의 복음을 제시합니다. 
    암몬 족속의 이야기는 또한 신약에서 회개의 중요성을 부각시키는 데 기여합니다. 
    암몬 족속이 심판을 받았던 주요 이유는 그들의 우상 숭배와 하나님을 거역한 죄악 때문이었습니다. 
    신약에서도 예수님과 사도들은 반복적으로 죄에서 돌이켜 하나님께로 돌아오라는 메시지를 전했습니다. 
    이는 하나님의 심판이 단순히 처벌의 목적이 아니라 회개의 기회를 제공하고 은혜의 문을 여는 데 있음을 보여줍니다.

    오늘날 우리에게 주는 메시지

    암몬 족속과 이스라엘의 이야기는 오늘날에도 중요한 신앙적 교훈을 제공합니다. 
    이 이야기는 하나님의 인도와 보호를 신뢰해야 함을 일깨우며,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믿음을 굳건히 지키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보여줍니다. 
    이스라엘이 암몬과의 대립 속에서도 하나님께 의지하며 나아갔던 모습은 우리가 현대의 갈등과 도전 속에서 취해야 할 신앙의 태도를 가르칩니다. 
    암몬 족속의 죄악은 우리에게 죄의 심각성을 상기시킵니다. 
    몰렉 숭배와 같은 우상 숭배는 단순히 과거의 일이 아니라, 오늘날에도 다양한 형태로 나타나는 인간의 자기중심성과 탐욕을 상징합니다. 
    이는 우리가 현대 사회에서 마주하는 물질주의나 이기심과도 연결되며, 이를 경계하고 회개와 믿음의 삶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경고로 작용합니다. 
    또한, 암몬과 이스라엘 간의 갈등은 하나님의 공의가 모든 상황에서 동일하게 적용됨을 보여줍니다. 
    하나님은 죄를 미워하시지만, 동시에 죄인을 구원하기를 원하십니다. 
    이는 우리가 어려움 속에서도 하나님의 정의와 은혜를 신뢰하며, 그의 말씀에 따라 살아가야 함을 가르쳐줍니다. 
    신약에서 예수님의 화해 사역을 통해 드러난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의 삶 속에서 갈등을 해결하고 화평을 이루는 방법을 제시합니다.


    중국의 헌법 제1조 
    ① 중화인민공화국은 노동 계급이 지도하고 노농동맹을 기초로 하는 인민민주주의 독재의 사회주의 국가이다. 
    ② 사회주의 제도는 중화인민공화국의 근본제도이다. 어떠한 조직이나 개인이 사회주의 제도를 파괴하는 것을 금지한다.

    북한의 헌법 제1조 

    제1조
    우리 나라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다.
    제2조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주권은 인민에게 있다.
               주권은 인민이 최고 주권기관인 최고인민회의와 지방주권기관인 인민위원회를 근거로 하여 행사한다.

    일본의 헌법 제1조

    제1조 천황은 일본국의 상징이자 일본 국민 통합의 상징이며, 이 지위는 주권이 존재하는 일본 국민의 총의에 근거한다.

    대한민국의 헌법 제1조

    ①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②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


    미국의 헌법 제1조

    이 헌법에 의하여 부여되는 모든 입법 권한은 미합중국 의회에 속하며, 의회는 상원과 하원으로 구성한다.

    미국 수정헌법 제1조

    의회는 종교를 세우거나, 자유로운 종교 활동을 금지하거나, 발언의 자유를 저해하거나, 출판의 자유, 평화로운 집회의 권리, 그리고 정부에 탄원할 수 있는 권리를 제한하는 어떠한 법률도 만들어서는 안 된다.







    9월 11일(목) 에스겔 25-28장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분노의 책벌(25:17)

  • 25장 : 주변 민족들의 심판(암몬, 모압, 블레셋)
  • 26~28장 : 두로와 시돈의 심판

  • 암몬 / 나의 친족의 아들
    모압 /
    물, 종자, 아버지의 후손 
    블레셋 /
    방황자의 땅, 나그네

  • 분노의 책벌로 내 원수를 그들에게 크게 갚으리라 내가 그들에게 원수를 갚은즉 그들이 나를 여호와인줄 알리라 하시니라.
    I will carry out great vengeance on them and punish them in my wrath. 
    Then they will know that I am the LORD, when I take vengeance on them.

    분노의 책벌(베토케호트 헤마) בְּתֹוכְחֹות חֵמָה

    2534. 분노(헤마. chêmâʼ)   חֵמָה 스트롱번호2534

    1. 따뜻함.  2. 분노.  3. 독
    발음 [ chêmâʼ ]  
    어원  /  3179에서 유래  
    구약 성경  /  125회 사용
    • 1. 명사, 여성 따뜻함, 온기, 흥분, 격정, 호7:5
    • 2. 명사, 여성 분노, 진노, 격노, 성이 남, 창27:44, 렘6:11, 25:15, 사51:17.
    • 3. 명사, 여성 독, 신32:24, 시58:5(4).
    • 관련 성경 / 노(창 27:44, 시37:8, 렘23:19), 진노(레26:28, 대하34:21, 잠16:14), 격분(신29:23,28), 분(잠15:18, 렘42:18), 
      뜨거움(호7:5), 독(신32:24,33), 노함(사27:4), 분노(겔13:13, 슥8:2), 진노(대하28:9, 시59:13), 분노함(욥36:18), 분냄(시90:7).



    8433. 책벌(토우케하흐. tôwkêchâhתּוֹכֵחָה 스트롱번호8433

    1. 주장하는 행위.  2. 복수형 논의들.  3. 설복시킴
    발음 [ tôwkêchâh ]  
    구약 성경  /   4회 사용
    • 1. 명사, 여성 주장하는 행위, 권리를 유지함, 삿16:6.
      • a. 먕사, 여성 [주]복수형 논의들, 욥23:4.

    • 2. 명사, 여성 설복시킴, 반박, 부인, 시38:15(14), 잠29:1.
    • 3. 명사, 여성 책망[말로 받는], 징계, 잠1:23,25,30,3:11, 5:12, 27:5, 29:15.
      • a.  명사, 여성 [주]복수형:잠6:23.
    • 4. 명사, 여성 불평[하나님께 대하여], 합2:1.
    • 5. 명사, 여성 형벌, 단련, 시73:14.
      • a. 명사, 여성 [주]복수형: 시39:12(11), 겔5:15, 25:17
    • 관련 성경
      ☞변론(욥13:6), 징벌(시73:14), 책망(잠1:23, 겔5:15), 징계(잠3:11, 15:5), 꾸지람(잠5:12,29:15), 경계(잠13:18), 견책(잠15:10,32), 책벌(사37:3), 벌(시149:7), 벌함(호5:9), 변론할 말(욥23:4), 반박할 말(시38:14).


    17. 하나님께서 아벨의 자손들을 대신하여 그들의 원수에게 심판을 내리시고 보복하시는 장면입니다. 
    이 말씀은 하나님이 의로운 심판자임을 강조하며, 그분의 공의로 인해 악한 자들은 반드시 대가를 치르게 된다는 것입니다. 
    또한, 이러한 하나님의 행동을 통해 사람들은 여호와가 참된 하나님임을 알게 될 것이라는 메시지를 전달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의 주권과 정의를 다시 한번 깨닫게 되며, 하나님께서 궁극적으로 그의 백성을 보호하시고 원수를 갚으신다는 확실한 약속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내 원수 - 14절과 같은 유형으로서 블레셋 사람들이 하나님의 백성인 이스라엘을 대적한 것은 곧 하나님을 대적한 격이 되기 때문에 그들이 하나님의 원수로 표현되었다.

    내가...여호와인줄 알리라 - 하나님의 대적들에 대한 심판은 단순히 그들에 대해 처벌을 가함으로써 고통과 파멸만을 당하도록 하는 목적에서 멈추지 않고 그 일을 통해 하나님의 참되심, 공의로우심을 깨달아 알도록 하는 결과가 수반되어짐을 엿보게 한다.

    에스겔 25장 본문의 구조

    암몬에 대한 심판 (1~7절)
    모압과 세일에 대한 심판 (8~11절)
    에돔에 대한 심판 (12~14절)
    블레셋에 대한 심판 (15~17절)
    결론

    이방 민족들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
    본문 요약

    에스겔 25장은 이스라엘 주변 이방 민족들인 암몬, 모압, 에돔, 블레셋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을 선포하는 말씀입니다. 이들은 이스라엘의 멸망을 기뻐하며 조롱했으며, 그들의 악행으로 인해 하나님의 심판을 받게 될 것입니다. 암몬은 예루살렘이 무너질 때 기뻐했고, 모압은 유다가 다른 민족들과 다를 바 없다고 말하며 하나님을 경멸했습니다. 에돔은 이스라엘을 공격하며 복수심에 사로잡혀 있었고, 블레셋 역시 유다를 멸망시키려 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들의 악을 간과하지 않으시고, 그들이 행한 대로 심판하실 것입니다. 이는 하나님의 공의가 이스라엘뿐만 아니라 온 세상에 동일하게 적용됨을 보여줍니다.

    본문의 구조
    1. 암몬에 대한 심판 (1~7절)
    2. 모압과 세일에 대한 심판 (8~11절)
    3. 에돔에 대한 심판 (12~14절)
    4. 블레셋에 대한 심판 (15~17절)
    암몬에 대한 심판 (1~7절)

    하나님은 암몬이 예루살렘의 멸망을 기뻐하며 조롱한 죄를 지적하십니다. 암몬 사람들은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심판을 받자 그것을 조롱하며 즐거워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암몬을 이방인들에게 넘기시고, 그들의 땅을 황폐하게 하실 것이라고 선언하십니다. 암몬의 수도 랍바는 폐허가 될 것이며, 그들은 더 이상 강한 민족이 되지 못할 것입니다. 이는 하나님의 백성이 비록 죄로 인해 징계를 받을지라도, 그것을 조롱하는 자들은 결국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수 없음을 보여 줍니다.

    모압과 세일에 대한 심판 (8~11절)

    모압은 이스라엘을 조롱하며, 그들이 다른 나라와 다를 바 없다고 말했습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특별한 백성으로 택하셨다는 사실을 부정하는 태도였습니다. 모압은 하나님의 선택을 무시하며, 이스라엘의 멸망을 보며 경멸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모압을 심판하실 것이며, 그들을 이방 민족들 가운데서 사라지게 하실 것입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을 향한 특별한 계획을 가지셨으며, 그들을 멸시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심판을 면할 수 없음을 보여 줍니다.

    에돔에 대한 심판 (12~14절)

    에돔은 형제국인 이스라엘을 향한 복수심으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그들은 이스라엘이 약해졌을 때 공격하며 그들을 잔인하게 다루었습니다. 하나님은 에돔의 이러한 행동을 간과하지 않으시고, 그들에게 심판을 내리실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에돔은 하나님의 심판 아래 완전히 멸망할 것이며, 그들이 이스라엘에게 행한 대로 되갚음을 받을 것입니다. 이는 하나님의 공의가 모든 민족에게 동일하게 적용됨을 의미합니다.

    블레셋에 대한 심판 (15~17절)

    블레셋은 오랜 세월 동안 이스라엘과 대립하며 그들을 괴롭혀 왔습니다. 
    그들은 유다가 약해졌을 때 기회를 틈타 공격하며 복수심에 불타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들의 폭력과 증오를 심판하시고, 그들을 철저히 멸망시키실 것입니다. 
    블레셋은 하나님의 심판을 통해 더 이상 위협적인 존재로 남지 못할 것이며, 그들의 악한 행위에 대한 대가를 치르게 될 것입니다.

    결론

    에스겔 25장은 하나님의 공의가 이스라엘뿐만 아니라 이방 민족들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됨을 보여 줍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심판을 받았다고 해서, 그것을 기뻐하고 조롱하는 민족들이 면죄부를 받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하나님은 그들의 교만과 악행을 반드시 심판하십니다. 
    이는 오늘날 우리에게도 중요한 교훈을 줍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의 고난을 조롱하거나 경멸하지 말아야 하며, 하나님의 공의를 신뢰하며 겸손하게 살아가야 합니다. 
    또한, 하나님의 심판은 결코 불의하지 않으며, 모든 민족과 개인에게 동일한 기준이 적용됨을 기억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모든 것을 보고 계시며, 그의 때에 그의 방식으로 공의를 이루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바른 삶을 살아가며, 그의 뜻에 순종하는 자들이 되어야 합니다.


    "분노"에 관한 성경 구절

    성경에서 말하는 '분노'란 무엇인가?

    1. 인간의 분노에 대한 경고

    성경은 인간의 분노가 죄를 유발할 수 있다고 경고합니다. 야고보서 1:19-20은 "사람의 분노가 하나님의 의를 이루지 못함이라"고 말하며, 분노를 억제할 것을 가르칩니다.

    2. 의로운 분노

    성경은 하나님의 거룩한 성품에 따른 의로운 분노를 인정합니다. 예수님은 성전을 더럽히는 자들을 보고 분노하셨습니다(요한복음 2:13-17). 의로운 분노는 죄와 불의에 대한 반응입니다.

    3. 분노의 통제

    성경은 분노를 품지 않고 빠르게 해결할 것을 권합니다. 에베소서 4:26에서는 "분을 내어도 죄를 짓지 말며,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말라"고 말합니다. 이는 분노가 오래 지속되면 악한 결과를 초래할 수 있음을 경고합니다.

    4. 분노와 용서

    성경은 분노 대신 용서를 선택하라고 가르칩니다. 마태복음 6:14-15에서 예수님은 "다른 사람의 죄를 용서하면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도 너희를 용서하시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5. 성령의 열매와 분노 극복

    갈라디아서 5:22-23은 성령의 열매 중에 온유와 절제가 있다고 가르치며, 성령을 의지할 때 분노를 극복할 수 있다고 강조합니다.

    성경은 인간의 분노가 죄로 이어질 수 있음을 경고하며, 분노를 통제하고 용서와 사랑으로 극복하라고 가르칩니다. 분노의 주체가 하나님이라면 인간들의 죄에 대한 심판입니다.

    주제별 성경구절 모음

    창세기 4:5

    가인과 그의 제물은 받지 아니하신지라. 가인이 몹시 분하여 안색이 변하니.

    창세기 4:6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 네가 분하여 함은 어찌 됨이며 안색이 변함은 어찌 됨이냐.

    출애굽기 32:19

    진에 가까이 이르러 그 송아지와 그 춤추는 것들을 보고 크게 노하여 손에서 그 판들을 산 아래로 던져 깨뜨리니라.

    민수기 22:27

    나귀가 여호와의 사자를 보고 사탄 앞에서 몸을 땅에 엎드리니 발람이 크게 노하여 그 나귀를 막대기로 때리는지라.

    민수기 25:3

    이스라엘이 바알브올을 가까이 하매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에게 진노하시니라.

    신명기 9:8

    호렙산에서도 너희가 여호와를 격노하게 하였으므로 여호와께서 진노하사 너희를 멸하려 하셨느니라.

    신명기 29:27

    그러므로 여호와의 진노와 격분이 이 땅을 향하여 타올라 모든 저주가 기록된 대로 이 땅에 임하게 하셨느니라.

    사무엘상 20:34

    요나단이 크게 노하여 식탁에서 떠나고 그 달의 이튿날 초하루에 음식을 먹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그의 아버지가 다윗을 욕되게 하였으므로 그를 위하여 슬퍼함이었더라.

    열왕기상 21:4

    아합이 근심하고 답답하여 왕궁으로 돌아와 침상에 누워 얼굴을 돌리고 식사도 아니하니.

    열왕기하 5:11

    나아만이 노하여 물러가며 이르되 나는 생각하기를 그가 내게로 나와서 서서 그의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고 그의 손을 그 환처 위에 흔들어 나병을 고칠까 하였도다.

    열왕기하 17:18

    그러므로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에게 심히 진노하사 그들을 그의 앞에서 제거하시니 오직 유다 지파만 남았더라.

    역대하 12:12

    르호보암이 스스로 겸비하였으므로 여호와께서 그의 진노를 돌이키사.

    느헤미야 4:1

    산발랏이 우리가 성을 건축한다 함을 듣고 크게 분노하여 유다 사람들을 비웃으며.

    에스더 3:5

    하만이 모르드개가 무릎을 꿇지도 아니하고 절하지도 아니함을 보고 크게 노하되.

    욥기 5:2

    분노가 우매한 자를 죽이고 질투가 어리석은 자를 죽이느니라.

    욥기 18:4

    네가 분을 내어 자신을 찢는구나. 너로 말미암아 땅이 버림을 받겠느냐.

    시편 37:8

    분을 그치고 노를 버리며 불평하지 말라. 오히려 악을 만들 뿐이라.

    시편 76:10

    진실로 사람의 노여움이 주를 찬송하게 될 것이요 남은 노여움은 주께서 금하시리이다.

    잠언 14:29

    노하기를 더디하는 자는 크게 명철하거니와 마음이 조급한 자는 어리석음을 나타내느니라.

    잠언 15:1

    유순한 대답은 분노를 쉬게 하여도 과격한 말은 노를 격동하느니라.

    잠언 16:32

    노하기를 더디하는 자는 용사보다 낫고 자기의 마음을 다스리는 자는 성을 빼앗는 자보다 나으니라.

    잠언 19:11

    노하기를 더디하는 것이 사람의 슬기요 허물을 용서하는 것이 자기의 영광이니라.

    잠언 22:24

    노를 품는 자와 사귀지 말며 울분한 자와 동행하지 말지니.

    전도서 7:9

    급한 마음으로 노를 발하지 말라. 노는 우매한 자들의 품에 머무름이니라.

    이사야 13:9

    보라 여호와의 날 곧 잔혹한 날이 이르러서 경노와 분노로 땅을 황무지로 만들며.

    예레미야 4:8

    그러므로 너희는 굵은 베를 두르고 애곡하며 애통할지어다. 이는 여호와의 맹렬한 진노가 아직 우리에게서 돌이키지 아니하였음이라.

    예레미야애가 2:3

    맹렬한 노를 발하시며 이스라엘의 모든 뿔을 자르셨고 원수 앞에서 오른손을 뒤로 거두셨으며.

    에스겔 5:13

    이와 같이 내 노가 다 풀리고 내가 내 분을 그들에게 이루어 안식을 얻으리니.

    다니엘 3:19

    느부갓네살이 분이 가득하여 그의 얼굴 모양이 변하고.

    요나 4:4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네가 성내는 것이 옳으냐 하시니라.

    미가 5:15

    내가 분노와 진노로 순종하지 아니한 나라에 원수를 갚으리라.

    나훔 1:2

    여호와는 질투하시며 보복하시는 하나님이시라. 여호와는 보복하시며 진노하시되 자기를 거스르는 자에게 여호와는 보복하시며.

    하박국 3:12

    주께서 분노로 땅을 두르셨으며 노를 발하사 여러 나라를 밟으셨나이다.

    마태복음 5:22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형제에게 노하는 자마다 심판을 받게 되고.

    마가복음 3:5

    예수께서 그들의 마음이 완악함을 탄식하사 노하심으로 그들을 둘러보시고.

    누가복음 15:28

    그가 노하여 들어가고자 하지 아니하거늘 아버지가 나와서 권한대.

    사도행전 15:39

    서로 심히 다투어 피차 갈라 서니.

    로마서 12:19

    내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하나님의 진노하심에 맡기라.

    에베소서 4:26

    분을 내어도 죄를 짓지 말며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말고.

    에베소서 4:31

    너희는 모든 악독과 노함과 분냄과 떠드는 것과 훼방하는 것을 모든 악의와 함께 버리고.

    골로새서 3:8

    이제는 너희가 이 모든 것을 벗어버리라. 곧 분노와 노여움과 악의와 비방과 너희 입의 부끄러운 말이라.

    디모데전서 2:8

    그러므로 각처에서 남자들이 분노와 다투는 마음이 없이 거룩한 손을 들어 기도하기를 원하노라.

    야고보서 1:19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너희가 알지니 사람마다 듣기는 속히 하고 말하기는 더디 하며 성내기도 더디 하라.

    야고보서 1:20

    사람의 성내는 것이 하나님의 의를 이루지 못함이라.

    요한계시록 6:17

    그들의 진노의 큰 날이 이르렀으니 누가 능히 서리요 하더라.



    “분노의 책벌(Punish of wrath)”
    에스겔 25장은 암몬(2∼7절)과 모압(8∼14절) 그리고 블레셋(15∼17절)에 관한 책벌의 말씀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떠나 우상 숭배할 때 이웃 나라들을 동원하여 이스라엘을 핍박하거나 무너트리셨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을 핍박한 나라는 반드시 다른 나라에 의해서 핍박을 받게 하십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방법에서 “하나님의 공의로운 사람”을 깨닫게 합니다.
    왜냐하면 사랑하는 백성들이 죄를 범하거나 잘못된 길을 선택할 때는 반드시 바른 길을 찾게 하고 죄악 된 자리에서 떠나도록 인도하시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공의라고 하겠습니다. 그러나 주의 백성들을 바로 세우려고 사용한 이웃 나라에 대해서 다른 나라를 통하여 징계하므로 하나님의 사랑을 보여주십니다.

    “징계는 다 받는 것이거늘 너희에게 없으면 사생자요 참 아들이 아니니라.”(히브리서 12:28)

    어떤 어려움에 시달리고 있습니까?
    어려움에서 벗어나려고 몸부림을 칠 것이 아니라 어려움 가운데서 주님께서 기뻐하시고 원하시는 방향으로 삶을 돌이켜야 하는 것이 우선입니다. 그러면 내게 닥쳐왔던 어려움은 자연스럽게 없어질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 순종할 때 세상이 그와 같은 사람들의 삶을 부러워한다면 그 사회는 정의로운 사회가 될 것입니다. 반면에 세상이 그러한 사람들을 미워하고 대적한다면 그 사회는 불의한 사회가 될 것입니다.  

    미국에서는 오늘은 “하누카(Hanukkah. 히브리어: חנוכה)”라는 유대인의 명절입니다.
    “하누카”란 “봉헌”이란 뜻으로 “안티오쿠스 4세”에 의해서 더럽혀진 예루살렘 성전을 기원전 164년 “마카베오 혁명”으로 이스라엘의 하느님 여호와에게 다시 봉헌하였다는 것에서 유래했습니다. 당시 마카베오 혁명에 대해서는 “외경 마카베오 상, 하”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요한복음에서는 “수전절(the Feast of Dedication)”이라고 하였으며(10:22), “메노라”는 “하누카”를 지킬 때 사용하는 촛불이며 촛대는 “하누키야” 라고 합니다.

    뉴욕에서 공립학교는 유대인의 명절은 마치 공휴일과 같습니다. 왜냐하면 유대인 교사들이 출근하지 않기 때문에 수업에 어려움을 겪게 되므로 자연스럽게 유대인의 명절은 공휴일로 제정하지 않아도 공휴일처럼 지내게 됩니다. 유대인은 미국에서 소수민족입니다. 비록 소수민족이지만 민족 명절을 철저하게 지키므로 그들이 살고 있는 사회를 움직일 수 있는 힘을 갖고 있습니다.

    세상을 움직일 수 없는 그리스도인들이라면 오늘의 말씀을 깊이 묵상하며 주님께서 기뻐하는 삶을 위하여 결단해야 합니다.

    코로나 바이러스가 삶을 힘들게 할지라도 살아 있는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확신하며 주님께서 기뻐하시는 길을 선택할 때 그 길을 따라가는 주위 백성들과 함께 하실 것이며 반드시 지켜주실 것입니다. 


    * 단어 및 용어 정리

    1. 랍바(5절) : 암몬의 수도(21:20 참조)

    2. 벧여시몬(9절) : “황야의 집”이란 뜻.

    3. 바알므온(9절) : 좋은 목초지로 모압과 국경 지대에 있던 아모리인들의 성읍.

    4. 데만에서부터... 드단까지(13절) : 에돔의 전 국토.

    5. 이스라엘 손을 빙자하여(14절) : 이 예언은 BC 164년경 유다의 마카비에 의해서 성취되었다.


    "분노"와 관련된 책 소개
    분노의 놀라운 목적

    저자 마셜 B. 로젠버그

    출판 한국NVC센터

    발매 2017.08.21.

    분노가 찾아올 때 우리는 그것을 느낀다. 얼굴이 벌게지고 시야가 좁아진다. 온갖 판단들이 마음을 휘저어 심장 박동이 빨라진다. 마침내 분노가 폭발하고, 우리는 상황을 더 악화시킬 말이나 행동을 한다. 화가 화를 부르고 말다툼이 주먹다짐으로 이어진다. 우리 사회에 널리 퍼진 증오나 혐오도 그 뿌리는 분노이기 마련이다. 분노가 안 좋은 결과를 낳을 때가 많다 보니, 사람들은 분노를 억눌러야 할 것, 부정해야 할 것으로 여긴다. 자제심 부족, 성숙하지 못한 인격의 증표라고 본다. 이 책의 저자는 분노를 억눌러야 한다는 통념에 이의를 제기한다. 분노는 우리 욕구가 충족되지 못하고 있음을 알리는 경보이고, 따라서 내면의 소중한 것들에 연결되도록 우리를 이끄는 선물이라는 것이다.
    왜 분노하는가?

    저자 조정민

    출판 두란노서원

    발매 2018.09.18.

    현대인의 대부분이 분노라는 병에 사로잡혔다. 스티븐 패덕이나 묻지마 살인을 저지르는 사람들을 보면 그들을 붙잡고 있는 분노가 얼마나 심각한 병인지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왜 이 질병을 앓게 됐을까? 다들 왜 이렇게 화가 나 있을까? 만약 우리 사회가 이 화를 다스리지 않으면 어떤 결과를 가져오게 될 것인가? 이 화는 어떻게 다뤄야 할까?
    이 책은 우리 사회의 분노가 어디서 시작되었는지, 분노가 어떤 결과를 가져오고 있는지, 각 개인과 집단은 이 분노를 어떻게 다뤄야 하는지, 무엇보다 먼저 성경의 인물들을 통해 살펴보고 있다. 그리고 그 인물들을 통하여 우리 스스로 그 분노를 어떻게 다뤄야 할 지에 대한 해답을 찾는다.

    분노 컨트롤

    저자 칩 잉그램, 베카 존슨

    출판 디모데

    발매 2011.06.03.

    실제적이고 성경적인 분노 해결법! 파괴적인 감정을 삶의 에너지로 바꾸는 실제적 방법 '분노 컨트롤'. 분노를 단지 감정일 뿐 선하지도, 악하지도 않은 감정 또는 기분이라고 정의 하는 이 책은 바른 방법으로 분노하여 건강한 감정을 가질 수 있도록 돕는다. 10년간의 상담과 사역 경험을 통해 저자는 분노의 심리학적 측면과 성경적 원리를 함께 다루면서 분노가 어떻게 우리 자신과, 우리의 인간관계를 변화시키는 도구로 하나님께 쓰일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또한 분노를 삶의 에너지로 바꾸는 실제적인 방법을 제시해준다. 이 책을 통해 분노의 파괴적인 힘을 정복하며, 개인과 사회와 문화를 변화시키는 데 분노의 선한 영향력을 사용하는 계기를 마련한다.






    9월 10일(수) 에스겔 22-24장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심문권(23:24b)

  • 22장 : 예루살렘의 죄악
       - 선지자들의 배역(25절), 제사장의 율법 거역(26절), 거짓 예언(28절)
  • 23장 : 두 음녀의 비유
      - 오홀라(사마리아), 오홀리바(예루살렘)
  • 24장 : 끓는 가마 비유


  • 내가 심문권을 그들에게 맡긴즉 그들이 그 심문권대로 너를 심문하리라. 
    I will turn you over to them for punishment, and they will punish you according to their standards.


    1. 판단.  2. 레 19:15.  3. 욥 9:32  
    발음 /  [ mishpâṭ ]
    어원 / 8199에서 유래  
    구약 성경 / 424회 사용

    그들이...너를 에워쌀지라 
    - 바벨론 군대들은 B.C. 605년 제1차로 예루살렘을 포위 공격하여 다니엘과 같은 일부 귀족들을 포로로 잡아 갔다(왕하 24:1, 2, 7;단 1:1-6). 

    그리고 이들은 B.C. 588년에 제3차로 유다를 침공해 예루살렘을 3년 동안 에워싸다가 함락시켜 유다 왕국을 멸망케 했다(왕하 25:1-7).

    내가 심문권을 그들에게 맡긴즉 
    - '심문권'(미쉐파트)은 '법적인 판결' 또는 '공식적인 선고'를 뜻하는데 여기서는 바벨론 제국이 하나님의 심판의 도구가 되어 유다를 재판하게 됨을 가리킨다. 
    이처럼 하나님은 범죄한 유다 왕국을 심판하시기 위해 이방 나라 바벨론을 당신의 일시적인 도구로 사용하셨던 것이다(렘 27:6;43:10).


    상징과 의미

    • 오홀라와 오홀리바: 이름만 다를 뿐 둘 다 하나님의 백성임에도 불구하고, 이방 민족의 관습을 따라 우상숭배와 비도덕적 행위에 빠진 모습을 상징합니다.
    • 음행의 비유: 하나님과의 언약적 관계를 저버린 것을 사람의 불륜 및 음행에 비유하여, 영적 배신과 배타적 충성의 상실을 극적으로 드러냅니다.
    • 심판의 선언: 반복된 타락 후에 마침내 임박한 심판이 언급되며, 이는 하나님의 공의와 속죄 없는 죄에 대한 심각성을 강조합니다.

    문학적 특징

    에스겔 23장은 다른 예언서보다도 더욱 생생하고, 때로는 충격적일 만큼 직설적으로 비유를 사용합니다. 이는 죄악의 본질과 그 심각성을 강하게 독자에게 각인시키기 위함입니다. 반복되는 관용구와 상징, 인물의 대조는 전체적인 구조 안에서 본문의 메시지를 선명히 드러냅니다.

    묵상포인트

    • 믿음의 공동체가 하나님의 언약을 지키지 못할 때, 어떤 결과가 따르는지 본문은 경고합니다.
    • 나와 우리의 신앙 안에서 하나님만을 신뢰하고 따르고 있는가, 혹은 세상의 가치관이나 우상을 따라가고 있지는 않은지 점검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나에게 적용해보기

    • 하나님과 나 사이의 언약적 관계를 매일 새롭게 기억하며 주님의 뜻에 충실하게 살아가는지 돌아봅시다.
    • 현대 사회 속에서도 하나님 아닌 것에 마음을 빼앗기고 있지 않은지, 우상숭배적 요소가 무엇인지 스스로 점검해보길 바랍니다.


    "심판의 잔"

    서론 | 심판을 부르는 잊음

    사람은 누구나 잘 잊는 존재입니다. 중요한 약속을 잊을 때도 있고, 기념일이나 소중한 사람의 말을 잊을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단순히 기억력이 부족해서 잊는 것과, 의도적으로 외면하고 무시해서 잊는 것은 전혀 다른 차원입니다. 누군가를 잊었다는 말에는 단순한 실수가 아니라, 그를 더 이상 마음에 두지 않는다는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에스겔 23장의 본문은 “잊음”이라는 단어를 중심에 두고 우리에게 경고합니다. 예루살렘은 하나님을 잊었습니다. 단순히 순간적으로 기억하지 못한 것이 아니라, 삶의 중심에서 하나님을 밀어내고, 하나님을 등 뒤에 버렸습니다. 그 결과는 무엇입니까? 예루살렘은 자신이 사랑하다가 미워한 대적의 손에 넘겨졌고, 스스로 붙잡았던 대상에게 심판을 당했습니다. 하나님을 떠나 세상 권세를 의지했던 것이 결국 심판의 도구로 돌아와 그들을 치게 된 것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무엇인가를 기억하고, 또 무엇인가를 잊으며 살아갑니다. 문제는 우리가 무엇을 기억하고, 무엇을 잊느냐입니다. 하나님을 잊는 순간, 우리의 마음은 반드시 다른 것을 기억합니다. 그것은 세상의 힘일 수도 있고, 눈앞의 성공과 쾌락일 수도 있습니다. 결국 하나님을 잊은 자리는 비어 있지 않습니다. 그 공백은 반드시 다른 무엇으로 채워지고, 그것이 심판의 도구로 변하게 됩니다.

    본문은 충격적인 장면으로 가득합니다. 예루살렘은 벌거벗김을 당하고, 귀와 코가 잘리며, 자녀들이 칼과 불에 사라집니다. 이는 단순히 잔혹한 묘사가 아니라, 하나님을 잊은 죄가 얼마나 무섭고 철저하게 심판받는지를 보여주는 상징입니다. 사람들은 죄를 감추려 하지만, 하나님은 반드시 드러내십니다. 은밀히 행했던 음행이 만천하에 폭로되고, 수치와 부끄러움이 드러나게 됩니다.

    이 모든 것의 핵심은 마지막 절에서 분명히 드러납니다. “네가 나를 잊었고, 나를 네 등 뒤에 버렸은즉, 너는 네 음란과 네 음행의 죄를 담당할지니라.” 결국 죄의 본질은 하나님을 잊는 데 있습니다. 그리고 그 잊음의 대가는 반드시 심판입니다.

    오늘 우리의 삶을 돌아보면 어떻습니까? 우리는 바쁘다는 이유로, 현실이 힘들다는 이유로, 하나님을 자주 잊습니다. 예배를 드리면서도 마음은 세상에 빼앗기고, 기도를 하면서도 하나님의 얼굴을 기억하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그렇게 하나님을 등 뒤로 밀어낸 순간, 우리는 예루살렘과 같은 길을 걷게 됩니다.

    그러므로 오늘 본문은 우리에게 무거운 질문을 던집니다. 나는 지금 누구를 기억하며 살고 있는가? 하나님을 기억하는 삶인가, 아니면 하나님을 잊고 세상의 힘을 붙잡는 삶인가? 하나님을 잊은 순간, 우리는 이미 심판의 길 위에 서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기억하는 순간, 우리는 은혜와 구원의 길 위에 서게 됩니다.

    본론ㅣ잊은 자에게 임하는 심판

    1. 심판의 도구가 되는 세상의 권세와 힘 (22–24절)

    하나님께서는 에스겔을 통해 예루살렘의 실체를 고발하시며, 심판의 도구가 어디서 오는지를 분명히 보여주십니다. 예루살렘은 한때 바벨론과 앗수르의 힘과 화려함에 매혹되었습니다. 그들의 강력한 군사력, 세련된 문화, 부와 영광은 예루살렘의 눈을 사로잡았고, 그들을 의지하면 자신들도 안전할 것이라는 헛된 확신을 주었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그 동맹은 예루살렘을 짓누르는 짐이 되었고, 결국 그들은 바벨론과 앗수르를 미워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바로 그들이 “사랑하다가 싫어하던 자들”을 충동하여 예루살렘을 치도록 하십니다. 하나님은 단순히 우연히 일어난 국제 정치적 사건을 설명하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주권 속에서 예루살렘이 붙잡았던 대상이 심판의 도구로 바뀐다는 원리를 선포하신 것입니다.

    “나는 네가 사랑하다가 싫어하던 자들을 충동하여 사방에서 와서 너를 치게 하리니”라는 말씀은 인간사의 역사를 움직이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보여줍니다. 예루살렘은 눈에 보이는 힘을 의지했지만, 하나님께서 그 힘을 돌려 세워 심판의 몽둥이로 삼으십니다. 우리가 붙잡는 것이 하나님이 아닐 때, 그것은 반드시 심판의 도구가 됩니다. 바벨론의 화려함은 결국 포위와 파괴의 병거로 돌아왔고, 앗수르의 위세는 무너뜨림의 창과 방패로 변했습니다.

    본문은 또 하나의 중요한 메시지를 전합니다. 하나님은 “내가 재판을 그들에게 맡긴즉 그들이 그들의 법대로 너를 재판하리라”(24절)고 하십니다. 이는 언약 백성으로서 하나님 안에서 보호받던 신분이 더 이상 유지되지 않음을 의미합니다. 예루살렘이 하나님을 버렸으므로, 하나님도 그들을 언약의 보호에서 내어버리십니다. 이제 예루살렘은 언약의 법이 아니라, 이방의 법정에 서서 심판을 받습니다. 하나님을 버린 순간, 백성은 더 이상 특별한 보호를 누리지 못하고, 세상의 질서와 가치 속에서 무참히 무너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것이야말로 가장 큰 비극이 아닐 수 없습니다.

    오늘 우리의 삶에도 동일한 경고가 주어집니다.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세상의 권세와 힘을 붙잡을 때, 바로 그것이 심판의 도구로 바뀔 수 있습니다. 돈을 붙잡으면 돈이 우리를 얽매는 채찍이 되고, 권력을 붙잡으면 권력이 무너짐의 원인이 되며, 인간의 관계를 붙잡으면 그 관계가 심판의 상처가 될 수 있습니다. 예루살렘이 붙잡았던 바벨론과 앗수르, 애굽. 이 모든 것이 결국 하나님이 사용하신 심판의 도구로 변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삶에서도 동일한 원리를 작동시키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기억하지 않고, 그분을 등 뒤에 버릴 때, 우리가 붙잡은 것들은 곧 우리를 벌거벗기고 조롱하는 심판의 도구가 됩니다. 이 사실은 우리로 하여금 무엇을 붙잡고 있는지를 깊이 돌아보게 합니다. 나는 지금 무엇을 의지하고 있는가? 하나님을 기억하고 붙잡는가, 아니면 세상의 힘과 지위를 붙잡는가?

    예루살렘은 하나님이 아닌 세상을 붙잡았기에 결국 세상 법정에서 심판을 당했습니다. 오늘날 교회와 성도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세상의 가치와 질서를 따라갈 때, 그것이 결국 우리를 재판하는 법정이 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잊은 자는 더 이상 하나님의 법 안에서 보호받지 못하고, 세상의 법에 따라 수치를 당하게 됩니다.

    이 본문은 우리에게 두 가지 중요한 교훈을 줍니다. 첫째, 하나님 외에 어떤 것도 붙잡아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붙잡는 순간, 그것은 우리의 심판의 도구가 될 수 있습니다. 둘째, 하나님을 기억하고 그분의 언약 안에 거할 때, 우리는 세상의 심판에서 자유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붙잡는 삶만이 진정한 안전과 평안을 보장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우리의 손에 무엇이 쥐어져 있습니까? 예루살렘처럼 세상의 힘을 붙잡고 있습니까? 아니면 하나님을 굳게 붙잡고 있습니까? 붙잡은 것이 곧 우리의 미래가 됩니다. 세상을 붙잡으면 세상이 심판의 도구로 변해 우리를 무너뜨릴 것이고, 하나님을 붙잡으면 하나님이 우리의 방패와 피난처가 되어 주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이 말씀 앞에서 하나님을 잊지 않고, 그분만을 굳게 붙잡는 결단이 필요합니다.

    2. 벌거벗김과 수치로 드러나는 죄의 결과 (25–30절)

    하나님은 예루살렘의 죄를 심판하실 때, 단순히 전쟁의 패배로 끝나게 하지 않으십니다. 그분의 질투는 구체적이고 철저하게 드러납니다. 본문 25절은 “내가 너를 향하여 질투하리니”라고 선언하며 시작합니다. 하나님의 질투는 인간의 질투와 다릅니다. 그것은 언약적 사랑에서 나오는 거룩한 열심입니다. 남편이 아내의 불륜을 목격했을 때 느끼는 배신의 고통과 분노를 떠올리면 됩니다. 예루살렘은 하나님의 신부로 불림받았지만, 이방을 사랑하고 우상을 좇는 배반을 일삼았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언약의 남편으로서 반드시 그 배반을 심판하십니다.

    그 심판의 모습은 끔찍합니다. 대적들은 예루살렘의 코와 귀를 잘라내고, 자녀들을 칼로 엎드러뜨리며, 남은 자들을 불에 사릅니다. 이는 단순한 육체적 파괴가 아니라, 존엄과 정체성의 완전한 상실을 상징합니다. 얼굴의 코와 귀는 존재의 표징인데, 그것이 잘린다는 것은 인간으로서의 존엄을 잃는 것을 의미합니다. 자녀들이 칼과 불에 사라지는 장면은 공동체의 미래 자체가 끊어지는 것을 뜻합니다. 결국 예루살렘의 현재와 미래, 존엄과 생명이 모두 파괴되는 것입니다.

    이어 26절은 “또 네 옷을 벗기며 네 장식품을 빼앗을지라”라고 선포합니다. 옷과 장식은 하나님께서 언약 백성에게 입혀주신 존귀의 상징이었습니다. 그러나 예루살렘은 그 옷과 장식을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데 쓰지 않고, 오히려 음행과 우상 숭배의 도구로 사용했습니다. 하나님은 그 모든 것을 거두시며, 벌거벗은 몸으로 수치를 드러내게 하십니다. 은혜를 은혜로 받지 못한 자는 결국 그것을 빼앗기게 됩니다.

    27절은 더욱 뿌리 깊은 문제를 건드립니다. 하나님은 “네 음란과 애굽 땅에서부터 행음하던 것을 그치게 하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예루살렘의 죄는 단순히 최근의 타락이 아니라, 애굽에서부터 배워온 오래된 습관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심판을 통해 그 뿌리 깊은 음행을 단절시키십니다. 다시는 애굽을 기억하지 못하게 하심으로써, 과거의 미련과 죄의 뿌리를 뽑아내십니다. 심판은 단순한 파괴가 아니라, 죄의 근원을 끊어내는 하나님의 철저한 손길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예루살렘은 여전히 고집을 꺾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28절에서 “네가 미워하는 자와 네 마음에 싫어하는 자의 손에 너를 붙이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아이러니하게도 예루살렘은 한때 사랑했던 바벨론을 미워하게 되었고, 부담스러워하며 등을 돌렸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바로 그 미워하는 자들의 손에 넘겨 심판을 집행하게 하십니다. 우리가 붙잡았던 것이 결국 심판의 도구가 되어 돌아오는 것입니다.

    29절은 예루살렘이 맞이할 치욕을 적나라하게 묘사합니다. “그들이 미워하는 마음으로 네게 행하여 네 모든 수고한 것을 빼앗고 너를 벌거벗은 몸으로 두어서 네 음행의 벗은 몸을 드러내리라.” 하나님을 잊고 세상에 바친 모든 수고는 결국 빼앗기고, 숨기고 싶던 음행과 부끄러움은 만천하에 드러납니다. 하나님을 떠난 수고는 헛수고가 되고, 죄는 반드시 폭로됩니다.

    마지막으로 30절은 심판의 원인을 분명히 밝힙니다. “네가 이같이 당할 것은 네가 음란하게 이방을 따르고 그 우상들로 더럽혔기 때문이로다.” 모든 심판은 결국 죄의 결과입니다. 하나님은 불공평하게 백성을 치신 것이 아니라, 그들이 선택한 길의 결말을 그대로 돌려주신 것입니다. 이방을 따르고 우상을 붙잡은 것이 바로 자신들을 더럽히고 파괴하는 원인이 되었습니다.

    이 모든 장면은 우리에게 중요한 교훈을 줍니다. 하나님을 잊은 죄는 반드시 벌거벗김으로 드러나고, 감추려 했던 수치는 만천하에 폭로됩니다. 죄는 결코 은밀히 끝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반드시 그 수고를 헛되게 하시고, 그 부끄러움을 드러내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버리고 세상을 붙잡을 때, 그것은 결국 우리를 심판하는 도구로 바뀌어 돌아옵니다.

    오늘 우리의 삶도 예루살렘과 다르지 않습니다. 하나님보다 세상의 힘을 붙잡을 때, 우리는 반드시 그 대가를 치르게 됩니다. 하나님을 잊고 살아온 모든 흔적은 결국 벌거벗김으로 드러나고, 우리의 수고는 빼앗기며, 미래는 끊어지는 아픔을 경험하게 됩니다. 그러나 이 말씀은 단순히 두려움만을 주지 않습니다. 심판을 통해 하나님은 죄의 뿌리를 끊으시고, 다시는 애굽을 기억하지 못하게 하시는 은혜를 베푸십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는 심판을 피하는 것이 아니라, 심판을 통해 정결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3. 죄의 대가, 심판의 잔 (31–35절)

    하나님께서는 예루살렘이 걸어간 길의 본질을 ‘네 형의 길을 따랐다’는 말로 요약하십니다(31절). 예루살렘은 북이스라엘 사마리아가 걸었던 동일한 죄의 길을 그대로 반복했습니다. 사마리아는 이미 앗수르에 의해 멸망했고, 그 멸망의 이유는 우상 숭배와 언약 배반이었습니다. 예루살렘은 그 멸망을 분명히 보았음에도 불구하고, 교훈을 얻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더 깊은 불순종으로 나아가 결국 사마리아가 마신 심판의 잔을 그대로 손에 쥐게 됩니다.

    하나님은 그 잔을 “깊고 크고 가득히 담긴 잔”으로 묘사하십니다(32절). 이는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무겁고 철저한 심판을 상징합니다. 잔은 단순한 음료 그릇이 아니라, 하나님의 분노와 공의를 담는 그릇입니다. 예루살렘은 그 잔을 마시며 코웃음과 조롱을 당하게 됩니다. 이는 단순히 패망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세상 앞에서 철저한 모욕과 수치를 당하는 상황을 뜻합니다. 한때 화려함과 권세를 자랑하던 도시가 이제는 비웃음과 멸시의 대상으로 전락하는 것입니다.

    33절은 더욱 충격적인 선언을 담습니다. 예루살렘이 마셔야 할 잔은 곧 “놀람과 패망의 잔”입니다. 놀람은 예상치 못한 충격과 두려움을 뜻하고, 패망은 완전한 붕괴를 의미합니다. 예루살렘은 자신들이 의지하던 세력에게 배신당하고, 스스로의 수고가 무너지는 놀람을 겪습니다. 그리고 그 결과는 회복 불가능한 패망이 됩니다. 하나님께서 내리시는 심판은 단순한 시련이 아니라, 죄의 본질을 드러내고 그것이 얼마나 무너뜨리는지 보여주는 철저한 파멸입니다.

    34절은 심판의 철저함을 더욱 강조합니다. 예루살렘은 잔을 다 기울여 마셔야 할 뿐 아니라, 그 깨어진 조각까지 씹어야 합니다. 이는 심판을 부분적으로만 경험하는 것이 아니라, 끝까지 철저하게 겪어야 함을 보여줍니다. 죄의 결과는 잠시 맛보고 끝나는 것이 아니라, 마지막 파편까지 삼켜야 하는 고통으로 이어집니다. 또한 “유방을 꼬집을 것”이라는 표현은 수치와 모욕을 상징합니다. 하나님을 배반한 자는 결국 존엄을 잃고 가장 깊은 수치 가운데 드러나게 됩니다.

    마지막 35절은 이 모든 심판의 이유를 근본적으로 밝힙니다. “네가 나를 잊었고, 나를 네 등 뒤에 버렸은즉 너는 네 음란과 네 음행의 죄를 담당할지니라.” 죄의 뿌리는 단순히 잘못된 행동이나 우상 숭배가 아니라, 하나님을 잊은 것입니다. 하나님을 잊는 순간, 사람은 반드시 다른 것을 붙잡습니다. 예루살렘은 하나님을 잊었기에 애굽을 그리워했고, 앗수르를 동경했으며, 바벨론을 의지했습니다. 그러나 그 모든 것들이 결국 심판의 도구가 되어 돌아왔습니다. 죄는 하나님을 잊는 순간부터 시작되며, 그 결과는 반드시 심판입니다.

    이 말씀은 오늘 우리 신앙에도 깊은 도전을 줍니다. 우리는 무엇을 잊고, 무엇을 기억하며 살아가고 있습니까? 하나님을 잊는 것은 단순히 예배를 드리지 않는 상태가 아닙니다. 예배를 드리면서도 마음이 세상에 빼앗길 때, 기도하면서도 하나님의 뜻보다 자신의 욕망을 붙잡을 때, 우리는 이미 하나님을 등 뒤로 버린 것입니다. 하나님을 잊은 삶은 결국 심판의 잔을 마시게 합니다.

    그러나 이 말씀은 동시에 우리를 복음으로 인도합니다. 예루살렘은 자기 죄를 스스로 담당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신약의 성도들에게는 소망이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 대신 그 심판의 잔을 마셔 주셨기 때문입니다. 십자가에서 그분은 “내 아버지여 할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라고 기도하셨으나, 결국 순종으로 그 잔을 마셨습니다. 우리가 마셔야 할 철저한 심판의 잔을 그리스도께서 대신 마심으로, 우리는 이제 구원의 잔을 들 수 있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이 말씀은 단순히 절망의 메시지가 아닙니다. 경고와 동시에 소망을 줍니다. 하나님을 잊으면 반드시 심판의 잔을 마셔야 하지만, 하나님을 기억하고 그리스도를 붙잡으면 우리는 구원의 잔을 들 수 있습니다. 오늘 이 본문 앞에서 우리는 결단해야 합니다. 나는 하나님을 잊고 심판의 잔을 마실 것인가, 아니면 하나님을 기억하며 그리스도의 은혜로 구원의 잔을 들 것인가? 선택은 분명합니다. 하나님을 기억하는 삶이 곧 생명이며, 그 기억이 심판을 넘어 구원으로 우리를 인도합니다.

    결론 | 하나님을 기억함이 구원 길입니다.

    오늘 본문은 무겁고 두려운 심판의 메시지로 가득 차 있습니다. 예루살렘은 자신이 사랑하다가 미워한 대적에게 넘겨졌고, 결국 그들의 손에 의해 벌거벗김을 당하며 수치를 드러냈습니다. 그들이 한때 매혹되었던 바벨론, 앗수르, 애굽은 심판의 도구로 돌변했습니다. 하나님은 예루살렘이 스스로 선택한 길을 그대로 심판의 결과로 돌려주셨습니다. 그들이 붙잡았던 것들이 결국 자신들을 파괴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 모든 이유는 단순히 행동의 문제가 아니라, “네가 나를 잊었고 나를 네 등 뒤에 버렸다”라는 하나님 말씀에 요약됩니다. 죄의 뿌리는 바로 하나님을 잊는 데 있었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깊은 질문을 던지지 않을 수 없습니다. 나는 오늘 누구를 기억하며 살아가고 있는가? 하나님을 기억하는가, 아니면 하나님을 등 뒤에 버린 채 세상의 힘과 가치를 붙잡고 있는가? 예루살렘은 하나님을 잊고 세상을 기억했습니다. 그 결과는 수치와 멸망, 그리고 심판의 잔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기억하는 사람에게는 심판의 잔이 아니라, 구원의 잔이 주어집니다.

    십자가에서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가 마셔야 할 심판의 잔을 대신 드셨습니다. “아버지여 할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라고 기도하셨지만, 결국 순종으로 그 잔을 다 마셨습니다. 예루살렘이 한 방울도 남기지 않고 마셔야 했던 그 심판의 잔을 주님이 대신 마심으로, 이제 우리는 새로운 잔을 들 수 있게 되었습니다. 시편 116편에서 고백한 것처럼, “내가 구원의 잔을 들고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리로다.” 하나님을 잊은 자는 심판의 잔을 들지만, 하나님을 기억하는 자는 구원의 잔을 듭니다.

    그러므로 오늘 본문은 단순한 두려움의 메시지가 아니라, 선택의 메시지입니다. 우리는 날마다 하나님을 기억하는 삶으로 부름받았습니다. 기억은 단순한 회상이 아니라, 관계의 중심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을 기억한다는 것은 그분을 삶의 우선순위에 두고, 그분의 말씀과 은혜를 붙잡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기억할 때, 우리의 수고는 빼앗기지 않고, 우리의 삶은 벌거벗김이 아닌 존귀로 세워집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하루를 살아가며 무엇을 기억하겠습니까? 세상의 불안과 욕망입니까, 아니면 우리를 구원하신 하나님의 은혜입니까? 예루살렘은 하나님을 잊은 대가로 심판의 잔을 마셨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을 기억할 때, 구원의 잔을 들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이미 심판의 잔은 마셔졌고, 우리에게는 감사와 구원의 잔이 남아 있습니다.

    오늘 이 말씀 앞에서 결단합시다. 하나님을 잊지 않고, 그분을 늘 기억하며 살아가기로. 세상의 화려함과 두려움에 마음을 빼앗기지 않고, 하나님만을 붙잡기로. 그때 우리의 삶은 심판의 길이 아니라 구원의 길로 나아가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을 기억하는 것이 곧 구원입니다. 오늘도 그 하나님을 기억하는 믿음의 걸음을 걸어가기를 소망합니다.


    [23장 22절-35절 본문 연구 및 주석]

    📖 본문 배경

    ❖ 개요

    에스겔 23장 22–35절은 예루살렘, 곧 오홀리바를 향한 하나님의 심판 선언이 집중적으로 드러나는 대목입니다. 앞선 1–21절에서는 두 여인, 오홀라(사마리아)와 오홀리바(예루살렘)의 영적 음행과 배신이 병렬적으로 묘사되었습니다. 오홀라는 앗수르와 관계를 맺다가 멸망했고, 오홀리바는 언니의 타락을 목격하고도 돌이키지 않고 오히려 더 심각한 음행에 빠져 바벨론과 애굽을 동경했습니다. 이제 22절 이하의 말씀은 예루살렘이 불가피하게 당하게 될 구체적 심판을 선언하며, 하나님께서 그들의 선택과 결과를 어떻게 돌려주시는지를 보여줍니다.

    본문은 매우 생생하고 노골적인 언어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예루살렘은 자신이 사랑하다가 미워하게 된 바벨론과 그 동맹자들에게 포위당하고, 그들로부터 철저히 짓밟히게 됩니다. 특히 묘사되는 형벌은 단순한 전쟁 피해가 아니라 공동체의 존엄과 정체성이 완전히 무너지는 수치의 언어들입니다. “코와 귀를 자른다”는 형벌은 고대 근동 사회에서 반역자에게 가해지는 잔혹한 처벌로, 단순한 육체의 고통이 아니라 사회적 수치와 영구적인 낙인을 의미했습니다. 또한 자녀를 빼앗기고 불태운다는 표현은, 단순히 가족의 고통을 넘어 미래 세대와 공동체의 희망이 송두리째 파괴됨을 상징합니다. 결국 예루살렘은 벌거벗겨져 그동안 감추었던 음행이 만천하에 드러나고, 자신이 택한 길의 결과를 고스란히 마주하게 됩니다.

    이 심판은 단순한 사건이 아니라 하나님의 공의가 드러나는 방식입니다. 하나님은 예루살렘이 의지했던 이방 나라들, 곧 자신이 매혹되어 동맹을 맺었던 대상들을 심판의 도구로 사용하십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역사의 주권자이심을 보여주는 중요한 장면입니다. 인간의 눈에는 바벨론이 스스로의 힘으로 예루살렘을 치는 것처럼 보이지만, 영적 관점에서 보면 그 모든 일이 하나님의 주권적 허락 아래서 일어나고 있습니다. 즉, 하나님은 그들이 사랑했던 대상이 결국 자신들의 파멸을 가져오는 심판자로 변모하게 하시는 역설적 상황을 허락하신 것입니다.

    본문의 중반부(31–34절)는 심판을 ‘잔’의 이미지로 표현합니다. 예루살렘은 언니 사마리아의 길을 그대로 따라갔기에, 동일한 ‘심판의 잔’을 받아 마셔야 합니다. 성경에서 ‘잔’은 흔히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을 상징합니다. 시편 75편 8절에서는 “여호와의 손에 잔이 있어 술이 거품치며 속에 섞인 것이 가득하니 여호와께서 그것을 쏟아 내시되 지상의 모든 악인이 기울여 마시리로다”라고 선포합니다. 이사야 51장 17절에서도 예루살렘이 “여호와의 손에서 그 분노의 잔을 마셨다”라고 묘사됩니다. 따라서 ‘잔’은 단순한 비유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죄에 대한 대가를 반드시 돌려주신다는 엄중한 상징입니다. 예루살렘은 사마리아가 이미 마신 심판의 잔을 피할 수 없으며, 오히려 더 깊고 크고 가득한 잔을 끝까지 마셔야 한다는 선언은 죄악의 결과가 얼마나 철저히 갚아지는지를 보여줍니다.

    본문의 결론부(35절)는 심판의 근본 이유를 분명하게 밝힙니다. “네가 나를 잊었고 또 나를 네 등 뒤에 버렸은즉 너는 네 음란과 네 음행의 죄를 담당할지니라.” 결국 예루살렘의 문제의 핵심은 단순히 우상숭배나 외교적 실패가 아닙니다. 그 뿌리는 하나님을 잊은 데 있었습니다. 하나님을 잊었기에 이방을 사모했고, 하나님을 등 뒤에 버렸기에 세상의 힘을 붙잡았습니다. 그러므로 죄의 본질은 하나님을 기억하지 않는 데서 비롯됩니다. 그 결과는 반드시 멸망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따라서 본문의 개요는 이렇게 정리할 수 있습니다. 에스겔 23장 22–35절은 예루살렘의 불순종이 어떤 구체적인 심판으로 이어지는지를 보여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그들의 죄를 외면하지 않으시며, 그들이 스스로 선택한 길을 심판의 도구로 사용하십니다. 예루살렘은 사마리아의 길을 답습했고, 결국 동일한 잔을 마시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을 잊는 죄는 가장 치명적인 배신이며, 언약을 버린 대가는 반드시 돌아옵니다. 그러나 동시에 이 말씀은 우리로 하여금 그리스도를 바라보게 합니다. 예루살렘이 마신 심판의 잔을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대신 마셔주셨기에, 오늘 우리는 다시금 구원의 잔을 마실 수 있게 된 것입니다.


    ❖ 역사적 배경

    본문은 예루살렘이 걸어간 역사적 선택의 결과가 얼마나 비극적이었는지를 보여주는 말씀입니다. 본문이 선포된 시기는 대략 주전 591년경, 즉 시드기야 왕의 통치 기간으로 추정됩니다. 이미 예루살렘은 바벨론에 두 차례 포로로 끌려간 경험이 있었고(597년, 605년), 에스겔 자신도 그 포로 무리에 속해 있었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예루살렘은 멸망하기 전이었으며, 마지막 기회를 붙잡을 수도 있었던 상황이었습니다. 하지만 본문이 보여주듯 남유다는 하나님의 경고를 외면하고, 오히려 더 심각한 음행의 길로 나아갔습니다.

    먼저 역사적 맥락을 살펴보면, 북이스라엘 왕국은 주전 722년 앗수르의 공격으로 사마리아가 함락되면서 이미 멸망했습니다. 이는 남유다에게 분명한 경고가 되어야 했습니다. 오홀라(사마리아)의 멸망은 단순한 정치적 사건이 아니라, 하나님을 버리고 이방 열강을 의지한 결과였습니다. 그러나 예루살렘은 이 사건에서 아무런 교훈을 얻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언니의 길을 따라갔다”는 본문 말씀처럼, 북왕국의 죄를 반복하며 더 깊은 불순종에 빠져들었습니다.

    특히 시드기야 왕의 시대는 남유다 역사에서 가장 위태로운 시기였습니다. 그는 원래 바벨론의 꼭두각시 왕으로 세워졌습니다. 바벨론은 유다의 정치적 충성을 확보하기 위해 시드기야를 왕으로 임명했지만, 시드기야는 바벨론의 압박에 불만을 품고 애굽과 동맹을 맺으려는 시도를 했습니다. 이는 바벨론의 신뢰를 무너뜨리는 행위였으며, 동시에 하나님이 예레미야와 에스겔을 통해 반복해서 경고하셨던 길이기도 했습니다. 하나님은 예루살렘이 바벨론에 항복하고 그 징계를 겸허히 받아들이라고 말씀하셨지만(렘 27:12–17), 예루살렘은 이를 거부하고 오히려 정치적 술수를 통해 위기를 모면하려 했습니다.

    본문에서 “바벨론 사람과 갈대아 모든 무리, 브곳과 소아와 고아 사람”이 언급되는데, 이는 실제로 바벨론 제국을 구성한 다양한 민족들을 가리킵니다. 바벨론 제국은 단일 민족이 아니라 여러 속국과 동맹으로 이루어진 다민족 제국이었습니다. 따라서 이 표현은 단순히 군사적 다수성을 강조하는 것이 아니라, 예루살렘이 의지했던 세력이 곧 그들을 짓밟는 연합 군대로 변모하게 될 것을 예고합니다. 역사적으로 주전 588–586년 바벨론의 네부카드네살은 예루살렘을 포위했고, 약 2년간의 긴 포위를 거쳐 결국 성을 함락시켰습니다. 그 과정에서 성전은 불타고, 백성들은 칼에 쓰러지거나 포로로 잡혀갔습니다. 본문은 바로 그 상황을 영적으로 해석하며, 하나님의 심판으로 드러내고 있는 것입니다.

    또한 본문에 나오는 형벌 묘사—코와 귀를 자르고, 자녀를 빼앗고, 옷과 장식을 빼앗는 장면—은 실제로 고대 근동에서 반역자나 패배한 왕에게 가해지던 처벌을 반영합니다. 앗수르와 바벨론은 종종 반란을 일으킨 속국의 왕이나 지도자들의 코나 귀를 잘라 치욕을 안겼고, 그들의 자녀를 포로로 삼아 인질로 데려갔습니다. 따라서 이 말씀은 단순한 비유가 아니라, 당시 청중이 너무나 잘 알던 역사적 현실과 직결된 표현입니다.

    역사적 배경 속에서 중요한 또 하나의 요소는 애굽입니다. 본문 27절에서 하나님은 “네가 애굽 땅에서부터 행음하던 것을 그치게 하겠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이는 단순히 영적 은유가 아니라, 남유다가 애굽과 정치적·군사적 동맹을 맺으려 했던 실제 상황을 가리킵니다. 시드기야는 바벨론을 거슬러 애굽을 의지하려 했지만, 애굽은 결국 예루살렘을 구원하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그 동맹은 바벨론의 분노를 더욱 불러일으켰고, 예루살렘을 멸망으로 내몬 결정적 계기가 되었습니다.

    따라서 본문은 단순히 예루살렘의 도덕적 타락을 고발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실제 역사 속에서 반복된 불순종과 잘못된 선택을 영적으로 해석한 말씀입니다. 사마리아가 이미 무너졌음에도 불구하고, 예루살렘은 그 길을 똑같이 걸어갔습니다. 그리고 결국 같은 심판을 피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결론적으로 역사적 배경은 이렇게 요약할 수 있습니다. 본문은 단순한 환상이 아니라, 실제 역사적 현실과 맞물려 있습니다. 남유다는 애굽과 바벨론 사이에서 흔들리며 하나님 대신 열강을 의지했고, 그 결과 자신이 의지하던 바로 그 열강에게 무너졌습니다. 하나님은 역사의 주인이시며, 그분의 말씀은 결코 헛되지 않습니다. 예루살렘의 멸망은 인간의 정치적 실패가 아니라, 하나님의 언약을 배신한 역사적 결과이자, 하나님의 주권적 심판의 성취였습니다.


    ❖ 문화적 배경

    에스겔 23장 22–35절은 단순히 영적인 메시지만 담고 있는 것이 아니라, 고대 근동 사회의 문화와 관습을 깊이 반영하고 있습니다. 본문에 나타나는 여러 은유와 상징들은 당시 청중이 곧바로 이해할 수 있는 사회적·문화적 코드였으며,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죄악을 폭로하시기 위해 그들이 익히 아는 언어와 이미지를 사용하신 것입니다.

