____________________________ 레위기 27장 / 서원(2절)
Speak to the Israelites and say to them: 'If anyone makes a special vow to dedicate persons to the LORD by giving equivalent values.
서원(5088) 네데르(neder) נֶדֶר
1. 맹세, 2. 서원한 것
어원 / 어미활용 נִדְרִי, 복수형 נִדְרֵי ,נְדָרִים,5087서 유래
관련 성경 / 서원(창 28:20, 민 30:2, 잠 20:25, 레 7:16, 민 15:3, 시 116:18), 서원제(레 22:18, 민 29:39, 신 12:6), 서원물(신 12:11, 26)
구약 성경 / 60회 사용
27:1-8. 인신서원의 환산, 즉 인신으로써 한 서원의 환산.
27:9-13. 생축서원의 환산, 즉 생축에 의한 서원.
27:14-15. 가옥서원의 환산, 즉 가옥에 의한 서원의 환산.
27:16-25. 토지서원의 환산, 즉 전답에 의한 서원의 환산.
27:26-29. 헌물 정가에 관한 부언(26-27 첫 새끼의 환산, 28-29 영구 봉헌물).
27:30-33. 십일조의 규정(소산물과 과실 및 소와 양의 십분의 일에 대하여).
27:34- 결어.
모든 소산의 십분 일을 구별하여 하나님께 바쳐야 했던 것이다.
원래 십일조는 이스라엘만의 독특한 규례가 아니라 당시 고대 근동 사회에서 널리 시행되던 제도였다.
그러나 지배자가 피지배자를 수탈하는 데 활용하던 고대 근동의 제도와 달리 이스라엘의 십일조는 하나님의 보호와 축복에 대한 자발적인 헌금의 성격을 띠고 있다.
성경에서는 아브라함이 멜기세덱에게 전리품의 십일조를 바친 것이 처음으로 등장하며, 야곱이 벧엘에서 하나님께 십일조를 약속한 경우도 있다. 그러나 성문화된 것은 본장에 나타난 모세의 율법을 통해서이다. 신약에서는 십일조에 관한 예수님의 구체적인 언급이 나타나지 않는다. 다만 초대교회에서 교회의 운영과 지도자의 생계를 위해 십일조를 강조한 전통에 의해 현대에서도 십일조는 성도들의 당연한 의무로 여겨지고 있다.
레위기 27장은 "서원에 대한 규정"을 강조합니다.
서원(誓願)을 히브리어로 "네데르(neder. נֶדֶר)" 라고 합니다.
'네데르'란 "맹세" 또는 "약속한 것"을 의미합니다.
더구나 서원은 의무가 아니라 주로 하나님의 축복에 대한 감사의 마음이나 간구에 대한 응답을 믿음으로 자발적으로 약속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서원을 하면 반드시 지켜야 합니다.
서원의 목록에는 "사람, 생축, 집, 땅(부동산)"에 대해서 말씀하셨습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 부부는 그들의 소유를 모두 팔아 바치겠다고 서원했습니다.
그런데 모든 밭을 팔아 돈을 받은 후에 순간적으로 유혹에 무너지고 말았습니다.
그 결과 모든 것을 바친다고 한 것 때문에 부부가 동시에 죽고 말았습니다.
1. 서원 예물로 사람을 드리는 경우(27:1-2)
사람을 하나님께 드리기로 서원할 경우에는 직접 드릴 수 없으므로 성별과 나이에 따라 돈으로 환산하여 드리게 했습니다. 그 때 성소에 드린 돈을 속전(贖錢)이라고 불렀습니다. 그 속전은 20~60세 되는 남자는 은 50세겔 여자는 은 30세겔이고, 5~20세되는 남자는 은 20세겔 여자는 은 10세겔이고, 60세 이상되는 남자는 15세겔 여자는 10세겔이고, 1개월~5세 되는 남자는 은 5세겔 여자는 은 3세겔입니다.
2. 짐승으로 서원하는 법 (9-13절)
생축을
드리기로 서원했으면 다른 생축으로 바꾸어 드릴 수 없습니다. 만일 더 좋은 다른 짐승으로 드리려 할 때는 전에 드리기로 한
짐승은 드려진 채로 두고 새로 드리려 하는 짐승을 또 드려야 합니다.
3. 가옥으로 서원하는 법 (14-15절)
자기 집을 하나님께 드리기로 서원한 경우에는 짐승과 마찬가지로 제사장이 그 집의 우열을 따라 값을 정하고 그 정가를 속전으로 드려야 합니다. 만일 자기가 그 집에서 계속 살려고 하면 배상금조로 정가에 5분의 1을 더 드려야 합니다. 그러면 그 집이 자기 소유가 되었습니다 (14-15절).
4. 토지로 서원하는 법 (16-25절)토지를
드릴 경우에도 두락수(斗落數)대로 속전으로 드립니다. 보리 한 호멜지기에 은 50세겔로 계산하여 드립니다. 호멜(Homer)은
고체의 측정 단위로서 한 호멜은 230ℓ 정도 됩니다. 한 호멜지기는 230ℓ 정도의 씨앗을 뿌릴 수 있는 면적을 말합니다.
5. 처음 난 생축에 대한 규정 (26-27절).
생축의 첫새끼는 하나님의 것이므로 하나님께 드려야 합니다. 그것을 자기 것으로 삼거나 팔아서도 안되지만 서원 예물로 사용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26절).
6. 헌물(獻物)에 대한 규정 (28-29절).
여호와께 아주 바쳐진 것은 그것이 사람이든 생축이든 가옥이든 토지이든 물건이든 서원 예물도 드릴 수 없습니다. 속전으로 대신 드릴 수도 없습니다. 사람과 생축은 죽여야 하고 성읍과 가옥과 물건은 파괴해야 하고 토지는 황무하게 내버려 두어야 합니다.
7. 십일조에 대한 규정 (30-34절).땅의
10분의 1은 서원 예물로 드릴 수 없습니다. 땅의 10분의 1 은 토지 자체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토지에서 나는 모든 소출의
십일조를 말합니다. 십일조는 하나님께서 하나님 몫으로 성소에 드려야 할 성물로 구별한 것이기 때문에 서원 예물로 드릴 수 없다는
것입니다.
사무엘상 10-12장
누가복음 9:37-62
사실 레위기는 26장으로 끝나야 가장 자연스러운 것입니다.
이것은 아마도 모세가 이 레위기를 다 기록한 이후에 다시금 추가적인 규례를 넣어야 하는 상황이 생겼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중간에 넣을 수 없어서 제일 뒤에 부록형식으로 첨부한 것이죠.
그러면 오늘 본문을 살펴보겠습니다.
오늘 본문은 “서원 무르기 규례”입니다(2, 9절).
서원이란 “하나님께 대한 약속 또는 맹세”를 의미합니다.
즉 어떤 긴급한 상황이 있을 때, “이 어려움을 해결해주시면 제가 ~를 드리겠습니다.” 하고 하나님께 약속하는 것이 서원입니다.
아니면 어떤 문제가 발생했다기보다는 단순히 신앙과 헌신의 표현으로 서원할 수도 있습니다(시 132:2-5).
어떤 경우든 서원이라고 하는 것은 자원해서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구체적으로 무엇을 헌신해 드릴 수 있습니까?
레위기 27장은 그 목록으로 사람, 생축, 집, 땅을 드릴 수 있다고 말씀합니다.
1. 서원 예물로 사람을 드리는 경우(27:1-2)
2. 서원 예물로 생축을 드리는 경우
먼저 사람을 드리는 것과 관련한 규례를 살펴보겠습니다.
본문의 1절과 2절을 보십시오.
1.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일러 가라사대
2. 이스라엘 자손에게 고하여 이르라 사람을 여호와께 드리기로 서원하였으면 너는 그 값을 정할지니
하나님은 누군가가 사람을 여호와께 드리기로 서원할 수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자신을 드릴 수도 있고, 자기 자식을 드릴 수도 있습니다.
사람을 바친다는 말은 몰렉에게 제사하는 것처럼 하나님께 사람을 제물로 드린다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가증히 여기시는 것입니다.
사람을 하나님께 바친다는 것은 두 가지 중의 하나입니다.
하나는 한나가 사무엘을 나실인으로 바쳐서 그로 제사장 직무를 행하도록 한 것처럼 하나님께 자신의 노동력을 헌신해 드리는 것입니다. 다른 하나는 돈을 드려서 하나님께 헌신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나무를 드리는 것하고, 나무의 열매를 드리는 것하고 비교할 수가 있습니다.
방식은 다르지만 결국 똑같은 헌신인 것입니다.
돈을 드려 헌신하는 방식이 레위인들을 하나님께 바치는 행위에서 잘 나타났습니다.
출애굽할 때 어린양의 피로 이스라엘의 모든 장자가 구속함을 얻었습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의 모든 장자와 생축의 첫 새끼는 하나님의 것입니다.
그런데 나중에 보면 하나님께서 장자들 대신에 레위인들을 받으셔서 레위인들로 하여금 성막과 제사의 일을 섬기도록 하셨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레위인들이 이스라엘의 모든 장자들보다 수가 적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모자란 만큼, 한 사람당 오 세겔씩 내도록 하여 헌신하도록 하셨습니다(민 3:44-51).
즉 하나님께서는 돈으로 드리는 것을 레위인으로 대속하여 헌신해드리는 것과 동일한 것으로 여겨주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민수기 말씀을 보면 그 돈을 일컬어서 ‘속전’이라고 표현합니다.
“모세가 레위인으로 대속한 이외의 사람에게서 속전을 받았으니”(민 3:49)
속전이라는 단어는 돈을 주어 그 사람을 노예 됨에서 해방시켜주는 무르기 규례를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본다면 오늘 레위기 본문에서 사람을 바칠 때 돈을 대신하여 드리는 것은 일종의 무르기로서 속전을 하나님께 바치는 행위인 것입니다.
곧 자기 자신을 하나님께 드린 후 속전을 지불하여 무름으로써 다시 자기 생업으로 돌아갈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어쨌든 돈을 속전으로 드렸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그가 헌신했다고 인정해주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물질적인 헌신이 나실인의 경우만큼이나 성소를 섬겨 가는데 있어서 꼭 필요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성소가 잘 돌아가기 위해서는 노동력보다는 사실상 돈이 더 많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노동력은 이미 헌신된 레위인들로도 거의 충분합니다.
그러나 돈은 늘 부족하죠.
그래서 하나님은 사람을 드릴 때 무르는 방식으로 헌신을 하도록 하셔서 돈을 드릴 수 있도록 하셨습니다.
오늘 레위기 27장 전체가 바로 이러한 무르기를 통한 헌신에 포인트가 있습니다.
서원할 때 제사장이 값을 정하는 것도 다 이 무르기를 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그러면 사람을 드릴 때, 제사장이 어떻게 가격을 정합니까?
사람의 경우는 제사장 마음대로 정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친히 정해주셨습니다(레 27:3-7).
본문의 내용을 보면 대체적으로 남자가 여자보다 1.5배 또는 2배 비싸고, 연령대에 따라서는 한창 일할 수 있는 20-60세 연령대가 가장 비싸고, 연소하고나 연로할 경우에는 가격이 낮아집니다.
그래서 20-60세 사이의 남성이 가장 비싸며, 그 값이 무려 50세겔이나 됩니다.
1세겔이 노동자 한 달 월급에 해당하는 것으로 추측되는데, 50세겔이면 오늘날의 1억 정도 됩니다.
일반평민이 1억 정도 벌려면 평생 뼈 빠지게 일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50세겔을 드린다는 것은 사실상 자신의 인생 전체를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남자가 왜 여자보다 값이 비싼가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아마도 역할 면에서 남자가 여자보다 더 가치가 있기 때문에 그런 것 같습니다.
동일한 하나님의 형상이지만, 그러나 오늘날과 같이 과학기술이 발달하지 않은 시대에서는 노동력과 군사력을 제공할 수 있는 남자가 훨씬 가치 있게 여겨졌던 것입니다.
대부분의 학자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이 가격은 아마도 그 당시 노예 시세를 반영하는 것으로 추측됩니다.
그런데 8절에 보면 가난한 자들을 위한 예외규정이 주어집니다.
8. 그러나 서원자가 가난하여 너의 정가를 감당치 못하겠으면 그를 제사장의 앞으로 데리고 갈 것이요 제사장은 그 값을 정하되 그 서원자의 형세대로 값을 정할지니라
다른 서원 예물의 경우는 예외규정이 없는데, 사람을 바칠 때는 가난한 자들을 위한 예외규정이 있습니다.
그것은 다른 서원 예물은 자신이 이미 가지고 있는 것을 그냥 드리면 되는 것이지만, 사람을 드리는 것은 생돈 수 천 만원을 새로 마련해서 드려야 하는 것이므로, 만일 가난할 경우에는 그것을 도무지 감당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이런 예외규정을 두지 않으셨다면, 가난한 자들은 도무지 자신을 헌신해드리는 서원을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은혜로우시게도 하나님은 가난한 자들도 서원할 수 있도록 해주셨습니다.
2. 서원 예물로 생축을 드리는 경우
9. 사람이 예물로 여호와께 드리는 것이 생축이면 서원물로 여호와께 드릴 때는 다 거룩하니
10. 그것을 변개하여 우열간 바꾸지 못할 것이요 혹 생축으로 생축을 바꾸면 둘 다 거룩할 것이며
11. 부정하여 여호와께 예물로 드리지 못할 생축이면 그 생축을 제사장 앞으로 끌어 갈 것이요
12. 제사장은 그 우열간에 정가할지니 그 값이 제사장의 정한 대로 될 것이며
13. 그가 그것을 무르려면 정가에 그 오분 일을 더할지니라
생축을 드리기로 서원할 때는 그냥 “양 한 마리 드리겠습니다.”
그렇게 하지 않고 구체적으로 지정하여 서원합니다.
예를 들면 “다음 달에 태어나는 양을 하나님께 드리겠습니다.”라고 서원하는 것이죠.
그러면 그 약속을 함과 동시에 다음 달에 태어난 양은 이미 하나님의 것으로서 거룩한 것이 됩니다.
그러므로 기한이 되어 서원을 갚을 때 그것을 변개하면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 마음이라는 것이 간사해서 긴급한 상황에서는 아낌없이 드리겠다고 서원하지만, 나중에 실제로 드릴 때는 아까운 마음이 들어서 좀 값이 덜나가는 양으로 바꾸어 드리고 싶은 유혹을 받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렇게 할 경우 더 손해가 있게끔 하셨습니다.
원래 드려야 할 것과 바꾼 것 두 마리 다 드리도록 하신 것입니다.
즉 하나님께 약속했으면 꼼수부리거나 잔머리 굴리지 말고 그 약속을 철두철미하게 지켜야 된다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부정한 짐승의 경우도 마찬가지로 제사장이 값을 정해서 알려줍니다.
그러나 부정한 짐승은 제물로 쓰일 수 없기 때문에 제사장이 그것을 가지고 있다가 다른 사람에게 팔아야 할 것입니다.
만일 정한짐승이든 부정한 짐승이든 서원을 무르고 그 생축을 다시 집으로 데려오고자 한다면, 정해진 값의 1/5을 추가하여 드려야 합니다.
1/5은 우리가 속건제 할 때 배웠듯이 배상의 의미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서원을 함부로 해서는 안 되고, 서원을 했으면 반드시 지켜야 하고, 어기면 그에 대한 배상을 해야 한다는 것을 알고서 서원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레위기 27장이 서원 무르는 것을 무조건 나쁜 것으로 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어떤 경우는 오히려 하나님께서 적극적으로 무르기를 하라고 요구하시는 경우가 있습니다.
예를 들어서 사람을 드리는 경우가 여기에 해당될 것이고, 특별히 부정한 짐승을 드리는 경우도 여기에 해당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부정한 짐승을 드릴 때는 서원자가 정가의 120%를 내고 무르는 것이 더욱 하나님께 헌신하는 것입니다(27절 참조).
그래서 성급하게 서원했다가 자신의 욕심 때문에 약속을 취소하는 나쁜 무르기가 있는가 하면, 그 헌물을 성막이 필요로 하지 않기 때문에 무르기 하여 돈으로 드리는 좋은 무르기가 있는 것입니다.
둘 다 무르는 것이기 때문에 120%를 내야 하지만, 그 동기에 따라서 성격이 많이 달라지는 것입니다.
3. 서원 예물로 부동산을 드릴 경우
14. 사람이 자기 집을 구별하여 여호와께 드리려면 제사장이 그 우열간에 정가할지니 그 값이 제사장의 정한 대로 될 것이며
15. 그 사람이 자기 집을 무르려면 정가한 돈에 그 오분 일을 더할지니 그리하면 자기 소유가 되리라
16. 사람이 자기 기업된 밭 얼마를 구별하여 여호와께 드리려면 두락수대로 정가하되 보리 한 호멜지기에는 은 오십 세겔로 계산할지며17. 그가 그 밭을 희년부터 구별하여 드렸으면 그 값을 네가 정한 대로 할 것이요
18. 그 밭을 희년 후에 구별하여 드렸으면 제사장이 다음 희년까지 남은 연수를 따라 그 값을 계산하고 정가에서 그 값에 상당하게 감할 것이며
19. 밭을 구별하여 드린 자가 그것을 무르려면 정가한 돈에 그 오분일을 더할지니 그리하면 그것이 자기 소유가 될 것이요
집이나 밭을 헌신해드릴 경우도 제사장이 먼저 값을 정해야 합니다.
집은 제사장이 보고 적절한 가격을 매기면 되지만, 땅은 파종하는데 필요한 씨앗의 양으로 그 가격을 정합니다.
보리 한 호멜로 파종할 수 있는 구역의 경우는 희년까지 50세겔로 정해집니다.
희년까지 얼마 남지 않았으면 가격이 많이 싸질 것이고, 희년 다음해에 드렸다면 50세겔 그대로가 될 것입니다.
희년을 기준으로 값을 매기는 이유는 희년까지만 무르기가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희년이 되어서도 무르지 않을 경우 그 밭은 영영히 제사장의 기업이 됩니다.
20. 그가 그 밭을 무르지 아니하려거나 타인에게 팔았으면 다시는 무르지 못하고
21. 희년이 되어서 그 밭이 돌아오게 될 때에는 여호와께 바친 성물이 되어 영영히 드린 땅과 같이 제사장의 기업이 될 것이며
그래서 이 규례는 서원자로 하여금 희년 전까지 이 밭을 무르도록 강력히 권장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물론 정말 하나님께 자신의 땅을 온전히 헌정해드리기를 원하는 사람은 희년에도 무르지 않겠지만, 그러나 그렇게 하지 않고 120%의 속전을 지불하여 희년에 무르기 해서 하나님께 헌신해드릴 수도 있는 것입니다.
문제는 헌신해드린 후에 (헌신해드렸더라도 밭의 관리와 경작은 서원자 본인이 해야 합니다.)
잔머리를 굴려서 손해 보지 않겠다고 그것을 다른 사람에게 팔아버리는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는 것은 아주 나쁜 것으로서 무를 수 있는 권리마저 박탈당하는 벌을 받게 됩니다.
그러면 자신에게 손해가 없도록 하기 위해 다른 사람의 밭을 드리면 어떻습니까?
만일 헌신해드린 밭이 자기 밭이 아닐 경우는 희년이 되면 서원자가 무조건 그 정가를 주고 무르기 해야 하며, 무르기 한 후에 그 밭은 원주인에게 돌려주어야 합니다. 22-24절을 보시면...
22. 사람에게 샀고 자기 기업이 아닌 밭을 여호와께 구별하여 드렸으면
23. 너는 정가하고 제사장은 그를 위하여 희년까지 계산하고 그는 너의 정가한 돈을 그 날에 여호와께 드려 성물을 삼을지며
24. 그 밭은 희년에 판 사람 곧 그 기업의 본주에게로 돌아 갈지니라
결국 핵심은 헌신해드리기로 서원했으면, 정말 서원대로 드리든, 정해진 가격의 120%를 지불하여 무르든, 아니면 어떤 방식으로든 그 서원을 갚아야만 하고, 또 갚을 수밖에 없도록 하나님이 규정하신 것입니다. 서원하면 헌신하는 것은 피할 수 없습니다. 손해를 덜 보겠다고 꼼수를 부릴수록 더 많은 손해를 봐야 합니다. 물론 하나님이 이렇게 하시는 것이 억지로라도 헌신을 받겠다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 한 약속은 반드시 지켜야 하며, 그것이 하나님을 경외한다고 하는 신앙의 표이기 때문에, 그러한 경외함을 배우도록 하시기 위해서 이렇게라도 헌신하도록 하신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약속에 신실하신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여호와 하나님을 믿고 섬기는 이스라엘 백성들도 하나님께 대한 신의를 지켜야 합니다. 중요한 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벌금이 무서워서 헌신할 것이 아니라, 환난 날에 응답하신 그 은혜를 깊이 깨닫고 기억하면서 감사와 자원함으로 헌신해야 하는 것입니다.
4. 서원 예물이 될 수 없는 목록 - 생축의 첫 새끼, 십일조
26절부터는 서원 예물로 드릴 수 없는 목록을 언급합니다.
26. 오직 생축의 첫새끼는 여호와께 돌릴 첫새끼라 우 양을 물론하고 여호와의 것이니 누구든지 그것으로는 구별하여 드리지 못할 것이며
27. 부정한 짐승이면 너의 정가에 그 오분 일을 더하여 속할 것이요 만일 속하지 아니하거든 너의 정가대로 팔지니라 ...
30. 땅의 십분 일 곧 땅의 곡식이나 나무의 과실이나 그 십분 일은 여호와의 것이니 여호와께 성물이라
31. 사람이 그 십분 일을 속하려면 그것에 그 오분 일을 더할 것이요
32. 소나 양의 십분 일은 막대기 아래로 통과하는 것의 열째마다 여호와의 거룩한 것이 되리니
33. 그 우열을 교계하거나 바꾸거나 하지 말라 바꾸면 둘 다 거룩하리니 속하지 못하리라
26절부터 언급되는 생축의 첫 새끼나 십일조 같은 것들은 워낙 하나님의 것이기 때문에 서원 예물로 드릴 수 없습니다.
그것은 의무적으로 드려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자원해서 서원하여 드렸든, 십일조와 같이 의무적으로 드려야 하는 것이든 상관없이 그 헌물이 하나님께 바쳐졌으면 그것은 하나님의 것으로서 거룩한 것입니다.
그리고 서원 예물과 동일하게 생축의 첫 새끼와 십일조의 경우도 그 정가의 120%를 드려서 다시 무를 수가 있습니다(본문의 ‘속하다’는 단어가 ‘무르다[가알]’라는 단어임).
특히 부정한 생축의 첫 새끼는 서원예물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무를 것을 권장합니다. 그러나 서원자가 무르기를 원치 않으면, 제사장이 자신이 정한 가격으로 다른 사람에게 팔아야 합니다. 그런데 주의할 것은 특별히 십일조를 드릴 때, 서원 예물 드릴 때와 마찬가지로 잔머리를 굴리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소나 양의 십일조를 드릴 때 보다 값이 떨어지는 것으로 드리고 싶은 것이 인간의 죄악된 본성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아예 소나 양의 십일조 드리는 방법을 정해주셨습니다. 소나 양을 랜덤하게 일렬로 줄을 세워놓고 지나가게 하면서 열 번째로 지나가는 것을 (그것이 열등한 것이든 우등한 것이든 상관없이) 십일조로 드려야 합니다. 만일 우등한 것이 걸렸는데, 그것을 열등한 것으로 바꾸면 둘 다 바쳐야 합니다.
그러므로 오늘 본문을 요약하면 서원은 반드시 지켜야 하고, 어기거나 잔머리를 굴리면 더 큰 손해를 보게 되며, 헌신해 드릴 때는 성소의 필요에 따라서 서원한 그대로 드릴 수도 있고, 또는 속전을 지불하여 무름으로써 헌신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5. 아주 바쳐진 것은 무를 수 없음
그런데 오늘 본문에 보면 전체문맥의 흐름을 떠나서 전혀 다른 의미의 헌신을 이야기합니다. 이것이 사실상 매우 놀라운 것이고, 또 매우 중요한 부분입니다.
(28)오직 여호와께 아주 바친 그 물건은 사람이든지 생축이든지 기업의 밭이든지 팔지도 못하고 속하지도 못하나니 바친 것은 다 여호와께 지극히 거룩함이며(29)아주 바친 그 사람은 다시 속하지 못하나니 반드시 죽일지니라
28-29절은 아주 바쳐진 헌물을 이야기합니다. 원어로 ‘헤렘’이라는 단어인데 이미 21절에서 한번 사용되었습니다. 즉 밭을 헌신해드렸는데, 희년이 되어서도 무르지 않으면 영영히(헤렘) 바쳐진 땅이 되어 무를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알게 되는 것은 헌신해드리는 것이 다 똑같이 헌신해드리는 것이 아니라 나름대로 등급이 있다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께 헌신해드릴 때 그냥 드릴 수도 있고, 아주! 드릴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나님께 아주 드리는 경우에는 다시 무를 수가 없습니다. 지극히 거룩한 것으로서 제사장의 소유가 되거나, 또는 성막에서 거룩한 용도로만 사용되어야 합니다. 만일 그것이 세속적인 용도로 사용될 때에는 반드시 폐기처분하든지 죽이든지 해야 합니다. 또는 본질적으로 거룩하게 될 수 없는 사물이나 생명체는 하나님께 온전히 드려지는 그 즉시로 죽여야 합니다.
지극히 거룩하신 하나님께 부정한 인간을 아주 바친다는 것은 곧 그 인간의 소멸을 뜻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마치 불 가까이에 나무를 가져다놓는 것과 같습니다. 이러한 사실을 이 ‘헤렘’이라는 단어가 잘 보여줍니다. ‘헤렘’은 이중적인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봉헌’이라는 뜻도 있지만, ‘완전히 멸망시키다, 진멸하다’라는 뜻도 있습니다. 이 두 의미가 연결되어 있는데, 이 사실이 가나안 정복 전쟁에서 잘 나타나는 것입니다.
“이 성과 그 가운데 모든 물건은 여호와께 바치되 기생 라합과 무릇 그 집에 동거하는 자는 살리라 이는 그가 우리의 보낸 사자를 숨겼음이니라”(수 6:17)
원어에 보면 ‘물건’이라는 단어가 없습니다. 그냥 성 안에 있는 모든 것을 바치라고 나와 있습니다. 그것은 물건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과 생축을 다 포함하는 것입니다(기생 라합만 살리는 표현을 보십시오). 그런데 이 구절에서 ‘바치다’라는 단어가 원어로 보면 ‘헤렘’이라는 단어입니다. 표준새번역이 이것을 잘 번역했습니다.
“이 성과 이 안에 있는 모든 것을 전멸시켜서, 그것을 주께 제물로 바쳐라. 그러나 창녀 라합과 그 여인의 집에 있는 사람은 모두 살려 주어라. 그 여인은 우리가 보낸 정탐꾼들을 숨겨 주었다.”(수 6:17,표준새번역)
여리고 성의 모든 사람들과 생축, 모든 사물들을 하나님께 아주 드려야 하는 것입니다. 사람들과 생축을 어떻게 하나님께 드립니까? 그들의 목을 따서 제물로 하나님께 바쳐드립니다. 한편 생명체가 아닌 보물들과 물건들은 여호와의 곳간에 구별하여 드려야 합니다. 이렇게 여리고에 있는 모든 것은 다 여호와께 아주 바쳐진 것으로서 지극히 거룩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것을 절대로 건드리면 안 되는 것이고 절대로 무를 수도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비열하게도 아간이 간사하게 그것을 숨겨서 탈취하다가 하나님의 진노를 받아 죽임당하고 말았던 것입니다. 앞에 서원 예물의 경우는 꼼수를 부리거나 속여서 취하거나 하면 벌금을 무는 것으로 끝이지만, 아주 바쳐진 것을 건드릴 경우에는 하나님께서 용납하지 않으시고 반드시 진노하셔서 엄벌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결론적으로 “사람을 하나님께 아주 바친다”는 것은 하나님의 원수의 목을 따서 하나님께 드림으로 하나님의 마음을 시원하게 해드리는 것을 의미합니다. 가나안 족속들이 얼마나 큰 죄들을 지었습니까? 그래서 이스라엘에게 진멸하여 나에게 바치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가나안 족속만 원수가 아니라 모든 인간이 다 죄인이므로 다 하나님의 원수인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을 하나님께 아주 드린다는 것은 그 자체로는 좋은 의미인데, 문제는 우리가 다 죄인이기 때문에 그것이 곧 우리에게는 죽음을 의미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인생들을 떠나 계시고, 이스라엘 성막 가운데 임재하셨어도 겹겹으로 싸서 텐트로 가려서 보지 못하도록 하신 이유가 우리로 죽임당하지 않도록 하시기 위함입니다. 이것이 은혜입니다.
(29)아주 바친 그 사람은 다시 속하지 못하나니 반드시 죽일지니라
그래서 이 말씀은 정말 자기 자신이나 자식을 죽여서 하나님께 바치라는 말이 아니라, “정말 나에게 온전히 헌신하고 싶냐? 그러나 너희는 죄인이기 때문에 지극히 거룩한 나 하나님의 소유가 될 수가 없다. 안 그러면 너희가 죽어야 된다.” 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은혜로운 것은 더러운 죄인이 온전히 하나님께 바쳐질 수 있는 새로운 길이 열리게 된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아론이 하나님께 온전히 드려진 것에서 잘 나타나는 것입니다. 전적타락하고 부정한 인간에 불과한 아론이 어떻게 하나님께 온전히 드려져서 지극히 거룩한 대제사장이 되었습니까? 아론이 하나님께 아주 바쳐지게 되면 그냥 거기서 죽어버려야 정상인 것인데, 하나님께서는 아론 대신에 수송아지를 대신 죽이심으로 아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의에 대하여는 산자로 여겨주신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사실은 모형과 예표이기 때문에 사실은 아론도 하나님께 온전히 드려지지 못했습니다.
사람이 진짜 온전히 하나님께 드려지는 일은 구약의 모든 모형의 실체가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졌습니다. 참으로 신약의 성도들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께 온전히 아주 드려진 자들입니다. 어떻게 우리가 하나님께 드려졌습니까?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죄를 대신 짊어지시고, 우리 대신 하나님께 아주 드려지셔서 십자가에서 비참하게 처형당해 죽으셨습니다. 자신의 목을 따서 하나님께 제물로 드림으로써 우리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와 분을 모두 삭히시고 하나님의 마음을 시원하게 해드린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를 위해 부활하셔서 우리의 구세주가 되신 것입니다. 그리고 성령님께서 우리를 이 2000년 전의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 속에 집어넣으셔서 우리로 그리스도와 함께 죽게 하시고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아나게 하셔서 우리로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의에 대하여는 하나님께 대하여 산자가 되게 하신 것입니다. 그리하여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께 온전히 드려지게 된 것입니다. 그것을 요한계시록 말씀은 이렇게 표현합니다.
“새 노래를 노래하여 가로되 책을 가지시고 그 인봉을 떼기에 합당하시도다 일찍 죽임을 당하사 각 족속과 방언과 백성과 나라 가운데서 사람들을 피로 사서 하나님께 드리시고”(계 5:9)
그래서 우리는 예수의 피 값으로 아주 하나님께 바쳐진 자들이기 때문에, 신약의 성도들은 서원할 레야 서원할 수가 없습니다. 죽을병에 걸려서, “하나님 살려주시면 제 인생을 하나님께 바쳐드리겠습니다.”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것을 가지고 하나님과 흥정하겠다는 것과 다를 바 없습니다. 그럴 때는 서원할 것이 아니라, 그동안 하나님의 것인데 배은망덕하게 자기 마음대로 살았던 죄를 회개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께 온전히 드려졌습니다. 그리고 한번 드려졌기 때문에 절대로 무를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께 속한 자는 영영히 하나님의 것이 되었고 그의 손에서 빠져나올 수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의 삶이 어떻습니까? 오늘날 우리가 아간이 했던 짓을 우리도 하고 있지는 않는지 우리는 심각하게 우리 자신에게 자문해보아야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적당히 신앙 생활하는 것, 잔머리 굴리면서 꼼수를 부리면서 적당히 헌신하는 것이 얼마나 하나님 앞에서 심각한 죄인지 잘 인식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더 정신 나가면 “예수 믿기 전이 좋았지... 차라리 그때로 돌아가고 싶다...” 그런 마음까지도 품는 것입니다. 그러나 무를 수 없습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38)오직 나의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또한 뒤로 물러가면 내 마음이 저를 기뻐하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39)우리는 뒤로 물러가 침륜에 빠질 자가 아니요 오직 영혼을 구원함에 이르는 믿음을 가진 자니라”(히 10:38-39)
우리 신앙의 자동차에는 후진기어가 없습니다. 오직 전진만 있습니다. 그것이 우리가 가야 할 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우리 대신 십자가에서 죽임 당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깊이 생각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은혜가 어떤 은혜인지, 하나님의 것으로 하나님께 드려졌다는 것이 얼마나 놀라운 특권이고 축복인가 하는 것을 깨달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소유가 되어 하나님 안에서 하나님과 교제 나누는 삶의 행복과 기쁨을 무엇으로 설명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우리는 사도바울의 말씀을 우리 마음에 새겨야 합니다.
로마서 12:1-2
1.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
2.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롬 12:1-2)
정말 우리가 성령충만함을 받아 심령이 변화되어 새롭게 될 수 있기를 원합니다.
그래서 우리 자신을 거룩한 산 제사로 하나님께 온전히 헌신해드릴 수 있기를 원합니다.
레위기 전체의 규례는 출애굽 2년 1월에 한달 동안 시내산에서 모세가 여호와 하나님께로부터 받아 기록한 내용입니다. 이제 그 계시가 본 장으로 끝을 맺습니다. 26장이 레위기 전체의 결론에 해당된다면 27장은 레위기 전체의 부록이라 할 수 있습니다. 27장은 서원에 대한 규례입니다. 1-8절은 사람으로 서원하는 법, 9-13절은 짐승으로 서원하는 법, 14-15절은 가옥으로 서원하는 법, 16-25절은 토지로 서원하는 법, 26-27절은 처음 난 생축에 대한 규정, 28-29절은 헌물(獻物)에 대한 규정, 30-34절은 십일조에 대한 규정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서원(나다르)은 헌신하다 다짐하다 맹세하다 의 뜻입니다. 서원은 사람이 하나님께 무엇을 하겠다고 자원하여 맹세하는 것을 말합니다. 서원의 내용은 사람일 수도 있고 가축일 수도 있고 가옥일 수도 있고 토지일 수도 있습니다. 무엇을 서원하든지 서원하는 자는 하나님과 교제를 통해 은혜를 받게 됩니다. 그리고 서원의 속전은 성전과 제사장 생활 유지에 사용됩니다.
1. 사람으로 서원하는 법 (1-8절)
사람을
하나님께 드리기로 서원할 경우에는 직접 드릴 수 없으므로 성별과 나이에 따라 돈으로 환산하여 드리게 했습니다.
그 때 성소에
드린 돈을 속전(贖錢)이라고 불렀습니다.
그 속전은 20~60세 되는 남자는 은 50세겔, 여자는 은 30세겔
5~20세되는
남자는 은 20세겔, 여자는 은 10세겔
60세 이상되는 남자는 15세겔, 여자는 10세겔
1개월~5세 되는 남자는 은
5세겔, 여자는 은 3세겔
규정된 값을 지불할 수 없는 극빈자는 제사장이 그 형편과 능력에 따라 정해준 대로 해야 합니다(2-8절).
그 속전의 차이는 인격의 차이가 아니고 노동력에 따라 정한 차이입니다.
세겔 (Shekel)은 금이나 은의 무게
단위인데 당시에 화폐의 단위로 사용되었습니다.
한 세겔은 11.4g입니다.
구약에서 은 30세겔은 노예 한사람 값이었습니다.
세겔은 왕궁에서 쓰는 세겔이 있고 성전에서 쓰는 세겔이 있고 일반인이 쓰는 세겔이 있었는데 각각 중수가 달랐습니다.
왕궁에서 쓰는
세겔은 일반인이 쓰는 세겔의 2배였고 성전에서 쓰는 세겔은 일반인이 쓰는 세겔에 5분의 1을 더한 무게입니다.
체면이나 명예욕 때문에 분수에 지나치게 했다가 지키지 못하면 위선죄가 됩니다.
명예와 영괌심 때문에 과도하게 서원하면 오히려 범죄하기 쉽습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처럼 범죄하게 됩니다(행 5:1-11).
반대로 능력이 충분한데도 인색함으로나 억지로 해서도 안됩니다(고후 9:6-7).
하나님은 물질의 액수보다도 그 마음과 그 마음을 행위로 옮기는 믿음을 보십니다 (막 12:41: 44).
그러므로 서원은 경솔하게 하거나 억지로 하다가 지키지 못한다면 안됩니다. 진실하게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2. 짐승으로 서원하는 법 (9-13절)
생축을 드리기로 서원했으면 다른 생축으로 바꾸어 드릴 수 없습니다. 만일 더 좋은 다른 짐승으로 드리려 할 때는 전에 드리기로 한 짐승은 드려진 채로 두고 새로 드리려 하는 짐승을 또 드려야 합니다. 그리고 드리려 하는 짐승이 나귀와 같이 부정하다고 규정된 짐승일 경우에는 하나님께 드려질 수 없으므로 제사장이 그 짐승에 해당하는 값을 매기고 서원자는 그 정가(定價)를 속전으로 드려야 합니다. 혹 서원자가 그 부정한 짐승을 다시 물려받아 집으로 가져갈 경우에는 그 짐승의 가치에 5분의 1을 더 드려야 합니다.
한번 서원한 것은 이미 하나님께 바쳐진 것으로 간주한 것입니다. 한번 서원한 것은 바꿀 수 없습니다. 서원은 자발적으로 하는 것입니다 (신23:21-23). 그런데 그것을 철회하거나 자기 손익에 의해 변경시킨다고 하면 하나님을 멸시하고 경홀히 여기는 죄가 됩니다. 시편15:4에는 그 눈은 망령된 자를 멸시하며 여호와를 두려워하는 자를 존대하며 그 마음에 서원한 것은 해로울지라도 변치 아니하며 라고 했고, 전도서5:4에는 네가 하나님께 서원하였거든 갚기를 더디게 말라 하나님은 우매자를 기뻐하지 아니하시나니 서원한 것을 갚으라 라고 했습니다.
3. 가옥으로 서원하는 법 (14-15절)
자기 집을 하나님께 드리기로 서원한 경우에는 짐승과 마찬가지로 제사장이 그 집의 우열을 따라 값을 정하고 그 정가를 속전으로 드려야 합니다. 만일 자기가 그 집에서 계속 살려고 하면 배상금조로 정가에 5분의 1을 더 드려야 합니다. 그러면 그 집이 자기 소유가 되었습니다 (14-15절).
사람이든 생축이든 가옥이든 토지이든 그 값을 정하여 드리되 그것을 계속 자신이 소유권을 가지기 위해서는 그 값의 5분의 1을 더 드려야 합니다 (13,15,19절). 그것은 하나님께 드려야 할 것을 충분히 보상해야 한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님께 서원하여 드린 것은 이미 하나님의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기업이 됩니다. 성소 유지와 제사장 생활에 사용됩니다. 곧 하나님의 것에는 손해가 가지 않도록 하라는 것입니다.
4. 토지로 서원하는 법 (16-25절)
토지를 드릴 경우에도 두락수(斗落數)대로 속전으로 드립니다. 보리 한 호멜지기에 은 50세겔로 계산하여 드립니다. 호멜(Homer)은 고체의 측정 단위로서 한 호멜은 230ℓ 정도 됩니다. 한 호멜지기는 230ℓ 정도의 씨앗을 뿌릴 수 있는 면적을 말합니다. 50세겔은 한 호멜지기에서 50년 동안 얻을 수 있는 소출을 값으로 정한 것입니다. 그것은 한 호멜지기에 매년 한 세겔씩 드린다는 말이 됩니다. 그 토지를 무르려면 정가에 5분의 1을 더해서 드려야 합니다. 만일 그 토지를 무르지 않거나 다른 사람에게 팔게 되면 희년 때에 자기에게로 돌아오지 않고 성물이 되어 제사장 기업이 됩니다. 그리고 드리려 하는 토지가 자기 기업이 아닐 경우에는 매년 나누어 드리지 않고 일시불로 드립니다. 그 정가는 자기 기업일 경우와 같은 방법으로 하되 한 세겔을 20게라로 계산해야 합니다. 게라(Gerah)는 세겔의 20분의 1로서 약 0.57g에 해당합니다 (16-25절).
사람이나 짐승이나 가옥도 마찬가지이지만 토지에 대한 서원법을 보면 하나님께서 서원을 얼마나 신중히 다루시는지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서원을 신중히 해야 합니다. 경솔히 하다가는 그것이 오히려 올무가 될 수 있습니다. 잠20:25 함부로 이 물건을 거룩하다 하여 서원하고 그 후에 살피면 그것이 그물이 되느니라 라고 했습니다. 서원을 하지 않는 것은 죄가 아니지만, 서원을 하고 지키지 않는 것은 죄가 됩니다 (민30:2). 그러므로 서원하고도 갚지 못하는 것은 서원하지 않은 것만 못합니다 (전5:5). 그러나 그것이 서원을 하지 말라는 의미는 아닙니다. 하나님은 진실한 서원을 들으시고 복을 주십니다. 시편61:5에 하나님이여 내 서원을 들으시고 주의 이름을 경외하는 자의 얻을 기업을 내게 주셨나이다 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성령의 감동을 소멸하지 말고 믿음으로 서원하되 믿음으로 한 서원은 손익을 생각지 말고 끝까지 믿음으로 드려야 합니다.
5. 처음 난 생축에 대한 규정 (26-27절).생축의 첫새끼는 하나님의 것이므로 하나님께 드려야 합니다. 그것을 자기 것으로 삼거나 팔아서도 안되지만 서원 예물로 사용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26절). 하나님께서 출애굽 사건과 관련하여 사람이든 짐승이든 처음 난 것은 유월절 밤에 죽을 데서 살려 주었기 때문에 하나님의 것이라고 했습니다. 출애굽기13:3에 이스라엘 자손 중에 사람이나 짐승이나 무론하고 초태생은 다 거룩히 구별하여 내게 돌리라 이는 내 것이니라 하시니라 고 했습니다. 그래서 원래 하나님의 것을 다시 서원 예물로 드리려 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부정하다고 규정된 짐승들이 있는데 그것도 서원 예물로 드릴 수 없습니다. 부정한 짐승은 나귀, 약대, 사반, 토끼, 돼지 등을 말합니다 (출13:13, 레11:3-8). 부정한 짐승을 드리기로 서원 한 경우에는 제사장이 정한 그 짐승의 정가의 속전을 드리든지 아니면 그 짐승을 정가대로 다른 사람에게 팔아서 그것으로 속전과 배상금(5분의1)을 드려야 합니다 (27절). 이 내용은 11-13절에서 언급된 내용입니다.
하나님께 당연히 드려져야 할 것으로 자신의 믿음을 증명하기 위해 서원하거나 은혜받는 수단으로 서원하지 않아야 합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만홀히 여기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그 위선에 속을 수 있으나 하나님은 중심을 보시기 때문에 속지 않습니다. 그것은 부정한 것을 드리는 것과 다를 것이 없어서 하나님께서 인정하지 않습니다.
6. 헌물(獻物)에 대한 규정 (28-29절).
여호와께 아주 바쳐진 것은 그것이 사람이든 생축이든 가옥이든 토지이든 물건이든 서원 예물도 드릴 수 없습니다. 속전으로 대신 드릴 수도 없습니다. 사람과 생축은 죽여야 하고 성읍과 가옥과 물건은 파괴해야 하고 토지는 황무하게 내버려 두어야 합니다.
여호와께 아주 바친 그 물건 은 하나님께 구별하여 예물로 드려진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멸망키로 정한 것들을 말합니다. 바친 그 물건 은 히브리어로 헤렘 인데 그 뜻은 저주를 받은 것 없애기 위해 바쳐진 것 의 의미입니다. 그래서 여호와께 아주 바쳐진 것이란 하나님께서 파멸하기로 결정한 대상들을 말합니다. 하나님의 공의의 법에 의해 죽임 당할 자로 지목된 자들과 그 소유들을 말합니다. 이를테면 우상 숭배자나 신성 모독자들, 그리고 그들이 기르는 짐승이나 그들이 거하는 성읍이나 그들이 경작하는 토지나 그들이 사용하는 물건 등을 말합니다. 실례로 우상을 숭배했던 가나안 족속과 여리고성 그리고 그 안에 있는 물건들(수6:17, 7:1-5), 미스바로 모이라는 이스라엘 회중의 결의를 반대하고 모이지 않은 길르앗 야베스 사람들(삿21:9-10), 이스라엘이 출애굽할 때 이스라엘을 공격하여 이스라엘의 진행을 방해했던 아말렉 족속들(삼상15:2-3)을 들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미 멸망을 선고하신 것으로 신앙적 헌신을 나타내려 해서는 안됩니다. 하나님 앞에 옳지 못한 것으로 하나님의 마음을 사려고 해서는 안됩니다. 그것은 마치 사울왕이 진멸하라고 한 짐승으로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겠다는 것이나 다름 없습니다. 하나님은 천천의 수양과 만만의 기름 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을 원하십니다. 하나님 말씀을 듣는 것을 원하십니다 (미6:7, 삼상15:22-23).
7. 십일조에 대한 규정 (30-34절).
땅의 10분의 1은 서원 예물로 드릴 수 없습니다. 땅의 10분의 1 은 토지 자체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토지에서 나는 모든 소출의 십일조를 말합니다. 십일조는 하나님께서 하나님 몫으로 성소에 드려야 할 성물로 구별한 것이기 때문에 서원 예물로 드릴 수 없다는 것입니다. 다만 그 소출들을 무를 수는 있었는데 그러려면 그 소출에 해당하는 정가를 속전으로 내고 그것에 배상금조의 5분의 1을 더해서 드려야 합니다 (30-31절). 한편 짐승을 십일조로 드릴 때는 모두 우리에 가두었다가 내어 보내면서 열번째에 걸리는 짐승을 드려야 하는데 그 걸리는 짐승의 우열을 교계(탐색)하거나 다른 것으로 바꾸어 치우면 두 마리 다 드려야 합니다. 그럴 경우 속전으로 대신할 수 없습니다 (32-34절).
소득의
십일조는 모든 소득의 대표로 드리는 것입니다.
그것은 땅과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이 하나님의 것임을 인정하는 것이며 모든 소득이
하나님의 은혜로 얻어진 것임을 고백하는 것이며 앞으로도 은혜로 채워 주실 것을 바라보는 행위입니다(시 24:1, 대상 29:14,
창 2:16-17).
온전한 십일조를 드리는 자에게는 은혜를 넘치도록 부어 주신다고 했습니다(고전 9:7-9, 말 3:8-12,
신 28:1-7).
그래서 십일조를 하는 것은 저축을 하는 것과 같습니다(전 11:1, 마 6:20).
그러므로 십일조는 즐거움으로
드려야 하며 감사와 기쁨으로 드려야 합니다(스 1:4, 고후 9:7).
그것을 신앙을 가장한 위선으로 사용하지 않아야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날 십일조를 자기 의도대로 사용하는 것은 안타까운 일입니다.
성경에는 하나님을 신뢰함으로 하나님께 서원을 하므로 직면했던 문제들이 해결되고 복을 받았던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삼상 2:20-21, 삿 11:30).
우리도 힘들고 어려울 때 우리 자신을 돌아보며 하나님 앞에 바로 살아가겠다는 결단이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그런 결단들이 감정이나 흥분이나 욕망이나 위선에 의해서가 아니라 진실한 신앙에 의해서 되어지도록 해야 합니다.
____________________________ 레위기 26장 / 자기를 위하여(1절)
Do not make idols or set up an image or a sacred stone for yourselves, and do not place a carved stone in your land to bow down before it. I am the LORD your God.
3-13 하나님께 순종(복종)하는 자에게 약속된 축복.
14-39 하나님께 순종하지 않는 자에게 대한 형벌.
40-46 장래에 있어서의 백성의 회개와 하나님의 권고의 예언.
그런데 축복과 저주는 동일한 형식에 따라 나타납니다.
땅의 축복과 원수로부터의 보호에 관한 것으로 이 두 가지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중요한 의미를 갖습니다.
첫째, 땅은 언약의 증표이며 생명의 근거
땅을 빼앗긴다는 것은 하나님의 임재를 상실하고 생명의 근거를 박탈당하는 것이므로 더 이상 이스라엘 민족이 존재할 수 없게 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계명의 준수는 근본적으로 언약 공동체의 생존과 직결되는 것이었습니다.
둘째, 원수로부터의 보호하심
이스라엘은 소수 민족으로 주변의 가나안 원주민이나 강대국으로부터 끊임없는 위협을 받고 있었습니다.
원수들의 침략 역시 민족의 생존과 직결된 것이었으며, 하나님 외에는 방어 수단이 전무했습니다.
축복과 저주의 형식은 구속사 속에서도 동일하게 적용됩니다.
종말에 나타날 하나님 나라는 가나안 땅의 완성이며, 죄와 사망의 권세는 이스라엘 민족에 대한 원수들의 침략으로 나타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대한 전적인 신뢰의 표현인 계명 준수는 오늘날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으로 나타나고, 그 믿음은 종말의 구원과 영원한 축복을 결정하는 유일한 요소가 됩니다.
하나님은 계명 준수에 따른 축복과 저주를 명하시면서 죄로 인해 저주받은 경우에 회개를 통해 회복할 수 있는 길을 열어 주셨습니다.
이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완악하고 연약함을 미리 아셨기 때문입니다.
본장에서는 이처럼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고 참으시는 자비하신 여호와이심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한편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신 회개의 길은 오늘날 죄에 빠진 성도들에게도 주시는 동일한 은혜이기도 합니다.
성도가 비록 지금 죄에 빠져 하나님의 심판 앞에 놓여 있을지라도 자신의 죄를 진심으로 뉘우치고 하나님 앞에 나아간다면 하나님은 사랑으로 용서하시고 다시 축복의 자리로 인도하실 것임을 교훈합니다.
그러므로 성도들의 삶에서 중요한 것은 죄를 짓지 않으려는 노력파 더불어 죄에 대한 회개를 망설이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우상'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엘릴'은 '아니다'(not, no, nor, never)란 뜻의 '알'에서 파생된 말
곧 '없음'(nothing), '공허함'(vanity), '아무 것도 아님'(thing of nought)등의 뜻이다.
이것은 우상의 속성을 한마디로 잘 보여주는 말이다.
한편 한글 개역 성경에는 '우상'(偶像)으로, 그리고 영어 성경에는 'idol' 혹은 'graven image'로 한결같이 번역되어 있는 우상은 본래 히브리어 성경에는 다음 20가지 단어로 나타나는데, 그 모두가 우상의 헛된 속성을 잘 보여 주고 있다.
명칭 및 관련 성구 어근(어근)의 의미
1. 아웬(사 66:3) 존재하지 않음 : 아무것도
2. 엘릴(사 2:8) 아님, 텅빔, 헛됨, 덧없음
3. 헤벨(렘 10:8) : 쓸데없음, 무가치함
4. 세멜(대하 33:15) : 모양이 없음
히브리어 [세멜]의 뜻은 조각된 우상, 초상을 의미합니다.
헬라어로[에이도스]라고 발음을 하는데 그 뜻은 우상을 의미합니다.
'엘릴(אֱלִיל)', 즉 '아무것도 없는 것', '헛된 것'이라는 뜻의 단어가 쓰였다. 이 외에도 '마세카(מַסֵּכָה, 부어 만든 것)', '페셀(פֶּסֶל, 새긴 것)', '테라핌(תְּרָפִים, 드라빔)' 등이 있다. 신약성경에는 '형상'이라는 뜻의 헬라어 '에이도스(εἶδος)'에서 파생된 '에이돌론(εἴδωλον)'이 우상, 거짓 신을 가리키는 단어로 기록됐으며, 이 단어가 영어 아이돌(Idol)의 어원이다.
우상의 종류와 우상을 섬긴 결과
오늘 본문을 이해하려면 모세가 하나님의 인도와 함께 하시는 은혜로 출애굽 하여 하나님께서 홍해를 가르셔서 육지 같이 건너 광야를 거쳐 삼 개월 만에 시내 산에 도착하여 이스라엘 백성들이 시내 산 앞에 장막을 치고 3일 후에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해 십계명을 주셨습니다. 오늘은 1, 2, 3계명을 중심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해드리기 전에 우상의 종류와 우상을 섬긴 결과에 대해 전해드리겠습니다.
1.우상의 원어적인 의미
히브리어로 우상을[아웬]이라고 발음을 하는데 그 뜻은 헛되고 공허한 것, 우상의 집, 거짓, 사기, 불법, 불법을 행하는 자들, 불행, 역경, 재난을 의미합니다. 히브리어 [세멜]의 뜻은 조각된 우상, 초상을 의미합니다. 헬라어로[에이도스]라고 발음을 하는데 그 뜻은 우상을 의미합니다. 헬라어로[에이돌로라테리아]는 우상숭배를 의미합니다.
2.우상의 종류와 명칭
몰렉(레18:21), 밀곰(왕상11:33), 몰록(행7:43), 바알(왕상18:40), 바알세붑(왕하1:16), 바알세불(마10:25), 아스다롯(삼상12:10), 아세라(출34:13), 벨(사46:1),
그모스(왕하23:13), 금송아지(출32:4-35), 므로닥(렘50:2), 느보(사46:1) 느후스단(왕하18:4), 일월성신(신4:19), 숙곳브놋(왕하17:30), 네르갈, 아시마(왕하17:30), 니스록(사37:38),
닙하스, 다르닥(왕하17:31), 림몬(왕하5:18), 아드람멜렉(왕하17:31),
이집트의 모든 우상들(출12:12), 기윤(암5:26), 쓰스, 허매(행14:12), 그리스의 알지 못하는 우상(행17:23), 아데미(행19:24), 다곤(삼상5:2-5), 짐승(계13:1-18) 마르둑 등 이상의 우상들은 다산, 풍년을 준다는 것입니다.
3.우상을 만드는 재료
금(출32:3), 은, 동, 철, 나무(신29:17), 돌(신4:28),
4.우상숭배의 대상이 된 것들
야곱의 외삼촌 라반의 집 우상 드라빔(창31:19), 금송아지(출32:4), 놋뱀(왕하18:4), 일월성신(왕하21:5), 천사(골2:18), 벽에 그린 우상들(겔8:10), 수염소(레17:7), 동물숭배(롬1:23), 에봇(삿8:27) , 사람(행14:11), 우상조각상(민33:52), 배와 그물과 어망(합1:16), 바다, 재물(마6:24), 사탄, 마귀, 귀신(신32:17,시106:36, 고전10:20), 탐심(골3:5)
5.우상에게 바치는 제물과 제사방법
자녀를 우상에게 바쳤다(신12:31), 금송아지 앞에 번제와 화목제를 바치고 먹고 마시며 뛰놀았다(출32:6-25) 이스라엘 백성들이 싯딤에서 모압 여인들과 음행하며 모압 여인들이 바알브올 우상에게 제사를 할 때 이스라엘 백성들이 절을 해서
하나님께서 진노하셨다(민25:1-3절) 향을 피웠다(렘1:16) 우상에게 기도를 했다(욘1:5) 찬양을 하였다(단5:4) 춤을 추었다(출32:18-19) 모든 악기를 동원해서 금신 상 앞에서 연주를 함(단3:5-7) 입을 맞춤(왕상19:18), 무릎을 꿇고 절함(왕상19:18) 북 이스라엘 왕이 유다와 같이 절기를 정하고 제사장을 아무나 세우고 벧엘에서 만든 송아지에게 제사를 드렸다(왕상12:32)
6.우상을 세운 곳
왕궁에, 산당에(레26:30) 은밀한 곳에(신27:15) 집에(창31:19)
7.우상숭배에 대한 하나님의 경고
우상의 형상을 만들거나 섬기지 말라(출20:4-5) 우상의 이름을 부르지 말고 우상을 없애라(출23:13-24)
8.우상을 섬기는 이유
마음이 우준하여(롬1:21-25) 우상숭배자들과 교제함으로(민25:1-3) 이방여인과 혼인함으로(왕상11:6) 사탄에게 이단에게 이교도에게 미혹이 되어.
9.우상을 섬기면 안 된다.
우리가 하나님의 성전이기 때문에(고후6:16)
하나님은 질투하시는 하나님이시라 우상을 섬긴 죄가 3-4대 이른다(출20:5) 하나님의 나라에 못 들어감(갈5:21) 저주를 받는다(신27:15) 하나님이 버리신다(왕상9:6-9) 올무가 된다(삿2:3) 사막이 된다(겔6:5-6) 바벨론 포로가 된다(행7:43) 북 이스라엘과 남 유다가 망한 이유가 바로 우상숭배 한 결과다. 칼과 기근과 전염병으로 망한다(겔6:11) 유황불 못에 들어감(계21:8) 망한다(신30:17-18) 저주를 받음(신11:28) 심판을 받음(신32:15-26)
10.현대의 우상들
고사지내는 것, 우상 앞에 절하거나 신발을 벗거나 향을 피우거나 제물과 헌물을 바치면 안 된다. 우상에게 바친 제물을 먹으면 안 된다. 토정비결, 조각한 우상에게 절하거나 옷을 입히거나, 나무에 금줄을 치거나, 점치거나, 운세를 보거나, 띠 맞추기, 이사 날 자를 액이 꼈다고 피하거나, 굿을 하거나, 묘를 이장을 하면 자손들에게 해롭다거나, 조상을 섬기거나, 제사를 지내거나
바위나 나무에 빌거나, 돌하르방 코를 만지면 아들을 낳는다거나, 해, 달, 별에게 절하거나 기도하거나, 자녀나 남편이 우상시 되거나, 사탄의 음악에 빠지거나, 약물이나 마약에 중독이 되거나, 알콜 중독이 되어 알콜을 의지하거나, 아이돌이 우상이 되거나, 삼위일체 하나님 외에 다른 피조물을 섬기면 다 우상숭배에 해당이 됩니다.
본문 성경 하나님의 말씀인 십계명 1, 2, 3 계명으로 결론을 내겠습니다.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두지 말라고 말씀하셨는데 이 말씀은 우상을 마음에 두지도 말고 절하거나 섬기지도 말라는 뜻입니다. 하늘에 있는 것이나(천사, 일월성신) 땅에 있는 모든 것과 물속에 있는 것 등(물고기 형상이나 용왕 등) 어떤 형상도 만들지 말며 그것들에게 절하지 말며 그것들을 섬기지 말라 네 하나님 여호와는 질투 하는 하나님인즉 나를 미워하는 자의 죄를 갚되 아버지로부터 아들에게로 삼사 대까지 이르게 하거니와 나를 사랑하고 내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는 천 대까지 은혜를 베푸느니라.
너는 네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이 부르지 말라 망령되게 부르는 자를 죄 없다 하지 아니하리라.
태초에 에덴동산에서 사탄(뱀)이 하와를 미혹 할 때 너희가 선악과를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져 하나님과 같이 된다고 유혹을 했습니다(창3장)
하나님과 같이 되려는 것이 교만이며 우상숭배입니다. 하나님의 위치에 놓는 것이 바로 우상숭배입니다. 하나님 보다 더 사랑하고 위하는 것이 우상숭배입니다.
사무엘 선지자의 말대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우상을 버리고 미스바에 모여 기도를 드릴 때 블레셋이 침략해 왔으나 사무엘 선지자가 백성들의 요구대로 하나님께 기도를 드리고 어린양으로 온전한 번제를 하나님께 드렸더니 하나님께서 블레셋군대를 치셔서 패하게 하셨습니다(삼상7장)
솔로몬이 말년에 이방여인들을 후궁으로 맞이하며 우상을 섬기도록 허락해서 솔로몬 왕이 타락한 내용을 보면 솔로몬 왕의 후궁이 700명이었는데 왕비들이 솔로몬이 시돈의 우상 여신 아스다롯, 암몬 자손의 신 우상 밀곰을 섬기게 하였습니다.
솔로몬이 후궁들을 위해 모압의 우상 그모스와 암몬의 우상 몰록의 신전을 감람산에 지어주었고 솔로몬이 이방여인인 후비들을 위하여서도 산당을 지어주었고 후비들이 우상에게 분향하며 제사하도록 방관하였습니다.
솔로몬이 하나님을 떠나자 하나님께서 두 번이나 솔로몬에게 우상을 섬기지 말라고 경고를 하셨는데도 하나님의 명령을 따르지 않음으로 하나님께서 솔로몬에게 내가 이 나라를 네게서 빼앗아 네 신복여로보암에게 주리라고 말씀을 하셨습니다.
다윗을 위하여 아들 대에 가서 나라를 빼앗는다고 말씀하시며 나의 종 다윗과 나의 뺀 예루살렘을 위하여 한 지파를 네 아들에게 주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솔로몬도 다윗처럼 처음에는 하나님을 잘 섬기다가 이방 여인들을 후궁으로 삼아 그 여인들이 섬기는 우상을 왕궁에서 감람산에서 섬기도록 허락함으로서 솔로몬의 사후에 나라가 반으로 갈라져서 북이스라엘은 10지파가 나라를 세워 수도는 사마리아,남쪽 유다 나라는 두 지파가(유다, 베냐민)나라를 세우고 수도는 예루살렘입니다.
우상을 섬기면 3-4대를 멸하시며 하나님을 사랑하고 계명을 지키는 자는 천대 즉 3만 년 은혜를 베푸신다고 말씀을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구원과 축복이 여러분과 자자손손에게 내려가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교회 안에는 두 부류의 사람
1. 율법 아래 있는 사람
2. 은혜 아래 있는 사람
은혜 아래 있는 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엄청난 복을 받았다는 것을 깨닫고 감사와 찬송하는 자리로 나아가게 되지만,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지켜서 복을 받고자 하는 것으로 나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속에는 두 계통
1. 말씀을 지키지 못하여서 멸망을 받은 계통
2. 말씀을 지키지 못하였는데도 살아난 계통
하나님은 멸망 받은 계통은 법으로 대하셨고, 살아남은 계통은 은혜로 대하셨습니다.
언약의 백성은 은혜를 적용하시고, 저주의 백성은 법을 적용하신 것입니다.
하나님 말씀은 항상 정체성을 확인하는 차원에서 주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인간이 지킬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지킬 수 없는 말씀을 던져 줌으로 인간의 실상을 고발하는 것입니다.
자기 본질을 아는 자는 말씀을 지킬 수 없다는 것을 알고 말씀이 떨어지면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을 구하게 됩니다.
죄인은 복 받는 길을 알려주어도 행할 수 없는 존재들입니다.
죄인이 복을 받고 산다는 것은 오로지 하나 하나님께서 긍휼히 여겨 주실 때입니다.
가나안 땅은 은혜로 살아가는 곳입니다.
은혜를 모르면 가나안에서 살아 갈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광야에서 은혜로 살아간다는 것을 가르치신 것입니다.
광야(廣野); 미드바르 מִדְבָּר 다바르 דָבַר 로고스( λόγος, logos)
이스라엘의 광야 40년은 사실은 가나안이 목적지가 아니라 하나님이 목적지였습니다!
광야의 세월은 의미있는 세월이었습니다.
그 광야에 축복이 있었습니다. 바로 '말씀'의 축복이었습니다.
☛ 광야(廣野) : 히브리어 (미드바르 מִדְבָּר) -
☛ 하나님의 말씀 : 히브리어 "다바르(דָבַר)"
이 두 단어는 같은 어원을 가지는데 신명기서 1:1절에는 이 미드바르(광야)라는 단어와 다바르(말씀)이라는 단어가 함께 나타납니다.
이는 모세가 요단 저쪽 숩 맞은편의 아라바 르광야(미드바) 곧 바란과 도벨과 라반과 하세롯과 디사 합 사이에서 이스라엘 무리에게 선포한 말씀(다바르)이니라
☛ 다바르 דָבַר (말씀 dabar)-> speak 말하다, talk 대화하다, promise 약속하다, commune 교감하며 대화하다, declare 선포하다)
다바르에는 광야에서 신음하는 이들에게 주시는 소망과 사랑의 약속, 구원, 치유, 위로, 용서, 용기, 비전, 희망- 즉 하나님의 마음이 있었습니다.
☛ 다바르 דָבַר 에는 다양한 파생어들이 있습니다.
☛ 미드바르 מִדְבָּר(광야(廣野 신명기 1:1)
☛ 드비르 דְּבִ֥יר (지성소 至聖所 시편 28:2)- 광야에서도 말씀의 성소가 있다면!
☛ 데베르 דֶּבֶר(역병(疫病 전염병 傳染病 신명기 28:21) 다바르를 떠날 때
☛ 도베르 דֹּבֶר(목장(牧場 이사야 5:17) 다바르를 붙잡을 때- 인생은 푸른 초장!
그리고 다바르는 헬라어로 곧 로고스( λόγος, logos)입니다.
[요1:1] 태초에 말씀(다바르=로고스=예수님)이 계시니라 이 말씀(다바르=로고스=예수님)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다바르=로고스=예수님)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광야같은 세상 미드바르를 살 때! 다바르=로고스이신 예수님을 모시면! 영원한 생명을 얻습니다.
광야는 없습니다!
말씀이 있는 한 이곳이 천국입니다!
역사는 하나님의 은혜를 드러내는 장소입니다.
우리는 역사 속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배워가게 되는 것입니다.
장차 천국에서 행할 그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는 것을 배우는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가 늘 불순종 하면서도 이렇게 살고 있는 것입니다.
죄인이 산다는 것 자체가 하나님의 은혜로 살고 있음을 증거하는 것입니다.
예수그리스도를 믿는 것은 은혜의 결정체입니다.
예수그리스도의 희생 속에서 살고 있음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들에게 은혜를 담아 놓았습니다.
베드로도 예수님을 저주하였고,
바울도 예수님을 죽이는데 앞장을 선 자였습니다.
그런데도 사도의 일을 행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왜 이러한 자들을 사도로 삼으셨을까요?
이는 하나님의 은혜로 살고 있음을 드러내고자 하심입니다.
피조물이 존재하는 그 자체가 창조주의 은혜입니다.
은혜를 모르는 자는 성도가 아닙니다.
은혜 받은 성도가 머물 자리는 긍휼의 자리입니다.
긍휼의 자리에서 말씀을 받으면 은혜가 쏟아져 내리는 것을 알 게 됩니다.
오직 은혜입니다.
순종의 계명 세 가지(1-2)
사무엘상 7-9장
누가복음 9:18-36
26장에서는 축복과 저주
27장에서는 약속에 대한 신앙 즉 서원에 대한 것을 말씀합니다.
26:3.
너희가 내 규례와 계명을 준행하면
26:14-15.
그러나 너희가 내게 청종하지 아니하여 이 모든 명령을 준행하지 아니하며
내 규례를 멸시하며 마음에 내 법도를 싫어하여 내 모든 계명을 준행하지 아니하며 내 언약을 배반할진대.
1-13, 순종의 축복
14-39, 불순종의 저주
40-46, 회복의 언약
순종의 계명 세 가지(1-2)
너희는 내 안식일을 지키며 내 성소를 경외하라 나는 여호와이니라
하나님 중심의 삶이 무너진다.
2. 안식일을 지키라
예배의 시간을 확보하라
3. 성소를 경외하라
예배의 장소를 확보하라
하나님을 향한 초점을 정확하게 맞추며 살아가라
그러면 먼저 첫 번째 단락부터 살펴보겠습니다.
1. 2계명과 4계명
하나님께서는 이제까지 모세를 통해 모든 규례와 법도를 다 말씀해주셨는데, 상벌규정을 말씀하시기에 앞서서 대표적인 계명 두 가지를 다시금 명하십니다. 사도바울이 빌립보서에서 말한 것처럼, 중요한 내용일 경우에는 반복해서 말하는 것이 말하는 자에게는 수고로움이 없고, 듣는 사람에게는 더욱 안전합니다(빌 3:1). 그러면 여기서 명해지는 계명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우상숭배 금지 계명(1,2계명)과 안식일 계명(4계명)입니다.
(1)너희는 자기를 위하여 우상을 만들지 말지니 목상이나 주상을 세우지 말며 너희 땅에 조각한 석상을 세우고 그에게 경배하지 말라 나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임이니라(2)너희는 나의 안식일을 지키며 나의 성소를 공경하라 나는 여호와니라
이것은 마치 부부가 결혼식을 해서 언약을 맺을 때, 혼인 서약하는 것과 비슷합니다. 남편에 대한 아내의 의무가 정말 많지만, 결혼식 할 때는 그 모든 의무를 다 언급하지 않고, 가장 중요한 것만 언급합니다. 그것은 바로 “정절을 지키면서 남편만을 사랑하고 공경하며, 남편만을 섬기면서 살겠느냐?” 하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은 우상숭배 피하고, 하나님을 경외하면서 하나님만을 예배하라고 지금 명하시는 것입니다.
축복(26:3-13)
1. 때에 맞는 비(3-5)
(3)너희가 나의 규례와 계명을 준행하면
(4)내가 너희 비를 그 시후에 주리니 땅은 그 산물을 내고 밭의 수목은 열매를 맺을지라
(5)너희의 타작은 포도 딸 때까지 미치며 너희의 포도 따는 것은 파종할 때까지 미치리니 너희가 음식을 배불리 먹고 너희 땅에 안전히 거하리라
4절에서 ‘시후’라는 말은 원어로 보면 ‘때’를 뜻하는 단어입니다.
곧 제때에 비를 내려주시겠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농사를 지을 때는 두 번의 비가 꼭 필요한데, 새로 파종하는 가을(10-11월)에 큰 비가 필요하고, 다 자란 곡식들이 풍성한 결실을 맺기 시작하는 늦겨울과 초봄(3-4월)에 약한 비가 필요합니다.
적절한 때에 내리는 적절한 강수량은 곡식의 품질과 생산량을 놀랄만하게 높이지만, 때에 맞지 않는 비는 도리어 아주 파괴적일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먼저 풍요와 번영을 허락해주십니다.
2. 평화(6-8)
(6)내가 그 땅에 평화를 줄 것인즉 너희가 누우나 너희를 두렵게 할 자가 없을 것이며 내가 사나운 짐승을 그 땅에서 제할 것이요 칼이 너희 땅에 두루 행하지 아니할 것이며
(7)너희가 대적을 쫓으리니 그들이 너희 앞에서 칼에 엎드러질 것이라
(8)너희 다섯이 백을 쫓고 너희 백이 만을 쫓으리니 너희 대적들이 너희 앞에서 칼에 엎드러질 것이며
두려움 없이 눕는다는 것은 사방이 트인 들판에서 아늑하고 안전하게 누워있는 그림을 연상시킵니다.
곧 온 땅에 약탈자들이 없고, 전쟁이 없게 해주시겠다는 것입니다.
사실 팔레스틴 땅은 지정학적으로 전쟁이 가장 많이 일어날 수밖에 없는 곳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모든 전쟁에서 승리하게 하시고 원수들이 망하게 하심으로써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평안히 누울 수 있도록 해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너희 다섯이 백을 이기고 백이 만을 이길 것이라고 약속하십니다.
전쟁의 용사이신 여호와께서 친히 싸우심으로 전세가 아무리 불리해도 절대로 지지 않는 것입니다.
3. 번성(9-10)
(9)내가 너희를 권고하여 나의 너희와 세운 언약을 이행하여 너희로 번성케 하고 너희로 창대케 할 것이며
(10)너희는 오래 두었던 묵은 곡식을 먹다가 새 곡식을 인하여 묵은 곡식을 치우게 될 것이며
“창대케 한다”는 단어도 수적 증가를 의미합니다.
이것은 아브라함 언약의 성취입니다.
그런데 옛말에 “자식 많이 낳으면 거지꼴 못 면한다.”는 말이 있죠.
그렇게 이스라엘 백성들이 자식을 많이 낳아서 번성하게 되면, 가난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열 명씩 스무 명씩 낳는데도 풍족합니다.
어느 정도로 풍족하냐 하면, 묵은 곡식이 계속 쌓여서 버리게 될 정도로 풍족한 것입니다.
참으로 놀라운 축복입니다.
4. 임재하심(11-13)
(11)내가 내 장막을 너희 중에 세우리니 내 마음이 너희를 싫어하지 아니할 것이며
(12)나는 너희 중에 행하여 너희 하나님이 되고 너희는 나의 백성이 될 것이니라
(13)나는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어 그 종된 것을 면케 한 너희 하나님 여호와라 내가 너희 멍에 빗장목을 깨뜨리고 너희로 바로 서서 걷게 하였느니라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잘 섬기고 계명을 잘 지키면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사랑하시고, 그들 가운데 장막을 세워 그들 가운데 거하실 것이라고 약속하십니다.
이것이 이스라엘이 받는 축복의 최고봉에 있는 것으로서 최상의 축복입니다.
너희 중에 행한다는 말은 동행한다는 뜻입니다.
에녹이 하나님과 함께 동행 하였던 것처럼, 하나님께서 친히 이스라엘과 동행하시며 그들과 교제 나누시고 그들을 인도하시며 보호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 언약의 목표가 성취될 것입니다.
언약의 목표는 바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되고,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바로 이 목표를 위해서 이스라엘을 애굽의 속박에서 건져내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들의 목에 있는 멍에와 굴레를 부수셨습니다.
‘멍에’는 황소의 등에 얹은 무거운 십자형 나무를 의미하는데, 황소에게 무거운 짐을 지우기 위한 것입니다.
노예들은 늘 무거운 짐을 날라야 하기 때문에 등이 휩니다.
그리고 주인 앞에서 굽신거려야 하기 때문에 결국 새우등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등과 목에 있는 멍에를 부수셔서 그들의 짐을 가볍게 하셨을 뿐만 아니라, 그들의 신분을 존귀케 하여 똑바로 서서 당당하게 걷도록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이러한 출애굽의 은혜를 다시금 상기시키시면서 그들로 하여금 이러한 축복의 약속을 받도록 계명을 지킬 것을 명하고 계신 것입니다.
이제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런 축복을 누릴 것인지 아니면 누리지 못할 것인지는 그들이 어떻게 하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만일 그들이 계명을 지키지 않고, 불순종한다면, 이런 축복들이 그들과 아무런 상관이 없게 될 것입니다. 축복을 못 받는 것은 둘째 치고 오히려 엄청난 저주를 받게 될 것입니다. 어떤 저주를 받게 되는지 이제 저주 단락을 살펴보겠습니다.
저주(詛呪)
저주단락은 축복단락과 대칭되면서도 독특한 특징이 있습니다.
먼저 양이 2배 이상 많습니다(신명기의 경우는 3배 이상 많습니다).
그리고 축복단락에서는 “너희가 순종하면”이라는 조건이 맨 앞에 한번만 나오지만, 저주단락에서는 처음에 “너희가 불순종하면”이라고 말할 뿐만 아니라, 새로운 저주단락이 시작될 때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만일 너희가 불순종하면(대항하면)...”의 표현이 반복됩니다(14, 15, 18, 21, 23, 27절).
저주가 다섯 가지인데, 그것이 축복의 경우처럼 동시적으로 한꺼번에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한 번에 하나씩 주어지고, 그 다음에 회개의 기회가 주어집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이 회개하지 않으면 점층적으로 그 강도와 잔혹성을 세게 하여 벌하시는 것입니다.
그것을 “너희 죄를 위해 너희를 칠 배나 더 징치하리라”라는 표현의 반복이 잘 보여줍니다(18, 21, 24, 28절).
7이라는 숫자는 완성, 또는 온전함을 의미하는데, 그러므로 일곱 배 강하게 재앙을 내리실 것이라는 말은 그들이 죄를 고집할 때 각각의 새로운 단계에서 징벌의 수위를 매번 파격적으로 끌어올리실 것이라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그러면 저주 단락이 어떻게 시작됩니까?
14절과 15절을 보십시오.
14절과 15절을 보면, 그들이 불순종하는 것이 무지나 연약함 때문에 그런 것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줍니다.
(14)그러나 너희가 내게 청종치 아니하여 이 모든 명령을 준행치 아니하며(15)나의 규례를 멸시하며 마음에 나의 법도를 싫어하여 나의
모든 계명을 준행치 아니하며 나의 언약을 배반할진대
여기서 ‘청종’이라는 단어는 그 말하는 사람을 존중하고, 그 말하는 내용의 중요성을 알고서 경청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청종치 아니한다는 것은 하나님을 무시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는 것을 말합니다.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그렇게 멸시하는 이유는 그 규례를 마음에서부터 싫어하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싫어한다’는 단어는 일반적으로 싫어하는 것을 의미하는 단어가 아니라, 성경에서 오직 9번만 사용된 아주 독특한 단어입니다(오늘 본문에서만 5번 쓰임).
이 단어는 “배설물로 취급하다.
싫어하거나 경멸하여 버리다.
낙태를 해버리다.”등의 의미를 가진 단어입니다. 마치 아주 철없는 아이들이 부모의 말을 잔소리로 여겨서 그 잔소리를 들을 때 그 말을 매우 싫어해서, 부모에게 대항하고 달려들듯이, 그렇게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규례와 명령을 싫어하고 듣기를 거부하며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는 것은 곧 언약을 배반하는 것입니다.
부부가 서로만을 사랑하고 서로의 의무를 다하기로 서약했는데, 이 여자가 다른 남자와 바람을 피우게 되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남편이 얼마나 그 아내에 대하여 진노하며 분노하겠습니까? 특히 이스라엘은 그냥 아내가 아니라, 벌거벗겨진 채로 버려졌던 핏덩어리였는데, 하나님께서 데려다가 양육한 여자였습니다. 이제 어엿한 처녀가 되어서 처녀 이스라엘과 결혼 해주신 것인데, 이 여자가 그 은혜를 잊어버리고 다른 남자와 만난다면, 그것은 그냥 악한 것이 아니라, 아주 역겹고 배은망덕한 행위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언약을 배반한 것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어떻게 갚으십니까?
26:16-17. 질병과 쇠약해짐, 전쟁에서 패배, 대적의 압제, 약탈을 당함
1. 놀라운 재앙(13-17)
‘놀라운 재앙’이란, 놀랍도록 엄청난 재앙이라는 뜻이 아니라, 느닷없이 갑작스러운 재앙이라는 것입니다. 재앙은 예고 없이 옵니다. “평안하다, 평안하다” 할 때에 갑작스럽게 임하는 것입니다(살전 5:3). 그렇기 때문에 이 재앙이 더욱 무서운 것입니다. 그 재앙은 바로 질병과 쇠잔하게 되는 것입니다. 언급되는 질병은 폐병, 열병, 시력감퇴질병(백내장, 녹내장), 식욕상실 & 기력쇠진의 질병입니다. 한두 명이 이렇게 되는 것이 아니라 민족적으로 이렇게 되면... 국가 전체가 쇠약해져서 결국 대적들의 밥이 되고 말 것입니다. 여호와의 보호막이 걷혀지게 되자, 이스라엘은 적들에게 두들겨 맞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파종을 열심히 해도, 대적들의 약탈로 인해서 그것을 얻지 못하게 되는 것이죠. 대적에게 패하고, 대적들의 압제 하에 있게 되고, 얼마나 마음이 약해지고 두려움에 사로잡혔는지 쫓는 자가 없어도 도망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언약적 저주가 이스라엘의 역사 가운데 그대로 성취가 되었습니다.
”(13)곧 그들이 여호와를 버리고 바알과 아스다롯을 섬겼으므로(14)여호와께서 이스라엘에게 진노하사 노략하는 자의 손에 붙여 그 들로 노략을 당케 하시며 또 사방 모든 대적의 손에 파시매 그들이 다시는 대적을 당치 못하였으며(15)그들이 어디를 가든지 여호와의 손이 그들에게 재앙을 내리시매 곧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것과 같고 여호와께서 그들에게 맹세하신 것과 같아서 그들의 괴로움이 심하였더라”(삿 2:13-14)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자마자 타락했는데,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범죄 할 때마다 대적에게 패하게 하시고 압제 당하게 하시고 약탈을 당하게 하셨던 것입니다.
2. 극심한 흉년(18-20)
이스라엘이 이런 비참한 처지에 있게 되었으면 응당 회개해야 할 것인데, 이스라엘이 회개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재앙의 강도를 일곱 배나 높이시는 것입니다. 18절부터 보시면...
(18)너희가 그렇게 되어도 내게 청종치 아니하면 너희 죄를 인하여 내가 너희를 칠배나 더 징치할지라(19)내가 너희의 세력을 인한 교만을 꺾고 너희 하늘로 철과 같게 하며 너희 땅으로 놋과 같게 하리니(20)너희 수고가 헛될지라 땅은 그 산물을 내지 아니하고 땅의 나무는 그 열매를 맺지 아니하리라
하나님은 벌을 칠 배나 더하시는데, 두 번째 저주의 내용은 바로 흉년의 재앙입니다. 그것은 19절에 보는 것처럼 그들의 세력으로 인한 교만을 꺾으시기 위한 하나의 방편입니다. 풍년으로 나라가 부요하게 되고, 군사력이 강하게 되면, 교만하게 됩니다. 하나님은 그러한 교만을 처참하게 깨트리시는데 그들이 누리던 풍요와 번영을 치심으로써 깨트리시는 것입니다. 하늘이 철과 같이 되고 땅이 놋과 같게 되면 농사가 도무지 되지가 않습니다. 하늘은 비를 내리지 않을 것이고 땅은 식물을 내지 않을 것입니다. 가난과 배고픔이 있으며 나라의 경제가 마비될 것입니다.
이 재앙도 이스라엘 역사 속에서 그대로 성취가 되었습니다. 엘리야가 아합 왕에게 흉년을 선언하자 삼년 6개월 동안 비가 오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이 흉년이 얼마나 극심했는지 엘리야를 섬긴 사르밧 과부는 이렇게 얘기했습니다.
“(12)저가 가로되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의 사심을 가리켜 맹세하노니 나는 떡이 없고 다만 통에 가루 한 움큼과 병에 기름 조금 뿐이라 내가 나무가지 두엇을 주워다가 나와 내 아들을 위하여 음식을 만들어 먹고 그 후에는 죽으리라”(왕상 17:12)
물론 사르밧 과부는 하나님의 은혜로 양식을 공급받아 살 수 있었지만, 아마 대부분의 이스라엘 백성들은 굶주림으로 죽어나갔을 것입니다. 이렇게 엄청난 재앙을 당했으면 이제는 회개해야 하는데, 이스라엘이 고집을 부립니다.
3. 들짐승 재앙(21-22)
(21)너희가 나를 거스려 내게 청종치 않을진대 내가 너희 죄대로 너희에게 칠배나 더 재앙을 내릴 것이라
(22)내가 들짐승을 너희 중에 보내리니 그것들이 너희 자녀를 움키고 너희 육축을 멸하며 너희 수효를 감소케 할지라 너희 도로가 황폐하리라
입니다. 우리는 동물원에서 사자나 곰과 같은 야생동물을 보기 때문에 이 재앙이 얼마나 무서운 재앙인지 잘 모릅니다. 그러나 사자나 곰과 같은 아주 위험한 짐승들이 온 마을에 창궐해서 돌아다닌다고 생각해보십시오. 그것이 얼마나 끔찍한 재앙이 되겠습니까? 아마 이스라엘 백성들은 야생짐승들로 인해서 공포에 떨게 될 것입니다. 특히 아이들과 노인들이 수시로 찢겨죽는 일이 발생하여 인구가 대폭적으로 감소하게 될 것이고, 가축들 같은 경우는 아예 씨가 마를 정도로 다 잡아먹히게 될 것입니다. 생존자들은 집밖을 나가는 것을 무서워하기 때문에 길에 사람이 없어 황량하게 될 것입니다.
이런 무서운 재앙을 이 율법을 받는 1세대 이스라엘 백성들이 친히 경험하였던 것입니다. 그들이 광야 길에서 고생함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불평했을 때, 하나님은 그들에게 불뱀을 보내셔서 많은 사람들이 물려죽게 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이스라엘 역사 가운데서도 간헐적으로 야생동물의 재앙을 내리셔서 그들을 징치하셨습니다(왕하 2:24, 17:25-26). 그런데도 이스라엘이 고집을 부리면 이제 어떤 재앙이 임합니까? 네 번째 저주가 임합니다.
4. 도륙, 염병, 극심한 식량난(23-26)
(23)이런 일을 당하여도 너희가 내게로 돌아오지 아니하고 나를 대항할진대
(24)나 곧 나도 너희에게 대항하여 너희 죄를 인하여 너희를 칠배나 더 칠지라
(25)내가 칼을 너희에게로 가져다가 너희의 배약한 원수를 갚을 것이며 너희가 성읍에 모일지라도 너희 중에 염병을 보내고 너희를 대적의 손에 붙일 것이며
(26)내가 너희 의뢰하는 양식을 끊을 때에 열 여인이 한 화덕에서 너희 떡을 구워 저울에 달아 주리니 너희가 먹어도 배부르지 아니 하리라
네 번째 묶음의 저주에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대적하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하나님을 대적했기 때문입니다. 25절에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자신의 원수라고 이야기하십니다. 왜냐하면 언약을 배반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30절에 보면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싫어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왜냐하면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율법을 싫어하였기 때문입니다(레 26:15). 참으로 하나님은 사람이 자기에게 행한 대로 갚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자기를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시고, 자기를 간절히 찾는 자에게 만나주십니다. 반대로 자기를 멸시하는 자를 멸시하시고, 자기를 미워하는 자를 미워하시고, 자기를 대적하는 자를 대적하십니다. 이것은 인격과 인격 사이에 항상 있게 되는 원리인 것입니다. 물론 이런 원리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가 먼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고,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자기 아들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심으로 우리에게 대한 자기 사랑을 확증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사랑은 무조건적이고 영원히 변함이 없는 사랑입니다. 그런데 이것을 오해해서 죄를 지으면서 살아도 예수의 공로 때문에 하나님이 자기를 향해서 사랑의 미소를 짓고 계실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하나님의 인격을 무시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자식이 담배 피다 아버지에게 걸렸는데 아버지의 사랑은 무조건적이고 변함이 없다는 사실을 근거로 해서 아버지가 나를 향해 사랑스러운 미소를 지으면서 자기를 안아줄 것을 기대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것은 아버지의 인격을 무시하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라도 악하게 죄를 범할 때 하나님은 우리를 향해 진노하시고 미운 감정을 나타내시고 교만한 우리를 물리치십니다(약 4:6-10). 그러나 우리가 우리 죄의 악함을 깨닫고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으로 회개한다면, 하나님은 자비와 은혜를 베풀어주실 것입니다.
다시 본문을 돌아와서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대적했을 때 하나님께서도 이스라엘을 대적하시고 그들에게 재앙을 내리십니다. 하나님께서 네 번째로 내리시는 저주는 칼입니다. 이것은 전쟁의 패배로 군인들만 도륙당하는 것이 아니라, 민간인들도 칼로 도륙당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은 이 칼로 배약한 원수를 갚겠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면 백성들은 전쟁에 대한 두려움으로 시골을 떠나 성읍 안으로 가서 안전을 확보하려고 할 것인데, 하나님은 그때 역병이 돌게 하셔서 성읍 안에서 죽게 하시고, 결국 대적에게 점령당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치시고자 하시면 피할 길이 없습니다. 어떠한 대책과 방도도 다 소용이 없습니다(계 6:15). 그리고 그들이 의뢰하는 양식의 지팡이를 끊으실 것입니다. 얼마나 양식이 핍절한지 열 명의 여인에게 양식을 배급하는데, 그 열 명의 여인에게 돌아간 양식의 양이 한 솥에 다 찔 수 있을 만큼 아주 작은 양인 것입니다. 그러니 늘 배고플 수밖에 없죠. 그런데도 회개하지 않으면 이제 마지막 재앙이 내려질 것입니다. 이것은 모든 재앙의 절정에 해당하는 것으로서 그 잔혹성과 비참함을 이루 말할 수 없습니다.
5. 자식을 고기로 먹음, 우상과 함께 파멸됨, 대적의 포로로 잡혀감, 대적의 땅에서 칼로 도륙 당함(27-39)
(27)너희가 이같이 될지라도 내게 청종치 아니하고 내게 대항할진대
(28)내가 진노로 너희에게 대항하되 너희 죄를 인하여 칠배나 더 징책하리니
(29)너희가 아들의 고기를 먹을 것이요 딸의 고기를 먹을 것이며
극심한 기근이나 대적에게 둘러싸여 양식이 전혀 없게 되어졌을 때, 부모가 자식을 죽여서 그 자식을 양식으로 먹는 일이 있게 됩니다(신 28:53-57).
이것이 얼마나 충격적인 일입니까?
우리가 어머니 사랑하면... 너무 아름답고 감동적인 것이어서, “하늘 아래 그 무엇이 높다 하리요 어머님의 은혜는 가이 없어라”라고 노래하는 것인데, 여기서는 어머니가 자기 살겠다고 자식을 죽여서 고기로 먹게 되는 일이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인간의 존엄성마저 완전히 상실한 모습입니다.
신명기 말씀을 보면 그 어머니가 자기 자식을 먹는데, 다른 사람에게 뺏길까봐 심지어 자기 가족들에게도 뺏기지 않으려고 몰래 먹게 된다고까지 언급합니다.
이것보다 더 끔찍하고 충격적인 일이 어디 있습니까?
그런데 이것이 이스라엘 역사 속에서 그대로 성취가 되었던 것입니다.
“(26)이스라엘 왕이 성 위로 통과할 때에 한 여인이 외쳐 가로되 나의 주 왕이여 도우소서(27)왕이 가로되 여호와께서 너를 돕지 아니하시면 내가 무엇으로 너를 도우랴 타작마당으로 말미암아 하겠느냐 포도주 틀로 말미암아 하겠느냐(28)또 가로되 무슨 일이냐 여인이 대답하되 이 여인이 내게 이르기를 네 아들을 내라 우리가 오늘날 먹고 내일은 내 아들을 먹자 하매(29)우리가 드디어 내 아들을 삶아 먹었더니 이튿날에 내가 이르되 네 아들을 내라 우리가 먹으리라 하나 저가 그 아들을 숨겼나이다(30)왕이 그 여인의 말을 듣고 자기 옷을 찢으니라 저가 성 위로 지나갈 때에 백성이 본즉 그 속살에 굵은 베를 입었더라”(왕하 6:26-29)
그리고 이 일은 바벨론에 의해 예루살렘이 함락될 때도 일어났습니다(애 2:20, 4:10).
그러나 이것으로 끝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이런 끔찍한 일을 당하게 하신 뒤에 그들을 우상과 함께 죽이십니다.
(30)내가 너희의 산당을 헐며 너희의 태양 주상을 찍어 넘기며 너희 시체를 파상한 우상 위에 던지고 내 마음이 너희를 싫어할 것이며
여기서 “파상한 우상”은 원어로 보면 ‘우상의 시체’라는 뜻입니다. 즉 우상의 시체위에 이스라엘 백성들의 시체를 던지신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분노한 남편이 간음을 행한 아내와 그 간부를 함께 죽이는 것과 같은 맥락에 있는 것입니다. 뿐만 아닙니다. 31절부터 보시면...
(31)내가 너희 성읍으로 황폐케 하고 너희 성소들로 황량케 할 것이요 너희의 향기로운 향을 흠향치 아니하고(32)그 땅을 황무케 하리니 거기 거하는 너희 대적들이 그것을 인하여 놀랄 것이며(33)내가 너희를 열방 중에 흩을 것이요 내가 칼을 빼어 너희를 따르게 하리니 너희의 땅이 황무하며 너희의 성읍이 황폐하리라 ... (36)너희 남은 자에게는 그 대적의 땅에서 내가 그들의 마음으로 약하게 하리니 그들은 바람에 불린 잎사귀 소리에도 놀라 도망하기를 칼을 피하여 도망하듯 할 것이요 쫓는 자가 없어도 엎드러질 것이라(37)그들은 쫓는 자가 없어도 칼 앞에 있음 같이 서로 천답하여 넘어지리니 너희가 대적을 당할 힘이 없을 것이요(38)너희가 열방 중에서 망하리니 너희 대적의 땅이 너희를 삼킬 것이라(39)너희 남은 자가 너희 대적의 땅에서 자기의 죄로 인하여 쇠잔하며 그 열조의 죄로 인하여 그 열조 같이 쇠잔하리라
하나님께서는 그들로 대적들의 포로가 되게 하실 것입니다.
즉 이스라엘 가운데 대부분은 굶어죽거나 칼에 도륙당해 죽을 것이고 일부 생존자들은 포로로 잡혀가며 예루살렘 성전은 파괴되어 더 이상 제사를 드릴 수 없게 되고, 성읍은 사람이 살 수 없는 곳처럼 황폐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대적의 땅에서도 칼이 끊임없이 따르게 하셔서 끔찍한 살육 당하게끔 하실 것이고, 몸과 마음이 지속적으로 쇠잔하게 될 것입니다.
참으로 끔찍한 재앙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런데 34-35절에 다음을 말씀하십니다.
(34)너희가 대적의 땅에 거할 동안에 너희 본토가 황무할 것이므로 땅이 안식을 누릴 것이라 그 때에 땅이 쉬어 안식을 누리리니
(35)너희가 그 땅에 거한 동안 너희 안식시에 쉼을 얻지 못하던 땅이 그 황무할 동안에는 쉬리라
하나님은 갑자기 땅의 안식을 언급하십니다.
이 말씀은 두 가지를 보여주는데, 첫째는 그동안 이스라엘 백성들이 얼마나 땅을 혹사시키면서 욕심대로 살았는지를 증거 해줍니다.
그러므로 땅의 주인이신 여호와께서 악한 청지기를 쫓아내시고, 땅으로 하여금 그동안 혹사당한 것에 대한 보상을 한꺼번에 받도록 하십니다. 땅은 안식을 누리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은 대적의 땅에서 고통을 당하며 점차로 소멸될 것입니다.
그런데 한편으로 이것은 회복의 메시지도 전해줍니다. 왜냐하면 이스라엘의 포로기간이 바로 땅의 밀린 안식년 기간만큼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즉 490년 동안 70번의 안식년을 안 지켰으므로 그들의 포로 기간이 70년으로 한정되었던 것입니다.
어쨌든 중요한 것은 본문에서 열거된 무시무시한 재앙들이 이스라엘 역사 속에서 그대로 성취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불순종함으로 말미암아 BC 586년에 예루살렘이 함락되고 수없이 많은 사람들이 살육을 당했으며, 예루살렘 성전이 파괴되고 그 남은 자들은 바벨론 포로로 잡혀갔습니다. 이 형벌이 어찌나 극심했는지 예레미야는 다음과 같이 애가를 지어 노래했습니다.
“(20)여호와여 감찰하소서 뉘게 이같이 행하셨는지요 여인들이 어찌 자기 열매 곧 손에 받든 아이를 먹으오며 제사장들과 선지자들이 어찌 주의 성소에서 살륙을 당하오리이까(21)노유는 다 길바닥에 엎드러졌사오며 내 처녀들과 소년들이 칼에 죽었나이다 주께서 진노하신 날에 죽이시되 긍휼히 여기지 아니 하시고 살륙하셨나이다(22)주께서 내 두려운 일을 사방에서 부르시기를 절기에 무리를 부름 같이 하셨나이다 여호와께서 진노하신 날에 피하거나 남은 자가 없었나이다 내 손에 받들어 기르는 자를 내 원수가 다 멸하였나이다”(애 2:20-22)
적용
이스라엘의 멸망은 두 가지를 보여줍니다.
첫째는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가 어떠한지, 언약을 배반한 죄인들을 향한 여호와의 질투와 복수심이 어떠한지를 분명히 보여줍니다.
이스라엘이 받은 끔찍한 저주들은 지옥형벌의 그림자요 모형입니다.
참으로 하나님은 예수님을 믿지 않고 회개하지 아니한 모든 사람들에게 여기 기록된 형벌보다 더 끔찍한 형벌을 내리실 것입니다.
둘째로 이스라엘의 멸망은 하나님이 언약에 신실하신 하나님이심을 보여줍니다.
이 언약에는 언약적 저주도 포함됩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겁만 주시는 것이 아니라, 말씀하신 모든 재앙을 다 이스라엘에게 내리셨던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은 오늘날 우리에게 재림의 때를 약속하시고 최후의 심판과 지옥형벌에 대해 경고하셨습니다. 그것은 겁주시는 것이 아니라, 때가 되면 반드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때가 악하기 때문에, 우리는 구원의 기회가 있는 오늘 하루 동안 참되게 회개하며 예수를 믿고, 믿음으로 이 세상을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사도바울은 이스라엘의 멸망의 역사는 말세를 만난 우리에게 경계로 기록된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이렇게 죄에 대해서 진노하시고 잔혹하게 복수하시는 하나님, 질투하심으로 원수를 갚으시는 하나님이 바로 우리가 섬기는 하나님이십니다. 구약에만 이런 하나님이고 신약에 와서는 용서와 사랑과 자비의 하나님으로 바뀌신 것이 아닌 것입니다. 하나님은 소멸하는 불이시고, 질투하시는 하나님이시라는 표현이 신약성경에서도 나옵니다. 여전히 두렵고 엄위하신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성령이 시기하기까지 우리를 사모하신다는 말씀을 허투루 들으면 안 됩니다.
우리는 그러므로 깨어 정신을 차리고 하나님을 두려워해야 합니다. 죄가 얼마나 심각한 것인지 깨달아야 하며, 죄와 싸우는 삶을 살아야 하고, 죄 가운데 있다면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으로 회개해야 합니다. 그러나 두려움으로 복종할 뿐만 아니라, 더더욱 이러한 우리의 죄에 대한 무한한 분노와 복수를 우리대신 예수 그리스도께 쏟아 부으셨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래서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그 끔직한 고통을 당하셔서 우리를 율법의 저주에서 속량해주셨음을 알고, 그 십자가의 은혜를 깨닫고 믿고 의지해야 합니다. 그래서 그 은혜 안에서 우리의 정과 욕심을 못 박고 더욱 감사와 사랑으로 하나님께 복종해야 하는 것입니다.
가. 계명 순종을 장려하기 위한 방편
첫째로 이 규정들은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계명을 순종하도록 장려하기 위한 도구인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러한 축복과 저주의 말씀을 들었을 때, 그들이 무엇을 느꼈겠습니까? 아마도 그들은 즉시로 모세를 통해서 주신 이 율법의 규례들이 얼마나 엄중한 말씀이며 심각한 말씀인가 하는 것을 깨닫게 되었을 것입니다. 축복을 들으면서 “정말 순종하면서 살아서 복을 받아야 되겠구나” 하는 것을 생각하게 되었을 것이고, 저주에 관한 내용을 들으면서 (정신이 바짝 들어서) “정말 계명을 어기면서 살면 끝장이구나...”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을 것입니다. 결국 법에 처벌규정이 있는 것은 처벌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사람들로 하여금 처벌에 대한 두려움을 느끼게 하여 그들로 법을 지키며 살도록 하는데 목적이 있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궁극적으로 하고자 하시는 말씀은 “그렇기 때문에 너희가 나의 규례와 법도를 청종하고 순종하면서 살아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내용은 오늘날 우리들에게도 동일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신약의 성도들에게도 순종을 장려하시기 위해서 이러한 방법을 동일하게 사용하십니다. 신약에도 상급에 대한 약속의 말씀, 그리고 불순종에 대한 경고의 말씀이 많이 나옵니다(마 5:11-12, 딤후 4:7-8, 빌 3:14, 갈 6:7-8, 엡 5:5-7).
“(7)땅이 그 위에 자주 내리는 비를 흡수하여 밭 가는 자들의 쓰기에 합당한 채소를 내면 하나님께 복을 받고(8)만일 가시와 엉겅퀴를 내면 버림을 당하고 저주함에 가까와 그 마지막은 불사름이 되리라”(히 6:7-8)
이것은 행위구원론을 말하려는 것이 아니라, 순종하면 복을 받고 상급을 받지만, 불순종하고 죄를 고집하면 결국 저주를 받고 망하게 될 것이라고 경고하심으로써 우리로 하여금 성화의 삶을 지속적으로 살아가도록 독려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축복과 저주의 말씀에 있어서 구약과 신약의 근본적인 차이점이 있습니다.
그것은 축복과 저주의 차원이 다르다는 것입니다. 우선 구약에서 약속된 복은 이 땅에서의 풍요와 번영입니다. 그러나 신약에서 약속된 복은 다른 복입니다. 그런데 많은 목회자들이 그것을 모르고 레위기나 신명기의 축복과 관련된 말씀을 그대로 가져와서 오늘날 우리들에게도 적용하는 경우가 많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 잘 믿고, 주일성수 잘하고, 십일조 잘하면, “들어가도 복 받고 나가도 복 받고... 건강하고 사업 잘되고 자식 좋은 대학가고...” 등등의 말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큰 착각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 나라의 가시적인 모형이기 때문에 하나님 나라의 영적인 축복과 행복을 이 땅의 가시적이고 물질적인 풍요와 번영으로 표현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구약의 교회는 구속사적으로 보면 아직 어린 교회입니다. 그래서 율법을 초등학문이라고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어린 아이들에게는 어린 아이들에게 맞는 교육방법이 있습니다. 우리가 작은 아이들에게 “말 잘 들으면 돈 100만원 줄게”라고 말하면 통하질 않습니다. 오히려 아이들에게 “말 잘 들으면 마이쭈 사주고, 말 안 들으면 맴매 맞는다.”라고 말하면 통합니다. 반대로 어른들에게 “마이쭈 사줄 테니 내가 시키는 대로 하라...” 그러면 그것은 상대방을 우롱하는 것이 됩니다. 신약교회는 예수님 잘 믿으면 이 땅에서 건강해지고 부자가 된다는 이야기를 들으면... 그런 사탕발린 복음을 들으면... 화가 나야 합니다.
그러므로 신약교회가 이런 본문을 문자 그대로 취하여 받아들이면 곤란합니다. 신약의 장성한 교회는 이제 알 거 다 아는 그런 나이가 되었기 때문에 그런 저급한 것보다 한 차원 높은 것 그리고 궁극적 차원의 복을 추구하는 것입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오늘날에는 물질적이고 가시적인 복이 전혀 없다고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가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할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필요를 넘치게 채워주시는데, 그 채워주심도 바로 하나님이 주시는 복입니다. 다만 각 사람의 분수에 맞게 허락하시는데, 따라서 부해도 가난해도 신약의 성도들은 자기 형편에 얼마든지 자족하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신약의 성도들이 추구하는 궁극적인 복은 그런 세속적인 복이 아닙니다. 무엇이 우리에게 있어서 궁극적인 복입니까? 예수 그리스도 그분 자신이 우리의 상급이 되시고, 그분 안에서 주어진 구원이 최고의 상급이며, 그분 안에서 장차 주어질 하나님 나라가 우리에게는 최고의 상급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구약에서부터 이미 표현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축복의 끝, 축복의 절정에서 이미 하나님이 이 사실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신약의 성도들은 이 놀라운 복을 이 땅에서부터 이미 받아 누린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다 받은 것이 아니라, ‘아직 아니’의 측면이 있어서 장차 받게 될 부분이 있습니다. 그것은 “... 눈으로 보지 못하고 귀로도 듣지 못하고 사람의 마음으로도 생각지 못할” 그런 것입니다(고전 2:9). 그러므로 성도들은 이 복을 사모하면서 성화의 삶을 살아가며, 이 땅에서 어떠한 고난과 어려움이 임해도 인내해야 하는 것입니다.
나. 율법은 행위언약이다
둘째로 오늘 본문 말씀은 시내산 언약이 행위언약임을 분명히 보여줍니다. 마치 아담의 선악과 금령과 비슷합니다. 지키면 살고 어기면 죽습니다. 마찬가지로 이스라엘이 모든 율법을 온전히 지키면 살고, 또 많은 복을 받지만, 그러나 어기면 형벌을 받습니다. 죽임당하고 멸망당하는 것입니다. 그냥 죽이시는 것이 아니라 가장 잔혹하게 형벌하셔서 죽이십니다. 마지막 재앙에서 보는 것처럼 하나님은 자식을 고기로 먹게 하시고, 원수의 포로로 잡혀가서 온갖 고생하다가 거기서 칼에 도륙당해 죽게 하시는 것입니다. 특히 자식을 고기로 먹게 하시는 것은 완전히 인간됨을 상실하게 되는 처지로까지 떨어뜨리시는 것인데, 정말 충격적인 형벌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이러한 구약의 재앙은 구약의 복이 그러했던 것처럼 궁극적인 지옥형벌에 대한 서막이요 모형일 뿐입니다. 죄 가운데 있는 인생들에 대해 복수하시기 위해 하나님은 영원한 지옥형벌을 예비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오늘 본문을 통해서 바로 하나님 앞에서 짓는 죄가 얼마나 큰 죄이며 얼마나 큰 형벌이 있으며, 하나님 없이 죄 가운데 사는 것이 얼마나 비참한 인생인지를 분명히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참으로 이 행위언약 아래서 모든 인생들은 다 죽을 죄인으로 하나님 앞에 있는 것입니다. 율법을 지키면 복 받지만, 그러나 그것은 하나의 이상일 뿐 전적타락한 인간이 이 율법을 결코 지킬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율법은 이스라엘에게 주어졌지만, 사실상 모든 인류가 율법의 저주아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한편으로 이 율법을 통해서 사람들은 자신이 저주아래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는데, 사실 이것이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율법은 결국 율법의 몽학선생 역할을 위하여 주어진 것입니다. 율법은 우리를 저주아래 있게 하여 우리로 하여금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나아가게끔 합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 우리 대신 죄를 짊어지시고 십자가에서 율법의 저주를 다 당해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께서 우리 대신 율법의 모든 계명을 다 지켜순종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믿음으로 그리스도와 연합한 자는 값없이 죄사함을 받고 의롭다 함을 얻어 하나님이 약속하신 축복을 다 받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율법의 저주에서 속량하여 주심으로 이제 신약의 성도들은 법아래 있지 않고 은혜 아래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는 결코 정죄함이 없습니다.
그러면 은혜 아래 있으니 죄를 지어도 상관이 없습니까? 그럴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율법에서 해방되어 법 없는 자가 되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그리스도의 율법 아래 거하는 자가 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의 율법은 우리 마음에 새겨진 율법을 말합니다. 구약은 율법이 마음 밖에 명해집니다. 율법만 명해지고, 그것을 지킬 수 있는 성령의 은혜가 없습니다. 그러나 신약은 성령님의 은혜로 마음 안에 기록됩니다. 따라서 신약의 성도들은 성령에 의해 거룩하게 함을 입고, 마음에서부터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생겨나서 자원하여 기쁨으로 율법을 순종하며 살게 되는 것입니다.
물론 신약의 성도들도 때때로 계명을 어기며 죄를 지을 때가 있습니다. 그렇게 죄를 지을 때 하나님은 우리를 향해 노하시고, 또 친히 징계하시는 것입니다. 마치 부모가 자식을 징계하듯이 그렇게 징계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은혜언약인데, 이러한 은혜언약이 오늘본문에서도 잘 나타나는 것입니다.
다. 상벌 규정에 나타난 하나님의 은혜 - 회개를 위한 징계
셋째로 이스라엘과 하나님이 맺은 언약은 근본적으로 은혜언약이라는 사실을 오늘 본문이 잘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들은 어린양의 피로 이미 구원받았고, 율법은 감사의 규범으로서 주어진 것입니다. 그리고 이스라엘이 불순종할 때 내리시는 저주는 결국 징계인 것입니다.
“(18)너희가 그렇게 되어도 내게 청종치 아니하면 너희 죄를 인하여 내가 너희를 칠배나 더 징치할지라”(레 26:18)
여기서 ‘징치한다’는 말은 ‘징계하다, 훈육하다’라는 말입니다. 하나님이 내리시는 언약적 저주들이 처벌 그 자체를 목적으로 하는 형벌이 아니라, 그들로 회개하여 돌이키도록 하기 위한 징계라는 것입니다. 만일 이 저주들이 처벌을 목적으로 했다면, 불순종한 즉시로 모두 진멸 당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당장에 다 진멸하지 않으시고, 매 단계마다 회개의 기회를 주시고, 또 남은 자를 두시고 회개할 때까지 징계하시는 것입니다. 물론 이스라엘이 징계를 받고서도 죄를 고집하게 된다면 하나님께서는 더 세게 징계하실 것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도 고집보다 하나님의 고집이 더 세기 때문에 이스라엘은 그 하나님 앞에 항복할 수밖에 없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열거되는 저주들이 과연 징계가 맞나 싶을 정도로 너무나 혹독하고 잔혹하지만, 그러나 우리는 여기서 “하나님이 너무 가혹하게 징계하신다”라고 생각할 것이 아니라, 이렇게까지 코너로 몰지 않으면 도무지 회개할 생각을 하지 않는 이스라엘의 완악함과 강퍅함에 놀라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러한 사실을 생각하면서 오늘 본문 말씀이 곧 우리를 향한 말씀이라는 것을 깨달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자녀로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우리가 죄를 범하면 그 죄에 대해서 징계하시는 것입니다. 징계하실 때는 아주 뼈아픈 징계를 내리시는 것입니다. 건강을 치시기도 하시고, 사업이 망하게 하기도 하시고, 여러 가지 사건과 사고로 어려움에 처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때로는 영적으로 침체에 빠진 상태에서 하나님의 사랑스러운 얼굴을 가리시고 진노와 미움의 얼굴을 대하게 하셔서 짓이기는 고통을 당하게도 하십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향해서 자신의 원수라고 호칭하시고 그들을 싫어하신다고까지 말씀하셨습니다. 그것이 사랑의 징계이고, 미워하는 것이 하나님의 본심이 아니지만, 그러나 그렇게까지 하지 않으면 우리가 도무지 회개할 생각을 하지 않기 때문에 혹독하게 우리를 징계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징계를 받을 때 그 징계를 경홀히 여겨서도 안 되고, 또 그 징계로 낙심하여 절망에 빠져서도 안 됩니다. 아이들이 부모에게 매를 맞았을 때 울면서 다시 부모 품에 안기려고 나아오는 것처럼 그렇게 주님 품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1. 축복의 성취
그러면 저주 단락을 배우기 앞서서 지난주에 배운 축복의 말씀이 이스라엘 역사 가운데 어떻게 성취되는지 먼저 살펴보겠습니다. 축복이 이스라엘 역사 가운데서 성취되었다는 것이 놀라운 은혜인데, 왜냐하면 전적타락한 인간은 율법을 지킬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이스라엘 백성들은 가나안 땅에 들어가자마자 곧바로 타락해버렸고, 언약을 배반하여 우상을 숭배하였습니다. 그래서 그들에게 언약적 저주가 다 임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들에게 언약적 저주만 임하고 축복은 하나도 못 받았습니까? 그것이 아니라, 다윗과 솔로몬을 통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은혜로 이 축복을 경험합니다. 왕 한 사람의 경건과 순종함을 통해서 온 이스라엘이 축복을 받는 것입니다.
전쟁에서의 승리 - “다메섹 아람에 수비대를 두매 아람 사람이 다윗의 종이 되어 조공을 바치니라 다윗이 어디를 가든지 여호와께서 이기게 하시니라”(삼하 8:6)
평화 - “(24)솔로몬이 하수 이편을 딥사에서부터 가사까지 모두 다스리므로 하수 이편의 모든 왕이 다 관할한바 되매 저가 사방에 둘린 민족과 평화가 있었으니(25)솔로몬의 사는 동안에 유다와 이스라엘이 단에서부터 브엘세바에 이르기까지 각기 포도나무 아래와 무화과나무 아래서 안연히 살았더라”(왕상 4:24-25)
번성 - “유다와 이스라엘의 인구가 바닷가의 모래 같이 많게 되매 먹고 마시며 즐거워하였으며”(왕상 4:20)
풍요 - “왕이 예루살렘에서 은을 돌 같이 흔하게 하고 백향목을 평지의 뽕나무 같이 많게 하였더라”(왕상 10:27)
성전건축 - “(10)제사장이 성소에서 나올 때에 구름이 여호와의 전에 가득하매(11)제사장이 그 구름으로 인하여 능히 서서 섬기지 못하였으니 이는 여호와의 영광이 여호와의 전에 가득함이었더라(12)그 때에 솔로몬이 가로되 여호와께서 캄캄한데 계시겠다 말씀하셨사오나(13)내가 참으로 주를 위하여 계실 전을 건축하였사오니 주께서 영원히 거하실 처소로소이다 하고”(왕상 8:10-13)
솔로몬의 고백 - “여호와를 찬송할지로다 저가 무릇 허하신 대로 그 백성 이스라엘에게 태평을 주셨으니 그 종 모세를 빙자하여 무릇 허하신 그 선한 말씀이 하나도 이루지 않음이 없도다”(왕상 8:56)
물론 이런 평화와 번영은 그리 오래가지 못했습니다. 왜냐하면 결국 다윗도 솔로몬도 허물과 약점이 있는 자들이었기 때문입니다. 더욱이 다윗과 솔로몬은 그나마 괜찮은 왕이었지만, 대부분의 왕들은 앞서서 언약을 배반하고 우상숭배했습니다. 이스라엘이 사느냐 죽느냐 하는 것이 사실상 그들의 왕이 어떤 사람이냐 하는 것에 달려 있는 것인데, 왕들이 앞서서 우상숭배하니 그 결말은 안 봐도 비디오인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이 약속하신 축복의 궁극적인 성취는 보통 인간 왕을 통해서는 이루어질 수가 없는 것입니다. 오직 참 신이시오 참 사람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이루어질 수 있는 것입니다. 다윗과 솔로몬은 바로 이 그리스도의 모형이요 그림자였습니다.
“(24)내 종 다윗이 그들의 왕이 되리니 그들에게 다 한 목자가 있을 것이라 그들이 내 규례를 준행하고 내 율례를 지켜 행하며(25)내가 내 종 야곱에게 준 땅 곧 그 열조가 거하던 땅에 그들이 거하되 그들과 그 자자손손이 영원히 거기 거할 것이요 내 종 다윗이 영원히 그 왕이 되리라(26)내가 그들과 화평의 언약을 세워서 영원한 언약이 되게 하고 또 그들을 견고하고 번성케 하며 내 성소를 그 가운데 세워서 영원히 이르게 하리니(27)내 처소가 그들의 가운데 있을 것이며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 백성이 되리라”(겔 37:24-27)
바로 다윗의 이름으로 오시는 한 사람 예수 그리스도께서 율법의 저주를 다 받으심으로 율법의 저주 아래 있는 우리를 속량하시고, 한 사람 예수 그리스도의 온전히 순종하심으로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된 것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는 결코 정죄함이 없고, 그리스도에게 허락된 모든 언약적 축복을 그리스도와 함께 받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를 믿었으면 이 땅에서부터 하나님 나라의 행복을 미리 받아 누립니다. 그래서 성도의 육신은 고난으로 말미암아 점점 후패해갈지라도 성도의 마음속에는 세상이 줄 수 없는 평안과 기쁨이 있고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땅에서 누리는 것은 하나님이 약속하신 축복의 극히 일부분에 불과합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고자 예비하신 축복은 눈으로도 보지 못했고, 귀로도 들어보지 못했고, 사람의 생각으로도 상상하지 못했던 놀라운 축복입니다. 이 궁극적인 축복의 성취는 주님의 재림의 때에 이루어집니다.
“(2)또 내가 보매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이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니 그 예비한 것이 신부가 남편을 위하여 단장한 것 같더라(3)내가 들으니 보좌에서 큰 음성이 나서 가로되 보라 하나님의 장막이 사람들과 함께 있으매 하나님이 저희와 함께 거하시리니 저희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은 친히 저희와 함께 계셔서(4)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씻기시매 다시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계 21:2-4)
이때는 영육간의 완전한 풍요와 번영이 있게 됩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셔서 언약의 목적인 “너는 내 백성이 되고, 나는 너희 하나님이 되리라”는 목적을 성취하시는 것입니다. 이 모든 은혜가 그리스도 안에서 주어집니다.
그러므로 신약의 성도들에게 있어서 복을 받을 것이냐 저주를 받을 것이냐, 사느냐 죽느냐의 문제는 율법을 준행하느냐 준행하지 않느냐에 달려있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믿어 그분과 연합하느냐, 아니면 믿지 아니함으로 그분밖에 있느냐 하는 것에 달려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행함으로 의롭다 함을 받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은혜로 의롭다 함을 받습니다.
우리가 믿음에 있는지, 우리가 그리스도와 연합하였는지 우리 자신을 돌아보아야 합니다. 그리스도께 우리 안에 계심을 스스로 알고 깨닫고 느끼지 못한다면 우리는 버리운 자입니다(고후 13:5).
그러면 본격적으로 오늘 본문을 살펴보겠습니다. 만일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계명의 말씀을 준행하지 않는다면 다섯가지 묶음의 저주가 임하게 됩니다. 16절부터 보시면...
2. 첫 번째 저주 - 질병, 약탈, 패배, 압제
(16)내가 이같이 너희에게 행하리니 곧 내가 너희에게 놀라운 재앙을 내려 폐병과 열병으로 눈이 어둡고 생명이 쇠약하게 할 것이요 너희의 파종은 헛되리니 너희의 대적이 그것을 먹을 것임이며(17)내가 너희를 치리니 너희가 너희 대적에게 패할 것이요 너희를 미워하는 자가 너희를 다스릴 것이며 너희는 쫓는 자가 없어도 도망하리라
첫 문장의 시작이 의미심장합니다. “내가 이같이 너희에게 행할 것이다...” 곧 불순종과 배반행위에 대해 묵과하지 않으실 것이라는 것입니다.
땅은 그 산물을 내고(물질의 복)
5. 너희의 타작은 포도 딸 때까지 미치며 너희의 포도 따는 것은 파종할 때까지 미치리니 너희가 음식을 배불리 먹고 너희의 땅에 안전하게 거주하리라
6. 내가 그 땅에 평화를 줄 것인즉 너희가 누울 때 너희를 두렵게 할 자가 없을 것이며 내가 사나운 짐승을 그 땅에서 제할 것이요 칼이 너희의 땅에 두루 행하지 아니할 것이며.
칼이 없어질 것이다
7. 너희의 원수들을 쫓으리니 그들이 너희 앞에서 칼에 엎드러질 것이라
전쟁의 승리
흩어진다.
주거 불안정
내가 칼을 너희에게로 가져다가 언약을 어긴 원수를 갚을 것이며 너희가 성읍에 모일지라도 너희 중에 염병을 보내고 너희를 대적의 손에 넘길 것이며
염병, 인육을 먹는 것
(돌보심 - 치심)
41. 나도 그들에게 대항하여 내가 그들을 그들의 원수들의 땅으로 끌어 갔음을 깨닫고 그 할례 받지 아니한 그들의 마음이 낮아져서 그들의 죄악의 형벌을 기쁘게 받으면.
____________________________ 레위기 25장 / 희년(10절)
Consecrate the fiftieth year and proclaim liberty throughout the land to all its inhabitants. It shall be a jubilee for you; each one of you is to return to his family property and each to his own clan.
◎ 50년 마다 지켜야 할 회년에 대하여.
8-10 자유를 공포할 것.
11-13 파종하지 말것.
14-19 이웃과의 매매에 대하여.
23-34 토지를 물러줄 것.
35-38 동족을 사랑하여 이식을 취하지 말 것.
36-55 몸을 판 자의 속량.
레위기 25장에서는 두 가지 해에 대한 규례를 말씀합니다.
첫째는 안식년입니다(1-7절)
둘째는 희년입니다(8-55절)
7676. 안식년. 샤바트(shabbâth) שַׁבָּת
발음 / 샤바트(shabbâth)
어원 / 7673에서 유래
관련 성경 / 안식일(출 16:23, 느 9:14, 암 8:5), 안식(레 25:4, 신 5:14), 안식년(대하 36:21). [동] 안식하다(레 25:2, 신 5:14)
구약 성경 / 11회 사용
* 7673. שָׁבַת
1. 휴식하다, 2. 멈추다, 3. 안식일을 거행하다
발음 / 샤바트 [ shâbath ]
관련 성경 / 안식하다(창 2:3, 출 16:30, 대하 36:21), 쉬다(출 31:17, 잠 22:10), 그치다(사14:4), 끊어지다(사33:8), 마치다(창2:2), 중지하다(느6:3), 멸절하다(사17:3), 없어지다(렘26:29, 겔6:6), 제하다(레26:6), 무르다(룻4:14), 폐하다(왕하23:5), 버리다(시119:119), 끊다(사13:11), 잠잠하다(시8:2), 망하다(암8:4), 떠나다(사30:11), 못하다(레2:13), 제하여 버리다(왕하23:11), 포기하다(대하16:5), 지키다(레23:32), 누리다(레26:34)
구약 성경 / 71회 사용
1. 뿔 나팔 소리, 2. 은 나팔의 신호, 3. 악기
발음 / 요벨(yôwbêl)
어원 / 혼성. 2936에서 유래한 것으로 보임
관련 성경 /나팔(출 19:13), 희년(레 25:10, 54, 27:18), 양각나팔(수 6:4, 5, 6)
구약 성경 / 27회 사용
* 2936. טָנַף
발음 / 타나프 [ ṭânaph ]
관련 성경 / 더럽히다(아 5:3)
안식년 제도를 통하여 주시는 은혜
1. 땅에 대한 은혜(4절)
제 칠년에는 땅으로 쉬어 안식하게 할찌니 여호와께 대한 안식이라 너는 그 밭에 파종하거나 포도원을 다스리지 말며.
땅에 대한 은혜란 곧 자연에 대한 은혜라고 하겠습니다.
땅에 경작을 멈추도록 하는 것은 생산력을 증대시킬 수 있는 비결이라고 합니다.
땅의 신음 소리를 들어야 합니다(로마서 8:22)
피조물이 다 이제까지 함께 탄식하며 함께 고통을 겪고 있는 것을 우리가 아느니라.
안식년의 소출은 너희의 먹을 것이니 너와 네 남종과 네 여종과 네 품군과 너와 함께 거하는 객과.
네 육축과 네 땅에 있는 들짐승들이 다 그 소산으로 식물을 삼을찌니라.
3. 하나님에 대한 신뢰(21절)
명하여 제 육년에 내 복을 너희에게 내려 그 소출이 삼년 쓰기에 족하게 할찌라
가난한 사람들에게 새로운 출발을 약속하는 은혜
1. 자유를 공포하라(10절)
제 오십년을 거룩하게 하여 전국 거민에게 자유를 공포하라 이 해는 너희에게 희년이니 너희는 각각 그 기업으로 돌아가며 각각 그 가족에게로 돌아갈찌며.
종들에게는 자유를, 내 기업은 내 소유로 돌아오게 하라
땅은 원래 사람의 것이 아니라 창조주 여호와 하나님의 것임을 인정하는 것이 희년의 의미라고 하겠다.
모든 것의 주인은 하나님이시다(23절)
구속의 은총을 주시는 하나님( 절)
구속(고엘)의 대상은 네 가지
고엘 - 기업을 회복시켜 줄 자
1. 땅(23-28절, 24-25절)
너희 기업의 온 땅에서 그 토지 무르기를 허락할찌니.
만일 너희 형제가 가난하여 그 기업 얼마를 팔았으면 그 근족이 와서 동족의 판 것을 무를 것이요
2. 가옥(29절)
성벽 있는 성내의 가옥을 팔았으면 판지 만 일년 안에는 무를 수 있나니 곧 그 기한 안에 무르려니와
3. 채무(35-38절)
네 동족이 빈한하게 되어 빈손으로 네 곁에 있거든 너는 그를 도와 객이나 우거하는 자처럼 너와 함께 생활하게 하되.
4. 종(39-41절)
18-22절 |
땅은 그 산물을 내리니 너희가 배불리 먹고 거기 안전히 거하리라.
혹 너희 말이 우리가 만일 제 칠년에 심지도 못하고 그 산물을 거두지도 못하면 무엇을 먹으리요 하겠으나.
내가 명하여 제 육년에 내 복을 너희에게 내려 그 소출이 삼년 쓰기에 족하게 할찌라.
너희가 제 팔년에는 파종하려니와 묵은 곡식을 먹을 것이며 제 구년 곧 추수하기까지 묵은 곡식을 먹으리라.
결론 55절 /
이스라엘 자손은 나의 품군이 됨이라 그들은 내가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나의 품군이요 나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니라.
오늘 읽어야 할 말씀
사무엘상 4-6장
누가복음 9:1-17
희년(禧年) 요벨(yôwbêl) יֹבֵל
당시 고대 근동 사회에서 볼 수 없는 독특한 제도가 등장하는데, 바로 희년 제도이다.
희년 <요벨>은 어원상 숫양의 뿔을 뜻하는데 이는 희년의 시작을 알릴 때 숫양의 뿔로 만든 나팔을 부는 데서 유래 된 명칭이다.
희년은 칠 년마다 돌아오는 안식년이 일곱 번 지난 후의 다음해로 오십 년이 되는 때를 말한다.
이때도 안식년과 같이 노동이 금지되고 땅을 휴경해야 한다.
그러나 희년이 갖는 독특성은 모든 채무가 탕감되고 매매되었던 토지가 원주인에게 돌아가고 종 되었던 자들이 자유인이 된다는 데 있다.
언약 공동체만이 지닌 이러한 희년 제도는 몇 가지 면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첫째, 모든 소유가 하나님께 있음을 고백하는 제도
땅이나 인간이나 모든 물질은 원래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이므로 사람이 주인이 될 수 없다.
그러기에 희년이 되면 하나님이 원래 수여한 상태대로 돌려놓아야 하는 것이다.
둘째, 공동체의 유지를 위한 것
공동체 내에서 토지의 매매나 채무, 종이 생기는 것은 경제적인 이유 때문이다.
이는 경제적인 부가 평등하게 분배되지 않고 특정한 곳으로 몰리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경제적인 불평등은 공동체간의 갈등을 초래하고 하나 됨을 파괴한다.
따라서 희년 제도는 경제적인 원인으로 공동체가 파괴되는 것을 방지하고 경제 정의를 실현하는 제도인 것이다.
셋째, 구속사에서 종말론적인 하나님의 구원과 축복을 예표
죄와 사망에서 해방되어 영원한 안식을 얻고 하나님이 세우실 새로운 낙원에서 누릴 무한한 축복의 현세적 경험이 바로 희년인 것이다.
희년 제도는 가진 자와 못 가진 자 사이에 발생할 수 있는 갈등을 미연에 방지하고 언약 공동체 내에 경제적인 평등을 실현하려는 제도이다.
이러한 경제 정의와 평등의 원리는 오늘날 사회에서도 성도들이 지키고 실현해야 할 원리이다.
성도들은 자신이 소유한 물질이 하나님의 소유임을 인정하고 하나님의 뜻을 위해 사용해야 한다.
사회적으로 소외되고 가난한 자를 외면하는 것은 하나님이 제정하신 희년의 정신을 어기는 것이다.
하나님이 성도들에게 물질을 허락하심은 물질이 필요한 자들을 위해 베풀도록 하기 위함이다.
따라서 성도들은 가난한 자를 물질적으로 돌보아야 하며, 경제적으로 불평등한 현대 사회 속에서 경제적인 평등과 정의를 실현하는 데 힘써야 한다.
희년이 시작되는 구체적인 날자에 대한 지적이다.
희년은 그 해의 속죄일(종교력 7월 10일, 민간력 1월 10일)에 시작되었는데 이는 먼저 속죄가 선행되어야만 기쁨과 해방, 그리고 자유의 회복이 선포되는 하나님의 은총이 임한다는 사실을 상징적으로 교훈해 준다.
한편 '속죄일 규례'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16장 주석을 참조하라.
나팔을 크게 불지며
유대 종교력으로 7월 10일, 즉 속죄일이 되면 전국에서 일제히 나팔을 불어 희년의 도래를
선포했다.
그러므로 희년 벽두에 울려 퍼지는 여기 이 나팔 소리는 마치 여호와의 시내 산 강림시 울려 퍼졌던 나팔 소리와도
같이(출 19:16) 언약의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은혜로우신 현존(現存)을 알리고, 자유를 잃은 자에게 자유를 선포하며, 땅의
휴식과 더불어 농민들이 노동의 고통으로부터 해방됨을 선포하는 은총의 나팔 소리였다. 한편 여기 이 '나팔'은 양의
뿔로 만들어진 곡선형의 긴 나팔을 가르키는데, 그 소리는 은은한 저음으로 길게 울려 퍼졌다(23:24).
제 오십 년 ... 자유를 공포하라 -
희년이 갖는 가장 중요한 역사적 의의는 바로 자유의 선포이다.
그리고 여기서 말하는
자유는 추상적이거나 관념적인 자유가 아니라, 구체적인 행동을 통해 인간의 현실 속에 분명하게 작용하는 역사적 해방 사건이다.
이런
맥락에서 이 자유의 내용을 세분하여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노예 상태로부터의 해방(39-55절)
둘째, 잃어버렸던 기업의
회복(13절-34절)
셋째, 노동으로부터의 안식과 토지의 휴경 (11절)
넷째, 빚의 탕감
이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어느 누구에게 속할 수 없고, 땅 또한 하나님의 것으로서 어느누구에게 영속되어질 수 없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한편 여기서 '자유'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데로르'의 기본 개념은 '재빠르게 움직이다'(move lapidly)란 의미를
가지고 있는데, 이것은 창공을 재빠르게 날아다니는 제비류(a kind of swallow)의 비행으로부터 연유된 말이다.
그러므로
자유는 일차적으로는 육체적인 모든 구속과 억압, 그리고 영적으로는 모든 죄와 사망의 사슬로부터 해방되어 '그리스도의 품
안'이라는 창공에서 마치 제비같이 재빠르게 훨훨 날아다니는 것, 바로 그것이다.
너희에게 희년이니 -
'희년'(禧年, Jubilee)에 해당하는 희브리어 '요벨'은 '수양의 뿔'(ram's
horn)이란 뜻으로, 곧 수양의 뿔로 만든 나팔을 불어 희년의 시작과 자유를 선포했던 사실에서 유래한 명칭이다.
한편 구약의 이
희년 제도는 성도들이 그리스도의 복음에 선포로 말미암아 마침내 죄와 사망과 마귀의 사슬에서 해방되어 참된 기쁨과 안식, 그리고
영원한 생명을 소유하게 될 것을 상징한다(눅 4:18,19).
땅을 놀게 버려두라라는 말인데 땅이 소득의 유일한 근거인데 어떻게 놀릴 수가 있었을까?
자동차 10부제도 지키려고 마음먹어도 기분내키는 것은 결코 아니다.
하물며 땅을 일년이나 묵히다니
땅을 놀린 다른 예인 유럽의 중세때 돌려짓기와 비교하면 차이가 무엇인가?
돌려짓기는 지력회복이 목적이지만 안식년은 하나님 앞에서 자유와 평등을 누리는 것이다(4절).
부수적인 효과도 있겠지만 지력회복이 주목적이라면 7년 만에 쉬는 것은 너무 길다.
도라지를 옮겨심지 않으면 지력이 약해져서 몇 년
만에 썩어버린단다.
같은 농작물을 연속해서 심지 않고 바꾸는 것이나 퇴비를 충분하게 넣어줌으로 이것을 방지하는 방법도 있으므로 안식년의 주목적은
지력회복이라고 볼 수 없다.
소출에 차이가 있다.
돌려짓기는 땅을 놀림으로 지력을 유지함으로 연작하는 것보다는 분명히 더 나은 효과가 있었을 것이다.
안식년은 하나님께서 특별히 소출을 많이 주겠다고 약속하셨다(21)
안식년에 땅을 버려두는 것은 종과 품꾼과 객과 들짐승들을 위한 것이다? (O, X)
X; 땅(4)과 이스라엘 백성(6절의 '너')도 포함되기 때문이다.
결국 안식년에는 일정한 부분에서는 주인과 종의 구분이 없어진다.
물질과 노동에 집착하지 않는 연습을 하는 셈이다.
우리도 때로는 바쁜 일상에서 물러나 하나님과 교제하는 일에 시간을 써야한다. 재물에 집착하지 않는 훈련도 필요하다.
너의 곡물의 스스로 난 것이나 열매를 거두지 말라(5)면서 안식년의 소출은 너희의 먹을 것(6)이라면 말이 맞지 않는데?
안식년의 소출이란 씨를 뿌리지 않았음에도 스스로 난 곡식이나 열매를 가리키는 말이며 이것을 먹어도 좋다는 뜻이다(6,12).
다만 특정한 사람이 거두는 것이 아니라 누구에게나 개방된 것이다.
안식의 개념이 다음과 같이 발전하고 있다.
첫 안식의 주인공은 하나님, 그 다음 안식의 주인공은 사람, 이제 안식의 주인공은 땅이다.
도대체 안식의 마지막 목표가 무엇인지 본문을 근거로 설명해 보자.
안식의 목표는 희년이다.
모든 자에게 자유가 선포되는 것, 아마 마지막 안식은
하늘나라에서 하나님과 영원한 안식을 누리는 것이 될 것이다.
안식년이 소출을 즐기는 점에서는 주인과 종과 짐승의 차이마저
없애버리는 해라면
禧年(유비레타, jubilee)은 더욱 확대되어 하나님으로 말미암은 기쁨이 넘치는 해이다.
노예상태에서 해방, 잃어버렸던 땅과
기업을 되찾음, 노동으로부터 해방이다.
해방을 당하는 사람이나, 보내는 사람이나 모두 기뻐하는 해이다.
하나님을 기뻐하지 못하는 사람은 재산의 손실을 몹시 슬퍼하게 될 것이다.
물질에, 재산 축적에 너무 관심을 기울이지 말고
하나님과 더불어 살라.
나팔을 부는 7월 10일은 49년째인가 50년째인가?
새로운 날을 알리는 나팔이라면 1월에 불어야지 7월에 부나?
1일에 불지 왜 10일에 부나?
50년 째 7월 10일이다.
원래 나팔을 부는 날 7월 1일이다.
종교력으로 7월이지만 실제로는 신년 첫달이다.
신년이 왔다고 바로 희년을 선포하는 것이 아니라 열흘이나 기다려야했다.
속죄일을 기다리는 것이다.
바로 이 과정에서 진정한 자유와 기쁨은 속죄일에 온다는 것을 깨닫게 했을 것이다.
희년에 파종하지 않으면 그 전 안식년까지 연속 2년간 농사를 짓지 않는 셈인데 뭘 먹고 살지?
하나님 은혜로 살 수 있나 없나 확인해보라는 것이다.
믿고 따르는 자에게 하나님의 역사하심이 있다.
우리 나라 사람들이 땅을 살 때에는 가장 먼저 생각하는 것이 무엇일까?
이스라엘 사람은?
우리나라 사람들은 '돈이 되는가'를 제일 먼저 생각한다.
기업도 그렇고 개인도 땅을 투기의 대상으로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희년이 몇 년 남았는가를 따졌다.
즉 내가 몇 년 동안 사용할 수 있는가를 먼저 생각했다.
결코 자신의 것이 될 수 없는 것이다.
나중의 일이지만 안식년은 말할 것도 없고 희년도 끝내 지켜지지 않는다.
누가 희년을 기뻐할 수 없었을까?
사장님, 대지주, 많은 종을 거느린 주인.
부나 권력이 한 사람에게 집중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 아니다.
인간세상이 결국 그렇게 될 수 밖에 없다고 하더라도 가난하고 약한 자를 돌아보는 노력이 필요하다.
안식년 제도가 없다할지라도 우리의 삶 속에서 그 정신이 구현되어야 한다.
각종 임금제도는 최대한으로 노동력을 짜내는 방법이 연구되지만 모두가 함께어울려 사는 방법이 먼저 연구되어야 한다.
능력없는 사람도 충분하게 고려된 임금체계가 연구되어야 한다.
거래를 할 때 희년의 년수를 감안하는데 속이고 말고 할 게 있을까(17)?
다 아는 사실 아닌가?
원어의 기본의미는 '억압하다' '분노하다'이다.
NKJV은 'do not oppress,' NIV는 'do not take advantage of'로 번역하였다.
희년의 년수에 상관없이 강자의 뜻대로 거래를 하지 말라는 뜻이다.
날씨가 맑을 날이 거의 없는 영국에서는 아침 인사가 Good morning이 되었다.
우리 조상들의 관심사는 '밤새 안녕'과 '진지'였다.
이스라엘의 '샬롬'이라는 인사는 '안녕하십니까?'와 같은 말이다.
이스라엘이 차지한 가나안은 우리보다 더 많은 이민족이 짓밟은 곳이며 농산물이 그리 풍성한 곳이 아니다.
이스라엘을 하필 이런 곳으로 인도하여 땅을 차지하게 하신 하나님의 의도가 무엇인가?
배부르고 안전하게 거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법도와 규례를 지켜 행하는 것임을 알게 하시려고(18-19).
잠시만 하나님을 벗어나면 스스로의 힘으로 안녕을 유지할 수 없는 곳에서 하나님만 의지하고 살라는 것이다.
물을 충분하게 가두어두고 필요할 때마다 가져다 농사를 지을 수 있는 곳이 아니다.
늑대들(이민족)이 우글거리는 가운데 넣어놓고 '하나님만 의지할래 네 힘으로 막아볼래?' 하시는 셈이다.
하나님 외에 의지할 것이 많은 사람은 인간적으로 복이 많아 보이지만 진정한 행복을 누리기는 어렵다.
6년째에 충분한 소출을 보장해 주었음에도 결과적으로 이스라엘은 안식년을 제대로 지키지 않아서 토지는 강제로 안식년을 얻게된다. 토지가 어떻게 안식년을 누렸을까?
(스스로 답을 생각해본 다음에 다음 구절을 참고할 것. 레 26:34-36, 41-45, 대하 36:21, 렘 29:10)
이스라엘 사람들이 포로로 잡혀감으로.
이에 토지가 황무하여 안식년을 누림같이 안식하여 칠십 년을 지내었으니 여호와께서 예레미야의 입으로 하신 말씀이 응하였더라 (대하 36:21).
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바벨론에서 칠십 년이 차면 내가 너희를 권고하고 나의 선한 말을 너희에게 실행하여 너희를 이 곳으로 돌아오게 하리라 (렘 29:10).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 사람의 근본되는 목적이기도 하다.
그러면 어떻게 하나님을 경외할 수 있는지 본문에서 근거를 찾아보자.
사람 사이에 바른 관계를 가지는 것(17, 36, 43).
적어도 이 본문에 따르면 형제를 억압하지 말 것, 형제를 돌아볼 것, 종이 된 동족을 엄하게 부리지 않는 것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다.
역이 반드시 성립하는 것은 아니지만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은 사람과의 관계마저 바를 수밖에 없다.
장기판에는 일수불퇴란 말이 있고 고스톱 판에는 낙장불입이란 말이 있다.
오락이나 노름판보다 하나님의 법이 왜 이렇게 더 물렁하나?
왜 언제든지 물려주라고 하는가?
너희의 것이 아니라 내 것이기 때문이다(23).
너희가 가진 그 무엇이 절대적인 것이냐?
생각해 보라는 것이다.
매사에 하나님을 의식하고 살아야한다는 뜻이다.
땅도 하나님의 것이요 사람도 하나님의 것이다.
내 마음대로 해도 좋은 것이 아니다는 생각만 분명해도 사람 사이의 많은 문제는 저절로 해결된다.
성벽이 없는 지역의 가옥은 안되지만 성벽 안에 있는 가옥은 영구히 소유할 수 있다.
이게 도대체 무슨 의도일까?
성벽안에 있는 가옥은 어떤 면에서 고급주택이다.
희년이란 제도가 부자를 위한 제도가 아니다.
성벽안에서는 아무리 거주지를 넓혀도 크게 넓힐 수 없다.
제한된 범위 안에서 재산의 축적을 허용하는 셈이다.
그래도 레위인의 것은 영구히 살 수 없다.
흔히 하는 말로 돈놀이를 해서는 안된다.
형제에게 이자를 받지 말라(36)고 하기 때문이다.
그러면 은행은 문을 닫아야하나?
본문은 착취나, 고리대금을 통하여 가난한 형제(35)를 착취하지 말라고 경고하는 것이다.
오히려 '너와 함께 생활하게 하라'는 것은 최소한 형제다움(인간다움)을 유지할 수 있도록 도와주라는 말이다.
가난한 형제를 착취하지 말고 함께 살도록 도와주어야하는 이유는 같은 하나님의 자녀이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되는 것'과 '이스라엘에게 가나안 땅을 주는 것'이 어떻게 같은 의미가 되는가?
필연적인 선후관계.
부자관계가 회복되면 아버지의 것이 동시에 아들의 것이 된다.
양자를 들였으면 다음에는 필요한 것을 주는 것이 당연하다.
출애굽해서 가나안을 준 것은 범죄한 인생을 불러내어 하나님의 나라에 들일 것에 대한 상징이다.
같은 하나님의 자녀가 너무 가난하게 되면 도와주어야 한다(35-38).
그래도 안되면?
사야한다.
일을 시켜서라도 돌보아야한다.
희년까지 생계를 보장해주어야 한다는 뜻이다.
동족 이스라엘은 영원한 종이 되지 못할 뿐만 아니라 일시적인 종도 안된다.
종으로 사서라도 종으로 다루지 말고 품군처럼 대우하라는 것은 여전히 형제를 돌아보라는 것이다.
특히 다른 민족에게 팔려가서 영구히 종이 되는 것을 금하는 것이다.
능력이 없는 동족을 철저하게 도와 주어도 돕는 사람이 기분 나쁘지 않으려면 무엇을 잊지 않아야할까?
자신들이 노예생활 하던 곳에서 하나님께서 공짜로 구해 주었음을 기억해야한다(38, 42, 55).
그래서 그리스도인들은 좀 다르게 살아야한다.
기도, 찬송, 예배가 다른 것이 아니라. 삶의 기준이 좀 달라야한다.
이방인을 샀을 경우에는 영구히 종으로 삼을 수 있었다.
하나님께서 이방인과 유대인을 이렇게 차별하면 되나?
인격적 차원의 이야기가 아니다. 하나님의 백성이냐 아니냐의 차이이다.
지금도 이런 차이는 상존하고 있으며 앞으로도 여전히 있을 것이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아주 쉬운 길을 열어놓으신 이상 이것은 비난의 대상이 되지 못한다.
레위기 25장. 안식년과 희년. 은혜의 해.
안식년 규정은 미래에 소망을 주기 위한 하나님의 배려입니다.
이 규정은 수고로운 노동, 살면서 안게 되는 빚과 같은 인생의 무거운 짐들로부터 완전하게 벗어나는 안식이 올 것을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바라보게 하였습니다.
또한 이것은 현실적으로 부유한 계층의 형성이나, 빚진 자들의 몰락을 막기 위한 장치이기도 했습니다.
여기서 언급하는 것은 땅의 안식년인데, 땅을 그저 죽은 사물로 보지 않고, 인격화하여 말합니다.
땅은 하나님에게 속한 것입니다.
7년째 안식년에는 조직적인 파종과 수확이 금지되었습니다(5).
하지만 사람들은(동물들까지도) 밭과 포도원에서 마음대로 가져다 먹을 수 있었습니다.
지주나 종들이나 똑같았습니다.
땅은 다 하나님께 속한 것이고, 자신의 생계는 전적으로 하나님을 의지해야 한다는 사실을 안식년 마다 뼈저리게 배우게 하신 것입니다. 또한 땅은 하나님의 것이며, 땅에서 나오는 모든 것은 하나님의 공급이며, 그 풍성함은 나누어져야 한다는 사실을 그들은 기억해야 합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이스라엘 백성이 안식년을 제대로 지킨 증거는 별로 없습니다.
기록이 거의 없습니다.
단지 히스기야 때 지켜졌을 가능성이 기록되어 있을 뿐입니다(왕하 19:29; 사 37:30).
나라가 망한 후 하나님께서는 지키지 않은 안식년을 소급해서 억지로 시행되게 하셨습니다(대하 36:21).
포로기 이후 구약과 신약 사이에 안식년이 지켜진 증거들이 있습니다.
인간이 이렇습니다.
희년은, 7번의 안식년을 지낸 다음 해인 50년째 해를 말합니다.
이것은 메시야 시대의 모형으로서 기능합니다.
사회에서 실패한 사람들에게는 새로운 기회를 주고, 그들의 실패를 통해서 이익을 얻은 사람들에게는 얻은 것을 포기해야 하는 시간이었습니다.
희년은 백성들에게 자기 소유가 일시적임을 가르쳐주었습니다.
이 땅의 소유가 영원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자기 힘이 아니라, 하나님의 공급하심과 지켜주심을 신뢰하고 삽니다.
희년의 규정에서 가장 기본적인 원리를 55절이 보여줍니다.
“이스라엘 자손은 나의 종들이 됨이라.”
땅만이 아니라 백성들도 결국은 하나님께 속한 자들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하나님의 법을 오늘날 적용할 때, 모든 소유가 일시적이라는 사실을 기억하고 살아야 합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욕심을 위해서 거짓을 행하며, 다른 사람의 것을 빼앗아가면서 살아갈 수 없습니다.
희년이 이스라엘 백성에게 소망이 되었다면, 우리에게도 소망이 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종과 억압의 시대는 언젠가 반드시 끝나는 날이 있으며, 그리고 영원히 자유할 날이 오고 있습니다.
희년은 자유의 날입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것인 것을 알고, 자기의 것을 기꺼이 포기할 수 있는 사람, 내 배를 채우기보다는 가난하고 외로운 자의 가슴을 채워줄 수 있는 사람, 그런 사람으로부터 하나님의 나라는 진정한 자유의 나라로 이 땅에 서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희년의 가르침입니다.
내 소유는 없습니다.
우리는 그저 청지기이며, 나그네일 뿐입니다.
모두 하나님의 것이며, 하나님의 필요에 따라 각 사람에게 때로는 많게도 하시고, 적게도 하십니다. 하나님의 안식을, 우리의 안식이 되게 하셨으니, 우리도 다른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안식을 나누는 삶을 살기 원합니다.
이 땅에 있다가 없어질 것에 욕심 부리고 가지려 하기보다, 기꺼이 하나님의 것을 나누려고 하는 마음을 갖게 하옵소서.
조금 더 넉넉하고 부요한 마음으로 오늘 하루도 하나님 앞에서, 이웃을 사랑하며 살아가게 하옵소서.
안식년을 지키려고 한다면 반드시 제기되는 질문이 있습니다.
안식년에는 무엇을 먹고 살 것인가?
6년동안 열심히 농사지어
열매와 곡식을 먹었는데, 농사짓지 않는 일곱째 해, 안식년에는 무엇을 먹을 것인가?
이러한 질문에 대해 하나님이 미리
대답해주십니다.
20-21절입니다.
“만일 너희가 말하기를 우리가 만일 일곱째 해에 심지도 못하고 소출을 거두지도 못하면 우리가 무엇을 먹으리요 하겠으나 내가 명령하여 여섯째 해에 내 복을 너희에게 주어 그 소출이 삼 년 동안 쓰기에 족하게 하리라”
여섯째 해에 곡식과 열매를 거두고 나면, 그 곡식과 열매로 여섯째 해를 나고, 그 다음해인 안식년까지 먹어야 하며, 안식년
다음해인 여덟째 해에 파종하여 곡식을 거두기까지도 여섯째 해의 곡식으로 버텨야 하는데 하나님이 그것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여섯째 해에 내 복을 너희에게 주어 그 소출이 삼 년 동안 쓰기에 족하게 하리라”
안식년을 갖게 하기 위해서 하나님은 그 땅에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안식년을 지나고 농사를 지어서 소출을 얻기까지 3년을 살아가기에 충분한 소출의 복을 주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이어서 하나님은 안식년이 일곱번 지나고 난 그 다음해 즉 오십년째 해를 희년으로 지키라고 명령하십니다.
10-12절입니다.
“너희는 오십 년째 해를 거룩하게 하여 그
땅에 있는 모든 주민을 위하여 자유를 공포하라 이 해는 너희에게 희년이니 너희는 각각 자기의 소유지로 돌아가며 각각 자기의
가족에게로 돌아갈지며 그 오십 년째 해는 너희의 희년이니 너희는 파종하지 말며 스스로 난 것을 거두지 말며 가꾸지 아니한
포도를 거두지 말라이는 희년이니 너희에게 거룩함이니라”
한글 성경에 나오는 ‘희년(禧年)”이라는 뜻은 한문으로 복이라는 의미의 희(禧)와 해의 의미인 년(年)을 써서 복된 해라는
의미입니다.
희년에는 종에게 자유가 선포되고 가난과 여러가지 이유로 빼앗겼던 땅과 소유지가 회복되는 해이기 때문에 복된 해,
축제의 해입니다.
이에 대한 자세한 규례가 13절 이하에 설명되고 있습니다.
13-17절은 토지가 본래의 주인에게 돌아가는
것에 대해서,
23-28절은 기업으로 물려받은 땅에 대해서,
29-34절은 성안과 성밖에 있는 가옥에 대해서,
35-38절은 가난한 채무자에 대해서,
39-46절은 종으로 팔린 이스라엘 사람과 이방사람에 대해서,
47-55절은 실제 사례를
들어 희년의 규례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안식년과 마찬가지로 희년에도 농사나 파종을 금지하고 있기 때문에 일곱번째 안식년이 지난
희년을 지낼 때는 4년을 육년째 해의 소출로 먹게 되는 것입니다.
인간의 계산으로는 전혀 가능해 보이지 않지만 하나님은
50년째 해를 희년, 복된 해, 해방과 자유의 해, 축제의 해로 선포하십니다.
안식일, 안식년, 희년이 가능한 이유는 무에서 유를 창조하시는 하나님의 공급하심때문입니다.
출애굽기 16장에서 하나님은 광야로 나와
먹을 것이 전혀 없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기적으로 먹을 것을 공급하셨습니다.
전혀 먹을 것이 없는 광야에서 하늘로부터 만나와
메추라기를 공급하신 것입니다.
광야를 행군해가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기댈 곳은 오직 하나님 뿐이었습니다.
그들이 일곱째 날
안식일을 지킬 수 있는 것은 여섯째 날 일곱째 날까지 공급해주시는 하나님때문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이 일곱째 되는 날
쉬기를 원하셨습니다.
이를 위해 여섯째 날에는 만나를 이틀치 먹을 만큼 베풀어 주셨습니다.
그런데도 일곱째 날에 만나를
거두려고 들판에 나갔던 사람들은 모두 허탕을 치고 돌아와야만 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공급하심과 그 공급하심을 신뢰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누리는 안식일이었습니다.
하나님을 신뢰하지 못한 이스라엘 백성은 헛수고를 한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을 공급하심을
신뢰하지 못하는 사람은 안식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안식을 명령하시는 것은 안식을 위해 미리 준비하셨음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이
우리 눈에 보이지 않는 길로, 우리 머리에 이해되지 않는 명령을 내리신다고 해도 거기에는 이미 하나님의 정확한 공급하심과
예비하심이 계산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살아가는 일주일이라는 시간속에 일곱째 날을 정하셔서 쉼을 얻고 안식을 누리고
하나님과 교제하는 기쁨을 누리게 하십니다.
이를 위해 여섯째 날에 주의 공급하심을 예비하십니다.
하나님은 칠년째 되는 해에 쉼과
안식을 우리를 위해서 명하셨습니다.
이를 위해 여섯째 해에 충분히 공급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리고 그 명령에 순종하면, 내가
살아가는 땅, 환경, 관계, 주변 사람들 까지도 쉼과 복을 얻습니다.
하나님은 50년째 되는 해에 희년을 선포하십니다.
시간과 사람, 땅과 자연, 그 안에 깃들어 있는 모든 것의 소유권을 지니신 하나님께서 땅과 사람과 그 안에 있는 것들을 얽매이고
있던 모든 것에서 부터의 자유를 선포하십니다.
가난으로부터의 자유, 그래서 하나님이 주신 원래의 소유, 땅, 가옥이
회복되고, 하나님이 한 개인과 가정, 가문에게 부여하신 원래의 목적과 계획대로 질서가 회복되고 자유가 회복되기를 원하십니다.
이를 위해 치밀하게 준비하시고 예비하십니다.
안식년, 희년의 규례를 통해서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과 우리들에게 쉼을 주십니다.
자유를 주십니다.
우리에게 참 해방을 주십니다.
모든 굴레와 속박으로부터의 자유를 선포하십니다.
우리와 똑같은 인간의 모습으로 이 땅에 오신 예수님께서 자신이 자라나신 고향 나사렛에서 안식일에 회당에 들어가사, 이사야 (사61:1이하)의 한 구절을 찾아서 읽으셨습니다.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 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롭게 하고 주의 은혜의 해(희년)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누가복음 4:18-21)
그리고는 회당에 있는 모든 자들이 다 주목하고 있을 때 이렇게 덧붙이셨습니다.
“이 글이 오늘 너희 귀에 응하였느니라”
예수님이 우리에게 희년을 선포하십니다.
‘하나님의 공급하심과 예비하심이 있으니 걱정 하지 마라’
먹을 것, 입을 것, 마실 것, 살아갈 걱정 때문에 짓눌리고,
목매어, 억압과 굴레속에 살아가는 자들에게 선포하십니다.
‘내가 공급한다’ 하나님이 예비하신 복과 기업의 은혜를 다
잃어버리고 죄의 노예로, 욕망의 노예로, 돈의 노예로, 가난과 질병의 노예로, 권력과 명예의 노예로 신음하며 살아가는 당신의
자녀들에게 예수님이 선포하십니다.
‘쉼을 얻으라, 자유를 얻으라, 아들이 너희를 자유케 하면 너희가 참으로
자유하리라.’(요 8:36)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자유의 해, 해방의 해, 회복의 해, 구원의 해, 새로운 시대, 희년을
선포하십니다.
두려워하지 말고 주님이 이끄시는 쉼과 안식의 자리로 나아가십시다.
안식년, 희년의 자리로 나아가십시다.
주님이 이끄시는 그곳에 주님의 예비하심이 있습니다.
주님의 공급하심, 주님의 능력이 함께 하십니다.
하나님 아버지, 안식년과 희년의 규례를 통해서 쉼없이 살아가는 우리 인생에 안식을 주시는 분이, 우리에게 공급하시고
예비하시는 분이 하나님이심을 알게하시고 깨닫게 하심을 감사합니다.
희년을 선포하시는 예수그리스도의 안식과 쉼이 우리 인생가운데 풍성하게
하여주옵소서.
바둥거리며 우리 힘으로 살려고 하는 우리의 버거움을 내려놓고 주님의 공급하심과 예비하심을 바라보며 은혜의 날,
은혜의 해를 누리게 하옵소서.
그리하여 우리가 누리는 예수 그리스도안에서의 쉼과 안식, 평안과 기쁨, 회복의 은혜가 오늘
누군가에서까지 흘러가는 복된 날 되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____________________________ 레위기 24장 / 순결한 기름(2절)
Command the Israelites to bring you clear oil of pressed olives for the light so that the lamps may be kept burning continually.
순결한 기름 - 여기서 '순결한'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자크'는 '투명한'(transparent) 혹은 '빛나는'(bright)이란 뜻이다.
곧 이것은 다른 이물질(異物質)이 전혀 섞이지 않은 순수하고 깨끗한 상태를 의미한다.
어원 / 2141에서 유래
관련 성경 / 순결한(출 27:20, 레 24:2), 순수한(출 30:34), 정결한(욥 11:4, 16:17, 레 24:7), 청결한(욥 8:6, 잠 20:11), 깨끗한(욥 33:9, 잠16:2, 21:8)
구약 성경 / 11회 사용
* 2141. זָכַךְ
발음 / 자카크[zâkak]
관련 성경 / 깨끗하게 하다(욥 9:30), 깨끗하다(애 4:7)
구약 성경 / 4회 사용
따라서 일상 생활에서 흔히 사용되는 기름은, 감람 나무의 열매, 잎, 가지 등을 함께 으깨어서 만든 반면, 하나님을 섬기는데 사용된 순수한 기름은 오직 감람 열매만을 부수어서 짜낸 순결한 기름이었다(출 27:20).
끊이지 말고 등잔불을 켤지며 -
이것은 일차적으로 제사장이 성소 안에서 제사 활동을 하는데 불편함이 없도록 하고 또한
하나님의 성소를 빛 가운데 보존하기 위함이다.
그리고 여기서 끊이지 말고 불을 켜라는 명령은 하루 24시간 계속적으로 불을 켜라는
뜻이 아니라, 매일 날이 어두워지기 시작하는 저녁 무렵 불을 켠 후 다음날 아침까지 그 불을 꺼뜨리지 말고 잘 간검하라는
의미이다(출 27:20, 21).
한편 빛은 영적으로 복음을 상징하는데, 이는 그리스도의 복음을 통한 하나님의 구원 행동이 계속되고
있음과 또한 역설적으로는 성도들이 복음의 진리를 밝히는 등대 구실을 하여야 함을 암시해 준다(마 5:14-16).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위에 있는 동네가 숨기우지 못할 것이요.
사람이 등불을 켜서 말 아래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 이러므로 집안 모든 사람에게 비취느니라.
이같이 너희 빛을 사람 앞에 비취게 하여 저희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성막에 대한 규례
24:1-9 / 성소의 두 기구
24:1-4. 등잔불(등대, 메노라)
24:5-9. 진설병
24:10-22. 하나님의 이름을 모독한 혼혈아이에 대한 처분을 중심으로 하는 인과응보의 원칙에 대한 말씀
24:17-22. 살인 상해에 대한 배상의 규정.
성막의 기구들에 대한 규례는 이미 앞에서 언급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본장에서는 등불과 진설병에 대해 다시 한번 언급하고 있다.
이는 등불과 진설병이 구속사에서 그리스도를 예표하기 때문에 강조하기 위해서이다.
성소에는 원래 일곱 개의 등불이 놓여 항상 불을 밝혀야 한다.
이것은 죄로 인해 죽음의 어두움에 처해 있는 인간에게 구원의 빛을 밝힌 그리스도를 예표하고 있다.
또한 등불을 밝히는 기름은 성령을 의미하며 오늘날에도 성령은 끊임없이 복음의 빛을 밝혀 구원을 이어 가심을 말해 준다.
한편 진설병은 여섯 개씩 두 줄로 열두 개를 놓았다.
이것은 이스라엘 열두 지파의 헌신을 의미한다.
따라서 진설병은 하나님의 계획을 위해 자신을 드리신 그리스도의 헌신을 상징하고 있다.
또한 속죄 의식을 담당하는 제사장에게 공급되는 진설병은 자신을 생명의 떡이라고 말씀하신 그리스도를 가리키며(요 6:35), 자신을 내어 줌으로 인간들을 구원하시고 생명을 주신 예수님의 사역을 예표한다.
하나님의 이름을 모독한 자는 외국인이든 본토인이든 돌로 쳐죽이라고 명령하고 있다.
왜냐하면 이는 생명의 근원이며 만물을 다스리시는 하나님의 주권에 대한 거부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오늘날의 성도들에게도 마찬가지이다.
그런데 하나님을 모독하는 것은 비단 말로만이 아니라 행동을 통해서도 나타난다.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지 않고 자신의 의지대로 행동하거나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하면서도 죄를 짓는 자는 행동으로 하나님을 모독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생활 속에서 자신의 행위가 혹시 하나님의 이름을 더럽히고 영광을 가리우지 않는지 돌이켜 조심해야 할 것이다.
먼저 2절에서 4절까지의 말씀은 여호와 하나님의 임재의 상징인 등불을 밤 시간동안에 계속해서 켜둘 것을 명령하십니다. 그리고 5절에서 9절은 이스라엘 백성을 상징하는 떡 열두개를 하나님 앞에 항상 진설할 것을 명령하십니다. 그리고 이것을 영원토록 잘 관리하라고 명령하십니다. 성소의 구조상 떡은 등잔대의 정면에 놓여있습니다. 그리고 이 등잔불이 떡상의 떡을 항상 비추도록 하나님의 명령하신 것을 볼때, 이것은 분명 빛의 상징인 하나님과 떡의 상징인 이스라엘 백성들이 계속적인 관계를 맺고 있어야 함을 나타내는 것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성경은 이 관계를 언약으로 설명합니다. 즉 오늘의 말씀은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들이 맺은 언약이 영원함을 눈으로 보여주는 상징인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3절, 8절, 9절에서 영원한 규례, 영원한 언약이라고 강조하고 계신 것입니다. 이 모습을 매일 매일 봄으로, 그리고 이것을 유지하기 위해 매일 매일 신경써서 관리함으로 하나님의 임재로 인해 이스라엘이 살아갈수 있음을 확인하고 또 확인하는 것입니다.
10절이하의 말씀을 읽으면 좀 이해가 어렵습니다. 갑작스럽게 한사람의 이야기로 집중하고 있는데다가 그 결과는 처참하기 때문입니다. 전형적인 구약의 엄격하고 무서운 하나님의 모습이 그려집니다.
그런데 말씀의 구조를 자세히 보시면 하나님이 이야기 하고 싶으신 것이 “하나님을 모독하는 자를 죽여라, 받은대로 갚아주어라” 라는 것이 아님을 알수 있습니다. 만일에 하나님이 이야기하고 싶은 것이 하나님을 모독하는 자를 죽이라는 것이라면, 14절로 끝내시면 됩니다. 율법대로 죽었기에 더 고민할 이유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이 말씀에서 끝내지 않고 계속 말씀을 이어갑니다. 17절, 사람을 죽인자는 반드시 죽는다 18절, 짐승을 죽인자는 짐승을 갚아주어야 한다. 19절 이웃을 다치게 하면 나도 다쳐야 한다.. 무슨말입니까? 우리의 행동에 분명한 책임을 져야 한다는 말입니다. 나를 넘어서서 누군가에게 영향을 미치는 행동을 했다면, 그것을 원상복구해야할 책임이 있다는 말입니다. 분명 이 말씀들은 죽여라 물어주어라 상하게 해라에 방점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러한 결과가 있으니, 사람의 생명을 해하지 말아라, 짐승을 함부러 죽이지 말아라, 남을 이유없이 해하지 말아라라는 말에 방점이 있는 것입니다. 결과는 확실하지만 그 결과로 우리를 겁박하시고자 하는 것이 하나님의 의도가 아니라, 그 결과를 우리가 경험하지 않게하시려는 것이 하나님의 의도라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한가지 사실을 더 알려주십니다. 그것은 이스라엘 백성의 울타리가 어디까지인가? 라는 사실입니다. 22절의 말씀을 함께 읽어보겠습니다.
“거류민에게든지 본토인에게든지 그 법을 동일하게 할 것은 나는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임이니라.”
하나님의 법은 혈통적 이스라엘 백성에게만 유효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인정하는 그 백성과 같이 있는 것만으로도 동일하게 유효합니다. 하나님의 법이 동일하게 유효하다는 이 말에 집중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법이 적용된다는 사실은 그가 하나님의 관심속에 있다는 중요한 반증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눈에 불신자 같고, 우리의 생각에 교회에 다녀서는 안될것 같은 사람이라도, 하나님의 자녀인 나와 함께 있다면 그는 하나님의 관심속에 있는 사람이라는 해석이 가능해지기 때문입니다. 왜 하나님이 불신자를 나에게 붙여주셨을까요? 왜 우리의 신앙을 힘들게 하는 사람들이 주변에 있을까요? 오늘의 말씀을 통해 그들을 해석하면, 그들이 하나님의 관심속에 있음을 우리를 통해 알려주기 위해서라는 것도 생각해볼수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법이 살리심과 그에 따르는 책임에 방점이 있고, 그 법이 하나님의 사람들과 함께하는 모든 이들에게 동일하게 적용된다는 이 사실속에서 등잔불과 떡을 묵상해보기 바랍니다. 그러면 무엇이 보일까요?
그것이 바로 슬로밋의 아들이 하나님을 모독함으로 죽은 사건입니다. 유대인의 전승에 이 슬로밋의 아들 이야기가 나옵니다. 당시 타국인의 장막터는 순수 이스라엘 혈통을 가진 자들의 장막터와 약간 떨어져 있었습니다. 따라서 당시 아버지의 혈통을 따라야 하는 관례상 이 여인의 아들도 타국인의 장막터에 장막을 쳤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당연히 좋은 곳은 아니었겠지요. 그래서 이 이들이 단지파의 지역에서 장막을 치려 했습니다. 어머니의 신분으로 보면 당연히 단지파에 들어갈수 있다고 보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단지파 사람들에게 거부되었고, 결국 자신의 권리를 되찾고자 단지파의 어떤 사람과 격하게 싸우던중 하나님의 이름까지 모독했다는 것입니다. 무슨 말이냐면, 이 아들이 믿음이 없어서 하나님을 모독한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오히려 아이러니 하게도 믿음이 과도하게 있었기 때문에 하나님을 모독하는 지경까지 가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바라시는 것과 달랐던 겁니다. 그는 하나님의 자녀됨을 가치있게 여긴것이 아니라 자녀됨으로 얻는 권리만을 가치있게 여기고, 그 권리만을 요구한 것입니다. 마치 바리새인들처럼 겉은 신앙인인데 마음은 그렇지 않았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것이 하나님의 자녀가 가져야할 거룩함, 정결함이 아니라는 겁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의 자녀들이 매일 매일을 하나님 앞에 서야 한다고 강조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로서 누리는 결과론적인 은혜와 복을 경험하는 것을 믿음의 최우선으로 삼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됨, 그 자체가 주는 기쁨이 우리의 믿음의 시작이요, 전부가 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임재를 매일 경험하는 것을 가장 중요하게 보고 계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우리도 마찬가지로, 오늘 이 시간이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는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마음으로 삶을 해석할수 있는 우리가 되기를 바랍니다. 믿음의 권리가 주는 욕심에 빠져 믿음의 본질이신 주님을 잊어버리는 미련함을 버리고, 믿음의 기초이신 하나님을 만나는 이 새벽시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레위기 24장의 구조
1절-9절, 등잔불과 진설병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성막 기구 중의 등반대와 등잔불, 그리고 진설병 상과 진설병을 관리하는 규정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깨끗한 감람유를 가지고 오면 그것으로 등잔불을 켰으며, 아론과 제사장들은 등잔불을 계속 관리해야만 했습니다. 또, 진설병은 고운 가루로 떡을 굽고 열 두 지파를 상징하는 열 두 덩이의 떡을 진설병 상에 올려 둡니다. 7일마다 떡을 교체하고 그 떡은 아론과 그의 제사장들이 먹어야 했습니다.
10절-16절, 신성모독과 처벌
이스라엘 여인과 애굽 남자 사이에 태어난 아들이 하나님의 이름을 저주하며 이스라엘 사람과 싸웠습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는 그를 돌로 쳐서 처벌하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이름을 저주하는 행위는 하나님을 모독하는 행위이고, 그 결말은 사형이기 때문입니다.
17절-23절, 각종 상해죄의 처벌
하나님께서는 또 사람을 죽인 자, 짐승을 죽인 자, 이웃에게 손해를 입힌 자 등에 대한 처벌과 관련된 여러 규정들을 말씀해 주십니다. 이 같은 규정의 말씀 후, 하나님의 이름을 모독한 자를 진영 밖에 끌고 나가서 돌로 쳐서 죽이며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였습니다.
레위기 24장
1절-4절, 당신의 빛을 꺼트리지 마십시오
성소 내부에 있는 중요한 성물들 중에 하나는 등잔대와 그 등잔대로 켜는
등잔불이었습니다.
이 등잔불은 항상 켜져 있어야 한다고 하나님께서 명령하셨습니다.
그리고 이 등불을 위해서는 순결한 감람유를
사용해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베푸시는 은혜를 기억하게 하는 순결한 감람유로 등잔의 불을 켰고, 그
불은 꺼트리지 말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성소의 자리에 임재해 계시고 하나님의 높고 위대하심을 모든 백성들이
기억하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신약 시대에는 우리 주 예수님께서 세상의 빛으로 오셨습니다.
어두워진 세상에 빛을 비추시고 우리를
빛의 자녀로 삼아 주셨습니다.
그리고 우리를 세상에 보내시고 빛이 되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우리도 예수님처럼 빛을 꺼트리지 말고,
세상에 빛을 비추는 사명을 감당하며 살아갑시다.
5절-9절, 거룩한 떡을 함께 나누십시오
성소 안에는 등잔불과 더불어 진설병 12개와 그것들을 담는 상이 있었습니다. 12개의 떡들은 이스라엘의 12지파를 상징하면서 동시에,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과 맺으신 여러 언약들을 의미합니다. 이 떡들은 아론과 그의 자손들만 먹을 수 있었는데, 그들이 이스라엘을 대표하기 때문입니다. 이 떡을 먹음으로써 하나님과 이스라엘이 서로 교제하며 동행한다는 상징적인 의미가 담겨 있었습니다. 우리 주 예수님은 생명의 떡으로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분 안에 진정한 영생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를 위해 찢으신 주님의 몸을 기억하며 성만찬을 통하여 예수님과 온전한 교제를 지켜 나가야만 합니다. 거룩한 떡을 서로 나눌 때, 우리 안에 예수님께서 함께 하십니다.
17절-23절, 눈은 눈으로 그리고 이는 이로
하나님께서는 악을 행하는 자에 대하여 어떻게 대처할 것인지에 대한 규정을 주셨습니다.
그중에 특히 동해보복법이라고 부르는 규정을 주셨습니다.
이 규정은 해를 받은 대로 처리하는 법으로, 눈을 다치게 했다면 가해자의
눈을 상하게 하는 처벌규정입니다.
공의로우신 하나님은 죄를 미워하시고 죄를 제거하라고 명령하셨기에, 동해보복법을 통하여 처벌을
했었습니다.
그러나 율법의 완성이 되시는 예수님은 원수까지도 사랑하라고 말씀하셨고, 원수를 축복하고 기도하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말씀과 같이 원수를 내가 갚지 말아야 하는 이유는, 하나님께서 친히 원수를 갚아 주시기 때문입니다.
이제 우리는 예수님의
사랑을 기억하고 원수까지도 사랑하며 모든 처리를 하나님께 맡기는 지혜로운 성도가 됩시다.
____________________________ 레위기 23장 / 여호와의 절기(2절)
이스라엘 자손에게 고하여 이르라 너희가 공포하여 성회를 삼을 여호와의 절기는 이러하니라.
Speak to the Israelites and say to them: 'These are
my appointed feasts, the appointed feasts of the LORD, which you are to
proclaim as sacred assemblies.
구약의 절기는 그림자이며 몸은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골로새서 2:16-17
그러므로 먹고 마시는 것과 절기나 월삭이나 안식일을 인하여 누구든지 너희를 폄론하지 못하게 하라.
이것들은 장래 일의 그림자이나 몸은 그리스도의 것이니라.
* 폄론(貶論) : 낮출 폄(貶), 논할 론(論) - 남을 깎아 내려 헐뜯음. 또는 그런 말. / 폄훼(貶毁)
안식일의 의미 - 천국을 경험하는 날
세상에서 안식의 맛을 누리지 못한 사람은 천국에서 안식을 누리지 못할 것이다.
메누하
מְנוּחָה
스트롱번호4496
발음 / 메누하[ menûwchâh ]
- 관련 성경 / 쉴 곳(창49:15, 시132:14, 미2:10), 위로(룻1:9), 평안한 곳(시132:8), 봉안(대상28:2), 거한 곳(사11:10), 안식(사66:1), 머뭄(슥9:1),태평(왕상8:56), 평안(대상22:9), 병참(렘51:59).
- 구약 성경 / 21회 사용
카도쉬
קָדוֹשׁ
스트롱번호6918
발음 / 카도쉬[ qâdôwsh ]
어원 / 6942에서 유래
- 관련 성경 / 거룩한(출19:6, 삼상2:2, 사4:3). [명] 성민(신7:6, 14:2,21), 성도(신33:3, 시16:3), 성일(느8:9,10,11), 거룩한 자(시78:41, 사5:19, 호11:9), 성소(시46:4), 성전(시65:4), 거룩하신자(사12:6, 30:11, 호11:12). [부] 거룩히(레21:8, 신23:14).
- 구약 성경 / 116회 사용
여호와의 절기와 세상의 절기는 구별되어야 합니다.
세상의 절기는 "과거의 사건을 기념하는 것"이라면 여호와의 절기는 "구속의 목적을 성취하려는 것" 이라고 하겠습니다.
레위기 23장은 유대인의 7대 명절을 말씀합니다.
모든 절기의 기본 정신과 신앙은 "안식일"에서 출발합니다.
안식일의 목적은 창조의 완성을 위한 재창조의 쉼이라고 하겠습니다.
7대 명절
- 레위기 7대 절기
유월절, 무교절, 초실절, 칠칠절, 나팔절, 속죄절, 초막절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유월절(逾越節) Passover. 페사흐
유월절 - 이렇게 죽으리라!
그리스도와 피, 구원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
요한복음 1:29
이튿날 요한이 예수께서 자기에게 나아오심을 보고 가로되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
무교절(無酵節) The Feast of Unleavened Bread. 하그 하마쵸트
무교절 - 무덤에 있으리라!
자아의 파쇄, 죽음
초실절(初實節) Feast of Firstfruits. 비쿠림
초실절 - 부활하리라!
부활, 성화, 잘 될 것이다.
부활은 안식 후 첫 날이었다.
맥추절(麥秋節) The Feast of Harvest. 칠칠절, 오순절. Pentecost. 칵 학카칠
칠칠절 - 성령을 부어 주리라!
성령 세례(체험), 요나가 토함을 받는다(물고기 배속)
오순절의 성도가 됩시다!
나팔절(喇叭節) The Feast of Trumpet. 로슈 하샤나
나팔절 - 재림(再臨) 주님 다시 오시리라!
그리스도의 신부(열 처녀의 비유), 휴거
속죄일(贖罪日) Day of Atonement. 욤 키푸르
속죄절 - 심판(審判), 심판하리라!
알곡과 죽정이로 구분할 것이다. 신부(거룩한 세마포 예비)
초막절(草幕節) Feast of Tabernacles. 수콧(Sukkot)
초막절 - 새 하늘과 새 땅(新天地), 새 예루살렘, 천년왕국이 임하리라!
“절기”를 가리키는 히브리어는 “하그”와 “모에드” 라고 합니다.
2282. 하그(châg) חָג
1. 축제, 2. 희생 제물
- 어원 / 2287에서 유래
- 관련 성경 / 절기(출 10:9, 왕상 12:32, 말 2:3), 절일(출 32:5, 민 28:17, 시 81:3), 희생(시 118:27)
- 구약 성경 / 62회 사용
* 2287. חָגַג
발음 / 하가그(châgag)
- 관련 성경 / 지키다(출 12:14, 나 1:15, 슥 14:16), 구르다(시 107:27), 춤추다(삼상 30:16).
[명] 성일(시 42:4), 절기(출 5:1, 23:14, 신 16:15).
- 구약 성경 / 16회 사용
“하그”는 “춤춘다” “순환한다”는 의미다.
매년 그맘때가 되면 예외 없이 절기가 돌아오며 주기적으로 순환하는 속성을 두고 불리는 명칭이다.
축제의 성격을 띠고 있기에 축제의 기본 요소인 춤춘다는 단어가 사용된 것이다.
4150 모에드(môwʽêd) מוֹעֵד
1. 정한 때, 2. 시간의 한 점, 3.시간의 공간
- 어원 / 3259에서 유래
- 관련 성경 / 계절(창 1:14), 기한(삼상 13:8, 시 102:13), 때(출 23:15, 수 8:14, 습 3:18),
회막(출 27:21, 레 24:3, 왕상 8:4), 성막(출 35:21, 40:2), 회막문(출 40:12, 민 16:18, 27:2),
성회(레 23:2,37, 겔 46:11), 절기(레 23:37, 민 29:39, 대하 8:13, 호 2:11), 절기제(민 15:3),
회중(민 16:2, 시 74: 4), 시기(민 28:2, 렘 46:17), 군호(삿 20:38), 날(삼상 13:11),
시간(삼상 20:35), 한 해(왕하 4:16), 회당(시 74:8), 기약(시75:2), 절기의 날(애 2:7, 호 9:5).
[동] 돌아오다(왕하 4:17), 정하다(욥 30:23, 시 104:19).
- 구약 성경 / 223회 사용
* 3259. יָעַד
발음 / 야드(yâʽad)
- 관련 성경 / 상관하지 아니하다(출 21:8), 정하다(렘 47:7, 미 6:9), 주다(출 21:9), 만나다(출 25:22, 29:42, 느 6:2), 모이다(민10:3, 왕상8:5, 시48:4), 뜻이 같다(암3:3), 가다(느6:10), 서로약속하다(욥2:11), 거역하다(민14:35), 소환하다(욥9:19), 다투다(렘49:19, 50:44), 놓이다(렘24 : 1).
- 구약 성경 / 29회 사용
“하그”는 “춤춘다” “순환한다”는 의미다.
매년 그맘때가 되면 예외 없이 절기가 돌아오며 주기적으로 순환하는 속성을 두고 불리는 명칭이다. 축제의 성격을 띠고 있기에 축제의 기본 요소인 춤춘다는 단어가 사용된 것이다.
“모에드”는 “특별하게 정해진 시간”을 가리킨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정하신 “모에드”에 따라 공생애 사역을 하셨다.
요한복음 2:4, 예수께서 가라사대 여자여 나와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내 때가 아직 이르지 못하였나이다.
성경은 이 절기를 ‘여호와의 절기’라고 밝힌다(레위기 23:2).
이스라엘 자손에게 고하여 이르라 너희가 공포하여 성회를
삼을 여호와의 절기는 이러하니라. (Speak to the Israelites and say to them: 'These are
my appointed feasts, the appointed feasts of the LORD, which you are to
proclaim as sacred assemblies.)
이스라엘 민족의 절기가 각 민족의 절기와 근본적으로 다르다.
왜 그럴까요?
첫째, 이스라엘의 절기는 여호와 하나님이 직접 제정하셨다.
따라서 과장이나 꾸밈, 조작이 있을 수 없다.
하나님의 특별한 목적이 드러나기 때문이다.
둘째, 사건과 절기의 순서가 다르다.
즉, 다른 민족의 절기는 사건이 발생한 뒤 그 사건이 일어난 날짜를 기념해 생겨났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경우 먼저 절기가 만들어지고 그것에 맞춰 사건이 발생했다. 이스라엘 최대 절기인 유월절을 예를 들어보면 확연히 알 수 있다.
하나님은 애급에 대한 10가지 재앙 중 마지막 ‘장자의 죽임’이 임할 날짜를 이스라엘 민족에게 미리 알려주셨다. 그리고 재앙을 피할 수 있도록 집집마다 양을 잡아 그 피를 인방과 설주에 바르도록 하셨다. 죽음의 신이 이스라엘의 집에 넘어가도록 정하셨고 이를 유월절로 제정하신 것이다.
레위기 23장엔 이스라엘의 7개 절기가 언급돼 있다.
유월절, 무교절, 초실절, 칠칠절, 나팔절, 속죄절(대속일), 초막절 등.
이는 하나님이 진행하실 인류 구속사의 파노라마를 보여준다.
절기에는 하나님의 구속의 경륜과 프로그램이 암호화돼 있다.
유월절은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을,
무교절은 그리스도의 친교를,
초실절은 그리스도의 부활을,
칠칠절(오순절)은 그리스도와 성령의 임무 교대를,
나팔절은 그리스도의 강림을,
대속죄일은 그리스도의 속죄를,
초막절은 그리스도의 심판을.
본절은 본장 전체의 서론 부분으로 본장의 내용이 여호와의 절기에 관한 것임을 분명하게 제시하고 있다. 민 28,29장과 본장에는 구약 시대에 지켜진 이스라엘의 공식 절기가 거의 모두 열거되어 있는데, 절기를 이처럼 상세히 설명하고 있는 이유는 다음과 같다. 첫째, 이 절기들을 통하여 인류의 역사에 직접 개입하시는 당신의 구원 행동을 백성들에게 깨우쳐 주고 둘째, 각 절기가 갖고 있는 상징적 의미 및 구속사적 중요성을 백성들에게 일목요연하게 가르치기 위함이다.
성회(미크라 코데쉬)
'거룩한 모임들'이란 뜻으로 앞으로 언급될 모든 절기를 총칭하는 말이다.
히브리인들은 이 날에 아무 노동도 하지않고, 안식일처럼 거룩하게 여호와의 은혜와, 구원을 찬양하고 기념하면서 지냈다.
여호와의 절기
'절기'(모에드)는 '지정하다'(appoint), '만나다'(meet),
'소집하다'(summon), '고정하다'(fix)란 뜻을 가진 '야아드'에서 파생된 말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지키라고 특별히 그 시기를 정해놓은 '축제일'(festival)을 의미한다.
그러나 이 축제일은 단순한 휴식이나 육체적 쾌락을
위한 날이 아니라, 영적 각성과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을 위하여 하나님께 헌신하는 날이다.
이스라엘에는 민간력과 종교력이 있는데 본문은 종교력으로 표시되어 있다. 종교력으로 1월은 민간력으로 7월이고, 태양력으로는 3, 4월에 해당한다. 수확기도 우리와 다르다. 1월에 보리(봄), 3월에 밀, 5월에 여름실과, 6월에 포도, 7월(가을)에 밭갈기, 8월에 파종, 9-11월은 겨울이다.
제사에 사용되는 용어를 분명하게 이해하지 못하면 레위기를 읽을 때 어려움이 있다.
제사의 분류는 어떤 기준으로 나눠 놓은 것인지 생각해보자.
번제, 소제, 화목제, 속죄제, 속건제 : 제사의 종류
화제, 거제, 요제, 전제 : 제사의 방법, 화제(불로), 거제(들어올림), 요제(흔듬), 전제(부음).
소제 : 제물의 종류 곡식을 드리는 제사
번제 : 제물의 종류 생축을 드리는 제사
하나님께서 명하신 절기는 전부 몇 개인가?
또, 절기의 이름이 나타나지 않은 것은 적당한 이름을 생각해내든지 아니면 작명을 해보자.
안식일(3, 매주)
7대 절기 :
유월절(5, 1월 14일),
무교절(6, 1월 15-21),
첫 이삭을 바치는 날(10, 초실절),
50일 되는 날(3월 10일 경, 칠칠절, 맥추절, 오순절),
나팔절,
속죄일,
장막절(7월 15-22, 수장절, 초막절).
3대 절기는 유월절, 맥추절, 수장절
이스라엘의 각종 절기는 무엇하는 날인가?
절기를 지키는 데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인가?
성회로 모이는 것(2, 3, 4, 7, 8, 21, 24, 27, 35, 36, 37)
일하지 말라(3, 7, 8, 21, 25, 28, 31, 32, 35, 36)는 것도 답이 되겠지만 성회로 모이는 것을 정답으로 하는 것은 일하지 않는 것은 안식의 소극적 표현이고
성회로 모이는 것은 안식의 적극적인 표현이기 때문이다.
일하지 않는 이유는 하나님 앞에서 성회(축제의 성격을 띤)로 모여야 하기 때문이다.
특히 2절을 보면 성회가 중요한 것을 알 수 있다.
성탄절의 주인공은 당연히 예수님이어야 한다.
그러나 현실은 예수님 대신에 산타가, 교회대신에 백화점이 더 주인공 같이 행세하고 있다.
이스라엘의 절기에는 누가 주인공일까?
모든 절기는 여호와의 절기다(2).
여호와께서 제정하시고 여호와께서 하신 일을 기억하기를 바라고, 여호와께 감사를 드리고,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기를 바라시기 때문이다.
절기의 목적은 여호와와 관계를 회복, 유지, 발전시키는 것이다.
일주일씩 지키는 절기는?
무교절(8, 다음 제 7일이 안식일),
초막절(36, 다음 제 8일이 안식일)
가장 중요한 절기이며 가장 먼저 제정되었으며 특정한 날을 정하지 않고 계속 지켜야 하는 절기는?
안식일 : 가장 기본적인 절기이다.
하나님과 함께 안식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목표이기 때문이다.
안식일을 지키기 위해서 가장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
6일 동안 열심히 일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시고 누린 그 기쁨을 함께 누리는 날이며 그 안식을 잃어버린 우리에게는 다시금 되찾을 영원한 안식을 바라보며 맛을 보는 날이다.
두 번째로 제정되었으며 어린 양의 피를 보고 죽음의 천사가 그냥 지나간 것을 기념하는 절기는?
유월절 : 어떠한 사람인가라는 것은 문제가 되지 않았다.
피를 바른 집안에 있기만 하면 그가 어떤 죄인이었건 상관없이 살아났다는 것은 우리의 구원이 바로 그런 것임을 잘 보여준다.
나의 공로나 선함 때문이 아니라 문설주와 인방에 바른 피, 즉 예수 그리스도의 피를 의지하여 구원을 얻게 되었다.
세 번째로 제정되었으며 이스라엘이 출애굽 시에 다급하여 빵을 부풀리지 못한 채 나온 것을 기념하는 절기는?
무교절 : 딱딱한 무교병을 일주일씩이나 먹으면서 과거의 그 사실을 잊지 않는 것이다.
이런 행사가 하나님을 기억하게 하고, 한 민족으로 단단하게 묶어주는 역할을 한다.
그럼에도 하나님을 잊었다는 것은 정말 불가사의다.
자신의 능력이나 노력을 의지하지 말고 하나님께서 나를 지켜주시기를 기도하자.
유월절과 무교절은 연속되는 것이기 때문에 나중에는 서로 혼동되어 나타난다.
'기한에 미쳐' 란 말은 '특정한 날짜가 되거든'이란 뜻이다.
특정한 날짜가 명시된 절기는 어떤 것이 있는가?
1월 14일 : 여호와의 유월절
1월 15-22일 : 여호와의 무교절,
첫날(15일, 무노동)과 일곱째날(21일)은 성회로 모임, 7일 동안 무교병을 먹을 것과 화제를 드릴 것,
7월 1일 : 나팔절, 신년 축제일이다.
7월 10일 : 속죄일
7월 15-22일 : 수장절, 초막절, 장막절; 한 해의 결실을 저장하고 자신들을 인도하신 하나님을 기억하는 절기이다.
1월 1일부터 30일까지 전혀 일하지 않아야 하는 날은 며칠인가?
5일 : 7, 14, 15, 21, 28로 네 번의 안식일과 무교절 첫날(15일)이다.
첫 이삭을 드리는 제사의 시기를 알 수 있는 말은 11절에 '안식일 이튿날에'라는 말이다.
이 안식일은 어느 안식일을 가리킬까?
무교절의 끝에 있는 안식일이다.
결국 세 절기가 붙어 있는 셈이다.
첫 이삭을 드릴 때 드린 제사도 번제, 소제, 전제로 만만치
않은데 50일이 지나서 또 새 소제를 드리라는 데 함께 드리는 제사는 더욱 성대하다.
새 소제(고운가루 에바 10분의 2)를
누룩을 넣어 구운 떡 두 개를 요제로 드리고,
번제(어린 양 7, 젊은 수소1, 수양2)를 화제로, 전제, 속죄제(수염소1), 화목제(어린 수양2)를 드린다.
이중과세에
세율이 너무 높은 것 아닌가?
11절의 첫 이삭과 19절의 첫 이삭은 같은 걸까?
다르다. 아무래도 전자는 작은 추수같고, 후자는 큰 추수인 것 같다 :
수확기를 아는 유대인들에게는 이렇게만 해도 알아듣지만 우리에게는 다소간의 노력이 필요하다.
전자는 초실절로 보리,
후자는 칠칠절(五旬절, 맥추절)로 밀을 수확한 것을 기념하는 절기이다.
하나님은 이유없이 이렇게 제사를 드리라는 분은 아니다.
제사의 종류만 다른 것이 아니라 후자의 경우에는 성회로 모이라고 하고
더구나 추수 때의 유의사항이 따로 기록된 것을 보아도 더 큰 추수인 것을 알 수 있다.
이 예물을 드리고 추수를 시작했을까?
추수를 마치고 이렇게 드렸을까?
제물이 많은 것은 제사장을 위함인가(20)?
위의 제사에서 드리는 제물이 많은가? 적은가?
개인이 드리는 제사라면 나중 제사는 제물이 많은 편이다.
공동체에서 드리는 제사라면 그리 많은 것은 아니다.
제사는 제물이 많고 적음의 문제가 아니다.
하나님을 기억하는 것이 중요하다.
거의 잊혀져가는 것이지만 예전에는 집안의 어른이 먼저 숟가락을 들기 전에 아이들이 숟가락 드는 일이 없었다.
이런 풍습은 이어가도 좋은데...
흔히 누룩은 죄를 상징하는 것이라서 하나님께서 싫어하시는 것으로 설명하는데 여기 번제를 드릴 때 함께 드리는 떡은 누룩을 넣어서 구운 것이다(17). 어떻게 이해해야할까?
암소는 번제에 사용할 수 없지만 화목제에서는 허용한다.
제사의 성격에 따라 하나님께서 허용하시는 것이다.
고생하던 날을 기억해야 하는 무교절에는 무교병을 먹으라고 하셨지만 이 제사는 하나님께 드리지만
사람들이 즐거워하는 절기이기 때문에 번제가 아닌 요제로 흔들어 드리고(17, 20) 제사장에게로 돌렸다(20).
하나님께서 자신의 입장대신 사람의 입장을 고려하신 것이다.
이혼의 문제도 본래는 허용된 것이 아니지만
여인을 위하여 허용한 것이다(마 19:8).
수확기는 일년 중 가장 즐거운 날이다. 이런 때일수록 가난한 자를 돌아보아야 한다. 가난한 자와 객을 위하여 떨어진 것이나 모퉁이를 그냥 버려두라는 것도 고마운 말씀이지만 그보다는 깔끔하게 추수해서 돈이나 현물로 돕는 것이 더 낫지 않을까?
가난한 자의 체면, 노력을 위함이다.
남을 도울 때에도 도움을 받는 사람의 입장을 최대한 고려해야한다.
주는 사람이야 자랑스러울지 몰라도 받는 사람 편에서는 결코 자랑스럽지 못한 경우가 대부분 아닐까?
1월 7일이 안식일인데 7월 1일을 안식일로 삼으라면 요일에 문제가 생기지 않을까?
만약 한 달을 30일로 잡으면 7월 2일이 안식일이 되기 때문에 문제가 된다. 어떻게 해결하면 될까?
특정한 날의 요일을 먼저 고정시키고 일년을 364일로 하면 된다. 윤달처럼, 윤주를 넣던지.
스스로 괴롭게 하는 게 어떻게 하는 것일까? 자해?
죄를 회개하며 근신하는 것 : 좋고 편안한 환경을 떠나 거친 음식과 거친 환경에서 지나는 것, 625음식이라면서 주먹밥을 나누는 것과 비슷할 것이다.
안식일이 아닌데도 일하지 않는 날은 무교절 첫날이다.
그 외에 또 있는가?
7월 10일 속죄일이다.
스스로 괴롭게 하는 날은 언제이며 즐거워하는 날은 언제인가?
비교하면 무슨 차이가 가장 커 보이는가?
스스로 괴롭게 하는 날은 7월 10일 하루인데 즐거워하는 날은 7월 15일부터 일주일간이다.
구약에서 나팔을 부는 경우는 전쟁이 일어났을 때나 특정한 날임을 선포하는 경우,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들을 소집하는 경우에도 나팔을 불었다(출 19장).
7월 1일에는 무슨 이유로 나팔을 불고 기념하라고 했을까?
신년의 도래를 알리는 나팔이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새로운 한 해를 기쁨으로 맞이하는 절기이다.
희년에도 나팔을 불었다.
모든 것이 원상으로 돌아가는 날이다.
종으로 팔린 사람이 놓여나고 빼앗겼던 땅도 돌아오는 날이다.
예수님께서 다시 오시는 그 날에도 나팔 소리가 울려퍼질 것이다.
새로운 시대가 열렸음을 알린다.
37-38절을 근거로 하나님께 드리는 예물을 두 종류로 나누어 보자.
절기예물(단체로, 의무)
일반예물(개인적, 수시, 자원); 개인적인 헌신과 작정에 따르는 것.
아름다운 나무 실과와 종려 가지와 무성한 가지와 시내 버들을 취하여 즐거워하라(40)는 것은 어떻게 즐거워하라는 말인가?
과일은 먹고 다른 가지로는 초막을 짓고 하나님의 은혜를 감사하라는 말이다.
찬송할 때 종려 가지를 들고 흔들었던 적이 있다. 이 초막은 이스라엘이 광야에서 지낸 것을 기념하는 절기이다.
'내가 누군지 아느냐? 내가 바로 5파운드야!' 학기초만 되면 이렇게 자신의 별명을 소개하는 선생님이 계셨다.
5파운드는 야구 배트를 가리키는 말이다.
별명만 듣고도 아이들은 주눅이 들어버렸다.
폭력교사는 아니고 학생주임으로 지혜로운 분이었다.
하나님께서 '나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니라'고 하시는데 본문에서 이 말이 주는 느낌은?
문맥을 무시한다면 강압적이고 고압적인 느낌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문맥에서 본다면 결코 아니다.
가난하고 불쌍한 자를 결코 잊지 않으시며 돌아보시는 분이란 뜻이다(22, 43).
하나님께서 이렇게 폼을 잡고 나서면 가장 두려운 것은 가난하고 힘없는 자를 돌아보았는지 살펴 보아야 한다.
민수기 28, 29장에도 절기에 관한 상세한 기록이 있다.
하나님께서 성경의 곳곳에서 절기에 대한 말씀을 자주 하시는 이유가 무엇일까?
절기를 통해서 하나님의 임재하심을 느끼고 확인하라는 것이다 :
대부분의 절기가 출애굽과 관련되어 있다.
심지어 추수 감사도 '우리를 이 땅으로 인도하여 땅을 주셔서...'라는 것이 중요한 부분이다.
우리의 생각 속에도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워하셨다는 감사가 끊이지 않아야 한다.
기념하라는 말씀이 많이 나오는 것과 동일하다.
특정한 날을 기억함으로 흐트러진 공동체의 결속력을 다지고, 영적으로 각성케하는 것이다.
가정에서도 동일한 원리가 적용될 수 있다. 가정을 위해서라도 기념일을 잊지않고 챙기는 것이 좋다.
