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 데살로니가전서




데살로니가전서의 핵심 내용과 주요 메시지


① 영어 제목  1 Thessalonians → 데살로니가 교회에 보낸 첫 번째 편지

② 헬라어 원어 및 발음
원어: Πρὸς Θεσσαλονικεῖς Αʼ
발음: Pros Thessalonikeis A (프로스 테살로니케이스 알파)
→ 뜻: “데살로니가인들에게 (첫 번째 편지)”

③ 복음 중심 한 문장 요약
데살로니가전서는 핍박 속에서 믿음을 지킨 성도들을 격려하며,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과 구원의 소망 안에서 거룩하고 깨어 있는 삶을 권면하는 복음의 소망의 서신이다.

④ 복음적 메시지 요약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회의 믿음, 사랑, 소망을 칭찬하며 감사로 시작함 (1장)
복음을 전할 때의 고난과 성도들과의 영적 사랑과 친밀감이 강조됨 (2–3장)
하나님의 뜻은 거룩함, 특히 음행을 멀리하는 것 (4:3)
성도는 낙심하지 말고 재림의 소망 가운데 위로받을 것 (4:13–18)
주의 날은 도둑같이 이를 것이며, 성도는 빛의 자녀로 깨어 살아야 함 (5장)
재림의 소망은 두려움이 아니라 소망과 위로가 되어야 함 

대표 구절

> “주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로 친히 하늘로부터 강림하시리니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고
그 후에 우리 살아 남은 자들도 그들과 함께 구름 속으로 끌어 올려
공중에서 주를 영접하게 하시리니
그리하여 우리가 항상 주와 함께 있으리라.”
(데살로니가전서 4:16–17)

데살로니가전서 배경

 

📌 저자 : 사도 바울

📌 기록 시기 : 주후 50-51년경, 고린도에서 기록

👉 바울이 제2차 선교여행 중 데살로니가를 방문했다가 박해로 인해 갑작스레 떠난 뒤, 데살로니가 교회의 소식을 듣고 위로와 교훈을 주기 위해 기록.

📌 수신자 :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

• 마케도니아 지방 데살로니가

• 박해 속 믿음을 격려

• 믿음으로 고난을 견디는 성도들에게 위로와 격려

• 신앙의 기초 교리 교육

•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 거룩한 삶, 사랑의 실천 권면

• 잘못된 종말론 교정

• 재림의 시기에 대한 오해와 혼란을 바로잡음

📌 주요 주제 : 믿음의 역사:복음을 받아들이고 고난 속에서도 믿음을 지킨 성도들,

사랑의 수고:성도 간의 사랑과 섬김, 공동체의 유대,

소망의 인내: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에 대한 소망과 기다림

거룩한 삶:우상숭배와 음행을 멀리하고 거룩하게 살아갈 것,

재림 교리:예수님 재림의 때와 방식, 신자의 부활, 휴거

📌 핵심 구절

“주의 날이 밤에 도둑같이 이르리라”

(데살로니가전서 5:2)

👉 주님의 재림은 예상치 못한 때에 임하기에 늘 깨어 믿음으로 살아가야 함을 강조

 

📖 데살로니가전서 개요와 장별 요약

이 편지는 바울이 복음을 전한 데살로니가 교회에 보낸 최초의 서신으로, 초대교회 성도들이 박해 속에서도 신앙을 지키며 재림을 기다리는 모습을 보여주는 귀한 말씀입니다.

특히 데살로니가전서는 주의 재림을 소망하며 거룩하게 살아가는 교회의 모습을 담고 있어, 오늘날 우리 믿음의 삶에도 깊은 도전을 줍니다. 그러면 장별로 내용을 요약해 보겠습니다.

 

📌 1장 — 믿음, 소망, 사랑의 본이 된 교회

바울은 먼저 데살로니가 교회에 문안하며, 그들의 믿음과 사랑, 그리고 재림을 기다리는 소망을 칭찬합니다. 성령의 능력으로 복음을 받아들인 이 교회는 마게도냐와 아가야 지방 사람들에게도 본이 되어, 신앙의 모범이 되고 있습니다. 주의 재림을 기다리는 교회의 모습이 어떤 것인지 잘 보여주는 장입니다.

 

📌 2장 — 바울의 사역과 복음의 진실성

바울은 자신이 데살로니가에서 어떤 태도로 복음을 전했는지를 회상합니다. 사람을 기쁘게 하려 하지 않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는 순전한 마음으로 섬겼던 사역을 상기시키며, 마치 어머니가 자녀를 돌보듯 사랑으로 대했음을 고백합니다. 그리고 복음을 방해하는 유대인들의 핍박에도 불구하고, 주의 복음을 위해 헌신했던 사도들의 자세를 보여줍니다.

 

📌 3장 — 믿음의 견고함을 위한 염려와 기쁨

바울은 성도들의 믿음이 흔들릴까 염려되어 디모데를 보내어 그들의 신앙을 살피게 합니다. 디모데를 통해 성도들의 믿음이 굳건하다는 소식을 듣고, 바울은 큰 위로를 얻고 감사하며, 더 풍성한 사랑과 믿음 안에서 자라가길 기도합니다. 어려움 속에서도 믿음을 지키는 공동체의 아름다움을 보여주는 장입니다.

 

📌 4장 — 거룩한 삶과 재림의 소망

바울은 음행과 불의를 멀리하고, 거룩하고 정결한 삶을 살 것을 권면합니다. 형제 사랑과 조용히 자기 일을 감당하며, 외인들에게도 존경받는 삶을 살 것을 당부하죠. 이어서, 주의 재림과 성도의 부활에 대한 가르침을 전합니다. 주께서 강림하실 때, 죽은 자가 먼저 일어나고 살아있는 성도들이 공중으로 들려 올라 주님을 영원히 함께하게 될 것이라는 소망의 말씀입니다.

 

📌 5장 — 깨어 근신하며 사는 성도의 자세

바울은 주의 날이 도적같이 임할 것임을 경고하며, 성도들이 깨어 근신하며 믿음과 사랑, 구원의 소망으로 무장할 것을 당부합니다. 서로 위로하고 덕을 세우며, 교회 안에서 질서를 지키고, 항상 기뻐하고 쉬지 말고 기도하며, 범사에 감사하는 신앙의 태도를 가르칩니다. 종말을 살아가는 성도의 올바른 자세가 무엇인지 제시하며 서신을 마무리합니다.

 

📖 정리하며

데살로니가전서는 박해 속에서도 믿음과 소망, 사랑으로 굳게 선 교회의 본을 보여주며, 우리에게도 주의 재림을 소망하며 거룩과 사랑으로 살아가라고 권면합니다.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이 말씀은 큰 도전이 됩니다.

우리 역시 언제 오실지 모르는 주님을 기다리며, 거룩하고 성결한 삶으로 준비하는 성도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묵상 포인트와 적용 질문

📌 묵상 포인트

1️⃣ 나는 오늘도 주의 재림을 소망하며 살아가고 있는가?

데살로니가 교회는 환난 중에도 주의 재림을 소망하며 믿음을 지켰습니다.

우리의 시선이 현실의 문제에만 머물러 있지는 않은지 돌아보며,

‘주님 다시 오심’의 소망이 내 삶의 중심에 있는지 묵상해봅시다.

2️⃣ 거룩함을 지키며 살아가는 삶

바울은 음행과 불의에서 떠나 거룩하게 살 것을 강하게 권면합니다.

나는 오늘 하나님 앞에서 정결하고 거룩한 삶을 위해 어떤 결단을 하고 있는지

묵상해보고, 실천할 부분을 찾아봅시다.

3️⃣ 믿음, 소망, 사랑의 삶

데살로니가 교회가 믿음의 역사, 사랑의 수고, 소망의 인내로 본이 되었던 것처럼

나의 믿음은 어떤 열매를 맺고 있는지,

사랑으로 수고하는 삶을 살고 있는지,

소망으로 인내하며 살아가고 있는지 점검해봅시다.

 

📌 적용 질문

• 나는 매일 주님의 재림을 소망하며 하루를 살아가고 있는가?

• 세상 가치관에 물들지 않고, 거룩함을 지키려는 구체적인 삶의 실천이 있는가?

• 믿음으로 역사하고, 사랑으로 섬기며, 소망으로 인내하는 내 모습이 있는가?

• 주변 사람들에게 믿음의 본이 되어주고 있는가?

 










데살로니가전서 개요

데살로니가전서(1 Thessalonians)는 신약성경에 포함된 바울 서신 중 하나로, 바울 사도가 데살로니가 교회에 보낸 편지입니다. 이 서신은 신약성경 중 가장 이른 시기에 기록된 문서 중 하나로 여겨지며, 대략 AD 50년경 바울이 고린도에서 체류하던 시기에 작성되었습니다. 데살로니가전서는 기독교 초기 공동체의 신앙, 소망, 사랑을 격려하며 종말론적 소망에 초점을 맞춥니다.

1. 배경 및 역사적 맥락

데살로니가는 마케도니아 지역의 주요 도시로, 당시 로마 제국의 중요한 상업 중심지이자 교통의 요지였습니다. 바울은 그의 두 번째 선교 여행 중에 데살로니가를 방문하여 유대교 회당에서 복음을 전했고, 그 결과 유대인과 이방인들로 구성된 교회가 설립되었습니다(사도행전 17:1-9).

그러나 데살로니가 교회는 바울의 복음 전파로 인해 반대 세력의 박해를 받았습니다. 바울은 이러한 박해 때문에 도시를 떠날 수밖에 없었으나, 교회가 지속적으로 성장하고 있다는 소식을 디모데를 통해 들었습니다. 이에 바울은 교회를 격려하고 믿음을 강화하기 위해 이 편지를 작성했습니다.

2. 주요 내용과 주제

데살로니가전서는 다섯 장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주요 주제는 다음과 같습니다.

(1) 감사의 표현 (1장)

바울은 데살로니가 성도들의 믿음, 사랑, 소망에 대해 감사를 표합니다. 그는 그들의 신앙이 마케도니아와 아가야 지역 전체에 본이 되고 있음을 칭찬하며, 복음의 능력과 성령의 역사로 그들이 변화된 삶을 살아가고 있음을 강조합니다.

(2) 바울의 사역 변호 (2장)

바울은 자신의 사역이 사람을 기쁘게 하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기쁘게 하려는 것임을 변호하며, 데살로니가 교회를 섬길 때 보여준 그의 헌신과 사랑을 상기시킵니다. 그는 자신의 사역이 성도들의 믿음을 세우기 위한 것이었음을 강조합니다.

(3) 격려와 위로 (3장)

바울은 디모데를 통해 교회의 소식을 들은 후, 그들의 믿음과 사랑이 여전히 굳건함을 확인하고 감사하며, 더욱 성장하도록 격려합니다. 그는 교회의 박해와 시련 속에서 믿음을 유지하도록 계속해서 기도하겠다고 약속합니다.

(4) 거룩한 삶에 대한 권면 (4장)

바울은 성도들에게 거룩함과 순결함을 유지할 것을 권면하며, 특히 성적인 순결을 강조합니다. 그는 사랑과 형제애를 실천하고, 세상 사람들 앞에서 단정하고 존경받는 삶을 살 것을 요청합니다.

(5) 주님의 재림과 종말론적 소망 (4장 후반-5장)

데살로니가 성도들 중 일부는 주님의 재림 전에 죽은 자들이 어떻게 될 것인지에 대해 혼란스러워했습니다. 이에 바울은 주님의 재림 때 죽은 자들이 먼저 부활하고, 산 자들이 그들과 함께 주님을 맞이할 것이라는 소망을 확신시킵니다. 그는 또한 주님의 날(재림의 날)이 도둑같이 갑작스럽게 이를 것임을 경고하며, 깨어있고 정신을 차리며 빛의 자녀로 살아갈 것을 권면합니다.

3. 데살로니가전서의 신학적 메시지

(1) 신앙, 소망, 사랑의 삼중주

데살로니가전서는 기독교 신앙의 핵심인 믿음, 사랑, 소망을 강조합니다. 이 세 가지는 데살로니가 성도들의 삶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났으며, 모든 성도의 삶에서 중요한 덕목으로 제시됩니다.

(2) 종말론적 소망

주님의 재림과 부활의 소망은 이 서신의 중심 주제입니다. 바울은 재림 신앙이 단순히 미래의 사건에 대한 기대감이 아니라 현재의 삶을 변화시키는 능력을 제공한다고 가르칩니다.

(3) 거룩함과 윤리적 삶

바울은 신앙이 단순히 개인적인 믿음에 그치지 않고, 일상생활 속에서 거룩함과 윤리적 삶으로 나타나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이는 특히 성적 순결과 형제애를 통한 사랑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납니다.

4. 현대적 적용

(1) 박해 속의 믿음

현대 기독교인들도 박해나 고난 속에서 믿음을 지켜야 하는 상황에 직면합니다. 데살로니가전서는 이런 상황에서 격려와 소망의 메시지를 제공합니다.

(2) 삶의 성화

데살로니가전서는 모든 그리스도인이 거룩하고 성화된 삶을 살아야 한다는 점을 상기시킵니다. 이는 오늘날의 윤리적 도전 속에서도 중요한 교훈이 됩니다.

(3) 재림 신앙의 현재적 의미

주님의 재림은 미래의 사건이지만, 그 소망은 현재의 삶에서 믿음을 굳건히 하고 윤리적으로 살아가도록 동기를 제공합니다.

결론

데살로니가전서는 초기 기독교 공동체의 신앙과 삶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문서로, 현대의 그리스도인들에게도 깊은 도전과 격려를 줍니다. 바울은 데살로니가 성도들의 믿음을 칭찬하며, 재림의 소망 속에서 거룩하고 깨어 있는 삶을 살 것을 권면합니다. 이 메시지는 오늘날의 신앙 공동체에도 여전히 유효하며,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을 기다리며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중요한 지침이 됩니다.








데살로니가전서 

헬라어 성경에서 본서는 ‘프로스 데살로니케이스(προς θεσσαλονικεις Α)’로 불린다. 
이는 ‘데살로니가인들에게 보내는 첫 번째 편지’란 뜻이다‘. 데살로니가전서’는 이 제목에서 유래되었다.

기록자와 연대

1. 기록자 / 수신자

① 기록자 : 바울

데살로니가전서를 바울이 기록한 서신이라고 하는 확실성은 거의 모든 측면에서 인정되고 있다. 
(그러나 몇몇 사람들은 데살로니가전서가 바울의 저작이 아니라는 주장을 펼치고 있다. 
그들은 본 서신이 바울에 의해서 기록된 것으로 알려진 다른 서신들보다 교리적 성격이 훨씬 결여되어 있다는 것과 본 서신이 율법의 행위에 의한 칭의 사상을 공격하고 있지 않다는 점 등을 들어서 본 서를 바울의 저작이 아닌 위조된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들의 이런 주장에도 불구하고 본 서신은 바울의 저작임이 확실하다.) 
그것의 근거로는 몇 가지가 있다. 
먼저 본 서신 자체가 바울로부터 보내어진 것임을 스스로 보여주고 있다(살전 1:1). 
또한 본 서신에 등장한 사람들은 사도행전의 근거에 비추어 바울의 제2차 선교 여행 때 바울과 함께 동행했던 사람들이다. 
또한 어휘가 분명히 바울이 사용한 어휘라는 것, 
로마서와 고린도전·후서와 일관되는 사상, 
초대교부들의 증언이 바울의 기록임을 분명히 해주고 있다.

② 수신자 : 데살로니가의 교회

데살로니가는 마게도니아 지역의 수도
로마와 현대의 이스탄불인 도시를 거쳐 유럽의 동쪽을 연결하는 당시 군사용 상업용 도로망인 ‘비아 에그나티아’(Via Egnatia)에 위치한 매우 중요한 도시다.

신약시대에는 약 20만 명이 살고 있었으며 헬라인들이 많았으나, 발단된 도시에는 늘 유대인 사업가들이 있었으며 특히 데살로니가에 있는 유대인 회당은 상당한 영향을 가지고 있었다.

데살로니가라는 도시의 이름은 카산더 장군의 부인이자 알렉산더 대왕의 이복 누이인 데살로니가의 이름을 따서 지은 것이다. 
또한 데살로니가는 제 2차 세계대전 때 나치가 그곳에 살고 있던 약 6만 명의 유대인을 죽인 곳이기도 하다.

사도 바울은 2차 전도 여행 당시 빌립보를 지나 데살로니가에 가게 되는데, 최소 3번의 안식일 동안 유대인의 회당에서 성경을 강론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파하여 헬라인의 큰 무리와 적지 않은 귀부인도 그를 따르게 되었다(행 17:1-4). 
그러나 유대인들이 그를 시기하여 불량한 사람을 데리고 소동을 일으켜 할 수 없이 바울은 밤중에 급히 베뢰아로 피하게 되었다(행 17:10-11). 
그러나 데살로니가에 있던 유대인들이 그 소식을 듣고 베뢰아까지 쫓아 오자 바울은 아덴으로 피하게 되었다. 
이렇게 짧은 기간이었지만 바울의 집중적인 가르침으로 인하여 교회가 세워지게 되었으나 여러 가지 문제가 있을 수밖에 없었다.

2. 기록연대 /  장소

살전 1:1의 문안 기록으로 미루어 볼 때 바울이 데살로니가전서를 기록할 당시 실라는 바울과 함께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사도행전에 의하면 실라는 제2차 전도 여행시에 바울과 동행했었지만 1차나 3차 여행 때에는 동행하지 않은 것으로 나온다. 
그러므로 이런 사실들이 본 서가 바울의 2차 선교 여행 중에 기록되었다는 것을 입증해 준다.

아울러 바울의 2차 전도 여행의 노정은 1차 전도지를 방문한 이후에 성령님에 이끌림을 받아 마게도냐로 항하여 빌립보, 데살로니가, 베뢰아, 아덴, 고린도를 거치게 된다(행 16-18장). 
이것은 데살로니가전서에 나오는 장소들과 일치한다.

그런데, 바울이 이 편지를 쓰게 된 결정적인 이유에 대하여 밝히고 있는 살전 3장에서 바울은 아덴에 있다가 데살로니가로 디모데를 보냈다가 디모데가 다시 돌아와서 여러 가지 소식을 전했다고 밝히고 있으므로(3:1-6), 사도행전의 말씀과 비교해 볼 때 고린도 지역에 머물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구체적인 시기로 보면 주후 51-53년 사이로 볼 수 있다.

기록 목적 

디모데가 데살로니가 교회에서부터 고린도에 있는 바울에게 가져온 소식은 대부분 반가운 소식이었으나 몇몇 좋지 못한 소식도 있었다. 바울의 반대자들이 바울의 영향을 감소시키려 했다는 소식이었다. 
그리하여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인들에게 위로와 신앙적인 지도를 해야 한다는 생각을 절실히 하게 되었고 그리하여 데살로니가전서를 기록하게 되었다. 

이 서신의 기록 목적은

1. 바울 자신의 인격과 동기에 대한 비방에 대한 반박(살전 1, 2장)
2. 디모데가 가져온 반가운 소식에 대한 바울의 기쁨과 감사의 표현(살전 3장)
3. 시련받는 자들을 격려(살전 3:3-5)
4. 성결한 생활과 성실한 삶을 강조(살전 3:12-4:12)
5. 재림 때의 죽은 자들의 장래에 대한 바른 이해(살전 4:13-15)
5. 그리스도의 재림의 시기, 재림에 대한 바른 준비 등을 가르치려고 한 것에 있다(살전 5:1-11)

주제와 특징

1. 주제

사도 바울이 본 서신을 기록할 때 염두에 두었던 여러 가지 목적에 비추어 볼 때 본 서신에는 데살로니가 교회의 여러 가지 문제들에 대해서 언급하며 일반적이고 포괄적인 주제를 다루고 있다. 
그럼에도 본 서신 가장 많이 강조된 부분은 그리스도의 재림이라고 할 수 있다. 
특별히 바울 일행이 데살로니가에 짧은 기간밖에 머물 수 없었던 이유가 유대인들의 핍박 때문이었는데, 바울 사도는 데살로니가 교회들도 같은 동족으로 인한 동일한 고난이 있음을 위로하며(2:14) 더욱 주의 재림에 대해서 바로 이해할 수 있도록 자세히 설명한다. 
즉, 이 땅에서의 삶이 끝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재림으로 말미암는 마지막 심판의 때가 있음을 강조하며 그들에게 그리스도의 통치를 염원하는 그리스도인들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다루고 있다. 
그리하여 본 서신은 성도들이 믿음과 사랑 안에서 자라남으로 하나님 나라의 시민으로 합당한 성결한 생활을 영위해야 함을 강조하고 있다.

2. 특징

첫째, 교회를 향한 극진한 사랑과 감사가 드러난 편지이다(살전 1:2-3:13). 
사랑하는 아들에 대한 염려를 표현한 듯한 구절들을 보면 알 수 있다(살전 2:17-20)

둘째, 특별한 논쟁은 없다. 
바울은 자신의 반대자들에 대해서도 구약을 인용하여 온화한 논조로 서술했다.

셋째, 그리스도의 재림에 대한 의문과 염려에 대해 바울이 구체적으로 답변하고 있다. 
본 서의 각 장마다 언급되어 있을 정도로 종말론적 교훈과 묵시 문학적 표현이 많이 등장하고 있다(살전 1:10; 2:19-20; 3:13; 4:13-18; 5:1-3, 23).

넷째, 성결의 서신이라고 할 정도로 깨어 근신해서 빛의 거룩함을 유지할 것을 강조하며, 재림을 소망하는 가운데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야 할 것을 가르치고 있기 때문이다.

3. 데살로니가의 신학

본 서신은 신론, 기독론, 성령론과 구원론 그리고 종말론이 적절하게 기록되어 있다.

① 신론 : 하나님이 유일하고 참되신 분으로(1:9) 모든 것을 인도하신다

② 기독론 : 예수 그리스도는 본질적으로 하나님과 동등하신 분

③ 성령론 : 환란 가운데에서도 기쁨을 주시는 성령(1:5)

④ 구원론 : 예수께서 죽으심으로 성도들이 구원을 얻게 되었다

⑤ 종말론 : 그리스도의 재림 시에 나타날 현상 기록

 

주요 내용

본 서신은 주로 데살로니가 교인들의 믿음의 칭찬과 자신의 기쁨을 나타내고 있으며 신앙적인 권고와 성결된 생활의 교훈을 강조하고 그리스도의 재림에 대해 주로 언급하고 있다. 
본 서신은 크게 세 부분으로 구분할 수 있다.

 

1) 데살로니가 교회에 대한 칭찬과 염려(살전 1-3장)

① 박해를 이기는 교회에 대한 칭찬(1:1-10)

: 너희는 많은 환난 가운데서 성령의 기쁨으로 말씀을 받아 우리와 주를 본 받은 자가 되었으니 그러므로 너희가 메게도냐와 아가야에 있는 모든 믿는 자의 본이 되었느니라(6-7)

② 전도 회고와 교회에 대한 감사와 재방문의 소망(2:1-16)

: … 우리가 너희 각 사람에게 아버지가 자기 자녀에게 하듯 권면하고 위로하고 경계하노니 이는 너희를 부르사 자기 나라와 영광에 이르게 하시는 하나님께 합당히 행하게 하려 함이라(11-12)

③ 성도와 사도간의 끝없는 교제(2:17-3:13)

: 그러므로 너희가 주 안에 굳게 선즉 우리가 이제는 살리라(8) … 주야로 심히 간구함은 너희 얼굴을 보고 너희 믿음이 부족한 것을 보충하게 하려 함이라(10)

 

2) 경건한 생활(살전 4장)

① 성결한 생활(4:1-8)

: 하나님의 뜻은 이것이니 너희의 거룩함이라 곧 음란을 버리고 각각 거룩함과 존귀함으로 자기의 아내 대할 줄을 알고 하나님을 모르는 이방인과 같이 색욕을 따르지 말고(3-5)

② 형제 사랑, 근면(4:9-12)

: 너희에게 명한 것 같이 조용히 자기 일을 하고 너희 손으로 일하기를 힘쓰라(11)

③ 재림과 성도의 부활(4:13-18)

: 우리가 예수께서 죽으셨다가 다시 살아나심을 믿을진대 이와 같이 예수 안에서 자는 자들도 하나님이 그와 함께 데리고 오시리라

 

3) 그리스도의 재림에 대한 교훈(살전 5장)

① 종말을 기다리는 성도의 자세(5:1-11)

: 주의 날이 밤에 도둑 같이 이를 줄을 너희 자신이 자세히 알기 때문이라(2) … 그러므로 우리는 다른 이들과 같이 자지 말고 오직 깨어 정신을 차릴지라(6)

② 종말을 기다리는 구체적인 성도의 생활(5:12-22)

: … 사랑 안에서 가장 귀히 여기며 너희끼리 화목하라(13) …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16-18)

③ 마지막 기도와 인사(5:23-28)

: 평강의 하나님이 친히 너희를 온전히 거룩하게 하시고 또 너희의 온 영과 혼과 몸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강림하실 때에 힘 없게 보전되기를 원하노라 너희를 부르시는 이는 미쁘시니 그가 또한 이루시리라(23-24)

 

 

  1. 구조

1) 도입부 : 문안인사(1:1)

2) 본론부(1:2-5:24)

① 역사적 부분-교회를 향한 칭찬과 격려(1:2-3:13)

② 교훈적 부분-교회를 향한 교훈과 권면(4:1-5:24)

3) 종결부(5:25-28)







2025 골로새서




윤효배 목사

■ 골로새서

  1. 책 제목

헬라어 성경에서 본서는 ‘프로스 콜로싸에이스(προς κολοσσαεις)’로 불린다. 이는 ‘골로새인들에게’(to Colossians)란 뜻이다‘. 골로새서’는 이 제목에서 유래되었다.

 

 

  1. 기록자와 연대

1) 기록자/ 수신자

① 기록자

본서신은 사도 바울의 저작으로 본다. 그이유로 본서신의 내용이 이를 구체적으로 증거하며(1:1, 23; 4:18), 초대 교부들 역시 전통적으로 바울을 본서신의 저자로 보기 때문이다. (하지만 반론들도 있다. 본서신의 문체나 사상적 흐름이 다른 바울 서신들과는 차이가 나며, 본서신에 나타나는 영지주의적 색채는 2세기에 유행하던 조류로서 바울 시대와는 맞지 않다는 것이다. 그러나 문체나 사상적 흐름은 주제에 따라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으며, 영지주의 이단 사상은 이미 1세기 때부터 시작되었음을 감안한다면 이상의 반론들로 바울 저작을 부인하기는 미흡하다.)

 

② 수신자

수신자는 골로새에 있는 성도들 곧 그리스도 안에서 신실한 형제들이다. 골로새 지역의 특징과 바울과 어떠한 관계를 가졌는지에 대하여 알 필요가 있다.

 

*골로새 지역의 특징

골로새는 소아시아의 브루기아 주 남서쪽 루커스(Lycus) 계곡에 위치하였고, 이곳은 서쪽 20㎞지점의 라오디게아, 라오디게아 북쪽 인근의 히에라볼리와 함께 삼각 지역을 이루고 있는 교통, 무역의 중심 도시로서 일찍부터 이단사상과 철학들이 성행하였다. 골로새는 섬유산업이 발달하여 콜로시눔(colossinum)이라 불리는 검붉은 양모가 유명하였고, 점점 주민들에게 일자리를 제공하는 상업 중심지로 발달하면서 커졌으나 B.C. 100년경 인접한 지역에 라오디게아가 건설되어 활발하고 상업적인 강력한 경쟁자로 떠오르면서 쇠퇴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인접한 히에라볼리와 더불어 이 두 도시는 A.D. 17년(티베리우스 황제 때)과 A.D. 60년(네로 황제 때)에 있었던 지진으로 파괴됐다. (이후 재건되기는 했지만, 옛 명성을 되찾지 못했고, A.D. 400년경에 이르러서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도시가 됐다.)

골로새는 유대인들은 거의 살지 않고 이방인들이 대부분 살고 있었다.

 

*바울과 골로새 교회와의 관계

사도 바울은 골로새 지역을 직접 간 적은 없다(2:1). 그러나 그는 에베소에서 교회를 세우고 말씀을 전하는데 약 3년 정도의 시간을 보내는데, 그때 골로새에 사는 자들도 복음을 전해 들었을 것이다.(행 19:10). 직접적으로는 에바브라가 골로새지역에 말씀을 지속적으로 가르쳐 교회를 세웠고(골 1:7), 빌레몬이 일반성도로서 바울의 동역자 역할들을 감당하였고, 아킵보가 직분을 받은 교인이었으며 압비아와 오네시모 등이 있었다(몬 1-2, 골 4:9)

 

3) 기록 장소/ 연대 : 바울이 로마에 1차 투옥 당시(A.D. 60-62년 경) (4:3, 10)

본 서신은 에베소서, 빌립보서, 빌레몬서와 함께 옥중서신으로 불린다. 옥중서신은 바울이 로마 옥중에서 로마 황제의 재판을 기다리며 2년 동안 연금 생활할 당시 기록된 서신들을 일컫는다. 이렇게 본다면 본 서신은 로마에서 기록되었으며, 기록 시기는 대략 A.D. 62-63년경으로 추정된다. (한편, 바울은 로마로 이송되기 전 가이사랴에서도 2년 정도 투옥된 적이 있어 혹자는 기록 장소를 가이사랴로 보기도 한다. 그러나 골로새서 4장 후반부에는 바울이 옥중에서 여러 사람들과 수시로 접촉한 듯한 느낌을 주는데(4:7-18) 가이사랴 감옥과는 달리 바울이 로마 감옥에서는 외부 사람과 다소 자유롭게 교류할 수 있었음을 감안한다면(행 24:27; 28:16, 30) 본서신의 기록 장소는 아무래도 가이사랴보다 로마가 더 적합할 것이다.)

 

 

  1. 기록 배경

사도 바울이 본서신을 기록하게 된 직접적인 동기는 에바브라가 당시 골로새 교회를 위협하는 혼합주의적인 다양한 이단들의 가르침에 대한 소식을 전하였기 때문이다. 본서에서 에바브라가 전한 이단들의 가르침이 무엇이냐 하는 것에 대해서는 직접적으로 말하고 있지 않기 때문에 명확하게 밝히는 것은 어렵지만 본서 내용이 골로새 교회에 있었던 이단 사상에 대해 암시해 주고 있는 사실에 근거하여 다음 몇 가지로 정리해 볼 수 있다.

첫째로 유대교적인 요소로서, 이것은 절기를 지키는 것이나(레 23장) 부정한 음식으로 규정된(레 11장) 특정한 음식을 금하여 의식적 정결을 유지하는 유대주의적 관습이나(2:16) 할례에 관한 문제였다.

둘째는 이방적인 요소로서, 이것은 철학적인 특징을 지니며 ‘철학과 헛된 속임수’라는 말로 묘사되어 있다(2:8). 이러한 사상이 구체적으로 가리키는 바가 무엇인지 확실히 알기는 어렵지만 2세기에 들어서 절정을 이룬 영지주의의 초창기 모습인 원시 영지주의적 혼합주의로 생각되는 바 사도 바울은 이것들을 ‘세상의 초등 학문’이라고 규정하여 경계하도록 하였다(2:8-10).

셋째는 위장된 기독교적 요소로서, 이는 그리스도의 신성을 부인하며 그리스도의 유일하신 중보자요 구원자 되심을 부인하는 심각한 사상이었다. 그래서 바울은 본서를 통해 그리스도의 위대하심과 완전한 구세주요 주로서의 그리스도의 최고 주권과 온전하심을 강조하는 데 많은 힘을 기울였다(1:13-20, 27, 28:2-4, 8-10, 16, 17, 19; 3:1-4).

넷째는 영지주의 사상과 관련되는 것으로 보이는 천사 숭배 사상(2:18)과 금욕주의(2:21) 및 확인되지는 않으나 여러 민족이 모여서 살았던 골로새에는 여러 배타적인 사상들과 유치한 사상들이 있었을 것이다.

바울은 이와 같이 이단들의 거짓 가르침에 빠질 위험에 처해 있는 골로새 교회로 하여금 그리스도만이 유일한 절대적인 구주시오, 그 분만이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중보자이심을 확실하게 믿도록 하며 이단들의 가르침을 물리치고 견고한 신앙을 가지며 성결한 생활을 하게 하기 위하여 본서를 기록한 것이다.

 

 

  1. 골로새서의 이해

골로새서를 좀 더 쉽게 이해하고자 하면 교회는 바울의 동역자 ‘에바브로’가 개척한 교회로 바울에게 문의한 두 가지 문제에 대한 답변으로 구성되어 있다고 보면 된다. 즉, 골로새 교회가 다양한 이단들의 가르침을 수용하고 있으며, 그에 따라 그들이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온전한 삶을 살아가지 못하고 회심 전의 모습으로 돌아가고 있는 것에 문제점을 지적하며 본서를 기록한 것이다.

이에 따라 본서를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누어서 살펴보면 서신의 앞 부분인 1-2에서는 주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교리적인 부분을 다루고 있고, 뒷부분인 3-4장에서는 그것에 따른 실천적 부분을 다루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바울은 골로새에 보내는 편지를 통하여 그리스도가 탁월하시다는 것(만물 중에서 가장 먼저 나셨고, 만물의 으뜸되심)과 그리스도인의 삶은 그의 탁월하심을 나타내야 한다는 것을 보여주고, 오직 성도는 그리스도 안에 뿌리를 박고, 그 안에서 살고, 그 안에서 보호받으며, 그 안에서 온전하게 자라나기 때문에 그리스도 없는 삶을 산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임을 강조한다.

 

 

  1. 주제

1) 그리스도의 우월성을 통한 구속함을 깨달으라(1:13-29)

본서의 목적은 일차적으로 골로새의 이단을 논박하기 위함이다. 이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바울은 그리스도를 지극히 높여, 그리스도가 바로 하나님의 형상이며(1:15), 창조자이며(1:16), 만물보다 선재하신 분으로서 만물을 유지하시는 분이며(1:17), 교회의 머리시며(1:18), 맨 처음 부활하신 분이며(1:18), 신성의 모든 충만이 육체로 거하시는 분이며(1:19, 2:9) 화해하게 하시는 분(1:20-22)이라고 밝히고 있다.

그리고 그러한 분이 육체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원수가 되었던 자들을 화목하게 하게 하사 거룩하고 흠 없고 책망할 것이 없는 자로 세우고자 하셨다는 것을 잊지 않도록 권면한다(1:20-22).

 

2) 그리스도의 탁월성을 깨달아 주 안에서 행하라(2:1-23)

바울은 율법주의와 천사숭배사상과 금욕주의와 어떤 철학과 헛된 속임수에도 미혹되지 않도록 더욱 하나님의 비밀인 그리스도를 깨닫게 하려 한다. 그리스도에게는 지혜와 지식의 모든 보화가 감추어져 있는데 그를 아는 것을 통하여 그렇게 될 수 있음을 강조한다(2:1-2).

그리스도 안에는 모든 충만이 육체로 거하시고, 그는 모든 통치자와 권세의 머리이시며 우리의 죄를 사하사고, 세례와 함께 장사되고 일으키심을 받은 존재임을 밝힘으로(2:9-15). 더 이상 율법주의와 다양한 이단들로부터 미혹되지 말고 그 안에서 뿌리를 박으며 세움을 받아 교훈을 받은 대로 믿음에 굳게 서서 감사함을 넘치게 하도록 당부한다(2:6-7).

 

3)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고 벗어, 하나님의 형상의 새 사람을 입으라(3:5-17)

바울 사도는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다시 살리심을 받았기 때문에, 땅의 것이 아니라 위의 것을 찾도록 강조한다. 그러므로 땅에 있는 지체의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을 죽이고,(3:5) 노여움, 악의, 비방, 부끄러운 말을 벗어 버릴뿐만 아니라(3:8), 새 사람을 입었음을 강조하여, 자기를 창조하신 이의 형상을 따라 지식에까지 새롭게 하심을 입은 것을 행동해야 함을 말한다(3:10),

그러므로 성도의 실제의 삶에 있어서 거룩하고 사랑받는 자처럼 긍휼과 자비와 겸손과 온유와 오래 참음을 옷 입고(3:12) 서로 용납하여 피차 용서하되 사랑을 더해야 할 것이고, 평강이 너희 마음을 주장하게 해야 하며, 감사하는 자가 될 뿐만 아니라, 지혜로 피차 가르치며, 하나님을 찬양하고,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하는 삶을 살아야 할 것을 구체적으로 교훈한다.

 

4) 각자의 위치에서 주께 하듯하라(3:18-4:1) cf) 엡 5:22-6:9

바울은 실제적인 삶에 있어서 가정에서나 사회에 있어서나 구원받은 성도로서 마땅히 행해야 할 자세에 대해서도 교훈을 주고 있다. 이것은 에베소서의 내용과 거의 같은 내용인데, 에베소 교인들뿐만 아니라 골로새 교회와 모든 성도들이 함께 깨달아 알아야 하는 내용으로 받아야 하겠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아내들로서는 남편에게 복종하고(3:18), 남편들로서는 아내를 사랑하며 괴롭게 하지말아야 하며(3:19), 자녀들로서는 모든 일에 부모에게 순종하고((3:20), 부모들로서는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아야 한다(3:21). 사회에 있어서도 마땅한 자세를 가르치고 있는데, 종들로서는 모든 일에 육신의 상전들에게 순종하되 사람을 기쁘게 하는 자와 같이 눈 가림을 하지 말아야 하며(3:22), 상전들로서는 그들에게도 상전이 계심을 알아 의와 공평을 종들에게 베풀어야 함을 강조한다(4:1).

 

 

  1. 특징

로마서가 구원론, 에베소서가 교회론을 강조한 서신이라면, 본 서신은 기독론에 초점을 둔 교리서라 할 수 있다. (즉, 에베소서는 교회를 ‘그리스도의 교회’라고 이름 붙일 수 있다면 골로새서는 당연히 ‘교회의 그리스도’라고 이름을 붙일 수 있다.)

특히 본서신의 기독론은 만유(우주 만물)의 머리이신 그리스도라는 우주론적 차원에서의 기독론을 말한다. 사도 바울은 혼합주의적 색채가 강한 이단들이 난무하는 골로새 지역의 교회를 향해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이 유일무이한 만왕의 왕이시며 구주시라는 사실을 가르치면서 이단을 배격하여 성도다운 삶을 살도록 권면한다.

 

 

  1. 구조

1) 인사(1:1-12)

2) 그리스도의 우월성(1:13-2:23)

3) 그리스도인의 성숙한 삶(3:1-4:6)

4) 끝인사(4:7-18)



2025 빌립보서




윤효배 목사

■ 빌립보서

  1. 책 제목

헬라어 성경에서 본서는 ‘προς Φιλιππησιους(프로스 필립페시우스)’로 불린다. 이는 ‘빌립보인들에게’란 뜻이다. 한글성경 ‘빌립보서’는 이 제목에서 유래되었다.

 

 

  1. 기록자와 연대

1) 기록자/ 수신자

① 기록자

본서의 기록자는 바울이라는 사실은 본서 자체의 내증에 의해 확실시된다. 본서 1:1의 표현은 본서가 빌립보 교회에 보낸 바울의 서신임을 분명히 보여준다. 그리고 본서에 나타난 어휘와 문체, 회신 이후의 자신의 변화된 삶에 대한 바울의 간증(3:4-9) 등은 바울의 다른 서신들의 그것과 일치된다.

 

② 수신자

수신자는 빌립보에 사는 모든 성도, 감독, 집사들(1:1)이다. 이들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도시적 특성과 함께 바울과 어떻게 관계를 가졌는지에 대하여 알 필요가 있다.

 

*빌립보에 대하여

빌립보 도시는 B.C.350년 마게도냐 대왕 빌립 2세에 의하여 세워진 도시로서 원래의 이름은 ‘작은 우물’이란 뜻을 가진 ‘크레니데스’였으나 빌립에 도시를 확장, 증축하고 자신의 이름을 따라 ‘빌립보’라고 칭하였다. 그 후 이곳은 로마에 정복당해 바울 당시에는 마게도냐라는 로마 속주의 한 식민지 성읍이 되었다. 이곳은 본래 금과 은이 많이 나는 곳이었으며, 강기츠 강이 흐르는 비옥한 평지이며, 유럽과 아시아를 연결하는 교통의 요지로서 로마의 군사적 전초기지였으며 전략상 마게도냐 지방에서 제일로 꼽히는 성이었다(행 16:12).

 

*바울과 빌립보 교회의 관계

빕립보에는 소수의 유대인 거주자는 있었으나 유대인들의 회당은 없었고 단지 기도처가 강가에 있었다(행 16:13). 바울과 실라는 2차 전도여행 중에 성령에 인도하심에 따라 메게도냐 지역으로 가서 기도처를 찾다가 거기에서 여인들을 발견했고, 그중에 한 명이 자색 옷감 장사로서 루디아이며, 그녀에게 복음을 전하여 주변에도 영향을 끼쳐 감옥에도 갔으나 감옥의 간수에게 전도한 이후로 빌립보 교회가 세워지게 되었다.

 

2) 기록장소/연대

본서의 기록시기는 저작 장소와 밀접한 연관을 가진다. 바울은 자신이 옥중에 수감되어 있다고 밝히고 있다(1:7, 13, 17). 그렇다고 한다면 이 감옥은 전통적인 의견으로 볼 때 여기는 로마 감옥인 것으로 본다.

바울은 빌립보서를 통해서 시위대에 대한 언급(1:13)과 가이사 집 사람(4:22)에 대한 언급을 이어나간다. 여기서 시위대는 왕을 호위하는 고관이나 사령관을 보호하는 무리들을 말하는데, 신약성경에서 시위대라를 뜻하는 ‘프라이토리온’(πραιτώριον)은 호마 황제 근위대를 의미했다. 따라서 바울이 로마에 투옥되었을 때 기록했을 것이라는 추측이 가능하다.

또 가이사의 집사람에 대한 언급도 바울이 로마에 투옥되었다는 이야기를 지지해준다. 가이사는 ‘가이우스 율리우스 케사르'라는 로마 황제의 칭호를 말한다. 이 율리우스 이후의 모든 칭호를 말한다. 가이사의 집사람이었다는 사실은 바울이 바로 로마 통치 아래 있었다는 사실을 생각나게 한다.

마지막으로, 수감 기간의 활동이 보여주는 느슨한 제재(행 28:16, 30-31)를 봤을 때 이곳이 로마라는 사실을 더욱 극명하게 드러난다. 사도행전은 자신이 갇혀 있음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을 머물게 해주었고, 맞이 했다고 말한다. 이것은 바울이 로마에서 가택연금을 당했던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당시 로마 시민으로 황제에게 상소한 미결수는 로마에 도착하면 황제의 근위대장에게 인수인계되어 황제근위대 감옥에 감금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그러나 근위대장은 바울에게는 그렇게 하지 않고, 감옥 밖에, 가택연금의 형태로 따로 지낼 수 있도록 허락해주었다. 그럼에도 왜 바울에게 이렇게 관대하게 대해주었는지 그 이유는 알 길이 없지만, 하나님의 신비한 손길이 역사하셨다고밖에 설명할 길이 없다. 바울은 감옥 밖에 있었기 때문에 자신을 찾아오는 사람들에게 복음도 전하고, 그리스도인의 교제를 할 수 있었다.

이런 점을 볼때, 다른 옥중서신과 마찬가지로 빌립보서 또한 로마에 1차 투옥되었을 AD 62-63년에 기록되었을 것이다.

