μελετάω
Storng number3191
1. 조심하다. 2. 연습하다. 3. 생각하다
Pronunciation
[ mĕlĕta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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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tymology / 제1부정과거 ἐμελέτησα, 3199의 파생어에서 유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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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조심하다, 힘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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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연습하다, 개발하다, 연마하다, 양성하다, 애쓰다, 힘쓰다, 딤전4: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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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생각하다, 꾀하다, 묵상하다, 행4: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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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근심하다, 막13:11.
θεωρία, ας, ἡ
Storng number 2335
1. 구경거리. 2. 광경. 3.눅 23: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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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ronunciation
[ thĕōria ]
묵상(默想, 영어: contemplation)은 특정 대상을 깊게 생각하는 행위이며 종교적인 관점에서 묵상은 기도 및 명상을 수행하는 방법 중 하나이다.
묵상은 플라톤 철학의 중요한 부분이었다.
플라톤은 묵상을 통해 영혼이 좋은 형태 나 다른 신성한 형태의 지식으로 올라갈
것이라고 생각했다.
Plotinus as a (neo) Platonic 철학자는 또한 henosis에 도달하기위한 가장 중요한
구성 요소로서 숙고를 표현했다.
플롯 티 누스 (Plotinus)에게 하나님, 모나드 또는 하나라는 비전을 경험하는 것이 가장 큰
묵상이었다. Plotinus는 Enneads의 작품에서이 묵상의 경험을 묘사한다. 그의 학생 반암 (Porphyry)에 따르면
플롯 티 누스 (Plotinus)는 그가 4 번이 경험을 했다고 말했다. Plotinus는 Enneads 6.9.xx에서 자신의
묵상에 대한 경험을 썼다.
묵상이라는 단어는 라틴어 단어 contemplatio에서 파생된다.
그것의 뿌리는 또한 라틴어 단어 templum, 후원의
받음을 위해 봉헌 된 땅 조각, 또는 예배를위한 건물, Proto-Indo-European 기초 가 되었고 유럽에서 기초
-"스트레칭 "- 따라서 제단 앞의 정리 된 공간을 가리킨다.
라틴어 단어 contemplatio는 그리스어 θεωρία
(theòría)를 묵상의 의미를 번역하는 데 사용되었다.
기독교에서 묵상이란 살아있는 현실로서의 하나님에 대한 인식을 향한 내용없는 마음을 의미한다.
이것은 어떤면에서 동양 종교에서
기도를 하는 행위인 사마 디 (samadhi)라고 불리는 것에 해당한다. 한편 서양 교회에서 수세기 동안 묵상은 이그나 티아
운동이나 개종자와 같이 성서적 장면을 시각화하는 것과 같은 것에서 활발한 수행과정으로 연습을 언급했다. 정신 분야 전문가는
"성경의 내용을 듣고 "마음의 귀"는 마치 그 또는 그녀가 하나님과 대화하고있는 것처럼, 그리고 하나님은 토론 할 주제를 제안하고
계신다.라고 묵상의 목표를 제시했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묵상에 관하여 다음과 같이 썼다.
"인간 공동체의 유익을 위해서는 묵상의 삶에 헌신하는 사람들이 있어야한다."
토마스 아퀴나스를 연구한 독일인 기독교 철학자 조셉 피퍼(Josef Pieper)는 다음과 같이 논평했다.
"인간 사회의 한가운데에 보존되어있는 진실성은 한 번에 동시에 쓸모 없으며 모든 가능한 사용에 대한 척도가 된다. 따라서 진실을 유지하는 것도 고려 중이다."
”묵상은 적용을 낳고, 묵상은 치유하고, 묵상은 가르친다.“(Ezekiel Culverwell)
말씀 묵상 목적과 방법
”묵상은 적용을 낳고, 묵상은 치유하고, 묵상은 가르친다.“(Ezekiel Culverwell)
영적 성장은 신자들의 기독교적 삶의 한 부분이 되어야 한다. 베드로는 신자들에게 “우리 주 곧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그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 가라.”(벧후 3:18)고 권면한다. 하이델베르크 교리문답은 “참된 그리스도인은 믿음으로 그리스도의
지체가 되고, 그리스도의 기름 부음에 참여하게 된다.”고 말한다.
참된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말미암아 새 생명을 얻어 살아나고, 그에 대한 보증으로 그들에게 성령이 주어진다.
그리고 성령의 권능으로 말미암아 ‘위의 것을 찾는다’(골 3:1) 참된 그리스도인에게는 영적 성장이 당연히 기대되는 일인데, 그
이유는 “참된 믿음으로 그리스도에게 접붙여져 있는 사람들이 감사의 열매를 맺지 않는 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질문 32, 45, 48, 64)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의 성장을 가로막는 한 가지 장애물은 그리스도인들이 영적 지식을 계발하지 않는다는 데 있다. 우리는 기도와
성경 읽기에 시간을 충분히 할애하지 못하고 있고, 묵상 습관을 실천하지 못했다. 한때 기독교의 핵심 훈련의 한 분야로 간주
되고, ‘기도 활동에 극히 필수적 예비단계이자 보조 업무’로 간주 되었던 묵상(默想, meditation)이라는 단어가 지금은
비성경적인 뉴에이지(New Age) 영성과 결탁이 되어 있는 것은 얼마나 큰 비극일까!
우리는 당연히 초월(超越) 명상과 마인드 컨트롤(mind control)과 같은 다른 수련에 종사하는 자들을 비판한다.
왜냐면 이런 수련은 불교나 힌두교(Hinduism)와 같은 거짓 종교에 연루되어 있고, 성경과는 아무 관계가 없기 때문이다. 이런
명상은 마음을 비워 세상과 격리시키고 소위 우주정신에 합일(合一)되도록 하는 데 초점이 맞춰져 있고, 살아 계신 인격적인
하나님께 다가가 귀를 기울이고, 적극 반응을 하는 것과는 무관하다. 그러나 우리는 이런 사람들을 통해 조용한 반성과 묵상의
중요성을 배울 수 있다.
한때 기독교 교회는 죄를 멀리하고 하나님과 이웃을 가까이하는 데 초점을 둔 성경적 묵상에 깊이 참여한 적이 있었다. 청교도
시대에 수많은 목회자가 묵상 방법에 대해 설교하고 글을 썼다. 이번 장에서 우리는 청교도의 묵상 관습을 살펴보면서 ‘묵상 본질과
의무’, ‘방식과 주제’, ‘유익과 장애물’, ‘자기 검토’에 대해 확인해 볼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청교도들을 스승으로 삼으면
우리 시대에 합당한 성경적 묵상 관습을 회복할 수 있을 것이다.
1. 묵상의 정의, 본질, 종류
(1) 묵상의 정의
‘묵상하다’(meditate) 또는 ‘명상하다’(muse)는 말은 ‘깊이 생각하다’ 또는 ‘반성하다’는 뜻이다. 다윗은
“작은 소리로 읊조릴 때 불이 붙으니”(시 39:3)라고 말했다. 여기서 “작은 소리로 읊조리다.”(muse)는 말은
‘속삭이다.’, ‘중얼거리다.’, ‘입으로 소리를 내다.’는 뜻이다. 곧 이 말은 ‘우리가 혼자 말을 하는 것’을 표현하는데 쓰는
말이다. 이런 식의 묵상은 성경 구절을 암기하기 위해 낮은 소리로 홀로 낭송하는 것을 가리켰다.
성경은 종종 ‘묵상’에 대해 언급한다. 창세기 24:63은 “이삭이 저물 때에 들에 나가 ‘묵상’하다가”라고 말한다.
가나안을 정복하는 일을 지휘해야 하는 힘든 업무를 맡고 있음에도, 주님은 여호수아에게 율법책을 주야로 ‘묵상’하여 그 안에 기록된
대로 다 지켜 행하라.“(수 1:8)고 명하셨다. 그러나 ‘묵상’이라는 말은 시편에 가장 자주 등장하는데, 그 횟수가 다른 모든
성경 속에 나오는 것을 합친 것보다 많다.
시편 1편은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사람을 복 있는 사람’이라고 부른다. 시편
63:6을 보면, 다윗은 자신이 침상에서 주를 기억하며 새벽에 주의 말씀을 작은 소리로 읊조린(meditating) 것에 대해
말한다. 시편 119:148은 “주의 말씀을 조용히 읊조리려고(meditate) 내가 새벽녘에 눈을 떴나이다.”라고
말한다.(참고, 시 4:4, 77:10-12, 104:34, 119:16,48.59,78,97-99)
(2) 묵상의 본질
생각하는 것, 반성하는 것이나 명상하는 것은 묵상 주제를 전제로 한다. 공식적 묵상은 중요한 주제를 대상으로 한다. 예를
들면 철학자들은 물질과 우주와 같은 개념들을 묵상하고, 신학자들은 하나님, 영원한 작정, 인간의 의지 등에 대해 묵상한다.
청교도는 성경적 묵상은 삼위 하나님과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 생각하는 걸 포함한다고 말하기를 결코 게을리한 적이 없었다.
청교도는 묵상 대상을 살아 있는 말씀인 예수 그리스도와 기록된 말씀인 성경에 고정시킴으로 행함을 무시하고 명상만 강조하며, 성경
내용을 무시하고 상상의 나래를 펼치는 데 몰두하는 거짓 영성이나 신비주의와 같은 부류와는 거리를 두었다. 청교도는 묵상을 통해
지성과 마음(감정)을 함께 단련시켰다. 묵상하는 자는 지성뿐만 아니라 감정을 갖고 주제에 접근한다.
토머스 왓슨(Thomas Watson, 1620-1686, the Puritan preacher and author)은
묵상을 “하나님의 진리를 기억하고, 이 진리를 진지하게 상고해서 우리 자신에게 적용하는 지성의 거룩한 실천이다.”라고 정의했다.
에드먼드 칼라미(Edmund Calamy, 1600-1666)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참된 묵상은 묵상할 때 그리스도를
묵상함으로 마음이 그리스도에 대한 사랑으로 불타오르게 하고, 하나님의 진리에 대해 묵상해서 마음이 그 진리에 따라 변화되게 하며,
죄에 대해 묵상해서 마음이 죄를 미워하게 만드는 것이다.”
그는 계속해서 말하기를 “묵상을 통해 유익을 얻기 위해서는 세 개의 문 곧 지성의 문, 마음과 감정의 문, 실천적 삶의
문으로 들어가야 한다.”라고 했다. 에드먼드 칼라미는 이렇게 말했다. 그는 또 “그대는 하나님이 걷는 것처럼 걷기 위해 하나님을
묵상하고, 그리스도를 존중하고 그리스도께 순종하는 삶을 살기 위해 그리스도를 묵상해야 한다.”라고도 말했다.
그리스도인의 묵상은 매일 이행해야 할 의무로서 청교도가 말하는 기독교적 삶의 다른 모든 의무를 더 잘 이행하게 하는 역할을
한다. 기계에 윤활유를 치는 것 같이 묵상도 은혜의 수단들(성경 읽기, 설교 듣기, 기도 등)을 부지런히 사용할 수 있도록
돕고(참고, 웨스트민스터 대요리문답 질문 154), 은혜의 표지(회개. 신앙. 겸손)를 더 깊이 있게 하며, 다른 존재들과의
관계(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를 강화시켜준다.
(3) 묵상의 종류
청교도는 두 종류의 묵상 곧 ‘임시적 묵상’과 ‘계획적 묵상’에 대해 말했다. 칼라미는 “하늘의 일들에 대한 돌발적인 ‘임시적인 묵상’이 있고, 엄숙하며 정해져 있고 ‘계획적 묵상’이 있다.”라고 말했다.
⓵ 임시적 묵상
임시적 묵상은 감각을 통해 관찰한 것으로 자신 생각을 하늘에 대한 묵상으로 들어 올리는 것이다. 신자는 자신의 눈으로 보거나
귀로 듣는 것을 ‘천국에 오르는 사닥다리’로 이용한다. 다윗이 시편 8편에서 달과 별들을 보고 말한 것, 솔로몬이 잠언 6장에서
개미들을 보고 말한 것, 그리스도께서 요한복음 4장에서 우물을 보고 말한 것이 바로 임시적 묵상이다.
토머스 맨톤(Thomas Manton, 1620-1677)은 이렇게 설명했다. “하나님이 모형과 의식들을 통해 구약교회를
훈련을 시키셨는데 이것은 그들로 일상적인 대상을 통해 영적 사고에 이를 수 있도록 하신 것이다. 신약 시대에 우리 주님은 세상사를
위해 모든 직업과 일터를 갖고 일하는 사람들 속에서 발견되는 통상적인 기능과 직무들에서 취한 비유와 비사를 통해 우리가 일하는
장소가 가게이든 공장이든 들판이든지 계속 그리스도와 천국에 대해 생각하도록 천국 정신을 가르치셨다.”
‘임시적 묵상’이나 ‘즉흥적 묵상’은 실천하기가 비교적 쉽다. 왜냐면 언제 어디서든 어떤 사람들 속에서든 실천할 수 있기
때문이다. 영적 성향의 사람은 자연물을 영적 진리로 삼는 법을 쉽게 배울 수 있다. 그의 욕구는 영적인 것까지도 육적인 것으로
만들어 버리는 육적 성향의 사람과는 반대되기 때문이다.
맨톤이 말한 것처럼 “은혜를 받은 마음은 증류기(蒸溜器) 같아서 접하는 모든 것 속에서 유용한 묵상 자료를 증류해 낼 수 있다. 은혜를 받은 마음은 하나님 안에서 모든 것을 보는 것처럼 모든 것 속에서 하나님을 본다.”
묵상에 대한 거의 모든 청교도 작품이 임시적 묵상을 언급하고 있다. 월리엄 스퍼스토(William Spurstowe,
Spurstow, 1605-1666), 토머스 테일러 (Thomas Taylor, 1576-1632), 에드워드 버리(Edward
Bury, 1616-1700), 헨리 루킨(Henry Lukin, 1628-1719) 같은 청교도는 임시적 묵상만을 다룬 책을
썼다. 그러나 임시적 묵상은 위험성도 있다.
조셉 홀(Joseph Hall, 1574-1656) 주교는 이런 묵상은 억제하지 않고 방치하면 쉽게 말씀에서 이탈해서
로마가톨릭 영성의 경우처럼 미신적인 것이 되고 만다고 경고했다. 즉 사람의 상상력은 거룩한 말씀의 통제를 받아야 한다. 청교도는
임시적 묵상을 어디까지 인정해야 하는지에 대해 각기 의견이 달랐다.
‘천로역정과 청교도 묵상의 전통’(The Pilgrim’s Progress and Traditions in Puritan
Meditation)에서 카우프만(Milo Franklin Kauffman, 1898-1988)은 청교도의 묵상에는 두 가지
전통이 있다고 말했다. 카우프만은 “교회 정치 분야에서는 아니나 신학 분야에서는 온건한 청교도인 조지프 홀은 1606년에 처음
출판된 ‘신적 묵상의 방법’(Art of Divine Meditation)이라는 책을 통해 청교도 속에서 묵상 문학이 발전하는
길을 열어 놓았다고 말했다.
조셉 홀은 묵상 내용을 말씀으로 한정시킴으로 묵상할 때 상상력을 발휘하는 것에 제동을 걸었다. 홀의 생각은 1650년대에
주로 활동했던 아이작 암브로스(Isaac Ambrose, 1604-1664)와 1586년 7월 5일, 토마스 후커(Thomas
Hooker, 1586-1647) 그리고 그로부터 한 세대 후에 활동했던 존 오웬(John Owen, 1616-1683)과
에드먼드 칼라미(Edmund Calamy, 1600-1666)에게 크게 영향을 미했다.
카우프만은 말하기를 로마가톨릭 저술가들과 달리 대다수 청교도 저술가들은 “그리스도의 생애 속에서 일어난 사건들보다는 성경
교리나 특수한 명제들에 대해 묵상했던 것으로 보인다.”고 했다. 카우프만에 따르면 리처드 십스(Richard Sibbes,
1577-1635)와 리처드 백스터 (Richard Baxter, 1615-1691)는 이런 전통에서 벗어나 성례와 천국에 대한
묵상을 추천했다. 특히 십스는 영혼은 제약 없는 상상력으로 크게 상처를 받을 수도 있으나 또한 “그로 인해 큰 도움을 받을 수도
있다.”고 주장했다.
천국을 잔치로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혼인(婚姻)으로 표현하는 것처럼 하늘의 일들을 땅의 말로 표현하는 것은 “우리의 상상력이
허다한 영적 유익을 얻으면서 (중략) 걸어가는 넓은 들판을 제공했다.”라고 십스는 말했다. 카우프만은 백스터가 감각 대상과 신앙
대상을 비교함으로써 상상력을 강조할 때 십스의 ‘영혼의 갈등’에 영향을 받은 것이라 생각을 했다. 또 존 번연(John
Bunyan, 1628-1688)은 ‘천로역정’을 쓸 자극을 받게 되는데 이 책에서 그는 상상력을 동원해서 신자의 영적 순례에
결정적인 아주 광범한 주제들을 다루고 있다.
카우프만의 평가는 어느 정도 진실을 담고 있는 것이 사실이지만 그는 청교도가 성경을 벗어나 상상력을 자유롭게 사용하는 것을
두려워했다는 것을 거의 의식하지 못하고 있다. 청교도는 안셀무스, 로욜라의 이그나티우스 그리고 다른 로마가톨릭 학자들이 지나치게
복음서 이야기-특히 그리스도의 체포와 재판과 고난과 부활-를 시각화해서 오감을 통한 상상력에 문을 열어 놓은 것을 당연히
경계했다. 나아가 홀과 람브로스에 대한 카우프만의 부정적 평가는 두 저술가가 성경적 상상력과 감각 활용에 대해 얼마나 괄목할 만한
자유를 부여했는지를 고려하지 못한 데서 기인한다.