앞에서 각종 제사는 예수님과 관련이 있음을 보았다.
본문의 각종 절기도 예수님과 어떻게 관련되고 있는지 생각해보아야 한다.
유월절 어린 양의 피는 예수님의 피를,
무교절의 무교병은 세상에서
연락(宴樂)대신 거친 길이라도 걷겠다는 각오를 다지게 해준다.
나팔절의 나팔소리는 예수님의 재림 때 울려 퍼질 나팔소리와 무관하지 않다.
그러면 초실절에 하나님께 바치는 첫 이삭은 다음 구절을 참고해서 예수님과 관련지어보자.
사 53:2, 눅 2:7; 보리 이삭은 곡식 중에서는 별로 볼 품이 없는 축에 속한다.
고전 15:20; 첫 열매를 뒤이어 많은 곡식을 거두게 된다.
마 28:1, 요 20:19, 행 20:7; 예수님을 안식 후 첫날에 부활하셨고 이 날을 기념하여 주일이 되었다. 첫 이삭을 바치던 날이 바로 안식일 다음 날이었다.
1에바는 약 23ℓ, 1힌은 약 3.7ℓ
1. 안식일
2. 유월절
3. 무교절
4. 초실절; 첫이삭(보리) 단을 바치는 절기(유월절 절기 중의 안식일 다음날)
안식일 다음 날 첫 수확한 곡식의 첫 이삭 한단을 흔들어 드릴 것, 번제(수양), 소제(기름 섞은 고운가루 에바 10분의 2),
전제(포도주 4분의 1 힌)를 아울러 드릴 것, 제사장이 드림, 드리기 전에는 떡이든지 볶은 곡식이든지 생 이삭이든지 먹지 말 것
5. 칠칠절 (맥추절, 오순절) : 밀의 수확과 관련
새 소제(고운가루 에바 10분의 2)를 누룩을 넣어 구운 떡 두 개를 요제로, 번제(어린 양 7, 젊은 수소1, 수양2)를 화제로, 전제, 속죄제(수염소1), 화목제(어린 수양2)를 요제로(다섯 가지 제사를 드린다15-21)
6 나팔절 : 신년도래 (나팔 부는 절기는 뭐야? 어떨 때 나팔을 불렀지?)
7. 속죄일 : 7월 10일
8. 장막절(수장절, 초막절) : 광야에서 장막생활을 기념하는 절기
유월절(逾越節) Passover. 페사흐
절기의 시작은 1월 14일 저녁부터 시작되었다(레위기 23:5).
이 때 준비한 흠없고 1년된 어린 숫양을 14일에 무교병과 쓴 나물을 함께 먹었다(출애굽기 12:3-8).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의 역사를 말하며 이와같이 그리스도와 함께 죄인들의 연합을 의미한다.
유월절 희생양은
흠없으신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을 예시하고 갈보리 십자가의 대사건을 상징한다(마태복음 26:2) (다니엘 7:26).
다니엘 7:26
그러나 심판이 시작된즉 그는 권세를 빼앗기고 끝까지 멸망할 것이요.
마태복음 26:2
너희의 아는 바와 같이 이틀을 지나면 유월절이라 인자가 십자가에 못박히기 위하여 팔리우리라.
무교절(無酵節) The Feast of Unleavened Bread. 하그 하마쵸트
애굽으로부터 급히 빠져 나왔던 이스라엘 백성이 누룩없는 무교병을 먹으며 고생을 한 것을 기념하기 위한 축제이다(출애굽기 23:15) (레위기 23:6).
무교병은 하나님께 대한 전적인 희생과 봉사를 의미한다(출애굽기 12:16-20).
절기의 시작은 1월 15 - 21일까지 7일간 번제와 속죄제를 드린다(민수기 28:19-24).
7일간 무교병을 먹고 2일간은 곡식단을 흔들고 매일 번제를 드렸다.
그리고 첫날
과 마지막 날은 성회로 모이고 노동을 금했다(출애굽기 12:15-20).
죄 없으신 예수 그리스도의 몸이 성도들을 위해 찢기심과 그의 부활에 대한 상징이며 성도들에게 주어지는 생명과 부활에 대한 확실한 소망을 주는 것으로 나타낸다(에베소서 1:21-22)
모든 정사와 권세와 능력과 주관하는 자와 이 세상뿐 아니라 오는 세상에 일컫는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나게 하시고.
또 만물을 그 발 아래 복종하게 하시고 그를 만물 위에 교회의 머리로 주셨느니라.
무교절은 죽으신 예수님께서 무덤에 안장된 사흘의 기간을 의미합니다.
초실절(初實節) Feast of Firstfruits. 비쿠림
첫 곡물(보리 수확)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며 첫 곡식단을 봉헌하는 축제이다(레위기 23:10) (출애굽기 23:16).
이 절기는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에 들어간 다음에야 지켜질 수 있었다.
왜냐하면 광야에서는 농사를 짓지 않았으므로 수확을 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안식일 다음 날에 그리스도는 부활하셨다(마가복음 16:2).
그리스도는 부활의 첫 열매로서 성도들의 부활의 보증이 되심을 나타낸다(로마서 8:23).
하나님께 바쳐진 첫 이삭단은 성도와 교회를 암시한다.
절기의 시작은 무교절 후(안식일 다음 날)에 곡식의 단을 거두어 흔들고 번제와 소제를 드리며 예물을 드리기 전에는 먹지 말아야 한다(레위기 23:13-14).
이는 신약교회의 이방인의 추수를 상징한다(로마서 11:25) (요한계시록 14:4)
초실절은 부활의 첫 열매가 되신 예수님을 의미합니다.
맥추절(麥秋節) The Feast of Harvest. 칠칠절, 오순절. Pentecost. 칵 학카칠
초실절을 드린 후 7주(50일째) 되는 날의 절기이다.
구약의 맥추절 또는 칠칠절인 절기가 신약적 의미로 변화되어 완성된 것이 오순절이다.
곡물 수확의 마지막 날로 지정하였고 곡식의 첫 열매(밀 수확)를 바치는 봄 절기인 축제이다(출애굽기 34:22) (레위기 23:15) (신명기 16:8).
절기의 시작은 안식일 다음날 초실절 후에 50일 째에 소제로서 떡을 흔들고 번제, 속죄제, 화목제와 요제를 드렸다.
이 날은 성회로 공포되고 노동을 못하게 하고 오직 하나님과
교제하며 그의 은총만을 사모할 수 있도록 하였다(레위기 23:21).
신약에서는 성령강림절이라고 불리운다.
예루살렘 회심의 유형이며 갈보리 십자가의 첫 열매를 의미하며 마지막 때의 대추수를 상징한다.
오순절은 성령강림 때에 임하시는 예수님을 의미합니다.
나팔절(喇叭節) The Feast of Trumpet. 로슈 하샤나
역사적으로 이 축제는 시나이 반도를 기념하며 나팔을 불어 성회에 모여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축제이다(레위기 23:24) (민수기 29:1).
절기의 시작은 유대교 일력으로 7월 1일 시행되었는데 이 날은 안식일이었고 그들은 성회로 모여 여호와께 화제를 드렸다.
이스라엘의 재결합에 의미를 두고 있다.
7 이라는 숫자의 신성에 의한 인간력 새해 시작을 기념하는 날이다.
절차는 일반 월삭보다 더 큰 규모의 희생제사를 거행했다(민수기 29:6).
나팔을 불어 알리고 번제와 소제와 속죄제를 드렸다.
이 절기의 나팔소리는 마지막 날에 공중강림과 휴거를 상징한다(데살로니가전서 4:14-17) (요한계시록 11:14-19).
나팔절은 다시 오실 예수님을 의미합니다.
속죄일(贖罪日) Day of Atonement. 욤 키푸르
이스라엘의 죄들이 사함받은 날로 그날은 금식하며 일년 중 가장 기쁜 날의 축제이다(레위기 16:3)(레위기 23:27)(민수기 29:7).
절기의 시작은 유대인 일력의 7월 10일 안식일날로 성회에 모이고 노동을 금했다.
이 속죄일의 집행자는 대제사장이 지성소에 들어가
이스라엘의 속죄를 위해 하나님께 제사를 드렸다(레위기 16:34).
이스라엘의 현재의 비애와 미래의 기쁨을 말하며 온 백성의 죄를
속죄하며 성소를 정결하게 하였다(히브리서 9:12-14).
절차는 모든 백성은 금식하고 쉬며 번제와 소제를 드리고 속죄를 위한 염소를 잡아 피를 뿌리고 아사셀 염소는 광야로 보냈다.
그리스도의 속죄의 피를 예표하며 마지막 때 남은 자들의 대속죄와 지상재림을 상징한다(마태복음 24:30)(요한계시록 19:11-21).
초막절(草幕節) Feast of Tabernacles. 수콧(Sukkot)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광야에서 천막생활을 인도하고 보호하신 은혜를 기념하는 축제이다(출애굽기 23:16) (레위기 23:34) (민 수기 29:12) (신명기 16:13).
절기의 시작은 7월 15 - 21까지 7일간 계속되었고 그 다음날은 안식일이었다.
이 때 이스라엘 백성들은 종려나무나 감람나무 가지를 취하여
여호와 앞에서 즐거워했다(레위기 23:40).
토지 소산의 과일 추수를 마칠 때 여호와의 절기를 지키기 위한 것이다.
새벽에는 해맞이와 관련된
의식과 아침에는 현수의식 그리고 밤에는 축제의식을 가졌다.
절차는 초막에서 7일간 거주하며 매일 번제와 소제를 드리고 여덟 번째 날에는 성회로 모인다.
이스라엘의 메시야왕국(천년왕국)에 대하여
상징한다(다니엘 9:24) (베드로후서 2:9) (데살로니가전서 4:16-17) (마태복음 24:42-44) (요한계시록 20:3-6).
초막절은 새 하늘과 새 땅으로 임하시는 예수님의 의미합니다.
____________________________ 레위기 22장 / 성물(2절)
아론과 그 아들들에게 고하여 그들로 이스라엘 자손이 내게 드리는 성물에 대하여 스스로 구별하여 내 성호를 욕되게 함이 없게 하라 나는 여호와니라.
Tell Aaron and his sons to treat with respect the
sacred offerings the Israelites consecrate to me, so they will not
profane my holy name. I am the LORD.
성물(6944) 코데쉬(qôdesh) קֹדֶשׁ
1. 거룩함, 2. 거룩한 것, 3. 지성소
발음
/ 코데쉬[ qôdesh ]
어원 / 6942에서 유래
- 관련 성경
- ☞성회(출12:16, 레23:35, 민28:18), 성소(출26:33, 레20:3, 민8:19), 지성소(출26:33, 레16:16, 왕상6:16), 성결(출28:36, 말2:11), 성물(출28:38, 레22:12, 민6:20), 거룩한 패(출29:6), 성의(출29:29, 레16:32), 거룩한 산(시43:3), 성산(겔28:14), 지성물(레21:22, 민4:4), 거룩한 날(출31:14), 성일(사58:13), 성소(레4:6), 성호(대상16:35, 시105:3, 145:21), 예물(대하31:12), 성전(시5:7, 138:2, 욘2:4), 거룩한 곳(렘31:40), 성도(단12:7). [형] 거룩한(출3:5, 레2:3, 시2:6), 성결한(출15:13, 삼상21:5).
- 구약 성경
- 477회 사용
레위기 22장의 내용은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22:1-16. 제사장의 음식(성물)에 대한 규례
제사장의 음식은 여호와 하나님께 바쳐진 제물 중 제사장의 몫으로 구별한 것들입니다.
제사장의 몫으로 구별되었다고 해서 제사장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제사장이라도 부정하게 된 사람은 성물을 먹을 수 없었습니다.
제사장이 부정하게 되는 경우는 백성들이 부정하게 되는 경우와 다르지 않습니다.
제사장의 가족과 식솔은 성물을 먹을 수 있었고, 성물을 먹을 수 없는 사람이 모르고 성물을 먹게 되었을 경우에는 속건제를 드려야 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 바쳐진 성물을 더럽히는 죄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22:17-33. 제사에 바쳐지는 제물에 대한 규례
이스라엘 백성들이 제물로 바치는 것을 제사장이 먹을 수 있는 것은 "지성물"이라고 합니다.
제사장과 그의 가족들이 먹을 수 있는 것은 "성물"이라고 합니다.
레위인은 기업을 받지 않기 때문에 백성들이 바친 제물 중에서 하락된 것을 먹을 수 있도록 하셨습니다.
레위기 22장은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첫 번째 부분인 1-16절은 제사장의 음식(성물) 규례입니다.
제사장의 음식은 여호와 하나님께 바쳐진 제물 중 제사장의 몫으로 구별한 것들입니다.
제사장의 몫으로 구별되었다고 해서 제사장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제사장이라도 부정하게 된 사람은 성물을 먹을 수 없었습니다.
제사장이 부정하게 되는 경우는 백성들이 부정하게 되는 경우와 다르지 않습니다.
제사장의 가족과 식솔은 성물을 먹을 수 있었고, 성물을 먹을 수 없는 사람이 모르고 성물을 먹게 되었을 경우에는 속건제를 드려야 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 바쳐진 성물을 더럽히는 죄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두 번째 부분 17-33절은 제사에 바쳐지는 제물에 관하여 말씀합니다.
이 단락에서 반복되는 표현은 “열납되도록”이라는 말입니다(19, 20, 21, 23, 25, 27, 29절).
열납(悅納) 7522. 라촌(râtsôwn) רָצוֹן
발음 / 라촌[ râtsôwn ]
어원 / 7521에서 유래
관련 성경 / 혈기(창 49:6), 은혜(신 33:16, 잠14:9, 사61:2), 뜻(대하15:5, 시103:21), 마음(에1:8, 9:5),은총(시30:5, 잠8:35, 18:22), 선(시51:18), 소원(시145:16,19), 은택(잠16:15). [동] 받다(출28:38), 기쁘게 받다(레1:3, 19:5, 22:19, 23:11), 기쁘게 하다(잠10:32, 사56:7), 기뻐하다(잠11:1, 12:22). [부] 뜻대로(스10:11, 단11:36),임의로(느9:24, 단11:16)
구약 성경 / 56회 사용
열납되도록(리르초네켐)
'기뽐을 주다', '받아들이다'란 뜻의 '라차'에서 유래한 말로, 제물을 드리는 자가 그 제물을 통하여 '하나님께 참된 즐거음 드릴 수 있도록' 드리라는 의미이다.
흠없는 수컷
여호와께 드려지는 모든 희생 제물이 갖추어야 될 기본적인 조건이다.
이러한 조건 하나님께서 요구하시지
않고 자기 자신이 자원하여 드리는 경우에도 적용되어졌다.
첫째, 하나님께서 거룩하신 분이시기 때문
둘째, 자원하여
드리는 것이라 할지라도 그것은 하나님 앞에서 자기 자신의 순수한 신앙을 표현하는 것이기 때문
이와 같은 것은 오늘날 성도
역시 자원하여 자신을 하나님께 드릴 때, 거룩한 마음과 하나님께서 받으시기에 합당한 흠 없는 정결한 상태로 오직 하나님만 위하여
자신을 드려야 함을 암시한다(롬 12:1).
하나님이 기쁘게 받으시는 제물이 무엇이며 기뻐하지 않는 제물이 무엇인지 말씀합니다.
하나님이 기쁘게 받으시는 제물은 흠이 없고 온전한 제물입니다.
이것은 단지 제물의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온전한 마음에 관한 것입니다.
시므온은 나이가 42세인 제사장이다.
어느 날 그는 나귀를 타는 중에 실수로 떨어졌는데 불행히도 다리가 심하게 부러져 영구히 불구자가 되었다.
신체의 문제로 인해 그는 레위기 규정을 따라 더 이상 제사장 직무를 수행할 수 없게 되었다.
규정에 의하면 앞을 보지 못하거나 다리를 절고 손발이 부러진 불구자는 ‘흠’을 지닌 이유로 제사장으로서 성소에 들어갈 수 없기 때문이다.
집에서 한가로이 하루하루 보내던 시므온은 삼촌인 제사장 엘리에셀이 병으로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시므온은 오래도록 그를 존경했으며 깊은 교분을 나누었으나 그 장례에 참여할 수 없었다.
레위기 규정상 제사장은 직계 가족의 장례만 참여하고 집행할 수 있으며 그 외에는 어떠한 장례식도 참여하지 못하도록 금지되어 있기 때문이다.
레위기 21~22장은 이러한 제사장의 자격과 의무를 다룬 규정이다.
이것은 제사장이라는 주제로 8~10장과 대칭을 이룬다.
8~10장이 제사장 위임과 더불어 제사장들의 첫 제사와 실패한 제사를 이야기하고 있는 반면, 21~22장은 제사장의 자격과 준수사항, 그리고 결격사유가 되는 신체적 흠과 그들이 분별해야 하는 짐승의 흠에 관해 다룬다.
제사장의 장례와 결혼 규정
시체는 전염성이 강하므로 장례의 절차를 진행하는 사람들이나 전쟁에서 시체와 접촉한 사람들에게 필연적으로 중대한 오염을 유발했다(민 19:11~22). 따라서 성소의 직무를 위해 구별된 제사장들은 장례식을 집행할 수 없음은 물론 장례에 참여하는 자체가 금지되었다.
다만 일반 제사장들은 직계 가족들의 장례는 치를 수 있었으나(레 21:1~4) 가장 높은 거룩성을 유지해야하는 대제사장에게는 그마저 엄중히 금지되었으며, 심지어 부모의 장례조차 허용되지 않았다(레 21:10~12). 일반 제사장들의 경우 그의 집안에서 출가한 여자는 이미 다른 집안의 가족이므로 그녀의 장례에 참여할 수 없었다. 그러나 직계 가족 중 미혼인 여성들의 장례는 그가 모두 책임져야 했다. 마찬가지로 1~4절에서 제사장의 아내의 장례가 언급되지 않은 것은 시집 온 그녀는 당연히 제사장의 직계 가족이기 때문으로 보인다.
21:4은 해석상의 논란이 있는 구절이다. “제사장은 그의 백성의 어른인즉 자신을 더럽혀 속되게 하지 말지니라”는 문장에서 ‘어른’ 혹은 ‘주인’을 뜻하는 히브리어 바알(baal)은 ‘남편’을 의미할 수도 있다. 이에 근거하여 혹자는 남편된 제사장이 자신의 아내의 집안사람의 장례에 관여해서 제사장이 부정케 되는 일이 없도록 금지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이 경우 ‘백성’으로 번역된 히브리어 암(am) 범위는 아내의 집안으로 제한된다.
그러나 4절은 1절과 평행을 이루는 구절이다. 1절이 제사장이 백성의 장례에 참여하지 말라는 원론적 금지 조항이라는 점으로 미루어 볼 때, 4절 또한 포괄적인 금지 규정일 것이다. 즉 제사장은 이스라엘 백성의 장례에 관여하거나 참여해선 안 된다. 이때 바알은 ‘남편’보다는 ‘백성의 어른’으로 해석하는 것이 옳다. 따라서 이 구절에는 제사장이 백성의 장례에 관여하여 자신을 더럽히면 백성 전체를 더럽히는 결과를 초래한다는 의미가 내포된 듯하다.
5~6절 또한 장례 관행과 관련된 규정으로, 레위기 19:27~29과 신명기 14:1의 규정과 관련이 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장례 때 머리털을 밀고 수염을 깎는 것이 허용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스 9:3; 욥 1:20; 렘 7:29; 16:6; 겔 27:31). 하지만 제사장들에게는 직계 가족의 장례를 치를 때에도 이런 두발 모양이 허용되지 않았다. 대제사장들은 금지된 애곡 행위, 곧 옷을 찢고 머리를 푸는(10절) 행위로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해선 안되었으나 일반 제사장이라면 가능했을 것이다. 참고로 “죽은 자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베지 말며 눈썹 사이 이마 위의 털을 밀지 말라”(신 14:1)는 명령에서 금지된 면도 방법은 이방의 관행으로 보인다. 한편, 몸에 상처를 내고 문신하는 애곡 행위는 일반 백성과 제사장 모두에게 허용되지 않았다(렘 41:5; 48:37).
정리하자면, 이스라엘에서는 몸을 베거나 눈썹 사이 이마 위 털을 밀거나, 몸에 상처를 내는(문신) 애곡 행위는 이방 관행으로 전적으로 금지되었다. 반면에 머리털을 밀고(깎고) 그것을 풀고 수염을 깎고 옷을 찢고 베옷을 입으며 재를 머리에 뿌리는 관행은 허용되었다. 일반 제사장은 더 엄격해서 머리털을 밀고 수염을 깎는 것이 금지되었고, 다만 옷을 찢고 머리를 푸는 애곡은 허용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대제사장은 그 어떤 애곡 행위도 금지되었다. 제사장들에게 적용되는 결혼 규정 역시 엄격했다. 일반 제사장들은 창녀나 이혼녀와 결혼할 수 없었는데(아마 과부는 가능했던 것으로 보ㅇ니다), 또한 그만큼 자신의 딸도 철저히 관리해야 했다(9절). 그러나 대제사장은 반드시 처녀를 아내로 삼아야 했다(7절, 13~14절).
제사장의 흠과 짐승의 흠
이어지는 단락은 제사장이 성소에 들어가려면 갖추어야 하는 신체적 자격요건에 관한 것이다(레 21:18~20). 흥미롭게도 제사장이 성막 내 업무를 처리할 수 없게 만드는 신체적 흠들 12가지(레 21:18~20)와 희생에 부적격한 짐승의 흠들 12가지(레 22:22~24)가 나란히 명시된다. 이 특징들은 지면상 자세한 설명은 생략할 수 밖에 없으나 주목해야할 점은 이 중 네 가지 흠만이 제사장과 희생 짐승에게 공통적이고 나머지는 다르다는 것이다. 그 이유는 인간과 짐승의 생물학적 차이와 신체에 나타나는 증상의 차이 때문일 것이다.
제사장과 짐승의 흠의 목록이 각각 12가지인 이유는 아마도 12라는 숫자가 ‘완전성의 의미’를 지녔기 때문일 것이다. 따라서 흠들이 굳이 각각 12가지로 제한된다고 볼 필요는 없으며 이 목록을 기준으로 흠의 목록은 더 세부적으로 확대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예컨대, 겉으로 볼 때 손상이 되거나 장애를 지니지 않았으나 삐쩍 마른 가축이라면 속병에 걸린 것으로 판단되어 제물에서 제외되었을 것이다. 또한 목록에 없으나 청각 장애가 있거나 손발이 하나 없는 제사장이 고난도의 성소 업무를 수행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흠을 가진 모든 짐승은 제물로 바쳐질 수 없었는데, 다만 자원의 화목제의 경우는 더한 지체나 덜한 지체를 가진 짐승이 허용되었다(23절). 자원의 화목제의 규준이 다소 완화된 이유는 아마 그것이 감사할 일이나 서원의 이행과 같은 특별한 이유가 없이 마음에 우러나와 바치는 것이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짐승의 흠이 제사장의 흠에 관한 규정과 나란히 등장하는 것은 구성상 어울리지 않지만 이는 의도적 배치임이 분명하다. 제사장에게는 제물로 희생되는 짐승을 검사할 최종 책임이 있기 때문에 짐승의 흠의 목록이 제사장 규정에서 나타나는 것은 자연스럽다. 제사가 드려지는 성막과 제사를 집행하는 제사장, 그리고 제사에서 바쳐지는 희생 제물 모두 흠 없이 거룩해야 했다. 레위기 21~22장은 흠 없는 짐승을 요구하는 1~7장의 동물 제사 규정과 제사장직의 위임과 그 직무의 자격을 제시하는 8장의 내용을 보완하고 있다.
얼핏 장애인이나 신체에 흠이 있는 사람을 차별하는 것처럼 보이는 율법을 어떻게 해석하면 좋을까? 레위기 제사법에 의하면 분명 ‘흠’은 제물로서 큰 결격사유였지만 이는 제사장에게 요구되는 신체 조건을 명시한 것뿐 장애인에 대한 차별이 아니다. 레위기 21:22~23은 이 질문에 대한 실마리를 제공한다.
그들은 제사장의 직무에서만 배제되었을 뿐, 제사장 가족의 일원으로서 모든 혜택을 동등하게 누렸다. 다만 그들은 성소의 직무에서 배제된다. 다시 말해 모든 제사장 가족들은 백성들이 바친 성물들을 가족 별로 공평히 나누어 가졌던 것이다. 한편, 구약의 훈육은 많은 경우 실물적 교훈과 상징을 통해 이루어지는데, 여기서도 동일한 원리에 의해 신체적 흠을 불완전성의 상징으로서 하나님의 거룩에 합당하지 않게 여겼을 뿐이다.
여기에 더해 제사장이 성막 내에서 섬세하고 과중한 업무를 수행하느라 육체적·정신적 피로에 시달렸다고 추정해볼 수 있다. 신체적 장애로 인해 자칫 제의적 실수를 할 가능성도 있으니 그들을 직무에서 배제한 것은 일종의 배려일 수 있다. 장애인의 군 입대를 막는 것이 이들에 대한 차별이 아니듯이 장애인에게 제사장의 역할을 맡기지 않았다 해서 이를 차별이라 볼 수는 없다. 따라서 이것은 단순히 실제적 역할과 흠의 상징성의 문제였다. 물론 신약에 이르러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구약의 교훈을 위해 설정된 이 모든 임시적인 차별의 장벽들이 사라졌다. 그러나 우리가 기억해야할 것은 모든 인간은 하나님 앞에 서면 장애와 흠을 지닌 존재들이라는 사실이다. 그럼에도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 앞에 담대히 나갈 자격을 얻었다는 사실이다.
제사장의 성물 음식 섭취 규정
레위기 22:1~16은 성물을 먹을 수 있는 제사장의 자격에 대한 규정이다.
제사장이 먹는 성물 음식은 지성물과 일반 성물로 나뉘었는데(레 21:22) 아마 여기서 성물이란 제단에 바쳐진 지극히 거룩한 음식을 가리킬 것이다.
몸이 부정케 된 제사장은 성물과 접촉하거나 성물을 먹을 수 없었으며 이 규정을 어기면 ‘제명’당하는 징벌이 뒤따랐다(3~10절). 여기에는 나병 환자, 유출 환자, 시체를 만진 자, 정액이 유출된 자, 기는 짐승의 사체를 만진 자(참조. 레 11:29~31, 41~43), 그리고 오염원에 접촉된 자와 자연사한 짐승이나 찢겨 죽은 짐승의 사체를 먹는 자들이 포함된다.
이런 이유들로 부정을 탄 제사장은 목욕을 한 뒤 저녁까지 기다려야 다시 정결케 된다. 부정한 상태에서 성물 음식을 먹음으로써 그것을 더럽히는 것은 중대한 범죄 행위다(9절). 그러나 이 규정은 부정케 된 제사장이 음식을 전혀 먹을 수 없다는 의미는 아니다. 그들은 제단에 오르지 않고 성전에 바쳐진 다른 음식 봉헌물들, 예를 들어 추수의 감사 예물과 같은 일반적인 음식은 먹을 수 있었다.
일반인들과 제사장 집의 손님, 제사장이 잠시 고용한 일꾼은 성물 음식을 먹을 자격이 없었다. 그러나 제사장의 종과 그의 자녀들은 제사장의 식구로 간주되어 성물을 먹을 수 있었다(11절). 제사장의 딸이 출가하면 시댁의 일원이 되므로 성물을 먹을 권리를 박탈했으며 혼인 관계가 중단되어 아버지 집으로 돌아오는 경우에는 그 권리가 회복되었다(12절). 일반인은 성물 음식을 섭취할 수 없다는 것을 거듭 강조함과 더불어 주어진 추가 지침 한 가지는 실수로 그것을 먹는 경우 이는 성물 침해죄에 속하기에 속건제가 요구된다는 것이다.
이때 죄인은 성물에 20%를 더하여 갚고, 이어서 숫양 한 마리를 성소에 바쳐야 했다(14절). 그러나 의도적으로 성물을 먹은 자에게는 그 죄에 합당한 형벌이 주어질 것이다(15절). 이 경우에 해당하는 형벌은 명시되어있지 않으나 성경의 다른 구절에 비추어 볼 때 하나님의 직접 심판에 의한 ‘죽음’이나 ‘제명’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마지막으로 제사장들의 유념해야할 몇 가지 추가적인 제의 규정들이 주어진다. 먼저 가축의 새끼가 태어나면 칠일 동안 어미와 같이 있게 하고 팔일 째부터는 희생으로 바칠 수 있다(22:27). 이것은 남자 아이가 태어나면 칠일이 지나 팔일 째에 할례를 해야하는 규정과 병행을 이루고 있는데(창 17:12; 21:4; 눅 1:59; 2:21) 짐승의 경우 “어미와 같이 있게 하라”는 요구사항에서 분명히 가축에 대한 인격적 배려가 깃들어 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이러한 인격적 배려는 바로 뒤잇는 규정에서 명백해진다. 암컷 가축을 잡을 때 어미와 새끼를 같은 날에 잡아서는 안된다(28절). 이어지는 규정은 화목제의 고기를 먹는 규정의 반복이다(28~29절). 유독 첫날 고기를 모두 먹어야 했던 감사의 화목제만 나타나는데, 이것은 아마도 감사의 화목제 고기를 자칫 이튿날까지 먹는 일이 발생하지 않도록 특별한 주의를 주기 위함일 것이다. 반면에 다른 화목제 고기들, 즉 서원의 화목제와 자원의 화목제(특별한 감사한 일이 없이 자원해서 감사의 마음으로 바친 화목제)의 경우 이튿날까지 고기를 먹을 수 있었다. 이 중대한 제사장 규정들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거룩의 속성을 강조하시고 또한 자신이 이스라엘을 거룩하게 하는 여호와임을 상기시키면서 끝을 맺는다(22:31~33).
귀찮은 것이 아니라 감사 감격해야 옳다; 여호와와 자신들의 관계가 어떤 것인지를 먼저 살펴야한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당신에게서 만은...'이라는 말은 나와 특별한 관계가 있다는 말인데
다른 분도 아닌 하나님께서 나와 특별한 관계에 있다고 강조한다는 것은 얼마나 영광스런 일인지 모른다. 훌륭한 목사와 성도간의 관계는 헌신을 요구하고 그 헌신을 받아들이는 관계이다.
해준 게 없다고 자식 앞에 비굴한 부모보다는 해준 것도 없으면 자식 앞에 당당한 부모가 보기 좋다. 당당하게 '너에게는 거룩히 여김을 받아야겠다'는 하나님의 선언이 내게는 얼마나 감격스러운지 모른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권위를 세우신다는 것은 뒤집어보면 나를 자녀로 인정하신다는 뜻이다. 홍길동이 온 천하를 헤집고 다니게된 원인은 아버지를 아버지라고, 형을 형이라고 불러보지 못한 탓이다.
그에게 유일한 소원은 아버지를 아버지라고 불러보는 것이었다. 그런데 어느 날 '내가 네게는 아버지라고 불려야겠다'고 한다면?
짐승들을 빨리 살을 찌우기 위해서 거세시키는 경우를 금함(24); 짐승이든 사람이든 이런 방식을 하나님께서는 좋아하시지 않음; 국화 기르는 것이나 과일나무를 기르는 것도 어떻게 본다면 비슷한 현상인데?
제사장(祭司長) כֹּהֵן
코헨(3548) kôhên / כֹּהֵן
발음 / 코헨 [ kôhên ]
관련 성경 / 제사장(창 14:18, 레 14:18, 대하 31:19, 스 6:9, 7:12, 24)
구약 성경 / 752회 사용
말라크(4397) malʼâk מַלְאָךְ
1. 보내진 자, 2. 하나님의 사자, 3. 천사
발음 / 마라크[ malʼâk ]
어원 / ‘대리로 파견하다’는 뜻의 사용하지 않는 어원에서 유래
관련 성경 / 사자(使者)(창 16:7, 삿 2:1, 시 34:7), 천사(창 19:1, 삼하 24:16, 대하 32:21), 왕(삼하 11:1), 사신(사 14:32, 33:7),
파견자(나 2:13)
구약 성경 / 212회 사용
3549. כָּהֵן
발음 / 카헨 [ kâhên ]
어원 / 아람어
관련 성경 / 제사장(스 7:12, 16, 21)
구약 성경 / 8회 사용
1. 제사장직, 2. 제사장의 임무, 3. 제사장의 역할
발음 / 케훈나 [ kehunnâh ]
어원 / 3547에서 유래
관련 성경 / 제사장 직분(민 3:10, 수 18:7, 느 13:29), 제사장(출 40:15)
구약 성경 / 14회 사용
* 3547. 카한(kâhan) כָּהַן
1. 예시하다, 2. 사제가 되다, 3. 피엘형 כִּהֵן
관련 성경 / 제사장 직분을 행하다(출 28:41, 겔 44:13), 제사장이 되다(호 4:6), 제사장 직을 행하다(출 31:10, 39:41)
구약 성경 /23회 사용
__________________ 레위기 21장 / 백성의 어른(4절)
04-01-2023(토) 사순절 제34일제사장은 그의 백성의 어른인즉 자신을 더럽혀 속되게 하지 말지니라.
He must not make himself unclean for people related to him by marriage, and so defile himself.
He shall not defile himself as a relative by marriage among his people, and so profane himself.
레위기 21장과 22장은 제사장에 관한 규례입니다.
21장에서는 제사장이 지켜야 할 규례
22장에서는 제사장이 먹어야 할 음식 즉 성물에 관한 규례
제사장은 하나님의 성소를 섬기고 돌아보는 직무를 맡은 직분입니다.
우리 모두가 우리 주 예수그리스도로 인하여서 왕 같은 제사장들이 되었다는 사실도 이와 다르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성전 되어진 하나님의 백성들을 우리가 섬기고 또 돌아보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모습들로 인도할 수 있는 그러한 사명을 받은 자가 왕같은 제사장이라는 칭호를 받은 저와 여러분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렇다면 그러한 삶에 그러한 사람의 삶의 모습과 삶의 자리는 그렇지 않은 사람과 사실 같다'라고 말할 수 없겠습니다.
어떻게 구별되어야 하고, 어떤 인식의 차이가 있으며 또 어떤 목표를 갖고 있는지,
오늘의 말씀은 구약성경 레위기 속에서도 얼마든지 신약의 이 시대의 성령의 세대를 살아가고 있는 우리들에게도 큰 도전이 된다' 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오늘 말씀을 통하여서 왕 같은 제사장 하나님의 성전을 섬기는 저와 여러분의 생애가 되어지기를 축원합니다.
거룩함의 기준이 높을수록 사랑으로 배려합니다
레위기 21장은 제사장이 지킬 규례입니다.
레위기 21, 22장은 제사장이 지킬 규례입니다.제사장은 백성의 어른입니다.
대제사장은 형제 제사장들 중에서 으뜸입니다.
제사장들은 거룩하신 하나님께 제사를 드림과 동시에 백성들로 하여금 거룩하게 살아가도록 본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해 제사장들이 하나님 앞에서, 백성들 앞에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말씀합니다.
가장 가까운 살붙이, 곧 어머니나 아버지나 아들이나 딸이나 형제의 주검은 괜찮다.
또한 시집가지 못하고 죽은 친누이의 주검도 괜찮다.
그 여자에게 남편이 없기 때문이다.
이들의 주검을 만져 몸을 더럽히는 것은 괜찮다.
그러나 제사장은 백성의 어른이므로, 스스로 더럽혀 욕되게 해서는 안 된다.
그들은 하나님께 거룩하게 구별된 사람들이니, 그들이 섬기는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해서는 안 된다.
그들은 주께 제물을 살라 바치는 이들, 곧 하나님께 음식을 바치는 이들이기 때문에, 그들은 거룩하여야 한다.
제사장은 하나님께 거룩하게 구별된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는 너희가 섬기는 하나님께 음식제물을 바치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제사장은 너희에게도 거룩한 사람이다.
너희를 거룩하게 하는 나 주가 거룩하기 때문이다.
제사장이 지킬 규례들
1. 제사장은 백성의 시체를 만져서 자신의 몸을 더럽히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한다.
→물론 어머니나 아버지나 아들이나 딸이나 형제의 시체에 접촉하는 것 허용
→또한 시집가지 못하고 죽은 친누이의 시체에 접촉하는 것도 허용
2. 제사장은 머리털을 깎아 대머리같이 하면 안 된다.
3. 제사장은 자기 수염 양쪽(구레나룻)을 밀면 안 된다.
4. 제사장은 제 몸에 칼자국을 내서는 안 된다.
5. 제사장은 하나님께 대하여 거룩해야 한다.
6. 제사장은 그들이 섬기는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해서는 안 된다.
7. 제사장은 창녀나, 이미 몸을 버린 여자와 결혼해서는 안 된다.
8. 제사장은 이혼한 여자와도 결혼하지 않아야 한다.
☞ 제사장은 하나님께 거룩하게 구별된 사람이기 때문이다.
9. 제사장의 딸이 창녀 짓을 하여 제 몸을 더럽히면,
제 아버지를 더럽히는 것이나 마찬가지이므로, 그 여자는 불태워 죽여야 한다.
제사장에게 하신 명령보다 더 엄격합니다.
이유는 하나, 형제 제사장들의 으뜸이 되는 대제사장이기 때문입니다.
그는 어떤 주검에도 가까이해서는 안 된다.
자기 아버지나 어머니가 죽었을 때에도, 그 주검에 가까이하여 몸을 더럽혀서는 안 된다.
그가 섬기는 하나님의 성소를 더럽혀서는 안 된다.
그는 남달리, 하나님이 기름부어 거룩하게 구별하고, 대제사장으로 임명하였기 때문이다. 나는 주다.
과부나 이혼한 여자나 이미 몸을 버린 여자나 창녀와 결혼해서는 안 된다.
그는 다만 자기 백성 가운데서 숫처녀를 아내로 맞이하여야 한다.
그래야만, 그는 더러워지지 않은 자녀를 자기 백성 가운데 남기게 될 것이다. 그를 거룩하게 한 이는 주다.”
대제사장이 지킬 규례들
2. 대제사장은 어떤 주검에도 가까이해서는 안 된다.
3. 대제사장은 자기 아버지나 어머니가 죽었을 때에도, 그 주검에 가까이하여 몸을 더럽혀서는 안 된다.
4. 대제사장은 절대로 성소에서 떠나서는 안 된다.
5. 대제사장은 그가 섬기는 하나님의 성소를 더럽혀서는 안 된다.
6. 대제사장은 처녀를 아내로 맞이하여야 한다.
7. 대제사장은 과부나 이혼한 여자나 이미 몸을 버린 여자나 창녀와 결혼해서는 안 된다.
8. 그는 다만 자기 백성 가운데서 숫처녀를 아내로 맞이하여야 한다.
하나님께 음식 제물을 드릴 수 없는 자들 즉 몸에 흠이 있는 자들의 목록
어른이란 성숙함이 기준입니다.
제사장을 라틴어로 폰티팍스(pontifax)라고 합니다.
'폰티팍스'의 어원은 "다리를 놓는 사람"을 말합니다.
다리의 용도는 계곡과 계곡 사이를 연결하여 보행자들이 편하게 다닐 수 있도록 하는 것입니다.
제사장은 피조물과 창조주 사이에 다리가 되어 사람이 전능자를 쉽게 찾아갈 수 있도록 길 안내를 해야 합니다.
만일 제사장이 어른스럽지 못하면 사람들은 길을 잃어버릴 것입니다.
레위기 21장은 구약시대 제사장이 지켜야 할 규례들을 말씀합니다.
21:1-8. 제사장된 자는 스스로 더럽혀 욕되게 해서는 안될 것.
21:9. 제사장의 딸이 음행했을 때의 벌.
21:10-15. 제사장은 몸을 더럽혀서 안될 것.
21:16-24. 제사장은 신체 완전해야 할 것.
제사장의 개인적 정결 규례는 크게 세 가지로 말씀합니다.
제사장이 하나님 앞에서 백성들을 대표한다는
면에서 제사장에 대한 이런 규례는 언약 공동체 전체의 대한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첫째는 시체를 만지지 말라
둘째는
수염이나 털을 깎지 말라
셋째는 부정하거나 이혼한 여자와의 결혼하지 말라
시체 접촉 금지는 죄에 대한 정결을
의미합니다.
구약이나 신약이나 죽음은 죄에 대한 심판의 결과라고 판단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시체 접촉 금지는 범죄에 대한 단호한 경고를 뜻합니다.
수염이나 털을 깎지 않는 것은 하나님에 대한 전적인 헌신을 의미합니다.
동양 사상에서 ‘신체발부 수지부모 불감훼상(身體髮膚 受之父母 不敢毁傷)’ 이란 말처럼 "부모로부터 물려 받은 몸의 터럭 하나라도 감히 훼손해선 안 된다."는 정신을 생각나게 합니다. - 효경(孝經), 첫 장의 구절
부정한 여자 또는 이혼한 여자와 결혼하지 말라는 규례는 하나님께서 세우신 사회의 기초
공동체로서 가정이 건전해야 함을 의미합니다.
그래야만 언약 공동체 전체가 조화롭게 유지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언약 백성으로서 이스라엘 백성 전체가 하나님 앞에서 거룩해야 하지만 특별히 레위기 21장에서는 제사장은 백성의 어른이므로 모범이 되어야 한다는 점에서
더욱 정결해야 할 것을 강조합니다.
따라서 오늘날 하나님의 제사장인 성도들도 백성의 어른처럼 정결한 삶을 유지하므로 세상 사람들에게 믿음의 본을 보여줄 수 있습니다.
만일 성도들이 정결하지 못하고
개인적으로나 가정적으로 문제가 많다면 "예수 믿는 너희들이나 잘 해라!" 비난을 받게 되어 복음을 전할 수 없을 것입니다.
성도들이 개인적으로나 가정적으로 세상 사람들에게 모범이 될 때 우리가 전하는 말씀이 더욱 힘있게 전파될 것입니다.
날마다 거룩한 삶과 거룩한 질서 회복을 위해 최선을 다하는 믿음의 사람으로 굳게 세워지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너 주의 사람아
21:1-12. 제사장의 장례식
참석 규례
21:13-15. 제사장 결혼규례
21:16-24. 제사장 신체 조건에 대한 규정
제사장들 중에서도 대제사장은 성결을 위해 지켜야 할 규례가 더 엄격했습니다.
예를 들면 대제사장들은 직계존비속에 대해서는 시체에 접근할 수 있었지만(2절), 대제사장들은 예외를 인정하지 않았다.(11절)
이와 같이 구약의 율법은 하나님을 섬기는 거리에 따라 성결에 대한 요구의 정도가 달랐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보혈의
능력으로 말미암아 신약시대 이후로는 이러한 구분이 다 무너졌다. 예수그리스도를 구주라고 고백하는 그리스도인이라면 누구든지 직접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는 대제사장의 신분의 변화가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제 성도라면 누구나 대제사장 신분으로 성결을
지켜야 하는 의무가 생긴 것이다. 그래야 거룩하신 하나님과 더불어 깊이 교제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제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과 나의 막힘 담을 허물어 주신 그곳에 우리의 교만과 죄악으로 다시금 불결함이 채워지는 것이 아니라 왕 같은 제사장의 신분으로 언제나 주의 말씀을 따라 성결함으로 나아가야 할 것이다.
나는 오늘 이 말씀을 묵상하면서 하나님 나라의 거룩한 백성으로서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성결한 삶을 살고 있는가 반추하게 되었다.
세상의 유혹과 시험이 몰려올 때 우리는 도저히 우리의 힘으로 그것들을 이겨낼 힘이 없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만이 하나님의 선한 손이 우리를 도울 뿐이다.
이제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말미암아 왕 같은 제사장의 신분인 된 우리들이 하나님 앞에서 성결한 삶을 살기 위해서는 오직 기도와 말씀으로 사는 길 밖에 없는 것이다.
나에게 왕 같은 제사장의 신분을 주신 하나님 아버지께 늘 기도와 말씀 묵상으로 성결함을 잃지 말아야겠다.
신명기 14:1
너희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자녀니 죽은 자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베지 말며 눈썹 사이 이마 위의 털을 밀지 말라
에스겔 44:20
그들은 또 머리털을 밀지도 말며 머리털을 길게 자라게도 말고 그 머리털을 깎기만 할 것이며
레위기 19:27-28
머리 가를 둥글게 깎지 말며 수염 끝을 손상치 말며
레위기 10:6
모세가 아론과 그 아들 엘르아살과 이다말에게 이르되 `너희는 머리를 풀거나 옷을 찢지 말아서 너희 죽음을 면하고 여호와의 진노가 온 회중에게 미침을 면케 하라 오직 너희 형제 이스라엘 온 족속이 여호와의 치신 불로 인하여 슬퍼할 것이니라
이사야 15:2
그들은 바잇과 디본 산당에 올라가서 울며 모압은 느보와 메드바를 위하여 통곡하도다 그들이 각각 머리털을 없이 하였고 수염을 깎았으며
이사야 22:12
그 날에 주 만군의 여호와께서 명하사 통곡하며 애호하며 머리털을 뜯으며 굵은 베를 띠라 하셨거늘
예레미야 16:6
큰 자든지 작은 자든지 이 땅에서 죽으리니 그들이 매장되지 못할 것이며 그들을 위하여 애곡하는 자도 없겠고 자기 몸을 베거나 대머리 되게 하는 자도 없을 것이며
예레미야 48:37
각 사람의 두발이 밀렸고 수염이 깍였으며 손이 베어졌으며 허리에 굵은 베가 둘렸고
아모스 8:10
너희 절기를 애통으로, 너희 모든 노래를 애곡으로 변하며 모든 사람으로 굵은 베로 허리를 동이게 하며 모든 머리를 대머리 되게 하며 독자의 죽음을 인하여 애통하듯 하게 하며 그 결국으로 곤고한 날과 같게 하리라
미가 1:16
너는 네 기뻐하는 자식으로 인하여 네 머리털을 깎아 대머리 같게 할지어다 네 머리로 크게 무여지게 하기를 독수리 같게 할지어다 이는 그들이 사로잡혀 너를 떠났음이니라
제사장은 달랐다! 제사장의 자격과 의무
고난도 성소 직무 수행 제사장, 함부로 울지도 먹지도 못했다
신체조건부터 결혼자격까지 흠이 없는 엄격한 규정 통해 하나님 거룩성 드러내는 책임 강조
성전에 들어가지 못하는 제사장
시므온은
나이가 42세인 제사장이다. 어느 날 그는 나귀를 타는 중에 실수로 떨어졌는데 불행히도 다리가 심하게 부러져 영구히 불구자가
되었다. 신체의 문제로 인해 그는 레위기 규정을 따라 더 이상 제사장 직무를 수행할 수 없게 되었다. 규정에 의하면 앞을 보지
못하거나 다리를 절고 손발이 부러진 불구자는 ‘흠’을 지닌 이유로 제사장으로서 성소에 들어갈 수 없기 때문이다.
집에서
한가로이 하루하루 보내던 시므온은 삼촌인 제사장 엘리에셀이 병으로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시므온은 오래도록 그를 존경했으며
깊은 교분을 나누었으나 그 장례에 참여할 수 없었다. 레위기 규정상 제사장은 직계 가족의 장례만 참여하고 집행할 수 있으며 그
외에는 어떠한 장례식도 참여하지 못하도록 금지되어 있기 때문이다.
레위기 21~22장은 이러한 제사장의 자격과 의무를
다룬 규정이다. 이것은 제사장이라는 주제로 8~10장과 대칭을 이룬다. 8~10장이 제사장 위임과 더불어 제사장들의 첫 제사와
실패한 제사를 이야기하고 있는 반면, 21~22장은 제사장의 자격과 준수사항, 그리고 결격사유가 되는 신체적 흠과 그들이 분별해야
하는 짐승의 흠에 관해 다룬다.
제사장의 장례와 결혼 규정
시체는
전염성이 강하므로 장례의 절차를 진행하는 사람들이나 전쟁에서 시체와 접촉한 사람들에게 필연적으로 중대한 오염을 유발했다(민
19:11~22). 따라서 성소의 직무를 위해 구별된 제사장들은 장례식을 집행할 수 없음은 물론 장례에 참여하는 자체가
금지되었다.
다만 일반 제사장들은 직계 가족들의 장례는 치를 수 있었으나(레 21:1~4) 가장 높은 거룩성을
유지해야하는 대제사장에게는 그마저 엄중히 금지되었으며, 심지어 부모의 장례조차 허용되지 않았다(레 21:10~12). 일반
제사장들의 경우 그의 집안에서 출가한 여자는 이미 다른 집안의 가족이므로 그녀의 장례에 참여할 수 없었다. 그러나 직계 가족 중
미혼인 여성들의 장례는 그가 모두 책임져야 했다. 마찬가지로 1~4절에서 제사장의 아내의 장례가 언급되지 않은 것은 시집 온
그녀는 당연히 제사장의 직계 가족이기 때문으로 보인다.
21:4은 해석상의 논란이 있는 구절이다. “제사장은 그의
백성의 어른인즉 자신을 더럽혀 속되게 하지 말지니라”는 문장에서 ‘어른’ 혹은 ‘주인’을 뜻하는 히브리어 바알(baal)은
‘남편’을 의미할 수도 있다. 이에 근거하여 혹자는 남편된 제사장이 자신의 아내의 집안사람의 장례에 관여해서 제사장이 부정케 되는
일이 없도록 금지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이 경우 ‘백성’으로 번역된 히브리어 암(am) 범위는 아내의 집안으로 제한된다.
그러나
4절은 1절과 평행을 이루는 구절이다. 1절이 제사장이 백성의 장례에 참여하지 말라는 원론적 금지 조항이라는 점으로 미루어 볼
때, 4절 또한 포괄적인 금지 규정일 것이다. 즉 제사장은 이스라엘 백성의 장례에 관여하거나 참여해선 안 된다. 이때 바알은
‘남편’보다는 ‘백성의 어른’으로 해석하는 것이 옳다. 따라서 이 구절에는 제사장이 백성의 장례에 관여하여 자신을 더럽히면 백성
전체를 더럽히는 결과를 초래한다는 의미가 내포된 듯하다.
5~6절 또한 장례 관행과 관련된 규정으로, 레위기
19:27~29과 신명기 14:1의 규정과 관련이 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장례 때 머리털을 밀고 수염을 깎는 것이 허용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스 9:3; 욥 1:20; 렘 7:29; 16:6; 겔 27:31). 하지만 제사장들에게는 직계 가족의 장례를
치를 때에도 이런 두발 모양이 허용되지 않았다. 대제사장들은 금지된 애곡 행위, 곧 옷을 찢고 머리를 푸는(10절) 행위로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해선 안되었으나 일반 제사장이라면 가능했을 것이다. 참고로 “죽은 자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베지 말며 눈썹
사이 이마 위의 털을 밀지 말라”(신 14:1)는 명령에서 금지된 면도 방법은 이방의 관행으로 보인다. 한편, 몸에 상처를 내고
문신하는 애곡 행위는 일반 백성과 제사장 모두에게 허용되지 않았다(렘 41:5; 48:37).
정리하자면,
이스라엘에서는 몸을 베거나 눈썹 사이 이마 위 털을 밀거나, 몸에 상처를 내는(문신) 애곡 행위는 이방 관행으로 전적으로
금지되었다. 반면에 머리털을 밀고(깎고) 그것을 풀고 수염을 깎고 옷을 찢고 베옷을 입으며 재를 머리에 뿌리는 관행은 허용되었다.
일반 제사장은 더 엄격해서 머리털을 밀고 수염을 깎는 것이 금지되었고, 다만 옷을 찢고 머리를 푸는 애곡은 허용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대제사장은 그 어떤 애곡 행위도 금지되었다. 제사장들에게 적용되는 결혼 규정 역시 엄격했다. 일반 제사장들은 창녀나
이혼녀와 결혼할 수 없었는데(아마 과부는 가능했던 것으로 보ㅇ니다), 또한 그만큼 자신의 딸도 철저히 관리해야 했다(9절).
그러나 대제사장은 반드시 처녀를 아내로 삼아야 했다(7절, 13~14절).
제사장의 흠과 짐승의 흠
제사장이 성소에 들어가려면 갖추어야 하는 신체적 자격요건에 관한 것이다(레 21:18~20).
흥미롭게도 제사장이 성막 내
업무를 처리할 수 없게 만드는 신체적 흠들 12가지(레 21:18~20)
희생에 부적격한 짐승의 흠들 12가지(레
22:22~24)가 나란히 명시된다.
이 특징들은 지면상 자세한 설명은 생략할 수 밖에 없으나 주목해야할 점은 이 중 네 가지
흠만이 제사장과 희생 짐승에게 공통적이고 나머지는 다르다는 것이다.
그 이유는 인간과 짐승의 생물학적 차이와 신체에 나타나는
증상의 차이 때문일 것이다.
제사장과 짐승의 흠의 목록이 각각 12가지인 이유는 아마도 12라는 숫자가 ‘완전성의
의미’를 지녔기 때문일 것이다.
따라서 흠들이 굳이 각각 12가지로 제한된다고 볼 필요는 없으며 이 목록을 기준으로 흠의 목록은 더
세부적으로 확대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예컨대, 겉으로 볼 때 손상이 되거나 장애를 지니지 않았으나 삐쩍 마른 가축이라면 속병에
걸린 것으로 판단되어 제물에서 제외되었을 것이다. 또한 목록에 없으나 청각 장애가 있거나 손발이 하나 없는 제사장이 고난도의
성소 업무를 수행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흠을 가진 모든 짐승은 제물로 바쳐질 수 없었는데, 다만 자원의 화목제의
경우는 더한 지체나 덜한 지체를 가진 짐승이 허용되었다(23절). 자원의 화목제의 규준이 다소 완화된 이유는 아마 그것이 감사할
일이나 서원의 이행과 같은 특별한 이유가 없이 마음에 우러나와 바치는 것이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짐승의 흠이
제사장의 흠에 관한 규정과 나란히 등장하는 것은 구성상 어울리지 않지만 이는 의도적 배치임이 분명하다. 제사장에게는 제물로
희생되는 짐승을 검사할 최종 책임이 있기 때문에 짐승의 흠의 목록이 제사장 규정에서 나타나는 것은 자연스럽다. 제사가 드려지는
성막과 제사를 집행하는 제사장, 그리고 제사에서 바쳐지는 희생 제물 모두 흠 없이 거룩해야 했다. 레위기 21~22장은 흠 없는
짐승을 요구하는 1~7장의 동물 제사 규정과 제사장직의 위임과 그 직무의 자격을 제시하는 8장의 내용을 보완하고 있다.
얼핏
장애인이나 신체에 흠이 있는 사람을 차별하는 것처럼 보이는 율법을 어떻게 해석하면 좋을까? 레위기 제사법에 의하면 분명 ‘흠’은
제물로서 큰 결격사유였지만 이는 제사장에게 요구되는 신체 조건을 명시한 것뿐 장애인에 대한 차별이 아니다. 레위기
21:22~23은 이 질문에 대한 실마리를 제공한다.
그들은 제사장의 직무에서만 배제되었을 뿐, 제사장 가족의
일원으로서 모든 혜택을 동등하게 누렸다. 다만 그들은 성소의 직무에서 배제된다. 다시 말해 모든 제사장 가족들은 백성들이 바친
성물들을 가족 별로 공평히 나누어 가졌던 것이다. 한편, 구약의 훈육은 많은 경우 실물적 교훈과 상징을 통해 이루어지는데,
여기서도 동일한 원리에 의해 신체적 흠을 불완전성의 상징으로서 하나님의 거룩에 합당하지 않게 여겼을 뿐이다.
여기에
더해 제사장이 성막 내에서 섬세하고 과중한 업무를 수행하느라 육체적·정신적 피로에 시달렸다고 추정해볼 수 있다. 신체적 장애로
인해 자칫 제의적 실수를 할 가능성도 있으니 그들을 직무에서 배제한 것은 일종의 배려일 수 있다. 장애인의 군 입대를 막는 것이
이들에 대한 차별이 아니듯이 장애인에게 제사장의 역할을 맡기지 않았다 해서 이를 차별이라 볼 수는 없다. 따라서 이것은 단순히
실제적 역할과 흠의 상징성의 문제였다. 물론 신약에 이르러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구약의 교훈을 위해 설정된 이 모든 임시적인
차별의 장벽들이 사라졌다. 그러나 우리가 기억해야할 것은 모든 인간은 하나님 앞에 서면 장애와 흠을 지닌 존재들이라는 사실이다.
그럼에도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 앞에 담대히 나갈 자격을 얻었다는 사실이다.
제사장의 성물 음식 섭취 규정
레위기
22:1~16은 성물을 먹을 수 있는 제사장의 자격에 대한 규정이다. 제사장이 먹는 성물 음식은 지성물과 일반 성물로
나뉘었는데(레 21:22) 아마 여기서 성물이란 제단에 바쳐진 지극히 거룩한 음식을 가리킬 것이다. 몸이 부정케 된 제사장은
성물과 접촉하거나 성물을 먹을 수 없었으며 이 규정을 어기면 ‘제명’당하는 징벌이 뒤따랐다(3~10절). 여기에는 나병 환자,
유출 환자, 시체를 만진 자, 정액이 유출된 자, 기는 짐승의 사체를 만진 자(참조. 레 11:29~31, 41~43), 그리고
오염원에 접촉된 자와 자연사한 짐승이나 찢겨 죽은 짐승의 사체를 먹는 자들이 포함된다.
이런 이유들로 부정을 탄
제사장은 목욕을 한 뒤 저녁까지 기다려야 다시 정결케 된다. 부정한 상태에서 성물 음식을 먹음으로써 그것을 더럽히는 것은 중대한
범죄 행위다(9절). 그러나 이 규정은 부정케 된 제사장이 음식을 전혀 먹을 수 없다는 의미는 아니다. 그들은 제단에 오르지 않고
성전에 바쳐진 다른 음식 봉헌물들, 예를 들어 추수의 감사 예물과 같은 일반적인 음식은 먹을 수 있었다.
일반인들과
제사장 집의 손님, 제사장이 잠시 고용한 일꾼은 성물 음식을 먹을 자격이 없었다. 그러나 제사장의 종과 그의 자녀들은 제사장의
식구로 간주되어 성물을 먹을 수 있었다(11절). 제사장의 딸이 출가하면 시댁의 일원이 되므로 성물을 먹을 권리를 박탈했으며 혼인
관계가 중단되어 아버지 집으로 돌아오는 경우에는 그 권리가 회복되었다(12절). 일반인은 성물 음식을 섭취할 수 없다는 것을
거듭 강조함과 더불어 주어진 추가 지침 한 가지는 실수로 그것을 먹는 경우 이는 성물 침해죄에 속하기에 속건제가 요구된다는
것이다.
이때 죄인은 성물에 20%를 더하여 갚고, 이어서 숫양 한 마리를 성소에 바쳐야 했다(14절). 그러나
의도적으로 성물을 먹은 자에게는 그 죄에 합당한 형벌이 주어질 것이다(15절). 이 경우에 해당하는 형벌은 명시되어있지 않으나
성경의 다른 구절에 비추어 볼 때 하나님의 직접 심판에 의한 ‘죽음’이나 ‘제명’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마지막으로
제사장들의 유념해야할 몇 가지 추가적인 제의 규정들이 주어진다. 먼저 가축의 새끼가 태어나면 칠일 동안 어미와 같이 있게 하고
팔일 째부터는 희생으로 바칠 수 있다(22:27). 이것은 남자 아이가 태어나면 칠일이 지나 팔일 째에 할례를 해야하는 규정과
병행을 이루고 있는데(창 17:12; 21:4; 눅 1:59; 2:21) 짐승의 경우 “어미와 같이 있게 하라”는 요구사항에서
분명히 가축에 대한 인격적 배려가 깃들어 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이러한 인격적 배려는 바로 뒤잇는 규정에서
명백해진다. 암컷 가축을 잡을 때 어미와 새끼를 같은 날에 잡아서는 안된다(28절). 이어지는 규정은 화목제의 고기를 먹는 규정의
반복이다(28~29절). 유독 첫날 고기를 모두 먹어야 했던 감사의 화목제만 나타나는데, 이것은 아마도 감사의 화목제 고기를
자칫 이튿날까지 먹는 일이 발생하지 않도록 특별한 주의를 주기 위함일 것이다. 반면에 다른 화목제 고기들, 즉 서원의 화목제와
자원의 화목제(특별한 감사한 일이 없이 자원해서 감사의 마음으로 바친 화목제)의 경우 이튿날까지 고기를 먹을 수 있었다. 이
중대한 제사장 규정들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거룩의 속성을 강조하시고 또한 자신이 이스라엘을 거룩하게 하는 여호와임을 상기시키면서
끝을 맺는다(22:31~33).
1. 본문은 제사장과 대제사장이 삶의 영역에서 어떤 기준을 충족시킴으로 하나님의 거룩함과 영광을 드러내야 하는지를 보여줍니다.
이들은 백성의 지도자로서 백성들보다 더 높은 거룩함의 기준이 요구되는데 이것은 신약의 원리와도 동일합니다(딤전 3:1~13; 고후 4:1~2).
일반 제사장을 위한 장례와 결혼(1~9),
대제사장의 경우의 장례와 결혼(10~15),
모든 레위인들을 위한 봉사의 자격 요건(16~24)
에 대한 규정을 다루고 있습니다.
즉 삶의 전반에 있어서 특별히 레위인과 제사장들은 높은 수준의 거룩이 요구되는 것입니다.
제사장들은 직계 가족이 아닌 한, 죽은 자로 자신을 더럽혀서는 안 됩니다(1~6).
이 말은 이방 특히 가나안 백성들처럼 애도해서는 안 되고(머리털을 깎아 대머리 같게 하거나 수염 양쪽을 깎거나 살을 베는 행위) 시체를 가까이 해서는 안 된다는 말입니다(5). 대제사장의 경우는 직계 가족, 자신의 부모의 죽음이라고 할지라도 그 시체로 몸을 더럽힐 수 없다는 더 높은 기준이 요구되었습니다(11). 그는 이런 일로 머리를 풀거나 옷을 찢는 애도 행위도 할 수 없고 계속해서 성소에 머물러야 했습니다(10,12). 왜냐하면 대제사장은 하나님께 가장 가까이 행하는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왜 죽음이라는 사건에 대해서 제사장이나 대제사장이 이런 방식으로 요구받는 것일까요? 이스라엘에서 죽음은 우선적으로 사람을 하나님께로부터 분리시킨 저주와 관련이 있는 것으로 여겨졌기 때문입니다(창 3:19). 하지만 제사장과 대제사장은 이 죽음의 시간에도 언약의 영원한 소망을 나타내야 했습니다. 하나님은 산 자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제사장의 결혼 문제가 다루어집니다. 일반 제사장은 ‘기생이나 부정한 여인’ 또는 남편으로부터 ‘이혼당한 여인’을 아내로 취할 수 없습니다(7). 또 제사장의 딸이 창녀가 되면 그것은 아버지를 모독하는 것으로 죽임을 당해야 한다는 규정이 있습니다(9). 대제사장의 경우에는 자기 백성 가운데서(이스라엘) 처녀와만 결혼할 수 있었습니다(13~15). 이들은 세습을 통해서 하나님을 섬기는 직분이었다는 점에서 결혼을 통한 경건한 자손을 얻는 것이 중요하게 여겨졌을 뿐 아니라, 일반 백성에게도 결혼 자체가 신성한 것이라면 이들 제사장들에게는 더더욱 그래야 했을 것입니다. 죽음과 함께 결혼이 제사장의 삶의 중요한 규례로 제시되는 것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결혼은 하나님과의 언약에 비교되는 신성한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제사장의 자격 요건에 대한 규정이 이어집니다(16~23).
제사장은 제물과 마찬가지로 흠이나 결점이 없이 온전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섬기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창조의 완전함을 드러내야 하기 때문입니다.
18~20절은 제사장의 육체의 온전함의 목록들을 제시합니다. 제사장들이 이렇게 온전함을 요구받는 것은 백성들의 온전함과 거룩함을 요구해야 하는 자들로서 당연한 것입니다.
7. 사도 베드로는 온 교회가 거룩한 제사장이라고 말했습니다(벧전 2:4~10). 그러니 당연히 모든 성도는 세상이 가지고 있는 기준을 능가하는 거룩함과 온전함을 요구받습니다. 이것은 육체적인 차원의 것일 뿐만 아니라, 영적인 차원의 것입니다. 교회의 영적 지도자들은 비록 구약의 제사장은 아니지만, 성도들보다 더 높은 수준의 거룩이 요구됩니다. 슬픔을 당했을 때에도 믿음의 소망을 드러내야 할 것이고, 결혼 생활에 있어서도 모범과 언약의 순결을 보여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언약 공동체인 교회에게 이런 거룩의 질서와 조건을 여전히 요구하신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성도여. 거룩하십시오!
21장의 대상은 제사장들이다.
제사장에게만 따로 적용할 규례가 필요한가?
제사장은 일반인보다 더 엄격한 기준이 요구되었다.
목사는 좀 더 엄격한 기준을 자신에게 적용하면서 살아야 한다.
'나도 인간이다' 이런 소리를 가급적 하지 않아야 한다.
다만 이런 자세는 스스로 다짐하는 것이어야 바람직하다.
성도들은 '목사도 인간이다'고 말해주는 것이 도움이 될 때가 많을 것이다.
제사장들이 백성 중의 죽은 자로 인하여 스스로 더럽히지 말라는 것은 구체적으로 무엇을 하지 말라는 것인가?
그 머리를 풀지 말며 그 옷을 찢지 말며 어떤 시체에든지 가까이 말 것(10-11).
일반적인 장례 절차에 참여치 말라는 것이다.
그래도 조금 먼 친척이 있을 수 있고, 가까운 친구가 죽었을 경우도 있는데 이런 일에
전혀 슬픈 기색을 보이지 말라는 것은 너무 하지 않은가?
기본적으로 하나님의 입장에 서는 것이 제사장의 할 일이다.
목회자는 개인적이고 가정적인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의 대리인이라는 신분을 잊지 말아야 한다.
제사장이라도 장례식에 참석하고 슬픔을 표할 수 있는 경우는 어떤 때인가?
골육지친인 경우에 허용
부모, 자녀, 형제, 출가하지 아니한 친자매의 경우에는 허용되었다.
피도 눈물도 없는 하나님이 아니라 최소한의 예외는 허락하시는 분이시다.
우리의 연약함을 아시고 하나님께서 양보할 때도 있다는 것에 감사해야 한다.
제사장이라도 장례식에 참석할 수 있는 대상 중에 아무래도 빠진 사람이 있는 것 같은데?
아내 : 이 경우에는 당연직인가?
아내는 한 몸으로 취급했기 때문에 별도의 사람으로 다루지 않았다.
제사장들은 머리털을 깎아 대머리 같게 하지 말며 그 수염 양편을 깎지 말며 살을 베지 말라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 (4-5)
(수염 양편을 깎는다는 말의 원어적 의미는 긴 수염의 끝을 둥글고 짧게 자른다는 뜻이다)
이교도들의 우상숭배와 관련이 있는 행위이다.
제사장이 일반인과 달라야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백성의 어른이기 때문(4)
하나님의 식물을 드리는 자(6)
여호와께 거룩한 자(7) : 여호와를 위하여 특별하게 구별한 자라는 뜻이다.
실제로 아론이나 그 아들들이 거룩할 이유가 없다.
아론만 해도 얼마나 어리석을 짓을 한 사람인가?
백성들이 요구한다고 해서 금송아지를 만들었던 장본인 아닌가!
그럼에도 아론과 그 아들들이 거룩한 것은 자신들의 공로가 아님을 보여주는 말씀은?
8절. 거룩한 하나님께서 그렇게 여기라고 하시기 때문이다.
어느 누구도 하나님 앞에서 거룩할 수 없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여기시기 때문에 거룩할 뿐이다.
오늘날 우리는 모두가 제사장이 되어 하나님께 담대히 나아갈 수가 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피를 흘리신 덕분에 우리 모두를 거룩한 자로 여기시기 때문이다.
이혼당한 여인이 부정한 여인인가? 그러면 억울한 사람은 없을까?
제사장은 모든 일에 순결해야한다는 의미이지 이혼한 여인을 탓하려는 것이 아니다.
여기서 이혼 당한 여인이란 부정한 이유로 버림받은 경우를 가리킨다.
영국의 황태자가 사랑한 사람이 하필이면 미국의 이혼녀이었다.
미국사람이라는 것도 싫은데 이유야 어쨌거나 이혼한 사람을 왕비로 모시는 것이 싫다는 것은 인지상정이다.
하나님의 의도는 제사장이나 제사장의 가족은 순결해야한다는 것이다.
순결해야하는 이유는?
우리의 결혼 생활이 나아가서 하나님과 우리와의 관계를 상징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제사장의 딸은 더욱 조심하여야한다. 잘못하면 벌을 더 받는다. 옳은 처사인가?
사리분별이 가능한 경우에는 마땅히 그래야 한다.
어릴 때는 구별하는 것이 그리 옳아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그런 구별이 역효과를 낼 수도 있다.
목사나 장로의 자녀가 그럴 수 있느냐는 말이 들리지 않게 잘 키우는 것이 좋겠지만 너무 강조해서도 안된다고 생각한다.
대제사장은 제사장보다 더 엄격한 규정이 적용되었다. 예를 든다면?
부모의 상도 치르지 말라(11)
대제사장이 제사장보다 다른 점은 무엇인가?
기름부음을 받고, 예복을 입은 점(10).
하나님과 가까운 정도에 따라 규정이 더 엄격해 지는 것을 볼 수 있다.
스스로 하나님과 가깝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하나님을 아는 그 만큼 더 하나님 앞에서 깨끗한 삶을 살도록 노력해야 한다.
대제사장은 부모의 상도 치를 수 없다. 이것은 너무 비인간적이거나 몰인정한 처사가 아닌가?
적어도 대제사장은 인간적이 되기 전에 먼저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이라는 것을 기억해야한다.
백성을 대신해서 하나님을 섬기는 일은 세상의 어떤 일과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한 일이다.
우리 목사님의 부친이 위독해서 수요일 예배시간이 다가오는데도 목사님께서 부친 곁에 머물러 있으니 예배 시간에 목사가 여기 있으면 되느냐고 억지로 쫓아낸 부친의 모습이 생각난다.
대제사장의 아내는 순결한 처녀이어야한다. 제사장의 경우보다 더 엄격한가? 굳이 그럴 필요는 없을 것 같다. 왜 그럴까?
어차피 제사장 중에서 대제사장이 되는 법이니까.
다시 말하면 총각으로 대제사장이 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라고 생각된다.
이런 규정을 통해서 강조하는 것은 대제사장의 결혼이 아니라 흠이 없는 가정생활을 영위해야한다는
뜻이다.
원만하고 아름다운 가정을 이루는 기초가 흠없는 처녀와의 결혼일 것이다.
성도들은 육체적인 순결에도 노력해야한다.
그것이 믿음을
바탕으로 하는 가정의 기초가 되기 때문이다. 물론 남자의 순결도 마찬가지다.
장애자를 이렇게 차별해도 되나(17-21)?
인격적인 차별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직분에 대한 성결함을 강조하는 의미이다.
다른 일, 즉 먹는 것으로는 차별하지 않는다(22).
제사장이라는 직분을 그만큼 소중하게 여기라는 뜻일 뿐이다.
한국 교회가 현재 어려움에 처한 원인이 이것과 관련이 있다.
공부 잘하고 똑똑한 아들은 법대, 상대 보내고, 실력이 못한 아들은 신학교에 보낸 결과가 교회의 질적 저하를 초래한 것이다.
가장 좋은 것을 하나님께 드려야한다는 것과 일맥상통한 것으로 보아야 한다.
참고로 '장애자'의 상대어는 '정상인'이 아니라 '비장애인'이라고 한다. 장애인도 동등한 인격을 가진 자로 대하자는 뜻의 좋은 표현이다.
국가 간에도 그렇고 정당간에도 마찬가지인데 대화를 할 때 특히 신경을 쓰는 것이 상대방에서 대화의 상대자가 누구냐라는 것이다.
상대는 장관급인데 이쪽에서 국가 원수가 나간다는 것은 굴욕적이라고 보는 것이다. 본문과 무슨 상관이 있는 말인가?
거룩한 하나님을 상대로 하는 제사장은 거룩해야한다.
억지로라도 거룩해야 한다.
목사는 영적인 아버지인가?
어떤 목회자가 회의 석상에서 그리고 설교 중에 자기 자신을
“영적인 아버지”라는 주장을 하고 있는데, 과연 사람에게 (개신교 목사에게) 영적인 아버지라는 표현을 적용하는 것이 가능한
것인가요?
영적인 지도자라면 몰라도 영적인 아버지라는 표현이 자꾸 맘에 걸립니다.
성경에 “영적인 아버지”라는 표현은 단 한번 나오더군요.
“우리를 낳아준 아버지가 견책해도 우리가 그를 존경한다면 영적인 아버지께 복종하여 살아야 한다는 것은 더욱 당연한 일이 아니겠습니까?”(히브리서 12:9 - 공동번역)
“또 우리 육신의 아버지가 우리를 징계하여도 공경하였거든 하물며 모든 영의 아버지께 더욱 복종하며 살려 하지 않겠느냐”(히브리서 12:9 - 개역개정)
[답변]
우선
그 목사님께서 어떤 구체적인 상황에서 그 말씀을 하셨는지 설명이 안 되어 있는데다, 또 어떤 의도로 그런 말씀을 하셨는지 본인이
아닌 이상 정확하게 알기는 힘듭니다. 그러나 질문자님께서도 이미 생각해 본대로 성경에 나타난 의미에 따라 과연 그렇게 주장해도
합당한지 아닌지는 추적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우선
히브리서 12:9의 영의 아버지(the Father of spirits)는 바로 하나님을 가리킵니다.
따라서 목사님이 이런
의미로는 결코 그 말을 사용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혹시라도 그 목사님이 이 말씀의 뜻처럼 교인들에게 어떤 징벌을 가하면서 하나님
대신에 벌을 주는 것이라는 뜻으로 사용했다면 정말 큰 일입니다.
대신에 목사님은 아마도 바울 사도가 고린도 교회에 쓴 편지에서 “그리스도 안에서 일만 스승이 있으되 아비는 많지 아니하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복음으로써 내가 너희를 낳았음이라”(고전 4:15)고 한 말씀을 염두에 두고 한 말씀인 것 같습니다.
바울은 사실상 자기를 고린도 교회 교인들에게 “영적인 아버지”가 된다고 말한 셈입니다.
당시
고린도 교회는 네 개의 당파(1;12)가 있을 정도로 분쟁이 심했습니다. 성도들을 실질적으로 양육하는 이는 하나님이신데(3:7)
하나님의 사역자에 불과한 인간 지도자를 추종하고 경배했었습니다. 아직 영적 분별력이 미숙한데다 인간적인 이기심과 시기심이
작용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영적 성장의 진정한 주관자는 하나님이시고 당파의 주역이 된 자신과 아볼로는 단지 그분의
종이란 사실을 강조했습니다.(3:8,9)
이어서
간곡한 어조로 인간적인 교만과 분파주의를 버리고 화합하여 일치될 것을 권합니다.(4:1-21) 그런데 자신이 다른 지도자들과는
근본적으로 차이가 있는 입장에서 그 권고를 하고 있음을 분명히 밝히기 위해 “영적인 아버지”라는 표현을 사용했습니다. 그러나
고린도 교회의 설립자(교회를 낳은 아버지)인 자신의 위치와 특권을 강조하기 위한 뜻이 아니라 부성애적 사랑에 바탕을 둔
표현이었습니다.
바울이 “일만
스승”과 “많지 않는 아비”를 대비하고 있음에 주목해야 합니다. 즉 말씀을 교리에 비추어 가르치기만 하는 목회자는 얼마든지 많지만
정말 아비의 심정으로 성도의 유익만을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희생하며 한 사람씩 따뜻하게 참 사랑으로 섬기는 목자는 많지 않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요한복음 10장에 예로든 것 같은 선한 목자는 바울 당시나 지금이나 아주 드문가 봅니다.
그렇다고
바울이 자신을 스스로 선한 목자라고 높이는 표현은 더더욱 아닙니다. 지금 서로 교만해지고 시기심으로 분쟁에 휩싸인 고린도
교인들의 상태가 너무 안타까워 정말 아버지의 심정으로 간절하게 권한다는 뜻입니다. 감정적 동정이나 율법적 훈계와는 거리가 먼
권면입니다. 그 바탕에는 아주 따끔한 질책과 너무나 넓은 자비가 동시에 깔려 있습니다. 실제 아들에게 하는 아버지의 훈계의 성격에
비추어 보면 바울이 왜 이런 표현을 사용했는지 짐작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럼 이제 답변은 다 나온 셈입니다. 정말 바울과 같은 입장이라면 그런 표현을 써도 되겠습니다만,
그래도 고린도 교회의 예처럼 아주 특별한 경우에 한해서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질문 가운데 “회의석상에서 설교 중에 주장하고
있다”라는 말씀이 자꾸 신경 쓰이게 합니다. 자주 사용하여 마치 목사는 다 그렇다고 주장하거나, 스스로 자기를 높이려는 시도로
보이기 때문입니다.
“나는 선한 목자라 내가 내 양을 알고 양도 나를 아는 것이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 같으니 나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노라”(요10;14,15) 아버지는 아들을 위해서 목숨을 내어 놓습니다. 또
아비는 아들을 알고 아들도 아비를 아는 것은 너무나 당연합니다. 구태여 서로 아비나 아들이라고 주장할 이유가 하등 없습니다.
영적인 권위는 지도자가 스스로 세우는 것이 아니라 성도들이 진심으로 존경하고 따를 때에 자연적으로 세워지는 법입니다.
자신은
모든 것을 희생하더라도 오직 복음의 진리를 정확하게 가르치겠다는 헌신을, 또 성도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라고 권하는
열정과 정말로 자기 아들 같이 사랑하고 섬기겠다는 심정을 강조하기 위해 목사님들이 “영적인 아버지”라고 표현하는 경우는 있을
것입니다. 진짜 진짜로 –강조했습니다- 그렇다면 크게 문제 삼을 일은 아니라고 봅니다.
목사 때문에 예수를 믿게 되었다. 복음을 전한 전도자의 입장이 아니라 구원을 받는데 결정적인 역할과 힘을 발휘했다. 자기가 아니었다면 결코 믿을 수 없었다. 그래서 문자 그대로 복음을 잉태케 해 준 아버지다. 바울의 표현대로 하자면 복음의 씨를 심고 물을 주는 정도가 아니라, 아예 자라게 했고 구원 받을 믿음을 실제로 목사가 심어 주었다.
목사의 영적인 권위는 신성불가침이며 어느 누구에게도 제약 받을 수 없다. 하나님을 잘 섬기려면 목사부터 잘 섬겨야 한다. 그래야 하나님의 축복도 많이 받는다. 하나님을 경배하기 이전에 인간 목사를 경배해야 한다.
그래서 앞으로의 영적 지도와 권면과 징계를, 성경 말씀을 가르침에서 뿐만 아니라 모든 교회 일을 수행함에 있어서, 아버지의 명령으로 알아서 절대 순종해야 한다. 나아가 목사가 하는 어떤 일에도 반대나 불만이 있어선 안 된다. 그리고 정말 아들이 아버지를 섬기듯이 모든 면에서 목사를 정성스레 섬겨야 한다.
한마디로 바울은 하나님의 종의 입장에서 오직 성도의 유익을 위해 섬기고 또 성도를 하나님 안에서 거룩하게 세우려는 애끓는 심정에서 자신을 그렇게 표현했습니다. 그에게는 말씀으로 가르치거나 사랑으로 섬기거나 간에 정말 혼자서 일만 스승을 감당하고도 남을 열정과 정성과 진심이 있었습니다.
____________________________ 레위기 20장 / 반드시 죽어야 할 죄(2절)
03-31-2023(금) 사순절 제33일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또 이르라 그가 이스라엘 자손이든지 이스라엘에 거류하는 거류민이든지 그의 자식을 몰렉에게 주면 반드시 죽이되 그 지방 사람이 돌로 칠 것이요.
Say to the Israelites: 'Any Israelite or any alien
living in Israel who gives any of his children to Molech must be put to
death. The people of the community are to stone him.
20:1-5. 몰렉 숭배에 대한 형벌
20:7-8. 거룩하라는 명령
20:6, 9-21, 27. 박수를 추종하는 자, 부모를 저주하는 자, 또는 여러가지 음행에 대한 형벌
20:22-26. 다른 국민과 달리 거룩하라는 명령
죽어 마땅한 사람이 되지 말고
살아 마땅한 삶이 됩시다!
죽어야 할 죄를 짓지 말고
살아야 할 거룩을 회복하자!
몰렉(Molech)
몰록(Μόλοχ, מֹלֶךְ)은 고대 근동의 신이다.
가나안과 페니키아에서 숭배되었으며, 북아프리카 및 레반트 문화와 연관이 있다.
바빌로니아 지방에서는 명계의 왕으로, 가나안에서는 태양과 천곡의 신으로 알려졌다.
고대 가나안 주민들이 섬기던 신 중의 하나로서, 그를 예배하는 데 어린이를 희생제물로 바치는 일 때문에 이스라엘 사람들은 그를 특별히 무섭게 여겼다(레 20:2, 렘 32:35).
몰록(왕상 11:7)이란 이름의 꼴은 옛 그리스어 번역본을 따른 것이다.
본디 이 신은 '멜렉'(임금)이라고 불렸는데(밀곰), 히브리 본문을 전해 내려오던 유다 사람들이 이 이름의 자음에다 부끄러움을 뜻하는 히브리 낱말('보셋')의 모음을 붙여서 '몰렉'(레 18:21)이라 부르게 되었다.
이로써 이스라엘의 '임금'이신 여호와(시 93:1, 97:1, 99:1, 사 52:7)에서
'여호와 또는 하나님이 통치하신다'고 옮긴 문장은 '여호와 또는 하나님이 임금이시다'라는 뜻으로 이해할 수도 있다)를 셈족
지역에서 지하 세력들 특히 불의 주로 널리 알려져 있는 신과 혼동하지 않게 하려고 한 듯하다.
몰록 종교 의식은 특히 주전
8-7세기에 이스라엘에도 들어왔다.
사람들은 정해진 예식을 거행하여 제물을 몰록의 통치 영역인 불에 바침으로써 이 신을 섬겼다.
아이들도 몰록에게 제물로 바쳤다(레 18:21, 신 18:10, 왕하 16:3, 23:10, 렘 7:31, 32:35, 겔 16:20-22).
‘몰록’은 암몬족의 신인데 '그모스'와 마찬가지로 어린아이들을 인신제사로 바쳤던 신으로서 제사 의식 중에는 어린아이를 불 위로 걷게 하거나, 또는 불에 달군 기둥 위를 걷게 하는 잔인한 의식이 있었습니다.
유대의 자료에는 ‘이 혐오스러운 종교적 관행은 매우 무시무시하게 진행되었음'을 기록하였습니다.
카르타고의 ‘타니트 신전’은 이 신을 섬기는 신전이었는데, 신전 안에서 제물로 바친 새끼 양이나, 염소의 제물 보다 많은, 어린 아이들을 태운 뼈를 담은 항아리가 출토되기도 하였습니다.
신접한 자와 박수
(오보 & 이드오니)אוֹב אוֹ יִדְּעֹנִי
신명기 18장 9-14절은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거든 가나안 족속들의 가증한 행위를 본 받지 말 것을 강조하는 금령을 선포하고 있다.
이 중에 10-11절은 아래와 같이 아홉 가지 부류의 사람들을 제시하고 있다.
“10 그의 아들이나 딸을 불 가운데로 지나게 하는 자나 점쟁이나 길흉을 말하는 자나 요술하는 자나 무당이나 11 진언자나 신접자나 박수나 초혼자를 너희 가운데에 용납하지 말라”
여기에
언급된 아홉 가지 부류의 사람들 중에 “신접자”와 “박수”가 레위기 19:31; 20:6에도 언급되어 있다.
“신접자”와 “박수”가
누구이며 어떠한 종교사적 배경이 있길래 디아스포라 공동체에서 엄금하고 있는지, 그리고 신명기에 기명된 아홉 가지 사람들 중에 유독
이 두 부류의 사람들만 레위기에 언급되어 있는지 궁금하다.
더 나아가 오늘날 한국의 전통종교들에 속하는 무속에 대해서 지극히
혐오하고 금기시하는 기독교인들의 태도는 얼마나 성서적인가를 물어 보려고 한다.
히브리어 원어로 “신접자(神接者)”는 אוֹב(오브)이고 “박수”는 יִדְּעֹנִי (이드오니)이다.
신접자(神接者) 178. אוֹב
발음 [ ’ôwb ]
어원 / 복수 אוֹבוֹת, 1과 동형에서 유래[아버지라는 말을 떠듬거리며 말한다는 점에서 유래된 것 같다]
관련 성경 / 신접한 자(레 19:31, 삼상 28:3, 사 29:4), 신 접자(신 18:11)
구약 성경 / 17회 사용
박수. 3049.
יִדְּעֹנִי
스트롱번호3049
발음 [ yiddeʽônîy ]
어원 / 3045에서 유래
관련 성경 / 박수(레 19:31, 삼상 28:3, 대하 33:6), 마술사(사 8:19), 요술(사 19:3)
구약 성경 /11회 사용
* 3045. יָדַע
발음 / 야다 [ yâdaʽ ]
"나를 위하여 신접한 여인을 찾으라"(사무엘상 28:7)
자신을 위해 기도해주고 지도해 주던 사무엘이 죽었고 의지할 자가 없다는 생각에 더욱 크게 절망한 것 같다.
사울은 제사장들을 대량 학살하는 사건(22:18, 19)으로 인하여 '우림과 둠밈'이라는 계시 수단을 자신의 경쟁자인 다윗에게 넘겨주고 말았다.
이 때는 영적으로 어두운 때였다.
"선지자로도 꿈으로도...대답지 아니하는 때"였다.
이러한 계시(啓示)의 단절은 악한 인물 또는 악한 시대에 대한 징벌의 성격을 띠는 것으로서(6절; 3:1), 여기서는 곧 하나님께서 사울과 함께 하지 아니하신다는 사실을 확증해 주는 객관적 증거이다.
이러한 때 일수록 하나님의 신앙을 회복하는 기회로 삼았어야 하는데 사울은 신접한 여인을 찾아 나눔으로 자신을 더욱 나락으로 떨어트렸다.
"나를 위하여 신접한 여인을 찾으라"
이같은 사울의 명령은 하나님께서 금하시고(레 19:31), 또한 사울 자신이 세워놓은 규범(3절)을 스스로 무너뜨리는 것이었다.
아무튼 이것은 하나님께로부터의 계시가 완전히 단절된 상황에서, 비신앙적 인물인 사울이 필연적으로 택할 수 밖에 없는 방법이었다. 한편 여기서 '신접한'은 문자적으로 '혼령을 다스리는'이란 의미로, 곧 '신접(新接) 한 여인'이란 죽은 자의 혼령을 통해 미래의 일을 알아보는 자를 가리킨다(레 19:31).
사울이 접신녀(接神女)를 찾아가서 문의한 이 사건은, 사울의 집권 초기에 그가 이스라엘 사회에서 모든 박수와 무당들을 쫓아낸 것(3절)이 그 자신의 확고한 신념에 따른 행동이 아니었음을 증명해 준다.
사울은 (1) 하나님의 계명(출 22:18; 레 19:31; 20:27; 신 18:10-14)을 충실히 지켜야 된다는 신념이나,
(2) 또는 초혼술(超魂術)은 철저하게 미신적이어서 신뢰의 대상이 못된다는 신념 등에 따라 박수와 무당을 축출한 것이 아니었던 것이다. 사울은 다만 이스라엘 사회에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했던 사무엘과, 그리고 여호와 하나님을 향한 순수한 신앙으로 막 발돋음해 가던(7:2, 5-11) 이스라엘 백성들의 환심을 사기 위한 인간적 목적에 따라 그같은 정책을 시행했다고 볼 수 있다.
한편, '엔돌'(Endor)은 '거주의 샘'이란 뜻이다.
그 위치는 다볼 산(Mt. Dabor) 남쪽 약 6.4km, 소(小) 헬몬 산 북쪽 경사 지대이다.
그리고 '수넴'으로부터는 북동쪽으로 약 6~7km 정도의 지점으로 추정된다.
오늘날에도 소 헬몬산 경사 지대에 '엔돌'이란 마을이 있는데(수 17:11), 무당들이 거처하기에 좋은 많은 동굴들이 있다고 한다(Robinson, Thompson, Stanley).
1. 사울이...변장하고
옷은 곧 그 사람의 신분을 상징한다는 점(18:4)에서, 사울은 왕의 표시가 되는 일체의 복장과 장식물을 제거하고 완전한 평민의 복장을 취했던 것 같다.
즉 아무도 자신을 이스라엘의 왕 사울로 알아보지 못하도록 변장을 했던 것이다.
변장한 채 엔돌의 신접한 영인을 찾아가는 사울의 모습에서 그의 철저한 타락상을 볼 수 있다.
한편 미신적(迷信的)인 발상에서 무당이나 점장이를 찾아가는 것은 하나님께서 언급하신 바 있는 영적 간음 행위이다(레 19:31; 신 18:9-14).
그러므로 성도들은 급박한 상황이 닥칠 때일수록 더욱 하나님을 굳게 의지하고 성경 말씀에 근거한 상담과 기도에 힘쓰는 등 끝까지 신앙적인 자세를 지켜야만 할 것이다.
신접한 여인이 사울의 청을 거절하자, 사울은 자신이 복술 행위를 적발키 위해 찾아온 싸람이 결코 아님을 밝힘으로써 그 무녀를 안심시킨다.
그러나 사울은 "여호와께서 사시거니와"이라며 자신의 목적을 달성키 위해 하나님께서 가중히 여기시는 복술 행위를 여호와의 이름으로 요청하는 등 그의 완악해지고 굳은 심령의 타락 상태를 여실히 드러내고 있다.
2. 신접한 술법으로
히브리 원문대로 번역한다면 '유령' 혹은 '그것을 불러내기 위한 도구'를 의미한다(3절).
한편 '술법'은 '점을 치다'란 의미가 있는 동사에서 파생된 말로(겔 21:29; 미 3:6), 바로 이 동사에서 본서 6:2에서도 나타나는 '복술자'(卜術者)라는 단어가 나왔다(신 18:10; 사 3:2; 슥 10:2).
따라서 사울은 지금 신접한 여인에게 '복술'(卜術) 행위를 요청한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복술 행위는 하나님께 가증한 행위로서, 율법에서 철저히 금지시킨 행위였다(신 18:10-14; 레 19:31; 20:27).
3. 사람을 불러 올리라
죽은 자의 영혼을 불러내는 행위를 가리킨다.
11절 주석참조.신접한 자와 박수 - 3절; 레 19:31 주석 참조.
•신접한 여인의 행위
1. "내가 누구를...불러 올리랴?"
이같은 무녀의 질문은 고대 히브리인들의 음부관을 반영하고 있다. 즉 고대 히브리인들은 사람이 죽으면
경건한 자나 불경건한 자를 막론하고 일단 모두 '스울'(Sheol) 즉 '음부'(陰部)라고 부르는 지하 세계로 들어가 휴식을 취한다고 보았다. 아마도 이러한 생각은 시체가 땅 속에 묻히는 것과 관련되어 파생된 단순한 개념인 듯하다(창 27:35). 그러나 계시(啓示)가 점진 완료된 신약 시대의 관점에서 엄밀히 말하면, 죽은 자 중 성도는 낙원으로 가 위로와 안식을 누리고, 불신자는 지옥으로가 고통을 당하게 되는 것이지, 어떤자도 음부에서 단순한 휴식을 취하지는 않는다(눅 16:19-31).
반면 고대 히브리인들은 하나님이나 천사는 땅 위의 어느 공간에 거주하고 있는 것으로 생각했다. 그러므로 죽은 자의 세계 또는 죽은 자의 혼과 교통할 수 있다고 믿는 접신녀(接神女)는 '스올'(음부)로부터 죽은 자의 혼(魂)을 불러 올릴 수도 있다고 한 것이다.
2. 여인이 사무엘을 보고
이 접신녀(接神女)가 실제로 사무엘을 보았는지에 대한 해석은 구구하다. 그러나 그 해석은 크게 다음 몇 가지로 분류된다.
(1) 실제로 사무엘의 혼이 임한 것을 무녀가 보았다는 견해(Josephus, Klein, Keil, Lange)
이 견해는 여러가지 맹점이 있다. 첫째, 하나님께서 성도 특히 선지자의 영혼을 무당의 술수에 이용되도록 하실 리 없으며 둘째, 혼이 땅에서 올라왔다는 13절의 언급은 성도들의 영혼은 하늘로 올라간다는(전 3:21; 눅 16:22, 23) 성경적 개념과는 배치되며, 오히려 접신술(接神術) 등과 같은 거짓 사상과 합치된다(사 29;4)는 점 등에서 잘못됐음이 분명하다.
(2) 거짓 혼이 사무엘의 혼인양 행세하면서 나타난 것을 보았다는 견해(Luther, Calvin, M. Henry, Grotius, Patrick)
이 견해가 가장 타당한 것 같다. 실제 사무엘의 혼이 아닌 사무엘을 가장한 사단의 어떤 형상을 봤음이 분명하다.
(3) 본문의 '사무엘' 앞에 '이름'이라는 단어가 필사자의 실수로 탈락됐을 것으로 간주하고, 그 무녀(巫女)는 사무엘의 어떤 형상을 본 것이 아니라 다만 사울의 입에서 나온 '사무엘'이라는 '이름'을 들었을 뿐이라는 견해(Hertzberg)
이 견해는 뚜렷한 근거 없이 원문 중 '보고'를 '듣고'로 변경시켜야 되는 문제가 있다는 점에서,
(4) 그냥 아무것도 본 것이 없으나 거짓으로 본 척했을 뿐이라는 견해(Smith).
이 견해는 첫째, 12절의 '사무엘을 보고'는 무당의 말이 아닌 본서 저자의 언급이며 둘째, 영매(靈媒)등은 주관적 혹은 심리적으로 어떤 형상(혹은 환상)을 보기도 한다는 점 등에서 볼 때 타당성이 없다.
한편, 무녀가 유령같은 것을 보고 놀랐을 때, 사울이 그녀에게 "네가 무엇을 보았느냐!" 고 물은 것을 통해 그 때 사울은 아무 형상도 보지 못했음을 시사해 준다. 사실 그 무녀가 어떤 형상을 본 것은 초자연적 혹은 심리적 현상이었기 때문에, 사울이 아무것도 못본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또한 여기 사울의 이 질문은 사울이 무당이 위치했던 곳과 어느 정도 격리되어 있었음을 말해 준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사울과 무당이 각기 다른 방에 있었다고는 볼 수 없다.
3. 내가 신이 땅에서 올라오는 것을 보았나이다
여기의 '신'은 형태상으로는 복수이나 단수로 이해해야 할 것이다. 즉 그 무녀는 자기가 본 어떤 형상에 대한 자신의 두려움을 반영하기 위하여 한 혼의 형상만을 보았으면서도, 그것을 복수 곧 '장엄 복수'로 표현한 것이다. 그렇다면 여기 '신'이란 단어가 갖는 의미는 무엇일까? 이 '신'은 항상 어떤 '신'(god) 장체만을 의미치 의미치 않는다. 즉 이말은 '신적인 존재' 곧 '영'(靈)을 의미하기도 한다는 점에서, 어떤 '영적인 존재' 곧 '유령'을 가리킨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 사무엘 유령의 정체
한편 '사무엘을 불러 올리라'는 사울의 요청(11절)으로 접신녀가 불러 올린 사무엘에 대한 해석은 매우 어려운 난제 중 하나임에 틀림없다. 특히, "사무엘이 사울에게 이르되"라는 표현처럼 성경 기자는 여기서 마치 실제의 사무엘이 등장하여 말하는 것처럼 기술하고 있다. 그러나 실상에 있어서 성경 기자는, 사무엘을 흉내내어 나타났고 그 이름을 빙자하여 말하고 있는 악령을 편의상 간결하게 '사무엘'이라는 말로 표현하고 있을 뿐이다. 이때 악령은 초혼술(招魂術)에서 흔히 볼 수 있듯이, 영매(靈媒)인 접신녀(接神女)의 입을 통해서 말하고 있었다.
아무튼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우리는 접신녀와 초혼술(招魂術)의 정체를 바로 이해할 필요가 있다. 먼저 초혼술을 행사하는 접신자는 우선 강신(降神)이라고 하는 특수한 심령적 경험을 통과한 사람으로서, 죽은 자위 혼을 불러 일으켜 현실의 인간과 의사 소통을 할 수 있도록 하는 매개체의 역할을 하게 된다. 이것이 소위 초혼술(招魂術)이라고 불리우는 일종의 이교적 사술(邪術)형태이다. 그러나 초혼술은 다음과 같은 성경적 근거에서 악령의 역사이며, 사단의 속임수이다.
(1) 초혼 자체가 성립될 수 없다. 즉 성경은 사람이 죽게 되면 그 혼은 즉시 지상의 세계와 차원이 다른 처소(천국 혹은 지옥)로 옮겨지고 지상의 세계와 교통하지 못하는 것으로 말하고 있다(눅 16:19-31; 23:43; 고후 5:1). 따라서 초혼이 이루어진다면 그것은 결코 죽은 자의 혼이라 볼 수 없고, 다만 죽은 자의 혼을 가장한 사단 혹은 귀신의 역사에 불과할 뿐이다.
(2) 초혼자는 사단의 역사를 위해 동원된 도구 역할을 하는 셈이다. 한걸음 더 나아가 초혼자는 사람들로하여금 하나님과의 바른 교제를 방해하며 미혹하게 한다는 점에서 하나님의 백성들이 결코 용납해서는 안된다(신 18:10, 11). 즉 성경은 신접자, 초혼자, 무당 등을 존재 자체부터 정하고 있는 것이다(출 22:18; 레 19:31; 20:27; 신 18:10-14). 결국 이런 이유로 여기서 접신녀가 불러 올린 사무엘은 진짜 사무엘의 혼이 될 수 없다. 즉 '땅에서 올라온 그 신'은 루터(Luter)나 칼빈(Calvin)이 말한대로 사무엘의 형체를 입고 나타난 사단적 유령(곧 사단의 부림을 받은 귀신)으로 보아야 한다.그 모양이 어떠하냐 사울의 이같은 질문은, 무당이 실제로 사무엘의 형상을 보았는지의 여부를 확인키 위한 것이다. 따라서 이때 사울은 무당이 사무엘을 봤다는 언급에 대하여 일말의 의심을 갖고 있었던 것 같다.
아무튼, 사울은 자기 앞에 나타난 악령을 진짜 사무엘의 영으로 착각하고 그에 대한 존경의 표시로 무릎을 꿇고 앉아 있었던 것이다(14절). 그러다가 자기가 기대하던 해결책은 얻지 못하고 대신 악령으로부터 자신의 멸망에 대한 예언을 듣게 되자(16-19절), 그는 (1) 큰 두려움의 엄습과 (2) 육체적 탈진으로 땅바닥에 길게 엎드러지고 말았다. 이것은 하나님을 멀리 떠나 자행 자지(自行自止)하던 타락자 사울 왕이 머지 않아 비참한 종말을 맞이할 것에 대한 하나의 전조(前兆)였다.(31:1-6).
첫째,
신접술은 하나님께서 금하신 방법이다.
신명기 18:9-12,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주시는 땅에 들어가거든 너는 그
민족들의 가증한 행위를 본받지 말 것이니 그 아들이나 딸을 불 가운데로 지나게 하는 자나 복술자나 길흉을 말하는 자나 요술하는
자나 무당이나 진언자나 신접자나 박수나 초혼자를 너의 중에 용납하지 말라. 무릇 이런 일을 행하는 자는 여호와께서 가증히
여기시나니.”
둘째,
신접술로 나타난 사무엘은 사울의 경배를 받았다.
14절, “사울이 그가 사무엘인 줄 알고 그 얼굴을 땅에 대고 절하니라.”
이것은 인간에게는 합당치 않은 일이라고 본다. 그가 진짜 사무엘이었다면, 그의 발 앞에 엎드렸던 고넬료에게 일어서라고 한
베드로처럼 말하였을 것이라고 본다(행 10:25-26).
셋째,
하나님께서는 후에 사울의 그 행위를 정죄하셨다.
역대상 10:13-14, “사울의 죽은 것은 여호와께 범죄하였음이라. 저가
여호와의 말씀을 지키지 아니하고 또 신접한 자에게 가르치기를 청하고 여호와께 묻지 아니하였으므로 여호와께서 저를 죽이시고 그
나라를 이새의 아들 다윗에게 돌리셨더라.”
넷째,
신접술에 의해 올라왔다고 하는 사무엘이라는 영은 땅에서 올라왔다.
13절, “여인이 사울에게 이르되 내가 신이 땅에서 올라오는
것을 보았나이다.”
그러나 의인은 하늘의 안식에 들어간다. 전도서 3:20-21, “다 흙으로 말미암았으므로 다 흙으로 돌아가나니
다 한 곳으로 가거니와 인생의 혼은 위로 올라가고 짐승의 혼은 아래 곧 땅으로 내려가는 줄을 누가 알랴.” 시편 73:24,
“주의 교훈으로 나를 인도하시고 후에는 영광으로 나를 영접하시리니.” 구약 성도도 죽은 후에 영광에 들어갔다. 또 하늘에 올라간
의인의 영은 다시 땅으로 내려올 수 없고(눅 16:26), 또 하나님께서 악령의 활동인 신접술에 의해 사무엘을 땅으로 내려보내실
리도 없다.
다섯째,
악령도 강한 추측으로 어느 정도 미래를 예측하며 예견하기도 한다.
무당들도 신기한 일을 하며 어느 정도 미래를 예측하며
예견한다. 마태복음 24:11, [종말의 징조들 중에] “거짓 선지자가 많이 일어나 많은 사람을 미혹하게 하겠으며.”
[20-25절] 사울이 갑자기 땅에 온전히 엎드러지니 이는 사무엘의 말을 인하여 심히 두려워함이요 또 그 기력이 진하였으니 이는 그가 종일 종야에 식물을 먹지 못하였음이라. 그 여인이 사울에게 이르러 그 심히 고통함을 보고 그에게 이르되 여종이 왕의 말씀을 듣고 나의 생명을 아끼지 아니하고 왕이 내게 이르신 말씀을 청종하였사오니 그런즉 청컨대 이제 여종의 말을 들으사 나로 왕의 앞에 한 조각 떡을 드리게 하시고 왕은 잡수시고 길 가실 때에 기력을 얻으소서. 사울이 거절하여 가로되 내가 먹지 아니하겠노라. 그 신하들과 여인이 강권하매 그 말을 듣고 땅에서 일어나 침상에 앉으니라. 여인의 집에 살진 송아지가 있으므로 그것을 급히 잡고 가루를 취하여 뭉쳐 무교병을 만들고 구워서 사울의 앞에와 그 신하들의 앞에 드리니 그들이 먹고 일어나서 그 밤에 가니라.
사울이 신접한 여인을 만난 것은 그를 더욱 절망케 했을 뿐 아무런 해결책이 되지 못했다. 거짓된 신비주의는 참된 해답이 아니다.
본장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우리는 범죄했을 때 하나님 앞에서 철저히 회개하고 오직 하나님의 계명에 순종해야 한다. 모든 문제의 해결은 회개에 있다. 사울에게는 철저한 회개가 없었다. 사람이 죄를 범할 수는 있으나 회개가 중요하다. 회개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하나님의 은혜이다. 물론 회개는 하나님의 계명을 순종하는 것으로 나타나야 한다. 우리는 다 부족한 자이므로 때때로 실수하고 넘어질 수 있으나 죄를 깨달을 때 그 죄를 철저히 회개하고 청산하고 하나님의 계명에 순종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것이 모든 문제의 해결책이다.
둘째로, 우리는 위기 상황에서 하나님만 의지하고 담대히 행해야 한다. 사울은
블레셋과의 전쟁에서 두려워 떨었고 철저히 회개하고 하나님을 의지하는 대신에 신접한 여인에게 찾아갔다. 죄인은 위기 상황에서
두려워 떨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는 그럴 때에 더욱 하나님을 의지해야 한다. 믿음은 위기 상황에서 빛을
발하는 법이다. 우리에게 닥친 세상의 모든 일들은 영적 전쟁과 같다. 그러나 이 전쟁에서 승리하는 길은 다른 어디에 있는 것이
아니고 오직 하나님께 있다. 우리는 오직 하나님만 의지하고 담대히 행하자.
“박수”는 한자어가 없는 순수한 우리말로서 “남자무당”이라고 정의되어 있다.
이 두 가지 용어는 אוֹב אוֹ יִדְּעֹנִי (오보 오 이드오니)라고 나란히 병접되어 함께 언급되기 때문에 그 한글번역어들을 특정하여 살펴 보기로 하자.
(오보 오 이드오니)אוֹב אוֹ יִדְּעֹנִי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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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8:11 |
레19:31 |
레20:6 |
개역 |
신접자나 박수 |
신접한 자와 박수 |
신접한 자와 박수 |
개정 |
신접자나 박수 |
신접한 자와 박수 |
접신한 자와 박수무당 |
새역 |
귀신을 불러 물어 보는 사람과 박수 |
혼백을 불러내는 여자 / 점쟁이 |
혼백을 불러내는 여자와 마법을 쓰는 사람 |
공역 |
도깨비 또는 귀신을 불러 물어 보는 자 |
죽은 사람의 혼백을 불러 내는 여인이나 점장이들 |
죽은 사람의 혼백을 불러내는 여인들과 점장이 |
천역 |
혼령이나 혼백을 불러 물어 보는 자 |
영매들과 점쟁이들 |
영매들과 점쟁이 |
NKJ |
a medium or a spiritist |
mediums and familiar spirits |
A man or a woman who is a medium, or who has familiar spirits |
NRS |
who consults ghosts or spirits |
mediums or wizards |
A man or a woman who is a medium or a wizard |
“신접자”, “귀신을 불러 물어 보는 사람”, “도깨비를 불러 물어 보는 자”, “혼령을 불러 물어 보는 자”라고 번역한 히브리어 명사 אוֹב (오브)는 성경에 17회 언급되며 오경에는 레19:31; 20:6, 27; 신18:11의 네 구절에만 나온다. 이 명사는 사무엘상서 28장에 네 차례나 언급되는데 사울이 사무엘을 불러올려달라고 אוֹב (오브)에게 부탁하는 장면에 나온다(삼상18:3, 7, 7, 8, 9). 그 אוֹב (오브)는 אֱלֹהִים (엘로힘)이 지하에서 올라오는 것을 보고 있다고 사울에게 말했다. 이로 미루어 볼 때 는 망자의 혼을 불러내는 영매였던 것 같다. 오늘날에서 이러한 행위를 하는 자를 “무당”이라고 부른다.
이 단어와 병행하는 יִדְּעֹנִי (이드오니)는 성경에 11회 언급되는데 오경에는 3회 나온다(레19:31; 20:6, 27; 신18:11; 삼상28:3, 9; 왕하21:6; 23:24; 대하33:6; 사8:19; 19:3). 위의 도표에서 보듯이 이 단어는 “박수”, “박수무당”, “점쟁이”, 마법을 쓰는 사람”, “귀신을 불러 물어 보는 자”, “혼백을 불러 물어 보는 자”, “점장이들”, “점장이”, “점쟁이들” 따위로 다양하게 번역되었다. 영역본들은 spiritist, familiar spirits, one who has familiar spirits, wizards 따위로 번역했다. 명사 יִדְּעֹנִי (이드오니)는 ‘알다’란 동사 ידע (야다)에서 파생했기에 남들이 모르는 어떤 것을 알고 있다고 알려진 데에서 비롯한 용어였을 것이다. 이 단어는 항상 אוֹב (오브)와 함께 나란히 언급되고 있다. 이로 미루어 볼 때 아마도 יִדְּעֹנִי (이드오니)는 אוֹב (오브)의 단짝이거나 배우자였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우리말로 ‘무당’의 남자 동료를 ‘박수’라고 부르는 관습이 이에 해당할 수 있을 것 같다.
박수는
굿거리에 직접 나서서 의례를 집행하며 춤과 노래를 부르기도 하지만 굿거리에 직접 나서지는 않고 여무(女巫)가 춤을 추는 동안
3현 6각을 다루는 잽이의 역할을 하기도 한다.
제정일치시대의 박수는 무당과 더불어 사제권과 왕권(王權)을 지닌 권력자였다.
우리나라에서는 제정일치가 이루어졌던 시대의 단군· 동명왕· 박혁거세· 남해 등을 박수로 간주한다.
가나안의 종교문화에서 권력자로
군림하던 샤먼으로서의 무당과 박수는 정교가 분리되던 시대에 왕의 조력자로서 신전을 관리하는 관직으로 정해졌으며, 지방에서는
산당에서 일하는 무속 샤먼으로 행세했을 것이다.
이들은 신전들과 지방성소들과 산당들에서 접신하는 종교현상을 보이면서 신들이 뜻을
전달하는 일을 하였다.
또한 이들은 권력자들이나 왕들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면서 길흉을 점쳐주거나 통치를 위한 지배이데올로기를
창출하는 역할을 하기도 하였다.
성경은
국가신전과 지방성소와 산당들의 종교적 관례가 모두 거짓 신탁을 내리면서 혹세무민하는 악습을 금지하고 있다.
성경으로 말씀예배를
드리던 디아스포라 공동체는 잘못된 우상종교의 미신과 폐단을 척결하고 오로지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하여 시내산에서 주신 말씀에
의거하여 말씀공부와 말씀예배로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라는 야훼의 말씀을 진리의 도로 내세웠다.
오늘의 교회 안에 기독교인들이
은사를 받아서 말씀 없이 예언하고 길흉을 점치고 돈을 받고 축복권을 남발하는 행태들이 나타나고 있다.
이러한 이들은 기도원이라고
간판을 붙인 곳에서 성행하지만, 건전하다고 자부하는 일반교회들의 목회자들 중에서 종종 무당이나 박수처럼 신비함을 가장한 거짓신탁과
축복권을 남발하는 자들도 많이 있다.
더 나아가 정치적인 목적을 위하여 일부 정치권력자들과 야합하여 하나님을 빙자하여 말씀을
신탁처럼 내뱉고 성도들뿐만 아니라 일반인들까지도 속이는 종교인들이 근자에 기독교에서 나타나고 있다.
성경은 말씀 이외의 어떠한
신비한 행위도 교회 안에서 금지할 것을 가르치고 있다.
하나님을 빙자하고 사칭한 자에게는 무서운 징벌이 기다리고 있음을 두려워해야
한다.
‘몰록’의 우상은 소의 머리에 사람의 모습을 하였는데, 두 손을 펴고 직립하여 서 있거나, 단상에 걸터앉은 것도 있었으며, 그 몸과 단은 속이 비어있으며, 제전이 있을 때는 그 속에 불을 지펴서 그 몸체을 뜨겁게 달군 뒤에, 제사장은 어린아이의 아버지에게서 아이를 받아 우상의 두 손 위에 놓고 태워 죽게 하였으며, 이때 아이의 아버지에게 아이의 곡성이 들리지 않게하기 위하여 북을 울리도록 하였다고 전해집니다.
이
신을 섬기는 것에 대해 모세 시대부터 바벨론 유수 기간까지 약 900여년간 선지자들이 경고 해 왔던 기록들이 성경 곳곳에
기록되어 있으며, 특별히 출애굽 한 이스라엘 백성이 철저히 진멸하였던 가나안의 나라나 성읍들이 이러한 신들을 섬기고 있었기에
하나님의 무서운
‘진노의 심판’를 받은 것으로 기록되었습니다.
이 신에게 제사를 드렸던 곳이 후에는 죽은 짐승들의 사체를 버리고, 온갖 오물을 버리는 곳이 되어 이를 불태우는 연기가 밤낮 타오르게 되었으며, 구더기와 온갖 벌레들이 서식하고 악취가 풍기는 불쾌한 곳이 되었습니다.
< 몰렉 Molech 그림출처 US_RoninHammer>
제사지냈던 장소의 이름은 ‘게벤 힌놈’ 곧 ‘힌놈의 아들의 골짜기’란 뜻으로써 신약성경에서 예수께서 ‘지옥’ ( 헬 : gevenna 게엔나 )으로 불렀던 곳입니다.
< 레 18:21 너는 결단코 자녀를 몰렉에게 주어 불로 통과케 말아서 네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하지 말라 나는 여호와니라 >
아리러니컬 하게도 출애굽한 이스라엘은 이러한 신들을 섬겼던 가나안 민족들을 처절하고 냉정하게 응징하였던 심판의 도구가 되었었으나, 그 후손들은 오히려 그 신들을 받아들임으로써, 자신들이 처절한 심판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학자들 간에는 앞에 열거된 모든 신들이 바벨론의 니므롯 ( 담무즈 Tammuz )이 신격화되어 퍼져나간 것으로 보기도 하는데, 신들의 이름이나, 신상의 모양, 인신제사법 등이 유사하며, ‘신들의 아내들’의 명칭 또한 동일하거나, 니므롯의 아내 ‘세라미스’에게서 나온 이름들인 것을 볼 때 사단의 ‘은밀’하고 ‘통일된’ 계략들이 인류 역사 속에 얼마나 뿌리깊게 역사되어 왔는지를 성경과 역사는 알려 주고 있습니다.
< 몰렉 Molech 사진출처. boughtmearabbit>
레위기 20:1-5 / 몰렉 숭배의 죄
머리는 소의 형상, 몸은 사람의 형상
1.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일러 가라사대
2.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또 이르라 무릇 그가 이스라엘 자손이든지 이스라엘에 우거한 타국인이든지 그 자식을 몰렉에게 주거든 반드시 죽이되 그 지방 사람이 돌로 칠 것이요.
3 나도 그 사람에게 진노하여 그를 그 백성 중에서 끊으리니 이는 그가 그 자식을 몰렉에게 주어서 내 성소를 더럽히고 내 성호를 욕되게 하였음이라.
4. 그가 그 자식을 몰렉에게 주는 것을 그 지방 사람이 못본체하고 그를 죽이지 아니하면
5. 내가 그 사람과 그 권속에게 진노하여 그와 무릇 그를 본받아 몰렉을 음란히 섬기는 모든 사람을 그 백성 중에서 끊으리라 >
레위기 20:6-8 / 접신자를 따르는 자의 죄(신접자, 오보트, 박수 이데온)
죽은 자의 신을 불러내어 미래를 알아내는 힘
영매 즉 죽은 자의 혼을 사용한다.
신명기 18:9-11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주시는 땅에 들어가거든 너는 그 민족들의 가증한 행위를 본받지 말 것이니.
그 아들이나 딸을 불 가운데로 지나게 하는 자나 복술자나 길흉을 말하는 자나 요술하는 자나 무당이나.
진언자나 신접자나 박수나 초혼자를 너의 중에 용납하지 말라.
레위기 20:9 / 부모를 저주하는 죄
부모는 하나님의 대리자로 주셨다.
에베소서 6:1-2
자녀들아 너희 부모를 주 안에서 순종하라 이것이 옳으니라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라 이것이 약속 있는 첫계명이니.
옳으니라 - 자연스럽다, 자연법
순종하라 - 내적인 자세
공경하라 - 외적인 자세
약속 있는 첫 계명 - 신적 계명
3. 이는 네가 잘 되고 땅에서 장수하리라.
유대인의 경영자는 직원을 선택할 때 먼저 부모와 인터뷰를 진행한다.
먼저 부모와의 관계가 중요하다고 한다.
레위기 20:10-
로마서 12:1-2
-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
-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1. 본문이 언급하는 죄의 종류를 크게 나눈다면 몇 가지인가?
우상숭배, 성범죄 두 가지로 대별할 수 있다.
빠뜨리기 쉬운 죽을 죄가 한 가지 더 있다.
무엇일까?
그것은 범죄행위를 방관하는 죄이다(4).
당연히 말해야하고 행동해야할 때 말하지 않고 행동하지 않는 것도 사형에 해당하는 죄이다.
2. 몰렉은 암몬족의 신으로 머리는 황소이며 몸통은 사람인 청동우상이다. 밑에서 불을 때면 뜨거워진 팔에 유아를 얹어서 죽게하는 방식으로 섬겼다고 한다. 이와 관련해서 죽어야할 자는 어떤 자들인가?
몰렉에게 자식을 주는 자와 그것을 방관하는 자.
현대판 몰렉은 무엇일까?
몰렉보다 더욱 잔인한 우상은 어쩌면 돈이다.
돈 때문에 남편이나 아내를, 혹은 자녀나 부모를 죽이는 일이 가끔 보이는 것이 우리 사회이다.
말씀대로 우리 이웃이 그렇게 하면 돌로 쳐야 하나?
그렇게 죽어야할 사람이 얼마나 될까?
구약의 율법을 지금 우리가 문자 그대로 시행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3. 몰렉에게 자녀를 주는 것이 어떻게 성소를 더럽히고 하나님의 거룩한 이름을 더럽히는 것이 되나?
이스라엘의 자녀는 곧 하나님의 자녀이며 하나님의 자녀를 마음대로 다른 곳에 팔아먹는다는 것은 곧 하나님을 무시하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할아버지 밥그릇을 허락도 없이 덜어서 자녀에게 주면 노발대발하실 것이다. 밥 몇 숟가락이 아까워서가 아니다.
4. 그 지방 사람이 몰렉숭배자를 돌로 쳐서 심판을 하면 하나님도 그를 백성 중에서 끊으리라고 말씀하신다.
사람들이 나서서 심판하면 하나님은 좀 빠지셔야하는 것 아닌가?
사람들의 심판과 상관없이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심판이 있다는 말씀이다. 사람들이 돌로 치거나 치지 않거나 하나님의 심판이 있다. 결국 사람들의 심판이 진짜 심판이 아니라 하나님의 심판이 진짜 심판이다. 하나님의 심판에 사람들이 동조하는 것일 뿐이다.
5. 신접한 자, 박수를 추종하는 자를 하나님께서 싫어하시는 이유가 무엇인가?
음란한 짓이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우상숭배는 두 가지 측면에서 간음이다. 1) 인간적인 측면에서 보면 이스라엘이 다른 신들을 그렇게 쉽게 추종한 것은 그런 신들을 섬기는 과정이 음란한 탓이다. 물론 본인들은 그것을 결코 음란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예술? 사랑? 자유? 라고 말하겠지만 실상은 음란이다. 2) 영적인 측면에서 보면 하나님과 맺은 관계를 파기하는 것이며 곧 하나님의 사랑을 배신하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6. 여호수아를 통해서 가나안 주민을 전멸시키시는 이유는 극심한 우상숭배 때문이었다. 사방에 우상이 널려 있는 상태에서 이스라엘 백성만 유독 그런 행위에 물들지 말라고 경고하시는 것이다.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명령을 하시는 이유가 무엇인가?
나는 너희를 거룩케하는 여호와니라; 너희는 특별히 내 백성이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이야 애인을 줄줄이 꿰차고 다니든 말든 손가락질도 하고 웃기도 하겠지만 내 애인이 바람피우는 것은 용납하지 못하는 것처럼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관계 때문이다. 예수 믿는 우리에게는 이런 하나님이 계신다. 그래서 구별된 삶을 살아야한다. 불행한가? 애비없이 제 마음대로 사는 고아가 부러워 보이는가?
7. 아비나 어미를 저주하는 행위는 왜 이렇게 무서운 것인가?
보이는 부모(형제)를 공경(사랑)하지 못하면 보이지 않는 하나님도 공경할 수 없기 때문이다(요일 4:20). 부모를 저주하는 것이 곧 하나님을 저주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아비를 조롱하며 어미 순종하기를 싫어하는 자의 눈은 골짜기의 까마귀에게 쪼이고 독수리 새끼에게 먹히리라 (잠 30:17)
8. 하나님께서 주시는 가장 큰 벌은 '백성 중에서 끊쳐지는 것'이다. 내 백성이 아니라는 말이다. 본문에서 이와 비슷한 다른 표현을 찾아보자.
무자하리라(21); 단순히 자식이 끊어진다는 의미 이상으로 하나님과 관계가 끊어진다는 의미이다.
9. 성범죄에 대한 10-21절의 내용은 18장에서 상세하게 언급한 내용이다. 반복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두 본문을 자세히 비교해 보자. 차이점이 있는지?
형벌에 대한 부분이 추가되어 있다; 처벌규정이 덧붙여져 있는데 예외없이 사형이다. 성범죄를 왜 이렇게 중벌에 처했을까? 성 윤리가 모든 윤리의 기초가 되기 때문이다. 이것이 무너지면 다른 것은 볼 것도 없다. 역으로 성적인 유혹이 그만큼 집요하고 매력적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위험한 것을 왜 인간에게 주셨는가? 잘 쓰면 그만큼 아름다운 것이기 때문이다. 남용, 오용이 잘못이지 약 자체가 나쁜 것은 아니다.
10. 남매 간에는 하체를 보는 것만으로도 죽을 죄가 되는가(17)? 한 집안에서 살면서 실수로 보게되면 어떡하지?
여기서 본다는 것은 성관계를 가진다는 말의 완곡하게 표현한 것일 뿐 단순하게 본다는 의미가 아니다.
11. 경도(생리)중인 여인과 동침하는 것이 죽을 죄가 되는 것은 피근원을 드러내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것은 아무도 피를 먹지말라고 하면서 피를 소중하게 여겼던 사상과 관련이 있을 것이다. 비정상적인 성관계를 금지하는 규정들은 오늘날에도 존중되어야하지만 이 문제만은 조금 다르게 다루어져야한다고 본다. 무슨 차이점이 있어서?
다른 모든 관계는 정상적인 성관계를 맺을 수 있는 관계가 아니지만 이 경우는 정상적인 부부의 관계일 수 있기 때문이다. 피에 대한 개념이 달라졌으므로 문자 그대로 적용할 일은 아니라고 본다. 윤리적인 탈선의 문제도 아니요 형법에 저촉되는 일도 아닌 종교의식상의 부정이기 때문이다. 다음과 같은 성의학자들의 의견을 존중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심리적으로 불안정할 수 있음에 주의하고 의학적으로 크게 문제가 될 것은 없으나 몸이 약해져 있는 상태이므로 조심스럽게 대해야한다는 것 같다.
12. 여기에 언급된 이런 성범죄가 사형에 해당할 정도로 심각한 범죄인 이유가 무엇일까?
가정파괴범이기 때문이다; 가정은 하나님께서 최초로 인간에게 준 제도이다. 이것을 파괴하는 것은 곧 하나님의 창조를 허무는 일이다. 강도, 강간범에게 가정파괴범이란 말로 그들의 범죄의 심각성을 지적해낸 법관은 법에도 없는 이 말을 처음 사용해서 칭찬을 많이 들었다. 가정을 허무는 것은 단순히 한 가정의 일이 아니라 사회의 근간을 흔드는 일이기 때문에 심각한 범죄행위가 된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하나님이 가장 소중하게 만든 작품을 깨뜨리는 일임을 잊지 말아야한다.
13. 예전에 유행하던 '지구를 떠나거라'는 말은 웃음을 주는 표현이었지만 잘 생각해보면 웃을 일만은 아니다. '죽어라'는 말이기 때문이다. 본문에서도 이와 같은 표현이 있다면?
땅이 토하여 내리라(22), 무자하리라(21), 백성 중에서 끊쳐지리라(18); 다 답이 될 수 있겠으나 전자가 더 좋은 답이라고 본다.
14. 하나님이 거룩한 것이야 당연하지만 그렇다고 우리까지 꼭 거룩해야 하나?
하나님의 소유가 되었기 때문이다; 소유란 자녀요 아내인 관계를 말한다. 너희로 나의 소유를 삼으려고 너희를 만민 중에서 구별하였음이라(26). 당시의 가나안 풍속과 이스라엘이 지켜야하는 성적인 자세는 너무나 다르다. 그런 삶을 살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의 뜻을 기억하자. 현대인들이라고 해서 이런 점에서는 옛날보다 더한 것도 없고 덜한 것도 없는 것 같다. 우리 주변은 예전이나 지금이나 성적으로 문란하고 우상이 들끓고 있다. 이런 가운데서 성도는 어떤 삶을 지녀야할지 의견을 나누어 보자.
15. 가나안 원주민들이 이스라엘에 의해서 철저하게 죽음을 당하거나 쫓겨나야했던 것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만 편애하셨기 때문이 아니란 증거가 본문에 있는가?
이런 계명을 어기면 이스라엘도 쫓겨나리라고 말씀하고 있는 점이다(22); 가나안 족속들이 쫓겨난 것은 결국 그들이 저지른 범죄행위의 대한 심판이다. 다른 측면에서 본다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땅을 주시려고 그랬다고 볼 수도 있지만 심판의 측면에서 보아도 틀림없는 일이다. 그렇게 될 것을 하나님께서는 미리 알고 계셨을 뿐이다(창 15:16).
16. 가나안 땅은 우리나라에 비해서도 척박한 땅이요, 농사에 적합한 비도 그리 많지 않다. 그런데 왜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라고 하는가?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이다; 상징적으로 천국을 가리킨다. '예수가 지옥에 있다면 나는 지옥으로 가겠다'는 것은 루터의 말이다. 진정으로 젖과 꿀이 흐르는 곳은 하나님이 계신 곳에서 하나님과 교제를 나누는 것이다. 가나안보다 더 비옥한 땅은 천지삐깔이다.
17. 왕처럼 귀한 분이 특별히 귀한 것을 따로 보관해놓고 보고 또 보면서 소중하게 여기는 것을 가리키는 말이 본문에 있다. 하나님에게 이스라엘이 그러했고, 또 우리가 그러하다. 우리말로는 별로 실감이 나지 않는데 어느 단어일까?
소유; 세굴라( )라는 단어인데 하나님께서 우리를 얼마나 소중한 존재로 여기시고 있는가를 잘 보여주는 단어이다. 그가 너로 인하여 기쁨을 이기지 못하여 하시며 너를 잠잠히 사랑하시며 너로 인하여 즐거이 부르며 기뻐하시리라(습 3:17b)는 표현에 가장 잘 어울리는 표현이다.
레위기 20장은 하나님께서 가증스럽게 여기시는 흉악한 범죄들에 대해서 말씀하십니다.
흉악한 범죄들은 “반드시 죽여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사랑의 하나님께서 왜 이렇게 잔인한 형벌을 강조하셨을까요?
창조주이시며, 구원자이신 여호와 하나님을 떠나, 가나안 즉 세상의 악한 풍습을 따르고, 우상을 숭배하며, 근친상간 등의 죄악을 행하는 것을 하나님께서 가증히 여기시며 용납하지 않으시기 때문입니다.
거룩(카도쉬)이란 죄악으로부터 떠나는 윤리적이고 도덕적인 문제만이 아닙니다.
거룩(카도쉬)이란 영원한 삶과 죽음의 문제라는 것을 분명하게 알려주고 있습니다.
레위기 20장에서 흉악죄를 크게 세 가지로 분류합니다.
첫째는 몰렉 숭배의 죄(20:1-5)
몰렉이란 머리는 소의 형상이며 몸은 사람의 모습을 갖춘 암몬 사람들이 섬기는 우상을 말합니다.
둘째는 접신자를 따르는 죄(20:6-8)
접신자는 무당을 말합니다.
미래가 불투명한 시대를 살아야 하는 사람들은 미래를 알고 싶어하는 강열한 욕망이 있습니다.
믿음이란 미래를 알기 때문에 믿는 것이 아니라 볼 수 없고 알 수 없지만 미래를 인도하는 주가 여호와 하나님이심을 확신하는 것입니다.
신명기 18:9-11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주시는 땅에 들어가거든 너는 그 민족들의 가증한 행위를 본받지 말 것이니.
그 아들이나 딸을 불 가운데로 지나게 하는 자나 복술자나 길흉을 말하는 자나 요술하는 자나 무당이나.
진언자나 신접자나 박수나 초혼자를 너의 중에 용납하지 말라.
셋째는 부모를 저주하는 죄(20:9)
하나님은 세상 모든 사람들에게 부모님을 하나님의 대리자로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성경인 주 안에서 부모를 순종하라(내적인 자세), 공경하라(외적인 자세)고 하셨습니다.
에베소서 6:1-2
자녀들아 너희 부모를 주 안에서 순종하라 이것이 옳으니라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라 이것이 약속 있는 첫계명이니.
부모를 공경하고 순종하는 자녀들에게 네가 잘 되고 땅에서 장수하게 될 것이라고 약속하셨습니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믿고 섬긴다는 것은 보이는 부모님을 공경하는 것에서 확인할 수 있는 가르침이라고 하겠습니다.
오늘도 진리의 말씀에 따라 거룩한 주의 백성으로 주위 사람들에게 인정받는 하루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옳으니라 - 자연스럽다, 자연법
순종하라 - 내적인 자세
공경하라 - 외적인 자세
약속 있는 첫 계명 - 신적 계명
3. 이는 네가 잘 되고 땅에서 장수하리라.
유대인의 경영자는 직원을 선택할 때 먼저 부모와 인터뷰를 진행한다.
먼저 부모와의 관계가 중요하다고 한다.
레위기 20:10-
로마서 12:1-2
하나님의 백성은 우상숭배에 대한 경고를 받습니다(2b~6).
우상숭배의 결과는 ‘백성 중에서 끊으리라’는 것입니다(3, 5, 6).
자녀를 산 채로 바치는 몰렉 제사는 가장 잔인하고 저속하고 역겨운 이방 종교를 대표하는 것입니다.
이런 금지된 제사에 대한 처벌은 돌로 치는 것입니다(2). 이것은 공동체 전체에 악한 영향을 미치는 것이었기에 엄중한 처벌을 받아야 했습니다. 만일 공동체가 이 처벌을 행하지 않는다면(4) 하나님께서 친히 그를 백성 중에서 끊어내시겠다고 하셨습니다(5).
하나님께서는 가나안 땅에서 자행되고 있는 성적인 타락에 대해 정죄하십니다(9~21).
하나님은 가정이 파괴되는 것을 원치 않으십니다.
간음은 사형입니다(10).
근친상간(11~12)의 경우도 사형으로 처벌해야 합니다.
결혼 관계를 위반하는 것은 어떠한 이유에서든 잘못입니다.
동성애 역시 생명을 위한 하나님의 창조 질서를 범하는 가증한 죄로 사형에 해당합니다(13).
14절은 아내와 장모를 함께 취하는 경우를 다루는데 여기 ‘취한다’고 한 단어는 사실상 결혼 관계를 암시하는 말입니다. 물론 이스라엘 공동체가 이런 관계를 용인하지는 않았겠지만, 가나안의 문화를 닮아가는 것을 하나님은 엄격히 금하시고, 그들을 불에 태워 죽이라고 명하신 것입니다. 수간의 경우도 하나님의 창조 질서의 위반으로 사형에 해당합니다(15~16).
하나님의 백성은 거룩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들도 가나안 사람들이 그 땅에서 토해냄을 받은 것과 같이 되고 말 것입니다(22~23).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님의 약속이 온전히 성취될 소망을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24). 그들은 자기들의 하나님과 같이 거룩해야 합니다(25~26). 그러므로 다시 한 번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삶이 거짓 종교들로부터 자신을 지켜야 하고, 그런 거치는 자들을 돌로 쳐서 제거해야 할 것을 명하십니다(27)
거짓 종교는 언제나 저속하고 역겨운 삶으로 인도합니다.
하지만 참된 종교는 거룩한 삶으로 인도합니다.
본문은 무서운 경고의 메시지입니다.
죽음의 형벌을 초래하는 죄악들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금지 규례와 함께 처벌 규정, 즉 범죄에 대한 형량이 함께 기록된 것은 단순히 처벌이 목적이 아닌, 하나님의 구원의 의지도 함께 담겨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소극적으로는 개인의 구원을 이루어갈 뿐만 아니라, 적극적으로는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악의 세력을 대항하고, 하나님 나라의 공의와 사랑을 세상에 알려야 할 의무가 있는 것입니다.
세상을 닮고 따라가는 것은 곧 죽음입니다.
__________________ 레위기 19장 / 하나님을 경외하라(14절)
03-30-2023(목) 사순절 제32일너는 귀먹은 자를 저주하지 말며 맹인 앞에 장애물을 놓지 말고 네 하나님을 경외하라 나는 여호와이니라.
'Do not curse the deaf or put a stumbling block in front of the blind, but fear your God. I am the LORD.
경외하라(3372) 야레(yârêʼ) יָרֵא
발음 / 야레[ yârêʼ ]
관련 성경 / 두렵다(창18:15, 삼하7:23, 말4:5), 두려워하다(창19:30, 신5:5, 왕하10:4), 경외하다(출1:21, 왕상1:50, 대상16:25), 놀라다(합3:2,사57:11, 시106:22), 공경하다(레19:30), 두렵게 하다(느6:13, 삼하14:15, 느6:19), 내놓다(욥32:6), 보다(사60:5), 위험하다(신8:15), 두렵다(시47:2), 엄위하다(시65:5, 66:5), 기이하다(시139:14), 지존하다(시111:9).
[명]위엄(출15:11, 시68:35), 두려움(시76:12, 사18:2)
구약 성경 / 293회 사용
하나님을 경외하라( fear your God)
하나님의 속성 중에서 피조물인 우리들이 도저히 본받을 수 없는 속성이 있는가 하면 본받을 수 있는 속성도 있습니다.
본받을 수 없는 속성은 "영원, 전지전능, 무소부재"와 같은 절대적 속성입니다.
반면에 본받을 수 있는 속성은 "사랑, 거룩, 의"와 같은 속성은 상대적 속성이라고 합니다.
따라서 너희는 서로 사랑하라, 너희는 거룩하라, 너희는 의를 행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또한 오늘의 본문에서 너희는 하나님을 경외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왜 하나님을 경외하라고 하셨을까요?
애급에서 나온 이스라엘 백성들이 정착해야 할 땅은 이방인들의 문화와 제사가 거룩한 백성들을 유혹하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레위기 19장에서 사회생활에 관한 다양한 규례들을 소개합니다.
레위기 19장에 소개된 규례들은 수직적이며 수평적 규범이 동시에 강조됩니다.
이것은 당시 고대 근동 사회와 형식적인
면에서 차이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내용 면에서는 뚜렷한 구별이 나타납니다.
고대 근동의 규범은 수직적 관계가 수평적 규범으로 전환될
때 그 중개자인 신관이나 족장이 신을 대신하여 특권을 누리게 됩니다.
따라서 이들은 사회의 규범보다 위에 있어 개인의 의지에 따라
사회를 통치합니다.
그러나 레위기 19장에 나타난 모세 율법은 수직에서 수평의 규범으로 전환할 때 중개자가 없고 모든 공동체의 구성원들이
하나님 앞에서 동일하게 취급됩니다.
이것은 오직 하나님만이 그들의 통치자임을 나타내기 위한 것입니다.
또한 규범의 내용도 개인의 의지가
아니라 정의라는 규범에 의해 제정된 것입니다.
따라서 모세 율법은 정의와 평등이라는 내용 면에서 고대 근동의 다른 규범보다 우월성을
갖습니다.
본장은 언약의 공동체 내에서 지켜야 할 인간과의 규범에 대해 네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말로 결론을 맺고 있다.
이것은
이웃에 대한 사랑 이 형식적인 것이 아니라 진심으로 우러나오는 것이어야 함을 의미한다.
왜냐하면 이웃에 대한 사랑은 곧 나에
대한 사랑이며 하나님께 대한 사랑의 표현이기 때문이다.
타인을 대할 때 마치 그리스도를 대하듯이 대하고 또한 그를 영접할 때
그리스도께 하듯이 영접하고 사랑을 베풀어야 한다.
그래서 성경은 보이는 바 형제를 사랑하지 않는 자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다고 말씀하고 있다.
본문 1절에서 2절입니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너는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에게 말하여 이르라 너희는 거룩하라 이는 나 여호와 너희 하나님이 거룩함이니라”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거룩한 삶을 요구하시는 이유는 하나님께서 거룩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본질적으로 거룩하십니다.
그에 따라 거룩하신 하나님께로부터 하나님의 백성으로 부름 받은 이스라엘의 책무는 거룩하신 하나님의 백성답게 그에 부합되는 거룩한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를 통해 하나님의 백성들은 거룩하신 하나님을 닮아 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를 위해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통해 이스라엘 온 회중에게 거룩한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지켜야할 규례를 전하게 하십니다.
관련하여 오늘 본문은 크게 3가지 종류의 규례로 나눠 볼 수 있습니다. 1절부터 8절까지는 ‘부모님과 하나님을 대하는 규례’이며,
9절부터 18절까지는 ‘이스라엘 공동체 내에서의 규례’이고, 19절부터 36절까지는 ‘개인 규례’에 관한 내용입니다. 먼저
3절입니다. “너희 각 사람은 부모를 경외하고 나의 안식일을 지키라 나는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이니라”
하나님께서 요청하신 거룩한 백성의 첫 번째 책무는 ‘부모를 경외하는 것’이었습니다. 참고로 이와 유사한 내용이 십계명중 제5계명에
‘네 부모를 공경하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두 규례 사이에는 미묘한 차이점이 있습니다. 본문의 경우 ‘경외하라’라는
동사가 쓰인 반면 십계명에서는 ‘공경하라’는 동사가 쓰였다는 점입니다. ‘경외하다’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야례’는 주로
‘하나님’을 목적어로 하는 동사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는 ‘부모’가 목적어입니다. 곧 부모의 권위가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임을
강조하며 공경의 차원을 넘어 부모를 경외하라는 뜻입니다.
아울러 거룩한 백성의 첫 번째 책무가 ‘부모를 경외하는 가정내 규례’에서부터 시작된다는 것은 ‘진정한 거룩’은 가정으로부터,
부모자녀간의 바른 관계로부터 출발해야한다는 점을 알 수 있습니다. 사실 예배당 안에서의 거룩한 모습은 그리 어렵지 않게 찾아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예배당 밖에서의 거룩, 곧 가정 내에 진정 거룩한 모습이 있는지 여부는 파악하기가 어렵습니다. 쉽게 드러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거룩한 백성의 첫째 요건으로 ‘부모를 경외하는 것’, 곧 ‘신앙 안에서 부모와 자녀가 바른
관계를 맺는 것’을 첫 번째로 요청하고 계신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요청하시는 거룩한 백성의 두 번째 책무는 ‘안식일을 지키는 것(3절)’, ‘우상 숭배하지 않는 것(4절)’, ‘화목제를
잘 이행하는 것(5-6절)’ 으로 대표되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안식일을 가리켜 ‘우리의 안식일’이
아니라 ‘나의 안식일’임을 분명하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곧 안식일이라는 시간의 주인이 하나님이심을 강조하고 계신 것입니다. 주일은
단순히 ‘휴일’이 아니라 ‘주님의 날’입니다. ‘주님을 경배하며 주님께 예배드림을 위해 하나님께서 구별해 놓으신 날’입니다.
거룩한 백성임을 인지하며 거룩한 백성답게 살아가려는 그리스도인이라면 주일을 절대 경홀히 여기지 않습니다. 거룩한 백성임의 표지이기
때문입니다.
더불어 하나님을 경외하는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들은 우상을 숭배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자리에 다른 것들을 올려놓고 숭상하지
않습니다. 아울러 화목제라는 지극히 개인적인 순종이 요구되는 영역에서까지도 철저하게 하나님의 말씀을 준행합니다. 거룩한
그리스도인은 자기중심적 사고를 탈피하여 삶의 아주 작은 영역 속에서도 하나님을 경외하는 일을 실천해 나갑니다.
이제 9절부터 18절까지는 ‘이스라엘 공동체 내에서의 규례’에 관한 내용입니다. 다른 말로 하자면 ‘사회윤리’에 대한 내용입니다. 9절에서 10절입니다. “너희가
너희의 땅에서 곡식을 거둘 때에 너는 밭 모퉁이까지 다 거두지 말고 네 떨어진 이삭도 줍지 말며 네 포도원의 열매를 다 따지
말며 네 포도원에 떨어진 열매도 줍지 말고 가난한 사람과 거류민을 위하여 버려두라 나는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이니라”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으로서 실천해야할 기본적인 ‘사회윤리’는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을 배려하는 것’이었습니다. 당시 이스라엘
공동체내에는 가난한 사람 뿐 만 아니라 나그네와 같은 외국인들이 있었습니다. 그런 그들을 위해 하나님께서는 곡식을 다 수확하지도
말고 땅에 떨어진 이삭도 줍지 말며 포도 열매를 다 따거나 떨어진 열매를 줍지 말라 명령하십니다. ‘탐욕적인 삶’이나 ‘인색한
삶’이 거룩한 하나님의 백성에게는 합당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또한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은 도둑질이나 거짓말로 이웃에게 피해를 주지 않으며(11절), 이웃의 재산을 강탈하거나 약자의 것을
착취하지도 않아야합니다(13절). 공의로 재판하며(15절), 이웃에 대해 험담하거나 이웃의 생명을 담보로 이익을 취해서도 안
됩니다(16절). 타인을 미워하는 마음을 품어서도 안 되며, 이웃이 잘못을 하면 반드시 타일러야만 합니다(17절). 서로 앙심을
품거나 원수를 갚아서도 안 됩니다(18절 전반절). 결국 이 모든 사회윤리의 근간은 한 문장으로 요약 될 수 있는데 바로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입니다(18절 하반절).
거룩한 하나님의 백성은 자신과 이웃을 동일시합니다. ‘나’는 하나님의 백성이지만 동시에 ‘내 이웃’ 또한 하나님의 백성이기
때문입니다. 아니 내가 ‘이웃’ 으로 규정하지 않는 ‘낯선 타인’ 또한 ‘하나님께서 만드신 존재’임을 인식하며 존중하려 애를
씁니다. 사랑하려 노력합니다. 더 나아가 보다 적극적인 자세로 ‘원수’까지 사랑하며 ‘나를 박해하는 사람’을 위해
기도하려합니다(마 5:44). ‘죄인이었던 나’를 사랑으로 품어주신 사랑의 하나님을 알고 믿기 때문입니다. 이웃을 나처럼 사랑하며
원수까지도 품는 것은 거룩하신 하나님을 닮기 원하는 아니 닮아야만 하는 하나님의 백성에게 요청되는 모습입니다.
이제 19절부터 36절까지는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이 개인의 삶의 영역에서 실천해 나가야 할 ‘신앙윤리’입니다. 19절입니다. “너희는 내 규례를 지킬지어다 네 가축을 다른 종류와 교미시키지 말며 네 밭에 두 종자를 섞어 뿌리지 말며 두 재료로 직조한 옷을 입지 말지며”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은 종이 다른 가축을 교미시키거나 서로 다른 두 종류의 씨앗을 함께 재배해서는 안 된다고
말씀하십니다. 아울러 두 재료를 섞어 짠 옷감으로 만든 옷도 착용하지 말라 하십니다. ‘거룩’은 ‘구분’입니다. 하나님께서
‘구분’해 놓은 것을 ‘지키는 것’ 또한 ‘거룩’입니다. 그런 차원에서 ‘종간(種間)의 혼합을 금지하는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는
것’ 또한 일상의 삶에서 ‘거룩을 실천해나가는 것’입니다.
아울러 20절부터 22절까지는 다른 남자와 정혼한 여종과 동침했을 경우 속건제를 드리는 규정이며, 23절부터 25절까지는 과목을
먹는 규정에 관한 내용, 26절부터 36절까지는 점이나 술법, 머리가를 둥글게 미는 것, 문신 등에 대한 금지 규례이며, 노인을
공경하며 거류민들을 사랑할 것과 공평한 저울과 추의 사용에 대한 규정이 계속해서 언급됩니다. 모두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해야 할 것’과 ‘하지 말아야 할 것’에 대해 ‘구분’해 놓으신 규례들을 준수하라는 내용입니다. 거룩한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님께서 구분해 놓으신 것을 존중하며 그 규정들을 일상의 삶에서 준행합니다. 마지막 절인 37절이 ‘하나님께서 세우신 모든
규례와 법도를 지켜 행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으로 끝나는 것은 이와 무관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은 하나님의 말씀을
단순한 지식적 앎으로 생각하며 축적하는데 만족하지 않고 삶속에서 행동으로 구체화시켜 나갑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모두를 거룩하신 하나님의 자녀로 불러주셨습니다. 그리고 오늘 우리에게 새로운 한 날을 또 허락하셨습니다. 부르심에
합당한 거룩한 삶으로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입증함으로 하나님께서 영광 받으시기를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우리가
하나님의 거룩한 자녀임을 직시하며 오늘도 구별된 삶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삶으로 준행해 나아간다면 우리를 통해 하나님의 거룩하심은
드러나기 마련이며 그를 통해 하나님께서 영광 받으시는 선순환의 역사는 반드시 일어날 것입니다. 이 사실을 기억하시며 하나님의
구분된 명령을 삶속에서 실행해 나가심으로 하나님께는 영광이요 우리 모두에게는 큰 기쁨이 넘치는 복된 하루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저희를 하나님의 거룩한 자녀로 삼아주심을 감사합니다.
저희들에게 허락하신 이 하루를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준행함으로 거룩한 자녀답게 살아가도록 인도하여 주시고
세상 사람들의 눈에 이 땅에 거룩한 주의 자녀들이 있다는 것을 확인시켜 그들에게도 거룩한 삶의 의미를 깨우칠 수 있는 기회가 제공될 수 있도록 복음의 문을 열어주시옵소서.
일상생활 속의 거룩(1-8절)
레위기 18-20장은 하나님의 백성의 윤리적 기준, 즉 하나님의 백성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해서 증거합니다.
(1-2)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너는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에게 말하여 이르라 너희는 거룩하라 이는 나 여호와 너희 하나님이 거룩함이니라
18장의
마지막 절의 마지막 부분이 “나는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이니라”입니다. 그리고 19장에 “나는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이니라”, 또는
“나는 여호와이니라”가 15번이나 나옵니다. 그래서 18장에서 하나님의 백성이 윤리적으로 정결한 삶을 살아야 한다고 말씀하시는
하나님께서 19장에서는 하나님의 백성은 일상에서도 거룩한(구별된) 삶을 살아야 한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께서는
하나님께서 거룩하신 하신 것처럼 하나님의 백성도 거룩해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만약 누군가에게 “학생다워라”,
“의사다워라”라고 말한다면, 그것은 그 말을 듣는 사람이 이미 학생이고, 의사이기 때문입니다. 학생이 아닌 사람에게 학생다우라고
말할 수 없고, 의사가 아닌 사람에게 의사다우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백성인 우리에게 “너희는 거룩하라”라고
말씀하시는 것은 우리가 이미 거룩한(구별된)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그 거룩한 삶, 구별된 삶이 무엇인지를 구체적으로 말씀하십니다.
(3) 너희 각 사람은 부모를 경외하고 나의 안식일을 지키라 나는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이니라
이 말씀은 십계명 중, 제5계명과 4계명에 상응하는 명령입니다.
십계명에서는
‘부모를 공경하라’라고 했는데, 여기에서는 ‘경외하라’라고 말씀합니다. ‘공경하다’는 ‘무겁게 여기다’의 의미인데, 그 무거움은
하나님께로부터 비롯되었다는 것을 일깨워줍니다. 즉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은 부모를 경외를 경외하고, 부모를 경외하는 사람은
하나님도 경외하는 사람이어야 함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또한 안식일을 구별하여 지키며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는 것은 자신의 모든 삶과 모든 시간이 하나님을 향해 있음을 고백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백성(그리스도인)이 거룩해진다는 것(구별된다는 것)은 일상의 삶에 신실한 것입니다.
(4) 너희는 헛된 것들에게로 향하지 말며 너희를 위하여 신상들을 부어 만들지 말라 나는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이니라
이 말씀은 십계명의 제1계명과 2계명에 상응하는 명령입니다.
고대나
지금이나 동일하게 사람들이 하나님 한분만을 섬기는 것으로 만족하지 못해서 ‘우상’을 만들고, 섬기는 이유는 모두 ‘자기를
위해서’입니다. 자신이나 가족이든, 부귀영화든, 건강이든, 입신양명이든, 인간관계든 그 무엇이든지, 그것을 우상으로 삼는 것은
오직 ‘자기를 위해서’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신상(우상)들을 만들지 말아야 할 이유가 ‘너희를 위하여_우리를
위하여’라고 하십니다. 사람들은 ‘자기 자신’이라는 신을 만족시키기 위해서 ‘우상’을 만드는데, 하나님은 우리를 위해서 우상을
만들지 말라고 하십니다. 그것은 하나님 한 분만으로도 충분하기 때문입니다.
(5-8)
너희는 화목제물을 여호와께 드릴 때에 기쁘게 받으시도록 드리고 그 제물은 드리는 날과 이튿날에 먹고 셋째 날까지 남았거든
불사르라 셋째 날에 조금이라도 먹으면 가증한 것이 되어 기쁘게 받으심이 되지 못하고 그것을 먹는 자는 여호와의 성물을 더럽힘으로
말미암아 죄를 담당하리니 그가 그의 백성 중에서 끊어지리라
화목제물을 먹는 문제는 7:15-18에도 동일하게 나와 있습니다.
화목제는
일종의 잔치 제사입니다. 잔치의 큰 특징 중의 하나는 참석한 사람들과 함께 나누는 것입니다. 당시에는 하나님께 제사를 드릴 때,
제물 드림을 통해서 드렸습니다. 제물 중에서 번제물은 모두 태워서 드렸습니다. 그래서 남는 것이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그리고
소제, 속죄제, 속건제의 제물은 하나님 앞에서 태워서 드리는 부분을 제외하고, 나머지는 제사장의 몫이었습니다. 그런데 화목제물은
기름과 피는 하나님께 드리고, 제사장에게는 앞 가슴살, 오른쪽 뒷다릿살을 주고, 나머지는 제사를 드리는 사람의 몫이었습니다.
화목제에는
그냥 감사해서 드리는 ‘감사제’, 어떤 서원이 있어서 드리는 ‘서원제’, 자원해서 드리는 ‘자원제(낙헌제)’ 등이 있었습니다.
‘감사제’로 드리는 제물은 당일에 다 먹어야 했고, ‘서원제’와 ‘자원제(낙헌제)’는 그다음 날까지 먹을 수 있었습니다. 만약
셋째 날에도 먹으면 드린 화목제는 무효가 되었습니다.
화목제의 제물은 흠 없는 소나, 양이었습니다. 만약 화목제물을 소로
드렸다면, 제사장분을 빼고도 약 300kg(500근) 정도 남는다고 합니다. 그 정도의 양이면, 최소한 1,000명이 먹을 수
있습니다. 그것을 이틀 만에 다 먹어야 합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해가 떨어지고 나면 다음 날이 됩니다. 만약 오후 2시쯤에
제사를 드렸다면, 해가 떨어지기 직전일 것입니다. 그러면 만 하루 만에 다 먹어야 합니다. 가족은 물론 일가친척이 먹어도 다 먹지
못합니다. 그래서 이웃과도 나누어 먹고, 잘 모르는 사람과도 나누어 먹고, 심지어 감정이 좋지 않은 사람과도 나누어 먹으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나누어 먹는 것이 거룩하게 사는 것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사회생활 속의 거룩(9-18절)
9-18절에서는 사회생활 속의 거룩에 대해서 증거합니다.
(9) 너희가 너희의 땅에서 곡식을 거둘 때에 너는 밭 모퉁이까지 다 거두지 말고 네 떨어진 이삭도 줍지 말며
하나님께서는
곡식을 추수할 때 땅에 떨어진 알갱이는 줍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혹시 추수하는 사람이 최대한 조심해서 땅에 알갱이를 떨어뜨리지
않도록 할까 봐 아예 밭모퉁이는 추수하지 않고 남겨두도록 했습니다. 그것은 추수하는 일꾼의 수고를 덜어주기 위함이 아니라, 농사를
지을 땅이 없는 고아와 과부를 비롯한 가난한 사람들과 이방인(거류민, 나그네)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룻이 시어머니와 함께
모압에서 베들레헴으로 와서 보아스의 밭에서 곡식을 주웠던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즉 하나님의 백성이 거룩하게(구별되게)
사는 것은 자신의 수입 중에는 이웃을 위한 몫도 있음을 기억하는 것이라고 일깨워주시는 것입니다.
(10) 네 포도원의 열매를 다 따지 말며 네 포도원에 떨어진 열매도 줍지 말고 가난한 사람과 거류민을 위하여 버려두라 나는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이니라
포도 농사에서 수확할 때도 동일하게 적용되었습니다.
우리
교회는 매달 첫째 주일을 ‘나눔주일’로 지키고 있습니다. 나눔주일의 의미는 내가 여유가 있기 때문에 이웃을 돕기 위해서 여분의 새
물품을 가져온다는 것만이 아닙니다. 우리 개인이 가져오는 쌀 한 봉지, 라면 한 봉지, 기름 한 병, 통조림 한 통 등은
가난해서 먹을 것이 없는 사람들 전체의 필요에 비하면 미미합니다. 하지만 그것은 우리의 삶과 신앙에 하나님의 풍성함을 경험하게 해
줍니다. 우리가 시장에서 나 아닌 다른 사람을 위해서 먹거리를 구입한다는 것은 내 마음과 삶에 이웃을 위한 공간이 있다는
의미이고, 또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마음이 있다는 의미입니다. 또한 다른 사람을 위해 구입한 먹거리가 집 안 한쪽이나 자동차
안에 있는 것을 자녀나 가족이 보는 것은, 삶에 이웃을 위한 공간이 있어야 한다는 것을 수백 마디의 말로 교육하는 것보다 훨씬 더
강력한 메시지입니다. 나눔주일은, 주는 자가 받는 자보다 복이 있다는 예수님의 말씀처럼, 우리가 가져온 물건을 받는 사람보다
우리에게 훨씬 더 풍성한 의미를 줍니다.
(11-12) 너희는 도둑질하지 말며 속이지 말며 서로 거짓말하지 말며 너희는 내 이름으로 거짓 맹세함으로 네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하지 말라 나는 여호와이니라
자신의
것이 아닌 다른 사람의 것을 도둑질하는 것은 상대가 가진 것을 자신도 가질 권리가 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문제는 자신이 갖게
되는 것을 바른 절차, 정당한 과정을 거치지 않고 가지려고 하기 때문에 바르지 않은 것이고, 틀린 것입니다. 그로 인해서 다른
사람들이 누려야 하는 것을 누리지 못하기도 하고, 그 비용을 대신 감당하기도 합니다. ‘속이다’는 어쩔 수 없는 상황이 아니라
마땅히 정직해야 할 상황에서 거짓되게 행하는 것입니다. 또한 ‘거짓말하다’는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 약속을 깨뜨리거나 상대를 속이는
행동을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당시 사람들은 맹세하는 자신보다 더 위대하다고 생각되는 존재의 이름으로 맹세하곤 했습니다.
그래서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으로 맹세하고서 상대를 속이거나 거짓말하는 것은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게 일컫는 것일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존재를 부정하고 멸시하는 것과 같았습니다. 그래서 여호와 하나님은 속이거나 거짓을 위한 맹세로 인하여 결코 더럽게 사용될
수 없는 이름인 것을 상기시켜 주는 것입니다.
(13) 너는 네 이웃을 억압하지 말며 착취하지 말며 품꾼의 삯을 아침까지 밤새도록 네게 두지 말며
이
말씀은 힘이 있는 사람이 그 힘으로 이웃의 삶을 더 힘들게 만들고, 더 많은 것을 취하려고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만약 품꾼에게
주어야 할 삯을 주인이 아침까지 갖고 있다고 해서 그것이 더 늘어나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품꾼은 삯을 받지 못하면 밤새 그
가족들이 굶을 수 있습니다. 그러한 행위는 거룩한(구별된) 하나님의 백성을 하지 않는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14) 너는 귀먹은 자를 저주하지 말며 맹인 앞에 장애물을 놓지 말고 네 하나님을 경외하라 나는 여호와이니라
다른
사람이 가진 장애나 선천적으로 가질 수밖에 없는 것으로 인해 상대를 경멸하거나 헐뜯는 것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 거룩한
백성의 품격과는 거리가 먼 것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나와 다른 사람들 역시 나와 함께 사회를 구성하고, 함께 살아가는
존재입니다.
(15) 너희는 재판할 때에 불의를 행하지 말며 가난한 자의 편을 들지 말며 세력 있는 자라고 두둔하지 말고 공의로 사람을 재판할지며
법은 유전무죄나 무전유죄도 아니고, 유전유죄나 무전무죄도 아니며, 공평해야 한다고 말씀합니다. 그래야 법이 법다워지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을 공평하신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16) 너는 네 백성 중에 돌아다니며 사람을 비방하지 말며 네 이웃의 피를 흘려 이익을 도모하지 말라 나는 여호와이니라
돌아다니지 않고서도 다른 사람을 비방하는 것은 바르지 않는 일이고, 돌아다니면서 다른 사람을 비방하는 것은 더 바르지 않은 일입니다.
가인이 동생 아벨을 죽였을 때, 하나님께서는 가인에게 “네 아우의 핏소리가 땅에서부터 내게 호소한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자신의 이익을 위해 다른 사람들의 피를 흘리게 하면, 하나님께서는 결코 그 사실을 모르지 않으십니다.
(17) 너는 네 형제를 마음으로 미워하지 말며 네 이웃을 반드시 견책하라 그러면 네가 그에 대하여 죄를 담당하지 아니하리라
하나님의
구별된 백성은 형제자매를 미워하지 않아야 한다고 하는데, ‘마음으로’ 미워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가인이 동생 아벨을 죽일 때도
‘몹시 분하여 안색이 변했다’라고 증거합니다. 이미 그 마음에서 극도의 증오심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거룩한 사람은
‘심(心)보를 바르게 한다’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삶을 바르게 하는 것뿐만 아니라 이웃의 삶도 바르게 인도한다고
하십니다.
(18) 원수를 갚지 말며 동포를 원망하지 말며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나는 여호와이니라
하나님의
백성이 원수를 스스로 갚으려고 하는 것이 바르지 않는 것은, 인간의 분노는 100% 온전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로마서에서도 “내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하나님의 진노하심에 맡기라 기록되었으되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고 주께서 말씀하시니라(롬 12:19)”라고 말씀하십니다. 원수를 갚는 것은 사람의 영역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역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바르게 정리해 주실 것을 믿는 사람만 하나님께 맡길 수 있습니다. 그래서 맡기는 것은 믿음입니다.
또한 원수갚음을 하나님께 맡기는 사람이 다른 사람을 원망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자기를 바르게 사랑하는 사람은
이웃도 사랑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백성, 이스라엘 자손에게 ‘너희는 거룩하라’라고 명령하셨습니다.
그것은 그들이 거룩해야 하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피조물인
우리는 하나님의 속성 중 본받을 수 없는 것이 있습니다.
전지전능하심, 무소부재하심, 영원하심 등은 우리가 본받을 수 없습니다.
하지만 사랑하심, 의로우심, 거룩하심 등은 본받을 수 있는 것이기에 우리에게 ‘사랑하라’, ‘의를 행하라’, ‘거룩하라’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자손에게 하신 말씀을 우리에게도 동일하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거룩하라.”
오늘 하루도 거룩한 삶, 구별된 삶을 살기 위해서 눈을 들어 하나님을 바라보십시다.
그것이 거짓이 난무한 세상에서 진리의 통로로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백성에게 “너희는 거룩하라”라고 명령하셨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백성은 애굽 사람들이나 가나안 땅 사람들과는 다른 구별된
삶을 살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백성으로 세속적인 가치관을 따라 살지 않고 구별된 삶을 신실하게 살아가게 하여
주옵소서.
또한 그 구별된 삶이 일상에서 구별된 것임을 잊지 않게 하여 주시옵소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게 하시고, 나의
소유와 수입에는 이웃의 몫도 있음을 잊지 않게 하여 주시옵소서.
또한 이웃과 함께 살아가야 함도 되새기게 하시고, 모든 사람을
공평하게 대해야 함도 잊지 않게 하여 주시옵소서.
오늘 하루도 주님을 향해 눈을 듦으로 거룩한 삶, 구별된 삶을 살아가는 은혜의 하루가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화목제 고기를 아끼지 마라
블레셋이 다시 유다를 침략했다. 헤브론 인근 마을에 살던 조나단은 애국심에 불타 전쟁터로 달려갔다. 전투는 치열했다. 철병거를 앞세워 진격한 블레셋의 공세에 많은 희생자가 발생했다. 패배를 앞둔 절박한 순간, 때 아닌 폭우가 쏟아져 블레셋의 철병거가 무용지물이 되는 기적이 일어났다. 마침내 유다가 승리했다. 조나단은 무사히 전쟁터에서 고향으로 귀환했다. 하나님의 은혜로 전쟁을 극적으로 승리함으로써 그가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던 것이다.
조나단은 기쁜 마음을 가지고 하나님께 감사의 표시로 각각 번제의 양과 화목제의 소를 준비해서 성전으로 올라갔다. 양은 번제로 하나님께 바치고, 소는 화목제로 하나님께 바친 뒤 마을 사람들과 잔치를 베풀기 위한 제물이었다. 번제는 전체를 태워 하나님께 드리나, 화목제는 내장 부위의 기름 덩어리와 콩팥, 그리고 간엽을 떼 드리면 되었다. 화목제 규정을 따라 소의 몸통 중에 가슴과 오른쪽 뒷다리는 수고한 제사장의 몫으로 드리고 제사장은 다른 제사장들과 함께 그것을 나누어 먹었다. 나머지 몸통의 고기는 모두 조나단이 가져와 마을 사람들을 위해 잔치를 벌인다.
마을 사람 전체가 화목제의 잔치에 초대되었다. 그날 소를 화목제로 바친 조나단은 그다지 부유하지는 않아 평소 소고기를 먹을 기회가 많지 않았다. 그는 비싼 소고기에 욕심이 발동해 사람들 몰래 왼쪽 뒷다리 둘을 잘라 뒷마당의 선선한 창고에 걸어놓았다. 이로 인해 초대된 사람들의 몫은 크게 줄었다. 평소 여러 사람의 간증이 쏟아지고 고기도 실컷 먹으며 기쁨이 넘쳤던 화목제 잔치와는 사뭇 실망스러웠다.
그런데 놀랍게도 며칠 후 마을 사람들은 조나단이 갑자기 앓더니 사망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사망의 원인으로 그가 화목제물의 고기를 몰래 숨겨 놓아 규정을 어겼기 때문이라는 이야기가 돌았으며 가족들은 하나님이 제정하신 ‘끊어짐’(제명)의 형벌의 원칙을 따라 가족묘에 그를 묻지 않았다고 알려졌다. 이로써 그는 영원히 공동체로부터 제명되었다.
레위기 19장에서 왜 화목제 규정이 다시 등장하는가?
접대자 조나단이 화목제 규정을 모르는바가 아니었다. 감사의 화목제 고기는 당일에 모두 먹어야 하고 식탁에 참여하는 모든 사람은 정결해야 한다. 그러나 그는 고기 욕심에 눈이 멀어 뒷다리 둘을 몰래 감춰놓은 것이다. 만일 이 고기를 당일에 먹지 않고 다음날 먹는다면 율법은 이에 대해 매우 엄중한 ‘끊어짐’(제명)의 형벌을 경고한다(레 7:21). 이틀간 먹을 수 있었던 서원과 자원의 화목제와 달리 감사의 화목제의 유통기한은 하루로 제한되어 있기 때문이다(레 7:15~18). 하나님께서는 만일 사람들이 실컷 먹고도 고기가 남게 되면 정한 날짜가 지난 그 고기는 모두 태워서 없애라 하셨다(레 7:19).
묘하게도 이 규칙이 레위기 19장에서 다시 등장한다(5~8절). 다시 한번 화목제 고기 유통기한의 준수가 강조되고 있으며 제명의 형벌이 경고되는 것이다. 레위기 19장에 화목제 규정이 다시 등장하는 것은 매우 생뚱맞아 보인다. 왜냐하면 레위기 19장에 나열된 수 많은 법들은 대체로 윤리법들과 약자 보호법, 그리고 사회 정의와 관련된 것들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레위기 18장과 20장의 가족 보호법 사이에 끼인 19장은 대체로 동포 이웃과의 조화로운 공동체적 삶을 지시하는 사회윤리법이라 할 수 있다. 그 이유를 뒤에서 다시 설명하겠지만 결론부터 말하자면, 화목제 고기에 대한 탐욕을 버리고 공동체와 이웃을 위해 아낌없이 베풀라는 강조를 위함이다. 즉, 이 화목제 규정은 공동체의 화합과 일치에 찬물을 끼얹는 탐심과 욕심을 버리라는 명령이다.
공동체를 세우기 위한 법들: 레위기 19장
레위기 19장의 법들은 대체로 인권과 관련한 것들이다. 예를 들어 19장에는 다양한 약자 보호법과 더불어 거짓과 불의한 상거래, 그리고 정의의 왜곡을 경고하는 법들이 나타난다. 가난한 사람들과 외국인 거류민(나그네)을 위해 밭과 과수원의 작물 중 일부는 거두지 말고 남겨두어야 한다(9~10절). 이웃을 억압하지도, 착취하지도 말며 품꾼의 삯을 아침까지 주지 않는 일은 없어야 하며(13절), 장애인을 잘 보살피고(14절) 나그네(거류민)를 학대하거나 차별하지 말아야 한다(34절). 또한 사회적 정의를 위해 도둑질 및 거짓말(11절), 상거래 과정의 속임수(36절), 그리고 재판의 왜곡과 무고한 피흘림에 대해 강력히 경고한다(15~16절).
보다
적극적으로는 원수를 갚지 말고 이웃과 동포를 자신과 같이 사랑할 것이며(17절) 어르신들을 잘 공경할 것을 권면한다(32절).
공동체에 대한 이러한 배려는 자연의 지평으로 확대되어 과실수를 심을 때 탐욕에 가득 차 아직 어린 나무로부터 열매를 훑어내지 말
것을 명령한다(23~25절). 더불어 사람들을 현혹하여 공동체의 신앙적 정체성을 혼란케 하는 사악한 이교적 관행들, 즉 점술과
마법을 금지하고 이방의 가증한 장례 문화나 딸에게 매춘행위를 시키는 것과 같은 음란한 사회적 관행을 금지한다(26~29절).
오히려 백성들은 그런 이방의 종교와 관행들을 거부하고 여호와 예배를 위해 지정된 때(안식일)와 장소(성소)를 잘 지켜야
한다(30절).
그러나 이러한 레위기 19장의 법들은 체계나 통일성 없이 무작위로 나열된 것처럼 보이므로 학자들은 오랫동안 이
법들의 논리적 연결성과 구조성을 찾는 데 애를 먹었다. 당장에 학자들이 찾아낸 것은 레위기 19장이 십계명을 토대로 작성되었다는
것이다. 실제로 19장에서 안식일 준수와 우상 숭배 금지가 가장 선두에 등장하는 등, 19장은 십계명 중 대부분을 언급하며 그
구체적인 사례를 들어 논의를 확장한다. 이런 점에서 레위기 19장은 십계명의 주석이라 볼 수 있다. 19장을 자세히 살피면,
우리는 이 장에 제1계명부터 제10계명에 이르는 십계명 전체가 흩어져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지난 호에서 우리는 레위기 19장을 둘러싸고 있는 18장과 20장은 가족 보호법으로 볼 수 있음을 밝힌 바 있다. 이것들은 윤리법들이다. 19장도 마찬가지로 사회를 건강하게 유지하기 위한 사회 윤리법들로 구성된다. 물론 엄밀하게 보면 19장이 윤리 규정만으로 구성된 것은 아니다. 의식법으로 볼 수 있는 화목제물의 고기를 먹는 기일 준수의 요구(5~8절), 3년간 과실수 열매의 수확 금지(23~25절) 등 몇 가지 제의법들(ritual laws)이 한데 어우러져 있다. 따라서 많은 학자들은 18~20장 전체를 윤리법의 목록으로 보기를 거부한다.
그러나 이러한 제의법들 또한 윤리적 목적을 내포하는 것으로 보인다. 예를 들어 앞서 말한 대로 화목제 고기를 즉시 나누지 않고 보관하다 상하게 하는 것은 탐욕의 죄라 할 수 있다. 이어지는 9~10절은 가난한 사람들과 나그네를 위해 추수 때 논밭의 이삭과 포도원에 떨어진 열매를 줍지 말라는 명령인데, 이런 문맥을 고려해 볼 때 화목제 고기에 대한 경고는 분명히 고기를 아낌없이 나누라는 의도일 것이다. 이것이 공동체의 선을 도모하고 공동체가 한 몸, 한 가족으로 세워지게 한다. 한편 3년간의 과실수 수확 금지에는 자연에 대한 배려와 존중의 의도, 나아가 생태학적·윤리적 교훈이 묻어있다. 4년째 과일은 수확해서 성전에 바치고 백성들은 5년째 과일부터 즐길 수 있다. 이것은 자연에 대한 배려이기도 하지만, 공동체의 이익을 위한 것이기도 하다. 만일 어린 과실수를 일찍부터 훑어내면 부실한 과실수가 되어 결국 공동체 전체의 손해를 초래할 것이다. 레위기 18장에서 월경 중인 아내와 동침하지 말라는 명령(19절)도 아내에 대한 인격적 존중이 깃들어 있다고 볼 수 있고 또한 지나친 성적 욕망의 통제와 절제를 위함일 수 있다. 레위기 18~20장 전체의 법의 취지는 이와 같이 윤리적 목적에 경도되어 있는 것이 분명하다.
물론
분명히 순수하게 의식적인 것으로 보이는 규정들도 나타난다. 백성들은 여호와의 거룩을 훼손하는 일을 삼가야 한다. 거룩한 것은
정결해야하므로 그들은 가축의 이종교배를 금지하고 밭에 두 종류의 씨를 뿌리거나 두 종류의 옷감으로 옷을 만드는 것과 같은 이질적인
것들의 ‘혼합’은 금지된다(19절). 또한 백성들은 머리를 둥글게 깎거나 수염 끝을 잘라서는 안 된다(27절). 정통 유대교
신자들은 오늘날에도 이러한 머리모양을 고수한다. 아마 이런 두발 규정은 이어지는 28절 장례에서의 애곡에 대한 규정과 관련이 있을
것이다. 즉 이스라엘 백성들은 평소에 장례식을 연상케 하는 머리를 해서는 안 된다(욥 1:20; 렘 7:29; 겔 27:31).
또한 죽은 자를 위해 하나님의 창조물인 자기 몸을 해하지 말아야 한다. 자신의 몸을 스스로 베거나 몸에 문신을 새겨서는 안
된다(레 19:28; 참조. 신 14:1). 이것들은 이방의 장례식에서 실천된 제의적 관행들로 추정된다. 그러나 이러한 지침들도
하나님의 질서를 엉망으로 만드는 동성애나 수간을 금지하는 것처럼 본질상 이방과의 구별을 위한 윤리적 지침으로 경도되어 있다고 볼 수
있다. 문신을 새기거나 칼로 베는 등, 하나님의 주신 몸을 학대하는 것도 비윤리적이라 이해할 수 있다.
한편, 거룩한 삶은
사회 정의 및 이웃 사랑과 깊은 관련이 있다. 거룩은 사랑 안에서 구체적인 실제로 표현되어야 한다. 거룩한 백성은 이웃을 자신과
같이 사랑해야 한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 아버지가 온전한 것처럼 너희도 온전하라고 말씀하시며 원수까지 사랑하는 것이 자녀의
삶이라 하셨다. 온전함은 거룩의 핵심적 개념이다. 거룩한 삶이란 만인을 사랑하는 삶이다. 신약은 그것을 “남에게 대접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마 7:12; 눅 6:31)는 황금률로 규정했다. 거룩한 사람은 자신의 힘으로 사회적 약자를 돌보고,
이웃을 돕는 자가 되어야 한다. 레위기 19장에 가득 찬 사회 정의와 인권을 위한 법에서 확인되듯이 하나님 백성된 고용주는
회사원들의 복지를 돌보고 넉넉한 임금을 지불하여 최저 생계를 보장해 줄 수 있어야 하며(엡 6:9; 골 4:1; 딤 6:2) 또한
노동자는 최선을 다해 고용주와 회사를 위해 일해야 하며(엡 6:5; 골 3:22; 딤 6:1; 딛 2:9) 다른 사람의 일을
마치 자신의 일처럼 돌보아야 한다(빌 2:4). 모든 그리스도인은 이웃을 보살피기 위해 폭압적 불의에 저항할 수 있어야 한다.
사회적 약자와 장애인, 소외된 사람을 돕고 그들과 더불어 사는 길을 모색해야 한다. 이것이 탐욕과 이기심을 극복하는 삶이다.
자비로운 추수법을 통해 본 약자 보호법
레위기 19장 9~10절은 자비로운 추수 규정이다. 이 법은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밭모퉁이의 곡식을 추수하지 말라고 권하면서 나아가 바닥에 떨어진 이삭들을 줍지 말고 남겨둘 것을 명령한다. 또한 이 법은 과실수를 일차 수확 후 남은 과일까지 샅샅이 거두는 행위를 하지 말라고 금지한다. 과실수는 따고 남은 것이 있는가 하면, 수확 중에 바닥에 떨어진 것도 있다. 농장주는 가난한 자들을 위해 이것들을 다시 훑어가는 탐욕을 부려선 안된다. 율법은 이삭과 과일을 얼마나 남겨둬야 하는지 명시하고 있지 않다. 율법은 사랑과 자비의 자발적 실천을 강제하지는 않는다. 법은 개개인이 자신의 양심에 따라 능동적으로 실천해야 하는 것이다. 그럼에도 자비심이 충만했던 사람은 관례적 기준보다 몇 배나 많은 이삭을 떨어트려 놓거나 모퉁이에도 많은 곡식을 남겨 놓았을 것이다. 룻기에서 성실한 룻의 모습을 본 보아스는 일꾼들에게 곡식 다발에서 일부러 뽑아낸 곡식을 바닥에 많이 흘려놓으라는 지시를 내린다(룻 2:15~16). 주인은 밭에 이삭을 넉넉히 남겨둘 뿐 아니라 낫질을 하지 않는 모퉁이 구역을 넓게 산정하며 가지에 많은 포도송이를 남겨두는 자비심을 품어야 한다.
자비로운 추수법에서 한 가지 더 주목해야 할 사실은 이 법이 곡식과 포도원의 포도에만 국한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은 다양한 재산을 갖추고 있었다. 그들은 특히 소, 양, 염소와 같은 가축을 많이 길렀고, 무화과나무나 감람나무와 같은 여러 가지 과실수도 길렀다. 그들은 전 재산에 이 같은 율법을 적용하여 자선과 구제를 위해 가난한 자들을 상대로 나눔을 실천해야 했을 것이다. 이때도 율법은 단지 권장사항일 뿐 개인이 율법을 지키지 않거나 교묘히 악용한다 해도 제재할 수 있는 법적 수단은 마땅치 않았다. 하나님께서 제정하신 법과 제도라 해도 인간이 마음으로 순종하여 자발적으로 따르지 않는다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부르짖으면 내가 반드시 들을 것이다!’라고 약속하신다. 이것은 자비로우신 하나님께서 직접 그들의 보호자가 되신다는 의미다.
6918. 거룩한(카도쉬. qâdôwsh) קָדוֹשׁ
발음 / 카도쉬 [ qâdôwsh ]
어원 / 6942에서 유래
관련 성경 / 거룩한(출19:6, 삼상2:2, 사4:3). [명] 성민(신7:6, 14:2,21), 성도(신33:3, 시16:3), 성일(느8:9,10,11), 거룩한 자(시78:41, 사5:19, 호11:9), 성소(시46:4), 성전(시65:4), 거룩하신자(사12:6, 30:11, 호11:12).
[부] 거룩히(레 21:8, 신 23:14)
구약 성경 / 116회 사용
* 6942. קָדַשׁ
발음 / 카다쉬 [ qâdâsh ]
관련 성경 / 거룩하다(출29:21, 사29:23, 학2:12), 빼앗기다(신22:9), 성별하다(느3:1), 준비하다(렘22:7, 미3:5), 예비시키다(렘51:27,28),구별하다(민8:17, 대상26:27), 드리다(대상18:11), 빼앗다(대상18:11), 예비하다(렘12:3), 깨끗하게 하다(삼하11:4).
[명] 성물(레22:2, 대상26:28), 성회(욜1:14, 2:15), 성호(레22:32), 성소(대하26:18, 겔7:24), 거룩한 자(사29:23)
구약 성경 / 171회 사용
하나님 창조질서 왜곡하는 부적절한 성범죄 경계하다
사회적 안전과 질서 유지하는 공동체의 ‘가족관계’ 보호하는 데 초점 맞추고 있어
레위기 11~15장과 18~20장의 관계: “너희는 거룩하라”
▲ 김경열 목사(총신대 강사) |
레위기 11~15장이 의식적 정결법이라면 18~20장은 윤리적 정결법에 속하는데, 이것들을 각각 ‘정결법’과 ‘성결법’으로 칭하기로 하자. 흥미롭게도 레위기 11장 44~45절의 ‘너희는 거룩하라’는 명령은 레위기 20장의 마지막 부분(25~26절)에서도 나타난다. 따라서 우리는 레위기 11~20장 전체가 동일한 목표, 즉 “너희는 거룩하라”는 목표를 지향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레위기 11~15장이 의식적 정결을 통해 거룩을 구현한다면, 레위기 18~20장은 윤리적 정결을 통해 거룩을 구현한다. 이스라엘 백성은 의식적 정결을 유지함으로써 거룩한 백성으로 살아야 한다. 또한 이스라엘 백성은 윤리적 정결의 삶을 삶으로써 거룩한 백성의 자격을 유지해야 한다. 그 사이에 레위기 16~17장이 끼어있다.
여기서 속죄일은 이스라엘의 국가적 속죄와 회복을 위한 가장 중대한 제의 시스템이다. 만일 백성들이 의식적으로 부정하게 되어 그들의 거룩이 훼손되고 상실된다면 그들은 몸을 정결케 하고 속죄제를 드림으로써 거룩을 회복해야 한다(레 11~15장). 정결법에 지정된 정결 의식을 치르지 않은 자는 ‘제명’이라는 형벌을 받는데(레 15:31) 이 문제는 속죄일까지 이어질 수 있다. 윤리적 삶을 사는 데 실패하여 거룩함을 상실한 인간에게는 사형과 제명이라는 결과가 기다리고 있다(레 18~20장). 그러나 만일 하나님께서 심판을 유보하시면 그들은 즉각 회개와 더불어 속죄의 기회를 얻을 수 있고, 특별히 속죄일은 마지막 회개의 자리가 될 수 있다. 연중에 해결되지 못한 그들의 모든 죄는 최종적 속죄일에 짐승의 피와 아사셀 염소 의식을 통해 사해지고 성전 역시 전면적 정화를 이룸으로써 그들은 마침내 원래의 거룩성을 회복하고 처음의 자리로 돌아간다.
윤리적 성결을 위한 법
레위기 18~20장의 구성이 흥미로운 것은 19장을 사이에 두고 18장과 20장이 주로 불법적 성관계들을 금지하는 규정들로 이루어져있다는 점이다. 18장은 구체적 대상들이 명시된 대가족 안에서 금지된 근친상간과 그 외 불법적 성관계들을, 20장은 그런 금지된 성관계에 대한 징벌들을 자세히 규정한다. 그런 불법적 행위는 땅이 토해낼 만큼 대단히 역겹고 문란하며 그에 따른 형벌은 가혹한 죽음이다. 한편, 18장과 20장 사이에 있는 19장은 대부분 십계명을 비롯하여 사회 정의에 초점을 맞춘 다양한 윤리적 조항들로 채워져 있다. 한편, 여기서 금지된 것은 단순히 근친간의 성관계를 의미하는가 아니면 근친간의 결혼 관계인가? 이 표현 자체는 일시적·충동적 성적 행위인 것처럼 보이지만 구약의 율법은 남녀의 혼전 순결을 명령하므로 성관계와 결혼 관계를 구분할 필요가 없다. 즉 근친 간에는 결혼은 물론 어떠한 성관계도 금지된다. 18장과 20장에서 불법적인 것으로 금지된 행위들을 목록으로 만들면 다음과 같다.
근친상간의 금지
다음과 같은 근친상간의 관계가 금지된다: 1)어머니; 2)계모; 3)누이; 4)손녀; 5)이복누이; 6)고모; 7)이모; 8)숙모; 9)며느리; 10)형수나 제수; 11)한 여자와 그녀의 딸; 12)한 여자와 그녀의 손녀; 13)아내의 누이(처형이나 처제); 14)장모. 18장에 나열된 근친의 대상 중 흥미롭게도 친딸과 장모가 빠져 있다. 장모는 18장에는 누락되어 있지만 20장에는 나타나고 있으므로 18장에서도 당연히 포함된다고 간주할 수 있다. 그러나 딸은 그렇지 않다. 17절에 딸이 명시되지만 이 경우는 자신과 혈연관계가 아닌 딸을 가리킨다. 아마 딸은 가장 역겨운 사례인 어머니를 명시함으로써 자동으로 그 아래 포함되는 것으로 보인다.
참고로 이집트 왕가에서는 혈통 보존을 위한 남매간의 결혼이 일상적이었다. 그러나 레위기법은 친누이든 의붓 누이나 배다른 누이든 그녀와의 결혼 혹은 성관계가 금지된다. 핵가족을 넘어 대가족 내에서는 3촌까지 혼인이 금지된다. 그러나 4촌부터는 결혼이 가능했다. 실제로 구약에서는 족내혼의 전통에 따라 4촌간의 결혼이 성행하여 그런 부부가 많이 존재한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이웃 나라들에서는 남매혼 뿐 아니라 근친혼이 성행했다. 특히 이집트와 로마의 왕가에서는 혈통 보존을 위해 근친혼을 장려한 결과 유전병을 지닌 자녀들이 많이 태어났다.
물론
레위기 18장의 율법이 주어지기 전인 족장 시대에는 금지된 결혼을 묵인하는 장면들이 나타난다. 우선 친 남매가 아닌 배다른
남매간의 결혼이 허용되었다. “그는 정말로 나의 이복누이로서 내 아내가 되었음이니라”(창 20:12)라는 아브라함의 진술에서 이
점을 알 수 있다. 또한 아브라함의 형제 나홀은 조카인 밀가를 아내로 맞았다(창 11:27~29). 야곱의 장자였던 르우벤은
아버지의 첩 빌하와 관계를 맺었으며, 다말은 시아버지 유다를 속여 집안의 혈통을 잇는 행위를 저질렀는데, 레위기 법에서는 아버지의
아내와 며느리와의 성관계 금지를 나란히 배치하여 이를 어길 경우 사형에 처할 것을 명한다(레 20:11~12). 레위기 법은
이러한 모든 행위들을 금지한다. 카미카엘(C. M. Carmichael)에 의하면 레위기 18~20장의 법들은 족장들 사이의
이러한 풍속들을 배경으로 작성되었는데 그런 행위들을 이제는 불법으로 규정하면서 그에 관한 법률적인 금지 규정을 만든다. 레위기는
이러한 관례들을 가나안과 이집트의 풍습으로 규정하고 있다. 따라서 성경의 관점을 따르면 오히려 족장들 역시 이 지역 문화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아브라함이 이복누이와 결혼했던 지역이 우르 땅, 즉 메소포타미아였다는 것은 당시 그러한 결혼이 그
지방의 관행이었음을 시사한다.
다른 유형의 성관계들의 금지
그 밖의 다른 유형의 금지된 성관계들이 몰렉 희생의 금지와 더불어 추가된다: 1) 월경 중인 아내; 2) 이웃의 아내; 3) 몰렉에 자녀 바치기; 4) 동성애; 5) 수간. 월경 중인 아내와 잠자리를 금하는 데는 부정을 탄 상태라는 제의적 이유도 있겠지만(레 15:24) 아마도 몸 상태가 정상이 아닌 아내에 대한 배려 역시 자리 잡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여기서 금지된 모든 사악한 성관계들을 이집트와 가나안의 관행으로 볼 수는 없다. 예를 들어 어머니나 딸, 혹은 이웃의 아내와의 성관계는 보편적 금기사항이었다. 어떤 사람은 고대 근동 지역에서 수간과 동성애가 자행되었다는 증거가 매우 희박하다고 주장하지만 이에 대한 증거가 다수 존재한다. 예를 들어, 히타이트 법전은 양, 소, 돼지, 개와의 수간은 금했으나, 말과 나귀와의 수간은 금하지 않았다. 그러나 구약은 어떤 형태의 수간이든 여러 곳에서 죽음의 형벌과 더불어 금지하고 있다(출 22:19; 민 35:16~21; 신 27:1). 한편, 가나안의 신화에서는 신들과 동물의 교접이 일상적으로 벌어졌으며 구약은 가나안에 만연했던 동성애 풍습을 고발하고 있다(창 19:4~8; 삿 19:22). 수간 행위를 히브리어로 테벨(tebel)이라 하는데 이것은 ‘문란한 일’로 번역되었으나 의미상으로 볼 때 그보다는 ‘뒤틀림’ 혹은 ‘혼합’에 가깝다. 금지된 모든 성관계 역시 개념상으로는 일종의 테벨이라 볼 수 있다. 즉 수간, 동성애, 그리고 여타의 금지된 성관계들은 모두 하나님의 창조 질서를 엉망(테벨)으로 만드는 짓이다.
이웃의 아내와의 간음과 수간은 오늘날까지도 통하는 보편적 금기사항이지만, 동성애에 대한 현대 그리스도인의 인식은 크게 변하고 있다. 그러나 동성애는 항구적, 본질적 도덕법으로서 구약뿐 아니라 신약에서도 엄격히 금지된다(롬 1:26~27; 고전 6:9; 딤전 1:10). 동성애는 문화와 시대적 상황에 따라 달리 해석할 여지가 있는 문제가 아니라 간음과 근친상간 및 수간, 음행, 그리고 우상숭배와 더불어 동일한 범주의 항구적인 불법행위다. 여기서 동성애만 별개의 문제로 제외하려는 시도는 대단히 잘못된 의도적인 본문의 곡해다.
몰렉 숭배와 접신술사 및 박수무당
몰렉(molek)은 ‘몰록’이라고도 불리는데 아마 ‘밀곰’과 더불어 동일한 신의 명칭으로 보인다. 어떤 사람은 몰렉에게 실제로 자녀를 불살라 바쳤을 리가 없다고 주장하나, 성경의 수많은 증거는 그런 사악한 관행이 실제로 존재했음을 말해준다(신 12:31; 18:10; 왕하 16:3~4; 렘 7:31; 19:5; 32:35; 겔 16:21; 사 57:5~9; 30:33). 중요한 것은 므낫세 치하의 타락상에서 볼 수 있듯이 몰렉 제의와 같은 자녀 희생제가 사악한 종교적 관행들, 즉 사술, 요술, 신접술, 점술을 동반한다는 것이다(대하 33:2~6). 접신술은 고대 중동에서 광범위하게 실행된 종교 행위였다. 영매들과 심령술사들은 귀신들, 특히 망자 의식을 통해 죽은 자의 혼령과의 접촉을 시도했다. 그러나 이 접신술은 영매에게 혼령이 들어와 메시지를 전하는 동양의 접신 방식이 아니라 망자의 혼령을 불러내어 그와 대화를 나누며 메시지를 전달하는 영매술을 의미한다(예, 삼상 28장의 엔돌의 무녀가 사무엘의 혼령을 부르는 장면). 구약에서 점과 마술을 사악한 행위로 취급한다. 그 이유는 인간이 점을 통해 미래를 예측한 뒤 적절한 예방 조치나 마술을 통해 미래의 일을 자기 뜻대로 조종하려 하기 때문이다. 점술을 통해 “길흉을 말하며” 미래를 미리 알아내려는 인간의 시도는 사악했다. 마술과 사술로 하늘의 시간표를 바꾸고 운명의 조작을 시도하는 것과 같았다. 이는 곧 역사를 주관하는 하나님에 대한 중대한 도전이었다.
그렇다면 20장에 나열된 금지된 성관계의 목록에 몰렉 숭배와 초혼술의 금지 명령이 끼어있는 이유는 무엇인가? 구약의 여러 증거들을 통해 볼 때 몰렉에게 자녀를 희생시키는 것이 가나안의 점술 및 초혼술(망자 의식)과 깊이 결부되어있었기 때문일 것이다(신 18:10; 왕하 17:17; 21:6; 대하 33:6). 이 경우 몰렉은 지하 세계의 신으로 추측된다. 몰렉에게 자녀를 바침으로써 죽은 조상의 혼령을 불러내는 의식이 진행되었다는 추론이다. 세 가지 측면에서 몰렉신을 위한 자녀의 희생은 가족 파괴적 악행이다. 첫째, 거짓 신을 상대로 사랑하는 자녀를 희생시킨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둘째, 이 행위는 가족에게 약속된 언약의 ‘씨’를 바치는 셈이다. 셋째, 이 관행은 죽은 자가 살아있는 가족의 삶을 통제한다는 점에서 사악하다. 이러한 이유들로 인해 이 사악한 관행들의 금지명령이 가까운 가족 간의 성적인 문제를 다룬 법들과 나란히 배열된다고 볼 수 있다.
한편, 레위기 18장과 20장에 등장한 성적 범죄의 목록은 다음과 같이 세 가지 범주로 정리해볼 수 있다. 이 목록에 포함된 범죄들은 모두 부적절한 성 범죄의 일종으로 간주될 수 있다. 몰렉 신 숭배를 넓은 의미에서 성 범죄의 범주에 넣을 수 있는 이유는 실제로 몰렉 신 숭배를 ‘몰렉을 따라가 매춘을 한다’, 즉 몰렉을 ‘음란히 섬긴다’고 표현하기 때문이다: 1) 악신과의 금지된 혼음; 2) 사람과의 금지된 성관계; 3) 동물과의 금지된 결합. 이런 일들은 이집트 족속과 가나안 족속들 사이에서 행해지던 풍속이었다(레 20:3, 24). 그 일로 그들은 땅에서 징벌을 당하여 멸절당했다. 그런 가증한 행위는 이스라엘 백성과 땅을 모두 ‘더럽힌다.’ 땅은 이스라엘 역시 토해낼 것이고, 이런 불법적인 성관계를 맺은 자는 ‘끊어질 것이다’(레 20:26~28).
이 모든 것들은 결국 공동체 안에서 ‘가족 관계’를 보호하는 데 초점을 맞추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가족은 사회의 기본 단위임과 동시에 사회적 안전을 위한 초석이다. 남자와 여자에 대한 제사장의 관점의 중심에는 세계와 사회의 질서는 결혼과 대가족에 기반하고 있다는 믿음이 존재했다. 즉 각 가족의 안정성을 기반으로 사회가 유지될 수 있는 것이다. 바로 그런 이유에서 레위기 19장의 공동체의 유대를 위한 다양한 사회 윤리법들이 가족 보호법인 레위기 18장과 20장으로 둘러싸여 있는 것으로 보인다.
__________________ 레위기 18장 / 규례와 법도를 지키라(5절)
03-29-2023(수) 사순절 제31일너희는 내 규례와 법도를 지키라 사람이 이를 행하면 그로 말미암아 살리라 나는 여호와이니라.
Keep my decrees and laws, for the man who obeys them will live by them. I am the LORD.
규례(2706) חֹק
발음 / 호크 [ chôq ]
어원/ 2710에서 유래
관련 성경 / 녹(창47:22), 법(창47:26), 규례(출12:24,레6:22), 수효(출5:14), 법도(출15:25, 왕상3:14), 율례(출18:16, 민30:16, 수24:25), 소득(레6:18, 레10:13), 몫의 음식(민18:8), 명령(레10:15, 잠8:29, 습2:2), 경계(욥26:10), 한계(욥38:10, 잠8:29, 렘5:22), 명령(시2:7, 148:6), 일(잠31:15), 한량(사5:14), 일용할 양식(겔16:27), 지경(미7:11). [동] 작정하다(욥23:14). [형] 정하다(욥23:12), 필요하다(잠30:8)
구약 성경 / 129회 사용
발음 / 하카크 [ châqaq ]
관련 성경 / 새기다(사49:16), 그리다(겔4:1, 23:14), 있다(잠8:27), 정하다(잠8:29), 쓰다(사30:8),만들다(사10 : 1), 쪼아내다(사22:16), 세우다(잠8:15), 씌어지다(욥19:23). [명] 통치자(창49:10), 방백(삿5:9), 규(민21:18, 시60:7,108:8), 법(신33:21, 잠31:5), 다스리는 자(삿5:14), 율법(사33:22)
구약 성경 / 19회 사용
법도(4941) מִשְׁפָּט
발음 / 미쉬파트 [ mishpâṭ ]
어원 / 8199에서 유래
관련 성경 정의(창18:19), 법(렘30:11), 공의(신16:18,시25:9), 율례(왕상9:4), 양식(출26:30, 왕상6:38), 판결(출28:15, 민27:11, 삼상8:3), 규례(레5:10, 민15:16, 삼상30:25), 법도(레18:4, 신4:1), 재판(레19:35, 신1:17), 법(레24:22, 왕하17:26,27), 사연(민27:5), 판결법(민27:21), 몫(신18:3), 권리(신21:17), 송사(신24:17, 왕상3:11), 방식(수6:15), 관습(삼상2:13), 계명(왕상2:3), 직무(왕상4:28), 일(왕상8:45,59), 모양(왕하1:7), 풍속(왕하17:33,34,40), 반열(대상6:32), 판단(대상16:12), 사정(욥13:18, 사40:27), 응답(욥19:7), 정당함(욥27:2), 판단력(시72:1), 뜻(습3:8), 작정(잠29: 26), 권리(사10:2, 렘32:7), 재판석(사28:6), 보응(사49:4), 심문(사53:8), 형벌(렘49:12, 습3:15), 화(렘51:9), 죄(겔7:23), 죄악(겔7: 27), 의로움(렘12:1). [동] 합당하다(신19:6), 공의롭다(신32:4), 재판받다(수20:6, 삿4:5), 심문하다(왕하25:6), 재판하다(욥14:3), 옳다(욥34:4), 정직하다(욥34:6), 공판하다(시35:23), 심판하다(시119:84, 사3:14), 정직하다(잠12:5), 작정하다(잠16:33), 적당하다(사28:26), 바르게 하다(사32:7), 송사하다(사54:17)
구약 성경 / 424회 사용
발음 / 솨파트 [ shâphat ]
관련 성경 / 판단하다(창16:5, 출18:16, 시98:9), 재판하다(출18:26, 왕상3:9, 잠31:9), 판결하다(민35:24, 신1:16, 왕상3:28), 다스리다(삼상8:20, 왕하23:22), 심판하다(왕상8:32, 겔7:3,시10:18, 사11:4), 신원하다(잠31:9, 애3:59),징벌하다(대하20:12, 22:8), 다스리다(왕하23:22, 대하26:21), 변론하다(사43:26), 다투다(잠29:9). [명] 재판장(신1:16, 수8:33, 욥12:17), 사사(삿16:31, 삼상4:18, 대상17:10),방백(삼상6:16), 법관(창19:9), 재판관(삼하15:4, 대하19:6, 욥9:24, 시141:6), 심판자(욥23:7), 재판자(미5 : 1), 재판(시37:33), 심판(시9:19, 사66:16)
구약 성경 / 142회 사용
지키라(8104) שָׁמַר
발음 / 솨마르 [ shâmar ]
관련 성경 / 지키다(창18:19, 신4:2, 렘51:12), 두다(창37:11, 삼하11:16), 시무하다(민3:7), 행하다(신5:32, 느12:45), 보호하다(출23:20, 삼상26:15), 인정하다(욥10:14), 바라다(욥24:15),삼가다(신24:8, 시17:4), 기다리다(잠8:34),따르다(호4:10), 살피다(욥13:27, 시37:37), 보존하다(시86:2, 잠22:18), 단속하다(출21:29), 준행하다(레26:3), 실행하다(신23:23), 감시하다(욥33:11), 보전하다(잠14:3), 유의하다(사42:20), 맡다(민3:28), 주관하다(왕하22:14, 에2:3), 엿보다(시71:10), 살펴보다(전11:4), 순찰하다(아3:3), 지키다(겔40:45,슥11:11), 조심하다(수23:11), 방비하다(왕하6:10), 보호받다(시37:28), 충만하다(말2:15),은밀하다(삼상19:2). [명] 문지기(왕하25:18, 느11:19), 감독(느2:8), 파수꾼(사62:6)
구약 성경 / 411회 사용
레위기 18장은 그리스도인의 성생활에 대한 교훈을 강조하는 말씀입니다.
