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 스가랴


“거룩”이란 무엇인가: “코데쉬(קֹדֶשׁ)/카도쉬(קָדוֹשׁ)“


  • 어원적 의미

레위기 19장 2절의 “너희는 거룩하라 이는 나 여호와 너희 하나님이 거룩함이니라(개역개정)”라는 하나님 말씀은 우리에게 대체 무엇을 요청하는 것일까요? 우리가 “거룩”해지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하는 것인가요? 표준국어대사전은 ‘거룩’을 “뜻이 매우 높고 위대하다”로 정의하고, Oxford Languages는 ‘holy’를 “dedicated or consecrated to God or a religious purpose”로 정의하는데, 그렇다면 “거룩하라”는 명령은 뜻을 높은 곳에 두고 24시간 하나님만 바라보라는 뜻인가요?

명사 코데쉬형용사 카도쉬의 어원적인 의미는 ‘분리(separate)’와 ‘다름(different)’을 의미합니다. 

따로 떼어놓아, ‘다른 것과 다른’ 특별한 것을 가리킬 때 사용됩니다. 창세기 2장 3절에서 “하나님이 일곱째 날을 복 주사 거룩하게 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그 창조하시며 만드시던 모든 일을 마치시고 이 날에 안식하셨음이더라”라는 구절은, 그 일곱째 날이 무언가 금치장으로 빛이 번쩍번쩍하고 함부로 손대면 안 될 것 같은 귀한 날이라는 의미라기 보다는, 일곱째 날은 다른 날과 다른, 특별한 날이며, 그 날의 다른 점, 혹은 특별한 점은 하나님께서 그 날에 창조행위를 멈추셨다는 사실에 있다는 것입니다. 일반적인 성(聖)과 속(俗)의 이원론으로 이해하면, 일곱째 날인 안식일만 ‘성스러운(holy)” 날이 되고, 나머지 6일동안의 하나님의 창조행위는 ‘속된’ 것이 되어버립니다. 이런 생각에는 동의할 수 없습니다. 모든 날이 귀하고 소중한 날입니다. 다만 일곱째 날은 다른 날과는 다르게 하나님께서 일을 하지 않으신 날이고, 이런 방식으로 하나님은 인간에게 일주일에 하루는 일을 하지 않아도 되는 명분을 부여하십니다.  

마찬가지로, 이스라엘의 절기인 유월절과 무교절이 제정되는 출애굽기 12장 16절의 “첫날에도 성회(거룩한 모임)요 제 칠일에도 성회(거룩한 모임)가 되리니 이 두 날에는 아무 일도 하지 말고”라는 구절은 다음과 같이 이해하는 것이 좋습니다: ‘첫째날과 일곱번째 날은 특별한 날인데, 어떤 점에서 특별하냐 하면 아무 일도 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다른 날과는 다르다.’

출애굽기 28장에서 제사장의 복장을 규정하는 장면에서도 아론을 위해 “거룩한 옷”을 지어(2절), 그 옷으로 아론을 “거룩하게” 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은, 그 옷감이 값비싼 귀한 재질로 되어 있거나 어떤 신비한 힘이 깃든 옷이라는 뜻이 아니라, 일반 백성들이 입는 옷과는 차이가 나는 다른 방식으로 지어진 특별한 옷이라는 뜻으로, 그 옷을 입은 사람은 옷만으로도 그가 남들과는 다른 사람이라는 것을 알 수 있게 하라는 것입니다.

  • 거룩의 수직성과 수평성

“코데쉬/카도쉬”는 분리와 다름을 나타내기 때문에, 이 단어가 나올 때는 어떤 면에서 다른가, 혹은 어떻게 달라야 하는가에 대한 설명이 뒤따라옵니다. 

레위기 19장 2절의 “너희는 거룩하라”는 명령은 “너희는 달라야 한다”는 뜻이기에 3절 이하에서 어떤 면이 달라야 하는가를 아주 자세히 설명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믿고 따르는 백성들이 다른 민족들과 달라야 할 첫번째로 성경이 언급하는 것은 흥미롭게도 “부모를 경외하라”는 것이고, 그 다음 “나의 안식일을 지키라”는 명령이 뒤따릅니다(레19:3). 

다른 민족들이 어떻게 하든 간에 하나님 믿는 백성들은 자신의 부모를 두려움으로 공경해야 하고, 다른 사람들이 쉼 없이 일을 하건, 열흘에 한번, 혹은 십사 일에 한번 휴식을 취하건, 이스라엘의 여호와를 창조의 하나님으로 섬기는 사람들은 6일을 일했으면 하루는 반드시 멈춰야 한다는 것입니다.

레위기 19장이 말하는 “거룩,” 즉 다름과 차이, 특별함은 크게 두 가지로 나뉩니다. 

하나는, 하나님을 대하는 ‘수직적’인 측면이고, 또 하나는 이웃과 사람들을 대하는 ‘수평적’인 측면입니다. 

우상을 만들지 말라(4절)는 명령과 제물을 드리는 특정한 방식(5-8절), 하나님의 이름으로 거짓 맹세하지 않는 것(12절) 등을 ‘수직적인 거룩’이라 한다면, 그 외의 대부분의 명령은 ‘수평적인 거룩’이라 할 수 있습니다. 가난한 사람과 난민들을 위해 밭과 포도원의 일부를 추수하지 않고 남겨놓는 것(9-10절), 남의 것을 훔치지 않으며, 남을 속이거나 거짓말하지 않는 것(11절), 이웃을 억압하거나 착취하지 않고, 노동자의 임금을 제때 지불하는 것(13절), 장애가 있는 이들을 괴롭히지 않는 것(14절), 공평과 정의로 재판하는 것(15절), 이웃을 희생하여 자신의 이익을 도모하지 않는 것(16절), 형제를 미워하지 않으며 그를 바른 길로 인도하는 것(17절) 등. 마지막으로, “너희는 거룩하라(2절)”는 명령은 그 유명한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18절)”는 명령으로 귀결됩니다.

이러한 수직적이고 수평적인 거룩의 두 방향성은 십계명의 두 가지 측면(수직적인 1-4계명과 수평적인 5-10계명: 제4계명인 안식일 계명은 수직성과 수평성을 모두 갖고 있습니다)과 연결되며, 그리고 마태복음 22장과 누가복음 10장에서 말하는 율법(성경)의 핵심인 하나님과 사랑과 이웃 사랑의 명령과도 궤를 같이 합니다. “너희는 거룩하라”는 명령이 여러분의 머리 속에서 “네 이웃을 사랑하라”는 명령과 연결되지 않는다면, 성경을 처음부터 다시 읽어 보셔야 할 때입니다.


레위기에 나오는 ‘거룩’(성결)의 기본 개념 

   ‘레위기’라는 책은 ‘하나님은 거룩하시다’라는 진리에 기초한다. ‘거룩’(qodesh)이라는 말은 레위기 히브리어 원문에서 100회 이상이나 등장한다. 하나님은 거룩하시다고 말하는 것은 그분이 모든 악이나 흠으로부터 완전히 구별되어 계시다는 의미다. 달리 말하면, 하나님은 완벽하면서도 온전하게 좋으신 분이라는 것이다. 여호와는 전적인 충성과 하나님만을 향한 예배, 사랑에서 비롯된 순종을 받기에 합당하시다.

   이스라엘의 정체성이 드러나게 된 연유는 하나님의 행위에 의해 그들이 거룩해졌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또한 이스라엘이 매우 실질적인 방식으로 거룩하게 행동하기를 여호와께서 기대하시기 때문이다. 여호와 자신이 거룩하시므로 이스라엘도 거룩한 백성이 되도록 부르심을 받은 것이다(레 11:44, 45; 19:2 20:7 21:8). 레위기에 나오는 판이해 보이는 율법은 삶의 의식적, 윤리적, 상업적, 형법적 국면을 다루고 있으며, 이 모든 율법은 거룩하심에 대한 이런 핵심 개념에 근거한다.

   알렉산더 힐(Alexander Hill)은 하나님의 거룩, 공의 및 사랑에 기초해 크리스천의 기업 윤리에 대한 논의를 전개했다. “만일 어떤 기업의 행위가 하나님의 거룩하고 공의롭고 애정이 깊은 품성을 반영한다면 그것은 윤리적인 것이다.”[1]

Alexander Hill, Just Business: Christian Ethics for the Marketplace, 2nd ed. (Downers Grove: IVP Academic, 2008), 15쪽.

힐은 사업을 하는 크리스천은 하나님을 향한 열정을 품을 때 하나님의 거룩을 반영하는 것이며, 그 하나님은 그들의 궁극적인 최우선의 대상이시자 순결과 책임감과 겸손함을 가지고 행동하는 분이시다. 이런 품성은 농경 사회를 위해 제정된 상법을 재연하려는 노력의 일환이기보다, 오늘날 레위기를 따라 사는 것이 무엇인지를 보여 준다. 이는 율법의 이런저런 규정을 무시하는 게 아니라 오늘의 상황에서 율법을 성취하기 위해 하나님께서 우리를 어떻게 인도하시는지 분별하는 것이다.

   거룩에 대한 이스라엘의 외적 관습은 두 가지 분야로 표현된다. 첫째로, 하나님은 복합적이고 종합적인 규정에 따라 서로에게 거룩함을 실천하라고 이스라엘 백성에게 명령하셨다. 예를 들어, 인류학자인 메리 더글러스는 레위기에 나오는 음식법이 제멋대로 제정된 것도 아닐뿐더러, 주로 사람의 건강을 염두에 두고 제정된 것도 아님을 밝혀냈다. 이스라엘이 매일 먹는 음식은 구별되었다는 의미에서 하나님의 거룩을 강력하게 상기시키고 강화하는 역할을 한 것이었다.[2]

Mary Douglas, Purity and Danger: An Analysis of the Concepts of Pollution and Taboo (London: Routledge, 1966).

이것은 ‘구별된 백성’이라는 이스라엘의 정체성을 보여 주는 데 필수적이었다. 우리는 십자가 위에서 예수님이 유대인과 이방인의 구별을 철폐하셨으며(엡 2:14-16) 따라서 그분의 제자는 모두 거룩하게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크리스토퍼 라이트가 지적했듯이, “그리스도 안에서는 더 이상 유대인과 이방인 사이의 구별이 없으므로, 크리스천에게는 더는 그런 구분을 상징하는 음식들이 존재할 필요가 없다.”[3]

Christopher J. H. Wright, Old Testament Ethics for the People of God (Downers Grove: InterVarsity Press, 2004), 299쪽.

이 원리는 상이한 종류의 동물을 교배하지 못하게 하는 율법, 상이한 종자를 동일한 밭에다 혼작하지 못하게 하는 율법, 상이한 직물로 만든 옷을 입지 못하게 하는 율법(레 19:19)뿐만 아니라 이발이나 문신을 금지하는 율법(레 19:27-28)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로 적용된다.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에게 거룩하라고 요구하신 두 번째 분야는 다른 나라와의 관계였다. “너희는 나에게 거룩할지어다 이는 나 여호와가 거룩하고 내가 또 너희를 나의 소유로 삼으려고 너희를 만민 중에서 구별하였음이니라”(레 20:26). 모세의 말을 빌리자면,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율법을 따른다면 위대한 지혜와 지식을 소유하게 되므로,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에게 가까이 계신다는 사실을 열국이 인식하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신 4:6-8). 하나님의 백성이 일상생활을 통해서 하나님의 거룩을 드러내야 하는 강력한 이유가 바로 이것이었다. 라이트는 이런 사명에 대한 동기를 다음과 같은 말로 확증했다. “종교적 구별은 윤리적 구별을 통해 구현되어야 하며, 이 두 가지는 다 넓은 의미의 거룩에 포함된다. 그런데 윤리적인 하나님 여호와(YHWH)께서 이스라엘 가운데 임재해 계신다는 사실을 보여 주는 것이 바로 이스라엘의 윤리적 구별이었을 것이다.”[4]

Christopher J. H. Wright, The Mission of God (Downers Grove: InterVarsity Press, 2006), 336쪽. 크리스토퍼 라이트, 《하나님의 선교》(IVP 역간).

   따라서 레위기에서 ‘거룩’은 구별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하나님 백성의 공동체를 번영시키기 위한 것이며, 나아가 각 구성원이 하나님과 화해하기 위한 것이다. 거룩은 규정을 따르는 개인 행위와 관련 있을 뿐만 아니라, 각자의 행위가 하나님 나라의 대리자인 하나님 백성 전체의 삶과 일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가 하는 문제와도 관련이 있다. 이에 비춰 볼 때, 예수님이 하나님의 백성을 향해 이방인에게 “소금”과 “빛”이 되라고 하신 요구(마 5:13-16)는 충분히 이해가 간다. 거룩하라는 말은 이웃을 사랑하고 원수도 사랑하며 “그러므로 너희의 하늘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과 같이 너희도 완전하여라”(마 5:48 레 19:2, 18 참조)라고 한 율법을 초월하는 것이다.

   요컨대 고대 이스라엘이 레위기를 따랐던 것은 그것이 일련의 특이한 규정이어서가 아니라 그들 가운데 계시는 하나님 임재를 표현한 것이기 때문이었다. 레위기는 오늘날 하나님 백성에게도 중요하다.


성경에서의 거룩 의미와 용례

성경에서 "거룩"은 하나님의 성품을 나타내는 핵심적인 개념으로, 하나님의 백성이 그의 뜻에 맞게 삶을 살아가도록 요구하는 중요한 명령이기도 합니다. "거룩"의 의미와 성경 속에서 거룩이 가지는 다양한 실례를 구약과 신약을 중심으로 깊이 있게 정리해 보겠습니다.

1. 거룩의 원어적 정의와 의미

성경에서 "거룩"이라는 개념은 히브리어 ‘카도쉬’(קדוש, qadosh)헬라어 ‘하기오스’(ἅγιος, hagios)로 표현됩니다. 이 단어들은 모두 ‘구별됨’‘다름’을 의미하며, 하나님과 피조물을 구별하고, 죄악된 세상에서 깨끗함을 유지하는 것을 강조합니다.

  • 히브리어 ‘카도쉬’: 이 단어는 ‘분리하다’ 또는 ‘따로 떼어놓다’는 의미에서 파생되어, 하나님이 창조 세계와 구별되어 계신다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거룩은 하나님의 본질적 속성이며, 그의 백성이 하나님을 닮아가야 한다는 의미로도 확장됩니다.
  • 헬라어 ‘하기오스’: 신약 성경에서는 하나님의 성품과 구별된 삶을 사는 성도들을 가리킬 때 주로 사용됩니다. 이 단어는 거룩함을 통해 하나님께 속하고, 그분의 목적에 맞추어 삶을 살아야 함을 의미합니다.

거룩함은 하나님과 하나님의 백성 간의 관계에서 비롯되며, 신앙인의 생활과 행동 전반에 걸쳐 그 삶이 구별되고 깨끗하게 유지되어야 한다는 것을 함축합니다. 거룩의 구별된다는 뜻을 가졌다는 것은 하나님께 드려진 존재라는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온전히 하나님 것이란 뜻입니다. 하나님께 드려진 것들을 '거룩하다'라고 말합니다.

2. 구약에서의 거룩: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의 관계

구약 성경에서 거룩은 주로 하나님의 성품, 그의 백성의 성결함, 그리고 이를 지키기 위한 율법과 제사 제도에 관련하여 설명됩니다.

1) 하나님의 거룩함

하나님은 본질적으로 거룩한 분으로, 그의 모든 속성 중 거룩함이 가장 두드러집니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스스로 거룩하시다고 말씀하십니다.

  • 출애굽기 15:11: "여호와여 신들 중에 주와 같은 자 누구니이까? 주와 같이 거룩함으로 영광스러우며."
  • 이사야 6:3: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만군의 여호와여 그의 영광이 온 땅에 충만하도다."

하나님의 거룩함은 피조물과 구별된 절대적 순결과 완전성을 의미합니다. 그는 죄가 없고, 완전히 의로우시며, 인간의 불완전함과는 대조적으로 완벽한 거룩함을 지니고 계십니다.

2) 이스라엘 백성에게 요구된 거룩함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하나님의 백성으로 택하시고, 그들에게 거룩을 요구하셨습니다. 이는 그들이 죄와 불결함으로부터 벗어나 하나님께 온전히 속하는 삶을 살도록 하려는 것입니다.

  • 레위기 11:45: "너희도 거룩할지어다 이는 나 여호와가 거룩함이니라."
  • 레위기 19:2: "너희는 거룩하라 이는 나 여호와 너희 하나님이 거룩함이니라."

이스라엘 백성에게 요구된 거룩은 하나님의 성품을 닮고 그의 뜻에 따라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거룩함을 유지하기 위해 다양한 율법과 정결 의식을 제정하셨습니다. 이 법들은 이스라엘 백성이 거룩한 생활을 할 수 있도록 도왔고, 구별된 민족으로 세우기 위한 수단이었습니다.

3) 율법에서의 거룩과 정결 의식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거룩함을 유지하기 위한 구체적인 율법과 정결 의식을 주셨습니다. 이는 그들이 죄와 불결로부터 분리되어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으로 살아가도록 돕기 위함입니다.

  • 정결 음식법: 레위기 11장과 신명기 14장에서는 먹을 수 있는 음식과 먹을 수 없는 음식을 구분하여, 음식 섭취를 통해 백성이 정결하게 유지되도록 했습니다.
  • 정결 예식: 구약 율법에는 제사와 속죄를 통해 죄와 불결을 씻어내는 다양한 정결 예식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는 이스라엘 백성이 성전과 하나님의 거룩함에 접근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역할을 했습니다.
  • 안식일과 절기: 이스라엘 백성에게 거룩하게 지키도록 명령된 절기와 안식일도 있습니다. 안식일과 절기 준수는 하나님께 대한 충성과 순종의 상징이며, 그의 백성이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구별된 시간을 보내는 방식이었습니다.

이 모든 의식은 이스라엘이 하나님과의 관계 안에서 구별된 삶을 살아야 함을 상징합니다.

4) 성막과 성전에서의 거룩함

구약에서 성막과 성전은 하나님의 거룩한 임재가 머무는 장소였습니다. 이러한 성소는 이스라엘 백성의 삶 속에서 하나님의 거룩을 상징하는 중심지였습니다.

  • 성소 내에서 행해진 제사속죄는 하나님과 백성 간의 관계를 유지하는 수단이었으며, 이를 통해 이스라엘은 거룩하게 유지될 수 있었습니다.
  • 성막과 성전에서의 예배와 제사는 백성에게 거룩의 개념을 각인시키고, 하나님의 임재가 있는 곳에 들어가기 위해 정결해야 한다는 것을 가르쳤습니다.

3. 신약에서의 거룩: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성결

신약에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새로운 의미의 거룩이 제시됩니다. 예수님은 완전한 거룩의 모범이시며, 그분을 통해 신자들은 하나님께 드려진 거룩한 삶을 살아가게 됩니다.

1) 예수님의 거룩함

예수님은 하나님의 거룩함을 완전히 보여주는 존재로, 그의 삶과 사역을 통해 하나님의 거룩을 계시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죄가 없으신 분으로서, 거룩함의 완전한 모범이 되십니다.

  • 히브리서 4:15: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지 못하실 이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똑같이 시험을 받으신 이로되 죄는 없으시니라."
  • 예수님은 죄 없으신 삶을 사셨으며,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신자들의 죄를 씻고 그들을 거룩하게 하셨습니다.

2) 성령을 통한 거룩의 성화

신약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이 성령의 역사로 인해 점차 거룩하게 변화된다고 가르칩니다. 이는 성령이 신자들 안에서 거룩을 이루어 가는 과정, 즉 성화(sanctification)로 설명됩니다.

  • 데살로니가전서 4:7: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심은 부정하게 하심이 아니요 거룩하게 하심이니."
  • 갈라디아서 5:22-23: 성령의 열매로 인한 신자의 거룩한 삶을 설명하며, 성령의 역사로 인해 신자들이 거룩한 성품을 갖게 됨을 강조합니다.

성령은 신자의 삶 속에서 지속적으로 역사하며 그들이 거룩한 성품을 갖추도록 인도하십니다.

3) 신자들의 삶에서의 거룩

신약에서는 신자들에게 거룩한 삶을 요구합니다. 이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구원받은 신자들이 하나님께 속하여, 그분의 뜻에 따라 삶을 살아가야 함을 의미합니다.

  • 베드로전서 1:15-16: "오직 너희를 부르신 거룩한 이처럼 너희도 모든 행실에 거룩한 자가 되라."
  • 신약에서는 율법적 의식을 통한 거룩보다 신앙과 삶의 일치를 강조하며, 이는 신자가
  • 세상 속에서 거룩함을 나타내는 방식으로 나타납니다.

4) 교회와 성도들의 거룩함

신약 성경에서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거룩한 공동체로 불립니다. 이는 교회가 세상과 구별된 거룩한 공동체로 살아야 한다는 의미를 가집니다.

  • 에베소서 5:25-27: 예수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깨끗하게 하사 거룩한 공동체로 세우셨다고 설명합니다.
  • 고린도전서 3:16-17: 교회와 성도가 하나님의 성령이 거하시는 성전으로서 거룩하게 유지되어야 함을 강조합니다.

교회는 거룩한 공동체로서 하나님께 구별된 삶을 살며, 하나님께 예배하고 서로를 세우는 사명을 가지고 있습니다.

4. 거룩에 대한 성경적 의미의 종합

거룩은 하나님과 그의 백성 간의 구별된 관계를 나타내는 가장 중요한 성경적 개념 중 하나입니다. 구약에서의 거룩은 율법과 제사 제도, 정결 예식을 통해 하나님의 백성이 세상과 구별된 거룩함을 유지하도록 하는 데 중점을 두었습니다. 반면, 신약에서는 예수 그리스도와 성령을 통해 모든 신자가 거룩한 삶을 살아가도록 인도받고, 세상 속에서 하나님의 거룩을 드러내는 삶을 강조합니다.

신약과 구약의 거룩의 개념을 종합해보면, 거룩함은 단순한 종교적 예식이 아니라 하나님의 본질과 그의 백성들이 살아가야 할 정체성을 나타내는 핵심 요소로 이해됩니다. 하나님을 닮아가는 삶, 하나님께 온전히 드려진 삶, 죄와 세상으로부터 구별된 삶이 바로 성경이 말하는 거룩한 삶입니다.

따라서 성경에서 거룩은 모든 신자의 삶의 목표이며,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에서 비롯된다는 점에서, 우리는 지속적으로 성령의 도우심을 받아 거룩한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성결은
'거룩하고 깨끗함'을 의미하며, 신학적으로는 세상으로부터 분리되어 하나님께 헌신하고, 
성령의 역사로 말미암아 하나님을 닮아가는 상태를 가리킵니다. 
이는 신앙생활의 중요한 목표이자,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고 온전한 삶을 추구하는 과정입니다. 
성결의 주요 의미
  • 거룩함 : 하나님께 속한 것, 하나님으로부터 분리된 것을 의미하며, 하나님만이 본질적인 거룩함을 가지십니다.
  • 디모데전서 4:5 /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로 거룩하여짐이니라.
  •                            because it is consecrated by the word of God and prayer

  • 헌신 : 세속적인 것에서 분리되어 오직 하나님께 자신의 삶을 드리는 상태입니다.
  • 성화(聖化) : 신자가 성령의 도우심을 통해 죄로부터 멀어지고 점진적으로 거룩해져 가는 과정입니다.
  • 온전함 : 완전함을 추구하며,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삶을 살기 위해 노력하는 것을 포함합니다.
  • 하나님과의 관계 : 성결은 하나님과의 깊고 올바른 관계를 회복하는 것이며,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는 삶의 근본적인 조건입니다

성결의 신학적 이해

기독교신학과 성결론

한국성결교회의 가장 중요한 교리는 두 말할 것도 없이 성결론이다. 한국성결교회는 중생, 성결, 신유, 재림의 사중복음을 강조한다. 하지만 그 중에서도 성결론은 가장 핵심되는 부분이다. 성결교회 는 중생한 신자는 성결을 추구해야 하며, 신유의 궁극적인 목적은 성결한 삶에 있으며, 또한 모든 신자는 다시 오실 주님을 성결한 삶으로 맞이해야 한다고 가르친다.

성결교회를 웨슬리안 교파라고 부르는 이유도 사실 성결에 있다. 웨슬리는 종교개혁의 칭의 교 리를 받아들였지만 동시에 종교개혁이 간과한 또 다른 중요한 성서적인 진리인 성결을 강조했다. 웨 슬리는 자신이 세운 감리교의 존재 목적이 성결의 전파에 있다고 주장하며, 혹시 성결을 전파하지 않는 감리교가 생길까봐 염려된다고 말했다. 사실 성결교회는 기존의 감리교가 성결을 제대로 강조하지 못하고, 웨슬리의 정신에서 벗어났다는 자각에서 시작되었다. 그래서 이명직목사는 성결교회는 초시대 감리교의 정신으로 돌아가려고 시작되었다고 밝히고 있다.

하지만 성결은 성결교회나 웨슬리안교파의 전유물이 아니다. 초대교회 이래로 동방교회와 서방 교회는 성결을 강조하여 왔다. 동방과 서방교회 교부들은 "온전한 그리스도인"(Christian Perfection)을 강조하여 왔다. 물론 동방교회의 온전한 기독교인의 개념이 플라톤적인 요소가 있고, 서방교회의 그 개념이 율법주의적인 요소가 있는 것이 사실이지만 "온전한 그리스도인"이라는 개념은 그들의 신앙과 신학에 있어서 핵심적인 요소를 차지하고 있다. (이에 대해서는 뒤에 자세하게 논의할 것이다.) 따라서 어떤 면에서 성결교회의 성결론의 특징은 성결론을 처음으로 말했다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 기독교 전통이 가지고 있는 성결론을 복음적으로 재확립했다는 데 있다.

성결, 혹은 거룩(holiness)은 기독교전통에서만 중요한 것이 아니다. 사실 종교학자들은 종교의 본질은 윤리나 사상에 있는 것이 아니고, 초자연적인 거룩의 체험에 있다고 본다. 이것은 루돌프 오토 (Rudolf Otto)나 멀치아 엘리아데(Mircea Eliade) 같은 유명한 종교학자들의 견해이다. 이들의 견해를 따른다면 종교의 본질적인 위치는 진(眞)도, 선(善)도, 미(美)도 아닌 성(聖)에 있다. 그래서 성은 종교 적인 인물이나, 장소, 혹은 사건을 설명하는 말로 쓰여진다. 필자는 이런 것들을 종합적으로 생각하면서 한국성결교회의 성결론을 폭넓은 기독교전통에서 재해석하고, 그 의미를 발견하고자 한다.

I. 성결의 정의와 비슷한 용어들

많은 사람들이 성결에 대한 이야기를 들을 때 혼란스러워하는 것들 중의 하나가 성결에 대한 용 어가 매우 다양하다는 것이다. 기독교전통에서 성결과 관련하여 사용되는 단어들을 살펴보면 성화, 기 독자의 완전(Christian perfection), 제2의 축복, 현재적 구원, 온전한 구원 등이 있으며, 동방교회에서 는 신화(deification)라는 용어를 사용하기도 한다. 성결의 신학적인 의미를 밝히기 전에 우선 이런 용어들에 대해 간단히 정리하고자 한다.

기독교대한성결교회의 헌법은 "성결이라 함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성신의 세례를 받음이니 곧 거듭난 후에 신앙으로 순간에 받을 경험이다. 이 은혜는 원죄에서 정결하게 씻음과 그 사람을 성별하여 하나님을 봉사하기 위하여 현저한 능력을 주심이라. 사람이 의롭다 함을 얻음에 신앙이 유일의 조 건됨과 같이 성결도 오직 신앙으로 얻는 은혜이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예수교대한성결교회의 헌장은 성결을 좀더 자세하게 설명하고 있다. 이 헌법은 "우리는 예수의 대속적 보혈과 성령세례로 말미암는 성결을 믿는다"는 전제아래 성결의 뜻, 의무, 필요, 방법을 설명 하고 있다:

1. 성결의 뜻 (의의): '성결'이라함은 '거룩'='정결'='성령세례'='불세례'='완전한 사랑'등의 말로도 표현한다. 이는 [하나님]과 같은 절대적인 성결을 뜻함이 아니요, [하나님]의 성결을 상대로 하여 받는 상대적 성결을 뜻한다. 곧 타락한 인간으로서 [예수]의 구속을 받아 무죄의 상태가 됨을 뜻 함이다. 다시 말하면, [예수]의 보혈과 성령세례로 원죄에서 정결하게 씻음을 받고, [하나님]께 봉 사하기에 현저한 능력을 주시는 은총이다. 이 은혜는 중생 후, 또는 동시에 신앙으로 말미암아 받는 순간적 체험이다.

3. 성결의 필요: 사람에게는 조상으로부터 전해 내려오는 원죄가 있고, 또는 죄로 인하여 부패하 여진 악한 정욕, 구습이 있고, 또한 양심이 더러워져있으니, 여기에서 정결을 받아야 된다. 그래야 종신하도록 성결하므로 [주]를 섬기게 될 것이며, 재림하시는 [주님]앞에 흠없이 서게 될 것이다.

4. 성결의 방법: 이 은혜는 인간의 방법인 수양이나, 교육이나 개혁이나 난행 고행이나, 점진적인 방법등으로 받을 수 없고, 오직 하나님께서 보여 주신대로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의 능력과 주의 보혈을 믿음과 순종과 기도로 받는 것이다.

5. 중생과 성결: 중생은 자범죄에서 사함과 생명을 받는 일이고, 성결은 심중에 잠재한 원죄에서 정결함을 받는 일이며, 중생에는 죄가 진압되고, 성결에는 죄의 몸이 멸함이 된다. 그러므로 중생은 성결의 시작이요, 성결은 중생의 완성이다.

기독교대한성결교회의 헌법과 예수교대한성결교회의 헌장이 말하는 성결은 같다. 이 두 헌법이 정의하는 성결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1) 성결이란 중생 이후에 이루어지는 2차적인 축복이며, 2) 이것은 인간의 노력으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순간적으로 얻어지는 것으로, 3) 성결의 은 혜를 받게 되면 인간의 마음 속에 자리잡고 있는 원죄(혹은 부패성)에서 정결케 되며, 4) 이것은 그리 스도의 보혈과 성령의 충만한 능력으로 이루어지며, 성결은 성령의 사역이기 때문에 성령세례라고 불려지며, 5) 이 은혜를 받으면 하나님의 사역을 감당할 수 있는 능력을 받게 된다. 이 헌법에 나타나있 는 것이 한국성결교회가 믿는 성결론의 핵심이다.

그러면 이런 성결과 성결에 대한 다른 용어들은 어떻게 다른 의미를 갖고 있는가? 먼저 성결과 가장 많이 교차하여 사용하는 용어가 성화이다. 하지만 성결이 주로 중생 이후의 특별한 경험을 지칭 하는 말이라면, 성화는 중생에서 영화에 이르는 전 과정을 지칭하여 이르는 말다. 특히 칼빈주의 계통 에서 성화는 신앙생활에 어떤 계기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중생에서 영화에 이르는 전 과정을 말한다. 따라서 성화를 성결교회와 같이 중생이후의 2차적인 경험으로 설명하지 않는다. 칼빈신학에서는 먼저 성화를 말하고, 그 시작으로서 중생, 그리고 그 완성으로서 영화를 말한다. 이런 오해를 피하기 위해서 웨슬리는 중생을 초기의 성화, 성결을 온전한 성화라고 부르기도 한다. 한국성결교회는 성화라는 용어보다는 성결이라는 용어를 많이 사용하여 왔다.

기독교의 역사에서 성결이라는 말을 표현하는 말로 가장 많이 사용된 것이 "기독자의 완전"일 것이다. 하지만 원래 성서에서 완전이라는 말을 사용할 때 그것은 정적인 의미의 완전이 아니라 목적 을 향하여 나간다는 의미에서 온전을 뜻하는 말이었다. 따라서 필자는 정적인 완성을 의미하는 기독 자의 완전이라는 말보다는 동적으로 완성을 지향한다는 의미의 "온전한 그리스도인"이라는 말을 선호 한다. 그리고 이 말은 이미 기독교인이 된 사람은 온전한 기독교인이 되는 것을 목적으로 삼아야 한다는 의미에서 사용되어졌다. 이런 의미에서 온전한 기독교인이 되는 목표가 성결이기 때문에 이 두 용어는 동의어로 사용되어져 왔던 것이다.

온전한 그리스도인이라는 개념은 천주교 신학에서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해왔다. 특별히 천주 교는 신자의 윤리와 성직자의 윤리를 구분하면서 온전한 신자가 되려면 절대순명, 절대순결, 절대청빈의 삼종서원(三從誓願)을 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여기에 성직자가 평신도보다 위에 있다는 천주교의 계층구조가 형성되는 것이다. 하지만 웨슬리는 온전한 신앙은 성직자만의 개념이 아니라 모든 신자가 추구해야할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또한 천주교는 하나님의 은총으로 공로를 쌓으며, 그 공로의 결과로 구원을 얻는다고 가르친다. 이것은 믿음으로 인한 구원이 아니라 공로를 통한 구원이다. 그러나 웨슬 리안은 율법적인 완전을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복음적인 완전을 주장한다.

기독교의 역사에서 성결에 대한 새로운 용어가 만들어졌는데 그것은 성령세례이다. 아마도 이것 은 성결운동이 성결론에 미친 독특한 견해라고 생각된다. 성결운동은 부흥운동과 같이 발전했으며, 이 런 과정에서 성결은 영적훈련으로 이루어지는 것이라기보다는 성령의 선물로서 주어지는 것이라는 생 각이 나타나게 되었다. 이런 점에서 19세기 미국의 성결운동은 성결과 성령세례를 동일시하였다. 우리 성결교회의 헌법은 성결은 곧 성령세례라고 못박고 있다. 이 점이 성결교회의 성결론의 가장 두드러진 점이라고 생각된다.

최근에 일부 학자들이 웨슬리와 동방교회 신학과의 대화를 시도한다. 그리고 이 둘의 관계 가운 데 핵심적인 요소가 동방교회의 신화(deification)의 개념과 웨슬리의 성결의 개념이다. 동방교회의 신 화는 하나님이 인간이 된 것은 인간이 신이 되도록 하기 위해서라는 것이다. 이런 동방교회의 개념은 플라톤 철학에 뿌리를 두고 있다. 하지만 기독교신학은 플라톤의 신비적인 합일을 받아들이지는 않았 다. 서방기독교의 입장에서 보면 이런 개념들 속에는 상당한 오해의 소지가 있다. 주목할 만한 것은 웨슬리가 신화라는 용어를 사용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웨슬리안 성결론은 하나님과의 교제를 강조하지 하나님과의 합일을 강조하지는 않는다.

이런 용어 외에도 성결을 지칭하는 다른 용어로서 제2의 축복, 현재적 구원, 온전한 구원 등이 있다. 제2의 축복이란 성결은 칭의 이후에 오는 제2의 은총이라는 의미이다. 이것은 전통적인 개신교 가 칭의의 은총만 강조하는데 비하여 성결운동은 여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갈 것을 요청하는 것이다. 현재적 구원이란 성결은 죽어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지금 여기서 얻을 수 있는 구원이라는 점에 서 사용하는 말이다. 여기서 성결을 현세에서 가능한 것으로 이해하는 웨슬리안의 정신이 담겨져 있다. 온전한 구원이란 칭의가 죄의 벌에서 구원받는 것을 강조하는데서 멈추지만 이것은 그리스도의 구속의 은총을 제한하는 것이며, 그리스도는 우리의 죄책뿐이 아니라 우리의 죄성, 곧 부패성에서도 우리를 구원하신다는 의미에서 사용하는 말이다. 따라서 제2의 축복, 현재적 구원, 온전한 구원 등은 다같이 성결의 의미를 밝히 드러내주는 용어들이다.

II. 인간이해: 하나님의 형상과 인간의 타락

전통적인 기독교신학에 의하면 성결이란 하나님의 형상의 회복이다. 따라서 성결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형상이 무엇이며, 또한 타락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밝혀야 할 것이다.

웨슬리는 하나님의 형상을 세 가지로 나누어서 설명하였다. 첫째는 자연적인 형상으로 이성적인 판단 능력을 말하는 것이요, 둘째는 정치적인 형상으로 자연을 다스리는 능력을 말하는 것이요, 셋째 는 도덕적인 형상으로 하나님과 관계를 맺을 수 있는 능력을 말하는 것이다. 웨슬리의 성결론은 이 세 번째 형상의 회복을 말하는 것이다. 웨슬리가 성결이라고 말할 때 그것은 무엇보다도 하나님과 바 른 관계를 회복하는 것을 의미한다. 웨슬리는 자연적인 형상이나 정치적인 형상의 회복은 영화의 단계에서 완성된다고 가르쳤다.

교부들에 의하면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imago)과 하나님의 모양(similitudo)을 따라서 만들어졌 다. 여기에서 '형상'이라 함은 하나님의 객관적인 측면을 말하는 것이요, '모양'이라 함은 그 객관적인 것을 구체화할 수 있는 측면을 말하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서 지음 받 았을지라도 하나님의 모양이라는 특별은총을 힘입지 않으면 하나님의 뜻대로 살수 없다는 것이다. 웨슬리는 이 모양, 즉 특별은총을 생명나무와 관련해서 설명하고 있다. 하나님이 생명나무실과를 주신 이유는 이 특별은총을 계속 받아야 만이 하나님의 사람으로 살 수 있다는 뜻이라는 것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성결의 두 가지 측면을 언급할 수 있을 것이다. 첫 번째는 기독론적인 것으로 성결이란 옛 사람을 벗어버리고, 두 번째 아담 예수 그리스도를 옷입는 것이다. 사실 하나님의 형상 과 그리스도의 형상은 같은 말이다. 두 번째는 성령론적인 것으로 그리스도를 모신 사람은 성령의 계속적인 도우심으로 신자의 삶을 유지할 수 있는 것이다. 사실 성령은 우리의 삶 속에서 그리스도의 모습을 드러나게 해주시는 분이시다.

그러면 인간의 타락은 어떻게 설명될 수 있는가? 웨슬리안 성결론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죄가 무 엇인지를 분명하게 파악하고 있어야 한다. 인간의 불순종은 성령의 특별은총을 거부하게 만들었다. 인 간이 하나님의 형상을 유지하고 살아갈 수 있는 것은 성령의 특별은총 덕분인데, 이것이 사라지자 인 간의 본성에는 세 가지 중요한 결과가 나타났다. 첫째는 선악과를 따먹지 말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거 역한 자범죄(voluntary sin)이다. 이것은 분명히 아담과 하와가 지은 죄이다. 두 번째는 그 죄를 지음 으로 주어지는 죄책(gulity)이다. 인간은 죄를 지으면 죄에 대한 벌을 받아야 한다. 셋째는 부패성 (depravity)이다. 부패성이란 인간의 마음 속에 있는 죄를 자꾸 짓고자하는 죄성을 말하는 것이다. 이 부패성은 아담의 죄악된 본성에서 유래하기 때문에 원죄라고도 부르며, 또한 계속 자손들에게 유전된다는 의미에서 유전죄라고도 부른다.

웨슬리안 성결론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 원죄, 또는 부패성을 잘 이해해야 한다. 사실 원죄이론 은 서방기독교의 중요한 전통이다. 그리고 원죄를 가장 철저하게 설명한 사람은 어거스틴이다. 어거스 틴은 원죄를 교만과 욕망이라고 보았다. 하나님과 같이 되고자 하는 인간의 교만은 모든 것을 자기의 것으로 삼고자 하는 욕망을 낳는다고 하는 것이다. 어거스틴은 이런 욕망의 가장 적나라한 표현을 성 욕으로 보았다. 어거스틴은 인간이 죄를 짓는 것은 아담의 원죄 때문이 아니라 우리가 아담 안에(in Adam) 있기 때문에 죄를 짓는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곧 어거스틴은 인간의 모든 죄악의 원천은 아담 의 죄악된 본성, 즉 부패성 때문이라고 본 것이다. 이 어거스틴의 원죄론은 그 후 칼빈주의 전통에 서 강조되어졌고, 이것은 다시금 19세기 장로교의 구파를 통해서 계속 유지되어왔다. 사실 성결운동은 원죄와 부패성을 강조한다는 점에서 서방기독교, 그리고 칼빈주의 전통과 맥을 같이한다. 사실 19세기 성결운동은 자신들을 구파라고 부르며, 진보적인 감리교신학을 신파 감리교(New School Methodism)라고 비판하였다.

일부 신학자들은 웨슬리안 성결운동가들이 부패성을 잘못이해하고 있다고 비판해 왔다. 즉 웨 슬리안들은 부패성을 육체 안에 있는 일종의 종양과 같은 것으로 이해하여 그것을 제거할 수 있는 것 으로 본다는 것이다. 웨슬리안 성결운동가들이 '제거'라는 말을 사용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이것은 상 징적인 의미이지 의학적인 의미는 아니다. 웨슬리안이 강조하고자하는 것은 인간의 본성 안에 죄성이 실체로서 존재한다는 것이며, 이것이 해결되지 않고서는 진정한 거룩은 이루어질 수 없다는 것이다. 웨슬리안은 부패성을 단지 죄로의 경향성이나 하나님과의 관계단절로 이해하는 것을 반대한다. 죄로 의 경향성은 타락이전에도 존재하였기 때문에 죄로의 경향성을 부패성으로 이해하는 것은 잘못이다. 또한 타락은 하나님과의 관계단절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내면의 부패성을 낳았다. 다시 말하면, 원죄를 단지 죄의 경향성이나, 하나님과의 관계단절이라고 보는 것은 원죄의 심각성을 약화시킬 위험성이 있다는 것이다.

또한 웨슬리안 성결운동은 인간의 본성을 죄성으로 오해하고 있다는 비판을 받아왔다. 즉 인간 의 죄성을 사람 그 자체와 동일한 것으로 오해하여 죄성의 제거를 본성의 제거와 같은 것으로 이해하 였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 점은 웨슬리안 성결신학의 부패성을 오해한 것이다. 웨슬리안은 어떤 신학 보다도 인간의 본성과 죄성을 구분한다. 길보른은 "오류의 원인은 많은 삶들이 '사람의 성품'과 육의 성질, 곧 죄의 성질을 구별하지 못하는데 있다"고 말한다. 육체는 하나님이 원래 만드신 좋은 것이 지만 인간의 죄성, 곧 부패성은 인간의 타락이후에 인간의 본성에 덧붙여진 것이다. 따라서 웨슬리안 이 성결을 말할 때 인간의 본래적인 모습에 덧붙여진 죄성을 제거하고 변화시킨다는 말이지, 인간의 육체 그 자체를 바꾼다는 말이 아니다. 이 육체 그 자체는 우리가 부활의 상태에 들어갈 때까지 변하지 않는다.

사실 성결을 죄성의 변화로 이해하는 것은 이미 칼빈주의 전통에서 시작된 것이다. 에드워즈는 타락을 본성의 부패(physical depravity)라고 불렀다. 성령의 역사는 타락한 본성에 새로운 은총을 부 어주셔서, 우리의 부패성을 변하여 새롭게 만들어 주시는 것이다. 이것을 18세기의 칼빈주의자들은 본 성의 중생(physical regeneration)이라고 불렀다. 그리고 이것을 마음의 할례라고도 불렀다. 비록 칼 빈주의자들이 이 세상에서 온전한 성결이 이루어질 것이라고 믿지는 않았지만 성결을 단지 관계회복으로 보지 않고, 부패성의 변화라고 본 것은 역사적인 사실이다.

사실 성결운동이 이 세상에서 온전한 성결이 가능하다고 믿는 것은 죄성이 인간의 본성이 아니 라는 신앙에 근거하고 있다. 인간의 본성이 죄성이라면 인간은 죽기 전에는 결코 온전한 성화를 이룰 수가 없다. 하지만 이 죄성이 본래적인 것이 아니라 아담의 타락으로 덧붙여진 것이라면 이것은 성령 의 능력으로 제거할 수 있으며, 변화시킬 수 있다고 보는 것이다. 이점에서 웨슬리안 성결운동은 세대 주의와 다르다. 세대주의자들은 죄성과 인간의 본성을 동일시하여 인간이 육체를 가지고 있는 한 본성은 변할 수 없으며, 단지 아담으로부터 유전된 본성과 성령으로부터 유래한 새로운 성품이 인간의 마음속에 공존할 뿐이라고 주장한다. 이것을 '두 본성이론'이라고 부른다. 성결운동은 두 본성이론을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으로 말미암는 옛 본성의 변화를 주장하는 것이다.

III. 하나님의 구속계획: 두 가지 치유

웨슬리안 구원론은 아담의 범죄는 두 가지 결과를 가져왔다는 전제에서 출발한다. 하나는 죄책 이요, 다른 하나는 부패성이다. 아담의 죄가 두 가지 결과를 가져왔다면 이것을 치유하는 하나님의 방 법도 두 가지여야 한다. 우드(J. A. Wood)는 그것을 용서(pardon)과 정화(purity)라고 말한다. 즉 우리 는 죄에 대한 벌에서 용서받아야 하며, 자꾸만 죄를 짓는 내면의 부패성에서 정화되어야 한다. 우드는 이것을 다음과 같이 묘사한다:

[용서]는 우리를 위해(for us) 행하시는 신적 자비의 행위이며, [정화]는 우리 안에서(in us) 행해 진 은총의 역사이다. 그는 타락을 용서하지도, 그렇다고 죄책을 씻어주지도 않는다. 용서와 정화 는 인간의 구원에 있어서 분명하게 구분되는 것이다. 죄책을 제거하는 전자가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는 우리의 자격을 보증한다면 죄의 오염을 제거하는 후자는 그것을 위한 우리의 준비를 보증한다.

웨슬리안의 성결론을 설명하기 위해서 죄책보다도 더욱 중요한 것이 부패성이다. 왜냐하면 부패 성은 죄악의 뿌리이기 때문에 아무리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공로로 용서를 받았다고 할지라도 죄악의 뿌리가 남아있는 한 인간은 또다시 죄에 빠질 수밖에 없기때문이다. 예를 들면 사형수가 대대통령의 특사로 사면 받았지만 그의 마음 속에 사람을 죽이고자하는 살생의지가 있다면 그 사형수는 밖에 나 가서 다시금 살인을 하고 말 것이다. 따라서 사면은 살인수의 근본적인 문제해결이 될 수 없는 것이다. 근본적인 해결은 살인자의 죄성이 변하여 새로운 마음을 갖는 것이다. 이와 같이 부패성의 문제가 해결되지 않고서는 근본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 성결은 바로 이 부패성의 문제에 대한 해결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루터신학의 한계를 지적하고 넘어가야 할 것이다. 루터는 천주교의 공로구원에 반대하여 이신칭의를 강조하였다. 루터의 관심은 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 이루어 놓으신 공로를 덧입 는 것이다. 이것을 '낯선 의'(alien righteousness)라고 부른다. 이것은 우리 밖에서(extra nos)에서 우리 에게 '전가되는 의'이다. 하지만 루터는 천주교의 공로구원에 반대한 나머지 성서가 그렇게 강조하는 인간의 내면의 변화에 대해서는 무관심하였다. 이런 점에서 루터는 그리스도의 객관적 의를 너무 강조한 나머지 신자들의 내면에서 일어나는 성령의 역사를 무시했다고 비판을 받을 수 있다.

그렇다면 어떻게 인간의 내면의 죄성이 정결케 되며 변화될 수 있는가? 이에 대한 웨슬리안 성 결운동의 대답은 그리스도의 보혈과 성령의 역사이다. 인간의 내면이 오염되어 부패해졌다면 이것을 정케하는 방법은 오직 그리스도의 보혈이다. 이것을 가장 잘 표현해 주고 있는 것은 찬송가이다. 찬송 가 186장은 "내 주의 보혈은 정하고 정하다. 내 죄를 정케하신 주 날 오라 하신다. 내가 주께로 지금 가오니 골고다의 보혈로 날 씻어 주소서"라고 되어 있다. 이것은 또한 초기 동양선교회 선교사들이 한국에 왔을 때 강조했던 것이다. 그들은 한국의 여인들이 냇가에서 흰옷을 빠는 것을 보면서, 자신들이 한국에서 해야할 일은 십자가의 보혈로 한국인들의 마음을 정결케 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인간의 부패성은 그리스도의 보혈로 정결케 되지만 동시에 성령의 세례로 새롭게 변화되는 것이 다. 사실 하나님이 인간을 처음 창조하실 때에 흙으로 사람을 만드시고, 그 코에 생기를 불어 넣으셔 서 생령(生靈)이 되었다. 그런데 인간의 타락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생기, 곧 하나님의 영은 떠나고 인간의 육체만 남게 되었다. 그런데 우리가 회개하고 예수를 믿게 되면 성령을 선물로 받게 되고, 그러면 육체만 남은 인간에게 하나님의 영이 들어와서 하나님께서 원래 만들어 놓으신 인간을 만들게 되는 것이다. 웨슬리는 이 영은 신자에게만 주어지는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웨슬리에게 있어서 우리 를 성결케 하는 분은 본질적으로 성령이다. 우리 찬송가 178장 2절은 이것을 잘 표현하여 주고 있다: "정욕과 죄악에 물든 맘을 성령의 불길로 태우사 정결케 합소서. 태우소서 깨끗케 하여 주옵소서. 주 여 성령의 은사들을 오늘도 내리어 줍소서. 성령의 뜨거운 불길로서 오늘도 충만케 합소서."

여기에서 우리는 인간내면의 변화에 대해서 좀더 고찰해 볼 필요가 있다. 사실 서구윤리는 인간 의 덕성 함양에 큰 관심을 가져왔다. 아리스토텔레스의 고전윤리에 의하면 인간이 선행을 반복하게 되면 이것이 습성이 되고 이것이 덕성이 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덕은 인간의 노력으로 되는 것이며, 이 덕성이 쌓여질 때 이것은 우리에게 구원을 가져다 주는 것이다. 여기에 천주교의 공로사상이 자리 잡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개신교는 이런 아리스토텔레스의 덕목을 반대한다. 성경은 새로운 성품은 인간의 노력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의 능력으로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러므로 새로운 성품은 하나님의 역사인 중생에서 시작된다. 성령이 우리 속에서 역사하게 되면 옛 아담 은 물러가고, 두 번째 아담이 우리 속에 거주하게 된다. 그러면 우리는 새로운 성품을 소유하게 된다. 이런 점에서 복음주의 기독교는 참된 인간은 도덕적인 훈련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성령으로 말 미암는 중생으로 시작된다고 믿는다.

웨슬리는 죄를 내적인 죄와 외적인 죄로 나누고, 내적인 죄를 부패성이라고 말하고, 외적인 죄를 자범죄라고 말한다. 웨슬리안은 이 부패성을 죄악의 쓴 뿌리라고 부른다. 이 쓴 뿌리가 자라서 외적인 죄, 곧 자범죄를 만든다. 그러므로 자범죄를 짓지 않기 위해서는 근본적으로 내적인 부패성의 문제가 해결되어야 한다. 웨슬리는 또한 성결을 내적인 성결과 외적인 성결로 나눈다. 그가 말하는 내적인 성 결이란 하나님의 형상의 회복을 말하며, 외적인 성결이란 율법, 곧 사랑의 법을 준수하는 것을 말한 다. 하지만 이 둘은 긴밀한 관계를 갖고 있다. 즉 내적인 성결이 이루어져야 외적인 성결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인간의 내면의 진정한 변화는 중요한 것이다.

IV. 구원의 이중적인 단계 : 중생과 성결

다음으로 우리가 다루어야할 문제는 그러면 어떤 과정으로 우리의 내면이 변화될 수 있겠는가 하는 문제이다. 여기에 대해서 웨슬리는 인간의 단계를 세 단계로 설명하고 있다. 첫 번째가 자연인의 단계이며, 두 번째가 종의 단계, 세 번째가 아들의 단계이다. 자연인의 단계는 아직 신앙을 갖지 않은 불신의 상태이며, 종의 단계는 이미 예수를 주로 믿고 거듭났으나 아직 온전한 자유를 얻지 못한 상태이며, 아들의 단계는 온전한 성화(성결)를 이루어 마음의 기쁨이 충만한 단계이다. 자연인의 상태는 모든 인류가 공통적이므로 실질적인 하나님의 은총의 역사는 중생과 성결의 두 단계로 말할 수 있다.

위에서 지적한대로 웨슬리안은 성령으로 거듭나지 않고서는 진정으로 새로운 인간이 될 수 없다 고 믿는다. 중생은 하나님 백성의 출발점이다. 이것은 태초에 하나님이 인간의 코에 생기를 불어넣는 것과 같다. 이 영이 없이는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말할 수 없다. 그러나 중생은 하나님의 역사의 시작일 뿐 그것 자체로 완성은 아니다. 중생으로 얻어지는 것은 완전한 승리가 아니라 이제 성령의 역사 와 육체의 소욕 사이가 갈등상태에 들어서는 것이다. 따라서 웨슬리는 자연인의 상태에서는 갈등이 없지만 중생한 이후에는 영과 육의 갈등을 느끼게 된다고 말했다.

웨슬리안이 중생이 신앙의 완성이 아니고, 영적으로 성장하기 위한 출발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로마서 7장에 근거하는 것이다. 사도 바울은 자신의 과거를 살펴보면서 이미 중생했지만 자신의 속에 서 죄와 사망의 법과 생명과 성령의 법이 싸우고 있다고 말했다. 하지만 웨슬리안의 주장은 단지 성 서를 그냥 반복하는 것이 아니다. 웨슬리안 성결운동가들은 수많은 사람들의 체험을 통해서 중생의 체험 직후에는 큰 기쁨이 있고 죄를 이길 수 있지만, 얼마가지 않아서 자신의 속에 죄악의 세력이 남아 음을 느낀다는 것을 알았다. 이것은 우리의 신앙경험을 통해서도 인정할 수 있는 일이다.

그러면 중생이후에 우리의 속에 남아있는 것이 무엇인가? 이것을 신학적으로는 잔여죄(殘餘罪)라 고 부른다. 성령으로 거듭난 우리는 분명히 옛날과 같은 성품이 아니라 새로운 모습으로 변화되었다. 하지만 온전히 변화된 것이 아니다. 아직도 우리 속에는 여전히 옛 사람 아담의 모습이 남아있다. 이것을 웨슬리는 신자의 죄라고도 부른다.

이 잔여죄에 대해서 몇 가지 입장이 있다. 먼저 칼빈주의자들은 이 잔여죄는 인간의 육체가 존 재하는 한 인간이 극복할 수 없는 것으로 본다. 이들은 따라서 신자의 삶이란 영과 육의 갈등의 연속 이며, 이것은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정통 칼빈주의자들은 오히려 이런 갈등이 우리로 하여금 겸손하게 만들고 결국에 가서는 우리의 신앙을 유익하게도 한다고 강변한다. 하지만 웨슬리안은 성서가 강조하는 것은 영육의 갈등이 아니라 성령으로 인한 승리라고 믿는다.

다음으로 19세기의 일부 진보적인 감리교도들은 중생때 인간의 죄 문제가 다 해결되었다고 본 다. 이들은 뉴 헤이븐신학의 영향을 받아서 자범죄만 인정할 뿐 죄성을 부인한다. 인간의 죄성을 부인 하기 때문에 중생이후에 죄성이 남아 있다는 것도 부인한다. 잔여죄를 부정하기 때문에 이 잔여죄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또 다른 제2의 은총도 부정하게 된다. 따라서 19세기 후반의 진보적 감리교는 중생 이후에는 지속적인 성화만 있을 뿐 제 2의 은혜로서의 성결은 없다고 주장하였다.

이에 대해 웨슬리안 성결운동은 중생이후에도 여전히 잔여죄가 남아있으며, 이것은 하나님의 은 총으로 해결해야 한다고 믿는다. 여기에서 웨슬리안 성결운동은 성결은 중생이후에 오는 것으로 중생 과 분명하게 구분되는 이차적인 은혜라고 지적한다. 중생으로 인해서 죄성이 붕괴되기 시작했다면 성 결로 인해 죄성이 제거된다는 것이다. 이것을 웨슬리안은 온전한 구원이라고 말한다. 즉 성결에서야 자범죄만이 아니라 부패성(죄성)에서 온전히 해방되기 때문이다. 성결운동은 내적인 부패성에서 해방 되지 못하면 아직 운전한 구원의 상태에 들어가지 못한 것으로 간주한다. 그 이유는 그 남아있는 죄성이 다시금 우리를 죄악으로 인도할 수 있기 때문이다.

성결운동이 이중적인 치유를 설명하는데 다양한 패러다임을 사용한다. 먼저 이들은 구약의 출애 굽 패러다임을 이용하여 이중적인 치유를 설명한다. 즉 이스라엘이 홍해바다를 건너는 것이 중생이라 면 요단강을 건너는 것은 성결이다. 애굽이 불신앙의 상태라면, 광야시대는 영육의 갈 등의 상태요, 가나안은 영의 승리의 상태이다. 또한 성결운동은 부활절과 오순절의 관계를 들어서 이중적인 치유를 설명한다. 부활절이 중생의 상태라면 오순절은 성결, 곧 성령세례의 상태라는 것이다.

필자는 이런 이중적인 치유가 원칙적으로 옳은 것이기는 하지만 모든 신자의 신앙경험이 항상 중생과 성결의 두 단계를 거치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사실 어떤 사람은 여러 차례의 신앙체험을 거쳐서 성결에 이르는 경우도 있고, 또한 어떤 사람에게는 단 일회적으로도 온전한 은혜의 상태에 들 어설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어디까지나 성령의 역사와 거기에 반응하는 인간의 자세에 달린 문제일 것이다. 그러므로 중생과 성결의 두 단계가 표준적이기는 하지만 모든 신앙의 경험을 두 단계로 도식화하는 것은 지나친 단순화라고 본다.

성결운동은 성결의 상태가 천사와 같은 완전한 인간이 되는 것은 아니라고 주장한다. 이미 위에 서 지적한 것처럼 웨슬리에게 있어서 온전한 그리스도인이란 도덕적인 형상의 회복을 말하는 것이지 자연적인 형상과 정치적인 형상까지도 완전하게 회복되는 것은 아니다. 달리 말하면 성결 이후에도 인간은 여전히 인간으로서의 한계를 갖는다는 것이다. 여기에는 무지로서의 죄, 연약하여 짓는 죄 등 이 포함된다. 따라서 이런 인간의 한계 때문에 인간은 언제든지 다시 타락할 가능성이 있다. 이것은 타락이전의 아담이 죄성이 없었는데도 사탄의 유혹을 받아 범죄한 것에서 잘 알 수 있다. 타락이전에 부패하지 않은 아담과 하와가 타락했다면 성결한 신자도 다시금 타락할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성결은 인간의 한계 내에서의 성결이지 결코 인간을 신적인 위치에 놓는 것은 아니다.

웨슬리안은 인간의 육체가 갖고 있는 모든 한계를 뛰어넘는 온전한 인간은 영화의 단계에서나 이루어진다고 본다. 이점에서 성결운동과 칼빈주의는 사실 같은 입장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이 두 입 장은 다같이 영화의 상태에 이르러서야 무지와 연약함에서 인간은 자유로워질 수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이 점에 있어서 성결운동이 항상 강조하는 것이 천사와 같은 완전이 아니라, 성서가 말하는 복음 적인 완전이라는 사실을 상기해야 한다.

V. 성령의 역사로서의 성결 : 성령세례

웨슬리안 성결론의 가장 중요한 특징은 성결을 성령세례로 이해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것은 많 은 성결교파들이 성결을 성령세례라고 정의하는 데서도 잘 드러난다. 그러면 웨슬리안이 왜 성결을 성령세례라고 말했을까? 웨슬리는 일찍이 성결을 자신의 가장 중요한 목적으로 삼았다. 문제는 이 성 결을 어떻게 성취할 것인가 하는 것이다. 웨슬리가 처음 사용한 방법은 은총의 수단이다. 그는 열심히 교회가 정해주는 성례전에 참여하고, 선행을 실천했다. 하지만 그 결과는 실패였다. 이때 그에게 모라 비안은 믿음을 강조했고, 그는 자신을 하나님께 맡겼다. 그 후에 그는 "이상하게 마음이 뜨거워지는" 올더스게랻의 체험을 한 것이다. 올더스게랻의 체험은 일종의 성령체험이다. 그 후부터 그에게 이전에 는 가능하지 않던 새로운 삶이 시작되었다. 웨슬리는 칭의가 우리를 위하여(for us) 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 행하신 사역에 근거하는 것이라면, 성화는 우리 안에서(in us) 우리를 새롭게 하시는 성령의 사역에 근거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성결을 성령세례와 보다 분명하게 연관시킨 것은 웨슬리의 후계자들이다. 한때 웨슬리가 자신의 후계자로 지목했던 풀렛처는 성결은 성령세례라고 분명하게 언급했다. 그는 성결은 인간의 노 력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사도행전 1장에 나오는 성령세례로 가능하다고 믿은 것이다. 그후 19세기 미국의 성결운동은 성결을 성령세례라고 불렀다. 특별히 19세기의 성결운동이 부흥운동을 통 해서 나타났다는 점을 주목하여야 한다. 19세기 전반에 일어났던 팔머의 부흥운동, 19세기 후반에 나 타난 전국성결연합회의 부흥운동은 성결을 성령의 역사로 강조하였다. 이들에게 있어서 인간의 내면에 있는 부패성을 제거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오직 성령세례를 받는 길 이외에는 없는 것이다.

이점에 있어서 웨슬리안 성결운동은 신학사에 있어서 독특한 위치를 갖고 있다. 기독교신학은 전적인 타락을 강조하여 이 세상에서는 온전한 성결이 가능하지 않다는 어거스틴적인 신학이나, 아니 면 인간의 도덕적인 능력을 강조하여 온전한 성결이 가능하다는 펠라기안적인 신학으로 나뉘어졌다. 전자는 너무 비관적이며, 후자는 너무나 낙관적이다. 하지만 웨슬리안 성결운동은 어거스틴과 같이 인간의 부패성을 믿으며, 펠라기안과 같이 온전한 기독교인의 가능성을 믿는다. 그러면 이것이 어떻게 가능한가? 여기에서 나오는 것이 성령세례이다. 인간이 타락했지만 성령의 능력으로 이것을 극복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웨슬리안은 펠라기안이 말하는 인간의 도덕적인 능력에 근거한 인본 적인 완전을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

웨슬리안은 인간의 육체가 갖고 있는 모든 한계를 뛰어넘는 온전한 인간은 영화의 단계에서나 이루어진다고 본다. 이점에서 성결운동과 칼빈주의는 사실 같은 입장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이 두 입 장은 다같이 영화의 상태에 이르러서야 무지와 연약함에서 인간은 자유로워질 수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이 점에 있어서 성결운동이 항상 강조하는 것이 천사와 같은 완전이 아니라, 성서가 말하는 복음 적인 완전이라는 사실을 상기해야 한다.

V. 성령의 역사로서의 성결 : 성령세례

웨슬리안 성결론의 가장 중요한 특징은 성결을 성령세례로 이해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것은 많 은 성결교파들이 성결을 성령세례라고 정의하는 데서도 잘 드러난다. 그러면 웨슬리안이 왜 성결을 성령세례라고 말했을까? 웨슬리는 일찍이 성결을 자신의 가장 중요한 목적으로 삼았다. 문제는 이 성 결을 어떻게 성취할 것인가 하는 것이다. 웨슬리가 처음 사용한 방법은 은총의 수단이다. 그는 열심히 교회가 정해주는 성례전에 참여하고, 선행을 실천했다. 하지만 그 결과는 실패였다. 이때 그에게 모라 비안은 믿음을 강조했고, 그는 자신을 하나님께 맡겼다. 그 후에 그는 "이상하게 마음이 뜨거워지는" 올더스게랻의 체험을 한 것이다. 올더스게랻의 체험은 일종의 성령체험이다. 그 후부터 그에게 이전에 는 가능하지 않던 새로운 삶이 시작되었다. 웨슬리는 칭의가 우리를 위하여(for us) 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 행하신 사역에 근거하는 것이라면, 성화는 우리 안에서(in us) 우리를 새롭게 하시는 성령의 사역에 근거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성결을 성령세례와 보다 분명하게 연관시킨 것은 웨슬리의 후계자들이다. 한때 웨슬리가 자신의 후계자로 지목했던 풀렛처는 성결은 성령세례라고 분명하게 언급했다. 그는 성결은 인간의 노 력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사도행전 1장에 나오는 성령세례로 가능하다고 믿은 것이다. 그후 19세기 미국의 성결운동은 성결을 성령세례라고 불렀다. 특별히 19세기의 성결운동이 부흥운동을 통 해서 나타났다는 점을 주목하여야 한다. 19세기 전반에 일어났던 팔머의 부흥운동, 19세기 후반에 나 타난 전국성결연합회의 부흥운동은 성결을 성령의 역사로 강조하였다. 이들에게 있어서 인간의 내면에 있는 부패성을 제거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오직 성령세례를 받는 길 이외에는 없는 것이다.

이점에 있어서 웨슬리안 성결운동은 신학사에 있어서 독특한 위치를 갖고 있다. 기독교신학은 전적인 타락을 강조하여 이 세상에서는 온전한 성결이 가능하지 않다는 어거스틴적인 신학이나, 아니 면 인간의 도덕적인 능력을 강조하여 온전한 성결이 가능하다는 펠라기안적인 신학으로 나뉘어졌다. 전자는 너무 비관적이며, 후자는 너무나 낙관적이다. 하지만 웨슬리안 성결운동은 어거스틴과 같이 인간의 부패성을 믿으며, 펠라기안과 같이 온전한 기독교인의 가능성을 믿는다. 그러면 이것이 어떻게 가능한가? 여기에서 나오는 것이 성령세례이다. 인간이 타락했지만 성령의 능력으로 이것을 극복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웨슬리안은 펠라기안이 말하는 인간의 도덕적인 능력에 근거한 인본 적인 완전을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

최근 성서신학계는 세례와 성령세례의 관계에 대해서 논란 중이다. 제임스 던을 중심으로 하는 성서신학자들은 초대교회에는 세례시에 성령세례가 나타났다고 주장하면서 성령세례는 2차적인 세례 가 아니라 일차적인 것이라고 주장한다. 많은 개혁파신학자들은 여기에 동의한다. 개혁파신학은 세 례를 받을 때 이미 성령을 받았으므로 이차적으로 성령세례를 받을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이것을 세 례시의 중생(Baptismal Regeneration)이라고 부른다. 이 세례시의 중생이론에 따르면 신자들은 본인이 의식하든 그렇지 않든 간에 세례시에 중생하며, 동시에 성령을 받았다는 것이다. 이런 이론은 천주 교의 성례전 교리, 즉 신부가 성례를 집전할 때 자동적으로(ex opera operato)로 은혜가 임한다는 교 리에 근거한 것이다. 원래 개신교는 성례가 자동적으로 은혜를 전달해주는 것이 아니라 신자의 믿음 에 의하여 은혜를 전달해 준다고 믿는다. 이런 점에서 개혁파의 세례시의 중생론은 개신교의 원리에 철저하지 못하다고 본다.

천주교는 세례를 받을 때 아담으로부터 내려오는 원죄를 씻김 받는다고 본다. 천주교는 세례는 원죄를 씻어주는 효과가 있으며, 따라서 유아도 세례를 받지 못하면 원죄에서 씻김을 받지 못하기 때 문에 멸망을 받는다고 가르친다. 천주교는 이런 역사는 신자가 의식하든지, 의식하지 못하든 관계없이 신비스럽게 이루어진다고 본다. 따라서 천주교의 유아세례는 원죄교리와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다. 하 지만 웨슬리안 성결운동은 인간의 내면에 있는 죄성의 파괴는 형식적인 세례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며 성령의 인격적인 역사로 인해 나타나는 중생과 성결에서 이루어진다고 믿는다. 중생때 죄성이 부분적으로 붕괴되어지며, 성결 때 온전히 변화된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성령세례와 천주교의 성례전과의 관계를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다. 천주교는 성례전은 그리스도가 세운 은총의 수단이기 때문에 인간의 인격이나 믿음에 관계없이 성령의 역사를 우리에게 전달해 준다고 믿는다. 하지만 웨슬리안 성결운동은 이런 전례주의를 반대한다. 물론 원칙적인 의미에서 성례전은 은총의 수단이다. 하지만 성결운동은 기존교회에서 전례가 은총의 수단이 되지 못하고 단지 형식으로 전락하고 만 것을 보아왔다. 따라서 그들은 성례전을 강조하기보다는 개인의 기도와 찬송과 성경읽기를 통한 하나님과 인격적인 만남을 추구하였다. 다시 말하면 성례전을 통한 간접적인 방법보다는 개인의 경건생활을 통한 보다 직접적인 방법을 택했다는 것이다. 이점에 성결운 동의 영성의 중요한 측면이다.

일부 웨슬리안 신학자들은 성결운동의 성령세례와 천주교의 견진성사가 서로 유사하다고 주장한 다. 성결운동이 성령세례를 물세례(혹은 중생)에 이은 두 번째 은혜로 보는 것과 같이 천주교는 견진 성사를 세례 다음에 주어지는 성례전으로 본다. 천주교는 세례가 신자를 교회에 받아들이는 의식이라면 견진은 실제적으로 신앙인의 삶을 살수 있도록 만들어주는 의식이라고 본다. 이런 점에서 견진은 성결과 관련이 있다. 하지만 천주교와 성결운동은 이런 외적인, 신학적인 유사성에도 불구하고 근본 적인 차이가 있다. 그것은 성령세례는 자동적으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성령세례는 물론 견진성사에도 함께 할 수 있다. 하지만 견진을 받았다고 해서 성령세례를 받았다고 말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성결운동은 성령세례는 우리가 의식하든, 못하든 주어진 것이 아니라 신자가 자신의 삶을 통 해서 분명하게 간증할 수 있는 것이라고 이해한다.

성결운동이 성결을 성령세례로 이해하는데는 매우 중요한 신학적인 특징이 있다. 오순절운동은 성령세례를 받은 일차적인 증거를 방언으로 이해한다. 이런 은사에 대한 강조는 성령의 가장 중요한 역할을 은사로 보게 하는 오류를 갖게 만들었다. 물론 필자는 은사를 부인하지 않는다. 오히려 성경에 나타난 은사는 권장되어야 하는 것이라고 이해한다. 하지만 성령의 본래적인 사역은 은사에 있다기보다는 죄인의 변화에 있다고 본다. 성령의 일차적인 역할은 우리를 새로운 인간으로 만드는 것이다. 이 런 점에서 성령세례는 성결로서 나타난다.

하지만 성결운동과 오순절운동은 다같이 성령세례를 성령의 능력이라는 관점에서 보고 있다. 이 것은 사도행전 1장의 말씀을 따른 것이다. 다시 말하면 예수님은 성령세례를 받고 능력을 얻어서 세계선교에 나가라고 말씀하셨다. 따라서 성령세례는 처음부터 선교를 위한 능력과 밀접한 관계를 갖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초기 성서학원의 목적은 성령세례를 받아서 능력있는 사역자를 만드는 것이었다. 성결교회는 성령세례는 거룩한 삶과 능력으로 나타난다고 믿었다.

하지만 성령세례가 한편으로는 성결이라는 윤리로 나타나지만 이것이 단지 윤리로 제한되는 것 은 잘못이다. 성령세례는 근본적으로 초자연적인 성령의 체험이다. 이것을 종교학자들은 거룩의 체험 이라고도 부른다. 이 거룩의 체험을 할 때 인간은 자신의 죄성을 깨닫고, 하나님 앞에 회개하며, 새로 운 삶을 살게 된다. 하지만 이런 새로운 삶의 원천은 인간의 노력이 아니라 거룩의 체험인 것이다. 이런 점에서 거룩은 일차적으로 체험이며, 이차적으로 윤리라고 말할 수 있다. 사실 많은 성결운동가들 은 자신들의 신앙과정에서 이런 체험을 경험하였다. 이것은 아마도 종교의 가장 원초적인 경험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VI. 성결에 이르는 길: 점진적인 노력과 순간적인 은혜

19세기 성결운동에 대한 가장 중요한 비판 가운데 하나가 성결의 순간적인 측면은 강조하면서 성결의 점진적인 측면은 무시했다는 것이다. 이들의 주장을 따르면 웨슬리는 점진적인 성결과 순간적 인 성결을 조화롭게 강조했는데 19세기 성결운동가들은 일방적으로 순간적인 측면만 강조했다는 것이다. 전반적으로 보아서 19세기 성결운동은 순간적인 측면을 강조한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점진적인 측면을 무시한 것은 아니다.

그러면 왜 성결교회가 순간적인 성결을 강조했을까? 그 이유는 무엇보다도 성결은 하나님의 선 물이라는 점 때문이다. 성결이 하나님이 주시는 선물이라면 그것은 순간적일 것이다. 선물은 항상 순 간적으로 받는 것이지 점진적으로 받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두 번째 이유는 성결은 믿음으로 받기 때문이다. 믿음으로 이루어지는 칭의가 순간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처럼 성결도 순간적으로 이루어진다. 세 번째는 성결은 인간의 노력의 산물이 아니기 때문이다. 성결은 덕성의 함양이 아니다. 이것은 성령 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주시는 것이다. 많은 성결운동가들은 성결이 점진적인 것이라는 주장을 진화론과 관련시켰다. 신학적 진화론자들은 성결을 점진적인 것으로 본다. 하지만 신학적 창조론자들은 성 결을 순간적인 것으로 이해한다는 것이다.

보스턴 대학교의 신약학자 다니엘 스틸은 성결의 순간적인 측면을 신약신학적으로 입증하고자 했다. 그는 신약성서에서 성결에 관련된 단어를 조사한 결과 거의가 부정과거용법을 사용하고 있다는 것을 발견하였다. 부정과거용법은 지속적이거나 습관적이거나 반복적인 행위를 지칭하지 않고, 순간적 이며, 일회적인 사건을 설명한다. 이것은 성결이 점진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순간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임을 뒷받침 해준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성결의 순간적인 측면이 가장 잘 드러난 것이 팔머의 제단신학에서이다. 팔머는 지금 까지 많은 사람들이 성결을 체험하지 못한 이유는 성결은 오랜 노력 끝에 이루어지는 것이라고 생각 하고, 성결추구를 포기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팔머는 오히려 성결은 지금, 당장 여기에서 얻을 수 있는 것이라고 주장하면서 그 방법으로 제단신학을 내세웠다. 제단신학이란 "제단이 제물을 거룩하게 만든다"는 마태복음 23장 19절에 근거하여 우리가 대제사장이 되시는 그리스도에게 우리자신을 제물 로 드리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거룩하게 만드신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필요로 하는 것은 인간의 노력이 아니라 자아의 포기이며, 이 포기는 성령으로 하여금 역사하게 만드는 것이다. 팔머는 수많은 사람 들을 제단으로 초청하여 안수하므로 성령세례, 곧 성결의 체험을 하게 하였다.

이러한 팔머식의 성결운동은 19세기 미국의 부흥운동에 잘 들어맞았다. 성결운동은 주로 부흥운 동에서 일어났으며, 부흥회는 목회와는 달라서 짧은 기간 내에 결과를 얻어야 한다. 미국의 기독교는 오랫동안 부흥운동적인 컨텍스트에서 발전하여 왔으며, 순간적인 성결의 체험은 이런 부흥회와 잘 어울리는 구조를 갖고 있다.

하지만 성결운동이 성결의 점진적인 측면을 무시한 것은 아니다. 성결운동의 주장은 인간은 성 결을 받기 위해서 노력해야 하지만 정작 성결을 주시는 분은 하나님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마치 선물 을 받는 사람이 선물을 받을 준비를 해야하는 것과 같다. 실질적으로 성결운동은 성결을 위해서 진지한 준비를 할 것을 가르쳐왔다. 그래서 이명직목사는 진정한 회개가 이루어져야 중생도 성결도 가능 하다고 보았다. 그러면 진정한 회개란 무엇인가? 이명직목사는 "첫째 자기가 죄인이라는 자각, 둘째 자기의 죄에 대한 통회, 셋째 그것을 겸손하게 고백하는 행위, 넷째 자신의 죄 값을 변상하는 회개의 열매, 다섯째 그 결과로 사죄의 확신을 갖게된다"라고 말하였다. 이것은 성결운동이 그냥 수동적으 로 기다리고만 있지 않다는 것을 보여준다. 성결신학은 중생 이후에도, 그리고 성결 이후에도 하나님 의 은혜를 유지하기 위한 인간의 노력은 필요하다고 본다.

하지만 성결운동은 성결의 체험에 있어서 은총의 수단의 사용에 대해서 별로 언급하지 않았다. 원래 성례전은 우리의 신앙생활을 돕는 은총의 수단이다. 웨슬리에게는 성례전이 매우 중요했다. 하지만 이것이 형식화되면서부터 은총의 전달은 없어지고, 단지 의식만이 남는 경우가 많이 있었다. 부흥 운동은 여기에 대한 도전으로 생긴 것이다. 여기에 영향을 받은 한국성결교회가 비전례적인 태도를 가져온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전례가 바로 행해져서 이것을 통해 신자들이 진정으로 성령의 역사를 체험하고, 삶의 변화를 가져온다면 이것은 바람직한 것일 것이다. 그러나 이런 내적인 역사가 없이 단 지 전례주의로 돌아가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생각된다.

맺는 말: 한국성결교회의 성결론의 역사적인 위치와 특징

지금까지 필자는 한국성결교회의 성결론을 보다 폭넓은 기독교신학의 관점에서 살펴보았다. 성 결은 초대교회에서부터 현대교회에 이르기까지 기독교 전통의 중요한 주제 가운데 하나였다. 그렇다면 한국성결교회의 성결론은 다양한 전통들과 어떻게 다른가?

동방교회는 성결을 신화라는 개념으로 설명한다. 하지만 서방교회의 전통에 서있는 한국성결교 회는 성결을 신이 된다는 개념보다는 죄악의 본성을 변화시켜,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시킨다는 의미로 이해한다.

천주교는 기독자의 완전이라는 용어를 강조한다. 하지만 천주교는 성직자의 윤리와 평신도의 윤 리로 나누었으며, 그것은 결과적으로 교회의 계층구조를 만들었다. 아울러서 천주교의 성결은 공로구원으로 전락할 가능성이 많이 가지고 있다.

종교개혁자 루터는 칭의의 교리는 강조하였으나 성결의 교리는 강조하지 못하였다. 칼빈은 루터 에 비해 성화를 강조했지만 인간의 육체적인 한계 때문에 이 세상에서는 온전한 성화가 가능하지 않다고 보았다. 여기에 대해서 성결은 이 세상에서 가능하며, 모든 신자들은 이것을 추구해야 한다고 주 장한 사람이 웨슬리이다.

한국성결교회는 웨슬리의 전통을 이어받고, 19세기의 성결운동을 거치면서 형성된 성결론을 주 장하고 있다. 19세기 성결운동은 성결은 한편으로는 내면적인 부패성에서의 해방이며, 이것은 성령의 세례로서 가능하고, 이 성령세례는 우리에게 능력을 주어 하나님의 사역을 감당하도록 만든다고 보았다.

19세기 성결운동에서 오순절 운동이 나왔다. 오순절운동과 성결운동은 다같이 성령을 강조한다. 하지만 성결운동은 보다 성령의 변화시키는 사역에 강조점을 둔다면 오순절운동은 보다 은사적인 측면에 강조를 둔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면 한국성결교회의 성결론의 특징은 무엇일까? 첫째, 웨슬리안 성결운동은 기독교신학의 중 심주제인 성결을 다시 강조하였다. 많은 개신교가 루터의 칭의교리를 일방적으로 수용하여 성서와 기독교신학의 중심주제인 성결을 잃어버렸는데 웨슬리안 성결운동은 이것을 다시금 회복시킨 것이다.

둘째, 웨슬리안 성결운동은 성결을 건전한 기독교신학의 전통에서 재확립하였다. 신학은 한편으 로는 신비주의에 빠져 신인합일을 주장하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도덕폐기론에 빠져 도덕을 무시하기도 한다. 하지만 한국성결교회의 성결론은 이런 양극에 빠지지 않고 성서적인 성결론을 형성하였다.

셋째, 웨슬리안 성결운동은 체험과 윤리를 잘 조화시킨 성결론을 갖고 있다. 일부 종교는 윤리를 상실한 신비적인 경험을 강조하고, 다른 종교는 초월을 상실한 딱딱한 윤리를 주장하고 있다. 하지만 성결교회는 성결이 성령세례라고 규정함으로써 성결의 윤리와 성령세례의 체험을 하나로 결합시켰다.

넷째, 웨슬리안 성결운동은 기독교인이 되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온전한 기독교인이 되는 것을 강조함으로써 목회의 지평을 확대시켰다. 물론 일차적으로는 믿음으로 얻는 구원을 전해야 하지만 여기에서 머물지 않고 온전한 구원을 추구하게 함으로써 성결교회는 성숙한 기독교를 만드는데 공헌할 수 있다.

하나님께서 성결교회를 세우신 목적은 성결의 복음을 전하게 하기 위해서이다. 성결교회는 불신자에게 구원의 은총을 전하고, 신자에게는 성결의 복음을 전할뿐 아니라, 더 나아가서 이것을 신학적 으로 연구하여 성결론이 다시금 신학의 중심주제가 되도록 해야 할 것이다.



여호와께 성결

여호와게 성결이란 용어가 성경에서 찾아보면 3구절로 소개됩니다.
세 구절은 모두 구약에서만 사용되었습니다.

출애굽기에서 3구절 그리고 스가랴서에서 1구절로 나타납니다. 
여호와께 성결이란 용어가 처음 사용된 구절은 출애굽기 28:36입니다.  

출애굽기 28:36
너는 또 정금으로 패를 만들어 인을 새기는 법으로 그 위에 새기되 「여호와께 성결」이라 하고.

출애굽기 39:30 
그들이 또 정금으로 거룩한 패를 만들고 인을 새김 같이 그 위에 「여호와께 성결」이라 새기고.



스가랴 14:20 
그 날에는 말 방울에까지 여호와께 성결이라 기록될 것이라 여호와의 전에 모든 솥이 제단 앞 주발과 다름이 없을 것이니


'성결'이란 무엇인가? 

'성결'이란 개념은 기독교 신앙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며, 이는 하나님에 대한 헌신과 도덕적 완전성을 추구하는 삶의 상태를 의미합니다. 

성경과 다양한 신학자들의 해석에 따르면, 성결은 다음과 같은 특징들을 포함합니다:

  1. 거룩함: 성결은 하나님의 거룩함을 본받고자 하는 노력을 의미합니다. 이는 도덕적, 영적 순결을 유지하는 것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뜻에 따르는 삶을 살기 위해 자신의 삶을 구별하는 것을 포함합니다. "하나님께서 거룩하시니 너희도 거룩하라"는 성경 말씀(베드로전서 1:16)에서 기인합니다.
  2. 완전성: 성결은 도덕적, 영적 완전성을 추구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는 죄악을 멀리하고 하나님의 뜻에 맞는 삶을 살아감으로써 도달할 수 있습니다. 완전성은 결코 인간의 힘만으로 이뤄질 수 없는 것이며, 하나님의 은혜와 성령의 인도하심 아래 가능합니다.
  3. 헌신: 성결은 하나님께 완전히 헌신하는 삶을 추구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삶을 살아감으로써 나타납니다. 예수님께서 주신 '가장 큰 계명'인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마태복음 22:37-39)을 실천하는 것이며, 이는 성결한 삶의 중요한 요소입니다.
  4. 성령의 역사: 성결은 성령의 내주하심과 인도하심에 의해 이루어집니다. 성령께서 신자의 마음을 변화시키고, 성결한 삶을 살 수 있도록 도와주십니다. 성령의 열매(갈라디아서 5:22-23)를 맺으며, 이는 성결한 삶의 외적 증거가 됩니다.
  5. 성화와 지속적인 성장: 성결은 성화의 과정과 연관되어 있습니다. 성화는 한 번의 사건이 아니라, 신자가 평생을 걸쳐 지속적으로 하나님께 더 가까이 나아가고 더 거룩해지는 과정을 의미합니다. 성결은 이 과정에서 지속적으로 이루어지는 영적 성장을 포함합니다.

요한 웨슬리와 같은 신학자들은 성결을 강조하며, 이는 감리교 신학의 중요한 요소로 부각되었습니다. 웨슬리는 성결을 신자들이 믿음 속에서 계속적으로 성장하고 성령의 인도하심 속에서 더 깊은 영적 삶을 추구하는 과정으로 보았습니다.

요약하자면, 성결은 거룩함, 완전성, 헌신, 성령의 역사, 성화와 지속적인 성장을 포함하는 개념으로, 이는 신자들이 하나님과의 깊은 관계 속에서 살아가며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삶을 추구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성결한 삶의 모델(디모데전서 4:6~7)

경건에 이르도록 네 자신을 연단하라 육체의 연단은 약간의 유익이 있으나 경건은 범사에 유익하니 금생과 내생에 약속이 있느니라.

정진경 원로목사님은 성결한 삶을 살았던 분입니다. 
많은 사람들에게 삶의 본을 보였고 참 깨끗한 삶을 사셨고 원칙 있는 삶을 보여주셨습니다. 
신앙인의 삶은 성결의 삶이 목적이고 성결한 삶을 추구하는 삶이 목적입니다. 
그 삶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가장 성숙한 삶입니다. 

오늘 읽은 본문은 그 성결한 삶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딤전 4장6-7절에서 사도바울은 제자 디모데에게 성결한 삶을 살라고 요구하고 있습니다. “경건에 이르도록 네 자신을 연단하라, 육체의 연단은 약간의 유익이 있으나 경건은 범사에 유익하니 금생과 내생에 약속이 있느니라.” 오늘 이 시대에는 성결은 비 인기 단어입니다. 비인기 주제입니다. 사람들은 경건한 성결한 삶 보다는 재미를 추구하고 이익을 추구하고 화려한 행복을 추구합니다. 그래서 성결 추구자는 세상에서 뒤떨어진 사람같이 보이기도 합니다. 그렇지만 인생을 길게 보면 성결을 추구하는 사람들이 진정한 성공한 인생입니다. 진정으로 인생을 풍요롭게 하고 재미와 행복을 만들어가는 삶은 성결한 삶입니다. 성결한 삶을 말하려면 다음의 몇 가지를 먼저 생각할 것이 있습니다. 

성결 - 연단의 열매 

성결은 그냥 어느 날 기도 많이 한다고 교회를 오래 다녔다고 해서 자동적으로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성결의 삶은 연단이 필요하고 훈련이 필요합니다. 성결의 모델은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은 죄가 없으시고 성결한 삶을 사셨습니다. “내가 세상을 이기었으니 너희는 담대하라”(요16:33)고 하셨습니다. 성

결은 그냥 어느 날 주어지는 것 아닙니다. 성결이 주어지지까지는 연단과 훈련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예수님도 연단을 받으셨습니다. 요단강에서 세례를 받으시고 40일 금식을 하셨습니다. 그 금식은 단식입니다. 물조차도 마시지 않는 철두철미 단식입니다. 그 후에 성령에 이끌려 광야에 가서 무서운 시험을 받으셨습니다. 예수님은 그 시험 중에서도 하나님이 주신 사역을 충실하게 감당하셨습니다. 

히브리서 4장15절을 보면 “모든 일에 우리와 똑같이 시험받으셨다”고 했습니다. 예수님도 연단을 받으시고 훈련을 받으셨습니다. 그래서 성결한 삶은 연단과 훈련의 산물인 것입니다. 사도바울은 디모데에게 그 연단을 받으라고 권고합니다. 그 말은 훈련을 받으라는 말입니다. 인격과 신앙과 경건은 어느 날 갑자기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고 훈련과 연단을 통해서 이루어집니다. 그 훈련 후에 비로소 성결이 만들어지는 것입니다.  

원로목사님은 부드러움이 있었고 따뜻함이 있었던 분입니다. 그 요소들이 성결의 요소들입니다. 그 요소들은 그냥 어느 날 주어진 것이 아닙니다. 그 분도 일생 연단을 많이 받으셨습니다. 북한에서 피난의 길을 떠났습니다. 죽을 고비도 여러 차례 경험하였고 옥에도 갔습니다. 단돈 몇 푼 들고 공부하러 가족들을 놔두고 미국으로 갔습니다. 그것이 모두 훈련입니다. 그런 훈련이 없이 어떻게 큰 인물이 될 수 있겠습니까. 큰 인물들을 보면 다 그런 고난의 훈련이 있었습니다. 그것도 모자라 큰 인물들은 육신의 질병으로 연단을 추가하여 받은 분들이 대부분입니다. 그리고 비로소 큰 인물들이 되고 성결한 인생을 살았습니다. 

다윗을 보십시오. 엄청난 훈련 코스를 다 마치고 비로소 다윗이 됩니다. 욥을 보십시오. 욥은 다윗보다 더 어려운 훈련 코스를 이수하고 마침내 성결인이 됩니다. 아브라함을 보십시오. 하나님께서 복을 주신다니까 곧 복을 주실 줄 믿고 고향을 떠납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약속하신 복은 아브라함의 생전에는 받지 못했습니다. 그가 죽은 후 500년 후에 이루어졌습니다. “네 자손이 하늘의 별처럼 땅의 모래처럼 많게 하겠다.” 그 약속은 아브라함 사후 500년 후에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끌고 광야에 나갔을 때 그때 숫자가 어른만 60만 명이었고 거기에 우양들을 이끌고 종들까지 이끌고 광야로 나아갔으니 그 모습이 마치 바다의 모래처럼 하늘의 별처럼 많게 보였을 것입니다. 그것이 아브라함 사후 500년 후에 이루어진 모습입니다. 또 요셉을 보십시오. 그도 엄청난 고된 훈련을 받고 마침내 애굽의 재상이 됩니다. 

원로목사님도 그런 연단의 과정을 거쳐서 오늘 성결한 지도자로 살다가 인생을 마감하셨습니다. 성결은 연단과 훈련을 통해서 이루어집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제자 디모데에게 “경건을 위하여 연단을 받으라”고 강권합니다. 성결한 삶은 연단을 통해서 만들어집니다. 그래서 예수님도 고된 연단을 받으셨습니다.   

성결 - 하나님 성품 닮아가는 것 

연단을 받게 되면 무엇이나 빛이 나도록 되어 있습니다. 도자기에는 무광 도자기가 있고 광택 나는 도자기가 있습니다. 무광 도자기는 불가마니 속에 들어가지 않은 것입니다. 광택 나는 도자기는 불가마니 속에 들어가서 수천도의 열에 연단을 받고 나온 것입니다. 그래서 광택이 나는 것입니다. 연단이나 훈련은 그래서 중요한 것입니다. 그 훈련을 통해서 나의 미성숙한 모습과 거친 나의 성격이 다듬어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길들여지지 않은 나의 미성숙한 자세가 연단을 통해서 하나님의 성품을 닮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사람이 성숙해지고 광택이 나는 것입니다. 

오늘도 성격과 행동과 처세와 말과 삶이 아주 어설프거나 모난 행동을 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것은 아직 미성숙해서 그렇습니다. 열매가 미성숙하면 풋 냄새가 나고 비린내가 나고 떫은 냄새가 나듯이 사람도 덜 익으면 그 모습에서 모난 행동이 나오고 말을 함부로 하고 상대방의 감정을 상하게 하고 공동체를 불화하게 만듭니다. 그러고도 자신은 그것을 모릅니다. 상대방이 자신의 말 한마디로 상처를 입은 것을 모릅니다. 덜 익어서 그렇습니다. 아주 무책임한 행동입니다. 그래서 연단이 필요한 것입니다. 연단은 사람으로 하여금 푹 익게 만듭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디모데에게 그것을 강조했습니다. “너는 말씀과 교훈으로 양육을 받으라, 경건에 이르도록 네 자신을 연단하라“(6-7)고. 

 예수님도 연단을 받으셨습니다. 신앙인은 예수 안에서 끊임없이 연단을 받고 훈련을 받아야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의 성품을 닮아가게 됩니다. 그 하나님의 성품을 닮아가는 것이 곧 성결의 생활입니다. 성결은 하나님의 성품을 닮아가는 삶입니다. 그렇게 하나님의 성결한 성품을 가진 사람은 보기만 해도 좋습니다. 푹 익었기 때문입니다. 그런 점에서 원로목사님은 그 많은 연단들을 통해서 하나님의 성품을 닮으셨습니다. 하나님의 성품은 따뜻함이고 부드러움이고 사랑이고 관용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죄에 대해 관심이 많으셨으나 용서에 대해서 더 많이 관심을 가지셨습니다. 왜냐하면 그 마음이 따뜻하였기 때문입니다. 그 마음에 사랑이 가득하였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심판의 하나님이시고 공의의 하나님이시고 무서운 책망의 하나님이지만 그런데 그 하나님은 그 보다 더 따뜻한 사랑의 하나님이셨습니다. 그래서 그 따뜻함에 공의와 법과 심판이 다 묻혀버린 것입니다. 그 마음을 닮는 생활이 성결한 삶입니다. 원로 목사님이 그렇게 따뜻한 마음과 너그러움과 풍성함과 온화함으로 살아오셨습니다. 그것이 성결한 모습입니다. 우리 신앙인의 삶의 목표가 이 성결한 삶입니다. 

연단만 받으면 누구나 되는가 

그런 것은 아닙니다. 사람마다 차원이 다 다를 수 있습니다. 모세는 하나님 곁에서 40일 동안 두 번씩이나 함께 있었습니다. 그가 산에서 내려올 때에는 얼굴에서 광채가 나서 수건으로 얼굴을 가리었을 정도였습니다. 그 정도면 성결이 완성된 것 아닙니까. 그런데 백성들이 우상을 만들어 놓고 절하며 타락한 모습을 볼 때 모세는 순간적인 혈기를 이기지 못하고 하나님이 만들어 주신 돌비를 내 던져 박살을 내 놓았습니다. 아무리 흥분해도 그렇지 그 돌이 무슨 돌인데 그것을 던져 박살을 내 놓습니까. 베드로도 도마도 유다도 주님과 함께 3년 동안이나 동행하며 훈련을 받았습니다. 그런데도 그들은 그런 실수를 범하게 되었습니다. 

바울은 3층천을 다녀온 사람입니다. 그곳은 낙원입니다. 천국입니다. 사람들이 그의 손수건만 만져도 병이 나았을 정도입니다. 그 정도면 완성된 성결인이 아닙니까. 그런데도 그는 그의 모난 성격을 절제하지 못하고 사람들과 충돌이 잦았습니다. 그래서 고민도 갈등도 많이 하였습니다. 이것이 인간의 한계이기도 합니다. 문제는 기본의 마음 바탕입니다. 인격의 바탕입니다. 온화한 심적 바탕입니다. 

빌레몬은 골로새 사람입니다. 그는 인격과 마음 바탕이 아주 온화한 사람이었다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그가 어느 날 에베소에 갔다가 바울의 전도 집회에 참석하여 회심을 하게 되고 그의 마음에 성령이 임하게 됩니다. 그 후 빌레몬이 성자가 되었고 바울은 목회하면서 어려울 때마다 그를 찾아가 그의 얼굴만 보아도 위로가 되었다고 빌레몬서에서 고백하였습니다. 그것이 마음의 인격에 성령의 함께 하심으로 주어지는 변화입니다. 원로목사님은 그런 점에서 오늘의 빌레몬이었습니다. 그분에게는 기본의 인격과 마음의 바탕이 있었습니다.     

성결 삶의 열매   

성결한 삶의 열매는 마음의 성결로 나타납니다. 성결은 마음에 따뜻함을 품게 합니다. 사람의 마음은 그래서 중요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은 거룩의 영이십니다. 그 거룩한 영이 내 안에 거주하시면 내 마음을 다스리시고 변화시키십니다. 하나님의 성품을 닮은 마음의 바탕을 이루십니다. 그래서 성결한 삶이 만들어지고 그 삶이 성령과의 교제를 이루게 하십니다. 그 성령과의 교제를 통해서 성결이 유지되고 완성되는 것입니다. 성결한 삶은 먼저 내 마음에 따뜻함과 온화함과 풍성함의 열매를 맺게 합니다. 하나님의 성품이 내 안에 조성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성결의 열매는 이렇게 마음에 맺힙니다. 

그런데 이 열매가 없으면 평화가 깨지고 불화가 자리를 잡습니다. 그리고 마음에 불화가 자리를 잡으면 되는 일이 없습니다. 자기감정에 스스로가 휘말리게 되고 아주 무서운 혼란을 가져오게 됩니다. 

여자 테니스 스타인 알프스 소녀라고 부르는 스위스의 마르틴 힝기스라는 선수는 테니스 신동이라 일컬어졌던 소녀이고 테니스 챔피언입니다. 1999년 윔블던 대회에서 세계 랭킹 1위에 오른 선수입니다. 그런데 이 선수가 어느 날 16세의 무명 선수에게 55분 만에 2:0으로 완패를 당했습니다. 그래서 그 경기가 윔블던 대회 사상 최악의 이변으로 기록되었습니다. 이 테니스 챔피언이 무명선수에게 왜 어이없이 참패를 당했는가 하면 전날 어머니와 크게 다투고 마음이 불화한 상태에서 경기에 임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거기에 또 그의 어머니가 경기 도중 자리에서 퇴장하였는데 그 모습을 목격한 이 챔피언이 순간적으로 감정이 엉망으로 뒤엉켜 버려서 정상적으로 경기를 하지 못한 것이 원인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이 챔피언은 결국 무명선수에게 무참하게 무너진 것입니다. 이 선수는 엄밀히 말하자면 무명선수에게 패한 것이 아니고 자기 자신의 기분에 패배한 것입니다. 마음은 이렇게 중요한 것입니다. 마음의 성결은 그래서 더 중요한 것입니다. 성결은 마음에 열매로 나타납니다. 

 두 번째 열매는 원만한 관계의 열매입니다. 이 성결한 삶은 삶에서 적을 만들지 않습니다. 누구나 다 친구가 됩니다. 원만한 관계를 이루고 조화력을 발휘하고 평화를 이룹니다. 산상수훈에서 주님은 “화평하게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이라”(마5:9)고 말씀했습니다. 

화평은 아무나 이루지 못합니다. 그것도 은사입니다. 성결의 열매입니다. 오늘은 불화를 야기하는 사람이 훨씬 더 많은 세상입니다. 그리고 화평을 이루는 사람은 극소수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산상수훈에서 화평을 이루는 사람이 적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화평을 이루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게 될 것이라고 선포하셨습니다. 성결은 화평케 하는 은사를 발휘하게 합니다. 그래서 그가 가는 곳 마다 화평을 조성하고 이루고 조화를 형성합니다. 

 세 번째 열매는 성결한 언어의 열매입니다. 신앙적으로 성결하고 성숙해지면 아주 뚜렷하게 변화가 생기는데 그것이 말의 변화이고 언어의 성결입니다. 말은 사람의 마음을 그대로 표현하는 외적인 표현입니다. 얼굴을 보거나 말을 들어보면 그 사람의 마음상태를 알 수 있습니다. 마음에 평화가 없으면 말이 거칠어집니다. 마음에 불만이 있으면 말에 뼈가 생기고 감정이 들어가게 됩니다. 그래서 마음에 평화가 없으면 말에도 평화가 없습니다. 

말은 참 중요한 수단입니다. 교회에서도 보면 말을 함부로 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안 해도 될 말을 해서 상대방의 마음을 상하게 하고 조금만 정화해서 하면 좋을 말을 다듬어지지 않은 채 그냥 해서 상대방의 마음을 불화하게 만드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더 큰 문제는 당사자 자신은 말을 함부로 하는 줄을 모른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상처는 상대방만 받게 됩니다. 왜 그러냐 하면 사람이 성숙하지 못해서 그렇고 성결하지 못해서 그렇습니다. 마음의 성결이나 언어의 성결은 모두 성결의 열매입니다.      

 성결은 인내와 자기절제의 산물입니다. 이 세상에서는 내가 하고 싶은 말을 다하고 살 수가 없습니다. 내 눈에 거스른 것을 다 말하다 보면 살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인내하고 자기를 절제하고 때로는 자기를 부정하기도 해야 남의 부족한 부분을 덮을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언어의 변화는 성결의 열매라고 보는 것입니다. 이런 일은 어떻게 가능한가 하면 어느 날 갑자기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고 훈련과 연단을 통해서 이루어집니다. 

그래서 본문에서 사도바울은 제자 디모데에게 “너는 예수의 좋은 일꾼이 되어 믿음의 말씀과 네가 따르는 좋은 교훈으로 양육을 받으라, 그리고 경건에 이르도록 네 자신을 연단하라, 육체의 연단은 약간의 유익이 있으나 경건은 범사에 유익하니 금생과 내생에 약속이 있느니라”고 했습니다. 

 이 세상에는 그냥 되어지는 일이 한 가지도 없습니다. 산속의 하찮은 들풀도 꽃을 피우는데 그 들풀이 꽃을 피우기까지 상당한 훈련이 있었습니다. 겨울에 추위를 이겨내는 훈련이 있었고 봄에 녹아내리는 땅을 헤집고 새싹을 내는 아픔의 과정도 있었고 여름에는 모진 더위 속에서 인내하고 연단해서 마침내 남들이 알아주지도 않는 꽃을 피우는 것입니다. 그런 연단 없이 이 세상에는 한 가지도 열매를 맺거나 이루어지는 것이 없습니다. 그래서 성결한 삶이 우리 신앙인의 삶의 목표인데 그 성결도 그냥 주어지는 것이 아니고 연단을 통해서 만들어지는 것입니다. 