‘홀의 묵상’(Contemplations)과 암브로스의 ‘예수를 바라보라’는 성경의 경계를 이탈하지 않으면서 자유롭게 묵상에
전념했다. 이 균형은 청교도 전통 속에서 결정적으로 중요하고, 그것만으로도 청교도는 우리가 거룩한 상상력을 어떻게 사용을 해야
하는지 스승과 같은 역할을 한다.
⓶ 계획적 묵상
가장 중요한 묵상 종류는 날마다 시간을 정해 놓고 하는 ‘계획적 묵상’이다. 칼라미는 “계획적 묵상은 ‘사람들에게서 분리되어
(중략) 어떤 시간에 은밀한 골방에서나 또는 홀로 걸으면서 갖는’ 묵상으로 이때 묵상하는 자는 엄숙하게 그리고 숙고(熟考)하며
하늘의 일들에 대해 묵상한다.”라고 말했다.
이런 숙고는 ‘벌이 꽃 위에 머물러 있으면서 꿀을 몽땅 빨아들이는 것처럼’ 하나님과 그리스도와 진리 위에 머물러 있다. 또
이런 묵상은 영혼의 반성 행위로서 이 행위를 통해 영혼은 자신을 돌아보면서 그 원인과 결과와 속성들을 비롯한 주제에 대해 자신이
알고 있는 모든 사실을 깊이 성찰(省察)한다.
토마스 화이트(Thomas White, ?-1762)는 “계획적 묵상은 네 가지 원천 곧 성경, 기독교의 실천적 친리,
섭리적 사건(경험), 설교에서 나온다.”라고 했다. 특히 설교는 화이트가 “단지 한편의 설교를 듣고 묵상하는 것이 두 편의 설교를
듣고 전혀 묵상하지 않는 것보다 났다.”라고 말한 것처럼 묵상을 위한 비옥한 땅이다.
어떤 청교도는 ‘계획적 묵상’을 두 부분으로 나눴다. 즉 ‘직접적 묵상’ 곧 묵상 주제에 초점을 맞추는 묵상과 ‘반성적(또는 반사적) 묵상’ 곧 묵상하고 있는 자신에 초점을 맞추는 묵상이다.
‘직접적 묵상’은 사고(思考)하는 지성의 행위이나 ‘반성적 묵상’은 양심의 행위다. ‘직접적 묵상’은 지식으로 지성을
계몽하나 ‘반성적 묵상’은 마음을 선(善)으로 가득 채운다. ‘계획적 묵상’은 말씀을 대상으로 삼고 있으므로 교리적일 수 있고
또는 우리의 삶을 대상으로 삼고 있으므로 실천적일 수 있다.
토마스 구지(Thomas Gouge, 1605-1681)는 ‘계획적 묵상’의 다양한 국면을 종합해서 이렇게 말했다.
“정시(定時)의 계획적 묵상은 진지하게 지성을 영적 주제나 천상의 주제에 적용(適用)하고, 그렇게 함으로써 자신과 대화를 나누는
것으로 결국에는 마음이 따스해지고 감정은 되살아나고 결심은 더욱 굳건해져 하나님을 더욱 사랑하고 죄는 더욱 미워하는 일 등이
일어나게 된다.”
리처드 백스터는 또 “‘정시 계획적 묵상’은 ‘임시적 즉흥적 묵상’과는 크게 다른데 그것은 정시(定時) 기도가 일상적 업무를
수행하면서 임의로 간구하는 기도와 다른 것과 같다.”라고 말했다, 그러나 이 두 종류의 묵상은 모두 성도의 경건에 필수적이다. 이
두 묵상은 머리의 지성(知性)과 가슴 감성(感性)의 필요를 충족시킨다. 가슴의 뜨거운 적용이 없으면 묵상은 연구와 다르지 않다.
토머스 왓슨은 이렇게 말했다. “성경연구는 진리를 찾아내는 것이고 성경 묵상은 진리를 영적으로 진보시키는 것이다. 즉 전자는
금맥을 찾는 것이고 후자는 금을 캐내는 것이다. 연구는 따스함과 영향력이 거의 없는 겨울의 태양과 같다. 반면에 묵상은
(중략) 마음이 얼어붙어 있을 때 녹이고 마음이 사랑의 눈물을 흘리게 만든다.”
2. 묵상의 의무와 필요성
청교도들은 묵상의 필요성을 매우 강조했다. 그들은 그 이유를 이렇게 말했다.
첫째, 하나님은 말씀을 묵상하라고 명하신다.
이 한 가지만으로도 우리가 묵상해야 할 이유는 충분하다. 청교도는 묵상의 필요성을 강조하기 위해 수많은 성경 본문(신
6:7, 32:46, 시 19:14, 49:3, 63:3, 94:19, 119:11,15,23.28,93,99, 143:5, 사
1:3, 눅 2:19, 요 4:24, 엡 1:18, 딤전 4:13, 히 3:1 등)과 성경적 사례(멜기세덱. 이삭. 모세.
여호수아. 다윗. 마리아. 바울, 디모데 등)를 인용한다.
우리가 일상적(日常的)으로 말씀을 묵상하지 않을 때 우리는 하나님과 하나님 말씀을 가볍게 여기게 되고 자신도 모르게 경건하지 못하다는 것을 드러내게 된다.
둘째, 성경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보내신 편지이다.
토머스 왓슨은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말씀을 성급하게 대충 흝어보는 식으로 넘어가서는 안 되고 말씀을 기록하게 하신 일
속에 나타나 있는 하나님의 지혜와 이 말씀을 우리에게 보내신 일에 나타나 있는 하나님의 사랑과 그의 뜻을 묵상해야 한다.”
이런 묵상은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감정과 사랑에 불을 붙여 놓을 것이다. 다윗이 말한 것과 같다. “또 내가 사랑하는 주의 계명들을 향하여 내 손을 들고 주의 율례들을 작은 소리로 읊조리리이다.”(시 119:48)
셋째, 묵상이 없으면 우리는 견고한 그리스도인이 될 수 없다.
토마스 맨톤(Thomas Manton, 1620-1677)은 이렇게 말했다. “우리가 하나님의 영적 약속에 대한 묵상을
지속적(持續的)으로 먹지(계속하지) 않으면 신앙은 비쩍 말라 굶어 죽게 될 것이다. 다윗이 시편 119:92에서 말한 것과 같다.
‘주의 법이 나의 즐거움이 되지 아니하였더라면 내가 내 고난 중에 멸망하였으리이다.’”
또 토마스 왓슨(Thomas Watson, 1620-1686)은 이렇게 말했다. “말씀을 묵상하지 않는 그리스도인은
훈련(訓練)받지 못한 비무장(非武裝)의 군인과 같고 연장 없이 일하려는 기술자(技術者)와 같다. 말씀 묵상이 없으면 하나님의
진리는 우리에게 머무르지 못할 것이다. 곧 마음은 강퍅해지고 기억은 쇠잔할 것이다. 말씀 묵상이 없으면 결국 우리는 모든 것을
잃고 말 것이다.”
넷째, 묵상 없으면 선포된 말씀이 우리에게 유익이 되지 못한다.
스쿠더는 “말씀 묵상이 없으면 성경 읽기도 ‘날 음식을 씹지 않고 삼키는 것’과 같다.”고 말했다. 이 말에 리처드 백스터는 “그러나 한 번에 지나치게 많이 먹으면 제대로 소화 시킬 수 없다.”고 덧붙였다.
토머스 왓슨은 이렇게 말했다. “진리에 대한 지식과 진리에 대한 묵상은 큰 차이가 있는데 그 차이는 마치 촛불과 태양 빛의
차이와 같다. 태양 빛이 비취는 정원에 등불이나 촛불을 놓아보라. 아무 영향을 주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태양은 엄청난 영향을
미친다. 식물을 자라게 하고 풀을 무성하게 한다.
마찬가지로 묵상이 없는 지식도 지성 속에서 빛나고 있는 촛불처럼 별로 아니 전혀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 지식은 사람을 더나은
존재로 만들지 못한다. 그러나 묵상은 태양 빛과 같다. 묵상은 감정을 변화시키고 마음을 따스하게 하고 더 거룩하게 한다. 묵상은
진리 속에 생명을 낳는다.”
다섯째, 묵상 없는 기도는 그 효력이 감소하게 된다.
토마스 맨톤은 이렇게 말했다. “묵상은 말씀과 기도 사이에서 의무의 매개체로서 양자를 관련시킨다. 말씀은 묵상에 힘을 주고
묵상은 기도를 힘 있게 한다. 우리는 우리 신앙이 오류가 있는 건 아닌지 말씀을 들어야 하고 그 후에는 우리 신앙이 열매 없는
신앙은 아닌지 묵상해야 한다. 그러므로 이 두 의무는 항상 함께 가야 한다. 말씀을 읽고 들은 후에는 묵상을 하고 묵상을 한
후에는 기도해야 한다.”
여섯째, 묵상 없이는 진리를 변증할 수 없다.
묵상 없는 신앙은 척추(脊椎) 없는 사람과 같고 자신이 어떤 존재인지 알지 못한다. 토마스 맨톤은 이렇게 말했다. “묵상이
생소한 사람은 자신에 대해서도 생소하다.” 토마스 왓슨은 또 “그리스도인을 그리스도인으로 만드는 건 말씀 묵상이다.”라고 말했다.
제임스 우셔(James Ussher, 1581-1656)는 “우리는 묵상의 필요성을 알고 있다. 우리는 천국에 가고 싶다면 이
의무 실천을 결심해야 한다.”라고 말했다.
일곱째, 묵상은 설교 준비의 필수적 한 부분이다.
묵상이 없으면 설교는 깊이 있는 지성, 풍부한 감정, 명확한 적용이 결여(缺如) 될 것이다. 뱅겔이 헬라어 신약 성경을
공부하는 학생들에게 준 지침은 이런 묵상의 본질을 잘 포착하고 있다. “본문 전체를 자신에게 적용을 시켜라.”
3. 말씀 묵상 방법
청교도 저술가들에 따르면, 묵상에는 필수 조건과 규칙들이 있었다. 그들이 묵상 빈도와 시간, 묵상을 위한 준비, 목상 지침 등에 대해 쓴 것을 고찰해 보자.
(1) 묵상 빈도와 시간
첫째, 경건한 묵상은 자주 해야 한다.
시간과 의무감이 허락된다면 하루에 두 번이 이상적이다. 최소한 하루에 한 번은 해야 한다. 빈틈없는 지도자였던 여호수아가
하나님에게서 그분의 법을 주야(晝夜)로 묵상하라는 명령을 받았다면 우리가 매일 아침과 저녁으로 하나님의 진리를 묵상하는 것을
즐거워하는 것은 당연하지 않은가?
일반적으로 삼위 하나님과 그분의 진리를 자주 묵상할수록 하나님을 더 깊이 알게 될 것이고 아울러 묵상도 그만큼 더 쉬워질
것이다. 묵상과 묵상 사이의 간격이 길어지면 묵상의 열매를 잘 맺지 못할 것이다. 월리엄 베이츠가 이렇게 말한 것 같다. “새가
오랫동안 둥지를 떠나 있으면 알은 차가워지고 부화(孵化)에 적절하지 못한 상태가 되지만 계속 품고 있으면 부화할 것이다.
마찬가지로 우리도 오래 신앙의 의무를 떠나 있으면 감정은 차가워지며 거룩함을 낳고 영혼을 위로하는 데 적절하지 못한 상태가 될
것이다.”
둘째, 묵상 시간을 정해 놓고 엄수하라.
이렇게 하면 ‘빼먹고 싶은 허다한 유혹’을 이기게 될 것이라고 백스터는 말했다. 가장 정신이 맑고 다른 의무 때문에 방해받지
않는 새벽 시간이 묵상하기에 가장 좋은 시간이 될 것이다. 왜냐면 그 시간의 목상이 하루의 나머지 시간의 분위기를 결정하기
때문이다.(출 23:19, 욥 1:5, 시 119:147, 잠 6:22, 막 1:35) 그러나 사람에 따라서는 저녁이 묵상에 더
유익할 수도 있다.(창 24:63, 시 4:4) 그들은 하루의 일과를 다 마치고 달콤한 묵상을 통해 하나님의 품에서 안식할 준비를
하게 된다.(시| 16:7)
완벽한 묵상 시간을 가지려면 주일을 활용하라. 웨스트민스터 총회의 문서 작성자들은 예배 모범에서 “회중의 엄숙한 공적 모임
사이나 후에 비어 있는 시간에 성경 읽기와 묵상과 설교를 반추(反芻)해 보는 게 좋다.”고 권면했다. 토마스 구지(Thomas
Gouge, 1609-1681)는 “그대가 이 경건한 묵상의 의무가 주는 달콤함을 맛본 적이 있다면 특히 주일에는 잡담이나 한가한
담화에 시간을 거의 쓰지 않을 것이다.”라고 했다.
백스터는 “우리 주님이 땅에서 일어나 사망과 지옥을 완전히 정복하고 우리를 위해 천국을 취하신 날보다 우리가 천국에
올라가기에 합당한 날이 언제겠는가?”라고 물었다. 또 특별한 경우의 시간을 묵상에 활용하라. 청교도에 따르면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다.
‣ 하나님이 우리 영에 특별한 부흥과 능력을 주실 때,
‣ 고난이나 두려움이나 염려나 시험으로 말미암아 복잡한 심적 혼란에 빠져 있을 때,
‣ 하나님의 사자들이 죽음에 대해 환기(喚起)를 시킬 때 곧 노년에 이르러서든 육체가 노쇠해서든 아니면 모종의 죽음의 징후에 의해서든 떠날 때가 그리 밀지 않았다고 말해줄 때,
‣ 설교나 성례를 통해 감동하거나 하나님 섭리의 어떤 심판이나 자비나 한 행위를 확인했을 때, 철은 빨갛게 달궈졌을 때가 단련하기 가장 좋은 때이다.(시 119:23)
‣ 성찬과 회개의 시간과 주일과 같이 엄숙한 의무를 시행하기 전이다.
셋째, 영혼의 유익을 발견할 때까지 통상적으로 묵상해야 한다.
베이츠는 “묵상은 젖은 나무에 불을 붙이려고 시도하는 것과 같다.”라고 말했다. 이때 끝까지 참는 자가 불을 붙이게 될
것이다. 묵상을 시작할 때 처음에는 소량의 연기와 작은 불꽃 정도밖에 일으키지 못하지만 결국에는 거룩한 감정의 불길이 치솟아
하나님을 향해 올라갈 것이다. 그래서 베이츠는 ‘불길이 그렇게 올라갈 때까지’ 인내하며 묵상하라고 말했다.
불길이 올라가지 못할 때도 있을 것이다. 그때 여러분은 막연히 계속해서는 안 된다. 이에 대해 토마스 맨톤은 이렇게 말했다.
“게으름에 빠지거나 영적인 따분함에 빌미를 주지 마라. 마귀는 이 두 가지 태도에 있어 여러분보다 유리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힘을 소진(燒盡)해서 여러분의 영이 혼란 속에 있을 때 마귀는 하나님의 역사를 가로막을 것이다.”
대다수 청교도는 묵상에 구체적으로 어느 정도의 시간을 할애해야 하는지는 말하지 않았다. 그러나 제임스 어셔는 최소한 한 주에
한 시간 정도는 할애해야 한다고 주장했고, 토머스 화이트는 이렇게 주장했다. “묵상에는 준비, 성찰, 감정, 결단 등 여러
요소가 있는데 이 요소 가운데 어느 것도 경홀히 여겨서는 안 된다. 왜냐면 감정은 그리 쉽게 일어나는 것이 아니며 불이 붙으면
멈추지 않고 바람을 불어 넣어야 하기 때문이다. 이때 불길이 타오를 정도가 되려면 입문자들은 적어도 하루 30분 정도고 묵상에
익숙한 사람들은 한 시간 정도가 적합하다.
(2) 묵상을 위한 준비
청교도 저술가들은 효과적인 묵상을 위한 몇 가지 준비 단계를 제시했는데 모두가 마음 상태에 크게 좌우되는 것들이다.
첫째, 마음을 이 세상의 것에서 분리를 시켜라.
곧 세상일과 세상이 주는 즐거움과 세상과 관련된 내적 고뇌 및 동요 등에서 벗어나라. 칼라미는 이렇게 말했다. “외부
친구뿐만 아니라 내부의 친구 즉 무익하고 세속적이고 마음을 산란하게 하는 생각들도 차단(遮斷)시켜 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하라.
둘째, 죄책과 오염에서 마음을 깨끗게 하고 영적인 것에 열렬한 사랑으로 타오르게 하라.
성경 본문과 영적 진리의 보물을 축적하라. 시편 119:11의 ”내가 주께 범죄 하지 아니하려 하여 주의 말씀을 내 마음에 두었나이다.“라는 다윗의 고백에 따라 살기 위해 은혜를 구하라.
셋째, 가장 진지한 마음으로 묵상에 임하라.
묵상의 중요성과 탁월성과 잠재력을 유념하라. 묵상에 성공한다면 여러분은 하나님의 참된 임재 속에 들어가게 될 것이며, 다시
한번 이 땅에서 영원한 기쁨을 맛보기 시작할 것이다.(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질문 58) 어셔는 이렇게 말했다.
“다음과 같은 생각이 그대 마음의 생각이어야 한다. 곧 나는 그 앞에서 모든 것이 벌거벗은 것처럼 고스란히 드러나는 하나님을
믿고 있다. 그러므로 나는 전지(全知)하신 하나님 앞에서 어리석은 말을 하지 않도록 조심하고, 내 생각이 탈선에 이르지 않도록
해야겠다. 사람은 다른 일로 분주해진 마음을 갖고 가장 위대한 임금과 대화를 나눌 수 있다. 그럴 때는 하나님과 대화를 나누지
않도록 하라. 하나님의 눈이 그 마음 위에 있고, 그러하기에 그대의 주관 심사는 마음의 방향키를 굳게 지키는 데 있어야 한다.