거룩한 성도가 되기 위하여 성생활을 하지 않아야 한다는 매우 잘못된 생각을 갖는 것은 성경적인 사고가 아닙니다.
성경은 성생활을 금하는 것이 아니라 잘못된 성생활 즉 이교 문화권에서 성행했던 성생활과 문화를 철저하게 금하고 있습니다(3절).
"너희는 너희가 거주하던 애굽 땅의 풍속을 따르지 말며 내가 너희를 인도할 가나안 땅의 풍속과 규례도 행하지 말고."
그러므로 "규례와 법도를 지키라(Keep my decrees and laws)"고 하셨습니다(4-5절)
"너희는 내 법도를 따르며 내 규례를 지켜 그대로 행하라 나는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이니라.
너희는 내 규례와 법도를 지키라 사람이 이를 행하면 그로 말미암아 살리라 나는 여호와이니라."
규례(호크)는 "제한된 것"을 의미합니다.
법도(미쉬파트)는 "판단"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규례와 법도를 지키라는 것은 성생활의 대상은 제한되었다는 것을 판단하여야 하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인간을 정의할 때 "섹스하는 인간(호모 섹수스, homo sexus)" 이라고 합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인간을 지으셨을 때 남자와 여자로 창조하셨고 땅을 점령하고 번성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남자와 여자의 성생활은 더럽고 추한 것이 아닙니다.
레위기 18장에서는 성 범죄에 관해 아주 단호하게 금하며 애굽과 가나안의 풍습을 좇지 말라고 합니다.
당시 근동 사회에서 가장 빈번하게 발생하는 범죄가 성 범죄였습니다.
근친 상간과 간통 및 강간은 다툼과 전쟁을 일으키는 원인 중
하나였다.
따라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성 범죄를 강력히 금하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첫째는 성적으로 순결함으로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이방인들과 구별될 것을 요구합니다.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드러내기 위한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둘째는 성 범죄가 가져올 공동체간의
갈등과 분열을 미연에 방지하기 위한 것입니다.
성 범죄로 인해 일어나는 갈등은 당사자간에 다툼과 미움을 불러일으키고 결국 공동체는
분열되어 하나로 합쳐질 수 없게 되기 때문입니다.
모든 사람을 사랑해야 한다고 주장하며 동성애자들의 잘못된 방법도 인정해야 한다는 것은 비성경적인 주장입니다.
사람은 사랑하되 잘못된 방법은 바르게 고칠 수 있는 길을 가르쳐야 합니다.
쾌락을 위한 삶이 아니라 주 안에서 함께 즐거워할 수 있는 생명의 길을 찾아가야 하겠습니다.
본문에서 가르치는 교훈을 소개합니다.
6-18절. 근친상간에 관한 죄
가정을 철저하게 지켜야 할 하나님의 명령을 지키기 위한 것
현대 가정의 붕괴는 막장 드라마와 같은 현상이 사람들을 자극하는 것이라고 하겠다.
현대 과학은 근친 결혼은 기형아 출산율이 높아지고 있다고 알려주고 있다.
고대 사회는 대가족 사회에서 자주 발생할 수 있는 환경이었다.
19절. 일방적인 성행위에 대한 경고
너는 여인이 월경으로 불결한 동안에 그에게 가까이 하여 그의 하체를 범하지 말지니라.
20절. 간음에 대한 경고
너는 네 이웃의 아내와 동침하여 설정하므로 그 여자와 함께 자기를 더럽히지 말지니라.
21절. 자녀 학대에 대한 경고
너는 결단코 자녀를 몰렉에게 주어 불로 통과하게 함으로 네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하지 말라 나는 여호와이니라.
22절. 동성애에 대한 경고
너는 여자와 동침함 같이 남자와 동침하지 말라 이는 가증한 일이니라.
자유주의 신학을 주장하는 사람은 동성애를 하나님이 허락하신 사랑이라고 강조하고 가르친다.
로마서 1:26-27
이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들을 부끄러운 욕심에 내버려 두셨으니 곧 그들의 여자들도 순리대로 쓸 것을 바꾸어 역리로 쓰며.
그와 같이 남자들도 순리대로 여자 쓰기를 버리고 서로 향하여 음욕이 불 일듯 하매 남자가 남자와 더불어 부끄러운 일을 행하여 그들의 그릇됨에 상당한 보응을 그들 자신이 받았느니라.
고린도전서 6:9
간음, 탐색, 남색.....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하지 못하다
불의한 자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줄을 알지 못하느냐 미혹을 받지 말라 음행하는 자나 우상 숭배하는 자나 간음하는 자나 탐색하는 자나 남색하는 자나.
Do you not know that the wicked will not inherit the
kingdom of God? Do not be deceived: Neither the sexually immoral nor
idolaters nor adulterers nor male prostitutes nor homosexual offenders.
23절. 수간에 대한 경고
너는 짐승과 교합하여 자기를 더럽히지 말며 여자는 짐승 앞에 서서 그것과 교접하지 말라 이는 문란한 일이니라.
하나님께서는 오랜 애굽 생활로 인해 그 곳의 풍속에 익숙해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애굽의 풍속을 본받지 말라고 명하십니다.
또한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들어갈 가나안은 우상 숭배와 음란한 성적 행위가 극에 달해 있었으므로 쉽게 죄악에 물들 가능성이 있어 그 땅에 들어가기 전부터 가나안의 풍속과 규례를 좇지 말라고 명하십니다(1-3).
그러면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당신의 법도와 규례를 지킬 경우에 그로 인하여 살게될 것을 약속하셨습니다(4-5).
하나님께서는 오늘 날 성도들에게도 세상을 본받지 말라고 요구하십니다.
6-20. 근친간의 음란에 대한 경계
하나님은 가장 먼저 가족간의 성행위를 금하셨습니다. 어미와의 성행위와 계모와의 성행위, 남매간의 성행위, 형수나 제수와의 성행위를 금지 시켰습니다(6-11).
하나님께서는 친척간의 성행위를 금하셨습니다. 고모와 백모, 그리고 숙모에 대한 간음은 아버지와 어머니를 범하는 것과 동일한 패륜으로 간주되었습니다. 자부와 손녀, 그리고 외손녀와의 성행위는 상위 위계자로서 파렴치한 행위이며, 혈족간의 위계 질서를 스스로 파괴하고 인격적 권위와 윤리적 황폐를 초래하는 만행입니다(12-18).
월경 중인 여자와 성교를 급하신 하나님께서는 타인의 아내와 통간하여 그로 자기를 더럽히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타인의 아내와 통간하는 행위는 주님께서 명하신 혼인의 순결을 더럽히는 일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권위 및 질서에 대한 명백한 도전이므로 철저히 금해야 합니다(19-20).
근친 성교와 결혼이 성행했던 고대 사회에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의 영적, 육적 순결의 필요성을 가르치셨습니다.
21-23. 몰렉 숭배, 기타 가증히 여길 죄
하나님은 자녀를 몰렉에게 주어 불로 통과케 말도록 하셨습니다.
몰렉은 암몬 민족의 국가 신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 백성이 암몬 신에게 자신의 자녀를 바치는 것은 이스라엘의 구속주요 왕이신 여호와께 대한 불충이었습니다(21).
하나님께서는 동성 또는 짐승과의 교합을 금하셨습니다.
동성 연애는 하나님의 본래적인 창조 질서에 정면으로 도전하는 것입니다.
또한 인간이 짐승과 교합하는 것은 인간으로서의 품위와 존엄성을 스스로 유린하는 반인간적인 죄악입니다(22-23).
24-30. 이러한 일로 말미암아 몸을 더럽히는 자는, 가나안 거민처럼 멸절되리라는 경고
그들의 행위와 풍습은 하나님께서 미워하시는 가증한 일로 그것을 행하면 "백성 중에서 끊쳐지리라"고 경고하셨습니다(24-29).
하나님의 명령에 언제나 철저하게 순종하는 것이 거대한 죄악의 물결에서 가장 효과적으로 자신을 보호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내 명령을 지키고 너희 있기 전에 행하던 가증한 풍속을 하나라도 좇음으로 스스로 더럽히지 말라"는 말씀에 귀 기울여야 합니다(30절).
레위기 18장에서는 성 범죄에 관해 아주 단호하게 금하며 애굽과 가나안의 풍습을 좇지 말라고 합니다.
당시 근동 사회에서 가장 빈번하게 발생하는 범죄가 성 범죄였습니다.
근친 상간과 간통 및 강간은 다툼과 전쟁을 일으키는 원인 중 하나였다.
따라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성 범죄를 강력히 금하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첫째는 성적으로 순결함으로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이방인들과 구별될 것을 요구합니다.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드러내기 위한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둘째는 성 범죄가 가져올 공동체간의 갈등과 분열을 미연에 방지하기 위한 것입니다.
성 범죄로 인해 일어나는 갈등은 당사자간에 다툼과 미움을 불러일으키고 결국 공동체는 분열되어 하나로 합쳐질 수 없게 되기 때문입니다.
성경에서 성 범죄는 다른 죄보다 더욱 엄하게 다루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성 범죄는 인간 속에 거하는 하나님의 형상에 대한 모독이며 파괴이기 때문입니다.
존엄하게 지어진 인간을 쾌락의 대상으로 삼는 것은 인간을 짐승과 같이 취급 하는 행위가 됩니다.
그런데 오늘날 인간의 성을 상품과 같이 팔고 사는 세태는 성적 타락으로 인해 심판 받은 소돔과 고모라보다 더욱 심각한 수준으로 드러나고 있습니다.
이런 시대에서 성도들은 성적 타락의 유혹에 빠지지 않도록 자신을 지켜야 합니다.
순간의 쾌락 뒤에 임할 하나님의 준엄한 심판을 기억하며 결코 자신과 상대방을 짐승과 같은 존재로 만들지 않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 카도쉬, 코데쉬
이사야 6:3
서로 불러 이르되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만군의 여호와여 그의 영광이 온 땅에 충만하도다 하더라.
제사법은 관계의 회복
정결법은 생명의 회복
성결법은 거룩의 회복
육체의 생명은 피에 있다.
피를 함부로 쏟거나 먹거나 할 수 없다.
레위기의 주제 - 하나님은 생명이시다! 하나님은 거룩이시다!
(하나님은 빛이시다!)
인간은 왜 사랑해 후손을 낳고 죽는 것일까?
생물이라면 본능적으로 당연히 하는 일이 아니냐고 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사랑과 죽음은
섹스를 하는 생물에게만 나타나는 숙명적인 현상이다.
섹스의 즐거움이 있는 대신에 죽음의 고통이 있는 게 바로 인간이다.
무성생식을 하는 아메바 같은 하등동물에는 죽음도 사랑도 없다.
예를 들어 아메바는 환경만 적당히 주어지면 자신의 몸을 둘로 갈라 또
다른 자신을 만들어 낸다.
이때 만들어진 두 개체는 같은 유전 정보를 갖는 복제품이다.
물론 아메바도 언젠가는 죽는다.
하지만
자신의 몸에서 갈라져 나간 복제품이 대를 이어 수억 년 동안 계속 복제품을 남기게 된다.
인간은 왜 이런 편한 방법을 놔두고 섹스와 죽음을 택하게 되었을까?
유성생식은 무성생식보다 다양한 자손을 만들 수 있어 환경
변화에 적응하기 쉽다는 게 지난 수십 년 동안 유력한 학설이었다.
그러나 최근에는 기생충, 박테리아, 바이러스 같은 기생생물의
침입에 대한 방어 수단이라는 학설이 주목을 받고 있다.
정자와 난자는 우리의 몸이 만들어 낸 가장 신선한 세포이다.
비록 몸은 바이러스나 기생충에 감염됐다 하더라도 정자와 난자는
감염되는 법이 없다.
그래서 새로 태어난 아기는 기생충에서 자유로운 것이다.
유전자의 입장에서 보면 낡고 병든 ‘생존 기계’에
목을 매느니 차라리 낡은 기계는 버리고 새로운 기계를 만들어 쓰는 게 더 유리한 것이다.
인류의 역사는 바이러스 같은 기생충과의 전쟁의 역사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바이러스는 지금도 인류를 위협하는 최대의 적이다.
1918년의 스페인 독감은 1년 동안 유럽에서 2천 100만 명의 목숨을 앗아갔다.
무서운 에이즈로 일부 아프리카 국가의 평균
수명은 거의 절반으로 뚝 떨어진 상태다.
우리의 몸에는 지난 수십억 년 동안 기생충과 전쟁을 벌여 온 상처와 흔적이 그대로 남아 있다.
조상이 기생충과 맞서 싸우면서
습득해 유전자를 통해 물려준 면역 체계가 그것이다.
천연두에 대한 면역 능력이 없었던 아메리카 인디언들은 컬럼버스의 미 대륙 발견
이후 유럽인들이 퍼뜨린 천연두에 맥없이 쓰러져 몰살당하다시피 했다.
때로는 기생생물이 우리 몸 속에 들어와 우리 몸의 부속품이 되기도 한다.
대표적인 것이 인체 세포의 에너지 생산 기관인
미토콘드리아이다.
세포 내의 발전소로 불리는 미토콘드리아는 수십억 년 전 인간이 하찮은 하등동물이었을 때 우리 몸에 기생해 살림을
차렸다.
세포 내 기관 가운데 유일하게 미토콘드리아만이 자신의 유전 정보를 지닌 핵을 갖고 있다는 것이 기생의 증거다.
다행히
미토콘드리아가 엄청난 에너지를 만들기 때문에 우리는 걷고 뛸 수 있다.
인간 게놈 프로젝트를 통해서도 인간의 염색체에는 박테리아 유전자와 비슷한 유전자가 200개나 존재한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이
유전자들은 인간이 아직 하등한 무척추동물이었을 때 박테리아 감염 과정에서 우리 몸에 들어와 살림을 차린 것이다.
우리의 몸은
박테리아와 하등동물의 유전자를 짜깁기해서 만든 셈이다.
때로는 바이러스가 여러 숙주를 옮겨 다니면서 다른 생물의 유전자를 사람한테 옮기기도 한다.
또한 바이러스는 우리 몸에 들어와서
유전자를 망가뜨리기도 하지만 잠자고 있는 유전자의 스위치를 켜는 일도 한다.
인간은 바이러스에 맞서 면역 체계를 만들어 전쟁을
벌여 왔지만 한편으로는 바이러스가 돌연변이와 진화의 원동력이 된 것이다.
어렸을 적에 똥구멍을 가렵게 했던 기생충도 우리 몸에 꼭 해로운 것만은 아니다.
긁적거리면 어머니는 요충약을 먹였다.
요충은
항문을 가렵게 하지만 그다지 위험한 기생충은 아니다.
일부 의사는 우리 몸이 이 기생충과의 싸움을 통해 조금씩 전투력을 향상시키기
때문에 유아기 때는 오히려 우리 면역 체계의 훌륭한 스파링 파트너가 된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이처럼 기생생물은 인간을 몰살시키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인간을 진화시켰고 성을 발명하게 했을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남자가 먼저
만들어졌을까 아니면 여자가 먼저 만들어졌을까?
어떻게 보면 닭과 달걀 같은 문제로 보이지만 여자가 먼저 만들어졌다고 보는 것이
옳다.
성경에는 아담의 갈비뼈를 빼서 이브를 만들었다고 하지만 과학적으로 보면 이브의 갈비뼈를 빼서 아담을 만들었다고 보는 편이
맞다.
태아는 자궁에서 임신 8주가 되기까지 성기에 차이가 없다.
임신 8주가 지나면서 Y염색체에 존재하는 TDF라는 고환 결정 유전자의
스위치가 켜지고 남성 호르몬인 테스토스테론이 만들어져야 태아는 남성의 특징을 갖게 된다.
하지만 여아의 경우는 Y염색체가 없기
때문에 원래 인체의 설계도가 계획한 대로 태아가 만들어진다.
사람이 만들어지는 과정을 기차에 비유한다면 여자는 원래의 궤도를 따라
그대로 달리다 보면 만들어지는 것이고 남자는 궤도를 수정해 만들어지는 것이다.
따라서 사람의 기본형은 여성이고 남성은
옵션형이다.
성’(섹스)은 인간의 기본적 욕구이다.
진화론에서는 섹스의 본질은 생존에 있으며, 종족의 유지가 그 목적이라고 한다. 분명한 것은 성욕은 생존과 함께 인간의 2대 욕구로써 인류의 문명을 발전시킨 동력이 되어 왔다. 오늘날에는 법적으로 성에 관한 선택권을 부여하는‘성적 자기결정권’을 프라이버시권리로 인정하게 되었으니 성의 천국이 되었다. 현대인은 성을 종교로 믿는 경향이 있으며, 티머시 켈러는 이를 ‘거짓 신’이라고 부른다. 성생활에도 왕도는 없으므로 그 방법을 터득하고 알맞게 개발해야 한다. 오늘날 결혼이라는 ‘제도’와 자연으로서의 ‘사랑’: 그 계곡에서 많은 사람들이 방황하고 있다.
섹스는 인간의 ‘기본적 욕구’이다.
성욕은 인간의 기초적인 ‘자연적 욕구’로써 죽음과 함께 가장 강력한 욕구이다.
그리스 철학자 에피쿠로스는 성욕을 먹고 입는 욕구, 부와 명예의 욕구와 함께 인간의 3대 욕구로 들고 있다.
김정운 교수는 행복을 구체화할 수 없다면 가짜라고 비판하면서 ‘자는 것’ : 잠자리가 좋아야 행복해진다고 한다.
인간은 동물적 존재로써 섹스를 한다.
기본적으로는 종족 보존을 위한 본능으로 신이 인간에게 내려준 선물이다.
그런데 인간만이 쾌락을 추구하기 위해 언제든 섹스를 할 수 있다고 한다.
쇼펜하우어는 남녀 간의 사랑이란 아무리 별나라의 신비함을 간직하고 있더라도 그 본질은 성욕을 충족시키는데 있다고 했다.
1960년대 이후 우리나라에도 성 혁명의 바람이 불어 닥쳐 혼전 섹스가 증가하고 성윤리가 무너지기 시작했다.
성은 본능이 아니라 ‘충동’이라고 프로이트는 말했다.
그 이유는 동물은 종족 보존을 위해 본능적으로 섹스를 하지만, 인간은 쾌락을 위해 충동적으로 섹스를 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오늘날에는 성을 (성적) 쾌감을 느끼기 위한 유희의 수단으로 여기는 경향이 있다.
생식을 위한 성행위는 1%에 불과하고, 99%는 쾌락을 위해 한다는 통계가 있다.
그렇지만 성은 남녀 사이에 신비함이 숨어 있어 성은 신비함을 가지고 있으며, 섹스는 성교 이상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
진정한 사랑은 육체적 사랑에 그치지 않고, 섹스가 정신과 육체가 합일되는 교량역할을 하는 데 그 가치가 있는 것이다.
육체와 정신이 하나가 되는 상태가 황홀감을 주는 최고의 행복이다.
그러므로 성의 올바른 기능을 통해 성적 욕구를 충족시키면서 건전한 사랑을 키워가는 것이 지속적인 행복을 누리는 길이다.
다른 동물들은 번식을 위해서 일정한 시기에만 섹스를 하는데, 인간은 시도 때도 없이 섹스를 즐긴다.
하나님의 섭리를 배반한 것인가, 아니면 쾌락을 누리도록 진화한 것인가?
섹스를 하면 옥시토신이 대량으로 혈류에 유입되어 오르가즘을 느끼게 되는데, 이로 인해 심신에 기쁨과 건강을 가져다준다.
이는 부부관계를 돈독하게 할 뿐 아니라 사랑이라는 감정 이상의 상태에 도달한다.
진화심리학자 데이비드 버스는 사회조사를 한 후 인간이 섹스 하는 이유가 자그만 치 237가지나 된다고 했다.
가장 중요한 이유는 육체적 쾌락, 황홀감, 섹스의 재미, 발정상태, 애정표현 등을 들고 있다.
이러한 이유들은 애정표현의 수단이란 것을 제외하면 결국 쾌락을 추구하는 것들이다.
그러나 그 느낌은 순간적인 것으로 다시 평상으로 돌아간다.
이러한 느낌을 계속 유지하려고 하면 섹스 중독이 되고, 과한 섹스는 건강을 해칠 뿐 아니라 반사회적 행위가 될 수 있다.
그러므로 그 기능을 최대한 프라이버시로서 누리되, 사회적 문제가 되지 않도록 주의를 기우려야 한다.
가정 내에서 부부 간에 이루어지는 것은 건전한 섹스이지만, 가정 밖에서 불법적으로 이루어지는 섹스는 바람직하지 않다.
한 사회조사에서‘성생활이 삶과 인간관계에 얼마나 영향을 미친다고 봅니까?’라는 질문에 대하여 대다수의 사람들이 성생활이 행복지수에서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고 보았다.
그러므로 건전한 성생활을 통해 행복지수를 높이는 것이 행복으로 가는 중요한 방법이다.
이제 성은 더 이상 단순한 방사(房事)가 아니라 자유의사에 따라 성을 누릴 수 있는 개방된 세상이 되었다.
오늘날에는 법적으로 성에 관한 선택권을 부여하는‘성적 자기결정권’을 프라이버시 권리로 인정하게 되었으니 성의 천국이 되었다.
성인 만남 사이트 애슬리 매디슨에는 Life is short. Have an affairs.(인생이란 짧다. 바람을 피워라.)라는 광고가 실려서 세상의 이목을 끌기도 했다.
칸트는 혼외정사나 매춘이 상대방을 목적 자체로 존중하지 않고 대상화하기 때문에 정당화될 수 없다고 한다.
이는 성이 이성 사이에 사랑을 매개로 이루어져야 할 신성한 것이어야 한다는 말이다.
이제 섹스는 사랑을 전제로 한다거나 섹스를 하면 책임을 저야 한다는 것은 윤리적 요구일 뿐 법적으로 책임을 묻기 어렵게 되었다. 우리나라 헌법재판소는 형법상 간통죄를 위헌으로 결정함으로써 간통죄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이 결정이 나왔을 때 많은 남성들이 갈채를 보냈다고 한다. 다만 결혼을 한 다음에는 부부는 순결의무를 다하기 위해 배우자 이외의 사람과 간통을 한 경우에는 민법이 손해배상을 인정하고 있을 뿐이다. ‘하루 밤만의 자유’라는 소설책을 읽어보니 ‘오직 하루 밤의 자유를!’이 그 주제다. “당신의 몸은 나의 일기장이다. 열어라. 읽어라. 그것이 진정한 세계사다.”라고 끝을 맺는다. 그 본체는 성적 자유가 아니라 성적 유희에 지나지 않는다. 성적 자기결정권은 법과 도덕이 허용하는 범위 내에서 인정되며, 불륜은 인정되지 않는다.
섹스는 인간의 기본적 욕구로서 자연현상의 일부이지만, 일부일처제라는 결혼제도에 의해 합법적으로 인정되는 범위 안에서만 인정되고, 혼외정사는 불륜이고 불법이다.
그런데 행복해지려면 억압된 성을 해방시켜야 한다는 성 혁명이 제기된 후 섹스는 행복의 중요한 요소로 인식되면서 일부 사람들은 성적 쾌락을 추구하기 위해 그 대상을 찾아다니고 있으며, 성산업이 이를 부채질하고 있다.
주세페 토마시 디 람페두사의 소설 ‘레오퍼드’에서 주인공인 공작은 사랑을 “1년간 타오르는 불과 그 후 30년간의 재”라고 정의하고 있다. 남아있는 30년의 지루함을 풀거나 성적 욕망을 채우기 위해 새 파트너를 찾아 나선다.
그래서 간통이 행하여지고, 심지어는 성매매를 하게 된다.
나아가 불꽃이 꺼지면 새 파트너를 만나기 위해 이혼까지 불사한다.
다시 인간사회는 ‘소돔과 고모라의 시대’로 돌아가고 있는가?
현대사회는 탐욕의 문화에 젖어 있고, 성을 우상으로 숭배하는 경향이 있다.
현대인들은 성을 종교로 믿는 경향이 있으며, 티머시 켈러는 이를 ‘거짓 신’이라고 부른다.
인공행복을 통한 섹스는 그 신성성을 잃게 되고,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파탄을 맞게 되어 끝내 불행을 초래하게 된다. 성에 대한 욕망으로부터 벗어나야 비로소 자유함을 느낄 수 있고, 내면의 평화가 깃들게 되어 참된 행복을 누릴 수 있다. 성에도 과유불급의 원칙이 적용된다. 성도덕이 바로 서고, 성행위를 절제함으로써 건강한 사회를 만들어가야 진정한 행복을 누릴 수 있게 된다.
결혼을 하면 남편은 옛날 애인이 아니고 아저씨로 변한다고 한다.
열정적인 사랑은 식어가고, 여성들은 사랑을 목매어하면서 살아가야 한다.
대화는 안 통하고 섹스는 줄어들고, 집안은 절간처럼 변해간다.
챈들러의 표현에 따르면, “첫 키스는 마법이고, 두 번째 키스는 친밀함이지만, 세 번째 키스는 일상”이라고 한다.
미국 전 대통령 쿨리지는 영부인과 함께 양계장을 방문할 기회가 있었다.
영부인은 농부에게 수탉은 어떻게 그 많은 수정란을 만들어내는지 묻자 매일 수십 번씩 수정을 한다고 하자 그 사실을 대통령에게 전해 달라고 했다.
이 이야기를 들은 대통령은 매번 같은 암탉을 상대하느냐고 물으니 매번 다른 암탉이라고 농부가 대답하니 미소를 지으면서 이 사실을 영부인에게 말해달라고 했다.
이처럼 ‘참신함’이 성적 욕망과 능력에 영향을 준다는 이론에 대통령의 이름을 따서 ‘쿨리지 효과’라는 이름이 붙게 되었다.
그래서 성적 욕구라는 자연현상과 일부일처제라는 제도 사이에 갈등이 일어난다.
가메야마 사나에는 불륜을 긍정하지도 부정하지도 않고 “현재 이루어지고 있는 사실”일 뿐이라고 하면서 불륜은 사적 행위로 누구도 손가락질 할 자격이 없다고 했다.
부부 관계 사이에도 아무리 서로 사랑을 한다고 하더라도 계속 새로운 변화와 자극을 주지 않으면 쿨리지 효과가 적용된다는 사실은 엄연한 현실이므로 이러한 현상을 극복하기 위해서 항상 노력을 해야 행복한 결혼생활을 지속할 수 있다.
부부 사이에 가장 행복감을 주는 것은 성행위를 통해 얻는 쾌감이라는 점에는 누구도 부정 못할 것이다.
그래서 성이 부부생활에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고 있으며, 불만의 원인이 되기도 하고 이혼의 사유가 되기도 한다.
그런데 성에도 쾌락적응 현상이 나타나므로 이를 극복하는 것이 결혼생활의 중요한 과제다.
남녀 사이에는 그 본성상 성적 태도에 차이가 있다는 점을 인식해야 한다.
생물학적으로는 남녀 사이에 성감대의 분포나 오르가즘에 도달하는 시간과 만족을 느끼는 형태에 있어서 차이가 있으므로 성생활에 있어서 남녀 사이에 항상 간극이 있기 마련이다.
오르가슴이나 성적 만족은 성교를 통해서만 얻는 것이 아니고, 로맨틱한 터치만으로 흥분시킬 수 있다.
키스는 그 자체만으로 두 영혼이 동화되는 과정이고, 성감대의 접촉만으로도 성적 흥분을 느낄 수 있다.
부부는 남성과 여성 사이에 성감대나 성감정의 차이점을 잘 이해하고, 협업하는 정신으로 접근하고 실행해야 만족감을 느낄 수 있다.
성행위의 횟수나 성행위 시간이 성의 만족도나 행복감을 결정하지는 않는다.
부부 사이에 성생활을 지속하면서 성적 쾌감을 느끼기 위해서는 친밀도가 중요하고, 결국 두 사람이 그 방법을 터득하고 개발해야 한다. 성적 문제는 정신적 문제로서 성행위가 목적이 아니라 즐기는데 집중하라고 엘리스·하퍼는 권고한다.
성생활에도 왕도는 없다.
서로 한 마음으로 노력하고 협력한 길밖에는. 사랑이란 이처럼 협업으로 이루어지고, 노력으로 극복하는 것이다.
‘불륜’이란 사전적 의미로는 윤리에 어긋난다는 말이다.
기혼자가 다른 이성과 섹스 하는 것은 윤리적으로 금지되고 있다.
그런데 법률이 이를 간통죄로 규정하여 처벌의 대상으로 만들었으며, 그 배경에는 종교들이 일부일처제를 요구하면서 간통을 금지시킨 규범이 있다.
결혼은 일상으로 무료함과 공허함을 탈피하기 위해 성적 일탈을 통해 쾌락을 추구하는 경향이 있는데, 불륜 역시 이러한 본능이 시키는 짓이다.
처벌과 비난 그리고 이혼이라는 위험성을 무릅쓰고 불륜을 계속 하는 이유는 금기를 깨는 스릴과 쾌락 때문이다.
불륜하면 영화 ‘메디슨 카운티의 다리’가 생각난다.
사진작가 킨 케이드는 메디슨 카운티에 지붕이 있는 다리를 찍기 위해 갔다가 가정주부인 프란체스카를 만나 4일간의 사랑에 빠진다.
두 사람 사이의 사랑은 뜨겁고 흡족했다.
킨 케이드는 떠나기 전날 함께 떠나자고 청하지만 프란체스카는 유부녀로서 가정을 지키기 위해 이를 거절한다.
그는 그녀의 선택을 받아드리고 홀로 떠난다.
결혼이라는 ‘제도’와 자연으로서의 ‘사랑’: 이상과 현실이 충돌하는 현상이다.
그 계곡에서 많은 사람들이 헤매고 있다. 어디에서 바라보느냐에 따라 그 평가는 달라진다. 두 사람의 진솔한 사랑에 많은 사람들이 환호하고 선망의 대상이 되기도 하였다. 이 영화가 회자되는 이유는 가정과 사랑 사이에 놓인 ‘건널 수 없는 다리’를 건넌 모습에서 대리만족을 얻었기 때문이 아닐까? ‘내로남불’: 내가 하면 로맨스이고, 남이 하면 불륜이라는 속설이 규범과 현실의 간극을 잘 표현하고 있다.
__________________ 레위기 17장 / 그 피가 생명과 일체라(14절)
03-28-2023(화) 사순절 제30일모든 생물은 그 피가 생명과 일체라 그러므로 내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르기를 너희는 어떤 육체의 피든지 먹지 말라 하였나니 모든 육체의 생명은 그것의 피인즉 그 피를 먹는 모든 자는 끊어지리라.
because the life of every creature is its blood. That is why I have said to the Israelites, "You must not eat the blood of any creature, because the life of every creature is its blood; anyone who eats it must be cut off."
그 피가 생명과 일체라(the life of every creature is its blood)
1818. 피(담, dâm) דָּם
발음 / 담 [ dâm ]
어원 / 1826에서 유래
관련 성경 / 피(창 4:11, 왕하 3:22, 겔 35:6), 산혈(레 12:4,5,7), 살인(시 26:9), 살육(겔 5:17), 피투성이(겔 16:6,22), 피 값(겔 3:18), 죄(겔33:6), 핏빛(욜 2:31), 피 흘린 자[죄](레 17:4, 신 21:8), 피흘리기를 즐기는 자(시 59:2)
구약 성경 / 360회 사용
- 1. 남성형 명사 포도즙, 창세기 49:11, 신명기 32:14.
- 2. 남성형 명사 피, 신19:10,13, 27:25, 삼상14:32,33,왕하21:16, 시106:38, 렘19:4, 22:17, 겔33:25
- 3. 남성형 명사 유혈 살해, 학살, 살인죄, 창37:26, 레17:4, 19:16, 신17:8.
규가 유다를 떠나지 아니하며 통치자의 지팡이가 그 발 사이에서 떠나지 아니하기를 실로가 오시기까지 이르리니 그에게 모든 백성이 복종하리로다.
그의 나귀를 포도나무에 매며 그의 암나귀 새끼를 아름다운 포도나무에 맬 것이며 또 그 옷을 포도주에 빨며 그의 복장을 포도즙에 빨리로다.
* 1826. דָּמָם
1. 침묵하다, 2. 놀라다, 3. 출애굽기 15:16
발음 / 다맘 [ dâmam ]
관련 성경 / 머무르다(수 10:12), 기다리다(삼상 14:9), 잠잠하다(시 4:4, 사 23:2, 애 3:28), 멸하다(렘 8:14), 침묵하다(출 15:16), 쉬게 하다(애 2:18), 적막하다(렘 25:37, 48:2), 멸절되다(렘 49:26, 50:30), 끊어지다(렘 51:6), 평온하다(시 131:2),
[부] 가만히(렘 47:6)
구약 성경 / 30회 사용
1-9. 희생 동물을 잡는데 대하여.
10-16. 피를 먹지 말라시는 경계.
레위기 17장에서는 짐승을 먹을 때 피와 함께 먹는 것을 금하고 있습니다.
이와 같은 금령은 노아 홍수 후에 하나님께서 노아에게
주신 규례에서 이미 언급한 것입니다(창 9:4-5).
"그러나 고기를 그 생명 되는 피째 먹지 말 것이니라.
내가 반드시 너희의 피 곧 너희의 생명의 피를 찾으리니 짐승이면 그 짐승에게서, 사람이나 사람의 형제면 그에게서 그의 생명을 찾으리라."
이미 피에 대한 금령이 레위기 1-7장 및 11장에서 소개되었습니다.
그런데 또 다시 소개되는 것은 제사장에겜만 국한 된 것이 아니라 모든 백성들이 범하지 말아야 할 계율이기 때문이며 동시에 두 가지 중요한 의미를
갖습니다.
첫째는 성경에서 피는 생명을 상징합니다.
피를 먹는 것은 생명을 취하는 것이며, 모든 생물의 생명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의 권한에 대한 침범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러므로 본 금령은 짐승만이 아니라 인간의 모든 생명이 하나님께 달려 있음을 의미합니다.
둘째는 성경에서 피는 속죄를 의미합니다.
피를 흘림으로 속죄가 이루어집니다.
그런데 피를 먹는 것은 속죄의 효과를 무효화 시키며
거부하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따라서 피의 금령은 그리스도의 피 흘림을 통한 속죄를 상징하며 그 은혜를 거부하는 자는 멸망할 것을 강조한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식용으로 짐승을 잡을 때 반드시 먼저 하나님 앞에 예물로 드리라고 합니다.
이것은 백성들이 먹고 살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임을 강조하기 위한 것입니다.
아무리 자신이 생계를 위하여 수고할지라도 하나님께서 허락하지 않으면
아무 것도 얻을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자신이 얻은 물질을 자기 노력의 대가로 여기는 것은 잘못된 것임을 암시합니다.
성도들은
세상에서의 모든 수확을 통해 하나님의 베풀어 주시는 은혜라는 것을 깨닫고 감사해야 합니다.
그럴 때 하나님께서는 더욱 큰 은혜로
채워 주실 것입니다.
피는 생명을 지켜주지만 예수님의 피는 영생을 약속하셨습니다.
영원한 생명을 약속하신 주의 보혈의 공로를 의지하여 무너지는 세상의 가치를 바르게 세워가는 일에 밑거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피는 곧 생명’ 희생짐승의 피는 대속의 효과 불러온다
피와 관련된 잘못 자행될 가능성 컸던 화목제는 취급 방식 엄중히 강조하고 있어
사슴을 잡아 온 요아킴
▲ 김경열 목사(총신대 강사) |
최근
요아킴은 전염병으로 양떼를 많이 잃었다. 그로 인해 일부 하나님께 제물로 쓸 여유는 있으나 식용으로 양을 잡아먹을 처지는
아니었다. 그래서 요아킴은 요즘 마을 밖 야산으로 사슴 사냥을 나간다. 오후 늦은 시간 그는 하나님의 은혜로 커다란 사슴을 잡는 데
성공했다. 요아킴은 아직 숨이 붙어있는 사슴의 목을 따 피를 모두 빼냈다. 그리고 흙으로 피를 덮었다. 하나님께서 율법으로
생명을 상징하는 피는 먹어선 안되고 피를 빼내 땅에 흘려 흙으로 덮으라 명하셨기 때문이다. 흥에 겨워 돌아오는 길에 요아킴은 바위
위에 죽은 산양 한 마리가 놓여 있는 것을 발견했다. 병들어 죽었거나 독사에 물려 죽었을 것이다. 고기를 덤으로 얻게 된 행운일
수 있으나 요아킴은 그 산양의 사체를 두고 산을 내려왔다. 율법에서 자연사한 짐승이나 들짐승에 찢겨 죽은 짐승은 먹지 못하도록
금지했기 때문이다.
피를 금지하는 레위기 17장
요아킴이 말한 율법들은 레위기 17장에 집약되어 있다. 여기에서 크게 두 가지 문제가 제기될 수 있다. 첫째, 17장에서 화목제 규례가 추가로 주어지는데(3~9절) 뒤이어 느닷없이 ‘피’의 의미와 기능에 대한 설명이 등장한다. 왜 화목제에 관한 문맥에서 ‘피’에 관해 설명하는 것일까? 둘째, ‘일반 도살’의 문제다. 레위기에서 화목제라는 제의 도살 후 평민들이 고기를 먹는 것이 허용된다. 그렇다면 과연 가축을 제단이 아닌 자신의 집에서 잡아먹는 일반 도살이 가능했는가? 17장의 규정은 언뜻 그런 일반 도살을 금지하는 것으로 보인다(2~6절).
결론부터 말하자면 레위기 17장은 궁극적으로 11절의 의미와 기능을 설명하기 위해 쓰였다. 이 장에는 서로 무관해 보이는 법들이 일관성 없이 산발적으로 등장하는 것처럼 보인다. 17장의 전체 구조와 관찰되는 법의 종류는 다음과 같다:
a. 합법적인 화목제 도살(1~7절)
b. 합법적인 제의적 도살(8~9절)
c. 피의 의미와 기능(10~12절)
d. 사냥한 짐승의 섭취 방법(13~14절)
e. 스스로 죽은 짐승의 섭취 금지(15~16절)
이 법들은 서로 무관한 듯 보이지만 실은 피의 문제와 서로 연관되어 있다. 그래서 피 섭취를 금지하는 10~12절이 17장의 중심에 놓여 있으며 다른 법들이 대칭 구도로 배치되어 있다.
첫
번째 법(1~7절)은 이스라엘 백성은 진영 안이든 밖이든(들판에서) ‘염소 신’에게 화목제로 바치기 위해 가축을 도살해선 안
된다는 규정이다. 두 번째 법(8~9절)은 이스라엘인과 이방인 모두 하나님의 성소가 아닌 곳에서 번제와 다른 제사들을 드리지
말아야한다는 규정이다. 여기서 3~4절은 모든 짐승의 도축은 반드시 성소에서 이루어져야한다는 뜻으로 보인다. 그로 인해 고대로부터
랍비들은 오랫동안 이 문제로 논쟁을 벌였다. 사냥한 짐승의 고기는 허용되지만 가축의 일반 도살은 레위기에서 전면 금지된 것인가
하는 쟁점에 대해 학자들 사이에서도 의견이 두 갈래로 나뉜다. 레위기 후대 저작을 따르는 대다수 학자들은 신명기에서는 일반 도살이
허용되었는데 후대의 레위기 법이 이것을 금지하고 고기를 먹기 위한 모든 도축을 성소로 제한했다고 주장한다. 즉 레위기 법에서는
고기를 먹기 위해서는 언제나 짐승을 성소에 끌고 온 뒤 화목제로 도살해서 드려야 한다. 이 견해는 각 사람의 성읍 내에서(아마
들판에서도) 짐승을 잡아 그 피를 땅에 흘려 흙으로 덮은 뒤 고기를 먹을 수 있다는 일반 도살법(신명기 12장)과 정면으로
대치되며, 역사서에 기록된 합법적으로 짐승을 잡아먹는 일화와도 모순된다(예, 삼상 14:31~35). 그들은 이에 대한 답변으로
처음에, 그리고 원래는 세속에서 일반 도살이 허용되었으나(신명기), 포로기 이후에 제사장 그룹들이 제의 체계를 구축하는
과정에서(레위기의 편집과 새로운 법들의 창안) 금지시켰다고 말한다.
그러나 이에 대해 다른 설명들이 가능하다. 보수적 입장의 학자들은 환경 변화로 인해 법이 개정되었다고 본다. 레위기 17장의 법은 성막이 매우 근접해 있던 광야를 배경으로 주어진 반면, 신명기 12장의 법은 가나안 땅 중앙에 놓인 성전과 멀리 떨어져 있던 성읍을 배경으로 주어졌다는 것이다. 가능한 견해 중 하나다. 그러나 광야 시절에도 고기를 먹을 때마다 성소에서 잡았다는 생각은 적절치 않다. 집에서 기른 비둘기는 그런 제한이 없다. 또한 제단에 올릴 수 없는 흠을 가진 짐승은 버렸을까? 그런 짐승은 집에서 얼마든지 잡아서 먹었을 것이다. 또한 들짐승의 사냥은 허용되고 있다. 결론적으로 가축의 일반 도살이 광야에서도 가능했다는 결론이다. 그러므로 3~9절은 번제나 화목제, 특히 화목제를 드리려고 사적인 제단이나 불법적 성소로 달려가는 것을 금지하는 것이다. 일반 도살은 그와 별개로 당연히 전제되고 있다.
피의 의미와 기능, 그리고 피 섭취의 금지(10~12절)
세 번째 법은 피에 대한 규례다. 여기서 왜 피에 대한 경고와 교훈이 화목제에 관한 문맥에서 갑자기 나타나는가 하는 의문을 제기해볼 수 있다. 특히 11절에서 피가 생명이라는 진술과 더불어 피의 속죄 기능이 설명된다. 왜 피의 의미와 기능이 이때 진술된 것일까? 분명 4절에 비추어볼 때 1~9절의 합법적 제사에 대한 법은 피가 어떤 제단에 돌려지는가에 초점을 두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우리는 여기서 3~7절이 오직 화목제 문제만 집중적으로 다루는 이유를 추론해 볼 수 있다. 아마도 고기가 주요 목적 중 하나였던 화목제는 가장 사적인 성격이 강해 피를 잘못 취급할 가능성이 컸을 것이다. 그런 위험은 다른 제사에서도 물론 발생할 수 있었기 때문에 8~9절에서는 “번제와 제물을 드리되”라는 말로 다른 제사들을 포괄하고 있다. 그럼에도 이 경고의 강조점은 3~7절의 화목제에 놓여 있다. 10, 14절의 경고대로 이때 자칫하면 피를 제대로 쏟지 않고 고기를 먹을 위험이 컸다. 또한 7절이 암시하듯이 짐승을 가지고 사적인 제단이나 불법적인 우상의 제단으로 향할 가능성이 컸을 것이다. 그러나 그 피를 더 이상 그런 개인 제단이나 우상의 제단에 뿌려선 안 된다. 결론적으로 화목제의 주요 목적 중 하나가 제물로 드린 고기를 나누어 먹는 것이었던 만큼 피를 다룰 때 실수하기 가장 쉬운 제사였다고 볼 수 있다. 이런 점에서 화목제에서 피와 관련된 잘못이나 범법 행위가 자행될 가능성이 가장 컸으므로 피 취급방식을 엄중히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10~12절을
보면 피의 의미와 기능을 설명하는 11절을 중심으로 10절과 12절에는 피를 먹지 말라는 경고가 주어진다. 전체적인 흐름상
10절은 앞의 희생 짐승들과 관련된 피의 섭취 금지와, 그리고 12절은 이어지는 사냥한 짐승과 자연사한 짐승의 피 섭취 금지와
연결되는 것으로 보인다.
사냥한 짐승의 피와 자연사한 짐승의 고기 섭취 금지(13~16절)
정결한 야생 동물의 사냥이 허용되어 네발짐승뿐 아니라 새도 사냥할 수 있었는데 이때 사냥한 짐승의 고기를 먹기 전에 그 피를 모두 땅에 쏟은 뒤 흙으로 덮어야 했다. 여기서 피가 남아있는 고기를 피 채 먹지 말라는 경고가 다시 한 번 주어진다(13~14절). 사냥한 짐승의 섭취는 가축의 일반 도살이 오래전부터 허용된 관행이라는 분명한 암시다. 아마도 짐승을 사냥했을 때 고기를 피가 있는 채로 먹게 될 확률이 가장 높았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15~16절은 도살된 짐승이 아닌 스스로 죽은 짐승이나 찢겨 죽은 짐승의 섭취를 금지한다. 이러한 짐승과 접촉한 자 역시 부정결해졌다는 점에서 이 규정은 마치 짐승의 사체와의 접촉을 금하라는 경고처럼 보인다. 그러나 여기서는 피의 문제가 초점이 된다. 이러한 짐승들의 사체에는 모두 피가 남아있으므로 결국 이런 짐승의 사체를 먹는다면 고기와 더불어 피를 먹는 셈이다. 요약하자면 레위기 17장의 법들은 모두 피의 문제와 관련되어 있다. 이 장은 피의 의미와 기능을 설명하면서 피의 섭취를 금지하는 10~12절을 중심으로 피 문제로 실수하지 않도록 짐승의 불법적인 제의 도살을 금지하고, 사냥한 짐승의 고기를 먹기 전에 반드시 피를 쏟아내도록 하며, 스스로 죽은 짐승의 고기에는 여전히 피가 남아있으니 섭취하지 않도록 한다.
피는 곧 생명, 생명을 속하는 피 (11절)
11절을 제대로 번역하면 다음과 같다: “왜냐하면, 육체의 생명은 그 피 안에 있기 때문이다. 내가 그것을 너희를 위해 제단에 주었는데, 이는 너희 생명을 속죄하기 위함이다. 이는 그 피가 그 생명으로 대속하기 때문이다.” 11절은 구약 성경에서 유일하게 피의 기능을 알려주는 대목인 만큼 매우 중요하다. 이 구절의 히브리어 원문에 의하면 피에 관해 다음과 같은 순서로 세 가지 명제를 도출할 수 있다. 1) 짐승의 피는 생명이다 2) 피는 제단에 귀속된다 3) 피가 대속을 한다. 여기서 이 세 명제의 적용 범위는 뒤로 갈수록 좁아진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 첫 번째 명제는 모든 짐승의 피에 해당되며 사냥감도 예외는 아니므로 사냥한 짐승의 피 역시 절대 먹어선 안 된다. 두 번째 명제는 그 범위가 희생 짐승으로 좁혀진다. 즉 희생으로 바쳐지는 짐승의 피는 결코 불법적 제단이나 다른 곳에서 임의대로 처리되어선 안 되고, 반드시 제단으로 돌려져야 한다. 마지막 세 번째로 그렇게 바쳐진 어떤 희생짐승의 피는 대속의 효과를 불러온다. 여기서 많은 학자들은 11절에서 제시된 피의 의미와 기능은 모든 희생 짐승에 적용된다고 본다. 일단 피의 기능과는 별개로 피의 의미, 즉 피는 곧 생명이므로 제단에 돌려져야한다는 원칙은 화목제 짐승을 포함한 모든 희생 제물에 적용된다. 나아가 희생 짐승을 포함한 모든 짐승의 피는 곧 그것의 생명과 같은 것으로 간주된다(14절). 따라서 모든 짐승의 피가 곧 그것의 생명이라는 것이 모든 짐승의 피가 인간 생명을 위해 대속을 만든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그 기능은 대속의 희생 짐승들에 제한되는 것이다.
결국 피의 대속 기능은 대속의 제사인 속죄제와 속건제를 포함하여 아마도 인간의 기본적 죄성을 속죄하는 번제에 적용된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화목제는 결코 죄 때문에 드리는 제사가 아닌 축제와 잔치의 제사였기에 대속의 기능이 있었는지 매우 의심스러우며 구약 전반에 그런 증거가 나타나지 않는다.
신약에서의 피의 문제
구약은 생명을 상징하는 피를 먹지 말도록 한다. 그러나 피 섭취의 금지는 신약에서도 항구적으로 계승되는 규정인가? 사도행전 15장 20절과 29절에서 예루살렘 공의회는 교회 내의 유대파 그리스도인들로부터 발생한 율법 준수 논쟁에서 잠정적으로 다음과 같은 네 가지 금지령을 내렸다. 1) 우상의 더러운 것(제물) 2) 피 3) 목매어 죽인 것 4) 음행. 음행을 제외한 나머지는 전부 먹는 것과 관계가 있다. 우상에 바쳐진 음식과 피가 금지됨은 물론 목매어 죽인 것 역시 그 고기 안에 피가 담겨있다는 점에서 피 금지와 관련이 있다고 볼 수 있다. 어떤 그리스도인들은 사도행전 15장에서 정한대로 피는 영구적으로 금지되었다면서 선지 해장국을 먹지 않는다. 우선 음행의 금지는 본질에 관한 규례이자 신약으로 이어지는 불변의 도덕법이다. 그러나 먹는 것은 외적인 형식에 지나지 않는다. 예수께서는 더 이상 입으로 들어가는 것이 사람을 더럽히지 않는다고 교훈하셨다(막 7:14~23). 바울 또한 이 정신을 이어받아 신자들은 원칙적으로 이제 모든 음식으로부터 자유하다고 선포한다(롬 14:15; 고전 10:25~26). 바울은 심지어 우상의 제물마저도 알고 먹는 것은 주의해야 하나 시장에서 모르고 사서 먹을 경우 아무 문제가 없다고 말한다. 음식은 이제 무엇이든 스스로 속된 것은 없으되 속되게 여기는 그 사람에게 속된 것일 뿐이다(롬 14:14). 만물이 다 깨끗하되 거리낌으로 먹는 사람에게 악할 뿐이다(롬 14:20). 하나님께서 지으신 모든 것은 모두 선하며 단지 감사함으로 받으며 버릴 것이 없다(딤전 4:3~4). 필자는 피 역시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를 통해 피의 대속을 완성한 이상 짐승의 피에 더 이상 특별한 의미를 부여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__________________ 레위기 16장 / 아사셀 염소(8절)
두 염소를 위하여 제비 뽑되 한 제비는 여호와를 위하고 한 제비는 아사셀을 위하여 할지며.
He is to cast lots for the two goats--one lot for the LORD and the other for the scapegoat.
레위기 16장은 레위기 신학의 핵심이 되는 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문단 분해
1-28. 제사장이 지성소에 들어가 행해야 할 속죄일의 의식.
29-34. 칠월십일은 1년에 1차씩 속죄의 대 안식일로써 지키라는 명령.
유대인의 달력 7월에는세 가지 중요한 절기가 있는 달입니다(양력 10월 경에 해당).
7월 1일은 새해(로쉬 하샤나)
7월 10일은 대속죄일(욤 키퍼)
7월 15일은 초막절(수카)
아사셀 염소(Scapegoat)란 "떠나보냄"이란 뜻으로 대속죄일에 두 마리 염소 중 제비를 뽑아 한 마리를 광야로 보내는 염소를 말합니다.
대제사장은 두 염소를 성막안 북편 번제 희생을 잡는 곳에 둔 후(1:11. 16:7)에 항아리속에서 제비를 뽑았습니다.
"칼피(Calphi)"라고 부르는 항아리(urn) 속에는 똑같은 크기나 모양를 가진 두 개의 제비가 들어 있었는데, 각각의
제비에는 '여호와를 위하여(라 예호와)'라는 글과 '아사셀을 위하여(라 아자젤)'라는 글이 새겨져 있습니다.
대제사장은
백성들 앞에서 항아리를 흔든뒤, 두 손을 넣고 한 손에 하나씩 제비를 집어 두 마리의 염소들 각각의 머리 위에 그 제비를 놓습니다.
이때 그 머리 위에 '여호와를 위하여(la-JEHOVAH)'라는 제비가 얹힌 염소는 그 목에 붉은 천을 두른 후 여호와께
속죄제로 드렸고, '아사셀을 위하여(la-Azazel)'라는 제비가 얹힌 염소는 그 뿔에 붉은 천을 맨 후 무인지경의 광야로
내보냈습니다(The Preacher's Homiletic Commentary, Vol.III. p. 200-201).
아사셀 염소가 광야로 나가 모든 백성들 앞에서 사라질 때 백성들은 그들의 죄가 완전히 사하여졌다는 것을 확인하고 소리높여 환호합니다.
이러한 예식은 메시아가 모든 백성들의 죄를 짊어지신 것을 상징하는 예표라고 하겠습니다.
그러나 이 속죄제도 우리의 모든 죄를 근본적으로 없애줄 수는 없습니다.
일 동안의 죄만 사하는
것입니다.
제사의 유효 기간이 일 년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그 이듬해 짓는 모든 죄를 사하기 위해서는 또 그 다음해 7월 10일 대속죄일에 역시
같은 방법으로 속죄제사를 드려야 했습니다.
이 제사는 예수님이 오실 때까지 계속해서 드려졌습니다.
이 제사는 우리의 죄를 영원히 씻어줄 만한 능력은 없기 때문에 불완전한 제사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심으로 이 제사는 더 이상 드릴 필요가 없어졌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는 대제사장으로서 그의 몸을 속죄희생의 제물로 드리셨기 때문입니다.
히브리서 7:27
그는 저 대제사장들이 먼저 자기 죄를 위하고 다음에 백성의 죄를 위하여 날마다 제사 드리는 것과 같이 할 필요가 없으니 이는 그가 단번에 자기를 드려 이루셨음이라.
히브리서 9:12
염소와 송아지의 피로 하지 아니하고 오직 자기의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사 단번에 성소에 들어가셨느니라.
히브리서 9:26
그리하면 그가 세상을 창조한 때부터 자주 고난을 받았어야 할 것이로되 이제 자기를 단번에 제물로 드려 죄를 없이 하시려고 세상 끝에 나타나셨느니라.
히브리서 9:28
이와 같이 그리스도도 많은 사람의 죄를 담당하시려고 단번에 드리신 바 되셨고 구원에 이르게 하기 위하여 죄와 상관 없이 자기를 바라는 자들에게 두 번째 나타나시리라.
히브리서 10:10
이 뜻을 따라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단번에 드리심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거룩함을 얻었노라.
베드로전서 3:18a
그리스도께서도 단번에 죄를 위하여 죽으사 의인으로서 불의한 자를 대신하셨으니 이는 우리를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려 하심이라.
사랑하는 믿음의 사람들이여,
나를 위하여 영원한 속죄의 제물이 되시고 다시 살아나셔서 다시 오실 것을 약속하신 주님을 기다리는 믿음으로 날마다 내 삶의 자리에서 세상의 소금과 빛의 역활을 바르게 감당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부탁하며 축복합니다.
초막절(5521) 수카(çukkâh) סֻכָּה
발음 / [ çukkâh ]
관련 성경 / 우릿간(창 33:17), 초막(레 23:42, 느8:14, 욘4:5), 야영(삼하11:11), 장막(삼하22:12, 왕상20:12, 시18:11), 굴(욥38:40), 원두막(사1:8),천막(사4:6, 암9:11)
구약 성경 / 31회 사용
5799. 아사셀(ʽăzâʼzêl) עֲזָאזֵל
어원 / 579와 235에서 유래
구약 성경 / 4회 사용
뜻풀이부
* 579. אָנָה
발음 / 아나(’ânâh)
관련 성경 / 넘기다(출 21:13), 미치다(시 91:10), 임하다(잠 12:21), 시비하다(왕하 5:7)
구약 성경 / 4회 사용
* 235. אָזַל
발음 / 아잘(’âzal)
관련 성경 / 다하다(삼상 9:7), 줄어지다(욥 14:11), 돌아다니다(렘 2:36), 돌아가다(잠 20:14), 거래하다(겔 27:19)
구약 성경 / 5회 사용
아사셀 염소(Scapegoat)란 "떠나보냄"이란 뜻으로 대속죄일에 두 마리 염소 중 제비를 뽑아 한 마리를 광야로 보내는 염소를 말합니다.
두 염소를 위하여 제비뽑되
제비(lot)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고랄'(gôwrâl. גּוֹרָל)은 '돌처럼 거칠다'(be rough as
stone)란 기본개념을 갖고 있는데, 이것은 당시의 제비 도구가 작고 매끈한 모양의 자갈(pebble)이었음을 암시합니다.
제비(1486)(고랄, gôwrâl) גּוֹרָל
발음 / [ gôwrâl ]
어원 / 복수 גּוֹרָלוֹת ,גּוֹרָלִים, ‘거칠다’는 뜻의 사용하지 않는 어원에서 유래
한편,
대제사장 아론은 두 염소를 성막안 북편 번제 희생을 잡는 곳에 둔 후(1:11; 16:7), 항아리속에서 제비를 뽑았다.
칼피(Calphi)라 불리우는 이 항아리(urn) 속에는 똑같은 크기나 모양를 가진 두 개의 제비가 들어 있었는데, 각각의
제비에는 '여호와를 위하여'(라예호와)라는 글과 '아사셀을 위하여'(라아자젤)라는 글이 새겨져 있었다.
대제사장은
백성들 앞에서 항아리를 흔든뒤, 두 손을 넣고 한 손에 하나씩 제비를 집어 두 마리의 염소들 각각의 머리 위에 그 제비를 놓았다.
이때 그 머리 위에 '여호와를 위하여'(la-JEHOVAH)라는 제비가 얹힌 염소는 그 목에 붉은 천을 두른 후 여호와께
속죄제로 드렸고, '아사셀을 위하여'(la-Azazel)라는 제비가 얹힌 염소는 그 뿔에 붉은 천을 맨 후 무인지경의 광야로
내보냈다고 한다(The Preacher's Homiletic Commentary, Vol.III. p. 200-201)
‘아사셀’이란
말은 히브리어로 ‘완전한 제거’ 또는 ‘내어놓음’이라는 의미를 가진 말입니다.
이제 대제사장은 이 염소에게 안수하여 이스라엘
자손의 모든 죄를 담당시키고, 미리 정한 사람에게 맡겨 광야로 보냅니다.
한 마리의 염소가 죽어서 속죄소 위에 피를 흘림으로써
이스라엘 백성들이 짓는 1년치의 죄가 이미 다 사해졌는데, 왜 또 이 염소에게 안수해서 죄를 담당시킵니까?
레위기 16장 8절에
보면, “두 염소를 위하여 제비뽑되 한 제비는 여호와를 위하고, 한 제비는 아사셀을 위하여 할지며”라고 했습니다.
여호와를 위하는
염소의 피는 속죄소 위에 뿌려져서 ‘여호와 앞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정결케 합니다.
두 번째 염소, 즉 아사셀을 위한 염소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죄가 그들의 눈앞에서 떠나가는 사실을 볼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준비된 염소입니다.
대제사장이 7월 10일에 아사셀을 위한 염소의 머리에 안수하면 어떻게 됩니까?
이스라엘 백성이 일 년 동안 짓는 모든 죄가
아사셀을 위한 염소의 머리로 넘어갑니다.
온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 장면을 지켜봅니다.
그 후에는 미리 정해 놓은 사람이 그
염소를 끌고 광야의 무인지경으로 갑니다.
그 염소가 이스라엘 백성들의 눈앞에서 점점 멀어져갈 때, 염소에게 옮겨진 이스라엘
백성들의 모든 죄도 그들의 눈에서 점점 멀어져갈 것입니다.
그러다가 어느 시점에 가면 그 염소가 영영 보이지 않게 되겠죠. 그리고
그 염소는 나중에 악한 짐승에게 잡아먹혀 없어지고 말 것입니다.
그러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아, 내 죄를 짊어진 염소가 보이지
않는구나.
내 시야에서 영영히 사라졌구나.
그러면 내 죄도 염소와 함께 영영히 나를 떠나갔구나. 이제 더 이상 내 죄를 찾아볼
수가 없네!’ 하는 마음이 생기는 것입니다.
그것이 믿음입니다.
이 염소는 우리의 죄를 완전히 제거하는 염소라고 해서 ‘아사셀을
위한 염소’라 부르는 것입니다.
이 염소는 백성들의 죄가 그들의 눈앞에서 떠나가는 것을 보고 믿을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준비된
염소입니다.
사람들이
그 염소를 자세히 주목하면 자기에게 죄가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이나 자기 죄를 지고 가는
속죄제물을 주목하지 않고 ‘자기 자신을’ 자세히 주목합니다.
자기 자신을 바라보면 죄인처럼 여겨지게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금방울소리와 같은 이 복음을 귀로 듣고 믿든, 우리 죄를 담당한 예수님을 말씀 속에서 눈으로 보고 믿든, 대속물의 죽음으로
우리의 죄가 사해졌다는 믿음을 주시고 싶어하십니다.
“우리의 죄를 따라 처치하지 아니하시며, 우리의 죄악을 따라 갚지 아니하셨으니...동이 서에서 먼 것같이 우리 죄과를 우리에게서 멀리 옮기셨으며”(시편 103:10~12)
동쪽과 서쪽은 영원히 만날 수 없는 방향입니다.
아사셀을 위한 염소가 우리의 죄를 지고 우리 눈앞에서 사라졌듯이, 예수님은 우리의 모든 죄를 우리가 다시는 볼 수 없는 곳으로 옮기셨습니다.
이렇게
해서 대속죄제는 끝이 납니다.
그러나 이 속죄제도 우리의 모든 죄를 근본적으로 없애줄 수는 없습니다.
1년 동안의 죄만 사하는
것입니다.
제사의 유효 기간이 1년입니다.
그러면 그 이듬해 짓는 모든 죄를 사하기 위해서는 또 그 다음해 7월 10일에 역시
같은 방법으로 속죄제사를 드려야 했습니다.
그래서 이 제사는 예수님이 오실 때까지 약 1500년 동안 계속해서 드려졌습니다.
그러나 이 제사는 우리의 죄를 영원히 씻어줄 만한 능력은 없기 때문에 불완전한 제사였습니다.
아사셀을 위한 염소의 역할은 무엇이었는가?
레위기 16장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숫염소 둘을 준비하여, 대속죄일의 정결
예식에서 각각 역할을 담당하도록 합니다(5절).
어떤 염소가 어떤 예식에 사용될지를 결정하기 위해 대제사장은 제비를 사용했는데,
이는 여호와가 선택하신다는 것을 암시합니다.
그런 다음 두 염소를 구분하기 위해 제비를 뽑고 각각에 제비 표를 붙였습니다(8절).
“여호와께 속한” 제비를 받은 염소는 여호와를 위한 염소로서, 부정과 죄들을 성소에서 정결케 하기 위해 속죄제로 드려졌다(참조
15-19, 25절).
“아사셀에게 속한” 제비를 받은 다른 염소는 여호와 앞에 드려졌다.
그러나 그것은 여호와께 희생 제물로
드려지지 않고, 산 채로 여호와께로부터 광야의 아사셀에게 보내졌다(10절).
“속죄”가 그 살아있는 염소에 대하여 행해졌는데,
대제사장이 그 염소의 머리 위에 양손을 얹고 이스라엘의 도덕적 죄를 고백함으로써 그 염소에게 옮긴 후 그것이 그 모든 악을
진영으로부터 짊어지고 나감을 의미했다(20-22절).
아사셀에 관한 각양한 견해들 :
“아사셀이 누구이며, 아사셀을 위한 염소는 무엇을
대표하는가?”이다.
“아사셀”의 의미를 그것의 어원을 근거로 알려고 수없이 시도했지만 실패했다.
“아사셀”(히브리어
아자젤[‘Aza’zel])에 대한 일반적인 영어 번역 “도망의 염소”(Scapegoat; 엣-아젤[‘ez-’azel]에서
파생함)는 확실하지 않으며, 레위기 16:10(“보낼지니”)에 비추어 볼 때 그 의미가 맞지 않기 때문에 이 번역을 받아들일 수
없다.
아사셀에게 속한 염소는 아사셀에게 보내졌다. 따라서 이 구절을 “아사셀” 대신에 “도망의 염소”(Scapegoat)로
읽으면 그 염소에게 속한 염소[goat for Scapegoat]가 그 염소[Scapegoat]에게 보내졌다는 말이 되어 버린다.
많은 학자들은 “아사셀”을 황폐한 곳, “제거”의 의미, 신 등으로 해석하였다.
널리 알려진 유대인의 견해는 아사셀을 귀신으로
본다(예를 들어, 에녹 1서 9:6; 10:4, 5, 8, 아브라함의 묵시서; 들염소, 염소-귀신, 인적이 없는 곳에 있는
귀신들과의 연관성에 대해서는 레 17:7; 사 13:21; 34:14; 눅 11:24; 계 18:2 등을 비교하라).
아사셀이
귀신이라는 견해를 지지하는 어떤 그리스도인들(재림교인들을 포함하여)은 이 살아있는 염소를 귀신의 왕이며 하나님의 대적(大敵)인
사단의 상징으로 본다.
그러나 다른 그리스도인들은 이러한 견해로 보면 사단이 죄를 대신 짊어지는 것처럼 되므로 이를 반대하고,
소위 “도망의 염소”를 인간의 죄를 짊어지고 성문 밖에서 고난당하신 그리스도(히 13:12; 그러나 11절은 아사셀을 위한
염소와는 상관이 없는 문맥임을 보여준다)의 상징으로 해석하기를 선호한다.
아사셀을 위한 염소는 제물로 희생되지 않았음 :
“아사셀”의 정체를 밝히는 단서는 한 염소는 여호와께 속하고 다른
염소는 아사셀에게 속했다고 말하는 레위기 16:8-10이다.
아사셀은 한 염소를 소유할 수 있는 여호와가 아닌 다른 독립적인
존재를 가리키는 고유명사임이 분명하다.
그러나 살아있는 염소는 아사셀에게 바쳐진 제물이 아니다.
오히려 이
“운반-염소”(tote-goat)는 죄를 제거하는 이 비(非)희생 정결 예식에서 이스라엘의 죄를 광야에 있는 아사셀의 영토로 멀리
실어다 버리는 “쓰레기 운반 트럭” 같은 기능을 한다(참조 5절; 이 경우에는 “속죄제”로 번역되어서는 안 된다). 어떤
사람의 “마당”에다 그러한 유독성 쓰레기 한 짐을 쌓아 놓는다면, 이는 정말로 못된 행위이다. 이런 점에서, 이 예식을 명하신
여호와께서는 아사셀을 이스라엘의 죄의 창시자로 보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그러므로 이 죄들은 그것들의 근원으로 되돌려진다.
아사셀이 죄의 창시자로서 사람들을 유혹하여 죄 짓게 한 후(창 3장; 계 12:9), 그들이 용서 받았는데도 그들을 비난하는
사단(계 12:10; 위증자에 대한 처벌을 말하는 신 19:16!
-21과 비교하라)을 대표한다면 위의 논리에는 타당성이 있다.
“‘여호와의
염소’는 여호와께 속했고, 따라서 여호와께 드려졌으며, 그것은 또한 인간의 죄를 위해 죽으신 분 곧 여호와(요 8:58;
10:30)이신 그리스도(히 13:11-13)를 상징했다. 여호와와 여호와의 염소 사이에 밀접한 연관성이 있다고 본다면 아사셀에게 속한 염소도 아사셀을 대표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고려해야 한다.”(Roy Gane, Leviticus, The NIV Application Commentary [Grand Rapids, MI: Zondervan, 2004], 290). |
그리스도만이 우리의 죄를 대신 지시는 분임 :
여호와께 속한 염소는 그분께 제물로
드려졌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의식 체계 너머에 있는 실재를 가리키는 더 높은 수준의 상징 즉 “표상”에서 이 염소는 여호와 곧
인간의 죄를 대신하여 죽으신 그리스도를 대표한다(요 1:29; 히 13:11-13). 이렇게 높은 차원의 관점에서 볼 때,
아사셀의 영역인 광야로 산 채로 추방된 염소가 하나님의 백성들의 죄에서 그의 몫을 담당하고 결국 그런 죄들을 배후에서 조종한
자로서 그 책임을 짊어질 자 곧 사단(아사셀)을 상징한다고 말하면 의미가 통한다. 죄는 그것을 불러일으킨 장본인에게 되돌려지고,
그는 자기가 속한 곳으로 보내진다. 이로써 하나님의 백성을 위한 일종의 속죄가 이뤄지는데(레 16:10), 이는 기본적으로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관계를 가로막아 온 죄의 장본인(사단)을 그들 가운데서 깨끗이 제거함으로써 하나님과의 화목을 이루는 것을
의미한다(참조 민 25:7, 8, 13). 그러나 이 속죄의 국면에는,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대신하여 제공하신 속죄(우리를 대신한
그분의 희생을 받아들일 때 그분이 우리의 모든 허물을 짊어!
지신다)와는 달리 대속이 없다. 사단은 우리의 죄와 관련하여 그 자신의 몫 때문에 죽을 것이며, 그리스도만이 우리의 죄를 대신 지시는 분이시다.
이와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백성들은 결국 유혹과 악한 무고(誣告)로부터 해방될 것인데(계 20:1-3), 사단이 그들에게 이러한 계략을 사용한 데 대한 책임을 지고 처벌을 받을 때이다.
1. 또 내가 보매 천사가 무저갱의 열쇠와 큰 쇠사슬을 그의 손에 가지고 하늘로부터 내려와서
2. 용을 잡으니 곧 옛 뱀이요 마귀요 사탄이라 잡아서 천 년 동안 결박하여
레위기 16장은 레위기 신학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자비하심, 이스라엘의 용서의 필요성, 그리고 정결과 속죄에 대한 강조가 레위기 16장에 소개됩니다.
속죄의 핵심은 “대속죄일”에 거행되는 의식에서 발견됩니다.
특히 1-10장이 하나님과 교제를 지속하는 개인적인 방법을 제시한다면, 16장은 공동체 전체의 관점에서 하나님과 맺은 언약을 지속할 수 있는 방법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에서 속죄일은 일 년 중 가장 거룩한 날입니다.
대속죄일은 이스라엘 달력으로 일곱째 달의 열째 날로, 양력으로는 10월 초순에 해당합니다(욤 키퍼).
속죄일의 주요 목적은 죄와 부정으로 더럽혀진 회막의 부정을 정결하게 하는 것입니다.
대제사장이 일 년에 단 한 번 지성소에 들어가서 이스라엘 전 백성의 죄를 속하기 위하여, 속죄제를 드림으로써 죄로 인해 분리되었던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 사이를 화해시켰던 절기입니다.
그러나 한 개인의 속죄제나 속건제가 아닌 이스라엘 백성 전체를 위한 대속죄일 규례입니다.
나답과 아비후를 먼저 언급하심으로 죄의 심각성을 깨닫게 하고, 하나님을 경배할 수 있는 방법을 제시합니다.
인간이 고안한 인본주의적인 예법이 아닌, 하나님 중심의 예배법으로 하나님 앞에 나아가야 합니다.
구약에서 하나님의 은혜와 인간의 믿음의 필요성을 속죄일의 의식보다 더 분명하게 묘사하는 그림은 없습니다.
11-15장에서 모든 사람은 예외없이 부정에 노출되어 있음을 보았습니다.
하나님이 본래 만드셨던 사람, 아니 더 나아가 피조 세계 전체가 타락한 상태라는 것을 보았습니다.
음식, 질병, 성, 아무에게도 보일 수 없는 가장 은밀한 부분까지, 인간은 모든 부분에서 부정에 노출되어 있습니다.
이러한 부정을 가진 인간은 결코 하나님 앞, 성소로 나아갈 수 없었습니다.
하나님의 임재와 다스림을 받을 수가 없습니다.
죄의 치명적인 결과이며, 죄는 결코 하나님과 만날 수가 없게 합니다.
그래서 이러한 부정을 면하기 위해서, 제사는 필수입니다.
그러나 문제는 인간이 모든 부정과 죄에 대하여, 민감하게 하나님께 사죄하며 부정을 제거하고 있지는 않다는 것입니다.
사실 그럴 실력도 능력도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러한 부정의 상태로 하나님의 성소와 회막에 나아가며, 부정한 상태로 하나님의 진 안에 머물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의 진노만 부를 뿐입니다.
속죄일에 행하는 의식의 주요 목적은 부정한 예배자들이 부지중에 오염시킨 성소의 모든 부정을 정결하게 하는 것에 있습니다(16:16, 19).
대제사장은 하나님의 임재가 지속적으로 이스라엘의 성소에 머무르도록 하기 위해, 죽음을 무릅쓰고 지성소에 들어가야 했습니다.
바로 이 날 대제사장은 자신의 죄부터 회개하며, 온 백성의 회개를 인도하여, 전 공동체를 죄의 사슬로부터 해방시킵니다.
그저 한 번의 행사로 마치는 절기가 아닙니다.
하나님과 백성과 자연의 총체적인 공동체가 재차 건강한 공동체로 회복할 수 있는 기회가 바로 이 대속죄일인 것입니다.
그리고 결국 한 대제사장은 그 죄를 속하기 위해 장차 십자가에서 죽음을 당하였습니다.
우리는 죄에 대하여 민감하지 않은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조차도 죄사함과 회개, 그리고 정결에 대한 깊은 이해와 처절한 자기 인식이 없습니다.
철저히 모든 죄를 제거하기 원하시는 하나님의 간절하심과 대충 얼버무리려 하는 인간의 완악한 마음에는 큰 간격이 있습니다.
1-16장에서 다룬 예배자의 삶이 철저한 거룩과 정결의 삶인 것을 제대로 배웠다면, 이 시대의 그리스도인의 모습을, 그리고 오늘 나의 모습을, 시대적인 흐름 앞에서 고민하지 않을 수가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거룩한 삶을 살기를 원하십니다.
우리가 거룩해야, 거룩하신 하나님을 만날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와 교제하기 원하시며, 우리와 영원한 안식을 함께 누리기를 원하시는 하나님께서, 오늘도 우리에게 거룩할 것을, 죄에서 멀어질 것을 요구하십니다.
단순하게 착하게 살면 좋겠다는 것이 아니라, 거룩하고 정결하여 하나님과 교제할 수 있는 삶을 살라는 하나님의 마음을 읽을 수 있는 마음을 주옵소서.
그리하여 오늘도 죄를 멀리하게 하시고, 거룩을 더욱 사모하게 하옵소서.
속죄(3725) 키푸르(kippûr) כִּפֻּר
발음 / 키푸르[ kippûr ]
관련 성경 / 속죄(출 30:10), 속전(출 30:16), 속죄일(레 23:27, 25:9), 속죄제(민 5:8).
[동] 속죄하다(출 29:36, 레 23:28, 민 5:8)
구약 성경 / 8회 사용
* 3722. כָּפַר덮다 카파르
발음 / 카파르 [ kâphar ]
관련 성경 / 칠하다(창 6:14), 속죄하다(출 30:10, 신 32:49, 겔 45:17), 알다(사 47:11), 용서하다(겔 16:63), 마치다(단 9:24), 속량하다(신21:8), 풀다(창 32:20), 속죄하게 하다(레 17:11), 사하다(대하 30:18, 시 78:38), 폐하다(사 28:18)
[명] 속죄제(느 10:33, 겔 43:26), 속죄물(출 29:33)
구약 성경 / 101회 사용
아사셀 염소(the scapegoat)
하나님께 나아갈 때는 죄의 문제를 먼저 해결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거룩하시고 인간은 죄인이기 때문에 더러운 죄를 가지고
거룩하시고 온전하신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는 없습니다.
그러므로 ‘속죄’는 레위기의 가장 중요한 주제 가운데 하나로 다루고
있습니다.
‘속죄’라는 말은 ‘덮는다’는 뜻입니다.
“어떤 사람이 지은 죄에 대하여 그 대가를 치르고 속량(贖良)받는 일”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죄를 지을 때마다 속죄제를 드렸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속죄일이 필요했던 것은 이스라엘의 제의에서 백성의 모든
죄를 완전하게 속죄하기 위해서는 평일의 속죄제와 속죄일의 속죄제가 모두 필요했습니다.
평일에는 죄가 드러나거나 깨닫게 될 경우
속죄제를 드려야 했습니다.
반면에 속죄일에는 일년 동안 해결하지 못하고 누적된 죄들을 한꺼번에 용서함 받아야 할 필요가 있었던
것입니다.
다시 말해 속죄일은, 미해결된 백성의 모든 죄와 성전의 지성소까지 누적된 죄를 철저히 닦아내는 날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이 속죄일에는 평일에 용서받지 못한 백성의 모든 죄와 그로 인해 누적된 성소의 오염을 깨끗이 청소함으로써 온 이스라엘
백성의 모든 속죄가 이루어졌습니다.
성전은 매년 한 번 이루어지는 대대적 청소를 통해 원래의 거룩한 상태로 유지하고 성전으로서의
기능을 할 수 있었습니다.
속죄일의 철저한 청결을 거쳐 다시 거룩해진 성소는 여호와의 지속적인 임재를 유지했습니다.
이 점에서
이스라엘에게 있어 속죄일은 이스라엘백성들의 거룩함을 유지하기 위해 가장 중요한 날이었던 것입니다.
속죄일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모든 죄를 속량해 주시는 날 입니다.
레위기 10장에 보면 아론의 두 아들 나답과 아비후가 하나님이 명하시지 않은 다른 불로 제사를 드리다가 불에 타서 죽은 일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잘못하면 죽임을 당할 수 있기 때문에 이 문제는 매우 심각한 것이었습니다.
이제는 어느 누구라도 담대하게
성소에 나아가서 제사의식을 거행하기에는 두려움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모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지성소에는 정한 날만 들어가고, 절차를 거쳐 들어감으로써 죽음을 면하라는 것’입니다. 즉 마음대로 들어가고 나갈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론이 성소에 들어가려면 수송아지로 속죄제물을 삼고 숫양으로 번제물을 삼고
거룩한 세마포 속옷을 입으며 세마포 속바지를 몸에 입고 세마포 띠를 띠며 세마포 관을 쓰고세마포 옷은 거룩하기에 죄로 더러워진 몸을 씻고 세마포 옷을 입어야’ 했습니다.
속죄일에는 세 번 지성소에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첫 번째 들어갈 때(14절)
우선 자신의 죄와 가족들을 위하여 수송아지로는 속죄제를, 수양으로는 번제를 드리도록 하셨습니다.
그리고 위임식 때 입었던 화려한
예복은 벗고, 몸을 씻고, 희고 깨끗한 세마포 옷을 입어야 했습니다.
이것은 겸손의 표현이자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설 자격이
없다는 자각의 표현이었습니다.
하얀 세마포는 겸손과 정결을 상징하는 옷입니다.
아론은 이처럼 먼저 자기 자신과 그 가족을 위한 속죄제의 수송아지를 드려야 했습니다.
그것은 인간의 죄 때문이었습니다.
두 번째 들어갈 때
수송아지를 잡아 그 피를 가지고 들어가 손가락으로 속죄소 동쪽에 뿌리고, '앞'에 일곱 번
뿌립니다.
이렇게 피를 속죄소 위에 뿌리는 것은 십계명의 돌비, 곧 율법의 정죄가 하나님께 상달되는 것을 막아주는 역할을 하기
때문입니다.
속죄소의 피가 우리의 죄를 덮어주고 가리워 줌으로 언약궤 위에 그룹들 사이에 계신 하나님께서 그 피를 보시고 우리를
용서해 주시는 것입니다.
"앞에" 뿌리는 것은 그 율법의 정죄가 인간을 괴롭히지 못하도록 막아주는 것을 뜻합니다.
세 번째 들어갈 때(8절)
염소의 피를 가지고 지성소에 들어갑니다.
"여호와를 위하여" 제비 뽑힌 염소를 잡아(8절) 백성을 위한 속죄제를 드리랴고 들어갔습니다.
그리고 속죄소 위와 앞에 일곱 번 뿌렸습니다.
염소의 피를 취하여 지성소를 위하여 뿌리고 회막을 위하여도 피를
뿌렸습니다.
이와 같이 대제사장은 세 번에 걸쳐 지성소에 들어가 자신과 그의 가족, 그리고 백성을 위하여 속죄제를 드리고 나올 때까지는 백성은 물론, 일반 제사장들까지도 회막문 밖에서 기다려야 했습니다(17절).
지성소에서 대속죄를 마친 후 대제사장은 회막 앞뜰에 있는 번제단을 속죄해야 합니다.
그는 염소의 피를 번제단 네 귀의 뿔에
바르고(18절) 또 손가락으로 그 피를 그 위에 일곱 번 뿌려 이스라엘 자손의 부정에서 단을 성결케 했습니다(19절).
이렇게
함으로써 대속죄일의 제사가 끝나고, 백성들은 일 년간 범죄한 모든 죄를 속죄 받았습니다.
이처럼 이스라엘 백성들은 매년 7월 10일이면 자신들의 허물과 잘못을 회개하면서 나머지 남은 364일의 기간을 하나님 앞에서 거룩하게 살 것을 다짐했습니다.
보통 때는 피 뿌리는 것만으로 사람들을 위한 속죄가 이루어졌습니다(4장).
그러나 속죄일에는 그와 아울러 상징적이면서 현실적으로
죄를 없애는 예식이 거행되었습니다.
곧 백성의 모든 죄를 염소에게 짊어지워 그 염소를 광야로 내몰아 거기서 죽게 하는 것입니다.
피를 뿌리는 것과 염소를 광야로 내보내는 일은 세상 죄를 짊어지고 가신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의 행위를 암시합니다.
그래서 로마서 3:24-26은 이렇게 기록합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써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제물로 세우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심이니 곧 이 때에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사 자기도 의로우시며 또한 예수 믿는 자를 으롭다 하려 하심이라”
또한 레위기 16장을 배경으로 히브리서 9-10장이 가르쳐주고 있는 것은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자신을 제물로 드려 죽으심으로써 사람이 바치는 모든 제사에 종지부를 찍은 속죄 행위가 이루어졌다는 것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속죄일은 우리의 죄를 대속하기 위하여 죽으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단번에 죄 사함을 받는 것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원죄에 대하여 우리는 그분으로 말미암아 죄 사함 받고 하나님께서는 의롭다고 인정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단번에 모든 죄를 사하여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는 놀랍고 측량할 길 없습니다. 그러나 한 번 목욕한 사람도
발은 더러워질 수 있습니다. 날마다 죄를 자백함으로 깨끗함을 받고, 자신의 삶속에서 계속 이어지는 믿음의 선순환을 통해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가는 성도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우리의 죄를 위하여 단 번에 십자가에 죽으사 우리의 죄를 사하시고 그 피로 우리를 거룩하다 하시고 양자 삼으신 것을 감사드립니다.
구원받은 자녀로, 이제 하나님의 자녀답게 살게 하시고, 거룩하게 살게 하시고, 구별되게 사는 주의 백성 되게하여 주옵소서.
하지만 연약한 육신을 입은 몸으로 죄를 짓고, 범죄할 때 마다 더러워진 발을 씻고, 손을 씻듯 주 앞에 나아가 회개하고 용서함
받음으로 용서받은 기쁨으로 날마다 새롭게 살아가는 믿음의 사람 되게하여 주시고, 이제는 더 이상 같은 죄를 반복하여 죄 가운데
빠지는 일이 있지 않도록 은혜를 더하여 주옵소서.
__________________ 레위기 15장 / 부정한 자(2절)
03-25-2023(토) 사순절 제28일이스라엘 자손에게 고하여 이르라 누구든지 몸에 유출병이 있으면 그 유출병을 인하여 부정한 자라.(2절)
Speak to the Israelites and say to them: 'When any man has a bodily discharge, the discharge is unclean.
1-15 유출병과 그 결례.
16-18 설정의 부정.
19-30 부인의 유출의 부정과 결례.
31-33 본장의 결론.
유출병(조브) זוֹב
1. 흐름, 2. 유출병
발음
(zôwb)
어원 / 2100에서 유래
관련 성경 / 유출병(레 15:2, 3,15,33), 유출(레 15:13,25,30, 레15:25).
구약 성경 / 13회 사용
발음
/ 주브(zûwb)
관련 성경 / (물을) 내다(시78:20), 흘러나다(시105:41,사48:21), 쇠약하다(애4:9),
흐르다(출3:8,레20:24, 겔20:6), 유출하다(레15:19). [명]백탁병자(삼하3:29), 유출(레15:25),
유출병(레15:2, 민5:2).
구약 성경 / 41회 사용
발음(bâsâr)
어원 / 1319에서 유래
관련 성경 / 살(창 2:21, 시 27:2, 슥 14:12), 몸(창 2:24, 출 30:32, 레 14:9), 육체(레 17:11, 민 16:22), 혈육(창 6:12, 시 56:4), 생물(창 7:21, 민 18:15), 고기(창 9:4, 출 12:8, 레 16:27), 포피(창 17:14, 레 12:3), 하체(레 6:10), 육신(창 6:3, 신 5:26, 대하 32:8, 잠 14:30), 전부(사10:18).
구약 성경 / 270회 사용
* 1319. בָּשַׂר
1. 기뻐하다, 2. 피엘형 בִּשַּׂר .기쁜 소식으로 즐겁게 하다
발음
/
[ bâsar ]
관련 성경 / 전하다(삼하 18:20, 사 41:27, 렘 20:15), 전파하다(삼상 31:9, 삼하 1:20), 소식을
전하다(대상 10:9), 선포하다(대상 16:23),
소식(왕상 1:42, 삼하 18:26, 31), 공포하다(시 68:11).
구약 성경 / 24회 사용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 12 지파가 진을 치고 있는 진중의 중심인 성막을 임재의 처소로 삼으셨기 때문에 이스라엘은 존귀하신 하나님의 거룩이 손상되지 않게 그들 역시 삶의 전반에 거룩이 요구 되었다
그래서 더러워진 자가 정결하게 되는 속죄를 위하여 5대 제사(번제, 소제, 화목제, 속죄제, 속건제) 제도를 가르쳤고 이어서 삶의 정결을 위해 정한 음식과 부정한 음식을 배우게 하셨으며(11장) 산모 정결법(12장)과 문둥병 정결법[13, 14장)을 명하셨습니다.
레위기15장은 은밀한 성생활에서 유발되는 정상적인 유출 또는 비정상적인 유출에서의 정결법을 말씀합니다.
여기서 유출이란 체내 분비물 유출을 말하는데 15장 전체를 놓고 보면 네 가지 분비물 유출로써 남자에게 관련된 두 가지와 여자에게 관련된 두 가지를 소개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또 정상적인 체내 분비물 유출인 경우와 비정상적인 유출로 구분합니다.
남성의 경우 정상 유출은 15:16-18
여성의 경우 정상 유출은 15:19-24에서 다루고 있으며
남성의 경우 비정상적인 유출은 15:2-15에서
여성의 경우 비정상적인 유출은 15:25-30에서 다룬다.
이것들은 모두 남녀 성생활과 관련된 유출이면서 생식기에서 일어나는 배출을 다루고 있다.
그런데 여기서 궁금한 것이 있다.
성병으로 인한 비정상적 유출은 부정한 것이라고 하겠지만 자녀 생산을 위한 유출이나 혹은 남녀의 정상적인 성행위에서 나오는 사정(유출) 뿐만 아니라(15:16-18) 스스로 설정하는 오난이즘(자위. 창 38:9. 레 15:16)까지도 모두 부정하게 보며 물로 씻는 정결을 요구하는 것을 보면서 왜 하나님은 이렇게 드러내고 싶지 않은 은밀한 부분까지도 정결을 요구하시고 있는지 궁금하지 않을 수 없는데 이는 위생적으로도 자기 백성들의 건강한 삶을 위해 정결을 요구하신 것은 아닌가 생각된다.
그러나 한편 분비물 유출과 관련하여 같은 내용을 다루고 있는 출애굽기의 말씀에서 유추해보면 분비물 사정[유출]이나 심지어 대변(똥) 기타 몸의 유출물로 자신이 부정하게 되지 말라 하시는데 (여기서 대변의 문제는 자신의 변을 자신의 눈으로 봄으로써 부정하게 되는 것이다] 이는 거룩한 전쟁을 앞두고 진을 더럽힌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당시 이스라엘 사람들의 경우 하나님을 만난다거나 전쟁에 출정하는 것 같은 중요한 일을 앞에 놓고 있을 때 여인을 가까이 하지 말라 하시는 것들이 모두 여기에 관련하여 이해하게 되는데 이는 당시 바알 숭배를 추구했던 이교도들과 정반대되는 것이다.
이교도들은 자신들의 신전에서 신전 창기들을 통해서라도 성적 에너지 방출과 같은 분비물 유출을 통해 신인합일[神人合一]을 추구한 것에 반해 야훼 하나님의 백성들은 하나님을 만나거나 함께 하는 일을 앞두고 거꾸로 성적인 억제나 절제를 통해 정결을 도모하고 하나님과 함께하는 친밀성을 고양시켰던 것을 감안하면 분비물 유출을 다루고 있는 레위기 15장의 말씀들은 당시 만연한 이교도들의 우상숭배로부터 자기 백성을 보호하며 여호와 신앙의 순수성을 지키게 하신 방도로도 이해하게 된다(민 25:1-9).
그런데 자기 백성들의 보건 위생적인 생활과 하나님과 함께하는 중요한 일을 위해 주신 이런 유출 관련 정결 법 및 거룩과 속됨을 구별하는 레위기의 많은 정결 법들이 예수님 시대에 이르러는 일반 백성들을 가장 극심하게 억압하는 율법으로 작용하게 되는데 예수님은 이에 대해 스스로 정결 법을 위반하는 행위를 하시면서 까지 이런 정결법의 굴레에 매여서 제대로 숨도 쉴 수 없는 당시 사람들에게 출구를 제시하신다.
그의 생애와 교훈과 사역을 보여주는 복음서에 보면 예수님은 문둥병자를 친히 손으로 만져 치유하심으로 자신이 스스로 부정한 자가 되시기도 하며(마 8:1-4) 12년간 혈루병[유출병]으로 고생한 여인이 자기의 옷자락을 만지는 것을 다 아시면서도 허용하시는 것을 통해
자신도 함께 부정한 자가 되시고(마 9:18-26) 심지어 죽은 지 며칠이 지난 나인 성 과부의 아들이 시체로 들어있는 부정한 상여의 관을 접촉하면서까지 죽은 자를 살려내시고(눅 7:11-17) 또 부정한 것들과 접촉하는 이러한 행위를 통하여 우리에게 매시야[그리스도]로 오신 그를 통하여 그리고 그 분 안에서 레위기가 말하는 모든 정결예법의 시효가 만료되었음을 보여주신다.
그가 친히 부정한 것들에 접촉하는 것 뿐 아니라 부정한 자들이 자신을 만지고 접촉하는 죄인들에게 접촉당하심으로써 모든 부정한 자들을 정결케 하시는 새로운 길을 열어주신 것인데 구약에서 자기 백성에게 엄중한 정결법을 요구하신 하나님께서 인간이 결코 이룰 수 없는 정결의 자리에 이르게 하시기 위해서 친히 사람의 몸으로 찾아 오시고 율법 아래 나시어 이 모든 것을 이루어주셨다.
흠도 티도 없는 가장 거룩하신 주님께서 나 같이 부정한 죄인을 정케 하시기 위해 나의 모든 부정을 한 몸에 뒤집어쓰시고 스스로 부정한 자가 되시어 십자가에 달리심으로 례위기 법전이 요구하는 모든 정결예법을 단 번에 완성해 주신 것을 감사드립니다.
날 정결케 하시는 이 은혜를 힘입어 오늘도 삶의 현장에서 세상을 주님의 것으로 세워가는 일에 바르게 쓰임받도록 인도하여 주시옵소서.
1. 부정한 곳에 접촉함으로 부정하게 되는 이차적인 경우(하루만 부정)는 제외하고 일차적으로 부정한 경우(7일 부정)를 몇 가지 언급하고 있는가?
5가지;
1) 유출병이 있는 자(1-12),
2) 설정함으로 부정을 입은 자(16-18),
3) 불결을 앓는 여인(19-24),
4) 유출병이 있는 (남)녀(25-26, 27절은 남자를 가리킴),
5) 불결한 여인과 동침한 자에게 관한 것(32-33).
2. 부정한 경우를 의미상으로 분류한다면 크게 두 가지로 나눌 수 있겠다. 어떻게 나눌 수 있을까?
1) 실제로 불결하고 죄이기 때문에 부정; 남녀가 유출병이 있는 경우, 회복된 후 정결례를 행하기까지 부정함
2) 죄를 상징적으로 가르치는 경우(출산이나 생리의 경우)나, 의식법상 부정하다고 간주되는 경우(설정);
실제로 불결하거나 죄는 아니지만 그대로 하나님 앞에 나아오기에는 의식상으로도 문제가 있다고 여겨지는 경우, 일정 기간 부정함. 식사 도중에 화장실 얘기하는 것이나 어른들 앞에서 방귀를 뀌는 경우처럼
무슨 큰 죄가 되거나 나빠서라기보다는 의식상으로 그렇다는 말이다. 요즈음 아이들은 '생리적인 현상을 어떡하라고?' 하면서 대든다.
3. 유출병이란 것은 구체적인 병명이 아니라 몸에서 비정상적으로 흘러나오는 병을 총칭하는 말이다. 여인의 유출은 19절부터 언급하고 있으므로 2-3절의 유출병은 남자의 병이다. 그렇다면 현대식으로 하면 무슨 병일까?
성병(임질); 성병의 증상을 잘 모르기 때문에 대답을 잘 못할 것이다. 현대인은 성병이라면 으레껏 매독이나 에이즈를 떠올리겠지만 매독은 신대륙을 발견하고 정복자들이 날뛰던 시대에 본격적으로 창궐하기 시작했고
에이즈는 최근에야 등장한 것이다. 성경시대에는 임질이라고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현대의 성병과 비교하면 병 축에 들지도 않는 것이지만.
매독만 해도 좋은 치료약이 발명되었기 때문에 요즈음은 잠잠한 듯 싶으나 한 때는 공중화장실은 성병 치료를 위한 안내문이
도배되다시피 했었다. 무서운 질병이었다. 자기만 해로운 것이 아니라 후손에게까지 치명적인 손상을 입히는 무서운 질병이었다.
두뇌가 없는 아이처럼 심각한 장애를 유발시킨다. 이름은 제일 아름다운지 모른다. VD라고 하는 데 비너스의 병이란 뜻이다.
우리말로 매독이란 것도 매화꽃의 독이란 말로 미화되어 있다. 위대한 예술가들이 단명한 원인으로 곧잘 지목되는 병이다.
이제 더 무서운 AIDS로 대체되었다. 정신적으로, 육체적으로 건강한 부부관계를 유지하는 것만이 예방을 위한 최선의 길이다.
4. 부정한 자가 되면 옷을 빨고 몸을 씻고 저녁까지 기다려야한다. '옷을 빨고'란 표현이 몇 번 나오는가?
물이 그리 흔한 곳도 아닌 데 이렇게 열심히 빨 수 있었을까?
10번 (5, 6, 7, 8, 10, 11, 13, 21, 22, 27); 부정한 짓을 않으면 이렇게 많이 빨 일이 없지! 일단 부정하게 되면 무조건 빨아야하고 몸을 씻어야한다.
바리새인들이 손씻지 않는 제자들과 싸움을 했던 것을 보면 이것이 얼마나 중요하게 여겼는 지 알 수 있다. 우리는 우리 옷을 어디에 빨아야 하는가? 어린양의 피에 빨아야한다
(계 2:4, 3:7, 22:14).
5. 왜 저녁까지 부정하다고 할까?
하루의 시작이 저녁이기 때문이다. 유대인들에게 저녁은 하루의 끝이기도 하고 시작이기도 하다. 해가 지는 것을 보면서 드디어 나의 부정이 끝나는구나 라는 느낌을 가지게 된다면 새로운 저녁을 맞는 느낌이 우리와 좀 다를 것 같다. 아마 저녁에 중요한 일이 많았을 것이며 즐거운 마음으로 잠자리에 들 수 있었을 것이다. 분을 품어도 저녁까지 품지 말라던가!
6. 유출병과 문둥병을 비교해보면?
유출병;내부적인 질병이지만 겉으로 봐서(타인이 보기에)는 멀쩡하다.
문둥병;내부적인 질병이면서 겉으로 확연하게 드러난다.
겉과 속을 다 정결하게 유지하라는 분부이다. 보이는 죄도 무섭지만 남이 알지 못하는 나 혼자만이 아는 것까지 정결케 하여야한다.
7. 유출병이 있는 자는 전염병을 옮기는 병원균이나 마찬가지다. 이 사람은 주변을 온통 부정하게 만들 수 있다. 이 사람으로 말미암아 이차적으로 부정하게되는 경우는 다음과 같다. 무슨 느낌이 드는가? 혹은 이와 관련하여 무엇이 생각나는가?
1) 유출병 있는 자의 침상에 접촉하는 자
2) 유출병 있는 자의 몸에 접촉하는 자
3) 유출병 있는 자의 침이 묻은 자
4) 유출병 있는 자의 몸 아래 닿았던 것에 접촉한 자
5) 그런 것을 옮기는 자
6) 유출병 있는 자가 물로 손을 씻지 않고 만진 자
7) 유출병 있는 자가 만진 질그릇과 목기
이런 곳에 접촉하더라도 깨달았을 때 부정하다. 유출병은 겉으로 드러나는 병이 아니다. 본인이 부정하다고 자수하지 않으면 주변 모든 사람을 부정하게 만들 수 있다. 알지 못하고 깨닫지 못하면 부정한 것이 아니다(5:3).
가급적이면 꼼짝 않고 있는 것이 좋겠다. 돌아다닌다면 주변을 온통 부정하게 만들어버린다.
차라리 부정하지 않도록 미리 노력하는 것이 좋겠다. 누구처럼 고백성사가 싫어서 나쁜 짓 하지 않는 것처럼.
8. 아무리 유출병이 있는 사람이라도 만져야할 사람이 있다면 어떡하나? 애기 젖이라도 먹여야하면 어떡하지?
손을 씻으면 된다.(11) 세심하게 신경을 쓰고 계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다. 너무나 인간적인 하나님이시다!
9. 이렇게 부정하게 된 물건이나 장소는 어떻게 하나?
우선 병자가 나아야된다.(26) 그 다음에는 언급이 없다? 저녁까지 부정!
10. 유출병이 깨끗해지면 정함을 받는 절차는 무엇인가?
1) 7일을 계산하여 옷을 빨고 흐르는 물에 몸을 씻을 것이요(13)
2) 제 8일에 산비둘기 둘이나 집비둘기 새끼 둘을 취하고 그 하나는 속죄제로, 하나는 번제로 드릴 것(14)
다른 속죄제와 비교하면 극히 간단하다. 가난한 자가 드리는 제사를 드리라는 것이다. 온 천지를 부정하게 만드는 자신의 부정함에 비하면 정결례는 너무 간단하다.
11. 설정이란 원어의 의미는 남녀간의 정상적인 성관계를 말한다.
부부간의 성행위에서의 설정도 왜 부정하다고 할까?
원래 부부의 성은 하나님께서 주신 복이었지만 범죄한 이후 인생 자체가 저주 아래 놓여버린 탓이다. 어떻게 보면 가장 동물적인 행동이기에 종교의식상 부정한 것으로 취급한 것이다. 하나님께 가까이 하는 자는 여자를 가까이 하지 말라는 것이다(삼상 21:4, 출 19:15). 주 안에서 거듭난 우리는 그렇게 부정하게 여길 필요가 없다. 사람을 부부간에 그렇게 만드신 분이 하나님인데? 사람을 남자와 여자로 만드신 분도 하나님이시고 그 둘 사이에 엄청난 비밀을 묻어두신 분도 하나님인데? 처음에는 그랬지. 어쨌든 범죄의 무서움을 말하고 있다. 모든 복이 일순간에 저주로 바뀌어 버린 것이다. 예수님께서 다시 원래대로 돌려놓으셨다.
12. 유출병이 있는 남자와 유출이 있는 여자 중에 어느 쪽이 더 부정할까? 무슨 근거로?
남자; 유출병이 있는 남자가 만진 것(물로 손을 씻지 않고 만진 자, 유출병 있는 자가 만진 질그릇과 목기; 11-12)은 부정하게 되는 반면에 유출이 있는 여자가 만진 것에 대한 언급은 없으며, 정하게 되는 과정에서 여자는 '옷을 빨고 흐르는 물에 몸을 씻으라'는 말이 없어서 남자가 더 부정한 것 같기도 하다. 여자의 유출은 대체로 정상이지만 남자의 유출은 비정상적인 현상이기 때문에 더 죄가 많은 것이다.
13. 생리로 인해서 부부관계는 최소한 얼마간 금지되어야 하는가?
칠일(19); 이 기간에는 임신이 되지 않는다고 한다. 혹시 된다면 비정상적인 아이가 태어날 가능성이 많단다. 이런 점을 감안해서 주신 말씀인가?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산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어도 그런 의식이 항상 살아 있기가 쉽지 않다. 유대인들은 이런 규정들로 인하여 하나님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도록 만들어 놓았다. 그래도 하나님을 잊어버리고 우상을 섬겼다는 것은 정말 불가사의다. 아니면 이런 하나님을 고의로 버렸는가?
14. 동침하다가 생리의 시작을 알게된 경우는 어떻게 되나?
생리중인 여인과 동침한 자는 백성 중에서 끊쳐지리라(레 20:18)는 규정과 비교해보면 24절(여인과 동침하여 그 불결에 전염되면 칠 일 동안 부정할 것)이 바로 이런 경우를 가리키는 경우일 것이다.
15. 이렇게 세밀하게 부정한 경우를 언급하면서 부정해서는 안된다고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부정한 상태로 그들 가운데 있는 하나님의 장막에 나아옴으로 죽임을 당하지 않게 하기 위함이다. 어른을 모시고 살면 이런 제약이 많은 법이다. 그럼 어떻게 하나? 나 편하라고 어른을 버려? 그런 세상이 되어가고 있는 것 같다. 하나님을 그렇게 생각하면 이것은 엄청난 손실이다. 달리 설명하면 이런 과정을 통해서 하나님을 결코 잊지 말라는 당부라고 하겠다.
16. 여자의 생리현상을 부정하다고 하면 되나?
실제로 부정해서 부정한 것이 아니라 종교의식상으로 그렇다는 말이다; 부부간의 설정과 출산도 부정하다고 하는 판이니 서럽게 여길 필요는 없는 것 같다.
생명의 상징인 피를 흘린다는 점과 자신의 느낌으로도 정하다는 느낌을 갖지 못하는 심리적인 이유도 있을 것이다. 실제로 그런 느낌을 가질 이유가 없다.
귀신과 관련된 일(제사, 배타는 일)에 여자를 뺀 이유도 이런 식으로 부정하다고 여긴 탓이 아닐까?
어떻게 보면 종족보존이라는 사명을 위하여 여성이 다소간 희생당한 측면도 있고 보호받은 측면도 있는 것 같다.
'인자야 이스라엘 족속이 그 고토에 거할 때에 그 행위로 그 땅을 더럽혔나니 나 보기에 그 소위가 월경 중에 있는 여인의 부정함과 같았느니라' (겔 36:17)
17. 부정하게 되는 경우를 너무나 상세히 기록하고 있다. 부정함을 방지하기 위한 노력을 엿볼 수 있다. 하나님께서 부정함에 대한 거부감이 어떤지를 알 수 있다. 식구 중에 이렇게 깔끔하고 까다로운 사람이 있으면 얼마나 피곤할까? 이런 말씀을 읽으면서 우리가 지녀야할 태도는 무엇인가?
예수님께 감사; 예수께서 이런 규정을 충족시키시고 우리를 하나님 앞에 깨끗한 존재로 세우시지 않았다면 우리의 삶도 얼마나 고달플까? 부정에 대한 이런 모든 의식법적 규례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충족되었으므로 더 이상 의미가 없다. 그 속에 담긴 하나님의 뜻과 영적 교훈을 잘 알아서 수용해야한다남자에게 부정한 유출병(1-2)
유출병은 일종의 성병으로 정액이나 더러운 피가 몸에서 흘러 나오는 즉 방탕한 성생활의 결과로 생기는 질병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으로 선택된 이스라엘은 몸과 마음이 깨끗해야 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생활 또는 성기능도 항상 정결해야 하고
정상적으로 유지해야 했습니다(1-2).
유출병자와 접촉된 자와 기구 정결례(3-12)
하나님은 유출병을 앓는 병자 뿐 아니라 유출병자와 접촉한 침상, 의자, 안장 등도 다 부정하며 그 부정한 물건과 접촉한
사람까지도 부정하다고 규정하셨습니다. 유출병자로 인하여 부정하게 된 자는 그 옷뿐만 아니라 그의 몸도 물로 씻어야
합니다(3-12)
유출병자의 정결 의식(13-15)
유출병에서 치료함을 받은 사람은 자신의 몸을 씻고 옷도 7일 간에 걸쳐 빨아야 합니다. 이는 병균이 옷에 붙어 있다가 옷을
통해 다시 옮겨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유출병이 그치고 성결의 기간을 마친 후 자신의 부정을 속함받기 위해 제물을
제사장에게 가져가고 제사장은 그를 위해 속죄제와 번제를 드려야 했습니다(13-15).
설정한 자의 정결 의식(16-18)
설정이란 말은 남자의 정액이 분비되는 것을 말합니다. 남녀의 성관계를 통한 정액의 방출도 의식적으로 부정한 것으로 간주되었습니다.
설정을 한 자는 저녁까지 기다린 후 몸과 옷을 씻음으로 부정을 제거했습니다. 정수가 묻은 옷이나 가죽은 물에 빨았습니다. 동침한 남녀는 물로 씻도록 했습니다(16-18).
여인의 유출 정결례(19-33)
여자의 월경은 피와 연관되어 의식적인 불결로 간주되어 월경 중에 있는 여인과 접촉한 자와 그 여인이 누웠던 자리와 앓았던
자리도 부정한 것으로 간주되어 옷을 빨고 물로 씻어야 했습니다. 그 여인은 부정의 기간이 지난 후 비둘기 두 마리를 속죄제와
번제를 드려 속죄해야 합니다(19-29).
일단 부정해졌던 자가 공동체의 일원으로 복귀하려면 속죄제를 드려 정결케 되고 난 뒤 일정 기간의 연단을 거치고 난 후에야
비로소 공동체의 일원이 될 수 있었습니다. 그것은 부정해진 사람이 그냥 공동체 안에 머물게 되면 그 곳에 속한 모든 사람을 부정케
만들어 그들을 죽음으로 내몰기 때문이었습니다(30-31).
죄를 범했을 경우 먼저 하나님께 회개하고 용서를 빌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죄악이 온 교회와 성도들을 더럽히게 됩니다.
부정한 병과 규례를 통해 우리는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당신의 백성들도 거룩할 것을 요구하신 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32-33).
주께서 주신 오늘! 항상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고 있음을 명심하고 부정한 모습들을 살펴 언제 어디서나 주 안에서 정결하게 살아가길 원합니다.
__________________ 레위기 14장 / 정결케 되는 날(2절)
03-24-2023(금) 사순절 제27일 문둥 환자의 정결케 되는 날의 규례는 이러하니 곧 그 사람을 제사장에게로 데려갈 것이요.
These are the regulations for the diseased person at the time of his ceremonial cleansing, when he is brought to the priest:
6883. 차라아트(tsâraʽath) צָרַעַת
- 하나님께서 치심으로 얻은 병 즉 하나님께서 치셨다. 얻어 맞았다!
정한 산 새 두 마리 -
여기서 '정한새'는 율법적으로 부정하다고 판결받은 새 종류 이외의 모든 들새를 지칭한
것이다(11:13-19).
완치된 문둥병자의 정결 예식을 위해 준비된 정한 산 새 두 마리 중 한 마리는 죽여 그 피를 취하고,
다른 한 마리는 '백향목 나무가지에 우슬초 줄기와 더불어 홍색실로 묶어'(Mishna) 그 죽은 새의 피에 몸을 적신 후 넓은
들판으로 날려 보냈다.
한편 여기서 피를 흘리며 죽어간 새는 일차적으로 문둥병자의 부정을 속하기 위한 희생 제물로서의 의미를
갖지만(Keil), 영적으로는 범죄하여 죽을 수 밖에 없는 인류의 죄짐을 대신 지고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그리스도의 대속 사역을
상징한다(The Preacher's Homiletic Commentary, p. 182).
반면 들판으로 날려보낸 새는 일차적으로
문둥병자가 그 병과 부정에서 해방되어 자유케 된 것을 의미하며(Lange), 구속사적으로는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로 말미암아 모든
성도들이 죄와 사망으로부터 해방되어 영생을 얻게 될 것을 상징한다(Matthew Henry).
백향목 -
레바논의 특산물로서 위로 곧게 뻗어 품위가 있어 보이며, 강하여 좀이 잘 먹지도 않고 잘 썩지도 않을 뿐만
아니라 광택과 향기가 아름다우며 오래 보존되는 특징을 가진 귀한 나무이다.
이같은 나무가 문둥병자의 정결 의식에 특별히 사용된
것은 문둥병이 죄의 부패성을 상징하는 반면, 이 백향목은 죽음을 극복한 생명의 능력 또는 생명의 영속성을 상징하기
때문이다(Keil Delitzsch, p. 386).
홍색실 -
'홍색'은 붉은 피 색깔을 나타낸다. 따라서 일차적으로 이 홍색실은 그 건강한 피 색깔로 인해 '회복된
혈색'(Matthew Henry, Lange), 혹은 '활기찬 생명의 신선함'(Keil)을 의미한다. 나아가 구속사적으로 본절의
홍색실은 특별히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말미암은 구원의 능력을 상징한다(수 2:18).
우슬초 -
고대 근동 지역의 담벽에 흔히 자라는 박하초 식물로 그 냄새가 향기롭다(왕상 4:33).
그러므로 이것은
일차적으로 문둥병자가 그 병의 악취로부터 해방되었음을 나타내기 위하여 사용되었다고 볼 수 있다(Lange, Matthew
Henry).
나아가 성경에서 이 식물은 주로 희생제물의 피를 뿌릴 때 사용되었는테, 죄 및 부정으로부터 정결케 하는 능력을
상징한다(시 51:7).
한편 후일 히브리 기자는 백성을 대표한 모세가 하나님과 언약을 체결한 후, 이스라엘 백성을 정결케 하는
예식 때(출 24:6-8) 물과 피와 붉은 양털 및 홍색실을 취하여 뿌렸다는 사실을 증거함으로써, 하나님께서는 바로 문둥병자와도
같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깨끗케 하여 당신의 자녀로 삼으셨다는 놀라운 복음을 설파하였다(히 9:19, 20).
거룩하게 되는 방법
첫째는 제사를 통하여
둘째는 제사장을 통하여 - 하나님의 인정에 의한 것
정결케 되는(2893) 토호라 [ ṭohŏrâh ] טָהֳרָה
관련 성경 / 정결(레 13:7, 15:13), 깨끗함(레 13:35), 정함(레 14:32), 정결하게 함(민 6:9, 대상 23:28, 겔 44:26), 결례(레 14:23, 느 12:45)구약 성경 / 13회 사용
14장의 문단 구성
1-20. 나병의 정결케되는 규례의 순서
21-32. 가난한 자의 정결케 되는 규제
33-53. 집안 나병과 그 처치
54-57. 결론
문둥병 환자의 정결 의식
범죄한 백성들에게 제사를 통해 속죄의 길을 열어 주신 하나님은 문둥병으로 인해 공동체에서 제외된
자들에게도 성결 의식을 통해 복귀의 가능성을 열어 주셨습니다.
문둥병이 죄의 결과로 인식되었다는 점에서 본장에 나타난 문둥병 정결
의식은 속죄 의식을 상징한다고 하겠습니다.
문둥병자를 위한 정결 의식을 위해 산새 두 마리, 백향목, 홍색실, 우슬초 등을 준비합니다.
이 준비물들은 구속사에서 볼 때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을 예표합니다.
산새 두 마리는 각각 대속의 제물이 되신
그리스도와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상징합니다.
백향목은 성경에서 생명과 번성을 의미하며 그리스도 안에서 성도들에게 주어지는
영생과 축복을 말합니다.
그리고 홍색실은 십자가에서 흘리신 그리스도의 보혈을 의미하며, 물을 뿌려 정결하게 하는 우슬초는
그리스도를 통해 모든 죄가 씻겨졌음을 상징합니다.
문둥병 환자의 정결 의식을 통해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을 예표합니다.
문둥병은 당시 의술이 발달하지 못했던 시대에는 가장 무서운 병이었습니다.
특히 전염되는 특성 때문에 모든 사람들로부터
멸시당하고 배척받았지요.
그러나 하나님은 그런 문둥병자에게도 정결함을 받고 공동체에 복귀할 수 있는 기회를 주셨습니다.
이는 죽을
수밖에 없는 죄인에게도 생명으로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보여 주신 것입니다.
아무리 큰 죄인이라도 하나님께 나와 회개하면 용서함을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세상에서의 삶에서 죄에 빠졌을 때도 낙심하지 말고 간절한 마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면 용서받고 위로함을 받을 수 있습니다.
표준새번역
“사람들이 악성 피부병에 걸린 환자를
제사장에게 데려가면”
그 당시 나병은 천형(天刑)으로서 하나님께 대한 죄의 결과였습니다.
그러기에 부정한 나병환자는 진 밖에서
혼자 따로 살아야만 했습니다.
하지만 오늘 본문에서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나병환자 스스로가 제사장에게 가는 것이 아니라 공동체의
사람들이 그를 데리고 제사장에게 가야한다’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역으로 이야기 하자면 비록 천벌을 받아 징계를 받고 있는
죄인일지라도 신앙공동체는 그를 외면할 것이 아니라 늘 관심을 가지고 돌보아야한다는 것입니다.
우리 주변에도 중죄를
짓고 감옥에 수감되어 격리되어 있는 그리스도인들이 있습니다.
물론 ‘어떻게 그리스도인으로서 그런 일을 저지를 수 있나!’ 하며
그를 정죄하며 비난의 화살을 퍼부을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의 삶에서는 주님을 비롯한 우리 그리스도인들 모두의 이름이 걸려있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그런 뉴스를 접할 때마다 범인(凡人)의 경우보다 더 분개하곤 합니다.
하지만 오늘
본문을 통해 하나님께서는 ‘천형(天刑)을 받은 큰 죄인일지라도 공동체가 그를 외면해서는 안 된다’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가
회복될 때까지 관심을 가지고 돌보아야 한다’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죄는 미워하되 사람은 미워하지 말고 끝까지 품어야 한다는
것’이 하나님의 본심이시기 때문입니다.
우리 모두는 다 하나님 앞에서 죽을 수밖에 없는 죄인이었습니다.
하지만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님께서는 그런 우리를 외면하지 않으셨습니다.
죄인 된 우리에게 관심을 가지시고 낮고 낮은 이 땅에 찾아
오셨습니다.
그리고 우리 영혼 돌봄을 위해 자신의 몸이 십자가에서 갈기갈기 찢기시는 것도 마다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런 주님의
사랑이 있었기에 죄인이었던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라는 신분을 얻게 된 것입니다.
그런 우리이기에 비록 우리 눈에 큰
죄를 지은 그리스도인일지라도 우리는 결코 그를 외면해서는 안 됩니다. 정죄하며 그를 마음으로부터 완전히 밀어내서도 안 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회복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반드시 죄로부터 그를 회복시켜주시는 ‘사랑과 자비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우리 스스로가 그 일에 증인이지 않습니까? 그러기에 우리는 죄에 빠졌었던 그리스도인을 계속 정죄함으로
그를 우리 마음으로부터 분리해낼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회복시키실 그 날을 기대하며 지속적인 관심과 사랑으로 그에게 다가가야
합니다.
10절부터 20절까지는 나병이 나은 자가 드리는 네 가지 제사 - 속건제, 속죄제, 번제, 소제 - 의식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속건제는 어떤 사람이 하나님 혹은 다른 사람에게 져야할 의무에 대해 부적합한 행위를 했거나 그 의무를
거부했을 때 요구되는 제사입니다. 그에 대한 잘못을 용서받기 위해 드려지는 제사가 바로 속건제입니다. 이와 더불어 나병환자의
정결예식에는 속죄제가 포함되었습니다. 나병은 하나님의 진노에 의한 것이었기에 정결해지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용서가 필요했습니다.
그러기에 반드시 속죄제가 드려져야 했습니다. 이와 관련하여 속건제와 속죄제가 저지른 과거 죄에 대한 청산 절차라면, 번제와 소제는
이제 하나님께 새롭게 헌신하고 봉사할 것을 다짐하겠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본문의 제사란 오늘 날 우리가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의 원형입니다. 우리 또한 어떤 의미에서는 영적 나병환자 아닙니까? 거룩하신 하나님의 자녀로서 성결한 삶을
살아가야함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그토록 싫어하시는 죄를 아직도 반복해서 저지르고 있으니까 말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주일을
부활하신 주님 안에서 우리가 누리게 된 영생을 기뻐하는 축제일로만 생각할 것이 아니라, 죄에 대해 통회하며 하나님께 용서를 구하는
속건제와 속죄제의 날로 기억해야 합니다. 더 나아가 죄에 대한 통회함을 넘어 하나님의 자녀다운 성결함으로 새로운 한 주간을
살아갈 것을 다짐하는 결단의 날로 삼아야 할 것입니다. 그를 통해 다시금 겸비함과 거룩함을 회복할 수 있게 되기 때문입니다.
21절부터
32절까지는 가난한 나병환자가 낫게 된 후 드리는 제사에 대한 소개가 있습니다. 특별히 제물과 관련, 우리는 본문 내용을 통해
그가 상대적으로 값이 덜 나가는 제물로 제사를 드릴 수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일반인들과 제물은 달랐을지라도
하나님께서는 그에게도 제물을 요구하셨습니다. 가난한 자라고 해서 면제해 주시지 않으셨습니다. 그것은 가난한 자에 대한 하나님의 속
깊은 배려이셨습니다.
제사는 오늘날의 예배로, 제물은 헌물에 비유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헌금을 통해 모든 것이
주님께로부터 온 것임을 다시금 기억하게 되고, 마음에 새기게 됩니다. 이는 곧 우리가 물질에 빼앗겼던 마음을 다시금 주님께로
모으게 하는 구심점 역할을 합니다. 가난하면 오히려 돈에 더 집착하게 되고, 돈의 마력에 (魔力) 끌려가기 십상입니다. 그러기에
하나님께서는 상대적으로 값이 덜 나가는 제물일지라도 가난한 자에게도 제물을 요청하셨던 것입니다. 가난한 자를 더 가난한 자리로
이끌어 가시고자 함이 아니라 헌금을 통해 그의 심령을 하나님 나라로 채워주심으로, 돈의 마력에 빠지지 않도록 하시기 위한 특별하신
배려였던 것입니다.
둘째 단락인 33절부터 53절까지는 집에 발생한 나병 색점으로부터 정결하게 되는 지침이
소개되고 있습니다. 이는 이스라엘 백성이 약속의 땅에 들어가 거주하는 집에서 나병이 발생했을 경우 이를 처리하는 규례입니다.
약속의 땅에서 지은 집도 나병 발생의 여지가 있다는 것입니다.
이는 흡사 오늘 우리 그리스도인의 모임인 교회와
비슷합니다. 신앙 공동체인 교회는 구원을 받은 사람들의 모임입니다. 즉 약속의 땅에 들어선 사람들의 집합체입니다. 하지만 죄라는
것이 언제 그 공동체에 파고들지 모릅니다. 그러기에 교회공동체의 지체인 우리 각 자가 먼저 죄에 대해 깨어있어야 합니다. 아울러
교회라는 집 또한 노출된 죄로부터 공동체를 정화해 나갈 수 있는 순결의 능력을 잃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오늘 함께 나누신 말씀들을 기억하심으로, 오늘 한 날을 주님 안에서 넉넉함과 겸비함, 헌신과 순결의 삶을 살아가시는, 사랑하는 우리 교우님들 되시기를 소원합니다.
__________________ 레위기 13장 / 제사장이 진단하여(3절)
03-23-2023(목) 사순절 제26일 제사장은 그 피부의 병을 진찰할찌니 환처의 털이 희어졌고 환처가 피부보다 우묵하여졌으면 이는 문둥병의 환처라 제사장이 진단하여 그를 부정하다 할 것이요.
The priest is to examine the sore on his skin, and if
the hair in the sore has turned white and the sore appears to be more
than skin deep, it is an infectious skin disease. When the priest
examines him, he shall pronounce him ceremonially unclean.
레위기서의 목적은
첫째, 거룩한 백성
둘째, 거룩한 나라
거룩한 백성은 거룩한 삶이 요구됩니다.
거룩한 삶을 위하여
1-10장 / 제사법
1-7장 : 제사의 방법과 규례
8-10장 : 제사장을 위한 규례
11-16장 / 정결법
11장(47절) : 음식에 대한 것
12장(8절) : 산모의 출혈
13장(59절) : 나병
14장(57절) : 나병
17-27장 / 성결법
13장 - 나병의 성격
14장 - 나병의 정결 방법(구원의 문제)
문둥병의 네 가지 특성(성격) / 문둥병은 죄의 모형으로 생각
6883. 차라아트(tsâraʽath) צָרַעַת
어원 / 6879에서 유래
관련 성경 / 나병(레 13:2, 왕하 5:3, 대하 26:19)
구약 성경 / 35회 사용
* 6879. צָרַע
관련 성경 / 나병환자(레 13:44, 45, 22:4, 민 5:2, 삼하 3:29, 왕하 5:1, 7:3,8, 15:5), 나병(출 4:6, 레 14:3, 왕하 5:27).
구약 성경 / 20회 사용
부정(2930) 타메 טָמֵא
발음 / 타메(ṭâmêʼ)
[명] 부정(레 15:32, 5:3)
불결하다, 더럽혀지다, 오염되다, 타락하다, 부정하다, 부패하다, 모독하다[특히 제례상 불결한 의미로 쓰임],
레 15:32, 18:20, 23.《반》 טָהַר 레 11:24이하.
악성 피부병과 유출병에 대한 엄격한 조치는 거룩한 창조질서 회복에 그 목적이 있어
문둥병(나병)이 아닌 악성 피부병(레위기 13~14장)
레위기 13~14장은 표면에 발생한 악성 번식의 진단과 그 처리 방식에 대한 규정이다. 13장은 사람의 피부에 발생한 악성 번식들의 증상과 진단법이 설명되고 14장은 그로부터 정결함을 되찾는 복잡한 절차들로 채워진다. 먼저 두 가지 이유에서 ‘문둥병’(한글개역) 혹은 ‘나병’(개역개정), 즉 ‘한센병’이라는 번역은 오류다. 첫째, ‘문둥병/나병’이라 번역된 히브리어 단어 짜라아트(tsa-ra-at)는 ‘벽이나 물건의 표면에 번지는 악성 곰팡이’라는 뜻으로도 쓰인다. 벽이 문둥병에 걸릴 수는 없으니 짜라아트를 ‘문둥병/나병’으로 옮기는 것은 적절치 않다.
둘째, 사람의 피부에 발생된 짜라아트의 증상들은 나병(한센병)과는 거리가 멀다. 많은 학자들이 지적한대로 사람의 피부에 나타난 짜라아트는 불에 덴 피부에 나타나는 증상을 포함해(레 13:24~28) 매우 다양한 양상의 피부병들을 가리킨다. 대표적인 증상으로는 피부가 눈처럼 하얗게 일어나며 피부 발진(색점)으로 붉게 부풀어 오른 종기, 전염성이 있는 피부 발진, 머리털이 빠지며 생기는 머리의 피부염을 비롯한 피부 질환들이 있다. 따라서 우리는 편의상 ‘나병’이라는 말을 사용하겠지만, 사람 피부의 짜라아트는 악성 피부병, 건물이나 사물의 표면에 나타나는 짜라아트는 악성 곰팡이로 해석하는 것이 옳다. 그러나 이러한 악성 표피 질환은 보건위생학적인 부정결이 분명하나 그보다 더욱 중요하게는 제사장에 의해 제의적인 부정결로 판정된다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
악성 피부병과 악성 곰팡이 증상들
악성 피부병, 즉 나병의 증상들 중에 대표적인 것이 피부가 군데군데 하얗게 변하는 피부 발진인데 이때는 털도 덩달아 희어지기 때문에 마치 피부에 눈이 내린 것처럼 보이게 된다. 예를 들어 저주를 받은 미리암(민 12:10)과 나아만(왕하 5:27)에게서 공통적으로 나병의 전형적인 증상으로 “나병이 발하여 눈같이 되었다”라는 표현이 사용된다. 일단 나병의 증상이 발견되면 제사장이 악성 여부를 판정하는데 현대 의학적 방법으로 표현하자면 질환의 양성과 음성을 판정하는 것과 비슷하다. 음성 판정이 내려지면 추방을 면하고 자신의 거처에서 일련의 정결 의례를 치러야 하지만, 악성 판정이 내려지면 그 즉시 추방된다. 여기서는 지면상 악성 피부병과 악성 곰팡이의 종류들과 증상들을 설명할 수 없다. 이 증상들은 대체로 다음과 같은 종류들로 나뉜다: (1)나병증상과 진단(13:2~17); (2)치료된 종기의 감염(13:18~23); (3)화상과 피부 감염(13:24~28); (4)옴(13:29~37); (5)어루러기(13:38~39); (6)비정상적 대머리(13:40~44). 이것들에 대해서는 필자의 저서 <레위기의 신학과 해석>을 참고하라. 건물벽이나 옷, 가죽 등의 사물 표면에 발생한 악성 곰팡이는 청색 얼룩점이나 홍색 얼룩점 여부에 의해 판정된다. 악성 번식의 진단과 판정, 그리고 정결 절차는 다음과 같이 정리해볼 수 있다. <표 참조>
한편, 나병에 걸린 사람의 피부는 마치 송장과 같다(민 12:12). 즉, 나병은 죽음에 속한 증상이므로 부정하다. 또한 나병과 송장의 연관성은 시신과의 접촉으로 부정결해진 사람을 위한 정결 규례(민 19:1~13)와 나병 환자의 정결 규례(레 14:4~7)의 유사성을 통해 암시된다. 마찬가지로 악성 곰팡이가 핀 건물이나 사물 역시 무덤과 그 안에 있는 물건을 연상케 한다.
사람의 경우 최종적으로 악성 번식으로 판정되면 추방된다. 그는 즉각 진 밖으로 추방되는데, 병이 완치된 후에는 진영 내로 복귀가 가능하다. 다만 그때에는 네 단계에 걸친 매우 까다롭고 복잡한 정결 절차가 요구된다(레 14:1~32). 그것에 대한 상세한 도표와 설명도 필자의 책을 참고하라.
유출병들과 정결례(레위기 15장)
정결법의 마지막 주제는 남녀 생식기에서 발생하는 다양한 유출병이다.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생명의 기운이자 씨앗인 피와 분비물, 그리고 정액의 유출은 곧 생명이 빠져 나간다는 의미다. 신체의 유출은 생명에서 멀어지고 죽음에 가까워지고 있다는 신호이기에 부정하게 여겨졌다. 유출병을 다룬 레위기 15장은 크게 남성의 만성 유출과 설정(1~18절), 그리고 여성의 만성유출과 월경(25~30절)으로 나뉜다. 한편, 유출병으로 인한 부정결의 이차, 삼차 감염의 양상과 그것에 따른 조치는 굉장히 복잡하다(필자의 저서의 도표를 참고하라).
(1)남자의 만성 유출과 설정(1~18절): 남자의 성기로부터 발생하는 유출은 정액 유출과 만성 비뇨기 질환에 의한 유출로 나뉜다. 첫 번째 유출병인 몸(즉, 성기)에서 액체가 흘러나오는 증상(3절)은 성기로부터 분비물이 나오는 임질과 같은 성병일 가능성이 있다. 두 번째는 성기에 분비물이 끼어 배뇨에 지장을 주는 증상으로 볼 수 있다. 이처럼 비뇨기 질환으로 인한 유출은 장기간 지속되는 것이 특징이다. 유출병을 앓던 남자의 유출이 중단되면 그날로부터 7일을 기다린 후에 옷을 빨고 목욕을 한다. 그리고 8일 째에 그는 성소에 올라가 속죄제와 번제로 비둘기 두 마리를 바친다. 여기서 핵심은 속죄제인데, 그는 유출병으로 인해 그 자신뿐 아니라 성소 역시 더럽혀졌기에 속죄제의 피로 그러한 오염을 씻어낸다. 한편, 남자의 성기로부터의 설정은 두 가지로 나뉜다. 몽정처럼 불가항력인 설정과 정상적인 성관계에 의한 설정이다. 두 경우 모두 하룻동안 부정케 된다. 당일에 목욕을 한 뒤 저녁까지 기다렸을 것이다(18절).
(2)여자의 만성 유출과 월경(19~24절): 여자의 자궁 출혈 또한 두 가지로 나뉜다. 하나는 매달 생리적 현상으로 찾아오는 월경과 다른 하나는 비정상적으로 계속되는 자궁 출혈이다. 월경이 찾아오면 여자는 7일간 부정한 상태로 지낸다. 이 기간은 대략 여성의 평균적인 월경 기간과 일치한다. 본문에는 명시되어 있지 않으나 추정컨대 7일째 되는 날 여자는 옷을 빨고 목욕을 한 뒤 그날 저녁이면 정결을 회복한다. 이때 성소에 올라가 희생을 드릴 필요는 없었다는 점에서 이어지는 만성 자궁 출혈에 비해 부정결의 정도가 낮았다. 월경 중인 여자와 잠자리를 할 경우 심각한 결과가 초래된다. 본문은 남자가 여자와 마찬가지로 7일간의 부정결 기간을 겪어야한다고 명시한다. 7일째 되는 날, 본문에 역시 언급되지 않으나 그는 옷을 빨고 목욕을 해야 했을 것이다. 한편, 여자의 만성 출혈은 상태가 더욱 심각하다(25~30절). 이것은 여자의 성기로부터 출혈이 오래 지속되는 상태를 가리킨다. 월경으로 인한 정상적인 출혈을 넘어 장기간 지속되는 이러한 만성 자궁 출혈은 의학적 관점에서 볼 때 혈루증일 가능성이 크다. 자궁 출혈이 지속되는 동안 환자인 여자는 부정결한 상태를 벗어날 수 없다. 따라서 월경과 마찬가지로 접촉을 통해 부정결이 감염된다. 출혈이 멈추면 그로부터 7일을 더 기다린 뒤 본문에는 언급되지 않지만 옷을 빨고 목욕을 해야 했을 것이다. 월경과는 달리 8일 째에 그녀는 반드시 성소에 비둘기 두 마리를 가지고 올라와 속죄제와 번제를 드려야한다. 이러한 사실은 만성 자궁 출혈이 월경보다 훨씬 더 강한 부정결이었음을 말해준다. 무려 12년 동안 만성 자궁 출혈을 앓던 복음서의 혈루증 앓던 여인에 대한 이야기는 이러한 배경에서 이해할 때 그녀의 절실함이 더욱 강하게 느껴진다.
정결법의 의의
정결법에 관해 한 가지 풀어야할 숙제는 왜 자연스러운 출산과 생리, 그리고 정상적인 성관계를 더럽게 여겼느냐는 것이다. 출산과 월경의 문제는 앞서 어느 정도 설명한 바 있는데 출산과 성 관계가 그 자체로는 더러운 것으로 간주되지 않았음을 기억해야 한다. 그것은 하나님 창조의 축복이었으나 다만 그런 행위 뒤에 발생한 신체로부터의 피와 정액의 유출 때문에 부정을 유발했다. 앞서 말한 대로 이것은 ‘생명력의 소실’이므로 부정하게 여겨진다. 성경신학적 관점에서는 이 문제를 포함한 레위기 11~15장의 부정결들은 아마 창세기 3장에서 인간의 범죄로 인해 몸과 자연의 창조질서가 다소 어긋난 결과로 보아야할 것이다.
정액이 부정결을 유발하기 때문에 하나님 면전에, 즉 성소에 올라갈 때나 거룩한 전쟁을 수행할 때는 부부간의 성관계가 금지되었고(출 19:15; 삼상 21:4~6; 참조. 삼하 11:11), 몽정을 해도 그 사람을 진 밖으로 내보냈다(신 23:10). 바울이 기도에 집중하려 할 때 부부가 방을 따로 쓰도록 권면한 이유도(고전 7:5) 이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이방의 제의에서 성관계는 성소 내에서 중요한 제의 중 하나로 실행되곤 했다. 수메르 사회에는 ‘성혼례’(sacred marriage rite) 제도가 있었는데 신당의 꼭대기 층에서 새해를 맞을 때마다 풍요와 다산을 기원하며 선택된 여자 사제와 도시 국가의 통치자인 왕이 혼인식을 거행하고 성관계를 가졌다. 그러나 구약은 인간의 성 행위를 철저히 인간의 영역으로 제한했다. 성소에서는 어떠한 성 행위도 금지되었으며 각자의 처소에서 성 행위를 한 후에는 성소에 접근할 수 없었다. 자녀의 출산은 창조의 질서 내에서 하나님의 축복으로 허용되는 것이지 성소에서의 제의적 성행위라는 수단을 통해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성 자체는 하나님께서 주신 아름다운 선물이지만 인간에 의해 최상의 쾌락을 위한 수단으로 오용될 위험은 상시 존재했다. 그로 인해 하나님 앞에 특히 집중해서 나아갈 때는 일시적인 성적인 절제가 요구되는 것으로 보인다.
정결법의 정-부정 구분은 기본적으로 제의 신학에 의한 것이지만 그 배경에는 보건-위생학적 관심이 결부되어 있다. 먹지 못하도록 금한 짐승들 중 일부는 비위생적인 곳에 서식하며, 월경을 겪는 여자의 일시적인 격리와 산모의 장기 격리는 그녀의 신체적 회복을 위한 배려이기도 하다. 또한 악성 피부병과 곰팡이는 강한 전염성과 번식력으로 인해 그 오염원이 차단되거나 파괴되었다. 유출병 환자의 활동 제한과 부분적 격리는 병원균의 감염을 차단하고 불결한 신체적 상태를 청결케 하여 환자가 조속히 회복되도록 하기 위한 조치일 수 있다. 그러나 레위기의 정-부정의 진단은 언제나 그런 보건 위생학적 조치 이상의 제의적·신학적 개념에 의한 것이다. 앞서 강조한 대로 ‘부정 탔다’는 것은 그런 위생적 개념 이상의 정신적·관념적 개념으로, 부적절하고 흉조를 예감케 하는 상태를 말한다.
이미 논의한 바와 같이 정결법의 목적은 ‘거룩’에 있다. 신약에서 정결법의 형식은 모두 폐지되었지만 그 본질적 취지는 율법을 통해 계승된다. “너희를 부르신 거룩한 이처럼 너희도 모든 행실에 거룩한 자가 되라. 기록되었으되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 하셨느니라”(벧전 1;15~16; 참조. 벧전 2:9). 바울은 신자들의 모임인 교회를 ‘성전’이라 칭하면서 그 영적인 성전을 더럽히면 하나님께서 그를 멸하실 것이라 경고한다(고전 3:16-7). 그러므로 신자는 거룩한 신분을 유지하기 위해 세상과는 구별된 정결한 삶을 살아야 한다. 바울은 ‘부정한 것을 만지지 말라’는 레위기의 정결법을 영적·윤리적 교훈으로 바꾸어 재적용한다: “그러므로 너희는 그들 중에서 나와서 따로 있고 부정한 것을 만지지 말라”(고후 6:17). 음식법은 폐지되었으므로 먹는 문제로 하나님의 사역이 방해를 받아서는 안 된다. 만물이 모두 깨끗하고 부정한 음식이란 없으며 거리낌으로 먹는 사람에게 악할 뿐이다(롬 14:20). 하나님의 백성은 “거룩함을 온전히 이루어 육과 영의 온갖 더러운 것에서 자신을 깨끗케”해야 한다(고후 7:1). 이렇게 자신을 깨끗하게 하는 사람은 귀하게 쓰이는 그릇이 되어 주인이 기쁘게 사용하고 모든 선한 일을 하기에 합당한 사람이 될 것이다(딤후 2:21). 이렇듯 신약에서는 신체적·외적 정결성과 완전함보다는 내면의 도덕적 정결성과 완전성이 산 제물로 드려지는 신자의 표준이 된다.
1. 부정한 것(불결성)
13장-15장 / 부정하다 53회 반복 사용
죄는 부정한 것
이사야 64:6
무릇 우리는 다 부정한 자 같아서 우리의 의는 다 더러운 옷 같으며 우리는 다 잎사귀 같이 시들므로 우리의 죄악이 바람 같이 우리를 몰아가나이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로마서 3:23)
2. 전염성
레위기 13:5-8
칠일만에 제사장이 그를 진찰할찌니 그의 보기에 그 환처가 변하지 아니하고 병색이 피부에 퍼지지 아니하였으면 제사장이 그를 또 칠일 동안을 금고할 것이며.
칠일만에 제사장이 또 진찰할찌니 그 환처가 엷어졌고 병색이 피부에 퍼지지 아니하였으면 피부병이라 제사장이 그를 정하다 할 것이요 그는 옷을 빨 것이라 그리하면 정하리라.
그러나 정결한 여부를 위하여 제사장에게 보인 후에 병이 피부에 퍼지면 제사장에게 다시 보일 것이요.
제사장은 진찰할찌니 그 병이 피부에 퍼졌으면 그를 부정하다 진단할 것이라 이는 문둥병임이니라.
야고보서 1:15
욕심 - 죄 - 장성한즉 - 사망
47-59절 / 의복
3. 격리
45-46절
문둥 환자는 옷을 찢고 머리를 풀며 윗입술을 가리우고 외치기를 부정하다 부정하다 할 것이요.
병 있는 날 동안은 늘 부정할 것이라 그가 부정한즉 혼자 살되 진 밖에 살찌니라.
4. 불살라야 해결
52. 그는 그 색점 있는 의복이나 털이나 베의 날이나 씨나 무릇 가죽으로 만든 것을 불사를찌니 이는 악성 문둥병인즉 그것을 불사를찌니라
55. 그 빤 곳을 볼찌니 그 색점의 빛이 변치 아니하고 그 색점이 퍼지지 아니하였으면 부정하니 너는 그것을 불사르라 이는 거죽에 있든지 속에 있든지 악성 문둥병이니라.
57절. 그 의복의 날에나 씨에나 무릇 가죽으로 만든 것에 색점이 여전히 보이면 복발하는 것이니 너는 그 색점 있는 것을 불사를찌니라.
문둥병을 불사름으로 해결하듯 죄에 대한 것도 불사름에 의해서 해결
요한계시록 20:14-15
- 사망과 음부도 불못에 던지우니 이것은 둘째 사망 곧 불못이라
- 누구든지 생명책에 기록되지 못한 자는 불못에 던지우더라
요한계시록 21:8
그러나 두려워하는 자들과 믿지 아니하는 자들과 흉악한 자들과 살인자들과 행음자들과 술객들과 우상 숭배자들과 모든 거짓말 하는 자들은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에 참예하리니 이것이 둘째 사망이라.
마가복음 9:43
만일 네 손이 너를 범죄케 하거든 찍어버리라 불구자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두 손을 가지고 지옥 꺼지지 않는 불에 들어가는 것보다 나으니라.
문둥병의 감정법
1-8 피부병(발진 또는 색점)에 의한 감정법.
9-17 난육(생살)에 의한 감정법.
18-23 종처에 의한 감정법.
24-28 화상에 의한 감정법.
29-37 모발환처에 의한 감정법.
38-44 색점과 대머리에 의한 감정법.
45-46 문둥병자의 격리.
47-59 의복에 생기는 나병과 그처리.
문둥병의 공동체적 의미.
율법에 나타난 정결 규례 중에서 본장에 나타난 문등병에 관한 규례가 가장 상세히 다루어졌다.
이는 당시
문화에서 문둥병은 개인만이 아니라 공동체에 심각한 상황을 야기하는 원인이 되기 때문이다.
첫째로 당시에 문둥병은 접촉만으로도
전염되는 병으로 인식되었고 치료가 거의 불가능하였다.
따라서 문둥병 환자가 발생한 경우 공동체 전체에 전염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하여 철저히 격리시키거나 추방시켜야 했다.
둘째로 천형의 병으로 여겨지던 문둥병은 죄에 대한 신의 저주로 생각되었다.
따라서
문둥병이 발생한 경우 공동체 전체가 신께 제사를 통해 용서를 구하였던 것이다.
이로써 공동체 전체에 대한 신의 저주를 면하고자
하였으며 또한 자신들의 죄의 요소를 제거하는 계기로 삼아서 전체 공동체의 성결성을 유지하고자 하였다.
본장에 나타난 문둥병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문둥병의 발생은 이스라엘에게 하나님과의 관계에 대한 위기를 보여 준다.
따라서 제사장은 문둥병 유무를
철저하게 가려내어 하나님께 속죄의 의식을 드렸던 것이다.
그러므로 문둥병에 관한 규례는 단순히 위생학적인 전염병 예방의 내용보다
하나님과의 관계를 파괴시키는 죄에 대한 엄중한 경고를 의미한다.
본장에 나타난 문둥병은 당시 사람들에게 죄의 대가로 여겨졌다.
따라서 문둥병 환자를 격리하는 것은 죄로부터 다른 사람들을
보호한다는 의미를 지닌다.
이와 같이 죄는 문둥병처럼 타인에게 전염되는 특성을 지니며 돌이킬 수 없는 결과를 초래함을 교훈해 주고
있다.
그러므로 죄에 대해 심각함을 깨닫지 못하고 대수롭지 않게 생각한다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죄에 오염되어 버리고 만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죄악의 모든 요소들로부터 철저히 자신을 보호하고 악한 자와는 절대로 관계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또한 죄에
대해서는 아주 단호한 자세로 싸워야 하며 죄가 될 수 있는 것들은 그 모양이라도 버리는 결단력 있는 삶을 살아야 한다. 그럴 때
하나님의 심판을 면할 수 있다.
성경에서 가장 많이 언급된 질병은 나병입니다.
나병 관련 단어가 83회나 등장합니다.
성경에서 나병이 처음으로 등장하는 때는
모세가 하나님을 만나는 장면에서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을 출애굽 시키라는 하나님의 명령 앞에서 모세는 거부합니다. 그 불순종으로
모세의 손은 나병에 걸립니다. 그러나 그 즉시 하나님은 나병에 걸린 모세의 손을 치유하심으로 나병 같은 불치병도 고칠 수 있는
전능자 하나님이심을 보여주셨습니다.
모세의 누이 미리암도 나병에 걸렸습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의 대리자였던 모세가 구스 여자와 결혼한 것을 비방함으로써 하나님이 주신
모세의 권위를 훼손시킨 것에 대한 하나님의 벌이었습니다. 열왕기하 5장에는 엘리사의 사환 게하시가 문둥병에 걸렸다가 치유받은
나아만 장군에게 보상금을 요구했다가 나병에 걸렸습니다. 그리고 역대기하 26장에는 블레셋을 정복하고 교만해진 웃시야 왕이 제사장의
규례를 어기고 여호와의 성전에 들어가 향단에 분향하는 범죄를 저지름으로 인해 나병에 걸렸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말씀, 곧 그의 권위와 경륜과 주신 규례에 대한 불순종이 있을 때, 형벌로 주어진 병이 나병입니다. 모든 병이 그렇지만 특히 나병이 더욱 더 부정한 질병으로 해당된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본문 1~2절을 보시겠습니다. ‘여호와께서 모세와 아론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만일 사람이 그의 피부에 무엇이 돋거나 뾰루지가 나거나 색점이 생겨서 그의 피부에 나병 같은 것이 생기거든 그를 곧 제사장 아론에게나 그의 아들 중 한 제사장에게로 데리고 갈 것이요’
오늘 본문에서 나병으로 번역된 단어, ‘차라아트’는 악성피부병을 포함하는 광범위한 피부질환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2절의 ‘나병’에 1)이 있는데 아래를 보면, ‘넓은 의미로 악성피부병을 뜻함’이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나병은 한센씨병, 또는 한센병이라 부릅니다. 나병을 한센병이라 부르는 이유는 1873년 노르웨이의 세균학자이자 의학자인
아우메우에르 게하르트 한센(Armauer Gerhard Henrik Hansen, 1841-1912)이 나병 바이러스를 발견했기
때문입니다. 이후 나병 치료를 위한 연구가 본격화 되면서 1941년에 'DDS (Diamino-Diphenyl
Sulfone)'라는 특효약이 발명되어 한센병은 완치가 가능한 질병이 되었습니다. 나병이란 말이 역사적으로 질병보다는 멸시,
격리, 차별, 편견의 의미를 담고 있었기 때문에 현재는 나병이라 하지 않고 한센병으로 부르고 있습니다.
사실 오늘 본문의 내용은 한센병에 대한 설명이라기 보다는 악성피부병에 대한 내용입니다. 본문 2~42절까지는 주로 오늘날의 마른
버짐이나 기계충, 피부손상과 관련이 있고, 47~59절은 곰팡이 세균과 관련된 증상이 기록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반면 나병으로
불리는 한센병은 곰팡이나 일반 세균이 아닌 특정 쪽팡이 세균과 관련이 있는 질병입니다. 따라서 나병, 즉 한센병으로 번역되어 있는
오늘 본문의 단어를 보다 정확하게 번역하면 악성피부병입니다. 하지만 당시 고대 사회에서는 악성피부병과 한센병을 구분할 수
없었기에 피부에 생긴 단순한 문제를 제외하고는 모두 한센병으로 불렀습니다.
문제는 한센병을 부정한 병으로 보았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한센병에 걸린 사람을 부정한 사람으로 취급했습니다. 여기서 부정하다는
말은 단지 질병의 확산을 막기 위한 방지 차원에서 격리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은 자, 저주받은 자로 취급을 받았다는
의미입니다. 이로인해 한센병에 걸렸다고 판단된 사람은 의료적 격리가 아닌 사회적 격리, 종교적 격리, 비인격적 격리를 당해야만
했습니다.
이것을 오늘 내 실존에 비추어서 생각해 보겠습니다.
율법적으로 볼 때, 한센병에 걸린 사람은 부정한 사람입니다. 부정한 사람은 거룩한 공동체에 들어오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절대로 나아갈 수 없는 사람이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부정한 사람이요 거룩한 공동체에 들어오지 못하는 사람이요 그래서
하나님 앞에 절대로 나아갈 수 없는 사람은 실은 다름 아닌 나 자신이었습니다. 본래 우리 모두는 하나님으로부터 선택받지 못해
영원히 멸망받을 수밖에 없는 이방인이었습니다. 그러고보니 율법으로는 우리가 바로 한센병 걸린 자와 같은 존재였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렇게 살아야만 했습니다. 본문 45~46절입니다.
‘나병 환자는 옷을 찢고 머리를 풀며 윗입술을 가리고 외치기를 부정하다 부정하다 할 것이요 병 있는 날 동안은 늘 부정할 것이라 그가 부정한즉 혼자 살되 진영 밖에서 살지니라’
옷을 찢고 머리를 풀며 윗입술을 가리고 부정하다 부정하다를 반복하면서 혼자서 그것도 사람들로부터 격리되어 살아야만 하는
존재였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우리에게 다가오셨고 우리를 위해 십자가 달려 죽으심으로 우리를 고쳐주셨습니다. 그 은혜로 우리는
정결한 존재가 되었으며, 더 이상 격리되어 혼자 살지 않아도 되었습니다. 이 사실을 인정한다면 우리의 마음속에 한 가지 사실이
각인되어야 합니다. 그것은 감사입니다.
누가복음 17장에 보면, 열 명의 한센병에 걸린 사람들의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주님을 우연히 만난 열 명은 소리높여 자신을
긍휼히 여겨 달라고 외쳤습니다. 이에 주님은 그들을 치유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제사장에게 가서 너희 몸이 깨끗케 되었음을 보이라
하셨습니다. 그 길로 열 명은 제사장에게 가서 한센병이 치료되었음을 확증받았습니다. 그 가운데 9명은 각자 자신의 길로
가버렸으나 1명만이 다시 주님께 돌아와 치유받은 것에 대해 감사를 표했습니다. 이에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누가복음
17:17~19절입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열 사람이 다 깨끗함을 받지 아니하였느냐 그 아홉은 어디 있느냐 이 이방인 외에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러 돌아온 자가 없느냐 하시고 그에게 이르시되 일어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하시더라’
한센병에서 고침 받고 감사한 마음을 표현한 사람과 감사하지 않은 사람의 차이는 하늘과 땅 차이입니다. 주님은 감사를 표현한 한
사람에게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 사람은 이 한 사람뿐이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또한 주님은 감사를 표현한 것을 믿음으로 보셨으며, 그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감사는 이처럼 귀한 것입니다. 감사는 곧 믿음이요 감사는 곧 구원받은 증거가 되기
때문입니다.
한때 예수님을 믿는 성도들을 핍박하던 사울이 회심하고 돌이켜 주님을 핍박하던 자에서 주님을 위한 사명자로 살아갈 때, 그는 주님이
걸어가신 좁은 길, 고독한 길을 걸었습니다. 편한 세상길을 포기하고 남들 가지 않는 험한 길을 걸어갔습니다. 이처럼 주님의
은혜에 감사하는 사람은 세상 사람들이 다 그렇게 하기에, 나도 그렇게 사는 사람이 아니라, 진리의 좁은 길을 걸어가는 사람입니다.
한센병에 걸린 자와 같은 나를 고치시고 구원해 주신 주님께 삶으로 감사를 드리는 오늘 하루가 되시길 원합니다.
__________________ 레위기 12장 / 정결케 되는 기한(4절)
03-22-2023(수) 사순절 제25일 그 여인은 오히려 삼십 삼일을 지나야 산혈이 깨끗하리니 정결케 되는 기한이 차기 전에는 성물을 만지지도 말며 성소에 들어가지도 말 것이며.
טָהוֹר 스트롱번호2889
순수한.
깨끗한
혼합되지 않은
-
발음 [ ṭâhôwr ]
- 어원
- 2891에서 유래
- 관련 성경
- ☞정결한(창7:2, 8:20, 출37:29, 합1:13), 부정하여지지 아니한(레11:36), 깨끗한(레7:19, 대하13:11, 사66:20), 정한(레10:10, 민19:19, 겔22:26), 순결한(레24:4,6, 시12:6), 성결한(대하30:17), 맑은(겔36:25). [명] 순금(출25:11, 대하3:4, 대상28:17), 정결(민9:13).
- 구약 성경
- 95회 사용
불결하다
니팔형 נִטְמָא. 분사 복수형 נִטְמְאִים: 겔20:30
민5:13
-
발음 [ ṭâmêʼ ]
- 관련 성경
- ☞부정하다(레11:25, 민19:14), 더럽히다(민6:12, 시79:1, 겔22:3), 더러워지다(레18:25,시106:39, 미2:10), 부정하게 하다(레22:5),더럽다(왕하23:10,13, 사30:22). [명] 부정(레15:32, 5:3).
- 구약 성경
- 163회 사용
하나님께서는 출산 자체를 부정하다고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라, 출산 때 나오는 산혈을 부정하다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정해진 기간이 지나면 산혈이 깨끗하게 된다고 합니다.
즉 출산의 산혈이 사람을 부정하게 만들고, 그래서 정결하게 되기까지의 기한을 채워야 한다고 합니다.
출산의 산혈이 왜 산모를 부정하게 하는 것일까요?
성경의 다른 본문들을 통해 그 이유를 짐작해 볼 수 있습니다.
성경은 피는 곧 생명이라고 말씀합니다.
산모가 해산할 때 피를 많이 흘리게 되는 것은 곧 산모의 생명이 많이 소실되는 것이고, 산모로서 정상적인 몸 상태를 유지하지 못하게 합니다.
그래서 그 정상적이지 않은 상태를 부정하다고 말하는 것이라 생각할 수 있겠습니다.
피나 체액의 유출에 대해서는 15장에서 좀 더 자세히 살펴보겠습니다.
또 한 가지, 출산 시 산혈이 산모를 부정하게 한다는 것은 창세기 3장에서 범죄한 하와에게 하나님이 주신 형벌을 생각나게 합니다.
여자에게 해산의 고통을 더하셨는데, 출산은 하나님의 명령이요, 복임에도 불구하고 타락한 인간은 그 명령을 순종하고, 복을 누림에 있어서 죄의 영향에서 자유롭지 않게 된 것입니다.
큰 고통을 수반하게 되었고, 많은 피를 흘리며 생명의 위협을 경험해야 했습니다.
피를 많이 흘려서 생명의 위험을 경험하며 출산하는 이 일은 첫사람의 죄, 곧 원죄를 생각하게 하고, 우리가 죄의 영향 아래 있음을 기억하게 하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이렇게 부정하게 된 산모가, 정결해지기까지의 시간을 보낸 후에 하나님께 나와 번제와 속죄제를 드려야 한다고 말씀합니다.
해산의 산혈로 부정하게 된 것은 단순히 시간이 지나면 정결해지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해산의 피로 부정하게 된 것을 제사로 깨끗하게 한다는 것은 나의 피로 부정하게 된 것을 나를 대신하는 희생제물의 피로 깨끗하게 한다는 의미입니다.
우리의 부정한 것, 우리의 죄를 그리스도의 피로 깨끗하게 해주셨음을 오늘 말씀을 통해 기억해야 하겠습니다.
8절에 보면 가난한 사람에게는 번제로 어린양이 아니라 비둘기 두 마리로 대신하게 하였습니다.
누가복음에 보면 마리아가 예수님을 낳은 후에 비둘기 두 마리로 제사하였다고 기록했습니다.
예수님이 아주 가난한 가정에서 태어나셨음을 알 수 있지요.
예수님께서는 가장 가난한 가정에서 태어나셨고, 율법 아래 태어나셨습니다.
예수님의 피로 우리의 죄를 깨끗하게 해주시기 위해,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셨습니다.
우리 안에 이 죄와 부정함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만 깨끗해집니다.
우리는 우리의 죄가 시간이 지나면 저절로 깨끗해지는 것이라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깨끗하게 되기 위해 번제와 속죄제를 드린 것처럼, 우리 역시 우리의 죄를 그리스도의 보혈의 공로를 의지하여 회개하고, 우리를 깨끗하게 하신 그리스도의 은혜에 감사하여야 하겠습니다.
1. 아들을 낳으면 7일간 부정 (경도할 때와 같다)하고, 33일이 지나야 산혈이 깨끗하게 된다(40일 동안).
여자를 낳으면?
-
2×7일 간 부정하고, 66일이 지나야 산혈이 깨끗하게 된다. 80일 간의 휴식.
2. 해산한 여인이 성물을 만지거나 성소에 들어가지 말아야한다는 것은 평소에는 성물을 만지거나 성소에 들어간다
- 좁은 의미로 성물은 성소에 들어 있는 기구를 말하는 것이지만 넓게는 하나님께 드려진 모든 예물을 가리킨다.
성소도 마찬가지로 넓게는 예배나 제사를 위해서 설치한 성소 주변의 뜰까지 포함하는 의미이다.
예배까지 참석하지 말라는 명이다.
3. 아들이든 딸이든 한 생명이 태어나는 것은 축하할 일이 아닌가? 그런데 왜 부정하다고 하는 걸까?
예전 풍습이지만 우리나라에서도 출산하면 대문에 걸어두는 것을 금줄이라 한 것과 닮은 점이 있지 않을까?
사람들의 접근을 금지하는 역할
기본적으로 산모와 태아를 보호하기 위하여 사람들의 접근을 막아야할 필요가 있다.
정결케 되기까지 성물을 만지거나 성소에 들어가지 말라는 것은 '모든 일에 열외'라는 표현과 다름 아니다. 모든 의무에서 벗어나 쉬어야하기 때문이다.
충분한 육체적, 정신적 휴식을 위하여 심지어 남편조차 접근하지 못한다. 하나님께 대한 의무마저 면제다. 부정한 여인은 함부로 돌아다니지도 못하고 만지지도 못한다.
가만히 누워있는 것이 상책이다. 산모가 따뜻한 방에 누워서 바람도 쇠지 않고 한 달(40일)을 지나는 것이 몸을 회복하는 데 아주 요긴하다.
이 때 산후 조리를 잘못하면 평생 병을 얻게된다. 무리하게 일을 해서는 안된다라고 명하는 것보다 아예 부정하다하여 아무도 접근하지 못하게 하는 것이 출산한 본인의 건강 회복을 위해서 훨씬 유리하다.
출산한 여인이여! 한달 동안 여왕처럼 지낼지어다. 이 말과 한달 동안 부정하다는 말은 동일한 결과를 가져온다. 군대서 한창 고생스럽게 훈련 받는 중에 험한 말로 '너 이리 나와봐' 하면서 빼내서 쉬게하는 경우가 더러 있다.
아는 훈련병을 만나서 말이다. 다만 불러낼 때 말을 좀 거칠게 해야한다.
여인에게 해산의 고통을 더한 하나님의 의도(창세기 3:16)
출생 자체는 인간적인 측면에서 보면 엄청난 복이기도 하면서 고생의 시작이기도 하다.
출생을 마냥 기뻐할 수만도 없는 것이, 원래는 하나님께서 주신 복이었지만 타락한 이후 고통이 더해 졌다. 홍수 이후 인간의 수명이 짧아지는 것이 하나님의 원하심이다.
이렇게 일그러진 모습으로 오래 사는 것을 원하시지 않기 때문이다. 처음 에덴 동산의 회복을 앞당기려는 것이다. 해산의 고통은 떠나버린 인간을 다시 자녀로 만들기 위한 하나님의 고통을 상징하는 것이다.
바울은 한 생명을 하나님께로 돌아오게하는 것을 해산의 고통이라고 표현했다(갈 4:11). 범죄한 인간을 다시 하나님의 자녀로 삼기 위하여 독생자를 보내시고 그가 십자가에 달려 고통 당함을
차마 바로 보지 못하는 하나님의 마음이 바로 이 해산의 고통이다. 여인들은 뱀의 머리를 부술 후손을 낳는다는 생각으로 해산의 고통을 이겨야했다.
이 고통에 담긴 의미를 이해한다면 여인에게 해산의 고통은 곧 구원의 길이기도 하다(딤전 2:15). 그런만큼 부정한 기간이란 해산의 고통과 동일한 의미를 지니고 있는 셈이다.
범죄한 이후 여인의 후손을 통해서 완전한 구원을 이루시기까지 하나님의 편치 못한 심경을 담고 있는 기간이다.
4. 여자를 낳으면 부정함과 산혈이 깨끗하여지는 기간이 왜 더 길까?
- 남자를 출산한 경우와 여자를 출산한 경우 신체적으로 어떤 차이가 있는지 좀 알아봐야겠다.
아마 산부인과 의사를 만나는 것이 좋겠다.
차이는 없을 것이란 예상이다.
친구 부인이 둘째 딸을 낳을 때 시어머니가 제주도에서 포항까지 와서 병실을 지키다가 딸이라는 말을 듣고 바로 제주도로 돌아가 버렸다.
남편이란 친구는 날마다 술집에서 헤롱거리고 산모는 산모대로 울어서 눈이 퉁퉁 붓고... 어쩌면 딸을 낳은 뒤의 이런 정신적인 차이조차 감안하지 않았을까?
선악과를 용감하게 따먹은 것이 여자이었음도 감안하지 않았을까?
우리가 잘 알지 못하는 차이점이 있다는 암시가 아닐까?
사실은 남자와 여자는 다른 언어를 사용하는 이족(다른 민족)이나 마찬가지다.
레위기 27:2-7을 보면 사람의 값이 남자와 여자가 다르다. 이런 점이 감안되었을 것이다.
남자아이는 할례 받는 대신 여자아이는 기간이 늘어난 것으로 이해할 수도 있다. 드려야할 유향이 없으면 다른 노력이 좀 더 필요한 것(레 2)을 감안하면 그렇게 생각할 수 있다. 그렇다면 여자아이도 어릴 때 할례를 받은 셈이다.
5. 아이들의 포경 수술을 반대하는 무리가 있다.
괜히 쓸데없이 사람을 학대하는 행위라는 것이다.
건강상 해야한다고 떠들어서 수술이 유행처럼 번지게 할 때는 언제고, 불필요한 고통을 주는 짓이라고 하지 말라니 도대체 어느 장단에 맞춰야할지 모르겠다.
이스라엘 사람들에게는 건강상 이유가 아니라 민족의 정체성과 관련된 중요한 일이니 고민할 것도 없겠다.
일생 중 고통이 가장 적고 수술하기도 수월한 때가 언제일까?
-
생후 8일 째 아픔도 적고 피도 쉽게 응고된단다.
6. 경도 즉 생리에 대하여 '어떤 여인이 유출을 하되 그 유출이 피면 칠 일 동안 불결하니 무릇 그를 만지는 자는 저녁까지 부정할 것'(레 15:19)이라고 한다. 생리현상을 불결하다(2)고 말하는 것은 종족 보존에 대한 사명을 지닌 여성에 대한 모독 아닌가?
-
외형상 피 흘림을 부정한 것으로 다룸으로 여성뿐만 아니라 남성까지 보호하는 측면이 있다; 본인
스스로도 불결하다는 느낌을 가지게 됨으로 몸을 정하게 하겠지만 부부관계마저 멀리하게 하는 결과를 가져온다.
남자의 시도 때도 가리지 않는 성욕으로부터 일정기간 피할 수 있다. 세상의 좋은 것은 다 먹었을 왕들이 일찍 죽는 것은 거의
대부분 많은 여자들을 거느린 탓이다. 죽을 줄도 모르고 열심히 종족 보존에 힘쓰는 것을 일정기간 강제로 쉬게 만드는 것이다.
만약 생리도 소변보듯이 간단하게 처리할 수 있었더라면 남자들의 수명은 지금보다 훨씬 더 단축되었을 것이다.
7. 정하게 되기위해서 일정한 기한이 지나야하고 기한이 차면 제사를 드려야한다는 것은 이중 과세(?)가 아닌가?
- 정결케 되기 위한 기한이 있는 경우 기한이 차면 저절로 정결케된다. 다만 자녀를 낳은 여자의 경우 부정한 기간이 긴데도 제사를 드려야하는 것이 그 기간이 본인의 건강회복을 위한 것이기 때문이다.
8. 기한이 차거든 번제로 1년 된 어린 양과 속죄제를 위하여 집 비둘기 새끼나 산비둘기를 드려야한다. 가난한 여자는?
- 아무리 가난해도 생략해서는 안된다. 만약 힘이 미치지 못하면 집 비둘기 새끼 둘이나 산비둘기 둘을 가져다가 하나는 번제로 하나는 속죄제로 드려야한다. 헌금할 돈이 없는데 10원이라도 반드시 해야한다면 어떤 느낌인가?
그 10원이 진짜 10원을 의미한다면 이것은 대단히 고마운 일이다. 그렇게 작은 것도 기쁘시게 받으신다면 누구나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결국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것은 제물이 아니라 드리는 사람의 마음이다.
사람들끼리 이런 표현이 사용될 때는 10원이 문자대로 10원이 아닌 게 문제다.
9. 감사와 경배의 의미로 드리는 번제 예물은 어린 양이고 죄를 속하기 위한 속죄제물은 집비둘기 새끼나 산비둘기라는 것은 아무래도 제물이 바뀐 느낌이다. 죽을 죄를 지은 사람이 용서받기 위해서 내야하는 몸값과 그 용서에 감사해서 선물을 드리는 경우를 가정해서 생각해보면 아무래도 제물이 바뀐 느낌이 드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의도하시는 바가 무엇일까?
- 만약 속죄제물이 어린 양이라면 가난해서 제사드리지 못하는 사람도 많을 것이고 제물을 함부로 다른 것으로 바꿀 수도 없다. 최소한의 제물로 속죄의 길을 열어줄테니 누구나 오라는 것이다.
아무리 바쁘고 힘들어도 '예수는 믿어야한다'는 하나님의 요구라고 생각된다. 정말 간단한 방법으로 구원을 얻을 수 있는 길을 열어두신 것이다. 그런 다음 감사와 예배는 자신의 형편을 감안해서 드리라는 것이다.
10. 해산한 여인의 부정은 아이 때문일까? 피를 흘렸기 때문일까?
피를 흘렸기 때문; 경도할 때, 산혈이 깨끗하리니 등의 표현을 보면 그렇게 말하는 것이 정답이라고 해야겠다.
출생은 누구나 기뻐하는 경사스런 일이다. 그러나 성경은 반드시 그렇게 말하지 않는다. 범죄한 이후에도 1000년 가까이 살던
우리 조상들의 수명을 십분의 일로 단축시켜버린 하나님의 뜻을 기억해야 한다.
이 땅에 천년만년 잘 먹고 잘 살아서는 안된다는 뜻이다. 우리 인간들끼리 본다면 기뻐할 일이지만 하나님을 기억하면 마냥 기뻐할
일은 아니다. '내가 죄악 중에 출생하였음이여 모친이 죄 중에 나를 잉태하였나이다' 라고 말한다(시 51:5).
우리 인생 자체가 저주 아래 있기 때문에 진정한 기쁨은 예수의 피로 속죄받고 다시 태어나는 것이다. 구속사적인 입장에서 보면
해산 자체는 부정한 일이다. 인간적인 삶에서 볼 때는 물론 경사스러운 일이다.
하나님께서 이런 면도 인정하시기 때문에 자녀를 복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레위기는 전통적으로 유대인이 다섯 살쯤 된 자녀에게 가르치기 시작하는 모세 오경의 첫 번째 책이라고 한다.
성경의 첫 번 째 책인 창세기가 아니라 레위기를 자녀에게 첫 번째 성경 교육으로 시작한다는 것은 레위기의 비중을 그만큼 중시한다는 의미일 것이다.
실제로 레위기는 중요한 예배와 섬김의 지침서이자[1-10장 21-27]
생활 지침서로서 정하고 부정한 음식 문제부터 시작해서[11장]
오늘의 말씀인 산모 정결법[12장]
그리고 이어지는 문둥병이나 유출 병의 정결법과[14. 15장]
심지어 침실 내밀한 곳에서 이뤄지는 성생활이나 성윤리 도덕의 문제까지도 세세하게 다루고 있다.[18. 20장]
따라서 이 책은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먼저 하나님께 향한 바른 예배[제사]를 강조하고 또 예배 후에는 공동체 안팎에서 거룩한 예배자로 살도록 요구한다.
오늘의 말씀으로 주신 산모 정결법은[레 12장] 출산한 여인의 하혈[출혈]과 관련하여 주시는 말씀인데 출산 후 출혈이 얼마나 가는지 인터넷 검색창에 쳐보니 출산 후에도 길게는 2주간 하혈을 하며 몇 달간 지속되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
산모를 부정하다고 규정한 것은 출산과정에서 나오는 출혈 때문으로 보는데[12:2] 이 산혈이 깨끗해지는데 필요한 기간이 아들일 경우 7+33일, 딸일 경우 14+ 66일로써 이 기간 동안에는 성물을 만질 수 없고 성소에도 들어갈 수 없다.
그러나 이 정결을 위한 기간이 차면 산모는 정결례를 위해 번제와 속죄제를 드리는데 이는 일년 된 어린 양과 비둘기를 회막문 제사장에게로 가져가 속죄제를 드리고 그리고 나서 산혈이 깨끗하리라고 한다.
그러나 어린 양을 드릴만한 경제적 여유가 없으면 비둘기 두 마리를 가져가 하나는 번제물로 하나는 속죄 제물로 삼아 드려서 속죄가 되게 하라고 하신다.
앞선 말씀에서 죽은 시체의 부정에 대해서 말씀하셨다면 오늘의 말씀에서는 아기를 출생시킨 산모의 부정과 정결 기간을 말씀하신다.
결국 죄와 저주아래 놓여 진 인간은 출생에서부터 죽음까지 부정이라는 굴레를 벗어날 수 없는가 보다
최초의 인간이 자신의 존재와 이유가 되는 창조자보다 뱀[사단 마귀]를 선택하고 반역한 이후 인간은 죄와 저주의 굴레를 벗어날 수 없으며 이 저주의 굴레를 풀어줄 구원자를 필요로 하게 되었는데 그는 바로 여자의 출산을 통해 이 땅에 오실 여자의 후손 이었다[창 3:15]
따라서 죽은 것들의 부정에 대해서 말하는 어제의 말씀이나 출산의 부정에 대해서 말씀하시는 오늘의 말씀들이 결국은 죄와 저주의 굴레를 벗어날 수 없는 인간의 비참함과 그 인간을 죄와 저주로 부터 풀어주실 구원자 - 여자의 후손 [그리스도]를 기다리는 희망으로 이어지게 하는 것 같다.
여성이 출산 후 자신의 정결을 위해 번제와 속죄제를 드려야 하는 제사 제도에서도 자신을 온전히 정결케 하실 구원자를 기다리는 희망을 담고 있는데 마침내 그 구원자 - 여자의 후손이 되시는 예수님께서 이 땅에 탄생하셨을 때 예수님을 출생시킨 산모 마리아도 오늘의 말씀과 같은 똑같은 정결규례를 이행하였다.[눅 2:22-24]
이제 우리와 똑같이 태어나신 예수님을 통해 출생부터 죽음까지 부정의 굴레를 떠날 수 없는 인간에게 희망의 태양이 비쳐 온 것이다.
특별히 오늘의 말씀에 나타난 산모의 정결예법에서 여아 출산의 경우 남아 출산보다 갑절의 정결기간을 필요로 하며 두문불출 집에만 있어야 할 것을 말씀하시는데 이는 남아선호 사상이 강했던 고대 농경사회의 배경에서 생각해 보면 자칫 소훌 하게 방치될 수 있는 여아를 보호하시고 배려하신 차원에서 산모가 집밖으로 나가지 못할 긴 기간을 정하신 것 같다.
여성들은 사람을 계수하는 숫자에도 넣어주지 않았던 당시 풍습을 생각해보면 남아를 출산하지 못하고 여아를 출한했을 경우 출산의 수고와 고통에 대해 대우받지 못하며 또 자칫 소훌 하게 보호될 수 있는 여아에 대해 충분한 보호가 되도록 산모가 집밖으로 나가지 못하는 정결기간을 남아보다 두 배를 더 갖게 하신 것으로 이해하게 된다.
집안에만 있어야 하는 산모는 그만큼 긴 기간을 자신의 몸을 잘 추스르며 또 출생된 아이의 보호에 정성을 쏟을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아이를 출산한 산모의 정결법을 가르치는 오늘의 말씀 속에서 산혈을 깨끗하게 하는 정결기간을 두므로 하나님 앞에 정결을 도모하는 것은 물론 산모와 출생된 아이들 특히 여아들을 보호하신 우리 하나님의 자상하신 성품을 본다.
왜냐하면 산모가 남아를 출산하거나 여아를 출산하는 것은 산모 자신의 뜻이 아니라 이 세상에 남녀의 성비를 균등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숨은 섭리도 이 속에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과연 우리 하나님은 거룩하신 하나님이실 뿐만 아니라 우리네 인생이 살아가는 모든 삶의 영역 세세한 부분까지도 간섭하시며 특별히 약자를 동정하고 배려하시는 좋으신 하나님 되심을 오늘의 말씀에서 확인하게 된다.
[말씀에 응답하는 기도]
때가 차 매 아들을 보내시되 여자의 후손으로 출생하게 하셔서 [갈4:4]
죄와 저주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없는 우리를 구원하시고 희망을 주심을 찬양합니다.
특별히 산모들이 아이들을 출산할 때 여아는 남아보다 갑절의 정결기간을 주셔서 보호와 배려의 기간으로 삼게 하신 자비하심을 보면서
나도 항상 약한 자를 동정하고 배려하는 신앙과 삶이 되게 하옵소서.
__________________ 레위기 11장 / 먹을 만한 생물(2절)
03-21-2023(화) 사순절 제24일 이스라엘 자손에게 고하여 이르라 육지 모든 짐승중 너희의 먹을만한 생물은 이러하니.
Say to the Israelites: 'Of all the animals that live on land, these are the ones you may eat:
Speak to the sons of Israel, saying, 'These are the creatures which you may eat from all the animals that are on the earth.
먹을 만한 생물(Something Edible)
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먹을 수 있는 것과 먹을 수 없는 것을 구별하라고 하셨을까요?
가장 중요한 이유는 이스라엘 백성들은 애급에서 430년 노예생활을 하였기 때문에 그들 스스로 무엇을 먹어야 할지 알지 못했습니다.
노예는 오직 주인이 제공하는 음식만 먹고 살아야 했습니다.
애급에서 나온 후에 광야 40년 동안은 하늘에서 내려준 만나와 메추라기만 먹고 살았습니다.
무려 500년 동안 스스로 무엇을 찾아서 만들어 먹어야 할지를 알지 못한 백성들에게 다양한 짐승들과 다양한 물고기들과 다양한 조류들과 다양한 곤충들을 볼 때 무조건 잡아 먹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먹어야 할 것과 먹지 말아야 할 것을 미리 지정하고 그 규정에 따라 먹을 것만 잡아서 먹도록 배려하신 것입니다.
따라서 먹을 수 있는 것과 먹을 수 없는 것을 구별하는 것을 "카도쉬" 즉 "거룩"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오늘날은 사람마다 체질이 다르고 식성이 다르기 때문에 먹는 것도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심지어 몸에 병이 있을 때는 담당 의사로부터 먹어야 할 것과 먹지 말아야 할 것에 대한 정보를 얻을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과 현대인들에게 먹을 것과 먹지 못할 것을 통한 공통된 목표는 같습니다.
레위기 11:44-45
나는 여호와 너희 하나님이라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몸을 구별하여 거룩하게 하고 땅에 기는바 기어다니는 것으로 인하여 스스로 더럽히지 말라.
나는 너희의 하나님이 되려고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여호와라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찌어디.
먹을 수 있는 것과 먹을 수 없는 것이 어떤 것이냐가 아니라 "거룩"을 유지하라고 하셨습니다.
"카도쉬"라는 히브리 단어를 구별이라고 하는 것의 의미는 먹을 수 있는 것과 먹을 수 없는 것을 구별하는 것이 곧 거룩의 시작이기 때문입니다.
무엇을 먹느냐?
무엇을 먹지 않느냐?
이러한 것을 구분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가를 찾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왜냐하면 어떤 사람에게는 맛 있는 먹거리가 어떤 사람에게는 맛이 없는 것이 될 수 있습니다.
또한 어떤 사람에게는 체질에 맞지 않는 음식이지만 또 어떤 사람에게는 체질에 맞는 음식이 되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레위기 11장에서 강조하는 것은 "거룩(코데쉬, qôdesh. קֹדֶשׁ )" 입니다.
그렇다면 '거룩'이란 무엇일까요?
'거룩'이란 "하나님을 닮아가는 것"입니다(11:44-45)
"나는 여호와 너희 하나님이라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몸을 구별하여 거룩하게 하고 땅에 기는바 기어다니는 것으로 인하여 스스로 더럽히지 말라. 나는 너희의 하나님이 되려고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여호와라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찌어다."
본질상 진노의 자녀로 태어난 사람이 어떻게 거룩한 하나님을 닮아갈 수 있을까요?
"거룩(코데쉬)"의 어원은 "카다쉬(qâdâsh. קָדַשׁ )"라고 합니다.
'카다쉬'란 "자신을 하나님께 드린 사람'을 말합니다.
자신을 하나님께 드린 사람을 '거룩하다' 또는 '신성하다'고 일컫습니다.
구약시대에 규정한 먹을 수 있는 것과 먹을 수 없는 것을 오늘의 시대에 그대로 적용할 수 없다는 것은 하나님의 법이 시대에 따라 바뀐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거룩"을 유지하라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어느 미국 교회에서 있었던 이야기를 소개합니다.
그 교회 담임목사님이 광고 시간에 어느 나이 많은 여자 교인이 지난 주간에 담배를 끊었다고 알리며 모두 축하합시다 하고 말했습니다. 모든 교인들이 함께 손뼉을 치며 즐거워 했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그 목사님이 "나는 아직도 담배를 끊지 못했는데 저 부인이 담대를 끊었다는 것은 놀라운 소식입니다." 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성경은 분명하게 말씀합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외모로 사람을 취하지 아니하심이니라."(로마서 2:11)
"주는 외모로 사람을 취하심이 없느니라."(골로새서 3:25b)
"만일 너희가 외모로 사람을 취하면 죄를 짓는 것이니 율법이 너희를 범죄자로 정하리라."(야고보서 2:9)
"그들이 물어 가로되 선생님이여 우리가 아노니 당신은 바로 말씀하시고 가르치시며 사람을 외모로 취치 아니하시고 오직 참으로서 하나님의 도를 가르치시나이다."(누가복음 20:21)
무엇을 먹는냐 먹지 않느냐가 아니라 예수님을 나의 구세주로 믿느냐 믿지 않느냐에 따라 믿지 않는 사람을 긍휼히 생각하여 주님을 영접할 수 있는 기회를 만들어주는 일에 성공하시기 바랍니다.
거룩함(6944) 코데쉬( qôdesh) קֹדֶשׁ
발음 / 코데쉬(qôdesh)
어원 / 6942에서 유래
관련 성경 / 성회(출 12:16, 레 23:35, 민 28:18), 성소(출 26:33, 레 20:3, 민 8:19), 지성소(출 26:33, 레 16:16, 왕상 6:16), 성결(출 28:36, 말 2:11), 성물(출 28:38, 레 22:12, 민 6:20), 거룩한 패(출 29:6), 성의(출 29:29, 레 16:32), 거룩한 산(시 43:3), 성산(겔 28:14), 지성물(레21:22, 민 4:4), 거룩한 날(출 31:14), 성일(사 58:13), 성소(레 4:6), 성호(대상 16:35, 시 105:3, 145:21), 예물(대하 31:12), 성전(시 5:7, 138:2, 욘 2:4), 거룩한 곳(렘 31:40), 성도(단 12:7). [형] 거룩한(출 3:5, 레 2:3, 시 2:6), 성결한(출 15:13, 삼상 21:5).
구약 성경 / 477회 사용
* 6942. 카다쉬(qâdâsh) קָדַשׁ
발음 / 카다쉬(qâdâsh)
관련 성경 / 거룩하다(출 29:21, 사 29:23, 학 2:12), 빼앗기다(신 22:9), 성별하다(느 3:1), 준비하다(렘 22:7, 미 3:5), 예비시키다(렘51:27,28),구별하다(민 8:17, 대상 26:27), 드리다(대상 18:11), 빼앗다(대상 18:11), 예비하다(렘 12:3), 깨끗하게 하다(삼하 11:4). [명] 성물(레 22:2, 대상 26:28), 성회(욜 1:14, 2:15), 성호(레 22:32), 성소(대하 26:18, 겔 7:24), 거룩한 자(사 29:23).
구약 성경 / 171회 사용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방인과 구별된 삶을 사는 것
첫 번째는 흠이 없는 제물을 하나님 앞에 제사로 드리는 그 제사를 통해서 이방인들과는 구별된 삶을 살았습니다.
두 번째는 먹을 수 있는 음식 가운데 먹을 수 있는 것과 먹을 수 없는 것을 구별해서 먹을 수 있는 것만 먹는 그런 일들을 통해서 이방인과의 삶과 구별된 삶을 그들이 살게 된 것입니다.
그러면 먹을 수 있는 것과 먹을 수 없는 것을 잘 구별해서 먹을 수 있는 것만 먹어야 하는데, 그러면 정말 먹을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하나님께서 4가지 영역으로 나눠서 말씀을 구체적으로 하십니다.
1. 포유류(땅의 짐승)
땅에 있는 것 중에는 굽이 갈라지고, 되새김질을 할 수 있는 동물은 다 정결한 짐승이기 때문에 너희가 먹어도 좋다.
예를 들면, 소나, 양과 같은 동물입니다.
굽이 갈라지긴 했지만, 되새김질을 할 수 없는 동물은 부정하다.
그런 동물은 먹지 말라! 대표적 예시가 돼지입니다.
또는 굽은 갈라지지 않았지만, 되새김질을 할 수 있는 동물이 있는데, 그런 동물들도 부정하다.
그런 동물들도 먹지 말라! 대표적인 것이 낙타, 토끼 같은 동물입니다.
2. 어류
물에 사는 물고기에 대해서는 먹을 수 있는 것을 딱 지정해 주셨습니다.
지느러미와 비늘이 있는 물고기
강에 살던, 바다에 살던 상관없이 지느러미가 있고, 비늘이 있는 것은 정결한 물고기이기 때문에 너희들이 먹어도 좋지만, 만약에 지느러미가 없다든지, 비늘이 없는 고기는 부정한 고기이기 때문에 너희들이 먹어서는 안 된다.
3. 조류
공중 영역 하늘의 영역에서는 먹지 말아야 할 것을 지정해 주십니다.
주로 맹금류입니다.
독수리라든지, 매라든지, 올빼미라든지, 부엉이라든지 그 중에는 박쥐도 들어가 있습니다.
이런 것들은 절대 부정한 것이기 때문에 절대
4. 곤충
날개가 있고, 4발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땅을 기어 다니는 곤충은 부정한 것이기 때문에 절대 먹지 말고, 날개도 있고, 4발이 있지만, 그러나 땅에서 뛸 수 있는 곤충! 메뚜기라든지, 귀뚜라미라든지 이런 것은 정결한 곤충이기 때문에 너희가 먹을 수 있다.
특별히 어떤 동물이던 간에 배로 땅을 기어 다니는 뱀이라든지, 지네라든지, 악어도 거기에 들어갑니다.
그런 것은 다 부정한 것이기 때문에 그런 것들은 먹어서는 안 된다.
이렇게 하나님이 구체적으로 먹을 수 있는 것과 먹을 수 없는 것을 구별해 주셨습니다.
중요한 것은 왜 어떤 짐승은 정결하고 어떤 짐승은 부정한 것일까?
왜 어떤 짐승은 먹을 수 있는데, 왜 어떤 짐승은 먹을 수 없는 것일까?
도대체 그 기준이 무엇일까?
하나님은 어떤 기준을 가지고 저것은 먹어도 좋고, 저것은 먹어서는 안 된다. 그렇게 말씀하신 것일까?
사실 생각이 많습니다.
크게 두 가지를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하나는 하나님이 그 동물들을 다 만드셨기 때문에 어떤 동물이 인간의 몸에 건강에도 좋고, 먹어서 몸에 의로운지를 하나님이 다 아신다.
그리고 어떤 동물이 먹으면 인간의 몸에 해롭고, 건강에 안 좋은지도 하나님은 다 아신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인간의 몸에 도움이 되고, 건강에도 유익한 그런 동물들은 다 먹을 수 있게 하셨고, 인간의 몸에 해롭거나, 건강에 좋지 않은 영향을 줄 수 있는 그런 동물들은 먹지 말라고 했다. 이런 생각입니다.
지금도 이런 생각을 하는 사람이 많이 있습니다. 특별히 안식교 교인들이 그렸습니다. 안식교 교인들은 지금도 그렇게 믿고, 그렇게 생활하고 있습니다.
또 한 가지 생각은 그것이 먹을 수 있는 것은 우리 건강에 도움이 되는 것이고, 먹을 수 없는 것은 우리 건강에 해롭기 때문이다. 그것이 의학적으로나, 과학적으로나 입증인 된 것이 아무 것도 없습니다. 그런 것과 상관없이 하나님이 부정하다고 이야기하셨기 때문에 부정한 것이고, 하나님께서 정결하다고 말씀하시니깐 정결한 것이지! 그것이 의학적으로 그런 근거가 있어서, 과학적으로 그런 근거가 있어서 그런 것은 아니다. 그냥 하나님이 그렇게 정하셨기 때문에 그런 것으로 믿고 우리는 순종해야 하는 것이다.
예를 들면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하나님이 우리를 의롭게 여겨주십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의롭게 여겨주시기 때문에 우리가 의로워 진 것이지!
우리의 내면에 의로움이 있어서 의로워진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의롭다고 말씀하시니깐 의로운 것입니다.
그런 것처럼 정결 동물이나, 부정한 동물도 그런 이유에서 그렇게 말씀하신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문제는 구약시대에 엄격한 규정했던 먹을 수 있는 음식과 먹지 안 않아야 할 음식 신약 시대에 오면 폐지가 됩니다. 먼저 마가복음 7:15~16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이 하시는 말씀입니다.
“무엇이든지 밖에서 사람에게로 들어가는 것은 능히 사람을 더럽게 하지 못하되 사람 안에서 나오는 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니라 하시고”
그러니깐 어떤 음식이든 다 먹어도 괜찮다는 것입니다.
부정한 음식이라고 그래서 그것이 우리 안에 들어와서 부정하게 만드는 것도 아니고, 정결한 음식이라고 해서 그것이 우리 안에 들어와서 정결하게 만드는 것도 아니다. 예수님이 직접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어떤 음식이든, 상관이 없다. 음식이 우리를 부정하게 만들거나, 정결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다. 이렇게 예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도 그렇게 말씀하십니다.
사도행전 10:10~15
15. “그가 시장하여 먹고자 하매 사람들이 준비할 때에 황홀한 중에 하늘이 열리며 한 그릇이 내려오는 것을 보니 큰 보자기 같고 네 귀를 매어 땅에 드리웠더라
그 안에는 땅에 있는 각종 네 발 가진 짐승과 기는 것과 공중에 나는 것들이 있더라 또 소리가 있으되 베드로야 일어나 잡아먹어라 하거늘 베드로가 이르되 주여 그럴 수 없나이다 속되고 깨끗하지 아니한 것을 내가 결코 먹지 아니하였나이다 한대 또 두 번째 소리가 있으되 하나님께서 깨끗하게 하신 것을 네가 속되다 하지 말라 하더라”
베드로가 12시 기도 시간에 기도하러 옥상에 올라가서 기도를 하려고 하니깐 배가 너무 고픈 것입니다. 그때 마침 환상 중에 먹을 것이 가득 담긴 바구니가
내려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세히 들여다보니깐 레위기에서 먹어서는 안 되는 동물들만 가득한 것입니다. 그런데도 하나님이 뭐라고 말씀하시냐면 베드로야! 일어나서 잡아먹어라! 베드로가 어떤 생각을 했겠습니까! 하나님이 나를 시험하시나 보다! 저런 것들은 먹을 수 있는 동물들이 아닙니다. 레위기 말씀에 의하면 저런 동물들은 먹을 수가 없습니다. 저는 한 번도 저런 동물을 먹어본 적이 없습니다. 그랬더니 하나님이 뭐라고 말씀하시냐면 내가 깨끗하게 한 것을 네가 속되다고 말하지 말라! 내가 정결케 한 것을 네가 부정하다고 말하지 말라! 이미 하나님은 뭡니까? 모든 것을 다 정결하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디모데전서 4:4~5
하나님께서 지으신 모든 것이 선하매 감사함으로 받으면 버릴 것이 없나니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로 거룩하여짐이라.
어떤 음식도 그것이 부정한 음식이든, 정결한 음식이든 상관없이 우리가 기도하고 먹으면, 그 기도로 인해서 다 정결한 음식이 된다는 것입니다.
어떤 음식이든 우리가 감사함으로 기도하고 먹으면, 어떤 것이든 먹을 수 있다.
아무런 상관이 없다.
이렇게 말씀을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신약에 와서는 이렇게 다 폐지될 수밖에 없었던 문제를 왜 구약시대에서는 그처럼 하나님께서 엄격하게 구별하고,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지키라고 명령하신 것일까?
도대체 하나님은 어떤 생각과 어떤 의도로 그렇게 하신 것일까?
하나님의 백성은 이방인들하고는 달라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할 수 있는 것이 있고, 할 수 없는 것이 있다.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해서 모든 것을 다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해야 될 일이 있고, 해서는 안 되는 일이 있다는 것입니다.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것도 아니지만, 모든 것을 할 수 없는 것도 아니다.
그것을 잘 구별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구별해서 사는 것이 구별된 삶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훈련하고, 가르치려는 목적으로 먹는 것 가지고, 이것은 먹을 수 있는 것이고, 이것은 먹을 수 없는 것이다.
그것을 가지고 그런 훈련을 하는 것입니다.
굉장히 중요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에게는 할 수 있는 것이 있고, 할 수 없는 것이 있습니다.
해야만 하는 것이 있고, 해서는 안 되는 것이 있습니다.
이것을 지킬 줄 알아야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말씀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구약시대에 그들이 제사를 통해서 이방인들과 구별된 삶을 살았고, 먹을 수 있는 음식과 먹지 못하는 음식을 구별하는 것을 통해서 이방인과 다른 구별된 삶을 살았는데 아니 이것이 다 폐지된 다음에 오늘 우리는 무엇으로서 이방인들과 믿지 않는 사람들과 구별된 삶을 살아야 하느냐? 이 과제가 우리에게 남아 있는 것입니다. 이미 제사 제도나, 먹는 문제는 폐지가 되었기 때문에 오늘 우리는 제사를 드리지 않습니다. 제사 대신에 예배를 드립니다. 여기서 우리가 명심해야 될 것은 제사 대신에 예배를 드리는데 그 예배가 오늘 이렇게 모여서 드리는 예배가 다가 아닙니다. 그것을 아셔야 합니다. 이것이 우리가 생각하는 예배의 모두가 아닙니다. 로마서 12:1 말씀을 보시겠습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
여기서 말하는 영적 예배라고 하는 것은 영으로 드리는 예배라는 것이 아니고, 너희들의 일상적인 삶 속에서 드리는 삶을 통해서 드리는 예배가 영적인 예배다. 우리가 이렇게 모여서 드리는 예배와 그것을 구별하기 위해서 사도바울이 그것을 영적인 예배라고 표현을 한 것입니다. 그것을 잘못 이해해서 영적 예배는
영으로 예배를 드리는 것으로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가 예배를 드리는 것도 영으로 예배를 드리는 것입니다. 굳이 영적 예배라고 표현한 것은 이렇게 우리가 모여서 예배만이 예배가 아니라, 우리들이 일상에 돌아가서 우리들의 삶으로서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 그 예배도 있다는 것입니다. 그 예배가 영적인 예배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스라엘 백성들은 제사라는 것을 통해서 구별된 삶을 살았습니다. 제사에서 어떤 것이 부정하고, 어떤 것이 거룩하냐? 구별이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 드려지는 제물 가운데 흠이 있는 것은 부정한 것이고, 흠이 없는 것은 정결한 제물이 됩니다. 그것으로 구별을 했습니다. 먹거리를 통해서는 하나님이 먹을 수 있다고 한 음식은 정결한 음식이고, 먹어서는 안 된다고 규정한 것은 다 부정한 음식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당시 구약시대에 이것은 정결하다. 저것은 부정하다는 그 근거는 다 제사 적인 것에서 나온 것입니다. 그런데 이미 우리는 그런 제사를 드리지 않습니다. 다 폐지가 되었기 때문에 또 먹는 문제도 다 폐지되었기 때문에 다 무엇이든지 먹을 수 있습니다. 그러면 그런 우리들에게는 이것이 무슨 의미가 있느냐?
그래서 제사를 드리지 않고, 삶으로서 예배를 드리는 우리들에게는 제이적은 부정과 정결함은 큰 의미가 없습니다. 삶으로서 예배를 드리는 우리들에게 있어서는 어떤 것이 필요하냐? 삶 속에서 우리가 사는 행위로 나타나는 윤리적인 측면에서 무엇이 정결한 것이고, 무엇이 부정한 것이냐? 그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의 삶 속에서 어떤 삶이 부정한 삶이고, 어떤 삶이 정결한 삶이냐! 이것을 잘 분별해서 정결한 삶을 살아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떤 것이 정결한 삶이냐? 어떤 것이 부정한 삶이냐? 여러 가지가 있지만, 크게 3가지를 우리가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하나는 절제된 삶입니다.
절제된 삶은 정결한 삶이고, 무절제한 삶은 부정한 삶입니다. 왜 절제된 삶은 정결한 삶이고, 무절제한 삶은 부정한 삶이냐? 우리가 고린도전서 14:33 말씀을 보시겠습니다.