 원로목사님은 성결한 분이었습니다. 그분에게 말의 따뜻함이 있었습니다. 말에 칭찬이 가득했습니다. 그것은 그 분이 성결했다는 말입니다. 성결한 삶은 하나님을 닮아가는 과정의 삶입니다. 신앙인의 삶의 최종 목표는 성결해지는 일입니다. 

그래서 본문에서 바울은 디모데에게 “경건에 이르도록 네 자신을 연단하라”고 강조하고 있습니다. 우리 모두 그 성결한 삶을 이루는 일에 힘써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우리도 성결한 삶을 흉내 내며 살아가야 합니다. 이 삶은 연단과 훈련을 통해서 주어집니다. 그것이 우리 주님이 오늘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삶의 덕목이고 우리들이 주님을 닮아가는 삶의 내용인 것입니다. 





 

서론

다윗은 최선의 준비를 다하여 하나님의 법궤를 다윗 성으로 옮기려고 하였습니다. 
하지만, 다윗의 정성과 수고에도 불구하고, 첫 번째 시도는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법궤를 하나님께서 가르쳐 주신 방법대로 옮기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소들이 뛰놀 때 웃사가 법궤를 붙들자 하나님께서 진노하시고 그를 치셨습니다. 
선한 의도였지만, 거룩에 대한 무지가 비극을 낳은 것입니다. 하나님의 거룩함은 인간의 생각과 기준을 초월합니다.

본론

오늘 본문의 말씀은 만물의 마지막 날, 곧 ‘여호와의 날’에 임할 최종적인 심판과 회복을 보여줍니다. 
열방이 예루살렘을 치러 모이지만, 여호와께서 친히 임하여 그들을 심판하십니다. 
무서운 재앙이 대적들에게 임하고, 살아남은 자들은 만군의 여호와께 나아와 경배하게 됩니다. 
오늘 본문은 그 심판의 구체적인 모습과, 심판 후에 도래할 완전한 성결의 나라, 모든 것이 여호와께 거룩하게 되는 새 시대의 영광스러운 비전을 선포하고 있습니다.

1. 만국의 예배, 초막절의 영광

하나님께서는 온 세상 만물이 하나님께 온전하고 거룩한 예배를 드리기를 원하고 계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20절 말씀입니다.

  • 스가랴 14:20, 그 날에는 말 방울에까지 여호와께 성결이라 기록될 것이라 여호와의 전에 있는 모든 솥이 제단 앞 주발과 다름이 없을 것이니

여기서 ‘성결’로 번역된 히브리어 ‘코데쉬(קֹדֶשׁ)’는 ‘분리됨, 구별됨, 봉헌됨’을 의미합니다. 본래 이 문구는 대제사장의 관(冠)에만 새겨져, 가장 거룩한 지성소에 들어가는 그의 특별한 신분을 나타냈습니다(출애굽기 28:36).

그러나 마지막 날에는, 가장 평범하고 세속적인 물건으로 여겨졌던 ‘말 방울’에까지 이 거룩한 문구가 새겨집니다. 이는 성(聖)과 속(俗)의 구분이 사라지고, 모든 영역이 하나님의 거룩한 통치 아래에 있음을 상징합니다. 우리의 삶 전체가 하나님께 드려지는 예배가 되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이러한 사실을 신약의 언어로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베드로전서 2:9)라고 선포하며, 모든 성도가 거룩한 제사장임을 확인시켜 줍니다.

한 간증 모음집에서, 환경미화원이 거리를 청소하며 “이 거리의 주인은 하나님이시기에 깨끗하게 하는 것이 저의 예배입니다”라고 고백한 것을 본 기억이 있습니다. 크게 드러나지는 않지만, 그의 빗자루는 세상의 그 어떤 화려한 장식보다 거룩한, 주님께 드려진 ‘말 방울’과도 같았습니다.

2. 말 방울에서 솥까지, 완전한 성결

만국이 하나님 앞에 거룩한 예배를 드리기를 원하시는 하나님께서는, 이어서 일상이 거룩한 예배가 되어야 한다고 다시 말씀하셨습니다. 21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 스가랴 14:21, 예루살렘과 유다의 모든 솥이 만군의 여호와의 성물이 될 것인즉 제사 드리는 자가 와서 이 솥을 가져다가 그것으로 고기를 삶으리라 그 날에는 만군의 여호와의 전에 가나안 사람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라

성전에서 제물을 삶는 데 쓰이던 ‘솥’은 제단 앞의 거룩한 ‘주발’과 같이 성물이 될 것이라고 선포합니다. 일상의 도구가 가장 거룩한 예식의 기물처럼 구별된다는 것입니다. 또한, ‘가나안 사람’이 다시는 성전에 있지 않을 것이라 말씀합니다. 여기서 ‘가나안 사람(כְּנַעֲנִי, 카나아니)’은 문자적인 혈통을 넘어 ‘상인, 장사꾼’이라는 의미를 가집니다 (잠언 31:24). 이 선언은 하나님의 집에서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고 거룩함을 더럽히던 모든 세속적이고 불결한 요소가 완전히 제거될 것을 의미합니다.

예수님께서 성전에서 장사하는 자들을 내쫓으시며 “내 집은 기도하는 집이라” (마가복음 11:17) 선포하신 사건은 이 예언의 성취를 잘 보여 주는 선언입니다. 오늘날 우리의 마음과 교회 공동체 안에 하나님보다 자신의 유익과 욕심을 앞세우는 ‘가나안 사람’은 없습니까? 한 대형 교회가 재정 비리 문제로 사회적 지탄을 받았다는 뉴스는, 오늘날 교회 안에 여전히 몰아내야 할 가나안적 요소가 무엇인지를 아프게 돌아보게 합니다.

3. 십자가로 완성된 '여호와께 성결'

스가랴가 예언한 완전한 성결의 나라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완성됩니다. 말 방울과 솥과 같은 우리의 비천하고 죄된 본질이 어떻게 ‘여호와께 성결’이 될 수 있겠습니까? 그것은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이 우리를 덮을 때에만 가능합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친히 대제사장이 되셔서 자신의 몸을 단번에 제물로 드리심으로, 우리와 하나님 사이를 가로막던 죄의 휘장을 찢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성전에서 장사꾼들을 내쫓으심으로 부패한 성전을 정화하셨고, 십자가의 죽음으로 우리 마음의 성전에 있던 모든 가나안 사람, 즉 죄와 욕망을 몰아내셨습니다. 이제 누구든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는 새로운 피조물이 되어 거룩한 하나님의 성전이 됩니다.

사도 바울은 에베소에 있는 교회를 향해 이렇게 편지를 썼습니다.

  • 에베소서 1:4,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리스도의 피가 우리를 거룩하게 하셨기에, 우리는 이제 우리의 삶 전부를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릴 수 있습니다. 오늘 하루, 우리가 매 시간마다 사용하는 스마트폰을 켤 때마다 ‘여호와께 성결’이라는 이 말씀을 떠올리며, 이 작은 기계를 통해 하나님의 거룩함을 드러내는 말과 생각과 소통을 하기로 결단합시다.

결론

여호와의 날은 악에 대한 준엄한 심판으로 시작되지만, 그 끝은 모든 것이 회복되고 거룩하게 되는 영광스러운 나라의 완성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그 심판과 회복의 정점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는 이미 ‘여호와께 성결’이라 칭함 받은 거룩한 백성입니다. 이제 우리의 일상이, 우리의 직업이, 우리의 모든 소유가 거룩한 제물이 되어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삶을 살아내야 할 것입니다.

함께 하는 기도

거룩하신 하나님, 죄로 더러워진 우리를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씻으사 ‘여호와께 성결’이라 인 쳐 주시니 감사합니다. 우리의 삶이 더 이상 세상의 것이 아니라 주님의 것임을 고백하오니, 우리의 생각과 말과 행실, 모든 영역이 주님 보시기에 거룩한 산 제사가 되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함께 할 기도

  • 우리의 일상이 주님께 드려지는 예배가 되게 하소서.
  • 마음의 성전에서 모든 세속적인 욕심을 몰아내게 하소서.
  •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에 의지하여 거룩함을 지키게 하소서.
  • 매일의 삶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하루를 시작하는 은혜를 주소서.



10월 14일(화) 스가랴 12-14장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여호와께 성결(14:20) 

그 날에는 말 방울에까지 여호와께 성결이라 기록될 것이라 여호와의 전에 모든 솥이 제단 앞 주발과 다름이 없을 것이니.

On that day HOLY TO THE LORD will be inscribed on the bells of the horses, and the cooking pots in the LORD's house will be like the sacred bowls in front of the altar.

여호와께 성결(Holy to The LORD) 코데쉬 라아도나이

출애굽기 28:36
너는 또 정금으로 패를 만들어 인을 새기는 법으로 그 위에 새기되 「여호와께 성결」이라 하고.

출애굽기 39:30 
그들이 또 정금으로 거룩한 패를 만들고 인을 새김 같이 그 위에 「여호와께 성결」이라 새기고.

스가랴 14:20 
그 날에는 말 방울에까지 여호와께 성결이라 기록될 것이라 여호와의 전에 모든 솥이 제단 앞 주발과 다름이 없을 것이니


여호와께 성결(HOLINESS TO THE LORD) 출애굽기 28:36-38

“여호와께 성결”이란 말씀에 유심하게 보라는 표시가 되어 있다. 
즉 우리 말 성경에는 「여호와께 성결」이라 되어 있고, 영어 성경인 HOLY BIBLE에는 HOLINESS TO THE LORD라고 전부가 대 문자로 써져 있다. 

여기에는 그 말씀의 중요성을 심히 강조한 것이니 그 이유는 대 문자로 써졌을 뿐 아니라, 여기에 HOLY라고 아니하고 HOLINESS라는 강조된 말로 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러한 특수성을 염두에 깊이 두고 영감의 거룩한 인도를 구하면서, 우리의 아직도 죽어 있는 육을 영생으로 살려야 할 귀한 구원 도리를 힘써 살펴 깨달아 알자.

1. 성결의 의미


성결은 신성하고 거룩하고 깨끗하다는 뜻이며 세상 생활에서는 잘 쓰여지지 않고 성경(출 19:10, 14, 22, 수 3:5, 7:13, 삼상 16:5, 대상15:12, 14, 23:13, 대하 29:5, 15, 19, 34, 30:17, 19, 24, 31:18, 35:5, 약 3:17, 4:8)과 기독교인의 생활에서만 많이 사용되고 있다. 
성결의 뜻과 같은 뜻으로 쓰여지는 말들 중에는 청결(욥 8:6, 시 24:4, 사 4:4, 마 5:8, 딤전 1:5, 딤후 1:3), 
정결(창 35:2, 레 24:7, 욥 16:17, 시 19:9, 잠 22:11, 고후 11:2), 
깨끗(삼하 22:27, 시 18:26, 24:4, 대하 29:15, 16, 18, 31, 30:18, 19, 마23:26, 딤전3:9, 딤후2:20, 21, 히 9:14, 요1서 3:3), 
순결(출 27:20, 레 24:2, 4, 6, 시 12:6, 19:8, 마 10:16) 등이 있다.

정금으로 된 패에 “여호와께 성결이라”고  새겨진 것이 대제사장 아론의 이마에 있는 관 전면에 있게 하라는 것은, 대제사장이 자신과 이스라엘 모든 백성을 위한  속죄물로 자신을 드려서(레16:6, 11, 17) 자신과 모두가 여호와 앞에 성결케 됨을 말하며, 여기의 대제사장 아론은 앞으로 오실 큰 대제사장 예수님의(히4:14) 그림자이며  그 후 예수님이 세상에 도성인신 하셔서 죄 없으신 분으로  모든 죄인을 위하여 속죄 제물로 드려져 여호와께 성결하게 바쳐지셨다.

우리의 영원한 구원을 위한 예수님의 여호와께 대한 대속적 성결의 섬김을 완전히 이루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평생에 오직 “여호와께 성결”로 살게 하기 위하심이다.
성경에는 “성결”이라는 말씀이 강조되었다. 주일날에 받는 7대복(성결의 복, 변화의 복, 왕권의 복, 부활 신앙의 복, 주님 상봉과 평강의 복, 성령 충만의 복, 계시 받음과 영안 열림의 복) 중의 첫째 복이 성결의 복이며, 또한 “오직 위로부터 난 지혜는 첫째 성결하고 다음에 화평하고■”(약3:17,18), 그리고 “■두 마음을 품은 자들아 마음을 성결케 하라”(약4:8) 등에 밝히 나타나 있다.

2. 성결해져야 될 면


1) 우리의 영혼
  우리가 예수를 구주로 믿으면 죽었던 영혼이 즉시 영생으로 중생하는 동시에 또한 영혼은 즉시 완전하고 영원히 성결케 되어 다시는 불결 됨이 없다. 이 얼마나 복되고 감사하며 기뻐할까! 순전히 값 없이 거져 받았으니(롬3:24, 엡1:6).

2) 우리의 육
  우리의 육은 마음과 육체로 구성되었으며(시73:26, 84:2) 아직도 영원한 사망에 있고(롬8:10, 고후4:10, 11), 또한 성결치 못하고 불결하다.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이라”(렘17:9). “■하물며 악을 짓기를 물 마심 같이 하는 가증하고 부패한 사람이겠느냐”(욥15:16)라고 말씀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오직 마음과 몸, 곧 행위를 하나님께 성결케 하기에 전심하여야 된다. 먼저 마음부터 그렇게 되기를 힘써야겠다. “무릇 지킬만한 것보다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잠4:23)고 말씀했다.

3. 하나님의 역사는 누구와 함께?
하나님은 무소 부재하시매 존재적으로는 누구와도 함께 계시나 역사하심 면에서는 그렇지 않고 성결한 자에게만 역사 하신다. “■너희는 스스로 성결케 하라. 여호와께서 내일 너희 가운데 기사를 행하시리라”(수3:5)고 했다. 성결한 자들을 위하여서는 기적의 역사도 하시겠다는 언약이시며 실제로 그렇게 하셨다.(수3:15-17). 그러나 범죄 하여 불결한 자들에게는 여호와께서 그대로 버려 두어 전쟁에서 패전케 하셨다. 이스라엘 자손들이 바친 물건울 인하여 범죄 하였으니, 곧 아간이 바친 물건을 인하여 그들로 아이성 싸움에서 패전케 하셨다(수7:1-5). 그 후에 그들이 통한히 스스로 회개하여 성결케 함으로서 여호와께서 역사하사 아이성을 점령케 하셨다.(수7:6-8:).      

4. 세상일에도 능력보다 도덕성이 앞이다.
우리 나라의 정치인들이나 정부의 고위직부터 하위직에까지의 형편에서 판단할 때, 많은 경우에 능력보다 도덕성을 더 중요시하는 일이 허다하다. 도덕성 저하의 내용은 주로 물질문제 그리고 남녀이성문제 등이다. 물질 면에서는 뇌물, 거짓 등이 주요 원인이다. 능력과 기능의 자격이 넉넉하나 위에 말한 그런 내용의 도덕성 상실 문제로서 그 직무의 중단이나 전인격을 매장 당하니 본인의 불행은 물론이며, 국가적으로도 크나큰 손실이다. 올 새해 지난달에 있었던 교육부 장관 겸 부총리의 임명된 이 모씨의 경우가 바로 그것이다. 그의 임명을 적극적 반대하는 단체나 인사들도 그의 능력 면에서는 다 인정하나 오직 도덕성 결여의 문제로 그렇게 되어 임명 3일도 못 되어 사임 당했다.

세상일도 이러한데 하물며 우리 기독인들이나 그 지도자들에게 있어서야 「여호와께 성결」이 얼마나 중요하고 큰 일일까! 성경에 말씀한 성결은 도덕성에 최고봉의 표시다.  

5. 교회여, 불결에서 벗어나자
오늘날 땅 위의 교회들은 거의가 다 성경적 성결을 잃고 불결케 된지 이미 오래다. 「여화와께 성결」이라고 명하신 하나님께서 얼마나 탄식하실까! “주님이시여, 아무쪼록 이 땅의 교회들을 정화시켜 성결케 하여 주시옵소서. 우리도 에스라처럼 하나님 앞에 엎드려 울며 자복하여 그 불결로 인한 부패와 타락의 죄를 깊이 찾아 회계하고 다시 성결케 하여 주시옵기를 전심 기도하자. 교회가 어찌하다 이렇게 성결을 잃게 되었나! 깊이 살펴 철저히 찾아 버리자.

1) 물질 문제의 불결
오래 전부터 세상 사람들이 흔히 말하기를 교회도 돈을 많이 좋아한다고 하니, 왜 그럴까? 교회 안에서 교역자가 돈 있는 교인들을 대우하며, 믿음 중심으로 원칙대로 세워야 할 제직, 심지어 극히 중요한 직분인 장로까지도 그렇게 하는 일이 꽤 있기 때문이며, 그 외에도 여러 가지 물질 생활의 잘못이 많다.

2) 명예 영광심의 불결
교회의 신자들 중에 명예 영광심의 많음이 세상 사람들보다 다를 바 없다고 한다. 그렇다. 장로 되기 위하여 여러 가지 비신앙적 운동까지 하고도 안되면 큰 시험까지 받아 타락조차 한다.

3) 성적 시험과 범죄의 불결
교인들간에 많고 심지어 교역자들이나 다른 지도자들간에도 있어 많이 부끄럽다.

4) 교회의 치리 부재의 불결
성도들의 잘못이나 범죄에 대하여 교회에서 하여야 할 바른 치리가 이미 오래 전부터 거이 없게 되어 교회의 불결은 점점 가속화되고 있다.

5) 기타 여러 가지 불의로 인한 불결
거짓, 수근 수근, 교만, 외식, 위선, 회칠한, 평토장한 무덤, 원칙 무시, 부모 거역, 미움, 시기, 질투, 모함, 중상, 추악, 기타 모든 불의와 악독.

6. 교회와 성도여, 절대 성결하자

1) 믿음으로 깨끗하게(사도행전 15:9)


믿음으로 저희 마음을 깨끗이 하사 저희나 우리나 분간치 아니하셨느니라.
He made no distinction between us and them, for he purified their hearts by faith. 

2) 소금으로 성결하라(출애굽기 30:35)

그것으로 향을 만들되 향 만드는 법대로 만들고 그것에 소금을 쳐서 성결하게 하고. 
and make a fragrant blend of incense, the work of a perfumer. It is to be salted and pure and sacred.



3) 말씀으로 성결하라(삼하22:31, 시12:6, 18:30, 19:8, 105:19, 119:9,140, 잠15:26, 21:8,   22:11, 30:5, 요15:3, 고후2:17, 4:2, 엡5:26, 히1:3, 벧전2:2)

4) 성결은 안에서부터(마태복음 23:26)

소경된 바리새인아 너는 먼저 안을 깨끗이 하라 그리하면 겉도 깨끗하리라. 

Blind Pharisee! First clean the inside of the cup and dish, and then the outside also will be clean.


5) 스스로 깨끗하게(이사야 1:16)

너희는 스스로 씻으며 스스로 깨끗케 하여 내 목전에서 너희 악업을 버리며 악행을 그치고.
wash and make yourselves clean. Take your evil deeds out of my sight! Stop doing wrong.

6) 예배드릴 때 성결하게(삼상16:5)
주일날엔 마음, 몸, 옷을 다 깨끗하게. 

가로되 평강을 위함이니라 내가 여호와께 제사하러 왔으니 스스로 성결케 하고 와서 나와 함께 제사하자 하고 이새와 그 아들들을 성결케 하고 제사에 청하니라.
Samuel replied, "Yes, in peace; I have come to sacrifice to the LORD. Consecrate yourselves and come to the sacrifice with me." Then he consecrated Jesse and his sons and invited them to the sacrifice.


7) 성경 공부 때 마음부터 성결하게(대상15:11-15)

8) 까마귀 싸우는 곳에 백로야 가지 마라 성난 까마귀 흰 빛을 새오나니 창파에    좋이 씻은 몸을 더럽힐까 하노라(鄭圃隱母堂). 이는 불결한 자들과 가까이 하지 말   라는 경고다(잠13:20).

9) 자신을 부단히 정리 정도하며 종신을 성결과 의의 생활로 하나님께 바치라(눅    1:75).

10) 말세 성도의 생활을 거룩하고 성결한 행실과 경건함으로 살아라(벧후3:12)

11) 성결하여 도덕의 완전자 되라(창세기 17:1, 마태복음 5:48). 
성결의 결과는 성화다.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

Be perfect, therefore, as your heavenly Father is perfect.

12) 주 예수께서 재림하실 때에 “하늘에 있는 군대들이 희고 깨끗한 세마포를 입고   백마를 타고 그를 따르더라”(요한계시록 19:14)




스가랴 14장은 종말에 관한 예언으로, '여호와께 성결'이라는 문구는
마지막 때 모든 것이 하나님께 거룩하게 구별되는 것을 상징합니다. 이 구절은 말 방울과 솥 등 모든 일상적인 물건에도 '여호와께 성결'이라고 새겨져 여호와만이 만군의 주가 되시며 모든 것이 그분께 속함을 나타낸다고 말합니다. 이 장은 재림하시는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과 심판을 묘사하며, 하나님을 경배하지 않는 자들에게는 벌이 있을 것이고 남은 백성에게는 평안이 있을 것이라고 예언합니다. 
스가랴 14장의 주요 내용
  • 여호와의 날: 마지막 때에 있을 심판의 날을 묘사합니다.
  • 예루살렘의 공격과 방어: 이방 나라들이 예루살렘을 공격하지만, 남은 백성은 끊어지지 않고 하나님이 그들을 보호하십니다.
  • 감람산의 갈라짐: 여호와의 발이 감람산에 서실 때 산이 동서로 갈라져 큰 골짜기를 만듭니다.
  • 생명의 물: 예루살렘에서 흘러나오는 생수가 동해와 서해로 흘러갈 것입니다.
  • 만왕이신 여호와: 여호와께서 천하 만국의 왕으로서 홀로 통치하시게 됩니다.
  • '여호와께 성결':
    • 말 방울: 말 방울에도 '여호와께 성결'이 기록됩니다.
    • 솥과 제단: 예루살렘에 있는 모든 솥이 제단 앞 주발과 다름없이 거룩하게 사용될 것입니다.
  • 경배하는 자: 해마다 초막절을 지키기 위해 예루살렘에 올라오는 자들에게는 복이 있을 것입니다. 올라오지 않는 자에게는 비를 내리지 않으실 것입니다. 
'여호와께 성결'의 의미
  • 일상의 성결: '여호와께 성결'이라는 문구가 말 방울과 솥 같은 일상적인 물건에도 새겨진다는 것은, 마지막 날에는 모든 피조물이 하나님께 완전히 구별되어 거룩하게 될 것임을 의미합니다.
  • 하나님만의 통치: 이는 하나님만이 홀로 통치하시며 모든 것이 그분의 주권 아래 있음을 상징합니다.
  • 신앙의 척도: 하나님을 섬기는 자와 그렇지 않은 자를 구분하는 척도가 되며, 하나님을 경배하는 자는 구원받고 그렇지 않은 자는 심판을 받게 됩니다. 



[9절] 여호와께서 천하의 왕이 되시리니 그 날에는 여호와께서 홀로 하나이실 것이요 그 이름이 홀로 하나이실 것이며.

아들 하나님의 왕 되심은 지금 부분적으로 드러나고 인정되지만, 장차 충만히, 완전히 드러나고 모든 사람들에게 인정을 받고야 말 것 입니다. 결국 그는 유일하신 지구 상의 왕이 되실 것입니다.



  • קֹ֖דֶשׁ  לַֽיהוָֽה
    Holy to the Lord
    여호와께 성결
    (출애굽기 28장 36절)
  • 이스라엘 모든 사람을 대표하는 대제사장. 그 제사장의 이마에는 "여호와께 성결"이라는 패를 붙여야 했습니다. 
    이 패가 있으므로 이스라엘이 죄로 인해 드리는 모든 성물을 하나님께서 기쁨으로 받으셨습니다.  

  • 1. 여호와께 성결
    성소에 들어가는 제사장의 의복에 대한 설명이 이제 막바지에 다다르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일반적인 옷의 형태와 함께 제사장의 이마에 금으로 된 "패"를 붙이라고 하셨는데 거기에는 "여호와께 성결"이라는 문구를 기록해야 했습니다. 
    "여호와께 성결"은 히브리어로 코데쉬 라앋도나이 
  • 2. 여호와께서 받으시게 되리라

    제사장의 이마에 "여호와께 성결"이라는 문구가 항상 있음으로 인해 백성들이 드리는 성물을 하나님께 받으시게 되었습니다(출 28:38). 

  • 이 패가 아론의 이마에 있어서 그로 이스라엘 자손의 거룩하게 드리는 성물의 건을 담당하게 하라 그 패가 아론의 이마에 늘 있으므로 그 성물을 여호와께서 받으시게 되리라.

  • It will be on Aaron's forehead, and he will bear the guilt involved in the sacred gifts the Israelites consecrate, whatever their gifts may be. It will be on Aaron's forehead continually so that they will be acceptable to the LORD. 

  • "하나님께서 받으시리라"로 해석된 문장은 히브리어로 לְרָצֹ֥ון לָהֶ֖ם  לִפְנֵ֥י  יְהוָֽה(발음: 르라촌 라헴 리프네 아도나이)인데
     רָצוֹן(발음: 라촌)이 "기쁨"이라는 의미를 포함하는 것을 고려할 때 "여호와 앞에 기쁨이 되기 위해"로 해석될 수도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성물을 받으신다는 것은 그것을 기쁘게 여기신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단순히 받고 안 받고의 문제로 해석하면 하나님의 마음을 오해할 수도 있을 듯 합니다. 
    어떤 해석을 취하든 가장 중요한 것은 "여호와께 성결"이 하나님 앞에 기쁨이 된다는 것이며 이는 곧 이스라엘 모든 백성들이 하나님께 무언가를 드릴 때 가장 먼저 고려해야 할 것이 "거룩"이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내 마음에 "여호와께 성결"이라는 패가 붙여져 있지 않으면서 하나님께 무언가 드리기만 한다면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기뻐하지 않으실 것입니다. 
    재물의 일부를 하나님께 드리기만 하면 된다고 생각하고 자신의 마음과 태도를 하나님 앞에서 여전히 더러운 상태로 유지한다면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기뻐하지도, 받으시지도 않는다는 것이지요. 여호와께 제물을 드림에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은 마음의 거룩입니다.

  • 그리스도인으로서 항상 "거룩"에 대해서 중요하게 생각할 것입니다. 
    외형적인 태도와 함께 마음의 거룩이 중요하다는 것을 누구도 부인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그렇게 알고 있어도 여전히 우리는 겉으로 보여지는 모습에 집중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주로 내가 하나님께 이것도 하고 있고 저것도 하고 있다는 식으로 우리 삶을 괜찮은 것으로 평가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 마음을 아십니다. 
    아무리 많은 것을 드려도 우리 마음이 "여호와께 성결"을 외치고 있지 않다면 하나님께서는 그 모든 것을 기뻐하시지 않을 것입니다. 
    성결과 거룩을 세세하게 정의하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다만 그 영역을 자신의 생각대로 한정하지 않고 말씀에 기록된 그대로 순종하려는 것이 요구됩니다.
     
    하나님 앞에 거룩을 유지하기 쉽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거룩을 향해 계속 나아가려는 우리의 마음을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리라 믿습니다. 
    지치지 않고 주의 말씀에 온전히 순종하는 삶이 되길 기도합니다.











성결(카도쉬)이란 단순히 거룩하라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원하시는 목적에 합당한 삶을 위하여 자신을 철저하게 구분하는 것을 말합니다.

성결(聖潔)이란 하나님의 소유로 살아가는 것이다.

성결(聖潔) / 성인 성, 깨끗할 결 
거룩하고 깨끗함 

레위기 20:26
너희는 내게 거룩할지어다 이는 나 여호와가 거룩하고 내가 또 너희로 나의 소유를 삼으려고 너희를 만민 중에서 구별하였음이니라.
You are to be holy to me because I, the LORD, am holy, and I have set you apart from the nations to be my own. 

카도쉬(qâdôwsh)  קָדוֹשׁ 스트롱번호 6918

1. 거룩한.  2. 욥 6:10. 3. 레 21:6
발음 [ qâdôwsh ]
어원  /  6942에서 유래 
구약 성경  /  116회 사용
관련 성경  /  거룩한(출 19:6, 삼상 2:2, 사 4:3).
 [명] 성민(신 7:6, 14:2, 21), 성도(신 33:3, 시 16:3), 성일(느 8:9, 10, 11), 거룩한 자(시 78:41, 사 5:19, 호 11:9), 성소(시 46:4), 
성전(시 65:4), 거룩하신자(사 12:6, 30:11, 호 11:12). 
[부] 거룩히(레 21:8, 신 23:14) 


로마서 1:4
성결의 영으로는 죽은 가운데서 부활하여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되셨으니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시니라

야고보서 4:8
하나님을 가까이 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가까이 하시리라 죄인들아 손을 깨끗이 하라 두 마음을 품은 자들아 마음을 성결케 하라

야고보서 3:17
오직 위로부터 난 지혜는 첫째 성결하고 다음에 화평하고 관용하고 양순하며 긍휼과 선한 열매가 가득하고 편벽과 거짓이 없나니

왜 말방울에 여호와게 성결이라고 하엿나

말방울에 '여호와께 성결(Holy to the Lord)'이라고 새겨진 이유는, 말방울이 달린 말과 마병 모두 하나님 앞에서 거룩하고 성결해야 함을 상기시키기 위함입니다
. 특히, 이는 하나님 통치의 완전성을 상징하는 예언적 성격의 구절로, 말의 방울까지도 모든 것이 하나님의 성물로 간주되는 궁극적인 날(예: 스가랴 14장 20절)을 나타냅니다. 이는 제사장이 쓴 패에 새겨진 구절("여호와께 성결")과 동일한 의미로, 하나님께 바쳐진 모든 것이 거룩해야 한다는 의미를 강조합니다. 

핵심 이유
  • 궁극적인 성결의 강조 : 말방울은 단순한 소음이 아니라, 그 소리까지도 하나님의 성결함을 상징하는 중요한 요소로 여겨졌습니다.
  • 하나님의 완전한 통치 : 이 예언은 하나님께서 천하의 왕이 되시는 날, 예루살렘이 평안히 서고 모든 것이 하나님의 성물이 되는 완전한 통치의 날을 묘사합니다.
  • 제사장의 의무와 연결 : 원래 제사장이 쓰는 패에 새겨진 '여호와께 성결'이라는 문구와 같은 의미로, 제사장이 하나님 앞에서 거룩하게 직무를 수행해야 함을 상기시키는 것과 같습니다.
  • 일상생활 속 거룩함 : 말방울이 단순한 생활용품이 아니라 하나님의 소유물이자 성물로서 인식되므로, 사람들의 일상생활 속에서도 거룩함이 요구된다는 점을 보여줍니다. 

말방울에까지 여호와께 성결이라

아들이신 하나님(神)이 인간의 육신을 입었다는 성육신의 사건이야말로 일상생활의 신학과 영성에 있어서 결정적인 가치를 지닐 뿐 아니라 기독교 복음과 교리에 있어 가장 중요한 잣대가 된다는 것을 이미 역설한 바 있습니다. 
저는 이런 성육신의 원리-완전한 하나님이신 분이 완전한 인간이 되셨다-가 ‘은혜의 방편’이라고 일컬어지는 두 가지 신앙의 실체, 즉 성경 성례(성례에도 두 가지 즉 세례와 성찬)에도 깃들어 있다고 생각합니다.

우선,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인 동시에 사람들의 말을 기록한 책입니다. 
하나님이 자신을 계시하여 보여주시기 위해 소위 영적인 매체(환상, 영적인 계시, 환영)만을 사용하기보다 한계가 많고 한심한 인간의 글이란 매체를 사용하신 이유가 무엇일까 생각해봅니다.

이것은 우리와 진정한 의사소통을 원하셨기 때문일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예수님의 양성교리처럼 성경이 신적인 책이라는 사실을 부정하거나 반대로 성경이 인간 저자의 작품이라는 사실을 부정하면 거기서부터 잘못된 해석, 잘못된 신학, 잘못된 영성, 잘못된 삶이 나오게 됩니다. 
특히 성경이 인간 저자의 일상적 삶과 깊이 연관되어 있으며, 일상적인 주제를 수없이 다루고 있다는 사실(아가서를 생각해보시라)을 무시하고 무조건적으로 모든 것을 영적으로 해석하려는 태도(특히 알레고리적 해석을 유일한 해석의 원리로 생각하는-그렇다고 알레고리 자체를 부정할 수는 없지만)는 교회사 속에서도 그 해악을 보였고 오늘 우리 시대에도 경계하여야 할 태도라고 단언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성경을 통해 은혜를 누리는 것은 한편으로는 은혜를 주시는 성령 자신이 성경의 저자이시기 때문이며, 다른 편으로는 그것을 우리가 누릴 수 있도록 인간적인 일상의 언어로, 일상의 정황 속에서 우리에게 다가오기 때문입니다.

다음으로 성례를 생각해봅시다. 

개신 교회는 두 가지 성례를 인정합니다. 
그것은 신앙의 출발로서의 세례신앙의 지속으로서의 성찬입니다. 

이 성례라는 일종의 드라마들을 통해 개인과 공동체가 큰 유익을, 큰 은혜를 누립니다. 
그런데 이 성례를 명령하신 주님께서 이 성례를 소위 천상적인 소재와 방식으로가 아니라 가장 일상적인 소재와 가장 일상적인 방식으로 누리도록 하셨다는 것을 놓치면 이상한 방향으로 흐를 수 있습니다.

세례에 사용된 물은 무슨 거룩한 성수가 아니었고 그저 길가다가 물이 있으면 세례를 주는 데서-사도행전의 간다게의 내시에게 빌립이 세례를 주었듯이-보듯이 그냥 물이었습니다. 
성찬에 사용된 빵과 포도주는 거룩하기 위해 금장을 두르거나 값비싼 보석을 박은 그릇이 아니라 일상적인 그릇에 담긴 일상적인 식사의 내용물이었습니다.

가장 일상적인 소재가 가장 거룩한 소재가 되도록 하셨던 것입니다. 

어떤 일상적인 소재라도 가장 거룩한 소재가 될 수 있음에 대한 스가랴 14장 20절 “그날에는 말방울에까지 여호와께 성결이라 기록될 것이라. 여호와의 전에 모든 솥이 제단 앞 주발과 다름이 없을 것이니”라는 말씀이 생각나는 대목입니다. 

주님은 가장 일상적인 소재를 가지고 우리가 신앙을 출발하고 그 신앙을 지속하는 성령의 은혜를 누리도록 하셨습니다.

가장 높으신 하나님의 아들이 가장 일상적인 삶의 자리로 오신 성육신의 신비. 가장 일상적인 도구를 사용하여 가장 거룩한 은혜를 누리게 하는 방편이 성(聖)경과 성(聖)례 속에 들어 있음을 발견합니다.






성결(聖潔)의 불

 순결(純潔) / 순수할 순, 깨끗할 결 

몸과 마음이 아주 깨끗함, 잡 것이 섞이지 않고 깨끗함 


어떤 남편이 밤새도록 술을 퍼마시고 인사불성이 되어 집에 돌아와 구토를 하고 물건을 깨부수고 난리를 피웠습니다.
다음날 아침 정신이 돌아온 남편은 지난 밤 일이 어렴풋이 생각나 "아이쿠!!! 내가 어젯밤에 무슨짓을 한 거야! 난 이제 큰일났다. 
난 죽었다." 
슬금슬금 기어서 거실로 나오니 아내가 속풀이 해장국을 끓여놓고 콧노래를 부르며 남편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뜻밖의 풍경에 아이를 가만히 불러서 물어봅니다.
"너, 엄마 왜 저렇게 기분이 좋냐?"
"어젯밤 엄마가 술취한 아빠를 침대에 눕히고 옷을 벗기려고 하는데,
'이러시면 안돼요.. 난 결혼한 남자입니다...
나는 아내가 있는 몸입니다. 안돼요.' 하고 무심결에 하는
아빠 말을 듣고 엄마가 저러시는 거에요.

성결, 순결은 오직 한 대상만을 위해 나를 바치는 것입니다.
오직 하나님을 위해 나를 바치는 것을 '성결'이라 하고, 배우자만을 위해 내 몸을 바치는 것을 '순결'이라 합니다.
부부 사이에 어떤 일도 다 용서가 되지만 바람피우는 것은 용서가 안 되는 것은 '순결의 법'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모든 죄를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용서하시지만, 단 하나 '성결'하지 못한 사람은 아예 상종도 하지 않으십니다.  
우리의 마음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성결케 되고, 예수의 피로 성결케 되며,  성령의 세례로 성결케 됩니다. 
한 영혼을 성결케 하기 위해 성부와 성자와 성령이 총동원하여 역사합니다.

그렇게 '성결'은 중요합니다.

"우리를 구원하시되 우리의 행한 바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지 아니하고

오직 그의 긍휼하심을 따라 중생의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성결의 불)으로 하셨나니"(디도서 3:5)

우리를 구원하시되 우리의 행한바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지 아니하고 오직 그의 긍휼하심을 좇아 중생의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으로 하셨나니.
he saved us, not because of righteous things we had done, but because of his mercy. He saved us through the washing of rebirth and renewal by the Holy Spirit. 


기독교는 성결의 종교입니다.
성령님께서 직접 성령의 불로 우리를 성결하게 하십니다.
성결한 사람은 이 세상 거짓과 혼합될 수 없습니다.
만약 예수 믿는다 하면서 이 세상 가치관과 기준을 따라 산다면 그것은 세상과 놀아나는 창녀이지 진짜 기독교인이 아닙니다. 



10월 13일(월) 스가랴 9-11장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네 왕이 네게 임하나니(9:9)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나니 그는 공의로우며 구원을 베풀며 겸손하여서 나귀를 타나니 나귀의 작은 것 곧 나귀새끼니라.
See, your king comes to you, righteous and having salvation, gentle and riding on a donkey, on a colt, the foal of a donkey.

네 왕이 네게 임하리니(Your King comes to you)

4428. 왕( melek)  מֶלֶךְ

1. 왕.  2. 신 33:5.  3. 사 8:21
발음 [ melek ]

어원  /  4427에서 유래
구약 성경  /  2548회 사용
관련 성경  / 왕(창 14:1, 출 1:8, 삼하 5:2, 19:11, 대상 29:23, 대하 9:8), 왕들(창 17:6,16, 삿 5:19), 임금(신 28:36, 삼하 3:17, 왕하 23:25), 군왕(시 2:2, 10).

* 4427.  מָלַךְ

1. 통치하다.  2. 왕위에 오르다.  3. 히필형 : 왕을 삼다
발음 [ mâlak ]
구약 성경 / 347회 사용 

겸손하고 평화로운 왕이 올 것을 예언합니다.
그는 공의로우며 구원을 베푸는 왕으로 오십니다.
이 왕은 군마가 아닌 어린 나귀를 타고 오십니다.
마치 초라한 행렬과 같습니다.
그러나 이 왕은 힘과 권세로 집하는 것이 아닙니다.
공의로 세상을 다스릴 것입니다.
구원으로 세상을 다스릴 것입니다.
이것은 군사력에 의한 승리가 아니라 평호와 사랑으로 세상을 정복하는 메시야를 향한 예언이라고 하겠습니다.

메시야로 오시는 왕의 특징을 세 가지로 설명할 수 있습니다.

첫째는 평화의 왕 
나귀를 타고 오는 왕은 힘으로 백성을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겸손한 마음으로 백성을 섬기는 왕을 상징합니다.

둘째는 공의와 구원의 왕
이 왕은 공의롭고 구원을 베풀며, 억압받는 이들을 해방시킬 왕을 상징합니다.

셋째는 평화의 도래
이 왕의 통치로 인해 이스라엘의 전쟁 무기가 사라지고, 세상에 평화가 깃들 것이라고 예언합니다.


네 왕이 네게 임하나니(스가랴 9:9~17)


겸손한 왕의 도래 
9시온의 딸아 크게 기뻐할지어다 예루살렘의 딸아 즐거이 부를지어다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시나니 그는 공의로우시며 구원을 베푸시며 겸손하여서 나귀를 타시나니 나귀의 작은 것 곧 나귀 새끼니라 
10내가 에브라임의 병거와 예루살렘의 말을 끊겠고 전쟁하는 활도 끊으리니 그가 이방 사람에게 화평을 전할 것이요 그의 통치는 바다에서 바다까지 이르고 유브라데 강에서 땅 끝까지 이르리라

왕께 속한 백성의 영광 
11또 너로 말할진대 네 언약의 피로 말미암아 내가 네 갇힌 자들을 물 없는 구덩이에서 놓았나니 
12갇혀 있으나 소망을 품은 자들아 너희는 요새로 돌아올지니라 내가 오늘도 이르노라 내가 네게 갑절이나 갚을 것이라 
13내가 유다를 당긴 활로 삼고 에브라임을 끼운 화살로 삼았으니 시온아 내가 네 자식들을 일으켜 헬라 자식들을 치게 하며 너를 용사의 칼과 같게 하리라 
14여호와께서 그들 위에 나타나서 그들의 화살을 번개 같이 쏘아내실 것이며 주 여호와께서 나팔을 불게 하시며 남방 회오리바람을 타고 가실 것이라 
15만군의 여호와께서 그들을 호위하시리니 그들이 원수를 삼키며 물맷돌을 밟을 것이며 그들이 피를 마시고 즐거이 부르기를 술취한 것 같이 할 것인즉 피가 가득한 동이와도 같고 피 묻은 제단 모퉁이와도 같을 것이라 
16이 날에 그들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들을 자기 백성의 양 떼 같이 구원하시리니 그들이 왕관의 보석 같이 여호와의 땅에 빛나리로다 17그의 형통함과 그의 아름다움이 어찌 그리 큰지 곡식은 청년을, 새 포도주는 처녀를 강건하게 하리라

묵상하기

1. 하나님은 시온의 딸들아 기뻐하라고 말씀한다. 시온의 딸에게 기뻐하라고 말씀하신 이유는 무엇인가? (9~10절)

2. 하나님은 메시아가 오시면 자신의 백성들에게 어떤 일이 일어날지 구체적으로 보여주신다. 그 내용은 무엇인가? (11~17절)

3. 겸손히 나귀를 타고 오시는 왕의 모습에 무엇을 느끼는가?

4. 왕이신 예수님은 이 땅에 오셔서 겸손과 섬김의 삶을 사셨다. 당신은 예수님의 모습처럼 겸손과 섬김의 삶을 사는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는가? 오늘 당신이 가져야 할 겸손과 섬김의 모습은 무엇인가?

길잡이

오늘 본문은 메시아의 도래와 그로 인한 구원과 승리에 대한 예언의 말씀이다.

· 겸손의 왕, 평화의 왕(9~10절)

시온의 딸(예루살렘 백성)에게 왕이 오시니 크게 기뻐하고 즐거이 노래하라고 선포한다. 여기서 말하는 왕은 세상을 정복하고 군림하는 왕이 아니라, 공의로우시며 구원을 베푸시는 겸손한 왕이다. 고대 근동에서 왕이 백마를 타는 것은 전쟁과 승리를 상징했다. 하지만 본문 속의 왕은 어린 나귀 새끼를 타고 오신다. 이는 그가 겸손하며, 힘과 폭력이 아닌 평화와 정의로 통치할 분임을 보여준다. 이 예언은 훗날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 나귀를 타심으로 그대로 성취되었다(마 21:1-9). 이 왕은 전쟁의 상징인 병거와 말, 활을 끊고 이방 나라에 화평을 전하며, 그의 통치는 세상 끝까지 미치게 된다. 이는 곧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한 온 인류의 화해와 평화의 복음을 예표한다.

· 구원 받은 백성의 영광(11~17절)

메시아가 오시면 하나님의 백성에게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를 구체적으로 보여준다.

물 없는 구덩이는 고통과 절망, 죽음의 상황을 상징한다. 당시 바벨론 포로 생활로 고통받던 이스라엘 백성의 형편을 나타내는 동시에, 궁극적으로는 죄와 사망에 갇혀 절망에 빠진 모든 인류의 상태를 의미한다. 하나님은 언약의 피로 말미암아 이들을 구원하실 것을 약속하신다. 이는 훗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보혈로 우리가 죄에서 해방되는 구원의 사건을 가리킨다.

하나님은 유다를 활로, 에브라임을 화살로 삼아 원수들을 치겠다고 말씀하신다. 이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원수들을 물리치고 승리하게 될 것을 보여주는 비유적인 표현이다. 이 전쟁은 인간의 힘이 아닌, 하나님이 직접 나타나셔서 싸우시는 영적인 전쟁이며, 그 결과 백성들은 양 떼처럼 안전하게 보호받고 왕관의 보석처럼 빛나는 존재가 될 것이다.

마지막 구절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축복의 풍성함을 노래한다. 곡식과 새 포도주로 소년과 처녀가 강건하게 된다는 것은 전쟁이 그치고 평화가 임하여 풍요로운 삶을 누리게 될 것을 의미한다.

왕이신 예수님은 이 땅에 오셔서 겸손과 섬김의 삶을 사셨다. 당신은 예수님의 모습처럼 겸손과 섬김의 삶을 사는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는가? 오늘 당신이 가져야 할 겸손과 섬김의 모습은 무엇인가?

기도

이 땅에 겸손의 왕으로 오신 예수님을 따라 겸손과 섬김의 삶을 살게 하소서.

삶속으로

테레사 수녀는 알바니아 태생으로, 젊은 시절 인도의 로레토 수녀회에서 교사로 사역했다. 
하지만 어느 날, 그녀는 캘커타 거리에서 죽어가는 사람들, 버려진 아이들을 보며 깊은 충격을 받았다. 
그녀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거리에서 죽어가는 사람 안에 예수님을 보았습니다. 그들을 섬기는 것이 곧 예수님을 섬기는 것이었습니다.”
그때부터 그녀는 모든 것을 내려놓고, 캘커타의 거리로 나아가 고통받는 사람들을 돌보는 삶을 시작했다. 
누가 주목해 주지 않아도, 인정받지 못해도, 그녀는 작은 일들을 위대한 사랑으로 감당했다. 
한 번은 한 기자가 그녀에게 물었다.
“수녀님이 하시는 일이 너무 작고, 너무도 미미하게 보입니다. 정말 세상이 바뀔까요?”
그녀는 이렇게 대답했다.
“우리는 모두 작은 물방울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수많은 물방울이 모이면 큰 강이 되고, 큰 강은 바다를 이룹니다. 나는 위대한 일을 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다만 작은 일을 큰 사랑으로 감당할 뿐입니다.”
그녀는 가난한 자의 벗이 되었고, 수많은 자원봉사자와 공동체가 그녀를 따르게 되었으며, 마침내 1979년 노벨 평화상을 수상하게 되었다. 
하지만 그 순간에도 그녀는 고개를 숙이며 이렇게 말했다.
“이 상은 하나님께 돌려야 합니다. 나는 다만 예수님이 하신 일을 조금 흉내 낸 것뿐입니다.”
진정한 위대함은 대단한 무엇인가를 행함이 아니라 사랑에 있음을 기억하고, 예수님이 걸어가신 사랑과 섬김의 길을 따라가길 소망해 본다.









  

스가랴 9장 9절의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시나니 그는 공의로우며 구원을 베푸는 왕이라"는 구절은
겸손하고 평화로운 왕이 올 것임을 예언합니다. 이 왕은 군마가 아닌 나귀를 타고 오며, 힘과 권세로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공의와 구원으로 세상을 다스릴 것이라고 선언합니다. 이는 군사적 승리가 아닌, 평화와 사랑으로 세상을 정복하는 메시아를 향한 예언입니다. 
주요 내용:
  • 평화의 왕: 나귀를 타고 오는 왕은 힘으로 백성을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겸손한 마음으로 백성을 섬기는 왕을 상징합니다.
  • 공의와 구원: 이 왕은 공의롭고 구원을 베풀며, 억압받는 이들을 해방시킬 것입니다.
  • 평화의 도래: 이 왕의 통치로 인해 이스라엘의 전쟁 무기가 사라지고, 세상에 평화가 깃들 것이라고 예언합니다

본장에는 이스라엘을 괴롭힌 이방 민족들에 대한 심판과 긍휼, 메시아 예언, 하나님 백성들의 승리가 나타나 있습니다. 

지명들을 세 그룹으로 나누면 다음으로 분류된다고 합니다 : (참조: http://www.skhong.org/zechariah/zechariah_09t.htm) 

- 수리아 지역 (하드락, 다메섹, 하맛)

- 베니게 지역 (두로, 시돈)

- 블레셋 지역 (아스글론, 가사, 에그론, 아스돗)

여호와의 말씀의 경고가 하드락과 다메섹과 하맛에 임합니다. 심판의 도구로 쓰임받는다는 것을 모른 채 음금을 자랑하고 지혜를 자랑하며 교만을 부리던 두로와 시돈, 도 마찬가지입니다. 

스가랴가 하나님의 말씀을 받고, 메시아의 통치와 그의 왕국에 대하여 입을 열어 “시온의 딸아 크게 기뻐하라, 예루살렘의 딸아 즐거이 노래하라”하면 메시야의 위대한 구속의 행진을 증거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공의로우시며, 구원을 베푸시며, 겸손히 아주 작은 나귀 새끼를 타고 예루살렘에 임하셨다”고 증거하였습니다.

스가랴가 그리는 메시아는 다윗 집안에서 나올 메시야의 모습과 이사야가 묘사한 고난 받는 하나님의 종의 모습(사52:13-53:12)이 한데 어우러진 평화(שָׁלוֹם)의 왕입니다. 그는 공의(צַדִּיק)로 온 세상을 통치합니다.

나귀는 사사시대에 높은 사람들이 타는 짐승입니다(삿5:10; 삿12:14). 그러나 왕국들의 임금들은 말을 탔습니다. 세상의 왕들은 높은 말에 올라타고 무지막지한 방식으로 통치하여 백성들을 억압으로 숨도 못 쉬게 합니다. 하나님의 천사들도 심판을 위해 세상에 나갈 때는 말을 타고 나갑니다(슥1:11).

왕국시대의 이스라엘에서 나귀는 보통 사람들이 타거나 짐을 실어 나르는 짐승입니다(왕상 10:28; 렘17:25; 잠21:31). 나귀는 싸움과 전쟁에 적절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메시야에 대한 기대를 표현하는 데에는 나귀만큼 적절한 타는 짐승은 없습니다.

나귀는 왕이 겸손하고 평화를 사랑한다는 것을 상징할 뿐만 아니라 오실 왕이 메시야의 위엄으로 오실 것임을 아주 잘 증거 합니다(창49:10-11). 나귀를 타고 오신 메시야는 병거와 말과, 활을 제거하고 화평을 선포하는 말씀으로 통치하실 것입니다.(사30:15-16; 31:1; 호1:7; 2:18; 14:3; 미5:10).

그는 말씀만으로도 넉넉히 평화를 이루어 보존시키고(사9:6; 11:4; 미5:5 참조), 이스라엘뿐만 아니라 온 땅의 모든 백성들에게도 그렇게 하실 것입니다(사2:4; 11:10; 42:1-4, 시72:7). 이렇게 메시아는 무력으로 대적을 잔혹하게 다루어 평화를 가져오는 왕들과 달리 화평을 전파함으로 유다와 온 땅을 다스릴 것입니다.

이에 시온 산에 거주하는 주민들이 모두 기뻐하며 소리쳐야 하는 것입니다. 진짜 왕이 오셨기 때문입니다. 힘, 군사력, 기타의 능력을 준마를 타고 행사하는 자가 아니라 오직 겸손하여 초라한 나귀에 몸을 얹고 입성하시는 진짜 왕을 즐거이 노래하며 반겨야 하는 것입니다(시33:16-19).

스가랴의 예언은 예수님에게서 성취되었습니다(마21:5; 요12:15). 예수님은 세상 사람들의 기대와 환호에 어울리는 모습이 아니라 그들의 그릇된 비전에 도전하고 환상을 깨는 모습으로 오셨습니다. 지금도 그렇게 우리 가운데 와 계실 것입니다(렘23:5-6).

겸손하고 조용하지만 측량 못할 권능으로 통치하시는 주님의 방식이 참된 공의입니다.(사9:6-7; 11:4-5; 32:1-2; 시72:3, 슥8:8) 그는 겸손(가난하다)하셔서 가난하고 낮아진 하나님 백성에 어울리셨습니다. 곤고하고 가난한 백성들이 그에게 보호를 받습니다(습3:12).

우리도 스가랴 선지자가 선포한 왕이 예수 그리스도이심을 확신합니다. 복음서에서는(마21:4-5; 요12:14-15) 슥9:9-10의 예언이 특히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으로 이루어졌다고 봅니다. 예수께서 세상에 주시는 평화는 그의 이름으로 불리는 전도자들에 의해 지금도 성취되고 있습니다(마28:18-20).

우리는 겸손(עָנִי)한 왕을 전하는 종들입니다. 그의 영이 인도하심을 따라 그가 베푸시는 공의(צֶדֶק)와 구원(יָשַׁע)을 선포하는 전도자들입니다. 우리의 증거로 말미암아 화평(שָׁלוֹם)으로 통치하시는 그의 나라가 확장될 것입니다.


기뻐할지어다(1523)

גִּיל 스트롱번호1523
1.

맴돌다

2.

기뻐 날뛰다

3.

떨다

발음 [ gîyl ]
구약 성경
45회 사용
  • 1.
    원형 맴돌다
    • a.
      원형 기뻐 날뛰다, 기뻐하다, 욥3:22, 시9:15(14), 13:6, 21:2(1), 31:8, 149:2,사29:19, 41:16, 49:13, 65:18, 욜2:23
    • b.
      원형 떨다, 전율하다, 시2:11, 호10:5.

참고 정보

문법설명

미완료형 יָנִיל

연관 단어

  • 문법설명
    미완료형 יָנִיל
    관련 성경
    ☞즐거워하다(사65:19, 대상16:31, 슥10:7), 기뻐하다(사49:13, 시9:14, 호10:5), 기쁘게 하다(잠23:24).



공의로우며(6662)

צַדִיק 스트롱번호6662
1.

의로운

2.

의로움을 지닌 사람.

3.

출9:27

발음 [ tsaddîyq ]
어원
6663에서 유래
구약 성경
206회 사용
  • 1.
    형용사 의로운, 공정한. [왕이나 재판관에게 사용] 삼하23:3, [의로운 재판장이신 하나님을 가리킴] 신32:4, 욥34:17, 시11:7, 119:137, 렘12:1, [처벌하고 징계하는 데] 대하12:6, 스9:15, 애1:18, 단9:14, [보상해 주는 데] 시112:6,129:4, 145:17, 사24:16, [약속을 성취시켜 주는 데] 느9:8, 사45:21
  • 2.
    형용사 의로움을 지닌 사람.
    • a.
      형용사 [법적인 의로움에 있어서] 출9:27,23:8, 잠18:17.
    • b.
      형용사 옳고 참된 것을 말하는 사람, [부사로] 옳게, 참되게, 사41:26.
  • 3.
    형용사 개인으로서 다른 사람에게 공정하게 해주는 사람, 잠29:7, 하나님의 법도를 순종하는 자, 창6:9, 욥12:4, 시5:13(12).

연관 단어

  • 관련 성경
    ☞의인(창6:9, 시1:5, 사3:10), 의로움(창7:1),정의(창18:25, 시37:30, 합1:4), 승리자(사49:24). [형] 의로운(창20:4, 왕상8:32, 시116:5),공의로운(신4:8, 느9:33, 슥9:9), 옳은(잠24:24, 사41:26), 바른(잠18:17).



구원을 베풀며(3467)

יָשַׁע 스트롱번호3467
1.

넓다

2.

히필형 הוֹשִׁיעַ. 미완료형 יוֹשִׁיעַ

3.

해방하다

발음 [ yâshaʽ ]
구약 성경
205회 사용
관련 성경
☞구원하다(민10:9, 삼하22:42, 렘17:14), 구원을 얻다(렘8:20, 삼하22:4, 렘4:14), 구하다(렘30:7), 돕다(삼하10:19, 대상19:12), 보복하다(삼상25:26,31), 건져내다(삿2:16), 이기게 하다(대상18:6), 보호하다(시36:6), 도와주다(신28:31). [명] 구원(사45:17, 신32:29, 습3:17), 구원자(삿3:9, 왕하13:5, 시106:21).




 




바벨론 유수(幽囚) : 그윽할 유, 가둘 수 
         
 - - 부수 囗(큰 입구 몸, 3획). 부수  幺  (작을요, 3획),


잡아 가둠 - 구금(拘禁) : 잡을 구, 금할 금

구류(句留)  : 글귀 구, 머무를 유 


시대의 소망 / 네 왕이 임하나니

“시온의 딸아 크게 기뻐할지어다 예루살렘의 딸아 즐거이 부를지어다 네 왕이 네게 임하나니 그는 공의로우며 구원을 베풀며 겸손하여서 나귀를 타나니 나귀의 작은 것 곧 나귀 새끼니라”(슥 9:9).DA 569.1

그리스도께서 탄생하시기 오백 년 전에 선지자 스가랴는 이스라엘의 왕의 오심을 이와 같이 예언하였다. 이 예언은 이제 성취될 것이었다. 아주 오랫동안 왕의 영광을 거절해 오셨던 분께서 이제 다윗의 보좌의 약속된 후계자로서 예루살렘에 임하신다. DA 569.2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승리의 입성을 하신 것은 주일 중 첫째 날이었다. 그분을 보려고 베다니에 모였던 군중들이 이제 그분이 받으실 환영을 보려는 열망으로 그분과 동행하였다. 많은 백성들이 유월절을 지키기 위하여 도성으로 가는 도중에 있었는데 이들도 예수님을 수행하고 있던 군중들과 합세하였다. 자연계도 모두 기뻐하는 것처럼 보였다. 나무들은 신록으로 물들어 있었으며 그 꽃들은 대기에 은은한 향기를 내뿜고 있었다. 새로운 생명과 기쁨이 백성들에게 활력을 주었다. 새 왕국에 대한 희망이 다시 솟아나고 있었다. DA 569.3

예루살렘에 타고 갈 목적으로 예수께서는 두 제자를 보내어 당신께로 나귀와 나귀 새끼를 끌어오라고 하셨다. 구주께서는 태어나실 때, 다른 사람들의 환대에 의존하셨다. 그분이 누우셨던 구유는 빌린 안식처였다. 수많은 언덕 위의 가축들이 다 그분의 것이지만 이제 그분께서는 왕으로서 예루살렘에 들어가실 때에 타실 짐승을 다른 사람의 친절에 의존하셨다. 그러나 당신의 제자들을 이 심부름을 위하여 보내면서 주신 상세한 지시 가운데서까지도 그분의 신성이 다시 드러났다. 그분이 예언하신 대로 “주가 쓰시겠다”는 간청이 곧 수락되었다. 예수께서는 사람이 타본 일이 없는 나귀 새끼를 쓰기로 결정하셨다. 제자들은 기뻐 열광하며 저희 옷을 짐승 위에 펴고 주님을 그 위에 앉혔다. 지금까지 예수께서는 언제나 도보로 여행하셨다. 그러므로 그분께서 지금 짐승을 타고 가기로 선택하시자 제자들은 처음에는 놀랐다. 그러나 그분께서 도성에 들어가서 친히 왕임을 선언하고 왕권을 주장하시리라는 즐거운 생각에 그들의 마음은 희망으로 빛났다. 심부름을 가면서 그들은 저희의 열렬한 기대를 예수님의 친구들에게 전달하였으며 따라서 흥분은 원근에 널리 퍼졌고 백성들의 기대는 최고조에 달했다.DA 569.4

그리스도께서는 왕의 입성에 관한 유대인의 풍습을 따르고 계셨다. 그분이 타신 짐승은 이스라엘 왕들이 탔던 것으로 메시야가 이와 같은 방법으로 당신의 나라에 임하시리라고 예언되었다. 그분께서 나귀 새끼를 타시자마자 승리의 함성이 하늘을 찌르는 듯하였다. 군중들은 그분을 저희 왕 메시야로서 환호하였다. 예수께서는 지금, 전에는 결코 허락하신 적이 없었던 존경을 받으셨다. 제자들은 이것을 그분이 보좌에 오르시는 것을 봄으로써 그들의 즐거운 희망은 실현될 것이라는 증거로 받아들였다. 군중들은 해방될 시간이 이르렀다고 확신하였다. 그들은 로마의 군대가 예루살렘으로부터 쫓겨 가고 이스라엘은 다시 한 번 독립 국가가 되는 것을 상상하였다. 모든 사람들은 행복과 흥분에 도취되었고 서로 다투어서 그분께 충성을 바쳤다. 그들은 화려한 행렬과 웅장함으로 장식할 수는 없었지만 행복한 마음으로 그분께 경배하였다. 그들은 값진 선물을 그분께 선사할 수는 없었지만 그분의 가시는 길에 저희 겉옷을 융단처럼 펴놓았고 또한 잎이 무성한 감람나무와 종려나무 가지를 큰길에 깔아 놓았다. 그들은 왕기(王旗)를 가지고 승리의 행렬을 인도할 수는 없었지만 자연계의 승리의 상징인 쭉쭉 뻗은 종려나무 가지를 꺾어 높이 흔들면서 큰 환호성과 호산나를 외쳤다. DA 570.1

그들이 행진하자 예수께서 오신다는 소식을 듣고 행렬에 참가하려고 달려 나온 자들로 말미암아 군중은 계속 불어났다. 구경꾼들은 계속적으로 군중과 섞이면서 이분이 누구시냐, 이 소동은 모두 무엇을 의미하느냐고 물었다. 그들은 모두 예수님에 대하여 들었고 그분이 예루살렘에 가시기를 기대했다. 그러나 그들은 이분이 지금까지 당신을 보좌에 앉히려는 모든 노력을 좌절시켰음을 알고 있었다. 그러므로 이분이 바로 그분임을 알자 그들은 매우 놀랐다. 당신의 나라는 이 세상 나라가 아니라고 선언하셨던 분에게 어떻게 해서 이런 변화가 일어났는지 그들은 의아해 하였다. DA 570.2

저희의 질문들은 승리의 함성으로 묵살되었다. 이 환성은 열광적인 군중으로 말미암아 반복되었다. 그것은 백성들에 의해 멀리 전달되었으며 주위의 산과 골짜기들로부터 메아리쳐 울려 왔다. 이제 예루살렘에서 온 무리들이 그 행렬과 합류하였다. 유월절을 지키려고 모인 군중 가운데 수천 명의 사람들이 예수님을 환영하려고 나왔다. 그들은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고 성가를 부르면서 그분을 환영하였다. 제사장들이 성전에서 저녁 제사를 위한 나팔을 불었지만 거기에 반응하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그리하여 관원들은 우려하면서 서로 “온 세상이 저를 좇는도다”라고 말하였다.DA 571.1

예수께서는 당신의 지상 생애에서 이전에 결코 이런 시위 행렬을 허락하신 적이 없었다. 그분은 그 결과를 훤히 내다보셨다. 이것은 그분을 십자가로 몰고 갈 것이었다. 그러나 이와 같이 자신을 구속주로서 공공연히 드러내는 것이 그분의 목적이었다. 그분은 타락한 세상에 대한 당신의 사명의 최후를 장식할 그 희생에 주의를 불러일으키기를 열망하셨다. 백성들이 유월절을 지키려고 예루살렘에 모여들고 있는 동안 원형적(原形的)인 양이신 그분은 자원하여 자신을 제물로 구별하셨다. 이후 모든 시대를 통하여 그분의 교회는 세상 죄를 위한 그분의 죽으심을 깊은 사색과 연구의 제목으로 삼아야 할 것이었다. 그것과 관련된 모든 사실은 의심의 여지없이 실증되어야 한다. 그리하여 모든 백성들의 눈이 그분을 주목하고 그분의 큰 희생에 앞서 일어난 사건들을 통하여 희생 그 자체를 확실히 볼 수 있게 해야 하였다. 그분이 예루살렘에 입성할 때에 수행하던 그런 시위 행렬이 있은 후 모든 사람들의 시선은 최후의 장면으로 향하시는 그분의 급박한 행진을 보게 될 것이었다. DA 571.2

승리의 입성과 관계된 사건들은 각 사람의 화제가 될 것이며 모든 사람의 마음에 예수님을 소개할 것이었다. 그분이 십자가에 못 박히신 후에도 많은 사람들은 이러한 사건들을 그분의 고난과 죽으심에 관련시켜 회상하게 될 것이었다. 그들은 예언을 연구하고 예수께서 메시야이심을 확신하게 될 것이었다. 그리하여 모든 나라에서 신앙에 귀의하는 개심자들이 증가될 것이었다. DA 571.3

구주께서는 당신의 지상 생애 중 이 한 번의 개선 장면에서 하늘 천사들의 호위를 받으며 하나님의 나팔로 선포되는 가운데 나타나실 수도 있으셨다. 그러나 그러한 시위 행렬은 그분의 사명의 목적과 그분의 생애를 주관했던 법칙에 배치되었을 것이다. 그분은 당신이 받아들이셨던 비천한 운명에 충실하셨다. 세상 사람들의 생명을 구하기 위하여 당신의 생명을 바칠 때까지 그분은 인류의 짐을 지셔야 하였다. DA 571.4

이 기쁨의 장면이 저희 주님의 고통과 죽음의 서곡임을 알았다면 제자들의 생애 중 최고의 날로 보였던 이 날은 침울한 구름이 드리운 그늘진 날이 되었을 것이다. 예수께서는 당신이 받으실 확실한 희생을 그들에게 여러 번 반복하여 말씀하셨지만 현재의 즐거운 개가 속에서 그들은 그분의 슬픔에 찬 말씀을 잊어버리고 다윗의 보좌에 좌정하여 이루실 그분의 번영된 통치를 내다보았다. DA 571.5

행렬에 새로 가담하는 자들이 계속되었으며 거의 예외 없이 거기에 가담한 모든 사람들은 그 상황에 고무되어 언덕마다 골짜기마다 반복해서 메아리치는 “호산나”를 드높이는 데 한몫을 하였다.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라고 부르짖는 환호성은 계속되었다.DA 572.1

세상은 일찍이 그와 같은 승리의 행렬을 본 일이 없었다. 그것은 세상의 유명한 정복자들의 행렬과 같지 않았다. 왕다운 용맹의 전리품인 신음하는 포로들의 대열도 거기에 없었다. 그러나 구주의 주위에는 죄 많은 인류를 위하여 그분께서 사랑으로 행한 수고의 영광스러운 전리품들이 있었다. 그 곳에는 예수께서 사단의 권세로부터 건져 주심으로 그 구원을 감사하여 하나님을 찬양하는 포로들이 있었다. 그분이 눈을 뜨게 한 소경이 길을 인도하고 있었다. 그분이 혀를 풀어 주신 벙어리가 가장 큰 소리로 “호산나”를 외쳤다. 그분이 고쳐 주신 절름발이들이 기쁨으로 약동하고 제일 적극적으로 종려나무 가지를 꺾어 구주 앞에서 흔들었다. 과부와 고아들은 그들에게 베푸신 그분의 자비의 행위로 인하여 예수님의 이름을 높이고 있었다. 깨끗함을 받은 문둥병자들이 그들의 깨끗한 옷을 그분의 길에 펴고 그분을 영광의 왕으로 환영하였다. 무리 중에는 그분의 음성이 죽음의 잠에서 깨워낸 자들도 있었다. 그의 몸이 무덤에서 썩고 있었던 나사로는 지금 건장한 남자의 활력으로 기뻐하며 구주께서 타신 짐승을 몰고 있었다. DA 572.2

많은 바리새인들은 이 장면을 보고 질투와 악의에 불타올라 민중들의 감정의 흐름을 돌리려고 애썼다. 그들이 지닌 모든 권력을 행사하여 백성을 침묵시키려고 하였으나 그들의 간청과 위협은 열심을 더욱 증가시킬 뿐이었다. 바리새인들은 민중들이 수적 우세로 예수님을 왕으로 추대할까봐 두려워하였다. 그들은 최후의 수단으로 군중들을 헤치고 구주께서 계시는 곳에 나아가 “선생이여 당신의 제자들을 책망하소서”라는 책망과 위협의 말을 하였다. 이와 같이 시끄러운 시위운동은 불법적이므로 당국에서 허락할 수 없다고 그들은 선언하였다.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만일 이 사람들이 잠잠하면 돌들이 소리지르리라”는 예수님의 대답을 들었을 때 그들은 침묵할 수밖에 없었다. 이 승리의 장면은 하나님께서 친히 지정하신 것이었다. 그것은 선지자에 의해 예언된 것으로 인간이 하나님의 목적을 저지하기에는 무력하였다. 만일 사람들이 그분의 계획을 수행하는 데 실패하였다면 하나님께서는 생명 없는 돌들에게 음성을 주셔서 돌들의 찬양의 환호성으로 하나님의 아들을 환영하게 하셨을 것이다. 침묵당한 자들이 뒤로 물러가자 스가랴의 예언이 많은 사람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시온의 딸아 크게 기뻐할지어다 예루살렘의 딸아 즐거이 부를지어다 보라 왕이 네게 임하나니 그는 공의로우며 구원을 베풀며 겸손하셔서 나귀를 타나니 나귀의 작은 것 곧 나귀 새끼니라.”DA 572.3

행렬이 언덕 마루에 도달하여 막 도성으로 내려가려고 했을 때 예수께서 발걸음을 정지하셨으며, 따르던 모든 무리들도 발을 멈추었다. 그들 앞에는 기울고 있는 태양의 광선을 담뿍 받아 찬란히 빛나는 예루살렘이 보였다. 모든 사람의 눈이 성전으로 끌렸다. 성전은 장엄하고 웅대한 모습으로 다른 모든 것보다 높이 치솟아, 마치 백성들을 유일하고 참되며 살아 계신 하나님께 인도하려고 하늘을 가리키는 것처럼 보였다. 성전은 오랫동안 유대 민족의 자랑이며 영광이었다. 로마인들 역시 성전의 장대함을 그들 스스로 자랑하고 있었다. 로마가 임명한 왕이 유대인과 힘을 합쳐 성전을 재건하고 단장하였다. 로마 황제도 선물을 보내어 그것을 더욱 아름답게 장식하였다. 성전은 그 견고함, 화려함, 그리고 장대함으로 세계의 경이 중의 하나가 되었다. DA 575.1

서산으로 기울어지는 해가 하늘을 황금빛으로 물들이는 가운데, 그 눈부신 영광은 성전 벽의 순백색 대리석을 비추었으며, 금으로 입힌 성전 기둥에서 번쩍거렸다. 예수님과 그분을 따르는 제자들이 서 있는 산등성이에서 볼 때 성전은 횐 눈으로 만든 큰 건물에 황금 첨탑들이 솟아 있는 모습이었다. 성전 입구에는 금, 은으로 된 포도나무가 있었는데 거기에는 가장 솜씨 좋은 예술가들이 세공하여 만든 푸른 잎사귀와 큰 포도송이들이 달려 있었다. 이 디자인은 번성하는 포도나무 같은 이스라엘을 대표하였다. 금과 은과 생생한 푸른 잎들은 진귀한 아취(雅趣)와 훌륭한 솜씨로 잘 결합되어 있었으며 그 포도나무는 희고 번쩍이는 기둥을 우아하게 감고 있었다. 그리고 금장식에는 빛나는 덩굴이 매달려 있었는데 기울고 있는 태양의 광채를 받아 마치 하늘에서 빌려온 영광처럼 빛나고 있었다. DA 575.2

예수께서 이 광경을 응시하시자 수많은 군중들은 외치던 일을 멈추고 갑자기 펼쳐진 아름다운 광경에 넋을 잃는다. 그들 스스로 느낀 그 감탄을 구주의 얼굴에서도 찾으려는 기대로 모든 사람의 시선은 그분에게로 향한다. 그러나 그들은 감탄 대신에 슬픔의 구름을 본다. 눈물이 가득한 그분의 눈과 큰 폭풍 앞에 선 나무처럼 이리저리 흔들리는 그분의 몸을 보며 한편 마치 상처받은 마음에서 나오는 듯한, 그분의 떨리는 입술에서 터져 나오는 비탄의 울음소리를 들을 때 그들은 매우 놀라고 실망한다. 천사들은 그들의 사랑하는 사령관이 고뇌의 눈물을 흘리는 이 광경을 보고 얼마나 놀랐을까! 승리의 함성을 울리고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며 그분이 통치하시기를 기쁨으로 희망하면서 영광스러운 도성으로 그분을 호위하던 기쁨의 무리들도 이 광경을 보고 얼마나 놀랐을까! 예수께서는 나사로의 무덤에서 우셨었다. 그러나 그것은 인간의 재난을 동정하는 경건한 슬픔에서였다. 그러나 이 갑작스런 슬픔은 어떤 장엄한 승리의 합창에 삽입된 통곡의 곡조와도 같았다. 모든 사람이 그분에게 경의를 표하고 있던 그 기쁨의 장면에서 이스라엘의 왕은 조용한 기쁨의 눈물이 아니라 억누를 수 없는 고뇌의 눈물을 흘리며 신음하고 계셨다. 군중들은 갑자기 침울해졌다. 그들의 만세 소리는 잠잠해졌다. 이해할 수 없는 슬픔에 동정하여 많은 사람이 눈물을 흘렸다.DA 575.3

예수님의 눈물은 자신의 고통을 예감함에서 오는 눈물이 아니었다. 바로 그분 앞에는 겟세마네가 있었는데 얼마 안 있어 그 곳에서 큰 흑암의 공포가 그분을 뒤덮을 것이었다. 양의 문도 또한 거기서 보였는데 수 세기 동안 이 문을 통하여 희생 제물이 된 짐승들이 들어갔다. 이 문이 원형이신 예수님을 위하여 곧 열릴 것이었는데 이 모든 희생 제물들은 세상 죄를 위한 그분의 희생을 가리키고 있었다. 가까이에는 다가오고 있는 그분의 고뇌의 장소가 될 갈바리가 있었다. 그러나 구속주께서 마음의 고통으로 우시고 신음하신 것은 당신이 받으실 참혹한 죽음을 생각나게 해주는 것들 때문이 아니었다. 그분의 슬픔은 이기적인 슬픔이 아니었다. 고상하고 자기희생적인 그분의 영혼은 자신이 받을 고통에 대한 생각으로 위협받지 않았다. 예수님의 마음을 찢어지게 한 것은 하나님의 아들을 거절하고 그분의 사랑을 조소하며 그분의 능력 있는 이적을 보고서도 확신하기를 거절하고 그분의 생명을 취하려는 예루살렘의 광경이었다. 예수께서는 예루살렘이 그의 구속자를 거절함으로써 어떤 상태에 있는지와, 만일 예루살렘이 그의 상처를 치료할 수 있는 유일한 분이신 당신을 받아들였더라면 어떻게 되었을 것을 보셨다. 예수께서 예루살렘을 구원하려고 오셨는데 어찌 예루살렘을 버릴 수 있으셨겠는가?DA 576.1

이스라엘은 은총 받은 백성이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성전을 거처로 삼으셨다. 그것은 “터가 높고 아름다”웠으며 “온 세계”의 “즐거”움이었다(시 48:2). 아버지가 그의 외아들을 품듯이 천 년 이상이나 그리스도께서 보호자의 보살핌과 부드러운 사랑으로 돌보신 기록이 거기 있었다. 이 성전에서 선지자들은 그들의 엄숙한 경고를 발하였다. 그 곳에서 예배자들의 기도와 합하여 향연이 하나님께로 올라가는 동안 불타는 향로를 흔들었다. 그 곳에서 그리스도의 피를 예표하는 짐승의 피가 넘쳐흘렀다. 그 곳에서 여호와께서는 당신의 영광을 시은소 위에 나타내셨다. 그 곳에서 제사장들이 제사를 드렸으며 상징과 예식의 화려한 의식이 각 시대를 통하여 계속해 내려왔다. 그러나 이 모든 일이 종말을 고하여야만 하였다. DA 576.2

예수께서는 병자와 고통당하는 자를 축복하기 위하여 여러 번 드신 그 손을 드시고, 운명 지어진 도성을 향하여 흔드시면서 슬픔과 비탄에 잠긴 어조로 “너도 오늘날 평화에 관한 일을 알았더면 좋을 뻔하였거니와…” 라고 부르짖으셨다. 구주께서는 여기서 말씀을 멈추시고 만일 예루살렘이 하나님께서 주고자 원하셨던 선물인 그분의 사랑하는 아들을 받아들였더라면 어떤 형편 가운데 처하게 되었을 것인지를 말씀하지 않으신 채 남겨 놓으셨다. 만일 예루살렘이 그의 특권이 무엇임을 알고 하늘에서 보내신 빛에 주의했었더라면, 그 도성은 하나님이 주신 능력을 힘입어 자유한 가운데 열국의 여왕으로서 번영을 자랑할 수 있었을 것이다. 예루살렘 성문에는 무장한 군사들이 서 있지 않았을 것이며 성벽에는 로마의 깃발이 휘날리지도 않았을 것이다. 만일 예루살렘이 구속주를 받아들였더라면 축복 받았을 뻔했던 그 영광스러운 운명이 하나님의 아들 앞에 나타났다. 그분께서는 예루살렘이 당신을 통하여 무서운 질병을 치료받고 속박에서 해방되어 세상의 강력한 수도로 세워졌을 것을 보셨다. 예루살렘 성벽으로부터 평화의 비둘기가 모든 민족에게 날아갔을 것이다. 예루살렘은 세상의 영광의 면류관이 되었을 것이다.DA 576.3

그러나 예루살렘에 이루어졌어야 했을 빛난 장면이 구주의 시야에서 사라진다. 그분은 예루살렘이 이제 로마의 속박 아래 있으며 하나님의 불쾌히 여기심을 입고 그분의 보응의 심판을 받을 운명에 처하게 됨을 깨달으신다. 그분은 비탄으로 끊었던 말씀을 계속하신다. “지금 네 눈에 숨기웠도다 날이 이를지라 네 원수들이 토성을 쌓고 너를 둘러 사면으로 가두고 또 너와 및 그 가운데 있는 네 자식들을 땅에 메어치고 돌 하나도 돌 위에 남기지 아니하리니 이는 권고 받는 날을 네가 알지 못함을 인함이니라.” DA 577.1

그리스도께서는 예루살렘과 그 자녀들을 구원하려고 오셨다. 그러나 바리새인들의 거만, 위선, 질투, 그리고 악의 때문에 그분께서는 당신의 목적을 성취하지 못하셨다. 예수께서는 운명 지어진 도성에 임할 무서운 징벌을 아셨다. 그분은 예루살렘이 군대로 에워싸이는 것과 포위된 주민들이 굶주려 죽는 것을 보셨으며, 어머니들은 저희 자녀들의 죽은 시체를 먹으며 부모와 자녀들은 마지막 한 입의 음식까지도 서로 빼앗아 먹는 등 타고난 애정까지도 끊임없이 계속되는 굶주림의 고통 때문에 깨지는 것을 보셨다. 그분은 당신의 구원을 거절함으로 확실히 입증된 유대인들의 완고함이 그들로 하여금 침략군에 대해서도 역시 항복하기를 거절하게 만들 것이라는 사실을 보셨다. 그분은 당신이 십자가에 달리실 갈바리 언덕에 삼림의 나무들처럼 빽빽하게 십자가가 세워지는 것을 보셨다. 그분은 그 가엾은 거민들이 고문대와 십자가에서 고통을 당하며, 아름다운 궁전은 파괴되고 성전은 황폐되며 성전의 거대한 벽들은 돌 하나도 돌 위에 첩놓이지 않고 마치 그 도성이 밭과 같이 파헤쳐질 것을 보셨다. 이 무서운 장면을 보시고 구주께서 고민하며 우신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DA 577.2

예루살렘은 그분이 돌보아 오셨던 자녀였으므로 사랑하는 아버지가 방탕한 아들에 관하여 슬퍼하는 것처럼 예수께서는 사랑하는 도성을 보고 우셨다. 내가 어찌 너를 버릴 수 있겠는가? 내가 어찌 네가 멸망에 빠진 것을 볼 수 있을 것인가? 네가 불의의 잔을 채우도록 놔두어야 할까? 한 영혼의 가치는 너무도 커서 그것과 비교할 때 온 천하는 하찮게 보인다. 그런데 여기 온 민족이 멸망당하려고 한다. 신속히 서산으로 기울고 있는 태양이 하늘에서 자취를 감출 때 예루살렘의 은혜의 날도 끝날 것이었다. 그 행렬이 감람산 고개에 머물러 있는 동안에는 아직도 예루살렘이 회개하기에 너무 늦은 것은 아니었다. 그 때에 은혜의 천사는 공의와 급히 다가오는 심판에 자리를 내어 주려고 그의 날개를 접고 황금 보좌에서 내려오고 있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위대한 사랑의 마음은 아직도 당신의 자비를 조롱하고 당신의 경고를 멸시하며 당신의 피로 저희 손을 더럽히려고 하는 예루살렘을 위하여 간청하였다. 만일 예루살렘이 회개하기만 한다면 아직 너무 늦은 것은 아니었다. 지는 해의 마지막 광선이 성전과 망대와 누각 위에 머물러 있을 동안 어떤 선한 천사가 예루살렘을 구주의 사랑으로 인도하여 그의 멸망의 비운을 돌이키지 않을까? 선지자들을 돌로 쳐 죽이고 하나님의 아들을 거절한, 아름다우나 악한 그 도성은 회개하지 않음으로 속박의 사슬로 스스로를 묶고 있었다. 그 도성에 대한 자비의 날들은 거의 다 지나갔다.DA 577.3

그러나 하나님의 성령께서는 다시 예루살렘에 말씀하신다. 그 날이 다 가기 전에 또 하나의 증언이 그리스도를 증거한다. 증거의 음성이 과거의 예언된 외침에 응답하면서 높이 울려 퍼진다. 만일 예루살렘이 그 부르심을 듣는다면, 만일 그의 문으로 들어오고 계시는 구주를 받아들인다면 아직도 그 성은 구원받을 수 있을 것이다. DA 578.1

예수께서 백성들의 큰 무리와 함께 도성에 이르고 계시다는 소식이 예루살렘의 관원들에게 전달된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의 아들을 환영하지 않는다. 그들은 군중들을 분산시키기를 바라면서 두려움 가운데 그분을 만나러 나아간다. 행렬이 감람산을 내려가려고 할 때 관원들의 제지를 받는다. 그들은 떠들썩한 기쁨의 원인을 묻는다. 그들이 “이는 누구냐?” 라고 질문할 때에 제자들은 영감의 영에 충만하여 이 질문에 대답한다. 그들은 웅변적인 어조로 그리스도께 관한 예언들을 아래와 같이 반복한다. DA 578.2

아담은 그대들에게, 이는 뱀의 머리를 상하게 할 여인의 후손이라고 말할 것이다. DA 578.3

아브라함에게 물어보라. 그는 이분이 살렘 왕 멜기세덱이요 평화의 왕이라고 그대들에게 말할 것이다(창 14:18). DA 578.4

야곱은 이분이 유다 지파의 “실로” 라고 말할 것이다. DA 578.5

이사야는 “임마누엘”,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사 7:14, 9:6)이라고 말할 것이다. DA 578.6

예레미야는 다윗의 가지요 “여호와 우리의 의”(렘 23:6)라고 말할 것이다. DA 578.7

다니엘은 그분이 “메시야”라고 말할 것이다.DA 579.1

호세아는 그분이 “만국의 하나님 여호와시라 여호와는 그의 기념 칭호니라”(호 12:5)고 말할 것이다. DA 579.2

침례 요한은 그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로다”(요 1:29)라고 말할 것이다. DA 579.3

크신 여호와께서는 그분의 보좌에서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마 3:17)라고 선언하셨다. DA 579.4

그분의 제자인 우리는, 이분은 예수요 메시야요 생명의 왕이요 세상의 구속주라고 선언한다. DA 579.5

그리고 어둠의 권세 잡은 왕도 “나는 당신이 누구인 줄 아노니 하나님의 거룩한 자니이다”(막 1:24)라는 말로 그분을 승인한다. DA 579.6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리라(스가랴 9:1-17)

7-8장까지 금식과 회복의 말씀
9장 마지막까지의 말씀은 예언과 신탁이 담겨 있는 말씀입니다. 
비록 심판에 대한 예언의 말씀이 담겨 있지만 그 밑바탕에는 희망의 깔려 있습니다. 
이는 예수그리스도의 재림을 통해서 완성될 하나님 나라를 전제로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서 구원의 왕으로 오신 그리스도가 어떤 분이신지를 배울 수 있습니다.

I. 이는 내가 눈으로 친히 봄이니라( 슥 9:1-8)

슥 9:1-2 / 여호와의 말씀이 하드락 땅에 내리며 다메섹에 머물리니 사람들과 이스라엘 모든 지파의 눈이 여호와를 우러러봄이니라

그 접경한 하맛에도 임하겠고 두로와 시돈에도 임하리니 그들이 매우 지혜로움이니라

북부 지역 견고한 성이 무너집니다. 하드락은 수리아에 속한 도시이고 다메섹은 수리아의 수도였습니다. 여호와의 말씀의 경고가 그들의 땅에 내리고 머문다는 것은 수리아가 경고대로 멸망하기까지 재앙이 그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슥 9:3-4 / 두로는 자기를 위하여 요새를 건축하며 은을 티끌 같이, 금을 거리의 진흙 같이 쌓았도다

주께서 그를 정복하시며 그의 권세를 바다에 쳐넣으시리니 그가 불에 삼켜질지라

그 말씀의 경고가 하맛에도 임할 것이요, 두로와 시돈에도 임할 것입니다. 매우 지혜롭다고 하는 두로와 시돈에도 그 말씀이 임합니다. 두로와 시돈은 예부터 무역 왕국이었습니다. 해상 무역으로 엄청난 재물을 쌓아두었습니다. 은을 티끌처럼 긁어모으고, 금을 거리의 진흙같이 쌓아놓았습니다. 두로는 작은 섬이지만 자기를 지킬 요새를 건축했습니다. 45m나 되는 난공불락의 성을 쌓아서 앗수로의 군대가 5년 동안 공격했으나 실패했습니다. 느부갓네살 왕은 13년 동안 포위하였으나 정복하지 못하였습니다.

하드락과 다메섹, 하맛, 두로와 시돈은 팔레스틴의 북부지역입니다. 그런데 이 북부 지역들은 헬라의 알렉산더 대왕에게 멸망하였습니다.

그리고 팔레스틴 남부지역에 대한 경고의 말씀이 이어집니다.

슥 9:5-6 / 아스글론이 보고 무서워하며 가사도 심히 아파할 것이며 에그론은 그 소망이 수치가 되므로 역시 그러하리라 가사에는 임금이 끊어질 것이며 아스글론에는 주민이 없을 것이며

아스돗에는 잡족이 거주하리라 내가 블레셋 사람의 교만을 끊고

팔레스틴 남부지역은 주로 블레셋 족속이 살던 도시들이었습니다. 아스글론, 가사, 에그론은 블레셋 도시들입니다. 이들은 두로와 시돈이 멸망하는 것을 보면서 무서워할 것이요, 두려워 떨 것입니다. 그리고 가사에는 임금이 끊어질 것이요, 아스글론에는 더 이상 주민이 살지 않게 될 것입니다. 실제로 알렉산더가 블레셋을 칠 때에 가사의 왕을 사로잡아 갔습니다. 백성들이 포로로 끌려가고, 다른 나라사람들을 그곳으로 이주시켰습니다. 그래서 왕의 대가 끊어지고, 아스글론에는 더 이상 사람이 살지 않게 되었습니다. 이는 그들이 이스라엘을 괴롭히고 하나님을 만홀히 여긴 죄악을 징벌하신다는 말입니다. 그렇지만 그들을 완전히 진멸하시지는 않습니다.

슥 9:7 / 그의 입에서 그의 피를, 그의 잇사이에서 그 가증한 것을 제거하리니 그들도 남아서 우리 하나님께로 돌아와서 유다의 한 지도자 같이 되겠고 에그론은 여부스 사람 같이 되리라

그들 가운데 남은 자들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어서 유다와 한 가족처럼 지내게 되고, 에그론은 여부스 사람처럼 된다고 하셨습니다. 여부스족속은 이방인들이었지만 다윗의 그 성을 정복하고 그들도 유다 백성이 되었습니다(삼하 24:16; 대상 21:15). 이처럼 그들도 하나님께로 돌아와서 언약의 백성이 된다는 것입니다. 이 일은 메시아가 와서 복음이 전파된 후에 하나님께 돌아오게 될 것에 대한 예언의 말씀입니다.  

슥 9:8 / 내가 내 집을 둘러 진을 쳐서 적군을 막아 거기 왕래하지 못하게 할 것이라 포학한 자가 다시는 그 지경으로 지나가지 못하리니 이는 내가 눈으로 친히 봄이니라

그렇다면 언약의 백성들은 어떻게 보호하십니까? 그 집을 둘러 진을 치고, 적군을 막아 거기 왕래하지 못하게 하십니다. 포악한 자들이 다시는 그 지경으로 지나가지 못하게 하십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이 그들로부터 당한 모든 고통과 억울한 일들을 친히 보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들에게 철저하게 갚아주시는 것입니다. 실제로 알렉산더가 팔레스틴 지역을 정복할 때 유일하게 이스라엘 지역만 살아남았습니다.

II. 나귀타고 오시는 겸손하신 구원의 왕(슥 9:9-13)

슥 9:9-10 / 시온의 딸아 크게 기뻐할지어다 예루살렘의 딸아 즐거이 부를지어다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시나니 그는 공의로우시며 구원을 베푸시며 겸손하여서 나귀를 타시나니 나귀의 작은 것 곧 나귀 새끼니라

내가 에브라임의 병거와 예루살렘의 말을 끊겠고 전쟁하는 활도 끊으리니 그가 이방 사람에게 화평을 전할 것이요 그의 통치는 바다에서 바다까지 이르고 유브라데 강에서 땅 끝까지 이르리라

시온의 딸, 예루살렘의 딸이란 딸처럼 아끼고 사랑하는 택한 백성을 가리킵니다. 그들에게 크게 기뻐하고, 즐겁게 노래를 부르라고 외치고 있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왕이 오신다는 것입니다. 이는 나라가 회복되고, 주권이 회복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크게 기뻐하고 즐거이 노래를 부르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들에게 임하는 왕은 어떤 왕입니까? 그 왕은 그는 공의로우시고, 구원을 베푸시는 왕이십니다. 나귀 새끼를 타고 오실 만큼 겸손한 왕이십니다. 그리고 그 왕이 세우시는 왕국은 어떤 나라입니까? 하나님께서 에브라임에서 병거를 없애고, 예루살렘에서 군마를 없애며, 전쟁할 때에 쓰는 활도 다 꺾으신다고 했습니다. 즉 화평의 복음을 전하실 겸손과 평화의 왕이십니다. 그래서 그의 통치가 바다에서 저 바다까지 이르고, 유프라테스 강에서 땅 끝까지 이르게 됩니다. 그리고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님을 왕으로 모시고 사는 왕국 시민들입니다. 예수님을 본받아 사랑과 겸손으로 섬기는 하나님 나라 시민들입니다.

III. 왕관의 보석같이 빛나리로다(슥 9:11-17)

하나님께서는 시내 산에서 언약의 말씀과 이스라엘 백성에게 피를 뿌림으로 언약을 맺으셨습니다. 즉 언약이란 맹세로 보증하신 약속입니다. 그리고 이 언약의 피는 구원의 왕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세우실 영원한 새 언약이기도 합니다.

9:11-13  

또 너로 말할진대 네 언약의 피로 말미암아 내가 네 갇힌 자들을 물 없는 구덩이에서 놓았나니.
갇혀 있으나 소망을 품은 자들아 너희는 요새로 돌아올지니라 내가 오늘도 이르노라 내가 네게 갑절이나 갚을 것이라.
내가 유다를 당긴 활로 삼고 에브라임을 끼운 화살로 삼았으니 시온아 내가 네 자식들을 일으켜 헬라 자식들을 치게 하며 너를 용사의 칼과 같게 하리라.

그러므로 아직도 이스라엘로 돌아오지 않고 바벨론에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 요새로 돌아오라고 호소하십니다. 요새는 예루살렘, 곧 하나님 자신이 요새가 되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전쟁의 선두에 서서 진두지휘하시겠다는 것입니다. 다윗에게 힘을 주시어 골리앗을 이기게 한 것과 같이 미약한 자들에게 힘을 주어 승리하게 하십니다.  

9:14-17 
여호와께서 그들 위에 나타나서 그들의 화살을 번개 같이 쏘아내실 것이며 주 여호와께서 나팔을 불게 하시며 남방 회오리바람을 타고 가실 것이라.
만군의 여호와께서 그들을 호위하시리니 그들이 원수를 삼키며 물맷돌을 밟을 것이며 그들이 피를 마시고 즐거이 부르기를 술취한 것 같이 할 것인즉 피가 가득한 동이와도 같고 피 묻은 제단 모퉁이와도 같을 것이라. 
이 날에 그들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들을 자기 백성의 양 떼 같이 구원하시리니 그들이 왕관의 보석 같이 여호와의 땅에 빛나리로다.

그의 형통함과 그의 아름다움이 어찌 그리 큰지 곡식은 청년을, 새 포도주는 처녀를 강건하게 하리라

하나님은 우리가 당하는 모든 억울함과 원통함을 친히 보시고 기억하십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마지막 날에 모든 악의 세력을 멸하시고 만왕의 왕, 만주의 주로 이 세상을 통치하실 것입니다. 
그날에 예수를 믿는 우리도 주님이 쓰신 왕관에 박힌 보석과 같이 여호와의 땅에서 빛날 것을 믿고 기대하며 현실에서의 어려움과 고통을 견딜 수 있는 힘을 공급받아야 하겠습니다.




10월 11일(토) 스가랴 5-8장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진실과 화평을 사랑하라(8:19)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노라 사월의 금식과 오월의 금식과 칠월의 금식과 시월의 금식이 변하여 유다 족속에게 기쁨과 즐거움과 희락의 절기가 되리니 오직 너희는 진실과 화평을 사랑할찌니라.
This is what the LORD Almighty says: "The fasts of the fourth, fifth, seventh and tenth months will become joyful and glad occasions and happy festivals for Judah. Therefore love truth and peace."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노라 사월의 금식과 오월의 금식과 칠월의 금식과 시월의 금식이 변하여 유다 족속에게 기쁨과 즐거움과 희락의 절기가 되리니 오직 너희는 진실과 화평을 사랑할찌니라 

"사월 금식"은 예루살렘이 느부갓네살의 정복을 당한 사건을 기념하는 금식
"오월 금식"은 성전을 불사른 사건을 기념하는 금식
"칠월 금식"은 그달리야 총독의 피살 사건을 기념하는 금식 
"시월 금식"은 예루살렘이 포위된 사건을 기념하는 금식 

성서와 유대 전통 금식

성서속의 인물들은 여려 가지 이유들을 가지고 금식을 하였다. 
다윗은 밧세바와의 간음을 통해 태어난 아기가 사경을 헤매고 있을때 혹이라도 하나님께서 살려주시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7일 동안 금식하며 기도를 하였다(삼하 12장). 
느헤미야는 훼파된 예루살렘의 중건이 진행되지 않고 있다는 비보를 듣고 수일 동안 슬퍼하며 금식 기도를 하였다(느 1장). 
개인적인 이유뿐 아니라 왕의 죽음 (삼상 31:13; 삼하 1:12). 
전쟁 (삿 20장), 
전 국민의 회개 (삼상 7:6; 욘 3장) 를 촉구하며, 
그리고 하나님의 도우심을 바라면서 (에스더 4:16) 집단적인 금식 기도를 하기도 하였다.

특별히 구약 성서는 국가적으로 정해진 금식일에 대한 언급을 한다. 

예를 들어, 

렘 36:6에는 “너는 들어가서 내가 말한 대로 두루마리에 기록한 여호와의 말씀을 금식일에 여호와의 성전에 있는 백성의 귀에 낭독하고...” 라고 기록되어 있고, 

요엘 1:14 에도 “너희는 금식일을 정하고 성회를 선포하여...” 

스가랴 7:5와 8:19에는 “칠십년 동안 오월과 칠월에 금식하고...사월의 금식과 오월의 금식과 칠월의 금식이 변하여...” 라고 기록되어 있다. 

또한, 대속죄일에도 금식을 하였을 가능성이 있다. 

“너희는 스스로 괴롭게 하고” 라는 표현이 두번 (레 16:29,31) 등장하는데 이는 금식과 직접적으로 관련 있는 표현들이다. 

스가랴서에서 명한 사월, 오월 그리고 칠월 금식은 예루살렘 성전 파괴와도 관련성이 있다. 

4월 금식은 주전 587년 예루살렘 성이 바벨론에 의해 포위된 때 (왕하 25장)를 기억하며, 

5월 금식은 같은 해 예루살렘 성전이 파괴된 때 (왕하 25:8-9)를 기억하며, 

7월 금식은 바벨론이 유대 땅을 관활하도록 세운 그달리아의 죽음 (왕하 25:22-26)을 애도하며 국가적으로 금식을 하였다. 
물론 7월 금식은 대속죄일 금식일과도 직접적으로 관련이 있다. 

신약에서 금식은 예수와 바리새인들 사이의 논쟁 거리가 되기도 하였다. 
전통적으로 바리새인들은 일주일에 이틀 (월요일, 목요일)을 금식하였다. 
“요한의 제자들과 바리새인들이 금식하고 있는지라” (막 2:18)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눅 18:12) 라는 표현들을 통해 금식은 유대 종교인들의 삶의 일부분이었음을 엿볼 수 있다. 

유대인들이 금식을 하였던 여러 이유들 중에는 이런것들도 있다. 

우기철에 비가 내리지 않는 경우 유대인들은 금식을 통해 비 내림을 간구하기도 하였고, 쿰란 공동체의 경우에는, 소수 학자들의 견해이긴 하지만, 금요일날 정기적인 금식을 하기도 하였다고 한다. 
이유는 안식일이 끝나는 토요일 저녁까지 화장실을 가지 않기 위해서였다고 한다. 

안식일 (토요일)에는 금식을 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안식일은 기쁨의 날이기에 이날은 공동체 예배 모임과 가족 모임을 갖고 금식이 아닌 즐거운 식탁 교제를 하였기 때문이다. 

어떤 랍비들은 안식일날 식사를 더 맛있게 하기 위해 금요일 오후부터는 금식을 하라고 권하기도 하였다. 

오늘날 유대 종교인들은 일곱번의 공식적인 금식을 한다.

1. 대속죄일 (욤키푸르) : 새해를 맞이하고 나서 10일째 되는 날. 이 날은 공휴일이며 공적인 용무 ( public work)를 위한 차량을 제외하고는 차량 통행을 전면 금지하고, 텔레비젼 방송도 나오지 않는다. 

2. 장자들의 금식일 : 이 금식은 첫 아들들만 금식하는 것으로 출애굽때 장자들이 구원받은 것을 기념하는 금식으로 유월절 바로 전날 금식을 한다. 

3. 예루살렘이 바벨론에 의해 포위된 날 : 주전 587년 느부갓네살이 예루살렘을 포위한 날을 기억하며 금식을 한다. 

4. 예루살렘 성벽이 바벨론에 의해 파괴된 날: 유대력으로 4월에 해당하는 달 (타무즈 17일)로 금식을 한다. 

5. 예루살렘 성전 파괴일 : 대속죄일 다음으로 중요한 금식일로 제 1 & 2 성전 파괴일을 기억하며 금식한다. 
                                         전통적으로 유대인들은 제 1 성전과 2 성전 파괴가 동일한 날 행해졌다고 믿고 있다. 

6. 그달리야 암살일 : 왕하 25장에 나오는 그달리야가 암살 당한 사건을 기억하며 금식을 한다. 

7. 부림절 하루 전날 금식 : 아드르 13일 (2월이나 3월중) 부림절기 하루 전날 금식을 한다. 



이 네 가지 금식절은, 바벨론에 포로된 유대인들이 바벨론에서 지키던 것들입니다. 
이제 저들이 하나님의 은혜로 본국에 돌아와서는 그 금식을 지키지 않고 희열의 기회로 가진다. 

너희는 진실과 화평을 사랑하라 

- 진실은 진정한 이스라엘의 특징이다(요 1:47). 
그리고 화평도 하나님의 자녀(참 이스라엘)된 증표이다(마 5:9). 
이 말씀은, 재건된 이스라엘 백성의 특징을 말해 주지만 겸하여 신약 시대 새 이스라엘의 특징을 예언하기도 한다.