    무엇보다 본문에서 반복되는 “음행”과 “간음”의 은유는 고대 사회에서 정치적 동맹과 외교적 관계를 설명할 때 흔히 사용되던 언어입니다. 결혼은 단순히 두 개인의 사적인 관계를 넘어, 두 집단이나 국가가 언약을 맺는 가장 강력한 상징이었습니다. 따라서 남유다가 바벨론이나 애굽과 맺은 동맹은 하나님과의 언약을 깨뜨리고 다른 “남편”을 맞이한 배신으로 비유될 수 있었습니다. 청중은 이 표현을 단순한 외설적 수사로 듣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곧바로 하나님과의 언약 관계에서 벗어난 영적 간음을 뜻했으며, 신실해야 할 아내가 남편을 버리고 다른 이와 몸을 섞는 극단적인 배신의 모습으로 이해되었습니다.

    본문 23절에서는 바벨론과 갈대아의 무리뿐 아니라 브곳, 소아, 고아 사람들과 함께 앗수르 사람들까지 언급됩니다. 이 묘사는 단순히 지리적 이름의 나열이 아니라, 바벨론 제국을 구성하는 다민족의 성격을 드러내는 동시에, 예루살렘이 얼마나 다양한 열강의 매혹에 끌려갔는지를 강조합니다. 흥미로운 점은 이들을 “준수한 청년이며 다 고관과 감독이며 귀인과 유명한 자요 다 말 타는 자들”이라고 묘사했다는 점입니다. 고대 근동에서 말과 병거를 소유한 자는 곧 군사적 권력과 화려한 지위를 상징했습니다. 즉, 예루살렘은 그들의 외모적 매력이나 권세의 상징에 매혹되어 그들을 의지했습니다. 이는 단순히 정치적 선택이 아니라, 인간적 욕망과 영적 허영이 결합된 타락을 드러내는 문화적 장치였습니다.

    또한 본문 25–26절에서 묘사되는 수치의 장면은 고대 사회에서 반역자나 죄인에게 가해지던 실제 관습을 반영합니다. 고대 근동에서 신체 일부를 절단하는 것은 단순한 고문이 아니라, 평생 지워지지 않는 낙인을 남기는 수치의 형벌이었습니다. 귀와 코는 인간의 외모에서 가장 눈에 띄는 부분으로, 그것을 잘라내는 것은 한 사람의 사회적 정체성과 존엄을 철저히 무너뜨리는 행위였습니다. 이는 곧 예루살렘이 더 이상 존귀한 하나님의 백성으로 불릴 수 없고, 열방 앞에서 완전히 수치를 당하게 될 것을 보여주는 강렬한 문화적 이미지였습니다.

    본문에 반복해서 등장하는 “벌거벗김”의 장면 역시 중요한 문화적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고대 사회에서 옷은 단순한 의복이 아니라, 신분과 지위를 드러내는 상징이었습니다. 왕과 제사장은 화려한 옷과 장식을 통해 자신들의 권위를 나타냈습니다. 따라서 옷을 벗겨지고 장식품을 빼앗기는 것은 단순한 약탈이 아니라, 한 사람 혹은 공동체의 정체성과 권위를 완전히 빼앗기는 수치를 의미합니다. 예루살렘은 하나님이 입혀주신 영광의 옷을 버리고 이방의 장식품을 탐하다가, 결국 모든 것을 빼앗기고 벌거벗은 수치로 드러나게 되는 것입니다.

    32절 이하에서 사용된 “잔”의 이미지는 문화적 배경에서 더욱 중요합니다. 고대 근동에서 잔은 단순히 음료를 담는 그릇이 아니라, 종교적·상징적 의미를 가진 도구였습니다. 연회에서 잔은 기쁨과 축복을 나누는 수단이었지만, 동시에 신들의 진노나 저주를 상징하는 도구로도 사용되었습니다. 성경에서도 ‘잔’은 자주 심판의 은유로 등장합니다. 예레미야 25장 15–16절에서 하나님은 “내 손에서 분노의 잔을 받아 마시게 하라”고 하시며, 열국이 그 잔을 마시고 비틀거릴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에스겔 23장의 ‘잔’은 바로 이 전통을 이어받아, 예루살렘이 언니 사마리아가 이미 마신 심판의 잔을 끝까지 마시게 될 것을 보여줍니다. “깊고 크고 가득한 잔”은 심판이 부분적이거나 일시적이지 않고, 철저하며 피할 수 없다는 것을 강조하는 표현입니다.

    특히 “그 잔을 다 기울여 마시고, 그 깨어진 조각을 씹는다”는 묘사는 당시 사람들이 가진 술잔의 문화적 경험을 배경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고대인들은 잔을 비운 후 그 바닥에 남은 찌꺼기까지 마시는 행위를 최후의 만족 혹은 최후의 심판으로 여겼습니다. 그러나 여기서는 긍정적 의미가 아니라, 철저히 심판을 끝까지 경험해야 하는 처절한 상황을 의미합니다. 조각을 씹는다는 표현은 심판이 단순히 ‘마시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파괴된 잔의 파편처럼 아픔과 고통이 몸을 찌르고 남을 때까지 계속된다는 강렬한 은유입니다.

    문화적 배경 속에서 중요한 또 하나의 요소는 “유방을 꼬집는다”는 표현입니다(34절). 이는 단순히 외설적인 언어가 아니라, 고대 사회에서 음녀나 죄인의 수치를 드러내는 가장 노골적인 방식 중 하나였습니다. 여인의 가슴은 생명과 양육의 상징이었으나, 그것이 조롱과 학대의 대상이 된다는 것은 생명 자체가 모욕당하고 조롱받는 상황을 드러냅니다. 이처럼 에스겔은 당시 사회에서 가장 수치스럽고 모욕적인 이미지를 차용하여, 예루살렘이 맞게 될 멸망의 모습을 극적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본문 22–35절의 문화적 배경은,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불순종을 고발하시기 위해 당대 사람들이 가장 익숙하게 알고 있던 사회적·문화적 상징들을 사용하신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결혼과 음행, 벌거벗김과 장식의 박탈, 잔과 조롱, 그리고 신체 훼손과 수치의 이미지는 단순한 수사가 아니라 당시 청중의 피부에 와 닿는 실감나는 언어였습니다. 하나님은 백성이 하나님의 언약을 버리고 세상을 좇을 때, 그 끝은 화려함과 영광이 아니라 수치와 멸망뿐임을 이 문화적 배경 속에서 선명히 드러내셨습니다.


    ❖ 신학적 배경

    오늘 본문의 신학적 배경은 크게 네 가지 축을 중심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곧 언약의 파기, 하나님의 질투와 공의, 심판의 불가피성과 보편성, 그리고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될 새로운 언약입니다. 본문은 단순히 예루살렘의 정치적 실패나 역사적 멸망을 기록한 것이 아니라, 그 사건 이면에서 일하시는 하나님의 성품과 언약적 원리를 드러내는 말씀입니다.

    첫째, 언약의 파기와 영적 간음의 문제입니다. 에스겔서는 일관되게 이스라엘의 죄를 “음행”으로 묘사합니다. 이는 단순히 성적인 문란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언약 관계를 파기하고 이방 신들과 열강을 의지한 영적 배신을 뜻합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신부”로 삼으셨고(호 2:19–20), 언약을 통해 그들과 결혼 관계와 같은 친밀하고 배타적인 관계를 맺으셨습니다. 그러나 예루살렘은 바벨론과 애굽을 남편 삼고, 그들의 힘과 화려함을 동경했습니다. 이 행위는 언약의 신실성을 저버린 중대한 반역이었고, 신학적으로 볼 때 단순한 정치적 실수나 외교적 판단 오류가 아니라 “하나님을 버린 죄”라는 본질적 문제였습니다.

    둘째, 하나님의 질투와 거룩하신 성품입니다. 본문 25절에서 하나님은 “내가 너를 향하여 질투하리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서의 “질투”(qinaʾ, 히브리어)는 단순히 감정적 분노를 뜻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는 언약적 사랑에서 비롯된 거룩한 열심을 가리킵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이 다른 신을 섬기거나 이방 권세를 의지하는 것을 결코 용납하지 않으십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단순한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언약을 파기하고 다른 남편을 맞이하는 불륜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질투는 사랑의 반대가 아니라, 사랑의 깊이를 드러내는 다른 표현입니다. 사랑하기에 배신에 분노하시고, 사랑하기에 음행을 심판하시는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질투는 그분의 거룩과 언약적 신실성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셋째, 심판의 불가피성과 보편성입니다. 본문은 예루살렘이 언니 사마리아의 길을 걸었기에, 동일한 심판의 잔을 마실 수밖에 없음을 보여줍니다. 31절에서 하나님은 “네가 네 형의 길로 행하였은즉 내가 그의 잔을 네 손에 주리라”라고 선언하십니다. 여기서 “형의 길”은 북왕국 사마리아가 걸었던 우상 숭배와 이방 의존의 길을 가리킵니다. 북왕국은 앗수르와의 동맹 속에서 멸망을 자초했고, 남왕국은 바벨론과 애굽을 의지하다가 동일한 멸망을 맞이하게 됩니다. 성경은 일관되게 죄의 결과로 심판이 따른다는 원리를 가르칩니다(롬 6:23). 따라서 심판은 우연이 아니라, 하나님의 공의로운 법칙이 역사 속에서 실현되는 사건입니다. 더 나아가 심판은 보편적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이라 할지라도 언약을 깨뜨리면 예외가 될 수 없습니다. 이는 신학적으로 하나님의 거룩과 공의가 특정 민족이나 개인의 특권을 넘어 모든 이에게 동일하게 적용된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넷째, 하나님을 잊은 죄의 본질입니다. 본문 35절은 심판의 이유를 이렇게 요약합니다. “네가 나를 잊었고 또 나를 네 등 뒤에 버렸은즉 너는 네 음란과 네 음행의 죄를 담당할지니라.” 결국 모든 죄의 뿌리는 하나님을 잊는 데 있습니다. 하나님을 기억하지 않으니, 다른 신을 찾고, 세상의 힘을 의지하게 됩니다. 하나님을 등 뒤로 버린다는 것은 단순히 무관심이 아니라, 의도적으로 하나님을 밀어내고 다른 것을 삶의 중심에 세우는 것입니다. 성경은 “여호와를 기억하라”(신 8:18)고 반복해서 명령합니다. 기억은 곧 신앙의 핵심입니다. 하나님을 기억할 때 언약에 신실할 수 있고, 하나님을 잊을 때 언약을 배반하게 됩니다. 따라서 신학적으로 예루살렘의 멸망은 단순히 역사적 사건이 아니라, 하나님을 잊은 신앙적 결과였습니다.

    다섯째, 잔의 신학적 의미입니다. 본문에서 등장하는 “깊고 크고 가득한 잔”은 하나님의 심판의 도구입니다. 성경에서 “잔”은 종종 하나님의 진노를 상징합니다. 시편 75편 8절, 이사야 51장 17절, 예레미야 25장 15절 등에서 하나님은 열방에게 분노의 잔을 마시게 하십니다. 이 잔은 단순한 징계가 아니라, 끝까지 마셔야 하는 철저한 심판을 의미합니다. 예루살렘이 마셔야 할 잔은 사마리아가 이미 마신 잔과 동일하지만, 더 깊고 더 가득한 잔입니다. 이는 죄의 반복이 죄의 심화를 낳고, 더 큰 심판을 불러온다는 신학적 원리를 드러냅니다. 하나님은 결코 죄를 눈감아주지 않으시며, 반드시 그 대가를 치르게 하십니다.

    여섯째, 그리스도 안에서의 성취입니다. 본문은 결국 우리를 십자가로 이끕니다. 인간은 본질적으로 하나님을 잊고, 언약을 배반하며, 심판의 잔을 마셔야 할 운명에 놓여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께서 겟세마네 동산에서 “아버지여,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마 26:39)라고 기도하셨습니다. 주님은 결국 십자가에서 하나님의 진노의 잔을 끝까지 마셔주셨습니다. 우리가 마셔야 할 심판의 잔을 대신 드심으로, 이제 우리는 심판의 잔이 아니라 구원의 잔을 마시게 되었습니다(시 116:13). 따라서 에스겔 23장의 심판 언어는 단순한 과거의 경고가 아니라, 장차 오실 메시아 안에서 성취될 구속의 예표이기도 합니다.

    마지막으로, 이 본문은 오늘날 교회와 신자들에게 중요한 신학적 경고를 던집니다. 하나님을 잊고 세상 권세와 화려함을 좇는 것은 곧 영적 간음입니다. 교회가 세상적 성공과 정치적 힘을 의지할 때, 예루살렘과 동일한 길을 걸을 수 있습니다. 따라서 신학적으로 이 말씀은 우리에게 “오직 하나님만 의지하라, 언약의 신실함을 지켜라”는 강력한 요청입니다. 동시에 그리스도 안에서 이미 완성된 구속의 은혜를 붙잡으라는 초대입니다.


    📖 본문 요약

    ❖ 단락 구분

    22–24절 | 오홀리바를 치러 오는 열강의 군대

    하나님은 예루살렘(오홀리바)이 의지하고 사랑하다가 결국 싫어하게 된 자들, 곧 바벨론과 갈대아 무리, 브곳, 소아, 고아 사람들과 더불어 앗수르 사람들까지 충동하셔서 예루살렘을 치게 하신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들은 모두 젊고 준수한 자들이며, 고관과 귀인, 명망 있는 자들로서 말과 병거, 무기와 방패, 수레를 거느린 강대한 군대입니다. 그들이 예루살렘을 사방에서 포위할 것이며, 하나님은 재판을 그들에게 맡기셔서 그들의 법대로 예루살렘을 심판하게 하십니다. 이는 예루살렘이 매혹되어 따라갔던 열강들이 결국 자신을 멸망시키는 도구가 되는 역설적 장면입니다.

    25–27절 | 치욕과 수탈을 당하는 예루살렘

    하나님의 질투로 인해 예루살렘은 열강의 분노를 직면합니다. 그들은 예루살렘의 코와 귀를 잘라내어 수치를 안기고, 자녀들을 칼로 죽이며, 남은 자들은 불에 사릅니다. 또한 그들의 화려한 옷을 벗기고 장식품을 빼앗아, 더 이상 존귀한 하나님의 백성으로 불리지 못하게 합니다. 하나님은 이 과정을 통해 애굽 땅에서부터 이어온 오홀리바의 음행을 끊어내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예루살렘은 이제 애굽을 다시는 그리워하거나 바라볼 수 없게 되며, 오래된 정욕의 습관이 단절됩니다.

    28–30절 | 미워하는 자들의 손에 넘겨짐

    하나님은 예루살렘을 그녀가 미워하고 싫어하는 자들의 손에 넘기십니다. 그들은 미움의 마음으로 예루살렘을 대하며, 모든 수고의 열매를 빼앗고, 벌거벗겨 그 음행을 드러냅니다. 예루살렘의 수치와 부끄러움은 온 세상 앞에 폭로되며, 이는 단순한 전쟁 피해가 아니라 영적 간음의 결과임이 강조됩니다. 그들이 이러한 수치를 당하는 이유는 곧 이방을 따르고 우상으로 자신을 더럽혔기 때문입니다. 결국 하나님을 버리고 세상과 우상에 자신을 내어준 죄가 그대로 되돌아와 심판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31–34절 | 사마리아의 잔을 마시는 예루살렘

    예루살렘은 언니 사마리아의 길을 따라갔기에, 동일한 심판의 잔을 받게 됩니다. 하나님은 “깊고 크고 가득한 잔”을 그녀의 손에 주시며, 예루살렘이 그것을 끝까지 마실 것이라고 선언하십니다. 이 잔은 놀람과 패망의 잔으로, 마시는 자는 코웃음과 조롱을 당하고, 근심과 취함으로 무너집니다. 예루살렘은 잔을 다 비울 뿐 아니라, 그 깨어진 조각까지 씹어야 하는 철저한 심판을 경험합니다. 심지어 유방이 꼬집히는 치욕을 당하며, 하나님께서 친히 말씀하셨기에 그 누구도 피할 수 없는 상황이 됩니다.

    35절 | 하나님을 잊은 죄의 결론

    하나님은 심판의 근본 이유를 밝히십니다. 예루살렘은 하나님을 잊었고, 하나님을 등 뒤에 버렸습니다. 언약의 하나님을 잊고 다른 신들과 이방을 붙잡은 것이 모든 죄의 뿌리였습니다. 그 결과 예루살렘은 자신의 음란과 음행의 죄를 담당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최종적이며, 백성이 피할 수 없는 심판의 결론을 드러냅니다.


    ❖ 내용 요약

    에스겔 23장 22–35절은 예루살렘(오홀리바)이 걸어간 불순종의 길이 어떤 최종적인 결말을 맞이하게 되는지를 구체적이고 충격적으로 보여줍니다. 하나님은 예루살렘이 그토록 사랑하고 의지하던 바벨론과 그 동맹 세력들을 도구 삼아 그녀를 치게 하십니다. 예루살렘은 처음에는 바벨론의 화려한 군사력과 젊고 준수한 귀인들의 모습을 동경하며 그들과 관계를 맺었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그들을 싫어하게 되었고, 정치적으로도 배신과 변심을 반복했습니다. 하나님은 바로 그 대상들을 다시 불러내셔서 예루살렘을 치게 하십니다. 이것은 인간의 관점에서는 단순한 국제 정세의 변화처럼 보이지만, 영적 차원에서는 하나님의 주권적 섭리 가운데 이루어지는 심판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의 재판을 맡기셨기에, 예루살렘은 그들의 법과 관습에 따라 가차 없이 심판을 당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질투는 열강의 분노로具현化됩니다. 예루살렘은 코와 귀가 잘리는 수치와 함께, 자녀를 빼앗겨 칼에 쓰러지고 불에 태워지는 참혹한 경험을 하게 됩니다. 이는 단순히 전쟁 피해가 아니라, 공동체의 존엄과 미래가 송두리째 파괴되는 상징적 장면입니다. 또한 화려하게 차려입었던 옷과 장식품은 모조리 빼앗기고, 결국 벌거벗은 몸으로 수치를 당하게 됩니다. 하나님은 이를 통해 애굽에서부터 이어온 음행의 습관을 철저히 끊어내십니다. 예루살렘은 어린 시절부터 애굽의 정욕을 배웠고, 성인이 된 후에도 그 유혹을 반복적으로 그리워했습니다. 그러나 심판의 과정 속에서 하나님은 그들이 더 이상 애굽을 바라보지 못하게 하시고, 과거에 집착했던 음행의 근원을 잘라내십니다.

    예루살렘은 자신이 미워하고 싫어하던 자들의 손에 넘겨집니다. 이는 심판의 아이러니입니다. 자신이 사랑하다가 싫어하게 된 대상, 한때 의지했으나 결국 멀리하려 했던 열강이 이제는 미움으로 가득 차 예루살렘을 짓밟습니다. 그들은 모든 수고와 열매를 빼앗고, 예루살렘을 벌거벗겨 온 세상 앞에 수치를 드러냅니다. 음행의 흔적과 부끄러움이 만천하에 드러나게 된 것입니다. 이것은 단순한 외교적 실패가 아니라, 하나님을 잊고 우상을 좇은 결과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는 네가 음란하게 이방을 따르고 그 우상들로 더럽혔기 때문이다”(30절)라고 말씀하시는 것처럼, 죄의 본질은 세상과 우상에 몸을 내어준 영적 간음이었습니다.

    이어 하나님은 예루살렘이 언니 사마리아의 길을 그대로 따라갔음을 지적하시며, 동일한 심판의 잔을 그녀의 손에 쥐어주십니다. 이 잔은 “깊고 크고 가득한 잔”으로, 단순히 한 모금 마시는 정도가 아니라 끝까지 비워내야 하는 철저한 심판을 의미합니다. 예루살렘은 그 잔을 마시고 조롱과 수치를 당하며, 취하여 비틀거리고 근심 속에 무너집니다. 더욱이 “그 깨어진 조각을 씹는다”는 표현은, 심판이 일회성 고통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 잔해조차 삼켜야 하는 철저하고 끝까지 따라오는 심판임을 보여줍니다. 심지어 “유방을 꼬집는다”는 표현은 당시 사회에서 가장 모욕적인 수치의 상징으로, 생명과 양육의 상징이 조롱과 학대의 대상으로 전락했음을 드러냅니다. 이는 하나님을 배신한 언약 백성이 맞게 될 가장 치욕적인 결말을 극적으로 보여줍니다.

    마지막으로 본문은 죄의 근원을 분명히 드러냅니다. 35절에서 하나님은 예루살렘의 모든 문제를 이렇게 요약하십니다. “네가 나를 잊었고, 또 나를 네 등 뒤에 버렸은즉, 너는 네 음란과 네 음행의 죄를 담당할지니라.” 모든 죄는 결국 하나님을 잊는 데서 시작됩니다. 하나님을 기억하지 않으니 세상과 우상에게 마음을 빼앗기고, 하나님을 등 뒤로 버리니 다른 것에 의지하게 된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을 잊은 자는 반드시 자신의 죄를 스스로 담당해야 합니다.

    이 말씀은 단순히 고대 예루살렘의 비극을 넘어 오늘날 우리에게 깊은 신학적 교훈을 줍니다. 하나님을 잊는 순간, 우리는 반드시 다른 것을 붙잡게 되고, 그 붙잡은 것이 곧 심판의 도구로 변모합니다. 예루살렘이 바벨론을 동경하다가 바벨론에게 짓밟혔듯, 오늘날 우리의 우상도 결국 우리를 파멸로 이끌 것입니다. 죄의 본질은 단순한 행위의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을 잊고 언약을 배신하는 데 있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이 말씀은 소망을 열어줍니다. 예루살렘은 심판의 잔을 마셔야 했지만, 신약의 성도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대신 마신 진노의 잔 덕분에 구원의 잔을 마실 수 있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겟세마네에서 “아버지여,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라고 기도하시며, 결국 십자가에서 우리 대신 심판의 잔을 끝까지 비우셨습니다. 따라서 오늘 우리는 하나님을 기억하고 언약에 신실할 때, 심판이 아닌 구원의 은혜를 누릴 수 있습니다. 에스겔의 경고는 우리로 하여금 두려움 가운데 회개로 나아가게 하고, 동시에 그리스도의 십자가 안에서 참된 위로와 소망을 붙잡게 만듭니다.


    📖 붙잡는 말씀

    35 그러므로 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셨느니라 네가 나를 잊었고 또 나를 네 등 뒤에 버렸은즉 너는 네 음란과 네 음행의 죄를 담당할지니라 하시니라

    이 구절은 오늘 본문의 전체 맥락을 응축하는 결정적인 선언입니다. 하나님은 예루살렘의 모든 타락을 단 하나의 근원적인 문제로 요약하십니다. 그것은 곧 “나를 잊었다”는 사실입니다. 예루살렘이 바벨론을 동경하고, 애굽을 사모하며, 이방의 우상들을 좇은 이유는 결국 하나님을 잊었기 때문이었습니다. 하나님을 기억하지 않으니 언약은 희미해지고, 신앙은 형식으로만 남게 되었습니다. 겉으로는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부르지만 실제로는 다른 주인을 따라간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을 잊는 것은 단순한 무지나 망각이 아니라, 의도적인 배반이자 신앙의 근본적 파괴를 의미합니다.

    하나님을 잊는 순간 사람은 자신을 지켜줄 새로운 대상을 찾게 됩니다. 예루살렘은 눈에 보이는 군사력과 화려함에 매혹되어 열강을 의지했습니다. 그러나 그것들은 결코 보호자가 되지 못하고, 오히려 심판의 도구가 되어 돌아왔습니다. 신앙을 잃은 삶이 얼마나 허무하고 비극적인지를 보여주는 대목입니다. 사실 예루살렘의 죄악 목록—음행, 우상숭배, 배교, 언약 파기—는 표면적 현상일 뿐, 그 뿌리는 “하나님을 잊은 것”이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이 말씀을 통해 드러내시는 것은 죄의 근본 구조입니다. 인간은 하나님을 기억할 때 비로소 살아갈 수 있지만, 하나님을 잊는 순간 모든 죄의 사슬에 묶여 결국 스스로 선택한 길의 결과를 담당하게 됩니다.

    오늘 우리의 현실도 다르지 않습니다. 바쁜 일상과 치열한 경쟁, 빠른 변화 속에서 우리는 얼마나 자주 하나님을 잊고 사는지 돌아보게 됩니다. 눈앞의 문제 해결을 위해 하나님이 아닌 사람의 지혜와 돈의 힘을 의지할 때가 많습니다. 삶의 계획 속에서 하나님의 뜻은 뒷자리에 밀려나고, 세상의 기준과 가치가 우리의 선택을 지배합니다. 그러면서도 우리는 여전히 자신을 신앙인이라고 부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등 뒤에 버린 순간, 우리의 신앙은 본질을 잃고 껍데기만 남습니다. 본문은 바로 이 위험을 고발합니다.

    “나를 잊었다”는 말은 단순히 기억이 사라진 상태가 아닙니다. 그것은 삶의 우선순위에서 하나님을 밀어내고, 그 자리를 다른 무엇으로 채우는 행위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잊는 것은 언제나 적극적인 선택이며, 의도적 배신입니다. 예루살렘은 하나님 대신 열강을 선택했고, 그 대가를 철저히 치러야 했습니다. 오늘 우리도 하나님을 잊으면 예루살렘과 같은 심판을 피할 수 없습니다. 신앙은 순간의 감정이 아니라 매일의 기억에서 시작됩니다. 말씀을 기억하고, 은혜를 기억하고, 십자가를 기억하는 것이 신앙의 본질입니다.

    하지만 이 말씀은 단순한 절망의 선언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너는 네 음란과 네 음행의 죄를 담당할지니라”는 말씀은 인간이 반드시 자기 죄를 책임져야 함을 분명히 하지만, 동시에 우리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떠올리게 합니다. 예루살렘은 스스로 죄를 담당해야 했지만, 우리는 그리스도로 인해 그 무게에서 해방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겟세마네에서 “아버지여,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라고 기도하실 때, 그분은 우리가 감당해야 할 진노의 잔을 대신 마시기로 결단하신 것입니다. 십자가 위에서 주님은 우리 대신 죄의 대가를 담당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더 이상 심판의 잔을 마실 필요가 없습니다. 오히려 구원의 잔, 감사의 잔을 들고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습니다.

    이 구절은 오늘 우리에게 분명한 선택을 요구합니다. 하나님을 기억할 것인가, 잊을 것인가. 하나님을 등 뒤에 버릴 것인가, 아니면 앞에 모실 것인가. 결국 신앙의 길은 기억과 망각의 길목에서 갈라집니다. 우리는 매일의 삶에서 하나님을 기억하는 훈련을 해야 합니다. 말씀을 묵상하며, 기도 가운데 주님의 은혜를 떠올리며, 삶의 작은 순간 속에서도 하나님을 인정하는 것이 바로 신앙인의 길입니다.

    결국 이 말씀은 우리에게 경고와 소망을 동시에 줍니다. 경고는, 하나님을 잊는 순간 우리는 예루살렘처럼 죄의 대가를 피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소망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는 다시 하나님을 기억하며 구원의 은혜 안으로 돌아올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말씀은 오늘 우리에게 “다시 하나님을 기억하라”는 부르심이자, “다시는 하나님을 등 뒤에 버리지 말라”는 경고입니다.


    📖 단어 연구

    ❖ 잔 (כּוֹס / 코스)

    ✦ 뜻과 의미

    히브리어 כּוֹס (kos, 코스)는 기본적으로 ‘잔, 컵’을 의미합니다. 물이나 포도주를 담아 마시는 그릇을 지칭하는 일상적인 단어지만, 성경에서는 단순한 그릇 이상의 의미를 지닙니다. 잔은 축복과 환대의 상징으로 쓰이기도 하고(시 23:5, “내 잔이 넘치나이다”), 반대로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을 담은 잔으로 표현되기도 합니다(시 75:8, 렘 25:15). 따라서 이 단어는 ‘마시는 행위’를 통해 은혜나 심판을 경험하게 하는 상징적 도구로 쓰이며, 하나님께서 주시는 몫, 혹은 인간이 피할 수 없이 받아야 하는 운명을 가리키는 깊은 함의를 담습니다.

    ✦ 본문에서의 의미

    에스겔 23장 31–34절에서 “잔”은 예루살렘이 마셔야 할 심판의 도구로 등장합니다. 하나님은 오홀리바(예루살렘)에게 언니 사마리아가 이미 마셨던 잔을 그대로 주십니다. 이 잔은 단순히 포도주가 담긴 잔이 아니라, 놀람과 패망과 수치가 가득 담긴 심판의 잔입니다. 더구나 그 잔은 “깊고 크고 가득하다”고 묘사되며, 부분적으로 맛보는 것이 아니라 끝까지 비워내야 하는 철저한 심판을 상징합니다. 예루살렘은 언니의 길을 그대로 따라갔기에, 동일한 잔을 마셔야 했습니다. 심지어 잔을 다 비우고 난 후에는 “그 깨어진 조각을 씹는다”고 표현됩니다. 이는 심판이 단순한 일시적 고통이 아니라, 잔해와 파편까지 삼켜야 하는 끝없는 고통임을 의미합니다. 또한 “네 유방을 꼬집을 것”이라는 묘사는 수치와 모욕의 극치를 드러내며, 그 잔을 마시는 것이 단순한 징계가 아니라 존엄 자체가 파괴되는 심판임을 보여줍니다. 따라서 본문에서의 잔은 하나님을 잊고 언약을 배반한 자가 반드시 감당해야 하는 결과이자, 사마리아의 전철을 밟은 예루살렘이 피할 수 없는 운명의 몫을 상징합니다.

    ✦ 신학적 의미

    신학적으로 “잔”은 인간이 선택한 죄의 결과와 하나님이 내리시는 심판을 의미합니다. 성경 전반에서 잔은 하나님의 분노의 상징으로 자주 등장합니다(사 51:17, 렘 25:15). 그러나 동시에 시편에서는 축복과 구원의 잔으로 표현되기도 합니다(시 116:13). 에스겔 23장의 잔은 전적으로 심판의 잔으로, 하나님을 잊고 우상을 좇은 언약 백성이 피할 수 없이 받아야 하는 형벌을 드러냅니다. 그러나 신약으로 가면 이 심판의 잔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대신 마신 잔으로 전환됩니다. 예수님은 겟세마네에서 “내게서 이 잔을 옮기시옵소서”(마 26:39)라고 기도하시며, 결국 십자가에서 하나님의 진노의 잔을 끝까지 비우셨습니다. 그 결과 우리는 심판의 잔을 면하고, 대신 구원의 잔을 들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신학적으로 잔은 경고와 동시에 은혜의 상징입니다. 하나님을 잊으면 반드시 심판의 잔을 마시게 되지만, 그리스도를 통해서는 구원의 잔, 감사의 잔을 높이 들 수 있는 새로운 은혜가 주어집니다.


    ❖ 질투 (קִנְאָה / 킨아)

    ✦ 뜻과 의미

    히브리어 קִנְאָה (qin’āh, 킨아)은 기본적으로 ‘질투, 열심, 뜨거운 감정’을 의미합니다. 이 단어는 인간 관계에서 나타나는 소유욕적인 질투를 가리킬 때도 있지만, 성경에서 하나님께 적용될 때는 전혀 다른 차원을 드러냅니다. 하나님께서 “질투하시는 하나님”(출 20:5, 신 4:24)이라고 말씀하실 때의 질투는 언약적 사랑에서 비롯된 거룩한 열심입니다. 이는 하나님이 당신의 백성을 향한 독점적이고 배타적인 사랑을 지키시는 성품을 나타내며, 우상 숭배와 언약 배반을 결코 용납하지 않으신다는 뜻을 내포합니다. 따라서 qin’āh는 단순히 감정적 질투가 아니라, 언약의 신실성과 거룩을 수호하려는 하나님의 불타는 열심을 나타냅니다.

    ✦ 본문에서의 의미

    에스겔 23장 25절에서 하나님은 “내가 너를 향하여 질투하리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질투는 단순히 감정의 폭발이 아니라, 오랫동안 누적된 언약 배반에 대한 하나님의 거룩한 반응입니다. 예루살렘은 하나님의 신부로 부름받았으나, 바벨론과 앗수르, 애굽과 같은 이방 나라들을 남편 삼아 음행을 반복했습니다. 언약 관계에서 남편이 아내의 불륜을 목격했을 때 느끼는 가장 치명적이고 불타는 감정이 바로 질투입니다. 하나님은 예루살렘의 배신 앞에서 그저 무관심하시거나 감정을 억누르지 않으시고, 질투로 응답하십니다. 이는 곧 언약을 파괴한 자에게 임할 불가피한 심판의 동기가 됩니다.

    본문에서 하나님의 질투는 구체적인 징벌로 나타납니다. 열강이 분노하여 예루살렘의 코와 귀를 자르고, 자녀를 빼앗으며, 옷과 장식품을 탈취하게 되는 모든 과정이 하나님의 질투로 인한 심판입니다. 즉, 질투는 추상적인 감정이 아니라, 실제 역사 속에서 심판으로 구현되는 하나님의 거룩한 열심입니다. 하나님은 예루살렘의 타락을 보고 질투하심으로, 마치 불타는 불길처럼 죄를 태워 없애고, 음행을 끊어내시는 공의로운 행동을 하십니다. 따라서 본문 속 질투는 단순한 감정적 표현이 아니라, 언약적 불륜에 대한 하나님의 정의로운 반응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 신학적 의미

    신학적으로 “질투”는 하나님의 언약적 사랑과 거룩을 동시에 보여줍니다. 하나님은 결코 무관심한 신이 아니십니다. 언약을 맺은 백성이 다른 신을 섬기고 세상에 마음을 빼앗기는 것을 보고도 침묵하신다면, 그것은 사랑하지 않는다는 증거일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사랑하시기에 질투하시며, 질투하시기에 심판하십니다. 이는 인간의 소유욕적 질투와는 본질적으로 다릅니다. 하나님의 질투는 거룩을 지키기 위한 열심이며, 사랑의 증거입니다.

    또한 신학적으로 질투는 구속사적 의미를 가집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질투 때문에 멸망을 경험했지만, 그 심판조차 하나님의 거룩한 열심이 멈추지 않았음을 보여줍니다. 신약에서 이 질투는 그리스도의 십자가 안에서 완전히 드러납니다. 하나님은 죄를 미워하시기에 질투하시고, 그 질투를 십자가의 심판으로 쏟으셨습니다. 동시에 그리스도의 희생을 통해 우리를 새 언약 백성으로 회복시키셨습니다. 오늘날 교회 역시 동일한 경고를 받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고백하면서 세상의 권세와 우상을 붙잡는 것은 영적 음행이며, 반드시 하나님의 질투를 불러옵니다. 따라서 질투는 단순히 두려운 심판의 언어가 아니라, 우리가 하나님만을 사랑하고 신실하게 붙잡아야 한다는 강력한 부르심을 담고 있습니다.


    ❖ 벌거벗김 (עָרוֹם / 아롬)

    ✦ 뜻과 의미

    히브리어 עָרוֹם (ʿārôm, 아롬)은 기본적으로 ‘벌거벗은, 옷을 벗긴 상태’를 의미합니다. 성경에서는 단순히 옷을 입지 않은 상태를 뜻하기도 하지만, 더 깊이 들어가면 수치, 연약함, 무방비 상태를 상징하는 표현으로 사용됩니다. 창세기 3장에서 아담과 하와가 죄를 범한 후 “자기들이 벗은 줄을 알고” 부끄러워한 사건에서처럼, ‘벌거벗음’은 죄로 인해 드러난 인간의 수치와 두려움을 나타냅니다. 또한 이 단어는 전쟁에서 포로가 된 자들이 옷을 빼앗기고 벌거벗겨진 상태를 묘사할 때 사용되며, 권위와 존귀가 철저히 무너진 상황을 드러내는 강력한 언어입니다.

    ✦ 본문에서의 의미

    에스겔 23장 26절과 29절에서 예루살렘이 벌거벗겨지는 장면이 나옵니다. 바벨론과 그 동맹 세력은 예루살렘의 옷을 벗기고, 장식품을 빼앗아 그녀를 벌거벗은 몸으로 만듭니다. 이는 단순히 물질적 재산을 빼앗기는 사건이 아니라, 예루살렘의 정체성과 존귀함이 철저히 무너지는 것을 상징합니다. 하나님은 예루살렘을 언약 백성으로 입히시고, 존귀의 옷을 주셨습니다. 그러나 예루살렘은 그 옷을 스스로 더럽혔고, 결국 모든 것을 빼앗기며 수치를 당하게 된 것입니다.

    본문의 ‘벌거벗김’은 영적 간음의 결과로서 나타나는 심판의 구체적인 모습입니다. 음행의 은밀한 행위는 드러나지 않는 듯 보였지만, 결국 하나님은 모든 죄를 드러내십니다. 벌거벗겨진다는 것은 곧 그동안 숨기려 했던 음행과 수치가 온 세상 앞에 폭로됨을 의미합니다. 또한 고대 사회에서 옷은 단순한 의복이 아니라, 신분과 지위를 나타내는 상징이었습니다. 왕은 왕의 옷으로, 제사장은 제사장의 옷으로 그 권위가 드러났습니다. 따라서 옷을 벗긴다는 것은 단순한 모욕이 아니라, 권위와 지위, 정체성을 모두 무너뜨리는 행위입니다. 예루살렘은 더 이상 하나님의 신부로서 존귀함을 유지할 수 없었고, 온 세상 앞에 수치와 부끄러움으로 드러나게 되었습니다.

    또한 본문은 벌거벗김을 통해 예루살렘의 음행이 결코 은밀히 끝날 수 없음을 선언합니다. 죄는 반드시 드러나며, 하나님은 은밀한 것을 빛 가운데 끌어내십니다. 결국 예루살렘은 자신이 의지했던 바벨론에게 배신당하고, 그들 손에서 옷을 빼앗기며 벌거벗겨진 채 수치를 당합니다. 이는 하나님을 잊은 백성이 세상에 의지할 때 맞이하게 되는 최후의 결말을 강렬하게 보여줍니다.

    ✦ 신학적 의미

    신학적으로 ‘벌거벗김’은 죄의 결과로 드러나는 인간의 실존을 상징합니다. 창세기에서 아담과 하와는 죄를 범한 후 자신들의 벌거벗음을 깨닫고 두려워 숨었습니다. 이는 죄가 인간을 부끄럽게 하고, 하나님의 임재 앞에서 설 수 없게 만드는 본질적 문제를 드러냅니다. 에스겔 23장의 벌거벗김 역시 동일한 신학적 원리 위에 있습니다. 언약 백성이 하나님을 버리고 세상을 붙잡자, 하나님은 그들을 벌거벗겨 죄와 수치를 드러내십니다.

    또한 벌거벗김은 심판의 도구이지만 동시에 회복의 과정이기도 합니다. 하나님은 죄를 숨긴 채 두지 않으시고, 드러내어 심판하심으로써 백성에게 죄를 직면하게 하십니다. 이는 단순한 파괴가 아니라, 은밀한 것을 벗겨내고 진정한 회복으로 이끄시려는 하나님의 목적이 담겨 있습니다. 신약에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벌거벗겨지심으로 우리의 수치를 대신 담당하셨습니다. 그분이 우리의 죄와 부끄러움을 드러내고 짊어지셨기에, 우리는 다시 의의 옷을 입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계 19:8).

    따라서 ‘벌거벗김’은 두 가지 신학적 교훈을 줍니다. 첫째, 하나님을 버리고 세상을 좇는 모든 자는 결국 수치를 당하게 된다는 경고입니다. 둘째, 그 수치를 대신 담당하신 예수 그리스도로 인해 우리는 다시 의의 옷을 입을 수 있다는 소망입니다. 그러므로 이 단어는 단순히 심판의 이미지가 아니라, 십자가를 통해 회복된 복음의 은혜를 더욱 깊이 깨닫게 하는 신학적 상징입니다.


    ❖ 음란/음행 (זְנוּת / 즈누트)

    ✦ 뜻과 의미

    히브리어 זְנוּת (zenût, 즈누트)은 ‘음란, 음행, 매춘, 간음’을 뜻하는 단어입니다. 구약에서 주로 이스라엘의 우상숭배를 영적 간음으로 표현할 때 사용됩니다. 단순히 성적 부도덕을 가리키는 것 이상으로, 하나님과의 언약을 깨뜨리고 다른 신이나 이방 나라를 따르는 영적 배반의 개념을 담고 있습니다. 고대 근동 사회에서는 우상 숭배와 성적 문란이 종종 함께 나타났기 때문에, ‘음란’은 종교적·사회적 타락을 동시에 상징하는 말로 사용되었습니다. 따라서 zenût는 성경에서 가장 강력하게 하나님의 거룩한 언약에 반하는 태도를 폭로하는 단어 중 하나입니다.

    ✦ 본문에서의 의미

    에스겔 23장 22–35절에서 하나님은 예루살렘의 죄를 반복해서 “음란”과 “음행”으로 규정하십니다. 예루살렘은 하나님과 언약을 맺은 백성으로서 신실해야 했지만, 대신 바벨론과 앗수르, 애굽과 같은 이방 열강을 의지하며 동맹을 맺고 그들의 풍습과 우상을 받아들였습니다. 본문 30절은 명확히 말합니다. “네가 이같이 당할 것은 네가 음란하게 이방을 따르고 그 우상들로 더럽혔기 때문이로다.” 여기서 ‘음란’은 단순히 도덕적 문란이 아니라, 하나님을 대신하여 세상의 권세와 우상에게 마음을 준 영적 간음을 뜻합니다.

    본문에서 예루살렘의 음행은 은밀히 감춰진 것이 아니라, 결국 만천하에 드러나는 죄였습니다. 그들이 사랑하다가 싫어한 자들, 즉 바벨론과 그 동맹들은 하나님의 도구가 되어 예루살렘의 음행을 폭로합니다. 벌거벗김, 장식품의 탈취, 수치와 조롱은 바로 이 음행의 결과로 나타난 것입니다. 하나님은 질투하시는 남편으로서, 언약을 깨뜨린 아내의 음행을 결코 용납하지 않으십니다. 결국 예루살렘은 사마리아가 걸었던 동일한 길을 걸으며, 사마리아의 잔을 똑같이 마셔야 하는 심판을 피할 수 없게 됩니다.

    따라서 본문에서의 ‘음란/음행’은 예루살렘의 모든 죄악의 총칭입니다. 경제적 착취, 정치적 동맹, 군사적 숭배, 종교적 우상숭배는 하나님을 잊은 데서 비롯된 영적 음행으로 규정됩니다. 본문은 ‘음행’이라는 단어를 통해 예루살렘의 죄가 단순히 정치적 실패가 아니라, 언약의 근본을 무너뜨린 반역임을 분명히 드러냅니다.

    ✦ 신학적 의미

    신학적으로 ‘음란/음행’은 하나님과의 언약을 깨뜨린 인간의 본성을 드러내는 중요한 개념입니다. 성경 전체에서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을 신부로 비유하시고, 언약 관계를 혼인 관계로 설명하십니다(호 2:19–20, 겔 16장). 따라서 음행은 단순히 도덕적 타락이 아니라, 언약적 배신이며 영적 불륜입니다. 하나님을 남편으로 두고도 다른 대상에게 마음을 준다는 것은 하나님에 대한 가장 깊은 모독이며, 결국 심판을 불러옵니다.

    또한 ‘음행’은 인간의 반복되는 죄성을 보여줍니다. 북왕국 사마리아가 음행으로 멸망했음에도 남왕국 예루살렘은 같은 길을 걸었습니다. 이는 인간이 역사 속에서 교훈을 얻지 못하고, 동일한 죄를 되풀이하는 본성을 잘 드러냅니다. 신학적으로 볼 때, 음행은 단순한 한 시대의 문제가 아니라 인류 전체가 하나님을 잊을 때마다 반복하는 근본적 죄의 패턴입니다.

    그러나 동시에 ‘음행’이라는 단어는 그리스도의 구속을 더 빛나게 합니다. 교회는 여전히 연약하고 종종 영적 간음에 빠지지만,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신부를 끝까지 사랑하시며 피 흘려 정결케 하십니다(엡 5:25–27). 그러므로 음행은 심판을 불러오는 단어이자, 동시에 복음을 통해 정결하게 회복되는 은혜를 갈망하게 만드는 단어입니다.


    ❖ 잊다 (שָׁכַח / 샤카흐)

    ✦ 뜻과 의미

    히브리어 שָׁכַח (šāḵaḥ, 샤카흐)은 ‘잊다, 기억하지 못하다, 망각하다’라는 뜻을 가집니다. 일상적으로는 단순히 어떤 사실이나 사건을 떠올리지 못하는 것을 의미하지만, 성경에서 이 단어는 훨씬 더 깊은 영적 함의를 지닙니다. 구약에서 “하나님을 잊다”라는 표현은 단순한 기억의 소홀함이 아니라, 하나님을 삶의 중심에서 밀어내고 다른 신이나 세상의 가치로 대체하는 행위를 가리킵니다. 신명기에서 반복적으로 “네 하나님 여호와를 잊지 말라”(신 6:12, 8:11)고 경고하는 것은, 하나님을 잊는 것이 곧 언약을 파기하는 심각한 죄임을 드러냅니다. 따라서 샤카흐는 단순한 망각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를 의도적으로 외면하고 버리는 행위를 뜻합니다.

    ✦ 본문에서의 의미

    에스겔 23장 35절은 이렇게 선언합니다. “네가 나를 잊었고 또 나를 네 등 뒤에 버렸은즉 너는 네 음란과 네 음행의 죄를 담당할지니라.” 여기서 ‘잊다’라는 표현은 본문 전체를 요약하는 핵심입니다. 예루살렘이 범한 수많은 죄(바벨론을 의지한 것, 애굽을 그리워한 것, 앗수르와 동맹한 것, 우상을 섬긴 것)는 결국 하나님을 잊었기 때문에 일어난 결과였습니다. 하나님을 기억하는 삶은 언약에 신실함을 유지하게 하지만, 하나님을 잊는 순간 인간은 다른 대상을 의지할 수밖에 없습니다. 예루살렘은 눈앞에 보이는 열강의 힘과 화려함을 붙잡았고, 그 과정에서 하나님을 등 뒤에 버렸습니다.

    본문에서 하나님을 잊는다는 것은 단순히 기억의 소실이 아닙니다. 그것은 적극적인 배반이자 의도적인 무관심입니다. 예루살렘은 하나님을 삶의 중심에서 몰아내고, 대신 세상의 권세와 쾌락을 삶의 주인으로 삼았습니다. 그 결과 그들의 정체성은 무너지고, 벌거벗김과 조롱, 심판의 잔을 마셔야 하는 결말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잊다”라는 말은 곧 언약적 신실성을 상실한 상태를 표현합니다. 마치 남편을 배반한 아내가 더 이상 남편을 떠올리지 않는 것처럼, 예루살렘은 자신을 남편 삼으신 하나님을 철저히 외면했습니다.

    ✦ 신학적 의미

    신학적으로 “잊다”는 인간의 죄의 본질을 드러내는 단어입니다. 모든 죄의 뿌리는 하나님을 잊는 데서 시작됩니다. 시편 기자는 “하나님을 잊은 자들은 음부로 돌아가리라”(시 9:17)고 말하며, 하나님을 잊는 것이 곧 멸망의 길임을 선포합니다. 반대로 신앙은 하나님을 기억하는 삶에서 출발합니다. 출애굽 사건, 율법, 성전 예배는 “기억”을 중심으로 이루어졌습니다.

    에스겔 23장의 “잊음”은 언약 백성이 하나님을 삶의 중심에서 몰아내고 다른 것을 붙잡는 선택을 보여줍니다. 신약에서는 이 문제가 더 깊이 다루어집니다. 인간은 본질적으로 하나님을 기억하지 못하는 존재이며, 자기 욕망과 세상의 신들을 더 쉽게 기억합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이 망각의 죄를 극복하는 하나님의 해답입니다. 예수님은 최후의 만찬에서 “나를 기억하라”(눅 22:19)고 말씀하시며, 성찬을 통해 하나님의 백성이 결코 하나님을 잊지 않도록 은혜의 표징을 주셨습니다.

    따라서 “잊다”라는 단어는 경고이자 초대입니다. 하나님을 잊는 것은 곧 죄와 심판을 자초하는 길이지만, 하나님을 기억하는 것은 언약 안에서 생명과 구원의 길을 여는 출발점입니다. 결국 신앙생활의 본질은 매일의 삶 속에서 하나님을 기억하고, 그분의 은혜와 약속을 잊지 않는 데 있습니다.


    📖 절별 주해

    22절 | 하나님이 충동하신 대적의 부름

    “그러므로 오홀리바야 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셨느니라 나는 네가 사랑하다가 싫어하던 자들을 충동하여 그들이 사방에서 와서 너를 치게 하리니”

    이 구절은 하나님의 주권적 심판 방식을 명확히 보여줍니다. 예루살렘은 한때 바벨론과 그 동맹국들을 사랑했습니다. 그들의 군사력과 화려한 문화를 매혹적으로 바라보았고, 스스로도 그들과 같은 위세를 누리고 싶어 했습니다. 그러나 그 동맹이 오래가지 못하고 정치적 이해관계가 엇갈리자, 예루살렘은 곧 그들을 싫어하게 되었고 반역을 꾀하기도 했습니다. 겉으로는 자존심과 독립을 내세운 행동처럼 보였지만, 본질적으로는 하나님을 신뢰하지 않은 채 세상 세력 사이에서 줄타기를 한 결과였습니다.

    하나님은 바로 그 예루살렘이 사랑하다가 미워하게 된 세력들을 충동하여 공격하게 하십니다. 여기서 “충동하다”라는 말은 인간의 감정과 의지를 자극하여 움직이시는 하나님의 주권적 역사 개입을 드러냅니다. 사람의 눈으로 보면 단순한 국제 정치의 변화나 동맹 관계의 파탄처럼 보이지만, 하나님의 눈으로 보면 이는 언약을 배반한 백성을 심판하시기 위해 하나님께서 친히 대적을 일으키신 것입니다. 결국 그들이 의지했던 대상이 파괴의 도구로 변해 돌아오는 것은 하나님의 의도된 심판입니다.

    오늘 우리의 삶에도 동일한 원리가 적용됩니다. 하나님이 아닌 대상을 붙잡을 때, 그것은 결국 심판의 도구로 바뀌게 됩니다. 돈, 권력, 인간 관계, 세상의 성공—all 이 모든 것들이 하나님보다 앞설 때, 그것은 반드시 우리를 치는 채찍으로 변모합니다. 그러므로 이 말씀은 우리의 신앙을 점검하게 합니다. 나는 무엇을 사랑하다가, 또 언제 그것을 미워하고 있는가? 혹시 하나님 대신 붙잡은 그 무언가가 언젠가 심판의 도구로 바뀌지 않을까? 하나님만을 의지하는 믿음의 길로 서지 않으면, 예루살렘과 같은 비극은 오늘 우리의 현실 속에서도 반복될 수 있습니다.


    23절 | 심판에 동원된 열강의 세력

    “그들은 바벨론 사람과 갈대아 모든 무리 브곳과 소아와 고아 사람과 또 그와 함께 한 모든 앗수르 사람 곧 준수한 청년이며 다 고관과 감독이며 귀인과 유명한 자요 다 말 타는 자들이라”

    하나님은 예루살렘을 심판하시기 위해 다양한 세력을 불러 모으십니다. 바벨론과 갈대아뿐 아니라, 브곳, 소아, 고아 사람들과 함께 앗수르 사람들까지 동원됩니다. 이는 단순한 나열이 아니라, 다민족 제국의 힘과 무서운 군사적 연합을 강조하는 표현입니다. 특히 앗수르 사람들의 언급은 아이러니합니다. 예루살렘은 과거 앗수르의 세력을 동경하고 그들의 풍습을 받아들였지만, 지금은 그들이 심판을 집행하는 도구로 등장합니다.

    본문은 그들을 “준수한 청년, 고관, 감독, 귀인, 유명한 자, 말 타는 자들”로 묘사합니다. 이는 단순히 외모의 매력을 넘어, 사회적 위세와 정치적 영향력을 갖춘 자들을 뜻합니다. 또한 말을 소유했다는 것은 고대 사회에서 강력한 군사력을 상징했습니다. 예루살렘은 한때 이들의 매력에 매혹되어 자신들의 안전을 그들에게서 찾으려 했습니다. 그러나 이제 그 매혹은 심판의 도구로 바뀌었고, 예루살렘을 짓밟을 세력으로 돌변했습니다.

    이 장면은 우리에게 중요한 경고를 줍니다. 사람의 눈에는 부러움과 매혹의 대상이 될 수 있는 세상의 힘과 권세가, 하나님을 떠난 순간 오히려 파괴와 수치의 원인이 될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세상의 화려함은 결코 하나님의 보호와 은혜를 대신할 수 없습니다. 오히려 그것을 붙잡을 때, 하나님은 그 대상을 심판의 도구로 바꾸십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눈에 보이는 화려함과 권세를 의지하지 말고, 하나님만을 신뢰해야 합니다.


    24절 | 이방 법정에 맡겨진 재판

    “그들이 무기와 병거와 수레와 크고 작은 방패를 이끌고 투구 쓴 군대를 거느리고 치러 와서 너를 에워싸리라 내가 재판을 그들에게 맡긴즉 그들이 그들의 법대로 너를 재판하리라”

    여기서 하나님은 심판의 구체적인 방식을 보여주십니다. 대적들은 무기와 병거, 수레와 방패로 철저히 무장한 군대를 이끌고 와서 예루살렘을 사방에서 포위합니다. 이는 단순한 전쟁의 묘사가 아니라, 피할 길 없는 심판의 확실성을 보여줍니다. 예루살렘은 하나님을 버리고 세상 권세에 기대었기에, 이제는 그 권세에 둘러싸여 도망할 길조차 없는 상황에 놓입니다.

    특히 주목할 표현은 “내가 재판을 그들에게 맡긴즉”이라는 부분입니다. 하나님은 심판을 직접 집행하시기도 하지만, 때로는 이방 세력을 사용하여 당신의 뜻을 이루십니다. 충격적인 점은 예루살렘이 더 이상 언약 백성의 기준에 따라 재판받지 않고, 이방인의 법과 질서에 따라 심판을 당한다는 것입니다. 언약을 버린 자에게는 언약의 보호가 없습니다. 하나님을 버린 백성은 이제 세상의 법정 앞에 서서 그들의 판단을 받게 됩니다.

    이 장면은 오늘날 교회와 신자들에게도 심각한 경고를 줍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버리고 세상의 가치와 질서에 순응한다면, 결국 그 질서 속에서 무너지고 심판을 받게 됩니다. 하나님의 법을 버린 자는 세상의 법에 붙잡혀 버림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따라서 이 말씀은 우리의 신앙 정체성을 붙들라는 경고이자, 하나님께서 역사의 주관자로서 심판을 집행하신다는 엄숙한 선언입니다.


    25절 | 하나님의 질투와 치욕의 심판

    “내가 너를 향하여 질투하리니 그들이 분내어 네 코와 귀를 깎아 버리고 남은 자를 칼로 엎드러뜨리며 네 자녀를 빼앗고 그 남은 자를 불에 사르며”

    하나님은 예루살렘을 향해 질투하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질투는 단순한 감정의 분노가 아니라, 언약적 사랑에서 비롯된 거룩한 열심을 뜻합니다. 남편이 아내의 불륜을 목격했을 때 느끼는 질투처럼, 하나님은 언약을 배반한 예루살렘을 향해 질투하십니다. 이 질투는 단순히 감정적 반응으로 머무르지 않고, 구체적이고 무서운 심판으로 나타납니다.

    예루살렘은 대적들의 손에 넘어가 코와 귀가 잘리는 모욕을 당합니다. 코와 귀는 얼굴의 중심적인 기관으로, 인간의 존엄과 외형을 대표합니다. 이를 잘라낸다는 것은 단순한 육체적 고통을 넘어 존재의 수치와 존엄의 상실을 의미합니다. 또한 자녀들이 칼로 엎드러지고 남은 자들이 불에 사라지는 장면은, 공동체의 미래가 송두리째 파괴되는 철저한 심판을 묘사합니다. 하나님은 단순히 현재만 심판하시는 것이 아니라, 다음 세대까지 끊어내시는 무서운 심판을 집행하십니다.

    이 모든 것은 하나님의 질투의 결과입니다. 언약을 지키지 않고 하나님을 배반한 결과는 필연적으로 존엄의 상실과 공동체의 멸망으로 이어집니다. 본문은 죄가 개인의 차원에서 멈추지 않고, 가정과 자녀 세대에까지 영향을 미친다는 것을 경고합니다. 하나님을 잊은 선택은 단순히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후대의 생명과 정체성까지 위협하는 심각한 죄입니다.

    오늘날 우리 역시 동일한 경고를 받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잊고 세상과 타협하며 우상을 붙잡을 때, 그 결과는 나만의 문제가 아니라 가정과 다음 세대에까지 흘러갑니다. 하나님은 언약의 신실성을 요구하시며, 그것을 배반하는 자에게는 반드시 공의로운 질투로 응답하십니다. 따라서 신앙은 단순히 개인적 영역이 아니라, 후대의 생명과 공동체 전체를 책임지는 언약적 결단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26절 | 옷과 장식의 탈취

    “또 네 옷을 벗기며 네 장식품을 빼앗을지라”

    예루살렘의 옷과 장식품이 벗겨지고 빼앗기는 장면은 단순한 물질적 손실이 아닙니다. 고대 사회에서 옷은 신분과 지위를 나타내는 상징이었고, 장식품은 존귀와 영광을 드러내는 수단이었습니다. 하나님은 한때 예루살렘에게 존귀의 옷을 입히시고, 장식으로 아름답게 꾸며주셨습니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을 우상 숭배와 음행에 사용하였으므로, 이제 그것들이 모두 빼앗기는 수치를 당하게 됩니다.

    옷을 벗기고 장식을 빼앗는 것은 단순한 전쟁의 약탈 행위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신 영광과 존귀가 철저히 무너지는 것을 상징합니다. 언약 백성으로서의 정체성이 사라지고, 벌거벗은 상태로 세상 앞에 드러나는 수치는 하나님을 잊은 삶의 필연적 결과입니다.

    본문에서 옷과 장식은 하나님께서 주신 은혜와 축복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예루살렘은 그것을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데 사용하지 않고, 우상 숭배와 세속적 욕망을 채우는 데 소비했습니다. 결국 하나님은 그 모든 것을 거두어 가심으로써, 은혜를 배반한 자들에게 더 이상 그 축복이 남지 않게 하십니다.

    오늘 우리의 삶도 동일합니다. 하나님이 주신 은혜와 축복을 내 욕망과 세상의 우상에 사용한다면, 그 은혜는 결국 심판의 날 빼앗기게 될 것입니다. 은혜의 옷은 거룩을 위해 입혀진 옷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을 기억하며 주신 것을 하나님께 돌려드리는 삶이 필요합니다. 그때에만 우리는 수치와 벌거벗김이 아닌 존귀와 영광을 유지할 수 있습니다.


    27절 | 애굽의 음행을 끊으시는 하나님

    “이와 같이 내가 네 음란과 애굽 땅에서부터 행음하던 것을 그치게 하여 너로 그들을 향하여 눈을 들지도 못하게 하며 다시는 애굽을 기억하지도 못하게 하리라”

    이 구절은 하나님께서 예루살렘의 죄의 뿌리를 정면으로 다루시는 장면입니다. 예루살렘의 음행은 단순히 최근에 생긴 문제가 아니라, 역사적으로 애굽에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이스라엘은 애굽에서 오랫동안 노예 생활을 하며 그들의 우상과 풍습에 익숙해졌습니다. 하나님께서 출애굽 사건을 통해 그들을 구원하셨지만, 그들의 마음속에는 여전히 애굽의 정욕과 우상 숭배의 흔적이 남아 있었습니다.

    예루살렘은 애굽의 정욕을 끊지 못한 채, 시간이 지나면서도 반복적으로 애굽을 의지했습니다. 시드기야 왕 때에도 유다는 바벨론에 맞서 애굽과 동맹을 맺으려 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본문에서 그 뿌리를 단호히 끊으시겠다고 선언하십니다. “눈을 들지도 못하게 하고, 기억하지도 못하게 하겠다”는 말씀은 단순한 망각이 아니라, 더 이상 애굽을 의지하거나 그리워하지 못하게 하는 철저한 차단을 뜻합니다.

    여기서 중요한 신학적 의미는 하나님께서 심판을 통해 죄의 근원을 제거하신다는 사실입니다. 예루살렘은 애굽을 향한 끊을 수 없는 미련 때문에 계속해서 하나님을 배반했지만, 하나님은 심판을 통해 그 유혹을 근본적으로 제거하십니다. 이는 고통스럽고 파괴적인 과정이지만, 동시에 하나님의 백성을 회복으로 이끄는 과정이기도 합니다.

    오늘 우리 삶에도 애굽과 같은 뿌리 깊은 죄의 습관이 존재합니다. 과거로부터 붙잡아 온 죄의 습관과 세속적 욕망은 쉽게 끊어지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시기에 때로는 강력한 심판과 징계를 통해 그 뿌리를 제거하십니다. 그리하여 다시는 옛 습관을 기억하지 못하게 하시고, 하나님만을 바라보게 하십니다. 이 말씀은 단순한 파괴가 아니라, 진정한 회복을 향한 하나님의 의지를 보여줍니다.


    28절 | 미워하는 자들의 손에 넘겨짐

    “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셨느니라 나는 네가 미워하는 자와 네 마음에 싫어하는 자의 손에 너를 붙이리니”

    이 절은 하나님의 심판의 아이러니를 극적으로 보여줍니다. 예루살렘은 처음에는 바벨론을 사랑하고 동경했지만, 시간이 지나며 그들을 부담스러워하고 미워하게 되었습니다. 바벨론의 압제와 간섭이 싫어졌고, 그래서 애굽과 새로운 동맹을 맺으려 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바로 그 “미워하는 자, 싫어하는 자”의 손에 예루살렘을 넘겨주십니다.

    이는 하나님의 심판이 단순히 외부의 우연한 공격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직접적으로 주권적으로 행하시는 역사임을 드러냅니다. 인간의 관점에서는 정치적 배신과 동맹의 붕괴로 보이지만, 하나님의 관점에서는 언약을 배반한 백성을 심판하시기 위해 하나님께서 친히 그들을 대적의 손에 넘겨주신 것입니다.

    이 구절은 또한 우리가 세상에서 붙잡는 것이 얼마나 허망한지를 드러냅니다. 처음에는 사랑하고 의지하던 것이 시간이 지나면 미워하는 존재가 되고, 결국 그것이 우리를 파괴하는 도구로 바뀝니다. 하나님을 버린 자는 사랑할 대상도, 의지할 대상도, 끝내 지켜줄 대상도 없습니다. 결국 자신이 붙잡았던 것이 심판의 도구로 돌변합니다.