“하나님은 무질서의 하나님이 아니시요 오직 화평의 하나님이시니라 모든 성도가 교회에서 함과 같이”
이것을 뒤집어 이야기하면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인가요?
하나님은 질서의 하나님이시다.
그 질서의 하나님을 화평이라고 설명을 했습니다.
하나님은 질서의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은 질서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거룩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거룩하시기 때문에 너희도 거룩 하라!
그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신약에서는 어떻게 표현하느냐?
고린도전서 14:40 말씀을 보시겠습니다.
“모든 것을 품위 있게 하고 질서 있게 하라”
하나님은 질서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거룩하신 하나님이다.
그러니 너희도 거룩 하라! 어떻게? 너희도 품위 있게! 질서 있게 살라는 것입니다.
질서 있게 사는 것이! 절제함을 가지고 사는 것이! 그것이 정결한 삶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절제가 있는 삶이 무엇입니까? 먹고 싶다고 해서 아무거나 먹지 않는 것입니다. 하고 싶다고 해서 무엇이나 다 하는 것이 아닙니다.
말할 수 있다고 해서 생각 없이 되는대로 모든 것을 말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이 절제입니다. 그런데 무절제라는 무엇이냐?
질서가 없다고 하는 것은 무엇이냐? 먹고 싶으면, 뭐든지 다 먹는 것입니다. 원숭이 골도 먹고, 박지도 잡아먹고 끝이 없는 것입니다.
그것이 무절제한 삶입니다. 하고 싶으면, 참지를 못하고 무엇이든지 다 해야 합니다. 끝까지 다 해봐야 합니다.
바람 피고 싶으면 바람 피고, 외도하고 싶으면 외도하고, 동성애 연애를 하고 싶으면 동성애 연애를 하고 질서가 없는 것입니다.
하고 싶은 대로 다 해보는 것입니다. 그것이 부정한 삶입니다. 말하는 것도 다른 사람의 입장과 다른 사람의 처지를 생각해서 해야 할 말인지, 하지 말아야 말인지 생각하며 말을 해야 하는데 그렇지 않고, 그냥 내가 하고 싶은 말! 내 입으로 내가 말하는데 누가 뭐라고 하느냐! 그래서 하지 말아야 말! 못 할 말!
그냥 다 쏟아 부는 것입니다. 그것이 무절제한 삶입니다. 그렇게 사는 삶이 무엇이냐? 부정한 삶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과 어떤 면에서 구별이 되어야 하느냐? 바로 이렇게 절제가 있는 삶! 삶의 품격이 있고, 질서가 있는 그런 삶으로 우리가 믿지 않는 사람들과 구별이 되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섬기는 삶은 정결한 삶이고, 섬김을 받는 삶은 부정한 삶입니다. 왜 그러느냐? 섬김을 받으려고 하는 것은 교만에서 나온 생각이고, 섬기려고 하는 삶은 겸손에서 나오는 마음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섬김을 받으려고 하는 것은 부정한 것이고, 섬기는 것은 정결한 것이다. 하는 것을 우리가 조금 더 설명하기 위해서 생각하려고 합니다. 인간이 섬김을 받기를 원하는데, 그 뿌리는 교만해 있는 것입니다. 도대체 얼 만큼 섬김을 받으면, 만족할까? 얼 만큼의 섬김을 받으면 더 이상 원이 없을까? 이사야 14:12~14 말씀을 보시겠습니다. 마귀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제일 마지막 부분을 보시겠습니다.
“너 아침의 아들 계명성이여 어찌 그리 하늘에서 떨어졌으며 너 열국을 엎은 자여 어찌 그리 땅에 찍혔는고 네가 네 마음에 이르기를 내가 하늘에 올라 하나님의 뭇 별 위에 내 자리를 높이리라 내가 북극 집회의 산 위에 앉으리라 가장 높은 구름에 올라가 지극히 높은 이와 같아지리라 하는도다”
그러니깐 하나님처럼 돼서, 섬김을 받는 것! 거기까지입니다. 그래서 인간의 욕심이 끝이 없는 것입니다. 인간의 교만도 끝이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처럼 되려고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거기까지 가야 합니다. 그래서 인간의 욕망도 부정한 것이고, 인간의 교만도 부정한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여러분들이 잘 아는 것처럼 요한복음 13장에 제자들의 발을 씻겨 주십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을 섬겨주셨습니다.
그런데 제자들의 발을 그냥 씻겨 주신 것이 아닙니다. 계기가 있었습니다. 왜 제자들의 발을 씻겨 주셨는지! 누가복음 22:24~27 말씀을 보시겠습니다.
“또 그들 사이에 그 중 누가 크냐 하는 다툼이 난지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이방인의 임금들은 그들을 주관하며 그 집권자들은 은인이라 칭함을 받으나 너희는 그렇지 않을지니 너희 중에 큰 자는 젊은 자와 같고 다스리는 자는 섬기는 자와 같을지니라 앉아서 먹는 자가 크냐 섬기는 자가 크냐 앉아서 먹는 자가 아니냐 그러나 나는 섬기는 자로 너희 중에 있노라”
너희들은 누가 섬김을 받아야 하느냐를 두고 다투고 있는데, 예수님은 너희 중에 섬김는 자로 있다는 것입니다. 사실은 섬김을 받을 수 있는 자가 있다면, 예수님인데 예수님은 뭐라고 말씀하시냐면 나는 너희들 중에 섬기는 자로 있다. 그러시면서 마가복음 10:45 절에 아주 유명한 말씀을 하십니다.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십자가를 말하는 것입니다. 인자가 온 것은 십자가를 통해서 인간을 구원하러 오신 것입니다. 인간을 무엇으로부터 구원을 하는 것입니까? 죄로부터 구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죄는 부정한 것이고, 구원은 정결한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예수님은 무엇으로 설명하느냐? 섬김으로 설명하시는 것입니다. 섬김은 정결한 것이고, 섬김을 받는 것은 부정한 것입니다. 그러면 섬긴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항상 상대방의 입장에서 생각하고, 말하고, 상대방을 배려해주고, 상대방을 도우려고 하는 것이 섬기는 것입니다. 섬김을 받는 것은 항상 자기 입장에서 생각하고, 자기 입장에서 말하고, 모든 사람이 다 자기중심적으로 움직여지는 것을 바라는 것입니다. 자기 이익을 위해서 모든 사람이 그렇게 움직여주기를 바라는 것들 그것이 섬김을 받으려고 그러니 우리가 예수 믿지 않는 사람들과 어떤 면에서 구별된 삶을 살 수 있느냐? 섬김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은 섬김을 받으려고 하기보다는 섬기려고 하는 그런 자세로 사는 사람들이다. 세상 사람들이 우리를 그렇게 인정을 해줘야 합니다. 그래야 구별이 되는 것입니다.
세 번째는 정직하게 사는 것입니다. 진실하게 사는 것은 정결하게 사는 것이고, 거짓되게 사는 것은 부정하게 사는 것입니다. 왜 그러느냐?
시편 33:4
“여호와의 말씀은 정직하며 그가 행하시는 일은 다 진실하시도다”
하나님은 정직하고, 진실하시다. 그래서 하나님은 거룩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우리에게도 진실을 요구하시고, 정직을 요구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마귀라는 존재는 전혀 다릅니다.
요한복음 8:44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 너희 아비의 욕심대로 너희도 행하고자 하느니라 그는 처음부터 살인한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없으므로
진리에 서지 못하고 거짓을 말할 때마다 제 것으로 말하나니 이는 그가 거짓말쟁이요 거짓의 아비가 되었음이라”
거짓의 근원이 누구냐? 마귀라는 것입니다. 거짓이 어디서부터 온 것이냐? 거짓의 뿌리가 어디냐? 마귀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마귀는 부정한 영입니다.
그 마귀가 부정한 영이라는 것을 신약성경에서는 여러 가지로 이야기를 합니다.
마가복음 1:23, 1:26
“23 마침 그들의 회당에 더러운 귀신 들린 사람이 있어 소리 질러 이르되
26 더러운 귀신이 그 사람에게 경련을 일으키고 큰 소리를 지르며 나오는지라”
우리가 무엇으로서 믿지 않는 사람과 구별된 삶을 살겠습니까?
정직하고, 진실하고!믿지 않는 사람과 다른 것이 무엇이냐?
주일날 성경책 가지고 교회에 오는 것 그것 외에는 그들과 다른 것이 없습니다.
우리가 무절제한 삶을 산다는 것은 레위기 적인 말씀으로 하면, 하나님이 먹지 말라고 금한 그 음식을 먹는 것입니다.
우리가 다른 사람에게 섬김을 받으려고
하는 그런 삶도 하나님이 부정하다고 그것을 먹지 말라는 그 음식을 우리가 먹고사는 것입니다. 정직하게 못 하게 사는 것도 결국 우리가 부정한 음식을 먹으며 사는 것입니다.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들은 제사를 통해서, 먹는 것을 가지고 구별된 삶을 살았다면, 오늘 우리는 절제된 삶으로, 섬기는 삶으로, 정직하고 진실한 삶으로 구별된 삶을 살아내어야 합니다. 여러분들이 구원받았다는 것이 자랑스럽습니까! 여러분들이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것이 자랑스럽습니까!
그러면 하나님의 자녀로서 구별된 삶을 사는 것도 자랑스러워야 합니다. 지금 이 시간에 하나님께서 우리 모두에게 그렇게 하나님의 자녀로서, 구원받은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구별된 삶을 살아갈 수 있는 은혜를 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거룩하신 아버지 하나님!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들이 먹을 수 있는 것과 먹을 수 없는 것을 가지고 구별된 삶을 살았던 것처럼 우리들은 절제된 삶! 섬김의 삶! 정직한 삶을 통해 구별된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하나님 우리 모두에게 은혜를 베풀어 주시옵소서.
거룩한 백성의 정결한 삶(레 11~15장)
정결과 부정결의 교훈은 ‘거룩’의 주제와 연결되어 있다
레위기 11장은 부정한 짐승의 문제를 다룬 ‘음식법’ …
상징과 실제의 세계 혼동하지 말아야
▲ 김경열 목사(총신대 강사) |
돼지를 먹지 못한 구약 백성들
이스라엘 땅에 혹독한 기근이 찾아왔다. 곡식과 과일은 거둘 것이 없었고 가축마저 떼죽음당해 식량 부족으로 온 나라가 아우성이다. 기근의 고통은 신실한 요아킴과 그의 가족도 예외는 아니었다. 들판에는 산양, 야생염소, 사슴, 비둘기, 참새, 등등 아직 더러 있었으나 특히 멧돼지들이 많이 보였고 녀석들이 굶주림에 식량을 찾아 마을 어귀까지 내려오곤 했다. 그러나 요아킴과 마을 사람들은 굶주림 속에서도 멧돼지만은 잡지 않았다. 멧돼지만이 아니라 야생 새들 중 독수리와 따오기와 같은 새들, 그리고 기근을 함께 버티고 있던 가축들인 낙타와 노새도 끝까지 잡아먹지 않았다. 이것들은 하나님의 율법에서 엄중히 식용 금지된 부정한 짐승이기 때문이다. 율법에 불순종하여 하나님의 징계로 찾아온 대기근 속에서 요아킴과 백성들은 크게 회개하며 극한의 상황 속에서도 율법을 준수하려 애를 썼다. 오랜 기다림 끝에 마침내 단비가 내렸다. 대지를 적시며 땅이 살아나고 온갖 생명이 힘차게 다시 약동했다. 순종하는 백성에게 ‘이른 비와 늦은 비’를 주겠다고 약속하신 하나님께서 은혜를 내려주신 것이다.
왜 어떤 짐승들은 식용 금지되었는가?
소위 ‘정결법’이라 불리는 레위기 11~15장은 모든 짐승들을 정결한 것과 부정한 것으로 분류하는 한편(11장) 인간과 사물의 다양한 부정결한 상태를 정의하고 그 해결책을 제시한다(12-15장). 부정결의 문제는 결국 ‘거룩’이라는 주제와 결부되어 있다. 거룩한 백성은 곧 정결한 백성이기 때문이다. 레위기 11~15장의 주제를 장별로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11장, 정-부정 동물과 음식법; 12장, 산모의 출산 후 부정결; 13-14장, 악성 표피 질환의 부정결, 15장, 신체의 유출들의 부정결.
왜 어떤 짐승이 부정하고 사람과 사물의 어떤 상태가 부정한가? 오래도록 학자들은 이 문제를 놓고 씨름해왔는데, 주로 레위기 11장의 연구에 주력해왔다. 그들은 오랜 연구 끝에 결국 레위기 11장은 11~15장의 전체적 맥락 속에서 파악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과연 레위기 11~15장을 관통하는 부정결의 근원적 원리(rationale)는 무엇인가? 레위기 11장에 대한 다양한 이론들을 살피면 그 답이 발견된다. 특히 레위기 11장은 강단에서 가장 흔하게 풍유적(알레고리) 해석으로 설교되는 본문이므로 각별한 주의가 요망된다.
레위기 11장은 신명기 14장과 더불어 부정한 짐승의 문제를 다룬 ‘음식법’이다. 오늘날도 유대인들은 여전히 ‘코세르’(kosher)라는 이름으로 이를 준수하고 있다. 레위기 11장은 음식 관련 규정과 더불어 사체 접촉의 부정결이라는 주제를 다루는데 양자는 밀접히 결부되어 있다. 짐승은 음식으로 허용된 짐승(정결한 짐승)과 금지된 짐승(부정결한 짐승)으로 나뉜다. 이때 짐승의 구분은 구약의 세계에서 허용된 상징을 통해 교훈을 주기 위한 목적을 가질 뿐 부정하고 흠이 있는 짐승이 내재적·존재론적으로 열등하다는 의미는 아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피조물을 창조하시고는 보시기에 좋았다 하셨다(창세기 1장). 따라서 구약을 읽을 때는 상징의 세계와 실제의 세계를 혼동하지 말아야 한다. 예를 들어 독수리는 경우에 따라 부정적인 상징으로 쓰이기도 하고, 긍정적 상징으로 쓰이기도 한다. 레위기 11장(신 14장)에서는 먹지 못할 새로 가장 먼저 언급될 만큼 부정한 생물의 대표 격이며, 신명기 28장 48~51절에서는 장차 이스라엘을 침공할 흉악한 민족을 상징하지만, 출애굽기 19장 4절(신 32:11)에서는 이스라엘을 시내산까지 이끌어주신 하나님의 완벽한 보호와 인도하심에 대한 상징물로 사용된다. 또한 나귀와 낙타는 부정한 짐승이었지만 짐을 부리는 가축으로 매우 귀한 재산이기도 했다. 부정한 짐승은 순전히 먹는 것과 관련해 그 상징성 때문에 부정하게 여겨졌다. 부정한 짐승들은 몇 가지 신체적 특징과 기준에 의해 판정되거나 짐승들의 목록으로 범주화된다. 그동안 동물을 정-부정으로 구분하는 기준에 대해서는 많은 이론들이 제시되었는데 그중 가장 대표적인 것 몇 가지는 다음과 같다.
a) 보건-위생학적 설명: 부정한 짐승은 비위생적이며 건강에 해롭다는 주장이다. 일부 유대교 랍비들의 해석으로, 제칠일 안식일 교회가 이를 따른다. 어떤 랍비들은 일부 동물들은 서식 환경이 불결하다는 이유로 금지된다고 말하기도 하고, 지느러미와 비늘이 없는 물고기는 탁한 물에서 살고, 체액이 차기에 먹으면 몸에 해롭다. 또한 육식조류의 피는 탁하고 진하므로 이것을 먹으면 마음이 잔인해지고 몸에서 검은 빛깔의 체액이 분비된다. 미생물학이 발달한 근대에 이르러 부정한 짐승들에 대한 과학적 연구를 통해 돼지고기는 선모충균이 가득하고 토끼는 야토병을 일으킨다는 사실이 밝혀짐으로써 보건-위생학적 설명이 힘을 얻었다. 이런 견해의 문제점은 금지된 짐승들 중에는 영양이 뛰어나고 위생적으로도 문제가 없는 것들이 많고 반대로 허용된 짐승들 중에도 건강에 좋지 않은 것들이 다수 포함되어 있다는 것이다. 허용된 초식성 반추동물 중에도 위험한 기생충의 숙주역할을 하는 것이 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그리고 돼지를 비롯한 금지 동물뿐 아니라 닭이나 염소 등도 불결한 생활습성을 가졌다. 위생을 기준으로 음식의 정-부정을 판가름했다면 ‘독초’는 왜 부정한 음식에 속하지 않는지 설명할 길이 없다. 무엇보다 하나님께서 인간의 건강을 고려하여 주신 법이기에 이 법은 계속 유효하다는 주장은 신학적 문제를 내포한다. 신약은 먹을 수 있는 것과 없는 것의 구분을 완전히 폐기했다. 제칠일 안식일 교회는 레위기 음식법의 항구적 유효성을 주장하지만 예수(막7:14~20)와 사도들(행10:9~16)의 가르침을 볼 때 이는 더 이상 효력이 없음이 분명하다. 하나님께서 건강을 증진하기 위해 주신 법을 나중에는 스스로 제거했다는 설명은 납득하기 어렵다. 물론 음식법 외에 다른 정결의식에 관한 율법들, 말하자면 출산한 여인을 장기간 격리시키고, 곰팡이와 피부병을 취급할 때는 청결을 엄격히 요구하고, 질병의 원인이 될 수 있는 사체를 멀리하게 하는 조치에는 보건 위생학적인 의도가 엿보인다. 그러므로 음식법에도 그런 위생학적 고려가 전혀 없었다고는 말하기 어려울 것이다. 그럼에도 보건-건강학·위생학적 설명은 이미 제시된 여러 난점을 통해 알 수 있듯이 그 규정에 대한 포괄적인 근거가 될 수는 없다. 레위기의 정결법에서 정결과 부정결은 보건 위생적 개념을 일부 포함하기는 하지만 그 이상의 고도의 신학적 개념이다.
b) 상징적(풍유적) 해석: 정결하고 부정한 짐승의 구분은 그것들이 지닌 상징성 때문에 주어졌다. 정결한 짐승들은 의인으로서 이스라엘 사람들의 행동양식을 나타내며, 반대로 부정한 짐승들은 죄인들의 모습을 나타낸다는 식의 해석이다. 이스라엘 백성은 유순한 초식 동물을 먹고 난폭한 육식 동물은 피해야 한다. 갈라진 굽은 의와 불의의 구분을 상징하고 새김질은 회상을 표시한다. 파괴적 습성을 가진 쥐는 혐오스럽고, 족제비는 입 모양을 볼 때 소문내기의 상징이다. 지느러미와 비늘을 가지고 강한 물살에 저항하는 물고기는 인내와 절제를 상징한다. 이와 같은 해석이 오래도록 한국교회 강단에서 여과 없이 전달되었다. 그러나 풍유적 해석법은 현대의 성경 해석학에서 매우 위험한 것으로 간주되어 더는 주석가들의 지지를 받지 못하고 있다. 근거없는 해석은 주관성이라는 함정에 빠지기 쉽다. 예를 들어 한국교회에서는 흔히 갈라진 굽은 신약과 구약의 말씀을 상징하고 새김질은 말씀의 묵상을 상징한다는 해석이 흔히 통용된다. 그러나 갈라진 굽은 선과 악을 상징하고 새김질은 선악의 분별을 상징한다는 해석도 존재한다. 둘 중 어느 것이 옳은 것인가? 이와 같이 풍유적 해석은 명확한 기준이 없기에 주관성을 피할 수 없다. 무엇보다도 성경 해석이야 교인들에게 감동과 은혜만 되면 문제가 없다는 식의 태도로는 이단의 창궐을 막을 수 없다.
그 외 금지된 동물이 이방의 제의에서 제물로 바쳐졌다는 ‘이방 제의 기원설’이 있으나 이스라엘의 이웃 나라들에서 공통적으로 소, 양, 염소가 주 제물이었다는 점에서 잘못된 주장이다. 또한 ‘생태학적 설명’이 있는데, 이에 따르면 이스라엘의 생태적 환경이 부정한 짐승들이 인간에게 도움을 주지 못했기 때문에 배척되어 결국 금지된 짐승으로 법제화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동일한 생태적 환경에 사는 이웃 나라들이 그런 짐승들을 허용했다는 것은 이런 설명을 수용하기 어렵게 한다. 학자들에게 가장 인기있고 매우 중요한 이론은 다음의 구조주의적 설명이다.
질서는 정결, 무질서는 부정결로 간주하는 구조주의적 설명
구조주의에 입각한 메리 더글러스는 ‘부정결’과 ‘오염’은 질서를 벗어난 것, 변칙적이고 자리를 이탈한 상태, 그리고 흠이 있는 불완전한 상태라고 주장했다. 그와 반대로 정결한 것은 원래의 자리에 있는 상태, 정상적인 것, 그리고 흠이 없는 완전한 상태를 말한다. 정결과 더불어 거룩 또한 적합한 질서를 일컫는 개념이다. 모든 동물은 하늘, 땅, 수중의 각 영역에 맞는 신체 구조와 이동 방식을 지녀야 한다. 예를 들어 정한 것으로 분류되는 짐승, 물고기, 새, 그리고 곤충은 저마다 삶의 영역에 부합하는 신체 구조와 이동방식을 가졌다. 더글러스에게 있어 모든 생물은 창세기 1장의 자연 생태계에 적합한 신체 구조와 이동방식을 가져야 하며, 이 기준을 벗어난 것은 무엇이든 “변칙적인 것”이기에 부정하다.
(1) 지상(땅): 정상적인 지상 동물에게는 갈라진 굽과 새김질이 필수다. 예컨대 굽이 갈라지지 않은 발(paw)은 펑퍼짐한 모양의 손과 같다. 즉 규칙을 이탈해 손이 발의 역할을 하는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신체적 특징을 가진 개, 고양이, 호랑이 등의 짐승들은 부정하다. 날거나 걷지 않고 기는 동물 역시 물고기나 새, 짐승 중 어느 것으로도 분류할 수 없으므로 자동적으로 배제된다. (2) 공중: 예를 들어, 새 중에 공중과 수중의 두 영역을 넘나드는 것은 질서를 어지럽히므로 부정하다. 새에는 구체적인 신체 기준이 적용되지 않고 20종류의 목록이 제시된다. (3) 수중: 정상적인 어류에게 요구되는 지느러미와 비늘을 가진 물고기만이 정결하다. 따라서 상어나 갈치처럼 지느러미가 없는 어류는 부정하고, 해삼, 낙지, 멍게, 조개류는 자동으로 배제된다. 또한 이들은 기어서 이동하는 종들이다. 수중에서 기는 동작은 정상적인 이동 방식이 아니므로 부정하다. (4) 기는 것: 어느 부류에도 속하지 않는 애매한 동물들은 부정하다. 땅, 물, 공중을 불문하고 기어 다니는 짐승들은 물고기도, 짐승도, 새도 아니기 때문에 모두 부정하다.
결국 더글러스에게 있어서 부정한 동물이란 정상적인 신체 형태와 이동 방식을 벗어난 변칙적인 것들이요 정결한 동물들은 그러한 요건을 갖춘 것들이다. 이러한 음식법의 표준과 정-부정 동물은 거룩하신 하나님께서 온전하고 완전하신 분임을 증언한다. 그것들은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완전성, 정결성, 통일성을 인식시킨다. 더글러스의 새로운 견해에 성경학자들의 반응은 열광적이었으며 지금도 큰 인기를 끌고 있다. 그러나 그녀의 이론은 많은 반론을 불러일으켰다. 특히 이동 방식의 변칙성(anomaly) 설명에 대한 집요한 비판이 이어졌다. 이것이 전 동물계에 일관성 있게 적용되지 않기 때문이다. 우선 가축의 경우 굽의 갈라짐은 논외로 하더라도 새김질은 신체적 특징이나 운동방식과는 무관하며, 음식섭취와 관련이 있다. 물고기의 비늘 역시 운동방식과 아무 상관이 없다. 부정한 새들이 공중과 물을 오가며 이동할 것이라는 주장도 추론에 불과하다. 11장의 목록에 있는 20가지의 새들 중 많은 것이 어떤 종인지 알려지지 않았으므로 그 새들 전부가 다이빙을 하고, 수영을 한다고 확신할 수는 없다. 또한 이스라엘 사람들의 생활환경은 물이 드문 고지대였으므로 그들에게 익숙한 조류는 대부분 오히려 강이나 호수의 생태적 습성과 거리가 멀었을 것이다. 게다가 공중을 나는 새는 모두 땅을 걸어 다니므로 두 영역을 넘나드는 변칙으로 간주되어야 한다. 따라서 더글러스의 기준은 일관성이 없다. 무엇보다 왜 지상의 짐승다운 짐승의 표준이 갈라진 굽과 새김질로, 또한 수중의 짐승의 표준은 마땅히 지느러미와 비늘로 결정되었는지 납득하기 어렵다.
이런 답변들에 만족하지 못한 일련의 구약학자들은 정-부정을 가르는 가장 설득력 있는 이유를 찾아냈다. 그것은 바로 생명과 죽음의 두 축이다. 우리는 지면상 이 문제를 다음 호에서 다루기로 하자. 동시에 그 생명-죽음의 두 축이 어떻게 레위기 11장의 음식법과 나머지 12~15장에 이르는 모든 정결법에 일관되게 적용되는지 살펴볼 것이다. 우리는 생명-죽음을 기준으로 나뉘는 정결과 부정결의 교훈이 결국 ‘거룩’을 가르치기 위한 레위기의 중대한 신학이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먹을 수 있는 것(something edible)
육지의 모든 짐승 중에서
1. 먹을 만한 것은 무엇인가?
2. 일반적인 특성은 무엇인가?
3. 왜 그런 짐승들만 먹으라시는가?
1) 굽이 갈라져서 쪽발이 되고 되새김질 하는 것 : 소, 양, 염소, 사슴, 노루
2) 대체로 풀을 먹고 사는 동물이며 평화로운 짐승들이다.
3) 구별된 삶과 묵상하는 삶을 통해 평화로운 삶을 영위할 것은 요구하신다.
먹을 수 없는 이유를 생각할 때마다 갈라졌느냐, 되새김질을 하느냐를 따져야한다.
당연히 사람에게도 갈라졌느냐 되새김질이 중요하다는 것을 인식하게 된다.
갈라지는 것의 의미는 거룩(구별)을 뜻하고, 되새김질은 묵상을 뜻한다.
그렇게 하노라면 자연스럽게 모든 사람과 평화하는 삶을 살게 될 것이다.
사반 : 토끼 비슷한 초식 동물
토끼 : 실제로는 되새김질을 하지 않는다. 그냥 모양만 하는 것처럼 보일 뿐이다.
물에 있는 모든 것 중에서 먹을 만한 것은 어떤 것이며 그것이 무슨 의미를 지니고 있을지 생각해보자?
지느러미와 비늘이 있는 것.
지느러미는 물고기가 방향을 잡아서 나아가는 데 필요한 것이다.
살아가는 방향이 분명해야하고 때로는 물을 거슬러 나갈 줄도 알아야한다.
한 곳에 머물러 있거나 타의에 휩쓸려 가는 삶은 안된다.
비늘이 없는 것은 땅에 기는 짐승과 비교할 수 있다(뱀장어류).
진흙에 깊이 박혀 있거나(조개류) 물 밑 깊은 곳에서 공격적이고 음흉하다.
미꾸라지의 파고 들어가는 성질은 유명하다.
끊는 물에 미꾸라지와 두부를 함께 넣으면 미꾸라지가 두부에 파고 들어가서 익어버리기 때문에 마치 백찜에 속을 넣은 것같이 된다나!
반면에 비늘이 있고 지느러미가 있는 물고기는 대체로 수면 가까이에서 활발하게 움직이며 산다.
가끔은 수면으로 뛰어오르기도 하고. 하늘을 바라보면 살아야하는 그리스도인들의 삶과 비슷한 점이 많다.
곤충 중에서 먹을 만한 것 무엇인가? 왜 그럴까?
날개가 있고 땅에 뛰는 다리가 있는 것 :
날개가 있는 데 기는 것은 가증하다.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을 받았으면서도 마치 하나님이 없는 것처럼 맥빠진 모습으로 사는 것은 하나님께서 가증하게 여기신다.
뛰는 다리란 땅에서 살되, 땅에 속하지 않는 것을 의미한다.
땅에 발을 디디긴 하되 빠지지는 말라는 것이다.
귀뚜라미는 날개가 없음에도 정한 것으로 취급되었다.
정한 짐승과 부정한 짐승, 먹을 수 있는 짐승과 먹어서는 안 되는 짐승을 구분합니다.
굽이 갈라지고 새김질하는 짐승은 정하기에 먹을 수 있습니다.
둘 중의 하나만 해당하는 낙타, 토끼, 돼지는 먹을 수 없습니다.
불완전하다는 것입니다.
비늘과 지느러미를 가진 물고기도 먹을 수 있습니다.
비늘과 지느러미를 완벽한 물고기의 조건으로 본 것입니다.
독수리, 타조, 올빼미처럼 먹이를 탈취하는 조류는 먹을 수 없습니다.
날개가 있으면서 동시에 네발로 기어 다니는 곤충도 부정합니다.
메뚜기처럼 날개가 있어도 네 발로 뛰는 것은 먹을 수 있습니다.
심지어, 부정한 짐승의 사체를 만지거나 접촉해도 부정합니다.
이처럼 정한 것과 부정한 것 (clean vs. unclean)에 대한 규정이 복잡하고 엄격합니다.
그러다 보니 다양한 견해가 제시되었습니다.
첫째로, 특별한 기준이 없고 하나님께서 정한 것과 부정한 것을 임의로 정하시고 이스라엘 백성들의 순종을 요청하셨다는 것입니다.
정한 것과 부정한 것 사이에 뚜렷한 기준이 없는 것을 고려한 해석입니다.
둘째는, 본문의 부정한 짐승들은 이스라엘이 아닌 이방 민족의 제사에 사용된 것이라는 견해입니다.
그러니 먹을 수 없습니다.
돼지가 대표적인데, 그렇다면 바알신의 상징인 소고기도 금해야 했기에 일관성이 없습니다.
셋째는, 의학이 발달한 근래에 제기된 의견으로 위생상의 이유라는 것입니다.
세균을 옮기기 쉽거나 박테리아 등을 갖고 있는 위험한 짐승들이라는 것입니다.
상하기 쉽고 종종 전염병을 일으키는 돼지가 대표적입니다.
그런데 구약성경에서 부정한 짐승이 건강상 해롭다는 지적이 없다는 것이 함정입니다.
네 번째는, 상징적인 의미가 있다는 견해입니다.
구약의 율법에서는 온전한 것(wholeness)과 창조 섭리에 맞는 자연스러운 것(normality)을 중요시 합니다.
레위기 11장에서 정한 것으로 분류한 것들은 하나님의 창조 섭리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는 것입니다.
또한, 먹이를 새김질하는 짐승을 정한 것으로 구분한 것은 하나님 말씀을 새김질하듯이 묵상하는 것을 의미한다는 식입니다.
상징적인 해석은 그럴듯하지만, 비약이 있고 주관적입니다.
어떤 견해가 맞는지를 두고 집요하게 연구할 것도 아닙니다.
본문 자체가 명확한 입장을 보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레위기 11장의 정한 것과 부정한 것의 구분이 만고불변의 진리라면 하나님께서 정확한 기준을 제시하셨을 것이니 본문의 규정을 현대에 맞출 필요도 없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너희 몸을 구별하여 거룩하게 하고 스스로 더럽히지 말라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는 말씀입니다(레 11:44-45).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임의적 명령이든, 이방의 풍습을 따르지 말아야 했든지 위생상의 이유나 상징적인 의미에서든지 11장의 규정을 지켜야 했습니다.
당시에는 그것이 몸을 더럽히지 않고 하나님 백성에 걸맞은 거룩한 삶이었습니다.
그렇다면, 현대를 사는 우리에게 세상 사람들과 구별되는 “거룩함”은 무엇일까요?
우리 몸을 스스로 더럽히는 것들은 없는지요?
구약의 이스라엘이 먹는 것으로 거룩함을 유지했다면 우리는 무엇을 갖고 거룩함을 지켜야 할까요?
“거룩함”이라는 단어를 붙잡고 오늘 하루를 살아 봅시다.
나는 여호와 너희의 하나님이라.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몸을 구별하여 거룩하게 하고 (레 11:44)
For I am the LORD your God. Consecrate yourselves therefore, and be holy, for I am holy. (Lev 11:44)
하나님 아버지 구약의 복잡한 규정을 지키지 않아도 하나님 백성으로 거룩함의 길을 걷게 하소서.
정결한 짐승 섭취를 통해 거룩한 백성의 신분 유지하다
생명은 질서, 죽음은 무질서에 속해 … 죄의 증상으로 나타난 부정결 씻어 내는 속죄제 필요
앞선
글에서 우리는 왜 어떤 동물이 정결하고 다른 동물은 부정한지 여러 견해를 살펴보았다. 나아가 우리는 왜 산모는 부정하게 여겨졌고
나병(정확히는 악성 피부병)과 신체의 유출증은 부정한지를 질문해볼 수 있다. 정결과 부정결이 구분되는 기준은 생명과 죽음이라 볼
수 있다. 이 견해의 장점은 음식법뿐 아니라 레위기 11~15장 정결법 전체에 잘 들어맞는다는 것이다. 이에 따르면 생명과
죽음은 각각 질서와 무질서를 가리킨다. 죽음은 곧 하나님의 부재이자 거룩의 부재를 나타내며, 부정한 것이다. 생명이 제거된
자리에는 죽음이 들어온다. 하나님과 결합된 인간은 생명 안에 있기에 거룩하고, 하나님 없는 인간은 죽음의 영역에 속하니 부정하다.
이러한
관점에서 금지된 짐승과 새들 중 대다수는 피를 내면서 죽음을 유발하는 육식동물, 죽음의 찌꺼기와 사체를 먹는
청소동물(scavengers), 그리고 돼지와 같은 잡식성 동물들이다. 다른 한 부류들로는 멧돼지와 육식 조류와 같이 고대
이스라엘인들 사이에서 악마의 거주지로 간주되었던 황량한 광야와 황무지에서 사는 것들이다. 죽은 자를 부르는 강신술과 관계된 동물들
역시 부정하다. 예를 들어 이사야 65장 2~7절에서 이스라엘인들은 마술, 강신술을 동원해 집회를 열면서 돼지고기와 가증한
짐승의 국물을 먹는다. 한편 죽음은 강력한 부정결의 근원이므로 사체와의 접촉은 피해야 했다. 심한 피부병은 사체의 피부를
연상시키고, 악성 곰팡이가 핀 건물은 습한 지하나 무덤과 상태가 비슷하기 때문에 부정하게 여겨졌을 것이다. 신체적 유출은 생명의
액체가 몸에서 빠져 나가기 때문에 부정했을 것이다. 둘 다 남녀 생식기로부터의 유출과 관련되어 있다. 여성의 자궁 출혈과 남성의
정액 유출 및 비뇨기 질환으로 인한 유출이 여기에 해당된다.
이와 같이 모든 정-부정을 구분하는 근거는 ‘생명’과 ‘죽음’일 수 있다. 11~15장을 ‘생명’과 ‘죽음’으로 완벽하진 않지만 거의 일관성 있게 설명할 수 있다. 생명에 속하고 생명과 가까운 것은 정결하고, 죽음에 속하고 죽음과 가까운 것은 부정결하다. 더불어 더글라스의 견해인 질서와 무질서를 생명과 죽음에 적용하는 것이 가능하다. 곧 생명은 질서에 속하고 죽음은 무질서에 속한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부정결의 문제를 해결하려면 특히 속죄제가 필수적으로 요구된다. 이것은 특히 레위기 12~15장의 부정결의 증상들이 죄와 관련되어 있다는 유추를 가능하게 만든다. 추정컨대 부정을 유발하는 신체적 유출의 배경과 기원은 창세기 3장의 인간이 저지른 최초의 범죄로 거슬러 올라간다. 다시 말해 인체에 나타나는 여러 가지 부정결과 그와 비슷한 사물의 부정결은 아담의 범죄로 인해 발생된 신체적·자연적 변화로 인한 증상일 가능성이 있다. 죄의 증상으로 나타난 부정결을 씻어 내기 위해 속죄제가 요구되는 것이다.
레위기 11장: 정-부정 동물(음식법)과 사체 접촉
창세기 1장을 비롯 성경 전반의 우주관은 하늘, 땅, 수중으로 삼중적인데, 레위기 11장의 자연계는 4중으로 구분된다(공중/지상/지표면/수중). 땅을 지상과 지표면으로 세분화하면 생물들을 네 영역에 분포시키는 것이다. 특이하게 11장에는 자연계를 구분하는 경우 외에도 의도적으로 4배수의 숫자를 사용하고 있다. 경계선에 있는 동물 4종(4~7절); 금지된 조류 20종(13~19절); 허용된 곤충 4종(20-22절); 금지된 기는 동물 8종(29~30절). 각 영역별로 부정한 짐승들의 목록이 주어진다. 앞서 말한 대로 부정결을 판별하는 기준은 생명과 죽음이다.
지상의 짐승 중에 사냥하는 짐승과 사체를 먹는 짐승, 잡식성 짐승은 부정하다. 생명-죽음이라는 기준에 따라 제일 먼저 초식 동물이 허용되며, 그것을 토대로 반추 동물(소, 양, 염소)의 공통점인 갈라진 굽과 새김질이 표준으로 결정되어 자연계 전체에 적용되었다고 볼 수 있다. 이때 경계선에 위치한 네 부류의 짐승들에 유의해야 한다(4~7절). 언제나 진짜와 비슷한 가짜가 더 위험한 법이기 때문이다.
수중 생물 중 바닥을 청소하는 종류는 우선 배제된다. 수중에서 기는 짐승들은 수중 밑바닥에 널브러진 죽은 어류의 잔해를 섭취할뿐더러 수면 밑을 배로 쓸고 다니거나 그곳에서 산다. 수중을 헤엄치는 물고기는 지느러미와 비늘을 모두 가지고 있지만 지상 동물과 달리 이 둘 중 하나만 가진 물고기는 정결한 동물로 분류되지 않는다. 더글라스가 말한 대로 육상 동물과 수중 동물에게 신체적 기준을 적용한 데는 짐승의 흠을 판별한 것과 마찬가지로(레 22:17~25) ‘완전성’이라는 교훈을 가르칠 목적이 있었을 것이다. 따라서 더글라스의 구조주의적 설명에 오류는 있을지언정 그녀가 발견한 ‘신체적 완전성으로서의 거룩’이라는 개념을 배제할 수는 없다. 그러니 결국 ‘생명과 죽음’을 기준으로 정-부정 동물을 구분했고, 거기에 신체적 완전성의 원리가 덧붙여진 것이 분명하다. 그래야 동물의 굽과 새김질, 비늘 지느러미와 같이 정결한 짐승에게 요구된 신체적, 생태적 특징이 설명된다.
공중의 새에도 같은 기준이 적용되어 주로 육식 조류와 사체를 먹는 습성을 가진 조류, 물고기를 잡아먹는 새들이 부정하게 여겨졌다. 다만 금지된 조류들 사이에서 별다른 신체적 공통점을 찾아볼 수 없어 금지된 조류 20가지를 목록으로 정리한 것으로 보인다(13~19절). 이 조류들의 정확한 종류가 무엇인지는 알 길이 없고 현대의 번역 성경들뿐만 아니라 고대의 역본들도 천차만별이다. 지표면을 기는 짐승을 부정하게 여긴 것은 아마도 사체와 뼈가 깔린 지표면을 쓸고 다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지표면이 부정한 영역으로 취급되는 또 다른 이유는 음부(스올)의 접촉면이기 때문이다. 구약에서는 기본적으로 지하를 의미하는 음부를 망자의 세계로 인식한다. 즉 지표면은 죽음의 잔해들이 널려있고, 동시에 사체가 묻혀있는 지하 세계와 맞닿아있다. 따라서 두더지나 쥐처럼 땅속을 드나드는 짐승들 또한 기는 것의 범주에 포함되어 가증하게 여겨지는 듯하다. 곤충류는 새처럼 나는 생물임과 동시에 기는 것으로 분류되어 부정하지만, 네 종류의 메뚜기는 발로 뛰는 특징 때문에 허용된다(20~22절).
이 음식법의 목적은 정결한 짐승의 섭취를 통해 거룩한 백성의 신분을 유지하는 것이다(레 11:44~45). 한편 레위기 11장은 부정한 짐승의 섭취를 금지함과 동시에 부정을 유발하는 짐승의 사체와의 접촉 역시 금지하고 있다. 이때 정한 짐승과 부정한 짐승 사체 모두 접촉이 금지된다. 만일 접촉이 발생하면 하루의 시간이 지난 뒤 목욕하고 옷을 빤 뒤 저녁까지 기다려야 한다. 참고로 인간의 시신의 경우 훨씬 강력한 부정결의 근원으로서 송장과 접촉한 사람이나 물건과 접촉되면 그것들도 부정케 된다.
레위기 12장: 산후 정결법
자녀를 출산한 여인은 부정하게 여겨졌는데 이것은 아이를 낳은 것 자체가 아니라 그로 인해 발생한 자궁 출혈 때문이다. 이어서 거론되는 악성 피부병(13~14장) 및 신체의 유출(15장)과 더불어 이러한 부정은 당사자의 의지와 상관없이 자연적 또는 불가항력적으로 발생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경의 법은 그것들을 부정한 상태로 간주한다. 출산은 ‘생육하고 번성하라’는 하나님의 창조 명령에 따른 행위임에도(창 1:26~28) 그로 인한 출혈은 부정하게 여겼다는 것은 언뜻 매우 부당한 조치로 보인다. 그러나 알고 보면 여기에는 오경의 신학적 배경이 놓여 있다. 11장과 달리 12~15장은 대부분 인간의 몸에서 발생되는 부정한 증상들을 다룬다. 12장은 산후 출혈, 13~14장은 문둥병으로 불려온 악성 피부병(건물과 사물의 표면에 발생하는 곰팡이를 포함한다), 그리고 15장은 생식기로부터의 액체가 빠져나가는 증상들을 부정하게 취급한다. 그것은 월경을 포함한 자궁 출혈과 정액의 유출, 혹은 비뇨기 질환으로 인한 유출이다. 더글라스는 11장의 해석과 같은 맥락에서 이러한 신체적 유출이 부정한 이유는 완전한 담지체인 몸이 체액 소실로 인해 불완전해지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그것보다는 몸으로부터 ‘생명의 액체’가 빠져나간 결과라 할 수 있다. 둘 다 남녀 생식기로부터의 유출과 관련되어 있다. 일단 이러한 액체는 몸으로부터 빠져 나가는 순간 접촉을 통해 2차, 3차 감염을 일으키는 유출물이 된다.
이와 같이 산모가 부정을 타는 이유는 출혈 때문이라 할 수 있는데 달리 보면 그녀는 출혈과 더불어 생명을 내줌으로써 죽음에 다다르는 과정을 거쳐 새로운 생명을 탄생시킨다. 즉 산모는 죽음과 생명의 중간 상태에 놓인 존재이기에 부정하게 된다. 12장의 산모의 부정결과 정결에 관한 규례는 다음과 같이 정리해 볼 수 있다. <표 참조>
레위기 12장의 가장 큰 난점은 출산한 아이의 성별에 따라 부정결한 상태가 지속되는 기한에 차이가 있다는 점이다. 남자 아이를 낳으면 산모는 7일간 부정한 상태로 있다가 8일 째에 아이를 할례한다(2~3절). 이때 본문에는 생략되어 있으나 다른 사례들에 비추어볼 때 산모의 부정함은 목욕과 더불어(아마도 옷 세탁을 포함) 깨끗이 씻길 것이다. 그러나 산모는 그로부터 33일이 지나야 비로소 완전히 남은 산혈이 완전히 깨끗해졌다(4절). 그러나 이 기간에는 성소에 접근이 제한되고 성물을 만지는 것이 금지될 뿐(4절), 집안에 격리되지 않고 별다른 제약 없이 일상생활을 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다만 성소 접근을 금지한 데서 알 수 있듯이 일상생활에도 어느 정도의 제한이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남아를 출산한 산모가 완전히 정결해지기까지는 총 40일간이 소요되었다. 여아를 낳았을 때는 그 기간이 두 배로 늘어난다. 목욕과 더불어 마무리되는 일차 부정결의 기간은 14일이며, 그 후 66일 동안은 성소 접근이 금지되었다. 완전한 정결을 위해 총 80일이 소요되는 셈이다.
이 같은 차이가 발생하는 원인은 아직 명확히 규명되지 않았는데 이에 대해 그 동안 다양한 설명들이 시도되었다. 여아를 낳으면 실제로 출혈 기간이 더 길다는 의학적 근거를 제시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여아가 미래의 산모인 이유로 여아는 매달 운명적으로 부정결의 고통을 겪는 미래의 산모라는 점이 고려되어 두 배의 기간이 요구된다는 주장도 있다. 그러나 가장 강력한 의견은 고대에서의 남녀의 차이 때문이라는 견해다. 고대 이스라엘의 가부장 체제 속에서는 여자가 남자보다 열등했으며, 몸값도 반값이었다는 것이다(레 27:2~7). 그러나 반드시 부정결한 정도가 높은 쪽의 가치가 상대적으로 떨어지는 것은 아니다. 예를 들어 사람의 시체는 돼지의 사체보다 더럽지만, 사람과 돼지의 가치는 정반대다. 결국 어느 것도 남아와 여아 출산 사이의 차이에 대한 명쾌한 답변은 되지 못한다.
그 이유가 무엇이었든 출산을 마친 여인을 장기간 격리시키고 그녀의 활동을 제한한 배경에는 산모의 육체적 회복과 감염 방지를 위한 배려가 숨어있었을 것이다. 만일 여아의 경우 산모의 출혈이 더 오래 가고(남아의 두 배에는 훨씬 못 미칠지언정) 그만큼 회복에 오랜 시간이 걸린 것이 사실이라면 그 기간을 넉넉히 두 배로 할 것을 법제화했는지도 모른다.
오랜 기간이 지나 산혈이 완전히 깨끗해진 뒤 산모는 마지막으로 성소에 제사를 드리러 올라와야 한다. 이때 도표에서 보는 바와 같이 번제를 위한 어린 양 한 마리와 속죄제를 위한 집비둘기나 산비둘기 한 마리가 요구된다. 그러나 가난한 여자의 경우 번제의 어린 양을 비둘기로 대체하여 비둘기 두 마리로 약소한 제사를 바쳤다(레 12:8). 복음서에는 마리아가 예수님을 출산한 뒤 8일 만에 할례를 하고, 정결 기간을 지낸 후 희생제를 바치러 예루살렘 성전에 올라온 일화가 기록되어 있다(눅 2:21~24). 그녀가 비둘기 두 마리를 바친 점으로 미루어볼 때 예수님은 매우 가난한 가정에서 태어나셨을 것이다.
여기서 속죄제는 그녀의 부정결로 제단이 더럽혀졌기에 필수며, 번제는 아마도 자녀 출산에 대한 감사의 뜻으로 드렸을 것이다. 번제에 관한 규정이 앞서 등장하는 것으로 보아 순서상 번제를 먼저 드렸을 것이다. 이것은 이 희생제에서 출산에 대한 감사가 우선되어야 함을 암시한다. 그러나 사실은 뒤에 드려진 속죄제가 더 중요했다. 성소를 오염시킨 그녀의 부정결을 씻어내야 했기 때문이다.
__________________ 레위기 10장 / 다른 불(1절)
03-20-2023(월) 사순절 제23일 아론의 아들 나답과 아비후가 각기 향로를 가져다가 여호와의 명하시지 않은 다른 불을 담아 여호와 앞에 분향하였더니.
Aaron's sons Nadab and Abihu took their censers, put fire in them and added incense; and they offered unauthorized fire before the LORD, contrary to his command.
성경을 읽을 때 어떤 사건에 대한 이해가 매우 중요합니다.
사건을 이해하는 방법은 "대립 사건(對立 事件)" 또는 "유사 사건(類似 事件)"을 구분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은 아벨의 죽음과 같은 것과 비교할 때 "유사 사건"이라고 합니다.
반면에 아이 성을 공격하고 실패했을 때 아간이 죽임을 당하는 것은 "대립 사건"이라고 하겠습니다.
레위기 10장은 제자상 위임식 후에 첫번 제사를 마친 후에 아론의 두 아들이 여호와께서 명하지 않은 불을 사용하므로 여호와 앞에서 불이 나와 나답과 아비후가 죽고 말았습니다.
왜 제사장으로 임명을 받은 "나답"과 "아비후"가 "여호와가 명하지 않은 다른 불(unauthorized fire, strange fire)"을 사용하였을까요?
여호와가 명하지 않은 불이란 위임식 때 하늘에서 불이 떨어졌습니다(9:24).
"불이 여호와 앞에서 나와 단 위의 번제물과 기름을 사른지라 온 백성이 이를 보고 소리지르며 엎드렸더라."
제사장의 임무는 이때 떨어진 불을 잘 관리하여 제사 때마다 그 불을 사용해야 합니다.
따라서 여호와의 명하지 않은 다른 불이란 단 위의 번젬물과 기름을 태웠던 불이 아니라 일상생활에서 사용하던 불을 말합니다.
그 결과 나답과 아비후는 불에 타 죽고 말았습니다(10:2).
"불이 여호와 앞에서 나와 그들을 삼키매 그들이 여호와 앞에서 죽은지라."
축복의 불과 저주의 불을 생각해 봅니다.
축복의 불이란 "제물을 태우는 여호와 앞에서 나온 불"을 말합니다(9:24).
저주의 불이란 "나답과 아비후를 태웠던 불"을 말합니다(10:2).
왜 나답과 아비후가 여호와께서 명하지 않은 불을 사용하였을까요?
그 이유를 레위기 10장 9절에서 찾아봅니다.
"너나 네 자손들이 회막에 들어갈 때에는 포도주나 독주를 마시지 말아서 너희 사망을 면하라 이는 너희 대대로 영영한 규례라."
본문에 의하면 나답과 아비후가 포도주나 독주를 마셨기 때문에 다른 불을 사용한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향단에 불을 피울 때는 번제단의 불을
향로에 담아 향단에 옮겨서 분향해야 합니다.
그러나 나답과 아비후는 여호와께서 명하시지 아니한 다른 불을 담아 여호와 앞에
분향하였습니다.
나답과 아비후가 죽자 모세는 웃시엘의 아들들인 미사엘과 엘사반을 불러 회막 성소 앞에 있는 두 시체를 옮겨 장사되었습니다.
그리고 모세는 아론과 그의 두 아들을 불러 슬픔의 표현을 금지시키고 여호와의 진노가 온 회중에게 미침을 면케 하라고
하였습니다.
우리에게 견디기 어려운 시련이 닥칠 때에도 그러한 상황을 허락하신 주님의 손길을 인정하며 불평하지 않고 묵묵히 참고 견디는 믿음이 필요합니다.
제사장은 포도주와 독주를 마시지 말아야 합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은 거룩하신 분이기 때문에 제사장들은 그들의 직무를 수행하는 데 있어서 성결해야 했으며 특히 포도주와 독수를 마시지 말
것을 당부하셨습니다.
정신이 맑아야 거룩한 것과 속된 것, 부정한 것과 정한 것을 바르게 구별할 수 있을 뿐 아니라 백성들을
온전히 가르칠 수 있기 때문이다. 나답과 아디후의 심판 사건 직후에 주신 것입니다.
노아도 술 취함으로 범죄하였던 것 처럼 신앙
생활을 파괴하는 독약이 되는 포도주를 멀리해야 합니다.
사랑하는 교우들이여,
주님께서 주신 오늘
겸손한 자세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길이 재앙을 물리치는 길이요 하나님의 축복을 받을 수 있는 지름길이라는 것을 잊지말아야 하겠습니다.
제사장들에게는 제사의 음식을 먹어야 하는 규례가 이미 주어져 있었습니다.
모세는 그것을 명했지만, 회중의 죄를 위한 제사의 고기를 아론과 두 아들들은 먹지 않았습니다.
모세는 이 일로 인하여 노했지만, 이 제사에는 자신들의 죄악도 포함되어 있었다고 생각해서 속죄제물을 먹지 않았다고 한 아론의 대답을 모세는 합당하게 여겼습니다.
나답과 아비후의 불순종과, 엘르아살과 이다말의 불순종은, 모두 동일한 불순종이지만, 질적인 차이는 완전히 다릅니다.
제사장의 직무를 얼마나 소중히 여기며, 하나님 앞에서 자신이 어떻게 서야 하는 것을 알고, 더욱 더 거룩하고자 한 엘르아살과 이다말의 말은 모세를 납득시키기에 충분했습니다.
하나님의 법이 막무가내로 무조건 지켜야 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더욱 중요한 마음을 주님께 어떻게 드리느냐에 따라 이러한 융통성은 발휘됩니다.
나답과 아비후가 여호와의 명하시지 않은 다른 불을 가지고 왔다는 것은, 바울 사도의 언어로 하면 다른 복음을 전하는 것일 것입니다(갈 1).
사람들은 자기의 방법, 자기의 불, 자기 생각이 하나님의 옛 방식이나 인기 없는 방법보다 낫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또 이런 것은 언뜻 보기에 대수롭지 않아 보이고 사소해 보이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천사라 할지라도 저주를 받아야 한다고 사도 바울이 선언한 바와 같이 심각한 일입니다.
자기의 방법과 방식으로 하나님을 예배하고 하나님의 교회를 세워보려고 하는 모든 헛된 시도들은 하나님의 심판의 대상이 될 뿐입니다. 예배와 삶과 행동과 모든 판단의 기준은, 나의 판단과 경험과 생각이 결코 아닙니다. 모든 기준은 오직 성경이며, 오직 하나님의 말씀과 명령뿐입니다.
오늘 하루 우리의 삶 속에서,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고 판단하는 모든 것의 기준이, 오직 하나님의 말씀이 되게 하옵소서.
내 눈에 좋은 것을 택하거나, 내가 보기에 옳다고 여기는 것을 옳게 여기는 것이 아니라, 이것을 하나님께서 기뻐하실까? 하나님께서 이것을 인정하실까? 하나님의 뜻은 무엇일까? 계속하여 물으며, 사람을 기쁘게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오늘 이 하루가 되게 하옵소서. 오늘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살게 하옵소서.
아론의 아들 나답과 아비후 -
대제사장 아론과 그 아내 엘리세바 사이에는 네 아들, 곧 나답과 아비후, 및 엘르아살과
이다말이 있었습니다(출 6:23).
네 아들들 중에서 나답과 아비후는 제사장 직무를 잘못 감당하여 여호와의 불로 죽임을 당했기 때문에 셋째
아들인 엘르아살이 후일 아론의 뒤를 이어 대제사장이 되어 레위 족속의 어른이 되었습니다(출 6:25; 민 20:28).
향로(마흐타) -
이것은 성소 안에 설치된 분향단에 아침과 저녁마다 새로이 향을 사를 때 사용되는 불씨를
번제단에서 향단까지 옮기는데 쓰이던 금제 그릇을 가리킨다.
성경의 다른 부분에는 '불똥 그릇'(출 25:38),
'통'(출 27:3; 38:3)이라고도 합니다.
다른 불 -
직역하면 '이상한 불'(strange fire)인데 이 불이 구체적으로 어떠한 불을 가리키는지는 확실치
않습니다.
여호와께서 명하신 불, 즉 번제단의 제물이 타는 불이 아닌 '일반 불' 또는 다른 불"을 의미하는
듯합니다(The Preacher's Homiletic Commentary).
나답과 아비후는 분향할 불로는 오직 번제단의
불만을 사용해야 한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이를 어긴 것은 여호와의 규례를 멸시하는 행위이며 하나님께 대한 불순종의 죄라고 하겠습니다.
하나님의 규례를 지키지 않는 불순종의 죄로 인하여 나답과 아비후는 저주의 불에 의해서 죽고 말았습니다.
왜 나답과 아비후가 이런 잘못을 행하였는지 추측하게 하는 말씀은 포도주와 독주를 마시지 말라고 당부한 것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한편 나답과 아비후가 이러한 죄를 범하게된 이유 중의 하나는 그 날 독주를 마신 때문이라고 추측된다.
왜냐하면 이 사건 이후 곧
독주 금지 규례가 주어지기 때문입니다(9절). (Matthew Henty, Harrison).
여호와의 불
모든 제사가 마무리되었을 때 여호와의 불이 제단 위의 번제물을 불살랐습니다.
여호와의 불은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제단 위의 번제물을 사르는 여호와의 불을 보고서 백성들은 놀라움과 두려움으로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린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제사 후에 여호와의 불로 임재하신 것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를 하나님께서 목도하고 계실 뿐 아니라 영광을 받으시는 제사임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이 광경을 본 제사장들과 백성들이 어찌 함부로 제사를 드렸겠습니까?
신약의 사도들은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산 제사를 마무리하셨을 때 하나님의 영광이 불같이 임하심을 목도하였기에 그들은 온전한 예배의 삶을 드렸던 것입니다.
마태복음 27:50-51
예수께서 다시 크게 소리 지르시고 영혼이 떠나시니라 이에 성소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까지 찢어져 둘이 되고 땅이 진동하며 바위가 터지고.
그러므로 오늘날 성령의 임재를 경험하지 못한 자들은 영과 진리로 드리는 예배의 의미를 잘 모르는 것입니다.
우리가 드리는 예배에 성령께서 임재하고 계심을 깨닫지 못하는 자들은 그 마음에 진실함으로 예배를 드리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의 몸 된 공동체의 제사장들입니다.
그러므로 교회의 예배는 공적인 예배이면서 아울러 성도 한 사람 한 사람이 하나님 앞에 진정으로 드리는 참 제사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레위기 10:1-2
아론의 아들 나답과 아비후가 각기 향로를 가져다가 여호와께서 명령하시지 아니하신 다른 불을 담아 여호와 앞에 분향하였더니
불이 여호와 앞에서 나와 그들을 삼키매 그들이 여호와 앞에서 죽은지라.
하나님의 불이 번제단의 제물을 사른 바로 그날, 즉 아론과 모세가 백성들을 축복한 바로 그날 나답과 아비후가 각기 자기 향로에 다른 불로 향을 태우다가 죽임을 당하였습니다.
마치 이 장면은 오순절 성령 강림 후에 교회가 부흥하기 시작할 때, 하나님 앞에 밭을 팔아서 드리고도 죽었던 두 사람 아나니아와 삽비라 사건을 떠 올리게 합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영광과 은혜가 부어진 후에 사람들은 그 영광을 자신의 의로 바꾸려는 죄를 범하게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것에 대해서 철저하게 응징하십니다.
하나님의 영광은 결코 인간의 의로 대신할 수 없는 것임을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후에 가장 많이 범죄하는 것이 바로 교만의 죄입니다.
자신 마치 특별하거나, 어떤 의로운 사람인 것처럼 생각하거나 행동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러한 것을 결코 참지 않으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가 부어진 후에 가장 경계해야 하는 것이 교만입니다.
사탄이 태초에 아담에게 역사했던 그 교만의 더러운 물을 거듭난 주의 자녀들에게도 부으려 하는 것입니다.
나답은 '관대하다'라는 뜻이며,
아비후는 '아버지는 그이시다'라는 뜻으로 오늘날 자유주의와 권위주의(율법주의)자들을 대변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오늘날에도 교회 안에 교회를 무너뜨리는 나답과 아비후들이 있습니다.
저들은 하나님의 거룩함을 시대에 편승하여 적당주의로 격하시키거나, 그리스도인의 특권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는 자들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불은 영광의 불이시면서 동시에 소멸하시는 분이십니다.
이것은 서로 다른 속성이 아니라 거룩이라는 하나의 속성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즉 하나님의 영광은 거룩함에서 비롯된 것이기에 그 거룩함을 더럽히는 죄에 대해서는 소멸하시는 불로 역사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마주한 자들에게 나타나는 반응은 경외함도 있지만 동시에 그 영광을 잊어버리는 자들이 있습니다.
홍해의 기적과 광야에서 반석의 물을 마시며, 만나와 메추라기로 배부르고 구름기둥과 불기둥으로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영광을 마주한 자들이 여호수아와 갈렙을 제외하고 모두 광야에서 죽었습니다.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은 십자가를 통해서 하나님의 기적과 은혜를 체험한 자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을 노래하면서도 죄를 짓기에 빠른 발(감사하지 못하고 늘 불평하는 입술, '다오다오'하는 만족하지 못하는 탐욕,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보다 자신을 자랑하기 바쁜 자 등)이 아닌지 항상 스스로 살펴야 할 것입니다.
__________________ 레위기 9장 / 축복(23절)
Moses and Aaron then went into the Tent of Meeting. When they came out, they blessed the people; and the glory of the LORD appeared to all the people.
23. 모세와 아론이 회막에 들어갔다가 나와서 백성에게 축복하매 여호와의 영광이 온 백성에게 나타나며.
* 축복(祝福) 1288. 바라크(bârak) בָּרַךְ
1. 무릎을 꿇다, 2. 하나님께 기원하다, 3. 피엘형 בֵּרֵךְ
관련 성경 / 문안하다(삼상 13:10), 무릎을 꿇다(대하 6:13, 시 95:6), 찬송하다(창 9:26, 왕상 1:48, 시 113:2), 복을 받다(창 24:31, 삼하2:5, 시 72:17), 축복하다(창 27:33, 민 23:11, 왕상 8: 66), 칭찬하다(삼상 25:33), 복이 있다(삼상 25:33, 룻 2:19, 20), 찬양하다(삼하18:28, 왕상 5:7, 시 106:48), 송축하다(왕상 8:15, 스 7: 27), 복되다(출 20:11, 잠 5:18), 복을 주다(사 19:25, 출 20:24, 신 15:6), 복을 얻다(창 12:3, 시 128:4), 복을 내리다(출 23:25, 신 28:8), 은혜를 베풀다(신 7:13), 저주하다(왕상 21:10, 13), 욕되게 하다(욥 1:5), 복을 빌다(욥 31:20), 자랑하다(시 10:3), 욕하다(욥 2:9), 풍부히 주다(신 14:24), 축사하다(삼상 9:13), 인사하다(왕하 4:29), 축하하다(시 49:18), 꿇리다(창 24:11), [명] 찬송(신 33:20, 시 135:21, 욥 1:21), 복된자(사 65:23), 축복(민 23:20), 복(대상 4:10), 안부(왕하 10:15)
구약 성경 / 256회 사용
כָּבוֹד 스트롱번호3519
발음 / 카보드(kâbôwd)
어원 / 3513에서 유래
관련 성경 / 재물(창 31:1), 영화(창 45:13, 삼상 6:5, 시 8:5), 영광(창 49:6, 출 33:18, 대하 1:11, 에 5:11), 존귀(잠 15:33), 귀(貴)(대상29:12, 잠 3:16), 존영(잠 11:16), 영예(잠 25:2, 29:23), 위력(사 8:7),심령(시 108:1).
구약 성경 / 199회 사용
* 3513. כָּבַד
발음 / 카바드(kâbad)
관련 성경 / 쫓겨나다(욥 30:8), 상하다(시 109:16), 낙심하다(단 11:30), 근심하다(겔 13:22).
구약 성경 / 113회 사용
영광(榮光) = 불 화(火) + 덮을 멱(冖 . 冪) + 열 십(十) + 사람 인(人)
3. 누가복음 2:9
발음 / 독사(dŏxa)
어원 / 1380의 어간에서 유래
관련 성경 / 영광(마 4:8, 막 8:38, 눅 2:9), 광채(행 22:11), 영화(榮華)(요 17:5).
신약 성경 / 166회 사용
* 1380. δοκέω
발음 / 도케오(dŏkĕō)
관련 성경 / 생각하다(마 3:9, 눅 17:9, 요 11:13), 주관하다(막 10:42), 알다(눅 1:3, 요 20:15, 행 15:28), 가결하다(행 15:22), 유력하다(갈2:6), 보이다(고전 12:22), 여기다(고후 11:16). [명] 생각 (마 17:25, 21:28, 요 11:56), 의견(눅 10:36)
신약 성경 / 63회 사용
하나님의 영광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나요?
질문 / 신약 성경을 읽다보면 “영광”이라는 말이 참으로 어렵습니다.
- “목자들은 자기들에게 이르던 바와 같이 듣고 본 그 모든 것으로 인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찬송하며 돌아가니라” (눅 2:20)
- “영광중에 나타나서 장차 예수께서 예루살렘에서 별세하실 것을 말할새” (눅 9:31)
- “내게 주신 영광을 내가 그들에게 주었사오니 이는 우리가 하나가 된 것 같이 그들도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이니이다.”(요17:22)
상기 구절의 영광이 각기 다른 의미인 것 같습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영광을 어떻게 이해하고 또 어떻게 구분해야하는지 궁금합니다.
영광(榮光)은 하나님만의 광채
먼저 아셔야 할 것은 “영광”이라는 용어는 오직 하나님과 그분의 역사에만 적용됩니다.
그 의미는 쉽게 말해 하나님께 도저히 가까이 범접할 수 없는 거룩함이나 눈을 뜨고 볼 수 없을 정도의 찬란한 광채가 난다는 것입니다. 성경에는 간혹 인간이나 물건에도 영광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지만, 앞뒤 문맥만 잘 살피면 금방 하나님의 영광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그분의 영광이 가장 잘 드러나는 예를 구약과 신약에 각각 하나씩 들어보겠습니다.
모세가 시내 산에서 하나님께 율법을 받았을 때에 그분의 영광의 광채가 그 얼굴에 반사되어서 백성들이 보지 못할 정도였습니다. “아론과 온 이스라엘 자손이 모세를 볼 때에 모세의 얼굴 꺼풀에 광채 남을 보고 그에게 가까이 하기를 두려워하더니.”(출 34:30)
또 예수님이 베드로를 비롯해 제자 셋을 데리고 변화산에 올랐을 때입니다. “엿새 후에 예수께서 베드로와 야고보와 그 형제 요한을 데리시고 따로 높은 산에 올라가셨더니 저희 앞에서 변형되사 그 얼굴이 해 같이 빛나며 옷이 빛과 같이 희어졌더라.”(마 17:1,2)
하나님의 영광은 빛으로만 드러나는 것은 아닙니다. “여호와께서 그 거하시는 온 시온 산과 모든 집회 위에 낮이면 구름과 연기, 밤이면 화염의 빛을 만드시고 그 모든 영광 위에 천막을 덮으실 것이며.”(사 4:5)
구름과 연기와 화염의 빛을 “그 모든 영광”이라고 합니다.
구름이나 연기로도 그 영광을 드러내었다는 뜻입니다.
결국 영광이란 하나님의 임재를 실제로 느꼈을 때의 인간 인식의 총칭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문제는 그분의 실체가 임재하면 그 앞에 설 자는 아무도 없습니다.
그분은 더럽고 추한 것과는 절대 공존할 수 없는 소멸하는 불이십니다.
‘불’이라는 표현도 사실은 인간이 이해할 수 있도록 인간의 언어로 표현한 것일 뿐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은 인간이 죽지 않고도 당신을 인식할 수 있는 형태나 상황으로 당신을 드러내십니다.
“모세가 가로되 원컨대 주의 영광을 내게 보이소서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내가 나의 모든 선한 형상을 네 앞으로 지나게 하고 여호와의 이름을 네 앞에 반포하리라 나는 은혜 줄 자에게 은혜를 주고 긍휼히 여길 자에게 긍휼을 베푸느니라 또 가라사대 네가 내 얼굴을 보지 못하리니 나를 보고 살 자가 없음이니라.”(출 33:18,19)
모세가 하나님의 영광을 보고자 원했지만 직접 그분을 보고 살 자가 없기에 바위틈에 숨게 하고 당신의 모든 선한 형상으로 모세 앞에 지나게 했습니다. 모세가 본 것은 얼굴이 아니라 그분의 등이었습니다.(23절)
말하자면 인간이 본 하나님의 영광은 그분의 모든 선한 형상입니다. 그분의 얼굴이 아니라 등입니다. 시내 산에서 율법을 받을 때에 모세의 얼굴에 반사된 광채도 단순히 그분을 인식토록 만든 수단으로써 빛이 동원된 것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나 어떤 형태로 나타나시든 하나님이 당신을 드러내고 싶으면 인간이 그분의 임재를 분명하게 인식할 수 있게끔 하십니다. 그래서 A. Richardson 이라는 신학자는 “영광이란 하나님의 지상(地上) 임재(臨在)를, 주로 빛으로 나타나는, 인간이 인식한 것을 효과적으로 표현하는 용어다.”라고 정의했습니다. Bengel은 더 명료하게 “영광은 하나님의 신성이 드러나는 것이다”(The Glory is the Divinty manifests.)라고 정의했습니다.
영광은 바로 하나님 자신
그러나 영광을 단지 하나님의 임재를 인식할 수 있는 빛 같은 물리적 현상에만 제한시켜 이해해선 많이 부족합니다. 영광은 그분의 속성 전체를 망라한다고 봐야 합니다. 쉽게 비유하면 이러합니다. 아주 의로운 사람이나 특정 분야의 최고 전문가를 만나면 저절로 고개가 숙여집니다. 우리말로 ‘아우라’라고 표현하듯이 왠지 모르게 뒤에서 빛이 나는 것 같고 큰 권위가 느껴집니다. 실제로 빛이 나거나 물리적 힘이 작용한 것은 아닙니다. 그 사람이 쌓아온 그 모든 성품이나 실력, 나아가 그 인격체 자체가 아우라인 것입니다.
사람에게서도 이러할진대 정말로 하나님을 대면하고 그분과 교제, 동행한 체험이 있다면 그분에게서 느끼는 아우라는 인간의 언어로는 도무지 설명하지 못합니다. 영광이라는 한 단어로 밖에는 말입니다. 영광은 그분의 임재는 물론 동행하심을 직접 겪고 난 이후에 그분 전체를 한 마디로 표현하는 것입니다.
예레미야 선지자는 그래서 영광은 하나님에게만 속하지만 곧 이스라엘의 영광이라고 말했습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 역사 속에 간섭하셔서 그들로 당신을 알게 했던 그 모든 신앙체험을 한 마디로 표현하면 영광이라는 뜻입니다. “어느 나라가 그 신을 신 아닌 것과 바꾼 일이 있느냐. 그러나 나의 백성은 그 영광을 무익한 것과 바꾸었도다.”(렘2:11) 이스라엘이 당신께서 간섭하신 내용을 제대로 안다면 도무지 우상을 숭배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여호와 우리 주여 주의 이름이 온 땅에 어찌 그리 아름다운지요. 주의 영광을 하늘 위에 두셨나이다.”(시8:1) 하늘 위에 영광을 두셨으니 하늘의 별빛으로도 이해할 수 있지만 어디까지나 쉽게 설명하기 위한 비유입니다. 동일 내용을 평행구절로 반복하는 것은 히브리어의 대표적 수사법입니다. “주의 이름‘과 ”주의 영광“은 동의어입니다. 주의 이름 즉, 그분의 모든 속성을 온 땅과 온 하늘, 우주 만물에 드러내었다는 것입니다.
주님이 가르치신 기도도 마찬가지입니다.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마6:13) 여기서 영광은 그분의 그분다우심, 그분의 모든 속성이 영원하다는 것입니다. 바울도 그래서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지지 않는다.(immortal)”(롬1:23)고 형용했습니다.
요컨대 영광은 하나님 당신이라고 말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인간에게서 고귀한 성품, 권세, 힘 등이 다 없어져도 여전히 인간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에게서 당신의 품성, 권위, 능력 등이 다 합쳐져서 겉으로 드러나는 아우라 즉, 영광이 사라지면 하나님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Calvin은 “우리가 그분을 알 때 그분의 영광을 본다.”라고 말했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는 곳은?
비록 영광이 하나님 당신이라고 말할 수 있어도 구체적으로는 인간이 인식할 수 있어야만 합니다. 이미 말씀드린 대로 반드시 빛, 구름, 연기 같이 물리적 양상을 갖출 필요는 없습니다. 그렇다고 단순히 종교적 관념으로 머무는 것도 아닙니다. 당신의 백성과 당신 사이에서 반드시 지정의적 반응이 수반되는 영적 교감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신자가 그분의 영광을 맛보면 반드시 1) 그분의 그분다우심에 대한 경외감과, 2) 피조물인 인간으로서 그분 앞에 서게 되는 겸비함을, 동시에 느끼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런 영광을 보고 지각할 수 있는 경로는 크게 셋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우선 하나님의 창조와 그 피조물에 드러납니다.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게 되나니 그러므로 저희가 핑계치 못할찌니라.”(롬1:20) 아름답고 위대한 자연을 바라볼 때에 분명히 창조주 하나님의 손길을 감지할 수 있습니다. 또 그 모든 것들이 완벽하게 운행되는 모습을 볼 때에 그분의 숨결을 들을 수 있습니다. 창조와 창조물을 통해서 하나님의 영광을 보아 아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만물을 창조하시고 마지막으로 인간을 만드신 후에 심히 좋았다고 말했습니다. 당신의 뜻대로 완벽하게 만들어졌다는 것입니다. 특별히 인간은 당신의 형상대로 만드셨는데, 당신의 영광스런 속성을 인간에게도 부여했다는 뜻입니다. “남자는 하나님의 형상과 영광이니 그 머리에 마땅히 쓰지 않거니와 여자는 남자의 영광이니라.”(고전1:17) 하나님에게만 적용될 영광을 인간도 일부 갖고 있기에 인간을 숭배해도 된다는 뜻은 결코 아닙니다. 하나님과 영으로 교통할 수 있고 이 땅을 그분 대신에 다스려야 할 책임을 맡았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발견할 수 있는 둘째 대상은 예수님과 그 십자가입니다. “참 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취는 빛이 있었나니 ...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아버지 품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셨느니라.”(요1:9,14,17) 태초부터 계셨던 말씀이 육신이 되어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이 하나님의 영광을 사람들이 볼 수 있도록 다 드러내었다고 합니다.
성경은 또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시어 죄인을 구속하는 사역을 완성하신 것을 하나님의 영광이라고 표현합니다. 외적으로는 비천한 모습으로 죽으셨기에 찬란한 광채가 나는 상태와는 전혀 반대이지만 앞에서 말한 대로 하나님의 성품과 능력이 온전히 드러났기 때문입니다. 당신의 독생자를 죽이시더라도 죄인을 너무나 사랑하시어 구원하시겠다는 뜻은 도무지 인간의 생각과 다른 오직 그분만의 성품이기에 영광이라고 표현하는 것입니다. 또 그 구원의 은혜를 맛본 자는 그분에 대한 경외감과 자신에 대한 겸비함을 절감하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가 이런 고난을 받고 자기의 영광에 들어가야 할 것이 아니냐 하시고는”(눅24:26)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가 스승의 참혹했던 십자가 죽음을 이해하지 못하자 부활하신 예수님이 당신의 죽음은 구약성경에 예언된 하나님의 구원이라고 풀어서 설명해주었습니다. 또 그래서 예수님은 죽기 전날 밤에 제자들을 위한 기도를 “아버지여 때가 이르렀사오니 아들을 영화롭게 하사 아들로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옵소서.”(요17:1)라고 시작했습니다.
셋째로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는 곳은 바로 예수님의 재림 때입니다. “그 때에 사람들이 인자가 구름을 타고 능력과 큰 영광으로 오는 것을 보리라.”(눅21:27) “너희 믿음의 시련이 불로 연단하여도 없어질 금보다 더 귀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실 때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하려 함이라.” 믿음의 시련을 견뎌낸 성도들에게는 독생자의 영광으로 덧입히실 것이라고 합니다. “그가 만물을 자기에게 복종케 하실 수 있는 자의 역사로 우리의 낮은 몸을 자기 영광의 몸의 형체와 같이 변케 하시리라.”(빌3:21) 천국에서 부활한 성도는 영광스런 육체를 입게 될 것입니다. “우리 생명이신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그 때에 너희도 그와 함께 영광중에 나타나리라.”(골3:4) 부활한 성도도 주님과 함께 강림한다고 합니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는 것은?
창조와 재림에 드러나는 하나님의 영광은 모든 사람이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과 그 십자가는 성령의 간섭으로 신자의 영이 거듭나야 비로소 그 영광을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은 후에도 신자 속에 내주하신 성령을 통해 하나님의 영과 교통함으로써 그분의 영광을 인식할 수 있습니다. 또 그런 자만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습니다.
말하자면 성경 말씀을 읽고, 기도를 하며, 찬양과 예배를 드리는 중에, 아니 평소에도 하나님에 대해 묵상하는 중에 그분의 영광을 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성령의 충만함 가운데 하나님이 바로 내 앞에 서있다는 인식을 느낄 때가 있습니다. 자신의 삶과 인생에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거룩하신 성품, 위대한 능력, 신비한 섭리, 완전하신 인도, 또 장래에 보여주실 비전 등을 깊이 깨달을 수 있습니다.
그러면 저절로 그 자리에 무릎 꿇고 엎드리게 됩니다. 외적 예배의 형태를 갖춘다는 것이 아니라 신자의 심령이 완전히 낮아진다는 것입니다. 또 오직 하나님의 은혜와 권능으로 자신의 심령과 삶에 가득 채워지기를 소원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분 뜻대로 순종하여 그분의 일에 쓰임 받고 싶어지며 실제로 그렇게 실천하게 됩니다. 하나님이 자기를 통해 이루고자 하는 사역에 함께 동참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는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본 신자가 그에 합당한 반응을 보이는 것입니다. 가장 먼저 하나님의 하나님다우심을 온전하고도 절대적으로 인식하는 것입니다. 자연히 그분에 대한 경외와 소망과 믿음과 사랑이 자신의 생각과 말과 행동을 주장하게 됩니다.
반드시 거창한 종교적 의식이나 업적으로 영광을 돌리는 것이 아닙니다. 진정으로 영광을 돌리는 것은 그분의 뜻이 세상에 구현되도록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는 것이 하나님의 영광이라고 했듯이 사탄의 미혹된 영혼들에게 주님의 사랑을 전하여 죄에서 구원 받게 하는 것이 하나님께 가장 큰 영광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려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뿐 아니라 그분의 영광을 보려고만 해도, 하나님 외의 어떤 다른 존재나 대상을 경배해선 안 됩니다. 특별히 사람들과 자신을 높이는 그 어떤 것이라도 완전히 제거되기 전까지는 하나님께 온전히 영광을 돌리는 것이 아닙니다. 이런 맥락에서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에게 언제나 질투의 하나님으로 다가옵니다. “너는 다른 신에게 절하지 말라 여호와는 질투라 이름하는 질투의 하나님이니라.”(출34:14)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에게 당신만의 십자가 사랑으로 사랑하셨기에 절대적 배타적 사랑을 요구할 수 있습니다. “오직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자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게 하려 하심이라.”(벧전2:9) 신자는 무엇을 먹든 마시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해야 합니다. 웨스트민스터 소요리 문답 1항 대로 “사람의 첫째 되는 목적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과 그를 즐거워하는 것”이어야 합니다.
하나님 영광의 구체적 예들
지금껏 설명 드린 하나님의 영광에 대한 근본 개념을 갖고서 질의하신 세 구절의 구체적 의미를 살펴봅시다.
“목자들은 자기들에게 이르던 바와 같이 듣고 본 그 모든 것으로 인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찬송하며 돌아가니라”(눅2:20) 본문에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는 것은 그분의 그분다우심을 온전히 실감했다는 것입니다. 놀라운 일이 일어났는데 인간이 아니고 하나님이 하신 일이 분명하다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객관적 사실만 수긍한 것이 아니라 실제로 하나님의 놀라운 권세를 보고 들으면서 그 분을 향한 경외심으로 충만해졌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목자들은 주의 사자가 곁에 서고 주의 영광이 저희를 두루 비취매 크게 무서워했습니다. 또 천사가 기쁨의 좋은 소식을 전하며 두려워 말라고 했습니다. 나아가 홀연히 허다한 천군이 그 천사와 함께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평화라고 찬송했습니다. 그래서 그 천사들의 말대로 베들레헴에 가서 보니 마리아가 아기 예수를 낳아 강보에 안고 있음을 목도했습니다.(2:8-19) 이 모두가 환상이나 공상이 아니라 실제 체험이었을 뿐 아니라 그러는 와중에 너무나 놀라운 하나님의 권세에 온전히 붙들려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가 그 현장에 있었다고 상상해 보십시오. 밤중에 천사가 나타나서 찬란한 빛 가운데서 메시아 탄생에 대한 예언을 합니다. 또 그 예언을 보증하기 위해서 하늘에서 천군이 내려와 웅장한 찬양을 합니다. 헨델의 메시아 합창곡보다 더 장엄하고 경건하게 들렸을 것입니다. 또 그 예언대로 실제로 일어났으며 아기 예수를 보는 순간 틀림없이 천사의 예언대로 말로 형용할 수 없는 평강을 느꼈을 것입니다. 그럼 하나님에게 감사와 찬양과 경배를 올려 드릴, 즉 그분께 모든 영광을 돌려드릴 수밖에 없지 않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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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광중에 나타나서 장차 예수께서 예루살렘에서 별세하실 것을 말할새” (눅 9:31) 본문의 영광도 같은 의미입니다. 변화산에서 예수님이 기도할 때에 실제로 “용모가 변화되고 그 옷이 휘어져 광채가 나더니 무든 두 사람이 예수와 함께 말하니 이는 모세와 엘리야.”(29,30절)였습니다. 성경에 구체적 묘사가 없지만 베드로를 비롯한 세 제자가 본 것은 천국의 영광이었습니다. 지상세계와 전혀 다른 광채와 위엄이 아름답게 눈앞에 펼쳐졌던 것입니다.
변화산 기사의 첫 머리는 “이 말씀을 하신 후에 팔일 쯤 되어”(28절)입니다. 예수님이 “이 말씀”대로 실현되는 것을 제자들에게 보여주려고 산에 올라갔다는 뜻입니다. 바로 앞에 있는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여기 섰는 사람 중에 죽기 전에 하나님의 나라를 볼 자들도 있느니라.”(27절)라는 말씀입니다. 제자 중 일부가 죽기 전에 천국의 영광을 볼 수 있다고 말했으니 세 제자가 본 것은 실제 천국의 모습이었던 것입니다. 얼마나 아름답고 장엄했으면 베드로가 산 밑으로 내려가기 싫다고 말했을까요?
“내게 주신 영광을 내가 그들에게 주었사오니 이는 우리가 하나가 된 것 같이 그들도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이니이다.”(요17:22) 요한복음 17장은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시기 직전 제자들을 위해 중보 기도한 내용입니다. 그 기도의 시작이 십자가에 죽음으로써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난다고 했습니다. 죄인을 구원하는 일이 하나님의 영광이었던 것입니다. 바로 그 영광을 제자들에게 주신 것입니다. 제자들도 동일한 사역을 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제자들이 진리의 영인 성령을 통해 복음의 비밀 깨닫게 되고, 또 성삼위 하나님이 하나가 된 것 같이 하나가 되며, 비록 세상에서 미움을 받으나 진리로 이겨내며, 하나님이 당신을 세상에 보낸 것 같이 저들도 세상으로 보내달라고 간절히 기도하신 것입니다. 또 세상 사람들이 복음의 진리를 전하는 제자들을 볼 때에 아버지의 이름과 당신의 십자가 사랑을 알게 해달라고 하면서 기도를 마쳤습니다.
“곧 내가 저희 안에,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셔 저희로 온전함을 이루어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은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과 또 나를 사랑하심 같이 저희도 사랑하신 것을 세상으로 알게 하려 함이로소이다 아버지여 내게 주신 자도 나 있는 곳에 나와 함께 있어 아버지께서 창세 전부터 나를 사랑하시므로 내게 주신 나의 영광을 저희로 보게 하시기를 원하옵나이다 의로우신 아버지여 세상이 아버지를 알지 못하여도 나는 아버지를 알았삽고 저희도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줄 알았삽나이다 내가 아버지의 이름을 저희에게 알게 하였고 또 알게 하리니 이는 나를 사랑하신 사랑이 저희 안에 있고 나도 저희 안에 있게 하려 함이니이다.”(요17:23-26)
요컨대, 하나님의 영광은 당신께서 인간 앞에 당신다우심을 직접 나타내실 때에 인간이 보고 듣고 느끼게 되는 장엄함과 거룩함을 말합니다. 그분의 현현(顯現)은 천사나 빛과 구름 같은 가시적 매개체를 통해, 혹은 말씀과 기도 같은 신자와의 불가시적인 영적교통을 통해 드러납니다.
어떤 경로가 되었던 그분을 실제로 만나 그분의 마음을 읽게 된 신자는 그분을 향한 사랑과 소망으로 충만해집니다. 또 마땅한 감사와 찬양과 경배를 올려드리며 그분 뜻대로 순종하게 됩니다. 이것 외의 어떤 반응도 그분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 아닙니다. 아니 그분의 영광을 실제로 본 것도 아닙니다.
레위기 1장부터 7장은 다섯 가지 제사에 관한 말씀입니다.
레위기 8장부터 10장은 제사를 집례하는 제사장에 관한 말씀으로 8장에서는 제사장의 위임식, 9장에서는 제사장이 집례하는 첫번째 제사에 대하여, 10장에서는 제사장이 여호와께서 명하지 않은 다른 불을 사용하여 제사를 드렸을 때 아론의 두 아들 나답과 아비후가 죽는 사건을 소개합니다.
레위기 9장의 내용을 소개합니다.
1-6. 아론과 그 아들들의 임직식의 헌물에 대한 모세의 명령
7-14. 아론이 자기를 위해 속죄제와 번제를 드리다.
15-21. 백성을 위해 속죄제, 번제, 소제, 화목제(수은제, 감사제)를 드리다.
22-24. 제사장이 백성을 축복하매 하늘에서 불이 임하여 번제를 사르다.
칠 일 간의 위임식을 끝낸 아론과 그 아들들이 제사장으로 취임하는 모습을 기록하고 있다.
모세가 제사를 지낸 위임식과
달리 취임식부터는 아론이 직접 제사를 드리기 시작한다.
모세는 아론에게 제사장의 직무를 시작하도록 명하였다(1-7절).
이에
아론은 자신을 위하여 속죄제와 번제를 드리고(8-14절)
백성들을 위하여 속죄제와 화목제를 드렸다(15-21절).
이때
하나님께서 불로 단 위의 제물과 기름을 사르셔서 취임을 인정하는 증표를 주셨다(22-24절).
레위기 8장에 소개된 제사장 임직에 대한 계속입니다.
7일 동안의 위임식을 마친 제사장은 자신과 이스라엘 백성들을 위하여
속죄제를 드렸습니다.
이는 제사장이 위임된 후 하나님께 드린 첫 제사로서 제사장들을 위한 제사, 온 회중을 위한 제사, 모세와
아론의 축복과 불로 나타난 여호와의 영광 등으로 이루어졌습니다.
그중에서도 아론이 드린 첫 제사는 아론이 신적 권위를 갖고서
이스라엘과 하나님 사이의 중재자로 출발하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본장에서는 취임식 행사로 아론에게 다시 속죄제를 드리도록 요구하고 있다.
이는 몇 가지 측면에서 구속사적 의미를 보여 준다.
첫째는 끊임없이 요구되는 속죄 제사를 통해 인간의 철저한 부패와 죄성을 보여 주고 있다.
즉 인간은 나면서부터 죽을 때까지 언제나 지중에 존재하므로 오직 하나님 외에는 소망이 없음을 말해 주는 것이다.
둘째는 끊임없이 드려야 하는 속죄제는 구원에 있어 인간의 노력이 얼마나 불완전한지를 보여 줌으로써 완전한 대제사장인 그리스도에 대한 소망을 나타내고 있다.
예수님의 대속은 자신을 단번에 드림으로 모든 구원을 이루시고 짐승의 희생 제사를 온전히 이루신 것이다.
한편 아론이 백성들을 위하여 속죄제를 드린 것은 영원한 대제사장이신 예수께서 구원 사역의 유일한 중보자이심을 예표하고 있다.
칠 일 간의 위임식 행사를 통해 끊임없이 자진을 정결케 한 아론은 취임식을 맞아 다시금 속죄제를 드려야 했다.
인간은 연약하고
죄의 본성을 가지고 있으므로 하나님 앞에서 언제나 죄인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하나님 앞에서 스스로 자랑할 수 있는 자는 아무도
없음을 교훈해 준다. 따라서 성도들은 매일의 삶 속에서 자신의 죄를 돌아보아 회개하여야 하며, 하나님 앞에 겸손히 엎드려 오직
그의 구원과 은혜만을 바라보는 자가 되어야 할 것이다.
1) 아론에게 헌제를 지시하는 모세(1-2)
모세는 제사장들의 위임식 후 팔 일째 되는 날에 아론과 그 아들들과 이스라엘 장로들을 불러모으고 아론으로 하여금
대제사장으로서 첫 제사를 드리라고 하였습니다. 이는 대제사장인 아론도 하나님 앞에서 항상 자신의 죄를 사함받아야 하는 죄인이기
때문입니다(1-2).
2) 제사의 순서(3-6)
아론이 자기와 백성을 위하여 드리는 제사의 순서로 첫 번째로 드리는 속죄제는 하나님과 백성 사이의 있는 죄를 용서받는 것을
의미합니다. 두번째로 드리는 번제는 속죄받은 자로서의 온전한 헌신을 나타냅니다. 마지막으로 드리는 화목제는 하나님과 백성의
진정한 교제와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축복에 감사하는 것을 의미합니다(3-4)
.
모세가 아론에게 명령한 것은 모두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하였습니다(5-6).
3) 아론 자신을 위한 속죄제와 번제(7-14)
위임식이 끝난 아론은 대제사장으로서의 백성의 죄를 위한 속죄제를 드리기 전에 자신을 위한 속죄제를 먼저
드렸습니다(7-11). 그 이유는 죄의 문제가 해결된 후에야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감사와 하나님에 대한 전적인 헌신의 고백이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자신을 위해 속죄제를 드린 아론과 그 아들들은 번제를 드렸습니다. 번제의 향기를 하나님께서 향기로운 제사라고 하셨듯이, 번제는 속죄함을 받은 하나님 백성의 헌신과 성결과 충성스러운 삶을 상징합니다(12-14).
구약 시대의 제사장들도 회개해야 할 죄인이기 때문에 완전하고도 영원한 그리스도의 중보가 필요한 것입니다.
4) 백성을 위한 제사 (15-21)
아론은 자신을 위해 속죄제와 번제를 드리고 난 후 백성을 위해 속죄제와 번제와 소제, 그리고 화목제를 드렸습니다(15-21).
5) 손을 들어 축복함(22)
아론은 하나님과 백성 간의 중보자로서 그 모든 제사가 하나님께 기쁘게 열납되었다는 의미에서 백성을 향해 손을 들어 축복하였습니다. 축복을 선포하는 자는 제사장이지만 축복을 주시는 분은 오직 하나님이십니다(22).
6) 하나님의 영광(23-24)
아론은 대제사장으로서 첫 직무를 끝마치고 모세와 함께 회막에 들어갔습니다. 그리고 얼마 후에 모세와 아론은 회막에서 나와
백성에게 축복하였습니다. 그때 여호와의 영광이 온 백성에게 나타났습니다. 이것은 제사장으로 위임된 아론의 첫 직무를 기쁘게
받으셨다는 것을 의미했고, 그의 축복 행위에 대한 응답이었습니다. 그리고 불이 여호와 앞에서 나와 단 위의 번제물과 기름을 모두
태웠습니다(23-24).
주께서 주신 오늘! 하나님의 말씀대로 지시한 모세 그리고 순종한 아론의 순종을 통해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났던 것 처럼 나의 생각을 버리고 하나님의 말씀에 온전히 순종하는 삶을 살아가길 원합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부르십니다. 그분이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 우리를 회복시키시고 새로운 직분을 임명하셨습니다. 베드로전서 2장 9절은 ‘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 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려 하심이라 ’ 고 선언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스스로가 그렇게 잘나지 못하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모세보다 나은 분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가 아닌 척 위선을 뒤집어쓰지도 말고, 그대로 포기해 버리지도 말라고 하십니다. 먼저 우리가 하나님과 만나는 것을 최우선적으로 하기 원하십니다.
모세가 아론에게 속죄제와 번제를 드려야 한다고 한 것은 예수님이 우리에게 바라는 예배이기도 합니다. 아론은 자신이 하나님과 이스라엘 간의 다리 역할을 하는 제사장으로 위임받았음에도, 여전히 모세의 말을 따라 자신을 위한 예배를 준비합니다. 우리도 택하신 족속, 왕 같은 제사장, 거룩한 나라, 소유된 백성이라는 거창한 명칭에 취하지 말고 예수님 말씀을 따라 바른 예배를 드려야 할 책임이 있습니다.
아론은 먼저 속죄제를 드립니다. 8장의 임직식에서 이미 속죄제와 번제를 드렸음에도 재차 드려야만 했습니다. 그토록 중요한 고백이었습니다. 8절부터 11절입니다. 제사장의 속죄제는 일반적인 속죄제가 간, 기름, 콩팥만 번제단 위에 얹어서 태웠던 것과 달랐습니다. 기름, 콩팥, 간을 번제단 위에서 태울 뿐 아니라 나머지 고기와 가죽도 이스라엘 진영 밖 재를 버리는 곳에서 다 태웠습니다. 나아가 제물의 피를 손가락에 찍어서 제단 네 뿔에 바르고 제단 밑에 쏟아 버렸습니다. 이것은 이스라엘의 제사장들이 ‘ 세상을 바꾸고 신과 마주하게 돕겠다 ’ 는 명분을 들어 사람들에게 지시를 내리는 자가 아니라, 스스로를 가장 먼저 죄 사함이 필요한 존재로 여겨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속죄제의 제물이 흠 없는 수송아지였다는 것은 아론이 하나님과의 독대 이후 처음 드린 예배에서 출애굽기 32장에 있던 사건, 하나님 계명을 받으러 간 모세를 기다리지 못하고 백성에게서 모은 황금으로 송아지를 만들었던 것, 을 떠올려야 했다는 것입니다. 그는 자신이 하나님 은혜 없이는 이 자리에 설 수 없는 ‘ 만성적 우상 제작자 ’ 임을 잊지 말아야 했습니다. 제물의 피로 제단 네 뿔에 찍고 밑에 쏟아 대속물의 흔적이 예배에 선명히 드러나야 했습니다. 속죄제를 드리고 나서, 아론은 번제를 시작합니다. 12절부터 14절입니다. 숫양 머리나 각을 뜬 사지를 태운 후 그 위에 내장과 정강이를 씻어서 태웠습니다. 속죄제를 드림으로 죄를 용서받았을 뿐 아니라, 번제를 통해 자기 인생을 헌신하겠다고 다짐한 것입니다.
이렇게 은혜에 대한 감사 고백으로서의 속죄제와 헌신을 소망하고 결단하는 번제를 마친 아론은 백성을 위한 제사를 시작합니다. 15절부터 22절은 이 제사들을 통해 백성을 위한 염소를 가져다가 속죄제를 통해 죄 용서를 선언하고, 번제를 통해 하나님께 헌신하기로 고백하고 결단하며, 소제를 통해 이것이 매일의 순종과 헌신으로 증명되어야 함을, 화목제를 통해 그 결과로 받기 원하는 것은 오직 하나님과 참된 교제의 기쁨임을 전했다고 합니다.
기억해야 할 것은 이 예배는 온 백성의 철저한 준비와 긴장감 속에 이루어졌다는 것입니다. 모세는 백성에게 제물을 준비하게 합니다. 이 제사는 한 사람만의 노력으로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백성들은 숫염소를 가져와 속죄제를, 흠 없는 송아지와 어린양을 가져와 번제를, 수소와 숫양을 가져와 화목제를, 기름 섞은 소제물을 가져와 소제를 드렸습니다(3-4절). 아론과 자녀들이 임직식을 마치고 회막 문에서 하나님과 독대하던 때는, 백성들도 거룩한 두려움과 떨림으로 기다려야 했습니다. 23절에서도 모세와 아론이 회막에 들어갔다가 나올 때까지 이스라엘 백성들은 기다려야 했습니다. 그 기다림이 지나야 하나님 영광의 임재 구름을 영접합니다. 모든 과정에서 불순한 부분이 하나라도 있었다면 결코 예배를 완수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이를 기억하며 우리가 주일에 예배를 드리기 위해 어떤 준비를 하는지, 하루를 거룩한 두려움과 떨림으로 조심하는지, 그리하여 주일을 제외한 월요일부터 토요일까지의 여섯 날이 삶의 예배로 드려지고 있는지 점검해야 합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께서 명령하셨던 예배의 명령들을 하나씩 실천합니다.
예배는 약속으로 시작해 축복으로 맺습니다. 4절은 여호와의 영광이 ‘ 오늘 ’ 나타날 것이라 예언하고 6절은 여호와의 영광이 ‘ 너희에게 ’ 나타날 것이라고 약속합니다. 그리고 그것이 16-17절에서 이루어집니다. 이루어진 약속은 확실한 축복을 전합니다. 아론이 이스라엘 백성을 축복한 내용은 민수기 6장 24-26절에 있습니다. ‘ 24 여호와는 네게 복을 주시고 너를 지키시기를 원하며 25 여호와는 그의 얼굴을 네게 비추사 은혜 베푸시기를 원하며 26 여호와는 그 얼굴을 네게로 향하여 드사 평강 주시기를 원하노라 할지니라 하라 ’ 오늘도 예배를 준비하고, 예배자로 살아가는 모두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분명한 축복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복을 주시고 지켜주시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얼굴을 우리에게 비추사 은혜 베푸시기를 확실히 원하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그 얼굴을 우리에게 향하여 드사 평강 주시기를 원하십니다. 복과 안전, 은혜와 평강은 예배를 통해서만 경험할 수 있음을 감사해야 합니다.
24절에는 하나님의 불이 하늘에서 떨어져 제물을 태우는 것을 온 백성이 보고 소리 지르며 엎드렸습니다. 하나님의 임재는 막연하지 않았습니다. 예배를 드린 날, 영광이 불로 제단 위 번제물과 기름을 태웠습니다. 골고다 언덕에서 피를 쏟아 자신을 제물 삼으셨던 예수님을 닮기 위해 스스로를 제단 위에 두는 모든 이에게 주시는 약속입니다. 하나님의 거룩한 불이 반드시 임하시고, 제단 위에 올려둔 인생을 성령의 불길로 태우심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온 백성이 찬송 부르며 주님께 굴복할 것입니다.
히브리서 12장 28-29절입니다. ‘ 28 그러므로 우리가 흔들리지 않는 나라를 받았은즉 은혜를 받자 이로 말미암아 경건함과 두려움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섬길지니 29 우리 하나님은 소멸하는 불이심이라 ’
죄(罪) = 넉 사(四) + 아닐 비(非) / 하마르티아(hamartia) ἁμαρτία
불법(不法) 요한일서 3:4
죄를 짓는 자마다 불법을 행하나니 죄는 불법이라.
Everyone who sins breaks the law; in fact, sin is lawlessness.
불의(不義) 요한일서 5:17
모든 불의가 죄로되 사망에 이르지 아니하는 죄도 있도다.
All wrongdoing is sin, and there is sin that does not lead to death.
불선(不善) 야고보서 4:17
이러므로 사람이 선을 행할줄 알고도 행치 아니하면 죄니라.
Anyone, then, who knows the good he ought to do and doesn't do it, sins.
불신(不信) 요한복음 16:9, 마가복음 16:16
죄에 대하여라 함은 저희가 나를 믿지 아니함이요.
in regard to sin, because men do not believe in me;
믿고 세례를 받는 사람은 구원을 얻을 것이요 믿지 않는 사람은 정죄를 받으리라.
Whoever believes and is baptized will be saved, but whoever does not believe will be condemned.
불순종(不順從)
에베소서 2:2
그 때에 너희가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속을 좇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
in which you used to live when you followed the ways of
this world and of the ruler of the kingdom of the air, the spirit who is
now at work in those who are disobedient.
에베소서 5:6
누구든지 헛된 말로 너희를 속이지 못하게 하라 이를 인하여 하나님의 진노가 불순종의 아들들에게 임하나니.
Let no one deceive you with empty words, for because of such things God's wrath comes on those who are disobedient.
디도서 1:6
책망할 것이 없고 한 아내의 남편이며 방탕하다 하는 비방이나 불순종하는 일이 없는 믿는 자녀를 둔 자라야 할찌라.
An elder must be blameless, the husband of but one wife, a man whose
children believe and are not open to the charge of being wild and
disobedient.
ἁμαρτία, ίας, ἡ 266
2. 고린도후서 11:7 / 내가 너희를 높이려고 나를 낮추어 하나님의 복음을 값없이 너희에게 전함으로 죄를 지었느냐
어원 / 264에서 유래
관련 성경 / 죄(요 8:21, 롬 5:20), 불법(살후 2:3), 죄악(히 11:25).
신약 성경 / 173회 사용
* 264. ἁμαρτάνω
어원 / [기본형] 미래 ἁμαρτήσω, 제2부정과거 μάρτω, 가정법 ἤμαρτον, 제1부정과거 ἡμάρτησα, 가정법 ἁμαρτή- σω, 과거분사 ἁμαρτήσας, 1[부정불변사]과 3313의 어간에서 유래
관련 성경 / 죄를 범하다(마 18:15), 죄를 짓다(눅 15:18, 롬 6:15), 죄로 인하다(요 9:2), 범죄하다(롬 2:12), 죄가 있다(벧전 2:20).
신약 성경 / 43회 사용
성경에서 말하는 죄의 개념
1. 죄의 본질
죄에 대한 잘못된 생각과 견해들이 많이 있다.
예를 들어, 죄를 물질적 몸의 특징, 진화되지 못한 동물성, 존재의 부정 혹은 제한, 단순한 결핍, 실재(實在)하지 않는 착각, 정신의 불건전한, 병적 상태, 선에 대한 필요한 대립 원리, 사람의 이기심, 인간의 자아 적 의식의 투쟁 등으로 보는 것들이 그러하다.
성경적인 관점에서 보는 죄란 하나님의 법을 어기는 것이다.
요한일서 3:4은 "죄를 짓는 자마다 불법을 행하나니 죄는 불법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죄”라는 히브리어 “하타”는 “표적을 빗나가다, 실패하다”이라는 뜻이며,
이와 관련된 용어들은 아바르(벗어나다, 위반하다), 파솨(반역하다, 위반하다), 솨가(잘못을 범하다, 길을 벗어나다)등이 사용되었다.
신약에서도 하마르티아, 포네로스, 아디키아, 파라바시스등의 단어가 사용되었는데, 이 단어들은 “악, 불의, 부정, 위반”등의 의미를 갖는다.
즉 죄는 단순히 사회의 도덕적인 기준을 어기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함을 말하며, 그 기준에 부족한 것이나 그것을 어기는 것을 말한다.
시편 51:4
내가 주께만 범죄하여 주의 목전에 악을 행하였사오니 주께서 말씀하실 때에 의로우시다 하고 주께서 심판하실 때에 순전하시다 하리이다.
하나님의 법을 어긴 것이 죄이므로, 죄는 하나님 앞에서의 문제이다.
특히, 하나님의 법은 하나님의 인격과 속성과 권위를 반영하므로, 죄는 그 성격상 하나님의 인격과 속성을 모독하는 것이요 그의 권위를 침해하는 것이다.
여기에 죄의 사악성과 심각성이 있다.
창세기 39:9
그런즉 내가 어찌 이 큰 악을 행하여 하나님께 죄를 지으리이까?
하나님의 법을 어긴 것이 죄이므로, 죄는 항상 적극적 성격을 가진다.
소극적 죄, 태만의 죄도 결국 하나님의 법을 어긴 죄가 된다.
또한, 죄와 죄가 아닌 것, 둘 중에 하나라는 선(線)이 분명하다.
그 둘 사이에 중립지대는 없다.
▶ 원죄(原罪, original sin)
원죄(原罪)란, 아담이 지은 죄를 가리키는데, 우리는 이러한 의문이 생길 수가 있다.
창세기 시대에 아담이 저지른 그의 실수 때문에 왜 내가 하나님께 죄인이 되며, 아담이 지은 죄로 인하여 나까지도 죽어야만 하는가?
무엇보다도 나는 결코 선악과를 먹은 적이 없다.
그러므로 내가 죄인이라는 것은 억울한 일이라고 항변할 수 있다.
그러나 성경은 모든 사람들이 죄를 지은 것으로 간주하고 있다고 말하고 있다.
로마서 5:12-14
12. 그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들어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
13. 죄가 율법 있기 전에도 세상에 있었으나 율법이 없었을 때에는 죄를 죄로 여기지 아니하였느니라.
14 그러나 아담으로부터 모세까지 아담의 범죄와 같은 죄를 짓지 아니한 자들까지도 사망이 왕 노릇 하였나니 아담은 오실 자의 모형이라.
하나님은 아담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창세기 2:16-17
16.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명하여 이르시되 동산 각종 나무의 열매는 네가 임의로 먹되
17.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 하시니라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는 말씀에는 “먹지 않으면 죽지 않는다.”는 반대적인 의미가 담겨져 있다.
아담은 하나님께 지음을 받은 첫 사람으로서, 온 인류를 대표하는 것이다.
“먹지 말라”는 하나님의 당부는 아담과 하나님만의 관계가 아니라, “인류 전체와 하나님과의 관계적인 언약”이었다.
아담은 모든 인류를 대표하여 하나님과 언약하였다고 보는 것이 바로 “언약적 대표설”이라고 부른다.
만일 그 실과를 먹으면 죽게 되며, 그 실과를 먹지 않으면 영원히 죽지 않게 되는 언약인 것이다.
이 사실은 로마서 5장이 증거 할 뿐만 아니라, 죄와 정죄와 죽음의 보편성이 증거 한다.
성경은 분명히 죄의 보편성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다.
로마서 3:23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에베소서 2:1
그는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
죄는 죄책(罪責)과 부패성(오염)으로 구성된다.
다시 말하여 우리에게 “원죄(原罪)”가 있다는 것은 우리가 “죄책과 오염”을 갖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죄란 물질명사가 아니라, 관계(關係)를 의미한다.
죄책이란, 하나님의 법을 어겼다는 “법적 책임”을 가리키는데, 좀 더 분석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도덕적으로 비난 받아야 마땅하다는 사실
둘째, 하나님의 공의에 따라 형벌을 받아야 한다는 사실
죄에서 중요한 것은 바로 이 죄책(罪責)이다.
특히 원죄에 의한 죄책을 우리는 "원시적 죄책(Original Guilty)" 이라고 한다.
또 부패성이란, 죄인이 가지고 있는 죄악 된 성질(죄성, 罪性), 죄를 향한 경향성(傾向性) 혹은 연약성(軟弱性)을 가리킨다.
아담의 첫 범죄의 죄책의 전가(轉嫁) 뿐만 아니라, 또한 그 범죄로 인한 인성의 부패성이 모든 인류에게 전달되었다.
즉 원죄의 결과가 오염된 죄 성을 초래한다.
그것을 우리는 원시적 오염(Original pollution)이라고 부른다.
예레미야 17:9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이라 누가 능히 이를 알리요마는.
시편 14:1
어리석은 자는 그의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없다 하는도다. 그들은 부패하고 그 행실이 가증하니 선을 행하는 자가 없도다.
고린도후서 11:3
뱀이 그 간계로 하와를 미혹한 것 같이 너희 마음이 그리스도를 향하는 진실함과 깨끗함에서 떠나 부패할까 두려워하노라
시편 51:5
내가 죄악 중에서 출생하였음이여 어머니가 죄 중에서 나를 잉태하였나이다.
다윗의 이와 같은 고백은 곧 죄성(罪性)을 의미한다.
사도 바울은 이와 같은 죄성을 본질상 진노의 자녀라고 하였다
에베소서 2:3
전에는 우리도 다 그 가운데서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
이것은 이미 부패와 오염된 죄성을 갖고 있었다는 것을 말한다.
창세기 6:5
여호와께서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가득함과 그의 마음으로 생각하는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
이사야 64:6
무릇 우리는 다 부정한 자 같아서 우리의 의는 다 더러운 옷 같으며...
시편 58:3
악인은 모태에서부터 멀어졌음이여 나면서부터 곁길로 나아가 거짓을 말하는도다.
▶ 자범 죄(自犯罪, actual sin)
자범 죄(自犯罪)란, 원죄의 부패성을 가진 모든 사람들이 실생활 속에서 짓는 죄를 가리킨다.
원죄와 자범 죄는 몇 가지 측면에서 서로 구별된다.
첫째, 인과(因果)의 관계가 있다.
원죄는 원인이요 자범죄는 그 결과이다.
그러므로 원죄는 하나이지만, 자범죄는 여러 겹(sins)이다.
둘째, 인식의 측면에서도 서로 다르다.
원죄는 모든 사람에게 다 인식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불신앙자들은 그것의 존재를 빈번히 부정하지만, 자범죄의 존재는 일반적으로 인정된다.
물론 오늘날 진화론의 영향으로 사람들의 죄의식이 많이 상실되어 있다.
진화론자들은 사람의 죄를 동물성의 잔재(殘在) 정도로 간주하기 때문에 그것을 하나님께 대한 악으로 보기보다는 단순히 다른 사람들에 대한 악 정도로 생각한다.
셋째, 죄책의 측면에서도 서로 다르다.
원죄는 본성의 죄로서 죄책을 포함하지만, 자범죄는 자신의 의지적 악행이기 때문에 더 큰 죄책을 가진다고 본다.
예수를 믿는 그리스도인은 과거와 현재와 장래의 모든 죄로부터 사함을 받는다.
그것은 “죄책”에 대해서 면책되어짐을 뜻한다.
그러나 거듭난 그리스도인들도 그 “죄성”은 갖고 있다.
즉 거듭난 그리스도인이라고 하여도 알게 모르게 죄를 지을 수 있으며, 또한 그리스도인은 죄를 지어도 하나님과의 법적 신분적 상태는 변하지 않는다.
로마서 8:1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우리는 소위 칭의적 상태(의롭다고 부르심)를 유지하며, 하나님의 자녀로서 효력이 유지된다.
그러나 하나님은 결코 죄를 기뻐하지 않으시며, 성경은 죄와 심판에 대하여 징계와 책망의 차이가 있음을 밝히 증거하고 있다.
예수께서는 "47 주인의 뜻을 알고도 준비하지 아니하고 그 뜻대로 행하지 아니한 종은 많이 맞을 것이요 48 알지 못하고 맞을 일을 행한 종은 적게 맞으리라..."고 말씀하셨다(눅 12:47, 48).
또 “우리가 다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나타나게 되어 각각 선악간에 그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고후 5:10)라고 말하고 있다.
또한 “불의를 행하는 자는 불의의 보응을 받으리니...”(골 3:25)이라고 하였고
“자신은 구원을 받되 불 가운데서 받은 것”(고전 3:15)이라고 말하고 있다.
하나님께서 각 사람의 행한 대로 보응하실 것이라고 증거한
바울 사도의 증거도 죄와 심판의 차등(差等)을 전제한다(롬 2:6).
“각 사람에게 그 행한 대로 보응하시되....”(롬2:6) “
2. 구약과 신약에서 나오는 죄의 개념
* 구약성경에서의 죄의 개념 8가지
죄에 대한 성경적 개념은 신구약 성경에서 죄에 대해 사용된 단어들에 관한 연구를 통해서 살펴볼 수 있다.
성경에 나오는 '은혜(grace)'를 나타내는 단어에 비해서 죄에 대한 용어는 상당히 많이 있다.
'은혜'를 표현하기 위해서 오직 세 가지의 단어가 사용된다.
구약성경에 있는 첸(chen)과 체세드(chesed),
신약성경에 있는 카리스(charis)이다.
그와는 대조적으로, 구약성경에는 죄를 나타내는 최소한 8개의 기본 단어가 있으며, 신약에는 최소한 12개의 기본 단어가 있다.
그 모든 단어들이 죄에 대한 교리에 있어 기본적인 개념의 틀을 제공하고 있다.
1. 챠타(Chata) - 표적을 벗어난 것
죄에 대한 모든 형태의 단어 중에서 가장 기본적인 이 단어는 구약 성경에 522회 사용되고 있다. 이 단어의 기본적인 뜻은 '표적을 벗어난 것(to miss the mark)' 으로 헬라어 하말타노(hamartano)와 같은 의미를 가진 단어이다. 그러나 '표적을 벗어난 것'은 '다른 표적을 쏜 것' 이라는 의미도 내포하고 있다.
예를 들어 사람이 올바른 표적을 맞히지 못해서 죄를 짓는 것은 잘못된 표적을 맞힌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즉 이 단어는 '수동적인 벗어남의 개념(a passive one of missing)' 뿐만 아니라 '능동적인 쏨의 개념(an active one of hitting)'도 가지고 있습니다. 이 단어는 도덕적인 죄악, 우상숭배, 의식적인 죄를 지칭할 때 사용된다.
2. 라(Ra) - 파멸시킴(breaking up)' 혹은 '폐허로 만듦(ruin)
구약성경에서 444번 나오는 이 단어는 헬라어 카코스(kakos) 및 포네로스(poneros)에 상응하는 단어로, '파멸시킴(breaking up)' 혹은 '폐허로 만듦(ruin)' 이라는 기본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다.
이 단어는 때때로 재난(calamities)을 의미하기도 하고 많은 경우에 '사악한 것(wicked)'이라고 번역된다.
이 단어는 또한 '도덕적으로 그릇된 것(something morally wrong)' 은 물론 '손상을 입히는 것(something injurious)' 도 의미한다(창 3:5, 38:7, 삿 11:27).
이사야 45:7에서는 하나님이 빛과 어둠, 평안(well-being)과 라(ra, 환난)도 창조하신 분으로 언급되고 있다.
어떤 사람은 이 구절에 나오는 단어가 재난 및 다른 사악한 상태를 의미하는 것이라고 이해한다.
이러한 이해가 사실이라면, 이것은 비록 죄를 짓는 것에 대한 책임은 창조주가 아닌 피조물에게 있을지라도 사악한 것을 포함한 모든 것이 하나님의 계획안에 포함되어 있다는 사실을 드러내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3. 파샤(Pasha) - 반역하는 것(to rebel)
이 단어가 보통 '배반(transgression)' 이라는 단어로 번역되고 있을지라도 이 단어가 가지고 있는 기본 개념은 '반역하는 것(to rebel)' 이다.
열왕기상 12:19, 열왕기하 3:5, 잠언 28:21, 이사야 1:2을 보라.
4. 아원(Awon) - 부정(inquity, 죄악)과 죄책(guilt, 저주)이라는 개념
이 단어는 히브리 사상에서 서로 밀접한 관련을 가지고 있는 부정(inquity, 죄악)과 죄책(guilt, 저주)이라는 개념(삼상3:13)을 모두 포함하고 있는 단어이다.
이 단어가 '고난당하는 종(사53:6, the Suffering Servant)' 및 '훼방하는 죄(a defiant sin)' 와 관련하여 사용되고 있다는 점을 주목하라.
5. 샤가그(Shagag) - 잘못한 것(to err), 길을 잃어버린 것(to go astray)
이 단어는 '잘못한 것(to err)'이나 양 혹은 술 취한 사람이 보여주는 모습과 같은 '길을 잃어버린 것(to go astray)'을 의미하는 단어이다(사 28:7).
이 단어는 실수를 언급하는 단어인데, 그 실수를 범하는 사람은 그 실수에 대해 책임을 져야 했습니다.
율법에서 이 단어는 길을 잃은 사람이 율법에서 어떤 명령을 했는지 알아야 할 책무가 있었다는 것을 암시하는 단어이다.
6. 아샴(Asham) -고의적인 죄와 고의가 아닌 죄에 대한 죄책(intentional and unintentional guilt)
이 단어는 거의 대부분 레위기, 민수기 및 에스겔서에 나와 있는 성막 및 성전의 의식과 관련하여 사용되고 있다.
하나님 앞에서의 죄책감이 이 단어가 가지고 있는 중요한 개념이다.
이 단어는 속죄제와 속건제를 지칭할 때 사용되는 단어로서 '고의적인 죄와 고의가 아닌 죄에 대한 죄책(intentional and unintentional guilt)'을 의미하는 단어로 사용된다.
7. 라샤(Rasha) - 사악한 것(wicked)
이 단어는 출애굽 전에는 거의 사용되지 않고, 시편, 에스겔, 그리고 지혜서(the Wisdom literature)에 주로 나타나는 단어이다.
이 단어의 뜻은 '의로운 것' 의 반대되는 개념으로 '사악한 것(wicked)'을 의미하는 단어이다
출애굽기 2:13, 시편 9:16, 잠언 15:9, 에스겔 18:23
8. 타흐(Taah) - 이리저리 방황하는 것(to wander away)' '길을 잃는 것(to go astray)
이 단어는 '이리저리 방황하는 것(to wander away)' '길을 잃는 것(to go astray)'을 의미하는 단어로, 비록 사람이 그 자신의 죄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깨닫지 못하고 있을지라도 우연히 벌어진 죄라기보다는 계획적인 죄를 뜻하는 단어이다.
민수기 15:22, 시편 58:3, 119:21, 이사야 53:6, 에스겔 44:10,15
이러한 단어 연구를 통해서는 우리는 구약 성경이 가르치고 있는죄에 대한 개념의 3가지 결론을 도출해낼 수 있다.
1. 죄는 많은 형태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죄에 대해 사용된 단어의 다양성으로 인해,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신의 죄가 특별히 어떤 죄의 형태인지를 인식할 수 있었다.
2. 죄는 율법과 반대되는 입장에 서 있는 것으로, 궁극적으로 죄는 하나님께 불순종하는 것이다.
3. 불순종에는 긍정의 개념과 부정의 개념이 모두 포함되어 있는데, 그 개념은 부정의 개념에서 '좋은 일을 하지 못한 것(omission)' 뿐만 아니라 긍정의 개념에서 '그릇된 일을 한 것(commission of wrong)'도 강조하는 개념이다.
죄는 '표적을 벗어난 것' 뿐만 아니라 '그릇된 표적을 쏜 것'을 의미했다.
* 신약성경에서의 죄의 개념 12가지
1. 카코스(Kakos) - 나쁜 것(bad)
'나쁜 것(bad)'을 의미하는 단어로, 이 단어의 부사형은 때때로 '육체적으로 나쁜 것(physical badness)'
즉 질병(disease)을 의미하기도 하지만(막 1:32), 이 단어의 형용사형은 보통 '도덕적으로 나쁜 것(moral badness)'을 지칭합니다(마 21:41, 24:48, 막 7:21, 행 9:13, 롬 12:17, 13:3-4,10, 16:19, 딤전 6:10).
2. 포네로스(Poneros) - 악한 것(evil)
이 단어는 '악한 것(evil)'에 대한 기본적인 용어로, 거의 대부분 '도덕적 죄악(moral evil)'을 지칭하는 단어로 사용되고(마 7:11, 12:39, 15:19, 행 17:5, 롬 12:9, 살전 5:22, 히 3:12, 요이 11), 악한 영이라 불리는 귀신을 지칭할 때에도 이 단어가 사용된다(눅 11:26, 행 19:12).
3. 아세베스(Asebes) - 경건치 않은 것(godless)
'경건치 않은 것(godless)'이라는 뜻을 가진 이 단어는 거의 대부분 베드로후서와 유다서에서 경건치 않는 배교자라는 표현으로 나타난다. 구원받지 못한 사람은 경건치 아니한 자라고 지칭된다(롬 4:5, 5:6).
4. 에노코스(Enochos) - 죄책(guilt)
이 단어는 '죄책(guilt)'을 의미하는 단어로 대개 자신의 범죄가 죽기에 마땅한 경우를 지칭할 때 이 단어가 사용된다.
(마 5:21-22, 막 14:64, 고전 11:27, 약 2:10).
5. 하말티아(Hamartia) - 표적을 빗나가는 것(missiong the mark)
이 단어는 죄에 대해 가장 흔히 사용되는 단어로서 신약성경에서 여러 가지 형태로 약227번 등장하는 단어이다. 어떤 작가가 죄에 대해 한 가지 용어만을 꼭 사용해야 한다면 그는 이 단어를 사용했을 것이다.
이 단어가 은유하고 있는 원래 뜻은 '표적을 빗나가는 것(missiong the mark)'이다.
그러나 구약 성경에서의 챠타(chata)처럼, 이 단어는 부정형의 개념뿐만 아니라 '그릇된 표적을 맞추는 것(hitting some wrong mark)'이라는 긍정형의 개념도 포함하고 있는 단어이다. 복음서에서 이 단어가 사용될 때, 이 단어는 거의 대부분 용서 혹은 구원을 언급하는 문맥에서 발견된다(마 1:21, 요 1:29). 이 단어와 관련된 다른 몇 개의 중요한 참고구절로는 사도행전 2:38, 로마서 5:12, 고린도전서 15:3, 고린도후서 5:21, 야고보서 1:15, 베드로전서 2:22, 요한일서 1:7, 2:2, 요한계시록 1:5이 있다.
6. 아디키아(Adikia) - 의롭지 못한 어떤 행동(any unrighteousness conduct)
이 단어는 넓은 의미로 '의롭지 못한 어떤 행동(any unrighteousness conduct)'을 의미하는 단어이다. 이 단어는 구원받지 못한 사람과 관련해서(롬 1:18), 돈과 관련해서(눅 16:9), 인간 육신의 지체와 관련해서(롬 6:13, 약 3:6), 행위와 관련해서(살전 2:10) 사용되는 단어이다.
7. 아노모스(Anomos) - 법과 질서가 없는 것(lawless)
'불법(iniquity)'이라고 번역되는 이 단어는 '법과 질서가 없는 것(lawless)'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이 단어는 넓은 의미로 법을 어기는 것과 관련되어 사용된다(마 13:41, 24:12, 딤전 1:9).
종말론적 사상과 관련하여 이 단어는 불법의 사람, 즉 적그리스도를 언급할 때 사용되는 단어이다(살후 2:8).
8. 파라바테스(Parabates) - 법을 위반하는 것
범죄자(transgressor)'를 의미하는 이 단어는 보통 특별히 '법을 위반하는 것' 과 관련해서 사용되는 단어이다(롬 2:23, 5:14, 갈 3:19, 히 9:15).
9. 아그노에인(Agnoein) - 무지한 우상숭배(ignorant worship)
이 단어는 참된 하나님 이외의 다른 신에 대한 '무지한 우상숭배(ignorant worship)'를 언급할 때 사용되는 단어인데(행 17:23, 롬 2:4), 그러한 무지는 사람을 죄인의 상태로 만든다(히9:7).
10. 플라나오(Planao) - 비난받아 마땅하기까지 길을 잃는 것(to go astray in a culpable sense)
'비난받아 마땅하기까지 길을 잃는 것(to go astray in a culpable sense)'이 바로 이 단어가 의미하는 것이다(벧전 2:25).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을 속일 수 있다(그들을 길을 잃게 하는 것)(마 24:5-6); 사람들은 그들 자신을 속일 수 있다(요일 1:8); 그리고 사단은 만국을 미혹으로 이끕니다(계1 2:9, 20:3,8).
11. 파라프토마(Paraptoma) - 타락해 나가는 것(falling away)
이 단어가 가지고 있는 개념은 '타락해 나가는 것(falling away)'으로서, 대부분의 경우에 의도적인 타락에 대해서 사용되고 있다. 사도 바울은 이 단어를 로마서 5:15-20에서 6번 사용하고 있다. 마태복음 6:14, 18:35, 고린도후서 5:19, 갈라디아서 6:1, 에베소서 2:1, 그리고 야고보서 5:16을 보라.
12. 히포크리시스(Hypocrisis) -
이 단어는 세 가지 개념을 함께 가지고 있다.
(1) 어떤 사람이 계시를 그릇되게 해석하는 것(to interpret falsely as an oracle might do);
(2) 어떤 사람이 거짓된 행동을 꾸미는 것(to pretend as an actor does);
(3) 그릇된 것으로 알려진 해석을 따르는 것(to follow an interpretation known to be false).
종말의 때에 거짓 선생들은 거짓된 해석을 할 것이고, 거짓된 행동을 꾸밀 것이며, 많은 사람들은 그들의 가르침을 좇게 될 것이다(딤전 4:1-2). 외식하는 자들은 처음에 그들 자신이 미혹되어서 그릇된 것을 옳게 만들고, 나중에는 다른 사람까지 미혹하게 된다. 이것이 이 죄의 치명적인 속성이다.
신약성경의 단어 연구로부터 몇 가지 결론이 도출될 수 있다.
(1) 죄는 '존재하는 어떤 뚜렷한 기준'을 어기는 것이다.
(2) 궁극적으로 모든 죄는 하나님에 대해 의도적으로 반역하는 것이고 하나님의 표준을 어기는 것이다.
(3) 죄악은 여러 가지 형태를 가지고 있다.
(4) 인간의 책무는 분명하며 모든 인간들은 그 책무를 뚜렷하게 이해할 수 있다.
그 책무를 다하지 않는 것도 큰 의미에서 죄라고 말할 수 있다.
죄의 가장 중요한 성격은 '하나님과 반대방향을 지향하는 것(that it is directed against God)' 이다.
우리는 죄에 관한 단어연구를 통해 거룩하신 하나님의 보시기에 죄가 얼마나 치명적인 것인지를 깨닫게 된다.
하박국은 다음과 같이 언급했다.
하박국 1:13
주께서는 눈이 정결하시므로 악을 차마 보지 못하시며 패역을 차마 보지 못하시거늘 어찌하여 거짓된 자들을 방관하시며 악인이 자기보다 의로운 사람을 삼키는데도 잠잠하시나이까.
3. 성경에서 말하는 '죄'(sin, 罪)란,
죄 - 히브리어로 하타아(핫타스)
죄 - ‘άμαρτία’(하마르티아) / 목표에서 벗어난 것
1) 화살이 과녁의 목표에 미달하는 것
2) 과녁의 목표를 더 지나쳐 빗나가 버린 것
이 의미는 화살이 과녁을 맞추지 못하고 벗어난다는 것이다.
그리고 여기에서 지칭하는 과녁이란 하나님의 말씀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을 벗어나는 것이 죄이며, 이단이므로 죄와 이단은 서로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예를 들어 아담의 죄를 단순히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를 따먹은 것이라고 한다면 이것으로써는 정당한 기준 점이 없으므로 죄라고 하기에는 부족한 표현이며,정확히 표현하자면 그 나무의 실과를 따먹지 말라고 한 하나님의 말씀을 어긴 것이기에 죄가 되는 것이다.
무엇보다 사람의 본분에서 벗어나는 것이고(전도서 12:13)
성경과 진리의 영이라는 과녁을 이탈하는 것이다.
*사람이 지음을 받을 때 하나님의 뜻을 적중 시킬 존재의 목적을 가지고 창조 되었다.(창 1:26-27)
그럼에도 인생은 그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에 부족하고 빗나가 버렸다.
바로 그 상태가 죄이며, 불행이다.
죄는 하나님의 뜻을 배반하는 것(도덕적인 관념과는 다르다.)
죄는 과녁을 맞추지 못한 것
죄는 부주의로 범한 과실까지도 포함됨(모르고 지은 죄)
죄는 하나님께 대한 반역을 말함
죄는 하나님과의 교제를 파괴하고 이반하여 자기 임의대로 행동하는 것(롬 8:6-8).
죄에 대해 변함없이 적대하시는 하나님은, 그 의로움과 그 완전한 공의라는 속성 때문에 죄를 용납하실 수 없다.
세상 죄는 어린 양(예수님)의 어깨위에 지워졌으며(요 1:29)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은 그 십자가에 쏟아졌다.
그러기에 십자가의 피 아래에서만 인간은 비로소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에서 자유로울 수 있다.
그래서 오직 예수 이름으로만 구원을 얻을 수 있다.(행 4:12, 요 14:6)
죄가 실재(實在)하듯 지옥도 사실이며 심판도 사실이다.(히 9:27. 계 20:10. 계 21:8. 롬 3:23. 롬 6:23. 요일 1:9)죄와 지옥과 심판은 서로 별개가 아니라, 하나이다.
죄는 무엇을 했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의 문제이다.(마 8:21-22)
죄는 윤리나 도덕의 문제이기도 하지만, 나타난 죄의 여러 현상보다 더 깊고 본질적인 문제이다.
죄는 아버지를 등지고 나가는 탕자와 같다.
죄는 만왕의 왕께 반역하는 태도입니다.
창조주이신 만주의 주를 거절하는 것이다.
자신의 존재 근원이 되시는 분을 일부러 잊는 것이다. 하나님 아버지와 원수 되는 것이다.
죄는 자기중심적인 마음과 생각이며 삶의 태도이다.(자아)
죄는 항상 육체적이며 동물적이며 본능적입니다.(자아), 유다서1:10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어졌지만 신적 형상을 잃고(본능과 탐심만이 생명을 추동[推動]하는) 짐승이 된 것이다.
죄는 늘 육체-중심적이며, 물질적이며, 권력적이다.
죄는 항상 외모-지상주의 적이며 쾌락적이며 이기주의적이다.
죄는 개인-이기주의, 집단-이기주의, 국가-이기주의로 나타난다.
죄는 항상"먹음직도 하고, 보암직 도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러운"(창세기 3:6)특징이 있다.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을 위한 육체적 욕구와 에너지로 움직여지는 모든 가치들이다.
요일 2:16의 말씀은 창세기3:6절과 하나가 된다.
인간의 삶 그 자체가 거의 전부 죄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죄는 그 자체로 하나님과 원수가 되는 것이다.
죄는 다양한 현상으로 나타나지만 그 본질은 하나이다.
딤후3장1절-5절에서 나타나는 현상과 갈5장19-21에서 열거되는 것들이다.
또, 보이지 않는 - 영이신 전능자 앞에서 보이는 사람(목사나 교주)을 높이 세우는 것은 아론의 금송아지를
숭배하는 것(출32:)와 똑같다. 자기를 높이는 목사나 이단 사이비 교주들은 우상이다.
세상에서 성공한 사람을 믿음의 본보기로 추겨 세우고 설교의 례[例]와 간증의 본보기로 삼는 행위 역시
육체의 소욕을 좇는 것이며, 변장술로 은폐한 죄이다.
하나님을 거부하고 자신의 삶을 살고 자기 육신의 사고방식대로 생각하는 것 그것이 죄이다.
(롬 8:5-7. 롬 8:13.- 요 14:17. 고전 2:12. 요 3:6. 요 6:63)
죄는 하나의 세력이다. 욕심, 시기, 미움, 증오등과 같이, 악의 힘, 어둠의 힘이고, 타오르는 열정이다.
죄는 지옥이 지옥 되게 하는 원소이며 지옥을 불타오르게 하는 에너지원(源)이다.(약 3:6)
* 죄는 자기의 의를 나타내기 위한 순종도 죄다(롬10:2-3) - 자존심, 체면, 자기생각
마 5:45-47 (자기가 할 수 있는 것만 해도 안 된다.) - 원수 사랑해야
*죄와 관계된 성경구절
약 4:17, 약 2:9, 롬 14:23, 삼상 12:23, 요 8:24-27, 16:9, 롬 12:11, 잠 21:4, 신 15:7-11, 렘 48:10
*죄의 종류
바이스 - 음주(중독), 마약 복용(자기가 자신에게)
크라임 - 율법 상의 죄 - 도적, 상해, 살인, 사기
씬(sin) - 종합적인 죄(하나님을 떠날 때)
4. 죄란 무엇인가?
1. 죄란 무엇인가?
일반적으로 죄라고 말할 때 살인, 강도, 간음, 사기 등 외형적인 범죄를 죄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성경은 외형적인 범죄뿐만 아니라 교만, 질투, 증오, 시기, 탐욕, 음욕 등도 내적인 죄라고 지적하고 있다. 예수님께서는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음욕을 품고 여자를 보는 자마다 마음에 이미 간음하였느니라.”(마 5:28)고 말씀하셨다.
그렇다면 이 세상에 죄 없는 자가 있을까?
성경은 인류 모두 죄의 구속을 받고 있는 죄인들이라고 말씀하고 있다(롬 3:10). 아무리 선하고 의로운 일을 행한다 할지라도 율법아래선 죄인이며, 예수 그리스도 외에는 죄 없는 이가 없다고 말씀한다. 기독교적인 신앙관에서는 죄에 대해 인간의 전적타락(Total Depravity)을 믿고 있다. 인류는 죄의 영향에 의해 온갖 부패와 불의, 불행, 질병 등을 영육 간에 불행한 고통을 겪게 되었고, 종국에는 사망에 이르게 되었다(창3:16-19, 롬6:23).
“여인에게서 태어난 사람은 그 사는 날이 짧은데다가, 그 생애마저 괴로움으로만 가득 차 있다.”(표준 새 번역, 욥14:1)죄의 기원과 종류모든 인류가 죄인일 수밖에 없는 사실은 타락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인간이 타락함으로써 죄가 마음 깊숙이 뿌리내리게 됐기 때문이다.
인간 마음 깊숙이 뿌리내리고 있는 죄는 크게 4가지인데 불법, 불의, 불신, 불순종이다.
죄의 기원을 살펴보면 크게 두 가지로 보고 있다.
먼저 교만과 탐욕으로 하나님께 도전한 천사들(사단)의 타락으로 죄가 기원했다고 본다(유 6, 벧후 2:4).
두 번째는 하나님의 형상대로 선하게 창조된 인류가 마귀의 유혹과 인간의 선택으로 죄가 들어왔다는 것이다(창3:1-13).
즉 죄는 사단에게서 기인하였고 인간에게 죄를 짓도록 사단이 유혹했다.
타락에서 기원된 죄는 외적인 범죄뿐만 아니라
그 근원(분노, 욕심, 교만 등)까지 죄로 규정하고 있다.
불신자나 초신 자의 경우 왜 모든 인류가 죄인지에 대해 반문할 수 있다.
성경은 하나님을 믿지 못하는 것 자체가 죄가 된다고 말하고 있다(요16:9).
더 나아가 하나님의 뜻에 반대되는 일을 행하는 모든 행위를 죄라고 규정하고 있다.
인류의 조상인 아담이 죄를 지음으로 인해 모든 인류는 죄를 가지고 태어나게 된다(시 51:5).
이것을 ‘원죄’(Original Sin)라고 구분한다. 원죄는 한 사람의 순종치 않음으로 발생한 죄악이다.
또한 원죄는 아담이 인류에게 남긴 상속 물로 인류의 가장 보편적인 죄악이며 모든 사람을 죽음으로 몰고 왔다(롬5:12). 이 원죄의 속박의 틀을 깨신 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인 것이다. 즉 한 사람의 죄악으로 사망이 들어왔던 것을 한 사람의 희생으로 의롭게 될 수 있게 됐다(롬 5:15-21).
한편 아담 이후 인간들은 수많은 죄악을 범하게 됐는데 이를 ‘본죄 혹은 자범 죄’(Actual Sin)라고 불린다. 자범 죄는 한 개인이 원죄의 영향을 받아 스스로 고의적으로 짓는 범죄를 가리킨다. 그러나 자범 죄는 ‘살인, 강도, 사기, 간음 등’ 외부적인 생활의 죄와 ‘교만, 질투, 증오, 육욕, 사욕 등’ 마음으로 짓는 내적 생활의 죄로 구분된다.
죄의 본질과 특성인류에게 원죄를 선사한 아담이 지은 죄는 무엇일까?
대부분의 사람들은 아담이 선악과를 따 먹음으로 죄가 들어왔다고 생각한다.
더불어 하나님께서 에덴동산에 선악과를 두지 않으셨거나 선악과만 없었다면
죄는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하나님께서 일부로 인류가 죄를 짓도록 만들기 위해 동산 가운데 선악과를
두신 것이 아니냐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다.
과연 그럴까?
아담의 죄는 금단의 열매를 따먹은 것이 죄라기보다는 불순종이 죄의 원인이 된다.
인간에게 자유의지(선택권)를 주신 하나님께서는 인간에게 에덴동산을 지킬 것과
선악과를 먹지 말 것을 명령하셨다. 그러나 사단의 유혹에 넘어간 인간은 교만과 욕심으로
하나님의 명령을 불순종하게 된 것이다.
특히 하나님께서는 아담과 하와에게 회개의 기회를 주셨을 때
그들은 잘못을 타인에게 전가시키는 죄를 범하였다.
죄의 특성은
① 전염성이 강하다는 점이다. 아담 한 사람의 죄가 온 인류에 전가됐으며, 죄는 주변 사람들을 쉽게 오염시킨다. ② 불치의 병(사망에 이르는 병)과 같다. 죄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피가 없었다면
완치되기 어려운 병처럼 용서받기 어렵다.
③ 고리의 빚과 같다. 죄는 빚처럼 갚지 않으면 견딜 수 없으며,
고리의 이자처럼 불어나듯 죄를 용서받지 못하면 다른 죄까지 불러온다(눅 7:41, 마 6:12).
④ 족쇄와 같다. 법을 어기면 벌을 받아야 하듯 죄를 범하면 반드시 그에 따르는 대가를 치루어야 하며,
심판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다(요일 3:4).
⑤ 사단의 노예로 만든다. 죄를 진 모든 인간은 사단의 노예로 살아갈 수밖에 없다(롬 6:17-18).
그렇다면 전적 부패한 인간은 죄로부터 어떻게 자유로워 질수 있는가?
인간은 스스로의 힘으로 죄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그렇다고 율법을 통해 죄를 깨달을 수는 있지만 치유하거나 속죄 받지는 못한다. 성경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피와 그를 믿음으로써 죄 용서함을 받고 의롭다함을 받을 수 있다(롬 3:25, 고후 5:21). 그리스도를 향한 믿음과 회개만이 죄에서 해방될 수 있다.
2. 죄의 본질 4대 요소
① 불순종(不順從)
죄의 본질은 불순종이며, ‘믿음과 신뢰의 결핍’에서 나오는 것으로 불신에서 파생된 죄악이다. 특히 불순종은 하나님의 법에 대한 이탈, 지나침(반항, 계명위반)으로 의미한다. 많은 사람들의 하나님의 명령에 불순종함으로써 징계를 받았다(아담, 사울 등). “한 사람이 순종하지 아니함으로 많은 사람이 죄인 된 것 같이”(롬 5:19)
② 불법(不法)
하나님께서는 죄악 된 인류를 구원의 방편으로 율법을 주셨다. 하나님의 법이든 사람이 만든 법이든 주어진 법을 어기는 것은 죄이다. 법을 알면서 어겼거나 법이 있는 줄도 모르고 어기게 된 경우도 불법에 해당된다(눅 12:47,48, 롬 2:12).
“죄를 짓는 자마다 불법을 행하나니 죄는 불법이라”(요일 3:4)
③ 불의(不義)
가장 근본적인 불의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것이고, 하나님과 관계, 사람과 사람간의 관계가 올바르지 못한 것을 의미한다(시 50:6, 신 24:13). 또한 선지자시대에는 의가 가난하고 궁핍한 사람들을 돕는다는 개념을 포함하고 있다(단 4:27, 암 5:12)
“불의한 자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줄을 알지 못하느냐”(고전 6:9)
④ 불신(不信)
불신은 불순종과 배반을 의미하는 것으로 하나님의 긍휼을 받고도 믿지 못하는 죄다(요 16:9). 불신은 범사에 믿음을 좇지 않는 것으로 하나님의 말씀과 교훈을 따라 행치 않는 것을 의미한다. 불신앙은 모든 죄의 원천으로 하나님으로부터 등을 돌리는 것이다.
“믿음을 따라 하지 아니하였기 때문이라 믿음을 따라 하지 아니하는 것은 다 죄니라”(롬14:23)
<용서받지 못하는 대죄>
성경은 하나님의 뜻에 어긋난 모든 것들, 선을 행하지 않고 악한 행동과 생각들을 죄라고 규정하고 있다.
이 모든 죄악들을 속죄 받을 수 있는데 그것은 하나님의 구속은혜와 회개라고 말씀하고 있다.
그러나 회개하고 기도해도 용서받지 못하는 죄가 있다. 요한일서 5장에는 ‘사망에 이르는 죄’와 ‘이르지 않는 죄’가 있는데, 전자는 기도할 필요가 없고 후자의 경우 하나님께 기도로 간구할 것을 지시하고 있다(16-17절).
죄악 가운데도 하나님으로부터 용서받는 죄와 그렇지 못한 죄가 있음을 말해주고 있는 것이다.
① 성령 훼방 죄 : 성령의 사역을 방해하는 행위로 하나님의 나라를 받아들이지 있고 비방·모독하는 죄(마12:31)② 성령 거역 죄 : 성령의 인도를 거부하고, 성령의 사역을 부정(불신)하는 참람 죄(마12:32)
③ 성령 배반 죄 : 하나님의 말씀과 내세 능력, 은사 등을 맛보고 성령에 참여했다가 배교하는 죄
(히6:4-5, 10:26-27)
<죄를 이기는 비결>
▲ 죄에서 떠난 성결의 삶을 살아라.
거룩과 순결의 삶을 가는 성도는 세상의 모든 죄악과 유혹에서 벗어날 수 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신앙과 성결의 삶을 살면 죄가 왕 노릇하지 못한다(롬 1:4, 약 3:15-18, 4:8)..
▲ 육신의 정욕에 순종하지 말라
죄악 된 인간은 육체적인 욕망으로 인해 죄를 짓게 되며, 성경은 육체의 욕망 15가지를 제시하고 있다(갈 5:19-21). 육신의 정욕은 하나님 나라의 유업을 받지 못하도록 방해하지만 이에 순종해서는 절대 안 된다(요일 2:16). 영혼을 거스리는 육체의 정욕을 제어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벧전 2:11).
▲ 의의 병기로 만들어야 한다.
성경은 우리의 육체를 불의의 병기로 만들어 죄를 짓지 말고 의의 병기로 만들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도구로 사용되도록 해야 한다고 말씀한다(롬 6:13). 하나님의 의의 병기가 되기 위해서는 기도와 간구, 말씀으로 무장해야 한다(히 6:13-18).
3. 파멸로 이르게 하는 7가지 죄악
인간을 파멸로 이르게 하는 내적인 죄악을 크게 7가지로 규정하고 있다.
외적인 살인, 강도, 강간, 사기 등은 아니지만 외부적인 죄악의 근원이 되고 있다.
또한 내적인 7가지 죄악은 현대인으로 하여금 영적인 죄악을 저지르게 만들고
하나님을 멀리하도록 만드는 가장 심각한 죄악들이다.
1) 교만(Pride)
교만은 신앙적으로 하나님을 의존하고 복종하기를 거부하며 영광을 자기에게 돌리는 행위로 ‘겸손’의 반대되는 것이다. 성경은 교만을 죄의 근원이며 본질로 간주하였다. 또한 교만은 극단적으로 자기중심적이기 때문에 일종의 자기 숭배의 죄악이다. 지나친 우월감으로 인한 교만은 이웃(교인)과 나, 더 나아가 하나님과의 사이에 벽을 쌓는 죄악이다. 중세스콜라 신학자 토마스 아퀴나스는 루시퍼가 교만하게 하나님으로부터 독립하여 자신의 보좌를 높이려는 시도를 했을 때 최초로 교만이 나타났다(사 14:12-14)고 말했다. 즉 교만은 마귀가 타락한 원인이었고, 최초의 인간 아담과 하와를 타락하게 한 주요 수단이다. 잠언에서는 교만을 패망의 선봉이라고 말하고 있고(잠 16:18), 예수님은 사람의 악한 마음에서 나오는 더럽게 하는 악덕 중의 하나로 지목하고 있다(막 7:22).
▲성경어원 : 교만(게아, 잠 8:13), 거만(가아와), 장점을 뽑아내는 것(가온, 잠 16:18)으로 신령한 지혜에 유해한 것으로 규정하고 있다.
▲대표적 인물 : 느부갓네살(단 4:30,37),
2) 탐욕(Greed)
탐욕, 탐심은 이기심을 살찌우는 죄악으로 인간을 물질의 노예가 되게 만든다.
성경은 탐욕을 일만 악의 뿌리라고 규정하고 있고(딤전 6:10),
십계명에서는 10번째 계명으로 탐욕하지 말 것을 명령하셨다.히브리인들은 ‘욕망은 영혼을 충동질하여 다른 사람들과 다른 사물들에 미치도록 만든다.’고 생각했다. 구약성경에서는 율법으로 탐심을 금하고 있다(출 20:17). 사도행전 20:33, 디모데전서 6:9, 로마서 7:7에서는 ‘강렬한 욕망이 그릇된 방향으로 가면 돈에 집중될 수 있다’고 지적하며, 탐욕은 돈을 사랑하는 것(금전욕)과 동일시하였다(딤전 6:10).탐욕이란 단어는 종종 악한 것의 목록 속에 들어 있는 비도덕성과 관련되며(엡4 :19), 신약에서는 본질적으로 으뜸가는 우상숭배로 표현하고 있다(엡 5:5, 골 3:5). 또한 터무니없는 욕심(눅 12:15), 법을 어기고 남의 것을 탐내는 것(출 20:17), 소유할 권리가 없는 것을 가지려는 노력(딤전 6:10) 등을 의미한다.
▲성경어원 : 이웃의 소유를 탐내는 것(하마드, 신 5:21), 부당한 이득을 탐내는 것(베차, 잠 28:16), 이기적인 욕심(아와, 잠 21:26), 강렬한 욕망(에피뒤미아, 행 20:33), 무지비한 자기 주장(플레오넥시아, 고후 2:11).
▲대표적 인물: 아간(수 7:16-26), 발람(벧후 2:15)
3) 분노(Wrath)
분노 그 자체는 인간의 자연스러운 감정이지만, 분노를 통제하지 못했을 때는 범죄가 발생하였다. 최초의 분노 자 가인은 제사문제를 경쟁관계로 인식하고 하나님이 아벨의 제사만 받은 것에 격분해 동생을 살인하게 됐다. 가인의 상황을 예로 볼 때 분노의 원인은 내 자신 속에서 발생하며, 분노가 일어나는 것은 죄의 소원을 다스리지 못했기 때문이다.
즉, 분노는 인간관계를 경쟁관계로 인식케 만들며 항상 폭력을 유발하게 만든다.구약에서 분노에 부들부들 떠는 난폭한 주먹은 신적 권위를 주제넘게 사칭하는 것으로 여겨 하나님의 심판을 받았다(시 37:8-9). 그래서 맹렬한 격분은 이스라엘에 있어서 금지되고 거부되었다(창 49:5-7). 신약에서는 인간의 분노와 그 실행에 대해 강력히 금지하고 있다. 이런 가르침은 산상수훈에서 잘 나타난다(마 5:9,21,22). 분노는 본질적으로 성도를 성화(聖化)하지 못하게 하며, 궁극적으로 영화(榮化)하지 못하게 막는 걸림돌과 같다. 그래서 성경은 우리에게 분노의 해소 방법으로 기도와 용서를 제안하고 있다.
▲성경어원 : 성나다, 화를 내다(카챂, 사 8:21), 흔들리다, 격동하다(라가즈, 신 2:25)
▲대표적 인물 : 가인(창 4:3-16)
4) 음욕(Lust)
성경은 모든 음행과 정욕을 죄로 규정하고 있다.
무절제한 정욕(색욕)은 선한 생활을 파괴할 뿐 아니라 죄의 종이 되게 하며,
고난과 파멸을 초래한다는 것이다. 잠언 기자는 “여인과 간음하는 자는 무지한 자라 이것을 행하는 자는 자기의 영혼을 망하게 하며 상함과 능욕을 받고 부끄러움을 씻을 수 없게 되나니”(잠6:32-33)고 말씀하고 있다.
특히 성경은 음행을 믿음으로 대항해 직접 싸워야 하는 죄악이기보다는 피하라고 경고하고 있다. 그 만큼 연약한 인간이 음행의 죄를 떨쳐버리기 어렵다는 것을 반증한다(고전 6:18). 또한 음행은 하나님께서 거하시는 성도의 몸(성전)을 오염시키는 일과 같다. 방탕한 마음에서 생기는 음욕은 식을 줄 모르며 급격히 오염되는 특성이 있다. 성경에서 음행으로 인해 소돔과 고모라의 멸망했고(유 7), 모압 여인과 음행한 이스라엘 백성들은 죽임을 당했다(민 25장). 한편 성경에서는 단순한 육체적인 관계만이 아닌 신앙적인 배교행위까지 영적 음란행위로 규정하고 있다.
▲성경어원 : 음탕함과 부절제함, 외설스러움, 육욕(아셀게이아, 갈 5:19). 아셀게이아는 육욕과 관계되는 의미로 공공의 예의를 지키지 못하고 범하는 호색스러움을 의미한다.
▲대표적 인물 : 소돔과 고모라 사람들(창 19장)
5) 탐식(Gluttony)
인간을 죄악으로 유혹하는 3대 욕구를 물욕, 성욕, 식욕이라고 한다.
식욕은 가장 쉽게 저지를 수 있는 죄악으로 에서는 식탐으로 인해 장자 권을 팔았다.
탐식은 절제하지 못하는 탐욕스러운 인간의 모습을 극명하게 나타내는 모습으로
성경에서는 책망되고 있는 악습으로 지적하고 있다(잠 23:21). 고대 히브리인들은 배나 육체는 열정이나 탐욕의 중심이 되는 곳으로 보았다.
그래서 배를 의미하는 ‘베텐’(욥 20:20)이 탐욕을 의미하는 단어로 사용되었다.탐식이라는 것은 우리를 순간적인 유혹에 굴복시켜 버리게 만들고, 파멸시키는 죄악이며, 가장 저지르기 쉬운 죄악이다. 성경은 탐식이 탐욕과 밀접한 연관이 있으며, 악하고 게으른 자들이 지닌 특성(롬 1:29, 잠 21:26)이라고 말하고 있다. 즉 절제하지 못하는 식욕은 육체를 부담스럽게 하고 고통스럽게 하며, 서서히 육체를 파괴시켜 나가는 죄악이다. 또한 탐식은 육체만 파괴하는 것만 아니라 영성을 파괴하는 죄악이기도 하다.
히브리 기자는 탐식으로 장자권을 판, 에서를 가리켜 망령된 자라고 기록하였다(히 12:16-17).
▲성경어원 : 탐식을 뜻하는 파고스(마 11:19, 딛 1:12)는 ‘배만 위하는 게으름 장이’, ‘나태한 배’, ‘태만한 탐식가’ 등으로 사용됐다.
▲대표적 인물 : 에서(창 25:29-34, 히 12:16-17)
6) 질투(Envy)
질투, 시기는 자기의 가능성을 제한시키며, 일상적 삶을 빼앗아 가는 죄악이다. 결국 자신의 삶을 파괴시키는 것이다. 성경은 질투가 죄악 된 행동의 동기가 되어 분쟁과 분열, 미움, 살인까지 가져온다고 말하고 있다(고후 12:20, 갈 5:21). 질투는 사랑의 반대행위로 이웃이나 타인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에게 생겨난다(고전 13:4). 질투는 타인에 대한 불순한 내적 감정을 의미하며 본질적으로 죄이다. 질투는 타인에 대한 시기로 증오로 발전하게 되고, 대립하게 됨에 따라 참된 그리스도인의 교제에 걸림돌이 된다(고전 13:4). 그래서 예수님은 외적인 행위가 따르지 않더라도 생각과 태도만으로 죄가 된다고 말씀하셨다(마 5:21-31).질투를 의미하는 히브리어(키나)와 헬라어(젤로오, 행7 :9)는 감정이 오로지 한 가지에만 신경을 쓰는 것을 말한다. 지나친 질투는 결국 타인뿐만 아니라 본인 자신의 삶을 파괴시키는 죄악입니다. 질투를 극복할 수 있는 완전한 해결책은 사랑이다. 이웃을 사랑하고 축복하는 것은
▲성경어원 : 검붉게 된다(키나, 민5 :14), 이기주의, 야망, 경쟁(에리디아, 롬 1:29)
▲대표적 인물 : 요셉의 형들(창 37:34), 사울(삼상 18:6-9)
7) 나태(Sloth)
일반적으로 나태라는 말을 행동이나 노동을 싫어하는 것, 태만한 것, 게으른 것, 느린 것, 부지런하지 않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신학적인 면에서는 행동이나 정신적인 사물(事物)에 대한 게으름을 의미하는 것 뿐 아니라 교회의 활동에 대해 냉담하고 적극적이지 못한 것도 의미한다. 나태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 태만의 죄로 단테는 ‘게으름은 사랑을 포기한 죄악’이라고 말했다. 잠언은 나태한 자를 한없이 게을러 늘 잠자는 자로 묘사하고 있다. 결국 나태는 하나님께서 주신 은사를 사용하고 그 소명을 수행하는 일에 게으르거나 불순종하는 것이다. 나태한 사람은 행동을 요구하는 어떤 상황에 반응치 못하고 어떤 목적도 없는 말을 분주히 분에 넘치게 말한다. 또한 나태는 일상생활과 함께 신앙생활을 파괴시키는 죄악이다. 사단은 성도를 죄의 그림자에 머물게 하기 위해 성경 보기 싫은 나태, 기도하기 싫은 나태, 전도하며 봉사하기 싫은 나태 등 영적 태만을 주입하려고 애를 쓴다. 그래서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항상 깨어 기도하라고 말씀을 하셨다.
▲성경어원 : 비생산적, 무익한, 비효과적인, 텅빈(알고스, 마1 2:36),
▲대표적 인물 : 미련한 다섯 처녀(마 25장)4. 죄는 과녁에서 빗나감
죄를 의미하는 히브리어 ‘하타아트’와 헬라어 ‘하마르티아’를 살펴보면
‘과녁을 쏘아 맞출 수 있는데 맞추지 않는 오만한 행위’를 뜻한다.
즉
①표적을 쏘아 빗나가다(이탈)
②표적을 지나쳐가다(과도)
③표적에 못 미치다(미달) 등으로, 죄는 알고 있는 의무의 태만을 의미한다(약 4:17).
5. 무엇이 죄인가?
대개의 사람들은 ‘자신이 생각할 때 “나쁘다”고 생각되는 모든 것’을 “죄”라고 믿고 있다.
그러나 성경은 ‘하나님이 정해놓은 기준(목표)’에 반하는 모든 것을 죄라고 정의한다.
히브리어에 있어서 죄를 나타내는 3대 용어는
A) [불의] 아-와(아벤)(에벨) : [악을 행하다], [불의를 행하다]
B) [허물] 페솨 [파-솨] : [거역, 반역]
C) [죄] 헤-트 :[과녁을 벗어나다, 실패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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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불의]
[아-원]이 원어로서, [악을 행하다], [불의를 행하다] 등을 뜻하는 동사[아-와]에서
온 명사 ⇨사악한 행위. 의도적, 의식적, 악의 성질, 또는 동기와 내용
의(옳지)롭지 않은 행위, 악한 행위, 의롭지 않은 의식(생각), 동기 등 -- 대개의 도덕적 기준에서 벗어난 것.
B) [허물]
원어 페솨[파-솨] [거역, 반역]을 의미하는 동사 에서 온 명사로서, 여기서는 하나님께 대한 반역이 죄로 생각되고 있다(창 31:36, 왕상 12:19, 사 1:2, 호 8:1).
창 31:36
야곱이 노하여 라반을 책망할새 야곱이 라반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내 허물(페솨)이 무엇이니이까 무슨 죄가 있기에 외삼촌께서 내 뒤를 급히 추격하나이까
왕상 8:50
주께 범죄한 백성을 용서하시며 주께 범한(파솨; 반역한, 거역한) 그 모든 허물을 사하시고 그들을 사로잡아 간 자 앞에서 그들로 불쌍히 여김을 얻게 하사 그 사람들로 그들을 불쌍히 여기게 하옵소서
왕상 12:18,19
18 르호보암 왕이 역꾼의 감독 아도람을 보냈더니 온 이스라엘이 그를 돌로 쳐죽인지라 르호보암 왕이 급히 수레에 올라 예루살렘으로 도망하였더라.
19 이에 이스라엘이 다윗의 집을 배반(파솨)하여 오늘까지 이르렀더라
호 8:1
나팔을 네 입에 댈지어다 원수가 독수리처럼 여호와의 집에 덮치리니 이는 그들이 내 언약을 어기며 내 율법을 범함(파솨 ; 반역한, 거역한)이로다.
“의(옳지)롭지 않은 행위, 악한 행위, 의롭지 않은 의식(생각), 동기 등등으로 대개의 도덕적 기준에서 벗어난 것”이 [불의](아원)라면 [허물](페솨)(거역, 반역)은 보다 <근본>을 배반하는 일들이다.
예를 들면 나라에서 정해 놓은 <사회 도덕규범>을 범하는 것이 [불의](아원)이며, 나라의 헌법에 반역함{[허물](페솨)(거역, 반역)}은 <그 나라를 배반하는 것>이다.
또 다른 예: 과거 5공 당시 사기행각, 강도행각, 거짓, 살인 등등의 범죄(도덕적인 것 거역)는 죄 값을 치루면 되지만, 당시의 ‘반공법위반’은 <대한민국 자체를 배반>하는 것으로 “헌법을 거역하는 행위”로 규정되었다.
‘도덕법 위반’하는 것보다 훨씬 더 큰 죄가 ‘반공법위반’으로 <국가 반역> 죄에 해당하는 것.
(반공법 위반은 도덕법으로 근거한 “악행”[아-원]이 아니다.)
이에 비하여 히브리 원어 [헤-트 af] <죄>는 전혀 다른 의미를 가진다.
C) [죄]
[헤-트 af]와 그 여성 형 [핫타-아]그리고, 가장 많이 씌어진 꼴로는 [핫타-스]인데 (창 4:7 기타 빈출), 하말티아 (헤-트, 하말티아) : [과녁을 벗어나다, 실패하다]
창 4:4-7 4 아벨은 자기도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으로 드렸더니 여호와께서 아벨과 그의 제물은 받으셨으나
5 가인과 그의 제물은 받지 아니하신지라 가인이 몹시 분하여 안색이 변하니
6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 네가 분하여 함은 어찌 됨이며 안색이 변함은 어찌 됨이냐
7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선을 행하지 아니하면 죄(헤-트)가
문에 엎드려 있느니라 죄(욕망)가 너를 원하나 너는 죄(욕망)를 다스릴지니라
창 18:20 여호와께서 또 이르시되 소돔과 고모라에 대한 부르짖음이 크고 그 죄(헤-트)악이 심히 무거우니
왕상 8:50 주께 범죄(헤-트)한 백성을 용서하시며 주께 범한 그 모든 허물(파-샤)을 사하시고
그들을 사로잡아 간 자 앞에서 그들로 불쌍히 여김을 얻게 하사
그 사람들로 그들을 불쌍히 여기게 하옵소서
<죄>라는 단어의 원뜻이 “과녁을 벗어나다”라면 “과녁이 무엇인가”에 대한 문제 풀이부터 해야 할 것이다.
그 다음에 “왜 벗어났는가”에 대한 문제 해결점으로 접근 해 본다.
첫째 <과녁>.
“목표물”, 또는 “하고자 하는 목적”. 혹은 “필연적으로 해야 되는 일”
이 “목표”는 “하고자 하는 어떤 목적”이며, 이는 인간(人間)이 “하고자 하는 어떤 목적”이
아니라 신(神)이 “하고자 하는 어떤 목적”이다. 곧 “Will of God”이다.
이 “죄의 개념”에서 “과녁에서 벗어나는 원인”은 무엇인가?
여러 가지 이유가 있을 것이다.
‘목표물이 보이지 않았던지’, 아니면 ‘의도적으로 목표물을 보려하지 않았던지’
그것도 아니면 ‘목표물이 오해 됐던지’,
둘째 <목표물의 내용>.
성경에서 사용되는 “화살이 맞추어야할 <목표>”는 신(神)이 “하고자 하는 어떤 목적”이다.
어떤 자의 말처럼 “저절로 우주가 생겨나고, 저절로 발전되어지고,
그리고 현재 저절로 존재되고 있다”고 한다면 “저절로 생겨났으니 저절로 우주가 없어진다.”고 해야 한다.
(‘저절로’는 ‘진화’란 뜻)
논리가 옳은가?
“하고자 하는 어떤 목적”의 그 내용은---
신은 모든 우주 만물을 창조 하실 때 분명히 어떤 목적에 의해서, 계획하시고,
그리고 그 계획대로 완성하시고, 또한 온전한 완성을 위해 계획대로 진행되고 있는 것이다.
그 “신의 계획된 내용”을 기록한 성경은 신(神)이 “하고자 하는 어떤 목적”이다.
신은 우주 만물이 생겨나기 전부터 ‘그리스도의 출현을 계획’하셨고,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라고 기록됨은
<인간의 영원한 구원>이 신(神)의 궁극적 목표가 됨을 설명하는 구절이 된다.
요 17:5 아버지여 창세 전에 내가 아버지와 함께 가졌던 영화로써 지금도 아버지와 함께 나를 영화롭게 하옵소서
엡 1:4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신은 “사람을 흙으로 지으시고 살게 하는 생기(生氣)를
그 코에 불어 넣으니 <생령>이 되었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다.
흙으로 짓고 +생기=생령-이것은 사람 만드는 공식이다.
아마도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라도 ‘혼이 있는 모든 생물’을 만드는 하나님의 공식일 것 같다.
이런 공식에 의해 창조된 사람은 보기에는 좋았지만 ‘영원 할 수 있느냐’에 문제점이 있다.
죽지 않고 거의 천년을 살아온 창세기 5장에 기록된 ‘사람들의 삶은 어떠했을까’
상상 해 본다. 행복했을까?? 불행했을까? 어떻게, 왜 ‘행복하고 불행 했을까’
<하나님의 목표>는 “신(神)이 특정 피조물과 영원히 거하는 것”이다.
“영원히 거하는 존재”는<신(神)이어야만 한다.>는 필연적인 조건이다.
신(神)만이 영원하다. 신(神)이 아니고는 영원 할 수가 없다.
모든 짐승들은 ‘죄를 범하는 범죄’라는 것이 없다.
그 이유는 짐승들에게는 어떠한 율법도 주신일이 없기 때문이며,
율법이 주어 졌다 해도 그 율법을 지킬만한 능력을 소유하고 있지 못하기 때문이다.
신은 ‘지킬 능력이 없는 대상’에게<지켜야 할 법을 주셨다>고 할 수 없다.
사람에게만 그런 능력이 있고, 사람만이 주어진 율법을 “지키던지, 안 지키던지”일 뿐이다.
‘신의 목표에서 벗어난 자’들 중에 짐승들은 없다.
짐승은 신의 목적과 무관하게 지음을 받았기에 짐승에게는 <죄>가 없다.
짐승을 지은 신의 목적은 “잡혀 먹히기 위함”
즉 ‘짐승들은 신과 함께 영원히 거할 계획’이 되어있지 않기 때문이다.
짐승들이 어떻게 태어나든, 어떻게 자라나든, 그 짐승이 동료를 몇이나 물어 죽였던지,
혹은 사람을 몇 명이나 잡어 먹었던지 - “신의 과녁에서 벗어나는 짐승은 없으며,
신의 과녁(목적)과는 무관 한 짐승들이다.”
사람이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를 먹지 아니 했다”면 얼마의 기간 동안
에덴에서 살 수 있을는지는 알 수 없으나(6000년? 아니면 6억년?) 신과 영생하지는 못한다.
혈과 육은 신과 영생할 수 없기 때문이다.
사람은 선악과를 먹음으로 죽을 수 있게 된다.
혈과 육을 가지고는 결코 신의 세계로 갈 수 없다.
혈과 육을 가지고 있으면 신의 목표에서 벗어 난 것이다.
혈과 육이 없어야 신의 세계로 갈 수 있는 조건이 된다.
혈과 육을 가진 사람 자체가 신의 목표에서 벗어 난 것이다.
그러나 누구든지 혈과 육을 가지고 있는 동안(산혼)신의 영을 받아서
<혼과 영(신)의 결합>이라는 <새로운 피조물>이 신으로부터 출생되고,
혈과 육을 가진 사람이 혈과 육을 포기하여 죽을 때
‘혈과 ’육은 흙으로부터 왔으니 본디의 본향인 흙으로 귀향하고,
영은 신으로부터 왔으니 본디의 본향인 신에게로 귀향한다.
단 귀향 때는 결합된 혼과 같이 간다.
혼과 영의 결합은 독립된 하나의<새로운 피조물>이기 때문이다.
대개의 사람들은 선악과를 먹은 것 자체가 <원죄>라고 알고, 그렇게 믿고 있다.
그런 가르침을 누구로부터 오랫동안 받아 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성경에<원죄>라는 단어는 없으며 또한 ‘선악과를 먹은 것이<원죄>’라고
기록된 성경도 없다.
<원죄>란 뜻은
성경은 ‘한 사람 아담의 범죄를 통하여 죄가 세상에 들어 왔고, 죄로 인하여 사망이 왔다’고 기록하고 있다.
억지로 라면 “먹지 말라”는 것을 먹은 “불순종”이<원죄>일 수가 있다.
<죄의 시작>이 되는 것이 원죄(原罪)다. 원조(元祖), 원천(源泉)
모세 출현 오래전부터 있는 죄는 ‘율법을 범함으로 오는 죄’
곧 “[불의](아-와), [허물] (페솨)”가 아니라 “[죄](헤-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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롬 5:12-19 12 그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헤-트,하말티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헤-트, 하말티아)로
말미암아 사망이 들어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헤-트,하말터노)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
13 죄(헤-트, 하말티아)가 율법 있기 전에도 세상에 있었으나 율법이 없었을 때에는
죄를 죄로 여기지 아니하였느니라
14 그러나 아담으로부터 모세까지 아담의 범죄와 같은 죄(헤-트, 하말티아)를
짓지 아니한 자들까지도 사망이 왕 노릇 하였나니 아담은 오실 자의 모형이라(원형, 모형)
15 그러나 이 은사는 그 범죄와 같지 아니하니 곧 한 사람의 범죄를 인하여 많은 사람이 죽었은즉
더욱 하나님의 은혜와 또한 한 사람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말미암은 선물(도레아)은
많은 사람에게 넘쳤느니라
16 또 이 선물은 범죄한 한 사람으로 말미암은 것과 같지 아니하니 심판은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정죄에 이르렀으나 은사는 많은 범죄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심에 이름이니라
17 한 사람의 범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그 한 사람을 통하여 왕 노릇 하였은즉 더욱 은혜와 의의
선물을 넘치게 받는 자들은 한 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생명 안에서 왕 노릇 하리로다
18 그런즉 한 범죄로 많은 사람이 정죄에 이른 것 같이 한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아 생명에 이르렀느니라
19 한 사람이 순종하지 아니함으로 많은 사람이 죄인 된 것 같이 한 사람이 순종하심으로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되리라
누구든지 사단에게 순종하면 사단이 그의 왕이 된다.
롬 6:16 너희 자신을 종으로 내주어 누구에게 순종하든지 그 순종함을 받는 자의 종이 되는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혹은 죄의 종으로 사망에 이르고 혹은 순종의 종으로 의에 이르느니라
요 10:10 도둑이 오는 것은 도둑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뿐이요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
사단이 “우리”의 왕이면 “우리”는 사단의 종이다.
‘사단의 종’이 낳은 후손도 ‘사단의 종’이니 아담과 같은 범죄를 하지 아니하여도
“우리”는 사단의 소유물이며, 그의 종이다.
종은 주인에게 순종되어야 한다. 죽으라면 죽을 수밖에 없다.
사단은 거짓의 아비이며, 사단은“사망 그 자체”이다.
그러므로 “죄를 짓지 아니한 자들이라도 사망이 왕 노릇하여” 모든 사람은 다 죽음에 이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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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으로 갓 태어난 아기의 범죄([불의] 아-와, [허물] 페샤)는 없다.
그러나 <육체로 태어난 자체>가 치명적인 죄이다.
‘육으로는 갈 수 없는 하나님의 나라’
‘육으로는 하나님과 영원히 거할 수 없는 악 조건.
창 6:2-4 2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을 보고 자기들이 좋아하는 모든 여자를 아내로 삼는지라
3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나의 영이 영원히 사람과 함께 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그들이 육신이 됨이라
그러나 그들의 날은 백이십 년이 되리라 하시니라
4 당시에 땅에는 네피림이 있었고 그 후에도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에게로 들어와 자식을
낳았으니 그들은 용사라 고대에 명성이 있는 사람들이었더라
“육체가 됨”은 “하나님의영이 영원히 함께 할 수 없다”는 결론이다.
육체가 되고, 영의 존재가 결혼 생활과 인간의 삶을 사는 것은 육적 존재가 됨이다.
성경에는 ‘사망에 이르는 죄와 사망에 이르지 아니하는 죄’가 있다고 기록되고 있다.
요일 5:16 누구든지 형제가 사망에 이르지 아니하는 죄 범하는 것을 보거든 구하라
그리하면 사망에 이르지 아니하는 범죄자들을 위하여 그에게 생명을 주시리라
사망에 이르는 죄가 있으니 이에 관하여 나는 구하라 하지 않노라
아-와()와 페샤(허물)로 불리는 죄는 사함이 가능할지 모르나
헤-트(죄)는 이 세상과 저 세상에서도 사함이 못되는 “신의 목표에서 벗어 난 것”이 된다.
“신의 목표에 도달하는 길”은 여러 조건들이 있을 것이다.
그 중에 가장 초점이 되는 것은---
혈과 육을 가진 사람이 육신에만 매어 살 때 신의 목표에서 벗어 난 것이다.
혈과 육을 가진 사람이 육신에만 매어 살 때 <죄> 이다.
혈과 육을 가진 사람이 육신에만 매어 살 때 <원죄>가 드러난다.
이 죄에서의 해결은 육적이 아니라 “혈과 육”을 초월 할 수 있는
“신의 과녁(목표)에 맞는 신의 영을 받는 것”만이 해결책이다.
6. 죄, 죄인, 죄의 진정한 본질을 드러낸다.
죄는 거역이다.
곧 선과 악 사이에 하나님께서 두신 경계인 율법을 밟고 넘어가는 것이다.(시 51:1, 눅 15:29)
죄는 죄악이다.
곧 금지된 것으로 명시가 되었던 안 되었던 간에 본질적으로 그릇된 행동이다.
죄는 잘못이다.
곧 옳은 데에서 벗어나는 것이다.(시 51:9, 롬 3:23)
죄는 목표를 벗어나는 것이다.
곧 하나님의 기준을 충족하는 데에 실패한 것이다.
죄는 범죄이다.
곧 하나님의 권위의 영역 안으로 자신의 의지가 침입하는 것이다.(엡 2:1 허물)
죄는 불법이다.
곧 영적인 무정부상태이다.(딤전 1:9)
죄는 불신이다.
곧 하나님의 진실하심을 모욕하는 것이다.
죄는 다음 세 가지로 요약될 수 있다.
1. 죄는 율법을 범하는 것
요한일서 3:4
죄를 짓는 자마다 불법을 행하나니 죄는 불법이라.
2. 죄는 그것이 행동이든지 상태이든지 하나님의 성품에 대해 일치되어야 할 것이지 부족한 것이다.
3. 죄는 본질적으로 하나님을 향한 적의를 가진다.
모든 사람은 두 가지를 충족시키고 있기 때문에 죄인이다.
첫째 있는 그대로의 상태가 죄인으로 규정된다.
이는 의가 없는 모든 인간의 타락한 상태이다.
모든 인간의 자연적 상태가 바로 죄의 상태이다.(롬 5:12)
시 51:5 내가 죄악 중에서 출생하였음이여 어머니가 죄 중에서 나를 잉태하였나이다
시 39:5 주께서 나의 날을 한 뼘 길이만큼 되게 하시매 나의 일생이 주 앞에는 없는 것 같사오니
사람은 그가 든든히 서 있는 때에도 진실로 모두가 허사뿐이니이다 (셀라)
죄는 인간의 본성이다. 즉 인간은 죄를 타고 난다.
그러나 누구든지 구원받으면 옛 사람은 새 사람으로 태어나는 것이며 변화된
새 성품은 하나님의 본성에 동참하게 되는 것이다.(벧후 1:4)
둘째 죄는 행동이다.
죄의 성품이 표출되는 것, 즉 행동으로 옮겨지는 것이 바로 죄들이다.
그러므로 인간은 모태에 있거나, 갓 태어나거나 죽기 직전의 사람이나
누구든지 죄인의 상태에 있으며 죄들을 행하고 있기 때문에 죄인인 것이다.
인간은 허물과 죄 가운데 죽은 상태에서 태어나서, 죄와 더불어 살다가, 죄와 하나가 되어
하나님 앞으로 심판 받으러 돌아간다. 태어날 때부터 진노의 자녀이며 불순종의 자녀이다.(엡 2:1-3)
죄는 아담을 통해서 세상에 들어 왔으며 그 죄는 사단과 함께 온 것이다.
약 1:14-15
롬 5:12
사 14:12-14
죄는 하나님에 대항하여 비방하는 것에 귀를 기울이는 것이며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것에
의심하는 것이다. 로마서1장은 죄 있는 인간의 모습을 잘 설명해 주고 있다.(롬 1:29-31)
그 외에도 성경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고 있다.
롬 3:23, 5:12, 3:10
첫 사람 아담이 지은 죄는 불순종이다.
아담은 선과 악의 지식의 나무의 열매를 먹으면 죽는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아담은 하나님에 대한 믿음도 있고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죽는다는 사실도 믿었다.
그런데 그는 죄를 지었다. 바로 죄는 알면서 짓는 것이다.
그래서 처음 아담이 지은 죄는 불순종이다. 롬 5:12,14,16,17,18,19
한 사람의 불순종으로 인하여
롬 5:12-19
죄는 세상에 들어오지 않을 수도 있었다.
만약 이브에게서 죄가 끝났다면 죄가 세상에 들어오는 것이 불가능했다.
이브는 아담 없이 혼자서 자녀를 낳을 수 없기 때문이다.
아담의 의도적인 죄는 세상으로 들어와 사람들에게 전수되었다.
지금도 아담 안에서 태어난 모든 사람에게서 죄는 계속되고 있다.
시편 51:5 - 이제 모든 사람들은 태어나면서부터 죄인이라는 사실이 분명해졌다.
롬 1;29-31, 갈 5:19-21, 골 3:5,8, 딤전 1:9-10, 고전 6:9-10, 막 7:20-23
50여 가지의 죄들이 기록되어 있다. -
바울은 죄인들의 상태를 이렇게 말한다.
딛 1:15, 딤전 4:2, 전 7:20, 시 39:5 롬 3:4, 요일 1:8,
과녁에 미치지 못한 화살이 하나님의 의에 미치지 못한 인간과 같다.
나무에 열린 열매의 많고 적음에 관계없이 그 나무는 그 열매의 이름에 따라 그 나무로 불려 진다.
그 이유는 그 나무 안에 그 열매를 맺게 하는 씨가 있기 때문이다.
유전 되는 것 가운데는 외양적인 모습뿐만 아니라 성품, 성씨, 성격, 말씨, 행동 등도 부모를 통해 유전된다.
비물질적인 것이 유전되는데 그 가운데 핵심이 죄(의 성품)이다.
그런데 정작 결단코 용서받을 수 없는 죄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씀하신다.
요 16:9에 죄에 대하여 라 함은 그들이 나를 믿지 아니함이요
요 3:18에 그를 믿는 자는 심판을 받지 아니하는 것이요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아니하므로 벌써 심판을 받은 것이니라
요 3:36에 아들을 믿는 자에게는 영생이 있고 아들에게 순종하지 아니하는 자는 영생을 보지 못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진노가 그 위에 머물러 있느니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시는 그리스도의 피를 거절한 사람들은
스스로 참으로 구원받을 길을 거절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요일 1:7에 그가 빛 가운데 계신 것 같이 우리도 빛 가운데 행하면 우리가 서로 사귐이 있고
그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7. 사망에 이르는 죄(요한일서 5:16-17)
누구든지 형제가 사망에 이르지 아니하는 죄 범하는 것을 보거든 구하라 그리하면 사망에 이르지 아니하는 범죄자들을 위하여 그에게 생명을 주시리라. 사망에 이르는 죄가 있으니 이에 관하여 나는 구하라 하지 않노라.
모든 불의가 죄로되 사망에 이르지 아니하는 죄도 있도다.
사망에 이르는 죄(사망에 이르지 아니하는 죄?)
예수님을 믿고 구원을 체험한 사람이라 할지라도 실수로 혹은 일시적인 미혹에 빠져서 죄를 범할 수 있다.
그런 죄는 회개하면 즉시 죄 사함을 받을 수 있다.
그러나 사함을 얻지 못하는 죄가 있는데 그것을 마 12:31-32에서는 "성령을 훼방하는 죄"로 표현하고 있다. 하나님 아버지를 거역했을 때는 아들의 중보로 사함 받을 수 있는 길이 있다. 아들 되시는 예수님을 거역했을 때는 성령님의 중보로 사함 받을 수 있는 길이 있다. 그러나 성령님을 거역하면 더 이상 중보자가 없기 때문에 사함 받을 수 있는 길이 없다는 것이다.(현재시대)
*성령을 훼방하는 가장 흔한 죄 중의 하나가 성령의 감동으로 기록된 성경을 부인하는 것이다.
제일 두려운 것이 있다면 하나님의 말씀이다.
왜냐하면 성경을 믿지 못하면 하나님을 무시한 죄가 되고, 하나님의 말씀을 저버리면
하나님을 업신여긴 죄가 되기 때문이다. 이것이 성령훼방죄가 된다.
사망에 이르는 죄의 또 하나의 유형은 히 6:4-6, 10:26-27에 기록되어 있다.
한번 비췸을 얻고 하늘의 은사를 맛보고 성령에 참예 한 바 되고
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내세의 능력을 맛보고 타락한 자들은 다시 새롭게 하여 회개케 할 수 없다고 했다.
*받은바 은혜를 배신하는 행위는 회개하여 사함 받을 수 없다는 것이다.
*십계명 가운데 제1계명부터 제4계명을 범하는 것 - 우상숭배 죄,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 죄, 사망에 이르는 죄 (마 22:37-39)
요한계시록 22:18-19 18 내가 이 두루마리의 예언의 말씀을 듣는 모든 사람에게 증언하노니
만일 누구든지 이것들 외에 더하면 하나님이 이 두루마리에 기록된
재앙들을 그에게 더하실 것이요
19 만일 누구든지 이 두루마리의 예언의 말씀에서 제하여 버리면
하나님이 이 두루마리에 기록된 생명나무와 및 거룩한 성에
참여함을 제하여 버리시리라 - 구원받지 못함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 너희 아비의 욕심을 너희도 행하고자 하느니라 저는 처음부터 살인한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없으므로 진리에 서지 못하고 거짓을 말할 때마다 제 것으로 말하나니 이는 저가 거짓말장이요 거짓의 아비가 되었음이니라.
You belong to your father, the devil, and you want to carry out your father's desire. He was a murderer from the beginning, not holding to the truth, for there is no truth in him. When he lies, he speaks his native language, for he is a liar and the father of lies.
죄(罪)
하나님의 말씀을 믿지 못하는 불신으로 인간을 항상 욕심과 거짓과 미움에 갇혀 살게 만들고 죽음을 두려워하는 것.
하나님의 말씀을 알려하지 않는 것
- 말씀을 깨닫지 못하는 것(노력 없는 상태)
사람은 존귀하나 장구치 못함이여 멸망하는 짐승 같도다.
But man, despite his riches, does not endure; he is like the beasts that perish.
존귀에 처하나 깨닫지 못하는 사람은 멸망하는 짐승 같도다.
A man who has riches without understanding is like the beasts that perish.
레위기 5대 제사
번제(燔祭) / 구울 번(燔), 제사 제(祭)
번제(燔祭) / 구울 번(燔), 제사 제(祭)
Burnt Offering
히브리어 / 올라 <올라간다>
번제(Burnt Offering)
1) 어의
번제를 뜻하는 히브리어 '올라'( )는 '올라가다', '실어 올리다', '높이다'라는 뜻의 '아라'( )에서 파생된 것으로서 '위로 드려지는 제사', '위로 올라가는 제사'를 뜻한다. 이러한 단어의 의미는 불에 태워진 희생 제물의 향기가 하나님께 상달된다는 의미를 포함하고 있다.
2) 제물의 종류
번제에 사용된 제물은 수송아지, 수양, 수염소, 혹은 비둘기인데, 이 모든 제물은 반드시 흠없고 일년 된 수컷임을 그 특징으로 하였으나 비둘기에 대해서만은 수컷이나 암컷 중 어느 것을 드리라는 특별한 지시가 없다.
3) 번제의 방법
① 헌제자가 제물이 될 짐승을 끌고 회막문 여호와 앞으로 나아온다.
② 헌제자의 손을 제물의 머리 위에 얹고 안수한다.
③ 헌제자가 제물을 잡아 피를 제사장에게 주면 제사장은 그 피를 번제단 사면
에 뿌린다.
④ 헌제자가 제물의 가죽을 벗기고 각을 뜬다.
⑤ 제사장은 그 뜬 각과 머리와 기름, 그리고 물로 씻은 내장과 정강이를 단 위
에서 불 사른다.
이러한 방법은 양과 염소의 경우 역시 마찬가지였으나 비둘기의 경우는 달라서 제사장 혼자서 머리를 비틀어 끊고 단 위에 불사르며 피는 단 곁에 흘리고 멱통과 창자 등은 재 버리는 곳에 버리고 몸은 쪼개어 단 위에서 불살랐다.
4) 번제의 목적
번제의 목적은 두 가지로 나타난다. 그 첫번째는 '속죄를 위한 것'(레1:4,16:24)인데 대부분의 주석가들이 속죄제와 속건제가 죄를 속하기 위해 드려지는 제사라는 점을 들어 이 목적을 등한시 여기거나 그냥 지나쳐 버리려 하지만 번제의 주된 목적은 성경이 밝히 말해 주고 있는 대로 '속죄를 위한 것'이다. 번제의 두번째 목적은 '하나님을 향한 자신의 헌신에 대한 표현'이다. 이러한 목적은 창22장에 나오는 아브라함의 순종에서 잘 나타나는데 그는 자신의 순종과 믿음의 증명을 위해 자신의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바치려 하였고, 그러한 믿음과 순종을 인정하신 여호와께서는 그를 위해 미리 준비해 놓으신 양을 제물로 삼아 번제를 드리게 하심으로 아브라함의 헌신과 믿음을 인정하셨다.
5) 번제의 영적 의미
번제는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과 구원의 희생을 상징'함과 동시에 그의 희생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은 성도들이 하나님께 헌신하고 그의 뜻대로 순종하며 살아갈 것을 상징한다. 그러므로 번제의 영적 의미는 한마디로 '그리스도의 희생과 성도들의 헌신'이라고 할 수 있다
먼저 속죄제를 통해서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모든 잘못된 것을 제거하여 정결케 하고 이제는 전적으로 헌신을 상징하는 번제를 드립니다.
번제는 온 삶과 생명 전체를 하나님께 바치는 헌신을 의미합니다.
보잘 것 없는 사람을 하나님과 백성들의 중재자로 세워주시니 얼마나 감사합니까? 그 은혜를 생각하면 죽기까지 충성하기로 헌신을 다짐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저도 목사 안수를 받을 때 하나님의 은혜가 너무나 크고 감사하여 눈물이 핑 돌았던 경험이 있었습니다.
저드슨(1788-1850)이 대학을 거쳐 신학교를 졸업하자 보스톤시에 있는 상류층의 교회에서 부목사로 와 달라는 초빙을 받았습니다. 그의 동료 친구들은 모두 부러워하며 집의 어머니와 누이도 매우 기뻐했습니다. 그러나 저드슨은 고개를 흔들었습니다.
"하나님은 나를 해외선교에 쓰시려고 부르셨습니다. 내가 이곳에 남아서 일을 해도 주님의 일을 하는 것이지만 나는 부분적으로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이 됩니다. 나는 주님께 전체로 순종하렵니다."
안일한 자리를 물리친 저드슨은 결국 철통같은 불교의 나라 미얀마(버마)에 선교사로 갔습니다. 그곳은 너무나도 어려운 곳이었기에 목숨을 바칠 각오로 일했으나 처음의 한 사람을 전도하여 세례를 베푸는데 무려 6년간의 갖은 고생을 다 했습니다. 저드슨은 오랜 기간을 버마의 감옥에서 지나기도 했고 죽음과 질병의 고비도 몇 번이나 넘겼습니다. 그러나 저드슨의 거룩한 헌신은 5만 명이라는 크리스천을 미얀마(버마)땅에 탄생시키고 전세계의 크리스천들의 마음에 꺼지지 않는 횃불을 밝히 켜 놓은 것입니다.
제사장은 자신의 욕망이나 정욕을 죽이고 마침내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드리는 일꾼입니다. 제사장이 되어 임직을 행하기 전에 먼저 희생을 각오하는 번제물이 되어야 합니다.
어떤 사람이 진정 헌신의 사람이 될 수 있을까요?
감사하는 마음을 가진 사람이 헌신의 사람이 됩니다. 바울의 고백을 들어보십시오.
딤전 1:12 나를 능하게 하신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께 내가 감사함은 나를 충성 되이 여겨 내게 직분을 맡기심이니
사랑하시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의
죄를 용서하여 주시고 일꾼으로 세워 주신 은혜를 감사하게 생각하십니까? 그렇다면 죽도록 충성하며 헌신하기를 다짐하십시오.
하나님은 자기 일꾼들이 온전히 헌신하시기를 소원하고 있습니다. 손에 쟁기를 잡은 일꾼이 뒤를 돌아보면 안됩니다. 주님만 바라보아야
합니다.
소제(素祭) / 힐 소(素), 제사 제(祭)
- 성품, 변화(고운가루)(자아 파쇄)
파쇄(破碎) - 깨트릴 파, 부술 쇄 / 깨어져 부스러짐. 또는 깨뜨려 부스러뜨림. 부숨. 부서짐.
소제(素祭) / 힐 소(素), 제사 제(祭)
Grain Offering
Serial Offering
Meat Offering
히브리어 / 민하 <선물>
소제(Grain Offering)
1) 어의
소제를 뜻하는 히브리어 '민하'( )는 '분배하다', '수여하다'라는 의미의 어근 '마나'( )에서 유래한 것으로 '헌물', '조공', '희생 제물'을 뜻하는데 특별히 '피 없는 곡물 제사'에 사용되어 말 그대로 '소제', 또는 '피 없는 곡물 제사'를 뜻한다.
2) 제물의 종류
소제에 드려진 제물의 종류는 모두 네 가지였다. 그 첫째는 '고운 가루'로서 여기에는 '기름'과 '유향'이 첨가된다. 둘째는 누룩을 넣지 않고 '고운 가루'에 '기름'을 섞어 만든 '무교병'으로서 무교병을 만드는 방법은 '화덕에 구운 것'(레2:4)과 '번철에 부친 것'(레2:5), 그리고 '솥에 삶은 것'(레2:7)의 세 가지였다. 소제물의 세번째는 '처음 익은 곡식'이었으며, 네번째는 '첫이삭'이었는데 특별히 첫이삭을 소제물로 드릴 때는 볶아 찧은 것에다 기름과 유향을 드려야 했다.
3) 소제의 방법
소제를 드리는 방법은 제물을 제단으로 가져오기 전에 집에서 제물을 준비하는 것에 더욱 주목해야 하는데 그것은 제물을 준비하는 과정 자체가 소제를 드리는 방법에 속하기 때문이다.
첫째, 고운 가루의 소제물일 경우에는 그 위에 기름을 붓고 유향을 놓은 후 제사장에게로 가져오는데 제사장은 고운 가루 한 줌과 모든 유향을 취하여 기념물로 제단 위에 불사른 후 나머지는 자신의 음식으로 취한다.
둘째는, 무교병을 소제물로 삼을 경우인데 이 때는 화덕에 구운 것과 솥에 삶은 것은 고운 가루에 기름을 섞어 만들고, 번철에 구울 경우에는 고운 가루를 누룩 없이 기름과 섞어 구운 후 조각으로 나누고 그 위에 기름을 붓는다. 이러한 무교병의 소제물 역시 제사장에게로 가져가면 제사장은 그것 중 기념할 만큼만 취하여 여호와께 화제로 드리고 나머지는 자신의 음식으로 취하였다.
셋째는, 첫이삭을 드릴 경우인데 이 때는 반드시 그 곡식을 볶아야 하며 그 위에 기름을 붓고 유향을 더한 후 제사장에게로 가져가야 하며 제사장은 그중 얼마와 모든 유향을 취하여 여호와께 화제로 드린 후 나머지는 자신의 음식으로 취하였다(이때의 나머지에 대해 성경의 특별한 언급이 없지만 소제물이 제사장의 음식으로 주어졌다는 일반적인 규례를 따를 때 첫이삭의 소제물 역시 제사장의 음식으로 주어진 것으로 보아야 한다). 한편 이러한 모든 소제물에 반드시 지켜야 할 법칙이 한 가지 있는데 그것은 모든 소제물에는 누룩과 꿀을 넣지 말고 반드시 소금을 치라는 것이었다.(레2:11,13)
4) 소제의 목적
소제의 목적 역시 두 가지로 볼 수 있는데
첫째는 우리가 삶을 영위할 수 있도록 물질을 공급하여 주시고 보호하여 주신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에 감사하며 경배 돌리기 위함이며,
둘째는 자신의 땅을 가지고 있지 않은 제사장과 레위인에게 음식을 제공하여 그들을 보호하기 위한 것이었다.
5) 소제의 영적 의미
소제의 영적 의미는 우리를 구원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늘로부터 내려오는 영적 양식의 공급자가 되실 뿐만 아니라 자신 스스로 생명의 떡이 됨을 상징하는 동시에(요6:32-35), 이러한 영적 양식과 일용할 육적 양식까지도 공급받는 성도들이 드려야 할 감사의 의무를 상징한다. 한편 모든 소제물에 '소금'을 치라는 명령은 '영원한 계약'을 상징하는 '소금'(민18:19,대하13:5)을 통해 제사 드리는 자가 하나님과의 영원한 계약 관계에 있음을 깨닫게 하는 것으로서 하나님께서 제사 드리는 자를 결코 버리지 않을 것과 제사 드리는 자는 그 계약법을 지켜야 할 영원한 의무가 있음을 뜻하는 것이다. 이렇듯 하나님과의 영원한 계약 관계에 있는 자는 죄악과 세상의 유혹에서 떠나야 하는데 이러한 사실은 죄악을 상징하는 '누룩'과 달콤한 세상의 유혹을 상징하는 '꿀'을 모든 소제물에서 제하라는 하나님의 준엄하신 명령으로 주어졌다.
화목제(和睦祭) / 화목할 화(和), 회복할 목(睦), 제사 제(祭)
- 관계회복, 교제
화목제(和睦祭) / 화목할 화, 회복할 목, 제사 제
Fellowship Offering(7:13)
Peace Offering(7:37),
Freewill Offering(7:16) 자원제, 신명기 12:17, 낙헌 예물
히브리어 / 제바흐 쉘라밈 <제물, 평화>
화목제(Peace Offering)
1)어의
화목제를 뜻하는 히브리어 '제바흐 쉐라밈'( )은 '동물을 살육하다', '죽이다', '제사 드리다'라는 뜻의 '자바흐'( )에서 파생된 '도륙', '희생물'을 뜻하는 '제바흐' )와 '완전한', '정다운', '공평한', '평화로운'을 뜻하는 '솨렘' )에서 파생된 '쉐라밈'( )의 합성어로서 그 의미는 '사람이 하나님과의 완전한 관계', 또는 '평화로운 관계를 얻고자 하는 희생 제물'이라는 의미이다.
2) 제물의 종류
⑴ 소와 염소 : 흠 없는 것으로서 암컷,수컷 구별 없이 어느 것이든 가능하다. 그러나 전부를 드리는 것이 아니라 내장에 덮인 기름과 내장에 붙은 모든 기름, 그리고 두 콩팥과 그 위의 기름, 허리 근방에 있는 것과 간에 덮인 꺼풀을 콩팥과 함께 드리도록 되어 있었다.
⑵ 양 : 소와 마찬가지로 흠 없는 것으로 하되 암,수 어느 것이든 가능하였고, 어린 양을 드릴 수도 있었다. 양의 경우 역시 양의 기름만을 드리되 미려골(등심뼈 또는 척추)에서 베어 낸 기름진 꼬리와 내장에 덮인 것과 모든 기름진 두 콩팥과 간에 덮인 기름과 꺼풀만을 콩팥과 함께 드릴 수 있었다.
3) 화목제의 방법
화목제를 드리는 방법은 번제의 방법과 거의 유사한데 그 순서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① 헌제자가 제물이 될 짐승을 끌고 여호와 앞으로 나아온다.
② 헌제자의 손을 제물의 머리 위에 얹고 안수한다.
③ 헌제자가 제물을 잡아 피를 제사장에게 주면 제사장은 그 피를 번제단 사면에 뿌린다.
④ 헌제자가 제물의 가죽을 벗기고 그 속의 내장에 덮인 기름과 내장에 붙은 모든 기름과 콩팥과 그 위의 기름과 허리 근방에 있는 것과 간에 덮인 것을 제사장에게 주면 제사장은 그것들을 받아 제단에서 불사른다.
⑤ 제물의 가슴은 '요제'로 제물의 우편 뒷다리는'거제'로 흔들어 제사장의 음식으로주어지는데 제사장과 가족들은 그것을 그날에 다 먹어야 하며 남은 것은 불에 태워야 했다.
4) 화목제의 특색
화목제는 다른 제사와는 달리 두 가지의 특색이 있었다. 그것은 첫째로, 의무적인 제사가 아닌 '선택적인 제사'로서 '자원함으로나'(레7:16), '서원함으로'(레7:16,삼상1;21이하), 그리고 '감사함으로'(레7:15)드리는 제사였으며, 둘째로, 화목 제물의 고기를 헌제자도 먹을 수 있는 일종의 축제 형식의 제사였다는 점이다(레7:15-21)
5) 화목제의 영적 의미
화목제의 영적 의미는 화목제의 성격이 드러내는 바 그대로 하나님과 죄인을 화목케 하는 '화목 제물되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상징'과(롬 3:25, 엡 2:13 ,골 1:20), 그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목을 누리는 성도들의 친교인 '성만찬에 대한 예표'이다(고전 10:16)
헌신을
상징하는 번제의 수양을 드린 후에 따 다른 수양, 곧 위임식 수양을 제물로 드렸습니다.