진실(571) 에메트 Truth   

אֶמֶת 스트롱번호571
1.  확고함.  2. 성실성.  3. 수 2:12.
발음 [ ’emeth ] 
어원 /  539에서 유래 
구약 성경 / 127회 사용
관련 성경 / 바름(창 24:48), 진실함(출 18:21, 렘 42:5), 확실함(신 17:4, 잠 11:18), 참됨(신 22:20, 단 10:1), 충성됨(대하 32:1), 진정함(느9: 13), 성실함(시54:5), 충실함(사16:5), 견고함(사 39:8), 옳음(사43:9). [부] 분명히(렘32:41), 참으로(삿9:15), 진실히(삼상12:24, 왕상2:4, 겔18:8), 성실히(시132:11, 잠29:14). [명] 성실(창24:27, 왕상3:6, 시71:22), 진실(왕하20: 3, 시111:7), 진리(창32:10), 시57:3, 단10: 21), 성실함(창47:29), 참(신13:14, 대하15:3, 렘 10:10), 진실함(수24:14).

539.  아만( ’âman)  אָמַן

1. 지속하다.   2. 팔로 지탱하다.   3. 아이를 운반하다. 
발음 [ ’âman ]

련 성경 /  양육자(룻4:16), 유모(삼하4:4), 양부(사 49:23), 충성된 자(삼하20:19, 시101:6, 욥12: 20), 충실한 자(시12:1), 충성(잠27:6), 의지 (욥29:24), 믿는 자(사28:16), 성실한 자(시 31:23). [동] 자라다(애4:5), 보존되다(삼하 7:16), 교육하다(왕하10:1,5), 충성하다(시 78:8), 성실하다(시78:37), 확실하다(시93: 5, 사55:3), 신실하다(잠11:13, 호11:12, 사49:7), 진실하다(창42:20, 사8:2), 안기다(사60:4), 충성되다(민12:7), 오래다(신28:59), 충실하다(삼상2:35), 견고하다(삼상2:35, 왕상 11:38, 사33:16), 세움을 입다(삼상3:20), 든든하다(삼상25:28), 충직하다(느13:13), 굳게 세우다(시89:28), 단단하다(사22:25), 믿다(창15:6, 왕상10:7, 신1:32), 확신하다(신 28:66), 바라다(욥15:22, 24:22), 의탁하다 (욥39:12), 신뢰하다(대하20:20).  
구약 성경  / 100회 사용


화평(7965) 샬롬 Peace   שָׁלוֹם

1. 온전한.  2. 창 43:27.  3. 렘 13:19.  
발음 [ shâlôwm ]


어원  /  7999에서 유래 
구약 성경
237회 사용
  • 관련 성경 / 평안한(창29:6, 렘12:5, 슥8:12), 친한(렘20:10), 화평한(왕상2:13, 에9:30), 화목한(시55:20, 옵1:7), [명] 안심(창43:23), 안부(창43:27), 문안(출18:7, 삼상17:22), 화평(신20:11), 화친(왕상20:18), 평강(삼상25:6, 대상12:18), 친목(왕상5:12), 안위(에10:3), 형통함(시73:3), 평화(레26:6, 신20:10), 평강(민6:22, 삼상16:4), 평안(신23:6, 삼상20:21), 화평(삿4:17, 시28:3), 안부(삼하11:7, 에2:11),태평(왕상2:5, 왕하20:19), 평안함(시35:27),친구(렘38:22). [부] 평안히(창15:15, 삼상1:17, 겔34:25), 평화로이(대상12:17), 안전히(사41:3), 온전히(렘13:19), 편안하게(창37:4).

  • 사랑하다(157) 아하브()


    אָהַב 스트롱번호157
    1. 좋아하다.  2. 사람을 사랑하다.  3. 창 22:2.
    발음 [ ’âhab ]
    구약 성경  /  208회 사용 
     
    관련 성경 /  사랑하다(창22:2, 신10:12, 잠19:8), 즐기다(창27:4,14), 좋아하다(시11:7, 슥8:17, 호 10:11), 좋게 여기다(렘5:31), 기뻐하다(호4: 18, 암4:5), 사랑을 입다(잠8:17), 사모하다 (시34:12), 사랑스럽다(삼하1:23), 사랑 받다 (신21:15,16). [명] 사랑(잠17:17, 호3:1), 정든자(겔16:33,36,37), 사랑하는 자(삼하19:6, 시40:16, 애1:19), 친구(에5:10, 잠14:20, 렘 20:4).





    이것저것

    역사 관련 명언 30가지

    by 커피 중독자 2024. 6. 29.

    역사는 우리의 과거를 이해하고, 현재를 살아가며,

    미래를 준비하는 데 중요한 교훈을 제공합니다.

    역사 속 인물들이 남긴 명언들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오늘날 우리에게도 깊은 영감을 줍니다.

    오늘은 역사와 관련된 30가지 명언을 소개하겠습니다.

    이 명언들을 통해 역사의 지혜를 되새기며,

    우리의 삶에 적용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1.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 - 윈스턴 처칠

    2. "역사는 반복된다. 한 번은 비극으로, 두 번째는 희극으로." - 카를 마르크스

    3. "과거를 모르는 사람은 그 과거를 반복할 수밖에 없다." - 조지 산타야나

    4. "역사란 현재와 과거의 끊임없는 대화다." - E. H. 카

    5. "역사는 승리자에 의해 쓰여진다." - 나폴레옹 보나파르트

    6. "역사는 사람들이 무엇을 생각했는지에 대한 기록이다." - H. G. 웰스

    7. "우리는 역사의 일부가 아니라, 역사를 만드는 존재다." - 넬슨 만델라

    8. "과거를 기억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그것을 반복할 운명에 처해 있다." - 에드먼드 버크

    9. "역사는 우리에게 미래의 지혜를 제공한다." - 토머스 제퍼슨

    10. "역사란 우리가 누구인지, 어디서 왔는지, 어디로 가고 있는지를 가르쳐준다." - 제임스 볼드윈



    직 너희는 진리와 화평을 사랑하게 될 것이라고 하셨는데, 어떤가요? 진실과 화평을 사랑하는 자들입니까? 진실과 화평을 사랑하는 자들은 믿음의 증인이 된다고 합니다. 하나님을 믿는 자신을 통하여 세상 사람들이 하나님만을 찾고 은혜를 구하게 된다고 하셨습니다. 우리들이 똑바른 신앙생활을 한다면 이러한 사건이 생겨야 할 것입니다.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노라 사월의 금식과 오월의 금식과 칠월의 금식과 시월의 금식이 변하여 유다 족속에게 기쁨과 즐거움과 희락의 절기가 되리니 오직 너희는 진실과 화평을 사랑할찌니라 - "사월 금식"은 예루살렘이 느부갓네살의 정복을 당한 사건을 기념하는 금식이고, "오월 금식"은 성전을 불사른 사건을 기념하는 것이고, "칠월 금식"은 그달리야 총독의 피살 사건을 기념하는 것이고, "시월 금식"은 예루살렘이 포위된 사건을 기념하는 것이었다. 이 네 가지 금식절은, 바벧론에 포로된 유대인들이 바벨론에서 지키던 것이다. 이제 저들이 하나님의 은혜로 본국에 돌아와서는 그 금식을 지키지 않고 희열의 기회로 가진다. "너희는 진실과 화평을 사랑하라". 진실은 진정한 이스라엘의 특징이다(요 1:47). 그리고 화평도 하나님의 자녀(참 이스라엘)된 증표이다(마 5:9). 이 말씀은, 재건된 이스라엘 백성의 특징을 말해 주지만 겸하여 신약 시대 새 이스라엘의 특징을 예언하기도 한다.


    너희는 진실과 화평을 사랑하라". 
    진실은 진정한 이스라엘의 특징이다(요 1:47).
    그리고 화평도 하나님의 자녀(참 이스라엘)된 증표이다(마 5:9). 
    이 말씀은, 재건된이스라엘 백성의 특징을 말해 주지만 겸하여 신약 시대 새 이스라엘의 특징을 예언하기도 한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죄악을 심판하셨습니다. 
    그들을 바벨론의 손에 붙이시고 징계하셨습니다. 
    그러나 이제 만군의 여호와, 싸우면 이기시는 여호와 하나님께서 전혀 다른 어조로 회복을 선포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시온을 위하여 크게 질투하신다 말씀하십니다. 

    이스라엘의 회복은 그들만의 행복으로 그치지 않습니다. 
    여러 백성과 많은 사람들이 그들 가운데 나타난 하나님의 은혜, 살아계신 하나님의 영광을 보게 될 것입니다. 
    이스라엘과 함께 하시는 하나님, 그들을 진리와 사랑으로 인도하시며 구원해 내신 하나님, 회복하시고 축복하시는 하나님을 알게 될 것입니다. 
    이 성읍 저 성읍에서 놀랍고 기쁜 소식들이 퍼져나갈 것입니다. 
    너도 나도, 얼른 가서 여호와 하나님을 만나 뵙고 여호와께 은혜를 구하자 할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자신의 하나님으로 만나고 싶어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회복과 구원의 약속은 개인과 공동체의 삶에서 여전히 유효하며, 
    메시아에 대한 예언은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또한, 성전 재건을 통한 예배 회복의 중요성은 오늘날 교회와 신앙 생활에 대한 중요한 교훈을 제공합니다. 
    스가랴서의 메시지는 희망과 격려를 주며,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믿고 따르는 삶을 촉구합니다.






    스가랴는 어떤 선지자인가?

    스가랴는 구약 성경의 선지자 중 한 명으로, 포로 귀환 이후 유다 백성을 격려하고 회복을 예언한 회복의 선지자입니다.
    다음은 스가랴 선지자의 주요 특징과 사역을 정리한 것입니다:

    1. 시대적 배경

    • 활동 시기 : 주전 520년경(바사 왕 다리오 1세 시대)
    • 동시대 인물 : 학개 선지자
    • 역사적 상황 : 바벨론 포로에서 귀환한 유다 백성이 성전 재건을 시작했지만, 
                            외부 방해와 내부 낙심으로 중단됨 (학개 1장, 스가랴 1:1)

    2. 스가랴서의 중심 메시지

    구분 주요 내용
    초반부(1–8장) 8개의 환상을 통해 성전 재건의 당위성과 하나님의 도우심을 강조
    후반부(9–14장) 메시아 왕국의 도래와 장차 이스라엘의 영적 회복을 예언

    3. 선지자 스가랴의 특징

    • 격려와 위로의 메시지 중심 : 백성에게 “돌아오라” 하시며 은혜와 회복을 약속 (스가랴 1:3)
    • 환상과 상징의 선지자 : 말 탄 자, 뿔과 대장장이, 금촛대와 감람나무 등 풍부한 상징적 환상을 통해 하나님의 뜻을 전달
    • 메시아에 대한 예언 풍성 :
      • 겸손하게 나귀를 타고 오실 왕 (슥 9:9)
      • 은 30에 팔림 (슥 11:12–13)
      • 찔림 당하신 메시야 (슥 12:10)

    4. 스가랴의 이름 의미

    • 히브리어 “여호와께서 기억하신다”
      → 하나님의 언약과 약속을 잊지 않으심을 보여주는 이름

    5. 신약과의 연결

    스가랴서의 메시아 예언은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와 수난에서 여러 부분이 성취됨:

    • 예루살렘 입성 (마 21:5)
    • 은 30에 팔림 (마 26:15)
    • 십자가에서 찔리심 (요 19:37)

    요약 정리 

    스가랴는 낙심한 백성에게 하나님의 회복과 메시아의 소망을 전한 예언자입니다.
    그의 예언은 과거의 회복뿐 아니라 미래의 하나님 나라를 바라보게 하는 이중적 메시지를 담고 있습니다.


    스가랴의 장

    1장 / 환상, 회개와 회복의 메시지 전달

    2장 / 예루살렘의 회복과 보호, 성전 재건을 위한 메시지 전달 

    3장 /  여호수아 대제사장이 사탄 앞에서 변호받음, 하나님의 구원의 약속

    4장 / 금 촛대와 두 올리브 나무 환상, 성전 재건의 힘

    5장 / 심판의 상징적 나타남과 죄의 결과 

    6장 / 네 마리의 말과 두 번재 환상을 통해 하나님의 계획 전달 

    7장 / 금식에 대한 질문과 응답

    8장 / 예루살렘을 회복하실 것에 대한 약속과 축복의 선포

    9장 / 메시야의 오심과 이스라엘 구원의 예언 

    10장 / 이스라엘의 회복과 하나님의 은혜 약속

    11장 /  스가랴가 두 목자를 상징적으로 묘사, 이스라엘의 심판 예언

    12장 /  예루살렘의 구원과 하나님의 보호 

    13장 / 이스라엘의 죄가 용서, 하나님의 구원의 약속

    14장 /  여호와의 날과 최후의 심판 예언, 하나님의 왕국이 세워질 것을 선포 
     

    스가랴서의 현대적 의미

    하나님의 회복과 구원의 약속은 개인과 공동체의 삶에서 여전히 유효하며, 
    메시아에 대한 예언은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또한, 성전 재건을 통한 예배 회복의 중요성은 오늘날 교회와 신앙 생활에 대한 중요한 교훈을 제공합니다. 
    스가랴서의 메시지는 희망과 격려를 주며,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믿고 따르는 삶을 촉구합니다.





    스가랴 환상과 요한계시록 환상의 공통점

    스가랴서의 환상과 요한계시록의 환상은 구약과 신약의 대표적인 묵시 문학으로서,
    시대를 넘어 서로 깊이 연결되며 수많은 공통점을 공유합니다.
    요한계시록이 스가랴서의 상징과 주제를 창의적으로 활용하고 발전시킨 경우가 많기 때문입니다.

    1. 상징적 이미지의 공유

    두 책 모두 상징적인 이미지를 풍부하게 사용하여 하나님의 메시지를 전달합니다.
    특히 여러 상징이 놀라울 정도로 유사하게 나타납니다.


    공통 상징
    • 스가랴서
    요한계시록
    네 존재(말/병거)
    • 네 병거(붉은 말, 검은 말, 흰 말, 어룽진 말)가 온 땅을 순찰하며
      하나님의 심판과 통치를 수행합니다 (슥 6:1-8).
    네 생물과 네 말 (흰 말, 붉은 말, 검은 말, 청황색 말)이 등장하여 인을 떼는 재앙을 통해 심판을 집행합니다 (계 6:1-8).
    촛대(등잔대)
    • 순금 등잔대와 그 곁의 두 감람나무는 기름 부음 받은 두 지도자(스룹바벨과 여호수아)를 상징하며,
      성령의 능력으로 교회가 세워질 것을 보여줍니다 (슥 4장).
    일곱 금 촛대는 일곱 교회를 상징하며, 주님께서 교회 가운데 거니시는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두 증인은 두 감람나무와 두 촛대로 묘사됩니다 (계 1:12-20, 11:4).
    측량줄
    • 한 사람이 측량줄을 가지고 예루살렘을 측량하며, 이는 하나님의 보호와 회복,
      그리고 성곽 없는 도시로의 무한한 확장을 상징합니다 (슥 2:1-5).
    요한이 성전과 제단과 그 안에서 경배하는 자들을 측량하며, 이는 환난 가운데서도 당신의 백성을 보호하시는 하나님의 주권을 상징합니다 (계 11:1).
    두루마리
    • 날아가는 두루마리는 온 땅에 내리는 저주, 즉 도둑질하고 거짓 맹세하는 자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을 상징합니다 (슥 5:1-4).
    하나님의 손에 있는 일곱 인으로 봉해진 두루마리가 등장하며, 오직 어린 양 예수 그리스도만이 그 인을 떼고 하나님의 구원 계획을 펼치실 자격이 있음을 보여줍니다 (계 5장).
    대제사장
    • 더러운 옷을 입은 대제사장 여호수아를 사탄이 고발하지만,
      하나님은 그의 죄를 사하고 깨끗한 옷으로 갈아입혀 주십니다.
      이는 죄의 용서와 회복을 상징합니다 (슥 3장).
    성도들이 어린 양의 피에 그 옷을 씻어 희게 된 모습으로 나타나며,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말미암는 속죄와 정결함을 강조합니다 (계 7:14).

     

    2. 주제의 유사성

    상징뿐만 아니라, 두 책이 다루는 핵심 주제에서도 깊은 연관성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 하나님의 주권적 통치: 두 책 모두 역사의 주관자는 세상의 권력이 아니라 만군의 여호와 하나님이심을 강력하게 선포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온 땅을 감찰하시고(스가랴의 말들), 당신의 계획에 따라 심판과 구원을 이루십니다.
    • 회개와 회복의 촉구: 스가랴가 포로 귀환 공동체에게 "내게로 돌아오라"고 외쳤듯이, 요한계시록도 일곱 교회에 회개를 촉구하며 이기는 자에게 주어질 약속을 제시합니다.
    • 메시아(그리스도) 중심: 스가랴는 '순(Branch)'이라 불리는 메시아, 고난받는 종이자 겸손한 왕으로 오실 그리스도를 예언했습니다 (슥 3:8, 6:12, 9:9). 요한계시록은 이러한 예언이 성취된 어린 양 예수 그리스도, 만왕의 왕이시며 심판주로 다시 오실 그분께 모든 초점을 맞춥니다.
    • 천상 회의와 천사의 역할: 두 책 모두 천사가 환상을 해석해주고 하나님의 메시지를 전달하는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또한 사탄이 참소하는 모습(슥 3:1)과 하늘에서 쫓겨나는 모습(계 12:9) 등 천상에서의 영적 전쟁을 묘사합니다.
    • 예루살렘(새 예루살렘)의 최종적 영광: 스가랴는 회복될 예루살렘의 영광을 예언했습니다. 요한계시록은 이를 새 하늘과 새 땅의 중심인 '새 예루살렘'으로 확장하여,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과 영원히 함께 거하시는 최종적인 구원의 완성을 보여줍니다 (계 21장).

    이처럼 스가랴의 환상은 요한계시록의 환상을 이해하는 중요한 신학적, 문학적 배경을 제공합니다. 요한은 스가랴의 상징과 주제를 가져와 예수 그리스도의 초림과 재림이라는 관점에서 재해석하고 심화시킴으로써, 시대를 초월하여 모든 성도에게 소망과 위로를 주는 하나님의 최종적인 승리의 메시지를 선포하고 있습니다.








    스가랴(Zechariah) 제커라이어 / 여호와께서 기억하신다, 여호와게서 기억하심 

    스가랴서는 구약 성경의 마지막 선지서 중 하나로, 히브리어 성경에서 '소선지서'에 속합니다. 
    스가랴는 포로기 이후 유다 백성들을 위한 메시지를 전달한 선지자 중 하나로, 그 이름의 의미는 "여호와께서 기억하심"입니다. 
    스가랴서는 특히 예루살렘 성전 재건과 관련된 예언과 환상으로 유명하며, 신약 성경에서도 자주 인용됩니다.​

    스가랴의 이름과 뜻

    스가랴(히브리어: זְכַרַיְָה, Zəkaryāh)는 "여호와께서 기억하신다" 또는 "여호와께서 기억하심"이라는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이 이름 자체가 스가랴서의 메시지를 함축적으로 드러냅니다. 
    하나님은 포로된 자신의 백성을 잊지 않으시고, 다시금 회복시키시며, 언약을 성실히 지키시는 분이심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스가랴의 이름은 곧 선지자 자신의 정체성과 사역의 방향을 상징합니다.


    스가랴의 생애와 저자적 배경

    스가랴는 제사장 가문 출신으로서 예언자였으며, 학개와 거의 같은 시기에 활동한 동시대의 인물입니다(스 5:1, 6:14). 
    그의 아버지는 베레갸요, 할아버지는 잇도이며(슥 1:1), 잇도는 느헤미야서와 역대기에 언급되는 제사장 계열의 인물입니다(느 12:4, 대하 24:11). 
    따라서 스가랴는 제사장적 배경과 함께 예언자적 소명을 받은 인물로, 제의와 종말, 정결과 성전을 주제로 심오한 통찰을 보여줍니다.

    그는 바벨론 포로기 이후, 고레스의 칙령(BC 538년)으로 유다 백성이 예루살렘으로 귀환한 후 약 20여 년 후(BC 520년경)에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 활동하기 시작했습니다. 
    당시 유다는 정치적으로 미약하고 성전 재건은 중단된 상태였으며, 귀환 백성들은 낙심과 영적 침체 속에 있었습니다. 
    바로 이때 스가랴는 환상과 메시지를 통해 하나님께서 여전히 자신의 백성을 향한 계획을 가지고 계심을 선포하며, 영적 재건을 독려했습니다.

    역사적 배경 / 스가랴서는 주로 기원전 6세기 후반, 바벨론 포로기 이후의 시기에 쓰여졌습니다. 
    당시 유다 백성들은 바벨론에서 돌아와 예루살렘에 정착했지만, 
    성전 재건 작업은 여러 어려움으로 인해 지연되고 있었습니다. 
    스가랴와 동시대의 선지자 학개는 백성들에게 성전 재건을 독려하며, 이를 통해 하나님의 축복을 받을 것이라고 예언했습니다.

    시대적 배경과 역사적 상황

    스가랴의 예언은 바사 제국(페르시아) 시대, 특히 다리오 1세(Darius I, BC 522-486)의 통치 시기에 이루어졌습니다. 
    이 시기는 유다인들이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왔지만, 재건된 공동체는 주변 민족의 방해와 내부의 무기력으로 인해 성전 재건 사업이 중단된 상황이었습니다. 

    학개는 성전 재건의 필요성을 실질적으로 강조했고, 
    스가랴는 영적인 관점에서 그 이유와 목적을 계시해주며, 더 나아가 종말론적 회복과 메시아적 기대를 확장시켰습니다.

    특히 스가랴는 유다 공동체가 하나님 나라의 회복을 위한 통로임을 강조하며, 
    회복은 단순히 성전의 외적 재건에 그치지 않고,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 제사장직의 정결함, 
    그리고 정의로운 통치의 회복을 포함한다는 점을 부각시켰습니다. 
    이처럼 스가랴서는 역사와 신학, 현재와 미래, 회복과 종말이라는 긴장을 함께 끌어안고 있습니다.

    문학적 구조와 신학적 구성

    스가랴서는 총 14장으로 구성되며, 일반적으로 두 부분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1. 1:1 ~ 8:23 /  귀환 공동체를 향한 권면과 환상
    2. 9:1 ~ 14:21 / 장차 올 메시아와 종말의 심판과 구원

    1-8장은 주로 환상(총 8개 환상)과 메시지로 구성되어 있으며, 
    이는 유다 공동체의 회복을 향한 하나님의 의도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장면들입니다. 
    이 환상들은 마치 다니엘서의 환상들과 유사한 종말론적 해석이 가능하며, 
    스가랴는 과거의 심판과 미래의 영광을 교차적으로 배치함으로써 현재를 사는 자들에게 방향을 제시합니다.

    9-14장은 종말론적 색채가 강하며, 
    두 왕(9:9-10), 찔림받은 목자(12:10), 여호와의 날(14장)에 대한 예언을 포함합니다. 
    특히 9장과 14장은 메시아적 해석의 핵심 본문으로, 예수님의 나귀 타심과 십자가 사건, 종말의 심판과 새 예루살렘에 대한 신약적 연결 고리가 됩니다.

    내용 개요 / 스가랴서는 14장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두 부분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1. 1-8장 -  환상과 성전 재건에 관한 내용
         2. 9-14장 -  메시아와 종말에 관한 예언

    첫 번째 부분 : 환상과 성전 재건 (1-8장)

        1.서언 (1:1-6) / 스가랴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회개와 순종을 촉구하며, 이전 선지자들이 전한 하나님의 말씀을 상기시킵니다.

    ​    2.여덟 개의 환상 (1:7 - 6:8) / 스가랴는 여덟 가지 환상을 통해 하나님의 뜻을 전합니다. 
                이 환상들은 대체로 성전 재건, 예루살렘의 회복, 이스라엘의 정화와 보호를 상징합니다.

         첫 번째 환상 : 네 마리 말이 온 땅을 순찰하는 장면으로,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돌보신다는 메시지를 전합니다.

         두 번째 환상 : 네 뿔과 네 대장장이의 환상으로, 이스라엘을 괴롭히는 민족들을 하나님께서 심판하신다는 내용입니다.

         세 번째 환상 : 측량줄을 든 사람이 예루살렘을 측량하는 장면으로, 예루살렘의 회복과 번영을 예고합니다.

         네 번째 환상 : 대제사장 여호수아가 더러운 옷을 벗고 정결한 옷을 입는 장면으로, 이스라엘의 죄 사함과 정결을 상징합니다.

         다섯 번째 환상
     : 순금 등잔대와 두 감람나무로, 성전 재건과 성령의 역사를 상징합니다.

         여섯 번째 환상 : 날아다니는 두루마리로, 악을 심판하는 하나님의 말씀을 나타냅니다.

         일곱 번째 환상 : 에바 가운데 있는 여인으로, 악이 바벨론으로 옮겨짐을 상징합니다.

         여덟 번째 환상 : 네 병거가 온 땅을 순찰하는 장면으로, 하나님의 전능하신 통치를 상징합니다.


    주요 주제와 신학적 의미

    성전과 예배의 회복

    스가랴서는 단순한 성전 건축에 그치지 않고,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과 정결한 예배의 회복을 강조합니다. 
    여호수아 대제사장의 정결 예식(3장)은 이스라엘의 영적 상태와 하나님이 베푸시는 은혜의 상징으로, 
    제사장의 중보 역할이 정결하게 회복됨을 보여줍니다. 
    이는 장차 올 대제사장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모형적 사건으로 해석됩니다(히 7장).

    메시아 예언과 이중적 성취

    스가랴는 메시아에 대한 다양한 예언을 담고 있습니다. 
    9:9은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 사건과 직결되며, 
    12:10은 십자가에서 찔림을 받은 주님을 바라보게 되는 회개의 날을 묘사합니다. 
    이 예언들은 1차적으로는 포로 귀환 시대의 희망을 위한 메시지이지만, 
    궁극적으로는 신약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성취됩니다. 
    이는 "이미"와 "아직"이라는 종말론적 패턴 속에서 해석해야 하며, 
    스가랴는 구약 중에서 신약의 예수 그리스도와 가장 깊이 연결된 예언서를 구성합니다.

    성령의 역사

    스가랴 4:6의 말씀, 
    "힘으로 되지 아니하며 능으로 되지 아니하고 오직 나의 영으로 되는이라"는 말씀은 
    하나님의 구속 역사가 인간의 힘이 아닌 성령의 역사임을 천명합니다. 
    이는 초대교회에서 성령 강림 사건을 통해 하나님의 나라가 확장된 것과 연결되며, 
    스가랴의 예언은 성령론적 기초를 제공합니다.

    여호와의 날과 종말론

    스가랴 14장에 등장하는 '여호와의 날'은 고대의 심판 개념이 종말론적으로 재해석된 장입니다. 
    하나님은 악을 심판하시고, 예루살렘을 회복시키시며, 열국을 심판한 후 만국이 예루살렘에 와서 절기를 지킬 것이라 예언됩니다. 
    이는 요한계시록 21-22장의 새 예루살렘, 
    그리고 스가랴 14:8에 등장하는 생명수의 강과 연결되며, 
    스가랴는 구약의 종말론적 희망이 신약에 이르러 어떻게 실현될지를 예시합니다.

    이방에 대한 구속과 선교적 확장성

    스가랴서는 유다만이 아닌 열방의 회복에 대한 비전을 담고 있습니다. 
    2:11에서는 "많은 이방 사람들이 그 날에 여호와께 속하여 그의 백성이 될 것이요"라고 하며, 
    하나님의 구원이 이스라엘을 넘어 열방에게로 확장됨을 보여줍니다. 
    이는 아브라함 언약(창 12:3)의 성취이며, 교회 시대의 선교적 사명을 예표합니다.

    거룩과 정결에 대한 강조

    스가랴서는 제사장적 정결함과 공동체의 거룩함을 반복하여 강조합니다. 
    이는 예배의 핵심이 단지 형식이 아니라 정결한 중심에 있음을 보여줍니다. 
    13장에서는 죄와 더러움을 씻는 샘이 예루살렘에 열릴 것을 말하는데, 
    이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흘러나온 보혈의 은혜와 연결됩니다. 
    거룩은 구속받은 자의 삶의 표지이며, 
    스가랴는 그 거룩이 하나님 나라의 도래를 위한 필수 조건임을 선포합니다.

    결론 : 신약을 준비하는 구약의 거대한 문

    스가랴서는 구약 선지서 중에서도 가장 풍부한 종말론과 메시아적 예언을 담고 있으며, 
    신약의 복음서와 요한계시록에 깊이 연결된 본문입니다. 
    단지 포로기 이후 유다 공동체의 회복을 넘어서, 구속사의 전개와 그리스도를 통한 완성, 그리고 하나님 나라의 궁극적 도래를 바라보게 합니다.

    따라서 스가랴서는 성경신학적으로 단절이 아닌 연속의 계시를 보여주는 책이며, 
    구약의 마지막에서 신약의 시작을 준비하는 통로로서의 중요한 위치를 점하고 있습니다. 
    스가랴의 메시지는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도 여전히 유효하며, 회복과 거룩, 그리고 장차 오실 메시아에 대한 소망을 새롭게 하도록 이끌어 줍니다.


    3.대제사장 여호수아의 관 (6장 9-15절): 스가랴는 여호수아에게 관을 씌우며, 그가 메시아의 예표가 될 것임을 예언합니다.

    4.금식에 대한 질문과 응답 (7-8장): 백성들이 금식에 대해 질문하자, 하나님은 진정한 회개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장차 다가올 축복을 약속하십니다.

    두 번째 부분: 메시아와 종말에 관한 예언 (9-14장)

    1.여호와의 심판과 구원 (9-11장): 이 부분은 주변 민족들에 대한 심판과 이스라엘의 구원을 예언합니다. 특별히 9장 9절에서 의와 구원을 가진 왕이 겸손하게 나귀를 타고 오신다는 예언은 예수 그리스도의 예루살렘 입성을 예고한 구절로 유명합니다.

    2.이스라엘의 회복과 메시아 (12-14장): 이 부분은 종말에 관한 예언으로, 예루살렘의 회복과 구원, 메시아의 통치를 다룹니다.

      • 12장: 하나님께서 예루살렘을 보호하시고, 모든 민족을 심판하실 것을 예언합니다.

      • 13장: 이스라엘의 정결과 회복을 예언하며, 거짓 선지자들과 우상 숭배가 제거될 것을 예고합니다.

      • 14장: 여호와의 날에 일어날 사건들을 예언하며, 온 세계가 하나님을 예배할 것을 예고합니다.










    스가랴의 8개 환상과 10개 예언

    스가랴(여호와께서 기억하신다)

    1. 구약성경의 39권의 중 38번째 책
    2. 주전 520년경 기록되었으니 지금부터 2,540년전의 책
    3. 14장으로 기록된 책은 8개의 환상과 예수 그리스도의 초림과 재림이 기록된 난해한 책

    스가랴 1~8장 : 8개의 환상

    스가랴  9~10장 :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 예언

    스가랴 12~14장 : 예수 그리스도의 초림 예언


    스가랴서의 예언과 성취


    ① (550년 후 성취) 예수 그리스도의 초림에 대한 나귀 새끼의 예언은 문자적으로 성취되었다 (슥 9:9)

    ② (550년 후 성취) 은 30개에 팔릴 것이 문자적으로 상취되었다 (슥 11:12) 

    ③ (550년 후 성취) 그것으로 토기장이의 밭을 산 것도 문자적으로 성취되었다 (슥 11:13)

    ④ (590년 후 성취) 그들이 메시아를 거절하므로 여러 나라에 흩어질 것이다, 디아스포라 (슥 7:11~14)

    ⑤ (2468년 후 성취) 여러 나라에 흩어졌던 그들이 예루살렘으로 돌아 올 것이다 (슥 8:1~13)

    ⑥ (2540년 후 성취) 예루살렘은 모든 민족들의 취하는 잔이 되고 무거운 돌이 된다 (슥 12:2~3)

    ⑦ (미성취) 이방 나라들이 예루살렘을 치러 올 것이다 (슥 12:3~9, 14:12~15)

    ⑧ (미성취) 이스라엘 큰 애통으로 회개하고 메시아에게 돌아올 것이다 (슥 12:10~13:1)

    ⑨ (미성취) 주께서 예루살렘 동쪽 감람산에 재림하실 것이다 (슥 14: 4~5)

    ⑩ (미성취) 이방 나라들이 초막절을 지키러 에루살렘으로 올라올 것이다 (슥 14:16~21)



    스가랴 핵심 요약 - 회복과 메시야의 환상을 본 선지자

    📖 스가랴서 요약 – “회복을 격려한 환상의 선지자”

    📘 영어 제목: Zechariah

    ✡️ 히브리어 원어: זְכַרְיָה (Zekharyah) — “여호와께서 기억하셨다”

    🕊 복음 중심 한 문장 요약

    하나님은 포로에서 돌아온 백성에게 회복의 소망을 주시며, 장차 오실 메시야를 통해 완전한 구원을 이루실 것을 약속하신다.

     

    성전 재건을 넘어, 메시아를 향한 약속: 스가랴서 핵심 요약

    스가랴서는 구약성경에서 가장 난해하고 신비로운 예언서 중 하나입니다. 학개서와 마찬가지로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온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어졌지만, 그 메시지는 성전 재건을 넘어 미래에 오실 메시아와 종말에 대한 예언까지 담고 있습니다.

     

    1. 배경: 돌아온 백성과 멈춰버린 희망

    학개서가 백성들의 눈앞에 놓인 현실(성전 건축)을 다뤘다면, 스가랴서는 그들이 놓쳐버린 영적인 비전에 초점을 맞춥니다. 백성들은 포로에서 돌아왔지만, 초라한 현실 속에서 희망을 잃어가고 있었습니다. 바로 이때 하나님은 스가랴를 통해 여덟 가지 환상과 함께 강력한 메시지를 전달하십니다.

     

    2. 여덟 가지 환상: 희망을 주는 비전 (1-6장)

    스가랴서의 핵심은 여덟 가지 환상에 담겨 있습니다. 이 환상들은 모두 하나님의 보호와 회복, 그리고 미래에 대한 희망을 약속합니다.

    * 첫 번째 환상 : 네 명의 기마병 (1:7-17)

    * 메시지 : 하나님께서 이방 민족들의 죄를 심판하시고, 예루살렘을 회복시키실 것을 약속하십니다.

    * 두 번째 환상 : 네 뿔과 네 대장장이 (1:18-21)

    * 메시지 : 이스라엘을 괴롭혔던 모든 대적들을 멸하실 것을 약속하십니다.

    * 세 번째 환상 : 측량줄 (2:1-13)

    * 메시지 : 예루살렘이 다시 거대하고 영광스러운 도시가 될 것이며, 하나님이 그 성읍의 보호자가 되실 것을 보여줍니다.

    * 네 번째 환상 : 대제사장 여호수아 (3:1-10)

    * 메시지 : 더러운 옷을 입은 대제사장 여호수아의 죄를 깨끗하게 하십니다. 이는 죄 사함을 받은 이스라엘의 모습을 상징합니다.

    * 다섯 번째 환상 : 순금 등잔대와 두 올리브 나무 (4:1-14)

    * 메시지 : 성령의 능력으로 성전 재건이 완성될 것을 약속하십니다. "힘으로 되지 아니하며 능력으로 되지 아니하고 오직 나의 영으로 되느니라"는 유명한 말씀이 여기에 나옵니다.

    * 여섯 번째 환상: 날아가는 두루마리 (5:1-4)

    * 메시지 : 이스라엘 백성 가운데 있는 죄와 저주가 제거될 것을 예언합니다.

    * 일곱 번째 환상 : 에바(곡식 통) 속의 여인 (5:5-11)

    * 메시지 : 죄의 상징인 여인이 바벨론으로 옮겨지는 모습을 통해, 이스라엘에서 죄악이 완전히 제거될 것을 약속합니다.

    * 여덟 번째 환상 : 네 병거 (6:1-8)

    * 메시지 : 하나님이 모든 땅을 다스리시는 통치자이심을 보여줍니다.

     

    3. 메시아 예언과 미래의 소망 (9-14장)

    스가랴서의 후반부는 놀라운 메시아 예언들로 가득합니다.

    * 겸손한 왕: 예수님이 어린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것을 예언합니다. (스가랴 9:9)

    * 배신당한 목자: 예수님이 은 삼십에 팔리실 것을 예언합니다. (스가랴 11:12-13)

    * 찌름을 당한 자: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상징합니다. (스가랴 12:10)

    이러한 예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성취되었으며, 스가랴서가 단순히 이스라엘의 역사를 넘어 온 인류를 위한 구원의 메시지를 담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4. 정리: 스가랴서가 오늘날 우리에게 주는 메시지

    스가랴서는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의 약속을 굳게 믿으라고 권면합니다. 우리 눈에 보이는 현실이 아무리 초라하더라도, 하나님은 우리를 보호하고 계시며, 성령의 능력으로 모든 것을 이루실 것입니다. 또한 스가랴서는 우리에게 궁극적인 소망이 예수 그리스도에게 있음을 분명히 보여줍니다.

    이처럼 스가랴서는 하나님 나라의 완성을 향해 나아가는 거대한 비전과 희망을 우리에게 전하고 있습니다.

     

    📚 스가랴서 간단 요약, 무너진 성전을 다시 세우는 희망의 메시지

     

    스가랴서는 학개와 동시대 인물로,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온 유다 백성에게 성전 재건을 독려하며, 하나님의 회복의 약속과 장차 오실 메시야에 대한 환상을 전한 책입니다.

    이 책은 두 부분으로 나뉘며, 전반부(1–8장)는 성전 재건과 회복에 대한 환상과 메시지, 후반부(9–14장)는 미래의 구원과 종말론적 예언, 메시야의 통치에 대한 예언을 담고 있습니다.

     

    1. 포로 귀환 백성을 향한 격려

    성전 재건이 중단된 상황에서, 스가랴는 “여호와께로 돌아오라, 그리하면 내가 너희에게 돌아가리라”(1:3)는 말씀으로 시작합니다.

    그는 총 여덟 개의 환상을 통해 성전 재건이 하나님의 계획 안에 있으며, 스룹바벨과 여호수아를 통해 하나님이 회복을 이루실 것을 선포합니다.

    > “만군의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힘으로 되지 아니하고 능으로 되지 아니하고 오직 나의 영으로 되느니라” (스가랴 4:6)

     

    2. 메시야에 대한 환상과 예언

    스가랴는 특별히 메시야에 대한 풍성한 예언으로 유명합니다.

    겸손하게 나귀를 타고 오시는 왕 (9:9)

    은 삼십으로 팔린 목자 (11:12–13)

    찔림을 받는 자 (12:10)

    죄를 씻는 샘의 열림 (13:1)

     

    감람산 위에 서시는 여호와 (14:4)

    이 모든 예언은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와 십자가 사건, 재림을 예표하고 있습니다.

     

    📖 장별 요약

     

    장                    내용 요약

     

    1장     회개 촉구, 첫 환상: 말탄 자의 환상

    2장     측량줄 환상: 예루살렘의 회복과 보호

    3장     대제사장 여호수아 정결케 함 (그리스도의 예표)

    4장     금촛대 환상: 성전 재건은 성령의 능력으로

    5장     날아가는 두루마리, 에바 속 여인 환상

    6장     병거 환상, 여호수아의 관 씌움 (왕과 제사장의 예표)

    7장     외식적인 금식에 대한 책망

    8장     예루살렘의 회복과 평강의 약속

    9장     이방 나라 심판, 나귀를 타신 왕의 예언

    10장   이스라엘의 회복과 목자의 부재

    11장   악한 목자에 대한 심판, 은 삼십 예언

    12장   예루살렘의 구원과 찔린 자를 바라봄

    13장   죄를 씻는 샘, 목자가 치심

    14장   여호와의 날, 예루살렘의 궁극적 승리

     

    ✝ 복음 메시지 포인트

    하나님은 과거를 기억하시며, 약속하신 구속을 반드시 이루신다.

    예수 그리스도는 스가랴의 모든 메시야적 환상의 성취이시다.

    성전은 건물이 아니라, 성령으로 거듭난 공동체의 회복이다.

    오직 하나님의 영으로만 진정한 회복과 사명이 완성된다 (슥 4:6)

     

    🙏 삶의 적용

    나는 내 힘으로 하나님의 일을 하려 하고 있지 않은가?

    하나님의 회복 약속을 기다리며 믿음으로 순종하고 있는가?

    메시야 예언의 성취 앞에 나는 감사와 경외로 반응하고 있는가?






    스가랴의 8개의 환상

    환상 1 : 온 땅을 돌아보는 말들(감찰하시는 하나님)

    환상 2 : 네 뿔과 네 일꾼들(하나님의 백성을 괴롭히는 자들과 그들을 심판하시는 하나님)

    환상 3 : 측량줄을 지닌 사람(하나님의 백성을 측량하시는 하나님)

    환상 4 : 여호수아와 제사장의 옷(정결케 하시는 예수 그리스도)

    환상 5 : 촛대와 두 올리브나무(성령의 기름으로 꺼지지 않은 등잔)

    환상 6 : 날아다니는 두루마리(범죄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

    환상 7 : 에바 속의 여자(디아스포라 예언)

    환상 8 : 네개의 전차(네 개의 임무)


    PART I


    1. 환상 1 : 온 땅을 돌아보는 말들 (슥 1:7~17)


    여호와의 전지전능은 우주적이고 지구적인데 거기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을 알고 계신다

    특히 그의 백성의 회복에 관심을 가지신다

    붉은 말과 자줏빛 말과 백말 등 여러 말들이 있는데 말을 탄 자들의 임무는 세상 전역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살피고 보고하는 일이다

    세상은 평온한 듯 보였지만 예루살렘의 성전건축은 중단되고 영적 나태함에 빠진 백성들에게 회개를 촉구하고 성전건축을 격려한다


    환상 2 : 네 뿔과 네 명의 대장장이 (슥 1:18~21)


    네 뿔은 이스라엘은 대적하고 괴롭히는 사방의 왕들을 의미한다

    넷이란 세상의 네 모퉁이 즉 지구 전체를 총체적으로 상징한다

    역사적으로 앗시리아, 이집트, 바벨론, 메대바사, 헬라, 로마 등이다

    네 명의 대장장이는 주의 백성을 괴롭히는 제국과 왕들을 심판하는 도구이다

    하나님은 악한 권세자들을 두고만 보시지 않으시고 반드시 심판하신다



    환상 3 : 측량줄을 지닌 사람 (슥 2:1~13)


    한 사람이 자기 손에 측량줄을 잡고 있었다

    "어디로 가십니까?"

    "예루살렘을 재어서 그 너비와 길이가 얼마나 되는지 알아보러 간다"

    측량줄이 예루살렘의 성전과 성벽재건과 관계 있다면 이스라엘의 회복을 상징할 것이다 

    또한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의 불성벽이 되어 주실 것이며 그의 눈동자처럼 보호하실 것이다

    이는 성도들에게도 같은 보호막이 되어 주실 것이며 그들의 중심과 삶이 측량되어질 것이다


    환상 4 : 여호와 앞에 선 여호수아와 새싹(슥 3:1~10)


    네 번째 환상은 여호수아가 천상의 어전회의장에 서 있다

    더러운 옷을 입은 대제사장 여호수아가 여호와 앞에 서 있고 사탄이 고발하는 환상이다

    여호수아는 죄로 더럽혀진 이스라엘 민족과 성도들을 상징한다

    여호수아는 하나님의 명령으로 깨끗한 관과 아름다운 옷을 입음으로써 정결함을 회복한다

    사탄이 여호수아를 참소할 때 여호수아를 변호하는 이는 예수 그리스도시며 그를 통하여 정결해 질 수 있다

    새 싹과 세운 돌은 메시아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한다


     

    환상 5 : 금촛대와 두 올리브나무 (슥 4:1~14)

    금촛대는 스룹바벨 성전, 교회와 성도를 상징하는데 일곱개의 등잔은 기름그릇에 대롱으로 연결되어 자동으로 기름이 보충된다

    등잔의 기름은 성령을 상징하고 성령충만은 세상을 밝히는 빛이 된다

    두 올리브나무는 온 세상을 다스리는 여호와를 섬기는 기름 부음을 받은 두 사람이다

    대제사장 여호수아와 총독 스룹바벨을 의미한다고 하지만 구약과 신약, 12지파와 신약교회, 두 증인 등을 다양한 견해가 있다

    중요한 것은 교회와 신자들의 등잔의 불이 꺼지지 않도록 성령으로 충만해 지는 것이다

      


    환상 6 : 날아다니는 두루마리 (슥 5:1~4)


    날아다니는 양탄자처럼 길이 9m, 폭이 4.5m의 큰 두루마리가 날아 다닌다

    두루마리의 크기는 성전의 성소 면적과 똑같았다

    이 두루마리는 온 세계위를 날아 다니면서 범죄한 사람을 찾아 그 안에 기록된 죄를 짓는 자에게는 저주와 벌을 내렸다

    두루마리의 양편에 써있는 글이 다음과 같다

    날아다니는 두루마리는 범죄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을 상징한다


    "도둑질하는 자는 모두 없어질 것이다"

    "거짓 맹세하는 자도 모두 없어질 것이다"


    당시 도둑질과 거짓맹세는 바벨론 포로에서 귀환한 자들의 대표적인 죄였다

    이 두 죄는 십계명을 요약한 죄이기도 하다

    죄악된 삶은 성령이 거하는 성전이나 하나님의 택한 백성에게 어울리지 않는 것이다

    그러나 믿음의 공동체에도 범죄한 자들이 활보하며 내부적인 부패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음을 상기시킨다



    환상 7 : 에바 속의 여자 (슥 5:5~11)

    에바는 곡식의 양을 재는 되와 같은 측정도구로 범죄의 양을 재는 기준으로 쓰였다

    에바의 크기를 속여 부당한 이익을 취하는 경우가 있었다

    이스라엘 백성의 범죄를 측정하여 또다시 이방땅으로 쫓겨 가게 될 것을 예언하고 있다

    그들은 약속의 땅에서 쫓겨나 디아스포라가 되어 세상을 떠돌아 다녔다 



    환상 8 : 네개의 전차 (슥 6:1~8)

    놋쇠로 된 두 산 사이에서 네 대의 전차가 나온다

    네 대는 네 뿔, 네 대장장이, 네 바람처럼 온 세상 사방을 의미한다

    붉은 말, 검은 말, 흰 말, 얼룩진 힘센 말은 요한계시록의 네 개의 인의 임무와 유사하다

    전쟁, 기근, 기만, 전염병을 상징한다

     


    PART II


    금식에 대한 질문 (슥 7: 1~14)

    스가랴가 1~6장에 기록된 8가지 환상을 본 지 2년이 지났다

    벧엘 사람들이 사절단을 보내 스가랴에게 금식에 대해 질문을 했다

    "우리가 여러 해 동안 금식을 해 왔는데 올해도 금식을 해야 합니까?"

    그들이 선지자에게 받은 네 가지 응답은 위선적인 금식보다 순종을 원하신다는 것이다

    공정한 재판, 사랑과 자비, 억누르지 말 것, 서로 해치지 말 것에 대한 종교의 핵심 메시지를 받았다 

    예루살렘 회복에 대한 약속 (슥 8:1~23)

    예루살렘은 회복되어 사랑과 공의가 넘치는 도시가 될 것이며 슬픔이 사라지고 온 세계 만민에게 구원을 전하는 성읍이 될 것이다




    PART III


    예수 그리스도의 초림과 심판 (슥 9장~11장)


    그는 공의로우시고 구원을 베푸실 것이며 겸손하여 나귀 새끼를 타실 것이다

    메시아의 성품은 공의, 구원의 원천, 겸손하시다

    예수 그리스도의 초림에 대한 나귀 새끼의 예언은 문자적으로 성취되었다

    은 30개에 팔리고 그것으로 토기장이의 밭을 산 것도 문자적으로 성취되었다

    그의 사역은 크게 4 가지로 언급되고 있는데

    메시아는 평화를 선포할 것이며, 구원하실 것이며, 재림시에 거짓 목자들을 멸하실 것이고, 이스라엘 백성을 다시 모으실 것이다 

    이스라엘에 대한 심판 : 유대인들이 메시아를 배척한 결과로 겪게 될 무서운 심판(예루살렘의 멸망)을 예언하였다




    PART IV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 (슥 12장~14장)


    마지막 때에 이르러 예루살렘은 모든 민족들의 취하는 잔이 되고 무거운 돌이 된다

    이 예언은 우리 시대에 성취되는 것을 목격중이다

    이스라엘 백성들 가운데 1/3이 남고 2/3는 멸망당한다

    그 남은 1/3도 불 속에 던져 연단받고 시험받아 정결케 할 것인데 짐승의 통치때 박해 받을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마침내 세계의 연합군이 예루살렘을 치러 올 것이고 이스라엘은 회개하며 돌아올 것이다

    그러나 아마겟돈 전쟁은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으로 승리할 것이다

    예루살렘을 치러 왔던 이방 나라를 패전할 것이고 메시아 왕국이 완성될 것이다

    모든 나라는 여호와를 섬기며 예루살렘으로 초막절을 지키러 매년 올라올 것이다

    온 세상은 여호와께 거룩하게 구별되어 드려질 것이다



    참고자료

    1. 히브리어,헬라어 원문 성경(큠란)

    2. 엑스포지멘터리 (EM)












    10월 11일(토) 스가랴 5-8장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진실과 화평을 사랑하라(8:19)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노라 사월의 금식과 오월의 금식과 칠월의 금식과 시월의 금식이 변하여 유다 족속에게 기쁨과 즐거움과 희락의 절기가 되리니 오직 너희는 진실과 화평을 사랑할찌니라.
    This is what the LORD Almighty says: "The fasts of the fourth, fifth, seventh and tenth months will become joyful and glad occasions and happy festivals for Judah. Therefore love truth and peace."









    10월 10일(금) 스가랴 1-4장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나의 신으로 되느니라(4:6)

    그가 내게 일러 가로되 여호와께서 스룹바벨에게 하신 말씀이 이러하니라 만군의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이는 힘으로 되지 아니하며 능으로 되지아니하고 오직 나의 신으로 되느니라.
    So he said to me, "This is the word of the LORD to Zerubbabel: 'Not by might nor by power, but by my Spirit,' says the LORD Almighty.


    스가랴 4장 6절은 "힘으로 되지 아니하며 능으로 되지 아니하고 오직 나의 신으로 되느니라"는 말씀으로,
    눈앞의 큰 어려움이 인간의 능력이나 힘이 아닌, 하나님의 신(성령)의 능력으로 해결될 수 있음을 강조하는 구절입니다. 
    이 구절은 성전 재건이라는 어려운 과업 앞에서 좌절할 수 있는 스룹바벨에게 주어진 메시지이며,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지할 것을 당부하고 있습니다. 

    주요 내용 :
    • 인간의 한계를 넘어선 하나님의 능력 : 스룹바벨이 맞닥뜨린 성전 재건이라는 거대한 과업은 인간의 힘과 능력으로 달성할 수 없음을 분명히 합니다.
    • 하나님의 신(성령)의 중요성 : 이 거대한 과업을 이루는 것은 오직 하나님의 영, 즉 성령의 능력으로 가능하다는 것을 가르칩니다.
    • 하나님에 대한 전적인 의지 : 큰 산과 같은 어려움이 있더라도 하나님이 평지가 되라고 명령하시면 그대로 될 것이므로, 하나님을 의지하고 신뢰해야 함을 강조합니다.
    • 성취의 약속 : 큰 산과 같은 장애물 앞에서도 성전 재건의 머릿돌을 놓을 때 은총이 가득할 것이며, 반드시 성전이 완성될 것이라는 예언이 담겨 있습니다.




    스가랴의 다섯번째 환상 부분입니다.

    어떤 환상입니까? 금촛대와 두 감람나무의 환상입니다. 스가랴 선지자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하여 성전건축의 꿈과 이스라엘의 미래 비전을 계속적으로 심어주었습니다.  

     

    오늘 말씀에는 금 촛대와 두 감람나무의 환상이 나오고 있습니다. 그리고 한 사람의 이름이 거론되고 있는데 스룹바벨이라는 이름입니다. 스룹바벨이란 이름은 바벨론의 ㅜ예, 후손이란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곧 그는 바벨론 포로 시대에 태어난 자입니다. 스가랴 3장에도 한 사람의 이름이 거론됩니다. 그는 여호수아입니다.

     

    여호수아는 대제사장이요 스룹바벨은 총독입니다. 즉 다시 말하면 한 사람은 종교지도자요 또 한사람은 정치 지도자인 것입니다.

     

     성전 사역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두 사람을 언급하고 있는 것입니다. 성전 건축의 실무를 담당한 사람들입니다. 성전건축을 해야 한다고 외친 사람은 학개와 스가랴이지만 그 말씀을 듣고 백성을 지도하여 실천에 옮겨야 할 사람이 바로 여호수아와 스룹바벨이었던 것입니다.

     

    당시 스룹바벨은 여러 가지 내외적으로 정치적인 압박과 방해를 받고 있었습니다. 또한 성전건축으로 인한 많은 고민과 번민도 있었습니다. 그로인해 스룹바벨은 밤새워 고민하였을 것입니다. 그 때 하나님께서 귀한 환상을 스가랴를 통하여 스룹바벨에게 주셨습니다.

     

    5~9을 보면 스룹바벨이 큰 산을 펴이로 만드는 역사를 이뤄내게 됩니다. 큰 산은 이스라엘 민족의 장래를 방해하는 큰 방해요소들입니다. 물론 일차적으론 성전공사를 방해하는 대적들입니다. 2차적으론 모든 악의 세력들입니다. 그런 방해하는 산 같은 것들을 그는 평지로 만드는 사역을 여호수아 대제사장과 함께 하게 됩니다. 거기엔 성령의 도우심이 함께 합니다.

     

    4장 6절을 보십시오!

    “그가 내게 대답하여 이르되 여호와께서 스룹바벨에게 하신 말씀이 이러하니라 만군의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이는 힘으로 되지 아니하며 능력으로 되지 아니하고 오직 나의 영으로 되느니라.” 고 하십니다.

     

    네 힘으로 되는 것이 아니다, 네 능으로 되는 것이 아니다, 오직 성령의 능력으로 이루어 지는 것이다! 성전의 건축도 하나님의 신으로 하는 것입니다. 너는 염려하지 말아라 내가 한다 내가 하는 것이다!

     

    여러분! 하나님의 일은 물론 우리의 힘도 필요하지만 가장 큰 힘이나 원동력은 오직 하나님의  성령의 능력으로 되어집니다. 그렇습니다.

    성경은 말씀합니다. “너는 범사에 그를 인정하라 그러면, 너의 길을 지도 하시리라!”하십니다.

     

    먼저 하나님은 비전을 허락하여 주십니다. 우리는 비전을 따라 갈 뿐입니다.  내가 하는 것이 아닙니다.

    본론)

     1. 스가랴가 환상 속에서 본 것은 ‘순금 등잔대와 두 감람나무’였다 했습니다. 본문 2절에는 먼저 이 순금 등잔대의 모양이 묘사되어 있습니다. "... 순금 등잔대가 있는데 그 위에는 기름 그릇이 있고 또 그 기름 그릇 위에 일곱 등잔이 있으며 그 기름 그릇 위에 있는 등잔을 위하여 일곱 관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일곱은 완전을 상징하는 숫자입니다. 본문에서 조금 내려와 10절 하반절에 보면 "이 일곱은 온 세상에 두루 다니는 여호와의 눈이라"고 하나님께서 말씀해주셨다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일곱 개의 등잔이 있는 이 순금 등잔대는 다름 아닌 온 세상 모든 것을 보고 살피시는 하나님 자신을 상징하는 것이었습니다.

    2. 본문 3절에서는 등잔대의 좌우 곁에 두 감람나무가 서있었는데 그 두 감람나무의 뜻은 밑의 14절에서 "기름 부음 받은 자 둘"이라고 해석되었습니다. 12절의 "금기름을 흘리는 두 금관 옆에 있는 이 감람나무 두 가지"라는 말은 그 두 감람나무가 하나님의 기름 부으심을 받은 두 사람을 가리키는 것임을 뒷받침해 줍니다.

    이스라엘의 왕과 대제사장은 하나님으로부터 기름부음을 받음을 받아야 공직에 취임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이 환상은 정치적인 지도자 스룹바벨과 영적, 신앙적 지도자 여호수아를 암시하는 것이라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실제로 에스라서 5장과 6장의 기록을 보면 학개와 스가랴 두 예언자의 효과적인 도움을 받은 총독 스룹바벨과 대제사장 여호수아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끌며 예루살렘 성전 재건을 완성한 사실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가 주목하고자 하는 것은 본문 6절에서 읽는 대로 하나님께서 스룹바벨에게 하셨다는 말씀, 즉 "이는 힘으로 되지 아니하며 능력으로 되지 아니하고 오직 나의 영으로 되느니라" 하는 말씀입니다.

    "오직 나의 영으로 되느니라", 즉 그 어떤 위대한 지도자라 할지라도 그의 인간적인 힘을 신뢰하지 말고 하나님을 의지해야 함을 가르치는 말씀이라는 것입니다.

    3. 에스라서 4장을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성전을 재건하려 할 때에 방해꾼들이 나타납니다. 에스라서 4: 1절을 보면, "유다와 베냐민의 대적이 사로잡혔던 자의 자손이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를 위하여 전을 건축한다 함을 듣고" 포로에서 돌아온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전을 건축한다는 소리를 예루살렘 지역에서 살고 있던 사람들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4:4절의 말씀을 보면 "이로부터 그 땅 백성이 유다 백성의 손을 약하게 하여 그 건축을 방해하되" 훼방합니다.

    어떻게 방해를 놓냐면 그 당시의 전 세계의 패자였던 페르시아 왕 아닥사스다 왕께 '아무래도 지금 이스라엘 백성들이 왕을 모반하려는 시도를 하려는 것 같습니다'라는 무모한 고발 참소를 합니다. 그래서 어떤 결정이 내려집니까? 4장 21절을 보니까 " 이제 너희는 명을 전하여 그 사람들로 역사를 그치게 하여 그 성을 건축지 못하게 하고 내가 다시 조서 내리기를 기다리라" 그래서 성전 재건이 무기한 연기되는 지경에 이르고 맙니다.

    그들의 실패의 가장 큰 이유는 하나님에 대한 사랑과 열정이 부족하다는 점이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함께하신다는 믿음의 부분적 결여였습니다. 부족한 믿음 때문이었습니다. 충전이 된 밧데리가 거의 닳게되면 빌빌 거리며 기계가 잘 작동하지 않습니다. 면도기나 전동칫솔 등을 써보면 그렇습니다. 결국 하나님의 영이 충만하지 않으면 우리도 신앙에서 승리하기 어렵다는 것이지요. 고로 하나님의 영이 충만히 임하도록 우리는 기도하고 겸손해져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교만으로 패망하게 됩니다.

    신명기 8:17과 18절의 말씀에는 " 또 두렵건대 네가 마음에 이르기를 내 능과 내 손의 힘으로 내가 이 재물을 얻었다 할까 하노라 네 하나님 여호와를 기억하라 그가 네게 재물 얻을 능을 주셨음이라 이같이 하심은 네 열조에게 맹세하신 언약을 오늘과 같이 이루려 하심이니라" 고 증거하고 있습니다.

    '내 능력과 내 손으로 이것을 이루었다'이런 교만과 자만심을 갖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뜻은 우리에게 재물 얻을 능력을 누가 주었느냐? 너에게 준 건강, 너의 지혜, 그 근원이 어디에 있느냐? 이것을 잊지 말아라-는 것입니다.

    5. 오늘 본문에서 등잔에 금기름이 나옵니다. 이 기름이 바로 하나님의 성령을 상징합니다. 우리 심령은 하나님의 성령의 인도를 받고 성령의 충만을 늘 사모해야 합니다. 이제 먹고 살만한데 뭔 하나님이냐? 이제 부족함이 없는데 무슨 성령충만이냐? 고 하면 안됩니다. 사탄은 하나님이 필요없다고 느낄 때 우리에게 다가옵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이 자랑해야 할 것은 내가 무엇을 어떻게 했다 가 아니라, 하나님이 나를 도와 주셨는가여야 합니다.  이것은 나의 힘으로도 나의 능으로 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의 영, 성령으로 되었다 라고 고백하는 길입니다.

     

    [7-10절] 큰 산아, 네가 무엇이냐? 네가 스룹바벨 앞에서 평지가 되리라. 그가 머릿돌을 내어놓을 때에 무리가 외치기를 은총, 은총이 그에게 있을지어다 하리라 하셨고 여호와의 말씀이 또 내게 임하여 가라사대 스룹바벨의 손이 이 전의 지대를 놓았은즉 그 손이 또한 그것을 마치리라 하셨나니 만군의 여호와께서 나를 너희에게 보내신 줄을 네가 알리라 하셨느니라. 작은 일의 날이라고 멸시하는 자가 누구냐? 이 일곱은 온 세상에 두루 행하는 여호와의 눈이라. 다림줄이 스룹바벨의 손에 있음을 보고 기뻐하리라.

     

    하나님께서는 스룹바벨의 손을 통해 성전의 기초와 머릿돌을 놓게 하셨습니다. 사람들은 “은총, 은총이 그것(라흐)(KJV, NASB)에게 있을지어다”라고 외칠 것입니다. 그것은 성전 건축의 일이 하나님의 은혜로 시작되고 완성됨을 고백하고 기원하는 것입니다.

     

    10절의 ‘작은 일들’은 이전의 솔로몬 성전에 비교해서 보잘것없어 보이는 스룹바벨 때의 성전 재건 공사를 가리킵니다. 일곱 등잔은 온 세상에 두루 행하는 여호와의 일곱 영을 가리킵니다.

    요한계시록 5:6도, “일곱 눈이 있으니 이 눈은 온 땅에 보내심을 입은 하나님의 일곱 영이더라”고 말햇습니다.

     

    성령께서는 하나님의 영이시며 전지(全知)하신 영이십니다. 성령께서는 온 땅에 두루 행하시며 모든 일을 보시고 행하시며 이루신다.

     

    [11-14절] 내가 그에게 물어 가로되 등대 좌우의 두 감람나무는 무슨 뜻이니이까 하고 다시 그에게 물어 가로되 금 기름을 흘려내는 두 금관 옆에 있는 이 감람나무 두 가지는 무슨 뜻이니이까? 그가 내게 대답하여 가로되 네가 이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느냐? 대답하되 내 주여, 알지 못하나이다. 가로되 이는 기름 발리운 자 둘이니 온 세상의 주 앞에 모셔 섰는 자니라 하더라.

     

    순금등대 좌우의 두 감람나무나 두 가지는 같은 것을 상징한다고 봅니다. 두 감람나무의 두 가지에서 금 기름이, 두 금관을 통하여 흘러 등대의 일곱 등잔에 공급되고 그 등잔은 빛을 냈습니다.

     

    두 감람나무에서 나오는 기름을 금 기름이라고 부른 것은 그 기름의 고귀한 가치를 상징적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그 기름은 분명 성령을 상징합니다.

     

    천사는 그 두 감람나무를 온 세상의 주, 곧 하나님 앞에 모셔 섰는 기름 발리운 자 둘이라고 설명하였다.

     

    구약시대에 기름 발리운 사람은 선지자와 제사장과 왕이었습니다. 여기에서는 먼저 대제사장 여호수아와 총독 스룹바벨을 가리켰다고 보아야 합니다.

     

    그러나 단지 그들 자신을 가리켰다기보다는 그들의 직분과 사역이 예표하는 자를 가리켰다고 볼 수도 있습니다.

     

    그들은 메시아를 예표한 자들이었죠. 메시아께서는 제사장과 왕으로 오실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대제사장들은 예표의 사람들입니다(슥 3:8). 메시아께서 일곱 눈을 가진 돌로 오셔서 친히 고난을 받으시고 죄악을 하루에 제하실 것입니다.

     

    회복된 이스라엘 곧 신약교회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성령의 충만한 공급하심을 받아 세상에 빛을 발할 것입니다.

     

    구약성전이 예표했던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는 진리와 의를 비추는 순금등대와 같습니다. 성전 건립의 일, 곧 성도 개인의 구원과 온전함, 그리고 교회의 건립과 성장과 완성은 참으로 귀하고 가치 있는 일이죠.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작게 보이는 일을 멸시하지 말아야 합니다.

     

    결론)

    성전 재건의 일은 사람의 힘으로 되지 않고 오직 성령의 도우심으로 이루어집니다. 씨를 심는 이나 물을 주는 이는 아무것도 아니고 기르시는 이는 오직 하나님뿐입니니다. 성전 건축이나 교회 부흥의 일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로 됩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와 성령의 충만한 은혜만 의지하면서,개인의 성화를 이루고 교회의 성장과 완성을 위해 힘써야만 합니다.







    스가랴 요약


    스가랴의 이름은 ‘여호와는 기억하신다. 기억하시는 여호와’라는 뜻을 내포하고 있다. 스가랴는 학개와 같은 시대에 활동했으며 학개는 민족의 어른이었지만 스가랴는 젊은 선지자였다. 그는 젊은 날에 소명을 받았고 참담한 현실 앞에서 예루살렘의 과거와 현지와 미래를 보면서 비젼을 바라보았다.

    스가랴가 본 이상은 그 당시 참담했던 예루살렘이 중건될 것과 메시야가 와서 나귀를 타고 입성하실 것을 보았다. 또한 마지막 때에 주님께서 심판하시기 위하여 감람산에 재림하실 것을 미리 내다 보았다.

    스가랴 선지자도 학개와 같이 성전 건축을 게을리하는 백성들을 독려하는 역할을 맡았다. 학개와 스가랴 선지자의 말에 감동된 백성들은 다시 성전 재건 작업을 시작하였고, 두 달 후에 그 기초를 완성하게 되었다. 스가랴서는 백성들에게 책망하고 꾸중하는 부분이 없다.



    시대 상황

    • BC 586: 유다 바벨론 느부갓네살 왕에 의해 멸망
    • BC 539: 바사가 바벨론을 무너뜨림
    • BC 538: 바사의 고레스 왕 유다 백성 귀향 허용
    • BC 536: 유다 백성 귀향 후 성전 재건 시작
    • BC 535: 위협과 법적인 고소로 성전 건축 중단
    • BC 520: 학개의 책망의 메시지로 건축 재개
    • BC 516: 성전 재건 완료


    스가랴가 본 환상들 (1-6장)

    이스라엘은 조상들이 하나님께 불순종과 선지자들의 경고를 무시한 결과 바벨론에 망하고 포로 생활을 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70년의 바벨론 포로 생활을 마치고 예루살렘으로 돌아 왔습니다, 돌아 온 백성에게 스가랴는 조상의 악행을 본받지 말고 회개하라는 경고로 메시지를 시작합니다.

    • (1:3) 그러므로 너는 그들에게 말하기를 만군의 여호와께서 이처럼 이르시되 너희는 내게로 돌아오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그리하면 내가 너희에게로 돌아가리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유다 백성과 관련하여 '돌아오라’라는 단어는 그들이 타락한 행실을 바꾸고 새로운 삶으로 하나님께로 돌아와야 함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그들을 “돌이가리라”는 것은 그분께서 그들을 다시 그분의 은총으로 받아들이시고 불쾌함이 아닌 명백한 친절을 베푸실 것임을 의미합니다.[8]
    • (1:15) 안일한 여러 나라들 때문에 심히 진노하나니 나는 조금 노하였거늘 그들은 힘을 내어 고난을 더하였음이라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에게 분노하셨던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은 단지, 부모가 자녀의 유익을 위해 그들을 벌하실 뿐입니다. 그런데 나라들은 하나님께서 쓰시는 단순한 도구로서의 역할을 넘어섰습니다. 이스라엘을 완전히 파괴하거나, 벌을 내리기로 예정된 기간을 넘어 그들을 억압하기를 원했습니다. 앗수르(이사야 10:5 등)와 바벨론(이사야 47:6)에 대해서도 비슷한 책망이 있습니다.[9]

    8개 환상 (1:7-6:8)

    요약표[7]

    환 상 의 미


    화석류나무 사이의 천사 주께서 예루살렘을 다시 축복하신다
    네 뿔과 대장장이 네 명 유다를 흩었던 자들은 쫓겨난다
    척량줄을 잡은 사람 하나님께서 예루살렘을 불로 보호하실 것이다
    대제사장 여호수아 종 싹(The servant the Branch)께서 구원하러 오신다
    등잔대와 두 감람나무 주께서 성령으로 이스라엘에게 능력을 주신다
    날아가는 두루마리 부정직은 저주받는다
    에바 속의 여인 사악함은 제거될 것이다
    네 병거 천사를 통해 모든 세상을 심판하신다

    8개의 환상이 4개의 주제로 대칭 이루고 있다.[10]

    • 순찰하는 네 명의 말 탄 자들 (1:8-17, 6:1-6): 하나님께서 감찰하신다
    • 이스라엘의 과거 죄, 포로기 상기 (1:18-21, 5:5-11)
    • 새 예루살렘 재건 (2:1-13, 5:1-4): 모든 민족의 등불, 그리고 말씀으로 정결케 됨
    • 지도자 (3:1-10, 4:1-14): 메시아의 나라 도래

    화석류나무 사이의 천사 (1:7-17)


    화석류나무 (myrtus communis)

    화석류나무 사이에 한 천사가 있고 그 뒤에 붉은 말과 자줏빛 말과 백마가 있는 환상을 봅니다. 그들은 땅을 감찰하기 위해 하나님께서 보내신 자들이라고 천사가 설명합니다. 그들은 땅이 평안하다고 천사에게 보고합니다. 천사는 하나님께 언제 유다 백성에 대한 노를 푸실지 질문합니다. 하나님은 그들을 불쌍히 여기시고 그들에게 복을 주시리라 약속하십니다.

    • (1:17) 그가 다시 외쳐 이르기를 만군의 여호와의 말씀에 나의 성읍들이 넘치도록 다시 풍부할 것이라 여호와가 다시 시온을 위로하며 다시 예루살렘을 택하리라 하라 하니라 하나님은 유다에 대한 사랑을 보여주기 위해 그 도시들을 자신의 것으로 부르셨으며, 그 도시들이 귀향하는 자들에 의해 재점유될 뿐만 아니라, 인구가 증가함에 따라 그 범위와 수가 증가할 것이라고 약속하십니다. 이 예언의 항목들의 부분적 성취는 성전 재건, 느헤미야에 의한 예루살렘의 회복, 그리고 아스모네아(Asmonean) 군주들의 통치 하에서 유다의 번영에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마지막 구절에서 추가적인 축복에 대한 힌트가 주어졌지만, 그 축복의 본질은 명확하게 언급되지 않았습니다.[9]

    네 뿔과 대장장이 네 명 (1:18-21)

    이스라엘을 망하게 한 나라들로 네 뿔과 그 나라들을 망하게 할 대장장이 네 명을 보이십니다.

    • (1:21) 내가 말하되 그들이 무엇하러 왔나이까 하니 대답하여 이르시되 그 뿔들이 유다를 흩뜨려서 사람들이 능히 머리를 들지 못하게 하니 이 대장장이들이 와서 그것들을 두렵게 하고 이전의 뿔들을 들어 유다 땅을 흩뜨린 여러 나라의 뿔들을 떨어뜨리려 하느니라 하시더라 두 번째 환상은 첫 번째 환상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으며, 하나님께서 이방 나라들의 자기 안보에 대한 맹렬한 진노를 어떻게 내리실 것인지를 보여줍니다(슥 1:15).

    척량줄을 잡은 사람 (2장)

    척량줄(Measuring Line)을 잡은 사람이 예루살렘을 측량한다고 합니다. 천사는 스가랴에게 예루살렘은 성곽이 없는 도시가 될 거라고 알려줍니다.

    • (2:5) 여호와의 말씀에 내가 불로 둘러싼 성곽이 되며 그 가운데에서 영광이 되리라 예루살렘은 벽이 필요 없을 것이다. 하나님께서 그의 보호자가 되어, 공격으로부터 그를 방어할 뿐만 아니라, 그를 공격하려고 하는 적을 소멸시킬 것이다(신명기 4:24;[11] 시편 68:2[12] 참조).[9]

    대제사장 여호수아 (3장)

    여호수아가 천사 앞에 사단이 그 오른쪽에 섰는데, 하나님께서 사단을 책망하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여호수아 입고 있는 더러운 옷을 벗기고 아름다운 옷을 입히게 하십니다. 유다의 죄에 대한 용서와 그들의 회복을 상징합니다.

    • (3:9)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가 너 여호수아 앞에 세운 돌을 보라 한 돌에 일곱 눈이 있느니라 내가 거기에 새길 것을 새기며 이 땅의 죄악을 하루에 제거하리라 하나님의 일곱 눈(완벽한 감시와 보살핌을 의미함. 일곱은 완벽함을 뜻하는 숫자임)이 이 돌(성전, 메시아) 위에 고정되어 있을 것이라는 약속이라고 해석합니다. 즉, 그분은 그 돌에 대한 목적이 성취될 때까지 결코 눈을 떼지 않으실 것이라는 뜻입니다. “하루에”. 속죄의 날 즉 예수님의 십자가로 이 땅의 죄악이 제거됩니다.[13]
    • (3:10)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노라 그 날에 너희가 각각 포도나무와 무화과나무 아래로 서로 초대하리라 하셨느니라 사랑과 친절로, 복음의 동일한 신성한 은혜와 축복에 참여함으로써 이웃이 되는 사람들을 초대합니다. 거룩한 의무와 경건한 교제에 함께 참여하고, 참 포도나무 그늘 아래 앉아 기쁨으로 그 열매를 맛보는 것은 마치 유대에서 사람들이 그늘 아래서 함께 잔치를 벌이고 포도나무와 무화과나무 열매를 먹는 것과 같습니다. 죄책과 불의의 권세가 제거되고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 되면, 우리는 칭의, 거듭남, 그리스도와의 연합의 열매로서 귀중한 특권과 축복을 받습니다.[8]

    등잔대와 두 감람나무 (4장)

    등잔대 (lampstand, 메노라 - המנורה)

    천사가 스가랴에게 두 감람(올리브)나무에서 기름을 공급받는 금등잔대를 보여줍니다.

    • (4:6) 그가 내게 대답하여 이르되 여호와께서 스룹바벨에게 하신 말씀이 이러하니라 만군의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이는 힘으로 되지 아니하며 능력으로 되지 아니하고 오직 나의 영으로 되느니라 두 올리브나무는 유다 총독 스룹바벨과 대제사장 여호수아를 상징합니다. 금등잔대는 성전과 성전을 숭배하는 공동체를 상징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다시 한번 그분의 백성을 통해 성전의 기초를 놓고 그 일을 마무리하실 것이라는 요점을 말씀하셨습니다.[14] 스룹바벨과 여호수아는 유대인들을 지휘하여 성전을 완성하고 유대 국가를 재건할 것이다. 무력으로가 아니라, 인간의 힘으로가 아니라 하나님의 섭리와 은혜의 도움으로 그렇게 할 것이다. 마치 등잔에 기름이 사람의 도움 없이 비밀스럽고 보이지 않는 방식으로 공급되는 것과 같다.[8]
    • (4:10) 작은 일의 날이라고 멸시하는 자가 누구냐 사람들이 스룹바벨의 손에 다림줄이 있음을 보고 기뻐하리라 이 일곱은 온 세상에 두루 다니는 여호와의 눈이라 하니라 성경 예언의 정확한 성취는 그것이 하나님으로 부터 왔다는 것에 대한 설득력 있는 증거입니다. 도구가 약하고 가능성이 없어도, 하나님은 종종 그들을 택하여 위대한 일들을 이루십니다. 새벽의 빛을 멸시하지 마십시오. 그것은 점점 더 밝아져서 완전한 날이 될 것입니다. 재건을 마칠 수 없다고 절망했던 사람들은 스룹바벨의 지휘 아래 일이 성사되는 것을 보고 기뻐할 것입니다. 온 땅을 다스리는 동일한 전지전능한 섭리가 특히 교회에 대해 잘 알고 있다는 것은 우리에게 위안이 됩니다. 손에 다림줄을 든 모든 사람은 주님의 눈을 바라보고, 끊임없이 하나님의 섭리를 존중하며, 그 인도에 의지하여 행동하고 순종해야 합니다. 우리의 믿음을 그리스도께 고정시키고, 그분이 자신의 영광스러운 계획에 따라 자신의 일을 수행하고 매일 영적 건물을 완성에 더 가까이 가져오는 것을 봅시다.[15]

    감람(올리브) 나무

    • (4:14) 이르되 이는 기름 부음 받은 자 둘이니 온 세상의 주 앞에 서 있는 자니라 하더라 스가랴는 두 올리브나무가 무엇인지 알고 싶어합니다. 왕손 스룹바벨과 제사장 여호수아는 하나님의 영의 은사와 은혜를 받았습니다. 그들은 같은 시대에 살았고, 둘 다 하나님의 일과 봉사에 도구가 되었습니다. 그 둘은 왕과 제사장이라는 그리스도의 직분을 예시합니다. 이 두 직분이 인간의 몸으로 오신 하나님의 인격 안에서 결합됨으로써 은혜의 충만함이 받아들여지고 부여됩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성전을 건축했습니다. 영적으로 그리스도도 그렇게 하십니다. 그리스도는 메시아 즉 기름부음받은 자일 뿐만 아니라, 그의 교회에 좋은 올리브이십니다. 그의 충만함에서 우리는 그 기름을 받습니다. 그리고 성령께서 우리가 받은 기름부음입니다. 올리브나무이신 그리스도로부터, 올리브가지이신 성령에 의해, 은혜의 모든 황금 기름이 믿는 이들에게 흘러가서 그들의 등잔이 타오르게 합니다. 구주의 중보와 은혜를 통해, 지금까지 그의 모든 성도들에게 충분했던 그 충만함에서 공급을 구합시다. 복음 안에서 그를 기다리며, 몸과 혼과 영으로 온전히 거룩해지기를 원합시다.[15]

    날아가는 두루마리 (5:1-4)

    여섯 번째 환상은 날아가는 커다란 두루마리(Scroll)입니다.

    • (5:3) 그가 내게 이르되 이는 온 땅 위에 내리는 저주라 도둑질하는 자는 그 이쪽 글대로 끊어지고 맹세하는 자는 그 저쪽 글대로 끊어지리라 하니 구약과 신약의 성경은 하나님께서 그의 율법과 복음의 위대한 것들을 기록하신 두루마리입니다. 그것은 날아다니는 두루마리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매우 빠르게 달립니다(시 147:15).[16] 이 날아다니는 두루마리에는 죄인들에 대한 하나님의 의로운 진노의 선언이 들어 있습니다.[15]

    에바 속의 여인 (5:5-11)

    이번에 스가랴가 보는 환상은 에바(Basket, 광주리)에 한 여인이 있고 날개 달린 두 여인이 그 에바를 들어 옮깁니다. 에바는 온 땅에서 그들의 모양(죄)이고[17] 광주리 안에 있는 여인은 악이라고 설명합니다.

    • (5:11) 그가 내게 이르되 그들이 시날 땅으로 가서 그것을 위하여 집을 지으려 함이니라 준공되면 그것이 제 처소에 머물게 되리라 하더라 에바 가운데 앉아 있는 여자는 타락한 후기 시대의 죄 많은 유대인을 상징합니다. 스가랴는 그 여인이 들어 있는 에바가 먼 나라로 옮겨지는 것을 봅니다. 이것은 유대인들이 자기들의 땅에서 서둘러 쫓겨나 바빌론에서처럼 먼 나라에 살도록 강요당할 것을 암시합니다.[15] 시날(Shinar): 고대 메소포타미아 남부 지역으로 바벨론을 구약 성서에서 시날 이라고 불렀다(창10:10, 11:2, 14:1, 사11:11, 슥5:11, 단1:2).[18]

    네 병거(6:1-8)

    네 병거 환상 - 구스타브 도레(Gustave Doré)[19] 작품

    두 구리(bronze) 산 사이에서 나오는 네 병거(Chariots)를 봅니다. 병거는 각각 붉은 말들, 검은 말들, 흰 말들, 그리고 얼룩말들이 끕니다. 그들은 하늘의 네 바람으로 세상에 나가 땅을 살핍니다.

    • (6:5) 천사가 대답하여 이르되 이는 하늘의 네 바람인데 온 세상의 주 앞에 서 있다가 나가는 것이라 하더라 ‘하늘의 네 바람’은 유대인들에게 친숙한 상징으로 ‘바람’은 종종 죄인들에게 하나님의 뜻을 집행하는 데 사용됩니다(시편 104:4;[20] 시편 148:8;[21] 예레미야 49:36;[22] 다니엘 7:2[23] 참조). 바람은 하나님의 종으로 여겨지며, 하나님의 뜻을 수행하기 위해 그의 명령에 따라 나갑니다.[9]
    • (6:8) 그가 내게 외쳐 말하여 이르되 북쪽으로 나간 자들이 북쪽에서 내 영을 쉬게 하였느니라 하더라 문자적으로 해석하면, 이전에는 적들에 대한 심한 불쾌함으로 진노했던(스가랴 1:15) 내 영이, 의로운 보복이 완료되었기 때문에 지금은 쉬고 있다. 어떤 사람들은 다른 곳(전도서 10:4;[24] 잠언 29:11,[25] 후자의 경우, 여기와 마찬가지로 LXX는 θυμός)에서 처럼 “영”을 “분노”라고 생각합니다. 즉 “내 분노를 그 위에 머물게 하였다”로 해석합니다. 요한이 믿지 않는 자에 대해 “하나님의 진노가 그 위에 머물러 있느니라(요 3:36)”라고 말한 것과 같습니다.[13]

    여호수아의 면류관 (6:9-15)

    그리고 하나님은 스가랴 선지자에게 은과 금으로 면류관을 만들어 여호수아에게 씌우라 말씀하십니다.

    • (6:15) 먼 데 사람들이 와서 여호와의 전을 건축하리니 만군의 여호와께서 나를 너희에게 보내신 줄을 너희가 알리라 너희가 만일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들을진대 이같이 되리라 바빌론에서 하나님께 예물을 가지고 온 자들은 이방인들의 표상이 되었는데, 사도들은 이방인들에 대하여 "이제는 전에 멀리 있던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워졌느니라" (에베소서 2:13), "또 오셔서 먼 데 있는 너희에게 평안을 전하시고 가까운 데 있는 자들에게 평안을 전하셨으니" (에베소서 2:17), "이 약속은 너희와 너희 자녀와 모든 먼 데 사람 곧 주 우리 하나님이 얼마든지 부르시는 자들에게 하신 것이라 하고" (사도행전 2:39) 말합니다.[26]

    하나님께 순종하라 (7-8장)

    환상에 대해서는 마쳤지만 이 책의 계시에 대해서는 아직 다루지 않았습니다. 환상을 더 이상 보지 못하지만 스가랴에게 여전히 “여호와의 말씀이 임했습니다." 백성들이 선지자에게, 그들이 포로로 잡혀 있던 70년 동안 종교적으로 지켰던 엄숙한 금식을 계속해야 할지 묻습니다(슥 7:1-3). 이 질문에 대한 답이 7장과 8장에 나와 있습니다. 이 답변은 한꺼번에 다 주어진 것이 아니라 네 번에 걸쳐 주어지고, 각 담화는 뚜렷하게 “여호와의 말씀이 임했다"는 서문이 있습니다(슥 7:4, 7:8, 8:1, 18). 즉, 1. 금식에 대한 잘못된 이해 책망(슥 7:4-7), 2. 그들의 죄를 기억하고 삶의 개혁 권고(슥 7:8-14), 3. 상처를 살핀 후, 그것을 싸매고 치유하며, 하나님께서 그들을 위해 큰 자비에 대한 은혜로운 약속(8:1-17), 4. 그 자비로 그들의 금식을 축제로 바꾸실 것이라고 희망(8:18-23)입니다.[15]

    여호와께서는 금식보다 청종을 원하신다 (7:1-7)

    백성이 관례대로 근신을 계속해야 하는지 질문합니다. 이에 대해 하나님은 스가랴를 통해 답하십니다. 먼저 그들의 금식은 하나님을 향한 진심이 아니었다고 책망하십니다.

    • (7:3) 만군의 여호와의 전에 있는 제사장들과 선지자들에게 물어 이르되 내가 여러 해 동안 행한 대로 오월 중에 울며 근신하리이까 하매 “오월 중에" 일곱째 날부터 열째 날까지 예루살렘은 불길에 휩싸였습니다. 느부갓네살이 불을 질렀습니다. "그는 주님의 집과 왕의 집과 예루살렘의 모든 집과 모든 위대한 사람들의 집을 불태웠습니다."[26] 유대인들은 이를 기억하며 금식했었습니다.
    • (7:6) 너희가 먹고 마실 때에 그것은 너희를 위하여 먹고 너희를 위하여 마시는 것이 아니냐 먹는 것도 너희가 아니냐? 마시는 것도 너희가 아니냐? 거기서 문제는 끝난다. 자기가 문제이고, 하나님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고린도전서 8:8;[27] 고린도전서 10:31[28] 비교).[9]

    사로잡혀 가는 까닭 (7:8-14)

    하나님께서 백성에게 정의와 사랑을 실천하라 하셨으나 그들은 순종하지 않았습니다.

    • (7:12) 그 마음을 금강석 같게 하여 율법과 만군의 여호와가 그의 영으로 옛 선지자들을 통하여 전한 말을 듣지 아니하므로 큰 진노가 만군의 여호와께로부터 나왔도다 그들은 돌처럼 마음을 굳게 만들어 깎거나 새길 수 없게 만들었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어떤 메시지도 들어올 수 없게 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그들 자신의 고집 때문이었습니다.[9]

    예루살렘 회복에 대한 약속 (8:1-17)

    금식을 계속해야 할지의 질문에 대한 답으로 7장은 불순종에 대한 책망이었고 8장은 기꺼이 순종하는 자들에게 격려하는 두 말씀입니다. 전자(슥 8:1-17)에서 하나님은 예루살렘이 회복되고 개혁될 것이라고 약속하신다(스가랴 8:2-8). 나라가 부강해질 것이며, 그들의 명예가 회복될 것이며, 그들의 상태가 모든 면에서 지난 여러 해 동안의 상태와 반대가 될 것이다(스가랴 8:9-15). 그는 그들에게 그들 가운데 잘못된 것을 바로잡아 그들이 그들에게 계획된 이 은혜를 받을 준비가 되도록 권고합니다(슥 8:16, 17).[15]

    • (8:16) 너희가 행할 일은 이러하니라 너희는 이웃과 더불어 진리를 말하며 너희 성문에서 진실하고 화평한 재판을 베풀고 선의 약속의 성취를 받기 위해 그들은 하나님의 뜻을 행해야 합니다(스가랴 7:9 등). 진리는 이웃과의 모든 대화와 거래에서 지켜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이 명령을 인용합니다(에베소서 4:25).[29] 재판에서 완벽한 공평을 실천하고, 진실과 정의에 따라 판결하여 관련 당사자 간에 평화와 화합을 이루어야 합니다. 성문은 당시 재판관들이 앉아 정의를 집행하던 곳입니다(신명기 16:18; 신명기 21:19; 아모스 5:10 참조).[9]

    금식에 관하여 말씀하시다 (8:18-23)

    두 말씀 중 후자(슥 8:18-23)에서 하나님은 백성들의 금식이 자비의 보답으로 대체될 것이라고 약속합니다(슥 8:19). 그리고 그 후에 그들은 이방 나라들이 그들에게 다가 옴으로서 회복되고, 부강해질 것이라고 약속하십니다(슥 8:20-23).[15]

    • (8:19) 만군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넷째 달의 금식과 다섯째 달의 금식과 일곱째 달의 금식과 열째 달의 금식이 변하여 유다 족속에게 기쁨과 즐거움과 희락의 절기들이 되리니 오직 너희는 진리와 화평을 사랑할지니라 이러한 금식의 준수는 하나님께서 명하셨거나 금하시지 않은 듯합니다. 하지만 그들의 죄로 인해 절기는 애통으로 바뀌었습니다(아모스 8:10).[30] 이제 그들의 금식은 기쁜 잔치로 바뀌어야 하며, 이전의 비참함은 지금 그들에게 쏟아지는 축복 앞에서 잊혀져야 합니다. 그러므로 진리와 평화를 사랑하십시오. 이것이 약속의 성취의 조건입니다(슥 8:16; 슥 7:9). 여기서도 다시 한 번 강력하게 각인되어 있습니다.[9]
    • (8:23) 만군의 여호와가 이와 같이 말하노라 그 날에는 말이 다른 이방 백성 열 명이 유다 사람 하나의 옷자락을 잡을 것이라 곧 잡고 말하기를 하나님이 너희와 함께 하심을 들었나니 우리가 너희와 함께 가려 하노라 하리라 하시니라 열 명은, 많은 사람들이라는 뜻으로, 어떤 민족도 더 이상 배제되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참 신앙을 고백하는 자들이며 유대 민족의 조상들에게 주어진 약속에 속한 자들이기 때문에 때때로 유대인이라는 이름으로 불린다. 특히 이런 의미에서 이 단어는 여기서 받아들여져야 한다. 다른 사람을 붙잡는 것은 그의 친절한 도움을 간청하는 몸짓이다(이사야 3:6; 이사야 4:1 참조). 그러므로 이 구절의 의미는 이교도들이 교회에 들어갈 자격을 갖추기 위해, 그리스도인들에게 교훈을 구한다는 것이다.[8] 제롬은 “유다 사람”을 메시아로 해석했습니다.[9]

    회복과 메시야의 소망 (9-14장)

    이스라엘의 회복과 메시아 소망에 대한 예언입니다. 메시아께서 겸손하게 나귀를 타고 예룰살렘 입성하십니다(9-10장). 그런데 그 메시아는 거부를 당하십니다(11장). 마지막으로 선지자에게 메시아 왕국 즉 새 예루살렘이 보입니다(12-14장).

    그리고 9-11장은 예수님의 초림, 12-14장은 예수님의 재림의 예언이라는 해석도 있습니다.

    이스라엘 이웃 나라들에 대한 하나님의 말씀 (9:1-8)

    이스라엘 주변 국가에 대한 심판이 예언됩니다. 이 예언은 바사를 무너뜨리고 근동 지역을 지배하는 알렉산더 대왕의 그리스에 의해 성취되었다고 (BC 330년 경) 해석합니다. 그리스가 다른 나라들은 무너뜨릴 때 예루살렘은 하나님의 보호 아래 무사했습니다.

    • (9:8) 내가 내 집을 둘러 진을 쳐서 적군을 막아 거기 왕래하지 못하게 할 것이라 포학한 자가 다시는 그 지경으로 지나가지 못하리니 이는 내가 눈으로 친히 봄이니라 여러 나라에 대한 심판이 예언되었습니다. 그런데, 마케도니아인(Macedonians)과 그리스의 알렉산더의 군대들이 이 나라에서 전쟁을 벌이고 있을 때, 주님은 그의 백성을 보호하겠다고 약속하십니다. 하나님의 성전은 적의 한가운데에 있고, 그의 백성은 가시덤불 가운데 있는 백합과 같습니다. 하나님의 권능과 선하심은 그들을 특별한 보호에서 드러납니다. 주님은 그의 백성 주위에 진을 치고, 교만한 반대자들의 군대가 지나가고 돌아올 때, 그의 눈은 백성을 지켜 적들이 이길 수 없도록 하시고, 나아가 더 이상 어떤 적이 그의 백성을 지나가지 않을 때가 올 것입니다.[15]

    구원을 베풀 왕 (9:9-17)

    선지자는 메시아가 오심을 기쁘게 표현합니다.

    • (9:9) 시온의 딸아 크게 기뻐할지어다 예루살렘의 딸아 즐거이 부를지어다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시나니 그는 공의로우시며 구원을 베푸시며 겸손하여서 나귀를 타시나니 나귀의 작은 것 곧 나귀 새끼니라 선지자는 예루살렘에 그들의 왕이 오심을 기뻐하라고 권합니다. 그 왕은 알렉산더 대왕과 같은 강력한 지상의 권세자나 정복자가 아니라, 다른 종류의 왕입니다(스바냐 3:14[31] 비교).[9]
    • (9:16) 이 날에 그들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들을 자기 백성의 양 떼 같이 구원하시리니 그들이 왕관의 보석 같이 여호와의 땅에 빛나리로다 구원의 모든 것은 하나님의 행하심이어야 한다. 그들은 늑대들 가운데 있는 양떼와 같았으며, 잡아먹힐 준비가 되어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의 “양떼, 곧 그분의 백성"이다. 그분께서 말씀하셨듯이, "내가 그들의 수효를 양 떼 같이 많아지게 하되, 제사 드릴 양 떼 곧 예루살렘이 정한 절기의 양 무리 같이 황폐한 성읍을 사람의 떼로 채우리라" 에스겔 36:37-38. "사람이 온 힘을 다하여 양떼를 구원하듯이, 그분은 그의 백성을 구원하실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그의 양떼이기 때문이다." 시편 77:20에서처럼, "주의 백성을 양 떼 같이 모세와 아론의 손으로 인도하십니다". 원수들은 하나님의 백성을 하찮은 돌처럼 짓밟을 것이지만, 그들은 목적을 달성하지 못하고, 백성은 귀중한 보석이 될 것이다. 왕이나 제사장의 성별된 왕관이 "높이 올려져" 모든 사람이 볼 수 있도록 될 것이다.[26]

    여호와께서 구원을 약속하시다 (10장)

    10장에서는 메시아의 통치를 자세히 언급한다. 그는 거짓 목자를 폐하고 우상을 제거하고, 흩어진 유대인들을 모으고 대적을 궤멸시키실 것이다. 그의 출현으로 정의와 평화가 강같이 흐르는 새 왕국이 건설될 것이다.[32]

    • (10:4) 모퉁잇돌이 그에게서, 말뚝이 그에게서, 싸우는 활이 그에게서, 권세 잡은 자가 다 일제히 그에게서 나와서 유다에서 왕자 즉 온 건물이 그 위에 놓일 모퉁잇돌이 나올 것입니다(이사야 28:16).[33] 이는 곧, 첫째, 이스라엘이 외국 통치자들로부터 독립할 것이고 둘째, 유다에서 메시아, "모퉁이의 머릿돌"이 나올 것입니다(마태복음 21:42;[34] 에베소서 2:20; 히브리서 7:14).[9]
    • (10:8) 내가 그들을 향하여 휘파람을 불어 그들을 모을 것은 내가 그들을 구속하였음이라 그들이 전에 번성하던 것 같이 번성하리라 목자가 휘파람으로 양 떼를 모으듯이 먼 나라에서 그들을 부를 것이다. 왜냐하면 주께서 신성한 섭리의 작용으로 그들을 원수의 손에서, 그리고 그들을 포로로 잡은 자들로부터 구출하고 구속할 것이기 때문이다.[8]

    거부당하는 메시아 (11장)

    11장은 1-3절은 하나님의 심판, 나머지 절에서 심판하시는 이유가 설명됩니다. 심판의 이유는 이스라엘이 메시아를 거부했기 때문입니다. 이 심판의 장면은 AD 70년, 예수님께서 승천 후 약 40년 뒤, 예루살렘이 로마에 점령당한 사건의 예언이라는 해석이 주류입니다.

    • (11:1) 레바논아 네 문을 열고 불이 네 백향목을 사르게 하라 선지자는 유다에 내릴 형벌을 생생하게 묘사합니다. 이 형벌을 초래한 죄, 즉 목자와 왕을 거부한 죄는 나중에 비난받습니다(9절). 레바논은 북쪽에서 들어오는 길목으로, 대부분의 적대적인 군대가 그곳을 거쳐 이스라엘로 들어왔습니다. 레바논의 "문"은 그 나라로 들어가는 길을 열어준 산길입니다. 일부 주석가들은 고대 유대교 해석을 따라 레바논이 성전이나 예루살렘을 의미한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다음 절들을 은유적으로 해석하기 어렵기 때문에 “레바논”을 문자적으로 해석하는 것이 맞다고 봅니다.[9]
    • (11:4) 여호와 나의 하나님이 이르시되 너는 잡혀 죽을 양 떼를 먹이라 이스라엘 백성은 선지자가 의인화한 선한 목자를 거부했기 때문에 처벌을 받았습니다. 그 목자는 양 떼를 다스리고 악한 자들을 징벌하지만 그들은 변하지 않습니다. 마침내 그들의 반항에 분노하십니다. “하나님이 이르시되” - 말씀을 받은 사람은 스가랴 자신인데, 그는 환상 속에서 선한 목자의 직분을 맡고(15절 참조) 택함받은 백성, 곧 주님의 목초지의 양 떼를 돌보라는 명령을 받았습니다. 이 말씀에서 하나님께서는 외부의 적들과 국내의 불의한 통치자들로 인해 그들이 겪은 다양한 시련 속에서도 가장 초기부터 그의 백성을 돌보심을 보이려고 계획하셨습니다. “잡혀 죽을 양 떼” - 현재 통치자(목자)들의 손에 의해 멸망하도록 노출되어 있습니다(시편 44:22; 예레미야 12:3; 로마서 8:36).[9]
    • (11:13)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그들이 나를 헤아린 바 그 삯을 토기장이에게 던지라 하시기로 내가 곧 그 은 삼십 개를 여호와의 전에서 토기장이에게 던지고 가룟 유다가 은 30냥으로 예수님을 팔고, 양심에 가책을 받아 그 돈을 돌려주었는데, 그 돈으로 대제사장들은 토기장의 밭을 사서 나그네의 묘지로 삼았습니다(마27:3-10, 행1:18).[35] 은 30냥, 당시 유대인들에게 미천한 종의 가치로 상징되는, 그 가치 정도로 이스라엘은 진정한 목자, 진정한 왕, 메시아, 예수님을 거부했습니다. 

    예루살렘의 구원 (12장)

    12-14장은 전체적으로 도래할 메시아 왕국의 승리를 부각시키는 데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12장은 예루살렘의 승리(1-9절)와 회개 운동을 다루고 있다.[32]

    • (12:3) 그 날에는 내가 예루살렘을 모든 민족에게 무거운 돌이 되게 하리니 그것을 드는 모든 자는 크게 상할 것이라 천하 만국이 그것을 치려고 모이리라 돌이 너무 무거워서, 들어올리려고 하는 이의 손아귀에서 미끄러져 상처를 입거나 더한 부상을 입을 것입니다. 초대 교부 제롬의 설명에 의하면, 유대 지역을 포함한 당시 팔레스타인의 도시에서, 매우 무거운 둥근 돌을 놓고, 젊은이들이 그 위에서 운동을 헸디고 합니다. 그들은 각자의 힘에 따라, 어떤 사람은 무릎까지, 어떤 사람은 배꼽까지, 어떤 사람은 어깨와 머리까지 들어올립니다. 어떤 사람은 엄청난 힘을 과시하며, ​​두 손을 똑바로 위로 하여 무게를 머리 위로 들어올립니다.[13]
    • (12:10) 내가 다윗의 집과 예루살렘 주민에게 은총과 간구하는 심령을 부어 주리니 그들이 그 찌른 바 그를 바라보고 그를 위하여 애통하기를 독자를 위하여 애통하듯 하며 그를 위하여 통곡하기를 장자를 위하여 통곡하듯 하리로다 “부어 준다”는 것은 풍부한 유출을 나타냅니다. (비교 요엘 2:26)[36] 여기서 "은총”이라는 단어는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은혜(grace)라는 주된 의미가 아니라, 이차적인 의미, 즉 성령의 은사와 영향력을 통해 인간에게 미치는 그 은총의 효과라는 의미로 사용됩니다. 요한복음 1:16;[37] 고린도전서 15:10;[38][13]

    치임 받는 목자 (13장)

    13장에서는, (1) 복음 시대와 관련된 몇 가지 추가 약속을 다룹니다. 죄 사함(슥 13:1), 마음의 개혁(슥 13:2), 특히 거짓 선지자들을 정죄하고 침묵시키는 것에 대한 약속이 있습니다(슥 13:2-6). (2) 그리스도의 고난과 그로 인한 그의 제자들의 분산(슥 13:7), 얼마 지나지 않아 유대 민족의 대부분이 멸망(슥 13:8)되고, 그들 중 남은 자들, 곧 하나님께 특별한 백성이 정화되는 것에 대한 예언입니다(슥 13:9).[15]

    • (13:1) 그 날에 죄와 더러움을 씻는 샘이 다윗의 족속과 예루살렘 주민을 위하여 열리리라 모든 죄를 깨끗이 하는 그리스도의 피(요일 1:7)가[39] 여기서 분명히 의도된 바는 유대인들이 회개하고 개종하면 기독교 언약의 모든 특권을 받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8]
    • (13:7)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노라 칼아 깨어서 내 목자, 내 짝 된 자를 치라 목자를 치면 양이 흩어지려니와 작은 자들 위에는 내가 내 손을 드리우리라 여기 그리스도의 고난에 대한 예언이 있습니다. 하나님 아버지는 아들이 자신의 영혼을 죄를 위한 제물로 기꺼이 바쳤을 때, 그의 정의의 칼이 깨어나도록 명령하셨습니다. 그리스도와 아버지는 하나입니다. 그는 양을 위해 자신의 목숨을 바칠 목자입니다. 희생 제물이라면 그는 죽임을 당해야 합니다. 생명의 피가 흘리지 않고는 용서가 없기 때문입니다. 이 구절은 그리스도께서 배반당하던 밤에 모든 제자들이 그를 버리고 도망쳤을 때 성취되었습니다.[15]

    여호와의 날 (14장)

    그 날에는 빛이 없겠고 광명한 것들이 떠날 것이라 (슥 14:6)

    기독교의 역사는 하나님의 창조로 시작하여 주의 강림으로 종결될 것이다. 이스라엘의 고난의 역사가 주의 출현으로 끝나듯, 인류 역사도 주의 재림으로 끝맺는다. 그날이 의인(이스라엘)에게는 승리의 날이나 악인(이방 여러 나라)에게는 파멸의 때이다(12-15절).[32]

    폴 N. 벤웨어는 스가랴서의 핵심 단어를 “장차 올 메시야”로 그리고 14장(메시아의 강림)을 핵심 장으로 본다.[40]

    • (14:6) 그 날에는 빛이 없겠고 광명한 것들이 떠날 것이라 R. V. 난외주에 있는 것처럼, 즉 천체들이 어두워질 것이다. 그것은 깊은 어둠의 날이 될 것이다. 비교: “해와 달이 캄캄하며 별들이 그 빛을 거두도다” 요엘 3:15, 마태복음 24:29; 요한계시록 6:12-13.[13]
    • (14:9) 여호와께서 천하의 왕이 되시리니 그 날에는 여호와께서 홀로 한 분이실 것이요 그의 이름이 홀로 하나이실 것이라 여호와는 하나이실 것입니다. 즉, 그분은 본질과 사실에 있어서 변함없이 존재하시므로 사람들이 그분을 인정하고 경배하는 데 있어서도 하나이실 것입니다. 칼빈이 이 구절을 자세히 해석했듯이, 이교도 중 많은 이들도 그것을 인정하기 때문에, 하나님은 한 분의 최고신과 신성의 근원으로 인정되십니다. 그뿐만 아니라 그분 자신에 대한 여러 계시는 그분이 더 이상 다른 여러 열등한 신 중 하나로 여겨지지 않고, 그분이 사람들에게 자신을 알리는 유일한 이름의 일부와 측면으로 여겨질 것입니다. 거룩한 삼위일체의 세 인격도 하나의 이름에 포함될 것입니다. 마태복음 28:19[41][13]
    • (14:21) 예루살렘과 유다의 모든 솥이 만군의 여호와의 성물이 될 것인즉 제사 드리는 자가 와서 이 솥을 가져다가 그것으로 고기를 삶으리라 그 날에는 만군의 여호와의 전에 가나안 사람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라 나라의 모든 그릇은 거룩하게 하여 신성한 예배에 사용된다. 레위인의 구별은 폐지되고, 주님의 예배는 완전한 자유가 될 것이다. 교회의 모든 구성원은, 그의 지위가 아무리 낮거나 그의 학식이 아무리 하찮더라도, 성도가 되어 주님의 사용에 합당해야 한다(디모데후서 2:21 비교).[42] 문맥상 "가나안 사람"은 더럽거나 불경스러운 사람을 의미한다고 이해하는 것이 좋습니다(창세기 9:25,[43] 레위기 18:28[44] 등 비교).[9]



    가랴서의 메시지는 희망과 격려를 주며,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믿고 따르는 삶을 촉구합니다.