삼위일체의 하나님이 임재하고 계신다는 사실을 유념하라.“
넷째, 묵상이 방해받지 않을 조용하고 자유로운 장소로 하라.
조지프 홀은 “사람이 없고, 소음이 없고, 움직임이 없는 내밀함과 조용함과 쉼을 목표로 하라.”고 했다. 일단 적합한 장소를
찾으면 그 장소를 계속 고수하라. 어떤 청교도는 주의를 산만하게 하는 눈에 보이는 것들을 피하도록 방을 어둡게 하거나 눈을 감는
방법을 권장했다. 다른 청교도는 자연 속을 산책하거나 앉아서 묵상하는 방법을 추천했다. 여기서 우리는 나름대로 좋은 방식을
찾아야 할 것이다.
다섯째, 묵상의 몸가짐에도 유의하라.
않았거나 서 있거나 걷거나 누워 있거나 간에 전능자 앞에 마음은 물로 경건한 몸가짐을 유지하라. 묵상하는 동안 몸은 영혼의
종이 되어야 하고 영혼의 감정을 따라야 한다. 묵상 목표는 영혼과 지성과 몸을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고후
4:6)에 집중시키는 것이다.
(3) 묵상을 위한 지침
청교도는 묵상 실천을 위한 지침도 제시했다.
‣ 성령의 도우심을 구하는 기도로 묵상을 시작한다.
묵상할 때 마음을 조절해서 신앙의 눈으로 바라보는 능력을 달라고 기도하라. 칼라미가 다음과 같이 말한 것처럼 이렇게
기도하라. “나는 여러분이 ‘지성을 조명’하고 ‘경건을 소생’시키고 ‘감정을 뜨겁게’ 해 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하고, 그리하여 그
시간이 여러분에게 복이 되기를 바라고, 나아가 경건의 일에 대해 묵상함으로써 여러분이 더욱 거룩해지고, 여러분의 욕심은 더욱 죽고
은혜는 더욱 증가 되며, 세상과 세상의 허영에 대해서는 죽고 천국과 천국의 일에 대해서는 더욱 고조되기를 바란다.”
‣ 묵상할 본문이나 주제를 선택한다.
이어서 청교도는 성경을 읽고 묵상해야 할 성경 구절이나 교리를 선택하라고 했다. 청교도는 처음에는 묵상하기에 비교적 쉬운
주제를 선정하는 것이 좋다고 권면했다. 예를 들어 삼위일체 교리보다는 하나님 속성에 대한 주제에서 시작해 보라. 그리고 한 번에 한
가지 주제를 묵상하는 것이 좋다.
아울러 여러분의 현재 상황에 가장 잘 적용할 수 있고 여러분 영혼에 가장 유익이 될 주제를 선택하라. 예를 들어 보자. 만일
여러분이 영적으로 낙심한 상태 속에 있다면 불쌍한 죄인들을 용납하고 자신에게 나아오는 모든 자를 용서해 주시는 그리스도의 자상한
마음에 대해 묵상하라. 양심이 너무 괴롭다면 회개하는 자에게 은혜를 베푸시는 하나님의 약속을 묵상하라. 경제적 어려움에 있다면
곤궁한 자들에 대한 하나님의 놀라운 섭리에 대해 묵상하라.
‣ 묵상한 주제나 구절을 암기하라.
이후에는 선택한 구절이나 주제 내용을 암기해 둠으로써 묵상을 자극하고 신앙을 강화시키며 하나님 인도의 수단으로 삼으라.
그다음에는 여러분의 생각을 성경이나 주제에 고정시키고 하나님이 계시하신 것 이상으로 알려고 하지 마라. 여러분의 기억을 활용해서
성경이 여러분이 택한 주제에 대해 말씀하는 것에 철저히 초점을 맞추라.
과거에 들은 설교들과 다른 교훈적인 책들을 참고하라. 여러분이 선택한 주제의 다양한 측면들 곧 제목과 원인 특징과 결과와
영향 등을 생각할 때 ‘양심이라는 책’, ‘성경이라는 책’, ‘피조물이라는 책’을 활용하라. 마리아처럼 이런 것들을 마음속으로
숙고하라. 예증과 비유와 반대 사실 등을 생각함으로써 여러분의 지성을 조명하고 여러분의 감정을 불타오르게 하라.
‣ 여러분이 묵상하고 있는 것의 가치를 평가하라.
칼라미가 보여 주는 실례가 여기 있다. 만일 여러분이 죄에 대한 주제를 묵상하려고 한다면 “죄에 대한 설명에서 시작하고,
이어서 최의 파급에 대해 다루고, 원죄와 죄의 원인, 죄의 저주스러운 결과와 영향, 일반적으로 죄의 성격 및 속성과 특수적으로
개인적인 죄의 성격 및 속성, 죄의 반대 사실인 은혜, 죄에 대한 은유, 죄에 붙여진 명칭, 싱경이 죄에 대해 말씀하는 모든
사실을 묵상해야 한다. 여기서 두 가지 경고가 순서대로 나온다.
첫째, 맨톤이 말한 것처럼 방법의 규칙성 때문에 자유로운 영에 재갈을 물려서는 안 된다.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것은 신앙이지
논리가 아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이런 규칙과 규정에 얽매이게 되면 생각이 좁아져 샘에서 나오는 물이 아니라 증류기에서 나오는 물처럼
흘러나오게 될 것이다.
둘째, 여러분의 마음이 산만해지면 정신을 바짝 차리고, 용서를 위해 짧은 기도를 드리고, 힘을 달라고 간구하며, 합당한 성경
본문을 찾아 다시 읽어 보고 묵상하도록 하라. ‘성경 읽기’, ‘묵상’, ‘기도’는 동반자라는 것을 기억하라. 어느 한 부분이
약해지면 다른 부분에서 대책을 찾으라. 인내하라. 이 의무를 포기함으로써 사탄에게 굴복해서는 안 된다. 이어서 사랑과 욕구와
소망과 용기와 감사와 열심과 기쁨과 같은 감정을 분발시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라.
‣ 여러분 자신의 영혼과 대화를 나누라.
자신의 무능력과 단점으로 야기된 불평은 내려놓고 하나님 앞에 여러분의 영적인 갈망을 토설하라. 하나님이 여러분을 도우실 걸
믿으라. 폴 베인(Paul Bayne, 1573-1617)은 묵상을 은혜의 개인적 수단으로 설명하면서 묵상을 첫째는 마음에 영향을
미치는 시각 능력으로 비유하고, 둘째는 잉태 및 탄생 과정으로 비유했다.
“임신하면 출산 고통과 때가 이를 때 아기가 탄생한다는 것을 기대하게 된다. 마찬가지로 영혼이 생각을 통해 임신하게 되면
감정은 즉시 즐겁고 흥분 상태가 된다. 왜냐면 불쏘시게처럼 불꽃이 튀기면 불이 붙는 것처럼 생각에 따라 감정은 불길에 휩싸이기
때문이다. 감정이 움직이면 의지는 자극을 받고 분발하게 된다. 이렇게 여러분의 기억과 판단과 감정이 환기되면 여러분의 영혼을
의무와 위로로 이끌고 죄를 멀리하도록 묵상 내용을 여러분 자신에게 적용하라.”
윌리엄 페너(William Fenner, 1600-1640)가 다음과 같이 쓴 것처럼 하라. “그대 자신의 영혼 속으로
뛰어들라. 그대 자신의 마음을 예상해 보고 대책을 세우라. 그대의 마음을 약속, 경고, 자비, 심판, 계명으로 채우라. 묵상을
통해 그대의 마음을 살피라. 그대의 마음을 하나님 앞으로 끌고 가라.” 은혜 안에서 자라고 있는지 여러분 자신을 검토하라. 과거를
반성해 보고 “내가 어떻게 했지?”라고 물으라. 미래를 전망하고 “하나님의 은혜로 내가 무엇을 하기로 할까?”라고 물으라.
율법적으로 질문하지 말고 거룩한 열정과 성령이 역사하는 은혜 안에서 자라갈 기회를 얻기 위한 마음으로 질문하라. 율법 업무는
우리의 일이지만 묵상 업무는 달콤한 일이다. 칼라미가 다음과 같이 권면하는 대로 하라. “만일 묵상을 실천함으로써 유익을
얻으려고 한다면 여러분은 구체적인 적용에까지 이르러야 한다. 또 그리스도를 묵상하되 그리스도를 여러분의 영혼에 적용해야 한다. 또
천국에 대해 묵상하되 천국을 여러분의 영혼에 적용해야 한다.”
‣ 묵상한 대로 실천할 것을 결심하라.
여러분이 묵상한 대로 살라.(수 1:8) 묵상과 실천은 두 자매처럼 손을 잡고 함께 가야 한다. 실천 없는 묵상은 다만
여러분의 죄악을 더하게 할 뿐이다. 그다음에는 여러분의 적용이 결심과 함께 이루어지도록 하라. 화이트는 “여러분의 결심은 단순한
소원이 아니라 결연한 목표나 결정으로서 굳건하고 강력해야 한다고 말했다.
여러분의 결심을 죄에 대한 유혹과 맞서 싸우는 의지로 삼으라. 여러분의 결심을 기록해 두라. 무엇보다 먼저 거룩하고 경건한
일들을 묵상하는 사람이 되는 데 목숨을 바치겠다고 결심하라. 여러분 자신과 여러분 가족과 여러분이 소유한 모든 걸 즐거운
체념(滯念)과 함께 하나님의 손에 내려놓으라.
‣ 기도와 감사와 시편 찬송으로 묵상을 끝내라.
조지 스윈녹(George Swinnock, 1627-1673)은 “묵상은 가장 좋은 기도의 시작이며, 기도는 가장 좋은
묵상의 끝이다.”라고 말했다. 토마스 왓슨(Thomas Watson, 1620-1686)은 이렇게 말했다. “묵상한 내용에 대해
기도하라. 기도는 모든 것을 거룩하게 한다. 기도가 없으면 묵상은 단지 부정(否定)한 것일 뿐이다. 기도는 영혼을 묵상에
고정시킨다. 기도는 묵상이 탈선하지 않도록 묵상의 끝에 매듭을 계는 것이다. 하나님이 여러분의 지성에 영원히 경건한 묵상을 거하게
하고 묵상의 맛을 여러분의 마음속에 머무르게 하시도록 기도하라.”
묵상할 때 도와주신 것에 대해 주님께 감사하라. 그렇지 않으면 리처드 그린햄(Richard Greenham, 1542-1594)이 경고한 것처럼 우리는 다음 묵상을 할 때 고투에 시달리게 될 것이다.
시편 찬송은 묵상에 큰 도움이 된다. 이 시편의 운율 형식은 기억하기에 좋게 되어 있다. 하나님 말씀으로서 시편은 묵상에
적절한 주제를 제공한다. 칼빈의 말처럼 시편은 ‘영혼에 대한 완벽한 해부학’으로서 묵상에 풍성한 자료와 지침을 제공한다.
기도문으로서(시 72:20), 감사의 시로서(시 118:1) 시편은 묵상의 적절한 수단이자 묵상을 끝내는 적절한 방법이다.
조셉 홀(Joseph Hall, 1574-1656)은 이렇게 말했다. “묵상을 마칠 때 나의 마음과 음성을 하나님께 바쳐
다윗 시편의 한두 구절 – 우리 기질과 우리의 묵상 주제에 어울리는 구절 – 을 노래함으로써 큰 위로를 받았다. 이렇게 하면
마음은 큰 달콤함과 만족을 누리게 된다.”
존 라이트봇(John Lightbot, 1602-167)은 “하나님에 대한 찬양을 노래하는 것은 우리가 공적으로 묵상할 때
행할 수 있는 최고의 사역이다. 이런 찬송은 찬송한 내용을 마음이 가장 오래 기억하게 한다. 기도와 설교를 듣는 것은 이 문장에서
저 문장으로 넘어가는 것이 빠르다. 그러나 찬송은 그 내용을 오래 고수하게 한다.”라고 했다.
‣ 묵상 후 즉시 세상일에 몰두하지 말라.
마지막으로 묵상을 마친 다음에 너무 빠르게 세상일에 몰두하지 말라. 토머스 구지가 권면한 것처럼 “그래야 묵상할 때 그대의
마음속에 불을 붙여 놓았던 영적인 마음이 갑자기 꺼지지 않게 될 것이다.” 한 시간 동안의 이런 묵상이 천 편의 설교를 듣고 마는
것보다 더 가치가 있음을 명심하라. 어셔 주교는 “묵상은 말씀의 가치를 떨어뜨리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말씀을 영예롭게
한다.”라고 말했다.
4. 묵상 주제
청교도는 다양한 묵상 주제와 대상과 자료를 제시했다. 각 주제 뒤에 붙어 있는 숫자는 그 주제에 대한 묵상을 요청한 청교도
저술가들로서 내가 찾아낸 사람들의 수를 표시한다. 이 목록은 개혁파조직신학의 전통적인 구분법을 따르고 있다.
(1) 서 론
‣ 거룩한 하나님의 말씀(3)
‣ 기독교에 대한 변증(1)
(2) 신 론
‣ 하나님의 본질과 속성(7)
‣ 하나님의 사역과 섭리(7)
‣ 인간의 제일 목적인 하나님의 영광(4)
‣ 하나님의 엄위(3)
‣ 하나님의 자비(3)
‣ 창조주이신 하나님(2)
(3) 인간론
‣ 죄의 죄악성과 우리의 개인적인 죄(9)
‣ 마음의 부패함과 기만성(5)
‣ 아담의 타락과 하나님으로부터의 분리(4)
‣ 인간의 헛됨(4)
‣ 영혼의 가치와 불멸성(3)
‣ 육체의 연약함(2)
‣ 세상이 주는 위로의 불확실성(1)
‣ 탐심의 죄(2)
‣ 하나님과 인간 간의 대조(1)
(4) 기독론
‣ 그리스도의 성육신
‣ 그리스도의 수난과 죽음(8)
‣ 그리스도의 사랑(5)
‣ 그리스도의 인격(4)
‣ 복음의 신비와 경이(4)
‣ 그리스도의 본성(2)
‣ 그리스도의 직분(2)
‣ 그리스도의 생애 (2)
‣ 그리스도의 지위(1)
(5) 구원론과 그리스도인의 삶
‣ 하나님의 약속(7)
‣ 은혜의 경험적 증거에 대한 자기 검토(5)
‣ 성도의 풍성한 특권(3)
‣ 성령의 은혜와 인격(3)
‣ 신앙의 유익(2)
‣ 성화(2)
‣ 기도(2)
‣ 하나님의 계명(2)
‣ 하나님의 권면과 경고(2)
‣ 배교의 위험성(1)
‣ 구원받은 자 수가 적음(1)
‣ 영적 위험들(1)
‣ 사랑과 기쁨과 소망(1)
‣ 안식일(1)
‣ 자기 부인(1)
(6) 교회론
‣ 하나님의 규례(5)
‣ 성찬(4)
‣ 세례(2)
‣ 말씀을 듣는 것과 읽는 것(2)
‣ 교회의 기쁨과 슬픔(2)
(7) 종말론
‣ 천국(10
‣ 죽음(8)
‣ 심판(7)
‣ 지옥(7)
‣ 영원(5)
청교도는 이 주제들을 명백하고 강력하고 유용한 하나님의 진리로 불렸다. 조지프 홀과 같은 일부 청교도는 다른 사람들보다 더
상세한 목록을 제시했다. 홀은 묵상해야 할 87가지의 주제를 열거하고 왜 그렇게 해야 하는지 각각의 주제마다 설명을 붙여 놓았다.
그 주제들은 다음과 같다.
명예와 위대함, 무지, 타락, 거룩한 삶, 잡담, 악한 친구, 하나님의 약속, 세상을 사랑함, 만족, 위선, 행복, 세상을
사랑함, 친구, 하늘과 땅, 일과 수고, 재산, 천국과 지옥, 죽음, 고통, 선한 싸움, 죄, 성공, 은혜 안에서 자라감, 교만,
죄를 미워함, 편견, 탐심, 기도, 사랑, 불경, 고결함, 기도, 시험, 수단의 사용, 예배, 행복, 순종, 회개, 야망,
자만심, 짧은 인생, 자기 검토, 역경, 고통, 신앙과 철학, 쾌락, 죄, 신실한 친구, 분열과 진리, 근심과 걱정, 두려움,
이교도와 그리스도인, 눈의 빛, 지성과 마음, 진심 어린 신앙, 스스로 받는 상처, 마음과 혀, 시간 사용, 염려, 섭리, 사랑,
불쾌, 우정, 싼 물건 찾아다니기, 책망, 시기, 세속적 쾌락, 훌륭한 본보기를 따름, 시간, 향유, 선행, 열매 맺음,
어리석음, 선을 행함, 은둔 생활, 행복한 삶, 하늘의 징계, 영적 갈망, 회개, 영적 싸움, 시련 속에서 얻는 힘, 천국을 향한
마음, 겸손, 죽음, 삶의 목적, 악이 주는 유익, 광기, 묵상 자체의 실천
분명히 말하면 청교도는 이 가운데 어떤 주제는 다른 것보다 더 중시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에 대해 존 오웬(John
Owen, 1616-1683)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만일 내가 경험을 통해 확인한 것이 있다면 바로 이것이다. 곧 사람은
그리스도의 인격, 그리스도의 나라의 영광, 그리스도의 사랑에 대한 자신 생각과 묵상에 따라 은혜의 성장과 쇠퇴를 가늠해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아마 청교도에게 가장 중요한 묵상 주제는 천국 곧 하나님을 가장 깊이 알고 가장 크게 경배하고 가장 크게 즐거워하는 곳,
그리스도가 아버지 보좌 우편에 앉아 있는 곳, 성도들이 영광에서 영광으로 옮겨가며 즐거워하는 곳이었을 것이다. 리처드
백스터(Richard Baxter, 1615-1691)는 “묵상은 대다수 다른 의무들의 생명이고 천국을 보는 게 묵상의
생명이다.”라고 말했다. 천국은 이런 이유로 묵상할 때 최상의 주제다.