속죄제, 번제, 화목제의 제사를 드릴
때마다 아론과 그의 아들들은 제물 위에 안수하였습니다.
모세는 위임식 수양을 잡고 그 피를 취하여 아론의 오른 귓부리와 오른 손
엄지가락, 오른 발 엄지가락에 피를 발랐습니다.
그의 아들들에게 같은 예식을 거행하였습니다.
이것은
제사장들의 귀도, 손도, 발도 하나님을 위하여 성별 되었음을 의미합니다.
먼저 아론과 그의 아들들의 오른 귓부리에 피를 바른
의미가 무엇인지 생각해 봅시다.
제사장은 먼저 귀를 성별 하여 하나님의 명령하심에 귀를 기울여야 함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귀로
하나님의 말씀만 들으라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듣는 것이 중요합니다.
아담과 하와는 마귀의 음성에 귀를 기울였다가 타락하였습니다.
가룟 유다도 마귀의 음성에 귀 기울였다가 하나님의 아들을 팔아먹는 배신자가 되었습니다.
사람은
듣는 것을 조심해야 합니다.
성경에서 귀 있는 자는 들으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귀가 따로 있다는
말씀입니다.
여러분들에게는 그런 귀가 있습니까? 오직 주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시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잠언 5:1-8
내 아들아 내 지혜에 주의하며 내 명철에 네 귀를 기울여서.
근신을 지키며 네 입술로 지식을 지키도록 하라.
대저 음녀의 입술은 꿀을 떨어뜨리며 그 입은 기름보다 미끄러우나.
나중은 쑥같이 쓰고 두 날 가진 칼같이 날카로우며.
그 발은 사지로 내려가며 그 걸음은 음부로 나아가나니.
그는 생명의 평탄한 길을 찾지 못하며 자기 길이 든든치 못하여 그것을 깨닫지 못하느니라.
그런즉 아들들아 나를 들으며 내 입의 말을 버리지 말고.
네 길을 그에게서 멀리하라 그 집 문에도 가까이 가지 말라.
오른
귓부리에 피를 바른 후에 오른손 엄지가락과 오른발 엄지가락에 피를 발랐습니다.
손과 발은 행위를 나타냅니다.
특히 오른 쪽은
힘과 능력을 상징합니다.
이것은 자신에게 주신 힘과 능력을 다하여 주님만을 위하여 행동하겠습니다 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또한
이 피는 제사장들의 옷에도 뿌려졌습니다.
관유와 피가 그들의 옷에 뿌려짐으로 그들의 입는 예복이 거룩하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보혈과 성령의 기름 부으심이 없다면 우리가 결코 거룩하게 될 수 없음을 가리켜 주는 것입니다.
모세는 화목제물과 소제물을 아론과 그 아들들의 손에 두어 여호와 앞에 흔들어 요제를 삼게 하였고 모세가 그들의 손에서 취하여 단 윗 번제물 위에 불사르니 이는 향기로운 냄새를 위하여 드리는 위임식 제사였습니다.
위임식 수양으로 드리는 화목제물 가운데서 모세의 응식은 무엇이었습니까?
수양의 가슴이었습니다.
그리고 나머지는 아론과 그 아들들에게 위임식 광주리의 떡과 함께 회막 안에서 삶아 먹고 나머지는 불사르도록 하였습니다.
이렇게 모든 의식을 마치고 아론과 그의 아들들은 제사장이 되었습니다. 성막은 아무나 다가설 수 있는 곳이 아니었습니다. 거룩한 영역을 침범하는 자는 죽임을 당하였습니다. 아론과 그의 아들들은 거룩한 제사 의식을 수행하기 위해 위험한 곳에서 일하였습니다. 이곳은 삶과 죽음이 교차하는 곳이었습니다. 이제 이들은 그 안에서 머물 수 있는 안전한 통과가 주어졌습니다. 삶과 죽음 사이에 있는 제사장들은 거룩한 곳과 비거룩한 곳, 삶과 죽음 사이의 중보자로서 살게 된 것입니다.
위임제는 제사의 종류가 아닙니다. 제사장을 세우는 위임식 제사를 의미합니다. 이 의식은 7일간 계속되었습니다. 제사장은 7일 동안 회막에서 나오지 못합니다(33,34). 성막에는 의지나 쉴 곳이 없다는 것이 특징입니다. 7일 동안 그들은 편히 누워서 잠도 못 자고 철야를 하면서 지냈을 것입니다. 매일 수송아지 한 마리로 속죄제를 드리고, 아침저녁으로 어린양 한 마리씩으로 번제와 소제를 겸하여 바쳤을 것입니다(출 29:36-39).
이와 같이 7일 동안 위임식이 거행된 것은 제사장의 직분이 얼마나 거룩하고 큰 직분인가를 알 수 있습니다. 후일에 대제사장은 최고의 권위자로 나타납니다.
그러나 인간의 중보자는 영원하지 못하다는 흠이 있습니다. 죽을 수밖에 없는 인간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보내주신 영원히 살아 계신 대제사장이 계십니다. 그분이 바로 우리의 구주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히브리서 4:14-16
그러므로 우리에게 큰 대제사장이 있으니 승천하신 자 곧 하나님 아들 예수 시라 우리가 믿는 도리를 굳게 잡을지어다.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 연약함을 체휼하지 아니하는 자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한결같이 시험을 받은 자로되 죄는 없으시니라.
그러므로 우리가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
속죄제(贖罪祭) / 속죄할 속(贖), 허물 죄(罪), 제사 제(祭)
Sin Offering
Purification Offering
히브리어 / 하타트(chaṭṭâʼth) 2403. חַטָּאָת
1. 죄
2. 우상에 대해 적용되기도 함
3. 속죄제
발음
/ 하타트(chaṭṭâʼth)
어원 / 2398에서 유래
관련 성경 / 죄(창 4:7, 레 4:3, 대하 6:25), 죄악(창 18: 20,사 5:18), 속죄제(출 29:14, 민 15:27,
왕하 12:16), 속죄 제물(레 4:32, 민 8:8, 대하 29:23), 속죄 희생(레 4:25), 허물(레 5:6),
잘못(레 5:10,11), 속죄(레 10:19, 민 8:7), 속건제(레 7:7), 번제(레 4:29), 죄악(시 32:5, 애4:6),
죄인(잠 5:22, 13:6), 벌(슥 14:19). [동] 범죄하다(느 1:6, 욥 35:3).
구약 성경 / 221회 사용
속죄제 : 하나님의 계명을 범한 죄에 대한 제사
속건제 : 손해를 입힌 것에 대한 보상을 위한 제사
속죄제(Sin Offering)는 하나님의 계명을 범한 죄에 대한 제사를 말합니다.
속죄제의 제물은 신분에 따라 그 종류가 달라질 수 있습니다.
제사장은 "흠 없는 수송아지"(4:3)
온 회중은 "수송아지"(4:13)
족장은 "흠 없는 수염소"(4:23)
평민은 "흠 없는 암양이나 암염소"(4:28)
이 외에도 가난한 자는 "산비둘기"나 "집비둘기"를 제물로 드릴 수 있었으며(5:7), 이보다 더 가난한 자는 고운 가루 에바 십분의 일을 제물로 드릴 수 있습니다(5:11)
속죄제의 영적인 의미는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신 후 무덤에 장사되었을 때 안식 후 첫날 새벽에 막달라 마리아와 여자들이 준비한 향품을 가지고
무덤에 찾아갔을 때 무덤은 열려 있었고 찬란한 옷을 입은 두 천사가 “어찌하여 산자를 죽은자 가운데서 찾느냐? 그가 여기 계시지 않고 말씀하시던 대로 살아나셨느니라”라고 일러주었습니다.
막달라 마리아와 다른
여자들이 제자들에게 달려가 부활의 사실을 알렸을 때 사도들은 믿지 않았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분명한 사실이었지만 제자들에게 체험되지 않은 사건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부활은 제자들에게 신앙 사건화가 되지 못했습니다.
따라서 오늘날도 속죄제의 제사를 통하여 예수님의 부활을 나의 신앙으로 사건화하지 못하면 도저히 믿을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2023년 전 갈보리 언덕에서 일어났던 십자가 사건은 곧 주께서 나를 위하여 죽으신 사건이었으며 주님의 부활은 곧 나를 위한 부활 사건으로 인정할 때에 신앙의 사건화가 일어날 것입니다.
이러한 신앙은 종말에 나타날 메시야의 구원사건( Salvation
Event) 이라고 합니다.
3) 속죄제의 방법
① 헌제자가 제물이 될 짐승을 회막문 여호와 앞으로 가져온다.
② 헌제자의 손을 제물의 머리 위에 얹고 안수한다.
③ 헌제자가 제물을 잡아 피를 제사장에게 주면 제사장은 그 피를 손가락으로 찍어 성소 앞에 일곱 번 뿌리고 향단 뿔에 바른 후 회막 앞과 번제단 밑에 전부 쏟는다.
④ 희생 제물의 모든 기름과 콩팥을 번제단 위에서 불사른 후 그 나머지 부분은 진 바깥 재 버리는 정결한 곳에서 나무 위에 놓고 불사른다. 그러나 아론과 그 아들들을 위한 속죄제는 진 밖에서 불사르지 않고 다리와 고기를 회막 뜰에서 구워 먹도록 하였다(레6:24-27)
1) 어의
속죄제를 뜻하는 히브리어 '하타트'( )는 '과녁에서 벗어나다', '죄를 짓다', '속죄물을 드리다', '속죄하다'를 뜻하는 '하타'( )에서 파생된 것으로 '하나님의 법에서 벗어난 죄로부터 청결과 속죄함을 얻기 위하여 드리는 제사'를 뜻한다.
2) 제물의 종류
속죄제의 제물은 범죄자의 사회적인 위치에 따라 달랐다.
① 제사장 -- 흠 없는 수송아지를 드림(레4:3)
② 온 회중 -- 수송아지를 드림(레4:13)
③ 족장 -- 흠 없는 수염소를 드림(레4:23)
④ 평민 -- 흠 없는 암양이나 암염소를 드림(레4:28)
이 외에도 가난한 자는 산비둘기나 집비둘기를 제물로 드릴 수 있었으며(레5:7), 이보다 더 가난한 자는 고운 가루 에바 십분의 일을 제물로 드릴 수 있었다(레5:11)
3) 속죄제의 방법
① 헌제자가 제물이 될 짐승을 회막문 여호와 앞으로 가져온다.
② 헌제자의 손을 제물의 머리 위에 얹고 안수한다.
③ 헌제자가 제물을 잡아 피를 제사장에게 주면 제사장은 그 피를 손가락으로 찍어 성소 앞에 일곱 번 뿌리고 향단 뿔에 바른 후 회막 앞과 번제단 밑에 전부 쏟는다.
④ 희생 제물의 모든 기름과 콩팥을 번제단 위에서 불사른 후 그 나머지 부분은 진 바깥 재 버리는 정결한 곳에서 나무 위에 놓고 불사른다. 그러나 아론과 그 아들들을 위한 속죄제는 진 밖에서 불사르지 않고 다리와 고기를 회막 뜰에서 구워 먹도록 하였다(레6:24-27)
4) 속죄제와 속건제의 차이
속죄제의 목적은 '범죄에 대한 용서'를 위한 것이었다. 그런데 이러한 목적은 속건제의 경우 역시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이 둘은 근본적인 차이가 있다.
첫째는, 범죄의 성격적 차이로서 속죄제가 하나님께 범죄한 자, 즉 '율법을 범한 죄'를 위한 제사였던 반면에, 속건제는 인간에게 범죄한 죄, 즉 '도덕적인 범죄의 대속을 위한' 제사였다.
둘째는, 속죄제는 속건제와는 달리 '범죄한 일을 배상할 수 없는 죄'에 대한 용서를 구하는 제사였던 반면, 속건제는 '배상이 가능한 죄'에 대한 용서를 구하는 제사였다는 점이다.
5) 속죄제의 영적 의미
속죄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를 지심으로 모든 인류의 죄를 대속하신 '그리스도의 대속 사역'을 상징한다. 그리스도는 실로 속죄 희생의
어린 양이 되셔서(벧전1:19) 모든 인류의 대속물이 되셨는데, 그의 죽음의 장소는 속죄제 희생 제물이 진 바깥 정결한 곳에서
불살라진 것처럼 예루살렘 성 바깥의 골고다 산상의 고통스런 십자가였다.
Q :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 사건은 이미 2016년 전에 일어났던 고대 사건인데요. 이 고대의 사건을 오늘을 사는 현대인들에게 전도로 믿게 하려면 쉽지 않는 줄 압니다. 어떻게 십자가 사건과 부활의 고대 사건을 현재의 우리에게 적용시켜 믿게 하는 것이 가능한지요?
A :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신 후 무덤에 장사되었을 때 안식 후 첫날 새벽에 막달라 마리아와 여자들이 준비한 향품을 가지고 무덤에 찾아갔습니다. 무덤에 가보니 무덤은 열려 있었고 큰 돌은 굴려져 있었습니다. 그때 찬란한 옷을 입은 두 천사가 말합니다. “어찌하여 산자를 죽은자 가운데서 찾느냐? 그가 여기 계시지 않고 말씀하시던 대로 살아나셨느니라” 그래서 막달라 마리아와 다른 여자들이 제자들에게 달려가 그 부활의 사실을 흥분하여 알렸을 때 사도들은 저희 말이 허탄한 듯이 보여, 믿지 아니했다고 했습니다. 문제는 분명히 예수님의 부활 사건이 확실한 사건이었지만 그것이 제자들에게 체험되어지지 아니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부활 사건이 그들에게 신앙 사건화가 되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 사건은 신학적으로 말한다면 “종말에 나타난 메시야의 구원사건”( Salvation
Event)이라고 부릅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이 과거의 사건이 나와 무슨 관계가 있느냐는 것입니다.
그래서 중요한 것은
2016년 전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으심이 나를 위한 죽음의 사건이 되고 그리스도의 부활 사건이 바로 나를 위한 부활 사건으로
적용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즉 신앙사건화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사건이 나를
위한 신앙사건화가 되기 위해서는 성령님의 중재가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과 부활사건은 2023년전 고대의 사건입니다.
우리와는 엄청난 시간적인 갭이 있습니다.
고대의 구원의 사건이 우리에게 생생하게 믿어지려면 성령님이란 중개자가 필요합니다.
중매자는 전혀 알지 못하는 남남의 관계를 가장 가까운 부부의 관계로 연결시킵니다.
성령님은 예수님의 영이시기에 고대의 예수님과 현재의 우리를 연결시켜줍니다.
성령님은 하늘의 예수님과 땅의
우리들을 연결시켜줍니다.
그래서 성령님의 역사로 감동 감화하시면 그리스도의 사건이 바로 현재 나를 위한 사건으로 의심 없이
받아들여지고 그리스도의 죽음이 나와 개인적인 관계를 맺게 하고 그리스도의 부활이 내생명과 절대적인 관계에 임하게 만들어줍니다.
그래서 결국은 그리스도가 나의 구세주요 주인으로 믿고 고백하게 연결시켜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부활절 후에 성령님이 강림해서
그리스도의 사건을 믿게 하기 위해 이 땅에 찾아오신 것입니다.
이 성령님은 그리스도를 믿게 하는 그리스도의 영이신 것입니다.
중매의 영이십니다.
전도하면 성령님이 역사하여 고대의 십자가 사건이
나를 위한 사건이었다고 의심 없이 믿게 하는 것입니다. 이게 기적입니다.
헬라인이란 혈통적으로 그리스 인들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헬라인이란 지혜와 지식을 숭상하는 부류의 사람들을 가리킵니다.
요즈음 말로 헬라인을 정의한다면 세상 고등 교육을 잘 받은 지성인이라는 말입니다.
이들은 십자가를 어떻게 보고 있습니까?
십자가를 foolish하다, 즉 미련하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 사람들은 십자가는 미련한 것이기에 그 십자가 안에는 참된 지혜를 찾을 수가 없다고 말합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십자가를 경멸합니다.
그들은 철학을 통하여 사물의 근본을 밝히려고 노력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의 지성적인 눈에는 십자가는 천하기 그지없습니다.
두 번째 부류의 사람은 유대인들
유대인들은 이성으로 논리를 추구하는 것을 좋아하기보다는 신앙으로 기적이 일어나는 것을 보기 좋아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22절에서 헬라인은 지혜를 추구하지만 유대인들은 표적을 찾는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유대인들이 메시야를 기다릴 때에도 메시야라고 주장하는 사람이 진짜 메시야인지 아닌지를 구별하는 척도도 메시야로서의 표적을 행했는가에 달려 있습니다.
이런 관점에서 본다면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는 유대인의 관점에서 본다면 전혀 메시야의 자격을 갖추지 못한 분입니다.
십자가에 달려서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절규하면서 하나님께 원망하면서 십자가 위에서 운명하신 예수를 메시야라고 볼 수가 없지요.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메시야는 힘과 능력을 가지고 있어서 로마를 뒤집어 엎어 버리고 이스라엘의 영광을 되찾아 주는 분이 되어야 합니다. 그런 기대를 우리 주님 예수에게서 유대인들을 볼 수가 없었습니다. 범죄자의 한 사람으로 수치스럽게 맥없이 나무 위에서 죽었던 나사렛 출신의 목수를 유대인들이 어떻게 메시야로 믿을 수가 있었겠습니까?
세 번째 부류의 사람들은 십자가를 자랑하는 사람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 형틀에 달리어서 죽었습니다. 그런 수치스러운 십자가를 우리들은 자랑합니다. 왜냐고요? 23절과 24절 말씀에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며 하나님의 지혜이기 때문입니다. 18절에 기록되어 있는 데로 십자가의 도, 즉 십자가의 메시지는 현재 영적으로 멸망 당하여 있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현재에 얻어 가지고 있는 우리들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기 때문입니다.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가 누구입니까? 오늘 우리들에게는 2천년이라는 시간의 갭이 있어서 십자가가 미화되어 있습니다. 십자가의 이미지는 오늘 현대를 사는 우리들에게는 아름답고 고상합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 당시의 십자가는 그야말로 처절한 십자가입니다. 피를 흘리면서 고통 스럽게 죽어 가는 처형대라는 말입니다. 그런 십자가에 달려서 죽어가는 예수를 바라 보면서 그를 주님이라고 부를 수가 있겠습니까? 세상 사람들은,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모두 십자가에 못박혀서 피흘리면서 고통스럽게 죽어 가는 예수를 저주 받은 자로 보았습니다. 십자가에서 절규하면서 죽어가는 예수를 바라보면서 예수께서 주님이시다 라는 고백을 하는 무리들이 바로 그리스도인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십자가 저 뒤에 있는 것을 보았기 때문인데, 그것이 무엇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지혜와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피흘리며 죽어 가는 예수의 모습 속에 무엇이 나타나 있습니까? 오늘 본문 24절에는 이런 말씀이 기록되어져 있습니다:오직 부르심을 받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 십자가 저 뒤에는 하나님의 능력과 지혜가 드리워져 있습니다.
첫 번째로 십자가에는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났습니다.
어떤 능력입니까? 나의 죄를 사하는 능력이 십자가입니다. 인생들이 죄를 지어서 죄에 매여 살게 되었습니다. 그 죄의 속박과 죄의 권세로부터 벗어나기 위해서는 막강한 힘과 능력이 있어야 합니다. 죄인들이 그런 죄의 속박을 부수고 죄의 권세로부터 탈출하도록 만들어 주는 권세가 십자가의 능력입니다. 18절 말씀은 이렇게 기록되어져 있습니다:십자기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얻은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십자가는 죄를 멸하는 능력입니다.
인류의 과학기술 문명이 발달하여서 로켓을 쏘아서 지구를 벗어 나서 달로 그리고 태양계 밖으로 까지 나갈 정도가 되었습니다. 로켓이 지구를 벗어 나기 위해서는 지구가 끌어 당기는 중력을 뿌리칠 수 있는 힘이 있어야 합니다. 그런 힘이 없으면 로켓은 땅으로 떨어 집니다. 굉음을 내면서 로켓이 하늘로 솟아 올라가는데, 몇 분 동안 중력을 뿌리치는 가속도를 내면 지구의 중력이 영향력을 미치지 않는 무중력 상태에 들어가게 되지요.
십자가에 나타난 능력은 우리를 나락으로 잡아 당기는 죄악의 권세를 뿌리치는 능력입니다. 죄의 권세는 우리를 유혹하면서 나락에 떨어지도록 우리를 잡아 당깁니다. 그러나 우리는 십자가의 능력으로 죄의 권세를 이겼습니다. 더 이상 죄의 권세가 우리를 억압하지 않는 그런 상태에 진입해 있습니다.
두 번째로 십자가 위에는 하나님의 지혜가 나타났습니다.
십자가는 하나님의 지혜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죄에 빠진 인류를 바라보시면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딜레마에 빠져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두가지의 속성을 가지고 계십니다. 하나님의 공의와 하나님의 사랑! 이 두가지는 서로 대척하는 속성입니다. 하나님이 속에 가지고 있는 공의라는 속성은 인류를 그대로 멸망시키라고 주장하시지만 그러나 하나님이 속에 가지고 계시는 다른 속성인 사랑은 인류를 구원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하나님은 그런 딜레마 속에 놓여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을 모두 충족시킬 묘책이 있겠습니까? 그 방법이 바로 십자가입니다. 하나님의 고민이 해결되었습니다. 십자가는 하나님이 자신의 딜레마에서 빠져 나오는 지혜가 담겨 있습니다. 십자가는 하나님의 공의도 100% 만족시켰고 하나님의 사랑도 100%만족시켰습니다. 어떻게 십자가가 그런 일을 했습니까?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신 분은 다름 아닌 하나님의 독생자입니다. 독생자라는 말은 하나님과 독특한(unique) 관계를 맺고 있는 아들이라는 말입니다. 하나뿐이면서 하나님과 독특한 관계를 맺고 있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피흘리면서 죽었습니다. 왜 그 아들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셔야 했는가?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심은 인류가 지었던 죄값을 청산하기 위해서입니다. 예수는 죄를 짓지 않았지만 우리의 죄를 대신해서 지고서 십자가에서 피흘리고 죽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공의가 만족되었습니다. 그냥 우리가 지은 죄를 말로 면죄하신 것이 아니라 그의 하나 뿐인 아들이 죄인인 우리를 대신하여서 피흘리고 죽었기에 그 댓가로 우리의 죄가 사하여졌습니다.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피흘리심으로써 하나님의 공의가 만족되었습니다.
또한 십자가 사건은 하나 뿐인 아들, 예수를 십자가에 죽일 정도로 하나님이 죄에 빠진 인류를 사랑하고 있음을 입증하는 사건입니다. 로마서 5:8절에는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지극한 사랑의 표현이 십자가입니다. 십자가에는 인류를 구원하려는 감추어진 하나님의 지혜가 들어 있습니다. 십자가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입은 여러분과 저에게는 십자가는 더 이상 수치스러운 물건이 아닙니다. 그 십자가는 여러분과 저를 죄와 죽음과 영원한 지옥의 심판에서 건지시기 위하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당하신 고난입니다.
세 번째로 십자가를 통하여 죄를 멸하는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하고, 십자가를 통하여 하나님의 지혜를 체험한 성도들에게 우리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것은 무엇입니까?
전도입니다. 21절 말씀은 이렇게 기록되어져 있습니다:하나님의 지혜에 있어서는 이 세상이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므로 하나님께서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셨도다. 세상에서 솟아난 지혜인, 유교, 도교, 불교, 또한 스스로 계시의 종교라 자처하는 이슬람교도 그들 자체의 지혜로는 결코 십자가를 수용할 수가 없습니다. 십자가 안에 있는 하나님의 지혜와 하나님의 능력을 결코 세상 지혜는 알 수가 없습니다. 먼저 깨닫고 믿고 안 자들이 전도를 통하여 십자가의 도를 전수 할 때에 영혼을 구원할 수가 있습니다. 다른 길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십자가의 도를 깨우친 그리스도인이라면 누구라도 땅끝까지, 우리 주님이 가라 하는 곳으로 갈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합니다.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면서 만민에게 복음을 전하라라는 명령은 우리 주님이 부활하신 후에 제자들에게 주신 명령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전도사역을 통하여 세상 불신자들을 구원하시기를 원하십니다. 참 미련한 방법이지만, 전도 외에는 사람의 영혼을 구원할 방법이 없습니다. 세상 많은 사람들이 영혼이 우리에게 달려 있습니다.
올해 우리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표어는 사람 낚는 어부가 되게 하소서 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이 복음을 가지고 이방 불신 세계로 가지 않기에 많은 사람들이 지옥 불 속으로 들어갑니다. 교회에 성령 불이 꺼져 가고 있기에 수 많은 사람들이 지옥 불 속으로 들어가고 있음을 기억하시길 바랍니다. 다시금 교회가 성령으로 불타 오르기를 바라고 소원할 뿐입니다.
십자가는 죄를 멸하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우리를 죄의 늪에서부터 건져 올리는 능력이 십자가 위에 나타나 있습니다. 십자가는 우리의 자랑입니다. 더 이상 그것은 수치가 아닙니다. 십자가에는 우리를 구원하기 위한 우리 하나님의 무한한 지혜가 나타나 있습니다. 십자가는 우리 하나님의 지혜입니다. 이 땅에서의 모든 우리의 삶을 끝내고 영원 세계에 들어 갈 때에도 우리는 십자가를 의지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이 땅 위에서 생겨난 인간의 지혜로는 십자가에 나타난 하나님의 지혜를 헤아려 알 수가 없습니다. 그러기에 우리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전도를 명하셨습니다. 지금도 우리 주님의 바람 같은 성령은 교회 밖, 불신 세계에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 불고 있습니다. 다양한 종류의 사람들이 교회 밖에 살고 있습니다. 학문을 연마하며 지혜를 추구하며 사는 지성인들의 가슴속에도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께서 들어가실 수가 있습니다. 또한 유대인들처럼 신앙적인 체험을 구하는 사람들의 심령 속에도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는 들어 가실 수가 있습니다. 주님 명령 따라서 내가 깨달아 알게 된 십자가의 도를 불신 이웃들에게 전하는 우리의 삶이 되어야겠습니다.
올 한 해 동안 미련하기도 하고 우직한 방법인 개인 전도를 통하여 적어도 한 영혼을 구원하는 우리들이 되어야겠습니다. 복음을 전해야 하는 타겟을 정하고 기도한 후에 복음을 전하기를 바랍니다.
제사장의
위임식 제사 가운데 가장 먼저 드려야 하는 제사가 있는데 그것이 바로 속죄제입니다.
제사장에게 왜 속죄제가 필요할까요? 제사장은
남을 위한 속죄를 위해 중보하기 전에 자신이 먼저 속죄를 입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모세가 속죄제의 수송아지를 끌어오니 아론과 그
아들들이 수송아지의 머리 위에 안수하였습니다. 자신들의 모든 죄를 수송아지에게 전가시키는 것을 의미합니다. 짐승이 죽는 것은
자기 죄 때문이라는 것을 분명히 자각해야 했습니다. 죄없는 짐승이 죽어 가는 동안 제사장은 죄가 얼마나 무서운 것이며, 이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서 무엇보다 성결해야 한다는 것을 마음에 굳게 결심하게 되었을 것입니다.
위임을 위한 속죄제는 수송아지의 피를 향단의 네 뿔에 바르지 않고(레 4:3-12절의 속죄제의 규정과 다르다) 오히려 바깥의 번제단의 네 뿔에 바르고 그 다음에 남은 피는 제단 밑에 쏟았습니다. 이와 같이 피는 장막 내부로 가져가지 않았습니다. 이는 이들이 아직은 제사장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임직식의 기간이 칠일간이었음을 볼 때(8:33) 이들은 아직은 제사장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따라서 제물의 피를 장막 내의 향단으로 가지고 가지 않고 바깥 제단에다 발랐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사야를 일꾼으로 부르실 때에도 먼저 그의 죄를 용서하여 주셨던 것을 봅니다.
사 6:7 그것을 내 입에 대며 가로되 보라 이것이 네 입에 닿았으니 네 악이 제하여졌고 네 죄가 사하여졌느니라 하더라
왜 이사야 선지자에게는 숯불을 입에 대었을 까요?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해야 하는 사람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부정한 입술을 가지고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 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 아닙니까? 그러므로 먼저 그의 입술을 정결케 하신 것입니다.
레위기에서
계속 강조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거룩”입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가지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가지려면 무엇보다 거룩해야 합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 거룩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성화된 삶을 살 수 있을까요? 우리가 십자가의 보혈로 정결함을 받은 후에 성화된 삶을 계속 이어가기 위해서는 말씀에
철저하게 순종하며 기도를 힘써서 하나님의 능력으로 무장을 해야 합니다. 그래야 자신을 세속으로부터 지킬 수 있는 것입니다.
속건제(贖愆祭) / 바칠 속(贖) . 속죄할 속(贖), 허물 건(愆), 제사 제(祭)
Guilt Offering
Trespass Guilt
히브리어 / 아샴 <보상, 배상, 죄책> 817. אָשָׁם.
1. 잘못
어원 / 816에서 유래
관련 성경 / 죄(창 26:10, 잠 14:9), 속죄제(레 5:6), 속건제(레 5:16), 속건제물(민 6:12), 죄값(민 5:7, 8), 죄(시 68:21), 죄과(罪過)(렘 51:5).구약 성경 /46회 사용
이사야 53:10 - 그 영혼을 속건 제물.....
속건제(Trespass Offering)
1. 어의
속건제를 뜻하는 히브리어 '아솸'은 '죄'(Sin)가 아닌 '범죄'(Guilt),'범법'(Tresspass), '손해'(Damage) 등을 의미하는 것으로 '사회적인 죄', 또는 '도덕적인 죄를 용서받기 위해 드리는 제사'를 뜻한다.
2. 속건제의 제물
속건제의
제물은 범죄의 형태에 따라 매우 다양하게 나타나고 있어 이러한 제물을 일일이 열거하자면 너무나도 복잡하고 광범위하다.
그러므로
각각의 범죄에 대한 속건 제물에 대해서는 레 5:14, 6:7, 7:1-10, 14:1, 15:2을 참고하도록 하되 이러한 여러
가지 제물을 요약하면 '흠 없는 일년된 수양', '범죄물과 그 범죄물의 오분의 일을 더하여 본인에게 주는 일', '산비둘기나
집비둘기 둘'이나, '고운 가루 에바 십분의 삼'과 '기름 한 록' 등이다.
3. 속건제의 영적 의미
속건제는 성도가 신앙생활 가운데서 범하기 쉬운 죄를 범했을 때 드리는 제사로서 그러한 범죄는 진리를 배반하거나 하나님을 배반하는 죄, 예수 그리스도를 부인하거나 성령의 사역을 거스리는 죄가 아닌 '실수와 실족의 범죄'를 뜻한다.
그러므로 속건제는 구원에 관련된 원죄에 대한 회개나 기도가 아닌 날마다 육신의 연약함 때문에 짓게 되는 육적인 죄, 즉 '자범죄에 대한 회개와 기도에 대한 상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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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위기는
여호와께 드려야 할 5 대 제사의 규례로서 시작된다.
그런데 이러한 레위기의 시작은 당연한 귀결이었다.
왜냐하면 건축된
성막의(출 40:17) 주된 목적이 제사였고, 따라서 성막이 완성된 지금 그곳에서 드려질 제사의 규례가 주어지는 것은 당연한 논리요
순서이기 때문이다.
제사의
종류에 대해서는 학자에 따라 5 대 제사로 분류하기도 하고 6 대 제사로 분류하기도 한다.
이러한 차이는 제사장의 위임식 때
거행하는 위임제를 여기에 포함시키느냐 그렇지 않느냐에 따른 차이인데, 여기서는 5 대 제사만을 거론할려고 하는데 그 이유는
제사장의 위임식 때 행해진 위임제는 모든 이스라엘에게 관련된 것이 아니라 제사장의 위임에만 관련된 것으로 보고, 모든 이스라엘이
행해야 할 나머지 5 대 제사, 즉 '번제와 소제', '화목제와 속죄제' 그리고 '속건제'에 대해서만 살펴보기로 한다.
__________________ 레위기 10장 / (23절)
03-20-2023(월) 사순절 제23일
8-11 제사장의 음주에 관한 훈계
12-15 소제 및 화목제(감사제, 수은제)의 제사장의 응식에 대하여
16-20 아론의 아들이 속죄제의 규례를 범하여 모세에게 견책되다.
잘못 드린 제사[레 10장]
[내용개요]
아론과 그의 아들들은 제사장이라는 축복된 사명을 받았다. 그러나 그 축복은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할 때 주어지는 것이었다. 본장은 취임 첫 날 아론의 두 아들이 죽는 비극적인 사건을 통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율법이 갖는 의미를 보여 주고 있다. 아론의 아들 중 나답과 아비후는 명하지 않은 불로 분향하다 불에 태워 죽음을 당하였다(1-7절). 이 일을 계기로 하나님은 제사장은 제사시 음주를 금하고 거룩한 음식은 반드시 단 옆에서 먹도록 명하셨다(8-15절). 또한 나답과 아비후의 일로 두려워한 나머지 속죄 제육을 먹지 않고 불사른 엘르아살과 이다말에 대한 모세의 견책이 나타난다(16-20절).
[강 해]
본장에서는 하나님의 명령에 대한 순종의 축복과 불순종의 저주라는 이스라엘 역사 전체를 관통하는 주제를 엿볼 수가 있습니다. 모처럼의 성스러운 임직식을 끝내고 하나님의 제사장으로 구별된 아론의 두 아들 즉 나답과 아비후가 자의로 분향하던 중 하나님의 형벌을 받아 죽었습니다. 본장에는 이 형벌 사건과 이 사건이 계기가 되어 제정된 제사장의 음주에 관한 훈계, 제사장의 몫으로 돌린 소제와 화목제에 관한 규정, 제사장 엘르아살과 이다말의 범과에 대한 모세의 견책 등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나답과 아비후의 죽음. 본장에는 취임식 첫 날에 아론의 두 아들 나답과 아비후가 죽는 사건이 나타난다. 제사장은 성소의 등불을 켜고 끌 때 향을 살라 바쳐야 하는데 그때 사용되는 불은 반드시 번제단에서 취해야 한다. 그런데 나답과 아비후는 다른 불로 향을 사르다 하나님의 진노를 받아 죽음을 당한 것이다. 이스라엘의 지도적 위치에 있는 제사장들이 명하지 않은 불로 향을 태웠다는 이유로 죽음을 당한 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율법이 갖는 의미를 보여 준다. 그것은 생명의 구원이다. 즉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의 축복 속에 존재할 수 있는 것은 아브라함의 자손이라는 혈통적 조건 때문이 아니라 율법에 대한 순종 때문임을 가리키는 것이다. 이는 오늘날 영적 이스라엘의 조건 또한 외적인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임을 말해 준다.
[영적교훈]
본장에서 하나님은 나답과 아비후의 사건을 계기로 제사장의 음주에 대한 금지를 명하셨다. 나답과 아비후는 자신들의 막중한 임무에도 불구하고 자신들의 육체적 정욕을 제어하지 못하였기에 죽음을 당한 것이다. 이는 성도들이 하나님의 일을 하기 위하여 먼저 자신을 돌아보아 모든 일에 절제하고 정결케 하여야 함을 교훈해 준다. 성결하신 하나님께서는 몸과 마음이 깨끗한 자를 택하여 자신의 일을 위하여 쓰시기 때문이다.
__________________ 레위기 9장 / 축복(23절)
Moses and Aaron then went into the Tent of Meeting. When they came out, they blessed the people; and the glory of the LORD appeared to all the people.
23. 모세와 아론이 회막에 들어갔다가 나와서 백성에게 축복하매 여호와의 영광이 온 백성에게 나타나며.
* 축복(祝福) 1288. 바라크(bârak) בָּרַךְ
1. 무릎을 꿇다, 2. 하나님께 기원하다, 3. 피엘형 בֵּרֵךְ
관련 성경 / 문안하다(삼상 13:10), 무릎을 꿇다(대하 6:13, 시 95:6), 찬송하다(창 9:26, 왕상 1:48, 시 113:2), 복을 받다(창 24:31, 삼하2:5, 시 72:17), 축복하다(창 27:33, 민 23:11, 왕상 8: 66), 칭찬하다(삼상 25:33), 복이 있다(삼상 25:33, 룻 2:19, 20), 찬양하다(삼하18:28, 왕상 5:7, 시 106:48), 송축하다(왕상 8:15, 스 7: 27), 복되다(출 20:11, 잠 5:18), 복을 주다(사 19:25, 출 20:24, 신 15:6), 복을 얻다(창 12:3, 시 128:4), 복을 내리다(출 23:25, 신 28:8), 은혜를 베풀다(신 7:13), 저주하다(왕상 21:10, 13), 욕되게 하다(욥 1:5), 복을 빌다(욥 31:20), 자랑하다(시 10:3), 욕하다(욥 2:9), 풍부히 주다(신 14:24), 축사하다(삼상 9:13), 인사하다(왕하 4:29), 축하하다(시 49:18), 꿇리다(창 24:11), [명] 찬송(신 33:20, 시 135:21, 욥 1:21), 복된자(사 65:23), 축복(민 23:20), 복(대상 4:10), 안부(왕하 10:15)
구약 성경 / 256회 사용
레위기 1장부터 7장은 다섯 가지 제사에 관한 말씀입니다.
레위기 8장부터 10장은 제사를 집례하는 제사장에 관한 말씀으로 8장에서는 제사장의 위임식, 9장에서는 제사장이 집례하는 첫번째 제사에 대하여, 10장에서는 제사장이 제사를 잘못 집례했을 때에 관한 말씀입니다.
아론의 첫 번째의 직무 수행[레 9장]
1-6 아론과 그 아들들의 임직식의 헌물에 대한 모세의 명령
7-14 아론이 자기를 위해 속죄제와 번제를 드리다.
15-21 다음으로 백성을 위해 속죄제, 번제, 소제, 화목제(수은제, 감사제)를 드리다.
22-24 제사장이 백성을 축복하매 하늘에서 불이 임하여 번제를 사르다.
[내용개요]
본장에서는 칠 일 간의 위임식을 끝낸 아론과 그 아들들이 제사장으로 취임하는 모습을 기록하고 있다. 모세가 제사를 지낸 위임식과
달리 취임식부터는 아론이 직접 제사를 드리기 시작한다. 모세는 아론에게 제사장의 직무를 시작하도록 명하였다(1-7절). 이에
아론은 자신을 위하여 속죄제와 번제를 드리고(8-14절), 백성들을 위하여 속죄제와 화목제를 드렸다(15-21절). 이때
하나님께서 불로 단 위의 제물과 기름을 사르셔서 취임을 인정하는 증표를 주셨다(22-24절).
[강 해]
본장은 레8장에 소개된 제사장 임직에 대한 계속입니다. 7일 동안의 위임식을 마친 제사장은 자신과 이스라엘 백성들을 위하여
속죄제를 드렸습니다. 이는 제사장이 위임된 후 하나님께 드린 첫 제사로서 제사장들을 위한 제사, 온 회중을 위한 제사, 모세와
아론의 축복과 불로 나타난 여호와의 영광 등으로 이루어졌습니다. 그중에서도 아론이 드린 첫 제사는 아론이 신적 권위를 갖고서
이스라엘과 하나님 사이의 중재자로 출발하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취임식 제사. 아론은 제사장으로 선택된 후 칠 일 간의 위임식 행사를 통해 속죄제를 드리고 스스로를 정결케 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본장에서는 취임식 행사로 아론에게 다시 속죄제를 드리도록 요구하고 있다. 이는 몇 가지 측면에서
구속사적 의미를 보여 준다. 첫째는 끊임없이 요구되는 속죄 제사를 통해 인간의 철저한 부패와 죄성을 보여 주고 있다. 즉 인간은
나면서부터 죽을 때까지 언제나 지중에 존재하므로 오직 하나님 외에는 소망이 없음을 말해 주는 것이다. 둘째는 끊임없이 드려야 하는
속죄제는 구원에 있어 인간의 노력이 얼마나 불완전한지를 보여 줌으로써 완전한 대제사장인 그리스도에 대한 소망을 나타내고 있다.
예수님의 대속은 자신을 단번에 드림으로 모든 구원을 이루시고 짐승의 희생 제사를 온전히 이루신 것이다. 한편 아론이 백성들을
위하여 속죄제를 드린 것은 영원한 대제사장이신 예수께서 구원 사역의 유일한 중보자이심을 예표하고 있다.
[영적교훈]
칠 일 간의 위임식 행사를 통해 끊임없이 자진을 정결케 한 아론은 취임식을 맞아 다시금 속죄제를 드려야 했다. 인간은 연약하고
죄의 본성을 가지고 있으므로 하나님 앞에서 언제나 죄인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하나님 앞에서 스스로 자랑할 수 있는 자는 아무도
없음을 교훈해 준다. 따라서 성도들은 매일의 삶 속에서 자신의 죄를 돌아보아 회개하여야 하며, 하나님 앞에 겸손히 엎드려 오직
그의 구원과 은혜만을 바라보는 자가 되어야 할 것이다.
1) 아론에게 헌제를 지시하는 모세(1-2)
모세는 제사장들의 위임식 후 팔 일째 되는 날에 아론과 그 아들들과 이스라엘 장로들을 불러모으고 아론으로 하여금
대제사장으로서 첫 제사를 드리라고 하였습니다. 이는 대제사장인 아론도 하나님 앞에서 항상 자신의 죄를 사함받아야 하는 죄인이기
때문입니다(1-2).
2) 제사의 순서(3-6)
아론이 자기와 백성을 위하여 드리는 제사의 순서로 첫 번째로 드리는 속죄제는 하나님과 백성 사이의 있는 죄를 용서받는 것을
의미합니다. 두번째로 드리는 번제는 속죄받은 자로서의 온전한 헌신을 나타냅니다. 마지막으로 드리는 화목제는 하나님과 백성의
진정한 교제와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축복에 감사하는 것을 의미합니다(3-4)
.
모세가 아론에게 명령한 것은 모두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하였습니다(5-6).
3) 아론 자신을 위한 속죄제와 번제(7-14)
위임식이 끝난 아론은 대제사장으로서의 백성의 죄를 위한 속죄제를 드리기 전에 자신을 위한 속죄제를 먼저
드렸습니다(7-11). 그 이유는 죄의 문제가 해결된 후에야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감사와 하나님에 대한 전적인 헌신의 고백이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자신을 위해 속죄제를 드린 아론과 그 아들들은 번제를 드렸습니다. 번제의 향기를 하나님께서 향기로운 제사라고 하셨듯이, 번제는 속죄함을 받은 하나님 백성의 헌신과 성결과 충성스러운 삶을 상징합니다(12-14).
구약 시대의 제사장들도 회개해야 할 죄인이기 때문에 완전하고도 영원한 그리스도의 중보가 필요한 것입니다.
4) 백성을 위한 제사 (15-21)
아론은 자신을 위해 속죄제와 번제를 드리고 난 후 백성을 위해 속죄제와 번제와 소제, 그리고 화목제를 드렸습니다(15-21).
5) 손을 들어 축복함(22)
아론은 하나님과 백성 간의 중보자로서 그 모든 제사가 하나님께 기쁘게 열납되었다는 의미에서 백성을 향해 손을 들어 축복하였습니다. 축복을 선포하는 자는 제사장이지만 축복을 주시는 분은 오직 하나님이십니다(22).
6) 하나님의 영광(23-24)
아론은 대제사장으로서 첫 직무를 끝마치고 모세와 함께 회막에 들어갔습니다. 그리고 얼마 후에 모세와 아론은 회막에서 나와
백성에게 축복하였습니다. 그때 여호와의 영광이 온 백성에게 나타났습니다. 이것은 제사장으로 위임된 아론의 첫 직무를 기쁘게
받으셨다는 것을 의미했고, 그의 축복 행위에 대한 응답이었습니다. 그리고 불이 여호와 앞에서 나와 단 위의 번제물과 기름을 모두
태웠습니다(23-24).
주께서 주신 오늘! 하나님의 말씀대로 지시한 모세 그리고 순종한 아론의 순종을 통해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났던 것 처럼 나의 생각을 버리고 하나님의 말씀에 온전히 순종하는 삶을 살아가길 원합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부르십니다. 그분이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 우리를 회복시키시고 새로운 직분을 임명하셨습니다. 베드로전서 2장 9절은 ‘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 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려 하심이라 ’ 고 선언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스스로가 그렇게 잘나지 못하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모세보다 나은 분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가 아닌 척 위선을 뒤집어쓰지도 말고, 그대로 포기해 버리지도 말라고 하십니다. 먼저 우리가 하나님과 만나는 것을 최우선적으로 하기 원하십니다.
모세가 아론에게 속죄제와 번제를 드려야 한다고 한 것은 예수님이 우리에게 바라는 예배이기도 합니다. 아론은 자신이 하나님과 이스라엘 간의 다리 역할을 하는 제사장으로 위임받았음에도, 여전히 모세의 말을 따라 자신을 위한 예배를 준비합니다. 우리도 택하신 족속, 왕 같은 제사장, 거룩한 나라, 소유된 백성이라는 거창한 명칭에 취하지 말고 예수님 말씀을 따라 바른 예배를 드려야 할 책임이 있습니다.
아론은 먼저 속죄제를 드립니다. 8장의 임직식에서 이미 속죄제와 번제를 드렸음에도 재차 드려야만 했습니다. 그토록 중요한 고백이었습니다. 8절부터 11절입니다. 제사장의 속죄제는 일반적인 속죄제가 간, 기름, 콩팥만 번제단 위에 얹어서 태웠던 것과 달랐습니다. 기름, 콩팥, 간을 번제단 위에서 태울 뿐 아니라 나머지 고기와 가죽도 이스라엘 진영 밖 재를 버리는 곳에서 다 태웠습니다. 나아가 제물의 피를 손가락에 찍어서 제단 네 뿔에 바르고 제단 밑에 쏟아 버렸습니다. 이것은 이스라엘의 제사장들이 ‘ 세상을 바꾸고 신과 마주하게 돕겠다 ’ 는 명분을 들어 사람들에게 지시를 내리는 자가 아니라, 스스로를 가장 먼저 죄 사함이 필요한 존재로 여겨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속죄제의 제물이 흠 없는 수송아지였다는 것은 아론이 하나님과의 독대 이후 처음 드린 예배에서 출애굽기 32장에 있던 사건, 하나님 계명을 받으러 간 모세를 기다리지 못하고 백성에게서 모은 황금으로 송아지를 만들었던 것, 을 떠올려야 했다는 것입니다. 그는 자신이 하나님 은혜 없이는 이 자리에 설 수 없는 ‘ 만성적 우상 제작자 ’ 임을 잊지 말아야 했습니다. 제물의 피로 제단 네 뿔에 찍고 밑에 쏟아 대속물의 흔적이 예배에 선명히 드러나야 했습니다. 속죄제를 드리고 나서, 아론은 번제를 시작합니다. 12절부터 14절입니다. 숫양 머리나 각을 뜬 사지를 태운 후 그 위에 내장과 정강이를 씻어서 태웠습니다. 속죄제를 드림으로 죄를 용서받았을 뿐 아니라, 번제를 통해 자기 인생을 헌신하겠다고 다짐한 것입니다.
이렇게 은혜에 대한 감사 고백으로서의 속죄제와 헌신을 소망하고 결단하는 번제를 마친 아론은 백성을 위한 제사를 시작합니다. 15절부터 22절은 이 제사들을 통해 백성을 위한 염소를 가져다가 속죄제를 통해 죄 용서를 선언하고, 번제를 통해 하나님께 헌신하기로 고백하고 결단하며, 소제를 통해 이것이 매일의 순종과 헌신으로 증명되어야 함을, 화목제를 통해 그 결과로 받기 원하는 것은 오직 하나님과 참된 교제의 기쁨임을 전했다고 합니다.
기억해야 할 것은 이 예배는 온 백성의 철저한 준비와 긴장감 속에 이루어졌다는 것입니다. 모세는 백성에게 제물을 준비하게 합니다. 이 제사는 한 사람만의 노력으로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백성들은 숫염소를 가져와 속죄제를, 흠 없는 송아지와 어린양을 가져와 번제를, 수소와 숫양을 가져와 화목제를, 기름 섞은 소제물을 가져와 소제를 드렸습니다(3-4절). 아론과 자녀들이 임직식을 마치고 회막 문에서 하나님과 독대하던 때는, 백성들도 거룩한 두려움과 떨림으로 기다려야 했습니다. 23절에서도 모세와 아론이 회막에 들어갔다가 나올 때까지 이스라엘 백성들은 기다려야 했습니다. 그 기다림이 지나야 하나님 영광의 임재 구름을 영접합니다. 모든 과정에서 불순한 부분이 하나라도 있었다면 결코 예배를 완수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이를 기억하며 우리가 주일에 예배를 드리기 위해 어떤 준비를 하는지, 하루를 거룩한 두려움과 떨림으로 조심하는지, 그리하여 주일을 제외한 월요일부터 토요일까지의 여섯 날이 삶의 예배로 드려지고 있는지 점검해야 합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께서 명령하셨던 예배의 명령들을 하나씩 실천합니다.
예배는 약속으로 시작해 축복으로 맺습니다. 4절은 여호와의 영광이 ‘ 오늘 ’ 나타날 것이라 예언하고 6절은 여호와의 영광이 ‘ 너희에게 ’ 나타날 것이라고 약속합니다. 그리고 그것이 16-17절에서 이루어집니다. 이루어진 약속은 확실한 축복을 전합니다. 아론이 이스라엘 백성을 축복한 내용은 민수기 6장 24-26절에 있습니다. ‘ 24 여호와는 네게 복을 주시고 너를 지키시기를 원하며 25 여호와는 그의 얼굴을 네게 비추사 은혜 베푸시기를 원하며 26 여호와는 그 얼굴을 네게로 향하여 드사 평강 주시기를 원하노라 할지니라 하라 ’ 오늘도 예배를 준비하고, 예배자로 살아가는 모두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분명한 축복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복을 주시고 지켜주시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얼굴을 우리에게 비추사 은혜 베푸시기를 확실히 원하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그 얼굴을 우리에게 향하여 드사 평강 주시기를 원하십니다. 복과 안전, 은혜와 평강은 예배를 통해서만 경험할 수 있음을 감사해야 합니다.
24절에는 하나님의 불이 하늘에서 떨어져 제물을 태우는 것을 온 백성이 보고 소리 지르며 엎드렸습니다. 하나님의 임재는 막연하지 않았습니다. 예배를 드린 날, 영광이 불로 제단 위 번제물과 기름을 태웠습니다. 골고다 언덕에서 피를 쏟아 자신을 제물 삼으셨던 예수님을 닮기 위해 스스로를 제단 위에 두는 모든 이에게 주시는 약속입니다. 하나님의 거룩한 불이 반드시 임하시고, 제단 위에 올려둔 인생을 성령의 불길로 태우심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온 백성이 찬송 부르며 주님께 굴복할 것입니다.
히브리서 12장 28-29절입니다. ‘ 28 그러므로 우리가 흔들리지 않는 나라를 받았은즉 은혜를 받자 이로 말미암아 경건함과 두려움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섬길지니 29 우리 하나님은 소멸하는 불이심이라 ’
__________________ 레위기 8장 / 위임식(22절)
03-17-2023(금) 사순절 제21일 또 다른 수양 곧 위임식의 수양을 드릴쌔 아론과 그 아들들이 그 수양의 머리에 안수하매.
He then presented the other ram, the ram for the ordination, and Aaron and his sons laid their hands on its head.
위임식(委任式) 4394
또 다른 수양 곧 위임식의 수양
제사장 위임식을 위해 준비한 두 마리의 수양 중(2절) 이미 한 마리는 번제로
드렸고(18절)
이제 이것은 위임식용 화목제 제물로 드릴 나머지 한마리를 가리킨다.
따라서 이 수양을 '위임식의 수양' 혹은
'위임제의 수양' 이라고 불렀다.
한편, 위임식 제사 곧 위임제(委任祭)에 대해서는 7:37 주석을 참조하라.
4394. מִלֻּא
어원 / 4390에서 유래
관련 성경 / [동] 물리다(출 25:7, 35:9), 가공하다(대상 29:2). [명] 위임식(출 29:22, 레 8:22, 33, 레 7:37).
구약 성경 / 5회 사용
* 4390. מָלֵא
위임제
이 제사는 1-7장 사이에는 나타나지 않았지만, 이미 출 29:19-30에서 계시받았기 때문에 여기에 함께 기록되었다.
한편, 위임제(委任祭, the Consecrations)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밀루임'은 '채우다'(fill),
'봉헌하다'(consecrate)란 뜻의 '말라'에서 파생된 말이다.
따라서 위임제란 여호와의 제단 위에 제사 예물을
드리도록 손에 무엇인가를 채워주는 의식을 가리킨다(출 29:29; 대상 29:5; 대하 29:31).
즉 위임제란 하나님께 제물을
드릴 수 있는 자로 제사장을 성별하는 의식을 가리킨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아론과 그의 아들들이 여호와의 거룩한 제사장으로
성별되기 위하여 제물을 손에 채워 여호와께 드리는 특수한 제사를 의미한다(Keil).
이런 의미에서 위임제는 번제, 소제,
속죄제, 속건제, 화목제 등과는 달리 제사의 한 종류가 아니라, 이러한 기존의 여러 제사 방법을 통하여 '성직(聖職) 임명'이라는
특수한 목적을 이루는 특별 제사이다.
한편 제사장 위임식에 대한 보다 자세한 규례는 출애굽기 29:19-28의 주해를 참조하라.
제사장 위임식의 일곱 가지 절차(레위기 8:1-36)
아론(모세의 형)과 그 아들들(나답, 아비후, 엘르아살, 이다말)의 제사장 위임식을 말씀하셨는데 이 위임식에는 일곱 단계의 절차가 있었습니다.
1. 온 회중을 회막앞에 모음(1-5절)
2. 제사장을 물로 씻김(6절)
3. 예복을 입힘(7-9절)
4. 기름을 부음(10-12절)
5. 제사를 드림
속죄제(14-17절)
번제(18-21절)
위임제(22-29절)
6. 하나님과 교제의 음식을 먹음(31-32절)
7. 칠일동안 성막 안에 머무름(33-36절)
※제사장과 교회: 예수님은 더 뛰어나신 제사장입니다.(히4:14-19:14) 따라서 이스라엘이 제사장
나라였듯이(출19:6) 그리스도의 지체인 신약교회도 제사장 나라입니다.(벧전2:5,9, 계1:6절) 구약시대에 제사장들이 특별히
구별된 예복을(레8:7-9) 입었듯이 신약시대의 그리스도인들도 믿음과 사랑과 소망으로 옷 입으며(살전5:8) 친절과 겸손과 인내로
옷 입어야 합니다.(골3:12) 특히 제사장 위임제에서 17절에 보면 가죽을 불살랐다고 했는데 가죽은 언제나 제사장
몫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임명될 때 드리는 제사는 제사장을 위하는 것이기 때문에 이 부분을 불태웠습니다. 아들들을 위하여 드리는
번제, 위임제(8:18-21)에서는 두 마리의 숫양이 필요했는데(8:2) 그 가운데 한 마리는 번제물로(인간의 죄에 대한 속죄
물로), 한 마리는 위임 제물로 바쳤습니다. 이때 숫양의 피를 제사장의 귀와 손과 발에 발랐는데(23-24) 이는 거룩한 성별과
온전한 헌신을 상징한 것입니다. 첫 번째 제사장의 위임식은 모세가 집례 하였고 7일 동안 거행했습니다. 7일이 지난 후에야 비로소
제사장으로 구별되었는데 신약의 성도들도 하나님께 예배드린 후에는 세상과 구별되어야 합니다. 바울도 사도로 부름을 받고서 자신이
거룩하게 구별되었다고 했습니다.(롬1:1절)
오른 귓부리... 오른손 엄지... 오른발 엄지 -
화목 제물로 잡은 수양의 피를 제사장의 이러한 신체 부위에 바르는 것은 곧
하나님께 대한 제사장의 전적 순종과 헌신을 상징적으로 나타내 보여 주는 것이다. 왜냐하면 사람이 손과 발의 엄지 가락을 잃으면
그는 힘을 쓸 수 없는 사람이 되기 때문이다(삿 1:6). 따라서 손과 발, 특히 그중에서도 오른손과 오른발의 엄지는 힘을
나타내며 여기에 피를 바른 것은 이것으로 열심히 봉사해야 하는 것을 상징한다고 볼 수 있다. 반면에 귀는 대체적으로 '예속'을
의미하는 신체 부위이다. 그러므로 고대 근동에서는 어떤 사람의 귀에 구멍을 뚫으면 그는 일평생 상전에게 소속된 사람으로서 충성을
다할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이해하였었다(21:6). 그러나 여기서 제사장의 귓부리에 화목제물의 피를 바른 것은 그가 하나님의
말씀을 주의깊게 듣고서 그 말씀대로 철저히 순종하는 것을 나타내는 상징적 행위로 이해함이 보다 타당하다(Wycliffe).
단 위의 피와 관유를... 옷에 뿌리라 -
수양의 피 중 단 위에 뿌리고 남은 피를 또다시 거룩한 목적에 쓰이는
관유(7절)와 섞어 제사장의 옷에 뿌렸다. 이처럼 피 섞은 기름을 제사장들의 옷에 뿌린 것은 피에 의해 그 옷을 입는 제사장의
죄가 가리워지며, 기름에 의해 거룩히 구별되는 것을 나타내기 위함이다.
제사장 안수식의 일곱 가지 절차
제사장이 안수를 받는 과정은 레위기 8장에 일곱 가지 절차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레위기 8장에서 가장 많이 반복되어 나오는 말씀이 있는데,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하심과 같았더라”는 구절입니다.
이 구절이 매 단계마다 기록되어 있는데, 총 7번 기록되어 있습니다.
첫 번째 단계는 안수식 준비 단계
레위기 8장 1~4절에 기록되어 있는데, 안수식 준비를 위해서는 총 세 가지를 갖춰야 합니다.
첫째는 안수 받을 대상자입니다. 아론과 그의 아들들입니다.
둘째는 준비물입니다.
제사장에게 입힐 의복, 제사장에게 부을 관유라는 기름, 속죄제를 드릴 수송아지, 번제와 화목제를 드릴 숫양 두 마리, 그리고 제사장이 먹고 하나님께 일부는 태워 드릴 무교병 떡 한 광주리입니다.
셋째는 이스라엘 온 회중을 불러 회막 문 안에 모이게 하는 일입니다.
8장 3절에 “온 회중을 회막문에 모으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인구가 300만명이 넘는데 어떻게 다 모일 수 있겠습니까?
회중 가운데 지도자들이 모이는 것입니다.
이것은 제사장의 안수식이 은밀하게 진행되는 것이 아니라 공개적으로 진행되는 일이라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두 번째 단계는 씻음과 입힘의 단계
레위기 8장 5~9절에 따르면 모세는 물두멍의 물로 아론과 그의 아들들을 씻깁니다.
그리고 아론에게 속옷을 입힌 후 겉옷을 입힙니다.
그런데 물로 씻길 때 이스라엘의 온 회중이 보고 있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벌거벗긴 채로 씻겼겠습니까?
그렇지는 않습니다.
왜냐하면 제사장의 의복가운데는 속옷 안에 입는 ‘고의’(속바지)가 있는데, 이것을 입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씻긴 후 입힌 속옷은 흰색 원피스입니다.
일반 제사장은 이 흰색 속옷을 입고 띠를 띠고 직무를 수행하면 됩니다.
그러나 대제사장은 흰색 속옷을 입고, 그 위에 청색 겉옷을 입습니다.
그리고 에봇을 걸치고, 열 두 개의 보석이 박힌 판결 흉패를 가슴에 붙입니다.
이 흉패에는 주머니가 있어서 우림과 둠밈을 보관합니다.
제사장이 하나님의 뜻을 물어볼 때 쓰는 도구입니다.
그리고 머리에 관을 씁니다.
관에는 ‘여호와께 성결’이라고 새겨진 금띠가 둘려 있습니다.
대제사장 의복의 특징은 ‘영광스럽고 아름답다’(Glory and Beauty)는 것입니다.
대제사장은 백성들 앞에 하나님을 대표하고, 하나님 앞에 백성들을 대표하는 중보자이기 때문에 영광스럽고 아름다운 의복을 입어야 하는 것입니다.
대제사장이 의복을 제대로 갖춰 입는 것은 매우 중요한 것입니다.
성막 안에서 아무 것이나 입고 일하면 안 되는 것입니다.
세 번째 단계는 관유라는 기름을 붓는 단계
모세는 관유를 취해 성막에 바르고, 번제단 뿔에 일곱 번 뿌리고, 번제단, 물두멍 등 성막의 모든 기구에 바르고 아론의 머리에도 기름을 붓습니다.
그러면 아론과 그의 아들들, 성막의 모든 기구가 거룩해지는 것입니다.
거룩하게 되었다는 것은 하나님을 위한 것 외에 다른 목적으로 사용할 수 없다는 의미입니다.
바벨론의 마지막 왕 벨사살은 여호와의 성전에서 가져온 기름 바른 기명들을 사용해서 술을 마시다 그 날 밤 죽고 말았습니다.
모세가 아론의 머리에 기름을 붓는 장면이 시편 133편 2절에 이렇게 묘사되어 있습니다. “머리에 있는 보배로운 기름이 수염 곧 아론의 수염에 흘러서 그 옷깃까지 내림 같고.” 관유를 부으면 수염을 적시고, 옷을 적시는데, 그 모습이 매우 아름다웠던 것입니다. 관유는 향내가 매우 깊습니다.
네 번째 단계는 속죄제를 드리는 단계
레위기 8장 14~17절까지로, 수송아지 한 마리로 속죄제를 드리는 단계입니다.
속죄제는 여호와의 금령을 모르고 범한 죄를 속하기 위한 제사입니다.
흠 없는 수송아지 머리에 안수하고 모세가 죽입니다.
그리고 그 피를 번제단 뿔에 바르고 남은 것은 번제단 밑에 쏟고 내장 기름은 다 태운 후 나머지는 진 밖으로 가지고 나가 불태우는 것입니다.
그러면 부지중에 여호와의 금령을 범한 죄들을 용서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일반적인 제사장의 속죄제인 경우, 분향단의 뿔에도 피를 바르고 분향단 밑에도 일곱 번 뿌리는 절차가 필요한데, 제사장 안수식에서의 속죄제는 이런 과정이 생략되어 있습니다.
번제단을 중심으로만 이루어진 것입니다.
그것은 온 회중이 밖에서 다 지켜보는 가운데 행해졌기 때문입니다.
공개적으로 진행되는 것이 이토록 중요한 것이었습니다.
다섯 번째는 번제를 드리는 단계
숫양 한 마리로 번제를 드리는 단계입니다.
번제는 알고 지은 죄를 용서받기 위한 제사입니다.
부지중에 지은 죄는 속죄제, 알고 지은 죄는 번제를 통해 용서받는데, 이는 모든 종류의 죄를 다 속한다는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여섯 번째는 화목제를 드리는 단계
숫양 한 마리로 화목제를 드리는 단계입니다.
레위기 8장 22~29절에 기록되어 있는데, 화목제의 특징은 고기를 드리는 사람이 먹을 수 있다는 점입니다.
그런데 일반적인 화목제와는 차이가 있습니다.
안수식의 화목제는 ‘위임제’(Offering of Consecration)라고 합니다.
그러면 왜 ‘위임’을 의미하는 단어(Dedication이나 Delegation)를 사용하지 않고, ‘성별’이라는 의미의 단어(Consecration)를 사용했을까요?
그것은 모세가 자기 권한을 아론에게 분여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는 하나님이 아론을 구별하여 택하시고 세우시는 것이기 때문에 ‘성별’(Consecration)을 사용한 것입니다.
화목제를 드리기 위해서는 아론과 그의 아들들이 숫양 머리에 안수하고 모세가 잡습니다.
그리고 모세는 그 피를 세 군데 바릅니다.
아론과 그의 아들들의 오른쪽 귓부리와 오른손 엄지, 오른발 엄지에 바릅니다.
이는 제사장들이 바른 말을 듣고, 옳은 일을 행하고, 좋은 곳에만 가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성도들은 바른 소리를 듣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아무리 착한 사람도 “이 사람 나쁜 사람이다!”라는 말을 몇 번만 듣게 되면 그 사람이 나쁜 사람으로 보이게 되어 있습니다.
나쁜 말을 들으면 선입견이 생기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귓부리에 피를 발라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손으로 도적질과 같은 나쁜 일을 하지 말고 선한 일을 행해야 합니다.
또 발로 좋은 곳을 향해 가야 합니다.
그리고 남은 피는 모두 제단 주위에 뿌립니다.
그리고 나서 세 가지를 태웁니다.
내장 기름과 광주리의 무교병 떡 세 개와 우편 뒷다리를 태웁니다.
원래 일반적인 화목제에서 제사장은 두 가지 고기를 먹을 수 있도록 되어 있었습니다.
가슴 고기와 우편 뒷다리 고기입니다.
그런데 위임제에서는 가슴 고기만 먹고 우편 뒷다리는 하나님께 태워드립니다.
이것은 제사장이 먹는 몫도 하나님이 주신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여러분이 먹고 사는 것은 모두 하나님이 주신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내가 노력해서 벌었지! 하나님이 해 준 것이 무엇이냐?”고 말합니다.
그런데 병이 들어 아파서 입원하면 내가 노력해서 번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금방 알게 됩니다.
하나님이 복을 주셔야 먹고 살 수 있는 것입니다.
일곱 번째는 무교병을 먹는 단계
레위기 8장 30~31절에 기록되어 있는데, 가슴 고기를 먹고 광주리에 남은 무교병을 먹는 단계입니다.
그런데 그냥 먹는 것이 아니라 모세가 관유와 피를 섞어 제사장의 옷에 뿌린 후 먹게 합니다.
온전한 거룩을 추구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음식을 먹는다는 것은 하나님과 교제가 이루어지게 되었다는 의미입니다.
아론과 그의 아들들은 7일 동안 회막 문 안에 거하며 위임식의 절차를 반복적으로 행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일은 졸속으로나 은밀하게 진행되는 것이 아니라 공개적이고 또한 신중하게 진행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제사장 안수식의 세 가지 영적 의미
제사장의 안수식 일곱 가지 절차를 통해 하나님이 우리에게 하시는 말씀은 세 가지입니다.
첫째, 하나님은 절대적으로 거룩한 분
인간은 제멋대로 하나님께 나아갈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 막말을 하고 건방진 자세로 나아갈 수 없는 것입니다. 죄를 가지고 접근할 수 없습니다. 모세와 아론과 같은 사람들이 기름을 바르고 피를 바르고 제사를 통해 하나님께 나아갔던 것처럼 우리도 하나님께 나아갈 때는 진실함과 거룩함으로 접근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대통령을 접견할 때도 무턱대고 나아가지 않습니다. 그에 합당한 예의를 갖추는 것입니다. 인간인 대통령에게도 예절을 갖춰야 한다면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막말을 하고 제멋대로 행동할 수 있겠습니까? 그럴 수 없는 것입니다. 레위기 10장에 아론의 두 아들이 현장에서 즉사한 이유는 자기 멋대로 하나님께 접근하려 했기 때문이었습니다.
둘째, 인간은 어느 누구도 자기 스스로의 능력으로 하나님께 나아갈 수 없다는 것
자기 힘으로 접근하려고 하면 현장 즉사입니다. 그래서 거룩하신 하나님께 나아가려면 중보자가 필요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셋째, 죄로 오염된 인간이 하나님과 교제를 이루기 위해서는 구별된 대제사장의 희생제사가 필요하다는 것
구약 시대에 거룩하신 하나님과 죄인 사이에 중보를 하는 사람이 대제사장 아론이었습니다.
그러나 아론은 예표이고, 실체는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거룩하신 하나님과 죄인 된 인간 사이를 중보해서 하나님께 나아가 교제할 수 있도록 하시는 분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 한 분 뿐이십니다.
공자, 석가모니, 모하메드가 아무리 훌륭하고 탁월한 종교인이었다 해도 그들은 중보자가 될 수 없습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하나님이 계신 천국에 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고,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 분과 교제하며 살게 되는 우리 모두가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출애굽기 29장은 제사장의 위임식(Ordination)
위임식은 특별한 의식을 통해서 제사장이 다른 사람들과 구별되게
함으로써 새로운 거룩한 영역에 들어가게 한다.
그들은 사람들을 대표하여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는 거룩한 일을 하기위해 남들과 구분된
삶을 살아야 한다.
그들은 자신이 해야 할 일이 무엇이며 그 일이 얼마나 소중한 일인지 또 어떻게 그 일을 수행해야 하는지를
알아야 한다.
위임식은 손을 채우다(Fill his hands), 지원하다(Support)라는 뜻이 있다.
제사장으로 위임한다는
말은 그의 손을 채운다는 뜻이다.
그에게 권위와 능력을 부여함으로써 기능을 채우게 한다.
모세는 그들에게 안수하여 능력을
부여하였다.
위임식은 제사장을 회막 문으로 데려다가 옷을 입히는 것으로 시작되며 7일간 진행된다.
위임식은 4단계로 나누어 지는데
첫째 단계에서는 아론과 그의 아들들이 의복을 입고(29:4-9)
둘째 단계에서는 수송아지를 속죄제물로 바치며(29:10-14)
세째 단계에서는 수양을 번제로 바치고(29:15-18)
네째 단계에서는 다른 수양하나를 위임식을 위한 희생의 제물로 바친 후 그
희생의 고기를 하나님 앞에서 먹는다(29:19-41).
3차례의 제사를 살펴보면 먼저 속죄 제물(Sin Offering)로
제단(Altar)을 정화시켜 제단이 가장 거룩한 곳이 되게 한다.
이 곳에 수송아지의 피를 단의 네 귀퉁이 뿔에 바르고 제단의
밑에 피를 쏟음으로써 제단을 정결케하는 의식을 마친다.
두번째는 번제(Burnt Offering)로 아론과 그 아들들의 죄를
속죄하기 위해 수양 전체를 하나님께 향기로운 냄새로 바쳐 하나님의 은혜와 자비를 구한다.
세번째는 위임식을 위한 수양을
잡아 속죄 제물 때 피를 바르는 것과는 달리 피를 제단과 제사장에게 뿌린다.
이는 피의 의식(Blood Rite)으로
불린다(출 24:6, 8).
이 피의 의식을 통해 제사장은 부정한 영역에서 거룩한 영역에 속한 자로 바뀐다.
3차례의 제사는
속죄제와 번제를 거쳐 화목제를 드린 후 거룩한 음식을 먹는 순서로 발전한다.
출애굽기 29장이 제사장의 위임식에 관한 지침을
지시한다면 레위기 8장은 이 지침을 시행하는 것을 기록한다.
위임식은 제사장을 거룩하게 하는 의식이다.
따라서 희생의 제물로
사용되는 동물은 흠이 없고 완전해야 한다.
그들이 입는 의복도 거룩해야 한다.
그들은 옷을 입기위해 회막문 앞으로 나와야 한다.
회막의 입구는 제단과 성막 사이에 위치한다.
제사장들은 이 곳에서 의식을 행했다.
제사장의 위임식은 이스라엘 백성이 지켜보는
가운데 행한다.
그들은 의복을 입기 전에 먼저 몸을 씻어야 한다.
몸 전체를 물에 담가 씻는지 아니면 손과 발 만을 씻는지를
정확히 알 수 없지만 몸을 정결하게 한 후 아론이 옷을 입고 그의 아들들이 차례로 옷을 입는다.
옷을 입은 후에는 모세가 그들의
머리에 기름을 붓는다. 기름을 붓는 행위는 그 사람에게 특별한 신분을 부여하는 정결의식으로 왕과 선지자들이 기름부음을 받았다.
출애굽기 29:20
피를 아론의 오른쪽 귓부리와 그의 아들들의 오른쪽 귓부리에
바르고 그 오른손 엄지와 오른발 엄지에 바를 것을 명하셨다.
레위기 14장에 기록된 문둥병 환자의 정결의식과 같다.
귀와
손과 발에 피를 바르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여야 하고 삶에서 행위로 반응하고 삶의 방향을 올바로 정립해야 하는 것을
상징한다.
제사장의 위임식과 문둥병 환자의 정결의식이 같은 이유는 무엇일까?
제사장과 문둥병 환자는 어떤 관계가 있는가?
성경은
분명 의학서적이 아니다.
그런데 왜 성경에서는 문둥병 환자에 대해 깊은 관심을 보이며 자세히 기록하는가?
문둥병은 가장 무서운
전염병이며 인간의 모든 신경조직을 파괴시키는 병으로 회복의 가능성이 희박한 절망의 병이다.
문둥병에 걸린 사람은 공동체에서
분리되어 정상적인 생활을 영위하지 못한다.
비록 살아있지만 죽은 자와 같은 어두운 삶을 살아야 한다.
우리 모두는 죄로 인해 몸이
썩어가는 문둥병 환자이다.
우리가 문둥병을 치유받고 정결의식을 거쳐 거룩해지지 않으면 공동체 안으로 들어갈 수 없다.
문둥병
환자의 정결의식의 과정을 자세히 살펴보면 흥미로운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먼저 제사장이 진 밖으로 나가 문둥 환자의 상태를
파악하기 위해 진찰한다.
그것은 예수님이 진 밖에 있는 우리를 만나기 위해 찾아 오시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정한 산 새
두마리를 잡는다.
한마리는 죽음을 당하고 다른 한 새는 산채로 취하여 들에 놓아 날아가게 한다.
죽은 새는 예수님의 죽음을
상징하며 산 새는 우리 믿는 자들을 상징한다.
죽은 새의 피에 의해 살아있는 새가 정결케 되기 때문이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을 통해 생명을 얻었다.
그러나 그 것은 끝이 아니라 시작이다.
우리에겐 공동체 안으로 들어가기 위해 해야 할 일들이 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삶의 변화이다.
삶의 변화가 없이는 완전히 치유된 것으로 볼 수 없다.
우리 모두는 제사장이다.
그러나
제사장은 그냥 자동으로 되는 것이 아니다.
반드시 위임식이라는 정결의식을 거쳐야 한다.
특히 피뿌림과 기름부음이 없으면 제사장이 될
수 없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죄로부터의 구원과 성령의 기름부음이 있어야 하며 삶의 변화가 필요하다.
삶의 변화가 없이 어떻게
남들과 구분된 삶을 살며 제사장의 거룩한 직무를 수행할 수 있겠는가?
결국 우리가 문둥병 환자라고 생각하던 아니면 제사장이라고
생각하던 우리에게 요구되는 요구사항은 같다.
나병 환자의 정결예식(레위기 14:1~20)
제사장의 진단(1~3절)
제사장이 행하는 정결 의식(4~8절)
환자가 행하는 정결의식(9절)
정결함을 받을 자가 드리는 속건제(10~18절)
하나님의 백성이 된 후에 드리는 속죄제와 번제와 소제(19~20절)
레위기 13장 - 나병의 종류와 진단과 조치법 : 나병의 영적인 의미
13장과 14장은 나병(문둥병, 한센병) 을 다루는 장입니다. 구약 성경에 기록된 나병은 피부병의 일종으로 전염성이 강하고, 사람의 피부에 발생될 뿐 아니라 의복, 그릇이나 집 안의 벽 등에 발생되는 것으로 나옵니다. 나병에 관해서 아는 바가 없어서 나병과 관련된 자료를 찾아보았습니다. 그 중에 가톨릭대학교 의과대학 한센병연구소의 채규태 교수님의 글을 비롯해서 위키백과, 서초구 보건소의 의학자료를 비롯해서 여러 가지 자료를 검색해 보았습니다. 그 중에 한센병 질환자의 사진 자료는 너무나 끔찍해서 사진을 보는 것만으로도 견디기 힘들만큼 끔찍합니다. 가톨릭의대 채규태 교수님의 글을 읽으면 구약에 기록된 나병에 대한 기록은 현대의 한센병과는 거리가 멀다는 견해를 보입니다.
성서에는 특히 구약성서에는 나병에 관한 기록이 많다.
위에서도 언급한 <출애굽기 4:6>의 나병에서부터 <루까 17:22>의 열명의 나환자에 이르기 까지 약 50회 정도 언급된다.
출애굽기에 나오는 손에 문둥병이 들어 마치 흰 눈이 덮인 것 같았다 <출애굽기 4:6>는 문둥병은 오늘날 우리가 보는 나균 감염으로 발생하는 문둥병(leprosy, Hansen's disease, 한센병)과는 다른 것으로 생각되며, 탈락성 피부염의 일종으로 보인다.
성서가 희랍어로 번역될 때, 히브리어인 zaraath, Tsraath(unholy, unclean)에 해당되는 말이 희랍어에는 leprosy 였다.
여기에 사용한 문둥병이라는 용어는 사람 뿐 아니라 집이나 옷에 생기는 깨끗하지 못한 질환을 뜻하고 있음을 성서에서 찾아 볼 수 있다<레위기 13장, 사람에 생긴 문둥병, 옷에 생긴 문둥병 레위기 13:47-59, 집에 생긴 문둥병 14:33-57>.
따라서 구약의 문둥병은 오늘날 우리가 진단하고 치료하는 전염병의 일종인 한센병(나병, 문둥병)과는 거리가 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오늘날 한센병을 앓고 있는 사람들에게 성서에 기록되어 있는 질병이므로 하느님의 심판을 받은 것이라고 말한다면 너무나 가혹한 처사임을 분명히 인식하여야 한다.가톨릭의대 한센병연구소 채규태 교수의 글 중에서
이와
같은 의학자의 견해를 참고하며 오늘 본문의 말씀의 내용을 분해해 보겠습니다.
글의 말미에는 나병과 관련된 영적인 의미가
무엇인가에 대해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2~23절 : 사람의 피부에 생긴 나병(심각한 피부병)
24~28절 : 화상에 난 나병
29~39절 : 환부에 생긴 나병, 옴, 피부 어루러기 등
40~44절 : 대머리에 난 나병
47~59절 : 털옷, 베옷, 가죽 옷 등에 발생한 나병
새번역에서는 한글개역성경에서 문둥병으로 번역했고, 개역개정에서는 나병으로 번역한 단어를 백선, 악한 피부병 , 곰팡이 등으로 번역하였기 때문에 헷갈릴 수 있는데 채규태 교수님의 글에서도 볼 수 있듯이 현대인이 생각하는 한센병과 구약에 기록된 문둥병, 나병이 거리가 멀다는 것들을 고려해서 번역한 용어가 아닌가 생각됩니다.
성경에서
수많은 질환들이 등장하지만 그 중에서 특정 질병에 대해 가장 자주 등장하고, 많은 지면을 할애해서 설명하는 질병은 나병(문둥병,
한센병)이 유일하다 생각됩니다.
왜 이렇게 하나님은 나병에 대해서 이렇게 집중적으로 중요하게 다루시는 것일까요?
여러 질병
가운데 가장 더럽고, 부정하고, 전염성이 강한 질환이기 때문입니다.
마치 전염병을 일으키는 바이러스나 세균처럼 주위 사람들에게
악한 질병을 퍼트리는 역할을 하기 때문에 엄격히 격리하고 차단하라고 명하신 것입니다.
나병(癩病, Leprosy) 또는 한센병(Hansen's disease; HD)은 미코박테리아의 일종인 나균(Mycobacterium leprae)과 나종균(Mycobacterium lepromatosis)에 의해 발생하는 만성 감염병이다.
처음 감염되었을 때는 아무 증상이 없고, 이 잠복기는 짧으면 5년, 길면 20년 가량 지속된다.
증상이 발현하면 신경계, 기도, 피부, 눈에 육아종이 발생한다.
이렇게 되면 통각 능력을 상실하고, 그 결과 자신도 모르는 사이 신체 말단의 부상 또는 감염이 반복되어 썩어 문드러지거나 떨어져 나가서 해당 부위를 상실하게 된다.
체력의 약화와 시력의 악화 또한 나타난다.위키백과 나병에 대한 정의
그런 까닭에 나병에 걸린 사람은 진영 안에서 살지 못하고 초기에 제사장이 진단을 하는 기간 동안에도 엄격하게 격리해서 관찰하는 기간을 두게 하셨고, 나병으로 확진 판정을 받게 되면 진영 밖으로 내보내서 혼자 생활해야 했습니다.
45. 악성 피부병에 걸린 사람은 입은 옷을 찢고 머리를 풀어야 한다. 또한 그는 자기 코밑 수염을 가리고 '부정하다, 부정하다' 하고 외쳐야 한다. 46. 병에 걸려 있는 한, 부정한 상태에 머물러 있게 되므로, 그는 부정하다. 그는 진 바깥에서 혼자 따로 살아야 한다." |
구약 성경에 기록된 나병에 걸린 대표적인 사람들
구약 성경은 심각한 피부질환인 나병을 영적인 문제와 연결해서 다루고 있다는 걸 발견할 수 있습니다.
구약 성경에 등장하는 나병에 걸린 사람들은 누가 있을까요?
1. 모세
구약
성경에서 최초로 나병에 걸린 것으로 표현된 인물은 모세입니다.
출애굽기 3장에서 하나님이 호렙산에서 떨기나무 불꽃으로
부르십니다.
그 때부터 하나님은 모세를 애굽으로 보내서 바로에게 내 백성을 보내라 명하라 하시지만 모세는 끝까지 하나님의 부르심을
거역하며 따를 수 없다고 반항하는 내용이 기록된 장면에서 등장하는 구절입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에 거역한 모세에게 나병이라는
이적을 보여주신 사건입니다.
출애굽기 4:6~7
6. 여호와께서 또 그에게 이르시되 네 손을 품에 넣으라 하시매 그가 손을 품에 넣었다가 내어보니 그의 손에 나병이 생겨 눈 같이 된지라7. 이르시되 네 손을 다시 품에 넣으라 하시매 그가 다시 손을 품에 넣었다가 내어보니 그의 손이 본래의 살로 되돌아왔더라.
2. 미리암
하나님이
세우신 모세를 대적한 미리암에서 나병이 발병합니다.
민수기 12장 전체가 미리암에게 하나님이 진노하사 나병이 발병하게 한 사건을
기록하고 있는 장입니다.
그 사건의 발단은 모세가 아내 십보라가 죽은 후에 구스 여인인 흑인여자를 두번째 아내로 맞아들인 일에
대해 미리암과 아론 두 사람이 모세를 심하게 비방한 사건입니다.
4절에 보면 하나님이 모세, 아론, 미리암 세 사람을 지명하여
부르십니다. 그런 후에 벌어진 사건입니다.
민수기 12:1~13
1. 모세가 구스 여자를 취하였더니 그 구스 여자를 취하였으므로 미리암과 아론이 모세를 비방하니라.
2. 그들이 이르되 여호와께서 모세와만 말씀하셨느냐 우리와도 말씀하지 아니하셨느냐 하매 여호와께서 이 말을 들으셨더라.
4. ○여호와께서 갑자기 모세와 아론과 미리암에게 이르시되 너희 세 사람은 회막으로 나아오라 하시니 그 세 사람이 나아가매.
5. 여호와께서 구름 기둥 가운데로부터 강림하사 장막 문에 서시고 아론과 미리암을 부르시는지라 그 두 사람이 나아가매.
6. 이르시되 내 말을 들으라 너희 중에 선지자가 있으면 나 여호와가 환상으로 나를 그에게 알리기도 하고 꿈으로 그와 말하기도 하거니와.
7. 내 종 모세와는 그렇지 아니하니 그는 내 온 집에 충성함이라.
8. 그와는 내가 대면하여 명백히 말하고 은밀한 말로 하지 아니하며 그는 또 여호와의 형상을 보거늘 너희가 어찌하여 내 종 모세 비방하기를 두려워하지 아니하느냐.
9. 여호와께서 그들을 향하여 진노하시고 떠나시매.
10. 구름이 장막 위에서 떠나갔고 미리암은 나병에 걸려 눈과 같더라 아론이 미리암을 본즉 나병에 걸렸는지라.
11. 아론이 이에 모세에게 이르되 슬프도다 내 주여 우리가 어리석은 일을 하여 죄를 지었으나 청하건대 그 벌을 우리에게 돌리지 마소서.
12. 그가 살이 반이나 썩어 모태로부터 죽어서 나온 자 같이 되지 않게 하소서.
13. 모세가 여호와께 부르짖어 이르되 하나님이여 원하건대 그를 고쳐 주옵소서.
미리암에게
나병이 발병한 원인은 하나님이 자신의 대리자로 세우신 모세를 비방하고, 모세보다 자신을 높이려한 미라임의 교만과 모세의 권위를
무시한 태도로 말미암은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아론이 미리암을 위해 기도한 구절을 보면 12절에 나병이 걸려서 중증으로 심각해지면
살이 썩어문드러지고, 형체를 알아볼 수 없는 지경까지 악화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미리암의 경우도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영적인 교만과
거역하는 태도가 직결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3. 웃시야 왕
남유다 왕국의 왕 중에서 나병에 걸린 유일한 왕이 웃시야 왕입니다.
역대하 26:16~19
16. ○그가 강성하여지매 그의 마음이 교만하여 악을 행하여 그의 하나님 여호와께 범죄하되 곧 여호와의 성전에 들어가서 향단에 분향하려 한지라. |
5. 엘리사 선지자의 시종 게하시
엘리사 선지자 시대에 아람 왕국의 장군 나아만은 나병을 고침 받으려고 엘리사 선지자를 찾아옵니다. 그는 많은 예물을 가지고 엘리사를 찾아와서 나병을 고침받기를 구합니다. 나아만 장군이 엘리사 선지자에게 한 행동은 14장에서 나병 환자의 정결례를 다룰 때 조금 더 소상히 설명을 하기로 하고, 여기선 게하시의 행동에만 초점을 맞추겠습니다.
열왕기하 5:15~16, 20~27
15. ○나아만이 모든 군대와 함께 하나님의 사람에게로 도로 와서 그의 앞에 서서 이르되 내가 이제 이스라엘 외에는 온 천하에 신이 없는 줄을 아나이다 청하건대 당신의 종에게서 예물을 받으소서 하니 16. 이르되 내가 섬기는 여호와께서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노니 내가 그 앞에서 받지 아니하리라 하였더라 나아만이 받으라고 강권하되 그가 거절하니라 20. ○하나님의 사람 엘리사의 사환 게하시가 스스로 이르되 내 주인이 이 아람 사람 나아만에게 면하여 주고 그가 가지고 온 것을 그의 손에서 받지 아니하였도다 여호와께서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노니 내가 그를 쫓아가서 무엇이든지 그에게서 받으리라 하고 21. 나아만의 뒤를 쫓아가니 나아만이 자기 뒤에 달려옴을 보고 수레에서 내려 맞이하여 이르되 평안이냐 하니 22. 그가 이르되 평안하나이다 우리 주인께서 나를 보내시며 말씀하시기를 지금 선지자의 제자 중에 두 청년이 에브라임 산지에서부터 내게로 왔으니 청하건대 당신은 그들에게 은 한 달란트와 옷 두 벌을 주라 하시더이다 23. 나아만이 이르되 바라건대 두 달란트를 받으라 하고 그를 강권하여 은 두 달란트를 두 전대에 넣어 매고 옷 두 벌을 아울러 두 사환에게 지우매 그들이 게하시 앞에서 지고 가니라 24. 언덕에 이르러서는 게하시가 그 물건을 두 사환의 손에서 받아 집에 감추고 그들을 보내 가게 한 후 25. 들어가 그의 주인 앞에 서니 엘리사가 이르되 게하시야 네가 어디서 오느냐 하니 대답하되 당신의 종이 아무데도 가지 아니하였나이다 하니라 26. 엘리사가 이르되 한 사람이 수레에서 내려 너를 맞이할 때에 내 마음이 함께 가지 아니하였느냐 지금이 어찌 은을 받으며 옷을 받으며 감람원이나 포도원이나 양이나 소나 남종이나 여종을 받을 때이냐 27. 그러므로 나아만의 나병이 네게 들어 네 자손에게 미쳐 영원토록 이르리라 하니 게하시가 그 앞에서 물러나오매 나병이 발하여 눈같이 되었더라 |
엘리사 선지자는 나아만 장군이 강권하며 예물을 바치는 것을 끝까지 거절합니다. 그런데 게하시는 물욕, 탐욕에 눈이 어두워서 선지자의 뜻을 거스르고, 독단으로 재물을 청하여 받게 됩니다. 그 게하시의 거스름에 대한 징벌로 나병이 그에게 임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나병을 통해서 주시는 교훈은 무엇일까요?
나병의 특징을 꼽아보겠습니다.
첫째, 나병은 잠복 기간이 깁니다.
5년에서 20년에 걸쳐 오랜 잠복기간을 거친 후에 발병하기도 한다고 합니다.
우리 안에 내재되어 있는 교만이나 거역한 태도는 평상시에는 마음 속에 깊이 잠재되어 있고, 노출되지 않는 상태일 수 있습니다. 그러다 어떤 게기에 부딪히게 될 때 드러나게 되죠. 미리암이 그랬고, 게하시가 그렇습니다. 웃시야 왕은 그가 하는 일들이 잘 되고, 강성해질 때 그 속에 잠재되어 있던 교만이 두드러지게 솟아나와 제사장만이 할 수 있는 일을 왕이 직접 제사장의 일까지 침범하여 직접 수행하고자 했죠.
둘째, 발병이 되면 신경이 마비되어 무감각하게 됩니다.
양심이 마비되면 무감각하게 됩니다. 부끄럽고 수치스러운 일을 저지르고도 부끄러움을 모르는 사람을 일컬어 얼굴에 철판을 깔았다고 합니다. 양심이 화인 맞은 자, 저주받은 자라고 하죠. 영적으로 나병에 걸리면 나타나는 증상이 이렇습니다. 죄 짓기를 밥먹듯이 하게 되면 누구나 똑같은 경로를 거쳐 양심이 마비된 파렴치한이 됩니다.
셋째, 전염성이 강합니다.
현대의 한센병은 대한 치료제가 개발되어 있기 때문에 치료제를 복용하면 며칠 안에 99%의 균이 사멸되기 때문에 전염성이 강하지 않다고 합니다. 구약 시대는 치료제가 없었고, 하나님의 징계로 인한 질병이었으며 진영 안에 두지 않고 진영 밖으로 쫓아냈던 것은 전염성이 강했기 때문이었습니다. 나병에 걸려서 중증이 되면 살이 썩어서 심한 악취가 나고, 얼굴이나 손발 등이 썩어서 떨어져 나가고 악종이 생기는 등 사람의 형체가 보기에 고통스러울정도로 변하기 때문에 고립된 독신생활을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영적인 죄악의 전염성솨 강력한 파괴력을 상정적으로 보여주는 질환이었던 거지요.
이러한 까닭에 사람을 부패하게 만들고, 영적으로 파멸에 이르게 하는 가시적인 질병으로 나병이 성경에 등장하고, 나병에 대한 강력한 경계심을 갖게 함으로써 자신을 하나님 앞에서 더러운 것과 접촉하지 않음으로 거룩함, 성결함을 지키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일인가를 깨닫게 한다는 사실입니다.
참고로 첨언하자면 나병, 문둥병은 공관복음에 기록되어 있지만 예수님이 우리의 죄를 대신하여 짊어지시고 희생제물로 피를 뿌리신 후에는 요한복음부터 요한계시록까지 나병-문둥병에 대한 기록이 한 번도 등장하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요? 율법 시대에 부정하다, 더럽다 정죄받은 것들이 모두 예수 안에서 해결된 것을 보여줍니다. 우리가 진정으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옛 사람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고, 내 안에 계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살아간다면 더 이상 문둥병, 나병에 대한 두려움과 공포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받아 죄에 빠지지 않기를 힘서야 합니다. 무엇보다 하나님 앞에 교만함, 거역하는 불순종의 죄는 각별히 조심해야 합니다.
레위기 14장(1~20) : 나병환자의 정결예식과 제사장 위임식의 비교
첫째, 나병 환자의 정결 예식
나병에 걸린 사람은 제사장의 진단을 받은 후에 나병으로 판명이 날 경우 더 이상 이스라엘 백성들의 공동체 안에서 함께 생활할 수 있는 자격을 박탈당하고 진영 밖으로 쫓겨나서 혼자 살아야 했습니다. 진영 안과 밖은 하나님과 언약을 맺은 백성이냐, 아니면 이방인과 같이 자격 없는 자들인가를 가르는 중요한 분기점이 됩니다. 나병 환자는 미리암, 엘시사 선지자의 시종 게시하, 웃시야 왕처럼 하나님을 거역하여 치명적인 죄를 저지른 자에게 하나님이 진노하사 내리는 천형과 같은 질병이었습니다. 하나님을 직접 대적하거나 혹은 하나님이 위임하여 세우신 직분을 맡은 사람을 대적하고 거역할 경우에 징벌적인 의도에서 발병한 병이 곧 성경에 기록된 나병의 성경적인 의미입니다.
그러므로 나병 환자의 정결예식은 하나님과 관계가 단절되고, 언약 백성의 반열에서 쫓겨난 사람이 다시 언약 백성의 지위를 회복하고, 하나님 앞에 거룩한 제사장과 같이 세움을 받는 과정을 보여주는 예식이지요. 나병환자의 영적인 지위는 다음과 같은 과정을 거치게 됩니다.
진영 밖 -> 1단계 정결예식 -> 진영 안으로 들어옴. (언약 백성의 지위, 신분을 회복함) 2차 정결예식 > 회막에 들어갈 수 있는 지위를 회복 > 회막에서 2단계 정결예식 -> 거룩하고 정결함을 입은 사람으로 제사장처럼 하나님께 쓰임받는 사람이 될 수 있게 됩니다.
정결 예식을 받은 나병 환자의 삶의 여정은 아래와 같이 됩니다.
진영 밖 -> 진영 안 -> 회막 안 -> 하나님 앞에 선 거룩한 삶
나병 환자가 진영 밖에 추방되어 살아가는 모습은 언약 밖에 있던 이방인의 영적인 신분과도 같다는 걸 알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방인에 대해 아래와 같이 기록하고 있습니다.
에베소서 2:11~15
11. ○그러므로 생각하라 너희는 그 때에 육체로는 이방인이요 손으로 육체에 행한 할례를 받은 무리라 칭하는 자들로부터 할례를 받지 않은 무리라 칭함을 받는 자들이라 12. 그 때에 너희는 그리스도 밖에 있었고 이스라엘 나라 밖의 사람이라 약속의 언약들에 대하여는 외인이요 세상에서 소망이 없고 하나님도 없는 자이더니 13. 이제는 전에 멀리 있던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워졌느니라 14.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원수 된 것 곧 중간에 막힌 담을 자기 육체로 허시고 15. 법조문으로 된 계명의 율법을 폐하셨으니 이는 이 둘로 자기 안에서 한 새 사람을 지어 화평하게 하시고 |
특히 에베소서 2장 12절을 보면 그리스도 예수께서 이방인으로서 이스라엘 나라 밖에 있던 약속의 언약에 대해 밖에 있던 외인이었던 이방인 성도들을 13절에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말미암아 14절에 언약 백성과 이방인 사이에 있던 중간에 막힌 담을 자기 육체로 헐어 15절에 이 둘(이스라엘 백성과 이방인) 그리스도 안에서 한 새 사람을 지어 화평하게 하셨다 라고 강해하고 있습니다.
갈라디아서 3:28~29
28. 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남자나 여자나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 |
이 과정이 위에 그림으로 도식을 그려놓은 것처럼 나병 환자가 진영 밖에 있다가 흐르는 물 가운데 오지그릇 안에서 잡은 피와 물을 백향목 가지에 묶은 우슬초에 피를 묻혀 일곱번을 뿌린 후에 진영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던 것과 영적인 원리가 같다는 걸 알 수 있습니다.
레위기 14:6~8
6 그렇게 한 다음에, 제사장은 백향목 가지와 홍색 털실 한 뭉치와 우슬초 한 포기와 그리고 그 살아 있는 나머지 새를 가져다가, 생수가 섞인 죽은 새의 피에 찍어서, |
둘째, 제사장 위임식의 절차와 순서
그러면 이제 복습을 겸해서 이미 공부하였던 레위기 8장 제사장 위임식의 2단계 순서를 간략히 정리해 보겠습니다.
제사장 위임식도 두 단계로 진행되는데 1단계를 물로 씻고 제사장의 옷을 입혀주는 일입니다. 그런 후에 2단계로 속죄제, 번제, 위임식 숫양 제사, 곡식제사를 드립니다.
1단계 제사장 위임 예식 - 물로 몸을 씻기고 거룩한 제사장의 옷을 입힙니다.
6. ○모세는 아론과 그의 아들들을 데려다가 물로 씻게 하였다. 7. 모세는 아론에게 속옷을 입혀 주고, 띠를 띠워 주고, 겉옷을 입혀 주고, 에봇을 걸쳐 주고, 그 에봇이 몸에 꼭 붙어 있도록 에봇 띠를 띠워 주었다. 8. 모세는 또 아론에게 가슴받이를 달아 주고, 그 가슴받이 속에다가 우림과 둠밈을 넣어 주었다. 9. 모세는 아론의 머리에 관을 씌우고, 관 앞쪽에 금으로 만든 판, 곧 성직패를 달아 주었다. 이렇게 모세는 주께서 명하신 대로 하였다. 12. 그리고 또 모세는, 거룩하게 구별하는 기름 가운데서 얼마를 아론의 머리에 붓고, 그에게 발라서, 아론을 거룩하게 구별하였다. 13. 모세는 아론의 아들들을 데려다가, 그들에게 속옷을 입혀 주고, 띠를 띠워 주고, 머리에 두건을 감아 주었다. 이렇게 모세는 주께서 명하신 대로 하였다. |
가장 먼저 그들에게 번제단과 성막 사이에 있는 물두멍의 물로 그들의 몸을 씻기고, 거룩한 세마포로 만든 제사장의 옷을 입혀줍니다. 대제사장인 아론에게는 제사장 옷 위에 에봇을 입히고, 가슴에 흉패를 붙이고, 제사장의 관을 씌우고, 기름을 그의 이마에 붓고 발라주지요. 그의 아들들인 일반 제사장에게는 물로 몸을 씻기고 하얀 세마포로 지은 제사장의 옷만 입혀줍니다. 이 과정은 나병 환자에게 물로 몸을 씻은 후에 옷을 빨아서 입게 한 일과 유사합니다.
2단계 짐승의 희생 제사를 드리는 의식
모세는 먼저 수송아지로 제사장을 위한 속죄제를 드립니다. (14~17절)
그런 다음에 숫양으로 번제를 드립니다. (18~21절)
숫양 한 마리로 위임식 제사를 드립니다.(22~29절) 이때 곡식제사를 함께 드립니다.(26절)
22. ○그렇게 한 다음에, 모세는 위임식에 쓸 또 다른 숫양 한 마리를 끌어 오게 하였다. 아론과 그의 아들들이 그 숫양의 머리 위에 손을 얹었다. 23. 모세는 그 제물을 잡고, 그 피를 얼마 받아서, 아론의 오른쪽 귓불과 오른쪽 엄지손가락과 오른쪽 엄지발가락에 발랐다. 24. 모세는 또 아론의 아들들을 오게 하여, 그 피를 오른쪽 귓불 끝과 오른쪽 엄지손가락과 오른쪽 엄지발가락에 발랐다. 모세는 남은 피를 제단 둘레에 뿌린 다음에, |
위임식을 위해 숫양 한 마리를 제사 드렸다고 기록된 22~29절에서 특히 27절에서 곡식 제사로 드린 제물을 흔들어서(요제) 바치는 제물로 드렸다는 구절과 29절에 모세가 숫양 제물의 가슴고기를 흔들어서 바치는 제물로 드렸으니 이 고기는 모세의 몫이라는 표현을 빌면 위임식으로 숫양을 드리는 제사는 속건제 규례에 따라 드린 제사라는 걸 알 수 있습니다.
다시 정리해 봅니다. 제사장 위임식의 희생제사 드린 순서는 아래와 같습니다.
속죄제 -> 번제 -> 위임식을 위한 속건제, 곡식제사(소제)
나병 환자를 위한 2차 정결 예식에서 제사를 드린 순서(레위기 14장 12~20절)
속건제 -> 속죄제 -> 번제, 곡식제사
12 제사장은 숫양 한 마리를 끌어다가, 그것을 기름 한 1)록과 함께 속건제물로 바치는데, 그것은 주 앞에서 흔들어 바치는 제물이므로, 제사장은 그것들을 흔들어야 한다. 13 제사장이 그렇게 하고 나면, 정하게 되려는 그 사람이 속죄제물과 번제물을 잡는 바로 그 장소 곧 거룩한 곳에서, 나머지 숫양 한 마리를 잡는다. 속건제물은 속죄제물과 마찬가지로 제사장의 몫이 된다. 그것은 가장 거룩한 것이다. 14 제사장은 속건제물의 피를 받아다가 정하게 되려는 사람의 오른쪽 귓불과 오른손 엄지와 오른발 엄지에 발라야 한다. 19 부정한 상태에서 이제 정하게 되려는 그 사람의 죄를 속하여 주려고, 제사장은 속죄제물을 바친다. 그렇게 한 다음에, 정하게 되려는 그 사람이 번제물을 잡으면, 20 제사장은 번제물과 곡식제물을 제단에 바친다. 이렇게 하여, 제사장이 그의 죄를 속하여 주면, 그는 정하게 된다. |
제사 드리는 순서는 다르지만 공통점은 양쪽 다 속건 제물의 제사를 바칠 때 희생 양의 피를 발라서 오른쪽 귓볼, 오른손 엄지, 오른발 엄지에 바르게 하신다는 점입니다.
제사장 위임식에서 마지막에 하는 것은 피와 기름을 뿌리는 것이었습니다. 레위기 8장 30절
30. ○또 모세는 거룩하게 구별하는 기름과 제단에 있는 피를 가져다가, 아론, 곧 제사장 예복을 입은 아론에게 뿌렸다. 그는 또 아론의 아들들, 곧 제사장 예복을 입은 그의 아들들에게도 뿌렸다. 이렇게 하여 모세는, 아론과 그의 옷 및 그의 아들들과 그들의 옷을 거룩하게 구별하였다. |
나병 환자에게 속건 제사를 드릴 때 기름을 바르는 장면(레위기 14장 15~18절)
15 그런 다음에, 제사장은 기름 한 록에서 얼마를 덜어, 왼손 바닥에 붓고, 16 오른쪽 손가락으로 왼손 바닥에 부은 기름을 찍어, 그 손가락에 묻은 기름을 주 앞에서 일곱 번 뿌린다. 17 그리고 제사장은 손바닥에 남아 있는 기름을, 정하게 되려는 그 사람의 오른쪽 귓불과 오른손 엄지와 오른발 엄지에, 이미 발라 놓은 속건제물의 피 위에 덧바른다. 18 그리고 나머지 기름, 곧 제사장의 손바닥에 남아 있는 기름은, 정하게 되려는 사람의 머리에 바른다. 그리고 나서, 제사장은, 주 앞에서 그 사람의 죄를 속하여 주어야 한다. |
레위기 8장 30절에서 위임식 속건제 제사를 종결할 때 피와 기름을 제사장에게 뿌리는 의식을 행한 것처럼 나병 환자를 정결하게 하는 정결 예식 중 속건제 제사를 드릴 때 피를 바르고, 기름을 뿌리고, 발라주며 머리에 기름을 바르는 의식을 했습니다. 제사장의 속건제나 나병 환자의 속건제나 동일하게 피와 기름을 뿌리고 발라주었습니다.
이방인인 우리는 원래 진영 밖에 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약속 받은 언약 밖에 있었던 사람이고, 하나님을 모르고 하나님과 단절된 상태에서 살았습니다. 그런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희생으로 말미암에 그의 피로 나병 환자와 같은 소망 없는 존재인 우리가 죄에서 구원을 받아 정결함을 받은 존재가 되었습니다. 이방인 성도는 유대인과 동등한 신분과 자격을 부여받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 회막 앞에서 하나님 앞에 선 자로서 기름(성령) 부음을 받은 거룩한 세마포 옷을 입은 존재로 구약 시대의 제사장들처럼 하나님을 경외하고 섬기기 위해 성막 안 성소, 지성소에 들어갈 수 있는 자격과 신분과 권한을 부여받은 존재가 되었습니다.
이러한 영적인 원리에 대해 히브리서는 아래와 같이 해설해 주고 있습니다.
히브리서 10장 19~25절
19 그러므로 형제자매 여러분, 우리는 예수의 피를 힘입어서 담대하게 지성소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20 예수께서는 휘장을 뚫고 우리에게 새로운 살 길을 열어 주셨습니다. 그런데 그 휘장은 곧 그의 육체입니다. 21 그리고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집을 다스리시는 위대한 제사장이 계십니다. 22 그러니 우리는 확고한 믿음을 가지고, 참된 마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갑시다. 우리는 마음에다 예수의 피를 뿌려서 죄책감에서 벗어나고, 맑은 물로 몸을 깨끗이 씻었습니다. 23 또 우리에게 약속하신 분은 신실하시니, 우리는 흔들리지 말고, 우리가 고백하는 그 소망을 굳게 지킵시다. 24 그리고 서로 마음을 써서 사랑과 선한 일을 하도록 격려합시다. 25 어떤 사람들의 습관처럼, 우리는 모이기를 그만하지 말고, 서로 격려하여 그 날이 가까워 오는 것을 볼수록, 더욱 힘써 모입시다. |
19절에서 "지성소"를 한글 개역, 개역개정은 "성소"로 번역했는데 다른 한글 번역본은 "지성소"로 번역을 했더군요. 휘장이 찢어진 것은 마태, 마가, 누가 복음에 공통적으로 기록된 "이에 성소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까지 찢어져 둘이 되니라"(마가복음15:38절)
말씀을 가리키는데 이 휘장은 성소와 지성소를 가로 막는 휘장입니다.
그러므로 이 휘장이 찢어짐으로 대제사장이 매년 7월 10일
대속죄일 절기에 한번만 들어갈 수 있었던 지성소에 대제사장이 아닌 일반 제사장된 이들도 들어갈 수 있는 자격을 얻게 되었음을
설명한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아무나 지성소에 들어갈 수 있다는 뜻일까요?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의 피 뿌림을 받고, 물로 정결하게 씻음 받은
사람들이 거룩한 기름 부음을 받고, 거룩한 세마포 옷을 입은 제사장 같은 이들만이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설 수 있다는 규례를 잊지
말아야 합니다.
비유를 하자면 제사장 위임식을 거친 제사장이나 나병 환자였다가 병 고침을 받은 사람이 1단계, 2단계 정결
예식을 치른 후에(물로 씻음받고, 피 뿌림, 기름 부음을 받은) 하나님 앞에 설 수 있었던 것과 같이 거룩함을 받고, 기름부음을
받은 사람들이 들어갈 수 있다는 걸 알게 하신다는 말입니다.
나병 환자가 병이 나은 후에 본래의 생활로 복귀하기 위해서 거쳐야 하는 2단계 정결예식 가운데 2단계 정결 예식을 다룬
내용입니다.
오늘은 2단계 정결 예식의 과정과 절차에 초점을 맞추어서 말씀을 깊이 있게 읽어보도록 하겠습니다.
본문에 들어가기 전에 어제 상고했던 1단계 정결 예식 가운데 몇 가지 점을 복습을 겸해서 짚어보고 싶습니다.
어제 밤에 잠들기 전에 1단계 정결 예식을 머리 속으로 곱씹어 보는 중에 두 가지 부분이 새롭게 깨달아졌습니다.
1단계
정결 에식은 물이 흐르는 곳에서 진행합니다.
흐르는 물이란 고인 물, 즉 오염물질이 고여있는 썩은 물이 아니라 오염되지 않고,
살아있는 생명의 물이라는 뜻이 있을 것입니다.
두 마리의 새 중에서 한 마리는 그 물이 담긴 오지 그릇 안에서 잡아서 피를
흘립니다.
이 피를 백향목 나무 가지에 우슬초를 붉은 홍색실로 묶은 후에 피를 정결함을 받을 사람에게 일곱번 뿌리죠.
즉 제사장이
피를 뿌림으로써 생명을 희생한 그 피로 말미암아 죄 사함을 받게 한다는 의미입니다.
이때 나병 걸렸다 나은 사람이 죄 사함을
받는 것은 타율적인 은혜로 말미암은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과 피 흘리심으로 말미암아 신약의 성도가 죄와 저주에서
놓임 받음을 믿는 것과 같지요.
일방적인 은혜의 선물입니다.
그런
다음에 더려워진 옷을 빨고, 몸에 난 털을 모두 면도해서 밀어버리게 합니다.
그런 후에 온 몸을 깨끗한 물에 몸을 담가 씻게
하지요.
이 과정 중에서 몸에 난 털을 모두 밀어버리라고 하신 것에는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
왜? 털을 밀어버리라고 하셨을까?
그러자 이어지는 한 단어가 있었습니다.
한 터럭조차 남김 없이!
이
뜻이구나.
나병에 걸렸던 육신입니다.
나병에 걸리게 만들었던 죄와 악행입니다.
그 모든 것에 대한 연결 지점이 될만한 것은 한
터럭조카도 남김이 없어야 한다.
이런 의도의 말씀이 아니었을까.
과거에 대한 미련과 집착을 완전히 떨쳐버리되, 지극히 사소한
것까지도 완전히 끊어라. 완전한 절연, 완전한 단절의 의미가 아닌가. 그런 후에야 진영으로 다시 돌아올 수 있다.
이렇게
제사장을 통해서 정결 의식을 받은 나병 환자였던 사람은 꿈에도 그리워하던 진영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 허락 되었습니다.
그러나
집에 도착했지만 안에 들어갈 수는 없지요.
칠일을 밖에 머물다가 칠일 째 되는 날 다시 옷을 빨고, 몸에 난 털을 모두 밀고,
목욕을 하는 일을 거치라 하십니다.
같은
행동을 두 번 반복하게 하십니다.
이중의 단절, 이중의 절연. 과거의 죄악에 결탁되었던 삶에서 완전히 돌이키라는 말씀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피를 뿌림으로 말미암아 죄를 용서받고, 죄와 저주에서 벗어나 자유함을 누리는 것은 타율적으로, 외부에서 일방적으로
임하는 은혜입니다.
이렇게 죄사함 받은 사람이 옷을 빨아 입고, 몸에 난 털을 밀고, 몸을 씻음으로 거룩하게 하는 것은 자율적인
거룩한 삶을 이루고자 하는 자신의 의지를 나타냅니다.
성막 뜰에 있는 번제단에서 희생 제사를 통해 피 흘림으로 죄를 속죄 받으면 그
다음에 번제단과 성막 사이에 있는 물두멍에서 손과 발과 얼굴을 씻고, 때로는 목욕을 합니다.
즉 희생의 피의 은혜로 죄사함 받은
후에 죄와 단절된 거룩한 삶을 살고자 하는 열심과 노력이 뒷받침 되어야 하죠.
그런 후에 성소에 들어가면 상에 진열된 무교병
떡을 먹고, 등잔대에는 기름에 불을 켜고, 분향단에서 하나님이 받으실만한 거룩한 향을 피워올리죠. 하나님 앞에서 날마다 하나님의
얼굴을 뵈며 말씀을 귀기울여 듣고, 그 말씀을 깊이 묵상하고, 상고하며 실천하는 삶을 살아갑니다.
나병 환자였던 사람의 1단계 정결 예식은 성막 뜰 안에 있는 번제단과 물 두멍에서 이뤄지는 것들을 진영 밖에서 동일한 영적인 원리로 한번 체험하게 하신 것이라는 것을 말씀을 상고하는 과정을 통해서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둘째, 2단계 정결예식(10~32절) : 속건제, 속죄제, 번제
두
번째 단계의 정결 예식을 위해 하나님은 4가지 제물을 준비하라 명하십니다.
즉 짐승의 희생 제사를 드릴 숫양 두 마리, 암양 한
마리를 준비하라 하시고, 곡식 제사를 드릴 기름에 섞은 고운 밀가루 십분의 삼 에바, 기름 한 록을 준비하라고 하십니다.
참고로, 에바는 고체 용량을 나타내는 단위이고, 록이나 힌은 액체의 용량을 나타내는 단위입니다.
1록은 0.54리터(약 두 홉
반)
10. 여드레째 되는 날에, 그는 흠 없는 숫양 두 마리와, 흠 없는 일 년 된 어린 암양 한 마리와, 곡식제물로 바칠 기름 섞은 고운 밀가루 십분의 삼 에바와, 기름 한 록을 가져 와야 한다. |
숫양
두 마리와 암양 한 마리는 무슨 제사에 쓰일 제물일까요?
숫양 한 마리는 속건제용
제물이고, 암양 한 마리는 속죄제용 제물이며, 남은 숫양 한 마리는 속죄제용 제물로 쓰이게 됩니다.
속건제 제사는 무조건 숫양을 한 마리를 드립니다.(레 5:15, 18)
다른 짐승 제물은 사용하지 않습니다.
속죄제는 수송아지(제사장, 온 이스라엘 회중), 족장은 숫염소, 일반 평민은 암염소 또는 암양을 드립니다.(레4장) 그런데 경제적으로 빈곤한 사람은 새 2마리로 대신할 수 있고, 여기에도 못 미치면 곡식 가루 십분의 일 에바를 곡물로 바칠 수 있습니다.
번제는 소, 염소, 양이나 가리지 않고, 가능한데 다만 수컷이라야 합니다. 이에 힘이 못 미치면 산비둘기, 집비둘기 새끼 등의 날짐승도 가능합니다.
화목제는 소, 양, 염소 세 가지만 가능한데 성별은 무관합니다.
이런 제사별로 사용되는 제물의 종류를 기억하고 있다면 숫양 두 마리, 암양 한 마리를 준비하라는 말씀을 읽으면 아, 무슨 무슨 제사를 드리라는 것이구나 라고 유대인들은 즉각 알아들었을 것입니다.
이렇게 제물을 준비한 후에 그 사람으로 하여금 드디어 성막 울타리 문을 지나 번제단 앞에 설 수 있었습니다. 나병 환자라면 진영 안에 들어올 수도 없었으니 성막 울타리 안에 들어간다는 건 꿈도 끌 수 없었을테니 당사자로서는 하나님 앞에 설 수 있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감격에 눈물이 쏟아지지 않았을까 생각해 봅니다.
(1) 나병 환자의 정결 제사 중 첫번째 제사가 속건제입니다.
제사장은 숫양 한 마리를 끌어와 기름 한 록과 함께 속건 제물로 바칩니다. 속죄제는 하나님 앞에 자신의 죄를 고백하고 용서 받기 위해 드리는 제사입니다. 반면 속건제는 하나님 뿐 아니라 사람에 대한 범죄에 대한 죄를 용서 받기 위해 드리는 제사를 말하지요.
12 제사장은 숫양 한 마리를 끌어다가, 그것을 기름 한 록과 함께 속건제물로 바치는데, 그것은 주 앞에서 흔들어 바치는 제물이므로, 제사장은 그것들을 흔들어야 한다. 13 제사장이 그렇게 하고 나면, 정하게 되려는 그 사람이 속죄제물과 번제물을 잡는 바로 그 장소 곧 거룩한 곳에서, 나머지 숫양 한 마리를 잡는다. 속건제물은 속죄제물과 마찬가지로 제사장의 몫이 된다. 그것은 가장 거룩한 것이다. 14 제사장은 속건제물의 피를 받아다가 정하게 되려는 사람의 오른쪽 귓불과 오른손 엄지와 오른발 엄지에 발라야 한다. |
나병이 단순히 육체의 피부병이 아니라 영적인 죄를 의미하는 질환을 상징한다고 보는 이유가 이런 이유 때문입니다. 속죄제를 드리기에 앞서서 속건제를 먼저 드려야 한다는 것은 하나님 뿐 아니라 사람에 대한 죄를 먼저 사함받지 않으면 안된다는 뜻이 되겠죠. 본인이 상처, 피해를 준 사람과 먼저 화해가 필요함을 보여주는 근거가 된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13절에 "나머지 숫양 한 마리를 잡는다." 라는 구절이 나오는데 이는 표준새번역, 새번역의 오역이라 생각됩니다. 개역한글, 개역개정, 공동번역, 우리말성경 등 타 한글번역본은 "그 어린 숫양"으로 번역하고 있습니다. 12절과 13절에서 제사장이 흔든다는 것은 곧 요제로 드린다는 말인데 속건제로 드린 제물은 제사장의 몫이 된다는 것을 부연 설명한 것으로 숫 양 두 마리 중에 한 마리를 산 채로 요제로 드려서 제사장의 몫으로 차지하고, 남은 한 마리 숫양을 잡아서 피를 흘리는 제물로 삼는다는 게 아닙니다. 숫양 두 마리 중에 한 마리는 속건제로 드리라는 말씀을 "나머지 숫양 한마리"라고 번역해서 혼란을 일으킨 오역일 뿐입니다.
14절에 속건제로 드린 숫양의 피를 받아서 정결함을 받을 사람의 오른쪽 귓볼, 오른손 엄지, 오른발 엄지에 피를 바르라고 하십니다. 그런데 이 과정은 레위기 8장 22~23절에서 숫양으로 제사장 위임식 제사를 드리는 장면에서 동일하게 등장합니다.
오른 쪽 귓볼과 오른쪽 엄지 손가락, 오른 쪽 엄지 발가락에 피를 발라서 거룩하게 하신다는 것은 과거의 죄인된 삶에서 단절하였으니 앞으로는 또 다시 악한 말에 귀를 기울이고, 죄를 저지르는데 손과 발을 바쁘게 놀리지 말 것이며 하나님의 말씀에만 귀를 기울이고, 거룩한 일에, 순종하는 일에 손과 발을 부지런히 놀리며 살아가라는 뜻이 있는 것이겠지요. 삶이 지향하는 방향과 뜻과 가치관에 하나님 말씀 중심으로 완전히 새롭게 변화받아야 할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라 봅니다.
그런 다음에 기름 한 록을 준비하게 하셨던 그 기름을 발라주라 명하십니다.
15 그런 다음에, 제사장은 기름 한 록에서 얼마를 덜어, 왼손 바닥에 붓고, 16 오른쪽 손가락으로 왼손 바닥에 부은 기름을 찍어, 그 손가락에 묻은 기름을 주 앞에서 일곱 번 뿌린다. 17 그리고 제사장은 손바닥에 남아 있는 기름을, 정하게 되려는 그 사람의 오른쪽 귓불과 오른손 엄지와 오른발 엄지에, 이미 발라 놓은 속건제물의 피 위에 덧바른다. 18 그리고 나머지 기름, 곧 제사장의 손바닥에 남아 있는 기름은, 정하게 되려는 사람의 머리에 바른다. 그리고 나서, 제사장은, 주 앞에서 그 사람의 죄를 속하여 주어야 한다. |
16절에 그 기름을 손가락에 찍어 주 앞에서 일곱번 뿌리라고 하십니다. 여기서 "주 앞에서"란 어느 대상을 말할까요? 성소 안에 있는 휘장이나 기물에 뿌리는 건 아닌 것이 확실합니다. 평민 개인을 위한 희생 제사는 모두 번제단 앞에서 이루어지니까요. 성소 안에 들어가지 않지요. 구체적으로 기름을 뿌리는 대상이 명시되어 있지 않지만 이러지는 구절을 통해서 유추해 보면 정결함을 받을 사람을 대상으로 기름을 일곱 번 뿌리라는 뜻인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 무방하다 생각됩니다.
기름을 일곱 번 뿌린 후에 그 기름을 오른쪽 귓볼, 오른쪽 엄지 손가락, 오른쪽 엄지 발가락에 피를 발랐던 곳에 덧바르라 하십니다. 그런 후에 남은 기름을 머리에 바르라고 하십니다. 대체 나병에서 회복된 사람이 무엇이길래 레위기 8장 30절에 제사장 위임식 말미에 아론과 그의 아들들과 그들이 입은 제사장 옷에 기름을 뿌려 거룩하게 하라 명하셨던 그 일을 이들에게도 하라고 하시는 것일까요?
이 단계에까지 이르고 보면 14장에서 나병 환자의 정결 예식에는 뭔가 다른 뜻이 들어있다는 확신이 듭니다. 나병 환자란 한센씨 병이 든 특정한 한 사람을 위한 것이 아니라 심각한 나병에 걸려 살이 썩어져 나가고, 감각이 무뎌져서 아픔조차 느끼지 못하는 썩어 문드러진 하나님의 백성 전체에 대한 상징이라는 걸 말입니다. 레위기 14장의 나병에 걸려 부정한 자는 특정인이 아니라 하나님께 부르심을 받아 구원을 받은 모든 언약 백성 전체를 상징하는 존재이며 영적으로 부패하고 썩어 영원히 멸망할 수밖에 없는 이들을 부르셔서 피 뿌려주시고, 기름을 뿌려주시고, 발라주시고, 머리에 기름을 부어주심으로 거룩한 제사장 나라를 삼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의도를 2단계에 걸친 정결 예식을 통해서 우리에게 계시해 주시는 말씀이 아닌가!
(2) 속죄제를 드리고, 번제를 드릴 때 곡식 제사를 함께 드린다(19~20절)
속건제를 드린 후에 속죄제를 드리게 하십니다.
19 부정한 상태에서 이제 정하게 되려는 그 사람의 죄를 속하여 주려고, 제사장은 속죄제물을 바친다. 그렇게 한 다음에, 정하게 되려는 그 사람이 번제물을 잡으면,ㅋ |
위의 19절과 20절을 보시면 속죄제를 드리는 것을 설명한 말씀을 보면 "제사장은 속죄 제물을 바친다"는 한 구절로 끝내 버립니다. 세부적인 설명이 없죠. 또한 번제로 드릴 숫양 한 마리를 잡으면 20절에 기름 섞은 고운 밀가루 십문의 삼 에바를 번제물과 함께 번제단에 바친다 라고 간략히 기술하고 넘어갑니다. 즉, 속건제 -> 속죄제 -> 번제+소제 순서로 제사를 드리되 나병 환자의 정결 제사 중에 핵심은 속건제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죠. 이렇게 네 가지 제사를 드리고 나면 나병을 앓았던 환자는 드디어 하나님 앞에 정한 사람으로 인정받을 수 있게 됩니다. 참으로 길고도 먼 여정이었습니다.
나병 환자의 2단계 정결예식의 초점이 속건제에 맞춰져 있다는 것은 바로 이어지는 21~22절에서도 확인할 수 있습니다.
21 그러나 가난해서 그렇게 많은 것을 바칠 수 없는 사람이, 자기의 죄를 속하려 할 때에는, 그는, 제사장이 흔들어 바칠 속건제물로는 숫양 한 마리를 가져 오고, 곡식제물로 바칠 기름으로 반죽한 고운 밀가루는 십분의 일 에바만 가져 오면 된다. 기름은 마찬가지로 한 록이다. 22 힘이 닿는 대로, 산비둘기 두 마리나 집비둘기 새끼 두 마리를 가져다가, 한 마리는 속죄제물로, 다른 한 마리는 번제물로 바치면 된다. |
숫양 두 마리, 암양 한마리를 감당할 수 없는 가난한 사람에 대한 규례가 21절부터 32절까지 이어집니다. 속건제로 드릴 숫양은 그대로 유지하고, 속죄제, 번제를 드릴 제물은 새 두 마리로 대체합니다. 또한 기름 섞은 고운 밀가루는 십분의 삼 에바에서 십분의 일 에바로 줄여도 된다고 하십니다. 변동이 없는 것은 속건제를 드리는 숫양 한마리와 기름 한 록입니다.
25~29절은 13~18절의 과정을 되풀이 하는 내용입니다. 다시 말하면 속건제 제물로 숫양을 잡고, 그 피를 정함을 받을 사람의 오른쪽 귓볼과 엄지 손가락, 엄지 발가락에 바르고, 기름을 그 사람에게 일곱 번 뿌린 후에 오른쪽 귓볼, 엄지 손가락, 엄지 발가락에 바르고, 남은 기름을 머리에 바릅니다. 그런 후에 속죄제와 번제는 새 두 마리로 대신합니다. 피를 통해서 말씀을 듣는 귀와 말씀을 순종할 손과 발을 거룩하게 하고, 그 위에 기름 - 성령을 부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 앞에서 정결함을 받은 사람으로서 성령의 이끄심에 순종하여 거룩한 제사장과 같은 삶을 살라는 것에 모든 초점이 맞추져 있는 것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나병 환자 단계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살지 못하고 진열 밖에서 살아야 했습니다.
몸은 썩어문드러지는 불치병에 걸려있고, 부정한 존재라 감히 하나님 앞에
나갈 수 없을 뿐 아니라 하나님의 언약 백성과 동등한 삶을 살 수조차 없는 비참한 존재였습니다.
이는 이방인 불신자의 영적인
상태를 상징적으로 보여줍니다.
1단계의 정결 예식 단계
나병 환자처럼 영원히 멸망할 수 밖에 없는 이방인 불신자인 우리에게 하나님은 영원한 제사장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그의 피를 힘입어 죄 사함을 받고, 우리의 모든 죄와 허물을 침례(세례)를 통해서 물로 씻어 목욕함으로써 정결함을 받게 되었습니다. 이 과정을 통해서 진영 밖에 머물러 있던 사람이 진영 안 하나님의 백성들의 공동체 속으로 들어갈 자격을 얻었습니다. 하나님께 부름받은 신자의 단계입니다.
2단계 정결 예식 단계
하나님은 제사장을 통해 우리를 하나님 앞에 서게 하십니다. 우리에게 숫양 두 마리와 암양 한마리, 고운 밀가루와 기름을 준비하라 하십니다.
지금은 정결하게 되었으나 과거의 우리는 나병을 앓던 썩어 문드러진 더럽고 부정한 자들이었습니다. 세상에서 하나님과 무관하게 살던 때의 모든 더러움과 허물, 죄와 악행을 단절하고 이제는 하나님 앞에서 그의 말씀을 부지런히 상고하고 연구하며 배우기를 힘쓰다가 그 말씀대로 순종하며 살아야 할 존재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살아야 할 것을 알면서도 제대로 그런 삶을 살지 못하는 비루한 존재가 바로 우리들이었습니다. 그런 우리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도록 귀에 기름을 발라주시고, 깨달은 말씀대로 순종하며 살아갈 수 있도록 손과 발에도 기름을 발라 주셨습니다. 그 뿐 아니라 머리에 기름을 발라주셨죠. 머리에 기름을 바른다는 것은 곧 제사장의 이마에 기름을 붓는 것과 다름 없지요. 거룩한 성령의 사람으로 세워주신 것입니다. 과거에는 진영 밖에 있는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를 수 없는 존재였지만 이제는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의 얼굴을 뵈옵고, 그 분에게 기름을 부어 세움을 받은 정결하고 거룩한 신분으로 새롭게 태어났음을 인증을 받았습니다.
나병을 앓던 사람이 진영 밖에서 살다가 제사장의 부르심을 받고, 진영 안으로 들어온 후에 성막 문 어귀에서 하나님께 기름부음을 받는 거룩한 사람으로 세움을 받는 이 모든 과정은 이방인 출신의 모든 신앙인들의 영적인 여정을 보여주는 한 폭의 그림이 아닌가.
구약에서 회개라는 단어가 사용된 말씀
욥기 42:6
그러므로 내가 스스로 한하고 티끌과 재 가운데서 회개하나이다
시편 7:12
사람이 회개치 아니하면 저가 그 칼을 갈으심이여 그 활을 이미 당기어 예비하셨도다
제사장의 위임식
모세에 의해서 아론과 그 아들들을 데려다가 몸을 씻기고 예복을 입힌 후에 기름을 붓고 발라주는 의식을 거행하였습니다.
이렇게 위임을 받은 제사장을 위해 세 가지 위임식 제사를 드렸습니다.
이러한 위임식 제사를 통하여 제사장은 하나님과 백성 앞에서 기능과 자격 및 특권을 가지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위임식 제사를 통해서 신약 시대를 살아가는 왕 같은 제사장으로 부름 받은 우리가 하나님 앞에 드려야 할 영적인 제사가 무엇인지를 살펴보려고 합니다.
1. 속죄제(14-17절)
제사장의
위임식 제사 가운데 가장 먼저 드려야 하는 제사가 있는데 그것이 바로 속죄제입니다.
제사장에게 왜 속죄제가 필요할까요? 제사장은
남을 위한 속죄를 위해 중보하기 전에 자신이 먼저 속죄를 입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모세가 속죄제의 수송아지를 끌어오니 아론과 그
아들들이 수송아지의 머리 위에 안수하였습니다. 자신들의 모든 죄를 수송아지에게 전가시키는 것을 의미합니다. 짐승이 죽는 것은
자기 죄 때문이라는 것을 분명히 자각해야 했습니다. 죄없는 짐승이 죽어 가는 동안 제사장은 죄가 얼마나 무서운 것이며, 이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서 무엇보다 성결해야 한다는 것을 마음에 굳게 결심하게 되었을 것입니다.
위임을 위한 속죄제는 수송아지의 피를 향단의 네 뿔에 바르지 않고(레 4:3-12절의 속죄제의 규정과 다르다) 오히려 바깥의 번제단의 네 뿔에 바르고 그 다음에 남은 피는 제단 밑에 쏟았습니다. 이와 같이 피는 장막 내부로 가져가지 않았습니다. 이는 이들이 아직은 제사장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임직식의 기간이 칠일간이었음을 볼 때(8:33) 이들은 아직은 제사장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따라서 제물의 피를 장막 내의 향단으로 가지고 가지 않고 바깥 제단에다 발랐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사야를 일꾼으로 부르실 때에도 먼저 그의 죄를 용서하여 주셨던 것을 봅니다.
사 6:7 그것을 내 입에 대며 가로되 보라 이것이 네 입에 닿았으니 네 악이 제하여졌고 네 죄가 사하여졌느니라 하더라
왜 이사야 선지자에게는 숯불을 입에 대었을 까요?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해야 하는 사람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부정한 입술을 가지고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 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 아닙니까? 그러므로 먼저 그의 입술을 정결케 하신 것입니다.
레위기에서 계속 강조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거룩”입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가지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가지려면 무엇보다 거룩해야 합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 거룩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성화된 삶을 살 수 있을까요? 우리가 십자가의 보혈로 정결함을 받은 후에 성화된 삶을 계속 이어가기 위해서는 말씀에 철저하게 순종하며 기도를 힘써서 하나님의 능력으로 무장을 해야 합니다. 그래야 자신을 세속으로부터 지킬 수 있는 것입니다.
2. 번제(18-21절)
먼저 속죄제를 통해서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모든 잘못된 것을 제거하여 정결케 하고 이제는 전적으로 헌신을 상징하는 번제를 드립니다.
번제는 온 삶과 생명 전체를 하나님께 바치는 헌신을 의미합니다.
보잘 것 없는 사람을 하나님과 백성들의 중재자로 세워주시니 얼마나 감사합니까? 그 은혜를 생각하면 죽기까지 충성하기로 헌신을 다짐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저도 목사 안수를 받을 때 하나님의 은혜가 너무나 크고 감사하여 눈물이 핑 돌았던 경험이 있었습니다.
저드슨(1788-1850)이 대학을 거쳐 신학교를 졸업하자 보스톤시에 있는 상류층의 교회에서 부목사로 와 달라는 초빙을 받았습니다. 그의 동료 친구들은 모두 부러워하며 집의 어머니와 누이도 매우 기뻐했습니다. 그러나 저드슨은 고개를 흔들었습니다.
"하나님은 나를 해외선교에 쓰시려고 부르셨습니다. 내가 이곳에 남아서 일을 해도 주님의 일을 하는 것이지만 나는 부분적으로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이 됩니다. 나는 주님께 전체로 순종하렵니다."
안일한 자리를 물리친 저드슨은 결국 철통같은 불교의 나라 미얀마(버마)에 선교사로 갔습니다. 그곳은 너무나도 어려운 곳이었기에 목숨을 바칠 각오로 일했으나 처음의 한 사람을 전도하여 세례를 베푸는데 무려 6년간의 갖은 고생을 다 했습니다. 저드슨은 오랜 기간을 버마의 감옥에서 지나기도 했고 죽음과 질병의 고비도 몇 번이나 넘겼습니다. 그러나 저드슨의 거룩한 헌신은 5만 명이라는 크리스천을 미얀마(버마)땅에 탄생시키고 전세계의 크리스천들의 마음에 꺼지지 않는 횃불을 밝히 켜 놓은 것입니다.
제사장은 자신의 욕망이나 정욕을 죽이고 마침내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드리는 일꾼입니다. 제사장이 되어 임직을 행하기 전에 먼저 희생을 각오하는 번제물이 되어야 합니다.
어떤 사람이 진정 헌신의 사람이 될 수 있을까요?
감사하는 마음을 가진 사람이 헌신의 사람이 됩니다. 바울의 고백을 들어보십시오.
딤전 1:12 나를 능하게 하신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께 내가 감사함은 나를 충성 되이 여겨 내게 직분을 맡기심이니
사랑하시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의 죄를 용서하여 주시고 일꾼으로 세워 주신 은혜를 감사하게 생각하십니까? 그렇다면 죽도록 충성하며 헌신하기를 다짐하십시오. 하나님은 자기 일꾼들이 온전히 헌신하시기를 소원하고 있습니다. 손에 쟁기를 잡은 일꾼이 뒤를 돌아보면 안됩니다. 주님만 바라보아야 합니다.
3. 화목제(22-29절)
헌신을
상징하는 번제의 수양을 드린 후에 따 다른 수양, 곧 위임식 수양을 제물로 드렸습니다.
속죄제, 번제, 화목제의 제사를 드릴
때마다 아론과 그의 아들들은 제물 위에 안수하였습니다.
모세는 위임식 수양을 잡고 그 피를 취하여 아론의 오른 귓부리와 오른 손
엄지가락, 오른 발 엄지가락에 피를 발랐습니다.
그의 아들들에게 같은 예식을 거행하였습니다.
이것은
제사장들의 귀도, 손도, 발도 하나님을 위하여 성별 되었음을 의미합니다.
먼저 아론과 그의 아들들의 오른 귓부리에 피를 바른
의미가 무엇인지 생각해 봅시다.
제사장은 먼저 귀를 성별 하여 하나님의 명령하심에 귀를 기울여야 함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귀로
하나님의 말씀만 들으라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듣는 것이 중요합니다.
아담과 하와는 마귀의 음성에 귀를 기울였다가 타락하였습니다.
가룟 유다도 마귀의 음성에 귀 기울였다가 하나님의 아들을 팔아먹는 배신자가 되었습니다.
사람은
듣는 것을 조심해야 합니다.
성경에서 귀 있는 자는 들으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귀가 따로 있다는
말씀입니다.
여러분들에게는 그런 귀가 있습니까? 오직 주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시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잠언 5:1-8
내 아들아 내 지혜에 주의하며 내 명철에 네 귀를 기울여서.
근신을 지키며 네 입술로 지식을 지키도록 하라.
대저 음녀의 입술은 꿀을 떨어뜨리며 그 입은 기름보다 미끄러우나.
나중은 쑥같이 쓰고 두 날 가진 칼같이 날카로우며.
그 발은 사지로 내려가며 그 걸음은 음부로 나아가나니.
그는 생명의 평탄한 길을 찾지 못하며 자기 길이 든든치 못하여 그것을 깨닫지 못하느니라.
그런즉 아들들아 나를 들으며 내 입의 말을 버리지 말고.
네 길을 그에게서 멀리하라 그 집 문에도 가까이 가지 말라.
오른
귓부리에 피를 바른 후에 오른손 엄지가락과 오른발 엄지가락에 피를 발랐습니다.
손과 발은 행위를 나타냅니다.
특히 오른 쪽은
힘과 능력을 상징합니다.
이것은 자신에게 주신 힘과 능력을 다하여 주님만을 위하여 행동하겠습니다 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또한
이 피는 제사장들의 옷에도 뿌려졌습니다.
관유와 피가 그들의 옷에 뿌려짐으로 그들의 입는 예복이 거룩하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보혈과 성령의 기름 부으심이 없다면 우리가 결코 거룩하게 될 수 없음을 가리켜 주는 것입니다.
모세는 화목제물과 소제물을 아론과 그 아들들의 손에 두어 여호와 앞에 흔들어 요제를 삼게 하였고 모세가 그들의 손에서 취하여 단 윗 번제물 위에 불사르니 이는 향기로운 냄새를 위하여 드리는 위임식 제사였습니다.
위임식 수양으로 드리는 화목제물 가운데서 모세의 응식은 무엇이었습니까?
수양의 가슴이었습니다.
그리고 나머지는 아론과 그 아들들에게 위임식 광주리의 떡과 함께 회막 안에서 삶아 먹고 나머지는 불사르도록 하였습니다.
이렇게 모든 의식을 마치고 아론과 그의 아들들은 제사장이 되었습니다. 성막은 아무나 다가설 수 있는 곳이 아니었습니다. 거룩한 영역을 침범하는 자는 죽임을 당하였습니다. 아론과 그의 아들들은 거룩한 제사 의식을 수행하기 위해 위험한 곳에서 일하였습니다. 이곳은 삶과 죽음이 교차하는 곳이었습니다. 이제 이들은 그 안에서 머물 수 있는 안전한 통과가 주어졌습니다. 삶과 죽음 사이에 있는 제사장들은 거룩한 곳과 비거룩한 곳, 삶과 죽음 사이의 중보자로서 살게 된 것입니다.
위임제는 제사의 종류가 아닙니다. 제사장을 세우는 위임식 제사를 의미합니다. 이 의식은 7일간 계속되었습니다. 제사장은 7일 동안 회막에서 나오지 못합니다(33,34). 성막에는 의지나 쉴 곳이 없다는 것이 특징입니다. 7일 동안 그들은 편히 누워서 잠도 못 자고 철야를 하면서 지냈을 것입니다. 매일 수송아지 한 마리로 속죄제를 드리고, 아침저녁으로 어린양 한 마리씩으로 번제와 소제를 겸하여 바쳤을 것입니다(출 29:36-39).
이와 같이 7일 동안 위임식이 거행된 것은 제사장의 직분이 얼마나 거룩하고 큰 직분인가를 알 수 있습니다. 후일에 대제사장은 최고의 권위자로 나타납니다.
그러나 인간의 중보자는 영원하지 못하다는 흠이 있습니다. 죽을 수밖에 없는 인간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보내주신 영원히 살아 계신 대제사장이 계십니다. 그분이 바로 우리의 구주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히브리서 4:14-16
그러므로 우리에게 큰 대제사장이 있으니 승천하신 자 곧 하나님 아들 예수 시라 우리가 믿는 도리를 굳게 잡을지어다.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 연약함을 체휼하지 아니하는 자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한결같이 시험을 받은 자로되 죄는 없으시니라.
그러므로 우리가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
우리의 대제사장이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가시는 우리 성도님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__________________ 레위기 8장 / 제사장 위임식
03-17-2023(금) 사순절 제21일
내용개요
본장에서부터는 제사를 전담할 제사장의 위임식에 관한 기록이 나타난다.
출애굽기 29장을 통해 제사장의 임명이 이루어졌으나 이제 성막이
완성되고 제사에 관한 규례가 완성된 시점에서 본격적인 제사장의 활동이 시작되고 있다.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아론 일가에 대해 제사장
위임식을 거행하도록 명하셨다(1-9절).
이에 모세는 아론과 그 아들들에게 관유를 붓고 위임식을 위해 속건제와 번제, 화목제를
드렸다(10-29절).
그 후에 아론 일가는 성막 안에서 칠 일을 지내며 위임식 행사를 함으로 제사장 취임의 모든 준비를
끝냈다(30-36절).
강해
레위기 8장은 출애굽기 29장에 기록된 모세의 규정을 전제하며, 레1-7장까지의 모든 제사 규정을 성취한 내용입니다.
특히 본장은 아론과
그의 자손들이 제사장으로 성별되는 위임식에 대해 자세히 언급하고 있습니다.
이 제사장 위임식은 이미 모세가 시내 산에서 지시받은
규례로 제사 제도가 규정되기 전에는 시행될 수 없었기 때문에 유보되다가 성막이 건립되고 제사 제도가 완비된 후에 시행되게 된
것입니다
신학주제
위임식 제사의 의미는 제사장이 갖는 중요한 위치를 나타낼 뿐
아니라 구속사에서 대제사장이신 그리스도를 예표한다는 점에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갑습니다.
먼저 기름 부음의 예식으로 성경에서
기름 부음을 받을 수 있는 신분은 왕과 제사장 그리고 선지자와 같이 하나님의 대리인으로 특별한 역할을 담당한 자에게만 가능합니다.
이런 의미에서 예수 그리스도는 곧
세상의 왕이며 죄를 대속하실 대제사장이시며 복음을 전할 선지자로 오실 것임을 예표한다고 하겠습니다.
또한 속죄제는 대속 의식을 담당할 제사장이
먼저 성결해야 함을 가리키며 순결하신 그리스도를 예표합니다.
번제는 제사장이 먼저 하나님께 대한 철저한 헌신을 맹세하는 것으로,
자신을 대속의 제물로 바친 그리스도의 희생을 예표합니다.
그리고 화목제는 백성들과 하나님 사이를 중재하기 위해 제사장이 먼저
하나님과 화평해야 함을 말하며, 대속으로 인간과 하나님 사이를 화해시킨 그리스도의 사역을 예표합니다.
영적교훈
자신을 대속 제물로 드림으로 모든 희생 제사를 완성하신 그리스도를 힘입어 오늘날 모든 성도들은 하나님의 제사장이 되었습니다(벧전 2:9).
오직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데서 불러 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자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따라서
본장에 나타난 제사장 규례는 영적 제사장인 성도들에게도 해당된다고 하겠습니다.
죄악 된 세상을 향하여 복음을 전파해야 할 성도들은 먼저
자신이 하나님 앞에 바로 서야 하며 맡겨진 사명을 위해 전적으로 헌신하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또한 언제나 하나님을 사랑하고
기뻐하는 자가 될 때 자신의 삶을 통해 죄악으로 더러워진 세상을 정결케 하는 제사장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__________________ 레위기 7장 / 제사법에 대한 추가 법규
03-16-2023(목) 사순절 제20일
레위기 7장 내용 분해
1-10. 속건제의 규례
11-34. 화목제 희생의 규례
* 22-27. 기름과 피를 먹지 말라
35-38. 제사법의 부언
본장은 다섯 가지 제사에 대한 최종 결론으로 희생 제물에 관한 처리 규정과 제사장의 분깃에 대해 말씀합니다.
속건제와
속죄제의 제사 규례와 제사장의 분깃에 대한 설명(1-10절)
화목제 희생 고기에 관한 규례와 제사장의 분깃에 대한 설명(11-34절)
특히 부정한 자는 화목제 희생 고기를 먹지 못하게 하는 금령이 강조됩니다.
하나님은 이
제사에 관한 규례를 이스라엘 자손 대대로 지ㅣ라고 말씀합니다(35-38절)
레위기 7장에는 6장에 이어 속건제 및 화목제의 규례가 언급되어 있으나, 이 제사들에 있어서 제사장의 몫과 그 제물을 먹는 규례가
언급되어 있습니다.
특히 제사 제도에 대한 규정이 주는 의미는 하나님께 제사하는 모든 일이 매우 중요하다는 것을 우리에게 가르쳐
줍니다.
구약 제사의 현대적 의미
하나님의 임재를 나타내는 성막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삶의 중심이며 생명의 근거이다.
따라서 하나님의
임재에 상응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헌신을 표시하는 제사는 공동체의 핵심적인 행위이다.
제사는 하나님과 이스라엘을 하나로 묶고
축복과 충성을 약속하는 증표인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구약에 나타난 제사는 비록 현대에 이르러 그 형식은 사라졌다 할지라도 내용은
여전히 유효한 것이다.
끊임없는 희생 제물을 요구하는 제사는 자신의 몸을 단번에 드려 모든 희생 제사를 완성시키신 그리스도에
의해 폐기되었다.
그러나 매일의 삶 속에서 자신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산 제사로 드리는 영적 제사는 성도들이 드려야 할 제사
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구원에 대한 전적인 헌신을 표시하는 구약 제사의 영적 계승이며, 그것을 통한 속죄와 축복은 현대의
성도들에게도 여전히 유효한 것이다.
본장에서 부정한 자는 화목 제사의 제물을 먹지 못하게 금하고 있다.
원래 화목 제물은 공동 식사를 통해 모두가 나눠 먹도록 되어
있다.
그러나 부정한 자는 참여하지 못하는 것이다.
이는 단순히 음식을 먹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화목 제물이 뜻하는 하나님과의
친교와 축복에 들어가지 못함을 의미한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거룩하시므로 죄 있는 자와 함께 하지 않으시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비록
구원받은 성도라 할지라도 범죄한 자는 하나님의 축복을 얻지 못함을 교훈해 준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언제나 자신을 돌아보아 죄에
빠지지 않도록 조심하며 죄를 지었을 때 지체 말고 하나님께 회개함으로 축복받는 자가 되어야 한다.
속건제에 관한 규정
7 “허물을 속하는 속건제에 관한 규정은 이렇다:
2 속건제의 제물은 대단히 거룩한 것이므로 제단 북쪽의 번제물을 잡는 곳에서 잡아야 한다. 제사장은 그 피를 받아 단 사면에 뿌리고
3 내장을 덮고 있는 모든 기름과 기름진 꼬리와
4 두 콩팥과 그 위에 덮여 있는 허리 부분의 기름과 간에 덮여 있는 간 꺼풀을 떼어내어
5 제사장은 이 모든 것을 제단에서 불로 태워 나 여호와에게 화제로 바쳐야 한다. 이것이 허물을 속하는 속건제이다.
6 이 제물은 매우 거룩한 것이므로 거룩한 곳에서 제사장들만 먹도록 하라.
7 “속죄제와 속건제에 다 같이 적용되는 규정은 이렇다. 그 제물의 고기는 제사를 드리는 제사장의 몫이다.
8 번제물을 드리는 제사장이 그 제물의 가죽을 갖도록 하라.
9 화덕에 구운 소제물과 솥이나 철판에서 만든 소제물은 그것을 드린 제사장의 몫이다.
10 이 밖의 모든 다른 소제물은 기름을 섞은 것이든 마른 것이든 모든 제사장들이 똑같이 나눠 먹어야 한다.”
화목제에 관한 규정
11 “나 여호와에게 드릴 화목제의 규정은 이렇다:
12 만일 사람이 화목제를 감사하는 마음으로 드리고자 하면 그는 누룩을 넣지 않고 기름을 섞어서 만든 빵과 누룩을 넣지 않고 기름을 발라 얇게 구운 과자와 고운 밀가루에 기름을 섞어 만든 과자를 감사의 희생제물과 함께 드려야 하며
13 또 누룩을 넣고 만든 빵도 화목제의 그 감사제물과 함께 드려야 한다.
14 그리고 각 예물 중에서 하나씩 제단 앞에서 들어올려 나 여호와에게 바친 다음 그것을 화목제의 피를 뿌린 제사장에게 주도록 하라.
15 감사하는 마음으로 드린 화목제물의 고기는 그 날에 다 먹어야 하며 다음날까지 조금도 남겨 두어서는 안 된다.
16 “그러나 만일 누가 감사의 예물이 아닌 서약이나 자원의 예물로 화목제를 드리면 제사장은 제사를 드린 그 날에 그 제물을 먹어야 하지만 남은 것이 있으면 다음날까지도 먹을 수 있다.
17 그렇지만 3일째까지 남은 것은 전부 불로 태워야 한다.
18 만일 3일째 되는 날에 그 화목제물의 고기를 조금이라도 먹으면 나 여호와는 그 제사를 받지 않겠다. 그것은 제물로서의 가치를 잃어버렸기 때문에 그 제물을 드린 자에게도 아무런 유익이 없고 오히려 더러운 것이 되고 만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그 제물을 먹는 자는 그 죄의 대가를 마땅히 받아야 할 것이다.
19 “만일 그 제물의 고기가 부정한 것에 접촉했으면 그것을 먹지 말고 불로 태워 버려라. 이 화목제물의 고기는 의식상 깨끗한 자만 먹을 수 있다.
20 그러나 부정한 자가 나 여호와에게 바친 이 화목제물의 고기를 먹으면 그는 자기 백성 가운데서 제거될 것이다.
21 만일 사람의 부정이든 부정한 짐승이든 무엇이든지 부정한 것을 만진 후에 나 여호와에게 바친 화목제물의 고기를 먹는 자는 자기 백성 가운데서 제거될 것이다.”
기름과 피는 먹지 못한다
22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셨다.
23 “너는 소나 양이나 염소의 기름을 먹지 말라고 백성들에게 일러라.
24 저절로 죽은 동물이나 맹수에게 찢겨 죽은 동물의 기름이 다른 목적을 위해서는 쓰일 수 있으나 너희가 그것을 먹어서는 안 된다.
25 누구든지 나 여호와에게 불로 태워 바친 희생제물의 기름을 먹는 자도 자기 백성 가운데서 제거될 것이다.
26 새의 피든 짐승의 피든 피는 절대로 먹지 말아라.
27 무슨 피든지 피를 먹는 자는 자기 백성 가운데서 제거될 것이다.”
제사장들의 몫
28 여호와께서 다시 모세에게 말씀하셨다.
29 “누구든지 나 여호와에게 화목제물을 드리려고 하는 자는 자기 손으로 직접 그 제물을 가져오라고 백성들에게 말하라.
30 그 사람은 그 제물의 기름과 가슴을 나 여호와에게 가져올 것이며 제사장은 그 가슴을 제단 앞에서 흔들어 요제로 나 여호와에게 바치고
31 그 기름을 단에서 불로 태운 다음 그 가슴은 아론과 그 자손들에게 주어야 한다.
32-33 그리고 그 제물의 우측 뒷다리는 들어 올려 나 여호와에게 거제로 드린 다음 그 화목제물의 피와 기름을 드리는 제사장이 갖도록 하라.
34 이스라엘 백성들이 드리는 화목제물 중에서 흔들어 바친 가슴과 들어올려 바친 뒷다리는 내가 제사장들에게 주었으므로 이것은 항상 그들이 차지해야 할 몫이다.
35 나 여호와에게 불로 태워 바친 이 제물 중에서 가슴과 우측 뒷다리는 아론과 그 자손들이 제사장으로 위임되던 그 날에 그들의 몫으로 정해진 것이다.
36 그들이 위임되던 날에 나 여호와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이것을 그들에게 주라고 명령하였다. 그러므로 이것은 그들이 대대로 차지할 몫이다.”
37 이것은 번제와 소제와 속죄제와 속건제와 위임제와 화목제에 관한 규정으로
38 여호와께서 시나이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제물을 드리라고 명령하신 그 날에 모세에게 말씀하신 것이다.
__________________ 레위기 6장 / 죄가 드러나는 날
죄(罪) - 넉 사(四) + 아닐 비(非)
하마르티아(hamartia) ἁμαρτία
불법(不法) 요한일서 3:4
불의(不義) 요한일서 5:17
불선(不善) 야고보서 4:17
불신(不信) 요한복음 16:9, 마가복음 16:16
ἁμαρτία, ίας, ἡ 266
2. 고린도후서 11:7 / 내가 너희를 높이려고 나를 낮추어 하나님의 복음을 값없이 너희에게 전함으로 죄를 지었느냐
어원 / 264에서 유래
관련 성경 / 죄(요 8:21, 롬 5:20), 불법(살후 2:3), 죄악(히 11:25).
신약 성경 / 173회 사용
* 264. ἁμαρτάνω
어원 / [기본형] 미래 ἁμαρτήσω, 제2부정과거 μάρτω, 가정법 ἤμαρτον, 제1부정과거 ἡμάρτησα, 가정법 ἁμαρτή- σω, 과거분사 ἁμαρτήσας, 1[부정불변사]과 3313의 어간에서 유래
관련 성경 / 죄를 범하다(마 18:15), 죄를 짓다(눅 15:18, 롬 6:15), 죄로 인하다(요 9:2), 범죄하다(롬 2:12), 죄가 있다(벧전 2:20).
신약 성경 / 43회 사용
♦ 3월 15일(수) 사순절 제19일
♦ 오늘 읽어야 할 말씀 : 레위기 6:1∼30
♦ 묵상을 위한 주제 : 죄가 드러나는 날(5절)
♦ 성구 : 무릇 그 거짓 맹세한 물건을 돌려보내되 곧 그 본물에 오분 일을 더하여 돌려보낼 것이니 그 죄가 드러나는 날에 그 임자에게 줄 것이요.
레위기 6장은 1장에서부터 5장에 언급된 다섯 가지 제사의 결론이라고 하겠습니다.
6장의 내용을 분해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6:1∼7. 재산권을 침해한 자가 드려야 할 속건제
6:8∼13. 번제와 화목제
6:14∼23. 소제
6:24∼30. 속건제를 드리는 절차와 방법
따라서 6장에서는 제사의 원인만이 아니라 절차와 방법까지 상세한 규례를 언급하므로 이스라엘 백성의 모든 삶이 전적으로 하나님의 뜻에 의해 이루어지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오늘 묵상할 주제는 “죄가 드러나는 날(the day the sin is revealed)”입니다.
세상에는 두 종류의 죄인뿐입니다.
첫째는 현장에서 간음 중에 붙잡혀 온 드러난 죄인입니다.
둘째는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처럼 드러나지 않은 죄를 지니고 있는 죄인
죄가 드러나지 않았다고 하여 죄가 작은 것도 아닙니다.
성 프란시스는 “하나님은 얼마나 위대하시며 나는 그 앞에 얼마나 죄인인가를 좀 깨닫게 해주세요!” 라고 날마다 기도했다고 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모든 육체의 죄들이 밝히 드러나는 그 순간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먼저 내 안에 감추어진 죄를 자복해야 합니다.
죄는 먼저 생각으로 시작합니다.
마치 가룟 유다가 예수님을 팔아넘길 생각을 했던 것처럼.........
이와 같이 사람은 먼저 죄를 생각하고 그 다음에 행동으로 옮깁니다.
결국 우리가 죄를 짓는 것은 몸뿐만 아니라 몸을 사용하는 마음이라고 하겠습니다.
예수님은 인류의 죄를 위해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임을 당하셨습니다.
그 보혈의 공로로 인하여 주홍 같은 우리의 죄는 희어졌으며 동이 서에서 먼 것 같이 우리 죄과를 멀리 옮기셨습니다.
마치 컴퓨터의 delete 삭제 버튼을 누른 것 같이 깨끗이 지워주셨습니다.
죄인을 의인으로 여겨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내게 크게 다가오면 올수록 빛이신 예수 그리스도에게 다가가면 갈수록 우리의 죄에 대한 반응은 더욱 더 예민해지게 됩니다.
죄가 있던 그 자리에 그리스도의 영이신 성령이 자리를 잡으면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계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새로운 생명의 삶을 누릴 수 있습니다.
오늘도 보혈을 지나 하나님 품에서 행복한 믿음의 주인공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주와 동행 365 제74일 읽어야 할 말씀
신명기 26∼27장
마가복음 14:27∼53
♪ 찬양 / 예수로 나의 구주 삼고
예수 내 구주!
예수 내 생명!
예수 내 권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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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위기의 목표
1. 거룩한 나라
2. 거룩한 백성
레위기 / 27장, 859절
히브리어 명칭 : 와이크라(그리고 그가 부르셨다)
목표 : 제사장 나라, 거룩한 백성
내용 분해 :
1장- 16장 / 거룩한 길, 하나님께 나가는 방법, 성소를 중심한 제사법전
1-7, 제사 규례
8-10, 제사장 규례
11-16, 결례 규례
17장-27장 / 거룩한 삶,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는 방법, 공동체 생활을 배경으로 전개되는 성결법전
17, 제사를 통한 거룩
18-22, 가정과 사회를 통한 거룩
23-25, 절기를 통한 거룩
26, 축복과 저주를 통한 거룩
27, 서원을 통한 거룩
해리슨(Harrison)
레위기는 기독교 신앙과 교리의 기초를 다루는 가장 중요한 말씀이다.
제사 드리는 방법에 따른 분류
어원 / 5130에서 유래
관련 성경 / 요제(출 29:24, 레 7:30, 민 6:20), 요제물(출 29:27, 민 18:11). [동] 흔들다(레 7:34, 민 6:20, 사 19:16).
- 구약 성경
- 30회 사용
히브리어 '테루마'는 "앞뒤로 움직이다", "흔들다"는 뜻의 히브리어 동사 '노프'의 힢일형에서 유래된 말이다.
탈굼에서는 이 단어를 "일어서다", "들어 올리다"는 동작을 나타내는 의미로 해석하였다.
마쏘라
사본에서는 이 동사의 힢일형이 "들어 올리다"는 의미와(사 10:15) "흔들다"는 의미로(사 19:16) 모두 사용되었다.
제물을 드리는 방법에는 화제, 거제, 요제, 전제가 있었는데, 요제는 그 중 하나였다.
제사의 종류는 번제, 속죄제, 속건제, 화목제, 소제가 있었다.
요제로
드려진 제물들은 다음과 같다.
곧 화목 제물로 드려진 동물의 가슴
부분(레 7:30, 9:21,10:14-15,민 6:20,18:18),
성막 장식용으로 바쳐진 보석류(출 35:22, 38:24),
위임식
수양의 가슴과 넓적다리 부분(29:22-26, 레 8:25-29),
칠칠절에 드린 누룩 넣은 빵과 곡식의 첫 열매와 어린 양
두마리(23:11-14, 17, 20),
문둥병의 정결예식에 사용된 어린 수양과 감람유(14:12, 24)등이다.
여러 종류의 제물들을 한꺼번에 요제로 드린 경우도 있었던 것 같다(출 29:22-24, 레 8:25-27).
또한 요제는 '순결을 판단하기 위한 소제' 때에도 사용되었다(민 5:25).
민수기
8:11,15, 21절에서 아론은 '이스라엘 자손을 위한 요제'로 레위인을 여호와께 드렸다고 나타나 있다.
요제는 하나의 의식
행위였으며, 요제로 인하여 제물들이 여호와께 헌납되었다.
그러나 요제의 정확한 의미와 성격은 명백히 밝혀져 있지 않다.
아마도
요제를 드릴 때는, 먼저 제사장이 봉헌자의 손바닥 위에 요제물을 얹어 놓은 다시 봉헌자의 손에서 제사장의 손으로 옮겨 놓고
제사장이 앞뒤로 흔드는 절기를 따랐던 것 같다(민 6:19-20).
제사장이 자신의 예물을 요제로 드릴 때는 요제물을 처음부터 자기
손바닥 위에 올려놓고 흔들었을 것이다.
요제물을 앞으로 내미는 행동은 여호와께서 제물을 다시 제사장에게 주는 것을 의미한다.
2. 거제(擧祭, Offering, 테루마) 8641. תְּרוּמָה
어원 / 7311에서 유래
관련 성경 / 제물(출 25:2, 삼하 1:21), 요제물(출 29:27), 성물(레 22:12, 민 5:9), 예물(출 36:3, 신 12:17, 겔 20:40), 거제(민 15:19, 신 12:6, 느 10:39), 거제물(민 18:8, 느 12:44), 뇌물(잠 29:4), 봉헌물(말 3:8)
구약 성경 / 76회 사용
제물을 들어서 제사 드림. 제물을 번제단 위에 높이 들어올렸다가 아래에 내려놓는 제사로, 하나님께 바쳤다가 제사장이 다시 하나님으로부터 받는 것을 의미하는 데서 생겨났다(레 7:14,민 15:19, 신 12:6)
3. 화제(火祭, Fire Offering, 이솨) 801. אִשָּׁה
어원 / 784에서 유래
관련 성경 / 화제(火祭)(출 29:18, 레 8:21, 민 15:3, 출 30:20, 레 7:5, 민 29:6), 화제물(레 4:35, 신 18:1, 수 13:14)
구약 성경 / 65회 사용
4. 전제(奠祭, Drink Offering, 네쉐크) 5262 נֶסֶךְ
어원 / 5258에서 유래
관련 성경 / 전제물(창 35:14, 민 6:15), 전제(출 29:40, 왕하16:13, 욜 1:13). [동] 붓다(민 4:7), 부어 만들다(사 41:29, 렘 10:14, 51:17).
구약 성경 / 21회 사용
창세기 - 선택(12:1-2)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너는 복이 될지라.
The LORD had said to Abram, "Leave your country, your people and your father's household and go to the land I will show you.
I will make you into a great nation and I will bless you; I will make your name great, and you will be a blessing.
출애굽기 - 구원(3:10)(19:5-6)
3:10. 이제 내가 너를 바로에게 보내어 너에게 내 백성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게 하리라.
So now, go. I am sending you to Pharaoh to bring my people the Israelites out of Egypt.
19:5-6. 세계가 다 내게 속하였나니 너희가 내 말을 잘 듣고 내 언약을 지키면 너희는 모든 민족 중에서 내 소유가 되겠고.
너희가 내게 대하여 제사장 나라가 되며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 너는 이 말을 이스라엘 자손에게 전할지니라.
Now if you obey me fully and keep my covenant, then out of all nations you will be my treasured possession. Although the whole
earth is mine,
you will be for me a kingdom of priests and a holy nation.' These are the words you are to speak to the Israelites."
레위기 - 성화(11:44-45), 베드로전서 1:15-16
나는 여호와 너희의 하나님이라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몸을 구별하여 거룩하게 하고 땅에 기는 길짐승으로 말미암아 스스로 더럽히지 말라.
나는 너희의 하나님이 되려고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여호와라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
I am the LORD your God; consecrate yourselves and
be holy, because I am holy. Do not make yourselves unclean by any
creature that moves about on the ground.
I am the LORD who brought you up out of Egypt to be your God; therefore be holy, because I am holy.
베드로전서 1:15-16
오직 너희를 부르신 거룩한 이처럼 너희도 모든 행실에 거룩한 자가 되라.
기록되었으되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 하셨느니라.
But just as he who called you is holy, so be holy in all you do;
for it is written: "Be holy, because I am holy.
거룩(聖) / 날마다 그리스도를 닮아가려는 것
1. 신분의 거룩(중생, 거듭남)
2. 심판의 거룩(마지막 날 그리스도와 함께)
3. 일상의 거룩(경험과 실천적 거룩)
성(聖) = 귀 이(耳) + 입 구(口) + 북방 임(壬)<크다> / 맡길 임(任) <맡기다>
속(俗) = 풍속 속(俗) / 사람 인(人) + 굴곡 곡(谷) <막히다>
민수기 - 연단(21:8)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불뱀을 만들어 장대 위에 매달아라 물린 자마다 그것을 보면 살리라.
The LORD said to Moses, "Make a snake and put it up on a pole; anyone who is bitten can look at it and live.
신명기 - 경고(6:4-5)
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유일한 여호와이시니.
너는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
Hear, O Israel: The LORD our God, the LORD is one.
Love the LORD your God with all your heart and with all your soul and with all your strength.
출애굽기 / 통과(Pass)
레위기 / 목적(Purpose)
민수기 / 백성들(People)
신명기 / 선물(Present)
거룩(聖과 俗)
거룩(카도쉬)
1. 소극적 의미의 거룩 : 정결
- 죄를 멀리하는 것
2. 적극적 의미의 거룩 : 분별(구별)
- 구별할 줄 아는 것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
So whether you eat or drink or whatever you do, do it all for the glory of God.
로마서 14:8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라.
5대 거룩
1. 거룩한 하나님(레위기 19:2)너는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에게 고하여 이르라 너희는 거룩하라 나 여호와 너희 하나님이 거룩함이니라.
Speak to the entire assembly of Israel and say to them: 'Be holy because I, the LORD your God, am holy.
- 요한일서 1:5, 하나님은 빛(어두움은 죄)
2. 거룩한 제사장(레위기 21:4)
제사장은 백성의 어른인즉 스스로 더럽혀 욕되게 하지 말지니라.
He must not make himself unclean for people related to him by marriage, and so defile himself.
3. 거룩한 땅(레위기 18:27, 20:24)
for all these things were done by the people who lived in the land before you, and the land became defiled.
내가 전에 너희에게 이르기를 너희가 그들의 땅을 기업으로 얻을 것이라 내가 그 땅 곧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너희에게 주어 유업을 삼게 하리라 하였노라 나는 너희를 만민 중에서 구별한 너희 하나님 여호와라.
But I said to you, "You will possess their land; I will give it to you as an inheritance, a land flowing with milk and honey." I am the LORD your God, who has set you apart from the nations.
4. 거룩한 백성(레위기 10:10)
You must distinguish between the holy and the common, between the unclean and the clean.
- 분별하는 것
5. 거룩한 구세주(히브리서 10:1)
율법은 장차 오는 좋은 일의 그림자요 참형상이 아니므로 해마다 늘 드리는바 같은 제사로는 나아오는 자들을 언제든지 온전케 할 수 없느니라.
The law is only a shadow of the good things that are coming--not the realities themselves. For this reason it can never, by the same sacrifices repeated endlessly year after year, make perfect those who draw near to worship.
파루스의 승리
BC 3세기, 그리스 북부에 피루스라는 왕이 있었습니다.
그는 전쟁 전문가로 주변에 많은 나라를 정복한
풍부한 경험과 강한 군사력을 가지고 있어
로마에도 전쟁을 선포했습니다.
하지만, 피루스의 신하인 키네아스는
로마와의 전쟁이 국력을 크게 소모할 것으로 생각해
왕을 찾아가 말했습니다.
"폐하, 로마와 전쟁을 해서 이긴 다음에는
무엇을 하실 것입니까?"
"우리가 로마 전체를 지배하게 된다."
그리고 왕은 시칠리아, 아프리카 북부 카르타고에 이어
마케도니아 전역을 지배할 수 있게 된다며 흥분하며 말했습니다.
대답을 들은 뒤 키네아스는 '그다음에는?'이라는
질문을 던지자 왕은 말했습니다.
"키네아스, 주변의 나라들을 모두 정복하면
우린 정말로 편히 앉아서 인생을
즐길 수 있을 거라네."
모든 정복에 성공한 뒤에야 편히 쉬겠다는
왕의 대답에 키네아스는 답했습니다.
"폐하, 원하는 것이 그것이라면 전쟁할 필요가 없습니다.
우린 지금도 그렇게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피루스 왕은 키네아스의 말을 듣지 않고
2만 5,000명의 군인과 20마리의 코끼리를 이끌고
로마를 침공했습니다.
격렬한 전쟁이 끝난 후,
피루스 왕은 승리를 얻었지만, 코끼리는 다 죽고
군인들도 4분의 3이나 죽어 남은 병력이
얼마 되지 않았습니다.
패배나 진배없는 승리를 표현할 때
'피루스의 승리'라고 합니다.
무모하게 계속되는 전쟁은
아무리 노력하고 수고해도 결국 돌아오는 것은
패배뿐입니다.
매우 소중한 것으로 생각했던 승리의 전유물이
사실은 아무 쓸모없는 것으로 판명 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인생에서
무엇이 헛되고 참된 것인지 깨닫고 분별하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 오늘의 명언
물을 빤히 바라보는 것만으로는 바다를 건널 수 없다.
스스로 헛된 바람에 빠지지 않도록 하라.
- 존 포웰 -
히브리어 / 아샴
계약 법전 출애굽기 20:22-23:33
신명기 법전 신명기 12:1-26:16
성결 법전 레위기 17:1-26:46
절기를 가리키는 히브리어는 '하그'와 '모에드'다. 하그는 '춤춘다' '순환한다'는 의미다. 매년 그맘때가 되면 예외 없이 절기가 돌아오며 주기적으로 순환하는 속성을 두고 불리는 명칭이다. 축제의 성격을 띠고 있기에 축제의 기본 요소인 춤춘다는 단어가 사용된 것이다. 모에드는 '특별하게 정해진 시간'을 가리킨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정하신 '모에드'에 따라 공생애 사역을 하셨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여자여 나와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내 때가 아직 이르지 못하였나이다"(요 2:4)
성경은 이 절기를 '여호와의 절기'라고 밝힌다(레 23:2). 이스라엘 민족의 절기가 각 민족의 절기와 근본적으로 다르다. 왜 그럴까?
첫째, 이스라엘의 절기는 여호와 하나님이 직접 제정하셨다. 따라서 과장이나 꾸밈, 조작이 있을 수 없다. 하나님의 특별한 목적이 드러나기 때문이다.
둘째, 사건과 절기의 순서가 다르다. 즉, 다른 민족의 절기는 사건이 발생한 뒤 그 사건이 일어난 날짜를 기념해 생겨났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경우 먼저 절기가 만들어지고 그것에 맞춰 사건이 발생했다. 이스라엘 최대 절기인 유월절을 예를 들어보면 확연히 알 수 있다.
하나님은 애굽에 대한 10가지 재앙 중 마지막 '장자의 죽임'이 임할 날짜를 이스라엘 민족에게 미리 알려주셨다. 그리고 재앙을 피할 수 있도록 집집마다 양을 잡아 그 피를 인방과 설주에 바르도록 하셨다. 죽음의 신이 이스라엘의 집에 넘어가도록 정하셨고 이를 유월절로 제정하신 것이다.
레위기 23장엔 이스라엘의 7개 절기가 언급돼 있다. 유월절, 무교절, 초실절, 칠칠절, 나팔절, 대속일, 초막절 등. 이는 하나님이 진행하실 인류 구속사의 파노라마를 보여준다. 절기에는 하나님의 구속의 경륜과 프로그램이 암호화돼 있다.
유월절은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
무교절은 그리스도의 친교
초실절은 그리스도의 부활
칠칠절(오순절)은 그리스도와 성령의 임무 교대
나팔절은 그리스도의 강림
대속죄일은 그리스도의 속죄
초막절은 그리스도의 심판
여호와의 3대 절기와 이스라엘의 농사
1. 여호와의 3대 절기
이스라엘의 농사는 하나님의 농사의 그림자이다. 또한 농사의 목적은 알곡을 수확하기 위함이듯이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을 경작하시는 목적은 하나님 나라의 아들들을 얻기 위하심이다(고전9:10). 세상농사의 종류가 다양하듯이 하나님의 농사에도 여러 종류가 있어서 각 시대별로 다른 복음의 씨가 뿌려진다(눅16:16). 또한 농사의 끝에는 부활을 의미하는 추수의 때가 있다(계14:6-7).
여호와의 3대 절기는 하나님의 3가지 농사를 예표한다. 여호와의 3대 절기로는 출23:14-16에서와 같이 '무교병의 절기'와 밭에 뿌린 것의 첫 열매를 거두는 '맥추절'과 연종에 모든 수확을 거두어 저장하는 '수장절'이다.
<무교절, 유월절>
· 무교절은 율법시대를 예표한다.
· 율법시대는 애굽에서 마지막 유월절날 어린양의 피를 문설주에 바름으로 시작되었고, 어린 양이신 예수그리스도께서 유월절날 십자가에서 피를 흘리심으로 마감되었다.(출12:7-11, 요13:1)
· 또한 주님은 삼일 후 초실절날 약속에 따라 부활의 첫 열매로 사망권세를 이기시고 무덤에서 일어나셨다(고전15:23).
<맥추절, 칠칠절, 오순절>
· 맥추절은 교회시대를 예표한다.
· 교회시대의 농사는 주님께서 부활하신 후 50일째가 되던 오순절날 성령께서 하늘로부터 내려오심으로 시작되었다(행2:1-3). 또한 교회시대는 밭에 뿌린 것의 첫 열매를 거두는 의미의 맥추절에 성령의 첫 열매(롬8:23,약:18,계14:4)가 하늘로 수확됨으로서 마쳐질 것이다.
· 마13:39에서 추수 때는 세상 끝이요, 추수 때에는 추수꾼을 보내어 가라지는 불사르고 알곡(영어성경은 '밀'로 표현됨)은 곳간에 거두어진다(마13:30).
<수장절, 초막절, 장막절>
· 수장절은 천년왕국시대를 예표한다.
· 연종에(세상나라의 끝) 모든 농사의 작물을 거두고 초막을 짓고 일주일동안 안식을 하게 된다. 또한 이 절기는 출애굽한 조상들이 광야에서 초막생활을 한 것을 기념하는 의미로 행하여진다(레 23:39-43). 초막은 결핍이나 초라함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여호와의 특별한 보호와 지켜주심을 의미한다(시27:5).
· 일시적인 광야생활을 지나 약속의 땅에 들어가 안식하였던 것과 같이 일시적인 천년왕국 후에는 영원시대가 도래하게 된다. 광야에 거할 때 바위에서 물이 솟아 나오고 불기둥이 그들을 비쳐주었지만 영원한 약속의 땅에서는 하나님의 보좌로부터 발원하는 생명수가 있을 것이며(계22:1-2) 어린양이 우리를 비추어주는 등불이 되어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낼 것이다(계21:23).
2. 이스라엘의 농사의 4가지 주요작물
이스라엘의 농사는 하나님의 농사를 예표한다. 이스라엘의 농사에는 4가지 주요 작물이 있다(대하2:15, 계6:6). 이는 밀과 보리, 그리고 기름과 포도주이다.
<보리와 밀; 곡물농사>
· 곡식농사는 보리와 밀이 있으며 보리는 가난한 자를 위한 것으로서 밀의 대용작물 혹은 그림자에 해당한다. 또한 보리농사는 율법시대를, 밀농사는 교회시대를 예표한다. 주님께서는 초실절에 보리농사의 첫 열매로 부활하셨고 성령의 첫 열매는 밀농사의 첫 열매(출34:22)가 거두어지는 맥추절에 있을 것이다(출23:16).
· 또한 추수시기별로 구분해 볼 때 추수를 시작할 시기에 얻는 첫 열매와 본격추수기와 추수가 끝날 무렵의 이삭줍기추수가 있다 (출23:19, 룻2:23).
· 여호와께서는 곡물의 첫 열매에 관한 제사의 방법을 지시하실때 곡물에 따라 다른 방법을 주셨다. 보리의 첫 열매는 첫 이삭 한 단을 제사장께 가져가 요제로 드리고(레23:10-12), 50일이 지난 후 밀의 첫 열매는 가루를 내어 누룩을 넣어 떡 두 개를 만들어 제사장에게 드려 여호와께 요제로 드려야 한다(레 23:16-17, 20).
· 또한 레23:22에서는 밀을 추수할 때 모퉁이까지 다 베지 말며 또 떨어진 것을 줍지 말라고 하셨다. 이는 가난한 자와 객을 위한 것으로 남기라 하셨으니 이는 이삭줍기 추수에 해당하는 것이다. 이와 같이 레위기 23장에서는 밀 추수의 3종류를 언급하였지만 보리는 오직 첫 열매만 언급이 되어 있음을 기억하자.
<포도와 올리브; 열매농사>
· 포도주틀은 주님께서 재림하신 후 행하시는 악인에 대한 심판을 의미한다(사63:3, 욜3:13, 계14:20).
· 올리브 농사는 이스라엘의 농사중 마지막 작물이다. 또한 올리브 열매에서 얻어지는 감람기름의 주목적은 태워져 빛을 발함이다. 광야시절 여호와의 장막 안에는 감람유 등불은 항상 빛을 발하였다. 마지막 농사인 감람열매는 천년왕국의 농사 즉 영원한 복음의 열매인 것이다. 광야의 장막 안 등대에서는 감람유가 항상 태워져 여호와의 영광을 나타냈듯이 영원한 복음은 "여호와께 영광을 돌리며 만물을 지으신 여호와를 경배하라"는 내용을 갖는다(계14:6-7).
<작물별 추수시기>
· 보리농사의 추수는 4-5월에 있다.
· 밀농사의 첫 열매는 5-6월에 시작된다. 이후 추수기는 3개월 정도 지속되어 이삭줍기로 마쳐진다.
· 포도의 수확은 8-9월에 있게 된다. 또한 포도주틀을 밟는 시기와 밀의 추수(타작마당)의 시기는 맞물린다(민18:27,30).
· 올리브열매의 수확은 연종에 있어 9월 중순-11월 중순경이다. 올리브열매의 타작은 포도수확 이후에 있다(사24:13).
위와 같은 모든 농사들이 끝나면 작물들은 거두어져 저장되고 다음해의 새 농사가 준비되는것 처럼, 영원한 복음을 끝으로 인간경작의 농사는 종결되고 새로운 시대인 새하늘과 새땅의 시대가 도래하게 되는 것이다.
3. 곡물의 제사방법
레위기 23장은 여호와의 절기에 대하여 상세한 규례를 소개한다. 그 중에서 보리농사의 첫 열매인 초실절(9-14절)과 밀농사에 해당하는 오순절(15-22절)에 대하여 살펴보자.
<초실절>
· 보리의 첫 이삭 한 단이 거두어져 제사장에게로 주어지며, 제사장은 안식일 이튿날 그 단을 여호와 앞에 열납되도록 흔들어 요제를 드린다.
· 주 예수님께서는 초실절에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로 부활하셔서 하늘에 오르사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아 계신다(눅22:69,히12:2).
<오순절>
· 보리의 초실절 이후 50일을 계수하여 새 소제를 드리는데, 이는 밀의 첫 이삭(20절)을 빻아 고운가루로 만들고 누룩을 넣어 떡 두 개를 만들어 첫 요제로 여호와께 드린다(17절). 누룩으로 구워진 떡은 죄의 성정(누룩은 죄악을 상징함)을 지니고 있는 인간을 의미한다. 또한 떡 두 개는 이스라엘과 이방인을 대표한다.
· 주님의 부활이후 50일째 날이었던 오순절 날에 120 문도에게 성령이 강림하심으로 교회시대의 농사가 시작되었다. 이제 밀농사의 추수 때가 이르러 성령의 첫 열매가 인류 가운데 처음으로 구속함을 입게 될 것이다(계14:4).
· 율법시대가 출애굽시의 유월절에 시작하여 주님이 십자가에서 희생하신 유월절에 이중적으로 이루어진 것과 같이, 교회시대도 역시 2,000년 전 오순절 날에 성령강림으로 시작하여 어느 한 맥추절(오순절)날에 인류 가운데 첫 구속함을 받은 첫 열매(약1:18, 계14:4)가 거둠어 짐으로 이중적으로 이루어질 것이다.
· 밀의 첫 열매는 보리의 첫 열매와 같이 여호와께 요제로 드려진다. 즉 성령의 첫 열매는 주님처럼 하나님의 보좌로 부활·휴거되어 대환난시에 하늘에서 거하는 자들(계12:12,13:6)이 되는 것이다. 이후 밀의 추수는 세상나라의 끝(마13:30,39) 시기에 주님이 구름을 타고 강림하실 때에(마24:29-30) 구름 위에서 낫을 휘두루매 곡식이 공중으로 거두어지는 것이다(계14:14-16, 살전4:14-17, 살후2:1-3,7-8).
· 이스라엘에서는 농부가 사는 집과 밭의 중간지점에 곳간을 지어놓고 수확된 알곡을 곳간에 저장한다. 마찬가지로 교회시대의 알곡성도는 하늘과 지상의 중간지점인 공중으로 모이게 되는 것이다. 또한 밀의 이삭줍기 추수는 주님이 지상에 재림하셔서 이 세상의 모든 권세와 정사를 멸하신 후(고전15:23) 천년왕국이 시작되기 직전에 있게 된다. 땅에 남겨진 밭의 모퉁이와 떨어진 낱알들은 이삭줍기 추수로 거두어짐과 같이 늦게 익어진 성도는 땅에 남겨지나 천년왕국 직전 이삭줍기의 추수에 이기는 자로 부활·휴거되어 1,000년간 주님과 함께 열국을 통치하게 된다. 이와같이 알곡은 익는 순서에 따라 거두어지게 되는 것이다.
주님은 자신을 광명한 새벽별이라 하셨다(계22:16). 일출 직전에 나타날 때 깨어 있는 자들만이 새벽별을 볼 수 있는 것처럼, 깨어 있는 성도들은 주님을 첫 열매의 자격으로 맞이할 수 있을 것이다. 어두운 때는 대환난기이며 일출은 천년왕국 시대인 것이다.
피그말리온 효과 / 교사기대효과, 로젠탈효과, 실험자효과
피그말리온 효과(pygmalion effect)는 교육심리학에서 심리적 행동의 하나로 교사의 기대에 따라 학습자의 성적이 향상되는 것을 말한다. 로젠탈 효과(Rosenthal effect), 교사 기대효과(Teacher expectancy effect), 실험자 효과라고도 한다.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조각가인 피그말리온은 조각에 심취하여 삶 전체를 조각에만 몰두하며 살았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피그말리온은 자신이 이상형으로 생각하는 여인을 조각상으로 만들고자 결심했습니다.
그렇게 완성한 조각상은 너무나 완벽하고 아름다웠습니다.
너무나 아름답게 조각된 조각상에 자신도 모르게 점점 빠져든 피그말리온은 차가운 조각상에 마치 살아있는 여인인 것처럼 진심으로 대했습니다.
이것을 올림포스산 위에서 측은하게 지켜본 사랑과 미의 여신 아프로디테는 아들 에로스를 보내 조각상에 생명을 불어넣어 주었습니다.
피그말리온은 사람이 된 아름다운 여인에게 '갈라테이아(Galatea)'라는 이름을 붙여주고 행복하게 잘 살았다고 합니다.
이 이야기에서 유래된 심리학 용어로 '피그말리온 효과'가 있습니다.
일이 잘 풀릴 것이라고 기대하면 잘 풀리고, 안 풀리겠다고 생각하면 정말 일이 잘 풀리지 않는다는 자기 충족적 예언(self-fulfilling prophecy)과도 같은 말이라고 합니다.
번제단과 성막 뜰(출애굽기 27:1-21)
출애굽기 27:1-8
번제단에 관한 규정
구약에서 제사(祭祀)를 위한 세 가지 필수적인 요소가 있다.
첫째는 제사장(祭司長) 코헨(kôhên) 3548 כֹּהֵן
- 제사장, 대제사장
둘째는 제물(祭物) 제바흐(zebach) 2077 זֶבַח
- 살륙, 희생,
관련 성경 / 제사(창 31:54, 출 12:27, 민 15:5), 희생(창 46:1, 레 3:1, 신 12:11), 제물(레 19:6, 신 18:3), 제육(祭肉)(잠 17:1), 잔치(겔39:17, 19), 제사를 드림(삼상 10:8)
구약 성경 / 162회 사용
* 2076. 자바흐(zâbach) זָבַח
관련 성경 / 희생을 드리다(출 8:27, 13:15, 호 4:14), 드리다(출 20:24, 신 16:5, 대하 30:22), 잡다(신 12:21), 제사드리다(신 16:2, 삼상 1:4, 대하 30:22), 제사하다(왕상 13:2, 삼상 16:2, 시 106:37), 예비하다(겔 39:19), 잡아드리다(신 15:21)
구약 성경 / 134회 사용
셋째는 제단(祭壇) 미즈베하(mizbêach) 4196 מִזְבֵּחַ
- 제단제사(祭祀)의 3요소(要所)
예수님은 대제사장(大祭司長)
히브리서 3:1
그러므로 함께 하늘의 부르심을 입은 거룩한 형제들아 우리의 믿는 도리의 사도시며 대제사장이신 예수를 깊이 생각하라.
히브리서 5:5
또한 이와 같이 그리스도께서 대제사장 되심도 스스로 영광을 취하심이 아니요 오직 말씀하신 이가 저더러 이르시되 너는 내 아들이니 내가 오늘날 너를 낳았다 하셨고.
히브리서 5:10
하나님께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은 대제사장이라 칭하심을 받았느니라.
히브리서 6:20
그리로 앞서 가신 예수께서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아 영원히 대제사장이 되어 우리를 위하여 들어 가셨느니라.
히브리서 4:14
그러므로 우리에게 큰 대제사장이 있으니 승천하신 자 곧 하나님 아들 예수시라 우리가 믿는 도리를 굳게 잡을찌어다.
히브리서 9:11
그리스도께서 장래 좋은 일의 대제사장으로 오사 손으로 짓지 아니한 곧 이 창조에 속하지 아니한 더 크고 온전한 장막으로 말미암아.
히브리서 4:15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 연약함을 체휼하지 아니하는 자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한결 같이 시험을 받은 자로되 죄는 없으시니라.
히브리서 2:17
그러므로 저가 범사에 형제들과 같이 되심이 마땅하도다 이는 하나님의 일에 자비하고 충성된 대제사장이 되어 백성의 죄를 구속하려 하심이라.
예수님은 제물(祭物)
로마서 3:25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 제물로 세우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심이니.
에베소서 5:2
그리스도께서 너희를 사랑하신 것 같이 너희도 사랑 가운데서 행하라 그는 우리를 위하여 자신을 버리사 향기로운 제물과 생축으로 하나님께 드리셨느니라.
요한일서 2:2
저는 우리 죄를 위한 화목 제물이니 우리만 위할뿐 아니요 온 세상의 죄를 위하심이라.
히브리서 10:14
저가 한 제물로 거룩하게 된 자들을 영원히 온전케 하셨느니라.
히브리서 9:23
그러므로 하늘에 있는 것들의 모형은 이런 것들로써 정결케 할 필요가 있었으나 하늘에 있는 그것들은 이런 것들보다 더 좋은 제물로 할찌니라.
예수님은 제단(祭壇)
로마서 11:3
주여 저희가 주의 선지자들을 죽였으며 주의 제단들을 헐어버렸고 나만 남았는데 내 목숨도 찾나이다 하니.
레위기 3:2
그 예물의 머리에 안수하고 회막 문에서 잡을 것이요 아론의 자손 제사장들은 그 피를 제단 사면에 뿌릴 것이며.
레위기 4:25
제사장은 그 속죄 희생의 피를 손가락에 찍어 번제단 뿔에 바르고 그 피는 번제단 밑에 쏟고.
레위기 4:30
제사장은 손가락으로 그 피를 찍어 번제단 뿔에 바르고 그 피 전부를 단 밑에 쏟고.
시편 84:3
나의 왕, 나의 하나님, 만군의 여호와여 주의 제단에서 참새도 제 집을 얻고 제비도 새끼 둘 보금자리를 얻었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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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애굽기 25-26장은 성막과 그 내부에 관한 것이었지만, 27장은 희생제물을 드리는 제단과 그에 따른 제사도구들에
관한 것이다.
이 단은 제물을 태워 드리는 단이기 때문에 ‘번제단,’ 놋으로 만들었기 때문에 ‘놋단’이라 부른다.
그러나 전체를 놋으로 만든
것은 아니고, 조각목으로 사방 5규빗(2.25m), 높이 3규빗(1.35m) 크기로 제작한 다음 놋으로 싼 것이다.
넓이는 1.5~1.6평
정도이다.
번제단에 필요한 도구들, 곧 재통, 부삽, 대야,
고기갈고리, 불 옮기는 그릇, 그물, 고리, 등은 모두 놋으로 만들어졌다.
놋은 십자가를, 조각목은 버림받은 인간을 상징한다.
제단은 하나님께
속죄예물과 감사예물을 바치는 곳이다.
버림받은 인간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보혈로 감싸질 때 비로소 속죄함을 받고 감사할 이유를 갖게 된다.
모세가 광야에서 죽어가는 자들을 위해서 놋뱀을 만들어
세웠고, 또 그것을 바라본 자들이 죽다가 살아났듯이, 번제단과 그것의 부속기구들을 모두 놋으로 만든 것은 그리스도의 구속의 능력을 상징하는
것이다.
민수기 21장 5-9절을 보면, 백성이 하나님과 모세를 원망하다가 불뱀들에게 물려 죽어가고 있었는데, 그들이 잘못을 깨닫고 회개했을
때, 하나님께서는 모세로 하여금 놋뱀을 만들어 장대에 매달아 세우게 하였다.
8-9절을 보면,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불뱀을 만들어
장대 위에 달라. 물린 자마다 그것을 보면 살리라. 모세가 놋뱀을 만들어 장대 위에 다니 뱀에게 물린 자마다 놋뱀을 쳐다본즉 살더라.”
조각목은 죄로 인해서 버림받은 인간을 상징한다고 했고,
놋은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상징한다고 했다.
조각목이 놋으로 감싸지듯이 죄를 범한 인간일지라도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구속의 능력을 믿고 의지하고
바라보는 자는 죽지 않고 영원히 살게 된다. 민수기에서 불뱀에 물린 자들을 위해서 놋뱀을 만들어 세운 것은 고대 근동과 그리스 로마세계에서 뱀은
치유의 상징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따라서 놋뱀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예표였다고 볼 수 있다.
번제단의 네 모퉁이는 뿔 모양으로 만들어졌는데, 그리스도의 구원의 능력을 상징 한다.
고대근동에서는 뿔을 신성과 힘과 권세의
상징으로 여겼다.
레위기 4장 25절을 보면, “제사장은 그 속죄제물의 피를 얼마 받아다가, 손가락으로 찍어서 번제단의 뿔에 바르고, 나머지
피는 번제단 밑바닥에 쏟아야 한다.”고 되어 있다.
제물을 번제나 화제로 바치기 전에 그 제물의 피를 제단 모퉁이 뿔에 발랐던 것이다(레
4:18).
이 의식은 단을 깨끗케 하는 예식이었다.
레위기 8장 15절을 보면, “모세는 그 수소를 잡고, 그 피를 얼마 받아다가 손가락으로
찍어서 제단의 뿔에 두루 돌아가며 발랐다.”고 했고, “그렇게 하여서, 모세는 제단을 깨끗하게 하였으며, 또 나머지 피는 제단의 밑바닥에 쏟아서
제단을 속하여 거룩하게 하였다.”고 했다.
희생제사에서 제물의 피를 제단 뿔에 바르는 것은 그리스도의 피가 갖는 속죄능력을 상징하는 것이다.
또
제단 뿔을 붙잡고 탄원을 하면 억울한 누명이나 실수로 인해 범한 죄 때문에 죽을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사면을 받을 수도 있었다(왕상 1:51).
성도는 어떠한 죄를 범했을지라도 그리스도의 보혈의 능력을 의지하고 회개하면 그 죄를 사함 받고 구원받는다는 것의 예표였던 것이다.
새찬송가
268장에서 잘 표현되었듯이, 죄에서 자유를 얻게 하는 것은 보혈의 능력, 주의 보혈이다. “주의 보혈 능력 있도다. 주의 피 믿으오. 주의
보혈 그 어린양의 매우 귀중한 피로다.”
27장 9-19절은 성막 뜰에 관련된 내용이다.
성막
뜰의 크기는 남쪽과 북쪽이 각각 100규빗 곧 45미터, 동쪽과 서쪽이 각각 50규빗 곧 22.5미터로써 306평 정도이다.
울타리는 5규빗 곧
2.25미터 높이로 세마포로 쳤다.
기둥은 5규빗 곧 2.25미터마다 하나씩 세웠고, 각 기둥은 놋받침을 만들어 받쳤다.
그러니까 성막 뜰의
경계를 표시할 울타리를 치는데 2.25미터 기둥 60개, 놋받침 60개, 2.25미터 폭 세마포가 126미터 필요했다.
또 각각의 기둥에는
은갈고리와 은고리와 놋말뚝들을 필요로 했다.
성막의 뜰은 하나님의 구속사역이 이루어지는 장소이다.
속죄를 위한 제사가 드려지고, 회개와 씻음이
이뤄지는 곳이다.
크기는 20규빗 곧 9미터이었고, 청색 자색 홍색실과 가늘게 꼰 베실로 수놓아 짠 휘장을 쳤다.
문은 그리스도를 상징한다.
구원에 이르는 문은 오직 하나임을 의미한다.
그러니까 성막 밖의 인간이 하나님의 임재장소인 거룩한 성막 안으로 들어갈 수 있는 통로는 동쪽문 하나뿐이었던 것이다.
이것은 죄인이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있는 유일하고 새로운 생명의 길이 ‘문’이신 예수님뿐임을 강조하는 예표였던 것이다.
요한복음 10장 9절에서 예수님은 말씀하시기를, “내가 문이니,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들어가면 구원을 얻고, 또는 들어가며 나오며 꼴을 얻으리라.”고 하셨다.
27장 20-21절은 등대의 연료 및 그
사용방법에 대한 규정이다.
이처럼 등대의 제작 규례와 사용 명령을 따로 구분하여 지시할 만큼 등대와 그것의 연료가 되는 기름은 상당히 중요한
역할을 했다.
네 겹의 앙장으로 씌워진 성막 안은 밤이면 바깥으로부터
자연광을 흡수할 수 없기 때문에 칠흑 같이 어두웠다.
바로 이곳 성소에 놓인 황금등대 위의 일곱 개 등잔에 불을 밝힘으로써 그 내부를 밝게 하며
제사장의 활동을 용이하게 하였다.
이처럼 등댓불은 죽은 것 같은 실내를 생명이 넘치는 곳으로 만든다.
결국 이 등대는 죄로 어두워진 인간의
양심과 음란하고 악한 세상을 밝히기 위해 이 땅에 오신 그리스도와 그분의 빛을 받아 이 땅에서 ‘빛’으로 살아가야 할 우리 성도들을 상징하는
예표였던 것이다.
예수님은 요한복음 8장 12절에서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두움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고
하셨고, 마태복음 5장 14절에서는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 위에 있는 동네가 숨기우지 못할 것이요.”라고 하셨다.
성소를 밝히는 기름의 재료는 올리브유였다.
지방
함유량이 60퍼센트 이상으로 많은 양의 기름이 추출된다.
올리브유는 질이 좋고 향기가 좋아 고대로부터 향유와 식용유로도 사용되어져왔다.
따라서
올리브유는 성도의 순결한 믿음을 상징하는 것으로써 성소를 밝힐 유일한 기름으로 규정되어 있다.
신약시대에는 올리브유가 성령님의 임재를 상징하는
‘인침’의 표시로 사용되었고, 치유를 목적으로도 사용되었다.
이뿐만 아니라, 올리브유는 성령님의 특성을 상징하는데도 사용되었다.