    스가랴의 장

    각 장에 대한 더 깊은 이해를 위해 아래 링크를 탐험하세요:

    • 스가랴 제 1 장: 하나님이 제사장 스가랴에게 환상을 보여주심. 회개와 회복의 메시지가 전해짐.
    • 스가랴 제 2 장: 예루살렘의 회복과 하나님의 보호가 약속됨. 스가랴가 성전 재건을 위한 메시지를 전함.
    • 스가랴 제 3 장: 여호수아 대제사장이 사탄 앞에서 변호받고, 하나님의 구원의 약속이 주어짐.
    • 스가랴 제 4 장: 스가랴는 금 촛대와 두 올리브 나무의 환상을 보며, 성전 재건의 힘을 설명함.
    • 스가랴 제 5 장: 하나님의 심판이 상징적으로 나타나며, 죄의 결과가 드러남.
    • 스가랴 제 6 장: 스가랴는 네 마리의 말과 두 번째 환상을 통해 하나님의 계획을 보여줌.
    • 스가랴 제 7 장: 이스라엘의 금식에 대한 질문과 하나님의 응답이 주어짐.
    • 스가랴 제 8 장: 하나님이 예루살렘을 회복하시겠다는 약속과 축복이 선포됨.
    • 스가랴 제 9 장: 메시아의 오심과 이스라엘의 구원이 예언됨.
    • 스가랴 제 10 장: 이스라엘의 회복과 하나님의 은혜가 약속됨.
    • 스가랴 제 11 장: 스가랴가 두 목자를 상징적으로 묘사하며, 이스라엘의 심판이 예언됨.
    • 스가랴 제 12 장: 예루살렘의 구원과 하나님의 보호가 약속됨.
    • 스가랴 제 13 장: 이스라엘의 죄가 용서받고, 하나님의 구원의 약속이 주어짐.
    • 스가랴 제 14 장: 여호와의 날과 최후의 심판이 예언됨. 하나님의 왕국이 세워질 것임을 선포함.







    주요 내용 및 요점 정리

    1

    ◈ 돌아오라

    •조상을 본받지 말고 주 하나님께 돌아오라고 주께서 말씀하시다.

    •스가랴가 화석류 나무 사이에 선 자를 보다.

    •스가랴가 네뿔과 네명의 대장장이를 보다..

    2

    ◈ 주의 백성

    •스가랴가 환상중에 측량줄 잡은 사람을 보다.

    •그때에 많은 나라가 하나님의 백성이 될 것이다.

    3

    ◈ 대제사장

    •스가랴가 환상중에 여호와의 천사 앞에 선 대제사장 여호수아를 보다.

    •주께서 대제사장 여호수아에게 주의 종을 보낼 것이라 말씀하시다.

    4

    ◈ 등잔대와 감람나무

    •스가랴가 환상중에 순금 등잔대와 두 감람나무를 보다.

    •천사가 스가랴에게 환상에 대하여 설명해 주다.

    5

    ◈ 저주와 죄악

    •환상 중에 본 두루마리를 천사가 저주라고 전하여 주다.

    •환상 중에 본 에바속 여인이 죄악이라고 천사가 전하여 주다.

    6

    ◈ 병거와 면류관

    •환상중에 네대의 병거를 보았는데 천사가 그것이 네 영이라고 전해주다.

    •하나님이 면류관을 만들어 여호수아에게 씌우라고 말씀하시다.

    7

    ◈ 순종

    •금식에 대해 주께 묻자 주께서 진정한 금식이었는지 꾸중하시다.

    •긍휼을 베풀고 어려운 사람을 도우며 주의 말씀을 들으라고 말씀하시다.

    8

    ◈ 회복

    •하나님이 예루살렘을 회복시키실 것이라고 말씀하시다.

    •금식이 유쾌하고 즐거운 절기가 될 것이라고 말씀하시다.

    9

    ◈ 징벌과 구원

    •주께서 이스라엘 이웃 나라들을 징벌하실 것이라고 말씀하시다.

    •공의로우신 구원의 왕이 오시리라 말씀하시다.

    10

    ◈ 구원의 약속

    •하나님이 백성들을 다시 구원하실 것이라고 약속하시다.

    •하나님이 백성들을 다시 모으고 강해지도록 하실 것이다.

    11

    ◈ 재앙

    •백성을 불쌍히 여기지 않으시고 주변나라에 넘기실 것이라 말씀하시다.

    •양떼를 돌보지 않는 목자에게 재앙이 내릴 것이다.

    12

    ◈ 구원

    •주께서 예루살렘을 강하게 하셔서 지켜주실 것이다.

    예루살렘을 치러 오는 나라들에게서 백성들을 지켜주고 구원할 것이다.

    13

    ◈ 죄씻음과 징계

    •죄를 씻는 샘이 열려서 예루살렘 백성들의 죄를 씻어줄 것이다.

    •주께서 우상을 따르는 예언자를 없애버릴 것이다.

    •주께서 목자들을 쳐서 죽이기도 하시고 단련하게도 하신다.

    14

    ◈ 심판과 회복

    •심판의 날에 예루살렘이 함락되고 사로잡겨 가게 될 것이다.

    •때가 되면 예루살렘은 회복될 것이다.

    •그날이 오면 예루살렘을 친 나라들이 심판 받을 것이다.




























































































    2025 학개



    학개서는 어떤 책인가?

    구약성경의 마지막 세 선지자, 학개, 스가랴, 말라기의 활동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유대의 역사를 살펴봐야 합니다. 
    주전 536년에 에스라는 약 50,000명의 유대인들을 데리고 거룩한 땅으로 돌아왔습니다. 
    이들은 제단을 다시 세우고 제사를 다시 시작하였습니다. 
    주전 535년에는 성전의 기초를 놓았습니다. 
    그러나 심각한 반대에 부딪혀 사역은 중단되었습니다. 
    이 백성이 그 일을 다시 시작한 것은 주전 520년의 일이었고, 515년에 드디어 성전이 완성되었습니다. 
    이 임무를 완성하는 데는 경건한 네 사람의 활동이 있었습니다. 
    즉, 총독인 스룹바벨과 대제사장인 여호수아, 그리고 선지자인 학개와 스가랴였습니다(스  5:1. 스  6:14 참조).

    학개서의 메시지

    학개가 이룬 사역의 전체적인 목적은 게으른 백성들을 일깨우며 하나님의 성전을 완성하도록 격려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들이 거룩한 땅에 처음 도착하여 일을 시작하기는 생각보다 쉬운 일이었습니다. 
    처음에는 모두들 헌신적이고 열성적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시련과 반대의 몇 달이 지나자 일은 지연되고 마침내는 멈추게 되었습니다. 
    처음에 일을 시작할 때보다도 다시 시작하게 된다는 것은 더욱 어려운 일입니다.

    학개는 돌아온 백성들이 성전을 건축하는 하나님의 일에 다시 헌신하도록 독려하고 격려하기 위해 책을 기록하였습니다.

    학개서의 개요

    학개서의 내용

    학개서에는 네 편의 설교가 있는데, 이들 각각에 날짜가 적혀 있습니다. 이 메시지들을 통하여 학개는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성취하며 하나님의 사역을 완성하지 못하도록 막고 있는 특별한 죄를 지적합니다.

    첫번째 설교 / 1:1-15 - 책망과 반응
    자신을 여호와보다 앞에 두는 일

    학개 선지자는 주전 520년 9월 1일 첫 메시지를 전하였습니다. 
    그 때는 성전에 기초가 놓인채 완성되지 못한 상태로 16년이 지난 시점이었습니다. 
    이 메시지는 지도자 스룹바벨(정치 지도자)과 여호수아(종교 지도자)에게 보냈습니다.

    “내 성전은 황폐한 채로 있는데 너희는 호화 주택에 살고 있느냐?"(학개 1:4)

    백성들은 자신의 집들을 지으면서 하나님의 집을 세울 때가 아니라고 말합니다. 
    유대인들 중의 어떤 이들은 그 당시로서는 굉장히 사치스러운 “판벽한 집“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비를 붙들어 두시므로(10절) 농작물은 소출이 없었습니다(11절). 
    결국, 유대인들은 그들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때 그 땅을 축복하실 것이라는 하나님의 약속을 알고 있었습니다(신 28장). 
    그러나 이들은 축복을 잃었습니다.

    메시지는 참된 깨우침으로 받아들여졌으며(12-15절), 지도자들은 하나님의 뜻을 행하기 위해 움직이기 시작하였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일어났으며 여호와를 그들의 삶의 첫자리에 두었습니다!(빌 1:21/빌 2:21 참조).

    두번째 설교 / 2:1-9 - 옛 성전 솔로몬 성전의 모습과 비교 후 실망
    앞을 내다보는 대신 뒤를 돌아봄

    장막절의 마지막 날인 10월 21일에 학개가 두번째 설교를 할 때는 일곱 주간 쯤 일을 했을 때였습니다. 
    이 날은 기쁨과 찬양의 큰 날이 되어야 마땅한데 반대로 실망과 불평의 하루였습니다. 
    그 이유는 사람들이 앞을 내다보는 대신 뒤를 바라보았던 데에 있었습니다. 
    그들이 16년 전에 기초를 놓았을 때 나이 많은 이들은 솔로몬의 성전의 영광을 생각하고는 울었습니다(스 3:13). 
    이제 백성들 중의 어떤 이들은 새로운 성전이 광채도, 영광도 없는 것들로 인하여 실망하였습니다. 
    물론 백성의 재앙은 그들의 죄에 마땅한 것이지만 그래도 뒤를 돌아다 볼 이유가 되지는 못합니다.

    “강하라... 두려워 말라!“라고 하나님은 용기를 잃은 지도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이 세상을 흔들어 놓을 것이며 어느 날 하나의 왕국을 세울 것이다“(히 12:26-29). 
    하나님은 나중 집(천년왕국기간의 성전)의 영광이 전의 집(솔로몬의 성전)의 영광을 훨씬 능가할 것이라고 약속하십니다. 
    “그리고 거기 평화가 있을 것이다!“

    세번째 설교 / 2:10-19 - 의식적 정결 
    죄를 고백하지 못함

    백성들은 성전 일을 시작한 바로 그 날에 물질적인 축복을 받게 될 것을 기대하였습니다. 
    그러나 12월 14일이 되어서도 일들은 여전히 어려웠습니다. 
    학개는 하나님이 왜 아직 이들을 축복하지 않으시는지를 설명하였습니다. 
    이들은 아직도 정결케 되지 않았으며 그들의 죄를 고백하지 않았기 때문이었습니다.

    “너희는 너희의 거룩함과 건강함을 누군가에게 줄 수는 없으나, 부정함과 병을 줄 수 있다“라고 그는 설명하였다. 
    그리고 백성이 부정하기 때문에 그들의 일도 부정하였다(학개 2:14).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못했습니다. 
    깨끗한 손과 순전한 마음으로 해야만 합니다. 
    고백하지 않은 죄는 주님의 사역을 성취하는 데에 있어서 큰장애물 중의 하나임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네번째 설교 / 2:20-23 - 새 예루살렘을 소망하라
    불신앙 

    세번째 멧세지와 같은 날 설교된 이 마지막 메시지는 총독 개인에게 주는 것이었습니다. 
    스룹바벨이 여호와의 일을 지도해 나갈 때에 그에게 특별한 격려가 필요했던 것은 분명하였습니다. 
    사탄은 언제나 영적인 지도자들을 공격합니다. 
    스룹바벨은 주위에 있는 큰 제국들을 보고 유대인의 작은 그루터기의 미래에 대해 염려했을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의 일을 일으켜 세우려고 할 때 환경은 우리를 실의에 빠지게하는 한 가지 요인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스룹바벨의 믿음을 격려하셨습니다. 
    불신앙은 언제나 우리에게서 하나님의 축복을 훔쳐 갑니다. 

    하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너는 유다 총독 스룹바벨에게 이렇게 말하라. ‘내가 하늘과 땅을 진동시키며 여러 나라의 왕위를 뒤엎고 그 권력을 무너뜨리며 전차와 그 전차병을 엎어 버리겠다. 말과 기병들이 서로서로 친 칼날에 쓰러질 것이다."(학개 2:21‭-‬22)

    스룹바벨과 예수 그리스도

    스룹바벨은 예수님의 조상 중의 한 명으로서, 그의 이름이 예수님의 족보에 실려 있습니다(마 1:12. 눅 3:27). 
    사실상, 스룹바벨은 그리스도에 대한 구약의 모형이며 예표였습니다. 
    여기서 그리스도는 하나님께서 선택하신 도장, 그의 귀중한 인(印)으로 나타납니다. 
    도장은 권위와 명예를 의미합니다. 
    하나님은 스룹바벨에게 성전을 완성할 수 있는 권위를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그의 아들에게 잃어버린 자들을 구원하고 그의 성전인 교회를 세우도록 권위를 주셨습니다(요 17:1-3).

    학개서의 도전

    하나님께서 당신에게 하라고 부르신 일은 무엇인가요? 
    그 일을 시작해 놓고 끝을 못맺고 있지는 않습니까? 
    당신은 혹시 실의에 빠져 있습니까? 
    그렇다면 주님의 일을 방해하는 죄들을 제거하십시오. 
    자신을 하나님보다 먼저 생각하는 것, 앞을 보는 대신 뒤를 보는 것, 고백하지 않은 죄, 불신앙과 같은 것들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당신에게 주시는 놀라운 약속들을 기억하십시다.

    내가 너와 함께 하리니(1:13) 

    두려워 말라(2:5) 

    내가 너를 축복하고(2:19) 

    내가 너희를 선택하였다(2:23)







    10월 9일(목) 학개 1-2장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전을 건축하라(1:8)

    너희는 산에 올라가서 나무를 가져다가 전을 건축하라 그리하면 내가 그로 인하여 기뻐하고 또 영광을 얻으리라 나 여호와가 말하였느니라.
    Go up into the mountains and bring down timber and build the house, so that I may take pleasure in it and be honored," says the LORD.


    '전을 건축하라'
    학개서 1장 8절에 나오는 하나님의 명령으로, 70년간 바벨론 유배에서 돌아온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중단된 성전 재건을 완수하라고 촉구하며 백성들의 영적 각성을 촉구하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백성들이 성전 건축보다 자신들의 안락한 삶을 우선시하며 번영을 기대했지만, 그들의 노력에 대한 불만족스러운 결과를 주고 계셨으며, 
    성전 건축을 통해 기쁨과 영광을 얻을 것을 약속하셨습니다. 

    성경 배경 및 중요성
    • 배경 : 이스라엘 백성은 바벨론 포로 생활 70년 후 예루살렘으로 귀환했으나, 성전 재건이 중단된 상태였고, 성전 건축보다는 자신들의 집 짓는 일에 더 몰두하고 있었습니다.
    • 하나님의 징계: 하나님께서는 백성들이 자신들의 이익을 우선시하며 성전을 소홀히 한 것에 대해 불만을 표현하셨고, 그들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풍성한 수확을 기대했으나 거둔 것이 적었던 것은 성전 건축을 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설명하셨습니다. 
    • 학개의 역할 : 하나님은 학개 선지자를 통해 백성들의 마음을 돌이키고 성전 재건을 다시 시작하도록 독려하셨습니다. 
    핵심 내용
    • "산을 올라가서 나무를 가져다가 전을 건축하라" : 이는 단순히 건축 자재를 가져오라는 명령이 아니라, 자신들의 안락한 삶에서 벗어나 영적인 우선순위를 회복하고 성전 건축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라는 강력한 촉구입니다.
    • "그리하면 내가 그로 인하여 기뻐하고 또 영광을 얻으리라" : 하나님은 백성들이 순종하여 성전을 재건할 때, 그 건축을 통해 기쁨을 얻고 영광을 받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결론적으로, 학개서의 '전을 건축하라'는 말씀은 백성들이 하나님을 섬기는 마음을 회복하고, 자신들의 영적 안녕을 위해 헌신할 것을 촉구하며, 그 순종에 대한 하나님의 축복을 약속하는 메시지입니다.



    나무를 가져다가 전을 건축하라(학개 1:1-15)

    지난 3월 21일 자 조선일보에 「"교회 100개 짓는 그 날까지" 꿈 이뤄가는 '꿈같은 인생'」 이라는 기사가 실렸습니다. 주인공은 자동차부품을 생산하는 대의그룹 채의숭(68) 회장었습니다. 충남 보령에서 태어난 그는 초등학생 시절 고향에서 교회 재건축과정을 지켜보았다고 합니다. 할아버지부터 3대째 신앙 생활을 하였다고 합니다. 보령에 하나밖에 없는 교회를 다시 짓는데 온 교인들이 몇 년에 걸쳐 돌 하나, 벽돌 한 장씩 모아서 지었답니다. 이것을 지켜본 어린 마음에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일이자 보람 있는 일이 교회 짓는 것'이란 생각이 들었답니다. 그것이 계기가 되어 앞으로 자라 '교회 100개 건축'의 꿈을 꾸게 되었답니다. 그 꿈과 더불어 학창 시절 두 가지 꿈을 더 목표로 삼았다고 합니다. '박사가 돼 대학교수가 되는 것과 큰 회사 사장되는 것'이었답니다. 가난한 농촌 가정의 6남매 중 장남으로서 쉽지 않은 목표였지만 1984년 경제학박사가 되고 그 해 대우아메리카의 사장에 오르고 2001년엔 겸임교수가 됨으로써 첫 번째, 두 번째 꿈을 이루었다고 합니다. 마지막 꿈인 '교회 100개 건축' 실현은 1990년부터 시작되었다고 합니다. 1985년 창업한 후 사업이 궤도에 오르자 스리랑카에 교회 짓기를 주도했답니다. 무려 5번이나 현지 주민들이 철거하는 반대 속에 1992년 완공된 교회가 모태가 돼 지금은 현지에 15개 교회로 확산되었답니다. 화양감리교회 장로인 채 장로님은 "그 후 17년 동안 설과 추석연휴를 국내에서 보낸 적이 없다"고 합니다. 교회건물이 필요한 해외 현지를 답사하거나 완공된 교회의 봉헌예배에 참석하기 위해 연휴를 반납했다고 합니다. 그렇게 하여 국내외에 45개 교회를 세웠다고 합니다. 때로는 수해와 화재로 공장이 폐허가 되기도 했고, 납품하던 대우그룹의 부도로 휘청할 때도 있었지만 포기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1997년엔 뇌출혈로 쓰러지기도 했지만 그는 "사업이 완전히 망할 위기에서도 적금을 깨 추수감사절 헌금으로 바치며" "매번 위기 때마다 하나님의 은혜를 입었고 교회건축을 계속할 수 있었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참 귀한 꿈을 가지신 분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심장으로 사시는 장로님 같았습니다. 우리 교회에서 이런 꿈을 가진 성도님이 계시실 소원합니다. 하나님 나라에 대한 소원, 세계 선교에 대한 소원, 굶주린 어린 아이들을 돕기 위한 소원, 핍박받는 사람들을 돕기 위한 소원, 교회 건축에 대한 소원 등 좀더 큰 소원들을 가지고 사는 우리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사람이 무슨 꿈을 가지고 사느냐가 참 중요합니다. 어떤 목표, 어떤 꿈, 어떤 비전을 가지고 사느냐에 따라 우리 인생의 삶의 질과 방향이 달라집니다. 바벨론 포로 생활을 하던 유대인들은 성전 재건에 대한 꿈을 가지고 살았습니다.
    바벨론에서 포로 생활하는 유대인에게는 한 가지 동일한 꿈이 있었다면 고국에 돌아가 하나님께 성전에서 예배드리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성막 중심, 성전 중심으로 산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어느날 바벨론과 전쟁에서 무참하게 짓밟혔습니다. 바벨론 왕 느브갓네살 2세에 의하여 성전은 파괴되고 나라는 망하고 인재들을 포로로 잡혀 가 버렸습니다. 포로 생활하면서 자나 깨나 성전에 가서 예배드릴 날을 고대했습니다. 70년이 지난 후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은혜를 베풀어 포로 생활에서 풀어 주었습니다. 그들의 독립 운동에 의한 것이 아니라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였습니다. 페르시아 왕 고레스가 바벨론을 점령하고 유다인들을 70년 만에 해방시킨 것입니다. 먼저 5만명 정도가 돌아 왔습니다. 그 감격은 이루 말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잃었던 자신들의 고국에 돌아 왔습니다. 일가 친척을 만납니다. 잃었던 땅을 찾았습니다. 꿈에도 그리던 성전 예배를 회복할 때가 왔습니다.
    그래서 해방되어 돌아오자 마자 처음 한 것이 무너진 성전을 짓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성전 중심으로 생활하던 사람들입니다. 신정국가를 이루었던 사람들입니다. 성전은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는 장소였습니다. 구속사 통로 역할을 감당했던 성전을 재건하였습니다. 무너진 성전을 다시 복원하고 그곳에서 하나님을 자유롭게 예배드리기 위해 서둘러 성전 터를 닦았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터만 겨우 닦아 놓고 16년 동안 성전 짓는 것을 중단하고 말았습니다.

    1. 성전 건축 지연에 이유(1-6)
    왜 그들은 그렇게도 소원했던 성전 건축을 중단하였습니까?
    첫째 이유는 건축할 시기가 아니라는 것입니다(2).
    2절 보세요. 당시 황폐화된 고국에 돌아 왔는데 지속적인 고난과 경제적 궁핍으로 계속됨으로 경제적 형편을 볼 때 아직 성전을 건축할 때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예레미야를 통하여 70년 후면 포로에서 해방된다고 말씀하였는데 만약 예루살렘이 완전히 멸망한 B.C.586년부터 포로 기간을 계산한다면 학개가 예언할 당시는 66년밖에 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처음 바벨론이 유다 거민들을 포로로 잡아간 B.C.605년부터 포로기간을 산출한다면 학개 당시는 이미 70년이 지난 상태였습니다. 귀환한 유다 거민들은 포로 기간을 아전 인수격으로 해석한 것입니다. 성전 건축을 방해하는 주변의 정치적 여건을 볼 때 아직 때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요즈음 말로 해석하면 돈도 좀 벌고 우리 집도 먼저 복구하고 그리고 자식 딸 장가도 보내고 여유 있는 삶이 보장된 후 하자는 말일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내 할 일 다 해 놓고 여유 자금이 있을 때 하자는 것입니다. 지금 농번기이니까 잠시 멈추었다 한가한 때 하자는 말일 수 도 있습니다. 불경기에 무슨 성전 건축이냐고 말할 수 있습니다. 아직 지금 예배당도 차고 넘치지 않는데 시기가 아니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사실 이런 이유는 단지 성전을 짓기 싫은 것에 대한 그럴듯한 명분에 불과했습니다. 이것이 얼마나 성전 건축에 대한 부담을 회피하기 위한 명분에 불과한 것인가를 금방 알 수 있습니다.
    두 번째 이유는 자기 집 짓는데 우선순위를 두었기 때문입니다(9).
    때가 아니라고 말하며 그 힘과 돈, 시간으로 무엇을 합니까? 1장 9절 보십시오. 자기집 짓기에 빨랐습니다. 관심이 다른 곳에 있습니다. 하나님의 집은 황폐합니다. 마음이 달라진 것입니다. 와서 터를 닦다 보니 마음이 변한 것입니다. 성전은 나중에 짓고 우리 집부터 짓자고 생각한 것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사랑이 식어진 것입니다. 열정이 살아졌습니다. 우리가 자식을 키우면서 자신은 100평 아파트에 살고 있는데 결혼한 자식이 지하 셋방을 살고 있으면 그것을 보고만 있을 부모가 있습니까? 자식을 사랑하면 그렇게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이들은 하나님의 은혜를 잊었습니다. 구원의 감격이 식어졌습니다. 사람의 마음은 그대로 방치해 놓으면 다 그렇게 현실적이게 됩니다. 안 좋은 쪽으로 흘러가게 되어 있습니다. 이것이 열역학 제 2의 법칙입니다. 하도 답답하니까 하나님이 책망의 어조로 물어 봅니다. 내백성이라고 말씀하시지도 않습니다. 이 백성이라고 말씀합니다(2). 4절에 보십시오. 그저 거주하는 집이 아닙니다. 판벽한 집입니다. 호화스러운 집을 짓기에 바쁘게 지냈습니다. 성전을 건축하지 못한 것은 결코 경제적 궁핍이나 때가 아직 되지 않은 것, 혹은 주변의 정치적 여건 때문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성전이 훼파되어 황무하게 되었으나 자신들의 집은 호화롭게 꾸미고 있었습니다. '판벽한'은 지붕이 덮힌 상태를 나타내기도 하며 호화스러운 사치품으로 치장하는 것을 뜻하는 말입니다. 자신들의 집들은 호화롭게 치장하면서도 보기 흉할 정도로 훼파된 성전은 돌아보지 않았습니다. 요즈음으로 말하면 누가 더 큰 집에서 사느냐? 누가 더 고급 인테리어를 해 놓고 사느냐? 누가 더 쌓아 놓고 누가 더 많은 유산을 남겨 놓을 것인가에 관심이 온통 쏠려 있었습니다. 집 다섯 체 여섯 체 가지고 있습니다. 빌딩이 있고 요소 요소에 땅이 있습니다. 노후를 준비하며 아들 딸들에게 어떻게 하면 더 많이 물려 줄 것인가를 생각합니다. 짓다 만 성전에는 전혀 관심이 없는 것입니다. 사람은 일평생 자신과 자신의 가족만 위해 살다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남을 위해 자선을 베풀며 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일평생 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다 먹고 살다 갑니다. 어떤 삶이 가치 있겠습니까?
    세 번째 이유는 사마리아 사람들의 방해 때문입니다.
    본문에는 나와 있지 않지만 인접해 있는 사마리아 땅을 다스리고 있었던 총독이나 그 밖의 집권자들에 의해서 강력한 방해를 받았기 때문입니다.(에스라4:3-4) 이방인과 혼혈족인 사마리아인들이 성전 짓는 것을 시기(에스라 4:1-10)하였습니다. 페르시아 관리들에게 뇌물을 주어 방해합니다. 오늘날로 말하면 우리가 교회 짓는데 가장 방해하는 세력이 있다면 사탄일 것입니다. 세상에 필요한 건물들이 많이 있지만 세 가지 가장 가치있는 건물을 들라면 아마 대부분 학교, 병원, 교회를 들것입니다. 학교는 가르치는 곳입니다. 병원을 질병을 났게하는 곳입니다. 교회는 영혼을 고치는 곳입니다. 전인격을 치유하는 곳입니다. 교회는 구속사를 이루는데 중심적 사역을 감당하는 기관입니다. 교회는 매일 살아 있는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되는 곳입니다. 교회는 세상에 희망을 주는 곳입니다. 교회는 구원의 방주 역할을 감당하는 곳입니다. 죽어 가는 생명이 교회에 나와 복음을 듣고 천국 백성이 되게 하는 곳입니다. 어두운 세상을 밝게 하는 곳입니다. 영혼을 살리는 곳입니다. 그래서 미국에 건너간 청교들은 자기 집을 짓기 전에 교회를 지었고 교회를 중심으로 세상을 살아가 지금 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나라 미국을 만들어 냈습니다. 사단이 갖가지 방법으로 방해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2. 성전 건축 지연의 결과(6, 10-11)
    그렇게도 그리던 고국에 돌아 왔습니다. 해방이 되었습니다. 이제 정치적 자유를 누리며 마음껏 하나님을 섬기며 행복하게 살 것으로 기대했습니다. 고국에 돌아가면 꼭 성전 예배를 회복할 것을 다짐하고 다짐했습니다. 그러나 막상 돌아 와 보니 현실은 달랐습니다. 내 살고 보아야 하겠습니다. 그래서 각자 자기 집 짓고 나만 잘 살면 된다고 성전 짓는 것은 외면하고 자기 잘살기 경쟁을 했는데 결과는 무엇입니까? 6절을 읽어보겠습니다.
    첫째는 노력한 만큼 소득을 거두지 못했습니다.
    둘째는 삶의 만족함을 누리지 못했습니다.
    셋째는 부가 쌓이지 않았습니다.
    열심히 일을 하여도 소득이 적었으며 먹고 마셔도 만족함을 누릴 수 없었고 집에 도둑이 들어온 것처럼 재물을 모으려 해도 모이지 않았습니다. 돈을 모으는 것 같은데 어느 날 보면 사고로 모은 돈이 다 날아가 버립니다. 열심히 일하여 살만한 것 같은데 질병으로 쓰러집니다. 돈은 쌓여 있는 것 같은데 집에 들어오면 만족이 없고 행복이 없습니다.
    왜 이런 결과가 나왔습니까? 9절을 보십시오. 하나님이 불어 버렸기 때문입니다. 10-11절을 보십시오. 자연 질서를 통제하시는 하나님이 자연 질서를 통해 아무리 인간이 노력해도 노력한 만큼 소득을 거두지 못하게 하고 삶의 만족을 누리지 못하게 하고 부가 쌓이지 않게 만들어 버린 것입니다. 빙과 기업이 아무리 빙과를 많이 만들어 놓아도 여름 날이 가을 날씨처럼 되어 버리면 소용이 없는 것입니다. 우리 인생과 역사와 미래는 하나님의 손에 있습니다. 하나님이 복을 부어 주어야 진정 쌓이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불어 버리면 모든 것은 순식간에 날아가 버립니다. 시편127:1-5절을 보십시오. 사람의 노력을 무시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들이 노력을 하나 그 노력이 열매를 맺는 데는 하나님의 축복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집을 세우는 일을 보십시오(1). 사람들이 집을 세우려고 노력을 하나 노력만 한다고 다 집이 세워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축복이 있어야 집을 세우려는 노력이 열매를 맺는다는 것입니다. 바벨탑을 쌓으려던 사람들이 노력이 모자라서 가 아니라 하나님의 축복이 없어 하늘까지 쌓으려던 그들의 노력이 헛되고 말았습니다(창11:1-9).
    성을 지키는 일(1)을 보십시오. 파수군이 밤새워 경성하는 노력으로만 성이 지켜지는 것이 아니라, 여호와께서 축복해 주셔야 밤새워 지키는 파수군의 노력이 열매를 맺게된다는 것입니다. 유다가 바벨론에게 망할 때에 파수군이 없어 망한 것이 아닙니다.
    돈버는 일(2)도 마찬가지입니다. 자녀 문제(3-5)도 마찬가지입니다. 내 힘과 노력이면 무엇이나 다 할 수 있다는 생각은 교만이고 어리석은 생각입니다.
    북한과 남한을 보십시오. 북한이 이렇게 못사는 것이 게을러서 그렇습니까? 그들은 천리마 운동을 하는 사람들입니다. 자원이 없어서 그렇습니까? 남한 보다 더 풍부한 자원이 있습니다. 6.25 전까지만 해도 남한 보다 더 잘 사는 나라였습니다. 휴전선 하나 사이 놓고 남쪽은 모든 곡식이 풍년이 들어 남아 돌아가 아우성이고 북은 굶주려 아우성입니다. 남미와 북미를 보십시오. 남미 사람들 금 찾아 떠난 사람들입니다. 북미 사람들 신앙을 지키기 위해 떠나 자기 집도 짓기 전에 교회부터 짓고 신앙 생활한 사람들입니다. 200여년의 역사가 흘렀습니다. 결과는 무엇입니까?
    제가 어릴 때 다니던 시골 교회에서 멀리 않은 곳에 신앙생활하시던 장로님이 계셨습니다. 당시 시골 예배당은 흙벽돌로 지었고 새마을 운동이 한창일 때 교회들도 개량을 하여 다시 지었습니다. 교회를 지으려고 하는데 돈이 없습니다. 그래서 그 장로님이 자신의 전답을 다 팔아 교회를 지었습니다. 이제 시골에서 자식들과 함께 살수가 없습니다. 돈 밭이 없는데 어떻게 합니까? 서울에 이사와서 셋방살이하며 장사를 하였습니다. 하나님이 복을 주어 물질을 많이 벌었습니다. 자녀들을 가르쳤습니다. 너무나 감사하여 다시 상도동에 교회를 지었습니다. 망하지 않았습니다. 큰아들 목사가 되었고 둘째는 의사로 교회에서 장로로 봉사하고 있습니다. 셋째 딸 사위는 서울대학 의대 교수로, 장로로 한 교회를 봉사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모든 사람에게 동일한 결과로 나타나지는 않지만 보편적 하나님의 법칙은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마 6:33)” "내가 어려서부터 늙기까지 의인이 버림을 당하거나 그 자손이 걸식함을 보지 못하였도다 (시 37:25)" “여호와의 이름으로 오는 자가 복이 있음이여 우리가 여호와의 집에서 너희를 축복하였도다 (시 118:26)”라는 것입니다.

    3. 성전 건축을 재개 명령(7-11)
    하나님은 그들에게 진정한 복을 주시기 위해 성전 건축을 재개하라고 말씀합니다. 그들에게 손해를 주고 그들에게 염려를 주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그들에게 고난을 주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선지자를 통해 무슨 말씀을 하십니까?
    첫째가 너희는 자기의 소위를 살펴보라고 말씀합니다(5,7).
    지금까지 행한 것, 겪은 것, 그들의 계획, 그리고 그 결과를 마음에 두고 분석하고 반성해 보라는 말입니다. 실제로 그렇게 했을 때 어떤 결과가 나왔는가 자신을 정직하게 점검해 보라는 것입니다. 왜 성전 짓기를 중단했는지 정직하게 신앙의 양심을 가지고 점검해 보라는 것입니다. 진정 돈이 없어서인지, 경제 환경이 나빠서인지, 방해가 많아서인지 정직하게 진단해 보라는 것입니다. 사람은 은혜는 물에 세기고 원수는 돌에 새긴다는 말이 있습니다. 이미 그들은 과거의 역사 속에서 뼈저리게 느낀 것입니다. 애굽에서 하나님의 은혜로 해방되었습니다. 가나안 땅 제비뽑기해서 받은 땅입니다. 그런데 그곳에서 무엇을 합니까? 하나님을 섬기기보다는 우상을 섬깁니다. 하나님은 사사들과 선지자를 보내어 계속 경고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돌아오지 않았고 그것으로 결국 망한 것입니다. 그런데 다시 해방되었는데 그 과거를 잊고 있는 것입니다.

    둘째는 산에 올라가서 나무를 가져다가 전을 건축하라는 것입니다(8).
    첫 번째 지은 솔로몬 성전처럼 값진 레바논 산의 백향목을 원하는 것이 아닙니다. 너희들이 쉽게 접근할 수 있는 근교 산에 올라가 목재를 구하라는 것입니다. 할 수 없는 것을 이유로 들어 포기하지 말고 할 수 있는 것부터 시작하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 우리 하나님이 그로 인하여 기뻐하신다는 것입니다. 또 영광을 얻는다는 것입니다. 솔로몬 성전에 비하면 초라한 것이지만 하나님은 많은 제물보다 순종을 기뻐하십니다.

    4. 성전 건축 재개(12-15)
    첫째 성전 재건에 대한 명령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인 것입니다(12).
    그들은 이제 반대자들의 이야기를 듣지 않았습니다. 자신의 형편을 보라는 내부의 소리를 듣지 않았습니다. 환경과 조건을 보라는 소리를 듣지 않았습니다. 오직 선지자를 통하여 주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12절을 보십시오. 선지자를 통해 주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청종하였습니다. 학개가 전하는 말씀이 하나님의 말씀인 것을 인정하고 주의 깊게 자신에게 주신 말씀으로 받아들인 것입니다. 순종하고 따랐다는 말입니다. 그 말씀이 자신에게 들여 주는 말씀으로 들었습니다. 하나님의 음성으로 들었습니다. 13절을 보십시오. 학개가 자신도 단순한 사람이 아니라 여호와의 사자의 권위로 하나님의 계시의 말씀을 전하는 것입니다. 전하는 자나 받는 자나 하나님의 음성이 모든 것보다 더 크게 들려올 때 역사는 일어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일에는 반드시 누군가 모든 것보다 하나님의 음성을 크게 듣는 사람이 있습니다. 보이지 않는 거름이 있기에 아름다운 꽃이 필수 있고 큰 나무가 될 수 있는 것처럼 보이지 않는 곳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헌신하는 사람들이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차를 타고 가다 보면 크고 작은 교회들이 잘 지어진 것을 봅니다. 그 교회가 건축되기까지는 하나님의 음성을 무엇보다 크게 들은 사람들의 헌신이 있었던 것입니다. 전북 지역에서 기독교적 정신으로 사람들을 치유해 주는 전주 예수병원이 생기기까지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은 잉골드의 헌신이 있었습니다. 그녀는 볼티모어 여자의과대학에 입학해 수석으로 졸업한 사람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편안한 생활 버리고 1897년 7월 고향을 떠나 조선 땅에 와서 예수님의 심장으로 질병으로 죽어 가는 수많은 사람들에게 희망을 주기 위해 1898년 11월 3일 진료소를 개원한 것입니다. 한국에서 세계적인 병원이 된 세브란스는 한 신실한 신앙인이었던 스탠더드 석유회사의 지배인이던 헌신적인 기독교 사업가 세브란스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1만 달러의 헌금 드림으로 세워졌습니다.
    저 유명한 템플 교회와 템플 대학교, 선한 사마리아 병원이 생긴 유래가 전해져 오고 있습니다. 57센트의 기적으로 이루어졌다고 합니다. 오래 전 미국 필라델피아 시의 외진 곳에 조그만 한 교회가 세워져 어른 중심으로 주일 예배가 드려졌답니다. 아이들은 좁은 예배실로 인해 번호표를 주어 "자리가 비면 순서대로 부르겠다"고 약속하고 집으로 돌려보냈답니다. 교회의 연락을 손꼽아 기다리던 한 소녀가 그 꿈을 이루지 못한 채 질병으로 죽고 말았답니다. 죽은 아이의 베개 밑에는 목사님께 쓴 편지 한 장과 57센트의 돈이 있었답니다. "목사님, 저는 교회에 가고 싶었으나 예배실이 너무 좁아 자리가 나기를 기다리는 아이입니다. 제가 먹고 싶은 것 사 먹지 않고 모은 돈을 드리니 이 돈으로 큰 예배당을 지어 모든 어린이들이 함께 예배드릴 수 있게 해주세요." 목사님은 이 편지를 장례식에 모인 모든 교인 앞에서 눈물로 읽었답니다. 이 때 이곳에 모인 사람들은 이 어린 아이의 편지가 자신들에게 주는 하나님의 메시지로 받아들였습니다. 그 자리에 모인 사람들은 아이의 무덤 앞에서 꼭꼭 감춰둔 그들의 돈주머니를 열기 시작했답니다. 그 후 큰 교회와 멋진 교육관을 지어 입당예배를 드렸답니다. 57센트의 기적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답니다. 가난으로 치료받지 못해 죽은 소녀를 위한 '선한 사마리아 병원'이 세워져, 그 병원은 주위 극빈자들에게 무료로 치료를 해줬답니다. 죽음 앞에서 친구들을 기억하며 쓴 한 장의 진실된 편지와 57센트의 헌금은 큰 기적의 역사를 이뤄 저 유명한 템플 교회의 초석이 되었으며 템플 대학교 설립의 원동력이 되었답니다.

    둘째 하나님을 경외하였습니다.
    경외한다는 말을 두려워하다 무서워하다는 말입니다. 환경을 두려워하는 것이 아닙니다. 세상을 두려워하는 것이 아닙니다. 미래를 두려워하는 것이 아닙니다. 학개 선지자를 통하여 주신 말씀을 듣고 백성들은 하나님을 공경하는 마음을 가지게 되었고 하나님을 두려워하게 되었습니다. 말씀을 듣고 마음이 완악해 진 것이 아닙니다. 말씀을 듣고 무감각해지거나 강퍅해진 것이 아닙니다. 말씀을 듣고 마음이 하나님을 향했습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이 생겼습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 무엇보다 귀중한 것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가 어떻게 됩니까(시25:12-14)
    그 택한 길을 저에게 가르치십니다.(12b) 영혼이 평안합니다(13). 자손이 복을 받습니다.(13) 여호와의 친밀함이 있습니다(14).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시34:7-10)가 어떻게 됩니까? 보호해 줍니다. 부족함이 없습니다. 모든 좋은 것으로 소원을 이루어 주신다고 했습니다.
    셋째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하신다는 사실을 받아들입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면 무엇이 두렵겠습니까? 하나님이 함께 하면 불가능이 가능으로 변합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면 절망이 소망으로 변합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면 우리의 앞길은 어떤 어려움이 있어도 극복할 수 있습니다.
    넷째 지도자에서 백성에 이르기까지 모든 사람들이 말씀에 감동되어 성전 재건을 시작하였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처음 임하지 불과 23일입니다. 16년 간 중단된 일입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잘못을 깨닫자 마자 신속하게 각자의 할 일을 찾아 하나님께 순종하였습니다. 그들이 다시 성전 공사를 착공한 이 때는(6월 24일) 서둘러서 추수를 끝내야 하는 일년 중 가장 바쁜 주간에 속합니다. 그런데도 그들은 모두 다 일어나서 성전 건축을 과감하게 착공합니다. 외적이 무섭지 않습니다. 1:13절을 보십시오. 2장 4절을 보십시오. 왜 이렇게 돌변했습니까? 14절 말씀에 그 이유를 찾을 수 있습니다. 마음을 흥분시켰기 때문입니다. 여기 마음은 정확히 번역하면 영입니다. “흥분시킨다는 말은 각성시키다. 일깨우다. 일으키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심령에 각성이 일어난 것입니다. 영적으로 어두워진 마음이 깬 것입니다. 진정한 영적 부흥이 말씀을 들을 때 일어난 것입니다. 그들은 자원하는 마음으로 감동을 받습니다.(에스라1:5참조) 감동받는 것도 복입니다. 성령님의 감동을 쉽게 받는 은혜가 있기를 바랍니다. 대외적으로는 사마리아 사람들의 방해 공작과 정치적 협박에 대한 두려움, 그리고 대내적으로는 경제적인 불황과 생활의 어려움도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불가능을 가능케 하시는 능력의 하나님, 무에서 유를 만드신 하나님, 전능하신 하나님 믿으면 믿을수록 자신감 생기게 되는 것입니다. 없다고 말할 것이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1장 8절을 보십시오. 하나님은 그들에게 산에 가면 나무가 많이 있다는 사실을 말하고 있습니다. 꼭 물질만 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지혜, 기도, 말, 노동의 봉사도 필요한 것입니다. 각자 주어진 달란트로 은사로 하면 되는 것입니다. 서울역 맞은편 대우회사 본부 뒷편에 있는 남대문 교회가 있습니다. 그 교회의 머릿돌 속에는 한 할아버지의 모시 적삼 한 벌이 기념으로 보관되어 있다고 합니다. 이 교회를 지을 때 바칠 헌금이 없어 자기가 아껴온 모시 적삼 한 벌을 드렸는데 그것을 교회가 보관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백화점계의 거성 J.C. Penny는 "하나님은 단지 우리의 소유물을 소유하기를 원치 아니하시고, 나를 소유하기를 원하신다."라는 말을 하였습니다.
    우리 교회는 이제 10주년이 지나고 11주년을 향해 나아가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제 종교부지에 교회를 건축해야 하는 중대한 일이 남아 있습니다. 교회가 지어지면 예수님 재림하실 때까지 세계를 품고 하나님이 원하시는 일을 할 것입니다. 그래서 이 번 주부터 마가복음 강해를 잠시 중단하고 4주간에 걸쳐 학개서를 강해하려고 합니다. 학개서는 성전 건축에 대한 하나님의 뜻을 집중적으로 계시해 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학개라는 말은 “여호와의 축제”라는 뜻입니다. 성전을 짓는 것이 하나님의 축제라는 의미가 함축되어 있는 것입니다. 학개서의 말씀을 듣는 중에 성령의 감동이 있기를 바랍니다.

    대구 서현 교회를 짖는데 온 힘을 기울인 정규만 장로님이 계셨다고 합니다. 33세의 나이에 장로장립을 받아 너무 감사해서 장로장립을 기념하여 대구 서현 교회 성전부지 1842평을 헌납하였다고 합니다. 1957년 8월 19일 성전 기공예배를 드리게 되었답니다. 연건평 1960평 당시 동양 최대의 석조 예배당이었답니다. 그런데 성전 건축 시작되자 마자 죽을 병에 걸렸습니다. 그 때 장로님은 하나님께 서원 기도를 하였답니다. "하나님 정규만의 생명을 한 번만 살려 주옵소서 이 생명을 한번만 살려주시면 이 한 목숨 다하여 또한 종의 전 재산을 다 바쳐 성전 건축에 헌신을 다하겠습니다." 온 교회 기도하였습니다. 그 결과 기적적으로 병에서 살아나시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때 대구 경북 지역에 악질전염병이 만연하였습니다. 병원에서 치료되지 않는데 유독 정규만 장로님의 한약방만 와서 약을 지어서 먹으면 깨끗이 나았습니다. 그래서 환자들이 아침부터 마당에 줄을 섰습니다. 건축비를 모두 감당하였습니다. 그 엄청난 공사비를 다 빗 한번 지지 않고 감당한 것입니다. 건축되자 교회는 부흥되었고 1000명이 넘는 교인들은 빨리 헌당하기를 원했답니다. 그러자 정 장로님은 자기가 죽으면 헌당식을 해달라고 부탁하였답니다. 혹이나 정장로님을 칭찬하여 천국 상급이 삭감될까봐서입니다. 성도들이 하려고 하니까 어서 빨리 천국에 대려가 달라고 하나님께 기도를 했다고 합니다. 1969년 정장로님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고 그 때서야 교회는 헌당식을 했다고 합니다. 결국 그는 고인이 되어서야 고인의 이름으로 표창장과 공로패를 받았고 온 교회는 눈물바다가 되었다고 합니다. 그의 장례식은 대구가 생긴 이래 가장 긴 승용차 행렬이 이어졌고 가장 많은 조문객이 모였다고 합니다.


    삶의 우선 순위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 6:33)

    ​어떤 중국인과 미국 청년이 대화하는 중에 중국인이 물었습니다. 
    "당신네 미국 사람은 아침에 일어나 제일 먼저 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우리는 수염 깎고 세수를 합니다." 
    그러자 중국인은 "그래요? 우리 중국 사람은 제일 먼저 옷을 입는데요" 하면서 서로 웃었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사실 하루의 생활에도 무엇을 먼저 해야 하는가 하는 우선순위의 문제가 있습니다. 
    이 우선순위를 바로 택하는 것은 그날의 성패를 크게 좌우합니다. 
    더 나아가 인간의 삶에 있어서 일생의 우선순위를 어디다 두어야 하는가 하는 것은 실로 누구에게나 중대한 문제입니다. 
    어떤 이는 돈을 최고의 목표로 삼는 듯하고, 어떤 이들은 권력을, 어떤 이들은 지식을, 어떤 이들은 명예를 최고의 목표로 삼는 듯합니다. 그러나 이것들 자체가 인간의 삶의 최고 목표가 되겠는가 하는 문제는 깊이 생각할 여지가 있습니다. 돈이나 지식, 지위나 명예 등이 인간의 가장 고귀한 삶의 도움은 될 수 있지만 그 자체가 최고가 될 수는 없습니다. 성경은 삶의 목표는 하나님을 알고 그에게 영광을 돌리는 데 있다고 지적합니다. 예수님께서도 산상 보훈에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 하는 의식문제에 목표를 두지말고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면 그 모든 것을 더하시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에게는 공의, 긍휼, 사랑 그리고 겸손하게 하나님과 동행하는 생활이 더 앞서야 될 것입니다. 즉 우리는 우선 순위를 세상적인 것이나, 육적인 것보다 하늘나라일과 영적인 것을 우선해야 하고, 우리가 무엇을 선택할 때에도 어느 쪽이 주님을 더 기쁘시게 할까? 또는 예수님이라면 어떻게 하셨을까?를 먼저 생각하고 선택하여야 바르고 후회없는 선택을 할 수 있을 것입니다.(신30:19, 왕상 18:21)

    삶의 최우선 순위

    ​어느 교회에서 결혼을 앞둔 사람들에게 질문지를 돌렸습니다. 
    질문지에는 직업, 배우자, 자녀, 친구, 가족, 교육, 교회, 여가, 자아실현 등 결혼 생활에서 중요하다고 생각되는 예들이 적혀있었고 이 예들을 바탕으로 자신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것들을 순서대로 적어 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예로 든 것 중에는 한 가지 의도적으로 빼놓은 것이 있었습니다. 바로 하나님입니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그 목록에 하나님을 적지 않았습니다. 어떤 사람은 교회와 하나님을 동일시해서 적지 않았다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우리가 이런저런 일로 바빠 삶의 우선 순위가 바뀌게 되면, 하나님은 우리의 인생 목록에서 아예 빠지고 맙니다. 예수님께서는 가난한 사람들을 돌보는 것이 그리스도인이 마땅히 해야 할 일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또한 예수님은 우리에게 무엇이 가장 중요한 것인지를 정확히 가르쳐 주고 계십니다.

    "가난한 자들은 항상 너희와 함께 있거니와 나는 항상 함께 있지 아니하리라"(마26:1)

    당신은 주님을 삶의 최우선 순위에 두고 살고 있습니까?

    삶의 우선 순위

    보험회사에 근무하는 베벌리 셰아(Beverly Shea)라는 한 월급쟁이가 있었습니다. 1930년대 당시 미국은 극심한 불황으로 회사마다 혹독한 구조조정과 임금삭감에 시달렸습니다. 어느 주일날 아침, 그는 찬송가를 연습하기 위해 피아노 앞에 앉았습니다. 그런데 회사문제로 인해 좀처럼 마음의 안정을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때 셰아는 건반 위에서 조그마한 종이쪽지 하나를 발견했습니다.

    "주 예수보다 더 귀한 것은 없네/ 이 세상 부귀와 바꿀 수 없네..."

    그것은 어머니 레아 밀러(Rhea Miller)가 괴로워하는 아들을 위해 적어놓은 시였습니다. 어머니는 아들이 삶의 우선 순위를 분명하게 정하길 원했습니다. 셰아는 이 시를 읽고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이 시에 곡을 붙여 찬송을 만들었습니다. 이 곡이 바로 그 유명한 찬송가 102장 '주 예수보다 더 귀한 것은 없네' 입니다. 어머니의 지혜와 사랑이 한 젊은이의 방황을 멈추게 했습니다. 어머니는 자녀의 교통순경입니다.

    삶의 우선순위

    이런 속담이 있다. 
    “시계가 하나인 사람은 시간을 정확히 알지만 시계가 두 개인 사람은 결코 확실한 시간을 알지 못한다.” 우리는 끊임없이 주의력이 분산당하는 세상에 살고 있다. 어떤 목표를 설정해도 목표에서 빗나가는 경우가 많다. 때로는 아주 작고 사소한 일들이 크게 부풀려져 일을 그르치게 만든다. 지도자들이 존경받지 못하는 것은 초심에서 빗나가버린 삶 때문이다. 부부가 불행한 것은 초심에서 크게 벗어나버린 애정 때문이다. 신앙인들이 가장 존경하는 인물 중 한 사람인 토저 목사님은 이렇게 말한다. “하나님을 만나는 것,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을 삶의 최우선으로 생각하라.”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행복한 인생이다.

    하나님을 만나지 않고는 못견디는 사람,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용암처럼 치솟는 열정의 사람은 행복하다. 하나님과의 관계를 최우선으로 생각하는 사람은 인간관계에서도 성공한다. 하나의 시계를 주시하라. 두 개의 시계는 불확실하다.

    공장복구의 우선순위

    ​김형남 박사가 전남방직공사의 관리인으로 있을 때이다. 6.25의 발발로 부산으로 철수했다가 광주에 돌아와 보니 공장은 90%가 파괴되었고 건물의 80%가 소실되어 누구나 전남방직은 이제 끝났다고 했다. 그러나 김형남은 간부들에게 돌아가서 공장을 복구하자고 격려했다. 세밀한 방직기계를 재생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것이었고 숙련된 기술자일수록 안 된다고 만류했다. 결국 김형남의 고집으로 기술자 100여명이 광주로 출발했다. 김형남은 공장에 돌아가 맨 먼저 공장 안의 교회를 청소하고 예배를 드렸다. 또한 공장 안에 철공소를 만들어 휘어진 철조각을 펴고, 손상된 부속들을 재생하였다. 고철이 된 기계나 부속들은 그 원형에 대한 설계도를 작성하여 시내의 철공소까지 일일이 찾아가 쇠를 깎았다. 세계의 문헌에도 없는 공장의 복구였다. 그들은 밤과 낮이 따로 없었으며, 주인과 종업원의 구별이 따로 없었다. 결국 재생작업 10개월만에 기적적으로 식당에 6,000추의 방추를 설치하게 되었다.

    아내보다 먼저 주님을

    데이벳 리빙스턴이 선교사업에 자원할 때까지 그는 결혼할 생각이 없었다. 그는 결혼에 대한 질문에 다음과 같이 답하였다. "가족들에 의해 생기는 걱정거리가 없다면, 선교사업에 최선을 다할 수 있다." 그런데 그가 메리 모페트를 만나게 되자, 그는 그녀에게 구혼을 하게 되었고 둘은 결혼을 하였다.

    메리는 곧 그의 남편이 하나님을 삶의 최상의 가치로 생각하는 것을 알았다. 또한 그녀도 그렇게 하기를 원했다. 리빙스턴은 아내인 메리에게 말했다.

    "사랑하는 아내여, 주의 은총이 그대에게 내리기를! 당신의 애정을 나에게보다 주 예수님께 더욱 깊숙이 쏟으십시오. 우리들 서로가 아무리 깊은 사랑을 느끼더라도 항상 예수님을 모두의 친구와 안내자로 생각합시다. 그러면 주님께서는 모든 악으로부터 자신의 영원한 품안에서 당신을 지켜 줄 것입니다."

    우선순위의 삶이 주는 축복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는 우선순위의 삶'을 살면 어떤 축복이 있을까요?

    1. 염려에서의 해방

    염려는 비생산적인 것으로서, 에너지를 줘도 모자란 판국에 에너지를 빼는 것입니다. 염려가 생기는 이유는 어려운 환경 때문이 아니라 집중하지 못하는 마음 때문입니다. 우선순위의 삶을 살면 좋은 일에 대한 집중력이 생겨서 염려를 쉽게 물리치게 됩니다.

    2. 믿음의 장성함

    우선순위의 삶은 하나님에 대한 충분한 신뢰를 바탕으로 이루어지는 삶입니다. 두 마리 물새의 대화가 생각납니다. 그 대화 중에 한 마리 물새가 말합니다. "인간은 만물의 영장이라면서 너무 염려가 많지?" 그러니까 다른 새가 맞장구칩니다. "맞아! 인간들은 말로는 하나님을 찾으면서 실제로는 하나님 없이 사는 것 같아!" 이런 부끄러운 피조물의 조롱소리가 들리지 않도록 참된 믿음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3. 복된 열매의 수확

    참된 믿음은 타인에게 일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일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안에서 자신의 일에 최선을 다하면 반드시 축복된 열매가 나타나게 됩니다. 그처럼 하나님을 인생의 첫 번째 채권자로 알고 빚을 갚는 심정으로 살려고 할 때, 어느 날 우리는 사랑하는 하나님 앞에 더욱 소중한 것을 드릴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인생을 살면서 시간관리를 잘하는 것보다 인생방향을 잘 잡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마음속의 나침반을 잘 따르고 있다면 시계에는 지나치게 신경 쓰지 말아야 합니다. '중요하지 않은 바쁜 일'로 인생의 에너지를 낭비한다면 얼마나 안타까운 일입니까? 바쁘게 살기보다 하나님 우선적인 삶을 통해 성공적인 인생을 만들어 가십시오.

    먼저 크리스천이 되어라.

    산부인과 의사 '강주심' 선생의 대문에는 십자가가 달려 있었고 창문마다 성경말씀이 쓰여져 있었습니다. 자녀들에게 철저하게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살아갈 것을 강조한다고 그분은 말했습니다. 가끔 불고기나 닭고기를 먹을 때도 "하나님이 우리 백성들에게 이런 좋은 음식을 먹을 수 있도록 하시는 것은 그 책임이 너희들에게 있음을 알게 하기 위함이다"고 책임의식을 확인시켜주곤 한다고 했습니다. 또 좋은 집에 살게 하는 것도 같은 목적이라고 일러준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돈을 벌거나 혹은 과학자가 되더 라도 반드시 하나님의 살아 계심을 증명하는 일을 게을리 하지 말라고 교훈한다고 했습니다. 우리 부모들은 무슨 말을 자녀들에게 자주 들려줍니까? 무엇인가 강조하고 보여주는 것이 자녀들의 최고의 가치가 됩니다. 만종을 그린 '밀레'가 파리에 공부하러 갈 때 할머니가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네가 하나님의 뜻을 어긴다든지 믿음이 없어진다든지 하는 것보다 오히려 죽는 것이 낫다고 생각한다. 이것을 잊지 말아라. 너는 화가가 되기 전에 먼저 올바른 크리스천이 되어라. 그릇된 일에 떨어지지 않도록 조심하라. 그림을 그리려거든 영원을 위해서 그릴 것이며 늘 하나님의 심판의 나팔소리가 들려올 것을 생각하고 살아라." 얼마나 귀한 교훈입니까! 진실로 하나님 제일주의 정신이 아닙니까? 참으로 천국 지향적인 신앙입니다. 우리도 이런 교훈을 자녀들에게 들려줄 수 있어야 합니다.

    순서가 바뀌면

    아마 영어를 배운 사람은 다 알겠지만 하나님을 영어로 'GOD'이라고 한다. 그런데 그 글자의 순서를 뒤집어 보라. 'DOG'가 된다. 무슨 의미인가 ? 하나님을 먼저 사랑해야 할 인간이 하나님을 먼저 사랑하지 아니하고 자기를 사랑하고 피조물을 더 경배하여 순서가 바뀌어지면 결국은 개처럼 되어버리고 만다.

    * 기도: 나의 유일하신 주님, 내가 주님 외에 그 어떤 것에도 마음을 빼앗기지 않게 하소서. 주님의 영광에 동참할 것을 소망하면서 세상적인 성공이나 안락함의 유혹을 물리치게 하소서. 내 생각과 삶의 우선을 주님께로 향하게 하소서.

    우선 순위

    ​어떤 목사님이 교회가 점점 부흥되어 가니까 몹시 바빴다. 그 분은 자기만의 기도실, 은밀한 곳이 있었다. 과거 교회가 작았을 때는 열심히 이 기도실에 들어가 무릎을 꿇고 기도하며 하나님과의 교제를 즐겼는데, 일이 바쁘고, 밤 열두시에 들어오게 되는 날이 많아지면서 피곤하니까 이내 잠자리에 들곤 하는 일을 몇 달 동안 했다. 그러던 어느 날, '하나님 전에 나가는 일에 내가 너무 등한히 했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 그 날은 기도실에 들어갔다. 거기 좀 들어가 있었더니 쿵쾅거리는 딸아이의 발소리가 들렸다. 목사님이 문을 여니까 문 밖에 와서 멈추어 섰던 딸아이가 화들짝 놀래면서, "아빠! 아무 것도 아니어요!" 하고는 되돌아 급히 내려가려 했다. 목사님은 딸아이를 붙잡고, "왜, 무슨 일이니?" 하고 물었다.

    "엄마가 아빠가 기도하시기 위해 이 방에 들어가시면 절대로 가까이 가지 말라고 하셨어요. 그런데 전 너무 아빠가 보고 싶어서 엄마 말씀을 어기고 그냥 올라온 거예요. 요 근래에 통 아빠를 못 뵈었거든요."

    목사님은 딸아이를 붙잡고 꼭 껴안아 준 다음 볼에 입맞추고 내려보내면서, "하나님, 용서해 주옵소서. 바로 이것입니다. 내가 어떤 시간보다 살아 계신 하나님과 만나야 하는 시간에 내 정성을 더 쏟았어야 했습니다. 나의 생활 따위에 시간을 다 빼앗기고 말았음을 용서해 주옵소서. 바로 제게 부족한 것이 이것입니다." 라고 울면서 회개했다고 한다. 우리가 아무리 엄청난 사업을 벌이고 이룩한다 하여도 하나님을 놀라게 할 수는 없다. 가장 귀한 것은 하나님 앞에 우리의 중심과 사랑이 드려지고, 마음과 뜻과 성품을 다해서 주님을 사랑하는 것이다. 이것이 결여된 어떤 프로그램이나 어떤 일도 하나님 앞에서는 무가치하다. 나의 생활보다 먼저 즐겨야 할 분은 우리 하나님이시다.

    신랑감 고르기

    한 처녀가 시집갈 나이가 되었는데 세 명의 구혼자가 나타나 서로 앞다투어 '좋아한다', '사랑한다'하여 결정을 하지 못하고 있었다. 이때 처녀는 그들에게 달리기 경주를 하여 자기를 붙잡는 자와 결혼하겠다고 했다. 처녀는 경주를 하기 전에 자신의 주머니에 돈을 가득 넣었다. 그들이 모두 뛰기 시작했는데, 한 청년이 그 여자를 거의 따라 오게 되었다. 그래서 그녀는 돈을 한 움큼 쥐어 그가 오는 길에 떨어뜨렸다. 그러자 그 청년은 돈을 보고는 처녀를 쫓는 것을 잊어버리고 돈을 줍기 시작했다. 그 사이에 처녀는 멀리 도망가 버렸다. 두 번째 젊은이가 그녀를 가까이 쫓을 때 마찬가지로 돈을 떨어뜨렸다. 역시 이 젊은이도 돈을 줍느라고 처녀를 그만 놓쳐 버렸다. 그들이 계속 달리는 동안에 세 번째 청년이 처녀에게 점점 가까이 따라갔다. 이때 처녀는 마지막으로 주머니에 남아 있는 돈을 몽땅 뿌렸다. 그러나 이 구혼자는 돈으로 인하여 처녀를 단념하지 않고 계속 달렸다. 그가 무엇보다도 제일 바라는 상을 위하여 뛰어갔다.

    너희는 먼저

    성경: 마6:33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영국의 그 유명한 빅토리아 십자훈장이 처음으로 수여된 것은 1857경, 런던의 하이드팍 공원에서 였습니다. 여왕에게 그 훈장을 받기 위하여 한 사람씩 올아 오는 중에, 싸움터에서 용감하게 큰 공로를 세우고 팔과 다리를 잃은 한 군인이 여왕 앞에 올라와 섰습니다. 지팡이에 의지하고 간신이 서 있는 영국의 용사를 바라보던 여왕은 훈장을 떨어뜨린 채로 뒤로 돌아 서서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웠습니다. 여왕은 수천의 군인을 등뒤로 하며 눈물을 흘리는 것이었습니다. 잠시 후에 진정한 여왕은 돌아서서 훈장을 집어들고 용사의 가슴에 꽂아주면서 사례의 말을 했습니다. 그러자 그 군인은 다음과 같이 말을 했습니다.

    "하나님이시여, 우리의 여왕을 축복하소서! 여왕폐하와 조국을 위해서라면 한번 더 라도 이 몸 바쳐 싸우겠습니다. 팔 다리를 하나씩 잃어버린 용사의 심금을 감동시킨 것은 가슴에 찬 훈장 때문이 아니라, 나라 위해 희생한 충성을 뜨겁게 인정해 준 여왕폐하의 눈물이었던 것입니다. 세상의 사람들이 모두 죄악과 정욕으로 살고 있는 동안에도 당신과 내가 주님을 섬기는 거룩한 믿음을 지켜 열심히 충성했다면 그분이 왜 이 모든 것을 모르시겠는가?

    오늘도 나의 모든 것을 다 아시는 주님을 바라보면서 하나님의 일을 먼저 구하는 아름다운 날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삶의 우선순위

    ​우리는 매일의 삶의 현장에서 큰 일과 작은 일, 중요한 일과 중요하지 않은 일을 판단할 줄 아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때로 정말로 중요한 일은 하찮게 여기고 중요하지도 않은 하찮은 일 때문에 많은 시간을 낭비해 버릴 때도 있습니다. 정말로 나는 내게 중요한 일이 무엇인지를 알고 내 인생을 살고 있는지, 그리고 그 중요한 일을 위하여 얼마나 힘쓰고 노력을 하며 살아가고 있는지, 아니면 중요하지도 않은 일에 나의 정력과 시간을 낭비하며 살아가고 있지 않는지를 생각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미국에 구두로 돈을 엄청나게 벌은 브라운이라는 분이 있습니다. 어느 날 목사님이 구두로 성공한 비결이 무엇이냐고 물었더니

    “제 성공의 비결은 우선순위가 분명하였습니다. 저는 매사에 첫째는 하나님, 둘째는 가정 그리고 셋째는 구두로 생각하였습니다. 그랬더니 하나님이 모든 것을 형통하게 하여 주셨습니다.”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여러분의 우선순위는 무엇입니까?

    사랑의 우선순위

    사랑의 대상에는 우선순위가 있다. 부부사랑이 최우선이다. 건강한 부부사랑이 있을 때 위에 계신 부모 공경과 태어난 자녀 사랑이 저절로 이루어진다. 아내가 사랑스러우면 장인 장모가 존경스럽고 아내 닮아 태어난 자녀들도 사랑스럽다. 또한 남편이 좋으면 시부모 공경이 저절로 되고 남편 닮아 태어난 자녀들이 사랑스럽다. 그렇지 못할 때 부부간의 사랑이 깨지고 만다. 부부사랑이 아름답게 꽃피는 집의 자녀들은 결혼을 사모한다.

    부부애가 깨진 집의 자녀들은 결혼하고 싶어하지 않는다. 부모를 공경하라. 그러나 먼저 아내를 사랑하라. 시부모 공경은 신바람으로 이어진다. 남편에게 순복해 보라. 남편이 친정 부모를 돌보는 일도 즐겁게 여긴다. 그래서 부부사랑은 부모 공경보다 우선이고 자녀사랑보다 우선이다. 남편들아 아내 사랑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위해 자신을 줌과 같이 하고 아내들아 남편에게 복종하기를 교회가 그리스도에게 복종하듯 하라(엡 5:22∼25).

    나침반 없는 항해

    ​오래 전 친구 여덟 명과 함께 배를 타고 포트 로더데일에서 바하마 군도로 향하면서 나는 한 가지 교훈을 얻었다. 
    배가 플로리다 해안을 떠난 후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 갑자기 전파 방향 지시기가 고장이 나 바다 한가운데에서 길을 잃어 버렸다. 
    우리는 멕시코 만류의 세기를 과소평가했는데, 예상보다 훨씬 북쪽까지 밀려가게 됐다. 일단 섬이 보이면 남으로 방향을 틀어 바하마의 수도인 나소(Nassau)로 향하기로 했었지만, 배가 북으로 너무 멀리 밀려간 나머지 섬은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보통 때라면 9시간이면 충분히 갈 수 있는 거리였지만, 우리는 36시간이나 망망대해에서 표류할 수밖에 없었다.

    배의 위치도 알 수 없는 상태로 그렇게 오랫동안 바다 위에 떠 있으면서 나는 두 가지 중요한 교훈을 얻었다. 우선, 육지가 보이지 않는 바다에서는 곧장 항해하는 것처럼 느껴지지만 지도에 항적을 그려 보면 지그재그 형태로 왔다 갔다 한다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최고 속도를 낼 수 있게 돛을 조절하기는 했지만 애초에 방향을 잘못 잡은 것은 아닐까 하는 불안한 느낌을 계속 가지고 있었다는 것이다. 이처럼 인생의 계획과 자기 사명서 없이 살아가는 것은 망망대해를 나침반 없이 항해하는 것과 다를 바 없다. 삶에서 무엇이 중요하고 의미 있는 것인가를 새롭게 인식하게 되면 자신의 시간과 자원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에 우선순위를 둬 다시 조정할 수 있는 기준이 생긴다. 이 기준을 놓치지 말라.

    김집사의 출세

    ​섬에서 초등학교 졸업하고 무작정 서울로 상경한 어린 소녀가 안해본 일 없이 다하며 피눈물나는 고생을 했다. 
    그리고 착한 남자 만나 삼남매를 두고 식당을 경영했다. 
    주일은 쉬며 하나님께 예배드리고, 음식은 한정판매했다. 
    인간답게 여유를 갖고 살며, 종업원도 그렇게 살도록 해주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뜻대로 사는데 우선순위를 두고, 그 나라와 그 의를 먼저 구하란 말씀으로 살았다.

    당시 여전도회 회원이 1000여명 되는 교회에서 일류 대학과 모든 인격 갖춘 사람들과 경쟁에서 당당하게 초등학교 졸업한 김 집사가 총회장으로 당선되었다. 
    참으로 감사해 눈물이 나왔다. 
    집에 돌아와 자기 방에 들어가 불끄고 이불 뒤집어쓰고 “하나님,섬 것이 예수 믿고 출세했습니다. 
    제가 오늘 여전도회 총회장이 되었습니다”며 흐느꼈다. 
    이것이 하나님이 주신 직분에 대한 김 집사의 감격이다. 
    하나님의 일은 직위나 신앙연륜이나 배경으로 결코 할 수 없다. 
    동물은 본능으로 살고 맹수는 야성으로 생존하듯,그리스도인은 오직 감사와 감격의 영성으로 산다.




    우선순위를 정하는 방법

    이 세상에서 우리에게 주어진 것들은 거의 모두 영원하지 않은 것들이다. 시간, 재화, 지식, 체력 등 우리는 유한한 것들을 가지고 세상을 살아가야 한다. 이는 필연적으로 우선 순위의 문제를 야기한다. 하고 싶은 것들은많은데, 해야할 것들은 많은데, 시간이 부족하거나 재화 또는 체력이 부족하기 때문에 우리는 우리에게 중요한 것들을 선택해야 한다. 만약 우리가 중요하지 않은 문제를 우선적으로 한다면 중요하지 않은 문제가 우리의 시간, 재화, 체력을 고갈시킬 것이다. 그리고 우리의 삶은 곧 가치 없는 사소한 일들로 가득차게 될 것이다.

    지금껏 우선순위를 정하는 방법에 대해 수많은 가르침들이 있었다. 두 가지 대표적인 사례가 있다. 먼저 『원씽』의 저자 게리 켈러는 성취할 경우 다른 모든 일을 쉽게 하거나 불필요하게 만드는 ‘단 한가지의 중요한 일(The One thing)’에 온전히 집중하라고 했다. 또한 세계적인 동기부여 강사인 브라이언 트레이시는 열 가지 중요한 일 리스트를 만들어 늘 품에 지니고 다니라고 말했다. 나는 이들의 말을 따라 가장 중요한 한 가지 일에만 집중했던 적도 있었고 매주 열가지 목표 리스트를 종이에 적어서 주머니에 가지고 다녔던 적도 있었다.

    그런데 내 삶은 딱 한가지 일에만 집중할 수 있을 만큼 단순하지 않았다. 특히 바쁜 직장 생활은 내가 딱 한 가지 일에만 집중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지 않았다. 또한 나는 열 가지 목표 리스트를 가지고도 생활해 보았는데, 리스트를 수시로 확인하지 않으면 목표들을 기억하기가 어려웠다. 그리고 많은 목표를 달성해야 한다는 압박감은 내게 큰 부담과 스트레스가 되었다.

    이 경험은 나에게 다음의 고민으로 이어졌다. “우선순위를 정할 때 몇 가지에 집중해야 하는가?” 무슨 대답이 나올지 바로 예상되지 않은가? 그렇다! 바로 삼의 법칙 대로 세 가지다.

    우선순위를 세울 때 세 가지 기준

    그런데 처음 내가 세 가지 우선순위를 정하기 시작할 때, 한 가지 어려운 점이 있었다. 그것은 우선순위를 정하는 시점에서 내가 진짜하고 싶은일들이 당장에 해야하는 일의 베일 속에 가려지는 것이었다. 예를 들어, 나는 회사에서 내가 추진하는 과제, 작가로서 쓰고있는 글, 두 아이의 육아를 위해서 해야하는 일 등등 이미 내가 하고있는 일 중에서 세 가지 우선순위를 잡았다. 이러한 일들은 당장에 내가 해야만 하는 일이었고 곧 완결 종료되기 일쑤였다. 나는 수시로 세 가지 우선순위 리스트를 재구성해야 했다. 무엇보다 내가 세 가지 우선순위를 가지고 열심히 살아도 내 삶이 크게 바뀌지 않는 것 같았다.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나는 우선순위를 세울 때 세 가지 기준을 마련했다.

    첫번째 기준은 이틀 이상 충분히 고민되었는지의 여부다. 최소 이틀의 시간을 가지고 고민해야, 현재의 바쁜 삶을 뛰어넘어 자신의 인생에서 정말 중요한 일들을 발굴해 낼 수 있다. 사실 이것은 직장에서 내가 자주 경험했던 현상이었다. 만약 한두 시간 안에 개인적으로 가장 중요한 일 세가지를 발굴하라고 하면, 거의 모든 사람들은 이미 진행하고 있고 해야만 하는 일들 중에서 세 가지를 선택한다. 반면 그들에게 이틀이란 충분한 시간을 주면, 그들은 장기적으로 중요하지만 현재의 업무가 바빠서 소홀하고 있었던 일이나 본인이 정말로 해보고 싶었던 것을 생각해낸다.

    두번째 기준은 장기적으로 중요한 일을 선정하는 것이다.『성공하는 사람들의 일곱 가지 습관』의 저자 스티브 코비 박사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긴급한 일을 중요한 일로 여기고 있으며, 긴급한 일을 하는데 거의 모든 시간을 사용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에 따르면 성공하는 사람들, 생산성이 높은 사람들은 장기적으로 중요한 일과 목적에 초점을 맞추는 사람들이다. 따라서 세 가지 우선순위를 정할때 장기적으로 중요한 일을 선정해야 한다. 그동안 나는 사회생활을 하면서 많은 평가를 받았다. 경험적으로 내가 확신하는 바는 다음과 같다. “모든 일은 중요하지 않다.” 그동안 당장 중요하다는 일들 정말로 많이 했다. 회사 분위기상 나는 나에게 맡겨진 일들을 빠짐없이 처리해야만 했다.

    그런데 결과적으로 연말 인사 고과 때가 되면 늘 깨닫게 되는 것은 이것이다. 당장 중요하다는 수많은 일들이 아닌 장기적으로 중요한 몇 가지 일들이 상위 고과를 결정한다는 것이다. 누가 시키든 얼마나 급하든 결국 잡일은 잡일이다. 다만 사회 생활을 하다보면 그런 일들을 안할 수 없기 때문에, 나는 잡일이라고 생각되는 일들을 최대한 빨리 처리하는 편이다.그래야 남은 시간에 장기적으로 중요한 일들, 결국 내 고과에 반영되는 일들에 집중할 수 있기 때문이다.

    세번째 기준은 내가 도전하고 싶은 것을 선정하는 것이다. 철학자 라캉은 인간은 타인의 욕망을 나의 욕망으로 착각하며 산다고 말했다. 직장인이니까, 한 가정의 아비이니까 등의 이유로 나는 내가 원하는 것을 많이포기했던 것 같다. 포기하는 만큼 내가 가진 욕망의 총합이 줄어들지는 않았다. 대신 타인의 욕망을 나의 욕망으로 여긴 것 같다. 나는 회사가 원하는 것을 내가 원하는 것으로, 가족이 원하는 것을 내가 원하는 것으로 여기며 오랫동안 살았다. 하지만 어느 순간 내 마음 속에서 이런 음성이 들리 기시작했다.

    “이렇게 사는 것이 정말 행복한가?”

    나는 내가 하고 싶은 것을 모두 다 할 수는 없어도 한 두 가지 정도는 과감하게 도전해 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때때로 나는 나 자신이 보이지 않는 알 껍질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는 생각을 한다. 이 보이지 않는 알은 매우 특이한데, 하나의 껍질만 있는 것이 아니라 껍질 속에 껍질이 있고 그 껍질 속에 또 다른 껍질이 있다. 최초의 껍질은 어머니의 자궁이었고, 나는 양수막을 깨고 세상의 빛을 보았다. 그리고 계속해서 그 위의 수많은 껍질들을 깨고 성장해 여기까지 왔다.

    내게 도전이라는 것은 껍질을 깨는 것과 같다. 껍질을 깨야 새롭게 성장하듯, 도전을 해야 비로소 내가 진정 원하는 삶을 누릴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이러한 배경 속에서 나는 세 가지 우선순위 리스트에는 가능한 내가 원하고 도전하고 싶은 것을 선정한다.

    나는 세 가지 우선 순위를 정할 때 세 달 곧, 한 분기 동안 지속 가능한 일을 선정한다. 그 이유는 세 달이란 시간이 우리 몸의 모든 세포가 새롭게 교체되는데 걸리는 시간이기 때문이다. 세 달의 시간 동안 나 자신이 새롭게 변화되는 만큼, 나는 세 달이 지나면 우선순위 리스트를 새롭게 교체한다. 예를 들어 2021년 2분기 나의 세 가지 우선순위 리스트는 다음과 같았다.

    1. 왓이프 챌린지

    2. 행복한 칼퇴 문화 만들기
    3. 자녀들의 말에 “우와!”로 반응하기

    왓이프 챌린지

    왓이프 챌린지는 ‘만약 ~하면 어떨까?’라는 의미의 What if 질문을 자유롭게 던진 뒤 재미있겠다 싶은 질문에 무엇이든 도전하는 것이다. 왓이프 챌린지의 규칙은 딱 하나 있는데, 한 번에 단 하나에만 도전하는 것이고 목표를 달성할 때까지 진행하는 것이다. 21년 2분기 내가 도전한 왓이프 챌린지는 타자 속도 2배 만들기였다. 유튜브를 보다가 우연히 분당 2000타의 속도로 타이핑을 하는 우리나라 타이핑 속기 1등 ‘FishFast’의 영상을 보았다. 그 영상을 보는 내내 나는 감탄을 멈출 수 없었고, 영상을 본 뒤, “나도 그렇게 글을 빨리 쓸 수 있다면, 작가 활동을 할 때나 회사에서 보고서를 쓸 때 매우 편하지 않을까?”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해서, 5월 11일부터 타자 속도 2배 만들기라는 왓이프 챌린지를 시작했다. 내 한글의 평균 타이핑 속도는 분당 350타 정도인데만약 내가 이 속도의 2배인 한글 700타 이상을 찍으면 이번 왓이프 챌린지가 성공이 되는 것이다.

    나는 한글 타이핑을 연습하기 위해서 그리고 내 한글 타자 속도를 측 정하기 위해서 'Taza'라는 무료 어플을 다운로드 받았다. 5/11부터 30~40 분 정도 시간을 내어 이 어플이 제공하는 정규 연습 프로그램 (자리연습, 단어연습, 짧은글연습, 긴글연습)을 따라 연습했다. 그리고 어플에 들어 있는 장문 타자 연습을 통해 측정된 평균 속도를 매일 모니터링 했다.

    첫 10일 동안 짬짬이 타자 연습을 꾸준히 해온 덕에 하루마다 평균 10 타 정도의 속도가 붙었다. 그래서 한글의 경우 최고 470타까지 실력이 향상되었다. 그런데 현재의 방법을 고수해서는 절대로 분당 500타 속도에 도달할 수 없을 것 같았다. 아무리 집중을 해도, 심지어 컨디션이 좋을 때여도 짧은 글과 긴 글을 통틀어 500타 이상의 기록을 달성할 수 없었다. 나는 구글에서 ‘타자 빠르게 치기’ 관련 검색되는 모든 글들을 찾아 읽었고, 이를 통해 타자 속도를 높일 수 있는 비법들을 찾기 시작했다.

    그 결과 두 가지 비법을 찾았다. 첫번째 비법은 타자를 칠 때, 음절을 단위로 순식간에 타자를 입력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사랑하는 그대’ 를 친다고 했을 때, ‘사 라 ㅇ 하 느 ㄴ 그대’로 각 자음과 모음을 하나의 단위로 연결해서 치는 것이 아니라 ‘사- 랑-하-는-그-대’로 음절 단위로 연결해서 빠르게 치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한 음절마다 정확한 타자의 위치가 머릿 속에 숙지되어 있어야 했고, 이것이 내 손에서 빠르게 튀어나오도록 꾸준히 손가락 연습을 해야 했다. 두번째 비법은 단어 사이를 연결하는 스페이스가 나올 때 이를 빠르게 치는 것이다. 유튜버 ‘FishFast’뿐만 아니라 많은 블로거들의 말에 따르면 스페이스 바 입력 속도가 타자 속도 향상 과정에서 가장 큰 병목 현상이었다고 한다. 나는 기존에 단어와 단어 사이의 스페이스를 별도의 문자로 인식했었다. 하지만 이제 앞 단어와 스페이스를 하나의 단어로 인식하여 타자를 치는 연습을 했다. 즉, ‘사랑하는 그대’를 칠 때, ‘사랑하는’ 치고 ‘스페이스’ 치고 ‘그대’를 치는 것이 아니라, ‘사랑하는_’을 치고 바로 ‘그대’ 를 치는 것이다. 이틀 동안 나는 이 두가지 비법을 중점적으로 연습하기 시작했다. 그 결과 5월 22일, 처음으로 한글 500타를 돌파 할 수 있었다. 그리고 나는 이 두 가지 비법을 꾸준하게 적용하고 연습해서 매일 안정적으로 한글 500타 이상의 속도로 타이핑을 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런데 한글 500타를 기록한 뒤 일주일 동안 아무리 노력해도 600 타라는 벽을 깨기란 도저히 불가능해 보였다.

    나는 타이핑 속도를 저하시키는 ‘요인’들을 하나하나 찾아서 이를 제거 하는 방향으로 훈련을 했다. 나는 장문의 글을 타이핑하면서 반복적으로 실수하거나 빨리 쳐지지 않는 것들을 점검 했다. 내가 발견한 가장 큰 딜레이 요인은 오른손 새끼손가락이었다. 오른손 새끼손가락을 가지고 0, 게, 계, [, ], “, ” 와 같은 문자를 쓸 때 오른손 새끼손가락이 잘 움직이지 않았다. 이 문자들 중에서 특히 ‘게’는 정말로 많이 쓰게 되는 문자이다. 기본 자리에서 오른손 새끼손가락으로 ‘게’를 치려고 하면 내 새끼손가락이 짧아 오른손을 약간 위쪽으로 비틀어야 했다. ‘게’를 친 다음에 바로 기본 자리로 돌아와야 하는데 이 과정에서 잦은 실수와 딜레이가 있었다. 나는 이 문제의 원인을 ‘짧은 새끼손가락’이라고 생각했고 이를 해결하기 위해서 약지로 새끼손가락을 대신해보았다. 내 약지는 충분히 길기 때문에 새끼손가락으로 치게 되는 모든 문자를 기본 자리 이탈 없이 칠 수있다고 판단했다. 나는 오른손으로는 엄지, 검지, 중지, 약지만을 가지고 문자를 입력하고, 오른손 새끼손가락으로는 오른쪽 shift 키와 ?, / 문자만을 입력하는 결정을 했다. 첫 하루 동안은 좀 어색한 감이 있었다. 하지만 그 다음날부터 기본자리 이탈 없이 문자를 입력하게 되어 전보다 더 편한느낌을받았다. 이틀 동안 열심히 이렇게 연습한 덕에 속도가 붙기 시작했고 이를 통해서 처음으로 600타 기록을 넘겼다. 또한 매일 같이 550타 이상의 속도로 편하게 타이핑을 하는 것이 가능해질 정도로 타이핑 실력이 향상되었다. 나는 계속해서 연습했고 오랫동안 타이핑을 해도 피로감 없이 타이핑을 할 수 있게 되었다. 또한 연습을 하면 할수록 오타 발생률이 점차 낮아졌고 나는 매일 600타 이상의 속도로 타이핑할 수 있게 되었다. 이후 조금씩 조금씩 타자 속도가 향상되었고 결국 챌린지시작 52일 만에(5/11일~7/2일) 처음으로 700타를 넘겼다. 이후 며칠 더 안 정적으로 700타 달성 여부를 확인한 뒤, 7/6일 “분당 700타 속도로 타이핑하기” 챌린지를 완수했다.

    행복한 칼퇴 문화 만들기

    2021년 1분기, 나는 회사에서 정말 바쁜 시간을 보냈다. 메모리 신제품의 수율 목표를 달성한다는 일념으로 온 부서 사람들은 평균일 일근무시간에 두 시간 정도는 기본으로 더 일을 했다. 나와 내 부서원들은 매일 저녁 8시가 넘어야 집에 돌아갈 생각을 했다. 집에 돌아가면 나는 마치 기름이 바닥난 자동차처럼 기진맥진한 채 침대에 쓰러지기 일쑤였다. 나는 내가 좋아하는 책을 읽고 글을 쓸 힘이 전혀 없었다. 나는 매일 같이 일어나 늦지않게 출근하고, 늦게 퇴근하여 씻고 나서 바로 잠자고, 또 일찍 일어나고 다시 출근하는 반복적인 삶을 살았다. ‘나도 이렇게 힘든데 다른 사람들은 어떨까?’ 어느날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사람들 중에는 아이 둘, 또는 셋을 키우면서도 일이 많기 때문에 나보다도 늦게 퇴근하는 사람들도 있었다(그리고 리더인 내가 늦게까지 일을 하는 것을 보고 은근히 눈치를 보며 늦게까지 남아 있는 사람들도 있었을 것이다). 나는 이러한 현실이 참으로 안타까웠다. 나는 팀원들에게 “직장 생활에서 행복한 일이 뭐가 있을까요?”라고 물었던 적이 있다. 한 분이 이렇게 답을 했다. “늦게 출근하고 일찍 칼퇴하는거죠!” 나는 이 대답을 기억해냈고 2분기 우선순위 목표로 행복한 칼퇴 문화 만들기를 정했다. 적어도 내 부서 안에서 말이다.

    나는 나와 팀원들이 일찍 퇴근하지 못하는 이유들을 파악하고자 했다. 그 이유를 제거한다면 행복한 칼퇴가 가능하지 않을까하고 생각했다. 첫 번째 이유는 많은 업무량이었다. 물론 상부에서 수명받은 업무는 안 할 수가 없다. 하지만 부서의 R&R(Role and Responsibility, 역할과 책임)이 명확하지 않아 사실 하지 않아도 되는 일을 우리 부서가 떠맡고 있거나 다른 팀에 빨리 위임을 하지 못하는 경우가 있다는 것을 나는 알게 되었다. 그래서우리팀은 당시 추진되고 있는 모든 과제를 리스트업하였고 그 과제를 추진함에 있어 우리 부서의 R&R을명확하게 정의하는 작업을 시작했다. 더 나아가 과제를 협업하는 유관부서의 R&R 또한 명확하게 정의한 뒤 우리가 해야할 업무와 그들이 해야할 업무, 그리고 다같이 협업해야 할 업무를 구분하였다. 우리는 매일 아침마다 아침회의를 진행하는데 과제별 R&R이 정리될 때마다 공유하는 식으로 내부 교육을 했다. 시간이 지나자 팀원들이 신속하게 유관 부서에 업무를 위임하기 시작했고 꼭 해야할 일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그결과 최소한 우리부서의 업무량이 최소한 현재보다 더 많아지는 것은 방지할 수 있었다.

    칼퇴를 막는 두번째 이유는 문서작업이었다. 나는 내 팀원들이 집에 가지 않고 무엇을 하는지를 관찰해 보았다. 거의 대부분 그들은 회의 자료를 작성하고 있었다. 어떻게 하면 회의 자료 작성의 부담을 최소화할 수있을지 고민했다. 고민 끝에 회의자료 마스터 템플릿을 만들어 놓으면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나와 팀원들은 주요 과제별 회의 때마다 범용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 대표 양식을 만들었다. 이제 팀원들은 업무를 추진하면서 새롭게 자료를 작성하는 것이 아니라 대표 양식에 지속적으로 업데이트만 하면 되었다. 우리는 과제별 자료 업데이트 담당자를 선정 했고 각 담당자가 매주 회의 하루 전, 주간 보고 하루 전까지 업데이트 하기로 약속했다. 이렇게 대표 양식을 활용해서 업무를 추진하니 팀원들은 문서 작성에 대한 부담감을 떨쳐버릴 수 있었다. 또한 그들은 PPT를 만들고 다듬고 고치는 긴 시간을 아껴 본인의 주요 실무에 집중할 수 있게 되었다. 늦게까지 남아서 자료를 작성해야 할 필요와 명분이 사라지니 (내 경우는 각 자료 취합 및 보고 준비로 주 2회 정도 늦게까지 일을 하긴 해야했다), 서서히 야근 횟수가 줄어들기 시작했다.

    칼퇴를 막는 세 번째 이유는 오래 일하면 일을 더 잘한다는 착각이었다. 내가 느끼기에 사람들이 일을 오래하면 더많은 성과를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그런데 회사 생활을 오래하면서 성과를 잘낸다는 많은 사람들을 관찰한 결과 나의 결론은 다음과 같았다. “일을 오래 하는사람이 성과를 잘 내는 것이 아니라 일을 잘하는 사람이 성과를 잘 낸다.” 나는 내 팀원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비록 수명 업무들이 갑자기 생겨서 도전을 포기해야 할지라도 가능한 저녁 6시 안으로 모든 업무를 마무리하고 칼퇴에 도전해보겠습니다. 만약 제가 6시를 넘긴다면 이것은 제가 일을 못하는 사람이구나 생각하고 더 효율적으로 일할 수 있는 방안을 마련해보겠습니다.”

    이 말을 한 그날부터 나는 진짜 6시 전에 칼퇴근을 했다. 이를 위해서 일과 시간에 정말로 정신 바짝 차리고 집중해서 일을 했다. 이후 아침 회의 시간에 팀원들과 차 한잔 하면서 “저 오늘 5시30분까지 집중해 보겠습니다!”와 같은 우스갯소리들이 오갔고 각자 내뱉은 말들을 지키고자 진짜 집중해서 일을 했다. 그리고 당당하게 칼퇴를 시전했다. 팀원들이 칼퇴를 해도 내 부서는 개선 활동을 차질 없이 잘 운영했고 성과 또한 잘 나왔다. 그렇게 내 부서 안에 행복한 칼퇴 문화가 실행 되었다. 그러나 한 달 뒤에 연달아 임원 수명 핵심 과제들이 쏟아지는 바람에 ‘행복한 칼퇴 문화’를 한 달 밖에 유지하지 못했다. 그래도 그 한달 동안 팀원들과 나는 참 여유롭고 균형 있게 회사생활을 했다.

    자녀들의 말에 “우와” 하고 반응하기

    2021년 5월 19일 방송된 <유 퀴즈 온 더 블럭>에는 가수 씨엘의 아버지이자 물리학 교수인 이기진 교수가 출연했다. 방송에서 이기진 교수는 딸 씨엘이 고등학교 2학년 시절에 자퇴를 선언했던 일화에 대해서 이야기했다. 학업과 연습생 생활을 병행하며 새벽 3~4시에 자는 생활을 했던 씨엘은 강변북로를 운전하고 있던 아빠에 게 이렇게 말했다. “아빠, 나 학교 그만두고 싶어!” 그러자 이기진 교수는 이렇게 답했다. “네가 그 결정을 하려고 얼마나 오래 고민했겠냐? 좋아, 하고 싶은 대로 해!” 방송에서 인터뷰 영상으로 등장한 씨엘은 아버지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아빠가 절대로 ‘노’ 하지 않을 것을 알았기에 자연스럽게 이야기를 했습니다. 한 번도 아빠는 ‘안 돼!’라고 이야기하시지 않았어요.”

    이 방송을 시청하면서 나는 두 자녀의 아빠로서 많은 반성을 하게 되었다. 그동안 나는 알게 모르게 자녀들의 말을 무시하거나 부정적으로 답하곤 했다.

    “아빠, 이거 하고 있거든!”
    “조금 있다가 이야기해줄래?” (그러고는 자주 까먹었다)
    “안돼! 그거 위험한 것 같아!”
    “아빠가 볼 때 좋지 않은 것 같아!”
    “그것 이미 해봤잖아. 그때는 하기 싫어했잖아?”

    나는 그동안 내 기준의 근거를 대며 자녀들의 많은 생각과 말을 자르고 거절했다. 나는 자녀들에게 미안함을 느꼈고, 이기진 교수의 양육법과 같이 자녀들의 말에 최대한 “우와!” 하며 긍정적으로 반응해보기로 했다. 내 기준에서 불합리적이고 비효율적으로 보일지라도 일단 자녀들의 말에 긍정적으로 반응하는 것이었다.

    “우와!”
    “그렇구나!”
    “대단하다, 어떻게 그런 멋진 생각을 했니?”
    “좋아! 너 말대로 해보자!”

    2021년 5월부터 6월까지 60일 동안 “우와!” 하고 반응해보았다. 그 과정은 정말로 쉽지 않았다. 크게 세 가지 고비가 있었다. 첫 번째 고비는 아이들이 그만 해야하는데 더 하겠다고 떼를 쓸 때였다. 예를 들어, 아이들이 놀이터에서 충분히 놀았고 집에 돌아가야 하는데 안 가겠다고 떼를 쓰고 울기 시작할 때, 예전 같았으면 아이들을 혼내고 강제로 집에 데려갔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너희들 정말 많이 놀고 싶었구나! 그래, 10분만 더 놀다가 집에 가자!” 이렇게 반응해보았다. 나는 TV 육아 프로그램에서 아이들이 스스로 규칙을 정하면 지킬 확률이 높아진다는 것을 들었고 아이들에게 “너희들 몇 번 더 놀고 싶니? 두 번, 세 번, 네 번?” 이렇게 묻는 노하우까지 생겼다.

    또 다른 예로, 첫째가 그림 그리는 것을 좋아하는데 문제는 벽지나 가구에 그림을 그리는 것이었다. 여러번 주의를 주고 혼을 냈지만 그래도 딸은 멈추지 않았다. 이번에도 어김 없이 내 책상에 물감칠을 했고 나는 이렇게 반응해보았다. “와우! 아빠 책상이 예술 작품이 되었구나! 예서야, 그림 정말 잘 그리네. 그런데 예서야, 아빠는 예서가 아빠 공책에 그림 그려주면 더 좋을 것 같아! 여기 아빠 공책들 있으니까 마음껏 그려줘!” 실제로 딸은 아빠 공책에 낙서를 했고 아빠 책상이나 아빠 책에 낙서하는 것을 멈추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딸은 또 다시 벽지에 그녀의 작품을 남겼다. 화가 났지만 화를 참으며 이렇게 말했다. “우와, 멋진데. 예서 작품이 도화지에 다 담을 수 없을 정도로 크고 멋지다. 예서야, 아빠가 아예 벽에 커다란 보드를 붙여줄까? 마음껏 벽에 그림 그리게 말이야” 딸은 답했다. “응,좋아!” 일주일 뒤 딸의 키보다 훨씬 더 큰 화이트 보드가 도착했고 딸은 마음껏 보드에 낙서를 했다. 그 이후 딸은 더 이상 벽지에 낙서하지 않았다.

    두 번째 고비는 해야 하는데 안 하겠다고 떼를 쓸 때였다. 처음에는 “응,그렇구나! 안하고 싶구나! 근데 안하면안되는데...”와 같은 식으로 반응했다. 화만 내지 않았지, 긍정적이 아닌 부정적인 반응이었다. 자기 전 칫솔을 계속 거부하는 아이에게 “응, 그래! 지금 안하고 싶지만 치카치카 안 하면 이빨 다 썩어서 치과 가야 할 걸? 그럼 엄청 아플 텐데... 아우 아프겠다!” 이렇게 나는 반응했다. 그런데 이것은 “우와!”로 반응하기의 취지(긍정적인 반응)와는 맞지 않는 것 같았다.

    그래서 나는 쉽지 않지만 기다려주는 전략을 택했다. “예서와 예준이가 치카치카 정말 잘하는데 지금은 하고 싶지 않나보네. 자기 전에 준비되면 이야기해줘!” 나는 이렇게 말했고, 시간이 좀 지나자 아이들은 양치하고 싶다고 했다(매일 양치하기 때문에 양치하지 않으면 불편해진다는 것을 잘 알고 있는 듯했다). 밥 먹을 시간이 다 되어도 안 먹고 버티고 있을 때 나는 이렇게 이야기 했다. “오케이, 알았어. 우리는 지금 밥 먹을거고, 예서 밥은 여기 준비해 두었어. 예서하고 싶은 것 하고 먹고 싶을 때 먹어.” 결국 아이들은 배고파지니 밥을 먹었고, 아내와 나는 스트레스 받 지 않아서 좋았다(물론 유치원 버스를 타기 위해서 일찍 일어나 준비하 는 것과 같이 딜레이를 용납하기 어려운 일들은 예외였다).

    세 번째 고비는 혼자만의 시간을 보내는 것을 방해 받았을 때였다. 평일 저녁 퇴근 후에는 직장 업무로 인한 스트레스를 풀고자 잠시 내 방에서 혼자만의 시간을 좀 보내는 편이다. 그런데 내 두 아이들은 어떻게든 내 방에 들어와 놀아달라고 떼를 쓴다. “아빠 지금 좀 힘들어! 아빠 혼자 있고 싶어! 아빠 좀 예민하거든!” 이렇게 말해도 아이들은 듣지를 않고 계속 방해를 한다. 그러다 결국 내가 못 참고 화를 내며 아이들은 펑펑 우는 경우가 많았다. “우와!” 하고 반응하기를 하면서 나는 혼자 있을 때 찾아오는 아이들에게 어떻게 화를 내지 않고 잘 말할지 많이 고민했다. 내가 찾은 답은 “예서와 예준이가 아빠 많이 보고 싶었구나! 아빠가 지금 좀 혼자서 쉬어야 하는데 20분 동안 혼자 방에 있을게! 알람 소리가 들리면 방에 들어와줘! 같이 놀자!”였다. 나는 약속대로 알람을 맞추었고, 아이들은 그 시간 동안 방해하지 않고 내 시간을 존중해 주었다. 나는 알람이 울리기 전까지 최대한 기분 전환을 하며 휴식할 수 있었다.