    오늘 우리 역시 같은 경고를 받아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보다 세상의 힘과 사람을 더 의지할 때, 결국 그 대상이 우리를 미워하는 자가 되어 돌아올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하나님만을 신뢰하기를 원하시며, 그 외의 모든 의지는 결국 심판과 멸망으로 이어짐을 이 말씀을 통해 경고하십니다.


    29절 | 미움의 행위와 수치의 폭로

    “그들이 미워하는 마음으로 네게 행하여 네 모든 수고한 것을 빼앗고 너를 벌거벗은 몸으로 두어서 네 음행의 벗은 몸 곧 네 음란하며 행음하던 것을 드러낼 것이라”

    이 구절은 예루살렘이 맞이할 치욕적인 현실을 적나라하게 보여줍니다. 대적들은 미워하는 마음으로 접근하여, 그동안 예루살렘이 애써 쌓아 올린 모든 수고를 빼앗아 갑니다. 경제적 풍요, 정치적 성취, 문화적 영광—all 이 모든 것이 단숨에 무너집니다. 그 결과 예루살렘은 벌거벗은 몸으로 세상 앞에 내던져집니다. 이는 단순한 물질적 약탈이 아니라, 예루살렘이 감추고 싶었던 음행의 실체가 드러나고 만천하에 수치가 공개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여기서 “벌거벗은 몸”은 단순히 옷이 벗겨진 상태가 아닙니다. 하나님과의 언약을 배반한 영적 음행이 철저히 폭로되는 상태를 가리킵니다. 예루살렘은 바벨론과 앗수르, 애굽을 따라가며 자신들의 힘과 지위를 과시했지만, 결국 하나님을 버린 결과 그 모든 영광은 빼앗기고 수치만 남게 됩니다. 하나님은 그들의 은밀한 죄를 드러내어, 숨을 곳 없는 심판의 현장으로 몰아가십니다.

    또한 “네 모든 수고한 것을 빼앗는다”는 표현은, 하나님 없이 세운 모든 것이 얼마나 덧없고 헛된지를 보여줍니다. 인간이 아무리 애써도 하나님을 배제한 수고는 결국 헛수고가 됩니다. 하나님을 잊고 세운 왕궁, 쌓은 재물, 추구한 권력—all 이 모든 것은 하루아침에 사라집니다. 오히려 그것들이 심판의 이유가 되고, 그 결과로 수치와 부끄러움이 드러나게 됩니다.

    오늘 우리의 삶 속에서도 동일한 교훈이 주어집니다. 하나님을 기억하지 않고 세운 모든 수고는 결국 빼앗깁니다. 화려함과 성취로 자신을 감추려 해도, 하나님 앞에서는 모든 것이 드러납니다. 이 말씀은 우리로 하여금 무엇을 위해, 누구를 위해 수고하고 있는가를 점검하게 만듭니다. 하나님을 잊은 수고는 수치로 끝나지만, 하나님을 기억하며 쌓은 수고는 영원한 열매가 됩니다.


    30절 | 음란의 결과로 맞이한 심판

    “네가 이같이 당할 것은 네가 음란하게 이방을 따르고 그 우상들로 더럽혔기 때문이로다”

    이 절은 예루살렘이 맞이한 모든 수치와 파괴의 근본 원인을 분명하게 밝힙니다. 심판은 우연히 찾아온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예루살렘이 스스로 선택한 음란 때문이었습니다. 하나님 대신 이방을 따르고, 그들의 우상으로 스스로를 더럽혔기 때문에 이런 결과를 맞게 된 것입니다.

    본문은 죄와 결과 사이의 인과 관계를 명확히 보여줍니다. 예루살렘은 하나님과의 언약을 깨뜨리고, 눈에 보이는 열강의 힘과 우상을 의지했습니다. 이는 단순한 정치적 선택이 아니라, 영적 배반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언약을 신실히 지키시는 분이시기에, 언약을 깨뜨린 자들에게는 반드시 그에 상응하는 심판이 따릅니다. 따라서 예루살렘의 멸망은 하나님의 불공정한 심판이 아니라, 스스로 선택한 길의 공의로운 결과였습니다.

    이 말씀은 죄의 본질을 드러냅니다. 죄는 단순히 규칙을 어긴 행위가 아니라, 하나님을 대신해 다른 대상을 붙잡는 것입니다. 예루살렘은 하나님보다 더 크고 강한 대상을 찾아 붙잡았지만, 그것이 오히려 자신들을 더럽히고 파멸로 이끌었습니다. 죄의 달콤함은 잠시뿐이고, 그 끝은 반드시 심판과 수치입니다.

    오늘 우리 역시 동일한 경고를 받습니다. 세상 속에서 하나님보다 더 크게 보이는 권세, 돈, 인간관계, 쾌락—all 이 모든 것은 우리를 더럽히고 심판으로 이끌 뿐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죄를 분명히 밝히시고, 그 결과를 스스로 담당하게 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말씀을 통해 죄의 본질을 직시하고, 하나님만을 기억하며 그분께 신실하게 서야 합니다.


    31절 | 사마리아의 길을 따라간 예루살렘

    “네가 네 형의 길로 행하였은즉 내가 그의 잔을 네 손에 주리라”

    이 구절에서 하나님은 예루살렘의 죄악을 한마디로 요약하십니다. “네 형의 길로 행하였다”는 말은 예루살렘이 북이스라엘(사마리아)이 걸었던 동일한 죄의 길을 그대로 반복했다는 의미입니다. 사마리아는 이미 우상 숭배와 열강 의존으로 인해 앗수르에 의해 멸망했습니다. 예루살렘은 그 멸망을 분명히 보았음에도 불구하고, 교훈을 얻지 못하고 오히려 더 심각한 불순종을 선택했습니다.

    하나님은 그 결과로 예루살렘의 손에 “그의 잔”을 주십니다. 잔은 단순한 음료를 담는 그릇이 아니라, 심판과 운명을 상징합니다. 즉, 사마리아가 마신 심판의 잔을 이제 예루살렘이 마셔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동일한 죄에 동일한 심판을 내리신다는 공의의 원리를 드러냅니다. 백성의 출신이나 지역, 지위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죄의 반복을 결코 간과하지 않으십니다.

    이 말씀은 오늘 우리에게 무서운 교훈을 줍니다. 앞선 세대의 죄와 그 결과를 보았음에도 불구하고, 동일한 길을 따라간다면 결국 같은 심판을 피할 수 없습니다. 교회의 역사와 개인의 신앙 여정 속에서도 반복되는 교훈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그것을 외면한다면, 사마리아의 길을 따라간 예루살렘처럼 우리 역시 동일한 심판을 받게 됩니다.

    그러므로 이 말씀은 “나는 과거의 실패에서 교훈을 얻고 있는가?”라는 질문을 던집니다. 과거의 멸망을 보았음에도 여전히 같은 죄를 반복한다면, 그것은 더욱 큰 심판을 불러옵니다. 예루살렘이 사마리아의 길을 따라갔던 것처럼, 오늘날 교회가 세상의 길을 따라간다면 동일한 결과를 맞게 될 것입니다.


    32절 | 깊고 큰 심판의 잔

    “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셨느니라 깊고 크고 가득히 담긴 네 형의 잔을 네가 마시고 코웃음과 조롱을 당하리라”

    여기서 하나님은 예루살렘이 마셔야 할 잔의 성격을 더 구체적으로 묘사하십니다. 그 잔은 “깊고 크고 가득히 담긴 잔”입니다. 이는 단순한 형벌이 아니라, 감당하기 어려운 압도적 심판을 의미합니다. 깊고 크다는 표현은 심판의 강도와 범위가 매우 크다는 것을 나타내며, 가득히 담겼다는 말은 심판이 피할 길 없이 철저하게 이루어질 것임을 뜻합니다.

    그 잔을 마신 결과 예루살렘은 “코웃음과 조롱”을 당하게 됩니다. 이는 단순히 패배의 아픔을 넘어, 세상 앞에서 수치와 모욕을 당하는 상황을 의미합니다. 한때 화려함과 영광을 자랑하던 예루살렘이 이제는 멸시와 비웃음의 대상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잊고 의지했던 세상 권세가 이제는 그들을 조롱하며, 그들의 수치를 만천하에 드러내게 됩니다.

    이 말씀은 인간이 하나님을 잊고 스스로 선택한 길의 결과가 얼마나 철저하고 고통스러운지를 보여줍니다. 심판은 단순히 고통으로 끝나지 않고, 명예와 존귀의 상실로 이어집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주신 영광을 스스로 버린 자들이 반드시 맞이해야 하는 결과입니다.

    오늘날 우리도 동일한 경고를 받습니다. 하나님을 떠나 세상에서 영광을 추구할 때, 그 영광은 반드시 조롱으로 변합니다. 교회가 세상의 힘과 화려함을 의지한다면, 결국 세상 앞에서 수치와 모욕을 당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말씀을 통해 하나님만이 영광의 근원이심을 기억하고, 그분께만 신실해야 함을 배웁니다.


    33절 | 놀람과 패망의 잔에 취함

    “네가 네 형 사마리아의 잔 곧 놀람과 패망의 잔에 넘치게 취하고 근심할지라”

    이 절에서 하나님은 예루살렘이 마셔야 할 잔의 성격을 더욱 분명히 설명하십니다. 그 잔은 단순히苦味를 가진 잔이 아니라, 놀람과 패망의 잔입니다. “놀람”은 갑작스러운 충격과 두려움을 뜻하고, “패망”은 완전한 몰락을 의미합니다. 즉 예루살렘은 생각지도 못한 충격 속에서 모든 것이 무너지는 경험을 하게 될 것입니다.

    이 잔은 또한 “넘치게 취하고 근심”을 준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취한다는 것은 단순히 포도주에 취한 상태가 아니라, 심판에 압도되어 정신을 차릴 수 없는 상태를 상징합니다. 예루살렘은 스스로의 힘을 과신하고 이방과의 동맹을 통해 안전을 보장받을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심판의 잔을 마셔 완전히 무너지고, 깊은 근심 속에 빠지게 되는 것입니다.

    “사마리아의 잔”이라는 표현은 북왕국의 멸망을 거울로 삼아야 했음을 상기시킵니다. 사마리아는 이미 음행과 우상숭배의 결과로 멸망했으며, 그 잔을 다 마셨습니다. 예루살렘은 그 잔의 무서움을 보았음에도 불구하고, 동일한 길을 걸어가 결국 같은 잔을 마시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동일한 죄에는 동일한 심판을 내리시며, 역사적 전례를 통해 경고하십니다.

    오늘 우리에게 이 말씀은 경고가 됩니다. 과거의 실패와 심판을 보면서도 교훈을 얻지 못한다면, 우리는 동일한 잔을 마실 수밖에 없습니다. 가정의 역사, 교회의 역사, 개인의 과거에서 이미 드러난 죄의 결과를 직시하지 못한다면, 놀람과 패망의 잔은 우리에게도 주어질 것입니다. 따라서 신앙인은 과거의 교훈을 깊이 새기고, 동일한 죄를 반복하지 않도록 깨어 있어야 합니다.


    34절 | 잔의 조각까지 씹는 철저한 심판

    “네가 그 잔을 다 기울여 마시고 그 깨어진 조각을 씹으며 네 유방을 꼬집을 것은 내가 이렇게 말하였음이라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이 구절은 하나님의 심판이 얼마나 철저한지를 극적으로 보여줍니다. 단순히 잔을 마시는 데서 그치지 않고, “다 기울여 마시고”라는 표현을 통해 마지막 한 방울까지 남김없이 심판을 받아야 함을 강조합니다. 부분적 형벌이나 일시적 징계가 아니라, 피할 길 없는 전면적 심판이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또한 “그 깨어진 조각을 씹는다”는 표현은 심판의 잔혹함을 상징적으로 드러냅니다. 단순히 쓰라린 심판을 맛보는 것이 아니라, 잔해와 파편까지 삼켜야 하는 고통을 뜻합니다. 이는 죄의 결과가 얼마나 뼈아픈지, 끝까지 피할 수 없는지를 강조합니다. 이어지는 “네 유방을 꼬집을 것”이라는 표현은 당시 문화에서 여인의 모욕과 수치를 상징하는 강렬한 언어입니다. 예루살렘이 겪는 심판은 단순한 멸망이 아니라, 존엄과 명예를 완전히 상실하는 치욕으로 이어집니다.

    이 모든 과정은 “내가 이렇게 말하였음이라”는 하나님의 선언으로 마무리됩니다. 즉, 이러한 심판은 인간의 우연이나 정치적 상황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과 주권에 의해 이루어지는 불가피한 현실임을 보여줍니다.

    오늘 우리 역시 이 말씀 앞에 서야 합니다. 죄의 결과는 결코 부분적이지 않고, 끝까지 치러야 하는 무거운 대가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심판의 철저함은 우리로 하여금 죄를 가볍게 여기지 않도록 경고합니다. 동시에 이 말씀은 우리를 십자가 앞으로 인도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바로 이 잔을 대신 마셨기에, 우리는 더 이상 잔해까지 씹는 심판을 당하지 않아도 됩니다. 그러나 그 은혜를 잊는다면, 우리는 동일한 심판 앞에 서게 될 것입니다.


    35절 | 하나님을 잊은 자가 담당할 죄

    “그러므로 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셨느니라 네가 나를 잊었고 또 나를 네 등 뒤에 버렸은즉 너는 네 음란과 네 음행의 죄를 담당할지니라 하시니라”

    본문의 마지막 절은 예루살렘의 심판을 종결짓는 핵심 이유를 선포합니다. 예루살렘이 당해야 할 모든 치욕과 멸망, 심판의 잔을 마시는 이유는 단 한 가지, “네가 나를 잊었고 또 나를 네 등 뒤에 버렸다”라는 선언으로 요약됩니다. 죄의 본질은 단순히 우상을 섬기거나 이방을 따른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기억하지 않고 의도적으로 외면한 데 있습니다.

    여기서 “잊다”라는 표현은 단순한 기억의 결핍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삶의 중심에서 밀어내고, 그분을 더 이상 의지하지 않는 적극적인 배반 행위를 가리킵니다. 또한 “등 뒤에 버렸다”는 표현은 하나님을 무시하고, 쓸모없는 존재처럼 취급하며, 완전히 외면했다는 의미입니다. 이는 가장 심각한 언약적 모독입니다. 신부가 남편을 잊고 다른 자를 따르는 것처럼, 예루살렘은 하나님을 철저히 배반했습니다.

    그 결과는 명확합니다. “너는 네 음란과 네 음행의 죄를 담당할지니라.” 하나님을 잊은 자는 자신의 선택에 대한 책임을 피할 수 없습니다. 심판은 단순히 외부에서 주어지는 형벌이 아니라, 자신이 선택한 길의 필연적 결과입니다. 음란과 음행의 죄를 지었다면, 그 대가를 스스로 감당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더 이상 예루살렘의 변명이나 회피를 허락하지 않으시고, 각자가 자기 죄의 무게를 짊어지게 하십니다.

    이 말씀은 오늘날 신앙인들에게도 깊은 도전을 줍니다. 우리의 모든 죄의 뿌리는 결국 하나님을 잊는 데 있습니다. 하나님을 잊는 순간, 우리는 세상의 힘과 욕망을 붙잡게 되고, 그것이 결국 심판의 도구로 변합니다. 따라서 신앙의 본질은 하나님을 기억하는 삶입니다. 날마다 하나님의 은혜와 말씀, 구속을 기억할 때 우리는 죄의 길이 아니라 생명의 길로 걸어갈 수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이 절은 복음의 필요성을 강하게 드러냅니다. 인간은 끊임없이 하나님을 잊고 자기 욕망을 따르기에, 결국 스스로 죄를 담당할 수밖에 없는 존재입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우리의 죄를 대신 담당하셨기에, 우리는 더 이상 멸망이 아닌 구원의 길을 걸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네가 나를 잊었고 버렸다”라는 고발은 그리스도 안에서 “내가 너를 기억한다”라는 은혜의 선언으로 바뀝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말씀 앞에서 하나님을 기억하고, 오직 그분만 의지하는 삶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 묵상

    에스겔 23장 22–35절의 본문은 마치 충격적인 재판정에 서 있는 듯한 긴장감을 줍니다. 하나님은 예루살렘을 향해 “네가 나를 잊었고, 나를 네 등 뒤에 버렸다”라고 말씀하시며, 그 죄의 뿌리를 드러내십니다. 그리고 그 결과로 예루살렘은 자신이 사랑하던 대상에게서, 이제는 미워하는 자들의 손에 넘겨져 심판을 받습니다. 그들이 동경했던 바벨론과 앗수르, 그리고 의지하려 했던 애굽. 이 모든 세력이 심판의 도구가 되어 돌아옵니다. 결국 예루살렘은 벌거벗김을 당하고, 수치가 폭로되며, 심판의 잔을 한 방울도 남김없이 마셔야 했습니다.

    본문을 묵상할 때 가장 마음을 울리는 대목은, 하나님께서 예루살렘의 모든 죄의 근원을 “나를 잊었기 때문”이라고 말씀하신 부분입니다. 죄는 결국 기억의 문제라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하나님을 기억하지 못하는 순간, 사람은 반드시 다른 것을 붙잡게 됩니다. 기억의 공백은 결코 비어 있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등 뒤에 밀어낸 자리는 곧 세상의 권세, 욕망, 쾌락이 채웁니다. 예루살렘이 애굽과 앗수르, 바벨론을 바라본 것은 단순한 정치적 선택이 아니라, 하나님을 잊은 결과였습니다.

    이것은 오늘 우리 삶에도 그대로 적용됩니다. 바쁜 일상 속에서 하나님을 기억하지 않는 순간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직장에서의 성과, 가정의 문제, 인간관계의 갈등, 미래에 대한 불안과 같은 이 모든 것이 마음을 점령하면, 하나님은 어느새 우리의 등 뒤로 밀려납니다. 겉으로는 여전히 예배하고 기도하는 것 같아도, 실제로는 마음의 중심에서 하나님을 기억하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그때 우리는 예루살렘처럼 눈에 보이는 힘과 매혹적인 대상을 붙잡게 됩니다. 그리고 그것이 결국 우리를 치는 도구로 돌아옵니다.

    심판의 잔을 “조각까지 씹으며” 마셔야 한다는 표현은 너무도 끔찍합니다. 그러나 그만큼 죄의 결과가 철저하고 피할 수 없음을 보여줍니다. 죄는 언제나 끝까지 값을 치르게 합니다. 우리는 종종 죄를 가볍게 여기고, 조금은 괜찮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죄는 반드시 우리의 수고를 빼앗고, 수치를 드러내며, 끝내는 멸망에 이르게 합니다. 하나님은 이를 분명히 보여주심으로써, 죄를 가볍게 여기지 말라는 강력한 메시지를 주십니다.

    하지만 이 무서운 본문 속에서도 은혜의 빛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예루살렘이 스스로 죄를 담당해야 했지만,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죄를 대신 담당하셨습니다. 그분이 심판의 잔을 마시셨고, 벌거벗김을 당하셨으며, 조롱과 멸시를 받으셨습니다. 우리가 감당해야 할 심판을 그분이 십자가에서 대신 감당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더 이상 절망 가운데 머무르지 않고, 은혜 안에서 새로운 삶을 시작할 수 있습니다.

    이 말씀은 우리에게 도전을 줍니다. 나는 지금 누구를 기억하며 살고 있는가? 하나님을 기억하는 삶인가, 아니면 하나님을 등 뒤로 버리고 세상의 무언가를 붙잡고 있는가? 나를 안전하게 지켜줄 것 같았던 것들이 사실은 나를 치는 심판의 도구로 바뀔 수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죄의 근본은 하나님을 잊는 것이며, 구원의 시작은 하나님을 기억하는 것입니다.

    오늘도 우리는 하나님을 기억해야 합니다. 말씀을 묵상하며, 기도를 통해, 작은 일상 속에서도 하나님을 떠올리며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을 기억하는 순간, 우리의 삶은 죄의 길이 아니라 생명의 길로 나아갑니다. 예루살렘이 하나님의 말씀을 잊었을 때 심판이 임했지만, 우리가 하나님을 기억할 때 은혜와 구원이 임합니다. 하나님을 기억하는 삶, 그것이 우리의 유일한 안전이자 소망입니다.


  • 상징과 의미

    • 오홀라와 오홀리바 : 
      이름만 다를 뿐 둘 다 하나님의 백성임에도 불구하고, 이방 민족의 관습을 따라 우상숭배와 비도덕적 행위에 빠진 모습을 상징합니다.

    • 음행의 비유 : 
      하나님과의 언약적 관계를 저버린 것을 사람의 불륜 및 음행에 비유하여, 영적 배신과 배타적 충성의 상실을 극적으로 드러냅니다.
    • 심판의 선언 : 
      반복된 타락 후에 마침내 임박한 심판이 언급되며, 이는 하나님의 공의와 속죄 없는 죄에 대한 심각성을 강조합니다.

    문학적 특징

    에스겔 23장은 다른 예언서보다도 더욱 생생하고, 때로는 충격적일 만큼 직설적으로 비유를 사용합니다. 
    이는 죄악의 본질과 그 심각성을 강하게 독자에게 각인시키기 위함입니다. 
    반복되는 관용구와 상징, 인물의 대조는 전체적인 구조 안에서 본문의 메시지를 선명히 드러냅니다.

    묵상포인트

    • 믿음의 공동체가 하나님의 언약을 지키지 못할 때, 어떤 결과가 따르는지 본문은 경고합니다.
    • 나와 우리의 신앙 안에서 하나님만을 신뢰하고 따르고 있는가, 혹은 세상의 가치관이나 우상을 따라가고 있지는 않은지 점검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나에게 적용해보기

    • 하나님과 나 사이의 언약적 관계를 매일 새롭게 기억하며 주님의 뜻에 충실하게 살아가는지 돌아봅시다.
    • 현대 사회 속에서도 하나님 아닌 것에 마음을 빼앗기고 있지 않은지, 우상숭배적 요소가 무엇인지 스스로 점검해보길 바랍니다.





  • 두 자매 오홀라와 오홀리바의 타락과 심판

    본문 요약

    에스겔 23장은 두 자매 오홀라와 오홀리바를 비유로 들어 사마리아(북이스라엘)와 예루살렘(남유다)의 타락과 하나님의 심판을 경고하는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두 자매가 어린 시절부터 음란한 행위를 일삼았으며, 이방 나라들과 부정한 관계를 맺으며 영적 간음을 저질렀다고 말씀하십니다. 오홀라(사마리아)는 앗수르와 연합하여 우상을 섬기다가 결국 앗수르에 의해 멸망했고, 오홀리바(예루살렘) 역시 바벨론과 이집트에 기대면서 우상 숭배에 빠졌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들의 죄악을 심판하시고, 그들이 의지하던 나라들에 의해 멸망당하게 하실 것입니다. 결국 이스라엘과 유다는 하나님을 떠나 이방 나라들의 문화와 신들을 받아들이면서 결국 그들 손에 멸망당하는 결과를 맞이하게 됩니다.

    본문의 구조

    1. 두 자매의 음행과 배교 (1~21절)
    2. 오홀리바의 더 큰 타락과 심판 (22~35절)
    3. 두 자매에 대한 최종 심판 (36~49절)

    두 자매의 음행과 배교 (1~21절)

    하나님께서는 오홀라(사마리아)와 오홀리바(예루살렘)를 한 어머니에게서 난 두 자매로 묘사하십니다. 그들은 어려서부터 부정한 행동을 일삼으며, 이방 나라들과 혼합된 신앙을 받아들였습니다. 오홀라는 앗수르를 사랑하며 그들의 신들과 문화를 받아들이고, 결국 앗수르에게 의지하다가 멸망당합니다. 하지만 오홀리바는 오히려 더 심하게 타락하여, 바벨론과 애굽을 따르며 그들의 풍습을 본받고 우상을 섬겼습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선택한 백성이 거룩한 삶을 살지 않고 세상의 쾌락과 권력을 따라갔음을 의미합니다.

    오홀리바의 더 큰 타락과 심판 (22~35절)

    하나님께서는 오홀리바(예루살렘)가 오홀라보다 더 악한 행위를 했다고 선언하십니다. 그녀는 바벨론을 의지하고, 그들과 동맹을 맺으며 더욱 깊은 우상 숭배에 빠졌습니다. 하지만 바벨론은 결국 그녀를 배신하고 예루살렘을 침략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녀가 스스로 선택한 길로 인해 고통받게 하시고, 그들이 의지했던 나라들이 오히려 그들을 멸망시킬 것이라고 선언하십니다. 이는 우리가 하나님이 아닌 세상을 의지할 때 결국 그 세상에 의해 무너질 수밖에 없음을 보여줍니다.

    두 자매에 대한 최종 심판 (36~49절)

    하나님께서는 두 자매가 행한 모든 죄를 열거하시며, 그들의 피 흘림과 우상 숭배가 얼마나 심각한지를 강조하십니다. 그들은 자신의 자녀들을 우상들에게 희생하며, 성전을 더럽히고, 하나님을 경멸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행위대로 심판을 내리실 것이며, 그들이 당할 형벌이 다른 나라들에게 본보기가 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행한 모든 죄로 인해 스스로 부끄러움을 당하고, 결국 하나님 앞에서 그들의 불의를 깨닫게 될 것입니다.

    결론

    에스겔 23장은 하나님을 떠나 세상을 의지하며 우상을 숭배한 이스라엘과 유다의 죄를 적나라하게 폭로하는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선택하시고 보호하셨지만, 그들은 하나님을 버리고 세상과 손을 잡았습니다. 그 결과 그들이 의지했던 이방 나라들에 의해 멸망을 당하게 되었습니다. 이는 하나님이 아닌 세상을 의지하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고 위험한지를 보여줍니다. 우리는 이 말씀을 통해 하나님만을 의지하는 것이 진정한 안전과 평안을 가져다준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세상을 따르지 않고, 거룩한 삶을 살아가길 원하십니다. 하나님의 심판은 공의롭지만, 동시에 그의 목적은 회개와 회복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을 떠나 세상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께만 우리의 신뢰를 두고 그의 말씀에 순종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 9월 9일(화) 에스겔 19-21장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슬피 탄식하라(21:6)

  • 19장 : 이스라엘 지도자들의 몰락
  • 20장 : 이스라엘의 반역 역사
  • 21장 : 바벨론의 칼
  • 인자야 너는 탄식하되 허리가 끊어지는듯이 그들의 목전에서 슬피 탄식하라.
    Therefore groan, son of man! Groan before them with broken heart and bitter grief.

    12. 인자야 너는 부르짖어 슬피 울찌어다 이것이 내 백성에게 임하며 이스라엘 모든 방백에게 임함이로다 그들과 내 백성이 함께 칼에 붙인바 되었으니 너는 네 넓적다리를 칠찌어다.
    Cry out and wail, son of man, for it is against my people; it is against all the princes of Israel. They are thrown to the sword along with my people. Therefore beat your breast.


    탄식하다(584) 아니흐(’ânach) אָנַח 스트롱번호 584

    1.  니팔형 : 한숨짓다.  2. 겔 21:12.  3.  출 2:23. 
    발음 [ ’ânach ]  
    구약 성경 / 11회 사용
      • a.원형 니팔형 : 한숨짓다, 신음하다, 한탄하다, 출2: 23, 욜1:18.
      •   b.원형 [עַל과 함께 쓰여 신음의 원인을 나타내는 경우], 겔21:12(7).
      • c. 원형 [מִן과 함께 쓰여 신음의 원인을 나타내는 경우], 출2:23.
    • 관련 성경  /  탄식하다(사 24:7, 겔 21:6, 욜 1:8). 
                          [명] 탄식(애 1:21).



    슬피하다(4814) מְרִירוּת 메리루트(merîyrûwth) 스트롱번호 4814


    1. 슬픔.  2. 괴로움.  3. 비애 
    발음 [ merîyrûwth ]  
    어원/ 4843의 유래  
    구약 성경 / 2회 사용
    • 1. 명사, 여성 슬픔, 괴로움, 비애, 비탄, 불행, 겔21:11(6).
    • 관련 성경 /  [부] 슬피(겔 21:6).



    허리(4975) 모템( môthen) מֹתֶן 스트롱번호 4975

    1. 가느다란.  2. 쌍수로만 쓰임 : מָתְנַיִם 허리
    발음 [ môthen ]
    어원 / 사용되지 않는 어원에서 유래  
    구약 성경 / 5회 사용
    • 1. 가느다란, 날씬한.
      • a.  [주]쌍수로만 쓰임: מָתְנַיִם 허리, 창37:34, 왕하4:29, 9:1, 사20:2, 시66:11, 렘1:17.
    • 관련 성경 / 허리(창 37:34, 왕상 20:31, 사 20:2), 요통(사 21:3). 
      [동] 차다(겔 9:3).


    끊어지다(7670) 쉬브로운( shibrôwn)  שִׁבְרוֹן    

    1. 깨뜨림.   2. 멸망
    발음 [ shibrôwn ]  
    어원  /  7665에서 유래
    구약 성경  /  2회 사용
    • 1.  명사, 남성 깨뜨림, 겔21:11(6)
    • 2.  명사, 남성 멸망, 렘17:18.
    • 관련 성경  / 멸망(렘 17:18), 끊어짐(겔 21:6).


    슬피 탄식하라
    무엇 때문에 무엇을 위하여 슬피 탄식해야 할까요?

    에스겔서 21장은 예루살렘과 이스라엘에 임할 하나님의 심판을 예고하는 말씀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이 장은 하나님께서 에스겔을 통해 예루살렘의 심판을 상징적으로 선포하시며, 바벨론의 공격이 불가피하다는 사실을 강조합니다. 
    구체적으로, '칼'이라는 이미지(심상)를 사용하여 임박한 재앙과 파멸의 위중함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구조와 주요 내용

    • 1-7절 : 하나님의 칼이 예루살렘과 이스라엘에 임할 것을 선포합니다. 슬퍼하며 경고하는 에스겔의 모습이 나타납니다.
    • 8-17절 : 날카로운 칼, 갈고 닦은 칼에 대한 비유로 심판의 확실성과 임박함을 알립니다.
    • 18-27절 : 바벨론 왕이 갈림길에서 점을 치고, 결국 예루살렘을 치기로 결정하는 장면이 등장합니다.
    • 28-32절 : 암몬 족속을 향한 별도의 심판 예언이 이어지며, 모든 민족에 대한 하나님의 정의로운 심판을 강조합니다.

    전체적인 의미와 메시지

    에스겔서 21장이 전달하는 중요한 메시지는 하나님의 공의와 심판의 불가피성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의 불순종과 죄로 인해 하나님의 칼, 즉 심판이 내려질 것임을 분명히 하고 있습니다. 
    또한, 하나님의 선지자는 개인적으로 민족의 아픔을 함께 겪으며 슬퍼함을 표현합니다. 
    이는 심판안에 담긴 하나님의 마음과 정의, 그리고 회개의 기회를 보여줍니다.

    묵상포인트

    • 하나님의 심판이 임박했음을 깨닫고, 삶의 방향과 마음의 상태를 점검할 필요성을 돌아봅니다.
    • 에스겔처럼 공감하는 마음으로 이웃과 사회의 아픔에 함께하는 태도를 배울 수 있습니다.
    • 하나님의 공의와 자비로우심이 함께 있음을 기억하며, 회개와 변화의 기회를 놓치지 않아야 함을 묵상합니다.

    나에게 적용해보기

    오늘날 나의 삶에도 때때로 '하나님의 칼'과 같은 경고가 들릴 때가 있습니다. 
    이럴 때, 내 마음과 행실을 점검하고, 하나님의 뜻을 구하며 회개하는 삶을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또한, 주변의 아픔과 불의를 외면하지 말고, 에스겔처럼 함께 슬퍼하고 기도하는 마음을 품을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에스겔 21장 : 왜 하나님의 칼은 모두를 향했는가?

    에스겔서 전반에 흐르는 긴장감 넘치는 심판의 예언은 21장에 이르러 '여호와의 칼'이라는 섬뜩하고도 역동적인 이미지로 절정에 달합니다. 
    이 장은 단순한 멸망의 선고를 넘어, 하나님의 공의로운 진노가 어떻게 구체적으로 역사 속에 현현하는지, 그리고 그 과정에서 선지자가 겪어야 하는 깊은 고뇌와 백성들의 처절한 애통을 생생하게 그려냅니다. 
    예루살렘과 이스라엘 땅, 심지어 이방 민족인 암몬 자손에게까지 미치는 여호와의 칼날은 죄악에 대한 하나님의 단호한 심판 의지를 보여주며, 동시에 모든 불의가 청산된 후 도래할 진정한 통치에 대한 희미한 소망을 암시하기도 합니다. 
    이 불가피한 심판의 드라마 속으로 들어가 보겠습니다.

    시대적 배경과 맥락 소개

    에스겔 21장의 예언이 선포될 당시, 남유다 왕국은 바벨론 제국의 압제 하에 마지막 숨을 몰아쉬고 있었습니다. 
    시드기야 왕은 바벨론에 대한 반역을 꾀했지만, 이는 오히려 바벨론의 더욱 가혹한 침공을 불러오는 결과를 초래하게 됩니다. 
    이러한 일촉즉발의 위기 상황 속에서, 예루살렘 성내에는 여전히 "하나님의 도성이 설마 망하겠느냐"는 안일한 낙관론과 거짓 선지자들의 달콤한 위로가 횡행하고 있었습니다. 

    백성들은 자신들의 죄악을 돌아보기보다는 현실의 고통만을 원망하거나, 혹은 헛된 기적을 바라며 현실을 외면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바로 이러한 영적 무감각과 임박한 파국 앞에서, 에스겔은 하나님의 심판을 상징하는 '여호와의 칼'이 이미 뽑혔으며, 그 칼날이 예루살렘을 향해 무섭게 다가오고 있음을 선포해야 했습니다. 
    이 예언은 단순한 경고를 넘어, 이미 시작된 심판의 집행을 알리는 선언과도 같았습니다. 
    포로로 잡혀와 있던 유다 백성들에게 이 메시지는 남아있는 고국과 성전에 대한 마지막 희망마저 꺾는 절망적인 소식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동시에 이 처절한 심판의 메시지는, 모든 것이 무너진 폐허 위에서 비로소 새로운 시작을 가능하게 하는 정화의 과정이기도 했습니다. 

    독자들이 이 이야기를 읽어야 하는 이유는, 개인과 공동체의 죄악이 초래하는 파괴적인 결과를 직시하고, 하나님의 공의가 어떻게 역사를 통해 실현되는지를 목격함으로써, 오늘날 우리가 마주하는 위기와 심판의 징조들 앞에서 어떤 자세를 취해야 할지 성찰할 기회를 제공하기 때문입니다. 
    또한, 극한의 절망 속에서도 꺼지지 않는 하나님의 궁극적인 구원 계획을 발견할 수 있는 실마리를 제공합니다.

    핵심 사건 또는 본문 요약

    에스겔 21장은 여러 단락으로 구성되어 있지만, 전체를 관통하는 핵심 이미지는 바로 '여호와의 칼'입니다. 
    이 칼은 다양한 대상과 상황을 향해 휘둘러지며, 하나님의 심판이 얼마나 철저하고 무자비하게 임할지를 생생하게 보여줍니다.

    첫째, 이스라엘을 향해 뽑힌 칼 (1-7절) : 

    하나님께서는 에스겔에게 예루살렘과 이스라엘의 성소들과 땅을 향하여 예언하라고 명령하십니다. 
    "내가 칼을 칼집에서 빼어 네 가운데에서 의로운 자와 악한 자를 끊어 버릴 것이다."(겔 21:3, 우리말성경) 라는 선언은 심판의 무차별성과 철저함을 강조합니다. 
    이 끔찍한 소식에 에스겔은 "허리가 끊어지는 듯이 탄식하라"(겔 21:6)는 명령을 받는데, 이는 선지자가 백성들이 겪게 될 고통을 미리 체감하며 깊이 애통해야 함을 보여줍니다.

    둘째, 칼의 노래 (8-17절) : 

    이 부분은 칼 자체를 의인화하여 그 예리함과 무시무시한 파괴력을 노래하는 형식으로 되어 있습니다. 
    "칼이여, 칼이여, 날카롭고도 빛나도다! 그 칼이 날카로움은 죽임을 위함이요, 빛남은 번개같이 되기 위함이니..."(겔 21:9-10, 새번역) 와 같은 구절들은 칼의 위력을 생생하게 전달합니다. 
    에스겔은 손뼉을 치며 칼의 임함을 재촉하고, 그 칼이 세 번 거듭 사용되어 많은 사람을 죽일 것임을 예언합니다. 
    이는 심판의 강도와 반복성을 암시합니다.

    셋째, 바벨론 왕의 칼 (18-27절) : 

    하나님께서는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이 두 길, 즉 암몬의 수도 랍바와 유다의 수도 예루살렘으로 가는 갈림길에서 점을 치는 모습을 묘사하게 하십니다. 
    그는 화살을 흔들어 점괘를 얻고, 드라빔(우상)에게 물으며, 짐승의 간을 살펴봅니다. 
    결국 점괘는 예루살렘을 향하게 되고, 바벨론 왕은 예루살렘을 공격할 것입니다. 
    이어서 이스라엘의 "악하고 더러운 군주"(시드기야 왕을 지칭)의 마지막 날이 이르렀음이 선포됩니다. 
    그의 왕관과 관모는 벗겨지고, 낮은 자가 높아지며 높은 자가 낮아지는 전복이 일어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내가 엎드러뜨리고 엎드러뜨리고 엎드러뜨리려니와 이것도 다시 있지 못하리라 마땅히 얻을 자가 이르면 그에게 주리라"(겔 21:27)고 선언하시는데, 이는 기존 질서의 완전한 파괴와 함께 장차 임할 새로운 통치자에 대한 희미한 암시를 담고 있습니다.

    넷째, 암몬 족속을 향한 칼 (28-32절) : 

    마지막으로 칼은 암몬 족속을 향합니다. 
    그들은 이스라엘의 멸망을 기뻐하며 스스로 안전하다고 여겼지만, 그들 역시 심판을 피할 수 없음이 선포됩니다. 
    그들의 칼은 다시 칼집에 꽂히지 못하고, 그들이 지음 받은 곳, 그들의 본토에서 심판받아 불에 삼켜질 것입니다.

    이러한 '여호와의 칼'의 행보는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습니다.


    '여호와의 칼'의 대상과 특징 (겔 21장) 주요 내용 및 의미
    이스라엘 (예루살렘, 성소, 땅) (1-7절) 의인과 악인 모두를 끊는 무차별적 심판. 선지자의 깊은 탄식 동반.
    칼의 노래 (8-17절) 날카롭고 빛나는 칼, 살육과 파괴를 위해 준비됨. 심판의 강도와 반복성.
    바벨론 왕의 도구로서의 칼 (18-27절) 점을 통해 예루살렘으로 향함. 시드기야 왕의 폐위, 기존 질서의 전복, 장차 올 '마땅히 얻을 자' 암시.
    암몬 족속 (28-32절) 이스라엘 멸망을 기뻐한 죄에 대한 심판. 철저한 멸망 예고.
    철학적 / 존재론적 상징 해석

    에스겔 21장의 '여호와의 칼'은 단순한 전쟁 무기를 넘어, 하나님의 공의, 심판의 불가피성, 그리고 인간 존재의 취약성에 대한 깊은 철학적, 존재론적 성찰을 담고 있습니다.

    첫째, '여호와의 칼'이 가진 심판의 보편성과 무차별성 

    신정론(Theodicy), 즉 악과 고통의 문제 앞에서 신의 정의를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하는 오래된 질문과 맞닿아 있습니다. 
    칼이 "의로운 자와 악한 자를 끊어 버릴 것"이라는 선언은, 공동체적 심판 앞에서 개인의 의로움이 때로는 무력할 수 있음을 보여줍니다. 이는 마치 자연재해나 전쟁과 같은 거대한 재앙 앞에서 선인과 악인이 함께 고통받는 현실을 떠올리게 합니다. 

    독일의 철학자 한나 아렌트(Hannah Arendt)는 '악의 평범성(banality of evil)'을 이야기하며, 거대한 악의 시스템 속에서 개인의 책임과 판단이 어떻게 마비될 수 있는지를 지적했습니다. 

    반대로, 하나님의 심판 역시 개인의 행위를 넘어선 공동체적 죄악의 결과로 임할 때, 그 범위는 개인의 경계를 넘어설 수 있음을 시사합니다. 이 무서운 공의 앞에서 인간은 자신의 유한성과 심판의 불가해성을 절감하게 됩니다.

    둘째, 에스겔에게 명령된 "허리가 끊어지는 듯한 탄식"

    고통에 대한 공감과 예언자적 중보의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선지자는 심판을 기계적으로 전달하는 자가 아니라, 백성들이 겪게 될 고통을 자신의 몸으로 미리 체감하고 그들을 위해 애통하는 존재입니다. 

    이는 프랑스의 철학자 엠마누엘 레비나스(Emmanuel Levinas)가 강조한 '타자에 대한 책임'과 유사한 맥락으로 이해될 수 있습니다. 
    레비나스는 타인의 얼굴 앞에서 우리는 무한한 윤리적 책임을 느끼게 된다고 보았습니다. 

    에스겔의 탄식은 단순한 감정 표현을 넘어, 고통받는 타자(이스라엘 백성)에 대한 깊은 연대와 책임의 표현이며, 동시에 그들을 향한 하나님의 아픔을 대변하는 행위이기도 합니다. 
    이처럼 심판의 메시지 속에는 역설적으로 사랑과 연민이 녹아 있는 것입니다.

    셋째, 시드기야 왕의 폐위와 함께 선포된 "내가 엎드러뜨리고 엎드러뜨리고 엎드러뜨리려니와 이것도 다시 있지 못하리라 마땅히 얻을 자가 이르면 그에게 주리라"

    기존 질서의 해체와 새로운 질서에 대한 갈망을 보여줍니다. 
    부패하고 불의한 통치의 종말은 필연적이며, 그 자리에는 진정으로 '마땅히 얻을 자', 즉 공의롭고 참된 통치자가 와야 한다는 소망이 담겨 있습니다. 
    이는 역사 속에서 반복되는 혁명과 개혁의 열망, 그리고 더 나은 세상을 향한 인간의 보편적인 기대를 반영합니다. 

    철학자 칼 마르크스(Karl Marx)가 계급 없는 사회를 향한 역사의 필연적 발전을 이야기했다면, 에스겔은 신적 개입을 통해 도래할 궁극적인 정의의 왕국을 예고하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이 '마땅히 얻을 자'에 대한 기대는 훗날 메시아 사상으로 발전하는 중요한 신학적 씨앗이 됩니다.

    현대적 적용 또는 실존적 질문

    에스겔 21장의 '여호와의 칼' 이야기는 섬뜩하고 충격적이지만,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여전히 유효한 질문과 성찰의 계기를 제공합니다. 과연 우리는 이 고대 예언에서 무엇을 읽어내야 할까요?

    첫째, 우리 시대의 '여호와의 칼'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전쟁이나 자연재해와 같은 물리적인 재앙일 수도 있고, 혹은 사회 전체를 병들게 하는 구조적인 악, 만연한 불의, 걷잡을 수 없는 환경 파괴, 인간성 상실과 같은 보이지 않는 위협일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칼날' 앞에서 "설마 나에게까지 미치겠어?"라는 안일함에 빠져 있지는 않습니까? 
    에스겔의 예언은 우리에게 현실을 직시하고, 임박한 위기에 대한 경고의 목소리에 귀 기울일 것을 촉구합니다.

    "가장 큰 죄악은 불의를 보고도 침묵하는 것이다. 그 침묵은 암묵적인 동의와 같다." - (익명의 격언 재구성)

    둘째, "의인과 악인을 함께 끊는" 심판 앞에서 우리는 개인의 책임과 공동체의 운명에 대해 어떤 태도를 가져야 할까요? 
    개인의 경건함과 선행이 중요하지 않다는 의미는 아닐 것입니다. 
    그러나 거대한 사회적 죄악의 물결 앞에서는 개인의 노력만으로는 한계가 있음을 인정해야 합니다. 
    이는 우리에게 더 넓은 시야를 가지고 공동체 전체의 문제에 관심을 갖고, 정의로운 사회 시스템을 구축하기 위해 함께 노력해야 할 필요성을 일깨웁니다. 
    나의 작은 선행이 세상을 바꿀 수 없다고 절망하기보다, 그 작은 행동들이 모여 큰 변화를 이룰 수 있다는 희망을 가져야 하지 않을까요?

    셋째, 에스겔의 "허리가 끊어지는 듯한 탄식"은 오늘날 우리에게 어떤 의미를 지닐까요? 
    세상의 고통과 불의 앞에서 우리는 얼마나 깊이 공감하고 아파하고 있습니까? 
    타인의 고통을 외면하거나 무감각해진다면, 우리는 이미 영적으로 죽은 자와 다름없을 것입니다. 
    선지자의 탄식은 우리에게 잃어버린 연민의 감정을 회복하고, 고통받는 이들의 편에 서서 함께 울고 기도하며, 그들의 아픔을 덜어주기 위한 구체적인 행동에 나설 것을 요구합니다. 
    진정한 변화는 차가운 이성이 아닌, 뜨거운 가슴에서 시작되는 법입니다.

    넷재, "마땅히 얻을 자"에 대한 소망은 절망 속에서도 희망을 찾게 하는 동력입니다. 
    모든 것이 무너지고 끝났다고 생각되는 순간에도, 하나님께서는 새로운 시작을 준비하고 계심을 믿는 것입니다. 
    부패한 세상 질서가 영원할 수 없으며, 궁극적으로는 정의와 평화가 승리할 것이라는 믿음은 우리에게 오늘의 어려움을 견디고 미래를 향해 나아갈 용기를 줍니다. 
    우리는 각자의 삶의 자리에서 그 '마땅히 얻을 자'가 오실 길을 예비하는 작은 등불이 될 수 있지 않을까요?

    에스겔 21장은 우리에게 다음과 같은 실존적 질문을 던집니다:

    • 나는 내 삶과 우리 사회에 드리워진 '심판의 칼날'을 감지하고 있는가?
    • 불의와 고통 앞에서 나는 침묵하고 있는가, 아니면 탄식하며 행동하고 있는가?
    • 나는 절망적인 현실 속에서도 궁극적인 희망을 붙들고 살아가는가?
    결론 요약

    에스겔 21장은 '여호와의 칼'이라는 강력하고도 무서운 상징을 통해 임박한 심판의 필연성과 그 범위를 생생하게 전달합니다. 
    이 칼은 예루살렘과 이스라엘의 의인과 악인을 가리지 않고 향하며, 선지자 에스겔에게는 백성들의 고통을 예감하는 깊은 탄식을 요구합니다. 
    또한 바벨론 왕을 도구로 사용하여 유다 왕 시드기야의 패역한 통치를 종식시키고, 기존의 모든 질서를 전복시킨 후 '마땅히 얻을 자'를 통해 새로운 통치가 도래할 것임을 암시합니다. 
    심지어 이스라엘의 멸망을 기뻐했던 이방 민족 암몬에게까지 심판의 칼날이 미침으로써, 하나님의 공의는 국경을 넘어 보편적으로 적용됨을 보여줍니다. 
    결국 에스겔 21장은 죄악에 대한 하나님의 단호한 심판이 개인과 공동체의 운명을 어떻게 뒤흔드는지, 그리고 그 절망적인 파괴 속에서도 어떻게 새로운 질서와 희망의 씨앗이 뿌려지는지를 극적으로 보여주는 예언입니다. 
    이 고대의 메시지는 오늘날 우리에게도 안일함에서 벗어나 시대의 위기를 직시하고, 정의를 향한 열망과 고통받는 이들에 대한 깊은 연민, 그리고 궁극적인 희망을 품고 살아가야 할 것을 강력하게 촉구하고 있습니다.


  • 에스겔 21:1~12 / 하나님의 마음을 아는 자

    6. 인자야 탄식하되 너는 허리가 끊어지듯 탄식하라 그들의 목전에서 슬피 탄식하라.. 
    12. 인자야 너는 부르짖어 슬피 울지어다

    하나님께서 유다를 심판하셨지만, 하나님의 목적은 냉혹한 형벌이 아니라, 죄로 인해 무너져가는 백성들의 회복이었다. 
    심판 가운데서도 안타까워하시며 눈물을 흘리시는 분이 바로 하나님이시다. 
    에스겔은 이런 하나님의 마음을 알았기에 “허리가 끊어지듯 탄식하고”, “슬피 눈물을 흘렸던” 것이다.

    바울도 십자가를 거부하는 동족들을 보면서 “큰 근심과 끊임없는 고통”이 있다고 했다. 
    자신의 동족들이 예수님을 믿게 된다면 바울은 저주를 받아도 상관이 없다고 했다. 
    그만큼 유다 민족들을 사랑했기 때문인데, 이 또한 이스라엘을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심장을 자신의 마음에 품었기 때문일 것이다.

    하나님의 사람은 하나님의 마음을 품은 자다. 
    하나님의 사람은 타인의 죄를 보고 비웃거나 정죄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마음으로 슬퍼할 줄 알고 긍휼히 여길 줄 아는 자다. 
    하나님의 사람은 죄인들과 연약한 자들을 무시하거나 비판하는 게 아니라, 예수님처럼 죄인들과 약자의 친구가 되는 자다. 
    말보다 눈물로, 비난보다 중보로 서는 자가 곧 하나님의 사람이다.

    하나님은 지금도 이런 하나님의 사람을 찾고 계신다. 
    하나님의 마음으로 울어줄 사람을 찾으시고, 하나님의 마음으로 사랑해 줄 사람을 찾으신다. 
    이제는 우리가 이런 하나님의 사람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 
    하나님의 마음을 품은 자가 되기를 소망해 본다.

    하나님의 마음을 품은 자가 되게 하옵소서. 
    하나님의 마음으로 울고, 하나님의 마음으로 사랑하는 자가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에스겔 21:6 (개역개정 / NASB)

  • “인자야 탄식하되 너는 허리가 끊어지듯 탄식하라 그들의 목전에서 슬피 탄식하라”
    "As for you, son of man, groan with breaking heart and bitter grief, groan in their sight.

    선지자 에스겔을 찾아온 유다 장로들은 그가 전하는 하나님의 말씀에 진지하게 반응하지 않았습니다. 
    그의 신탁을 단지 비유 정도로 가볍게 여겼습니다(20:49). 이에 에스겔은 칼의 심판이 실제로 일어날 것임을 절규하며 선포하였습니다.

    오늘 본문은 전반부인 1절-7절은 칼의 비유, 그리고 후반부인 8절-17절은 칼의 노래로 나눌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칼집에서 칼을 뽑아 남에서 북까지, 곧 이스라엘 전체를 심판하시겠다고 하십니다(3-5절). 에스겔은 이 같은 상황에서 허리가 끊어지듯 탄식하라는 명령을 받습니다(6절). 하나님께서는 칼이 준비되어 있다고 반복해서 경고하십니다(9-11절). 이 심판에는 의인과 악인 누구도 예외가 없습니다. 이 칼은 한 번만 쓰이는 게 아니라 두세 번 거듭 쓰일 것이라고 거듭 경고합니다(14절). 확실한 심판을 내리겠다는 하나님의 결연한 뜻입니다. 하나님의 칼은 분노가 다 풀릴 때까지 멈추지 않을 것입니다(16-17절).

    에스겔을 통해 전해지는 오늘 본문은 두려운 칼의 심판 장면입니다. 이 말씀은 역사 속에서 실제로 일어났던 예루살렘 멸망 사건을 예고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심판은 현대를 사는 우리에게도 가까이 있음을 경고합니다.

    “너는 허리가 끊어지듯 탄식하라. 그들의 목전에서 슬피 탄식하라”
    “그들의 목전에서 슬피 탄식하라”는 구절이 더 그랬습니다.

    선지서를 묵상하는 것은 제게 신앙을 각성시켜주는 용광로요 풀무 역할을 하는 말할 수 없이 귀한 말씀 경험입니다. 그러나 솔직하게 말하면 정말 어렵습니다. 말씀 해석도 어렵지만 계속 긴장하게 하는 그것이 마음을 편치 않게 해줍니다. 특히 이 묵상 말씀을 저만 적용 대상으로 하면 그래도 괜찮겠는 데, 이것을 다른 분들과 나눌 때 괴롭습니다. 이왕이면 밝고 힘이 되는 말씀, 미래를 예수 제자로 잘 사는 말씀을 나누면 좋을 텐 데 이런 경고와 심판에 관한 말씀을 나눠야 하니 제 마음도 답답하지만 이 글을 읽는 분들에게도 차마 못할 노릇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말씀은 어느 것 하나 소홀히 할 수 없는 ‘하나님의 말씀’이기에 순종하는 마음으로 오늘의 본문 에스겔서를 묵상합니다. 더구나 제가 목사 안수를 받기 전 깊이 마음에 다가왔던 구절인 예레미야 1:7에서 하나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내가 너를 누구에게 보내든지 너는 가며 내가 네게 무엇을 명령하든지 너는 말할 지어다”라는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여 오늘도 질책의 말씀을 함께 나눕니다.

    오늘 본문 6절에서 하나님은 에스겔에게 ‘탄식하라’고 명령하십니다. 그것도 “허리가 끊어지듯 탄식하라‘고 명령하십니다. 하나님의 재앙이 눈앞에 다가오고 있으니 허리가 부서질 정도로 괴롭고 통렬하게 탄식하라고 하십니다. 유다 백성들이 이 탄식을 보며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오도록 절박하고 절박한 마음으로 탄식하라고 명령하십니다. 이 대목을 읽으며 나는 우리 가정과 교회와 사회를 위해 이처럼 슬퍼하며 기도했는지, 나아가 이처럼 온 몸과 마음을 바쳐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는지를 돌아보게 됩니다. 특히 목사 안수를 받고나서 지난 2년 4개월 동안 여기저기서 전한 말씀들을 돌아보게 합니다. 오늘 말씀에 비추어 보면 턱도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비추어 봤을 때 분명히 우리 사회도, 교회도 정상이 아닙니다. 이건 지난 몇 주 동안 에스겔서를 나누면서 여러 번 지적했던 사항입니다. 이런 상황을 보고 축복만 얘기하는 것은 정상이 아닙니다. 분명히 잘못 되었다고 얘기해야 합니다. 유다가 범했던 죄인 우상숭배와 하나님의 공의에 반하는 불의를 행한 죄들은 바로 우리의 죄악들입니다. 그러므로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가자고 허리가 끊어지듯 탄식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은, 특히 목사나 교회 지도자들은 이를 위해 눈물을 쏟으며, 목숨을 바치는 마음과 자세로 그리해야합니다. 그것도 ‘그들의 목전에서’ 그리해야 합니다.

    에스겔이 하나님의 심판 재앙 소식을 전했을 때 유다 사람들은 에스겔을 비유나 늘어놓는 자가 아니냐면서 조롱했습니다(20:49). 그들은 에스겔에게 알아들을 수 없는 이야기나 하는 자라고 멸시했습니다. 이처럼 사람들 앞에서 듣기 거북한 심판 이야기를 전하는 것은 환영받는 일이 아닙니다. 아니 조롱과 핍박과 마주쳐야 하는 일입니다. 사실 저도 육신이 다한 후 심판이 있다는 메시지를 전하는 것이 부담스럽습니다. 그러나 이 가르침을 뺀다면 기독교가 아닙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자는 이 세상에 아무도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 교인들과 교회들은 이를 너무 가볍게 여기며 안일한 생활에 젖어 있습니다. 인기가 없더라도 교인들 앞에서 탄식하며 말씀을 전하고 또 가르치는 목사, 그리스도인이 되겠습니다. 이것은 이 시대를 사는 그리스도인 누구에게나 주신 하나님의 명령입니다.

    [오늘의 기도]

    사랑하는 하나님 아버지,

    저의 믿음을 아십니다. 저의 행위를 다 알고 계십니다. 아직도 우상과 불의에서 자유롭지 못한 믿음 없음을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 용서해 주십시오.








  • '허리가 끊어지듯' 탄식할 만한 상황

    심한 허리 통증이나 긴급한 상황을 의미하는 표현입니다. 
    이는 단순히 허리를 삐끗한 것 이상으로, 디스크 탈출, 척추관협착증, 골절, 감염 등 심각한 질환이나 신경 손상이 동반될 수 있는 응급 상황을 의미합니다. 
    이러한 증상이 있다면 즉시 전문의의 진단을 받아야 하며, 특히 다음과 같은 증상이 동반될 때 더욱 주의해야 합니다: 
    • 다리 마비 또는 감각 이상 : 다리에 힘이 들어가지 않거나 감각이 둔해지는 경우. 
    이럴 때 어떻게 대처해야 할까요?
    1. 병원 방문 :

      위의 위험 증상이 동반되거나 통증이 심하다면, 즉시 병원을 방문하여 정확한 진단을 받아야 합니다

      평소 허리를 보호하기 위한 방법

    잠잘 때 무릎 아래에 베개를 놓고 자거나, 앉을 때 엉덩이 아래에 방석을 깔아 허리에 가해지는 부담을 줄여줍니다. 
    맨몸 스쿼트와 같은 허리 강화 운동은 허리디스크 재활과 만성 통증 완화에 도움이 될 수 있습니다. 
    멸치, 브로콜리, 달걀, 연어 등 허리에 좋은 음식을 섭취하여 근육과 뼈 건강을 챙깁니다. 


  • 대소변 장애: 소변이나 대변을 원활하게 볼 수 없는 경우. 

  • 통증의 지속 또는 악화: 충분한 휴식이나 일반적인 처치에도 통증이 2주 이상 지속되거나 점점 심해지는 경우. 

  • 안정 및 휴식:
    급성 허리 통증의 경우 충분한 휴식이 도움이 되지만, 통증이 심하다면 무리한 활동을 피하고 안정을 취해야 합니다. 

  • 정밀 검사:
    의사의 진료 후, 필요하다면 엑스레이, CT, MRI 등의 정밀 검사를 통해 문제의 원인을 정확히 파악합니다. 









  • 9월 8일(월) 에스겔 16-18장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범죄하는 그 영혼이 죽으리라(18:4)

  • 16장 : 예루살렘의 타락한 역사. 부끄러운 과거 
  • 17장 : 두 독수리의 비유. 독수리와 포도나무 
  • 18장 : 개인의 책임. 자기 죄로 말미암아 죽는다


    모든 영혼이 다 내게 속한지라 아비의 영혼이 내게 속함 같이 아들의 영혼도 내게 속하였나니 범죄하는 그 영혼이 죽으리라.
    For every living soul belongs to me, the
    father as well as the son--both alike belong to me. The soul who sins is the one who will die.
  • 범죄하는 그 영혼이 죽으리라(The soul who sins is the one who will die)(The soul who sins will die.)

    남한은 안 먹어서 탈
    북한은 못 먹어서 탈 
    현대의 경제 정치 문화의 구조는 80년 차이
    남한은 사회는 발전이 빠르고 사람이 따라가는 것이 바쁘다.
    북한은 사회는 침체되고 사람은 배가 고파 오직 먹을 것만 생각한다.

    잘되면 제 탓 못되면 조상 탓 - 덕분

    남을 탓하는 것과 관련한 우리 속담이 많다. 
    ‘잘되면 제 탓 못되면 조상 탓’ 
    ‘내 탓 네 탓 수염 탓’ 
    ‘못살면 터 탓’ 
    ‘소경이 넘어지면 막대 탓’ 등이 있다. 
    남을 탓하는 것을 경계하라는 조상의 지혜가 담겨 있다고 볼 수 있다.

    ‘탓’은 주로 부정적인 현상이 생겨난 까닭이나 원인을 나타낼 때 쓰인다. 
    반면 좋은 일에는 ‘덕분(德分)’이 쓰인다. 
    “선배님 덕분에 맡은 일을 해낼 수 있었습니다” 
    “걱정해 주신 덕분에 잘 지냈습니다” 등과 같이 사용된다.

    그렇다면 ‘잘되면 제 탓 못되면 조상 탓’에서 ‘잘되면 제 탓’은 부정적 의미와 어울리는 ‘탓’의 용법상 맞지 않는다. 
    좋은 일은 ‘덕분(덕)’과 어울려야 하므로 ‘잘되면 제 덕분(덕) 못되면 조상 탓’이 돼야 한다. 
    둘 다 ‘탓’으로 처리한 것은 아마도 대구법(對句法) 또는 반복법으로 리듬감을 살리기 위함이거나 ‘탓’을 강조하다 보니 그렇게 된 것으로 보인다.

    비슷한 말로 ‘때문’이 있다. 
    ‘때문’은 긍정이나 부정적 현상을 가리지 않고 쓰인다는 점에서 ‘탓’ ‘덕분’과 구별된다. 
    따라서 “잘되면 제 탓(→덕분) 못되면 조상 탓”은 “잘되면 저 때문 못되면 조상 때문’으로 바꿔 써도 의미상 크게 차이가 나지는 않는다.

    에스겔 18:1- 2 

    또 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임하여 이르시되. 
    너희가 이스라엘 땅에 관한 속담에 이르기를 아버지가 신 포도를 먹었으므로 그의 아들의 이가 시다고 함은 어찌 됨이냐?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속담을 문제삼았습니다. 
    ‘아버지가 신 포도를 먹었으므로 그의 아들의 이가 시다 
    'The fathers eat sour grapes, and the children's teeth are set on edge'’ 

    이런 속담이 있었습니다. 
    이 속담은 이스라엘은 조상들의 죄때문에 심판을 받는단 말입니다. 
    이 속담은 하나님이 개인 책임을 무시하고 사람들 공동체적으로 대한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확실히 사람을 공동체적으로 대하며 이스라엘을 공동체로 부르셨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부르실 때 이스라엘을 공동체로 불렀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현재 이스라엘의 죄 뿐만 아니라 조상들의 죄때문에도 심판했습니다. 
    하나님은 확실히 이스라엘을 공동체적으로 대한 것은 오늘날 우리에게는 이상해 보입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오랫동안 공동체로 살고 공동체로 생각했습니다. 
    이스라엘이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것은 어떤 면에서는 맞는 말이자 이런 생각으로 개인적 책임을 면하고자 하는 것을 하나님은 못마땅하게 여겼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다시 이 속담을 사용하지 못하게 하십니다.

    ​에스겔 18:3-4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내가 나의 삶을 두고 맹세하노니 너희가 이스라엘 가운데에서 다시는 이 속담을 쓰지 못하게 되리라. 
    모든 영혼이 다 내게 속한지라 아버지의 영혼이 내게 속함 같이 그의 아들의 영혼도 내게 속하였나니 범죄하는 그 영혼은 죽으리라. 

    하나님은 하나님의 사심을 두고 맹세하며 이스라엘에서 이 속담을 사용하지 못하게 하시겠다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말합니다. 
    모든 영혼은 다 하나님께 속했습니다. 
    모든 영혼이 다 하나님이 지은 하나님의 형상이요, 하나님 앞에 인격적이고 책임성을 가졌습니다. 
    그러므로 인간은 근본적으로 다른 사람의 죄로 처벌받지 않고 오직 자기 죄로만 처벌받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범죄하는 그 영혼은 죽으리라’ 합니다. 
    사람은 근본적으로 다른 사람의 죄로 인해 심판받지 않고 오직 자기 죄로 심판받습니다.