 

 

  1. 기록 동기

바울에 의하여 세워진 빌립보 교회는 그에 대하여 특별한 애정을 가진고 있었으나 바울이 로마의 감옥에 갇혔다는 소식을 듣고 헌금을 모아 에바브로디도 편에 바울에게 보내어 바울을 도왔다(2:25). 이렇게 하여 감옥에서 에바브로디도를 만난 바울은 빌립보 교인들의 사랑으로 인해 큰 기쁨을 얻었으며 또한 에바브로디도를 통해 빌립보 교회의 소식을 들었다. 그런데 그곳에 머물며 바울을 돕던 에바브로디도가 그만 병들어 중태에 빠졌고(2:26, 30), 이 일은 바울뿐 아니라 에바브로디도를 로마로 보낸 빌립보 교인들을 근심케 하였다(2:26). 그러나 다행히도 피차 근심하던 중, 에바브로디도가 회복되었다(2:27). 이에 바울은 그를 빌립보로 돌려보내면서 그간 빌립보 교인들이 자신에게 베풀어준 호의에 감사하며 자신의 투옥으로 근심하여 염려하는 저들을 안심시키고 도리어 격려하고자 본 서신을 쓰게 되었다(1:3-30, 4:10-20).

 

 

  1. 바울과 빌립보 교회의 상황

1) 바울의 상황

바울은 현재 매여 있는 상태(1:7, 13, 14 17)인데, 어떻게 보면 죽어도 상관이 없다고 말할 정도이지만(1:20-24, 4:14), 에베브로디도를 통해 빌립보 교회의 상황을 듣고 매우 안타까워하고 있다(3:17-18), 빌립보 상황을 빨리 앎으로 안위를 받고자 하였다(2:19, 28),

아울러 바울은 바울이 매여 있는 것으로 인하여 형제 중 다수가 겁 없이 복음을 전한 것뿐만 아니라 투기와 분쟁으로 복음을 전한다 할지라도 어떻게 되든지 그리스도가 전파되는 것에 대하여 기뻐할 뿐만 아니라(1:18), 빌립보 성도들이 구원의 합당한 바른 믿음과 삶을 가지고 있다고 하면 죽을지라도 기쁘다고 말하며(2:17-18, 4:1), 이러한 기쁨을 함께 나누고자 하였다(4:4).

 

2) 빌립보 교회의 상황

① 빌립보 교회는 감독들과 집사들이 있을 정도로 튼튼한 조직을 가졌으나(1:1), 구원에 완전히 다 이룬 것처럼 생각하며 구원에 대하여 점차 무감각해지고, 복음에 합당한 생활이 드러나지 않았다(1:27-29, 2:12, 3:12-14)).

② 뿐만 아니라 바울을 시기하던 자들이 있어 바울이 감옥에 갇힌 것에 대하여 오히려 잘 되었다고 생각하며 투기와 분쟁으로 복음을 전하는 자들이 있었으며(1:15, 17), 몸을 상해 하면서 행악을 일삼고(3:2, 4), 어그러지고 거스르는 세상의 영향을 받아,(2:15-16) 땅의 일만을 생각하는 자들이 나타났다

③ 아울러 유오디아와 순두게 사이의 갈들이 발생하며 교회 내부적 갈등과 분열의 조짐(2:1-4, 4:2)이 보였고,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가 아니라 육체를 신뢰하는 이들이 생겨(3:1-9) 십자가와 복음의 원수가 되는 모습을 가지고 있었다(3:18-19).

 

 

  1. 주제

1) 신앙의 성장 : 구원에 합당한 모습에까지 성장하라!

① 바울의 기도에서(1:6, 9-11)
“너희 안에서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는 확신하노라”, “9내가 기도하노라 너희 사랑을 지식과 모든 총명으로 점점 더 풍성하게 하사 10너희로 지극히 선한 것을 분별하며 또 진실하여 허물없이 그리스도의 날까지 이르고 11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의의 열매가 가득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찬송이 되기를 원하노라”

② 바울의 갇힌 상황 속에서(1:29)
“그리스도를 위하여 너희에게 은혜를 주신 것은 다만 그를 믿을 뿐 아니라 또한 그를 위하여 고난도 받게 하려 하심이라”

③ 바울의 권면에서(2:12, 3:12-14)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나 있을 때뿐 아니라 더욱 지금 나 없을 때에도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 “12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가노라 13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14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노라

 

2) 성도 간의 교제와 연합의 중요성 : 참된 교제 가운데 나아가라!

① 그리스도의 겸손을 본받으라(2:3-4)
“3아무 일에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 4각각 자기 일을 돌볼뿐더러 또한 각각 다른 사람들의 일을 돌보아 나의 기쁨을 충만하게 하라”

② 기쁘신 뜻 가운데 행하라(2:13-14)
“13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에게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 14모든 일을 원망과 시비가 없이 하라 15이는 너희가 흠이 없고 순전하여 어그러지고 거스르는 세대 가운데서 하나님의 흠 없는 자녀로 세상에서 그들 가운데 빛들로 나타내며

③ 갈등 가운데 있는 성도들에게 있어서(4:2-3)
“2내가 유오디아를 권하고 순두게를 권하노니 주 안에서 같은 마음을 품으라 3또 참으로 나와 멍에를 같이한 네게 구하노니 복음에 나와 함께 힘쓰던 저 여인들을 돕고 또한 글레멘드와 그 외에 나의 동역자들을 도우라 그 이름들이 생명책에 있느니라”

 

3) 기쁨과 감사의 중요성 : 주안에서 기뻐하라!

① 그리스도가 전파되는 것과 그 안에서 성장하는 것
무슨 방도로 하든지 그리스도가 전파되는 것(1:18), 빌립보 성도들의 믿음이 온전히 성장하는 것(2:17, 4;1)

② 우리의 시민권이 하늘에 있음(3:20-21)
“20그러나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 거기로부터 구원하는 자 곧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노니 21그는 만물을 자기에게 복종하게 하실 수 있는 자의 역사로 우리의 낮은 몸을 자기 영광의 몸의 형체와 같이 변하게 하시리라”

③ 성도의 필요를 채워주는 행위가 하나님께서 받으실만한 제물이 됨(4:15-18)
“15빌립보 사람들아 너희도 알거니와 복음의 시초에 내가 마게도냐를 떠날 때에 주고 받는 내 일에 참여한 교회가 너희 외에 아무도 없었느니라 16데살로니가에 있을 때에도 너희가 한 번뿐 아니라 두 번이나 나의 쓸 것을 보내었도다 17내가 선물을 구함이 아니요 오직 너희에게 유익하도록 풍성한 열매를 구함이라 18내게는 모든 것이 있고 또 풍부한지라 에바브로디도 편에 너희가 준 것을 받으므로 내가 풍족하니 이는 받으실 만한 향기로운 제물이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 것이라”

 

 

  1. 구조

① 도입(인사) : 1:1-2

② 바울의 기도 : 1:3-10

② 바울의 상황 : 1:12-26

③ 바울의 권면 : 1:27-4:9

④ 바울의 감사 : 4:10-20

⑤ 종결(끝인사) : 4:21-23



2025 에베소서



μελετάω Storng number3191

1. 조심하다.  2. 연습하다.  3. 생각하다  
Pronunciation [ mĕlĕtaō ]
Etymology  / 제1부정과거 ἐμελέτησα, 3199의 파생어에서 유래
  • 1. 조심하다, 힘쓰다.
  • 2.  연습하다, 개발하다, 연마하다, 양성하다, 애쓰다, 힘쓰다, 딤전4:15.
  • 3. 생각하다, 꾀하다, 묵상하다, 행4:25.
  • 4.  근심하다, 막13:11.
  • 관련 성경  / 염려하다(막13:11), 경영하다(행4:25), 전심전력하다(딤전4:15).


θεωρία, ας, ἡ Storng number 2335
1. 구경거리.  2. 광경.  3.눅 23:48.
Pronunciation [ thĕōria ]
Etymology
2334와 동일어에서 유래
  • 1.
    구경거리, 광경, 눅23: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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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구경(눅23:48).



묵상(默想, 영어: contemplation)은 특정 대상을 깊게 생각하는 행위이며 종교적인 관점에서 묵상은 기도명상을 수행하는 방법 중 하나이다.

묵상은 플라톤 철학의 중요한 부분이었다. 
플라톤은 묵상을 통해 영혼이 좋은 형태 나 다른 신성한 형태의 지식으로 올라갈 것이라고 생각했다. 
Plotinus as a (neo) Platonic 철학자는 또한 henosis에 도달하기위한 가장 중요한 구성 요소로서 숙고를 표현했다. 
플롯 티 누스 (Plotinus)에게 하나님, 모나드 또는 하나라는 비전을 경험하는 것이 가장 큰 묵상이었다. Plotinus는 Enneads의 작품에서이 묵상의 경험을 묘사한다. 그의 학생 반암 (Porphyry)에 따르면 플롯 티 누스 (Plotinus)는 그가 4 번이 경험을 했다고 말했다. Plotinus는 Enneads 6.9.xx에서 자신의 묵상에 대한 경험을 썼다.

묵상이라는 단어는 라틴어 단어 contemplatio에서 파생된다. 
그것의 뿌리는 또한 라틴어 단어 templum, 후원의 받음을 위해 봉헌 된 땅 조각, 또는 예배를위한 건물, Proto-Indo-European 기초 가 되었고 유럽에서 기초 -"스트레칭 "- 따라서 제단 앞의 정리 된 공간을 가리킨다. 

라틴어 단어 contemplatio는 그리스어 θεωρία (theòría)를 묵상의 의미를 번역하는 데 사용되었다.

기독교에서 묵상이란 살아있는 현실로서의 하나님에 대한 인식을 향한 내용없는 마음을 의미한다. 
이것은 어떤면에서 동양 종교에서 기도를 하는 행위인 사마 디 (samadhi)라고 불리는 것에 해당한다. 한편 서양 교회에서 수세기 동안 묵상은 이그나 티아 운동이나 개종자와 같이 성서적 장면을 시각화하는 것과 같은 것에서 활발한 수행과정으로 연습을 언급했다. 정신 분야 전문가는 "성경의 내용을 듣고 "마음의 귀"는 마치 그 또는 그녀가 하나님과 대화하고있는 것처럼, 그리고 하나님은 토론 할 주제를 제안하고 계신다.라고 묵상의 목표를 제시했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묵상에 관하여 다음과 같이 썼다. 
"인간 공동체의 유익을 위해서는 묵상의 삶에 헌신하는 사람들이 있어야한다." 

토마스 아퀴나스를 연구한 독일인 기독교 철학자 조셉 피퍼(Josef Pieper)는 다음과 같이 논평했다.
 "인간 사회의 한가운데에 보존되어있는 진실성은 한 번에 동시에 쓸모 없으며 모든 가능한 사용에 대한 척도가 된다. 따라서 진실을 유지하는 것도 고려 중이다."






”묵상은 적용을 낳고, 묵상은 치유하고, 묵상은 가르친다.“(Ezekiel Culverwell)

말씀 묵상 목적과 방법

”묵상은 적용을 낳고, 묵상은 치유하고, 묵상은 가르친다.“(Ezekiel Culverwell)

영적 성장은 신자들의 기독교적 삶의 한 부분이 되어야 한다. 베드로는 신자들에게 “우리 주 곧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그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 가라.”(벧후 3:18)고 권면한다. 하이델베르크 교리문답은 “참된 그리스도인은 믿음으로 그리스도의 지체가 되고, 그리스도의 기름 부음에 참여하게 된다.”고 말한다.

참된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말미암아 새 생명을 얻어 살아나고, 그에 대한 보증으로 그들에게 성령이 주어진다. 그리고 성령의 권능으로 말미암아 ‘위의 것을 찾는다’(골 3:1) 참된 그리스도인에게는 영적 성장이 당연히 기대되는 일인데, 그 이유는 “참된 믿음으로 그리스도에게 접붙여져 있는 사람들이 감사의 열매를 맺지 않는 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질문 32, 45, 48, 64)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의 성장을 가로막는 한 가지 장애물은 그리스도인들이 영적 지식을 계발하지 않는다는 데 있다. 우리는 기도와 성경 읽기에 시간을 충분히 할애하지 못하고 있고, 묵상 습관을 실천하지 못했다. 한때 기독교의 핵심 훈련의 한 분야로 간주 되고, ‘기도 활동에 극히 필수적 예비단계이자 보조 업무’로 간주 되었던 묵상(默想, meditation)이라는 단어가 지금은 비성경적인 뉴에이지(New Age) 영성과 결탁이 되어 있는 것은 얼마나 큰 비극일까!  

우리는 당연히 초월(超越) 명상과 마인드 컨트롤(mind control)과 같은 다른 수련에 종사하는 자들을 비판한다. 왜냐면 이런 수련은 불교나 힌두교(Hinduism)와 같은 거짓 종교에 연루되어 있고, 성경과는 아무 관계가 없기 때문이다. 이런 명상은 마음을 비워 세상과 격리시키고 소위 우주정신에 합일(合一)되도록 하는 데 초점이 맞춰져 있고, 살아 계신 인격적인 하나님께 다가가 귀를 기울이고, 적극 반응을 하는 것과는 무관하다. 그러나 우리는 이런 사람들을 통해 조용한 반성과 묵상의 중요성을 배울 수 있다.

한때 기독교 교회는 죄를 멀리하고 하나님과 이웃을 가까이하는 데 초점을 둔 성경적 묵상에 깊이 참여한 적이 있었다. 청교도 시대에 수많은 목회자가 묵상 방법에 대해 설교하고 글을 썼다. 이번 장에서 우리는 청교도의 묵상 관습을 살펴보면서 ‘묵상 본질과 의무’, ‘방식과 주제’, ‘유익과 장애물’, ‘자기 검토’에 대해 확인해 볼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청교도들을 스승으로 삼으면 우리 시대에 합당한 성경적 묵상 관습을 회복할 수 있을 것이다.

1. 묵상의 정의, 본질, 종류

(1) 묵상의 정의

‘묵상하다’(meditate) 또는 ‘명상하다’(muse)는 말은 ‘깊이 생각하다’ 또는 ‘반성하다’는 뜻이다. 다윗은 “작은 소리로 읊조릴 때 불이 붙으니”(시 39:3)라고 말했다. 여기서 “작은 소리로 읊조리다.”(muse)는 말은 ‘속삭이다.’, ‘중얼거리다.’, ‘입으로 소리를 내다.’는 뜻이다. 곧 이 말은 ‘우리가 혼자 말을 하는 것’을 표현하는데 쓰는 말이다. 이런 식의 묵상은 성경 구절을 암기하기 위해 낮은 소리로 홀로 낭송하는 것을 가리켰다.

성경은 종종 ‘묵상’에 대해 언급한다. 창세기 24:63은 “이삭이 저물 때에 들에 나가 ‘묵상’하다가”라고 말한다. 가나안을 정복하는 일을 지휘해야 하는 힘든 업무를 맡고 있음에도, 주님은 여호수아에게 율법책을 주야로 ‘묵상’하여 그 안에 기록된 대로 다 지켜 행하라.“(수 1:8)고 명하셨다. 그러나 ‘묵상’이라는 말은 시편에 가장 자주 등장하는데, 그 횟수가 다른 모든 성경 속에 나오는 것을 합친 것보다 많다.  

시편 1편은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사람을 복 있는 사람’이라고 부른다. 시편 63:6을 보면, 다윗은 자신이 침상에서 주를 기억하며 새벽에 주의 말씀을 작은 소리로 읊조린(meditating) 것에 대해 말한다. 시편 119:148은 “주의 말씀을 조용히 읊조리려고(meditate) 내가 새벽녘에 눈을 떴나이다.”라고 말한다.(참고, 시 4:4, 77:10-12, 104:34, 119:16,48.59,78,97-99) 

(2) 묵상의 본질

생각하는 것, 반성하는 것이나 명상하는 것은 묵상 주제를 전제로 한다. 공식적 묵상은 중요한 주제를 대상으로 한다. 예를 들면 철학자들은 물질과 우주와 같은 개념들을 묵상하고, 신학자들은 하나님, 영원한 작정, 인간의 의지 등에 대해 묵상한다.

청교도는 성경적 묵상은 삼위 하나님과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 생각하는 걸 포함한다고 말하기를 결코 게을리한 적이 없었다. 청교도는 묵상 대상을 살아 있는 말씀인 예수 그리스도와 기록된 말씀인 성경에 고정시킴으로 행함을 무시하고 명상만 강조하며, 성경 내용을 무시하고 상상의 나래를 펼치는 데 몰두하는 거짓 영성이나 신비주의와 같은 부류와는 거리를 두었다. 청교도는 묵상을 통해 지성과 마음(감정)을 함께 단련시켰다. 묵상하는 자는 지성뿐만 아니라 감정을 갖고 주제에 접근한다.    

토머스 왓슨(Thomas Watson, 1620-1686, the Puritan preacher and author)은 묵상을 “하나님의 진리를 기억하고, 이 진리를 진지하게 상고해서 우리 자신에게 적용하는 지성의 거룩한 실천이다.”라고 정의했다.

에드먼드 칼라미(Edmund Calamy, 1600-1666)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참된 묵상은 묵상할 때 그리스도를 묵상함으로 마음이 그리스도에 대한 사랑으로 불타오르게 하고, 하나님의 진리에 대해 묵상해서 마음이 그 진리에 따라 변화되게 하며, 죄에 대해 묵상해서 마음이 죄를 미워하게 만드는 것이다.”

그는 계속해서 말하기를 “묵상을 통해 유익을 얻기 위해서는 세 개의 문 곧 지성의 문, 마음과 감정의 문, 실천적 삶의 문으로 들어가야 한다.”라고 했다. 에드먼드 칼라미는 이렇게 말했다. 그는 또 “그대는 하나님이 걷는 것처럼 걷기 위해 하나님을 묵상하고, 그리스도를 존중하고 그리스도께 순종하는 삶을 살기 위해 그리스도를 묵상해야 한다.”라고도 말했다.

그리스도인의 묵상은 매일 이행해야 할 의무로서 청교도가 말하는 기독교적 삶의 다른 모든 의무를 더 잘 이행하게 하는 역할을 한다. 기계에 윤활유를 치는 것 같이 묵상도 은혜의 수단들(성경 읽기, 설교 듣기, 기도 등)을 부지런히 사용할 수 있도록 돕고(참고, 웨스트민스터 대요리문답 질문 154), 은혜의 표지(회개. 신앙. 겸손)를 더 깊이 있게 하며, 다른 존재들과의 관계(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를 강화시켜준다.

(3) 묵상의 종류

청교도는 두 종류의 묵상 곧 ‘임시적 묵상’과 ‘계획적 묵상’에 대해 말했다. 칼라미는 “하늘의 일들에 대한 돌발적인 ‘임시적인 묵상’이 있고, 엄숙하며 정해져 있고 ‘계획적 묵상’이 있다.”라고 말했다.

⓵ 임시적 묵상

임시적 묵상은 감각을 통해 관찰한 것으로 자신 생각을 하늘에 대한 묵상으로 들어 올리는 것이다. 신자는 자신의 눈으로 보거나 귀로 듣는 것을 ‘천국에 오르는 사닥다리’로 이용한다. 다윗이 시편 8편에서 달과 별들을 보고 말한 것, 솔로몬이 잠언 6장에서 개미들을 보고 말한 것, 그리스도께서 요한복음 4장에서 우물을 보고 말한 것이 바로 임시적 묵상이다.    

토머스 맨톤(Thomas Manton, 1620-1677)은 이렇게 설명했다. “하나님이 모형과 의식들을 통해 구약교회를 훈련을 시키셨는데 이것은 그들로 일상적인 대상을 통해 영적 사고에 이를 수 있도록 하신 것이다. 신약 시대에 우리 주님은 세상사를 위해 모든 직업과 일터를 갖고 일하는 사람들 속에서 발견되는 통상적인 기능과 직무들에서 취한 비유와 비사를 통해 우리가 일하는 장소가 가게이든 공장이든 들판이든지 계속 그리스도와 천국에 대해 생각하도록 천국 정신을 가르치셨다.”

‘임시적 묵상’이나 ‘즉흥적 묵상’은 실천하기가 비교적 쉽다. 왜냐면 언제 어디서든 어떤 사람들 속에서든 실천할 수 있기 때문이다. 영적 성향의 사람은 자연물을 영적 진리로 삼는 법을 쉽게 배울 수 있다. 그의 욕구는 영적인 것까지도 육적인 것으로 만들어 버리는 육적 성향의 사람과는 반대되기 때문이다.

맨톤이 말한 것처럼 “은혜를 받은 마음은 증류기(蒸溜器) 같아서 접하는 모든 것 속에서 유용한 묵상 자료를 증류해 낼 수 있다. 은혜를 받은 마음은 하나님 안에서 모든 것을 보는 것처럼 모든 것 속에서 하나님을 본다.”

묵상에 대한 거의 모든 청교도 작품이 임시적 묵상을 언급하고 있다. 월리엄 스퍼스토(William Spurstowe, Spurstow, 1605-1666), 토머스 테일러 (Thomas Taylor, 1576-1632), 에드워드 버리(Edward Bury, 1616-1700), 헨리 루킨(Henry Lukin, 1628-1719) 같은 청교도는 임시적 묵상만을 다룬 책을 썼다. 그러나 임시적 묵상은 위험성도 있다.

조셉 홀(Joseph Hall, 1574-1656) 주교는 이런 묵상은 억제하지 않고 방치하면 쉽게 말씀에서 이탈해서 로마가톨릭 영성의 경우처럼 미신적인 것이 되고 만다고 경고했다. 즉 사람의 상상력은 거룩한 말씀의 통제를 받아야 한다. 청교도는 임시적 묵상을 어디까지 인정해야 하는지에 대해 각기 의견이 달랐다.        

‘천로역정과 청교도 묵상의 전통’(The Pilgrim’s Progress and Traditions in Puritan Meditation)에서 카우프만(Milo Franklin Kauffman, 1898-1988)은 청교도의 묵상에는 두 가지 전통이 있다고 말했다. 카우프만은 “교회 정치 분야에서는 아니나 신학 분야에서는 온건한 청교도인 조지프 홀은 1606년에 처음 출판된 ‘신적 묵상의 방법’(Art of Divine Meditation)이라는 책을 통해 청교도 속에서 묵상 문학이 발전하는 길을 열어 놓았다고 말했다.

조셉 홀은 묵상 내용을 말씀으로 한정시킴으로 묵상할 때 상상력을 발휘하는 것에 제동을 걸었다. 홀의 생각은 1650년대에 주로 활동했던 아이작 암브로스(Isaac Ambrose, 1604-1664)와 1586년 7월 5일, 토마스 후커(Thomas Hooker, 1586-1647) 그리고 그로부터 한 세대 후에 활동했던 존 오웬(John Owen, 1616-1683)과 에드먼드 칼라미(Edmund Calamy, 1600-1666)에게 크게 영향을 미했다.

카우프만은 말하기를 로마가톨릭 저술가들과 달리 대다수 청교도 저술가들은 “그리스도의 생애 속에서 일어난 사건들보다는 성경 교리나 특수한 명제들에 대해 묵상했던 것으로 보인다.”고 했다. 카우프만에 따르면 리처드 십스(Richard Sibbes, 1577-1635)와 리처드 백스터 (Richard Baxter, 1615-1691)는 이런 전통에서 벗어나 성례와 천국에 대한 묵상을 추천했다. 특히 십스는 영혼은 제약 없는 상상력으로 크게 상처를 받을 수도 있으나 또한 “그로 인해 큰 도움을 받을 수도 있다.”고 주장했다.

천국을 잔치로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혼인(婚姻)으로 표현하는 것처럼 하늘의 일들을 땅의 말로 표현하는 것은 “우리의 상상력이 허다한 영적 유익을 얻으면서 (중략) 걸어가는 넓은 들판을 제공했다.”라고 십스는 말했다. 카우프만은 백스터가 감각 대상과 신앙 대상을 비교함으로써 상상력을 강조할 때 십스의 ‘영혼의 갈등’에 영향을 받은 것이라 생각을 했다. 또 존 번연(John Bunyan, 1628-1688)은 ‘천로역정’을 쓸 자극을 받게 되는데 이 책에서 그는 상상력을 동원해서 신자의 영적 순례에 결정적인 아주 광범한 주제들을 다루고 있다.

카우프만의 평가는 어느 정도 진실을 담고 있는 것이 사실이지만 그는 청교도가 성경을 벗어나 상상력을 자유롭게 사용하는 것을 두려워했다는 것을 거의 의식하지 못하고 있다. 청교도는 안셀무스, 로욜라의 이그나티우스 그리고 다른 로마가톨릭 학자들이 지나치게 복음서 이야기-특히 그리스도의 체포와 재판과 고난과 부활-를 시각화해서 오감을 통한 상상력에 문을 열어 놓은 것을 당연히 경계했다. 나아가 홀과 람브로스에 대한 카우프만의 부정적 평가는 두 저술가가 성경적 상상력과 감각 활용에 대해 얼마나 괄목할 만한 자유를 부여했는지를 고려하지 못한 데서 기인한다.        

‘홀의 묵상’(Contemplations)과 암브로스의 ‘예수를 바라보라’는 성경의 경계를 이탈하지 않으면서 자유롭게 묵상에 전념했다. 이 균형은 청교도 전통 속에서 결정적으로 중요하고, 그것만으로도 청교도는 우리가 거룩한 상상력을 어떻게 사용을 해야 하는지 스승과 같은 역할을 한다.

⓶ 계획적 묵상

가장 중요한 묵상 종류는 날마다 시간을 정해 놓고 하는 ‘계획적 묵상’이다. 칼라미는 “계획적 묵상은 ‘사람들에게서 분리되어 (중략) 어떤 시간에 은밀한 골방에서나 또는 홀로 걸으면서 갖는’ 묵상으로 이때 묵상하는 자는 엄숙하게 그리고 숙고(熟考)하며 하늘의 일들에 대해 묵상한다.”라고 말했다.

이런 숙고는 ‘벌이 꽃 위에 머물러 있으면서 꿀을 몽땅 빨아들이는 것처럼’ 하나님과 그리스도와 진리 위에 머물러 있다. 또 이런 묵상은 영혼의 반성 행위로서 이 행위를 통해 영혼은 자신을 돌아보면서 그 원인과 결과와 속성들을 비롯한 주제에 대해 자신이 알고 있는 모든 사실을 깊이 성찰(省察)한다.

토마스 화이트(Thomas White, ?-1762)는 “계획적 묵상은 네 가지 원천 곧 성경, 기독교의 실천적 친리, 섭리적 사건(경험), 설교에서 나온다.”라고 했다. 특히 설교는 화이트가 “단지 한편의 설교를 듣고 묵상하는 것이 두 편의 설교를 듣고 전혀 묵상하지 않는 것보다 났다.”라고 말한 것처럼 묵상을 위한 비옥한 땅이다.

어떤 청교도는 ‘계획적 묵상’을 두 부분으로 나눴다. 즉 ‘직접적 묵상’ 곧 묵상 주제에 초점을 맞추는 묵상과 ‘반성적(또는 반사적) 묵상’ 곧 묵상하고 있는 자신에 초점을 맞추는 묵상이다.      

‘직접적 묵상’은 사고(思考)하는 지성의 행위이나 ‘반성적 묵상’은 양심의 행위다. ‘직접적 묵상’은 지식으로 지성을 계몽하나 ‘반성적 묵상’은 마음을 선(善)으로 가득 채운다. ‘계획적 묵상’은 말씀을 대상으로 삼고 있으므로 교리적일 수 있고 또는 우리의 삶을 대상으로 삼고 있으므로 실천적일 수 있다.

토마스 구지(Thomas Gouge, 1605-1681)는 ‘계획적 묵상’의 다양한 국면을 종합해서 이렇게 말했다. “정시(定時)의 계획적 묵상은 진지하게 지성을 영적 주제나 천상의 주제에 적용(適用)하고, 그렇게 함으로써 자신과 대화를 나누는 것으로 결국에는 마음이 따스해지고 감정은 되살아나고 결심은 더욱 굳건해져 하나님을 더욱 사랑하고 죄는 더욱 미워하는 일 등이 일어나게 된다.”

리처드 백스터는 또 “‘정시 계획적 묵상’은 ‘임시적 즉흥적 묵상’과는 크게 다른데 그것은 정시(定時) 기도가 일상적 업무를 수행하면서 임의로 간구하는 기도와 다른 것과 같다.”라고 말했다, 그러나 이 두 종류의 묵상은 모두 성도의 경건에 필수적이다. 이 두 묵상은 머리의 지성(知性)과 가슴 감성(感性)의 필요를 충족시킨다. 가슴의 뜨거운 적용이 없으면 묵상은 연구와 다르지 않다.

토머스 왓슨은 이렇게 말했다. “성경연구는 진리를 찾아내는 것이고 성경 묵상은 진리를 영적으로 진보시키는 것이다. 즉 전자는 금맥을 찾는 것이고 후자는 금을 캐내는 것이다. 연구는 따스함과 영향력이 거의 없는 겨울의 태양과 같다. 반면에 묵상은 (중략) 마음이 얼어붙어 있을 때 녹이고 마음이 사랑의 눈물을 흘리게 만든다.”

2. 묵상의 의무와 필요성

청교도들은 묵상의 필요성을 매우 강조했다. 그들은 그 이유를 이렇게 말했다.

첫째, 하나님은 말씀을 묵상하라고 명하신다. 

이 한 가지만으로도 우리가 묵상해야 할 이유는 충분하다. 청교도는 묵상의 필요성을 강조하기 위해 수많은 성경 본문(신 6:7, 32:46, 시 19:14, 49:3, 63:3, 94:19, 119:11,15,23.28,93,99, 143:5, 사 1:3,  눅 2:19, 요 4:24, 엡 1:18, 딤전 4:13, 히 3:1 등)과 성경적 사례(멜기세덱. 이삭. 모세. 여호수아. 다윗. 마리아. 바울, 디모데 등)를 인용한다.  

우리가 일상적(日常的)으로 말씀을 묵상하지 않을 때 우리는 하나님과 하나님 말씀을 가볍게 여기게 되고 자신도 모르게 경건하지 못하다는 것을 드러내게 된다.

둘째, 성경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보내신 편지이다.

토머스 왓슨은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말씀을 성급하게 대충 흝어보는 식으로 넘어가서는 안 되고 말씀을 기록하게 하신 일 속에 나타나 있는 하나님의 지혜와 이 말씀을 우리에게 보내신 일에 나타나 있는 하나님의 사랑과 그의 뜻을 묵상해야 한다.”

이런 묵상은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감정과 사랑에 불을 붙여 놓을 것이다. 다윗이 말한 것과 같다. “또 내가 사랑하는 주의 계명들을 향하여 내 손을 들고 주의 율례들을 작은 소리로 읊조리리이다.”(시 119:48)

셋째, 묵상이 없으면 우리는 견고한 그리스도인이 될 수 없다.

토마스 맨톤(Thomas Manton, 1620-1677)은 이렇게 말했다. “우리가 하나님의 영적 약속에 대한 묵상을 지속적(持續的)으로 먹지(계속하지) 않으면 신앙은 비쩍 말라 굶어 죽게 될 것이다. 다윗이 시편 119:92에서 말한 것과 같다. ‘주의 법이 나의 즐거움이 되지 아니하였더라면 내가 내 고난 중에 멸망하였으리이다.’”

또 토마스 왓슨(Thomas Watson, 1620-1686)은 이렇게 말했다. “말씀을 묵상하지 않는 그리스도인은 훈련(訓練)받지 못한 비무장(非武裝)의 군인과 같고 연장 없이 일하려는 기술자(技術者)와 같다. 말씀 묵상이 없으면 하나님의 진리는 우리에게 머무르지 못할 것이다. 곧 마음은 강퍅해지고 기억은 쇠잔할 것이다. 말씀 묵상이 없으면 결국 우리는 모든 것을 잃고 말 것이다.”

넷째, 묵상 없으면 선포된 말씀이 우리에게 유익이 되지 못한다. 

스쿠더는 “말씀 묵상이 없으면 성경 읽기도 ‘날 음식을 씹지 않고 삼키는 것’과 같다.”고 말했다. 이 말에 리처드 백스터는 “그러나 한 번에 지나치게 많이 먹으면 제대로 소화 시킬 수 없다.”고 덧붙였다.

토머스 왓슨은 이렇게 말했다. “진리에 대한 지식과 진리에 대한 묵상은 큰 차이가 있는데 그 차이는 마치 촛불과 태양 빛의 차이와 같다. 태양 빛이 비취는 정원에 등불이나 촛불을 놓아보라. 아무 영향을 주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태양은 엄청난 영향을 미친다. 식물을 자라게 하고 풀을 무성하게 한다.  

마찬가지로 묵상이 없는 지식도 지성 속에서 빛나고 있는 촛불처럼 별로 아니 전혀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 지식은 사람을 더나은 존재로 만들지 못한다. 그러나 묵상은 태양 빛과 같다. 묵상은 감정을 변화시키고 마음을 따스하게 하고 더 거룩하게 한다. 묵상은 진리 속에 생명을 낳는다.”

다섯째, 묵상 없는 기도는 그 효력이 감소하게 된다.

토마스 맨톤은 이렇게 말했다. “묵상은 말씀과 기도 사이에서 의무의 매개체로서 양자를 관련시킨다. 말씀은 묵상에 힘을 주고 묵상은 기도를 힘 있게 한다. 우리는 우리 신앙이 오류가 있는 건 아닌지 말씀을 들어야 하고 그 후에는 우리 신앙이 열매 없는 신앙은 아닌지 묵상해야 한다. 그러므로 이 두 의무는 항상 함께 가야 한다. 말씀을 읽고 들은 후에는 묵상을 하고 묵상을 한 후에는 기도해야 한다.”

여섯째, 묵상 없이는 진리를 변증할 수 없다. 

묵상 없는 신앙은 척추(脊椎) 없는 사람과 같고 자신이 어떤 존재인지 알지 못한다. 토마스 맨톤은 이렇게 말했다. “묵상이 생소한 사람은 자신에 대해서도 생소하다.” 토마스 왓슨은 또 “그리스도인을 그리스도인으로 만드는 건 말씀 묵상이다.”라고 말했다. 제임스 우셔(James Ussher, 1581-1656)는 “우리는 묵상의 필요성을 알고 있다. 우리는 천국에 가고 싶다면 이 의무 실천을 결심해야 한다.”라고 말했다.

일곱째, 묵상은 설교 준비의 필수적 한 부분이다.

묵상이 없으면 설교는 깊이 있는 지성, 풍부한 감정, 명확한 적용이 결여(缺如) 될 것이다. 뱅겔이 헬라어 신약 성경을 공부하는 학생들에게 준 지침은 이런 묵상의 본질을 잘 포착하고 있다. “본문 전체를 자신에게 적용을 시켜라.”    

3. 말씀 묵상 방법

청교도 저술가들에 따르면, 묵상에는 필수 조건과 규칙들이 있었다. 그들이 묵상 빈도와 시간, 묵상을 위한 준비, 목상 지침 등에 대해 쓴 것을 고찰해 보자.

(1) 묵상 빈도와 시간

첫째, 경건한 묵상은 자주 해야 한다.

시간과 의무감이 허락된다면 하루에 두 번이 이상적이다. 최소한 하루에 한 번은 해야 한다. 빈틈없는 지도자였던 여호수아가 하나님에게서 그분의 법을 주야(晝夜)로 묵상하라는 명령을 받았다면 우리가 매일 아침과 저녁으로 하나님의 진리를 묵상하는 것을 즐거워하는 것은 당연하지 않은가?

일반적으로 삼위 하나님과 그분의 진리를 자주 묵상할수록 하나님을 더 깊이 알게 될 것이고 아울러 묵상도 그만큼 더 쉬워질 것이다. 묵상과 묵상 사이의 간격이 길어지면 묵상의 열매를 잘 맺지 못할 것이다. 월리엄 베이츠가 이렇게 말한 것 같다. “새가 오랫동안 둥지를 떠나 있으면 알은 차가워지고 부화(孵化)에 적절하지 못한 상태가 되지만 계속 품고 있으면 부화할 것이다. 마찬가지로 우리도 오래 신앙의 의무를 떠나 있으면 감정은 차가워지며 거룩함을 낳고 영혼을 위로하는 데 적절하지 못한 상태가 될 것이다.”

둘째, 묵상 시간을 정해 놓고 엄수하라.

이렇게 하면 ‘빼먹고 싶은 허다한 유혹’을 이기게 될 것이라고 백스터는 말했다. 가장 정신이 맑고 다른 의무 때문에 방해받지 않는 새벽 시간이 묵상하기에 가장 좋은 시간이 될 것이다. 왜냐면 그 시간의 목상이 하루의 나머지 시간의 분위기를 결정하기 때문이다.(출 23:19, 욥 1:5, 시 119:147, 잠 6:22, 막 1:35) 그러나 사람에 따라서는 저녁이 묵상에 더 유익할 수도 있다.(창 24:63, 시 4:4) 그들은 하루의 일과를 다 마치고 달콤한 묵상을 통해 하나님의 품에서 안식할 준비를 하게 된다.(시| 16:7)

완벽한 묵상 시간을 가지려면 주일을 활용하라. 웨스트민스터 총회의 문서 작성자들은 예배 모범에서 “회중의 엄숙한 공적 모임 사이나 후에 비어 있는 시간에 성경 읽기와 묵상과 설교를 반추(反芻)해 보는 게 좋다.”고 권면했다. 토마스 구지(Thomas Gouge, 1609-1681)는 “그대가 이 경건한 묵상의 의무가 주는 달콤함을 맛본 적이 있다면 특히 주일에는 잡담이나 한가한 담화에 시간을 거의 쓰지 않을 것이다.”라고 했다.

백스터는 “우리 주님이 땅에서 일어나 사망과 지옥을 완전히 정복하고 우리를 위해 천국을 취하신 날보다 우리가 천국에 올라가기에 합당한 날이 언제겠는가?”라고 물었다. 또 특별한 경우의 시간을 묵상에 활용하라. 청교도에 따르면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다.    

‣ 하나님이 우리 영에 특별한 부흥과 능력을 주실 때,

‣ 고난이나 두려움이나 염려나 시험으로 말미암아 복잡한 심적 혼란에 빠져 있을 때,

‣ 하나님의 사자들이 죽음에 대해 환기(喚起)를 시킬 때 곧 노년에 이르러서든 육체가 노쇠해서든 아니면 모종의 죽음의 징후에 의해서든 떠날 때가 그리 밀지 않았다고 말해줄 때,

‣ 설교나 성례를 통해 감동하거나 하나님 섭리의 어떤 심판이나 자비나 한 행위를 확인했을 때, 철은 빨갛게 달궈졌을 때가 단련하기 가장 좋은 때이다.(시 119:23)

‣ 성찬과 회개의 시간과 주일과 같이 엄숙한 의무를 시행하기 전이다.

셋째, 영혼의 유익을 발견할 때까지 통상적으로 묵상해야 한다.

베이츠는 “묵상은 젖은 나무에 불을 붙이려고 시도하는 것과 같다.”라고 말했다. 이때 끝까지 참는 자가 불을 붙이게 될 것이다. 묵상을 시작할 때 처음에는 소량의 연기와 작은 불꽃 정도밖에 일으키지 못하지만 결국에는 거룩한 감정의 불길이 치솟아 하나님을 향해 올라갈 것이다. 그래서 베이츠는 ‘불길이 그렇게 올라갈 때까지’ 인내하며 묵상하라고 말했다.    

불길이 올라가지 못할 때도 있을 것이다. 그때 여러분은 막연히 계속해서는 안 된다. 이에 대해 토마스 맨톤은 이렇게 말했다. “게으름에 빠지거나 영적인 따분함에 빌미를 주지 마라. 마귀는 이 두 가지 태도에 있어 여러분보다 유리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힘을 소진(燒盡)해서 여러분의 영이 혼란 속에 있을 때 마귀는 하나님의 역사를 가로막을 것이다.”

대다수 청교도는 묵상에 구체적으로 어느 정도의 시간을 할애해야 하는지는 말하지 않았다. 그러나 제임스 어셔는 최소한 한 주에 한 시간 정도는 할애해야 한다고 주장했고, 토머스 화이트는 이렇게 주장했다. “묵상에는 준비, 성찰, 감정, 결단 등 여러 요소가 있는데 이 요소 가운데 어느 것도 경홀히 여겨서는 안 된다. 왜냐면 감정은 그리 쉽게 일어나는 것이 아니며 불이 붙으면 멈추지 않고 바람을 불어 넣어야 하기 때문이다. 이때 불길이 타오를 정도가 되려면 입문자들은 적어도 하루 30분 정도고 묵상에 익숙한 사람들은 한 시간 정도가 적합하다.

(2) 묵상을 위한 준비

청교도 저술가들은 효과적인 묵상을 위한 몇 가지 준비 단계를 제시했는데 모두가 마음 상태에 크게 좌우되는 것들이다.

첫째, 마음을 이 세상의 것에서 분리를 시켜라.

곧 세상일과 세상이 주는 즐거움과 세상과 관련된 내적 고뇌 및 동요 등에서 벗어나라. 칼라미는 이렇게 말했다. “외부 친구뿐만 아니라 내부의 친구 즉 무익하고 세속적이고 마음을 산란하게 하는 생각들도 차단(遮斷)시켜 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하라.

둘째, 죄책과 오염에서 마음을 깨끗게 하고 영적인 것에 열렬한 사랑으로 타오르게 하라.

 성경 본문과 영적 진리의 보물을 축적하라. 시편 119:11의 ”내가 주께 범죄 하지 아니하려 하여 주의 말씀을 내 마음에 두었나이다.“라는 다윗의 고백에 따라 살기 위해 은혜를 구하라.

셋째, 가장 진지한 마음으로 묵상에 임하라.

묵상의 중요성과 탁월성과 잠재력을 유념하라. 묵상에 성공한다면 여러분은 하나님의 참된 임재 속에 들어가게 될 것이며, 다시 한번 이 땅에서 영원한 기쁨을 맛보기 시작할 것이다.(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질문 58) 어셔는 이렇게 말했다.    

“다음과 같은 생각이 그대 마음의 생각이어야 한다. 곧 나는 그 앞에서 모든 것이 벌거벗은 것처럼 고스란히 드러나는 하나님을 믿고 있다. 그러므로 나는 전지(全知)하신 하나님 앞에서 어리석은 말을 하지 않도록 조심하고, 내 생각이 탈선에 이르지 않도록 해야겠다. 사람은 다른 일로 분주해진 마음을 갖고 가장 위대한 임금과 대화를 나눌 수 있다. 그럴 때는 하나님과 대화를 나누지 않도록 하라. 하나님의 눈이 그 마음 위에 있고, 그러하기에 그대의 주관 심사는 마음의 방향키를 굳게 지키는 데 있어야 한다. 삼위일체의 하나님이 임재하고 계신다는 사실을 유념하라.“

넷째, 묵상이 방해받지 않을 조용하고 자유로운 장소로 하라.

조지프 홀은 “사람이 없고, 소음이 없고, 움직임이 없는 내밀함과 조용함과 쉼을 목표로 하라.”고 했다. 일단 적합한 장소를 찾으면 그 장소를 계속 고수하라. 어떤 청교도는 주의를 산만하게 하는 눈에 보이는 것들을 피하도록 방을 어둡게 하거나 눈을 감는 방법을 권장했다. 다른 청교도는 자연 속을 산책하거나 앉아서 묵상하는 방법을 추천했다. 여기서 우리는 나름대로 좋은 방식을 찾아야 할 것이다.