    2개월 동안 자녀들에 “우와” 반응하면서, 나는 여러가지 배운 점들이 많았다. 첫째는 아이들이 표현력은 좀 부족하지만 나와 동일한 욕구를 가지고 있다는 것, 나와 같이 하고 싶은 것을 하고 싶고, 가지고 싶은 것을 가지고 싶고, 생각한 것을 존중받고 싶어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둘째는 긍정적으로 반응할 때 비로소 아이들 내면에 있는 긍정적인 동기를 바라보게 된다는 것이었다. 반대로 말하면 부정적으로 반응하면 아이들 내면에 있는 부정적인 동기만을 보게 된다. 세 번째는 내가 생각한 것보다 훨씬 더 아이들이 나를 사랑하고 있다는 것이었고 내가 사랑하는 자녀에게 내가 사랑받고 있다는 사실에 정말 행복했다.

    세 가지 우선순위는 마음의 평안을 준다

    ‘신뢰’라는 의미의 단어 Trust는 ‘평안’을 뜻하는 독일어 Trost에 비롯되었다고 한다. 무언가를 신뢰할 때 우리는 비로소 마음의 평안을 얻는 것이다. 신뢰가 깨지면 마음의 평안도 깨진다. 이에 대해서는 국제 정치 뉴스만 보더라도 잘 알 수 있는데, 양국가간 신뢰가 깨지는 경우 필연 잘 유지되어 온 평화도 깨져버린다.

    세 가지 우선순위를 정할 때 중요한 것은 “내게 장기적으로 중요한 이 세 가지가 내 삶을 변화시켜준다”고 믿는 믿음이다. 이 믿음을 가지고 담대하게 도전해나갈 때, 우리는 아무리 많은 일들 속에 둘러싸여 있어도 마음의 평안을 가지고 살아갈 수 있게 된다.

    인생에는 늘 등장하는 세 가지가 있다. 변화, 선택 그리고 원칙이다.
    -스티븐코비-

    아이작 유

    <셋으로 된 모든 것은 완벽하다> 중에서


    리더십을 연구하고 강의하는 세계 정상의 인기 강사이면서 베스트셀러의 저자인 스티븐 코비 박사라는 분이 있습니다.  그가 쓴 책 가운데 '소중한 것을 먼저 하라.'는 유명한 책이 있습니다.
    이 책에서 그는 출가한 딸과의 나누었던 대화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이 딸은 출가해서 세 번째 아이를 낳아 기르는 중이었습니다.  딸이 어느 날 아버지 코비 박사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아빠, 저는 너무 너무 속상해요.  제가 이 아이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아빠도 아시지요?  그렇지만 이 아이는 제 모든 시간을 빼앗고 있어요.  저는 이 아이 때문에 아무 것도 다른 일은 할 수가 없답니다."
    이때 아버지 코비 박사는 이렇게 말합니다.  "딸아 그냥 마음을 편히 가지려무나.  편안한 마음으로 그 아이를 그냥 즐겨.  아무도 너 만큼은 이 아이를 사랑할 사람이 없지 않느냐?  그렇다면 이 아이를 돌보는 것보다 더 중요한 일은 없겠지."
    그러면서 그 다음에 이 사람은 경영에 아주 탁월한 지도자임에도 불구하고 전혀 지도자답지 않은 충고를 딸에게 이렇게 합니다.
    "딸아, 시간 관리, 이런 것 다 잊어버려.  달력, 보지도 마라.  다만 네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이야기를 즐길 수 있을 때 마음껏 즐겨라.  그리고 네 내면의 나침반을 따르고 벽에 걸린 저 시계에는 얽매이지 말아라"
    네 내면에 있는 나침반을 따르고 저 벽에 있는 시계는 보지도 말아라.  시계는 시간을 알려주지만, 나침반은 방향을 가리켜 줍니다.  그러니까 코비 박사는 그의 딸에게 시간 관리보다도 훨씬 중요한 것, 그것은 인생의 방향을 바르게 설정하는 것이라고 가르치고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매우 바쁘게 서둘러 하는 일들, 그러나 그 일이 전혀 중요하지 않은 일일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전혀 중요하지 않은 일을 위해서 대부분의 우리의 시간을 사용하면서 살아가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의미 있는 인생은 시간을 따라서 바쁘게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인생의 올바른 방향을 설정하고 걸어가는 것입니다.  가치 있는 인생은 우선 순위에 따르는 인생이다 라고 말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오늘 본문에서 이런 가치 있는 인생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 인생은 바로 하나님께 우선 순위를 두고 살아가는 삶이라는 겁니다.  문제는 어떻게 우리의 인생이 이러한 우선 순위의 삶을 따라 살아갈 수 있느냐?  그것이 가장 중요한 질문이라고 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우리가 우선 순위를 따라가는 삶을 살려면, 첫째로 중요한 것은 염려를 극복해야 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께서는 이 짤막한 본문에서 무려 다섯 번에 걸쳐서 "염려하지 말라, 염려를 그치라, 염려를 중단하라"고 강조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염려하지 말아야 할 두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첫째는 아주 실제적인 이유인데, 염려한다고 해서 염려하는 문제가 전혀 해결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염려는 아주 파괴적인 것입니다.  염려는 전혀 비생산적인 것입니다.

    본문에서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을 하십니다.  27절을 다 같이 읽겠습니다.
    "너희 중에 누가 염려함으로 그 키를 한 자나 더할 수 있느냐"
    염려한다고 키가 자라날 수 있느냐?  물론 성장기에 있는 아이들은 열심히 자라날 겁니다.  그러나 우리 성인들에게 있어서는 더 이상 자라날 수가 없습니다.  그러면서도 염려한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그 염려가 우리에게 어떤 유익을 줄 수가 있겠습니까?  염려는 전혀 비생산적인 것입니다.

    본래 '염려'라는 단어는 희랍어에서 '나눈다'는 뜻과 '마음'이라는 두 단어가 합성된 것입니다.  그래서 염려라는 이 단어가 쓰여졌을 때 주님께서 본래 의도하신 것은 마음을 나눈다는 뜻에서 나온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 마음이 여러 가지로 나누어지게 되면 중요한 한 가지 결과가 발생합니다.  우리는 집중할 수가 없습니다.  마음이 나누어지다 보면 어떤 일도 집중할 수가 없습니다.  사실 우리는 염려하다 보면 그 염려하는 일에 마음을 빼앗기게 됩니다.  그보다 훨씬 중요한 일이 있는데 그 중요한 일을 하지 못하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결국 그런 인생은 생산적인 어떤 성취를 기대할 수 없는 결과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성경에 보면, 이런 상황 속에 처했던 한 여인을 볼 수가 있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마르다와 마리아의 사건입니다.  예수님께서 마르다와 마리아의 집에 방문하시지 않았습니까?  마리아는 너무 너무 기뻐하고 주님의 말씀을 열심히 듣고 있는데 마르다는 무슨 일을 했습니까?  예수님을 어떻게 대접할까?  그래서 밖에 나가서 이 일, 저 일을 합니다.  그 일 자체가 나쁜 것은 아닙니다.  그것은 매우 필요하고 또 중요한 일입니다.  그러나 문제는 "아니, 나는 이렇게 하고 있는데 마리아는 무엇을 하고 있나?  마리아가 나를 왜 안 도와주나?"  생각하니까 화가 나고, 또 화가 나다 보니까 마음들이 마구 나누어지기 시작을 합니다.  전전긍긍하고 당황하고 있었던 마르다의 모습을 주님께서 보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주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마르다야, 마르다야, 너는 많은 일로 염려하고 근심하니 …"  여기에서 염려한다는 단어가 오늘 본문에서의 염려한다는 단어와 똑같은 단어를 쓰고 있습니다.  네가 많은 일로 염려하고 근심하니, 즉 마음이 나누어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도 제대로 하는 것이 없다.  그러니까 밖에서 봉사하는 일이 나쁘다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을 정말 즐거운 마음으로 엔조이하고 있었다면 주님께서 그런 말씀을 하시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일 저 일에 마음을 빼앗기면서 어느 일도 집중하지 못하고 열중하지 못하는 모습을 보시면서 "네가 많은 일로 네 마음이 염려하고 근심하니"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러면서 그 다음 절에 보면 "네가 몇 가지만 하든지, 아니면 한 가지도 족하다.  한 가지라도 제대로 하라."  그렇습니다.  실제적인 이유가 있습니다.  염려 그 자체는 우리 인생에 생산적인 결과를 가져올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두 번째로 신앙적인 이유가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믿지 않는 사람과 꼭 마찬가지로 우리에게도 먹는 일에 대한 필요, 입는 일에 대한 필요, 또 어디에서 사느냐, 의식주의 동일한 필요를 안고 인생을 살아갑니다.  그러니까 그런 문제에 관해서 불신자들이 걱정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우리도 걱정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면서 우리는 동일한 염려의 짐을 지고 인생을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의 31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주님께서 어떻게 말씀을 하십니까?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그 다음 절입니다.  32절을 다같이 읽겠습니다.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천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
    "이것들은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다" 라고 하십니다.  다시 말하면 믿지 않는 사람들,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들도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 어디에서 살까, 부단히 의식주의 필요, 직장의 필요, 사업의 필요 등의 문제를 가지고 그들도 계속해서 염려하고 있다.  그런데 너희들도 똑같이 염려하고 있다.

    여러분, 지금 주님께서 어떤 의도로 이 말씀을 하십니까.  그렇다면 불신자와 꼭 마찬가지고 염려하고 걱정하면서 인생의 길을 걸어가고 있다면 너희들이 이방인들과 다른 것이 무엇이 있느냐?  이 말입니다.  다른 것이 뭐가 있느냐?  신앙의 필요가 어디에 있느냐?  예수 믿을 필요가 어디에 있습니까? 
    신앙이 우리의 삶 속에 믿지 않는 사람들과 전혀 다른 차이를 가져 올 수가 없다면, 우리의 삶 속에 전혀 어떤 변화와 우리의 삶에 역동성과 어떤 희망을 줄 수가 전혀 없다면, 왜 믿으십니까?  왜 교회에 나오십니까?  왜 시간을 바치십니까?  이것은 분명히 시간 낭비입니다.  무슨 의미가 있느냐 말입니다.  뭔가 좀 달라야 할 것이 아니냐 말입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이 도전을 주시고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이 예수님 앞에 와서 예수님을 나의 구주와 주님으로 영접하고, 그리고 하나님을 나의 아버지로 부르고 고백을 하는 이런 믿음의 삶이 시작되었다면 사랑하는 여러분, 아직도 염려하십니까?  아직도 걱정하십니까?  그렇다면 믿지 않는 사람들과 뭐가 다릅니까?  예수 없이, 복음이 없이, 하나님이 없이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과 우리의 삶이 본질적으로 어떻게 다른가 말입니다.  크리스챤이라면 무엇인가 좀 다른 것이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렇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달라지십시다.  우선 염려를 중단하시기 바랍니다.  일단 염려를 그치시기 바랍니다.  그러나 중요한 질문이 있습니다.  염려할 수 밖에 없는데 어떻게 염려하지 않을 수가 있습니까?  염려가 어떻게 극복될 수가 있습니까?  그리고 보다 중요한 인생의 우선 순위를 어떻게 추구할 수가 있습니까?

    두 번째 중요한 지혜가 있습니다.  하나님을 신뢰해야 합니다.  첫 번째는 염려 그 자체를 중단하는 것이고, 두 번째는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을 배워야 합니다.
    우리가 염려하지 않고 인생의 우선 순위를 추구하려면 하나님을 견고하게 신뢰하셔야 합니다.  왜 염려하고 있습니까?  왜 염려할까요?
    "이거 어떻게 되지?  이러다가 내 인생은 어떻게 되지?  내 직장은 어떻게 되지?  내 사업은 또 어떻게 되지?  내 아이들은 어떻게 될까?"
    여러분, 그러나 이러한 모든 염려의 밑바탕에 무엇이 깔려 있습니까?  정말 하나님을 신뢰하십니까?  그분이 내 삶의 주인이십니까?  "하나님, 내 인생의 주인되신 하나님, 나는 변함없이 당신을 신뢰합니다.  당신은 전능자이시며, 내 삶의 주인이십니다."  여러분은 이렇게 믿으십니까?
    우리가 염려한다는 것은 믿지 못한다는 이야기입니다.  우리가 정말 하나님을 신뢰한다면 우리는 염려할 필요가 없지 않겠습니까?  왜냐구요?  본문 26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공중의 새를 보라 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창고에 모아 들이지도 아니하되 너희 천부께서 기르시나니"
    그 다음에 무엇이라고 말씀하십니까?
    "너희는 이것들보다 귀하지 아니하냐?"
    "너희는 이것들보다 더 귀한 존재가 아니더냐?"
    하나님은 당신이 창조한 만물에 대해서 책임을 지십니다.  들의 백합화를 가꾸시는 하나님, 공중에 나는 새 한 마리에 관심을 가지시는 하나님, 그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고 예수 믿고 새로운 피조물이 되어 나를 통해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시는 도구로 선택된 나의 삶을 하나님이 책임져 주시지 않겠습니까?  중요한 것은 '이것을 믿느냐?' 이 말입니다.  정말 우리가 이것을 믿느냐?

    오늘 본문에 보면, 그러나 이 하나님을 신뢰하지 못하시는 안타까움을 주님께서 지적하시지 않습니까?
    30절을 다같이 읽겠습니다.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지우는 들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일까보냐 믿음이 적은 자들아"
    그렇습니다.  마지막 부분에 무슨 말씀이 나옵니까?  "믿음이 적은 자들아"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지우는 들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거든 하물며 믿음이 적은 자들아 ….
    주님은 주님을 따라오는 제자들이 당신을 믿고 신뢰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그러나 충분히 신뢰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말씀하십니다.  믿음이 적은 자들아….  그래서 염려하고, 그래서 방황하고, 그래서 걱정하고 있지 아니한가?  하나님을 신뢰하라.  이렇게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베드로전서 5장 7절에 보면, 사도 베드로는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합니다.
    "너희 염려를 다 주께 맡겨 버리라. 이는 저가 너희를 권고하심이니라"

    이 말씀을 기록한 사람은 베드로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복음서를 읽어보면 아주 재미있는 베드로의 성격을 볼 수가 있습니다.  그 중에 베드로는 아주 염려가 많습니다.  아주 격정적인 사나이이기 때문에 감정적입니다.  오늘은 그냥 주님을 위해서 목숨을 바치다가도 그 다음 날에는 죽고 싶다고 인생을 비관합니다.  물 위를 걸으라고 하니까 물 위를 걷다가 이상하니까 어떻게 합니까?  '나 죽습니다'하고 허우적대던 그였습니다.  예수님께서 너희들 중에 누군가가 나를 판다고 하셨을 때에 제일 걱정하는 사람이 베드로였습니다.  "선생님, 도대체 누가 팝니까?"  밤 잠을 이루지 못합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주님을 따라가면서 그의 삶이 여러 가지 경험을 통해 성숙되어가면서 아마 가장 중요한 것 중에 하나가 온전히 하나님을 신뢰하는 중요성을 배웠을 것입니다.  그리고 먼 훗날 그는 이런 말씀을 우리에게 증거하고 있습니다.  "너희 모든 염려를 주께 맡겨라.  주가 돌보신다"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 하나님을 신뢰하시기 바랍니다.
    그 하나님을 신뢰하고 해야 할 일을 최선을 다하시면 되는 겁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신뢰한다는 말이 아무 것도 하지 말고 가만히 있으라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주님께서 그런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이 절대로 아닙니다.  공중에 나는 새를 보라.  들에 핀 백합화를 보라.  잘 보시기 바랍니다.  공중에 나는 새, 가만히 있는 것이 아닙니다.  부지런히 돌아다니면서 먹이를 찾습니다.  들에 핀 백합화를 보라.  가만히 있는 것이 아닙니다.  땅에 뿌리를 내리고 부지런히 영양을 찾고 해야 할 일을 합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하나님을 신뢰하면서 그렇게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믿음이라는 것은 하나님을 믿기 때문에 우리를 아무 것도 안하게 만드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의지하면서 조용히 우리의 삶의 현장에 최선을 다하게 만드는 것, 그것이 믿음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을 신뢰하십시다.  그리고 한 걸음 한 걸음 최선을 다해서 걸어가십시오.  우리 주님께서 함께 하실 것입니다.  열어 주실 것입니다.  내 삶의 길을 여시고, 홍해 바다에 그 강을 마르게 하시고 나갈 길을 보여주시는 하나님의 능력과 손길을 체험하실 것입니다.  그 하나님만을 바라보시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자꾸만 염려하는 것입니다.  청교도들이 자기 어린아이들을 교육하기 위해서 자주 했던 이야기 가운데 '참새와 물새의 대화'라고 하는 것이 있습니다.
    어느 날 물새가 참새 보고 "야, 저 사람들 봐, 저 인간들….  그냥 먹고 살려고 허둥대고 염려하고 걱정하고 고민하고 저 인생들을 보라."  그러니까 참새가 물새 보고 하는 이야기가 "맞아 맞어.  쟤네들은 우리를 돌보시는 하나님이 없는 모양이야."  그런 대화의 내용이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은 하나님을 보십니까?  믿음의 눈으로 역사의 주관자이신 전능하신 하나님을 보십니까?  그 하나님을 신뢰하십니까?  그 하나님이 내 하나님인 것을 고백하십니까?  그 하나님이 내 삶을 책임져 주십니다.  이 사실을 믿으십니까?  그렇다면 염려하지 마십시오.  그 하나님을 굳게 신뢰하십시오.  이 믿음으로 우리는 일어설 수가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을 신뢰해야 합니다.

    그리고 세 번째로 중요한 것은 이제 먼저 구할 것을 구해야 합니다.
    다시 말해서 우선 순위를 분명히 확립해야 합니다.  오늘 본문을 통해서 예수님은 당신을 따라오는 제자들의 삶의 승리, 그리스도인들의 삶의 승리가 소극적으로는 하지 말아야 할 일을 말씀하십니다.  그거은 염려입니다.  염려를 하지 말아라.  염려를 묶어 두어라.  그러나 적극적으로는 하나님을 신뢰하라.  하나님을 의지하라.  전능하신 하나님을 신뢰하라.  그러나 이것만 가지고는 부족합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서 할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믿고 최선을 다 하십시오.  그런데 하나님을 믿으면서 우리가 최선을 다해야 할 우선 순위가 무엇입니까?  먼저 구할 것, 너희는 먼저 무엇입니까?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무슨 말입니까?
    '하나님의 나라'라고 하는 것, 하나님의 나라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통치입니다.  하나님의 통치를 구하라.  하나님의 다스림을 구하라.  주께서 다스려 주시는 삶.

    여러분, 염려할 일이 생겼을 때에 그보다 더 중요한 과제가 있습니다.  염려하고 있는 그 문제가 아니라 지금 하나님이 나를 다스리고 계시는가?  하나님이 나를 통치하고 계시는가?  그래서 내 삶 속에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고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고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나고 있는가?  그리고 나는 주님이 기뻐하시는 일에 내 인생의 진정한 우선 순위를 두면서 살고 있는가? 라는 사실입니다.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우리가 이 고난의 시대를 살아가게 될 때에 제일 염려가 되는 것은 사람들이 염려하고 있는 그 일 자체에 빠져 들어가고 있는 것입니다.  솔직히 염려야 하지 않을 수가 없을 것입니다.  누구인들 염려하지 않을 수가 있겠습니까?  문제는 그 염려의 노예가 되는 것입니다.  그 염려 속에 깊이 빠져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 염려 속에 빠져 들어가게 되면 염려가 우리를 사로잡습니다.  염려하는 그 문제, 그 상황이 내 인생의 주인이 되고 맙니다.  더 이상 그리스도가 주인일 수가 없습니다.  더 이상 내 삶은 하나님이 통치하시는 삶이 아닐 수가 있습니다.  사람이 염려하게 되면 그 염려가 끝이 없습니다.  한 신학자는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염려는 무저갱이다."  성경에 보면 무저갱이라는 말이 나옵니다.  무저갱, 끝이 없다. 바닥이 없다.  염려하기 시작하면 끝이 없는 수렁에 빠지게 됩니다.

    끝이 없는 염려 속에 빠지게 됩니다.  오늘 염려하다 보면 내일까지 염려하게 됩니다.  내일 염려하다 보면 모레까지 염려하게 됩니다.  내 인생의 모든 문제를 다 끌어다가 오늘 염려하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성경에서 주님께서는 마지막 구절에서 어떻게 말씀을 하십니까?  34절입니다.  다 같이 읽겠습니다.
    "그러므로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은 내일 염려할 것이요 한 날 괴로움은 그 날에 족하니라"
    염려하기 시작하면 염려하지 않아도 될 것까지 미리 염려하게 됩니다.  내일까지 염려합니다.  내일 일은 내일 염려하십시오.  그대로 그냥 놔두십시오.  그리고 오늘 해야 할 일은 오늘 하십시오.  오늘의 우선 순위, 오늘 내가 집중해야 할 것, 정말 나와 하나님과의 사이가 바른 관계가 맺어져 있는가?  하나님이 나를 다스리고 있는가?  그리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에,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삶에 내 인생의 우선 순위가 그려져 있는가?  이것이 더 중요하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면 염려가 극복이 됩니다.  정말 그럴려면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을 배워야 합니다.  하나님을 온전히 신뢰하는 것을 배워야 합니다.  기억하십시오.  그리고 믿으십시오.  걱정할 수밖에 없는 절대절명의 난관 속에서도 하나님은 언제나 책임져 주십니다.
    그리고 해야 될 일, 염려는 하나님께 맡기고 오늘 내가 해야 할 일, 오늘 이 순간 내 인생의 가장 중요한 일이 무엇이냐 말입니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사업가였던 록펠러의 전기를 읽어보면, 이 사람이 33세가 되었을 때 최초로 백만불의 순이익을 얻습니다.  그리고 43세에 미국에서 제일 큰 회사를 갖게 됩니다.  53세에 아마도 이 사람은 그 당시에 세계에서 최고의 부자가 되었습니다.  억만 장자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그는 아직도 행복한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53세가 되었을 때 그는 성공한 사람, 부요한 사람이 되고도 아직도 행복한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당시에 록펠러는 탈모증과 녹두병을 앓고 있었다고 합니다.

    머리가 다 빠지는 겁니다.  눈썹도 빠지고, 몸이 초췌하게 말라 가는 그런 병을 앓고 있었습니다.  한 주에 백만불, 어떤 때는 하루에 백만불을 벌기도 합니다.  그러면서도 이 사람이 먹는 식사는 밀크와 크랙크가 전부였다고 합니다.  그런가 하면, 얼마나 많은 사업의 경쟁자들과 이 사람의 목숨을 노리는 사람들이 있었든지 늘 주야로 보디가드를 동원하고 다니면서도 마음속에 안심이 안됩니다.  먹지도 못합니다.  어디를 마음 놓고 가지도 못합니다.  그리고 잠도 못 잡니다.  그리고 병은 점점 악화됩니다.  드디어 의사의 진단이 떨어졌습니다.  "아무래도 1년을 넘기기가 어렵습니다"  이 진단을 받던 날 밤, 록펠러는 깊은 고뇌 속에 빠졌습니다.  밤잠을 이루지 못하고 몸을 뒤척입니다.  내가 죽으면 ….  죽는다고 생각했을 때 자기가 가지고 있는 소유 자체가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겁니다.  자기가 가지고 있는 재물이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겁니다.  그때 아내가 그를 향해서 드러누워서 독백처럼 이렇게 외쳤다고 합니다.  "돈은 전부가 아니야."  그러다가 갑자기 일어나서 이렇게 소리를 치는 겁니다.  "하나님은 모든 것이 돼!"  "God is everything"
    그는 고민하고 밤잠을 이루지 못하고 뒤척이다가 벌떡 일어나서 침대 곁에 무릎을 꿇고 기도하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 이튿날 아침부터 달라지기 시작했습니다.  그 전에도 이 사람이 교회에는 왔다갔다했지만, 이제 그는 성실하게 교회에 출석하기 시작했습니다.  정말 마음으로부터 하나님을 신뢰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얼마 되지 않아서 그는 자기 주변의 사람들에게 자기가 주님의 몸된 교회를 지어서 드리고 싶다는 소망을 말합니다.  그래서 세워진 교회가 뉴욕에 가면 리버사이드 처치라는 교회입니다.  그리고 자기의 돈이 정말 가난한 사람들과 소중한 일들을 위해서 쓰여지도록 록펠러 재단을 만들었습니다.  이 결단을 내린 다음에 그가 잘 자기 시작합니다.  잘 먹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인생이 달라지기 시작했습니다.
    아마도 54세를 넘기기가 어려울 것이라고 진단을 받았던 록펠러가 몇 살을 산지 아십니까?  98세를 살았습니다.  그의 인생에 우선 순위가 조정되자 삶의 모든 것이 달라지기 시작했습니다.

    한 사람의 유명한 크리스챤 부호에 대해서 이야기를 더 하려고 합니다.  하이더 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이 사람도 굉장한 부자였습니다.  그러나 사업하다가 부도를 맞습니다.  그리고 빚을 갖게 됩니다.  당시에 십만불의 빚은 적지 않은 빚이었습니다.  이 빚더미에 있을 때 그는 이 빚더미 속에서 고민하면서 이 사람도 자기 신앙이 회복되기 시작합니다.  어떤 의미에서 인생에서의 고난은 새로운 기회입니다.  이 사람이 정말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하이더가 제일 먼저 결단한 것이 "내가 신앙생활을 제대로 해 보자.  교회 생활도 제대로 하자"였습니다.  그래서 주일 성수도 합니다.  제대로 십일조 생활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사업이 파산 나고 부도 나서 십일조 하기 시작했습니다.  이 사람이 데리고 있었던 회사 참모 가운데 한 사람이 이 사람을 비판하기 시작을 했다고 합니다.  "아니 빚더미에 앉아있으면서 이제 도대체 교회에 십일조를 내고, 그것이 정당한 십일조입니까?  이건 진정한 헌금이 아니야."
    그때 이 사람이 이렇게 말합니다.  "물론 이것은 아직도 진정한 헌금이 아니다.  그러나 내가 이것을 드리는 이유가 있다.  하나님은 나의 첫 번째 채권자이시기 때문이다.  나는 주님께 먼저 빚을 갚아야 하네"
    자기의 삶이 혼란해 지고 무너져 가는 삶의 와중에서 그는 하나님은 나의 첫 번째 채권자이시다.  나는 먼저 그분께 가장 소중한 것을 드려야 하네.

    IMF를 당하면서 시작되었던 구조조정이라는 말이 아직도 이 땅을 휩쓸고 있습니다.  여러분, 인생에서 구조조정의 우선 순위가 무엇인 줄 아십니까?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맺으십시오.  전능하신 내 삶의 주인이신 하나님을 바라보십시오.  그리고 금년 안에 하나님 앞에 내 인생을 어떻게 살 것인가를 결단하십시오.  이대로 살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이 신앙, 이 생활로는 주 앞에 드릴 수 없지 않겠습니까?  좀 뭔가 달라져야 하지 않겠습니까?  내 삶의 방향이 바로 세워져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럴 때에 모든 것은 달라질 수가 있습니다.  이것이 저와 여러분의 삶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기억하십시오.  지금이야말로 우리가 삶의 우선 순위를 분명히 해야 할 때라는 사실을 말입니다.





    성막(聖幕) 성인 성, 장막 막 

    성전(聖殿) 성인 성, 전각 전

    예수(Jesus) 그리스도(Kristos)를 주(主)로 고백(告白)하고 따르는 신자(信者)들의 공동체(共同體). 또는 그 장소(場所).

  • 교회(敎會) / 가르칠 교, 모일 회

    예수(Jesus) 그리스도(Kristos)를 주(主)로 고백(告白)하고 따르는 신자(信者)들의 공동체(共同體). 또는 그 장소(場所).

  • 성전에 대한 이해     

    1. 어원(語原)

    [히] lk;yhe (heka:l) [그] iJJerovn(hieron)   naov" (naos) [영] Temple 

    구약에서 '성전'(聖殿)으로 번역되어 있는 말은 히브리어 명사 '헤-칼-'( lk;yhe, heka:l)인데, 이 말은 원래는 '굉장한 집'을 뜻하는 슈메르어 '에갈'(EGAL)에서 유래한 것으로, '궁전'(宮殿)을 의미하여 '성전'(聖殿,사6:1)또는 '전(殿,왕상7:21;대하3:7)으로 번역하고 있다.

    신약에서 '히에론'(iJJerovn, hieron)는 성전 자체뿐 아니라 경내(境內)도 포함하고, '나오스' (naov", naos)는 성전 자체 및 그 중심인 성소(聖所)를 가리키고 있다.

    2. 정의(定義)

    하나님을 예배하기 위해 세운 건축물.

    3. 기본개념(基本槪念)

    1) 구약시대

    하나님을 예배하기 위해 세운 건축물. 성전의 기본적인 개념은, ‘하나님의 주거’(거처)라는 것인데, 하나님은 장소적 제약을 넘은 영적 존재로 생각되기에 이르러, 성전은 하나님의 지상적 임재의 상징으로 되었다. 성전은 ‘여호와삼마’(여호와께서 거기 계시다. 겔48:35)라는 하나님의 언약적 은총이 구현되는 장소이고, 하늘과 땅이 접하는 곳, 즉 야곱이 말하는 ‘하늘의 문’이었다(창28:17). 예루살렘 성전은 이스라엘 백성에 있어서, 모든 시대를 통하여 그 국민생활, 종교생활의 중심이었다.

    2) 신약시대

    구약시대의 성전의 구조와 기능, 그리고 제사를 위한 직제는 골고다에서 예수님이 단번에 완전히 성취하였으므로 유형적 성전은 없다. 육신을 입고 오신 예수님은 거룩한 성전이며(요2:21) 하늘나라의 원형이다. 또한 예수님의 은혜로 신약시대의 성전은 성도들이다(요2:21;고전3:16).

    4. 구약 시대의 성전 

     1) 성소(聖所, holy place)

    하나님께서 특별히 자신의 현존을 계시하고 그의 백성이 예배하는 장소(출15:17,25:8;히9:1,12). 성전 및 그 이전의 형태인 성막 혹은 그중 일부를 가리킨다. 초기에는 하나님께서 나타나신 장소에 ‘성소’가 세워졌다(창28:18-22). 또 언약궤가 두어진 땅이 ‘성소’로 되었는데 세겜이 그 최초다. 솔로몬시대 이후 예루살렘이 ‘성소’로 되었다

     2) 장막(帳幕, tent)

    출애굽 광야시절에 하나님은 장막에서 그의 백성들을 만나셨다. 장막의 지성소는 하나님의 임재의 처소였고, 가장 거룩하였다. 성소에서는 속죄물을 바침으로써 백성들의 죄가 속함을 받았다. 지성소에는 대제사장이 1년에 한 번씩 들어가 희생의 제물을 바침으로써 자신과 백성들의 죄를 속죄하였다. 성막에는 하나님의 법궤와 만나와 아론의 지팡이가 진설(陳設)되었다. 성막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였다. 모세는 이 성막에서 하나님을 대신하여 백성들을 만났다.

     3) 예루살렘 성전

    성경에서 성전은 거의 예루살렘 성전에 대해 언급되어 있다. 이스라엘이 약속의 땅으로 들어간 후에는 솔로몬 왕에 이르러 비로소 예루살렘 성전이 건립되었다. 예루살렘에는 세 성전이 있었다. 제1성전 '솔로몬의 성전'(Solomon's Temple), 제2성전 '스룹바벨의 성전'(Zerubbable's Temple), 제3성전 '헤롯의 성전'(Herod's Temple)이다.

      (1) 솔로몬 성전(Solomon's Temple).

    '솔로몬의 성전'은 먼저 다윗이 건설을 하고자 했는데(삼하7장;왕상5:3-5,8:17;대상22:14), 하나님께서 다윗은 전쟁을 통하여 피를 많이 흘렸기 때문으로 허락치 않아, 솔로몬에 의해 세워졌다. 솔로몬 왕 5년(주전 959년)에 예루살렘의 모리아산(구릉) 위에서 성전 건축에 착공, 7년의 세월을 거쳐, 제11년에 준공을 보았다(왕상6:37,38, 952년 완성).

    성전은 장방형의 구조로서, 현관, 성소, 지성소의 3부로 이룩되고, 넓이 10.5m, 길이 31.5m, 높이 15.8m로, 그 앞에 낭실이 있었다(왕상6:3,7:19, 21). 제1성전은 주전 587년, 예루살렘이 함락됨과 함께 바벨론왕 느부갓네살에 의해 완전히 파괴되었다(왕하25:13-17;렘52:13,17-23).

      (2) 스룹바벨의 성전(Zerubbabel's Temple)

    바사왕 고레스는 바벨론을 점령할 때, 유대인에게 예루살렘의 파괴된 성전 재축을 허락해 주었다(주전 538). 이 때 스룹바벨의 지휘 하에 재건된 성전으로 주전 515년 완성되었다. 제1성전에 비하면 규모가 적었으나 팔레스티나 및 디아스포라에 있어서의 전유대인의 종교적 중심이 되었다.

    주전 169년 시리아(수리아)의 안티오코스 에피파네스 4세에 의해 약탈되고, 로마의 폼페이우스 장군에의해, 주전 63, 62년 지성소까지 유린되었다.  

      (3) 헤롯성전(Herod's Temple)

    헤롯성전은 헤롯의 치세의 제 17, 또는 18년경 시작하여 10년이 걸려 완성되었다. 솔로몬 성전의 복원으로서 성전 뜰의 넓이를 솔로몬시대의 2배로 확장했다.

    헤롯시대 후는, 성전의 거의 외국 지배하에 놓여졌다. 로마군은 열심당(셀롯당)의 거점으로 되어 있는 예루살렘 성전을 기원 70년 성전을 불살라 버렸다.

    예루살렘 성전 자리에는 로마황제 하드리아누스(117-138 재위)에 의해 로마식의 신전이 건설되고, 아라비아 시대(기원 7세기)이래, 이슬람의 사원인 '암석의 돔'이 세워져 오늘에 이르고 있다.

      (4) 에스겔의 성전(Ezekiel's Temple).

    겔 40-48장에는, 선지자 에스겔의 이상적인 성전의 청사진과 거기에 있어서의 제의가 그려져 있다. 오랫동안 성전을 볼 수 없었던 이스라엘에게 희망을 주기 위해, 평안과 하나님의 임재의 상징인 성전과, 그것에 따르는 제의적 행사를 구체적으로 표시하는 것은 극히 필요했을 것이었으리라 생각된다.

    5. 신약 시대의 성전

    시간이 흐름에 따라서 '성전'은 '기도의 집'에서 종교적 장사 터로 변질돼 갔다(요2:14-16). 예수님은 제자들이 가리키는 외형적으로 화려하게 보이는 '예루살렘 성전'이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고” 무너질 것을 예고하셨다(마24:1,2;막13:1,2;눅21:5,6).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요2:19)는 말씀은 그의 몸인 새로운 영적 성전을 지으시기 위하여 돌로 지어지고 의식(儀式)으로 집전되는 옛 성전을 헐겠다는 것이다. 몸을 지니신 예수는 십자가 상에서 돌아가셨다. 그러나 그는 장사된지 사흘 만에 다시 사셨다. 대속적 죽음을 통해서 예수는 그의 몸으로 새로운 성전을 지으신 것이다. 몸을 지닌 예수는 부활하신 후, 성령의 임재 안에서 새로운 성전이 되신다.

     1) 성도의 몸으로 성전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를 모신 성도들의 몸이 하나님의 성전이라고 하였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교회 성도들에게 보이는 성전이 아니라 '성령의 전'에 관하여 말하고 있다(고전6:19). 성도의 몸이 '성령의 전'인 것은 “주와 합하는 자는 한 영”(고전6:17)이기 때문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성도들의 마음속에 영으로 내주하심으로써 성전을 이루고 계신다. 옛날 성전 자리에 남아 있는 것은 이슬람이 세운 황금 성전 '모스크'이다. 보이지 않으신 하나님은 더 이상 가시적 성전 속에 계시지 않으시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행17:24).

     2) 새 하늘과 새 땅의 성전

    요한은 '요한 계시록'에서 '새 하늘과 새 땅'에서 이루어지는 '성전'에 관하여 언급하고 있다. “또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보니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이 없어졌고 바다도 다시 있지 않더라. 또 내가 보매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이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니 그 준비한 것이 신부가 남편을 위하여 단장한 것 같더라”(계 21:1,2). 이 종말론적인 새 하늘과 새 땅에는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이 하늘에서 지상으로 내려온다. 그리하여 보이지 않는 하나님이 거처를 인간의 거처 가운데 정하신다(계21:3).성전이란 하나님의 임재의 상징이다. 그곳에서 하나님의 백성들은 하나님을 만난다. 그 때 하나님의 장막이 인간들 가운데 계셔서 하나님이 친히 인간들의 하나님이 되실 것이다. 그 때 우리는 하나님을 얼굴과 얼굴을 대면하여 보게 될 것이다.

    6. 성전(聖殿)과 교회(敎會)의 차이

    1) 성전은 손으로 지은 것이나(막14:58;마26:61),

        교회는 손으로 짓지 아니한 것이다(막14:58;요2:21).

    2) 성전은 하나님을 예배하기 위해 세운 건축물이나(요2:20),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다(엡1:23;고전12:12;골1:24;마16:18).

    3) 성전은 성도 개개인의 몸인 하나님의 처소를 말하나(고전3:16;고후6:16),

        교회는 그리스도의 생명을 수여받은 성도의 유기체인 공동체이다(고전12:27;엡4:25,5:30).

    7. 교회(敎會)와 교회당(敎會堂), 예배당(禮拜堂)

    교회(敎會, church) 성전인 성도들의 모임으로(마16:18;엡1:23), 그리스도를 믿는 신자들의 성령에 의해 결합된 공동체를 일컫는 명칭이다(엡5:23). 구약에는 ‘집회’(총회,신9:10,18:16), ‘회중’(왕상8:14,65;대하1:5,7:8)으로 종교적 회중을 가리키고 있다. 신약에 있어서 ‘교회’로 번역된 그리스원어 ‘에클레-시아’(마16:18,18:17)는 시민의 공적 목적으로 모이는 집회를 가리키고, ‘모임’으로도 번역되어 있다(행19:32,41).

    신약 서신서의 서두에는 '교회'(갈1:2)라는 표현과 '성도들'(엡1:1;빌1:1;골1:2)이라는 표현을 구분 없이 쓰고 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는 성도들이 함께 모여 예배를 드리며 기도하며 전도하며 기타 주의 일을 할 때 그 성도들이 교회가 된다.

    따라서 건물은 '교회'가 아니라 '교회당'으로 지칭되어야 한다. 엄밀히 따지면 '교회당'이라 하면 참 성도 만의 모이는 건물을 의미하는데, 실제로 참 성도만이 예배하는 건물이 아니니 '예배당'이란 표현이 성경적이다.

    8. 성전에 관련된 관용어(慣用語)

     1) 성전 건축 : 고대 족장시대에는 단을 쌓았으며(삿6:24,기드온), 그 이후 성막이나 성전은 유형적인 성전이다.

     2) 성전고 : 예루살렘 성전의 금고(마27:6).

     3) 성전 꼭대기 : 예수님께서 마귀로부터 시험을 받으셨던 곳(마4:5;눅4:9).

     4) 성전 맡은 자 : 성전 경호의 레위인의 한 대장(행5:24,26,4:1).

     5) 성전 봉사자(temple servants) : 성전에서 궂은 일을 맡은 사람(스2:70,8;20;느10:28).

     6) 성전세(聖殿稅, temple tax) : 성전 유지를 위해서 또는 건축을 할 때는 주로 자원하는 특별 헌금이나 헌물로 성전세는 성전을 위한 속전으로 20살 이상 된 성인 남자가 반 세겔을 드리도록 제정되었으며(출30:11-16), 거둬들인 성전세의 세목과 또 그 성전세가 성막 건축에 사용되고 있었음을 볼 수 있다(출38;24-31;왕하22:4;느10:32).

     7) 성전에 올라가는 노래 : 시편120-13편의 제목. 년 3회 순례자들이 명절에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길에 부른 노래로 여겨진다.

     8) 성전의 일을 하는 이 : 성직의 생활 보증의 원칙(민18:18,19,31;신18:1-3)에 준하여, 전도자의 생활 권리의 정당성을 주장한데 인용하고 있다(고전9:13).

     9) 하나님의 성전 : '성전'에 해당하는 헬라어 '나오스'는 '거룩한 장소' 즉 '성소'(sanctuary)를 가리킨다. 
    예수께서 자신의 몸을 '성전'이라고 부른 것처럼(요 2:19-21), 하나님의 성령이 거하는(6:19) 하나님의 구속받은 백성은 개인적으로나 집합적으로 '하나님의 성전'이라고 불리어질 수 있다. 바울은 '에이미(be) 동사의 복수형 '에스테'(너희는...이다)를 사용하면서도 '하나님의 성전'(나오스 데우)은 단수형을 사용하여 기독교 공동체 전체를 하나의 통일된 유기체로 보았다.






    성전건축 (학개 1:8)

    너희는 산에 올라가서 나무를 가져다가 전을 건축하라 그리하면 내가 그로 인하여 기뻐하고 또 영광을 얻으리라 나 여호와가 말하였느니라

    하나님은 우리 마음이 감동되기를 원하십니다. 거룩한 흥분으로 충만하기를 원하십니다. 성경에는 “흥분”이라는 단어가 딱 한번 나옵니다. 학개 1장 14절입니다. "여호와께서 스알디엘의 아들 유다 총독 스룹바벨의 마음과 여호사닥의 아들 대제사장 여호수아의 마음과 남은 바 모든 백성의 마음을 흥분시키시매 그들이 와서 만군의 여호와 그들의 하나님의 전 역사를 하였으니"(학 1:14). 표준새번역개정판에서는 “흥분”이 “감동”이란 말로 번역되었습니다. 우리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백성들을 흥분, 즉 감동시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에 감동되면, 성전건축에 흥분합니다. 제자들도 성령에 감동되자, 각 처로 나가 교회를 세웠습니다. 성전건축은 감동입니다. 성전건축은 거룩한 흥분이고, 하나님의 역사이며, 성령의 운행하심입니다. 하나님께서 이 위대한 역사에 우리를 부르시는 것입니다.

    성전건축의 영광과 방법에 대해 알아봄으로, 우리 모두 성전건축의 주인공이 됩시다.

    첫째, 하나님이 주신 기회다

    성전건축은 기회입니다. 바로 하나님의 기회이며, 하나님의 거룩한 일을 할 기회입니다. 또한 하나님의 복을 받아, 그 복을 누릴 기회입니다. 아무나 이 기회를 잡는 것은 아닙니다. 성전건축의 기회를 잡으려고 해도 못 잡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스라엘의 역사를 보면 잘 알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 역사는 창세기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이스라엘 역사 가운데 성전건축은 단 3번뿐입니다. 그것은 모세 때의 성막 건축, 솔로몬 왕 때의 성전 건축, 포로 귀환 이후 학개 선지자 때의 성전 재건축입니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도 누리지 못한 영광이 성전건축입니다. 하나님의 마음에 합했던 다윗도 잡지 못했던 기회가 성전건축입니다. 이사야와 같은 위대한 선지자에게도 성전건축은 허락되지 않았습니다. 성전건축은 하나님께서 허락하셔야만 되는 일입니다. 하나님은 성전을 건축할 사람을 특별히 따로 택하십니다. 성막을 지을 때도 브살렐과 오홀리압을 지명해서 부르셨습니다. 성전을 지을 때도 하나님은 솔로몬을 택하여 부르셨습니다(대상 28:10). 하나님은 지금 우리를 지명하여 부르십니다(학 1:8). 하나님의 기회를 내 것으로 만듭시다. 성전건축의 주인공이 됩시다. 하나님을 위해 성전을 세우면 하나님께서 나를 세워주십니다.

    둘째, 땀 흘려 참여하자

    성전은 하나님이 거하시는 전입니다(출 25:8). 성전건축은 하나님의 이름을 위한 역사입니다(대하 2:4). 하나님을 위한 일을 아무렇게나 할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땀을 원하십니다(학 1:8). 하나님은 우리가 산에 올라가는 수고를 원하시고, 나무를 가져오는 헌신과 조심스럽게 나무를 다듬는 정성을 원하십니다. 또한 가장 좋은 것을 드리길 원하십니다(출 35:5). 하나님께서 힘이 없으시거나 가난하시기 때문이 아닙니다. 금도 하나님의 것이요, 은도 하나님의 것이요, 모든 것이 하나님의 것입니다(학 2:8). 하나님은 우리의 믿음을 원하십니다. 하나님만이 참 신이심을 믿습니까? 하나님이 우리의 아버지이심을 믿습니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복에 복을 더하시는 분임을 믿습니까? 우리의 땀과 기도와 물질을 드립시다. 하나님의 것을 하나님께 돌려드리는 것이니 아깝지 않습니다. 성경은 "나와 나의 백성이 무엇이관대 이처럼 즐거운 마음으로 드릴 힘이 있었나이까 모든 것이 주께로 말미암았사오니 우리가 주의 손에서 받은 것으로 주께 드렸을 뿐이니이다"(대상 29:14)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 우리를 책임지시니 걱정하지 맙시다. 우리 모두 내 모든 것을 드려 성전건축에 참여합시다.

    셋째, 합심하여 건축하자

    하나님은 학개 1장 8절에서 “너희는”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성전건축에 참여하기 원하시는 것입니다(학 1:14). 하나님으로 인해 총독의 마음도, 대제사장의 마음도, 남자의 마음도, 여자의 마음도, 어른의 마음도, 어린이의 마음도 흥분되었습니다. 그 결과, 16년 동안 중단되었던 성전건축이 재개되었습니다. 다시 시작한지 4년 만에 성전을 완공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모두가 성전건축의 주인공이 되기 원하십니다. 그러기 위해 우리는 합심해야 합니다. 마음으로만 합심하는 것이 아니라, 물질로도 합심해야 합니다. 이스라엘은 광야에서 성막을 건축할 때 금과 은만 드린 것이 아닙니다. 실, 염소털, 가죽, 조각목, 등불, 관유도 드렸습니다. 큰 것부터 작은 것까지 전부를 하나님께 드렸습니다. 얼마나 많이 참여했는지, 나중에는 차고 넘칠 정도였습니다. 성경은 "있는 재료가 모든 일을 하기에 넉넉하여 남음이 있었더라"(출 36:7)고 말씀합니다. 합심이 힘입니다. 우리 모두 성령 안에서 합심합시다. 성전건축으로 합심합시다. 우리가 하나 되면, 무엇이든지 가능합니다.

    넷째, 하나님이 기뻐하신다

    우리 인생의 목적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위해 존재합니다(사 43:21; 골 1:16). 우리가 하나님 위해 살 때, 우리의 인생은 가치가 있습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릴 때, 우리 인생은 복된 인생이 됩니다. 성전건축은 하나님의 기쁨이고, 영광입니다. 성경은 "너희는 산에 올라가서 나무를 가져다가 전을 건축하라 그리하면 내가 그로 인하여 기뻐하고 또 영광을 얻으리라 나 여호와가 말하였느니라"(학 1:8)고 말씀합니다. 성전을 세운다는 것은 그냥 건물을 올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입니다. 또한 우리 인생의 본분을 다하는 것입니다. 인생은 한 번뿐입니다. 한 번 지나가면 다시 오지 않습니다. 우리가 수고하고 애쓴 것들은 안개처럼 다 사라집니다. 모든 것은 사라지지만, 하나님을 위해 행한 것만은 영원합니다. 우리 모두 가장 아름다운 성전을 건축함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립시다. 하나님의 영광을 세계 만방에 드러냅시다.

    다섯째, 하나님의 상을 받는다

    다윗은 하나님께로부터 엄청난 복을 받았습니다. 세상에서 존귀케 되었고, 대적으로부터 평안하게 되었고, 가문을 세울 수 있었고, 하나님과 자손대대로 부자 관계를 맺었고, 집과 나라가 영원히 견고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다윗이 뭔가 큰 업적을 세워서 복을 받은 것이 아닙니다. 오직 하나, 성전건축을 소원했을 뿐입니다. 성전을 지은 것도 아니고, 소원만 했습니다. 그런 다윗에게 하나님은 상상할 수 없는 상을 주셨습니다.

    성전건축은 하나님께 상 받는 지름길입니다. 먼저 하나님의 영광이 임하는 특권을 누립니다(학 2:7). 하나님의 영광이 없는 삶은 죽은 것과 다름없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임할 때, 우리는 영광스러운 존재로 변하고, 평강이 넘칩니다(학 2:9; 고후 3:17,18). 또한 물질의 상을 넘치게 받습니다. 학개 당시, 성전건축을 한 시기는 가장 바쁜 농번기였습니다. 추수와 파종이 동시에 이루어지는 달이었습니다. 인간적인 생각으로는 성전건축을 할 때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말씀에 순종하여 성전을 건축합니다. 그때부터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복을 주셨습니다. 성경은 "곡식 종자가 오히려 창고에 있느냐 포도나무, 무화과나무, 석류나무, 감람나무에 열매가 맺지 못하였었느니라 그러나 오늘부터는 내가 너희에게 복을 주리라"(학 2:19)고 말씀합니다. 인간의 계산을 뛰어넘을 때, 하나님의 축복이 임합니다. 마지막으로 자손의 자손에게 복이 임하는 상을 받습니다. 솔로몬과 유다 가문이 복을 받은 이유는 다윗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성전건축을 소원한 다윗에게 자손에게 임할 복을 약속하셨습니다(삼하 7:12-14). 다윗의 하나님이 우리의 아버지이십니다. 우리 모두 성전건축에 동참하여 자손과 가문에 하나님의 복을 유산으로 물려줍시다.

    우리 모두 성전건축의 주인공이 됩시다. 성전건축의 주인공이 하나님 나라의 주인공입니다. 성전을 세울 때, 우리 인생이 세워집니다. 성전이 올라갈 때, 우리 신앙이 올라갑니다.



    성전을 건축하라

    "다리오 왕 제이년 여섯째 달 곧 그 달 초하루에 여호와의 말씀이 선지자 학개로 말미암아 스알디엘의 아들 유다 총독 스룹바벨과 여호사닥의 아들 대제사장 여호수아에게 임하니라 이르시되 만군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여 이르노라 이 백성이 말하기를 여호와의 전을 건축할 시기가 이르지 아니하였다 하느니라 여호와의 말씀이 선지자 학개에게 임하여 이르시되 이 성전이 황폐하였거늘 너희가 이 때에 판벽한 집에 거주하는 것이 옳으냐 그러므로 이제 만군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니 너희는 너희의 행위를 살필지니라 너희가 많이 뿌릴지라도 수확이 적으며 먹을지라도 배부르지 못하며 마실지라도 흡족하지 못하며 입어도 따뜻하지 못하며 일꾼이 삯을 받아도 그것을 구멍 뚫어진 전대에 넣음이 되느니라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노니 너희는 자기의 행위를 살필지니라 너희는 산에 올라가서 나무를 가져다가 성전을 건축하라 그리하면 내가 그것으로 말미암아 기뻐하고 또 영광을 얻으리라 여호와가 말하였느니라 너희가 많은 것을 바랐으나 도리어 적었고 너희가 그것을 집으로 가져갔으나 내가 불어 버렸느니라 나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노라 이것이 무슨 까닭이냐 내 집은 황폐하였으되 너희는 각각 자기의 집을 짓기 위하여 빨랐음이라 그러므로 너희로 말미암아 하늘은 이슬을 그쳤고 땅은 산물을 그쳤으며 내가 이 땅과 산과 곡물과 새 포도주와 기름과 땅의 모든 소산과 사람과 가축과 손으로 수고하는 모든 일에 한재를 들게 하였느니라"(학개 1:1-11)

    가나안 성도
    기독교인이지만 교회에 안 나가는 사람을 '가나안 성도'라고 부릅니다. 교회 안 나가를 뒤집어서 만든 신조어입니다. 그들을 보는 여러 관점들이 있습니다. 먼저 청어람 아카데미 대표인 양희송은 가나안 성도들과 기존 목회자들간에 심각한 시각차가 있음을 지적합니다. "가나안 성도는 교회를 적극적으로 떠나는 사람이 좋은 신앙인이라고 여긴다. 오히려 이들은 교회를 떠나면서 죄책감보다는 교회로부터 탈출했다는 해방감을 가진다."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덧붙입니다. "가나안 성도들은 신앙을 포기해서가 아니라 신앙적 이유로 교회를 떠났기 때문에, 교회 공동체가 좋은 모습을 보인다면 70~80%는 다시 돌아올 것 같다."

    과연 그럴까요? 저는 불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기존의 교회들이 바른 교회의 모습을 회복한다는 것이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가나안 성도들 역시 교회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교회의 잘못된 모습을 보았을 수는 있습니다. 하지만 바른 교회가 무엇인지를 깨닫는 건 그렇게 간단한 일이 아닙니다.

    교회의 머리는 오직 주님 한 분뿐입니다. 오늘날 교회에서 사라진 것은 그리스도의 주 되심, 머리 되심 그리고 그분의 통치가 사라진 것이므로, 문제의 핵심과 본질은 그것을 회복하는 것입니다. 참된 교회는 진정한 제자도에 대한 개인의 선택으로부터 시작되지만, 반드시 성령 공동체를 이루고 하나님의 정의가 실현되는 대안 사회를 이루게 된다는 것이 복음이 말하는 진리의 핵심입니다. 오늘 우리가 살펴볼 학개서 역시 같은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학개
    학개의 생애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없습니다. 학개는 학개서 외에 에스라서에 두 절인 5:1과 6:14에서만 언급됩니다. 학개란 이름은 "명절에 태어난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학개의 활동 연대는 정확하게 적혀 있습니다. "바사의 다리오 왕 제2년"은 주전 520년으로, 학개는 주전 520년 8월에서 12월까지 예언 활동을 하였습니다.

    학개서의 일관된 주제는 예루살렘 성전의 재건입니다. 학개는 성전 재건이 주거 환경 개선보다 우선이라고 말합니다. 학개서의 핵심 메시지는 "자신의 필요에만 몰입하기보다는 먼저 자신의 본분(학개서에서는 성전 재건)에 충실하면 하나님이 그의 필요한 것을 채워 주실 것이다."입니다.

    배경
    학개가 전한 말씀에는 정확한 날짜가 적혀 있습니다. 1절 말씀입니다. 그 모든 말씀은 학개가 바사와 다리오 1세 제2년에 선포한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주전 539년에 바벨론(바빌로니아)은 바사(페르시아)에게 망합니다. 그 이듬해인 주전 538년에 바사 왕 고레스는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와 있던 유다 사람들에게 예루살렘으로 돌아가 무너진 성전을 재건하도록 하였습니다. 그것이 그 유명한 고레스의 칙령입니다(스 1:2-3 참조 6:3-5).

    유다 사람들은 조국으로 돌아오자마자 성전 재건 공사를 시작했습니다(스 3:8-10). 하지만 공사는 유다 땅에 머물러 있던 사람들과 포로에서 귀환한 사람들간의 주도권 다툼으로 인해 중단되고 맙니다. 공사 중단 상태는 그 외의 여러 문제가 복합적으로 작용하여 학개가 등장하는 주전 520년까지 지속되었습니다(스 4:23-24).

    성전 재건은 주전 538년에 유다 백성을 귀환시킨 고레스가 내린 명령의 주목적이었습니다. 그러나 거의 18년 동안 유명무실하다가, 주전 520년, 학개가 하나님으로부터 소명을 받습니다. 유다 백성들이 망각하고 있던 성전 재건의 임무를 일깨우는 것이었습니다.

    여러 정황으로 보아 학개는 유다 땅에 머물렀던 사람으로 추정할 수 있습니다. 바벨론에서 귀환한 유대 백성을 이끌었던 대표적인 지도자는 총독 스룹바벨과 대제사장 여호수아였습니다. 스룹바벨은 다윗 가문의 왕 여호야긴의 후손으로 바벨론에 잡혀갔던 여호야긴의 손자입니다. 여호수아는 여호사닥의 아들로서 역대상 6:15에 따르면 주전 587년에 예루살렘의 대제사장으로서 바벨론 왕에게 붙잡혀 리블라에서 처형당했습니다. 따라서 여호사닥의 아들 여호수아는 레의 제사장 계통에 속하는 인물이었습니다.

    스룹바벨은 왕족이고, 여호수아는 제사장 가문입니다. 총독 스룹바벨은 정치와 행정을 책임지는 정치 지도자이고, 여호수아는 정신적이고 종교적인 직무를 책임지는 종교 지도자입니다. 이 두 지도자는 학개와 달리 바벨론 포로에서 귀환한 사람들입니다. 학개가 이들에게 선포한 이유는 이들이 백성을 대표하는 지도자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이들이 성전 재건 독려의 책임을 맡은 자들이었기 때문입니다.

    백성들의 저항
    그런데 학개의 외침은 백성들의 저항에 부딪힙니다. 백성들은 경제적 상황이 열악하다며 성전 재건을 언급할 때가 아니라고 주장합니다(2절). 당시 유다 백성들은 성전 재건 자체를 부인한 것은 아니었지만 아직 때가 아니라고 판단했습니다. 그들의 지도자인 총독과 대제사장은 지금이 성전 재건의 적기라고 말하는 예언자와 아직 아니라고 말하는 백성 사이에서 결정을 내려야 했습니다. 학개는 아직 성전 재건을 할 시기가 아니라는 백성을 향해 이렇게 말합니다.

    "이 전이 황무하였거늘 너희가 이 때에 판벽한 집에 거하는 것이 가하냐?" (1:4)

    원문을 직역하면 "이 전이 황무하였거늘 너희가 너희를 위해서 이때에 판벽한 너희 집에 거하는 것이 가하냐?"입니다. 이것은 조롱조의 반문입니다. 폐허가 된 하나님의 성전에는 무관심하고 자기 것만 챙기는 유다 백성들의 이기주의를 폭로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황무한 하나님의 집"과 "판벽한 백성의 집"이 대조를 이룹니다. 황무란 황폐한 상태를 가리킵니다. "판벽"이라는 히브리어 '세푸님'은 '호화로운' 이라는 의미로 쓰이기도 하고 소박한 '덮개'라는 의미를 가리키기도 합니다. 학개서의 정황으로 보면 소박한 덮개라는 의미로 보는 것이 더 타당해 보입니다. 학개는 "백성들의 지붕 덮인 집"과 "지붕 없이 폐허가 된 하나님의 집"을 대조적으로 보여 줍니다. 학개는 지금 하나님의 집을 지붕도 없는 폐허 상태로 내버려둔 채 지붕 덮인 집에서 편안히 거하는 것이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옳은 태도인가를 묻고 있는 것입니다.

    사실 당시 백성 대부분이 극심한 빈곤을 겪고 있었습니다(6절). 백성들은 농작물 경작의 실패, 식량 부족, 가뭄으로 인한 물 부족, 낡고 헤진 의복, 물질 부족 등 기본적인 생존권을 위협받고 있었습니다. 제아무리 노력을 해도 헛수고였습니다. 무엇이 문제입니까?

    학개의 역설
    여기서 우리는 학개의 역설과 만나게 됩니다. 귀환한 유다 백성들은 성전 재건이라는 임무를 저버리고 자기 일에만 몰두했습니다. 그들은 자기 집을 먼저 짓고 나름대로 최선을 다했습니다. 그러나 기대 만큼 생활 형편은 나아지지 않았고 상황은 더욱 악화되었습니다.

    "너희가 많은 것을 바랐으나 도리어 적었고 너희가 그것을 집으로 가져갔으나 내가 불어 버렸느니라 나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노라 이것이 무슨 연고뇨 내 집은 황무하였으되 너희는 각각 자기의 집에 빨랐음이니라"(9).

    성전 재건의 무관심이 곤궁한 삶의 근본 원인이라는 것입니다. 학개는 하나님의 일에 대해서는 시간도 노력도 관심도 기울이지 않고 자기 일에만 몰두하는 백성의 빗나간 열정과 이기적인 삶을 고발하고 있습니다. 이기적이고 빗나간 열정이 화를 자초한다는 것입니다. 학개는 빈궁과 곤고함이 백성들이 하나님에 대해 무관심하여 자초한 하나님의 심판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므로 너희로 말미암아 하늘은 이슬을 그쳤고 땅은 산물을 그쳤으며 내가 이 땅과 산과 곡물과 새 포도주와 기름과 땅의 모든 소산과 사람과 가축과 손으로 수고하는 모든 일에 한재를 들게 하였느니라"(10-11).

    성전을 건축하라
    학개는 구체적으로 행동 지침을 내립니다. 

    "너희는 산에 올라가서 나무를 가져다가 전을 건축하라 그리하면 내가 그로 인하여 기뻐하고 또 영광을 얻으리라 나 여호와가 말하였느니라"(8).

    솔로몬 성전을 지을 때에는 레바논의 백향목과 잣나무를 사용하였습니다. 고급스러운 수입목이었습니다. 또 크고 귀한 돌을 떠다가 성전의 기초석으로 삼았습니다. 외국 기술자들이 동원되었습니다. 그러나 학개는 뒷산의 나무를 가져오라고 합니다. 돌은 언급조차 하지 않습니다. 백성들에게 지으라는 것입니다. 그 결과를 2:3절 말씀을 통해 확인할 수 있습니다.

    "너희 가운데에 남아 있는 자 중에서 이 성전의 이전 영광을 본 자가 누구냐 이제 이것이 너희에게 어떻게 보이느냐 이것이 너희 눈에 보잘것없지 아니하냐?"

    역시 결과는 시시했습니다. 예전 솔로몬 성전의 모습을 기억하고 있던 사람들은 그들이 지은 성전을 보고 울었습니다. 너무 보잘것없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백성들이 경제적인 어려움에 처한 것을 알고 계시므로 그들이 감당하지 못할 일을 시키지 않으십니다. 그러나 최선을 다할 것을 요구하십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 우리가 그분께 드릴 수 있는 것은 바로 최선을 다하는 삶의 태도입니다. 그것을 통해 하나님은 기뻐하시고 영광을 받으십니다.

    학개는 단순히 건물을 지으라고 한 것이 아닙니다. 제사적 기능만을 되살리기 위함도 아니었습니다. 당신의 백성에게 복을 베푸시려고 성전을 재건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성전은 축복의 통로이지 무거운 짐이 아닙니다. 아무리 보잘것없는 성전이라 할지라도 당신이 거하시는 집으로 인정하실 뿐만 아니라 복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십니다.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 6:33).

    성전 재건의 임무
    성전 재건의 임무는 귀환한 유다 백성들에게만 주어진 것이 아닙니다. 오늘날 교회는 무너진 예루살렘 성전보다 더 황무해졌습니다. 교회는 역사 속에서 언제나 부침을 거듭해왔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늘 당신의 교회를 다시 세울 사람들을 찾으시고 준비하십니다. 12세기 타락한 교회를 다시 세우고자 하나님은 아시시의 프란체스코를 선택하셨습니다. 그들이 세운 다미안 성당은 보잘것없었지만 하나님이 거하시는 성전이 되었습니다. 프란체스코라는 성전을 세우신 것입니다. 1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황폐한 도시와 넘치는 빈민들에게 아무런 역할도 하지 못하는 교회를 보고 에버하르트 아놀드는 형제의 처소라는 브루더호프를 세웠습니다. 그들은 그 시대의 교회를 다시 세우라는 주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그 음성이 오늘 우리에게도 들리고 있습니다. “내 교회를 다시 세우라!” 가나안 성도님들도 주님의 음성을 꼭 듣길 바랍니다.

    이 시대의 황무한 교회를 볼 수 있는 은혜가 우리들에게 임하기를 바랍니다. "성전을 건축하라"는 주님의 음성이 들리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먹고 살기 위해 자신의 삶을 낭비해서는 안 됩니다. 먼저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순서를 분명히 하는 것은 부족한 것이 하나도 없으신 하나님께 인간이 드릴 수 있는 최상의, 유일한 예물임을 깨닫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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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학개 개론

    1. 표제

     이 책의 표제는 단순히 이 책을 기록한 선지자의 이름을 딴 것이다. 히브리말로 학개(Chaggai)는 “축제의”, 혹은 “경축의” 뜻인데 아마도 그가 경축일에 태어난 것을 암시하는 것같다.
     2. 저자
     학개는 세명의 “포로 후 소선지자”중 첫번째 선지자이다. 학개에 관해서는 그의 책에 나타난 것과 에스라서가 그에 대해 언급한 것(스 5:1; 6:14) 이외에는 알려진 것이 없다. 어떤 학자들은 학개가 그의 예언서를 기록할 당시 나이가 꽤 많았으므로 그는 이전 성전을 보았다고 믿는다(학 2:3). 그것의 사실 여부는 어떠하든지 학개는 옛 성전과 새 성전을 연결시키는 고리같은 인물이라고 여겨진다.

     3. 역사적 배경
     고레스 대왕(Cyrus the Great)이 바벨론을 정복했을 때(539 B.C.) 그는 재빨리 바벨론의 종교와 화해하는 정책을 취했으며 바벨론의 신, 마르둑에게 존경을 표하기까지 했다. 그의 제국 안에 있는 정복된 민족들의 종교적 감정에 대한 이 일반적 화해의 태도는 유대인들이 귀향해서 예루살렘에 유대인 성전을 재건하도록 허락한 그의 조서에서 알 수 있다(스 1:1-4). 이 조서 덕분으로 비교적 적은 수인 일단의 포로들이 다윗의 후손인 스룹바벨(혹은 세스바살, 스 1:8)의 인도아래 고향으로 돌아가서 얼마 후에 곧 둘째 성전의 기초를 놓게 된다(스 2:64; 3:1-10). 고레스와 그의 후계자 캄비세스(Cambyses)의 통치 기간동안 유대인의 대적들은 이 역사를 중지시키기 위한 왕의 조서를 얻어내기 위해 노력했다(스 4:5). 그러나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을 위해 개입하시어(단 10:12, 13) 대적들이 성공하지 못하도록 막으셨다. 이렇게 해서 귀향한 포로들이 주의 전을 재건하는 데 힘있게 정진할 수 있도록 준비된 길들이 열려 있었다.
     그러나 그처럼 전도유망한 출발에도 불구하고 둘째 성전의 역사는 주로 사마리아인들의 계속적인 반대와 방해 때문에 차츰 부진 상태에 빠지게 되고 마침내는 실제적으로 중단되게 되었다(스 4:1-5). 실망한 백성들은 자신들을 위하여 토지를 경작하고 가옥들을 건축하는 일로 방향을 돌렸다. 둘째 성전의 기초가 놓였을 때 통곡한 사람들도(스 3:12) 그들의 행동이 하나님의 전을 회복하고자 노력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얼마나 큰 실망을 주는 것인가를 거의 깨닫지 못했다.
     캄비세스가 죽자 스메르디스(the False Smerdis)가 짧게 통치했는데 그 기간은 귀향한 포로들의 성전 건축에 큰 후퇴를 가져왔다. 여전히 복수심에 불타는 사마리아인들은 다리오가 성전의 파괴자라고 부른 이 왕으로부터 예루살렘의 역사를 중지하라는 조서를 얻어 내는데 마침내 성공했다. 이런 일련의 사건들 때문에 귀향한 백성들은 성전을 중건할 적당한 때가 아직 이르지 않았다고 주장하게 되었다(학 1:12). 백성들이 하나님의 성전 역사를 중지하고 그들의 관심을 자기들의 주택과 토지에 쏟자 하나님께서는 가뭄이 있게 하시고 그들의 계획이 좌절되도록 하셨다. 일년 이상이나 성전은 완전히 버려진 채 방치되었다. 그 동안에 스메르디스가 다리오(Darius)에게 죽임을 당하고 다리오가 즉위하자 스메르디스의 조서들은 폐기되었다.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무기력의 통탄할 만한 상태에 대처하시기 위하여 선지자 학개와 스가랴를 일으키셨다. 그들의 경고와 책망, 격려와 권면의 기별들은 백성들을 일으켜 행동하도록 하고 마침내 다리오 제2년에 성전 중건의 역사를 다시 시작하도록 하였다(학 1:14, 15). 여러 면에서 고레스에게 뒤지지 않으려고 애쓴 다리오왕이 성전 재건을 위한 또 다른 공식 조서를 내린 것은 백성들이 하나님의 보호를 신뢰하면서 실제적으로 다시 일을 시작한 그후였다. 이 조서는 고레스의 원래 조서를 확인하고 강화시켰다(스 5:3-6:13). 선지자 학개와 스가랴 그리고 귀향한 백성들의 지도자 스룹바벨과 대제사장 여호수아의 영감적인 지도를 받아(스 5:1, 2; 6:14) 백성들은 힘과 열성을 다해 매진하였고 마침내 다리오왕 제6년에 성전 건축은 완성되었다(스 6:15). 즉시로 결과를 볼 수 있었다는 관점에서 보면 학개는 가장 성공적인 선지자 중의 한 사람임에 틀림없다.

     4. 주제
     학개서를 구성하고 있는 네 가지의 기별들은 떨어진 백성들의 사기를 높혀서 하나님의 큰 일을 행할 뜻을 갖도록 그들을 고취시키고자 계획되었다. 학개는 하나님께서 임재하시는 가시적(可視的) 장소인 동시에 백성들로 하여금 언약에 충실하게 하고 율법에 순종하도록 붙들어 주는데 필요한 강력한 유대가 되는 성전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깨닫고 있었다. 학개는 귀향한 백성들을 격려하여 성전 재건에 전력을 다 기울이도록 하였다.
     전체적으로 보면 학개의 기별은 다른 어떤 선지자 보다도 백성들과 지도자들에게서 신속하고도 열렬한 반응을 얻었다. 예레미야의 기별이 전적으로 또 공공연히 배척을 받은 것과는 대조적이다. 대부분의 선지자들은 사실상 냉담에서 모멸로 또 핍박에 이르기까지 줄곧 계속되는 반대를 당했다. 그러나 만일 어떤 선지자의 성공의 척도를 그의 기별이 즉각적인 호응을 얻는 여부로 측정한다면, 학개는 선지자들 중에서 가장 성공한 인물에 해당한다. 그 당시 지도자들과 백성들의 고결한 모본은 오늘날에도 뚜렷이 본받을 만한 가치가 있다.
     그처럼 짧은 시간에 주의 전을 완성시킨 것은 진심에서 우러난 협력 정신이었다. 그와 동일한 정신이 오늘날에도 하나님의 신령한 전을 완성시키고 그분의 영원한 왕국을 세우도록 인도할 것이다(벧전 2:5; 마 24:14). 만일 학개 시대에 유대 민족에게 나타났던 그 정신이 계속 이어져 내려왔다면 선지자들을 통하여 조상들에게 허락된 영광스러운 약속들이 곧 성취되었을 것이고 메시야는 오셔서 돌아가시고 그의 영원한 통치를 시작하셨을 것이었다. 오늘날의 교회에 대한 학개의 기별은 경고와 권면이 될 뿐만 아니라 하나의 위대한 격려가 된다.

     5. 개요
    Ⅰ. 학개의 첫째 기별 1:1-15
         1. 무관심에 대한 책망 1:1-6
         2. 가뭄의 원인 1:7-11
         3. 학개의 기별에 대한 백성들의 반응 1:12-15

    Ⅱ. 학개의 둘째 기별 2:1-9
         1. 이전 성전을 생각하고 슬퍼하는 자들이 위로를 받음 2:1-5
         2. 새 성전의 영광이 이전 성전의 영광을 능가할 것임 2:6-9

    Ⅲ. 학개의 셋째 기별 2:10-19
         1. 종교적 형식주의는 충분치 못함 2:10-14
         2. 하나님의 축복을 받기 위하여 백성들은 순종해야 함 2:15-19

    Ⅳ. 학개의 넷째 기별 2:20-23
         1. 하나님을 대적하는 나라들의 멸망 2:20-22
         2. 스룹바벨에 대한 개인적인 약속 2:23








    2025 스바냐



    가까이 다가온 여호와의 날 : 스바냐가 전하는 심판과 구원의 마지막 기회

    스바냐 1:14– 2:3
    가까이 다가온 여호와의 날: 스바냐가 전하는 심판과 구원의 마지막 기회 

    다가오는 여호와의 날, 두려움과 흑암의 날

    스바냐 선지자는 유다와 예루살렘에 임할 심판을 선포하며 “여호와의 큰 날이 가깝고도 가깝다”고 외쳤다. 이 날은 단순한 경고가 아니라 실제로 다가오고 있는 현실이었다. 선지자는 이 날을 “분노의 날, 환난과 고통의 날, 황폐와 파멸의 날, 어둠과 흑암의 날”로 묘사한다. 그동안 성읍의 견고함을 자랑하던 유다의 백성들은 한순간에 무너져 내리는 것을 보게 될 것이며, 강한 용사들조차 슬피 울 수밖에 없을 것이다.

    스바냐가 전한 메시지는 단순히 유다 백성에게만 국한되지 않는다. 모든 시대의 사람들에게도 동일하게 경종을 울린다. 인간이 세운 성읍과 제도, 권력은 영원하지 않으며, 여호와의 날 앞에서는 모두 무너질 수밖에 없다. 결국 하나님의 심판은 현실이며, 그 날을 피할 수 없다는 것이 선지자가 전하고자 한 핵심이었다. 

    무너지는 성읍과 무력한 금은, 인간의 헛된 의지

    스바냐는 여호와의 심판이 임할 때, 사람들이 의지하던 모든 것이 무용지물이 된다고 선언했다. 백성들이 의지하던 성읍은 무너지고, 경제적 번영을 상징하던 금과 은도 그들을 구원하지 못할 것이다. 이는 당시의 우상 숭배와 물질 숭배에 대한 직접적인 심판이자 경고였다.

    오늘날에도 상황은 크게 다르지 않다. 인간은 여전히 물질과 권력, 과학과 제도를 의지하지만, 그것이 영원히 안전을 보장하지는 못한다. 위기의 순간에 드러나는 것은 결국 인간의 무력함이다. 스바냐는 바로 이 점을 강조하며, “여호와의 분노의 불에 온 땅이 소멸될 것”이라고 강력하게 경고했다. 

    절망 속에 외치는 선지자의 호소, “지금이 마지막 기회다”

    스바냐는 심판을 선포하면서도 절망만을 말하지 않았다. 그는 백성에게 모일 것을 촉구하며 “아직 늦지 않았다”고 외쳤다. 여호와의 날이 가까이 왔다고 해서 회개의 기회가 사라진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오히려 지금이야말로 마지막으로 하나님께 돌아올 수 있는 시간임을 강조했다.

    이는 영적으로 눈먼 자들에게, 하나님을 찾지 않고 구원의 갈망을 잃은 자들에게 던지는 절박한 외침이었다. 심판이 다가오는 현실 앞에서도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길은 열려 있으며, 그 길을 걷는 것이야말로 백성들이 살 길이라는 것이다. 

    남은 자의 소망, 공의와 겸손을 구하는 자들을 향한 하나님의 눈길

    스바냐는 대다수가 하나님을 떠나버린 현실 속에서도, 여전히 여호와의 규례를 지키며 겸손히 살아가는 소수의 사람들을 주목했다. 그는 이들에게 더욱 힘써 공의와 겸손을 구하라고 촉구했다. 하나님은 바로 이 남은 자들을 보시고 심판을 연기하시며, 그들을 통해 유다를 회복하실 수 있다는 확신을 전했다.

    오늘날 이 메시지는 시대를 넘어서는 교훈을 제공한다. 대다수가 신앙을 잃고 하나님을 외면할 때라도, 겸손히 중보하며 공의를 추구하는 이들이 있다면 그들로 인해 희망은 이어진다. 하나님은 남은 자들을 통해 여전히 세상을 회복하실 수 있으며, 그들에게서 새로운 역사를 시작하실 수 있다. 

    심판의 날 앞에서 우리에게 주어진 선택

    스바냐가 전한 여호와의 날은 과거의 유다만을 향한 메시지가 아니다. 오늘날에도 여전히 그 날은 우리 앞에 있다. 인간의 힘과 물질은 구원을 보장하지 못한다. 그러나 공의와 겸손을 구하며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이들에게는 여전히 소망이 있다.

    따라서 스바냐의 예언은 단순한 경고가 아니라, 회복과 구원의 길로 돌아올 마지막 초대이다. 지금이야말로 하나님을 찾을 때이며, 지금이야말로 영적인 잠에서 깨어날 때이다. 심판은 두렵지만, 남은 자를 통한 하나님의 구원은 여전히 유효하다. 선택은 각자의 몫이며, 그 선택이 곧 미래를 결정한다.


    존 에프 케네디의 네 가지 심판

    1. 양심의 심판 / 인간의 삶에 대한 판단의 기준과 주체가 되는 개념
    2. 법의 심판 / 사회적 규범에 대한 심판
    3. 역사의 심판  / 시간의 흐름에 따른 가치와 결과에 대한 판단
    3. 최후의 심판 / 전인류적인 초월적인 심판 

    '양심의 심판', '법의 심판', '역사의 심판'은 인간의 삶에 대한 판단의 기준과 주체가 되는 개념이며, 
    '최후의 심판'은 이러한 판단이 궁극적으로 이루어지는 기독교의 종말론적 사건을 의미합니다. 

    양심의 심판은 내면의 옳고 그름에 대한 판단                                                                                                                                                법의 심판은 사회적 규범에 대한 판단                                                                                                                                                        
    역사의 심판은 시간의 흐름에 따른 가치와 결과에 대한 판단이며, 
    최후의 심판은 이 모든 행위가 신 앞에서 결정되는 전인류적이고 초월적인 심판입니다. 

    1. 양심의 심판
    • 기준: 인간 내면의 도덕적 양심과 양심에 새겨진 하나님의 법입니다.
    • 판단 주체: 개인의 양심입니다.
    • 특징: 사회적 법이나 외적 규범이 없을 때도 인간이 스스로 옳고 그름을 판단하고, 양심을 거스르는 행동은 심판의 날에 증거가 됩니다. 

    2. 법의 심판
    • 기준: 율법, 즉 사회의 법적 규범과 계율입니다.
    • 판단 주체: 율법이 기준이 되는 사회 또는 국가입니다.
    • 특징: 유대인은 율법으로, 이방인은 양심으로 심판받는 것처럼, 각자에게 주어진 법적 기준에 따라 옳고 그름을 판단받습니다. 

    3. 역사의 심판
    • 기준: 시간의 흐름에 따른 사건, 가치, 인간 행위의 결과입니다.
    • 판단 주체: 역사 그 자체 또는 시대의 흐름입니다.
    • 특징: 특정 사건이나 인물이 후대의 평가를 통해 그 가치와 의미가 재조명되고, 과거의 잘못된 행위가 청산되거나 반복되지 않도록 교훈을 얻는 과정입니다. 

    4. 최후의 심판
    • 기준: 신(하나님) 앞에서 행한 모든 행위와 그에 대한 신의 뜻입니다.
    • 판단 주체: 신 또는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 특징: 세상의 마지막에 모든 인류가 신 앞에 나아가 일생을 심판받고, 이에 따라 구원과 멸망이 결정되는 기독교의 종말론적 사건입니다




    '양심의 심판', '역사의 심판', '최후의 심판'은 각각 다른 의미를 가진 개념입니다. 양심의 심판은 개인이 자신의 내면적 기준으로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행위를 의미하고, 역사의 심판은 인간의 행위에 대해 후대의 평가와 비판이 이루어지는 것을 뜻합니다. 최후의 심판은 기독교에서 세계 종말에 하나님께서 모든 인류를 심판하는 사건을 말하며, 미켈란젤로의 벽화 '최후의 심판'은 이를 묘사한 작품입니다. 

    1. 양심의 심판 (Conscience)
    • 의미: 개인이 자신의 도덕적 기준에 따라 자신의 행위나 생각의 옳고 그름을 판단하고 평가하는 과정입니다.
    • 특징: 내면적이고 주관적인 판단이며, 죄의식을 느끼게 하거나 자기 성찰을 유도하는 역할을 합니다. 

    2. 역사의 심판 (Historical Judgment)
    • 의미: 시간이 흐른 뒤, 후대 사람들이 과거의 사건이나 인물의 행위를 분석하고 평가하며 그 의미를 재해석하는 과정입니다.
    • 특징: 특정 사건의 중요성, 영향, 옳고 그름 등이 사회적, 문화적 맥락 속에서 판단됩니다. 

    3. 최후의 심판 (Last Judgment) 
    • 의미: 기독교 종말론에서 세계가 끝나는 날, 하나님께서 살아있는 자와 죽은 자를 모두 불러 심판하여 천국과 지옥을 결정하는 사건을 의미합니다.
    • 묘사: 신약성서 요한계시록에 근거하며, 예수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여 생명의 책을 펴고, 사람들의 행위에 따라 영원한 생명이나 영원한 형벌을 내리는 장면이 묘사됩니다.
    • 미켈란젤로의 작품: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가 바티칸 시스티나 성당에 그린 대형 프레스코 벽화로, 중앙의 그리스도와 성인들, 천국과 지옥으로 가는 영혼들을 역동적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여호와의 분노의 날이 너희에게 이르기 전에(스바냐 1:14-2:3)

    하나님께서 심판하시는 날은 가깝고도 빠르게 임할 것입니다. 
    사람에 따라 하나님께서 심판하시는 날이 가깝다고 느끼지 못하는 이들도 있을 것입니다. 
    수많은 세월을 지내오면서 하나님의 심판날이 아직도 오지 않았기에 멀게만 느껴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막상 여호와의 날, 여호와의 큰 날이라고 부르기도 하는 그 날이 닥치면 엄청나게 가깝고 빠르게 느껴질 것입니다. 
    예를 들어 약 일 년 전에 시험을 치르는 날이 예고되면 그 날이 멀게 느껴질 수 있습니다. 
    그런데 막상 그 날이 코앞으로 다가오면 그 날이 왜 이리 가깝고 빠르게 느껴지는지요. 
    마치 그럴 것입니다. 
    제대로 준비하지 않으면, 그 날에 수치를 당하고 말 것입니다.

    남왕국 유다 백성도 여러 선지자들을 통해 하나님께서 심판이 임할 것이라고 예고하셨지만, 그것을 피부로 느끼지 못했을지 모릅니다. “매번 하는 똑같은 이야기”라고 생각하며 무시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 날이 되어 나팔 소리가 울리고, 높이 솟은 망대가 무너지고, 많은 사람들이 엎드러져 피를 쏟으며, 은금을 비롯하여 그 어떤 것도 그러한 하나님의 심판을 막을 수 없다는 것을 느끼게 될 때에는 이미 늦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1:14~18). 
    그래서 그날은 분노의 날이요, 황폐와 패망의 날이요, 캄캄하고 어두운 날이요, 구름과 흑암의 날이 될 것입니다(1:15). 
    하나님의 질투의 불로 인하여 모두가 삼켜지게 될 것이며 눈 깜짝할 사이에 멸절될 것입니다(1:18). 

    남왕국 유다의 백성은 결국 바벨론의 군대에 의해 그러한 참혹한 일을 겪게 될 것입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은 하나님의 심판하실 그 날이 이르기 전에 돌이키고 회개할 것을 촉구하십니다(2:1~3). 
    회개를 촉구하시는 하나님은 남왕국 유다의 백성을 두 부류로 나누어 회개를 촉구하십니다. 
    먼저 수치를 모르는 백성에게 경고하시는 말씀입니다(2:1, 2). 

    수치를”이라는 단어는 히브리어로 “니크사프”(נִכְסָֽף)라는 단어가 사용되었는데, 이 단어의 원형은 “카사프”(כָּסַף)로 “수치”(shame)라는 의미와 더불어 “그리워하다”(to pine after)라는 의미로 사용되기도 합니다. 
    하나님을 사모하지도 않으면서도 부끄러움도 모르는 백성을 향하여 하나님의 진노가 임하기 전에 하나님 앞으로 모여 회개하라고 촉구합니다.

    그리고 여호와의 규례를 지키는 세상의 모든 겸손한 자들에게도 말씀하시는데, 여호와를 찾으며 공의와 겸손을 구하라고 촉구하십니다(2:3). 
    여전히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살려는 이들을 향한 메시지입니다. 

    계속하여 하나님을 찾고,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공의를 행하며 겸손하게 살 것을 촉구하신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그 화(禍)를 피하게 해주실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2:3에 나오는 “혹시”라는 단어는 그럴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는 의미라기보다는, 스바냐가 이 말씀을 전하면서 하나님의 진노와 징벌을 피하는 것은 인간의 노력으로 인하여 확실히 얻을 수 있는 결과가 아니라, 하나님의 주권에 있음을 표현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마지막 때에 반드시 심판주(審判主)로 임하실 것입니다. 
    그리고 그 날은 하나님을 배반하고, 하나님을 거역하는 자들에게는 참혹하게 진멸되는 날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온전히 살아가는 자들은 하나님께서 보호하시고 구원하실 것입니다.


    여호와의 분노의 날 예레미야 12:7-17

    하나님의 분노로 말미암아 7절에 언급한 말씀처럼 내 집, 내 소유, 내 마음을 모두 던져 버리고 원수에 넘긴다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 속에 하나님의 백성들의 불순종과 우상 숭배에 대한 죄의 깊이가 얼마나 깊었는지를 짐작하게 만듭니다. 파괴하는 자들을 허락하사 그들이 여호와의 칼이 되어 모든 육체가 평안하지 못하다는 말씀이 마음에 다가옵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을 영적인 깊은 병에서 살리시기 위해 고난과 고통을 허락하십니다. 나의 삶 가운데 연단이 오고 어려움이 처할 때, 국가적으로도 민족이 어려운 현실을 맞이할 때에 하나님 앞에 나의 죄를 뒤돌아보아야겠습니다. 육체가 평안을 잃어버리고, 수고하여도 소득을 얻지 못하며, 오히려 그 소산으로 말미암아 수치를 당한다는 것은 하나님 앞에 무엇이 잘못되었는가를 점검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겸손한 마음으로 무릎을 꿇고 순종하지 못한 나의 삶을 뒤돌아보아야겠습니다. 지은 죄를 회개하지 못한 나의 교만한 마음도 주님 앞에 내려놓습니다. 하나님의 나라와 영광을 위해 살아가도록 내 인생길의 방향을 수정해야겠습니다. 그리스도인답게 예비 된 천국을 바라보며 하나님이 바라시는 선한 삶을 살아야겠습니다.


    여호와의 날을 준비하라


    구약의 예언서에서 공통적으로 등장하는 말이 있습니다. ‘여호와의 날’(The Day of the Lord)이 그것입니다. 여호와의 날을 언급하고 있는 대표적인 예언서를 몇 군데 나열해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요엘 2:1-2
    “시온에서 나팔을 불며 나의 거룩한 산에서 경고의 소리를 질러라. 온 땅의 주민들이 떨지니 이는 여호와의 날이 이르게 됨이라. 이제 가까웠으니, 곧 어둡고 캄캄한 날이요, 구름과 짙은 흑암의 날이라...”

    아모스 5:18-20
    “여호와의 날을 사모하는 자들아, 너희에게 화가 있을지어다. 그 날이 너희에게 무슨 뜻이냐? 여호와의 날은 빛이 아니요 어둠이니...”

    스바냐 1:14-15
    “여호와의 큰 날이 가깝도다. 가까우며 심히 빠르도다... 그 날은 분노의 날이요, 환난과 고통의 날이요, 황폐와 폐망의 날이요, 캄캄하고 어두운 날이요...”

    이사야 13:6
    “너희는 애곡할지어다. 여호와의 날이 가까웠으니, 전능자에게서 멸망이 임할 것임이로다.”

    이 밖에도 여러 곳에서 ‘여호와의 날’을 언급합니다. 여호와의 날이 언급된 곳에는 언제나 ‘심판’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심판을 좋아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뭔가 자신의 치부가 드러나는 것이고, 그것 때문에 판단을 받고 벌을 받는 것이기 때문이죠. 여호와의 날이 임하면 ‘환란’을 당할 거라는 말, 분위기가 어둡습니다. 별로 듣고 싶지 않은 말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소망과는 달리, 성경은 줄기차게 ‘여호와의 날’에 대하여 말합니다. ‘그만 말하라’고 외치고 싶을 정도입니다. 

    언론/전문가 그룹에서 들려오는 2025년도에 대한 전망이 그리 밝지 않습니다. 한국은 ’12.3 내란사태’ 때문에 환율이 오르고, 증시가 급락하는 등 경제사정이 가뜩이나 안 좋은데, 더 안 좋아질 거라는 전망입니다. 미국도 그리 장밋빛 전망만은 아닙니다. 트럼프 집권 2기에 들어서면서 여러가지 정책이 바뀌면서 미래에 대한 불확실성만 커진 상태입니다. 각국에서는 트럼프 집권 2기에 맞서 대응 전략을 준비하기 한창입니다. 미국 우선주의 기조가 미국에게는 좋을지 몰라도, 미국 이외의 모든 나라에게는 어려움을 안겨다 줄 것이 확실하기 때문입니다. 미국 우선주의 기조가 미국에게도 과연 좋을지, 비판하는 목소리들이 많습니다. 

    새로운 해를 코 앞에 두고 들려오는 소식은 그리 희망적이지 못합니다. 더 춥고 더 어두운 시절이 될 거라는 소식만 들려옵니다. 이런 전망 앞에서 ‘여호와의 날’을 생각해 봅니다. 여호와의 날이 무엇일까. 왜 고대의 예언자들은 ‘여호와의 날’을 선포하며 사람들에게 준비하라고, 그날이 오면 힘들 거라고, 외쳤을까. 

    구약의 예언서들을 읽어보면, 그 당시 이스라엘에 닥친 환란들은 모두 인간이 만들어 낸 것들입니다. 거기에 자연재해가 겹치면서 일종의 ‘퍼펙트 스톰’이 사회를 휩쓸고 가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사회적 시스템도 미비하고, 과학기술도 변변치 못하던 시절, 인재와 자연재해가 겹치면 고대 사회의 사람들은 거의 아무런 보호장치 없이 그 환란을 온몸으로 감당해야만 했습니다. 정말 끔찍한 혼란이 왔던 것입니다. 

    그들이 그토록 끔찍한 환란을 어떻게 극복할 수 있었을까요? 그것은 바로, 그러한 환란을 ‘여호와의 날’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감당하기 어려운 끔찍한 환란에 정의(justice)를 부여하는 것입니다. 인간은 불합한 상황을 못 견딥니다. 그러나, 정당성이 부여되면, 즉 왜 이러한 일을 겪게 되었는지 스스로 이해가 되면, 어떠한 고통과 어려움도 감당합니다. 

    아무래도 2025년는 여러가지 정황 상, ‘여호와의 날’이 우리에게 임할 듯합니다. 미국에 살고 있는 우리들은 상황이 좀 더 나을지 모르겠으나, 고국의 앞날이 정말 걱정입니다. ‘여호와의 날’이 닥치면 겉으로 보면 환란이지만, 그 안에서 발생하는 일은 새로운 기회입니다. 그래서 예언자들은 여호와의 날을 심판의 날로 선포하는 동시에 구원의 날로 선포하는 것입니다. 환란이 닥치면 비로소 보이는 것들 것 있습니다. 이 지경까지 오게 만든 ‘죄악’, 바로 그것이 보입니다. 그 죄악을 해결/해소하지 못하면, 환란은 그치지 않고 반복될 것입니다. 그래서 여호와의 날에는 반드시 죄악의 해결/해소가 필요합니다.

    한국은 구조적으로 항상 ‘내란’에 휩싸일 수밖에 없는 나라입니다. 친일청산을 하지 못했고, 분단국가 상황이 지속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친일’이라는 용어와 ‘빨갱이’라는 용어가 한국말에서 사라지지 않는 한, 한국은 계속해서, 언제든지, 분위기가 조성되면 내란 상태에 빠지기 십상입니다. 보수 세력은 대개 친일 세력이고 자신들의 과오를 덮기 위하여 분단국가 현실을 이용합니다. 그래서 자신들을 공격하는 사람들을 ‘빨갱이’로 몰아세웁니다. 이것이 대한민국이 가진 구조적 모순이고 아픔입니다. 

    여호와의 날이 임하는 것을 너무 두려워할 필요 없습니다. 여호와의 날은 파멸을 위한 것이 아니라 구원을 위한 것입니다. 심판은 깨끗케 하여 구원하기 위함이지 괴롭혀 파멸에 이르게 하기 위함이 아닙니다. 더 춥고, 더 어두운 날이 임할지라도,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서로를 더 신뢰하고 믿고 의지한다면, 서로에게 좀 더 따뜻한 존재가 되어 준다면, 우리는 얼마든지 춥고 어두운 날을 견디며 이겨낼 수 있습니다. 우리 서로에게 미소를 더 자주 띄워 주어요. 우리 서로의 손을 더 자주 따스하게 잡아 보아요. 우리 서로의 어깨를 더 자주 두드리며 격려해 보아요. 


    여호와의 날이 오기전에(스바냐 1:7-13)

    스바냐 선지자는 그 기원이 왕족입니다. “아몬의 아들 유다 왕 요시아의 시대에 스바냐에게 임한 여호와의 말씀이라 스바냐는 히스기야의 현손이요 아마랴의 증손이요 그다랴의 손자요 구시의 아들이었더라” (습 1:1). 손자가 여러 명 있는데 현손은 몇 대손입니까? 손자가 자녀를 낳으면 증손자이고 증손자가 자녀를 낳으면 고손자이고 고손자가 아들 낳으면 현손자입니다. 즉, 현손은 4대손입니다. 

    스바냐 선지자는 히스기야의 4대손인 것입니다. 히스기야는 선한 왕이었는데 족보가 두 종류로 갈라집니다. 히스기야의 후손 가운데 왕이 된 사람과 왕이 되지 않은 사람으로 구별되는데 왕이 된 사람들의 족보는 악한 왕이었던 히스기야의 아들 므낫세, 아몬 그리고 선한 왕 요시야입니다. 그리고 왕이 되지 않은 족보는 아마랴, 그다랴, 구시, 스바냐인 것입니다. 

    스바냐의 의미는 ‘여호와께서 숨겨 놓으신 자’입니다. 그는 왕족이었기 때문에 예루살렘의 지리에 익숙했습니다. 스바냐 1장 10절에 보면 그는 어문, 제이구역, 작은 산 등 정확한 지명을 잘 알고 있습니다. 또 스바냐 1장 8절을 보니까 이방의 의복을 입은 자가 누구인지도 잘 알고 있고 귀족들과 양반들과 관리들의 의복 규정도 잘 알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스바냐가 활동한 시대의 왕은 스바냐 1장 1절에 정확하게 나타나있습니다. 유다 왕 요시야는 유다 역사 최후의 종교 개혁가였고 구약시대의 칼빈과 같은 사람이었습니다. 8살에 왕이 되어서 31년을 통치하다가 39살에 죽었습니다. 어려서부터 그는 여호와 앞에 정직한 왕이었습니다. 그는 20살에 시작하여 6년 동안 우상을 타파했습니다. 그리고 26살에 성전을 수리했습니다. 

    요시야 왕이 성전을 수리하다 모세의 율법책을 발견했습니다. 그것은 아마도 신명기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요시야 왕은 신명기를 읽다가 우리가 하나님 앞에 언약을 어겨서 어려움이 초래되었다는 것을 깨닫고 베옷을 입고 온 백성들과 함께 회개하였습니다. 그 이후 요시야 왕은 유다 역사상 가장 크고 성대한 유월절을 지켰습니다. 요시야 왕의 종교개혁은 네 가지 요소가 있습니다. 첫째, 우상타파 둘째, 성전 수리 셋째, 언약갱신 넷째, 유월절 준수입니다. 이 네 가지가 요시야 왕 31년 통치의 특징입니다. 

      그런데 스바냐 1장의 내용을 보게 되면 유다 백성들은 스바냐가 예언할 당시 세 가지 종류의 우상숭배에 빠져있었음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내가 유다와 예루살렘 모든 거민 위에 손을 펴서 바알의 남아 있는 것을 그곳에서 멸절하며 그마림이란 이름과 및 그 제사장들을 아울러 멸절하며 무릇 지붕에서 하늘의 일월성신에게 경배하는 자와 경배하며 여호와께 맹세하면서 말감을 가리켜 맹세하는 자와” (습 1:4-5). 

    첫째, 그들은 바알을 숭배하였는데 바알은 아세라 목상과 함께 음란한 제사를 드림으로 농업의 번성을 추구하던 종교였습니다. 

    둘째, 스바냐 1장 5절 전반부에 하늘의 일월성신을 섬겼다고 나와있습니다. 해, 달, 별 등 천체를 숭배한 것입니다. 신명기 4장 19절을 보면 하나님께서 천체를 숭배하는 것을 엄격하게 금지하셨습니다. “또 두렵건대 네가 하늘을 향하여 눈을 들어 일월 성신 하늘 위의 군중 곧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천하 만민을 위하여 분정하신 것을 보고 미혹하여 그것에 경배하며 섬길까 하노라” (신 4:19). 하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은 천체를 숭배한 것입니다. 

    셋째, 스바냐 1장 5절 후반부에 보면 말감이라고도 하고 밀곰이라고도 하는 신을 섬겼습니다. 솔로몬 왕 시대에 암몬에서 들어온 첩들이 말감이라는 신을 갖고 들어와 유다 백성들을 미혹했습니다. 이 우상숭배를 위해 그마림이라고 불리는 돌팔이 제사장들도 있었습니다. 원래 유다의 제사장들은 레위지파 가운데 아론의 후손들만 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마림은 그런 합법성이 없는 불법적인 제사장들이었던 것입니다. 

    요시야 왕이 20살 되던 해부터 우상타파를 시작했기 때문에 스바냐 선지자는 그 이전에 하나님으로부터 메시지를 받아 증거했다고 보는 것이 합당합니다. 스바냐 선지자가 증거한 메시지로 인해 요시야 왕은 자극을 받고 종교개혁과 우상타파를 시작했던 것입니다. 스바냐 선지자가 증거한 메시지의 핵심단어는 ‘여호와의 날’입니다. 하나님께서 유다 백성들을 우상숭배로 인해 심판하실 날이 여호와의 날입니다. 

    “여호와의 큰 날이 가깝도다 가깝고도 심히 빠르도다 여호와의 날의 소리로다 용사가 거기서 심히 애곡하는도다 그 날은 분노의 날이요 환난과 고통의 날이요 황무와 패괴의 날이요 캄캄하고 어두운 날이요 구름과 흑암의 날이요” (습 1:14-15). 

    여호와의 날은 하나님께서 분노하시는 날입니다. 그날은 사람들에게 환란과 고통의 날이 될 것입니다. 스바냐 선지자가 예언한 여호와의 날은 그가 예언한지 불과 40여년 만에 바벨론 왕 느브갓네살에 의해 실현되었습니다. B.C. 587년 예루살렘이 완전히 멸망한 것입니다. 

      하지만 여호와의 날은 이같이 역사적인 실현으로 그치지 않습니다. 만약 여호와의 날이 옛날 유다왕국이 바벨론에게 멸망하는 것만 의미한다면 지금 우리와 무슨 상관이 있겠습니까? 여호와의 날은 구약성경과 신약성경에 항상 종말론적인 의미로 사용되었습니다. 1차적인 의미는 역사 속에서 실현되지만 2차적인 의미는 예수 그리스도가 재림하실 때 이뤄질 온 인류에 대한 최후 심판의 날을 가리키는 것으로 사용된 것입니다. 

    “이는 정하신 사람으로 하여금 천하를 공의로 심판할 날을 작정하시고 이에 저를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것으로 모든 사람에게 믿을 만한 증거를 주셨음이니라 하니라” (행 17:31). 

    공의로 심판할 날을 하나님께서 정해놓으시고 심판주가 되실 예수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셨다는 것입니다. 심판할 때 예수님께서 공의를 기준으로 심판하신다는 이야기입니다. 인간의 심판은 가끔 공의롭지 못한 경우가 있습니다. 권력에 따라 재판의 결과가 바뀌는 경우도 있고 누구의 죄가 크냐는 것보다 누구의 변호사가 더 실력이 좋으냐가 재판의 결과를 결정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모든 재판이 그렇지는 않지만 이처럼 공의롭지 못한 경우도 있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리스도의 심판은 완전한 공의를 따라 심판하십니다. 지나간 유다 역사에 실현된 여호와의 날은 우리와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하지만 앞으로 다가올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으로 말미암아 실현될 여호와의 날은 모든 사람에게 상관이 있는 것입니다. 

    Ⅰ. 여호와의 날은 하나님의 공의가 100% 만족되는 날이다 

    스바냐 1장은 여호와의 날에 대해 세 가지 중요한 진리를 증거하고 있습니다. 첫째, 여호와의 날은 하나님의 공의가 100% 만족되는 날입니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징역 10년에 해당되는 죄를 지었다면 10년 동안 감옥에 있다 나오면 공의가 만족된 것입니다. 이렇게 형량을 채우고 나면 똑같은 죄목으로 다시 감옥에 집어넣을 수 없습니다. 하지만 10년 징역 선고를 받아야 할 자가 판사에게 뇌물을 줘서 무죄로 나왔거나 형량이 줄어들었다면 그것은 공의가 100% 만족된 것이 아닙니다. 

    성경에서는 아무리 억울해도 개인적으로 복수하지 말라고 합니다. 억울한 일이 있으면 국가가 그 사람을 공의롭게 재판해줘야 하는데 그렇지 못한 경우가 있기 때문에 결국 개인적인 복수가 성행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여호와의 날은 하나님의 공이가 100% 만족될 것입니다. 