    하나님은 범죄하는 영혼은 자기 죄로만 죽는다 하며 그 예를 들고 있습니다. 
    에스겔 18:5-9  
    사람이 만일 의로워서 정의와 공의를 따라 행하며. 
    산 위에서 제물을 먹지 아니하며 이스라엘 족속의 우상에게 눈을 들지 아니하며 이웃의 아내를 더럽히지 아니하며 월경 중에 있는 여인을 가까이 하지 아니하며. 
    사람을 학대하지 아니하며 빚진 자의 저당물을 돌려 주며 강탈하지 아니하며 주린 자에게 음식물을 주며 벗은 자에게 옷을 입히며. 
    변리를 위하여 꾸어 주지 아니하며 이자를 받지 아니하며 스스로 손을 금하여 죄를 짓지 아니하며 사람과 사람 사이에 진실하게 판단하며. 
    내 율례를 따르며 내 규례를 지켜 진실하게 행할진대 그는 의인이니 반드시 살리라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사람이 하나님 말씀을 지키며 의를 행하면 그는 의인으로 반드시 살게 됩니다.

    의인인 그가 아들을 낳았는데 그 아들이 의를 행치 않으면 아버지의 의와 상관없이 자기 죄로 심판을 받습니다.
     
    에스겔 18:10-13  
    가령 그가 아들을 낳았다 하자 그 아들이 이 모든 선은 하나도 행하지 아니하고 이 죄악 중 하나를 범하여 강포하거나 살인하거나 
    산 위에서 제물을 먹거나 이웃의 아내를 더럽히거나 
    가난하고 궁핍한 자를 학대하거나 강탈하거나 빚진 자의 저당물을 돌려 주지 아니하거나 우상에게 눈을 들거나 가증한 일을 행하거나 
    변리를 위하여 꾸어 주거나 이자를 받거나 할진대 그가 살겠느냐 결코 살지 못하리니 이 모든 가증한 일을 행하였은즉 반드시 죽을지라 자기의 피가 자기에게로 돌아가리라.

    의인의 아들이 악을 행하면 그는 아버지의 의와 상관없이 자기 죄로 죽으며 그 피가 자기에게 돌아갑니다.

    이런 자기책임 원칙은 손자에게도 적용됩니다. 
    의인의 아들이 악을 행하면 자기 죄로 주지만 그 악인의 아들이 의를 행하면 다시 자기의 의로 인해 삽니다. 

    에스겔 18:14-18  
    또 가령 그가 아들을 낳았다 하자 그 아들이 그 아버지가 행한 모든 죄를 보고 두려워하여 그대로 행하지 아니하고. 
    산 위에서 제물을 먹지도 아니하며 이스라엘 족속의 우상에게 눈을 들지도 아니하며 이웃의 아내를 더럽히지도 아니하며. 
    사람을 학대하지도 아니하며 저당을 잡지도 아니하며 강탈하지도 아니하고 주린 자에게 음식물을 주며 벗은 자에게 옷을 입히며. 
    손을 금하여 가난한 자를 압제하지 아니하며 변리나 이자를 받지 아니하여 내 규례를 지키며 내 율례를 행할진대 이 사람은 그의 아버지의 죄악으로 죽지 아니하고 반드시 살겠고. 
    그의 아버지는 심히 포학하여 그 동족을 강탈하고 백성들 중에서 선을 행하지 아니하였으므로 그는 그의 죄악으로 죽으리라.

    의인의 아들이었던 악인의 아들이 다시 의를 행하면, 그는 아버지의 죄로 죽지 않고 자기 의로 삽니다. 
    하나님은 자기 책임의 원칙을 여러 예로 설명합니다.

    하나님은 조상들의 죄로 인해 심판을 받는다 하는 유다백성에게 그것이 틀렸다 말합니다. 
    그들의 조상들의 죄로 인해 심판을 받는다 해도 하나님은 철저하게 개인 책임으로 이스라엘을 심판합니다. 
    지금 살아있는 이스라엘이 심판받는 이유는 자기 죄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공동체적으로 취급하지만 개인 책임을 무시하면서까지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사람은 자기의 행위와 삶에 책임이 있습니다. 
    사람이 살고 죽는 것은 오직 자기 의와 죄에 달렸으며 조상들에게 달려있지 않습니다, 사람에게 임하는 심판은 오직 자기 자신의 책임에 달려 있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자기 행위에 대해 책임지는 존재로 지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오늘 말씀에서 무엇을 배웁니까? 
    우리는 우리 자신에 대한 책임을 깊이 인정해야 함을 배웁니다. 
    오늘 하나님을 우리를 구원하되 그리스도의 몸 안으로 부르셨습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그리스도의 몸의 생활을 하고 공동체로 생활하게 하십니다. 
    공동체를 모르고 개인에 머물러 있는 자는 미성숙한 성도들이며 그러므로 성도들은 반드시 공동체에 눈을 떠야 합니다.

    하지만 우리가 공동체로 부름받고, 그리스도의 몸을 이루게 되었다는 것이 우리의 개인적인 책임을 면제시켜 주거나 약화시키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그리스도의 몸으로 부르셨지만 우리는 여전히 지극히 개인적 책임을 지는 존재들입니다. 
    에스겔은 책임을 강조합니다. 
    에스겔 3장에서 하나님은 에스겔을 부르고 파수꾼의 책임을 강조했습니다. 
    에스겔 14장에서도 하나님의 심판이 임할 때 노아, 다니엘, 욥이 있다해도 그들은 자기 자녀도 구하지 못하고 자신만 구원받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책임을 지는 존재로 지었다는 말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인간을 자유로운 존재로 지었고 이 자유에 대해서 책임을 지는 자들이 됐으며 이것이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았다는 말의 의미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들이요,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들이요, 이 시대의 목자요 성경선생이요 사도로 부름을 받았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우리를 자유롭게 하셨고 책임성있는 존재들이요, 하나님이 형상을 가진 자들로 지으셨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세상에서 책임성있는 삶을 사라갑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서 날마다 회개하며 주체성을 회복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로서 하나님의 자녀다운 삶을 살아갑니다. 우리는 날마다 하나님이 주신 자유를 누리며 살아가며 이 자유로 서로 종노릇하는 삶을 살아갑니다. 우리는 날마다 믿음으로 살아가며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는 삶을 살아갑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사람으로서 책임성있는 삶을 살아갑니다. 
    우리는 상황과 조건을 탓하는 사람들이 아니요 믿음으로 하나님께 감사하며 살아가며 하나님을 의지해 살아갑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몸을 이루고 공동체를 이루어 살아가는 것도 바로 우리의 책임성 안에 포함디어 있습니다. 
    우리는 어떤 경우에도 그리스도의 몸 안에서 몸을 통해서 몸울 위하여 살아가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웁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몸 안에서 자기의 책임을 다하며 교회를 세우고 돌봅니다. 
    하나님은 이 가운데 우리가 책임성있는 삶을 살아가게 하십니다. 
    우리가 이렇게 책임성있는 삶을 살아갈 때 사람은 최후의 심판의 날 하나님의 심판을 면하고 그리스도의 영광에 동참하게 될 것입니다. 오늘날 모든 죄는 무책임한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의 주신 자유를 누리며 하나님 앞에서 개인적인 책임을 잊지 않고 책임성있는 삶을 살아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길 기도합니다. 

    개인적으로 하나님은 저에게 그리스도 안에서 자유를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제가 그리스도 안에서 여러 사람들을 용서하고 사랑할 자유를 주셨습니다. 
    인생을 살다보면 상처를 준 사람들이나 섭섭하게 한 사람들을 미워하거나 용서하지 않고 과거에 매여 산 경우가 많았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갈라디아서 양식을 준비하며 하나님은 나를 자유하게 하셨다고 말씀해 주십니다. 
    그리고 그 자유는 무엇보다 용서할 자유입니다. 
    자신에게 상처를 준 사람들, 그리고 섭섭하게 한 사람들을 용서하고 사랑할 자유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으로 사랑하고 용서할 자유입니다. 
    하나님은 저에게 이런 자유를 주셨고 제가 이 하나님의 사랑으로 사랑하고 용서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저를 다시 하나님의 사람으로 회복하십니다. 
    제가 그리스도안에서 하나님의 주신 자유로 무엇보다 사랑하는 자유를 누리고, 새 피조물이 되고 하나님의 주신 자유를 누리며 책임성 있는 삶, 목자의 삶을 살아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드리길 기도합니다. 
    오늘도 제가 그리스도 안에서 사람들을 사랑하고 긍휼이 여기는 하루를 살아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길 기도합니다. 


    범죄하는 그 영혼은 죽으리라 : 에스겔 18장이 선포하는 공의와 자비

    에스겔 17장에서 '두 독수리와 포도나무' 비유를 통해 유다 왕국의 정치적 배신과 그로 인한 심판, 그리고 메시아적 희망을 제시한 후, 
    에스겔 18장은 이제 개인의 책임과 회개의 중요성이라는 근본적인 신학적 주제로 초점을 옮깁니다.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 사이에서는 "아버지가 신 포도를 먹었으므로 그의 아들의 이가 시다"(겔 18:2)는 속담이 유행했는데, 이는 조상의 죄 때문에 후손이 고통받는다는 숙명론적이고 책임 전가적인 사고방식을 반영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 속담을 단호히 부정하시며, 모든 영혼이 하나님께 속하였고 각 사람은 오직 자기 자신의 죄로 말미암아 심판받거나 자기 자신의 의로 말미암아 살게 될 것이라고 선언하십니다. 
    더 나아가, 악인이라도 돌이켜 회개하면 살 것이요, 의인이라도 범죄하면 죽을 것이라는 개인의 선택과 변화의 가능성을 강조하십니다. 에스겔 18장은 하나님의 공의와 자비, 그리고 인간의 자유의지와 책임에 대한 심오한 통찰을 제공하며, 절망 속에서도 회개를 통해 새로운 삶을 시작할 수 있다는 희망의 메시지를 강력하게 전달합니다.


    시대적 배경과 맥락 소개

    에스겔 18장의 배경은 여전히 바벨론 포로라는 국가적 재앙의 고통이 극심했던 시기입니다. 
    예루살렘은 멸망했거나 멸망 직전에 놓여 있었고, 백성들은 자신들이 겪는 고난의 원인을 조상들의 죄악 탓으로 돌리려는 경향이 강했습니다. 
    "아버지가 신 포도를 먹었으므로 그의 아들의 이가 시다"는 속담은 바로 이러한 책임 전가숙명론적인 절망감을 잘 보여줍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현재 고통이 자신들의 직접적인 죄 때문이라기보다는, 과거 세대의 잘못으로 인해 어쩔 수 없이 당하는 형벌이라고 생각하며 스스로를 위로하거나 변명하려 했습니다. 
    이러한 사고방식은 결국 개인의 책임을 회피하고, 회개와 변화의 가능성을 부정하며, 하나님의 공의에 대한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 있었습니다. 
    바로 이러한 잘못된 통념을 깨뜨리고 하나님의 공의로우심과 각 개인의 책임을 명확히 밝히기 위해, 하나님께서는 에스겔을 통해 이 중요한 메시지를 선포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더 이상 이스라엘 가운데서 이 속담을 사용하지 못하게 될 것이라고 단언하시며, 각 개인의 영혼이 하나님 앞에서 독립적인 존재이며, 각자의 행위에 따라 심판받는다는 원리를 분명히 하십니다. 
    이 이야기가 오늘날 우리에게 중요한 이유는, 우리 역시 삶의 어려움이나 실패의 원인을 다른 사람이나 환경 탓으로 돌리려는 유혹을 받기 쉽기 때문입니다. 
    에스겔 18장은 우리에게 자신의 삶에 대한 주체적인 책임감을 가지고, 과거의 실수나 타인의 잘못에 얽매이기보다 현재 자신의 선택과 행동을 통해 미래를 만들어가야 함을 가르쳐줍니다. 
    또한, 아무리 큰 죄를 지었더라도 진심으로 회개하고 돌이키면 용서받고 새로운 삶을 살 수 있다는 하나님의 무한한 자비와 희망을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핵심 사건 또는 본문 요약

    에스겔 18장은 이스라엘에 유행하던 속담을 반박하며, 개인의 책임과 회개의 원리를 다양한 예시와 반복적인 선언을 통해 강조합니다.

    첫째, "아들의 이가 시지 않으리라" – 속담 반박과 개인 책임의 원리 (1-4절): 하나님께서는 "아버지가 신 포도를 먹었으므로 그의 아들의 이가 시다"는 속담을 이스라엘 가운데서 다시는 사용하지 못하게 될 것이라고 선언하십니다. 모든 영혼은 아버지의 영혼이나 아들의 영혼이나 다 하나님께 속하였으며, "범죄하는 그 영혼은 죽으리라"(겔 18:4)는 원칙을 천명하십니다.

    둘째, 의로운 아버지, 악한 아들, 의로운 손자의 예시 (5-18절): 이 원리를 설명하기 위해 세 가지 가상적인 사례가 제시됩니다.

    • 의로운 아버지 (5-9절): 만일 어떤 사람이 의로워서 정의와 공의를 따라 행하며, 우상에게 제물을 먹지 아니하고, 간음하지 아니하며, 가난한 자를 학대하지 않고, 정직하게 행하며, 하나님의 율례와 규례를 지켜 진실하게 행하면, 그는 반드시 살 것입니다.
    • 포악한 아들 (10-13절): 그러나 그 의로운 아버지에게 포악하고 살인하며 위에 언급된 선한 일은 하나도 행하지 않고 오히려 온갖 악행을 저지르는 아들이 있다면, 그는 아버지의 의로움과 상관없이 자기 죄로 말미암아 반드시 죽을 것입니다.
    • 회개한 손자 (14-18절): 다시 그 악한 아들에게 아들이 태어나, 그 아들이 자기 아버지가 행한 모든 죄를 보고 두려워하여 그대로 행하지 아니하고, 오히려 의롭게 살아가며 하나님의 규례를 지킨다면, 그는 자기 아버지의 죄악으로 말미암아 죽지 아니하고 반드시 살 것입니다. 그의 아버지는 자기 죄악으로 죽지만, 그는 살게 됩니다.
    이 예시들은 조상의 죄나 의가 후손에게 자동으로 전가되지 않으며, 각 개인의 행위에 따라 생명과 죽음이 결정됨을 분명히 보여줍니다.

    셋째, 개인의 회개와 의로운 삶의 중요성 재확인 (19-29절): 백성들이 여전히 "아들이 어찌 아버지의 죄를 담당하지 아니하겠느냐?"(겔 18:19)고 반문할 것에 대비하여, 하나님께서는 다시 한번 개인 책임의 원리를 강조하십니다. "아들은 아버지의 죄악을 담당하지 아니할 것이요 아버지는 아들의 죄악을 담당하지 아니하리니 의인의 공의도 자기에게로 돌아가고 악인의 악도 자기에게로 돌아가리라"(겔 18:20).

    • 악인의 회개 (21-23절): 그러나 악인이라도 만일 그가 행한 모든 죄에서 돌이켜 떠나 하나님의 모든 율례를 지키고 정의와 공의를 행하면 반드시 살고 죽지 않을 것이며, 그가 행한 모든 죄악이 기억되지 않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내가 어찌 악인이 죽는 것을 조금인들 기뻐하랴 그가 돌이켜 그 길에서 떠나 사는 것을 어찌 기뻐하지 아니하겠느냐"(겔 18:23)라고 반문하시며, 악인의 회개를 간절히 원하시는 당신의 마음을 드러내십니다. 이 얼마나 자비로운 선언입니까!
    • 의인의 타락 (24절): 반대로 의인이라도 만일 그의 공의에서 돌이켜 악인이 행하는 모든 가증한 일을 따라서 악을 행하면 살지 못할 것이며, 그가 행한 공의로운 일은 하나도 기억되지 않고 그가 범한 허물과 그 지은 죄로 죽게 될 것입니다.
    • 하나님의 공평하심 (25-29절): 백성들이 "주의 길이 공평하지 아니하다"(겔 18:25, 29)고 불평할지라도, 하나님께서는 오히려 너희 길이 공평하지 않은 것이 아니냐고 반문하시며, 각 사람이 자기 행위대로 심판받는 것이야말로 진정으로 공평한 길임을 강조하십니다.

    넷째, 회개하고 새 영과 새 마음을 가지라는 최종 촉구 (30-32절):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족속에게 각 사람이 행한 대로 심판하실 것을 다시 한번 선언하시면서, "너희는 돌이켜 회개하고 모든 죄에서 떠날지어다 그리한즉 그것이 너희에게 죄악의 걸림돌이 되지 아니하리라"(겔 18:30)고 촉구하십니다. 그들은 모든 죄악을 버리고 스스로 "새 영과 새 마음을 만들지어다"(겔 18:31)라고 명령받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죽을 자가 죽는 것도 기뻐하지 아니하시노니 너희는 스스로 돌이키고 살지니라"(겔 18:32)고 간절히 호소하시기 때문입니다.

    에스겔 18장의 핵심 메시지는 다음과 같이 요약될 수 있습니다:

    구분 (에스겔 18장) 핵심 내용 및 상징적 의미
    속담 반박과 개인 책임 (1-4절) "아비가 신 포도, 아들의 이가 시다" 속담 부정. 모든 영혼은 하나님께 속함. "범죄하는 그 영혼은 죽으리라."
    3대의 예시 (5-18절) 의로운 아버지(삶) - 포악한 아들(죽음) - 회개한 손자(삶). 조상의 죄/의가 자동 전가되지 않음. 각 개인의 행위대로 심판.
    회개와 의로운 삶 재확인 (19-29절) 개인 책임 원리 반복. 악인의 회개 시 삶과 용서 약속. 의인의 타락 시 죽음. 하나님의 공평하심 강조.
    회개와 새 영/마음 촉구 (30-32절) 행한 대로 심판. 돌이켜 회개하고 모든 죄에서 떠나라. 스스로 새 영과 새 마음을 만들라. 하나님은 죽음을 기뻐하지 않으심. "스스로 돌이키고 살지니라."

    철학적/존재론적 상징 해석

    에스겔 18장은 인간의 자유의지, 책임, 정의, 그리고 변화의 가능성이라는 심오한 철학적, 존재론적 주제를 다루며, 인간 조건에 대한 깊은 통찰을 제공합니다.

    첫째, "범죄하는 그 영혼은 죽으리라"는 원칙개인의 도덕적 책임과 자유의지의 중요성을 강력하게 천명합니다. 이는 인간이 단순한 환경이나 유전, 혹은 조상의 업보에 의해 결정되는 존재가 아니라, 스스로 선택하고 행동하며 그 결과에 대해 책임을 지는 주체적인 존재임을 의미합니다. 프랑스의 실존주의 철학자 장 폴 사르트르(Jean-Paul Sartre)는 "인간은 자유롭도록 선고받았다"고 말하며, 인간에게 주어진 절대적인 자유와 그에 따르는 무거운 책임을 강조했습니다. 에스겔 18장 역시 각 개인이 자신의 삶을 선택할 자유를 가지고 있으며, 그 선택이 생명 또는 죽음이라는 궁극적인 결과를 가져온다는 것을 분명히 합니다. 더 이상 조상 탓이나 환경 탓을 하며 자신의 책임을 회피할 수 없다는 선언입니다. 이는 우리에게 각자의 삶을 얼마나 진지하고 책임감 있게 살아가야 하는지를 묻고 있습니다.

    둘째, 악인이라도 회개하면 살고, 의인이라도 타락하면 죽는다는 메시지인간의 변화 가능성과 현재적 삶의 중요성을 강조합니다. 과거의 삶이 어떠했든, 현재의 선택과 결단을 통해 미래는 얼마든지 바뀔 수 있다는 것입니다. 악인이었던 사람도 진심으로 죄를 뉘우치고 새로운 삶을 시작하면 용서받고 생명을 얻을 수 있으며, 반대로 과거에 의롭게 살았던 사람이라도 현재 죄악에 빠져 있다면 과거의 의로움이 그를 구원하지 못합니다. 이는 인간이 고정불변의 존재가 아니라, 끊임없이 변화하고 성장(또는 퇴보)할 수 있는 역동적인 존재임을 보여줍니다. 이러한 관점은 인간의 과거에 얽매이기보다 현재의 순간에 집중하고, 더 나은 미래를 향한 끊임없는 노력을 격려합니다. 또한, 한 번의 구원이나 의로운 행위가 영원한 안전을 보장하는 것이 아니라, 끝까지 신실함을 지키는 지속적인 노력이 필요함을 시사합니다. 이 얼마나 역동적인 구원의 관점입니까!

    셋째, "내가 어찌 악인이 죽는 것을 조금인들 기뻐하랴... 사는 것을 어찌 기뻐하지 아니하겠느냐"라는 하나님의 반문은, 심판하시는 하나님의 공의 이면에 있는 그분의 자비로우신 본성과 모든 영혼을 향한 사랑을 드러냅니다. 하나님은 죄를 미워하시지만 죄인을 미워하시는 분이 아니며, 그들이 멸망하기보다 돌이켜 생명을 얻기를 간절히 원하십니다. 이는 하나님의 심판이 단순한 복수나 징벌이 아니라, 궁극적으로는 죄로부터의 돌이킴과 관계 회복을 목표로 한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마음은 우리에게 죄에 대한 단호함과 동시에 죄인을 향한 긍휼과 용서의 마음을 품어야 함을 가르칩니다. 또한, 아무리 절망적인 상황에 처한 사람이라도 포기하지 않고 회복의 가능성을 믿으며 다가가야 할 이유를 제공합니다. 하나님의 마음은 언제나 생명을 향해 열려 있다는 것입니다.

    넷째, "너희는 스스로 새 영과 새 마음을 만들지어다"라는 명령은, 비록 11장에서 하나님께서 새 영과 새 마음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음에도 불구하고, 인간 편에서의 능동적인 결단과 노력 또한 필요함을 강조하는 역설적인 표현입니다. 이는 구원이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이지만, 동시에 인간의 자유로운 응답과 책임 있는 참여를 요구한다는 신학적인 긴장을 보여줍니다. 인간은 스스로를 완전히 새롭게 창조할 수는 없지만, 하나님께서 주시는 은혜에 반응하여 옛사람을 벗어 버리고 새로운 삶을 향해 나아가려는 의지적인 노력을 해야 합니다. 이는 마치 씨앗을 심는 것은 농부의 역할이지만, 그것이 자라나 열매 맺게 하는 것은 하나님의 능력인 것과 같습니다. 하나님과의 협력을 통해 진정한 변화와 성장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현대적 적용 또는 실존적 질문

    에스겔 18장의 개인 책임과 회개의 메시지는 오늘날 우리 사회와 개인의 삶에 깊은 성찰을 요구하며, 시대를 초월하는 진리를 담고 있습니다.

    첫째, '내 탓이오' 정신의 회복입니다. 현대 사회는 종종 문제의 원인을 외부 환경이나 타인에게 돌리려는 경향이 강합니다. "사회가 문제다", "부모님 때문이다", "운이 없었다" 등등. 그러나 에스겔 18장은 우리에게 자신의 삶의 문제에 대해 스스로 책임을 지는 성숙한 자세를 요구합니다. 물론 환경적인 요인이나 타인의 영향력을 완전히 무시할 수는 없지만, 궁극적으로 우리의 선택과 행동에 대한 책임은 우리 자신에게 있다는 것을 인정해야 합니다. 이러한 책임 의식은 문제 해결의 첫걸음이며, 진정한 성장과 변화를 위한 필수적인 전제 조건입니다. 나는 내 삶의 어려움 앞에서 누구를 탓하고 있습니까?

    둘째, 과거의 실패나 성공에 얽매이지 않는 현재 중심적인 삶입니다. 우리는 종종 과거의 실수나 트라우마에 발목 잡혀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거나, 혹은 과거의 영광에 안주하여 현재의 노력을 게을리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에스겔 18장은 과거가 현재를 결정짓는 것이 아니라, 현재의 선택이 미래를 만들어간다는 것을 분명히 보여줍니다. 아무리 어두운 과거를 가졌더라도 지금 돌이키면 새로운 시작이 가능하며, 아무리 빛나는 과거를 가졌더라도 지금 타락하면 모든 것을 잃을 수 있습니다.

    "어제는 역사이고, 내일은 미스터리이며, 오늘은 선물이다. 그래서 오늘을 '선물(present)'이라고 부른다." - 엘리너 루스벨트

    우리는 과거의 그림자에서 벗어나, 그리고 미래에 대한 막연한 불안감에서 벗어나, 하나님께서 주신 '오늘'이라는 선물에 최선을 다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나는 과거의 나에게 매여 있습니까, 아니면 현재의 나를 새롭게 만들어가고 있습니까?

    셋째, 모든 사람에게 열려 있는 회개와 용서의 가능성입니다. 에스겔 18장의 가장 큰 희망의 메시지는 바로 이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악인이 죽는 것을 결코 기뻐하지 않으시며, 그가 돌이켜 살기를 간절히 원하십니다. 이는 아무리 큰 죄를 지은 사람이라도, 진심으로 뉘우치고 하나님께로 돌아오면 용서받고 새로운 삶을 시작할 수 있다는 복음의 핵심과 맞닿아 있습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을 쉽게 정죄하거나 낙인찍어서는 안 되며, 모든 사람에게 회복과 변화의 가능성이 열려 있음을 믿고 긍휼의 마음으로 다가가야 합니다. 또한, 우리 자신 역시 죄와 실패 앞에서 절망하기보다, 언제든지 하나님께로 돌아가 용서를 구하고 다시 시작할 수 있다는 소망을 가져야 합니다. 나는 누군가를 용서하지 못하고 있거나, 혹은 나 자신의 죄에 대해 절망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에스겔 18장은 우리에게 다음과 같은 근본적인 질문을 던집니다:

    • 나는 내 삶의 결과에 대해 얼마나 주체적으로 책임지려 하는가, 아니면 습관적으로 남 탓을 하고 있는가?
    • 나는 과거의 영광이나 실패에 얽매이지 않고, 현재 하나님 앞에서 올바른 선택을 하며 살아가고 있는가?
    • 나는 죄인에 대한 하나님의 긍휼하신 마음을 품고 있는가, 아니면 쉽게 정죄하고 판단하는가?
    • 나는 "스스로 돌이키고 살지니라"는 하나님의 간절한 초청에 어떻게 응답하고 있는가?

    이 장은 우리에게 무거운 책임감을 느끼게 하지만, 동시에 그 책임감 속에서 진정한 자유와 희망을 발견하도록 이끌어 줍니다. 선택은 우리에게 달려 있습니다.

    결론 요약

    에스겔 18장은 "아버지가 신 포도를 먹었으므로 그의 아들의 이가 시다"는 당시 이스라엘에 유행하던 숙명론적 속담을 단호히 부정하며, 각 개인의 책임과 회개의 중요성을 강력하게 선포하는 장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영혼이 당신께 속하였으며, "범죄하는 그 영혼은 죽으리라"는 원칙과 함께, 의로운 아버지와 악한 아들, 그리고 회개한 손자의 예시를 통해 조상의 죄나 의가 후손에게 자동으로 전가되지 않음을 분명히 하십니다. 이 장의 핵심은 악인이라도 그가 행한 모든 죄에서 돌이켜 회개하면 반드시 살고 용서받을 것이며, 반대로 의인이라도 그의 의에서 돌이켜 악을 행하면 과거의 의가 그를 구원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악인이 죽는 것을 결코 기뻐하지 않으시며, 모든 사람이 스스로 돌이켜 새 영과 새 마음을 가지고 살기를 간절히 원하십니다. 결국 에스겔 18장은 하나님의 공의로우심과 동시에 그분의 무한한 자비와 사랑을 드러내며, 우리 각자에게 자신의 삶에 대한 주체적인 책임감을 가지고 회개를 통해 새로운 삶을 선택하라는 희망의 메시지를 강력하게 전달하고 있습니다.












  • 《믿음의 사람》 대구 서현교회 정규만장로

    (박정희대통령의 동기생으로 구미 상모교회 출석. 박정희 22세 때까지 상모교회 출석)

    한 주일은 교회 출석, 다른 한 주일은 낚시를 즐겼다.
    목사의 책망을 듣고도 낚시를 갔는데 아주 큰 잉어를 잡은 후 교회에 가지 않았더니 아주 대어를 낚았다.
    그 잉어를 요리하려고 각종 한약재를 넣어 끓이던 중 그 안에 아들이 떨어져 죽었다.

    서현교회 / 설계는 미국에서, 대리석은 전라도 황간에서...
                     먼저 교인들이 헌금을 하면 나머지는 내가 감당하겠다.
                     건축헌금을 하도록 집집마다 돈 봉투를 던져 넣었다고 한다.
     

    1. 대구의 약령시가 열리던 약전골목은 전국의 한약들이 판매되는 유명한 곳으로 역사가 350년이 넘었습니다.
    조선시대부터 전국의 한약들이 판매되는 곳이었습니다.
    이 약점 골목 한쪽 구석에는 맨바닥에 앉아서 풀을 파는 풀장수 정씨가 있었습니다.
    50년 전에는 풀을 쑤어서 장에서 팔았습니다.
    풀 한 덩어리 사다 벽도 바르고 창호지로 문도 발랐습니다.
    당시에 정씨는 늘 술에 취해 있었습니다.
    돈만 생기면 술을 먹고 행패를 부리고 집에서 아내를 때리고 했습니다.
    그의 아내는 대구 제일교회 성도였습니다.
    교회에 가면 늘 마음이 편안하고 말씀을 들으면 은혜가 되어 그 재미로 사는 성도였습니다.

    어느날 대구 제일교회에 유명한 김익두 목사님이 부흥회 인도하러 오셨습니다.
    원래 김익두는 깡패였고 술주정뱅이었습니다.
    모든 사람이 그를 싫어했습니다.
    그래서 장에 갈 때마다 성황당에다가 돌을 던지면서 빌었습니다.
    "오늘 제발 김익두를 만나지 않도록 해주세요."
    김익두는 시장 입구에 다리를 쫙 벌리고 서서 다리밑으로 지나가라고 했습니다.
    다리 밑으로 안갈려면 돈을 내놓으라고 협박을 했습니다.

    2. 깡패였던 사람이 예수를 믿고 은혜받아 목사가 되어 대구 제일교회에 부흥회를 인도하러 왔고 은혜가 넘쳤습니다.

    특히 풀장수 정씨의 아내가 많은 은혜를 받았습니다.
    하루는 은혜 받고 저녁 늦게 집에 오는데 남편이 술에 취해서 아내가 들어오자 마자 뺨을 때렸습니다.
    다른 때는 맞으면 대들었는데 뺨을 한 대 때리니까
    “여보, 내가 늦게와서 당신의 마음이 상했다면 이쪽 뺨도 때리세요"
    "그래?"
    그리고 때리려고 하니까 마음이 이상하더랍니다.
    다른 때와 달리 한 대를 맞고는 나 때문에 당신 마음이 상했다면 한 대 더 때리라고 하니까 놀라서 "오늘 교회에서 무슨 일 있었냐?"고 물었습니다.
    그의 아내가 은혜 받은 이야기를 하며 “우리 교회에 부흥회에 오신 분이 김익두 목사님이신데 원래는 술주정뱅이였고 깡패였다고 합니다. 예수님을 믿고 목사님이 되었대요.
    당신도 나하고 한 번만 교회에 가요”
    남편이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하니까 그 다음날 따라갔습니다.

    3. 처음으로 교회에 갔는데 뭔가 가슴이 뭉클하고 이상했답니다.
    그 다음날도 마지막 날도 갔는데 김익두 목사님이 설교 중에 "여러분! 한 번 사는 인생인데 이왕이면 하나님의 복을 받고 삽시다!
    복을 받는 비결이 네 가지가 있습니다.
    첫번째, 주일을 잘 지키세요.
    그러면 은혜받습니다.
    두번째, 십일조 생활을 잘 하세요. 그러면 물질의 복을 받게 됩니다.
    세번째, 새벽기도회 빠지지 마세요.
    날마다 하나님이 형통의 길로 인도 하십니다.
    네번째, 주의 종이 가르칠 때, 잘 듣고 생명 받쳐 그 말씀을 지키세요.
    이렇게만 하면 나처럼 됩니다.
    나는 원래 깡패이고 못난이고 사람들에게 늘 욕을 먹고, 저주 받고 했습니다.
    오죽했으면 나를 만나지 않게 해달라고 성황당에 돌을 던지고 빌고 갔겠습니까?
    그런 내가 그렇게 했더니 오늘 목사가 되어서 여러분들에게 말씀을 전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풀 장수 정씨가 들어보니까 과거의 생활이 자기하고 비슷했습니다.
    술 주정뱅이에 깡패였던 사람이 목사가 되었단 말인가?
    목사, 깡패가 그렇게 될 수 있었다면....

    4. 풀장수 정씨는 결심을 했습니다.
    "그러면 나도 한 번 밑바닥 인생이 되지 말고 하나님의 복을 받아보자.'
    그 다음 주일부터 꼭 주일을 지켰습니다.
    풀파는 통 옆에 조그마한 상자를 만들어 놓고 10원어치 팔면 1원을 넣고 그 날부터 십일조 생활을 했습니다.
    새벽마다 교회에 가서 기도했습니다.
    주일날 목사님의 말씀을 들으며 나도 그렇게 되겠다고 그 말씀을 지켰습니다.

    얼마 후 약전 골목에 술주정뱅이가 사람되었다는 소문이 돌았습니다.
    약전골목에서 장사하는 모든 사람들이 칭찬을 했습니다.
    세상에 저렇게 변할 수가 있냐고......
    한약방을 하는 친구가 하루는 정씨에게 “야! 너 이제 풀장사 그만하고 사람되었으니까 약방을 한번 해봐라. 약장사를 해봐.”
    “나는 돈도 없고, 너도 알다시피 약에 대해 아무 것도 모르는데 내가 어떻게 약국을 하겠냐?”
    "너를 보니까 완전히 사람이 바뀌어졌어. 그러니까 내가 너를 도와줄 테니까 약장사를 해봐."
    친구가 자기 집에 있는 약재료를 이것 저것 조금씩 주어서 약장사를 시작했습니다.
    남들은 가게에서 하는데 길바닥에서 장사를 시작했습니다.

    5. 친구는 노트에 약의 효능과 처방하는 방법에 대해서 써주었습니다.
    감기걸린 사람이 오면 이렇게 지어주고 열병이 있는 사람이 오면 지어줄 약초를 알려주고 보약을 찾는 사람들이 오면 감초넣고 다른 약초를 넣고 지어주라고 가르쳐 주었습니다.
    정씨는 가르쳐 주는 것을 노트에 꼼꼼히 적었습니다.
    그리고 환자가 오면 노트에 써있는 내용을 보면서 약을 지어 주는데 이상한 것은 정씨에게서 약을 지어 먹으면 어떤 병이든 낫는다는 것이었습니다.
    일자무식인데도 그에게 가서 약을 지어 먹으면 다 낫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몰려들기 시작했습니다.

    나중에는 그 골목에서 제일 잘되는 약국 주인이 되었습니다.
    그가 바로 대구서현교회를 시무하다가 천국에 가신 정규만 장로님입니다.
    하나님께서 정규만 장로님에게 복을 주시는 것이었습니다.

    그 때에 대구 지방에 이상한 소문이 돌기 시작했습니다.
    정장로님네 약방에 가서 약을 지어 먹으면 아들을 낳는다.
    정장로님은 그런 말을 한 적이 없는데 소문이 퍼졌습니다
    당시에는 대를 이어야 한다며 여자들은 아들을 낳아야 했습니다.
    아들을 못낳으면 쫓겨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정장로님이 약을 지어주면 아들을 낳았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사람들이 와서 물었습니다.
    “정말 이 집에서 약을 지어 먹으면 아들을 낳을 수 있는 거에요?”
    장로가 거짓말을 할 수는 없어서
    “안먹는 것보다는 낫지요.”
    그랬다고 합니다.

    6. 또 대구에서 장티프스가 유행을 했는데 다른 약방에 가서 약을 지어 먹으면 안낫는데 정장로님네 약방에 가서 약을 지어 먹으면 어떤 병도 나았습니다.
    그래서 정장로님의 약방 앞에는 새벽부터 줄을 섰습니다.
    장로님 약방에 약이 떨어지면 옆 집에서 빌려와서 지어주었는데 다른 집에서 약을 지어 먹으면 안낫는데 정장로님이 빌려온 약으로 자기 약방에서 지어 먹으면 낫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다른 약방 주인들이 정장로님 약방에 와서 물었습니다.
    "당신은 어떻게 약을 짓길래 우리 약을 먹으면 안낫고, 당신이 지은 약을 먹으면 낫습니까?"고 물었습니다.
    "네, 특별한 재료가 하나 들어갑니다."
    "그것이 뭡니까?"
    "당신들이 쓰지 않는 재료가 우리 약에는 들어갑니다.
    기도라는 재료가 들어 갑니다."
    장로님은 약을 지을 때마다 한 봉지 한 봉지 지을 때마다 기도를 했습니다.
    그래서 남의 것을 빌려다가 지어 주어도 병이 나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장로님에게 복을 주셨습니다.
    복 받을 사람은 언제나 복 받을 짓을 합니다.

    7. 교회를 새로 짓게 되었을 때 정규만 장로님이 건축위원장이 되었습니다.
    돌로 교회를 짓자고 결정이 되었습니다. 전국에서 제일 좋은 돌이 전라북도 황등에서 나옵니다.
    익산군 황등에서 기차를 대절하여 돌을  대구까지 싣고 가서 교회를 지었습니다.
    그런데 건축이 시작되자마자 정규만 장로가 병으로 사경을 헤매게 되었습니다.
    그때 그는 하나님께 서원기도를 드렸습니다.
    “하나님! 생명을 살려 주옵소서.
    살려주시면 목숨 다하여 종의 재산을 바쳐 성전건축에 헌신하겠습니다.” 하면서 산에서 기도하는데 어떤 짐승이 모르는 나무를 자꾸만 갉아먹고 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주신 약초로구나 하고 그것을 삶아 먹었더니 낫게 되었습니다.

    병이 나은 후에 정장로님은 교회 건축 비용 절반이상을 약속대로 혼자 감당했습니다.
    그는 엄청난 헌금을 했습니다.
    건축을 마치고 성도들은 헌당식을 하자고 하니까 장로님이 하지 말자고 했습니다.
    내가 죽으면 합시다.

    8. 내가 살았을 때 헌당식하면 하나님의 영광을 내가 받을까 두려우니까 나 죽으면 하세요.
    그래서 헌당식을 못하고 기다렸습니다.
    장로님이 1969년 1월 초에 돌아가실 때 얼굴이 천사처럼 되었고 마지막 돌아가실 때 오른손을 들었답니다. 그러면서 천사들이 나를 데리러 왔다고 말하고 돌아가셨습니다.
    장로님이 돌아가시고 난 며칠 후인 1969년 1월 29일에 서현교회는 헌당식을 했습니다.

    우리는 조금만 하고도  우쭐하는데 정규만 장로님은 교회를 위해 거의 혼자 짓다시피 하고도 절대로 자기 생전에 헌당식을 못하게 하고 자기 죽은 다음에 헌당을 하도록 했습니다.
    지금도 대구에 가면 정규만 장로님을 존경하고 흠모합니다.
    왜요? 겸손했기 때문입니다.
    여러붐도 겸손하시기를 바랍니다.
    그러면 여러분이 복을 받고 여러분의 후대가 복을 받습니다.


    한국 현대사를 이끈 지도자, 박정희 대통령의 업적과 평가

    1. 박정희 대통령은 누구인가?

    출생 : 1917년 11월 14일, 경상북도 구미시

    본관: 고령 박씨

    학력: 대구사범학교, 일본 육군사관학교 졸업

    군 경력: 광복 후 대한민국 국군 창설에 참여, 육군 참모총장 역임

    정치 입문: 1961년 5·16 군사정변을 주도,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

    대통령 재임: 1963~1979 (제5·6·7·8·9대 대통령)

    박정희는 군인 출신 지도자로, 국가의 근대화와 부국강병을 목표로 삼았다.
    하지만 그의 집권 방식은 민주주의적 절차를 거치지 않은 권력 장악이었고,
    이는 이후 한국 정치에 큰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2. 경제 개발과 산업화: 한강의 기적

     


    박정희 대통령의 가장 대표적인 업적은
    대한민국을 세계 최빈국에서 경제 성장국으로 끌어올린 것이다.

    경제개발 5개년 계획(1962 시작): 국가 주도의 계획 경제 체제 도입

    수출 주도형 산업화 정책: 농업 중심 사회에서 제조업·수출 중심으로 전환

    포항제철 설립(1973): 국내 철강산업 기반 조성

    경부고속도로 개통(1970): 수도권과 남부지역 연결, 국가 물류망 혁신

    새마을운동(1970): 농촌 근대화, 생활 개선 캠페인

    1960년대 초반 1인당 GDP 약 80달러에 불과했던 대한민국은
    1979년 박정희 사망 당시 약 1,600달러까지 성장했다.
    이른바 *한강의 기적'이라고 불리는 급격한 경제 성장은
    박정희 시대를 상징하는 대표적 키워드다.

     

    3. 정치 체제: 유신헌법과 권위주의

     


    박정희는 1972년 10월 유신을 통해 헌법을 개정하고,
    사실상 장기 집권과 대통령 권한 강화 체제를 수립했다.

    대통령 직선제 폐지, 통일주체국민회의 통한 간접선거제 도입

    국회 해산권, 긴급조치권 부여 등 강력한 통치권 확보

    이는 경제 성장과 국가 안보를 명분으로 삼았지만,
    실질적으로는 민주적 견제와 균형을 무력화시킨 권위주의적 체제로 비판받는다.

    이 시기 언론 통제, 야당 탄압, 인권 탄압이 광범위하게 이뤄졌으며,
    1970년대 후반 민주화 요구가 거세지면서 박정희 정권에 대한 사회적 반발도 커졌다.

     

    4. 대외정책: 한·미동맹 강화와 한·일 국교 정상화

     


    박정희 정권은 냉전 체제 하에서
    반공을 국시로 삼고 미국과의 동맹 강화를 추진했다.

    한·미상호방위조약 강화

    베트남 전쟁 파병(1964): 미국과의 협력 강화, 경제 지원 확보

    한·일 국교 정상화(1965): 8억 달러 경제 지원 및 수교 체결

    특히 한·일 국교 정상화는 국내에서 거센 반대 시위에도 불구하고 체결되었지만,
    장기적으로는 한국 경제 발전의 토대를 마련하는 데 일정한 역할을 했다.

     

    5. 박정희 시대의 긍정적 평가

     


    고속 경제 성장: 세계 최빈국에서 중진국 진입

    산업 기반 조성: 중화학공업·제조업 발전

    국방력 강화: 자주국방 기반 마련

    농촌 근대화: 새마을운동을 통한 생활 수준 향상

    박정희는 국가 성장과 국민 생활 수준 향상이라는 측면에서
    분명한 긍정적 업적을 남겼다.
    특히 오늘날 대한민국이 경제 강국으로 성장하는 데 중요한 기초를 제공했다.

     

    6. 박정희 시대의 부정적 평가

     


    민주주의 후퇴: 유신 체제와 긴급조치권 남용

    인권 탄압: 언론 통제, 야당 탄압, 시민 권리 제한

    사회적 양극화: 급속한 성장 속 빈부 격차 심화

    정치 폭력: 야당 지도자 구속, 민주 인사 탄압

    박정희 정권의 부정적 측면은
    한국 민주주의 발전 과정에서 반드시 넘어야 할 과제로 남았으며,
    오늘날까지도 다양한 사회적 논쟁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7. 박정희 대통령의 죽음과 그 이후

     


    1979년 10월 26일, 중앙정보부장 김재규에 의해 피살되면서
    박정희 시대는 극적으로 막을 내렸다.

    그의 죽음은 곧바로 정치적 혼란과 12·12 군사반란(신군부 등장)으로 이어졌지만,
    장기적으로는 1987년 6월 민주항쟁을 통해 한국 사회가
    민주주의로 이행하는 계기를 마련하는 데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다.

     

    8. 새마을운동: 농촌 근대화의 상징

     


    박정희 정권은 산업화가 도시 중심으로 진행되면서
    도시와 농촌의 격차가 심화되는 문제를 인식하고 있었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추진한 것이 바로 **새마을운동(1970년 시작)**이다.

    슬로건: 잘살아보세

    목표: 농촌의 자조정신, 근면성, 협동심을 고취하여 자발적 발전 촉진

    초기 사업: 초가집 개량, 농로 정비, 소득 증대 사업 추진

    정부는 마을 단위로 지원금을 배분하고,
    자율성과 경쟁을 강조하며 농촌 생활환경과 소득 수준을 획기적으로 개선하려 했다.

    새마을운동의 성과
    농가 소득 증가

    농촌 전기 보급 확대

    농로 및 교량 확충

    교육과 보건 인프라 개선

    새마을운동은 한국 농촌 사회의 근대화를 촉진했으며,
    이후 개발도상국 모델로도 수출되는 등 국제적 주목을 받았다.

     

    9. 산업화의 빛과 그림자

     


    박정희 시대의 산업화는 한국 경제 구조를 완전히 변화시켰지만,
    동시에 사회적 불균형과 노동 인권 문제를 초래하기도 했다.

    산업화의 긍정적 측면
    고도 경제 성장(연 8~10% 성장)

    제조업 기반 확립(섬유, 조선, 철강, 전자 등)

    수출 중심 경제로의 전환

    일자리 창출

    산업화의 부정적 측면
    재벌 중심 경제 구조 형성 → 경제력 집중 문제

    노동자 권리 미약, 열악한 근로 조건

    농촌과 도시 간 소득 격차 심화

    환경 오염, 도시 슬럼화

    박정희 정권은 급속한 성장을 위해
    노동자 파업을 강경 진압하거나, 산업재해 문제를 간과하기도 했다.
    이러한 부작용은 이후 민주화 운동과 노동운동의 중요한 원인이 되었다.

     

    10. 국방력 강화와 자주국방 전략

     


    박정희는 한반도 안보 현실을 정확히 인식하고 있었다.
    특히 베트남전 파병 이후 미국이 아시아 정책에서 발을 빼려 하자,
    자주국방 체제 구축을 본격 추진하였다.

    주요 성과
    국방과학연구소(ADD) 설립(1970)

    국산 무기 개발 착수: K1 전차, 자주포, 소총 등

    예비군 창설(1968): 향토 방위 강화

    방위산업 육성 정책: 국내 방산업체 육성

    이를 통해 대한민국은 단순한 '미국 의존형 군사력'을 넘어,
    자체 방어 능력을 갖춘 국가로 발전할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하였다.

     

    11. 현대적 재평가: 박정희를 보는 다양한 시각

     


    박정희에 대한 평가는 시대와 세대에 따라 크게 갈린다.


     

     

    평가 항목                                    긍정적 시각                                                        부정적 시각

    경제 발전 한강의 기적, 중산층 형성 재벌경제, 빈부격차 심화
    정치 체제 안보 강화, 국가 통합 권위주의, 민주 억압
    농촌 정책 새마을운동 통한 생활 개선 농민 부담 증가, 과도한 경쟁 유발
    국방 정책 자주국방 기반 마련 군사화 경향 심화

                                                      

                                            

     

    특히 2000년대 이후 박정희에 대한 재조명은
    "산업화와 민주화 모두를 인정해야 한다"는 중도적 평가로 이동하는 추세다.

    즉, 경제 발전과 근대화의 업적을 인정하는 동시에
    민주주의와 인권 침해에 대한 문제점도 함께 지적하는 균형 잡힌 평가가 이루어지고 있다.

     

    12. 박정희가 남긴 유산과 오늘날의 의미

     


    박정희는 오늘날 한국 경제, 사회, 정치, 안보 체계의
    초석을 다진 인물임에는 분명하다.

    그가 남긴 유산은 다음과 같다:

    경제개발 계획 체계화

    산업 기반 조성

    수출 주도형 경제모델

    국방력 자주화 토대 마련

    농촌 현대화 및 국민 생활수준 향상

     

    반면,
    민주주의와 인권 의식 확산은 그가 남긴 과제였고,
    이는 1987년 민주화운동 이후 한국 사회가 꾸준히 발전시켜온 분야다.

    박정희를 둘러싼 찬반 논쟁은 여전히 진행 중이지만,
    그가 대한민국 현대사에 남긴 강력한 흔적과 영향력은 누구도 부정할 수 없다.


    박정희의 지도 사상

    1. 목표를 세우라

    성공적인 삶을 사는 지혜는 분명한 목표를 세우는 것입니다. 우리가 매일 매일을 승리와 영광으로 가득차게 하려면 먼저 바라고 소원하는 목표가 분명해야 합니다. 꿈을 잉태하지 않으면 창조와 생산을 가져올 수가 없습니다. 마음 속에 꿈을 그리면서 강력한 소원을 가져야 합니다. 꿈이 있다 하더라도 마음 속에 강력을 소원을 가져야 합니다.

    미국의 30대 백만장자가 된 폴 마이어 박사가 있습니다. 그가 사원들에게 종이를 나누어 주고 거기에 당신이 가장 원하는 것을 쓰라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몇몇 사원은 빈정대며 쓰지 않았습니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 ‘소원을 쓰면 누가 이루어 주느냐“고 비웃었습니다. 그러나 다른 사원들은 종이에 자기 소원을 썼습니다.

    그는 사원들에게 여러분이 바라는 것을 강력한 소원을 가지고 매일 눈으로 보면서 이것이 꼭 이루어진다고 마음에 그림을 그리며 살아가라고 용기를 주었습니다. 소원을 가진 사람들은 뜻대로 이루어졌습니다.

    몇 년 후 성취된 간증을 하는데 “나는 아름다운 집을 갖기를 원했는데 좋은 집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어떤 사람은 “학위를 갖기를 원했는데 그대로 되었습니다.” 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소원을 쓰지 않은 사람은 아무것도 이룬 것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목표가 없으니 달성된 것도 없을 뿐입니다. 마음 속에 불타는 소원을 가져야 합니다. 날마다 꿈을 가지고 목표를 세우면 어느 때인가 이루어지는 날이 있습니다. 구역 부흥이나 전도도 강력히 불타는 소원이 있어야 합니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미국의 가든 그로브에 있는 드라이브인 처치의 로버트 슐러 박사에게 어느 분이 인사하면서 “당신이 그 많은 꿈이 생전에 다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하고 말하니까, 그 분의 대답이 “천만에요, 나는 죽을 때까지 나의 꿈이 이루어지지 않기를 바라고 있을 뿐이오!” 했습니다. 이 말은 죽을 때까지 끊임없이 꿈을 가지고 살아가겠다는 말입니다. 한 가지 꿈이 성취되면 또 다른 꿈을 가지고 죽을 때까지 계속해서 꿈과 목표를 가지고 살아가겠다고 하는 뜻입니다.

    꿈과, 희망이 없는 사람은 육신은 살았으나 정신적으로 죽은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성도들은 꿈을 가져야겠습니다. 개인적으로 꿈이 있어야 합니다. 신앙적으로도 꿈을 가져야 합니다. 교회적으로도 꿈을 가져야 합니다.




    2. 사람을 찾으라(용인술)

    <용인술> 사람을 쓰는 법

    사람을 보는 법, 얻는 법, 기르는 법을 우리는 용인술이라고 한다.

    사람을 쓰는 법, 용인술에 대한 공자의 경험과 지혜를 다루는 책 용인술!!!


     저자 : 김성회         출판사 : 쌤앤파커스

      “사람을 쓰는 법”이란 부제가 있는 이 책은 2500년 동안 동양사회의 정신적 리더인 공자에게서 배우는 ‘사람 보는 법’, ‘얻는 법’, ‘기르는 법’에 대해 소개하고 있다. 공자는 춘추전국의 난세를 주유하며 리더의 도를 알리고, 3000명의 제자를 시대의 동량으로 키워낸 인재경영의 대가다.


      이 책은 인재를 알아보고, 활용하고, 그들의 마음을 얻는 법에 관한 공자의 경험과 지혜를 다룬다. '사람이 전부'라는 인재경영 마인드를 군주에게 설파하고 이를 바탕으로 인재를 양성했던 공자의 용인술을 배울 수 있을 것이다.

      이 책은 공자의 《논어》와 《공자가어》에 나타난 관련 이야기를 기본으로, 동서고금의 사례와 경영학 이론, 저자가 취재한 현장 이야기를 통해 '사람 쓰는 역량'을 키우는 방법을 안내하고 있다. 사람을 알아보고 평가하는 방법부터 인재육성, 동기부여, 충성심을 얻는 방법 등 사람을 뽑고 키우는 데 무엇을 관찰하고, 무엇을 성찰해야 하는지에 대해 제대로 익힐 수 있는 책이다.

      이 책은 모두 4개 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1장은 “인재만사할 것인가, 인재망사할 것인가”라는 주제로 사람을 알아보는 방법, 평가하는 방법, 그리고 인재를 엮는 법에 대하여 정리하고 있다. 2장은 “어떻게 인재를 육성할 것인가”라는 주제로 사람 키우는 법, 즉 인재육성에 대한 공자의 지혜를 담고 있다. 3장은 “어떻게 열정을 일으킬 것인가”라는 주제로 사람을 움직이는 법, 즉 동기부여에 대한 공자의 조언을 다루고 있다. 4장은 “어떻게 충성을 이끌어낼 것인가”라는 주제로 사람의 충성심을 얻는 법에 대하여 정리하고 있다.

      “인자(仁者)는 자기가 일어서기 원하면 남을 먼저 일으켜 세우고, 자기가 성공하고자 하면 먼저 남이 성공하도록 돕는다(夫仁者 己欲立而立人 己欲達而達人, 옹야편).”


      공자의 리더십 에센스는 이 한 줄로 압축된다. ‘나뿐’인 성공은 나쁜 성공이다. 남과 함께 해야 가치가 있다. 남을 성장하게끔, 성공하게끔 하는 것이 리더십의 진수다. 남을 통해 일하고 남을 성장시키고 성과를 내게 하는 것이 리더의 할 일이다. - <공자에게 ‘사람 쓰는 법’을 묻다> 중에서

      많은 경영자들이 인재가 중요하다는 것은 알고 있지만, 그것이 정말 중요한지 뼛속 깊이 인식하고 있는가는 겸허히 돌이켜볼 필요가 있다. 불리한 환경에서 출발했음에도 동종업계에서 앞서는 경우를 보면 승리의 마스터키가 인재관리인 경우가 많다. J사장은 손실이 누적되면 사업전략을 검토하기보다 회사의 각 분야를 맡을 유능한 인재부터 찾아 삼고초려로 영입했다고 말한다. - <당신이 인재난에 허덕이는 이유를 아는가?(君子成人之美 不成人之惡 小人反是 - 『논어』 안연편)> 중에서

      『여씨춘추』에서는 인재판별법으로 8관6험법을 추천한다.

    8관, 즉 살펴야 할 8가지란 순조로울 때 어떤 사람을 존중하는지, 높은 자리에 있을 때 어떤 사람을 기용하는지, 부유할 때 어떤 사람과 접촉하는지, 무엇을 말하고 무엇을 하는 지다. 또 한가할 때 무엇을 즐기는지, 친해진 뒤 말속에 드러나는 뜻을 본다. 아울러 좌절했을 때 지조를 보고, 가난할 때 무엇을 하지 않는지 본다.

    6가지 실험법은 기쁘게 해서 천박하게 행동하지 않는지, 즐겁게 해서 본래의 취향을, 화를 돋워 통제능력이 있는지, 두렵게 만들어 견딜 수 있는지, 슬프게 만들어 스스로 지탱할 수 있는지, 힘들게 만들어 의지가 있는지 시험하는 것이다. - <인재(人材)와 인재(人災 )를 구분할 수 있는가(視其所以 觀其所由 察其所安 人焉廋哉  人焉廋哉 - 『논어』 위정편)> 중에서

      약한 리더야말로 악한 리더다. 진정한 인재는 목적을 완수하겠다는 냉철한 의지를 가진다. 대세를 따라가느라, 인기에 영합하느라 기본을 어정쩡하게 만들고 현실과 타협하지 않는다. 좀 더 강경하게 심지어는 우둔하게 원칙을 밀고 나가야 할 상황이 언제인지 생각해보고, 자신이 피하려는 갈등이 무엇인지 곰곰이 따지고 챙긴다. 목표의 정당성에 초점을 맞추고, 조직의 원칙과 가치가 무엇인지를 잊지 않는 사람을 찾아라. - <진품 인재와 사이비 인재를 어떻게 판별할 것인가(鄕愿 德之賊 - 『논어』 양화편)> 중에서 

      결국 인재를 바르게 평가하려면 ‘사실 뒤의 진실’은 물론 ‘호평과 혹평의 오류’를 가려낼 혜안이 필요하다. 모두가 좋아하고 모두가 싫어하더라도 반드시 매의 눈을 가지고 다시 살펴보라. 꺼진 불도 다시 보아야 하듯, 상하 모두에게 악평을 받는 인물도 꼼꼼히 관찰하는 것이 중요하다. 인재경영의 필살 내공은 얼마나 많은 사람의 지지를 받느냐보다 어떤 사람들의 지지를 받느냐를 살피는 것이다. 인재평가에서는 양의 법칙보다 질의 법칙이 중요하다. - <인재평가, 질의 법칙을 쓸 것인가, 양의 법칙을 쓸 것인가(鄕人皆惡之 何如 子曰 未可也 不如鄕人之善者好之 其不善者惡之唯仁者 能好人 能惡人 - 『논어』 이인편)> 중에서

      공자가 인재육성에 성공한 것은 상당 부분 눈높이 소통에 기인한다. 공자는 강제가 아닌 설득과 토론의 방식을 취하고자 했다. 이를 위해 공자는 4가지를 끊으려고 노력했다고 밝힌다. 즉 편견과 선입관, 독단, 완고성, 아집이 그것이다. 공자는 유연성, 포용성, 개방성의 태도를 가지고 있었다. 공자가 청년들의 스승으로 자리매김된 것은 제자들에게 의견을 묻고 들어주고 수평적으로 대해준 데 있다. 말 잘하는 것보다 잘 말하는 것이 인재육성의 비결이다. - <가르칠 것인가, 깨우칠 것인가(子曰 求也退故 進之 由也兼人故 退之 - 『논어』 선진편)> 중에서 

      이익만으로 뭉치면 ‘야합’이 되고, 그나마 없으면 ‘오합지졸’이다. 진정한 ‘단합’을 하려면 사명과 목적의식으로 뭉쳐야 한다. 리더는 조직의 ‘살아 있는 비전’이고 직원은 ‘조직을 살린 비전’이다. 리더로서 조직에 북두칠성처럼 빛나게 하는 구성원의 밝은 비전을 공유하고 있는가? 혹시 ‘바쁘다’를 연발하며 조각 퍼즐만 줍느라 부산하지 않는가? 정명의 빅피처(big picture)를 구성원들과 함께 바라보고 있는지 냉정하게 돌아보라. - <명분으로 움직이는가, 명령으로 움직이는가(子路曰 衛君 待子而爲政 子將奚先 子曰 必也正名 - 『논어』 자로편)> 중에서

      군자는 자문을 구하고, 의견을 수렴하는 것만으로 충분하지 않다. 자문을 구해 좋다고 수긍이 되면 행동으로 옮겨야 한다. 자신의 평판을 위해 어정쩡하게 듣는 시늉만 하고 병풍으로 이용만 한 채 행동으로 옮기지 않으면 어진 사람들의 기대를 저버리고 소인들의 방어심리만 자극해 결국 듣지 않느니만 못하게 된다. 용인을 잘하면 인재가 제 발로 찾아온다. - <약속할 것인가, 증명할 것인가(子曰 君子欲訥於言而敏於行 - 『논어』 이인편)> 중에서

    3. 기간을 정하라

    4. 시도하라
        5%의 가능성만 있어도 시작하라 


    골로새서 1:16
    만물이 그에게 창조되되 하늘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보좌들이나 주관들이나 정사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
    For by him all things were created: things in heaven and on earth, visible and invisible, whether thrones or powers or rulers or authorities; all things were created by him and for him.

    of the people, by the People, for the People.

    갈라디아서 5:1
    그리스도께서 우리로 자유케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세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
    It is for freedom that Christ has set us free. Stand firm, then, and do not let yourselves be burdened again by a yoke of slavery.

     



    9월 6일(토) 에스겔 13-15장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우매(愚昧)한 선지자(13:3)

  • 13장 : 거짓 선지자들에 대한 심판
              거짓 선지자들에 대한 경고와 그들의 잘못된 예언을 고발함.

  • 14장 : 우상 숭배자들의 심판
  •           이스라엘의 우상 숭배에 대한 경고와 회개를 촉구함.

    15장 : 포도나무의 심판
  •            이스라엘의 불순종과 그로 인한 심판을 비유적으로 설명함.

    주 여호와의 말씀에 본 것이 없이 자기 심령을 따라 예언하는 우매한 선지자에게 화가 있을찐저.
    This is what the Sovereign LORD says: Woe to the foolish prophets who follow their own spirit and have seen nothing!

    (새한글) 주 여호와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 「끝장났다, 우둔한 예언자들은! 이들은 자신들의 영을 뒤쫓아 가다가 아무것도 보지 못한 사람들이다.

    본 것이 없이...선지자에게 화가 있을진저 
    - 여기에서 '본 것'이란 선지자로 소명받은 자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기 위해 하나님의 이상, 즉 하나님이 부여주시는 초자연적인 진리 또는 그 진리의 현상을 보는 것을 뜻한다. 
    이것은 하나님의 소명받은 자가 성령의 능력을 통해 영적인 눈으로 보는 것이다. 
    따라서 사도 바울은 에베소 교인들을 위해 '지혜와 계시의 정신(영, spirit)을 너희에게 주사 하나님을 알게 하시고 너희 마음눈을 밝히사...알게 하시기를 구하노라'(엡 1:17-19)고 기도하기도 했다. 
    그러나 거짓 선지자들은 소명을 받지 않았을 뿐 아니라 성령을 받지도 않았다. 
    그들은 그들 자신의 심령에 따라 거짓되이 예언하였다. 
    더욱이 이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예언한다고 공언하면서 헛된 묵시로 거짓되이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예언하였다. 
    이들은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빙자한 불의를 범했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들을 헛된 비진리 가운데로 빠지게 하여 실족케 하는 죄를 범하였다. 
    또한 이들은 하나님의 참된 진리, 즉 당시에 유다의 임박한 멸망, 하나님의 급박한 심판을 전한 선지자들을 거역하고 훼방하는 죄악까지 범하였다(렘 28:1-16). 
    이들은 하나님께서 당신의 언약 백성을 어떤 경우에도 버리시거나 멸망항도록 버려두시지 않는다는 사상에만 얽매여 있었던 같다. 
    그들이 하나님의 공의의 속성에 대해 조금이라도 관심을 가졌더라면 그토록 어리석은 예언은 하지 않았을 것이다.