다섯째, 묵상의 몸가짐에도 유의하라.

않았거나 서 있거나 걷거나 누워 있거나 간에 전능자 앞에 마음은 물로 경건한 몸가짐을 유지하라. 묵상하는 동안 몸은 영혼의 종이 되어야 하고 영혼의 감정을 따라야 한다. 묵상 목표는 영혼과 지성과 몸을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고후 4:6)에 집중시키는 것이다.    

(3) 묵상을 위한 지침

청교도는 묵상 실천을 위한 지침도 제시했다.

성령의 도우심을 구하는 기도로 묵상을 시작한다. 

묵상할 때 마음을 조절해서 신앙의 눈으로 바라보는 능력을 달라고 기도하라. 칼라미가 다음과 같이 말한 것처럼 이렇게 기도하라. “나는 여러분이 ‘지성을 조명’하고 ‘경건을 소생’시키고 ‘감정을 뜨겁게’ 해 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하고, 그리하여 그 시간이 여러분에게 복이 되기를 바라고, 나아가 경건의 일에 대해 묵상함으로써 여러분이 더욱 거룩해지고, 여러분의 욕심은 더욱 죽고 은혜는 더욱 증가 되며, 세상과 세상의 허영에 대해서는 죽고 천국과 천국의 일에 대해서는 더욱 고조되기를 바란다.”

묵상할 본문이나 주제를 선택한다.

이어서 청교도는 성경을 읽고 묵상해야 할 성경 구절이나 교리를 선택하라고 했다. 청교도는 처음에는 묵상하기에 비교적 쉬운 주제를 선정하는 것이 좋다고 권면했다. 예를 들어 삼위일체 교리보다는 하나님 속성에 대한 주제에서 시작해 보라. 그리고 한 번에 한 가지 주제를 묵상하는 것이 좋다.

아울러 여러분의 현재 상황에 가장 잘 적용할 수 있고 여러분 영혼에 가장 유익이 될 주제를 선택하라. 예를 들어 보자. 만일 여러분이 영적으로 낙심한 상태 속에 있다면 불쌍한 죄인들을 용납하고 자신에게 나아오는 모든 자를 용서해 주시는 그리스도의 자상한 마음에 대해 묵상하라. 양심이 너무 괴롭다면 회개하는 자에게 은혜를 베푸시는 하나님의 약속을 묵상하라. 경제적 어려움에 있다면 곤궁한 자들에 대한 하나님의 놀라운 섭리에 대해 묵상하라.

묵상한 주제나 구절을 암기하라.

이후에는 선택한 구절이나 주제 내용을 암기해 둠으로써 묵상을 자극하고 신앙을 강화시키며 하나님 인도의 수단으로 삼으라. 그다음에는 여러분의 생각을 성경이나 주제에 고정시키고 하나님이 계시하신 것 이상으로 알려고 하지 마라. 여러분의 기억을 활용해서 성경이 여러분이 택한 주제에 대해 말씀하는 것에 철저히 초점을 맞추라.

과거에 들은 설교들과 다른 교훈적인 책들을 참고하라. 여러분이 선택한 주제의 다양한 측면들 곧 제목과 원인 특징과 결과와 영향 등을 생각할 때 ‘양심이라는 책’, ‘성경이라는 책’, ‘피조물이라는 책’을 활용하라. 마리아처럼 이런 것들을 마음속으로 숙고하라. 예증과 비유와 반대 사실 등을 생각함으로써 여러분의 지성을 조명하고 여러분의 감정을 불타오르게 하라.  

여러분이 묵상하고 있는 것의 가치를 평가하라.

칼라미가 보여 주는 실례가 여기 있다. 만일 여러분이 죄에 대한 주제를 묵상하려고 한다면 “죄에 대한 설명에서 시작하고, 이어서 최의 파급에 대해 다루고, 원죄와 죄의 원인, 죄의 저주스러운 결과와 영향, 일반적으로 죄의 성격 및 속성과 특수적으로 개인적인 죄의 성격 및 속성, 죄의 반대 사실인 은혜, 죄에 대한 은유, 죄에 붙여진 명칭, 싱경이 죄에 대해 말씀하는 모든 사실을 묵상해야 한다. 여기서 두 가지 경고가 순서대로 나온다.

첫째, 맨톤이 말한 것처럼 방법의 규칙성 때문에 자유로운 영에 재갈을 물려서는 안 된다.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것은 신앙이지 논리가 아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이런 규칙과 규정에 얽매이게 되면 생각이 좁아져 샘에서 나오는 물이 아니라 증류기에서 나오는 물처럼 흘러나오게 될 것이다.

둘째, 여러분의 마음이 산만해지면 정신을 바짝 차리고, 용서를 위해 짧은 기도를 드리고, 힘을 달라고 간구하며, 합당한 성경 본문을 찾아 다시 읽어 보고 묵상하도록 하라. ‘성경 읽기’, ‘묵상’, ‘기도’는 동반자라는 것을 기억하라. 어느 한 부분이 약해지면 다른 부분에서 대책을 찾으라. 인내하라. 이 의무를 포기함으로써 사탄에게 굴복해서는 안 된다. 이어서 사랑과 욕구와 소망과 용기와 감사와 열심과 기쁨과 같은 감정을 분발시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라.

여러분 자신의 영혼과 대화를 나누라.

자신의 무능력과 단점으로 야기된 불평은 내려놓고 하나님 앞에 여러분의 영적인 갈망을 토설하라. 하나님이 여러분을 도우실 걸 믿으라. 폴 베인(Paul Bayne, 1573-1617)은 묵상을 은혜의 개인적 수단으로 설명하면서 묵상을 첫째는 마음에 영향을 미치는 시각 능력으로 비유하고, 둘째는 잉태 및 탄생 과정으로 비유했다.    

“임신하면 출산 고통과 때가 이를 때 아기가 탄생한다는 것을 기대하게 된다. 마찬가지로 영혼이 생각을 통해 임신하게 되면 감정은 즉시 즐겁고 흥분 상태가 된다. 왜냐면 불쏘시게처럼 불꽃이 튀기면 불이 붙는 것처럼 생각에 따라 감정은 불길에 휩싸이기 때문이다. 감정이 움직이면 의지는 자극을 받고 분발하게 된다. 이렇게 여러분의 기억과 판단과 감정이 환기되면 여러분의 영혼을 의무와 위로로 이끌고 죄를 멀리하도록 묵상 내용을 여러분 자신에게 적용하라.”

윌리엄 페너(William Fenner, 1600-1640)가 다음과 같이 쓴 것처럼 하라. “그대 자신의 영혼 속으로 뛰어들라. 그대 자신의 마음을 예상해 보고 대책을 세우라. 그대의 마음을 약속, 경고, 자비, 심판, 계명으로 채우라. 묵상을 통해 그대의 마음을 살피라. 그대의 마음을 하나님 앞으로 끌고 가라.” 은혜 안에서 자라고 있는지 여러분 자신을 검토하라. 과거를 반성해 보고 “내가 어떻게 했지?”라고 물으라. 미래를 전망하고 “하나님의 은혜로 내가 무엇을 하기로 할까?”라고 물으라.

율법적으로 질문하지 말고 거룩한 열정과 성령이 역사하는 은혜 안에서 자라갈 기회를 얻기 위한 마음으로 질문하라. 율법 업무는 우리의 일이지만 묵상 업무는 달콤한 일이다. 칼라미가 다음과 같이 권면하는 대로 하라. “만일 묵상을 실천함으로써 유익을 얻으려고 한다면 여러분은 구체적인 적용에까지 이르러야 한다. 또 그리스도를 묵상하되 그리스도를 여러분의 영혼에 적용해야 한다. 또 천국에 대해 묵상하되 천국을 여러분의 영혼에 적용해야 한다.”

묵상한 대로 실천할 것을 결심하라.

여러분이 묵상한 대로 살라.(수 1:8) 묵상과 실천은 두 자매처럼 손을 잡고 함께 가야 한다. 실천 없는 묵상은 다만 여러분의 죄악을 더하게 할 뿐이다. 그다음에는 여러분의 적용이 결심과 함께 이루어지도록 하라. 화이트는 “여러분의 결심은 단순한 소원이 아니라 결연한 목표나 결정으로서 굳건하고 강력해야 한다고 말했다.      

여러분의 결심을 죄에 대한 유혹과 맞서 싸우는 의지로 삼으라. 여러분의 결심을 기록해 두라. 무엇보다 먼저 거룩하고 경건한 일들을 묵상하는 사람이 되는 데 목숨을 바치겠다고 결심하라. 여러분 자신과 여러분 가족과 여러분이 소유한 모든 걸 즐거운 체념(滯念)과 함께 하나님의 손에 내려놓으라.

기도와 감사와 시편 찬송으로 묵상을 끝내라.

조지 스윈녹(George Swinnock, 1627-1673)은 “묵상은 가장 좋은 기도의 시작이며, 기도는 가장 좋은 묵상의 끝이다.”라고 말했다. 토마스 왓슨(Thomas Watson, 1620-1686)은 이렇게 말했다. “묵상한 내용에 대해 기도하라. 기도는 모든 것을 거룩하게 한다. 기도가 없으면 묵상은 단지 부정(否定)한 것일 뿐이다. 기도는 영혼을 묵상에 고정시킨다. 기도는 묵상이 탈선하지 않도록 묵상의 끝에 매듭을 계는 것이다. 하나님이 여러분의 지성에 영원히 경건한 묵상을 거하게 하고 묵상의 맛을 여러분의 마음속에 머무르게 하시도록 기도하라.”

묵상할 때 도와주신 것에 대해 주님께 감사하라. 그렇지 않으면 리처드 그린햄(Richard Greenham, 1542-1594)이 경고한 것처럼 우리는 다음 묵상을 할 때 고투에 시달리게 될 것이다.

시편 찬송은 묵상에 큰 도움이 된다. 이 시편의 운율 형식은 기억하기에 좋게 되어 있다. 하나님 말씀으로서 시편은 묵상에 적절한 주제를 제공한다. 칼빈의 말처럼 시편은 ‘영혼에 대한 완벽한 해부학’으로서 묵상에 풍성한 자료와 지침을 제공한다. 기도문으로서(시 72:20), 감사의 시로서(시 118:1) 시편은 묵상의 적절한 수단이자 묵상을 끝내는 적절한 방법이다.

조셉 홀(Joseph Hall, 1574-1656)은 이렇게 말했다. “묵상을 마칠 때 나의 마음과 음성을 하나님께 바쳐 다윗 시편의 한두 구절 – 우리 기질과 우리의 묵상 주제에 어울리는 구절 – 을 노래함으로써 큰 위로를 받았다. 이렇게 하면 마음은 큰 달콤함과 만족을 누리게 된다.”

존 라이트봇(John Lightbot, 1602-167)은 “하나님에 대한 찬양을 노래하는 것은 우리가 공적으로 묵상할 때 행할 수 있는 최고의 사역이다. 이런 찬송은 찬송한 내용을 마음이 가장 오래 기억하게 한다. 기도와 설교를 듣는 것은 이 문장에서 저 문장으로 넘어가는 것이 빠르다. 그러나 찬송은 그 내용을 오래 고수하게 한다.”라고 했다.    

묵상 후 즉시 세상일에 몰두하지 말라.

마지막으로 묵상을 마친 다음에 너무 빠르게 세상일에 몰두하지 말라. 토머스 구지가 권면한 것처럼 “그래야 묵상할 때 그대의 마음속에 불을 붙여 놓았던 영적인 마음이 갑자기 꺼지지 않게 될 것이다.” 한 시간 동안의 이런 묵상이 천 편의 설교를 듣고 마는 것보다 더 가치가 있음을 명심하라. 어셔 주교는 “묵상은 말씀의 가치를 떨어뜨리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말씀을 영예롭게 한다.”라고 말했다.

4. 묵상 주제

청교도는 다양한 묵상 주제와 대상과 자료를 제시했다. 각 주제 뒤에 붙어 있는 숫자는 그 주제에 대한 묵상을 요청한 청교도 저술가들로서 내가 찾아낸 사람들의 수를 표시한다. 이 목록은 개혁파조직신학의 전통적인 구분법을 따르고 있다.

(1) 서 론

‣ 거룩한 하나님의 말씀(3)
‣ 기독교에 대한 변증(1)

(2) 신 론

‣ 하나님의 본질과 속성(7)
‣ 하나님의 사역과 섭리(7)
‣ 인간의 제일 목적인 하나님의 영광(4)
‣ 하나님의 엄위(3)
‣ 하나님의 자비(3)
‣ 창조주이신 하나님(2)        

(3) 인간론

‣ 죄의 죄악성과 우리의 개인적인 죄(9)
‣ 마음의 부패함과 기만성(5)
‣ 아담의 타락과 하나님으로부터의 분리(4)
‣ 인간의 헛됨(4)
‣ 영혼의 가치와 불멸성(3)
‣ 육체의 연약함(2)
‣ 세상이 주는 위로의 불확실성(1)
‣ 탐심의 죄(2)
‣ 하나님과 인간 간의 대조(1)

(4) 기독론

‣ 그리스도의 성육신
‣ 그리스도의 수난과 죽음(8)
‣ 그리스도의 사랑(5)
‣ 그리스도의 인격(4)
‣ 복음의 신비와 경이(4)
‣ 그리스도의 본성(2)
‣ 그리스도의 직분(2)
‣ 그리스도의 생애 (2)
‣ 그리스도의 지위(1)

(5) 구원론과 그리스도인의 삶

‣ 하나님의 약속(7)
‣ 은혜의 경험적 증거에 대한 자기 검토(5)
‣ 성도의 풍성한 특권(3)
‣ 성령의 은혜와 인격(3)
‣ 신앙의 유익(2)
‣ 성화(2)
‣ 기도(2)
‣ 하나님의 계명(2)
‣ 하나님의 권면과 경고(2)
‣ 배교의 위험성(1)
‣ 구원받은 자 수가 적음(1)
‣ 영적 위험들(1)
‣ 사랑과 기쁨과 소망(1)
‣ 안식일(1)
‣ 자기 부인(1)

(6) 교회론

‣ 하나님의 규례(5)
‣ 성찬(4)
‣ 세례(2)
‣ 말씀을 듣는 것과 읽는 것(2)
‣ 교회의 기쁨과 슬픔(2)

(7) 종말론

‣ 천국(10
‣ 죽음(8)
‣ 심판(7)
‣ 지옥(7)
‣ 영원(5)

청교도는 이 주제들을 명백하고 강력하고 유용한 하나님의 진리로 불렸다. 조지프 홀과 같은 일부 청교도는 다른 사람들보다 더 상세한 목록을 제시했다. 홀은 묵상해야 할 87가지의 주제를 열거하고 왜 그렇게 해야 하는지 각각의 주제마다 설명을 붙여 놓았다. 그 주제들은 다음과 같다.              

명예와 위대함, 무지, 타락, 거룩한 삶, 잡담, 악한 친구, 하나님의 약속, 세상을 사랑함, 만족, 위선, 행복, 세상을 사랑함, 친구, 하늘과 땅, 일과 수고, 재산, 천국과 지옥, 죽음, 고통, 선한 싸움, 죄, 성공, 은혜 안에서 자라감, 교만, 죄를 미워함, 편견, 탐심, 기도, 사랑, 불경, 고결함, 기도, 시험, 수단의 사용, 예배, 행복, 순종, 회개, 야망, 자만심, 짧은 인생, 자기 검토, 역경, 고통, 신앙과 철학, 쾌락, 죄, 신실한 친구, 분열과 진리, 근심과 걱정, 두려움, 이교도와 그리스도인, 눈의 빛, 지성과 마음, 진심 어린 신앙, 스스로 받는 상처, 마음과 혀, 시간 사용, 염려, 섭리, 사랑, 불쾌, 우정, 싼 물건 찾아다니기, 책망, 시기, 세속적 쾌락, 훌륭한 본보기를 따름, 시간, 향유, 선행, 열매 맺음, 어리석음, 선을 행함, 은둔 생활, 행복한 삶, 하늘의 징계, 영적 갈망, 회개, 영적 싸움, 시련 속에서 얻는 힘, 천국을 향한 마음, 겸손, 죽음, 삶의 목적, 악이 주는 유익, 광기, 묵상 자체의 실천

분명히 말하면 청교도는 이 가운데 어떤 주제는 다른 것보다 더 중시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에 대해 존 오웬(John Owen, 1616-1683)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만일 내가 경험을 통해 확인한 것이 있다면 바로 이것이다. 곧 사람은 그리스도의 인격, 그리스도의 나라의 영광, 그리스도의 사랑에 대한 자신 생각과 묵상에 따라 은혜의 성장과 쇠퇴를 가늠해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아마 청교도에게 가장 중요한 묵상 주제는 천국 곧 하나님을 가장 깊이 알고 가장 크게 경배하고 가장 크게 즐거워하는 곳, 그리스도가 아버지 보좌 우편에 앉아 있는 곳, 성도들이 영광에서 영광으로 옮겨가며 즐거워하는 곳이었을 것이다. 리처드 백스터(Richard Baxter, 1615-1691)는 “묵상은 대다수 다른 의무들의 생명이고 천국을 보는 게 묵상의 생명이다.”라고 말했다. 천국은 이런 이유로 묵상할 때 최상의 주제다.

‣ 그리스도는 지금 천국에 계시고, 우리의 구원은 성령으로 말미암아서 그리스도와 연합을 이루고 있다. 그리스도는 우리의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원함이시다. 천국의 중심이신 그리스도는 그대로 우리의 믿음과 소망과 사랑의 중심이 되어야 한다.        

‣ 우리는 그리스도의 마음을 갖고 있어야만 즉 우리가 진실로 천국을 향한 마음을 갖고 천국의 관점에 따라 이 땅과 이 시대를 바라봐야만 오늘날처럼 악한 시대에 그리스도인으로서 살 수 있다.

‣ 천국은 우리 순례의 목적지다. 우리는 이 땅에서 믿음과 소망과 사랑으로 그리스도와 함께하기 위해 천국을 향해 여행하고 있는 순례자이다.

청교도는 천국과 다른 주제들에 대한 묵상이 다음과 같은 세 가지 이유로 우선권을 갖는다고 가르쳤다.

첫째, 예배 특히 설교는 특별 묵상이 필수적이기 때문이다.

칼라미(Edmund Calamy, 1600-1666)는 “하나님은 여러분이 설교를 듣기를 원하시고 또 들은 설교를 묵상하기 원하신다.”라고 말했다. 제임스 어셔(James Ussher, 1581-1656)가 말한 것처럼 모든 설교는 묵상을 위한 준비이다. 그러므로 훌륭한 설교는 우리 지성(知性)에 건전한 교리를 알려 줄 뿐만 아니라 감동을 주는 설교다. 훌륭한 설교는 우리 의지(意志)를 죄에서 돌이키게 하고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도록 이끈다.

묵상은 지성을 통해 하나님 말씀을 우리 마음속에 받아들이도록 합으로써 감정을 넓히고 지시한다. 그러므로 우리가 설교에 대해 묵상하지 않을 때 설교에서 아무 유익을 얻지 못한다.

리처드 백스터는 이렇게 말했다. “왜 그토록 많은 설교가 우리에게 아무 소용이 없고, 신앙 고백자들은 온갖 다양한 설교를 듣거나 읽는 데도 영혼은 쇠잔하고 굶주리게 되는지 그 이유에 대해 나는 그들의 묵상에 대한 무지와 이해할 수 없는 게으름 말고 더 참되고 더 큰 다른 원인은 모르겠다.” 그는 또 “어떤 청중은 식욕도 없고 소화력도 없어 영적 식욕 부진에 빠져 있는 반면에 또 어떤 청중은 영적 폭식증에 걸려 식욕은 있으나 소화력이 없다.”고 했다.

신실한 청교도는 묵상을 위해 설교를 받아 적었다. 우리 교회 나이가 많은 한 여성도가 이런 습관을 갖고 늘 설교를 적는다. 그리고 매 주일 저녁에는 무릎을 꿇고 한 시간씩 그날 받아 적은 설교 내용으로 기도하고 묵상했다. 그녀는 주일의 시간 가운데 이 시간이 가장 좋은 시간이라고 고백했다.                

둘째, 성찬 예식에 바르게 참여하기 위해 신자는 자신의 죄를 위해 속죄 제물이 되신 주 예수에 대한 묵상이 요구되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 토머스 화이트(Thomas White, ?-1672)는 이렇게 말했다. “여러분은 성찬을 준비할 때 거행할 때, 거행한 후에 감당해야 할 의무에 대해 묵상하라. 성부 하나님의 사랑과 성자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묵상하라. 특히 성육신하신 그리스도의 인격의 탁월하심과 그리스도 고난의 위대하심 그리고 그 고난이 하나님의 공의를 얼마나 타당하게 만족시키셨는지를 숙고하라. 그리고 나아가 성찬의 효력과 본질과 용도에 대해서도 숙고하라.”

칼라미는 성찬에 참여하는 동안 묵상해야 할 주제로 12가지를 제시했다. “성육신하신 그리스도를 주심에 나타나 있는 성부 하나님의 크고 놀라우신 사랑, 자신을 내놓은 것에 나타나 있는 그리스도의 사랑, 죄의 가증함, 성찬 예식의 효력, 우리 자신의 무가치함, 우리의 영적 기갈과 궁핍, 자격 없는 수찬자가 받게 되는 저주, 자격 있는 수찬자에게 주어지는 복, 성찬의 요소(떡과 포도주), 성찬에서의 행동(목사의 행동이 어떻게 그리스도를 표상하는지), 성찬의 약속, 복음으로 주어지는 그러스도(성찬의 은사)”

에드워드 레이놀즈(Edward Reynolds, 1599-1667) 같은 청교도 신학자들은 성찬에 임할 때 신자들이 어떻게 해야만 되는지에 대한 논문을 썼다. 존 오웬은 성찬 준비 방법으로 묵상, 자기 검토, 간구, 기대 등을 요구했다. 모든 신자는 이런 준비에 동참해야 한다.(참고 웨스트민스터 대요리문답 질문 171,175)

셋째, 매 주일은 묵상에 특별히 좋은 시간이다.

주일은 하나님의 사람들이 영적 양식을 공급받아 다가올 한 주간을 위해 그 양식을 비축해 놓는 날이다. 따라서 청교도들은 주일을 ‘영혼의 장날’이라고 했다.  

넷째, 영적 성숙에 따라 묵상의 내용도 다르다. 

나다니엘 레이뉴(Nathaniel Ranew, 1602-1678) 같은 청교도는 묵상에 대한 글을 광범하게 썼는데 영적 성숙도에 따라 신자들이 다양하게 도움을 받도록 지침을 제시했다. 레이뉴는 각각 ‘갖 회심한 초신자를 위해’, ‘더 성숙하고 연륜이 있는 신자를 위해’, ‘노년 신자를 위해’ 장을 따로 구분해서 글을 썼다. 그리스도인은 나이가 들수록 더 깊은 묵상을 당연히 기대하게 된다.

5. 묵상의 유익

청교도는 묵상의 유익, 장점, 효능, 이점, 활용 등에 대해 방대한 글을 썼다. 여기서 그들이 강조한 묵상의 유익을 열거해 보자.

‣ 묵상은 삼위 하나님께 초점을 맞추도록 도움을 줌으로 그 인격들에 따라 지성적, 영적, 심미적으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즐거워하도록(요일 4:8) 이끈다.
‣ 묵상은 경건한 진리에 대한 지식을 증진 시키는 데 도움을 준다. 묵상은 진리의 얼굴에서 수건을 제거한다.(잠 4:2) 묵상은 ‘지혜의 유모’  인데 그 이유는 지혜의 근본인 하나님에 대한 경외를 자라게 하기 때문이다.(잠 1:7)
‣ 묵상은 우리의 온갖 영적 환난 속에서 약속의 하나님을, 우리의 온갖 외적 시련 속에서 섭리의 하나님을 신뢰하도록 도움을 줌으로 우리의 믿음을 증진시킨다.
‣ 묵상은 우리의 감정을 자극한다. 토머스 왓슨은 묵상을 ‘감정의 고함 소리’라고 했다. 그는 또 이렇게 말했다. “묵상은 어미 닭이 달걀 위에 앉아 병아리를 부화시키듯이 좋은 감정을 부화(孵化)시킨다. 우리는 이 묵상의 불로 감정을 점화시킨다.”(시 39:3)
‣ 묵상은 회개와 삶의 개혁을 일으킨다.(시 119:59, 겔 36:31)
‣ 묵상은 기억의 절친한 친구다.  
‣ 묵상은 예배를 계발할 필요가 있는 분야로 생각하도록 도움을 준다.
‣ 묵상은 우리 자신의 집보다 하나님의 집을 더 좋아하게 한다.
‣ 묵상은 영혼의 천에 성경을 수놓는다.
‣ 묵상은 기도의 유익한 도구이다.(시 15:1)
‣ 묵상은 기도하기 전에 기도라는 악기를 조율한다.
‣ 묵상은 말씀을 듣고 읽을 때 실제 유익을 얻도록 돕는다.
‣ 묵상은 말씀이 우리 영혼을 생명과 에너지로 채우게 하는 역할을 한다. 월리엄 베이츠는 이렇게 말했다. “말씀을 듣는 건 음식을 섭취하는 것과 같고 들은 말씀을 묵상하는 건 섭취한 음식을 소화하는 것과 같다. 묵상을 통해 말씀을 소화하는 것은 따스한 감정, 강한 결심, 거룩한 행동을 낳는다.”
‣ 성례에 대한 묵상은 우리가 받은 은혜를 더 유익하게 하고 더 강하게 하는 데 유익을 준다.
‣ 묵상은 믿음, 소망, 사랑, 겸손 그리고 수많은 영적 위로가 영혼 속에서 풍성하게 자라도록 도움을 준다.
‣ 묵상은 죄의 가증함을 강조한다.
‣ 묵상은 우리가 죄를 이기는데 필요한 모든 무기를 모으고 모든 논쟁    의 힘을 집약시키고 그것들을 마음에 담아 준비하게 한다. 토마스 후커(Thomas Hooker, 1586-1647) “묵상은 타락의 침과 힘을 날카롭게 해서 영혼을 더 아프게 찌른다.”고 했다.
‣ 묵상은 죄에 대한 강력한 ‘해독제’요 탐심에 대한 ‘치료약  이다.
‣ 묵상은 영혼에 하나님의 선하심에 대한 생생한 느낌과 감정을 전달하기 때문에 신앙적 의무를 이행할 수 있게 한다.
‣ 묵상은 헛되고 사악한 생각을 예방하는 데 도움을 준다.(렘 4:14, 마 2:35)
‣ 묵상은 오늘날 악한 시대에 우리를 세상과 구별하는 데 도움을 준다.
‣ 묵상은 일상적 삶에 대한 지침(잠 6:21,22)과 유용한 내적 자원들을 제공한다.(시 !77:10-12)
‣ 묵상은 믿음 안에서 인내하도록 도움을 준다. 월리암 브리지(William Bridge, 1600-1670)는 묵상은 “우리가 외적, 세속적으로 즐기는 모든 것     속에서 향기롭고 영적인 것으로 우리의 마음을 지켜 준다.”고 했다.
‣ 묵상은 사탄과 시험을 물리치는 강력한 무기다.(시 119:11,15, 요일 2:14)
‣ 묵상은 고통 속에 있을 때 구원의 길을 열어준다.(사 49:15-17, 히 12:5)
‣ 묵상은 영적 교제와 권면으로 다른 사람을 돕게 한다.(시 66:16, 77:12, 145:7)
‣ 묵상은 하나님이 자기 아들을 통해 우리에게 베푸신 온갖 복을 더욱 감사하게 한다.  
‣ 묵상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한다.(시 49:3)

정리하면 토마스 브룩스(Thomas Brooks, 1608-1680)가 이렇게 말한 것과 같다. “묵상은 여러분 영혼의 양식이다. 또 묵상은 영적 진리들을 소화하는 진정한 위(胃)이자 참된 열(熱)이다. 만일 사람이 심장이 뛰지 않아도 살 수 있다면 묵상하지 않아도 자신이 읽거나 들은 것을 통해 유익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중략) 가장 훌륭하고 가장 멋지고 가장 지혜롭고 가장 강한 그리스도인으로 인정될 수 있는 자는 가장 잘 읽는 자가 아니라 가장 묵상을 잘하는 자다.”

6. 묵상의 장애물

청교도 지도자들은 묵상의 장애물에 대해 자주 경고했다. 여기서 이런 장애물들과 그에 대한 해결 방법을 들어보자.

(1) 불안정 혹은 무지

이런 사람들은 자신 생각을 하나의 대상에만 고정(固定)할 수 없다고 말한다. 그들의 생각은 가볍고 새의 깃털처럼 이리저리 떠돌아다닌다.

답변 : 불안정하거나 무지하거나 또 생각이 요동한다고 해서 의무에 대한 면죄부(免罪符)가 주어지는 건 아니다. 즉 여러분의 능력 상실이 하나님의 권리 상실을 의미하는 건 아니라는 말이다. 진리가 선포됐을 때 여러분은 아마 묵상을 게을리하고 진리를 사랑하지 않아서 불안정한 상태가 되었을 것이다.  

토머스 맨톤은 “죄악 된 불안정한 기질이 하나님에 대한 우리 의무를 무효화 하지는 않는다. 이것은 종이 술에 취했다고 해서 할 일을 면제받는 것이 아닌 것과 같다.”라고 말했다. 성결한 지식을 충분히 비축하고 그 지식을 꾸준히 실천함으로써 문제를 해결하도록 하라. 그리고 이렇게 하는 동안 반드시 성령의 도우심을 의지하라. 그렇게 할 때 여러분은 묵상이 더 수월하고 더 달콤하게 되는 것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2) 분주함

이런 사람들은 자신들이 세상일에 너무 바빠 묵상의 의무를 철저하고 진지하게 실천할 시간이 없다고 말한다.

답변 : 참된 신앙은 단순히 한가한 시간에 펼쳐지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바쁠수록 더 묵상에 힘써야 한다. 바쁠 때 우리는 하나님 앞에 나아가 묵상할 필요가 더욱 크기 때문이다.

(3) 영적 무감각

이런 사람들은 선한 의도는 있으나 묵상할 때 영혼이 집중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답변 : 마태복음 11:12에 천국은 ’침노하여 빼앗는 자‘가 받는 상이라고 말한다. 왜 여러분은 영원하지 않은 세상에서 얻는 상(유익)을 추구하는 데는 열심이면서 영원한 상(기업)인 영적 추구는 게을리하는가? 영적 잠자기를 즐기는 자는 낡은 옷을 입게 될 것이다.(잠 23:21) 맨톤이 한 말처럼 “부끄러운 고통을 당하는 것보다는 수고하는 것이 낫고, 어둠의 사슬에 묶이는 것보다는 의무의 줄에 묶이는 것이 낫다.”

(4) 세속적 쾌락과 친구

이런 사람들은 자신들이 지나치게 의로운 자가 되는 것은 원하지 않고 그래서 헛된 즐거움과 친구들을 포기하고 싶지 않다고 말한다.

답변 : 이에 대해 메이츠는 이렇게 말했다. “세상 쾌락은 우리 영혼을 불안하게 하고 우리 육체가 묵상 의무를 수행하는 데 부적합한 상태로 만든다. (중략) 이것을 기억하라. 곧 신앙의 즐거움은 감각적인 모든 쾌락과 비교할 수 없다는 사실을 말이다.”      

(5) 마음의 거역

이런 사람들은 이처럼 힘든 의무의 멍에를 메고 싶지 않다고 말한다. 그들은 죄책(罪責)을 젊어지고 하나님과 대면하는 것에 대해 두려움을 갖고 있다.

답변 : 이에 대해 맨톤은 “그리스도의 피를 진지하게 적용하여 양심을 깨끗하게 하고 묵상을 비롯해 은혜의 수단들의 멍에를 메라!”고 권면했다.(시 19:14) 묵상을 빼먹은 결과는 심각하다고 칼라미는 경고했다. 그 결과 마음이 완고해진다.

하나님의 약속과 경고들이 왜 우리에게 별로 영향을 미치지 못하게 될까? 하나님의 약속과 경고들에 대해 우리가 묵상하지 않기 때문이다. 왜 우리가 하나님이 베푸신 복을 감사하지 못할까? 왜 하나님의 섭리와 고난이 우리의 삶 속에서 경건의 열매를 맺지 못할까? 왜 우리가 말씀과 성례에서 유익을 얻지 못하고 왜 우리가 다른 사람을 판단하며 왜 우리가 영원을 준비하는 데 그토록 빈약할까?

그것은 묵상하지 않는 데 가장 큰 원인이 있다. 우리는 묵상 훈련을 해야 한다. 대다수 청교도 목회자들이 그렇게 말했다. 그러나 청교도 시대에도 상대적으로 묵상 훈련을 자신의 의무로 본 사람은 거의 없었다. 백스터는 이렇게 말했다. “많은 사람이 설교, 금식, 공적 및 사적 기도 등을 빼먹으면 혼란을 느끼나 묵상을 빼먹고는 혼란을 느끼지 않는다. 그들은 한평생 지금까지 그렇다.”

결론

– 자기 성찰로서의 묵상 –

청교도에게 묵상은 은혜의 특별 수단 이상의 것이었다. 묵상은 청교도의 헌신을 위한 포괄적인 방법이었다. 곧 성경적, 교리적, 경험적, 실천적인 방법이었다. 묵상 신학은 바울과 아우구스티누스와 칼빈 신학이었다. 묵상 주제는 성경이라는 책, 피조물이라는 책, 양심이라는 책에서 나왔다.

월리엄 브리지가 말한 것처럼 묵상은 영혼이 어떤 것을 열렬히 그리고 긴밀하게 적용하는 것으로 묵상을 통해 사람의 지성을 그 일을 깊이 생각하고, 자신의 유익과 이득을 위해 그 일에 거하고 고정되며  결국 그것은 하나님의 영광으로 나아간다.

청교도는 전형적으로 자신들이 쓴 묵상에 대한 글에서 독자에게 자기 검토를 요청하는 것으로 끝을 맺고 있다. 이 자기 검토는 다음과 같은 요소로 이루어진다.

(1) 시험

‣ 여러분의 묵상이 ‘살아 있는 신앙’을 행사하는 데서 연원(連原)하고 있는가? 참된 묵상은 신앙의 실천과 불가분리적(不可分離的)이다. 여러분은 새뮤얼 워드가 다음과 같이 설명한 것처럼 묵상하는가?

“묵상할 때 하나님과 대화하도록 그대의 영혼을 각성시키라. 그대가 습관적으로 믿고 있는 약속과 권면들이 무엇인지 확인해 보고 이제부터는 그것들을 진심으로 생각해 보라. 곧 그대 영혼의 미각으로 달콤함을 느낄 때까지 그것들을 그대의 혀로 굴려 보고 그걸 씹으라. 그것들을 전체적으로, 여러 번에 걸쳐 바라보라. 때로는 하나를 숙고하고 때로는 다른 하나를 더 깊이 생각해 보라. 이것은 배우자가 동산을 거닐면서 열매를 따 먹도록 부르는 것으로 단순하게 말하면 내가 믿음을 사용하고 믿음으로 사는 것으로 부르는 것이다.”

‣ 여러분의 마음속에 있는 이 영적 생각들이 그대의 삶 속에서 거룩함을 낳고 있는가? 하나님 생각이 싫증 난다는 건 귀신들처럼 된다는 것임을 명심하라.(약 2:19)

(2) 책망과 권면

‣ 불신자에게 : 하나님이 여러분을 이성적인 피조물로 만드셨을 때 하나님이 여러분이 생각을 이기적이고 죄를 범하는 데 사용하도록 의도했겠는가? 여러분의 모든 생각 속에 왜 하나님이 없는가? 이에 대해맨톤은 이렇게 물었다. “그대는 하나님과 그리스도에 대해 생각해 본 적이 없는가?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과 영원한 영광이 그대가 해 볼 최고의 생각으로 가치가 없는가? 그대는 다른 일들 – 속된 일, 아주 유치한 일 – 에 대해서는 충분히 생각하고 충분히 시간을 내면서 하나님과 그분의 말씀에 대해서는 왜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가?”

‣ 신자에게 : 묵상을 게을리하면 우리는 두려움과 근심에 직면할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에 대해 묵상하지 않고 죄악 된 일들을 생각한다는 그것은 얼마나 하나님을 욕되게 하는 것인지 아는가? 농부는 자신의 땅에 대해, 의사는 자신의 환자에 대해, 법률가는 자신이 맡은 소송사건에 대해, 가게 주인이 자신의 판매 상품에 대해 심사숙고한다면 그리스도인들은 자신들의 하나님과 구주에 대해 묵상하는 것이 당연하지 않겠는가?        

청교도는 우리에게 이렇게 말할 것이다. “여러분이 계속 묵상을 게을리하면 하나님에 대한 여러분의 사랑은 곧 약화 되거나 파괴되고 말 것이다. 하나님에 대해 생각하는 게 불쾌한 일이 되고 말 것이다. 죄를 즐거운 것으로 간주할 정도로 죄에 대해 문을 열어 놓고 말 것이다. 그 결과는 온갖 종류의 시험과 유혹 앞에서 상처를 입고 무너지기 쉬울 것이다. 요약하면 여러분은 하나님에게서 멀리 떨어져 나가게 될 것이다. 레이뉴가 말한 것처럼 “어떤 경건의 의무도 우리에게 먼저 다가오는 것은 없다. 우리가 다가가야 한다.”

마지막으로 여기서 토머스 왓슨의 권면을 주목해 보자. “여러분이 이전에 묵상을 게을리했다면 그 게으름을 슬퍼하고 이제부터는 양심에 부끄럽지 않게 해야 한다. 경건한 묵상을 통해 여러분 자신을 하나님께 묶어두라.(적어도 하루에 한 번) 이 산을 올라가라. 정상에 도달하면 여러분 앞에 멌진 광경 곧 그리스도와 천국이 보일 것이다.(*) 

글쓴 이 / 조엘 비키(Joel R. Beeke, 퓨리탄리폼드신학대학원(Puritan Reformed Theological Seminary) 학장, 조직신학 교수, 그랜드래피즈 네덜란드개혁교회(The Heritage Netherlands Reformed Congregation) 담임목사  출처, 조엘 비키, 마크 존스 지음 / 김귀탁 옮김, ‘청교도 신학의 모든 것’ (서울. 부흥과 개혁사) 2017, pp. 1010-1031.






12월 31일(수) 에베소서 1-3장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속 사람(3:16)

광의 풍성을 따라 그의 성령으로 말미암아 너희 속 사람을 능력으로 강건하게 하옵시며.
I pray that out of his glorious riches he may strengthen you with power through his Spirit in your inner being.

에베소서의 특징은 교회론에 관한 말씀이며 또한 옥중서신에 해당합니다.
옥중서신에는 "에베소서, 빌립보서, 골로새서, 빌레몬서"를 말합니다.

사도 바울은 사람을 두 종류로 구분하여 설명합니다.
첫째는 속사람(Inner Self)
둘째는 겉사람(Outer Self) 

속사람은  영혼, 정신, 마음, 인격의 중심을 의미하며, 하나님의 성령이 거주하는 곳을 말합니다.
겉사람은 육체, 외모, 세상의 가치관 등 눈에 보이는 부분으로 시간의 흐름에 따라 낡아지고 쇠약해집니다.
겉사람이 늙고 병들어도 속사람이 강건하면 낙심하지 않고, 세상의 환난을 이겨낼 힘을 얻습니다.
그러므로 믿음이란  말씀과 기도를 통해 성령의 능력으로 강건해지고, 날마다 새로워지며, 사랑과 감사가 넘치게 되는 것을 말합니다.

속사람(內的人)을 강건하게 하는 방법

첫째, 말씀을 읽고 묵상하며 성령의 인도하심을 사모합니다.
둘째, 기도와 찬양을 통해 하나님과 교제합니다.
셋째, 세상에서 사랑을 실천합니다.
넷째, 세상의 유행보다 영적인 성장에 집중합니다.

세상의 헛된 것들을 부러워하지 맙시다.
오직 하나님 나라에서 받을 상급을 기대합시다.
먼저 가정에서 행복을, 교회에서 기쁨을, 세상에서 보람을 얻는 신령한 삶의 주인공이 됩시다.

2025년을 마감하고 2026년을 맞이하면서 속사람을 새롭게 하는 복된 한 해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 영적 삶의 핵심 : 외적인 신앙생활보다 내면의 변화(마음)가 중요하며, 하나님은 중심을 보시기 때문입니다.
  • 세상 역경 극복 : 세상의 유혹, 고난, 죽음 앞에서도 영원한 소망을 갖고 승리할 수 있는 힘의 원천입니다.
  • 참된 변화 : 겉모습을 꾸미는 대신 속사람의 영성을 가꾸고 업그레이드하는 것이 진정한 영적 성숙입니다. 
속사람을 강건하게 하는 방법
  • 말씀을 읽고 묵상하며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름.
  • 기도와 찬양을 통해 하나님과 교제함.
  • 믿음의 공동체 안에서 사랑을 실천함.
  • 세상의 유행보다 영적인 성장에 집중함. 


속사람(內的人)이란?

성경과 신학에서 속사람

  • 겉모습이나 육체가 아닌

  • 마음, 영, 인격, 양심, 믿음의 중심을 가리키는 표현입니다.

📖 관련 성경 구절

  • 고린도후서 4:16

    “겉사람은 후패하나 속사람은 날로 새로워지도다

  • 에베소서 3:16

    “그의 영으로 말미암아 속사람을 능력으로 강건하게 하옵시며

➡️ 의미 정리

  • 겉사람 : 육체, 외적 조건, 세상적 모습

  • 속사람 : 하나님 앞에서의 참된 자아, 믿음과 성품

만약 다른 단어를 의도하신 거라면, 조금만 더 써 주세요.

속사람

속사람은 성경에서 매우 중요한 개념입니다.

1️⃣ 속사람의 의미

속사람은 겉모습이나 육체(겉사람)가 아닌,
👉 마음·영·양심·인격·믿음의 중심, 곧 하나님 앞에서의 참된 나를 뜻합니다.

히브리적 사고에서는 인간을 분리된 부분이 아니라
하나님과 관계 맺는 전인격적 존재로 보며,
속사람은 그 중심을 가리킵니다. 

2️⃣ 성경 속 속사람

📖 고린도후서 4:16

“그러므로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겉사람은 후패하나
속사람은 날로 새로워지도다

📖 에베소서 3:16

“그의 영으로 말미암아 속사람을 능력으로 강건하게 하옵시며

📖 로마서 7:22

“내 속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 속사람은 성령의 역사로 새로워지고 강건해지는 영역입니다.  

3️⃣ 신앙적 의미

  • 신앙 성숙은 겉사람의 성공이 아니라
    속사람의 변화로 측정됩니다.

  • 고난과 연약함 속에서도
    속사람은 오히려 더 깊어질 수 있습니다.

  • 하나님은 우리의 외형보다 마음의 중심을 보십니다.