등잔에 기름이
충분할 때 어둠을 오랫동안 밝힐 수 있는 것처럼, 우리 성도들도 성령의 기름으로 충만할 때 내 속의 어둠을 몰아내고, 세상의 어둠도 몰아낼 수
있다.
______________________레위기 6장
6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셨다.
2 “누구든지 전당잡은 물건과 맡은 물 건을 돌려 주지 않거나 강도질하거나 자기 이웃을 착취하거나
3 분실물을 주운 다음에도 그 사실을 부인하고 거짓 맹세하는 등,
4-5 이런 죄를 범한 자는 그 죄가 드러나는 날에 그 물건의 5분의 을 더하여 주인에게 돌려 주어야 하며 그는 자기 허물을 속할 속건제물을 나 여호와에게 가져와야 한다.
6 그는 네가 정한 값에 해당하는 흠 없는 숫양을 제사장에게 가져갈 것이며
7 제사장은 그를 위해 속죄해야 한다. 그러면 그가 용서받게 될 것이다.”
번제에 관한 규정
8-9 여호와께서는 아론과 그의 아들들에게 이런 명령을 전하라고 모세에게 말씀하셨다. “이것은 불로 태워 바치는 번제에 관한 규정이다. 번제물은 놋제단 위에 밤새도록 얹어 놓고 불이 꺼지지 않도록 해야 하며,
10 다음날 아침 제사장은 고운 모시로 만든 속옷과 겉옷을 입고 번제물의 재를 가져다가 단 곁에 둔 다음
11 다른 옷으로 갈아 입고 그 재를 야영지 밖의 깨끗한 곳으로 가져가야 한다.
12 그리고 단 위의 불은 항상 피워 두어 꺼지지 않게 해야 한다. 너희 제사장은 아침마다 그 위에 나무와 번제물을 올려놓고 화목제물의 기름을 태우도록 하라.
13 단의 불은 꺼지지 않고 계속 타야 한다.”
소제에 관한 규정
14 “다음은 곡식을 제물로 드리는 소제에 관한 규정이다: 제사장은 제단 앞에서 나 여호와에게 제물을 바쳐야 한다.
15 그는 곱게 빻은 밀가루 중에서 한 움큼을 떠내어 감람기름과 향을 섞은 다음 전체를 나 여호와에게 바쳤다는 표로 그것을 단 위에서 불로 태워야 한다. 그것은 나 여호와를 기쁘게 하는 향기이다.
16-17 그 나머지 밀가루는 제사장들이 먹을 몫이다. 그러나 이것은 누룩을 넣지 말고 구워 성막 뜰에서 먹어야 한다. 내가 이것을 나에게 바친 화제물 중에서 제사장들에게 주었으므로 그것은 속죄제물이나 속건제물과 같이 아주 거룩한 것이다.
18 그러므로 이것은 대대로 제사장들만 먹어야 한다. [a]누구든지 이것을 만지는 자는 거룩해질 것이다.”
19-20 또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셨다. “아론의 자손들이 기름 부음을 받아 제사장으로 위임되는 날에 그들은 나 여호와께 소제물로 고운 밀가루 [b]2.2리터를 바치되 반은 아침에, 반은 저녁에 바쳐야 한다.
21 그들은 그것을 감람기름으로 반죽하여 철판에 구운 다음 썰어서 나 여호와를 기쁘게 하는 소제물로 바쳐야 한다.
22-23 아론의 자손이 자기 아버지의 대를 이어 기름 부음을 받고 제사장으로 위임되는 날에 이 소제물을 바치게 하라. 이것은 영구히 지켜야 할 규정이다. 이 제물은 나 여호와 앞에서 완전히 불로 태워야 하며 아무도 그것을 먹어서는 안 된다.”
속죄제에 관한 규정
24-25 여호와께서는 아론과 그의 아들들에 게 이런 명령을 전하라고 모세에게 말씀하셨다. “이것은 속죄제에 관한 규정이다. 속죄제의 제물은 대단히 거룩하므로 제단 북쪽의 번제물을 잡는 곳에서 잡아야 한다.
26 제사를 드리는 제사장은 그 제물을 성막 뜰, 거룩한 곳에서 먹도록 하라.
27 그 고기에 접촉하는 자마다 거룩해질 것이다. 그러므로 그 제물의 피가 묻은 옷은 거룩한 곳에서 빨아야 한다.
28 만일 그 고기를 토기에 삶았으면 그 그릇은 깨뜨려 버리고 놋그릇에 삶았으면 그 그릇을 깨끗이 닦고 물에 씻어야 한다.
29 이 제물은 매우 거룩한 것이므로 제사장들만 먹도록 하라.
30 그러나 피를 가지고 성막에 들어가 성소에서 죄를 속하기 위해 사용된 속죄제물의 고기는 제사장이라도 먹어서는 안 되며 그것은 완전히 불로 태워야 한다.”
Footnotes
죄가 드러나는 날(레위기 6:5) / the day the sin is revealed
죄가 드러나는 날(레위기 6:5) / the day the sin is revealed
무릇 그 거짓 맹세한 물건을 돌려 보내되 곧 그 본물에 오분 일을 더하여 돌려 보낼 것이니 그 죄가 드러나는 날에 그 임자에게 줄 것이요.or whatever it was he swore falsely about. He must make restitution in full, add a fifth of the value to it and give it all to the owner on the day he presents his guilt offering.
그 거짓 맹세한 물건
이웃의 물건을 횡령하거나 탈취하고서도 결코 그러한 일이 없다고 거짓 맹세함으로써, 그것을 자신의 소유물로 삼고 있는 부당한 물건을 가리킨다.
본물에 오분 일을 더하여
이웃의 물건을 거짓맹세로 부당하게 취한 자가 죄 용서함 받기 위해서는 먼저 그 물건을
주인에게 성실히 돌려주는 일부터 시작해야 했다.
이때 이웃의 물건을 횡령, 탈취 등으로 취한 자는 자신이 취한 물건, 즉
본물(本物) 뿐만 아니라 그동안 피해자가 겪었을 손실이나 어려움 등을 고려하여 본물의 가치에 덧붙여 손해 배상격으로
1/5(20%)을 더 가산하여 갚아야 했다.
이러한규정을 통하여 우리가 깨닫는 교훈은 다음과 같다.
1. 진정한 회개는 단지 말
뿐만 아니라 행동으로써 그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어야 한다는 사실이다(마 3:8).
이런 의미에서 예수께서는 산상수훈을 통해
누구든지 하나님께 예물을 드리려는 자는 먼저 형제와 화해한 후. 하나님께 예물을 드리는 것이 마땅하다고
가르치셨다(마 5:23,24).
2. 본물에 오분 일을 덧붙여 갚는 행위는, 진정한 회개가 단지 죄 짓기 이전 상태로의 환원이
아니라 그 이상의 신실한 생활에로의 향상을 의미한다는 사실이다.
삭개오의 경우, 그는 예수님과의 만남을 통해 진정 회개한후에 그
회개의 표시로 만일 자신이 토색(討索) 한 물건이 있을때는 배로 갚겠다고 고백했음을 볼 수 있다(눅 19:8).
죄가 드러나는 날에
남의 물건을 횡령하거나 약탈한 자가 자신의 범죄를 사함받기 위해 하나님께 속건제를 드리는 날에.
여호와께 신실치 못하여 범죄하되(2절)
이 말은 속건제의 대상 중 하나인 이웃에 대한 모든 범죄가(1-7절) 궁극적으로 여호와께
신실치 못한 데서 기인하고 있음을 분명히 밝혀주고 있다.
왜냐하면 사람이 여호와께 대한 진실한 신뢰가 없을 때그 형상대로 지음받은
인간에게도 역시 신실치 못하여 쉽게 범죄할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인간에 대한 범죄는 곧 하나님께 대한 범죄와 일맥
상통한다(Matthew Henry, The preacher's Complete Homiletic Commentary). 이런
의미에서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의 계명은 결코 별개의 계명이 아니라, 상호 밀접히 연관된 계명으로서 모든 율법의 핵심을 이루는
2대 정신이다(마 22:36-40).
남의 물건을 맡거나
은행이나 보험 제도를 갖추고 있지 못했던 고대사회에서는 장기간 출타시 귀중한 물품을 이웃에게
위탁하는 관습이 있었다.
이때 기탁된 남의 물건을 맡은 자는 성실히 그 책임을 감당해야했다.
그런데 만일 남의 물건을 맡은 자가
나중에 거짓말로 그러한 사실을 부인할 경우, 그것은 그에게 죄가된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만일 맡은 물건이 도적을 당했을 경우,
위탁자는 그 정황 여하에 따라 자신의 책임유무를 재판장앞에서 엄격히 따져, 면제가 되기도 하고 혹은 배상의 책임을 지기도 했다(출
22:7-13).
전당 잡거나 -
이말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테수멧야드'는 곧 '서약이나 맹세의 증거로 준 담보물'을 뜻한다.
따라서 이러한 남의 담보물을 마치 자기 소유인 양 타인에게 마음대로 처분하는 행위는 죄가 된다는 의미이다.
영어 성경(KJV)은
'친분이나 우정을 속여 물건을 횡령하는 것'이란 뜻으로 번역하고 있다.
늑봉하고도
'늑봉하다'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아솩'은 '압제하다','사기치다', '협박하다'란 뜻이다.
따라서
늑봉(勒捧)이란 폭력과 사기 등으로 이웃을 협박하여 소유물을 빼앗는 행위를 가리킨다(신 24:14; 호 12:7; 욥 24:2).
6:8-13. 번제와 화목제
6:14-23. 소제
6:24-30. 속건제를 드리는 절차와 방법
첫째는 현장에서 간음중에 붙잡혀 온 죄인은 드러난 죄인입니다.
둘째는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처럼 드러나지 않은 죄를 지니고서 드러난 죄인들을 정죄하는 죄인입니다.
죄가 드러나지 않았다고 하여 죄가 작은 것도 아닙니다.
성 프란시스는 “하나님은 얼마나 위대하시며 나는 그 앞에 얼마나
죄인인가를 좀 깨닫게 해주세요” 라고 날마다 기도했다고 합니다. 하나님의 무한하신 존재의 빛 앞에 우리 자신이 벌거벗은 것 같이 모든 육체의 현저한 죄들이 밝히 드러나는 그 순간은 얼마나 두려운 시간일까? 죄는 먼저 우리의 생각에서부터 시작한다. 사람은 먼저 죄를 생각하고 그 다음에 행동으로 옮긴다. 결국 우리가 죄를 짓는 것은 몸 뿐만이 아니라 몸을 사용하는 마음이다. 그리고 우리의 마음이 부패되는 데는 단 1분도 걸리지 않는다. 예수님은 인류의 죄를 위해서 십자가에서 돌아가셨다. 그 보혈의 공로로 인하여 주홍 같은 우리의 죄는 희어졌으며, 동이 서에서 먼 것 같이 우리 죄과를 멀리 옮기셨으며, 우리의 죄를 발로 밟으시고, 우리의 죄를 깊은 바다에 던져주셨다. 마치 컴퓨터의 DELETE 삭제 버튼을 누른 것 같이 깨끗이 지워주셨다. 이 얼마나 놀랍고 엄청난 하나님의 사랑이며 은혜인가? 그리하여 죄인을 의인으로 여겨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내게 크게 다가오면 올수록 “이제는 죄를 마음껏 지어도 되겠지”가 아니라, 빛이신 예수 그리스도에게 다가가면 갈수록 우리의 죄에 대한 반응은 더욱 더 예민해지게 된다는 사실이다. 죄가 용서되어진 그 마음에 그리스도의 영이신 성령이 들어오시면,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계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기 때문이다. 보혈을 지나 하나님 품으로 예수님은 인간이 하나님을 볼 수 있는 기관을 마음이라고 하셨다. 산상수훈에서 예수님은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라고 하셨다 (마 5:8). 마음을 눈으로 볼 수 있는 사람은 없다. 그러나 마음이 없다고 말하는 사람도 없다. 잠언 4장 23절에는 “모든 지킬 만한 것 중에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고 말씀하신다. 고귀한 마음을 가진 사람도 때로는 헛된 생각에 사로잡힐 수 있다. 그러나 헛된 생각을 마음에 오래 품지 않고 떨쳐버려야 한다. 루터는 “새가 우리 머리 위로 날아가는 것을 막을 수는 없다. 그러나 그 새가 우리 머리 위에 앉는 것은 막을 수 있다. 더군다나 새가 우리 머리에 둥지를 트는 것은 더욱 막을 수 있다”고 하였다. 예수님이 우리를 위하여 보배로운 피를 흘려 주신 이유는 우리가 어떤 죄를 짓더라도 회개만 하면 용서하기 위함만은 아니다. 그가 돌아가심은 모든 죄를 용서하심과 동시에 우리로 보혈의 능력을 힘입어 천국백성이 되게 하기 위함이다. 결코 우리에게 이중적인 삶을 살게 함이 아니다. 예수님이 돌아가셔야 할 정도로 무서운 죄에 대해 우리가 더 민감하게 반응하게 하심이다. 우리의 마음은 생명의 근원이 되는 중요한 처소이다. 그리고 인생과 신앙생활을 더 풍요롭게 하는 능력의 근원이 되기도 한다. 세례 요한은 예수님이 오시기에 앞서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 (마 3:2)고 선포했다. 진정한 회개는 나 중심의 삶에서 하나님 중심의 삶으로 돌이키는 것이다. 이제는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사심으로 날마다 나의 자아가 십자가에서 죽는 것을 연습하는 것이다. 보혈을 지나 하나님 아버지 품으로 한 걸음씩 나아가고 있는 우리에게 사도 바울은 이렇게 말씀하신다. “새 사람을 입었으니 이는 자기를 창조하신 이의 형상을 따라 지식에까지 새롭게 하심을 입은 자니라” (골 3:10) “보혈을 지나 하나님 품으로, 보혈을 지나 아버지 품으로, 보혈을 지나 하나님 품으로 한걸음씩 나가네. 존귀한 주 보혈이 내 영을 새롭게 하시네, 존귀한 주 보혈이 내 영을 새롭게 하네” (보혈을 지나 찬양 가사) 어느 랍비가 제자들에게 1달러를 주며 이 강의실을 가득 채울 수 있는 물건을 구하여 오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여러 제자들이 시장으로 달려가서 과연 강의시를 가득 채울 수 있는 물건이 무엇일까 하고 열심히 찾았습니다. 어떤 제자는 휴지, 어떤 제자는 강냉이, 어떤 제자는 솜뭉치..... 다양한 물건을 갖고 날이 어두워질 무렵 제자들이 모였습니다. 랍비는 제자들이 가져온 물건들을 보며 하나씩 확인하였으나 마음에 맞는 물건이 없었습니다. 그때 한 제자가 강의실의 불을 모두 끄라고 한 후에 손에 들고 있던 초에 불을 밝혔습니다. 그러자 어둡던 강의실이 밝아지며 모든 것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작은 촛불이 어둡던 강의실을 환하게 밝힌 것입니다. 죄는 내 마음을 어둡게 합니다. 그러나 죄를 드러내면 내 마음은 아주 환하게 밝아질 것입니다. 레위기의 목표는 "거룩한 나라" "거룩한 백성"입니다. 거룩한 나라는 거룩한 백성이 세워갈 수 있습니다. 자유대한민국은 자유를 사랑하고 지키려는 국민들에 의해서 유지될 것입니다. 공산주의와 김일성주의를 추종하는 주사파들에 의해서 자유대한민국은 유지될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들은 천국 시민권자들로서 무엇을 지켜야 할까요? 오직 복음으로만 나를 무장하고 세상의 소금과 빛이 되어 나를 지켜야 합니다. 나의 가족들을 지켜야 합니다. 나의 조국을 지켜야 합니다. |
마르틴 루터의 가장 절친한 친구였던 필리프 멜란히톤(Philipp Melanchthon,) 은 늘 죄의식에 쉽게 사로잡혀 루터를 성가시게 했습니다. 보다 못한 루터는 어느날 맬란히톤에게 살인 같은, 도저히 용서 안 될 것 같은 죄라도 저지르고 오라는 의미심장한 말을 던졌습니다.
루터의 이 말을 “구원 받았으니 이제 맘껏 죄지어도 된다”고 한 것이 아니냐는 식으로 곡해하는 사람들이 있지만, 사실 루터의 강조점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다는 진리가 우리 삶에 비추는 능력을 말하려했던 것입니다(로마서 8:1).
새로운 피조물이 된 믿는 자들은 이제 죄에 대하여는 죽고 하나님에 대하여는 살아난 자라는 것입니다(로마서 6:11, 3:21).
이제 죄가 드러나더라도 그 죄가 믿는 자들을 주장하지 못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로마서 6:14).
드러나는 죄를 미워하고 멀리하는 것은 예수님의 은혜에 시선을 고정할 때 성령님을 통해 이뤄지는 열매이지 결코 우리 스스로의 노력으로 지켜낼 수 없는 부분입니다. 성화를 강조하면 할수록 우리는 성화에서 멀어지게 됩니다. 칭의를 말하고 고백 할수록 영적성숙은 자연스럽게 이뤄집니다. 정죄감 없이 더욱 주님을 좇는 능력이 생수처럼 뿜어져 나오게 됩니다. 사단은 계속 죄의식을 갖도록 유혹하고 인간으로 하여금 온갖 방법으로 그 죄의식을 줄이거나 없애도록 노력하게 만들지만 헛될 뿐입니다. 예수님이 성취하신 죄사함과 의롭게 하심의 은혜에 마음과 영혼을 고정시키면 우리는 성령의 능력으로 바다 위를 걷게 될 것입니다. 죽일 듯이 몰아치는 폭풍과 삼킬 듯 넘실거리는 파도를 보느라 우리의 시선을 예수님의 얼굴에서 떼지 않기를 바랍니다.
세 가지 죄
첫째, 남의 물건을 위탁 받거나 전당 잡고도 이를 부인하는 것
둘째, 강도질하거나 늑봉하고도 그 사실을 부인하는 것
셋째, 남이 잃은 유실물을 습득하고도 그 사실을 부인하는 것
이러한 죄는 율법을 위배한 것이요, 그것은 곧 하나님께 대한 죄입니다.
원상 회복과 보상
하나님은 부당하게 가로챈 물건을 원주인에게 돌려주도록 하셨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욕심 때문에 이웃에게 손해를 입힌 사람은 이웃이 당한 고통을 보상하도록 하셨습니다.
이때 하나님은 탈취한 사람이 물건을 돌려줄 때에는 본물의 5분의 1을 더해 주도록 배상의 원칙을 정해 주셨습니다.
___________________ 레위기 5장
속죄제를 필요로 하는 경우
5 “만일 어떤 사람이 법정에 증인으로 소환되었으나 자기가 보거나 들은 것을 말하지 않으면 그는 그 결과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한다.
2 “어떤 사람이 죽은 들짐승이나 가축이나 곤충과 같이 의식상 부정한 것을 만졌을 경우에는 그가 모르고 만졌을지라도 부정하게 되어 과실을 범하는 자가 된다.
3 “만일 그가 모르고 사람의 부정에 접촉하였다가 그것을 알게 되면 그는 과실을 범한 자가 될 것이다.
4 “어떤 사람이 선한 일이든 악한 일이든 아무 생각 없이 어떤 일을 하겠다고 맹세하였다가 후에 자기가 한 일을 깨달으면 그는 과실을 범한 자가 된다.
5 “누구든지 이런 과실을 범한 자는 자기가 과실을 범했다고 고백하고
6 자기가 범한 그 과실에 대하여 속죄제물로 어린 양의 암컷이나 암염소를 끌고 와서 나 여호와에게 바칠 것이며 제사장은 그 사람의 과실을 위해 속죄해야 한다.
7 “만일 그가 어린 양이나 염소를 바칠 형편이 못 되면 자기가 범한 과실에 대해서 산비둘기 두 마리나 집비둘기 두 마리를 나 여호와에게 가져와 한 마리는 속죄제물로, 다른 한 마리는 번제물로 바쳐야 한다.
8 그는 그 제물을 제사장에게 가져갈 것이며 제사장은 속죄제물을 먼저 드리되 그 목을 완전히 끊지 말고 비틀어
9 피를 단 곁에 뿌리고 그 나머지 피는 제단 밑에 흘려야 한다. 이것은 속죄제이다.
10 그리고 나머지 한 마리는 규정대로 불에 태워 번제로 드려야 한다. 이와 같은 방법으로 제사장이 그 사람의 과실을 위해 속죄하면 그가 용서받게 될 것이다.
11 “만일 그가 산비둘기 두 마리나 집 비둘기 두 마리도 바칠 형편이 못 되면 그는 자기가 범한 과실에 대하여 고운 밀가루 [a]2.2리터를 가지고 와서 속죄제로 드려야 한다. 이것은 속죄제이므로 그 위에 기름을 붓거나 향을 놓아서는 안 된다.
12 그는 그것을 제사장에게 가져갈 것이며 제사장은 전체를 바쳤다는 표로 그 가루 한 움큼을 집어다가 단에서 나 여호와에게 불로 태워 바치는 화제물 위에 얹어 태워야 한다. 이것은 속죄제이다.
13 이와 같은 방법으로 제사장이 과실을 범한 그 사람을 위해 속죄하면 그가 용서받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 제물의 나머지는 곡식으로 드리는 소제물의 경우와 같이 제사장에게 주어야 한다.”
속건제
14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셨다.
15 “어떤 사람이 무의식 중에 나 여호와에게 드리는 거룩한 예물에 대하여 잘못을 범하면 그는 벌금으로 네가 정한 값에 해당하는 흠 없는 숫양을 나 여호와에게 바쳐야 한다. 이것은 허물을 씻는 속건제이다.
16 그는 거룩한 예물을 드리는 데 있어서 범한 잘못에 대하여 자기가 바치도록 되어 있는 예물의 5분의 을 더 추가하여 제사장에게 가져갈 것이며 제사장은 속건제의 숫양으로 그를 위해 속죄해야 한다. 그러면 그가 용서받게 될 것이다.
17 “어떤 사람이 나 여호와가 금한 명령 중 하나를 모르고 범했을지라도 그것은 죄가 되므로 그는 그 죄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한다.
18 그는 모세 네가 정한 값에 해당하는 흠 없는 숫양을 속건제물로 제사장에게 가져갈 것이며 제사장은 그가 모르고 범한 잘못에 대하여 속죄해야 한다. 그러면 그가 용서받게 될 것이다.
19 그가 나 여호와에게 잘못을 범했으니 이 속건제를 반드시 드려야 한다.”
Footnotes
- 5:11 히 ‘에바 1/10’
속죄제와 속건제의 의미(레위기 5:1-19)
레위기 4장에서 속죄제는 죄를 지었을 때 그 죄를 속하기 위해서 드리는 제사로 언급되었습니다. 제물은 빈부에 따라 형평에
맞게 드렸습니다. 제사장과 온 회중은 흠 없는 수송아지로, 족장은 흠 없는 숫염소로, 평민은 흠 없는 암염소나 어린 암양으로
드렸습니다. 그러나 가난한 자는 산비둘기나 집비둘기 두 마리로, 극빈자는 고운 가루 십분의 일 에바, 곧 2.3리터를 바치도록
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제물에 차별을 두신 것은 속죄제나 속건제가 의무제이기 때문에 하나님께 죄를 범한 자가 경제적인 이유로 속죄를
받지 못하는 일이 생기지 않도록 그 피해를 줄이기 위함이었습니다. 구속사적인 관점에서 볼 때, 속죄제나 속건제의 규례는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말미암아 구속에 이르는 길에 결코 빈부귀천의 차별이 있을 수 없다는 복음의 보편성에 대한 모형이자 그림자라고 볼
수 있습니다. 복음에는 빈부귀천의 차별이나 남녀반상의 차별이 없습니다. 복음은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차별 없이 누구한테나
주어진다는 것이 로마서의 말씀입니다.
속죄제는 대속을 위한 제사였습니다. 하나님의 계명 중 하나라도 범했거나 어떤 사건에 직간접으로 연루된 증인이 정직하게
진술하지 않음으로써 하나님과 자기 자신을 속이고 타인에게 해를 끼쳤을 때나(1절), 자신도 모르게 짐승이나 사람의 부정한 것에
접촉하여 부정을 입었을 때나(4절), 경솔하게 맹세한 후에 그 맹세가 잘못되었음을 깨달았을 때(4절) 반드시 바쳐야 하는
제사입니다. 이 경우 범죄자는 반드시 먼저 죄를 인식하고, 그것이 하나님께 죄가 된다는 사실을 솔직하게 고백해야 했습니다. 그런 후
비로소 속죄를 바라는 겸허한 심령으로 어린 암양이나 암염소를 취하여 속죄제 규례를 따라 하나님께 예물을 바쳐야 했습니다. 이것은
속죄제의 근본정신이 죄에 대해서 철저히 깨닫고, 겸손히 회개하는데 있다는 사실을 암시하는 것입니다. 바쳐진 예물 가운데 남은
것은 제사장이 먹었습니다.
속죄제와 속건제의 차이점에 대해서 다시 한 번 정리해 보겠습니다.
속죄제는 특별한 죄에 대하여 바치는 제사이고, 속건제는 보상이 가능한 죄, 곧 성물이나 이웃에게 범한 죄에 대하여 바치는
제사로써 오분의 일이 플러스되는 벌금형이 함께 주어졌습니다. 단순한 벌금형으로도 처벌이 가능하지만 제사를 바치는 이유는 죄의
근원적인 용서가 하나님께 있기 때문입니다.
속죄제와 속건제의 형식적 차이를 보면, 첫째, 제물이 다릅니다. 속죄제는 소, 염소, 양, 비둘기, 고운 가루를 드렸지만,
속건제는 오로지 흠 없는 숫양을 드렸습니다. 둘째, 속죄제는 남은 피를 번제단 밑에 쏟았으나 속건제는 쏟지 않았습니다. 셋째,
속건제는 언제나 개인적인 제사였지만, 속죄제는 집단적인 제사도 포함했습니다. 동물의 머리위에 손을 얹고 죄를 전가시키는 문제를
속건제에서는 언급하고 있지 않는데, 당연한 일이기 때문에 생략된 것으로 봅니다. 끝으로 속건제는 속죄제와 달리 특별한 경우에도
드려졌습니다. 곧 문둥병자가 나은 후에(4:1-20), 또한 나실인이 부정한 허물을 용서받기 위해 속건제를 드리기도 했습니다.
속건제는 단순히 어떤 사람이 잘못을 범한 것에 대한 책임, 범과 등을 보상하는 제사입니다. 속죄제는 무의식중의 범죄를 속하고 속건제는 의식적으로 하나님과 타인의 명예를 손상시킨 것을 배상하는 제사입니다.
속건제를 바치는 경우를 크게 두 가지로 나눠볼 수 있습니다. 첫째는 하나님의 성물에 대해 범한 죄이고(14-19절),
둘째는 이웃에게 범한 죄입니다(6:1-7). 첫째 죄는 다시 고의로 하나님의 성물에 대하여 범과한 것과 부지중에 계명 중 하나를
범한 것으로 나눠서 설명할 수 있습니다.
레위기 5장은 다른 사람의 재물을 가로채는 사기 행위를 했거나 그것을 부인하며 거짓 맹세하였을 때도 속건제를 바쳐야 한다고
규정하였습니다. 사람에게 잘못한 것은 하나님께 잘못한 것이 되고, 하나님께 잘못한 것은 사람에게 잘못한 것이 되기 때문에
이웃에게 죄를 범하였을 때 하나님과 이웃 모두에게 죄를 범한 것이 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속건제를 바쳐야 하고, 손해를 끼친
사람에게는 범죄물과 그 범죄물의 오분의 일을 더하여 본인에게 배상을 해야 합니다.
속건제는 속죄제와 불가분의 관계입니다. 이는 그리스도께서 속죄 제물인 동시에 속건제물이 되셨다는 사실에서 알 수 있습니다.
구약의 속죄제와 속건제가 예표한 하나님의 구속 사역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십자가 위에서 성취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죄에 따르는
형벌을 받으심으로써 속죄제를 완성하셨고, 하나님의 모든 요구들을 순종하심으로써 속건제를 완성하셨습니다.
신약성서에서는 다양한 언어로 구원의 의미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첫째, ‘의롭다 하심’(4:24; 5:1/justification)이란 말이 있는데, ‘의롭다 하심’은 법정용어입니다. 법정에서의 무죄 선언에 비유될 수 있습니다.
둘째, ‘구속(救贖)’(3:24/redemption)이란 단어가 있습니다. ‘구속’은 노예시장의 통용어입니다. 근본개념은
몸값 지불, 즉 속전(贖錢)을 내고 노예의 속박에서 풀려나는 것을 말합니다. 속건제의 의미를 이 몸값 지불의 ‘구속’의 의미에서
찾을 수가 있습니다.
셋째, ‘화목’(5:10-11/reconciliation)이란 단어가 있습니다. ‘화목’은 중재(仲裁)용어입니다. 분단의 벽을 헐고 적대감정을 풀어 화평의 관계를 회복하는 것을 말합니다.
넷째, ‘그 피를 인하여’(3:25; 5:9/sacrifice)가 있습니다. ‘그 피를 인하여’는 피해보상의 개념이며,
희생제사 용어입니다. 그리스도는 우리를 위하여 속죄제물, 희생제물, 대속제물이 되셨습니다. 안수를 통해서 예배자의 죄가 제물에게
전가되듯이, 우리의 죄가 그리스도에게 전가되었고, 그분은 우리의 죄를 친히 짊어지시고 우리를 위해서 대신 십자가에 못 박히심으로
우리가 하나님께 끼친 피해를 보상하셨습니다.
두 번째의 구속개념과 네 번째의 피해보상 개념이 속죄제 및 속건제와 연관을 갖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당신의 아들 예수님을
통해서 죄인이며 피조물에 불과한 우리를 위해서 친히 속죄제물이 되시고, 속건제물이 되셨습니다. 이 사실이 얼마나 귀하고 소중하고
기쁘고 반갑고 복된 소식입니까? 이 복음의 깊이와 가치를 깨닫고, 그것을 잘 간직하고 잘 전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오분의 일(1/5)
속죄제
4 여호와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이렇게 전하라고 모세에게 말씀하셨다.
2 “누구든지 무의식 중에 나 여호와가 금한 명령 중 하나를 어겼을 경우에는 이렇게 하여라.
3 “만일 기름 부음을 받은 [a]제사장이 모르고 범죄하여 백성에게 그 죄의 재앙이 돌아가게 하였으면 그는 자기가 범한 죄에 대하여 흠 없는 수송아지 한 마리를 속죄제로 나 여호와에게 바쳐야 한다.
4 그는 그 수송아지를 성막 입구 나 여호와 앞에 끌어다가 그 수송아지 머리 위에 손을 얹은 다음 그것을 나 여호와 앞에서 잡아야 한다.
5 그리고 기름 부음을 받은 제사장은 그 수송아지 피를 가지고 성막에 들어가서
6 손가락으로 피를 찍어 나 여호와 앞 곧 성소의 휘장 앞에 일곱 번 뿌리고
7 또 그 피를 성막 안의 향단 뿔에 바를 것이며 그 송아지의 나머지 피는 성막 입구에 있는 번제단 밑에 모두 쏟아야 한다.
8 그런 다음 그는 그 속죄제물의 모든 기름, 곧 내장을 덮고 있거나 그것에 붙어 있는 기름과
9 두 콩팥과 그 위에 덮여 있는 허리 부분의 기름과 간에 덮여 있는 간 꺼풀을 떼어내어
10 화목제물의 기름을 떼어냈을 때처럼 그것을 번제단 위에서 불로 태워야 한다.
11 그러나 그 수송아지의 가죽과 그 모든 고기와 그 머리와 다리와 내장과 똥,
12 곧 기름 부분을 제외한 그 나머지는 모두 야영지 밖으로 가지고 가서 재 버리는 정결한 곳에서 나뭇불로 태워야 한다.
13 “만일 이스라엘 전체 백성이 잘못하여 나 여호와가 금한 명령 중 하나를 어겨 범죄하고도 깨닫지 못하다가
14 후에 그 죄를 깨달으면 그들은 수송아지 한 마리를 속죄제로 드려야 한다. 그들은 그것을 성막 앞으로 끌어다 놓고
15 백성의 장로들이 나 여호와 앞에서 그 수송아지 머리에 손을 얹은 다음 그것을 내 앞에서 잡을 것이며
16 기름 부음을 받은 제사장은 그 수송아지 피를 가지고 성막으로 들어가서
17 손가락으로 피를 찍어 나 여호와 앞 휘장 앞에서 일곱 번 뿌리고
18 또 성막 안 나 여호와 앞에 있는 향단 뿔에 그 피를 바를 것이며 나머지 피는 성막 입구에 있는 번제단 밑에 쏟아야 한다.
19 그리고 그는 그 송아지의 기름을 다 떼어내어 단에서 불로 태워
20 속죄제의 수송아지에게 한 것처럼 해야 한다. 이런 식으로 제사장이 백성을 위해 속죄하면 그들이 용서받게 될 것이다.
21 그런 다음 그는 [b]기름을 제외한 그 수송아지의 나머지 부분을 야영지 밖으로 가지고 가서 제사장 자신의 죄 때문에 바친 그 송아지처럼 그것을 불에 태워야 한다. 이것은 전체 백성을 위한 속죄제이다.
22 “만일 백성의 지도자가 모르고 나 여호와의 명령 중 하나를 어겨 범죄하였다가
23 후에 자기 죄를 깨닫게 되면 그는 흠 없는 숫염소 한 마리를 제물로 가져와서
24 그 숫염소 머리에 손을 얹은 다음 나 여호와 앞 번제물을 잡는 곳에서 잡아야 한다. 이것은 속죄제이다.
25 제사장은 그 속죄제물의 피를 손가락으로 찍어 번제단 뿔에 바르고 나머지 피는 모두 번제단 밑에 쏟을 것이며
26 그 모든 기름은 화목제 제물의 기름처럼 단 위에서 불로 태워야 한다. 이와 같은 방법으로 제사장이 죄를 범한 지도자를 위해 속죄하면 그가 용서받게 될 것이다.
27 “만일 일반 백성이 모르고 나 여호와가 금한 명령 중 하나를 어겨 범죄하였다가
28 후에 자기 죄를 깨닫게 되면 그는 흠 없는 암염소 한 마리를 끌고 와서
29 그 머리에 손을 얹은 다음 제단 북쪽의 번제물을 잡는 곳에서 잡을 것이며
30 제사장은 손가락으로 그 피를 찍어 번제단 뿔에 바르고 나머지 피는 모두 그 제단 밑에 쏟아야 한다.
31 그런
다음 그는 화목제 제물의 기름을 떼어낸 것처럼 그 암염소의 기름을 모두 떼어내어 단 위에서 불로 태워 나 여호와를 기쁘게 하는
향기가 되게 해야 한다. 이와 같은 방법으로 제사장이 그를 위해 속죄하면 그가 용서받게 될 것이다.
32 “만일 그가 어린 양을 속죄제물로 가져올 경우 그는 흠 없는 암컷을 끌고 와서
33 그 머리에 손을 얹은 다음 번제물을 잡는 곳에서 잡을 것이며
34 제사장은 그 속죄제물의 피를 손가락으로 찍어 번제단 뿔에 바르고 그 나머지 피는 모두 번제단 밑에 쏟아야 한다.
35 그런 다음 그는 화목제의 어린 양에서 기름을 떼어낸 것처럼 그 제물의 모든 기름을 떼어내어 나 여호와에게 불로 태워 바치는 화제물 위에 얹어 태워야 한다. 제사장이 이런 식으로 그 사람을 위해 속죄하면 그가 용서받게 될 것이다.”
Footnotes
속죄제, 속죄 제물(4:3, 8, 14, 20, 21, 24, 29, 34) 2403
하타트(2403) חַטָּאָת
어원 / 2398에서 유래
관련 성경 / 죄(창4:7, 레4:3, 대하6:25), 죄악(창18: 20,사5:18), 속죄제(출29:14, 민15:27, 왕하12:16), 속죄 제물(레4:32, 민8:8, 대하29:23), 속죄 희생(레4:25), 허물(레5:6), 잘못(레5:10,11), 속죄(레10:19, 민8:7), 속건제(레7:7), 번제(레4:29), 죄악(시32:5, 애4:6), 죄인(잠5:22,13:6), 벌(슥14:19). [동] 범죄하다(느1:6, 욥35:3).
구약 성경 / 221회 사용
* 2398. חָטָא
3. 사사기 20:16
발음 / 하타(châṭâʼ)
요아킴은 최근 태어나 가장 정신없는 한달을 보냈다. 딸의 결혼식을 성대히 치른 뒤 며칠 못가 지병을 않으시던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겨우 장례식을 마친 뒤 한숨 쉬려는가 했더니 최근 사업을 함께 시작한 동업자 녀석이 모든 물건을 빼돌려 도망을 가고 말았다. 요아킴은 쉴 겨를이 없었다. 그 녀석이 두로 항으로 도망간 뒤 배에 오르면 끝장이었다. 서둘러 추적을 떠난 요아킴은 이틀을 노숙한 뒤 삼일 째에도 이른 아침부터 발걸음을 재촉했다. 요아킴은 반나절이 지나 어느 마을에 도착한 뒤에 그 날이 안식일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일련의 큰 사건들이 연이어 발생한 바람에 안식일 날짜를 망각하는 중대한 실수를 범한 것이다. 가슴이 덜컹거리며 두려움에 사로잡힌 요아킴은 그 자리에서 무릎 꾾고 하나님의 용서를 구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 그의 죄가 해결될 수는 없었고 속죄제를 바쳐야만 했다. 하나님의 은혜로 요아킴은 그 범죄자가 배에 승선하기 직전 체포할 수 있었다. 재산을 되찾아 집으로 돌아온 요아킴은 안식일을 무심코 범했던 죄를 용서받기 위해 즉시 성전으로 올라가야 했다. 더불어 그에게는 추가로 드려야할 제물이 있었다. 바로 잃었던 재산을 되찾게 해주신 하나님께 대한 감사의 번제와 화목제였다. 하지만 그 중 가장 중요한 제사는 속죄제였다. 죄를 용서받지 않고 드리는 번제와 화목제를 하나님께서 기뻐하실리 없기 때문이다.
무심코 지은 죄를 위해 바친 속죄제
요아킴이 안식일을 무심코 범한 뒤 바친 제사는 ‘속죄제’였다. 속죄제는 두 가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제사였다. 첫째, ‘비고의적인 죄’를 해결하고(레 4~5장) 둘째, ‘부정결’의 문제를 해결했다(레 11~15장). 예컨대 여자가 아이를 낳으면 산후 정결례를 거쳐 깨끗케 되는데, 일정 기간 날짜가 지난 뒤 목욕을 해야 하며, 가장 중요하게는 자녀 출산에 대한 감사의 번제와 더불어 ‘속죄제’를 바쳐야만 했다(더 자세한 것은 나중에 레 12장을 다룰 때 설명할 것이다). 덧붙여 유출병 걸린 여자가 피가 멈춘 뒤, 또는 악성 피부병(나병이라는 번역은 잘못이다) 환자가 치료된 뒤 반드시 바쳐야하는 것도 속죄제다. 사람이 부정을 탔을 때 그것은 죄 문제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속죄제가 요구된 이유는 무엇인가? 분명 그것은 그런 다양한 부정결들은 창세기 3장에서 죄가 세상에 들어온 후 발생된 죄의 증상들이기 때문일 것이다. 따라서 부정결의 문제도 근원을 따지면 죄의 문제에서 비롯된 것이기 때문에 속죄제가 요구된 것으로 추측된다.
그러나 우선 속죄제는 속건제와 더불어 ‘죄’를 해결하는 제사였다. 속건제가 해결하는 죄는 재산상의 피해를 입힌 죄에 국한된다는 점에서 속죄제가 다루는 죄와 차이가 난다. 속건제에서는 상대방의 금전적/물질적 손해를 배상하고 하나님께 속건제 숫양을 바쳐 그 문제를 해결한다. 그러나 속죄제는 도덕적 계율을 어긴 죄인데, 다만 그 죄는 ‘비고의적인 죄’ 다시 말해 ‘그릇’ ‘무심코’ 여호와께서 금지하신 계명을 범한 죄다. 한글 성경에서는 단순히 ‘여호와의 계명 중 하나라도’라고 되어 있으나 히브리어 원문의 의미는 정확히 ‘여호와께서 금지하신 계명 중 하나라도’이다. 고의적인 죄의 경우는 일부 고의성이 가벼운 경우를 제외하고(레 5:1~4) 매우 심각하여 속죄제는 허용되지 않았다. 그것은 반역죄로서 하나님께서 직접 징벌하셔서 처단하시거나(예, 레 10장의 잘못된 제사를 드린 나답과 아비후) 하나님의 지시로 백성들이 처형을 했다(예, 레 24장의 하나님을 저주한 이스라엘 평민). 다만 어떤 반역죄의 경우 심판이 유보되어 하나님께서 회개의 기회를 주시기도 했다.
어쨌든 금지 명령은 매우 중대한 계명이다. 따라서 무심코 위반했다 하더라도 상당히 심각하다. 요아킴의 경우 안식일에 여행이 절대 금지되어 있으나 그는 무심코 이 금지 명령을 위반했다. 속죄제를 바쳐 죄가 속죄되어 하나님께 용서받아야만 했다. 요아킴은 평민이었기 때문에 바쳐야하는 속죄제 짐승은 암염소나 암양이었다.
속죄제는 짐승의 피로 성전과 그 기물들의 오염을 씻어내는 효과를 낸다는 점이 가장 큰 특징이다. 인간의 죄와 부정결이 성전과 그 기물들을 더럽히기 때문이다. 이렇게 속죄제는 죄와 부정결의 문제를 위해 바치는 것이 원칙이나, 그 외에도 제사장 임직이나 레위인의 임직, 또는 나실인의 서원과 같은 몇 가지 특별한 예식에 속죄제를 드렸으며, 국가적 절기마다 다양한 속죄제를 바치곤 했다. 그 기능에 대해서는 몇 가지로 의견이 나뉘는데 그중 가장 그럴듯한 설명은 아마도 절기별로 제단과 성전의 잠재적 부정결을 닦아내는 기능을 했을 것이란 견해다.
속죄제와 속건제, 특히 속죄제는 그 제사의 특징과 의미, 제사의 절차를 설명하기 위해서는 대단히 많은 지면을 필요로 하는데, 여기서는 최대한 간략하게 설명해야하는 아쉬움이 있다. 상세한 설명과 목회적 적용과 여러 힌트, 특히 속죄제의 자세한 교회론적 의미에 대해서는 필자의 책 <레위기의 신학과 해석>(새물결 플러스)의 도움을 받기 바란다.
신분에 따라 등급화된 속죄제
속죄제는 죄인의 신분과 사회적 지위에 따라 달랐다. <표>는 높은 지위로부터 낮은 지위에 이르기까지 제물의 크기와 가치가 줄어든다는 것을 보여준다.
우선 4장에서 먼저 (대)제사장의 비고의적인 죄에 대해 수소를 바칠 것을 명령한다. 많은 학자들이 3절의 ‘기름부음받은 제사장’을 대제사장으로 해석하지만, 만일 그렇게 될 경우 제사장이 목록에서 누락되므로 이것은 분명 대제사장을 포함한 제사장들로 보아야 한다. (대)제사장과 회중은 동급이었다. 따라서 둘 다 수소가 요구된다. 이때 회중은 제사장이 포함된 회중을 의미한다. 만일 제사장과 회중이 분리되어 취급되는 경우, 제사장이 제외된 회중의 제물은 흔하게 숫염소였다(레 9장; 16장). 족장은 평민의 지도자로서 숫염소를 속죄제로 바쳤고, 평민은 암염소나 암양을 바쳤다. 여기서 수컷이 암컷보다 제의적 가치 면에서 우위에 놓여 있음이 다시 확인된다(시장 가치로는 암컷이 월등히 비쌌다). 한편, 제사장과 평민 사이에는 레위인이 있어야 하는데 레위기 4~5장의 목록에서 빠져있다. 아마 레위인은 제사장과 평민 사이의 신분이었다는 점에서 족장과 동급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양과 염소를 조달하기 어려운 가난한 계층을 위해서는 비둘기 두 마리가 속죄제로 바쳐졌다. 이때 한 마리는 번제와 같이 모두 제단에 태웠고, 다른 한 마리는 피를 제단에 흘린 뒤 제사장이 섭취하는 방식으로 두 비둘기가 처리되었다. 그러나 가난한 계층 중에는 심지어 비둘기마저 힘에 겨운 사람들이 있었다.
그런 극빈자들이 무심코 죄를 범했을 경우에도 죄 문제를 그대로 넘길 수는 없었기에 하나님께서는 마지막 수단을 그들에게 허락하셨다. 바로 그들이 평소 음식으로 먹는 밀가루 1/10에바(약 2.2리터)를 소제의 속죄 제물로 가져오라 명하신 것이다(레 5:11~13).
경제적 형편과 무관하게 죄의 문제는 어떤 방법으로든 반드시 해결되어야 했다. 비록 밀가루는 피가 없는 속죄 제물이었지만, 하나님은 자신의 재량으로 극도로 가난한 자들을 위해 밀가루 제물에 피의 효력이 있는 것으로 간주해주셨다. 마지막 한 사람을 위해서까지 속죄의 길을 열어주신 하나님의 큰 은혜가 아닐 수 없다.
매우 특이한 속죄제의 피뿌리기
속죄제의 피 의례는 매우 독특한 방식으로 이루어졌다. 먼저 (대)제사장과 회중을 위한 속죄제 수소는 안수 후 도살을 한 뒤 그 피를 양푼에 받아 내성소로 가지고 들어간다. 거기서 양푼의 피를 손가락으로 찍은 뒤 지성소 휘장 앞의 향단 주변에 ‘뿌리고’ 향단의 네 뿔에 ‘발랐다’(레 4:6~7, 17~18). 그러나 평민을 위한 속죄 제물인 염소와 양의 피는 마당에 놓인 번제단의 네 뿔에 ‘바른다’(레 4:25, 30). 비둘기의 경우에 피를 양푼에 받지 않고 죽인 뒤 몸채 들고 마당의 번제단 벽에 일부를 뿌리고 남은 피는 제단 아래 흘렸다(레 5:9). 여기서 주목해야할 것은 제사장과 회중을 위한 속죄제 수소의 피는 내성소에 들어가 향단에 처리한 반면, 평민의 속죄제 짐승(염소와 양, 비둘기)의 피는 마당의 번제단에서 처리했다는 점이다. 이것은 신분에 따른 죄의 오염력과 영향력이 차이가 났기 때문이다. 제사장과 회중의 죄의 ‘독기’는 내성소까지 침범해 향단을 더럽힌 반면, 평민의 죄는 마당의 번제단을 더럽히는 결과를 낳았다. 그러한 이유로 피를 뿌리는 위치가 달랐다.
<표>에서 확인해 볼 수 있듯이 피를 어디에 뿌렸느냐에 따라 속죄제 고기 처분 방식도 달라졌다. 내성소에서 피를 뿌린 짐승의 경우 결코 그 고기를 제사장이 먹지 못하고 진영 밖의 재를 버리는 ‘정결한 곳’에서 소각을 해서 없앤다. 반면에 마당의 번제단에서 피가 처리된 속죄제 짐승의 고기는 제사장들에게 일종의 수고비로 건네져 그것을 먹어서 없앴다. 이것은 분명히 속죄제 고기의 오염도의 차이로 인한 것이다. 내성소에 피를 뿌린 속죄제 짐승의 경우 피를 통해 흡수된 오염이 강해 먹을 수 없어 밖에 반출해 태웠던 반면, 마당에 피를 뿌린 속죄제 짐승의 경우 그 오염이 경미해 제사장이 먹을만 했기에 하나님께서 그 제사를 집례한 제사장들이 먹도록 조치하시고 밖에 버려 태우진 않았다고 볼 수 있다. 이렇게 해서 속죄제는 ‘태우는 속죄제’와 ‘먹는 속죄제’로 나뉜다.
속죄제의 피 뿌리는 특유의 동작은 아래의 비교를 통해 분명해진다. 우선 속죄제 외의 다른 모든 제사들, 즉, 번제/속건제/화목제에서는 피를 뿌리는 방식이 공통적으로 ‘끼얹다’(zaraq ‘dash, throw’)이다. 피를 양푼에 받은 뒤 제단 사면 벽에 뿌려서 처리한다. 그러나 속죄제는 전혀 다르다. 그것은 피를 양푼에 담은 뒤 다음 세 가지 동작을 통해 피를 처리한다.
a. ‘뿌리다’(히자-hizza ‘sprinkle’) : 손가락으로 제단 주변에
b. ‘바르다’(나탄-natan ‘daub, put’) : 손가락으로 제단의 네 뿔에
c. ‘쏟다’(샤파크/야차크-shapak/yatsak ‘pour’ ): 제단 밑에
속죄제에서는 피가 든 양푼을 들고 제단 벽에 끼얹는 것이 아니라, 손가락을 양푼에 담아 피를 찍은 뒤 소량의 피를 제단 주변에 뿌리거나 제단 뿔에 바르는 동작으로 피를 처분한다. 피가 대량으로 남는데, 이 남은 피는 제단 밑에 쏟는다. 여기서 손가락으로 피를 뿌리고 바르는 동작이 매우 중요하다. 이것이 가져오는 효과는 제단의 정화이기 때문이다(레 8:16; 16:19). 즉, 속죄제의 피를 특이한 동작으로 뿌리고 바를 때 제단과 성전이 청소된다. 이것이 속죄제의 가장 큰 특징이다.
죄의 자백이 요구됨
레위기 5장 1~6절은 약간의 고의성이 있는 죄들을 위해 바치는 속죄제 규정이다. 네 가지 사례가 주어지는데 이것은 모두 고의성이 개입되어 있으므로 그 죄의 공개적인 인정과 자백이 요구된다. 이런 죄의 인정과 자백은 속죄제 절차에서 매우 중요했다. 그것 없이는 속죄제는 아무런 효력이 발생되지 않았을 것이다. 혹자는 이 경우는 고의성이 있기 때문에 더 죄질이 나빠 ‘자백’이 요구되었지만, 4장의 죄들은 ‘비고의적’인 죄들이 때문에 죄질이 가벼워 자백이 요구되진 않았다고 말한다. 실제로 4장에는 ‘자백’의 요구가 나타나지 않는다. 그러나 4장은 ‘금지명령’이기 때문에 요아킴의 사례에서 보듯이 무심코 그 죄를 지었다하더라도 심각했다. 따라서 자백은 그런 심각한 상황에서 자동적으로 수반되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런 이유로 4장에서는 자백을 명시적으로 요구하고 있지 않을 것이다. 속죄제의 최종적 효과는 ‘속죄’와 그로 인한 ‘죄사함’이었다(레 4:20, 26, 35).
속죄제는 레위기 4:1-6:7에 걸쳐 소개된다.
‘하타트’라는 단어에서 왔다.
‘과녁에서 벗어나다’ ‘죄를 짓다’ 속죄하다‘라는 뜻을 가진다.
죄를 짓고 나서
속죄하기 위해 드려지는 제사이다.
죄와 상관없는 제사는 없지만, 속죄제의 경우 죄와 직접적으로 연결되어있다.
1970년대 새로운
속죄제 이론과 더불어 정결제(purification offering)로 부르기로 제안했다.
트렘페 롱맨Ⅲ와 레이몬드 딜러드
역시 ‘정결제’로 부른다. 정결제로 부르는 이유는 제사방법에 대한 것이 아니라 용어 때문이다.
속죄제에 대한 내용은 레 4:1-5:13까지 나와 있지만, 6:25-7:7에서 속건제와 함께 다루어진다.
고의적인
죄는 말할 것도 없거니와 부지주의 죄도 포함한다.
5:1-6에서는 부지중에 지은 죄에 대해 다룬다.
민수기 15:22-31에서
부지중의 죄와 고의로 지은 죄를 설명한다.
속죄제는 드리는 사람들을 구체적으로 구분해 놓았다.
다른 제사와 다르게 물질의 부가 아닌 지휘체계 안에서 구분했다. 내용은 아래와 같다.
4:3-12. 제사장
4:13-21. 이스라엘 온 회중
4:22-26. 이스라엘의 지도자
4:27-35. 이스라엘의 평민
속죄제 제사 방법
신분에 따라 드리는 제물과 방법이 약간씩 다르다. 대제사장과 전체 회중의 경우 반드시 수소를 드려야 하고, 밖에서 소각된다.
또한 피뿌림도 마당이 아닌 내성소까지 들어간다.
그런데 숫양은 보이지 않는다.
(아래의 표는 김경열의 것에서 가져옴)
신분 |
제물 |
피의 취급 |
소각 대상 |
남은 고기 |
(대)제사장 |
수소 |
내성소/향단 |
기름 |
밖에서 소각 |
회중 |
||||
족장 |
숫염소 |
마당/번제단 |
두 콩팥 |
제사장 섭취 |
평민 |
암염소 혹은 암양 |
마당/번제단 |
간엽 |
제사장 섭취 |
빈민 |
비둘기 두 마리 (속죄제와 번제) |
마당/번제단 |
번제 비둘기 |
속죄제 비둘기 제사장 섭취 |
극빈 |
밀가루 1/10에바 |
없음 |
한 움큼 |
제사장 섭취 |
제사장이 드리는 속죄제(4:3-12)
제물을 회막문 앞에 가져온다. 제물의 머리에 안수하고 잡는다.
기름부음을 받은 제사장은 피를 받아 회막에 가져가서
성소의 휘장 파에 일곱 번 뿌린다.
회막 안 향단 뿔들에 바르고, 피 전부를 회막문 앞 번제단 밑에 쏟는다.(4-7)
수송아지의 모든 기름을 떼어내고 더불어 다른 내장도 떼어낸다.
떼어낼 것들은 다음과 같다.
내장에 덮인
기름, 내장에 붙은 모든 기름, 두 콩팥과 그 위의 기름, 허리쪽에 있는 것과 간에 덮인 꺼풀 등이다.
이것들을 모두 번제단 위에
불사른다.
그러나 나머지 수송아지의 가죽과 모든 고기, 머리와 정강이와 내장, 똥 등은 진영 바깥 재 버리는 곳에서 불로 사른다.
*죄를 사함 받는다는 말이 없다.
평민이 드리는 속죄제(4:13-21)
제물을 회막문 앞으로 가져온다. 회중의 장로들이 제물의 머리에 안수하고 잡는다. 제사장은 수송아지의 피를 회막에 가지고 들어가서 손가락으로 피를 찍어 회막 안 제단의 뿔에 바르고, 나머지는 번제단 밑에 쏟는다. 기름만을 취하여 제단에 불사른다. 나머지는 진영 밖에 나가 재버리는 곳에 모두 불태운다. *제사장이 회중을 위하여 속죄하여 죄사함을 받는다.
속죄 제사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제사를 상징한다.
속죄 제사를 통해 죄인들이 구원을 얻게 된다.
속죄 제사는 이스라엘 백성 중에 어누 누구도 필할 수 없는 제사입니다.
하나님의 계명을 어긴 죄가 있는 자들은 반드시 속죄 제물을 가지고 하나님께 나와야 합니다.
이 제사는 제사장부터 평민에 이르기까지 예외가 없는 제사입니다.
가난한 자들도 죄가 있으면 속죄 제사를 드려야만 속죄받을 수 있습니다.
이것은 무엇을 말씀하고 있는 것일까요?
하나님 앞에 모든 자들이 죄인인데 이 모든 죄인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제사를 통하지 않고는 절대 속죄받을 수 없는 것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속죄제의 의미를 통해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 제사를 깨다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레위기 4:2
이스라엘 자손에게 말하여 이르라 누구든지 여호와의 계명 중 하나라도 그릇 범하였으되.
속죄제사는 누구든지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을 하나라도 지키지 못하고 범죄 하면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입니다.
‘범하였으되’ עשה(아사 6213) 준행하다, 범하다, 범죄 하다, 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떨어졌지만 말씀대로 살지 못한 자들은 하나님께 속죄 제사를 드려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행동에 옮기지 못하고 범죄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죄를 지은 것이 자신이 아니라고 우겨도 되지 않습니다.
자신의 행동이 올바르고 윤리적으로 깨끗하게 살았다고 해도 하나님 앞에서 죄가 없는 것이 아닙니다.
이 죄는 계속해서 짓고 있습니다.
그래서 죄를 지을 때마다 속죄 제물을 가지고 와서 속죄를 받아야 합니다.
우리도 이미 아담으로부터 원죄가 있기 때문에 반드시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 제사를 통해 구원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윤리적으로 양심적으로 살아간다고 해서 하나님 앞에 죄가 없는 것이 아닙니다.
레위기 4:3
만일 기름 부음을 받은 제사장이 범죄 하여 백성의 허물이 되었으면 그가 범한 죄로 말미암아 흠 없는 수송아지로 속죄 제물을 삼아 여호와께 드릴지니.
만약에 제사장이 하나님께 범죄 하여 백성들 앞에 허물이 있으면 수송아지로 속죄 제물을 삼아 여호와께 드려야 합니다.
‘속죄제물을’ חטאה(핫타아 2403) 속죄
희생, 이라는 뜻입니다.
이 단어는 חטא(하타 2398) 정결하다, 제사드리다, 깨끗이 하다, 라는 뜻에서 유래되었습니다.
제사장이 죄를 범하면 흠 없는 수송아지를 속죄 제물로 하나님께 드렸습니다.
이 수송아지는 제사장의 모든 죄를 전가받아 죽었습니다.
범죄 한 제사장 대신으로 제물이 죽었던 것입니다.
이 제물이 희생을 당하고 제사장은 정결하며 깨끗하게 되어 하나님 앞에 설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이 제사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희생을 나타내고 있는 제사입니다.
주님의 피 흘림이 지금의 구원받은 제사장들을 살린 것입니다.
레위기 4:12
똥 곧 그 송아지의 전체를 진영 바깥 재 버리는 곳인 정결한 곳으로 가져다가 불로 나무 위에서 사르되 곧 재 버리는 곳에서 불사를지니라.
제사장을 위해 희생된 송아지의 가죽과 고기와 머리와 정강이와 내장과 똥을 진영 바깥 재 버리는 곳에 가져다가 불로 태워버리라고 하나님은 명령하고 있습니다.
‘가져다가’ יצא(야차 3318) 이끌어내다, 건져내다, 옮기다, 불러내다, 라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정결한 곳으로 송아지의 제물을 모두 가져가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송아지의 제물은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하고 있습니다.
이 제물을 통하여 죄로 죽었던 자들이 살아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죄악에서 건져내 주시고 불러내어 의인의 자리로 이끌어 내시는 것입니다.
결국 이 송아지가 죽고 내가 구원받게 되는 것을 상징하고 있습니다.
송아지의 제물을 하나님께서 허락하셨기 때문에 진영 바깥 재 버리는 곳으로 가지고 갈 수 있습니다. 하나도 빠짐없이 모두 제물을 챙겨가야 합니다. 이 제물은 이미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제사이며 예수 그리스도도 진영 바깥 재 버리는 곳에서 죽을 것을 예언하고 있는 말씀입니다.
(히 13:11-12) 이는 죄를 위한 짐승의 피는 대제사장이 가지고 성소에 들어가고 그 육체는 영문 밖에서 불사름이라 그러므로 예수도 자기 피로써 백성을 거룩하게 하려고 성문 밖에서 고난을 받으셨느니라
예수님께서도 자신의 육체는 영문 밖에서 불사름이 되었고 예수님의 피로 백성을 거룩하게 하시려고 성문 밖에서 고난을 받으셨습니다.
‘사를지니라’ שרף(사라프 8313) 불사르다, 불타다, 분향하다, 라는 뜻입니다. 속죄 제물은 재버리는 곳에서 불에 태워지게 됩니다. 이 제물이 불태워져 하나님께 향기로운 냄새가 되어 하나님이 흠향하기에 좋은 냄새가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바로 십자가에서 영원한 속죄를 이루어 주시는 예수님의 제사를 상징합니다. 예수님의 영원한 속죄 제사가 하나님께 분향이 되어 올라가게 되고 택함 받은 백성들은 예수님을 통하여 구원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고난은 자신이 원한 것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아니면 택한 하나님의 백성들을 살릴 길이 없었기 때문에 십자가에 죽으셨습니다.
구약의 송아지 제물은 계속해서 드려야 하지만 신약에서는 예수 그리스도 한 분이면 끝입니다. 더 이상의 속죄 제물은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모든 죄를 사함 받고 영원한 천국을 바라보게 되었으며 죄인에서 의인의 자리에 있는 줄을 깨달아야 합니다.
(레 4:13-14) 만일 이스라엘 온 회중이 여호와의 계명 중 하나라도 부지중에 범하여 허물이 있으나 스스로 깨닫지 못하다가 그 범한 죄를 깨달으면 회중은 수송아지를 속죄제로 드릴지니 그것을 회막 앞으로 끌어다가
만일 이스라엘 회중이 하나님 앞에 계명을 어겨 허물이 있지만 스스로 깨닫지 못하다가 범한 죄를 깨달으면 속죄제를 드려야 합니다.
‘스스로 깨닫지 못하다가’ שגה(샤가 7686) 범죄 하다, 길을 잃다, 미혹되다, 라는 뜻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 앞에 정도를 걷지 못하고 길을 잃어 신앙을 버리고 우상을 섬기거나 세상의 미혹에 빠져 살아갈 때에 제대로 깨닫지 못하고 죄인 줄도 모르고 있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계속해서 하나님 앞에 죄를 짓고 있으면서도 죄인 줄도 모르는 상태가 계속 이어지다가 깨달을 때에 속죄 제사를 드리는 것입니다. 우리들도 이럴 수 있습니다. 나는 신앙생활을 열심히 한다고 하지만 자신이 열심히 할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인정하시는 열심이어야 합니다. 구원에 관해서 나의 열심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공로를 무시하고 부인하는 것은 자신의 열심에 빠져 하나님께 죄를 짓게 되는 것입니다. 이럴 때에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공로를 인정하는 것이 속죄 제사를 드리는 것입니다.
(레 4:20) 그 송아지를 속죄제의 수송아지에게 한 것 같이 할지며 제사장이 그것으로 회중을 위하여 속죄한즉 그들이 사함을 받으리라
회중들을 위해 송아지의 속죄 제사를 드림으로 회중들이 죄 사함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사함을 받으리라’ סלח(살라흐 5545) 용서하다, 사하여 주다, 라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드린 속죄 제사를 통하여 회중들의 모든 죄를 용서해 주시고 완전하게 사하여 주시는 것을 말씀합니다. 바로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 보혈을 통해 택한 자들의 모든 죄를 용서해 주시고 생명을 주시는 것을 예표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죄 사함을 받은 것은 전적인 하나님의 주권 속에서 이루어진 일입니다. 인간의 힘으로는 절대 죄를 용서함 받을 수 없습니다. 완전하게 죄가 깨끗해진 것은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이루어진 일이라는 것을 상징해 주고 있습니다. 내가 구원받은 것도 이와 같습니다. 하나님의 절대 주권으로 죽음의 자리에서 생명의 자리로 옮겨주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보혈의 공로가 아니면 나는 절대 구원을 얻을 수가 없습니다. 내 힘으로는 죄에서 빠져나올 어떠한 힘도 없기 때문입니다.
속죄제를 드리는 방법은 무엇입니까?
첫째, 제물의 머리에 안수해야 합니다.
(레 4:15) 회중의 장로들이 여호와 앞에서 그 수송아지 머리에 안수하고 그것을 여호와 앞에서 잡을 것이요
속죄 제사를 드릴 때에는 흠 없는 제물을 드려야 합니다. 조금의 흠이라도 있으면 제물로서는 불합격입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무 흠도 없고 점도 없으신 분입니다.
(벧전 1:19) 오직 흠 없고 점 없는 어린양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된 것이니라
죄인들의 죄를 사해주기 위해서는 흠이 없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어린양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를 통해 죄인들의 죄를 사해주셨습니다. 그래서 흠 없는 제물에 안수를 하여 자신들의 죄를 전가시켰던 것같이 우리의 죄를 예수 그리스도께로 전가시키고 예수님의 의가 나에게 올 때 구원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구약에서 안수의 행위는 이 시대에 적용해보면 주님의 십자가 공로를 내가 믿는 것을 의미합니다. 또한 나의 죄를 하나님께 고백하고 회개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요일 1:9)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그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하나님께 나의 죄를 자백하면 하나님은 주님을 통해 죄를 사해주시고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해 주시는 것입니다. 반드시 죄의 고백과 회개가 있어야 합니다.
둘째, 피를 뿌려야 합니다.
(레 4:17) 그 제사장이 손가락으로 그 피를 찍어 여호와 앞, 휘장 앞에 일곱 번 뿌릴 것이며
속죄 제물의 피를 성막의 휘장에 일곱 뿌려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를 상징하고 있습니다. 피가 없이는 죄 사함을 받을 수가 없습니다.
(히 10:20) 그 길은 우리를 위하여 휘장 가운데로 열어 놓으신 새로운 살 길이요 휘장은 곧 그의 육체니라
휘장은 예수그리스도의 육체를 의미하고 있습니다. 항상 나의 죄를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 보혈 앞에 고백해야 합니다. 피를 일곱 번 휘장에 뿌린 것은 완전한 회개를 상징합니다. 우리의 죄를 날마다 주님 앞에 뿌려야 합니다. 그리고 죄 사함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 보혈을 떠나서는 살 수 없습니다. 주님의 보혈 안에 늘 거주하고 있어야 합니다.
속죄제는 크게 두 종류로 나눌 수 있습니다.
회중 전체를 위한 속죄제
개인을 위한 속죄제
회중 전체를 위한 속죄제를 드릴 때에는 제물의 피를 성소 안으로 옮겨서 뿌린 다음 나머지는 번제단 밑에 쏟고 고기는 진
밖에서 불사르게 됩니다.
개인을 위한 속죄제를 드릴 때에는 제물의 피가 성소 안으로 옮겨지지 않습니다.
번제단 밑에 다
쏟게 됩니다.
대신 개인을 위한 속죄제물의 고기는 제사장이 먹습니다.
왜 이런 과정을 하나님께서 겪게 하셨을까요?
속죄제는 속죄 과정을 설명하고 있는 제사입니다.
‘속죄제’라는 말과 ‘속죄하다’라는 말이 우리말로는 비슷한데 히브리어로는
전혀 다르다는 사실을 먼저 알아야 합니다.
‘속죄하다’는 히브리어로 ‘카파르(כָּפַר)’라고 하며 죄를 ‘덮다(cover)’와
‘지운다’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는 동사입니다.
‘카파르’라는 동사가 기본형으로 쓰인 예를 성경에서 찾아보면 매우
흥미롭습니다.
홍수 당시 노아에게 방주를 만든 다음 “역청을 그 안팎에 칠하라”(창세기 6:14)고 한 말이 바로 카파르입니다.
역청으로 나무 전체를 덮어서 나무가 보이지 않도록 지운 것과 같습니다.
쉽게 설명해서 볼펜으로 쓴 글씨를 지우려면 화이트를 칠하여 글씨를 덮어서 지우게 됩니다.
‘카파르’는 그렇게 죄를 ‘덮어서 지운다’는 뜻입니다.
이
단어에서 나온 파생어 중에 ‘코페르(כֹּפֶר)’라는 단어가 있는데, ‘속전(ransom)’ ‘보상’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내가 다른 사람의 물건을 망가뜨리면 돈을 주어 보상을 하려고 할 것입니다.
이때 보상을 뜻하는 단어가 바로
코페르입니다.
‘속죄일’을 뜻하는 ‘욤 키푸르’ 역시 동사 카파르에서 나왔습니다.
속죄의 과정으로는 용서와 정결이 있습니다.
이사야 43:25
“나 곧 나는 나를 위하여 네 허물을 도말하는 자니 네 죄를 기억하지 아니하리라.”
속죄제의 의미와 속죄제를 드리는 방법
속죄제(Sin Offering) 어의
속죄제를
뜻하는 히브리어 ‘하타트'는 ‘과녁에서 벗어나다’, ‘죄를 짓다’, ‘속죄물을 드리다’,
‘속죄하다’를 뜻하는 ‘하타'에서 파생된 것으로 ‘하나님의 법에서 벗어난 죄로부터 청결과 속죄함을 얻기 위하여 드리는 제사’를 뜻한다.
제물의 종류
속죄제의 제물은 범죄자의 사회적인 위치에 따라 달랐다.
제사장 — 흠 없는 수송아지를 드림(레 4:3)
온 회중 — 수송아지를 드림(레 4:13)
족장 — 흠 없는 수염소를 드림(레 4:23)
평민 — 흠 없는 암양이나 암염소를 드림(레 4:28)
이 외에도 가난한 자는 산비둘기나 집비둘기를 제물로 드릴 수 있었으며(레 5:7)
이보다 더 가난한 자는 고운 가루 에바 십분의 일을 제물로 드릴 수 있었다(레 5:11)
속죄제의 방법
헌제자가 제물이 될 짐승을 회막문 여호와 앞으로 가져온다.
헌제자의 손을 제물의 머리 위에 얹고 안수한다.
헌제자가 제물을 잡아 피를 제사장에게 주면 제사장은 그 피를 손가락으로 찍어 성소 앞에 일곱 번 뿌리고 향단 뿔에 바른 후 회막 앞과 번제단 밑에 전부 쏟는다.
희생
제물의 모든 기름과 콩팥을 번제단 위에서 불사른 후 그 나머지 부분은 진 바깥 재 버리는 정결한 곳에서 나무 위에 놓고
불사른다. 그러나 아론과 그 아들들을 위한 속죄제는 진 밖에서 불사르지 않고 다리와 고기를 회막 뜰에서 구워 먹도록
하였다(레6:24-27)
속죄제와 속건제의 차이
속죄제의 목적은 ‘범죄에 대한 용서’를 위한 것이었다.
그런데 이러한 목적은 속건제의 경우 역시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이 둘은 근본적인 차이가 있다.
첫째는, 범죄의 성격적 차이로서 속죄제가 하나님께 범죄한 자, 즉 ‘율법을 범한 죄’를 위한 제사였던 반면에, 속건제는 인간에게 범죄한 죄, 즉 ‘도덕적인 범죄의 대속을 위한’ 제사였다.
둘째는, 속죄제는 속건제와는 달리 ‘범죄한 일을 배상할 수 없는 죄’에 대한 용서를 구하는 제사였던 반면, 속건제는 ‘배상이 가능한 죄’에 대한 용서를 구하는 제사였다는 점이다.
속건제(Guilt Offering)의 어의
속건제를
뜻하는 히브리어 ‘아솸'( )은 ‘죄'(Sin)가 아닌 ‘범죄'(Guilt),’범법'(Tresspass),
‘손해'(Damage) 등을 의미하는 것으로 ‘사회적인 죄’, 또는 ‘도덕적인 죄를 용서받기 위해 드리는 제사’를 뜻한다.
속건제의 제물
속건제의 제물은 범죄의 형태에 따라 매우 다양하게 나타나고 있어 이러한 제물을 일일이 열거하자면 너무나도 복잡하고 광범위하다. 그러므로 각각의 범죄에 대한 속건 제물에 대해서는 레5:14, 6:7, 7:1-10, 14:1, 15:2을 참고하도록 하되 이러한 여러 가지 제물을 요약하면 ‘흠 없는 일년된 수양’, ‘범죄물과 그 범죄물의 오분의 일을 더하여 본인에게 주는 일’, ‘산비둘기나 집비둘기 둘’이나, ‘고운 가루 에바 십분의 삼’과 ‘기름 한 록’ 등이다.
속건제와 속죄제의 차이
죄와 관계된 제사
가. 속죄제(하타아트-sin offering)
* 제물이 대상과 재력에 따라 차이가 있다.
- 제사장과 백성 전체(수송아지)
- 족장(수염소)
- 평민(어린 암양, 암염소)
- 가난한 자(비둘기, 곡식 가루)
* 향기로운 냄새를 위한 제사가 아니라, 죄를 속하기 위해 드린 제사였다.
* 번제처럼 모든 제물을 제단에 불사르지 않고 기름을 제외한 모든 제물을 진 밖으로 가져가서 태워야 했다.
* 인간의 죄성과 연약함을 인해 부지중에 지은 죄를 속하기 위해 드려졌다.
나. 속건제(아샴-배상제사(trespass offering))
* 속건제는 생활 중에 범한 죄나, 자기 의무를 태만히 해서 남에게 해를 입혔을 경우에 드리는 사죄와 보상에 대한 제사였다.
* 속건제를 드리는는 경우는 다음과 같았고, 그 외에는 속죄제사를 드렸다.
- 하나님의 성물을 범했을 때
- 하나님의 법에 따라 마땅히 해야 할 것을 하지 않은 경우
- 이웃에게 악을 행하거나 물질에 손해를 입힌 경우
- 남의 물건을 강제로 빼앗거나/ 분실물을 습득하거나/ 저당물을 잡거나/ 거짓맹세로 남에게 피해를 입힌 경우
- 시체로 인해 몸이 부정케 된 경우
* 속건제는 다음과 같은 세 가지 속죄 원리가 나타난다.
- 잘못이 있을 때는 자백하고 인정하라.
- 죄에 대한 대가를 지불하라.
- 번제는 계속해서 드리지만 속건제는 한 번에 해결할 문제이다.
다. 속죄제와 속건제의 같은 점과 다른 점
*. 같은 점
이
두 제사는 백성들이 "여호와의 명령을 어긴 경우에 드리는 제사"였다. 백성들은 "여호와께서 금한 일을 했거나, 또는 하라고 한
일을 하지 않았을 경우"에 이 제사를 드리도록 되어 있었다. 그러나 이 제사는 결코 고의로 지은 죄를 속하기 위한 제사는
아니었다. 하나님은 고의, 또는 계획적으로 지은 범죄(짐짓 죄)에 대해서는 반드시 처벌하게 하셨다.
속죄 제사를 통해서 용서받을 수 있는 죄는 실수나 연약함으로 지은 죄(그릇 범한 죄)였다. 속죄 제사를 드릴 수 있는 죄는 다음과 같았다.
1) 실수나 부지 중에 지은 죄(4:13,22,27,5:18)
2) 부주의로 인해 지은 죄(5: 1,4,15)
3) 무의식적으로 짓는 죄(민 35:11,15, 22, 23).
* 다른 점
속죄제는 일반적으로 여호와의 명령을 어긴 보편적인 경우에 드렸다. 그러나 속건제(보상제사)는
1) 여호와의 성물을 드릴 것을 자기가 사용했거나(5:15-19)
2) 남의 물건을 빼앗거나 손에 넣고 부인하거나 거짓 맹세를 해서 피해를 입힌 경우에 이를 보상하기 위해 드려졌다(5:20-25).
*. 제사 절차상의 차이점
- 속죄제는 속죄제물만 드렸지만, 속건제는 속건제물 외에 불법으로 취한 것에 1/5(전체 6/5)을 더한 배상이 요구되었다.
- 속죄제는 제물을 드리는 자가 그 제물을 죽이고 직접 불에 태웠다(4:15,24,29,33).
- 그러나 속건제는 제사장이 대신해서 제물을 잡았으며, 그 제물도 제사장이 먹어야만 했다(14:12).
- 속죄제물은 개인의 경우 암컷을 드렸다(4:28,32). 그러나 속건제사는 제물로 수양이 필요했으며(5;18, 6:6), 훔친 것 외에 1/5에 해당하는 배상을 첨가했다.
딸의 결혼식을 성대히 치른 뒤 며칠 못가 지병을 않으시던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겨우 장례식을 마친 뒤 한숨 쉬려는가 했더니 최근 사업을 함께 시작한 동업자 녀석이 모든 물건을 빼돌려 도망을 가고 말았다.
요아킴은 쉴 겨를이 없었다.
그 녀석이 두로 항으로 도망간 뒤 배에 오르면 끝장이었다.
서둘러 추적을 떠난 요아킴은 이틀을 노숙한 뒤 삼일 째에도 이른 아침부터 발걸음을 재촉했다.
요아킴은 반나절이 지나 어느 마을에 도착한 뒤에 그 날이 안식일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일련의 큰 사건들이 연이어 발생한 바람에 안식일 날짜를 망각하는 중대한 실수를 범한 것이다.
가슴이 덜컹거리며 두려움에 사로잡힌 요아킴은 그 자리에서 무릎 꾾고 하나님의 용서를 구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 그의 죄가 해결될 수는 없었고 속죄제를 바쳐야만 했다.
하나님의 은혜로 요아킴은 그 범죄자가 배에 승선하기 직전 체포할 수 있었다.
재산을 되찾아 집으로 돌아온 요아킴은 안식일을 무심코 범했던 죄를 용서받기 위해 즉시 성전으로 올라가야 했다.
더불어 그에게는 추가로 드려야할 제물이 있었다.
바로 잃었던 재산을 되찾게 해주신 하나님께 대한 감사의 번제와 화목제였다.
하지만 그 중 가장 중요한 제사는 속죄제였다.
죄를 용서받지 않고 드리는 번제와 화목제를 하나님께서 기뻐하실리 없기 때문이다.
무심코 지은 죄를 위해 바친 속죄제
요아킴이 안식일을 무심코 범한 뒤 바친 제사는 ‘속죄제’였다.
속죄제는 두 가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제사였다.
첫째, ‘비고의적인 죄’를 해결(레 4~5장)
둘째, ‘부정결’의 문제를 해결(레 11~15장)
예컨대 여자가 아이를 낳으면 산후 정결례를 거쳐 깨끗케 되는데, 일정 기간 날짜가 지난 뒤 목욕을 해야 하며, 가장 중요하게는 자녀 출산에 대한 감사의 번제와 더불어 ‘속죄제’를 바쳐야만 했다(더 자세한 것은 나중에 레 12장을 다룰 때 설명할 것이다).
덧붙여 유출병 걸린 여자가 피가 멈춘 뒤, 또는 악성 피부병(나병이라는 번역은 잘못이다) 환자가 치료된 뒤 반드시 바쳐야하는 것도 속죄제다.
사람이 부정을 탔을 때 그것은 죄 문제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속죄제가 요구된 이유는 무엇인가?
분명 그것은 그런 다양한 부정결들은 창세기 3장에서 죄가 세상에 들어온 후 발생된 죄의 증상들이기 때문일 것이다. 따라서 부정결의 문제도 근원을 따지면 죄의 문제에서 비롯된 것이기 때문에 속죄제가 요구된 것으로 추측된다.
그러나 우선 속죄제는 속건제와 더불어 ‘죄’를 해결하는 제사였다. 속건제가 해결하는 죄는 재산상의 피해를 입힌 죄에 국한된다는 점에서 속죄제가 다루는 죄와 차이가 난다. 속건제에서는 상대방의 금전적/물질적 손해를 배상하고 하나님께 속건제 숫양을 바쳐 그 문제를 해결한다. 그러나 속죄제는 도덕적 계율을 어긴 죄인데, 다만 그 죄는 ‘비고의적인 죄’ 다시 말해 ‘그릇’ ‘무심코’ 여호와께서 금지하신 계명을 범한 죄다. 한글 성경에서는 단순히 ‘여호와의 계명 중 하나라도’라고 되어 있으나 히브리어 원문의 의미는 정확히 ‘여호와께서 금지하신 계명 중 하나라도’이다. 고의적인 죄의 경우는 일부 고의성이 가벼운 경우를 제외하고(레 5:1~4) 매우 심각하여 속죄제는 허용되지 않았다. 그것은 반역죄로서 하나님께서 직접 징벌하셔서 처단하시거나(예, 레 10장의 잘못된 제사를 드린 나답과 아비후) 하나님의 지시로 백성들이 처형을 했다(예, 레 24장의 하나님을 저주한 이스라엘 평민). 다만 어떤 반역죄의 경우 심판이 유보되어 하나님께서 회개의 기회를 주시기도 했다.
어쨌든 금지 명령은 매우 중대한 계명이다. 따라서 무심코 위반했다 하더라도 상당히 심각하다. 요아킴의 경우 안식일에 여행이 절대 금지되어 있으나 그는 무심코 이 금지 명령을 위반했다. 속죄제를 바쳐 죄가 속죄되어 하나님께 용서받아야만 했다. 요아킴은 평민이었기 때문에 바쳐야하는 속죄제 짐승은 암염소나 암양이었다.
속죄제는 짐승의 피로 성전과 그 기물들의 오염을 씻어내는 효과를 낸다는 점이 가장 큰 특징이다. 인간의 죄와 부정결이 성전과 그 기물들을 더럽히기 때문이다. 이렇게 속죄제는 죄와 부정결의 문제를 위해 바치는 것이 원칙이나, 그 외에도 제사장 임직이나 레위인의 임직, 또는 나실인의 서원과 같은 몇 가지 특별한 예식에 속죄제를 드렸으며, 국가적 절기마다 다양한 속죄제를 바치곤 했다. 그 기능에 대해서는 몇 가지로 의견이 나뉘는데 그중 가장 그럴듯한 설명은 아마도 절기별로 제단과 성전의 잠재적 부정결을 닦아내는 기능을 했을 것이란 견해다.
속죄제와 속건제, 특히 속죄제는 그 제사의 특징과 의미, 제사의 절차를 설명하기 위해서는 대단히 많은 지면을 필요로 하는데, 여기서는 최대한 간략하게 설명해야하는 아쉬움이 있다. 상세한 설명과 목회적 적용과 여러 힌트, 특히 속죄제의 자세한 교회론적 의미에 대해서는 필자의 책 <레위기의 신학과 해석>(새물결 플러스)의 도움을 받기 바란다.
신분에 따라 등급화된 속죄제
속죄제는 죄인의 신분과 사회적 지위에 따라 달랐다. <표>는 높은 지위로부터 낮은 지위에 이르기까지 제물의 크기와 가치가 줄어든다는 것을 보여준다.
우선 4장에서 먼저 (대)제사장의 비고의적인 죄에 대해 수소를 바칠 것을 명령한다. 많은 학자들이 3절의 ‘기름부음받은 제사장’을 대제사장으로 해석하지만, 만일 그렇게 될 경우 제사장이 목록에서 누락되므로 이것은 분명 대제사장을 포함한 제사장들로 보아야 한다. (대)제사장과 회중은 동급이었다. 따라서 둘 다 수소가 요구된다. 이때 회중은 제사장이 포함된 회중을 의미한다. 만일 제사장과 회중이 분리되어 취급되는 경우, 제사장이 제외된 회중의 제물은 흔하게 숫염소였다(레 9장; 16장). 족장은 평민의 지도자로서 숫염소를 속죄제로 바쳤고, 평민은 암염소나 암양을 바쳤다. 여기서 수컷이 암컷보다 제의적 가치 면에서 우위에 놓여 있음이 다시 확인된다(시장 가치로는 암컷이 월등히 비쌌다). 한편, 제사장과 평민 사이에는 레위인이 있어야 하는데 레위기 4~5장의 목록에서 빠져있다. 아마 레위인은 제사장과 평민 사이의 신분이었다는 점에서 족장과 동급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양과 염소를 조달하기 어려운 가난한 계층을 위해서는 비둘기 두 마리가 속죄제로 바쳐졌다. 이때 한 마리는 번제와 같이 모두 제단에 태웠고, 다른 한 마리는 피를 제단에 흘린 뒤 제사장이 섭취하는 방식으로 두 비둘기가 처리되었다. 그러나 가난한 계층 중에는 심지어 비둘기마저 힘에 겨운 사람들이 있었다.
그런 극빈자들이 무심코 죄를 범했을 경우에도 죄 문제를 그대로 넘길 수는 없었기에 하나님께서는 마지막 수단을 그들에게 허락하셨다. 바로 그들이 평소 음식으로 먹는 밀가루 1/10에바(약 2.2리터)를 소제의 속죄 제물로 가져오라 명하신 것이다(레 5:11~13).
경제적 형편과 무관하게 죄의 문제는 어떤 방법으로든 반드시 해결되어야 했다. 비록 밀가루는 피가 없는 속죄 제물이었지만, 하나님은 자신의 재량으로 극도로 가난한 자들을 위해 밀가루 제물에 피의 효력이 있는 것으로 간주해주셨다. 마지막 한 사람을 위해서까지 속죄의 길을 열어주신 하나님의 큰 은혜가 아닐 수 없다.
매우 특이한 속죄제의 피뿌리기
속죄제의 피 의례는 매우 독특한 방식으로 이루어졌다. 먼저 (대)제사장과 회중을 위한 속죄제 수소는 안수 후 도살을 한 뒤 그 피를 양푼에 받아 내성소로 가지고 들어간다. 거기서 양푼의 피를 손가락으로 찍은 뒤 지성소 휘장 앞의 향단 주변에 ‘뿌리고’ 향단의 네 뿔에 ‘발랐다’(레 4:6~7, 17~18). 그러나 평민을 위한 속죄 제물인 염소와 양의 피는 마당에 놓인 번제단의 네 뿔에 ‘바른다’(레 4:25, 30). 비둘기의 경우에 피를 양푼에 받지 않고 죽인 뒤 몸채 들고 마당의 번제단 벽에 일부를 뿌리고 남은 피는 제단 아래 흘렸다(레 5:9). 여기서 주목해야할 것은 제사장과 회중을 위한 속죄제 수소의 피는 내성소에 들어가 향단에 처리한 반면, 평민의 속죄제 짐승(염소와 양, 비둘기)의 피는 마당의 번제단에서 처리했다는 점이다. 이것은 신분에 따른 죄의 오염력과 영향력이 차이가 났기 때문이다. 제사장과 회중의 죄의 ‘독기’는 내성소까지 침범해 향단을 더럽힌 반면, 평민의 죄는 마당의 번제단을 더럽히는 결과를 낳았다. 그러한 이유로 피를 뿌리는 위치가 달랐다.
<표>에서 확인해 볼 수 있듯이 피를 어디에 뿌렸느냐에 따라 속죄제 고기 처분 방식도 달라졌다. 내성소에서 피를 뿌린 짐승의 경우 결코 그 고기를 제사장이 먹지 못하고 진영 밖의 재를 버리는 ‘정결한 곳’에서 소각을 해서 없앤다. 반면에 마당의 번제단에서 피가 처리된 속죄제 짐승의 고기는 제사장들에게 일종의 수고비로 건네져 그것을 먹어서 없앴다. 이것은 분명히 속죄제 고기의 오염도의 차이로 인한 것이다. 내성소에 피를 뿌린 속죄제 짐승의 경우 피를 통해 흡수된 오염이 강해 먹을 수 없어 밖에 반출해 태웠던 반면, 마당에 피를 뿌린 속죄제 짐승의 경우 그 오염이 경미해 제사장이 먹을만 했기에 하나님께서 그 제사를 집례한 제사장들이 먹도록 조치하시고 밖에 버려 태우진 않았다고 볼 수 있다. 이렇게 해서 속죄제는 ‘태우는 속죄제’와 ‘먹는 속죄제’로 나뉜다.
속죄제의 피 뿌리는 특유의 동작은 아래의 비교를 통해 분명해진다. 우선 속죄제 외의 다른 모든 제사들, 즉, 번제/속건제/화목제에서는 피를 뿌리는 방식이 공통적으로 ‘끼얹다’(zaraq ‘dash, throw’)이다. 피를 양푼에 받은 뒤 제단 사면 벽에 뿌려서 처리한다. 그러나 속죄제는 전혀 다르다. 그것은 피를 양푼에 담은 뒤 다음 세 가지 동작을 통해 피를 처리한다.
a. ‘뿌리다’(히자-hizza ‘sprinkle’): 손가락으로 제단 주변에
b. ‘바르다’(나탄-natan ‘daub, put’): 손가락으로 제단의 네 뿔에
c. ‘쏟다’(샤파크/야차크-shapak/yatsak ‘pour’): 제단 밑에
속죄제에서는 피가 든 양푼을 들고 제단 벽에 끼얹는 것이 아니라, 손가락을 양푼에 담아 피를 찍은 뒤 소량의 피를 제단 주변에 뿌리거나 제단 뿔에 바르는 동작으로 피를 처분한다. 피가 대량으로 남는데, 이 남은 피는 제단 밑에 쏟는다. 여기서 손가락으로 피를 뿌리고 바르는 동작이 매우 중요하다. 이것이 가져오는 효과는 제단의 정화이기 때문이다(레 8:16; 16:19). 즉, 속죄제의 피를 특이한 동작으로 뿌리고 바를 때 제단과 성전이 청소된다. 이것이 속죄제의 가장 큰 특징이다.
죄의 자백이 요구됨
레위기 5장 1~6절은 약간의 고의성이 있는 죄들을 위해 바치는 속죄제 규정이다. 네 가지 사례가 주어지는데 이것은 모두 고의성이 개입되어 있으므로 그 죄의 공개적인 인정과 자백이 요구된다. 이런 죄의 인정과 자백은 속죄제 절차에서 매우 중요했다. 그것 없이는 속죄제는 아무런 효력이 발생되지 않았을 것이다. 혹자는 이 경우는 고의성이 있기 때문에 더 죄질이 나빠 ‘자백’이 요구되었지만, 4장의 죄들은 ‘비고의적’인 죄들이 때문에 죄질이 가벼워 자백이 요구되진 않았다고 말한다. 실제로 4장에는 ‘자백’의 요구가 나타나지 않는다. 그러나 4장은 ‘금지명령’이기 때문에 요아킴의 사례에서 보듯이 무심코 그 죄를 지었다하더라도 심각했다. 따라서 자백은 그런 심각한 상황에서 자동적으로 수반되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런 이유로 4장에서는 자백을 명시적으로 요구하고 있지 않을 것이다. 속죄제의 최종적 효과는 ‘속죄’와 그로 인한 ‘죄사함’이었다(레 4:20, 26, 35).
레위의 아들들 가운데 제사장의 직분을 받는 자들이 율법을 좇아 아브라함의 허리에서 난 자라도 자기 형제인 백성에게서 십분의 일을 취하라는 명령을 가졌으나.
이는 멜기세덱이 아브라함을 만날 때에 레위는 아직 자기 조상의 허리에 있었음이니라.
(공동번역) 멜기세덱이 아브라함을 맞았을 때에 레위가 조상 아브라함의 몸 속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현대인의 성경) 이것은 멜기세덱이 아브라함을 만났을 때 레위는 아직 태어나지 않고 자기 조상의 몸 속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아직 자기 조상의 허리에 있었음이니라
히브리서 7:4-10
이 사람의 어떻게 높은 것을 생각하라 조상
아브라함이 노략물 중 좋은 것으로 십분의 일을 저에게 주었느니라.
레위의 아들들 가운데 제사장의 직분을 받는 자들이 율법을 좇아
아브라함의 허리에서 난 자라도 자기 형제인 백성에게서 십분의 일을 취하라는 명령을 가졌으나.
레위 족보에 들지 아니한 멜기세덱은
아브라함에게서 십분의 일을 취하고 그 약속 얻은 자를 위하여 복을 빌었나니.
폐일언하고 낮은 자가 높은 자에게 복 빎을 받느니라.
또
여기는 죽을 자들이 십분의 일을 받으나 저기는 산다고 증거를 얻은 자가 받았느니라.
또한 십분의 일을 받는 레위도 아브라함으로
말미암아 십분의 일을 바쳤다 할 수 있나니 이는 멜기세덱이 아브라함을 만날 때에 레위는 아직 자기 조상의 허리에 있었음이니라.
레위가 조상의 허리에 있었다는 말씀은 히브리서 기자의 아주 특이한 표현 방법으로 "허리"는 생식 기관을 은유족으로 표현한 것이라고 합니다.
예를 들면 남편이 허리를 다쳐 고통을 받는다는 말은 육체적인 기관 허리가 아니라 생식 기관을 사용하기 어렵다는 표현입니다.
아브라함이 십일조를 바칠 때 레위는 아직 태어나지 않았던 때입니다.
그러나 그 허리에 있었다는 것은 장차 태어날 것을 알려주신 것입니다.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케 하리니 너는 복의 근원이 될지라.
하나님 나라의 복입니다.
우리는 이 복에 대해서 바로 깨달아야 합니다.
사람들은 복이라고 하면 이 세상에도 받고 하나님 나라에서도 받는 것으로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복은 하나님 나라라는 것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자기들의 이성적 지식으로 마치 율법을 잘 지켜야 복을 받는 것으로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멜기세덱이 아브라함을 만날 때에 레위는 아직 자기 조상의 허리에 있었다고 말씀을 하고 있고 아브라함의 복을 받으려면 아브라함과 같은 믿음을 가진 자라야 복을 받을 수 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허리'라는 말이 나오는 이게 무슨 뜻입니까?
창세기 35:11
그에게 이르시되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니라 생육하며 번성하라 국민과 많은 국민이 네게서 나고 왕들이 네 허리에서 나오리라.
즉 이스라엘이라는 인물이 된 야곱의 허리에서 많은 국민과 많은 왕이 줄줄이 쏟아져 나온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많은 국민과 많은 왕은 어디 들어있는 겁니까?
이미 야곱 안에 담겨 있는 겁니다.
그것이 허리라는 배출구를 통해서 역사 안에서 터져 나오게 되어 있습니다.
그렇게 보면, '허리'라는 말은 결코 분화되지 않는다는 겁니다.
'따로 따로'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모두가 하나의 원질 안에 예속되어 있다는 말입니다.
동양식으로 말하지만 '허리'란 '배'를 뜻합니다.
아무리 후손들이 번식해도 모두 선조의 뱃속에 이미 담겨 있었던 존재였다는 겁니다.
그러면 레위 족속이 아브라함의 허리에 있다는 말은 무슨 말일까요?
레위 지파가 하는 일은 이미 하나님께서 아브라함 내린 그 약속에 다 담겨 있는 일이다는 겁니다.
아브라함의 허리에서 나온 자가 이삭이고 그 이삭의 허리에서 나온 자가 야곱이고 그 야곱의 허리에서 나온 자 중의 하나가 레위입니다. 그래서 결과적으로 레위 지파는 아브라함의 허리 안에 있는 자입니다.
신약에 와서 '허리'라는 말 보다 다른 확실한 말을 성경은 우리에게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안'이라는 말입니다.
즉 '예수님 허리'가 아니라 그냥 "예수님 안에 있음"으로 표현하는 겁니다.
로마서 8:1-2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갈라디아서 3:26-27
너희가 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으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자는 그리스도로 옷 입었느니라.
예수님을 믿기만 하면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겁니다.
더 이상 율법에 매여 살면 안됩니다.
사도 바울은 이런 점을 우려해서 다음과 같이 당부하고 있습니다.
갈라디아서 4:10-11
너희가 날과 달과 절기와 해를 삼가 지키니 내가 너희를 위하여 수고한 것이 헛될까 두려워하노라.
사도는 평소에 다음과 같이 당부한 점을 유의합시다.
"내가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라는 당부 말입니다. 사도 바울은 성도가 율법에 더 이상 매이지 않고 해방되었다고 합니다.
갈라디아서 4:4-5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 율법 아래 나게 하신 것은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을 속량하시고 우리로 아들의 명분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멜기세덱이 아브라함을 만날 때에 레위는 이미 자기 조상의 허리에 있었음이라는 의미는?
창세기 14:17-24
아브라함이 조카 롯을 구하기 위한 전투에서 승리합니다.
돌아오는 길에 살렘왕 멜기세덱을 만나 전리품의 십분의 일을 그에게 드립니다.
그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제사장이기도 했습니다.
왕이자 제사장의 신분을 동시에 가진 자는 멜기세덱 외에 예수님 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멜기세덱을 오실 예수님의 모형으로 생각합니다.
구약시대의 제사장은 레위지파에서만 할 수 있었기 때문에 레위라는 호칭은 제사장과 같은 의미로 쓰여집니다.
조상의 허리에 있었다는 표현은 태어나기 전 이라는 뜻 입니다.
그 의미는 레위지파 제사장보다 멜기세덱 제사장이 더 우월하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레위지파의 조상인 아브라함이 멜기세덱 제사장에게 진리품의 십분의 일을 드렸기 때문입니다.
예수님도 제사장입니다.
그러나 레위지파 계열의 제사장보다 우월하십니다.
그 이유는 멜기세덱 계열의 제사장이기 때문입니다.
야곱의 허리에서 나온 사람이 모두 칠십이요 요셉은 애굽에 있었더라”(출애굽기 1:5)
“The descendants of Jacob numbered seventy in all; Joseph was already in Egypt.”(Exodus 1:5)
출애굽기는 야곱의 계보로부터 시작합니다.
이 계보 끝 출애굽기 1장 5절은 창세기 46장 27절을 그대로 인용하면서도 단 하나의
단어를 바꿔 말하고 있습니다.
야곱의 ‘집 사람’을 야곱의 ‘허리’로 바꿉니다.
여기서 간과해선 안 될 메시지가 있습니다.
‘야곱의 허리’란 히브리어로 ‘예렉 야코프’라고 하는데, ‘예렉’은 단지 허리가 아니라 ‘허벅지 관절에 있는 둔부의 힘줄’을 말하며 ‘허벅다리 사이’, 사타구니 즉 ‘생산의 자리’를 의미합니다(창세기 32:32).
5절. / 야곱의 혈속(네페쉬 요츠에 예레크 야아콥)
- 직역하면 '야곱의 허리로부터 나온 영혼들'이다.
이처럼 후손을 '허리에서
난 자'로 묘사하고 있는 것은 허리에 후손을 얻을 생명력이 보존되어 있다고 믿는 히브리인들의 관용적 표현이다(히 7:5).
* 예레크(3409) יָרֵךְ
- 어원 / 연계형 יֶרֶךְ, 어미활용 יְרֵכִי, 쌍수 יִרֵכַיִם, ‘부드럽다’는 뜻의 사용하지 않는 어원에서 유래
- 관련 성경 / 허벅지(창 24:2, 32:25, 47:29), 몸(창 46:26,삿 8:30), 밑판(출 25:31, 민 8:4), 넓적다리(출 28:42, 민 5:22, 겔 24:4), 쪽(출40:22, 민 3:29, 왕하 16:14), 다리(삿 3:16, 21), 허리(출 32:27,시 45:3, 아 3:8), 볼기(렘 31:19).
- 구약 성경 / 34회 사용
한편
여기서 사람을 '영혼'(네페쉬)으로 서술한 것은(창 12:5) 영혼을 인격의 대표격으로 여긴 히브리인의 사고(시 42:1,
2, 5)를 반영한다. 그리고 혈속(血屬)이란 가장을 중심으로 몇 대(代)가 함께 기거하는 이른바 대가족을 가리킨다.
따라서 이는
1절의 '권속'과 비교되는 혈연 집단이다.
야곱은 얍복강에서 하나님의 축복을 받아내겠다고 씨름해 기어이 이깁니다.
이때 생산의 자리가 골절되는 부상으로 절뚝거리는 중상을
입게 됩니다.
그 대가로 야곱과 그의 자손들의 번영을 약속받았기에 ‘허리’라는 단어를 의도적으로 쓴 것입니다.
‘야곱의 허리’는
야곱의 고난을 통해 세워진 이스라엘 가문을 뜻합니다.
이스라엘의 번성(출 1:7)엔 조상들의 고난의 대가가 있었습니다.
믿음의 가문은 그냥 세워지는 것이 아닙니다.
인생의 값은 고난의 값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저절로 성취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
약속을 이루기 위해 과정이라는 고난을 지불해야 합니다.
그만한 값을 치를 때 비로소 값진 인생이 됩니다.
10절 “이는 멜기세덱이 아브라함을 만날 때에 레위는 이미 자기 조상의 허리에 있었음이라.”
허리에 있었다는 말은 자식을 낳는 생식에 대한 부분을 묘사하는 말입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이 십일조를 드린 것은 레위 후손들이 드린 것과 마찬가지라는 것을 이야기를 하는 것입니다.
그 논리를 완성함으로 인해서 레위인의 십일조를 받는 사람은 제사장이므로 멜기세덱이 제사장이라는 논리를 완성하는 것입니다.
또한 유대인들이 자랑하고 드높이는 제사장과 레위인보다 멜기세덱이 더 높은 위치에 있는 사람인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럼으로써 허탄한 족보와 신화 이야기를 더 이상 하지 못하도록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구원과 관계가 없고 영적 성장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레위 지파가 아닌 멜기세덱을 따라서 대제사장이 되셨습니다. 제사장들이 성경에 많이 나오지만 아론이 첫 번째 대제사장이었는데 그는 하나님이 직접 세우신 대제사장이므로 그를 제외하고는 멜기세덱보다 훌륭한 대제사장은 없었다고 생각합니다. 제사의 영역에서는 아론을 제외하고 가장 탁월한 제사장이라고 생각합니다. 반면에 홉니와 비느하스처럼 수준이 낮은 제사장들도 성경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멜기세덱은 성경에서 높다고 할 만큼 최고수준의 제사장이 확실합니다.
모세가 광야에서 40년 동안 생활할 때 이드로의 집에서 생활했습니다. 이드로의 집에서 모세가 그렇게 오랫동안 살았는데 이드로가 만일 하나님의 제사장이 아닌 이방신의 제사장이라면 그가 그렇게 오래 함께 있었겠습니까. 이드로의 하나님과 모세의 하나님이 다르다고 생각할 수 없는 것입니다.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들을 인도하면서 이드로의 말을 듣고 백성들을 다스렸는데 만약 이드로가 이방신의 제사장이라면 그런 사람의 말을 듣고 따라갔다는 것이 되므로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람이 이방신의 제사장의 말을 따른 것이 된다면 큰 문제입니다. 그래서 이드로가 믿은 하나님과 모세가 믿은 하나님이 같은 하나님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드로의 충고를 모세가 받아들인 것입니다. 그런데 이드로는 애굽에서 유대인과 같이 살지도 않았고 오히려 가나안 지역에서 미디안 족속으로 산 자입니다. 그러므로 꼭 유대인만 구원을 받았다고 보면 안 됩니다. 이드로는 미디안 사람이고 제사장입니다. 히브리서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유대인들이 자신들에게만 구원이 있는 것처럼 자부하고 있지만 그렇지 않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유대인이 아니라도 이방 땅에도 훌륭한 사람들이 많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려고 하는 것입니다. 욥도 훌륭하고 이드로도 훌륭하고 멜기세덱도 훌륭합니다. 결국 히브리서를 통해 예수 그리스도를 드러내면서 한편으로는 유대인들의 편협 된 사고를 깨려는 의도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모든 이야기들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께서 얼마나 위대하신 분이신지를 보여줍니다.
히브리서 7:10
이는 멜기세덱이 아브라함을 만날 때에 레위는 이미 자기 조상의 허리에 있었음이라.
중학교 생물교과서 진화론을 이야기할 때에 예문이 “옛날 히브리사람들은 (성경에) 자손의 씨(정자)가 허리에 있다고 믿었다“라는 예가 있었다.
교과서 저자는 성경시대의 옛 사람이 생물학도 모르는 무식한 사람들이며 그 성경을 믿는 그리스도인들이 무식하다는 간접적인 비아냥이다.
(인간의 이론 진화론이 판치는 비이성적인 세태이기 때문에 그렇다.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
진화론 창조론 모두 한편 합리성이 있고 다른 한편 증명할 수 없는 모순이 있다.
과학적인 태도라면 두 주장을 다 언급해야 과학적이고 객관적인 것이다.
그런데 사람은 대세, 유행을 따른다.
지금은 진화론이 대세 유행이어서 창조를 주장하면 무식해 보여 그런 것은 아닐런지?
진화론, 창조론 모두 논리성과 모순이 있는 데 어느 것을 선택하는 가는 믿음이다.
나는 창조를 믿는다.)
그런데 성경 전체를 문맥을 따라 읽어 보면 “허리”라는 표현은 종종 reproductive organ system (생식기관)을 포괄적으로 의미함을 알 수 있다.
성경 어디에 그런 내용이 있을까?
그러려면 성경을 문맥을 따라 조화롭게 읽어야 한다.
성경의 문맥을 떠나서 일부 구절, 내용만 가지고 해석 설파 하는 것을 경계하라.
예를 들어
우리말도 뒤를 본다, 뒷간, 볼일을 본다… 라 말하면 젊잔은 표현이지만 똥을 눈다(싼다), 똥깐 이라고 말하면 비속 표현인 것과 같다.
이런 경우, 문맥상 뒤를 본다는 말을 “자신의 뒤쪽을 본다”고 하면 오해다.
성경에서 Sex와 관련된 것을 직접적으로 기술하는 것이 불편하여 완곡한 표현했다.
이렇게 말하면 내가 억지 주장을 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면 성경의 다음 구절을 읽어보자.
창세기에 있는 유다의 아들 오난의 이야기이다.
[창세기 38:8,9]
유다가 오난에게 이르되 네 형수에게로 들어가서 남편의 아우 된 본분을 행하여 네 형을 위하여 씨가 있게 하라
오난이 그 씨가 자기 것이 되지 않을 줄 알므로 형수에게 들어갔을 때에 그의 형에게 씨를 주지 아니하려고 땅에 설정하매
오난의 이야기를 보면 구약에서도 생식기관을 통해 자손이 이어진다는 것을 명확히 알고 있었다.
남자의 정액이 여성의 몸에 들어가 자녀가 생긴다는 것을 알았다는 것이다.
롯의 두 딸도 성행위를 통해 자손이 생긴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창세기 19:31-38 참조)
구약시대의 사람들도 다 알고 있었다는 말이다.
(우리가 말하는 성행위라는 표현만도 완곡한 표현이다.
자세하게 표현을 하면 음란 소설이 될 것이다.
그러니 완곡한 비유적 표현을 성경에 썼을 것이다.)
성경을 문맥을 따라 전체적으로 읽는 것이 중요하다.
히브리서 7:10 및 성경 많은 곳의 문맥에서 허리는 reproductive organ system (생식기관)을 의미한다.
그 냥 쉽게 말해서 그의 몸에서 라고 이해하면 된다.
그 이상의 해석은 불필요하다.
성경의 문맥을 무시하고 해석, 설명하는 오류를 범하지 말아야한다.
또한, 그렇게 말하는 사람을 경계해야한다.
믿는 사람이 성경 전체를 주의 깊게 열심히 읽어야 하는 이유이다.
허리가 reproductive organ system (생식기관) 혹은 몸을 표현하는 구절은 많이 있지만
무작위로 둘을 뽑았다.
[창세기 35:11]
하나님이 그에게 이르시되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 생육하며 번성하라 한 백성과 백성들의 총회가 네게서 나오고 왕들이 네 허리에서 나오리라
[출애굽기 1:5]
야곱의 허리에서 나온 사람이 모두 칠십이요 요셉은 애굽에 있었더라
그런데 이것을
다음과 같이 이상하게 현학적으로 풀어 설명하는 것은 듣는 이를 혼란에 빠지게 한다.
뭔 히브리어가 어쩌구 저쩌구 … 하면서
물론 전문가라면 원어(히브리어, 헬라어)를 열심히 공부해야한다. 그러나
문맥을 무시한 원어를 들먹이는 현학적인 해석은 사람을 혼동시킨다.
자기도 잘 이해를 못했으니까 성경의 문맥을 떠나 복잡하게 설명을 하는 것이다.
문맥을 따라 명료하게 설명을 할 수 없으면 자기도 잘 모른다는 뜻이다.
요즈음 이런 사람들(설교자)이 매우 많은데 이런 설교자를 경계한다.
(문맥을 따라 이해한다는 것은 제나라 말, 국어를 잘 이해 한다는 말인데 제 나라 말도 문맥을 따라 잘 이해하지 못하면서 원어로 이해하려 하면 매우 이상한 뒤틀린 오해, 해석을 하게 된다.
이런 사람은 제대로 진지하게 성경을 읽었나 하는 의심을 하게 된다.
아마 요즈음 유식한 교인이 많기 때문에 자기도 모르는 열등감에
뭔가 더 우월하다는 것을 나타내려고 원어가 어쩌구저쩌구 하는 것이 아닐까 하는 비뚤어진 생각을 해본다.
그렇다고 꼭 원어로 해석을 하지 말라는 말은 아니다.
인간에게 절대라는 말은 잘못이다.)
몇 가지 예를 들어 본다.
예를 들 것도 없이 Naver, Google에서 “허리에서”라고 찾아보면 많이도 나온다.
(쓸데없는 일이지만 시간 나는 분은 찾아보세요)
(1) 히브리 원어에서 “허리”는 무엇이라고 하는 데 그 뜻은 원어에서는 어쩌구저쩌구 ….
이런 설명은 문제라고 생각한다.
성경을 진지하지 읽지 않는 수준 미달의 설교자가 많이 있다.
듣는 사람은 주의해야한다.
예수님을 믿는 성도는 성경 진지하게 전체적으로 많이 읽어야 한다.
(2) 이스라엘의 허리는 “얍복강에서 이스라엘로 이름이 바뀐 야곱의 허리”라고 한 사람도 있다,
(창세기 32_22-32 참조)
속죄제의 영적 의미(레위기 4:1-35)
레위기 4장은 속죄제에 관한 내용입니다. 4장에서는 제사장과 온 회중과 족장과 평민이 속죄제를 바쳐야할 경우와 방법에 대해서 설명하고 있습니다. 속죄제는 5장에서도 이어지는데, 5장에서는 가난한 자와 극빈자가 속죄제를 바쳐야할 경우와 방법 및 속건제에 대해서 설명하고 있습니다.
제사장이 속죄제를 바치는 경우에는 죄 범한 제사장이 흠 없는 수송아지를 회막문 앞으로 끌어와서 그 제물의 머리에 안수한 후에 도살합니다. 다른 정결한 제사장이 그 제물의 피를 받아 회막에 가지고 들어가서 손가락에 그 피를 찍어 성소 휘장 앞에 일곱 번 뿌리고 향단 뿔에 바릅니다. 그리고 나머지 피는 모두 번제단 밑에 쏟아 붓습니다.
도살된 제물 가운데 내장에 붙은 모든 기름과 콩팥과 허리 근방에 붙은 기름과 간에 덮인 꺼풀을 콩팥과 함께 취하여 정결한 제사장이 번제단 위에 불사릅니다. 그리고 제물의 나머지 곧 가죽과 고기와 머리와 다리와 내장을 진 바깥 재 버리는 곳인 청결한 곳으로 가져다가 불로 나무 위에서 태웁니다. 이스라엘의 온 회중이 속죄제를 바치는 경우에도 제사장이 속죄제를 바치는 경우와 동일한 방법으로 바칩니다. 그렇게 하면 사함을 얻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족장이 속죄제를 바치는 경우에는 흠 없는 수염소를 예물로 가져다가 그 제물의 머리에 안수하고 도살합니다. 제사장은 그 피를 받아 손가락으로 찍어 번제단 뿔에 바르고 나머지 피는 번제단 밑에 붓습니다. 그리고 모든 기름은 단 위에서 불사릅니다. 평민이 속죄제를 바칠 경우에도 동일한데, 다른 것이 있다면, 수염소가 아니라 암염소를 바친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기억할 것은 족장과 평민의 속죄제의 경우, 앞서 제사장과 온 회중의 속죄제에서와 같이 제물의 가죽과 살코기를 모두 진 바깥에서 태우라는 언급이 없다는 것입니다. 또 제사장과 온 회중을 위한 속죄제에서는 그 피를 가지고 성소에 들어가 휘장 앞에 일곱 번 뿌리고 향단 뿔에 바르도록 했지만, 족장과 평민을 위한 속죄제에서는 성소에 들어가지 않고 그냥 번제단 뿔에 바르도록 하고 있습니다. 그와 같이 하면 사함을 얻으리라고 했습니다.
구약시대의 제사는 자발적인 제사와 의무적인 제사로 나눠집니다. 자발적인 제사에는 번제, 소제, 화목제가 있고, 의무적인 제사에는 속죄제와 속건제가 있습니다. 속죄제는 부지중에 혹은 실수로 지은 죄를 사함받기 위한 제사이고, 속건제는 사람이나 성물에 대하여 범한 죄를 사함받기 위한 제사였습니다. 속죄제를 정화제사, 속건제를 배상제사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번제가 과거의 죄를 사함받기 위한 것이고, 소제는 개인적 성별을 위한 것이며, 화목제는 하나님과 공동체의 교제유지를 위해 바쳐진 제사라면, 속죄제는 무지로 범한 죄를 용서받기 위해서 드리는 제사입니다.
속죄제를 드리는 목적은 뜻하지 않게 하나님께서 주신 계명 가운데 하나를 범한 것에 대해 속죄를 구하는 것입니다. 속죄제를 드려야 하는 구체적인 상황은 5장에 나타나 있는데, 증인임에도 불구하고 증언을 하지 않았을 때, 부정한 들짐승이나 가축이나 곤충의 시체를 만졌을 때, 부정한 사람과 접촉했을 때, 경솔하게 맹세했을 때 등입니다. 이 모두는 고의가 아니라 부지중에 범한 죄들입니다.
속죄제에는 몇 가지 중요한 특징이 있습니다.
첫째는 예배자 자기 죄를 깨닫고 사함받기 위해서 하나님께 제물을 가지고 나아간다는데 있습니다. 물론 이 경우에는 의무적인 것입니다. 죄를 깨닫고서도 그 죄를 사함받기 위해서 하나님께 나아가지 않을 수 없다는 뜻입니다. 속죄제의 제물은 범죄자의 사회적 신분에 따라 달랐습니다. 제사장과 온 회중은 흠 없는 수송아지를, 족장은 흠 없는 숫염소를 드렸습니다. 평민은 흠 없는 암염소나 암양을 드렸고, 가난한 자는 산비둘기나 집비둘기를 제물로 드릴 수 있었습니다. 극빈자는 고운 가루 에바 십분의 일을 제물로 드릴 수 있었습니다. 에바는 ‘바구니’란 뜻으로 양을 재는 단위입니다. 1에바는 약 23리터입니다. 따라서 그 십분의 일은 약 2.3리터에 해당됩니다. 그리고 이들 가난한 자와 극빈자의 속죄제에 대해서는 5장에서 설명됩니다.
둘째는 속죄제가 십자가를 지심으로 인류의 죄를 대속하신 그리스도의 대속 사역을 상징한다는 데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이 대속희생의 어린양이 되사 모든 사람의 대속물이 되셨으며 그가 죽으신 장소는 예루살렘 성 바깥 골고다 언덕이었습니다. 속죄제 희생제물이 불살라진 곳이 진 바깥 정결한 곳이듯이 예수님도 진 바깥 골고다 언덕에서 대속제물이 되셨습니다.
구약시대에는 짐승의 피로써 하나님의 선민이 되었지만, 신약시대에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써 하나님의 선민이 됩니다. 짐승의 피가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의 피가 믿는 자들의 죄를 대속하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과 사도들의 입장은 구약시대의 짐승의 피는 신약시대의 그리스도의 피에 대한 모형과 그림자에 불과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그리스도의 피로써만이 진정으로 속죄를 입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죽음은 인간의 죄를 대속하기위한 것이었습니다(고전 15:3). 예수님은 잡히시던 날 밤에 제자들에게 포도주잔을 주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죄 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바 나의 피 곧 새 언약의 피니라”(마 26:28). 또 예수님의 수제자 베드로는 그리스도께서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이는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벧전 2:42절)고 하셨습니다. 또 바울 사도는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는 자로 우리를 대신하여 죄를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저의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고후 5:21)고 하셨습니다. 이들 말씀들은 그리스도께서 친히 속죄를 위한 제물처럼 우리의 죄를 짊어지시고 우리를 대신해서 하나님의 진노를 푸시려고 제물이 되어 주셨다는 사실을 말해 주는 것입니다.
셋째는 이 은혜를 감사하고 기뻐해야 한다는데 있습니다. 우리는 죄에서 자유 하였고, 의로운 자라는 칭함을 믿음으로 받았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마땅히 받아야 할 것을 받은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사랑으로 인한 것이며, 우리의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닙니다(요 3:16). 우리를 의롭게 하시는 의로움이 우리의 것이 아닌 것은 그리스도께서 친히 짊어지신 죄의 대가가 그분의 것이 아닌 것과 같습니다(고후 5:21).
화목제
3 “화목제를 드릴 때 누구든지 소로 드리고 싶은 사람은 수컷이든 암컷이든 흠 이 없는 것을 나 여호와에게 바쳐야 한다.
2 그 제물을 가져온 사람은 그 짐승의 머리에 손을 얹은 다음 그것을 성막 입구에서 잡아야 하며 아론의 자손 제사장들은 그 피를 제단 사면에 뿌려야 한다.
3 그는 화목제물 중에서 나 여호와에게 불로 태워 바칠 부분, 곧 내장을 덮고 있거나 그것에 붙어 있는 모든 기름과
4 두 콩팥과 그 위에 덮여 있는 허리 부분의 기름과 간에 덮여 있는 간 꺼풀을 떼어낼 것이며
5 아론의 자손들은 그것들을 단의 불붙는 나무 위, 번제물 위에 놓아 태워야 한다. 이것은 불로 태우는 화제이며 나 여호와를 기쁘게 하는 향기이다.
6 “만일 나 여호와에게 드릴 화목제의 제물이 양이라면 암컷이든 수컷이든 그것은 반드시 흠 없는 것이어야 한다.
7 만일 그 제물이 어린 양일 경우 그것을 드리는 사람은 그 양을 나 여호와 앞에 끌어다가
8 그 머리에 손을 얹은 다음 성막 앞에서 잡을 것이며 아론의 자손들은 그 피를 단 사면에 뿌려야 한다.
9 그리고 그는 화목제물 중에서 나 여호와에게 불로 태워 바칠 부분, 곧 등뼈 부근에서 잘라낸 기름진 꼬리와 내장을 덮고 있거나 그것에 붙어 있는 모든 기름과
10 두 콩팥과 그 위에 덮여 있는 허리 부분의 기름과 간에 덮여 있는 간 꺼풀을 떼어낼 것이며
11 제사장은 그것들을 단 위에서 불로 태워야 한다. 이것은 나 여호와에게 불로 태워 바치는 음식이다.
12 “만일 화목제의 제물이 염소라면 그는 그것을 나 여호와 앞에 끌어다가
13 그 머리에 손을 얹은 다음 성막 앞에서 잡을 것이며 아론의 자손들은 그 피를 단 사면에 뿌려야 한다.
14 그는 그 제물 중에서 나 여호와에게 불로 태워 바칠 부분, 곧 내장을 덮고 있거나 그것에 붙어 있는 모든 기름과
15 두 콩팥과 그 위에 덮여 있는 허리 부분의 기름과 간에 덮여 있는 간 꺼풀을 떼어낼 것이며
16 제사장은 그것들을 단 위에서 불로 태워야 한다. 이것은 불로 태워 바치는 음식이며 마음을 기쁘게 하는 향기이다. 모든 기름은 나 여호와의 것이다.
17 너희는 기름과 피를 먹지 말아라. 이것은 너희가 어느 곳에 살든지 대대로 지켜야 할 불변의 규정이다.”
레위기 3장 17절 말씀에서 하나님께서 왜 기름과 피를 먹지 말라고 하셨나요?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는 목적에 따라 번제, 소제, 화목제, 속죄제, 속건제로 구분되며 제사 드리는 방법에 따라서는 화제, 요제, 거제, 전제로 나누어집니다.
화제 중에는 제물에서 떼어낸 기름을 불에 사르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는 그 중에서 예물을 가져다가 여호와께 화제를 드릴지니 곧 내장에 덮인 기름과 내장에 붙은 모든 기름과 두 콩팥과 그 위의 기름 곧 허리 쪽에 있는 것과 간에 덮인 꺼풀을 콩팥과 함께 떼어낼 것이요 제사장은 그것을 제단 위에서 불사를지니 이는 화제로 드리는 음식이요 향기로운 냄새라 모든 기름은 여호와의 것이니라”(레위기 3:14-16)
이 말씀 중에서 중요한 것은 모든 기름은 여호와의 것이다 라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기름을 먹지 말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고기를 그 생명 되는 피째 먹지 말 것이니라”(창세기 9:4)
고기를 먹되 그 생명되는 피째 먹지 말라는 말씀이십니다.
그 이유는 이렇게 설명합니다.
“이스라엘 집 사람이나 그들 중에 거류하는 거류민 중에 무슨 피든지 먹는 자가 있으면 내가 그 피를 먹는 그 사람에게는 내 얼굴을 대하여 그를 백성 중에서 끊으리니 육체의 생명은 피에 있음이라 내가 이 피를 너희에게 주어 제단에 뿌려 너희의 생명을 위하여 속죄하게 하였나니 생명이 피에 있으므로 피가 죄를 속하느니라”(레위기 17:10-11)
모든 생명의 주인은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인간이 함부로 생명을 다루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인간의 생명경시 풍조를 경계하시기 위하여 그런 명령을 주신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사야 55:6-9 복음의 7대 연합
복음의 7대 연합
1. 탄생의 연합2. 고난의 연합
3. 죽음의 연합
4. 부활의 연합
5. 승천의 연합
6. 재림의 연합
7. 왕국의 연합
아버지께서는 모든 충만으로 예수 안에 거하게 하시고.
첫째는 하나님과의 관계(대신관계)
둘째는 사람과의 관계(대인관계)
셋째는 물질과의 관계(대물관계)
물질관계는 세상의 환경과 물질과 모든 피조물과의 관계가 회복되는 것을 말합니다.
넷째는 자기 자신과의 관계(대아관계)
에베소서 2:13-18
이제는 전에 멀리 있던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와졌느니라.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중간에 막힌 담을 허시고.
원수 된 것 곧 의문에 속한 계명의 율법을 자기 육체로 폐하셨으니 이는 이 둘로 자기의 안에서 한 새 사람을 지어 화평하게 하시고.
또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 원수 된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
또 오셔서 먼데 있는 너희에게 평안을 전하고 가까운데 있는 자들에게 평안을 전하셨으니.
이는 저로 말미암아 우리 둘이 한 성령 안에서 아버지께 나아감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내가 하늘로서 내려온 것은 내 뜻을 행하려 함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려 함이니라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은 내게 주신 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이것이니라.
내 아버지의 뜻은 아들을 보고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는 이것이니 마지막 날에 내가 이를 다시 살리리라 하시니라 .
화목의 능력과 용서의 능력은 사람에게서 찾을 수 없지만 용서 받은 사람은 십자가안에서 내가 더 큰 용서를 받았기 때문에 사람과의 담을 무너트릴 수 있습니다.
사람은 용서를 하지 않으려고 하는 본능적인 속성을 갖는다.
십자가의 빚을 알고 깨닫고 체험한 사람만이 사람과의 담을 무너트릴 수 있습니다.
골로새인 빌레몬의 종으로 일찌기 주인에게 죄를 짓고 로마에 도망하여 있는 중 바울에게서 복음을 듣고 회개하여 신자가 되었다.
바울이 골로세서를 써서 두기고와 오네시모편에 보내었다(골 4:7-9).
바울이 그를 전 주인에게 권하여 보내며 빌레몬서를 붙여 그 신덕을 증거하고 또 그 죄를 사하여 형제같이 사랑하라 하였다(골 4:9, 몬10-12).
화목제의 영적의미(레위기 3:1-17)
레위기 3장은 화목제에 관한 말씀입니다.
화목제의 특징은 ‘제사자가 바친 고기를 먹는 제사’입니다.
화목제는 하나님과의 친교를 위해서 무교병과 함께 드립니다.
화목제는 제사자가 암컷과 수컷 중에서 소나 양이나 염소 가운데서 흠이 없는 것으로 회막문에 가져와서 그 동물의 머리에 안수를 함으로써 동물로 하여금 제사자를 대신하게 하고, 예배자의 죄를 그 동물에 전가시켜 시켜 희생시킵니다.
예배자가 동물을 죽여 피를 받아 제사장에게 주면, 제사장은 그 피를 제단 사면에 뿌립니다. 가죽을 벗기고, 각을 뜨지만,
번제와는 달리 고기를 태우지 않습니다. 오직 콩팥과 내장의 덮인 모든 기름과 기름진 꼬리를 제사장이 제단의 불에 놓아 태웁니다.
동물의 가슴은 요제로, 오른쪽 뒤 넓적다리는 거제로 흔든 다음 가죽과 함께 제사장에게 주어지고, 나머지는 예배자가 가져다가 가족 친지들과 함께 그날에 다 먹어야 합니다.
제사장도 마찬가집니다. 먹다 남은 것은 불에 태웁니다.
화목제의 종류에는 자원제사와 서원제사와 감사제사가 있습니다.
특히 항해나 광야여행에서 무사히 돌아왔을 때, 병이 나았을
때, 감옥에서 나왔을 때 드리는 제사입니다.
감사제로써 화목제는 유월절 양, 제사장 위임식, 나실인의 서원 등에 드리며, 반드시
고기는 제사 드린 바로 그 날에 모두 먹어야 합니다.
화목제의 의미에는 하나님과 사람들과의 평화, 언약체결에 대한 확증, 인간이 하나님께 제물을 드리면, 하나님이 받으시고 그
제물을 다시 인간에게 선물로 주시는 의미, 곧 하나님의 선물로써의 의미를 갖습니다.
이 선물을 제사장과 예배자와 예배자의
가족친지들이 함께 하나님 앞에서 나눔으로써 화목을 공고히 한다는 의미를 갖습니다.
하나님이 내리신 선물을 하나님 앞에서 나누어
먹음으로써 하나님과 사람 사이, 사람과 사람사이에 신비로운 연결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서 먹는 것이지 하나님과
함께 먹는 것은 아닙니다.
기독교에서 행하는 성만찬의 의미를 가장 잘 표현해 주는 제사가 바로 이 화목제입니다.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과
사람사이에, 사람과 사람사이에 갈등과 반목을 샬롬, 곧 평화로 바꾸시기 위해서 하나님의 선물, 곧 화목제물로 이 땅에 오셨던
것입니다.
"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안에 있는 영생이라"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를 화목제물로 삼으시고, 그의 피로 인한 구속을 믿는 인간들의 범한 죄를 용서하심으로서 당신의 공의로우심을 나타내시고,
또한 예수를 믿는 자들을 의롭다고 부르십니다.
하나님은 공의로우신 분이시며, 죄를 벌하십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에
죄범한 인간들이 모두 멸망 받기를 원치 아니 하십니다.
따라서 하나님은 인간들의 죄로 인한 진노를 푸시고 원수된 죄인들과의 관계
개선을 위해서 하나밖에 없는 아들로 친히 하나님과 죄인 사이의 화목제물로 삼으셨습니다.
화목제물이란 말은 일반적으로 신의 진노를
풀기 위해서 인간이 마련한 희생제물을 뜻하지만, 성서가 말하는 화목제물은 진노하신 하나님께서 스스로 화목제물이 되셨음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정신은 피해자가 가해자를 벌하기보다는 오히려 먼저 화해의 길을 모색하는 자기부정과 희생의
정신을 말합니다. 이런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정신을 통해서 우리는 자신의 평화, 가정의 평화, 지역사회의 평화, 더 나가서는
국제사회의 평화를 도모할 수가 있고, 하나님의 나라를 앞당겨 실현 할 수가 있습니다. 이 일을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화목하게 하는 직책을 주셨습니다(고후 5:17-20).
고대 근동지방에서는 공동식사를 통해서 평화 협정이나 협약 또는 계약체결을 인준하는 규정관습이 있었습니다.
이삭과
아비멜렉(창 26:30),
야곱과 라반(창 31:54)
다윗과 아브넬(삼후 3:20).
쌍방간에 의견이
교환되고, 그것이 수용되고, 계약이 체결되면, 그것이 백성들에게 공포되고, 그들은 하나님을 보고 먹고 마셨습니다(출
24:1-11).
이스라엘 민족은 하나님을 계약의 하나님으로, 그들을 계약의 백성으로 믿었습니다. 출애굽 사건이 있은 후에 시내산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들을 종살이에서 해방하신 야훼 한 분만을 그들의 신으로 섬기며, 그들은 야훼의 백성이 되기로 하나님과 계약을
체결했습니다. 그러고 나서 그들은 하나님께 화목제사를 드렸고, 언약의 피뿌림을 받았으며, 그 제물을 나누어 하나님을 보고 먹고
마셨습니다. 이로써 그들은 열국 중에서 하나님의 “소유가 되었고, 제사장 나라가 되었으며, 거룩한 백성”(출 19:5-6)이
되었습니다. 이것이 구약(舊約)이요 이스라엘의 선민계약이었습니다.
그리스도인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침례식 때에 우리 모두는 하나님과 계약을 체결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구속의
사건으로 인해서 죄의 종살이로부터 우리를 해방하시고, 성령으로 사는 새로운 삶을 주신 하나님 한 분만을 구세주로 모시고 섬기며,
하나님은 우리의 하나님이 되시기로 새로운 계약을 체결했습니다. 죄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바 그리스도의
언약의 피로 된 것입니다.
이것이 신약(新約)이요 그리스도인들의 선민계약입니다.
성만찬은 바로 이 새로운 선민계약체결을 공고히 하기 위해서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벧전 2:9-10)된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을 보고 먹고 마시는 행위입니다. 성만찬은 하나님과의 약속을 공고히 할
뿐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을 확인하는 귀중한 시간인 것입니다.
우리 조상들은 제사상에 올린 음식을 신(神)의 선물(膳物, gift)이라고 여겼습니다.
비록 제사상의 음식이 인간이 차린
음식이고, 다분히 잘 보살펴주시라는 뇌물의 성격을 띤 것이지만, 신(神)은 인간들의 정성을 받으시고, 음식은 예배공동체를 내리시기
때문에 선물이라고 하는 것 같습니다.
이렇게 제사 음식은 신이 내린 선물이고, 예배공동체에 대한 신(神)의 뜻이 담긴 음식이기
때문에 공동체의 모든 구성원은 반드시 이 제사 음식을 먹어야 했습니다.
예전에 우리가 사용하던 ‘복덕방’이란 말이 바로 이 선물을
나누던 회관을 뜻했다고 합니다.
이 말이 토지나 가옥 중개업소란 뜻으로 한동안 사용되기는 했지만, 먼 옛날의 복덕방은 각종
부락제 때 제사상에 올린 음식과 살코기를 마을회관으로 옮겨와 나눠 먹던 장소였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먹고 마심으로 복을
받고(飮福, 음복), 먹고 마심으로 덕담을 나누는(飮德, 음덕) 신성한 장소가 복덕방이었던 것입니다.
복덕방에서 선물을 나누는 행위는
신의 뜻(神意, 신의)을 나누는 행위였고, 한 공동체의 결속과 연대를 신의 명령(神命, 신명)으로 이해하고 받아드렸던 엄숙한
행위였습니다.
제물은 이와 같이 마을 공동체를 강하게 결속시키고 공동 운명체임을 자각시키는 중요한 역할을 해냈습니다.
복 복(福), 덕 덕(德), 방 방(房)
제사가 끝나면 음식을 나누어 먹는 일을 '음복(飮福)'이라 하는데 이 때의 '복(福)'은 '제사에 쓴 고기와 술'이라는 의미이다.
'명복(冥福)을 빈다'라는 말을 가끔씩 듣는데 이 때의 '명(冥)'이 '저승 명'이기에 '저승에서의 복을 빈다'라고 해석해야
한다. '복생어미(福生於微)'라는 말이 있다. 복은 미세한 일에서 생긴다는 의미이다.
복덕방의 어원은 '생기복덕(生起福德), 즉 복과 덕을 생기게 하는 것이라는 말에서 유래 하며, 복덕방(福德房)은 말 그대로 복과 덕이 있는 방을 말합니다.
복덕방은
원래 일종의 뒷풀이 장소였습니다.
마을의 당제나 동제를 지내고 난 뒤에 제사음식을 나누어 먹던 당산나무 아래나 그 곁에 넓은
마당집을 일컫는 말로, 마을 유지들은 음식과 돈을 기부하고 가난한 사람들은 제를 올리기 위해 노동력을 제공하고 제사음식은 모두
골고루 복덕방에서 나누어 먹었던 곳이 바로 복덕방입니다.
제사음식을 받으러 윗마을 아랫마을 사람들이 다들 마을입구 복덕방 자리에
모이게 되면 집안 대소사에 관한 이야기가 자연스럽게 오가고 간단한 물건을 교환하거나 흥정도 자주 이루어져 나중에는 타지 사람들까지 그 마을에 빈집이 있는지 동네사람들이 어떤지 알아보곤
했던것이 자연스럽게 복덕방에서 집을 사고팔수 있도록 중개하는 곳이 되었습니다.
복덕방은 마을전체의 사람들과 어울리며, 개방적으로
부동산을 알아보고 흥정한 것처럼, 기획부동산이나 일부 뜨내기 부동산처럼 자신의 이익을 위한 장소가 아닌 진정한 복덕방으로써의
책무를 다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신성한 뜻을 받들어 주님의 살과 피를 나누는 곳이 복덕방이요, 성도들이 먹고 마시는 떡과 잔은 모두가 한
운명체임을 주님의 명령으로 받는 하나님의 구원의 선물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택하신 자들의 구원과 축복을 위해서 외아들 예수님을
화목제물(和睦祭物)로 삼으시고, 구원을 위한 선물로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희생당하심은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서
마련하신 화목제물 곧 선물인 것입니다. 이 선물을 나누는 곳이 교회입니다. 그리고 이 제물 곧 하나님의 선물을 상징하는 성찬의
나눔이 있는 곳이 바로 하나님의 신령한 복을 나누는 복덕방인 것입니다.
03-10-2023(금)
_________________ 레위기 2장 / 소제(素祭) 민하(민카), grain offering.
serial offering. meat offering(KJV)
누구든지 소제의 예물을 여호와께 드리려거든 고운 가루로 예물을 삼아 그 위에 기름을 붓고 또 그 위에 유향을 놓아.
And when any will offer a meat offering unto the LORD, his offering shall be of fine flour; and he shall pour oil upon it, and put frankincense thereon:
소제의 의미
소제의 의미 / 겉사람을 죽여라
- 구원 받은 후에 새로운 삶을 회복해야 한다.
곡식이 고운가루가 되려면 철저하게 부서지고 깨져야만 한다.
고린도후서 4:16
그러므로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겉사람은 후패하나 우리의 속은 날로 새롭도다.
번제의 의미
번제의 의미 / 영혼 구원야고보서 1:21
히브리서 10:39
우리는 뒤로 물러가 침륜에 빠질 자가 아니요 오직 영혼을 구원함에 이르는 믿음을 가진 자니라.
여호와여 일어나 저를 대항하여 넘어뜨리시고 주의 칼로 악인에게서 나의 영혼을 구원하소서.
소제에 사용할 수 있는 예물
- 씨앗, 성장, 열매, 추수, 탈곡, 맷돌
-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의 과정
2. 기름(2:1)
- 창세기 28:18-19, 요한일서 2:20, 27, 요한계시록 8:3-4
- 불로 굽게 되면 향기가 난다
- 마태복음 2:11
4. 소금(2:13)
- 언약(민수기 18:19, 역대하 13:5)
소제의 제물
1. 고운가루(1절)
2. 기름(누가복음 4:17-19)
선지자 이사야의 글을 드리거늘 책을 펴서 이렇게 기록한 데를 찾으시니 곧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케 하고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였더라
3. 유향(시편 141:2)
나의 기도가 주의 앞에 분향함과 같이 되며 나의 손 드는 것이 저녁 제사 같이 되게 하소서.
그리스도께서 너희를 사랑하신 것 같이 너희도 사랑 가운데서 행하라 그는 우리를 위하여 자신을 버리사 향기로운 제물과 생축으로 하나님께 드리셨느니라.
and live a life of love, just as Christ loved us and gave himself up for us as a fragrant offering and sacrifice to God.
요한복음 12:24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I tell you the truth, unless a kernel of wheat falls to the ground and dies, it remains only a single seed. But if it dies, it produces many seeds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늘에서 내린 떡은 모세가 준것이 아니라 오직 내 아버지가 하늘에서 내린 참 떡을 너희에게 주시나니
하나님의 떡은 하늘에서 내려 세상에게 생명을 주는 것이니라.
우리는 각기 다른 모양의 십자가를 지고 가지만, 목적지는 같다.
목적지가 같은 만큼 우리에게는 많은 길동무들이 있다.
같은 모습으로 닮아 가는 자매와 형제들이 있는 것이다.
세상 사람들은 우리를 보며 예수님을 보고, 우리가 스칠 때 예수님의 향기를 맡는다.
우리는 작은 예수다.
예수님은 복 있는 자가 되려면 마음을 비우고, 슬퍼할 줄 알며, 온유하며, 남을 불쌍히 여기며, 마음이 깨끗하고, 화평케 하며, 의를 위해 굶주리고 목말라야 한다고 말씀하셨다(마태복음 5:3~12).
예수님을 닮기를 사모하는 사람은 날마다 이 교훈의 거울에 자기를 비춰 보면서 순종 하지 않으면 안 된다.
오늘날 세상 사람들의 눈에 비치는 우리들의 이미지는 너무 참담하다.
그들의 눈에 우리는 예수님을 믿지 않는 자들과 전혀 다를 게 없다.
성경을 들고 있다고 해서 우리를 특별하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어쩌다 이 지경에 까지 이르렀을까.
예수님을 닮아 가야 하는 거룩한 목표를 상실했기 때문이다.
‘너무 비현실적인 목표야.
이대로 사는 사람이 어디 있겠어. 믿음만 있으면 구원받는데…’ 하는 등의 변명을 늘어놓으면서 예수님을 닮는 우리의 목표를 마치 응접실에 걸어 놓은 액자처럼 쳐다만 보며 신앙생활을 하는 데 그 원인이 있다.
예수님의 복 있는 사람의 조건에 대한 메시지는 분명하다.
예수님의 제자는 하늘에 계신 하나님과 같이 온전해야 한다는 것이다.
세상에서 부름받은 제자는 땅에서부터 예수님을 닮는 것을 목표로 삼아 열심히 오르는 자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내세의 구원을 외치는 자는 많지만 예수님의 제자가 되자고 외치는 자는 많지 않은 것이 우리의 현실이다.
세상 사람들의 눈에 비친 우리의 모습이 이러한 현실을 잘 설명하고 있지 않은가.
흠이 없는 자가 되어야 한다는 말이 아니다.
우리가 오를 정상이 어디인지를 분명히 하자는 것이다.
그 정상은 ‘작은 예수’가 되는 것이다.
그렇게 되려고 흉내라도 내야 한다.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다(야고보서 2:26)
영국의 어느 술집 주인이 빌리 그레이엄 목사의 전도집회에서 복음을 듣고는 마음의 변화를 얻어 “나 예수 믿겠습니다.”하고 벌떡 일어나 앞에 나가서 무릎 꿇고 기도하고 돌아갔다.
그리고는 곧바로 자기 술집 앞에 간판을 하나 붙였는데, “나 엊저녁에 예수 믿었소 오늘부터 술집 영업 안 합니다.”라고 써 놓았다고 한다. 이것이 믿음이다.
어제와 오늘의 인생이 완전히 바뀌는 것이 믿음이다.
이것은 기적처럼 저절로 일어나는 현상이 아니라 우리의 의지를 통해 행동으로 드러나는 믿음의 과정이다.
“너는 믿음이 있고 나는 행함이 있으니 행함이 없는 네 믿음을 내게 보이라 나는 행함으로 내 믿음을 네게 보이리라”(야고보서 2:18) 아브라함이 믿음의 조상으로 인정받게 된 데에는 그의 마음속 믿음뿐 아니라 행동으로 드러나는 믿음을 하나님이 보셨기 때문이다.
아브라함은 100세에 아들을 주신 이가 죽은 아들을 능히 살리실 수도 있다고 믿었다.
그래서 그는 늘그막에 얻은 아들을 바침으로 아들보다 하나님이 자신의 우선순위에 있음을 행동으로 증명했고, 그로 말미암아 우리의 신앙의 뿌리이며 믿음의 조상이자 하나님의 친구로 일컬음을 받았다.
제자로 사는 것은 제자처럼 생각하거나 제자처럼 말하는 것이 아니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예수님이 사신 모습을 따라 ‘사는’ 것 이다.
이것이 제자 훈련의 핵심이다.
그러나 현대 교회의 성도들은 예수님처럼 변하는 것은 점진성을 가지고 마지막 날에나 이루어지는 것이라는 점만 강조하여, “우리는 모두 인간인데…”하며 눈감아 주는 현실주의에 곤두박질치고 있는 실정이다.
이것이 바로 우리 한국 교회에 냄새가 진동하는 이유 중 하나일 것이다.
작은 예수가 되라는 명령은 목회자뿐 아니라 모든 믿는 자에게 요구하시는 하나님의 표준이다.
맥스 루케이도는 이렇게 말했다.
“하나님은 당신을 있는 그대로 사랑하신다.
그러나 그대로 두지는 않으신다.
하나님은 당신이 예수님처럼 되기를 원하신다.”
헨리 나우엔은 더 강하게 이야기한다.
“진정한 구원은 그리스도가 되는 것이다.
진정한 구원은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가 되는 것이다.”
이것은 마지막 날에 얻게 될 변화를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다.
지금 우리가 있는 자리가 우리의 모습을 말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마태복음 5:48)
이것이 주님이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수준이다.
원수를 사랑하라는 명령도 부담스러워하는 우리에게 주님은 온전하라고 명령하신다.
이 명령에 따르려고 몸부림치지 않는 한 우리가 배우고 외우는 말씀들은 결국 우리 입에서 맴도는 메마른 구호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유향은 향기를 발하는 일종의 향수입니다.
유향이라는 말만 들어도 향기가 납니다.
냄새나는 마굿간에서 예수가 나셨기에 향수인 유향을 선물한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이 탄생하신 것까지는 몰랐을 것입니다.
유향 - 제사장을 상징
몰약 - 메시아
황금은 왕권을 의미합니다.
우리나라 박물관을 가보아도 왕은 황금으로 왕관을 만들어 썼습니다.
황금 띠를 띠고 황금 그릇을 사용하였습니다.
동방박사중에 한 명이 아기 예수에게 황금을 선물로 드린 것은 예수님은 우리의 왕이라고 하는 믿음의 고백이 들어 있는 것입니다.
당시 역사가 세네카는 당시 중동에서는 이런 말이 있었다고 전하여 주고 있습니다.
<황금을 가지지 않고는 왕을 만날 생각을 하지 말아라.>
왕을 만날 때에는 반드시 준비하여야 하는 선물이 황금이었습니다.
황금은 금속의 왕이고 예수님은 세상에 왕이십니다.
예수님은 <왕되신 사람>이며 <사람이 되신 왕>이셨습니다.
예수님은 힘으로 이 세상을 통치하시는 왕이 아니라 사랑으로 통치하시는 왕이셨습니다.
예수님은 총이나 법으로 이 세상을 다스리시지 않으시고 십자가로 온 세상을 다스리신 왕이십니다.
세상의 왕은 못 할 것이 너무 많은 왕이지만 예수 왕은 못 할 것이 없으신 전지전능하신 왕입니다.
세상의 왕은 모든 면에 전문적인 지식을 가지고 있지 못 하기에 참모들이 같이 일해주어야만 하는 왕이지만 예수 왕은 모든 면에 탁월한 지식을 가지신 왕중의 왕이십니다. 정치, 경제, 교육, 건강 모든 면에 그를 따를 자가 없는 왕이십니다.
세상의 왕은 임기가 있는 일시적인 왕이지만 예수 왕은 영원한 왕이십니다.
세상의 왕은 이 땅의 왕이지만 예수 왕은 오는 세상에서도 왕이십니다.
어느 역사학자가 알렉산더 왕과 예수님을 비교한 글이 있습니다.
BC 350년 경 알렉산더 대왕은 세계를 정복하고 거대한 제국을 세웠다.
그리스도와 알렉산더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두 사람은 젊은 날에 일을 시작하여 33세에 세상을 마쳤다.
알렉산더는 왕국에서 태어났고 예수는 마굿간에서 태어났다.
알렉산더는 왕자로 태어났고 예수는 목수의 아들로 태어났다.
알렉산더는 왕좌에서 고귀한 왕으로 죽었으며 예수는 십자가에서 조롱받으며 죽었다.
알렉산더는 일생에 위대한 성공을 보였고 예수의 일생은 실패한 것으로 보인다.
알렉산더는 자신의 소유를 위하여 수 십만의 피를 흘렸고 예수는 전 인류를 위하여 피를 흘렸다.
알렉산더는 영광의 바벨론에서 죽었고 예수는 수치의 갈보리에서 죽었다.
알렉산더는 모든 왕국을 정복하였고 예수는 죽음을 정복하였다.
알렉산더는 모든 사람을 노예로 만들었고 예수는 모든 인간을 자유케 하였다.
알렉산더는 역사를 만들었고 예수는 역사를 변화시켰다.
아기 예수에게 황금을 바친 것은 예수님은 왕이라는 고백이 들어 있습니다.
유향의 의미 - 제사장
유향은 향기를 발하는 일종의 향수입니다.
유향이라는 말만 들어도 향기가 납니다.
냄새나는 마굿간에서 예수가 나셨기에 향수인 유향을 선물한 것은 아닙니다.
동방박사들은 별을 따라 오기는 하였지만 마굿간에서 예수님이 탄생하신 것까지는 몰랐을 것입니다.
유향은 가정에서는 온 가정을 향기롭게 하는 데 사용하였고 성전에서는 제사드리는 데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이었습니다.
제사중에 가장 많은 제사가 소제입니다.
소제는 다른 제사를 드리고 하나님이 그 제사를 받으셨음을 감사드리며 드시는 일종의 감사 제사였기에 모든 제사 후에 거의 소제가 드려졌습니다.
그런데 소제를 드릴 때에는 반드시 유향이 필요하였습니다.
레위기 2:1-2
누구든지 소제의 예물을 여호와께 드리려거든 고운 가루로 예물 을 삼아 그 위에 기름을 붓고 또 그 위에 유향을 놓아 아론의 자손 제사장들에게로 가져 올 것이요 제사장은 그 고운 기름 가루 한 줌과 그 모든 유향을 취하여 기념물로 단 위에 불사를지니 이는 화제라 여호와께 향기로운 냄새니라.
그리고 분향단위에는 늘 향이 꺼지지 않고 타고 있었습니다. 향을 내는 향품은 소합향, 나감향 그리고 풍자향을 유향으로 섞어 버므려 태우게 되어 있었습니다.
출애굽기 30:34-36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는 소합향과 나감향과 풍자향의 향품을 취하고 그 향품을 유향에 섞되 각기 동일한 중수로 하고
그것으로 향을 만들되 향 만드는 법대로 만들고 그것에 소금을 쳐서 성결하게 하고
그 향 얼마를 곱게 찧어 내가 너와 만날 회막 안 증거궤 앞에 두라 이 향은 너희에게 지극히 거룩하니라.
청진기라고 하면 제일 먼저 생각나는 사람은 의사입니다.
망치와 톱하면 제일 먼저 떠오르는 사람은 목수입니다.
시멘트와 모래와 자갈하면 얼른 떠오르는 이는 건축가입니다.
유향하면 제일 먼저 떠오르는 이는 제사장입니다.
유향은 제사장이 사용하는 물건중에서 가장 필요한 것이었습니다.
제사장은 라틴어로 폰티펙스(Pontifex)라고 하는 데 이는 다리를 놓는 사람이라는 의미입니다.
아기 예수에게 유향을 선물한 것은 아이를 기르는 방에 향기가 늘 진동하기를 바란다는 바램으로 유향을 선물하였겠지만 그 속에 들어 있는 영적 의미는 <예수님은 제사장>이라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을 향하여 길을 여신 분이 예수님이십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돌아 가실 때 하나님이 계신 지성소를 향하여 난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로 찢어져 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누구나 담대히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 때 예수님은 크게 외치셨습니다.
<다 이루었다.>
마태복음 27:50-51
예수께서 다시 크게 소리 지르시고 영혼이 떠나시다.이에 성소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까지 찢어져 둘이 되고 땅이 진동하며 바위가 터지고.
히브리서 10:19-20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나니 그 길은 우리를 위하여 휘장 가운데로 열어 놓으신 새롭고 산 길이요 휘장은 곧 저의 육체니라.
유향을 선물한 것은 예수님은 제사장이라는 고백입니다.
진실로 예수님은 제사장입니다.
몰약의 의미 - 메시야(선지자)
몰약은 시스터스(cistus)라고 하는 나무에서 나오는 진입니다. 아주 값진 기름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제사장과 왕과 선지자들에게는 머리에 기름을 부었습니다. 그 때 붓는 기름을 관유라고 하는 데 관유를 만들 때에 몰약을 썼습니다.
출애굽기 30:23-29
너는 상등 향품을 취하되 액체 몰약 오백 세겔과 그 반수의 향기로운 육계 이백 오십 세 겔과 향기로운 창포 이백 오십세겔과 계피 오백 세겔을 성소의 세겔대로 하고 감람 기름 한 힌을 취하여 그것으로 거룩한 관유를 만들되 향을 제조하는 법대로 향기름을 만들지니 그것 이 거룩한 관유가 될지라.너는 그것으로 회막과 증거궤에 바르고 상과 그 모든 기구며 등대 와 그 기구며 분향단과 및 번제단과 그 모든 기구와 물두멍과 그 받침에 발라 그것들을 지 성물로 구별하라 무릇 이것에 접촉하는 것이 거룩하리라.
<내 침상에는 화문 요와 애굽의 문채 있는 이불을 폈고 몰약과 침향과 계피를 뿌렸노라>( 잠7:16-17)
예수님의 생애는 몰약으로 시작하여 몰약으로 끝났습니다. 예수님이 이 세상에 탄생하셨을 때 몰약을 선물로 받으셨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죽으셨을 때 마지막으로 받은 선물도 바로 몰약이었습니다. 예수님이 세상을 떠나자 니고데모가 몰약과 침향을 100근쯤 가지고 와서 예수님의 시체에 발랐습니다.
<일찍 예수께 밤에 나아왔던 니고데모도 몰약과 침향 섞은 것을 백 근쯤 가지고 온지라>( 요19:39)
아주 귀한 사람의 침상에 뿌리고 정말 귀한 분의 몸에 바르고 하나님이 택하신 존귀한 자
의 머리에 붓는 기름이 바로 몰약입니다. 아기 예수님에게 몰약을 드린 것은 너무나 그 분을 존귀하게 여기는 자세입니다.
그런데 메시야란 <기름부음을 받은 자> 곧 그리스도라고 하는 의미입니다. 동방박사는 예수님을 메시야로 알았기에 몰약을 드린 것일까요? 아주 존귀한 사람의 시체에 바르는 기름이기에 예수님의 죽으심을 예수님이 태어날 때부터 알았던 것일까요?
이런 것은 전혀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메시야에게 붓는 기름이라는 것만은 틀림이 없습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태어나신 목적이 인간의 죄를 짊어지고 죽으시기 위하여 오신 것입니다.죄의 값은 사망이기에 대신 죽으러 오신 분이십니다.
아마 이 세상에 예수님에 관한 그림이 가장 많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그림이 있다고 바클레이는 소개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목수일을 하다가 너무 피곤하고 기지개를 펴는 데 벽에 그림자가 비쳐졌습니다
예수님이 두 팔을 벌리고 있기에 그림자는 십자가로 나타났습니다.
그런데 그 십자가를 어머니 마리아가 근심스럽게 의미심장하게 바라보고 있는 그림입니다.
그렇습니다.
동방박사들은 아기 예수님에게 황금과 유향과 몰약을 드렸습니다. 이 세 가지 선물속에 예수님에 대한 모든 예언이 다 들어 있습니다.
예수님은 왕중에 왕이십니다.
예수님은 제사장중에 제사장이십니다.
예수님은 오직 한 분이신 메시야이십니다.
하나님은 온전하신 분이시기에 우리에게 온전하기를 기대하시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마5;48)
예수님도 온전한 분이시기에 우리에게 온전하기를 원하시고 계십니다.
<믿음의 주요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저는 그 앞에 있는 즐거움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 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히12;2)
그래서 바울은 하나님을 믿으면서 온전하여 지면서 우리에게 온전하여 지기를 권면하고 있습니다.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한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롬12;2)
우리는 온전케 될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함께 하시면 온전케 될 수 있습니다.
<모든 은혜의 하나님 곧 그리스도안에서 너희를 부르사 자기의 영원한 영광에 들어가게 하신 이가 잠간 고난을 받은 너희를 친히 온전케 하시며 굳게 하시며 강하게 하시며 터를 견고케 하시리라>(벧전5;10)
그러면 온전케 되려면 어떻게 하여야 하나요?
예수님의 말씀에서 그 해답을 찾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가 온전하고자 할 진대 가서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을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좇으라>(마19;21)
예수님은 온전하고자 하면 네 구제하라고 하였습니다. 남의 아픔을 내 아픔으로 여길 수 있는 이들이 온전한 이들입니다.
우리는 이제 1층에 까페를 개설하였습니다. 쌀을 샇아 두어야 합니다. 누가 가지고 가는 지 모르게 가지고 가게 하여야 합니다. 누가 쌀을 갖다 놓았는 지 모르게 갖다 놓아야 합니다.
옷도 그렇습니다.
까페를 통하여 지역을 섬기기로 하였습니다. 성탄절을 지내며 전도하고 도와주어야 진정으로 주님께 예물을 드리는 것이 됩니다.
소제에 사용할 수 없는 것
1. 누룩(Yeast)(2:5, 11)- 죄와 부패의 상징(고린도전서 5:6-8)
너희의 자랑하는 것이 옳지 아니하도다 적은 누룩이 온 덩어리에 퍼지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누룩 없는 자인데 새 덩어리가 되기 위하여 묵은 누룩을 내어버리라 우리의 유월절 양 곧 그리스도께서 희생이 되셨느니라.
이러므로 우리가 명절을 지키되 묵은 누룩도 말고 괴악하고 악독한 누룩도 말고 오직 순전함과 진실함의 누룩 없는 떡으로 하자 .
* 바리새인의 누룩(교훈) / 마태 8:15, 16:6, 11-12, 누가 12:1)
2. 꿀(Honey)(2:11)
- 정욕, 탐욕의 상징(잠언 25:27)
꿀을 많이 먹는 것이 좋지 못하고 자기의 영예를 구하는 것이 헛되니라.
소제의 의미
1. 삶을 영위하는 물질을 주신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에 대한 경배
2. 땅을 소유하지 않은 제사장과 레위인에게 음식을 제공하고 보호하는 것
3. 예수는 생명의 떡(요한복음 6:32-35)
4. 영원한 계약(소금)
소제의 제물
1. 고운 가루(1절) fine flour
- 한 줌을 취하여 기념물
- 남은 것(아론과 그 자손에게)
- 기름(성령), 유향(예수님의 거룩한 삶, 온유와 겸손)
2. 화덕에 구운 것(4절) baked in an oven
- 고운가루, 기름, 무교병
3. 번철에 부친 것(5절) on a griddle
- 고운가루, 누룩을 넣지 말라
4. 솥에 삶은 것(7절) cooked in a pan
- 고운 가루, 기름
5. 첫 이삭(14절) first fruits
- 볶아 찧은 것, 기름, 유향
1-3. 고운가루(맥분)로써 만드는 소제
4. 화덕에 구운 것을 드리는 때
5-6. 번철(남비)에 부친 것을 드리는 때
7. 솥에 삶은 것으로 드리는 때
8-10. 소제 드리는 법
11, 13. 누룩이나 꿀을 넣지 말고 소금을 쳐야 할 것
12, 14-16. 첫 이삭을 소제로 드리는 때(볶아 찧은 것)
번제, 소제, 화목제가 바르게 드려질 때는 향기로운 냄새가 드러납니다.
따라서 냄새 제사라고도 합니다.
소제는 겉사람을 죽여야 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은 완전한 인간이며 완전한 하나님이셨습니다.
소제는 인성을 다스려야 하는 제사라고 하겠습니다.
나의 환경, 사건, 고난은 맷돌과 같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깨어진 사람의 특징
소제
2 “누구든지 곡식으로 나 여호와에게 소제를 드리려거든 고운 밀가루를 바쳐라. 제물을 바치는 자는 그 밀가루에 감람기름을 붓고 그 위에 향을 놓아.
2 아론의
자손 제사장들에게 가져가야 할 것이며 제사장은 감람기름이 섞인 그 고운 밀가루 한 줌과 모든 향을 집어 그 제물 전체를 나
여호와에게 바쳤다는 표로 그것을 제단 위에서 불로 태워야 한다. 이것은 불로 태우는 화제이며 나 여호와를 기쁘게 하는 향기이다.
3 그 소제물의 남은 것은 아론과 그 자손들에게 주어라. 이것은 나 여호와에게 바친 화제 중에서 아주 거룩한 것이다.
4 “만일 너희가 화덕에 구운 것으로 소제를 드리려고 하면 그것은 고운 밀가루에 누룩을 넣지 않고 감람기름을 섞어 구운 빵이나 감람기름을 발라 구운 얇은 과자여야 한다.
5 만일 철판에 부친 것으로 소제를 드리려고 하면 그것은 고운 밀가루에 기름을 섞어 누룩을 넣지 말고 만든 것이어야 한다.
6 그리고 그것을 조각으로 나누어 그 위에 기름을 부어라. 이것은 곡식으로 드리는 소제이다.
7 만일 너희가 솥에 찐 빵으로 소제를 드리려고 하면 그것은 고운 밀가루에 감람기름을 섞어 만든 것이어야 한다.
8 너희는 나 여호와에게 바칠 이런 소제물들을 제사장에게 가져갈 것이며 제사장은 그것을 단으로 가지고 가서.
9 나에게 전체를 드렸다는 표로 그 일부를 단에서 불로 태워야 한다. 이것은 불로 태우는 화제이며 나 여호와를 기쁘게 하는 향기이다. 10 소제물의 남은 것은 아론과 그 자손들에게 주어라. 이것은 나 여호와에게 바친 화제 중에서 아주 거룩한 것이다.
11 “너희는 나 여호와에게 곡식으로 드리는 소제물에 누룩을 넣지 말아라. 너희가 나에게 바치는 소제물에 누룩이나 꿀을 넣어서는 안 된다.
12 누룩과 꿀은 제일 처음 추수한 예물로서 나에게 바칠 수 있으나 그것을 단에 올려 태워서는 안 된다.
13 너희는 곡식으로 드리는 모든 소제물에 소금을 쳐라. 소금은 너희와 나 사이에 맺은 계약의 상징이므로 너희 모든 예물에 이 소금을 쳐야 한다.
14 너희가 첫 이삭을 나 여호와에게 소제로 드리려거든 그것을 볶아서 찧은 다음.
15 그 위에 감람기름을 붓고 향을 얹어 바쳐라. 이것은 곡식으로 드리는 소제이다.
16 그리고 제사장은 그 모든 것을 나 여호와에게 바쳤다는 표로 찧은 곡식 일부와 감람기름 일부와 모든 향을 불로 태워야 한다. 이것은 나 여호와에게 불로 태워 바치는 화제이다.”
구원을 받은 사람도 자아 즉 인간성이 나타나므로 하나님과 동행을 방해하므로 자아의 파쇄가 필요합니다.
고운가루가 되어야 합니다.
소제는 고운가루가 되어야 하는 것이다!
2:1a. 누구든지 곡식으로 나 여호와에게 소제를 드리려거든 고운 밀가루를 바쳐라.
깨어진 사람의 특징
1. 언어가 부드럽다.
* 고집은 마귀의 역사와 같다.
2. 유향 - 주님의ㅡ 성품 온유와 겸손
1b. 제물을 바치는 자는 그 밀가루에 감람기름을 붓고 그 위에 향을 놓아.
3. 기름 -
1b. 제물을 바치는 자는 그 밀가루에 감람기름을 붓고 그 위에 향을 놓아.
내적 기름의 부음 : 반죽하기 위하여
외적 기름의 부음 : 반죽을 요리하기 위하여
가루가 된 제물에 유향이 첨가되어 향기로은 제물이 됩니다.
가루가 된 제물에 기름을 부어 가루가 덩어리로 만들어지는 것처럼 성령의 역사로 하나가 될 수 있습니다.
4. 누룩을 넣지 말라
4 “만일 너희가 화덕에 구운 것으로 소제를 드리려고 하면 그것은 고운 밀가루에 누룩을 넣지 않고 감람기름을 섞어 구운 빵이나 감람기름을 발라 구운 얇은 과자여야 한다.
누룩은 잘못된 교훈을 의미합니다.
바리새인들의 누룩을 주의하라!
예수에 대하여 잘못된 교리 즉 기독론이 잘못된 것.
이단 종파의 교주 - 정명석 하나님께서 1만명의 여자와 동침하라고 하셨다.
여학생들을 유혹하려고 영어를 가르치고 취업하기에 필수적인 과목들을 가르친 후에 인간 관계를 친밀하게 형성한 후에 드디어 교리를 드러낸다.
고린도전서 5:7-8
너희는 누룩 없는 자인데 새 덩어리가 되기 위하여 묵은 누룩을 내어버리라 우리의 유월절 양 곧 그리스도께서 희생이 되셨느니라.
이러므로 우리가 명절을 지키되 묵은 누룩도 말고 괴악하고 악독한 누룩도 말고 오직 순전함과 진실함의 누룩 없는 떡으로 하자.
마태복음 16:6
예수께서 이르시되 삼가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의 누룩을 주의하라.
사람의 본성은 누룩을 좋아한다.
귀가 솔깃하여 귀담아 듣고 마음에 담은 후에 전달하려고 한다.
* 설교의 품위를 높이려면 누룩을 넣을 것이 아니라 오직 예수로만 전해야 한다.
자아의 죽음 - 뜻, 견해, 의지
하나님의 뜻, 견해, 의지는 살아나야 합니다.
나의 뜻, 견해, 의지는 반드시 죽어야 합니다.
뜻 : will
1. 사람이나 신과 같은 존재가 어떤 일에 대해 마음속에 품고 있는 생각이나, 어떤 일을 하고자 하여 가지는 마음이나 바람.
2. 뜻이 굳다.
3. 말이나 글, 또는 단어 등이 나타내거나 가리키는 바. 의미(意味).
견해(見解) : view
1. 어떤 사물에 대한 자기의 의견이나 평가.
견해를 달리하다.
의지(意志) : meaning
1. 어떠한 일을 이루려고 하는 마음가짐. 지의(志意)
의지가 강한 사람.
2. 철학•윤리학 /
어떠한 목적을 실현하기 위해 자발적으로 의식적인 행동을 하게 하는 내적(內的) 욕구. 도덕적 가치 평가의 원인도 됨.
3. 심리학 /
생활체(生活體)가 나타내는 목적적 행동을 발생시켜, 그것을 통제하는 심적(心的) 과정. 반사적(反射的)·본능적인 행동과는 구별됨.
1-3절은 고운 가루로 드리는 소제에 대해서,
4-10절은 굽고, 부치고, 찐 것으로 드리는 소제에 대해서,
11-13절은 누룩과 꿀을 삼갈 것과 모든 소제물에 언약의 소금을
칠 것에 대해서,
14-16절은 첫 이삭을 볶아 찧은 것으로 드리는 소제에 대해서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들 말씀에 나타난
영적의미를 간략하게 살펴보겠습니다.
첫째, 소제에는 다섯 가지 예물
고운 기름 가루, 고운 기름 가루를 화덕에 구운 것, 고운 기름 가루를 번철에
부친 것, 고운 기름 가루를 솥에 찐 것, 첫 이삭 곡식을 볶아 찧은 것이 그것들입니다.
고운 가루의 상징적 의미는 그리스도를
본받아 모든 거칠고 조악한 모습을 없애고 하나님 앞과 그리스도 안에서 깨어지고 부서진 순수한 심령으로 하나님을 섬기고 봉사할 것을
말합니다.
둘째, 소제는 하나님께 향기로운 냄새로 드리는 화제
기념이 될 만큼만 불에 태우고 나머지는 제사장이 자기 몫으로 취합니다.
번제는 동물로 드리는 제사이고, 소제는 곡물가루로 드리는 제사입니다.
번제는 가죽을 벗겨 제사장이 취하고, 새의 멱통과
더러운 것은 버리고, 나머지는 전부 불태워 향기로운 냄새로 하나님께 드려지지만, 소제는 가루 한 움큼과 유향을 불살라 향기로운
냄새로 하나님께 드리고 남은 것은 제사장이 취했습니다.
또 번제는 피를 단 사면에 뿌리는 제사였지만, 소제는 곡식의 가루로 드렸기
때문에 피없는 제사였습니다.
가톨릭 학자들은 이 소제에서 성만찬의 근거를 마련하기도 합니다.
번제가 그리스도의 고난과 대속적인 죽음을 예표 했다면, 소제는 율법의 요구를 만족시키신 그리스도의 거룩한 삶을 예표
합니다.
소제물은 찬양의 제물이며 하나님께서 자비를 보여주신 데 대한 언약백성의 감사를 상징합니다.
소제물로는 최상의 것을
드렸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가진 최상의 것, 곧 우리의 몸과 마음, 우리의 재능과 학식 등의 최상의 것을 주님을 위해 바쳐야 함을
의미합니다.
셋째, 소제는 단독 제사이기보다는 다른 제사와 함께 드려지는 제사
출애굽기 29장과 민수기 15장에 설명된 내용으로
봐서 번제와 소제는 서로 연관된 제사로써 번제가 먼저 드려졌습니다.
따라서 소제는 번제를 완성시키는 제사로 볼 수 있습니다.
이처럼 ‘공물’의 의미를 지닌 소제는 일반적으로 다른 제물들과 함께 드려졌습니다.
그리고 소제는 예배자가 하나님께 드리는
선물입니다.
하나님께서 번제를 통해서 죄를 용서해 주실 것을 확증해주시고, 예배자는 소제를 통해서 하나님께 선물을 드림으로써
응답하게 됩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솔선해서 주신 한량없는 은총에 대해서 예배자가 감사의 응답으로 바치는 헌신적인 삶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넷째, 소제물은 기름과 유향을 섞어 드려야 합니다
여기서 ‘기름’은 올리브유를 말합니다.
그리고 ‘유향’은 유향나무의
수지를 건조시켜 얻은 우윳빛 향료를 말합니다.
아라비아산 수입품으로써 거룩한 관유에 섞는 향료 중 하나였습니다.
동방박사들이
예수님께 바쳤던 예물들 가운데 한 가지가 바로 이 유향이었습니다.
유향과 기름부음은 성령의 충만함과 향기라는 그리스도인의 삶을
의미합니다.
고린도후서 2:14-17
항상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서 이기게 하시고, 우리로 말미암아 각처에서
그리스도를 아는 냄새를 나타내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라. 우리는 구원 얻는 자들에게나 망하는 자들에게나 하나님 앞에서 그리스도의
향기니, 이 사람에게는 사망으로 좇아 사망에 이르는 냄새요, 저 사람에게는 생명으로 좇아 생명에 이르는 냄새라. 누가 이것을
감당하리요. 우리는 수다한 사람과 같이 하나님의 말씀을 혼잡하게 하지 아니하고, 곧 순전함으로 하나님께 받은 것 같이 하나님
앞에서와 그리스도 안에서 말하노라.
다섯째, 소제물에는 누룩과 꿀을 넣지 말아야 합니다.
누룩이 부패를 상징하고, 꿀이 쾌락을 상징하기 때문입니다.
‘누룩’에
해당하는 히브리어는 ‘하메츠,’ 곧 ‘흥분시키는 것,’ ‘날카롭게 쏘는 것’이란 의미가 있습니다.
따라서 누룩은 그 속성상
성경에서 종종 죄와 거짓 교훈, 위선과 허영을 상징하는데 쓰입니다.
‘꿀’은 벌꿀로써 발효의 성질을 가지고 있으므로 종종 누룩과
동일하게 취급됩니다.
무엇보다도 꿀은 세상적인 쾌락을 상징합니다.
우리 성도들은 이런 것들에서 벗어나 하나님 앞에 순전한 자들이
되어야 합니다.
여섯째, 소제물에는 언약의 소금을 넣어야 합니다.
13절에서 “네 모든 소제물에 소금을 치라. 네 하나님의 언약의 소금을 네
소제에 빼지 못할지니, 네 모든 예물에 소금을 드릴지니라.”
소금은 누룩과 반대로 부패를 방지합니다.
고대근동지방에서는 중요한 매매나 언약체결 시에 체결된 언약을 공고히 하기 위해서 공동식사를 했습니다.
이때 어떤 경우에도 변함없이
약속을 이행한다는 뜻으로써 상대방의 소금을 먹었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소금은 언약체결을 상징하며, 그 언약을 신실하게 지킬 것과
불변성을 상징합니다.
이것은 우리 성도들이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지표로 삼고 사회의 부패를 방지하며 유익을 끼치는 삶을 살아야할 뿐
아니라, 하나님과의 서약을 신실하게 지켜야 할 것을 교훈하는 말씀입니다.
일곱째, 번제와 마찬가지로 소제도 생활형편이 고려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형편과 처지를 참작하시는 분이심을 알 수 있습니다.
갈라디아서 2:20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I have been crucified with Christ and I no longer live, but Christ lives in me. The life I live in the body, I live by faith in the Son of God, who loved me and gave himself for me.
빌립보서 1:20-21
나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을 따라 아무 일에든지 부끄럽지 아니하고 오직 전과 같이 이제도 온전히 담대하여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히 되게 하려 하나니.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니라.
I eagerly expect and hope that I will in no way be ashamed, but will have sufficient courage so that now as always Christ will be exalted in my body, whether by life or by death.
For to me, to live is Christ and to die is gain.
고린도후서 4:10-11
우리가 항상 예수 죽인 것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도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우리 산 자가 항상 예수를 위하여 죽음에 넘기움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죽을 육체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니라.
We always carry around in our body the death of Jesus, so that the life of Jesus may also be revealed in our body.
For we who are alive are always being given over to death for Jesus' sake, so that his life may be revealed in our mortal body.
선악과를 따서 먹을 때에 죽어야 할 것이 살아났기 때문에 산 자가 되었다.
그러므로 죽어야 한다.
따라서 주님 앞으로 나오려면 반드시 산 자가 죽은 자가 되어야 한다.
선악과에 감염된 사람은 산 자가 되었으므로(자아, 육, 고집) 죽어야 한다.
산 자의 핵심은 선악과이므로 죽음은 영, 혼, 육의 죽음으로 나타난다.
영은 선악과를 먹은 즉시 죽었다.
예수를 모르기 때문
혼은 죽지 않고 살아서 몸부림을 친다.
선악과의 독성은 인간의 혼은 하나님의 뜻, 견해, 의지를 따르지 못하게 한다.
자기의 뜻, 견해, 의지를 주장한다.
고린도전서 15:31
형제들아 내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서 가진바 너희에게 대한 나의 자랑을 두고 단언하노니 나는 날마다 죽노라.
I die every day--I mean that, brothers--just as surely as I glory over you in Christ Jesus our Lord.
소제 드리는 방법
1. 세 가지 방법
소제 드리는 방법은 세 가지인데 첫 번째는 화덕에 구운 것으로 소제를 드리는 경우입니다.
이 방법은 고운 가루에 기름을 섞어
만든 무교병이나 기름 바른 무교 전병을 드리는 것입니다.
두번째는 번철에 부친 것으로 소제를 드리는 경우입니다.
이 방법은 고운
가루에 누룩을 안 넣고 기름을 섞어 조각으로 나누어 드리는 것입니다.
세번째는 고운 가루에 기름을 섞어 솥에 삶은 것을 드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 세 가지 방법 중에서 제사를 드리는 사람이 자유롭게 선택하여 드릴 수 있도록 하셨습니다.
a. 화덕의 기름(레 26:26)
b. 번철에 부친 것에 대한 규례(레 2:5)
소제 드리는 절차
모든 제사에는 절차가 매우 중요합니다.
소제물을 여호와께로 가져다가 제사장에게 줍니다.
제사장은 그것을 단으로 가져다가 기념할
것을 취하여 단 위에서 불에 태워 화제로 드립니다.
그리고 소제물의 남은 것은 제사장과 그 가족에게 주어 식물로 삼게 합니다.
a. 제사장은 하나님께서 세우심(히 5:5)
b. 여호와의 제단에서 드리는 제물(사 56:7)
소제 드릴 때의 주의 사항
소제물에 있어서 금지된 것과 반드시 넣어야 할 것이 있었습니다.
즉 누룩과 꿀은 소제물에 넣어서는 안 되는 것이었고, 반드시
넣어야 하는 것은 소금입니다.
누룩과 꿀은 부패의 속성과 전염의 성질이 있습니다.
그러나 소금은 부패와 불결로부터 벗어나서 정결한
상태가 계속 유지되는 것을 상징해 줍니다.
a. 소제를 드릴 때(레 2:7)
b. 누룩을 넣지 말라(레 6:17)
'민하'는 구약에서 광범위한 용도를 갖는다.
비제의적 본문들에서 그것은 다른 사람들에게 주는 "예물(들)"을 의미할 수
있는데, 특히 어떤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의무적으로 바쳐야 하거나 다른 사람의 호의를 얻기 위해 드리는 선물이다(예를 들어, 삼상
10:27; 창 32:14; 43:11).
그것은 또한 "어떤 나라가 그들의 통치자에게 바치는 공물"(왕상 5:1[4:21])을
지시한다.
제의적 배경에서 민하는 드리는 품목이 구체적으로 지시되지 않은 제물에 대해 사용된다.
예를 들어, 창세기
4:3-5에서 그것은 땅의 소산 중에서 드리는 제물과 가축 떼 중에서 드리는 제물에 공히 사용된다.
그러나 제의적 본문들에서
민하의 의미는 보통 제한적 의미인 "곡식 제물"이다.
이 제물을 지칭하기 위해 민하가 선택된 것은 곡식 제물이 여호와의 주권과
예배자의 생명에 대한 그분의 전적인 요구를 인식하는 가운데 드리는 예물이라는 사실을 추가적으로 지시한다.
시편
20:4에서 민하는 올라("번제")와 병행을 이룬다.
민하는 여호와께 바치는 일종의 곡식 제물을 지시하고 올라는 제단에서 태워지는
제물을 지시할 것이다(참조. H. J. Kraus, Psalmen 1-59. BKAT 15/1 [
Neukirchen-Vluyn: Neukirchener. 1978] 311).
이 두 단어는 함께 성소에서 드려지는 다양한
제물들을 수반한다.
그러나 더욱 빈번하게 민하는 전반적인 제물을 포함하는 '제바흐'와 짝을 이룬다(삼상 2:29; 3:14; 사
19:21; 암 5:25; 시 40:7). 함께 나타나는 이 두 단어가 "곡식"과 "짐승"을 의미하는 것이 가능하지만, 더욱
그럴듯한 것은 민하가 올라(번제)를 대신하는 용어라는 것이다(참조. Rendtorff, Studien. 191-192). 그렇다면
민하는 하나님께 전적으로 바치는 희생물을 지시하고, 제바흐는 절기 식사가 되는 제물들을 나타낸다. 후기 예언서인 말라기에서
민하는 일반적으로 희생물의 의미로 사용된다(1:10, 11, 13; 2:12, 13; 3:3, 4). 따라서 민하는 폭넓은
의미론적 범위를 갖는다. 그 결과 민하의 엄밀한 의미가 의심스러운 몇몇 구절들이 있다(예를 들어, 슥 3:10). 이것은 민하가 또
다른 용도로 사용된 사례다. 그것은 때로 매일 특정 시간에 바치는 제물에 대한 언급으로서 하루 중 어떤 시간을 지칭하는 문구에서
사용되기도 한다. 대체로 올라(번제)는 이러한 방식으로 사용되는데, 그러나 몇 군데에서는 저녁의 민하에 대한 언급이 있으며(왕상
18:29; 스 9:4, 5; 단 9:21), 한 군데는 아침의 민하다(왕하 3:20). 민하의 폭넓은 의미론적 범위를
고려하면, 이러한 매일 드리는 민하의 정확한 성격은 불확실하다. 그것은 동물 희생, 특히 제단에서 완전히 태우지 않는 제물을
지시하거나 혹은 가능하게는 소제(곡식제)를 지시할 수도 있다.
제의 법안에서는 민하가 일반적으로 소제물(곡식 제물)을
나타낸다. 적은 양이 제단 위에서 태워지며, 나머지는 제사장들의 몫이 된다. 그것은 거의 매번 올라(번제)를 수반하며(삿
13:15-16, 19; 왕하 16:13, 15; 렘 14:12; 대상 21:23). 또한 자주 '제바흐 쉘라밈'(화목제)도
수반한다(레 7:12-13; 민 6:17). 흔히 나싸크("전제 물" : 붓는 제물)가 소제물과 함께 드려진다(민 15:1-21;
28-29장).
일부 본문들은 독자적인 민하에 대해 말한다. 제사장의 소제(곡식제)가 6:12-16(19-23)에서
묘사된다. 이 단락은 제사장 위임식 날과 그 이후에 날마다 민하가 드려진 것을 지시하는 것처럼 보인다. 민수기 5:11-15에는
질투의 소제(민하트 키느앗: 개역 성경: 의심의 소제)에 대한 언급이 있다. 그것은 자신의 아내가 의심스럽다고 염려하는 어떤
남편이 아내의 정절을 시죄법(범죄 여부를 시험하는 의식)으로 시험해 볼 것을 요구할 때 제사장에게 가져오는 제물이다. 칠칠절에는
회중이 햇곡식의 제물을 드린다(민하 하다샤: 23:16-17; 민 28:26). 이때 또한 번제가 이에 수반되는 소제(곡식제) 및
전제와 더불어 드려진다(23:18). - WBC 레위기 주석에서 발췌
누구든지 ... 드리려거든 - 소제는 구약의 5대 제사 중 번제, 화목제 등과 더불어 제물드리는 자가 자신의 생활 형편에 따라 그 마음에 기쁜대로 자발적으로 드리는 자원제(自願祭)이다. 그러나 속죄제와 속건제는 죄사함 받기 위하여 반드시 드려야만 하는 의무제(義務祭)였다.
소제(민하) - '선물' 혹은 '공물'(貢物)이란 뜻의 '민하'는 기본적으로어떤 사람이 보다 높은 사람의 호의(favor)얻기 위하여 드리는 예물을 가리켰다(창32:21 ;43:15). 그러나 후에는 받은 호의나 은혜에 대하여 감사하는 마음을 표하기 위해 자발적으로 바치는 예물을 뜻하게 되었다(Kell). 한편 구약의 5대 제사 중 소제가 번제, 화목제. 속죄제, 속건제 등 다른 네 가지 제사와 다른 독특한 특징은 다른 4가지 제사는 동물을 희생시켜 드리는 '피 있는 제사'이나 소제만은 피 없는 '곡물제사'라는 점이다. 그리고 소제에는 두 가지 형태가 있다. 즉 번제, 화목제 등과 같은 피흘리는 제사들과 더불어 그 일부로서 함께 드려지는 소제의 경우가 있고(출 29:38,39;레23:12, 13;민 15:5-10), 또한 독자적으로 드려지는 경우가 있다. 소제는 주로 피 흘리는 제사의 부속적 제사로서 특히 번제와 더불어 드려졌으나, 본장에 나타난 소제의 경우에는 백성들이 하나님께 대해 감사와 충성을 표현할 이유를 발견했을 때, 언제든지 드릴 수 있었던 독자적인 소제에 관한 규례이다(Matthew Henry). 소제에 관한 보다 자세한 내용은(서론, 구약 제사의 종류와 의미)를 참조하라.
고운 가루(쏠레트) - 기본 동사 '쌀라'는 '흔들다'란 뜻인데, 곧 이 말은 고대 이스라엘 사람들이 고운 가루를 골라내기 위하여 빻은 가루를 흔들었기 때문인 듯하다. 한편 소제의 예물이 되는 고운 가루는, 먼저 인간과 관련되어 겉모습이 완전히 깨어진 후 순결한 심령으로 하나님을 섬기는 것을 상징하며(고후 4:10-12), 그리고 그리스도와 관련되어서는 조금도 조악(粗惡)한 데가 없는 그리스도의 순결하고 완전한 인성(人性)을 상징한다(히 4:15 ;요일 3:5).
기름을 붓고
소제 예물의 종류로는 크게 '날 것'과 '요리된 것'이 있다.
요리된 예물의 경우에는 기름을 고운
가루(밀가루)와 '섞어야' 했지만(4-7절), 요리된 제물이 아닌 경우에는 단지 기름을 '붓기만' 했다(1,15절).
한편 여기서
기름(쉐멘)은 감람나무 열매로부터 짜낸 올리브 기름을 가리키는데 영적으로 이 기름은 성령의 사역을 상징한다고 볼 수 있다(The
Preacher's Complete Homiletic Commentary).
유향을 놓아
'유향을 첨가하여'. 여기서 유향(레보나)은 감람과에 속하는 유향나무로부터 짜넨 고급 향료를
가리키는데, 이것을 첨가하는 이유는 제물이 향기를 풍기도륵 하기 위함이었다.
영적 의미에서 유향으로부터 퍼져 나오는 이 향기는
성도의 아름다운 기도나 모범적인 생활(고후 2:15), 혹은 하나님 앞에 전적 순종하신 그리스도의 향내나는 아름다운 생애를
상징한다(엡 5:2).
고운 기름 가루 한 줌
소제물에는 5가지 종류가 있다.
1. 고운 기름 가루 한 줌으로 드리는 소제
2. 화덕으로 구운 것을 드리는 소제(4절)
3. 번철에 부친것을 드리는 소제(5, 6절)
4. 솥에 삶은 것을 드리는
소제(7절)
5. 첫 이삭을 볶아 찧은 것으로 드리는 소제(14절)
'한 줌'은 손에 가득(handful)
퍼담은 양을 가리키며 (Keil, Lange), 유대 랍비들의 주장처럼 단지 손가락으로 움켜 집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기념물(*, 아즈카라).
'기억하다'란 뜻의 '자칼'(*)에서 유래한 말로, 곧 기념물이란 인간 편에서는 풍성한 소산을
허락하신 하나님의 은혜을 기억하여 드리는 제물이란 뜻이요, 하나님 편에서는 하나님께 상달되어 하나님의 기억에 남을 만한 제물이란
뜻이다(시 20:3; 행 10:4).
따라서 기념물은 순수한 '여호와의 몫'으로서 '기념의 몫' 혹은 '기억의 몫'이라고도
한다.
한편 소제물 중 '아스카라'(기념물)로 취해지지 않은 나머지 소제물은 '제사장의 몫'이 되어 아론과 그의 자손들에게
돌려졌다(서론, 구약제사의 종류와 의미).
이는 화제라 여호와께 향기로운 냄새니라
1:9,13,17에서 이미 반복된 말로, 하나님께 불살라 바쳐지는 제물이 하나님 앞에 기쁘게 상달되어진다는 의미이다.
자세한 내용은 1:9 주석을 참조하라.
제사 드리는 자가 정해진 번제 규례를 따라 자발적인 순종과 헌신의 마음으로 제사를 드릴 때, 그것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다는 뜻이다(엡 5:2; 고후 2:15; 빌 4:18).
특별히 여기서 '향기로운'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니호아흐'는 '편안한'(Commfortable), '휴식의'(restful)란 뜻이다.
즉 이것은 희생 제물이 하나님께
열납됨으로 말미암아 죄로 인한 하나님의 진노가 멈추고, 이제 안정되고 평화로운 안식의 상태가 되었다는 의미이다.
언약의 소금
소금은 부패를 방지하고 맛을 내게 할 뿐 아니라, 그 맛을 지속시키는데 절대 필요한 생활 필수품이다.
따라서
이소금은 고대로부터 계약을 체결하고 그 체결한 계약을 확증할 때 계약 당사자들이 그것을 먹음으로써 계약의 지속성과 변개치 않을
것임을 표시했던 우정과 친교, 그리고 불변성의 상징물이었다(MatthewHenry, Keil, Lange, The
Preacher's Complete Homiletic Commentary).
이러한 견지(見地)에서 살펴볼 때 하나님께서 당신께
바칠 모든 소제물에 소금을 치라고 명령한 이유는 명확하다.
즉 그것은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과 맺은 언약이 진실되고 불변할
것이라는 사실을 나타내기 위함이었다.
그리하여 백성들로 하여금 감사와 기쁨 중에그 언약을 믿고 바라며 살아가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하나님께서는 바로 이러한 사실을 소금이 갖는 속성에 반영시켜 그 백성들에게 확증시켰던 것이다.
따라서 성경은 영원히 변치 않는
확실한 언약을 가리켜 '소금 언약'(Covenant of Salt)이라고 불렀다(민 18:19; 대하 13:5).
아울러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 자신의 소제물에 소금을 치는 인간의 행위는 그 영원한 하나님의 사랑의 언약에 대해 믿음과 감사를 나타내는 신앙
고백적 행위였다.
그러므로 후일 그리스도께서도 이 '소금의 원리'로서 그리스도인의 생활 규범을 삼으셨던 것이다(마 5:13; 막
9:50).
한편 후대에 이르러 이처럼 제물에 소용되는 소금은 제단에 불을 지필 장작나무와 더불어 공동 부담으로 마련되어(스
7:20-22), 성전 뜰 소금의방에 항상 비치해 두고 있었다(Matthew Henry's Commentary).
제단의 의미
놋 제단이다.
놋 제단은 사람이 하나님께 가까이 갈 수 있도록 하는 유일한 길이다.
사람은 오직 놋 제단의 제물을 통해서만 하나님과 교통할 수 있다.
놋 제단의 첫 번째 의미는 심판이다.
사람이 사탄에 의해서 손상되었고 죄의 독을 주입받았기 때문에, 사람이 하나님께 가까이 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먼저 죄가 처리되어야 한다.
심판을 통과하는 것 말고는 죄를 처리할 수 있는 다른 길이 없다.
놋 제단에는 모든
희생 제물을 태우기 위한 불이 있으며, 제단에 입혀진 놋은 하나님의 심판을 상징한다.
하나님께 제단에 바쳐진 희생
제물을 심판하시고 그것을 불로 태우실 때마다 구속이 성취되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제단에서 하나님의 심판을 통과한 이들은 하나님에
의해 구속된 것이다.
하나님께서 구속하신 모든 사람은 결국에는 제단에 두어져야 하고 번제물로서 하나님께 바쳐져야만
한다.
주님은
성령께서 오시면 “세상을 책망하시어,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깨닫게 하실 것입니다.”(요 16:8)라고
말씀하셨다. 하나님은 십자가에서 이미 우리의 죄들을 심판하셨다. 그러므로 우리도 반드시 이 심판의 빛 안에서 우리 자신을 심판해야
한다. 우리의 생활이 반드시 심판받아야 하며, 우리의 의복도 반드시 심판받아야 한다. 우리의 가족도 반드시 심판받아야 하며
우리의 직장도 반드시 심판받아야 한다. 우리에게 속한 모든 것은 반드시 심판을 통과해야 한다.
이것은
인간 사회에 있는 칭찬이나 아첨과는 대조적이다.
복음을 듣기 위해 오는 사람에게 하나님의 교회가 반드시 말해 주어야 하는 첫
번째 말은 바로 “사랑하는 친구여, 당신은 죄인입니다!”라는 것이다.
우리의 존재와 우리가 가진 것과 우리가 하는 일은 좋든지
나쁘든지 관계없이 모두 십자가에 두어져야 하고 불태움을 통과하고 죽음에 넣어져야 한다.
이러한
심판을 통과하지 않고 놋 제단에서 심판받지 않은 사람들은 구속받을 수 없다.
심판을 통과한 모든 이는 피로 깨끗하게 되었고
구속되었다.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것은 구속받은 모든 이가 헌신하여 전제단에서 그들 자신을 바치는 것이다.
그러므로 구속의 제단은
번제단이 된다.
하나님은 그 제단에 두어진 모든 것은 완전히 얻으신다.
만일 여러분을 완전히 얻지 못하신다면 여러분은 하나님에
의해 건축될 수 없다.
하나님의 건축은 제단에서부터 시작한다는 것을 기억하라.
'예배 본다'와 '제단 쌓는다'
한국 교회가 예배 호칭에 대하여 반드시 고쳐야 할 말은 “예배 본다”라는 말과 예배 행위를“제단 쌓는다”라고 표현하는 말이다.
‘예배’라는 말의 근본적인 원리로 볼 때 ‘본다’라는 말과 결합할 수 없는 말이다.
“예배 본다”라는 말은 신학적 근거가 없을 뿐
아니라 근본적인 뜻으로도 써서는 안될 말이다.
“예배 본다”라는 말을 교회사적으로 보면 한국 교회는 1777년 가톨릭에서부터 1865년 개신교 <토마스>의 선교로
이어져 <알렌>, <언더우드>, <아펜 젤러>, <스크랜 톤> 등의 선교사들에 의하여
의료와 교육, 예배 등이 시행되면서 한국인들에게는 “경이로운 일”로 보이게 되었다.
그리고 대원군시대와 그 직후까지 종교에 대한 박해와 인명이 희생되는 사건으로 인하여 백성들은 교회 출석이나 신앙을 선뜻 가지려
하지 않고 관망하고 있을 때 먼저 교인(입교)된 신자들이 전도의 방법으로 ‘주일’ 혹은 ‘특별집회’의 “예배하는 것”이 볼만하고
재미가 있고 서양인(선교사)이 왔으니 “구경하러 가자”라는 뜻으로 “예배 보러 가자”고 한 말이, 그 후에 그렇게 전도 받은
사람들이 예배는 “보는 것”으로 알고 “예배 본다”라는 고정어를 만들게 되어 그것이 오늘에까지 관용어가 되었다.
혹자는 요
1:46에 <빌립>이 <나다나엘>을 예수님께 소개하고 인도할 마음으로 “와 보라”한 말씀이 근거가 될 수
있지 않느냐고 하는 지론(持論)을 펴기도 하나, 이는 예배에 적용될 수가 없는 억지에 불과하다. 예배는 하나님의 임재에 대한
신앙인의 영성적 반응이며 인격적 응답행위인 것으로써 “보는 것”이 될 수는 없다. 만약 “예배 본다”라는 호칭 사용을 계속
방치한다면 예배자는 ‘예배 참관자’(예배 관람자) 또는 ‘예배 구경꾼’에 지나지 않게 된다.
‘제단 쌓는다’를 ‘예배한다’로.
‘제단’이나‘쌓는다’라는 말은 구약적인 용어로서 “하나님을 만난다”는 상징성은 있으나 그리스도로부터 열려진 신약교회의 표현은
아니다.
이 “제단”이라는 말의 구약적인 의미는 “하나님의 만남의 장소”(창 25:22, 17:15)였고, 제물과 화해를 받으시던
곳이며 속죄의 장소였는데 이 말이 구약에 42회, 신약에 20여 회가 기술되고 있으나 신약에서 ‘제단’이라는 표현은 구약제단의
사상적 인용이고 실제적으로 하나님과 신약의 교인 사이에 제단이 존재하지 않았다.
원래 ‘제단’의 또 다른 의미는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달려 고귀한 희생을 치루실 것을 예표(豫表)한 곳으로서 “피 흘림이 없이는 죄사함이 없다는 사실을 선포해 주던 곳”이
제단이었다(히 9:9, 22).
그래서 예수님이 속죄의 제물이 되어 주심으로 제물도, 피흘림도, 제단도 그리스도로 완성되었다.
따라서 예수님의 십자가 속죄물이 되신 이후의 신약교회는 제단이 요구되지 않았으며, 초대 교회 교인들은 실제적으로 제단을 사용하지
않았다.
십자가상에서 완전한 제물이 되신 그리스도께서 개개인의 제단이 되셨기 때문이다(히 10:14, 18).
그러므로 오늘날 상당수의 교회가 예배 행위의 별칭으로 “제단 쌓는다”라는 말을 쓰는 것은 그리스도의 중보사상으로나 신약 교회의
예배 원리에서 보아 잘못된 것이다.
많은 교회들이 ‘바쳐야 받을 수 있다’는 이교적 발상에서 “제단 쌓는다”라는 말의 사용 사례를
보면 “신흥교단”들, “사이비 종파”, “무속풍의 기복신앙인과 지도자들”, 미신적 불건전 신비파들 등인데 이들은 가정제단,
새벽제단, 구국제단, 민족제단, 피의 제단, 불의 제단, 능력제단 등과 교회당 내의 소예배실을 ○○제단, 그리고 ○○산 제단 등의
이름을 걸고 제단이 뜻하는 바와 같이 희생을 요구하여 그 희생에 상응하는 ‘헌금’을 유인하고 여기에 복을 강조할 뿐 아니라,
성경이나 교리보다는 체험이나 개인의 은사를 더 강조하고 있다.
그러나 히 10:18 이후에는 제단은 요구되지 않고 제물이
없으므로 “쌓는다”라는 ‘제의(祭儀)적 구조’나 ‘제물의 조성’이 전혀 요구되지 않는다.
따라서 “제단 쌓는다”라는 말이 예배적
사상을 담은 표현이라면 “예배한다”로 갱신되어야 한다.
히브리서 10:18
이것을 사하셨은즉 다시 죄를 위하여 제사드릴 것이 없느니라.
제단(祭壇) altar(KJV, NASB, NIV)
요약
구약 때에는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는 단을 말하며, 신약 때에는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는 곳을 말한다.
개념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기 위한 단이다(출 20:24~25)
희생 제물을 드리는 번제단과 향을 태워 드리는 분향단이 있다(출 27:1~8)
영적 의미
육적인 제단은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는 단이며,
영적인 제단은 영적 제사인 예배(롬 12:1)를 드리는 곳이다.
즉 제단은 하나님이 계신 곳이다.
종류
번제단
- 재료: 조각목을 놋으로 싼 것이다(출 27:1~7, 출 38:1~7).
- 크기: 장이 오 규빗, 광이 오 규빗, 고는 삼 규빗으로 되어 있다(출 27:1, 출 38:1).
- 용도: 회막의 성막 문 앞에 놓고(출 40:6), 하나님께 번제물을 올려 드렸던 제사 도구이다(레 1:1~9).
분향단
- 재료: 조각목으로 단을 만들고, 그 위에 금을 둘렀다(출 30:1~5).
- 크기: 장이 일 규빗, 광이 일 규빗, 고는 이 규빗이며(출 30:2), 금단 네 모퉁이에 뿔이 있다(출 37:25~28).
- 용도: 지성소 증거궤 앞에 있는 장 밖에 두었고(출 30:6, 출 40:5), 대제사장이 홀로 일 년에 한 차례씩 속죄를 위한 제사를 올릴 때 금단에 분향한 향로의 향연으로 속죄소를 가리워 죽음(사망)을 면할 수 있었다(레 16:12~13).