‣ 그리스도는 지금 천국에 계시고, 우리의 구원은 성령으로 말미암아서 그리스도와 연합을 이루고 있다. 그리스도는 우리의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원함이시다. 천국의 중심이신 그리스도는 그대로 우리의 믿음과 소망과 사랑의 중심이 되어야 한다.
‣ 우리는 그리스도의 마음을 갖고 있어야만 즉 우리가 진실로 천국을 향한 마음을 갖고 천국의 관점에 따라 이 땅과 이 시대를 바라봐야만 오늘날처럼 악한 시대에 그리스도인으로서 살 수 있다.
‣ 천국은 우리 순례의 목적지다. 우리는 이 땅에서 믿음과 소망과 사랑으로 그리스도와 함께하기 위해 천국을 향해 여행하고 있는 순례자이다.
청교도는 천국과 다른 주제들에 대한 묵상이 다음과 같은 세 가지 이유로 우선권을 갖는다고 가르쳤다.
첫째, 예배 특히 설교는 특별 묵상이 필수적이기 때문이다.
칼라미(Edmund Calamy, 1600-1666)는 “하나님은 여러분이 설교를 듣기를 원하시고 또 들은 설교를 묵상하기
원하신다.”라고 말했다. 제임스 어셔(James Ussher, 1581-1656)가 말한 것처럼 모든 설교는 묵상을 위한
준비이다. 그러므로 훌륭한 설교는 우리 지성(知性)에 건전한 교리를 알려 줄 뿐만 아니라 감동을 주는 설교다. 훌륭한 설교는 우리
의지(意志)를 죄에서 돌이키게 하고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도록 이끈다.
묵상은 지성을 통해 하나님 말씀을 우리 마음속에 받아들이도록 합으로써 감정을 넓히고 지시한다. 그러므로 우리가 설교에 대해 묵상하지 않을 때 설교에서 아무 유익을 얻지 못한다.
리처드 백스터는 이렇게 말했다. “왜 그토록 많은 설교가 우리에게 아무 소용이 없고, 신앙 고백자들은 온갖 다양한 설교를
듣거나 읽는 데도 영혼은 쇠잔하고 굶주리게 되는지 그 이유에 대해 나는 그들의 묵상에 대한 무지와 이해할 수 없는 게으름 말고 더
참되고 더 큰 다른 원인은 모르겠다.” 그는 또 “어떤 청중은 식욕도 없고 소화력도 없어 영적 식욕 부진에 빠져 있는 반면에 또
어떤 청중은 영적 폭식증에 걸려 식욕은 있으나 소화력이 없다.”고 했다.
신실한 청교도는 묵상을 위해 설교를 받아 적었다. 우리 교회 나이가 많은 한 여성도가 이런 습관을 갖고 늘 설교를 적는다.
그리고 매 주일 저녁에는 무릎을 꿇고 한 시간씩 그날 받아 적은 설교 내용으로 기도하고 묵상했다. 그녀는 주일의 시간 가운데 이
시간이 가장 좋은 시간이라고 고백했다.
둘째, 성찬 예식에 바르게 참여하기 위해 신자는 자신의 죄를 위해 속죄 제물이 되신 주 예수에 대한 묵상이 요구되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 토머스 화이트(Thomas White, ?-1672)는 이렇게 말했다. “여러분은 성찬을 준비할 때 거행할 때,
거행한 후에 감당해야 할 의무에 대해 묵상하라. 성부 하나님의 사랑과 성자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묵상하라. 특히 성육신하신
그리스도의 인격의 탁월하심과 그리스도 고난의 위대하심 그리고 그 고난이 하나님의 공의를 얼마나 타당하게 만족시키셨는지를 숙고하라.
그리고 나아가 성찬의 효력과 본질과 용도에 대해서도 숙고하라.”
칼라미는 성찬에 참여하는 동안 묵상해야 할 주제로 12가지를 제시했다. “성육신하신 그리스도를 주심에 나타나 있는 성부
하나님의 크고 놀라우신 사랑, 자신을 내놓은 것에 나타나 있는 그리스도의 사랑, 죄의 가증함, 성찬 예식의 효력, 우리 자신의
무가치함, 우리의 영적 기갈과 궁핍, 자격 없는 수찬자가 받게 되는 저주, 자격 있는 수찬자에게 주어지는 복, 성찬의 요소(떡과
포도주), 성찬에서의 행동(목사의 행동이 어떻게 그리스도를 표상하는지), 성찬의 약속, 복음으로 주어지는 그러스도(성찬의 은사)”
에드워드 레이놀즈(Edward Reynolds, 1599-1667) 같은 청교도 신학자들은 성찬에 임할 때 신자들이 어떻게
해야만 되는지에 대한 논문을 썼다. 존 오웬은 성찬 준비 방법으로 묵상, 자기 검토, 간구, 기대 등을 요구했다. 모든 신자는
이런 준비에 동참해야 한다.(참고 웨스트민스터 대요리문답 질문 171,175)
셋째, 매 주일은 묵상에 특별히 좋은 시간이다.
주일은 하나님의 사람들이 영적 양식을 공급받아 다가올 한 주간을 위해 그 양식을 비축해 놓는 날이다. 따라서 청교도들은 주일을 ‘영혼의 장날’이라고 했다.
넷째, 영적 성숙에 따라 묵상의 내용도 다르다.
나다니엘 레이뉴(Nathaniel Ranew, 1602-1678) 같은 청교도는 묵상에 대한 글을 광범하게 썼는데 영적
성숙도에 따라 신자들이 다양하게 도움을 받도록 지침을 제시했다. 레이뉴는 각각 ‘갖 회심한 초신자를 위해’, ‘더 성숙하고 연륜이
있는 신자를 위해’, ‘노년 신자를 위해’ 장을 따로 구분해서 글을 썼다. 그리스도인은 나이가 들수록 더 깊은 묵상을 당연히
기대하게 된다.
5. 묵상의 유익
청교도는 묵상의 유익, 장점, 효능, 이점, 활용 등에 대해 방대한 글을 썼다. 여기서 그들이 강조한 묵상의 유익을 열거해 보자.
‣ 묵상은 삼위 하나님께 초점을 맞추도록 도움을 줌으로 그 인격들에 따라 지성적, 영적, 심미적으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즐거워하도록(요일 4:8) 이끈다.
‣
묵상은 경건한 진리에 대한 지식을 증진 시키는 데 도움을 준다. 묵상은 진리의 얼굴에서 수건을 제거한다.(잠 4:2) 묵상은
‘지혜의 유모’ 인데 그 이유는 지혜의 근본인 하나님에 대한 경외를 자라게 하기 때문이다.(잠 1:7)
‣ 묵상은 우리의 온갖 영적 환난 속에서 약속의 하나님을, 우리의 온갖 외적 시련 속에서 섭리의 하나님을 신뢰하도록 도움을 줌으로 우리의 믿음을 증진시킨다.
‣
묵상은 우리의 감정을 자극한다. 토머스 왓슨은 묵상을 ‘감정의 고함 소리’라고 했다. 그는 또 이렇게 말했다. “묵상은 어미
닭이 달걀 위에 앉아 병아리를 부화시키듯이 좋은 감정을 부화(孵化)시킨다. 우리는 이 묵상의 불로 감정을 점화시킨다.”(시
39:3)
‣ 묵상은 회개와 삶의 개혁을 일으킨다.(시 119:59, 겔 36:31)
‣ 묵상은 기억의 절친한 친구다.
‣ 묵상은 예배를 계발할 필요가 있는 분야로 생각하도록 도움을 준다.
‣ 묵상은 우리 자신의 집보다 하나님의 집을 더 좋아하게 한다.
‣ 묵상은 영혼의 천에 성경을 수놓는다.
‣ 묵상은 기도의 유익한 도구이다.(시 15:1)
‣ 묵상은 기도하기 전에 기도라는 악기를 조율한다.
‣ 묵상은 말씀을 듣고 읽을 때 실제 유익을 얻도록 돕는다.
‣
묵상은 말씀이 우리 영혼을 생명과 에너지로 채우게 하는 역할을 한다. 월리엄 베이츠는 이렇게 말했다. “말씀을 듣는 건 음식을
섭취하는 것과 같고 들은 말씀을 묵상하는 건 섭취한 음식을 소화하는 것과 같다. 묵상을 통해 말씀을 소화하는 것은 따스한 감정,
강한 결심, 거룩한 행동을 낳는다.”
‣ 성례에 대한 묵상은 우리가 받은 은혜를 더 유익하게 하고 더 강하게 하는 데 유익을 준다.
‣ 묵상은 믿음, 소망, 사랑, 겸손 그리고 수많은 영적 위로가 영혼 속에서 풍성하게 자라도록 도움을 준다.
‣ 묵상은 죄의 가증함을 강조한다.
‣
묵상은 우리가 죄를 이기는데 필요한 모든 무기를 모으고 모든 논쟁 의 힘을 집약시키고 그것들을 마음에 담아 준비하게 한다.
토마스 후커(Thomas Hooker, 1586-1647) “묵상은 타락의 침과 힘을 날카롭게 해서 영혼을 더 아프게
찌른다.”고 했다.
‣ 묵상은 죄에 대한 강력한 ‘해독제’요 탐심에 대한 ‘치료약 이다.
‣ 묵상은 영혼에 하나님의 선하심에 대한 생생한 느낌과 감정을 전달하기 때문에 신앙적 의무를 이행할 수 있게 한다.
‣ 묵상은 헛되고 사악한 생각을 예방하는 데 도움을 준다.(렘 4:14, 마 2:35)
‣ 묵상은 오늘날 악한 시대에 우리를 세상과 구별하는 데 도움을 준다.
‣ 묵상은 일상적 삶에 대한 지침(잠 6:21,22)과 유용한 내적 자원들을 제공한다.(시 !77:10-12)
‣
묵상은 믿음 안에서 인내하도록 도움을 준다. 월리암 브리지(William Bridge, 1600-1670)는 묵상은 “우리가
외적, 세속적으로 즐기는 모든 것 속에서 향기롭고 영적인 것으로 우리의 마음을 지켜 준다.”고 했다.
‣ 묵상은 사탄과 시험을 물리치는 강력한 무기다.(시 119:11,15, 요일 2:14)
‣ 묵상은 고통 속에 있을 때 구원의 길을 열어준다.(사 49:15-17, 히 12:5)
‣ 묵상은 영적 교제와 권면으로 다른 사람을 돕게 한다.(시 66:16, 77:12, 145:7)
‣ 묵상은 하나님이 자기 아들을 통해 우리에게 베푸신 온갖 복을 더욱 감사하게 한다.
‣ 묵상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한다.(시 49:3)
정리하면 토마스 브룩스(Thomas Brooks, 1608-1680)가 이렇게 말한 것과 같다. “묵상은 여러분 영혼의
양식이다. 또 묵상은 영적 진리들을 소화하는 진정한 위(胃)이자 참된 열(熱)이다. 만일 사람이 심장이 뛰지 않아도 살 수 있다면
묵상하지 않아도 자신이 읽거나 들은 것을 통해 유익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중략) 가장 훌륭하고 가장 멋지고 가장 지혜롭고
가장 강한 그리스도인으로 인정될 수 있는 자는 가장 잘 읽는 자가 아니라 가장 묵상을 잘하는 자다.”
6. 묵상의 장애물
청교도 지도자들은 묵상의 장애물에 대해 자주 경고했다. 여기서 이런 장애물들과 그에 대한 해결 방법을 들어보자.
(1) 불안정 혹은 무지
이런 사람들은 자신 생각을 하나의 대상에만 고정(固定)할 수 없다고 말한다. 그들의 생각은 가볍고 새의 깃털처럼 이리저리 떠돌아다닌다.
답변 : 불안정하거나 무지하거나 또 생각이 요동한다고 해서 의무에 대한 면죄부(免罪符)가
주어지는 건 아니다. 즉 여러분의 능력 상실이 하나님의 권리 상실을 의미하는 건 아니라는 말이다. 진리가 선포됐을 때 여러분은
아마 묵상을 게을리하고 진리를 사랑하지 않아서 불안정한 상태가 되었을 것이다.
토머스 맨톤은 “죄악 된 불안정한 기질이 하나님에 대한 우리 의무를 무효화 하지는 않는다. 이것은 종이 술에 취했다고 해서 할
일을 면제받는 것이 아닌 것과 같다.”라고 말했다. 성결한 지식을 충분히 비축하고 그 지식을 꾸준히 실천함으로써 문제를
해결하도록 하라. 그리고 이렇게 하는 동안 반드시 성령의 도우심을 의지하라. 그렇게 할 때 여러분은 묵상이 더 수월하고 더
달콤하게 되는 것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2) 분주함
이런 사람들은 자신들이 세상일에 너무 바빠 묵상의 의무를 철저하고 진지하게 실천할 시간이 없다고 말한다.
답변 : 참된 신앙은 단순히 한가한 시간에 펼쳐지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바쁠수록 더 묵상에 힘써야 한다. 바쁠 때 우리는 하나님 앞에 나아가 묵상할 필요가 더욱 크기 때문이다.
(3) 영적 무감각
이런 사람들은 선한 의도는 있으나 묵상할 때 영혼이 집중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답변 : 마태복음 11:12에 천국은 ’침노하여 빼앗는 자‘가 받는 상이라고 말한다. 왜
여러분은 영원하지 않은 세상에서 얻는 상(유익)을 추구하는 데는 열심이면서 영원한 상(기업)인 영적 추구는 게을리하는가? 영적
잠자기를 즐기는 자는 낡은 옷을 입게 될 것이다.(잠 23:21) 맨톤이 한 말처럼 “부끄러운 고통을 당하는 것보다는 수고하는
것이 낫고, 어둠의 사슬에 묶이는 것보다는 의무의 줄에 묶이는 것이 낫다.”
(4) 세속적 쾌락과 친구
이런 사람들은 자신들이 지나치게 의로운 자가 되는 것은 원하지 않고 그래서 헛된 즐거움과 친구들을 포기하고 싶지 않다고 말한다.
답변 : 이에 대해 메이츠는 이렇게 말했다. “세상 쾌락은 우리 영혼을 불안하게 하고 우리
육체가 묵상 의무를 수행하는 데 부적합한 상태로 만든다. (중략) 이것을 기억하라. 곧 신앙의 즐거움은 감각적인 모든 쾌락과
비교할 수 없다는 사실을 말이다.”
(5) 마음의 거역
이런 사람들은 이처럼 힘든 의무의 멍에를 메고 싶지 않다고 말한다. 그들은 죄책(罪責)을 젊어지고 하나님과 대면하는 것에 대해 두려움을 갖고 있다.
답변 : 이에 대해 맨톤은 “그리스도의 피를 진지하게 적용하여 양심을 깨끗하게 하고 묵상을
비롯해 은혜의 수단들의 멍에를 메라!”고 권면했다.(시 19:14) 묵상을 빼먹은 결과는 심각하다고 칼라미는 경고했다. 그 결과
마음이 완고해진다.
하나님의 약속과 경고들이 왜 우리에게 별로 영향을 미치지 못하게 될까? 하나님의 약속과 경고들에 대해 우리가 묵상하지 않기
때문이다. 왜 우리가 하나님이 베푸신 복을 감사하지 못할까? 왜 하나님의 섭리와 고난이 우리의 삶 속에서 경건의 열매를 맺지
못할까? 왜 우리가 말씀과 성례에서 유익을 얻지 못하고 왜 우리가 다른 사람을 판단하며 왜 우리가 영원을 준비하는 데 그토록
빈약할까?
그것은 묵상하지 않는 데 가장 큰 원인이 있다. 우리는 묵상 훈련을 해야 한다. 대다수 청교도 목회자들이 그렇게 말했다.
그러나 청교도 시대에도 상대적으로 묵상 훈련을 자신의 의무로 본 사람은 거의 없었다. 백스터는 이렇게 말했다. “많은 사람이
설교, 금식, 공적 및 사적 기도 등을 빼먹으면 혼란을 느끼나 묵상을 빼먹고는 혼란을 느끼지 않는다. 그들은 한평생 지금까지
그렇다.”
결론
– 자기 성찰로서의 묵상 –
청교도에게 묵상은 은혜의 특별 수단 이상의 것이었다. 묵상은 청교도의 헌신을 위한 포괄적인 방법이었다. 곧 성경적, 교리적,
경험적, 실천적인 방법이었다. 묵상 신학은 바울과 아우구스티누스와 칼빈 신학이었다. 묵상 주제는 성경이라는 책, 피조물이라는
책, 양심이라는 책에서 나왔다.
월리엄 브리지가 말한 것처럼 묵상은 영혼이 어떤 것을 열렬히 그리고 긴밀하게 적용하는 것으로 묵상을 통해 사람의 지성을 그
일을 깊이 생각하고, 자신의 유익과 이득을 위해 그 일에 거하고 고정되며 결국 그것은 하나님의 영광으로 나아간다.
청교도는 전형적으로 자신들이 쓴 묵상에 대한 글에서 독자에게 자기 검토를 요청하는 것으로 끝을 맺고 있다. 이 자기 검토는 다음과 같은 요소로 이루어진다.
(1) 시험
‣ 여러분의 묵상이 ‘살아 있는 신앙’을 행사하는 데서 연원(連原)하고 있는가? 참된 묵상은 신앙의 실천과 불가분리적(不可分離的)이다. 여러분은 새뮤얼 워드가 다음과 같이 설명한 것처럼 묵상하는가?