📖 사무엘상 16:7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여호와는 중심을 보시느니라” 

4️⃣ 오늘의 적용

  • 나는 무엇을 더 가꾸고 있는가? 겉사람인가, 속사람인가

  • 말씀·기도·회개·순종은 속사람을 살찌우는 은혜의 통로입니다

  • 하루의 분주함 속에서도
    속사람이 하나님을 향해 살아 있는지 점검해 보세요


수요성서학당 #. 14(09-16-20)

겉 사람과 속 사람(고린도후서 4:16, 에베소서 4:22-24)

고린도후서 4:16

그러므로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겉사람은 후패하나 우리의 은 날로 새롭도다.
Therefore we do not lose heart. Though outwardly we are wasting away, yet inwardly we are being renewed day by day

공동번역 / 그러므로 우리는 낙심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외적 인간은 낡아지지만 내적 인간은 나날이 새로워지고 있습니다.

현대인의 성경 / 그러므로 우리는 낙심하지 않습니다. 비록 우리의 겉 사람은 쇠약해 가지만 우리의 속사람은 날마다 새로와지고 있습니다.

새번역
/ 그러므로 우리는 낙심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겉사람은 낡아가나, 우리의 속사람은 날로 새로워집니다.

- 겉 사람 속 사람을 구별하는 기준은 "시간" 이라고 하겠습니다.

시간이 지나면 지날 수록 겉 사람은 누구나 약하여지고 쇠하여 갈 것입니다.
반면에 속 사람은 정신을 차리기도 하고 철이 들기도 하고 반성하며 후회하면서 새로운 사람으로 살아가려고 결단합니다.

- 옛 사람 새 사람을 구별하는 기준은 "신앙" "거듭남" "중생" "구원" 이라고 하겠습니다.

구원을 받은 후에도 내 안에서 옛 사람의 삶의 습관이 나를 힘들게 합니다.
사도 바울은 이와 같은 모습을 일컬어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라"고 탄식했습니다.
그러나 성령으로 충만케 된 후에는 "나의 달려 갈 길을 다 가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렇게 고백합니다.

* 자연인의 반대는 "문화인" 또는 "문명인"
그러나 기독교에서는 "그리스도인"이라고 한다.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의 영을 소유한 사람이다.
자연인의 겉 사람은 육체의 소욕을 따라가는 사람
자연인의 속 사람은 정신적인 가치를 추구하는 사람

* 자연인과 문화인 그리고 그리스도인 모두에게 겉 사람은 동일한 모습이다.
모두 시간이 지날수록 육체는 쇠약해질 수밖에 없다.

그러나 속 사람은 목적과 추구하는 것이 다르다.
속사람은 새로워 집니다.
어떻게 새로워 집니까?
자연인의 속 사람은 "정신을 차린다" "철이 들었다"
그리스도인의 경우는 "회개" "깨닫는다"고 합니다.

에베소서 4:22-24

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좇는 옛 사람을 벗어 버리고
오직 심령으로 새롭게 되어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

You were taught, with regard to your former way of life, to put off your old self, which is being corrupted by its deceitful desires;
to be made new in the attitude of your minds;
and to put on the new self, created to be like God in true righteousness and holiness.





















 용어                          영어                                      성구          헬라어                  의미





겉 사람

    outward man, outwardly, outer man

  고후 4:16

     ἔξω

       육에 끌리는 사람

속 사람

    inwardly, inward man, inner man

고후 4:16

     ἔσω

       영에 끌리는 사람

옛 사람

    the old man, the old self   

엡 4:22  

  παλαιός

        중생 이전의 사람

새 사람

    the new self, the new man

엡 4:24

   καινός

         중생 이후의 사람

대부분의 설교자는 겉 사람은 옛 사람이며, 속 사람은 새 사람이라고 설명합니다.
그러나 성경을 자세하게 읽어보면 옛 사람과 새 사람은 거듭난 후에 나타나는 삶의 양식으로 옛 사람의 삶을 완전히 버리지 못한 상태가 지속되므로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야 합니다.

겉 사람과 속 사람이란 모든 사람에게 해당되는 모습으로 구원을 받은 사람이나 구원 받지 못한 사람에게서 나타나는 삶의 양식으로 겉 사람은 육체 끌리는 삶의 양식이라면 속 사람은 영에 끌리는 삶의 양식 즉 선한 양심에 의하여 갈등하며 고민하는 모습이라고 하겠습니다.


NEET족 ; Not in Education, Employment, Training
(한국어로 방콕족)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의 의미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자신의 철저한 무가치함과 무능력을 깨닫는 것을 의미한다.
자신의 철저한 무가치함을 깨달은 자는 자신에게 선한 것이라고는 하나도 없고 오직 죄 지은 것만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고 전율한다.
자신의 철저한 무능력을 깨달은 자는 자신을 구원하기 위해 자기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전에도 없었고 앞으로도 없다는 사실을 알고 한 없이 슬퍼한다.
그리고 그는 자신의 구원을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능력과 하나님께서 주시는 한없는 사랑과 은혜에만 의지한다.

무덤 속의 나사로는 죽은 지 나흘이나 되어 부패한 냄새를 풍기고 있었다.
그러나 그가 부활한 것은 “나사로야 나오라!”는 예수님의 말씀이 선포된 것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이 된 자는 자기도 그렇게 구원받았음을 시인하고 고백하는 자이다.
죽은 시체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나사로는 무덤에서 걸어 나온 후에도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그의 몸은 수의로 칭칭 감겨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 그에게 예수께서는 “풀어놓아 다니게 하라”고 말씀하셨다.
참된 그리스도인으로 거듭난 자는 자기가 구원 받기 전에는 물론, 구원 받은 후에도 행한 것이라고는 죄짓는 것 밖에 없었다는 사실을 깨닫고 절망한다.
그리고 그는 물속으로 빠져 들어가고 있는 베드로처럼 절규한다.
“주여 나를 구원하소서!”

율법주의자와 행위주의자들

어떤 형태로든 자기의 의를 주장하는 자들은 아직 그리스도인이 되었다 할 수 없는 자들이다.
그들은 예수 믿는다고 말하는 이교도들일 뿐이다.
그들이 참으로 예수를 믿고 거듭나는 때는 자신의 철저한 무가치함과 무능력을 깨닫고 겸손히 고백하는 때이다.
그 때가 어서 왔으면 참 좋겠다.
그러면 하늘나라에서는 회개할 것 없는 의인 아흔 아홉보다 그들로 인해 큰 기쁨의 잔치가 열릴 것으로 믿는다.

인생을 살면서 많은 선생님을 만납니다.
선생님들의 역할은 중요합니다.
그러나 모든 선생님이 내 인생에서 중요한 존재는 아닙니다.

‘박군의 마음’ 이라는 전도지

박군이라는 청년에게 전도를 하는 내용인데 박군의 마음속에 있는 일곱 가지 악한 성향, 짐승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 일곱 짐승이 차지하고 있는 마음을 주님이 온전하게 들어오심으로 일곱 짐승이 다 나가고 아름답고 선한 마음이 되는 것을 설명한 전도지입니다.

영적 전쟁을 아주 쉽고 간단하게 묘사하고 있는데, 아마 이 전도지를 처음 만든 사람은 영적으로 많이 열려진 사람일 것입니다.

그 일곱 가지 짐승의 마음은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수다쟁이 영 / 개구리

말이 많은 사람은 그 사람의 안에서 개구리가 쉬지 않고 개굴개굴 하고 울어대고 있는 것입니다.
성경에도 개구리는 입에 관련된 것으로 설명됩니다(요한계시록 16:13).

또 내가 보매 개구리 같은 세 더러운 영이 용의 입과 짐승의 입과 거짓 선지자의 입에서 나오니.

말이 많은 사람은 절제하지 못하고 수없는 말들을 입에서 쏟아냅니다.
그리하여 영적 에너지를 잃게 하고 주변에 악한 기운으로 가득하게 만듭니다.
이러한 이들은 침묵을 배우고 입술로 주님을 찬양하고 높여야 합니다.

주님께 받은 은혜를 나누는 대화가 있는가 하면, 세상을 사랑하고 세속에 깊이 물든 대화가 있습니다.
덕을 세우는 말이 있는가 하면, 남을 비방하고 또는 상처가 될 수 있는 날카로운 말도 있습니다.
다툼이 있는 곳에는 절제되지 못한 말들이 있습니다.

성경 곳곳에 말의 중요성이 나옵니다.
축복의 말은 반드시 축복으로 돌아오지만 저주의 말을 하면 나쁜 저주가 임합니다.
이것이 혀의 권세입니다(잠언 18:21).
말한 대로 열매를 맺습니다.

죽고 사는 것이 혀의 권세에 달렸나니 혀를 쓰기 좋아하는 자는 그 열매를 먹으리라

둘째, 교만의 영 / 공작새

공작새가 그 날개를 활짝 펴서 자랑을 하듯이 교만의 영을 가진 이들은 자신의 아름다움을 드러내고 자랑하고 싶어 합니다.
자기가 선하고 지식이 많으며 영적이라고 자랑하고 싶어 합니다.
이러한 이들은 회개하지 않으면 멸망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뿐 아니라 교만은 스스로를 높이는 것입니다.
과거에 바벨탑을 쌓았던 사람들이 이 잘못을 저질렀습니다.
하나님을 버리고 자신들의 왕국을 세우려고 했습니다.
또 다시 대홍수가 일어나도 살아남을 수 있도록 높은 탑을 쌓은 것입니다.
하나님을 버리고 그분의 말씀과 뜻을 거역하고 하나님 없이도 잘 살수 있다고 믿으며 사는 사람이 교만한 사람입니다.

불신앙이 가장 큰 교만의 죄입니다.

하나님을 안 믿으면 지옥에 가지요. 이 사실이 부당한가요?
하나님을 알만한 지식이 사람들 안에는 있습니다.
하나님은 없다고 주장하는 사람들, 심지어 공산당들도 죽을 위기를 만나면 어떻게 하는 줄 아세요?
"하나님, 잘못했어요. 하나님, 제발 한번만 살려주세요!" 이렇게 나옵니다.
무신론자라도, 부처를 섬기는 사람이라도 죽기 직전엔 하나님을 찾아요.
그러나 하나님을 거역하고자 하는 악독한 마음이 있기 때문에 순순히 그분을 따르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무시하고 거절하는 것입니다. 

잠언 16:18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요 거만한 마음은 넘어짐의 앞잡이니라

셋째, 간교한 영 / 뱀

뱀은 간교한 영을 상징합니다.
하나님이 지으신 들짐승 중에 뱀이 가장 간교하더라.”(창세기 3:1).

간교한 영의 사람은 지혜가 많고 머리가 좋아서 말을 잘 하며 사람들을 잘 속입니다.
잘못을 해도 상대방이 그것을 추궁하면 교묘하게 변명하여 오히려 상대방이 잘못한 것으로 만들어 버립니다.
이 영은 “배신의 영”과도 연결되어 있으며 “유혹의 영”과도 연결되어 있습니다.
이들은 강자 앞에서 약하며 약자 앞에서 잔인합니다. 영안이 열린 이들에게 이들은 뱀의 형상으로 보이게 됩니다.

야곱은 속임수에 능한 사람이었습니다.
겨우 한 끼 먹을 팥죽으로 형의 장자의 명분(권리)을 빼앗았습니다.
그의 지혜는 분명히 타고난 것입니다.
하지만 바르게 사용하지 않을 때, 그것은 악한 영의 도구가 됩니다.
간사하게 부리는 꾀는 하나님이 기뻐하시지 않기 때문에 다듬어져야 합니다.
야곱은 그로 인해 험한 세월을 보내게 되었습니다.

골로새서 2:8
누가 철학과 헛된 속임수로 너희를 노략할까 주의하라 이것이 사람의 유전과 세상의 초등 학문을 좇음이요 그리스도를 좇음이 아니니라

넷째, 음란한 영 / 염소

염소는 성적으로 더러우며 정욕이 강하다고 합니다.
성적으로 문란한 이 시대에 음란을 피해가기란 정말 어렵습니다.
기술이 발전하면서 과거에 비해 생활이 많이 편리해졌습니다.
과거에 없던 것들이 새로 생겨나고 있습니다.
하지만 거기에 따른 문제도 심각한 문제로 발전하고 있습니다.
편리한 도구들은 우리의 생활을 풍성하게 해줍니다.
정보를 빠르게 얻을 수 있어요. 하지만 이것이 문제입니다.
죄를 짓는 데에도 쉽고 빠릅니다.
음란과 세속에 빠지는 죄는 지금 매우 심각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데살로니가전서 4:3
하나님의 뜻은 이것이니 너희의 거룩함이라 곧 음란을 버리고. 

베드로전서 4:3
너희가  음란과 정욕과 술 취함과 방탕과 연락과 무법한 우상 숭배를 하여 이방인의 뜻을 좇아 행한 것이 지나간 때가 족하도다.  

다섯째, 혈기의 영 / 호랑이(사자)

사자 또는 호랑이는 분노의 영 또는 화의 영을 상징합니다.
속에서 폭발적으로 분노와 혈기가 일어나는 이들은 속에 호랑이나 사자가 으르렁거리고 있는 것입니다. 이 영을 가지고 있는 이들은 성질이 강하고 사나워서 가까이 하기 어려운 사람들입니다.

“마귀가 우는 사자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베드로전서 5:8)

성경에서 최초의 살인 사건은 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을 돌로 쳐 죽인 것입니다. 가인은 동생 아벨을 왜 죽였을까요? 미움과 혈기를 참지 못해서 죽였습니다. 

따돌림과 괴롭힘이 학교에서 왜 일어날까요? 혈기 내는 영이 사람 안에 있어서 그렇습니다.


에베소서 4:26
분을 내어도 죄를 짓지 말며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말고. 

디모데전서 2:8
그러므로 각처에서 남자들이 분노와 다툼이 없이 거룩한 손을 들어 기도하기를 원하노라. 
 

여섯째, 탐욕의 영 / 돼지

돼지의 영을 “탐욕의 영”이라고 합니다. 돼지의 영이 내 안에 들어오면 끊임없이 욕심을 부리며 그 욕망으로 인하여 멸망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러한 사람은 아무리 가진 것이 많이 있어도 남들에게 자기가 가진 것을 주려고 하지 않으며 더 많이 얻으려고 합니다.

나발이란 사람은 부자이었지만 다른 사람에게 베푸는데 인색했습니다. 굶주린 다윗과 그의 일행을 먹이기는커녕 조롱하는 말로 다윗을 노하게 했지요. 그리고 어떻게 되었나요? 그는 몸이 돌처럼 굳어져 며칠 후 죽었습니다.

누가복음 12:15
저희에게 이르시되 삼가 모든 탐심을 물리치라 사람의 생명이 그 소유의 넉넉한데 있지 아니하니라.

골로새서 3:5
그러므로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 곧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이니 탐심은 우상 숭배니라.   

일곱째, 게으름의 영 / 거북이

거북이와 같은 게으름의 영의 지배를 받으면 항상 나태하고 게을러서 모든 것을 미루며 일하는 것을 싫어합니다. 이러한 사람은 사명을 받았어도 제대로 감당하지 않기 때문에 주님으로부터 “악하고 게으른 종아(You wicked, lazy servant!)” 라는 책망의 말씀을 듣게 될 것입니다.

마태복음 25:26∼30
그 주인이 대답하여 가로되 악하고 게으른 종아 나는 심지 않은데서 거두고 헤치지 않은데서 모으는 줄로 네가 알았느냐? 그러면 네가 마땅히 내 돈을 취리하는 자들에게나 두었다가 나로 돌아 와서 내 본전과 변리를 받게 할 것이니라 하고. 그에게서 그 한 달란트를 빼앗아 열 달란트 가진 자에게 주어라. 무릇 있는 자는 받아 풍족하게 되고 없는 자는 그 있는 것까지 빼앗기리라. 이 무익한 종을 바깥 어두운데로 내어 쫓으라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 하니라. 

46절, 저희는 영벌에, 의인들은 영생에 들어가리라 하시니라. 

죄의 종류와 마귀의 역사는 수도 없이 많지만 이 죄들은 사람의 마음 안에 자리잡고 있는 대표적인 일곱 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디모데전서 2:4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데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who wants all men to be saved and to come to a knowledge of the truth.

베드로후서 3:9
주의 약속은 어떤이의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 같이 더딘 것이 아니라 오직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치 않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The Lord is not slow in keeping his promise, as some understand slowness. He is patient with you, not wanting anyone to perish, but everyone to come to repentance.

디도서 3:4-6
우리 구주 하나님의 자비와 사람 사랑하심을 나타내실 때에
우리를 구원하시되 우리의 행한바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지 아니하고 오직 그의 긍휼하심을 좇아 중생의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으로 하셨나니
성령을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풍성히 부어 주사.

새 사람은 도덕과 윤리에 의한 것이 아니라 오직 성령으로 새롭게 합니다.
그러므로 성령의 사람 즉 성령의 지배를 받는 삶을 사모하고 기도하며 그 삶을 실천해야 합니다.

시편 104:30
주의 영을 보내어 저희를 창조하사 지면을 새롭게 하시나이다.

에베소서 4:23
오직 심령으로 새롭게 되어.

시편 51:10
하나님이여 내 속에 정한 마음을 창조하시고 내 안에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하소서.

골로새서 3:10
새 사람을 입었으니 이는 자기를 창조하신 자의 형상을 좇아 지식에까지 새롭게 하심을 받는 자니라.

요한계시록 21:5
보좌에 앉으신 이가 가라사대 보라 내가 만물을 새롭게 하노라.

사람과 속사람의 뜻과 차이점



들어가는 글

성경을 읽다 보면 "겉사람"과 "속사람"이라는 표현이 등장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 개념은 특히 사도 바울의 서신에서 강조되며, 기독교 신앙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닙니다. 그렇다면 겉사람과 속사람이란 무엇을 의미하며, 이 둘의 차이는 무엇일까요? 본 글에서는 성경에서 사용된 겉사람과 속사람의 뜻을 살펴보고, 신앙생활에서 우리가 어떻게 적용할 수 있는지 정리해 보겠습니다.

1. 겉사람과 속사람의 성경적 의미

1) 겉사람의 의미

  • 겉사람(outer man)은 우리의 육체적, 물질적, 외적인 존재를 의미합니다.
  • 사도 바울은 고린도후서 4:16에서 "그러므로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우리의 겉사람은 날마다 후패하나 우리의 속사람은 날로 새로워지도다"라고 말했습니다.
  • 이 말씀에서 겉사람은 시간이 지나며 쇠퇴하고 연약해지는 육체적인 부분을 가리킵니다.

2) 속사람의 의미

  • 속사람(inner man)은 영적인 존재로서,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성장하고 변화하는 내면을 의미합니다.
  • 에베소서 3:16에서 바울은 "그의 영광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성령으로 말미암아 너희 속사람을 능력으로 강건하게 하시오며"라고 말하며, 속사람이 성령을 통해 강건해질 수 있음을 가르칩니다.

2. 겉사람과 속사람의 차이

1) 본질적인 차이

  • 겉사람: 육체, 감각, 외적인 삶과 관련됨
  • 속사람: 영혼, 믿음, 내적인 삶과 관련됨

2) 시간의 흐름에 따른 변화

  • 겉사람은 시간이 지나면서 노화하고 쇠퇴합니다.
  • 속사람은 시간이 지나면서 더욱 강건해질 수 있으며, 하나님과의 교제 속에서 성장할 수 있습니다.

3) 삶의 방향성과 목적

  • 겉사람은 세상의 기준과 욕망을 따르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 속사람은 하나님을 따르며, 영적인 가치를 중심으로 살아갑니다.

3. 신앙생활에서의 적용

1) 겉사람을 의지하지 말고 속사람을 성장시키기

  • 우리는 육체적인 건강과 외적인 삶을 중요하게 여기지만, 더욱 중요한 것은 내면의 성숙입니다.
  • 성경 묵상, 기도, 예배를 통해 속사람을 강화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2) 성령을 통한 속사람의 강건함

  • 속사람은 성령의 도우심을 통해 변화됩니다.
  • 갈라디아서 5:16에서 "너희는 성령을 따라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고 말합니다.
  •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을 때 속사람이 더욱 강건해집니다.

4. 겉사람과 속사람의 조화로운 삶

1) 영적인 우선순위 세우기

  • 세상에서 살아가는 동안 육체적인 필요도 중요하지만, 영적인 성장을 우선시해야 합니다.
  • 마태복음 6:33에서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고 하신 말씀을 기억해야 합니다.

2) 삶의 중심을 속사람에 두기

  • 우리의 신앙은 단순히 겉모습이 아니라, 마음과 내면에서 진정한 변화를 경험하는 것입니다.
  • 예수님께서도 바리새인들을 향해 겉모습만 신경 쓰는 신앙을 경계하셨습니다(마태복음 23:27).

결론 정리

겉사람과 속사람의 개념은 단순한 이분법이 아니라, 신앙생활에서 우리가 무엇을 우선시해야 하는지를 가르쳐 줍니다. 
겉사람은 육체적이고 유한하지만, 속사람은 영적이며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자라갑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겉사람에 매이기보다, 속사람을 성장시키는 데 힘써야 합니다. 
매일 말씀과 기도로 속사람을 강건하게 하며, 하나님과 더 깊은 관계를 맺는 삶을 살아가길 바랍니다.



겉사람 (Outer Man) 재료 - 흙

겉사람은 우리의 육신적인 존재를 의미합니다. 
즉, 시간이 지남에 따라 늙고, 약해지고, 병들 수 있는 우리의 몸을 가리킵니다.

세상의 고난과 시련, 박해 등으로 인해 쇠퇴하고 소모되는 우리의 외적인 면모를 나타냅니다. 고린도후서 4장 8-9절에서 바울이 “우리가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박해를 받아도 버린 바 되지 아니하며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하고”라고 말한 것처럼, 겉사람은 이러한 어려움 속에서 고통받고 손상될 수 있습니다.

속사람 (Inner Man) 재료 - 생기 

반면에 속사람은 우리의 영적인 존재, 즉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새롭게 된 우리의 영혼과 마음을 의미합니다. 
속사람은 육신이 쇠퇴할수록 오히려 날마다 새로워지는 특징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는 성령의 역사와 하나님의 은혜를 통해 내면이 강건해지고, 믿음이 깊어지며, 영적으로 성장하는 것을 뜻합니다. 
세상의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능력과 위로로 인해 강해지는 내면의 상태를 나타냅니다.

  

고린도후서 4장 16절의 의미

고린도후서 4장 16절은 “그러므로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우리의 겉사람은 낡아지나 우리의 속사람은 날마다 새로워지는도다”라고 말합니다. 이는 성도들이 육체적인 고난과 어려움을 겪으면서도 낙심하지 않을 수 있는 이유가 바로 속사람의 새로워짐에 있다는 것을 강조합니다.

즉, 외적인 환경이나 육체적인 상태가 아무리 힘들고 어려워도, 우리의 내면은 하나님의 은혜로 인해 끊임없이 회복되고 성장하며 강해진다는 위로와 소망의 메시지를 담고 있습니다.


겉사람과 속사람(고린도후서 4:16-18)

1. 겉사람의 한계: 우리는 왜 채워지지 않는 갈증을 느낄까요?

2030 세대에게 '갓생(God-생)'은 중요한 키워드입니다. 남들에게 보여지는 스펙, 외모, 경제력을 위해 치열하게 살죠. 이것이 성경이 말하는 **'겉사람'**의 영역입니다. 흙으로 빚어진 육체, 감각으로 세상을 느끼는 나 자신이죠.

하지만 문제는 이 겉사람이 '유효기간'이 있다는 점입니다. 아담의 타락 이후, 인간은 하나님과의 연결이 끊기며 방향 감각을 잃었습니다. 겉은 화려해 보여도 속은 텅 빈 '번아웃' 상태가 되는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성경 말씀 "우리가 육신에 있을 때에는 율법으로 말미암는 죄의 정욕이 우리 지체 중에 역사하여 우리로 사망을 위하여 열매를 맺게 하였더니" (로마서 7:5)

[실제 예화] 세계적인 팝스타나 성공한 기업가들이 화려한 무대 뒤에서 우울증과 공허함을 고백하는 뉴스를 자주 접합니다. 모든 것을 가졌음에도 '내가 누구인지, 왜 사는지'를 몰라 방황하는 모습은, 영혼(속사람)이 죽어 육체(겉사람)의 감각에만 의존하며 사는 인간의 비극을 단적으로 보여줍니다. 겉만 가꾸는 인생은 마치 밑 빠진 독에 물 붓기와 같습니다.


2. 속사람의 탄생: 예수 그리스도라는 '새로운 엔진'

죽었던 우리 영혼을 깨우는 유일한 방법은 '수리'가 아니라 '교체'입니다. 낡은 옷을 기워 입는 게 아니라 새 옷을 입는 것이죠.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우리 죄를 대신 지심으로, 우리는 하나님을 '아빠 아버지'라 부를 수 있는 **'속사람'**을 선물 받았습니다.

성경 말씀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영으로 난 것은 영이니" (요한복음 3:5-6)

[실제 예화] 스마트폰의 액정이 아무리 깨끗해도 내부 소프트웨어가 망가지면 벽돌이나 다름없습니다. 반대로 겉은 좀 낡았어도 최신 OS가 설치되어 있다면 강력한 기능을 수행하죠. 예수님을 영접한다는 것은 우리 영혼에 '성령'이라는 새로운 OS를 설치하는 것과 같습니다. 비로소 내가 누구인지, 어디로 가야 하는지 삶의 '네비게이션'이 켜지는 순간입니다.


3. 영적 전쟁: 매일 낡아지는 겉사람, 매일 새로워지는 속사람

예수를 믿어도 갈등은 있습니다. 내 마음은 하나님을 향하고 싶은데, 내 몸은 자꾸 세상 유혹을 따라가려 하죠. 바울 사도조차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라고 탄식했을 정도입니다. 이때 필요한 것이 **'매일 죽는 연습'**입니다.

성경 말씀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사람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 (로마서 8:14)

[실제 예화] 매일 아침 우리는 세수를 하고 거울을 봅니다. 영적인 삶도 마찬가지입니다. 겉사람의 욕망이 고개를 들 때마다 "너는 이미 십자가에서 죽었다!"라고 선포해야 합니다. 운동선수가 근육을 단련하듯, 우리도 말씀과 기도로 속사람의 '코어 근육'을 길러야 합니다. 겉사람은 세월의 흐름에 따라 어쩔 수 없이 낡아지지만(Aging), 속사람은 성령 안에서 매일 더 힙하고 새롭게(Renewing) 성장할 수 있습니다.


💡 2030을 위한 핵심 메시지 3가지

  1. 눈에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닙니다. 스펙과 외모는 '잠시'뿐이지만, 여러분의 영혼은 '영원'합니다. 낡아질 것에 목숨 거는 인생이 아니라, 영원히 새로워질 속사람에 투자하세요.
  2. 내면의 갈등을 이상하게 여기지 마세요. 내 안에서 선과 악이 싸우고 있다면, 그것은 당신의 속사람이 살아있다는 증거입니다. 매일 성령님을 '환영하고 인정'하며 그분의 인도를 구하세요.
  3.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진짜 나'를 찾으세요. 세상이 정의하는 당신이 아니라, 하나님이 "너는 내 귀한 자녀다"라고 말씀하시는 정체성을 붙드세요. 그때 진정한 자유가 시작됩니다.

"우리의 겉사람은 낡아지나 우리의 속사람은 날로 새로워지도다." 오늘도 이 약속을 믿으며, 진짜 나를 깨우는 하루가 되시길 축복합니다!







하나님께서 아담을 지으셨을 때 속사람인 영의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으로 지음을 받았습니다. 성경에 “하나님은 영이시라”고 말씀하신 대로 인간은 영으로 지음을 받았지만 육신 즉 겉사람을 옷입고 살아가게 하셨습니다. 그러나 아담이 하나님께 범죄하여 그 죄 값으로 영의 사람으로서의 속사람이 죽고 육신의 사람인 겉사람이 되고 말았습니다.

1. 타락한 인간

타락한 인간은 영적으로 죽은 인간입니다. 죽었다는 것은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교통이 끊어진 것을 말합니다. 이사야 59장 2절에 “오직 너희 죄악이 너희와 너희 하나님 사이를 갈라 놓았고 너희 죄가 그의 얼굴을 가리어서 너희에게서 듣지 않으시게 함이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영적으로 죽은 아담과 하와는 영이신 하나님과의 교통이 단절되었고 이로인해 신령한 지식이나 체험을 갖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육이 죽은 사람은 세상에 대해서 아무런 반응이 없기 때문에 보지 못하고 듣지 못하고 냄새 맡지 못하고 맛도 못보고 또한 촉감도 없습니다. 죽은 사람이 세상에 일어나는 일을 전혀 알지 못하는 것처럼 영적으로 죽은 사람도 하나님과 교통하지 못하기 때문에 예수님을 아는 지식을 가질 수 없고 성령의 역사하심도 전혀 깨닫지 못하는 것입니다. 동물들이 신앙을 갖지 못하는 것은 영이 없이 현실적인 감각과 본능에 의해서만 살게 되므로 영적인 세계를 지각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영이 없는 동물들은 영적으로 죽어 있는 상태와 같기 때문에 육체의 일만을 지각할 뿐입니다.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대로 지음 받은 인간은 범죄하여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져 교통하지 못하므로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가질 수 없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은 하나님을 조금도 알수 없습니다. 예수님을 알게 하는 진리의 지식이 없으므로 성령님도 모르고 천국과 지옥을 가늠하는 내세의 심판을 알지 못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교통이 단절되므로 하늘나라에 속한 영적 지식이 하나도 없는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2장 14절에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들을 받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것들이 그에게는 어리석게 보임이요, 또 그는 그것들을 알 수도 없나니 그러한 일은 영적으로 분별되기 때문이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직 성령이 오셔서 우리의 영이 소생되어야 영의 세계에 반응할 수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12장 3절에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알리노니 하나님의 영으로 말하는 자는 누구든지 예수를 저주할 자라 하지 아니하고 또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살아있는 생물이 죽으면 부패하여 썩게 되는 것처럼 영적으로 죽게 되면 부패하고 썩어 악취를 내게 됩니다. 흐르지 않는 도랑물은 곧 썩어 온갖 더러운 벌레들이 살게 되듯이 영적으로 죽게 되면 부패함과 썩어짐을 통하여 온갖 귀신과 악령들이 사람의 마음속에 들어와 우글거리게 되는 것입니다. “어떻게 인간의 탈을 쓰고 그처럼 극악한 말과 행동을 하는가”라고 사람들은 말합니다. 그것은 겉으로는 사람으로 얼굴을 갖고 몸을 가지고 있지만 귀신이 그 썩은 영혼에 들어와서 악마화 되었기 때문에 사람이 할 수 없는 말을 하고 행동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시편 14편 1절에 “어리석은 자는 그의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없다 하는도다 그들은 부패하고 그 행실이 가증하니 선을 행하는 자가 없도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영이 죽었기 때문에 부패하고 가증하여 선을 행하는 사람이 없다고 시편기자는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처럼 영이 죽어 겉사람으로 사는 사람은 죄악과 질병과 고통,그리고 사방이 죽음으로 둘러쌓이게 됩니다. 이런 겉사람들이 살고 있는 이 세상은 어느 곳에 가나 죄악이 넘쳐나고 질병과 사망으로 둘러쌓여 있는 것입니다. 시편 38편 4절로 6절에 “내 죄악이 내 머리에 넘쳐서 무거운 짐 같으니 내가 감당할 수 없나이다 내 상처가 썩어 악취가 나오니 내가 우매한 까닭이로소이다 내가 아프고 심히 구부러졌으며 종일토록 슬픔 중에 다니나이다”라고 말씀한 것입니다.

우리가 이 땅 위에서 부귀, 영화, 공명을 얻으면 기쁘고 즐겁고 이를 통해서 소망이 생길것으로 생각하지만 영이 죽은 상태에서는 온전한 기쁨의 샘은 말라버리게 됩니다. 기쁨이 되시는 하나님이 우리의 영속에 들어오실 때 기쁨의 샘이 솟아 오르는 것입니다. 시편 16편 11절에 “주께서 생명의 길을 내게 보이시리니 주의 앞에는 충만한 기쁨이 있고 주의 오른쪽에는 영원한 즐거움이 있나이다”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하나님이 우리 영혼속에 계셔야 우리의 삶은 진실한 기쁨으로 넘쳐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를 믿지 않고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은 그 속에 기쁨의 샘이 없으므로 삶속에 늘 슬픔과 고통이 있을 뿐입니다. 쇼펜하우어는 “인생은 의미가 없다. 그러므로 낳지 않은 것이 행복인데 이미 낳았으니 빨리 죽는 것이 낫다”라고 말했습니다. 싱글턴 역시 “옳은 것도 없고 적당한 것도 없다. 우리는 잿더미 속에서 씨를 뿌리고 먼지 속에서 추수한다”고 말했습니다. 이들은 겉사람의 실상을 말한 것입니다.

사람은 하나님께 범죄하여 영적으로 죽은 상태이기 때문에 죄악과 질병과 죽음에 대한 두려움 속에 살고 있습니다. 이러한 겉사람은 하루도 쉬지 않고 염려, 근심, 낙심, 절망, 슬픔, 미움, 분노, 시기, 질투 등 온갖 마음의 억압으로 답답한 인생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욥기 17장 7절에 “내 눈은 근심 때문에 어두워지고 나의 온 지체는 그림자 같구나”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사는 것이 그림자와 같으므로 삶에 희망이 없고 온 천지가 낙심천지인 것입니다. 이러한 세상이 겉사람이 사는 세상으로 인간관계의 갈등, 억압, 소외, 대결 등이 끝없이 반복되고 있습니다. 계층간, 지역간, 국가간에 분열이 있고 끝없는 갈등과 대결이 있는 것입니다. 겉사람은 이러한 분열과 대립과 갈등을 해결할 도리가 없습니다. 전부 자기 중심으로 살고 자기 욕심으로 사니 서로 부딪치고 대립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한평생을 행복하게 살자고 결혼한 부부도 얼마 가지 아니하여 서로 부딪히고 원망하며 갈라서게 되는 것입니다. 부모 자식간에도 서로 원망, 불평, 탄식하게 되는 것입니다. 속사람이 죽어서 하나님이 없는 사람은 겉사람으로의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시편 38편 11절로 12절에 “내가 사랑하는 자와 내 친구들이 내 상처를 멀리하고 내 친척들도 멀리 섰나이다 내 생명을 찾는 자가 올무를 놓고 나를 해하려는 자가 괴악한 일을 말하여 종일토록 음모를 꾸미오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겉사람이 행하는 일입니다. 겉사람은 자기 상실감을 가지고 희망없이 늙고 병들고 쓸쓸히 죽어 갑니다. 겉사람은 자기가 어디서 와서, 왜 살며, 어디로 가는지 모릅니다. 아무리 많은 학식을 쌓고 또 세상에서 성공한 삶을 살지라도 겉사람으로 사는 사람은 어디서 와서, 왜 살며, 어디로 가는지 전혀 모릅니다. 자기를 잃어 버리고 사는 것입니다. 자기를 잃어버린 사람으로 쓸쓸히 인생의 황혼을 맞이하고 비참하게 죽음을 맞이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겉사람의 운명입니다.

2. 예수님의 구원과 속사람의 부활

영이 죽어 겉사람의 삶을 사는 인생들을 살려주기 위해서 예수님이 이땅에 오셨습니다. 2000년 전에 하나님의 아들이 사람의 몸을 입고 이땅에 온 것은 크나큰 축복입니다. 하나님이 멸망할 수 밖에 없는 인류를 구원하시려고 그 아들을 이 땅에 보내셨고 예수님은 연약한 인간의 몸으로 33년을 사시고 십자가를 짊어지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로마 빌라도의 뜰에서 말뚝에 묶여 등에 채찍을 맞으셨습니다. 죄를 지은적도 없고 죄를 알지도 못한 하나님의 아들이 무자비한 로마군인들의 채찍에 등이 갈기갈기 찢겨지는 고통을 당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고쳐 주시기 위해서 채찍에 맞고 고통을 당하면서도 참았던 것입니다. 지치고 피곤한 가운데 주님은 십자가의 무거운 짐을 지고 골고다로 올라갈 때 넘어지고 또 넘어지고 쓰러지셨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못박혀 6시간 동안 매달리시고 돌아가셨습니다. 보통 사람이라면 자기 죄로 말미암아 대가를 치루는 것이지만 죄 지은적이 없으신 예수님은 우리의 죄와 불의, 추악, 저주와 절망을 십자가에서 우리를 대신하여 짊어지신 것입니다.

이사야 53장 5절로 6절에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야훼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실 때 열두 명이 더 되는 천사에게 명령해서 십자가에서 내려오실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우리를 지극히 사랑하시는 주님은 우리에게 자유와 해방을 주시기 위해서 죽으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멍에 밑에 들어가면 그리스도의 흘리신 보혈의 능력으로 말미암아 우리 영혼이 살아나고 자유와 해방을 선물로 받게 되는 것입니다. 주님은 십자가에 못박혀서 죽어있는 우리의 속사람을 살려 일으키셨습니다. 완전히 죽어서 썩고 부패한 우리의 속사람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보혈로 씻음받고 성령을 통하여 다시 살게 되었습니다.

에베소서 2장 1절로 6절에 “그는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 그 때에 너희는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조를 따르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 전에는 우리도 다 그 가운데서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인하여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너희는 은혜로 구원을 받은 것이라) 또 함께 일으키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히시니”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구원을 선물로 받은 우리는 죽은 영혼이 살아나고 그리스도와 함께 부활, 승천하여 이미 영적으로 하늘에 앉아있는 것입니다.

고린도후서 5장 17절에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라고 말씀하고 있는데 우리의 힘으로는 새것이 될 수 없습니다. 새옷을 입었다고 새것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새집에 이사갔다고 새사람이 되지 않는 것입니다. 오직 우리의 속사람이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살아나서 새것이 되고 새피조물이 되는 것입니다. 겉을 아무리 변화시켜도 소용이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옛사람, 곧 우리의 겉사람을 십자가에 못박고 속사람을 살려 일으켜 주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십자가 멍에 밑에 들어가면 그 십자가의 보배로운 피로 말미암아 죄인된 옛사람은 사라지고 용서받고 의로워진 새사람으로 거듭나게 됩니다. 의인으로 거듭나서 주님과 함께 교통하고 하나님의 영광을 체험할 수 있는 것입니다. 죄의 담이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막아 놓았지만 예수님의 십자가의 보혈이 죄의 담을 헐어 버리고 용서와 의의 옷을 입혀 주시므로 하나님의 영광에 참여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 멍에 밑에 들어가면 모든 세속과 더러움이 사라지고 보혈로 말미암아 성령이 오셔서 우리를 거룩하고 성령충만한 사람으로 만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우리의 힘으로 아무리 거룩하게 되고자 하여도 세상과 죄악으로 묶여 있는 한 거룩함을 이룰 수 없습니다. 오직 예수님의 보혈만이 세상과 죄악에 묶여 있는 사슬을 끊을 수 있습니다. 보혈로 깨끗해진 우리에게 성령이 오시면 비로소 거룩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멍에 밑에 들어가서 믿고 순종하고 나아가면 주님은 그 멍에를 통하여 우리 육신의 연약함을 강하게 하시고 질병을 치료하시므로 우리에게 건강을 허락하여 주시는 것입니다. 주님이 십자가를 통하여 우리의 저주를 짊어지시고 아브라함의 축복을 누릴 수 있도록 허락하신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이 세상에서 헐벗고 굶주리고 피땀을 흘리는 고통스런 삶이 십자가로 인해 변화되고 십자가의 보혈을 통하여 우리를 저주에서 해방시켜 주시고 아브라함의 복으로 넘치게 채워 주시는 것입니다. 그 무엇보다도 주님이 짊어지신 십자가를 바라보고 주님을 따라가면 주님은 십자가의 죽으심과 부활의 능력을 통해서 우리를 영생복락인 천국으로 인도하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3장 16절에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예수께서 사망을 멸하시고 천국에 대한 기쁨과 소망으로 충만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님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다는 것을 인식해야 합니다. 십자가 보혈의 능력으로 새사람이 된 것을 알고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예전에 우리는 육신의 사람밖에 몰랐지만 이제 거듭난 속사람이 육신의 사람안에 살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됩니다. 하지만 그럴수록 육신의 사람과 우리안에 있는 속사람은 분쟁과 갈등을 끊임없이 일으키게 됩니다. 겉사람이 속사람을 충동질하고 유혹하므로 넘어 뜨리려고 하는 것입니다. 이러므로 겉사람의 말을 듣지 말고 겉사람을 제어하고 다스리는 거룩한 삶을 통해서 온전한 속사람으로 살아야 합니다. 눈에 보이는 환경에 민감한 겉사람은 감각적이고 체험적인 것만을 의지합니다. 또한 우리안에 속사람을 유혹하고 억압하므로 끊임없이 괴롭히고 고통을 주는 것입니다. 속사람은 교회에 나가려 하는데 겉사람은 나가지 말라고 충동질 합니다. 또한 술 담배 할 것을 유혹하고 음란과 도둑질과 미움과 증오의 마음을 겉사람을 통해서 일으키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를 유혹하고 시험하는 겉사람을 속사람을 통하여 투쟁하고 씨름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기전에는 겉사람이 시키는대로 행하고 겉사람이 사는 방식으로 살았지만 하나님을 믿음으로 우리안에 다시 살아난 속사람의 방식으로 살려고 하므로 겉사람과의 투쟁이 있는 것은 당연한 이치인 것입니다. 이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을 의지해서 속사람이 강해져야 되는 것입니다.

3. 날로 새로워지는 속사람

우리는 날로 새로워지는 속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성령을 통하여 우리의 속사람이 새로워지고 또한 성령이 주시는 힘과 능력으로 겉사람의 삶을 살지 말고 속사람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우리의 속사람을 날마다 새롭게 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이루어집니다. 로마서 12장 2절에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또한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영적인 자아상을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안에서 발견한 우리의 속사람은 의로운 사람이자 거룩한 사람이 되고 또한 치료받고 축복받은 사람으로 영생복락을 얻은 사람입니다. 베드로전서 2장 9절에 “그러나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 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려 하심이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우리의 속사람이 어떠한지를 알게 되면 될수록 더욱 강하게 일어나 겉사람을 대적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가운데 겉사람의 공격을 물리치고 겉사람의 삶을 따라 가지 않음으로 유혹에 넘어가지 않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속사람을 말씀으로 강하게 해야 하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10장 38절에 “나의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또한 뒤로 물러가면 내 마음이 그를 기뻐하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고 말씀하신 것처럼 속사람은 육신이 주는 감각적인 정보로 살지 않고 말씀으로 사는 것입니다. 눈에는 아무 증거 안보이고 귀에는 아무 소리 안들리고 손에는 잡히는 것 없어도 하나님이 주시는 말씀을 믿음으로 살아가는 것이 속사람이 사는 방식입니다. 겉사람은 눈에 보이는 것, 귀에 들리는 것, 냄새맡고 맛보는 것, 만져 보는것을 통해 지각할 수 있는 현실적인 감각과 체험으로 살아갑니다. 그러므로 겉사람은 속사람을 끊임없이 공격하는 것입니다. ‘믿음은 헛된 것이다.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는 것을 믿지말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감각으로 느낄 수 없는 것을 믿지 말라고 끊임없이 충동질하는 것입니다.