    지혜자와 우매자(전도서 7:6)

    우리는 어제보다 오늘이, 보다 더 나은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매순간 “나는 어제보다 더 나은 삶을 살아왔는가?”라고 스스로에게 물어 보아야 합니다.
    우리는 의미 있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우리는 보람 있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인생의 허무함을 맛보는 인생이 아니라, 인생의 참된 행복을 누리는 복된 삶을 살아야 합니다.
    어떤 삶이 의미 있고, 보람 있는 삶일까요?
    지혜로운 사람의 책망을 듣는 것이, 어리석은 사람의 노래를 듣는 것보다 더 낫습니다.
    지혜자의 책망은 하나님의 말씀을 통한 책망입니다.
    하나님께서 “내 말이 불 같지 아니하냐 바위를 쳐서 부스러뜨리는 방망이 같지 아니하냐”(렘 23:29) 
    하나님의 말씀은 불 같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바위를 쳐서 부스러뜨리는 방망이 같습니다.
    불같은 하나님의 말씀을 통하여, 우리의 죄악이 깨끗하게 태워져야 합니다.
    우리 안에 있는 이물질들이 다 제거되어져야 합니다.
    불순물들이 다 제거되어질 때, 순수한 금이 될 수 있습니다.
    욥은 “그러나 내가 가는 길을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순금 같이 되어 나오리라”(욥 23:10).

    방망이 같은 하나님의 말씀을 통하여, 우리의 굳은 마음이 부셔져야 합니다. 
    묵은 땅이 기경되어야 하는 것처럼, 딱딱하게 굳어버린 우리의 마음이 산산조각 부서져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통하여, 깨끗하여지고, 부드러워진 마음으로, 우리의 삶을 살아가는 것이, 더럽고 추한 마음으로, 딱딱하게 굳어버린 마음으로 살아가는 것보다는 더욱더 의미 있는 삶일 것입니다.
    어리석은 자들의 노래로, 우리의 부패한 마음을 충족시키기 보다는, 지혜로운 자의 책망을 통해, 우리의 부패를 정화시키는 것이 훨씬 더 낫습니다.

    잠언 6:23
    “훈계의 책망은 곧 생명의 길이라” 

    책망의 소리는 “우매자들의 노래 소리” 만큼 듣기 좋지는 않으나, 보다 유익합니다.
    “우매자의 노래”를 좋아한다는 것은 마음이 공허함을 나타내는 표적이 되며, 동시에 마음을 더욱 공허하게 합니다.
    우매자의 노래보다는 지혜자의 책망을 사모해야 합니다.
    어리석은 사람의 웃음소리는 가마솥 밑에서 가시나무 타는 소리와 같습니다.

    6절 말씀입니다.

    “우매한 자들의 웃음 소리는 솥 밑에서 가시나무가 타는 소리 같으니 이것도 헛되니라”
    “우매한 자들의 웃음소리”와 같은 일시적 쾌락에, 사람이 그토록 쉽게 현혹된다고 하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짓입니까!
    이와 같이 덧없는 즐거움을, “솥 밑에 지펴놓은 가시나무”에 비유하는 것은 적절합니다.
    가시나무는 탈 때는 소리만 요란하게 나고, 화염이 잠깐은 크게 일어나지만, 곧 꺼져 버리고, 그 재를 흩날리게 됩니다.
    그리고 무엇을 끓일 정도의 열을 얻어내는 데에는 거의 아무 도움도 되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그 정도의 열을 얻자면, 계속 타오르는 불길이 있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우매자의 웃음소리”는 시끄럽고 순간적이어서, 진정한 기쁨의 본보기는 아닙니다.
    “이것도 헛되니라”고 했는데, 그것은 사람들을 기만하여 파멸에 이르도록 하고, “그 환락의 끝은 슬픔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지금 우는 자는 복이 있나니 너희가 웃을 것임이요”라고 말씀하셨고, “화 있을진저 너희 지금 웃는 자여 너희가 애통하며 울리로다”(눅 6:21,25)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우매자들의 노래와 웃음소리에 현혹되어서는 안됩니다.
    우리는 지혜로운 사람의 책망을 듣는 것을 사모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지혜자의 책망은 우리의 생명을 살리기 때문입니다.
    바울 사도는 “이제는 그의 육체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화목하게 하사 너희를 거룩하고 흠 없고 책망할 것이 없는 자로 그 앞에 세우고자 하셨으니”(골 1:22)라고 말했으며, “주께서 너희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날에 책망할 것이 없는 자로 끝까지 견고하게 하시리라”(고전 1:8)고 말했습니다.

    또한, 바울 사도는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딤후 3:16)라고 말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통하여, 우리의 잘못된 행실에 대하여, 끊임없이 책망을 들어야 합니다.
    그리하여, 우리는 십자가의 주님을 믿고, 주님 앞에 서는 날, 책망할 것이 없는 모습으로 서야 할 것입니다.
    오늘 하루도 주님과 동행함으로 승리할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사도행전 20:35

    범사에 너희에게 모본을 보였노니 곧 이같이 수고하여 약한 사람들을 돕고 또 주 예수의 친히 말씀하신바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 하심을 기억하여야 할찌니라. 
    In everything I did, I showed you that by this kind of hard work we must help the weak, remembering the words the Lord Jesus himself said: 'It is more blessed to give than to receive.



    어리석은 농부

    인도의 우화에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떤 어리석은 농부가 논을 개간했습니다. 
    논에 댄 물이 아주 많은 양분을 제공해 그의 논은 기름지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 어리석은 농부는 이 기름진 논의 물이 이웃에 있는 다른 사람의 논으로 흘러가는 것이 못마땅하고 심통이 났습니다. 
    그래서 다음해에는 자기 논의 물이 어디에도 빠져나가지 못하게 틀어막았습니다. 
    농부의 논에는 다음 해에도 역시 많은 양분을 제공해 주는 물이 흘러들어 왔습니다. 
    그렇지만 나갈 곳이 없어서 벼는 모두 썩어 쌀을 얻을 수 없었다는 것입니다. 
    이웃을 생각하지 못하고 자기만 생각하는 욕심장이는 결국 자기가 손해를 보는 것입니다. 
    마땅히 받을 자에게 베풀기를 아끼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서로 돕고 사랑을 나눌 때 우리는 더욱 풍성함을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어리석은 부자

    어느 소년이 공자님께 나와서 하늘의 별이 모두 몇 개나 되냐고 물었다. 
    이때에 공자님의 말씀이 "하늘의 별들은 너무 먼 곳에 있기 때문에 취미가 없어서 모른다"고 답변하였더니, 짖궂은 소년은 다시 묻기를, "그럼 가까이 있는 눈썹은 몇 개나 됩니까?"하고 물었다. 공자님은 다시 대답하기를, "눈썹은 가까이 있기는 하지만 그런 것은 별로 알 필요가 없기 때문에 모른다."고 답변하였다고 한다. 사실 별의 숫자나 눈썹의 숫자는 알아서 손해될 것도 없고 모른다고 문제될 것도 없는, 알아도 그만 몰라도 그만인 것이지만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면서 반드시 알아야 할 것 몇 가지가 있다. 성경을 보면 많은 재산을 가지고 호의호식하면서도 알아야 할 것은 알지 못하고 살아간 어리석은 농부의 비유가 나타나 있다. 그는 명석한 두뇌를 가지고 부유하게 살았지만 하나님의 살아 계심을 믿지 못했다. 농사일을 하여 부유하게 되기까지는 농사일을 거둘어 준 이웃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이웃을 알아보지 못했다. 하나님께서 재물을 주실 때에는 그 재물로 값진 일을 하게 하기 위함인데 이 농부는 재물을 창고에 쌓아 두기만 하는, 생의 목적을 알지 못한 사람이었다. 그리고 언제 죽음이 닥치고 죽음 이후에 갈 곳이 어딘지를 알지 못하고 있었던 어리석은 부자였던 것이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들도 세상을 살아가면서 아무리 많은 지식과 재산을 가지고 정치와 경제를 논하며 문화와 예술을 논한다고 해도, 하나님의 살아 계심과 이웃이 있음을 알지 못하고 생의 목적과 죽음 이후에 돌아갈 곳이 어딘지를 모르고 산다면 이것이 비극이 아닐 수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어리석은 자가 되지 말고 오직 주의 뜻이 무엇인지 이해하라."(엡5:17)


    인간의 어리석음

    앞날을 내다보지 못하는 인간의 어리석음이 어느 정도인지 가르쳐 주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원자력에 이용하는 핵원료인 라듐의 모체가 되는 우라늄에 대하여 1945년에 쓴 영어 사전에는 이렇게 쓰고 있습니다.
    "아무 쓸모가 없는 희고 무거운 금속"
    그러나 시대가 바뀌었습니다. 우라늄이야 말로 원자핵 분열을 일으키는 막대한 에너지를 방출하는 핵원료이며 이 우라늄의 발견은 인류역사상 최대의 발견이라고 고쳐 쓰게 되었습니다.


    요동시(遼東豕) / 멀 요(遙), 동녘 동(東), 돼지 시(豕) 

    '요동시(遼東豕)'라는 성어는 우리의 일상에서 종종 들을 수 있는 말로, 그 의미는 견문이 좁아 신기하게 여기는 것이 사실은 흔한 것임을 나타냅니다. 

    이런 의미는 꽤나 깊은 역사적 배경과 함께 제시되었습니다. 
    후한(後漢) 광무제(光武帝)의 시절, 천하(天下)는 전쟁의 상처로 평화를 되찾지 못하였습니다. 
    그 때, 어양(漁陽) 태수 팽총(彭寵)은 군량미 확보의 중요성을 주장하며, 주부(朱浮)의 군량 공급 제안을 반대하였습니다. 
    이를 위해, 그는 연왕(燕王)이라 칭하며 모반의 계획을 추진하였습니다. 
    주부는 팽총의 행동을 비판하며, 요동에서 흰 돼지 새끼의 특이성을 예로 들었습니다. 
    그는 요동 지역에서는 흰 돼지가 흔하다는 것을 알려, 팽총이 자신의 공을 과대평가하고 있음을 지적하였습니다. 
    이러한 배경 속에서 '요동시'라는 성어는, 견문이 좁아 흔한 것을 신기하게 여기는 의미로 사용되게 되었습니다.

    한자풀이

    요동시의 한자 각각에 대한 풀이는 다음과 같습니다: 

    • 遼: 멀 료(요) 멀다, 늦추다, 느슨하게 하다 
    • 東: 동녘 동 동쪽, 오른쪽 
    • 豕: 돼지 시 돼지 

    이러한 한자의 조합을 통해 '요동의 돼지'라는 의미로 '요동시(遼東豕)'라는 성어가 형성되었습니다


    지혜자의 말과 우매자의 말(전도서 10:12-20) 


    우매자는 자기의 말에 무너진다.
    지혜자는 자기의 말에 탑을 쌓는다.

    전도자는 지혜자의 입의 말은 은혜롭다고 말합니다(12절). 

    지혜자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이기에 그의 말과 태도에 항상 하나님의 은혜가 담겨 있습니다. 
    지혜자의 말에는 큰 감화력이 있어 사람들을 옳은 길로 인도합니다. 
    궁극적으로는 참된 길, 생명의 길로 인도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오랜 시간이 걸릴지라도 우리 안에 말씀의 지혜를 채워야 합니다. 
    그리하여 우리의 입술을 통해 사람들에게 배려와 사랑을 전하고 큰 은혜를 끼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전도자는 우매한 자의 입술은 자기를 삼킨다고 말합니다(12절). 

    ‘자기를 삼킨다’는 말은 입술의 주인이 아니라 입술의 종이 되어 스스로 지배당하게 된다는 말입니다. 
    그렇게 되면 자신의 인격과 성품을 망가뜨리며, 나아가 인생을 망쳐 버립니다. 
    우리의 입술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통제받지 않으면 우리 ‘인생 전체를 불사르는 지옥 불이 됨’(약 3:6)을 잊지 말고 날마다 말씀에서 지혜를 얻어야 합니다.

    전도자는 자신조차 삼키는 우매자의 말의 특징에 대해 우매하게 시작하고 미친 것으로 끝마친다고 말합니다(13절). 본문에서 ‘미친’이라는 표현은 정신적인 영역뿐 아니라 영적인 영역에서 혼돈과 사악함이 뒤섞여 있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즉 우매자의 말은 어리석은 것으로 시작하고 점점 진행될수록 그 끝이 악한 정신과 영혼으로 나타나 자신과 다른 사람을 해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매한 자의 헛된 말에 휩쓸리지 말아야 합니다. 그들의 말에 휩쓸리게 되면 우리의 정신, 나아가 영혼까지 미혹을 받아 혼돈의 상태에 이르게 될 수 있습니다.

    전도자는 우매한 자의 또 다른 특징으로, 말을 많이 하지만 장래의 일에 대해 알지 못한다고 말합니다(14절). 우매자는 자기의 한계와 무지를 모르면서 모든 것을 아는 것처럼 그저 말을 많이 하는 허황되고 과장된 존재입니다. 성도는 말을 할 때 자신의 한계와 무지를 인정하며 겸손하고 진실한 태도를 지녀야 합니다. 내가 아는 것, 정확하게 인식하는 것, 또 내가 감당할 수 있는 것을 넘지 말아야 합니다. 이러한 전제를 두고 말하고 행동한다면 우리는 비로소 지혜로운 삶을 살 수 있을 것입니다.

    전도자는 마음으로도 왕을 저주하지 말고, 침실에서도 부자를 저주하지 말라고 당부합니다(20절). 속으로 한 말도, 혼잣말도 모두 말입니다. 반드시 전해지게 되어 있고, 반드시 나에게 되돌아오기 마련입니다. 그래서 누군가에 대해 말하고 싶을 때 그 사람 앞에서 할 수 없는 말이라면 어디서도 하지 말아야 합니다. 오늘날 얼마나 많은 사람이 말로 인해 상처받는지 모릅니다. 특히 교회 안에서의 갈등이 말에서 시작된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작은 혀가 내뱉는 말이지만 그 말이 우리의 삶을 이끌어 갑니다. 만약 우리의 말이 지혜를 담지 않고 우매함을 담아 흘러간다면 우리의 삶 전체가 헛되고 허무한 삶으로 전락할 것입니다. 진정 우리의 말이 은혜로운 지혜의 말이 되어 나의 생명도 살리고 다른 영혼도 살리는 의의 도구가 되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가증한 거짓 남녀 선지자와 심판

    본장의 핵심적인 성경구절은 (겔13:3)로 볼 수 있습니다.

    "주 여호와의 말씀에 본 것이 없이 자기 심령을 따라 예언하는 우매한 선지자에게 화가 있을진저"

    본 장은 두 단락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첫 단락 13:1-16 거짓 선지자의 허위와 멸망에 대한 것 
    둘째 단락 13:17-23 / 거짓 여 선지자의 형벌에 대한 것 

    1. 거짓 선지자의 허위와 멸망 / 13:1-16

     4절. 거짓 선지자들은 황무지에 있는 여우 같으니라

    여우는 성을 견고히 하거나 전쟁을 방비하기 위해 아무런 일을 하지 않은 동물입니다. 
    무위도식한다고 하는 말이 그 말이지요. 
    그러나 선지자들은 뭔가 저희들이 백성들을 위해 엄청난 일을 한 것 처럼 떠들어댄다는 것입니다. 

    그들이 죄는 먼저 하나님이 하신 적도 없는 말씀을 하나님께서 하셨다고 하며 백성들을 기만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에게 안심하라 걱정마라 하나님은 우리를 지키시고 예루살렘을 지키실 것이니 겁내지 말라, 항복해선 아니된다! 
    애굽을 의지하여야 한다! 또 바벨론은 곧 물러나거나 패배할 것이다 라고 했습니다. 문제는 하나님이 하신 말씀에 반대하고 참 선지자들을 핍박하고 죽이려 까지 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백성들에게 선물을 받고 양식을 받아 챙기는 삶을 살았다는 것이지요. 뿐만 아니라 전쟁에 대해서도 아무런 제대로 된 수고를 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성벽을 나름 보수하는 일을 돕는다고 떠벌렸지만 고작 한 일은 성벽에 회 칠을 한 것이 전부라는 것이지요. 회 칠이 무슨 힘이 있나요? 벽돌을 고치거나 바꾸어야 하는데 그런 힘든 일은 아예 손도 대지 않았다는 것이지요. 

    13. 그러므로 나 주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가 분노하여 폭풍으로 열파하고 내가 진노하여 폭우를 내리고 분노하여 큰 우박덩이로 훼멸하리라
    14. 회칠한 담을 내가 이렇게 훼파하여 땅에 넘어뜨리고 그 기초를 드러낼 것이라 담이 무너진즉 너희가 그 가운데서 망하리니 나를 여호와인 줄 알리라.

    2. 거짓 여 선지자의 형벌 / 13:17-23

    17. 너 인자야 너의 백성 중 자기 마음에서 나는 대로 예언하는 부녀들을 대면하여 쳐서 예언하여.
     
    점치는 여자들 무당들에 대한 심판과 징계의 말씀입니다. 
    이들은 독특한 복장을 하고 있었는데 방석을 모든 팔뚝에 꿰어 맸었다고 했습니다. 
    또한 수건들을 만들어서 자기도 쓰고 다른 사람들을 위해서도 수건을 팔아먹는 자들이었습니다. 
    아마도 그 수건이 복을 가져다 주는 매개체나 부적의 역할 한다고 했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부적을 팔듯이 그 수건을 팔아 생계를 유지하고 부를 축적하며 살았습니다.

    그러나 그 복술과 점치는 행위는 다 거짓말이라는 것입니다. 
    전에 박근혜씨가 대통령 출마했을 때 한국에서 내로라 하는 점쟁이들을 기자들이 찾아가서 누가 대통령이 될 것인가를 물어 본적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단 한 사람도 자신있게 박근혜라고 말한 사람이 없었습니다. 
    차배현 집사는 안철수가 될거라 하며 그를 밀기 위해서 부산에서 가서 협동해야 한다고 했구요, 저와 김동호 교수는 박근혜가 되기 전 일 년 전부터 박근혜가 될 것이라 했었지요. 
    저만도 못한 자들이 소위 점집을 차라고 돈을 받아 챙기고 있었던 것입니다.

    무당들은 거짓 선지자와 함께 참 선지자들을 정죄하고 비난하며 그들을 슬프게 했습니다. 
    결국 본 장에 나오는 무당들은 백성들의 마음이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도록 속삭였고 복을 받기 위해 우상과 사술을 따라야 한다고 가르쳤습니다. 
    그러므로 백성들의 영혼을 새 사냥하듯 지옥과 파멸에 이르도록 한 끔직한 죄를 저지르게 된 것입니다.

    오늘날도 길흉을 점치기 위해 소위 예언의 은사가 있다는 사람들을 찾아가는 성도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방언으로 뭐라 뭐라 기도하다가 길흉의 결과를 말해주고 헌금을 얼마를 받습니다. 
    기독교적 점쟁이의 일을 하는 것이지요. 
    그런 행위는 지극히 가증스러운 일입니다.

    결국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더 이상은 그런 악행을 하지 못하도록 바벨론 군대에 붙여 살해되도록 하셨습니다. 
    그들에게 바벨론 군대가 붙인 죄목은 무엇이었을까요? 
    반동분자 반역 협조자의 죄였지요. 왜입니까? 
    바벨론에 대한 항복을 반대하고 반역하려는 파에 협조하고 동조했기 때문이지요.

    기독교는 이적 기사 보다는 진리(말씀)를 따라가야 하는 신앙입니다. 
    방언하고 병고친다 떠들어도 그 행실이 지저분하고 거짓과 무정함과 타락에 휘둘려 사는 자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주여 주여 한다고 해서 다 참 된 종이 아닙니다. 
    그들의 열매를 보아야 합니다.

    오늘날도 마귀의 사주를 받은 거짓 이단의 선지자들도 이적과 기사를 종종 행함으로 미혹을 하기 때문에 속기 쉽습니다.

    그러나 참 하나님의 종들은 오직 하나님의 말씀만을 따라가는 자들입니다. 
    말씀이 아닌 것을 말하는 모든 자들은 가증한 거짓 선지자들입니다. 
    이들은 "자기 마음에서 나는 대로 예언하는 자들"입니다(1절).  
    이들은 자기들의 유익을 위하여 "영혼을 사냥하는 자들"(18, 20절)입니다.

    그것도 큰 돈을 위해서도 아니고 "두어 조각 떡을 위하여 나를 내 백성 가운데서 욕되게 하여 거짓말을 곧이듣는 내 백성에게 너희가 거짓말을 지어서 죽지 아니할 영혼을 죽이고 살지 못할 영혼을 살리는도다"(19절)라 했습니다.

    얼마 전에 다락방에 빠진 아주머니를 만나 대화를 나눈 적이 있었습니다. 
    그녀의 말엔 다락방의 교주처럼 말씀 바로 전하고 훌륭한 분을 마나 보지 못했으며 그만이 참 말씀을 전한다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저를 비롯해서 모든 교회의 수천 수만의 목사들이 다 거짓 말씀을 전한다는 결과가 됩니다. 
    그래서 저도 그 교주가 얼마나 말씀을 잘 전하나 유튜브에서 보았어요.

    먼저 인물부터 호감이 안가고 말씀 전하는 태도도 매력이 없고 내용도 그저 그런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깨달은 것은 “교주 수준이나 성도 수준이 똑 같구나” 하는 것입니다.  
    그들에겐 교만의 영이 있었어요. 
    참 안타까운 일이지만 그것이 사단의 작품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오늘날 WCC 라는 단체가 있습니다. 
    이 가증한 거짓 목자들은 평화를 외치며 하나님의 심판이 없다고 말하며 온 종교가 다원주의로 하나가 되어서 일치되어야 세계평화를 이룰 수 있다고 말합니다. 
    영적인 창녀집단이지요. 
    불교니 이슬람교니 천주교니 다 하나가 되고 화합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참기름에 콩기름 올리브유 옥수수기름 등등 마구 섞어대면 참기름이 될 수 없습니다. 
    가짜 참기름이지요. 
    종교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처럼 "허탄한 묵시를 보며 거짓 것을 점친" 사깃군들에게 "내 손이 그들을 쳐서 내 백성의 공회에 들어오지 못하게 하며, 이스라엘 족속의 호적에도 기록되지 못하게 하며, 이스라엘 땅에도 들어가지 못하게 하리니"(9절)하셨습니다. 

    그들은 다 거기서 죽거나 바벨론에 잡혀가서 죽임을 당한다는 거지요.

    또 13절에서도 "내가 분노하여 폭풍으로 열파하고 내가 진노하여 폭우를 내리고 큰 우박덩이로 훼멸하리라"(13절)하셨습니다. 
    열파=뜨거운 폭풍의 열로 파괴한다는 의미입니다. 
    그들을 뜨거움과 차가움과 휩쓸어버림으로 파괴해 버리신다는 것이지요.

    종종 우리 친척 중에 무당이나 박수가 있는 경우가 있습니다. 
    우리는 그들을 가까이하거나 긍휼히 여기지도 참 가족으로도 여겨선 아니 됩니다. 
    재앙과 화가 하나님의 손에서 나와 그들에게 임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옆에 있다간 다칩니다.

    하나님께서는 일찌기 신명기에서 모세에게 거짓말로 예언과 꿈을 말하는 선지자들을 죽여서 악을 제하라고 하셨습니다.

    신명기 13:1-5

    1 너희 중에 선지자나 꿈 꾸는 자 일어나서 이적과 기사를 네게 보이고 
    2 네게 말하기를 네가 본래 알지 못하던 다른 신들을 우리가 좇아 섬기자 하며 이적과 기사가 그 말대로 이룰지라도 
    3 너는  선지자나 꿈꾸는 자의 말을 청종하지 말라 이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가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여 너희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는 여부를 알려 하사 너희를 시험하심이니라 
    4 너희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를 순종하며 그를 경외하며 그 명령을 지키며 그 목소리를 청종하며 그를 섬기며 그에게 부종하고 
    그 선지자나 꿈 꾸는 자는 죽이라 ! 이는 그가 너희로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시며 종 되었던 집에서 속량하여 취하신 너희 하나님 여호와를 배반케 하려 하며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행하라 명하신 도에서 너를 꾀어 내려고 말하였음이라 너는 이같이 하여 너희 중에서 악을 제할지니라" 했습니다.

    오직 하나님만 섬기고 
    하나님 말씀만 따르면 축복과 은혜가 넘칠 것입니다. 
    오늘날 만연하는 거짓 예언과 말씀과 이적을 따르는 실수를 하지 아니하도록 우리는 늘 경성하고 깨어있어야만 하겠습니다.


    거짓 선지자들의 심판과 하나님의 참된 말씀

    에스겔 13장은 하나님께서 거짓 선지자들을 향해 내리는 심판의 메시지를 담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에는 하나님의 뜻을 따르지 않으면서도 거짓으로 예언하는 자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자신의 생각을 따라 말하고, 백성들에게 평안할 것이라는 거짓된 희망을 주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쌓아 올린 허약한 담이 폭풍과 홍수로 인해 무너질 것이라고 경고하시며, 그들의 거짓된 예언이 결국 헛된 것이었음을 밝히십니다. 
    또한 거짓된 예언으로 백성을 속이고 영적으로 타락하게 만든 여성들을 향해서도 심판을 선언하십니다. 
    그들은 부적과 마술을 이용하여 백성들을 속이며, 하나님의 백성을 타락하게 만들었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이 행한 악한 일들을 기억하시며, 반드시 그들을 심판하실 것입니다. 
    결국 거짓 선지자들은 하나님의 백성 중에서 끊어지고, 하나님의 참된 말씀이 무엇인지 분명히 드러날 것입니다.

    본문의 구조

    1. 거짓 선지자들에 대한 심판 선언 (1~9절)
    2. 허약한 담의 비유와 심판의 경고 (10~16절)
    3. 거짓된 여성 예언자들에 대한 심판 (17~23절)

    거짓 선지자들에 대한 심판 선언 (1~9절)

    하나님께서는 에스겔에게 거짓 선지자들을 향한 심판의 말씀을 전하라고 명령하십니다. 
    이들은 자신의 마음에서 나온 거짓된 환상을 보고도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전하는 자들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뜻을 따르지 않으면서도 백성들에게 거짓된 희망을 심어주었습니다. 
    이들은 참된 예언자가 아니라, 스스로를 속이며 백성을 잘못된 길로 인도하는 자들입니다. 
    하나님은 이러한 거짓 선지자들이 결국 하나님의 백성 중에서 끊어질 것이며, 이스라엘 족보에서 지워질 것이라고 경고하십니다. 
    이는 하나님의 말씀을 왜곡하고 백성들을 혼란에 빠뜨린 자들에게 내려지는 강력한 심판입니다.

    허약한 담의 비유와 심판의 경고 (10~16절)

    거짓 선지자들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평강하다, 평강하다"라고 말하면서도 실제로는 백성들을 멸망으로 이끌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거짓된 희망을 허약한 담에 비유하십니다. 
    거짓된 예언은 겉으로 보기에는 그럴듯해 보이지만, 실제로는 약하고 쉽게 무너질 것입니다. 
    하나님은 폭풍과 홍수를 보내어 이 담을 허물어버릴 것이며, 결국 그들의 거짓이 드러나게 될 것입니다. 
    이는 사람들이 하나님을 떠나면서도 거짓된 가르침을 따라 살면, 결국 심판을 피할 수 없다는 교훈을 줍니다. 
    거짓된 평안은 오래가지 못하며,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이 반드시 임할 것입니다.

    거짓된 여성 예언자들에 대한 심판 (17~23절)

    하나님께서는 거짓된 예언을 행하는 여성들에게도 심판을 선언하십니다. 
    이들은 부적과 마술을 사용하여 사람들을 미혹하고, 하나님을 떠나게 만들었습니다. 
    그들은 연약한 자들을 이용하여 부당한 이득을 취하고, 하나님의 백성들을 타락하게 만들었습니다. 
    하나님은 이러한 행위를 결코 용납하지 않으시며, 그들의 악한 행위를 끝내실 것입니다. 
    결국 이들은 하나님께서 보내시는 심판을 피할 수 없으며, 그들의 거짓된 능력도 무력화될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의 백성들이 더 이상 그들의 거짓된 예언에 속지 않도록 하실 것이며, 참된 하나님만을 의지하게 하실 것입니다.

    결론

    에스겔 13장은 거짓 선지자들이 얼마나 위험한 존재인지를 보여주며, 그들이 하나님과 백성들 사이에서 얼마나 큰 죄악을 범했는지를 강조합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뜻을 따르지 않으면서도 거짓된 메시지를 전하고, 사람들에게 평안을 약속하며 하나님을 떠나게 만들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은 반드시 이루어지며, 거짓된 희망은 무너질 것입니다. 
    거짓된 담처럼 보이는 것이 아무리 그럴듯해 보여도, 결국 하나님의 심판 앞에서는 힘을 잃고 사라질 것입니다. 
    하나님은 또한 마술과 미신을 사용하여 백성을 미혹하는 자들을 심판하시며, 그의 백성들이 참된 하나님만을 따르도록 하십니다. 
    우리는 이 말씀을 통해 거짓된 가르침과 거짓된 희망을 따르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을 온전히 신뢰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깨달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백성들을 보호하시고, 참된 진리를 따르는 자들에게 은혜를 베푸시는 분이십니다.  

    왜 하나님은 자기 생각대로 예언하는 자들을 미워하시는가?

    에스겔 12장에서 영적으로 무감각하고 완고한 백성들에게 임박한 심판을 선지자의 상징 행위를 통해 절박하게 경고
    에스겔 13장은 그 백성들의 영적 혼란을 더욱 부추기고 그릇된 평안을 속삭였던 '거짓 선지자들'에게로 하나님의 불타는 진노의 시선을 돌립니다. 
    이 장은 자기 마음에서 나오는 대로 예언하며 본 것이 없이 "여호와께서 말씀하셨다"고 거짓말하는 남자 선지자들과, 백성들의 영혼을 사냥하며 그릇된 위로를 전하는 여자 선지자들의 죄악을 신랄하게 고발합니다. 
    그들이 쌓아 올린 거짓 평화의 담은 결국 하나님의 폭풍 같은 심판 앞에서 허무하게 무너져 내릴 것이며, 그들의 허망한 종말을 통해 참된 예언과 거짓 예언의 차이가 극명하게 드러날 것을 선포합니다. 
    에스겔 13장은 오늘날에도 다양한 형태로 나타나는 거짓된 가르침과 위로에 대한 강력한 경고이며, 진리를 분별하는 지혜의 중요성을 일깨웁니다. 

    시대적 배경과 맥락 소개

    에스겔 13장의 배경은 예루살렘 멸망 직전의 극도의 혼란과 위기 상황입니다. 
    바벨론의 침략 위협이 현실로 다가오고 있었지만, 많은 백성은 여전히 임박한 재앙을 믿으려 하지 않았습니다. 
    이러한 분위기를 더욱 악화시킨 것이 바로 '거짓 선지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참된 메시지인 심판과 회개의 촉구 대신, 백성들이 듣고 싶어 하는 평안과 번영의 메시지를 선포하며 헛된 희망을 심어주었습니다. 
    그들은 개인적인 이익이나 인기를 얻기 위해, 혹은 자기 생각이나 환상을 하나님의 계시인 것처럼 포장하여 백성들을 미혹했습니다. 
    에스겔과 예레미야 같은 참된 선지자들이 생명의 위협을 무릅쓰고 하나님의 준엄한 경고를 전했던 것과는 대조적으로, 이들 거짓 선지자들은 위기의 본질을 가리고 백성들의 영적 무감각을 더욱 심화시키는 역할을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거짓 선지자들의 행위를 극도로 혐오하시며, 그들이야말로 이스라엘 공동체를 무너뜨리는 주범 중 하나로 간주하셨습니다. 
    이 이야기가 오늘날 우리에게 중요한 이유는, 시대와 상황은 다르지만 여전히 우리 주변에는 진리를 왜곡하고 사람들을 잘못된 길로 인도하는 거짓된 가르침과 지도자들이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에스겔 13장은 우리에게 영적인 분별력을 가지고 참과 거짓을 구별하며, 달콤한 거짓 위로가 아닌 때로는 아프더라도 진실된 하나님의 말씀에 귀 기울여야 할 필요성을 강력하게 일깨워줍니다.

    핵심 사건 또는 본문 요약

    에스겔 13장은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첫째, 이스라엘의 남자 거짓 선지자들에 대한 심판 선포 (1-16절)

    둘째, 여자 거짓 선지자들에 대한 심판 선포 (17-23절) 입니다.

    첫째, 이스라엘의 남자 거짓 선지자들에 대한 심판 선포 (1-16절):

    • 거짓 선지자들의 특징 : 
      하나님께서는 에스겔에게 "자기 마음에서 나오는 대로 예언하는 어리석은 선지자들"(겔 13:2-3, 우리말성경)에게 경고하라고 명령하십니다. 그들은 본 것이 없으면서도 "여호와께서 말씀하셨다"고 거짓말하며, 마치 "황무지에 있는 여우들"(겔 13:4)처럼 이스라엘의 무너진 성벽 틈에 올라가 수리하기는커녕 오히려 해를 끼치는 존재들로 묘사됩니다. 그들은 헛된 환상을 보고 거짓된 점괘를 말하며, 백성들에게 거짓된 평화를 약속합니다(겔 13:6-7, 10).

    • 회칠한 담의 비유 : 
      하나님께서는 이 거짓 선지자들의 행위를 '회칠한 담'에 비유하십니다. 백성들이 엉성하게 담을 쌓으면, 거짓 선지자들이 와서 그 위에 회칠을 하여 겉보기에는 멀쩡하게 보이도록 만듭니다. 그러나 폭우와 큰 우박 덩이, 그리고 폭풍이 몰아치면 그 담은 허무하게 무너져 내릴 것이며, 회칠한 것도 아무 소용이 없게 될 것입니다(겔 13:10-15). 이는 거짓된 평화의 메시지가 결국 하나님의 심판 앞에서 아무런 힘도 발휘하지 못하고 그 허구성이 드러날 것임을 상징합니다.

    • 심판의 결과 : 하나님께서는 이 거짓 선지자들을 당신의 백성의 공회에 참여하지 못하게 하고, 이스라엘 족속의 명단에도 기록되지 못하게 하며, 이스라엘 땅에도 들어가지 못하게 하실 것이라고 선언하십니다. 이를 통해 그들은 "내가 주 여호와인 줄 알리라"(겔 13:9, 14)고 깨닫게 될 것입니다.

    둘째, 여자 거짓 선지자들에 대한 심판 선포 (17-23절):

    • 여자 거짓 선지자들의 특징 : 
      하나님께서는 에스겔에게 "자기 마음에서 나오는 대로 예언하는 네 백성의 딸들"(겔 13:17, 우리말성경)에게도 경고하라고 명령하십니다. 그들은 사람들의 손목에 부적을 매어 주고 머리에 너울을 씌워 주며 점을 치고, 사소한 이익(보리 몇 움큼과 빵 몇 조각)을 위해 죽지 않아야 할 사람을 죽이고 살지 않아야 할 사람을 살린다고 거짓말하며 영혼들을 사냥한다고 고발당합니다(겔 13:18-19).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을 미혹하여 거짓된 위안을 주고 하나님의 이름을 더럽혔습니다.

    • 심판의 결과 :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부적과 너울을 찢어버리고, 그들에게 사냥당한 영혼들을 구원해 내실 것이라고 선언하십니다. 더 이상 그들이 거짓된 점괘나 예언을 하지 못하게 하실 것이며, 이를 통해 그들은 "내가 여호와인 줄 알리라"(겔 13:21, 23)고 깨닫게 될 것입니다.

    두 부류의 거짓 선지자들 모두 하나님의 백성을 미혹하고 진리를 왜곡한 죄로 인해 엄중한 심판을 받게 될 것임이 명확히 선포됩니다. 참으로 두려운 경고입니다!

    에스겔 13장의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이 요약될 수 있습니다:

    구분 (에스겔 13장) 핵심 내용 및 상징적 의미
    남자 거짓 선지자들에 대한 심판 (1-16절) 자기 마음대로 예언, 본 것 없이 "여호와께서 말씀하셨다" 거짓말. 황무지의 여우, 회칠한 담 비유. 거짓 평화 선포. 심판: 공회 참여 불가, 명단 제외, 이스라엘 땅 진입 불가. 목적: "내가 주 여호와인 줄 알리라."
    여자 거짓 선지자들에 대한 심판 (17-23절) 자기 마음대로 예언. 부적과 너울로 점치며 영혼 사냥. 사소한 이익 위해 거짓 예언. 심판: 부적과 너울 찢김, 사냥당한 영혼 구원, 더 이상 예언 못하게 함. 목적: "내가 여호와인 줄 알리라."

    철학적 / 존재론적 상징 해석

    에스겔 13장의 거짓 선지자들에 대한 고발은 단순한 종교적 비판을 넘어, 진리와 거짓, 언어의 힘과 책임, 그리고 인간의 자기기만이라는 보편적인 철학적, 존재론적 주제를 탐구합니다.

    첫째, "자기 마음에서 나오는 대로 예언하는" 행위는 진리의 객관성을 부정하고 주관적인 생각이나 감정을 절대화하는 위험성을 경고합니다. 
    이들 거짓 선지자들은 하나님의 계시를 받은 것이 아니라, 자신들의 욕망, 두려움, 혹은 백성들이 듣고 싶어 하는 말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둔갑시켰습니다. 
    이는 마치 현대 포스트모더니즘 사상에서 객관적 진리의 존재를 부정하고 개인의 해석이나 경험을 중시하는 경향과 유사점을 찾을 수 있지만, 에스겔서는 이러한 주관주의가 결국 파멸적인 결과를 초래할 수 있음을 보여줍니다. 
    진리는 인간의 생각이나 감정에 의해 좌우되는 것이 아니라, 그 자체로 객관적인 실재로서 존재하며, 그것을 왜곡하거나 무시할 때 공동체는 방향을 잃고 혼란에 빠지게 됩니다. 
    "본 것이 없이" 예언하는 것은 결국 공허한 메아리일 뿐이며, 그들의 말에는 생명력이 없습니다.

    둘째, '회칠한 담(whitewashed wall)'의 비유겉모습만 번지르르하게 꾸미고 본질적인 문제는 덮어버리는 위선과 자기기만의 실체를 강력하게 고발합니다. 
    담이 이미 부실하게 쌓여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위에 회칠을 하여 마치 견고한 것처럼 보이게 하는 것은, 문제의 근원을 해결하기보다 일시적인 위안이나 피상적인 해결책에 만족하려는 인간의 어리석음을 상징합니다. 
    이는 개인의 삶뿐만 아니라 사회 전체에도 적용될 수 있습니다. 
    구조적인 모순이나 부패를 덮어두고 겉으로만 평화롭고 안정된 것처럼 보이게 하려는 시도는, 결국 더 큰 재앙 앞에서 그 허구성이 만천하에 드러나게 됩니다. 
    하나님의 심판이라는 '폭풍'이 몰아칠 때, 그 어떤 화려한 회칠도 견뎌내지 못하고 무너져 내릴 수밖에 없습니다. 
    진정한 안전은 문제를 직시하고 근본적인 해결을 추구하는 데서 오는 것이지, 겉치레나 임시방편에 있지 않다는 통렬한 지적입니다. 
    아, 얼마나 많은 '회칠한 담'이 우리 주변에 있습니까!

    셋째, 여자 선지자들이 "죽지 아니할 영혼을 죽이고 살지 아니할 영혼을 살리려 하는" 행위는 언어가 가진 엄청난 힘과 동시에 그릇된 언어가 초래할 수 있는 생사(生死)를 가르는 책임을 보여줍니다. 
    그들은 사소한 이익을 위해 거짓된 예언으로 사람들을 속이고, 의로운 자에게 절망을 안겨주며 악한 자에게 헛된 희망을 심어주었습니다. 
    이는 말이 단순한 의사소통의 도구를 넘어, 한 사람의 운명과 영혼에까지 영향을 미칠 수 있는 강력한 힘을 지니고 있음을 의미합니다. 특히 영적인 권위를 가진 자의 말은 그 영향력이 더욱 클 수밖에 없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한다고 주장하는 자들은 그 말의 무게와 책임을 깊이 인식해야 하며, 극도의 신중함과 정직함으로 진리만을 선포해야 합니다. 
    거짓된 위로나 정죄는 영혼을 '사냥'하는 것과 다름없는 악행이라는 하나님의 평가는 매우 엄중합니다. 
    우리의 말은 사람을 살리기도 하고 죽이기도 한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현대적 적용 또는 실존적 질문

    에스겔 13장의 거짓 선지자들에 대한 경고는 시대를 초월하여 오늘날 우리에게도 여전히 중요한 의미를 지니며, 진리를 분별하고 올바른 신앙의 길을 걷도록 도전합니다.

    첫째, 우리 시대의 '거짓 선지자'는 누구인가? 

    고대에는 종교적인 영역에서 주로 활동했지만, 오늘날 거짓된 메시지를 전파하는 이들은 더욱 다양하고 교묘한 형태로 나타납니다. 
    미디어를 통해 가짜 뉴스를 퍼뜨리는 사람들, 대중의 인기에 영합하여 무책임한 발언을 일삼는 정치인들, 물질적 성공만을 최고의 가치로 내세우는 자기계발 강사들, 혹은 개인의 욕망을 정당화하며 성경의 진리를 왜곡하는 일부 종교 지도자들까지도 현대판 '거짓 선지자'가 될 수 있습니다. 
    그들은 달콤한 말로 우리를 유혹하고, 어려운 문제에 대한 손쉬운 해결책을 제시하며, 진정한 회개와 변화를 요구하는 대신 값싼 위로를 판매합니다. 
    우리는 이러한 거짓된 목소리들을 어떻게 분별하고 저항해야 할까요? 
    이를 위해서는 무엇보다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깊은 이해와 성령의 조명을 통한 영적 분별력이 필요합니다.

    둘째, 나는 '회칠한 담'을 쌓고 있지는 않은가? 

    우리 자신의 삶 속에서, 혹은 우리가 속한 가정이나 공동체 안에서 문제를 덮어두고 겉으로만 평안한 척, 거룩한 척 위장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내면의 죄와 상처, 관계의 갈등, 구조적인 불의를 직시하고 해결하려 하기보다, 일시적인 위안이나 피상적인 활동으로 그것을 가리려고 한다면, 우리는 결국 '회칠한 담'을 쌓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은 그 모든 위장을 꿰뚫어 보시며, 언젠가는 그 허술함이 드러나게 될 것입니다. 
    진정한 평안과 건강함은 고통스럽더라도 진실을 마주하고, 회개를 통해 근본적인 치유와 회복을 경험하는 데서 비롯됩니다. 
    지금 내가 쌓고 있는 담은 과연 폭풍우를 견딜 수 있을 만큼 견고한 기초 위에 세워지고 있습니까?

    셋째, 나는 어떤 말로 사람들에게 영향을 주고 있는가? 

    우리는 모두 일상생활에서 말을 통해 다른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칩니다. 
    우리의 말이 다른 사람에게 헛된 희망을 주거나 절망에 빠뜨리지는 않습니까? 
    진실을 왜곡하거나 과장하여 개인적인 이익을 추구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특히 자녀를 양육하거나 다른 사람을 가르치고 인도하는 위치에 있다면, 말의 책임은 더욱 커집니다. 
    에스겔 13장은 우리에게 진실하고 사랑이 담긴 말, 사람을 살리고 세우는 말을 하도록 도전합니다.

    "죽고 사는 것이 혀의 힘에 달렸나니 혀를 쓰기 좋아하는 자는 혀의 열매를 먹으리라." (잠언 18:21)

    우리의 혀가 생명의 열매를 맺도록 신중하게 사용해야 할 것입니다.

    에스겔 13장은 우리에게 다음과 같은 근본적인 질문을 던집니다:

    • 나는 진리를 분별할 수 있는 영적인 감각을 가지고 있는가? 아니면 달콤한 거짓에 쉽게 미혹되는가?
    • 나의 신앙과 삶은 진실된가, 아니면 겉모습만 번지르르한 '회칠한 담'과 같은가?
    • 나는 내 말의 영향력과 책임을 얼마나 깊이 인식하고 있는가? 나의 말은 사람들을 살리는가, 아니면 해치는가?
    •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나는 "본 것이 없이 자기 마음대로 예언하는" 자인가, 아니면 진실되게 그분의 말씀을 따르는 자인가?

    이 장의 경고는 우리로 하여금 끊임없이 자신을 돌아보고, 참된 진리 위에 굳건히 서도록 이끌어 줍니다. 그 부르심에 응답하는 것이 우리의 지혜입니다.

    결론 요약

    에스겔 13장은 예루살렘 멸망 직전, 백성들에게 거짓된 평안을 속삭이며 그들의 영적 혼란을 가중시켰던 남자와 여자 거짓 선지자들에 대한 하나님의 준엄한 심판을 선포하는 장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자기 마음에서 나오는 대로 예언하며, 본 것이 없이 "여호와께서 말씀하셨다"고 거짓말하고, 헛된 환상과 점괘로 백성을 미혹했다고 신랄하게 비판하십니다. 
    특히 남자 거짓 선지자들의 행위는 '회칠한 담'에 비유되어, 겉보기에는 그럴듯하지만 결국 하나님의 심판이라는 폭풍 앞에서 허무하게 무너져 내릴 것임이 예고됩니다. 
    여자 거짓 선지자들 또한 사소한 이익을 위해 영혼들을 사냥하고 거짓된 위로를 전한 죄로 인해 심판을 면치 못할 것입니다. 
    이 모든 심판을 통해 하나님께서는 자신이 참된 여호와이심을 드러내실 것이라고 강조하십니다. 
    에스겔 13장은 오늘날 우리에게도 다양한 형태로 나타나는 거짓된 가르침과 위로를 경계하고, 오직 진실된 하나님의 말씀만을 분별하여 따를 것을 강력하게 촉구합니다. 
    결국, 진리를 왜곡하고 백성을 미혹하는 모든 시도는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 앞에서 그 허구성이 드러나고야 말 것이라는 엄중한 메시지를 전달하고 있습니다.

    9월 5일(금) 에스겔 10-12장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일치한 마음(11:19)

    내가 그들에게 일치한 마음을 주고 그 속에 새 신을 주며 그 몸에서 굳은 마음을 제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주어서.
    I will give them an undivided heart and put a new spirit in them; I will remove from them their heart of stone and give them a heart of flesh.

    10장 : 하나님의 영광이 성전을 떠나다
    그룹들이 하나님의 영광을 운반하며, 성전에서 떠나가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이는 이스라엘의 심판과 영적 황폐함을 의미합니다.

    11장 : 회개와 새 영의 약속
    하나님께서 백성을 흩으시지만, 다시 회복시키고 새 영을 부어 주실 것을 약속하십니다.

    12장 : 포로 생활에 대한 예언
    에스겔이 포로처럼 짐을 싸고 떠나는 행동을 통해 이스라엘이 바벨론으로 끌려갈 것을 상징적으로 예언합니다.




    일치한 마음(an undivided heart )

    새한글 / 19-20
    19. 내가 그들에게 한가지 마음을 주고 새 영을 그들 가운데 주겠다. 돌같이 굳은 심장을 그들의 몸에서 없애 버리고 살같이 부드러운 심장을 주겠다. 
    20. 그래서 그들이 나의 규정들을 따라 살아가게 하고 나의 법령들을 지키게 하겠다. 그것들을 따라 행동하게 하겠다. 그러면 그들은 나에게 백성이 되고 나야말로 그들에게 하나님이 될 것이다.


    같은 마음

    빌립보서 2:2 - 한 마음(마음을 같이 하여)
    마음을 같이 하여 같은 사랑을 가지고 뜻을 합하며 한 마음을 품어

    빌립보서 4:2 - 같은 마음(주 안에서)
    내가 유오디아를 권하고 순두게를 권하노니 주 안에서 같은 마음을 품으라

    고린도전서 1:10 - 같은 마음(분쟁이 없이)
    형제들아 내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다 같은 말을 하고 너희 가운데 분쟁이 없이 같은 마음과 같은 뜻으로 온전히 합하라.








    내가 그들에게 일치한 마음을 주고 그 속에 새 신을 주며 그 몸에서 굳은 마음을 제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주어서.

    New American Standard Bible
    "And I will give them one heart, and put a new spirit within them And I will take the heart of stone out of their flesh and give them a heart of flesh,

    새(2319) 하다쉬 
    חָדָשׁ 스트롱번호2319

    1. 새로운.   2. 삼상 6:7.  3. 신 20:5.  
    발음    [ châdâsh ]  
    어원 / 2318에서 유래  
    구약 성경  /  53회 사용


    אֶבֶן 스트롱번호  68

    1. 돌.  2. 하나의 돌
    발음 [ ’eben ]  
    구약 성경 / 270회 사용



    신(7307) 루아흐

             
     חָדָשׁ   רוּחַ

    רוּחַ 스트롱번호 7307

    1. 영.  2. 입 기운.  3. 호흡  
    발음    [ rûwach ]  
    어원 / 7306에서 유래  
    구약 성경 / 378회 사용



    일치한 마음(레브 에하드)(3820)(259) 

    굳은 마음(레브 에벤)(
    ’eben)(68) אֶבֶן

    1. 돌.  2. 하나의 돌
    발음 [ ’eben ]  
    구약 성경 / 270회 사용


    부드러운 마음(레브 바솨르)()(1320)

    일치한 마음(
    lêb ’echâd)   ב אֶחָד לֵב
    לֵב אֶחָד

    3820. 레브(
    lêb) / 마음  לֵב
    발음 [ lêb ]  
    구약 성경 / 599회 사용

    259. 일치한(에하드. ’echâd)     אֶחָד
                        
    1. 똑같은.  2. 첫째의.  3. 어떤 사람.
    발음 [ ’echâd ]  
    구약 성경  /  699회 사용

    내가 그들에게...부드러운 마음을 주어서 
    -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남은 자들에게 새로운 형태의 은혜를 베푸신다. 
    이 은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한 후 하나님께서 율법 언약을 체결하시고 율법을 주시사 지키라고 명하신 것과는 다르다(출 19:5, 6; 24:3). 
    오히려 이 은혜의 형태는 신약에서 하나님께서 새 언약을 체결하시고 새 마음을 주시고 성령을 부어 주시사 성령의 능력으로 말씀을 따라 살도록 하신 것과 상통한다(히 8:10-13). 
    하나님께서 이렇게 하심은 시내 산의 율법 언약으로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스스로 그 율법을 지킬 힘과 능력이 없어 실족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하나님의 은혜의 계시는 36:24-31과 렘 31:31-34 등에도 나타난다. 
    특히 본서 36;26에서는 본 구절의 '일치된 마음' 대신에 '새 마음'으로 되어 있다.




    에스겔 11:19-20 해설

    19. 이 말씀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새로운 마음과 영을 주시겠다는 약속입니다. 
    하나님은 그들의 냉담하고 완고한 돌 같은 마음을 제거하고, 부드럽고 순종하는 살처럼 부드러운 마음을 주겠다고 하십니다. 
    이는 그들이 하나님의 계명에 순종하며 살아가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이 구절은 하나님의 변함없는 사랑과 은혜를 나타내며, 회복과 변화의 상징으로 신앙 생활에서의 내부적 변화와 새로움을 강조합니다.

    20. 이 구절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새 마음과 새 영을 주어 그들이 하나님의 율례와 규례를 따르고 지키게 하실 것을 약속하는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이는 이스라엘이 영적 갱신과 회복을 경험하게 되고, 다시 하나님의 백성이 되며 하나님도 그들의 하나님이 되겠다는 언약의 확증입니다. 
    이러한 관계 회복은 구약에서 예언된 메시아 시대와 신약의 성령 강림을 통해 이루어지는 새로운 언약의 성취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주전 593년 6월 5일에 에스겔은 우상 숭배로 더럽혀진 성전에 대한 환상을 에스겔 8장에서부터 11장까지 기록하고 있습니다. 
    당시 하나님께서는 에스겔로 하여금 성전 동문의 거짓말로 안전을 유포하는 25인을 대항하는 예언을 선포하도록 명하십니다. 
    25라는 숫자는 성전 현관과 제단 사이에서 태양신 숭배 의식을 거행하고 있던 숫자와 같았습니다. 
    태양신 숭배의식을 거행하던 사람들은 제사장들이었고 25인은 고관들로서 정치지도자들이었습니다. 
    정치와 종교의 모든 분야가 철저하게 타락하여 하나님을 대항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잘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3절에서 정치지도자들은 집을 건축할 때가 가깝지 아니하니 이 성읍은 가마가 되고 우리는 고기가 된다고 말함으로 예루살렘의 안전을 주장하였습니다. 
    ‘집을 건축할 때가 가깝지 아니한즉’ 이란 말은 1, 2차에 걸쳐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가 그곳에서 신속한 회복을 기대하며 집도 짓지 아니하고 불안정한 삶을 사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해 이스라엘의 회복은 오랜 기간이 경과한 후에 이루어질 일이므로 집을 짓고 안정적인 삶을 살 것을 가르친 예레미야의 권고를 정면으로 반박한 것으로, 예루살렘이 멸망할 때가 이르지 않을 것이라는 말입니다. 
    그리고 이 성읍은 가마가 되고 우리는 고기가 된다는 말(3절)은 단단한 가마가 고기를 보호하듯이 견고한 예루살렘이 자신들을 안전하게 보호하여 줄 것이라는 말입니다. 
    이 모든 것은 다 거짓 예언이었습니다. 
    거짓 예언을 하였던 자들을 향하여 하나님께서는 5절을 통해 마음에서 일어나는 것을 내가 다 아노라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마음의 생각을 다 아십니다. 
    우리의 심령 깊숙한 곳에 무엇을 담고 있는지 다 꿰뚤어 보신다는 것입니다. 
    겉으로 드러난 결과를 가지고 그 가치를 판단하고 평가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의 마음 중심을 보고 판단하십니다. 
    우리의 마음에 겉으로 드러나지 않은 생각이라고 해서 함부로 아무렇게나 해서는 안됩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드러나지 않았더라도 그 마음을 품은 것 자체로 합당한 보응과 신원을 하시는 분이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마음 속에 우리가 품은 생각을 다 아신다는 것이 부담이거나 두려움이 되십니까? 
    아니면 여러분에게 위안과 감사가 되십니까? 
    우리 안에 무엇을 품고 있느냐에 따라 다를 것입니다. 
    아무리 오해받고 미움을 당하더라도 악한 마음이 아닌 선한 마음을 품고 있다면 하나님은 알고 계신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위안이 됩니다. 
    그러나 마음속으로 악을 품고 있는 겉으로 선량해 보이도록 포장하는 사람에게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마음을 꿰뚤어 보신다는 사실은 부담스럽고 깨름직한 일일 것입니다.

    시편 말씀 66:18-19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내가 나의 마음에 죄악을 품었더라면 주께서 듣지 아니하시리라 그러나 하나님이 실로 들으셨음이여 내 기도 소리에 귀를 기울이셨도다 

    하나님께서 우리 마음을 다 아시고 우리를 신원하시고 그 마음에 상응하는 보응을 주시는 분이신 줄을 믿으시는 사랑하는 모든 나눔과섬김의 성도님들이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6절을 보면 하나님께서는 25인의 고관들을 향하여 ‘너희가 이 성읍에서 많이 죽여 거리를 시체로 채웠도다’ 라고 질타하시고 있습니다. 이 말씀은 예루살렘 고관들의 도덕적인 악행을 고발하는 것처럼 보여집니다. 
    고관들이 자신들의 이기적인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강포를 행하며 많은 사람들을 죽인  사실을 고발한 것처럼 보이는 것입니다. 
    유다 말기의 타락상을 염두에 둘 때에 이는 충분히 가능한 해석입니다. 
    실제로 유다의 타락한 고관들은 억울하게 사형을 선고하기도 했고 재판 절차를 수행하지도 않고 마구잡이로 백성들을 학살하는 폭정이 자행되었습니다. 
    결국 하나님의 뜻을 거스른 결과로 인하여 많은 백성들이 죽음에 이르는 결과를 초래한 것입니다. 
    에스겔 당시 하나님의 예루살렘을 향한 뜻은 바벨론에 항거하는 것이 아니라 바벨론의 지배에 복종하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은 바벨론의 지배라는 징계를 통하여 타락한 유다를 연단하고 정결하게 만드시기를 원하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바벨론에 항거하지 말고 복종할 것을 예레미야 선지자를 통하여 거듭하여 촉구했습니다. 
    그러나 실질적으로 권력을 장악하고 있던 유대의 고관들은 하나님의 뜻을 따르기 보다는 대세의 뜻, 사람들의 염원과 그들의 목소리를 듣고 움직였던 것입니다. 
    그들의 애국심과 항거의 마음은 영웅적 메시지를 전달하고 있었는지는 몰라도 그것은 하나님의 뜻과는 전혀 상관없는 마음이었습니다. 그 결과 예루살렘은 하나님의 뜻대로 공격을 받아 수많은 사람들이 살육 당하였습니다.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대세의 뜻이 다 하나님의 뜻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아무리 많은 사람들이 외치고 있다고 하더라도 하나님의 뜻은 그 반대의 경우일 수도 있다라는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분별력이 정말 많이 필요합니다. 
    대한민국의 지도자가 없습니다. 
    그로인해 누군가는 새로운 희망을 꿈꾸고 또 누군가는 절망과 탄식을 표합니다. 
    이러한 시대에 우리는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의 기준이 되어 시대와 세대와 역사속에서 하나님의 뜻을 분별할 수 있는 지혜를 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우리는 조국과 조국의 교회를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이 땅을 향한 뜻이 무엇인지 하나님의 손가락 끝이 어디를 향하고 있는지를 놓고 기도해야 합니다. 

    여러분 다수의 뜻이 하나님의 뜻은 아닙니다. 
    그렇다고 소수의 뜻만이 하나님의 뜻이라는 말이 아닙니다. 
    시대를 역행하고 대세를 역행하더라도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고 알고 어떠한 댓가를 치루더라도 진리의 방향을 가리키고 외칠 수 있는 예레미야와 에스겔과 같은 마음이 우리 가운데 있어야 합니다. 
    또한 새로 뽑힐 지도자를 위해서 기도해야 합니다. 
    우리가 지도자를 놓고 기도할 때에는 반드시 그 지도자는 사람의 뜻으로 뽑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으로 뽑힐 것이라는 신뢰와 확신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로마서 13장 1절 말씀과 같이 권세는 하나님의 뜻으로 나지 않음이 없다고 말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위로부터의 권세는 바로와 같이 악한 왕이든, 다윗과 같이 선한 왕이든지 간에 하나님의 뜻으로 하나님의 백성들을 위해 세워졌기 때문입니다. 
    시대 가운데 필요한 지도자가 대한민국과 국민들을 위해 반드시 세워질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도 마찬가지 입니다. 
    우리가 서있는 삶의 자리가 바로 하나님께서 보내신 곳입니다. 
    우리를 싱가폴에 부르신 것은 다 하나님의 뜻이 있기 때문임을 신뢰해야 합니다. 
    24절을 보시면 주의 영이 나를 들어 하나님의 영의 환상 중에 데리고 갈대아에 있는 사로잡힌 자 중에 이르시더니 내가 본 환상이 나를 떠나 올라간지라’ 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에 보면 에스겔은 다시 그가 본래 있던 삶의 자리로 돌아가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영이 바벨론 텔아빕의 에스겔의 집에서 에스겔에게 임하여 환상중에 그를 예루살렘으로 옮겨 예루살렘 성전에서 행하여지던 유다 백성들의 우상 숭배와 그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영광이 예루살렘 성전과 성에서 떠나가시는 것을 보게 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을 보게 하신 후에 다시 에스겔을 그 본래의 자리로 돌려 보내신 것입니다. 

    에스겔이 머물고 있었던 갈대아는 어떤 곳이었습니까? 
    그곳은 바로 포로의 자리입니다. 
    고통의 자리이고, 자유가 없는 곳입니다. 
    사람들은 누구나 그러한 자리를 싫어합니다. 
    싱가폴이 누군가에게는 행복과 기쁨이 가득한 곳일 수 있지만 또 누군가에는 속박과 고통과 답답함이 있는 곳일 수 있습니다. 
    여러분이 있는 곳이 혹 고통이 가득하고 답답함이 가득하다고 하더라도 그곳이 하나님이 부르셨기에 서 있는 자리라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에스겔은 자유가 없는 포로의 신분에서 하나님의 소명을 받았고 사명을 온전히 이루어 갔습니다. 
    갈대아라는 곳에서 백성들이 억압당하고 암울하고 비참한 삶을 살았지만 그곳의 그의 사역의 현장이었습니다. 
    여러분이 서있는 곳은 여러분을 통하여 하나님이 보게하시고 듣게 하시고 또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을 통하여 누군가에게 하나님의 뜻을 전하기 위한 사명지임을 기억하는 하루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피하고 싶고 부담스럽고 꺼려지지만 누군가는 해야만 하는 그 일을 우리에게 맡기신 것입니다. 
    우리의 마음과 주변의 상황에 따라 우리의 사명지를 떠나고자 하는 마음이 불일듯 일어나는 그 때에 우리는 크게 한숨을 내쉬고 이곳이 내 사명지다. 라는 생각을 가져야 합니다.

    말씀의 결론

    1.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마음의 생각을 다 아십니다.
    2. 다수의 뜻이 하나님의 뜻은 아닙니다.
    3. 우리가 서있는 삶의 자리가 바로 하나님께서 보내신 곳입니다.

    함께 기도

    1. 우리의 마음을 꿰뚫고 살피시는 하나님을 의식하며 코람데오의 삶을 살게 하소서
    2.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고 그 뜻대로 살아가는 하루가 되게 하소서
    3. 우리가 속해 있는 곳이 우리의 사명지임을 기억하고 오늘 하루도 나에게 맡겨진 사람들과 공동체 사역과 책임을 다하는 하루가 되게 하소서


    하나님이 주시는 마음(에스겔 11:19-20)

    사람은 한 사람이지만, 사람이 살아가는데 있어서, 그 마음은 가지각색입니다. 금방 금방 달라집니다.

    마음이 깨끗한 사람이 있는가 하면, 더러운 사람이 있고, 마음이 온유한 사람이 있는가 하면, 강퍅한 사람이 있습니다. 마음이 부드럽고 따뜻한 사람이 있는가 하면, 그 마음이 차갑고 냉정한 사람이 있습니다.

    여러분은 어느 쪽에 속해 있습니까?

    전쟁 중에 한 여인이, 군인인 남편을 따라, 캘리포니아 사막 끝까지 왔습니다. 남편은 그녀가 오는 것을 말렸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남편과 어려움을 함께 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들은 인디언 마을 근처의 쓰러져 가는 오두막집을 발견하고, 그곳에서 살기로 했습니다. 그곳 생활은 생각한 것보다, 무척 힘이 들었습니다. 환경이 사막인지라, 온도가 40도를 오르는 날씨가 계속되었습니다. 바람은 쉴새 없이 불어, 모래가 쌓이곤 하였습니다. 또한 인디언들과 영어가 통하지 않았고, 근처에 이웃도 없어, 그녀에게 하루하루는 지겨움의 연속이었습니다. 한번은 남편이 작전 명령을 받고, 2주 동안, 사막 깊숙이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그녀의 외로움과 두려움은 극에 달했습니다. 결국 견디다 못해, 어머니가 있는 집으로 돌아가겠다는 편지를 남편에게 보냈습니다. 얼마 후 그녀는 짤막한 두 줄의 답장을 받았습니다.