“묵상할 때 하나님과 대화하도록 그대의 영혼을 각성시키라. 그대가 습관적으로 믿고 있는 약속과 권면들이 무엇인지 확인해 보고
이제부터는 그것들을 진심으로 생각해 보라. 곧 그대 영혼의 미각으로 달콤함을 느낄 때까지 그것들을 그대의 혀로 굴려 보고 그걸
씹으라. 그것들을 전체적으로, 여러 번에 걸쳐 바라보라. 때로는 하나를 숙고하고 때로는 다른 하나를 더 깊이 생각해 보라. 이것은
배우자가 동산을 거닐면서 열매를 따 먹도록 부르는 것으로 단순하게 말하면 내가 믿음을 사용하고 믿음으로 사는 것으로 부르는
것이다.”
‣ 여러분의 마음속에 있는 이 영적 생각들이 그대의 삶 속에서 거룩함을 낳고 있는가? 하나님 생각이 싫증 난다는 건 귀신들처럼 된다는 것임을 명심하라.(약 2:19)
(2) 책망과 권면
‣ 불신자에게 : 하나님이 여러분을 이성적인 피조물로 만드셨을 때 하나님이 여러분이 생각을 이기적이고 죄를 범하는 데
사용하도록 의도했겠는가? 여러분의 모든 생각 속에 왜 하나님이 없는가? 이에 대해맨톤은 이렇게 물었다. “그대는 하나님과
그리스도에 대해 생각해 본 적이 없는가?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과 영원한 영광이 그대가 해 볼 최고의 생각으로 가치가 없는가?
그대는 다른 일들 – 속된 일, 아주 유치한 일 – 에 대해서는 충분히 생각하고 충분히 시간을 내면서 하나님과 그분의 말씀에
대해서는 왜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가?”
‣ 신자에게 : 묵상을 게을리하면 우리는 두려움과 근심에 직면할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에 대해 묵상하지 않고 죄악 된 일들을
생각한다는 그것은 얼마나 하나님을 욕되게 하는 것인지 아는가? 농부는 자신의 땅에 대해, 의사는 자신의 환자에 대해, 법률가는
자신이 맡은 소송사건에 대해, 가게 주인이 자신의 판매 상품에 대해 심사숙고한다면 그리스도인들은 자신들의 하나님과 구주에 대해
묵상하는 것이 당연하지 않겠는가?
청교도는 우리에게 이렇게 말할 것이다. “여러분이 계속 묵상을 게을리하면 하나님에 대한 여러분의 사랑은 곧 약화 되거나
파괴되고 말 것이다. 하나님에 대해 생각하는 게 불쾌한 일이 되고 말 것이다. 죄를 즐거운 것으로 간주할 정도로 죄에 대해 문을
열어 놓고 말 것이다. 그 결과는 온갖 종류의 시험과 유혹 앞에서 상처를 입고 무너지기 쉬울 것이다. 요약하면 여러분은
하나님에게서 멀리 떨어져 나가게 될 것이다. 레이뉴가 말한 것처럼 “어떤 경건의 의무도 우리에게 먼저 다가오는 것은 없다. 우리가
다가가야 한다.”
마지막으로 여기서 토머스 왓슨의 권면을 주목해 보자. “여러분이 이전에 묵상을 게을리했다면 그 게으름을 슬퍼하고 이제부터는
양심에 부끄럽지 않게 해야 한다. 경건한 묵상을 통해 여러분 자신을 하나님께 묶어두라.(적어도 하루에 한 번) 이 산을 올라가라.
정상에 도달하면 여러분 앞에 멌진 광경 곧 그리스도와 천국이 보일 것이다.(*)
글쓴 이 / 조엘 비키(Joel R. Beeke, 퓨리탄리폼드신학대학원(Puritan Reformed Theological
Seminary) 학장, 조직신학 교수, 그랜드래피즈 네덜란드개혁교회(The Heritage Netherlands Reformed
Congregation) 담임목사 출처, 조엘 비키, 마크 존스 지음 / 김귀탁 옮김, ‘청교도 신학의 모든 것’ (서울.
부흥과 개혁사) 2017, pp. 1010-1031.
12월 31일(수) 에베소서 1-3장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속 사람(3:16)
그 영광의 풍성을 따라 그의 성령으로 말미암아 너희 속 사람을 능력으로 강건하게 하옵시며.
I pray that out of his glorious riches he may strengthen you with power through his Spirit in your inner being.
에베소서의 특징은 교회론에 관한 말씀이며 또한 옥중서신에 해당합니다.
옥중서신에는 "에베소서, 빌립보서, 골로새서, 빌레몬서"를 말합니다.
사도 바울은 사람을 두 종류로 구분하여 설명합니다.
첫째는 속사람(Inner Self)
둘째는 겉사람(Outer Self)
속사람은 영혼, 정신, 마음, 인격의 중심을 의미하며, 하나님의 성령이 거주하는 곳을 말합니다.
겉사람은 육체, 외모, 세상의 가치관 등 눈에 보이는 부분으로 시간의 흐름에 따라 낡아지고 쇠약해집니다.
겉사람이 늙고 병들어도 속사람이 강건하면 낙심하지 않고, 세상의 환난을 이겨낼 힘을 얻습니다.
그러므로 믿음이란 말씀과 기도를 통해 성령의 능력으로 강건해지고, 날마다 새로워지며, 사랑과 감사가 넘치게 되는 것을 말합니다.
속사람(內的人)을 강건하게 하는 방법
첫째, 말씀을 읽고 묵상하며 성령의 인도하심을 사모합니다.
둘째, 기도와 찬양을 통해 하나님과 교제합니다.
셋째, 세상에서 사랑을 실천합니다.
넷째, 세상의 유행보다 영적인 성장에 집중합니다.
세상의 헛된 것들을 부러워하지 맙시다.
오직 하나님 나라에서 받을 상급을 기대합시다.
먼저 가정에서 행복을, 교회에서 기쁨을, 세상에서 보람을 얻는 신령한 삶의 주인공이 됩시다.
2025년을 마감하고 2026년을 맞이하면서 속사람을 새롭게 하는 복된 한 해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
영적 삶의 핵심 : 외적인 신앙생활보다 내면의 변화(마음)가 중요하며, 하나님은 중심을 보시기 때문입니다.
-
세상 역경 극복 : 세상의 유혹, 고난, 죽음 앞에서도 영원한 소망을 갖고 승리할 수 있는 힘의 원천입니다.
-
참된 변화 : 겉모습을 꾸미는 대신 속사람의 영성을 가꾸고 업그레이드하는 것이 진정한 영적 성숙입니다.
속사람을 강건하게 하는 방법
- 말씀을 읽고 묵상하며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름.
- 기도와 찬양을 통해 하나님과 교제함.
- 믿음의 공동체 안에서 사랑을 실천함.
- 세상의 유행보다 영적인 성장에 집중함.
속사람(內的人)이란?
성경과 신학에서 속사람은
-
겉모습이나 육체가 아닌
-
마음, 영, 인격, 양심, 믿음의 중심을 가리키는 표현입니다.
📖 관련 성경 구절
-
고린도후서 4:16
“겉사람은 후패하나 속사람은 날로 새로워지도다”
-
에베소서 3:16
“그의 영으로 말미암아 속사람을 능력으로 강건하게 하옵시며”
➡️ 의미 정리
만약 다른 단어를 의도하신 거라면, 조금만 더 써 주세요.
속사람은 성경에서 매우 중요한 개념입니다.
1️⃣ 속사람의 의미
속사람은 겉모습이나 육체(겉사람)가 아닌,
👉 마음·영·양심·인격·믿음의 중심, 곧 하나님 앞에서의 참된 나를 뜻합니다.
히브리적 사고에서는 인간을 분리된 부분이 아니라
하나님과 관계 맺는 전인격적 존재로 보며,
속사람은 그 중심을 가리킵니다.
2️⃣ 성경 속 속사람
📖 고린도후서 4:16
“그러므로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겉사람은 후패하나
속사람은 날로 새로워지도다”
📖 에베소서 3:16
“그의 영으로 말미암아 속사람을 능력으로 강건하게 하옵시며”
📖 로마서 7:22
“내 속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 속사람은 성령의 역사로 새로워지고 강건해지는 영역입니다.
3️⃣ 신앙적 의미
-
신앙 성숙은 겉사람의 성공이 아니라
속사람의 변화로 측정됩니다.
-
고난과 연약함 속에서도
속사람은 오히려 더 깊어질 수 있습니다.
-
하나님은 우리의 외형보다 마음의 중심을 보십니다.
📖 사무엘상 16:7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여호와는 중심을 보시느니라”
4️⃣ 오늘의 적용
-
나는 무엇을 더 가꾸고 있는가? 겉사람인가, 속사람인가
-
말씀·기도·회개·순종은 속사람을 살찌우는 은혜의 통로입니다
-
하루의 분주함 속에서도
속사람이 하나님을 향해 살아 있는지 점검해 보세요
수요성서학당 #. 14(09-16-20)
겉 사람과 속 사람(고린도후서 4:16, 에베소서 4:22-24)
고린도후서 4:16
그러므로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겉사람은 후패하나 우리의 속은 날로 새롭도다.
Therefore we do not lose heart. Though outwardly we are wasting away, yet inwardly we are being renewed day by day
공동번역 / 그러므로 우리는 낙심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외적 인간은 낡아지지만 내적 인간은 나날이 새로워지고 있습니다.
현대인의 성경 / 그러므로 우리는 낙심하지 않습니다. 비록 우리의 겉 사람은 쇠약해 가지만 우리의 속사람은 날마다 새로와지고 있습니다.
새번역 / 그러므로 우리는 낙심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겉사람은 낡아가나, 우리의 속사람은 날로 새로워집니다.
- 겉 사람과 속 사람을 구별하는 기준은 "시간" 이라고 하겠습니다.
시간이 지나면 지날 수록 겉 사람은 누구나 약하여지고 쇠하여 갈 것입니다.
반면에 속 사람은 정신을 차리기도 하고 철이 들기도 하고 반성하며 후회하면서 새로운 사람으로 살아가려고 결단합니다.
- 옛 사람과 새 사람을 구별하는 기준은 "신앙" "거듭남" "중생" "구원" 이라고 하겠습니다.
구원을 받은 후에도 내 안에서 옛 사람의 삶의 습관이 나를 힘들게 합니다.
사도 바울은 이와 같은 모습을 일컬어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라"고 탄식했습니다.
그러나 성령으로 충만케 된 후에는 "나의 달려 갈 길을 다 가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렇게 고백합니다.
* 자연인의 반대는 "문화인" 또는 "문명인"
그러나 기독교에서는 "그리스도인"이라고 한다.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의 영을 소유한 사람이다.
자연인의 겉 사람은 육체의 소욕을 따라가는 사람
자연인의 속 사람은 정신적인 가치를 추구하는 사람
* 자연인과 문화인 그리고 그리스도인 모두에게 겉 사람은 동일한 모습이다.
모두 시간이 지날수록 육체는 쇠약해질 수밖에 없다.
그러나 속 사람은 목적과 추구하는 것이 다르다.
속사람은 새로워 집니다.
어떻게 새로워 집니까?
자연인의 속 사람은 "정신을 차린다" "철이 들었다"
그리스도인의 경우는 "회개" "깨닫는다"고 합니다.
에베소서 4:22-24
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좇는 옛 사람을 벗어 버리고
오직 심령으로 새롭게 되어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
You were taught, with regard to your former way
of life, to put off your old self, which is being corrupted by its
deceitful desires;
to be made new in the attitude of your minds;
and to put on the new self, created to be like God in true righteousness and holiness.
용어 영어 성구 헬라어 의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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겉 사람 |
outward man, outwardly, outer man |
고후 4:16 |
ἔξ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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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에 끌리는 사람 |
속 사람 |
inwardly, inward man, inner man |
고후 4: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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ἔσω |
영에 끌리는 사람 |
옛 사람 |
the old man, the old self |
엡 4: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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παλαιός |
중생 이전의 사람 |
새 사람 |
the new self, the new man |
엡 4:24 |
καινός |
중생 이후의 사람 |
대부분의 설교자는 겉 사람은 옛 사람이며, 속 사람은 새 사람이라고 설명합니다.
그러나 성경을 자세하게 읽어보면 옛 사람과 새 사람은 거듭난 후에 나타나는 삶의 양식으로 옛 사람의 삶을 완전히 버리지 못한 상태가 지속되므로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야 합니다.
겉
사람과 속 사람이란 모든 사람에게 해당되는 모습으로 구원을 받은 사람이나 구원 받지 못한 사람에게서 나타나는 삶의 양식으로 겉
사람은 육체 끌리는 삶의 양식이라면 속 사람은 영에 끌리는 삶의 양식 즉 선한 양심에 의하여 갈등하며 고민하는 모습이라고
하겠습니다.
NEET족 ; Not in Education, Employment, Training
(한국어로 방콕족)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의 의미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자신의 철저한 무가치함과 무능력을 깨닫는 것을 의미한다.
자신의 철저한 무가치함을 깨달은 자는 자신에게 선한 것이라고는 하나도 없고 오직 죄 지은 것만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고 전율한다.
자신의 철저한 무능력을 깨달은 자는 자신을 구원하기 위해 자기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전에도 없었고 앞으로도 없다는 사실을 알고 한 없이 슬퍼한다.
그리고 그는 자신의 구원을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능력과 하나님께서 주시는 한없는 사랑과 은혜에만 의지한다.
무덤 속의 나사로는 죽은 지 나흘이나 되어 부패한 냄새를 풍기고 있었다.
그러나 그가 부활한 것은 “나사로야 나오라!”는 예수님의 말씀이 선포된 것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이 된 자는 자기도 그렇게 구원받았음을 시인하고 고백하는 자이다.
죽은 시체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나사로는 무덤에서 걸어 나온 후에도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그의 몸은 수의로 칭칭 감겨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 그에게 예수께서는 “풀어놓아 다니게 하라”고 말씀하셨다.
참된 그리스도인으로 거듭난 자는 자기가 구원 받기 전에는 물론, 구원 받은 후에도 행한 것이라고는 죄짓는 것 밖에 없었다는 사실을 깨닫고 절망한다.
그리고 그는 물속으로 빠져 들어가고 있는 베드로처럼 절규한다.
“주여 나를 구원하소서!”
율법주의자와 행위주의자들
어떤 형태로든 자기의 의를 주장하는 자들은 아직 그리스도인이 되었다 할 수 없는 자들이다.
그들은 예수 믿는다고 말하는 이교도들일 뿐이다.
그들이 참으로 예수를 믿고 거듭나는 때는 자신의 철저한 무가치함과 무능력을 깨닫고 겸손히 고백하는 때이다.
그 때가 어서 왔으면 참 좋겠다.
그러면 하늘나라에서는 회개할 것 없는 의인 아흔 아홉보다 그들로 인해 큰 기쁨의 잔치가 열릴 것으로 믿는다.
인생을 살면서 많은 선생님을 만납니다.
선생님들의 역할은 중요합니다.
그러나 모든 선생님이 내 인생에서 중요한 존재는 아닙니다.
‘박군의 마음’ 이라는 전도지
박군이라는 청년에게 전도를 하는 내용인데 박군의 마음속에 있는 일곱 가지 악한 성향, 죄를 짐승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 일곱 짐승이 차지하고 있는 마음을 주님이 온전하게 들어오심으로 일곱 짐승이 다 나가고 아름답고 선한 마음이 되는 것을 설명한 전도지입니다.
영적 전쟁을 아주 쉽고 간단하게 묘사하고 있는데, 아마 이 전도지를 처음 만든 사람은 영적으로 많이 열려진 사람일 것입니다.
그 일곱 가지 짐승의 마음은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수다쟁이 영 / 개구리
말이 많은 사람은 그 사람의 안에서 개구리가 쉬지 않고 개굴개굴 하고 울어대고 있는 것입니다.
성경에도 개구리는 입에 관련된 것으로 설명됩니다(요한계시록 16:13).
또 내가 보매 개구리 같은 세 더러운 영이 용의 입과 짐승의 입과 거짓 선지자의 입에서 나오니.
말이 많은 사람은 절제하지 못하고 수없는 말들을 입에서 쏟아냅니다.
그리하여 영적 에너지를 잃게 하고 주변에 악한 기운으로 가득하게 만듭니다.
이러한 이들은 침묵을 배우고 입술로 주님을 찬양하고 높여야 합니다.
주님께 받은 은혜를 나누는 대화가 있는가 하면, 세상을 사랑하고 세속에 깊이 물든 대화가 있습니다.
덕을 세우는 말이 있는가 하면, 남을 비방하고 또는 상처가 될 수 있는 날카로운 말도 있습니다.
다툼이 있는 곳에는 절제되지 못한 말들이 있습니다.
성경 곳곳에 말의 중요성이 나옵니다.
축복의 말은 반드시 축복으로 돌아오지만 저주의 말을 하면 나쁜 저주가 임합니다.
이것이 혀의 권세입니다(잠언 18:21).
말한 대로 열매를 맺습니다.
죽고 사는 것이 혀의 권세에 달렸나니 혀를 쓰기 좋아하는 자는 그 열매를 먹으리라.
둘째, 교만의 영 / 공작새
공작새가 그 날개를 활짝 펴서 자랑을 하듯이 교만의 영을 가진 이들은 자신의 아름다움을 드러내고 자랑하고 싶어 합니다.
자기가 선하고 지식이 많으며 영적이라고 자랑하고 싶어 합니다.
이러한 이들은 회개하지 않으면 멸망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뿐 아니라 교만은 스스로를 높이는 것입니다.
과거에 바벨탑을 쌓았던 사람들이 이 잘못을 저질렀습니다.
하나님을 버리고 자신들의 왕국을 세우려고 했습니다.
또 다시 대홍수가 일어나도 살아남을 수 있도록 높은 탑을 쌓은 것입니다.
하나님을 버리고 그분의 말씀과 뜻을 거역하고 하나님 없이도 잘 살수 있다고 믿으며 사는 사람이 교만한 사람입니다.
불신앙이 가장 큰 교만의 죄입니다.
하나님을 안 믿으면 지옥에 가지요. 이 사실이 부당한가요?