한번은 예수께서 베다니에 가시기 전에 그 사랑하시던 나사로가 병들어 죽게 되었습니다. 죽어 무덤에 들어간지 나흘이 지나 썩은 냄새가 진동했을 때 예수님이 오셔서 무덤 문을 열어 놓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와같은 예수님의 말씀은 속사람의 말씀입니다. 그러나 아직 속사람으로 살지 못하는 마리아와 마르다는 “주여, 죽은지 나흘이 되어 썩은 냄새가 납니다. 그 사람을 무덤에서 왜 끌어냅니까?”라고 말하므로 겉사람의 사는 방식으로 대답하였던 것입니다. 요한복음 11장 39절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돌을 옮겨 놓으라 하시니 그 죽은 자의 누이 마르다가 이르되 주여 죽은 지가 나흘이 되었으매 벌써 냄새가 나나이다”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마르다여,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 하지 않았느냐!”라고 말씀하시므로 믿음은 속사람에 의한 것임을 나타내셨습니다. 겉사람은 감각에만 의지해서 살려고 하기 때문에 우리의 속사람이 믿음으로 살고자 할 때 겉사람이 저항을 하고 반대를 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말씀을 많이 읽고 쉬지 말고 기도하는 가운데 믿음이 강해진 속사람으로서 살아야만 하는 것입니다. 로마서 1장 17절에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또한 속사람은 성령의 은혜로 삽니다. 우리 속사람이 살아나기 위해서는 하나님이 주시는 성령님을 우리안에 모셔들여야 합니다. 속사람은 성령님이 도움을 통해서 힘을 얻게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속사람은 언제나 성령님을 환영하고 인정하고 모셔들이고 의지하는 가운데 성령님의 도움을 구해야 합니다. 이러한 성령님은 우리의 가정교사이자 변호사로서 또한 안내인으로서 우리를 돕는 선생의 역할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속사람은 기도의 힘으로 살아가게 됩니다. 겉사람은 기도하지 말라고 말합니다. 우리의 속사람이 복음을 증거하고자 한다면 마귀는 겉사람을 통해서 공격을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겉사람은 속사람에게 기도하지 말고 편안히 쉴 것을 권유하고 당장에 다른 급한 일들에 관심을 갖도록 이끄는 것입니다. 그리고 겉사람을 통해서 마귀는 피곤함과 고통과 괴로움을 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속사람은 기도의 힘을 통해서 마귀에 대항하고 투쟁해야 하는 것입니다. 사람이 숨을 쉬지 않으면 몇분만에 죽는 것처럼 영적인 호흡과도 같은 기도를 하지 않는다면 속사람은 살아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앉으나 서나 기도하므로 우리의 속사람이 하나님의 생명으로 넘쳐나도록 쉬지말고 기도해야만 하는 것입니다.

사람은 세월이 흘러갈수록 겉사람은 점점 노쇠해지고 무능력해집니다. 왜냐하면 겉사람이 후패하면 모든 것이 둔해지고 쇠패해지고 낡아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속사람은 날로 새롭고 강성해지고 신령한 생명으로 충만해지는 것입니다. 속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을 항상 먹으므로 하나님의 생기로 살아갑니다. 또한 하나님이 주시는 생명이 넘치고 믿음으로 살아가므로 성령님이 동행하는 가운데 천국이 우리안에 임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므로 겉사람은 후패하나 우리의 속사람은 날로 새로워지는 것입니다. 하지만 겉사람으로 사는 사람은 마음에 고통을 안고 절망가운데 살아갑니다. 겉사람으로 사는 자들에게는 영원한 천국이 주어지지 않습니다. 오직 슬픔과 탄식과 좌절을 안고 영원히 몸부림치며 지옥으로 내려가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속사람이 살아난 사람은 낡은 겉사람을 벗어 버리고 그리스도와 함께 기뻐하며 영광 가운데 천국에 들어가 주님과 영원히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장차 다가올 아름다운 본향에 들어갈 때 한사람도 낙오되는 사람이 없기를 주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

하나님 우리 아버지여!
영혼이 죽은 우리를 살리기 위해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를 짊어지시고 대신 죽으신 것을 감사합니다. 우리같이 죄많은 인생을 대신해서 십자가에서 죽으시므로 우리의 속사람을 살려주시니 감사합니다. 말씀과 기도와 성령으로 우리의 속사람이 하나님과 교통하게 하시고 또한 영원한 본향으로 인도하시니 너무나 감사합니다. 예수믿고 속사람이 살아난 자녀들이 다시 겉사람을 따라 살지 않고 매일매일 속사람으로 살아갈 수 있도록 도와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겉 사람, 속 사람, 옛 사람, 새 사람 

1.겉 사람은 사람의 몸(육신)을 말한다.

『이런 까닭에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라. 오히려 우리의 겉 사람이 썩어질지라도 우리의 속 사람은 날마다 새로워지나니』(고후4:16)

『우리가 이것을 아나니 곧 우리 옛 사람이 그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힌 것은 죄의 몸을 멸하여 더 이상 우리가 죄에게 종 노릇 하지 않게 하기 위함이니라.』(롬6:6)

『내 안에 (곧 내 육신 안에는,) 선한 것이 거하지 않는 줄을 내가 아노니 원함은 내게 있으나 선한 것을 어떻게 행하는 것인지는 알지 못하노라』(롬7:18)

 

 

2.속 사람(inner man)은 사람의 혼을 말한다. 

『이런 까닭에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라. 오히려 우리의 겉 사람이 썩어질지라도 우리의 속 사람은 날마다 새로워지나니』(고후4:16)

구원받은 사람만 속 사람이 있는 것이 아니라 구원받은 사람은 구원받은 혼(속 사람)이 있고, 구원받지 못한 사람은 구원받지 못한 혼(속 사람)이 있는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구원받은 사람만 속 사람이 있는 것으로 잘 못 알고 있는데 그것은 속 사람을 혼과 연결시키지 못하기 때문이다.

 

 

3.옛 사람은 겉 사람과 같이 사람의 몸(육신)을 말하며 새 사람과 대조를 이룬다.

『이전 행실에 관해서는 기만의 욕망에 따라 썩어진 옛 사람을 벗어 버리고』(엡4:22)

『서로 거짓말하지 말라. 너희가 그 행위와 함께 옛 사람을 벗어 버리고』(골3:9)

 

 

4.새 사람은 거듭 난 사람의 영 안에 들어오신 성령님을 말한다.

『예수께서 대답하시기를 “진실로 진실로 내가 너에게 말하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태어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육신으로 난 것은 육이요, 또 성령으로 난 것은 영이니라. 내가 너에게 ‘너희는 거듭나야만 한다.’고 말한 것을 이상히 여기지 말라. 바람이 임의로 불어서 네가 그 소리를 들어도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듯이 성령으로 난 사람은 모두 그와 같으니라.”고 하시더라.』(요3:5-8)

자연인의 영 안에 예수 그리스도의 영이신 성령이 들어오시면 사람의 영이 거듭나게 되는데 이 때부터 하나님을 의식하게 되고 하나님의 말씀과 예배에 관심을 가지게 되며 하나님을 섬기게 된다. 『하나님을 따라 의와 참된 거룩함 안에서 창조된 새 사람을 입으라.』(엡 4:24)

또한 거듭난 사람의 영 안에 들어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말한다. 『너희 가운데 그리스도 안으로 침례를 받은 사람은 그리스도로 옷입었느니라.』(갈 3:27)

그러므로 사람의 영이 죽어서 태어난다고 하는 것은 사람의 영 안에 성령께서 거하시지 않는 상태를 말한다. 첫 사람 아담이 타락해서 ‘반드시 죽으리라.’ 했던 그 죽음은 바로 사람의 영 안에 죄로 인해 하나님의 영이 떠나 버린 상태를 말하는 것으로 사람의 영에 주의 촛불이 꺼져 버린 상태를 말하는 것이다. 『사람의 영은 주의 촛불이라. 뱃속에 있는 모든 깊은 부분들을 살피느니라.』(잠20: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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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에베소서

  1. 책 제목

헬라어 성경에서 본서는 ‘προς ΄ΕΦεσιος(프로스 에페시우스)’로 불린다. 이는 ‘에베소인들에게’(to Ephesians)란 뜻이다. ‘에베소서’는 이 제목에서 유래되었다.

 

 

  1. 기록자와 연대

1) 기록자/ 수신자

① 기록자

본 서신은 바울이 기록하였다고 직접 증언하고 있고(1:1; 3:1), 언어나 문체, 중심 사상 등이 바울의 다른 서신들과 일치하고 있으며, 초대 교부들(Irenaeus, Polycarp, Eusebius, Origen) 역시도 전통적으로 본 서신을 바울 기록으로 보기 때문에 대부분이 바울의 저작으로 인정한다.

 

② 수신자

바울은 에베소 교회 및 모든 믿는 그리스도인(1:1)에게 편지를 쓰고 있다고 밝히고 있는데, 물론 모든 믿는 그리스도인들에게도 이 서신을 읽도록 하는 것이지만 1차 독자는 그가 밝히고 있는 것처럼 에베소 교회라고 할 수 있겠다. 여기서 에베소는 교통의 요지이기도 하여, 소아시아 최대도시로 매우 번영했는데, 그 지방의 로마행정의 중심이었다. 이 에베소는 신전시(神殿市)로 불리웠다. 그것은 유명한 아르테미스(아데미르 역) 신전이 있는 데서, 그리고 후에는 황제예배를 목적으로 하는 2, 3의 신전까지도 포함되어서이다.

바울은 2차 전도여행할 때에 아시아 전도를 계획하였으나 성령 하나님께서 막으셔서(행 16:6), 유럽에 건너가 여러 교회를 세우고 다시 안디옥 모교회로 가는 동안 에베소에 잠깐 들렀다가 브리스길라와 아굴라를 에베소에 남겨 두었다(행 18:18-22, 26, 고전 16:19).

후에 바울은 제3차 전도여행할 때 윗 지방 갈라디아를 거쳐서 에베소에 와서(행 19:1), 회당에 들어가 석달 동안 담대히 하나님 나라에 관하여 강론하였고, 어떤 사람들은 이 도를 비방하여 그들을 떠나 두란노 서원에서 날마다 강론하여 2년 동안 말씀을 전하였다.

이렇게 바울은 이곳에 이 지방 전체에 복음을 전하는 기지로 된 교회를 세웠고 그 뒤에 디모데와 사도 요한이 이 교회에 머물며 사역을 했다. 이렇게 따라서 에베소 교회도 소아시아교회의 중심이 되고, 교회 역사상으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였다.

 

2) 기록연대

본 서신은 A.D. 62년경 로마 옥중에서 기록된 것으로 보인다. 본 서신에는 사도 바울이 옥에 갇혀 있음을 암시하는 표현들이 여럿 나타난다(3:1; 4:1; 6:20). 사도행전에 의하면 바울은 빌립보(행 16:19-34), 가이사랴(행 24:27), 로마(행 28:16, 30) 등 모두 세 차례 감옥에 투옥된 것으로 나타난다. 이 가운데 빌립보 감옥의 투옥 기간은 며칠(혹은 하루)에 지나지 않는다. 따라서 본 서신을 기록할 만한 여유는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일부 학자들이 가이사랴 감옥을 본 서신의 기록 장소로 보기도 한다. 그러나 본 서신의 필치가 매우 세련되고 신앙적 깊이와 원숙미가 넘친다는 측면에서 대분의 학자들은 이보다 훨씬 후대인 로마 감옥으로 본다. 바울은 로마 감옥에서 2년 정도 투옥되어 있었다. 이 기간에 바울은 빌립보서, 골로새서, 빌레몬서를 함께 기록했을 것으로 보며, 에베소서와 함께 옥중서신으로 불린다. 실제로 바울이 옥중에서 쓴 서신은 디모데후서도 포함되는데 이는 같은 시기에 쓴 글은 아니고, 바울 사도가 다시 붙잡혀서 순교하기 전에 목회자인 디모데에게 마지막 유언과 같이 남긴 글이며, 목회서신으로 분류된다.

 

  1. 기록 동기와 목적

본서중에는, 두기고가 다른 소식(통지)을 아시아에 전하기로 되어있다는 것(엡 6:21, 골 4:7) 이외에는, 이 편지가 기록된 특별한 이유 및 직접 목적 등에 대해 구체적으로 말하고 있지 않다. 그럼에도 바울이 행하던 사역의 모습과 편지의 내용을 통해 다음과 같이 생각해 볼 수 있다.

바울은 기원 52년부터 54년까지 약 3년 동안 그의의 전도 사역지 중에서는 가장 오래동안 머물며 복음을 전하였고 교회를 세웠다. 바울 자신은 밤낮 눈물로 각 사람을 권하기를 쉬지 않았다고 표현할 정도로 관심과 사랑이 있었다(행 20:31). 그러나 바울은 로마 감옥에 갇혀 있을 때에 에베소 교회의 여러 소식들을 듣고, 그들에게 꼭 필요한 내용들을 중심으로 모든 믿는 그리스도인들에게 다음과 같이 몇 가지 중요한 내용들을 알려 주기 원했다.

 

① 구원에 대한 바른 이해를 위해

구원을 단순히 지상의 역사에서 이루어진 사건으로 간주하여 자신의 결단이나 노력으로 얻었다는 단순한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② 교회에 대한 바른 이해를 위해

또한 교회의 참된 의미가 무엇인지 모르고, 단순히 눈에 보이는 성도들의 예배와 교제 정도로만 생각하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유대인들과 이방인들이 하나 되지 못하고 나그네나 외인 정도로 생각하고 있었다.

 

③ 그리스도인의 삶의 바른 이해를 위해

아울러 예수님을 믿는 자의 삶이 무엇인지를 잘 알지 못하여 그리스도인으로서 각각에 주어진 자리에서 어떠한 삶을 살아야 하는 지와 영적으로 어떠한 제사로 임해야 하는지를 잘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1. 주제

1) 삼위일체 하나님께서 은혜로 주신 구원에 감사해야

사도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받게 된 것이 자신의 판단이나 결단에 근거한 것이 아니라 오직 뜻의 결정대로 일하시는 하나님의 계획을 따라 예정을 입어(1:11), 그의 경륜을 따라 하나님의 택하신 자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되게 하시기 위하여(1:10) 그의 피로 말미암아 우리의 죄를 사하여 주셨고, 이 복음을 듣고 믿을 수 있도록 성령께서 인(印) 치시고 보증이 되셨음(1:13-14)을 자세히 알려준다.

또한 구원받은 자로서는 나의 어떠한 행위가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았음(2:5, 8)을 분명히 하여, 그 앞에서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려고 하신 구원의 목적을 잘 깨달아(1:4), 그의 영광을 더욱 찬송해야 함을 분명하게 밝혀주고 있다(1:14).

 

2)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온전한 교회를 이루어야

바울 사도는 그리스도의 놀라운 통치 능력으로 만물을 그 아래 복종하게 하셨는데(1:21-22), 교회가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그의 능력을 드러내어 만물을 그의 뜻으로 충만하게 하시도록 해야 함을 강조한다(1:23). 그러는데 있어서 이방인(에베소인)과 유대인이 따로 구별되는 것이 아니라 동일한 하나님의 권속이고 함께 연결하여 주 안에서 성전이 되어 가야 함을 말한다(2:19-22).

아울러 이미 주의 부르심을 받아 주와 연합하였기 때문에 성령이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고(4:1-3), 각 사람에게 주신 분량에 따라 직분과 봉사의 일을 잘 감당하며(4:7-12),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자라도록 권면한다(4:13).

 

3) 옛사람을 버리고 새사람으로 이 세상을 살아가야

바울 사도는 구원을 받은 자답게 마음을 새롭게 하여 구습을 따르는 옛 사람을 벗어 버리고 심령이 새롭게 되어 새 사람으로, 빛의 자녀답게 성령 충만한 삶을 살 것을 강조하는데(4:22-24, 5:18),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가정의 각 구성원으로서 또한 사회에서 상전과 종으로서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에 대하여 원리를 잘 설명해 주고 있다(5:22-5:9).

아울러 이 땅에서의 싸움은 영적인 것임을 잊지 말고(6:10-12)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취하여 영적 전투를 잘 감당하여 승리하는 삶을 살도록 권면한다(6:13-18).

 

 

  1. 특징

1) 삼위일체 하나님에 근거한 교회의 비밀이 담긴 서신이다.

에베소서는 그렇게 분량이 그렇게 긴 서신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교회’(에클레시아)라는 말이 9번이나 나올 정도로 ‘교회’에 대하여 강조하고 있다. 즉,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유기적이며 생동적인 조직으로 설명하면서 교회가 지닌 비밀을 잘 설명해 주고 있는 서신이다.

골로새서에서는 그리스도의 인격과 역사(일)하심의 존엄에 대하여 강조한다고 하면 에베소서 바울은 구속된 자의 총체인 그리스도의 몸, 교회의 숭고함을 말하고 있는데 즉, 삼위일체 하나님께서 택자에게 베풀어주신 은혜의 픙성함을 믿는 그리스도인들에게 보여주기 위해 하나님의 놀라운 계획을 가르쳐주고 있다.

 

2) 복음 전체를 잘 요약해 주고 있다.

에베소서에는 기독론, 구원론, 교회론, 종말론 등 광범한 주제를 다루고 있지만 대단히 간결하고 명쾌하게 제시되고 있다. 따라서 에베소서는 바울 신학의 요약으로 불리기도 한다. 칼빈은 에베소서를 가리켜 ‘바울 작품의 면류관’(the Crown of St. Paul’s Writings)이라고 불렀다. 에베소서는 교회 역사를 통해 가장 많은 영향을 미친 바울 서신 중 하나로 손꼽히고 있다.

 

3) 차분하고 논리적인 서신이다.

고린도전·후서가 당면한 문제에 대한 해답을, 갈라디아서가 복음과 율법 사이의 치열한 변증과 격정적인 어조로 다루고 있다면, 본 서신은 교회의 본질(교회론)과 교회와 그리스도와의 관계(기독론)를 아주 차분하면서도 조용하게 가르치는 교리서라 할 수 있다. 즉, 본서는 고요히 하늘에 계시는 그리스도와의 가장 깊은 비밀을 차분하고도 확실하게 계시한다.

 

4) 골로새서와의 유사한 서신이다.

에베소서는 골로새서와 유사한 주제들이 동일한 순서로 설명되는데, 때로는 어휘까지 동일하게 다뤄지는 경우가 많이 있다. 대표적으로 세 가지만 예를 들면, 첫째, ‘하늘과 땅에 있는 모든 것이 다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내용은 에베소서 1:10; 골로새서 1:14-20에서도 동일하게 찾아볼 수 있다. 둘째, ‘나는 너희 믿음에 대해 들었다’는 내용은 에베소서 1:15; 골로새서 1:4에 나와 있다. 마지막으로 ‘너희에 대해 하나님께 늘 감사를 드린다’는 말은 엡 1:16과 골 1:3에 동일 하게 나와 있다.

이것은 바울이 골로새서, 빌레몬서, 에베소서 모두를 비슷한 시기에 작성했고, 모두 비슷한 상황 가운데 있는 아시아 지방에 보냈기 때문으로 생각된다(엡 6:21, 골 4:7).

 

 

  1. 구조

1) 삼위일체 하나님 안에서의 구원에 대한 진술(1-3장)

(1) 도입(1:1-2)

(2) 구원에 대한 진술(1:3-3:21)

① 구원을 위한 삼위 하나님의 활동(1:3-14)

② 구원을 위한 성도의 과거와 현재(2:1-22)

③ 구원을 위한 바울의 활동(3:1-13)

④ 바울의 기도(3:14-21)

 

2) 구원 받은 성도로서의 삶에 대한 권면(4~6장)

① 삶에 대한 권면(4:1-6:9)

② 종결(6:21-24)















2025 갈라디아서



요한복음은 언제 기록되었을까? 
- 비블리온(βιβλίον)과 그라페(γραφή)

예수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후에야 제자들은 구약과 신약을 그라페와 로고스로 구분하여 알게 되었다. 
구약은 그라페이고, 예수의 말씀은 로고스인 것을 알게 되었다. 
부활하신 후 예수가 바로 “나의 하나님”인 것을 알고 나서야 그렇게 되었다. 
구약과 신약이 한 권으로 붙어 있고 사건이 연속되지만 그 둘의 가치는 동등하지 않다. 
요한복음에선 그것을 그라페와 로고스 혹은 그라페와 비블리온으로 명확히 구분한다. 
그라페는 선지자들의 말씀이고, 비블리온은 아들의 말씀이다. 
그라페는 모세의 율법과 모세의 장막에서 들은 말씀이고, 비블리온은 하늘 지성소에서 아버지로부터 들은 말씀이다.

​요한복음에서는 로고스를 담고 있는 말씀만을 비블리온(βιβλίον)이라고 분명히 구분한다. 
구약성경은 그라페(γραφή)라고 한다. 
구약을 로고스나 비블리온이라고 하지 않는다. 
비블리온(신약성경)은 예수 자신이나 그의 입을 통해 나온 말씀과 그것을 증거한 말씀만을 의미한다. 
요한복음에는 비블리온이라는 단어가 두 번 나오는데(20:30, 21:25), 
모두 예수에 관해 기록한 요한복음만을 비블리온이라고 하였다. 
예수의 행적을 담고 있어야 비블리온이라는 것이다. 
예수의 행적을 기록한 책을 비블리온이라고 한 것은 그만큼 구약과 신약이 차이가 나고, 영적인 깊이가 다르기 때문이다. 
구약은 모세와 엘리야처럼 사라져야 하지만, 신약은 모두가 들어야 할 이의 말씀이요, 지극히 크신 위엄의 책이기 때문이다.

​비블리온은 하나님의 아들의 영광, 곧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다. 
그러나 그라페는 예수의 지극히 크신 위엄 앞에 모두 사라져야 할 모세와 엘리야에 대한 글이다. 
그라페가 영생을 얻게 하고 예수를 알게 하는 가치는 있지만, 은혜와 진리가 충만한 것은 아니다. 
예수의 십자가 죽음 앞에 태양이 빛을 잃듯이 빛을 잃는 게 그라페다.

요한복음 1:14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요한복음 20:30
예수께서 제자들 앞에서 이 책(βιβλίον)에 기록되지 아니한 다른 표적도 많이 행하셨으나. 

​요한복음 21:24-25
24. 이 일들을 증언하고 이 일들을 기록한 제자가 이 사람이라 우리는 그의 증언이 참된 줄 아노라.
25. 예수께서 행하신 일이 이 외에도 많으니 만일 낱낱이 기록된다면 이 세상이라도 이 기록된 책(βιβλίον)을 두기에 부족할 줄 아노라.

태양도 빛을 잃는 복음서를 마무리하면서 주의 사랑하는 제자는 왜 비블리온이라는 단어가 들어간 두 문장을 후반부에 둔 것일까? 
하나는 20장에서 도마가 예수를 만진 후에, 다른 하나는 요한복음의 마지막 장인 21장 마지막 구절인 25절에서 말이다. 
모세와 엘리야도 사라지는 복음의 말씀에 왜 사랑하는 제자 요한은 제자들의 공적 인정 문구와 자신의 평가 구절을 넣은 것일까? 
내용적으로 이미 인증을 받는 비블리온일 텐데, 복음서를 마감하면서 왜 이런 구절로 끝맺은 것일까? 
모세도 엘리야도 사라지는 주 예수의 복음을 마감하면서 왜 이런 구절을 끝 부분에 둔 것일까? 
요한이 자기 책의 권위를 위해 막판에 첨부한 것일까? 
성서비평학자들의 주장처럼 이후의 사람들이 요한복음의 권위를 높이기 위해 추가한 것이라면 버려도 되는 것이 아닐까? 
요한은 왜 제자들이 참이라고 인정했다는 구절을 넣은 것일까? 
또 낱낱이 기록된다면 이 세상에 둘 수 없을 정도로 많다고 한 것일까? 
게다가 25절은 “아노라” 하며 개인적인 의견을 표명했는데 왜 그렇게 한 것일까?

​24절은 요한이 훌륭한 복음서를 쓴 것에 대해 제자들이 질투하여 자신들도 일정한 역할을 했다는 표시를 하라고 강요해서 쓴 것일까? 
복음은 모세와 엘리야가 사라질 정도의 위엄이 있는 책인데, 굳이 제자들의 인정이 있었다는 말이 필요했을까? 
이 두 구절(24절과 25절)은 임의로 추가한 구절일까. 
오해가 생기게 하는 구절이다.

​그러나 요한복음은 이 두 구절 때문에 더 빛이 난다. 
마태복음이나 마가복음엔 이런 구절이 없어서 빛이 나지만, 요한복음은 이 구절이 있어서 빛이 난다. 
누가복음은 이런 구절이 첫 부분에 있어서 빛이 나지만, 요한복음은 끝 부분에 있어서 빛이 난다.

​24절은 요한복음의 기록 시기를 추정하게 하는 중요 구절이다. 
왜냐하면 이 구절을 근거로 하면 요한복음은 “우리”라는 주의 11제자들이 생존해 있을 때 완성되고 인정받았기 때문이다. 
사도 요한이 100세 정도 되었을 때 쓴 것이 아니라, 예수의 부활 후 이른 시기에 쓰였다는 논리가 가능하기 때문이다. 
다른 제자들이 다 죽은 후에 요한복음을 기록한 게 아니라 제자들이 살아 있을 때 썼다는 것이다.

​사실 요한복음은 천주교와 관련된 “불확실한” 전승으로 인해 매우 혼탁한 상황에서 해석되고 있는 비블리온인 것을 우리는 알아야 한다. 가장 대표적인 게 주의 모친 마리아를 사도 요한이 에베소에서 돌봤다는 것이다. 
에베소에 가면 그런 전승을 이용한 유적이 있으나, 성경에는 그런 것이 나와 있지 않다. 
또 한 가지는 요한이 100세 가까이 살면서 노년에 요한복음을 썼다는 것이다. 
그것 또한 성경에 나와 있지 않다. 
성경에 없으면 해석하지 않는 방향으로 나가야 하는데, 천주교는 교부 등의 기록과 전해 내려오는 카톨릭의 전승을 성경에 근접한 것으로 받아들인다. 
이런 것을 전제로 하여 요한복음을 해석하기에 혼탁하다는 것이다.

​성경 영감설을 따른다는 학자들조차 요한복음의 기록 연대를 “A.D. 90-110년 사이”라고 소개하고 있다. 
그러나 이들이 참고한 자료는 요한복음 21:24-25을 인정하지 않는 자료다. 
그들은 후대에 누군가가 그 구절을 추가했다는 것에 동조한다. 
성경에 추가하는 이런 방자한 짓을 감히 했다고 믿는가? 
그 당시 그런 일이 있었다면 사도를 비롯한 제자들은 그런 것에 아무런 대응을 하지 않았겠는가? 
모세도 사라지고 엘리야도 사라지게 하는 주 예수의 비블리온에 “임의 추가”라는 불경스런 일을 자행했다고 믿는가?

​주의 사명자들이 신학교에 가서 혼란에 빠지는 이유는 신약성경의 가르침과 그 후세대인 교부들의 가르침을 동등한 권위로 가르치고 있기 때문이다. 
성경 기록 이후의 사람들의 어록은 천주교적인 게 많은데도 기록으로 남았다는 이유로 인해, 전승으로 전해진다는 것으로 인해 성경의 내용과 유사한 권위로 대접받고 있다. 
교부 중에 복음에서 벗어난 이야기를 하는 경우가 왕왕 있는데, 그들의 주장을 대부분 무비판적으로 배우고 있기에 주의 사명자들이 “불신자”처럼 되어 신학교 문을 나오게 된다. 
성경 이후 인물들의 어록이 신약개론 등에 정경을 결정하는 근거자료로 소개되기 때문에 혼란에 빠지는 것이다. 
특히, 요한복음의 기록연대를 논한 글을 보면 어느 하나도 21:24-25을 근거로 설명하지 않는다는 안타까운 사실이다.

​사도들과 제자들은 성경책도 없이 체험만 갖고 전도하러 다녔다고 가르치고 있기 때문에 이런 혼란이 생긴 것이다. 
사도들과 제자들은 주 예수의 복음서도 나오지 않았는데, 바울의 편지를 읽고 신앙생활을 했다고 가르치고 있기 때문에 이런 혼란이 생긴 것이다. 
예수의 재림이 임박했다고 하니까 하늘로 들림 받기 위해 죽기 살기로 전도하러 다녔다고 가르치니까 이런 혼란이 생긴 것이다. 
주 예수는 부활하신 후 40일간 하나님의 나라를 가르치셨는데, 그때 배운 가르침은 어떻게 되었겠는가?

​사도행전 1:3
그가 고난 받으신 후에 또한 그들에게 확실한 많은 증거로 친히 살아 계심을 나타내사 사십 일 동안 그들에게 보이시며 하나님 나라의 일을 말씀하시니라. 

​3년간 따라다니며 배운 것을 40일간 집중과정을 거쳐 나온 게 복음서다. 
그래서 누가복음에선 그 내용을 기록한 사람이 있고, 전해준 사람이 있다고 하지 않았던가?

​누가복음 1:1-2 
1. 우리 중에 이루어진 사실에 대하여 
2. 처음부터 목격자와 말씀의 일꾼 된 자들이 전하여 준 그대로 내력을 저술하려고 붓을 든 사람이 많은지라.

누가복음에선 이렇게 많은 사람이 전하여 준 것이 있다고 하며, 그 내력을 저술한 사람이 많다고 하였는데, 그것을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 문제가 되고 있다. 
왜 전하여 준 그대로 내력을 저술하려고 했겠는가? 
부활하신 예수가 40일간 계시면서 설명해 준 것이기 때문에 그런 것이다. 
그 설명이 너무나도 완벽해서 전하여 준 그대로 저술한 것이다. 
전하여 준 그대로 저술할 정도로 은혜와 진리가 충만한 말씀인데, 어떻게 그런 말씀에 “임의 추가”를 했겠는가? 
임의 추가는 불경스러운 것이 아닐 수 없다.

​신학교에서 배우는 교재에선 대부분이 그런 기록은 단편이 되었을 뿐이라고 한다. 
대부분이 조각조각 나서 파편처럼 떠돌았을 뿐, 복음서가 되지 않았다고 한다. 
마태자료, 마가자료, 누가자료, 요한자료 등 자료로만 있어서 복음서마다 차이가 생긴 것이라고 설명한다.

​그런 설명은 요한복음의 명칭이 왜 “The Gospel According to John”인지를 잘 모르고 하는 것이다. 
according to는 헬라어로 κατὰ(카타)인데, 그것은 요한이 저자란 말이 아니다. 
누구의 저작이라고 한다면 written by라고 해야 한다. 
그 성경의 저자는 주 예수시고 요한은 전하여 준 그대로 정리한 자이기에 κατὰ를 사용한 것이다. 
쉽게 말하자면 예수가 하신 말씀을 녹취했다가 정리해서 내놓았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복음서는 예수 부활 후 얼마 되지 않은 때에 나왔다.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40일간 계시면서 하나님 나라에 대해 설명한 것을 근거로 만들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사도들은 주의 사랑하는 제자 요한이 쓴 κατὰ(카타) 복음서를 보고 감탄하였다. 
그래서 그들은 “우리는 그의 증언이 참된 줄 아노라”(24절) 하였다. 
요한의 글에 질투한 것이 아니었다. 
요한의 글을 볼 때 주 예수를 보는 것과 같았기에 참되다(ἀληθὴς, 알레데스)고 승인한 것이다. 
알레데스는 거짓되지 않다는 의미다.

​요한 또한 자신의 작업이 40일의 가르침에 비춰볼 때 지극히 작은 것이기에 25절의 말을 남긴 것이다. 
요한복음의 마지막 구절에서 말하는 것은 예수의 복음서가 4권으로 끝나지 않을 수도 있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낱낱이 기록한다면 이 세상에 둘 만한 곳이 없다고 하였다.

​“낱낱이”라고 번역된 단어는 “하나씩”이란 말이다. 
부활하신 당일에도 열 시간 넘게 제자들을 만나 가르치셨는데, 40일간 그렇게 하셨을 것인데 얼마나 많았겠는가? 
도마 앞에서도 많은 표적을 행하셨다고 하였는데, 그 표적을 적었다면 얼마나 많았겠는가? 
예컨대,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오천 명을 먹이셨는데 그것을 기록한다면 요한복음 6장보다 훨씬 더 자세하고 다양하게 책이 되게 할 수 있었다. 
나눠 주는 제자들의 시각으로 책을 낼 수도 있고, 그 떡과 고기를 가져온 소년의 입장에서도 책을 낼 수 있고, 받아먹는 무리의 입장에서도 낼 수도 있었다. 
그렇게 한다면 6장보다 훨씬 더 많은 분량이 되어 책이 될 수 있었다. 
그 후 오천 명이 먹고 남은 것을 열두 광주리에 담으라고 했으니, 그 남겨진 것과 관련된 것을 책으로 냈어도 그것은 엄청나게 많은 분량의 책이 될 수 있었다.

​그 뿐만 아니라 광야에서 가르치시고 병자를 고치셨으니, 그것을 기록했다면 얼마나 많은 책이 나왔겠는가? 
그들이 떡을 먹은 때가 저물었다고 했으니, 돌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기록했다면 얼마나 두껍고 많은 책이 되었겠는가? 
떡을 먹고 흩어진 사람들과 관련된 책을 냈어도 그것은 엄청나게 많을 것이다. 
또한 그들의 이야기를 듣고 많은 사람이 예수를 따랐을 텐데 그렇게 하면 얼마나 많은 책이 되었겠는가?

​요한복음의 마지막 구절은 40일 간의 이야기만 해도 엄청나다는 것을 짐작하게 한다. 
40일 간 행하신 표적도 다 기록한다면 보관할 장소가 없다고 하였는데, 3년 간 공생애 때 사역을 기록한다면 얼마나 많겠는가.

​그래서 이 마지막 구절을 헬라어 원문으로 살펴보면 좀 더 정확하고 풍성하게 알 수 있다. 
헬라어 원문 뒤에 나오는 영어 본문은 원문을 충실하게 번역한 “영(Young) 문자역”이다.

​Ἔστιν δὲ καὶ ἄλλα πολλὰ ὃσα ἐποίησεν ὁ Ἰησοῦς ἅτινα ἐὰν γράφηται καθ' ἕν οὐδὲ αὐτὸν οἶμαι τὸν κόσμον χωρῆσαι τὰ γραφόμενα βιβλία ἀμήν

​And there are also many other things -- as many as Jesus did -- which, if they may be written one by one, not even the world itself I think to have place for the books written. Amen.(Young's Literal Translation)

​예수의 사역이 더 많은 책으로 나올 수 있었다는 첫째 암시는 25절의 여섯 번째 단어인 ὃσα(호사)이다. 
이 단어는 “-하는 것은 얼마든지”(as many as)이다. 
따라서 이런 원 뜻을 살려 정확하게 번역하면 “예수께서 행하시는 것이 얼마든지 많아 이 외에도 많은데”이다. 
서방사본은 ὃσα(호사) 대신에 ἅ(하)라는 관계대명사를 사용하므로 그 뜻을 약화시켰다. 
ἅ(하)를 택하면 which나 that이라는 일반적인 관계대명사로 해석해야 한다. 
그렇게 하면 단순히 뒤의 문장과 연결하는 의미밖에 되지 않는다. 
즉, ‘예수가 행하신 일이 이 외에도 많아’가 된다. 
그러나 ὃσα(호사)는 상호관계대명사로서 “-하는 것은 얼마든지 많이”라는 뜻이기에 그 의미가 확실히 풍성해진다. 
한글개역성경은 상호관계대명사로 된 사본을 채택하지 않았다. 
관계대명사로 된 것을 택했다. 
그래서 그 의미를 제대로 살리지 못했다. 
그러다 보니 이 엄청난 마지막 구절을 “예수께서 행하신 일이 이 외에도 많으니”라는 단순 번역으로 마무리했다. 
영어성경 중에서는 위에 있는 YTL이 동방사본을 따랐기에 그 의미를 가장 정확하게 번역했다. 
“많다”는 πολλὰ(폴라)를 번역한 many와 함께 ὃσα(호사)를 번역한 as many as를 살려, 그 의미를 풍성하게 하였다.

​“그 크신 하나님의 사랑”이라는 찬송가 가사를 생각해 보라.

​“하늘을 두루마리 삼고 바다를 먹물 삼아도
한없는 하나님의 사랑 다 기록할 수 없겠네.
하나님의 크신 사랑 그 어찌 다 쓸까
저 하늘 높이 쌓아도 채우지 못하리”

​번역가와 주석가들이 이 단어 외에 “하나씩”이라는 καθ' ἕν(카트 헨)에도 주목하여 그 문장을 번역하고 주석했다면 요한복음의 풍성함은 마지막 구절에서 더 빛났을 것이다.

​주의 사랑하는 제자 요한의 추정처럼 4개의 복음서 외에 추가로 복음서가 나왔다면 이 세상에 둘 수 없을 만큼 많았을 것이다.

​요한복음 21:25의 이런 언급은 예수의 3년의 삶이 얼마나 매 순간 순간이 충실했던가를 다시 한 번 돌아보게 한다. 
이 구절을 주목해야 하는 이유는 예수의 하루만 기록했어도 수천 권의 복음서가 됐다는 것을 이 구절이 시사하기 때문이다. 
다른 말로 하면 이 구절로 인해 네 개의 복음서는 수천 억 권의 복음서의 대표라는 말이다.

​그래서 주의 사랑하는 제자 요한은 그의 복음서 마지막에 특이한 용어를 사용하여 그 감동을 표현하였다. 
요한복음에 나오는 가장 주관적인 용어이지만, 그 의미는 매우 특별하다. 
οἴμαι(오이마이)라는 단어가 바로 그것인데, 한글 성경에서는 24절의 제자들의 “안다”는 말과 같이 “안다”로 번역했다. 
그렇지만 그 뜻은 “생각한다(think)”, “추정한다(suppose)”, “예상한다(expect)”, “상상한다(imagine)”, “-같다(seem)”와 같이 다른 말이다. 정확한 뜻은 추정한다는 것이다.

​요한은 왜 그의 복음서 마지막에 이런 주관적 용어를 쓴 것일까? 
다른 복음서와 달리 왜 마지막에 이런 주관적 표현을 한 것일까? 
더군다나 다른 복음서와 달리 요한복음은 객관성을 위해 “우리”라는 제자들의 검증이 있었다고 하며, 그 결과가 “참되다”는 최고 평가를 내렸는데 왜 지극히 주관적이고 개인적인 단어인 “(나는) 아노라”(추정하노라)를 말한 것일까?

​이 요한복음을 거룩한 성경책으로 검증한 “우리”라는 제자들과는 다른 시각이었을까? 
그렇지는 않았다. 
제자들의 시각이나 요한의 시각으로 이 구절을 생각해 본다면 οἴμαι(오이마이)라는 이 말로 인해 검증이 더 빛나게 되었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 말은 요한의 아쉬움이 짙게 묻어나는 표현이기 때문이다. 
제자들도 공감하는 표현이기 때문이다. 
제자들도 이 비블리온이 참이라는 사실로 인해 얼마나 가슴 벅찼을까? 
그 감동을 요한은 οἴμαι(오이마이)라는 이 단어로 재차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이 단어에는 그런 감동과 감격과 감탄이 느껴진다.

​왜냐하면 제자들도 수천억 권이 될 만한 주 예수의 사역을 이미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그것을 요한이 한 권으로 압축해야 할 때 다른 내용을 삭제해야만 하는데 얼마나 안타까워하며 아쉬워했을까? 
제자들은 요한의 마음 잘 알고 있었다. 
요한도 제자들이 그런 마음인 것을 알고 마지막에 이 구절을 넣은 것이다. 
서로가 얼마나 아쉬워했을까? 
그들은 요한복음을 참되다고 동의하는 만큼 요한 기자처럼 주 예수의 복음은 이 땅에 둘 수 없을 만한 것임을 알았다. 
그러했으니 얼마나 아쉬워하며 감동했을까? 
요한처럼 그들도 매우 안타까워하며 21장의 24절을 썼고, 요한은 그들의 그 마음을 잘 알고 있기에 다시 25절을 쓴 것이다.

​요한복음 21:24-25 
이 일들을 증언하고 이 일들을 기록한 제자가 이 사람이라 우리는 그의 증언이 참된 줄 아노라. 
예수께서 행하신 일이 이 외에도 많으니 만일 낱낱이 기록된다면 이 세상이라도 이 기록된 책(βιβλίον)을 두기에 부족할 줄 아노라. 

​이런 마무리 멘트는 요한복음을 완성하면서 그의 복음서에 다 담지 못한 이야기가 얼마나 많다는 것을 암시한다. 
제자들 모두가 아쉬워하면서도 감격스러워한다는 것을 우리는 역력히 느낀다. 
요한복음의 마지막을 “아멘”으로 마무리하면서 매우 감격했을 것이다.

​요한은 수천 억 권으로 확대해도 모자랄 복음서를 한 권으로 정리했을 때 얼마나 그러했겠는가? 
그러면서도 그는 주 예수의 사역이 수천억 권의 책이 될 수 있는데도 다 펴내지 못한 것을 매우 안타까워하며 아멘을 썼을 것이다. 
아멘이라는 단어를 삭제한 사본을 택한 서방사본 옹호자들은 그 감격을 모를 것이다. 
동방사본 대부분은 왜 아멘이란 말을 지키려 했는지 잘 모를 것이다. 
요한계시록을 아멘으로 마무리 할 때에도 큰 감동이었을 것인데, 요한복음도 그렇게 마무리하게 되었으니 얼마나 감격스러웠겠는가. 
그는 복음서를 마감하면서도 큰 감동으로 “아멘”이라는 글자를 썼을 것이다. 
왜 “아멘”이라는 말이 들어가야 맞는가. 
진실로 진실로, 즉 아멘 아멘 하며 하신 말씀이기 때문이다.

​영감이란 주 예수의 말씀과 사역을 담고 있는 복음서를 볼 때 수천 억 권으로 확대해 볼 수 있는 능력이다. 
영감이란 성경 말씀을 수천억 배로 확대 인식하는 능력이다. 
그러나 교리주의자는 기존의 지식에 머물러 있다. 
전해 내려온 것 이상으로 상상하지 않는 자가 바로 교리주의자다. 
상상하지 않고, “어느 사본에는 없음”이나 “추가 사본”이라는 설명에 기대는 자가 바로 교리주의자다.

​그런 자와 달리 우리는 은혜와 진리가 풍성한 요한복음을 풍성한 영감으로 읽고 받아들여야 한다. 
독생자의 영광이 풍성하게 비춰져야 한다. 
글자 하나가 우주에 떠 있는 허블 망원경보다 수천억 배 확대되어 우리 심비, 곧 마음 판에 새겨져야 한다. 
예수의 행적이 수천억 권의 책이 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말하는 요한복음의 마지막 구절을 영감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비블리온의 말씀은 그렇게 풍성한 말씀이다.

​영생의 부활은 비블리온의 말씀을 믿는 자에게만 이뤄진다. 
영혼의 속죄는 비블리온의 말씀을 믿는 자에게만 이뤄진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은 비블리온의 말씀으로만 된다. 
귀신을 쫓아내는 것은 비블리온의 말씀으로만 된다. 
무슨 독을 마실지라도 해를 받지 않는 것은 비블리온의 말씀으로만 가능하다. 
병든 자에게 손을 얹은 즉 낫는 것도 비블리온의 말씀으로만 가능하다. 
성령이 임하는 것은 비블리온의 말씀을 믿을 때 이뤄진다. 
내 영혼의 비밀을 말하는 방언도 비블리온의 말씀을 믿을 때 이뤄진다. 
비블리온은 예수의 피가 뿌려진 옷을 입은 말씀이다. 
그러나 그라페는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며 짐승의 피를 뿌리며 메시야를 기다리는 자들이 상고하던 말씀이다.