    “두 사람이 감옥 창살을 통해 바깥을 보고 있었다. 한 사람은 땅을 보고, 다른 사람은 별을 보았단다”

    그녀는 편지를 읽고, 또 읽었습니다. 마침내 그녀는 자신이 부끄럽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마음을 바꾸기로 했습니다. 땅을 보지 않고, 하늘의 별을 보기로 했습니다. 인디언들을 사귀기 시작했고, 그들에게서 옷감 짜는 법과 도자기 굽는 법을 배웠습니다. 그녀는 그들의 문화와 역사에 친숙해지기 시작했으며, 그들과 정이 들게 되었습니다. 그녀에게 사막은 더 이상 황량하고, 쓸쓸한 곳이, 아니었습니다. 날이 갈수록, 아름답고, 기묘한 곳이 되었습니다. 그녀는 선인장과 유카와 조수아 나무를 연구했습니다. 그녀는 그곳의 태초 생태계에 관한 연구로, 이 분야의 전문가가 되어, 책을 출간하기도 했습니다.

    여러분! 무엇이 변했습니까? 사막은 변하지 않았습니다. 인디언들도 변하지 않았습니다. 오로지 이 여인의 마음만이 바뀐 것입니다. 여인의 마음이 바뀌자 세상이 바뀐 것입니다. 마음을 바꾸니, 운명이 바뀐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어떤 마음을 먹느냐에 따라, 우리 인생은 크게 바뀌기 시작할 것입니다. 우리의 남은 생애가 달라지기 시작할 것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사람들이, 어떤 마음을 품고 살아가기를 원하실까요?

    악한 마음을 품으면, 악한 사람이 됩니다. 교만한 마음을 가지면, 교만한 사람이 됩니다. 사랑하는 마음을 가지면, 사랑이 많은 사람이 됩니다.

    현대인들은 예전에 비해, 문명의 이기가 발달하여, 편리한 생활을 하며 살아갑니다. 그러나 문제는, 과거보다 더 많이 발생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마음이 병들었기 때문입니다.

    잠언 18:14절을 보면, “사람의 심령은 그의 병을 능히 이기려니와 심령이 상하면 그것을 누가 일으키겠느냐”라고 말씀합니다.

    마음 먹기에 따라, 병이 생기기도 하고, 병이 낫기도 한다는 뜻입니다. 죽을 병에 걸린 사람이라도, 마음에 따라 살 수도 있고, 죽을 수도 있습니다. 그만큼 마음이 중요한 것입니다.

    오늘 말씀은, 바벨론에 잡혀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입니다. 바벨론의 침략을 당하기 전, 예레미야 선지자를 비롯한 많은 선지자들이, 하나님 앞에 범죄하며, 우상 숭배에 빠져있던 백성들에게, 빨리 회개하라고 외쳤지만, 그들은 전혀 선지자들의 말을 듣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평안하다. 평안하다”고 외치는 거짓 선지자들의 말만 믿다가, 결국 하나님의 거룩한 성전이 있던 예루살렘은 폐허가 되었고, 많은 이스라엘 백성들은 바벨론의 포로가 되어 끌려갔습니다. 폐허가 된 정든 고향 산천을 뒤로 하고, 낯선 이국 땅으로 끌려온 이스라엘 백성들은 노예가 되어 하루하루를 고된 노역 가운데 힘들게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바로 이 때, 에스겔 선지자는 바벨론의 포로로 끌려와 노예가 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그발 강가에서, 통곡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의 계획을 예언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새로운 마음을 이스라엘에게 주실 것이며, 앞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이 주시는 마음으로 살아야 한다고 선포했습니다. 바벨론에 포로로 사로 잡혀 끌려와 절망과 좌절에 빠져 있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에스겔 선지자의 선포는 참으로 소중한 희망의 메시지였습니다.

    이 시대에 우리들이 가져야할 마음은 과연 어떤 마음입니까? 하나님이 우리에게 어떤 마음을 주실까요?

    첫째, 한 마음

    19절 말씀입니다. 

    “내가 그들에게 한 마음을 주고 그 속에 새 영을 주며 그 몸에서 돌 같은 마음을 제거하고 살처럼 부드러운 마음을 주어”

    위클리프 성경 번역회라는 선교단체가 있습니다. 
    이곳의 선교사들은 신앙이 투철할 뿐 아니라, 어학의 재능으로 봉사합니다. 
    남미나 아프리카의 소 부족들이 모여 사는 곳, 쓰는 말은 있어도, 글이 없는 곳에, 직접 언어를 만들어 줍니다. 
    그리고 그 언어로 성경을 번역합니다. 
    한 선교사가 마태복음을 번역하다 죽으면, 다른 선교사가 다시 그 곳에 가서 마가복음을 번역하고, 또 죽으면 다음 선교사가 누가복음을 번역합니다.

    한번은 그 곳에 들어간 선교사가 성경을 번역하다 “순종”이라는 단어의 번역에, 어려움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어떤 말을 순종이라는 단어로 번역할까, 고민하던 중, 마을에서 아버지가 아들에게 심부름을 시키는 장면을 우연히 보게 되었습니다. 
    아버지는 심부름을 꼭 해야 된다는 뜻으로, 한 가지 말을 계속 아들에게 강조합니다.

    “그 일을 꼭 해야 된다. 네 모든 마음으로”

    심부름을 가는 아들의 뒤에서, 아버지는 계속 말합니다. 

    “네 마음을 나누지 말라”

    그 모습을 보고, 선교사는 순종이라는 단어를 “마음을 나누지 않고, 모든 마음으로 따라가는 것이라고 번역하였습니다.

    마음을 나누지 않고, 모든 마음으로 주님을 따라가고 있습니까? 
    한 마음으로 주님을 따라가고 있습니까?
    나누지 않는 한 마음으로 주님을 따라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내가 그들에게 한 마음을 주고” 
    “한 마음”은 “나누어지지 않는 마음”입니다. 
    하나로 뭉쳐진 마음입니다. 여러 마음이 아니라, 하나로 똘똘 뭉쳐진 마음을 말합니다.

    마음이 하나가 되고, 일치가 되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마음이 하나 된다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닙니다. 
    한 마음이 되려면, 다른 이에게 맞추는 희생이 있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일을 하는 올바른 일군이 되려면, 한 마음이 필요합니다. 
    한 마음을 가질 때, 하나님께서 역사하십니다. 
    의견이 분분하고, 주장이 많으면, 일치되지 못합니다. 
    한 마음이 되지 못합니다. 
    한 마음, 일치하는 마음이 될 때, 기적이 일어납니다. 
    아무리 힘쓰고, 애써도, 분열이 있고, 미움과 시기와 다툼이 있는 곳에는, 하나님이 역사 하시지 않습니다.

    옛 속담에, 사공이 많으면, 배가 산으로 간다는 말이 있습니다. 
    각자의 의견이 분분하고, 주장이 많으면 많을수록, 하나가 되지 못합니다. 
    하나가 되고, 일치한 마음이 이루어질 때, 기적의 역사는 일어나는 것입니다. 
    회복의 역사, 부흥의 역사는 일어나는 것입니다.

    전도서 4:12절을 보면, “한 사람이면 패하겠거니와 두 사람이면 맞설 수 있나니 세 겹 줄은 쉽게 끊어지지 아니하느니라”고 말씀합니다.“세 겹 줄은 쉽게 끊어지지 않는다”
    너와 나의 마음이 하나가 될 때, 쉽게 끊어지지 않습니다.
    우리 모두의 마음이 하나가 될 때, 하나님의 큰 역사를 이루어갈 수 있습니다.

    사도행전 2:43-47절을 보면, 초대 교회 성도들은, 마음을 같이 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썼다고 했습니다.

    “사람마다 두려워하는데 사도들로 말미암아 기사와 표적이 많이 나타나니 믿는 사람이 다 함께 있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또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 주며 날마다 마음을 같이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 하나님을 찬미하며 또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으니 주께서 구원 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니라”

    마음을 같이 한다는 것은, 마음이 하나 되었다는 것입니다. 
    지금도 하나님이 원하시는 마음은, 하나된 마음입니다. 
    나누어지지 않는 일치된 마음, 하나된 마음입니다. 
    마음이 모아질 때, 주님께서 맡겨주신 사명을 잘 감당할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 모두는 주의 일을 열심히 감당하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를 원하는 줄 믿습니다. 
    하나님 앞에 충성하고, 마음껏 헌신하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하나가 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먼저 마음이 하나되어야 합니다.
    하나가 된 교회는, 사랑이 넘칩니다. 평안이 있습니다. 힘이 있습니다. 하나가 된 교회는, 능력이 있습니다.
    아무리 노력을 하고, 힘쓰고, 애를 쓴다고 해도, 분열이 있고, 미움과 시기와 다툼이 있는 곳에서는, 주님이 역사 하시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하나된 마음을 우리들에게 주시겠다고 말씀하셨으므로, 우리는 받기만 하면 됩니다. 하나님이 주시겠다는 것을 뿌리치면 안되겠지요. 당연히 받아야 합니다.
    이 자리에 계신 여러분 모두, 하나님이 주시는 한 마음, 하나된 마음, 일치한 마음을 소유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둘째, 새 영이 함께 하는 마음

    19절 말씀입니다. 함께 다시 읽겠습니다.

    “내가 그들에게 한 마음을 주고 그 속에 새 영을 주며 그 몸에서 돌 같은 마음을 제거하고 살처럼 부드러운 마음을 주어” 아멘.

    “내가 그 속에 새 영을 주며”

    “새 영”은 성령님을 가리킵니다. 
    하나님의 거룩한 영이신 성령님은 우리의 심령에 들어오기를 원하십니다.
    성령님이 내 안에 오셔서, 나를 주관하시고, 나를 인도하시고, 역사하시기를 원하십니다.

    사도행전 2장을 보면, 오순절 마가의 다락방에 120명의 성도들은, 주의 약속의 말씀을 믿고, 전혀 기도에만 힘쓰고 있었습니다. 
    그때 홀연히 하늘로부터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가 있어, 그들이 앉은 온 집에 가득하며, 마치 불의 혀처럼 갈라지는 것들이 그들에게 보여 각 사람 위에 하나씩 임하여 있더니, 
    그들이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았습니다.

    주의 약속은 그 말씀을 믿고 기도하며 기다리는 사람들에게 임하는 법입니다. 
    오순절 마가의 다락방에 임한 성령님은 오늘 우리에게도 역사하시길 원하십니다. 
    우리 심령에, 우리 가정에, 우리 교회에 임하시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마음 속에 새 영을 주시겠다고, 성령님을 주시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성령을 받기 전의 베드로는, 예수님을 모른다고 세 번이나 부인했던 연약한 사람이었지만, 성령을 받은 후의 베드로는, 주의 말씀을 전하되 담대히 전하였고, 그 말씀을 듣던 무리들은 삼천 명씩이나 회심하고, 주님을 영접하게 되는 놀라운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그러므로 성도가 능력있는 삶을 살기 위해서는, 반드시 성령을 받아야 합니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야, 우리의 삶에 능력이 있습니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야, 사명을 감당할 수 있는 것입니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야 모든 질병을 물리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날마다 성령의 충만함을 위하여, 하나님께 간구함으로, 성령충만함을 받아야 합니다. 
    성령충만은 약속된 것입니다. 
    성령충만은 꼭 필요한 것입니다. 
    성령 충만을 통해서, 진정한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고, 성령충만을 통해서 진정한 증인이 될 수 있습니다.

    누가복음 11:13절을 보면, “너희가 악할지라도 좋은 것을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께 구하기만 하면, 성령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주님께서 주시겠다고 말씀하셨기 때문에, 못 받을 이유가 없습니다. 우리가 받지 못하는 이유는, 구하지 않기 때문에 받지 못하는 것입니다.

    에베소서 5:18절을 보면,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으라”고 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 안에는 이미 성령님이 계십니다. 성령님이 계시므로, 우리는 예수를 나의 구주로 고백하였습니다. 이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성령님이 우리 안에 계시는 것으로 만족하는 것이 아니라, 언제나 성령충만함을 입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주시마 약속하신 것을 뿌리치면 안되겠지요. 당연히 받아야 합니다.

    성령충만함을 구함으로, 하나님이 주시마 약속하신 것을 받아 누릴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셋째, 부드러운 마음

    19절 말씀입니다. 함께 다시 읽겠습니다.

    “내가 그들에게 한 마음을 주고 그 속에 새 영을 주며 그 몸에서 돌 같은 마음을 제거하고 살처럼 부드러운 마음을 주어” 

    간디의 전기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인종차별이 심한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도시에서, 간디와 장로교 선교사 찰리가 함께 길을 걸어갑니다. 
    갑자기 불량배가 나타나, 그들의 길을 가로 막습니다. 
    찰리 목사는 도망갈 궁리를 합니다. 
    이때 간디는 묻습니다.

    “성경에 원수가 오른뺨을 치거든 왼뺨도 돌려대라고 하지 않았던가요?”

    찰리는 그것은 비유적인 표현일 뿐이라고 말합니다. 
    그러자 간디가 다시 말합니다.

    “난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요. 
    당신이 용기를 보여야 한다는 말씀이라고 생각합니다. 
    때리는 사람을 향해 기꺼이 한 대, 아니 여러 번이라도 얻어 맞을 용기 말입니다. 
    그렇게 행동한다면, 인간 본연의 성품에서, 미움이 줄어들고, 대신 존경심을 키우는 무언가를 끌어낼 수 있을 겁니다. 
    예수께서는 바로 그것을 찾아내신 것 같아요. 나도 그 무언가 살아 움직이는 걸 보았습니다”

    결국 영국은 간디의 온유함과 부드러움 앞에 손을 들었습니다. 
    물론 간디는 기독교인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예수의 가르침, 특히 산상수훈을, 도덕적 차원에서 받아들여, 삶 속에 실천한 인물이었습니다. 
    훗날 간디의 비폭력 저항 운동을, 미국에 그대로 적용한 인물이 마틴 루터 킹 목사입니다. 
    온유한 투쟁을 통해 간디는 인도의 땅을 돌려 받았고, 킹 목사와 흑인들은 미국의 땅을 차지하게 되었습니다.

    19절 말씀입니다.

    “내가 그들에게 한 마음을 주고 그 속에 새 영을 주며 그 몸에서 돌 같은 마음을 제거하고 살처럼 부드러운 마음을 주어”

    하나님은 우리에게 성령을 허락하여 주셨습니다. 성령님이 내 안에 계실 때, 우리의 마음은 변하기 시작합니다.

    성령님은 우리의 돌 같은 굳은 마음을 제거하시고, 살처럼 부드러운 마음을 주십니다. 
    부드러운 마음의 사람은 온유한 사람입니다. 
    마치 대패질을 잘한 나무 표면과 같은 성품을 가진 사람입니다.
    겨울을 지나, 봄이 되면, 딱딱한 길바닥처럼 굳은 땅에, 농사를 짓기 위하여, 농부는 그 밭을 갈아야 합니다.
    굳은 땅을 갈아 엎어서, 고랑을 내고, 돌맹이는 골라서 밖으로 던져 내고, 굳은 땅, 뭉쳐진 흙은 잘게 잘게 부수어서, 부드럽게 갈아냅니다. 
    거름도 주고, 비료도 주고, 골고루 갈아서, 씨앗을 뿌리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우리의 심령도 굳은 것을 제하고 부드럽게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부드러운 마음의 사람은 상대방에게 상처를 주지 않습니다. 
    감싸줍니다. 부드러운 사람의 말과 행동 속에는 상대방을 찌르는 가시가 없습니다. 
    부드러운 마음의 사람은 따뜻한 용서의 마음을 가진 사람입니다. 
    넓은 마음을 가진 사람입니다. 
    상대방의 나와 다른 모습, 나와 다른 행동, 나와 다른 생각을 이해하고 수용하려 합니다. 
    부드러운 마음의 사람은 강압적으로 나의 생각이나 가치관을 강요하지 않습니다. 자연스럽게 깨닫도록, 가르치고 인도합니다. 그러므로 부드러운 마음의 사람과 함께 멍에를 매는 것은 행복한 일입니다.

    개혁이 필요하다고 모두가 말을 합니다. 그러나 고쳐야할 부분은, 제도가 아니라, 마음입니다. 마음이 새로워져야 합니다. 성령님이 우리 마음 속에 계셔야 합니다. 성령님이 우리 마음을 변화시켜 주셔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 마음이 변하고, 세상이 변하고, 회복이 이루어집니다. 부드러운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다윗은 시편 51:10절에서 “하나님이여 내 속에 정한 마음을 창조하시고 내 안에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하소서”라고 기도했습니다.

    세상을 변화시켜 달라고 기도한 것이 아니라, 자신의 마음을 새롭게 해 달라고 기도했습니다.

    “내가 그 몸에서 돌 같은 마음을 제거하고 살처럼 부드러운 마음을 주겠다”

    주님이 주시겠다고 하시므로, 받기만 하면 됩니다. 주님이 주시겠다는데, 못 받을 사람이 없습니다.

    하나님이 주시마 약속하신 것을 뿌리치면 안되겠지요. 당연히 받아야 합니다.

    요한계시록 3:7절을 보면, “예수님이 열면 닫을 사람이 없고 닫으면 열 사람이 없다”고 했습니다.

    능력의 주님, 권능의 주님이 주시겠다고 말씀하시면 막을 자가 없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주님이 주신다고 말씀하시는데, 그것을 못 받는다면, 그것은 우리에게 잘못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주님이 주시는 마음을 받아 능력의 삶을 살아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넷째, 순종하는 마음

    20절 말씀입니다. 함께 읽겠습니다.

    “내 율례를 따르며 내 규례를 지켜 행하게 하리니 그들은 내 백성이 되고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리라”

    한 청년이, 교통사고로 큰 충격을 받아, 두 눈의 안구를 다 잃어버리게 되었습니다. 
    수술을 받을 때, 의사 선생님이 말합니다. 
    “출혈이 심하여 수술은 하지만, 안구가 빠져 앞으로는 볼 수 없을 것일세”

    이때 청년은 소리를 버럭 지릅니다.

    “장님으로 살기보다는 죽는 것이 낫지요. 수술하지 마시오. 이대로 죽을 것이요”

    그러나 의사 선생님은 말합니다.

    “무슨 소리인가? 생명은 소중한 것이야. 어려움을 극복해야지”

    그리고 강제로 마취를 하고 수술을 했습니다. 며칠 후 붕대를 풀면서, 의사 선생님은 말합니다.

    “축하하네. 실명은 했지만 자네를 위해 안구를 기증해 주신 분이 있어 눈 하나는 볼 수 있을 것 같네”

    청년은 또 소리를 지릅니다.

    “애꾸로 살기보다는 죽는 게 낫지”

    의사 선생님이 청년을 크게 책망을 합니다.

    “자네를 위해서 멀쩡한 눈을 빼준 고마운 분이 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되네. 무슨 망령된 행동인가?”

    의사 선생님이 청년의 붕대를 풀어 주었습니다. 그러자 뿌옇게 보이기 시작합니다. 점점 환하게 보이는데, 눈앞에는 서 있는 어머니가 보입니다. 그런데 어머니의 눈 하나가 없습니다. 청년은 자신을 위해, 안구를 빼어준 어머니의 사랑에 큰 감격을 받았습니다.

    “감사합니다. 어머니. 한평생 절대로 원망하지 않겠습니다. 오직 감사와 감격으로 살아가겠습니다. 자랑스러운 마음으로 살겠습니다”

    그는 순종하지 못했던 자신을 부끄럽게 여겼습니다.

    여러분! 불평하는 마음으로 사십니까? 순종하는 마음으로 사십니까?

    20절 말씀입니다.

    “내 율례를 따르며 내 규례를 지켜 행하게 하리니”

    여기의 “따르며”와 “행하게 하리니”는 순종하는 마음의 행위를 의미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바벨론 포로로 사로잡혀 있는 까닭도,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지 않은 결과입니다. 
    많은 선지자들을 보내어, 그들에게 말씀을 주셨는데, 말씀대로 살지 않았기 때문에,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을 바벨론의 손에 붙이신 것입니다. 
    그러나 순종하는 마음을 가질 때, 다시 자유를 허락하시겠다고 하나님은 약속하십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마음으로 살아갈 때, 하나님의 약속이 이루어짐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베드로는 밤이 맞도록 고기를 잡았습니다. 
    힘쓰고 애썼지만, 한 마리도 잡지를 못했습니다. 
    그때 예수님이 베드로의 배를 빌려, 따라온 무리들에게 말씀을 전하신 후, 베드로를 보시더니,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고 하셨습니다.

    그때 베드로가 예수님께 대답했습니다.

    “선생님. 우리들이 밤이 새도록 수고하였으되 잡은 것이 없지마는 말씀에 의지하여 내가 그물을 내리리이다”

    베드로가 예수님의 말씀처럼,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았더니, 잡은 것이 심히 많아 그물이 찢어지게 되었습니다. 다른 배에 있는 동무들에게 손짓하여 와서 도와 달라” 하니, 그들이 와서 두 배에 가득 채우게 되었습니다.

    베드로와 그와 함께 있는 모든 사람이 고기 잡힌 것으로 말미암아 놀랐습니다. 세베대의 아들로서 베드로의 동업자인 야고보와 요한도 놀랐습니다. 그들은 배들을 육지에 대고, 모든 것을 버려 두고, 예수를 따르게 되었습니다.

    밤이 맞도록, 애쓰고 힘쓰며, 수고하여도, 고기 한 마리 잡지 못했지만, 말씀에 순종함으로 그물을 내렸더니, 배에 고기가 가득 채워지는 복을 받게 되었습니다. 순종하였더니 축복을 받게 되었습니다.

    구약 학자 베이커의 고백입니다.

    “만일 하나님께서 돌담을 뛰어 넘으라 하시면 나는 그대로 순종할 것입니다. 
    뛰는 것은 내가 할 일이고 넘게 하시는 것은 하나님께 속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홍해를 건너는 순종이 모세의 의무라면, 구원은 하나님의 능력이었습니다. 
    그러기에 루터는 “이적을 행하는 사람이 되기보다 순종하는 사람이 되고 싶다”고 말했습니다.

    먼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마음을 가지십시오.
    하나님이 주시는 마음으로, 건강하고 희망 있는 교회를 함께 만들어 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한 마음으로, 성령 충만한 마음으로, 부드러운 마음으로, 순종의 마음으로, 아름다운 교회를 함께 만들어 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의 마음을 변화시키는 것은 참으로 어렵습니다. 
    힘쓰고 노력한다고, 우리의 마음이 변하는 것은 아닙니다. 
    세상 지식을 우리의 머리에 가득 채운다고, 우리의 마음이 금방 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성령 충만함을 받아야 합니다. 성령님이 역사하실 때, 나누어져 있던 우리의 마음이, 한 마음이 될 것입니다.
    돌 같은 딱딱한 마음, 굳어버린 마음이, 살처럼, 피부처럼 부드러운 마음이 될 것입니다.
    성령 충만할 때, 불신앙과 불순종을 버리고, 하나님의 말씀에 절대 순종하는 마음으로 변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한 마음, 성령충만한 마음, 부드러운 마음, 순종하는 마음을 소유함으로, 여러분을 통하여, 하나님의 큰 역사가 이루어지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에게 성령의 충만함을 허락하여 주셔서,
    분리된 마음이, 하나되게 하시고, 나누어진 마음이 일치되게 하여 주옵소서.
    딱딱한 마음이 부드러워지게 하시고, 불순종의 마음이 순종의 마음으로 변화되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에스겔 11장 깊이 읽기: 절망 속에서 어떻게 새 마음과 새 영을 받는가?

    에스겔 10장에서 하나님의 영광이 마침내 예루살렘 성전을 떠나는 충격적인 장면이 펼쳐진 후, 에스겔 11장은 그 영광이 성읍 동쪽 산에 머무는 가운데, 예루살렘에 남아 있던 악한 지도자들의 죄악과 그들에 대한 하나님의 준엄한 심판을 선포합니다. 그들은 마치 자신들이 안전한 가마솥 안의 고기인 양 헛된 안도감에 빠져 있었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가마솥 밖으로 끌어내어 심판하실 것을 분명히 하십니다. 그러나 이 절망적인 심판의 메시지 한가운데서, 놀랍게도 하나님께서는 포로로 흩어진 당신의 백성들을 다시 모으시고 그들에게 새 영과 새 마음을 주어 회복시키실 것이라는 위대한 약속을 선포하십니다. 에스겔 11장은 심판과 희망, 절망과 구원이라는 극적인 반전을 통해, 하나님의 공의로우심과 동시에 그분의 변함없는 사랑과 신실하심을 강력하게 증거하는 장입니다.



    시대적 배경과 맥락 소개

    에스겔 11장의 배경은 예루살렘 멸망 직전의 극도의 혼란과 위기 상황입니다. 바벨론의 군대는 이미 유다 땅을 유린하고 있었고, 예루살렘은 언제 함락될지 모르는 풍전등화의 운명에 놓여 있었습니다. 이러한 절체절명의 상황 속에서도 예루살렘에 남아 있던 일부 지도자들은 현실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고 거짓된 안도감에 빠져 있었습니다. 그들은 "건축할 때가 가깝지 아니한즉 이 성읍은 가마가 되고 우리는 고기가 된다"(겔 11:3)고 말하며, 마치 예루살렘 성벽이 자신들을 안전하게 보호해 줄 것이라고 착각했습니다. 이는 하나님의 심판 경고를 무시하고, 자신들의 지혜와 힘을 의지하려는 교만한 태도였습니다. 바로 이러한 악한 지도자들의 죄악과 그릇된 생각에 대해 하나님께서는 에스겔을 통해 강력한 심판을 선포하십니다. 그러나 동시에, 이미 바벨론으로 끌려가 절망 속에 있던 포로 공동체를 향해서는 전혀 예상치 못한 위로와 회복의 메시지를 전달하십니다. 이는 하나님의 구원 계획이 인간의 실패와 죄악에도 불구하고, 아니 오히려 그것을 통해 더욱 놀라운 방식으로 이루어질 수 있음을 보여줍니다. 이 이야기가 중요한 이유는, 위기 상황에서 지도자들의 역할과 책임이 얼마나 중요한지, 그리고 거짓된 낙관론이 얼마나 위험한지를 경고하기 때문입니다. 또한, 아무리 절망적인 상황이라 할지라도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백성을 결코 버리지 않으시며, '남은 자들'을 통해 새로운 시작을 이루어 가신다는 소망의 메시지를 전달하기 때문입니다. 이는 오늘날 우리에게도 어떠한 상황 속에서도 희망을 잃지 않고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붙들어야 함을 가르쳐줍니다.

    핵심 사건 또는 본문 요약

    에스겔 11장은 크게 세 부분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첫째, 예루살렘 지도자들의 죄악과 그들에 대한 심판 선포 (1-13절), 둘째, 포로 된 백성들을 향한 회복과 새 영의 약속 (14-21절), 셋째, 하나님의 영광이 성읍을 완전히 떠남 (22-25절) 입니다.

    첫째, 예루살렘 지도자들의 죄악과 그들에 대한 심판 선포 (1-13절): 하나님의 영이 에스겔을 여호와의 전 동문으로 데려가시는데, 그곳에는 백성의 고관 이십오 명이 있었습니다. 그중에는 아술의 아들 야아사냐와 브나야의 아들 블라댜와 같이 당시 백성들에게 영향력 있는 지도자들이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들이 바로 불의를 꾀하고 성읍 중에서 악한 지혜를 가르치는 자들이라고 지적하십니다. 그들은 "이 성읍은 가마가 되고 우리는 고기가 된다"고 말하며, 자신들이 안전하게 보호받을 것이라는 거짓된 안도감을 퍼뜨리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생각이 틀렸으며, 오히려 그들이 죽인 자들이 고기가 되고 이 성읍은 가마가 될 것이지만, 그들 자신은 그 가마 밖으로 끌려 나와 이스라엘 변경에서 심판을 받고 칼에 엎드러질 것이라고 선언하십니다. 이 예언이 선포되는 동안 블라댜가 갑자기 죽는 사건이 발생하고, 이에 놀란 에스겔은 "아하 주 여호와여 이스라엘의 남은 자를 다 멸절시키려 하시나이까"(겔 11:13)라며 다시 한번 탄식하며 중보합니다. 지도자의 갑작스러운 죽음은 심판의 즉각성과 확실성을 보여주는 충격적인 사건입니다.

    둘째, 포로 된 백성들을 향한 회복과 새 영의 약속 (14-21절): 에스겔의 탄식에 이어, 하나님께서는 이제 시선을 예루살렘에 남아 있는 자들이 아니라, 오히려 멸시받고 쫓겨난 포로 공동체에게로 돌리십니다. 예루살렘 주민들은 포로들을 향해 "너희는 여호와에게서 멀리 떠나라 이 땅은 우리에게 주어 기업이 되게 하신 것이라"(겔 11:15)고 조롱했지만, 하나님께서는 오히려 그들을 위해 친히 '잠깐 성소'가 되어 주시고, 그들을 열방 중에서 다시 모아 이스라엘 땅으로 돌아오게 하실 것이라고 약속하십니다. 더 나아가, 그들에게 "한 마음을 주고 그 속에 새 영을 주며 그 몸에서 돌 같은 마음을 제거하고 살처럼 부드러운 마음을 주어 내 율례를 따르며 내 규례를 지켜 행하게 하리니 그들은 내 백성이 되고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리라"(겔 11:19-20)는 놀라운 '새 언약'의 핵심 내용을 선포하십니다. 그러나 여전히 가증한 것과 미운 것을 마음으로 따르는 자들에게는 그 행위대로 머리에 갚으실 것이라고 덧붙이십니다. 이 얼마나 놀라운 반전이자 소망의 메시지입니까!

    셋째, 하나님의 영광이 성읍을 완전히 떠남 (22-25절): 마지막으로, 그룹들이 날개를 들고 바퀴들과 함께 움직이며, 이스라엘 하나님의 영광이 그 위에 덮인 채 성읍 가운데서부터 올라가 성읍 동쪽 산에 머무릅니다. 이는 10장에서 시작된 하나님의 영광의 이동이 최종적으로 완료되어, 이제 하나님의 임재가 예루살렘 성읍을 완전히 떠났음을 보여주는 슬픈 장면입니다. 에스겔은 이 모든 환상을 포로로 잡혀온 백성들에게 그대로 전합니다.

    에스겔 11장의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이 요약될 수 있습니다:

    구분 (에스겔 11장) 핵심 내용 및 상징적 의미
    악한 지도자들에 대한 심판 (1-13절) 예루살렘 고관 25명의 죄악(불의, 악한 지혜, 거짓된 안도감) 고발. "가마솥과 고기" 비유 반박. 이스라엘 변경에서 칼로 심판받을 것을 예고. 블라댜의 갑작스러운 죽음.
    포로들을 향한 회복과 새 영의 약속 (14-21절) 쫓겨난 포로들을 하나님이 친히 '잠깐 성소'가 되어주심. 다시 모아 이스라엘 땅으로 인도. 한 마음과 새 영을 주심, 돌 마음 제거, 부드러운 마음 주심. 율례와 규례 순종. "내 백성, 나는 그들의 하나님" (새 언약).
    하나님의 영광이 성읍을 떠남 (22-25절) 그룹들과 바퀴들, 하나님의 영광이 성읍 가운데서 올라가 동쪽 산에 머무름. 하나님의 임재가 예루살렘을 완전히 떠나심.

    철학적/존재론적 상징 해석

    에스겔 11장은 인간의 자기기만, 절망 속의 희망, 그리고 내적 변혁이라는 심오한 철학적, 존재론적 주제를 다루며, 인간 조건의 복잡성을 깊이 탐구합니다.

    첫째, "이 성읍은 가마솥이 되고 우리는 그 안의 고기가 된다"는 지도자들의 거짓된 안도감은 인간이 위기 상황에서 현실을 왜곡하고 자기 합리화를 통해 심리적 안정감을 추구하려는 경향을 보여줍니다. 그들은 임박한 위험을 애써 외면하고, 자신들이 처한 상황을 자신들에게 유리하게 해석하려 했습니다. 이는 마치 독일 철학자 아르투르 쇼펜하우어(Arthur Schopenhauer)가 인간의 '맹목적인 삶에의 의지(Wille zum Leben)'가 고통을 야기한다고 본 것처럼, 비합리적인 낙관론이나 자기기만은 결국 더 큰 파멸을 초래할 수 있음을 시사합니다. 진정한 안전은 현실을 직시하고 올바른 판단을 내리는 데서 오는 것이지, 스스로 만든 환상 속에 안주하는 데서 오는 것이 아닙니다. 그들의 '가마솥'은 결국 심판의 도구가 될 뿐이었습니다. 이 얼마나 어리석은 자기기만입니까!

    둘째, 절망적인 심판의 메시지 한가운데서 선포되는 포로들을 향한 회복과 '새 영, 새 마음'의 약속은 인간의 실패와 죄악을 넘어서는 하나님의 주권적인 은혜와 구원의 가능성을 강력하게 보여줍니다. 인간적인 관점에서는 모든 것이 끝난 것처럼 보이는 상황, 즉 성전도 파괴되고 백성들도 흩어진 절망 속에서 하나님께서는 오히려 새로운 시작을 계획하십니다. 특히 '돌 같은 마음을 제거하고 살처럼 부드러운 마음을 주시겠다'는 약속은, 외적인 변화가 아니라 근본적인 내적 변혁을 통해 진정한 회복이 이루어질 것임을 시사합니다. 이는 마치 실존주의 철학자들이 강조하는 '본래적 자기(authentic self)'로의 회복과 유사하게, 인간이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 속에서 참된 자아를 발견하고 새로운 삶을 살아갈 수 있게 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 '새 마음'은 하나님의 율법을 기쁨으로 순종할 수 있는 능력의 근원이 됩니다. 이는 인간의 노력만으로는 불가능하며, 전적으로 하나님의 창조적인 능력에 의한 선물입니다.

    셋째, 하나님의 영광이 성읍을 완전히 떠나 동쪽 산에 머무는 장면은 신적 임재의 부재(不在)가 가져오는 존재론적 공허함과 동시에, 그 '떠나심' 자체가 새로운 시작을 위한 공간을 마련하는 역설적인 의미를 지닐 수 있음을 보여줍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떠난 예루살렘은 더 이상 거룩한 도성이 아니며, 그곳에 남아 있는 자들은 영적인 고아와 같은 상태에 놓이게 됩니다. 이는 인간이 절대자와의 관계가 단절되었을 때 겪게 되는 깊은 소외감과 무의미함을 상징합니다. 그러나 동시에, 하나님의 영광이 특정 장소(성전)에 국한되지 않고, 이제는 흩어진 포로 공동체 가운데 '잠깐 성소'로서 함께하시겠다는 약속은, 신적 임재의 방식이 변화될 수 있음을 시사합니다. 또한, 동쪽 산에 머무는 영광은 여전히 이스라엘을 완전히 버리지 않으셨다는 하나님의 미련과 함께, 장차 다시 돌아오실 것이라는 희미한 기대를 품게 합니다. 때로는 기존의 것이 완전히 파괴되고 사라져야만, 진정으로 새롭고 본질적인 것이 들어설 자리가 마련되는 법입니다. 상실은 새로운 얻음을 위한 전제 조건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현대적 적용 또는 실존적 질문

    에스겔 11장의 극적인 반전과 심오한 약속은 오늘날 우리에게도 여전히 강력한 메시지를 전달하며, 우리의 삶과 신앙을 돌아보게 하는 중요한 질문들을 던집니다.

    첫째, 우리는 현실을 직시하고 있는가, 아니면 거짓된 '가마솥' 안에 안주하고 있는가? 현대 사회는 수많은 정보와 오락거리, 그리고 소비주의적인 유혹을 통해 우리로 하여금 불편한 진실을 외면하고 피상적인 만족감에 안주하도록 만듭니다. 개인적인 문제든, 사회적인 문제든, 혹은 영적인 문제든, 우리는 종종 문제의 본질을 직시하고 해결하려 하기보다, "괜찮을 거야", "나와는 상관없어"라는 자기 합리화 속에 숨으려 합니다. 그러나 에스겔 11장의 지도자들처럼, 이러한 태도는 결국 더 큰 위기를 초래할 뿐입니다. 우리는 용기를 내어 우리 자신과 우리가 속한 공동체의 현실을 정직하게 바라보고, 필요한 변화를 모색해야 합니다. 혹시 내가 안주하고 있는 '가마솥'이 실제로는 나를 위험에 빠뜨리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둘째, 절망 속에서도 '새 마음과 새 영'을 갈망하고 있는가? 삶의 여정에서 우리는 때로 깊은 절망과 실패를 경험하며, 마치 모든 것이 끝난 것처럼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과거의 상처와 죄책감, 그리고 굳어진 마음 때문에 새로운 시작을 꿈꾸기 어려울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에스겔 11장은 바로 그러한 절망의 자리에서 하나님께서 '새 마음과 새 영'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십니다. 우리의 힘으로는 변화될 수 없는 '돌 같은 마음'을 그분께서 '살처럼 부드러운 마음'으로 바꾸실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는 진정한 변화와 회복이 우리의 노력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운 개입을 통해 가능하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인간의 가장 큰 절망은 변화될 수 없다는 절망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가장 큰 약속은 변화시킬 수 있다는 약속이다." - 익명의 묵상

    우리는 우리의 한계를 인정하고, 겸손히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며, 그분이 주시는 새로운 마음과 영으로 살아가기를 갈망해야 합니다. 지금 나의 마음은 돌처럼 굳어 있습니까, 아니면 살처럼 부드럽습니까?

    셋째, 하나님의 임재는 어디에 있는가? '잠깐 성소'의 의미는 무엇인가? 하나님의 영광이 예루살렘 성전을 떠나 흩어진 포로 공동체 가운데 '잠깐 성소'가 되어 주시겠다는 약속은, 하나님의 임재가 특정 건물이나 장소에 국한되지 않는다는 중요한 진리를 가르쳐줍니다. 오히려 그분은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으로 당신을 찾는 이들과 함께하십니다. 이는 오늘날에도 화려하고 웅장한 교회 건물이 하나님의 임재를 보장하는 것이 아니며, 오히려 고난받고 소외된 이웃들 가운데, 그리고 진실된 예배와 교제가 있는 작은 공동체 가운데 하나님께서 함께하실 수 있음을 시사합니다. 우리는 눈에 보이는 형식이나 외적인 조건에 얽매이기보다, 어디에서든 하나님과의 살아있는 관계를 추구하고, 그분의 임재를 경험하는 '잠깐 성소'를 우리 삶 속에 만들어가야 합니다. 나의 삶은 하나님께서 기꺼이 머무실 수 있는 '성소'가 되고 있습니까?

    에스겔 11장은 우리에게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집니다:

    • 나는 내 삶의 어려움 앞에서 정직하게 현실을 마주하고 있는가, 아니면 헛된 희망이나 자기기만에 빠져 있는가?
    • 나는 나의 굳어진 마음과 반복되는 실패 앞에서 절망하고 있는가, 아니면 하나님께서 주시는 '새 마음과 새 영'을 통해 변화될 수 있다는 소망을 품고 있는가?
    • 나는 하나님의 임재를 특정한 장소나 형식에서만 찾으려 하는가, 아니면 내 삶의 모든 순간과 모든 관계 속에서 그분을 경험하려 하는가?
    • "그들은 내 백성이 되고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리라"는 언약 관계가 내 삶 속에서 실제로 이루어지고 있는가?

    결국 에스겔 11장은 심판의 어둠 속에서도 꺼지지 않는 희망의 빛을 보여주며, 진정한 회복은 인간의 내면 깊은 곳에서부터 시작됨을 강력하게 선포하고 있습니다. 그 부르심에 응답하는 것이 우리의 몫입니다.

    결론 요약

    에스겔 11장은 예루살렘에 남아 있던 악한 지도자들의 거짓된 안도감과 그들에 대한 하나님의 준엄한 심판을 선포하는 것으로 시작합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안전한 '가마솥' 안에 있다고 착각했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끌어내어 심판하실 것을 분명히 하십니다. 이처럼 절망적인 심판의 메시지 가운데, 놀랍게도 하나님께서는 포로로 흩어진 당신의 백성들을 향해 위대한 회복의 약속을 선포하십니다. 그들을 다시 모아 이스라엘 땅으로 돌아오게 하실 뿐만 아니라, 그들의 돌 같은 마음을 제거하고 살처럼 부드러운 새 마음과 새 영을 주어 하나님의 율례를 따르게 하시겠다는 '새 언약'의 핵심을 약속하십니다. 그러나 이 약속과 함께, 하나님의 영광은 마침내 예루살렘 성읍을 완전히 떠나 동쪽 산에 머무르며, 임박한 멸망의 슬픔을 더합니다. 에스겔 11장은 이처럼 심판과 희망, 절망과 구원이라는 극적인 반전을 통해, 인간의 죄악에도 불구하고 신실하게 구원을 이루어 가시는 하나님의 주권적인 은혜와 그분의 변함없는 사랑을 강력하게 증거합니다. 오늘날 우리에게도 이 메시지는 거짓된 안도감을 버리고, 절망 속에서도 새 마음을 주시는 하나님을 의지하며, 진정한 회복과 구원의 길로 나아갈 것을 촉구하고 있습니다.



















  • 9월 4일(목) 에스겔 7-9장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이마에 표하라(9:4)

    이르시되 너는 예루살렘 성읍 중에 순행하여 그 가운데서 행하는 모든 가증한 일로 인하여 탄식하며 우는 자의 이마에 하라.
    and said to him, "Go throughout the city of Jerusalem and put a mark on the foreheads of those who grieve and lament over all the detestable things that are done in it."

    이마에 표하라(put a mark on the foreheads)

    7장 / 끝이 가깝다. 
             이스라엘의 종말이 가까워짐을 알리는 경고와 심판의 날을 예고함.
    8장 / 예루살렘의 죄. 
             에스겔이 성전에서의 우상 숭배를 목격하고 하나님의 심판을 예언함.
    9장 / 예루살렘의 심판.
             이하나님이 에스겔에게 이스라엘의 죄로 인한 심판을 알리시고, 의인들을 구별하심.

    새한글 / 여호와께서 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 “너는 이 도시, 예루살렘 가운데를 걸어 돌아다녀라. 그러면서 사람들의 이마에 표시를 해 주어라. 그들은 예루살렘 가운데서 벌어지는 온갖 역겨운 일들 때문에 한숨짓고 신음하는 사람들이다


    탄식하며 우는 자...표하라 
    - 이는 예루살렘 성읍에서 가증한 우상 숭배를 하는 일반 사람들과는 달리 그 가증한 일을 애통해 하며 마음에 괴로움을 가지고 있는 자에게 표를 하라는 뜻이다. 
    그들이 이렇게 하나님으로부터 인정받는 표를 받을 수 있었던 것은 예루살렘에서 다른 사람에 의해 행해지는 가증한 죄에 동참하지 않고 같은 이스라엘 족속으로서 애통해 하며 통탄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표' (타우)란 히브리어 알파벱의 마지막 글자인 '타우'에서 유래된 말이다. 
    이것은 고대에서 십자가와 같은 기호를 나타내는 낱말로도 사용되었는데 아마 이런 형태의 표가 영적으로 인친것을 뜻하는 듯하다. 
    이와같이 하나님께서 인치시는 것은 가인의 생명을 보호하시기 위해 표하신 것(창 4:15)
    출애굽 전 유월절 어린 양의 피를 이스라엘 백성의 문설주에 발라 죽음의 사자(천사)가 그 집을 넘어가 멸망치 않도록 한 것(출 12:13, 21-29), 
    말세에 하나님께서 다신의 종들의 이마에 인을 치시므로 열방에서 구원하시는 것(계 7:1-8) 등과 유사하다. 
    이처럼 하나님께서 인을 치시는 사건은 하나님께서 항상 당신의 심판 속에서도 당신의 긍휼에 의해 보존된 자들을 지키시고 보호하심을 엿보게 한다(6:8)

    표(8420. 타브. ) תָּו 스트롱번호 8420  히트위타 타우(  וְהִתְוִיתָ תָּו)

    1. 표적.  2. 신호
    발음    [ tâv ]  
    어원  /  8427에서 유래
    구약 성경  / 3회 사용
    •  1. 명사, 남성 표적, 겔 9:4
    •  2. 명사, 남성 신호, 기호, 서명, 욥 31:35.
    • 관련 성경 / 서명(욥 31:35), 표(겔 9:6). [동] 표를 그리다(겔 9:4).

    תָּוָה 스트롱번호 8427

    1. 8376과 동일 : 묘사하다.  2. 피엘형 /  삼상21:14.  3. 히필형 ׃תִתְוָה תָו 묘사하다
    발음    [ tâvâh ]  
    구약 성경 / 2회 사용
    •  1. 동사 8376과 동일 : 묘사하다, 윤곽을 그리다.
      •  a. 동사 피엘형 : 삼상21:14(13).
      •  b. 동사 히필형 ׃ תִתְוָה תָו 묘사하다[עַל을 수반하여], 겔 9:4.
    • 관련 성경 / 그적거리다(삼상 21:13).




    죄 때문에 통곡하는 자들은 하나님이 특별히 표시하여 보호하신다.

    에스겔 선지자는 바벨론에 사로잡혀와 있는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있었습니다.  
    환상가운데 예루살렘에 가서  하나님께서 보여 주시는 환상을 보았습니다. 
    여호와의 영광이 예루살렘에서 떠나면서 하나님의 백성을 심판하실 것을 환상으로 보여 주었습니다.

    8장에서는 예루살렘에서 성전에서 이루어 지고 있는 우상숭배의 장면을 보았습니다. 
    오늘 읽은 9장은 죄를 지은 하나님의 백성을 심판하시는 환상입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예루살렘 시민 중 이마에  표시를 받은 사람들은 멸망하지 않고 보호하십니다. 
    예루살렘에서 이루어 진 가증한 일, 우상 숭배 때문에 탄식하며 우는 경건한 사람들입니다.

    오늘 우리에게 경고가 됩니다. 
    위로가 됩니다. 
    나 자신과 공동체의 죄 때문에 하나님께 통곡하며 간구하는 자는 하나님께서 자신의 것으로 확실히 도장을 찍습니다. 하나님의 특별한 보호를 내려 주십니다. 성령님으로 도장을 찍으셔서 하나님의 소유로 삼아 주셨습니다.

    다 함께 에스겔에게 주신 하나님의 계시 안으로 들어가 봅시다.

    죄 때문에 통곡하는 자들은 하나님이 특별히 표시하여 보호하신다.

    첫째, 죄 때문에 통곡하며 이마에 표를 받은 사람은 멸망하지 않습니다(1-7절)

    둘째, 에스겔은 백성을 위해 중보 기도하고 하나님께서 대답하십니다(8-11절)

    셋째, 경건한 자는 성령님을 통해 보호해 주십니다.

    이 시간 성령님께서 우리의 죄 때문에 통곡하며 하나님의 보호를 받는 복을 내려 주시기 바랍니다.

     

    이마에 표를 받은 사람은 멸망당하지 않음(1-7)

    1. 멸망시키는 천사들과 살려 주는 천사(1-2)

    여호와께서 큰 소리로 말씀하셨습니다. 
    이 성읍을 관할하는 자들이 각기 죽이는 무기를 손에 들고 나아오게 하라.” 
    관할하는 자는 형벌을 집행하는 자를 말합니다. 
    천사 6명이 나타났습니다. 
    성전 뜰 바깥의 북쪽문으로부터 옵니다. 
    오늘 환상을 통해 보인 것을 실제 실행하는 것은 바벨론 군대입니다. 
    이스라엘을 멸망시킬 바벨론 군대가 들어오는 문입니다. 
    그들의 “죽이는 무기”는 원래 “멸망시키는 무기”입니다. “멸망”은 노아 홍수 때 세상을 물로 멸망시킨 것에 쓴 단어입니다(창 6:13,17) . 소돔, 고모라를 멸망시키는 데 쓴 말입니다(창 18:28-32).  이집트의 바로가 하나님의 백성을 노예에서 벗어나게 하도록 재앙을 내렸습니다.  10번째 재앙을 내린 “멸하는 자” (출 12:23)에 쓴 말입니다.

    그런데 무기를 손에 든 6명의 천사들 가운데서 또 다른 천사 일곱째 천사가 있었습니다. 희고  부드러운 세마포 옷을 입고 있었습니다. 제사장이 입는 옷과 같습니다. 허리에는 서기관의 먹그릇을 차고 있었습니다. 먹그릇은 뿔로 되었는데, 거기에 붓과 두 개의 먹통을 넣을 수 있게 했습니다.

    7명의 천사들은 북문을 통해 들어 와서 성전 뜰에 섰습니다. 
    백성이 우상숭배하는 곳입니다. 

    2. 성전을 떠나가시는 여호와의 명령(3-7절)

    1) 3절에,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났습니다. 성전의 안쪽 지성소 언약궤에는 그룹 천사가 조각되어 있습니다. 원래 그 그룹 천사 위에 하나님의 영광의 구름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백성들에게 말씀하실 때 그곳으로부터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여호와의 영광의 구름이  지성소를 떠났습니다. 성전 밖으로 나와서 성전 문지방위에 왔습니다. 여호와의 영광이 성전 바깥으로 나와 떠나고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이 백성의 너무나 큰 죄 때문에 백성을 떠나십니다.

    4절에, 여호와께서 가는 베 옷을 입고 서기관의 먹 그릇을 찬 천사에게 외치셨습니다.

    “너는 그 성읍 가운데, 예루살렘 가운데 지나가라. 그 가운데에서 행하는 모든 가증한 일 때문에 탄식하며 우는 사람들의 이마들에  표를 그리라.”  이마에 X 를 그려 주라고 합니다.

    가증한 일은 하나님께서 미워 하시는 우상숭배를 말합니다. 또 우상 숭배의 결과 백성들이 서로를 착취하는 상태를 말합니다.  약한 사람을 괴롭히고 재산을 빼앗았습니다. 이마에 표를 받는 사람들은 우상 숭배에 참여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왕과 제사장 장로들, 백성들이 이 우상 숭배하는 것을 막을 힘이 없었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이 모독당하는 것을 보고 마음이 깨어지듯 탄식합니다. 또 이 가증한 일 때문에 하나님께서 재앙을 보내실 것을 알기 때문에 슬픔으로 기도합니다. 우리 성도님들도 죄 때문에 탄식하고 기도하고 있으면 참으로 복됩니다.

    5, 6절에서 하나님은 무기를 든 6명의 천사에게 말하십니다.  

    5. 너희는 이마에 표시를 하는 그를 따라 성읍 중에 다녀라. 불쌍히 여기지 말며 긍휼을 베풀지 말고 쳐서 죽이라. 
    6. 늙은 자와 젊은 자와 처녀와 어린이와 여자를 다 죽여라.  이마에 표 있는 자에게는 가까이 하지 말라 내 성소에서 시작할지니라.

    노인과 여자와 어린아이까지 다 죽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이마에 표가 그려져 있는 사람들은 죽이지 말라고 합니다.  

    죽이는 일을 하나님의 성소에서부터 시작하라고 하십니다. 
    배교와 우상 숭배가 가장 분명히 나타나는 곳이 성소이기 때문입니다. 
    성소 앞에 있는 늙은 사람부터 치기 시작했습니다. 
    “늙은 사람”은 장로라는 뜻도 됩니다. 
    8:10-12에 환상이 있었습니다. 
    장로 70명이 성전 안의 기구를 보관하는 방에 들어가서 각자가 우상에게 분향했습니다. 
    8:16절에 성전 안뜰에서 태양신을 향해 경배하던 25명도 먼저 죽임 당하는 장로들같습니다.

    우상숭배로 더럽혀 진 성전을 하나님께서 버리셨습니다. 
    사람들이 성전을 이미 더럽혔기 때문에 성전은 성전으로서의 거룩함을 잃어 버렸습니다. 
    무기 가진 자들에게 시체를 성전 뜰에 채워서 성전을 더럽게 하라고 명령합니다. 
    그리고 성전 밖에 나가서 성읍을 치라고 하십니다. 
    6명의 천사들은 그 명령대로 했습니다.

    이마에 표를 받은 구약 성도님을 본받읍시다. 
    우리는 하나님만을 높이고 경배합시다. 
    서로 사랑을 실천합시다. 
    우리가 바꿀 수 있는 대로 교회와 우리 가정을 하나님을 경외하는 공동체로 만들어 갑시다.

    우리의 죄를 볼 때 하나님께 통곡하며 회개합시다. 
    우리 가정과 우리 교회의 죄에 대해서도 하나님께 통곡하며 부르짖읍시다. 
    우리 사회의 죄에 대해서도 슬퍼하며 기도합니다. 
    하나님께서 심판하실 때 피하도록 합시다.

     

    둘째로, 에스겔은 백성을 위해 중보 기도하고 하나님께서 대답하십니다(8-11절)

    6명의 천사들이 예루살렘 성을 다니면서 치고 있을 때, 에스겔은 혼자 남았습니다. 엎드려 부르짖으며 기도합니다. 8절입니다.

    아하 주 여호와여 예루살렘을 향하여 분노를 쏟으시오니 이스라엘의 남은 자를 모두 멸하려 하시나이까?”

    하나님은 대답하십니다. 9절,

    이스라엘과 유다 족속의 죄악이 심히 중하여 그 땅에 피가 가득하며  성읍에 불법이 찼나니

    이미 멸망한 북쪽 이스라엘, 이제 하나님이 심판할 남쪽 유다의 죄가 아주 아주 컵니다.  그들의 죄는 하나님 대신에 우상을 섬긴 가증한 일입니다. 
    그 뿐 아니라 사람들을 향한 죄가 아주 컵니다. 그 땅에 서로를  불법적으로 행하고 약한 사람을 약탈하며 피흘리는 죄가 가득찼습니다.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실 때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창 1:28) 복을 약속하며 축복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백성은 땅을 사람으로 가득 채우는 일과 정반대의 일을 합니다. 
    사람을 죽인 피가 땅에 충만하게 만들었습니다. 
    하나님의 축복을 걷어 차는 이 백성은 멸망시켜야 합니다.
    이들의 또다른 죄는 하나님께 벌을 받으면서도 하나님을 향해 반항하는 태도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들은 말합니다.

    여호와께서  땅을 버리셨으며 여호와께서 보지 아니하신다.’

     백성들의 죄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들을 심판하신다고 선지자를 통해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면 회개하며 하나님께 나오는 것이 당연합니다. 
    그런데도 하나님이 보지 않으시니 계속 죄를 짓자라고 말합니다. 
    하나님께 반항적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백성을 엄중히 심판하십니다.

    10. 그러므로 내가 그들을 불쌍히 여기지 아니하며 긍휼을 베풀지 아니하고 그들의 행위대로 그들의 머리에 갚으리라 .”

    하나님께서 철저히 심판하십니다. 
    그 백성이 행한대로 갚으십니다.  
    하나님께 순종하지 않고 배반한 자를 완전히 멸망시킵니다.
    에스겔이 하나님과 대화하는 중에 가는 베옷을 입고 허리에 먹그릇을 찬 천사가 하나님께 보고합니다.

    주께서 내게 명령하신 대로 내가 준행하였나이다.

    백성의 죄악과 그들이 받을 심판 때문에 탄식하며 울던 사람들의 이마에 X 표시를 다 끝냈습니다.  
    우리 한 명 한 명도 죄를 회개하며 보이지 않는 표시를 하나님께서 해 주시기 바랍니다.

    셋째로, 참으로 경건한 자에게는 성령님을 통해 보호해 주십니다.

    1. 바벨론을 통한 하나님의 심판과 이마에 표가 있는 

    그런데 이 환상은 어떻게 실제로 이루어 졌을까요?  
    에스겔이 환상을 본 지 몇 년 후 바벨론이 예루살렘, 유다에 대한 3차 침공을 했습니다.  
    바벨론 군대는 여자와 어린아이까지 죽였습니다. 
    사람들을 포로로 바벨론으로 끌고 갔습니다. 
    예루살렘에는 가난하고 지위가 낮은 사람들만 남겨 두었습니다(렘 39:10).

    "시위대장 느부사라단이 아무 소유가 없는 빈민을 유다 땅에 남겨 두고 그 에 포도원과 밭을 그들에게 주었더라."

    그런데  하나님께서 이마에 표시가 있는 사람은 살려 두었다는 기록은 없습니다. 
    예루살렘의 가증한 일을 보고 탄식하며 울던 사람들도 재난을 함께 당했습니다.
    하나님께서 표시한 사람은 어떤 점에서 멸망을 피했을까요? 
    영적인 보호를 받았습니다.  
    예루살렘의 영적 타락 때문에 탄식하고, 앞으로 다가올 하나님의 심판 때문에 우는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당신의 사람들로 표시하고 보호하십니다.  
    하나님을 향한 굳센 믿음을 선물로 주십니다. 
    믿음을 연단하는 기회로 삼습니다.

    2. 요한계시록에 등장하는 이마에 도장이 찍힌 사람

  • 요한계시록 7:1-4 
    이 일 후에 내가 네 천사가 네 모퉁이에 선 것을 보니 의 사방의 바람을 붙잡아 바람으로 하여금 에나 바다에나 각종 나무에 불지 못하게 하더라
  • 또 보매 다른 천사가 살아계신 하나님의 인을 가지고 돋는 데로부터 올라와서 과 바다를 롭게 할 권세를 얻은 네 천사를 향하여 큰 소리로 외쳐
  • 가로되 우리가 우리 하나님의 종들의 이마에 인치기까지 이나 바다나 나무나 해하지 말라 하더라
  • 내가 인맞은 자의 수를 들으니 이스라엘 자손의 각 지파 중에서 인맞은 자들이 십 사만 사천이니.

    요한계시록은 우리 믿는 성도의 이마에 도장을 찍는 장면이 나옵니다(7:1-4).
  • 네 명의 천사가 온 세계 사방에서 바람을 잡고 있었습니다. 
    이 바람은 땅과 바다를 해치는 역할을 합니다. 
    그 바람이 불지 못하도록 붙잡고 있었습니다.
    그 때 또 다른 천사 한 명이 나타났습니다. 
    하나님의 도장을 들고 있었습니다. 
    이 천사가 네 명의 천사에게 말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종들의 이마에 도장을 찍기까지 땅이나 바다나 나무들을 해하지 마십시오.” 
    이마에 하나님의 도장이 찍힌 것은 하나님의 소유 된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그들을 바람의 해로부터 보호해 주십니다.
    이마에 도장이 찍힌 자의 수는 144,000명입니다. 
    구원 받은 하나님의 모든 백성을 상징적으로 144,000이라 합니다.

    14절에서는, 이 사람들은 큰 환란에서 나오는 자들입니다.  
    어린 양의 피에 그 옷을 씻어 희게 하였습니다. 
    어린 양의 피를 믿음으로 죄 용서 받은 사람들입니다. 
    어린 양처럼 믿음 때문에 고난을 당한 사람들입니다. 
    이마에 하나님이 주신 표시가 있는 자들은 성도들은 세상에서 환란을 면제 받은 자들이 아닙니다. 
    그들은 환란을 당했습니다. 
    그리스도를 믿는 것 때문에 박해를 받았기 때문에 불신자보다 더 많은 환란을 겪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들과 함께 하시면서 보호하셨습니다. 
    악에 빠지지 않도록 보호하셨습니다.  
    이마에 하나님의 도장을 받은 그들에게는  고난이 그들을 멸망 시키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지금 우리가 누리는 복입니다. 
    우리에게 큰 환란이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따라 가는 데 많은 방해들이 있습니다.  
    휴대전화를 통해 많은 방해를 받고 있습니다. 
    죄의 유혹에  마음이 흔들립니다. 
    하나님이 보시기에 가증한 일들을 합니다.

    그러나 나의 죄를 인하여 통곡하며 우는 자는 복 됩니다. 
    우리 공동체의 부족함을 인해 우는 자는 복 됩니다. 
    믿음으로 하나님께 기도하며 부르짖는 우리를 “너는 네 것이다.”고 도장을 찍어 주십니다.

    이 땅을 사는 날 동안 우리가 죄에 빠지지  않도록 보호해 주십니다.

    3. 복음전하는 자를 하나님이 보호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하나님께서 보호해 주실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누가복음 12:4-7에서 예수님께서 사도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박해를 당할 때 두려워 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7절은 말합니다. 
    “너희에게는 심지어 머리털까지도 다 세신바 되었나니 두려워 하지 말라. “

    하나님은 제자들이 박해를 당하지 않게 보호하지는 않습니다. 
    박해 당할 때도 우리와 함께 하시면서 보호하십니다. 
    이 세상에서 많은 어려움 가운데서 몸을 죽일 수는 있어도 죽음 이후의 세계와 우리 영혼에 대해 어떻게 할 수 없는 사람을 두려워 하지 맙시다.

    하나님을 두려워 하며 경외합시다. 
    말씀에 순종하며 살고 복음을 전하는 우리들을 하나님 아버지께서 보호해 주십니다. 
    우리 머리카락 수까지 기억하며 우리를 보호하십니다. 두려워 하지 맙시다.

    눅 12:11, 12는 우리가 복음을 전할 때, 복음 때문에 핍박을 받고 사람들 앞에 설 때에 대답할 말을 어떻게 할까 두려워 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마땅히 할 말을 성령이 곧 그 때에 너희에게 가르치시리라”고 하십니다. 
     
    4. 성령님이라는
      도장

    자기의 죄를 회개하며 하나님을 믿는 자에게는 하나님께서 성령님이라는 도장을 주셔서 영적으로 거룩한 삶을 살도록 하십니다.

    에베소서 1:13은 말합니다. “그(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도 진리의 말씀 곧 너희의 구원의 복음을 듣고 그 안에서 또한 믿어 약속의 성령으로 인치심을 받았으니 이는 우리 기업의 보증이 되사 그 얻으신 것을 속량하시고 그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 하심이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듣고 믿었습니다. 그리스도의 피에 몸을 씻어 깨끗하게 하셨습니다. 믿은 우리 모두에게 성령님을 보내 주셔서 도장을 찍듯이 마음에 확신을 주셨습니다. 성령님이 우리 안에 계셔서 성령님의 열매를 맺게 하십니다. 갈라디아5:22,23은 말합니다. 사랑, 기쁨, 화평, 오래참음, 자비, 양선/착함, 충성, 온유, 절제. 이런 것을 금할 법이 없습니다.

    우리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욕과 탐심을 십자가에 못박았습니다. 우리는 성령님으로 새 생명을 얻었으니 성령으로 행동하게 되었습니다.

    이제 여러 환란이 올 때 마다 기억합시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그분의 것이라고 도장을 찍었습니다. 
    성령이 도장 찍어 주셨으니 성령의 보호가 있으니 회개하는 삶을 계속 살아갑시다. 
    나와 우리 공동체의 죄를 회개하며  성령안에서 새로운 삶을 살아 갑시다. 
    고난은 우리를 망하게 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단련하여 믿음의 사람으로 성장하게 하십니다.