하나님을 알만한 지식이 사람들 안에는 있습니다.
하나님은 없다고 주장하는 사람들, 심지어 공산당들도 죽을 위기를 만나면 어떻게 하는 줄 아세요?
"하나님, 잘못했어요. 하나님, 제발 한번만 살려주세요!" 이렇게 나옵니다.
무신론자라도, 부처를 섬기는 사람이라도 죽기 직전엔 하나님을 찾아요.
그러나 하나님을 거역하고자 하는 악독한 마음이 있기 때문에 순순히 그분을 따르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무시하고 거절하는 것입니다.
잠언 16:18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요 거만한 마음은 넘어짐의 앞잡이니라.
셋째, 간교한 영 / 뱀
뱀은 간교한 영을 상징합니다.
“하나님이 지으신 들짐승 중에 뱀이 가장 간교하더라.”(창세기 3:1).
간교한 영의 사람은 지혜가 많고 머리가 좋아서 말을 잘 하며 사람들을 잘 속입니다.
잘못을 해도 상대방이 그것을 추궁하면 교묘하게 변명하여 오히려 상대방이 잘못한 것으로 만들어 버립니다.
이 영은 “배신의 영”과도 연결되어 있으며 “유혹의 영”과도 연결되어 있습니다.
이들은 강자 앞에서 약하며 약자 앞에서 잔인합니다. 영안이 열린 이들에게 이들은 뱀의 형상으로 보이게 됩니다.
야곱은 속임수에 능한 사람이었습니다.
겨우 한 끼 먹을 팥죽으로 형의 장자의 명분(권리)을 빼앗았습니다.
그의 지혜는 분명히 타고난 것입니다.
하지만 바르게 사용하지 않을 때, 그것은 악한 영의 도구가 됩니다.
간사하게 부리는 꾀는 하나님이 기뻐하시지 않기 때문에 다듬어져야 합니다.
야곱은 그로 인해 험한 세월을 보내게 되었습니다.
골로새서 2:8
누가 철학과 헛된 속임수로 너희를 노략할까 주의하라 이것이 사람의 유전과 세상의 초등 학문을 좇음이요 그리스도를 좇음이 아니니라.
넷째, 음란한 영 / 염소
염소는 성적으로 더러우며 정욕이 강하다고 합니다.
성적으로 문란한 이 시대에 음란을 피해가기란 정말 어렵습니다.
기술이 발전하면서 과거에 비해 생활이 많이 편리해졌습니다.
과거에 없던 것들이 새로 생겨나고 있습니다.
하지만 거기에 따른 문제도 심각한 문제로 발전하고 있습니다.
편리한 도구들은 우리의 생활을 풍성하게 해줍니다.
정보를 빠르게 얻을 수 있어요. 하지만 이것이 문제입니다.
죄를 짓는 데에도 쉽고 빠릅니다.
음란과 세속에 빠지는 죄는 지금 매우 심각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데살로니가전서 4:3
하나님의 뜻은 이것이니 너희의 거룩함이라 곧 음란을 버리고.
베드로전서 4:3
너희가 음란과 정욕과 술 취함과 방탕과 연락과 무법한 우상 숭배를 하여 이방인의 뜻을 좇아 행한 것이 지나간 때가 족하도다.
다섯째, 혈기의 영 / 호랑이(사자)
사자 또는 호랑이는 분노의 영 또는 화의 영을 상징합니다.
속에서 폭발적으로 분노와 혈기가 일어나는 이들은 속에 호랑이나 사자가 으르렁거리고 있는 것입니다. 이 영을 가지고 있는 이들은 성질이 강하고 사나워서 가까이 하기 어려운 사람들입니다.
“마귀가 우는 사자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베드로전서 5:8)
성경에서 최초의 살인 사건은 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을 돌로 쳐 죽인 것입니다. 가인은 동생 아벨을 왜 죽였을까요? 미움과 혈기를 참지 못해서 죽였습니다.
따돌림과 괴롭힘이 학교에서 왜 일어날까요? 혈기 내는 영이 사람 안에 있어서 그렇습니다.
에베소서 4:26
분을 내어도 죄를 짓지 말며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말고.
디모데전서 2:8
그러므로 각처에서 남자들이 분노와 다툼이 없이 거룩한 손을 들어 기도하기를 원하노라.
여섯째, 탐욕의 영 / 돼지
돼지의 영을 “탐욕의 영”이라고 합니다. 돼지의 영이 내 안에 들어오면 끊임없이 욕심을 부리며 그 욕망으로 인하여 멸망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러한 사람은 아무리 가진 것이 많이 있어도 남들에게 자기가 가진 것을 주려고 하지 않으며 더 많이 얻으려고 합니다.
나발이란 사람은 부자이었지만 다른 사람에게 베푸는데 인색했습니다. 굶주린 다윗과 그의 일행을 먹이기는커녕 조롱하는 말로 다윗을 노하게 했지요. 그리고 어떻게 되었나요? 그는 몸이 돌처럼 굳어져 며칠 후 죽었습니다.
누가복음 12:15
저희에게 이르시되 삼가 모든 탐심을 물리치라 사람의 생명이 그 소유의 넉넉한데 있지 아니하니라.
골로새서 3:5
그러므로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 곧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이니 탐심은 우상 숭배니라.
일곱째, 게으름의 영 / 거북이
거북이와 같은 게으름의 영의 지배를 받으면 항상 나태하고 게을러서
모든 것을 미루며 일하는 것을 싫어합니다. 이러한 사람은 사명을 받았어도 제대로 감당하지 않기 때문에 주님으로부터 “악하고
게으른 종아(You wicked, lazy servant!)” 라는 책망의 말씀을 듣게 될 것입니다.
마태복음 25:26∼30
그
주인이 대답하여 가로되 악하고 게으른 종아 나는 심지 않은데서 거두고 헤치지 않은데서 모으는 줄로 네가 알았느냐? 그러면 네가
마땅히 내 돈을 취리하는 자들에게나 두었다가 나로 돌아 와서 내 본전과 변리를 받게 할 것이니라 하고. 그에게서 그 한 달란트를
빼앗아 열 달란트 가진 자에게 주어라. 무릇 있는 자는 받아 풍족하게 되고 없는 자는 그 있는 것까지 빼앗기리라. 이 무익한 종을
바깥 어두운데로 내어 쫓으라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 하니라.
46절, 저희는 영벌에, 의인들은 영생에 들어가리라 하시니라.
죄의 종류와 마귀의 역사는 수도 없이 많지만 이 죄들은 사람의 마음 안에 자리잡고 있는 대표적인 일곱 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디모데전서 2:4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데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who wants all men to be saved and to come to a knowledge of the truth.
베드로후서 3:9주의 약속은 어떤이의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 같이 더딘 것이 아니라 오직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치 않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The Lord is not slow in keeping his promise, as some
understand slowness. He is patient with you, not wanting anyone to
perish, but everyone to come to repentance.
디도서 3:4-6 우리
구주 하나님의 자비와 사람
사랑하심을 나타내실 때에
우리를 구원하시되 우리의 행한바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지 아니하고 오직 그의 긍휼하심을 좇아 중생의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으로 하셨나니
성령을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풍성히 부어 주사.
새 사람은 도덕과 윤리에 의한 것이 아니라 오직 성령으로 새롭게 합니다.
그러므로 성령의 사람 즉 성령의 지배를 받는 삶을 사모하고 기도하며 그 삶을 실천해야 합니다.
시편 104:30주의 영을 보내어 저희를 창조하사 지면을 새롭게 하시나이다.
에베소서 4:23오직 심령으로
새롭게 되어.
시편 51:10하나님이여 내 속에 정한 마음을 창조하시고 내 안에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하소서.
골로새서 3:10새 사람을 입었으니 이는 자기를 창조하신 자의 형상을 좇아 지식에까지
새롭게 하심을 받는 자니라.
요한계시록 21:5보좌에 앉으신 이가 가라사대 보라 내가 만물을
새롭게 하노라.
사람과 속사람의 뜻과 차이점
들어가는 글
성경을 읽다 보면 "겉사람"과 "속사람"이라는 표현이 등장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 개념은 특히 사도 바울의 서신에서 강조되며, 기독교 신앙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닙니다. 그렇다면 겉사람과 속사람이란 무엇을
의미하며, 이 둘의 차이는 무엇일까요? 본 글에서는 성경에서 사용된 겉사람과 속사람의 뜻을 살펴보고, 신앙생활에서 우리가 어떻게
적용할 수 있는지 정리해 보겠습니다.
1. 겉사람과 속사람의 성경적 의미
1) 겉사람의 의미
- 겉사람(outer man)은 우리의 육체적, 물질적, 외적인 존재를 의미합니다.
- 사도 바울은 고린도후서 4:16에서 "그러므로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우리의 겉사람은 날마다 후패하나 우리의 속사람은 날로 새로워지도다"라고 말했습니다.
- 이 말씀에서 겉사람은 시간이 지나며 쇠퇴하고 연약해지는 육체적인 부분을 가리킵니다.
2) 속사람의 의미
- 속사람(inner man)은 영적인 존재로서,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성장하고 변화하는 내면을 의미합니다.
- 에베소서 3:16에서 바울은 "그의 영광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성령으로 말미암아 너희 속사람을 능력으로 강건하게 하시오며"라고 말하며, 속사람이 성령을 통해 강건해질 수 있음을 가르칩니다.
2. 겉사람과 속사람의 차이
1) 본질적인 차이
-
겉사람: 육체, 감각, 외적인 삶과 관련됨
-
속사람: 영혼, 믿음, 내적인 삶과 관련됨
2) 시간의 흐름에 따른 변화
- 겉사람은 시간이 지나면서 노화하고 쇠퇴합니다.
- 속사람은 시간이 지나면서 더욱 강건해질 수 있으며, 하나님과의 교제 속에서 성장할 수 있습니다.
3) 삶의 방향성과 목적
- 겉사람은 세상의 기준과 욕망을 따르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 속사람은 하나님을 따르며, 영적인 가치를 중심으로 살아갑니다.
3. 신앙생활에서의 적용
1) 겉사람을 의지하지 말고 속사람을 성장시키기
- 우리는 육체적인 건강과 외적인 삶을 중요하게 여기지만, 더욱 중요한 것은 내면의 성숙입니다.
- 성경 묵상, 기도, 예배를 통해 속사람을 강화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2) 성령을 통한 속사람의 강건함
- 속사람은 성령의 도우심을 통해 변화됩니다.
- 갈라디아서 5:16에서 "너희는 성령을 따라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고 말합니다.
-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을 때 속사람이 더욱 강건해집니다.
4. 겉사람과 속사람의 조화로운 삶
1) 영적인 우선순위 세우기
- 세상에서 살아가는 동안 육체적인 필요도 중요하지만, 영적인 성장을 우선시해야 합니다.
- 마태복음 6:33에서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고 하신 말씀을 기억해야 합니다.
2) 삶의 중심을 속사람에 두기
- 우리의 신앙은 단순히 겉모습이 아니라, 마음과 내면에서 진정한 변화를 경험하는 것입니다.
- 예수님께서도 바리새인들을 향해 겉모습만 신경 쓰는 신앙을 경계하셨습니다(마태복음 23:27).
결론 정리
겉사람과 속사람의 개념은 단순한 이분법이 아니라, 신앙생활에서 우리가 무엇을
우선시해야 하는지를 가르쳐 줍니다.
겉사람은 육체적이고 유한하지만, 속사람은 영적이며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자라갑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겉사람에 매이기보다, 속사람을 성장시키는 데 힘써야 합니다.
매일 말씀과 기도로 속사람을 강건하게 하며, 하나님과 더
깊은 관계를 맺는 삶을 살아가길 바랍니다.
겉사람 (Outer Man) 재료 - 흙
겉사람은 우리의 육신적인 존재를 의미합니다.
즉, 시간이 지남에 따라 늙고, 약해지고, 병들 수 있는 우리의 몸을 가리킵니다.
세상의 고난과 시련, 박해 등으로 인해 쇠퇴하고 소모되는 우리의 외적인 면모를 나타냅니다. 고린도후서 4장 8-9절에서 바울이 “우리가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박해를 받아도 버린 바 되지 아니하며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하고”라고 말한 것처럼, 겉사람은 이러한 어려움 속에서 고통받고 손상될 수 있습니다.
반면에 속사람은 우리의 영적인 존재, 즉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새롭게 된 우리의 영혼과 마음을 의미합니다.
속사람은 육신이 쇠퇴할수록 오히려 날마다 새로워지는 특징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는 성령의 역사와 하나님의 은혜를 통해 내면이 강건해지고, 믿음이 깊어지며, 영적으로 성장하는 것을 뜻합니다.
세상의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능력과 위로로 인해 강해지는 내면의 상태를 나타냅니다.
고린도후서 4장 16절의 의미
고린도후서 4장 16절은 “그러므로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우리의 겉사람은 낡아지나 우리의 속사람은 날마다 새로워지는도다”라고 말합니다. 이는 성도들이 육체적인 고난과 어려움을 겪으면서도 낙심하지 않을 수 있는 이유가 바로 속사람의 새로워짐에 있다는 것을 강조합니다.
즉, 외적인 환경이나 육체적인 상태가 아무리 힘들고 어려워도, 우리의 내면은 하나님의 은혜로 인해 끊임없이 회복되고 성장하며 강해진다는 위로와 소망의 메시지를 담고 있습니다.
겉사람과 속사람(고린도후서 4:16-18)
1. 겉사람의 한계: 우리는 왜 채워지지 않는 갈증을 느낄까요?
2030 세대에게 '갓생(God-생)'은
중요한 키워드입니다. 남들에게 보여지는 스펙, 외모, 경제력을 위해 치열하게 살죠. 이것이 성경이 말하는 **'겉사람'**의
영역입니다. 흙으로 빚어진 육체, 감각으로 세상을 느끼는 나 자신이죠.
하지만 문제는 이 겉사람이 '유효기간'이 있다는 점입니다. 아담의 타락 이후, 인간은 하나님과의 연결이 끊기며 방향 감각을 잃었습니다. 겉은 화려해 보여도 속은 텅 빈 '번아웃' 상태가 되는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성경 말씀 "우리가 육신에 있을 때에는 율법으로 말미암는 죄의 정욕이 우리 지체 중에 역사하여 우리로 사망을 위하여 열매를 맺게 하였더니" (로마서 7:5)
[실제 예화]
세계적인 팝스타나 성공한 기업가들이 화려한 무대 뒤에서 우울증과 공허함을 고백하는 뉴스를 자주 접합니다. 모든 것을 가졌음에도
'내가 누구인지, 왜 사는지'를 몰라 방황하는 모습은, 영혼(속사람)이 죽어 육체(겉사람)의 감각에만 의존하며 사는 인간의 비극을
단적으로 보여줍니다. 겉만 가꾸는 인생은 마치 밑 빠진 독에 물 붓기와 같습니다.
2. 속사람의 탄생: 예수 그리스도라는 '새로운 엔진'
죽었던 우리 영혼을 깨우는 유일한 방법은
'수리'가 아니라 '교체'입니다. 낡은 옷을 기워 입는 게 아니라 새 옷을 입는 것이죠.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우리 죄를 대신
지심으로, 우리는 하나님을 '아빠 아버지'라 부를 수 있는 **'속사람'**을 선물 받았습니다.
성경 말씀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영으로 난 것은 영이니" (요한복음 3:5-6)
[실제 예화]
스마트폰의 액정이 아무리 깨끗해도 내부 소프트웨어가 망가지면 벽돌이나 다름없습니다. 반대로 겉은 좀 낡았어도 최신 OS가
설치되어 있다면 강력한 기능을 수행하죠. 예수님을 영접한다는 것은 우리 영혼에 '성령'이라는 새로운 OS를 설치하는 것과
같습니다. 비로소 내가 누구인지, 어디로 가야 하는지 삶의 '네비게이션'이 켜지는 순간입니다.
3. 영적 전쟁: 매일 낡아지는 겉사람, 매일 새로워지는 속사람
예수를 믿어도 갈등은 있습니다. 내 마음은
하나님을 향하고 싶은데, 내 몸은 자꾸 세상 유혹을 따라가려 하죠. 바울 사도조차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라고 탄식했을
정도입니다. 이때 필요한 것이 **'매일 죽는 연습'**입니다.
성경 말씀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사람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 (로마서 8:14)
[실제 예화]
매일 아침 우리는 세수를 하고 거울을 봅니다. 영적인 삶도 마찬가지입니다. 겉사람의 욕망이 고개를 들 때마다 "너는 이미
십자가에서 죽었다!"라고 선포해야 합니다. 운동선수가 근육을 단련하듯, 우리도 말씀과 기도로 속사람의 '코어 근육'을 길러야
합니다. 겉사람은 세월의 흐름에 따라 어쩔 수 없이 낡아지지만(Aging), 속사람은 성령 안에서 매일 더 힙하고
새롭게(Renewing) 성장할 수 있습니다.
💡 2030을 위한 핵심 메시지 3가지
-
눈에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닙니다. 스펙과 외모는 '잠시'뿐이지만, 여러분의 영혼은 '영원'합니다. 낡아질 것에 목숨 거는 인생이 아니라, 영원히 새로워질 속사람에 투자하세요.
-
내면의 갈등을 이상하게 여기지 마세요. 내 안에서 선과 악이 싸우고 있다면, 그것은 당신의 속사람이 살아있다는 증거입니다. 매일 성령님을 '환영하고 인정'하며 그분의 인도를 구하세요.
-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진짜 나'를 찾으세요. 세상이 정의하는 당신이 아니라, 하나님이 "너는 내 귀한 자녀다"라고 말씀하시는 정체성을 붙드세요. 그때 진정한 자유가 시작됩니다.
"우리의 겉사람은 낡아지나 우리의 속사람은 날로 새로워지도다." 오늘도 이 약속을 믿으며, 진짜 나를 깨우는 하루가 되시길 축복합니다!