​따라서 우리는 예수의 말씀을 귀하게 여겨야 한다. 
예수의 피 뿌린 옷을 입을 말씀을 귀하게 여겨야 한다. 
그 말씀이 영생인 줄 알아야 한다. 
주 예수의 말씀은 하나님 아버지가 친히 명령하여 주신 말씀이기 때문이다. 
성경을 읽자, 비블리온의 말씀을 읽자. 
주 예수의 말씀을 가까이 하여 영생의 복을 누리자.

​내 영혼아, 너는 주 예수의 말씀을 들을지어다.
예수는 아버지의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

나는 그의 명령이 영생인 줄 아노라.

βίβλος, ου, ἡ

1. 책.   2. ‘성경’.  3. 생명의 책  
Pronunciation [ biblŏs ]  
Etymology  /  본래 의미는 파피루스 식물의 내부 ‘껍질’[즉, 종이 또는 책의 두루마리를 가리킴]
  • 1.  책.
  • 2. ‘성경’, 마1:1, 막12:26, 눅3:4, 20:42, 행1:20, 7:42.
  • 3. 생명의 책, 빌4:3, 계3:5, 13:8, 20:15.

βιβλίον, ου, τό Storng number 975

1. 책.  2. 율법의 두루마리.  3. 예언의 두루마리 
Pronunciation [ bibliŏn ] 
  •  1. 책, 두루마리, 계 6:14.
    •  a. 율법의 두루마리, 갈 3:10.
    •  b. 예언의 두루마리, 눅 4:17,20, 요한의 복음, 요 20:30.
    •  c. [특별히] 계시의 책, 계1:11, 5:1,2, 10:8, 22:7,9,10,18,19.
    •  d. 생명의 책, 계13:8, 17:8, 20:12, 21:27. [기타] 딤후4:13.
  •  2. 문서, 기록, 마19:7, 막10:4.
Grammar Explanation  / 976의 파생어
  • 문법설명 /  976의 파생어
  • 관련 성경  /  증서(마19:7, 막10:4), 글(눅4:17), 책(눅4: 20, 갈3:10, 딤후4:13), 두루마리(계6:14).

관련 성경
계보(마 1:1), 책(막 12:26, 행 7:42, 계 20:15), 시편(눅20:42, 행1:20).

γραφή, ῆς, ἡ Storng number 1124

1. 기록된 것.  2. ἡ γ.  3. 성경전체.
Pronunciation [ graphĕ ]
Etymology / 1125에서 유래
  • I.  기록된 것. 신약성경에서는 절대적인 신성한 의미로서 성경을 말함.
    • 1.  ἡ γ. 개개의 성경구절, 막12:10, 15:28, 눅4:21, 요13:18, 19:24,36,37, 행1:16, 8:35, 롬11:2, 딤후3:16, 약2:8,23.
    • 2.  성경전체.
      • a.  [복수로] αἱ γραφαί: 성경의 모든 부분들을 집합적으로 말함: 성경전서, 마21:42, 22:29, 26:54, 막12:24, 14:49, 눅24:27, 32,45, 요5:39, 행17:2,11, 18:24,28, 롬15:4, 벧후3:16, γ. ἅγιαι, 롬1:2, προφητικαί, 롬16:26.
      • b. [단수로] 성경전체를 가리킴, 요20:9, 행8:32, 벧후1:20, εἶπεν ἡ γ., 요7:38,42, λέγει, 롬4:3, 9:17, 10:11, 갈4:30, 딤전5:18, 약4:5, περιέχει ἐν γ., 벧전2:6. πεπλήρωται, ἐπληρώ- θη ἡ γ., 요17:12, πιστεύειν, υῇ γ., 요2:22, οὐ δύναται λυθῆναι ἡ γ.: 성경은 폐하지 못한다, 요10:35. [기타] 갈3:8,22.
  • 관련 성경  / 성경(마21:42, 요2:22, 고전15:3, 약2:8, 벧전2:6, 벧후1:20), 글(마26:56, 행8:35, 롬16:26), 말씀(약4:5).  


구약과 신약은 질적으로 다르다 
그라페와 로고스, 그라페와 비블리온의 차이를 알아야 신약의 가치가 보인다

예수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후에야 제자들은 구약과 신약을 그라페와 로고스로 구분하여 알게 되었다. 
구약은 그라페이고, 예수의 말씀은 로고스인 것을 알게 되었다. 
부활하신 후 예수가 바로 “나의 하나님”인 것을 알고 나서야 그렇게 되었다. 
구약과 신약이 한 권으로 붙어 있고 사건이 연속되지만 그 둘의 가치는 동등하지 않다. 
요한복음에선 그것을 그라페와 로고스 혹은 그라페와 비블리온으로 명확히 구분한다. 
그라페선지자들의 말씀이고, 비블리온아들의 말씀이다. 
그라페모세의 율법모세의 장막에서 들은 말씀이고, 비블리온하늘 지성소에서 아버지로부터 들은 말씀이다.

​요한복음에서는 로고스를 담고 있는 말씀만을 비블리온(βιβλίον)이라고 분명히 구분한다. 
이와 달리 구약성경은 그라페(γραφή)라고 한다. 
구약을 로고스나 비블리온이라고 하지 않는다. 
비블리온(신약성경)은 예수 자신이나 그의 입을 통해 나온 말씀과 그것을 증거한 말씀만을 의미한다. 
요한복음에는 비블리온이라는 단어가 두 번 나오는데, 모두 예수에 관해 기록한 요한복음만을 비블리온이라고 하였다
예수의 행적을 담고 있어야 비블리온이라는 것이다. (요한복음 20:30, 21:24-25)
예수의 행적을 기록한 책을 비블리온이라고 한 것은 그만큼 구약과 신약이 차이가 나고, 영적인 깊이가 다르기 때문이다. 
구약은 모세와 엘리야처럼 사라져야 하지만, 신약은 모두가 들어야 할 이의 말씀이요, 지극히 크신 위엄의 책이기 때문이다.

​비블리온은 하나님의 아들의 영광, 곧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다. 
그러나 그라페는 예수의 지극히 크신 위엄 앞에 모두 사라져야 할 모세와 엘리야에 대한 글이다. 
그라페가 영생을 얻게 하고 예수를 알게 하는 가치는 있지만, 은혜와 진리가 충만한 것은 아니다. 
예수의 십자가 죽음 앞에 태양이 빛을 잃듯이 빛을 잃는 게 그라페다.

○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요 1:14)

○ 예수께서 제자들 앞에서 이 책(βιβλίον)에 기록되지 아니한 다른 표적도 많이 행하셨으나(요 20:30)

○ 24) 이 일들을 증언하고 이 일들을 기록한 제자가 이 사람이라 우리는 그의 증언이 참된 줄 아노라 25) 예수께서 행하신 일이 이 외에도 많으니 만일 낱낱이 기록된다면 이 세상이라도 이 기록된 책(βιβλίον)을 두기에 부족할 줄 아노라(요 21:24-25)

태양도 빛을 잃는 복음서를 마무리하면서 주의 사랑하는 제자는 왜 비블리온이라는 단어가 들어간 두 문장을 후반부에 둔 것일까? 
하나는 20장에서 도마가 예수를 만진 후에, 다른 하나는 요한복음의 마지막 장인 21장 마지막 구절인 25절에서 말이다. 
모세와 엘리야도 사라지는 복음의 말씀에 왜 사랑하는 제자 요한은 제자들의 공적 인정 문구와 자신의 평가 구절을 넣은 것일까? 
내용적으로 이미 인증을 받는 비블리온일 텐데, 복음서를 마감하면서 왜 이런 구절로 끝맺은 것일까? 
모세도 엘리야도 사라지는 주 예수의 복음을 마감하면서 왜 이런 구절을 끝 부분에 둔 것일까? 
요한이 자기 책의 권위를 위해 막판에 첨부한 것일까? 
성서비평학자들의 주장처럼 이후의 사람들이 요한복음의 권위를 높이기 위해 추가한 것이라면 그런 용어는 버려도 되는 것이 아닐까? 요한은 왜 제자들이 참이라고 인정했다는 구절을 넣은 것일까? 
또한 낱낱이 기록된다면 이 세상에 둘 수 없을 정도로 많다고 한 것일까? 
게다가 25절은 “아노라” 하며 개인적인 의견을 표명했는데 왜 그렇게 한 것일까?

​24절은 요한이 훌륭한 복음서를 쓴 것에 대해 제자들이 질투하여 자신들도 일정한 역할을 했다는 표시를 하라고 강요해서 쓴 것일까? 
복음은 모세와 엘리야가 사라질 정도의 위엄이 있는 책인데, 굳이 제자들의 인정이 있었다는 말이 필요했을까? 이 두 구절(24절과 25절)은 임의로 추가한 구절일까. 오해가 생기게 하는 구절이다.

​그러나 요한복음은 이 두 구절 때문에 더 빛이 난다. 
마태복음이나 마가복음엔 이런 구절이 없어서 빛이 나지만, 요한복음은 이 구절이 있어서 빛이 난다. 
누가복음은 이런 구절이 첫 부분에 있어서 빛이 나지만, 요한복음은 끝 부분에 있어서 빛이 난다.

​24절은 요한복음의 기록 시기를 추정하게 하는 중요 구절이다. 왜냐하면 이 구절을 근거로 하면 요한복음은 “우리”라는 주의 11제자들이 생존해 있을 때 완성되고 인정받았기 때문이다. 사도 요한이 100세 정도 되었을 때 쓴 것이 아니라, 예수의 부활 후 이른 시기에 쓰였다는 논리가 가능하기 때문이다. 다른 제자들이 다 죽은 후에 요한복음을 기록한 게 아니라 제자들이 살아 있을 때 썼다는 것이다.

​사실 요한복음은 천주교와 관련된 “불확실한” 전승으로 인해 매우 혼탁한 상황에서 해석되고 있는 비블리온인 것을 우리는 알아야 한다. 가장 대표적인 게 주의 모친 마리아를 사도 요한이 에베소에서 돌봤다는 것이다. 에베소에 가면 그런 전승을 이용한 유적이 있으나, 성경에는 그런 것이 나와 있지 않다. 또 한 가지는 요한이 100세 가까이 살면서 노년에 요한복음을 썼다는 것이다. 그것 또한 성경에 나와 있지 않다. 성경에 없으면 해석하지 않는 방향으로 나가야 하는데, 천주교는 교부 등의 기록과 전해 내려오는 카톨릭의 전승을 성경에 근접한 것으로 받아들인다. 천주교뿐만 아니라 개신교 학자나 목회자들도 이런 것을 전제로 하여 가르치고 설교하기 때문에 요한복음을 해석하기가 매우 어지럽고 혼탁하다는 것이다.

​성경 영감설을 따른다는 학자들조차 요한복음의 기록 연대를 “A.D. 90-110년 사이”라고 소개하고 있다. 
그러나 이들이 참고한 자료는 요한복음 21:24-25을 인정하지 않는 자료라는 것이다. 
그들은 후대에 누군가가 그 구절을 추가했다는 것에 동조하며 그런 주장을 하고 있다. 
그들은 성경에 근거 없는 것을 추가하는, 못되고 방자한 짓을 감히 했다고 믿는가? 
그 당시 그런 일이 있었다면 사도를 비롯한 제자들은 그런 것에 아무런 대응을 하지 않았겠는가? 
모세도 사라지고 엘리야도 사라지게 하는 주 예수의 비블리온에 “임의 추가”라는 불경스런 일을 자행했다고 믿는가? 아닐 것이다.

​주의 사명자들이 신학교에 가서 혼란에 빠지는 이유는 신약성경의 가르침과 그 후세대인 교부들의 가르침을 동등한 권위로 가르치고 있기 때문이다. 성경 기록 이후의 사람들의 어록은 천주교적인 게 많은데도 기록으로 남았다는 이유로 인해, 전승으로 전해진다는 것으로 인해 성경의 내용과 유사한 권위로 대접받고 있다. 교부 중에 복음에서 벗어난 이야기를 하는 경우가 왕왕 있는데, 그들의 주장을 대부분 무비판적으로 배우고 있기에 주의 사명자들이 “불신자”처럼 되어 신학교 문을 나오게 된다. 성경 이후 인물들의 어록이 신약개론 등에 정경을 결정하는 근거자료로 소개되기 때문에 혼란에 빠지는 것이다. 특히, 요한복음의 기록연대를 논한 글을 보면 어느 하나도 21:24-25을 근거로 설명하지 않는다는 안타까운 사실이다.

​사도들과 제자들은 성경책도 없이 체험만 갖고 전도하러 다녔다고 가르치고 있기 때문에 이런 혼란이 생긴 것이다. 사도들과 제자들은 주 예수의 복음서도 나오지 않았는데, 바울의 편지를 읽고 신앙생활을 했다고 가르치고 있기 때문에 이런 혼란이 생긴 것이다. 예수의 재림이 임박했다고 하니까 하늘로 들림 받기 위해 죽기 살기로 전도하러 다녔다고 가르치니까 이런 혼란이 생긴 것이다. 주 예수는 부활하신 후 40일간 하나님의 나라를 가르치셨는데, 그때 배운 가르침은 어떻게 되었겠는가?

○ 그가 고난 받으신 후에 또한 그들에게 확실한 많은 증거로 친히 살아 계심을 나타내사 사십 일 동안 그들에게 보이시며 하나님 나라의 일을 말씀하시니라(행 1:3)

3년간 따라다니며 배운 것을 40일간 집중과정을 거쳐 나온 게 복음서다. 그래서 누가복음에선 그 내용을 기록한 사람이 있고, 전해준 사람이 있다고 하지 않았던가?

○ 1) 우리 중에 이루어진 사실에 대하여 2) 처음부터 목격자와 말씀의 일꾼 된 자들이 전하여 준 그대로 내력을 저술하려고 붓을 든 사람이 많은지라(눅 1:1-2)

누가복음에선 이렇게 많은 사람이 전하여 준 것이 있다고 하며, 그 내력을 저술한 사람이 많다고 하였는데, 그것을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 문제가 되고 있다. 왜 전하여 준 그대로 내력을 저술하려고 했겠는가? 부활하신 예수가 40일간 계시면서 설명해 준 것이기 때문에 그런 것이다. 그 설명이 너무나도 완벽해서 전하여 준 그대로 저술한 것이다. 전하여 준 그대로 저술할 정도로 은혜와 진리가 충만한 말씀인데, 어떻게 그런 말씀에 “임의 추가”를 했겠는가? 임의 추가는 불경스러운 것이 아닐 수 없다.

신학교에서 배우는 교재에선 대부분이 그런 기록은 단편이 되었을 뿐이라고 한다. 대부분이 조각조각 나서 파편처럼 떠돌았을 뿐, 복음서가 되지 않았다고 한다. 마태자료, 마가자료, 누가자료, 요한자료 등 자료로만 있어서 복음서마다 차이가 생긴 것이라고 설명한다.

그런 설명은 요한복음의 명칭이 왜 “The Gospel According to John”인지를 잘 모르고 하는 것이다. according to는 헬라어로 κατὰ(카타)인데, 그것은 요한이 저자란 말이 아니다. 누구의 저작이라고 한다면 written by라고 해야 한다. 그 성경의 저자는 주 예수시고 요한은 전하여 준 그대로 정리한 자이기에 κατὰ를 사용한 것이다. 쉽게 말하자면 예수가 하신 말씀을 녹취했다가 정리해서 내놓았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복음서는 예수 부활 후 얼마 되지 않은 때에 나왔다.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40일간 계시면서 하나님 나라에 대해 설명한 것을 근거로 만들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사도들은 주의 사랑하는 제자 요한이 쓴 κατὰ(카타) 복음서를 보고 감탄하였다. 그래서 그들은 “우리는 그의 증언이 참된 줄 아노라”(24절) 하였다. 요한의 글에 질투한 것이 아니었다. 요한의 글을 볼 때 주 예수를 보는 것과 같았기에 참되다(ἀληθὴς, 알레데스)고 승인한 것이다. 알레데스는 거짓되지 않다는 의미다.

요한 또한 자신의 작업이 40일의 가르침에 비춰볼 때 지극히 작은 것이기에 25절의 말을 남긴 것이다. 요한복음의 마지막 구절에서 말하는 것은 예수의 복음서가 4권으로 끝나지 않을 수도 있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낱낱이 기록한다면 이 세상에 둘 만한 곳이 없다고 하였다.

“낱낱이”라고 번역된 단어는 “하나씩”이란 말이다. 부활하신 당일에도 열 시간 넘게 제자들을 만나 가르치셨는데, 40일간 그렇게 하셨을 것인데 얼마나 많았겠는가? 도마 앞에서도 많은 표적을 행하셨다고 하였는데, 그 표적을 적었다면 얼마나 많았겠는가? 예컨대,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오천 명을 먹이셨는데 그것을 기록한다면 요한복음 6장보다 훨씬 더 자세하고 다양하게 책이 되게 할 수 있었다. 나눠 주는 제자들의 시각으로 책을 낼 수도 있고, 그 떡과 고기를 가져온 소년의 입장에서도 책을 낼 수 있고, 받아먹는 무리의 입장에서도 낼 수도 있었다. 그렇게 한다면 6장보다 훨씬 더 많은 분량이 되어 책이 될 수 있었다. 그 후 오천 명이 먹고 남은 것을 열두 광주리에 담으라고 했으니, 그 남겨진 것과 관련된 것을 책으로 냈어도 그것은 엄청나게 많은 분량의 책이 될 수 있었다.

그 뿐만 아니라 광야에서 가르치시고 병자를 고치셨으니, 그것을 기록했다면 얼마나 많은 책이 나왔겠는가? 그들이 떡을 먹은 때가 저물었다고 했으니, 돌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기록했다면 얼마나 두껍고 많은 책이 되었겠는가? 떡을 먹고 흩어진 사람들과 관련된 책을 냈어도 그것은 엄청나게 많을 것이다. 또한 그들의 이야기를 듣고 많은 사람이 예수를 따랐을 텐데 그렇게 하면 얼마나 많은 책이 되었겠는가?

요한복음의 마지막 구절은 40일 간의 이야기만 해도 엄청나다는 것을 짐작하게 한다. 40일 간 행하신 표적도 다 기록한다면 보관할 장소가 없다고 하였는데, 3년 간 공생애 때 사역을 기록한다면 얼마나 많겠는가.

그래서 이 마지막 구절을 헬라어 원문으로 살펴보면 좀 더 정확하고 풍성하게 알 수 있다. 헬라어 원문 뒤에 나오는 영어 본문은 원문을 충실하게 번역한 “영(Young) 문자역”이다.

Ἔστιν δὲ καὶ ἄλλα πολλὰ ὃσα ἐποίησεν ὁ Ἰησοῦς ἅτινα ἐὰν γράφηται καθ' ἕν οὐδὲ αὐτὸν οἶμαι τὸν κόσμον χωρῆσαι τὰ γραφόμενα βιβλία ἀμήν

And there are also many other things -- as many as Jesus did -- which, if they may be written one by one, not even the world itself I think to have place for the books written. Amen.(Young's Literal Translation)

예수의 사역이 더 많은 책으로 나올 수 있었다는 첫째 암시는 25절의 여섯 번째 단어인 ὃσα(호사)이다. 이 단어는 “-하는 것은 얼마든지”(as many as)이다. 따라서 이런 원 뜻을 살려 정확하게 번역하면 “예수께서 행하시는 것이 얼마든지 많아 이 외에도 많은데”이다. 서방사본은 ὃσα(호사) 대신에 ἅ(하)라는 관계대명사를 사용하므로 그 뜻을 약화시켰다. ἅ(하)를 택하면 which나 that이라는 일반적인 관계대명사로 해석해야 한다. 그렇게 하면 단순히 뒤의 문장과 연결하는 의미밖에 되지 않는다. 즉, ‘예수가 행하신 일이 이 외에도 많아’가 된다.

그러나 ὃσα(호사)는 상호관계대명사로서 “-하는 것은 얼마든지 많이”라는 뜻이기에 그 의미가 확실히 풍성해진다. 한글개역성경은 상호관계대명사로 된 사본을 채택하지 않았다. 관계대명사로 된 것을 택했다. 그래서 그 의미를 제대로 살리지 못했다. 그러다 보니 이 엄청난 마지막 구절을 “예수께서 행하신 일이 이 외에도 많으니”라는 단순 번역으로 마무리했다. 영어성경 중에서는 위에 있는 YTL이 동방사본을 따랐기에 그 의미를 가장 정확하게 번역했다. “많다”는 πολλὰ(폴라)를 번역한 many와 함께 ὃσα(호사)를 번역한 as many as를 살려, 그 의미를 풍성하게 하였다.

“그 크신 하나님의 사랑”이라는 찬송가 가사를 생각해 보라.

“하늘을 두루마리 삼고 바다를 먹물 삼아도
한없는 하나님의 사랑 다 기록할 수 없겠네.
하나님의 크신 사랑 그 어찌 다 쓸까
저 하늘 높이 쌓아도 채우지 못하리”

​번역가와 주석가들이 이 단어 외에 “하나씩”이라는 καθ' ἕν(카트 헨)에도 주목하여 그 문장을 번역하고 주석했다면 요한복음의 풍성함은 마지막 구절에서 더 빛났을 것이다.

주의 사랑하는 제자 요한의 추정처럼 4개의 복음서 외에 추가로 복음서가 나왔다면 이 세상에 둘 수 없을 만큼 많았을 것이다.

​요한복음 21:25의 이런 언급은 예수의 3년의 삶이 얼마나 매 순간 순간이 충실했던가를 다시 한 번 돌아보게 한다. 
이 구절을 주목해야 하는 이유는 예수의 하루만 기록했어도 수천 권의 복음서가 됐다는 것을 이 구절이 시사하기 때문이다. 
다른 말로 하면 이 구절로 인해 네 개의 복음서는 수천 억 권의 복음서의 대표라는 말이다. 

그래서 주의 사랑하는 제자 요한은 그의 복음서 마지막에 특이한 용어를 사용하여 그 감동을 표현하였다. 요한복음에 나오는 가장 주관적인 용어이지만, 그 의미는 매우 특별하다. οἴμαι(오이마이)라는 단어가 바로 그것인데, 한글 성경에서는 24절의 제자들의 “안다”는 말과 같이 “안다”로 번역했다. 그렇지만 그 뜻은 “생각한다(think)”, “추정한다(suppose)”, “예상한다(expect)”, “상상한다(imagine)”, “-같다(seem)”와 같이 다른 말이다. 정확한 뜻은 추정한다는 것이다.

요한은 왜 그의 복음서 마지막에 이런 주관적 용어를 쓴 것일까? 다른 복음서와 달리 왜 마지막에 이런 주관적 표현을 한 것일까? 더군다나 다른 복음서와 달리 요한복음은 객관성을 위해 “우리”라는 제자들의 검증이 있었다고 하며, 그 결과가 “참되다”는 최고 평가를 내렸는데 왜 지극히 주관적이고 개인적인 단어인 “(나는) 아노라”(추정하노라)를 말한 것일까?

이 요한복음을 거룩한 성경책으로 검증한 “우리”라는 제자들과는 다른 시각이었을까? 그렇지는 않았다. 제자들의 시각이나 요한의 시각으로 이 구절을 생각해 본다면 οἴμαι(오이마이)라는 이 말로 인해 검증이 더 빛나게 되었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 말은 요한의 아쉬움이 짙게 묻어나는 표현이기 때문이다. 제자들도 공감하는 표현이기 때문이다. 제자들도 이 비블리온이 참이라는 사실로 인해 얼마나 가슴 벅찼을까? 그 감동을 요한은 οἴμαι(오이마이)라는 이 단어로 재차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이 단어에는 그런 감동과 감격과 감탄이 느껴진다.

왜냐하면 제자들도 수천억 권이 될 만한 주 예수의 사역을 이미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그것을 요한이 한 권으로 압축해야 할 때 다른 내용을 삭제해야만 하는데 얼마나 안타까워하며 아쉬워했을까? 제자들은 요한의 마음 잘 알고 있었다. 요한도 제자들이 그런 마음인 것을 알고 마지막에 이 구절을 넣은 것이다. 서로가 얼마나 아쉬워했을까? 그들은 요한복음을 참되다고 동의하는 만큼 요한 기자처럼 주 예수의 복음은 이 땅에 둘 수 없을 만한 것임을 알았다. 그러했으니 얼마나 아쉬워하며 감동했을까? 요한처럼 그들도 매우 안타까워하며 21장의 24절을 썼고, 요한은 그들의 그 마음을 잘 알고 있기에 다시 25절을 쓴 것이다.

○ 이 일들을 증언하고 이 일들을 기록한 제자가 이 사람이라 우리는 그의 증언이 참된 줄 아노라(요 21:24)

○ 예수께서 행하신 일이 이 외에도 많으니 만일 낱낱이 기록된다면 이 세상이라도 이 기록된 책(βιβλίον)을 두기에 부족할 줄 아노라(요 21:25)

이런 마무리 멘트는 요한복음을 완성하면서 그의 복음서에 다 담지 못한 이야기가 얼마나 많다는 것을 암시한다. 제자들 모두가 아쉬워하면서도 감격스러워한다는 것을 우리는 역력히 느낀다. 요한복음의 마지막을 “아멘”으로 마무리하면서 매우 감격했을 것이다.

요한은 수천 억 권으로 확대해도 모자랄 복음서를 한 권으로 정리했을 때 얼마나 그러했겠는가? 그러면서도 그는 주 예수의 사역이 수천억 권의 책이 될 수 있는데도 다 펴내지 못한 것을 매우 안타까워하며 아멘을 썼을 것이다. 아멘이라는 단어를 삭제한 사본을 택한 서방사본 옹호자들은 그 감격을 모를 것이다. 동방사본 대부분은 왜 아멘이란 말을 지키려 했는지 잘 모를 것이다. 요한계시록을 아멘으로 마무리 할 때에도 큰 감동이었을 것인데, 요한복음도 그렇게 마무리하게 되었으니 얼마나 감격스러웠겠는가. 그는 복음서를 마감하면서도 큰 감동으로 “아멘”이라는 글자를 썼을 것이다. 왜 “아멘”이라는 말이 들어가야 맞는가. 진실로 진실로, 즉 아멘 아멘 하며 하신 말씀이기 때문이다.

영감이란 주 예수의 말씀과 사역을 담고 있는 복음서를 볼 때 수천 억 권으로 확대해 볼 수 있는 능력이다. 영감이란 성경 말씀을 수천억 배로 확대 인식하는 능력이다. 그러나 교리주의자는 기존의 지식에 머물러 있다. 전해 내려온 것 이상으로 상상하지 않는 자가 바로 교리주의자다. 상상하지 않고, “어느 사본에는 없음”이나 “추가 사본”이라는 설명에 기대는 자가 바로 교리주의자다.

그런 자와 달리 우리는 은혜와 진리가 풍성한 요한복음을 풍성한 영감으로 읽고 받아들여야 한다. 독생자의 영광이 풍성하게 비춰져야 한다. 글자 하나가 우주에 떠 있는 허블 망원경보다 수천억 배 확대되어 우리 심비, 곧 마음 판에 새겨져야 한다. 예수의 행적이 수천억 권의 책이 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말하는 요한복음의 마지막 구절을 영감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비블리온의 말씀은 그렇게 풍성한 말씀이다.

영생의 부활은 비블리온의 말씀을 믿는 자에게만 이뤄진다. 영혼의 속죄는 비블리온의 말씀을 믿는 자에게만 이뤄진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은 비블리온의 말씀으로만 된다. 귀신을 쫓아내는 것은 비블리온의 말씀으로만 된다. 무슨 독을 마실지라도 해를 받지 않는 것은 비블리온의 말씀으로만 가능하다. 병든 자에게 손을 얹은 즉 낫는 것도 비블리온의 말씀으로만 가능하다. 성령이 임하는 것은 비블리온의 말씀을 믿을 때 이뤄진다. 내 영혼의 비밀을 말하는 방언도 비블리온의 말씀을 믿을 때 이뤄진다. 비블리온은 예수의 피가 뿌려진 옷을 입은 말씀이다. 그러나 그라페는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며 짐승의 피를 뿌리며 메시야를 기다리는 자들이 상고하던 말씀이다.

따라서 우리는 예수의 말씀을 귀하게 여겨야 한다. 예수의 피 뿌린 옷을 입을 말씀을 귀하게 여겨야 한다. 그 말씀이 영생인 줄 알아야 한다. 주 예수의 말씀은 하나님 아버지가 친히 명령하여 주신 말씀이기 때문이다. 성경을 읽자, 비블리온의 말씀을 읽자. 주 예수의 말씀을 가까이 하여 영생의 복을 누리자.

그라페(γραφὴ), 테오스의 감동(Θεόπνευστος)

그리스어 본문 딤후 3:16, 모든 그라페(γραφὴ 바이블)는 테오스의 영감(靈感 Θεό + πνευστος:  Theopneustos)으로 된 것으로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료 교육하기에 유익합니다. (그라페 Strong's 1124, 51회 발생)

"Θεός"(Theos)는 일반적으로 그리스 신화에서 신들의 왕이자 천둥과 번개의 신인 제우스 신의 호칭이다.

그라페(γραφὴ & Βύβλος)

1. '그라페(γραφὴ)'는 그리스어 γράφειν(graphein)에서 파생된 명사형으로, 쓴 것, 글, 서적을 뜻하는 용어가 기독교의 바이블(Bible)을 가리키는 데 사용되었다. 성적 콘텐츠를 묘사하거나 성적 수치심이나 욕구를 자극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산업 및 문화 현상의 '포르노그래피'라는 용어는 그리스어 '포르노그라피아(πορνογραφία)'에서 유래했다. 포르노그라피아(음란물)는 '포르노스(πόρνος)' 즉 창녀나 매춘부, 남창, 남자 매춘을 뜻하는 그리스어 포르네(πόρνη: from πέρνημι: 팔다, 판매하다, 수출하다, 노예로 팔다)와 '쓰기(γραφία: From γραφή)', 즉 그리스어 'γράφειν(graphein)'에서 파생된 용어다.

초기 그리스 시대에는 창녀나 매춘부와 관련된 쓰기(write)를 가리키는 용어였지만, 현대에는 성적 콘텐츠를 묘사하거나 성적 욕구를 자극하는 용어로 널리 사용된다. "그라페"는 그리스어 γράφειν(graphein'쓴 것')에서 파생된 명사형으로, 포르노그래피는 매춘부를 의미하는 고대 그리스어 'porne(πόρνη)'와 '글쓰기'를 의미하는 'gráfo(γράφω)'의 합성어가 '포르노그래피' 음란물이라는 뜻이다. 각 문화권마다 고유의 명칭이 있지만 요즈음에는 그냥 '포르노(Πορνό)'로 통칭하여 말한다. 그리고 영미권에서는 간단히 '포르노(Πορνό)'는 에로, 음란물, 외설물로 세계 인터넷 검색어 표준이다. 

2. 헬레니즘 사상의 그라페와 같은 바이블(Byblos)은 4 왕조 호루스의 현신 파라오 '스네페루(Sneferu 기원전 2600년)' 이집트 상형 문자 기록에는 18 왕조 파라오, 아멘호테프 3세와 4세까지의 편지에서는 "구블라(𒁺𒆷 )"로 나타난다. 페니키아와 포에니 비문에는 "게발(𐤂𐤁𐤋: 언덕)"로 표시된다. 히브리어 원문에서는 "게발, 그발(גבל)"이라는 이름으로 에스겔서 27:9에 나온다. 바이블의 원래이름 "그발(Gebal)"은 알렉산드리아와 함께 그리스 문화의 중심지 중 하나인 시돈(צידון)과 두로(티레צוֹר)와 함께 페니키아의 3대 도시국가 중 하나였다. 바벨론 제국 때는 "구블라(Gubla)", 헬라 제국 때는 "비블로스(Byblos)"로 불렀다. 이것이 오늘날 기독교의 바이블(Bible)이 된 것이다.

테오스(제우스)의 영감(靈感 Θεό + πνευστος)

1. 디모데후서 3:16, 그리스어 '테오스(제우스)의 영감(靈感)'이라는 말은 히브리어로 야훼 엘로힘의 '거룩한 기운(에너지, 힘, 능력)'이라고 한다. 'רוח הקודש(Ruach HaKodesh)'라고 한다. 성경(תַּנַ"ךְ)에서 자주 등장하는 용어 중 하나며, 한글 변역 성령, 영혼, 또는 "영(靈)"과는 개념(concept) 자체가 완전 의미가 다르다.

2. 영감(spirit)을 직역하면 "영"은 '신령 령'이라는 한자어로, '신령(神靈)', '망령(妄靈)', '귀신' 등을 뜻한다. 巫(무당 무)와 음을 나타내는 霝(비올 령)이 합쳐진 형성자다. '무당(巫)이 기우제(雨)를 지내기 위해 동물의 머리 셋(口)을 바치고 있는 것으로, 그 의미는 귀신 들린 무당의 "영감"이라는 뜻이 된다.

3. 그리스어 "태오쁘네우스또스(Θεόπνευστος)"의 번역어다. 그리스 신화에 따르면, 제우스(바알, 천신)는 신들의 왕이며, 천국의 주인으로 그는 신들과 인간들을 지배하는 공중의 권세잡은 자(에베소서 2:2)로 번개와 천둥을 조종하고, 인간의 운명을 결정하는 등 강력한 힘을 지니고 있다. 그래서 그리스 신화에서는 '제우스의 영감(Θεό + πνευστος)'이라는 표현으로 묘사된다.

이것은 '신의 영감으로 생긴 것'을 의미하는데, 이는 제우스가 아이디어나 창조적인 업적을 위해 인간에게 영감(πνεύμα)을 불어넣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영감은 그리스 신화에서 예술, 문학, 음악 등 다양한 분야에서 제우스(Θεός)가 많은 인간들에게 영감을 불어넣은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예를 들어, 시인 호메로스는 '오디세이아'와 '일리아드'를 "제우스의 영감(태오쁘네우스또스)"을 받아 기록했다고 전해진다. 

4. 그리고 고대 헬레니즘 제국에서는 신들의 왕 "제우스 현신"을 테오스 에피파네스(Θεὸς Ἐπιφανής)라고 하였다. 그리스 신화에서 제우스는 인간들의 운명과 행운을 좌우하는 신으로서, 제우스의 호칭을 '테오스(Θεός)'라고 불렀다. 제우스는 신들 중 가장 강력하고 위대한 신으로 여겨졌기 때문에 이러한 칭호가 부여되었다. 

그라페(γραφὴ) VS 타나크(תַּנַ"ךְ)

기독교는 헤브라이즘(עִבְרִית계약)의 고유한 성경(תַּנַ"ךְ, לשון הקודש)을 타나크(Tanakh)라고 한다. 
그러나 헬레니즘 신앙의 근간을 두고 있는 기독교의 바이블은 창녀나 매춘부와 관련된 단순한 쓰기(write)를 가리키는 용어, 현대에는 성적 콘텐츠를 묘사하거나 성적 욕구를 자극하는 데 사용되는 용어인 '그라페(γραφὴ)'를 Holy-Bible이라고 한다.

그리고 태양신 바알숭배 국가인 페니키아의 주신(主神) '바알과 아스타르테(예레미야 44:18)'를 숭배하는 도시의 이름인 '비블로스(Βύβλος)'를 성경이라고 한다.

그리고 'רוּחַ אֱלֹהִים(Ruach Elohim)' 창조주 야훼 엘로힘의 '기운(힘)'을 '태오쁘네우스또스(Θεόπνευστος)' 제우스의 영감"이라고 번역하였다. 
이렇게 태양신 바알 제우스 숭배 신앙의 '헬레니즘(Έλλας)' 사상과 창조주 야훼를 숭배하는 '헤브라이즘(עִבְרִית)' 사상이 완전하게 정 반대 개념인 것을 알 수 있다.


요한복음 7:38 성경(그라패)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 나리라 
- 어떤 학자들은, 이 귀절 초두에 있는 "나를 믿는 자"란 말을, 앞절 끝의 "마시라"는 말의 주격으로 올려 붙인다. 
그것이 문법상으로 가능한데, 그렇게 하는 경우에는 그 뜻은, "나를 믿는 자로 마시도록 하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여기 "그 배에서"란 말을 "그리스도의 배에서"란 뜻으로 간주한다(Lagrange, Bultmann, Wikenhauser). 
옛날 교회에서는 히폴리트(Hippoliyt)가 그렇게 해석하였다. 
그러나 우리 한역과 같이 번역함이 옳다. 
초대 교회의 신자들은 성령의 은혜로 충만하였고, 그들에게서 나온 영적 역사는 무수한 사람들에게 미쳤다. 
후대의 일반 신자들도 잘 믿는 사람들은 이렇게 남들에게 신령한 은혜로 충만하였고, 그들에게서 나온 영적 역사는 무수한 사람들에게 미쳤다. 
후대의 일반 신자들도 잘 믿는 사람들은 이렇게 남들에게 신령한 은혜를 강수처럼 풍성히 전달해 준다. 
"성경에 이름과 같이"란 말씀은 다음 성귀들을 기억하게 한다. 
곧, 사 43:20, 44:3, 55:1,58:11; 겔 47:1-12; 욜 3:18; 슥 13:1, 14:8 등이다. 
여기 이른 바 "그 배에서"란 말은 성령님께서 신자의 가장 깊은 심령 속에서 역사하실 것을 가리킨다.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이루어질 영적 역사는, 이렇게 인간의 가장 깊은 요구를 만족시켜 주며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하여 준다. 
"생수"는 성령님을 비유하는데, 이런 비유가 성령님의 인격성을 제외함이 아니다. 
요한 복음은 성령님의 인격성(人格性)을 밝히 말하고 있다(1:33, 3:34, 6:63).

 

성경 디모데후서 3:15 그람마

네가 어려서부터 
- '어려서'에 해당하는 헬라어 '브레푸스'는 목회 서신에서 본절에만 나오는 단어이다. 
문자적으로는 '유아'를 의미하는 것으로(Sim-pson) '복중에 있는 아이'(눅 1:41,44)나 '젖먹이'(눅 2:12,16;18:15; 행 7:19; 벧전 2:2)를 가리킨다. 
한편 유대인들의 자녀 교육은 
1. 그 방법, 원리, 내용에 있어서 하나님 중심이었다. 
유대인들은 자녀들에게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과 역사에 대해 가르쳤다(창 18:19; 출 12:26,27; 신 6:7,9;11:19;시 119:15,16,99;사 38:19;엡 6:4). 
2. 그들의 교육의 주제는 '여호와를 경외케 하는 것'이다(잠 1:7;9:10). 
3. 부모의 훈계를 따르고 부모를 공경하도록 교훈했다(출 21:15-17;잠 1:8;6:20;엡 6:1-3). 
부모들은 자녀들을 사랑의 정신으로 양육하였으며(시 103:13) 자녀 스스로 선택, 결정할수 있도록 도와주었다(수 24:15). 
이렇게 어릴 때의 자녀 교육은 부모에 의해 이루어졌으며 성장하면서는 제사장, 레위인, 선지자, 특별 가정교사, 박사들 그리고 랍비들로부터 교육을 받았다(대상 27:32).

성경을 알았나니 
- '성경'에 해당하는 헬라어 '히에라 그람마타'는 문자적으로 '거룩한 문서'(Sacred Writings)를 의미하는 것으로 구약성경을 가리킨다(Hendriksen, Lock). 
이것은 '성경'에 대한 일반적 표현 '그라페'와는 다른 독특한 표현으로 바울이 이 표현을 사용한 이유는 다음과 같다(Scott).
1. '히에라 그람마타'에서 '그람마'는 원래 '문자'를 의미하는 것으로 디모데가 어릴 때 성경의 '문자'를 읽고 썼던 바로 그 기초적인 성경공부를 가리킨다(Lenski). 
2. 당시 에베소의 거짓교사들은 '에페시아 그람마타' 속된 문서를 사용하였다(행 19:19). 
바울은 이것과 대조를나타내기 위해서 '히에라 그람마타'를 사용한다(Lock). 
3. 디모데가 익숙했던 성경과 관련된 다른 기독교 문헌들을 가리킨다.

신약 성경주석

성경은 능히 너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느니라 
- 하나님께서 성경을 주신 목적은 모든 사람들로 하여금 '구원에 이르게 하는 지혜'를 얻게 하기 위함이다(시 19:7; 롬 11:11; 빌 1:19). 
성경에는 유대인들이 구원의 방법으로 주장하는 율법 외에 다른 방법인 '하나님의 의'가 계시되어 있다. 
'하나님의 의'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구원이다(롬 3:21, 22). '말미암아'의 헬라어 '디아'는 '통하여'라는 의미로 '그리스도 예수안에 있는 믿음'을 '통하지' 않고는 구원받을 수 없음을 시사한다. 
이것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믿음이 '성경'을 조명(照明)하며 생명력을 부여 한다는 것을 시사한다(Scott).

파사 그라페 데오프뉴스토스 카이 오펠리모스 프로스 디다스칼리안 프로스 엘레그몬 프로스 에파노르도신 프로스 파이데이안 텐 엔 디카이오쉬네

개역개정,16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새번역,16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영감으로 된 것으로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합니다. / ㉡또는 '하나님의 영감으로 된 모든 성경은 교훈과……'
우리말성경,16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가톨릭성경,16 성경은 전부 하느님의 영감으로 쓰인 것으로, 가르치고 꾸짖고 바로잡고 의롭게 살도록 교육하는 데에 유익합니다.
영어NIV,16 All Scripture is God-breathed and is useful for teaching, rebuking, correcting and training in righteousness,
영어NASB,16 All Scripture is inspired by God and profitable for teaching, for reproof, for correction, for training in righteousness;
영어MSG,16  Every part of Scripture is God-breathed and useful one way or another--showing us truth, exposing our rebellion, correcting our mistakes, training us to live God's way.
영어NRSV,16 All scripture is inspired by God and is useful for teaching, for reproof, for correction, and for training in righteousness,
헬라어신약Stephanos,16 πασα γραφη θεοπνευστος και ωφελιμος προς διδασκαλιαν προς ελεγχον προς επανορθωσιν προς παιδειαν την εν δικαιοσυνη
라틴어Vulgate,16 omnis scriptura divinitus inspirata et utilis ad docendum ad arguendum ad corrigendum ad erudiendum in iustitia
히브리어Modern,16 כי כל הכתוב נכתב ברוח אלהים גם מועיל להורת ולהוכיח ולישר וליסר בצדק׃


모든 성경은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파사 그라페'의 문자적인 뜻은 '모든 책'으로 구약성경을 의미한다. 
그런데 '모든'의 헬라어 '파사'에 대한 견해는 두가지이다. 
1.  '파사'는 '단일체로서의 전체'(all)를 의미한다(Lenski). 
2. '그라페' 앞에 관사 '헤'(*)가 없으므로 '각각의 개별 성경을 강조하는 모든'(Lenski). 
두 가지 견해의 차이는 강조점의 차이에 불과한 것으로 의미에는 별 차이가 없다(Calvin).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 '하나님의 감동'에 해당하는 헬라어 '데오프뉴스토스'는 문자적으로 '하나님께서 호흡하시는'의 의미로 사람이 하나님의 생기로 생령(生靈)이 된 것같이(창 2:7) 성경의 말씀도 하나님의 영감으로 되었음을 시사한다. 
이것은 성경의 절대 영감설을 뒷받침해 주는 근거가 된다(벧후 1:21). 
이에 대하여는 딤후 3:16, 17 주제강해 '성경 영감론'을 참조하라.