      둘째, 여호와의 날은 ‘희생의 날’입니다. “주 여호와 앞에서 잠잠할지어다 이는 여호와의 날이 가까웠으므로 여호와가 희생을 준비하고 그 청할 자를 구별하였음이니라 여호와의 희생의 날에 내가 방백들과 왕자들과 이방의 의복을 입은 자들을 벌할 것이며” (습 1:7-8). 

    희생이라는 단어가 심판과 관련되어 사용된 유일한 말씀입니다. 창세기를 보면 가인과 아벨이 하나님께 제사를 드림으로 희생제사가 시작됩니다. 범죄한 인간이 하나님께 나아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희생제사가 있어야 됩니다.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의 종류가 여러 가지인데 모세가 레위기에 번제, 소제, 화목제, 속죄제, 속건죄 다섯 가지로 법제화하였습니다. 그런데 이같은 희생제사는 두 가지 특징이 있습니다. 

    첫째,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라는 특징입니다. 옛날 오리겐이라는 사람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희생당한 것이 마귀에게 죗값을 갚으려고 한 것이라는 엉터리 이론을 내놓았습니다. 희생제사는 마귀에게 드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드리는 것입니다. 

    둘째, 하나님께서 만족하셔야 열납된다는 특징입니다. 가인과 아벨이 제사를 드렸지만 하나님께서 가인의 제사는 열납하지 않으시고 아벨의 제사만 열납하셨습니다. 결국 제사는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고 하나님께서 만족하셔야 그 제사를 드리는 목적이 실현됩니다. 

    구약의 모든 희생제사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희생을 가리키는 예표입니다. 희생제사는 모형이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희생을 당하고 죽으시는 것이 실체라는 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성부 하나님께서 영원 전에 택하신 자들의 죄를 한 몸에 지시고 십자가에서 희생 제사를 드리신 것입니다. 이번 주는 고난주간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피 흘리신 이유는 성부 하나님께서 택하신 자들을 위해 희생제사를 드리신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그 제사를 받으시고 만족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희생으로 하나님의 공의가 만족된 것입니다. 성부 하나님께서 영원 전에 택하시고, 성자 예수님께서 택한 자들을 위해 공의를 만족시키시고, 성령님께서는 택자를 부르시고 그리스도 예수를 구주로 믿게 하시며 거듭나게 하사 죄 사함과 구원을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여호와의 날에 희생은 무슨 의미가 있느냐? 앞으로 다가올 여호와의 날에도 하나님의 공의가 만족된다는데 그날은 누구를 향한 하나님의 공의가 만족된다는 말이냐? 그것은 불신자들에 대한 하나님의 공의가 만족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택함을 받지 못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으며 우상을 숭배하는 사람들에 대한 하나님의 공의가 만족됩니다. 유다 백성들은 하나님을 거역하고 우상숭배에 빠졌습니다. 

    결국 하나님께서 유다 백성들에게 70년 포로생활을 해야 공의가 만족되겠다고 하셨습니다. 유다 백성들은 70년 포로생활을 함으로 하나님의 공의가 만족되었지만 최후 심판의 날 하나님을 거역한 불신자들은 영원한 형벌을 받아야 하나님의 공의가 만족됩니다. 스바냐 1장 14절에 70년 포로생활에도 용사가 심히 애곡했다고 나옵니다. 그런데 요한계시록 1장 7절을 보면 땅의 모든 족속이 재림하시는 그리스도를 보고 절망으로 애곡합니다. “볼지어다 구름을 타고 오시리라 각인의 눈이 그를 보겠고 그를 찌른 자들도 볼 터이요 땅에 있는 모든 족속이 그를 인하여 애곡하리니 그러하리라 아멘” (계 1:7). 

    요즘 어떤 사람들은 예수님에 ‘개’자를 붙여 욕합니다. 만약 옆집 아저씨에게 ‘개’자를 붙여 욕하면 어떻게 되는지 해보십시오. 아마도 몇 대는 틀림없이 얻어맞을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향해 욕하고 대적하면 몇 대 얻어터지는 것으로 만족이 안 되는 것입니다. “거기는 구더기도 죽지 않고 불도 꺼지지 아니하느니라 사람마다 불로서 소금 치듯함을 받으리라” (막 9:48-49). 

    지옥에서는 죽지도 않습니다. 형벌이 10~20년 만에 끝나는 것이 아니라 영원히 계속 됩니다. 영원히 타는 불에서 영원한 형벌을 받아야 하나님의 공의가 만족된다는 것입니다. 무서운 말씀입니다. 

    Ⅱ. 하나님을 거역한 죄인들은 ‘여호와의 날’에 임할 심판을 피할 수 없다 

    하나님께서 유다 백성들에게 한두 번 말씀하신 것이 아닙니다. 이사야, 예레미야, 미가, 요엘 등 많은 선지자들을 보내어 여호와의 날이 온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하지만 유다 백성들은 선지자를 잡아 죽이고 그들의 경고를 거부했습니다. 선지자를 죽인다고 여호와의 날이 오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B.C. 587년 바벨론 왕 느브갓네살은 여호와의 말씀을 따라 예루살렘를 전멸시켰습니다. 

    이처럼 최후 심판의 날에도 피할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 때에 내가 등불로 예루살렘에 두루 찾아 무릇 찌끼 같이 가라앉아서 심중에 스스로 이르기를 여호와께서는 복도 내리지 아니하시며 화도 내리지 아니하시리라 하는 자를 벌하리니” (습 1:12). 

    ‘하나님은 없다’라고 말하는 자들을 다 찾아내신다는 것입니다. 찌끼같이 가라앉아있고 바퀴벌레같이 숨어있어도 소용없습니다. 여호와의 날에는 아무도 숨을 자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들의 은과 금이 여호와의 분노의 날에 능히 그들을 건지지 못할 것이며 이 온 땅이 여호와의 질투의 불에 삼키우리니 이는 여호와가 이 땅 모든 거민을 멸절하되 놀랍게 멸절할 것임이니라” (습 1:18). 

    여호와의 날에는 불신자들이 멸절됩니다. 완전히 멸절시키는 도구가 베드로후서에 불이라고 했습니다. 노아 홍수 때는 물이었지만 하나님께서 무지개를 보여주시며 다시는 물로 망하지 않게 하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하지만 물보다 더 무서운 불이 남아있는 것입니다. 불로 심판하시는 이유가 무엇이냐? 하나님께서는 질투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너는 다른 신에게 절하지 말라 여호와는 질투라 이름하는 질투의 하나님임이니라” (출 34:14). 

    하나님의 질투는 자신의 배우자가 바람을 피울 때 질투하는 것과 같은 분노입니다. 이것은 은과 금으로 해결되지 않습니다. 도망간다고 해결될 문제도 아닙니다. 반드시 피해자가 요구하는 공의가 만족되어야 해결되는 것입니다. 

    Ⅲ. 죄인들은 ‘여호와의 날’이 오기 전에 할 일이 있다 

    여호와의 날에 대해서 스바냐서는 무슨 이야기를 하느냐? 죄인들은 여호와의 날이 오기 전에 할 일이 있다는 것입니다. “수치를 모르는 백성아 모일지어다 모일지어다 명령이 시행되기 전, 광음이 겨 같이 날아 지나가기 전, 여호와의 진노가 너희에게 임하기 전, 여호와의 분노의 날이 너희에게 이르기 전에 그리할지어다 여호와의 규례를 지키는 세상의 모든 겸손한 자들아 너희는 여호와를 찾으며 공의와 겸손을 구하라 너희가 혹시 여호와의 분노의 날에 숨김을 얻으리라” (습 2:1-3). 

    스바냐 2장 1~3절은 중요한 핵심 메시지입니다. 2절에서 가장 많이 나오는 단어는 ‘전’이입니다. 시행되기 전, 지나가기 전, 임하기 전, 이르기 전. 

      여호와의 날이 오기 전에 세 가지를 하라는 것입니다. 첫째, 여호와를 찾으라. 하나님 앞에 나와 죄를 고백하고 하나님께서 세우신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라는 말입니다. 여호와를 찾는 것은 예수님을 믿는 것입니다. 둘째, 공의를 찾으라. 히브리어로 ‘쩨다카’는 하나님을 절대적으로 신뢰하고 사는 삶을 의미합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천국에서 받아주실 것을 절대적으로 신뢰하라는 것입니다. 셋째, 겸손을 찾으라. 교만은 하나님이 없이도 자신의 힘으로 살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없이는 1초도 살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목숨을 거둬가시면 바로 죽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겸손이란 한순간도 하나님 없이는 살 수 없다고 고백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결론 

    여호와를 찾고 공의를 찾고 겸손을 찾으면 여호와의 날이 오지 않거나 연기됩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여호와의 날이 오기 전에 회개한다고 해서 여호와의 날이 오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면 어떻게 된다는 말입니까? “너희가 혹시 여호와의 분노의 날에 숨김을 얻으리라” (습 2:3). 

    여호와의 날이 오기 전에 여호와를 찾으면 죄가 아무리 많아도 여호와께서 심판하시는 날 예수 그리스도의 피가 우리를 덮어 심판받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저도 죄가 많은 죄인입니다. 성경에 간음한 여인을 앞에 놓고 사람들이 돌로 쳐서 죽이려고 하자 예수님께서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돌로 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자 돌을 들고 있던 사람들이 모두 도망가 버렸습니다. “기록한 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롬 3:10). 

    우리는 모두 죄인이지만 왜 영원 형벌을 받지 않느냐? 그것은 심판의 날에 하나님께서 우리의 죄를 예수님의 피로 다 덮어주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너무 의로운 척하면 안되겠습니다. 스스로 의롭다고 생각하면 다른 사람들을 정죄하게 되어 있습니다. 어떤 분이 담배를 피다가 부흥회에 참석하여 방언 받고 성령의 불을 받아 담배를 끊게 되었답니다. 그 다음부터 갑자기 담배 피는 사람들과는 신앙생활을 함께 못하겠다고 하면서 담배 피는 사람들을 정죄했다고 합니다. 은혜 받고 의인이 되는 것은 좋은 일지만 그것으로 인해 남을 정죄하거나, 자기는 의롭고 남은 죄인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다 죄인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영원 형벌을 받지 않는 이유는 우리가 잘해서 그런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 희생으로 인해 흘리신 피가 우리 죄를 덮어줬기 때문이고 하나님의 공의가 그리스도 예수의 희생제사로 100% 만족되었기 때문인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우리는 영원한 형벌을 받는 것이 아니라 영원한 축복을 받는 것입니다. 옆에 계신 분과 인사하십시오. “우리는 지옥가기 다 틀렸습니다. 우리는 지옥에 갈 수 없습니다.” 

    하나님 공의가 만족되었기 때문에 우리는 지옥에 갈 수 없습니다. 죄가 있어도 하나님께서 덮어주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께서 숨겨주신 사람이 된 것입니다. 스바냐 선지자의 이름이 바로 ‘하나님께서 숨겨놓으신 자’ 아닙니까? 그러므로 우리는 영적으로 작은 스바냐가 된 것입니다. 

    얼마나 감사합니까? 하나님께서 죄를 다 덮어주시고 우리를 피난처에 숨겨주시며 영원한 형벌이 아니라 영원한 축복을 주십니다. 우리는 이같이 놀라운 복을 받았으므로 우리 가족들 중에 영원한 형벌로 가고 있는 사람들이 있다면 안타까워해야 될 줄로 믿습니다. 계속해서 전도하고 기도를 해야 할 것입니다. 전도하는 사람이 되시고, 하나님께 숨김 받은 사람이 된 것을 평생 감사하며 사시는 성도님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10월 8일 스바냐 1-3장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여호와의 분노의 날(2:2)

    명령이 시행되기 전, 광음이 같이 날아 지나가기 전, 여호와의 진노가 너희에게 임하기 전, 여호와의 분노의 날이 너희에게 이르기 전에 그리할찌어다.
    before the appointed time arrives and that day sweeps on like chaff, before the fierce anger of the LORD comes upon you, before the day of the LORD's wrath comes upon you.

    여호와의 분노의 날(예레미야 12:7-17)

    12:12-13 / 파괴하는 자들이 광야의 모든 벗은 산 위에 이르렀고 여호와의 칼이 땅 이 끝에서 저 끝까지 삼키니 모든 육체가 평안하지 못하도다. 무리가 밀을 심어도 가시를 거두며 수고하여도 소득이 없은즉 그 소산으로 말미암아 스스로 수치를 당하리니 이는 여호와의 분노로 말미암음이니라.

    하나님의 분노로 말미암아 7절에 언급한 말씀처럼 내 집, 내 소유, 내 마음을 모두 던져 버리고 원수에 넘긴다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 속에 하나님의 백성들의 불순종과 우상 숭배에 대한 죄의 깊이가 얼마나 깊었는지를 짐작하게 만듭니다. 파괴하는 자들을 허락하사 그들이 여호와의 칼이 되어 모든 육체가 평안하지 못하다는 말씀이 마음에 다가옵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을 영적인 깊은 병에서 살리시기 위해 고난과 고통을 허락하십니다. 나의 삶 가운데 연단이 오고 어려움이 처할 때, 국가적으로도 민족이 어려운 현실을 맞이할 때에 하나님 앞에 나의 죄를 뒤돌아보아야겠습니다. 육체가 평안을 잃어버리고, 수고하여도 소득을 얻지 못하며, 오히려 그 소산으로 말미암아 수치를 당한다는 것은 하나님 앞에 무엇이 잘못되었는가를 점검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겸손한 마음으로 무릎을 꿇고 순종하지 못한 나의 삶을 뒤돌아보아야겠습니다. 지은 죄를 회개하지 못한 나의 교만한 마음도 주님 앞에 내려놓습니다. 하나님의 나라와 영광을 위해 살아가도록 내 인생길의 방향을 수정해야겠습니다. 그리스도인답게 예비 된 천국을 바라보며 하나님이 바라시는 선한 삶을 살아야겠습니다.


    스바냐 2:1-3   

    1 수치를 모르는 백성아 모일지어다 모일지어다 
    2 명령이 시행되어 날이 겨같이 지나가기 전, 여호와의 진노가 너희에게 내리기 전, 여호와의 분노의 날이 너희에게 이리기 전에 그리할 지어다. 
    3 여호와의 규례를 지키는 세상의 모든 겸손한 자들아 너희는 여호와를 찿으며 공의와 겸손을 구하라 너희가 혹시 여호와의 분노의 날에 숨김을 얻으리라.

    스바냐 선지자는 유다 왕 요시아 시대의 선지자 입니다. 스바냐는 유다의 멸망을 예언 합니다,

    요시아 왕은 선정을 베풀고 여호와 하나님 보시기에 정직하게 행하여 조상 다윗의 길로 걸으며 좌우로 치우치지 않았습니다. 유다와 예루살렘을 정결하게 하고 산당들과 아세라 목상과  우상들을 제거하였습니다. 그러나요시아 왕의 바른 신앙으로도 여호와 하나님의 유다에 대한 진노를 막을 수는 없었습니다. 

    요시아의 할아버지 므낫세가 저지른 커다란 악행으로 인하여 여호와 하나님의 진노가 이미 결정이 되었습니다.  요시아의 바른 신앙으로도 여호와의 진노를 돌이키게 할 수는 없었으며 요시아로 인하여 유다에 대한 형집행 유예를 할 수 있었을 뿐 입니다. 

    스바냐 선지자는 하나님의 진노가 유다에 임할것을 경고합니다. 유다는 불과 50여년 후에 바벨론에 의하여 멸망을 당하게 됩니다.

    여호와의 심판의 날에는 그들의 은과 금이 그들을 능히 건지지 못할것 입니다.

    우리에게도 심판의 날이 임할 것 입니다. 그날이 우리들의 살아 생전일지는 알 수 없으나 우리 모두는 여호와하나님의 앞에 서는 날이 올 것입니다.

    우리들이 세상을 살면서 많은 은과 금을 모았을지라도 그것들이 우리를 능히 건져내지 못할 것 입니다.

    스바냐 선지자가 권면을 합니다.  그날이 우리에게 임하기 전에 아직 시간이 있는 지금 하라는 것 입니다. 여호와를 찿으며 공의와 겸손을 구하라고 합니다.

    여호와의 규례를 지키는 세상의 모든 겸손한 자들아 너희는 여호와를 찿으며 공의와 겸손을 구하라. 너희가 혹시 여호와의 분노의 날에 숨김을 얻으리라.

    분노의 날에 숨겨주시겠다고 하셨는데 왜 혹시라고 하셨을까?

    공의와 겸손에 대한 우리의 기준과 하나님의 기준이 다르기 때문일 것입니다.

    우리의 생각에 나는 공의를 지키고 겸손한 사람이라고 스스로 자평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달리 생각하실 수 있습니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혹시가 아니라 분명히 라고 말씀 하셨을 것 입니다.

    기독교와 교회들이 세상사람들로부터 욕을 먹는 시대입니다. 교회를 다닌다고 안전한 것이 아닙니다. 혹시 해당 안될 수도 있습니다. 우리들의 믿음을 다시 점검하고 아직 시간이 있는 지금 우리의 믿음을 바로 하기에 힘쓰기를 기도합니다.


    여호와의 분노의 날(the fierce anger of the LORD) 

    스바냐 2장 1~3절은 "여호와의 분노의 날"이 이르기 전에, "수치를 모르는 백성"에게 회개하고 하나님을 찾으라 경고하며, 겸손과 공의를 구하라고 촉구합니다. 
    여호와의 진노가 "겨 같이 지나가기 전"에 "모일지어다"라고 하며, 거룩하신 하나님을 추구하는 자들을 위한 "숨김" 즉, 심판에서 피할 수 있는 은혜를 약속합니다.  

    스바냐 2장의 주요 내용
    • 경고와 심판 :
      스바냐 2장은 "수치를 모르는 백성"들에게 하나님이 진노를 내리실 것임을 선포합니다. 
    결론
    스바냐 2장은 하나님이 정하신 "여호와의 분노의 날"이 오기 전에, 백성들이 겸손하고 공의로운 마음으로 하나님을 찾고 회개할 때 구원과 "숨김"을 얻을 수 있음을 강조합니다. 


  • 회개와 초청 :
    하나님은 진노가 임하기 전에 백성들에게 "모일지어다"라고 초청하며 하나님을 찾고 "공의와 겸손을 구하라"고 촉구합니다. 

  • 숨김을 얻으리라 :
    여호와의 규례를 지키고 겸손한 자들은 심판의 날에 하나님께 "숨김"을 얻을 수 있다고 말합니다. 

  • 이웃 국가에 대한 심판 :
    4절 이하에서는 블레셋, 모압, 암몬, 구스, 앗수르 등 이웃 국가들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을 예언합니다. 

  • 성경에서 말하는 "여호와의 날"의 의미

     ‘여호와의 날’(The Day of the LORD)은 성경에서 중요한 종말론적 개념 중 하나로, 하나님의 심판과 구원이 결정적으로 나타나는 날을 의미합니다. 이 개념은 구약과 신약을 관통하며, 주로 세 가지 핵심적인 의미를 가집니다.

    1. 여호와의 날의 특징

    ① 하나님의 심판의 날

    여호와의 날은 주로 하나님의 심판이 임하는 날로 묘사됩니다. 구약에서는 하나님께 불순종한 이스라엘과 이방 민족들에게 심판이 임하는 날로 언급됩니다.

    • 이사야 13:9
      "보라 여호와의 날 곧 진노와 맹렬한 분노의 날이 이르러 땅을 황폐하게 하며 그 중에서 죄인을 멸하리니"
    • 요엘 2:1-2
      "여호와의 날이 이르렀으니 이는 가까웠음이라 곧 어둡고 캄캄한 날이요 짙은 구름이 덮인 날이라"

    이처럼 여호와의 날은 죄악에 대한 하나님의 철저한 심판과 관련이 있습니다.

    ② 하나님의 구원의 날

    그러나 심판만이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에게는 구원의 날이기도 합니다. 하나님을 믿고 순종하는 자들에게는 회복과 영광이 주어지는 날입니다.

    • 요엘 2:32
      "누구든지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니"
    • 스바냐 3:17
      "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너의 가운데 계시니 그는 구원을 베푸실 전능자시라"

    이처럼 여호와의 날은 믿는 자들에게는 새로운 희망과 회복의 날이 됩니다.

    ③ 종말론적 성취: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과 최후의 심판

    신약에서는 여호와의 날이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과 최후의 심판과 관련됩니다.

    • 데살로니가전서 5:2
      "주의 날이 밤에 도둑 같이 이를 줄을 너희 자신이 자세히 알기 때문이라"
    • 베드로후서 3:10
      "그러나 주의 날이 도둑같이 오리니 그 날에는 하늘이 큰 소리로 떠나가고 물질이 뜨거운 불에 풀어지고 땅과 그 중에 있는 모든 일이 드러나리로다"

    여호와의 날은 예수 그리스도가 다시 오셔서 세상을 심판하시고, 하나님의 나라를 완성하는 날을 의미합니다.


    2. 여호와의 날과 종말론적 교훈

    1. 회개와 준비
      • 여호와의 날은 반드시 임하며, 예기치 못한 순간에 올 것이므로 성도는 항상 영적으로 깨어 있어야 합니다.
      • 마태복음 24:44 "이러므로 너희도 준비하고 있으라 생각하지 않은 때에 인자가 오리라"

    2. 하나님의 공의와 자비
      • 하나님은 악을 심판하시지만, 동시에 그의 백성을 보호하시고 구원하십니다.
      • 심판과 구원의 균형을 이해하고, 하나님께 의지해야 합니다.

    3. 새 하늘과 새 땅의 소망
      • 여호와의 날 이후에는 하나님의 완전한 나라가 도래하며, 의로운 자들에게 영원한 생명이 주어집니다.
      • 요한계시록 21:1 "또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보니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이 없어졌고 바다도 다시 있지 않더라"

    결론

    ‘여호와의 날’은 단순한 역사적 사건이 아니라,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최종적인 심판과 구원이 이루어지는 날입니다. 
    이는 성도들에게 두려움이 아니라 소망의 날이며, 하나님 앞에서 늘 깨어 준비하는 삶을 살아야 함을 가르쳐 줍니다. 
    그러므로 지금 우리는 여호와의 날을 대비하여 믿음과 순종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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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바냐(습 1:14-2:3 절)
    여호와의 분노의 날에 숨김을 얻으리라



    오늘 본문은 우리에게 분명히 경고합니다. 여호와의 날은 심판의 날이며, 그 날을 피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동시에 하나님은 그 날 앞에서 우리에게 은혜의 길을 열어 주십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 여호와의 날 앞에서 어떻게 살아야 하겠습니까? 본문을 통해 살펴보겠습니다.

    14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14 여호와의 큰 날이 가깝도다 가깝고도 빠르도다 여호와의 날의 소리로다 용사가 거기서 심히 슬피 우는도다

    여호와의 날이 임박하였음을 강조하는 말씀입니다. 스바냐 1장 7절에서도 여호와의 날이 가까이 왔다고 이미 말씀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그것을 더 강조해서, <가까도다> <가깝고도 빠르도다>표현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하반절에 보면 <용사가 거기서 심히 슬피 운다>는 표현을 사용하여 그 날이 얼마나 두렵고 무서운 날인지를 증거한 것입니다.

    용사도 우는 날, 강한 자도 떨며 무너지는 날, 그것이 여호와의 날입니다.


    15절에서는 더 구체적으로 말합니다.

    15 그날은 분노의 날이요 환난과 고통의 날이요 황폐와 패망의 날이요 캄캄하고 어두운 날이요 구름과 흑암의 날이요

    이 말씀은 우리에게 무엇을 보여줍니까? 그날은 고통의 날, 그날은 절망의 날임을 보여주고 있다면 16절은 그날이 전쟁의 날임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16 나팔을 불어 경고하며 견고한 성읍들을 치며 높은 망대를 치는 날이로다

    구약성경에 나팔이 크게 울려펴지는 것은, 안식일이나 희년을 온 백성들에게 선포할 때, 국가적 경사를 백성들에에 알릴 때, 전쟁을 시작할 때 행해졌습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16절에서의 나팔은, 전쟁의 날과 연관되어 있습니다.


    17절도 보겠습니다.. "내가 사람들에게 고난을 내려 맹인 같이 행하게 하리니 이는 그들이 나 여호와께 범죄하였음이라..."

    여기서 “내가 사람들에 고난을 내려..”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물론 17절의 ‘사람들’은 유다 백성들을 가리킵니다.

    내가 예루살렘에 고난을 내려 맹인 같이 하겠다는 의미는, 피할길을 찾지 못해 우왕좌왕하는 맹인의 모습에 비유하는 표현입니다.


    또한 하나님께서 고난을 내리신 이유를, 이어서 명확하게 말씀하고 았습니다. “그들이 나 여호와께 범죄하였음이라” 말씀을 계속 보면

    또 그들의 피는 쏟아져서 티끌 같이 되며 그들의 살은 분토 같이 될지라

    유다 백성의 죄악으로 말미암은 심판의 결말이 얼마나 끔찍하고 처절한 것이 될 것인지를 생생하게 묘사합나디.

    이렇게 비참하고 처참한 지경에 처하게 되는 이유는, 그들이 여호와께 심각한 죄를 저질렀기 때문입니다.


    18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그들의 은과 금이 여호와의 분노의 날에 능히 그들을 건지지 못할 것이며

    여기서 여호와의 분노의 날은, 두 말할 나위 없이, 심판의 날을 가리킵니다. 그런데 그 날에 은과 금이 능히 그들을 건지지 못한다고 말씀합니다.

    이것은 심판의 날, 세상 사람들이 추구하는 재물이 그들의 구원에 있어서 어떤 도움도 주지 못한다는 말씀입니다.

    즉, 심판의 날에 가장 중요한 것은 구원 받느냐, 받지 못하느냐 여부인데, 은과 금이 아무리 많아도 구원을 결정짓는데, 소용이 없다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세상의 힘과 돈과 명예로는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수 없습니다. 여호와의 날은 반드시 임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날을 기억하며 살아야 합니다.

    그 때 우리는, 참된 구원과 생명의 길, 영원한 가치를 가진 하나님의 나라를 구하는 삶을 살 수 있을 것입니다.


    18절 중반절을 보면 이렇게 선언합니다. 온 땅이 여호와의 질투의 불에 삼켜지리니 ...

    즉 여호와의 날은 온 세상을 향한 심판입니다. 모든 인생은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야 합니다.

    이것이 여호와의 날이며, 누구도 예외가 없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러나 사랑의 하나님께서는 심판만 말씀하지 않으십니다. 언제나 은혜의 길을 열어 두십니다.


    2:3 여호와의 규례를 지키는 세상의 모든 겸손한 자들아 너희는 여호와를 찾으며 공의와 겸손을 구하라 너희가 혹시 여호와의 분노의 날에 숨김을 얻으리라

    여호와의 날에, 길은 하나뿐입니다. 겸손히 하나님을 구하는 것입니다. 겸손이란 단순히 착하게 사는 태도가 아닙니다.

    그것은 자신의 죄를 인정하고 하나님의 말씀 앞에 낮아지는 것입니다. 교만을 내려놓고 하나님께 은혜를 구하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여호와의 날은 두려운 날이지만 동시에 은혜의 날이 될 수 있습니다.

    심판이냐, 구원이냐, 그것은 우리가 지금 하나님을 겸손히 찾고 있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여호와의 날은 심판의 날이지만,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에게는 구원의 날입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심판을 대신하여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는 <심판이 아니라 구원을 얻습니다> <진노가 아니라 은혜를 받게 됩니다>

    <멸망이 아니라 생명을 얻게> 될 것입니다. 

    “여호와의 날 앞에서 어떻게 살 것인가?”

    하나님의 은혜를 의지하며 겸손히 주를 찾는 길, 그 길만이 유일한 피난처임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때 우리는 다가올 여호와의 날에 숨김을 얻고, 구원의 은혜를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스바냐 1:14–2:3 묵상

    “여호와의 날, 심판과 숨김의 길”


    1. 서론 – 여호와의 날, 두려움과 소망

    스바냐는 예언자 중에서도 유난히 “여호와의 날”을 강조합니다. “여호와의 큰 날이 가깝도다”라는 경고는 단순히 먼 미래의 사건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 당장 임박한 현실적 사건으로 선포됩니다. 이 날은 분노와 심판의 날이지만 동시에 은혜와 구원의 길이 열려 있는 날이기도 합니다.

    오늘 본문은 크게 두 부분으로 나뉩니다.

    1. 여호와의 날의 무서운 심판 (1:14–18)
    2. 심판 앞에서 공의와 겸손을 구하라는 권면 (2:1–3)

    2. 본문 주해와 묵상

    2.1. 여호와의 큰 날의 임박성 (1:14)

    “여호와의 큰 날이 가깝도다, 가깝고도 빠르도다.”

    여기서 ‘가깝다’(קָרוֹב, qarov)는 단순한 시간적 거리만이 아니라, 피할 수 없는 확실성을 의미합니다. 스바냐는 반복적으로 ‘가깝다’고 강조하며, 심판의 날이 이미 문 앞에 서 있음을 선언합니다.

    또한 그 날은 “용사도 심히 슬피 우는 날”입니다. 즉, 가장 강한 자들도 여호와의 날 앞에서는 무력해집니다.

    오늘의 적용: 우리는 종종 ‘아직 멀었다’고 생각하며 안심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반복해서 하나님의 날을 ‘가까이 있다’고 말합니다. 신자는 늘 긴장된 준비 속에서 살아가야 합니다.


    2.2. 여호와의 날의 성격 (1:15–16)

    “그날은 분노의 날이요 환난과 고통의 날이요…”

    여섯 개의 병렬된 표현(환난, 고통, 황폐, 패망, 캄캄함, 어두움)은 이 날의 파괴적 성격을 강조합니다. 여호와의 날은 하나님의 거룩한 진노가 전면적으로 드러나는 날입니다.

    “나팔을 불어 경고하며 견고한 성읍들을 치는 날”(16절)이라는 표현은 군사적 심판을 나타냅니다. 이스라엘의 자랑이었던 성읍과 망대조차 무너지며, 인간이 의지하던 모든 안전장치가 무력화됩니다.

    오늘의 적용: 우리 시대의 ‘견고한 성읍’은 무엇입니까? 경제력, 군사력, 기술력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여호와의 날 앞에서 인간이 만든 모든 안전은 무너집니다.


    2.3. 범죄의 결과와 인간의 무력함 (1:17)

    “이는 그들이 나 여호와께 범죄하였음이라.”

    여호와의 날의 이유는 단순한 재앙이 아니라, 죄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하나님을 떠나 범죄했고, 그 결과 “맹인 같이 행”하게 됩니다. 영적 시력을 잃은 채, 길을 몰라 헤매는 모습입니다.

    또한 “피는 티끌 같고, 살은 분토 같다”는 표현은 인간 생명의 덧없음과 무가치함을 강조합니다. 아무리 강력해 보여도, 하나님 앞에서는 흙에 불과합니다.

    오늘의 적용: 죄는 인간을 맹인처럼 만듭니다. 방향 감각을 잃고, 결국 파멸로 갑니다. 오늘 우리가 하나님 앞에 죄를 인정하지 않는다면, 우리 역시 같은 운명을 맞게 됩니다.


    2.4. 은과 금의 무능력 (1:18)

    “그들의 은과 금이 여호와의 분노의 날에 능히 그들을 건지지 못할 것이며.”

    부와 재물은 고대에도, 오늘날에도 인간이 붙드는 최후의 안전망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심판 앞에서는 돈이 아무 능력이 없습니다.

    “온 땅이 여호와의 질투의 불에 삼켜지리니”라는 말씀은 하나님의 거룩한 사랑과 질투를 나타냅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영광을 빼앗는 모든 우상을 반드시 심판하십니다.

    오늘의 적용: 돈과 성공이 우리를 안전하게 지켜줄 것이라는 착각을 버려야 합니다. 여호와의 날에는 오직 하나님 자신만이 우리의 피난처입니다.


    2.5. 심판 앞에서의 권면 (2:1–2)

    스바냐는 놀랍게도 심판을 선포한 직후, 회개와 모임을 촉구합니다.

    “수치를 모르는 백성아, 모일지어다 모일지어다.”

    여기서 ‘모이다’(קָשַׁשׁ, qāšash)는 ‘모아 쌓다’라는 뜻으로, 공동체적으로 회개하라는 초청입니다.

    또한 긴급성을 강조합니다.

    • “날이 겨 같이 지나가기 전”
    • “여호와의 진노가 내리기 전”

    오늘의 적용: 회개는 나중이 아니라 지금입니다. 기회는 짧고, 하나님의 날은 갑자기 임합니다.


    2.6. 여호와를 찾고, 공의와 겸손을 구하라 (2:3)

    “여호와의 규례를 지키는 세상의 모든 겸손한 자들아… 여호와를 찾으며 공의와 겸손을 구하라.”

    스바냐는 단순히 “심판을 피하라”고 하지 않고, 구체적으로 겸손과 공의를 구하라고 합니다.

    • 겸손(עֲנָוָה, anawah): 자신을 낮추고 하나님을 의지하는 태도.
    • 공의(מִשְׁפָּט, mishpat): 하나님의 정의로운 질서를 따라 사는 삶.

    이것은 단순한 종교적 행위가 아니라, 삶 전체를 하나님 앞에 돌이키는 태도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사는 자들은 “여호와의 분노의 날에 숨김을 얻으리라.” 여기서 ‘숨김’(סָתַר, sātar)은 피난처를 의미합니다. 즉, 심판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은혜로운 보호가 있다는 약속입니다.

    오늘의 적용: 신자는 심판을 피하려고 도망가는 사람이 아니라, 겸손과 공의를 구하며 하나님 안에서 피난처를 찾는 사람입니다.


    3. 복음적 연결 – 심판에서 구원으로

    스바냐는 심판의 날을 무섭게 선포하지만, 동시에 구원의 길을 열어 둡니다.

    • 여호와의 큰 날은 신약에서 그리스도의 재림의 날과 연결됩니다.
    • 은과 금이 구원하지 못한다는 선언은, 오직 그리스도의 보혈만이 우리를 구원한다는 복음의 진리를 가리킵니다.
    • 겸손과 공의는 단순한 도덕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이 우리에게 주시는 삶의 열매입니다.

    → 궁극적으로 여호와의 분노에서 우리를 숨기시는 분은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십자가에서 그분이 하나님의 분노를 대신 받으셨기에, 우리는 그 안에서 안전하게 숨을 수 있습니다.


    4. 오늘 교회를 위한 교훈

    1. 심판의 날은 가깝다 – 영적 긴장감을 잃지 말라.
    2. 하나님을 범죄한 죄를 직면하라 – 변명하지 말고 인정하라.
    3. 돈과 권력은 구원하지 못한다 – 우리의 안전은 오직 하나님께 있다.
    4. 회개는 지금이다 – 지체하지 말고, 공동체적으로 돌이켜야 한다.
    5. 겸손과 공의의 삶을 추구하라 – 이것이 여호와의 날을 준비하는 길이다.

    5. 결론 – 숨김을 얻는 길

    스바냐 1장 14절–2장 3절은 우리에게 두 가지 그림을 보여줍니다.

    • 심판의 무서운 날: 인간의 모든 안전과 자랑이 무너지는 날.
    • 그러나 동시에 숨김의 길: 하나님을 찾고, 공의와 겸손을 구하는 자는 보호하심을 얻는 길.

    여호와의 날은 피할 수 없는 날입니다. 그러나 그날은 그리스도 안에서 심판에서 구원으로 바뀌는 날이기도 합니다.


    6. 마무리 기도

    “거룩하신 하나님, 여호와의 날이 가깝다는 경고 앞에서 저희의 무관심과 교만을 회개합니다. 은과 금을 의지하지 않고, 오직 주님을 피난처로 삼게 하옵소서. 공의와 겸손을 구하며 살아가게 하시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안에서 숨김을 얻는 은혜를 누리게 하옵소서. 아멘.”


    여호와의 날(스바냐 1:14 ~ 2:3)

    오늘 본문은 여호와의 날에 대한 개관입니다. 그것을 위해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우선은 다가오는 여호와의 날이 어떤 날이 될 것인지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 날은 분노, 환난, 고통의 날이고 황폐와 패망의 날입니다. 다음은, 여호와의 날이 오기 전에 공의와 정의를 구하라는 것입니다. 그러한 사람은 심판의 날에 재앙을 면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징계의 와중에도 구원의 길을 열어 놓는 하나님이십니다. 이른 바 ‘남은 자’ 사상의 기초입니다. 본문은 크게 네 가지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곧 여호와의 큰 날, 환난과 고통의 날, 징계하시는 이유, 구해야 할 공의와 겸손 등입니다.

    ‘그날은 분노의 날이요 환난과 고통의 날이요 황폐와 패망의 날이요 캄캄하고 어두운 날이요 구름과 흑암의 날이요’ - ‘그 날은 주님께서 분노하시는 날로, 환난과 고통을 겪는 날, 무너지고 부서지는 날, 캄캄하고 어두운 날, 먹구름과 어둠이 뒤덮이는 날이다’라는 말입니다. 매우 부정적인 이미지를 나타나는 이 용어들은 여호와의 분노에 대한 상징으로, 땅과 하늘에 있는 자연계가 심판 주로 오시는 여호와의 강림을 도저히 감당할 수 없어서 그렇게 반응한다는 것이지요. 자연계의 현상을 묘사하여 여호와의 날을 설명한 것으로, 곧 닥칠 유다의 심판의 날을 말합니다.

    그들의 은과 금이 여호와의 분노의 날에 능히 그들을 건지지 못할 것이며 이 온 땅이 여호와의 질투의 불에 삼켜지리니...놀랍게 멸절할 것임이라‘ -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은과 금이 그들을 건질 수 없다." 주님께서 분노하시는 날, 주님의 불같은 질투가 온 땅을 활활 태울 것이다. 땅에 사는 모든 사람을 눈 깜짝할 사이에 없애실 것이다’라는 말입니다. 악인이 의지하는 물질이 심판 날에 어떤 효과가 있는가를 진단하는 말로, 그것들은 여호와의 징계 앞에 무용지물이 될 것이라는 선언입니다. 세상과 물질을 의지하고 살아가는 사람들의 운명에 대한 예고입니다.

    ‘여호와의 규례를 지키는 세상의 모든 겸손한 자들아 너희는 여호와를 찾으며 공의와 겸손을 구하라 너희가 혹시 여호와의 분노의 날에 숨김을 얻으리라’ - ‘여호와의 명령에 순종하는 세상의 모든 겸손한 자들아, 너희는 여호와를 찾고 의와 겸손을 추구하라. 어쩌면 너희가 여호와께서 분노하시는 날에 형벌을 면할 수도 있을 것이다’라는 말입니다. 이는 유다 백성들에게 선지자가 권면한 것으로, 비록 죄로 말미암아 심판받는 것은 기정사실일지라도, 겸손을 다하여 지금이라도 하나님을 찾으며 올바로 살도록 힘쓰면 행여 화를 피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는 말입니다. 이는 하나님의 자비에 소망을 거는 스바냐의 간절한 바람입니다. 죄를 미워하시는 것이지 사람을 미워하시는 것이 하나님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여호와의 날은 심판의 날입니다. 본문의 여호와의 날은 예루살렘 심판의 날이라고 할 수 있고, 이 시대 여호와의 날은 마지막 종말의 날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날은 반드시 옵니다. 모든 것이 시작과 끝이 있듯이, 이 세상도 끝날이 있는데 바로 그날을 말합니다. 애석하게도 그날을 우리는 모릅니다. 우리 주님도 그날을 알 수 없고 오직 하나님께서만이 아신다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매일 준비하며 살아야 할 것입니다. 사도 바울에 의하면 그날은 도적같이 이른다고 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것보다 더 시급한 일이 있습니다. 그날이 닥치기 전에 먼저 우리가 하나님의 부름을 받고 갈 수 있다는 점입니다.

    그 때 우리는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설 것입니다. 두렵고 떨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구원의 문제가 아닙니다. 상급의 문제도 아닙니다. 우리가 오해하고 착각하는 것이 있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것이 하나님 앞에 큰 실패로 남을 수 있다는 점입니다. 이사야서에서 있는 것과 같이, 하나님의 생각이 우리 생각과 다르며 그 분의 길이 우리 길과 다를 수 있기 때문입니다. 또 잠언에 있는 것과 같이, 어떤 길은 사람이 보기에 바르나 필경은 사망의 길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때의 당혹함은 그지없을 것이며, 낭패로 인하여 우리 심령이 천길만길 꺼져갈 것 같을 것입니다.

    어떤 곳을 찾으려면 먼저 떠오르는 생각이 있습니다. 그러나 막상 네비를 보면 전혀 다른 길이 있을 수 있습니다. 업그레이드 한 것이라면. 그것이 인도하는 대로 하는 것이 바람직할 것입니다. 우리의 상식과 사고가 보다 객관적이고, 완전하지도 않기 때문입니다. 선지자의 말을 들으면 좋을 것 같습니다. ‘겸손한 자들아 너희는 여호와를 찾으며 공의와 겸손을 구하라’ 여기 이 땅에서 찾아야 합니다. 우리가 살아 있을 때에 오늘 구해야 합니다. 저기 하늘나라에서는 찾을 수 없고, 막상 심판대 앞에서는 구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미 늦은 것이지요. 그렇다면 여호와를 찾고 의와 겸손을 추구하는 것은 우리의 실수에 대한 보험과 같습니다.

    여호와를 찾아야 합니다. 오직 그분의 긍휼을 구해야 합니다. 그분에 대한 공부가 아닙니다. 신학이 아닙니다. 그분입니다. 우리의 실수와 오해를 그리고 착각을 용서해줄 당사자는 오직 여호와 하나님이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아 돌아오라 나의 노한 얼굴을 너희에게로 향하지 아니하리라 나는 긍휼이 있는 자라 노를 한없이 품지 아니하느니라’ - 이 말씀을 믿고, 그분의 얼굴을 구하는 자가 진정 겸손한 자입니다.





    스바냐 서론

    저자와 제목

    (1) 제목

    이 말씀의 창시자는 궁극적으로 하나님(‘여호와’)이었지만, 이 말씀을 유다에 전한 예언적 중재자는 스바냐입니다. 
    이 책의 제목은 스바냐의 이름을 따서 ‘스바냐’라고 명명되었습니다.

    (2) 저자

    ‘스바냐’라는 이름은 ‘여호와가 숨기셨다/보호하셨다’를 뜻입니다. 
    그의 부모의 경건함을 암시할 수도 있습니다. 
    실제로 1:1의 계보는 스바냐가 두 악한 왕이 왕좌에 오르기 전에 경건한 유다의 통치자였던 히스기야의 후손임을 암시할 수도 있습니다.

    저작 연대

    이 예언은 중요한 남유다의 왕인 요시야(BC 640~609년)가 다스리던 시대에 등장합니다. 북이스라엘은 앗수르에 의해 주전 722년에 이미 멸망 당하였습니다. 따라서 “이스라엘”은 북왕국 이스라엘을 가리키지 않습니다. 더 정확히 말해 이런 언급들은 이스라엘 나라의 남은 부분, 즉 남유다와 그 수도 예루살렘을 의미합니다.

    남유다 16대 왕 요시야는 자신의 증조할아버지 히스기야 시대 이래로 폐지되어 버린 하나님이 받으실 만한 예배 의식을 재확립하려 노력한 종교개혁 군주였습니다.

    주제

    다른 어떤 선지자보다도 스바냐가 더 일관되게 선포했던 주제는 “여호와의 날”입니다(1:7 등). 이 다가오는 날은 하나님께 죄를 짓는 이들에 대한 심판의 국면과 하나님을 따르는 이들에 대한 복의 국면이라는 두 가지 국면을 보여줍니다. 하나님은 형벌에 있어서나 자신의 공평하심을 보여주실 것입니다.

    배경, 특징

    (1) 배경

    당시는 악한 왕 아몬의 시대가 끝나고 종교개혁을 이룬 요시야 왕의 통치 초기였다. 그러나 국외적으로 앗수르가 근동 최강국의 위치를 굳혀 유다에 큰 위협이 되고 있었다.

    (2) 특징 

    ⓵ ‘여호와의 날’ 사상 – 여호와의 알의 심판과 구원의 양면적 성격을 자세히 부각시키고 있다.

    ⓶ 건조하고 사실적인 문체 – 수식어를 거의 사용치 않고 운율성을 강조하지 않은 간결하고 사실적인 문제를 채택하고 있다.

    (3) 내용

            ① 하나님은 온 땅과 유다와 유다의 이웃 이방 나라들을 똑같이 심판하실 것이다.

            ② 하나님은 언약을 지키는 분으로서 자기 백성이 하나님과의 언약 관계로 되돌아오면 그들에게 복을 주실 것이다.

            ③ 하나님은 복과 은혜를 모든 민족과 나라에 베풀기를 원하신다.

            ④ 심판과 복은 가까운 미래에 선지자와 선지자의 청중에게 발생하며 또한 먼 미래에도 발생한다.

           ⑤ 2세대 하나님의 자녀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모든 세대는 앞 세대의 믿음에 의존하지 말고 하나님의 언약을 인정해야 한다.

    문예적 특징

    스바냐서는 이른바 ‘소선지서’ 가운데 거의 유일무이하게 축소판 ‘대선지서’처럼 보인다. 스바냐서에는 심판 신탁(1:1~18), 이방에 대한 신탁(2:4~15), 소망의 신탁(3:8~20) (암 2:4 이후의 아모스서와 매우 비슷하게 관심사가 나라 밖에서 나라 안으로 바뀌는) 2:1~3과 3:1~7은 예루살렘에 예리하게 적용되는 ‘전환적’ 신탁의 역할을 한다.

    스바냐서의 문예적 의도는 다음과 같다. 즉, 다가오는 여호와의 날이라는 모티프를 통해 죄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을 묘사하는 것, 다가올 심판을 그림처럼 생생하게 묘사하는데 시라는 방편을 사용하는 것, 회개를 불러일으킬 목적으로 다가올 심판에 대한 두려움을 불러일으키는 것, 하나님의 복의 가능성을 하나님의 은총의 회복에 대한 마지막 신탁의 형태로 표현하는 것, 지위와 재물이 있는 이들을 고발하는 동시에 백성들과 동질감을 느끼고 가난한 이들에 대해 관심을 보이는 것이다(특히 습 2:3. 이 둘은 3:11~13에 압축되어 있다).

    스바냐 개요

    1. 심판의 예언(1:1-3:8)

        (1) 유다의 심판(1장)

        (2) 열방의 심판(2장)

            ① 서론(1-3)

            ② 블레셋의 심판(4-7)

            ③ 모압과 암몬의 심판(8-11)

            ④ 구스의 심판(12)

            ⑤ 앗수르의 심판(13-15)

    (3) 예루살렘의 심판(3:1-8)

    2. 구원의 예언(3:9-20)

            (1) 이방인의 구원(9-10)

            (2) 이스라엘의 구원(11-20)





    스바냐서 개관

    스바냐(צְפַנְיָה, 츠파냐)라는 이름은 “여호와께서 숨기셨다/감추어 보존하신다”는 뜻이란다. 이름만 들어도 이 책의 심장이 들리지? 배경은 요시야 왕 시대 초입, 개혁의 불씨가 막 피어오르기 전이었단다. 겉으론 성전이 있고 제사가 있었지만, 마음은 우상과 안일에 젖어 있었지. 그때 하나님은 한 선지자를 세워 엄중한 말과 다정한 위로를 함께 전하게 하셨어. 스바냐의 메시지는 처음엔 폭풍 같지만, 끝자락은 꼭 품처럼 따뜻하단다.


    스바냐는 하박국 예레미야와 함께 동시대를 살았던 사역자였다. 스바냐(츠파냐후)라는 뜻은 ‘여호와는 숨겨주신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히스기야의 현손, 즉 왕족이었던 스바냐는 우주적인 심판을 예언하였다. 스바냐서는 성경에서 제일 무서운 책이기 때문에 설교하시는 분이 거의 없다.

    스바냐의 예언은 먼저 예루살렘에 대한 심판선언에서 시작되어 점차 이스라엘 주변 나라들에 대한 심판선언으로 이어지고 있다. 스바냐는 여호와께서 생명 있는 모든 것을 진멸하고 멸절하실 날이 온다고 했다. 그때에 하나님은 모이기를 힘쓰는 자, 여호와의 규례를 지키는 자, 세상의 모든 겸손한 자, 여호와를 찾는 자, 겸손과 공의를 구하는 자를 숨겨주신다고 말씀하셨다.


    폭풍에서 품으로, 스바냐의 흐름

    1장–2장 초반: 여호와의 날, 가짜를 쓸어내는 바람
    책은 낯설도록 단호하게 시작해. “지면에서 모든 것을 진멸하리라.” 이 말은 멸망의 선언이 아니라, 가짜를 허물어 진짜를 남기려는 하나님의 정화(淨化)야. 스바냐는 예루살렘 골목을 돌며 말하지. “향이 아무리 진해도, 마음이 우상을 향하면 주께서 아신다.” 그러고는 속삭여. “땅의 겸손한 자들아, 여호와를 찾고 공의와 겸손을 구하라. 혹 그 분노의 날에 숨김을 얻으리라.” (2:3) 여호와의 날은 도망칠 날이 아니라 숨을 날이란다—그분의 품에.


    ◈ 진멸

    •하나님의 날에 모든 것을 진멸하실 것이라고 말씀하시다.

    •유다와 예루살렘과 우상을 섬기는 자들을 주께서 진멸하겠다고 말씀하시다.

    •하나님께 죄지은 자들에 대한 심판의 날이 다가오고 있다.


    2장 후반: 둘러싼 나라들, 모두 주의 법정에
    불레셋, 모압과 암몬, 구스, 그리고 니느웨(앗수르)까지—하나님은 이웃 민족도 당신의 법정으로 부르신다. “이스라엘만의 하나님”이 아니라 열방의 주이시기 때문이야. 교만은 민족을 막론하고 무너지고, 겸손은 국경을 넘어 살려내지.


    ◈ 주변국에 대한 진멸

    •하나님의 규례를 지키는 겸손한 사람들은 모일지어다.

    •이스라엘의 주변 국가들도 하나님의 벌을 받을 것이다.


    3장: 예루살렘의 완고함과 하나님의 완강한 사랑
    초반(3:1–7)은 예루살렘의 고집을 눈물로 고발해. 재판관은 늑대처럼, 제사장은 거룩을 더럽히고, 선지자는 경솔하단다. 그런데 3:8을 지나면, 하늘의 톤이 바뀌어. 하나님이 입술을 정결케 하여 모든 민족이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며” 그분께 나아오게 하시겠대(3:9). 그리고 마침내, 스바냐의 가장 고운 구절에 도착하지.
    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너의 가운데 계시니… 그가 너로 인하여 기쁨을 이기지 못하시며, 잠잠히 사랑하시며, 즐거이 부르며 기뻐하시리라.”(3:17)
    심판의 폭풍은 지나가고, 남은 자—상한 자, 밀려난 자—를 모아 노래하시는 하나님이 서 계시단다(3:19–20).


    ◈ 죄와 구원

    •예루살렘 성이 죄악이 있어서 주의 분노가 있을 것이다.

    •하나님의 겸손한 백성을 위해 주께서 새날을 준비하실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을 다시 모을 때 그들이 하나님을 찬송하게 할 것이다.



    1. 표제
     다른 소선지서들과 마찬가지로 스바냐서도 단순히 그 저자의 이름을 따서 불리워진다. 히브리어로 스바냐(Sephanyah)는 “여호와께서 숨기셨다”, 혹은 “여호와께서 간수하셨다”라는 뜻이다. 구약에는 같은 이름을 가진 몇 사람이 있다(대상 6:36; 렘 21:1; 슥 6:10, 14).
     2. 저자
     우리는 스바냐가 자기 책에서 자기에 대해 말한 것 이외에는 이 선지자에 대하여 아무것도 모른다. 습 1:1에 의하면 그는 유명한 가문의 출신인 것이 확실한 것같다. 그가 그의 조상을 히스기야까지 거슬러 올라가서 밝힌 사실은 그 이름을 가졌던 유다의 왕에 관하여 언급하려고 했던 것으로 보이며 그것은 그가 왕족의 혈통임을 의미하는 것이다.

     3. 역사적 배경
     선지자는 자기가 예언한 시기(습 1:1)가 유다왕 요시야의 시대라고 알려준다(B.C. 640-609). 스바냐가 B.C. 612년에 있었던 니느웨의 멸망을 예언하고 있으므로(습 2:13) 아마도 그는 요시아 통치 초기에 예언한 것으로 보인다. 그는 아마도 하박국과 동시대 사람인 것같다.

     4. 주제
     스바냐서는 요엘서와 마찬가지로 “여호와의 날”에 촛점을 맞추고 있다. 이 표현에 대한 의미는 사 2:12에 나와 있다. 선지자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올 임박한 심판을 드러낼 뿐만 아니라 다른 민족들에게 임할 징벌도 경고하고 있다. 그러나 스바냐가 그의 가혹한 심판들을 말하며 경고하는 것은 단지 백성들이 회개하며 “공의와 겸손을 구하”(습 2:3)여 심판을 면하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5. 개요
    Ⅰ. 유다의 죄 때문에 받게 될 심판 1:1-18
         1. 표제 1:1
         2. 심판의 엄격함과 범위 1:2-18


    Ⅱ. 은혜의 시기 동안에 여호와를 찾으라는 호소 2:1-3

    Ⅲ. 여러 민족들에 대한 심판들 2:4-15
         1. 블레셋 2:4-7
         2. 모압과 암몬 2:8-11
         3. 구스 2:12
         4. 앗수르 2:13-15

    Ⅳ. 예루살렘이 죄 때문에 견책받음 3:1-7

    Ⅴ. 모든 민족들이 받게 될 심판 3:8

    Ⅵ. 회복의 약속들 3:9-20


    숨겨 주시는 하나님, 숨는 법을 배우는 우리

    스바냐서는 우리에게 숨는 법을 가르쳐 준단다. 세상의 안전지대가 아니라, 하나님 자신에게 숨는 법 말이야. 교만은 크고 화려함에 숨으려 하고, 겸손은 하나님 품에 숨는다. 여호와의 날은 두렵지만, 그분의 품에 숨는 자에게는 피난처가 된다. 하나님은 심판으로 가짜를 걷어 내시고, 사랑으로 진짜를 지켜 내신다. 그러니 오늘도 조용히 이렇게 기도하렴.
    “주님, 제 이름이 사람 앞에 빛나기보다, 주의 마음에 숨겨지게 하소서.”

    그래서 스바냐서는

    여호와의 날의 엄중함 속에 숨겨 주시는 은혜를 드러내어, 교만을 허물고 겸손한 자를 품에 숨기시는 하나님을 심판과 노래, 경고와 위로로 함께 증언하는 책이다.

    이러한 스바냐서를 3문장으로 요약하면,

    1. 스바냐서는 여호와의 날에 가짜 신앙을 쓸어내고, 겸손과 공의로 하나님께 숨으라 부른다.
    2. 하나님은 열방과 예루살렘 모두를 심판하시되, 남은 자를 모으고 입술을 정결케 하여 그분의 이름을 부르게 하신다.
    3. 결말은 심판이 아니라 노래—“여호와가 너로 인해 기쁨을 이기지 못하신다”는 선언으로, 숨겨진 자들에게 회복의 춤을 허락하신다.





    스바냐 개론

    [제목]
    본서의 히브리어 성경의 표제는 선지자 '스바냐'의 이름을 따라 붙여진 것으로 '세판냐'이며 그 이름의 뜻은 '여호와에 의해 감추어 졌다'이다. 70인역(Lxx)에서는 '소포니아스'라 하였다.

    [저자]
    본서의 저자에 대해서는 1:1에 분명히 명시하고 있는데, 저자는 자신을 특별히 히스기야의 현손(손자의 손자)이라고 밝히고 있다. 이로 보건대 스바냐는 신실한 왕 히스기야의 왕통을 이은 유일한 선지자이다. 그는 이러한 이유로 요시아 왕의 궁전에 자유롭게 출입했으며 국내사정은 물론 국제 사회에 대해서도 비교적 식견이 넓었을 것이다.

    [기록연대]
    본 서의 저자인 스바냐가 어느 시대에 예언을 하였는가를 밝히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왜냐하면, 예언의 시기를 결정할 만한 내적 증거가 습1:4~6에만 나타나 있기 때문이다. 단지 여기에서는 므낫세 왕때 유행했던 이방신에 대한 제사와 바알 숭배가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요시야 왕의 종교 개혁 운동은 주전 621년부터 시작되었다. 그러므로 문제는 예언의 시기가 요시야의 종교 개혁 시대 이전이냐 이후이냐가 초점이 된다. 우상 숭배에 대한 책망이 기록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요시야 왕의 종교 개혁 (B.C.622년) 이전에 기록된 것으로 보인다. 결론적으로 본 서의 기록 연대는 요시야의 종교 개혁이 일어나기 전인 주전 640~622년경으로 추측할 수 있다.

    [배경]
    므낫세와 암몬의 사악한 통치가 끝나고 요시아 왕이 즉위했으나 근 50년 가량 만연해 있던 배교의 상황에는 어떤 도전도 일어나지 않고 있었다. 이러한 시기에 스바냐는 하나님의 심판이 임박했음을 그의 나라 백성들에게는 물론, 인근 나라 백성들을 향해서도 강력히 경고하기 시작했다. 그 한 예로 B.C. 722년의 앗수르의 멸망은 하나님의 전능과 공의를 상기시키는 엄숙한 사건이었다.

    [특징]
    본서는 유다와 그 주변 열국들에게 임박한 심판을 경고하고 그들의 회개를 촉구하기 위해 기록되었다. 하나님은 그의 백성들을 무한히 사랑하시되 심지어 질투하기까지 사랑하신다. 하지만 그들이 죄를 지을 때 하나님은 참으실 수 없으시다. 따라서 하나님이 그들에게 심판을 집행하시는데 이것 또한 그의 사랑의 발로이다.

    [목적]
    본 서의 기록 목적은 요엘이나 아모스와 같이 여호와의 날을 선포하기 위한 것이다. 본 서에 나오는 '여호와의 날'은 심판의 날을 상징한다. 일반 민중들은 여호와의 날을 선민으로서의 구원이라는 관념에서 생각하고 있으나 선지자들의 이날에 대한 관념은 두려운 심판의 날로 생각하고 있다. 또한 본 서는 여호와의 날에 구원받을 남은 자(습3:13)들의 영광을 노래하기 위하여 기록하였다. 여호와의 날은 심판의 날로 다가오나 그 처절한 심판 속에서 구원의 희망을 간직한 자들인 남은 자들의 모습도 등장한다.

    [구조]
    스바냐는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누어지는데 주의 날에 있을 심판(1장~3:8)과 주의 날에 있을 구원(3:9~20)이다. 전자는 진노의 날이고 후자는 기쁨의 날이다. 여기서 말하는 여호와의 날이란 궁극적으로는 신약에서 가르쳐 주는 최후 심판의 날과 동일한다. 그러나 다른 점은 신약의 최후 심판이 그리스도의 재림에 뒤이은 최종적 심판 그 자체만을 말하고 있는데 반해서 여호와의 날은 이스라엘 민족의 멸망이나 회복 등과 같은 역사적인 사건과 동시에 최종적인 심판을 한꺼번에 함축하고 있다는 점이다. 실로 여호와의 날은 심판과 구원의 양면성을 갖고 있다. 이는 하나님께서는 공의와 사랑의 양면을 갖고 계시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는 이 짧은 본서의 말씀을 읽고 들을 때마다 그 여호와의 날에 나의 모습은 과연 어떠할지 다시 한번 돌아보아야 하겠다.

    [내용]
    모든 세대에 있어서 오직 소수의 비교적 신실한 사람들만이 하나님을 따릅니다. 그렇지만 몇몇은 항상 믿음의 선에서 살아 있다. 유다가 바벨론 포로가 되기 직전에 스바냐는 남은 자들이 구속받을 것이라고 격려했다. 비록 하나님이 주시는 비와 햇빛이 선한 것과 악한 것에 똑같이 떨어지지만 하나님의 눈은 언제나 진실한 믿음의 사람들에게 향하여 있다. 비록 유다가 곧 심판받게 되었지만 그들 중 남은 자들은 언젠가 돌아올 것이었다. 스바냐의 말(습3:17)은 70년간의 포로 생활 기간 중 계속 외쳐졌을 것이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여전히 하나님을 인정했다. 하나님은 여전히 전능하셨다. 하나님은 때가 이르러서 하나님의 백성에 대한 사랑을 확고히 하셨다. 실제로 하나님께서는 여전히 하나님의 백성을 기뻐하셨다.

    [교훈]
    * 역사적인 교훈:본서는 유다와 열방에게 그들의 죄 때문에 닥칠 임박한 환난에 관하여 경고하고, 그들에게 회개할 것을 촉구하기 위하여 기록되었다.
    * 교리적인 교훈:본서는 하나님은 자기의 거룩하심을 나타내시기를 원하시며 따라서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심판하시는 것은 정당하다는 것을 가르치고 있다. 한편 심판의 목적은 정화적인 차원이며 하나님께서는 그 백성에게 자비와 용서를 베푸신다는 사실을 깨닫게 해 준다.
    * 기독론적인 교훈:본서에서 그리스도는 이스라엘 안에 거하시는 의로우신 주님으로(3:5), 열국을 대항하는 증인으로(3:8) 이스라엘의 '왕과 주'(3:15)로 나타나 있다.



    ·저 자 : 스바냐(하나님이 보호하심/여호와께서 숨기시다)

    ·기록한 때 : 주전 630년경

    ·내 용 : 이스라엘로 하여금 회개하고 은혜받기 위함

    ·제 목 : 네 손을 늘어 뜨리지 말라(3:16).

    1. 본서의 대지

    1) 여호와의 날의 형벌 ------------------------------------------------- 1장/2장

    2) 이스라엘의 장래 ---------------------------------------------------- 3장

    2. 본서의 대략적인 줄거리

    스바냐는 유다왕 히스기야의 5대 손자요 요시야의 혈통인 왕족이었다(1:1). 그는 왕족 으로 귀족들의 죄를 책망하였다. 그는 요시아 왕 집정시 예언하기 시작했다(이때는 나훔

    이 예언하지 50년 경과 후 였다/요시야는 스바냐가 원동력이 되어 대변혁을 일으켰다/

    대하34장 참조).

    그는 주변 국가들의 멸망을 예언했고(블레셋/모압/암몬/에디오피아) 당시 최강국인

    앗수르의 멸망도 예언했다(2:13/B.C 612년/성취되었음).

    특히 죄로인한 유다의 심판을 예언했고 그날은 환난/고통/황폐/폐허의 날이요, 캄캄하

    고 어두운 날로 그 비참함이 심각하게 드러날 것을 예언하다.

    그러나 하나님께 충성된 남은 자는 포로에서 돌아올 것이라 했으며, 이방인들도 회개

    하고 하나님을 믿게 된다는 것, 언젠가는 예루살렘 뿐만 아니라 다른 어느 곳에서도

    하나님 을 예배할 수 있게 된다는 것임(습2:11).

    본서의 특징은 "여호와의 날"이란 말이 7번 나오고 "질투"란 말을 하나님께서 사용하

    셨다.

    3. 스뱌나의 배경과 구성

    (13대) (14대) (15대) (16대) (17대) (18대) (19대) (20대)

    히스기야 →므낫세→ 아 몬→ 요시야→ 여호아하스→ 여호야김→ 여호야긴→ 시드기야

    29년 55년 2년 8세에 왕위에 3개월 11년 3개월 11년

    대하29:1 대하33:1 대하33:21 대하34:1-3 대하36:1 왕하23:36 왕하24:6 왕하24:18

    1장

    2장

    3장

    유다에 대한 진노

    열방에 대한 보복

    남은자의 회복

    오염된 신앙

    교만한 거역

    평화로운 귀환

    리라. 여기저기서 우는 소리가 들리리라.

    14-18절 여호와의 큰 날
    여호와의 큰 날이 가깝다. 용사가 슬피 울 것이다. 그날은 분노의 날이요 환난과 고통의 날이다. 나팔을 불고 견고한 성읍을 치리라. 내가 사람들에게 고난을 맹렬히 내리리라. 은과 금이 여호와의 분노의 날에 건지지 못하리라.


    스바냐 2장 요약

    1-3절 회개하라. 수치를 모르는 백성들은 모이라. 여호와의 날이 이르기 전에 겸손히 여호와를 찾으라.

    4-7절 블레셋 멸하리라. 가사는 버림을 당하고, 아스글론은 폐허가 되며 아스돗은 대낮에 쫓겨나며 에글론을 뽑히리라. 그렛 족속에게 화 있으리라. 그 지경이 유대의 남은 자들에게 돌아가리라.

    9-11절 모압과 암몬에 대한 경고. 모압과 암몬 자손이 이스라엘을 조롱했다. 이제 모압은 소담 같고 암몬 자손은 고모라 같을 것이다. 찔레가 나며 소금 구덩이가 될 것이다. 그들이 여호와의 백성을 훼방하고 교만했음이라.

    12절 구스도 내 칼에 죽으리라.

    13-15절 앗수르에 대한 경고. 여호와가 북쪽을 향하여 손을 펴서 니느웨를 황폐하게하고 사막처럼 마르게 하리라. 적막하고 황폐하여 들짐승이 거하리라.


    스바냐 3장 요약

    1-8절 유다를 심판하리라. 예루살렘의 멸망을 예언하심. 패역하고 더러운 성읍은 화 있으리라. 여호와의 명령을 받지 않고 교훈을 받지 않는다. 너희는 내가 일어나 벌할 때까지 기다리라. 나의 분과 진노를 쏟으려 여러 나라를 소집하라.

    9-20절 남은 자의 회복과 소망. 하지만 그때에 입술이 깨끗하여 나를 섬기는 이들이 있으리라. 그들의 교만을 제하고 곤고하고 가난한 백성들을 남겨 두리라. 시온의 딸은 노래하라. 예루살렘의 딸은 즐거워하라. 시온에 네 손을 늘어뜨리지 마라. 내가 근심하는 자들을 모으리라. 내가 사로잡힌 자들을 돌이키리라. 그때에 너희에게 천하 만민 가운데서 명성과 칭찬을 얻게 하리라.


    스바냐는 어떤 책인가?

    하나님의 그루터기를 희망한 스바냐는 유다의 가장 유명한 왕 중의 한 사람인 히스기야의 증손자입니다. 
    그의 혈관에는 왕의 피가 흐르고 있었으나, 보다 더 중요한 일은 그의 입술에 하나님의 메시지를 담고 전하는 자였습니다.

    • 스바냐서의 선지자

    스바냐는 “여호와의 숨기심”, 또는 “여호와의 보호하심“이란 뜻입니다. 이는 스바냐서의 메시지의 주요 내용으로 하나님께서는 ”심판 날에 겸손한 자를 숨기시고 보호해 주신다“는 것을 말해주는 듯 합니다. 스바냐는 히스기야의 4대 후손이라고 하였는데(1:1), 그렇다면 스바냐 선지자는 요시야의 조카뻘이 됩니다. 그러므로 그는 조카로서 삼촌(요시야)에게 예언 활동을 했으며, 우상 숭배에 대하여 심하게 책망을 하는 것으로 보아 아마도 그가 활동했던 기간은 요시야가 종교 개혁(주전 627년)을 하기 이전이었던 것으로 추정됩니다. 그는 히스기야 이후에 약 60년간이나 계속되었던 영적인 암흑기를 깨트리고 요사야 왕에게 다가가서 하나님의 뜻을 전해주었습니다. ”주의 날은 심판의 날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의지하면 기쁨의 날이 될 것입니다!“ 

    • 스바냐서의 배경

    스바냐는 경건한 왕 요시야가 통치하는 동안에 메시지를 전하였으며 이 때는 신앙의 큰 “부흥“이 일던 시대였습니다(왕하 22-23장). 요시야는 8세에 보좌에 올랐으며 16세에 자신을 여호와께 헌신하였슶다. 20세 때에는 그 땅에 큰 개혁을 시작하였으며 우상을 헐고 거짓 제사장들과 선지자들을 심판하였습니다. 다음으로 그는 성전을 재건하여 그 민족으로 하여금 유월절을 크게 지키도록 인도하였습니다. 외관상으로 나타난 일들로 보아서는 신앙적인 관심과 정화의 시기였습니다.

    그러나 스바냐는 표면보다 더 깊은 곳을 보았습니다. 그는 사람들의 마음을 보았으며, 그들의 신앙적인 열성이 진정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개혁은 얄팍한 것이었으므로, 백성은 가정에서 우상들을 제거하였으나 그들의 마음에 있는 우상들은 제거하지 않았습니다. 그 땅의 지도자들은 여전히 탐욕스럽고 불순종하였으며 예루살렘성은 온갖 사악함의 근원을 이루고 있었습니다.

    • 스바냐서의 개요

    스바냐서의 개관도표

    1) 심판의 날에 대한 예언(1:2-3:8)
    -모든 생물에 대한 심판(1:2-3)
    -유다의 심판과 회개에의 권고(1:4-2:3)
    -이방 열국들에 대한 심판(2:4-15)
    -예루살렘의 범죄를 책망함(3:1-8)

     2) 회복에 대한 약속(3:9-20)
    -열국의 회복(3:9)
    -유다의 회복(3:10-20)

     • 스바냐서의 메시지

    스바냐의 멧세지는 세 부분으로 나눌 수 있는데, 두 부분은 심판을 다루며 한 부분은 자비를 다룹니다.

     1. 하나님은 유다를 심판하실 것이다(1:1-2:3)
    그들의 죄 때문인데 특히 우상 숭배의 죄 때문입니다(4-6절). 이 선지자는 세 종류의 죄인들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즉, 여호와를 버린 사람들과 우상만을 섬기는 사람들(4-5상반절)과, 여호와와 우상을 함께 섬기는 사람들(5하반절), 또한 여호와를 공개적으로 버리고 그와 아무 관계를 맺지 않으려는 사람들(6절)입니다.

    장차 임할 심판은 7-18절에 묘사되어 있습니다. 스바냐는 이 날을 “여호와의 날“이라고 부르는데 이중의 의미가 있습니다. 즉, 지역적으로는 과거에 유다와 이스라엘에 임한 하나님의 심판이며, 또한 예언적으로는 하나님께서 그의 진노를 퍼부으실 장차 임할 심판(계 6-19장 참조)입니다. 이 경우에 있어서 “여호와의 날“은 주전 606년의 바벨론의 침략과 주전 586년의 성읍과 성전의 마지막 멸망이 될 것입니다.

    2장 1-3절에서 스바냐서의 선지자는 예루살렘과 유다를 향하여 백성이 여호와께 돌아와 그들의 죄를 회개할 것을 탄원합니다. “하나님의 심판의 칙령이 통과되기 전에 시간이 아직 있을 때, 여호와를 향하여 자비를 요청하라.“ 그를 만날 만한 때에 그를 찾으라! 그러나 슬프게도 이 민족은 “종교적인“ 것으로 만족하였습니다.

     2. 하나님은 이 나라를 심판하실 것이다(2:4-3:7)
    선지자는 유다 주위에 있는 여러 이방 나라들의 이름을 말하며 그들의 죄들로 인하여 하나님께서 그들을 벌하실 것임을 알립니다. 블레셋(4-7절), 애굽(12절), 앗수르와 그 수도 니느웨는 완전하게 파괴되어 그들의 땅은 황야가 될 것입니다(13-15절).

     스바냐는 자기의 백성에게 다시금 호소함으로 그의 메시지를 끝맺고 있습다(3:1-7). 만일 하나님이 이방인들의 죄를 심판하신다면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인 유다의 죄에 대해서는 얼마나 더욱 심판하실 것인가? 그는 예루살렘이 음란하고 오염되었다고 말합니다. 요시야가 모든 우상들을 제거하였지만 하나님은 그들의 마음을 볼 수 있으시며, 그들의 마음 가운데 있는 반역을 보셨습니다. 이들은 여호와를 믿는 참된 믿음을 가지지 못하였습니다.

    3. 하나님은 그의 백성을 회복시키실 것이다(3:8-20)
    스바냐는 위대한 약속으로 그의 멧세지를 끝맺습니다. 어느 날 하나님은 그의 백성을 다시 모을 것이며 이방 나라들을 벌하실 것이고, 이스라엘과 유다를 자기의 땅으로 회복시키실 것입니다.

    스바냐는 3장 8절은 아마겟돈 전쟁을 예언하는 것이 분명해 보입니다. 이 때는 모든 나라들이 예루살렘에 대항하여 모이게 될 마지막 때입니다(계 19:11-21).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께서 돌아오셔서 이 민족들을 심판하실 것이며 주님의 왕국을 건설하실 것입니다. 그는 흩어진 유대인들을 다시 모을 것이며, 그들의 죄에서 정결케 하실 것이고, 그의 의로운 왕국을 창설하셔서 예루살렘에 있는 다윗의 보좌에 앉으실 것입니다(슥 12-13장 참조).

     • 스바냐서의 남은 자 신앙


    스바냐는 “남은 자들“에 대하여 강조하고 있습니다(2:7/2:9/3:13) 그 당시 하나님에 대한 진실한 믿음을 가진 적은 무리의 믿음의 그루터기가 있었는데 오늘날에도 그와 같이 남은 믿음의 그루터기가 있습니다. 말세에 모든 유대인이 주님을 따르지는 않을 것이지만 남은 신앙인들은 따르게 될 것입니다.

     심판이 지나고 하나님의 진노가 끝이 나면 그는 이 민족을 회복시키실 것이며 그들을 기뻐하실 것입니다. 하나님은 유대인들을 괴롭힌 자들을 괴롭힐 것이며(3:19) 유대인들을 그들의 땅으로 돌려 보내실 것입니다. 물론 이 일은 70년의 포로 생활이 끝난 후에 일어날 것입니다.

    그래서 스바냐는 시온의 딸들을 향하여 하나님께서 그들의 형벌을 제하시고, 원수를 쫓아내시며, 하나님께서 그들 중에 계시므로 두려워하거나 낙심하지 말고 기쁜 노래를 부르라고 권면합니다.

    “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너의 가운데 계시니, 그는 구원을 베푸실 전능자시라. 그가 너로 인하여 기쁨을 이기지 못하시며, 너를 잠잠히 사랑하시며 너로 인하여 즐거이 부르며 기뻐하시리라”(스바냐 3: 14-18).


























    2025 하박국



    하나님까지 잃어버리면

    기독교 방송 드라마에 맹인 목사인 윤인수 목사의 간증 드라마가 방송된 적이 있습니다. 
    중병으로 앓아 누워 있는 어머니를 간병하기 위해 어린 소년 윤인수가 길거리에 나가 신문을 팔고 구두닦기를 시작했습니다.
    친구의 도움을 받긴 했지만 앞을 보지 못하는 윤인수로서는 여간 힘든 일이 아니었습니다. 
    어느 날 윤인수는 열심을 일을 해서 돈을 벌었습니다. 
    기뻐하며 그 돈을 가지고 집으로 돌아와 어머니에게 돈을 내놓았습니다. 
    돈을 받아 든 인수는 버럭 화를 내었습니다. 
    "십일조는 무슨 놈의 십일조인가, 하나님이 우리한테 해준 게 뭐가 있단 말인가, 나의 눈은 멀게 했고 엄마는 병들게 했고 공산당에게 쫓겨 피난민 신세가 되게 했고 재산도 다 빼앗기게 한 그런 하나님께 무슨 놈의 십일조를 내라느냐"며 항변했습니다.

    그러나 그의 병든 어머니는 어린 아들의 손목을 꼬옥 쥔 다음 "인수야 고향 잃어버린 것도 한스럽고 집 잃어버린 것도 원통하고 건강 잃어버린 것도 서러운데 하나님까지 잃어버리고 믿음까지 잃어버리면 뭐가 남겠니"라고 말했습니다.

    이 이야기는 건강한 삶을 살아가면서 하나님을 멀리하고 감사할 줄 모르는 사람들에게, 그리고 지금 당장 하나님께로 돌아와 잃어버린 믿음을 회복하지 않으면 안 될 절박한 상황에 처한 모든 사람들에게 엄청난 교훈과 신선한 충격을 주고 있습니다. 
    하나님께로 돌아올 때 우리 모두는 치료받고 건강한 삶을 누릴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신(信) = 사람 인(亻) + 말씀 언(言)

    믿음이란 하나님의 말씀위에 자기를 세워가는 것이라고 하겠다. 

    믿음 위에 자신을 세우라(유다서 1:20-21)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는 너희의 지극히 거룩한 믿음 위에 자기를 건축하며 성령으로 기도하며.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자기를 지키며 영생에 이르도록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긍휼을 기다리라.

    But you, dear friends, build yourselves up in your most holy faith and pray in the Holy Spirit.
    Keep yourselves in God's love as you wait for the mercy of our Lord Jesus Christ to bring you to eternal life.

    우리 인생을 든든히 세우는 비결은 지극히 거룩한 믿음 위에 자신을 세우는 것이라고 권면합니다. 
    예수님은 반석 위에 집을 지으라고 하셨습니다. 

    신앙생활은 크게 두 부분으로 이루어지는데 하나는 내적으로 나 자신을 만드는 것입니다. 
    즉 말씀을 배워서 그 말씀대로 순종하면서 점점 예수님을 닮아가는 것입니다. 
    또 다른 하나는 외적으로 전도하고 봉사하고 섬기면서 다른 사람을 위해서 일하는 것입니다. 
    이 둘이 조화를 이루면서 둘 다 잘 이루어져야 아름다운 신앙이 됩니다. 
    사도 바울은 전도와 선교에 힘쓰면서 자기를 쳐서 복종시키는 일도 힘썼습니다. 
    자기를 만들지 못하면서 남에게만 말씀을 가르치면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신이 버림을 당할까 봐 두렵다고 했습니다.

    ‘믿음 위에 자신을 세우며’ 이 말은 믿음 위에 자신을 건축하라는 말입니다. 
    신앙생활을 건축에 비유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나를 세우고 나의 인생을 건축하는 것은 나 자신입니다. 남이 세워줄 수 없습니다. 거룩한 믿음 위에 자신을 세우면 흔들리지 않습니다.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쳐도 무너지지 않습니다. 이 세상에서 집을 지을 때도 건성으로 대충 짓는 사람은 없습니다. 신앙생활 하는 것은 이 세상 집을 짓는 것보다 훨씬 중요합니다. 믿음으로 살지 않으면 그 인생은 실패한 인생입니다. 어리석은 부자와 같이 영혼이 구원받지 못하고 하나님께 버림을 당한다면 그가 쌓아 놓은 많은 재물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자기를 건축하는 방법을 살피겠습니다.

    1. 지극히 거룩한 믿음 위에 자신을 세우며

    20절에 “지극히 거룩한 믿음 위에 자신을 세우며” 집을 짓는 데 가장 중요한 것은 기초입니다. 우리 인생의 기초, 신앙의 기초는 거룩한 믿음입니다.

    첫째, 터를 잘 닦아야 합니다. 집을 세우는 데 가장 중요한 것은 터를 잘 닦는 것입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인생의 기초도 예수님이고 신앙의 기초도 예수님이라고 말씀합니다. 고린도전서 3:11에 “이 닦아 둔 것 외에 능히 다른 터를 닦아 둘 자가 없으니 이 터는 곧 예수 그리스도라” 예수 그리스도가 거룩한 터요 기초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고 3일 만에 부활하심으로 거룩한 터가 되셨습니다. 예수님을 믿으면 구원을 받습니다. 다른 구원의 길은 없습니다. 사도행전 4:12에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 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 하였더라”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은 절대 실패하지 않습니다. 

    둘째. 좋은 재료를 선택해야 합니다. 터를 잘 닦은 다음에는 어떠한 재료를 써야 할지 신중히 고려해야 합니다. 고린도전서 3:12에 재료는 6가지가 있습니다. 금 은 보석 나무 풀 짚입니다. 이 중에서 금 은 보석은 불에 타지 않는 재료이고 나무 풀 짚은 불에 타는 재료들입니다. 금 은 보석이 좋은 재료입니다. 건축을 다 마치고 나면 하나님께서 시험하십니다. 고린도전서 3:13-15에 보면 시험하는 방법은 불로 태워본다고 했습니다. 불로 태워서 그 공적이 그대로 남아 있으면 상을 받고 공적이 불에 타버리면 해를 받습니다. 그런 사람은 구원을 받기는 받으나 불 가운데서 나온 것 같은 부끄러운 구원을 받습니다. 

    그러면 금 은 보석으로 건축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a) 성경 말씀대로 신앙생활하고 성경 말씀 위에 자기 인생을 세우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가는 인생은 가장 복된 삶을 사는 것입니다. 성경대로 믿음 생활하는 것은 가장 좋은 재료를 써서 신앙의 집을 짓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7:24에 “그러므로 누구든지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는 자는 그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지혜로운 사람 같으리니” 그러면 불로 심판할 때 타지 않고 공력이 남아 있습니다.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부딪힐 때도 무너지지 않습니다. 말씀의 반석 위에 세워졌기 때문입니다. 하늘나라에서 큰 상급과 영광을 받게 됩니다. 

    b) 하나님을 위해서 일하는 것입니다. 자기만 위하는 이기주의나 욕심으로 살지 아니하고 하나님을 위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순종하고 충성하고 봉사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일이 잘되기를 바라고 하나님의 교회가 잘되기를 바라면서 믿는 일을 해야 합니다. 남을 섬기고 봉사하며 자기를 희생하는 것이 금 은 보석으로 자기를 건축하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사람에게 보이려고 하고 칭찬을 바라고 하는 것은 나무와 풀과 짚으로 하는 것입니다. 자기에게 이익이 되면 하고 이익이 안 되면 그만둡니다. 그것은 전부 자기를 위한 것이므로 상을 받지 못합니다. 우리는 다 자기를 건축하는 자들입니다. 좋은 터에다가 좋은 재료로 잘 건축해야 합니다.

    2. 성령으로 기도하며

    자기를 건축하는 일은 많은 힘과 노력이 필요합니다. 해산의 수고를 해야 합니다. 자기의 노력과 힘만으로는 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도우심이 있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기도해야 합니다. 기도할 때 성령으로 기도하라고 하셨습니다. 에베소서 6:18에 “모든 기도와 간구를 하되 항상 성령 안에서 기도하고 이를 위하여 깨어 구하기를 항상 힘쓰며 여러 성도를 위하여 구하라” 

    첫째, 성령으로 하는 기도는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기도입니다. 로마서 8:27에 “성령이 하나님의 뜻대로 성도를 위하여 간구하심이니라” 성령으로 하는 기도는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기도입니다. 성령은 진리의 영입니다. 성령은 언제나 진리 가운데로 우리를 인도하십니다. 그러므로 성령으로 하는 기도는 하나님의 뜻에 맞습니다. 예수님도 기도하실 때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라고 했습니다. 기도는 자기 욕심을 채우는 수단이 아니고 하나님의 뜻을 찾아 이루어 드리는 것입니다. 기도는 하나님의 뜻이 땅에서 이루어지게 하는 것입니다. 기도는 내 뜻을 관철시키려고 하는 것이 아니고 내가 하나님의 뜻에 복종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령으로 하는 기도입니다. 

    둘째 성령으로 하는 기도는 자기를 만드는 기도입니다. 기도는 죄를 찾아 회개하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고치고 바꾸는 일입니다. 순종하지 못하던 것을 순종하고, 사랑하지 못하던 사람을 사랑하고, 끊지 못하던 죄를 끊어버리면서, 성격도 고치고, 말도 고치고, 행실도 고치는 것이 기도입니다. 갈라디아서 5:16에 “내가 이르노니 너희는 성령을 따라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 성령은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합니다. 성령은 육체를 거스릅니다. 성령으로 하는 기도는 자기를 부인하게 만듭니다. 성령이 역사할 때 죄를 깨닫고 회개합니다. 자기 고집과 옛사람을 죽이고 자기를 만들어 가게 됩다. 그러므로 성령으로 기도하는 사람은 기도한 만큼 거룩해지고, 기도한 만큼 온유 겸손해지고, 기도한 만큼 믿음이 좋아집니다. 

    3.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자기를 지키며

    우리는 자기를 잘 지켜야 합니다. 믿음 생활을 잘하고 자기를 잘 세워도 자기를 지키지 못하면 모두 잃게 됩니다. 삼손은 하나님의 은혜로 굉장한 힘을 가졌지만 자기를 지키지 못함으로 다 잃었습니다. 사울은 왕도 자기를 지키지 못하다가 불행하게 되었습니다. 마귀는 삼킬 자를 찾아다닙니다. 그러므로 자기를 잘 지키고 다스려서 지금까지 이루어 놓은 것들을 빼앗기지 말아야 합니다. 

    첫째, 자기를 잃어버리지 말아야 합니다. 누가복음 9:25에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자기를 잃든지 빼앗기든지 하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세상을 보면 자기를 잃어버리고 사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정신없이 사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하지 말아야 할 말을 하기도 하고, 사람으로는 할 수 없는 일을 하기도 합니다. 많은 사람이 스스로 자기 생명을 잃어버리는 일을 합니다. 사는 길을 버리고 죽는 길로 갑니다. 생명 길을 버리고 사망 길로 갑니다. 하나님 없이 산다면 스스로 자기를 잃어버리며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자기를 잃어버리고 생명을 잃어버리는데 돈이 많으면 뭐하고 권세가 있으면 뭐합니까?

    둘째,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자기를 지켜야 합니다. 하나님을 떠나 사는 것, 예수님을 잃어버리고 사는 것이 곧 자신을 잃어버리고 사는 것입니다. 탕자가 아버지 집을 떠나 허랑방탕하며 사는 동안 그는 자신을 잃어버리고 살았습니다. 누가복음 15:17에 탕자가 회개하고 돌아올 때 ‘이에 스스로 돌이켜’ 돌아왔다고 했습니다. 잃어버린 자기 자신을 다시 찾았다는 것입니다. 전에 하나님 아버지를 떠나 방탕하게 지낼 때는 그는 자신을 잃어버리고 제 정신없이 살았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사랑 안에 있을 때 참 생명을 찾습니다. 나 자신의 삶을 찾습니다.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자신을 지켜야 합니다.

    아가서 5:6에 술람이 여인이 예수님을 잃어버리고 신앙의 잠이 들었다가 깨어난 후 “그때 내 혼이 나갔구나”라고 말했습니다. 예수님을 잃어버리고 있을 때가 나 자신을 잃어버리고 있는 것입니다. 믿음 잃어버리고 세상에 취해서 살아갈 때가 바로 자신을 잃어버린 순간입니다. 나 자신을 지키려면 하나님 안에 거해야 합니다. 정신을 차리고 믿음을 지켜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그 사랑 안에 거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사랑 안에 있을 때가 가장 행복하고 즐겁습니다. 우리가 하나님 안에 살기만 하면 하나님께서 지켜주시고 보호해 주십니다. 하나님을 떠나서 혼자 살아가려고 하는 자는 힘만 들고 고생만 합니다. 하나님을 떠나면 그것이 고통이요 불행입니다.

    4. 영생에 이르도록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긍휼을 기다리라

    우리는 예수님의 긍휼로 구원을 받았습니다. 천국에 들어갈 때까지 계속해서 주님의 긍휼을 입어야 합니다. 주님은 긍휼히 여기는 자가 복이 있다고 하셨고, 긍휼히 여길 줄 모르는 자는 긍휼 없는 심판을 받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다른 사람을 긍휼히 여기는 사람이 주님의 긍휼을 받을 수 있습니다. 주님은 자비하시고 노하기를 더디 하시고 진실이 한이 없으시고 긍휼이 풍성하십니다. 주님의 긍휼을 바라보고 기다리는 자가 긍휼을 받을 수 있습니다. 영생에 이르도록 긍휼을 기다려야 합니다. 예수님 재림하실 때까지 긍휼을 기다려야 합니다. 믿음 생활은 기다리는 것입니다. 주님의 약속을 기다리고 주님의 재림을 기다리는 것입니다. 본문을 네 개의 동사로 정리할 수 있습니다. ‘세우며, 기도하며, 지키며, 기다리라’



    10월 7일(화) 하박국 1-3장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그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2:4)

    보라 그의 마음은 교만하며 그의 속에서 정직하지 못하니라 그러나 의인은 그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See, he is puffed up; his desires are not upright-- but the righteous will live by his faith.

    나라 국(國) = 창 과(戈) +  작은 입 구(口) +  한 일(一) 영토 + 큰 입 구(口)
    • 1. 나라.  2. 도읍.  3. 고향.  4. 지방.  5. 나라를 세우다
    한 사람이 창을 들고 땅을 지키면 나라가 세워진다. 




    구원의 세가지 진리 (칭의, 성화, 영화)


    성경은 <구원>에 대한 세가지 진리를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영접함으로 믿음의 첫발걸음을 내딛고 의롭다 칭함을 받는 것을 <칭의>라고 하고, 영접 이후에 주님과 동행하며 죄로부터 떠나는 모든 과정속에서 이루어지는 복음에 합당한 열매를 맺는 과정을 <성화>라고 하며, 예수님의 재림을 통하여 죄의 존재로 부터 완전히 해방되어 주님과 같이 거룩한 형체로 순식간에 변화되는 과정을 <영화>라고 합니다.  이것을 <구원의 3양상>이라고 합니다. 먼저 결론부터 표로 정리하고 이 세가지 진리에 대한 자세한 설명을 덧붙입니다.

    * 구원의 3양상

    양상

    말씀

    의미

    방법

    태도

    결과

    이해

    1.칭의

    엡2:8-9

    롬3:24

    구원을 얻었다

    (과거)

    믿음

    (영접)

    감사

    죄의 <형벌>

    로부터 해방

    주님을

    모심

    2.성화

    빌2:12

    벧전2:2

    구원을 이루라

    (현재)

    믿음

    (순종)

    겸손

    죄의 <권세>

    로부터 해방

    주님을

    닮아감

    3.영화

    롬13:11

    고전15:

    51-52

    구원이 가깝다

    (미래)

    믿음

    (재림)

    순결

    죄의 <존재>

    로부터 해방

    주님과

    하나됨

    1. 칭의 (죄의 '형벌'로부터 해방)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치 못하게 함이니라 (엡2:8-9)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롬3:24)

    칭의(Justification)는 예수님을 믿지 않던 불신자가 자신의 죄를 회개하고 돌이켜 예수그리스도의 보혈을 의지하여 하나님께로 방향전환(회개와 영접)을 함으로써 '의롭다 칭함'을 받는 것을 말합니다. 원래는 의로운 존재가 아닌데 예수님의 공로로 의롭다고 인정해 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칭의는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로 되는 것이며 우리의 어떠한 행위나 의지나 선행을 통해 얻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칭의는 <구원의 출발점>이 되며 마치 고아원에 버려진 아이가 한 가정의 양자가 되듯이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신분과 자격이 주어지는 것입니다. 이 아이는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를 수 있고 하늘의 모든 축복과 하나님의 안에 있는 모든 것들을 자신의 것으로 누릴 수 있습니다.

    여기서 영접의 의미는 단순히 복음을 머리로 가볍게 이해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을 찢고 예수님을 구세주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반드시 마음을 찢는 애통함과 나의 죄로 인한 아픔, 지옥불에 떨어질 정도로 심각했던 나의 죄로 인해 예수님께서 대신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셨다는 사실에 대한 깨달음과 마음 중심으로부터 우러나오는 회개가 일어나야 합니다. 회개가 없는 영접은 진정한 칭의라고 볼 수 없으며 천국과 영생을 보장할 수 없습니다.

    이러한 영접의 과정은 사람에 따라 단번에 이루어질 수도 있고 서서히 점진적으로 이루어질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빨리 걸리든 오래 걸리든 반드시 마음을 찢고 회개하는 과정이 있어야만 진정한 칭의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단지, 머리로 복음을 이해하고 형식적으로 영접기도 드리는 것은 진정한 칭의가 아닙니다. 머리로 이해하는 복음으로는 거세게 사망으로 흘러가는 죄된 옛 생활의 흐름을 바꿀 수 없기 때문입니다.

    확실하게 죄로부터 회개하고 돌이켜 하나님쪽으로 방향전환을 한 사람은 죄의 형벌로부터 해방되어 그동안 내가 지은 죄, 지금 짓고 있는 죄, 앞으로 짓게 될 현재, 과거, 미래의 모든 죄에 대한 형벌로부터 용서받습니다. 단지 나의 죄를 위해 대신 십자가에 못박혀 돌아가신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하나만으로 내가 저지른 죄악들이 전부 무효가 되는 것입니다. 칭의는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와 십자가의 공로와 그것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회개와 영접을 통해 이루어집니다.

    2. 성화 (죄의 '권세'로부터 해방)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나 있을 때뿐 아니라 더욱 지금 나 없을 때에도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 (빌2:12)

    갓난 아이들같이 순전하고 신령한 젖을 사모하라 이는 이로 말미암아 너희로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게 하려 함이라 (벧전2:2) 

    죄로부터 확실하게 돌이켜 회개하고 예수님을 진심으로 마음에 모셔들인 사람에게는 예수그리스도 안에 있는 모든 권세와 통치, 영생, 죄사함, 구원의 여러가지 축복들이 단번에 마음속으로 들어오게 됩니다. 하지만 갓 예수님을 영접한 사람은 많은 경우에 영접하자마자 갑자기 사람이 바뀌지는 않습니다. 아직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도 모르고 성경도 모르고 주님과 대화해 본 적도 없으며 주님과의 관계가 친밀하게 맺어져 있지도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말씀과 기도를 통해 주님과 자주 대화하며 동행하는 과정을 통해 조금씩 주님과의 관계가 발전되고, 주님의 성품과 약속과 주님 주시는 놀라운 축복들을 하나하나 알아가며 누려가게 됩니다. 그러면서 주님과의 친밀한 관계가 더 깊이 맺어지면서 주님을 향한 갈망과 주를 닮고자 하는 마음이 싹트기 시작합니다. 주님께서 싫어하시는 죄를 나도 싫어하게 되고 주님께서 기뻐하시는 것들을 나도 기뻐하며 즐거이 순종하게 됩니다.

    성화(Sanctification)란 이미 칭의를 통해 얻은 완전한 구원의 선물가방의 지퍼를 열고 다양한 구원의 축복들을 하나씩 꺼내어가면서 누려가는 즐거운 과정입니다. 죄사함, 거듭남, 천국시민권, 영생, 의롭게 됨, 기도의 특권, 주님보좌에 수시로 드나들 수 있는 무한 통행권 등... 셀수 없는 수많은 구원의 축복들을 누리며 열매맺는 과정입니다. 반면에 주님의 뜻과 상반되는 이전에 누리던 옛사람의 잔재들을 하나하나 포기하고 버려가는 아픔이 수반되는 과정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앞서 설명한 칭의의 과정에서 진실하게 마음을 찢고 회개함으로 영접한 사람은 주님의 사랑과 은혜를 알기 때문에 기꺼이 그 아픔을 감수하며 옛사람을 포기하고 버립니다. 그리고 더 깊은 하나님과의 친밀한 동행속으로 멈추지 않고 계속 들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성화단계의 초기에는 옛것을 버리고 새것을 취하는 성장통의 과정을 겪지만, 그 단계를 지난 후에는 이제 다른 사람의 구원에 관심을 갖고 내가 받은 구원을 나누기 시작합니다. 이제 내 중심의 시야에서 벗어나 다른 사람의 구원을 위해 마음아파하며 하나님과 동일한 관심으로 전도하고 양육하며 다른 사람의 믿음을 붙들어주는 일을 사명으로 여기며 살아가게 됩니다.

    성화단계의 최절정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은, 내가 죽고 그리스도로 살아가는 (갈2:20)의 진리를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진리는 이미 칭의의 과정에서 이루어진 진리입니다. 단지 여러 시행착오를 겪으면서 결국 나는 주님을 떠나서는 살아갈 수 없는 Nothing임을 깨닫게 되고 주님께서 내 안에 살아가시도록 자신을 내어드리게 되는 것입니다. 저는 이 진리를 깨닫는데 15년이 걸렸습니다. 가능하다면 칭의의 과정에서 이 진리를 빨리 깨달았으면 하는 바램으로 현재 처음 믿음을 갖는 자들에게 믿음의 첫단추를 (갈2:20)로 끼워주려고 노력하는데 마음만큼 잘 되지는 않네요.^^;

    성화는 서서히 죄의 권세로부터 멀어지고 주님의 권세와 통치 안으로 들어가는 정말 경이로운 과정입니다. 성화는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와 나의 순종을 통해서 이루어가는 것입니다.

    3. 영화 (죄의 '존재'로부터 해방)

    또한 너희가 이 시기를 알거니와 자다가 깰 때가 벌써 되었으니 이는 이제 우리의 구원이 처음 믿을 때보다 가까왔음이니라 (롬13:11)
    보라 내가 너희에게 비밀을 말하노니 우리가 다 잠잘 것이 아니요 마지막 나팔에 순식간에 홀연히 다 변화하리니 나팔 소리가 나매 죽은 자들이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고 우리도 변화하리라 (고전15:51-52)

    영화(Glorification)는 예수님께서 재림하실 때 홀연히 이루어지는 변화의 과정입니다.

    성경에서는 예수님께서 재림하실 때 마지막 나팔이 울려퍼짐과 동시에 순식간에 믿는 자들이 다 변화된다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먼저 죽은 자들이 일어나 썩지 아니할 몸을 입게 되고 이 땅에 살아있는 우리도 이어서 변화된다고 합니다. 이 날은 (살전4:16-17)에 나오는 공중에서 주님을 영접하여 영원토록 주와 함께 거하게 되는 천국에서의 생활이 시작되는 첫날(휴거일)이 될 것입니다.

    영화의 축복을 누리게 되는 사람들은 끝까지 믿음을 지킨 자들입니다(딤후4:7-8). 믿음을 끝까지 지키지 못하고 죄와 세상을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여 스스로 믿음을 버린 자들, 믿음을 버릴 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등지고 배교하는 자들, 양심이 굳어져 믿음에서 파선한 자들은 결코 누릴 수 없는 자리인 것입니다.

    영화는 죄의 존재로부터의 완전한 해방을 의미합니다. 육신을 벗어버리고 주님과 같은 썩지 아니할 완전한 몸을 입게 되는 과정이기에 죄의 존재로부터 영원히 벗어나는 순간이 바로 영화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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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금껏 20여년간 예수님을 믿고 생활하면서 배우고 누린 구원의 개념을 위와 같이 정리해 보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각자가 구원을 스스로 확증하길 원하십니다. 우리를 낳아주신 부모를 부모로 확신하며 살아가는 것은 자녀의 마땅한 도리이자 부모님께서도 당연히 원하는 것입니다. 혹자는 사람이 어떻게 교만하게 구원을 확신하며 살아갈 수 있느냐, 구원을 확신하는 것은 하나님만이 아시는 하나님의 영역이라고 반박할 지 모르지만, 그것은 주님과의 관계가 친밀하게 맺어져 있지 않은 사람들이 하는 아주 무식한 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분명히 (고후13:5)말씀에서 너희가 믿음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스스로 확증하라고 하셨고, 그것을 확신하지 못한다면 버리운 자라고까지 강력하게 말씀하십니다.

    거두절미하고, 많은 크리스찬들이 고민하고 헥깔려하는 구원의 확신문제에 대해 제가 지금껏 사랑하고 섬겨온 주님과의 관계속에서 경험한 진리를 토대로 조심스럽게 종지부를 찍어봅니다.

    ​ 

    구원을 확신하지 못하는 원인이 여러가지가 있겠지만 한 가지 이유로 압축됩니다.

    한마디로 <주님과의 친밀한 사랑의 관계>가 없기 때문입니다.

    '나는 주님을 진짜 사랑하는데 연약해서 자꾸 넘어지고 죄의 유혹에 빠져서 구원의 확신이 흔들려요'

    이렇게 말하는 사람은 주님의 사랑을 잘 모르는 사람입니다. 주님께서 우리의 연약함을 용납하지 못하시고 내가 자꾸 죄를 지으면 구원을 취소하실 수도 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바꿔 말하면 주님의 사랑은 완전하지 않다, 십자가로는 내 죄를 씻기에 충분하지 않다는 믿음없는 참람한 고백인 것입니다.  한마디로 주님의 완전한 사랑을 의심하는 것이며 믿음이 없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은 주님을 사랑한다고 고백하기 전에 먼저 주님의 사랑이 어떤 사랑인지부터 제대로 배워야 합니다. 그래야 그 사랑고백이 진짜가 됩니다. 그 다음에는 지속적으로 주님의 사랑을 맛보아 알아야 합니다. 주님의 사랑은 우리가 연약하고, 죄인되었고, 원수되었을 때에도 목숨버려 사랑해 주신 완전한 사랑입니다. 이 사랑을 단지 머리로가 아닌, 가슴과 삶으로 체험하고 느끼고 경험해야 합니다. 그러면 연약함과 넘어짐 속에서도 사탄의 속임수에 넘어가지 않고 주님의 완전하신 사랑의 반석위에, 자신의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들고 나아가 자백하고 구원의 즐거움을 회복하게 됩니다.