하나님께서 아담을 지으셨을 때 속사람인 영의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으로 지음을 받았습니다. 성경에 “하나님은 영이시라”고
말씀하신 대로 인간은 영으로 지음을 받았지만 육신 즉 겉사람을 옷입고 살아가게 하셨습니다. 그러나 아담이 하나님께 범죄하여 그 죄
값으로 영의 사람으로서의 속사람이 죽고 육신의 사람인 겉사람이 되고 말았습니다.
1. 타락한 인간
타락한 인간은 영적으로 죽은 인간입니다. 죽었다는 것은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교통이 끊어진 것을 말합니다. 이사야 59장 2절에
“오직 너희 죄악이 너희와 너희 하나님 사이를 갈라 놓았고 너희 죄가 그의 얼굴을 가리어서 너희에게서 듣지 않으시게 함이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영적으로 죽은 아담과 하와는 영이신 하나님과의 교통이 단절되었고 이로인해 신령한 지식이나 체험을 갖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육이 죽은 사람은 세상에 대해서 아무런 반응이 없기 때문에 보지 못하고 듣지 못하고 냄새 맡지 못하고 맛도 못보고
또한 촉감도 없습니다. 죽은 사람이 세상에 일어나는 일을 전혀 알지 못하는 것처럼 영적으로 죽은 사람도 하나님과 교통하지 못하기
때문에 예수님을 아는 지식을 가질 수 없고 성령의 역사하심도 전혀 깨닫지 못하는 것입니다. 동물들이 신앙을 갖지 못하는 것은 영이
없이 현실적인 감각과 본능에 의해서만 살게 되므로 영적인 세계를 지각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영이 없는 동물들은 영적으로 죽어
있는 상태와 같기 때문에 육체의 일만을 지각할 뿐입니다.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대로 지음 받은 인간은 범죄하여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져 교통하지 못하므로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가질 수 없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은 하나님을 조금도 알수 없습니다. 예수님을 알게 하는 진리의 지식이 없으므로 성령님도 모르고 천국과
지옥을 가늠하는 내세의 심판을 알지 못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교통이 단절되므로 하늘나라에 속한 영적 지식이 하나도 없는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2장 14절에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들을 받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것들이 그에게는 어리석게
보임이요, 또 그는 그것들을 알 수도 없나니 그러한 일은 영적으로 분별되기 때문이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직 성령이 오셔서 우리의 영이 소생되어야 영의 세계에 반응할 수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12장 3절에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알리노니 하나님의 영으로 말하는 자는 누구든지 예수를 저주할 자라 하지 아니하고 또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살아있는 생물이 죽으면 부패하여 썩게 되는 것처럼 영적으로 죽게 되면 부패하고 썩어 악취를
내게 됩니다. 흐르지 않는 도랑물은 곧 썩어 온갖 더러운 벌레들이 살게 되듯이 영적으로 죽게 되면 부패함과 썩어짐을 통하여 온갖
귀신과 악령들이 사람의 마음속에 들어와 우글거리게 되는 것입니다. “어떻게 인간의 탈을 쓰고 그처럼 극악한 말과 행동을
하는가”라고 사람들은 말합니다. 그것은 겉으로는 사람으로 얼굴을 갖고 몸을 가지고 있지만 귀신이 그 썩은 영혼에 들어와서 악마화
되었기 때문에 사람이 할 수 없는 말을 하고 행동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시편 14편 1절에 “어리석은 자는 그의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없다 하는도다 그들은 부패하고 그 행실이 가증하니 선을 행하는
자가 없도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영이 죽었기 때문에 부패하고 가증하여 선을 행하는 사람이 없다고 시편기자는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처럼 영이 죽어 겉사람으로 사는 사람은 죄악과 질병과 고통,그리고 사방이 죽음으로 둘러쌓이게 됩니다. 이런 겉사람들이
살고 있는 이 세상은 어느 곳에 가나 죄악이 넘쳐나고 질병과 사망으로 둘러쌓여 있는 것입니다. 시편 38편 4절로 6절에 “내
죄악이 내 머리에 넘쳐서 무거운 짐 같으니 내가 감당할 수 없나이다 내 상처가 썩어 악취가 나오니 내가 우매한 까닭이로소이다 내가
아프고 심히 구부러졌으며 종일토록 슬픔 중에 다니나이다”라고 말씀한 것입니다.
우리가 이 땅 위에서 부귀, 영화, 공명을 얻으면 기쁘고 즐겁고 이를 통해서 소망이 생길것으로 생각하지만 영이 죽은 상태에서는
온전한 기쁨의 샘은 말라버리게 됩니다. 기쁨이 되시는 하나님이 우리의 영속에 들어오실 때 기쁨의 샘이 솟아 오르는 것입니다. 시편
16편 11절에 “주께서 생명의 길을 내게 보이시리니 주의 앞에는 충만한 기쁨이 있고 주의 오른쪽에는 영원한 즐거움이
있나이다”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하나님이 우리 영혼속에 계셔야 우리의 삶은 진실한 기쁨으로 넘쳐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를 믿지 않고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은 그 속에 기쁨의 샘이 없으므로 삶속에 늘 슬픔과 고통이 있을 뿐입니다. 쇼펜하우어는
“인생은 의미가 없다. 그러므로 낳지 않은 것이 행복인데 이미 낳았으니 빨리 죽는 것이 낫다”라고 말했습니다. 싱글턴 역시
“옳은 것도 없고 적당한 것도 없다. 우리는 잿더미 속에서 씨를 뿌리고 먼지 속에서 추수한다”고 말했습니다. 이들은 겉사람의
실상을 말한 것입니다.
사람은 하나님께 범죄하여 영적으로 죽은 상태이기 때문에 죄악과 질병과 죽음에 대한 두려움 속에 살고 있습니다. 이러한 겉사람은
하루도 쉬지 않고 염려, 근심, 낙심, 절망, 슬픔, 미움, 분노, 시기, 질투 등 온갖 마음의 억압으로 답답한 인생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욥기 17장 7절에 “내 눈은 근심 때문에 어두워지고 나의 온 지체는 그림자 같구나”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사는
것이 그림자와 같으므로 삶에 희망이 없고 온 천지가 낙심천지인 것입니다. 이러한 세상이 겉사람이 사는 세상으로 인간관계의 갈등,
억압, 소외, 대결 등이 끝없이 반복되고 있습니다. 계층간, 지역간, 국가간에 분열이 있고 끝없는 갈등과 대결이 있는 것입니다.
겉사람은 이러한 분열과 대립과 갈등을 해결할 도리가 없습니다. 전부 자기 중심으로 살고 자기 욕심으로 사니 서로 부딪치고 대립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한평생을 행복하게 살자고 결혼한 부부도 얼마 가지 아니하여 서로 부딪히고 원망하며 갈라서게 되는 것입니다.
부모 자식간에도 서로 원망, 불평, 탄식하게 되는 것입니다. 속사람이 죽어서 하나님이 없는 사람은 겉사람으로의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시편 38편 11절로 12절에 “내가 사랑하는 자와 내 친구들이 내 상처를 멀리하고 내 친척들도 멀리 섰나이다 내 생명을 찾는
자가 올무를 놓고 나를 해하려는 자가 괴악한 일을 말하여 종일토록 음모를 꾸미오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겉사람이 행하는
일입니다. 겉사람은 자기 상실감을 가지고 희망없이 늙고 병들고 쓸쓸히 죽어 갑니다. 겉사람은 자기가 어디서 와서, 왜 살며,
어디로 가는지 모릅니다. 아무리 많은 학식을 쌓고 또 세상에서 성공한 삶을 살지라도 겉사람으로 사는 사람은 어디서 와서, 왜
살며, 어디로 가는지 전혀 모릅니다. 자기를 잃어 버리고 사는 것입니다. 자기를 잃어버린 사람으로 쓸쓸히 인생의 황혼을 맞이하고
비참하게 죽음을 맞이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겉사람의 운명입니다.
2. 예수님의 구원과 속사람의 부활
영이 죽어 겉사람의 삶을 사는 인생들을 살려주기 위해서 예수님이 이땅에 오셨습니다. 2000년 전에 하나님의 아들이 사람의 몸을
입고 이땅에 온 것은 크나큰 축복입니다. 하나님이 멸망할 수 밖에 없는 인류를 구원하시려고 그 아들을 이 땅에 보내셨고 예수님은
연약한 인간의 몸으로 33년을 사시고 십자가를 짊어지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로마 빌라도의 뜰에서 말뚝에 묶여 등에 채찍을
맞으셨습니다. 죄를 지은적도 없고 죄를 알지도 못한 하나님의 아들이 무자비한 로마군인들의 채찍에 등이 갈기갈기 찢겨지는 고통을
당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고쳐 주시기 위해서 채찍에 맞고 고통을 당하면서도 참았던 것입니다. 지치고 피곤한 가운데 주님은
십자가의 무거운 짐을 지고 골고다로 올라갈 때 넘어지고 또 넘어지고 쓰러지셨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못박혀 6시간 동안
매달리시고 돌아가셨습니다. 보통 사람이라면 자기 죄로 말미암아 대가를 치루는 것이지만 죄 지은적이 없으신 예수님은 우리의 죄와
불의, 추악, 저주와 절망을 십자가에서 우리를 대신하여 짊어지신 것입니다.
이사야 53장 5절로 6절에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야훼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실 때 열두 명이 더 되는 천사에게
명령해서 십자가에서 내려오실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우리를 지극히 사랑하시는 주님은 우리에게 자유와 해방을 주시기 위해서
죽으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멍에 밑에 들어가면 그리스도의 흘리신 보혈의 능력으로 말미암아 우리 영혼이 살아나고
자유와 해방을 선물로 받게 되는 것입니다. 주님은 십자가에 못박혀서 죽어있는 우리의 속사람을 살려 일으키셨습니다. 완전히 죽어서
썩고 부패한 우리의 속사람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보혈로 씻음받고 성령을 통하여 다시 살게 되었습니다.
에베소서 2장 1절로 6절에 “그는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 그 때에 너희는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조를
따르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 전에는 우리도 다 그 가운데서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인하여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너희는 은혜로 구원을 받은 것이라) 또 함께
일으키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히시니”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구원을 선물로
받은 우리는 죽은 영혼이 살아나고 그리스도와 함께 부활, 승천하여 이미 영적으로 하늘에 앉아있는 것입니다.
고린도후서 5장 17절에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라고 말씀하고 있는데 우리의 힘으로는 새것이 될 수 없습니다. 새옷을 입었다고 새것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새집에
이사갔다고 새사람이 되지 않는 것입니다. 오직 우리의 속사람이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살아나서 새것이 되고 새피조물이 되는 것입니다.
겉을 아무리 변화시켜도 소용이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옛사람, 곧 우리의 겉사람을 십자가에 못박고 속사람을 살려
일으켜 주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십자가 멍에 밑에 들어가면 그 십자가의 보배로운 피로 말미암아 죄인된 옛사람은 사라지고 용서받고 의로워진 새사람으로
거듭나게 됩니다. 의인으로 거듭나서 주님과 함께 교통하고 하나님의 영광을 체험할 수 있는 것입니다. 죄의 담이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막아 놓았지만 예수님의 십자가의 보혈이 죄의 담을 헐어 버리고 용서와 의의 옷을 입혀 주시므로 하나님의 영광에 참여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 멍에 밑에 들어가면 모든 세속과 더러움이 사라지고 보혈로 말미암아 성령이 오셔서 우리를
거룩하고 성령충만한 사람으로 만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우리의 힘으로 아무리 거룩하게 되고자 하여도 세상과 죄악으로 묶여 있는 한
거룩함을 이룰 수 없습니다. 오직 예수님의 보혈만이 세상과 죄악에 묶여 있는 사슬을 끊을 수 있습니다. 보혈로 깨끗해진 우리에게
성령이 오시면 비로소 거룩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멍에 밑에 들어가서 믿고 순종하고 나아가면 주님은 그 멍에를
통하여 우리 육신의 연약함을 강하게 하시고 질병을 치료하시므로 우리에게 건강을 허락하여 주시는 것입니다. 주님이 십자가를 통하여
우리의 저주를 짊어지시고 아브라함의 축복을 누릴 수 있도록 허락하신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이 세상에서 헐벗고 굶주리고
피땀을 흘리는 고통스런 삶이 십자가로 인해 변화되고 십자가의 보혈을 통하여 우리를 저주에서 해방시켜 주시고 아브라함의 복으로
넘치게 채워 주시는 것입니다. 그 무엇보다도 주님이 짊어지신 십자가를 바라보고 주님을 따라가면 주님은 십자가의 죽으심과 부활의
능력을 통해서 우리를 영생복락인 천국으로 인도하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3장 16절에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예수께서 사망을 멸하시고 천국에 대한 기쁨과 소망으로 충만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님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다는 것을 인식해야 합니다. 십자가 보혈의 능력으로 새사람이 된 것을 알고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예전에 우리는 육신의 사람밖에 몰랐지만 이제 거듭난 속사람이 육신의 사람안에 살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됩니다. 하지만
그럴수록 육신의 사람과 우리안에 있는 속사람은 분쟁과 갈등을 끊임없이 일으키게 됩니다. 겉사람이 속사람을 충동질하고 유혹하므로
넘어 뜨리려고 하는 것입니다. 이러므로 겉사람의 말을 듣지 말고 겉사람을 제어하고 다스리는 거룩한 삶을 통해서 온전한 속사람으로
살아야 합니다. 눈에 보이는 환경에 민감한 겉사람은 감각적이고 체험적인 것만을 의지합니다. 또한 우리안에 속사람을 유혹하고
억압하므로 끊임없이 괴롭히고 고통을 주는 것입니다. 속사람은 교회에 나가려 하는데 겉사람은 나가지 말라고 충동질 합니다. 또한 술
담배 할 것을 유혹하고 음란과 도둑질과 미움과 증오의 마음을 겉사람을 통해서 일으키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를 유혹하고
시험하는 겉사람을 속사람을 통하여 투쟁하고 씨름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기전에는 겉사람이 시키는대로 행하고 겉사람이 사는
방식으로 살았지만 하나님을 믿음으로 우리안에 다시 살아난 속사람의 방식으로 살려고 하므로 겉사람과의 투쟁이 있는 것은 당연한
이치인 것입니다. 이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을 의지해서 속사람이 강해져야 되는 것입니다.
3. 날로 새로워지는 속사람
우리는 날로 새로워지는 속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성령을 통하여 우리의 속사람이 새로워지고 또한 성령이 주시는 힘과 능력으로
겉사람의 삶을 살지 말고 속사람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우리의 속사람을 날마다 새롭게 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이루어집니다. 로마서 12장 2절에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또한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영적인 자아상을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안에서 발견한 우리의 속사람은 의로운 사람이자 거룩한 사람이 되고 또한 치료받고 축복받은 사람으로
영생복락을 얻은 사람입니다. 베드로전서 2장 9절에 “그러나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 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려
하심이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우리의 속사람이 어떠한지를 알게 되면 될수록 더욱 강하게 일어나 겉사람을 대적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가운데 겉사람의 공격을 물리치고 겉사람의 삶을 따라 가지 않음으로 유혹에 넘어가지 않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속사람을 말씀으로 강하게 해야 하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10장 38절에 “나의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또한 뒤로 물러가면 내 마음이 그를 기뻐하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고 말씀하신 것처럼 속사람은 육신이 주는 감각적인 정보로 살지 않고 말씀으로 사는 것입니다. 눈에는 아무 증거 안보이고
귀에는 아무 소리 안들리고 손에는 잡히는 것 없어도 하나님이 주시는 말씀을 믿음으로 살아가는 것이 속사람이 사는 방식입니다.
겉사람은 눈에 보이는 것, 귀에 들리는 것, 냄새맡고 맛보는 것, 만져 보는것을 통해 지각할 수 있는 현실적인 감각과 체험으로
살아갑니다. 그러므로 겉사람은 속사람을 끊임없이 공격하는 것입니다. ‘믿음은 헛된 것이다.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는 것을
믿지말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감각으로 느낄 수 없는 것을 믿지 말라고 끊임없이 충동질하는 것입니다.
한번은 예수께서 베다니에 가시기 전에 그 사랑하시던 나사로가 병들어 죽게 되었습니다. 죽어 무덤에 들어간지 나흘이 지나 썩은
냄새가 진동했을 때 예수님이 오셔서 무덤 문을 열어 놓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와같은 예수님의 말씀은 속사람의 말씀입니다. 그러나
아직 속사람으로 살지 못하는 마리아와 마르다는 “주여, 죽은지 나흘이 되어 썩은 냄새가 납니다. 그 사람을 무덤에서 왜
끌어냅니까?”라고 말하므로 겉사람의 사는 방식으로 대답하였던 것입니다. 요한복음 11장 39절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돌을 옮겨
놓으라 하시니 그 죽은 자의 누이 마르다가 이르되 주여 죽은 지가 나흘이 되었으매 벌써 냄새가 나나이다”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마르다여,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 하지 않았느냐!”라고 말씀하시므로 믿음은 속사람에 의한 것임을
나타내셨습니다. 겉사람은 감각에만 의지해서 살려고 하기 때문에 우리의 속사람이 믿음으로 살고자 할 때 겉사람이 저항을 하고
반대를 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말씀을 많이 읽고 쉬지 말고 기도하는 가운데 믿음이 강해진 속사람으로서 살아야만 하는
것입니다. 로마서 1장 17절에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또한 속사람은 성령의 은혜로 삽니다. 우리 속사람이 살아나기 위해서는 하나님이 주시는 성령님을 우리안에 모셔들여야 합니다.