로마서 10:11

누구든지 저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아니하리라 
- 9:33과 같이 사 28:16로 부터 인용된 구절이다. 
그런데 이번에는 좀더 강조된 형태로 인용되었다. 
즉 '저를 믿는자'란 말 앞에 '누구든지'란 말이 첨가되어 있다(Hendriksen). 
이렇게 강조된 것은 앞에 언급된 4-10절의 말씀을 한 마디로 요약하려는 의도에서 비롯되었을 것이다. 
바울은 이사야의 말씀을 인용하여 구원이 유대 민족에게만 독점되어지고 또한 이방인에게 있어서는 모세의 율법에 의하여 할례를 받은 자에게만 국한시켰던 것을 확장시켜 이제는 복음을 받아들인 모든 자에게 허락되어졌음을 선포하고 있다(Godet).

고린도전서 15:3-4
성 경 [고전15:3]

그리스도의 부활은 성경적 진리임. 
우리 본문에 "성경대로"란 말이 두번 나온다. 
세상 역사상(歷史上)에는 성경에 기록되지 않은 것이 발생하는 사실들도 많다. 
그러므로 사실이라고 해서 반드시 다 성경에 예언되었던 것은 아니다. 
그러면 성경에 기록되어 있었음이 무슨 중요성(重要性)을 가지는가? 
사실들이 많은 중에도, 특별히 예수님의 죽었다가 부활 하실 것은 성경에 예언되어 있었다. 
이것이 그렇게 된 이유는, 인류(특별히 하나님의 백성)가 부활함이 우주 만물의 고대(苦待)하는 바 목표이기 때문이다(롬 8:19 "피조물의 고대하는 바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나타나는 것이니"). 
사 26:19엔 "주의 죽은 자들은 살아나고"라 하였고, 단 12:2엔 "땅의 티끌 가운데서 자는 자 중에 많이 깨어 영생을 얻는 자도 있겠고"라고 하였다. 
또 이밖에 구약에 많은 장 절들이 부활에 대하여 예언한 것이 확실하다. 
그것은, 부활 문제로 예수님께서 구약을 해석하신 것으로도 알려진다. 
그는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에게 이렇게 하셨다. 
곧, "미련하고 선지자들의 말한 모든 것을 마음에 더디 믿는 자들이여 그리스도가 이런 고난을 받고 자기의 영광에 들어가야 할 것이 아니냐 하시고 이에 모세와 및 모든 선지자의 글로 시작하여 모든 성경에 쓴 바 자기에 관한 것을 자세히 설명하시니라"(눅 24:25-27). 
부활 관계로 여기 있는 예수님의 구약 성경 취급을 보면, 구약 성경에 부활 장 절이 많이 있다. 다만 우리가 무식하여 모르는 것 뿐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아셨다. 그가 마 22:31,32에서 말씀하신 것을 보면, 우리로서는 부활에 대하여 가르친 것이라고 보기 어려운 장 절을 그는 부활 관계의 장 절로 생각하셨다. 
그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곧 "죽은 자의 부활을 의논할진대 너희에게 말씀하신 바 나는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요 야곱의 하나님이로라 하신 것을 읽어 보지 못하였느냐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요 산 자의 하나님이시니라"하셨다. 
그는 여기서 부활 장 절 같이 보이지 않는 장 절을 부활 장 절로 취급하셨다. 
그러나 그는 성경을 밝히 아시고 이렇게 취급하셨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보시기엔 구약이 전체적으로(직접 혹은 간접으로)부활을 가르친다고 생각되었을 것이다. 
그가 이렇게 생각하셨을 것은, 바울의 말로 보아도 확실하다. 
바울은 구약 성경의 목표가 부활을 가르치는데 있다는 의미로 말하였다(행 24:15-16, 26:22-23). 
이렇게 구원사(救援史)라고 할 수 있는 구약은, 주로 부활을 내다보고 예언하였다. 이렇게 된 이유는 부활이 우주(宇宙)의 목표이기 때문이다. 이런 중대성을 띤 것이 저렇게 중점적(重點的)으로 예언되었으니, 우리는 믿기에 용이하다. 우리는 믿어야 된다. 우리가 부활을 못 믿을 이유는 전혀 없다. 사람이 자기 힘으로 부활한다면, 그것은 믿어지지 않는다. 그러나 사람을 부활케 하시는 이가 하나님이시니, 우리는 부활을 믿기에 문제성(問題性)을 느끼지 않는다. 없는 데서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이, 죽은 자를 부활시킬 수 없으랴? 부활을 믿지 않는 자들이 이 세상에 늘 있는 이유는, 인간된 저들의 죄악성(罪惡性) 때문이다. 그러나 택함을 받은 자들은 성령으로 말미암아 부활을 믿는다. 그러므로 부활의 도리를 전할 때에, 믿는 자들이 생기는 반면에 믿지 않는 자들도 있다. 이와 같은 현상은 부활 이외의 다른 교리를 전할 때에도 마찬가지로 생긴다.















12월 30일(화) 갈라디아서 4-6장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예수의 흔적(6:17)

이 후로는 누구든지 나를 괴롭게 말라 내가 내 몸에 예수의 흔적을 가졌노라.
Finally, let no one cause me trouble, for I bear on my body the marks of Jesus.

예수의 흔적은 타락한 인간에게 두 가지 회복으로 나타납니다.

첫째는 양심(良心) / 어질 양, 마음 심
 
사물의 가치를 변별하고 자기의 행위에 대하여 옳고 그름과 선과 악의 판단을 내리는 도덕적 의식.

사도행전 24:16
이것을 인하여 나도 하나님과 사람을 대하여 항상 양심에 거리낌이 없기를 힘쓰노라. 



한글개역성경에서 양심이란 단어가 사용된 구절 / 28구절

둘째는 직관(直觀) 곧을 직, 볼 관     

  • 1. 철학 감관의 작용으로 직접 외계의 사물에 관한 구체적인 지식을 얻음.
  • 2. 철학 감각, 경험, 연상, 판단, 추리 따위의 사유 작용을 거치지 아니하고 대상을 직접적으로 파악하는 작용.









  • 흔적(痕跡) 스티그마(stigmaστίγμα

    1. 표.  2. 흔적.  3. 낙인  
    Pronunciation [ stigma ]   
    Etymology  /  στίξω ‘찌르다’에서 유래
    • 1.  표, 흔적, 낙인, 갈6:17.
    • 관련 성경  /  흔적(갈 6:17).


    󰃨 나를 괴롭게 말라 
    - '괴롭게'에 해당하는 헬라어 '코푸스...파레케토'(*)는 '내면적인 고통이나 슬픔'을 의미한다(마 26:10;눅 11:7). 바울이 당한 괴로움은 유대주의자들로부터의 직접적인 폭력이나 폭언이라기보다는 갈라디아 교인들이 유대주의자들에게 미혹되는 것을 지켜봐야 하는 안타까움이다. 따라서 '괴롭게 말라'는 구절은 더이상 갈라디아 교회 속에서 이단자들에 의하여 미혹(迷惑)되는 자들이 없기를 바라는 호소의 성격이 강하다.

    󰃨 예수의 흔적을 가졌노라 
    - '흔적'에 해당하는 헬라어 '스티그마타'(*)는 소나 양에게 낙인을 찍어 소유주를 나타내거나 종이 특정한 주인의 소유임을 나타내기 위하여 '자국'이나 '소인'을 남긴다는 것을 의미한다. 어떤 신비주의자들은 이'흔적'을 십자가에 못박히신 예수의 상처가 그대로 바울에게도 생긴 것이라고 한다. 일례로 아씨시의 프란시스(Assisi Francis)가 이런식의 거룩한 흔적을 받았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본절에서 '흔적'을 신비적 체험으로 이해하는 것에는 많은 무리가 따른다(Ridderbos, Huxtable, Cole). 바울이 말한 예수의 흔적은 복음을 전파하는 가운데서 예수의 이름으로 말미암아 얻게 된 수많은 고난의 흔적을 의미한다. 그것은 (1) 수많은 육체적 고난으로 인하여 실제로 남겨진 박해의 상처들을 뜻하며(고후 11:22-27),(2) 그리스도와 연합한 삶의 실천적 의미로서 수많은 고난에 동참하였음과 고난과 박해 속에서도 끝까지 예수를 따랐다는 사실을 나타낸다. 바울이 소유한 예수의 흔적은 예수의 고난에 참여함으로 얻은 거룩한 증표로서 율법주의자들이 육체의 자랑을 위해스스로 행한 '육체의 모양'과는 족히 비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것이다(행 20:24).


    갈라디아서 6:17 – 예수님의 흔적(στίγματα 스티그마타)이 말하는 복음의 최종적 보증


    “이 후로는 누구든지 나를 괴롭게 하지 말라 내가 내 몸에 예수의 흔적을 지니고 있노라” (갈 6:17)

    갈라디아서의 마지막 부분에서 사도 바울이 언급한 이 말씀은, 복음을 수호하는 바울의 단호한 선언이자, 이 편지 전체의 권위를 보증하는 인장 같은 구절입니다. 본문을 깊이 살펴보면서, 이 구절의 의미와 오늘날 우리에게 주는 교훈을 함께 묵상해보고자 합니다.


    1. “예수의 흔적”(στίγματα 스티그마)의 의미

    본문에 사용된 헬라어 στίγματα (stigmata)는 원래 “찔린 자국”, “낙인”, “문신”, “상처”를 뜻하는 단어입니다. 고대 사회에서는 주로 다음과 같은 맥락에서 사용되었습니다:

    • 노예나 군인의 소속을 나타내는 표식으로, 몸에 불로 지져 낙인을 찍음

    • 특정 신에게 헌신한 사람이 자신의 몸에 그 신의 상징을 문신으로 새김

    • 범죄인이나 도망노예에게 낙인을 찍어 사회적 위치를 명백히 함

    이처럼 στίγματα는 단순한 상처가 아니라, 특정한 주인이나 소속을 나타내는 상징적 표식이었습니다. 바울은 이 στίγματα를 “예수의 흔적”으로 표현하여, 자신이 그리스도의 종임을 몸으로 드러내고자 했습니다.


    2. 신약성경에서 στίγματα의 유일한 사용과 관련 구절

    흥미롭게도 στίγματα는 신약성경 전체에서 오직 이곳, 갈라디아서 6:17에만 사용되었습니다. 그러나 비슷한 개념은 바울의 다른 서신에서도 나타납니다:

    • 고린도후서 4:10: “우리가 항상 예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짐은…”

    • 고린도후서 11:23–27: 바울이 당한 고난과 핍박의 목록

    • 골로새서 1:24: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내 육체에 채우노라”

    • 빌립보서 3:10: “그 고난에 참여함을 알고자 하여…”

    이처럼 신약성경은 예수님을 위한 고난을 몸에 지니거나, 그 고난에 참여함을 통해 그리스도께 속한 자의 정체성을 나타내고 있음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의 흔적’이라는 말은 오직 갈라디아서에서만 바울이 단호히 선언한 독특한 표현입니다.


    3. 왜 바울은 편지 마지막에서 이 표현을 사용했는가?

    갈라디아서 전체는 유대주의자들의 율법적 할례 사상을 반박하며,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복음만이 구원의 길임을 변증하는 편지입니다. 이 서신에서 바울은 처음부터 자신의 사도권을 방어하며, “내가 전한 복음은 사람에게서 난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계시로 받은 것”이라고 말했습니다(1:11–12).

    ​그러나 당시 유대주의자들은 율법의 의식(특히 할례)을 강조하면서, 바울의 사도권을 부정하려 했습니다. 
    이에 대해 바울은 갈라디아서 마지막 부분에서 “이 후로는 누구도 나를 괴롭게 하지 말라”고 선언하며, 예수님의 흔적을 지닌 자기 몸을 증거로 내세웁니다. 이는 곧 :

    율법적 할례의 표식복음을 위한 고난의 흔적

    ​극명하게 대조시키는 선언입니다. 유대주의자들은 육체의 할례를 자랑했지만, 바울은 예수님을 위한 고난의 흔적이야말로 진정한 복음의 표식이라고 담대히 증언합니다.

    4. 복음을 위한 고난의 흔적 – 예수님의 ‘인장’

    당시 사회에서 στίγματα 스티그마타는 주인의 소유를 나타내는 낙인이었습니다. 바울은 이것을 오히려 수치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종으로서의 자랑으로 삼았습니다.

    ​예수님께서 “내 이름을 위하여 많은 고난을 받아야 하리라”(행 9:16)고 말씀하신 것처럼, 바울의 삶은 복음을 위한 고난으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고린도후서 11장에 기록된 수많은 박해와 고난은, 갈라디아서 6:17의 “예수의 흔적”을 실제로 몸에 새긴 증거입니다.

    ​결국, 바울의 몸에 있는 예수의 흔적들은, 갈라디아서 전체가 단순히 바울 개인의 글이 아니라, 예수님의 복음의 말씀임을 증거하는 인장이었습니다.

    ​바울은 이렇게 말하고 있는 셈입니다:

    “내가 전한 이 복음은 내 말이 아닙니다. 내 몸에 새겨진 이 예수의 흔적들이야말로,

    이 말씀이 참된 복음의 진리임을 보증합니다.” 

    5. 오늘날의 교훈

    “예수의 흔적”은 단순히 육체적 고난의 흔적을 넘어서, 복음을 위한 헌신과 희생의 표식을 말해줍니다.

    바울은 자신의 고난을 통해 복음의 진정성을 증명했고, 결국 갈라디아서 전체의 메시지가 오직 예수님의 복음임을 최종적으로 증언했습니다.

    ​오늘날 우리에게도 이 말씀은 깊은 도전을 줍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흔적을 지닌 자로서, 우리의 삶이 예수님께 속했음을 몸과 마음으로 드러내고 있습니까?

    진정한 복음의 순수성은 율법적 행위가 아니라, 그리스도를 향한 헌신과 고난의 흔적 안에서 드러납니다. 

    6. 맺음말

    갈라디아서 6:17은 단순한 개인적 고백이 아닙니다. 
    바울이 온 몸으로 새긴 고난의 흔적은, 예수님의 복음의 진리성과 능력을 보증하는 인장입니다.
    이 말씀을 기억하며, 우리 역시 예수님의 흔적을 삶으로 드러내는 자가 되길 소망합니다.

    몸에 새기는 일반적 의미의 표를 희랍어로 스티그마라 한다. 
    그 밖의 단어로는 ‘표시’라는 뜻의 세메이온
    ‘인(印)’이란 뜻의 스프라기스
    ‘표’란 뜻의 카라그마
    사도 요한이 짐승의 “표”라고 할 때 사용한 낱말은 카라그마
    하나님의 “인”이라고 할 때 사용한 낱말은 스프라기스
    그러나 대체로 위에 소개한 모든 낱말들은 얼마간 서로 바꾸어 쓸 수 있는 낱말들이었다.64 (372.2)


    σημεῖον, ου, τό Storng number 4592

    1. 표징.  2. 표.  3. 기적  
    Pronunciation [ sēmĕiŏn ]
    •  I. 표징, 표시, 이적.
      •  1. 표, 표시, 증거, 상징, 마24:3, 26:48, 막13:4, 눅2:12, 21:7, 살후3:17.
      •  2. 기적, 표징.
        •  a. 기적, 이적 [그리스도, 하나님, 하나님의 사람이 행한 기적], 막8:11, 눅 11:16, 요2:11,18,23, 3:2, 4:54, 6: 2,14,30, 7:31, 9:16, 10:41, 11:47, 요2:11, 4:48, 행2:43, 4:30, 5:12, 6:8, 7:36, 14:3, 15:12, 롬15:19, 히2:4, 고후12:12.
        •  b. [사탄이나 그의 대행자들이 행한] 기적, 마24:24, 막13:22, 계13:13, 16:14, 19:20.
        •  c. [마지막 날에 나타날] 전조, 징조, 눅 21:11,25, 행2:19, 계12:1,3, 15:1.
    Grammar Explanation  /  4592의 어간에서 파생된 중성

    • 관련 성경 /  표적(마12:38, 행2:22, 살후2:9), 징조(마24:3, 눅21:7, 행2:19), 군호(마26:48), 이적 (막13:22, 눅23:8), 표(롬4:11, 고후12:12).
    χάραγμα, ατος, τό Storng number 5480

    1. 표.  2. 형상 
    Pronunciation [ charagma ]
    Etymology  /  5482와 동일어에서 유래
    • 1. 표, 인, 계13:16, 14:9.
    • 2. 형상, 행17:29.
    • 관련 성경  /  표(계13:16, 16:2, 20:4), 새긴 것(행17:29).
    σφραγίς, ῖδος, ἡ Storng number 4973

    1. 인.  2.  인장.  3. 도장 
    Pronunciation [ sphragis ]
    • I.  인, 인장.
      • 1.  [문자적으로]
        • a.  인장, 봉인, 계5:1,2,5.
        • b.  도장, 계7:2.
        • c.  인장의 표, 인증하는 것, 롬4:11, 고전9:2.
      • 2. [상징적으로] 확신하다, 증명하다, 롬4:11, 고전9:2.
    Grammar Explanation  /  5420에서 유래된 강세형으로 보임

    • 관련 성경  /  인친 것(롬 4:11, 딤후 2:19), 인침(계 9:4), 인(계 5:1, 6:1, 8:1), 인봉(계 5:9).


    '예수의 흔적(痕跡)

    성경(갈라디아서 6:17)에서 사도 바울이 자신의 몸에 지닌 고난과 핍박의 상처, 즉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증명하는 표식을 의미하며, 이는 복음 전파를 위한 희생과 헌신의 결과로, 주님을 따르는 삶의 증거로 나타납니다. 
    이는 세상의 쾌락 대신 십자가만을 자랑하고, 세상의 유혹을 이기며, 주님을 위해 살고자 하는 삶의 태도와 변화된 인격으로 나타나는 영적인 표식이기도 합니다.
     
    의미 및 성경적 배경
    • 스티그마(στιγμα) : 헬라어 원어 '스티그마'는 주인의 소유를 나타내는 낙인이나 소인(seal)을 의미하며, 바울은 자신이 받은 박해의 상처를 예수 그리스도의 '브랜드 표시'로 여겼습니다.

    • 고난과 핍박의 증표 : 복음을 전하다가 얻은 육체적 고통과 상처, 그리고 세상으로부터의 조롱과 핍박 자체가 예수님과 함께 고난받았음을 증명하는 흔적입니다.

    • 세상과의 단절 : 세상의 것을 십자가에 못 박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을 자랑하며, 그로 인해 받는 고난을 부끄러워하지 않는 삶을 의미합니다. 
    삶 속에서의 '예수의 흔적' 
    • 변화된 삶 : 겸손, 온순, 순종, 자기 부인 등 성령의 열매를 통해 드러나는 인격의 변화.
    • 헌신과 희생 : 주님을 위해 기꺼이 희생하고 헌신하는 삶, 복음의 빚진 자로서 사는 삶.
    • 증인된 삶 : 세상이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의 사랑을 보고, 주님의 교회를 통해 하늘나라를 볼 수 있도록 삶으로 증거하는 삶. 
    요약

    '예수의 흔적'은 단순히 육체적 상처를 넘어,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하고 그 복음을 위해 살아감으로써 나타나는 영적, 인격적 변화의 표식이며, 이는 곧 주님을 자랑하고 세상의 유혹에 굴하지 않는 삶의 증거가 됩니다. 


    예수의 흔적이란 무엇을 의미할까요?

    “예수의 흔적”이라는 표현은 여러 가지 의미로 해석될 수 있습니다. 
    보통은 아래 세 가지 범주로 나누어 설명드릴 수 있습니다. 

    1️⃣ 역사적·문헌적 흔적

    🔹 신약성경 기록

    • **복음서(마태·마가·누가·요한)**는 예수의 생애, 가르침, 십자가 처형과 부활을 기록한 가장 핵심적인 문헌입니다.

    • 1세기 말~2세기 초에 기록되었으며, 당시 공동체의 증언이 반영되어 있습니다.

    🔹 비기독교 문헌 속 예수

    기독교 외부 기록에도 예수에 대한 언급이 있습니다.

    • 타키투스(로마 역사가) : 예수가 본디오 빌라도에 의해 처형되었다고 기록

    • 요세푸스(유대 역사가) : 예수를 지혜로운 인물로 언급
      → 이는 예수가 실존 인물이었음을 뒷받침하는 중요한 역사 자료로 평가됩니다. 

    2️⃣ 고고학적·지리적 흔적

    🔹 예수가 활동했던 장소들

    • 나사렛 : 성장한 마을

    • 가버나움 : 공생애 중심지

    • 예루살렘 : 십자가 처형 장소

    이 지역들에서는 1세기 유대 사회의 흔적들이 발굴되어, 성경의 배경과 시대상을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줍니다.

    🔹 성물(聖物) 논쟁

    • 토리노의 수의 : 예수의 장례 수의로 전해지는 천

    • 십자가 조각, 못
      → 신앙적 의미는 크지만, 과학적·역사적 진위 여부는 여전히 논쟁 중입니다. 

    3️⃣ 신앙적·영적 흔적

    🔹 예수의 가르침

    • 사랑, 용서, 겸손, 이웃 사랑

    • “원수를 사랑하라” 같은 가르침은 오늘날에도 강한 영향력을 가집니다.

    🔹 인류 역사에 끼친 영향

    • 기독교의 탄생과 확산

    • 서양 윤리, 법, 예술, 교육에 지대한 영향

    • 전 세계 수많은 사람들의 삶의 가치관과 선택에 흔적으로 남아 있음

    👉 즉, 예수의 가장 분명한 흔적은 물질보다 ‘사람들의 삶과 역사 속 변화라고 볼 수 있습니다.  

    예수의 흔적은 유물 하나로 남아 있다기보다, 문헌· 역사· 사람들의 삶 속에 깊이 새겨져 있습니다.


    양심(良心)(수네이데시스.  sünĕidēsis)  συνείδησις, εως, ἡ

    1. 의식.  2. 양심  
    Pronunciation  [ sünĕidēsis ]  
    Etymology  /  4894의 연장형에서 유래
    •  1. 의식, 고전8:7, 히10:2, 벧전2:19.
    •  2. 양심, 도덕의식, 롬2:15, 고전10:29, 고후1:12.
    • 관련 성경  /  양심(요 8:9, 고전 8:7, 히 9:9), 깨닫는 일(히 10:2), 생각함(벧전 2:19) 


    양심(아우토카타크리토스) 
    αὐτοκατάκριτος, ον Storng number 843

    1. 양심의 가책을 받는.  2. 스스로 정죄된.  3. 딛 3:11.  
    Pronunciation [ autŏkatakri- tŏs ]   
    Etymology  /  846과 2632의 파생어에서 유래
    •  1. 양심의 가책을 받는, 스스로 정죄된, 딛3:11.
    • 관련 성경  /  스스로 정죄한(딛 3:11)

    아이스데시스(aisthēsis)  ἴσθησις, εως, ἡ Storng number 144

    1. 직관.  2. 식별.  3. 통찰력  
    Pronunciation  [ aisthēsis ]  
    Etymology  /  143에서 유래
    •  1. 직관, 식별, 통찰력, 경험, 느낌, 지각, 빌1:9.
    • 관련 성경  /  총명(빌 1:9).

    143. αἰσθάνομαι Storng number 143

    1. ‘감각에 의해 이해하다’.  2. 깨닫다.  3. 이해하다  
    Pronunciation  [ aisthanŏmai ]   
    Etymology  /  제2부정과거 ᾐσθόμηνω, 가정법 α- ἴςθωμαι, 불확실한 파생어에서 유래
    •  1. ‘감각에 의해 이해하다’
      •  a. 깨닫다, 지각 능력을 소유하다.
      •  b. 이해하다, 《반》ἀγνοέω, 눅9:45.
    • 관련 성경  /  깨닫다(눅 9:45)






    당신의 직관을 믿어야 하는 이유 

    현대 사회에서 우리는 수많은 정보와 선택의 홍수 속에 살고 있습니다. 매 순간 결정을 내릴 때마다 데이터를 분석하고 논리적인 판단을 하는 것이 중요해 보이지만, 종종 우리가 쉽게 무시하는 ‘직관(intuition)’이 큰 힘을 발휘합니다. 직관은 오랜 경험과 무의식적인 패턴 인식을 통해 쌓이는 지혜의 축적입니다. 하지만 직관은 종종 비논리적이고 비합리적인 것으로 치부되며 신뢰받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왜 직관을 믿어야 할까요? 이 글에서는 직관의 본질과 그것이 우리의 삶과 의사결정에 어떻게 긍정적인 영향을 미치는지에 대해 심층적으로 알아보겠습니다. 또한, 직관을 효과적으로 활용하기 위한 구체적인 방법들도 함께 제시할 것입니다. 논리와 데이터에 의존하는 현대인일수록 직관의 중요성을 깨닫고 이를 활용할 수 있는 능력이 필요합니다.

    당신의 직관을 믿어야 하는 이유

    직관은 단순한 감정적인 반응이 아니라, 과거의 경험과 정보가 무의식 속에서 융합되어 빠르게 내리는 결론입니다. 신경과학자들과 심리학자들에 따르면, 직관적인 결정은 종종 논리적인 분석보다 더 빠르고 정확한 결과를 가져옵니다. 특히 복잡한 상황이나 불확실성이 높은 환경에서는 제한된 시간 안에 직관이 빛을 발하기도 합니다. 따라서 직관을 신뢰하고 활용하는 것은 단순히 운에 맡기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잠재적 지능과 축적된 지식을 활용하는 지혜로운 방법입니다. 이제 직관을 왜 신뢰해야 하는지, 그리고 직관을 더 잘 활용하기 위해 어떤 노력이 필요한지 살펴보겠습니다.

    직관의 정의와 본질

    직관은 오랜 시간 동안 축적된 경험, 지식, 감정이 복합적으로 작용하는 무의식적인 판단력입니다. 심리학자 칼 융(Carl Jung)은 직관을 ‘이성의 한계를 넘어선 무의식의 지혜’라고 설명했습니다. 이는 우리가 의식적으로 생각하지 않더라도 머릿속에 각인된 정보들이 하나로 통합되어 순간적인 결정을 내리게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를 들어, 위험한 상황에서 머뭇거릴 시간 없이 빠르게 몸을 피하는 것도 직관의 한 예입니다. 이처럼 직관은 무의식적으로 우리가 쌓아온 경험을 활용해 결정을 내리도록 돕습니다.

    하지만 직관의 작용은 단순한 ‘느낌’으로 오해되기 쉽습니다. 직관은 본능적인 반응과 다르게, 특정 경험과 학습의 산물입니다. 뇌가 일상에서 반복적으로 마주치는 상황을 학습하고 패턴을 분석한 뒤, 비슷한 상황이 발생했을 때 그 경험을 바탕으로 빠르게 결론을 도출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직관은 단순한 감정이나 우발적인 결정과는 다른 깊이를 가지고 있습니다.

    직관이 중요한 이유

    직관은 우리 삶의 다양한 영역에서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이는 논리적 사고와 함께 우리의 의사결정을 지원하는 강력한 도구로 작용합니다. 아래에서 직관이 중요한 이유를 구체적으로 알아보겠습니다.

    • 복잡한 문제 해결에 효과적
      논리적 사고만으로는 복잡하고 다양한 변수들이 얽혀 있는 문제를 해결하기 어려울 수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직관은 다양한 정보를 빠르게 종합해 결론에 도달할 수 있도록 도와줍니다. 예를 들어, 기업 경영자나 창업가들은 때로는 명확한 데이터가 부족한 상태에서 중요한 결정을 내려야 할 때가 많습니다. 이때 직관은 제한된 정보 속에서도 최선의 선택을 할 수 있게 합니다.
    • 시간 압박 속에서 신속한 판단
      시간적 여유가 없는 상황에서는 직관이 결정적인 역할을 합니다. 예를 들어, 스포츠 경기 중 선수들은 순간적인 판단이 경기의 승패를 좌우할 수 있습니다. 직관은 이처럼 빠른 판단을 요구하는 순간에 유용합니다.
    • 창의성과 혁신을 자극
      직관은 우리가 기존의 틀을 벗어난 아이디어를 떠올리는 데 큰 역할을 합니다. 직관적으로 떠오르는 영감은 새로운 문제 해결 방식을 제시하며, 특히 예술이나 과학 분야에서 혁신적인 발견으로 이어지기도 합니다. 역사적으로 많은 위대한 발명과 발견이 직관에서 비롯되었습니다.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도 그가 특정한 영감을 바탕으로 사고를 확장하면서 탄생한 결과입니다.

    직관이 효과적으로 작용하는 상황

    직관이 항상 정확한 것은 아닙니다. 따라서 직관을 잘 활용하려면 직관이 빛을 발하는 상황과 그렇지 않은 상황을 구분할 필요가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직관은 다음과 같은 상황에서 효과적으로 작용합니다.

    • 경험이 풍부한 분야에서의 직관
      특정 분야에서 오랜 시간 경험을 쌓아온 사람일수록 그 분야에 대한 직관이 발달해 있습니다. 예를 들어, 의사는 환자의 증상만 보고도 어떤 질병일 가능성이 높은지 직관적으로 파악할 수 있습니다. 이는 오랜 기간 축적된 경험에서 나온 결과입니다.
    • 정보가 불확실하거나 부족한 상황
      모든 정보를 충분히 확보할 수 없는 상황에서는 논리적 분석보다 직관이 더 좋은 결정을 이끌어낼 수 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는 직관이 기존의 경험과 지식을 바탕으로 최적의 선택을 유도합니다.
    • 반복적인 패턴 인식이 중요한 상황
      직관은 반복되는 패턴을 빠르게 파악하는 데 강점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 금융시장에서는 경험 많은 트레이더들이 직관적으로 시장의 움직임을 감지하고 빠르게 대응합니다. 이는 그들이 과거의 경험을 바탕으로 시장의 흐름을 무의식적으로 읽어내는 능력 덕분입니다.

    직관을 신뢰하기 위해 필요한 노력

    직관은 단순히 타고나는 것이 아니라, 훈련과 경험을 통해 발전시킬 수 있는 능력입니다. 직관을 효과적으로 활용하기 위해서는 다음과 같은 노력이 필요합니다.

    • 경험과 지식의 축적
      직관은 오랜 시간 쌓은 경험과 지식에서 나옵니다. 따라서 특정 분야에서 깊이 있는 경험을 쌓는 것이 중요합니다.
    • 자기 인식과 감정 조절
      직관이 효과적으로 작용하려면 자신의 감정 상태를 인식하고 조절할 수 있어야 합니다. 불안이나 두려움 같은 감정이 직관적인 결정을 방해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 피드백을 통한 학습
      직관이 맞았는지 틀렸는지를 지속적으로 점검하고 피드백을 받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를 통해 자신의 직관을 점차 개선할 수 있습니다.
    • 마음 챙김과 명상
      마음 챙김과 명상은 직관력을 높이는 데 도움이 됩니다. 이러한 활동은 내면의 목소리에 집중할 수 있는 능력을 키우고, 무의식적인 지혜에 더 쉽게 접근할 수 있도록 도와줍니다.

    결론

    직관은 논리적인 분석과 함께 우리의 의사결정을 돕는 중요한 도구입니다. 특히 불확실성이 높은 상황이나 시간 압박이 있는 환경에서는 직관이 더 큰 힘을 발휘합니다. 직관을 신뢰하고 활용하기 위해서는 경험과 지식을 쌓고, 자기 인식을 높이며, 명상과 피드백을 통해 꾸준히 직관력을 향상시켜야 합니다. 결국, 직관은 단순한 감각이 아니라 오랜 경험과 학습의 산물이므로 이를 믿고 발전시키는 것이 중요합니다.

    직관은 우리가 마주하는 복잡한 세상에서 빠르고 현명한 결정을 내리는 데 큰 도움이 됩니다. 논리와 데이터에 의존하는 것만큼이나 자신의 직관을 신뢰하고 활용하는 습관을 기르세요. 직관과 논리를 균형 있게 사용할 때, 우리는 더 나은 선택을 할 수 있으며 복잡한 문제들을 해결하는 능력도 강화될 것입니다.





    양심의 신비, 인간 본성을 넘어서는 도덕적 직관으로의 실질적 탐험

    ■ 옮긴이의 말_ 『양심: 도덕적 직관의 기원』 (패트리샤 처칠랜드 지음, 박형빈 옮김, 씨아이알, 320쪽, 2024.01)

    인간의 양심과 도덕적 자각에 관한 탐구는 철학적 관점에서 오랜 시간 동안 중요한 논의 주제가 되어왔다. 
    역사를 통틀어 수많은 사상가들이 양심의 본질에 대해 다양한 해석을 제시해왔으며, 그중 일부는 이를 본능적이거나 선천적인 것으로 보았고 다른 이들은 사회적이거나 문화적 구조 속에서 형성된 이념으로 설명하려 했다. 
    그러나 이러한 개념들을 둘러싼 실증적이고 과학적인 분석은 상대적으로 제한적이었다.

     『양심 : 도덕적 직관의 기원』은 도덕성의 기원과 발달에 대한 현대 과학의 최신 발견들을 통해 양심에 대해 깊이 있는 이해를 도모한다. 이 책은 뇌신경과학, 진화생물학, 진화심리학 등의 분야를 통해 양심의 실체와 작동 원리를 탐구한다. 
    동시에 철학적 사유를 통해 이러한 과학적 발견들을 심도 있게 분석한다. 
    이와 같은 독창적이며 다각적인 접근 방식은 우리의 양심이 단순히 추상적이거나 이론적인 개념이 아닌 구체적이고 실질적인 현상임을 깨닫게 한다.

    우리 양심에 대한 이해는 과학적인 동시에 철학적인 관점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그것은 인간에 대한 물리적 이해와 철학적 이해의 단절은 인간을 온전히 이해하는 데 걸림돌이 되기 때문이다. 
    이 점에서 본다면, 이 책은 인간이 자신과 타인에 대해 어떻게 도덕적 판단을 내리는지, 왜 때때로 우리는 자신의 행동을 정당화하기 위해 고귀한 이상을 들먹이면서도 동시에 내부적 모순에 빠지는지에 대한 깊은 성찰을 제공한다. 
    또한 우리가 양심을 외치며 정의를 주장하는 현상 뒤에 숨겨진 심리적, 사회적 동기를 탐색한다. 
    이러한 분석을 바탕으로 이 책은 양심의 생물학적 기반과 그것이 인간 행동에 미치는 영향에 대한 포괄적인 이해를 선보인다. 
    특히, 인간의 도덕적 판단과 행동이 어떻게 뇌의 구조와 기능, 그리고 진화의 역사에 의해 형성되었는지를 설명한다. 

    패트리샤 처칠랜드는 양심이라는 복잡한 주제에 대해 과학과 철학이라는 두 가지 관점을 통합하여 접근함으로써 독자들에게 양심이라는 개념을 새로운 시각에서 관찰하게 한다. 
    나아가 단순히 학문적 탐구에 그치지 않고 인간 본성의 깊은 탐구를 통해 우리 각자가 자신의 행동과 생각을 어떻게 조율하고 양심에 따라 살아갈 수 있는지에 대한 실질적인 안내를 한다. 
    그리고 때때로 왜 우리 자신이 우리의 양심과 분리된 선언을 발화하는지 깊이 고민하고 검토하게 한다. 
    특히 이 부분은 사이코패스와 도덕적 세심증에 대한 설명 그리고 설정점에 대한 논의를 통해 보다 분명히 드러난다. 

    독자들은 이 책을 통해 도덕적 직관의 본질과 그것이 개인의 삶과 사회에 미치는 영향에 대해 보다 심오한 인식을 얻게 될 것이다. 
    그리고 의무론이나 공리주의와 같은 기존 도덕철학의 관점에 대한 도전적이며 비판적인 시각도 경험하게 될 것이다. 
    더 나아가 이 책은 우리 각자가 양심에 귀 기울이고 우리의 행동과 판단이 어떻게 도덕적 가치와 연결되는지를 성찰하는 계기를 마련해 줄 것이다. 
    이러한 반성은 개인적 차원에서 시작되지만, 궁극적으로는 사회 전체의 윤리적 진보로 이어질 수 있다.

    결론적으로, 『양심: 도덕적 직관의 기원』은 도덕성의 생물학적 기반과 그것이 인간 사회에서 어떻게 작동하는지에 대한 탐구를 통해 도덕적 직관의 복잡성을 드러내며 이를 통해 인류가 보다 도덕적이고 공정한 사회를 향해 나아갈 수 있는 방향을 제시한다. 
    이 점에서 이 책은 학자, 학생, 일반 독자 모두가 양심의 소리에 귀 기울이고 그 지침에 따라 행동하는 것의 중요성을 일깨워준다. 
    뿐만 아니라 때로 이러한 우리의 내면의 소리가 편향적이고 잘못된 기준점을 가지고 있을 수 있음도 지적한다. 
    인간의 도덕성에 대한 이러한 신중한 탐색은 도덕철학, 신경과학의 분야에서 중요한 과제로 남아 있는 인간 본성에 대해 더 깊이 천착하도록 우리를 이끌 것이다. 
    또한 우리를 더 나은 존재로 도약하도록 도울 것이라 확신한다.

    박형빈 서울교대·윤리교육

    서울교육대학교 윤리교육과 교수이며, 서울교육대학교 신경윤리융합교육연구센터와 가치윤리AI허브센터의 센터장이다. 
    미국 UCLA 교육학과에서 Visiting Scholar를 지냈다. 
    전공 분야는 AI윤리, 뇌신경과학과 도덕교육, 인격교육 등이다. 
    대표적인 저서로는 『인공지능윤리와 도덕교육』, 『도덕지능 수업』, 『도덕교육학: 그 이론과 실제』, 『뇌 신경과학과 도덕교육』(2020세종학술도서) 등이 있다. 
    역서로는 『어린이 도덕교육의 새로운 관점』(공역)(2019세종학술도서), 『윤리적 감수성』(공역), 『윤리적 판단력』(공역), 『윤리적 실천』(공역), 『윤리적 동기부여』(공역) 등이 있다.



    기독교의 주요 성경 번역본들 비교

    기독교에서 성경은 신앙과 생활의 핵심적인 텍스트로, 다양한 언어로 번역되어 전 세계적으로 읽히고 있습니다. 성경의 각 번역본은 그 특성에 따라 다르게 번역되었으며, 그 목표나 대상 독자에 따라 해석의 차이가 존재합니다. 본 글에서는 기독교의 주요 성경 번역본들을 비교하여, 각 번역본의 특징, 번역 이론, 그리고 그들이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의 차이점을 살펴보겠습니다. 이 과정은 성경 번역본의 선택에 있어 독자들이 더 깊이 이해하고, 자신에게 맞는 성경을 선택하는 데 도움을 줄 것입니다.

    1. 킹제임스 버전(KJV): 전통과 권위의 상징

    킹제임스 버전(KJV)은 1611년에 처음 출판된 성경 번역본으로, 영어권 기독교 세계에서 가장 유명하고 영향력 있는 번역본 중 하나입니다. 킹제임스 버전은 원래 영국 왕 제임스 1세의 명령으로 번역되었으며, 영어 성경 중 가장 오래된 번역본으로 많은 사람들에게 신뢰받고 있습니다. 킹제임스 버전은 주로 직역 방식으로 번역되었습니다. 즉, 원문 언어인 히브리어, 아람어, 그리스어의 단어와 문장을 가능한 한 그대로 영어로 옮기려 했습니다. 이 때문에 킹제임스 버전은 언어적으로 매우 정확하고 권위 있는 번역본으로 평가받습니다. 또한, 당시의 고전적이고 문학적인 영어 스타일을 따랐기 때문에 문학적 아름다움도 뛰어난 특징으로 꼽힙니다. 많은 교회에서 킹제임스 버전을 권위적인 성경으로 여겼고, 오늘날에도 여전히 널리 읽히고 있습니다. 그러나 구식 언어와 어려운 문법은 현대 독자에게는 읽기 어려운 요소로 작용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킹제임스 버전에서는 당시의 고전 영어가 사용되어, 오늘날의 영어와 문법이 달라서 읽기 쉽지 않다는 단점이 있습니다. 또한, 일부 단어나 표현이 현대 영어에서는 사용되지 않거나 다른 의미로 해석될 수 있기 때문에 이해에 어려움을 겪을 수 있습니다.

    2. 뉴 인터내셔널 버전(NIV): 현대적이고 이해하기 쉬운 번역

    뉴 인터내셔널 버전(NIV)은 1978년에 처음 출판된 성경 번역본으로, 현대적인 언어와 이해도를 고려하여 번역된 성경입니다. NIV는 의역을 주로 사용하여, 원문의 의미를 보다 자연스럽고 이해하기 쉬운 방식으로 전달하려는 목적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 번역본은 성경의 메시지를 현대 독자들이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돕는 데 중점을 두고 번역되었습니다.

    NIV는 다양한 번역 이론을 결합하여 문학적 아름다움보다는 의미 전달을 중요시한 번역본입니다. 예를 들어, 문장이 복잡하거나 구식 표현을 사용할 때, NIV는 이를 현대적인 어휘와 구문으로 바꿔서 독자들이 쉽게 읽을 수 있도록 만들어졌습니다. 또한, NIV는 모든 세대와 문화적 배경을 고려하여 번역되었기 때문에, 세계 각국에서 널리 사용되고 있습니다. 현대 교회에서 성경을 읽을 때 가장 많이 선택되는 번역본 중 하나입니다. 하지만 NIV는 의역을 많이 사용하기 때문에 원문과의 차이가 생길 수 있습니다. 때로는 성경 원문의 미세한 의미가 왜곡될 수 있기 때문에, 원문을 그대로 보존하고자 하는 사람들에게는 적합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NIV는 현대적인 번역 스타일을 선호하는 사람들에게는 훌륭한 선택이지만, 원문에 대한 철저한 연구를 원하는 이들에게는 아쉬운 점이 있을 수 있습니다.

    3. 개역한글판(KRV): 한국적 전통을 지닌 번역

    개역한글판(KRV)은 1961년에 출판된 성경 번역본으로, 한국에서 가장 널리 사용되는 성경 중 하나입니다. 개역한글판은 히브리어와 그리스어의 원문을 바탕으로 번역되었으며, 직역 방식으로 번역된 성경입니다. 이 번역본은 고전적인 한국어로 번역되어, 한국어를 사용하는 기독교인들 사이에서 큰 영향력을 미쳤습니다. 개역한글판은 번역에 있어 전통적이고 보수적인 접근을 취하고 있으며, 원문의 문법과 단어를 충실히 따르려는 노력이 돋보입니다. 이 번역본은 교회에서 예배와 설교 시에 자주 사용되며, 고전적이고 권위 있는 성경으로 인식되고 있습니다. 또한, 한국의 기독교 전통을 중요시하며, 한국인들이 이해할 수 있도록 번역되었습니다. 그러나 개역한글판은 고전적인 한국어를 사용하고 있기 때문에, 현대 한국어를 사용하는 젊은 세대에게는 다소 어려울 수 있습니다. 또한, 번역에서의 어려운 표현이나 고어가 일부 독자에게는 이해하기 힘든 부분이 될 수 있습니다. 이로 인해, 현대 한국어 성경을 선호하는 독자에게는 개역한글판이 다소 불편할 수 있습니다.