    삽화 이야기 / 파가니니와 낡은 바이올린

    파가니니의 일화

    오래 전에 영국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런던의 템스 강변에 많은 사람들이 나와서 산책을 즐기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한쪽 귀퉁이에 한 거지노인이 다 낡아빠진 바이올린을 연주를 하며 구걸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낡아 빠진 바이올린에서 나오는 음악소리는 신통치 못했습니다. 
    그래서 지나가는 사람들이 별로 관심을 기울여주지 않았습니다. 
    거지노인이 벗어놓은 모자에 동전을 넣어주는 사람도 거의 없었습니다.

    그런데 웬 낯선 외국인 한 사람이 그 곁을 지나다가 잠시 걸음을 멈추고, 거지노인이 열심히 연주하는 모습을 물끄러미 쳐다보았습니다. 거지노인은 다 떨어진 외투를 입고 있었습니다. 
    신발도 떨어져서 너덜너덜했습니다. 
    머리도 제대로 감지 못해서 덥수룩 한 상태였습니다. 
    보기에도 처량해 보였습니다.
    그 외국인이 그에게 가까이 다가가 측은한 마음으로 이렇게 말했습니다

    "할아버지, 죄송하지만 지금 제 수중에 준비된 돈은 없습니다. 
    그러나 저도 바이올린을 좀 다룰 줄 아는데, 제가 할아버지를 대신해서 잠시 몇 곡만 연주해 드리면 안되겠습니까?" 

    거지노인은 잠시 쉬기도 할 겸해서 그 낯선 외국인에게 낡은 바이올린을 건네주었습니다. 
    외국인은 그것을 손에 쥐고서 천천히 활을 당기기 시작했습니다. 
    그러자 낡아 빠진 바이올린에서 놀랍도록 아름다운 선율이 흘러나왔습니다. 
    그 소리를 듣고 지나가던 사람들이 한 사람씩 두 사람씩 걸음을 멈추고는 외국인이 연주하는 음악에 매료되고 말았습니다.

    한 곡이 끝나자 사람들은 박수를 쳤습니다. 
    두 곡이 끝난 후 사람들은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모이게 되었습니다. 
    거지노인은 자기가 벗어놓은 모자를 들고서 사람들에게 다가갔습니다. 
    모두가 주머니에서 돈을 꺼내어 노인의 모자에 넣었습니다. 
    순식간에 돈이 수북히 쌓였습니다. 
    그것도 한 푼 두 푼 던져주는 동전이 아니었습니다. 돈의 단위가 높았습니다. 
    모두가 지폐를 꺼내서 모자에 넣었던 것입니다. 
    갑자기 몰려든 사람들을 보고 경찰관도 놀라 달려왔습니다. 
    그러나 경찰관마저도 다 낡아 빠진 바이올린에서 울려 퍼지는 아름다운 선율에 매료되어 그도 물끄러미 바라보며 감상을 하고 있었습니다. 
    경찰관도 주머니에서 돈을 꺼내어 거지노인의 모자에 넣었습니다. 
    이제 연주가 끝났습니다. 
    그곳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박수를 쳤습니다.
    그때였습니다.그곳에 서 있던 사람 가운데 한 사람이 큰 소리로 외쳤습니다
    "저 사람은 파가니니다, 그 유명한 '파가니니!!"

    * 이탈리아의 “니콜로 파가니니”(1782~1840)는 바이올린의 귀재로 잘 알려진 인물입니다. 
    '바이올린의 마술사'라고도 하는 세계적인 바이올린의 명 연주가입니다.

    그가 런던에 연주차 왔다가 호텔에 머물러 있으면서 잠시 시간을 내어 템스 강변을 산책하기 위해서 나왔던 것입니다. 
    그러다가 불쌍한 거지노인이 바이올린을 힘겹게 연주하는 모습을 보고 측은하게 생각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를 위해 대신 몇 곡을 연주해 주었던 것입니다. 
    바이올린의 명연주자 파가니니의 마음이 참 아름답습니다.

    여호와를 알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


    "이마에 표하라"는 에스겔 9장에 나오는 말로, 세상의 죄와 악을 보며 애통하고 회개하는 자들에게 하나님의 구원의 표를 하여 심판에서 보호하라는 명령을 의미합니다. 
    이 표는 하나님께서 정하신 사람들에게 주어지는 것이며, 세상의 죄와 더러움에 동조하지 않고 탄식하며 하나님께 기도하는 자들이 이 심판으로부터 구원받는다는 것을 상징합니다. 

    에스겔 9장의 내용
    • 환상 :
      에스겔은 환상 중에 성전에서 심판이 시작되는 것을 봅니다.
       
    • 심판의 시작 :
      예루살렘의 우상 숭배와 죄악 때문에 심판이 시작되며, 멸망시키는 천사들이 무기를 들고 나타납니다. 

    • 표를 하라는 명령 :
      하나님께서 "가는 베 옷을 입은" 사람에게 성읍 중에 순행하여 죄와 악으로 인해 마음 아파하고 탄식하는 자들의 이마에 표를 하라고 명령하십니다. 

    • 구원과 보호 :
      이마에 표를 받은 자들은 마지막 심판에서 제외되어 보호를 받게 됩니다. 
    표를 받는 자들의 특징 
    • 세상의 죄악과 잘못을 보며 마음 아파하고 통곡하는 자들입니다.
    • 사회 시스템이나 흐름에 순응하지 않고 문제를 삼고 애통하며 기도하는 자들입니다.
    • 믿음을 지키고 회개하는 자들입니다.
    "이마에 표하라"는 의미
    • 하나님의 보호 :
      .
      하나님의 징벌이 임할 때, 하나님의 백성을 구별하여 보호하시겠다는 약속입니다.
       
    • 구원과 심판 :
      .
      구원받을 사람과 멸망할 사람을 구별하는 하나님의 주권적인 행위입니다.
       
    • 신앙인의 자세 :
      .
      세상의 죄악에 타협하지 않고 하나님 앞에서 죄를 애통하며 회개하는 신앙인의 자세를 보여줍니다. 


    9월 3일(수) 에스겔 4-6장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여호와인 줄 알리라(6:10)

    그 때에야 그들이 나를 여호와인줄 알리라 내가 이런 재앙을 그들에게 내리겠다 한 말이 헛되지 아니하니라.
    And they will know that I am the LORD; I did not threaten in vain to bring this calamity on them.

    새번역 / 그 때에야 그들이 비로소 내가 주인 줄 알게 될 것이다. 내가 그들에게 이런 재앙을 내리겠다고 공연히 말한 것이 아님도 알게 될 것이다.

    4장 / 이스라엘의 죄를 상징적으로 나타내는 행동을 하도록 명령 받음.
    5장 / 이스라엘의 심판과 회복을 예언하며, 그들의 죄를 고발함.
    6장 / 이스라엘의 산과 골짜기를 향한 심판의 예언과 우상 숭배에 대한 경고.


    다국어성경 인터넷 판에서 "여호와인 줄 알리라'는 말씀을 검색한 결과 구약 전체에서 55구절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에스겔서에서 48구절이 사용되었다고 합니다.
    에스겔서에서 자주 사용되는 용어가 "여호와인 줄 알리라"라고 하겠습니다.


    그들이 나를 여호와인줄 알리라
     
    - 7절 주석을 참조하라.
    나를 여호와인줄 알게 하려 함이니라 
    - 이는 에스겔 선지자의 예언의 주요 특징이요 그 목적 중 하나다(7:4; 11:10, 12; 12:20; 13:9, 14, 21, 23; 14:8; 15:7; 16:62; 20:38, 42, 44; 22:16; 23:49; 24:24, Dyer). 

    '여호와'란 자존자(自存者), 즉 스스로 계시는 자라는 뜻이다(출 3:14, 15).
     
    이 성호는 하나님을 나타내는 고유 명사로서(출 6:3) 
    창세기 4:26부터 사람에 의해 불리워졌으며 구약에서 가장 많이 쓰인 하나님의 이름이다.

    에노스 때에 사람들이 비로소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다는 뜻은?

    “셋도 아들을 낳고 그 이름을 에노스라 하였으며 그 때에 사람들이 비로소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

    성경은 셋이 자기 아들을 낳고 ‘에노스’라고 이름 지은 동기에 대하여 그 때에 비로소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기 때문이라고 소개하고 있습니다.

    창세기 4:26  
    "
    셋도 아들을 낳고 그 이름을 에노스라 하였으며 그 때에 사람들이 비로소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

    ‘이름을 불렀다’는 것은 하나님과 인격적인 관계가 시작되었음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인간 관계에서도 서로 간에 직함이나 계급으로 부르지 않고 직접 이름을 부른다는 것은 그만큼 그 둘이 친숙하고 가까운 사이임을 의미합니다. 
    특별히 성경에서는 인간이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는 것을 구원과 직결되는 중대한 문제로 말씀하고 있습니다.

    사도행전 2:21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하였느니라

    로마서 10:13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그러므로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기 시작했다는 것은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적극적인 사귐이 시작된 것을 의미합니다. 
    여기 ‘부르다’(카라)는 ‘선포하다’, ‘크게 외치다’라는 뜻으로 여호와의 이름을 멀리까지 알린 것을 뜻합니다. 
    에노스 시대에 참 예배가 확립되고 바르게 세워짐으로, 몇몇 사람만이 아니라 많은 사람들에게 복음이 전파되고 알려지기 시작했음을 추정할 수 있습니다.


    에노스(Enos)

    에노스(Enos)는 창세기 5장에서 셋의 아들로 언급되는 인물로, 성경에서 중요한 신앙적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그의 이름은 인간의 나약함과 연약함을 상징하며, 그의 생애는 인류가 하나님을 향해 나아가기 시작한 중요한 전환점을 나타냅니다.

    1. 에노스의 이름: 히브리어 의미와 풀이

    에노스(Enos)의 이름은 히브리어로 'אֱנוֹשׁ' (에노시, Enosh)로 표기되며, 그 뜻은 '인간', '사람', '연약한 자'라는 의미를 지닙니다. 이 이름은 인류의 나약함과 필멸성을 상징하며, 인간이 본질적으로 죄와 고난 가운데서 하나님의 은혜를 필요로 하는 존재임을 암시합니다. 인간의 연약성을 강조할 때 에노시라는 단어를 사용했고, '아담'이란 단어는 보통 사람을 

    에노스의 이름은 성경에서 인간의 한계와 죄성을 강조하는 데 사용되기도 합니다. 예를 들어, 시편 103편 15절에서 "인생은 풀과 같으며, 그의 영화는 들의 꽃과 같도다"라는 구절에서 사용된 '인생'이라는 단어가 바로 '에노스'와 같은 히브리어입니다. 이는 인간의 삶이 얼마나 덧없고 연약한지를 보여주는 표현입니다.

    따라서, 에노스의 이름은 인류가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연약함을 깨닫고, 그분의 도우심과 은혜를 필요로 하는 존재라는 사실을 상징합니다. 그의 이름이 주는 의미는 인간이 스스로의 힘으로는 살아갈 수 없으며, 하나님께 의존해야 한다는 깊은 신학적 메시지를 담고 있습니다.

    2. 에노스의 생애

    에노스는 아담과 하와의 셋째 아들 셋의 아들로, 그의 탄생은 창세기 4장 26절과 창세기 5장 6-11절에서 언급됩니다.

    " 셋도 아들을 낳고 그의 이름을 에노스라 하였으며 그 때에 사람들이 비로소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 " (창세기 4:26)

    에노스의 생애는 그의 탄생 때 중요한 신앙적 전환점과 연결됩니다. 창세기 4장 26절에 따르면, 에노스가 태어난 시점에 사람들은 처음으로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구절은 인간이 처음으로 하나님을 향해 기도하고 예배하며, 그분을 인식하기 시작했음을 의미합니다.

    에노스의 생애는 성경에서 구체적으로 많은 기록을 남기지 않았지만, 그가 살았던 시대는 인류가 하나님께 다시 돌아가는 중요한 신앙의 시작을 알리는 시대였습니다. 셋의 계보를 통해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는 신앙적 행위가 시작되었으며, 에노스는 그러한 변화의 중심에 있었던 인물로 볼 수 있습니다. 에노스는 905세까지 살았으며, 그의 생애 동안 인류는 점차 하나님을 인식하고 그분께 나아가는 삶을 시작했습니다(창세기 5:11).

    3. 에노스 이야기의 교훈

    에노스의 짧은 기록 속에서 우리는 중요한 신앙적 교훈을 얻을 수 있습니다. 그가 등장한 시점에 사람들이 처음으로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다는 사실은, 에노스의 생애와 그가 상징하는 것이 신앙의 회복과 하나님께 나아가는 시작을 의미함을 보여줍니다.

    1) 하나님을 향한 회개와 돌아옴

    에노스의 생애와 그가 태어난 시점은 인류가 하나님을 향해 기도하고 예배하기 시작한 중요한 전환점을 나타냅니다. 그의 이름이 '연약함'을 상징하는 것처럼, 인간은 자신의 연약함을 깨달을 때에 비로소 하나님께 나아가게 됩니다. 인간은 스스로의 힘으로는 죄와 고통 속에서 벗어날 수 없으며, 하나님의 도우심을 필요로 하는 존재임을 인식해야 합니다.

    에노스의 시대에 사람들이 하나님을 찾기 시작했다는 것은, 인류가 자신들의 연약함을 깨닫고 하나님께 돌아오기 시작했음을 의미합니다. 이는 신앙 생활에서 회개와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상기시켜줍니다. 우리의 연약함을 인정하고, 그분의 은혜를 구할 때 우리는 참된 회복과 구원의 길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2) 기도와 예배의 시작

    에노스가 태어난 때에 사람들이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다는 것은 인류 역사에서 최초로 기도와 예배가 시작된 사건을 의미합니다. 하나님께서 인간과 다시 교제하시기 시작했으며, 사람들은 하나님을 향해 그들의 마음을 열고 그분의 이름을 부르기 시작했습니다. 이는 예배와 기도가 신앙 생활에서 얼마나 중요한 역할을 하는지를 보여줍니다.

    하나님께 기도하고 예배하는 것은 그분과의 관계를 맺는 중요한 방법입니다. 에노스의 시대에 시작된 이 신앙의 행위는 오늘날 우리의 신앙 생활에도 여전히 중요한 요소로 남아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우리의 마음을 열고, 그분의 도우심과 인도를 구해야 합니다. 기도와 예배는 단순한 종교적 의무가 아니라, 하나님과의 친밀한 교제를 의미합니다.

    3) 인간의 연약함과 하나님의 은혜

    에노스의 이름이 '연약함'을 의미하는 것은 인간의 필멸성과 한계를 상기시킵니다.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죄성과 연약함을 지닌 존재로, 하나님의 도우심 없이는 온전히 살아갈 수 없습니다. 에노스의 시대에 인류가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기 시작한 것은, 인간이 자신의 연약함을 깨닫고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기 시작했음을 상징합니다.

    이 교훈은 오늘날 우리에게도 적용됩니다. 우리의 삶에서 우리가 연약하다는 것을 깨닫는 순간이야말로 하나님께 나아가고, 그분의 도움을 구할 수 있는 기회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연약함을 아시고, 그분의 능력과 은혜로 우리를 도우시는 분이십니다. 에노스의 이야기는 우리가 연약할 때 하나님의 능력이 더욱 분명하게 드러난다는 중요한 진리를 가르쳐줍니다.

    4. 결론

    에노스는 성경에서 셋의 아들로, 그의 이름은 '연약한 자'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그의 생애는 인류가 처음으로 하나님을 향해 기도하고 예배하기 시작한 중요한 시기로 기록됩니다. 에노스의 시대에 사람들은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기 시작했으며, 이는 인류가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신앙의 회복을 의미합니다.

    에노스의 이야기는 우리의 연약함을 깨닫고, 하나님께 나아가 그분의 도움을 구해야 한다는 중요한 교훈을 줍니다. 또한, 기도와 예배는 신앙 생활에서 필수적인 요소임을 상기시킵니다. 인간은 하나님 없이 스스로의 힘으로 살아갈 수 없으며, 우리의 삶 속에서 하나님을 향해 나아가야 한다는 메시지를 에노스의 생애를 통해 배우게 됩니다. 에노스의 시대에 시작된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은 오늘날에도 계속되며, 우리는 우리의 연약함 속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는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에노스 이름 뜻 생애 교훈

    에노스 / 남자,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

    성경에서 하나님의 성호인 “여호와”가 처음으로 기록된 곳은 창세기 2:4이다. 
    그 후 창세기 2장에는 여호와가 계속해서 등장한다. 
    또한 아담과 하와는 첫 아들을 낳고 “여호와로 말미암아 득남하였다”(창 4:1)는 뜻으로 가인이라고 명명하였다. 
    그러므로 “여호와”는 이미 에노스 이전부터 그렇게 기록되고 불려졌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이 구절은 에노스 때에 “사람들이 비로소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고 말하고 있다. 
    이 말을 문자적으로 받아들이면 이 구절은 앞에 나온 증거들과 충돌된다. 
    그렇다면 이 뜻은 무엇인가?

    창세기 4:26의 “비로소...불렀더라”는 히브리어(후할리크로)를 문자적으로 번역하면 “부르기를 시작했다”이다. 
    그러므로 이 말의 문자적 의미는 분명히 셋이 에노스를 낳은 때로부터 사람들이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다는 것이다. 
    그러나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에노스 이전에도 사람들이 이미 여호와를 불렀다. 
    그러므로 이 구절의 의미는 문자적으로 그때 사람들이 여호와란 성호를 처음 불렀다는 것이 아닌 다른 의미를 나타내는 것임이 분명하다.

    여기에 대한 해석으로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다. 

    첫째, 체계적인 공적 예배가 시작되었다, 
    둘째, 마치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을 그리스도인이라고 부르는 것처럼 셋의 후예가 자신들을 여호와의 이름으로 부르기 시작했다. 
    셋째, 셋의 후예가 가인의 후예에게 전도하기 시작했다. 
    넷째, 가인의 후예가 여호와의 이름을 모독하기 시작했다.

    결론부터 말하면 이 구절은 이중 어느 하나의 의미보다는 이 모든 의미를 포함한 것으로 보는 것이 가장 건전한 이해이다. 
    먼저 성경에서 “여호와의 이름을 부른다”는 말은 종종 공적인 예배를 의미하는 것으로 사용되었다. 
    아브라함은 가는 곳마다 예배를 드렸는데, 성경은 그 사실을 그가 “단을 쌓고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다”고 한다(창 12:8; 13:4; 21:23). 
    이외에도 성경은 여호와를 부르는 것이 예배임을 여러 곳에서 나타낸다. 

    예를 들어 엘리야는 갈멜산에서 “나는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리니 이에 불로 응답하는 신 그가 하나님이니라”(왕상 18:24)고 하였고, 요엘은 “누구든지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을 것이라”(욜 2:32)고 하였으며, 다윗은 하나님을 거절하는 이방은 “주의 이름을 부리지 아니하는 열국”(시 79:6)이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여기 창세기 4:26에서 사용된 이 구절의 의미도 그와 같은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그래서 웬함(Gorden N. Wenham)도 “창세기 4:26은 앞의 구절들이 육축, 음악, 기게 만드는 것의 기원을 알려주는 것처럼 이 구절도 정규적인 거룩한 예배의 기원을 알려주고 있다”(WBC, 1:116)고 하였다. 
    이러한 이해는 재림교회 성경주석(SDABC)을 비롯하여 거의 모든 주석들이 동의하고 있는 바이다.

    이렇게 셋의 후예들로부터 공적인 예배가 시작되었을 때, 자연스럽게 위에서 언급한 나머지 세 가지의 결과들이 나타났을 것이다 .당연히 셋의 후예들은 자신들을 여호와의 이름으로 부리기 시작하였을 것이고, 가인의 후예들은 하나님을 모독하기 시작하였을 것이다. 이러한 이해와 일치하게 데이크(Dake) 주석은 “일반적으로 이때에는 인류에게 두 부류가 있었다고 믿는다. 하나는 셋의 후예로서 신앙인의 계보이고 다른 하나는 불신앙의 계보이다....그러므로 이 구절을 직역하면 ‘그 때 사람들이 여호와의 이름으로 그들 자신을 부르기 시작했다’ 이며, 혹은 ‘그들이 여호와의 이름으로 우상의 신을 부르기 시작했다’가 된다”고 하였다. 엘렌 G 화잇도 이러한 이해에 동의하면서 이 구절의 의미를 다음과 같이 설명하였다.

    “ 그러나 인구가 증가함에 따라 두 계급 사이의 구별이 더욱 현저하게 되었다. 한편에서는 하나님께 충성함을 공공연히 고백하였고 다른 편에서는 하나님을 무시하고 불순종하였다”








     
    그리고 특히 이 이름은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과 언약을 맺은 이후에 이스라엘 가운데 임재하시어 그들과 함께하시고 그들을 통치하시며 그들에게서 경배를 받으시는 언약의 하나님을 나타내는 용어로 사용된다(출 3:13-15; 6:7; 7:5; 레 11:45; 22:32, 33). 

    본 구절도 이스라엘 백성이 받는 징계를 통하여 그들을 다스리시는 하나님은, 이방 우상들과 같이 형상으로 만들어져 섬김을 받는 분이 아니시고 그들의 조상 때부터 언약을 맺으신 분이시며 스스로 계시는 자존자이심을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알게 하려 하신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백성들을 징계하시어 당신의 뜻을 나타내심을 암시해준다. 
    한편 하나님의 이런 의도는 심판 후에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심판의 멍에에서 건져내신 사건을 통해서도 알려지기를 바라신 것이기도 하다(34:27; 37: 6, 13). 
    또한 이는 이스라엘 주위의 열국들도 알기를 바라신 것이었다(25:7, 11; 29:6).


    알리라(알다. 야다. 3045) יָדַע  

    1. 보다.  2. 지각하다. 3. 삿 13:21  
    발음 [ yâdaʽ ]  
    구약 성경  /  940회 사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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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명] 총명한 자(단 2:21), 감각(잠 23:35), 지식(느 10:28), 지식인(전 9:11), 친구(왕하 10:11, 시 31:11), 친족(룻 2:1), 친우(시 55:13). 
    [부] 능히(대하 2:14), 부지중(아 6:12), 반드시(창 15:13), 밝히(삼상 20:3), 분명히(왕상 2:37, 렘 28:15), 순식간에(시 35:8), 부지런히(잠27:23).



    내가...한 말이 헛되지 아니하니라 
    - '헛되지'(하남)란 문자적으로는 '은혜로운', '관대한'을 뜻하는 히브리어 '헨'(*)에서 유래된 말로 '값없이', '까닭없이' 등의 뜻을 의미한다. 따라서 본 구절은 하나님께서 선포하신 말씀은 아무런 대가없이 행해진 헛된 말씀이 아니라 신실하시고 은혜로우신 그분의 속성에 따라 반드시 그대로 이루어지는 말씀임을 뜻한다(사 55:11).



    보십시오. “8그러나 너희가 여러 나라에 흩어질 때에 내가 너희 중에서 칼을 피하여 이방인들 중에 살아 남은 자가 있게 할지라. 9너희 중에서 살아남은 자가 사로잡혀 이방인들 중에 있어서 나를 기억하되 그들이 음란한 마음으로 나를 떠나고 음란한 눈으로 우상을 섬겨 나를 근심하게 한 것을 기억하고 스스로 한탄하리니 이는 그 모든 가증한 일로 악을 행하였음이라. 10그 때에야 그들이 나를 여호와인 줄 알리라 내가 이런 재앙을 그들에게 내리겠다 한 말이 헛되지 아니하니라.” 이스라엘은 죽임당할 뿐 아니라 칼을 피해 살아남은 자가 있는데, 그들은 사로잡혀 이방인들 중에 있어 하나님을 버리고 우상숭배하여 하나님을 근심하게 한 것을 기억하고 한탄할 것입니다. 그 때 그들은 하나님이 여호와인 줄 알게 될 것입니다.

    칼과 기근과 전염병으로 망할 때

    또한 이스라엘은 칼과 기근과 전염병으로 망할 때 하나님이 여호와인 줄 알게 될 것입니다. 에스겔 6장 11-14절을 보십시오. “11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이르시되 너는 손뼉을 치고 발을 구르며 말할지어다. 오호라. 이스라엘 족속이 모든 가증한 악을 행하므로 마침내 칼과 기근과 전염병에 망하되 12먼 데 있는 자는 전염병에 죽고 가까운 데 있는 자는 칼에 엎드러지고 남아 있어 에워싸인 자는 기근에 죽으리라 이같이 내 진노를 그들에게 이룬즉 13그 죽임 당한 시체들이 그 우상들 사이에, 제단 사방에, 각 높은 고개 위에, 모든 산 꼭대기에, 모든 푸른 나무 아래에, 무성한 상수리나무 아래 곧 그 우상에게 분향하던 곳에 있으리니 내가 여호와인 줄을 너희가 알리라. 14내가 내 손을 그들의 위에 펴서 그가 사는 온 땅 곧 광야에서부터 디블라까지 황량하고 황폐하게 하리니 내가 여호와인 줄을 그들이 알리라.” 이스라엘의 죄로 인해 망할 때 먼데 있는 자는 전염병에 죽고, 가까운데 있는 자는 칼에 죽고, 남아있어 에워싸인 자는 기근에 죽습니다. 그들의 시체가 우상에게 분향하던 곳에 있을 때 이스라엘은 하나님이 여호와인 줄을 알게 됩니다.

    유다가 망하는 날 그들이 우상 앞에서 죽고 이방에 포로로 잡혀가는 날, 그들이 우상 앞에서 멸망하는 날, 이스라엘이 칼과 전염병과 기근이 죽는 날 오히려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여호와로 알게 됩니다. 그들이 이방에서 회개하고 애통할 때 하나님을 알게 됩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 날 하나님은 살아계심을 나타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살아계십니다. 하나님은 눈을 창조한 분으로 보는 분입니다. 하나님은 귀를 창조한 분으로 들으십니다. 하나님은 유다가 하는 일들을 다 보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들의 죄악을 듣고 보기에 하나님이 그들을 심판할 때 하나님은 살아계시고 역사하는 하나님임이 드러납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여호와임을 알게 하는 것입니다.

    왜 이스라엘이 멸망할 때 여호와를 하나님으로 알게 됩니까? 하나님은 약속을 지키는 신실한 분임이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심판하는 이유는 하나님은 언약의 하나님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과 언약을 맺고, 그 언약대로 행합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언약에 충실하면 그들에게 복을 주십니다. 그들의 하나님을 떠나 우상을 숭배하면 하나님은 언약대로 그들을 심판합니다. 하나님이 심판하심은 하나님의 언약에 신실한 분이기에 이스라엘은 심판의 날 하나님이 여호와인 줄을 알게 됩니다. 이스라엘의 배교와 심판은 하나님이 모세에게 말했고 하나님은 심판 뿐 아니라 회복을 약속했습니다. 신명기 30장 6절에서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회복을 약속했습니다. 이스라엘이 우상을 숭배할 때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심판하지만 그들이 먼 나라에 있을 때 그들 마음에 할례를 베풀어 그들이 마음과 성품과 힘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하게 할 것이라 약속했습니다. 하나님은 언약대로 이스라엘을 심판합니다. 하나님의 약속대로 이스라엘을 심판하는 날 이스라엘은 하나님은 여호와이시며, 그는 살아계시고 역사하며, 언약을 지키는 하나님임을 알게 할 것입니다.

    심판의 날 그들이 하나님을 여호와로 아는 것은 그들이 하나님의 정의와 사랑을 아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유다를 심판하는 이유는 하나님의 정의와 사랑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을 심판하는 것은 마치 아이를 징계하는 부모와 같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손바닥에 새겼으며 아비가 자녀를 긍휼이 여김같이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긍휼이 여깁니다. 하나님의 이스라엘을 심판하는 것은 본심이 아니고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불쌍이 여깁니다. 예레미야가 말했듯 하나님이 이스라엘에 두신 뜻은 재앙이 아니라 장래에 소망을 주시는 것입니다. 이 하나님의 약속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성취됐는데, 새 언약을 통해, 마음의 할례를 통해, 그리고 새 피조물이 되게 하심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 우리를 하나님의 새 백성을 만드심으로 성취됐습니다.

    이스라엘에게 심판은 고통스럽지만 이 고통스러운 심판으로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알게 될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심판을 통과하고 회개하여 새로워지면 그들에게는 새 언약, 새 출애굽, 새 하늘과 새 땅, 새 피조세계, 새 하나님의 백성이 기다립니다. 이 모든 것 안에 하나님이 이 세상을 향한 사랑과 긍휼이 흘러 넘칩니다. 그들이 당하는 고통과 심판이 아니란 말은 아닙니다. 심판은 심판이고, 고통은 고통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사랑은 이런 심판을 넘어 더 크고 영광스러운 미래를 약속합니다. 그렇기에 이스라엘이 심판당하는 날, 회개하는 날 그들은 하나님이 여호와이심을 깨달아 알 것입니다. 아멘 할렐루야.

    제가 하나님의 저를 향한 사랑을 확신하고 하나님이 여호와이심을 확신합니다. 우리 육신의 부모도 나를 얼마나 사랑하고 나를 인해 가슴이 아팠는가를 압니다. 하물며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는 얼마나 우리를 사랑하고 가슴아파하실까 하는 것을 기억합니다. 내가 어떤 상황에 처해도 하나님의 사랑을 절대적으로 확신하고 하나님의 사랑의 품안에 안겨서 살겠습니다. 하나님은 사랑하는 자들에게 여러 훈련을 주시고, 하나님은 저도 사랑하셔서 여러 훈련을 주심을 감사합니다. 그리고 이 훈련을 통해 하나님은 하나님이 여호와이심을 알게 하십니다. 제가 오랫동안 하나님을 믿음으로 살지 않았지만 지금은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하시는 말씀을 붙들고 먼저 하나님의 나라를 구하는 삶을 살고자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다스리시는 세상, 부활한 예수가 왕으로 다스리는 세상을 살아내고자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약속을 지키셔서 이 모든 것을 더하시며 하나님의 여호와이심을 드러내실 것을 믿습니다. 아멘 할렐루야. 오늘도 제가 하나님이 주시는 훈련을 경외함을 받게 하시고 그리고 이를 통해 하나님이 여호와되심을 체험하게 하시길 기도합니다. 아멘 할렐루야.


    내가 여호와인 줄을 너희가 알리라 (에스겔 6장)

    하나님의 말씀이 또다시 임한다. 
    그러나 이번에는 사람에게가 아니라, 산과 언덕과 시내와 골짜기를 향한 외침이다. 
    에스겔은 무너진 땅, 황폐한 땅, 우상숭배로 오염된 땅을 향해 예언한다. 
    말씀이 임하는 대상은 더 이상 마음이 열린 백성이 아니다. 
    그들의 귀는 닫혔고, 그들의 눈은 멀었기에 이제 자연 자체가 증인이 되어야 한다. 
    산이 듣고, 골짜기가 응답해야 하는 절박한 상황, 그것이 이스라엘의 영적 현실이었다.

    ​하나님은 그 땅 위에 칼을 두신다. 
    산당은 무너지고, 제단은 깨지고, 우상 앞에 무릎 꿇었던 자들은 그 우상 앞에서 엎드러져 죽는다. 
    얼마나 처절한가. 
    예배가 회복되지 않으면, 삶 전체가 붕괴된다. 
    예배의 자리에서 하나님을 버린 자는, 삶의 자리에서도 하나님의 보호를 잃는다. 
    이스라엘의 재앙은 단지 정치적 사건이 아니며, 운명의 굴레가 아니다. 
    그것은 하나님 없는 예배의 끝자락에서 예언된 필연이었다.

    ​그들의 시체는 우상 앞에 던져지고, 해골은 제단 사방에 흩어진다. 
    마치 그들이 예배하던 대상이 누구였는지를 마지막으로 증언하듯, 그들의 죽음조차 그 잘못된 숭배를 고발한다. 
    하나님께서 무너뜨리시는 것은 단지 형상이 아니다. 
    그것은 마음이다. 
    음란한 눈, 음란한 마음. 
    하나님을 향하던 시선을 빼앗아 버린 정욕과 탐욕. 
    그로 인해 하나님께서 “근심하셨다”고 하신다. 
    하나님의 아픔은 백성의 고통 이전에 시작된다.

    ​그러나 이 심판의 파도 속에도 은혜의 줄기는 남아 있다. 
    “살아남은 자가 있게 할지라.” 
    완전한 전멸 속에서도 하나님은 자비를 거두지 않으신다. 
    그 살아남은 자들, 그 흩어진 자들, 그 수치 가운데 남겨진 자들은 “기억할 것”이다. 
    자신들이 떠났던 하나님을. 자신들이 거부했던 그 이름을. 하나님의 진노는 단지 벌이 아니라, 회복을 위한 흔들림이었다. 
    스스로를 한탄하게 하는 은혜, 기억하게 하시는 사랑. 이스라엘의 회복은 그 절망의 땅에서 시작된다.

    ​“그 때에야 그들이 나를 여호와인 줄 알리라.” 
    이 구절은 에스겔 전반을 꿰뚫는 선언이다. 
    심판의 이유도, 은혜의 목적도, 회복의 끝도 결국은 이것이다. 
    ‘내가 여호와인 줄 너희가 알리라.’ 
    하나님은 잊힌 이름이 되지 않으신다. 
    땅을 흔드시고, 역사를 흔드셔서라도 당신의 이름을 기억하게 하신다. 
    우리가 타락을 가벼이 여기고, 우상을 습관으로 받아들이고, 하나님의 말씀을 사소하게 여기는 시대에, 주님의 이 외침은 낯설고도 두렵게 다가온다.

    ​에스겔은 무너진 제단과 죽은 시체들을 보며 예언한다. 

    그러나 그 예언은 죽음의 선언이 아니라, 다시 살아야 할 이유를 일깨우는 고발이다. 
    하나님의 손은 심판의 손이지만, 그 손은 또한 살리시는 손이다. 
    “내가 내 손을 그들의 위에 펴서…” 이 말씀은 심판이지만 동시에 간섭이요, 주권의 표지다. 
    하나님은 여전히 그 땅을 떠나지 않으신다. 
    오히려 가장 깊이 개입하신다. 
    황폐한 땅, 재앙의 중심에서 다시금 하나님의 이름이 드러난다.

    ​오늘 우리는 어디에 서 있는가?
    황폐한 제단인가? 
    살아남은 자의 회개 가운데 있는가? 
    하나님의 이름은 우리가 축복받을 때만이 아니라, 무너질 때도 선포된다. 
    그 이름 앞에서만 우리는 다시 살아난다. 
    모든 무너짐의 끝자락에서 들려오는 음성. “내가 여호와인 줄 너희가 알리라.” 이 말씀이 오늘 우리의 무너진 심령을 깨우고, 숨은 우상을 부수며, 다시 예배의 자리로 부르신다.

    ​우리는 기억해야 한다. 
    무너진 자리에서 들리는 그 이름을. 심판 가운데서도 여전히 우리를 찾으시는 그분을. 
    그리고 다시 외쳐야 한다. 
    들을 귀를 가진 산과 골짜기처럼. 
    아직 살아 있는 자의 입술로. 주 여호와께서 말씀하셨노라.



    여호와인 줄 알리라 

    바벨론의 느부갓네살 왕은 주전 597년경에 이스라엘의 남유다에 2차 침공을 하여 많은 사람들을 바벨론 포로로 끌고 갔습니다. 
    그 때 바벨론 포로로 끌려간 에스겔 선지자는 바벨론에 있으면서 선지자로 활동을 하였습니다. 
    오늘 말씀은 그러한 상황 속에서 왜 이스라엘의 남유다가 바벨론을 통해 심판을 받고 무너지게 되는지 에스겔 선지자를 통해 예언한 내용입니다.

    오늘 본문인 6장 말씀의 중심내용은 1-7절까지는 우상숭배로 인한 심판에 대해, 8-10절까지는 살아남은 자들의 한탄함에 대해, 11-14절까지는 심판을 통해 자신을 알리시는 여호와로 볼 수 있습니다.

    우상 숭배로 인한 심판(1-7절)

    (3) 이르기를 이스라엘 산들아 주 여호와의 말씀을 들으라 주 여호와께서 산과 언덕과 시내와 골짜기를 향하여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나 곧 내가 칼이 너희에게 임하게 하여 너희 산당을 멸하리니

    사무엘 시대에는 산당이 부정적인 장소로 여겨지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왕국이 분열되고 북왕국 이스라엘을 세운 여로보암 왕(BC 930-909년)이 벧엘과 단에 제단을 세우고 산당을 지은 이후로 ‘산당’은 상당히 부정적인 이미지, 즉 우상 숭배의 장소로 여겨지게 되었습니다.

    주로 높은 산꼭대기에 자리잡은 ‘산당’이라는 단어의 문자적인 의미는 ‘높은 곳’ 입니다. 우상 숭배를 하던 그들은 세상 그 어떤 것보다 높다고 스스로 교만했습니다. 높다고 스스로 자랑하던 자들이 이제는 하나님을 통해 가장 비참한 모습으로 철저하게 낮아지게 되는 것을 우리는 볼 수 있습니다.

    (4) 너희 제단들이 황폐하고 분향제단들이 깨뜨려질 것이며 너희가 죽임을 당하여 너희 우상 앞에 엎드러지게 할 것이라

    이스라엘 백성의 우상숭배는 ‘너희 제단들’, ‘분향 제단들’, ‘너희 우상’이라는 표현을 통해 강조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제단을 쌓고, 건물을 세우고 그곳에서 우상을 섬겼습니다. ‘분향 제단’ 이라는 단어는 ‘태양 기둥’이라는 의미를 포함하고 있으며, ‘제사를 드리는 건물’이나 ‘예배실’도 함께 포함 합니다. 즉 하나님은 우상과 관계된 것은 제단이든 건물이든 모두 다 철저하게 부수시겠다고 선언하십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여호와 하나님을 경배하지 않고 우상을 숭배하는 큰 잘못을 범했습니다. 그들은 제단 앞에서 제사를 드리며 자신들의 ‘호의호식’만을 빌었습니다. 우상 숭배를 극도로 싫어하시는 하나님은 우상 숭배자들을 이제 철저하게 벌하시고 그들이 ‘호의호식’을 빌었던 제단 주변에서 죽도록 하여 우상 앞에 엎드러진다고 말씀 하십니다. 하나님의 진노로 인해 하나님께서 지켜 주시지 않는 평안은 얼마나 허무하게 사라질 수 있는지 우리는 오늘 말씀을 통해서 확실하게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스스로 하나님을 열심히 잘 믿는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어쩌면 하나님이 아닌 결코 영원하지 않은 다른 무언가에 우리들의 인생을 맡기고, ‘호의호식’만을 구하는 것은 아닌지 고민해 볼 수 있어야 겠습니다. 하나님은 높아진 것을 얼마든지 낮추실 수 있으며 반대로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낮아질 때, 우리를 높여 주실 수도 있는 분입니다. 우리가 스스로 만든 우상에 아무리 집착하고 열심히 빌어도 결코 영원한 평안을 얻을 수 없다는 것을 오늘 말씀을 통해 우리는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살아남은 자들의 한탄(8-10절)

    (8) 그러나 너희가 여러 나라에 흩어질 때에 내가 너희 중에서 칼을 피하여 이방인들 중에 살아 남은 자가 있게 할지라

    하나님은 심판하시는 중에도 긍횰을 잊지 않으십니다. 그래서 ‘살아 남은 자가 있게 할지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살아 남은 자들의 특징은 악에 대하여 이제는 한탄하며 회개하는 마음을 품었습니다.

    (9) 너희 중에서 살아 남은 자가 사로잡혀 이방인들 중에 있어서 나를 기억하되 그들이 음란한 마음으로 나를 떠나고 음란한 눈으로 우상을 섬겨 나를 근심하게 한 것을 기억하고 스스로 한탄하리니 이는 그 모든 가증한 일로 악을 행하였음이라

    살아남은 그들은 예언되었던 모든 재앙을 겪었기 때문에 왜 그런 일이 벌어졌는지 깨닫고 스스로 한탄하게 됩니다. 남은 자들은 그제서야 하나님이 진정으로 어떤 분이신지 깨닫게 되고 회개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끔찍한 징계를 당한 뒤에 이러한 사실을 인정하게 되는 것은 우리가 볼 때 참 안타깝습니다. ‘소 잃고 외양간 고친다’는 속담처럼 이러한 우를 범하지 말고 지혜로운 자는 하나님의 심판이 있기 전에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분명히 깨달을 수 있어야겠습니다.

    심판을 통해 자신을 알리시는 여호와(11-14절)

    (11) 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이르시되 너는 손뼉을 치고 발을 구르며 말할지어다 오호라 이스라엘 족속이 모든 가증한 악을 행하므로 마침내 칼과 기근과 전염병에 망하되

    하나님은 에스겔 선지자에게 ‘손뼉을 치고 발을 구르며 말하라’고 명령하십니다. 이러한 행동은 하나님의 심판에 대한 탄식의 행동으로 볼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행한 ‘가증한 악’으로 인해 하나님은 ‘칼과 기근과 전염병으로 심판 하십니다.

    11절의 ‘가증한 악’에서 ‘가증하다’는 단어는 ‘역겹다, 혐오스럽다’에서 왔습니다. 즉 ‘가증한 악’은 ‘역겨운 죄악들’ 입니다. 하나님이 극도로 싫어하시는 우상숭배가 얼마나 역겹고 끔찍한 것인지 우리는 잘 알 수 있습니다.

    (12) 먼 데 있는 자는 전염병에 죽고 가까운 데 있는 자는 칼에 엎드러지고 남아 있어 에워싸인 자는 기근에 죽으리라 이같이 내 진노를 그들에게 이룬즉

    하나님의 심판이 임하는 대상은 참 광범위합니다. ‘먼 데 있는자, 가까운 데 있는 자, 남아 있어 에워싸인 자’ 모두가 심판의 대상입니다. 그 어느 누구도 예외가 없습니다.

    (14) 내가 내 손을 그들의 위에 펴서 그가 사는 온 땅 곧 광야에서부터 디블라까지 황량하고 황폐하게 하리니 내가 여호와인 줄을 그들이 알리라

    지역적으로는 ‘온 땅 곧 광야에서부터 디블라’까지 심판이 임할 것이라고 합니다. ‘디블라’는 열왕기하 23장 33절에 나오는 ‘리블라’로 추정되는 지역으로, ‘하맛에 있는 북쪽 지경의 도시’ 입니다. 그러므로 ‘광야에서부터 디블라까지’라는 표현은 ‘단에서 브엘세바까지’라는 표현과 동일한 의미입니다. 남과 북의 순서만 바뀐 것이며 이스라엘 백성이 사는 모든 지역이 심판의 대상이 된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심판은 모든 지역, 모든 자에게 임할 것이고, 하나님의 심판을 통하여 백성들은 여호와 하나님을 분명히 알게 될 것입니다.

    (10) 그 때에야 그들이 나를 여호와인 줄 알리라 내가 이런 재앙을 그들에게 내리겠다 한 말이 헛되지 아니하니라

    우리는 세상의 여러 상황 속에서 어려움을 겪어봐야 무엇이 옳은 길인지 깨닫게 되는 경우들이 많습니다. 
    오늘 그들의 교만함과 우상숭배로 인해 심판을 받게 되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보며 우리의 모습들을 돌아볼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정말 몰랐던 것이 아니라, 알면서도 애써 무시할 때가 있었습니다. 
    우리가 ‘이정도 쯤이야 하나님도 이해해주실거야!’, 
    ‘이 정도 불순종 한다고 해서 바로 벌하는 하나님은 아니시지!’ 라는 잘못된 믿음으로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을 이용 할 때가 있었는지도 모릅니다.

    만약 우리들의 삶 속에서 하나님을 계속해서 무시한다면, 오늘 말씀의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결국 끔찍한 파국을 맞이 할 수 밖에 없습니다. 
    우리들은 어떠한 상황 속에서도 삶의 목적과 이유 되시는 하나님만을 바라보고 경외하며 하나님을 사랑하고 사람들을 사랑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오늘도 하나님의 친밀하심 속에서 겸손히 하나님의 뜻을 구하고 함께 지어져 가는 우리들이 되기를 축복합니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때로는 우리가 교만하여 내 마음 속 은밀한 곳에 나만의 산당을 세우고 하나님 보다 다른 것들을 더 의지하며 살아갈 때가 많았음을 고백합니다. 
    우리가 때 늦은 후회와 한탄을 하지 않도록 역겨운 죄악들을 멀리하기를 원합니다. 
    더욱 하나님께 집중하여 거룩한 삶을 살아가도록 우리들의 마음과 생각들을 끝까지 붙들어 주시옵소서. 
    우리가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사람들을 사랑하겠습니다. 
    하나님의 친밀하심 속에서 함께 지어져가도록 저희들을 붙들어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묵상을 돕는 질문

    1. 하나님은 산꼭대기에 있는 ‘산당’까지도 철저하게 징계를 하십니다. 
    당신 안에 교만함으로 높이 세운 ‘산당’과도 같은 우상은 무엇이 있습니까?
    2. 모든 재앙을 경험한 후에 살아남은 자들이 한탄 하였던 것처럼 당신도 때 늦은 후회를 해본 적이 있습니까?
    3. 당신이 생각하기에 이 세상 속에는 ‘역겨운 죄악들’과 같은 ‘가증한 악’은 어떤 것들이 있습니까?
    4. 당신은 심판을 받기 전에 하나님이 여호와이심을 알고 매일 매일 그렇게 고백하는 삶을 살기 위해 무엇을 결단하시겠습니까?


    2025년 8월 말 현재 한국의 외환 보유액 
    4천 500억 달러

    미국에서 투자액 일시불 선납 요구액
    3천 500억 달러 

    * 자동차 관세 25% - 일본 15%, 미국 자동차 시장은 완전히 붕괴될 것

    1천억 달러 연료 구입 약속


    9월 2일(화) 에스겔 1-3장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하늘이 열리며(1:1)


  • 에스겔 제 1 장: 에스겔의 환상과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남. 하나님께서 에스겔을 부르시는 장면이 묘사됨.
  • 에스겔 제 2 장: 하나님이 에스겔에게 말씀하시고 이스라엘 백성을 향한 경고를 전하라고 명령하심.
  • 에스겔 제 3 장: 에스겔이 하나님의 말씀을 먹고 이스라엘 백성에게 전하라는 사명을 받음.




  • 때는 제 삼십년 넷째 오일이었다. 그 때에 내가 포로로 잡혀 온 사람들과 함께 그발 강 가에 있었다. 나는 하나님이 하늘을 열어 보여 주신 환상을 보았다.
    In the thirtieth year, in the fourth month on the fifth day, while I was among the exiles by the Kebar River, the heavens were opened and I saw visions of God.

    1. 제 삼십년 사월 오일에 내가 그발강 가 사로잡힌 자 중에 있더니 하늘이 열리며 하나님의 이상을 내게 보이시니
  • 2. 여호야긴왕의 사로잡힌지 오년 그 오일이라
  • 3. 갈대아 땅 그발강 가에서 여호와의 말씀이 부시의 아들 제사장 나 에스겔에게 특별히 임하고 여호와의 권능이 내 위에 있으니라.

  • 하늘이 열린다는 것은 특별한 은총을 경험하는 사건이 일어났다는 것을 말합니다.
    에스겔 선지자는 2차 포로 때 바벨론으로 끌려갔습니다.
    포로가 된 사람은 소망이 없습니다.
    소망이 있다면 고향 땅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늘이 열리는 특별한 은혜를 경험합니다.

    우리는 모두 죄의 포로가 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하늘이 열리며 주 예수를 영접하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자냐답게 살아가야 할 특별한 임무를 부여 받았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로 살아가려면 두 가지가 필요합니다.

    첫째는 하나님의 밀씀(3절)
    둘째는 여호와의 권능(3절)

    (전개 이야기) 오영석총장

    작은 관심(關心) 오영석

    전남 해남에서 머슴 집 아들로 태어난 아이가 있었습니다. 
    태어날 때부터 몸이 허약하여 홍역을 심하게 앓자 그의 어머니는 
    ‘얘가 제대로 사람 구실이나 할 수 있을까?’를 걱정할 정도였습니다. 
    가난한 가정 형편 때문에 초등학교를 졸업했지만, 
    중학교에 가지 못하고 머슴인 아버지를 따라 나무를 하고 풀을 베는 일로 
    가난한 살림을 도와야 했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흐를수록 그는 너무나도 학교에 가고 싶었습니다. 
    소년은 어릴 때부터 엄마와 같이 다니던 교회에 가서 학교에 가게 해 달라고 
    며칠 기도하다가 하나님께 편지 한 장을 썼습니다. 

    “하나님, 저는 공부를 하고 싶습니다. 
    굶어도 좋고 머슴살이를 해도 좋습니다. 
    제게 공부할 길을 열어주세요. 
    그 길만 열린다면  제 생애를 바칠 테니 부디 하나님 응답해 주세요.” 

    소년은 공부에 대한 자신의 열망과  가난한 집안 형편을 편지에 적었습니다. 
    그리곤 편지봉투 앞면엔 ‘하나님 전 상서’라고 쓰고, 뒷면엔 자기 이름을 써서 우체통에 넣었습니다. 

    소년이 쓴 이 편지를 발견한 집배원은 어디다 편지를 배달해야 할지 알 수 없어 
    고민하던 끝에 ‘하나님 전상서라고 했으니 교회에 갖다 주어야겠다’라고 생각하고 
    해남읍에 있는 한 교회 목사님께 편지를 전해 주었습니다. 
    당시 그 교회 목사님은 농촌 계몽운동에 앞장선 분이었는데, 
    소년의 편지를 읽고 큰 감동을 받고 그를 불러 교회에서 운영하는 보육원에 살게 하고 과수원 일을 돕게 하면서 
    중학교에 보내주었습니다. 
    소년은 열심히 공부해서 전남대 의대에 합격했습니다. 
    그러나 아프리카에서 병든 흑인들을 무료로 치료해 준 슈바이처(Schweitzer, 1875-1965) 박사와 같은 좋은 의사가 되려면, 
    슈바이처 박사처럼 먼저 신학을 공부하겠다는 생각으로 한국신학대학에 진학합니다. 
    신학교를 졸업한 후에는 고향에서 목회를 하다가 스위스 바젤대학교로 유학를 가게 되었고, 
    박사학위를 받고 돌아와서는 모교인 한신대의 교수가 됩니다. 
    그 소년이 나중에 한신대학교 제3대 총장까지 역임한 오영석(吳永錫) 전 총장입니다.

    간절함을 포기하지 않는 한 언젠가 반드시 이루어집니다. 

    오영석 총장의 이야기에서 ‘하나님 전 상서’라는 편지를 목사님에게 전달해 준 우체부 아저씨를 생각해 봅니다. 
    어쩌면 그분의 지혜가 있었기에 한 유명한 인재가 만들어질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한 소년이 쓴 편지를 받아들고서 어디로 보내야할 지 모를 때, 
    ‘뭐 이런 편지가 다 있어!’라고 생각하고 휴지통에 버렸다면 오영석 총장은 존재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사소하지만 그 우편배달부는 어린 소년의 꿈과 간절함이 담긴 그 편지를 교회 목사님께 전달했고, 
    소년의 꿈이 이루어지게 만들었습니다. 
    사소하지만 그 사소함을 사소하게 여기지 않는 따뜻한 마음으로 말입니다. 

    나에겐 사소하지만 누군가에게는 자신의 인생이 걸린 문제일 수 있고, 
    나에겐 별거 아니지만  누군가에게는 목숨처럼 소중한 것일 수도 있습니다. 
    작은 것 하나까지도 소중하게 볼 수 있는 마음을 가질 때, 
    우리의 그 작은 정성과 관심이  한 사람의 영혼을 살리고 인생에 복이 될 수 있습니다. 
    오늘도 내 주변에서 일어난 작고 사소한 것일지라도 관심을 가져 보십시다. 
    그 작은 관심이 누군가를 살리고,  누군가에겐 잊지 못한 선물이 될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 전 상서' 쓴 뒤 대학총장 된 소년

    편지라는 낭만적인 통신수단이 세상을 연결해주던 느슨했던 시대에 하나님에게 편지를 써서 자신의 꿈을 전달하려 했던 어린 소년이 있었다. 
    해남군 계곡면 사정리 출신이었다. 
    소년은 그 꿈을 이루었을까? 
    '하나님 전 상서'의 주인공 오영석목사(1943. 7. 18 전남 해남군 계곡면 사정리 출생)

    해남사람이면 거의 다 아는 총장님에 대한 전설 같은 이야기를 저는 최근에야 알게 되었습니다. 
    어렸을 때 '하나님 전 상서'라는 편지를 써서 무작정 우체통에 넣었다구요? 
    말하자면 무대포 정신이랄까, 일반적인 상식으로는 불가능한 꿈을 꾸시고 이룩하셨는데 어떻게 어린 소년이 그런 용기를 내셨는지요?

    "하하 무대포정신이 무슨 뜻인지 모르겠는데 막다른 골목에서 도저히 다른 방법이 없을 때 이판사판 뭐든 해보는거…. 아무 것도 하지 않는 것보다는 낫지 않나요?

    나는 초등학교를 졸업한 후, 집이 가난해 진학을 못했는데 너무나 공부하고 싶은 마음이 불타서 견딜 수 없었지요. 
    어느 날은 후배가 소개해 준 목포 유달원이라는 고아원을 버스비도 없어 운전수한테 욕을 먹어가며 찾아갔는데 '가족이 있으면 유달원에서 살 수 없다'고 해서 고하도에 있는 다른 시설까지 찾아간 적도 있었어요.

    거기서도 받아주지 않아 다음날 아침 목포로 나와 큰 상점과 가게를 돌아다니며 점원으로 쓰고 대신 야간 중학교를 임금 대신 보내주도록 호소를 했지요. 
    그러나 아무도 그 절실한 호소를 들어주지 않아 뜻을 이루진 못했습니다."

    당시 어린 시절 이야기를 더 들려주십시오. 무대포정신이 통하지 않자 하나님께 편지를 쓰신 거군요.

    "고아원이라도 들어가 공부하려했던 뜻을 이루지 못하고 집으로 돌아와서는 이전처럼 지게를 지고 산에 가서 땔감을 해오거나 논밭에서 어머님과 함께 일을 했는데 마음은 항상 공부 생각 밖에 없었어요. 
    초등학교를 졸업한 후 1년이 지나고 2년째 여름방학이 되어 동네교회에 여름성경학교가 열렸는데, 광주에서 간호학교에 다니는 여선생님이 와서 성경을 가르쳤어요. 
    그 선생님은 설교와 위생교육 외에도 '장발장'같은 흥미진진한 동화를 많이 해주셨는데 큰 감명을 받았지요. 
    당시 나는 교회 종지기로 아침 저녁 종을 쳤는데 하루는 종이 비틀어져서 위에 올라가 바로잡고 내려오려는데 갑자기 눈물이 터져서 앞이 보이지 않더군요.

    선생님 같은 여성도 배우면 저렇게 큰일을 하는데, 나는 왜 배우지 못하고 이렇게 허송세월하고 있나 기가 막혀서였지요. 
    한참을 종각 위에서 울다가 땅으로 내려와서 종을 쳤던 기억이 있습니다."

    보통 사람들은 희망하는 일이 이뤄지도록 자신이 믿은 신께 빌거나 기도를 하는데요.

    "기도도 엄청 했지요. 
    낮에는 산과 들에서 일하면서 '공부할 수 있는 길을 열어주시라'고 기도하고 저녁에도 잠이 깊이 들면 하나님이 부르는 것을 듣지 못할까 봐 자다가 깨다가 하면서 기도를 했습니다. 
    사무엘처럼 하나님의 부름을 직접 듣지는 못했지만 그때 하나님이 내편이라는 것을 강하게 느꼈어요."

    어느날 우체통에서 편지들을 꺼내 분류하던 해남읍 우체국 직원들이 '하나님 전 상서'라는 낯선 편지를 보고 우체국장께 드렸는데 그 우체국장이 마침 해남읍교회의 신실한 신도였고, 결국 그 교회 이준묵 목사님께 전해져 공부의 길이 열렸다고 하지요. 
    아무렇게나 써 넣은 '편지한 장'이 그토록 원했던 학업의 길을 열어준 현실로 나타났는데 그게 기독교에서 말하는 기적입니까. 

    진정한 기적이란 무엇일까요?

    "아무렇게나 쓴 편지가 아닙니다. 
    그 편지를 쓰기까지 얼마나 오래 생각하고 궁리하고 또 기도를 했겠습니까? 
    소년이 할 수 있는 방법을 다 하고서 마지막으로 하나님께 담판하듯 편지를 보낸 것이지요. 
    나는 살아계신 하나님께서 어린 나의 기도를 듣고 내 편지에 어떤 방식으로든 대답하리라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그 대답을 기다리는 심정이었고요.

    그러던 어느 날, 김찬원이란 해남읍교회 장로님께서 나를 찾아오셨습니다. 
    내 편지를 읽어본 이준묵 목사님께서 찾는다는 것이었습니다. 
    1956년 3월 6일인데요. 
    비가 억수로 쏟아지는데 우산도 없어 비를 맞으면서 사정교회 장로님께서 주신 비파나무 분재 한그루를 안고 버스에 올랐었지요. 
    나에게 새로운 미래가 열린 날이었습니다. 
    이 이야기는 '하나님은 그의 역사를 사람들을 통해 이루신다.'는 말씀을 생각나게 합니다. 
    우리는 그것을 흔히 '기적'이라고 하지요."

    이준묵 목사님을 만나 그가 운영하시는 등대원에서 중?고등학교를 마치고 의과대학에 합격했는데 도중에 진로를 바꾼 배경은 무엇입니까?

    "의대를 택한 건 목사님 사모님의 추천이었지요. 
    1962년 2월 해남고등학교를 졸업하고서 선배와 함께 전남의대에서 보낸 합격증을 첨부하여 지원서를 제출하려고 버스를 탔는데 차 안에서 선배가 이런 말을 하는거예요. 
    "아프리카에서 병든 흑인들을 무료로 치료하여주는 슈바이처 박사같은 좋은 의사가 되려면, 슈바이처 박사처럼 신학을 공부하고 목사로 안수 받은 후에 의사가 되어야 한다"는 거예요. 
    그래서 뜻을 바꿔 1962년 2월 20일 경에 한국신학대학에서 다시 입학시험을 보았습니다. 
    2월말에 이준묵목사님께서 등록금을 갖고 오셔서 등록을 하려는데 "오영석 학생이 일등을 하였으므로 등록금을 내지 않아도 된다"하며 삼성모직에서 각 대학의 수석입학생들에게 준 양복 기지 선물까지 주었지요. 
    그 기지로 교복을 지어입고 한신대 교정에 들어서던 기억이 어제일 같군요."

    해남 뿐만 아니라 교계에서는 거의 성자로 알려지신 이준묵목사님 이야기를 좀 들려주십시오.

    "목사님은 호남의 굴지의 기업가로 아시아 자동차 공장과 나주 비료공장을 창업한 이문환 회장님의 동생이기도 하지요. 
    원래 결혼을 하지 않고 수도생활을 하면서 거지 성자로 불린 이현필 선생님과 강순명 목사님과 함께 활동을 하셨죠. 
    어느 날 중국에 선교사로 가려고 모든 수속을 밟고 광주에 계신 부모님과 형님에게 송별 인사를 갔는데 "결혼을 하지 않으면 집안호적에서 삭제하겠다."는 엄포에 포기를 하고 김수덕사모님(당시 간호사)과 결혼하셨다고 해요. 
    김수덕 사모님은 목사님보다 더 넓은 아량과 덕과 깊은 지혜를 지닌 분이셨지요.

    당시 읍교회의 신자들은 20 명에 불과했는데 목사님께서 목회를 하시면서 교회는 점차로 부흥 발전해 36년 목회하시고 은퇴하실 때, 신자들의 숫자가 400명이 넘었어요. 
    6·25가 나자 전쟁고아들과 걸식아동들을 모아 돌보았고 새마을 운동이 시작하기 훨씬 전인 50년 후반부터 농촌 살리기 운동을 전개하셨습니다. 
    군단위로는 전국에서 제일 처음에 해남읍에 YMCA를 창설하신 분이죠. 
    나주 비료공장에서 일하던 독일 기술자 호만씨의 협조를 통하여 해남에 호만학교를 설립하시고, 가정형편 상 중고등학교를 다닐 수 없는 많은 학생들에게 중고등학교의 교육을 받도록 하신 교육자였습니다."

    해남출신으로서 우리나라에서 가장 진보적인 신학자와 목회자들을 배출하는 한신대총장을 역임하셨습니다. 
    총장님께서 추구하는 기독정신이랄까 진실한 기독교인의 삶은 어떤 것입니까?

    "오늘 제가 한국신학대학교 신학대학원 캠퍼스, 그것도 장공 김재준기념관 앞에서 만나자고 한 것은 바로 장공신학을 통해 기독교를 이야기하고자 한 것입니다. 
    장공신학의 중심주제는 '현실과 변혁'이지요. 
    그분은 음식 속에 들어간 소금처럼, 밀가루 반죽 속에 들어간 누룩처럼 자기정체성을 잃지 않으면서 현실을 그리스도 생명의 현실로 변혁해 가야한다는 생활신앙을 가르쳤습니다. 
    그래서 한국교회의 사회참여운동에 앞장서며 민주화 운동에 교회가 적극 뛰어들도록 길을 폈고 보수 일색으로 경직됐던 한국 신학계에 현대신학의 물줄기를 들여와 교회 갱신에도 힘을 썼지요. 
    그 분을 따르던 인물들, 장준하, 문익환, 강원룡, 안병무박사 등 민족사의 분수령을 이루는 고비마다 양심의 횃불을 치켜들었던 사람들을 보면 참 기독교인의 삶이 어떤 것인지 알 수 있습니다. 
    저 뒤에 도서관 입구에 써진 성경문구는 히랍어인데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신다'는 뜻이지요."

    대학에서 은퇴를 하신 요즘 어떻게 지내시는지요?

    "한신대학교에서 교수와 총장으로서 25년 남짓 재직하다가 2005년 8월에 정년퇴직을 했습니다. 
    지금은 명예교수로서 일주일에 한 번씩 한 세미나를 인도하며, 세계적인 신학자 칼 바르트(<K, Barth)의 교회교의학을 번역하는 책임을 수행하고 있지요. 
    그의 신학사상은 20세기 초에 신학사상사에서 <코페르니쿠스적인 전환>을 이루었다고 합니다. 
    그의 교의학 책이 워낙 방대하고 깊고 어려워서 번역하기가 어려운데 13명의 저명한 교수들이 참여해 많은 진전을 이뤘지요. 
    그 책이 모두 번역 출판돼 학생들과 목회자들이 읽고 공부를 한다면, 한국교회와 강단의 생명력은 훨씬 풍성해지고 활력이 넘치게 될 것입니다."

    지난 해 여름부터 네 달 동안 고향 해남읍교회에 오셔서 목회를 하셨는데 아주 오실 생각은 없으신지요.