    구원을 확신할 수 있는 단 한가지 근거도 역시 <주님과의 친밀한 사랑의 관계>입니다.

    <믿음>은 이론이나 지식이 아니라 <주님과의 관계>라고 정의할 수 있습니다. 믿음이 좋은 사람은 주님과의 관계가 친밀하기 때문에 주님의 마음이 어떠한지.. 주님 마음속에 무엇이 있는지를 압니다. 주님께서 무엇을 기뻐하시고, 무엇을 싫어하시는지도 세세하게 다 압니다. 주님과 친하니까... 주님을 못견디게 사랑하니까... 사랑하는 주님의 눈빛과 제스처만 봐도 그분의 마음이 헤아려집니다.

    ​평생 주님과 친밀하게 동행하며 살아왔는데 천국문턱에서 갑자기 주님이 정색을 하시면서 '나는 너를 도무지 알지 못하노라' 말씀하실 리가 만무합니다. 그것은 절대로 있을 수도, 상상할 수도 없는 일입니다. 주님께서 어떻게 나를 사랑하셨는지를 아는 사람은 매일매일 주님과 손잡고 동행하며 에녹처럼 살아가다가 그 모습 그대로 천국문턱을 넘어 즐거이 노래를 부르며 여유있게 걸어들어가게 될 것입니다. 주님과 친밀하게 동행하는 자는 주님의 사랑을 의심하지 않고 그분이 얼마나 온유하시고 선함이 가득하시며 은혜가 한이 없으신 분이신지를 확실하게 알고 있기에 자신이 지금 당장 죽더라도 주님 품에 안길 수 있다는 것을 아무 의심없이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어쫓나니 두려움에는 형벌이 있음이라 두려워하는 자는 사랑 안에서 온전히 이루지 못하였느니라 (요일4:18)

    이제 더이상 내가 구원받을 수 있는지 없는지 확신하지 못한 상태로 계속 세월을 낭비할 시간이 없습니다. 날마다 말씀과 기도를 통한 주님과의 행복한 만남 속에서 주님과의 친밀한 사랑의 관계를 깊이깊이 맺어가야 합니다. 이것은 언제 시작해도 늦지 않습니다. 주님께서는 24시간 내내 종일 손을 벌리며 우리가 달려가 그 품에 안길 수 있도록 실시간 대기상태에 있기 대문입니다. 늦었다고 생각할 때가 가장 빠른 때입니다. 바로 지금 내 모든 상황들을 친구에게 이야기하듯 주님께 아뢰며 마음에 있는 것들을 이야기하면 됩니다.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왔습니다.

    사탄은 성경에 예언된 대로 이제 그 본색을 드러내며 대놓고 진리를 짓밟으며 하나님의 사랑을 훼방하며 수많은 크리스천들을 미혹하여 넘어뜨릴 것이며, 지금 전 세계적으로 그 가증한 일들이 이미 시작되었습니다. 엄청나게 빠른 속도로 사탄이 세력을 확장해 가고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다시오실 모든 준비를 마치시고 이제 구름을 타고 계시는 듯 합니다. 주님의 얼굴이 무척 어둡고 수심에 가득차 계십니다. 이제 더이상 스스로의 구원조차 확신하지 못한 채 영적인 갓난아이 수준으로 살아서는 안됩니다. 주님과의 사랑에 푹 빠져서 잃어버린 영혼들을 구원하는 주님의 제자와 일군, 그리스도의 군사, 주님의 순결한 신부로서 부지런히 복음을 전하며 그들을 주님의 사랑 안으로 들어오게 해야 합니다. 머뭇거릴 시간이 없습니다. 사탄이 주는 이생의 염려와 재리의 유혹과 자기 영광을 구하는 어두운 세상속에 푹 빠져서 살아갈 시간이 없습니다. 깨어나야 합니다. 정신을 차려야 합니다.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왔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정신을 차리고 근신하여 기도하라 무엇보다도 열심으로 서로 사랑할지니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 (벧전4:7-8)

    마지막으로 가장 중요한 한가지!!

    내가 주님을 사랑하고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 그 사랑은 날 위해 십자가에 못박혀 돌아가신 예수님의 사랑으로부터 흘러나온 것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사랑이 없었던 내가, 주님을 이토록 사랑하고 내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할 수 있는 것은, 주님이 '먼저' 내게 보여주신 <십자가의 완전한 사랑>이 있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 (갈6:14)

    <기도>

    사랑하는 주님, 제가 주님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주님은 아십니다. 하루에도 수십번 넘어지는 연약한 사람이지만, 주님께서 저를 어떠한 사랑으로 사랑하셨는지 알기에 다시 일어설 수 있습니다. 하지만 주님을 사랑하는 이 사랑조차도 제게서 난 것이 아니요, 절 위해 죽어주신 주님의 십자가사랑으로부터 온 것임을 고백합니다. 사도 바울의 고백처럼 저도 주님과 함께 영원한 천국에서 편히 쉬며 영원한 안식가운데 들어가는 것이 몹시 사모가 되지만, 이 땅에서 제가 할 일이 있습니다. 주님을 몰라 영원한 사망으로 가고 있는 잃어버린 영혼들을 구원하는 일이 제가 이 땅에 존재하는 유일한 이유입니다. 제가 복음을 전하지 않으면 그들에게는 소망이 없습니다. 제가 진리를 외치지 않으면 이 세상은 그대로 지옥 불못으로 침몰해갈 것입니다.

    주님, 이 글을 읽고 있는 수많은 믿지않는 사람들이 복음을 듣고 하나님의 자녀로 거듭나게 하소서. 세상과 타협하며 살아가는 수많은 크리스천들이 확실한 회개를 통해 구원의 확신 가운데 살아가게 하소서. 수많은 주님의 제자들이 복음을 들고 잃어버린 사람들의 삶속으로 뛰어들게 하소서. 주님 다시오실 그날까지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키는 주님의 신부들이 많이 일어나게 하소서. 그리고 조금만 더 기다려주옵소서. 한사람이라도 더 주님 품으로 안겨드리고 싶습니다. 주님 얼굴 하루라도 빨리 뵙고 싶지만 조금만 더 지체하여 주시옵소서. 아직 준비가 안된 주님의 사랑하는 자녀들이 주님 맞이할 기름을 채울 수 있도록 조금만 더 기다려주옵소서. 그리하여 모든 열방의 택함받은 주님의 백성들과 함께 어린양의 혼인잔치에 기쁨으로 찬양하며 들어갈 수 있는 후회없는 믿음의 삶을 우리 모두가 다 살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하박국 2:4

    2:4 보라 그의 마음은 교만하며 그의 속에서 정직하지 못하니라 그러나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개역한글]
    2:4 보라 그의 마음은 교만(驕慢)하며 그의 속에서 정직(正直)하지 못하니라 그러나 의인(義人)은 그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개역한문]
    2:4 보라 그의 마음은 교만하며 그 속에서 정직하지 못하나 의인은 그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개역개정]
    2:4 보라 그의 마음은 교만하며 그 속에서 정직하지 못하나 의인은 그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개역개정4판]
    2:4 보아라, 그의 마음은 교만하며, 그의 속 영혼은 바르지 못하다. 그러나 의인은 그의 믿음으로 살 것이다. [바른성경]
    2:4 보아라, 그의 마음은 驕慢하며, 그의 속 靈魂은 바르지 못하다. 그러나 義人은 그의 믿음으로 살 것이다. [바른성경 한문역]
    2:4 마음이 한껏 부푼 교만한 자를 보아라。 그는 정직하지 못하다。 그러나 의인은 믿음으로 산다。 [표준새번역]
    2:4 마음이 한껏 부푼 교만한 자를 보아라. 그는 정직하지 못하다. 그러나 의인은 믿음으로 산다. [새번역]
    2:4 보라, 마음이 교만한 사람은 그 안에 정직함이 없느니라. 그러나 의인은 자기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한글KJV]
    2:4 보라, 위로 높여진 자의 혼은 그 사람 속에서 곧바르지 아니하나 오직 의인은 자기 믿음으로 살리라. [한글흠정역]
    2:4 보아라. 마음이 교만한 사람은 의롭지 않다. 그러나 의인은 그의 믿음으로 살 것이다. [우리말성경]
    2:4 이 사실을 깨달아라. ㄱ) 악한 사람들은 제멋대로 허풍을 떨다가 멸망하지만, 의로운 사람은 진실하게 나를 의지하기 때문에 살 수가 있다. (ㄱ. `그(저 갈대아 사람)의 마음은(교만으로 가득 차서) 부풀어 있고 그 속에 성실함이 없다. 그러나 의인은 자신의 진실함으로써 살 수가 있다!'라고 번역하는 것이 원문에 더 가깝다) [현대어성경]
    2:4 악인은 마음이 교만하고 정직하지 못하므로 살아 남지 못할 것이나 의로운 사람은 믿음으로 살 것이다. [현대인의 성경]
    2:4 멋대로 설치지 말아라. 나는 그런 사람을 옳게 여기지 않는다. 그러나 외로운 사람은 그의 신실함으로써 살리라." [공동번역]
    2:4 보라, 뻔뻔스러운 자를. 그의 정신은 바르지 않다. 그러나 의인은 성실함으로 산다. [카톨릭성경]






    惟义人因信得生(유인인신득)

    • 1. 생각하다.  2. 꾀하다.  3. 벌이다.  4. 마땅하다.  5. 오직
    사람 인
    • 1. 사람.  2. 백성(百姓).  3. 남.  4. 어떤 사람.  5. 인간(人間)

    • 1. 인하다.  2. 말미암다.  3. 의지하다.  4. 유래하다.  5. 잇닿다

    • 1. 믿다.  2. 펴다.  3. 늘어남.  4. 신표.  5. 소식

    • 1. 얻다.  2. 만족하다.  3. 깨닫다.  4. 맞다.  5. 득

    哈巴谷书 2 [简体]

    • 1. 물고기가 많은 모양
    • 2. 마시다
    • 3. 입을 대고 훌쩍 마심
    • 4. 물고기가 입을 오물거리는 모양
    • 5. 속어로 웃음 소리를 나타내는 의성어
    획수 9획 부수 口(입구, 3획) 난이도 읽기 특급Ⅱ
    • 1. 땅 이름
    • 2. 파조(巴調)의 약칭
    • 3. 구렁이의 한 가지
    • 4. 아비
    • 5. 사천성(四川省)에 있는 땅의 이름
    획수 4획 부수 己(몸기, 3획) 난이도 읽기 1급, 쓰기 특급
    • 1. 골
    • 2. 흉노(匈奴)의 임금
    • 3. 골짜기
    • 4. 계곡
    • 5. 우묵한 골짜기
    획수 7획 부수 谷(골곡, 7획) 난이도 읽기 3급Ⅱ, 쓰기 2급
    • 1. 용렬하다
    • 2. 몸
    • 3. 못생김
    • 4. 體의 속자(俗字)
    • 5. 거칠다
    획수 7획 부수 亻(사람인변, 2획)

    迦勒底人自高自大,心不正直。惟义人因信得生。



    • 1. 부처 이름
    • 2. 만나다
    • 3. 막다
    • 4. 범어 kya의 차음자(借音字)
    • 5. 차단(遮斷)함
    획수 9획 부수 辶(책받침, 4획) 난이도 읽기 2급, 쓰기 특급Ⅱ
    • 1. 굴레
    • 2. 억누르다
    • 3. 억지로 하다
    • 4. 다스리다
    • 5. 새기다
    획수 11획 부수 力(힘력, 2획) 난이도 읽기 1급, 쓰기 특급
    • 1. 밑
    • 2. 이르다
    • 3. 바닥
    • 4. 멈추다
    • 5. 막히다
    획수 8획 부수 广(엄호, 3획) 난이도 읽기 4급, 쓰기 3급
    • 1. 사람
    • 2. 백성(百姓)
    • 3. 남
    • 4. 어떤 사람
    • 5. 인간(人間)
    획수 2획 부수 人(사람인, 2획) 난이도 읽기 8급, 쓰기 6급Ⅱ
    • 1. 스스로
    • 2. 저절로
    • 3. 좇다
    • 4. 쓰다
    • 5. 출처(出處)
    획수 6획 부수 自(스스로자, 6획) 난이도 읽기 7급Ⅱ, 쓰기 6급
    • 1. 높다
    • 2. 높이
    • 3. 높낮이
    • 4. 높이다
    • 5. 높게 하다
    획수 10획 부수 高(높을고, 10획) 난이도 읽기 6급Ⅱ, 쓰기 5급Ⅱ
    • 1. 크다
    • 2. 거대함
    • 3. 많다
    • 4. 고귀하다
    • 5. 훌륭하다
    획수 3획 부수 大(큰대, 3획) 난이도 읽기 8급, 쓰기 6급Ⅱ
    • 1. 마음
    • 2. 염통
    • 3. 가슴
    • 4. 한가운데
    • 5. 도(道)의 본원(本原)
    획수 4획 부수 心(마음심, 4획) 난이도 읽기 7급, 쓰기 6급
    • 1. 아닌가
    • 2. 크다
    • 3. 새 이름
    • 4. 의문사
    • 5. 오디새
    획수 4획 부수 一(한일, 1획)
    • 1. 바르다
    • 2. 정월
    • 3. 바르게 하다
    • 4. 예기(豫期)하다
    • 5. 듣다
    획수 5획 부수 止(그칠지, 4획) 난이도 읽기 7급Ⅱ, 쓰기 6급
    • 1. 곧다
    • 2. 값
    • 3. 품삯
    • 4. 바른 길
    • 5. 바루다
    획수 8획 부수 目(눈목, 5획) 난이도 읽기 7급Ⅱ, 쓰기 6급
    • 1. 생각하다
    • 2. 꾀하다
    • 3. 벌이다
    • 4. 마땅하다
    • 5. 오직
    획수 11획 부수 忄(심방변, 3획) 난이도 읽기 3급, 쓰기 2급
    • 1. 인하다
    • 2. 말미암다
    • 3. 의지하다
    • 4. 유래하다
    • 5. 잇닿다
    획수 6획 부수 囗(큰입구, 3획) 난이도 읽기 5급, 쓰기 4급
    • 1. 믿다
    • 2. 펴다
    • 3. 늘어남
    • 4. 신표
    • 5. 소식
    획수 9획 부수 亻(사람인변, 2획) 난이도 읽기 6급Ⅱ, 쓰기 5급Ⅱ
    • 1. 얻다
    • 2. 만족하다
    • 3. 깨닫다
    • 4. 맞다
    • 5. 득


    하박국 (Habakkuk)

    이름공간

    문서 행위

    보라 그의 마음은 교만하며 그 속에서 정직하지 못하나 의인은 그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합 2:4)

    하박국은 구약성경의 35번째 책으로 소선지서 12권 중 하나입니다.

    [ 나훔 <-- 하박국 --> 스바냐 ]

    하박국은 선지자와 하나님의 대화입니다. 하박국은 하나님께 세상에 악이 성행하는데 왜 침묵하시는지 질문하고, 하나님은 약인은 결국 망하고 하나님을 믿는 의인은 그 믿음으로 살리라 대답하십니다. 하나님의 답을 들은 하박국은 하나님께서 진노 중에도 긍휼을 배풀 것을 기도하며 하나님을 찬양하며 책은 맺습니다.

    • (3:18) 나는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리로다

    개관과 구조

    • 책 이름 약자: 합[1] , Hab.[2]

    구조와 특징

    하박국은 모두 3장으로 이루어져 있고 아래와 같이 나눌 수 있습니다.

    • 어찌하여 침묵하시나이까 (1장)
    • 하나님의 응답 (2장)
    • 하박국의 기도 (3장)

    특징

    • 선지자 하박국에 대해 알려진 것이 없다
    • 어떤 나라에 대한 예언이 아닌 하나님과의 대화이다

    어찌하여 침묵하시나이까 (1장)

    하박국서는 하박국이 하나님께서 택하신 백성이 포로로 고통받는 것을 허락받은 이유에 대한 답을 하나님께 간구하는 것으로 시작합니다(하박국 1:1-4). 주님은 하박국에게 본질적으로 "내가 말해도 믿지 않을 것이다"라고 말씀하시는 답변을 주십니다(하박국 1:5-11). 이어서 하박국은 "좋습니다. 당신은 하나님이시지만, 그래도 이런 일이 왜 일어나는지 더 자세히 말씀해 주십시오"라고 말합니다(하박국 1:17-2:1).[3]

    • (1:2) 여호와여 내가 부르짖어도 주께서 듣지 아니하시니 어느 때까지리이까 내가 강포로 말미암아 외쳐도 주께서 구원하지 아니하시나이다 선지자의 부르짖음은 과거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그러나 그가 오랫동안 외쳤지만 하늘로부터 아무런 응답을 받지 못했습니다. 악은 억제되지 않고, 심지어 하나님께서도 무시합니다(하박국 1:3).[4]
    • (1:6) 보라 내가 사납고 성급한 백성 곧 땅이 넓은 곳으로 다니며 자기의 소유가 아닌 거처들을 점령하는 갈대아 사람을 일으켰나니 하나님은 사람들이나 사탄의 자유의지와 사악한 정욕을 자신의 목적을 위해 사용하시며, 그래서 자신의 백성을 대적하도록 허락하신 자들을 "일으켰나니”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분의 섭리가 허락하신 사건들은 그들의 의도에 유리하며, 그들을 막는 것은 그분의 몫이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탐욕이나 교만함의 어떤 목적을 위해 스스로를 높입니다. 하지만 더 높은 차원의 것들이 있는데, 하나님께서 그들의 불의로 그분의 의를 성취하도록 그들의 행동을 명령하십니다.[5] 갈대아는 바벨론입니다.
    • (1:13) 주께서는 눈이 정결하시므로 악을 차마 보지 못하시며 패역을 차마 보지 못하시거늘 어찌하여 거짓된 자들을 방관하시며 악인이 자기보다 의로운 사람을 삼키는데도 잠잠하시나이까 하나님은 악과 함께할 수 없습니다(시편 5:5, 6).[6] 하나님의 거룩함은 악을 처다보시지도 못하고, 그의 자비는 인간의 비참함을 간과하시지 못합니다. 그런데도 이 악한 사람들이 하나님께서 선택한 백성을 괴롭히도록 허락합니다. 이것이 선지자의 당혹감이며, 그는 그것을 주님 앞에 놓았습니다.[7]

    하나님의 응답 (2장)

    그러자 하나님께서는 다시 그에게 대답하시며 더 많은 정보를 주시며, 땅이 그분 앞에서 잠잠하라고 말씀하십니다(하박국 2:2~20).

    • (2:3) 묵시는 정한 때가 있나니 그 종말이 속히 이르겠고 결코 거짓되지 아니하리라 비록 더딜지라도 기다리라 지체되지 않고 반드시 응하리라 종말은 적의 멸망과 믿는이의 위로를 담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비록 하나님께서 인간의 성급한 감정에 따라 이것을 실행하지 않으시더라도, 그 둘의 결과는 그의 정해진 때에 확실합니다.[8]
    • (2:4) 보라 그의 마음은 교만하며 그 속에서 정직하지 못하나 의인은 그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하박국은 율법의 전체 원칙과 모든 참된 신앙을 한 문장으로 요약합니다. 이 유명한 문장은 사도 바울이 그의 위대한 주장의 기초로 사용한 것입니다(로마서 1:17;[9] 갈라디아서 3:11; 히브리서 10:38 비교). 문자적이고 문맥적 적용은 의로운 사람은 하나님의 약속을 온전히 신뢰하고 갈대아인들의 손에 닥쳐올 환난의 날에 구원 받을 것을 의미합니다. 교만하고 탐욕스러운 이는 멸망하고 충실한 사람은 안전하게 살 것입니다. 그러나 이 적용은 그 상황에 국한되지 않습니다. 이 약속은 갈대아인과 이스라엘 사람들의 시간적 미래를 넘어 영원한 구원을 바라봅니다. 바울은 그리스도 안에서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는 교리를 가르치기 위해 여기에서 선언된 원리를 자연스럽게 적용했습니다.[7]
    • (2:20) 오직 여호와는 그 성전에 계시니 온 땅은 그 앞에서 잠잠할지니라 하시니라 참 하나님 여호와는 우상들과 같지 아니하시고 영원히 그 거룩한 성전인 천국에 거하시며 거기에서 만물을 보시고 다스리시며 그 백성에게 존재와 생명과 권능과 구원의 근원이 되십니다. 하나님의 주권적 권위와 지배력은 모든 사람들에게 경외심을 불러일으키고 순종하도록 만들어야 합니다.[10]

    하박국의 기도 (3장)

    하박국은 이러한 시련 속에서도 하나님에 대한 강한 믿음을 표현하는 기도를 썼습니다(하박국 3:1~19).

    • (3:2) 여호와여 내가 주께 대한 소문을 듣고 놀랐나이다 여호와여 주는 주의 일을 이 수년 내에 부흥하게 하옵소서 이 수년 내에 나타내시옵소서 진노 중에라도 긍휼을 잊지 마옵소서 하나님의 일은 이스라엘과 갈대아에 대한 심판이며, 선지자는 하나님께 그것을 빨리 그리고 이스라엘이 살아있게 해 달라고 기도합니다. 비록 그것이 그의 동포들에게 일시적인 고통을 가져다주지만, 그것은 또한 그들의 적들을 멸망시키고, 유대인들을 재건하고, 구원으로 왕관을 씌우고, 하나님의 영광을 온 땅에 알리기 때문입니다. 브릭스 박사는 “주님, 저는 당신에 대한 소문을 들었습니다. 저는 주님, 당신의 역사를 두려워합니다. 세월이 흐르는 동안 그를(이스라엘) 소생시키소서."라고 번역합니다.[11] 그는 주의 “일”이 신현 (Theophany)으로 그의 행위라고 설명합니다. 그의 심판, 특히 16절에서처럼 하박국 선지자에게 두려움의 원인입니다.[7]
    • (3:18) 나는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리로다 17절에 예언된 모든 고난에도 불구하고 기뻐합니다. 로마서 8:37에서[12] 사도 바울이 확신을 표현한 것을 떠올립니다.[13]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하박국 2:4~8, 로마서 1:17)



    르네상스와 종교개혁은 중세의 문을 닫게 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흔히 학자들은 르네상스를 한 마디로 ‘ad fontes’라고 표현합니다. 라틴어로 본질로 돌아가자는 뜻입니다. 중세시대는 인간의 본질보다 자연이나 신이 삶의 중심이었습니다. 중세와 르네상스 시대의 미술을 비교해 보면 금방 알 수 있습니다. 중세시대는 사람의 원래 모습보다 요란한 의상이 더 돋보입니다. 그러나 르네상스가 되면서 그림에서 인간 본래의 모습을 그리기 시작합니다. 르네상스의 개척자라고 할 수 있는 보디첼리의 ‘비너스의 탄생’이나 ‘봄’이란 그림을 보면 사람들의 나상을 그렸습니다. 아무 것도 걸치지 않는 인간 본래의 모습을 표현한 것입니다.

       반면에 종교개혁을 ‘ad biblia’라고 합니다. 성경으로 돌아가자는 뜻입니다. 중세시대에는 성경보다 교회의 결정이나 교황의 말이 더 권위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종교개혁이 되자 성경의 진리를 되찾는 운동이 일어났습니다. 해방과 거대한 변혁의 물결은 1,200년의 중세를 몰락하게 한 것입니다.

       16세기의 교회는 부패와 타락의 본산지였습니다. 교회의 수장인 교황은 세속군주로 전락해 버리고 말았습니다. 성 베드로 대성당의 건축비를 충당하기 위하여 면죄부를 남발하여 팔았습니다. 이 때 독일 비텐베르크 교회의 마르틴 루터는 극심한 영혼의 위기를 느끼게 됩니다. 그는 어느 날 성경을 읽다가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라는 구절이 눈에 띠었습니다. 이 구절을 통하여 영혼의 눈이 떠졌습니다. 그는 우리가 구원받는 것은 ‘오직 믿음’이라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1517년 그는 비텐베르크 정문에 ‘95개조 반박문’을 붙였습니다. 이것이 종교개혁의 시초였습니다.

       루터는 종교개혁의 중심인물로 어려움을 당하여 피신하고 변장하고 가명을 사용하였습니다. 마치 그의 이런 기간은 아우구스티누스의 영적 각성 기간과 같았고, 바울이 아라비아에서 3년을 지난 기간과 비유될 수 있습니다. 루터는 파문되어 교회로부터 탄압을 받았습니다. 그 당시에 파문이란 모든 권리를 박탈당하는 것입니다.

       로마에는 ‘세 분수 교회’라는 교회가 있습니다. 바울이 참수 당한 곳으로 알려진 기념교회입니다. 거기에는 돌계단이 있는데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어머니 헬레나가 신앙이 깊은 사람으로 알려져 있는데 그 돌을 팔레스타인에서 가져와서 지었다고 합니다. 28계단으로 대리석로 만든 계단입니다. 이 신성한 계단의 돌이 닳는다고 하여 나무로 덮어두었습니다. 그 곳에는 전통적으로 순례자들이 무릎을 꿇고 기어 올라가는 곳입니다. 바울은 이곳에 와서 무릎을 꿇고 올라가다가 성경에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는 말씀이 마음에 확신으로 다가와 그냥 걸어서 내려왔다는 계단입니다.

       독일 에르푸르트에 가면 루터의 동상이 있습니다. 이 동상에는 시편 118편 17절이 적혀 있습니다. “내가 죽지 않고 살아서 여호와의 행사를 선포하리로다”. 루터의 삶과 어울리는 구절입니다.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는 구절은 살게 하는 구절입니다. 그런데 이 구절이 수많은 사람을 죽게 하는 구절이 되었습니다. 진리를 깨달은 사람의 위험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하박국은 당시의 세태를 보면서 “왜 악인이 잘 됩니까?” “왜 의인이 고통을 당합니까?” “의인이 고통을 당하되 왜 악인이 의인을 핍박합니까?”라는 질문을 합니다. 그는 하나님께로부터 해답을 얻습니다. “보라 그의 마음은 교만하며 그 속에서 정직하지 못하나 의인은 그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이 해답은 구약의 하박국과 신약의 바울 그리고 중세의 아우구스티누스 그리고 개혁자 루터로 이어지는 신앙의 계보를 통해 신앙인의 위대한 해답으로 주어지고 있습니다.

       칼 바르트는 20새기 신학의 거장입니다. 그가 미국을 방문하였을 때에 여러 신학교에서 강의하였습니다. 어느 한 학생이 바르트에게 질문하였습니다. “박사님, 당신의 마음을 사로잡는 가장 큰 진리는 무엇입니까?” 그는 “예수님께서 나를 사랑하신다는 것입니다. 내가 이것을 압니다. 성경이 내게 그렇게 말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라고 대답하였습니다. 우리의 신앙의 해답을 분명히 아는 것은 큰 축복입니다. 악인이 성하고, 진리가 왜곡되고, 교회가 어려움을 당하고, 그리스도인들이 고난을 당하는 시대입니다. 우리도 하박국이 하나님께로부터 받았던 해답으로 힘을 얻기를 바랍니다.

    첫째, 악인은 교만하며 정직하지 못합니다.

    4절 상반절에는 “보라 그의 마음은 교만하며 그 속에서 정직하지 못하나”라고 합니다. 교만은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의 심적 자세입니다. 부정직은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의 생활 습관입니다. 교만과 부정직은 다 같이 하나님께 악을 행하는 것입니다. 교만은 그 자체가 부정직입니다. 인간이 하나님께 겸손한 것이 인간의 정직입니다.

       유다 왕 웃시야를 보세요. 역대하 26:16에는 “그가 강성하여지매 그의 마음이 교만하여 악을 행하여 그의 하나님 여호와께 범죄하되 곧 여호와의 성전에 들어가서 향단에 분향하려 한지라”고 합니다. 교만은 곧 악입니다. 사람이 교만하게 되면 하나님께 죄를 범하게 되는 것입니다. 열왕기하 16:2에는 “아하스가 왕이 될 때에 나이가 이십 세라 예루살렘에서 십육 년간 다스렸으나 그의 조상 다윗과 같지 아니하여 그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보시기에 정직히 행하지 아니하고”라고 합니다. 악한 사람은 한결같이 하나님께 정직하지 않습니다.

       ‘교만하며’란 말의 히브리어는 ‘우펠라’입니다. 이 말은 ‘부풀어 오름’을 의미합니다. 무례와 뻔뻔스러움을 나타냅니다. 교만한 자라는 말은 안정되지 못함을 나타내는 표현입니다. 이런 심적 상태가 왜 나타나는지 아십니까? 하나님으로부터 떠나있기 때문입니다. 교만한 자세를 보세요. 예수님께 비유로 말씀하신 바리새인 기도의 모습입니다. 그는 하나님께 고개 숙이지 않습니다. 말이 너무 많습니다. 자기 자랑이 끊이지 않습니다. 그의 삶에 회개가 없습니다. 이것이 교만의 모습입니다.

       주역(周易)에는 용(龍)을 빗대어 지도자의 성장과 소명을 설명합니다. 첫째는 잠룡(潛龍)입니다. 물속에서 때를 기다리는 용으로 지도자가 준비하는 과정을 뜻합니다. 둘째는 현룡(見龍)입니다. 모든 준비를 끝내고 물 밖으로 나타난 용입니다. 셋째는 비룡(飛龍)입니다. 하늘을 오르는 용으로 자신의 능력을 뽐내는 시기입니다. 넷째는 항룡(亢龍)입니다. 비룡이 너무 높이 올라간 나머지 교만하고 자만하고 추락하여 아무도 그를 추앙하지 않습니다. 그 결과 용이 눈물을 흘립니다. ‘용의 눈물’입니다. 누구나 너무 높이 올라가 자만하게 되면 이렇게 떨어질 때가 있다는 것입니다. ‘비둘기들은 자랑삼아 높이 날다가 너무 높이 날아오른 나머지 매의 먹이가 되고 만다’는 말이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13:4에는 사랑을 설명하면서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라고 합니다. 자랑하지 않는 것, 교만하지 않는 것이 사랑입니다. 그런데 이 말을 바꾸면 어떻게 됩니까? “악은 자랑하며 교만하며”라고 할 수 있습니다. 자랑과 교만은 결코 자신과 남에게 도움을 주지 못합니다.

       성경에 기록된 위대한 영웅들의 공통분모는 정직이었습니다. 겸손과 정직은 지도자의 필수 요건입니다. 정직은 리더십의 모퉁잇돌입니다. 야곱은 그의 자식들이 애굽에서 잘못 가져온 돈을 돌려주라고 하였습니다. 욥의 정직은 부단히 시험을 당했고 그 것을 잘 견디었습니다. 정직을 포기하는 것보다 다른 모든 것을 포기하는 것이 낫습니다(잠19:1). 정직하게 사는 것이 예배하는 것보다 더 중요합니다(잠21:3). 정직은 그 하나만 가지고도 하나님의 사랑을 받습니다.

       교만 그 자체가 부정직입니다. 겸손하면 정직하게 됩니다. 내가 가진 게 얼마나 됩니까? 내가 아는 게 뭐 있습니까? 내가 높아도 얼마나 높습니까? 겸손은 정직입니다. 구약성경의 열왕기상, 열왕기하, 역대상, 역대하를 재미있게 읽는 법이 있습니다. 왕들의 이름이 열거되고 있는 것을 크게 둘로 구분해 보세요. 한 쪽은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하게 행하여”라고 합니다. 선한 왕들에 대한 표현입니다. 한 쪽은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하여”라고 합니다. 악한 왕들을 이렇게 말합니다. 정직하지 않는 것은 악을 행하는 것입니다. 부정직은 곧 악입니다. 지금도 하나님은 우리의 완벽함을 기대하지 않으십니다. 정직함을 원하십니다. 악에 대항하는 방법은 겸손과 정직입니다. 겸손과 정직으로 악한 세상을 이기는 여러분이 되기를 바랍니다.

    둘째,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삽니다.

    4절 하반절에는 “의인은 그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고 합니다. 악인의 교만과 악인이 세상에서 성공하는 듯한 것에 대한 의문이 있습니다. 이에 대한 하나님의 해답은 바로 “의인은 그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는 말씀입니다. 의인이 누구입니까? 믿음으로 사는 자입니다. 의인은 믿음으로 살고, 믿음으로 살면 의인이 됩니다.

       ‘믿음’은 히브리어로 ‘에무나토’입니다. 이 말은 공평, 견고, 확실, 영원 등의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특별히 신뢰성에 기초하여 증명되는 개인의 품성이나 행위의 공평함을 뜻합니다. 믿음으로 산다는 말은 공평하게 살고, 견고하게 살고, 확실하게 산다는 의미입니다. 바울과 루터에 의하여 이 말씀이 해석되었습니다. ‘오직 믿음’으로 산다는 말은 인간의 어떤 행위도 구원을 받게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아우구스티누스와 신학적인 대립을 가졌던 펠라기우스 학파는 사람은 유대인의 의식적인 율법에 순종함으로 의를 얻는 것이 아니고, 다만 도덕적 율법을 행함으로 말미암아 의를 얻는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사람들 가운데 구원받을 만큼 행위가 온전한 자가 있습니까?

       욥기 22:3에는 “네가 의로운들 전능자에게 무슨 기쁨이 있겠으며 네 행위가 온전한들 그에게 무슨 이익이 되겠느냐”고 합니다. 인간 가운데는 행위가 온전한 자가 없습니다. 또 사람들이 보기에는 행위가 온전한들 그 온전히 인간의 기준에 불과합니다.

       예수님께서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는 말씀을 자주 하십니다. 성경에 기록된 것만 7번입니다. 예수님의 발에 향유를 부은 여인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이 여인에게는 사랑을 많이 베풀었다고 칭찬하셨습니다. 그러나 “네 사랑이 너를 구원하였다”고 하시지 않고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여리고를 지나가실 때에 “다윗의 자손이여” 소리치며 고쳐달라고 하던 맹인에게 그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열 사람의 한센 환자 가운데 고침 받은 후에 예수님께 와서 감사했던 사마리아 사람에게 그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옷 가에 손을 대고 나은 열 두해를 혈루증으로 앓던 여인에게 그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사랑을 많이 베풀어도, 위대한 행동을 해도 구원은 그것 때문에 구원받는 것이 아닙니다. 오직 믿음 때문입니다.

       믿음은 인간의 노력이라는 침몰하는 배에서 필사적으로 뛰어내리는 행동이라고 합니다. 포도나무의 비유를 보세요.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열매를 맺는 것이 아니라 가지에 붙어 있는 것입니다. 바울은 이 사실을 “그리스도 안에”라는 말로 표현하였습니다. 바울의 서신에는 이 말이 64회나 나타납니다. 이 말은 마치 노아 시대에 방주 안에 있는 것과 같습니다. 방주 밖은 죽음이지만 방주 안에 있다는 것만으로도 삽니다. 믿음은 세상의 죽음으로부터 지켜주는 방주입니다.

       요한복음 6:47에는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믿는 자는 영생을 가졌나니”라고 합니다. 믿으면 영원히 삽니다. 의인은 믿음으로 살고, 믿음은 살게 하는 것입니다. ‘믿다’라는 용어는 성경에 272번 사용되었습니다. 믿음이 얼마나 소중한가를 의미합니다. 믿음은 성경 전체의 주제입니다.

       모태신앙이란 말이 있습니다. 어떤 이는 모태신앙을 자랑합니다. 물론 모태에서 어머니로부터 신앙을 전수한 것이 얼마나 소중합니까?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현재적 신앙입니다. 어머니의 신앙이 아니라 나의 신앙입니다. 과거의 신앙 아니라 현재의 신앙입니다.

       사도신경의 “내가 믿습니다”(Credo)라는 말은 굉장히 중요한 고백입니다. 믿음(belief)은 내적인 확신을 의미합니다. 신앙(faith)은 외적인 행동을 의미합니다. 이 모든 신앙은 현재적이어야 하고, 우리의 신앙고백은 언제나 현재로 고백하는 신앙입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11장의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라는 말은 믿음이 지금, 현재라는 영역에서 작용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믿음은 과거나 미래가 아닙니다. 현재적 실상이 믿음입니다.

       우리의 행위는 믿음을 따라야 합니다. 우리의 믿음은 행위를 받쳐줘야 합니다. 신앙과 행위의 일치가 진정 믿음으로 사는 삶입니다. 야고보는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 “행함으로 내 믿음을 보이리라”고 합니다. 행함과 믿음은 하나입니다. 믿음이 없는 행함도, 행함이 없는 믿음도 다 헛것입니다.

       프랑스의 철학자 마리우스 블롱델은 “어떤 사람이 믿는바가 무엇인지 이해하고 싶으면 그의 말에 귀 기울이지 말고 그의 행동을 눈여겨보라”고 하였습니다. 의인은 믿음으로 사는 자입니다. 의인은 믿음의 행위를 가진 자입니다. 의인은 믿음과 행위가 일치된 자입니다.

       남북 전쟁이 막바지일 때 남군의 리(Lee)장군이 아포마톡스에서 북군의 그랜트 장군에게 항복하였습니다. 전 남부 사령관 헨리 와이즈의 아들은 신생 미합중국에 충성을 맹세하였다고 그의 아버지에게 말했습니다. 아버지 헨리 와이즈는 아들의 말을 듣고 “우리 가문에 오점을 남겼다”고 하였습니다. 남부 연합군의 지휘관이기도 했던 아들은 아버지에게 자기의 입장을 변호하였습니다. “그렇지만 아버지, 리 장군이 그렇게 하라고 조언하였어요”. 이 말을 들은 와이즈는 1분도 안되어 입장을 바꾸었습니다. “그렇다면 상황이 다르구나. 리 장군이라면 어떤 조언이라도 옳지”. 

    리 장군에 대한 신임을 의미합니다. 와이즈 장군은 리 장군을 철저하게 신뢰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말과 행동이 다른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세상에서 이런 사람이 되고 싶지 않습니까? 나의 어떤 말이라도 사람들이 긍정하고, 나를 옳다고 인정하는 삶을 살고 싶지 않으십니까? 내가 믿는 하나님과 나의 믿음이 인정받는 삶을 살고 싶지 않으십니까? 이런 삶을 살아야 의인다운 삶입니다.

    결론

    키에르케고르는 “기독교의 믿음을 저버리는 최악의 변질은 그 믿음이 단순히 문화의 일부가 되어버리는 것이다”고 하였습니다. 신앙이 머리에 머무는 것입니다. 신앙이 이념이 되어버리는 것입니다. 신앙은 생활이어야 합니다. 우리가 의인답게 살려면 믿음으로 살아야 합니다.

       진리가 폄훼되고 믿음이 훼손되는 시대에 우리가 삽니다. 누가복음 18:8에는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고 하십니다. 지금도 주님은 내게 이렇게 물어보십니다. 믿음이 보입니까? 믿는 자가 보입니까? 의인이 살아 있습니까?

       의인이 살기 힘든 시대입니다. 믿음을 보기 힘든 시대입니다. 진리가 폄훼되는 시대입니다. 이런 시대에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삽니다. “의인은 그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이 말이 우리에게 은혜가 되고, 삶의 지혜가 되고, 악을 능가할 수 있는 용기가 되기를 바랍니다.

    우리 모두가 어려운 때에 믿음으로 넉넉히 승리할 줄 믿습니다.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하박국 2:4, 로마서 1:16-17, 갈라디아서 3장, 히브리서 10:38)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시기 600여 년 전 예루살렘의 유대인들은 강포하고

    분쟁과 패역이 가득하여 제 멋대로 살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율법을 지키고 여호와 하나님께 제사를 올리면, 자신들이 할 바를

    다한다고 생각했지요.

    이런 죄악 속에 있는 남 유다를 보고 여기 하박국 선지자는 합1:2-3 보면

    내가 (그렇게) 부르짖어도 듣지 아니하시니 "주여, 어느 때까지리이까?

    내가 강포로 말미암아 외쳐도 주께서 구원하지 아니하시나이다."라고 

    원망 섞인 어조로 '어찌하여 나로 하여금 이 시대에 악인이 의인을 에워싸는 꼴을 보게 하시느냐'고 하나님께 따지며 불평을 늘어놓습니다.

    시편37:8에 분을 그치고 노를 버리며 불평하지 말라고 하셨는데도 말이지요

    이러는 하박국 선지자를 보면 꼭 적국 니느웨를 향해 가서 외치라는

    하나님의 명을 거역하고 그 반대편으로 도망갔다가 바다에 제물로 받쳐져

    큰 물고기 안에 사흘 동안 있으면서, 주의 은혜에 감사하고 결국 사흘 동안

    걸어서 니느웨로 가 하나님의 뜻을 전하는 요나 선지자가 떠오릅니다.

    반면 이런 백성들을 보고 돌이키기를 눈물로 호소했던 예레미야 선지자도

    있었지만, 하나님께서는 바벨론의 왕 느부갓네살을 종으로 세워 이스라엘을

    철저히 진멸하시고 끝내 70년간 바벨론으로 끌려가 포로생활을 하게

    하십니다.

    그러나 이미 하나님께서는 170여 년 전에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 지금의

    이란지역에서 일어날 페르시아의 왕 고레스에게 이례적으로 기름을 부으셔(사45장) 구원해 주실 것까지 예비해 놓으셨다는 사실에 진정 하나님은

    살아 계시고 전 인류의 역사를 주관하시는 분이라는 것을 알진대,

    당시의 이스라엘은 노아의 방주 때처럼 부패와 타락으로 하박국1:4

    '율법이 해이하고 정의가 전혀 시행되지 못하니, 하나님께서 나서셔야 할 것

    아닙니까? 왜 잠잠하시나이까?' 라는 하박국이 호소에

    하나님께서는 위에서 살펴본 대로 내 이방 바벨론을 세워서라도 유대를 심판하겠노라고 경고를 하시지요.

    왕궁은 불타고 예루살렘 성전이 무너지며 아주 철저히 땅은 황폐화되지만,

    실상 70년 동안 그 땅은 안식을 누리게 됩니다.(역대하36:18-21)

    그러자 하박국이 다시 하나님께 반문합니다.

    1장13-17절, 주께서​는 눈이 정결하시므로 악을 차마 보지 못하시며,

    패역을 차마 보지 못하시거늘 어찌하여 거짓된 자들을 방관하시며,

    어찌(하필이면) 포악한 바벨론을 들어 의인인 이스라엘을 징벌할 수

    있습니까?

    주변 여러 나라를 무자비하게 멸망시키는 것이 옳으니이까? 라고요.

    이에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교만과 불의, 우상숭배와 거짓스승 등

    너희 죽은 율법과 위선에 가득 찬 제사는 도무지 생기가 없어.

    의롭지 못한 것은 바로 너희들이야! 내가 바벨론을 들어 너희를 응징하고 난 다음에 그 바벨론도 이방인이지만 고레스를 나의 종으로 세워서 너희들을

    해방시킬거야...그러니 너는

    이 묵시를 판에 명백히 새기되 달려가면서도 읽을 수 있게 하고,(2:2)

    이 묵시는 정한 때가 있나니(이사야, 예레미야, 다니엘서) 그 종말이 속히

    이르겠고 결코 거짓되지 아니하리니, 비록 더딜지라도 (너희는) 기다리라.

    지체되지 않고 반드시 응하리라.(2:3)고 약속하십니다.

    여기 고레스 왕은 왕으로 오실 예수 그리스도의 예표입니다.

    갈라디아서 3:22-24절, 믿음이 오기 전에 우리는 율법 아래 매인 바 되고

    계시될 믿음의 때까지 갇혔느니라. 성경이 모든 것을 죄 아래 가두었으니,

    이는 믿는 자들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약속을 주려

    함이라.

    이같이 또 하나님 앞에서 아무도 율법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되지 못할 것이 분명하니 이는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 하였음이라.(갈3:11)

    이같이 율법이 우리를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초등교사(몽학선생)가 되어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게 하려 함이라.

    갈라디아서 2:20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바로 이것이 하박국 선지자가 하나님께 받은 묵시라는 생각이 안 드시나요?

    그러자 비로소 하박국이 <의인은 그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라는

    확신을 갖게 되고, 주께 기도와 찬송을 드리게 됩니다.(합3장)

    이 말씀은 신약성경 3곳에서 인용되는데 중요하기 때문에

    로마서1:16-17절만 읽어 보겠습니다.

    ​내가 그리스도의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는 복음이

    믿는 모든 자를 구원에 이르게 하는 하나님의 권능이기 때문이라.

    먼저는 유대인에게요 또한 그리스인(이방인)에게로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믿음에서 믿음까지 계시되어 있나니

    이것은 기록된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롬1:16-17, KJV역)

    어떻습니까? 이 말씀을 보고 카톨릭 신부였던 루터는 종교개혁을 하였으며,

    18C 영국의 성공회 ​출신 존 웨슬리 선교사는 미국에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선상에서 이 말씀을 보고 깨달아 영국의 복음주의 운동을 일으켰답니다.

    ​이 말씀은 성경 전체를 대변하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우리도 진정 성령님의 도움으로 나의 뜨거운 가슴에 믿음의 열매가 삶 속에 드러나시기를 기도 드립니다.

    갈라디아서 5장22-23절에 성령의 열매로 충성이 있지만, 헬라어 원의미로는

    믿음을 뜻합니다. 이처럼 믿음도 우리가 살아가면서 깨닫고 맺어야 할

    하나님의 의요 은혜입니다.​ 믿음이 내 뼈속까지 베어 있어야 내 마음과 뜻과

    힘을 다하는 순종도 충성도 뒤따르게 되는 것이지요.

    이런 하나님을 하박국 선지자는 찬양 합니다.​

    ​​

    주 여호와는 나의 힘이시라. 여호와여, 주는 주의 일을 이 수년 내에

    부흥케 하옵소서. 주의 진노 중에라도 긍휼을 잊지 마옵소서.(3:2)

    그의 광명이 햇빛 같고 광선이 그의 손에서 나오니 그의 권능이 그 속에

    감추어 졌도다.(3:4) (마치 예수님의 등장을 예견하듯 하지요?)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하지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먹을 것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나는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리로다.(3:17-18, 사61:10)고

    고백합니다.

    여기 믿음은 무엇입니까?

    믿음장이라고 하는 히브리서11장 1절에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라고 하셨습니다.

    하박국은 정한 때에 장차 일어날 일들을 보지는 못하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기뻐하며, 나의 발을 사슴과 같게 하사 나를 나의 높은 곳으로 다니게

    하실 줄로 믿어 의심치 않았던 것이지요.(3:19)

    성경엔 16명 정도 하나님께서 믿음으로 살게 한 의인들이 많이 등장합니다.

    의인의 조건이 무엇입니까?

    이들은 한 결 같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렸고,

    반드시 하나님이 살아계신 것과 하나님을 찾는 자들에게는 반드시 상 주실 것이라는 걸 믿었습니다.(히11:6)

    또한 이 세상은 잠시 머물다 가는 나그네요,

    이제는 하늘에 있는 본향을 더 사모하였습니다.(히11:13-16)

    아벨은 양의 첫 열매로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를 하나님께 드렸으며,

    에녹은 어떤 고난 속에서도 하나님과 동행하여 죽지 않고 올라갔으며,

    노아는 산꼭대기에 미친 놈 소리를 들어가면서도 하나님을 경외하며

    시키시는 대로 1,2년도 아니고 100년을 뚝딱뚝딱 3층 방주를 만들었습니다.

    믿음의 조상이란 아브라함은 어땠나요?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 순종하며 장래 갈 바를 알지 못하고 가나안 땅으로

    나아갔으며, 하늘의 무수한 별들을 보라는 하나님의 언약을 믿었는바

    100세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단산한 사라와 합방하여 이삭을 낳았고,

    어떻게 얻은 자식인데 하나님께서 외아들을 번제물로 받치라고 명하시자

    일언방구도 없이 사흘을 걸어 모리 산에 올라 하나님께서 능히 이삭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실 줄로 믿고 드립니다.(창22:1-14, 약2:21)

     

    ‘이 믿음 더욱 굳세라~! 주가 함께 하신다.

    어둔 밤에도 주위 밝은 빛 인도하여 주신다.’이 얼마나 대단한 믿음입니까?

    모세와 다윗의 삶은 어떠했습니까?

    특히 욥은 사탄의 시험으로 열 자녀와 모든 재산을 다 잃고,

    자신의 육신에 욕창이 와 만신창이가 되어도

    하나님을 욕하지 않으며 하박국과는 달리 불평하지 않았으며,

    오히려 내가 날 때부터 알몸이었고, 지금까지 누린 과거의 삶에 감사하며,

    지금 나에게 이러한 고난과 불행을 주시는 데에는 분명 하나님의 뜻이 있을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어찌하여 악인이 생존하고 장수하며 세력이 강하냐?고 의문을 갖지만,

    그들의 날을 행복하게 지내다가 (결국에는) 잠깐 사이에 스올(지옥)에

    내려갈지라.(욥21:7-14) 라고 자신합니다.

    지금 세월호 침몰과 신출귀몰한 유병언 일가를 보면서 이 세상도 이처럼

    불공평하고 정의롭지 못하다고 우리는 혹 푸념하고 있지 않나요?

    요나나 하박국 선지자처럼 말입니다.

    그러나 욥의 경우처럼 나의 인생이란 굴곡에서도 하나님의 의는 길게

    보아야 합니다. 성급하게 판단하지 말고 뚜벅뚜벅~ 걸어야 합니다.

    비록 현실에 있어서는 악인이 의인을 삼키는 것 같지만, 언젠가는 정녕

    마지막 심판 날에는 나의 믿음대로 하나님의 의는 이루어질 것이다...그러면 하나님은 정의로우시고 공의로우시기 때문에 공평한 저울과 추로 이 세상을 다스리고 계신다는 확신이 듭니다.(사5:16, 11:4-5, 시9:8, 41:10, 48:10)

    그러면서 욥이 놀라운 말을 하지요~!

    "내가 알기에는 나의 대속자가 살아 계시니 마침내 그가 땅 위에 서실

    것이라. 내 가죽이 벗김을 당한 뒤에도 내가 육체 밖에서 하나님을 보리라." (욥19:25-26)

    ​이게 무슨 뜻인가요?

    마치 장차 올 예수님을 나의 대속자로 알고,

    부활하여(또는 나의 육체로부터) 하나님을 볼 것이라는 소망을 피력합니다.

    악인의 이기는 자랑도 잠시요, 사곡한 자의 즐거움도 잠간이라.(욥20:5)

    나의 가는 길을 오직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정금 같이 나오리다.(욥23:10)라고

    자신합니다. 저는 욥기를 보면 소름이 돋습니다.

    어찌 저리 의연할 수가 있을까? 하나님께서 의인은 오직 믿음으로 살게

    하시고, 또한 욥은 순종하며 하나님의 뜻대로 살았구나하고 느껴지지요.

    마15:22-28 가나안 여인이 마귀 들린 딸을 위해 예수님을 좇을 때에

    그 모진 수모와 멸시에도 ‘개들도 자기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빵 부스러기를 먹나이다.’함으로써, 예수님께서 “네 믿음이 크도다.

    네가 원하는 대로 이루어지리라.”고 그 여인의 믿음을 칭찬하십니다.

    또한 마태복음 8장 5-13절을 보면, 중풍병으로 누워있는 하인을 고치기

    위해 한 백부장이 예수님 앞에 나아와 ‘주여 내 집에 들어오심을 나는

    감당하지 못하겠사오니 다만 말씀으로만 하셔도 내 하인이 낫겠나이다.‘

    예수님은 간구하는 그 겸손함을 보시고, 놀랍게 여겨 “네 믿은 대로

    될지니라.”하시죠. 믿음대로가 아니고 네가 믿은 대로입니다.

    이것이 바로 살아 있는 믿음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눅7:1-10, 요4:43-54)

    우리 성도님들은 지금 자신의 믿음이 살아 있는 믿음인지 죽어 있는

    믿음인지, 행위가 따른 믿음인지 행위 없는 믿음뿐인지 살펴보세요!

    여기 히브리서 11장의 믿음은 믿음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야고보서에서 보듯 행동하는 믿음까지 요구합니다.(약2:14-26)

    야고보는 행위가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임을 확신하기에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합2:4, 롬1:17, 갈3장, 히10:38)

    라는 바울 서신과는 정면으로 충돌하는 것 같으나, 전혀 아닙니다.

    단지 야고보는 믿음을 바탕으로 한 그리스도인들의 구원의 열매로 실제적인 행함을 더욱 강조한 것이지요. 즉, 1장에 믿음으로 시작하여 2장에서는 그에 따른 행위를 강조합니다.

    그리스도인이라면 이렇게 살아야 한다는 생활지침서인 셈이지요.

    특히 여기 행함이란 그 무엇보다도 사랑과 자비를 행하는 것을 말합니다.

    (약1:27, 2:8, 13-16, 3:17-18)

    네가 보거니와 (아브라함의) 믿음이 그의 행위와 함께 일하고,

    행위로 믿음이 완전하게 되지 아니하였느냐?”(약2:22)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그것을 그에게 의로 정하셨다 함과 같으니라.

    그런즉 믿음으로 말미암은 자들은 아브라함의 자손인 줄 알지어다.(갈3:6-7)

    결국 믿음이란 보이지 않는 것들이 있음을 믿는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 실체를 믿음으로써, 우리 삶의 기반이 되고 기준이 되며 출발점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지요.

    보이지 않는 것의 본질이 하나님이라면, 우리 삶의 현상은

    그 믿음으로 살아지고 그 믿음에서 의당 선한 행동이 나온다는 것입니다.

    좀 어렵나요?

    이를테면 '하나님은 내 안에 살아 계시고 하늘나라는 실제 존재 한다'는

    믿음이 우리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예수 그리스도가 나를 위해 십자가에 죽으셨으니 내 주를 본 적은 없으나

    다시 오실 것을 믿고 바라는 것이 진정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가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실생활은 그 모두가 신뢰를 바탕으로 이루어집니다.

    나 자신은 물론, 내 가정, 내 일터와 국가가 모두 서로간의 믿음이 없으면

    하루하루를 꾸려가기가 어렵습니다.

    특히나 부부지간에 신뢰가 무너지면, 사소한 것부터 모든 것에 불신이 쌓여

    ​삐걱대고 어긋나기 시작합니다.

    시편 37편 3절 여호와를 신뢰하고 선을 행하라.

    땅에 머무는 동안 그의 성실을 먹을거리로 삼을지어다.

    또 여호와를 기뻐하라. 그가 네 마음의 소원을 네게 이루어 주시리로다.

    네 길을 여호와께 맡기라. 그를 의지하면 그가 이루시고

    네 의를 빛 같이 나타내시며 네 공의를 정오의 빛 같이 하시리로다.

    조금 더 볼 까요! 전 아주 37이라는 숫자를 좋아 합니다.

    워낙 성경에서 제3일, 제7번 째 등등 숫자적 의미를 강조하는 것도 있지만,

    제가 예수님을 몰랐을 때부터 은연중에 저의 아이디도 ‘열린37’로 만들고,

    제가 10을 벌면 7은 남을 위해, 3은 내 가정을 위해 쓴다는 의미를 갖고

    있었습니다. 그래서인지 여기 시편 37편을 아주 좋아합니다.

    이 37편은 내 주변이 궁핍할 때, 특히 내 믿음이 곤궁할 때, 내 마음이

    한없이 아프고 초라할 때 묵상하면

    제 마음에 물밀듯, 제 배안에 생수의 강이 넘쳐흐르는 것을 느낍니다.

    이 믿음 역시 말씀을 통한 하나님의 은혜이고, 성령님의 은사이기에 가슴이

    벅차오르는 것입니다.

    여호와 앞에 잠잠하고 참고 기다리라. 자기 길이 형통하며

    악한 꾀를 이루는 자 때문에 불평하지 말지어다.

    분을 그치고 노를 버리며 불평하지 말라. 오히려 악을 만들 뿐이라.

    진실로 악을 행하는 자들은 끊어질 것이나, 여호와를 소망하는 자들은

    땅을 차지하리로다.

    잠시 후에는 악인은 없어지리니, 네가 그곳을 자세히 살필지라도 없으리로다.

    그러나 온유한 자들은 땅을 차지하며 풍성한 화평으로 즐거워하리로다.

    의인의 적은 소유가 악인의 풍부함 보다 낫도다.

    악에서 떠나 선을 행하라. 그리하면 영원히 살리니,

    의인의 입은 지혜로우며 그의 혀는 정의를 말하며,

    그의 마음에는 하나님의 법이 있으니 그의 걸음은 실족함이 없으리로다.

    여호와를 바라고 그의 도를 지키라.

    ​온전한 사람을 살피고 정직한 자를 볼지어다.

    모든 화평한 자의 미래는 평안이로다.(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목하고, 믿음의 은혜가 들어감으로써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할 수 있으니까요.)

    하지만 범죄자들은 함께 멸망하리니 악인의 미래는 끊어질 것이나,

    의인들의 구원은 여호와로부터 오나니 그는 환난 때에 그들의 요새이시로다.

    여호와께서 그들을 도와 건지시되, 악인들에게서 건져 구하심은

    그를 의지한 깨닭이로다.(4-40절)

    로마서 3장23-24절,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이 이르지 못하더니 ,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가 되었느니라.

    디모데후서3:12 무릇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박해을 받으리라.

    예수님은 이 땅에 오셔서 얼마나 세상으로부터 핍박을 받으셨습니까?

    모진 산고의 고통 끝에 한 생명이 태어나듯이

    나 하나 죽어 한 알의 밀알이 된다면, 그 씨앗은 싹이 트고 자라고 또 자라

    많은 결실을 맺게 될 것입니다.

    사도 바울처럼 날마다 나의 자아를 죽이고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는 복음, 즉

    예수 그리스도로 내 마음 안에 작은 성전을 지어 간다면,

    이 세상에 두렵고 무서워할 것이 뭐가 있겠습니까?

    마라나타~~~!!! 이미 내 속에 예수님은 와 계십니다.

    주님의 뜻에 따라 그 믿음 굳건히 붙잡고 하루하루 삶 속에서도 승리하시기를 축원합니다.​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사도 바울은 로마서 1장 17절에서 복음의 본질을 압축해 선포한다. 그는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난다”고 말하며, 죄와 사망의 그늘 아래 있는 인간이 어떻게 구원에 이를 수 있는지를 밝힌다.

    율법은 죄를 알게 하지만, 죄로부터 자유를 주지 못한다. 오히려 죄인에게는 심판과 저주로 다가온다. 그러나 복음 안에는 전혀 다른 길, 곧 하나님의 의가 드러난다. 이 하나님의 의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 나타난 구속의 사건이며, 죄인을 의롭다 하시는 하나님의 일방적인 은혜이다.

    바울은 복음을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한다”고 설명한다. 이는 믿음이 단순히 개인의 결단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시작된 믿음이 또 다른 믿음으로 이어지며 공동체와 역사 속에서 흘러간다는 의미다. 주께서 베푸신 사랑을 받아들이는 믿음에서, 다시 그 믿음을 나누고 전하는 믿음으로 확장되는 것이다. 그 결과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는 선언이 가능하다. 의인은 율법의 행위가 아니라,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믿음으로 받아들임으로써 살아난다.

    이 말씀은 종교개혁의 핵심 정신이 되었고, 오늘 우리 신앙의 근간이 된다. 인간은 스스로 의로워질 수 없다. 어떤 행위나 공로로도 하나님 앞에서 의로 설 수 없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나타난 하나님의 의를 믿음으로 받아들일 때, 우리는 의롭다 함을 얻고 생명을 누리게 된다. 믿음은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들이는 통로와도 같다. 주께서 값없이 주신 선물을 가감없이 받아들일 때, 그 안에 구원의 능력이 드러난다.

    바울이 전한 이 선언은 오늘 우리에게도 동일하게 도전이 된다. 세상의 눈에는 약하고 미련해 보일지라도, 복음은 죄와 사망을 이기신 하나님의 능력이다. 세상이 무너져도 믿음으로 사는 자는 살아남을 것이라는 약속이 여기에 담겨 있다. 하박국 선지자가 “의인은 그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고 외쳤던 것처럼, 바울은 로마의 성도들에게 그리고 오늘 우리에게도 동일하게 외친다.

    오늘 우리는 무엇을 붙잡고 살아가고 있는가? 행위와 공로에 의지하는가, 아니면 오직 믿음으로 주어진 은혜를 붙잡고 있는가? 바울의 고백은 우리에게 분명히 말한다.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이 길만이 생명의 길이며, 구원의 길이다.


    믿음으로 살리라(갈라디아서 3:10-14)

    무릇 율법 행위에 속한 자들은 저주 아래 있나니 기록된 바 누구든지 율법책에 기록된 대로 온갖 일을 항상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저주 아래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또 하나님 앞에서 아무나 율법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되지 못할 것이 분명하니 이는 의인이 믿음으로 살리라 하였음이니라 율법은 믿음에서 난 것이 아니라 이를 행하는 자는 그 가운데서 살리라 하였느니라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 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아브라함의 복이 이방인에게 미치게 하고 또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성령의 약속을 받게 하려 함이니라

    우리는 근래에 들어 개혁이라는 말을 많이 듣습니다. 정치 개혁, 경제 개혁, 사회 개혁, 나아가서는 의식 개혁…… 그러나 우리는 종종 실망할 때가 있습니다. 또한 자기 개혁 없는 개혁의 부르짖음이 얼마나 어리석은 것인가를 알게 됩니다. 내적으로 자기 자신에 대한 개혁이 없는 사람들이 개혁을 하느니 무엇을 하느니 떠듭니다. 이제는 개혁하자고 외치는 얘기조차도 굉장히 가소롭고, 때로는 역겹게 들리게 쯤 되었습니다. 자기 개혁 없는 개혁, 그것은 아무 것도 아닙니다. 젊은 사람들이 흔히 말하는 대로 웃기는 얘기밖에 안됩니다. 이론도 점점 더 복잡해지기만 합니다.

    오늘은 종교개혁 주일입니다.'개혁'은 영어로 'reformation' 're-form'이라고 하는데 이 말은 순수성으로 돌아간다, 본래성으로 돌아간다, 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교인 가정에 심방을 가보면 가끔 30년 전의 결혼사진을 벽에다 붙여놓은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제는 낡아서 누렇게 변색되었지만, 그 사진을 붙여놓은 의도를 알 것 같아요. 간간이 살아가는 것이 피곤하고 지칠 때마다 '저런 때도 있었는데'하고 원점으로 돌아가 다시 생각하자는 것입니다. 그것이 개혁입니다. 본래의 뜻으로 돌아가자는 것입니다. 종교개혁자의 근본 관심은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입니다. 사회도 아니고, 경제도 아니고, 정치도 아닙니다.

    하나님과 나와의 바른 관계가 관심입니다. 여기서부터 출발하는 것입니다. 거창하게 세상을 바꾼다는 얘기가 아닙니다. 애당초 본래의 관심은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였습니다. 이 관계가 바로될 때에 엄청난 역사가 뒤따르는 것입니다. 이것 없이는 아무 일도 되는 것이 없습니다. 된다면 그것은 허상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개인적 책임을 묻고, 자기 개혁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에이브러햄 링컨이 남북전쟁을 일으켰습니다. 노예해방을 위한 전쟁이니만큼 의미가 큰 것입니다 마는 어쨌든 서로 싸우고, 총을 쏘고, 죽였습니다. 그러나 알고 보면 사실 양쪽이 다 하나님을 믿습니다. 양쪽이 다 찬송을 부르고 하나님 앞에 기도하면서 전쟁을 합니다. 또 간단히 끝날 줄 알았던 전쟁이 7년으로 길어져서 많은 희생자가 생겼습니다. 그래서 대통령의 참모들이 고민에 빠졌습니다. 마침내 한 참모가 대통령에게 이런 질문을 했습니다. "이런 때에 하나님께서 우리편에 계시다면 참 좋겠는데요. 그것을 도무지 알 수가 없군요."링컨은 대답합니다. "무슨 말을 그렇게 하나? 나는 하나님께서 내 편에 계신 지 안 계신지 의심해본 일이 없네. 내 관심은 오직 내가 하나님 편에 서 있는가, 내가 정말 하나님의 일을 하고 있는가, 그것뿐이네." 종교 개혁자의 마음은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가 바로 되었는가, 이것을 묻습니다. 그래서 수도원에 있으면서도 스스로가 죄 많게 느껴져서 '내 죄, 내 죄……'하며 고민을 합니다. 그리고 죄의 문제를 해결합니다. 해결되는 바로 그 때에 개혁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종교개혁자의 관심은 의의 문제요, 죄의 문제요, 의롭다 함을 얻는 문제였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믿음의 문제로, 은혜의 문제로 발전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개혁입니다. 핵심은 죄의 문제입니다.

    오늘의 우리도 이 문제를 한번 생각해보십시다. 수많은 문제들이 있으나 우리는 죄의 문제에 대해서 너무나 오랫동안 소홀히하고 있었습니다. 번영을 생각했고, 생산을 생각했고, 분배를 생각했고, 평등을 생각했고, 자유를 생각했습니다마는 의와 정직함을 잊어버렸습니다.

    보세요. 의의 문제가 없는 번영이 얼마나 한심한 일입니까? 성실이 없는 건설이 얼마나 무서운 일입니까? 이제 와서 사건이 벌어졌느니 안 벌어졌느니 할 문제가 아닙니다. 그것은 어쩔 수 없는 얘기가 아닙니까? 불성실했으면 부러지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언제 부러졌느냐고 물을 것 없어요. 아무 때에라도 불성실은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거짓은 드러나고야 맙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잘못됐으면 잘못된 것이지 거저 잘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불성실하고도 무사하기를 바라는 마음도 잘못된 마음이지요. 또한 교육도 문제가 있지 않습니까? 부모들이 자녀들을 향해서 말을 합니다. 옛날 어른들은 귀가 따갑도록 '착한 사람이 되어라' 했습니다. 무엇을 잘하면 착하다고 칭찬했어요. 그러나 요새는 공부해라, 일이나 해라, 일류대학에 가라, 돈벌어라…… 이렇게 나오지 않습니까? 그 외에는 한마디도 없어요. 정직하라, 성실하라는 말은 들어볼 수가 없어요. 이런 교육이 나중에 어디로 가겠습니까? 지금의 교육이라는 것은 오로지 생산수단이요, 인간을 만드는 게 아니라 돈버는 기계를 만드는 것입니다. 바로 우리의 관심이 여기로 갔다는 말입니다. 여기서부터 개혁이 와야 합니다.

    저는 어제도 결혼 주례를 섰습니다. 신랑 신부가 아주 예뻤어요.

    가끔 어떤 분들이 "목사님, 결혼 주례서는 것이 참 피곤하지요?"라고 묻습니다마는 사실은 얼마나 재미있는지 모릅니다. 여러분들은 뒷모습만 보는 것이지마는 나는 그 두 사람을 앞에 세워놓고 있으니 참 재미있어요. 어쨌든 저는 이런 얘기를 해주었습니다. "그저 남편보고 너무 출세하라고 그러지 마세요. 요새 부끄러움 당하는 사람들을 보니까 하나같이 장가를 잘못간 사람들입니다. 아내가 자꾸 돈벌어라, 출세하라, 밑바닥에서 사니까 창피하다, 하니까 억지로 출세하고, 억지로 돈벌려다가 그 모양이 된 것 아닙니까? 그러니까 얼마를 벌어오든 '우리, 그저 정직하게 삽시다, 화목하게 삽시다'하는 아내가 되세요." 다시 말합니다. 그저 정직하고 성실하게--이것이 소원이요, 이것이 모토(motto)가 되어야지 잘살고 출세하는 것이 뭐 어떻다는 말입니까? 그것이 얼마나 불행하다는 것을 이제는 알만하지 않습니까? 이제 더 무엇을 바랄 것입니까? 다시 한번 생각해보십시다. 부정과 불성실, 그 위에 세워진 번영과 건설은 아무 것도 아니요, 그처럼 위험한 일이 없습니다. 그런고로 하나님 앞에 정직해야 합니다. 남들이 뭐라고 하건 무슨 문제가 됩니까? 그런 것은 중요하지 않아요. 개혁자의 관심은 하나님 앞에 정직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자, 이제 죄문제를 어떻게 해결해야 합니까? 간혹 우리는 쓸데없는 얘기하는 사람들을 봅니다. 지난날의 잘못을 속죄하는 마음으로 얼마를 내놓고, 또 얼마를 사회에 환원하고…… 한심한 소리입니다.

    생각해보세요. 어떤 사람이 도둑질을 했다고 합시다. 이 충격으로 인해서 도둑맞은 집의 부모는 죽었고, 아이들은 고아가 됐습니다. 그야말로 온 집안이 풍비박산입니다. 그 도둑이 나중에 돈벌어 갚겠다 한들 보상이 되는 것입니까? 무슨 소리하는 것입니까? 구제한다고 해서 되는 것입니까? 그 몇백만 배를 준다고 해서 죽은 사람이 살아납니까? 속죄란 없는 것입니다. 지나간 일을 자기가 어떻게 보상하겠다는 것입니까? 요새 걸핏하면 누가 죽었다, 그 다음에 보상한다 하는데 처음부터 보상이란 없는 것입니다. 주는 사람이나 받는 사람이나 다같이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죽은 사람의 것을 누가 받습니까? 받을 사람이 누구입니까? 세상의 죄는 우리 스스로도, 그 누구도 속죄할 수가 없습니다.

    인류 역사를 보면 많은 사람들이 이 죄문제를, 이미 지은 죄의 문제를 해결해보려고 많은 고민을 했습니다. 그래서 그 해결 방법으로 몇 가지를 취하고 있습니다. 하나는 육체에 호소해서 금식을 하고, 규율을 엄하게 지키고, 심지어는 자학행위를 하면서까지 고행을 합니다.

    일평생 고행을 해서 속죄하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죽을 때까지 고행을 해도 죄사함받을 수 없습니다. 또 감각에 호소해서 성례에 참례하고, 명상하고, 입신하고, 신비체험을 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런다고 죄가 사해지던가요? 또 의지에 호소해서 구제하고, 봉사하고, 선행하고, 업적을 세우고, 나라를 위해서 굉장한 일을 했다고 해서 죄가 사해지는 것입니까? 어림도 없는 얘기입니다. 그런다고 해서 그 뼈아픈 상처가, 그 죽은 사람이 되살아납니까? 세상에서는 그런 얘기를 하지만 하나님 앞에나 양심 앞에 이것은 절대 불가능한 것입니다. 내 죄의 문제는 내가 해결하지 못하며, 해결한다고 하는 속죄에 관한 얘기는 지위일 뿐이요, 거짓말입니다. 스스로 속는 것이요 남을 속이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제 의롭게 되는 길이 어디에 있습니까? 종교개혁자의 관심은 여기로 돌아옵니다. 오늘의 본문은 말씀합니다. '율법의 길로는 의롭게 되지 못한다'--율법에는 고발성이 있습니다. 죄를 고발합니다. 이것이 죄다, 저것이 죄다, 합니다. 요새도 보면 고발과 비판이 해결의 길인 줄로 착각하는 사람들이 있어요. 그래서는 이리 쑤시고 저리 쑤시고 하지만 아무리 쑤셔봐도 치유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것을 듣고 보면서 사람들의 마음만 황폐해질 뿐입니다. 세상에 어디 고발하는 것으로 치료되는 것 봤습니까? 아이들 가르칠 때에도 이게 잘못이다, 저게 잘못이다 하고 자꾸 지적하면 아이들이 집을 나가버립니다. 더 나빠집니다. 그래서 똑똑한 어머니가 자식을 버리는 것입니다.

    '내가 속을 줄 아니?'하며 전부 쓰시는데 끝도 없어요. 이게 됩니까? 고발 가지고는 안되는 것입니다. 율법적 행위는 안 되는 것입니다. 또 율법에 감금성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그래서 한번 죄를 짓고 나면 감옥에 갇히는 마음이 됩니다. 꼼짝달싹할 수가 없어요. 뭘 좀 하려고 하면 '너 같은 놈이, 너 같은 죄인이, 네 과거가 이랬지 않느냐'하게 되어 일어날 수가 없습니다. 율법이라는 감옥에 갇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떤 길이 있겠습니까? 그런고로 종교개혁자는 말합니다.

    전적 타락을 시인하라---total depravity를, 전적으로 타락했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여기서부터 출발하는 것입니다. 구약성경에 보면 하나님의 사랑을 많이 받은 다윗이 나옵니다. 사람의 이름으로는 다윗이 제일 많이 나오는데 그 횟수가 무려 팔백 번 이상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다윗을 사랑하십니다. 그러나 다윗이 의인은 아닙니다. 무서운 죄인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다윗이 사랑을 받은 것은 그의 정직함 때문입니다. 그는 엄청난 죄를 지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하나님 앞에 자복할 때에 '내가 죄를 지었습니다, 내 죄가 항상 내 앞에 있습니다. 어머니의 태로부터 나는 죄인입니다'하고 인정합니다.

    '나 혼자가 아니라 둘이서 지은 죄인데, 공모한 것인데, 그 여자가 잘못했는데……'하는 핑계도 없고, 환경이 어떻다는 말도 없습니다. 누구에게도 책임을 돌리지 않습니다. '내가 죄인입니다'---바로 이것이 종교개혁자의 마음입니다. 그리고 인간의 노력은 다 포기해버립니다.

    의롭고자 하는 노력마저 불가능하다고 인정합니다.

    이런 얘기가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실수로 강물에 빠졌습니다.

    허우적거리며 살려달라고 소리를 지릅니다. 구조대원이 이 소식을 듣고 달려왔습니다. 그런데 사람을 건질 생각은 않고 서서 구경만 하고 있습니다. 옆에 있던 사람들이 빨리 들어가서 건지라고 야단을 해도 대꾸도 않고 가만히 서 있습니다. 물에 빠진 사람이 허우적거리다가 지친 나머지 기진맥진합니다. 그제야 구조대원이 물에 뛰어들어가서 그를 건져냅니다. 사람들은 구조대원에게 물었습니다. "왜 사람을 빨리 건지지 않았오?" 구조대원은 말합니다. "허우적거리며 살려달라고 발악할 때에 물에 들어가면 저가 나를 꽉 붙듭니다. 그렇게 되면 나도 죽고, 저도 죽습니다. 완전히 기운이 빠져서 손을 들어야 구할 수 있어요." 그렇습니다. 완전히 항복한 다음에야 건질 수 있는 것입니다.

    버둥버둥하고 있으면 안됩니다. 스스로 의롭게 해보겠다며 자기 노력과 자기 의지로 백 번을 맹세하고 손을 자르고 해본들 될 일이 아니예요. 그런다고 뭐가 됩니까? 혈서를 쓴다고 되는 게 아니예요. 종교개혁자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인간 스스로는 의롭게 되지 못한다.' 그 노력까지 포기하고 다른 길을 찾습니다. 사도 바울이 말씀합니다. '예수께서 다른 길로 우리를 인도하십니다'---이것이 믿음의 길이요, 의의 길입니다. '오직 믿음으로'하는 것은 self-righteousness---자기 의를 완전히 포기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의롭게 되고자 하는 노력까지도 포기합니다. 그리고 오직 은혜, 오직 하나님의 의를 수용합니다.

    십자가의 은혜를 수용합니다. 그 거룩한 능력을 수용합니다. 그리고 의롭다 함을 얻습니다. 의롭다 함을 얻는, 거기서부터 출발합니다.

    샴마이라고 하는 랍비가 말하기를 모세의 율법에는 365가지의 금지사항과 248가지의 명령이 있다고 합니다. 다윗은 시편 15편에서 이것을 11가지로 요약해서 말씀합니다. 이사야는 이사야 33장 14, 15절에서 5가지로 요약해서 말씀합니다. 미가는 미가 6장 8절에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3가지라고 말씀합니다. 또한 오늘의 본문에 나타난 말씀이기도 합니다마는 하박국 2장 4절에서는 오직 한마디 "의인은 그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라고 요약합니다. 신학적으로 아주 복잡하고 또 중요한 문제를 가진 요절입니다. 이 말씀은 두 가지로 해석이 됩니다. 믿음으로 말미암은 의인은 살리라, 라고 해석되기도 하고,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 라고 해석되기도 합니다. 전자는 교리 문제요, 후자는 윤리 문제가 됩니다. 이 신학적 논단을 이 시간에 구구히 설명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문제는 내 의로 사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말미암은 의로 살고, 내 능력, 내 지혜에 의지하여 사는 것이 아니라 오직 믿음으로 사는 것입니다. 거기에 신앙의 근본이 있습니다.

    오직 믿음으로 살리라---그런고로 믿는 사람은 믿음으로 봅니다.

    다른 사람들이 보지 못하는 세계를 봅니다. 믿는 사람은 불가능한 것을 믿습니다. 도저히 믿을 수 없는 것, 그런 것을 믿습니다. 죄인이 구원받았다는 것, 내가 하나님의 자녀 되었다는 것, 예수께서 나를 위하여 죽으셨다는 엄청난 사실을 믿습니다. 또한 상상할 수도 없는, 불가능한 일을 받아들입니다. 생각해보세요. 저는 성경에서 제일 뻔뻔스러운 사람이 '돌아온 탕자'라고 생각합니다. 자기가 돌아왔다고 아버지가 잔치를 벌여준다 해서 떡하니 잔치상을 받아먹는 그 아들을 좀 보세요. 얼마나 뻔뻔스럽습니까? 형이 투덜거릴만도 합니다. 아버지 재산을 다 없애고 돌아왔는데도 아버지가 영접해주니까 그는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바로 그 염치없는 사람이 믿음의 사람입니다. 나 같은 죄인이 하나님의 자녀 되고, 영원히 죽을 자가 하나님의 사랑을 힘입어서 용서받고 하나님의 자녀 되었다는 것---이것, 수용할 수 있는 것입니까? 이것을 믿고 이것을 받아들이는 데서부터 출발합니다. 이것이 종교개혁자의 마음입니다. '오직 믿음으로'는 오직 은혜요, '오직 은혜로'는 오직 은총입니다. 모든 것이 은혜일 뿐입니다.

    H. A. 아이언사이드 박사가 쓴 책「In the heavener」라고 하는 것이 있습니다. 그 내용에 이런 얘기 한 가지가 인용되고 있습니다.

    엘리자베스 1세 여왕을 암살하려고, 한 여자 자객이 경비병처럼 남장을 하고 궁에 들어갔다가 실패하고 체포되었습니다. 그래서 재판을 받게 되었는데 여왕이 친히 나와 재판을 합니다. 심문을 받는 그녀는 담담하게 말합니다. "내가 잘못된 사람에게 고용되어서 이런 엄청난 죄를 지었지만 저에게 은총을 베풀어주시기를 바랍니다." 여왕이 그에게 "그래, 내가 너를 살려준다면 그 댓가로 무엇을 하겠느냐?"하고 묻습니다. 생명이 경각에 달려 있는 그 순간에 죄인은 "조건이 있는 은총은 은총이 아닙니다."라고 대답합니다. 여왕은 깊이 생각하고는 그를 석방했습니다. 무조건 석방했습니다. 이 사실을 두고 영국 역사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합니다. 여왕에게 그녀만큼 신실하고 헌신적인 여종은 없었다---석방된 이 죄인은 여왕의 종으로 일평생을 살았는데 더없이 성실하게 살았다고 합니다. 이것이 은총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은 무조건 사함 받는 은총을 받았어요. 오직 믿음으로 말입니다. 이제 이 믿음을 가지고 살 때에 그는 조건 있는 생을 사는 것입니다.

    우리의 조건은 미래에 있는 것이 아니라 과거에 있습니다. 내가 받은 은총, 이 조건으로 인해서 남은 생은 은총적 절대조건 안에서 살아갑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입니다. 오직 믿음으로 아무 것도 바랄 것도 없습니다. 더는 자신을 학대할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용서하신 자를 내가 용서 못해도 안됩니다. 이것이 믿음입니다. 하나님께서 용서하셨기에 내가 용서하고, 남이야 뭐라고 비판했든 나는 용서받은 자로 삽니다. 용서받은 죄인으로 삽니다. '오직 총으로'---이것이 자기 개혁의 근본입니다. 이 믿음으로, 이 은총의 세계에서 살아갑니다. '오직 믿음으로'는 '오직 은총으로'를 의미합니다. 여기에 자기개혁도 있고, 사회개혁도 있고, 창조적 역사도 있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10:38

    오직 나의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또한 뒤로 물러가면 내 마음이 저를 기뻐하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
    New American Standard Bible
    BUT MY RIGHTEOUS ONE SHALL LIVE BY FAITH; AND IF HE SHRINKS BACK, MY SOUL HAS NO PLEASURE IN HIM.

    의인은 그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내가 내 파수하는 곳에 서며 성루에 서리라 그가 내게 무엇이라 말씀하실는지 기다리고 바라보며 나의 질문에 대하여 어떻게 대답하실는지 보리라 하였더니 여호와께서 내게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는 이 묵시를 기록하여 판에 명백히 새기되 달려가면서도 읽을 수 있게 하라 이 묵시는 정한 때가 있나니 그 종말이 속히 이르겠고 결코 거짓되지 아니하리라 비록 더딜지라도 기다리라 지체되지 않고 반드시 응하리라 보라 그의 마음은 교만하며 그 속에서 정직하지 못하나 의인은 그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하박국 2:1-4).

    기다림의 의미

    인간에게 가장 어려운 것은 기다림입니다. 인간에게 가장 필요한 것 역시 기다림입니다. 오늘날 우리 사회가 점점 더 폭력적으로 치닫는 것은 기다림이라는 가장 중요한 덕목을 더 이상 배우지 않기 때문입니다. 인간이 태어나 가장 먼저 배우는 것이 바로 이 기다림입니다.

    기다림을 배우지 못하면 정상적인 인간으로 살아가기가 어렵게 됩니다. 우리는 그것을 요즘 아이들을 보며 깨달아야 합니다. 요즘 아이들은 이전 역사에서는 볼 수 없었던 각별한 돌봄 속에 성장합니다. 여간해서는 배고픔이라든가 더러움 같은 것을 배우게 되는 경우가 거의 없습니다. 그만큼 풍요로워지고, 그만큼 여유로워졌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풍요로워지고 여유로워진 만큼 인간은 가장 기본적인 덕목인 기다림을 배우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그 결과 우리 사회는 이전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조급하고 폭력적인 사회가 되었습니다. 다른 이를 배려하는 일은 어리석은 일이 되었고, 능력과 소유를 사용해 가급적 기다림을 줄이는 것이야말로 자유의 대명사가 되었습니다. 그 결과 갑질이 만연하고, 인간관계는 그만큼 파괴되고, 쾌락은 있지만 행복이 없는 삶 속으로 속수무책 현대인들이 던져지고 있습니다. 특히 스마트폰은 기다리기 싫어하고, 무언가 하지 않으면 견디지 못하는 인간들에게 즉석에서 많은 문제들을 해결해 주는 간편한 휴대용 하나님이 되었습니다.

    이런 현대의 삶 속에서 즉석에서 문제를 해결해 주지도 않고, 보이지도 않는 사랑의 하나님을 믿는 것은 그야말로 어리석은 일이 되었습니다. 문제 목사들과 교회들 때문에 교회가 쇠퇴하고 있다고 많은 이들이 생각하지만 그 근본적인 이유는 더 이상 현대인들이 기다림을 배우지 않고, 기다림 자체를 무능력과 동일시하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현대의 그리스도인들은 기다림이 무엇인가를 세상 사람들에게 보여줌으로써 하나님의 창조의 복원에 앞장서야 합니다.

    영적인 기다림은 단순히 하나님을 신뢰하는 일일 뿐 아니라 믿음의 시금석이며 참된 믿음으로 가기 위해 반드시 거쳐야 할 영적 성숙의 과정입니다.

    하박국서의 핵심 메시지는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입니다. 믿음으로 사는 것은 자신들의 의로움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의인의 의인됨은 우리가 신학에서 말하는 ‘전가된 그리스도의 의' 이전에 삶의 방식의 문제라는 것을 보여 줍니다. 의인은 믿음으로 살아야 합니다. 믿음은 곧 기다림입니다. 그 막연하고 고통스러운 기다림 속에서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신뢰는 시가 되고 꽃이 됩니다. 그것이 마침내 찬양으로 터져 나오는 것, 그것이 바로 신앙이며 영광입니다. 하박국 선지자는 우리를 그곳으로 안내합니다.

    구조와 배경

    하박국서는 "선지자 하박국이 묵시로 받은 경고라"라는 말로 시작합니다. 하박국서에는 선지자 자신과 그의 시대에 관한 언급이 전혀 없습니다. 하지만 1:6을 보면 갈대아 사람들이 언급됩니다. 여기서 갈대아 사람은 바벨론 사람을 가리킵니다. 이것으로 미루어 하박국서의 연대는 바벨론이 아시리아를 와해시키고(주전 612년) 고대 근동의 패권을 잡은 주전 600년대 초반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또한 3:13에서 왕이 그 기능을 담당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주전 598년의 첫 번째 예루살렘 함락 사건이 아직 반영되지 않고 있습니다. 하박국은 주전 600년경, 즉 나훔(주전 650) 이후, 예레미야와 동시대에 활동한 인물로 보입니다.

    하박국서의 핵심 구절은 로마서와 히브리서에도 기록된 "의인은 그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2:4)입니다. 이 구절은 하박국서의 핵심일 뿐 아니라 구약 성경 전체를 대표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탈무드에도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

    "모세는 이스라엘에게 613개의 계명을 주었다. 다윗은 그것을 11개(시15편)로 줄였고, 미가는 3개(6:8)로 이사야는 2개(56:1)로 줄였다. 그러나 하박국은 그것을 단 하나로 요약하였다. 의인은 믿음으로 살 것이다."

    의로운 자는 그분의 뜻이 확실한 때나 의심스러울 때나 언제든지 신실하게 그분의 뜻을 기다려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의인에게는 기다림이 필요합니다.

    하박국서는 하나님께서 세상(유다)의 불의를 벌하지 않으시고 방관하시는 것에 대한 선지자 하박국의 탄원으로 시작합니다(합 1:2-4). 하나님은 하박국에게 갈대아 사람들을 통해 유다의 불의를 심판할 것이라고 미리 알려 주십니다(합 1:5-11). 이에 대해 하박국의 두 번째 탄원이 이어집니다(합 1:12-17). 하박국은 "악인이 의인을 치는 것"이 과연 정당한지를 따지듯 묻습니다. 그러자 이 책의 핵심 메시지가 담긴 하나님의 응답이 주어집니다.

    하박국의 통보 (1절)

    1절은 하박국의 통보로서 선지자의 단호한 의지가 담겨 있습니다. 하박국은 파수하는 곳에 서 있습니다. 지금 그는 좋은 소식을 목이 빠지게 기다리는 파수꾼처럼 행동하고 있습니다. 파수꾼은 소식을 알리는 자입니다. 성 앞에 적국이나 지원군이 나타나면 이를 곧바로 성 안의 지휘부에 알리는 임무를 맡은 사람입니다. 하박국은 자신을 그런 파수꾼으로 묘사하면서 하나님이 위기에 처한 유다를 구하러 나타나실 것을 기대합니다. 이 표현은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드러내는 말이기도 합니다. 불굴의 믿음과 의지를 갖고 기다리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단순히 기다리지만 않고 그는 하나님께 항의하는 마음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나의 질문"이라는 말에는 그런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질문이란 단어는 "항의, 비난, 논쟁"이라는 뜻입니다. 이 어휘들은 상대방의 잘못을 따지며 대드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는 선지자가 지금까지 하나님께 불만을 토로한 내용을 가리킵니다. 바벨론이 유다를 무자비하게 짓밟는 것을 하나님께서 그냥 바라보시겠느냐는 것입니다. "불의한 자"를 통해 어찌 하나님의 선택한 백성을 치실 수 있느냐는 비난조의 항의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한편 파수하는 곳과 성루는 성벽 위에 세워진 망대나 요새를 가리킵니다. 파수하는 곳과 성루는 멀리 내다볼 수 있는 높은 자리로서 전략적인 위치입니다. 이곳은 사방을 볼 수 있도록 열려 있습니다. 거기서 하박국은 하나님의 응답을 들으려는 것이 아니라 보려고 합니다. 하박국 선지자는 하나님의 뜻을 보려고 하나님을 향한 불굴의 의지를 가지고 그분이 나타나시길 기다리고 있습니다. 이 불굴의 의지야말로 인간에게 필요한 신뢰의 증표입니다. 모든 것을 선으로 바꾸시는 하나님을 보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인간의 반응입니다.

    인간은 늘 즉각적인 변화와 자신이 원하는 대로의 가시적 성취를 기대하기 마련입니다. 하지만 믿음은 그 너머를 향하도록 인간을 이끌어갑니다. 아무런 변화가 없어도, 가시적인 성취가 없어도, 자기의 뜻이 반영되지 않아도, 모든 것을 선의 도구로 삼으시는 하나님의 능력과 사랑을 끝까지 신뢰하는 것, 이것이 바로 피조물인 인간이 창조주인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배워야 할,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인간의 반응으로서의 사랑인 것입니다.

    하박국 선지자는 그런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를 잘 보여 주고 있습니다. 하박국은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만한 망대로 올라가 그분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가 그렇게 하는 것은 그분이 응답하실 것을 확실히 믿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그런 선지자를 실망시키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의 명령 (2-3절)

    하박국은 마침내 하나님의 답변을 받았습니다. 하나님은 그저 질문에만 답하신 것이 아니라 그 이상의 일을 보여 주시고 명령하셨습니다. 하나님은 하박국에게 당신이 보여 주신 것을 기록하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말씀을 기록하는 것은 더 많은 사람들을 위한 준비입니다. 공간적, 시간적으로 말씀의 전달 범위를 넓혀 주며, 영향력 또한 확장됩니다.

    하나님은 이 말씀을 "달려가면서도 읽을 수 있게 하라"고 명령하십니다. 누구나 어려움 없이 읽을 수 있게 하라는 말씀입니다. 하박국이 할 일은 하나님께 받은 말씀을 백성들 앞에서 외치고 선포하는 것이 아니라 누구나 그것을 똑똑히 읽을 수 있도록 판에 쓰는 것이었습니다. 하박국의 사역은 문서 사역이 되었습니다. 그 판은 가장 많은 사람들이 모이는 성전 경내에 붙여질 것이며 모든 사람이 보았을 것입니다.

    그 내용 가운데 "이 묵시는 정한 때가 있다."라는 말씀이 들어 있습니다. 정한 때라는 말은 여인이 잉태한 후 아이를 낳을 시점을 가리키는 말로 사용되었습니다. 따라서 이 단어는 비록 하나님의 계시가 지시하고 약속한 시간이 너무 길고 때로는 오지 않을 것처럼 느껴질지라도 때가 되면 당연히 아이를 낳는 것처럼, 하나님의 정한 때 역시 반드시 온다는 확신을 담고 있습니다. 하박국서에서 쓰인 묵시는 후대의 묵시문학적 관점에서 선택된 단어가 아닙니다. 그것은 더 후대에 가서야 나타납니다. 이곳에서 쓰인 묵시, 혹은 종말이라는 단어는 아주 근접한 미래에 일어날 사건을 말합니다. 따라서 정한 때와 종말이라는 말은 갈대아 사람으로 인한 곤경이 머지않아 종식될 것임을 나타내는 말입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정한 때나 종말은 하나님이 정한 시간이라는 점입니다. 인간의 소관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절대 주권 하에 있습니다. 바로 이 지점이 인간에게 믿음이 요구되는 지점입니다. "비록 더딜지라도 기다리라. 지체되지 않고 반드시 응하리라." 진정한 하나님의 백성의 가장 중요한 일이 이곳에서 선포됩니다. 끝까지 하나님을 의지하고 신뢰하며 기다리라는 것입니다.

    간단한 이 몇 마디 말이 우리에게는 가장 힘들고 어려운 과제입니다. 동시에 진정한 희망의 메시지이기도 합니다. 더 중요한 것은 이 기다림을 통해 우리가 변화된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이 말씀은 단순히 책임을 면하기 위해 가능한 뒤로 미루는 인간들의 궁여지책이 아니라 하나님에 의해 주도되는 섭리의 과정입니다.

    하나님의 격려 (4)

    마침내 하나님의 응답이 주어집니다. 4절의 "그"는 바벨론을 가리킵니다. 하나님도 당연히 바벨론의 마음이 교만하고 정직하지 못한 것을 알고 계십니다. 이 말씀에서 관심은 심판의 도구로 사용되는 바벨론이 아니라 심판의 대상인 유다입니다. 그래서 4절의 핵심은 "의인은 그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믿음이란 히브리어로 '에무나'입니다. 이 단어는 단순한 믿음이라기보다는 인내, 성실, 진실, 신실 등을 포함해 광범위한 의미를 가집니다. 여기서 '에무나'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에 대한 신뢰를 가리킵니다.

    "의인은 그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라고 하박국은 말합니다. 구약성경에서 의롭다는 말은 어떤 관계의 요구를 이루는 것을 뜻합니다. 그러므로 이 말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신실함으로써 얻어집니다. 의인은 하나님과 맺은 언약을 지키고 그 언약의 가르침과 약속을 굳게 붙잡는 사람이며, 흔들리지 않는 굳센 마음으로 거기에서 벗어나지 않는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어떤 시험과 심판의 때에도 살아남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말씀은 여기서 더 구체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바벨론에 대한 심판은 하나님께서 정하신 때에 반드시 올 것입니다. 비록 더디 오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절대 포기하지 말고 믿음을 지키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을 벌할 때 필요한 경우에는 이방 권력을 사용하기도 하십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심판의 도구로 사용된 세속적 권력에 반드시 종말이 옵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대적의 외압으로부터 벗어날 때가 이미 하나님의 계획 가운데 정해져 있다는 것입니다. 그 권력이 오만하면 할수록 하나님이 꺾으실 날이 가까이 오는 법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그때까지 인내하며 기다려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을 혼란스럽게 만드는 불의와 무질서, 고통과 상실을 경험하더라도 하나님의 백성들은 끝까지 인내하며 일편단심으로 성실하고 충성스러워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하박국의 모든 질문들은 이 말씀, "의인은 그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로 모두 풀렸습니다. 그것은 한 단계를 더 거쳐 찬양으로 이어집니다.

    “온 천하는 그 앞에서 잠잠할찌니라.”

    그 단계는 바로 침묵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과 온전한 신뢰 관계로 들어가기 전에 반드시 침묵의 과정을 거치게 됩니다. 그것은 소크라테스의 아포리아를 지나 진리의 근처 어디에선가 반드시 마주치는 인간 지성의 한계이며 인간 존재 자체의 한계입니다. 그것은 비단 신앙의 삶 속에서만 경험하는 인간의 한계가 아닙니다. 진리를 탐구하는 철학자들이나 과학자들도 만나게 되는 깊은 세계로의 관문입니다. 아인슈타인도 그것을 경험했습니다. 그는 그 경험을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가 경험할 수 있는 가장 아름다운 감정은 신비다. 그것은 모든 진정한 예측과 과학의 원천이다. 이 감정을 겪어보지 못한 사람은.... 죽은 것이나 다름없다. 최고의 지혜와 가장 빛나는 아름다움으로 현현하지만 우리의 둔한 능력으로는 그것의 가장 원시적인 형태밖에 파악할 수 없는 불가해한 것이 정말 존재한다는 것을 아는 것..... 이런 앎과 느낌이야말로 모든 진정한 종교성의 핵심이다. 오직 이런 의미에서만 나는 독실하게 종교적인 사람이다."

    아인슈타인은 인격화된 근대의 신을 옹호한 것이 아니었지만, 그의 말을 통해 오늘날 우리가 얼마나 심각한 오해와 착각에 빠져 있으며, 진리를 망각한 인간에게 주어지는 형벌이 얼마나 큰 것인가를 깨달을 수 있습니다. 인간이 놓지 말아야 할 마지막 끈은 과학자 포퍼가 말했듯이 "우리는 아무것도 모른다."입니다. 장자(莊子) 역시 "사람이 아는 것은 그가 알지 못하는 것에 미치지 못한다."고 했습니다. 인간의 비극은 자신이 모든 것을 안다는 자만에서 비롯됩니다. 장자의 말대로 인간이 아무리 많이 알아도 인간이 알지 못하는 것에 미치지 못합니다. 인간이 가지고 있는 모든 지식을 다 합해도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할 수 있는 말은 여전히 "우리는 아무것도 모른다."입니다.

    지금 하박국 선지자는 바로 그 침묵에 도달했습니다. 그리고 모든 사람들을 향해 말합니다. "온 천하는 그 앞에서 잠잠할찌니라."

    비록

    마침내 세상의 모든 결핍들을 오히려 은혜로 받아 기쁨의 찬양을 부르기에 이릅니다. 기다림이 낳은 찬양입니다. 기다림이 맺은 열매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찬양이기도 합니다.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하지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먹을 것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나는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리로다"(합 3:17-18).

    '비록'의 신앙, '그리 아니하실지라도'의 신앙, 그리고 '죽으면 죽으리이다'의 신앙은 그냥 오는 것이 아닙니다. 오랜 기다림 속에서도 주님에 대한 신뢰를 잃지 않은 사람들이 침묵이라는 신비의 관문을 지나 마침내 창조의 목적을 이루는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입니다.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하박국 2:1-14)




    하나님께서는 하박국에게 친히 말씀하셨습니다.
    “보라 그의 마음은 교만하며 그 속에서 정직하지 못하나 의인은 그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그리고 이 말씀은 신약에서 가장 중요한 세 부분에서 인용됩니다.

    먼저 로마서에서 인용됩니다.
    [
    15 그러므로 나는 할 수 있는 대로 로마에 있는 너희에게도 복음 전하기를 원하노라
    16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먼저는 유대인에게요 그리고 헬라인에게로다
    17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롬 1:15-17)

    또한 갈라디아서에서 인용됩니다.
    [
    9 그러므로 믿음으로 말미암은 자는 믿음이 있는 아브라함과 함께 복을 받느니라
    10 무릇 율법 행위에 속한 자들은 저주 아래에 있나니 기록된 바 누구든지 율법 책에 기록된 대로 모든 일을 항상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저주 아래에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11 또 하나님 앞에서 아무도 율법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되지 못할 것이 분명하니 이는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 하였음이라
    12 율법은 믿음에서 난 것이 아니니 율법을 행하는 자는 그 가운데서 살리라 하였느니라
    ](갈 3:9-12)

    그리고 히브리서에서도 인용됩니다.
    [
    35 그러므로 너희 담대함을 버리지 말라 이것이 큰 상을 얻게 하느니라
    36 너희에게 인내가 필요함은 너희가 하나님의 뜻을 행한 후에 약속하신 것을 받기 위함이라
    37 잠시 잠깐 후면 오실 이가 오시리니 지체하지 아니하시리라
    38 나의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또한 뒤로 물러가면 내 마음이 그를 기뻐하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
    39 우리는 뒤로 물러가 멸망할 자가 아니요 오직 영혼을 구원함에 이르는 믿음을 가진 자니라
    ](히 10:35-39).

    우리는 로마서와 갈라디아서와 히브리서에서 하박국에게 하신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이 어떻게 인용되는지 알기 위해 먼저 하박국을 살펴보아야 합니다.

    하박국 선지자가 주 여호와 하나님과 대화를 나눈 때는 북이스라엘은 앗수르 제국에 의해 이미 멸망한지 오래 되었고, 이제 얼마 후면 남유다 역시 바벨론 제국에 의해 멸망될 것을 바라보는 때였습니다. 즉, 주전 7세기 정도에 쓰인 구약 성경입니다. 물론, 그 당시 유다 백성들은 자신들에게 예루살렘 성전이 있기 때문에 절대로 멸망되지 않을 것이라고 믿고 있었습니다. 그러면서 유다 사회에는 말할 수 없는 부패가 난무하고 있었습니다.

    구약에서 남유다 공동체는 지금 시대로 치면 기독교 교회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물론 남유다는 종교국가였기 때문에 현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가 자유롭게 활동할 수 국가와도 간접적으로 연관됩니다.

    하박국 1장 1절을 보면, 하박국서는 하박국이 하나님께로부터 묵시, 곧 환상으로 받은 경고의 메시지라고 합니다.

    1장을 보면, 남유다 사회의 상황이 보이는데, 그 사회에는 폭력이 난무했습니다. 법이 뇌물과 권력에 의해 제 역할을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불의가 가득했습니다. 비양심적인 인간들이 정직하게 살려는 자들보다 훨씬 많았고, 돈의 힘이 사회를 이끌고 있었습니다. 이곳 저곳 다툼과 미움과 분쟁과 살인이 많았고, 교만과 착취, 이혼, 음행, 불법과 우상이 창궐하였습니다. 가장 큰 문제는 불의하고 악한 부자들이 사회의 주도권을 쥐고 나라를 휘두르고 있었습니다. 지금 이러한 부패가 하나님의 백성인 유다 백성 가운데 발생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따라서 하박국은 괴로워하며 하나님께 오랫동안 기도해 왔습니다.
    “주 여호와 하나님! 하나님이 살아계시다면 어찌 주의 공동체인 이 나라 안에서 이러한 불의와 악행이 난무하는 것을 왜 그냥 내버려 두십니까? 왜 가만히 계십니까? 왜 제 기도에 응답하지 않으십니까? 저희들이 이러한 죄악과 불의와 압제와 더러움이 주의 백성 가운데 계속 진행되는 것을 계속 보아야만 합니까?”