시대별 제단의 의미
모세 때
초림 때
- 모세 때 드린 제사로는 죄를 사할 수 없어서(히 10:1~4), 어린 양으로 오신 예수님께서 속죄를 위해 영원한 제사 제물로 드려졌다(히 9:28, 히 10:10~14).
- 예수님과 제자들이 하나님이 함께하시는 성전과 제단이 되었다(마 3:16, 요 2:19~21).
재림 때
하나님의 제단
- 하나님을 위하여 노아(방주)는 정결한 새를 취하여 번제로 단에 드렸다(창 8:20).
- 아브라함은 하나님께 이삭을 번제로 드리기 위해 단을 쌓았다(창22:1~10).
- 하나님은 모세에게 토단과 돌로 단을 쌓아 번제와 화목제를 드리라 명하셨고, 이곳에 강림하셔서 복을 주신다고 하셨다(출 20:24~25).
이방(사단)의 제단
제단은 하느님과 만나는 장소
초대교회 때 카타콤바라는 지하묘지의 순교자 무덤 위에서 미사를 지낸 것에서 유래한다.
성당 중심이 되는 제단은 바로 그리스도를 뜻하기 때문이다.
옛날 사람들은 자연에는 신비스러운 초자연적 존재가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신적 존재가 나타날 것 같은 장소에 제단을 설치하여 신성시하였다. 따라서 제단은 일반적으로 사람들이 신에게 제사를 봉헌하고 희생을 바치는 시설이었다. 그러므로 제단은 보통 사람이 접근해서는 안 되는 신성한 장소로서 두려움과 매력을 동시에 주는 장소였다.
유다인들에게 제단은 하느님과 계약을 맺는 장소로서 중요했다. 이스라엘 백성을 이집트에서 탈출시킨 모세는 하느님에게서 십계명을 받기 위해 시나이산에 오르기 전 제단을 쌓고 희생을 바쳐서 계약 표시로 삼았다.
성서에서 최초로 언급되는 제단은 노아가 대홍수가 끝난 후 야훼 앞에 쌓은 제단이다(창세 8,20 참조). 구약시대 제단은 하느님과 인간의 결합을 나타내는 표시였다. 아브라함이 하란을 떠나 가나안 땅에 도착했을 때 야훼께서 아브라함에게 나타나 그 자손에게 이 축복된 땅을 주겠다고 하셨다. 이 말씀을 듣고 아브라함은 야훼를 위해 제단을 쌓았다(창세 12,7 참조).
이처럼 유다인들에게 제단은 희생을 바치는 장소뿐 아니라 신적 존재와 만남의 표시가 되었다. 모세도 아말렉 사람들과 전투에서 승리한 후 기념 제단을 쌓았다(출애 17,15 참조). 유다인들은 제단을 흙이나 돌로 쌓았는데, 특히 돌로 쌓을 경우에는 다듬지 않은 돌을 사용해야 했다(출애 20,25 참조). 거룩한 제단은 인간 손이 더해져 부정을 타서는 안 되고 자연 그대로 존재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이처럼 제단은 하느님과 관계를 가진다는 점에서 완전성의 상징이 되었다.
신약성서에서 제단은 실제적이라기보다 비유적 의미를 지닌다. 제단은 예수님께서 죄인들 손에 넘어가시기 전 제자들과 마지막 만찬을 나누신 식탁을 의미했다(마태 26,20-46 참조). 구약성서의 희생과는 본질적으로 완전히 다른 의미를 지닌 새로운 희생을 위한 제단이라 할 수 있다. 하느님 집인 교회 건물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도 바로 이 제단이었다. 제단의 상징적 의미는 무엇보다 최후 만찬 식탁의 모방이라는 것이다. 또 제단은 구원의 희생이 이루어진 거룩한 십자가의 상징이 되었다. 따라서 제단은 주님이신 그리스도 자신을 나타내는 것이었다.
가톨릭 교회에서 제단이라고 하면 미사성제를 거행하는 단을 말한다. 이 제단은 성당의 중심이며 성당도 이를 중심으로 건축된다. 이 제단은 주님이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신 골고타산도 의미하며 신령한 바위이신 그리스도를 의미하기도 한다. 최후 만찬 식탁을 모방한 제단은 예수의 살과 피를 나타내는 성체와 성혈을 바치는 단이 되었다. 여기에서 교회에 현존하는 그리스도의 십자가 희생이 반복된다.
보통 가톨릭 성당의 제단은 성당 전면에 설치되어 제대를 중심으로 사제와 신자가 마주보고 미사를 봉헌할 수 있도록 견고하고도 품위있게 축성된 것이다. 개신교의 제단 양식은 일정하지 않지만 최근에는 정면에 설치해서 십자가, 촛대, 꽃으로 장식하는 교회가 많아지고 있다.
03-09-2023(목)
_________________ 레위기 1장 / 번제(燔祭) 올라, burnt offering
3절. 그 예물이 소의 번제이면 흠 없는 수컷으로 회막 문에서 여호와 앞에 열납하시도록 드릴찌니라.
If the offering is a burnt offering
from the herd, he is to offer a male without defect. He must present it
at the entrance to the Tent of Meeting so that it will be acceptable to
the LORD.
1-2. 생축(가축)으로 예물 드림에 관한 지시
3-9. 소의 번제에 대하여
10-13. 양 혹은 산양의 번제에 대하여
14-17. 산비둘기 또는 집비둘기 번제에 대하여
제사의 종류는 " 번제(燔祭), 소제(素祭), 화목제(和睦祭), 속죄제(贖罪祭), 속건제(贖愆祭)" 다섯 가지로 구분합니다.
그리고 제사를 드리는 방식에 따라 "화제(火祭), 요제(搖祭), 거제(擧祭), 전제(奠祭)"로 설명합니다.
전제를 다른 말로 "관제(灌祭)" 라고도 합니다.
번제(燔祭. 올라, burnt offering)의 의미는 "하나님 향한 기쁨의 봉헌" 및 "전적인 헌신의 제사"를 말합니다.
번제를
뜻하는 히브리어 ‘올라'는 ‘올라가다’, ‘실어 올리다’, ‘높이다’라는 뜻의 ‘아라'에서 파생된 것으로서 ‘위로
드려지는 제사’, ‘위로 올라가는 제사’를 말하며, 불에 태워진 희생 제물의 향기가 하나님께 상달된다는
의미를 포함합니다.
번제의 방법
1. 헌제자가 제물이 될 짐승을 끌고 회막문 여호와 앞으로 나아온다.
2. 헌제자의 손을 제물의 머리 위에 얹고 안수한다.
3. 헌제자가 제물을 잡아 피를 제사장에게 주면 제사장은 그 피를 번제단 사면에 뿌린다.
4. 헌제자가 제물의 가죽을 벗기고 각을 뜬다.
5. 제사장은 그 뜬 각과 머리와 기름, 그리고 물로 씻은 내장과 정강이를 단 위에서 불 사른다.
이러한 방법은 양과 염소의 경우 역시 마찬가지였으나 비둘기의 경우는 달라서 제사장 혼자서 머리를 비틀어 끊고 단 위에 불사르며 피는 단 곁에 흘리고 멱통과 창자 등은 재 버리는 곳에 버리고 몸은 쪼개어 단 위에서 불살랐습니다.
첫번째는 ‘속죄를 위한 것'(레 1:4, 16:24)
대부분의 주석가들이 속죄제와 속건제가 죄를 속하기 위해 드려지는 제사라는 점을 들어 이 목적을 등한시 여기거나 그냥 지나쳐 버리려 하지만 번제의 주된 목적은 성경이 밝히 말해 주고 있는 대로 ‘속죄를 위한 것’입니다.
두번째는 ‘하나님을 향한 자신의 헌신에 대한 표현’
창세기 22장에 소개된 아브라함의 순종에서 잘 나타납니다.
그는 자신의 순종과 믿음의 증명을 위해 자신의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바치려 하였고, 그러한 믿음과 순종을 인정하신 여호와께서는 그를 위해 미리 준비해 놓으신 양을 제물로 삼아 번제를 드리게 하심으로 아브라함의 헌신과 믿음을 인정하셨습니다(여호와 이레).
사랑하는 믿음의 동지들이여
매일같이 번제를 드리는 믿음으로 삶의 현장에서 복음의 전령으로 승리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레위기의 5대 제사와 번제에 대한 이해
레위기는
여호와께 드려야 할 5 대 제사의 규례로서 시작된다.
그런데 이러한 레위기의 시작은 당연한 귀결이었다.
왜냐하면 건축된
성막의(출 40:17) 주된 목적이 제사였고, 따라서 성막이 완성된 지금 그곳에서 드려질 제사의 규례가 주어지는 것은 당연한 논리요
순서이기 때문이다.
번제를
뜻하는 히브리어 ‘올라'는 ‘올라가다’, ‘실어 올리다’, ‘높이다’라는 뜻의 ‘아라'에서 파생된 것으로서 ‘위로
드려지는 제사’, ‘위로 올라가는 제사’를 뜻한다.
이러한 단어의 의미는 불에 태워진 희생 제물의 향기가 하나님께 상달된다는
의미를 포함하고 있다.
번제에 사용된 제물은 수송아지, 수양, 수염소, 혹은 비둘기인데, 이 모든 제물은 반드시 흠없고 일년 된 수컷임을 그 특징으로 하였으나 비둘기에 대해서만은 수컷이나 암컷 중 어느 것을 드리라는 특별한 지시가 없다.
번제의 방법헌제자가 제물이 될 짐승을 끌고 회막문 여호와 앞으로 나아온다.
헌제자의 손을 제물의 머리 위에 얹고 안수한다.
헌제자가 제물을 잡아 피를 제사장에게 주면 제사장은 그 피를 번제단 사면에 뿌린다.
헌제자가 제물의 가죽을 벗기고 각을 뜬다.
제사장은 그 뜬 각과 머리와 기름, 그리고 물로 씻은 내장과 정강이를 단 위에서 불 사른다.
이러한 방법은 양과 염소의 경우 역시 마찬가지였으나 비둘기의 경우는 달라서 제사장 혼자서 머리를 비틀어 끊고 단 위에 불사르며 피는 단 곁에 흘리고 멱통과 창자 등은 재 버리는 곳에 버리고 몸은 쪼개어 단 위에서 불살랐다.
번제의 목적은 두 가지로 나타난다.
첫번째는 ‘속죄를 위한 것'(레 1:4, 16:24)인데 대부분의 주석가들이 속죄제와 속건제가 죄를 속하기 위해 드려지는 제사라는 점을 들어 이 목적을 등한시 여기거나 그냥 지나쳐 버리려 하지만 번제의 주된 목적은 성경이 밝히 말해 주고 있는 대로 ‘속죄를 위한 것’이다.두번째는 ‘하나님을 향한 자신의 헌신에 대한 표현’이다.
이러한 목적은 창세기 22장에 나오는 아브라함의 순종에서 잘 나타나는데 그는 자신의 순종과 믿음의 증명을 위해 자신의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바치려 하였고, 그러한 믿음과 순종을 인정하신 여호와께서는 그를 위해 미리 준비해 놓으신 양을 제물로 삼아 번제를 드리게 하심으로 아브라함의 헌신과 믿음을 인정하셨다.
회막(會幕) 4150(회), 168(막) 오헬 모에드
4150. מוֹעֵד
어원 / 3259에서 유래
관련 성경 /계절(창1:14), 기한(삼상13:8, 시102:13), 때(출23:15, 수8:14, 습3:18), 회막(출27:21, 레24:3, 왕상8:4), 성막(출35:21, 40:2), 회막문(출40:12, 민16:18, 27:2), 성회(레23:2,37, 겔46:11), 절기(레23:37, 민29:39, 대하8:13, 호2:11), 절기제(민15:3), 회중(민16:2, 시74: 4),시기(민28:2, 렘46:17), 군호(삿20:38), 날(삼상13:11), 시간(삼상20:35), 한 해(왕하4:16),회당(시74:8), 기약(시75:2), 절기의 날(애2:7, 호9:5). [동] 돌아오다(왕하4:17), 정하다(욥30:23, 시104:19).
구약 성경 / 223회 사용
* 3259. יָעַד
관련 성경 / 상관하지 아니하다(출21:8), 정하다(렘47:7, 미6:9), 주다(출21:9), 만나다(출25:22,29:42, 느6:2), 모이다(민10:3, 왕상8:5, 시48:4), 뜻이 같다(암3:3), 가다(느6:10), 서로약속하다(욥2:11), 거역하다(민14:35), 소환하다(욥9:19), 다투다(렘49:19, 50:44), 놓이다(렘24:1)
구약 성경 / 29회 사용
168. אֹהֶל
발음 / 오헬(’ôhel)
어원 / 166에서 유래
관련 성경 / 장막(창4:20, 출16:16, 대하1:4), 성막(출 26:36, 왕상1:39), 막(출26:12, 14, 36:19), 회막(출30:16, 레1:1, 민4:3), 천막(대하14:15, 렘 4:20), 성전(겔41:1). 집(삿19:9).
구약 성경 / 345회 사용
* 166. אָהַל
관련 성경 / 빛나다(욥 25:5)
구약 성경 / 4회 사용
예물(禮物) 7133 קָרְבָּן
발음 / 고르반(qorbân)
어원 / 7126에서 유래, 연계형 :קָרְבַּן
관련 성경 / 예물(레 1:2, 27:9, 민 5:15), 제물(레 4:32, 겔 20:28), 희생(겔 40:43)
[동] 드리다(레 2:12, 느 10:34)
구약 성경 / 80회 사용
* 7126. קָרַב
레위기 1-7장은 다양한 종류의 제사들에 대한 규정을 기록하고 있다.
크게 1-5장과 6-7장으로 다시 나눌 수 있는데 먼저 1-5장에서 제사는 다음의 순서로 기록되어 있다.
번제(1장)
소제(2장)
화목제(3장)
속죄제(4:1-5:13)
속건제(5:14-6:7)
그리고 6-7장에서는 다음과 같은 순서로 기록되어 있다.
번제(6:8-13)
소제(6:14-18)
위임식에서의 소제(6:19-23)
속죄제(6:24-30)
속건제(7:1-10)
화목제(7:11-21, 28-34)
1-5장은 교훈적인 목적을 위해 기록되었고,
6-7장은 집행상의 세부 사항을 묘사하기 위해 기록되었다고 볼 수 있다.
1-5장은 또다시 두 부분으로 나눌 수 있는데,
1-3장은 여호와께 향기로운 냄새(레아흐 니호아흐 라도나이)로 드려지는
희생들에 대한 내용이다
(번제 - 올라, 소제 - 민하, 화목제 - 제바흐 쉘라밈).
4-5장은 특정한 죄들을
대속하는(카파르) 제사들이다(속죄제 - 하타트, 속건제 - 아샴).
속죄제는 희생을 드리도록 요구된 사람의 신분에 따라, 속건제는
범죄의 성격에 따라 규정이 주어진다.
누구든지 죄를 지은 사람은 언약 공동체의 일원으로 남기 위해 반드시 제사를 드려야 했다.
6-7장은 희생제사에 대한 세부 사항들을 기록하고 있다.
희생제물의 거룩성과 남은 부분들의 처리에 대한 부분을 다루고 있다.
제사장들이 받는 부분에 대해서도 기록되어 있다.
여호와
이 신(神)명칭은 레위기 전반을 통해 사용되고 있다.
그것은 레위기가 특별히 언약의 백성이자 선민인 이스라엘
백성의 거룩과 성결에 대해 취급하고 있는 책이기 때문이다. 즉 '언약의 하나님', '구속주 하나님'이라는 뜻을 가진 '여호와'란
신명칭은 특별히 '언약의 백성'과 관련하여 사용되어지는 신명칭인 만큼 레위기의 주제 및 내용에 합당하게 적절히 사용되어지고 있는
것이다(Lange).
회막(오헬 모에드)
'만남의 천막'이란 뜻으로 특별히 회막(會幕)이란 용어는 하나님과 언약 백성 간의 만남의
장소로서의 기능을 강조한 말이다.
실로 하나님께서는 이 '회막'을 통하여 인간들 사이에 최초로 거주하셨고, 또한 인간들과
만나셨다. 특히 여기서 회막을 통하여 인간들 사이에 거주하신 하나님의 거주는 장차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신'(요
1:14)
그리스도의 거주를 예표한다(The Preacher's Complite Homiletic Commentary).
한편 이
말이 성경 다른 곳에서는 성막(출 26:9), 증거막(출 38:21), 법막(대하 24:6), 여호와의 전(출 23:19),
여호와의 장막(왕상 2:28)등으로도 표기된다.
또한 모세가 바로 직전에 시내 산 아랫자락에 회막을 세웠기 때문에(출
40:34-37) 모세가 여호와의 말씀을 들으러 더 이상 시내 산을 등정할 필요가 없게 되었고, 회막에서 여호와와 직접적인 교통을
하여 이 규정들을 받았다고 할 수 있다.
부르시고(와이크라)
직역하면 '그리고 그가 부르시고'란 의미인데 히브리 성경에서는 이 말이 첫 단어로 나온다.
아울러 '와이크라'란 단어는 각 성경의 첫 단어를 대체적으로 그 책의 제목으로 삼던 히브리인들의 관례를 따라 본서의 히브리 성경의
제목으로도 사용된 말이다.
특별히 이 단어에서 '그리고'(and)란 뜻을 지닌 '와'(*)는 의미상 출 40:33절에 이어지는
접속사로서 본서가 출애굽기의 후편임을 강력히 시사한다.
또한 '부르시고'에 해당하는 '이크라'는 특별한 임무를 부여할 때나 중요한
사항을 전달하고자 할때(출 3:4; 19:3) 주로 사용되는 동사로서 부름받는 자의 적극적이고 구체적인 반응을 구하는 동사이다.
일러 가라사대
자기 백성에 대한 왕의 자격으로서, 더 나아가 그들의 죄를 속(贖)해 주시는 구속주의 자격으로서 택함 받은 백성이 마땅히 지켜 행해야 할 생명의 법도를 지금 선포하시는 것이다.
레위기는 결코 쉬운 성경이 아니다.
제사 자체가 낯설고 특이하다.
또한
구약 전반을 연구하면 레위기에 나타난 제사들이 특징들이 섞여 있거나 명확하게 구분되지 않은 경우가 대부분이다.
많은 경우 한 번
제사 지낼 때 번제와 화목제, 화목제와 속죄제를 함께 드리는 경우가 흔하다.
그렇기 때문에 각 제사가 어떤 의미를 갖는지 이해하는
것이 어렵다.
구약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레위기의 제사법에 대한 명확한 이해가 선행되어야 한다.
1. 번제(Burnt Offering)
2. 소제(Grain Offering)
3. 화목제(Fellowship Offering)
4. 속죄제(Sin Offering)
5. 속건제(Guilt Offer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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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제는 하나님 향한 기쁨의 봉헌이자 전적인 헌신의 제사
공적 행사에서 기본 제사로 드려 차별없음이 번제의 정신이었다
요아킴은 하나님께 감사의 마음으로 충만하여 자신의 가축 중에 양 한 마리를 하나님께 바치기로 결심했다.
그는 평소 상품의 물건으로 찜해 둔 녀석을 골라 몸 상태를 잘 살핀 후 아무런 흠이 없다는 것을 확인하고 성소로 가져갔다.
성소에는 이미 많은 사람들이 다양한 목적으로 크고 작은 짐승을 바치려고 올라와 있었고 제사장들은 제사를 집행하느라 분주했다.
제단은 피로 흥건히 얼룩져 있었고, 제단 주변에는 짐승의 흘린 피 자국들이 여기저기 보였다.
잠시 기다리다 자신의 순서가 되자 요아킴은 양을 끌고 자신의 번제를 담당할 제사장 앞에 섰다.
제사장은 양의 몸을 다시 면밀히 검사하여 흠이 있는지 살폈다.
합격 판정이 내려지자 요아킴의 번제 바치기가 시작되었다.
그는 제사장이 보는 앞에서 자신의 손을 양의 머리에 얹고서 이 번제를 통해 비천한 자신을 받아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하고 왜 이 번제를 바치는지 말씀드렸다.
그는 시편의 감사시를 낭송하여 부르면서 하나님께 찬송을 올린 뒤 도살용 칼로 그 짐승의 고통이 최대한 빨리 끝나도록 목의 급소를 찔러 짐승을 도살했다.
요아킴과 제사장은 번제의 절차를 따라 신중히 그 제물을 마지막 순서까지 무사히 잘 드렸고 정성을 다해 바친 제사는 하나님께서 기쁘게 받으신다는 약속을 기억했다.
요아킴은 기쁨으로 충만하여 집으로 돌아왔다.
하나님의 은혜가 집안에도 가득히 들어차 있음이 느껴졌다.
요아킴은 매일 자신이 받은 축복을 감사하며 지냈고 어려운 시기가 닥칠 때에는 번제를 드린 순간의 결심과 감격을 기억하면서 하나님을 더욱 의지하며 인내했다.
명칭에서 살펴 본 번제의 의미
요아킴이 드린 제물은 번제였다.
이때 그 제물은 전체를 모두 제단 위에 올려서 태웠다.
번제는 우리말로 ‘태우는 제사’를 뜻하며 대부분의 영어 성경들에서도 마찬가지로 ‘the burnt offering’이다.
그러나 번제의 히브리어 ‘올라’(ola)는 단순히 ‘올리는 것’이다.
이것은 ‘올라가다’는 의미를 지닌 동사 ‘알라’(ala)에서 기원한 명사다.
번제의 이름 ‘올라’는 우연하게도 우리 말 ‘올라가다’와 발음이 일치한다.
이런 이름이 의미하는 바는 번제의 짐승의 모든 부위가 제단 위에 ‘올려 바쳐져’ 불에 타면서 짐승 전체가 연기되어 향기로 하나님께 ‘올라가기’ 때문이다.
그래서 전체를 태워 드린다는 의미를 반영하여 어떤 영어 성경들은 ‘전번제’(whole burnt offering)로 번역하기도 한다.
▲ 번제를 드리기 위해 양과 염소, 또는 소의 가죽은 벗겨지고 몸 안의 오물들이 제거됐다.
또 가죽을 제외하고는 모두 불태웠다.
번제는 이처럼 누구나 드릴 수 있었지만 드리는 자의 전적인 헌신을 필요로 했다.
번제의 특징
희생 짐승은 마당의 제단 근처에서 잡는데, 작은 가축인 양과 염소의 경우 “제단 북편”으로 도살 장소가 정확히 명시된다(레 1:11).
그러나 대형 가축인 소의 경우 위치가 정해지지 않는데, 아마 그 이유는 힘이 세고 덩치가 큰 소를 통제하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번제는 가죽을 제외하고 다 태운다.
가죽은 제사장의 수고비로 돌아간다(레 7:8).
가죽을 벗기는 행위에 옛사람을 벗어버리고 속사람의 온전한 헌신을 상징한다는 의미를 부여하기도 하지만, 실은 가죽의 특성상 잘 타지 않고 다른 부위도 덩달아 잘 타지 않게 되며 또한 향기로운 냄새가 아닌 악취를 풍기기 때문에 가죽을 벗겼을 것이다.
가죽을 벗겨내고 짐승으로부터 더러운 똥와 오물들을 다 깨끗하게 제거한 뒤 모든 부위를 다 드렸다(레 1:9):
몸통, 머리, 정강이, 창자. 번제는 다른 제사들과 달리 인간의 몫이 없이 모두 하나님께 태워져 바쳐진 이유로 랍비들은 번제가 다른 희생 제사들보다 우월했다고 설명한다.
그러나 적어도 감사의 목적으로 바친 목축하는 사람의 짐승의 번제와 농사꾼의 곡식의 소제 사이에 우열이 있었다고 보기는 어렵다.
그럼에도 번제가 가장 중요했던 이유는 가장 기본적인 감사와 헌신의 제사였기 때문일 것이다.
드리는 때
오대 제사중 처음 세 가지, 번제와 소제, 그리고 화목제는 자발적인 제사로 ‘감사’가 그 기본적 동기라 할 수 있다.
물론 각 제사의 용도는 그 외에도 다양했다. 예
를 들어 소제의 제물은 감사의 예물로만 바치지 않고 가장 가난한 사람을 위한 속죄제로 바쳐질 수 있었다.
번제 또한 자신의 비뚤어진 마음을 회개하는 마음으로 드릴 수 있었고 중대한 일을 앞두고 하나님의 도움을 구하고자 바치기도 했으나 기본적으로 번제의 취지는 “감사와 봉헌”이었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번제는 누구나 자신이 원하는 때에 성전에 올라가 번제를 드릴 수 있었다.
성경에는 노아가 홍수 후에 감사의 번제를 드릴 때 처음 등장한다(창 8:20).
여호와께서는 그 번제의 향기를 받으시고 다시는 사람의 악한 본성으로 인해 물로 땅을 심판하지 않으시겠다고 약속하신다(창 8:21; 9:11).
이처럼 번제에는 하나님의 진노를 완화하고 태도를 바꾸시게 하는 기능이 있었다.
어린 양을 바친 아벨의 제사 역시 번제의 속성을 가졌다(창 4:2~4).
성경 신학적 관점에서 볼 때 아담이 타락한 이후 하나님께서 그에게 가르쳐주신 제사법이 후손에게 전수된 것이 번제가 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특히 번제에 드린 짐승의 가죽이 제사장에게 돌아간 것은 에덴에서 아담과 이브에게 가죽옷을 입혔던 것을 연상시킨다(창 3:21).
이것은 분명 신학적 암시를 담은 구절이다.
에덴이 일종의 성전이었다고 가정하면 아담은 그 성전을 관리하는 제사장이었을 것이다.
따라서 아담이 최초로 번제 드리는 법을 전수받은 인물이라는 추론이 가능하다.
성경에서 번제는 대부분 공적인 행사에서 기본 제사로 드려진다.
의외로 지극히 사적인 번제는 구약성경에서 드물다. 몇 가지 예를 살펴보자면 하나님께 감사와 기쁨을 표시하기 위해
아낌없이 모두 드릴 때(삼상 6:13~14),
완전한 헌신을 다짐할 때(창 22:2; 삿 11:31),
고난 중에 하나님께 탄원하며 의지하고자 할 때(삿 21:2~4; 미 6:6) 번제를 바쳤다.
때로는 서원을 이행하기 위해 화목제와 더불어(레 7) 번제를 함께 올리기도 했다(레 22:18).
그러나 번제를 의무적으로 바치는 경우도 있었다.
크게 다음 세 가지 경우가 이에 해당된다.
a. 상번제 :
상번제란 항상 드리는 번제를 의미한다.
매일 아침저녁으로 제사장이 일년 생 숫양을 드리곤 했는데(민 28:3~4) 아마 이스라엘 백성들도 아침에는 처소에서, 저녁에는 각자의 일터에서 마음으로나마 번제에 동참했을 것이다.
b. 안식일과 절기 :
상번제 외에 안식일에는 소제와 전제와 더불어 일년 생 숫양 두 마리를 함께 드렸다(민 28:9).
절기마다 번제에 요구되는 짐승과 그 숫자가 달랐다(민 28~29장 외).
c. 기타 :
경우에 따라 속죄제를 드릴 때 번제가 요구되기도 했다.
일례로 레위기 12장에서 산모가 아이를 낳으면 부정해졌는데 이때 그녀는 일정 기간의 자연 정화 과정을 거친 뒤 성전에서 속죄제와 더불어 번제를 바쳐야 했다.
그 외에도 다시 정결한 상태를 회복하기 위해 흔히 속죄제와 번제를 함께 드렸으며(레 14:13; 15:15), 나실인 서약을 할 때도 속죄제 및 화목제와 더불어 번제가 요구되었다(민 6장).
출산한 여인의 경우 속죄제는 부정결한 산혈로 인한 제단의 오염을 씻어내기 위해 바쳐지나 번제에는 자녀를 얻은 것에 대한 감사의 의미가 담겨있을 것이다.
부정한 자를 깨끗케 하는 속죄제에 번제가 동반되는 것도 다시 정결해진 것을 감사하기 위해서일 수 있다.
기능과 목적
번제의 일차적 목적은 감사로 드리는 헌신과 봉헌이다.
여호와께 제사를 드리면 그분이 기쁘게 받으신다는 진술이 그 증거다(레 1:2~3).
즉 번제는 여호와께 전적인 기쁨이 되는 제사다.
아브라함에게 독자 이삭을 번제로 바치라 하신 하나님의 요구는 곧 아브라함의 완전한 섬김과 헌신을 확인하기 위함이었다(창 22:2).
자주 번제는 감사의 표시로 하나님께 바쳤다.
모세의 장인 이드로의 사례에서 볼 수 있듯이, 이때 화목제가 동반될 수 있는데 번제는 전적으로 하나님께 감사의 제물로 드리고 화목제는 사람들을 초청해 그 고기를 먹으며 감사와 기쁨을 나누었다(출 18:9~10).
제물에는 제물을 바치는 사람의 마음이 담겨있어야 한다.
정성스러운 번제를 바치면 하나님께서 ‘그를 기쁘게 받으신다’고 말한다.
미드라쉬 레위기 주석에서 랍비들은 희생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하나님께 올리는 희생 제물은 부서진 마음이다;
오 하나님, 부서지고 회개한 마음을 멸시하지 마소서.”
번제에 의한 속죄는 전적인 헌신의 표시에 뒤따른 부수적 효과라 할 수 있다(레 1:4):
“그를 위하여 속죄가 될 것이라.”
여기서 한 가지 질문이 발생한다.
이미 죄를 위한 속죄제와 속건제라는 제사가 별도로 존재하는데 그렇다면 번제는 이런 제사들과 어떤 기능적 차이가 있는가?
속죄제·속건제는 쌍둥이 제사로서 구체적인 죄의 문제를 다룬다.
그렇다면 번제를 드린 목적은 인간의 기본적 죄성(sinfulness), 즉 원죄의 속죄를 위해서일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가 단번에 모든 죄를 영원히 속죄하시기 전까지는 원죄 역시 거듭해서 속죄해야 할 대상 중 하나였다.
레위기에서 속죄제·속건제가 신설되기 전에는 죄를 용서받기 위해 번제를 드렸다는 사실은 매우 중요하다(욥 1:5).
즉 번제는 본래 구체적인 죄를 용서받기 위해 드리는 제사이기도 했으나 속죄제·속건제가 생긴 이후로는 원죄를 속죄하는 제한적 기능만을 수행하게 되었다고 볼 수 있다(참조. Milgrom 1991: 175~176).
물론 레위기에서 제사법이 제정된 이후에도 잘못을 저지른 뒤 하나님의 진노를 누그러뜨리기 위해 번제를 드리는 경우가 있었다.
예컨대 다윗이 자신의 군사력을 과시하려는 야욕에서 인구조사를 벌이자 그 결과가 하나님의 재앙이 임하여 많은 백성들이 희생되었다. 다윗이 황급히 번제와 화목제를 드리자 하나님의 진노가 가라앉고, 재앙이 멎었다(삼하 24:25; 대상 21:26).
자기 의를 드러내는 교만은 인간의 원죄의 근원적 뿌리다.
따라서 번제는 원래 하나님께 기쁨의 표시로 바쳐지곤 했지만 때로는 자신의 죄된 본성을 용서받고 욥처럼 부지불식간에 저지른 죄를 사함받기 위해 드리기도 했을 것이다.
그러나 많은 경우 번제는 하나님을 향한 기쁨의 봉헌물이자 감사의 표시로서 전적인 헌신과 아낌없는 드림을 보여주는 제사였다.
번제의 종류와 비둘기 번제가 주는 의미
번제의 짐승은 다음과 같이 등급이 나뉘었다.
본문에 구체적으로 명시되지는 않았지만 형편이 어려운 사람에게는 새나 곡식을 바치는 것을 허용했다는 사실에서(레 5:7, 11) 신분과 경제력에 따라 각기 다른 등급의 제물이 권장되었을 것으로 추정해볼 수 있다.
여기서 반드시 명심해야 할 점은 제물의 크기나 종류와 상관없이 번제의 효력은 동일했다는 사실이다.
9절과 13절, 그리고 17절 끝에서 소와 염소/양, 그리고 비둘기의 번제 각각의 효과에 대한 최종적 진술이 나타난다:
“이는 화제라 여호와께 향기로운 냄새니라.”
소와 비둘기의 크기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크게 차이가 나지만, 여호와는 모든 제물을 동등하게 평가하셨다.
겉모양과 크기를 보는 사람과 달리 하나님께서는 중심과 태도를 보시기 때문이다.
신약에는 두 렙돈 밖에 바치지 못하는 과부의 헌금에도 동일한 정신이 깃들어 있다는 대목이 있다(막 12장; 눅 21장).
번제의 정신은 차별 없는 제사에 있다.
누구에게나 여호와 앞에 나와 예배할 자격이 있다.
따라서 교회 안에 신분이나 빈부, 인종, 지역에 따른 차별이 존재해서는 안 된다.
레위기 1 Korean Living Bible
번제
1 여호와께서는 성막에서 모세를 불러 이스라엘 백성에게 다음과 같은 명령을 전하라고 말씀하셨다.
2 “너희 중에 누구든지 나 여호와에게 제물을 드리고자 하거든 너희 가축 중에서 소나 양을 바쳐라.
3 “만일 그 제물이 소를 잡아 불로 태워 바치는 번제라면 흠 없는 수소로 하고 내가 기쁘게 받을 수 있도록 그것을 성막 입구 나 여호와 앞에서 바쳐라.
4 제물을 바치는 자가 번제물의 머리에 손을 얹으면 내가 그것을 그의 죄를 대신 속죄하는 희생의 제물로 받을 것이다.
5 그는 나 여호와 앞에서 그 수송아지를 잡고 아론 자손의 제사장들은 그 피를 가져다가 성막 앞에 있는 제단 사면에 뿌려야 한다.
6 그리고 그는 그 제물의 가죽을 벗기고 각을 뜰 것이며
7 제사장 아론의 자손들은 제단 위에 불을 놓고 그 불 위에 나무를 벌여놓은 다음
8 머리와 기름을 포함하여 그 각 뜬 제물을 단의 불붙는 나무 위에 벌여놓아야 한다.
9 그리고 그 사람은 내장과 다리를 물로 씻을 것이며 제사장은 그 모든 제물을 단 위에서 불로 태워야 한다. 이것은 불로 태우는 화제이며 [a]나 여호와를 기쁘게 하는 향기이다.
10 “만일 그 제물이 양이나 염소를 잡아 불로 태워 바치는 번제라면 그것은 흠 없는 수컷이어야 한다.
11 그 제물을 가지고 온 사람은 나 여호와 앞 제단 북쪽에서 그 짐승을 잡아야 하며 아론의 자손 제사장들은 그 피를 단 사면에 뿌려야 한다.
12 그리고 그는 그 짐승의 각을 뜨고 제사장들은 머리와 기름을 포함하여 각 뜬 그 제물을 단의 불붙는 나무 위에 벌여놓아야 한다.
13 또 그 사람은 내장과 다리를 물로 씻어야 하며 제사장은 그 모든 제물을 단 위에서 불로 태워야 한다. 이것은 불로 태우는 화제이며 나 여호와를 기쁘게 하는 향기이다.
14 “만일 나 여호와에게 드리는 제물이 새를 불로 태워 바치는 번제이면 그것은 산비둘기나 집비둘기 새끼여야 한다.
15 제사장은 그것을 단으로 가지고 가서 목을 비틀어 끊고 그 머리를 단 위에서 불태우고 그 피를 단 곁에 흘릴 것이며
16 멱통과 내장은 제거하여 제단 동쪽의 재 버리는 곳에 던져야 한다.
17 그리고 그는 그 새의 날개를 잡고 몸을 완전히 떼어내지 말고 찢어서 그것을 단의 불붙는 나무 위에서 태워야 한다. 이것은 불로 태우는 화제이며 나 여호와를 기쁘게 하는 향기이다.”
Footnotes
- 1:9 또는 ‘여호와께 향기로운 냄새니라’
Q. 소의 번제로 드릴 경우, 어떤 소를 드려야 했나요?(3)
A. 흠 없는 수컷
Q. 왜 하나님은 암컷이 아니라 수컷을 드리라고 하셨을까요?
A. 수컷은 암컷을 대표하기 때문[QA성경]
학교에서 반장은 반학생을 대표한다.
마찬가지로 남성은 여성을 대표한다.
남성이 우월하거나 여성이 열등하다는 뜻은 아니다.
Q. 제물을 드리는 사람은 소를 어디에서 드리라고 하셨나요?(3)
A. 회막 문에서
Q. 4절 “그는 머리에 안수할지니”에서 그는 제사장을 가리킬까요? 제물 드리는 사람을 가리킬까요?
A. 제물 드리는 사람
Q. 제물을 드리는 사람은 회막 문에서 번제물인 소의 머리에 안수를 합니다. 안수는 무슨 뜻인가요?
A. 손을 머리에 얹고 기도하는 것
Q. 제물을 드리는 사람은 안수할 때 무슨 기도를 했을까요?
A. 자기의 죄와 허물을 고백하는 기도.
* 안수에는 제물을 드리는 사람의 죄가 번제물인 짐승에게 옮겨진다는 의미가 담겨 있다.
Q. 제사자가 번제물의 머리에 안수하면, 어떻게 된다고 말씀하시나요?(3)
A. 그(제사자)를 위하여 기쁘게 받으심이 되어 그(제사자)를 위하여 속죄가 될 것이라
** 속죄란 죄에 대해 값을 치르고 없애는 것이다. 제사자는 번제물인 짐승을 자기 죄의 값으로 지불하여 죄를 해결한다.
Q. 여호와 앞에서 그 수송아지를 잡는(죽이는) 사람은 제사장과 제물 드리는 사람 중 누구일까요?(5)
A. 제물 드리는 사람
** 수송아지를 잡는다는 것은 짐승의 목숨을 끊는 행위를 말한다. 제물 드리는 사람은 번제물의 목덜미를 칼로 그어 죽였다.
Q. 제물을 드리는 사람이 자기 죄를 위해 산 짐승을 죽일 때 어떤 기분이나 생각이 들었을까요?
A. 다양한 대답이 가능하다.
** 자기 죄 때문에 짐승이 피 흘리는 모습을 보면서 짐승을 불쌍하게 생각했을 것이고, 죄의 심각성을 깨달았을 것이다.
Q. 제사장들은 짐승의 목덜미에서 흘러나오는 피를 어떻게 했나요?(5)
A. 그 피를 가져다가 회막 문 앞 제단 사방에 뿌릴 것이며.
** 피를 그릇에 담아서 번제단 사면에 부었다.
Q. 번제물의 가죽을 벗기고 각을 뜨는 것은 제사장과 제물 드리는 사람 중 누가 했을까요?(6)
A. 제물 드리는 사람
** 각을 뜨는 것은 죽인 짐승을 머리, 몸통, 다리 등으로 잘라 나누는 것을 말한다.
Q. 번제단 위 나무를 준비하고 각 뜬 제물을 태우는 일은 누가 했나요?(7~9)
A. 제사장
Q. 번제는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를 나타냅니다.
번제는 OO와 어떤 관련이 있는지 말해보세요.
제물 드리는 사람, 번제물은 무엇을 가리킬까요?
A. 제물 드리는 사람은 죄인인 OO이고, 번제물은 예수 그리스도를 나타낸다. 번제물이 제사자의 죄를 속죄한 것처럼,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우리 대신 죽으셔서 OO의 죄를 없애셨다.
Q. 만약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지 않으셨다면, OO는 어떻게 될까요?
A. OO의 죗값을 OO가 직접 치러야 한다. 즉 죽어서 영원한 지옥불에서 자기 죄에 대한 벌을 받는다.
구약의 5대 제사에는 번제 뿐 아니라 소제, 화목제, 속죄제, 속건제가 있다.
모든 제사는 예수 그리스도를 나타낸다.
번제물 때문에 제사자의 죄가 없어지는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께서 OO 대신 죽으셨다.
하나님은 자기 아들을 OOO을 위해 제물로 주셨다.
하나님께서 OO를 어마어마하게 사랑했기 때문이다.
OO는 하나님을 찬양하며 살고, 하나님을 더욱 사랑해라.
기도
:
하나님 아버지, 사랑하는 아들을 제물로 주시니 감사드립니다.
OO가 예수 그리스도께서 대신 죽으신 사실을 영원히 잊지 않게
하옵소서.
OO가 일평생 예수님을 굳게 믿고, 하나님을 사랑하며 살게 하옵소서.
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1. 번제(Burnt Offering)
번제(燔祭) : 불사를 번(燔), 구울 번(燔), 제사 제(祭)
짐승을 통째로 태워 제물(祭物)로 바친 것으로, 매일(每日) 아침 저녁과 안식일(安息日) 또는 매달 초하루와 무교절ㆍ속죄제(贖罪祭)에 지냄.
번제(5930) (올라, ʽôlâh) עֹלָה
관련 성경 / 번제(창 8:20, 레 10:19), 번제물(출 10:25, 레 3:5, 민 6:11)
[동] 올라가다(겔 40:26), 번제하다(창 22:7, 8).
구약 성경 / 9회 사용
1. 번제
번제는 레위기 1장에 기록되어 있다.
번제는 ‘전체를 태워 모두 바치는 수직적 헌신의 제사’1이다.
번제가 기록된 레위기 1장의 구조를 잠깐 살펴보자.
1-2절 서론
3-9절 소의 번제
10-13절 양과 염소의 번제
14-17절 새의 번제
1-2절에 해당하는 서론은 후에 자세히 살펴보기로 하고, 곧바로 번제로 넘어가자.
한 가지 짚고 넘어갈 것은 2절에 번역된 ‘예물’은 히브리어 고르반 막 7:11에서 언급된 것으로 ‘하나님께 드려짐’으로 받는다.
2. 용어해설
번제(Burnt Offering)는 ‘불태우는 제사’이다.
모든 제사는 불, 즉 화제를 기본으로 한다.
번제의 히브리어 단어 ‘올라’는 ‘올라가다’ ‘높이다’는 뜻인 ‘아라’에서 온 단어다.
희생제물을 불로 태워 하늘로 올려 보낸다는 뜻에서 붙여진 이름 인듯하다.
3. 드리는 방법
1.2 드리는 방법
소를 드릴 경우, 먼저 ‘흠 없는 수컷’(3절)이어야 한다.
양과 염소인 경우에도 동일하게 흠 없고, 수컷이어야 한다.
새로 드릴 경우는 산비둘기와 집비둘기 새끼이어야 한다.
암수 구분은 없다.
회막 문에서 드려야 한다.
먼저 제사자(제사장이 아님)는 자신의 번제물의 머리에 안수한다.
그(제사자)는 숫송아지를 잡는다.
그 때 흐르는 피를 아론의 제사장들은 피를 받아 회막 문 앞 제단 사방에 뿌린다.
그는 번제물의 가죽을 벗기고 각을 뜬다.(6절)
내장과 정강이는 물로 씻는다.
새로 드릴 경우 가축과 다르게 제단 위로 바로 가져간다.
제단에서 목을 비틀어 불사른다.
흐르는 피는 곧바로 제단 곁에 흘린다.(15절)
그러나 먼저 모이주머니와 더러운 것들은 제거하여 제단 동쪽 재 버리는 곳에 던진다.
몸을 찢지만 완전히 찢지 않는다는 점도 특이하다.
제물을 잡는 곳이 이곳에는 드러나지 않는다.
5절에서는 단지 ‘여호와 앞’이라고 기록되어 있지만 11절에서는 ‘제단 북쪽 여호와 앞’이라고 방향을 정해 두었다.
번제의 의미
우리는 가장 먼저 언급되는 번제를 통해 몇 가지 교훈을 얻을 수 있다.
1 전부를 드리는 제사
첫 번째 교훈은 번제는 ‘모든 것’을 드려야 한다는 점이다.
제물이 준비되면 제사장들은 각을 뜬 제물의 머리와 기름을 제단 불 위에 놓여진 나무 위에 올려놓는다.
제사장을 불로 ‘전부’(9절) 태워 드려야 한다.
전부를 드린다는 의미에서 ‘전번제’로 부르기도 하는 이 제사는 제사의 가장 기본적인 의미를 알려 준다.
제물은 제사자를 상징한다.
그는 안수함으로 자신을 제물과 대입된다.
죄를 지어 드리는 제사가 아니기 때문에 전가로 확정할 수 없으나, 제물과 제사자는 다른 존재가 아닌 것이다.
2 대가를 지불하는 제사
두 번째 교훈은 제사를 드리기 위해서는 반드시 대가를 치러야 한다.
‘소’로 번역된 히브리어 ‘베헤마’는 들짐승인 ‘하야’와 반대되는 집에서 기르는 가축을 말한다.
대체로 소로 번역되지만 양과 염소와 같은 더 작은 가축도 포함한다.
구약 시대에 소는 최고의 가치를 지닌 가축이다.
그렇기 때문에 제사장이나 족장들이 드릴 때는 소를 드린다.
가축이 귀했던 시대에 소를 제물로 드린다는 것은 큰 희생의 의미를 지닌다.
또한 사냥을 통해 공짜까지라고 할 수는 없으나 약간의 노력으로 드릴 수 있는 들짐승이 아니다.
소는 가축을 기르는 사람들에게 가장 중요한 재산이자 가족과 같은 의미로도 사용된다.
소는 자신이 드릴 수 있는 최고의 가치를 하나님께 다린다는 의미다.
또한 흠이 없어야 한다는 조건은 일반 소가 아닌 최고의 소를 드려야 한다는 말이다.
제사(예배)는 실용적 측면에서 가장 무의미한 일이다.
그렇기 때문에 종종 하나님께 드려지는 제사는 사치스러운 것이다.
예배드림은 자신의 이득을 위한 것이 아니다.
전적으로 하나님께 헌신하는 상징적 행위이다.
번제가 비록 사랑과 헌신을 목적으로 하지만 속죄가 전제되어 있다는 것은 분명하다.(4절)
고든 웬함은 Milgrom의 말을 인용하여 ‘속죄제는 성막의 다양한 부분을 죄로 말미암아 일어난 부정에서 정결하게 하는 것과 관련 있지만 번제는 더 일반적인 의미에서 죄를 속죄하는 제사’라고 말한다.
즉 번제는 부지중에 지었을 죄에 대한 제사인 것이다.(민 15:24, 욥 1:5)
3 감사와 헌신
김경열은 번제가 가치 있는 이유를 ‘가장 기본적인 감사와 헌신의 제사였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죄와 직접적으로 연결되지 않는다.
자원하여 드리는 감사와 충성의 표시로서 드리는 제사인 것이다.
그렇기에 종종 죄와 상관없이 하나님과의 관계를 위해 드리는 화목제와 동반되기도 한다.
번제가 모든 제물을 불살라 드리는 전적 헌식의 의미를 담고 있다면, 화목제의 경우는 사람들을 초대함 함께 음식(제물)을 먹으며 기쁨을 나눈다.(출 18:9-10)
4 흠 없는 수컷
가장 중요한 의미는 하나님에 드려지는 제물은 ‘흠 없는 제물’이어야 한다는 점이다.
수컷이 대표성을 상징한다면, 흠 없음은 제물의 가치를 의미하다.
아무리 크고 멋있어 보여도 흠이 있다면 열납 되지 않는다.
22장에서 자원제물이나 서원제물이 번제로 드려질 경우, 조금의 흠도 허락되지 않는다.
즉 최고의 제물을 드려야 한다.
제물에 흠이 없다는 말에는 몇 가지의 의미를 갖는다.
후대로 넘어가면 제물을 돈으로 구입해 드리지만, 당시는 집에서 기른 가축이어야 했다.
흠이 없기 위해서는 가축 중에서 아무거나 드리면 안 된다.
자신이 좋은 것과 하나님께서 바라는 것은 다르다.
흠 없는 제물을 드리기 위해서는 제물로 드릴 가축을 꼼꼼히 살펴야 한다.
주의를 기울이지 않으면 겉으론 흠 없이 보이지만 실제로는 그러지 않을 수 있다.
준비되지 않는 제사는 위험할 수 있다.
번제를 드릴 때는 수컷을 드려야 한다.
이 또한 다른 제사와 차이를 보인다.
속죄제의 경우, 족장은 숫염소를 가지고 와야 하지만 일반 백성은 암염소를 드려도 된다.(레 4:22-31)
새를 드리는 경우는 특별히 예외가 적용된다.
새는 극빈자들을 위한 제물이며, ‘흠이 없어야 한다’는 조항이 붙지 않는다.
존 E. 하틀리는 ‘가난한 자가 번제물을 구하는 데 있어서 선택의 폭을 더 넓혀 주었을 것’이다.
매일 드려지는 제사
레위기 존 E. 하틀리는 번제가 매일 드려지고, 절기 때마다 드려졌음을 상기킨다.
대하 16:40에 의하면 다윗의 지시한 것이 율법에 나타난 대로인지 아니면 다윗이 정한 것인지 약간 모호하다.
하지만 아침과 저녁에 번제를 드리는 행위는 그 이후 계속되었을 것이다.
김경열은 번제를 다음과 같이 구분한다.
a. 상번제
상번제란 항상 드리는 번제를 의미한다. 매일 아침저녁으로 제사장이 일 년생 숫양을 드리곤 했는데(만 28:3-4) 아마 이스라엘 백성들도 아침에는 처소에서, 저녁에는 각자의 일터에서 마음으로나마 번제에 동참했을 것이다.
b. 안식일과 절기
상번제 외에 안식일에는 소제와 전제와 더불어 일년 생 숫양 두 마리를 함께 드렸다.(민 28:9) 절기마다 번제에 요구되는 짐승과 그 숫자가 달랐다.(민 28-29장 외)
c. 기타
경우에 따라 속죄제를 드릴 때 번제가 요구되기도 했다. 일례로 레위기 12장에서 산모가 아이를 낳으면 부정해졌는데 이때 그녀는 일정 기간의 자연 정화 과정을 거친 뒤 성전에서 속죄제와 더불어 번제를 마쳐야 했다.
영적인 교훈
번제의 의미를 정리하면 이렇다.
번제는 직접적인 죄로 인한 것은 아니다.
그렇지만 부지중에 지었을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대하 29:7-8)가 임하는 것을 막는 것이다.
고든 웬함은 ‘사람의 죄에 대한 하나님의 불쾌감이 처벌로 이어지지 않도록 차단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악한 본성을 지닌 인간은 의도하지 않았지만 죄를 지을 수 있다.
자신이 인지하든 하지 못하든 죄는 언제든지 타락한 인간의 심성 속에 존재한다.
속죄제가 계명을 위반한 경우에 드리고, 속건제가 물질적 보상에 대한 것이다.
그렇다면 번제는 무엇인가?
번제는 인간의 근본적 죄성에 대한 하나님 앞에 드려지는 겸손의 마음이다.
번제는 속죄의 의미를 전제하지 직접적이지 않다.
즉 자신을 되돌아보며 혹시 모르고 지었을 부지중의 죄에 대해 하나님께 자신의 허물을 고백하는 것이다.
고든 웬함은 더 나아가 번제가 ‘구원에 대한 감사제로, 자원제로, 또는 서원이 이루어질 때 서원제로 드려지는 것이 매우 적절’하다고 말한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제사는 감사로 드리는 제사이다.(시 50:23, 겔 46:2)
고든 웬함은 안수를 기도와 연관지어 하나님과의 친밀함과 정성어린 예배로 확장시킨다.
번제에서 제사자는 하나님에 대한 깊은 사랑과 헌신에 대한 결심을 갖는다.
자신의 죄인됨을 부정하지 않고 하나님의 은혜가 자신의 삶을 인도할 것을 간구하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번제는 속죄의 의미는 전제하는 동시에 감사와 찬양의 제사이다.
신약으로 나아가기
신약에서 번제라는 단어는 오직 두 곳에서 사용된다.(막 12:33, 히 10:6-8)
나머지 부분은 구약의 본문을 인용하거나 의역한 것이다.
나머지는 함축적 의미에서 번제가 언급된다.
마가는 예수님의 죽음을 ‘자기 목숨을 위한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함’이라고 강조한다(막 10:45).
바울 역시 번제를 암시하는 말을 한다.
그리스도께서 너희를 사랑하신 것 같이 너희도 사랑 가운데서 행하라 그는 우리를 위하여 자신을 버리사 향기로운 제물과 희생제물로 하나님께 드리셨느니라(에베소서 5:2)
번제의 핵심은 자신의 죄성에 대한 깊은 숙고이다.
번제가 죄에 대한 직접적인 연관이 아니지만 자신의 악한 본성으로 인해 지었을 수도 있는 죄를 겸손하게 인정하는 것이다.
주님은 세족식을 거행하면서 목욕을 한 자는 발만 씻으면 된다고 하셨다.
매일드리는 상번제는 매일의 회개와 같은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 앞에서 거룩하게 살기를 노력하는 것이며, 매일 주어지는 시간들에 대해 감사하는 것이다.
안수할지니(1:4)
따라서 제물에 안수하는 행위는 제물을 드리는 자가 안수를 통하여 그 제물과 하나됨을 나타내는 동시에 자신의 죄를 그 동물에게 전가시킨다는 것을 상징적으로 나타내는 행위인 것이다.
따라서 제물 드리는 자는 자신이 직접 피를 흘리지 않고도 자신과 연합된, 안수받은 제물의 피흘림을 통해 자신의 죄를 속함 받을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때 제물 드리는 자는 자기 대신 처참히 죽어가는 제물의 모습을 통해 죄의 심각성과 속죄의 은총을 마음속 깊이 체험해야 했다.
'안수할지니'에 해당하는 원어 '사마크 야도'는 '그가 자신의 손을(위에) 얹힐지니'란 의미인데 원어상 그 말 속에는 두가지 뜻이 내포되어 있다.
첫째, 제물을 드리는 자가 '직접' 자신의 손을 제물 위에 놓아야 한다
둘째, 제물 위에 손을 얹되 '힘껏 단단히 누르면서' 얹어야 된다(카일, Keil)
특히 이 점에 대해 유대 랍비들의 말을 빌리면,
제물을 드리는 자는 그의 양손을 희생 제물의 양 뿔 사이에 얹고 있는 힘을 다해 힘껏 눌러야 한다(Matthew Henry).
안수는 다양한 희생들에서 발견되는 의례다.
번제,
화목제(3:2, 8, 13), 속죄제(4:4,15, 24, 29, 33), 속건제에는 아무런 의식도 제시되어 있지 않을지라도, 이
안수 의례가 역시 그 희생 의식의 일부였던 것으로 추측될 수 있다.
사람이 짐승의 머리에 한 손을 올렸는지 아니면 두 손을
올렸는지는 논쟁이 되고 있다.
몇 군데에서 사람이 바치는 대상 위에 두 손을 모두 올린다고 명시적으로 진술된다(16:21; 참조.
민 27:23; 신 34:9).
일반적인 용어인 야도("그의 손")는 짐승에게 한 손을 대는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받아들여진다.
탈굼역(Tg)은 레위기 1-4장에 있는 야도를 "그의 오른손"으로 번역한다.
그렇지만 미쉬나(Mishnah)는 두 손의 안수를
요구한다(m. Menah. 9.8).
이 의례의 의미를 밝혀 보려고 그 동안 많은 의견들이 제안되었다.
한 입장은 희생을 드리는 사람이 자신의 죄를 짐승에게
전가한다는 것이다(Noordtzij, 22-23).
이것은 속죄일의 아사셀 염소의 경우에 해당되지만(16-21),
그 의례의
의미를 다른 희생들에 적용하는 것에는 심각한 난관들이 있다.
아사셀의 경우에는 대제사장이 한 손이 아닌 두 손으로 그 염소 위에
안수하며, 그 염소는 회중의 죄를 짊어진 채 더렵혀진다.
로드리게즈(Rodriguez, Substitution, 217-19)와
키우치(Kiuchi, Purification Offerings, 115)는 이러한 주장에 이의를 제기하면서,
10:17을 토대로
속죄제의 고기가 죄를 짊어지면서 동시에 가장 거룩한 것으로 분류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들의 입장은 속죄제의 고기는 제단에서
태우지 않지만, 제사장들이 먹거나 아니면 진 밖의 정결한 장소에서 태웠다(4:12).
게다가 안수 의례는 죄의 대속에는 거의
관심이 없는 희생제인 화목제 의식의 일부다(3:2).
노트(Noth. 22)는 사람이 자신의 인격을 그 짐승에게 전가한다고 생각한다.
이 입장의 변형인 또 다른
견해는 이러한 몸짓으로 사람이 제물을 통해 얻는 영적인 힘이나 거룩을 스스로 요청하고 있다는 것이다(J. Pederson,
Israel, 3-4; 366).
그러나 여전히 이러한 두 가지 해석을 화목제에 적용하기는 어렵다.
다른 이론은 바치는 자와 희생물 사이에 동일화가 형성된다고 주장한다(W. R. Smith. Religion of
the Semites, 325: R. K. Yerkes. Sacrifices in Greek and Roman Religions
and Early Judaism, 134).
페터(R. Peter, VT 27[1972] 48-55)는 제물에 한 손을 얹는 것은
바치는 자가 그 짐승을 자신과 동일시하는 몸짓인 반면, 두 손을 올리는 행위(예를 들어, 레 16:21; 24:14)는 한
편에서 다른 편으로의 어떤 것의 전이를 의미한다고 주장한다
- 이를테면, 한 사람이 갖는 특별한 신적 능력을 다른 사람에게
부여하는 행위(신 34:9; H. H. Rowley, Worship in Ancient Israel, 133; 참조.
Hoffmann. 1:122).
동일화의 범위는 이 견해를 주장하는 사람들 사이에 다양하다.
로울리(Rowley)의 제안에
의하면, 바치는 자는 자신과 하나님 사이에 어떤 장벽이 있든지 짐승의 죽음이 그것을 제거하고, 또한 바치는 자가 이 의례로써
감사와 충성 속에 하나님께 자신을 양도하는 것을 상징하는 방식으로 자신을 짐승과 동일시한다(133). 게세(H. Gese,
Essays on Biblical
Theology, tr. K. Crim[Minneapolis: Ausgburg. 1981]
104-8)가 믿는 바는, 희생을 가져오는 당사자가 안수로 자신을 그 짐승과 동일시함으로써 그것이 자신을 대신해서 역할하게끔
한다는 것이다.
거룩한 제단 위에 짐승의 생명을 앙도할 때, 역시 바치는 자의 생명이 그렇게 상정적으로 양도된다.
야노브스키(B.
Janowski. Siihne. 220-21)는 비슷한 해석을 한다.
그의 말에 의하면, 짐승의 대체가 상징적으로 하나님께 대한
당사자의 생명의 양도를 나타낸다는 점에서 바치는 자는 안수를 통해 그 짐승의 죽음에 동참한다.
속죄일에 아사셀을 위한 염소에게
죄들을 전가하는 의례와 대조적으로, 이 의례는 주체적인(subjective) 전가를 표현한다(아사셀 염소는 불특정 다수의 죄와
관련되지만, 번제의 안수는 개인이 주체가 되어 직접적인 전가가 된다는 의미).
즉 짐승의 네페쉬("생명력")가 바치는 자의
네페쉬를 대신한다(참조. 레 17:11).
키우치(Purification Offering, 116-19)는 마찬가지로 그 의례가
대체를 상징하는 것으로 해석한다.
그는 이 견해의 근거를 "열납"이라는 '라촌'의 의미에 두었지만(참조. 7:18),
본문은
대체의 성격에 대해 어떤 분명한 증거도 제공하지 않는다는 것을 지적한다.
이 의례가 화목제에서 사용된다 할지라도(3:2), 이러한
입장들은 속죄제에 적합할 수 있다(4:1-5:13).
그러나 그 제물이 어떤 방식으로 대체하는 제물로 간주되었는지 아무것도
암시되어 있지 않다(de Vaux, AI. 416, 448-49: Bertholet. 2-3). 대체의 개념이 원래의 안수 행위
배후에 있었는지의 여부는 구약 본문들로부터 결정짓기가 불가능하다.
3장과 4장에 있는 규정들에서 안수 행위가 짐승의 도살
뒤에 따르는데, 렌토르프(Rendtorff, 35-40)는 번제 규정 단락(1:3-17)의 4절에서 뒤따르는 단어들이 "그리하면
열납되어 그를 위하여 속죄가 될 것이라"는 사실을 주목한다.
그는 이 절이 안수 의례에 대한 설명이라고 해석한다.
즉 이 의례는
희생이 짐승을 바치는 개인에게 영적인 효과를 발휘하도록 하는 데 필수적이다.
바꾸어 말하면, 안수는 희생의 혜택이 바치는 자에게
발휘되는 것을 보증한다. 나아가 유대 전승이 강조하는 대로(참조. b. Menah. 93b), 이 의례는 대리자가 다른 사람을
위해 제물을 드리지 못하게 만든다.
바치는 자는 번제물의 머리에 안수하면서 연약한 한 인간으로서 자신의
무가치함과 죄성을 고백하고 또한 기도를 읊거나 시편을 인용함으로써 하나님께 대한 믿음을 진술한다.
그런 경우들을 위한 가능한
시편들로서 남아 있는 것들은 시편 40, 51 그리고 66편이다.
또한 제사장은 시편 30편이나 50편과 같은 어떤 시편을
사용하여 응답해 주었을지도 모른다(Wenham, 53).
죄의 대가가 죽음이기 때문에 바치는 자는 분명하게 짐승의 죽음이
필요하다는 것을 인식한다. - WBC레위기 주석에서 발췌
번제는 중앙 성소에서 가장 정기적으로 바치는 제사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규정은 개인적인 번제에 초점을 맞추었다.
가장 큰 관심은 그 희생이 하나님께서 그것을 받으시는 방식으로 드려진다는 것이었다.
따라서 예배자는 성소 입구에서 흠 없는 수컷을 바쳐야 하고 이어서 지정된 의식을 신중하게 따라야 했다.
열납되는 희생은 여호와께서 바치는 자의 죄의 성향을 위한 대속으로 그 짐승을 받으신다는 것을 의미했다.
당사자는 자신의 제물을 통해 속죄되면서 확신을 가지고 거룩하신 하나님의 존전에 나아갔을 것이다.
그는 그 외의 다른 제물들을 자유롭게 드릴 수 있었다.
보통 번제를 드린 후에 사람들은 화목제를 바쳤는데(3장), 그것은 자신의 가족이나 혈족을 위한 축제 음식으로 쓰여졌다.
번제 드리기가 여호와의 개인적 예배의 중대한 부분이었기 때문에, 너무
가난해서 소나 앙/염소를 바칠 수 없는 사람들을 위한 약관이 만들어졌다.
그런 사람은 비둘기나 산비둘기를 바칠 수 있었다.
이러한
새들은 매우 흔한 것이어서 쉽게 구할 수 있었을 것이다.
새의 작은 크기를 감안해 볼 때 의식 절차는 눈에 띄게 달랐으나 효력은
동일했다.
번제를 드리는 가운데 이스라엘 사람들은 자신의 완전한 죄성과 하나님의 전적인 생명에 대한 주권을 인정했다.
왜냐하면 번제는 전체를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제사장이나 바치는 자에게는 어떤 것도 돌아가지 않았다.
그것은 목자나
농부의 기본 재산에서 취한 값비싼 예물이었다.
이 제물을 가져와 바치는 자는 여호와께서 일용할 양식을 채워 주실 것을 신뢰하면서
믿음으로 행동했다.
이 제물을 통하여 하나님은 당사자에게 인간의 일반적인 죄성에 대하여 용서를 부여했다.
그런 용서는 주기적으로 필요했다.
타락한 인간은 세상에서 하나님의 저주 아래 살기 때문에 하나님의 모든 율법을 다 지키지 못하면서 매일 죄를 짓는다.
온갖 인간관계
속에서 존재하는 갈등들은 인간의 기본적 죄성에 대한 증거가 된다.
모든 사람이 이 죄성에 굴복하기 때문에, 인간은 하나님과의
교제를 유지하기 위해 정기적으로 자신의 죄성을 대속해야 한다.
고대의 이스라엘 사람이 얼마나 자주 그런 제물을 바쳤을까?
아마 각
사람의 죄에 대한 자각과 여호와를 향한 열심의 정도에 따라 몹시 다양했을 것이다.
최소한의 기준은 아마도 절기에 바치는 연례적인
희생이었을 것이다.
번제에 대한 이해는 신약의 많은 구절들을 조명해 준다.
그리스도의 희생적 죽음에 대한 신약의 언어 중
많은 것들이 일반적인 것이기에 구약의 제의 법안의 특정한 희생들과 관련짓기가 어렵지만, 그리스도의 죽음은 번제에 비견될 수
있다.
이 제사에 요구된 짐승과 마찬가지로 그분은 흠 없는 남성이었다(벧전 1:18-19).
그분은 하나님께 완전한 복종의 삶을
살면서 결점이 없으셨다.
이러한 이유로 그분의 희생은 옛 언약 하에서 바친 그 어떤 제물보다 훨씬 뛰어난 것이었다(히
9:23-26).
십자가의 제단 위에서 예수께서는 자신을 성부 하나님께 완전히 드리셨다(롬 8:32).
번제와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의 죽음은 하나님께 "향기로운 냄새"였다(엡 5:2).
빈번하게 드린 번제와는 달리, 그리스도께서는 단번에 영원한 제사로
자신을 드리셨다(히 10:12).
그리스도의 최종적인 죽음은 하나님께 대한 신실한 예배의 일부인 짐승 제사를 종결시켰다.
그리스도의 죽음으로 인해 믿는 자는 더 이상 매일 번제가 드려지는 손으로 만든 성소에서 예배를 드리지 않아도 된다(히
7:27).
오히려 예수께서는 하늘의 지성소로 자신의 피를 가져가심으로써 자신을 따르는 자들을 위한 영원한 구원을 보증해
주셨다(히 9:11-14). 그렇지만 믿는 자는 구약의 성도들과 마찬가지로 여전히 매일의 속죄를 필요로 한다.
그리스도의
죽음만으로 충분하다.
요한이 쓴 대로 "그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계속적으로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한다"(요일 1:7).
신약의 신자가 더 이상 성소에 짐승을 가져오지 않을지라도,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는 여호와의 예배가 그러했던
것처럼 완전한 헌신을 요구한다.
구약의 신자는 자신의 가축 떼에서 가져온 희생을 드림으로써 자신의 헌신과 믿음을 표현했다.
자신이
제사장인 신약의 신자는 마찬가지로 하나님께 대한 자신의 사랑과 신뢰를 자발적으로 표현했다.
짐승을 대신해서 그는 영적인 희생을
드렸다(벧전 2:5).
히브리서 13:15-16에 따르면, 믿는 자는 찬양의 희생제와 선행의 제사, 그리고 자신의 소유를 이웃에게
베푸는 나눔의 제사를 드린다.
사람이 이러한 전심으로 희생들을 드릴 때, 그의 제물은 하나님께 받아들여질 수 있다.
하나님께서
제물을 받으실지에 대한 관심은 신구약 모두에서 공통적이다.
바울은 신자들을 위해 희생의 은유를 확대시킨다.
그는
신자들에게 자신의 몸을 살아 있는 희생(개역 성경: 산 제사)으로 드리라고 말한다(롬 12:1, 2).
그가 염두에 두고 있는
제사는 번제다.
왜냐하면 번제물 전체가 제단에서 완전히 태워지는 것처럼, 신자는 자신을 전적으로 드려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짐승이 흠이 없어야 하는 것처럼 신자도 역시 거룩해야 한다.
이러한 개인적인 제물이 효력을 갖기 위해 번제와 마찬가지로 그 제물이
하나님께 받아들여질 만한 것이어야 한다.
신자의 삶은 살아 있는 번제로서 계속적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야 한다.
- WBC
레위기 주석에서 발췌
레위기 1장의 내용은 번제에 관한 것입니다. 번제의 핵심은 하나님을 향한 온전한 헌신과 감사에 있습니다. 번제는 제물을 모두 태워 향기로운 냄새가 하늘로 올라가게 하는 제사방식입니다.
제물은 예배자의 생활형편에 따라 수소, 숫염소, 숫양, 산비둘기 또는 집비둘기 가운데서 드릴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반드시 흠이 없어야 했고, 1년 된 수컷이어야 했습니다.
제사방법은 예배자가 제물이 될 짐승을 끌고 성막문 하나님 앞으로 끌고 갑니다. 속죄를 위해서 예배자가 제물의 머리에 손을 얹고 안수를 합니다. 예배자의 죄를 제물에게 전가시키는 것입니다. 죄를 뒤집어 쓴 제물이 예배자를 대신해서 죽는 것입니다. ‘죄의 삯은 사망이다’는 교훈을 담고 있는 것입니다. 예배자가 제물을 잡아 그 피를 제사장에게 주면, 제사장은 그 피를 번제단 사면에 뿌립니다. 예배자는 제물의 가죽을 벗기고 각을 뜹니다. 제사장은 그 뜬 각과 머리와 기름과 물로 씻은 내장과 정강이를 단 위에서 불로 태웁니다. 양과 염소도 동일한 방법으로 시행합니다. 단 비둘기의 경우에는 제사장이 직접 새의 머리를 비틀어 끊고 몸은 쪼개어 단 위에 불사르며 피는 단 곁에 흘리고 멱통과 창자 등은 재 버리는 곳에 버립니다.
번제는 가죽을 제외한 모든 것을 불로 태웁니다. 불로 태우기 때문에 번제를 화제라고 부릅니다. 번제는 가죽을 제외한 모든 것이 하나님의 몫이 되고, 제사장은 가죽을 취하지만, 예배자의 몫은 없습니다. 번제의 영적인 의미는 그리스도께서 생명 전체를 바쳤다는 것이고, 성도들의 온전한 헌신을 의미합니다. 불로 태우는 화제의 경우, 번제만 해당되는 것은 아닙니다. 소제, 화목제, 속죄제, 속건죄 모두에 해당이 됩니다.
이제 번제가 갖는 영적의미에 대해서 살펴보겠습니다.
첫째, 번제에 쓰인 제물들은 제각각 상징적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먼저 어린 숫양은 순전함을 나타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파송하시면서 “보라 내가 너희를 보냄이 양을 이리 가운데 보냄과 같도다”(마 10:16)고 하셨습니다. 또 온순한 양은 부드러운 마음씨를 상징하며, 형제사랑을 나타내기도 합니다. 마태복음 25장에서 예수님은 양과 염소의 비유에서 굶주리고 헐벗은 자들, 병들고 옥에 갇힌 자들, 나그네 된 자들을 돌보고 구해준 선한 사람들을 양의 무리로 분류하셨습니다. 요한복음에서는 예수님을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라고 했고, 계시록에서도 예수님을 어린양으로 묘사했습니다. 수소는 어질고 착한 마음씨를 상징합니다. 소는 밭을 갈거나 짐을 나르는 일에 쓰이지만, 불평이나 잔소리 없이 주인의 일을 묵묵히 수행합니다. 하나님의 구속사역을 이루기 위해서 무거운 십자가를 지시고 묵묵히 골고다 언덕에 오르신 예수님을 상징합니다. 염소는 험한 바위산이나 높은 곳을 좋아합니다. 저 높은 곳을 향하여 험한 곳도 마다않고 달려 나가는 참 신앙인을 상징합니다. 비둘기는 평화를 상징할 뿐 아니라, 오랫동안 메시지 전달자로 활동해 왔습니다. 평강의 왕으로서 하나님의 뜻을 전달하기 위해서 오신 예수님을 상징하는 새입니다.
둘째, 번제는 온전한 헌신을 의미합니다. 성도들은 하나님 앞에서 흠이 없는 산 제물이 되어야 합니다. 어린 새끼들처럼 마음과 생각이 순전하고 깨끗하고 순수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런 깨끗한 마음을 받으십니다. 무엇보다도 우리 자신을 산 제물로 온전히 하나님께 드려야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께서 받으시고 복을 주십니다. 바울은 로마서 12장 1절에서,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권하기를,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고 하셨습니다.
셋째, 번제는 영적 예배의 그림자입니다. 번제의 핵심사상은 온전한 헌신입니다. 온전한 예배를 상징합니다. 예수님께서 사마리아 여인에게 말씀하시기를, “아버지께 참으로 예배하는 자들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아버지께서는 이렇게 자기에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니라.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지니라”(요 4:23-24)고 하셨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신령과 진정으로 드리는 참 예배의 그림자가 번제인 것입니다.
그러면 여기서 말하는 온전한 헌신, 곧 신령과 진정으로 드리는 영적 예배란 무엇을 말할까요? 출애굽기와 레위기에서 분명하게 알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이 지시하시고 보여주신 그대로의 예배를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순종의 예배를 기뻐하십니다. 사도들이 우리에게 보여준 예배는 예수님의 생애를 재현하는 것이었습니다. 기독교는 전통적으로 사도들의 가르침을 정통신학으로 여겨왔습니다. 따라서 사도들의 가르침대로 하지 않는 예배는 온전한 예배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의 생애는 갈릴리에서의 말씀의 사역과 예루살렘에서의 다락방사역으로 나뉩니다. 기독교는 교회가 처음 세워진 때부터 제1부 말씀예배와 제2부 성만찬예배를 온전한 예배로 드려왔습니다. 그러나 개신교에서는 말씀과 기도와 찬양예배를 신령과 진정으로 드리는 예배로 생각하면서 예배에서 주의 만찬을 제외시켜왔습니다. 가톨릭 미사가 갖는 미신적인 요소들 때문이었습니다. 초기 개혁가들이었던 루터나 칼뱅 등은 가톨릭 미사의 미신적인 요소만을 제거한 채 매주일 예배 때마다 주의 만찬을 시행하고자 했으나 칼뱅의 선임자이자 군인이었던 츠빙글리가 주의 만찬을 일 년에 4차례로 제한시켜버린 것이 그만 굳어져서 바로 잡을 기회를 놓치게 되었고, 오늘날까지 그 잘못된 전통이 그대로 시행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주의 만찬이 빠진 예배는 기도회이지 온전한 예배라 말할 수 없는 불완전한 예배인 것입니다. 1960년대부터 수많은 신학자들이 이 점을 지적하고 있고 바로 잡으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만, 너무 오랫동안 굳어져 있고 오해도 있는 터라 쉽게 고쳐지지 않고 있습니다.
하나님께 드리는 온전한 예배는 하나님의 뜻대로 드리는 예배란 사실이고, 하나님의 뜻은 성서에 기록되어 있으며, 기독교 예배는 신약성서에 기록되어 있기 때문에 신약성서교회예배가 바르게 회복되어야 합니다. 우리 성도님들이 그 점을 깊이 인식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레위기는 히브리성서에서 첫 글자를 따서 바이크라[외치다] 라는 명칭으로 나타난다.
반면에 헬라어-라틴어성서에서는 제사장들을 위한 책으로 분류하여 헬라어 성서에서 류에이티콘[leueitikon]과 라틴어 성서에서 레비티콘[levitikon]으로 불리웠으며, 결국에 헬라어-라틴어성서에 따라서 ‘레위기’로서 불린다.
전체 구조
레위기는 처음부터 이 책이 시내산에서 하나님이 모세에게 주신 출애굽 율법의 연속선상에 있음을 제시한다. 레위기 1장 1절과 7장 38절 그리고 27장 3절을 보면, 계시의 장소로서 시내산이 등장한다. 즉, 레위기 1장 1절은 모세가 하나님으로부터 율법을 부여받은 장소와 시기를 출애굽의 연장선상으로 제시하며, 또한 하나님의 현현 → 율법 수여 → 제의에 필요한 제도와 기구 제작(이상 출애굽)과 더불어, 후속으로 제의의 이론과 실행을 제시하는 레위기의 시작을 알린다.
레위기 본론에 해당하는 레위기 1-25장은 간단한 구조를 가지고 있다.
먼저 소위 욤 키푸르(Yom Kippur)라고 하는 속죄일이 나타나는 레위기 16장을 기준으로 정확하게 두 개의 주제가 나누어진다.
전반부(레 1-15장)는 인간으로 하여금 하나님 앞에 죄를 어떻게 제거하고 나아갈 수 있는가를 제시하는 제사법과 제사의 실행(레 1-7장)과 하나님과의 교제를 거룩하게 유지하기 위하여 무엇을 알아야 하는지 설명하는 소위 정결법(레 11-15장)이 제시된다.
이 전반부(레 1-15 장)는 주제가 두 개인 것 같지만, 정확하게 보면 인간이 하나님에게 나아가지 못하게 하는 것을 제거한다는 측면에서 하나의 주제로 생각할 수 있다.
또한 속죄일(레 16장)을 지나 소위 ‘성결법전’(Holiness Code)으로 불리우는 법전이 레위기(레 17-27장) 차지한다.
레위기의 주제를 힘있게 이끄는 것은 세 가지 큰 단락 속에 섞여서 있는 이야기체들이다. 3개로 이루어진 이야기 형식들은(레 8-10 장; 16장; 24:10-23) 주제와 주제를 힘있게 연결하고, 전개된 주제를 끝내면서 전환점으로서 새로운 주제를 이끈다.25) 첫 번째 이야기 형식은 제의의 이론과 실행(레 1-7장)을 마감하는 이야기 형식으로 제사장의 위임과 역할에 대한 레위기 8-10장이다. 제사를 드리기 원하는 자와 주재하는 자가 레위기 8-10장을 통해 연결된다. 또한 제사장은 그 뒤에 나타나는 정결법(레11-16장)에서 정한 것과 부정한 것을 판별하는 주체가 된다. 이 이야기에서는 제사를 진행하게 하는 주체와 정결을 판단하게 하는 주체, 즉 제사장이 전반부를 이끌어 나간다.
두 번째 이야기 형식은 레위기 16장으로서 대속죄일(Day of Atonement)이라고 한다. 선택된 백성이 거룩한 길로 가기 위하여 지난 죄를 회개하고 정리하는 과정을 제시한다.
세 번째 이야기 형식은 세 가지 이야기체 중 가장 짧은 구절로서 레위기 24장 10-23절에 나타난다. 이 이야기는 신성모독(10-16절)과 사법적 결과들(17-23절)을 제시한다. 여기에서 신성모독이 인간이 행하는 범죄들 중에 가장 극단적인 제시하며, 마지막 결론을 유도하는(레 26장) 법전을 강조할 수 있게 한다.
레위기의 결론은 레위기 26장에서 볼 수 있다. 레위기 26장은 축복(레 26:3-13)과 저주(레 26:14-46)으로 나누어지며, 율법의 순종과 불순종에 따른 결과를 제시한다. 율법에 대한 순종은 추수를 위한 충분한 비(레 26:4), 점령한 땅에서의 평화(레 26:6), 마지막으로 가장 중요한 하나님이 함께하심(레26:11-12)이다. 반면에 율법에 대한 불순종은 병과 슬픔(레 26:16), 전쟁과 기근, 역병(레 26:23-29)들이다. 레위기 전체뿐만 아니라, 율법서의 결론을 이끈다.
결론 부분의 마지막 레위기 27장은 종교적 서원으로 나타나는 부록이다. 처음 부분은 자발적인 서약을 다루는 인간(2-8절)과 짐승, 물질(9-13절)과 헌정된 물건(14-2절)에 대하여 다루며, 그 헌정된 것에 대한 제약 규정이 뒤따른다(26-33절). 마지막 서원의 종착역은 십일조 (레 27:30-34)에 해당한다.
2.3.1. 제사법(레 1-7장)
레위기 1-7장은 제사에 대한 율법을 다루고 있는 장들이다. 여기 나오는 제사들은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를 긍정적으로 만드는 행위이다. 특히 인간이 거룩한 존재(하나님)와 소통할 수 있는 방법의 시도이다. 이스라엘은 제물과 제물을 드리는 자와 제사장이 중심이 되어 거룩한 존재와의 만남을 시도하였다. 다음에 제시되는 5개의 제 사법은 이스라엘 제의의 가장 기초적인 제사 방법이다.
번제(레 1장) :
히브리어 명칭은 올라(레 1장; 6:8-13)이며, ‘올라가는 것’이라는 의미이다.
번제는 가죽과 부정한 부위(예, 새의 모이 주머니 등)를 제거하고 동물 전체 부위를 화제(불에 태우는 행위)로 드린다.
원역사의 이른 시기부터(창 4:4; 8:20; 15장: 아브라함) 드려진 제사이다.
이 제사가 속죄의 기능을 가졌다는 것은 아마도 희생제물 머리에 손을 얹는 행위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에게는 선물로서 작용한다.
레위기 6장 8-13절에 또 한 번 나오는 번제는 제사장의 책임이 적혀 있다.
제사장은 제물을 밤새도록 타게 해야 하며, 아침에 옷을 갈아입고 단 옆에 있는 재를 치우는 역할을 했다.
소제(레 2장) :
히브리어 명칭은 민하(레 2장; 6:14-18)이다.
이 단어의 원래 의미는 ‘선물’이다.
즉, 권력자에게 호의를 불러일으킬 목적으로 주는 예물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레위기 2장에서 사용하는 공식 명칭은 ‘소제’ 또는 ‘음식제’이다.
소제물은 곡식 가루로 드리는 제사이다.
번제가 가축을 드리는 제사라면, 소제는 밭에서 추수한 곡식을 드리는 제사이다.
동물보다는 저렴한 가격의 곡식으로 드려진다는 점에서 가난한 자들이 드리는 것이다.
레위기 6장 14-18절에서 제사장들은 한 움큼의 소제물을 단위에 향과 함께 태워야 했다.
나머지는 누룩을 넣지 않고 아론과 그의 자손들이 먹을 수 있었다.
화목제(레 3장) :
이 제사는 히브리어 단어 샬롬(평강)에서 나온 단어와 희생 제물을 뜻하는 제바흐를 합성해서 사용하는 용어이다.
두 단어에서 보듯이 이 제사의 특징은 내부적 평안보다는, 다른 사람에게 평안을 비는 용어로 사용된다.(창 29:6; 삼하 18:30 등)
이 제사는 짐승의 기름기 일부만 제단에서 태워 하나님께 드리며, 나머지는 제사를 드리는 사람들과 주위에 있는 자들이 나눠 먹는다.
나눔의 교제는 화해와 화목을 전제로 한다.
후반부 제사장 규정(레 7:11-16)에서 화목제물은 감사의 표현으로 무교병과 무교전병으로 드리며(레 7:12), 서원이나 자원하는 맹세(레 7:16)로도 드려진다.
제사장의 몫으로는 가슴과 오른쪽 뒷다리이며, 아론과 그 아들들에게 속한 것이다.(레 7:28-34)
속죄제와 속건제(레 4:1-6:7) :
이 단락은 두개의 비슷한 제사 종류로서 속죄제(레 4:1-5:13)와 속건제(레 5:14-6:7)로 나눠진다.
속죄제와 속건제는 위에서 제기한 3개의 제사-번제, 소제와 화목제– 와는 다른 차이를 제시한다.
물론 5개의 모든 제사가 개인의 속죄에 관여되기는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앞의 3개의 제사(번제, 소제 그리고 화목제)는 인간이 지은 직접적인 죄와 관련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스스로 드리는 감사와 찬양의 성격을 가진다.
반면에 속죄제와 속건제는 부지 중에 ‘야훼의 계명을 어긴 경우’(레 4:2)에 해당한다.
위의 세 가지 제사가 자발적인 행위라고 한다면, 속죄제와 속건제는 부지중에 죄를 범한 경우에 드리는 제사이다.
위의 개념설명에서 보듯이, 속죄제는 히브리어에서 죄에 대하여 말하는 하타[죄를 짓다]라는 동사에서 나온 명사로서 핫타아[일반적인 죄(창 31:36); 죄를 깨끗하게 하는 매개물(속죄물: 민 19:9); 속죄제(레 6:18, 23; 겔 40:39; 42:13; 45:19; 스 8:35; 6:17비교, 느 10:34)라고 한다.
단어가 지적하듯이 죄와 관련되어 있으며, 죄의 영향을 다루고 있다.
즉, 하나님과 인간에게 죄를 지은 후에 잘못되었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 드리는 제사이다.
이것을 부지중에 지은 죄(레 5:1- 6)라고 한다.
속죄제는 죄를 지은 사람의 지위에 따라 제물이 달라지기도 한다.
속건제는 히브리어 단어 아샴[~va:죄, 범죄(민 5:7,8); 값, 대속물, 속건제물(삼상 6:3, 4, 8, 17; 사53:10); 속건제(레 5:15, 18, 19, 25; 6:10; 7:1, 2, 5 ,7 등등)]이라고 하며, 이 역시 ‘보상함으로 죄값을 치르다’라는 동사에서 나온 단어이다. 그래서 이 단어는 단순한 범죄의 속죄보다는 속죄와 배상의 의미를 같이 가지고 있다. 그 죄과를 치르기 위하여 제사장에게 1/5을 추가로 배상 지급해야 한다.(레 5:16)
* 5개 제사의 차이점
첫째, 번제, 소제와 화목제는 “여호와께 향기로운 냄새”(번제: 레 1:9, 13, 17; 소제: 레 2:2, 9; 6:15, 21; 화목제: 레 3:5, 16)가 주제인 반면에, 속죄제와 속건제는 “속죄와 사함을 받으라”(속죄제: 레 4:20, 26, 31, 35)는 주제이다.
둘째, 번제, 소제와 화목제는 제사를 드려야 하는 시기와 죄의 종류에 대하여 언급이 없다.
왜냐하면 ‘자발적’이기 때문이다.
반면에 속죄제와 속건제는 자발적이기 보다는 제사를 드려야만 하는 조건적인 경우이며 또한 속죄와 보상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
셋째, 이 제사들은 전부 ‘피의 사용법’을 제시한다.
그러나 번제, 소제와 화목제는 피를 성막 바깥으로 가져가서 뿌려진다.(레 1:5, 11, 15; 4:25 등)
그러나 속죄제와 속건제는 피를 성막 안으로 가지고 들어가서 성소와 지성소 앞 분향단의 뿔 등에 뿌린다.
전체적으로 보면 레위기 1-7장에서 이러한 제사의 종류를 제시하는 방법이 동일하게 두 부분으로 나뉘어 있는(레 1:1-6:7. 레 6:8- 7:38)것 같지만, 명백하게 앞의 제사(레 1:1-6:7)는 제물을 바치는 사람을 중요시하며, 평신도를 염두에 둔다.
그리고 뒤에 제사(레 6:8-7:38)는 제사장의 책임을 강조한다.
이것은 야훼에게 드리는 제사가 평신도와 제사장이 함께 했을 때 진실한 영향력을 발휘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2.3.2. 제사장 법(레 8-10장)
출애굽기에서 성막이 만들어지고(출 25-40장), 레위기에서 제사의 종류와 규정(레 1-7장)이 주어진다. 그리고 레위기에 속한 3개 이야기 형식 중에 하나인 레위기 8-10장은 하나님 예배를 집전할 제사장들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다. 이것은 앞의 제의에 관계되는 여러가지 경우를 판별하게 하는 결정적인 주제와 예배를 인도할 힘을 가진다는 것을 통하여 레위기 1-7장을 마무리 하고 있다. 그리고 또한 이 이야기의 목적은 이미 출애굽기 29장 43-46절에 기록되어 있다.
43 “내가 거기서 이스라엘 자손을 만나리니 내 영광으로 말미암아 회막이 거룩하게 될지라.
44 내가 그 회막과 제단을 거룩하게 하며 아론과 그의 아들들도 거룩하게 하여 내게 제사장 직분을 행하게 하며,
45 내가 이스라엘 자손 중에 거하여 그들의 하나님이 되리니
46 그들은 내가 그들의 하나님 여호와로서 그들 중에 거하려고 그들을 이집트 땅에서 인도하여 낸 줄을 알리라 나는 그들의 하나님 여호와니라.”(출 29:43-46)
전체적으로 이 이야기를 끌고가는 것은 “하나님이 명하신 대로 그대로 행했다”(레 8:4, 5, 9, 13, 17, 21, 29, 34 ,36; 9:6, 7, 10, 21; 10:7, 13, 15)라 는 말이다. 이것은 야훼의 지침에 대한 절대적 순종을 의미하며, 그 순종은 제사장과 그의 가족들, 결국에는 이스라엘 모든 백성들이 따라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레위기 8-10장은 세 부분으로 나누어지는데, 제사장의 위임식(레 8장)과 제사장의 직분을 올바르게 수행하는 방법(레 9장), 마지막으로 제사장 직무 수행에 있어서 금기사항(레 10장)을 제시한다. 제사장의 기원을 주제로 하는 레위기 8장은 아직 제사장으로 임명되지 않은 아론과 그의 아들들이 주인공이 되며, 이 임명 절차로 그들은 전적으로 제사장 가문으로서 이스라엘의 모든 제 사를 집전하게 된다. 레위기 8장의 구조는 위임식 준비(1-4절), 위임식의 거행(5-32절) 그리고 추가규정(33-36절)으로 구성되어있다. 특히 위임식 준비에서 모세가 온 회중(에다)이라고 말하는 단어는 중요한 사건에 대한 집단 증인으로서 작용한다. 비록 능동적으로 제사를 집행하지는 않지만, 그들이 그 사건에 있다는 것 자체로 그 사건을 정당화한다. 즉, 온 회중을 모았다는 것은 모든 이스라엘 민족이 이 위임식의 증인이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 다음 위임식 거행에서 아론의 착복식(5-9절), 제사장에게 기름 부음 (10-13절), 제사장이 드리는 제사(속죄제: 14-17절; 번제: 18-21절), 위임에 대한 화목제사(22-30절)의 순서로 이어진다. 레위기 8장은 출애굽기 29장과 닮은 꼴을 형성한다. 즉, 출애굽기 29장이 실행 규칙을 제정한 것이라면, 레위기 8장은 실제로 거행된 것을 보고하고 있다.
레위기 9장은 이레동안 위임식을 거행한 다음, 이제 정식적으로 완전하게 승인된 대제사장을 중심으로 제사를 드린다. 그렇다고 해서 모세의 역할이 줄어든 것은 아니다. 레위기 8장에서 이레동안 위임식을 행한 시기(레 8:33)와 칠 주야를 기다린 행위(레 8:35)를 통하여 모세가 이 제사의 주재자 임을 알 수 있다. 또한 레위기 9장에서도 대 제사장 아론의 직무가 시작되기 전에 첫 번째 공식적인 제사 지침을 모세가 명령(레 9:1-7)한다. 그 명령 후에 아론이 공식적인 첫 제사를 시작한다. 아직까지는 증인으로서 ‘온 회중’을 모으지 않는다. 공식적으로 준비는 아론, 그의 아들들 그리고 이스라엘 장로들이다.(레 9:1) 그리고 난 후 모세는 ‘온 회중’을 모은다.(레 9:5) 그리고 야훼의 영광이 나타날 것을 기대하며, 모세는 아론에게 제사의 시작을 명령한다.(레 9:6-7)
아론의 제사는 자신을 위한 제사로 시작한다. 첫 번째, 아론 자신을 위한 속죄제(레 9:8-11)와 번제(레 9:12-14)를 드린다. 대 제사장이라 할지라도 하나님 앞에 나아가기 위하여 자신부터 정결해야 한다. 그 다음 단락은 온 이스라엘 백성을 위한 속죄제, 번제, 화목제 그리 고 소제를 드린다(레 9:15-21). 그리고 아론의 축도(레 9:22-23)와 야훼의 영광(레 9:24)이 나타나며 9장이 끝난다. 9장의 진정한 목적은 제사를 통한 “야훼의 영광”이 회막에 나타났으며(레 9:23), 그리고 그 영광을 이스라엘이 경험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들이 경험한 것을 이스라 엘은 두 가지로 표현한다: 소리지르며[룬] 그리고 엎드렸다[나팔]. 여기에서 ‘룬’은 기쁨을 가지고 소리 지르는 것을 의미한다. 또한 여기에서 ‘엎드리다’라는 표현은 문맥상 불이 내려와 번제물을 태우는 것을 보고, 두려움 속에서 엎드린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상황은 두려움만을 표현했다기보다는 존경을 포함한 경외를 의미한다. 백성들은 제사를 통하여 야훼의 임재를 경험하고 기쁨의 환 성 속에서 야훼 경외를 경험한다. 이것은 오늘날 성도들이 예배를 통한 야훼 임재를 경험하는 것과 다를 바가 없다.
레위기 10장에서 야훼께서 명하지 않은 불을 분향함으로 올바른 예배가 손상되었다.
그리고 하나님의 불을 통한 심판이 나타난다.(레 10:1-3)
미사엘과 엘사반과 아론이 모세의 명을 순종함으로 손상된 예배가 회복된다.(4-7절)
이어서 모세가 아닌 야훼께서 처음으로 아론의 대 제사장직을 확인하는 명령이 나타난다.(8-11절) 거룩하고 속된 것을 분별하라는 명령은 자연스럽게 레위기 11-15장으로 연결하게 하는 작용을 한다. 마지막으로 모세 지시와 아론 사람들의 지시 불이행에 대한 논쟁과 모세의 수용으로 이어지는 레위기 10:12-20은 먼저 모세가 소제에 관하여 명령(12-15절), 엘르아살과 이다말의 지시 불이행(16절), 모세의 책망(17-18절) 그리고 아론의 중재(19 절) 마지막으로 모세의 수락(20절)으로 끝난다.
유월절 : 페사흐
초막절(레위기 23:33-44) 수코트(Succoth)
레위기 23:34
이스라엘 자손에게 고하여 이르라 칠월 십오일은 초막절이니 여호와를 위하여 칠일 동안 지킬 것이라.
7월 1일 나팔절(23:24)
7월 10일 속죄일(23:27)
7월 15일 초막절(23:34)
7대 절기
1. 유월절(Passover) 페사흐(Pesach
2. 무교절(Unleavened Bread) 마초트(Matsot) / 무교병(Matzo) 맛초, 무교절(맛차)
3. 초실절(First Fruits) 바쿠림(Bakurim)
4. 오순절(Feast of Week) 샤브옷(Shavuot)
5. 나팔절(Trumpet) 로쉬 하사나(Rosh Hashanah)
6. 속죄일(Atoinment) 욤 키퍼(Yom Kippur)
7. 초막절(Feast of Tabernacles) 수콧(Sukkot)
히브리어로는 '넘어가다' 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니산월(아빕월, 1월) 14일 해질 무렵, 나흘 전에 준비한 수양을 구워 무교병과 쓴 나물과 함께 먹고 그 피를 문설주에 바르고 아침까지 남은 것은 불에 태워 버린다.
애굽이 하나님의 진노로 장자를 잃는 열 번째 재앙을 당할 때 구원받은 것과 해방을 기념하는 날이다.
2. 무교절(레 23:6-8: 고전 5:7,8)
히브리어로는 맛차로. 니산월(아빕월, 1월) 15일부터 7일 동안(21일 까지) 누룩이 없는 무교병을 먹는다.
절기의 이름도 이 누룩 없는 떡을 먹는다하여 무교절이라 불리웠다.
무교절이 시작되는 첫 날과 마지막 날은 '성회' 로 백성이 모이고 노동을 하지 못했으며 매일 하나님께 화제를 드렸다
3. 초실절(레 23:9-14: 고전 15:20)
초실절은 히브리어로 바쿠림이라 불리며 무교절 기간 중에 있는 절기로, 유월절 후 첫 안식일 다음 날이다.
추수 전에 곡식의 첫 이삭 한 단을 하나님께 드리는 절기로써 양식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는 날이다.
초실절 예물을 하나님께 드리기 전에는 떡이나 볶은 곡식, 생 이삭이라도 먹지 않았다.
4. 오순절(칠칠절, 맥추절) (레 23:15-21 : 행 2:1-47: 고전 12:13: 엡 2:11-22)
히브리어로는 솨부아 '맹세하다' 라는 뜻으로 밀을 수확할 수 있도록 복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는 날이다.
칠칠절은 초실절로부터 50일째에 해당하는 날로써 보통 시완월(3월) 6일경이 된다.
이 날은 하루만 절기로 지키는데 성회를 공포하고 노동이 금지되며 하나님께 번제를 드렸고 수염소 한 마리를 속죄제로 드렸다.
특이한 것은 모든 절기에는 누룩이 없는 무교병을 쓰지만 칠칠절만은 누룩을 넣은 유교병을 소제로 사용한다.
5. 나팔절(레 23:23-25)
나팔절은 티쉬리월(7 월) 1일로 유대 민간력으로는 1월에 해당하는 새해 첫날이다.
이 날은 나팔을 하루 종일 일정한 간격으로 불었으며 성회가 선포되고 노동을 금했다.
그리고 속죄제로 수염소 한 마리를 드렸다.
6. 속죄일(레 23:26-32; 히 9:25, 26)
이 날은 성회가 선포되고 노동을 금하며 마음을 괴롭게 하는 날로 티쉬리월( 7월) 10일이다.
특별히 연중 이 날만 대제사장이 지성소에 들어갔다. 그리고 하나님을 위한 수염소와 아사셀을 위한 수염소를 드렸다.
7. 초막절(레 23:33-34)
수장절, 장막절이라고도 불린다.
티리쉬월(7월) 15일부터 8일 동안 행해진다. 초막절은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을 나와 광야에 머물었던 것을 기념하는 동시에 풍성한 수확을 허락하신 하나님께 감사하는 절기이다.
첫날과 여덟째 날에는 성회로 모이고 노동이 금지되었으며 각 날마다 그에 상응 하는 제사를 드렸다.
메시아의 도래를 바라보는 예언적 절기
- 전도서, 시편 113-118편
시편 118:25
여호와여 구하옵나니 이제 구원하소서 여호와여 우리가 구하옵나니 이제 형통케 하소서.
구원해 주소서!아도나이 호쉬안나!
장막(수카)을 만드는 4가지 재료(아르바미님)
레위기 23:40
첫날에는 너희가 아름다운 나무 실과와
종려 가지와 무성한 가지와
시내 버들을 취하여
너희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칠일 동안 즐거워할 것이라.
아르바 미님(레위기 23:40)
4(아르바) 종류들(미님)아름다운 나무 실과(에트로그. Etrog)
향이 있고 맛도 있다
토라를 배우고 실천하는 사람
종려 가지(룰라브. Lulav)
맛은 있으나 향이 없다
토라를 배우고 실천하지 않는 사람
아르바미님(레위기 23:40)
무성한 가지(하다스. Hadas)
향은 있으나 맛이 없다
토라를 배우지 않았으나 실천하는 사람
시내 버들(아라바. Aravah)
맛도 없고 향도 없다
토라를 배우지도 않고 실천하지 않는 사람
초막절을 지키는 규례
1. 안식하라(35절, 39절)
2. 성회로 모이라(35절, 37절)
3. 제물을 바치라(37절)
4. 초막을 짓고 거주하라(42절)
느헤미야 8:16-17
백성이 이에 나가서 나무 가지를 취하여
혹은 지붕 위에, 혹은 뜰 안에, 혹은 하나님의 전 뜰에,
혹은 수문 광장에, 혹은 에브라임 문 광장에 초막을 짓되 사로잡혔다가 돌아온 회 무리가 다 초막을 짓고
그 안에 거하니 눈의 아들 여호수아 때로부터 그 날까지
이스라엘 자손이 이같이 행함이 없었으므로
이에 크게 즐거워하며.
성전에서 지키는 의식 두 가지
실로암 연못에서 물을 길어온다.
제사장의 뜰 중앙에 초막절 마지막 날에 물을 붓는다.
이사야 12:2-3
보라 하나님은 나의 구원이시라
내가 의뢰하고 두려움이 없으리니
주 여호와는 나의 힘이시며 나의 노래시며 나의 구원이심이라.
그러므로 너희가 기쁨으로 구원의 우물들에서 물을 길으리로다.
요한복음 7:37-38
명절 끝날 곧 큰날에
예수께서 서서 외쳐 가라사대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리라.
1. 수확물을 창고에 저장하는 것
3. 가나안 땅에 입주하여 한 해 풍성한 수확물을 창고에 저장한 후 광야에서 하나님의 은혜로 지낸 시간을 기억하는 절기
4. 이른 비를 간구하는 절기
5. 한 해 농사의 절기를 마치며 농사의 전환기를 준비하는 절기로 우기가 시작한다.
비가 오기를 간구한다.
한 해 농사의 사이클의 마감과 더불어 과실들을 수확한다(5대 과일 / 포도, 무화과, 올리브, 대추야자, )
수카(초막)를 만드는 4가지 식물 : 아르바 미님
레위기 23:40 / 실과 종려, 시내버들,
아브라(4) 미님(종류들)
1. 아름다운 나무 실과 - 에트로그(Etrog)
2. 종려가지 - 룰라브(Lulav) Palm frond
3. 무성한 가지 - 하다스(Myrtle)
4. 시내버들 - 아라바(Willow)
아름다운 실과(에트로그)
향이 있고, 맛도 있다. 4종류의 사람이 있다.
토라를 배우고 실천하는 사람
맛은 있으나 향이 없다.
토라를 배우고 실천하지 않는 사람
무성한 가지 - 하다스(Myrtle)
토라를 배우지 않았으나 실천하는 사람
맛도 없고 향도 없다
토라를 배우지도 않고 실천하지 않는다.
광야의 백성들
1. 아름다운 나무 실과 - 에트로그(Etrog)
요단강 건너는 백성들
2. 종려가지 - 룰라브(Lulav) Palm frond
젖과 꿀이 흐르는 땅
3. 무성한 가지 - 하다스(Myrtle)
약속의 땅에 얻은 열매 상징
4. 시내버들 - 아라바(Willow)
실로암 못에서 물을 떠온다.
동틀 무렵 물을 떠와 제단에서 관제 의식을 행한다.
수문에서 레위인들이 나팔을 분다.
관제의 축제
여인의 뜰에서
불을 켠다(가지가 촛대 5개)
수전절(촛대 9개)
성전(촛대 7개)
아침까지 밤을 새워 행사한다(All night)
순결과 공의의 문에 도착했을 때 한 바퀴를 돌고 지성소가 있는 서쪽을 향하여
"이 성전에 계신 아버지여 저 이방인들은 성소를 등지고 얼굴을 동쪽을 향하고 떠오르는 태양을 숭배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눈은 여호와를 향합니다."
가장 나이가 많은 랍비의 선창에 따라
우리의 죄를 사하여 주시는 주여!
젊을 때에 죄를 사함받는 자들은 복이 있을지어다.
초막절 제물
1. 종료나무
2. 모짜(예루살렘 남서쪽 시냇가)의 버드나무 가지 / 시내 버들, 잘랐을 때 물이 없으면 말라 죽는다. 물이 필요한 것(물 =은혜)
성전 제단 남서쪽에 세운다. 제단에 기울도록 한다.
제단 주위를 매일 한 바퀴씩 돈다(시계 반대 방향으로). 7일 째 일곱 바퀴를 돈다.
요한복음 7장
시편 118:25 - 기도문(여호와여 구하옵나니 이제 구원하소서, 형통케 하소서!)
안나 아도나이 호시아 나, 안나 아도나이 하츨레하 나
제사장의 뜰이 개방된다(아이들, 심지어 여자들도 들어올 수 있다)
버드나무 가지를 "호시아나" 라고 한다.
3.
4.
누워서 하늘의 별이 3개가 보여야 한다.
아파트를 계단식 형으로 건축한다. 하늘 조망권을 화복한다.
예루살렘은 종교화, 텔아비브는 세속화 된다.
마태복음 17:4
초막 셋을 짓되.......
초막의 의미는 수카를 말한다.
변화산 사건이 초막절 즈음에 일어났던 사건이라고 추측한다.
7일 동안 황소 70마리를 번제로 드린다.
13, 12, 11, 10, 9, 8, 7마리 = 70마리
왜 창세기 10장에 열방의 70민족으로 소개된다.
열방을 축복하는 제사장 백성으로 삼으셨기 때문에 7일 동안 70마리 황소를 바친다.
제사장 백서으이 역할
7 : 완전수
70 :
숫양 : 14
어린 양 : 98(7의 14 배수)
364에바의 소제 : 7의 48배
초막절은 완성을 의미(수확의 완성)
첫 열매를 시작으로 밀과 여름 과실의 수확
구원의 최종적 완성
심판의 최종적 완성
초실절 - 칠칠절 - 초막절 / 교회가 완성되어가는 과정
교회 탄생 - 교회의 성장 - 재림(완성, 열방도 포함)
스가랴 14:16, 19,
솔로몬 성전의 봉헌
열왕기상 8:2
에다님 월(티스리월)
레위기 23:39, 여호와의 절기
다양한 이름으로 불리운다 / 수장절(feast of ingathering), 장막절
너희가 토지 소산 거두기를 마치거든 칠월 십오일부터 칠일 동안 여호와의 절기를 지키되 첫날에도 안식하고 제 팔일에도 안식할 것이요.
잠시 머물러 있는 동안 만나와 메추라기를 공급하여 먹게 하셨다.
2대절기 / 유월절, 초막절
지키는 방법
1. 안식하며 제물을 드리는 절기
- 노동을 하지 말라(35절, 39절)
첫날에는 성회가 있을찌니 너희는 아무 노동도 하지 말찌며.
39절, 너희가 토지 소산 거두기를 마치거든 칠월 십오일부터 칠일 동안 여호와의 절기를 지키되 첫날에도 안식하고 제 팔일에도 안식할 것이요.
첫날과 마지막 날에도 안식하라.
휴지구 즉 쉼표가 필요한 인생이다.
대략 9월말-10월 중순까지
한국의 경우 추석의 절기와 비슷하다.
2. 성회로 모이라(35절, 37절,
첫날에는 성회가 있을찌니 너희는 아무 노동도 하지 말찌며.
쉬면서 하나님을 묵상하라.
3. 제물을 바치라(37절)
이것들은 여호와의 절기라 너희는 공포하여 성회를 삼고 번제와 소제와 희생과 전제를 각각 그 날에 여호와께 화제로 드릴찌니.
신명기 16:16
너희 중 모든 남자는 일년 삼차 곧 무교절과 칠칠절과 초막절에 네 하나님 여호와의 택하신 곳에서 여호와께 보이되 공수로 여호와께 보이지 말고.
38절, 이는 여호와의 안식일 외에, 너희의 헌물 외에, 너희의 모든 서원 예물 외에, 너희의 모든 낙헌 예물 외에 너희가 여호와께 드리는 것이니라.
서원 제물,
앞으로 이루어 주실 것을 믿고
자원 제물
낙헌 제물
마당, 아파트의 경우 계단식 형으로 짓는다.
하늘의 별을 본다.
누구든지 올 수 있다.
느헤미야 8:16-17
포로에서 귀환한 후 먼저 초막적을 지켰다.
백성이 이에 나가서 나무 가지를 취하여 혹은 지붕 위에, 혹은 뜰 안에, 혹은 하나님의 전 뜰에, 혹은 수문 광장에, 혹은 에브라임 문 광장에 초막을 짓되
사로잡혔다가 돌아온 회 무리가 다 초막을 짓고 그 안에 거하니 눈의 아들 여호수아 때로부터 그 날까지 이스라엘 자손이 이같이 행함이 없었으므로 이에 크게 즐거워하며.
아르바미님
40절, 첫날에는 너희가 아름다운 나무 실과와 종려 가지와 무성한 가지와 시내 버들을 취하여 너희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칠일 동안 즐거워할 것이라.
2. 종려가지(Lulav)
3. 무성한가지(Hadas) - 영생을 상징
4. 시내버들(Aravah) - 그늘과 쉼이 있는 곳
1. 쉼과 예물
2. 초막을 짓고 거한다
3. 메시아의 도래를 바라보는 예언적 절기
- 전도서(헛되다는 것을 강조하여 주의 명령을 따라 살아가는 것이다)
- 시편 113-118편을 읽는다
시편 118:25
여호와여 구하옵나니 이제 구원하소서 여호와여 우리가 구하옵나니 이제 형통케 하소서.
O LORD, save us; O LORD, grant us success.
구원해 주소서(아도나이 호쉬안나) - 호산나
초막절 마지막 날 / 호산나 라바(큰 구원을 베풀어 주소서)
심핫 베잇 하소에바(Simchat Beit Hashoeva) : 실로암에서 물을 길어 오는 의식
제사장의 뜰 중앙에 초막절 마지막 날에 물을 붓는다(전제, 관제) 실로암 연못으로 간다.
히스기야 왕 시대에 지하수로를 만들었다(히스기야 턴널) 500m
물을 붓는 순간 나팔을 분다
이사야 12:2-3
보라 하나님은 나의 구원이시라 내가 의뢰하고 두려움이 없으리니 주 여호와는 나의 힘이시며 나의 노래시며 나의 구원이심이라
그러므로 너희가 기쁨으로 구원의 우물들에서 물을 길으리로다.
명절 끝날 곧 큰날에 예수께서 서서 외쳐 가라사대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리라 하시니.
마지막 날은 밤새도록 춤을 추며 네 개의 기둥에 불이 켜진다.
요한복음 8:12
예수께서 또 일러 가라사대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두움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
세상의 빛이시다 - 생명의 근원이시다!
여호와의 절기(레위기 23:39)
칠월절기(열왕기상 8:2, 역대하 5:3, 느헤미야 8:14)
7 사람은 나그네의 삶을 대표하는 인물이다.
1. 아브라함(은혜)
2. 이삭(용기)
5. 아론(존귀)
6. 요셉(기본)
7. 다윗(왕권)
3대 명절(출애굽기 23:14-17, 34:18-23)
2. 칠칠절(초실절, 맥추절, 오순절)
3. 초막절(수장절, 장막절)
출애굽기 23:14-17
14. 너는 매년 삼차 내게 절기를 지킬찌니라
15. 너는 무교병의 절기를 지키라 내가 네게 명한대로 아빕월의 정한 때에 칠일 동안 무교병을 먹을찌니 이는 그 달에 네가 애굽에서 나왔음이라 빈 손으로 내게 보이지 말찌니라
16. 맥추절을 지키라 이는 네가 수고하여 밭에 뿌린 것의 첫 열매를 거둠이니라 수장절을 지키라 이는 네가 수고하여 이룬 것을 연종에 밭에서부터 거두어 저장함이니라
17. 너의 모든 남자는 매년 세번씩 주 여호와께 보일찌니라
출애굽기 34:18-23
18. 너는 무교절을 지키되 내가 네게 명한대로 아빕월 그 기한에 칠일 동안 무교병을 먹으라 이는 네가 아빕월에 애굽에서 나왔음이니라
19. 무릇 초태생은 다 내 것이며 무릇 네 가축의 수컷 처음 난 우양도 다 그러하며
20. 나귀의 첫 새끼는 어린 양으로 대속할 것이요 그렇게 아니하려면 그 목을 꺾을 것이며 네 아들 중 장자는 다 대속할찌며 빈 손으로 내 얼굴을 보지 말찌니라
21. 너는 엿새 동안 일하고 제 칠일에는 쉴찌니 밭 갈 때에나 거둘 때에도 쉴찌며
22. 칠칠절 곧 맥추의 초실절을 지키고 가을에는 수장절을 지키라
23. 너희 모든 남자는 매년 세번씩 주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 앞에 보일찌라.
대속죄일(레위기 23:26-32)
26.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일러 가라사대27. 칠월 십일은 속죄일이니 너희에게 성회라 너희는 스스로 괴롭게 하며 여호와께 화제를 드리고
28. 이 날에는 아무 일도 하지 말것은 너희를 위하여 너희 하나님 여호와 앞에 속죄할 속죄일이 됨이니라
29. 이 날에 스스로 괴롭게 하지 아니하는 자는 그 백성 중에서 끊쳐질 것이라
30. 이 날에 누구든지 아무 일이나 하는 자는 내가 백성 중에서 멸절시키리니
31. 너희는 아무 일이든지 하지 말라 이는 너희가 그 거하는 각처에서 대대로 지킬 영원한 규례니라
32. 이는 너희의 쉴 안식일이라 너희는 스스로 괴롭게 하고 이 달 구일 저녁 곧 그 저녁부터 이튿날 저녁까지 안식을 지킬찌니라.
새해(로쉬 하샤나) :로쉬(머리, head), 하샤나(해, year)
- 한 해의 머리가 되는 날, 한 해의 으뜸이 되는 날
한국의 경우 보신각에서 종을 울린다.
이스라엘은 뿔 나팔을 분다.
레위기 23:24,
이스라엘 자손에게 고하여 이르라 칠월 곧 그 달 일일로 안식일을 삼을찌니 이는 나팔을 불어 기념할 날이요 성회라.
유대력으로 7월 1일(새해, 로쉬 하샤나)
태양력으로 9월 -10월 경
설날 השנה ראש (로쉬 하샤나)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새 해를 맞이하여 첫날을 명절로 삼고 축하한다.
우리 민족도 새해 첫날을 맞이하여 기뻐하는 ‘설날’이 있다.
설은
“원단/세초/연시”라는 한자말로도 표현한다.
1월 1일을 양력으로 신정(新正)이라고 하고 음력으로 구정(舊正)이라고 한다.
해가
바뀌어 새로이 한 해를 맞이하는 첫 날 곧 ‘설’을 쇨 때마다 한 살을 더 먹는다.
설 명절은 설날부터 대보름인 15일까지
이어진다.
유대인들에게도
설날이 있는데 השנה ראש (로쉬 하샤나)라고 부른다.
유대인의 ‘로쉬 하샤나’도 하루로 끝나지 않는다.
열흘 후에 지키는
‘욤 키푸르’(대속죄일)에 이르기까지 회개의 시간을 가진다.
유대인들은 ‘로쉬 하샤나’를 티쉬리월 첫째 날과 둘째 날에 지킨다.
티쉬리월은 양력 9월 말이나 10월 초에 오는데 이 달이 음력으로 첫째 달이 되는 까닭이 탈무드에 나온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신 달을 티쉬리월이라고 간주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일반으로는 니산월을 한 해의 시작으로 간주하지만 유대교 종교력은 이스라엘 백성이 출애굽 한 때를 기준으로 삼아 티쉬리월을 한 해가 시작되는 달로 지키는 것이다. 하지만 정작 출애굽기는 아빕월을 한 해 첫달로 지키라고 규정한다. 여기에서 장구한 세월에 걸친 유대 달력의 변천사를 짐작할 수 있다.
창세기
1장 1절에 히브리어 ראש (로쉬)란 단어가 나온다.
‘태초에’란 어구에 있다.
이 명사는 본디 머리를 가리켰는데 그 의미가
확장되어서 “으뜸/시작/우두머리/지도자” 따위로 그 의미가 다양해졌다.
“태초에 하나님께서 하늘과 땅을 창조하셨다”는 문장에서 בְּרֵאשִׁית (브레쉬트)는 “한 처음에/태초에”란 뜻이다.
이 어구에 나오는 “로쉬”는 모든 창조의 처음을 가리키기에 탈무드는 티쉬리월에 오는 새 해의 첫 날 “로쉬 하샤나”를 창조신학과 연결시켰다.
하샤나(השנה)는
‘해/년(年)’을 뜻하는 명사 <샤나>에 정관사 <하>가 접두한 형태이다.
“로쉬 하샤나”는 ‘나팔절’(욤
테루아 יוֹם תְּרוּעָה)이라고 부르기도 하는데 정작 성경에는 ‘나팔절’ 이란 단어가 나오지 않는다.
나팔절은 민수기
23장 ‘칠월 초하룻날 나팔을 불며 쉬라’는 말씀에서 유추한 용어이다.
레위기 23장 23절 이하에도 나온다.
나팔절 곧 설날은
오늘날까지 지키고 있는 유대인의 네 가지 큰 명절 중 하나이다.
로쉬
하샤나는 느헤미야 8장에도 나오는데 디아스포라 공동체는 토라를 읽으며 설 명절을 지켰다.
토라를 읽으며 명절을 지켰다는 데
주목해야 한다.
출애굽기 12장 2절에 רֹאשׁ חֳדָשִׁים (로쉬 호다쉼)이란 말이 나오는데 이는 첫째 달이란 듯이다.
첫째 달 첫날부터 열흘 동안 속죄한 후에 대속죄일을 맞이한다. 이 명절에는 안식일과 동일하게 노동을 하지 말고 쉬어야 한다.
느혜미야에 나타난 로쉬 하샤나에서는 서로 기쁨을 나누는 축제의 성격을 띠고 있다.
설날의
성경적 의미는 여러 가지로 찾아 볼 수 있다.
로쉬 하샤나는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신 것을 기념하는 뜻을 지닌다.
이 날은
정결하게 되고 새로워지는 시간이요, 용서받는 때이며, 새 출발을 의미한다.
또 심판의 날이란 뜻도 있다.
우리가 설날을 새 출발에
방점을 두지만, 성경의 설날은 지금까지 지은 죄를 뉘우치는 회개로부터 시작하는 날이 된다.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 공로로 죄씻음을
받고 다시는 죄를 짓지 않겠다는 다짐으로 새롭게 한 해를 시작하는 축제를 벌인다.
그런 의미에서 설날은 희년을 선포하는 것처럼
양각나팔을 불어 토라공부와 토라실천의 결기를 다짐하는 뜻 깊은 성숙의 날이 되어야 한다.
대속죄일
레위기 23:27-28,
27. 칠월 십일은 속죄일이니 너희에게 성회라 너희는 스스로 괴롭게 하며 여호와께 화제를 드리고
28. 이 날에는 아무 일도 하지 말것은 너희를 위하여 너희 하나님 여호와 앞에 속죄할 속죄일이 됨이니라
레위기 16:29,
너희는 영원히 이 규례를 지킬지니라 칠월 곧 그 달 십일에 너희는 스스로 괴롭게 하고 아무 일도 하지 말되 본토인이든지 너희 중에 우거하는 객이든지 그리하라.
대속죄일(욤 키퍼) : 욤(날, the day). 키퍼(카파르) 덮는다, cover.
새 해는 속죄를 통해서 맞이할 수 있다.
레위기 16:31
이는 너희에게 큰 안식일인즉 너희는 스스로 괴롭게 할지니 영원히 지킬 규례라.
큰 안식일 (솨바트 솨바톤) / 안식일 중의 안식일
대속죄일
1. 시기적 중요성 : 새해와 맞물려서 시작한다(로쉬 하샤나)
새해 맞이의 절정은 속죄로 시작한다.
2. 초막절(7월 15일) : 레위기 23:34,
이스라엘 자손에게 고하여 이르라 칠월 십오일은 초막절이니 여호와를 위하여 칠일 동안 지킬 것이라.
용서를 받아야 초막절이 찾아온다.
자기를 대면하는 날, 자기 성찰의 절기
레위기 16:29-34,
29절, 31절에서 반복되는 것
스스로 괴롭게 하고 아무 일도 하지 말라.
나그네까지도 참여해야 한다.
스스로 괴롭게 할지니
괴롭게 한다는 세 가지 의미
1. 하루 금식
2. 하루 금욕
3. 하루 기도
3. 중보자의 중요성 : 대제사장을 바라본다
대제사장의 속죄일에 입는 옷에 방울이 달려 있다.
대제사장이 지성소에서 나올 수 없을 경우 죄가 용서받지 못했다는 것
대제사장은 유일한 중보자이신 메시아를 보여주는 상징적인 사례라고 하겠다.
첫째, 진지한 준비(레위기 16:1-5)
- 아론의 두 아들이 여호와 앞에 나아가다가 죽은 후에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시니라
-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네 형 아론에게 이르라 성소의 장안 법궤 위 속죄소 앞에 무시로 들어오지 말아서 사망을 면하라 내가 구름 가운데서 속죄소 위에 나타남이니라
- 아론이 성소에 들어오려면 수송아지로 속죄 제물을 삼고 수양으로 번제물을 삼고
- 거룩한 세마포 속옷을 입으며 세마포 고의를 살에 입고 세마포 띠를 띠며 세마포 관을 쓸찌니 이것들은 거룩한 옷이라 물로 몸을 씻고 입을 것이며
- 이스라엘 자손의 회중에게서 속죄 제물을 위하여 수염소 둘과 번제물을 위하여 수양 하나를 취할찌니라.
아론의 두 아들이 진지한 준비가 없었다.
아무 때나 나올 수 없었다.
그러나 현재는 아무 깨나 나올 수 있다.
12-13절,
향로를 취하여 여호와 앞 단 위에서 피운 불을 그것에 채우고 또 두 손에 곱게 간 향기로운 향을 채워 가지고 장 안에 들어가서
여호와 앞에서 분향하여 향연으로 증거궤 위 속죄소를 가리우게 할찌니 그리하면 그가 죽음을 면할 것이며
아론의 두 아들은 아무 때나 아무 불이나 사용하므로 죽임을 당하였다.
레위기 8:7-9,
제사장의 평상복을 벗고 속죄일에는 세마포 옷을 입는다.
둘째, 자신을 위한 속죄의 제물을 드린다.
레위기 16:6
아론은 자기를 위한 속죄제의 수송아지를 드리되 자기와 권속을 위하여 속죄하고.
13-14절,
여호와 앞에서 분향하여 향연으로 증거궤 위 속죄소를 가리우게 할찌니 그리하면 그가 죽음을 면할 것이며
그는 또 수송아지의 피를 취하여 손가락으로 속죄소 동편에 뿌리고 또 손가락으로 그 피를 속죄소 앞에 일곱번 뿌릴 것이며.
셋째, 백성을 위한 속죄 제물을 드린다.
레위기 16:15
또 백성을 위한 속죄제 염소를 잡아 그 피를 가지고 장 안에 들어가서 그 수송아지 피로 행함 같이 그 피로 행하여 속죄소 위와 속죄소 앞에 뿌릴찌니.
레위기 16:21
아론은 두 손으로 산 염소의 머리에 안수하여 이스라엘 자손의 모든 불의와 그 범한 모든 죄를 고하고 그 죄를 염소의 머리에 두어 미리 정한 사람에게 맡겨 광야로 보낼찌니.
예수께서 죄를 짊어지고 극적으로 처리한 모습
"아사셀 염소"(레위기 16:10,
Azazel / 염소 + 사라진다(go away)
넷째, 번제를 드린다.
레위기 16:23-25,
25. 속죄제 희생의 기름을 단에 불사를 것이요
27. 속죄제 수송아지와 속죄제 염소의 피를 성소로 들여다가 속죄하였은즉 그 가죽과 고기와 똥을 밖으로 내어다가 불사를 것이요.
속죄함을 받은 후에 용서의 확신이 중요하다.
그 후에 반드시 해야 할 것은 "번제(태워버린다, 온전한 헌신)"
번제가 없으면 열매가 없다.
예배를 통헤서 나를 온전히 주 앞에 바치는 훈련이 중요하다.
크리스천은 오순절을 성령강림절로 지키지만, 유대인이 지키는 오순절은 모세가 시내산에서 토라를 받은 날이다. 모세가 시내산에서 토라를 받고 내려왔을 때, 산 밑에서는 아론과 이스라엘 백성들이 금송아지를 만들어 섬기고 있었다. 그래서 모세는 그들의 죄를 속죄하기 위하여 다시 산으로 올라갔다.
"이튿날 모세가 백성에게 이르되 너희가 큰 죄를 범하였도다. 내가 이제 여호와께로 올라가노니 혹 너희의 죄를 속할까 하노라 하고"(출 32:30)
모세는 이스라엘이 지은 우상숭배의 죄를 "큰 죄"라고 하며 그 죄를 속죄하러 하나님께 다시 올라갔다. 처음과 마찬가지로 모세는 40일간 하나님과 함께 있으면서 반역한 그들을 위하여 자기의 이름을 생명책에서 지워달라며 간절히 하나님께 속죄하고 내려왔다. 모세가 40일간 속죄하고 내려온 날이 속죄일인 티쉬리 월 10일이다.
출애굽기 34장 29절 이하를 보면, 모세가 여호와 하나님께 속죄하고 두 돌판을 가지고 내려왔을 때, 그의 얼굴에서 광채가 났다고 기록하고 있다. 모세의 얼굴에서 광채가 나므로 사람들은 그에게 가까이 하는 것을 두려워했다. 그들은 여호와 하나님께서 그들 앞에 나타나셨을 때에 무척 두려워했다. 왜냐하면 주님의 임재는 나팔소리와 함께 구름과 연기와 불과 우뢰와 번개 가운데 임하셨기 때문이다(출 19:16-19, 20:18).
그 뒤에 주께서는 70명의 장로를 산 위로 부르셔서 만나주셨고, 대제사장이 1년에 한 번 지성소에 들어오면 속죄소 앞에서 만나주시겠다고 말씀하셨다. 즉 우리가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것은 주 앞에 엎드려 회개할 때이다. 회개를 하지 않는 사람은 결코 하나님을 만날 수도 없고 그분으로부터 사명을 받을 수 없다.
“거기서 내가 너와 만나고 속죄소 위 곧 증거궤 위에 있는 두 그룹 사이에서 내가 이스라엘 자손을 위하여 네게 명령할 모든 일을 네게 이르리라"(출25:22)
언약궤 위에 있는 두 그룹은 날개를 펴서 언약궤와 속죄소를 덮고 있으며 얼굴을 서로 대하여 속죄소를 향하게 했다. 그곳에서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1년에 한 번 모든 백성을 대표한 대제사장을 통하여 만나주시고 죄를 사하여 주셨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속죄양이 되시고 대제사장이 되셔서 보혈의 피를 흘리시므로 피뿌림을 받은 우리들은 그분의 보혈의 공로로 1년에 단 한 번 대제사장만 들어갈 수 있는 지성소에 매일 아무 때나 들어갈 수 있게 되었다.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조상의 유전한 망령된 행실에서 구속된 것은 은이나 금 같이 없어질 것으로 한 것이 아니요 오직 흠 없고 점 없는 어린양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한 것이니라"(벧전 1:18-19)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나니 그 길은 우리를 위하여 휘장 가운데로 열어 놓으신 새롭고 산 길이요 휘장은 곧 저의 육체니라. 또 하나님의 집 다스리는 큰 제사장이 계시매 우리가 마음에 뿌림을 받아 양심의 악을 깨닫고 몸을 맑은 물로 씻었으니 참 마음과 온전한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자"(히 10:19-22
▶ 대속죄일의 의미
대속죄일의 히브리어
'욤 키푸르'의 '욤'은 '날'을 의미하며 '속죄'를 뜻하는 '키푸르'(כִּפֻּרִ)는 동사 '카파르'(כָּפַר)에서
유래했다. '카파르'(כָּפַר)는 '속죄하다'(make an atonement) 이외에 '화해하다'(make
reconciliation), '용서하다'(forgive), '덮다'(to cover), '자비롭다'(be merciful),
'씻다'(cleanse) 등의 뜻을 갖고 있다.
따라서 '대속죄일'이라는 말은 우리의 죄와 허물을 씻어주고 덮어주고
용서해주시는 하나님의 긍휼하심으로 인하여 단절되었던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어 하나님 아버지와 화해하여 은혜의 자리에 나아가게
되는 매우 기쁜 날이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피 뿌림'으로 이루어진 것이다. "피는 죄를 속하는 것"이므로
아무데나 뿌려지면 안된다. 그래서 어떠한 피도 먹지 말라고 하신 것이며 오직 그리스도의 피만 마시라고 한 것이다.
"육체의 생명은 피에 있음이라. 내가 이 피를 너희에게 주어 단에 뿌려 너희의 생명을 위하여 속하게 하였나니 생명이 피에 있으므로 피가 죄를 속하느니라"(레 17:11)
과거에는
대제사장 이외에 그 누구도 여호와 하나님을 만나러 지성소에 들어갈 수 없었다. 그리고 대제사장도 1년에 한 번 하나님께서
지정해주신 대속죄일에만 들어가서 여호와 하나님을 만날 수 있었다. 그런데 지금은 어떠한가?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의 공로로 왕같은
제사장이 된 우리는 아무 때나 어디에서든 하나님 아버지 앞에 나아갈 수 있다. 이는 아무 때나 어디에서나 주님 앞에 무릎을 꿇고
죄를 자복할 수 있다는 말이다. 언제든지 내가 원하는 것을 구하게 됐다는 말이 아니다.
그런데 그렇게 회개할 수
있도록 만나주시는 주님 앞에 우리는 너무 교만하다. 1년에 단 한 번 만나주시던 주님을 매일 만날 수 있게 되니 회개를 해야할
필요도 느끼지 못하며, 주님 앞에 나아가는 시간도 습관적으로 늦게 나가서 예배 시간도 제대로 지키지 못한다. 또 다른 볼 일
때문에 예배가 끝나기도 전에 나가기도 한다. 심지어 빠지기도 한다. 아침에 눈을 떴을 때에나 밤에 자기 전에도 주님 앞에 무릎을
꿇지 않는다.
그리고 예배하기 위하여 정결하고 거룩한 옷차림이나 마음가짐으로 나아가지 않고 자기 취향에 맞고 편한
옷차림과 편한 마음으로 나아간다. 예배를 구경하러 가는 구경꾼들이 얼마나 많은가? 정말로 주님을 두렵고 떨림의 대상이라고 믿는다면
어떻게 예배 시간에 늦을 수 있으며 중간에 나갈 수 있을까? 그리고 아무리 덥거나 춥거나 불편하다고 내가 원하는 옷차림과 자세로
예배의 자리에 나올 수 있을까?
레위기 16장에는 대제사장 아론의 두 아들이 여호와께 나아갔다가 죽은 뒤에 주께서 모세에게 죽고싶지 않으면 대제사장이 지성소에 아무 때나(무시로) 들어오지 말라고 하신 말씀이 기록되어 있다.
"아론의
두 아들이 여호와 앞에 나아가다가 죽은 후에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시니라.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네 형 아론에게
이르라. 성소의 장안 법궤 위 속죄소 앞에 무시로 들어오지 말아서 사망을 면하라. 내가 구름 가운데서 속죄소 위에 나타남이니라.
아론이 성소에 들어오려면 수송아지로 속죄 제물을 삼고 수양으로 번제물을 삼고 거룩한 세마포 속옷을 입으며 세마포 고의를 살에 입고
세마포 띠를 띠며 세마포 관을 쓸찌니 이것들은 거룩한 옷이라. 물로 몸을 씻고 입을 것이며 이스라엘 자손의 회중에게서 속죄
제물을 위하여 수염소 둘과 번제물을 위하여 수양 하나를 취할찌니라"(레 16:1-5)
"향로를 취하여 여호와 앞 단
위에서 피운 불을 그것에 채우고 또 두 손에 곱게 간 향기로운 향을 채워 가지고 장 안에 들어가서 여호와 앞에서 분향하여 향연으로
증거궤 위 속죄소를 가리우게 할찌니 그리하면 그가 죽음을 면할 것이며"(레 16:12-13)
이 말씀을 통하여
아론의 두 아들은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대로 행하지 않았기에 죽은 것을 알 수 있다. 속죄소에서 주님을 만나는 날은 1년에 한 번
대속죄일 뿐이며, 또 그곳에 나아갈 때에는 반드시 대제사장의 화려한 옷을 입으면 안 되고 흰 세마포 옷을 입어야만 한다. 또
반드시 목욕을 한 뒤에 세마포 옷을 입고 그곳에 들어가야 하며 빈손으로 들어가도 안 되며 반드시 향과 피를 갖고 들어가야 한다.
많은 이들이 '여호와의 절기'와 '안식일'에 대해 잘못 알고 잘못 가르치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셨기 때문에 여호와의 절기나 안식일을 지키는 것이 아니다. '여호와의 절기'와 '안식일'은 모두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한다. 따라서 절기들을 지켜야 하는 것이 아니라 '안식일의 주인'이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 거해야 한다. 그분 안에 거할 때, 지켜지고 완성되는 것이다.
성경은 결혼을 통하여 신랑이신 예수 그리스도와 신부인 교회가 하나라는 것을 말씀한다. 그래서 우리가 주님 안에 그리고 주님께서 우리 안에 거하신다는 것을 계속해서 말씀한다. 주님 없이 율법을 지킬 수 있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다. 그래서 율법을 친히 만드시고 완성하신 주님과 한 몸이 된 이들에게만 계명을 지켰다고 인정해주시고 의롭다고 인정해주시는 것이다. 그런데 많은 이들이 그것을 모르기 때문에 절기나 안식일을 지켜야 하느냐에 대하여 쓸데없는 논쟁을 하느라 세월을 아끼라는 주님의 말씀을 헛되이 지키고 있다.
"나는 나의 사랑하는 자에게 속하였고 나의 사랑하는 자는 내게 속하였다"(아 6:3)
"그 날에는 내가 아버지 안에,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너희가 알리라"(요 14:20)
"내가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의 사랑 안에 거하는것 같이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거하리라"(요 15:10)
▶ 스스로 괴롭게 하는 날
본문 27절에 보면 "너희는 스스로 괴롭게 하며 여호와께 화제를 드리라"라고 말씀하고 있다.
또 32절에서도 "이는 너희의 쉴 안식일이라.
너희는 스스로 괴롭게 하고 이 달 구일 저녁 곧 그 저녁부터 이튿날 저녁까지 안식을 지킬찌니라"라고 말씀한다.
Mishnah의 Yoma 8:1에 의하면 스스로 괴롭게 하는 것은 다음과 같다.
'금식'(물도 마시지 않음), '금욕'(부부관계), '목욕 및 샤워 금지', '향수나 크림 금지', '가죽으로 된 신발과 옷 착용 금지'
특히 이 날이 안식일과 겹칠 경우 안식일은 기쁜 날이므로 금식하지 않지만, 속죄일은 안식일 중의 안식일(שַׁבַּת שַׁבָּתֹון)이며 반드시 금식을 하며 경건하게 보내야 했다. 그래서 안식일과 명절이 겹치지 않도록 하기 위하여 힐렐 2세는 티쉬리 월 1일이 수요일이나 금요일이 되지 않도록 했다(359년).
"이는 너희에게 큰 안식일(שַׁבַּת שַׁבָּתֹון)인즉 너희는 스스로 괴롭게 할지니 영원히 지킬 규례라"(레 16:31)
속죄일을 맞으며 우리 자신을 괴롭게 하는 것이 무엇인지 생각해보자.
왜냐하면 우리 스스로 괴롭게 하면서 안식을 지키라고 하시기 때문이다.
그런데 많은 이들이 국어에서 말하는 '안식'을 생각하기 때문에 성경에서 말씀하는 '안식'의 개념을 모른다.
본문 말씀을 통해 우리는 안식일에 무엇을 해야하는지 알 수 있다.
우리 스스로를 괴롭게 하는 것이 안식하는 것이라는데, 이것이 우리의 상식으로 이해가 될까?
성령의 조명이 없으면 절대로 이해 불가능이다.
안식일의 개념은 우리가 하고싶은 모든 것을 중단하는 것이다.
오락이나 운동을 하며 놀고싶고, 사먹고 파티하고 싶고, 학교 공부나 숙제를 하고 싶고, 자고 싶고, 돈 벌고 싶고, 데이트하고 싶고, 커피숖에 앉아서 즐기고 싶고, 여행을 가고싶은 우리의 모든 육적이고 세상적인 것을 끊는 것이 안식이다.
오직 안식일의 주인이신 예수 그리스도만 생각하며 그분만 예배하며 우리가 원하는 모든 것을 중단하는 것이 진정한 안식에 들어간 것이다.
안식일에 제사장들은 절대로 쉴 수 없었다.
가장 바빴다.
그래서 예수님도 "아버지께서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라고 하셨다.
세상이 돌아가기 위해 하나님께서는 안식일에도 일하신다는 사실을 유대인들은 알기에 예수께서 하신 그 말을 반박할 수 없었다.
안식일은 쉬는 날이 아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주님만 예배하기 위하여 우리의 모든 것을 버리고 부인하고 내려놓고 번제물이 완전히 재가 될 때까지 타듯이 우리를 온전히 그분께 드리는 희생의 날이 안식일이다.
한국의 추석과 여호와의 절기 중 마지막 추수때 즉 심판때인 추수감사절인 장막절이 자주 같은 날이다.
왜냐하면 추석과 장막절 모두 보름달이 뜨는 때이기 때문이다.
그 동안 우리는 미국 청교도들의 전통에 의해 11월 마지막주 목요일에 추수감사절을 지켜왔다.
그러나 우리 크리스천은 추수감사절을 사람이 만든 시기가 아닌 여호와 하나님께서 지정해주신 날인 장막절에 지켜야 할 것이다.
"너희가 하나님의 계명은 버리고 사람의 유전을 지키느니라. 또 가라사대 너희가 너희 유전을 지키려고 하나님의 계명을 잘 저버리는도다"(막 7:8-9)
▶대속죄일의 절차
대제사장은 먼저 자신과 그의 가족들의 죄를 속죄하기 위하여 수송아지의 피로 속죄하고 이어서 백성들의 죄를 속죄하기 위하여 염소의 피로 속죄했다.
1. 대제사장은 향로를 취하여 제단 위에서 피운 불을 채우고, 두 손에 곱게 간 향기로운 향을 채워서 지성소로 들어가 분향하여 향연으로 속죄소를 가려서 죽음을 면하게 한다(레 16:12-13).
하나님을 대면하여 보지 않기 위해서이다.
2. 분향 후 수송아지의 피를 갖고 지성소에 들어가 대제사장과 그의 가족들을 속죄하기 위하여 손가락으로 속죄소 동편에 그 피를 뿌리고 속죄소 앞에 일곱 번 뿌린다(레 16:14).
7은 완전 수로 일곱 번 피를 뿌렸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가 완전하다는 것을 예표하는 것이다(히 7:27, 9:12, 10:10).
3. 백성들의 죄를 속죄하기 위하여 두 마리의 염소가 준비되는데 대제사장은 성전 동쪽 문에서 두 염소를 제비 뽑은 뒤 여호와를 위한 것과 아사셀을 위한 것을 구별한다. 그리고 아사셀 염소의 뿔에 ‘아사셀을 위하여’ 라고 쓴 붉은 띠를 묶는다.
4. 대제사장은 속죄제 염소로 제비뽑힌 염소를 잡아 그 피를 가지고 지성소에 들어가서 (2)와 같은 방식으로 속죄소 위와 속죄소 앞에 뿌린다.
5. 성소에 있는 분향단을 위하여 속죄하기 위하여 수송아지와 염소의 피를 취하여 분향단 귀퉁이 네 뿔에 바르고 손가락으로 그 피를 그 위에 일곱 번 뿌려서 이스라엘 자손의 부정에서 분향단을 성결케 한다(레 16:18-19).
6. 대제사장은 동쪽 문으로 가서 두 손으로 산 염소(아사셀 염소)의 머리에 안수하고 이스라엘 자손의 모든 불의와 그 범한 모든 죄를 고하고 그 죄를 염소의 머리에 두어 모든 불의를 지고 무인지경에 이르렀을 때 미리 정한 사람에게 맡겨 광야로 보낸다(레 16:20-21). 아사셀 염소가 광야로 가는 동안 대제사장은 소의 내장을 제거한 뒤 소와 염소를 묶고 아사셀 염소가 절벽에 이르렀을 때 불로 사른다. 이때 염소가 다시 돌아오는 불상사(죄가 돌아옴)를 막기 위하여 절벽으로 끌고가 밀어서 죽인다.
7. 대제사장은 여인의 뜰로 가서 대속죄일과 관련된 토라를 읽은 후 지성소에 들어갈 때 입었던 세마포 옷을 회막에 들어가 벗고 거룩한 곳(정결탕)에서 물로 몸을 씻고 자기 옷을 입고 나와서 두 마리의 양으로 자기의 번제와 백성의 번제를 드린다.
두 마리의 양을 북쪽에서 잡고 그 피를 담아 번제단 둘레에 바른다.
자기와 백성을 위하여 속죄하고 속죄제 희생의 기름을 단에 불사른다(레 16:23-25). 그리고 소제와 전제를 드린다.
"7월 10일에는 너희가 성회로 모일 것이요 마음을 괴롭게 하고 아무 노동도 하지 말 것이며 너희는 수송아지 하나와 수양 하나와 일년 된 수양 일곱을 다 흠 없는 것으로 여호와께 향기로운 번제를 드릴 것이며 그 소제로는 고운 가루에 기름을 섞어서 쓰되 수송아지 하나에는 에바 십분지 삼이요 수양 하나에는 에바 십분지 이요 어린 양 일곱에는 매 어린 양에 에바 십분지 일을 드릴 것이며 또 수염소 하나를 속죄제로 드릴 것이니 이는 속죄제와 상번제와 그 소제와 그 전제 외에니라"(민 29:7-11)
8. 세 번에 걸쳐 지성소에 출입하며 번제를 마치면 대제사장은 흰 세마포 새옷으로 갈아입고 손과 발을 씻고 지성소에 들어가 향로와 불을 제거하고 향로와 부삽을 가지고 나온다.
9. 수송아지와 염소의 가죽과 고기와 똥을 밖으로 내어다가 불사르고 그것을 불사른 자는 옷을 빨고 물로 몸을 씻은 후에 진에 들어올 수 있다(레 16:27-28).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나니 그 길은 우리를 위하여 휘장 가운데로 열어 놓으신 새롭고 산 길이요 휘장은 곧 저의 육체니라. 또 하나님의 집 다스리는 큰 제사장이 계시매 우리가 마음에 뿌림을 받아 양심의 악을 깨닫고 몸을 맑은 물로 씻었으니 참 마음과 온전한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자"(히 10:19-22)
이날 모든 사람은 흰 옷을 입고 오는데, 계시록에서 흰옷은 '성도들의 옳은 행실'이라고 말씀한다. 또한 매50년째 되는 희년에 있는 속죄일에는 모든 빚을 탕감해 주어야 했으며 팔렸던 종들도 해방되었다.
하나님께서는 긍휼이 한이 없으신 자비하신 분이다. 그래서 어떠한 죄도 하나님 앞에 고백될 때면 하나님께서는 용서해 주신다. 그러므로 속죄양이 되시고 대제사장이 되셔서 단번에 우리의 죄를 대속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그 크신 은혜를 우리는 잊지말아야 한다.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조상의 유전한 망령된 행실에서 구속된 것은 은이나 금 같이 없어질 것으로 한 것이 아니요 오직 흠 없고 점 없는 어린양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한 것이니라"(벧전 1:18-19)
우리의 예배는 반드시 회개가 동반되어야만 한다. 회개가 없는 예배는 가증한 종교의 형식일 뿐이다. 구원받은 성도가 할 수 있는 특권이 바로 회개이다. 회개를 통하여 우리는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며 마귀의 종노릇하던 곳에서 해방되어 자유를 맛 볼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매사에 회개할 수 있음에 감사해야 한다.
현대의 유대인들은 속죄일이 시작되기 전 오후에 만찬을 갖는다.
그리고 속죄일은 목욕이나 샤워를 할 수 없기에 속죄일 전에 먼저 정결 의식을 행한다.
대속죄일 저녁이 되면 남자들은 키텔(Kittel)이라는 흰 예복을 입고 기도회로 모인다.
저녁 기도회에서는 '콜 니드레(Kol Nidre) 기도'로 시작한다.
그래서 대속죄일 저녁에 드리는 예배를 '콜 니드레'라고 부른다.
막스 브루흐(Max Bruch)의 첼로 협주곡으로 유명한 '콜 니드라이'(Kol Nidrei, Op. 47: 신의 날: Day of Atonement)는 아람어인 '모든 서약들'(All Vows)이란 뜻의 '콜 니드레'(Kol Nidre)를 <히브리 선율에 의한 첼로, 관현악, 하프를 위한 아다지오>로 하프와 관현악이 함께 어우러지는 환상곡이다.
콜 니드레 기도는 "모든 서약들"이라는 말 그대로 유대인들이 하나님 앞에서 실행하지 못한 모든 서약들을 "동이 서에서 먼 것처럼" 기억하지 않으시고 도말해주시기를 바라며 하는 기도이다. 이 예배를 드리는 동안 "우리가 해야 할 것과 하지 말아야 할 계명을 어긴 것을 용서하옵소서. 우리가 알고 지은 죄와 모르고 지은 죄를 용서해 주옵소서"라는 기도를 많이 한다. 특히 대부분 말로 지은 죄를 고백하는 것으로 '악한 혀'(라숀 하라아 Lashon ha-Raa)라는 뜻의 죄 즉 거짓 맹세하거나 악하게 말하거나 저주나 욕을 한 것들의 죄를 고백하는 기도이다.
그 동안 나의 입에서는 어떠한 말이 나왔는가? 주님과 사람들에게 무언가 하겠다고 말로 약속을 해놓고 지키지 않은 것들은 얼마나 많은가? 화가 나서 내뱉은 말은 어떤 것들인가? 그러면서도 우리의 혀가 '악한 혀'가 아니라고 말할 수 있는가?
7월 10일에는 오전 8-9시부터 회당에서 예배가 시작되며 오후에는 요나서를 낭독하는데, 니느웨 사람들이 회개하므로 하나님의 용서를 받은 것처럼 유대인들도 회개하며 용서를 구하므로 하나님으로부터 긍휼하심을 얻기 위함이다.
대속죄일의 마지막 예배를 '네일라'라고 한다.
이때 예배자들은 마지막으로 네일라 기도를 한다.
그들은 마지막 기도의 문이 닫히기 전까지 하나님께서 그들을 용서해주시기를 간절히 바라는 마음으로 예배를 드리며 '테키야 그돌라'의 나팔 소리가 울려퍼지는 순간 모든 예배와 대속죄일이 끝난다.
테키야 그돌라의 긴 나팔 소리는 금식이 끝났음을 선포하는 것이며 이때부터 유대인들은 죄의 용서함을 받은 기쁨을 갖고 5일 후에 있을 여호와의 절기의 가장 하이라이트인 장막절 축제를 준비하기 시작한다. 각자 집 앞에 초막(수콧)을 만들기 위해 종려나무 가지를 비롯한 초막에 필요한 것들을 나르며 마지막 심판날인 추수 때를 준비한다.
여호와의 절기 중 가장 마지막 절기인 장막절은 안식일을 의미한다.
장막절은 7번째 절기이며 안식일은 7번째 날이다.
7은 완전 수이다.
불완전한 인간(인간의 수는 6)이 하나님(하나님의 수 1)과 하나가 된 상태가 7이며 그것이 안식이다.
그래서 하나님 안에 거하는 자만이 무시로 기도하며 범사에 감사할 수 있고 항상 기뻐할 수 있는 것이다. 감사절인 장막절에 신랑이신 그리스도와 결혼 잔치를 하게 되는 데 어찌 감사하지 않을 수 있으며 어찌 기뻐하지 않을 수 있으며 신랑과 대화를 안 할 수 있단 말인가?
안식에 들어가 범사에 감사하는 사람은 진정으로 천국을 소유한 것이며 임마누엘 주님과 동행하는 것이며 지성소에 들어간 것이다. 지성소에는 세상의 것은 아무 것도 갖고 들어갈 수 없고, 화려한 대제사장의 옷도 입을 수 없고 오직 '성도의 옳은 행실'을 의미하며 '그리스도의 의'를 상징하는 '흰 세마포 옷'만 입고 '성도들의 기도'인 '향'과 '속죄할 피'를 갖고 들어갈 수 있다. 즉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기도와 선한 행실과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 외에는 없는 것이다.
지금 내가 하고싶은 일은 무엇인가? 그것을 모두 중단할 수 있는가? 예수 그리스도 한 분 만으로 정말 만족하며 살아왔고 살고 있으며 살아갈 수 있는가? 나 스스로 얼마나 나를 괴롭게 할 수 있는가? 지금 내가 무엇을 버려야 하는가? 정말 버리기 싫은 것이 있는가? 그것이 무엇인가? 그것이 나의 우상이며 회개할 제목이다.
"주 여호와 내가 말하노라. 네가 잿물로 스스로 씻으며 수다한 비누를 쓸찌라도 네 죄악이 오히려 내 앞에 그저 있으리니"(렘 2:22)
우리는 우리를 스스로 깨끗케 할 수도 구원할 수도 없는 연약한 존재이다. 우리가 무엇을 하려고 하면 할 수록 '자기의 의'라는 더러운 때가 계속해서 추가될 뿐이다. 우리는 지성소에 들어가서 그리스도의 피뿌림을 받아야만 비로소 정결해질 수 있다. 그래서 우리에겐 속죄양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가 필요한 것이다.
"곧 하나님 아버지의 미리 아심을 따라 성령의 거룩하게 하심으로 순종함과 예수 그리스도의 피 뿌림을 얻기 위하여 택하심을 입은 자들에게 편지하노니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더욱 많을찌어다"(벧전 1:2)
유대인들은 다른 절기보다 대속죄일을 가장 열심히 지킨다. 그 이유는 그들의 행위를 기록한 책이 마지막으로 봉해지는 날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은 주께서 마지막으로 책을 봉하시기 전까지 최선을 다해 금식하며 기도하며 하나님의 긍휼을 기대하는 것이다. 그래서 대속죄일이 되기 40일 전부터 잘못한 사람들을 찾아다니며 용서를 구하는 것이다. 사람들에게 잘못한 것을 회개하지 않으면 대속죄일에 하나님께 죄를 용서해달라고 할 자격이 상실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예물을 제단에 드리다가 거기서 네 형제에게 원망 들을 말한 일이 있는 줄 생각나거든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 (마 5:23-24).
그러나 안타까운 것은 속죄양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그들은 모른다는 것이다. 반면에 크리스천들 중에 대속죄일이 언제인지 아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고, 대부분 관심도 없다. 그래서 그 날에 대해 이야기를 들어보지 못한 사람이 허다하다. 심지어 목사들 중에는 대속죄일이나 여호와의 절기 이야기를 하면 이단처럼 취급하는 이들도 있다. 이 얼마나 통탄할 일인가? 하나님의 말씀에 가감하면서도 전혀 죄책감을 느끼지 못하는 이들이 너무 많다.
"내가 이 책의 예언의 말씀을 듣는 각인에게 증거하노니 만일 누구든지 이것들 외에 더하면 하나님이 이 책에 기록된 재앙들을 그에게 더하실 터이요, 만일 누구든지 이 책의 예언의 말씀에서 제하여 버리면 하나님이 이 책에 기록된 생명 나무와 및 거룩한 성에 참예함을 제하여 버리시리라"(계 22:18-19).
여호와의 절기는 예수 그리스도의 모형이며 그분을 제대로 알기 위해 예행 연습을 하는 리허설(성회)이다. 우리 크리스천은 그러한 리허설(성회)을 통하여 예수께서 오셨을 때에 그분이 신랑이신 예수 그리스도라는 것을 알았으나 유대인들은 그렇게 열심히 리허설을 하면서도 아직까지도 메시야를 기다리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제 대속죄일을 맞을 때마다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서 물과 피를 쏟으신 예수 그리스도를 기억하여 금식하며 회개하는 가운데 주님의 긍휼을 바라보아야 할 것이다. 많은 이들이 구약에 있는 말씀들과 규례들을 구시대의 유물로 착각한다. 제사제도는 십자가 사건으로 폐하여졌다. 그러나 구약의 모든 것이 폐하여 진 것이 아니다.
대속죄일을 맞으며 요나서를 묵상하는 가운데 니느웨 사람들처럼 함께 회개의 자리에 나아가자. 그것이 지성소로 들어가는 것이다. 지성소로 들어가는 것은 목숨을 걸고 들어가는 것이다. 아론의 두 아들처럼 하나님의 지시하신 방법이 아닌 자기들 마음대로 들어갔다가는 죽는 곳이 지성소이다. 따라서 여호와 하나님과 그분의 말씀을 가볍게 여기지 말고 두렵고 떨림으로 구원의 길을 가자.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나 있을 때 뿐아니라 더욱 지금 나 없을 때에도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빌 2:12).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오라. 우리가 서로 변론하자. 너희 죄가 주홍 같을 지라도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요 진홍 같이 붉을지라도 양털같이 되리라"(사 1:18).
대속죄일은 연중 성정 행사의 클라이막스이다.
대제사장이 혼자서 주관하는 제사
아브라함의 천사가 대제사장을 돕는다.
안식일 중의 안식일 / 거리에는 차량도 다니지 않는다(단, 앰블런스는 제외)
TV.
히브리서 9:7, 11-12
7. 오직 둘째 장막은 대제사장이 홀로 일년 일차씩 들어가되 피 없이는 아니하나니 이 피는 자기와 백성의 허물을 위하여 드리는 것이라.
11. 그리스도께서 장래 좋은 일의 대제사장으로 오사 손으로 짓지 아니한 곧 이 창조에 속하지 아니한 더 크고 온전한 장막으로 말미암아
12. 염소와 송아지의 피로 아니하고 오직 자기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사 단번에 성소에 들어 가셨느니라.
대제사장의 대리 임명
나팔절(레위기 23:23-25)
24. 이스라엘 자손에게 고하여 이르라 칠월 곧 그 달 일일로 안식일을 삼을찌니 이는 나팔을 불어 기념할 날이요 성회라
25. 아무 노동도 하지 말고 여호와께 화제를 드릴찌니.
칠월 : 정확하게 번역하면 일곱번째 달 초하루
왜냐하면 1년 12달에 초하루는 모두 12번 있기 때문이다.
양각나팔 : 쇼파르(shofar)
나팔절에 양각 나팔을 부는 방법 : 최대한 길게 소리를 내어 분다
이러한 방법을 "테키야 하 그돌라" 라고 한다.
예전에 한국에 민방위 훈련시 사이렌을 길게 울려 불던 방식과 비슷하다.
유대인들은 "나팔절"을 "신년" "새해"라고 부릅니다.
히브리어로 "로슈 하샤나"
"로슈(머리)" "하샤나(한 해)" 즉 "한 해의 머리" 즉 한 해의 시작을 말합니다.
2021 / Sep. 6-8 (Hebrew Year 5782)
이스라엘에 거주하는 한국인들에게 "나팔절" 즉 "신년"과 관계된 우스개 이야기가 있습니다.
한국인들은 구정 때 한 살, 신정 때 또 한 살, 그리고 나팔절 때 또 한 살을 먹으므로 일 년에 세 살을 먹는다고 합니다.
나팔절은 신약에서 "예수님의 재림"에 해당합니다.
레위기 23장은 이스라엘의 절기가 아니라 그리스도인에게는 여호와의 절기라고 하겠습니다.
유월절 - 무교절 - 초실절 - 오순절 - 나팔절 - 속죄일 - 장막절
그 유래를 창세기 22장에서부터 시작합니다.
나팔절은 사랑의 대상에 대한 우선순위가 결정되어야 한다.
12, 13절에서 "....네가 네 아들 네 독자라도 내게 아끼지 아니하였으니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
아브라함이 눈을 들어 본즉 한 수 양이 뒤에 있는데 뿔이 수풀에 결렸는지라. 아브라함이 가서 그 수양을 가져다가 아들을 대신하여 번제로 드렸더라."
수풀에 뿔이 걸려 있는 수양은 신약에서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상징합니다.
아들을 대신하여 즉 나를 대신하여, 우리를 대신하여......
1. 천지창조가 완성된 날
아담이 창조 된 날, 인간의 역사가 시작되는 날이다.
인류 역사의 시작
2. 인류가 심판을 받는 날
3. 아브라함이 이삭을 모리아 산에서 바친 사건
이삭 대신 죽은 수풀에 뿔이 걸린 수양.
수양을 기념하기 위하여 수양의 뿔을 분다.
양각 나팔을 불기 때문.
일곱 번째달의 월삭이 나팔절이다.
칠(안식, 샤밧)
월삭이 중요한 이유
사무엘상 20:5
다윗이 요나단에게 이르되 내일은 월삭인즉 내가 마땅히 왕을 모시고 앉아 식사를 하여야 할것이나 나를 보내어 제 삼일 저녁까지 들에 숨게 하고
요나단이 다윗에게 이르되 내일은 월삭인즉 네 자리가 비므로 네가 없음을 자세히 물으실 것이라.
사무엘상 20:24
다윗이 들에 숨으니라 월삭이 되매 왕이 앉아 음식을 먹을 때에
이사야 1:13
헛된 제물을 다시 가져오지 말라
헛된 제물을 다시 가져오지 말라 분향은 나의 가증히 여기는바요 월삭과 안식일과 대회로 모이는 것도 그러하니 성회와 아울러 악을 행하는 것을 내가 견디지 못하겠노라.
골로새서 2:16
그러므로 먹고 마시는 것과 절기나 월삭이나 안식일을 인하여 누구든지 너희를 폄론하지 못하게 하라.
Therefore do not let anyone judge you by what you eat or drink, or with regard to a religious festival, a New Moon celebration or a Sabbath day.
나팔절과 생명책
탈무드에서 나팔절이 되면 저 하늘 보좌에서 3권의 책이 펼쳐진다.
1. 생명책 - 영원한 영생에 들어갈 사람
2. 멸망의 책 - 죽음의 책, 영원한 멸망
3. 중간 책 - 하는 것에 의해서 결정되는 것
10일 후에 결정된다. 나팔절부터 10일 7월 10일이 속죄일이다.
중간책에 있는 사람들은 이 기간동안 회개해야 한다.
시편 69:28,
저희를 생명책에서 도말하사 의인과 함께 기록되게 마소서.
May they be blotted out of the book of life and not be listed with the righteous.
출애굽기 32:32,
그러나 합의하시면 이제 그들의 죄를 사하시옵소서 그렇지 않사오면 원컨대 주의 기록하신 책에서 내 이름을 지워 버려주옵소서.
But now, please forgive their sin--but if not, then blot me out of the book you have written.
나팔을 부는 세 가지 목적
1. 언약(계약) 시내산 언약 출 19장을 기억하기 위하여
3. 죄의 잠에서 깨어 회개하도록
* 모든 숫놈의 뿔 나팔을 불 수 있다.
그러나 소의 뿔은 안 된다.
출애굽기 32장 금송아지 우상 사건 때문에....
양각나팔과 더불어 양 쪽에 은나팔(하초츠라)을 짧게 분다.
성소 계단에서 쇼파르(한글성경에서 호각)
시편 98:6
나팔과 호각으로 왕 여호와 앞에 즐거이 소리할찌어다.
with trumpets and the blast of the ram's horn-- shout for joy before the LORD, the King.
나팔절 때 바치는 제물
- 일곱번째 월삭
월삭에 드리는 제물 : 소 2, 양 7, 수염소 1
속죄일 : 10개의 제물을 추가적으로 드린다
(황소 1. 수양 1. 양 7. 염소 1)
나팔을 동문에서 분다.
가운데 양각나팔(쇼파르) 길게
양쪽에 호각(하초츠라) 짧게
성전 꼭대기에 올라가서 다시 나팔을 분다.
월삭을 어떻게 알 수 있는가?
- 초승달을 본 2명의 증인들이 성전에 와서 보고한다
- 3명의 증인이 필요하다(나팔절)
감람산 꼭대기에서 봉화를 올린다.
주후 350년에 달력을 만들어서 절기를 지킨다.
사마리아 지역에 안렉산드리온(사마리아 지역에 위치)에서 봉화를 올려야 할 때 올리지 않으므로 유대력을 만들게 되었다.
칠월 일일에 제사장 에스라가 율법책을 가지고 남자, 여자 무릇 알아 들을만한 회중 앞에 이르러.
So on the first day of the seventh month Ezra the priest brought the Law before the assembly, which was made up of men and women and all who were able to understand.
칠월 일일 : 나팔절(일곱번째 달 초 하루)
느헤미야 8:9-10
백성이 율법의 말씀을 듣고 다 우는지라 총독 느헤미야와 제사장겸 학사 에스라와 백성을 가르치는 레위 사람들이 모든 백성에게 이르기를 오늘은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성일이니 슬퍼하지 말며 울지 말라 하고
느헤미야가 또 이르기를 너희는 가서 살진 것을 먹고 단 것을 마시되 예비치 못한 자에게는 너희가 나누어 주라 이 날은 우리 주의 성일이니 근심하지 말라 여호와를 기뻐하는 것이 너희의 힘이니라 하고.
Then Nehemiah the governor, Ezra the priest and scribe, and the Levites who were instructing the people said to them all, "This day is sacred to the LORD your God. Do not mourn or weep." For all the people had been weeping as they listened to the words of the Law.
Nehemiah said, "Go and enjoy choice food and sweet drinks, and send some to those who have nothing prepared. This day is sacred to our Lord. Do not grieve, for the joy of the LORD is your strength."
단 것을 마시되 : 사과를 꿀에 찍어 먹는다.
나팔절과 재림
마태복음 24:31
저가 큰 나팔소리와 함께 천사들을 보내리니 저희가 그 택하신 자들을 하늘 이 끝에서 저 끝까지 사방에서 모으리라.
데살로니가전서 4:16
주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로 친히 하늘로 좇아 강림하시리니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고.
나팔절과 예수님의 시험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 좇아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 좇아 온 것이라.
성회와 절기(레 23:1~44)
1~2절, 44절을 보시면 “성회를 여호와의 절기라”고 하셨습니다.
절기는 신앙과 하나님께 돌릴 영광을
위하여 특별행사를 갖는 것입니다. 모형과 상징이 비유 교훈인 것처럼 깨닫게 하는데 유익이 있습니다. 그러나 모형과 상징을
실상보다 중히 여길 필요는 없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구약시대의 성회와 절기도 실상을 알게 하실 목적으로 주신 것임을 아셔야 할
것입니다.
① 1~8절은 “안식일, 유월절, 무교절에 대한 말씀”이고,
② 9~14절은 “첫 이삭을 드리는 행사”인데, 이것을
초실절(출 34:22)이라고도 합니다.
③ 15~21절은 “칠칠절 행사”이고,
④ 22절은 “가난한 자와 객을 위한 배려”이며,
⑤
23~25절은 “7월 1일 나팔 부는 성회”이고,
⑥ 26~32절은 “7월 10일 속죄일 성회”이며,
⑦ 33~44절은 “7월
15일 초막절 행사”입니다.
선민의 월력 개념을 살피면 출애굽한 달을 첫 달로 삼고(출 12:2), 그 달 10일에 유월절
제물을 준비했으며(출 12:3), 14일 해질 때에 잡아 유월절 양의 피를 문설주에 발랐으니(출 12:6), 그 14일 이 유월절
첫날이고(출 12:11), 그 다음 날부터 7일 동안 무교병을 먹는 날을 무교절이라고 합니다(출 12:18). 출애굽한 것은
유월절 밤이 지난 다음 날이었습니다(출 12:29~34, 37~41, 13:3). 1월 15일부터 출애굽 행군이 시작되었고,
안식일 용어는 출 16:25에서 만나를 받았을 때에 “오늘은 안식일이라” 하셨는데, 그때가 2월 15일(출
16:1)경이었습니다(마라, 엘림을 떠나고 만나를 먹을 무렵). 이 말씀을 드리는 이유는 1월 14일부터 21일까지의 유월절
기간이 첫 안식일(15일)부터 다음 안식일까지로 계산하였을 것으로 믿기 때문입니다. 그때부터 1주간 계획의 행사가 시작되어
지금까지 온 줄 압니다. 출애굽 당시의 아빕월(출 13:4, 신 16:1)을 1월로 시작하였고(양력으로 3, 4월에 해당),
왕정시대에 시브월(2월, 왕상 6:1, 37)과 에다님월(왕상 6월, 느 6:15), 기스르월(9월, 느 1:1, 슥 7:1),
데벳월(10월, 에 2:16), 스밧월(11월, 슥 1:7), 아달월(12월, 스 6:15, 에 3:7, 8:12)이 나온즉,
1년의 달 수는 12월인데 달의 날 수는 잘 알수 없습니다. 다만 유대력 1월을 양력 3월 15일~4월 15일로 추정하는
것입니다.
1. 안식일, 유월절, 무교절(1~8절)
이 절기는 출애굽할 때 시행하였지만(출 12:1~31) 여기에서 주신 계명은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지키라는 것(10절, 출 13:5)”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명에 의하여 하는 행사는 다 성회이고, 본 장에서는 6대 절기(유월절, 초실절, 칠칠절, 나팔절, 속죄절, 초막절)를 말씀하셨는데, 월삭(민 10:10)과 안식일은 절기에 들지 않습니다(3, 4절). 그리고 초실절이 곧 맥추절이며(출 23:16), 출 23:16의 수장절이 본문 22~25절에 해당하는 나팔절과 같은 것으로 사료됩니다. 수장절은 추수를 끝내고 연종에 하는 행사이기 때문입니다(절기상 연종은 추수를 끝낸 때임). 안식일에 대하여는 3절에서 “육일 동안 일하고 일곱 째 날은 무슨 일이든지(무노동을 강조한 뜻) 하지 말고 쉬라”고 하셨습니다(출 20:8~11). 4~8절에서 유월절(7일 중 첫날), 무교절(7일 중 6일간)의 말씀이 나옵니다. 유월절은 출애굽 전날 밤(문설주의 피, 애굽의 장자와 초태생 죽음)을 기념하는 뜻이고, 무교절은 누룩없는 떡을 먹으며 애굽을 탈출한 것을 기념하는 것입니다(15절). “첫날도 성회로, 7일도 성회로 모이라” 하셨는데, 이 날은 안식일과 겸하게 된 줄 압니다. 그리고 이 유월절을 기한에 미쳐(전) 공포하라(준비의 뜻)고 하셨습니다. 8절에 기록된 화제에 대하여는 민 28:16~25에 자세히 기록되었습니다.
2. 초실절 행사(9~14절)
이 시기는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첫 농사를 짓고 곡물을 거두었을 때 할 일입니다(10절). 안식일 이튿날에 첫 이삭 한 단을 제사장에게로 갖고 가서 제사장이 하나님 앞에 열납되도록 흔드는 것입니다. 그때에 1년 된 수양을 번제로 드리고, 다른 소제와 전제(힌 1/4의 포도주)도 함께 드립니다(11~13절). 14절은 “첫 소출을 하나님께 드리기 전에는 먹지 말라”는 뜻이고, “대대로 영원한 규례라” 하심은 하나님께 대한 감사를 영원히 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이 초실절이 다음 칠칠절을 계산하는 기점이 되는데, 이 날짜는 첫 곡식을 거두어 들일 수 있는 안식일 다음 날입니다. 영적 해석가들은 이 날을 예수님의 부활의 예표로, 그리고 칠칠절, 즉 오순절 요제를 성령 강림의 예표라고도 합니다.
3. 칠칠절 행사(15~21절)
15절에서 안식일 이튿날(초실절 행사일)부터 7안식을 지나는 날은 곧 50일 째 되는 날이기 때문에 오순절이라고도 하지만, 구약에서는 칠칠절로 말씀하셨고, 오순절이란 용어는 행 2:1에서 기록되었습니다. 16~17절에서 (그날에 고운 가루) 에바 2/10로 누룩을 넣고 만든 떡 두 개를 하나님께 첫 요제로 드리고(두 개의 의미는 알 수 없음), 18절에서는 “이 떡과 함께 1년 된…어린 양 일곱과 젊은 수소 하나와(늙은 소는 값이적음) 수양 둘을 그 소제, 전제와 함께 번제를 드리라(번제 규례 1장)”고 하셨습니다. “화제”는 불태운 것을 뜻하고, “향기로운 냄새”란 번제로 굽는 냄새를 뜻하는 것입니다. 또 19~20절에서 “수염소 하나로 속죄제를 드리고 1년 된 어린 수양 둘로 화목제를 드릴 것”은 레 3:1~17에, 20, 21절에서 드린 속죄제는 레 4:13~21에 준하여 드리는 것입니다. 17절에서 “누룩 넣은 떡을 만들어 드린다”는 것은 무교병과 대조되는 말씀인데, 새 소제(첫 이삭으로 만든 떡)를 드리는 제물로서 무교병(고난의 상징)의 입장에 머물지 않음을 상징하는 뜻으로 여겨집니다. 따라서 율법과 고난 상징의 시대가 복음(부활)과 성령의 시대로 전환될 것을 예고하신 의미라고 생각합니다. 오순절 성령 강림을 예고하시는 일이 아니고서야 구테여 칠칠절 다음 날 50일 째 되는 날을 성회로 열어 새 소제를 드리게 하실 이유가 있으셨을까? 하는 것입니다. 21절은 “그날도 안식일처럼 지키고 성회로 여기며…영원한 규례라(14절)”고 하셨습니다.
4. 가난한 자와 객을 위한 배려(22절)
이삭을 줍는 자와 배 고프게 지나가는 나그네는 항상 있는 것인즉 곡물을 벨 때 모퉁이까지 다 베지 말고 떨어진 것을 줍지 않게 하신 것은 가장 쉬운 방법으로서의 구제 행위라 할 것입니다. 예수님의 자선방식은 “자신이 필요 이상 갖지 않으시면서(고후 8:9) 구제할 때 은밀하게 하라(마 6:2~4)”는 것이었습니다.
5. 7월 1일 나팔 부는 성회(23~25절)
이 절기를 나팔절이라고 합니다.
“7월 1일을 안식일, 또는 성회로 삼고 하나님께 화제를 드리라”고
하셨습니다.
화제는 불태운다는 뜻인즉 규례대로(출 29:18, 레 1:9, 2:2, 신 18:1) 드리면 됩니다.
왜 나팔을 불고
성회를 삼았을까요?
“추수가 끝났은즉 가난한 사람들이 이삭을 주으러 가도 된다, 또 앞으로 10일 후면 속죄제 성회가 있은즉
준비하라”는 뜻으로 이해합니다.
민 29:1~6을 참고하십시오. 백성을 다스리는 일정이 주밀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6. 7월 10일 속죄일(26~32절)
속죄일 행사인즉 마땅히 속죄제를 드려야 할 것입니다. 회중을 위한 속죄제 규례는 레 4:13~21에 기록되었습니다. 본문에서 주신 말씀은 “7월 10일에 시행하라. 9일 저녁부터 준비하여 이튿날까지 안식하고 성회로 지켜라(26, 32절). 스스로 괴롭게 하고(죄를 생각하는 뜻) 하나님께 화제를 드려라. 속죄일인즉 일하지 말라(28절, 속죄가 먹고 사는 일보다 중요하다는 뜻). 스스로 괴롭게 하지 않는 자는(중심에 통회하지 않는 자, 시 51:17 참고) 백성 중에서 끊쳐질 것이라(29절). 이 날에 일하는 자는 멸절시키리라(30절). 아무 일도 하지 말라. 너희 거하는 각 처에서 대대로 영원히 지킬 규례라”고 하셨습니다. 회개하고 속죄 받는 행사에 참여하지 않는 자는 완악한 자로서 살아남을 수 없음을 알리는 엄격한 행사라고 할 것입니다. 이 행사는 레 16:5~22에서 “아사셀 양”이란 말씀으로 더 자세히 기록되었습니다.
7. 초막절(33~44절)
“7월 15일은 초막절이니 7일 동안 지키라(34절)”고 하셨습니다. “첫 날도 성회요, 아무 노동도 하지 말며(고용인들을 해방하는 뜻도 있음, 안식일처럼 지키는 뜻), 7일 동안 (매일) 화제를 드릴 것이요, 8일도 성회이며, 하나님께 드릴 거룩한 대회라(35~36절)”고 하셨습니다. 37~38절은 “초막절 뿐 아니라 다른 절기들을 지킬 때 미리 공포하여 준비하게 하고, 번제, 소제, 희생과 전제를 각각 그날에 화제로 드리고, 안식일 외에, 헌물 외에, 서원예물 외에, 낙헌예물 외에 드릴 것이라” 하시므로 이 초막절 행사를 다른 제사나 예물과 겸하지 않게 할 것을 명하신 것입니다. 39절은 “소산 거두기를 마친 때의 행사”이므로 감사절 의미가 있지만 더 큰 이유를 40~44절에서 말씀하셨습니다. 곧 “40년 동안 광야에서의 초막 생활을 기념하면서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는 것”입니다(신 16:13, 출 23:16을 참고하십시오). 출 23:16에서는 수장절이라고 하셨습니다. 수장절은 소출을 다 거둔 의미이고, 초막절은 광야의 초막생활을 기념, 전수, 감사하는 의미입니다. “첫 날에 아름다운 나무 실과와 종려가지, 무성한 가지, 시내 버들을 취하여(초막을 만들고) 출생자가 다 그 안에 거하며 너희 하나님 여호와 앞에 즐거워할 것이라(40절)” 하셨으니, 감사에는 예물에 앞서 즐거움이 있어야 합니다. 41절에서 “이는 내가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던 때에 초막에 거하게 한 줄을 너희 대대로 알게 함이라” 하셨으니, 초막에 거한 것도 감사할 일이요, 기념할 일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계획적으로 그렇게 하셨기 때문입니다. 이 말씀을 주신 때는 마라와 엘림을 거쳐(출 15:2~27) 신광야에 왔고, 만나와 메추라기를 먹었을 때, 즉 출애굽 2개월 15일 즈음입니다(출 16:1). 마라는 쓴물이고, 엘림은 단물입니다. 유교병은 굳은 떡이나 무교병은 부드러운 떡입니다. 칠칠절에는 “누룩을 넣어 먹으라(17절)”고 하셨습니다. 초막생활도 있었지만 가나안에 정착하는 생활도 있은즉 성도는 항상 소망 중에 살면서 고난도 취미와 낙으로 즐겨야 할 것을 교훈하신 것입니다(성령님 및 교리설교 9과 “성령 강림절을 지키는 정신” 참고).
"일곱주를 셀지니 곡식에 낫을 대는 첫날부터 일곱주를 세어 네 하나님 여호와앞에 칠칠절을 지키되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복을 주신대로 네 힘을 헤아려 자원하는 예물을 드리고"(신 16:9~10)
곡식에 처음 낫을 대는 날이 바로 초실절입니다.
이날은 예슈아께서 부활의 첫 열매로 부활하신 날이기도 합니다.
이 초실절부터 계수하여 7주를 지나면 49일이고 그 다음날이 50일 이 날이 오순절입니다.
이 오순절의 구속사적인 의미는 성화를 의미합니다.
즉 구원받은 자가 거룩한 삶을 살아가는 성화의 과정을 말합니다.
유월절에서 구원을 받고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다고 구원이 완성된 것이 아닙니다.
구원받은 것은 시작이고 성화의 과정이 필요합니다.
거룩한 삶을 살고 더 이상 죄짓지 않도록 살아야합니다.
그렇게 살기 위하여 그 당시에 토라말씀을 주셨고 예슈아시대에는 성령을 주셨습니다.
놀랍게도 이 오순절에 주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오순절에 주신 토라(율법과 계명) 와 성령의 역활은 무엇일까요?
여기서 토라를 다 율법이라고 신약번역자들이 번역해놓았습니다.
토라의 역활
첫째, 죄를 깨닫게 합니다.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을 하리요. 율법이 죄냐 그럴수 없느니라. 율법으로 말미암지 않고는 내가 죄를 알지 못하였으니 곧 율법이 탐내지 말라 하지 아니하였더라면 내가 탐심을 알지 못하였으리라."(롬7:7)
토라(율법)의 중요한 역할은 죄가 무엇인지 가르쳐주는 역할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세상사람과 똑같이 살면 죄를 짓고도 죄인지 알지를 못합니다. 세상 따라 살때는 탐내는 것이 죄인줄 알지 못하다가 토라를 보니까 탐내는 것이 죄라고 가르쳐주니까 죄인줄 압니다. 또한 동성애가 죄가 아니라고 세상은 말합니다. 그러나 성경의 가르침은 동성애는 죄라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그래서 그러한 죄를 짓지 않으려고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백성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처럼 토라는 죄를 알려주고 죄를 짓지 않도록 경고도 합니다.
둘째, 선하고 의로운 삶으로 도와줍니다.
"또 어려서부터 성경을 알았나니 성경은 능히 너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슈아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느니라.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하게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할 능력을 갖추게
하려함이라."(딤후3:15~17)
이 당시의 성경은 구약성경을 말합니다. 왜냐하면 이 때는 신약이 나오지도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구약 말씀 전체인 토라와 선지서 시가서입니다. 여기서 토라, 모세오경이 중심입니다. 디모데는 이 성경이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고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함으로 의의 열매를 맺게 하며 또한 모든 선한 일을 행할 능력에 있기에 선한 열매를 맺게 한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오순절은 이스라엘에서 생산되는 7가지의 식물(보리, 밀, 석류, 포도, 무화과, 대추야자열매, 올리브)을 거두어 하나님께 드리는날이듯이 우리는 이 날에 성화의 열매 선하고 의로운 열매들을 이 오순절에 드리도록 하기 위해 토라말씀을 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백성들은 토라의 가르침으로 선한 열매 의의 열매를 맺도록 해야합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토라의 가르침대로 살지 못하고 불순종하고 죄를 짓고 토라말씀보다 유전과 전통을 가르치고 토라가 되시는 예슈아를 거부하였습니다. 예슈아는 토라 말대로 사셨고 토라를 완성하셨습니다. 친히 유월절 어린양이 되사 십자가에서 모든 죄를 짊어지고 죽으셨기 때문입니다. 또 최고의 법인 하나님사랑과 이웃사랑을 실천하심으로 모든 울법을 이루셨던 것입니다. "사랑은 이웃에게 악을 행하지 아니하나니 그러므로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니라."(롬13:10) 이와같이 예슈아는 선하고 의로운 삶을 살도록 우리에게 가르쳐 주기 위해 시내산에서 이 토라를 주셨습니다.
성령의 역할
첫째 말씀을 가르치고 생각나게 하십니다.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리라."(요14:26) 토라받은 오순절에 성령님이 오셔서 백성들이 성화의
과정을 걸어가도록 즉, 토라의 가르침에 따라 성공적으로 걸어가도록 모든 것을 가르치고 모든 말씀을 생각나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보혜사는 변호하고 보호하심을 말합니다.
토라말씀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기록되었기 때문에 성령께서 하나님의 깊은 것이라도 통달하십니다. 그러므로 잘 모르면 성령님께 물어보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입니다. 성경에 기록된 말씀으로 응답하실 것입니다. 매년 오순절을 지내면서 자신의 성화 과정을 점검합시다. 또한 성령의 도움을 받아 구원의 완성을 향하여 죄를 짓지 않고 거룩한 삶을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되시길 축복합니다.
들째 성령의 열매를 맺게 하십니다.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 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갈 5:33~23) 하나님의 오순절에 7가지의 소산물을 예물로
가져오라고 하셨습니다. 마찬가지로 성령님을 보내주신 후에는 우리에게 9가지의 성령의 열매를 맺어 드립니다. 어떻게 열매를
맺는가요?
성령을 따라 살고 성령 충만함으로 토라의 가르침 따라 살 때에 맺는 열매입니다. 그러므로 성화의 과정을 성령님과 동행할 때 이러한 열매를 맺게 됩니다. 하나님은 구원받은 백성이 성령의 열매를 맺기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토라와 성령을 이 오순절에 보내주신 하나님의 뜻을 알고 거룩한 삶을 살아가길 축복합니다.
"너희 타작마당과 포도주틀의 소출을 거두어들인 후에 이레 동안 초막절을 지킬 것이요. 절기를 지킬 때에는 너와 네 자녀와 노비와 네 성중에 거주하는 레위인과 객과 고아와 과부가 함께 즐거워하되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택하신 곳에서 너는 이레 동안 네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절기를 지키고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 모든 소출과 네 손으로 행한 모든 일에 복을 주실 것이니 너는 온전히 즐거워할지니라."(신 16:13)
이 초막절은 초막을 지어놓고 그 속에서 하나님이 광야를 잘 인도해 주심을 감사하고 축하하고 기뻐하며 파티를 하는 절기입니다. 7일간 이 기간 내내 맛있는 음식과 노래와 춤을 초막 안에서 즐깁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나라를 의미합니다. 즉, 완전한 구원을 이루는 천국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특이한 점이 있습니다. 초막절에 들어가기 전에 반드시 거쳐야 할 다른 절기가 있습니다.
그것이 대속죄일입니다. 이 날은 금식하며 회개하는 날로서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는 날입니다. 물론 이전부터 회개를 하지만 이날은 특별히 하나님과의 관계와 다른 것에 흠이 있는지 살펴보면서 최종 회개하는데 그동안 성화의 과정을 거치면서 살아왔다 해도 완전한 의를 이루지 못함과 온전한 거룩함을 이루지 못하는 한계가 있기에 놀랍게도 이 대속죄일을 마련하여 이날에 십자가의 보혈로 모든 죄를 깨끗이 씻고 초막절로 들어가도록 하신 하나님의 은혜가 있다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중요한 것은 죄를 없애야 천국에 들어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절기의 사이클에서 구원의 완성인 초막절로 들어가기 전에 대속죄일에 온전히 회개하여 십자가의 보혈로 그동안의 죄를 씻고 초막절을 맞이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구속사적 관점으로 보면 초막절은 구원의 완성입니다. 성경은 신랑 되신 어린양 예슈아와 혼인잔치의 예표가 초막절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절기의 사이클에 따라 유월절은 어린양 예슈아를 통하여 구원을 받아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오순절은 말씀과 성령으로 구원을 이루어가는즉, 거룩해지는 성화의 과정을 거친 후에 가을 절기인 초막절에 들어가서 완전한 구원을 이루게 하는 계획이 들어있는 이 3대 명절은 하나님의 놀라운 구속사의 예표라는 것입니다.
결론입니다. 이러한 3대 절기를 매년 지나면서 우리는 구원을 지키고 이루어가며 거룩한 삶을 살고 천국까지 이르는 것을 연습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절기의 사이클에 따라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되길 축복합니다.
초실절(初實節) 레위기 23:9-14
9.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일러 가라사대
10. 이스라엘 자손에게 고하여 이르라 너희는 내가 너희에게 주는 땅에 들어가서 너희의 곡물을 거둘 때에 위선 너희의 곡물의 첫 이삭 한 단을 제사장에게로 가져갈 것이요
11. 제사장은 너희를 위하여 그 단을 여호와 앞에 열납되도록 흔들되 안식일 이튿날에 흔들 것이며
12. 너희가 그 단을 흔드는 날에 일년 되고 흠 없는 수양을 번제로 여호와께 드리고
13. 그 소제로는 기름 섞은 고운 가루 에바 십분 이를 여호와께 드려 화제를 삼아 향기로운 냄새가 되게 하고 전제로는 포도주 힌 사분 일을 쓸 것이며
14. 너희는 너희 하나님께 예물을 가져오는 그날까지 떡이든지 볶은 곡식이든지 생 이삭이든지 먹지 말찌니 이는 너희가 그 거하는 각처에서 대대로 지킬 영원한 규례니라.
히브리 백성들이 지키는 명절은 교훈적이며 예언적입니다.
유월절과 무교절에 이어서 초실절이라고 합니다.
초실절은 첫 열매를 하나님께 바치는 절기라고 하겠습니다.
첫 이삭은 보리 추수를 말합니다.
밀 추수는 맥추절이란 절기를 지킵니다.
히브리백성들이 바벨론에 포로가 될 때부터 흩어진 백성 즉 디아스포라가 되면서 절기를 지키는 것이 어려워졌습니다.
이때까지는 초실절을 지키는 것에 어려움이 없었을 것입니다.
11. 제사장은 너희를 위하여 그 단을 여호와 앞에 열납되도록 흔들되 안식일 이튿날에 흔들 것이며
안식일 이튿날에 흔들 것이며 - 주일
영적 의미는 첫 열매는 인간의 부활의 생명이 되는 부활의 주님을 상징합니다.
안식일 다음 날 부활하셨다.
이 날은 곧 초실절이 갖는 영적 의미라고 하겠습니다.
주일을 지키는 것도 이런 의미에서 바람직한 신앙이라고 하겠습니다.
안식후 첫날 마리아와 몇 명의 여인들이 무덤으로 달려갑니다.
그곳에서 무덤이 비었다는 것을 알고 부활의 소식을 전합니다.
고린도전서 15:20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도다.
흔드는 것은 기쁨의 표현입니다.
한 줄기가 아니라 한 단을 바쳤습니다.
고린도전서 15:23
그러나 각각 자기 차례대로 되리니 먼저는 첫 열매인 그리스도요 다음에는 그리스도 강림하실 때에 그에게 붙은 자요.
그리스도에게 붙어 있는 자들이 함께 부활한다.
부활은 예수님 한 분에게만 성립된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 속한 자들 모두가 부활할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사람은 출생 후에 세상을 떠나는 시간은 각 사람마다 달리 떠납니다.
어린 생명, 갓난 아기, 소년, 소녀, 청년, 장년, 노년..............등
그러나 모두 부활의 날에는 모두 함께 일어날 것입니다.
데살로니가전서 4:13-14
형제들아 자는 자들에 관하여는 너희가 알지 못함을 우리가 원치 아니하노니 이는 소망 없는 다른이와 같이 슬퍼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
우리가 예수의 죽었다가 다시 사심을 믿을찐대 이와 같이 예수 안에서 자는 자들도 하나님이 저와 함께 데리고 오시리라 .
13. 그 소제로는 기름 섞은 고운 가루 에바 십분 이를 여호와께 드려 화제를 삼아 향기로운 냄새가 되게 하고 전제로는 포도주 힌 사분 일을 쓸 것이며
(예) 가인과 아벨의 제사 / 첫 열매와 첫 새끼
첫 새끼를 드린 양
가인은 땅의 소산(창세기 4:3)
아벨은 자기도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창세기 4:4)
1. 첫 월급을 예물로 바치는 신앙
2. 사업장에서는 첫 수입을 예물로 바치는 신앙
3. 첫 시간을 무릎을 꿇고 시작하는 신앙
4. 첫 시간에 성경을 펴서 말씀을 읽고 시작하는 신앙
5. 음식을 만들었을 때 목회자에게 먼저 가져다 드렸던 신앙
6. 이웃의 영혼을 바칠 수 있는 신앙(직장, 이웃, 학교....)
로마서 15:16
이 은혜는 곧 나로 이방인을 위하여 그리스도 예수의 일군이 되어 하나님의 복음의 제사장 직무를 하게 하사 이방인을 제물로 드리는 그것이 성령 안에서 거룩하게 되어 받으심직하게 하려 하심이라.
무교절(無酵節) 레위기 23:5-8
정월 십사일 저녁은 여호와의 유월절이요
이 달 십오일은 여호와의 무교절이니 칠일 동안 너희는 무교병을 먹을 것이요
그 첫날에는 너희가 성회로 모이고 아무 노동도 하지 말찌며
너희는 칠일 동안 여호와께 화제를 드릴 것이요 제 칠일에도 성회로 모이고 아무 노동도 하지 말찌니라.
출애굽 당시 상황과 무교절의 유래
이스라엘 백성들이 유월절을 지키고 급히 애급에서 나오느라 누룩을 넣지 않은 떡을 가지고 나오면서 칠일간 무교병을 먹게 되었다(출애굽기 12:17~20).
유월절
밤에 애급 앙 바로가 장자를 멸하는 재앙을 당하고 모세와 아론을 불러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데리고 떠나라고 하였다(출애굽기
12:30~31).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가나안으로 출발한 후에 애급 왕 바로의 군대에게 쫓기기 시작하여 홍해 바다를 건너는 7일
동안의 고생한 날들을 기억하기 위한 절기이다(신명기 16:3).
유교병을 그것과 아울러 먹지 말고 칠일 동안은 무교병 곧 고난의 떡을 그것과 아울러 먹으라 이는 네가 애굽 땅에서 급속히 나왔음이니 이같이 행하여 너의 평생에 항상 네가 애굽 땅에서 나온 날을 기억할 것이니라.
그래서 무교병을 '고난의 떡'이라고도 불렀다.
구약 시대의 무교절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하나님의 백성들이 지켜야 할 율법을 알려 주시면서 15일부터 7일동안
무교절임을 선포하셨다(레위기 23:6~8). 애급에서 나온 것을 평생 기념하기 위해서 무교병을 먹으라는 율법(신명기
16:3~8)에 따라서, 오늘 날에도 유대인들은 무교병을 먹는다.
3. 유교병을 그것과 아울러 먹지 말고 칠일 동안은 무교병 곧 고난의 떡을 그것과 아울러 먹으라 이는 네가 애굽 땅에서 급속히 나왔음이니 이같이 행하여 너의 평생에 항상 네가 애굽 땅에서 나온 날을 기억할 것이니라>
4. 그 칠일 동안에는 네 사경 내에 누룩이 보이지 않게 할 것이요 또 네가 첫날 해 질 때에 제사드린 고기를 밤을 지내어 아침까지 두지 말것이며
5. 유월절 제사를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주신 각 성에서 드리지 말고
6. 오직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 이름을 두시려고 택하신 곳에서 네가 애굽에서 나오던 시각 곧 초저녁 해 질 때에 드리고
7.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택하신 곳에서 그 고기를 구워먹고 아침에 네 장막으로 돌아갈 것이니라.
8. 너는 육일 동안은 무교병을 먹고 제 칠일에 네 하나님 여호와 앞에 성회로 모이고 아무 노동도 하지 말찌니라
구약에서 무교절을 지키는 장면
1. 출애굽 당시 모세와 이스라엘 백성들이 지킨 무교절(출애굽기 12:17)
2. 솔로몬 시대 무교절 지키는 무겨절(역대하 8:13)
3. 히스기야 시대 남유다에서 지킨 무교절(역대하 30:13)
4. 요시아 시대 남유다에서 지킨 무교절(역대하 35:17)
5. 바벨론 포로 시절에 지킨 무교절(에스라 6:22)
구약 무교절 예법
1. 무교절 첫날과 끝날 성회를 열고 아무 노동도 하지 않음(레위기 23:7)
2. 무교절 절기 7일간 무교병을 먹음(레위기 23:6)
3. 무교절 절기 7일간 집에서 누룩을 제거(출애굽기 12:19)
신약 시대의 무교절
이스라엘 백성들이 유월절을 지키고 고난을 받은 것처럼, 예수님도 최후의 만찬으로 많이 알려져 있는 유월절을 지키시고 무교절(니산월 15일)에 십자가에 달리는 고난을 받으셨다.
초대교회 성도들은 신랑을 빼앗길 날에는 금식하라는 가르침대로 무교절에 금식으로 고난에 동참했다.
그러나 신랑을 빼앗길 날이 이르리니 그 날에는 금식할 것이니라
그리고, 신약성경에 무교절에 대한 기록이 있다.
우리는 무교절 후에 빌립보에서 배로 떠나 닷새 만에 드로아에 있는 그들에게 가서 이레를 머무니라
신약에서 무교절을 지키는 장면
신약 무교절 예법
- 무교절에 금식(마가복음 2:19~20)
현대 이스라엘에서 무교절
무교절은 7일 간의 휴일이며, 첫날과 마지막 날은 법정 공휴일로, 휴일 식사, 특별기도 서비스가 진행되며 그날에는 일을 하지 않음으로써 하나의 성일로 기념된다. 그리고 이스라엘이 아닌 외국에 거주하는 유대인들도 유월절을 포함하여 8일 동안 축제를 기념한다.
카라이테 유대교인들과 사마리아인들은 다른 종류의 유대력을 사용하는데,이 달력은 종종 현대의 유대력과 하루나 이틀씩 차이가 발생한다. 예를 들어, 2009년에 일반 유대교에서 사용한 유대력의 니산월 15일은 4월 9일에 해당하는 반면, 카라이테 유대교인들과 사마리아인들이 사용한 달력에서 아빕월(=니산월) 15일은 2009년 4 월 11일에 해당한다. 카라이테 유대교인과 사마리아인의 유월절은 하루 동안 진행되며 연이어 6일 간의 무교절 축제가 이어진다.
유월절과 무교절 날짜 논란
많은 이스라엘 사람들이 10일부터 유월절과 무교절 준비를 같이 시작하고 날짜도 하루 차이이고(유월절은 14일, 무교절은 15일로 부터 7일간), 봄철 대표 절기가 무교절이다 보니, 유월절과 무교절을 흔히 혼동한다.
유월절 다음날인 15일부터 7일간 무교절로 지내며 누룩을 넣지 않은 빵을 먹으며 15일과 7일째에 성회를 가진다.(레위기
23:6~8)
원래 이 두 축제는 별개의 축제로 취급되었으나 누룩을 넣지 않은 빵이 노예 생활에 대한 기억이며 죄악으로부터
정결하게 된다는 것을 의미하는데다, 실질적으로 무교절에 쓸 누룩을 넣지 않은 빵을 만들기 위해서는 유월절 전부터 준비해야 했으므로
점차 하나의 절기로 여겨졌다.
참고) 무교절과 유월절이 같은 절기이다는 주장과 사실 확인
출애굽기 12장 내용과 레위기 23장 내용이 일부 차이가 있어 결국 무교절과 유월절은 같은 절기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너희는 무교절을 지키라 이 날에 내가 너희 군대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었음이니라 그러므로 너희가 영원한 규례를 삼아 이 날을 대대로 지킬지라 정월에 그 달 십사일 저녁부터 이십일일 저녁까지 너희는 무교병을 먹을 것이요 칠 일 동안은 누룩을 너희 집에 있지 않게 하라 무릇 유교물을 먹는 타국인이든지 본국에서 난 자든지 무론하고 이스라엘 회중에서 끊쳐지리니 너희는 아무 유교물이든지 먹지 말고 너희 모든 유하는 곳에서 무교병을 먹을지니라
출애굽기 17절 초반에 보면, "무교절을 지키라"는 내용이 있고, "십사일 저녁부터 이십일일 저녁까지 무교병을 먹으라"는 내용이 존재한다. 무교절은 명칭에서 비롯된 것처럼, 무교병을 먹는 날로 알려져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19절에 보면, "칠 일 동안은 누룩을 너희 집에 있게 않게 하라"고 적혀 있다. 그러므로 14일부터 무교절이 시작하므로, 유월절은 무교절에 포함된 비 독립 절기라는 주장이다.
십사일부터 이십일일은 팔일에 해당한다. 8일간 무교병을 먹게 되는 이유는 다음과 같다.
14일 저녁 유월절에는 양고기와 무교병과 쓴 나물을 먹으라고 하셨다. (참고: 영문 위키 Passover Seder)
이달 십사 일까지 간직하였다가 해질 때에 ... 그 밤에 그 고기를 불에 구워 무교병과 쓴 나물과 아울러 먹되 ... 손에 지팡이를 잡고 급히 먹으라 이것이 여호와의 유월절이니라
15일부터 21일(칠 일)은 무교절에는 무교병을 먹으라고 하셨다.