    "네, 교회에 어려운 일이 있어서 잠시 설교목사로 갔었는데 기회가 되면 고향의 향기로운 냄새를 맡고 기름진 흙을 실컷 밟으면서 해남에서 살고 싶습니다. 
    지금도 잠을 잘 때 꿈을 꾸는데 꿈의 대부분이 거의 고향에서 펼쳐집니다. 
    금강곡의 맑은 물소리와 풍경들, 중고등학교 때 땔감을 하러 갔던 우슬재, 해남군청 광장 앞의 아름드리 나무들과 시끌벅적한 고도리 장터는 마음이 울적할 때면 찾아가 보고 싶은 곳이기도 하지요. 나는 지금까지 하나님께, 특별히 이준묵 목사님과 사모님의 큰 은혜와 해남읍교회에서 큰 도움을 받았지만, 아무것도 보답하지 못한 빚진 죄인의 심정을 간직하고 있습니다."

    오늘 특별히 한신대 장공기념관 앞에서 뵙게 돼 매우 즐거웠습니다. "해남이 한국에서만 아니라 세계에서 빛을 발하는 문화의 고향이 되기를 바란다"는 총장님의 기도가 꼭 이뤄지기를 바랍니다.

    오영석 전 총장 연보

    · 1943. 7. 18 전남 해남군 계곡면 사정리 출생
    · 1962  해남고등학교
    · 1969  한신대학교(신학사, Th. B)
    · 1971  한신대학교 신학대학원(신학석사, Th. M.)
    · 1982  스위스 Basel University(신학박사, Th.  D.)
    · 1972~1975  전남 해남 백야교회 목회
    · 1975~1976  전남 해남 해남읍교회 목회
    · 1984~2007  한신대학교 교수(조직신학, 신학과)
    · 1992. 3~ 7  독일 함부르크 대학교 객원교수
    · 1997~1998  한신대학교 신학대학원장
    · 1998~2000  한신대학교 신학대학장
    · 1999~2002  칼 바르트 학회 회장
    · 2001. 9~ 2005. 8  한신대학교 총장
    · 2009~현재  한신대학교 명예교수


    예수님께서 세례받으실 때 하늘이 열렸습니다(마태 3:16). 

    스데반이 돌 맞아 순교할 때 외친 말, ‘보라, 하늘이 열리고 인가 하나님 우편에 서는 것을 본다'(행 7:56), 

    이사야 64:1에서 ‘주는 하늘을 가르고 강림하시고
    ~’ 등이 있습니다. 

    신앙이 영적이라고 할 때, 예수 그리스도로 인하여 자신의 인생과 세상을 환하게 하는 경험을 하게 됩니다. 
    이 체험을 하늘이 열리는 체험으로 말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고, 살아서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않는다'(요 11:25, 26)는 말씀이 이런 영적 체험을 말합니다.

    빛의 반대는 어둠입니다. 
    우리 인생을 어둡게 하는 것은 죄와 죽음입니다. 죄와 죽음은 우리의 삶을 파괴합니다. 죄는 자기 스스로 자기 인생을 완성해야 한다는 강요와 욕망에 빠지게 합니다. 죽음은 자기 소멸에 대한 두려움입니다. 어느 누구도 죄와 죽음의 지배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벗어나는 길은 삶의 방향을 전환하는 것입니다. 회심입니다. 십자가에 달리셨으나 삼 일 만에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와 일치하는 것이 최선입니다. 자신의 노력으로 삶을 완성시키지 않아도 된다는 깨달음이 필요합니다. 생명은 하나님에 의해 완성될 것이라는 깨달음이 필요합니다.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 생명을 완성시키신다는 믿음을 가질 때 비로소 하늘이 열리고 천사들이 오르락내리락하는 것을 볼 것입니다.


    "에스겔"이란 이름의 뜻은 "하나님께서 강하게 하신다."

    남 유다 왕국에서 바벨론의 포로가 되어 세 차례 끌려갔던 유다 백성들이 있었습니다.

    1차 포로는 BC 605년 여호야김 왕 때(18대)
    2차 포로는 BC 597년 여호야긴 왕 때(19대)
    3차 포로는 BC 586년 시드기야 왕 때(20대) 예루살렘이 완전히 함락되었던 때 

    에스겔 선지자는 어느 때에 포로가 되었을까요?
    "여호야긴 왕의 사로잡힌지 5년 그달 5일이라."(2절)

    선지자 에스겔은 2차 포로 때 바벨론으로 끌려갔다고 합니다.
    그리고 30년이 지난 후 그발강 가에 있을 때 하늘이 열렸다고 합니다.

    성경에서 하늘이 열렸다는 말씀은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가 임했다는 증거를 의미합니다.
    언제 하늘이 열렸다고 하셨습니까?

    첫번째는 예수님께서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신 후에 하늘이 열렸습니다(눅 3:21).
    두번째는 베드로가 환상을 보았을 때 하늘이 열렸다고 합니다(행 10:11).
    세번째는 에스겔 선지자가 바벨론의 포로가 되어 그발강가에 머물고 있었을 때 하늘이 열렸다고 합니다(겔 1:1).

    하늘이 열렸다는 말씀은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가 임하게 될 것을 알려주는 특별계시라고 하겠습니다.
    남 유다 왕국의 백성들과 선지자가 바벨론의 포로가 되어 바벨론 땅에 머물고 있었습니다.
    포로들이 소망하는 것은 생전에 고향 땅으로 돌아가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의 소망은 무엇입니까?
    나의 소망은 한반도 땅에 자유통일의 날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우리의 소원은 통일(1947)
    작사 안석주/ 작곡 안병원 

    우리의 소원은 통일 꿈에도 소원은 통일
    이 정성 다해서 통일 통일을 이루자

    이 겨레 살리는 통일 이 나라 살리는 통일
    통일이여 어서 오라 통일이여 오라

    우리의 소원은 통일  꿈에도 소원은 통일
    이 정성 다해서 통일 통일을 이루자

    이 겨레 살리는 통일  이 나라 살리는 통일
    통일이여 어서 오라 통일이여 오라


    여호와의 말씀(다바르 아도나이) 1697  3068  / 데발 아도나이 

    דָּבָר 스트롱번호 1697

    1. 말.  2. 복수로 쓰인 경우. 3. 약속  
    발음    [ dâbâr ]
    어원 / 1696에서 유래 
    구약 성경 / 1442회 사용



    여호와의 권능(야드 아도나이)  3027  3068 / 야드 아도나이

    יָד 스트롱번호 3027

    1. 사람의 손.  2. 전치사와 함께 쓰이는 경우.  3. בְּיָדִי.㉠ 내 손에

    발음 [ yâd ]  
    구약 성경  / 1617회 사용

    여호와의 말씀이...특별히 임하고 
    - '에스겔'이란 뜻은 '하나님이 강하게 하시다', '하나님께서 단련시키시다'의 뜻이다. 
    이는 포로 기간 중에 유다의 죄악성과 심판, 예루살렘의 파괴 및 회복 등을 전한 그의 사역적 특성과 잘 어울린다. 
    한편 에스겔처럼 제사장 가문 출신이면서 선지자 사역을 감당한 자는 구약에서 사무엘(삼상 2:35; 3:20; 7:9; 16:2-13), 
    예레미야(렘 1:1), 스가랴(느 12:16; 슥 1:1; 7:3) 등이 있다. 
    또한 본 구절의 '특별히 임하고'의 히브리어 '하요 하야'(*)는 '하야'(*)의 반복적인 표현으로서 그 의미를 강조해준다.

    여호와의 권능이 내 위에 있으니라 
    - '권능'(*, 야드)이란 원어상 '손'(the hand, NASB)을 가리키는 말로서 하나님의 권능, 능력을 나타내는 신인동형동성론(神人同形同性論)적인 표현이다(3:22; 8:1; 33:22; 37:1).

    신인동성동형론(神人同性同形論, 擬人化, Anthropomorphism)

    하나님은 인간과는 달리 육체를 갖지 않으신 순수한 영이시다. 
    따라서 인간의 오관(五官)으로는 식별되지 않는다(딤전 6:15-16). 
    또한 하나님은 완전히 도덕적시시며 완전한 자성적, 주권적 속성을 갖고 계시는 점에서 인간과는 구별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은 하나님을 인간과 유사한 모습으로 묘사하는 때가 많다. 
    이처럼 여호와를 인간의 용어로 표현하거나 혹은 인간의 품성을 지닌 것처럼 묘사하는 것신인동성도형론(神人同性同形論)이라 한다.

    이에 해당하는(anthropomorphism)는 ‘인간’(안드로포스)와 ‘형태’(모르페)의 합성어이다. 
    이것은 원래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여러 신들이 인간과 유사한 형태와 성격을 지님을 표현하는 용어이다. 
    그러나 그리스의 다신 종교 뿐아니라 고대 다른 나라 종교에서도 역시 정도의 차이는 있으나 신을 종종 인간적인 형태로 묘사한다. 
    따라서 이는 종교학과 문학에서 보편적으로 사용하는 용어가 되었다.

    구약에서 여호와는 음성을 발하여 
    ‘말씀하시고’(창 1:3), 
    ‘보시며(창 1:4), 
    서늘할 때에 동산에서 ‘거니시는’(창 3:8) 분으로 묘사된다. 

    또한 여호와의 형상(민 12:8), 
    여호와의 발(출 24:10), 
    여호와의 손(사 50:11) 등과 같은 표현으로 마치 사지(四肢)와 육체를 가지신 분으로 묘사된다. 

    이러한 육체적 특성 외에도 
    ’질투하시며‘(출 2):5), 
    분노를 발하시고’(시 77:9), 
    ‘자비롭고’(욘 4:9), 
    능력이 많으시고(시 147:5), 
    ‘자비와 은혜가 넘치시고’(시 103:8), 
    후회 하시는(삼상 15:11), 
    인간적인 감성을 지니신 분으로 묘사된다. 

    또한 ‘목자’(시 23:1), 
    ‘신랑’(사 23:1), 
    ‘용사’(출 15:3), 출 15:3) 등과 같이 인간의 신분을 나타내는 용어를 여호와께 적용시키기도 하였다. 

    신약에서는 구약보다는 이러한 표현이 비교적 적게 등장하나 역시 
    ‘말씀하시고’(히 1:1), 
    ‘보내시고’(요 17:8), 
    ‘택하시고’(엡 1:4), 
    ‘예정하시고’(3:11), 
    ‘노하시고’(롬 1:18), 
    ‘판단하시고’(롬 2:2), 
    ‘화목케 하시고’,(고후 5:18), 
    ‘사랑하시는’(요 3:16), 분으로 묘사된다. 
    뿐만 아니라 손(요 10:29), 과 ‘품’(요 1:18), 얼굴(마 18:10)을 가지시며 아버지(마 6:9), 왕(계4:2) 등의 인간적인 용어로 표현된다.

    그러므로 신인 동성 동형론을 보다 세분하여 본다면 순수한 영이신 여호와를 육체를 가진 것처럼 묘사한 동형론과 여호와를 인간의 지, 정, 의와 인격에 비추어 묘사한 동성론으로 나누어 설명 할 수 있다.

    1. 동형론

    비물질적 존재인 여호와를 인간의 육체적 지능을 빌어 설명했다는 점에서 이는 순수한 은유(隱喩)로 받아들여야 한다. 즉, 여호와께서 바벨탑을 쌓은 인간의 성(城)과 대(臺)를 보시려고 강림(降臨) 하셨다는 표현은 여호와가 높은 곳에 계시다가 위치를 낮추시어 이 땅에 내려오신 동작을 나타낸 것이 아니다.(창 11:5). 이는 순수한 의인적인 표현으로 인간의 악한 행위에 관심을 기울이시며 자비를 보이신 지금까지의 태도를 변화시켜 공의의 심판을 행하시려는 의도를 나타내는 문학적 표현인 것이다.

    이와 같이 여호와가 인간의 역사에 개입하심을 나타내기 위하여 사용된 이러한 동형론적인 표현은 주로 여호와의 의지에 강조점을 두고 해석 할 수 있다. 이는 여호와의 팔은 전능하신 의지적 능력을(출 6:6, 시 89:13), 코는 공의로우신 분노를(삼하 22:9, 시 18:8), 입은 절대 변개치 않는 말씀을(시 33:6), 눈은 모든 것을 살피시며 아시는 전지하심을(대하 16:9), 나타낸다는 사실로서도 이를 입증 할 수 있다.

    2. 동성론

    동형론이 여호와께 없는 것을 마치 있는 것처럼 표현하여 여호와의 행위나 속성을 표현한 순수 은유라면 동성론은 무한한 여호와를 유한한 인간에 비유해 설명한 강조적 표현법이라 할 수 있다. 즉 여호와는 지정의를 갖춘 인격적인 존재로서 도덕성과 추진성 및 생명성을 갖고 계신다. 여호와의 형상을 부여받아 창조된 인간 역시 이러한 속성을 갖고 있으나 무한하신 여호와에 비해 유한하다는 차이점을 지닌다. 따라서 동성론적 표현은 제한적 존재인 인간에게 무한하신 여호와의 품성을 효과적으로 전달하기 위한 방법이라 할 수 있다.

    예를 들어 홍수 후에 노아와의 언약에 있어서 무지개를 보고 인간과의 언약을 ‘기억하겠다’ 는 (창 9:16), 표현은 여호와가 인간처럼 건망증(健忘症)이 있어서 평소에 잊고 있었던 것을 무지개를 보고 불현듯 떠 올린다는 의미가 아니다. 이것은 여호와께서 당신의 언약을 언제나 기억하시고 성실히 수행하신다는 것을 무지개 표징으로 나타내심을 강조하는 표현이다. 이러한 원칙은 여호와의 근심 (창 6:6), 노함(출 22:24), 질투함(민 25:11), 맹세함(사 62:8), 이상히 여김(막 6:6) 등의 표현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신인 동성 동형론은 여호와를 인간적 행동이나 품성을 나타내는 용어로 묘사하여 인간의 이해를 돕기 위한 문학적 방편인 반면, 성육신은 여호와가 직접 인간 가운데 인간의 몸을 입고 임하심을 가리킨다. 즉, 신인 동형 동성론은 범죄함으로 영안(靈眼)이 흐려진 인간이 잃어버렸던 여호와의 대한 정보를 다시 인간에게 보다 효율적으로 전달하기 위한 목적을 지니고 있으나, 성육신은 직접 인간 가운데 여호와가 임하심으로 지금까지 감추어졌던 여호와를 게시된 여호와로 온전히 드러내신 것이다. 이와 같이 전자는 모두 여호와의 자기 계시이나 후자는 구원을 위한 완전한 자기계시라는 차이점을 가진다.

    신인 동성 동형론은 무한하신 여호와를 유한한 인간적 용어로 표현한 것이므로 항상 오해의 위험이 따른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인간의 영적, 지적 파악력이 여호와에 대해 아는데는 미치지 못하며, 인간의 문자도 영적 진리를 전달하는데 분명한 한계가 있는데, 신인 동형 동성론이라는 ‘인간의 표현’은 또 다른 전달상의 문제를 지니므로 오해의 폭이 더 넓어질 수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신인 동형 동성론 표현을 해석 할 때는 항상 여호와는 무한하신 반면 인간은 유한성을 지닌다는 사실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특히 동성론적 표현일 때는 인간의 지정의나 인격이 순수치 못하며 복합적이라는 사실로 인해 여호와의 순수하신 품성을 오해하게 되는 경우가 많음을 유념해야 한다. 예를 들어 사 1:24 에 나오는 여호와의 슬픔을 해석 할 때 인간의 슬픔이 내포하는 연약함, 상실감, 분노, 좌절 등을 여호와께 적용해서는 안된다. 왜냐하면 이 부분에서 여호와의 슬픔은 부모가 자식을 징계 할 때 갖는 쓰라림과 같이, 범죄한 인간들을 향하여 심판하실 때에 그 같은 사랑과 안타까움으로 징계하심을 표현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성경 가운데서 신인 동형 동성론적 표현이 자주 등장하는 것을 들어 혹자는 이방 신화에서 발견되듯이 절대자 여호와에 대한 신관(神觀)의 미성숙 때문이라고 매도한다. 그러나 이는 유한한 인간에게 무한하신 여호와를 보여 주기 위한 방편이란 것을 무시한 잘모된 견해이다. 이 표현은 무한하시고 인간의 이해를 초월해 계신 여호와께서 자신을 연약한 인간에 대비하시기까지 스스로를 낮추시므로 인간을 구원으로 이끌기 원하시는 여호와의 사랑을 깨달으며 신인 동형 동성론적 사랑의 결정(結晶)인 성육신하신 예수님을 믿을 때 여호와의 형상대로 창조된 인간 본연의 모습에 가까운 제한적 의미에서 ‘신인동형동성론(神人同形同性論) 의 경지에 이를 수 있다.


    1961. 특별히(하야. hâyâh)   הָיָה 스트롱번호 1961

    1. 있다.   2. 어떤 자에게 속하다.  3. 섬기다
    발음 [ hâyâh ]
    구약 성경 / 3549회 사용









    하늘이 열리며(에스겔 1:1-3)

    사로 잡혀야 한다(1:1)

    1. 서른째 해 넷째 달 초닷새에 내가 그발 강 가 사로잡힌 자 중에 있을 때에 하늘이 열리며 하나님의 모습이 내게 보이니

    ​하늘이 열리는 경우와 열리지 않는 경우는 전혀 양상이 달라 밤과 낮만큼 차이가 납니다. 
    즉 하늘이 열리는 그 사람과 하늘이 닫히는 사람과는 상황이 전혀 달라집니다. 
    또 하늘이 열리는 가정과 그 가정을 향해서 하나님이 하늘을 닫아 버리는 바로 그 가정, 즉 하늘이 닫힌 가정과는 천양지차입니다.

    예를 들면 하나님께서 아합 왕 때 너무 노여워서 3년 6개월 동안 하늘이 닫혀 비가 오지 않았습니다. 
    이스라엘 나라를 향해서 하늘을 닫아 버린 결과 그 나라가 말할 수 없는 도탄에 빠지더라는 이야기입니다. 
    그러기 까닭에 우리나라를 향해서 하나님이 하늘을 닫아 버리면 말로 다 형용키 어려운 곤경에 빠지는 겁니다. 
    하늘 문이 활짝 열리므로 엄청난 비가 쏟아져서 모든 문제가 해결되고 평화와 행복을 다시 회복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하늘의 문이 닫히고 열림에 따라서 방향이 달라지고 내용이 전혀 달라집니다. 
    이런 의미에서 하늘이 열리며 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오늘의 주인공은 에스겔이라고 하는 선지자입니다. 
    에스겔이 바로 하늘이 열리는 그 장면을 언제 체험을 했느냐 하게 되면 그는 바벨론으로 잡혀간 유대인 포로로서 그발강가에서 말할 수 없는 환난을 당하는 그런 포로생활 중에서 선지자로 부름 받아 더욱 고생에 고생을 하던 때입니다. 
    이런 중에 그가 하늘이 열리는 장면을 보았습니다. 그래서 그에게는 열린 하늘이 얼마나 복이 되고 힘이 되었는지 모릅니다.

    계시의 은혜 (1-2)

    1절을 보게되면 이런 기록이 나옵니다. 
    제30년 4월 5일에 내가 그발강가 사로잡힌 자중에 있더니 하늘이 열리며 하나님의 이상을 내게 보이시니, 라고 하였는데 하나님의 이상을 보였다 하는 말씀은 바꾸어 말하면 하나님이 나타나셨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자기의 완전한 모습을 사람에게 보여 줄 수도 없고 보여준다 하여도 사람이 볼 수가 없습니다. 
    사람은 또 깨닫지도 못합니다. 
    그러기 까닭에 하나님을 우리가 보았다던가 하나님이 보여주셨다던가 하는 것은 하나님의 환상일 뿐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가 하나님의 환상을 보았다고 하게 되면 하나님이 나에게 나타났다는 뜻입니다. 
    결국 우리가 이 세상에서 가장 큰 은혜 중에 첫째로 꼽을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나타나는 것입니다. 
    또는 하나님이 우리 가정에 나타나는 것입니다. 
    마귀가 나타날 때와 하나님이 나타날 때 그 결과는 전혀 다릅니다. 
    또 하나님이 나타나는 가정과 마귀가 나타나는 가정은 천양지차입니다. 
    예를 들게 되면 에덴 동산이 얼마나 행복하고 아름답고 귀합니까? 
    그런데 마귀가 뱀으로 둔갑하여 찾아올 때 하와가 그 마귀를 영접하였습니다. 
    그런가하면 깊은 대화를 나누고 그 다음에는 하나님께 불순종하고 그 다음에는 죄를 짓고 얼마나 어려움에 빠집니까? 
    나중에는 에덴 동산에서 쫓겨나는 불행, 그 다음에는 천추만대에 우리에게까지 불행을 주는 결과를 낳지 않았습니까? 
    마귀가 그 집에 들어오니 어려운 문제가 일어났다는 말입니다. 
    다음에 하나님이 나타나서 아담아 하고 불렀으나 숨었습니다 왜 숨었느냐? 하면 부끄러웠기 때문입니다. 
    그 아담과 하와를 불러낸 다음에 하나님께서 짐승을 잡아 가죽으로 옷을 지어 입히시므로 말미암아 그 부끄러운 문제를 해결해 주셨습니다. 
    마귀가 들어오더니 문제를 일으켰고 하나님이 나타나신 결과는 문제를 풀어 주고 해결해주셨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나타나는 가정, 하나님이 나타나는 사람은 참 복이요 은혜입니다. 여러분들과 여러분들 가정에도 항상 하나님이 나타나기를 바랍니다. 이 말을 달리 표현하면 하나님이 자기를 나타내는 것을 계시라고 합니다. 하늘이 열리며 신령한 은혜를 받게된 에스겔은 먼저 계시의 은혜를 받았습니다. 오늘에는 성경 속에 하나님은 자신을 계시하십니다. 성경을 통해서 날마다 계시의 은혜를 받으시기를 바랍니다.

    말씀의 은혜 (3a)

    3절을 보면 여호야 긴 왕의 사로 잡힌지 5년 그 달 5일이라, 갈대아 땅 그발강가에서 여호와의 말씀이 부시의 아들 제사장 나 에스겔에게 특별히 임하고 라 하였습니다. 
    말씀이 특별히 임했다고 했으니 말씀의 은혜입니다. 
    이것은 무슨 말이냐 하면 분명히 다른 사람에게도 말씀이 임하지만 나에게 특별히 임했다 말입니다. 

    권능의 은혜 (3b)

    3절 하반절에 여호와의 권능이 내 위에 있으니라는 기록이 있습니다. 
    여러분 보십시오 우리는 이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에 자리라는 것이 상당히 중요함을 압니다. 
    왜냐하면 취직하면 그 다음에 직장에서는 자리를 줍니다. 
    사람마다 취직을 하는 것은 아닙니다. 
    세상에서 자기의 자리가 있다는 것이 얼마나 큰복입니까? 
    세상에서 활동하는데 내가 앉을 자리, 설자리가 없다면 얼마나 불행합니까? 
    자리라는 것이 상당히 귀할 뿐만아니라 계장, 과장, 부장자리로 승진하기도 합니다. 이렇게 주어진 높은 자리가 얼마나 좋습니까? 
    그러나 그 자리도 귀하지만 그 자리만 못지 않게 중요한 것은 자리를 감당할 능력입니다. 
    실력 없이 주어지는 그 자리는 오히려 화근이 됩니다. 
    그러기에 실력을 필요로 하는 세상, 실력이 인정받아야 하는 세상입니다. 
    또 실력을 알아주는 세상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 예수 믿는 사람에게도 주어지는 직분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 직분과 그 직책이 만들어 주는 자리도 귀하지만 그 자리를 감당할 영적 실력은 더욱 중요한 겁니다. 

    예를 들면 여러분 고린도 라고 하는 곳에 바울이 전도하다가 귀신들린 사람에게서 예수의 이름으로 귀신을 다 쫓아내 버렸습니다. 
    귀신들려 집나 갔던 아내가 돌아오고 아들이 돌아오고 딸이 돌아옵니다. 
    그 가정은 잃어버렸던 행복을 다시 찾고 활기를 되찾게됩니다. 
    그런데 그 지방에 스게와라고 하는 제사장이 있었습니다. 
    그에게 아들 7형제가 있습니다. 
    바울이 혼자서 쫓아내던 귀신을 일곱 명이 달려들어서 예수의 이름으로 귀신아 물러가라 하고 명했더니 귀신이 뭐라고 그럽니까? 
    사람 웃긴다는 것입니다. 
    나는 예수도 알고 바울도 아는데 너는 도대체 뭐냐고 대들었습니다. 
    형편없는 것이 까분다는 뜻입니다. 
    보십시오. 망신이란 망신은 다 당하고 귀신들린 사람이 죽인다고 달려들어 억제하니 옷도 못 입고 벌거벗은 몸으로 도망가지 않았습니까? 
    이런 사실을 보면 귀신이라는 놈이 우리들의 영적 실력을 누구 보다 더 잘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한가지 여기서 꼭 짚고 넘어갈 것이 있습니다. 
    믿음이라는 문제, 영력이라는 문제는 다수가 문제가 아닙니다. 
    바울이 혼자서 한 일을 일곱 명이 못 당했습니다.

    여러분 세상 이치로 따지면 다수가 중요하지만 영적으로 신앙적으로는 다수가 문제가 아닙니다. 
    그리고 제사장의 가문이 얼마나 좋은 가문입니까? 
    그렇다면 가문도 문제가 아닙니다. 
    실력이 문제입니다. 
    이렇게 악의 세력을 물리치고 승리할 수 있는 영적 능력, 또는 권세로 충만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본문의 가르침은 계시의 은혜, 말씀의 은혜, 권능의 은혜를 받았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천사의 교훈을 받았습니다 (4-25)

    4절에서 25절까지인데 내용이 길기 까닭에 제가 한절 한절 읽으면서 설명을 드리지 못하겠습니다. 그런데 내용은 이러합니다. 환상 중에 한 사람이 나타납니다. 분명히 사람입니다. 사람은 사람인데 자세히 보니 얼굴이 넷입니다. 사면을 향해 있습니다. 그 다음에는 날개가 넷입니다. 또 날개 밑에는 손이 있어서 손이 넷이고 그 손 밑에는 바퀴가 있는데 역시 넷입니다. 그 다음에는 눈이 얼마나 큰지 전체가 눈이라 할 만큼 눈이 사면에 가득하더라고 하였습니다. 이런 모습으로 나타났는데 분명히 사람이라고 하였습니다. 성경에도, 사람은 사람인데 천사라는 것입니다. 천사가 왜 사람의 모습으로 나타났느냐 하면 내가 사람의 모습으로 나타나서 이렇게 하는 것을 보고 너희도 본받아서 이렇게 살아가라는 교훈입니다. 우리는 천사와 똑같이 살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천사와 같은 사람을 본받아서 천사의 경지를 살아갈 수는 있습니다. 그것이 본문의 가르침입니다.

    1. 봉사의 손

    그러면 천사가 나타나서 사람의 모습으로 우리들에게 이렇게 살아야 된다고 하는 교훈의 내용이 뭐냐 하면 먼저 생각해 볼 수 있는 것이 날개 밑에 있는 손입니다. 여러분 손이라는 것은 무엇을 하는 것입니까? 일하는 손이요 봉사의 손입니다. 더구나 천사에게 손이 있다고 하게 되면 무엇을 말합니까? 천사는 하나님을 받들고 하나님이 시키심을 따라서 구원 얻은 성도를 섬기라고 보내심을 받은 존재입니다. 그렇기 까닭에 천사의 손은 성도를 섬기는 손, 하나님을 섬기는 손, 즉 봉사의 손입니다. 이처럼 우리 성도들은 봉사의 손을 가져야 됩니다. 독일이 2차 대전 때 망했습니다. 폭격이 심했습니다. 예배당이 다 무너졌습니다. 교인들이 피난 갔습니다. 전쟁이 끝나고 돌아왔더니 예배당 뜰에 있던 예수님의 동상이 간 곳이 없었습니다. 찾아봤더니 어느 구석에 묻혀 있었는데 팔이 떨어져 없어졌습니다. 그때 교인들은 녹여서 다시 만들어 세우자 혹은 아니다 팔만 만들어서 갖다 붙이자고 하는가하면 팔이 없는 그대로 세우자고 옥신각신 하다가 그냥 세워 놨습니다. 그리고 바로 그 팔 없는 예수님의 동상 그 밑에다 쓰기를 예수님의 손은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손은 여기에 있습니다 하고 교인들이 각자가 자신의 손을 가리켰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교인들의 손은, 성도들의 손은 바로 예수님의 손이어야 된다는 말입니다. 이 손은 봉사의 손이어야 합니다.

    2. 믿음의 날개

    본문은 분명히 천사에게 날개가 있다는 것을 가리킵니다. 만약 이 날개가 없다면 제구실을 못합니다. 천사가 천사 구실을 못한다는 말입니다. 본문의 천사가 사람으로 나타나 성도의 모습으로 본을 보여줬다면 바로 우리 성도들은 날개와 같은 부분이 있어야 합니다. 천사가 천사 노릇 할 수 있는 것이 날개라면 우리 성도가 성도 노릇을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믿음입니다. 믿음 없다면 성도는 성도가 아니고 교인도 아니고 믿는 사람이 아닙니다. 정치가는 정치할 때 정치가요 장사꾼은 장사할 때 장사꾼이요 학생은 공부할 때 학생이요 믿는 사람은 믿을 때 믿는 사람입니다. 신자에게서 믿음을 빼고 나면 아무것도 없습니다. 믿는 사람으로 믿는 사람 구실을 하게 하는 것이 믿음입니다. 그러므로 날개는 믿음을 가리킵니다. 성도에게 믿음은 날개와 같습니다.

    3. 상징적인 얼굴

    그 다음에는 생물에게는 네 얼굴이 있었습니다. 첫째로는 사람의 얼굴을 가졌습니다. 전체로 보면 한사람인데 자세히 보면 얼굴이 넷입니다. 그런데 첫째 얼굴이 사람의 얼굴이었다는 것은 예수 믿는 사람은 훌륭한 인격자가 돼야 된다는 말입니다. 사람의 얼굴을 가졌을지라도 사실상은 짐승만도 못한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예수 믿는 사람은 사람다운 사람의 얼굴을 가져야 됩니다. 즉 인격자이어야 된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두 번째는 무슨 얼굴이냐 하면 사자의 얼굴입니다. 사자는 산중의 왕이요 짐승의 왕입니다. 그 용기와 용맹은 천하가 못 당합니다. 사자는 조그마한 일에 낙심하지 않고 울지 않습니다. 그러기 까닭에 우리 예수 믿는 사람들은 사자와 같은 용맹과 용기가 있어야 된다는 겁니다. 그러기 때문에 조그마한 일에 울고 조그만 일에 하나님께 불평하고 원망하고 낙심하고 교회를 안 나오고 그러지 말라는 겁니다. 신자는 이런 의미의 사자의 얼굴을 가져야 된다는 겁니다. 여러분 아들딸들이 조그마한 일에 울고 투정부리고 그 다음에는 낙심하고 부모를 원망한다면 그 꼴을 어떻게 봐주겠습니까. 그러나 어려운 일을 당해도 "아버지 걱정하지 마십시오" 하고 일어나는 장한 아들 딸들이라면 그 용기와 용맹이 얼마나 귀합니까. 그래서 우리 예수 믿는 사람들이 가져야 할 얼굴의 모습은 용기와, 용맹입니다. 그리고 그 다음에 세 번째로는 소의 얼굴입니다. 소는 말이 없습니다. 소는 말하지 않고 하루종일 일만합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 성도들의 얼굴이 바로 이런 모습을 지녀야 된다는 말입니다. 말은 하지말고 소처럼 일하는 사람이 되라는 겁니다. 반대로 일을 안 하는 사람은 말이 많습니다. 봉사 안 하는 사람은 왜 그렇게 말이 많고 불평이 많습니까. 그런데 봉사하는 소는 말이 없습니다. 봉사 안 하는 사람은 말이 많습니다. 지난번 내가 맥추절에 광고 드렸습니다. 뭐라고 말했느냐 하면 금년 예산이 얼마인데 집사, 권사, 장로 목사는 알아서 하고 그 나머지 교인들은 마음대로 하십시오. 제직 이상은 책임지고 할 일입니다 했더니 며칠 안 있으니까 교회 나오는지 얼마 안 되는 평신도라면서 전화가 왔습니다. 목사님 왜 그런 소리를 하시는 겁니까? 그것은 헌금을 짜내려고 하는 소리 아닙니까? 라고 합니다. 그래서 당신은 집사가 아니지 않느냐, 집사가 아니면 당신에게 해당되는 말이 아닌데 전화 할 이유가 없지 않습니까? 라고 대답해 주었습니다. 분명히 집사이면서 평신도의 이름으로 전화를 한 것입니다. 헌금을 안하는 사람이 말이 많습니다. 바울 사도는 고린도 교인들에게 헌금할 때에는 미리 준비했다가, 그리고, 즐거움으로 하라고 하였습니다. 또한, 힘껏 하며 정성껏 하고 인색 한마음으로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바울 사도는 고린도 교인들에게 그렇게 하라고 하여도 되고 광성교회 김목사는 광성교인들에게 그렇게 하라하면 안 됩니까. 봉사 안 하는 사람이 무슨 일에든지 말이 많습니다. 소는 말이 없습니다. 일밖에 모릅니다. 신자들은 일하는 소의 모습을 지니고 말은 하지 말이야 한다는 교훈입니다.

    그리고 그 다음에 보십시오 네 번째 얼굴은 독수리의 얼굴을 하였습니다. 신령한 모습입니다. 우리는 회사에 나가면 한 책상에 너와 내가 일하지만 믿지 않는 사람과 믿는 사람은 차이가 있어야 됩니다. 신령한 면에 차이가 있어야 됩니다. 그러기 까닭에 우리는 신령한 면을 지니는 모습이 있어야 됩니다.

    4. 순종의 바퀴

    자동차를 타보고 운전해 보면 알겠지만 바퀴가 제 마음대로 갑니까. 가고 싶으면 가고 말고 싶으면 말고 왼쪽으로 오른쪽으로 마음대로 가느냐 그 말입니다. 전혀 아닙니다. 바퀴는 운전하는 사람이 가라하면 가고 서라면 서고 오른쪽으로 가라하면 오른쪽, 왼쪽으로 가게하면 외쪽, 오직 순종밖에 모릅니다. 그래서 믿는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서는 "아니요"가 없어야 합니다. 오직 순종뿐이어야 합니다. 즉 "아멘" 뿐이어야 합니다.

    5. 소망의 눈

    사면에 눈이 가득 하였습니다. 눈은 무엇을 가리킵니까? 눈은 소망을 의미합니다. 장사꾼은 장사꾼의 눈을 가졌고 과학자는 과학자의 눈을 가졌고 정치가는 정치가의 눈을 가진 것처럼 믿는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이 못 보는 눈을 가져야 됩니다. 저 사람 저런 고난 속에서 보통 사람 같으면 자살할 지경인데 저런 어려운 일을 당하고 이겨내겠는가? 라고 흔히 생각하지만 성도는 다른 사람들이 못 보는 세계를 보는 눈을 가졌기 때문에 실망하거나 좌절하지 않습니다. 성도가 순교현장에 끌려가면서도 찬송을 부르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이 눈은 바로 소망의 눈입니다. 여러분들은 바로 이 소망의 눈을 가지어서 남이 보지 못하는 영의 세계를 보시고 항상 낙심하시지 마시고 소망 중에 승리하시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이 천사를 통해서 성도들은 많은 교훈을 받고 천사의 경지로 살아야 된다는 뜻입니다.

    III.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났습니다 (26-28)

    1. 구원의 영광 (26- )

    26절에 그 머리 위에 있는 궁창 위에 보좌의 형상이 있는데 그 모양이 남보석 같고 그 보좌의 형상 위에 한 형상이 있어 사람의 모양과 같더라고 하였습니다. 이번에는 분명히 보좌가 나타나는데 보좌에 앉으신 분이 분명히 사람으로 보이더라는 겁니다. 그런데 본문의 사람은 천사와 다른 겁니다. 하나님이 분명히 사람의 모양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왜 사람으로 보였느냐 하면 이다음에 천하 만민을 구원하기 위해서 사람의 모습으로 오실 그리스도를 보여준 겁니다. 똑같은 포로 시대에 하나님이 사람의 모습으로 나타난 일이 있습니다. 사드락, 메삭, 이벳느고 라는 믿음 좋은 청년들이 우상에게 절하라는 왕의 명령을 거절하므로 풀무불을 뜨겁게 하기를 평일보다 7배나 뜨겁게 하고 결박하여 불 가운데 던지지 않았습니까 그리고 던짐 받은 사람은 셋인데, 나중에 보니 결박되지 않은 네 사람이 풀무불 가운데를 다니고 있었습니다. 네 번째 사람은 사람은 사람인데 신이요 신은 신인데 사람이었다는 것입니다. 구약에 나타난 예수님입니다.

    본문을 보게 되면 보좌에 앉으셨는데 사람으로 보이신 그 분이 바로 풀무불 속에 참여했던 분입니다. 왕이 말하기를 빨리 나오라고 하였습니다. 나왔더니 네 번째 사람은 간 곳이 없습니다. 여러분 이것은 무엇을 가르칩니까? 하면 풀무불과 같은 이 세상에 살면서도 그런 도탄에 빠져 죽을 고비를 넘겨 가면서도 믿음을 지키는 성도들, 믿음 때문에 오히려 환난을 당할 적에 하나님은 손뼉을 치면서 잘한다 구경하고 관망하시는 하나님이 아니라 그 현장에 뛰어들어서, 같은 처지와 입장이 되어 구원한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신의 모습이 아닌 사람의 모습으로 나타나 사람을 구원하는 구원의 영광을 미리 보여주셨습니다. 그래서 풀무불 속에서 세 청년을 구원하시고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셨습니다. 이처럼 에스겔은 보좌에 앉으신 사람의 형상을 통해서 구원의 영광을 보았습니다. 하나님께서 구원의 영광을 나타내셨기 때문입니다.

    2. 심판의 영광 (27- )

    27절을 보게 되면 내가 본즉 그 허리 이상의 모양은 단쇠 같아서 그 속과 주위가 불같고 그 허리 이하의 모양도 불같아서 사면으로 광채가 나며, 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씀을 설명 해 드리면 하나님이 사람의 모습으로 나타나기는 나타났는데 허리 이상은 단쇠 같았습니다. 얼마나 그 쇠가 새빨갛게 달아올랐는지 단쇠가 불과 같았습니다. 그래서 주위까지도 분명히 불과 같더라는 것입이다. 그리고 허리 이하를 보니 역시 불이더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심판을 상징하여 하신 말씀입니다. 제가 목사가 되어 24년이지만 성경을 읽는 중에 내가 전 주간에 이 사실을 발견하고 진리를 또 하나 발견했습니다. 무엇이냐 하면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끌고 애굽에서 나와 가나안 땅을 향해 갈 때 광야에서 큰 반역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모세에게 두고는 정말 기가 막히고 억울해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그 반역의 주모자가 고라입니다. 고라는 모세의 사촌입니다. 그러니까 사촌이 잘 되니까 배가 아파서 그렇게 한 것인지는 모르겠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도 아마 사촌이 땅을 사면 배가 아픈 모양입니다. 여러분들도 평수가 큰 아파트를 샀거든 절대로 크게 잔치 벌이고 뽐내지 마십시오. 고라는 250명의 불평분자들을 모아놓고 모세를 향해 반기를 들었습니다. 이때 하나님이 갈라서게 하셨습니다. 내가 모세를 나의 일꾼으로 세웠는데 네가 뭔데 대적하느냐는 것입니다. 갑자기 땅이 갈라지더니 불이 나와 삼켜 버리고 말았습니다. 여러분 이것이 무슨 뜻입니까? 우리가 하나님의 일을 하고 나라를 위해, 민족을 위해, 이웃을 위해 모세처럼 봉사하고 있을 때 그러지 않아야 될 사람이 앞장서서 반대하고 속 썩이고 억울하게 한 일 있습니까? 그럴 적에 하나님은 전후 좌우를 전부 살피시고 시와 비를 가려 주시고 단 쇠와 같은 불로 철퇴를 내러 심판해 주십니다. 이 심판이 하나님께는 영광이 됐고 모세에게는 승리가 되고 우리들에게는 은혜가 되는 겁니다. 그래서 불같은 단쇠는 심판을 의미합니다.

    3. 자비의 영광 (28- )

    28절 보니까 "그 사면 광채 의 모양은 비 오는 날 구름에 있는 무지개 같으니 이는 여호와의 영광의 형상의 모양이라" 고 하였습니다. 분명히 이것은 하나님의 모양입니다. "내가 보고 곧 엎드려 그 말씀하시는 자의 그 음성을 들으니라"는 말씀이 계속되어 있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를 보니 꼭 무지개 같더라는 말씀에 큰 뜻이 있습니다. 무지개라 할 때 무슨 생각이 납니까? 노아 홍수 때 심판하고 모든 사람이 다 죽고 하나님의 특별한 축복과 사랑 속에 구원받은 노아의 여덟 식구에게 이제 너의 자손들에게 다시는 내가 이런 심판을 안 하겠다는 약속 끝에 그 증거로 무지개를 보여 주셨습니다. 구원받은 노아의 가정에게 언약의 표징으로 준, 축복의 표징으로 준 무지개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무지개의 형상으로 나타났습니다. 무지개 형상으로 나타났다는 것은 축복의 상징이요 언약의 상징이요 자비의 상징입니다. 여러분들의 가정에 하나님께서는 이런 축복과 언약의 상징인, 축복의 무지개, 언약의 무지개, 자비의 무지개가 항상 나타나는 가정되기를 바랍니다.

    결론적으로 말씀드리면 하늘이 열리며 에스겔은 굉장한 은혜를 받았고 천사를 통해 교훈을 받았고 하나님의 영광을 보고 그 다음에는 포로 생활의 어려운 중에서도 선지자로서의 승리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이 삶이 여러분들 삶이 되기를 바랍니다. 
    우리도 이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에 에스겔처럼 포로 생활과 같은 고난과 역경 중에서도 열린 하늘을 보아야겠습니다. 
    하나님의 일을 하면서 당하는 고난과, 역경 중에 에스겔은 열리는 하늘을 보았습니다. 
    에스겔을 위해서 하늘이 열렸습니다. 
    이 열린 하늘을 통해서 주님의 신령한 은혜를 받았고 천사를 통한 교훈을 받았고 하나님의 영광을 보고 승리한 것처럼 우리도 이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에 이런 어려움 저런 어려움 속에 믿음을 지키며 살아갈 때 하늘 문을 열어 주실 것입니다.



    요시야의 네 아들

    ​16대 요시야 
    → 17대 여호아하스(요시야의 넷째아들인 살룸(렘22:11) 
    → 18대 여호야김(요시야의 둘째아들인 엘리야김) 
    → 19대 여호야긴(요시야의 둘째아들인 여호야김(엘리야김)의 맏아들, 요시야의 손자인 여고)
    → 20대 시드기야( 요시야의 셋째아들인 시드기야(맛다니야, 여호야긴의 숙부)이다. 

    대상3:14 “그 아들은 아몬이요 그 아들은 요시야며 요시야의 아들들은 맏아들 요하난과 둘째 여호야김(18대)과 셋째 시드기야(20대)와 넷째 살룸(여호아하스,17대)이요/ 여호야김의 아들들은 그 아들 여고냐, 그 아들 시드기야요

     여호야긴(19, 요시야의 둘째 아들인 여호야김(엘리야김)의 맏아들, 요시야의 손자인 여고냐).

    “요시야의 아들 유다 왕 여호야김 시대부터 요시야의 아들 유다 왕 시드기야의 제 십 일년 말까지 임하니라 이 해 오월에 예루살렘이 사로잡히니라”(렘1:3).

    2. 18대 여호야김

    “18대 여호야김의 아들들은 그 아들 여고냐, 그 아들 시드기야요“(대상3:16).

    여호야김은 ① 여고냐시드기야라는 두 아들이 있었는데 여고냐(여호야긴)가 먼저 왕이 되어 통치하다가 끌려갔기 때문에 여호야김의 아들 시드기야(=고니야)가 왕이 되어야 할 것이지만 느부갓네살이 제멋대로 요시야의 아들 시드기야를 왕으로 세웠다.

    남(南)유다왕 시드기야는 요시야왕의 아들이기 때문에...

    여호야김의 아들 고니야(렘22:24)는 시드기야지만 이는 남(南)유다왕이 된 시드기야와는 다른 인물이다.

    여고냐(여호야긴) : 18대 여호야김 다음으로 남(南)유다 왕이 되는 19대 여고냐(여호야긴)는 바벨론에서 포로생활을 하다가 37년 만에 풀려나게 된다(왕하25:27).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이 유다 왕 여호야김의 아들 여고냐(여호야긴)와 유다 방백들과 목공들과 철공들을 예루살렘에서 바벨론으로 옮긴 후에 여호와께서 여호와의 전 앞에 놓인 무화과 두 광주리로 내게 보이셨는데“(렘24:1).

    “전에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이 예루살렘에서 유다 왕 여고냐(여호야긴)와 백성을 사로잡아 갈 때에 모르드개도 함께 사로잡혔더라“(에스더 2:6).

    ② 시드기야 : 여호야김의 아들 고니아(렘22:24). 바벨론에서 돌아오지 못하고 죽었지만, 이 시드기야는 유다왕 시드기야가 아니다. 유다왕 시드기야는 요시야의 아들이고 여호야김의 아들이 아니기 때문이다.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나의 삶으로 맹세하노니 유다 왕 여호야김의 아들 고니야가 나의 오른손의 인장반지라 할찌라도 내가 빼어 네 생명을 찾는 자의 손과 너의 두려워하는 자의 손 곧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의 손과 갈대아인의 손에 줄 것이라 내가 너와 너를 낳은 어미를 너희가 나지 아니한 다른 지방에 쫓아내리니 너희가 거기서 죽고 너희 마음에 돌아오기를 사모하는 땅에 돌아오지 못하리라“(렘22:24~27).

    3. 19대 여호야긴

    사로잡혀간 여고냐(여호야긴)의 아들은 ① 스알디엘 ② 말기람 ③ 브다야 ④ 세낫살 ⑤ 여가먀 ⑥ 호사마 ⑦ 느다뱌 이다(대상3:17~18).  

    여고냐(여호야긴)에게는 7명의 아들이 있는데(대상3:17~18) 고니야는 무자(無子) 즉 자식이 없었기 때문이다(렘22:30). 렘22:24의 고니야는 여호야김의 아들 여고냐가 될 수 없다.

    “요시야의 아들 시드기야가 여호야김의 아들 고니야를 대신하여 왕이 되었으니 이는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이 그로 유다 땅의 왕을 삼음이었더라“(렘37:1).

    **여호야긴의 아들 스알디엘: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간 여호야긴 왕의 맏아들이다(대상 3:17). 유다의 총독이었던 스룹바벨의 아버지이며(스 3:2; 5:2; 마 1:12) 예수님의 선조 가운데 한 사람으로 예수님의 족보에 기록되었다(마 1:12; 눅 3:27). 다른 구절에서는 스룹바벨의 아버지를 ‘브다야’(대상 3:19)로 기록하고 있는데 이것은 스알디엘이 조카를 아들로 삼았거나 스알디엘이 죽은 후 동생 브다야가 스알디엘의 처와 결혼해서 스룹바벨을 낳은 것으로 보인다.

    4. 마태복음 1장 예수님 족보는 요시야에서 여고냐를 거쳐 스알디엘, 스룹바벨로 이어진다.

    “히스기야는 므낫세를 낳고 므낫세는 아몬을 낳고 아몬은 요시야를 낳고

    바벨론으로 이거할 때에 요시야는 여고냐와 그의 형제를 낳으니라

    바벨론으로 이거한 후에 여고냐(여호야긴)는 스알디엘을 낳고 스알디엘은 스룹바벨을 낳고“(마1:1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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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에스겔

    에스겔서는 구약성경의 예언서 중 하나로, 바벨론 포로기에 활동한 예언자 에스겔에 의해 기록되었습니다. 이 책은 유다의 멸망과 회복, 그리고 하나님의 영광에 대한 강력한 메시지를 담고 있습니다. 에스겔은 환상과 상징을 통해 하나님의 심판과 구원을 예언하며, 이스라엘 백성에게 회개와 순종을 촉구합니다. 그의 예언은 당시의 역사적 상황을 배경으로 하면서도, 오늘날까지도 깊은 영적 교훈을 제공합니다.

    에스겔의 주요 주제

    • 하나님의 영광: 에스겔서는 하나님의 영광이 이스라엘을 떠나는 장면과 다시 돌아오는 장면을 통해 하나님의 임재와 거룩함을 강조합니다. 이는 하나님의 영광이 인간의 죄로 인해 떠날 수 있지만, 회개와 순종을 통해 다시 임할 수 있음을 보여줍니다. 이 주제는 하나님의 거룩함과 인간의 책임을 상기시킵니다.
    • 회개와 회복: 에스겔은 이스라엘의 죄악과 그로 인한 심판을 경고하면서도, 회개를 통한 회복의 가능성을 제시합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다시 회복시키고 새로운 마음과 영을 주실 것을 약속하십니다. 이는 개인과 공동체가 회개를 통해 새로운 시작을 할 수 있음을 강조합니다.
    • 새로운 성전: 에스겔의 마지막 부분은 새로운 성전과 그에 따른 예배의 회복을 예언합니다. 이는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을 상징하며, 성전은 하나님의 임재와 백성의 영적 중심지를 나타냅니다. 이 주제는 신앙 공동체의 중요성과 하나님과의 친밀한 교제를 강조합니다.

    에스겔이 오늘날 관련 있는 이유

    에스겔서는 현대 신자들에게도 중요한 교훈을 제공합니다. 하나님의 영광과 임재, 회개와 회복의 메시지는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효하며, 개인의 영적 성장과 공동체의 회복에 대한 통찰을 제공합니다. 또한, 에스겔의 예언은 하나님의 주권과 계획을 신뢰하며, 어려운 시기에도 희망을 잃지 않도록 격려합니다. 그의 메시지는 신앙의 본질과 하나님과의 관계를 재확인하는 데 도움을 줍니다.

    에스겔의 장

    각 장에 대한 더 깊은 이해를 위해 아래 링크를 탐험하세요:

    • 에스겔 제 1 장: 에스겔의 환상과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남. 하나님께서 에스겔을 부르시는 장면이 묘사됨.
    • 에스겔 제 2 장: 하나님이 에스겔에게 말씀하시고 이스라엘 백성을 향한 경고를 전하라고 명령하심.
    • 에스겔 제 3 장: 에스겔이 하나님의 말씀을 먹고 이스라엘 백성에게 전하라는 사명을 받음.
    • 에스겔 제 4 장: 에스겔이 이스라엘의 죄를 상징적으로 나타내는 행동을 하도록 명령받음.
    • 에스겔 제 5 장: 에스겔이 이스라엘의 심판과 회복을 예언하며, 그들의 죄를 고발함.
    • 에스겔 제 6 장: 이스라엘의 산과 골짜기를 향한 심판의 예언과 우상 숭배에 대한 경고.
    • 에스겔 제 7 장: 이스라엘의 종말이 가까워짐을 알리는 경고와 심판의 날을 예고함.
    • 에스겔 제 8 장: 에스겔이 성전에서의 우상 숭배를 목격하고 하나님의 심판을 예언함.
    • 에스겔 제 9 장: 하나님이 에스겔에게 이스라엘의 죄로 인한 심판을 알리시고, 의인들을 구별하심.
    • 에스겔 제 10 장: 하나님의 영광이 성전에서 떠나는 모습을 묘사하며, 이스라엘의 심판을 예고함.
    • 에스겔 제 11 장: 하나님이 에스겔에게 이스라엘의 심판과 회복을 예언하게 하심.
    • 에스겔 제 12 장: 에스겔이 이스라엘의 포로 생활을 상징적으로 나타내는 행동을 하도록 명령받음.
    • 에스겔 제 13 장: 거짓 선지자들에 대한 경고와 그들의 잘못된 예언을 고발함.
    • 에스겔 제 14 장: 이스라엘의 우상 숭배에 대한 경고와 회개를 촉구함.
    • 에스겔 제 15 장: 이스라엘의 불순종과 그로 인한 심판을 비유적으로 설명함.
    • 에스겔 제 16 장: 이스라엘의 배신과 하나님의 사랑을 비유적으로 설명하며, 회복의 약속을 전함.
    • 에스겔 제 17 장: 이스라엘의 두 왕국과 그들의 운명을 비유적으로 설명하며, 회복의 약속을 강조함.
    • 에스겔 제 18 장: 개인의 책임과 회개에 대한 메시지를 전하며, 하나님께서 주시는 생명의 약속을 강조함.
    • 에스겔 제 19 장: 이스라엘의 왕들과 그들의 멸망을 비유적으로 설명하며, 하나님의 슬픔을 표현함.
    • 에스겔 제 20 장: 이스라엘의 역사를 통해 하나님의 인도하심과 백성의 불순종을 회상함.
    • 에스겔 제 21 장: 하나님의 심판이 임박함을 알리며, 바벨론의 칼을 예언함.
    • 에스겔 제 22 장: 이스라엘의 죄와 부패를 고발하며, 심판의 날을 예고함.
    • 에스겔 제 23 장: 이스라엘의 두 자매를 통해 우상 숭배와 배신을 비유적으로 설명함.
    • 에스겔 제 24 장: 에스겔의 아내의 죽음을 통해 이스라엘의 멸망을 상징적으로 표현함.
    • 에스겔 제 25 장: 주변 민족에 대한 심판을 예언하며, 하나님의 공의를 드러냄.
    • 에스겔 제 26 장: 두로에 대한 심판을 예언하며, 그 도시의 멸망을 상세히 묘사함.
    • 에스겔 제 27 장: 두로의 상업과 번영을 비유적으로 설명하며, 그 멸망을 경고함.
    • 에스겔 제 28 장: 두로의 왕에 대한 심판과 그의 교만을 고발함.
    • 에스겔 제 29 장: 이집트에 대한 심판을 예언하며, 그들의 멸망과 회복을 다룸.
    • 에스겔 제 30 장: 이집트의 멸망과 그로 인해 임할 고통을 예언함.
    • 에스겔 제 31 장: 이집트의 교만을 나무에 비유하며, 하나님의 심판을 예언함.
    • 에스겔 제 32 장: 이집트의 멸망과 그로 인한 슬픔을 예언하며, 지옥에 대한 묘사를 포함함.
    • 에스겔 제 33 장: 에스겔이 파수꾼으로서의 역할을 강조하며, 회개를 촉구함.
    • 에스겔 제 34 장: 이스라엘의 잘못된 지도자들에 대한 비판과 하나님이 세우실 참된 목자를 예언함.
    • 에스겔 제 35 장: 세일 산에 대한 심판을 예언하며,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회복의 약속을 강조함.
    • 에스겔 제 36 장: 이스라엘의 회복과 하나님의 은혜를 약속하며, 새로운 마음을 주실 것을 예언함.
    • 에스겔 제 37 장: 마른 뼈의 환상을 통해 이스라엘의 회복을 상징적으로 묘사함.
    • 에스겔 제 38 장: 고 Gog과 마곡에 대한 예언과 이스라엘에 대한 공격을 경고함.
    • 에스겔 제 39 장: Gog과 그의 군대에 대한 심판과 이스라엘의 회복을 예언함.
    • 에스겔 제 40 장: 새로운 성전의 환상을 통해 하나님께서 임재하실 장소를 묘사함.
    • 에스겔 제 41 장: 새로운 성전의 내부 구조와 장식에 대한 상세한 설명.
    • 에스겔 제 42 장: 성전의 외부 구조와 제사장들의 역할에 대한 설명.
    • 에스겔 제 43 장: 하나님의 영광이 성전에 임하는 모습을 묘사하며, 회복의 약속을 전함.
    • 에스겔 제 44 장: 제사장들의 규례와 성전에서의 봉사에 대한 지침을 제시함.
    • 에스겔 제 45 장: 성전의 구역과 제사장들의 분배에 대한 규례를 설명함.
    • 에스겔 제 46 장: 성전에서의 예배와 제사 규례에 대한 지침을 제시함.
    • 에스겔 제 47 장: 성전에서 흘러나오는 생수의 강과 그 회복의 의미를 묘사함.
    • 에스겔 제 48 장: 이스라엘의 땅 분배와 각 지파의 구역을 설명하며, 하나님의 임재를 강조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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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나님의 심판과 회복의 약속

    1장: 하나님의 영광의 환상
    에스겔이 포로로 끌려간 중에 하나님의 영광을 보는 환상을 경험합니다. 네 생물과 바퀴들, 그리고 하나님의 보좌를 통해 하나님의 주권과 거룩함이 드러납니다.
    2장: 선지자로 부르심을 받다
    하나님께서 에스겔을 선지자로 부르시고, 반역하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말씀을 전하라고 명령하십니다. 백성이 듣든지 아니 듣든지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해야 합니다.
    3장: 말씀을 받아먹고 경고하다
    하나님께서 두루마리를 먹게 하시며, 에스겔이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야 함을 상징적으로 보여주십니다. 그는 파수꾼으로 세워져, 악인의 죄를 경고할 책임을 가집니다.
    4장: 예루살렘의 포위에 대한 예언
    진흙 벽돌과 쇠 냄비를 사용해 예루살렘이 포위될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줍니다. 에스겔은 390일 동안 한쪽으로 눕는 행동을 통해 이스라엘의 죄를 짊어집니다.
    5장: 예루살렘의 심판
    머리털과 수염을 깎아 불태우고 흩트리는 행위를 통해 예루살렘이 칼과 기근, 포로로 인해 멸망할 것을 예언합니다.
    6장: 우상 숭배에 대한 심판
    이스라엘이 우상 숭배로 인해 심판받을 것이며, 산당과 제단이 파괴될 것입니다. 그러나 남은 자들이 회개하고 하나님을 기억할 것입니다.
    7장: 이스라엘의 끝이 다가오다
    하나님의 심판이 가까이 왔으며, 백성들은 은과 금으로도 자신을 구원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진노가 임할 것입니다.
    8장: 성전의 우상 숭배
    에스겔이 환상 중에 예루살렘 성전에서 일어나는 우상 숭배를 목격합니다. 하나님께서 성전을 떠나실 것을 암시하십니다.
    9장: 멸망과 보호
    하나님께서 우상 숭배로 인해 예루살렘을 심판하시지만, 탄식하는 자들은 보호하십니다.
    10장: 하나님의 영광이 성전을 떠나다
    그룹들이 하나님의 영광을 운반하며, 성전에서 떠나가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이는 이스라엘의 심판과 영적 황폐함을 의미합니다.
    11장: 회개와 새 영의 약속
    하나님께서 백성을 흩으시지만, 다시 회복시키고 새 영을 부어 주실 것을 약속하십니다.
    12장: 포로 생활에 대한 예언
    에스겔이 포로처럼 짐을 싸고 떠나는 행동을 통해 이스라엘이 바벨론으로 끌려갈 것을 상징적으로 예언합니다.
    13장: 거짓 선지자들에 대한 심판
    거짓 선지자들이 헛된 예언을 하며 백성을 속이고 있지만, 하나님께서 그들을 심판하실 것입니다.
    14장: 우상 숭배자들의 심판
    이스라엘 장로들이 하나님께 묻지만, 그들 마음에 우상을 품고 있어 응답받지 못할 것입니다.
    15장: 포도나무의 심판
    열매 없는 포도나무는 불에 던져지는 것처럼, 이스라엘도 쓸모없게 되어 심판받을 것입니다.
    16장: 예루살렘의 타락한 역사
    이스라엘이 하나님께서 돌보셨음에도 불구하고 우상을 섬기며 배신한 역사를 비유적으로 설명합니다.
    17장: 두 독수리의 비유
    바벨론과 애굽의 관계를 독수리와 포도나무 비유로 설명하며, 이스라엘이 바벨론과 애굽 사이에서 망할 것을 예언합니다.
    18장: 개인의 책임
    각 사람은 자기 죄로 인해 죽거나 살며, 부모의 죄가 자식에게 전가되지 않는다는 하나님의 공의를 강조합니다.
    19장: 이스라엘 지도자들의 몰락
    두 마리 사자와 포도나무 비유를 통해 이스라엘 왕들이 실패하고 심판받을 것을 예언합니다.
    20장: 이스라엘의 반역 역사
    출애굽 이후 이스라엘이 계속해서 하나님을 배반했음을 상기시키며, 결국 심판받을 것임을 경고합니다.
    21장: 바벨론의 칼
    하나님의 칼이 바벨론을 통해 이스라엘을 치실 것이며, 누구도 피할 수 없음을 경고합니다.
    22장: 예루살렘의 죄악
    예루살렘이 피 흘림과 우상 숭배로 인해 멸망할 것이며, 부패한 지도자들로 인해 더욱 타락했음을 지적합니다.
    23장: 두 음녀의 비유
    오홀라(사마리아)와 오홀리바(예루살렘) 비유를 통해 이스라엘과 유다가 우상 숭배로 타락했음을 책망합니다.
    24장: 끓는 가마 비유
    예루살렘이 끓는 가마처럼 불길 속에서 심판받을 것을 예언하며, 에스겔의 아내가 죽지만 애도하지 못하게 하십니다.
    25장: 주변 민족들의 심판
    암몬, 모압, 에돔, 블레셋이 하나님의 심판을 받을 것을 경고합니다.
    26~28장: 두로와 시돈의 심판
    교만한 두로와 시돈이 하나님의 심판을 받을 것이며, 바다 속에 가라앉을 것이라고 예언합니다.
    29~32장: 애굽의 심판
    애굽의 패망을 예언하며, 바벨론이 그들을 정복할 것임을 경고합니다.
    33장: 파수꾼의 책임
    에스겔은 이스라엘의 파수꾼으로서 경고할 책임이 있으며, 백성들은 회개해야 합니다.
    34장: 선한 목자와 악한 목자
    지도자들의 책임을 지적하며, 하나님께서 참된 목자가 되어 백성을 인도하실 것을 약속합니다.
    35장: 에돔의 심판
    에돔이 이스라엘을 조롱하고 멸망을 기뻐했지만, 결국 하나님의 심판을 받을 것입니다.
    36장: 새 마음과 새 영
    이스라엘이 회복될 것이며, 하나님께서 새 마음과 새 영을 주실 것을 약속하십니다.
    37장: 마른 뼈 환상
    마른 뼈들이 살아나는 환상을 통해 이스라엘이 다시 회복될 것을 예언합니다.
    38~39장: 곡과 마곡의 심판
    이스라엘을 대적하는 곡과 마곡이 하나님의 심판을 받을 것을 예언합니다.
    40~48장: 새 성전과 새 예루살렘
    하나님의 영광이 돌아오고, 성전이 재건되며, 이스라엘이 영적으로 회복될 것을 묘사합니다.
    결론
    에스겔서는 이스라엘의 죄로 인한 심판과 하나님의 공의를 강조하면서도, 결국 회복과 새 언약을 약속하는 책입니다. 하나님의 심판은 철저하지만, 동시에 그의 은혜와 자비는 신실하게 이루어집니다. 회개하고 하나님께 돌아가는 것이 유일한 소망이며, 하나님께서 결국 새 성전과 새 예루살렘을 통해 그의 백성을 다시 일으키실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