속사람은 성령님이 도움을 통해서 힘을 얻게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속사람은 언제나 성령님을 환영하고 인정하고 모셔들이고 의지하는
가운데 성령님의 도움을 구해야 합니다. 이러한 성령님은 우리의 가정교사이자 변호사로서 또한 안내인으로서 우리를 돕는 선생의 역할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속사람은 기도의 힘으로 살아가게 됩니다. 겉사람은 기도하지 말라고 말합니다. 우리의 속사람이 복음을
증거하고자 한다면 마귀는 겉사람을 통해서 공격을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겉사람은 속사람에게 기도하지 말고 편안히 쉴 것을
권유하고 당장에 다른 급한 일들에 관심을 갖도록 이끄는 것입니다. 그리고 겉사람을 통해서 마귀는 피곤함과 고통과 괴로움을 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속사람은 기도의 힘을 통해서 마귀에 대항하고 투쟁해야 하는 것입니다. 사람이 숨을 쉬지 않으면 몇분만에 죽는
것처럼 영적인 호흡과도 같은 기도를 하지 않는다면 속사람은 살아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앉으나 서나 기도하므로 우리의
속사람이 하나님의 생명으로 넘쳐나도록 쉬지말고 기도해야만 하는 것입니다.
사람은 세월이 흘러갈수록 겉사람은 점점 노쇠해지고 무능력해집니다. 왜냐하면 겉사람이 후패하면 모든 것이 둔해지고 쇠패해지고
낡아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속사람은 날로 새롭고 강성해지고 신령한 생명으로 충만해지는 것입니다. 속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을 항상
먹으므로 하나님의 생기로 살아갑니다. 또한 하나님이 주시는 생명이 넘치고 믿음으로 살아가므로 성령님이 동행하는 가운데 천국이
우리안에 임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므로 겉사람은 후패하나 우리의 속사람은 날로 새로워지는 것입니다. 하지만 겉사람으로 사는
사람은 마음에 고통을 안고 절망가운데 살아갑니다. 겉사람으로 사는 자들에게는 영원한 천국이 주어지지 않습니다. 오직 슬픔과 탄식과
좌절을 안고 영원히 몸부림치며 지옥으로 내려가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속사람이 살아난 사람은 낡은 겉사람을 벗어
버리고 그리스도와 함께 기뻐하며 영광 가운데 천국에 들어가 주님과 영원히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장차 다가올 아름다운
본향에 들어갈 때 한사람도 낙오되는 사람이 없기를 주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
하나님 우리 아버지여!
영혼이 죽은 우리를 살리기 위해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를 짊어지시고 대신 죽으신 것을 감사합니다. 우리같이
죄많은 인생을 대신해서 십자가에서 죽으시므로 우리의 속사람을 살려주시니 감사합니다. 말씀과 기도와 성령으로 우리의 속사람이
하나님과 교통하게 하시고 또한 영원한 본향으로 인도하시니 너무나 감사합니다. 예수믿고 속사람이 살아난 자녀들이 다시 겉사람을 따라
살지 않고 매일매일 속사람으로 살아갈 수 있도록 도와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겉 사람, 속 사람, 옛 사람, 새 사람
1.겉 사람은 사람의 몸(육신)을 말한다.
『이런 까닭에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라. 오히려 우리의 겉 사람이 썩어질지라도 우리의 속 사람은 날마다 새로워지나니』(고후4:16)
『우리가 이것을 아나니 곧 우리 옛 사람이 그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힌 것은 죄의 몸을 멸하여 더 이상 우리가 죄에게 종 노릇 하지 않게 하기 위함이니라.』(롬6:6)
『내 안에 (곧 내 육신 안에는,) 선한 것이 거하지 않는 줄을 내가 아노니 원함은 내게 있으나 선한 것을 어떻게 행하는 것인지는 알지 못하노라』(롬7:18)
2.속 사람(inner man)은 사람의 혼을 말한다.
『이런 까닭에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라. 오히려 우리의 겉 사람이 썩어질지라도 우리의 속 사람은 날마다 새로워지나니』(고후4:16)
구원받은
사람만 속 사람이 있는 것이 아니라 구원받은 사람은 구원받은 혼(속 사람)이 있고, 구원받지 못한 사람은 구원받지 못한 혼(속
사람)이 있는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구원받은 사람만 속 사람이 있는 것으로 잘 못 알고 있는데 그것은 속 사람을 혼과 연결시키지
못하기 때문이다.
3.옛 사람은 겉 사람과 같이 사람의 몸(육신)을 말하며 새 사람과 대조를 이룬다.
『이전 행실에 관해서는 기만의 욕망에 따라 썩어진 옛 사람을 벗어 버리고』(엡4:22)
『서로 거짓말하지 말라. 너희가 그 행위와 함께 옛 사람을 벗어 버리고』(골3:9)
4.새 사람은 거듭 난 사람의 영 안에 들어오신 성령님을 말한다.
『예수께서 대답하시기를 “진실로 진실로 내가 너에게 말하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태어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육신으로 난 것은 육이요, 또 성령으로 난 것은 영이니라. 내가 너에게 ‘너희는 거듭나야만 한다.’고 말한 것을 이상히 여기지 말라. 바람이 임의로 불어서 네가 그 소리를 들어도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듯이 성령으로 난 사람은 모두 그와 같으니라.”고 하시더라.』(요3:5-8)
자연인의
영 안에 예수 그리스도의 영이신 성령이 들어오시면 사람의 영이 거듭나게 되는데 이 때부터 하나님을 의식하게 되고 하나님의 말씀과
예배에 관심을 가지게 되며 하나님을 섬기게 된다. 『하나님을 따라 의와 참된 거룩함 안에서 창조된 새 사람을 입으라.』(엡 4:24)
또한 거듭난 사람의 영 안에 들어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말한다. 『너희 가운데 그리스도 안으로 침례를 받은 사람은 그리스도로 옷입었느니라.』(갈 3:27)
그러므로
사람의 영이 죽어서 태어난다고 하는 것은 사람의 영 안에 성령께서 거하시지 않는 상태를 말한다. 첫 사람 아담이 타락해서
‘반드시 죽으리라.’ 했던 그 죽음은 바로 사람의 영 안에 죄로 인해 하나님의 영이 떠나 버린 상태를 말하는 것으로 사람의 영에
주의 촛불이 꺼져 버린 상태를 말하는 것이다. 『사람의 영은 주의 촛불이라. 뱃속에 있는 모든 깊은 부분들을
살피느니라.』(잠20: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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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에베소서
- 책 제목
헬라어 성경에서 본서는 ‘προς ΄ΕΦεσιος(프로스 에페시우스)’로 불린다. 이는 ‘에베소인들에게’(to Ephesians)란 뜻이다. ‘에베소서’는 이 제목에서 유래되었다.
- 기록자와 연대
1) 기록자/ 수신자
① 기록자
본 서신은 바울이 기록하였다고 직접 증언하고 있고(1:1; 3:1), 언어나 문체, 중심 사상 등이 바울의 다른 서신들과
일치하고 있으며, 초대 교부들(Irenaeus, Polycarp, Eusebius, Origen) 역시도 전통적으로 본 서신을
바울 기록으로 보기 때문에 대부분이 바울의 저작으로 인정한다.
② 수신자
바울은 에베소 교회 및 모든 믿는 그리스도인(1:1)에게 편지를 쓰고 있다고 밝히고 있는데, 물론 모든 믿는
그리스도인들에게도 이 서신을 읽도록 하는 것이지만 1차 독자는 그가 밝히고 있는 것처럼 에베소 교회라고 할 수 있겠다. 여기서
에베소는 교통의 요지이기도 하여, 소아시아 최대도시로 매우 번영했는데, 그 지방의 로마행정의 중심이었다. 이 에베소는
신전시(神殿市)로 불리웠다. 그것은 유명한 아르테미스(아데미르 역) 신전이 있는 데서, 그리고 후에는 황제예배를 목적으로 하는
2, 3의 신전까지도 포함되어서이다.
바울은 2차 전도여행할 때에 아시아 전도를 계획하였으나 성령 하나님께서 막으셔서(행 16:6), 유럽에 건너가 여러 교회를
세우고 다시 안디옥 모교회로 가는 동안 에베소에 잠깐 들렀다가 브리스길라와 아굴라를 에베소에 남겨 두었다(행 18:18-22,
26, 고전 16:19).
후에 바울은 제3차 전도여행할 때 윗 지방 갈라디아를 거쳐서 에베소에 와서(행 19:1), 회당에 들어가 석달 동안 담대히
하나님 나라에 관하여 강론하였고, 어떤 사람들은 이 도를 비방하여 그들을 떠나 두란노 서원에서 날마다 강론하여 2년 동안 말씀을
전하였다.
이렇게 바울은 이곳에 이 지방 전체에 복음을 전하는 기지로 된 교회를 세웠고 그 뒤에 디모데와 사도 요한이 이 교회에 머물며
사역을 했다. 이렇게 따라서 에베소 교회도 소아시아교회의 중심이 되고, 교회 역사상으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였다.
2) 기록연대
본 서신은 A.D. 62년경 로마 옥중에서 기록된 것으로 보인다. 본 서신에는 사도 바울이 옥에 갇혀 있음을 암시하는
표현들이 여럿 나타난다(3:1; 4:1; 6:20). 사도행전에 의하면 바울은 빌립보(행 16:19-34), 가이사랴(행
24:27), 로마(행 28:16, 30) 등 모두 세 차례 감옥에 투옥된 것으로 나타난다. 이 가운데 빌립보 감옥의 투옥 기간은
며칠(혹은 하루)에 지나지 않는다. 따라서 본 서신을 기록할 만한 여유는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일부 학자들이 가이사랴 감옥을 본
서신의 기록 장소로 보기도 한다. 그러나 본 서신의 필치가 매우 세련되고 신앙적 깊이와 원숙미가 넘친다는 측면에서 대분의
학자들은 이보다 훨씬 후대인 로마 감옥으로 본다. 바울은 로마 감옥에서 2년 정도 투옥되어 있었다. 이 기간에 바울은 빌립보서,
골로새서, 빌레몬서를 함께 기록했을 것으로 보며, 에베소서와 함께 옥중서신으로 불린다. 실제로 바울이 옥중에서 쓴 서신은
디모데후서도 포함되는데 이는 같은 시기에 쓴 글은 아니고, 바울 사도가 다시 붙잡혀서 순교하기 전에 목회자인 디모데에게 마지막
유언과 같이 남긴 글이며, 목회서신으로 분류된다.
- 기록 동기와 목적
본서중에는, 두기고가 다른 소식(통지)을 아시아에 전하기로 되어있다는 것(엡 6:21, 골 4:7) 이외에는, 이
편지가 기록된 특별한 이유 및 직접 목적 등에 대해 구체적으로 말하고 있지 않다. 그럼에도 바울이 행하던 사역의 모습과 편지의
내용을 통해 다음과 같이 생각해 볼 수 있다.
바울은 기원 52년부터 54년까지 약 3년 동안 그의의 전도 사역지 중에서는 가장 오래동안 머물며 복음을 전하였고 교회를
세웠다. 바울 자신은 밤낮 눈물로 각 사람을 권하기를 쉬지 않았다고 표현할 정도로 관심과 사랑이 있었다(행 20:31). 그러나
바울은 로마 감옥에 갇혀 있을 때에 에베소 교회의 여러 소식들을 듣고, 그들에게 꼭 필요한 내용들을 중심으로 모든 믿는
그리스도인들에게 다음과 같이 몇 가지 중요한 내용들을 알려 주기 원했다.
① 구원에 대한 바른 이해를 위해
구원을 단순히 지상의 역사에서 이루어진 사건으로 간주하여 자신의 결단이나 노력으로 얻었다는 단순한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② 교회에 대한 바른 이해를 위해
또한 교회의 참된 의미가 무엇인지 모르고, 단순히 눈에 보이는 성도들의 예배와 교제 정도로만 생각하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유대인들과 이방인들이 하나 되지 못하고 나그네나 외인 정도로 생각하고 있었다.
③ 그리스도인의 삶의 바른 이해를 위해
아울러 예수님을 믿는 자의 삶이 무엇인지를 잘 알지 못하여 그리스도인으로서 각각에 주어진 자리에서 어떠한 삶을 살아야 하는 지와 영적으로 어떠한 제사로 임해야 하는지를 잘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 주제
1) 삼위일체 하나님께서 은혜로 주신 구원에 감사해야
사도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받게 된 것이 자신의 판단이나 결단에 근거한 것이 아니라 오직 뜻의 결정대로 일하시는
하나님의 계획을 따라 예정을 입어(1:11), 그의 경륜을 따라 하나님의 택하신 자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되게
하시기 위하여(1:10) 그의 피로 말미암아 우리의 죄를 사하여 주셨고, 이 복음을 듣고 믿을 수 있도록 성령께서 인(印) 치시고
보증이 되셨음(1:13-14)을 자세히 알려준다.
또한 구원받은 자로서는 나의 어떠한 행위가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았음(2:5, 8)을 분명히 하여, 그 앞에서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려고 하신 구원의 목적을 잘 깨달아(1:4), 그의 영광을 더욱 찬송해야 함을 분명하게 밝혀주고
있다(1:14).
2)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온전한 교회를 이루어야
바울 사도는 그리스도의 놀라운 통치 능력으로 만물을 그 아래 복종하게 하셨는데(1:21-22), 교회가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그의 능력을 드러내어 만물을 그의 뜻으로 충만하게 하시도록 해야 함을 강조한다(1:23). 그러는데 있어서 이방인(에베소인)과
유대인이 따로 구별되는 것이 아니라 동일한 하나님의 권속이고 함께 연결하여 주 안에서 성전이 되어 가야 함을
말한다(2:19-22).
아울러 이미 주의 부르심을 받아 주와 연합하였기 때문에 성령이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고(4:1-3), 각 사람에게
주신 분량에 따라 직분과 봉사의 일을 잘 감당하며(4:7-12),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자라도록
권면한다(4:13).
3) 옛사람을 버리고 새사람으로 이 세상을 살아가야
바울 사도는 구원을 받은 자답게 마음을 새롭게 하여 구습을 따르는 옛 사람을 벗어 버리고 심령이 새롭게 되어 새 사람으로,
빛의 자녀답게 성령 충만한 삶을 살 것을 강조하는데(4:22-24, 5:18),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가정의 각 구성원으로서 또한
사회에서 상전과 종으로서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에 대하여 원리를 잘 설명해 주고 있다(5:22-5:9).
아울러 이 땅에서의 싸움은 영적인 것임을 잊지 말고(6:10-12)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취하여 영적 전투를 잘 감당하여 승리하는 삶을 살도록 권면한다(6:13-18).
- 특징
1) 삼위일체 하나님에 근거한 교회의 비밀이 담긴 서신이다.
에베소서는 그렇게 분량이 그렇게 긴 서신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교회’(에클레시아)라는 말이 9번이나 나올 정도로 ‘교회’에
대하여 강조하고 있다. 즉,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유기적이며 생동적인 조직으로 설명하면서 교회가 지닌 비밀을 잘 설명해 주고
있는 서신이다.
골로새서에서는 그리스도의 인격과 역사(일)하심의 존엄에 대하여 강조한다고 하면 에베소서 바울은 구속된 자의 총체인 그리스도의
몸, 교회의 숭고함을 말하고 있는데 즉, 삼위일체 하나님께서 택자에게 베풀어주신 은혜의 픙성함을 믿는 그리스도인들에게 보여주기
위해 하나님의 놀라운 계획을 가르쳐주고 있다.
2) 복음 전체를 잘 요약해 주고 있다.
에베소서에는 기독론, 구원론, 교회론, 종말론 등 광범한 주제를 다루고 있지만 대단히 간결하고 명쾌하게 제시되고 있다.
따라서 에베소서는 바울 신학의 요약으로 불리기도 한다. 칼빈은 에베소서를 가리켜 ‘바울 작품의 면류관’(the Crown of
St. Paul’s Writings)이라고 불렀다. 에베소서는 교회 역사를 통해 가장 많은 영향을 미친 바울 서신 중 하나로
손꼽히고 있다.
3) 차분하고 논리적인 서신이다.
고린도전·후서가 당면한 문제에 대한 해답을, 갈라디아서가 복음과 율법 사이의 치열한 변증과 격정적인 어조로 다루고 있다면, 본
서신은 교회의 본질(교회론)과 교회와 그리스도와의 관계(기독론)를 아주 차분하면서도 조용하게 가르치는 교리서라 할 수 있다.
즉, 본서는 고요히 하늘에 계시는 그리스도와의 가장 깊은 비밀을 차분하고도 확실하게 계시한다.
4) 골로새서와의 유사한 서신이다.
에베소서는 골로새서와 유사한 주제들이 동일한 순서로 설명되는데, 때로는 어휘까지 동일하게 다뤄지는 경우가 많이 있다.
대표적으로 세 가지만 예를 들면, 첫째, ‘하늘과 땅에 있는 모든 것이 다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내용은 에베소서 1:10;
골로새서 1:14-20에서도 동일하게 찾아볼 수 있다. 둘째, ‘나는 너희 믿음에 대해 들었다’는 내용은 에베소서 1:15;
골로새서 1:4에 나와 있다. 마지막으로 ‘너희에 대해 하나님께 늘 감사를 드린다’는 말은 엡 1:16과 골 1:3에 동일 하게
나와 있다.
이것은 바울이 골로새서, 빌레몬서, 에베소서 모두를 비슷한 시기에 작성했고, 모두 비슷한 상황 가운데 있는 아시아 지방에 보냈기 때문으로 생각된다(엡 6:21, 골 4:7).
- 구조
1) 삼위일체 하나님 안에서의 구원에 대한 진술(1-3장)
(1) 도입(1:1-2)
(2) 구원에 대한 진술(1:3-3:21)
① 구원을 위한 삼위 하나님의 활동(1:3-14)
② 구원을 위한 성도의 과거와 현재(2:1-22)
③ 구원을 위한 바울의 활동(3:1-13)
④ 바울의 기도(3:14-21)
2) 구원 받은 성도로서의 삶에 대한 권면(4~6장)
① 삶에 대한 권면(4:1-6:9)
② 종결(6:21-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