기한에 미쳐 너희가 공포하여 성회로 삼을 여호와의 절기는 이러하니라 정월 십사일 저녁은 여호와의 유월절이요 이 달 십오일은 여호와의 무교절이니 칠 일 동안 너희는 무교병을 먹을 것이요
즉, 유월절날 무교병을 먹게 되어 있는 절기 내용 때문에 유월절과 무교절이 같다고 여기는 것이지, 유월절은 무교절과 같지 않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무교절 The feast of Unleavened Bread
출애굽기 12:15
너희는 칠일 동안 무교병을 먹을지니 그 첫날에 누룩을 너희 집에서 제하라 무릇 첫날부터 칠일까지 유교병을 먹는 자는 이스라엘에서 끊쳐지리라.
1. 무교절(無酵節)의 의미
무교병(無酵餠)은
히브리어 ‘맛차’, 헬라어 ‘아쥐모스’로, 누룩이 없는 떡을 말합니다.
한자로는 ‘없을 무(無), 술괼 교(酵), 떡 병(餠)’(창
19:3)이며,
반죽을 부풀게 하는 누룩을 넣지 않고 만든 넓적하고 얇은 빵입니다.
무교병은(출 12:15) 주로 긴급한 상황
속에서 만들어 먹었으며(출 12:33-34, 39, 삼상 28:24-25),
“고난의 떡”으로도 불렸습니다(신 16:3).
2. 무교절을 지키는 방법
무교절은
유월절이 끝난 직후인 1월 15일부터 21일까지 7일간 지키는 절기입니다(출 12:18, 레 23:5-8).
7일 동안 집안에
누룩을 없애고 누룩을 넣지 않는 떡(무교병)을 먹으며 지내는데, 이는 성도의 성별된 생활을 상징합니다.
특별히 “그 첫날에 누룩을
너희 집에서 제하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출 12:15).
유대인들은
니산월(태양력 3-4월)이 되면 유월절 전에 온 집안의 누룩을 제거하는데, 이 행사는 깊은 구속사적인 의미를 함축하고 있습니다.
유월절이 오기 며칠 혹은 몇 주 전부터 대청소를 합니다.
카펫트도 청소하고 옷이나 침구, 커튼 등도 세탁하고, 집안에 있는
먼지를 샅샅이 제거합니다.
주머니까지도 일일이 뒤집어서 털어 냅니다.
너무 낡고 더러운 것들은 새 것으로 교체합니다.
가정은
물론이고 각 건물마다 곰팡이와 먼지를 완전히 닦아 내는 대청소로 한바탕 소동이 벌어집니다.
그리고 마을마다 불을 피워 남아 있는
누룩들을 태우고, 식기들과 조리 도구들도 끓는 물로 소독하여 누룩의 흔적조차 모두 없앱니다. 특히 유월절 전날 저녁에는 누룩을
제거하는 일이 그 절정에 이릅니다.
누룩의 영적 의미
1. 잘못된 교훈(wrong teaching)
/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의 교훈
마태복음 16:6
예수께서 이르시되 삼가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의 누룩을 주의하라.
마태복음 16:11-12
어찌 내 말한 것이 떡에 관함이 아닌 줄을 깨닫지 못하느냐 오직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의 누룩을 주의하라.
그제야 제자들이 떡의 누룩이 아니요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의 교훈을 삼가라고 말씀하신 줄을 깨달으니라.
마태복음 16:6, 11을 볼 때,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의 누룩을 주의하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막 8:15).
이 누룩은 바로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의 교훈”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마 16:12).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은 율법을 문자적인 의미로 지키려고 노력했습니다.
이와
같은 노력에 대해서 예를 들어 말씀하시기를 "간음하지 말라"는 율법을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는 자마다 이미 간음하였다"고
하셨습니다. 잘못된 교훈은 행동으로 나타난 것만 죄라고 가르쳤으나 예수님께서는 행동하기 이전의 마음과 생각을 주의하라고
하셨습니다.
또 다른 예를 들면 안식일에 가축이 웅덩이에 빠져 있을 때 만일 가축이 죽을 것같으면 끄집어내야 합니다.
그러나 가축이 죽지 않을 것같으면 안식일이 지난 후에 웅덩이에서 꺼내야 합니다.
길을 가던 제자들이 안식일이 밀 이삭을 잘라 먹었을 때 바리새인들은 당신의 제자들이 안식일에 하지 못할 일을 한다고 합니다.
그 때 예수님께서는 다윗이 시장하여 진설병을 먹었다.
또 안식일에 제사장들이 성전 안에서 안식을 범하여도 죄가 없다는 것을 율법에서 읽지 않았느냐?
나는 자비를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않는다.
인자가 안식일의 주인이라고 하셨습니다.
2. 외식(hypocrisy) /
누가복음 12:1
그 동안에 무리 수만 명이 모여 서로 밟힐만큼 되었더니 예수께서 먼저 제자들에게 말씀하여 가라사대 바리새인들의 누룩 곧 외식을 주의하라.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바리새인들의 누룩 곧 외식을 주의하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외식(外飾)은 겉만 번지르르하게 꾸미는 것으로, 속과 겉이 다른 것을 말합니다.
마태복음 15장
제자들이 손을 씻지 않고 떡을 먹는 것을 본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장로의 유전을 지키지 않느냐?
부모를 공경하라고 하였으나 하나님께 드렸다고 하면 부모를 공경할 것이 없다며 너희 유전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폐한다고 하셨습니다.
입술로는 하나님을 공경한다고 하면서도 마음은 내게서 멀다고 하셨습니다.
3. 음행(sexual immorality) /
고린도전서 5:1
너희 중에 심지어 음행이 있다 함을 들으니 이런 음행은 이방인 중에라도 없는 것이라 누가 그 아비의 아내를 취하였다 하는도다.
고린도
교회에 음행이 있었는데, 이것은 누룩과 같아서 온 교회에 금방 퍼져 나가고 있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 ‘적은 누룩’이 온
덩어리에 퍼지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고 책망하면서, ‘묵은 누룩, 괴악하고 악독한 누룩’을 내어버리라 즉 누룩이란 죄악을 의미합니다.
고린도전서
5:6-8
너희의 자랑하는 것이 옳지 아니하도다 적은 누룩이 온 덩어리에 퍼지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누룩 없는 자인데 새 덩어리가 되기 위하여 묵은 누룩을 내어버리라 우리의 유월절 양 곧 그리스도께서 희생이 되셨느니라.
이러므로 우리가 명절을 지키되 묵은 누룩도 말고 괴악하고 악독한 누룩도 말고 오직 순전함과 진실함의 누룩 없는 떡으로 하자.
누룩의 결과 / 죽음(death) 로마서 5:1, 6:23
죽음은 모든 것을 썩이고, 냄새를 풍기고 이용이 불가능하게 하기 때문이다.
그 같이 누룩도 같은 작용을 한다.
그리고 죽음은 죄의 댓가요, 악의 열매이다(로마서 5:21, 6:23).
로마서 5:21
이는 죄가 사망 안에서 왕노릇 한 것 같이 은혜도 또한 의로 말미암아 왕노릇 하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생에 이르게 하려 함이니라.
로마서 6:23
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이니라.
누룩 / 쥐메 zuvmh, 2219
zuvmh, 2219(zyme: 쥐메). 효모, 누룩 leaven.
zumovw, 2220(zymoo: 쥐모오). 발효시키다 ferment.
azumo", 106(azymos 아쥐모스). 누룩 없는 unleavened.
1. 고전 헬라어 문헌.
쥐메(zyme:)는 아리스토텔레스(주전 4세기)로부터 텝투니스 파피루스(Tebtunis Papyri; 주후 2세기)에 이르기까지 세속 헬라어에 나타난다. 쥐모오(zymoo:)는 히포크라테스(Hippocrates: 주전 5세기)의 글에서 처음 사용된다. 누룩은 곡식을 발효시킬 때 쓰이는 것으로 이스트가 아니라 오래 되고 시큼해진 가루반죽이다. 이것을 저장해 두었다가 즙을 첨가하여 발효소가 되게 만든 후, 새 가루 반죽에 “넣어”(마 13:33; 눅 13:21) 그 속으로 스며들고 가루반죽이 부풀도록 하는 것이다. 로마 국가 제의(祭儀)에서 플라멘 디알리스(Flamen Dialis)는 누룩과 접촉해서는 안 되었다. 그 이유는 플루타르크(Quaestiones Romanae 109)의 주장에 따르면, 누룩이 약하게 하고 시큼하게 하고 부패시키기 때문이다.
구약성경
1. 쥐메(zyme:)는 70인 역본과 요세푸스의 글 가운데 절기(축제) 및 제사 규정과 관련된 제의 문맥(cultic contexts)에서 문자적으로 사용된다(예: 출 12:15; 출 12:19; 신 16:3; 요세푸스, Ant. 3, 252이하). 그것은 유대 의식에 있어서 반드시 금기는 아니었다. 누룩은 화목제의 감사희생에서는 사용되었으나(레 7:13), 불로 태워드리는 소제에서는 사용이 금지되었다(레 2:11; 레 6:17). 매년 유월절과 무교절 예식 때에는, 모든 누룩은 니산월 14일 하루 동안에 전 유대 가정에서 하나도 남김없이 제거되었고, 유대인들은 그날 저녁부터 7일 동안 오직 무교병만을 먹으며(출 20:14; 출 20:20) 애굽에서 급히 도망쳐 나온 것을 기념하였다(출 12:34; 출 12:39). 이러한 춘계 대청소는 제의 의식이었지만, 한편 그것은 신 누룩을 계속 사용함으로써 야기되는 연속적인 전염병 발생을 막고자 하는 위생상의 목적을 갖고 있다(C. L. Mitton, “Leaven”, ExpT 84, 1972-73, 339이하).
2. 비유적으로 누룩은 랍비 전승에서 서로 다른 여러 가지 의미들을 갖는다. 랍비 알렉산더는 그것을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에 대한 인간적인 억제를 나타내는 은유로서 사용하였다(I. Abrahams, Studies in Pharisaism and the Gospels, I, 1917, 52이하). 반면에 랍비 히야 바 압바(Rabbi Chiyya bar Abba)는 토라(율법)를 지키는 이스라엘 백성을 그 능력으로 다시 하나님에게로 인도할 '토라'를 누룩으로 묘사하였다(SBI 728). 필로(Philo) 역시 그것에 전이된 여러 가지 다른 의미들을 부여하였다. 한편으로, 그것은 과장된 오만함, 탐닉 및 허식을 상징하며(Quaest. in Exod, 1, 15; 2, 14), 다른 한편으로 그것은 완벽한(영적) 음식물과 행복한 기쁨을 나타낸다(Spec. Leg. 2, 185).
신약 성경
1. 쥐메(zyme:)와 쥐모오(zymoo:)
공관복음서와 바울 서신에 나타난다.
각각의 경우는 문학적 표현 즉 비유, 은유, 격언(잠언) 및 상징에 속한다.
비록
학자들 가운데에는 신약성경에서 “누룩은 전염병처럼 퍼지는 악 영향을 표상하기 위하여 상징적으로 사용된다”고 주장하는 이들도 종종
있기는 하지만, 다양한 용례들의 요점은 문맥에 따라 다르다(C. L. Mitton, Op. cit., 342).
(a) 비유, 마 13:33과 눅 13:21에서는, 예수의 말씀과 사역에서 보여지는 하나님의 → 왕국 Kingdom이 눈에 띄이지 않지만 영속적으로 팽창한다는 사실이 반죽 전체에 스며들기까지는 그 속에 감추어져 있는 누룩에 비유되고 있다.
오데버그(H. Odeberg)는 이 비유를 악에 대한 경고로 해석하며(Herren Kommer, 1962, 199-201),
미톤(C. L. Mitton)은 영향력 있는악의 힘과 비교하는 것이라고 말한다(Op. cit., 341).
그렇지만 이 비유 앞에 있는 겨자씨 비유의 요점은 적은 것에 의한 팽창 또는 성장이다(참조: 고전 5:6의 경구).
도마 복음서는 누룩을 비유적으로 사용하면서 그것의 팽창하는 성질을 강조한다(p.1-525*) (B. Gartner, The Theology of the Gospeis of Thomas, 1961, 230이하).
마태와
누가의 요점은 은밀하고 신비한 침투에 의한 팽창이며, 악의 영향력은 아닌 것으로 보여진다(B. Gerhardsson, “The
Seven Parables in Matthew 13”, NTS 19, 1972-73, 22이하). 반죽이 의미하는 것이 사회의
문화인지 아니면 지역적 세상(orbis terrarium)인지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시사된 바가 없다.
(b) 은유, 막 8:15에서 누룩은 제사들이 조심해야 하는 바리새인과 헤롯('헤롯당'의 다른 표현임)의 속성을 가리킨다.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을 경계하라는 내용의 마 16:11이하에서는 이 은유가 교훈으로 해석되며, 바리새인들만이 언급되고 있는 눅 12:1에서는
'외식' hypocrisy으로 설명된다. 몇몇 학자들(예: V. Taylor, The Gospel According to St.
Mark, 1953, 365)의 견해에 따르면, 그 훈계가 암시하는 바는 누룩이 악한 어떤 것을 지시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반드시 그러한 것은 아니다(H. Windisch, TDNT Ⅱ 906). 만일 바리새인들이 후에 랍비 히야 바 압바(위의
'구약성경' 2를 보라)가 주장한 것과 유사한 주장을 율법(토라)에 대해서 한다면, 마가복음에 설명되지 않은 경고는 설명 없이도
이해되었을 것이다. 뿐만 아니라 이 경우에 있어서 마태는 기독교인 대중에게 편지를 하면서 누가와 마찬가지로 그 은유를 올바로
해석하였다. 왜냐하면 바리새인의 율법 준수가 예수님 보시기에는 더 이상 활력에 찬 믿음이 아니라 가면이었기 때문이다(참조: 마 6:2이하; 마 23:13).
(c) 격언(잠언). 고전 5:6과 갈 5:9에서 바울은 “적은 누룩이 온 덩어리에 퍼진다”는 말을 한다.
형식에
있어서는 잠언(격언)이지만, 바울 외에는 다른 곳에서 잠언으로 사용된 예를 찾아볼 수 없는 이 말들은 기독교 교회에서 누룩의
비유와 관련되어 있었을 것이다. 빈디쉬(Windisch)는 예수께서 격언의 요점을 비유의 형태로 승화시키셨다고 생각한다(Op.
cit., 905). 그러나 그 비유가 바울을 제외하고 복음의 전승형성 이전에 존재했었다는 증거가 없으므로, 비유로 인하여 격언이
교회 내에 생겼을 가능성이 있다. 그리고 다른 경우에 있어서도 공관복음 전승이 신약서신들의 소재에 영향을 준 것으로
보인다(참조: H. Riesenfeld, The Gospel Tradition and its Beginnings, 1957,
15). 고린도전서에서의 그 격언은 공동체 안에 범법자가 계속 존재함으로써 공동체가 범법의 죄를 짓게 된다(고전 5:1)는 내용을 상징적으로 나타내며, 갈라디아에서의 비유적 표현은 회중의 이해(판단)에 미치는 거짓 교사의 영향력을 가리킨다.
(d) 상징. 고전 5:7에서 바울은 공동체에게 “묵은 누룩을 내어버리라”고 권면했다.
이것은 범죄자를 축출하라(고전 5:13)는 명령이거나 죄와의 연합에 대한 “자랑”을 버리라는 훈계일 것이다.
명령의 근거는 유월절 → 어린 양 Lamb 그리스도께서 희생당하셨다는 것과,
기독교인들은 “누룩 없는” 자들이라는 사실,
그리고
명절은 누룩(곧 악과 악의)를 내어버리고 누룩 없는 떡(곧 순전함과 진실함)을 함께 나눔으로써 지켜야 한다는 것이다(우화가
아닌, A. T. Hanson, Studies in Paul's Techique and Theology, 1974, 112이하).
이 상징은 유월절 의식을 상기시키며 기독교가 그리스도를 유월절 → 어린 양 Lamb(요 19:14; 요 19:31; 벧전 1:19)과
동일시한 것을 기억케 한다. 유대인들은 유월절 음식을 먹기 전에 누룩을 내버렸다. 이와 마찬가지로 기독교인도 누룩을 내버려야
하는데, 그 이유는 유월절 희생이 이미 일어났기 때문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기독교인은 하나님에게 받아들여지게 되고 하나님에 의해
새롭게 된다(고전 6:11). 이것이 바울의 윤리적 교훈의 전형적인 예이다. 이 윤리적 교훈에 따르면
기독교인을 위하여 그리스도 안에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행동(직설법으로 표현되었다)은 그리스도와 같은 삶을 살라는 권면의
근거(명령법으로 표현되었다)이니 하나님이 신자 안에서 역사할 때 악을 버리고 선을 좇는 것이다. 이 밖의 다른 예들을 찾아볼 수
있는 구절은 롬 6:1; 고전 6:19이하; 그리고 골 2:20-4:1 등이다.
2. 아쥐모스(azymos)는 '누록 없는' unleavened을 뜻하며, 고전 5:7이하(위의 1. (4)를 보라)의 경우를 제외한 신약성경의 다른 곳에서는 복수 형태의 '타 아쥐마'(ta azyma)로 나오는데, 이는 '무교(병)절'을 의미한다.이것은 본래 아빕월에 지켜지던 일종의 추수감사절이었는데(출 23:14-17), 유월절 의식의 일부가 되었다. 후자는 니산월 15일부터 21일까지 행해졌지만, 막 14:12에서 볼 수 있는대로, 니산월 14일에 시작되는 것으로 정해져 있었다(Josephus, Ant. 2, 15, 1; 14, 2, 1). 유대인들은, 눅 22:1이 보여주는 바와 같이, 언제나 유월절을 무교절과 동일시하였다(겔 45:21; Josephus, War, 2, 10). (p.1-526*) - G. T. D. Angel.
→ 떡 Bread, → 절기 Feast, → 굶주리다 Hunger, → 희생제사 Sacrifice.
O. T. Allis, “The Parable of the Leaven”, EQ 19, 1947, 254이하; Arndt, 340; J. P. Lewis, “Leaven”, ZPEB Ⅲ 901이하; Liddell-Scott, 757; C. L. Mitton, “Leaven”, ExpT 84, 1972-73, 339-42; H. Windisch, zym? etc., TDNT Ⅲ 902-6
"떡"은 주님이시다.
요한복음 6:22-29
나는 생명의 떡이라"고 했다.
그러므로 누룩없는 떡은 예수 그리스도는 죄와 악이 없을 뿐 아니라 죽음이 그를 주장하지를 못하고
다스릴 수 없음을 의미한다.
예수 그리스도에게는 생명과 부활의 능력만이 작용한다.
그러기 때문에 죽음에서 부활하셨다.
즉, 주님은
의롭고 거룩하실 뿐만 아니라 생명의 근본이심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그 떡을 먹는 이스라엘 자신들에게 의롭고 거록함만이 아니라
생명이 주어지는 것이다.
그 이유는 "그 거룩한 떡에 접촉된자는 거룩하여 진다"는 레위기의 말씀에 근거한 것이다. 그렇다면 이것은
신약시대에 제2이스라엘 되는 성도가 생명의 떡이 되시는 주님과 영적인 관계를 가질 때, 주님의 십자가의 공로를 힘입을 때,
의롭고 거ㄹ함만이 아니라 영생을 얻게 됨을 의미한다.그러므로 천하 다른 이름으로 구원이 없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 안에만 있다. 그
구원에는 칭의,거룩함, 생명이 있다. 그것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 안에만 있다. 그 구원에는 칭의,거룩함,생명이 있다. 그것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믿는 자 안에 주어지는 것이다 (요6:39-54,롬8:10-23,고전15:12-57).그러므로 요한복음 6장 22-29절에
주님은 자신이 생명의 떡이 되심을 말씀했다. 우리가 주의할 것은 이 무교절은 1주간 계속됨이다. 그 첫날과 마지막 날에 성회로
모이고, 다음 둘째 날에서 여섯째 날까지 5일간은 일을 했다. 이 날에 무슨 일을 했을까? 이 날에 한 일은 레위기 23장 9-14에
의하면 초실절을 지켰다. 즉 이스라엘이 처음 익은 보리단을 거두어 하나님께 바친 것이다. 그러므로 이날은 하나님을 위한 일을
하는 날이다. 위 성경에서 하나님께 드림이 된 처음 익은 곡식단은 무엇인가?이것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의미한다.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도다(고전 15:20)고 했다.103)
이런 첫 열매 되시는 그리스도의 부활은 그에게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성도들에게도 그 부활의 생명과 소망이 주어진 것이다. 그러기 때문에 고린도전서 15장 23절 이하에 "그러나 각각 자기 차례대로 되리니 먼저는 첫 열매인 그리스도요 다음에는 그리스도가 강림하실 때에 그에게 붙은자"이라고 했다. "이것은 일반 신자들의 부활을 보장하는 것이기도 하다.104)
그 부활은 전체 성도에게와 이스라엘과 이방인에게도 다 미친다(행 26;23). 물론 부활 때에 제1차 부활과 제 2차 부활이 있다. 그러나 부활의 역사는 하나이다.
우리들이 이 유월절과 무교절을 살펴보면 시간적으로 전주간과 차주간의 관계를 알 수 있다.
그와같이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의
관계도 역시 시간적인 차이가 있다.
즉 주님께서 전주간에 십자가를 지시고 죽으셨는가 하면 차주간인 안식일 후 첫날에 부활하셨다.
또한 그리스도를 믿고 따르는 우리들도 주안에서 죽으나 사나 주안에서 사는 부활의 영광이 있다.
우리는 이 소망중에 살고 있다(고전 15:12-57,딤전 4:14-16).
그러므로 우리는 그 무교절에서 배운 진리가 크다.
주님의 행하신 일들은 다 하나님의 거룩한 뜻과 섭리에 따라서 기록된 것이다.
그리스도의 초림만 아니라 그의 대속의 죽음과 부활도 다 그렇다.
앞으로 생각할 성령의 강림과 주님의 재림과 심판도 하나님의 거룩한
뜻에 따라 되어진 것이다.
그 그리스도의 부활은 우리에게 부활의 소망의 확증이요, 의롭게 함과 거룩함과 생명의 유대를 증거하는
증서이다.
신약시대의 무교절
구약시대에 지킨 무교절이 출애굽 당시의 고난을 기억하기 위한 절기라면
신약시대의 무교절은 그리스도의 십자가 고난을 기억하고 잊지 않기 위한 절기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신랑을 빼앗길 날이 이르리니 그날에는 금식할 것이니라” 하셨다(마태복음 9:15, 마가복음 2:20, 누가복음 5:35).
성경에서 신랑은 예수님을 가리킨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고난당하시며 운명하신 날, 즉 신랑을 빼앗긴 날은 유월절 다음 날인 무교절이었다.
바로 성력 1월 15일이다.
그래서 새 언약 안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은 해마다 이날이 되면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무한한 사랑으로 고난을 참으신 그리스도의 참사랑을 기억하기 위해 금식하며 예배를 드린다.
우리는 무교절 후에 빌립보에서 배로 떠나 닷새 만에 드로아에 있는 그들에게 가서 이레를 머무니라 (사도행전 20:6)
바울과 누가 일행은 마케도니아 지역인 빌립보에 있을 때 무교절을 맞이했다.
‘무교절 후에 떠났다’는 말은 빌립보에서 무교절을 지키고 떠났다는 뜻이다.
예수님께서는 유대인들에게 말씀하시길 “너희가 아브라함의 자손이면 아브라함의 행사를 할 것이라”고 하셨다.
이는 아브라함처럼 행사하지 않는 것은 아브라함의 자손이 아니기 때문이라는 말로 해석할 수 있다.
초대교회의 성도들이 ‘그리스도인’이란 칭호를 받게 된 것은 그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진실히 믿었기 때문이며 그리스도의 가르침대로 따르는 순수한 믿음을 가졌기 때문이었다.
우리가 진정한 그리스도인이라면 그리스도의 행사를 해야 한다.
신랑을 빼앗긴 날에는 금식으로 동참하는 사람들이 진정한 그리스도인들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유월절에 마지막 만찬을 드시고 무교절에 십자가에서 운명하셨다.
절기를 따라 절기의 제물이 되신 것이다.
무교절은 초대교회 사도들과 성도들이 지키던, 아주 소중한 그리스도의 율법이다.
유월절 Passover
출애굽기 12:27
너희는 이르기를 이는 여호와의 유월절 제사라 여호와께서 애굽 사람을 치실 때에 애굽에 있는 이스라엘 자손의 집을 넘으사 우리의 집을 구원하셨느니라 하라 하매 백성이 머리 숙여 경배하니라.
유월절은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의 노예 생활에서 해방된 것을 기념하는 날로, 유대 민족에게 있어서 최대의 축제일입니다.
1) 유월절의 의미
‘유월절’은 히브리어 ‘페사흐’로 ‘건너뛰다, 뛰어넘다’라는 뜻을 가진 ‘파사흐’에서 유래하였습니다(출 12:13, 23).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출애굽 시키시면서 애굽에 내리신 마지막 재앙은 사람부터 짐승까지 처음 난 것을 치신 장자 재앙이었습니다(출 12:29-30, 13:15). 이 때 이스라엘 백성에게 어린 양을 잡아 그 피를 문설주와 인방에 바르게 하심으로, 죽음의 사자가 이스라엘 백성의 집을 그냥 넘어 가게 하셨습니다. 유월절은 바로 그날, 이스라엘 백성이 죽음에서 구원 받은 것을 기념하여 지키는 절기로(출 12:13-14, 21-23, 27), 매년 반드시 지켜야 할 이스라엘의 3대 절기인 유월절, 칠칠절, 초막절 중의 하나였습니다(출 23:14-17, 34:18-23, 신 16:1-16).
2) 유월절 어린양의 준비
하나님께서 어린 양은 1월 10일에 준비하였다가(출 12:3), 특히 1월 14일 해 질 때에 잡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출 12:6). 유월절 제물로 사용되는 어린 양은 1년 된 수컷으로(출 12:5), 1월 14일까지 보관하면서 제물로서 합당한지 시험합니다. 만일 이때에 준비한 양이 흠이 있거나, 제물로서 합당하지 못한 기타 다른 요소들이 발견되면, 유월절 어린양으로 사용할 수 없었습니다.
특히 유월절 양을 1월 14일 해 질 때에 잡으라고 하셨는데(출 12:6), 해 질 때는 오후 3시부터 오후 6시 사이를 가리킵니다. 예수님께서 유월절 어린 양으로(요 1:29, 고전 5:7) 인간의 대속을 위해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때가, 바로 유월절 양을 잡기 시작하는 오후 3시였습니다(마 27:46-50).
3) 유월절을 지키는 방법 (제도)
유월절은 니산월(태양력 3-4월) 14일에 지켜졌으며, 특별히 성경에서는 마지막 10번째 재앙을 통해 애굽의 모든 장자들을 멸하신 유월절인 니산월(1월) 14일 밤(유대 달력으로 15일이 시작되는 밤)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1월 14일 저녁에 양을 잡아서 피와 고기를 분리시켰는데, 고기는 고기대로, 피는 피대로 사용될 수 있게 한 것입니다. 또 양의 죽는 모습을 통하여 죽음의 고통과 대가를 크게 느끼고 생각케 하는 것인데 그 양의 죽음은 대속의 죽음을 뜻합니다. 피는 양을 먹는 집 문설주와 인방에 바릅니다(출 12:7, 22). 이 피를 바름으로 양을 잡은 집을 표시하고, 양의 피냄새를 풍기어 양의 희생을 느끼게 하였습니다. 어린 양의 고기는 그날 밤에 불에 구어 먹되 무교병과 쓴 나물과 같이 먹습니다(출 12:8-9).
여기서 몇 가지 주의할 것이 있습니다(출 12:9-11, 46).
① 날로 먹어서는 안됩니다.
② 물에 삶아 먹어도 안됩니다.
③ 아침까지 남겨 두어서는 안되며, 남은 것은 불에 태웁니다.
④ 뼈를 꺾어서는 안됩니다.
⑤ 머리 뿐 아니라 정강이와 내장도 남김없이 다 구워 먹게 되어 있습니다.
⑥ 먹을 때 자세는 허리에 띠를 띠고, 발에 신을 신고, 손에 지팡이를 잡고 급히 먹습니다. 또한, 주의해야 할 것은 그 밤에 자기 집 문 밖에 나가지 말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 애굽에 재앙을 내리심으로 애굽 사람을 치러 두루 다니시기 때문입니다(출 12:2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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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14-2021(수)
유월절(踰月節) 요한복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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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대 절기 /요한복음 2:13, 유대인의 유월절이 가까운지라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셨더니.
요한복음 3:1, 바리새인 중에 니고데모라 하는 사람이 있으니 유대인의 관원이라.
공생애 첫번째 유월절 : 니고데모와의 대화
예수님의 일방적인 선포하시는 말씀이다.
이것을 유월절 배경에서 이해해야 한다.
유월절에 고대 이스라엘 국가가 탄생한 것처럼 유월절의 화두는 거듭남에 의한 하나님 나라를 깨우치셨다.
거듭남(아노덴)
위로부터 above
다시 / 니고데모가 어리석은 사람이 아니다.
학문적으로 깊은 사람이었으므로 아노덴을 다시라고 이해한 것이 합당하다.
born again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영적으로 설명하신다. 위로부터 from above
요한복음 6:4-5
마침 유대인의 명절인 유월절이 가까운지라
예수께서 눈을 들어 큰 무리가 자기에게로 오는 것을 보시고 빌립에게 이르시되 우리가 어디서 떡을 사서 이 사람들로 먹게 하겠느냐 하시니.
유월절에는 모든 유대인들이 예루살렘으로 향한다.
그런데 지금 예수님께서는 갈릴리 벳세다에 계신다.
이것은 굉장히 놀라운 사건이다.
이 해에 예수님은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지 않았다.
왜 그러셨을까?
세례 요한의 처형이 있었다.
가버나움은 헤롯 안티파스의 영역(세례 요한을 처형한 헤롯)
벳세다는 헤롯 빌립의 영역(헤롯 안티파스와 사이가 좋지 않았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이 지역으로 이동하셨다)
요한복음 기자는 전혀 다른 각도에서 유월절을 조명한다.
1. 보리떡
2. 물고기
요한복음 6:9
여기 한 아이가 있어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졌나이다 그러나 그것이 이 많은 사람에게 얼마나 되겠삽나이까
보리떡은 가난한 자들의 식량
유월절에는 밀떡을 먹는다.
빈들 - 벳세다는 유다 지방에서 가장 푸르른 지역. 년 강우량이 1000-1200mm
광야, 빈들(에레모스)이 아니다(지리적으로)
그런데 왜 광야, 빈들이라고 표현하였을까?
마태복음 14:15
저녁이 되매 제자들이 나아와 가로되 이곳은 빈 들이요 때도 이미 저물었으니 무리를 보내어 마을에 들어가 먹을 것을 사먹게 하소서.
애급에서 나온 백성들이 제일 먼저 들어간 곳이 광야 에레모스 빈들이었다.
요한복음 6:35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
자신을 생명의 떡이라고 표현하셨다.
요한복음 13장부터 18장까지의 기록이 마지막 유월절 6시간에 일어났던 일을 기록한다.
해가 질 때부터 자정까지 6시간 동안 진행된 유월절 만찬 자리에서 있었던 사건이다.
요한복음 13장 최후의 만찬 자리 / 큰 다락방
1. 크다
2. 2층
3. 가구가 준비된 방
4. 사랑방(손님을 위한 방으로 '카탈루마' 라고 한다)
유월절 만찬을 "세데르(Seder)" 라고 한다.
이 때 4잔의 포도주를 마신다.
취하지 않도록 1잔의 포도주에 3잔의 물을 넣어 희석시켜서 마신다.
왜 4잔의 포도주를 마시는가?
출애굽기 6:6-8
그러므로 이스라엘 자손에게 말하기를 나는 여호와라 내가 애굽 사람의 무거운 짐 밑에서 너희를 빼어 내며 그 고역에서 너희를 건지며 편 팔과 큰 재앙으로 너희를 구속하여
너희로 내 백성을 삼고 나는 너희 하나님이 되리니 나는 애굽 사람의 무거운 짐 밑에서 너희를 빼어낸 너희 하나님 여호와인줄 너희가 알찌라
내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주기로 맹세한 땅으로 너희를 인도하고 그 땅을 너희에게 주어 기업을 삼게 하리라 나는 여호와로라 하셨다 하라.
4개의 동사를 기념하는 의미에서 4잔의 포도주를 마신다.
유월절 행사의 핵심 코드는 "해방"
그러므로 "기쁨"이다.
기쁨의 상징은 포도 / 예수님은 포도나무, 너희는 가지
유월절 만찬 음식
무교병 - 급하게 나왔다. 구원의 즉각성(무교병을 먹는 것)과 점진성
어린 양 - 삶은 어린 양 고기
쓴나물 - 마로르
하로셋 - 무화과 대추야자 건포도 등을 혼합하여 만든 소스로 애급의 고역
구은 계란 - 고통 상징
포도주 4잔 -
소금 -
이적, 기적, 기사, 표적
miracle / 기적(奇蹟)
sign / 표적(表蹟)
성경은 이적과 기적과 기사 그리고 표적으로 가득하다.
인간의 능력을 초월하는 초인간적인 놀라운 행적으로 병을 고치고 죽은 자를 살리는 등의 사건 그리고 자연계에서 벌어지는 초자연적인 현상으로 물 위로 걷는다든가 물로 포도주를 만드는 사건 등을 이적, 기적, 기사라고 하고 이것들은 메시아적 증거로서 표적이라고 한다.
영어 성경은 이적과 기사를 Wonder로, 기적을 Miracle로 번역했고 표적은 sign이라고 번역했다.
한글 성경은 헬라어 세메이온(σημειόν)을 이적 또는 표적이라고 번역했고,
테라스(τέρας)를 기적이라고 번역해서 혼선 양상을 보인다.
이적, 기적, 가사는 테라스(τέρας)로 번역해야 하고 세메이온(σημειόν)은 표적으로 번역해야 구분이 될 것이다.
“표적”이란 히브리어로 ‘오트’(תוא)이고,
헬라어는 쎄메이온(σημεῖον)이며 영어로는 ‘사인’ (sign)으로 ‘표시’, ‘징조’, ‘증표’ 등의 뜻을 가진다.
표적을 둘로 나누어 본다면 초인간적 행사를 이적 기적이라 하고 초자연적 행사를 이적 기사라고 할 것이다.
그러므로 이적이나 기적이나 기사는 표적(sign, σημεῖον)의 다른 명사들이다.
그래서 히브리어에서는 이적, 기적, 기사, 표적이 ‘오트’(תוא)로 통일된다.
요한복음에는 예수 그리스도가 메시아라는 일곱 개의 대표적 표적이 나타난다.
1. 가나의 혼인 잔치에서 물을 포도주로 바꾸신 표적(요 2:1~11)
2. 가버나움에서 죽어가는 고관의 아들을 고치신 표적(요 4:46~54))
3. 베데스다에서 38년 된 병자를 고치신 표적(요 5:1~9)
4. 디베랴 바다 건너편에서 오병이어로 5,000명의 무리를 먹이신 표적(요 6:1~15))
5. 디베랴 바다에서 물 위를 걸으신 표적,(요 6:16~21)
6. 실로암에서 날 때부터 장님이었던 사람의 눈을 뜨게 해주신 표적(요 9:1~12)
7. 베다니에서 죽은 지 사흘 된 나사로를 살리신 표적(요 11:1~44)
표적의 의미가 무엇인가?
성경에 나타난 구속사적 표적들을 살펴보자.
첫째, 이스라엘 구원의 언약을 성취하시는 하나님의 표적
지팡이로 뱀을 만들어 보이시는 일, 모세의 손에 문둥병을 발하게 하셨다가 다시 치유하시는 일 등이 약속을 이행하시겠다는 하나님의 표적인 것이다. 임마누엘 하나님의 언약은 반드시 성취된다는 사인이다.
둘째, 무흠하신 속죄의 어린 양이신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표적
메시야가 성령으로 잉태되고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태어나게 하시고 성령세례를 받게 하신 것은 예수님께서 속죄 양으로 오신 메시아이심을 나타내는 표적이다(사 7:14). 예수 그리스도의 무죄하심과 속죄주의 자격을 나타내는 사인이다.
셋째, 기적을 통해 천국을 보이시는 성령님의 능력의 표적
예수님의 영이신 성령님의 권능을 따라 나타나는 치유사역과 초자연적 기적 등은 바로 구약에 예언된 메시아가 예수 그리스도이심을
나타내는 표적이다. 예수 그리스도가 성령님을 통해 만물을 회복하고 우리를 천국으로 초대하시는 메시아인 증거의 사인이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주님에 의한(by Jesus), 주님에 대한(of Jesus), 주님을 위한(for Jesus) 표적을 탐욕에 의하여 인간의 욕망을 채우는 표적으로 오인하게 되었다.
오병이어의 표적이 있은 뒤에 유대인들은 예수님께 질문했다. 모세는 만나를 통해 먹을 것을 제공하는 표적을 보였는데 예수는
무슨 표적을 보이겠는가? 라고 질문하게 된다. 유대인들이 주님을 따른 것은 경제적 해결이나 정치적 이슈로 표적을 구했음을 스스로
자인하는 장면이다
그 증거로 주님께서 오병이어의 기적을 행하셨을 때 주님을 따르는 무리가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이때 주님께서 그들을 보면서
말씀하셨다.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나를 증거하는) 표적을 본 까닭이 아니요 (이 땅의)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이로다”(요
6:26)라고 하셨다.
주님은 정치적이고 탐욕적인 표적을 추구하는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에게 진정한 표적이 무엇인가를 선포하셨다.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구하나 선지자 요나의 표적 밖에는 보일 표적이 없느니라 요나가 밤낮 사흘 동안 큰 물고기 뱃속에 있었던 것 같이 인자도 밤낮 사흘 동안 땅 속에 있으리라.”(마 12:39~40))
주님은 이미 자신에 대한 표적으로 많은 이적 기사를 통해 주님이 구약에 예언된 메시아이심을 나타내 보이셨다. 그러나 깨닫지
못하고 육신의 욕망을 채우고자 하며 이 땅의 표적만을 구하는 저들에게 요나의 표적을 통해 종말론적 구속자로 오시는 주님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을 증거하신 것이다. 요나의 표적이 주님 자신을 증거하는 모형으로서의 진정한 표적이라는 것을 알려주신 것이다. 그러나
깨달을 수 있는 귀 있는 자만이 알 수 있었다.
바울사도께서는 고린도교회를 향하여 선포했다.
“유대인은 (땅의)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땅의) 지혜를 찾으나 우리는 (표적과 지혜로)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한다”(고전 1:22~23).
이스라엘의 7대 절기
출애굽기 34:22절 말씀이 많은 혼동을 불러 일으키는 것 같은데…
일단은 레위기 23장을 중심으로 7절기를 정리하시는 것이 좋을 듯…
1 . 유월절(레 23:4-5; 고전 5:7)
히브리어로 "페사흐"
'넘어가다' 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니산월(아빕월, 1월) 14일 해질 무렵, 나흘 전에 준비한 수양을 구워 무교병과 쓴 나물과 함께 먹고 그 피를 문설주에 바르고 아침까지 남은 것은 불에 태워 버린다.
애굽이 하나님의 진노로 장자를 잃는 열 번째 재앙을 당할 때 구원받은 것과 해방을 기념하는 날이다.
2. 무교절(레 23:6-8: 고전 5:7,8)
히브리어로는 맛차로. 니산월(아빕월, 1월) 15일부터 7일 동안(21일 까지) 누룩이 없는 무교병을 먹는다.
절기의 이름도 이 누룩 없는 떡을 먹는다하여 무교절이라 불리웠다. 무교절이 시작되는 첫 날과 마지막 날은 '성회' 로 백성이 모이고 노동을 하지 못했으며 매일 하나님께 화제를 드렸다
3. 초실절(레 23:9-14: 고전 15:20)
초실절은 히브리어로 바쿠림이라 불리며 무교절 기간 중에 있는 절기로, 유월절 후 첫 안식일 다음 날이다. 추수 전에 곡식의 첫 이삭 한 단을 하나님께 드리는 절기로써 양식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는 날이다. 초실절 예물을 하나님께 드리기 전에는 떡이나 볶은 곡식, 생 이삭이라도 먹지 않았다.
4. 오순절(=칠칠절=맥추절) (레 23:15-21 : 행 2:1-47: 고전 12:13: 엡 2:11-22)
히브리어로는 솨부아 '맹세하다' 라는 뜻으로 밀을 수확할 수 있도록 복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는 날이다. 칠칠절은 초실절로부터 50일째에 해당하는 날로써 보통 시완월(3월) 6일경이 된다. 이 날은 하루만 절기로 지키는데 성회를 공포하고 노동이 금지되며 하나님께 번제를 드렸고 수염소 한 마리를 속죄제로 드렸다. 특이한 것은 모든 절기에는 누룩이 없는 무교병을 쓰지만 칠칠절만은 누룩을 넣은 유교병을 소제로 사용한다.
5. 나팔절(레 23:23-25)
나팔절은 티쉬리월(7 월) 1일로 유대 민간력으로는 1월에 해당하는 새해 첫날이다.
이 날은 나팔을 하루 종일 일정한 간격으로 불었으며 성회가 선포되고 노동을 금했다. 그리고 속죄제로 수염소 한 마리를 드렸다.
6. 속죄일(레 23:26-32; 히 9:25, 26)
이 날은 성회가 선포되고 노동을 금하며 마음을 괴롭게 하는 날로 티쉬리월( 7월) 10일이다. 특별히 연중 이 날만 대제사장이 지성소에 들어갔다. 그리고 하나님을 위한 수염소와 아사셀을 위한 수염소를 드렸다.
7. 초막절(레 23:33-34)
수장절, 장막절이라고도 불린다.
티리쉬월(7월) 15일부터 8일 동안 행해진다. 초막절은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을 나와 광야에 머물었던 것을 기념하는 동시에 풍성한 수확을 허락하신 하나님께 감사하는 절기이다. 첫날과 여덟째 날에는 성회로 모이고 노동이 금지되었으며 각 날마다 그에 상응 하는 제사를 드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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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대 절기 /유월절, 무교절, 초실절, 오순절, 나팔절, 속죄절, 장막절
1. 시기(時期)
a. 아빕월(אָבִיב, Abib) : ‘어린 이삭’ ‘새로운’
* 출 13:4, 23:15, 34:18, 신 16:1
* 유대 달력으로 첫째 달(정월), 아빕월(보리 추수기, 보리가 익는 계절)
b. 니산월(נִיסָ֗ן, Nisan) : ‘움직이다’ ‘출발하다’
- 바벨론식 표기 / 느헤미야, 에스더
* 느 2:1, 에 3:7
2. 제물(祭物)(출애굽기 12:5)
a. 10일 어린 양을 취하라(출 12:3)
b. 흠 없고 일년 된 수컷 양, 염소(출 12:5)
c. 14일 까지 간직, 해 질 때 잡을 것(출 12:6)
3. 방법(方法)
a. 양의 피를 먹을 집 좌우 문설주, 인방에 바를 것(출 12:7)
b. 고기를 불에 구워 무교병, 쓴나물과 먹을 것(출 12:8)
c. 아침까지 남겨두지 말 것(남은 것은 소화하라)(출 12:10)
d. 급히 먹으라(출 12:10)
* 허리에 띠를 띠고, 신을 신고, 지팡이를 잡고
4. 결과(結果)
a. 장자, 초태생, 애굽의 모든 신에게 벌을 내릴 것(출 12:12)
5. 의의(意義)
a. 바로(생명의 신, 주)가 신이 아니다
b. 여호와 하나님만이 생명의 주가 되신다
사도행전 3:15
생명의 주를 죽였도다
그러나 하나님이 죽은자 가운데서 살리셨으니
우리가 이 일에 증인이로라.
* 요한복음 1:29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
1. 유대인 : 여호와의 절기
출애굽기 12:14
너희는 이 날을 기념하여 여호와의 절기를 삼아 영원한 규례로 대대에 지킬찌니라.
* 그림자 : 참 형상이 아니다.
히브리서 10:1
율법은 장차 오는 좋은 일의 그림자요 참형상이 아니므로
해마다 늘 드리는바 같은 제사로는 나아오는 자들을 언제든지 온전케 할 수 없느니라.
2. 예수 그리스도 : 구속의 은혜
베드로전서 1:18-19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조상의 유전한 망령된 행실에서 구속된 것은 은이나 금 같이 없어질 것으로 한 것이 아니요.
오직 흠없고(自犯罪) 점(原罪) 없는 어린양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한 것이니라.
마가복음 1:1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복음의 시작이라.
사도 바울은 복음의 핵심을 가장 정확하게 깨달았다.
로마서 1:16-17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첫째는 유대인에게요 또한 헬라인에게로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유월절(踰月節)
성전(聖殿) : 공간적 배경 / 제사법, 성막 구조
절기(節氣) : 시간적 배경
유월절 : 니산월 14일, 무교절 전야(Eve)
무교절 : 니산월 15일-21일
주일안에 세 절기가 지켜진다 : 유월절, 무교절, 초실절
유월절 양 안에서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이 교제한다.
고린도전서 5:7-8
너희는 누룩 없는 자인데 새 덩어리가 되기 위하여 묵은 누룩을 내어버리라 우리의 유월절 양 곧 그리스도께서 희생이 되셨느니라.
이러므로 우리가 명절을 지키되 묵은 누룩도 말고 괴악하고 악독한 누룩도 말고 오직 순전함과 진실함의 누룩 없는 떡으로 하자.
언제 지키느냐?
유대 달력으로 첫째 달(정월)이면서, 동시에 아빕월(보리 추수기, 보리가 익는 계절)에 지켜야 한다.
마치 한국에서 농사를 지을 때 양력보다는 음력을 기준으로(24절기) 파종하고 수확하는 것과 비슷합니다.
문제는 유대인의 달력은 "태음력"
태음력은 한 달이 29.5일
29.5일은 1년이면 354일 / 태양력보다 11일이 부족하다.
3년이 되면 33일 즉 한 달이 부족한다.
3년마다 윤달을(아달월) 추가한다.
그러므로 유월절을 지킬 때 반드시 정월이면서 아빕월에 유월절을 지킨다.
역사적 사건과 농사적 추수기를 의도적으로 연결시키신 하나님
출애굽의 기적으로 약속의 땅에 인도하신 과거의 하나님은 작물의 수확을 주시는 천지의 하나님이심을 강조하는 것이다.
(적용) 누구나 출애굽의 사건이 있었다(구원)
그런데 출애굽의 사건만 갖고 있다면 현재의 삶에서 구원을 누리지 못하는 것이라고 하겠다.
그러므로 유월절이란 과거의 사건(니싼월, Nissan)에서 출발하여 약속의 땅(현재의 삶)에서도 구원의 길로 인도하시는 하나님을 만나야 합니다.
유월절을 지키는 유대인들의 풍경
1. 순례자를 위한 도로 보수
니싼월 전 달인 아달월 15일에 성전에서 사람들을 파견하여 도로 및 우물물을 보수한다.
평토장한 평민들의 무덤을 관리(뼈가 나뒹굴어 순례자들이 부정하게 되기 때문) unmark grave
마태복음 23:27, 회칠한 무덤 / 무덤에 회칠을 하여 순례자들의 성결을 보호한다.
2. 누룩제거
고린도전서 5:7
스바냐 1:12
3. 붉은 암송아지를 잡아서 정결케 하는 재를 만든다
감람산 번제단 위에서 붉은 암송아지를 태운다.
백향목과 우슬초를 함께 묶에서 태운다.
실로암 연못에서 떠온 물에 재를 풀어서 정결케 하는 의식을 행한다.
먼 지역에서 성전을 찾은 순례객이 부정하게 되었을 때 일주일울 기다릴 수 없으므로 특별하게 정결케 하였다.
7회 반복하여 정하다! 라고 선포한다.
* 정결케 하는 피 / 송아지의 피와 암송아지의 재와 그리스도의 피
히브리서 9:13-14
염소와 황소의 피와 및 암송아지의 재로 부정한 자에게 뿌려 그 육체를 정결케 하여 거룩케 하거든
하물며 영원하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흠 없는 자기를 하나님께 드린 그리스도의 피가 어찌 너희 양심으로 죽은 행실에서 깨끗하게 하고 살아계신 하나님을 섬기게 못하겠느뇨.
시편 51:7
우슬초로 나를 정결케 하소서 내가 정하리이다 나를 씻기소서 내가 눈보다 희리이다.
성전에 봉헌된 소년 제사장이 유월절 준비를 위하여 실로암 물에 가서 생수를 길어온다.
이때 처음으로 성전 밖으로 나갈 수 있었다.
4. 그릇을 정결탕에 넣어 정결케 한다.
돌그릇
놋그릇
질그릇 : 부정하여 질 때는 깨트려 버린다.
사람 : 질그릇과 같다.
사람은 날마다 깨트려서 버려야 하는 부정한 존재이다.
5. 성전세 : 반세겔
마태복음 17:24
가버나움에 이르니 반 세겔 받는 자들이 베드로에게 나아와 가로되 너의 선생이 반 세겔을 내지 아니하느냐?
유월절과 성경의 사건들
역대하 30:1
히스기야가 온 이스라엘과 유다에 보내고 또 에브라임과 므낫세에 편지를 보내어 예루살렘 여호와의 전에 와서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를 위하여 유월절을 지키라 하니라.
에브라임과 므낫세에 편지를 보내어 :
남 유다 히스기야 왕이 통치 할 때 북 이스라엘이 앗수르에 의해서 멸망합니다(BC 722).
사마리아 산지(에브라임과 므낫세 지역) - 남북이 나뉘었지만 거국적인 유월절을 지키려고 하였다.
많은 난민을 받아드리므로 예루살렘의 인구가 10배 증가 예루살렘 영토는 4배로 증가한다.
메시아의 모델로 묘사된다.
요시야의 유월절
역대하 35:1
요시야가 예루살렘 여호와 앞에서 유월절을 지켜 정월 십 사일에 유월절 어린 양을 잡으니라
주전 612년 앗수르가 연합군에 의해서 멸망한다(메데, 바사 연합군)
요시아 왕 때 일시적으로 남북이 통일이 된다.
통일된 이스라엘을 기념하여 전국적인 유월절을 지키게 된다.
느헤미야의 유월절
느헤미야 2:1
아닥사스다왕 이십년 니산월에 왕의 앞에 술이 있기로 내가 들어 왕에게 드렸는데 이전에는 내가 왕의 앞에서 수색이 없었더니.
니싼월(Nissan) 14일 - 유월절
에스라 6:15
다리오왕 육년 아달월 삼일에 전을 필역하니라. /
- 주전 615년 스룹바벨 성전의 완공과 봉헌의 때를 의미한다.
아달월은 니싼월 전 달 즉 12월을 말합니다.
에스라 6:19-22
사로잡혔던 자의 자손이 정월 십사일에 유월절을 지키되
사로잡혔다가 돌아온 이스라엘 자손과 무릇 스스로 구별하여 자기 땅 이방 사람의 더러운 것을 버리고 이스라엘 무리에게 속하여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를 구하는 자가 다 먹고
즐거우므로 칠일 동안 무교절을 지켰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저희로 즐겁게 하시고 또 앗수르 왕의 마음을 저희에게로 돌이켜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신 하나님의 전 역사하는 손을 힘있게 하도록 하셨음이었느니라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이 일제히 몸을 정결케 하여 다 정결하매 사로잡혔던 자의 모든 자손과 자기 형제 제사장들과 자기를 위하여 유월절 양을 잡으니.
사도행전 12:3-4
유대인들이 이 일을 기뻐하는 것을 보고 베드로도 잡으려 할쌔 때는 무교절일이라
잡으매 옥에 가두어 군사 넷씩인 네 패에게 맡겨 지키고 유월절 후에 백성 앞에 끌어 내고자 하더라.
애급에서 노예생활하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풀려난 때가 유월절
베드로가 감옥에서 풀려난 때가 유월절
요한복음과 유월절
예수님의 공생애 기간은 3년입니다.
3년 동안 유월절 절기를 몇번 지냈을까요?
분명하게 세 번 유월절을 지키셨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세 차례 유월절을 지키셨던 것 중에서 마지막 유월절을 살펴보는 것도 의미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요한복음 13:23
예수의 제자 중 하나 곧 그의 사랑하시는 자가 예수의 품에 의지하여 누웠는지라.
요한복음 13:25
그가 예수의 가슴에 그대로 의지하여 말하되 주여 누구오니이까?
유대 풍속에 따라 만찬의 자리 배정을 살펴보면
가룟 유다
예수님
사도 요한
예수님은 유다의 품에 안겨 있다. - 제자를 끝까지 사랑하시는 예수님의 모습
이미 유다가 예수를 팔아 넘길 것을 아시면서도 그 품에 안겨 있었다는 것은 유다로 하여금 회개의 기회를 주시려고 하신 것이다.
베드로가 만찬석의 말석에 앉았을 것이라고 유추할 수 있는 다섯 가지 근거
1. 성격 : 다혈질 / 가룟 유다를 싫어했다. 다른 제자들은 갈릴리 사람, 유다는 가룟 사람이었다.
2. 낮은 자가 되라 / 베드로는 큰 자가 되기 위해 먼저 말석을 차지한다.
3. 나를 팔 것이다 / 요한에게 머리짓을 하여 물어보자!
4. 식사 이후에 발을 씻어주어야 한다 /
5.
나는 참포도나무 - 포도는 기쁨을 상징한다.
중용, 절제 /
유월절 절기는 기쁨의 절기이지만 현재는 로마의 압제에 있었다.
유대인들은 5차례 봉기를 일으켰다.
15:2,
1. 열매를 잘 맺는 가지
2. 열매를 잘 맺지 못하는 가지
제거해 버린다(야이로) - 1. 잘라버린다 take out
2. 살짝 들어주는 것 lift up
흠 없는 양
다리를 꺾는다 / 예수님의 다리는 꺾이지 않았다.
흑암이 임하다 / 흑암 재앙(3일) 3시간 동안 태양 빛이 어둠
6시부터 9시까지 흑암
신포도주 / 우슬포로 찍어서 (우슬초 양의 피 좌우 문지장)
가나 혼인 잔치 , 물을 포도주, 가버나움에 들러
요한복음 2:13, 유대인의 유월절이 가까운지라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셨더니
공생애 첫번째 유월절 : 니고데모와의 대화
예수님의 일방적인 선포하시는 말씀이다.
이것을 유월절 배경에서 이해해야 한다.
유월절에 고대 이스라엘 국가가 탄생한 것처럼 유월절의 화두는 거듭남에 의한 하나님 나라를 깨우치셨다.
거듭남(아노덴)
위로부터 above
다시 / 니고데모가 어리석은 사람이 아니다. 학문적으로 깊은 사람이었으므로 아노덴을 다시라고 이해한 것이 합당하다.
born again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영적으로 설명하신다. 위로부터 from above
요한복음 6:4-5
마침 유대인의 명절인 유월절이 가까운지라
예수께서 눈을 들어 큰 무리가 자기에게로 오는 것을 보시고 빌립에게 이르시되 우리가 어디서 떡을 사서 이 사람들로 먹게 하겠느냐 하시니.
유월절에는 모든 유대인들이 예루살렘으로 향한다.
그런데 지금 예수님께서는 갈릴리 벳세다에 계신다.
이것은 굉장히 놀라운 사건이다.
이 해에 예수님은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지 않았다.
왜 그러셨을까?
세례 요한의 처형이 있었다.
가버나움은 헤롯 안티파스의 영역(세례 요한을 처형한 헤롯)
벳세다는 헤롯 빌립의 영역(헤롯 안티파스와 사이가 좋지 않았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이 지역으로 이동하셨다)
요한복음 기자는 전혀 다른 각도에서 유월절을 조명한다.
1. 보리떡
2. 물고기
요한복음 6:9
여기 한 아이가 있어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졌나이다 그러나 그것이 이 많은 사람에게 얼마나 되겠삽나이까
보리떡은 가난한 자들의 식량
유월절에는 밀떡을 먹는다.
빈들 - 벳세다는 유다 지방에서 가장 푸르른 지역. 년 강우량이 1000-1200mm
광야, 빈들(에레모스)이 아니다(지리적으로)
그런데 왜 광야, 빈들이라고 표현하였을까?
마태복음 14:15
저녁이 되매 제자들이 나아와 가로되 이곳은 빈 들이요 때도 이미 저물었으니 무리를 보내어 마을에 들어가 먹을 것을 사먹게 하소서.
애급에서 나온 백성들이 제일 먼저 들어간 곳이 광야 에레모스 빈들이었다.
요한복음 6:35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
자신을 생명의 떡이라고 표현하셨다.
요한복음 13장부터 18장까지의 기록이 마지막 유월절 6시간에 일어났던 일을 기록한다.
해가 질 때부터 자정까지 6시간 동안 진행된 유월절 만찬 자리에서 있었던 사건이다.
요한복음 13장 최후의 만찬 자리 / 큰 다락방
1. 크다
2. 2층
3. 가구가 준비된 방
4. 사랑방(손님을 위한 방으로 '카탈루마' 라고 한다)
유월절 만찬을 "세데르(Seder)" 라고 한다.
이 때 4잔의 포도주를 마신다.
취하지 않도록 1잔의 포도주에 3잔의 물을 넣어 희석시켜서 마신다.
왜 4잔의 포도주를 마시는가?
출애굽기 6:6-8
그러므로 이스라엘 자손에게 말하기를 나는 여호와라 내가 애굽 사람의 무거운 짐 밑에서 너희를 빼어 내며 그 고역에서 너희를 건지며 편 팔과 큰 재앙으로 너희를 구속하여
너희로 내 백성을 삼고 나는 너희 하나님이 되리니 나는 애굽 사람의 무거운 짐 밑에서 너희를 빼어낸 너희 하나님 여호와인줄 너희가 알찌라
내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주기로 맹세한 땅으로 너희를 인도하고 그 땅을 너희에게 주어 기업을 삼게 하리라 나는 여호와로라 하셨다 하라.
4개의 동사를 기념하는 의미에서 4잔의 포도주를 마신다.
유월절 행사의 핵심 코드는 "해방"
그러므로 "기쁨"이다.
기쁨의 상징은 포도 / 예수님은 포도나무, 너희는 가지
유월절 만찬 음식
무교병 - 급하게 나왔다. 구원의 즉각성(무교병을 먹는 것)과 점진성
어린 양 - 삶은 어린 양 고기
쓴나물 - 마로르
하로셋 - 무화과 대추야자 건포도 등을 혼합하여 만든 소스로 애급의 고역
구은 계란 - 고통 상징
포도주 4잔 -
소금 -
헤롯 아그립바 1세 / 헤롯 대왕의 손자
민수기 19:1-10
마치 한국에서 음력을 지킬 때 윤달이라고 하여 같은 달을 2회 반복하는 경우와 비슷하다.
레위기 23:5
정월 십사일 저녁은 여호와의 유월절이요.
아빕월 : "텔 아비브"
아비브(아빕) 봄이란 뜻(보리 추수 기)
03-24-2021(수)
레위기 23:2
이스라엘 자손에게 고하여 이르라 너희가 공포하여 성회를 삼을 여호와의 절기는 이러하니라.
7대 절기 /
유월절, 무교절, 초실절, 오순절, 나팔절, 속죄절, 장막절
1. 유대인 : 여호와의 절기(출애굽기 12:14)
너희는 이 날을 기념하여 여호와의 절기를 삼아 영원한 규례로 대대에 지킬찌니라.
* 여호와의 절기 / a festival to the LORD
2. 무교절(6)
3. 초실절(10)
4. 오순절(16)
5. 나팔절(24)
6. 속죄절(27)
7. 초막절(34)
7대 절기 /
유월절, 무교절, 초실절, 오순절, 나팔절, 속죄절, 장막절
1. 유대인 : 여호와의 절기(출애굽기 12:14) - 그림자
2. 예수 그리스도 : 구속의 절기(베드로전서 1:18-19) - 실체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조상의 유전한 망령된 행실에서 구속된 것은 은이나 금 같이 없어질 것으로 한 것이 아니요.
오직 흠없고 점 없는 어린양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한 것이니라.
(자범죄) (원죄)
히브리서 10:1
율법은 장차 오는 좋은 일의 그림자요 참형상이 아니므로
해마다 늘 드리는바 같은 제사로는 나아오는 자들을 언제든지 온전케 할 수 없느니라.
로마서 13:10
사랑은 이웃에게 악을 행치 아니하나니 그러므로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니라.
Therefore love is the fulfillment of the law.
야고보서 2:8
너희가 만일 경에 기록한 대로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과 같이 하라 하신
최고한 법을 지키면 잘하는 것이거니와.
If you really keep the royal law found in Scripture, Love your neighbor
as yourself, you are doing right.
7대 절기 /
유월절, 무교절, 초실절, 오순절, 나팔절, 속죄절, 장막절
1. 유대인 : 여호와의 절기(출애굽기 12:14) - 그림자
2. 예수 그리스도 : 구속의 절기(베드로전서 1:18-19) - 실체
3. 그리스도인 : 복음의 시작(마가복음 1:1)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복음의 시작이라.
The beginning of the gospel
영원한 복음(요한계시록 14:6)
또 보니 다른 천사가 공중에 날아가는데 땅에 거하는 자들
곧 여러 나라와 족속과 방언과 백성에게 전할 영원한 복음을 가졌더라.
the eternal gospel
사도 바울은 복음의 핵심을 가장 정확하게 깨달았다.
로마서 1:16-17
첫째는 유대인에게요 또한 헬라인에게로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7대 절기
유월절, 무교절, 초실절, 오순절, 나팔절, 속죄절, 장막절
1. 유대인 : 여호와의 절기(출애굽기 12:14) - 그림자
3. 그리스도인 : 복음의 시작(마가복음 1:1) - 영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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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 10일(수) 레위기 제1강
레위기의 3대 분류
1-10장 : 제사법
11-15장 : 정결법
16-27장 : 거룩법
레위기의 내용을 크게 두 단락으로 구분합니다.
레위기 1장 -16장 : 거룩한 길
- 하나님 앞으로 나가는 방법
레위기 17장 - 27장 : 거룩한 삶
-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는 방법
두 단락을 좀 더 구체적으로 설명합니다.
레위기 1장 -16장 : 거룩한 길
- 하나님 앞으로 나가는 방법
1장 - 7장 / 제사 규례
8장 - 10장 / 제사장 규례
11장 - 16장 / 결례, 규례
레위기 17장 - 27장 : 거룩한 삶
-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는 방법
18장 - 22장 / 가정, 사회를 통한 거룩
23장 - 25장 / 절기를 통한 거룩
26장 / 축복, 저주를 통한 거룩
27장 / 서원을 통한 거룩
레위기 1장을 읽기 전에 먼저 레위기에서 반드시 기억해야 할 몇 가지 주제를 소개합니다.
첫째는 다섯 가지 제사의 종류
1. 번제(燔祭)
2. 소제(素祭)
3. 화목제(和睦祭)
4. 속죄제(贖罪祭)
5. 속건제(贖愆祭)
둘째는 제사를 드리는 네 가지 방법
1. 화제(火祭) fire offering / 제이쉬세, 불로 태운다
2. 요제(搖祭) wave offering / 테누파, 앞뒤로 흔든다
3. 전제(奠祭) drink offering / 네데크, 관제(빌 2:17)
4. 거제(擧祭) heave offering / '테루마'(terumah), '들어올려진 것'
* 요제는 주로 성소 안에서, 거제는 주로 밖에서
셋째는 일곱 가지 절기
1. 유월절(逾越節) pass over
2. 무교절(無酵節) unleavened bread
3. 초실절(初實節) first fruits
4. 오순절(五旬節) pentecost (칠칠절) feast of ewwk
5. 나팔절(喇叭節) trumphet
6. 속죄절(贖罪節) atonement
7. 장막절(帳幕節) feast of tebernacles
레위기 1: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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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제의 규례 / 레위기 6:8-13
레위기 1장에 관한 질문(02-04-2021, 목)
1. 여호와께서 모세를 부르신 곳은?
2. 여호와께 드릴 예물은?
3. 번제의 제물의 종류는?
4. 여호와께 향기로운 냄새는?
첫째, 여호와께서 모세를 부르신 곳은?(1절)
회막(會膜) the tent of meeting(출애굽기 27:21) / KJV the tabernacle of the congregation
회막(오헬 모에드)
요한복음 1:14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 즉 그리스도의 거주를 예표하는 말씀이다.
성경에서 회막은 여러 용어로 표현합니다.
성막(聖幕) 출애굽기 26:9
증거막(證據幕) 출애굽기 38:21
법막(法幕) 역대하 24:6
여호와의 전(殿) 출애굽기 23:19 - 대궐 전(殿)
여호와의 장막(帳幕) 열왕기상 2:28
cf. 성막(聖幕) the tabernacle.(출애굽기 26:27)
성막 저편 널판을 위하여 다섯이요 성막 뒤 곧 서편 널판을 위하여 다섯이며.
cf. 장막(帳幕) tents (출애굽기 13:20)
그들이 숙곳에서 발행하여 광야 끝 에담에 장막을 치니.
이스라엘 자손에게 고하여 이르라 너희 중에 누구든지 여호와께 예물을 드리려거든 생축 중에서 소나 양으로 예물을 드릴찌니라. 그 예물이 소의 번제이면 흠 없는 수컷으로 회막 문에서 여호와 앞에 열납하시도록 드릴찌니라.
예물(禮物)이란 히브리 단어는 "고르반"과 "테루마"라고 합니다.
고르반(7133) : 제물, 희생물, 제단 가까이 가져온 것(레위기 1:2)
이스라엘 자손에게 고하여 이르라 너희 중에 누구든지 여호와께 예물을 드리려거든 생축 중에서 소나 양으로 예물을 드릴찌니라.
테루마(8641) : 선물(올려서 바치는 것) 요제, 봉헌물, 바친(출애굽기 25:2)
이스라엘 자손에게 명하여 내게 예물을 가져오라 하고 무릇 즐거운 마음으로 내는 자에게서 내게 드리는 것을 너희는 받을찌니라.
예물(禮物)과 제물(祭物) הַצָעָה
예(禮)는 정성을 다하여 드린 예물
제(祭)는 제사를 위해 바쳐진 예물
예물은 바치는 사람의 자세를 강조
제물은 제사에 드려진 물건을 강조
민하(명여)는 사용되지 않은 어근 마나흐(빌려주다, 선물을 주다)에서 유래했으며, '선물(gift), 공물(tribute), 제물(offering)'을 의미한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히브리어 어근 마나흐에서 유래하였다고 단정한다.
아랍어
마나하는 일정한 기간 동안 '어떤 사람에게 어떤 것(암낙타, 염소, 양, 혹은 한 구획의 땅)을 빌려주다'라는 전문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으며 따라서 차용자가 빌린 것에서 나온 소산물을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고(예: 소산, 우유, 수확 곡물 등), 그후
본래의 소유물을 되돌려 주는 것이다. 이때 수확물은 무료로 주는 선물이 된다.
구약성경에서 이 단어는 약 210회 나온다.
1. 민하는 사람이 사람에게 주는 '선물'을 의미한다.
민하는 야곱이 에서에게(창 32:14-22, 창 33:21), 야곱의 아들들이 요셉에게(창 43:11, 창 43:15, 창 43:26) 드린 예물(선물)에 대해 사용되었다.
민하는 우월한 사람, 특히 왕에게 바치는 선물이라는 세속적 배경에서 사용되는데, 이는 그 사람에 대한 존경 혹은 복종의 태도를 나타낸다. 삼상 10:27에서 사울을 경멸한 이스라엘 사람들은 그에게 "예물을 드리지 아니하니라", 즉 그를 새로운 왕으로 인정하지 않았다.
민하는 이런 의미로 삿 6:18, 삼상 10:27, 대하 9:24, 왕하 8:8-9, 왕하 20:12, 사 39:1, 시 45:13, 대하 32:23에서 사용되었다.
2. 민하는 '공물'이란 의미를 나타낸다.
삿 3:15, 삿 3:17-18, 삼하 8:2, 삼하 8:6, 대상 18:2, 대상 18:6, 왕상 5:1, 왕하 17:3-4, 대하 17:5, 대하 17:11, 대하 26:8, 호 10:6, 시 72:10.
3. 민하는 가장 자주 제물이나 예물이라는 제의적 의미로 사용되었다.
민하는 특히 곡식 예물을 뜻하나, 민하가 원래예물 혹은 공물을 의미하였기 때문에 이 단어가 특별한 제의적 의미를 나타낼 때 이 단어가 막연하게나마 그러한 의미로 사용될 수 있다고 스나이드(Snaith)가 말하는 것은 정확한 것처럼 보인다. 이러한 관계에서 특별히 흥미로운 것은 삼상 2:29, 삼상 3:14, 사 19:21에서 제바흐와 민하 간의 구별, 렘 14:12과 시 20:3에서 올라와 민하의 구별, 암 5:22에서 셸렘과 민하 간의 구별이다. 또한 창 4:3-4을 참조하라.
아벨과 가인은 하나님께 민하를 드렸다(창 4:4-5). 그러나 아벨에 있어서 그가 하나님께 동물 중에서 가장 좋은 부분을 바쳤으며 이는 하나님께 진정한 헌신을 반영하는 행위라고 언급되며 반면에 가인에 있어서는 단순히 그가 땅의 수확물 중에서 민하를 드렸다고 언급된다. 하나님께서는 그러한 형식적인 것을 거절하셨다. 가인의 진실한 복종의 결여(피흘림이 없는 희생제물을 주목하라)는 마침내 죄의 행위를 유발하였다(창 4:7 이하). 민하의 이러한 용법은 그 용어가 특별한 의미로 동물의 희생 제물을 의미하지는 않는다는 것을 가리킨다.
소제는 레 2:1-16과 레 6:14-23, H7-16에서 정의되고 있다. 이것은 곡식단 형태일 수 있으며, 대강 찧어서 건조하게 볶은 곡식, 가루로 빻거나(오직 밀만이 그러함, 보리가루는 "의심의 소제"를 위해 보존되었던 것 같다) 혹은 빵을 만들거나 혹은 과자로 만들어 솥에 넣고 굽거나 혹은 기름으로 튀겼다. 향과 소금은 예비된 민하의 한 부분이었으나 누룩과 꿀은 첨가되지 않았다.
민하는 매일 아침 저녁으로 제물로 드렸으며 신성한 제물이어서 예배하는 자와 함께 먹을 수 없었고 제사장들만이 그것을 먹었다. 속죄의 개념이 특별히 민하에 존재하지는 않으나 화목의 개념이 확실히 들어 있다. 일상적으로 누룩으로 발효된 떡과 더불어 그 땅의 새 소산의 제물(레 23:16)은 하나님 백성들의 전체적인 삶을 위대하신 주님께 위탁한다는 것을 가리킨다.(G. L. C.)
(참조: BDB; Gesenius; TWOT).
[동의어] (관련성구)
합하브(1890) / 선물, 제물
합하브(명남)는 야하브(3051: 주다)에서 유래했으며, '선물, 제물'을 의미한다.
구약성경에서 이 단어는 호 8:13에 한번 나오며 '제물'을 의미한다:
"내게 드리는 제물로 말할찌라도 저희가 고기로 제사를 드리고 먹거니와 여호와는 그것을 기뻐하지 아니하고 이제 저희의 죄악을 기억하여 그 죄를 벌하리니 저희가 애굽으로 다시 가리라".
(참조: Gesenius; HELOT).
[참고 - 합하브(bh:b]h' , 1890). 선물 gift.
호 8:13은, 그들이 "내게 드리는 제물"의 고기로 제사를 드리고 그것을 먹는다(they sacrifice flesh for the sacrifies of "mine offerings" and eat it, KJV), "그들은" 희생 제물을 "사랑하며, 그들은 고기를 제물로 바치고 그것을 먹는다"("they love" sacrifice, they sacrifice flesh andeat it, RSV), "내게 드리는 제물"에 관해서는(as for the sacrifiecs of "mine offerings", ASV), 그들은 제물을 "가져온다"(they "bring" sacrifices, Modern Language Bibie), "내 희생 선물"에 관하여는(as for "my sacrificial gifts, NASB와 NIV). KB는 이것이 전와되었다고 생각하고 이 구절과 호 4:18에 나오는 이 단어를 아하브(bh'a' , 158, 사랑 love)의 한 어형으로 수정한다. 개역 표준 성서는 이 두 구절이 불분명하다고 생각하며, 게다가 KB의 견해에 따른다. 그러나 합하브(bh:b]h' , 1890) 어형이이레적인 중복은 아니다. - P. R. Gilchrist.] (p. 640).
[동의어] (관련성구)
자바흐(2076) / 희생제물로 도살하다
자바흐(동사)는 기본어근이며, '희생제물로 도살하다'를 의미한다.
구약성경에서 이 단어는 약 130회 이상 나온다.
1. 자바흐는 희생제물로 바칠 짐승을 잡는 것에 대해 사용되었다.
산당에서 우상에게 바치는 제사와 관련하여 피엘형으로 19회 나오지만 대부분이 칼형으로 나온다. 피엘형 중에서 3회는 솔로몬(왕상 8:5, 대하 5:6), 히스기야(대하 30:22)의 풍부하고도 올바른 제물들을 언급한다.
2. 자바흐는 '먹기 위해 도살하는 것'에 대해 사용되었다(삼상 28:24, 겔 34:3, 대하 18:2, 신 12:15, 신 12:21, 왕상 19:21).
3. 자바흐는 하나님의 심판으로 살해하는 것에 대해 사용되었다(겔 39:17-19, 왕상 13:2, 왕하 23:20).
(참조: BDB; TWOT).
[동의어] (관련성구)
제바흐(2077) / 희생, 희생제물 sacrifice
제바흐(명남)는 자바흐(jb'z: , 2076)에서 유래했으며, '희생, 희생제물 sacrifice'을 의미한다.
구약성경에서 이 단어는 약 160회 나온다.
제바흐는 종종 예물(시 40:6)이나 번제물(삼상 6:15, 출 10:25)과 연결되어 나온다. 이 명사는 자주 화목제(셸라밈, 레 3:1, 레 17:5)와 밀접히 연접하여 사용되지만 가끔은 화목제와 구별되기도 한다(민 15:8, 수 22:27).
종종 제바흐는 자바흐(jb'z: , 2076)의 동족 대격이기도 하나, 희생은 '만들어' 지기도 하고('made' 민 6:17, 왕상 12:27), '가져오기도 하며'('brought' 암 4:4, 신 12:6), '가까이 가져오기도 한다'('brought near, 레 7:11).
[동의어] (관련성구)
코르반(7133) / 제물, 헌물, 예물
1. 코르반(명남)은 카라브(br'q; , 7126: 가까이 오다, 접근하다)에서 유래했으며, 가까이 가져오는 것, 즉 드려진 것, 특별히 하나님께 드려진 것을 가리킨다. 이것은 "희생으로 드려질" 것이라는 의미에서나(이 경우 이 단어는 모든 제의적 희생제사와 제물에 사용된다) 또는 단순히 성소에서 사용될 것이라는 의미에서 신에게 '바치는 제물, 헌물, 예물'을 의미한다(민 7:13이하, 참조: KD, Pentateuch, Ⅱ, p. 271; Vos, BT, p. 175).
구약성경에서 이 단어는 82회 나온다.
명사 코르반은 여기에서 주어질 수 있는 것 이상으로 더 깊이 주목해 볼만한 가치가 있다. 제사 예물의 주 요소들에는 다음과 같은 것이 포함된다. 첫째 헌물자가 행해야 할 점이 있다. 그의 예물 선택은 자아 희생을 반영해야 하며 자기의 생계 수단과 소산물로 이루어져야 한다(Vos BT, p. 175). 그 헌물은 흠이 없어야 한다. 왜냐하면 가장 좋은 것이 하나님께 속하기 때문이다. 헌물자의 사랑과 헌신은 응당 그로하여금 가장 좋은 것을 드리게 해야 하며(창 4:4) 오직 이것만이, 필수적이고 완벽한 희생제사의 도덕적 순수성을 반영할 수 있었다(벧전 1:19).
예물은 하나님에 의해 지정되며(레 1-7장) 하나님이 지정한 장소로 가져왔다(KD, Pentateuch, Ⅱ, p. 279). 예배의 열납은 하나님의 표준에 부합하는가에 달려 있다. 희생 제사용으로 구별해 놓은 산 제물에 안수하여(KD, ibid) 헌물자의 의향 뿐만 아니라 죄까지 그 제물에 전가시킨다(Vos, BT, p. 180).
그 다음 자아 고백적 죽음의 형벌이 대속적으로 그 짐승에게 가해졌다(Vos, ibid). 이와 같이하여 피는(q, v.) 덮는 것으로 사용되며(히 13:15) 고기는 불사르고(KD, op. Cit., p. 280) 인간의 생명은 상징적으로 하나님께 바쳐지게 되었다.
제사장은 피와 살(혹은 "곡물")을 받아 예정된 의식의 세부 사항에 따라 그것을 바친다. 하나님의 열납의 지시에 의해 이 모든 것은 불살라졌다.
여기서 한가지 크게 주의해야 할 것은 이교도의 희생제사 관념과는 달리 성경의 가르침에는 하나님께로의 하등의 가치 전달 개념이 없다는 점이다(Vos, BT, p. 176). 이스라엘 제사의 핵심적 의미는 영적인 것이었다(출 19:4-8, 렘 7:21 이하, 호 14:3).
(참조: L. J. COPPES).
우리는 후기 유대교에서 동일한 일반적인 용법을 발견하지만, 이 때이 용어는 어떤 것이 하나님께 드려질 때 - 희생제물로 드리거나 용도를 바꿈,즉 세속적인 사용과 관리를 중지함으로써 - 하는 맹세 용어이다. 하나님께 드려지는 것들에는 물건들, 음식들 따위가 있을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또한 개인이나 집단, 또는 전 국민이 될 수도 있다. 그것은 사람이나 물건이 성전에 넘겨진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단순히 그것들의 관리의 주체가 바뀐다는 것을 의미한다. 코르반은 개인의 포기의 형태를 취할 수도 있지만, 다른 사람이 어떤 사람의 종이나 소유를 사용하는 것을(압력을 가하는 것, 복수하는 것, 상해를 입히는 것) 거부하는 한 방법이다. 따라서 그것은 결혼이나 가족 관계 내에서조차 관계를 깨뜨리는 결과를 초래할 수도 있었다. 따라서 랍비는 순수한 관점에서, 그러나 그 과정의 철저한 결과를 고려하고 그 맹세를 변경하려 하거나 그 결과를 경감시킬 방법을 찾고자 하였다.
신약 시대에 코르반은 하나의 맹세를 가리키게 되었는데, 이 맹세로써 자기의 소유물이 관념상 성전에 바쳐지게 되며(실제로는 자신이 가지고 있음), 따라서 타인에게 주어질 수 없었다.
코르반은 신약성경에서 막 7:11에 한번 나온다: "너희는 가로되 사람이 아비에게나 어미에게나 말하기를 내가 드려 유익하게 할 것이 [고르반] 곧 하나님께 드림이 되었다고 하기만 하면 그만이라 하고". 코르반은 막 7:10이하의 서기관 및 바리새인과의 논쟁에서만 나타난다. 마 15:3이하에서는 '재물'(한글개역, "드림")이라는 의미로 도론을 사용한다(참조: 마 5:23 - 마 5:24; 마 8:4등; 또한 히 5:1; 히 8:3 - 히 8:4; 히 9:9; 히 11:4). 예수님의 논지는 비록 그 아들이 서원으로 인하여 부모에 대한 모든 의무로부터 자기를 자유롭게 하더라도 서기관들이 그 서원(코르반)을 지지하고 있다는 것이다. 서기관의 논지(민 30:2 - 민 30:3에 기초함)는, 하나님께 한 서원이 언제나 우선권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그 응답으로 예수님은 사 29:13을 인용하신다. 서기관들은, 하나님의 사랑과 공의는 일치하고, 하나님은 인간의 안녕에 관심을 갖고 있다는 사실을 잊고 있었기 때문에, 율법의 성취에 대한 그들의 관심을 올바르게 나타낼 수 없었다. 예수님은 성경의 유효성을 약화시키고자 하신 것이 아니라, 성경의 유효성을 성경의 온전한 문맥(취지)에 두자는 것이다. 여기에서 그 목적은 성화일 것이지만, 성화 그 자체는 자비로 이끈다. 제 4계명은 이것을 나타낸다. 그러나 코르반에 대한 방어적인 실행은 회피의 수단이 된다.
초대교회의 석의는 눅 21:4(여기에는 타 도라가 쓰임)의 노선을 따라서만 이 말씀을 해석한다. 라틴어 코르반(corban)은 자선 상자이며, 자선은 하나님께 드려진 제물로 간주된다. 후대에 이 용법은 사라졌다.
(참조: Walter Bauer; K.H.Rengstorf; C.Brown).
2. 쿠르반(명남)은 카라브(br'q; , 7126: 가까이오다, 접근하다)에서 유래했으며, '제물, 헌물'을 의미한다.
구약성경에서 이 단어는 느헤미야에서 2회 나온다(느 10:34, 느 13:31).
[동의어] (관련성구)
hm;WrT](8641, 테루마)
기증물, 제물
테루마(명여)는 룸(!Wr , 7311)에서 유래했으며, '기증물 contribution, 제물 offering'을 의미한다.
구약성경에서 이 단어는 76회 나온다.
테루마의 용법은 대략 테누파(hp;WnT] , 8573)의 용법과 유사하다. 테누파는 여러가지 제물을 나타내는 일반적인 제사 용어로 사용되며 또한 특히 직무를 이행하는 제사장을 위해 지정해 둔 제물들의 부분(몫)을 가리키는 용어로 사용된다.
테루마는 일반적으로 다음과 같은 것들을 나타낸다: 성막 건축을 위해 바친 물질들(출 25:2-3), 성전 건축을 위해 바사왕과 그 밖의 사람들이 드린 헌물(스 8:25), 반세겔의 속량금(출 30:13), 제사장들에게 주도록 정해 놓은 십일조의 십일조(민 18:25-32), 그리고 에스겔의 성전 이상에 나오는 거룩한 구역(겔 45:1, KJV '봉납(물) oblation', NASB '배당, 몫 allotment'), 우상에게 바친 제물(사 40:20)과 전리품 중에서 바친 제물(민 31:29)도 이 단어로 지칭된다. 그 땅의 처음 익은 곡식으로 만든 떡 재물을 가리키는 이 용어의 용법(민 15:20)은 첫 열매의 단을 언급하는 테누파(요제)의 용례를 상기시킨다.
테루마는 직무를 이행하는 제사장을 위해 정해 놓은 희생 제물의 몫을 가리키는 용어로서 "거제물"의 넓적다리를 가리켜 반복 사용된다(레 10:14-15, 민 6:20, KJV는 '넓적다리 thigh' 대신 '어깨 shoulder'라고 번역함, 한글개역은 본문에 "넓적 다리"라고 기록하고 난외주에 "어깨"라고 기록한다).
화목 제사에서 제사를 집행하는 제사장의 몫으로 할당된 수반되는 곡식 제물의 몫도 이 단어로 지칭된다(레 7:14, 대조적으로 테누파[요제]는 결코 고기가 아닌, 제사장의 몫을 지칭하지 않는다는 점을 주목하라). 테루마는 친족들에게 제사장의 몫을 먹지 말라고 금하는 구절에서도 나온다(레 22:12).
"거제물"이라는 말은 본래 이 제물이 드려질 때의 이 제물을 물리적으로 교묘히 다루는 것을 가리키는 것 같다. 그러나 그러한 교묘히 다루는 것을 분명히 언급하는 성경의 예는 없다. 이 용어는 의미가 약화되어서 예물을 어떤 방식으로 드리는지에 대한 암시 없이 단순히 '예물 gift'이나 '제물 offering'을 의미하게 되었다.
이 단어는 한 번 비제의적 용법으로 사용되어 뇌물로 매수하는 자들이나 이기적으로 선물을 강요하는 사람을 언급한다(잠 29:4, "선물의 사람들" men of gifts, 한글개역 "뇌물을 억지로 내게 하는 자").(A. Bowling)
(참조: BDB; THAT; TWOT)
3. 번제의 제물의 종류는?(3절, 10절, 14절)
(3절) 소의 번제 : 흠없는 수컷
그 예물이 소의 번제이면 흠 없는 수컷으로 회막 문에서 여호와 앞에 열납하시도록 드릴찌니라.
(10절) 양, 염소의 번제 : 흠 없는 수컷
만일 그 예물이 떼의 양이나 염소의 번제이면 흠 없는 수컷으로 드릴찌니.
(14절) 새의 번제 : 산비둘기, 집비둘기 새끼
만일 여호와께 드리는 예물이 새의 번제이면 산비둘기나 집비둘기 새끼로 예물을 삼을 것이요.
수컷을 제물로 바치는 것은 목축을 할 경우 암컷은 새끼를 낳기 때문에 수컷 보다 더 가치가 높았다고 합니다.
반면에 수컷은 주로 식용으로 사용한다고 합니다.
제사를 위해 바치는 것도 부담을 적게 하도록 배려한 것이라고 합니다.
4. 여호와께 향기로운 냄새는?
레위기에는 제사를 설명할 때 ‘여호와께 향기로운 냄새니라’
‘여호와께 드려 향기로운 냄새가 되게 하라’는 표현(表現)이 반복(反復)됩니다.
제사(祭祀)에는 늘 냄새가 있었습니다.
제물(祭物)을 태울 때 나는 냄새입니다.
그 냄새가 하나님께 향기로운 냄새라고 성경(聖經)은 말합니다.
마무리를 위한 질문과 적용
1. 오늘날 그리스도인에게서 나는 향기, 하나님께 드려질 향기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바로 우리가 살아서 제물이 될 때 나는 냄새입니다.
우리가 산 제물 될 때, 자아의 죽음이 만들어내는 냄새입니다.
그 냄새가 하나님께 향기로운 냄새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편지(고린도후서 3:2-3)
너희가 우리의 편지라 우리 마음에 썼고 뭇사람이 알고 읽는바라.
너희는 우리로 말미암아 나타난 그리스도의 편지니 이는 먹으로 쓴 것이 아니요 오직 살아 계신 하나님의 영으로 한 것이며 또 돌비에 쓴 것이 아니요 오직 육의 심비에 한 것이라.
You yourselves are our letter, written on our hearts, known and read by everybody.
You show that you are a letter from Christ, the result of our ministry, written not with ink but with the Spirit of the living God, not on tablets of stone but on tablets of human hearts.
예수 그리스도의 향기(고린도후서 2:15)
우리는 구원 얻는 자들에게나 망하는 자들에게나 하나님 앞에서 그리스도의 향기니.
For we are to God the aroma of Christ among those who are being saved and those who are perishing.
예수는 우리를 위해 자신을 버리사 향기로운 희생 제물로 자신을 드렸습니다.
예수 십자가 향기는 개선 행진의 냄새가 그렇듯 누군가에게는 생명의 냄새이고, 누군가에게는 사망의 냄새입니다.
마찬가지로 누군가는 십자가를 바라만 보아도 눈물이 나고, 누군가는 십자가만 보면 화내고 짜증을 냅니다.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서 내가 죽을 때 비로소 우리에게서 예수의 향기가 납니다.
상처 안 받으려고 피해 다니고, 죽지 않으려고 도망 다니면 우리는 향기 나는 삶을 살 수 없습니다.
내가 상처받고 죽을 때 비로소 내 안의 예수 향기가 나옵니다.
그러나 우리는 자아가 타버릴까 봐 방화복을, 자아가 죽을까 봐 방탄복을 입고 삽니다.
그러면 하나님께 향기로운 냄새를 올려 드릴 수 없습니다.
교회 안에는 옛 자아가 죽으면서 나는 냄새가 진동해야 합니다.
내 맘이 상해서 나는 냄새, 내 자아가 타들어 가는 냄새, 그 냄새가 하나님께 향기로운 냄새입니다.
십자가는 내가 죽는 곳입니다.
십자가는 꽃길이 아닙니다.
가시밭길입니다.
그러나 그 가시밭길만이 생명의 길입니다.
내가 스스로 산 제물이 될 때 나는 그 냄새가 바로 그리스도의 향기입니다.
하나님,
저희들이 세상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편지로 읽혀지기를 원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향기로 흘러넘치기를 원합니다.
저희들 안에 주 예수의 부활 생명의 싹이 솟아나야 하겠습니다.
부활 생명은 십자가 고난을 거쳐야 하오니
세상에서 겪는 모든 힘들고 어려운 과정을 참고 인내하며 오직 주님만 닮아가며
향기로운 냄새로 퍼지며
그리스도의 편지로 읽혀지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레위기 제2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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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 17일(수) 레위기 2:1-16 소제(素祭)
6:19-23 제사장 위임식(고운가루 에바 1/10, 아침에 절반 그리고 저녁에 절반, 기름으로 반죽하여 번철에 굽고 기름에 적시어 썰어서 소제로 드려야 한다.)
레위기 1장부터 7장까지는 다섯 가지 제사에 대해서 소개합니다.
1장에서는 번제의 제사를 말씀합니다.
번제의 예물에는 흠없는 수컷 소, 흠없는 수컷 양과 염소 그리고 새들 중에서 집둘기와 산비둘기 새끼를 제물로 바칠 수 있습니다.
개역 한글 성경에서는 비둘기를 집비둘기와 산비둘기라고 구분했지만 번제의 제사의 규정을 살펴보면 비둘기라고 하는 것이 훨씬 더 당시 번제의 제사에 가깝다고 합니다.
그 이유는 번제의 제물은 가축 즉 내가 집에서 키우던 것을 제물로 가져오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1장에서는 제물이 왜 달라지는지 설명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4장과 5장에서 속죄제의 규정에서 이스라엘의 평민들에게 어린 암양을 제물로 가져오라고 합니다.
그러나 형편이 어려울 때는 비들기를 가져오라고도 합니다.
따라서 번제의 제물이 달라지는 것은 가정 경제적인 형편에 따라 이렇게 가르친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1:2, 자원하는 제사
이스라엘 자손에게 고하여 이르라 너희 중에 누구든지 여호와께 예물을 드리려거든 생축 중에서 소나 양으로 예물을 드릴찌니라.
누구든지 여호와께 예물을 드리려거든 / 억지로 제물을 가져오는 것이 아니라 자원하는 믿음으로 제물을 가져와야 합니다.
1:4, 제물을 가져온 사람이 제물에 안수하라
그가 번제물의 머리에 안수할찌니 그리하면 열납되어 그를 위하여 속죄가 될 것이라.
안수한다는 동사가 손을 얹는 것만이 아니라 "누르다. 기대다. 의지하다"는 뜻으로 사용하는 단어라고 합니다.
따라서 번제의 제물에 안수하는 것은 제물에 나의 몸을 그대로 실어서 바치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러므로 제물이 되는 짐승(가축)에게 안수하는 것은 내 손만 얹는 것이 아니라 나의 모든 것 즉 나의 몸까지 온전하게 전부를 드리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번제의 제물을 집에서 내가 직접 키우던 가축 즉 나와 가장 가깝게 지내던 것으로 나를 상징하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그 번제물을 내 손으로 내가 직접 죽여야 합니다.
나를 죽이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기쁘게 받으시는 제사는 나를 죽여서 완전하게 바치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런데 이제까지 수천번 수만번의 예배를 드렸는데 아직도 내가 너무 팔팔하게 살아있어서 이것이 온전한 제사가 아니며 거룩하고 신령한 예배가 아닙니다.
또는 그리스도의 편지로 읽혀져야 합니다.
번제가 상징하는 의미는 "헌신(獻身)"이라고 하겠습니다.
오늘부터 사순절이 시작됩니다.
2021년 사순절 기간동안 내가 하나님께 헌신하기 위하여 번제의 제물처럼 완전히 불태워져 연기가 되어 하늘로 올라가야 할 것이 무엇인가를 찾아 한 가지씩 실천할 수 있는 은혜를 회복하여 부활주일 예배 때는 번제의 제물이 되는 기쁨을 함께 나눌 수 있기를 기대하며 기도합시다.
제사 제도를 어디에서 말씀하셨을까요?
레위기 7:37-38
이는 번제와 소제와 속죄제와 속건제와 위임제와 화목제의 규례라.
여호와께서 시내 광야에서 이스라엘 자손에게 그 예물을 여호와께 드리라 명하신 날에 시내산에서 이같이 모세에게 명하셨더라
(질문과 대답)
(1절) 고운가루
누구든지 소제의 예물을 여호와께 드리려거든 고운 가루로 예물을 삼아 그 위에 기름을 붓고 또 그 위에 유향을 놓아.
가루로 가져온 소제물에는 반드시 유향(乳香) 놓아야 합니다.
당시 유향은 매우 비싼 가격에 거래되었기 때문에 가난한 사람들은 유향을 넣지 않는 소제물을 드렸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면 가난한 사람들은 어떤 소제물을 바쳤을까요?
고운가루를 음식으로 만들어 드릴 때는 유향을 넣지 않았습니다.
(4절) 화덕에 구운 것
네가 화덕에 구운 것으로 소제의 예물을 드리려거든 고운 가루에 기름을 섞어 만든 무교병이나 기름을 바른 무교전병을 드릴 것이요.
화덕(가마)에 구운 것은 기름을 넣는다.
(5절) 번철에 부친 것
번철에 부친 것으로 소제의 예물을 드리려거든 고운 가루에 누룩을 넣지 말고 기름을 섞어
번철(빵굽는 판, 철판)에 부친 것에 기름을 넣는다.
(7절) 솥에 삶은 것
네가 솥에 삶은 것으로 소제를 드리려거든 고운 가루와 기름을 섞어 만들찌니라
솥에 삶은 것(솥에 찐빵, 냄비에 구운 곡식)
2. 소제의 제물에 첨가하는 것들은?
누구든지 소제의 예물을 여호와께 드리려거든 고운 가루로 예물을 삼아 그 위에 기름을 붓고 또 그 위에 유향을 놓아.
3. 소제물의 남은 것은 어떻게 합니까?
민수기 18:19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께 거제로 드리는 모든 성물은 내가 영영한 응식으로 너와 네 자녀에게 주노니 이는 여호와 앞에 너와 네 후손에게 변하지 않는 소금 언약이니라.
역대하 13:5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께서 소금 언약으로 이스라엘 나라를 영원히 다윗과 그 자손에게 주신 것을 너희가 알것이 아니냐.
하나님을 향한 그 마음을 변치 말아야 한다는 약속
둘째, 성결케하는 것(출애굽기 30:35, 에스겔 16:4, 열왕기하 2:21)
출애굽기 30:35
그것으로 향을 만들되 향 만드는 법대로 만들고 그것에 소금을 쳐서 성결하게 하고.
에스겔 16:4
너의 난 것을 말하건대 네가 날 때에 네 배꼽줄을 자르지 아니하였고 너를 물로 씻어 정결케 하지 아니하였고 네게 소금을 뿌리지 아니하였고 너를 강보로 싸지도 아니하였나니.
엘리사가 물 근원으로 나아가서 소금을 그 가운데 던지며 가로되 여호와의 말씀이 내가 이 물을 고쳤으니 이로 좇아 다시는 죽음이나 토산이 익지 못하고 떨어짐이 없을찌니라 하셨느니라.
소금은 반드시 넣어야 한다.
누룩과 꿀을 넣지 말아야 한다.
이러한 규정으로 인하여 아무리 작은 제사일지라도 소홀하게 여기지 말아야 한다.
소제가 번제 다음으로 소개된 것은 역시 헌신의 의미와 감사의 의미를 내포한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다른 제사에서는 무엇을 넣어라 넣지 말라는 규정이 없습니다.
오직 소제의 제사에만 이러한 규정에 따라 제사를 드리라고 한 것은 작은 제사일지라도 함부로 하지 말아야 한다는 교훈이 담겨져 있다고 하겠습니다.
번제(올라) : 올라간다
소제(민하) : 선물(膳物)
번제와 소제의 상징적 의미는 "헌신(獻身)" 이라고 하겠습니다.
모세가 이르되 각 사람이 그 아들과 그 형제를 쳤으니 오늘날 여호와께 헌신하게 되었느니라 그가 오늘날 너희에게 복을 내리시리라.
헌신이란 히브리 단어는 "마래" 라고 합니다.
마래의 뜻은 "가득 채운다"는 뜻입니다.
예를 들면 가득 채워진 물 항아리에는 다른 것을 넣을 수 없듯이 마음에 가득채워진 성령은(성령 충만)은 주님을 위하여 헌신하는 삶을 감당하게 합니다.
누룩은 부패와 위선을 의미합니다(마태복음 16:12)
그제야 제자들이 떡의 누룩이 아니요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의 교훈을 삼가라고 말씀하신 줄을 깨달으니라.
꿀은 세속적인 쾌락과 재리를 상징합니다(잠언 5:3)
대저 음녀의 입술은 꿀을 떨어뜨리며 그 입은 기름보다 미끄러우나.
이와 같이 누룩과 꿀은 우리의 삶을 부패시키고, 하나님으로부터 분리시키는 독소와 같은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소제물로서 화제를 드릴 때에는 누룩과 꿀을 드리지 말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또한 누룩과 꿀은 발효성이 강한 식품으로써, 높은 온도에서는 쉽게 발효하여 그 원래의 성질이 변질되는 특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누룩과 꿀은 쉽게 변질되는 신앙을 상징하기도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신앙을 변질시키는 누룩과 꿀을 우리의 삶 속에서 단호하게 제해 버려야 하는 것입니다.
또한, 본문 13절에는 “네 모든 소제물에 소금을 치라 네 하나님의 언약의 소금을 네 소제에 빼지 못할지니 네 모든 예물에 소금을 드릴지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고대에는 소금이 매우 비싸고 귀한 식품이었습니다. 또 소금은 맛을 내고 오래 두어도 변질되지 않는 성질을 가지고 있어서 언약의 상징물로 지정되었으며, 모든 예물에 첨가되었습니다. 그래서 본문에서도 소금을 가리켜 “네 하나님의 언약의 소금”이라고 표현한 것입니다. 소금은 바로 우리의 신앙의 순수성과 불변성을 상징합니다. 따라서 소제물에 소금을 치라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순수하고 변치 않는 신앙을 유지하라는 말입니다.
소제물에 대한 주의 사항은, 우리가 부패와 세속적인 유혹을 멀리하고 하나님을 향한 변함 없는 순수한 믿음을 갖고 신앙 생활을 하여야 한다는 것을 일깨워 줍니다. 우리가 이렇게 살아갈 때, 우리의 삶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이 될 것입니다.제사의 여섯 가지 원칙(레위기 1:1-9)과 예배의 두 가지 원칙(요한복음 4:24)
제사라는 단어 / 831구절
예배라는 단어 / 10구절
레위기 1:1-9, 제사(祭祀)의 여섯 가지 원칙(原則)
요한복음 4:24, 예배(禮拜)의 두 가지 원칙(原則)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신약의 예배는 재림하실 주님을 기다리는 믿음
회당 예배 : 말씀 중심
다락방 예배 : 성만찬 중심
16세기 종교개혁을 거쳐 17세기 이성주의와 합리주의 시대를 맞이하면서 예배가 설교 중심으로 바뀌기 시작하였다고 합니다.
그 이후 예배의 중심은 말씀과 성찬이 아니라 설교가 되었기 때문에 개신교회는 설교자에 따라 대형화 되는 추세를 나타냈습니다.
그러나 가톨릭교회는 대형화되지 않습니다.
최근에는 교회 예배가 마치 문화적인 양상으로 변화되고 있는 추세라고 하겠습니다.
이러한 때에 앞으로 예배가 어떻게 변화할지 예측하기 어렵습니다.
제사와 예배에 대한 이해를 함께 나누려고 합니다.
도축(屠畜), 도살(屠殺)과 제사(祭祀)의 차이점?
기르는 가축을 죽게 하고(殺)+피를 빼고(放血)+가죽을 벗겨내고(剝皮)+뼈를 바르고(拔骨)+모양을 갖추는(整形) 과정 모두가 도축, 도살에 들어간다.
제사에는 짐승의 머리 위에 손을 얹어 반드시 안수(安受)를 한다.
몽골 지방의 유목민들이 짐승을 잡을 때는 몸 밖으로 피가 나오지 않는 방법으로 짐승을 죽인다고 합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의 제사에서 짐승을 죽일 때는 반드시 몸 밖으로 피가 나와야 합니다.
그래야 그 피를 제사장이 들고 성소로 들어가서 뿌릴 수 있습니다.
둘째, 안수(按手)(1:4)(누를 按, 손 手)
안수(按手)는 손을 머리 위에 얹는 기도를 말한다.
히브리어 - “싸마크”(기대다. 눕히다) 야드”(손) / 싸마크 야드(안수하다) : 누르다, 기대다, 의지하다
헬라어로 - “에피티데미”(눕히다. 얹다) 케일“(손) / 에피키데미 케일(안수하다)
영어 - Laying of Hands, Ordination
신약에서 “안수”가 “에피데시스”라는 동사로서 씌어져 있는 것은 4곳이다(행 8:18, 딤전 4:14, 딤후 1:6, 히 6:2).
셋째, 잡으라(1:5)
살아있는 소를 제물로 바친다면 단번에 소를 죽일 수 있을까요?
살아있는 염소를 제무롤 바친다면 단번에 염소를 죽일 수 있을까요?
아마 어느 누구도 도살장에서 전문 직업을 갖고 있는 도살꾼이 아니라면 양과 염소 그리고 소를 단번에 죽일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런데 제물을 바치는 사람이 직접 그 제물을 죽여야 합니다. 제물을 죽이는 것조차 쉬운 일이 아닙니다. 간단하지도 않습니다.
그렇다면 제물을 반드시 죽여야 하는데 어떻게 해야 합니까?
염소를 죽이려고 하면 여러 차례 칼로 찌르고 또 찔러야 합니다.
그러면 염소가 가만히 있겠습니까?
닭 모가지를 비틀어 죽이는 것도 할 수 없는 사람이 어떻게 닭보다 훤씬 더 크고 강한 염소를 쉽게 죽일 수 있을까요?
염소가 칼에 찔리면 비명을 지르고 몸부림을 치며 온몸을 흔들기 때문에 피가 제물을 바치는 사람에게 튀어 온 몸에 피 범벅이 될 것입니다. 소와 염소는 칼에 찔리면 엄청난 난장판이 된다고 합니다.
그런데 양이 칼에 찔리면 양은 찌른 사람의 눈을 쳐다보며 아무런 비명고 지르지 않고 하늘만 쳐다본다고 합니다.
이사야 53:7
그가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 때에도 그 입을 열지 아니하였음이여 마치 도수장으로 끌려가는 어린 양과 털 깎는 자 앞에 잠잠한 양 같이 그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
소와 염소와 양의 가죽을 벗기는 일이 간단할까요?
가죽을 벗기는 것도 쉽지 않습니다.
어디서부터 어떻게 벗겨야 할지 모릅니다.
그런데도 제물을 바치는 사람이 직접 그 가죽을 모두 벗겨내야 합니다.
주방에서 닭 요리를 할 때 닭껍질 벗기는 것조차 힘들다고 하여 마트에서 닭을 구입할 때 껍질을 벗겨놓은 것을 구입하는 것이 주부들의 마음입니다.
다섯째, 각(脚)을 뜨라(1:6)(다리 脚)
예를 들면 손을 분리시키려면 여덟 마디로 분리시켜야 한다고 합니다.
뼈 마디 마디를 분리시키는 것을 각을 뜬다고 합니다.
여섯째, 단(壇)위에 두고 불사르라(1:9)(제터 壇)
내장과 정갱이를 물로 씻어야 합니다.
제물과 내장과 정갱이는 모두 불로 태워야 합니다.
이것을 향기로운 냄새라고 하셨습니다.
왜 제물이 타는 연기를 향기로운 냄새라고 하셨을까?
흠 없는 제물의 머리 위에 안수하는 것 : 나의 죄를 짐승에게 넘겨주는 것(轉嫁)( 구를 轉, 시집 갈 嫁)
짐승의 흠 없는 것이 나에게로 전가된다.
예수님의 경우
1. 나의 죄가 예수님에게 전가
2. 죄와 더불어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도 전가된다.
(하나님의 진노는 제물을 잡는 과정에서 철저하게 드러난다)
왜냐하면 제물을 잡는 과정이 이렇게 힘들고 고통스럽다면 누가 죄를 지으려고 하겠는가?
3. 예수님의 의(義)가 나에게 전가된다.
제물이 타는 냄새와 연기가 향기로운 것이 아니라 죄가 완전히 소멸(燒滅)되는 것이 향기로운 냄새가 된다.
제사로 언약을 맺은 사람들
시편 50:5
나의 성도를 내 앞에 모으라 곧 제사로 나와 언약한 자니라.
요한복음 4:24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찌니라.
God is spirit, and his worshipers must worship in spirit and in truth.
신령이란?
성령(in Spirit)
진정이란?
진리(in Truth)
예배는 성령의 도움을 받아 진실한 삶의 열매를 드리는 것
제사란?
바치는 것을 통하여
의와 공평을 행하는 것은 제사 드리는 것보다 여호와께서 기쁘게 여기시느니라.
하나님의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하나님이여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치 아니하시리이다.
레위기 3:1-17, 7:11-36 화목제(和睦祭)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첫째는 다섯 가지 제사의 종류
1. 번제(燔祭)
2. 소제(素祭)
3. 화목제(和睦祭)
4. 속죄제(贖罪祭)
5. 속건제(贖愆祭)
둘째는 제사를 드리는 네 가지 방법
1. 화제(火祭) fire offering / 제이쉬세, 불로 태운다
2. 요제(搖祭) wave offering / 테누파, 앞뒤로 흔든다
3. 전제(奠祭) drink offering / 네데크, 관제(빌 2:17)
4. 거제(擧祭) heave offering / '테루마'(terumah), '들어올려진 것'
* 요제는 주로 성소 안에서, 거제는 주로 밖에서
셋째는 일곱 가지 절기
1. 유월절(逾越節) pass over
2. 무교절(無酵節) unleavened bread
3. 초실절(初實節) first fruits
4. 오순절(五旬節) pentecost (칠칠절) feast of ewwk
5. 나팔절(喇叭節) trumphet
6. 속죄절(贖罪節) atonement
7. 장막절(帳幕節) feast of tebernacles
오늘은 화목제라는 제사를 함께 살펴보겠습니다.
화목제에 대한 내용을 살펴보기 전에 질문을 하겠습니다.
질문은 단순합니다.
예와 아니오라고 대답하면 됩니다.
(질문) 화목제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에게 제사하는 것이 맞습니까?
(질문) 하나님의 백성들이 화목해야 할 대상은 누구일까요?
첫째는 하나님과 화목해야 합니다.
둘째는 하나님의 백성들끼리 서로 화목해야 합니다.
화목제를 오늘의 시대를 살아가는 성도들에게 적용해 봅니다.
(질문) 나는 하나님과 화목한 신앙입니까?
(질문) 교회 공동체 안에서 모든 성도들과 화목하고 있습니까?
(질문) 가족들끼리 화목하고 있습니까?
어느 교회에서 코로나 바이라스로 인하여 예배당을 리모델링하기로 결정했습니다.
리모델링 하기 위한 헌금도 넘치도록 참여하여 재정적으로 아무런 문제가 없습니다.
강대상을 중심으로 성가대석이 있고 반대편에 그랜드 피아노가 있습니다.
예배당을 리모델링 하면서 가급적이면 더 많은 교인들이 참여하도록 준비 위원회를 조직했습니다.
그리고 위원회로 모였습니다.
마침 성가대 대장과 지휘자와 반주가가 참여하여 그랜드 피아노를 성가대석과 가까이 배치하는 것이 좋다고 의견을 제시했습니다.
이렇게 회의를 마쳤습니다.
그런데 어느 장로님께서 그랜드 피아노를 전에 놓여 있던 곳으로 옮겼습니다.
그 다음에는 다시 성가대석 가까이 또 옮겼습니다.
이렇게 주일 마다 그랜드 피아노가 오른편으로 왼편으로 옮겨지면서 예배당 바닥에 흠집이 생겨나기 시작했습니다.
바닥만 흠집이 생긴 것이 아니라 서로 자기 주장을 하는 사람들의 마음에도 흠집이 생겼습니다.
이렇게 반복하던 중 결국에는 교회의 분쟁은 점점 더 심각해졌고 결국에는 분열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런 현상이 오늘 우리에게는 없다고 단정할 수 있습니까?
아직도 누구는 무엇 때문에 거리낌이 내 안에 도사리고 있다면 오늘 화목제 제사를 살펴보며 내 안에 거리끼는 것들도 모두 정리해야 하겠습니다.
3:1-5, 소의 화목제
3:6-11, 양의 화목제
3:12-17, 염소의 화목제
Fellowship Offering (레위기 7:13) NIV
Peace Offering (레위기 7:37) KJV
Freewill Offering (레위기 7:16) NIV - 자원제
화목제의 근거
23.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24.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 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25.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 제물로 세우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심이니 .
구속 : 하나님의 은혜로 의롭다
예수의 피 : 화목제물
속죄소를 궤 위에 얹고 내가 네게 줄 증거판을 궤 속에 넣으라.
Place the cover on top of the ark and put in the ark the Testimony, which I will give you.
화목제물(和睦祭物)의 종류(種類) / 소, 염소, 양
소,
염소 : 흠 없는 암컷,수컷 / 소(3:1), 양(3:6), 염소(3:12)
3:1(소)
사람이 만일 화목제의 희생을 예물로 드리되 소로 드리려거든 수컷이나 암컷이나 흠 없는 것으로 여호와 앞에 드릴찌니.
3:6(양)
만일 여호와께 예물로 드리는 화목제의 희생이 양이면 수컷이나 암컷이나 흠 없는 것으로 드릴찌며.
염소(3:12)
만일 예물이 염소면 그것을 여호와 앞으로 끌어다가.
왜냐하면 제사장과 제사자가 나누려면 양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화목제(和睦祭)의 종류(種類) 레위기 7:11-18
감사제(感謝祭)(7:11-15)
감사제는 서원제와 자원제보다 더욱 엄숙한 제사였습니다.
감사제는
소제(12절)뿐 아니라 유교병(13절)과 함께 드려야 했습니다.
감사제를 드릴 때 무교병과 유교병 어느 하나만 드린 것이 아니라
이들 모두를 함께 드렸다(14절).
서원제(誓願祭)(7:16-18)
서원제와 자원제의 제물은 그 이튿날까지 먹는 것이 허용되었습니다(16-17).
반면 감사제의 제물은 제사 드린 당일에 다 먹어야 했습니다(15절).
자원제(自願祭)(樂獻祭)(7:16-18)
서원제와 자원제의 제물은 그 이튿날까지 먹는 것이 허용되었습니다(16-17).
반면 감사제의 제물은 제사 드린 당일에 다 먹어야 했습니다(15절).
제물을 제사 드린 당일에 다 먹지 못한 경우에는 태워야
했습니다.
제물의 고기를 당일에 먹어야 한다는 규례는 다른 제사의 제물과 관련해서는 나타나지 않습니다.
아마 고기를 신속히 먹어야
한다는 명령은 예배자에게 다른 사람들,
특히 가난한 사람들과 함께 고기를 나누어 먹도록 장려하기 위한 방편으로 인 것입니다.
즉
당일에 고기를 다 소비하라는 것은 다 나누어 함께 먹으라는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이를 어기고 남은 고기를 먹으면 그가 드린
제사는 가증하게 될 뿐 아니라 그 고기를 먹은 자는 죄를 지은 자로 간주되었습니다(18절). 이 경우에는 부정한 자가 제물을
먹었을 경우 위의 경우보다 더욱 심각한 심판을 받았습니다.
그는 그의 백성 중에서 끊어지는 형벌을 받았습니다(20-21절).
“백성 중에서 끊어지다”라는 구절은 죽음과 같은 하나님의 직접적인 심판을 지칭합니다.
백성 중에서 끊어지는 벌은 다양한 죄와
결부되어 나타나는데 주로 사람들이 판단하기에 대단히 힘든 종교적인 죄, 성적인 범죄와 관련되어 나타납니다(7:20-21, 25,
27; 17:4, 9; 18:29; 19:8; 20:17-18; 22:3절 등).
그만큼 부정한 가운데 제물을 먹는 것은 하나님을
모욕하는 행위였던 것입니다.
신약(新約)의 화목제(和睦祭)
신약에서 화목제와 가장 가까운 제도는 성만찬(聖晩餐) 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를 지시기 전 제자들에게 “이 잔은 내 피로 세운 새 언약”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고전 11:25).
새 언약의 피는 옛 언약의 피에 대한 표현입니다.
그렇다면 옛 언약의 피는 무엇이었을까요?
출애굽기 24:8
모세가 그 피를 취하여 백성에게 뿌려 가로되 이는 여호와께서 이 모든 말씀에 대하여 너희와 세우신 언약의 피니라.
출애굽기 24장에서 백성들이 여호와의 모든 말씀을 준행하겠다고 약속하자 모세는 이스라엘 열두 지파를 상징하는 열두 기둥을 세우고 번제와 화목제를 드립니다.
언약서를 백성들에게 낭독하자 백성들은 다시 한 번 여호와의 모든 말씀을 준행하겠다고 약속합니다(7절).
그러자 모세는 화목제의 피를 양푼에 담아 반은 하나님을 상징하는 단에 뿌리고(6절),
나머지 반은 백성들에게 뿌리며,
“이는 여호와께서 너희와 세우신 언약의 피”(8절)라고 선언합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먹고 마신 최후의 만찬은 이와 같은 면에서 화목제와 유사합니다.
성만찬과 화목제의 유사점은 참여하는 자가 정결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구약에서 제물을 바친 자들이 제물을 먹기 위해 정결해야 했던 것처럼
신약에서도 자기 몸을 살피지 않고 주의 만찬에 참여하는 자에게 하나님의 심판을 경고했습니다.
“만일 몸이 부정한 자가 여호와께 속한 화목제의 희생의 고기를 먹으면 그 사람은 자기 백성 중에서 끊쳐질 것이요”(레 7:20)
“그러므로 누구든지 주의 떡이나 잔을 합당치 않게 먹고 마시는 자는 주의 몸과 피를 범하는 죄가 있느니라”(고전 11:27)
제자들과 함께 그의 살과 피를 나눈 최후의 만찬은 화목제와 흡사합니다.
구별 없이 어느 것이든 가능하다.
그러나 전부를 드리는 것이 아니라 내장에 덮인 기름과
내장에 붙은 모든 기름, 그리고 두 콩팥과 그 위의 기름, 허리 근방에 있는 것과 간에 덮인 꺼풀을 콩팥과 함께 드리도록 되어
있었다.
양
: 소와 마찬가지로 흠 없는 것으로 하되 암,수 어느 것이든 가능하였고, 어린 양을 드릴 수도 있었다.
양의 경우 역시 양의
기름만을 드리되 미려골(등심뼈 또는 척추)에서 베어 낸 기름진 꼬리와 내장에 덮인 것과 모든 기름진 두 콩팥과 간에 덮인 기름과
꺼풀만을 콩팥과 함께 드릴 수 있었다.
화목제와 번제와 소제의 차이점은 예배 자에게 제물로 드린 동물의 고기를 먹는 것이 허용되었다는 것입니다. 번제의 경우 제물 전체를 태워 하나님께 드렸으면 소제의 경우 한줌의 제물만을 기념물로 태우고 나머지는 제사장들에게 주었습니다. 화목제의 경우 동물의 일부는 태웠으며, 일부는 제사장들이 먹었습니다. 또 그 가운데 일부는 예배 자에게 돌려져 예배 자와 그 친지들이 함께 먹었습니다. 따라서 화목제는 성소와 성소 근처에서 먹는 즐거운 축제였습니다.
그리고 “이는 화제라 여호와께 향기로운 냄새니라.” 또는 이와 유사한 구절로 결론을 맺습니다(5, 11, 16).
마지막 문단은 기름과 피를 먹지 말라는 구체적 명령이 추가 되었습니다.
“대대로 영원한 규례”라는 표현은 레위기에서 중요한 원칙을 강조하기 위해 자주 나타납니다.
2. 화목제 의식
화목제를 드리고자 하는 자는 암수에 관계없이 흠 없는 가축(소나 양이나 염소)을 여호와 앞으로, 즉 회막 문 앞으로 가지고 왔습니다(1,6-7,12절).
예배 자는 제물의 머리에 안수했습니다. 안수가 자신을 제물과 동일시하는 상징적 행위라는 점은 중요합니다. 아마 예배 자는 동물의 머리에 안수하며 예배 드리는 이유를 고백했을 것으로 보입니다. 예를 들면 기도 응답이나 서원이 성취되었다는 고백들입니다.
화목제 의식은 안수 한 후에 동물을 잡습니다.
제사장은 그 피를 단 사면에 뿌립니다.
그리고 동물의 가죽을 벗기고 토막 냅니다. 이것은 레위기 3장에서 나타나지 않지만 번제로 유추할 수 있습니다. 여기까지는 번제와 동일하게 화목제 의식이 진행되었습니다.
그러나 화목제가 번제와 다른 점은 번제가 동물 전체를 제단 위에서 태운 것과는 달리, 화목제에는 내장을 덮고 있는 기름과 콩팥을 덥고 있는 기름, 그리고 간 주위에 있는 기름만을(양으로 드릴 경우 꼬리의 기름까지) 여호와께 드리는 화제로 태웠습니다(3-5, 9-11, 14-16절)
화목제 의식은 예배 자와 함께 예배하는 사람들 또는 가족들이 그 나머지 고기를 먹는 성스러운 식사에 참여하는 것으로 끝맺습니다. 그래서 신약의 성만찬과 가장 유사한 모습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화목제 의식을 잘 이해하기 위해서는 7장에 소개되는 제사장들에게 주는 화목제 규례를 참조해야 합니다. 레위기 3장은 공동식사 자체에 대해서는 거의 설명하지 않습니다. 단지 7:20-21절에서 이 식사에 참여하는 모든 자는 의식적으로 정결해야 한다고 규정할 뿐입니다. 만일 부정한 자가 이를 먹으면 이스라엘 백성 중에서 끊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뒤에 다시 살피겠습니까만 제사장들이 제물을 먹지 못하게 하는 부정은 레위기 22장에 상세히 소개됩니다. 일반 백성 가운데 사람의 시체나 부정한 동물의 사체를 접촉한 자(11:24-40) 또는 몸에 유출병이 있는 자는 부정한 자로 간주되었으며, 이런 자는 적절한 정결의식을 행하기 전까지 어떤 제물도 먹을 수 없었습니다.
하나님께는 콩팥과 기름 부위를 태워 드린 반면, 제사장들은 가슴과 뒷다리를 먹을 수 있었습니다(7:31-34절). 한 편 예배 자와 동참자들은 그 나머지를 먹었습니다. 그러나 피와 기름은 결코 먹어서는 안 되었습니다(3:17; 7:22-27절). 피는 생명을 속하기에 먹으면 안 되었으며(17:11절), 기름은 아마도 가장 좋은 부분이었기에 하나님께 드린 것으로 보입니다. 구약에서 기름은 최고의 것과 동의어로 사용됩니다(창4:4; 45:18; 시81:16절). 제물은 상징적으로 예배자 자신을 나타내기에 하나님께 제물의 최상의 부위를 드린다는 것은 예배자 자신의 최고의 부분을 하나님께 드림을 의미합니다. 콩팥도 특별히 단에서 하나님께 드렸습니다. 콩팥과 내장은 구약에서 감정의 좌소로 간주되었습니다(욥19:27; 시16:7; 렘4:14; 12:2). 따라서 콩팥을 한님께 드림은 오늘날 우리 마음을 드림과 같은 의미였습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피를 먹는 것은 전적으로 금지되었습니다. 그것을 먹는 자는 자기 백성 중에서 끊쳐 지리라고 선언되었습니다(25-26절).
화목제 중에는 제사장의 분깃(7:28-36절)이 있습니다. 제사를 집행하는 제사장은 백성이 드리는 모든 제물에서 분깃을 받았다(6:26; 7:6-10). 이것은 제사장으로 기름부음을 받았기 때문에 주어지는 몫이었다(35). 화목제의 경우는 제사장은 가슴(30절)과 오른쪽 뒷다리(33절)을 받았습니다. 가슴은 요제라 불리며 뒷다리는 거제라 불립니다. 정통적인 해석은 거제의 경우 제물을 취하여 수직으로 흔드는 의식을 행한 것으로, 요제의 경우 제물을 취하여 수평으로 흔드는 의식을 행한 것으로 이해합니다. 이렇게 드린 제물은 제사장의 몫이 되었습니다.
3. 화목제의 목적
화목제의 히브리어 명칭인 쉘라밈은 화평한 관계(샬롬), 하나님께 드리는 선물(아카드어의 “슐마누”) 등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또는 일련의 제사를 “완성하는”(샬렘)절차를 나타낸다고 여겨지기도 합니다.
레위기 7장은 감사제, 서원제, 자원제라는 세 가지 종류의 화목제를 소개합니다(7:11-18절).
이 세 형태의 제사에서 구원 또는 평화가 공통적으로 발견됩니다.
화목제는 원수나 병의 공격에서 하나님의 도우심을 간구하거나 자신의 잘못을 고백하며 드렸고(삿 20:26; 21:4; 삼하 24:25)
혹은 환난에서 구원 받은 후에 하나님의 자비에 초점을 맞추어 감사제를 드렸습니다(예. 시 56:12-13).
또 어려운 상황을 만났을 때 사람들은 흔히 하나님의 도우심을 간구하며 서원제의 약속을 합니다.
따라서 서원이 이루어졌을 경우 서원자는 화목제를 드려야 했습니다.
에서를
피해 집에서 도망 다니던 야곱이 만일 하나님이 자신을 안전하게 집으로 돌아가게 하시면 여호와가 자신의 하나님이 될 것이라고
벧엘에서 서원하고(창 28:20-22), 돌기둥 위에 기름을 부음으로 자신의 서원을 확실하게 보증합니다.
그 후 야곱은 벧엘로 다시 돌아오자 제사를 드립니다(창 35장).
삼상 1장에서 한나는 만일 하나님이 아들을 낳게 해 주시면 그 아들을 하나님께 바치겠다고 서원합니다(삼상 1:11절).
사무엘이 태어나고 젖을 뗀 후 한나는 세 마리의 수소와 가루 한 에바와 포도주 한 가죽 부대로 서원제를 드렸습니다(삼상 1:24)
세 번째로 소개되는 화목제는 자원제입니다.
이것은 때로 낙헌제라고 번역되기도 했습니다(출 35:29; 스 1:4; 8:28; 시 54:6).
자원제 또는 낙헌제는 하나님의 호의와 선하심에 대해 예배자가 자발적으로 드리는 제사로 신명기는 추수를 한 후 드리는 자원제를 언급합니다(신 16:10)
자원하여 화목제를 드릴 경우에는 흠이 있는 제물이 허용되었습니다(레 22:23절).
하지만 감사제나 서원제에는 반드시 흠이 없는 동물로 제사 드렸습니다.
이 외에도 화목제는 흔히 언약 의식과 함께 나타납니다(출 24:5; 신 27:7; 왕상 8:63)
아마도 이스라엘을 하나님의 백성으로 선택하심에 대한 감사의 의미와 언약을 지키겠다는 서원의 의미로 화목제를 드린 듯합니다.
가끔 죄에 대한 고백과 구원에 대한 탄원이 나타나기도 하지만 화목제는 대부분 즐거운 경우에 드렸습니다.
따라서 제사 후 뒤따르는 성스러운 식사는 여호와 앞에서 즐거움을 나누는 기회였습니다(신 12:12, 18; 27:7; 왕상 8:66)
마찬가지로 화목제에도 피를 뿌리는 의식이 거행되기는 하지만 속죄는 화목제의 주목적이 아니었습니다.
속죄는 화목제를 드리기에 앞서 드려진 번제의 주요 목적이었습니다.
화목제에서 피 뿌리는 의식이 나타나는 것은 이와 같이 즐거운 경우에조차 인간은 항상 죄를 용서 받아야 함을 상기시킵니다.
화목제를 드리는 예배자는 하나님의 언약의 법을 준수할 것을 서원하거나,
하나님이 예배자의 기도를 응답하여 주시면 하나님을 위해 특정한 일을 하겠다고 구체적으로 서원합니다.
반면에 하나님은 이들에게 복을 주시겠다는 것을 화목제 식사를 통하여 가시적으로 보증하십니다.
고기를 먹으며 즐기는 것은 언약을 지키는 자에게 모든 다른 축복들(레 26:3-13; 신 28:1-14)도 주실 것임을 물리적으로 상기하게 하는 역할을 합니다.
하나님이 언약을 지키는 자들은 집에서든 집 밖에서든 평화를 누리며 풍성한 수확과 많은 자녀들과 번역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화목제는 하나님과 이스라엘이 확인하는 화평한 관계를 표현하는 제사입니다.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고 난 이후 하나님이 주신 예물을 먹고 나누면서 평안과 기쁨을 확인하는 예배가 바로 화목제입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요구하시는 것은 하나님과 이스라엘 사이에 이루어지는 샬롬입니다.
화목제가 드려지는 때가 감사할 때, 서원을 드릴 때, 그밖에 하나님께 대한 자신의 사랑을 임의적으로 표현할 때 드리게 되기에 화목제는 궁극적으로 하나님과의 화목을 강조하는 예배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화목제는 하나님과 이스라엘이 누리는 거룩한 교제를 드러내는 제사입니다. 화목제는 잔치입니다. 예배하는 자가 하나님의 식탁, 즉 제단에서 하나님을 주빈으로, 예배드린 자를 객(客)으로 삼아 먹고 나누는 기쁨의 잔치입니다. 화목제는 서로 나눠주는 예물입니다(히 13:16). 하나님의 은혜를 서로 나누고 확인하는 제사가 바로 화목제입니다. 신앙은 이론이 아닙니다. 신앙은 지식이 아닙니다. 신앙은 삶입니다. 하나님과 화목하여 누리는 기쁨과 감사의 삶입니다. 우리의 삶이 잔치가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화목을 드러내는 잔치가 되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은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적인 죽음으로 인하여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는 것은 순전히 예수의 피 덕분이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나니”(히 10:19)라고 히브리서 기자는 말씀하고 있습니다.
화목제(Fellowship Offering) 제바흐 쉐라밈
화목제를
뜻하는 히브리어 ‘제바흐 쉐라밈'
"자바흐"는 ‘동물을 살육하다’, ‘죽이다’, ‘제사 드리다’에서 파생된 "도륙" ‘희생물’을 뜻하는 ‘제바흐에서 파생하였다.
‘완전한’, ‘정다운’, ‘공평한’, ‘평화로운’을 뜻하는 ‘솨렘’에서 파생된
‘쉐라밈'
"제바흐"와 "쉐라밈"의 합성어로 그 의미는 ‘사람이 하나님과의 완전한 관계’, 또는 ‘평화로운 관계를 얻고자 하는 희생 제물’ 이라는
의미이다.
제물(祭物)의 종류(種類) / 소, 염소, 양
소와
염소 : 흠 없는 것으로서 암컷,수컷 구별 없이 어느 것이든 가능하다.
그러나 전부를 드리는 것이 아니라 내장에 덮인 기름과
내장에 붙은 모든 기름, 그리고 두 콩팥과 그 위의 기름, 허리 근방에 있는 것과 간에 덮인 꺼풀을 콩팥과 함께 드리도록 되어
있었다.
양
: 소와 마찬가지로 흠 없는 것으로 하되 암,수 어느 것이든 가능하였고, 어린 양을 드릴 수도 있었다.
양의 경우 역시 양의
기름만을 드리되 미려골(등심뼈 또는 척추)에서 베어 낸 기름진 꼬리와 내장에 덮인 것과 모든 기름진 두 콩팥과 간에 덮인 기름과
꺼풀만을 콩팥과 함께 드릴 수 있었다.
화목제를 드리는 방법
1. 제물을 갖고 여호와 앞으로 나온다.
2. 손을 제물의 머리 위에 얹고 안수한다.
3. 피를 제사장에게 주면 제사장은 그 피를 번제단 사면에 뿌린다.
4. 제물의 가죽을 벗기고 그 속의 내장에 덮인 기름과 내장에 붙은 모든 기름과 콩팥과 그 위의 기름과 허리 근방에 있는 것과 간에 덮인 것을 제사장에게 주면 제사장은 그것들을 받아 제단에서 불사른다.
5. 제물의 가슴은 ‘요제’로 제물의 우편 뒷다리는’거제’로 흔들어 제사장의 음식으로주어지는데 제사장과 가족들은 그것을 그날에 다 먹어야 하며 남은 것은 불에 태워야 했다.
화목제의 특색
화목제는
다른 제사와는 달리 두 가지의 특색이 있었다.
첫째, 선택적 제사
의무적인 제사가 아닌 ‘선택적인 제사’
1. ‘자원함으로'(레 7:16)
2. ‘서원함으로'(레 7:16, 삼상 1;21이하)
3. ‘감사함으로'(레 7:15) 드리는 제사
둘째, 축제의 제사
화목 제물의 고기를 제물을 바치는 사람도 먹을 수 있는 일종의 축제 형식의 제사(레 7:15-21)
요아킴은 하나님께 바칠 번제의 양과 화목제 소를 각각 한 마리 씩 고른 후 당장에 성전으로 달려갔다. 자신의 여행길에서 함께 해주신 하나님, 여러 차례 위기의 순간에 구원의 손길을 베풀어주신 여호와 하나님께 감사의 제사를 바치고 친족과 마을 사람들을 위해 기쁨의 잔치를 베풀고 싶었기 때문이다. 번제를 감사의 제물로 먼저 바친 후, 요아킴은 화목제를 또한 하나님께 올려 드렸다. 제사 규례를 따라 번제의 양은 남김없이 모두 태워져 하나님께 감사의 제물로 올라갔다. 이어서 화목제의 수소는 내장의 기름 덩어리와 두 콩팥, 그리고 간엽을 도려내 바친 후 가슴과 오른쪽 넓적다리는 수고하신 제사장님 몫으로 드리고 나머지 대부분의 몸통을 집으로 가져왔다. 그리고 요아킴은 마을 사람 모두를 불러 그 화목제 짐승으로 불고기 파티를 열었다. 그 동안 껄끄러운 관계였던 친구 시므온도 초대를 받고선 기꺼이 기쁨으로 달려와 주었다. 즐겁게 고기를 삶고 구워 먹으며 요아킴은 여행길에 어떻게 하나님께서 자신을 보호하셨는지 간증을 들려주었다. 감사가 풍성히 넘쳤다. 간증을 들은 다른 사람들도 또한 최근에 있었던 특별한 하나님의 은혜를 더하여 나누었다. 잔치의 자리에서 아름다운 찬양의 노래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모두가 시편의 찬양을 노래했다. 그 순간 요아킴과 시므온을 비롯 모두가 하나님 앞에서 화목하고 하나가 되었다.
화목제의 특징
위험한 여행을 마치고 돌아온 요아킴이 바친 제사는 번제와 화목제였다. 번제는 여러 목적으로 바쳤지만, 가장 대표적인 자원의 제사로서 감사의 제물로 바치는 경우가 많았다. 이때 흔하게 화목제가 수반되었다. 번제가 하나님께 온전히 바쳐진 제물이었다면, 화목제는 하나님께 일부 바치고 나머지 대부분은 사람이 함께 나누기 위한 제물이었다. 따라서 번제가 수직적인 제사였다면 또 하나의 감사의 제물이었던 화목제는 주로 사람들과 기쁨을 나누기 위한 수평적인 제사였다고 볼 수 있다.
레위기 3장에서 규정된 화목제의 히브리어는 쉘라밈(shelamim)이다.
이 단어는 분명 ‘샬롬’에서 기원한 것이다.
샬롬은 평화와 친교, 다시 말해 관계가 좋은 상태를 말한다.
화목제는 영어 성경에서 ‘평화의 제사’(peace offering)나 ‘친교의 제사’(fellowship offering)로 번역한다.
흔히 알고 있는 대로 화목제는 하나님과 ‘화목하기 위해’ 바치는 제사가 아니라 하나님과 이미 ‘화목한 관계’를 감사하며 기뻐하기 위해 바친다.
하나님과 관계가 틀어졌을 경우 관계를 복원하여 ‘화목’하고 화해하기 위한 제사는 속죄제와 속건제라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죄가 하나님과 백성 사이를 가로막기 때문이다. 감사의 번제나 화목제는 하나님과 이미 화목한 관계 속에서 교제를 지속하고 기쁨과 감사를 표현하기 위해 바치는 제사다. 화목제는 하나님 앞에서 영적인 잔치를 베풀어 사람들과 고기를 나누는 것에 목적이 있었기에 소, 양, 염소를 암수 구분 없이 화목제로 바칠 수 있었다. 비둘기는 제외되었는데 고기를 나누기에 너무 빈약했기 때문이다. 양과 염소는 아마 가족과 친족들만 초대해서 나누었던 반면, 소를 잡을 때는 마을 잔치가 벌어졌을 것이다. 어느 것을 바칠 지는 자신의 형편과 감사의 정도에 따라 제사자 본인이 결정할 수 있었다. 화목제의 가장 큰 특징은 짐승의 일부만 하나님께 바치고 나머지는 전부 사람들이 나누어 먹었다는 점이다. 이때 하나님께 바치는 부위는 내장 부위의 기름 덩어리(suet), 두 콩팥, 그리고 간엽(liver lobe)이었다. 흔히 히브리어 요테레트 카베드(yoteret kabed)를 간꺼플로 번역하는데 그런 얇은 막이 제물에 적합했을리 없다. 랍비들은 그것을 ‘간의 손가락’, 다시 말해 간의 어느 한 토막으로 번역한다. 그것은 간 중에서 ‘미상엽’이라는 부위로 알려진다. 콩팥과 간엽을 바치는 이유에 대해서는 여러 의견이 있으나 그 기관들이 인간의 감정이 집약되는 기관, 즉 감정의 좌소이기 때문이라고 보는 견해가 있다. 특히 간은 당시 널리 퍼져 있던 간점술을 금지하기 위해 제단에 바치라고 했다는 견해가 있다. 그러나 콩팥은 단순히 기름 덩어리에 묻혀 있기 때문에 기름과 한 덩어리로 취급된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화목제에서 태워지는 이 부위들을 단순히 ‘기름’이라고 표현하는 경우가 많다(레 6:12; 왕상 8:64; 대하 7:7; 사 1:11). 그리고 짙은 빨간 색의 간에 대해서는 고대인들에게는 그 기관이 피를 만드는 기관으로 간주되어 ‘피는 곧 생명’이며 하나님께 돌려야하기 때문에 간이 요구되었다는 설명이 가장 그럴 듯 하다.
▲ 고대 팔레스타인 양의 거대한 꼬리와 꼬리를 위한 수레
양의 경우는 특별히 미골에서 벤 기름진 꼬리를 잘라 바치라는 규정이 더해졌다(레 3:9). 꼬리가 두툼하고 묵직한 것이 팔레스타인 양의 특징이다. 최근에는 그런 양을 보기 힘들지만, 헤로도투스의 기록에 의하면 고대 팔레스타인 지역에는 어떤 양은 꼬리가 너무 거대한 나머지 바퀴가 달린 수레를 다는 경우도 있었다고 한다. 이처럼 기름진 꼬리는 미골을 절단하여 제단에 바쳤다(레 3:9). 그러나 염소 꼬리나 소 꼬리는 기름이 아닌 고기 덩어리이므로 제단에 바치지 않았다(레 3:3-4, 14-15).
이렇게 기름과 일부 내장을 제하고 남은 고기(아마 남은 내장도 포함되어 있었을 것이다)는 제사장 몫으로 일부를 떼어낸 뒤 제사자가 가져가 이웃과 함께 나누어 먹었다. 제사장의 몫은 가슴과 오른쪽 뒷다리, 나머지는 모두 제사자의 몫이었다.
그렇다면 왜 짐승의 기름을 여호와께 바쳤을까? 이에 대해서는 기름이 가장 맛있는 부위였다거나 콜레스테롤 덩어리라 인체에 해로워 제물로 바쳤다는 설이 있다. 기름에 잘 타는 부위인 만큼 제물의 소각을 도왔을 것이라는 실용적 이유를 내세우는 학자도 있다. 그러나 밀그롬이 말한 대로 내장에 엉긴 지방 덩어리는 고기 위에 붙은 비계와 달리 먹을 수 없는 부위다. 또한 콜레스테롤이 인체에 유해하다는 관점은 현대 의학의 발달과 함께 등장했으며, 과하게 섭취하지 않는 이상 콜레스테롤은 반드시 필요한 영양소다. 또한 해로운 것을 바치라했다는 견해는 ‘기름은 내 것이라’는 하나님의 선언과도 어울리지 않는다. 하나님께서 기름에 대한 소유권을 주장하신 데는 다른 의미가 있다. 그것은 제물이 향기로운 냄새를 내는 데 있어서 기름이 핵심적이기 때문이다. 더불어 고대 이스라엘에서는 기름이 부와 풍요의 상징이자 힘의 근원으로 간주되었기에 풍요와 힘의 근원이 하나님이심을 인정하면서 그것을 하나님께 되돌려드리는 의미가 있었을 것이다.
화목제를 드리는 때
번제와 마찬가지로 화목제 역시 자발적인 제사였기에 개인은 원하면 언제든 화목제 짐승을 바칠 수 있었다. 화목제는 월삭이나(민 10:10) 오순절 같은 일부의 절기에 공적 제의로 바쳐지는 경우를 제외하면(레 23:19) 매우 사적인 성격이 강한 제사였다. 민수기 29장 39절에 따르면 절기마다 바친 화목제는 절기법으로 규정되어 있기보다는 잔치를 위한 자발적 제사였음을 알 수 있다(참조. 대하 7:7). 또한 특별한 행사나 국가적 행사에서도 화목제를 풍성하게 드렸다(민 7장; 삿 20:26; 삼상 11:15; 대하 7:7; 30:22; 31:2). 화목제는 레위기 이전에도 이미 하나님께서 전수해주셔서 바쳐지던 제사였다(예, 출 18:12). <표>
a. 감사제/찬양제: 요아킴의 사례에서 보듯이, 여행을 무사히 마치거나 전쟁터에서 무사히 돌아왔을 때, 질병에서 회복되었을 때처럼 특별한 축복으로 인해 드리는 화목제였다. 감사의 화목제를 드릴 때 당일에 고기를 먹었다는 점으로(레 7:15) 미루어보면 감사의 기쁨이 충만했을 때 모든 고기를 즉시 먹는 것이 바람직했다.
b. 서원제: 하나님께 서원한 내용을 이행할 때 드리는 제사다. 한나가 아들 사무엘이 젖을 뗀 뒤 성전에 데리고 올라가 서원을 실행하며 수소 세 마리(혹은 삼년생 수소 한 마리)를 서원제로 바친 것(삼상 1:24)이 그 예다. 서원의 화목제 때는 이튿날까지 고기를 먹고, 종종 서원을 이행하기 위해 화목제와 더불어 번제를 함께 바쳤던 것으로 보인다(레 22:18).
c. 자원제/낙헌제: 특별한 일이 있어서 감사하는 것이 아닌 단순히 기쁨으로 자원해서 드리는 화목제였다. 이때도 이튿날까지 고기를 먹을 수 있었다. 이 경우 순전히 자발성에 의해 바치는 제사였던 이유로 짐승의 발이 더하거나 덜한(아마도 짧거나 긴) 약간의 흠이 있는 짐승도 바칠 수 있었다.
화목제의 고기는 지정된 기한 이후로는 거룩성을 상실하여 더러운 고기(히. 피굴)로 간주되었다. 이렇게 일정 기간 후에 제의적으로 부패한 고기나 부정한 것과 접촉한 고기를 먹는 것은 스스로를 부정케 하는 심각한 죄였기에 그런 고기는 진 밖에서 불살라 없애야 마땅했다. 또한 부정한 사람들이 속죄제의 고기를 먹으면 끊어지는(cutting off) 형벌을 받았다(레 7:18~20). 이는 아마 공동체에서 제명된다는 의미일 텐데, 고대 사회에서 공동체로부터 배제되는 것은 죽음과도 같았다.
화목제의 의의
화목제는 죄를 위해 드리는 제사가 아니었다. 화목제는 번제와 같이 하나님과 지속적으로 평화로운 관계를 유지하고 이를 기뻐하는 감사의 제사라 할 수 있다. 화목제는 기쁨을 이웃과의 교제 속에서 나누는 일종의 잔치의 제사다(레 7:11~21). 요아킴의 사례에서 보듯이 큰 일을 겪은 사람은 마음에 여유가 생기는 법이다. 이때 다른 사람과 반목 관계에 놓인 것이 매우 사소해 보일 수 있다. 이때 화목제를 바치면서 공동체의 친목이 강화되고 불편한 관계에 놓인 사람들도 특별한 축제로 인해 화해의 관계로 복원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이런 점에서 화목제는 사람과 사람 사이의 화목을 만드는 부수적 효과가 있었을 것이다.
그동안은 예배에서 번제적 요소, 즉 하나님을 향한 수직적 경배만이 강조되는 경향이 있었다. 그러나 하나님과의 수직적 교제(번제) 못지않게 사람 간의 수평적 교제(화목제)도 중요하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된 제사의 정신은 예배를 통해 실현되어야 마땅하다. 예배 시간은 짧지만 최대한 성도 간의 축하, 감사, 위로 및 합심의 기도 시간을 가져야 할 것이다. 하나님은 예배가 풍성한 교제와 나눔의 자리가 되는 것을 기뻐하실 것이다. 부족한 화목제의 요소는 예배 후 식사와 교제, 구역 예배나 여러 프로그램을 통해 채울 수 있다. 더불어 신자들은 자신의 물질을 화목제의 정신을 따라 이웃과 넉넉히 나눌 수 있어야할 것이다. 비단 물질만이 아니라 어려운 이웃을 섬기는 데 우리의 시간과 힘, 또한 지식을 사용할 수도 있다.
예수님께서는 예배에 앞서 성도들끼리의 나눔과 화해를 크게 강조하셨다. ‘그러므로 예물을 제단에 드리다가 거기서 네 형제에게 원망 들을 만한 일이 있는 줄 생각나거든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마 5:23~24). 이에 따르면 성찬식은 그리스도의 죽음을 기념함과 동시에 성도가 서로 사랑하라는 계명을 실현하는 중요한 예식이 된다.
속죄제(贖罪祭) 레위기 4:1-5:13, 6:2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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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
1. 속죄제를 드려야 할 사람은 누구인가?
(1) 제사장(3절)
(2) 이스라엘 온 회중(13절)
(3) 족장(22절)
(4) 평민(27절)
(1) 흠 없는 수송아지(3절) / 제사장(3절)
(2) 수송아지(14절) / 이스라엘 온 회중(13절)
(3) 수염소(23절) / 족장(22절)
(4) 암염소(28절), 어린 양(32절) / 평민(27절)
1. 속죄제의 언어적 의미
속죄제는 히브리어로 “하타트” 라고 합니다.
학자들에 따라서는 속죄제가 부정하게 된
성소를 정결하게 하는 기능을 중요하게 여겨서 히브리어 “하타트”를 "속죄제"(sin offering)로 번역하기보다는
“정결제”(purification offering)로 번역하는 것이 낫다고 말합니다.
히브리어 “하타트”는 본래 “죄”를 나타내는 명사형입니다.
구약에서 이 단어가 보통 155회 정도 이런 의미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동시에 이 말은 “죄의 용서”를 나타내는 “속죄제”라는 의미로도 사용됩니다.
히브리어 “하타트”가 속죄제란 의미로 사용된 것은 구약에서 대략 135회 정도입니다.
속죄제(하타트)는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뜻을 어기고 살면서 하나님의 백성다운 목표를 어긋난 삶을 살게 되었을 때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기 위하여 드리는 제사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속죄제를 드림으로써 “범한 죄에 대해서 속죄함을 받고 사함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4:20, 26, 31, 35: 5:6, 10, 13, 16).
일반적으로 속죄제는 속죄 제물을 드리는 자에게 “속죄함을 받게 하고, 용서함을 얻게 합니다.”
속죄제를 드려야 되는 상황은 크게 둘로 구분됩니다.
첫째는 부지중에 하나님의 금령을 어긴 것을 깨달았을 때 드리는 제사입니다(4:3-35).
특히 2절에서 ‘누구든지 여호와의 계명 중 하나라도 그릇 범죄하였으되’라고 말씀합니다.
그러니까 속죄제는 명시적인 계명을 부지 중에 어겼을 때 드리는 예배였던 것입니다.
둘째는 법정의 증언을 기피하거나 부정한 물체 등에 접촉하였거나 맹세한 것에 대한 약속을 이행하지 않은 것 등을 깨달았을 때 드리는 제사입니다(5:1-13).
그 어느 것이든 고의성이 없는 잘못과 허물에 해당합니다.
부주의하여 저지르거나, 무심코 저지르거나, 태만하여 저지른 범법행위가 여기에 속합니다.
만약 고의적으로, 의도적으로 저지른 범죄행위가 있다면 거기에 따른 형벌은 공동체로부터 “추방되는” 것 외에 다른 방도가 없었습니다.
속죄제의 특징은 성소에 피가 뿌려진다는 것입니다.
성소는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과 만나주시는 하나님 자신을 눈에 보이게 표현한 곳입니다.
바로 그 성소에 속죄제의 피가 뿌려졌습니다.
왜 이렇게 하는 것일까요?
이스라엘 신앙에서 죄의 삯은 부정(不淨)입니다.
죄는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관계를 파괴시키는 부정을 남깁니다.
죄는 이스라엘 공동체에서 사람과 사람의 관계를 파괴하는 부담스러운 실체입니다.
이 같은 관계의 파괴는 단순히 죄인에게 주는 죄책(罪責)으로만 그치지 않습니다.
관계의 파괴는 거룩한 신앙공동체의 질서를 근본적으로 뒤흔드는 위기를 초래합니다.
하나님의 성소가 죄로 인한 부정에 오염되게 되는 결과를 맞게 되는 것입니다.
2. 4:1-5:13절의 구조
레위기에 네 번째 나타나는 속죄제의 구조는 앞의 1-3장과 명백하게 구분됩니다.
레위기 1-3장이 제물을 중심으로 구성되어 있는 반면, 속죄제에서는 제사를 드리는 자의 사회적 지위가 문단을 배열하는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서론(4:1-2절)에 이어 각각의 단락은 “만일(임)"로 시작합니다(4:3,13, 22, 27, 32; 5:7,11).
“제사장이 그이 범한 죄에 대하여 그를 위하여 속죄한즉 그가 사함을 얻으리라.”
또는 이와 유사한 구절로 각 문단이 끝납니다(4:20, 26, 31, 35; 5:10,13).
이 표현은 대제사장이 범죄하여 속죄제를 드리는 첫 번째 단락(4:3-12)에는 나타나지 않습니다.
그 이유는 자신의 죄 때문에 제사를 드리는 대제사장 스스로 자신의 용서를 선포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4:22절과 5:1절은 종속적인 경우를 소개하는 만일로 시작하지 않고 각각 아쉐르(만일)와 네페쉬키(만일 누구든지)로 문장을 시작하여 새로운 주제가 시작되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이런 구분에 의해 다음과 같이 단락을 구분해 볼 수 있습니다.
4:1-2, 서론
4:3-21, 성소에서 피가 뿌려지는 속죄제
4:3-12. 대제사장의 속죄제
4:13-21. 온 회중의 속죄제
4:22-35, 번제단에 피를 바르는 속죄제
4:22-26. 족장의 속죄제
4:27-31. 평민의 속죄제(염소로 드리는 경우)
4:32-35. 평민의 속죄제(어린 양으로 드리는 경우)
5:1-13, 속죄제의 규례
5:1-6. 속죄제를 드리는 네 경우
5:7-10. 가난한 자의 속죄제
5:11-13. 극빈자의 속죄제
3. 속죄제 의식
속죄제는 레위기에 소개되는 제사 중에서 가장 자세히 묘사되어 있습니다.
먼저 제사자는 신분에 따라 자신이 드려야 하는 흠 없는 동물을 선택했습니다.
제사자는 선택된 제물을 회막의 입구로 가져와서, 그의 손으로 제물의 머리에 안수한 다음 잡았습니다.
여기까지는 다른 동물의 제사의식과 동일하지만 이 후의 의식은 독특하게 속죄제에만 나타납니다.
번제와 화목제의 경우 제사장이 동물의 피를 단 주위에 뿌렸습니다.
그러나 속죄제에서는 피의 일부를 대야에 담아 특별한 용도로 사용했으며, 나머지 피는 단 밑에 부었습니다.
대야에 담은 피는 제사자의 신분에 따라 다양하게 사용되었습니다.
기름부음을 받은 제사장 또는 이스라엘 온 회중이 속죄제를 드릴 경우,
대제사장은 이 피를 가지고 회막 안으로 들어가서 피를 성소의 휘장, 즉 회막의 가장 내부에 위치한 성소와 지성소를 구분하는 휘장에 일곱 번 뿌렸습니다. 그리고 약간의 피를 성소에 위치한 향단의 뿔에 발랐습니다.
이 의식은 성막에서 둘째로 거룩한 장소, 즉 제사장들만 들어가도록 허용된 성소에서 거행되었습니다.
족장이나 평민이 속죄제를 드릴경우 회막 안으로 가지고 들어가지 않고 단지 회막 뜰에 위치한 번제단의 뿔에 발랐습니다(레
4:22-35). 레위기 16장에 소개되는 속죄일에는 대제사장이 피를 가지고 지성소까지 들어가서 언약궤를 덮고 있는 속죄소 앞에
피를 뿌렸습니다(16:14-15).
대속죄일에는 일 년에 한번 시은좌에 피를 뿌림으로 죄를 덮었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죄의 경중과 상황에 따라 피가 뿌려지는 곳이 달라졌다는 말입니다.
피 뿌리는 의식에 이어 동물의 고기를 처리하는 의식이 진행되었습니다.
휘장에 뿌리거나 단에 바르고 남은 피는 번제단 밑에 쏟았으며,
기름 부위는 화목제와 마찬가지로 번제단에서 여호와께 향기로운 냄새로 태웠습니다(4:31).
기름과 콩팥을 제외한 나머지 고기는 기름부음을 받은 제사장 또는 온 회중이 죄를 지었을 때(4:3-21)
백성이 죄를 지었을 때 각각 다르게 처리되었습니다(4:22-35).
제사장 또는 온 회중이 부지중에 죄를 지었을 때에는 동물의 나머지 부분, 즉 가죽, 고기, 머리, 다리, 내장과 똥은 진 밖으로 가지고 나가서 재를 버리는 곳에서 불에 태웠습니다(4:11-12, 21).
그러나 만일 일반 백성 중 하나가 속죄제를 드릴 때에는 단지 기름 부위와 콩팥만 태웠고 그 나머지 고기는 제사장의 몫으로 주었습니다(6:26-30).
가난한 사람은 가축 대신에 비둘기 두 마리로 제사를 드릴 수 있었는데 그중 한 마리는 번제로 나머지 한 마리는 속죄제로 드렸습니다(5:7-10). 만일 새도 드리지 못할 정도로 가난할 경우, 그는 유향과 기름을 넣지 않은 고운 가루 에바 십분의 일로 속죄제를 드릴 수 있었습니다. 이때에는 한 줌의 기념물만이 제단에서 태웠으며, 그 나머지는 제사장에게 주었습니다(5:11-13).
속죄제는 제사를 드리는 사람의 신분에 따라 드리는 제물과 의식이 자세히 설명되고 있습니다.
이런 부분을 사회적 신분에 따라 정리해 보면 이렇습니다.
(1) 대제사장의 속죄제(4:3-12)
기름부음을 받은 제사장이라는 표현은 레위기 4장과 6장에만 나타납니다(4:3,5,16; 6:22).
이 표현은 오직 대제사장을 가리키는 전문적 용어로 이해하는 것이 좋습니다.
3절의 “백성의 허물이 되었으면”이라는 표현은 대제사장의 죄는 자신뿐만 아니라 백성 전체에 영향을 미친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구약의 제사장은 백성에게 주의 법도와 규례를 가르치는 교사의 역할을 했습니다.
따라서 이들은 자신의 공적인 삶에서는 물론 사적인 삶에서도 모범을 보여야 했습니다.
대제사장은 이스라엘을 대표하는 이상적인 사람이었습니다.
특히 대제사장은 제사장들의 우두머리로서 그의 삶은 모든 사람들이 지향해야 할 거룩한 삶의 전형적인 모범이 되어야 했습니다.
대제사장이 지은 죄가 일반 백성이 지은 죄보다 심각했다는 것은 대제사장이 가장 값비싼 수송아지로 제사를 드렸다는 사실과 제물의 피를 가지고 성소까지 들어가서 피 뿌리는 의식을 행했다는 것에서 잘 나타납니다.
수송아지는 대제사장과 온 회중이 죄를 지었을 경우에만 제물로 드렸습니다(4:4,14)
(2) 온 회중의 속죄제(4:13-21)
온 회중이 죄를 지었을 때 드리는 속죄제의 의식은 한 가지만 제외하고 대제사장의 경우와 같습니다.
온 회중이 죄를 지었을 경우 회중 전체가 제물의 머리에 안수할 수 없었기에 회중을 대표하는 장로들이 수송아지의 머리에 안수했습니다(15절).
(3) 족장의 속죄제(4:22-26)
족장은 존경받는 특권을 지닌 위치에 있었습니다.
그래서 족장 또는 지도자의 죄는 일반 백성보다 심각하게 간주되었습니다.
족장의 죄는 대제사장이나 온 회중의 죄만큼 심각하게 간주되지는 않았지만 죄를 지은 족장은 일반 백성의 제물보다 더 비싼 숫염소로 제사를 드려야 했습니다.
족장이 죄를 지었을 경우 제사장은 피를 가지고 성소로 들어가지 않고 다만 회막 뜰에 위치한 번제단의 뿔에 피를 바르는 의식을 거행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앞의 두 경우 콩팥과 기름을 제외한 모든 고기들을 진 바깥에서 소각한 반면, 족장을 포함하여 일반 백성이 속죄제를 드렸을 경우에는 제사장들이 기름과 콩팥을 제외한 나머지 고기들을 먹을 수 있었습니다.
즉 피를 가지고 성소에 들어가서 피 뿌리는 의식을 행한 기는 제사장들이 먹을 수 없었으며 진 밖에서 불살라야 했던 반면(4:12, 21),
회막 뜰에서 의식을 행한 제물들은 제사장들이 먹을 수 있었습니다(6:24-30)
(4) 평민의 속죄제(4:27-35; 5:7-13)
평민은 대제사장이나 족장과 같이 비싼 제물로 속죄제를 드리지 않아도 되었습니다.
평민은 암염소(4:28) 또는 암컷의 어린양(4:32)을 제물로 드릴 수가 있었습니다.
평민의 속죄제 의식은 족장의 경우와 동일했습니다.
가난한 자는 비둘기 두 마리로 제사를 드리는 것이 허용되었으며(5:7-10),
극빈자는 밀가루로도 드릴 수 있었습니다(5:11-13).
선택적으로 드리는 화목제는 반드시 생축(소, 양, 염소)으로 제사를 드린 반면,
의무적으로 반드시 드려야 했던 번제와 속죄제에서 양이나 염소를 드릴 수 없는 가난한 자에게는
생축이 아닌 비둘기 또는 밀가루(소제)로 제사를 드리는 것이 허락되었습니다.
가난한 자가 비둘기 두 마리로 각각 번제와 속죄제를 드린 것을 보면(5:7),
본문에는 명시되어 있지 않지만 아마도 부유한 사람들도 속죄제와 함께 번제를 드렸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4. 속죄제를 드리는 경우(5:1-6)
레위기는 속죄제를 드려야 하는 다양한 경우를 소개합니다.
출산으로 부정해진 여인이 정결해지기 위하여(레 12:6),
심각한 피부병으로 부정해진 사람이 나았을 경우 정결해지기 위하여(레 14:19),
유출병에서 나은 자가 정결해지기 위하여(레 15:15,30)
그 외 번번하지는 않지만
제사장 위임식(레 8:14),
제단의 봉헌식(민 7:16),
레위인 위임식(민 8:8)
나실인이 서원이 성취되었을 때(민 6:14)
레위기 4장은 단순히 여호와의 금령을 부주의로 그릇 행했을 경우 속죄제를 드려야 한다고 언급하지만(4:2,13, 22, 27)
5:1-6절은 좀 더 구체적으로 이 제사를 드려야 하는 네 가지 경우를 소개합니다.
①. 법정에서 증인의 의무를 행하지 않았을 경우(5:1; 참조, 잠 29:24)
②. 부지중에 부정한 동물의 사체에 접촉했을 경우(5:2; 참조. 11:24-28)
③. 모르고 부정한 사람과 접촉했다가 후에 그 사람이 부정한 사람이라는 것을 깨달았을 경우(3, 참조.15:13-15, 25-30)
④. 무심결에 맹세를 했다가 후에 자신이 이를 지키지 않았음을 깨달았을 경우
이런 네 가지 경우 자신의 죄를 고백하고 속죄제를 드려야 했습니다.
5:6절은 자신의 허물을 고백한 사람에게 “그 허물을 인하여 여호와께 속죄제를 드리되 양 떼의 암컷 어린양이나 염소를 끌어다가 속죄제를 드릴 것”을 명하고 있습니다.
여기 사용된 속죄제라는 말은 하타트가 아니라 야샴이라는 말로 벌금의 성격이었습니다.
5. 속죄제의 목적
동물로 드리는 모든 제사(번제, 화목제, 속죄제, 속건제)는 제물의 머리에 안수한 다음 동물을 죽이며,
그 피를 제단에 뿌린 다음 그 고기 전체, 또는 콩팥과 기름을 단에서 태웁니다.
따라서 동물로 드리는 모든 제사가 하나님의 진노를 가라앉히는 속죄의 기능이 있음은 자명합니다.
하지만 각 제사의식의 독특한 점들은 각 제사의 강조점과 목적이 무엇인지를 잘 보여줍니다.
번제는 죄의 사악함과 그 영향의 심각성을 보여주며,
제물 전체를 불사름으로서 하나님과의 관계가 다시 회복되었음을 보여줍니다.
화목제는 번제를 드린 다음에 드리는 제사로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의 결과로 주어지는
평화와 구원을 감사하며 즐기는 제사입니다.
속죄제의 독특한 점은 피 뿌리는 의식에서 발견됩니다.
구약에서 속죄제는 정결 또는 정화와 깊은 관련이 있습니다.
속죄제는 특히 출산한 여인(레 12:6),
악질 전염성 피부병(14:19),
또는 유출병(15:15, 30)의 경우에서 보듯이 몸의 정결과 관련하여 드렸습니다.
속죄제의 피 뿌리는 의식은 이스라엘의 부정을 깨끗이 씻어내는 효력이 있는 것으로 묘사됩니다.
“너희는 이와 같이 이스라엘 자손으로 그 부정에서 떠나게 하여 그들로 그 가운데 있는 재 장막을 더럽히고 그 부정한 중에서 죽음을 면케할 지니라”(레 15:31).
속죄일에는 대제사장이 피를 번제 단에 뿌렸는데,
이것은 이스라엘 자손의 부정에서 단을 성결케하기 위함이었습니다(16:19).
여기서 알 수 있는 것은 죄가 사람을 더럽힐 뿐 아니라 하나님의 성소까지 오염시키며,
이 오염된 것을 정결케 하는 합당한 수단이 바로 동물의 피라는 것을 보여줍니다.
번제가 죄인과 하나님 사이의 화해를 위한 제사
속죄제는 죄로 생긴 오염과 더럽힘을 처리하는 제사
속죄제는 성소 또는 성전을 정결케 함으로 하나님이 이스라엘 가운데 지속적으로 거하실수 있게 합니다.
속죄제의 가장 중요한 목적은 그의 백성 가운데 하나님이 계속 머무르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하나님을 섬기기에 적합하도록 예배에 사용되는 여러 도구들에 피가 칠해졌습니다.
향단과 번제단, 그리고 휘장 뿐 아니라 속죄소에까지 피가 뿌려졌으며(레 16)
더 나아가서는 제사장들의 귀와 손가락과 발가락 그리고 그들의 옷에도 피가 뿌려졌습니다(출 29:19-21; 레 8:22-24, 30).
히브리서 9:22
율법을 좇아 거의 모든 물건이 피로써 정결케 되나니 피 흘림이 없은즉 사람이 없느니라.
히브리서 9-10장은 이런 속죄제사와 그리스도의 피가 어떤 상관관계가 있는지를 자세하게 다루고 있습니다.
신약성경의 저자들은 속죄제의 피를 예수 그리스도의 피라고 증거합니다.
죄로 인한 부정과 타락에서 하나님의 사람을 정결하게 할 수 있는 것은 오로지 예수의 피라는 것입니다(벧전 1:2; 요일 1:7).
이런 사상을 가장 적극적으로 표현하고 있는 신약의 말씀은 히브리서입니다(히 9:12-14).
예수 그리스도는 “오직 자기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셨기” 때문에 우리들의 양심을 깨끗케 하고 죽을 행실을 떠나 살아계신 하나님을 섬기게 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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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죄제를
뜻하는 히브리어 ‘하타트'는 ‘과녁에서 벗어나다’, ‘죄를 짓다’, ‘속죄물을 드리다’, ‘속죄하다’를 뜻하는 ‘하타'에서 파생된 것으로 ‘하나님의 법에서 벗어난 죄로부터 청결과 속죄함을 얻기 위하여 드리는 제사’를 뜻한다.
제물의 종류
속죄제의 제물은 범죄자의 사회적인 위치에 따라 달랐다.
제사장 : 흠 없는 수송아지(레 4:3)
온 회중 : 수송아지(레 4:13)
족장 : 흠 없는 수염소(레 4:23)
평민 : 흠 없는 암양, 암염소(레 4:28)
가난한 사람 : 산비둘기, 집비둘기(레 5:7)
극빈자 : 고운가루 에바 십분의 일(레 5:11)
성경의 부피 단위 중 에바(אֵיפָה, Ephah)는 ‘바구니’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한 바구니에 넣을 정도의 양이며, 스아와 마찬가지로 가루나 볶은 곡식 등을 재는 단위다.
약 22ℓ에 해당한다.
12되와 같은 양이다.(1되 1.8 리터)
네가 단 위에 드릴 것은 이러하니라 매일 일 년 된 어린양 두 마리니 한 어린양은 아침에 드리고 한 어린양은 저녁 때에 드릴지며 한 어린양에 고운 밀가루 에바 십분 일과 찧은 기름 힌의 사분 일을 더하고 또 전제로 포도주 힌의 사분 일을 더할지며 한 어린양은 저녁 때에 드리되 아침과 일반으로 소제와 전제를 그것과 함께 드려 향기로운 냄새가 되게 하여 여호와께 화제를 삼을지니 (출애굽기 29:38~41)
하나님께 매일 드리는 제사를 이름하여 ‘상번제’라고 한다.
* 날마다 바치는 번제물(민수기 28:1-8) / 상번제(常燔祭)
아침과 저녁에 드리는 이 제사에는 일년 된 어린양과 고운 밀가루
에바 10분의 1과 기름, 포도주를 드린다.
에바의 10분의 1은 2.2ℓ로 1되 가량의 양이다.
무게로는 2.2kg 정도인
셈이다.
속죄제의 방법
헌제자가 제물이 될 짐승을 회막문 여호와 앞으로 가져온다.
헌제자의 손을 제물의 머리 위에 얹고 안수한다.
헌제자가 제물을 잡아 피를 제사장에게 주면 제사장은 그 피를 손가락으로 찍어 성소 앞에 일곱 번 뿌리고 향단 뿔에 바른 후 회막 앞과 번제단 밑에 전부 쏟는다.
희생
제물의 모든 기름과 콩팥을 번제단 위에서 불사른 후 그 나머지 부분은 진 바깥 재 버리는 정결한 곳에서 나무 위에 놓고
불사른다.
그러나 아론과 그 아들들을 위한 속죄제는 진 밖에서 불사르지 않고 다리와 고기를 회막 뜰에서 구워 먹도록
하였다(레6:24-27)
속죄제와 속건제의 차이
속죄제의 목적은 ‘범죄에 대한 용서’를 위한 것이었다.
그런데 이러한 목적은 속건제의 경우 역시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이 둘은 근본적인 차이가 있다.
첫째는, 범죄의 성격적 차이로서 속죄제가 하나님께 범죄한 자, 즉 ‘율법을 범한 죄’를 위한 제사였던 반면에,
속건제는 인간에게 범죄한 죄, 즉 ‘도덕적인 범죄의 대속을 위한’ 제사였다.
둘째는, 속죄제는 속건제와는 달리 ‘범죄한 일을 배상할 수 없는 죄’에 대한 용서를 구하는 제사였던 반면,
속건제는 ‘배상이 가능한 죄’에 대한 용서를 구하는 제사였다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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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17-2021(수)
속건제(贖愆祭) 레위기 5:17-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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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만일(萬一) 누구든지 여호와의 금령(禁令) 중(中) 하나를 부지중(不知中)에 범(犯)하여도 허물이라 벌(罰)을 당(當)할 것이니18. 그는 너의 지정(指定)한 가치(價値)대로 떼 중(中) 흠(欠) 없는 수양(羊)을 속건(贖愆) 제물(祭物)로 제사장(祭司長)에게로 가져올 것이요, 제사장(祭司長)은 그의 부지중(不知中)에 그릇 범(犯)한 허물을 위(爲)하여 속(贖)한즉 그가 사(赦)함을 얻으리라
19.이는 속건제(贖愆祭)니 그가 실(實)로 여호와 앞에 범과(犯過)함이니라.
속건제(Guilt Offering)의 어의
속건제를 히브리어로 ‘아샴(asam)'이라고 합니다.
'아샴'이란 ‘범죄'(Guilt),’범법'(Trespass),
‘손해'(Damage) 등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지 못한 것이 아니라 '사회적인 죄’, ‘도덕적인 죄를 용서받기 위해 드리는 제사’를 말합니다.
다섯 제사(Five Offering)
1. 번제(Burnt Offering) : 올라 / 희생
2. 소제(Grain Offering) : 민하 / 헌신
3. 화목제(Peace Offering) : 제바흐 쉐라밈 / 화평
4. 속죄제(Sin Offering) : 하타트 / 바른 관계
5. 속건제(Guilt Offering) : 아샴 / 바른 생활
예수님께서 우리의 죄를 대속하시려고 속죄제의 제물이 되셨을까요?
아님면 속건제의 제물이 되셨을까요?
이사야 53:10
여호와께서 그로 상함을 받게 하시기를 원하사 질고를 당케 하셨은즉 그 영혼을 속건제물로 드리기에 이르면
그가 그 씨를 보게 되며 그 날은 길 것이요 또 그의 손으로 여호와의 뜻을 성취하리로다.
* 속건제물(his life a guilt offering)
속죄제의 제물 :
1. 제사장, 회중 / 흠 없는 수송아지
2. 족장 / 수염소
3. 평민 / 암염소, 어린 양
4. 가난한 자 / 비둘기 두 마리(속죄, 번제)
5. 극빈자 / 고운가루 에바 1/10
속건제의 제물 :
1. 흠없는 수양
2. 배상
속죄제와 속건제
레위기 7:7
속건제나 속죄제는 일례니 그 제육은 속하는 제사장에게로 돌아갈 것이요 .
(현대인) 속죄제와 속건제에 다 같이 적용되는 규정은 이렇다. 그 제물의 고기는 제사를 드리는 제사장의 몫이다.
속죄제는 제물을 바치는 사람이 안수한다. 그러나 속건제물은 제사장이 제물의 머리에 안수한다
1. 제물이 다르다
속죄제 : 소, 염소, 양, 비둘기, 고운 가루
속건제 : 흠 없는 수양
2. 남은 피의 처리
속죄제 : 번제단 밑에 쏟는다
속건제 : 쏟지 않았다
3. 속건제 : 개인적인 제사
속죄제 : 집단적인 제사도 포함
동물의 머리에 손을 얹고 죄를 전가시키는 것을
4. 속건제 : 특별한 경우
나병환자가 나은 후에(레 4:1-20)
나실인이 부정한 허물을 용서받기 위해(민 6:1-12)
시편 19:12
자기 허물을 능히 깨달을 자 누구리요
나를 숨은 허물에서 벗어나게 하소서.
* 동북아에서 중국을 겨냥한 쿼타(quarter) : 호주, 인도, 일본, 미국
- 일본 주일 미군 사령관(three star),한국 주한 미군 사령관(four star)
한국 정부가 극좌파 편향적 정치색으로 동북아 펜타(penta) : 호주, 인도, 일본, 한국, 미국
미국의 국방부장관. 국무장관이 한국을 방문한다.
그런데 한국 정부는 여전히 중국과 북한의 지시를 따르려고 한다.
일본에서 기자들의 질문 / 중국과 북한의 선언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느냐?
그러자 미국은 중국과 북한의 선언에 관심이 없다.
오직 미국이 관심을 갖는 것은 한국의 입장이 무엇인가?
한국의 입장에 따라 대응할 것이다.
레위기 제사의 의미
제사(예배)의 형식은 시대에 따라 바뀔 수 있다.
그러나 제사의 본질은 바뀔 수 없다.
시편 51:17
하나님의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하나님이여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치 아니하시리이다.
The sacrifices of God are a broken spirit; a broken and contrite heart,
O God, you will not despise.
상한 심령(Broken Spirit)
통회하는 마음(Contrite Heart)
속건제를 드려야 할 경우
1. 성물에 대한 것(레 5:15a)
누구든지 여호와의 성물에 대하여 그릇 범과하였거든 여호와께
속건제를 드리되.
2. 계명(율법)에 어긋난 것(레 5:17)
만일 누구든지 여호와의 금령중 하나를 부지중에 범하여도
허물이라 벌을 당할 것이니.
3. 이웃에게 악을 행하거나 물질에 손해를 입힌 경우(레 6:1-7)
남의 물건을 강제로 빼앗거나
분실물을 습득하거나
저당물을 잡거나
거짓맹세로 남에게 피해를 입힌 경우
4 시체로 인해 몸이 부정케 된 경우
속건제 제사의 세 가지 속죄 원리
1. 잘못을 자백하고 인정하라
2. 죄에 대한 대가를 지불하라
3. 한 번에 해결
속건제의 제물은 범죄의 형태에 따라 매우 다양하게 나타나고 있어 이러한 제물을 일일이 열거하자면 너무나도 복잡하고 광범위하다. 그러므로 각각의 범죄에 대한 속건 제물에 대해서는 레 5:14, 6:7, 7:1-10, 14:1, 15:2을 참고하도록 하되 이러한 여러 가지 제물을 요약하면 ‘흠 없는 일년된 수양’, ‘범죄물과 그 범죄물의 오분의 일을 더하여 본인에게 주는 일’, ‘산비둘기나 집비둘기 둘’이나, ‘고운 가루 에바 십분의 삼’과 ‘기름 한 록’ 등이다.
속건제와 속죄제의 차이
죄와 관계된 제사
가. 속죄제(하타아트-sin offering)
* 제물이 대상과 재력에 따라 차이가 있다.
- 제사장과 백성 전체(수송아지)
- 족장(수염소)
- 평민(어린 암양, 암염소)
- 가난한 자(비둘기, 곡식 가루)
* 향기로운 냄새를 위한 제사가 아니라, 죄를 속하기 위해 드린 제사였다.
* 번제처럼 모든 제물을 제단에 불사르지 않고 기름을 제외한 모든 제물을 진 밖으로 가져가서 태워야 했다.
* 인간의 죄성과 연약함을 인해 부지중에 지은 죄를 속하기 위해 드려졌다.
나. 속건제(아샴-배상제사(trespass offering))
* 속건제는 생활 중에 범한 죄나, 자기 의무를 태만히 해서 남에게 해를 입혔을 경우에 드리는 사죄와 보상에 대한 제사였다.
* 속건제를 드리는는 경우는 다음과 같았고, 그 외에는 속죄제사를 드렸다.
1. 하나님의 성물을 범했을 때
2. 하나님의 법에 따라 마땅히 해야 할 것을 하지 않은 경우
3. 이웃에게 악을 행하거나 물질에 손해를 입힌 경우
4. 남의 물건을 강제로 빼앗거나/ 분실물을 습득하거나/ 저당물을 잡거나/ 거짓맹세로 남에게 피해를 입힌 경우
5. 시체로 인해 몸이 부정케 된 경우
* 속건제는 다음과 같은 세 가지 속죄 원리가 나타난다.
1. 잘못이 있을 때는 자백하고 인정하라.
2. 죄에 대한 대가를 지불하라.
3. 번제는 계속해서 드리지만 속건제는 한 번에 해결할 문제이다.
다. 속죄제와 속건제의 같은 점과 다른 점
* 같은 점
이
두 제사는 백성들이 "여호와의 명령을 어긴 경우에 드리는 제사"였다.
백성들은 "여호와께서 금한 일을 했거나, 또는 하라고 한
일을 하지 않았을 경우"에 이 제사를 드리도록 되어 있었다.
그러나 이 제사는 결코 고의로 지은 죄를 속하기 위한 제사는
아니었다.
하나님은 고의, 또는 계획적으로 지은 범죄(짐짓 죄)에 대해서는 반드시 처벌하게 하셨다.
속죄 제사를 통해서 용서받을 수 있는 죄는 실수나 연약함으로 지은 죄(그릇 범한 죄)였다.
속죄 제사를 드릴 수 있는 죄는 다음과 같았다.
1. 실수나 부지 중에 지은 죄(4:13, 22, 27, 5:18)
2. 부주의로 인해 지은 죄(5:1, 4, 15)
3. 무의식적으로 짓는 죄(민 35:11,15, 22, 23).
* 다른 점
속죄제는 일반적으로 여호와의 명령을 어긴 보편적인 경우에 드렸다.
속건제(보상제사)는
1. 여호와의 성물을 드릴 것을 자기가 사용했거나(5:15-19)
2. 남의 물건을 빼앗거나 손에 넣고 부인하거나 거짓 맹세를 해서 피해를 입힌 경우에 이를 보상하기 위해 드려졌다(5:20-25).
* 제사 절차상의 차이점
1. 속죄제는 속죄제물만 드렸지만,
속건제는 속건제물 외에 불법으로 취한 것에 1/5(전체 6/5)을 더한 배상이 요구되었다.
2. 속죄제는 제물을 드리는 자가 그 제물을 죽이고 직접 불에 태웠다(4:15, 24, 29, 33).
속건제는 제사장이 대신해서 제물을 잡았으며, 그 제물도 제사장이 먹어야만 했다(14:12).
3. 속죄제물은 개인의 경우 암컷을 드렸다(4:28, 32).
속건제사는 제물로 수양이 필요했으며(5;18, 6:6), 훔친 것 외에 1/5에 해당하는 배상을 첨가했다.
구약성경의 부피 단위
갑(Cab) / 빈 그릇
갑(קַב, Cab)은 히브리어로 ‘빈 그릇’이라는 뜻으로서 오목한 그릇을 가리킨다.
갑은 구약시대 이스라엘에서 고체를
측량할 때 사용하던 단위이며 1.2ℓ에 해당한다.
반 되 정도의 양이다.
성경의 부피 단위 중 가장 작다. 성경에는 열왕기하
6장에 한 번 언급되어 있다.
아람 사람이 사마리아를 에워싸므로 성중이 크게 주려서 나귀 머리 하나에 은 팔십 세겔이요 합분태 사분 일 갑에 은 다섯 세겔이라 (열왕기하 6:25)
사마리아는 항상 하나님의 말씀을 떠나 악을 행했다.
그런 사마리아는 아람의 군대에 의해 포위당하고 말았다.
성이 포위되자
성안에 있는 사람들은 굶주림으로 ‘나귀 머리’, 비둘기의 배설물인 ‘합분태’를 먹으며 생명을 유지했다.
합분태가 실제 비둘기 똥이
아니라 이와 비슷하게 생긴 식물이라는 주장도 있다.
여하튼 당시 합분태 사분 일 갑은 0.3ℓ의 적은 양이었는데 이것이 5개월치 급여만큼이나 비싸졌다.
그마저도 없어서 못 먹는
사람이 생겼고 결국 사마리아 성안에서는 인육을 먹는 일이 발생하기도 했다.
이 사건은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지 않는 것이 얼마나
끔찍한 결과를 낳는지 알려주는 좋은 예라 할 수 있다.
오멜(Omer) / 보리 한 묶음
오멜(עֹמֶר, Omer)은 ‘보리 한 묶음’이라는 뜻으로 구약시대 하루분의 양식이다.
1오멜은 2.2ℓ에 해당하며 에바의 10분의 1, 그리고 1되와 같은 양이다.
무게로는 2.2kg가량이다.
여호와께서 이같이 명하시기를 너희 각 사람의 식량대로 이것을 거둘지니 곧 너희 인수대로 매명에 한 오멜씩 취하되 각 사람이 그 장막에 있는 자들을 위하여 취할지니라 하셨느니라 이스라엘 자손이 그같이 하였더니 그 거둔 것이 많기도 하고 적기도 하나 오멜로 되어 본즉 많이 거둔 자도 남음이 없고 적게 거둔 자도 부족함이 없이 각기 식량대로 거두었더라 (출애굽기 16:16~18)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 생활 당시 양식이 없어 굶주림에 허덕일 때 하나님께서 만나를 내려주셨다.
일곱째 날 안식일을
제외한 6일 동안 백성들은 매일 아침 만나를 거둘 수 있었다.
만나를 거둘 때 주의할 것은 각 사람이 먹을 만큼만 거두는
것이었다.
즉 1인당 1오멜만 거둬야 했다.
스아(Seah)
스아(סְאָה, Seah)는 ‘세아’로도 번역되어 있다.
주로 가루나 곡식을 측량할 때 사용하는 단위다.
1스아는 7.3ℓ로 4되에 해당한다.
여호와께서 마므레 상수리 수풀 근처에서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시니라 … 내가 떡을 조금 가져오리니 당신들의 마음을 쾌활케 하신 후에 지나가소서 … 아브라함이 급히 장막에 들어가 사라에게 이르러 이르되 속히 고운 가루 세 스아를 가져다가 반죽하여 떡을 만들라 하고 아브라함이 또 짐승 떼에 달려가서 기름지고 좋은 송아지를 취하여 하인에게 주니 그가 급히 요리한지라 (창세기 18:5~7)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사람의 모습으로 나타나셨을 때 온 정성을 다해 하나님을 대접했다.
이때 사용한 고운 가루 3스아는 약
22ℓ의 양이다.
오늘날 팬케이크 하나를 만들려면 밀가루가 0.3ℓ(300㎖) 정도 소용된다는 것을 가정했을 때, 3스아는 70개
이상의 팬케이크를 만들 수 있는 양이다.
에바(Ephah) / 바구니
에바(אֵיפָה, Ephah)는 ‘바구니’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한 바구니에 넣을 정도의 양이며 스아와 마찬가지로 가루나 볶은 곡식 등을 재는 단위다.
약 22ℓ에 해당한다.
12되와 같은 양이다.
네가 단 위에 드릴 것은 이러하니라 매일 일 년 된 어린양 두 마리니 한 어린양은 아침에 드리고 한 어린양은 저녁 때에 드릴지며 한 어린양에 고운 밀가루 에바 십분 일과 찧은 기름 힌의 사분 일을 더하고 또 전제로 포도주 힌의 사분 일을 더할지며 한 어린양은 저녁 때에 드리되 아침과 일반으로 소제와 전제를 그것과 함께 드려 향기로운 냄새가 되게 하여 여호와께 화제를 삼을지니 (출애굽기 29:38~41)
하나님께 매일 드리는 제사를 이름하여 ‘상번제’라고 한다. 아침과 저녁에 드리는 이 제사에는 일년 된 어린양과 고운 밀가루 에바 10분의 1과 기름, 포도주를 드린다. 에바의 10분의 1은 2.2ℓ로 1되가량의 양이다. 무게로는 2.2kg 정도인 셈이다.
호멜(Homer) / 당나귀
호멜(חֹמֶר, Homer)은 성경의 부피 단위 중 최대 단위로 약 230ℓ에 해당한다.
히브리어 호멜은 ‘당나귀’라는
뜻을 가지고 있으며, 1호멜은 당나귀가 한번에 질 수 있는 양을 말한다.
주로 밀과 보리의 양을 잴 때나 메추라기의 양을 잴 때도
사용했다.
오늘날 쌀 한 가마의 무게가 80kg인데 이는 리터로 환산하면 약 180ℓ다.
호멜이 230ℓ이므로, 1호멜은 쌀 한
가마 반 정도에 해당하는 양이다.
백성이 일어나 종일 종야와 그 이튿날 종일토록 메추라기를 모으니 적게 모은 자도 십 호멜이라 그들이 자기를 위하여 진 사면에 펴 두었더라 (민수기 11:32)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먹이기 위해 내려주신 것은 만나만이 아니었다. 그들을 위해 메추라기도 보내주셨는데, 적게 모은 자도 10호멜이었다고 하니 그 양이 얼마나 방대했는지 알 수 있다.
신약성경의 부피 단위
되, 코이닉스(χοινιξ)
한글개역성경의 부피 단위 중 하나인 ‘되’는 헬라어 ‘코이닉스(χοινιξ)’를 옮겨놓은 말이다. 헬라의 부피 단위로 약 1.2ℓ다. 현재의 1되(1.8ℓ)보다 조금 작다.
내가 네 생물 사이로서 나는 듯하는 음성을 들으니 가로되 한 데나리온에 밀 한 되요 한 데나리온에 보리 석 되로다 또 감람유와 포도주는 해치 말라 하더라 (요한계시록 6:6)
말, 모디오스(μοδιος)
예수님께서 빛의 역할에 대해 하신 말씀 가운데 ‘말’이 등장한다.
사람이 등불을 켜서 말 아래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 이러므로 집안 모든 사람에게 비취느니라 (마태복음 5:15)
여기에서 ‘말’은 동물 말(Horse)이 아니다. 헬라어로 모디오스(μοδιος)인데, 고체의 부피를 잴 때 사용했던 바구니(Basket)를 가리킨다. 이 말씀을 공동번역에서 살펴보면 “등불을 켜서 됫박으로 덮어두는 사람은 없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즉, 오늘날의 됫박 역할을 했던 ‘말’이라는 부피를 측량하는 도구를 가리킨 것이다. 말의 부피는 약 8.7ℓ로 오늘날의 1말(약 18ℓ)보다는 10ℓ 정도의 차이가 있다.
말, 사톤(σατον)
예수님의 천국에 대한 가르침 속에도 부피 단위인 ‘말’이 등장한다.
또 비유로 말씀하시되 천국은 마치 여자가 가루 서 말 속에 갖다 넣어 전부 부풀게 한 누룩과 같으니라 (마태복음 13:33)
비유 속에 나타난 ‘말’은 헬라어 부피 단위인 ‘사톤(σατον)’을 번역한 말이다. 약 12ℓ로 가루 3말은 36ℓ의 많은 양이다. 적은 누룩으로 많은 양의 가루를 부풀게 한 것처럼 천국 소망은 우리의 믿음을 부풀게 하는 역할을 한다고 강조하신 것이다.
첫째, 다섯 가지 제사의 종류
1. 번제(燔祭)
2. 소제(素祭)
3. 화목제(和睦祭)
4. 속죄제(贖罪祭)
5. 속건제(贖愆祭)
둘째, 제사를 드리는 네 가지 방법
1. 화제(火祭) fire offering / 제이쉬세, 불로 태운다
2. 요제(搖祭) wave offering / 테누파, 앞뒤로 흔든다
3. 전제(奠祭) drink offering / 네데크, 관제(빌 2:17)
4. 거제(擧祭) heave offering / '테루마'(terumah), '들어올려진 것'
* 요제는 주로 성소 안에서, 거제는 주로 밖에서
셋째, 일곱 가지 절기
1. 유월절(逾越節) pass over /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
2. 무교절(無酵節) unleavened bread / 무덤에 안장되신 예수
3. 초실절(初實節) first fruits / 부활의 첫 열매가 되신 예수
4. 오순절(五旬節) pentecost (칠칠절) feast of ewwk / 성령 강림으로 임재하신 예수
5. 나팔절(喇叭節) trumphet / 다시 오실 예수
6. 속죄절(贖罪節) atonement / 심판주가 되신 예수
7. 장막절(帳幕節) feast of tebernacles / 새 하늘과 새 땅과 더불어 나타나실 예수
1 . 유월절(레위기 23:4-5, 고린도전서 5:7) /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
* 기한에 미쳐 너희가 공포하여 성회로 삼을 여호와의 절기는 이러하니라.
정월 십사일 저녁은 여호와의 유월절이요 .
* 너희는 누룩 없는 자인데 새 덩어리가 되기 위하여 묵은 누룩을 내어버리라 우리의 유월절 양 곧 그리스도께서 희생이 되셨느니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 양(요한복음 1:29)
이튿날 요한이 예수께서 자기에게 나아오심을 보고 가로되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
히브리어로는 '넘어가다' 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니산월(아빕월, 1월) 14일 해질 무렵,
나흘 전에 준비한 수양을 구워 무교병과 쓴 나물과 함께 먹고 그 피를 문설주에 바르고 아침까지 남은 것은 불에 태워 버린다.
애급이 하나님의 진노로 장자를 잃는 열 번째 재앙을 당할 때 구원받은 것과 해방을 기념하는 날이다.
2. 무교절(레위기 23:6-8, 고린도전서 5:7-8) / 무덤에 안장되신 예수
* 이 달 십오일은 여호와의 무교절이니 칠일 동안 너희는 무교병을 먹을 것이요
그 첫날에는 너희가 성회로 모이고 아무 노동도 하지 말찌며
너희는 칠일 동안 여호와께 화제를 드릴 것이요 제 칠일에도 성회로 모이고 아무 노동도 하지 말찌니라 .
* 너희는 누룩 없는 자인데 새 덩어리가 되기 위하여 묵은 누룩을 내어버리라 우리의 유월절 양 곧 그리스도께서 희생이 되셨느니라.
이러므로 우리가 명절을 지키되 묵은 누룩도 말고 괴악하고 악독한 누룩도 말고 오직 순전함과 진실함의 누룩 없는 떡으로 하자.
히브리어로는 맛차.
니산월(아빕월, 1월) 15일부터 7일 동안(21일 까지) 누룩이 없는 무교병을 먹는다.
절기의 이름도 이 누룩 없는 떡을 먹는다하여 무교절이라 불리웠다.
무교절이 시작되는 첫 날과 마지막 날은 '성회' 로 백성이 모이고 노동을 하지 못했으며 매일 하나님께 화제를 드렸다
3. 초실절(레위기 23:9-14, 고린도전서 15:20) / 부활의 첫 열매가 되신 예수
*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일러 가라사대
이스라엘 자손에게 고하여 이르라 너희는 내가 너희에게 주는 땅에 들어가서 너희의 곡물을 거둘 때에 위선 너희의 곡물의 첫 이삭 한 단을 제사장에게로 가져갈 것이요
제사장은 너희를 위하여 그 단을 여호와 앞에 열납되도록 흔들되 안식일 이튿날에 흔들 것이며
너희가 그 단을 흔드는 날에 일년 되고 흠 없는 수양을 번제로 여호와께 드리고
그 소제로는 기름 섞은 고운 가루 에바 십분 이를 여호와께 드려 화제를 삼아 향기로운 냄새가 되게 하고 전제로는 포도주 힌 사분 일을 쓸 것이며
너희는 너희 하나님께 예물을 가져오는 그날까지 떡이든지 볶은 곡식이든지 생 이삭이든지 먹지 말찌니 이는 너희가 그 거하는 각처에서 대대로 지킬 영원한 규례니라 .
*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도다.
초실절은 히브리어로 바쿠림이라 불리며 무교절 기간 중에 있는 절기로, 유월절 후 첫 안식일 다음 날이다. 추수 전에 곡식의 첫 이삭 한 단을 하나님께 드리는 절기로써 양식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는 날이다. 초실절 예물을 하나님께 드리기 전에는 떡이나 볶은 곡식, 생 이삭이라도 먹지 않았다.
4. 오순절(칠칠절, 맥추절) (레위기 23:15-21, 사도행전 2:1-47, 고린도전서 12:13, 에베소서 2:11-22) / 부활의 첫 열매가 되신 예수
* 안식일 이튿날 곧 너희가 요제로 단을 가져온 날부터 세어서 칠 안식일의 수효를 채우고
제 칠 안식일 이튿날까지 합 오십일을 계수하여 새 소제를 여호와께 드리되
너희 처소에서 에바 십분 이로 만든 떡 두개를 가져다가 흔들찌니 이는 고운 가루에 누룩을 넣어서 구운 것이요 이는 첫 요제로 여호와께 드리는 것이며
너희는 또 이 떡과 함께 일년 되고 흠 없는 어린 양 일곱과 젊은 수소 하나와 수양 둘을 드리되 이들을 그 소제와 그 전제와 함께 여호와께 드려서 번제를 삼을찌니 이는 화제라 여호와께 향기로운 냄새며
또 수염소 하나로 속죄제를 드리며 일년 된 어린 수양 둘을 화목제 희생으로 드릴 것이요
제사장은 그 첫이삭의 떡과 함께 그 두 어린 양을 여호와 앞에 흔들어 요제를 삼을 것이요 이것들은 여호와께 드리는 성물인즉 제사장에게 돌릴 것이며
이 날에 너희는 너희 중에 성회를 공포하고 아무 노동도 하지 말찌니 이는 너희가 그 거하는 각처에서 대대로 지킬 영원한 규례니라.
* 우리가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자나 다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고 또 다 한 성령을 마시게 하셨느니라.
히브리어로는 솨부아 '맹세하다' 라는 뜻.
밀을 수확할 수 있도록 복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는 날이다.
칠칠절은 초실절로부터 50일째에 해당하는 날로써 보통 시완월(3월) 6일경이 된다.
이 날은 하루만 절기로 지키는데 성회를 공포하고 노동이 금지되며 하나님께 번제를 드렸고 수염소 한 마리를 속죄제로 드렸다.
특이한 것은 모든 절기에는 누룩이 없는 무교병을 쓰지만 칠칠절만은 누룩을 넣은 유교병을 소제로 사용한다.
5. 나팔절(레위기 23:23-25) / 재림하시는 예수
이스라엘 자손에게 고하여 이르라 칠월 곧 그 달 일일로 안식일을 삼을찌니 이는 나팔을 불어 기념할 날이요 성회라
아무 노동도 하지 말고 여호와께 화제를 드릴찌니라.
나팔절은 티쉬리월(7 월) 1일로 유대 민간력으로는 1월에 해당하는 새해 첫날이다.
이 날은 나팔을 하루 종일 일정한 간격으로 불었으며 성회가 선포되고 노동을 금했다.
그리고 속죄제로 수염소 한 마리를 드렸다.
6. 속죄일(레위기 23:26-32, 히브리서 9:25, 26) / 심판주로 오실 예수
*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일러 가라사대
칠월 십일은 속죄일이니 너희에게 성회라 너희는 스스로 괴롭게 하며 여호와께 화제를 드리고
이 날에는 아무 일도 하지 말것은 너희를 위하여 너희 하나님 여호와 앞에 속죄할 속죄일이 됨이니라
이 날에 스스로 괴롭게 하지 아니하는 자는 그 백성 중에서 끊쳐질 것이라
이 날에 누구든지 아무 일이나 하는 자는 내가 백성 중에서 멸절시키리니
너희는 아무 일이든지 하지 말라 이는 너희가 그 거하는 각처에서 대대로 지킬 영원한 규례니라
이는 너희의 쉴 안식일이라 너희는 스스로 괴롭게 하고 이 달 구일 저녁 곧 그 저녁부터 이튿날 저녁까지 안식을 지킬찌니라.
이 날은 성회가 선포되고 노동을 금하며 마음을 괴롭게 하는 날로 티쉬리월( 7월) 10일이다.
특별히 연중 이 날만 대제사장이 지성소에 들어갔다.
그리고 하나님을 위한 수염소와 아사셀을 위한 수염소를 드렸다.
7. 초막절(레위기 23:33-34) / 새 하늘과 새 땅으로 오실 예수
*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일러 가라사대
이스라엘 자손에게 고하여 이르라 칠월 십오일은 초막절이니 여호와를 위하여 칠일 동안 지킬 것이라
수장절, 장막절이라고도 불린다.
티리쉬월(7월) 15일부터 8일 동안 행해진다.
초막절은 이스라엘 백성이 애급을 나와 광야에 머물었던 것을 기념하는 동시에 풍성한 수확을 허락하신 하나님께 감사하는 절기이다. 첫날과 여덟째 날에는 성회로 모이고 노동이 금지되었으며 각 날마다 그에 상응 하는 제사를 드렸다.
거제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제물로 바쳐진 것을 의미하며(골 1:22, 히 9:24~25),
생명의 양식으로 우리에게 주어지심(요 6:33~58, 롬 8:32)을 상징하는 것으로,
우리에게 풍성하게 주어지는 영의 양식과 축복을 상징한다.
‘화목제’(레 7:14, 32), ‘땅의 처음 익은 소산물을 드릴 때’, ‘십일조를 드릴 때’, ‘전리품을 드릴 때’ 거제라는 방법으로 제사를 드렸다.
거제를 드리기 위해서 경배자는 화목제 희생제물의 우편 뒷다리와 처음 익은 곡식가루와 떡, 타작마당의 곡식, 십일조, 포도주, 기름 등(레 7:32, 민 15:20, 18:24, 31:50~53, 느 10:39)을 하나님께 제물로 드렸다.
제사장들은 경배자가 화목제 희생제물을 가져오면 제사장이 여호와 앞에서 화목제 희생제물의 우편 뒷다리를 높이 들어 내린 후 바쳤고 하나님은 이를 기뻐 받으셨다.
“하나님의 떡은 하늘에서 내려 세상에게 생명을 주는 것이니라 저희가 가로되 주여 이 떡을 항상 우리에게 주소서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요 6:33~35)
“이제는 그의 육체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화목케 하사 너희를 거룩하고 흠없고 책망할 것이 없는 자로 그 앞에 세우고자 하셨으니”(골 1: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