    4. 현대 한국어 성경: 이해도와 친숙함을 고려한 번역

    현대 한국어 성경은 2000년대 이후로 출판된 성경 번역본으로, 쉬운 한국어를 사용하여 원문의 의미를 쉽게 전달하려고 했습니다. 이 번역본들은 의역을 사용하여 복잡한 구문을 풀어쓰고, 현대적인 어휘와 문법을 사용하여 성경을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돕습니다. 예를 들어, 새 번역이나 우리말 성경은 일상적인 한국어를 사용하여 성경의 메시지를 더 많은 사람들이 쉽게 접할 수 있도록 했습니다. 현대 한국어 성경은 기독교에 대한 접근성을 높이고, 신앙 생활을 하는 데 필요한 성경의 가르침을 쉽게 전하려는 목적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 번역본은 현대 독자들이 성경을 읽고 이해하는 데 편리함과 접근성을 제공합니다. 특히 청소년이나 신앙에 막 입문한 사람들에게 유용하게 사용됩니다. 하지만, 현대 한국어 성경은 의역을 많이 사용하기 때문에, 일부 독자에게는 원문의 세밀한 의미가 손실될 수 있다는 우려가 존재합니다. 또한, 신학적 정확성이나 전통적인 해석에 충실한 번역을 원하는 사람에게는 적합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디스크립션

    기독교 성경 번역본들은 각각의 시대와 문화적 배경에 따라 다르게 번역되었습니다. 킹제임스 버전(KJV)은 고전적이고 문학적인 아름다움과 권위를 자랑하는 전통적인 번역본이며, 뉴 인터내셔널 버전(NIV)은 현대적인 언어로 성경의 의미를 쉽게 전달하려는 의역 중심의 번역본입니다. 개역한글판(KRV)은 한국의 전통적인 기독교 환경에서 많이 사용되는 번역본으로, 직역 방식을 채택하여 원문의 의미를 충실히 따르려 했습니다. 또한, 현대 한국어 성경은 쉬운 한국어를 사용하여 성경을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번역된 책입니다. 각 번역본은 문학적 스타일, 언어의 정확성, 그리고 이해도 측면에서 차이를 보이며, 독자들의 필요와 선호에 따라 적합한 번역본을 선택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각 번역본의 특징을 이해하고 선택함으로써, 기독교의 신앙을 보다 깊이 있게 체험할 수 있습니다.





    대표적인 한국어 성경 번역본 비교

    번역본

    출간 연도

    특징

    추천 대상

    개역한글판

    1961

    고어체, 문어적이고 엄숙한 표현

    전통적 표현을 선호하는 성도, 장년층

    개역개정판

    1998 (개정 2005)

    고전미 유지 + 현대어 반영

    대부분의 교회에서 사용, 설교용

    표준새번역

    1993 (개정 2001)

    더 쉬운 현대어, 직역보단 의역 중심

    청소년, 초신자, 이해 위주 독자

    우리말 성경

    2004

    아주 쉬운 현대어, 읽기 편함

    어린이, 일반인 대상 읽기용

    새번역(바른성경)

    2001

    원문에 충실한 번역 + 읽기 쉬움

    성경 공부, 묵상용

    공동번역

    1977

    가톨릭/개신교 공동 작업, 직역보단 의역

    에큐메니칼 용도, 학문용








    그 성경이(헤 그라패,   η γραφη) 

    3588.  ὁ, ἡ, τόpl. οἱ, αἱ, τά Storng number 3588

    1.  이 사람
    2. τοῦ γὰρ καὶ γέ νος ἐσμέν: 왜냐하면 우리도 그의 자손이기 때문이다
    3. ὁ μὲν..
    Pronunciation [ hŏ ]

    1124.   γραφή, ῆς, ἡ

    1. 기록된 것.  2. ἡ γ.  3. 성경전체.
    Pronunciation [ graphĕ ]   
    Etymology  /  1125에서 유래
  • 관련 성경  /  성경(마 21:42, 요 2:22, 고전 15:3, 약 2:8, 벧전 2:6, 벧후 1:20), 글(마 26:56, 행 8:35, 롬16:26), 말씀(약 4:5).

  • 3551. 노모스(nŏmŏs) νόμος, ου, ὁ Storng number 3551

    1. 율법.  2. 롬 3:27.  3. 규칙  
    Pronunciation [ nŏmŏs ] 
    Etymology  /  기본형 νέμω ‘분배하다’에서 유래
    관련 성경  /  율법(마5:18, 눅2:23, 롬2:14), 법(눅2:22, 요18:31, 행18:15).

    성경이 모든 것을 죄 아래 가두었으니 
    - '성경'에 해당하는 헬라어 '헤 그라페'(*)는 '율법'(*, 노모스)과 동일한 의미로 쓰인 것이 분명하다(Bruce, Cole). 
    바울은 앞 구절에서의 의가 율법으로 말미암지 않는다는 것이 명백히보여준 뒤 본절에서는 율법이 가진 실제적인 기능은 모든 사람을 죄의 굴레 속에 가두는 것이 있다는 것을 명백히 보여준다. 
    율법은 인간을 정죄하기 때문에 사람이 율법주의를 통해 하나님께 의롭다고 여김을 받을 수 없으며 다만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통해 하나님의 약속을 받을 수 있다.

    모든 것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타 판타'(*)는 중성으로 쓰였는데 이는 가장 포괄적(包括的)인 범위를 뜻하는 용법이다. 
    바울이 이 말을 사용한 것은 이례적이다. 
    '타 판타'가 지시하는 내용은 크게 세 가지로 구분할 수 있다. 
    1. 유대인뿐만 아니라 이방인을 포함한 모든 사람들을 가리킨다. 
    2. 타락한 인간이 소유하고 있는 모든 것, 즉 말, 행위, 생각 등을 가리킨다. 
    3. 인간의 타락으로 말미암아 타락된 모든 피조 세계(롬 8:22)를 가리킨다. 
    아담의 타락에 의하여 모든 피조 세계가 타락한 것은 사실이지만, '타 판타'가 이러한 의미로 사용되었다고 유추하는 것은 무리가 있다(Boice). 
    오히려 본절에서는 '모든 것'이 하반절의 '믿는 자'라는 인칭 대명사와의 연관하에 이해됨이 타당하다. 
    물론 본절에서 바울이 이방인에 대한 율법의 적용에 대하여 구체적으로 언급하지는 않았지만, 최소한 이말이 본문에서 예수 그리스도에 의하여 구원될 자들의 옛 상태를 지시하는 말로 사용된 것만은 사실이다.



    12월 29일(월) 갈라디아서 1-3장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성경(聖經)(3:22)

    그러나 성경이 모든 것을 죄아래 가두었으니 이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약속을 믿는 자들에게 주려 함이니라.
    But the Scripture declares that the whole world is a prisoner of sin, so that what was promised, being given through faith in Jesus Christ, might be given to those who believe.

    성경(聖經)이 모든 것을 죄(罪) 아래 가두었다.

    죄는 얄미운 놈이라고 하겠습니다.
    슬그머니 나타나 존재감을 드러내고는 다시 숨어버립니다.
    잊을만하면 다시 일어나 고개를 들고 우쭐거립니다.
    잡힐 듯 잡히지 않고
    도망가듯 하면서도 꼬리를 감추고
    언제 또다시 나타날 때를 기다리는 고약한 놈입니다.

    성경은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말씀이 죄를 다스리고 있습니다.
    죄를 다스릴 수 있는 하나님의 말씀은 성육신(成肉身)하신 예수님을 통하여 온전하게 드러나셨습니다(요 1:14).
    말씀이 육신이 되어 세상에 오셨으며 그 육신은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심으로 죄값을 온전하게 치루셨습니다.

    성경이 기록되기 전에는 율법이 죄를 다스렸습니다.
    율법은 죄를 완전하게 다스리지 못하고 속죄의 제사를 통하여 일시적으로 통제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죄를 붙잡은 후에 더 이상 죄의 형벌을 주장할 수 없도록 다스림으로 죄에서 자유를 누리게 합니다.
    죄에서 자유를 누린다는 것은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믿는 믿음으로만 가능합니다.

    성경은 구약과 신약으로 구분합니다.

    구약은 율법을 강조하며 율법을 준수할 때에만 죄에서 자유를 얻게 합니다.
    신약은 은혜와 믿음을 강조하여 죄값을 온전하게 지불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죄로부터 자유를 얻게 합니다.

    그러므로 진리를 알지지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라리(요 8:32).
    주는 영이시니 주의 영이 계신 곳에는 자유함이 있느니라(고후 3:17).

    따라서 성경은 주의 영으로 기록된 진리의 말씀입니다.
    유대인들은 성경을 타나크(TaNaK)라고 합니다.
    타나크의 내용은 율법(토라)과 선지서(느비임)와 성문서(케투빔)으로 구분하는 구약 성경을 말합니다.
    유대인은 주로 토라만을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합니다(토라, 율법서, 모세오경).
    반면에  이방인 즉 유대인이 아닌 모든 나라와 모든 백성들은 성경을 구약과 신약으로 구분하여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합니다.

    죄를 다스릴 수 있는 비결은 무엇일까요?
    사람의 이성과 감정과 행동으로 다스리는 것이 아닙니다.
    거룩한 영이신 하나님께서 성경을 기록하게 하신 사람들에게 성령의 감동을 주어 그 시대의 문화와 배경으로 기록하게 하셨던 기록된 계시의 말씀을 믿고 따를 때에만 죄를 다스릴 수 있습니다.

    어제 먹었던 맛있는 음식은 어제를 위한 음식이었던 것처럼 믿음의 사람들은 매일 영의 양식을 먹어야 합니다.
    오늘 먹어야 할 영의 양식을 통하여 죄를 다스릴 수 있는 새로운 힘과 능력을 회복해야 합니다.


     
    "성경이 모든 것을 죄 아래 가두었다"는 말씀은 
    우리에게 인간의 절망적인 상황과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를 동시에 보여줍니다.
    우리는 스스로 죄의 문제를 해결할 수 없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죄의 용서와 영생을 얻을 수 있다는 소망을 줍니다.

    갈라디아서 3:22절은 복잡하고 신학적으로 중요한 구절입니다.

    이 구절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바울이 이 구절에서 무엇을 말하려고 했는지 배경과 문맥을 살펴봐야 합니다.

    1. 배경 및 문맥

    바울은 갈라디아서에서 믿음으로 의롭게 되는 것을 강조합니다. 당시 갈라디아 교회에는 율법을 지켜야만 구원받을 수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이에 바울은 율법은 오히려 사람을 죄의식에 사로잡고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게 한다고 주장하며,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만 참된 의로움을 얻을 수 있다고 역설합니다.

    "성경이 모든 것을 죄 아래 가두었다"는 의미

    이 구절에서 "성경"은 율법을 의미합니다. 
    율법은 하나님의 거룩한 표준을 보여주지만, 동시에 사람의 죄를 드러내고 정죄하기 때문에 모든 사람을 죄 아래 가두는 역할을 합니다.
    즉, 율법은 사람이 스스로의 힘으로는 하나님의 의로움에 이르지 못한다는 것을 깨닫게 합니다.
    율법은 죄를 드러내고 죄 아래 가두는 역할을 합니다. 
    우리는 율법을 보면서 스스로 얼마나 하나님의 명령을 지키지 못하는지, 얼마나 죄에 물들어 있는지 깨닫게 됩니다.
    율법 자체는 죄를 없애주는 능력이 없지만, 우리의 죄를 인지하도록 돕고 죄의 심각성을 일깨워줍니다.

    율법은 하나님의 의로운 기준을 보여주고, 인간의 죄를 드러냅니다.

    인간은 율법을 지키지 못함으로써 자신의 죄성을 깨닫게 됩니다.

    또한, 율법은 죄를 짓지 못하도록 제지하는 역할도 하지만, 인간의 힘으로는 율법을 완벽하게 지킬 수 없기 때문에 오히려 더 많은 죄를 짓게 만드는 역할도 합니다.

    그륗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믿음으로 의롭게 되는 길을 열어주셨습니다.

    율법은 우리가 스스로의 힘으로는 하나님의 의로운 기준을 충족시킬 수 없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죄로 인해 우리는 하나님과 단절되어 있으며, 율법을 지키는 것으로는 구원을 얻을 수 없습니다.

    따라서 율법은 우리를 예수 그리스도께로 인도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만이 우리의 죄를 대속하고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해 주실 수 있습니다.

    율법은 인간을 의롭게 만들 수는 없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의롭게 되는 길을 열어줍니다.

    율법 아래에서 인간은 죄의 포로가 되어 있지만, 믿음으로 그리스도와 하나 되면 죄의 사함과 자유를 얻게 됩니다.

    이 말씀은 하나님의 약속을 이루기 위한 하나님의 계획입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후손들에게 복을 주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이 약속은 율법을 통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이루어집니다.

    율법은 약속의 성취를 위한 하나님의 계획의 일부였지만, 그 자체로는 약속을 이루는 능력이 없었습니다.

    또한 시대적 구분을 넘어 하나님의 구원을 경험하도록 해줍니다.

    율법은 유대인들에게만 주어졌던 특별한 은혜였지만, 그리스도의 오심으로 모든 사람에게 하나님의 구원이 열리게 되었습니다.

    율법과 믿음은 서로 대립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구원 역사를 이루는 두 가지 중요한 요소입니다.

    갈라디아서 3:22절은 율법과 믿음, 그리고 하나님의 구원 계획에 대한 깊은 통찰력을 제공합니다.

    이 구절을 통해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더욱 깊이 이해할 수 있게 됩니다.

    3. "죄 아래 가두었다"는 표현의 함의

    죄의 문제를 인지하게 합니다. 율법은 사람에게 죄의 본질과 심각성을 보여주어 회개와 용서의 필요성을 깨닫게 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강조합니다. 율법으로는 의롭게 되지 못한다는 사실을 인지하게 함으로써, 하나님의 은혜와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을 더욱 절실하게 필요로 하게 합니다.

    믿음의 중요성을 강조합니다. 율법을 지키는 것으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다는 것을 깨닫게 함으로써,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의 중요성을 강조합니다.

    이 외에도 성경에는 죄가 세상을 어떻게 사로잡았는지, 그리고 하나님께서 어떻게 죄를 이기시고 구원을 베푸셨는지에 대해 다양한 방식으로 언급하고 있습니다.

    고린도후서 5장 21절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 안에서 세상을 화목케 하시고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않으시며 회개와 화목의 말씀을 우리에게 주셨나니"

    히브리서 9장 12절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는 피를 흘리사 영원한 구속을 이루시고 천적의 성소에 들어가시되 이제는 우리를 위하여 하나님 앞에 나타나시니"

    갈3:22절에 대한 더 깊은 이해를 위해서는 다음과 같은 질문들을 해볼 수 있습니다.

    • 율법은 어떻게 죄를 드러냅니까?
    • 율법은 왜 구원의 방법이 될 수 없습니까?
    •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는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 율법과 믿음은 서로 어떤 관계입니까?
    • 갈라디아서 3:22절은 오늘날 우리에게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까?

    이러한 질문들을 통해 갈라디아서 3:22절의 의미를 더욱 명확하게 이해하고 우리의 삶에 적용할 수 있을 것입니다.

    4. 결론

    결론적으로, 갈라디아서 3:22절은 율법과 믿음의 관계를 핵심적으로 보여주는 중요한 구절입니다.

    율법은 죄를 드러내고 예수 그리스도를 필요로 하게 하며,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을 수 있다는 약속을 선포합니다.

    또한 믿음으로 말미암은 새로운 시대를 열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갈라디아서 3:22절에서 "성경이 모든 것을 죄 아래 가두었다"는 말은 율법이 사람을 죄의식에 사로잡는다는 부정적인 의미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사람의 죄를 드러내고 회개와 용서로 이끄는 하나님의 은혜로운 계획의 일부라는 긍정적인 의미도 담고 있습니다.

    이 구절에서 바울은 모든 인간이 죄를 지었고, 그로 인해 하나님의 영광에서 멀어졌음을 지적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죄의 문제에서 벗어나 의롭게 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말미암은 하나님의 은혜라고 강조합니다.

    이 "모든 것을 죄 아래 가두었다"는 표현은 죄가 인간 존재의 모든 영역을 지배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의 생각, 감정, 행동 모두가 죄의 영향을 받고 있으며, 스스로의 힘으로는 죄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을 말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죄의 굴레에서 우리를 해방하시고 의로움을 주시는 약속을 주셨습니다.

    믿음으로 그리스도를 받아들이는 자는 누구든 죄의 용서와 영생을 얻을 수 있으며,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할 수 있습니다.
    간단히 보기




    그러나 성경이 모든 것을 죄 아래에 가두었으니 이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약속을 믿는 자들에게 주려 함이라

    믿음이 오기 전에 우리는 율법 아래에 매인 바 되고 계시될 믿음의 때까지 갇혔느니라

    이같이 율법이 우리를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초등교사가 되어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게 하려 함이라

    갈라디아서 3:22-24 해설

    22이 구절은 율법의 역할과 하나님의 은혜를 통한 구원의 중요성을 강조합니다. 모든 인간은 죄 아래에 가두어져 있어 스스로는 의롭다 함을 얻을 수 없음을 성경이 밝히고 있습니다. 이는 하나님의 계획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약속된 은혜와 구원을 받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따라서 이 구절은 인간의 행위나 공로가 아닌 믿음을 통해서만 참된 의로움과 하나님의 사랑을 받을 수 있음을 강력하게 나타내고 있습니다.



     
    갈라디아서 3:22에서 나오며, 이는 구약의 율법이 사람을 구원할 수 없고, 오히려 모든 인류가 죄인임을 깨닫게 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얻는 구원(약속)으로 인도하기 위한 목적을 가졌다는 신학적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즉, 율법은 사람을 죄의 노예 상태에 묶어두어 자신의 무력함을 깨닫게 하고, 예수님을 통해서만 구원받을 수 있음을 알게 하는 역할을 한다는 것입니다. 

    주요 의미
    • 율법의 역할 : 율법은 사람에게 의롭게 살도록 가르치지만, 결국 아무도 율법을 완벽하게 지킬 수 없음을 보여주어 모두가 죄인임을 드러냅니다.
    • 죄의 보편성 : '모든 것(온 세상)'은 모든 인류를 의미하며, 율법 아래 놓인 모든 사람이 죄 아래 갇혔음을 선언합니다.
    • 예수 그리스도로의 인도 : 율법의 최종 목적은 사람을 죄책감 속에 가두는 것이 아니라, 죄에서 벗어나게 할 유일한 구원자이신 예수 그리스도께로 이끄는 것입니다.
    • 약속의 중요성 : 율법은 일시적인 역할을 할 뿐, 궁극적으로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약속'을 통해 주어지는 구원을 위한 준비 단계입니다. 
    결론적으로, 이 구절은 율법을 통해 죄를 깨닫게 된 인간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자유와 구원을 얻게 된다는 복음의 핵심 메시지를 전달합니다.

    성경이 죄를 가두었다”는 표현은 갈라디아서 3장 22절에서 나오는 매우 신학적으로 중요한 말씀입니다.

    “그러나 성경이 모든 것을 죄 아래에 가두었으니
    이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약속을 믿는 자들에게 주려 함이라.”

    (갈 3:22)

    아래에서 핵심 의미를 단계적으로 설명드리겠습니다.


    1. “성경이 죄를 가두었다”의 뜻

    ‘가두었다’(헬라어 수네크레이센. συνέκλεισεν, synekleisen)는 사방을 막아 도망갈 수 없게 하다, 완전히 포위하다는 의미입니다.

    즉,

    • 인간이 율법을 통해 스스로 의롭다 할 수 있는 길이 없다는 사실을 분명히 드러낸 것

    • 모든 사람이 죄인이라는 사실을 객관적으로 선언한 것입니다

    성경은 죄를 만들어낸 것이 아니라, 죄의 실체를 숨길 수 없도록 폭로한 것입니다. 

    2. 왜 하나님은 죄 아래에 가두셨는가?

    갈라디아서의 핵심 논리는 이것입니다:

    목적이 정죄가 아님 목적은 구원으로 이끄는 것

    “이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약속을 주려 함이라”

    즉, 

    • 인간이 자기 의, 자기 노력, 율법 준수로는 구원받을 수 없음을 깨닫게 하시고

    • 오직 그리스도를 의지하도록 몰아가시는 하나님의 은혜의 전략입니다

    율법은 구원의 길이 아니라
    원이 필요한 존재임을 깨닫게 하는 거울입니다 (롬 3:20) 

    3. 바울의 논리 구조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1. 율법이 주어짐

    2. 율법은 죄를 드러냄

    3. 모든 인간이 죄 아래 있음을 확인

    4. 인간의 길이 막힘

    5. 오직 그리스도만이 유일한 길이 됨

    그래서 바울은 이어서 말합니다:

    “이같이 율법이 우리를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는 몽학선생이 되었다”
    (갈 3:24) 

    4. 신앙적 적용

    이 말씀은 우리에게 이렇게 질문합니다:

    • 나는 여전히 내 행위로 하나님 앞에 서려 하고 있는가?

    • 아니면 죄 아래에 갇힌 존재로서 그리스도의 은혜만 붙들고 있는가?

    👉 “죄 아래에 갇혔다”는 인식은 절망이 아니라 복음이 시작되는 자리입니다. 

    한 문장 요약

    성경이 죄를 가두었다는 말은, 인간을 절망시키기 위함이 아니라 그리스도만이 유일한 소망임을 분명히 하기 위함이다.



    성경이 모든 것을 죄 아래 가두었다.
     the Scripture declares that the whole world is a prisoner of sin.
    영어 성경(NIV)을 직역하면 ' 성경은 온 세상이 죄에 사로잡혀 있다고 선언한다.

    갈라디아서 3장 22절을 다양한 번역으로 소개합니다.

    새한글번역 / 그러나 성경은 모든 것을 죄 아래 가두었습니다. 믿는 사람들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에 기초하여 그 약속을 주시려는 것이었습니다.

    현대인의 성경 / 그러나 성경은 온 세상이 죄의 포로가 되었다고 선언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통해 약속된 것이 믿는 사람들에게 주어지도록 하기 위한 것입니다.

    새번역 성경 / 그러나 성경은 모든 것이 죄 아래에 갇혔다고 말합니다. 그것은 약속하신 것을,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에 근거하여, 믿는 사람들에게 주시려고 한 것입니다.

    공동번역 성경 / 그러나 성서는 온 세상이 죄에 갇혀 있다고 말합니다.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만이 그 믿음으로 약속된 선물을 받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갈라디아서 3장과 4장에는 사도 바울이 ‘믿음으로 의롭게 되는’, 이신득의(以信得義)의 진리를 변증하기 위하여 율법과 언약을 대조합니다.
    바울이 갈라디아 지역의 교인들에게 이신득의(以信得義)의 진리를 변증하는 이유는 거짓 교사들의 가르침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거짓 교사들의 가르침에 현혹되어 마음이 요동하는 갈라디아 지역의 교인들을 안타까워하는 바울은 3장 1절에서는 그들에게 ‘어리석도다 갈라디아 사람들아’라고 말하며 그들이 진리 안에 다시 거하기를 원했습니다. 
    율법이 사람을 의롭게 할 수 있다고 믿었던 사람들의 생각을 고치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롭게 됨을 변증하기 위하여 사도 바울은 아브라함을 예로 들었습니다. 
    아브라함은 유대인들의 조상이자 율법주의자들도 존경하는 인물입니다. 
    아브라함이 의롭게 된 것은 아브라함이 율법을 행하였기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을 믿었기 때문이었음을 설명합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아무도 율법을 행함으로 의롭게 될 수 없습니다.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안에서 가능합니다. 
    이를 뜻하는 성경 구절이 바로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입니다. 
    어제 본문은 바울의 다소 격양된 어조로 갈라디아 교인들을 책망하였다면 오늘 본문은 책망의 이면에 진리로의 회복을 소망하는 사랑의 마음을 담고 있습니다.

    사람의 언약이라도(15-18절)

    15. 형제들아 내가 사람의 예대로 말하노니 사람의 언약이라도 정한 후에는 아무도 폐하거나 더하거나 하지 못하느니라.

    사도 바울은 1절과 대조적으로 갈라디아 지역의 교인들에게 ‘형제들아’라고 부릅니다. 
    이것이 바울의 본심입니다. 
    책망을 통한 진리로의 회복입니다. 
    사람들이 책망을 듣지 않으면 문제의 심각성을 인식하지 못할 때가 많이 있습니다. 
    요즘처럼 코로나바이러스가 대유행하는 시기에 방역을 소홀히 하는 아이들에게 방역 수칙을 잘 지키라고 강하게 말하지 않으면 아이들의 마음에 방역의 중요성이 깊이 인식되지 않습니다. 
    부모님이나 선생님들이 그런 아이들에게 강하게 말할 때는 아이들의 건강에 대한 염려와 사랑의 마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바울이 ‘하나님의 약속’의 중요성을 사람의 약속과 비교하여 설명합니다. 
    ‘예대로 말하노니’에서 ‘예대로’는 ‘사람들의 삶의 방식에 따라’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사람이 살아가는 사회에서조차 사람 사이의 언약, 즉 약속을 지켜야 하는데 하물며 하나님께서 하신 언약을 누가 깰 수 있겠느냐입니다. 
    이신득의는 하나님의 언약에서 나왔기에 누구도 하나님께서 하신 약속을 폐하거나 더할 수 없습니다.

    16a. 이 약속들은 아브라함과 그 자손에게 말씀하신 것인데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셨습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의 후손들에게도 아브라함에게 하신 약속을 하셨습니다. 
    그래서 바울이 ‘이 약속들’이라고 말합니다. 바울이 강조하는 바는 16절 하반절에 있습니다.

    16b. 여럿을 가리켜 그 자손들이라 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한 사람을 가리켜 네 자손이라 하셨으니 곧 그리스도라.

    이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의 ‘자손들’이라고 복수형으로 말씀하지 않으시고 아브라함의 ‘자손’이라고 단수형으로 말씀하셨다는 것입니다. 이에 해당하는 성경 구절이 창세기 22장 18절입니다.

    창세기 22:18
    또 네 씨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받으리니 이는 네가 나의 말을 준행하였음이니라 하셨다 하니라.

    하나님께서 하신 이 말씀은, 아브라함이 그의 아들 이삭을 하나님께 제물로 바치려고 했을 때 들었던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 중 ‘네 씨’는 ‘아브라함의 씨’, 즉 ‘아브라함의 자손’을 뜻하는데 단수형으로 되어 있습니다. 
    이는 아브라함의 자손들이 아니라 자손 중 한 사람, 즉 예수 그리스도를 뜻합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의 자손 중 한 사람, 오직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받을 것이라고 약속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갈라디아 교인들이여, 왜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복, 즉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되는 복을 믿지 못하느냐’입니다. 바울은 이 하나님의 약속을 ‘후에 제정된 율법’이 폐할 수 없음을 다음 구절에서 설명하고 있습니다.

    17. 내가 이것을 말하노니 하나님께서 미리 정하신 언약을 사백삼십 년 후에 생긴 율법이 폐기하지 못하고 그 약속을 헛되게 하지 못하리라.

    430년이라는 숫자는 야곱과 그의 후손들이 애굽에서 노예 생활을 했던 시기를 뜻합니다. 
    야곱의 후손들이 애굽 생활을 하기 전에 하나님께서 정하신 언약이, 노예 생활을 청산하고 출애굽하여 시내 산에서 모세를 통해 받았던 율법에 의해 폐기될 수 없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의 씨,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받게 될 것이라는 선약이 나중에 만들어진 율법에 의해 폐기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 약속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롭게 되는 것입니다.

    18. 만일 그 유업이 율법에서 난 것이면 약속에서 난 것이 아니리라 그러나 하나님이 약속으로 말미암아 아브라함에게 주신 것이라.

    ‘유업’의 문자적 의미는 ‘부모로부터 상속받는 재산’을 뜻하지만, 성경에서 자주 사용되는 용례를 보면 이 단어는 ‘하나님의 나라’를 뜻할 때 사용되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곧 영원한 생명과 구원을 뜻합니다. 
    ‘유업’ 대신 ‘하나님의 나라’를 넣어 18절 상반절을 읽어 보면, ‘만일 하나님의 나라가 율법에서 난 것이면 약속에서 난 것이 아니리라’입니다. 
    우리가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는 것이 율법을 행함으로 가능하다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하셨던 약속은 무의미해진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갑니다. 
    이 진리는 바울 신학의 산물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 하셨던 말씀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해 주신 율법은 도대체 왜 필요한가 라는 의문을 가지게 됩니다. 
    이에 대해 다음 구절이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런즉 율법은 무엇이냐(19-21절) 

    19. 그런즉 율법은 무엇이냐 범법하므로 더하여진 것이라 천사들을 통하여 한 중보자의 손으로 베푸신 것인데 약속하신 자손이 오시기까지 있을 것이라.

    이 구절은 율법의 두 가지 중요한 기능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첫째, 율법은 인간이 범법함 때문에 만들어진 것입니다. 
    범법이란 ‘기준이나 규범으로부터의 벗어남’을 뜻합니다. 
    인간이 인간으로서 지켜야 할 기준을 벗어난 것이 범법입니다. 
    인간이 악을 행하지 않았더라면 율법은 만들어지지 않았습니다. 
    모세를 통해 하나님으로부터 율법을 받기 전에 이스라엘 사람들의 삶을 보면 어떻습니까? 
    인간다운 삶을 살았습니까? 
    그렇지 못했습니다. 
    애굽의 죄악된 습성을 버리지 못했습니다. 
    이처럼 율법은 인간의 범법함 때문에 만들어졌습니다. 
    그리고 동시에 율법은 인간의 범죄를 깨닫게 하기 위해 제정되었습니다. 
    율법이 제정되기 전, 인간은 인간으로서 지켜야 할 기준을 벗어나도 그것을 깨닫지 못했습니다. 
    죄가 죄인 줄 모르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도덕이 무너지고 윤리가 무너지고, 심지어 양심조차 무너진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에게 율법이 없다면, 자신의 악행을 정당화하지 않겠습니까? 
    율법의 중요한 기능 둘째는, 약속하신 자손이 오시기까지 역할 수행입니다. 
    ‘약속하신 자손’이란 앞에서 설명하였듯이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19절의 ‘천사들’은 모세가 시내 산에서 하나님께 율법을 받았을 때 있었던 천사들을 가리킵니다. 
    사도행전 7장 38절이 이를 증거하고 있습니다. 
    또한 ‘한 중보자의 손으로 베푸신 것’이란 하나님께서 중보자 모세를 통해 이스라엘 백성에게 율법을 수여하신 것을 뜻합니다. 
    그 중보자 모세의 역할이 무엇인지를 다음 구절이 알려줍니다.

    20. 그 중보자는 한 편만 위한 자가 아니나 하나님은 한 분이시니라.

    중보자 모세는 백성의 편만 들 수 없었고, 또한 하나님의 편에만 설 수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중보자의 역할이 중립자로서 양자를 연결하는 전달자이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중보자는 한쪽으로 치우칠 수 없습니다. 
    오늘날 중보자라고 말할 수 있는 중재자는 한쪽으로 치우치면 제역할을 할 수 없습니다. 
    한쪽으로 치우치면 그 중재는 실패합니다. 
    모세의 역할이 이와 같았습니다. 
    흔히 생각할 때 모세가 하나님의 편에 서야 한다고 하겠지만,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이 범죄하여 벌을 받을 상황에서는 그들을 외면할 수 없었습니다. 
    그들을 변호해야 했으며 그들의 죄 사함을 위해 이스라엘 백성의 편에서 하나님께 호소했습니다.
    그런데 20절 하반절의 ‘하나님은 한 분이시니라’는 말은 ‘성부와 성자가 하나이시다’는 뜻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성부 하나님과 하나이시기에 모세와 같은 중보자가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전하신 복음은 곧 하나님께서 전하신 복음과 같습니다. 
    그러므로 복음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직접 주셨기에 중보자 모세를 통해 주신 율법보다 우위에 있습니다. 
    그렇다면 율법은 무용한 것인가 또는 저속한 것인가 라는 의문점이 생깁니다. 
    이러한 우려를 다음 구절이 불식시켜줍니다.

    21. 그러면 율법이 하나님의 약속들과 반대되는 것이냐 결코 그럴 수 없느니라 만일 능히 살게 하는 율법을 주셨더라면 의가 반드시 율법으로 말미암았으리라.

    19절에서 율법의 기능에 대해서 언급하였습니다. 
    율법은 불필요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율법이 하나님의 악속들과 반대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율법이 우리를 능히 살게 해 주지는 못합니다. 
    즉 율법이 우리를 의롭게 하지는 못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율법을 전부 행할 정도로 도덕적으로나 의지적으로 완전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율법은 인간의 죄성과 영적 무능력함을 깨닫게 할 뿐입니다. 
    이것이 바로 율법의 제한적 역할입니다. 
    율법이 제한적 역할을 하기에 온전한 것이 있어야 합니다. 
    그 온전한 것이 올 것임을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통해 약속하셨습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22절)

    22. 그러나 성경이 모든 것을 죄 아래에 가두었으니 이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약속을 믿는 자들에게 주려 함이라.

    여기서 성경은 율법을 가리킵니다(헤 그라패). 
    그렇다면 ‘율법이 모든 것을 죄 아래 가두었다’는 것은 ‘율법이 모든 사람을 죄에 속박시켰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율법을 전부 다 지킬 수 없었으므로 율법 아래에서는 결국 죄인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사람은 율법을 통해 죄 아래 갇혀 있는 자신의 실존을 깨닫게 됩니다. 
    그리고 오직 예수님만이 죄의 속박에 있는 자신을 건져내실 수 있음을 깨닫게 됩니다. 
    이것이 율법의 역할입니다.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이 필요합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 의롭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하셨던 그 말씀이 지금도 영원히 하늘에 굳게 서 있어 유효합니다. 
    하나님께서 하신 약속의 말씀을 잊지 않고, 어떤 상황 속에서도 약속의 말씀을 숙고함으로 영원한 생명을 누릴 수 있는 사람으로 살아가십시다. 
    그리고 아직도 이 땅에 하나님께서 주신 약속을 모르는 사람에게 그 약속의 말씀을 전하는 주님의 귀한 통로로 살아가십니다.

    하나님 아버지, 영원히 하늘에 굳게 선 하나님의 약속이 폐하여지지 않게 하시어 저희를 믿음으로 의롭게 해 주시고, 약속의 자녀로 삼아주시고, 하나님의 나라에서 영원히 살아갈 수 있도록 은총을 베풀어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율법으로 죄를 깨닫게 해 주시고, 율법으로는 의롭게 될 수 없으며 오직 주님을 믿음으로 의롭게 됨을 잊지 않게 하시옵소서. 
    이 약속의 말씀을 매일 숙고함으로 저희 안에 있는 영원한 생명이 율법 아래 있는 자들에게 전해지는 통로가 되게 하시옵소서. 
    오늘도 약속의 말씀이 고난 중에 즐거움이 되게 하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묵상을 위한 질문

    1.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 하신 약속 중 ‘네 씨’는 누구를 가리킵니까?
    2. 율법이 하나님의 약속을 폐할 수 없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3. 율법의 기능은 무엇입니까?
    4. 율법을 다 지킬 수 없는 사람에게 복음이 주는 은혜가 무엇입니까?
    5. 영과 진리로 아버지께 예배할 수 있는 은혜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주신 약속과 어떤 연관성이 있습니까?

    갈라디아서 3:22
    그러나 성경이 모든 것을 죄 아래에 가두었으니 이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약속을 믿는 자들에게 주려 함이라.

    성경은 크게 우리에게 두 가지를 말합니다. 

    첫째, 모든 인류가 죄 아래 놓였다
    이것을 바울은 “성경이 모든 것을 죄 아래에 가두었다”고 표현했습니다. 

    둘째, 하나님께서 중보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에게 주셨고 우리에게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의 약속을 주셨다  
    그것을 또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약속”이라고 말했습니다.

    죄 아래 놓인 사람은 어느 누구도 자신의 힘으로 그 죄의 속박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복음이 이 땅에 들어오기 전에 우리 선조들은 복을 받기 위해서 수많은 노력을 했습니다. 
    매일 사용하는 수저, 베개, 이불, 몸에 지니는 주머니 등에 한자로 복(福)자를 새겨 놓고 복을 기원했습니다. 
    또 죽은 조상들을 극진히 섬김으로 조상들에게 복을 빌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복음을 깨달은 우리는 분명히 압니다. 
    이 세상을 떠난 사람이 그들이 아무리 이 땅에서 훌륭한 업적을 쌓았다고 할지라도 우리에게 복을 줄 수 없습니다. 
    우리에게 복을 주시는 유일한 분은 여호와 하나님 한 분뿐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복을 주시는 방법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통해서입니다. 
    죄의 무거운 짐을 지고 방황하는 우리를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중보자로 이 땅에 보내주셨고 예수님의 십자가 사역으로 우리를 죄에서 해방시키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복은 단지 죄에서의 구원만이 아닙니다. 
    죄에서 놓임을 받아 하나님의 백성이 된 우리들은 하나님이 주시는 풍성한 복을 누릴 수 있습니다.



    율법을 주신 근본적인 이유이며 목적
    22절은 ‘그러나’로 시작을 합니다. 
    앞 구절의 내용을 다시 정리하면서 연결해 보겠습니다. 
    ‘율법을 지켜서 의를 이룰 수 있다면 제사장 직분이 필요 없고, 메시야가 오실 필요도 없었을 것입니다. 
    율법을 완벽하게 지킨 자는 구원에 이르게 하면 되고, 율법을 완벽하게 지키지 못한 자는 죽이면 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모든 것을 죄 아래 가두었습니다.’ 이런 의미로 연결이 되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서 보게 되는 것은 바울이 ‘율법이 모든 것을 죄 아래 가두었다’고 표현하지 않고 ‘성경이 모든 것을 죄 아래 가두었다’라고 표현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헬라어 성경으로 보면 ‘성경’이란 단어 앞에 ‘그’라는 관사가 붙어 있습니다. 
    따라서 ‘그 성경이 모든 것을 죄 아래 가두었다’라는 의미가 됩니다. 
    따라서 성경이라는 표현은 바울이 신명기 27:26에 기록 된 ‘이 율법의 말씀을 실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라 할 것이요 모든 백성은 아멘 할지니라’라는 말씀을 염두에 두고 쓴 표현으로 보입니다. 

    율법의 모든 말씀을 실행치 아니하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라 할 것이요 모든 백성은 아멘 할찌니라. 

    하나님은 모세를 통하여 모든 백성을 율법으로 인한 죄 아래 가두시고 아멘하게 하여 확답도 받으셨습니다. 
    바울은 하나님께서 왜 이렇게 인간을 율법으로 인해 죄 아래 가두었다고 한 것일까요? 
    죄에 노예가 되어 있는 인류의 절망적인 상황을 직시하게 하게 하기 위한 것입니다. 
    또한 아브라함과 맺어주신 언약이 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서 성취되어야만 했는지 그 이유를 보여 주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약속을 믿는 자들에게 주려 함이라’고 정리한 것입니다. 

    마틴 루터는 ‘율법의 기본적인 요점은 인간을 향상시키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 악화시키는 것이다. 
    말하자면 율법은 인간의 죄를 폭로하고 그것을 깨닫게 함으로서 스스로 겸비하게 하고 두려워하게 하고 깨어지게 하고 부서지게 한 연후에 그들로 하여금 은혜를 구하게 하고 마침내는 복된 씨(즉 그리스도)에게로 나오게 한다.’라고 하였습니다. 

    로마서 4:25절을 보면 ‘예수는 우리가 범죄한 것 때문에 내줌이 되고 또한 우리를 의롭다 하시기 위하여 살아나셨느니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받은 은혜인 것입니다.

    기도 제목

    1.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은혜가 가슴에 깊이 새겨지도록 기도합시다.
    2. 세상 속의 청년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살아가는 힘이 생겨나도록 기도합시다.
    내게 주신 은혜를 가지고 오늘 하루도 성도로 살아내길 바랍니다.


    저주에서 아브라함의 축복으로 구속받음

    “이 모든 것을 죄 아래 가두었으니”
     8절과 22절 사이의 유사성을 주목하라.
     “성경이 모든 것을 죄 아래 가두었으니 이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큰 약속을 믿는 자들에게 주려 함이니라.” 
    “하나님이 이방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로 정하실 것을 성경이 미리 알고 먼저 아브라함에게 복음을 전하되 모든 이방이 너를 인하여 복을 받으리라 하였으니” 

    우리는 복음이 모든 사람을 죄 아래 가둔 같은 성경에 의해서 전파된다는 것을 볼 수 있다. 
    “가두었다”는 말은 23절에서와 같은 글자 그대로 “매인다”는 말이다. 
    법에 의하여 가두어진 사람은 감옥에 있다는 것을 말한다. 세상의 정부에서도 범죄자는 법에 의하여 그를 붙잡아 가둔다. 하나님의 법은 어디에나 존재하고 항상 작용하고 있으므로 사람이 죄를 지을 때에 즉시 그를 가둔다. 온 세상이 이와 마찬가지의 상태에 놓여 있다. 왜냐하면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며,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기”(롬 3:23, 10) 때문이다.

    그리스도께서 복음을 전하였었던 저 노아 시대의 불순종한 사람들도 마찬가지로 “옥”(벧전 3:19, 20)에 갇혀 있었다. 
    그러나 이 사람들도 다른 모든 죄인들과 마찬가지로 “소망을 품은 갇혔던 자들”(슥 9:12)이었다. 
    하나님께서 “그 높은 성소에서 하감하시며 하늘에서 땅을 감찰하셨으니 이는 갇힌 자의 탄식을 들으시며 죽이기로 정한 자를 해방하”(시 102:19, 20)기 위해서였다. 
    그리스도를 주시고 그를 “백성의 언약과 이방의 빛이 되게 하리니 네가 소경의 눈을 밝히며 갇힌 자를 옥에서 이끌어 내며 흑암에 처한 자를 간에서 나오게 하리라”(사 42:6, 7).

    개인의 경험에서 아직까지 주께서 주시는 기쁨과 자유를 체험적으로 알지 못하는 죄인을 이야기 해보자. 
    지금까지는 이런 기쁨과 자유를 체험하지 못했다고 하더라도 언젠가는 하나님의 영의 역사로 죄를 깊이 깨닫게 될 것이다. 
    지난 날에는 의심과 망설임이 많았고 쉽사리 자기 변호를 했지만 지금은 아무런 할 말이 없게 될 것이다. 
    지금은 하나님과 성령이 계시는 것에 대해서 의심이 없게 될 것이다. 
    또 그것을 확신시키려고 구구한 말을 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내 마음에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알게 되며 그러므로 옛 이스라엘과 같이 “하나님이 우리에게 말씀하시지 말게 하소서 우리가 죽을까 하나이다”(출 20:19)고 느낄 것이기 때문이다. 
    그때에는 감옥에 갇히는 것이 곧 사면팔방의 벽으로 둘러 싸여 빠져 나갈 수도 없는 옥에 갇히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알게 될 것이다. 
    큰 바위 아래 생매장시키는 것같은 사람들을 정죄하는 말이 마치 율법의 돌비가 우리의 생명을 박살내는 것같이 느끼고 한장의 대리석이 우리의 심장을 터지게 하는 것같이 보이는 것처럼 매우 생생하게 느끼게 될 것이다. 
    그때에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약속”을 우리가 받도록 하는 유일한 목적을 위하여 갇혀 있었다는 것을 기억할 때에 기쁨이 될 것이다. 
    우리가 의심의 성문을 여는 열쇠가 되는 이 약속을 붙잡을 때에 즉시 감옥문은 활짝 열릴 것이며 그러면 “우리 혼이 새가 사냥군의 올무에서 벗어남같이 되었나니 올무가 끊어지므로 우리가 벗어났도다”(시 124:7)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