    이미 남유다를 둘러싼 국제 분쟁도 복잡했습니다. 앗수르 제국과 애굽의 경쟁도 대단했고, 새롭게 등장하는 바벨론 세력도 비록 남 유다에게 강력하게 미치지는 못하였지만 대국 사이에서 힘을 겨루고 있었습니다.

    이때 하박국 및 참된 믿음의 자녀들이 볼 때, 하나님께서는 침묵하고 계신 것처럼 보였습니다. 심지어 공의의 하나님은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여겨질 정도였습니다. 따라서 “하나님! 거룩하시고 공의로우신 하나님! 현재 교회와 나라가 참으로 불법과 무법으로 향하며 주의 영광이 땅바닥에 떨어지고 있고, 선량한 자들이 고통과 피해와 억울함을 당하고 있는데, 주 하나님은 무엇을 하십니까? 하나님이 존재하시는 것은 맞습니까?”라고 기도해 왔던 것입니다.

    그러자 어느 날 주께서 하박국에게 묵시로 답변하십니다.
    “그래, 나는 역사하고 있다. 내가 네가 살아있는 동안에 큰 일을 이루겠다. 그 일은 네가 지금 다른 사람들을 통해 듣는다고 해도 믿을 수 없는 그러한 큰 일이며 끔찍한 일이다. 나는 바벨론 제국을 일으켜 온 세상을 삼키게 하겠다. 특히 바벨론 제국을 통해 남유다를 심판할 예정이다. 네가 알고 있듯이 바벨론 군사는 잔인하기로 유명하다. 그들은 제 멋대로 행할 것이며, 상상을 초월하는 만행을 저지를 것이다. 그들은 지독히 교만하며 자기들의 힘을 우상으로 삼고 있다. 따라서 그들의 죄가 내 앞에서 클 것이다.”

    하박국은 주 하나님의 첫 번째 답변을 듣자, 너무나 놀란 가운데 두 번째 질문을 합니다.
    “주 하나님! 우리 유대 민족을 바벨론 제국을 통해 쓸어버리시는 것이 주의 계획인지요? 결코 그리하시면 안 됩니다. 주께서 우리를 깨끗하고 정결하게 하시기 위해 징계하시는 것은 옳습니다. 하지만 악한 무리들이 이 백성을 잡아 삼켜 완전히 멸망시키는 것은 아니됩니다. 우리보다 더 악한 그들이 우리를 멸망시키는 것에 대해 가만히 계시는 것은 아니겠지요. 우리가 주인이 없는 물고기 같은 존재입니까? 그물에 잡혀서 끌려가면 그들은 그 그물을 우상으로 만들어 경배하지 않겠습니까? 그들이 주의 백성을 멸망시키고 자기 우상을 경배하는 것을 그냥 두실 수 있습니까?”

    하박국의 첫 번째 기도에서는 “남 유다는 하나님의 백성인데 왜 이 백성 가운데 불의와 더러움이 창궐합니까? 이들은 주의 백성인데 왜 주께서는 그들이 더러운 상태에 있도록 그냥 두십니까?”라는 질문입니다. 즉, 주의 백성이 형성하고 있는 공동체는 거룩하며 공의로우며 서로 사랑하는 공동체여야 한다는 것이 그의 질문이었습니다.

    이에 대한 하나님의 답변은 정말 무섭게 타락하고 불의한 바벨론 제국을 도구 삼아서 나의 백성인 유다 백성을 심판하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러자 하박국의 두 번째 기도는 “이 백성은 주의 이름을 지닌 백성인데, 이들보다 더 악한, 자기 힘을 믿고 그 힘을 우상으로 삼는 바벨론 제국에 의해 멸망 당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라고 기도한 것입니다.

    그리고 이에 대한 하나님의 답변을 기다려서 그 응답을 받아 기록한 것이 하박국 2장이며, 그 내용 중에 신약 성경 세 곳에서 인용한 그 위대한 하나님의 말씀이 담겨 있는 것입니다.
    “보라 그의 마음은 교만하며 그 속에서 정직하지 못하나 의인은 그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합 2:4).

    이 위대한 구절을 보면, 먼저 “보라 그의 마음은 교만하며 그 속에서 정직하지 못하나”라고 하는데 그는 누구입니까?

    먼저 1절부터 보겠습니다.
    하박국은 하나님께 왜 바벨론 제국을 들어서 주의 백성을 심판하시느냐고 질문한 후에 하나님의 대답을 기다립니다. 그런데 주의 답변을 기다리는 그의 모습이 얼마나 간절한지 모릅니다. 이러한 모습은 우리에게 있어야 하는 모습으로서 주의 마음에 감동을 주는 자세입니다. 그 자세는 간절하게 주를 기다리는 자세입니다.
    “내가 내 파수하는 곳에 서며 성루에 서리라. 그가 내게 무엇이라 말씀하실는지 기다리고 바라보며 나의 질문에 대하여 어떻게 대답하실는지 보리라”(1절).

    마침내 여호와께서 오셔서 하박국에서 환상으로 답변하십니다. 그리고 그 환상을 글로 기록하여 그 내용을 판에 새기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그 판에 있는 메시지를 온 세상에 알리라고 하십니다. 2절을 원어로 보니 “그 환상을 글로 쓰고, 그 글을 판에 새겨서 모든 사람들에게 신속하게 알리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하나님의 말씀을 기다리는 자들, 주의 음성을 믿고 따르는 자들에게 현재 상황에 대한 하나님의 대답을 신속하게 알려주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2장의 내용은 불의로 가득한 교회 및 복잡한 이 세상 가운데 하나님은 어디 계시며 무엇을 하실 것인지 더 이상 묻지 말고 지금 하박국을 통해 알려주는 그 메시지를 하나님의 대답으로 듣고 믿으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답변 내용은 무엇입니까? 그 답변 내용은 환상으로 주어졌습니다. 그러나 그 환상은 당장 일어나지 않고 하나님께서 정하신 때에 역사 속에서 발생할 것입니다. 그러나 더딜지라도 반드시 그 환상대로 이루어질 것입니다.

    그 환상 내용은 의인과 불의한 자로 나뉩니다. 그리고 불의한 자로서는 유다 공동체 내에서 불의를 저지르는 자들이 있고, 그래서 하박국의 가슴을 찢는 동료들이 있고, 또한 그들보다 더 불의한 바벨론 사람들이 있습니다.

    따라서 하박국 2장 4절에서 “그의 마음”의 ‘그’는 사회 속에서 불의를 행하는 자들로서 의인과 반대 편에 서 있는 자들입니다. 한편, 의인은 하나님을 경외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가까이 하며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안타까워하는 자들입니다. 불의한 자의 대표로는 일단 바벨론 왕을 비롯한 침략자들이고, 그러면서도 또한 이스라엘 공동체 내의 불의한 자를 포함합니다. 물론, 그들 중에는 바벨론의 침략으로 인해 회개하며 주께로 돌아오는 자들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가짜 신자들은 하나님께 돌아오지 않을 것입니다. 반면, 바벨론 군사들은 하나님과 전혀 무관한 존재들로서 하나님의 언약적인 사랑의 대상이 아닙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하박국에게 환상으로 보여준 그 사건이 주전 586년, 곧 바벨론이 예루살렘 성읍 및 성전을 완전히 무너뜨려 남유다가 바벨론 제국으로 넘어간 사건과 그 이후에 발생한 사건인 것을 압니다. 특히 메대-바사 제국이 일어나서 메대 왕 다리오가 주전 539년에 바벨론 왕 벨사살을 죽이고 바벨론 왕이 됨으로써 바벨론 제국은 막바지에 이르고, 그리고 주전 536년에는 고레스 왕이 모든 바벨론 제국을 삼키고 바사 제국을 장악함으로써 바사 제국의 제왕이 됩니다. 이때 고레스 왕은 그의 통치 원년에 남유다 백성으로 하여금 고국으로 돌아가 예루살렘 성전을 세울 것을 허락합니다.

    그러므로 하박국은 주의 답변을 통해 일차적으로 바벨론 제국이 유다 백성을 침략할 것을 환상으로 보고 알게 되었고, 비록 소수이지만 주의 의로운 백성들까지 불의한 지체들 때문에 고통을 당하게 될 것을 알게 됩니다. 그러므로 3장 끝을 보면, “내가 들었으므로 내 창자가 흔들렸고 그 목소리로 말미암아 내 입술이 떨렸도다 무리가 우리를 치러 올라오는 환난 날을 내가 기다리므로 썩이는 것이 내 뼈에 들어왔으며 내 몸은 내 처소에서 떨리는도다”(합 3:16)라고 고백한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께 속하여 사는 의로운 자는 믿음으로 삽니다. 즉, 이 땅에서 발생하는 불의 가운데 하나님께서 어떻게 세상을 다스릴 것인지 알고 오직 주의 때를 기다리며 주를 말씀을 믿고 의지하고 삽니다. 그것이 하박국서에서 말하는“의인은 그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는 뜻입니다.

    그러면 불의한 자는 누구입니까? 하박국서는 불의한 자의 특징을 잘 정리해 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불의한 자들 때문에 신음하는 의로운 하박국은 그들과 대칭되고 있습니다. 사실 하박국은 불의가 가득한 세상에서 신음하는 참된 주의 백성을 대표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주께서는 하박국에게 그들에게 신속하게 하나님의 답변을 판에 새겨서 알림으로써 그들을 위로하고 확신을 주라고 하신 것입니다.

    불의한 자의 특징은 1장 2절에 보니 ‘강포’입니다. 폭행이며 폭력을 행사하는 것입니다. 갑의 위치에서 을을 향해 철저하게 압제하고 이용하고 묵살하는 행위와 마음 자세가 강포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 속한 의로운 자는 강포하지 않습니다. 폭행하지 않습니다.

    3절에 보니, 불의에 패역, 겁탈이 추가되고 있습니다. 또한 변론과 분쟁이 포함됩니다. 변론과 분쟁은 자기 세력과 주장과 돈과 권력과 인기를 추구하기 위해 끊임없이 미워하며 다투는 모습입니다. 종종 변론과 분쟁은 살인으로 이어집니다. 이러한 불의의 상태에서는 결코 양보나 평화의 모습이 있을 수 없습니다.

    4절은 율법이 해이하고 정의가 전혀 시행되지 않고, 악인이 의인보다 많은 사회를 고발합니다. 그래서 정의가 굽어집니다. 이는 불의한 사회입니다. 그리고 불의가 무엇인지 정확하게 지적하고 있습니다. 불의는 하나님의 법을 어기는 것입니다.

    6절은 불의한 자로 불리는 바벨론 군사들의 특징인데, 사납고 성급합니다. 자기 멋대로 행합니다. 하나님을 두려워 함이 없습니다. 우상을 숭배합니다. 그들은 오직 인간의 힘, 무력, 권력을 신으로 삼습니다. 이것이 하나님 앞에서 불의한 것이며 불의한 자들입니다.

    그리고 2장 5절 이하를 보면, 불의한 자는 술을 즐기며, 거짓되며 교만합니다. 그들은 끊임 없이 자기 욕심을 채우기 위해 무한하게 넓혀가는 자들입니다. 돈에 대해서도 그러하고 권력에 대해서도, 인기에 대해서도, 땅에 대해서도, 뭐든 한없이 자기 소유로 만드는 것을 그의 삶과 마음의 목표로 삼습니다. 그들은 마치 죽음처럼 무엇이든지 끝없이 삼킵니다.

    그러므로 불의한 자는 남의 피를 흘리게 되어 있고, 남들로 하여금 억울함과 분노를 느끼는 하는 악한 일을 많이 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들은 양심을 어기는 일들을 계속하면서,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패역을 저지르는 것입니다. 남에게 술을 먹인 후에 정신 없게 만든 후 모든 것을 빼앗아 오는 일도 합니다. 따라서 불의한 자의 삶은 많은 원수들이 생길 수 밖에 없고, 삶 자체에 끊임없는 죄악이 점철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살아계시사 그들의 모든 수고를 헛되게 만드시고 그들의 죄악으로 인하여 반드시 수치에 떨어뜨려 멸망하게 만드실 것입니다.
    “네가 많은 민족을 멸한 것이 네 집에 욕을 부르며 네 영혼에게 죄를 범하게 하는 것이 되었도다 담에서 돌이 부르짖고 집에서 들보가 응답하리라 피로 성읍을 건설하며 불의로 성을 건축하는 자에게 화 있을진저”(합 2:10-12)

    특히 불의한 자의 가장 중요한 특징은 그의 마음 속에 하나님이 아니라 우상이 있는 것입니다. 그 우상 때문에 그들은 불의를 저지릅니다. 그러나 그들이 신으로 삼은 우상은 그들이 하나님의 심판을 받을 때 아무런 도움을 주지 못할 것입니다.
    “여호와의 오른손의 잔이 네게로 돌아올 것이라 더러운 욕이 네 영광을 가리리라. 이는 네가 레바논에 강포를 행한 것과 짐승을 죽인 것 곧 사람의 피를 흘리며 땅과 성읍과 그 안의 모든 주민에게 강포를 행한 것이 네게로 돌아오리라. 새긴 우상은 그 새겨 만든 자에게 무엇이 유익하겠느냐 부어 만든 우상은 거짓 스승이라 만든 자가 이 말하지 못하는 우상을 의지하니 무엇이 유익하겠느냐 나무에게 깨라 하며 말하지 못하는 돌에게 일어나라 하는 자에게 화 있을진저 그것이 교훈을 베풀겠느냐 보라 이는 금과 은으로 입힌 것인즉 그 속에는 생기가 도무지 없느니라”(합 2:16-19).

    하나님께서는 반드시 그들의 불의에 대해 심판하실 것입니다. 그들의 수고는 불타서 헛되게 될 것이고 그들의 모든 삶은 허무함으로 마치며 피곤하게 될 것입니다. 그때는 하나님의 공의가 온 세상에 가득함으로써 주의 영광이 나타날 것입니다.
    “민족들이 불탈 것으로 수고하는 것과 나라들이 헛된 일로 피곤하게 되는 것이 만군의 여호와께로 말미암음이 아니냐 이는 물이 바다를 덮음 같이 여호와의 영광을 인정하는 것이 세상에 가득함이니라”(합 2:13-14).
    “오직 여호와는 그 성전에 계시니 온 땅은 그 앞에서 잠잠할지니라”(합 2:20).

    하박국은 이러한 환상을 다 보면서 하나님의 의도와 계획을 알게 됩니다. 하나님은 거룩하며 공의로운 분이신 것을 다시 한번 확신하게 됩니다. 이 땅의 모든 불의는 반드시 주 앞에서 심판 받을 것이며 주를 믿고 의지하고 두려워하는 자들은 구원을 받게 될 것을 확신하게 됩니다.

    이러한 배경 속에서 주 하나님께서 하박국에게 “보라 그의 마음은 교만하며 그 속에서 정직하지 못하나 의인은 그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합 2:4)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우리는 불의의 시작이 교만이며, 의로운 삶의 시작과 과정은 믿음이라는 것을 보게 됩니다. 특히 하박국이 말하는 믿음은 하나님께서 보여주신 환상에 대한 믿음이며, 하나님의 공의하심과 사랑하심과 진실하심에 대한 믿음입니다. 따라서 그러한 믿음을 지닌 자들은 불의가 가득한 세상 속에서도 하나님과 그분의 말씀을 믿기 때문에 흔들리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하박국서 마지막에서 하박국의 고백을 보면, 불의로 인하여 의로운 자가 많은 피해를 보고, 심지어 공동체 내의 불의한 지체들 때문에 더 악한 불의한 자들에 의해 공동체 자체가 멸망의 기로에 선다고 해도 살아계신 하나님이 모든 역사를 공평하게 주관하시고 심판하시며 그 와중에서도 믿음으로 의로운 삶을 사는 자들을 구원하실 것을 확신하게 되었기 때문에 다음과 같이 노래할 수 있는 것입니다. 지금 이 고백은 행운이 없어서 가난하고 힘든 삶을 살게 되는 것을 의미하지 않고, 또는 내 죄로 인하여 하나님께 징계 받음으로 비통한 삶을 사는 것을 의미하지 않고, 불의한 세상 속에서 불의한 자들에 의해 억울한 일을 당하면서 가난해지고 병들고 힘들더라도 고백하는 노래 내용입니다.
    [
    17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하지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먹을 것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18 나는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리로다
    19 주 여호와는 나의 힘이시라 나의 발을 사슴과 같게 하사 나를 나의 높은 곳으로 다니게 하시리로다
    ](합 3:17-19)

    이는 이 세상은 잠깐 있다 없어지는 곳이며, 결국 하나님의 완전한 공의가 영원히 실현될 것을 믿고 확신하는 가운데 그 어떠한 불의와 죄악의 상황에서도, 억울한 상황에서도, 믿음으로 의로운 삶을 지키며 살겠다는 고백인 것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삶의 힘이 우리에게 있지 않고, 우리에게 언약하여 주시고 의로운 생명을 주신 구원의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기뻐할 때, 주 여호와께서 나의 힘이 되시면서 그 어떠한 지저분하고 힘들고 악이 가득한 상황에서도 그 모든 환경을 초월하여 거룩하고 청명하고 맑은 삶을 살 수 있다고 고백한 것입니다.

    하박국의 고백은 이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 세상에 오심과 구속을 이루심, 나아가 성령을 보내심으로 더욱 신자들에게 분명하여졌습니다. 그것이 로마서, 갈라디아서, 그리고 히브리서입니다.

    로마서에서 바울은 하박국에서 주신 하나님의 계시를 복음과 함께 사용합니다.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먼저는 유대인에게요 그리고 헬라인에게로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롬 1:16-17)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복음이라고 합니다. 복음의 핵심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것으로서 그분이 하나님의 아들이며, 메시아이며, 우리를 죄로부터 구원하시는 예수라고 전합니다. 복음은 구약에서 그림자처럼 가리켜왔던 그 모든 것의 실체로서 새 언약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자기 백성에게 보내시고, 그분으로 하여금 십자가 상에서 구속을 이루신 후에 부활 승천하게 하시고, 그 후 아들과 함께 성령을 보내셔서 택한 자를 거듭나게 하시고 온 세상을 향하여 예수님에 대한 복음을 전하게 하셨습니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이니라”(요 1:12-13).

    그런데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난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한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고 하며 하박국서의 말씀을 인용하였습니다.

    그러므로 믿음은 의와 관련합니다. 의가 없는 믿음은 거짓 믿음입니다. 새 언약으로 인한 믿음과 새 언약을 믿는 믿음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선물로서 그리스도 예수님과 연합하게 하여 우리를 성령으로 말미암아 거듭나게 하시니 우리 안에는 의로운 생명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 의로운 새 생명으로 성령의 강건하게 하시는 도우심과 함께 넉넉히 죄를 이기고 의로운 삶을 살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박국서의 말씀과 로마서의 복음은 일치하게 됩니다. 이에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고 바울은 증거한 것입니다.

    또한 갈라디아서에서도 하박국서의 이 내용을 인용하였습니다.
    “또 하나님 앞에서 아무도 율법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되지 못할 것이 분명하니 이는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 하였음이라 율법은 믿음에서 난 것이 아니니 율법을 행하는 자는 그 가운데서 살리라 하였느니라”(갈 3:11-12).

    인간은 아담 안에서 타락하여 부패한 존재가 되었기 때문에 완전한 의를 이룰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인간의 힘으로 의, 곧 완전한 의를 이루려는 것은 어리석음의 극치요 교만의 극치입니다. 그들이 만일 율법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되려고 한다면 그들은 저주 아래 있게 될 것입니다. 그 이유는 율법을 통해 의롭게 되는 것은 이미 인간에게 불가능한 일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이에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연합하게 함으로 주의 의로움을 선물로 주시고, 우리의 죄악을 그리스도께서 대신 담당하시는 그러한 은혜의 길을 열어 주셨습니다. 그것이 바로 죄인이 의롭다 칭함을 받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이며 또한 중생을 통해 의인이 될 수 있는 길로서, 주의 은혜로 택함을 받은 자들은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새 생명으로 살아갈 때에 의로운 삶이 나타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갈라디아서는 복음으로 말미암는 자유를 말하는데, 그 자유는 오직 그리스도를 믿어 성령을 받아 행할 때 죄로부터, 율법의 정죄로부터, 마귀로부터, 세상의 정욕으로부터 자유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이에 바울은 갈라디아서에서 진정한 자유의 삶을 사는 비결을 말합니다. 그 비결은 믿음으로 사는 것으로서 자연스럽게 우리 안에 심기운 의로운 새 생명이 우리의 삶으로 나타남으로써 온전한 의로운 삶이 되는 것입니다.
    “내가 율법으로 말미암아 율법에 대하여 죽었나니 이는 하나님에 대하여 살려 함이라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내가 하나님의 은혜를 폐하지 아니하노니 만일 의롭게 되는 것이 율법으로 말미암으면 그리스도께서 헛되이 죽으셨느니라”(갈 2:19-21).

    그러므로 하박국서에서 주신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은 궁극적으로 우리 성도들이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사는 삶으로서 불의와 죄악과 더러움과 저주로부터 구별되어 하늘의 신령하고 복된 거룩한 참된 자유의 삶을 사는 것으로 승화됩니다.

    그리고 히브리서에서도 인용됩니다.
    “그러므로 너희 담대함을 버리지 말라 이것이 큰 상을 얻게 하느니라 너희에게 인내가 필요함은 너희가 하나님의 뜻을 행한 후에 약속하신 것을 받기 위함이라 잠시 잠깐 후면 오실 이가 오시리니 지체하지 아니하시리라. 나의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또한 뒤로 물러가면 내 마음이 그를 기뻐하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 우리는 뒤로 물러가 멸망할 자가 아니요 오직 영혼을 구원함에 이르는 믿음을 가진 자니라”(히 10:35-39).

    히브리서는 주님을 믿고 사는 의인된 삶은 계속적으로 뒤로 물러서지 않고 인내하면서 하나님의 뜻을 행하여 반드시 약속하신 것을 받아낸다고 말합니다. 이때 믿음은 인내로 나타납니다.
    “이것이 큰 상을 얻게 하느니라.”

    그리고 믿음으로 사는 삶은 결코 하나님의 새언약을 저버리거나 성령의 역사를 거부하는 일이 없기 때문에 그 마음과 생각이 항상 새로운 생명 및 성령의 역사로 말미암아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을 사는 것임을 말합니다. 그러한 믿음은 영혼 구원함에 있어서 거짓 믿음으로 드러날 수 없습니다. 따라서 믿음으로 사는 사람은 그 믿음이 진정한 믿음으로써 반드시 구원함에 이르게 되어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박국서에서 말씀하신 주 여호와의 말씀에 가장 부합되는 분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가장 어두운 때에 가장 억울한 일을 당하시면서도 오직 믿음으로 의로운 삶을 유지하셨습니다. 그분의 의로운 삶은 다름 아닌 아버지를 향한 철저한 순종이었습니다.
    [
    7 그는 육체에 계실 때에 자기를 죽음에서 능히 구원하실 이에게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렸고 그의 경건하심으로 말미암아 들으심을 얻었느니라
    8 그가 아들이시면서도 받으신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워서
    9 온전하게 되셨은즉 자기에게 순종하는 모든 자에게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시고
    10 하나님께 멜기세덱의 반차를 따른 대제사장이라 칭하심을 받으셨느니라
    ](히 5:7-10)

    그리고 그러한 믿음으로 사는 삶, 곧 하나님의 주권과 역사를 믿고 그분께 나의 모든 것을 의지하고 순종하는 삶을 성도들에게 본으로 남겨 놓으셨습니다.
    [
    18 사환들아 범사에 두려워함으로 주인들에게 순종하되 선하고 관용하는 자들에게만 아니라 또한 까다로운 자들에게도 그리하라
    19 부당하게 고난을 받아도 하나님을 생각함으로 슬픔을 참으면 이는 아름다우나
    20 죄가 있어 매를 맞고 참으면 무슨 칭찬이 있으리요 그러나 선을 행함으로 고난을 받고 참으면 이는 하나님 앞에 아름다우니라
    21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받았으니 그리스도도 너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사 너희에게 본을 끼쳐 그 자취를 따라오게 하려 하셨느니라
    22 그는 죄를 범하지 아니하시고 그 입에 거짓도 없으시며
    23 욕을 당하시되 맞대어 욕하지 아니하시고 고난을 당하시되 위협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공의로 심판하시는 이에게 부탁하시며
    24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이는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는 나음을 얻었나니
    25 너희가 전에는 양과 같이 길을 잃었더니 이제는 너희 영혼의 목자와 감독 되신 이에게 돌아왔느니라
    ](벧전 2:18-25)

    오늘 우리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는 말씀을 다루었습니다.
    마음 속에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는 우상이 있으면 그는 믿음으로 사는 의인이 될 수 없습니다. 마음 속에 교만이 가득하여, 계속 세상 것을 쌓기 위해 착취하는 자는 믿음으로 사는 의인이 될 수 없습니다. 내 스스로 다른 사람들보다 훌륭한 삶을 살아서 하나님께 인정 받으려는 사람 역시 도리어 지독히 종교적인 위선자로서 결코 믿음으로 사는 의인이 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죄 사함 받고 성령으로 살아가면 그 믿음으로 인하여 우리는 의로운 삶을 살 수 있는 은혜를 충만하게 받게 됩니다.

    그러므로 오늘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을 믿고 죄사함을 받아 새출발하기 바랍니다. 우리의 과거의 죄가 어떠하든 우리 주님은 보혈의 공로로 새출발이 가능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주의 보혈을 근거로 해서 이제부터 오직 믿음으로 의로운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주의 성령께서 도우실 것입니다.

    우리는 호흡이 마치는 그 날까지 오직 믿음으로 삽니다. 오직 하나님을 믿으며, 따라서 그분이 하신 말씀과 약속을 믿고, 그 말씀과 약속의 최고 핵심인 새언약, 곧 복음을 믿고, 그분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여 살게 됩니다. 또한 하나님 아버지와 예수 그리스도께서 보내시는 성령을 믿고 성령의 도움과 생명력을 의지하여 내 힘이 아닌 생명의 성령의 법으로 살아감으로써 넉넉히 하나님의 기쁨이 되는 의로운 삶을 살 수 있는 것입니다.

    어느 날 우리가 이 세상을 떠날 때 우리의 신앙 양심은 우리 자신을 향하여 칭찬할 것입니다. 그리고 곧바로 그리스도를 만나 주께 칭찬을 얻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주께서 재림하시는 날에 하나님의 심판대에서 판정을 받아 영원한 면류관과 함께 새하늘과 새땅에서의 영원한 지위 및 영광을 받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견실하며 흔들리지 말고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이는 너희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 앎이라”(고전 15:58).

    더욱 우리 모두가 거룩하고 의롭고 주님 나라를 위해 힘쓰고 섬기는 지혜로운 그리고 진실한, 우리 주 하나님의 청지기들이 되어 오직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왕으로 섬기며 순종하는 참된 자녀들이 되기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하박국 2:1-14)


    1. 하박국 선지자

    (1) 요시야 왕이 므깃도에서 전사한 후 (BC609)

    - 요시야는 하나님께서 그가 태어나기 약 350년 전에 예언해주신 왕이었다. 요시야가 여로보암의 금송아지 제단을 훼파한다는 예언이었다. 그 예언대로 요시야 태어났고, 그는 왕이 되어 모든 산당을 헐며 종교개혁을 단행하고 율법부흥운동을 일으킨다. 그는 다윗 이후 가장 경건하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왕이었다. 요시야의 단 하나 잘못은 므깃도 전투에 끼어들어 전사한 것 밖에 없다.

    - 요시야가 죽고 유다는 23년만에 멸망한다. 그렇다면 요시야가 행한 종교개혁과 부흥운동은 무슨 의미가 있는가? 사람들은 냉소적이 되기 쉽다. 요시야의 부흥운동은 바벨론 포로에서 하나님의 남은 자를 위한 것이었다. 예레미야, 하박국, 다니엘 에스겔, 나훔 오바댜... 모두 요시야 부흥운동의 열매들이다.

    - 요시야는 네 아들이 있었는데 장남 요하난은 일찍 죽고 여호야김, 여호아하스, 시드기야 삼형제가 있었다. 요시야가 므깃도에서 바로느고에게 죽자 백성들은 차남 여호아하스를 왕으로 세운다. 왜 장남 여호야김이 아닌 차남 여호아하스를 왕으로 세웠을까? 여호야김은 포악하여 백성들의 신망을 얻지 못했기 때문이다. 여호야김은 바로느고와 내통하여 동생 여호아하스를 잡아가게 하고 자신이 왕이 된다. 그는 애굽바로를 의지해서 왕위에 앉고 백성들을 억압한다. 그는 예레미야 선지자를 핍박하여 감옥에 가두고 그의 예언을 기록한 두루마리를 칼로 찢어 불태운다(렘36장). 이게 하박국 선지자가 활동하던 시대의 상황이었다. 하박국 선지자는 알려진 바가 없다. 3장에서 시기오놋에 맞춰 부르고 셀라 음악기호를 사용하는 것으로 보아 하나님께 찬양하던 레위인으로 추정될 뿐이다.

    (2) 하박국 선지자의 질문과 하나님의 대답

    - 왜 하나님은 유다의 악행이 점점 증가하는데 그대로 두고만 보십니까? 유다 악인이 백성을 억압하는 것이 옳습니까? 하나님은 바벨론을 들어 유다의 악행을 멸하실 것이라 말씀하신다. 하박국은 다시 질문한다. 하나님이 유다의 악행을 징벌하시는데 유다보다 더 악한 바벨론을 사용하심이 옳습니까?(1장)

    - 하나님의 대답은 바벨론 멸망 예언(2장)을 주시며 “그것은 정한 때가 있다. 비록 더딜찌라도 기다리라. 지체치 않고 정녕 응하리라.”(2:3) 말씀하신다. 가깝게는 약 70년 후에 있을 바벨론 멸망이며(BC539) 멀게는 여호와의 날과 그리스도의 오심이다. 이 예언(2장)이 하박국서의 핵심주제이다.

    - 합2:3-4 “이 묵시는 정한 때가 있나니 그 종말이 속히 이르겠고 결코 거짓되지 아니하리라 비록 더딜찌라도 기다리라 지체되지 않고 정녕 응하리라. 보라 그의 마음은 교만하며 그의 속에서 정직하지 못하니라. 그러나 의인은 그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 하박국은 유다를 징계하시는데 악인 바벨론을 사용하심이 어찜이신가 여쭙는다. 하나님의 대답은 악인 바벨론은 교만하고 정직하지 못하게 살아가나, 의인 하나님의 백성(남은자)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대답하셨다.

    - 악인은 죄의 본성을 따라 자기 힘으로 교만하게 살아가지만, 의인은 믿음으로 산다. 악인 바벨론은 이스라엘을 포로로 잡아 교만하고 악을 행하지만, 포로로 잡혀간 하나님 백성(남은 자)은 하나님의 약속을 붙들고 믿음으로 살아간다. 그들이 의인이다. 하나님은 처음부터 그들을 의인이라 부르셨다.

    2.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1) 히브리서(히10:38) - 의인은 믿음으로 살아가는 사람이다.

    - 의인은 누구인가? 바벨론 포로의 어려운 현실 속에서 이스라엘 회복 예언이 비록 더디다 할지라도 반드시 응하리라는 하나님의 약속을 붙잡고 믿음으로 살아가는 사람이다. 이 말씀을 히브리서 10장은 그대로 인용하고 히브리서 11장은 성경인물들을 믿음으로 살아간 의인들의 실 예로 든다.

    - 히10:37-39 “잠시 잠깐 후면 오실 이가 오시리니 지체하지 아니하시리라. 오직 나의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또한 뒤로 물러가면 내 마음이 저를 기뻐하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 우리는 뒤로 물러가 침륜에 빠질 자가 아니요 오직 영혼을 구원함에 이르는 믿음을 가진 자니라.”

    - 히브리서 10장은 바벨론 멸망과 그리스도의 초림이 이마 다 지난 후다. 그러므로 하박국의 예언은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시는 마지막 날을 의미한다. 하박국 선지자 당시의 바벨론 멸망 예언은 약 70년 뒤에 성취되었다. 70년은 두 세대가 지나간 것이다. 인류의 역사 속에서 하나님의 시간으로 보면 아주 작은 한 기간에 불과하지만, 그 안에서 살아가는 개인에게는 일생을 지나는 것이다. 갓난아기로 태어나서 할아버지가 되어 손자까지 보게 되는 시간이다. 하나님은 그 기간을 기다리며 믿음으로 살아가라고 하신다.

    - 신앙은 죄와 사망의 세상에서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우리의 그리스도께서 오실 것이고 우리는 거룩한 부활의 몸으로 변화될 것이다. 우리는 새하늘과 새땅에서 새에덴의 회복과 완성을 이루고 새예루살렘 하나님 나라가 이루어질 것이다.

    - 새하늘과 새땅 새성전 새예루살렘은 무슨 뜻일까? 왜 하나님은 새성전을 건축하시고 그 성읍을 새예루살렘으로 말씀하시는가? 새성전은 솔로몬성전 같은 가시적 모형의 건물성전이 아니다. 에덴동산 전체가 성전이었듯 새예루살렘성 전체가 성전이며 그곳은 하나님 백성 누구나 언제든지 드나든다.

    - 예루살렘 솔로몬 성전은 파괴되고, 새예루살렘에 에스겔의 새성전이 다시 지어진다. 옛언약은 인간의 범죄로 파기되었지만, 하나님은 그리스도와 성령으로 새언약을 출범시키심이다. 이때 세상은 본래 에덴을 창조하신 하나님의 창조경륜(계획,뜻)을 회복하고 완성된다. 그러므로 새하늘과 새땅, 새성전은 새에덴의 회복과 완성의 의미이다. 예루살렘 제3성전을 의미하지 않는다.

    - 교회와 성도는 이 땅에서 용(사탄)과 짐승(정치권력)과 거짓선지자(종교권력)의 위협 회유 핍박을 받으며 음녀 바벨론(세상나라)의 유혹 속에 광야에서 살아가고 있다. 이것이 기독교 세계관이다. 성도는 영적인 눈으로 세상을 볼 줄 알아야 한다. 마치 하박국 선지자 예언 당시 유다백성들이 바벨론의 포로 되어 하나님의 남은 자로서 살아가는 것과 같다. 하나님은 그들(남은자,의인)에게 오직 믿음으로 살아가라고 하시듯 오늘 우리에게도 믿음으로 살아가라고 말씀하신다.

    - 구약의 남은 자는 바벨론 포로로 잡혀가 불 가운데서 고난을 당하며 믿음으로 정결케 된 자들을 말한다. 그들이 포로귀환해서 스룹바벨 성전을 세우고 이스라엘 회복을 기다리며 400년을 지낸다. 하나님은 그들 가운데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시고 신약교회를 세우셨다. 구약의 남은 자는 신약교회로 성취된 것이다. 신약교회가 하나님이 예언하신 남은 자이다. 이외의 소수 특별집단을 말하면 그가 거짓선지자요 이단이다.

    - 슥13:8-9 “여호와가 말하노라 이 온 땅에서 삼분지 이는 멸절하고 삼분지 일은 거기 남으리니, 내가 그 삼분지 일을 불 가운데 던져 은 같이 연단하며 금 같이 시험할 것이라 그들이 내 이름을 부르리니 내가 들을 것이며 나는 말하기를 이는 내 백성이라 할 것이요 그들은 말하기를 여호와는 내 하나님이시라 하리라.“

    (2) 로마서(롬1:17, 갈3:11) - 의인은 믿음으로 의롭다하심을 얻은 사람이다.

    -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but the righteous will live by his faith)”는 히브리어 문장은 두 가지로 해석될 수 있다. 첫째, by his faith 가 the righteous 를 수식하여 live 를 생명구원으로 보는 것이다. 믿음으로 의롭게 된 사람들은 생명구원을 얻는다. 로마서는 이런 의미로 해석한다. 둘째, by his faith 가 live 를 수식하여 의인은 믿음으로 살아간다. 히브리서는 이런 의미로 해석 한다 – 소선지서, 김희보 교수 -

    - 바울은 하박국 선지자의 예언에서 아주 중요한 진리를 말한다. 의인이란 하나님께서 죄인에게 믿음으로 의롭다하심을 주신 자이다. 이스라엘은 성전파괴 되었고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갔다. 의인(남은자)은 그곳에서 하나님의 약속인 이스라엘 회복을 기다리며 끝까지 믿음으로 살아가는 사람이다. 하나님은 그들을 의인이라 부르신다. 그들은 율법 지켜 의인됨이 아니라 이스라엘 회복 약속을 믿음으로 의롭다하심을 얻은 사람들이다. 하나님은 이미 그들을 의인이라 부르시고 계신다.

    - 하나님은 구약 인물 중 어느 누구도 율법을 지킨 완전한 자를 의인이라 부르지 않으셨다. 노아도 아브라함도 율법을 지켜 의인된 것 아니다. 노아는 여호와께 은혜를 입었고, 아브라함은 믿음으로 의인으로 불렸다. 하나님은 하박국 2장 4절에서 오직 믿음으로 살아가는 사람을 의인이라 부르신다.

    - 롬1:17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 갈3:11 “또 하나님 앞에서 아무나 율법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되지 못할 것이 분명하니 이는 의인이 믿음으로 살리라 하였음이니라.”

    -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를 지켜 내 공로로 얻음이 아니다. 죄인은 결코 율법의 요구인 거룩함을 이룰 수 없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십자가의 은혜로 죄용서와 의롭다하심을 통해 구원하신다. 죄인은 나의 공로 아닌 하나님 은혜로, 내 행위가 아닌 오직 믿음으로 의롭다하심을 얻는다.

    - 엡2:8-9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치 못하게 함이니라.”

    - 나의 선행과 행위로는 구원받을 수 없다. 내 힘으로는 죄를 이길 수 없기 때문이다. 오직 믿음으로만 구원을 얻는다. 그런데 나의 믿음은 절대로 구원의 공로가 될 수 없다. 은혜가 구원의 동인이고, 믿음은 은혜의 통로이다. 하나님이 은혜를 주셨기에 내게 믿음이 생기고 구원을 얻는다.

    - 믿음은 세 가지 요소가 있다. 그리스도 구원진리에 대한 지식 동의 신뢰이다. 지식 없는 믿음은 맹신이며, 지식 없는 신뢰란 우상숭배이다. 하나님과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은 그리스도께서 하신 일에 대한 지식과 동의, 그분께 전적인 신뢰(헌신) 행동을 말한다. 그러므로 믿음은 우리의 죄로부터 돌이킴과 그리스도께 순종함을 요구한다.

    <결론 및 적용>무화과 나뭇잎이 마르고 포도열매가 없어도 (3:17)

    (1) 주는 주의 일을 이 수년 내에 부흥케 하옵소서(2절)

    - 하박국은 하나님께서 지금 압제하는 바벨론을 멸하시고 이스라엘을 회복하시겠다는 말씀을 듣고 찬양을 드린다(3장). 시기오놋(식가욘)은 어떤 음악용어로 보인다. 셀라는 잠깐 쉬며 목상 하라는 음악용어이다.

    - 하박국이 활동했던 여호야김 시대에(BC605)이후 약 20년 후에 유다는 바벨론에 의해 멸망당한다(BC586). 하박국은 얼마 후 일어날 성전파괴와 바벨론 포로됨을 알고 두려웠지만 결국 하나님께서 반드시 바벨론을 멸하시고 이스라엘을 회복하심을 듣고 찬양한다.

    (2) 바벨론 포로됨을 앞두고 두렵지만 이스라엘 회복 약속을 기뻐하며(17절)

    - 합3:17-19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치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식물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찌라도 나는 여호와를 인하여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을 인하여 기뻐하리로다. 주 여호와는 나의 힘이시라 나의 발을 사슴과 같게 하사 나로 나의 높은 곳에 다니게 하시리로다...”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서론: 우리는 종종 적어도 한 번쯤은 하박국처럼 질문을 던진 적이 있을 것입니다. “왜 세상은 이렇게 불공평한가?” “왜 의로운 사람은 고난을 당하고, 악한 사람은 번영하는가?” 이 질문은 단순히 하박국의 시대에만 존재한 것이 아닙니다. 오늘날에도 많은 사람들이 고난과 불의 속에서 같은 질문을 던지며, 이에 대한 해답을 찾고자 합니다.

    어느 가장은 한 회사에서 오랫동안 성실히 일하면서 가정을 지켰고, 주일마다 예배를 빠지지 않으며 하나님을 믿고 섬겼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회사의 구조조정으로 갑자기 해고 당하고, 나이 때문에 재취업도 쉽지 않습니다. 그는 말합니다.
    “목사님, 저는 항상 정직하게 살았고, 믿음을 지키며 살았는데, 결국 제게 남은 것은 실직과 경제적 어려움뿐입니다. 도대체 하나님은 어디 계신 건가요?”

    또 다른 청년은 직장에서 자신의 자리에서 지켜야 할 원칙을 지키며 정직하게 일했습니다. 하지만 동료들은 요령껏 일을 하면서도 빠르게 승진합니다. 그가 일하는 방식은 오히려 그의 발전을 막았습니다. 속상한 마음에 그는 말합니다.
    “세상에서는 정직과 원칙이 결국 내게 손해를 끼친다고 느껴요. 내가 이렇게 믿음을 지키며 사는 게 정말 가치 있는 일인가요?”

    어느 어머니는 남편의 사업 실패와 자녀의 방황을 고민하며 기도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녀의 기도는 쉽게 응답되지 않았고, 고통은 계속 됐습니다. 지친 마음에 그녀는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께 맡기며 기도했습니다. 믿음을 지키며 기다렸습니다. 그런데 왜 제 삶은 여전히 나아지지 않는 걸까요? 믿음으로 살아가는 것이 정말 맞는 길인가요?”

    ‘왜 악한 자들이 득세하고, 의로운 자들이 고난을 겪어야 하는 것일까요?’ 이 질문은 신앙생활에 깊은 의심과 혼란을 불러 일으킵니다. 하지만 놀라운 것은, 지금으로 부터 무려 2,600년 전에 하박국 선지자도 우리와 같은 질문을 하나님께 했다는 것입니다.

    하박국서는 하나님과의 질의 응답식 대화를 통해서 메시지를 전하는 특징이 있습니다. 먼저 그는, 유다 왕국에서 악한 자들을 심판하지 않으시는 하나님에 대한 불만으로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 그의 1차 질문이 1장 2절에 나옵니다. “여호와여 내가 부르짖어도 주께서 듣지 아니하시니 어느 때까지리이까”
    - 이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이 5절 부터 11절에 나옵니다. 하나님은 ‘내가 한 일을 행할 것인데 너희에게 말하여도 믿지 아니할 것이다. 이로 인해 너희가 놀라고 놀라게 될 것이다’고 하십니다. 그것은 더 악한 바벨론 제국을 사용하여 유다 전체를 심판하시겠다는 답변을 주십니다.  00
    - 이에 대해 하박국은 ‘어떻게 악인이 자기보다 의로운 자를 집어 삼키는 것을 그대로 두고 보십니까?’ 2차 질문을 던집니다. ‘어떻게 악한 바벨론 국가가 계속 승승장구하며 번영을 누리게 하시는는가, 그렇다면 과연 하나님의 공의는 어디에 있는가’하고 의문을 제기합니다.
    - 그러자 하나님의 2차 응답이 2장 3절과 4절에서 주어집니다. 하나님이 정하신 때를 기다리면, 유다를 징계하기 위해서 채찍으로 사용한 바벨론 제국 또한 자신들의 죄 값으로 속히 멸망할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혼란과 혼동, 불안과 두려움의 시대에 하나님 백성들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해서 오늘 본문이 답을 주고 있습니다.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이 말씀은 하박국에게 주어진 답일 뿐만 아니라, 오고가는 모든 세대의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큰 울림을 주는 말씀이고, 오늘 우리에게도 여전히 살아 역사하는 능력의 말씀이고, 우리가 확실히 붙잡아야 할 진리의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단순한 위로가 아닙니다. 그 말씀은 우리가 믿음을 지키며 살아가는 이유와, 믿음으로 사는 것이 어떻게 승리로 이어지는지를 밝혀주는 중요한 진리입니다. 오늘 이 말씀을 통해, 믿음으로 사는 것이 왜 가장 확실한 길인지, 그리고 결국 믿음을 지키는 것이 어떻게 승리로 이어지는지를 함께 나누고자 합니다.

    1. 교만 VS 믿음

    하박국 2장 4절을 다 함께 읽어보겠습니다. “보라, 그의 마음은 교만하며 그의 속에서 정직하지 못하니라 그러나 의인은 그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여기에 대조 되는 두 부류가 나옵니다. 교만한 자와 믿음으로 사는 자입니다. 하나님을 믿지 않는 자들은 본질적으로 교만합니다. 창조주 하나님을 인정하지도 감사하지도 않습니다. 피조물이라는 자신의 한계를 인정하지 않습니다. 마치 자기가 우주의 중심인양 생각합니다. 자기만을 위해서 삽니다. 한 마디로 자신이 하나님이 되고자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사단의 타락한 죄의 본질에 비롯한 것입니다. 피조물 가운데 가장 아름답게, 가장 지혜롭게 지음을 받은 사단은 교만해져서 가장 높은 곳에 올라 하나님과 겨누어 보려다가 하늘로 부터 내침을 당했습니다. 그리고 타락한 마귀의 꾐에 빠진 아담과 하와 또한 선악과를 따먹음으로써 그와 동일한 죄에 빠졌습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하나님 말씀을 믿지 않고, 하나님 대신에 자신을 중심에 두려는 교만 죄에 빠진 것입니다. 인간의 모든 불행과 저주의 원인은 여기에서 출발합니다.

    이렇게 교만하고 올바르지 못한 자의 정형으로써 하박국 1장과 2장에서는 갈대아 사람들(바벨론 제국)에 대해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그들은 사납고 성급한 민족으로 다른 나라들을 거침없이 쳐들어가 쑥대밭으로 만들어 버립니다. 강력한 군대를 이끌고 다니며 나라들을 파괴하는 잔혹한 민족입니다. 자신들의 힘만을 의지하여 자신들을 높이고 하나님을 무시합니다. 그리고 끝없는 욕심으로 땅을 차지하고 불의한 방법으로 부를 쌓습니다. 피로써 성을 건설하고, 다른 민족의 희생을 통해서 자신의 영광을 쌓습니다.

    오늘날 우리 시대에도 교만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인간은 여전히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고, 자신의 힘과 능력, 지혜와 지식을 의지하며 물질적 번영과 권력의 추구에 매달리고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믿고 의지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눈에 보이는 것들, 즉 현실적인 것들을 의지하며 살아갑니다. 예를 들면:
    • 물질과 재산: 돈이 많으면 안전하고 행복할 것이라 믿습니다.
    • 성공과 명예: 사회적 지위와 업적이 인생의 가치를 결정한다고 생각합니다.
    • 사람과 관계: 가족, 친구, 권력 있는 사람들에게 기대어 삶의 안정감을 찾습니다.
    • 자기 자신: 자기 능력과 노력으로 원하는 것을 이루고자 합니다.
    • 과학과 이성: 논리와 증거를 바탕으로만 믿음을 결정하려 합니다.

    하지만 이것들은 영원하지 않으며, 환경과 상황에 따라 언제든지 돌변할 수 있습니다. 경제가 무너지거나, 관계가 깨지거나, 건강을 잃으면 삶의 기반이 흔들립니다. 그래서 자신의 안녕과 행복을 더욱 견고히 세우려고 끊임없이 더 많은 것을 소유하기 원하고, 더 높은 곳에 이르기를 추구합니다. 그만큼 불안하고 두려움이 많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 것인가, 여기에 주어진 하나님의 답은,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입니다. ‘악인은 마음이 교만하고 정직하지 못하므로 살아 남지 못할 것이나 의로운 사람은 믿음으로 살 것이다’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의인’이란 율법을 잘 지키거나 인간적인 도덕적 윤리적 규범을 잘 따르고, 선을 행하는 사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 ‘의인’은 하나님을 신뢰하고, 그분의 뜻에 순종하는 사람을 의미합니다. 올바르게 하나님과의 언약적 관계 속에 있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을 신뢰하고 의지하며, 그분의 말씀과 약속을 믿는 자입니다. 약속의 말씀이 성취되는 때를 기다리며 믿음으로 살아가는 자들입니다.

    이 사람은 자신을 의지하지 않습니다. 자신의 소유, 지위, 배경, 능력, 경력을 의존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과 하나님 말씀을 믿고 붙잡습니다. 눈에 보이는 것으로 살지 않고,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바라보며 삽니다. 성경은 언제나 이렇게 믿음으로 사는 자들을 통해서 하나님의 역사가 이루어졌음을 보여줍니다.

      • 노아는 홍수가 오기 전, 하나님의 경고하심에 따라 믿음으로 방주를 지어 그와 그의 가족이 구원을 받았습니다(창 6:9, 히 11:7).
      •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명령과 약속을 듣고서 본토 아비 친척 집을 떠났습니다(창 15:6, 롬 4:3).
      • 이스라엘 백성은 믿음으로 홍해를 건넜습니다(출 14:13-31).
      • 다니엘의 세 친구는 풀무불 앞에서도 하나님을 신뢰함으로 불 속에서 건짐을 받았습니다(단 3:16-18).
      • 바울은 감옥에서도 믿음을 버리지 않고 승리했습니다(고후 4:8-9).

    그들은 현실의 어려움 속에서도 하나님을 신뢰하며 나아갔습니다. 그리고 결국 그들의 믿음이 길을 만들었습니다.

    우리 눈에 보기에는 악인들이 승승장구하며 영구히 형통할 것 같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신앙이 오히려 짐이 되고, 손해를 줍니다. 한없이 마음이 답답하고 무겁습니다. 그런데 시편기자는 그들의 때가 길지 못할 것이라고 말합니다.

    (시편 37:1-11) “행악자를 인하여 불평하여 하지 말며 불의를 행하는 자를 투기하지 말지어다 저희는 풀과 같이 속히 베임을 볼 것이며 푸른 채소 같이 쇠잔할 것임이로다….잠시 후에 악인이 없어지리니 네가 그곳을 자세히 살필지라도 없으리로다 오직 온유한 자는 땅을 차지하며 풍부한 화평으로 즐기리로다”

    결국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심판하실 것이고, 하나님과 그분의 말씀을 믿고 신뢰하는 자가 최종 승리하게 될 것입니다. 아직 그 결말이 보이지 않습니다. 그럴지라도 믿음으로 기다리십시오. 잠시 후에 악인은 신속히 사라져 그 흔적 조차 없을 것이고, 믿음으로 참고 기다린 자들이 기업을 얻게 될 것입니다. 

    2.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 구속사적 의미

    하박국 2:4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이 구절은 구약에서 신약으로 이어지는 구속사의 한 중심에 서 있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 4장에서 아브라함을 본보기로 제시합니다. (로마서 4:19-22) “그가 백세나 되어 자기 몸이 죽은 것 같고 사라의 태가 죽은 것 같음을 알고도 믿음이 약해지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하지 않고 믿음으로 견고하여져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약속하신 그것을 또한 능히 이루실 줄을 확신하였으니 그러므로 그것이 그에게 의로 여겨졌느니라.”

    이 구절은 창세기 15장 6절을 인용한 것입니다. (창 15:6)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시고” 

    아브라함은 백세가 되도록 자녀가 없었고, 그의 아내 사라는 불임이었습니다. 현실적으로 볼 때, 하나님의 약속이 성취될 가능성이 전혀 없어 보였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이끌고 밖으로 나가셨습니다. 그리고 총총히 하늘에 박힌 별들을 가리키시며 “하늘을 우러러 뭇 별을 셀 수 있나 보라… 네 자손이 이와 같으리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몇 날 며칠에 자식이 태어나리라’고 하시지 않았습니다. 그냥 별만 보여 주셨습니다. 그 별도 한 두 개 아니었습니다. 뭇 별. 수많은 별들을 보여 주시며 “네 자손이 저렇게 많을 것이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자식은 아직 없고, 나이는 85세인데 이런 상황에서 여러분 같으면 믿겠습니까?

    그런데 아브라함은 어떻게 했습니까?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 놀랍게도 아브람은 하나님을 믿었습니다. 하나님을 신뢰하였습니다. 모든 의심과 불신적인 생각을 내려놓았습니다. 이때 아브람의 나이가 이미 80 중반입니다. 그리고 아직 자식을 낳을 어떤 징조 조차도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신뢰하고, 그분의 약속을 붙잡습니다. “하나님이 약속하셨으니 내게 자식을 주실 거야. 내가 알고 경험한 그분은 신실하신 분이야.” “비록 지금은 자식이 태어날 기미도 보이지 않고, 가능성도 없어 보이지만 장차 하늘의 별처럼 많은 후손들을 주실거야. 거짓말하실리 없는 그분의 약속이니까.” 하나님을 신뢰하고 믿었기에 그분의 약속 또한 이루실 것을 믿었습니다. 손에 잡히는 것 하나 없고, 눈에 보이는 것 하나 없지만, 장차 하늘의 별과 같고, 바다에 모래와 같이 많은 후손들을 주실 것을 믿었습니다.

    이를 하나님께서 그의 의로 여기셨습니다. 여기서 “여긴다”는 의미는 그렇게 간주해 주신다는 것입니다. 비록 의롭지는 않지만 그렇게 간주해 주신다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의롭다함을 받은 것은 그의 공로가 있어서가 아닙니다. 만약 그가 믿음이 좋고, 의롭고 거룩하게 살았기 때문에 의롭다함을 받았다고 한다면 그것은 그의 자랑거리가 될 것입니다. 그럴 만한 자격이나 요건을 갖추어서 의롭다함을 받았기에 은혜로 여기지 않고 당연하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그런데 아브라함도 우리처럼 처음부터 완전한 믿음의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가나안 땅에 기근이 들자 애굽으로 내려갔고, 거기서 아내 사라를 누이라고 속였습니다. 또, 하나님의 약속이 더디 이루어지자 사라의 몸종 하갈을 통해서 이스마엘을 낳는 실수를 범했습니다. 하지만 창세기 15장에서 하나님이 아브람에게 나타나셔서 “아브람아 두려워 말라 나는 너의 방패요 너의 지극히 큰 상급이니라”하며 믿음을 심어 주셨고, 17장에서는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 너는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고 흔들리고 있는 그의 믿음을 곧추세워 주셨습니다.

    아브라함은 자신의 행위로써 하나님 앞에서 자랑할 것이 없었습니다. 의롭다할 만큼 특별히 선행을 행한 것도 아닙니다. 그러면 아브라함이 무엇으로 하나님께 의롭다 인정함을 받게 되었습니까? (롬 4:3)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그것이 그에게 의로 여겨졌느니라” 아무런 증거가 없었지만 하나님을 믿었습니다. 하나님은 그 믿음을 보시고 의로 여기셨습니다.

    이렇게 아브라함이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훗날 이스라엘 백성들은 의롭다함은 율법을 지키는 것으로 오해하였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하박국 선지자를 통해 율법을 넘어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받는 구원의 길을 보여 주신 것입니다. 예수께서 이 땅에 오시기 전에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는 길이 열렸다는 메시지를 하박국 선지자를 통해서 미리 듣게 하신 것입니다. 장차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이루어질 하나님의 구원 역사에 대한 예언입니다.

    3. 그리스도 안에서 믿음과 구원

    사도 바울은 하박국서 2:4절을 인용하여 믿음으로 의롭게 되는 길에 대해 명확히 밝혔습니다. 로마서 1:17입니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예수 그리스도는 십자가에서 우리의 죄를 대신 짊어지시고, 우리가 받아야 될 죄의 형벌을 대신 담당하셨습니다. 이를 믿는 자마다 그 믿음을 통해서 의롭다함을 받습니다.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에서 하나님 앞에서 영원히 살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이것이 복음입니다. 신약성경에서는 이 복음을 반복해서 강조하고 있습니다.

    (갈 3:11) “또 하나님 앞에서 아무나 율법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되지 못할 것이 분명하니 이는 의인이 믿음으로 살리라 하였음이니라”
    (히 10:38) “오직 나의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또한 뒤로 물러가면 내 마음이 저를 기뻐하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

    여기서 강조점은 우리의 율법적 행위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는 것입니다. (엡 2:8-9)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치 못하게 함이니라”

    따라서,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받은 자들의 삶이란 한 마디로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를 전적으로 신뢰하고, 그분의 말씀을 따라 사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결론:
    하박국 2:4은 단순한 도덕적 교훈이 아닙니다. 율법적 행위를 말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구속의 역사 속에서 주신 놀라운 약속입니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의롭다함을 받고, 의롭다함을 받은 우리는 믿음으로 살아야 합니다. 하박국 시대에도, 아브라함 시대에도, 그리고 오늘날에도 이 진리는 변함이 없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세상의 것들이 변하고 사라질지라도 영원히 변하지 않는 하나님을 믿고 의지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 바가 무엇입니까?
    • 하나님의 약속: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을 신뢰합니다.
    • 예수 그리스도: 구원의 유일한 길이신 예수님을 의지합니다.
    • 성령의 인도하심: 인간의 지혜가 아닌,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아갑니다.
    • 하늘나라의 소망: 이 땅의 삶이 전부가 아니라 영원한 천국을 바라봅니다.
    • 기도와 믿음: 자신의 힘이 아니라 하나님께 맡기고 기도하며 살아갑니다.

    물론 우리는 여전히 흔들리는 세상에서 살고 있습니다. 노력해도 실패할 수 있고, 정직해도 불이익을 당할 수 있고, 기도해도 답이 없을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 우리는 묻습니다. “믿음을 지키는 것이 정말 가치가 있을까?” 여러분은 이런 상황에서도 여전히 하나님은 신실하시다는 것을 믿고 기다릴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의인은 그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우리는 어떤 상황에서도 믿음으로 살아가는 삶을 선택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성실하십니다. 변함이 없습니다. 영원합니다. 이 하나님께서 우리 믿는 자들을 끝까지 붙드십니다. 그리고 이를 믿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살 것입니다. 이 믿음에서 후퇴하지 않고, 믿음을 지키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축원합니다.


    믿음으로 살리라 (롬 1:17)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롬 1:17)

    하나님으로부터 의롭다 하심을 받는 길이 오직 믿음 뿐이라는 사실을 못 박는 듯 하박국서에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 이해가 안되도 하나님을 믿는 의인은 하나님을 잠잠히 신뢰하며 살아가야 할 것을 말하며 보라 그의 마음은 교만하며 그 속에서 정직하지 못하나 의인은 그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합 2:4)한 말씀을 인용하고 있다. 이는 믿음으로 의롭게 된 의인은 그 믿음으로 살리라 함으로도 이해한다.

    믿음은 우러러 보는 것이며  우러러 보는 믿음으로 살게된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불뱀을 만들어 장대 위에 매달아라 물린 자마다 그것을 보면 살리라 모세가 놋뱀을 만들어 장대 위에 다니 뱀에게 물린 자가 놋뱀을 쳐다본즉 모두 살더라(민 21:8-9)

    그런데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요 3:14)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요 3:15) 고 했다.

       구리 뱀은 장대 위에 세우신 예수님을 상징하며 십자가의 상징이었던 것이다. 구리 뱀의 경우는 육신의 눈이 그것을 바라 볼 때에 구원을 얻었다. 십자가의 경우는 영혼이 그 십자가를 바라보므로 구원을 얻는 것이다.

    여기에 신앙의 3요소가 결합되어 있다. 믿음이 대상을 바라보는 지각(지성적인 요소) 바라 보려는 집중력(의지적 요소) 바라보므로 산다는 확신(감정적 요소)이 있는 것이다. 
    땅의 모든 끝이여 내게로 돌이켜 구원을 받으라 나는 하나님이라 다른 이가 없느니라(사 45:22)

         믿음은 받아 드리는 영접이며 영접하는 믿음으로  살게 된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요 1:12)라 하시고 그러나 너희가 영생을 얻기 위하여 내게 오기를 원하지 아니하는도다 (요 5:40)라고 하시므로 구원을 받기 위해서는 주님께로 와야 함을 가르쳐 준다.

       가난으로 고생하는 한 부인에게 그 집을 찾아가서 몇 번이고 문을 두드렸으나 만나지 못하고 돌아와 그 후에 다시 만나서 그 때의 이야기를 했더니 "아 선생님이었어요. 참 미안합니다. 나는 집주인이 집세 받으려 온 줄 알고 때 마침 돈이 없기에 대답을 꺼리고 있었지요"라고 하더란다. 문을 열지 아니하는 그는 도움을 받을 수 없었다.

    감옥에 들어간 청년이 특사를 거절하고 외친 말이 있다. "여러분 나는 죄를 지어서 죽는 것이 아니라 특사를 거절해서 죽습니다." 하나님의 특사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면 생명이요 거절하면 죽음이다.
    받아드리는 것은 의심하지 않고 영접하는 것 곧 승인하는 것이다.  

      믿음은 온전히 맡기는 것이며 맡기는 믿음으로 살게 된다.

    [눅 23:42-43] 이르되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기억하소서 하니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하시니라
    나이야가라 폭포의 외줄 타기 선수와 아들이 아버지를 신뢰하고 자신을 맡김과 같다.

       페튼(John G Paten) 이란 분이 신약 성경을 자기 나라 말로 번역하면서 "믿는다"의 "믿음"이란 말을 자기 나라 말로 찾지 못했다. 그런데 어느 날  자기 나라의 선생님이 오셨는데 먼 길을 와서 피로하셔서 의자 위에 자기 몸을 맡기면서 "나의 모든 무게를 여기에 맡기고 싶다"고 하셨다. 이 말은 페튼에게는 매우 필요한 말이었다. 믿음이란 인생의 모든 무게를 다 풀어놓고 쉬는 행동과 같은 것이다. 

    헤추어(William E Hateher)  박사는 어릴 때 자기가 출석하는 마운트 허문 (Maunt Hermon) 교회에서 부흥 집회에 참석하게 됐다. 그러나 구원에 대해서 막연하기만 하였다. 다음 날 혼자서 길을 가고 있을 때 친척이 다가와서 너 자신을 주님 보시기에 무엇이라고 생각하느냐고 물었다. 그 때에 이 소년은 죄인이라고 생각하며 고통하고 있으나 어떻게 할 줄을 모르겠다고 하자 그리스도를 믿는 신앙을 가지라고 격려했지만 어떻게 흘 줄을 몰랐다. 그 때 친척이 참 나무의 큰 가지를 가리키며 너가 저 위에 올라가 안자 있다가 뛰어 내리면 무섭겠느냐 하니 그렇다고 하자 내가 너를 받아 줄 테니 뛰어 내릴 수 있느냐고 하여 못하겠다고 했다. 왜냐고 하여 나를 받아 줄 수 있는 힘이 없을 것 같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러면 만약 주님께서 그 나무아래 팔을 벌리고 너를 부른다면 어떻게 하겠느냐 하니 뛰어 내리겠습니다. 주님은 나를 붙들어 주실 힘이 있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하자 이것이 바로 믿음이란다. 라고 그 친척이 가르쳐 주었다. 그래서 그는 예배에 참석해서 내 자신을 예수님께 드려야지 하고 자신을 맡겼다 한다.

       무디 선생님이 잘 아는 친구 집에 가서 정원을 함께 걸으면서 이야기하는 가운데 두 아이가 놀고 있는 것을 보고서 자네 아들들인가 물으니 하나는 아들이고 하나는 아니라고 하자 어느 아이가 자네 아들인가 물어 보니 자네가 맞춰 보라고 하나 알 수가 없어 모르겠다고 하니 두 아이를 오라고 부르더니 아이들을 나무 가지 위에 올려놓고 뛰어 내리라고 하니 한 아이는 뛰어 내리는데 한 아이는 뛰어 내리지 못하고 울고만 있자 친구는 이래도 모르겠느냐고 하는 것이었다. 그래도 모르겠다고 하니 친구는 처음 뛰어 내린 아이는 내 아들이고 울고 있는 아이는 이웃집의 아이라고 설명을 하는 것이었다. 이웃 아저씨를 믿지 못하는 아이는 뛰어 내리지 못하고 두려워 울고 있으나 아버지를 믿는 아들은 비록 높은 나무 가지라 하더라도 아버지의 품으로 자신의 몸을 완전히 내어 맡기고 뛰어 내리는 이것이 곧 믿음의 행위인 것이다 

    믿음은 먹고 마심이며 먹고 마시는 믿음으로 살게 된다

    믿음의 한 요소를 의에 주리고 목마른 것으로 가르쳐 주셨다.
    (마 5:6)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배부를 것임이요
    제자적 죽음의 효능으로 사람들의 영적 영원적 생명의 원천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먹고 마심으로 가르치기도 한다.

    이는 하늘에서 내려오는 떡이니 사람으로 하여금 먹고 죽지 아니하게 하는 것이니라 (요 6:50)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떡이니 사람이 이 떡을 먹으면 영생하리라 내가 줄 떡은 곧 세상의 생명을 위한 내 살이니라 하시니라 (요 6:51) 그러므로 유대인들이 서로 다투어 이르되 이 사람이 어찌 능히 자기 살을 우리에게 주어 먹게 하겠느냐 (요 6:52)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인자의 살을 먹지 아니하고 인자의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 속에 생명이 없느니라 (요 6:53)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영생을 가졌고 마지막 날에 내가 그를 다시 살리리니 (요 6:54) 내 살은 참된 양식이요 내 피는 참된 음료로다 (요 6:55)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내 안에 거하고 나도 그의 안에 거하나니 (요 6:56) 살아 계신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시매 내가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는 것 같이 나를 먹는 그 사람도 나로 말미암아 살리라 (요 6:57) 이것은 하늘에서 내려온 떡이니 조상들이 먹고도 죽은 그것과 같지 아니하여 이 떡을 먹는 자는 영원히 살리라 (요 6:58)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다는 것도 이와 같이 떡과 물을 먹고 마시듯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진리를 영적으로 맛을 보며 먹고 마시는 것과 같다

    사람들이 음식물을 풍성히 장만해 놓고 냉장고에 잘 보존해 놓았다고 해서 나의 몸에 힘이 생기고 건강해 지리라고 생각지 않는다. 그 음식을 입에 넣어서 씹어 먹어야 한다. 병든 사람이 약이 병을 고칠 것으로 믿는다고 해서 병이 낫는 것은 아니다. 그 약을 먹을 때 그 약의 효력이 나타나 병이 낫게 되는 것이다.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내가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요 4:14)

       명절 끝날 곧 큰 날에 예수께서 서서 외쳐 이르시되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요 7:37)고 하셨다.

       영적 생명의 원천이신 그리스도께서 영적으로 물을 마시는 것으로 가르치셨다.

       오래 전 불란서와 영국간에 전쟁이 있었을 때에 불란서의 고래잡이배가 먼 항해를 떠났다가 돌아오는 길에 물이 떨어져서 목이 말라 쇠약해졌다. 영국의 포구 앞을 지나면서 고통의 신호를 보냈더니 영국 쪽에서는 전쟁은 끝났으니 포구에 들어와서 원하는 대로 마음 놓고 물을 마시라고 했다. 이 신호를 받은 불란서 고래잡이배는 이 신호만으로 목마름이 해결  될까 아니다 이 말을 사실로 받아 들여 배를 포구에 대고 물을 마셔야만 하는 것이다. 

      믿음은 하나님의 말씀을 확신하는 것이요 확신하는 믿음으로 살게 된다.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 순종하여 장래 기업을 받을 땅에 나갈 새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가게 되었다.(히 11:8) 

       믿음은 열린 마음으로 하나님의 약속을 확신하고 증언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전도자 빌리 그래함 목사는 결단을 촉구하며 외칩니다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그를 조롱 할 수 있습니다. 무관심 할 수 있습니다.  그를 반대 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영접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창조하실 때에 선택의 자유를 주셨습니다. 결단을 내릴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예수님이 무엇을 원하고 계시겠습니까. 회개하기를 원합니다. 회개가 무엇일까요. 하나님 나는 죄인입니다. 잘못했습니다. 고백 그것보다 더 한 것입니다. 내가 사는 방향을 바꾸겠습니다. 내 죄에서 나는 돌아서겠습니다 함이요, 그 후에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마음에 영접하는 것입니다. 나는 내가 가지고 있는 모든 신을 다 버리겠습니다. 주님은 나의 유일하신 하나님 유일하신 주님 유일하신 그리스도가 되셔야 하겠습니다. 나는 주님을 그리스도로 영접해야만 되는 것입니다. 이 선택이 100년 후의 위치를 결정하게 될 것입니다"
      영혼의 구원을 위하여 그리스도에게 복종하고 신뢰함이다

        요한 웨슬레는 몸무게가 50Kg 밖에 되지 않는 왜소한 분이었지만 역사상 가장 위대한 부흥사였다. 그는 아버지 위로 5대가 목사였고 어머니 위로도 5대가 목사인 신앙적인 가문에서 태어났다. 게다가 그는 영국 최고의 옥스포드 대학에서 신학을 공부했고 강의도 했다. 

    1732년, 그는 인디언 선교사로 자원해 미국 조지아 주의 인디안 원주민들을 찾았다. 그때 그에게는 광대한 신대륙에 복음을 전하겠다는 웅대한 비전이 있었고, 당당한 실력이 있었다. 또한 불타는 사명감과 인디언들을 향한 뜨거운 사랑도 있었다. 그러나 아무 성과도 거두지 못하고 처절한 실패를 맛보았다. 그처럼 최고의 실력을 갖추고 큰 꿈과 이상과 사명과 열정까지 가진 사람이 실패하였다.

    사람의 힘이나 능력만 가지고는 되지 않는다.

    (슥4:6) 그가 내게 대답하여 이르되 여호와께서 스룹바벨에게 하신 말씀이 이러하니라 만군의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이는 힘으로 되지 아니하며 능력으로 되지 아니하고 오직 나의 영으로 되느니라

    결국 선교사역에 실패하고, 폐결핵까지 걸린 웨슬레는 패잔병처럼 영국으로 귀향하게 되었다. 그런데 설상가상으로 귀향하던 배가 풍랑을 만났다. 배는 사람들의 아우성과 몸부림으로 아수라장이 되었습니다. 그때 웨슬레도 두려움에 젖어 있는데 어디선가 찬송소리가 들렸다. 그 소리에 이끌려 선창으로 가니 모라비안이라 불리는 경건파 성도 몇 명이 손잡고 찬송하고 있었다.

    그때 웨슬레가 물었다. “당신들은 두렵지 않습니까?” 그들은 대답했다. “우리는 예수 믿는 사람들이라서 어떤 일을 만나도 두려움이 없습니다. 선생님도 예수를 믿어보세요.” 그 말은 목사였던 웨슬리의 신앙양심을 무섭게 때렸다. “내가 이러고도 선교사를 자처했나?” 귀향 후, 런던에서 투병하다가 웨슬레는 1738년 5월 24일, 우연히 모라비안 성도들의 작은 밤 집회에 참석하게 되었다. 그때 한 청년이 오늘 본문을 낭독했다.

    (롬 1:17)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평소에 잘 알던 말씀이었지만 “의인은 믿음으로 산다!”는 말씀이 그날따라 그의 가슴을 치며 뜨거운 믿음의 불꽃이 점화되었다.

    그는 어렸을 때 화재로 타죽기 일보 직전에 살아났다. 그래서 그는 ‘타다 남은 숯’이란 별명을 지녔다. 그 숯에 다시 불이 붙은 것이다. 그는 투병하면서 자기 묘비에 새길 기도문을 적었다. “하나님! 이 무익한 종을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 타다 남은 웨슬레가 여기 누웠습니다.” 그 마지막 기도문을 써 놓고 35세를 일기로 죽음을 기다리다가 그때 은혜를 체험했다. 그리고 몸도 치유되었다. 그 뒤 그는 88세까지 장수하면서 복음을 전했다. 그가 말을 타고 지구를 열 두 바퀴 돌며 복음을 전했고, 일생 4만 2천 4백 번의 설교를 했고, 200권이 넘는 신앙서적을 남겼다.

       소련이 공산 국가가 되기 전의 이야기다. 한 무신론자가 성도를 비난하고 하나님이 없다고 외쳤다. 한 번은 많은 사람 앞에서 하나님이 있다면 이 자리에 나타나 보이라 만일 나타내 보이기만 한다면 나는 이 주먹으로 맹렬히 공격하겠노라 고 핏대를 올려 허공을 지른다 그러나 신이신 하나님이 형상으로 나타 날리 만무하다. 그러자 그는 더욱 기고 만장하여 보시오 하나님이 어디 있습니까 지금 하나님이 낮잠 자고 있지 않습니까 이때 군중들은 와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그런데 청중 가운데서 조용히 듣고 있던 한 농사꾼 부인이 겸손한 태도로 강단 앞에 나왔다. 많은 사람들이 이 여인을 쳐다보았다. 죄송합니다만 한 마디 하겠습니다. 저는 선생님처럼 철두철미한 무신론에 이론적으로 대답할 지식이 없으나 한 마디 묻겠습니다. 저는 수 십 년간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왔습니다. 저는 예수님이 저를 구원하신 일을 감사하며 살아왔습니다. 그의 의뢰는 나에게 더할 나위 없는 기쁨입니다. 그런데 제가 죽게 될 때에 가령 하나님이 안 계시는 것과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라는 것 구원은 없고 천국도 없다는 것을 모두 알게 되었다면... 저에게 대답해 주십시오. 예수님은 우리에게 남을 사랑 할 것과 옳고 착한 일등 조금도 죄 짖지 말 것을 가르쳤고 또 그 자신이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 죽으시므로  몸소 참 사랑을 보이셨습니다. 이러한 예수님을 믿고 살아온 내가 생활의 무슨 손해가 있습니까 선생님의 지혜로 대답해 주십시오. 청중들은 조용해졌습니다. 

    그 강사는 말이 떨리기 시작했고 아무 것도 손해나는 것이 없겠습니다라고 대답을 했다. 이 부인은 계속해서 말을 한다. 참으로 감사합니다. 그러면 한 마디만 더 대답해 주시기 바랍니다. 선생님께서 죽게 될 때에 운명하는 자리에서 만일 성경이 참 진리라는 것 분명히 지옥과 천국이 있다는 것 그리하여 조물주 하나님이 오셔서 우리의 죄 대로 심판하여 선생님을 지옥으로 넣어 버린 다면 ... 내게 대답해 주십시오. 선생님은 어떤 손해가 있겠습니까? 

    장내는 더욱 조용해졌습니다. 무신론 강사의 청산유수 같은 말문은 막혀 버리고 말 한마디 못하고 있습니다. 갑자기 저 뒤에서 옳다 하나님은 분명히 계시다. 하는 소리가 들리자. 이번에는 여기저기서 큰 소리로 저 무신론자를 쫓아내라 하는 외침이 높아졌다. 장내는 금방 아우성치듯 들끓었다. 쥐구멍을 찾아가듯 삽십 육계 줄행랑을 치는 무신론자였고 환희에 넘쳤으나 역시 조용히 서 있는 농사꾼의 부인의 얼굴은 더욱 빛나고 있었다. 

    우러러 보는 믿음 영접하는 믿음맡기는 믿음 먹고 마시는 믿음 말씀을 확신하는 믿음으로 살게 된다. 이러한  믿음으로 영광돌리며 사명 감당하는 모두가 되자.



    1. 하나님의 의(義) 앞에 선 인간의 절망과 두려움

    마틴 루터의 고뇌: 종교개혁가 마틴 루터는 ‘하나님의 의’라는 말씀 앞에서 절망감을 느낍니다. 그는 하나님의 완전한 의를 자신의 행위로 만족시킬 수 없다는 사실에 고통스러워했고, 심지어 그 의로움을 미워하기까지 했습니다. 이는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죄인 됨을 처절하게 깨달은 인간의 실존적 고뇌를 보여줍니다.

    죄인의 보편적 반응: 완전하고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섰을 때 죄인이 느끼는 첫 감정은 ‘두려움’입니다. 이는 성경의 여러 인물을 통해 일관되게 나타납니다.

    • 아담과 하와: 죄를 지은 후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두려워하여 숨었습니다.
    • 이사야: 하나님의 임재 앞에서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라고 외치며 자신의 부정함을 고백했습니다.
    • 베드로: 예수님의 신성을 목격하고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라고 고백했습니다.

    하나님을 아는 시작점: 이처럼 자신의 죄인 됨을 깨닫고, 하나님의 완전하심 앞에서 절망하는 ‘심령이 가난한 상태’가 바로 하나님을 만나는 신앙의 출발점입니다.


    2.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는 복음의 진리

    ‘하나님의 의’에 대한 새로운 깨달음: 루터는 반복적인 말씀 묵상 속에서 ‘하나님의 의’가 인간에게 요구하시는 행위의 기준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에게 선물로 주시는 것임을 깨닫게 됩니다. 즉, 심판의 근거가 아니라 구원의 근거인 것입니다.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의 세 가지 의미: 이 구절은 오해를 낳기 쉽지만, 개혁주의 신학 안에서 다음과 같이 일관되게 해석됩니다.

    250615 Sunday Service Romans 117 Only the righteous shall live by faith 2 1 250615   117     2
    • 구원의 전 과정 (시작, 여정, 완성): 구원의 시작인 ‘칭의’, 과정인 ‘성화’, 완성인 ‘영화’의 모든 단계가 인간의 행위가 아닌 오직 하나님의 은혜, 즉 ‘믿음’으로 이루어짐을 의미합니다. 우리의 구원은 100%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 구원의 확장 (유대인에서 이방인으로): 구원이 아브라함의 후손이라는 혈통적 ‘유대인의 믿음’에서 시작하여, 이제는 인종, 계층, 성별을 넘어 모든 민족을 포함하는 ‘보편적인 믿음’으로 확장되었음을 의미합니다.
    • 믿음의 성숙 (시작에서 성숙으로): 하나님이 주신 ‘첫 믿음’이 신앙의 여정을 통해 하나님을 더 깊이 알아가면서 ‘성숙한 믿음’으로 자라나고 열매 맺게 됨을 의미합니다.

    3. 믿음으로 ‘사는 것’의 의미

    삶의 방식으로서의 믿음 : 
    믿음은 천국행 티켓을 얻는 일회성 행위가 아닙니다. 구원받은 이후의 삶의 모든 과정을 살아가는 방식 그 자체가 바로 ‘믿음’입니다.

    하나님의 모든 속성을 찬양하는 삶 : 
    믿음으로 하나님의 의를 옷 입게 될 때,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뿐만 아니라, 두려움의 대상이었던 그분의 공의와 심판까지도 기쁨으로 찬양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모든 성품이 우리의 기쁨과 찬양의 이유가 되는 것입니다.

    세상을 이기는 능력 
    하나님이 주신 믿음은 세상의 가치관(돈, 명예, 권력)과 다른 방식으로 살게 하는 힘이 됩니다. 고난 속에서도 소망을 노래하고, 하나님 한 분만으로 만족하는 삶을 가능하게 합니다.


    Q1.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신데, 왜 우리는 그분 앞에서 먼저 ‘두려움’을 느끼게 되나요?

    성경은 하나님께서 완전하게 거룩하시고 의로우신 분이라고 말씀합니다. 그분의 거룩한 빛이 우리를 비출 때, 우리는 스스로의 힘으로는 감출 수 없는 죄 된 본성을 발견하게 됩니다.
    마치 어둠 속에 있던 먼지가 밝은 빛 아래서 낱낱이 드러나는 것과 같습니다. 아담과 하와, 이사야, 베드로가 그랬던 것처럼,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죄인 됨을 깨닫는 것은 자연스러운 반응이며, 이 두려움과 절망감이 바로 우리에게 구원자가 필요함을 인정하게 되는 은혜의 시작점이 됩니다.

    Q2. 구원이 100% 하나님의 은혜라면, 우리가 신앙생활에서 노력하고 애쓰는 것(기도, 예배, 순종 등)은 어떤 의미가 있나요?

    우리의 노력이 구원의 ‘조건’이나 ‘대가’가 되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구원은 전적으로 하나님이 주시는 선물이지만, 그 선물을 받은 자로서 감사하며 살아가는 ‘반응’이 바로 우리의 신앙생활입니다. 즉, 구원을 ‘얻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받은 구원에 ‘감사하여’ 살아가는 것입니다. 성령께서는 우리 안에 믿음을 주실 뿐만 아니라, 그 믿음으로 세상을 이기고 거룩한 삶(성화)을 살아갈 수 있도록 도우십니다. 따라서 우리의 신앙적 노력은 구원의 증거이자, 믿음이 자라가는 성숙의 과정입니다.

    Q3.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는 말씀이 오늘 나의 삶에 구체적으로 어떻게 적용될 수 있을까요?

    이 말씀은 세 가지 차원에서 우리의 삶 전체에 적용됩니다.

    첫째, 나의 어떠한 선행이나 자격 때문이 아니라,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다는 사실을 굳게 신뢰하는 것입니다.

    둘째, 일상의 모든 선택과 결정의 순간에 세상의 방식이 아닌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는 ‘믿음’을 삶의 원리로 삼는 것입니다.

    셋째, 신앙의 여정 속에서 어려움을 만나거나 죄로 인해 넘어질 때에도 절망하지 않고, 우리를 온전하게 하실 하나님을 신뢰하며 믿음이 더욱 성숙해지는 기회로 삼는 것입니다.


    오늘의 기도

    거룩하시고 완전하신 아버지 하나님,

    오늘 말씀을 통해 하나님의 의로우심 앞에 저의 죄 된 모습을 봅니다. 제 힘과 노력으로는 결코 주님 앞에 설 수 없는 죄인임을 고백하오니, 저를 긍휼히 여겨 주옵소서.

    심판받아 마땅한 저희를 위해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주시고, 그 십자가의 공로로 하나님의 의를 값없이 선물로 주시니 그 은혜에 감사와 찬양을 드립니다. 이제는 그 의를 힘입어 두려움이 아닌 담대함으로 주님의 보좌 앞에 나아갑니다.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하신 말씀을 제 삶의 방식으로 삼기 원합니다. 구원의 시작뿐 아니라 삶의 모든 과정과 마지막 날까지, 오직 주님이 주시는 믿음으로 살게 하옵소서. 세상의 가치관에 흔들리지 않고, 믿음으로 세상을 이기며, 고난 속에서도 주님 한 분만으로 만족하는 성숙한 믿음의 사람으로 자라나게 하옵소서.

    저의 모든 삶이, 하나님의 사랑과 공의, 그 모든 온전하심을 기쁨으로 찬양하는 예배가 되게 하여 주옵소서.

    이 모든 말씀, 우리를 의롭게 하시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하나님은 언제나 그의 택한 자녀들에게 한가지를 분명하게 요구하십니다. 그것은 믿음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올바른 믿음으로 살아간다는 것이 말처럼 그렇게 쉽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과연 무엇이 올바른 믿음이요,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믿음일까요?

    <믿음장>이라 불리는 <히브리서 11:1>에서 히브리서 기자는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라” (히. 11:1)고 믿음을 정의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곧 믿음이라는 것은 현재 보고 소유한 것이 아니라, 그 믿음을 통하여 미래에 보게 되고 실현되어지는 것입니다. 그럼으로 믿음은 본질적으로 그것을 통해 눈으로 보고 증명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은 언제나 성도에게 있어서 믿음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웨스트민스터 신학사전’에서는 ‘믿음’ (faith)를 이렇게 정의하고 있습니다. [기독교에서 볼때,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드러난 하나님을 향한 신뢰와 순종을 뜻함. 그것은 ‘구원’ (엡. 2:8) 혹은 ‘영생’ (요. 6:40)을 의미함. 그리고 믿음은 그 성도의 지성 (intellect) 감정 (emotion) 그리고 의지 (will) 이와 같은 모든 면에서 영향을 미침]이라고.

    오늘 본문말씀에서 사도 바울은 우리 인간이 하나님으로부터 의롭다고 인정함을 받고 그로 말미암아 살게 되는 것은 믿음으로 말미암게 되기 때문이라고 선언합니다. 그는 “~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v.17b)고 믿음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이제 그렇다면 무엇이 그 믿음을 통하여 살게 되고, 하나님이 인정하시는 믿음일까요? 우리가 무엇이 올바른 믿음인지를 확인해 나가는 효과적인 방법의 하나로써, 무엇이 믿음이 아닌지를 먼저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러면, 무엇이 믿음이 아닐까요?” 그것은

    첫째, 믿음은 ‘맹신’이 아닙니다: <국립국어 대사전>에서 찾아보면 “‘맹신’ (盲信/ blind faith)은 옳고 그름을 가리지 않고 덮어놓고 믿는 일”이라고 정의합니다. 우리가 모두 인정하듯이, 맹신은 인간의 건전한 상식과 판단을 마비시킴으로 올바른 믿음의 심각한 걸림돌이 되는 잘못된 믿음인 것입니다.

    둘째, 믿음은 ‘희망사항’이 아닙니다: 다시 말해, ‘나의 소원성취를 위해 그것을 간절히 추구하는 것’이 믿음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셋째, 믿음은 ‘추진력’이 아닙니다: 그러니까 내 자신이 옳다고 믿는 바를 끝까지 실천해 나가는 능력이 믿음이 아니다는 것입니다. 단순히 “내가 모든 것을 할수 있느니라”는 식의 추진력이 믿음이 아닌 것입니다.

    다음 시간에는 ‘무엇이 구체적으로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믿음인지?’를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의 믿음을 통해 살펴보겠습니다. 언제나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의 도우심으로 믿음으로 살아가는 성도 되시길 소망합니다.

    [설교 전문]

                저는 성경을 묵상하면 할수록 하나님께서 언제나 그를 믿는 그의 자녀들에게 분명하게 요구하는 것이 한가지 있음을 깨닫게 됩니다. 그것은 바로 믿음입니다. 이 믿음이 하나님을 향한 삶의 동기와 중심이 되어 아름다운 열매 맺는 삶을 살아가길 원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올바른 믿음으로 살아간다는 것이 말처럼 그렇게 쉽지 않다는 것입니다. 안따깝게도 자기 자신은 믿음생활을 잘한다고 여기지만, 실제로는 비뚫어지고 왜곡된 믿음으로 말미암아 많은 문제를 일으키며 살아가는 크리스챤들도 적지않다는 사실입니다. 그럼으로 만약 여러분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구원받는 성도로 살아간다면, 구원받는 그 자체로 만족할 것이 아니라, ‘나는 과연 올바른 믿음으로 살아가고 있는지?’를 점검하고 스스로 고민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그것을 통하여 진정한 믿음으로 영적 성장을 계속해야 하는 것입니다.

    제가 오늘 성도 여러분과 말씀을 통하여 ‘믿음이 무엇인가?’에 대해 살펴보면서 우리가 한가지 분명히 구분해야 할 점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무엇보다도 ‘믿음’과 ‘인정’은 본질적으로 다르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제가 말씀드리는 ‘인정’ (acception)은 무슨 의미일까요? 그것은 말하자면, 수학의 기본개념에서 ‘2 더하기 2는 4’라는 명제라든지, 혹은 과학에서 어떠한 현상을 증명하는 방식입니다. 과학의 한 예로써 ‘물’ 이 ‘수소’ 와 ‘산소’의 분자의 결합을 통해 생성되었음을 증명할 때, 물 (H20)에서 수소분자 (H)와 산소분자 (0)를 분류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수학적 증명이나, 과학적 증명을 통해서 그것이 올바른 증명이라고 판단될 때 우리는 그것을 ‘인정’ (accept)하는 것입니다. 누구도 이렇게 증명된 사실을 ‘인정한다’는 말대신 ‘믿는다’라고 말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것은 ‘인정’하는 개념이지 ‘믿음’의 개념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제가 지금 여러분과 ‘믿음이 무엇인지?’에 대해 살펴보면서 한가지 분명히 하기 원하는 것은 ‘믿음은 어떤 증명된 어떤 사실을 인정하는 것이 아니다’는 점입니다. 물론 이 점이 믿음의 결코 쉽지 않은 점임을 저도 잘 압니다. 왜냐하면, 믿음의 궁극적인 대상인 하나님을 그 누구도 결코 증명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을 수학적이든, 과학적이든, 인문학적이든 철학적이든 인간이 증명할 수 있는 그 어떤 방법으로도 증명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믿음입니까? 성경에서 보면 <믿음장>이라고 불리는 <히. 11:1>에서 믿음을 이렇게 선언합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라” (히. 11:1)고. 이러한 믿음에 대한 정의는 현재 보고 소유한 것이 아니라 미래에 보고 실현되는 것입니다. 그럼으로 믿음은 본질적으로 눈으로 보고 증명되는 것이 아닙니다.

    이제 그렇다면 우리가 믿는 기독교의 ‘믿음’에 대한 정의를 살펴보겠습니다. ‘웨스트민스터 신학성구사전’에서는 ‘믿음’ (faith)를 이렇게 정의하고 있습니다. [기독교에서 볼때,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드러난 하나님을 향한 신뢰와 순종을 뜻함. 그것은 ‘구원’ (엡. 2:8) 혹은 ‘영생’ (요. 6:40)을 의미함. 그리고 믿음은 그 성도의 지성 (intellect) 감정 (emotion) 그리고 의지 (will) 이와 같은 모든 면에서 영향을 미침]이라고 정의하고 있습니다. 그럼으로 ‘웨스트민스터 사전’에서는 하나님 아버지에 향한 성도의 신뢰와 순종이 믿음이고, 이 믿음은 ‘인격적인 모든 면’ 즉 ‘지.정.의’ 모두에 영향을 미친다고 정의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한사람이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그 분을 전적으로 신뢰함으로 인하여 순종함으로 나아가는 삶 > 의미하는 것인데, 그럼으로 이 믿음은 그 사람의 전인격에 절대적인 영향력을 미치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말씀에서 사도 바울은 어떻게 우리 인간이 하나님으로부터 의롭다고 인정함을 받고 그로 말미암아 살게 되는지를 밝히고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믿음이라고 선언하는 것입니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v.17) 그리고 이 말씀은 구약의 하박국 선지자가 선포한 말씀, <합. 2:4>을 인용한 것입니다. 제가 오늘 말씀 가운데 성도 여러분과 함께 묵상하고 고민해 보고자 하는 주제는 ‘무엇이 참된 믿음인가?’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다른 말로 한다면, ‘무엇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고 인정하시는 믿음인가?’ 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어떻게 우리는 하나님이 기뻐하시고 의롭다고 인정하시는 믿음으로 살아갈 수 있을 것일까요?

    이 주제를 시작함에 있어서 제가 취하는 방법의 하나는 그렇다면 ‘무엇이 믿음이 아닌가?’를 먼저 살펴보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무엇이 믿음이 아닌지를 먼저 이해하는 것이 무엇이 참된 믿음인지를 이해하는 효과적인 방법’이 될 것을 저는 믿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믿음이 아닐까요? (설교참조) 제가 이것에 대해 언젠가 말씀드린 적이 있는데, 그것은 첫째) 믿음은 ‘맹신’이 아닙니다. 둘째) 믿음은 ‘희망사항’이 아닙니다. 다시 말해, ‘나의 소원성취를 위해 그것을 간절히 추구하는 것’이 믿음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셋째) 믿음은 ‘실천력’이 아닙니다. 그러니까 내 자신이 옳다고 믿는 바를 끝까지 실천해 나가는 능력이 믿음이 아니다는 것입니다. 단순히 “내가 모든 것을 할수 있느니라”는 식의 추진력이 믿음이 아닌 것입니다. 이러한 <3가지>가 마치 믿음인 것처럼 성도들이 오해하는 대표적인 <잘못된 믿음>입니다. 저는 이 3가지 잘못된 믿음 가운데서 잘못된 믿음의 대표적인 ‘맹신’에 대해 좀더 깊이 살펴봄으로 우리 각자의 믿음을 돌아보는 시간이 되고자 합니다.

    먼저, 이러한 잘못된 믿음의 가장 눈에 띄는 ‘맹신’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국어사전에 보면 ‘맹신’ (盲信/ blind faith)은 “옳고 그름을 가리지 않고 덮어놓고 믿는 일”이라고 정의하고 있습니다. 말 그대로 ‘과연 무엇이 옳고 무엇이 그른지를 가리지도 확인해 보지도 않고 덮어놓고 믿는 것’이 <맹신>이라는 것입니다. 문자 그대로 ‘앞에 무엇이 있는지를 보지 못하는 믿음’ (blind faith)이 맹신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한가지 중요한 질문은 ‘왜 수많은 사람들이 이런 잘못된 믿음, 맹신에 빠지게 될까?’ 하는 것입니다. 물론 이런 맹신에 빠지게 되는 상황은 매우 다양할 수 있습니다. 그 사람이 기질적으로 남의 말을 덮어 놓고 잘 믿는 스타일이라든지, 또 어떤 지식을 접했을 때 그것을 분석하거나 객관적으로 판단할 지적 능력이 부족하다든지, 혹은 그와 같은 건전한 판단을 개발하고 훈련할 교육의 기회를 가지지 못함으로 인해 맹신이라는 매우 잘못된 형태의 믿음에 빠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유가 어떠하든지 이러한 ‘맹신’에 빠지게 되는 그 과정에 우리가 놓치지 말아야 될 한가지 단계가 있음을 저는 발견하게 됩니다. 그것은 ‘세뇌작업’입니다. 무엇이 ‘세뇌’ (洗腦)입니까? <세뇌>는 영어로는 “brainwash” 입니다. 말 그대로 ‘뇌를 씻는다’는 뜻입니다. ‘얼굴에 묻은 먼지를 씻어 내듯이, 우리의 뇌 속에 있는 기존의 지식과 판단능력을 물로 씻어 내듯이 다 씻어내고, 그 어떤 누군가가 의도하고자 하는 방법과 방향대로 어떤 정보와 지식을 뇌에 다시 집어넣는다’는 것입니다. 결론은 그 누군가가 자신의 의도데로 상대방을 조정하고 컨트롤하기 위하여 자신의 일방적인 지식과 가치를 주입한다는 것입니다. 매우 위험하고 잘못된 상태인 것입니다.

    이와 같은 ‘세뇌’과정에 관련된 한가지 구체적인 예로서, 우리 기독교 교리에 대해서 살펴보기 원합니다. 우리 프로테스탄스 기독교 교리의 가장 기본적이고 중요한 교리의 하나는 ‘삼위일체’ (Trinity) 교리입니다. 즉 ‘성부, 성자, 성령은 본질상 한 하나님이시다’는 것입니다. 물론 성부, 성자 그리고 성령 하나님은 각자 고유한 ‘위격’을 가지고 있지만 본질적으로 한 하나님 (in one Godhead)이시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호와증인’ 과 일부 기독교 교파 가운데서는 자신들이 주장하는 성경구절을 근거로 ‘삼위일체’의 교리를 부인하는 것입니다. 그 중에 하나가 <요한복음 14장>에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 아버지는 나보다 크심이니라” (요. 14:28)는 구절을 그 근거로 재시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이해해야 하는 것은 성자 하나님 되신 예수님이 스스로 자신이 하나님과 동등하다고 말씀하지 않았다는 것이 그분과 본질상 하나가 아님을 뜻하는 것이 아님을 이들은 이해하지 못한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언제나 자신을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낮추셨고, 그 분의 뜻에 언제나 복종하셨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그분의 태도가 자신이 성부 하나님과 동일하신 하나님이 아니다는 뜻일까요? 그렇치 않습니다. 성경에는 예수님 자신과 여러 성경 저자들에 의해 이것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주님은 직접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 (요. 10:30)고 선언하셨고, 사도 요한은 요한복음을 시작하면서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요. 1:1)라고 요한 복음을 시작하면서 영원한 말씀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본질은 ‘곧 하나님’이심을 분명하게 밝히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눈에 가시처럼 여겼던 유대 종교지도자들, 대제사장과 바리새인들이 결국 예수님을 빌라도에 고소하여 사형에 처하게 했던 법적 근거로 든것이 바로 <신성모독> (blasphemy) 이었던 것입니다. ‘신성모독’이라는 죄는 ‘하나님을 모독’한 죄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이 어떻게 하나님의 신성을 모독했다는 것입니까? 그들은 예수께서 하나님만 하실 수 있는 ‘죄에 대한 용서’를 행했다는 점 (마. 9:2~3)과, 스스로를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불렀다는 점 (요. 10:22~36; 19:7) 그리고 예수께서 하나님의 권능의 우편에 앉아 하늘의 구름을 타고 심판의 주로 오실 것을 주장한 점 (마. 26:64~65) 등을 들고 있습니다. 이 주장은 역설적으로 볼 때, 만약의 이들이 예수님을 고소하는 점이 모두 사실이라면 ‘나사렛 예수는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주님으로 고백하는 모든 거듭난 성도들이 믿듯이, 예수님은 죄를 용서하실 권세를 가지신 하나님의 독생하신 아들이시요, 장차 마지막날 산자와 죽은 자의 의로운 심판자로 다시 오실 것을 믿는 것입니다. 그러나 유대종교지도자들은 이러한 예수님의 신성을 결코 믿으려고도 하지 않고, 깨닫지도 못했기에 주님을 십자가에 못박아 죽게 한 것입니다. 이것이 신약성경에서 일관된 베드로와 여러 주님의 제자들의 주장이 아닙니까?

    제가 ‘삼위일체’ 교리의 관련되어 한가지 잘못된 성경이해에 대해 여러분과 확인해 나가고자 하는 것은 ‘잘못된 가르침을 통해 형성된 성경말씀에 대한 지식이 얼마나 믿음의 근거를 훼손하고 왜곡된 믿음으로 변질될 수 있는가?’하는 것입니다. 그럼으로 만약 이렇게 내 판단이 ‘예수님은 삼위일체의 하나님이 아니다’라는 잘못된 결론이 내려지면 그 이후의 이어지는 ‘삼위일체를 부인하는 가르침’에 대해서는 별 의심없이 비판 없이 믿게 된다는 것입니다. 자신의 판단기준에서 이런 잘못된 가르침은 어떤 의심이나 문제의식없이 진리로 받아들이게 된다는 것입니다. 물론 이와 같은 성경지식이 없을 때 분별하기 힘든 그런 것만 있는 것이 아니라, 보다 단순하고 엉터리 없는 가르침임에도 불구하고 앞서 설명 드린대로 그 사람의 교육수준과 판단능력의 미약함으로 인해 거짓된 주장에 쉽게 넘어가는 경우도 적지 않음을 볼 수 있습니다.

    여기까지가 ‘무엇이 믿음인가?’에 대한 기본적인 개념정의와 함께 무엇이 믿음이 아닌 것인가를 함께 살펴보았습니다. 그러나 이것까지가 성경에서 우리에게 말씀하는 믿음의 전부라면 여러분과 저는 여전히 믿음에 대한 여전히 풀리지 않는 많은 궁금증과 막연함으로 인해 그 믿음을 바로 깨닫고 적용함에 있어서 많은 어려움을 겪을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이것으로 그치지 않고 분명하게 ‘과연 무엇이 믿음인지’를 밝혀주고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롬. 4장>에서 사도 바울이 오늘 본문말씀인 <롬. 1:17>에서 선언한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게 되는 의인’ 즉, ‘하나님께서 그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고 인정해주시는 그는 누구인지’를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을 샘플로 정확하게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저는 다음시간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는 설교제목의 두번째 시간에 아브라함의 믿음을 살펴볼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인정하시고, 우리 모든 성도들이 본받을 믿음으로 확증하신 아브라함의 믿음은 과연 무엇인지를 구체적으로 확인해 볼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아가고 있습니까?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성령의 도우심으로 하나님 아버지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고 인정함을 받고 있습니까? 내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그분을 영접함으로 구원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것이 귀하고 소중한 만큼, 영생을 소유한 하나님의 자녀로써 계속해서 믿음으로 승리하고 열매맺는 삶을 살아야 되는 것은 그것만큼이나 지극히 당연하고도 중대한 우리 크리스챤의 삶의 목적일 것입니다. 그것은 오직 ‘믿음으로써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며, 그분을 영원토록 즐거워하는 것’ 입니다. 바라기는 성도 여러분의 남은 평생의 삶이 이와 같이 오직 믿음으로 하나님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며 그를 즐거워하는 축복된 삶 사시기를 축원합니다. 아멘.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갈라디아서 3:1-29)


    그리스도의 복음(13):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갈3장)
    The just shall live by faith.

    “그러나 하나님의 눈앞에서는 아무도 율법으로 의롭게 되지 못할 것이 분명하니,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 하였느니라.”(갈 3:11)

    주제: 의인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살아가는 자인데 성령님 안에 살아가자

    오늘은 종려주일(Palm Lord’s Day)입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십자가를 지시러 예루살렘 성으로 들어오실 때 수많은 군중들이 팜트리(palm tree 손바닥 모양으로 생긴 열대지방 나무, 대추 야자 열매를 맺음) 잎사귀를 들고 메시야로 환영을 하는데서 유래되었습니다(요 12:13). 사순절 여섯 번째 주일이며, 고난주간이 시작되는 주일입니다. 그래서 오늘은 “고난주일 Passion Lord’s Day”이라고도 합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시기 전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 군중이 자기들의 겉옷을 길에 펴고 종려나무 가지를 베어 펴면서 “호산나 다원의 자손이여”하고 환호성을 올리던 사실을 기념하는 주일입니다(요 12:13, 계 7:9) 호산나(Hosanna)라는 단어는 히브리어 ‘호시안나'(Hosianna)라는 말을 헬라적 표현으로 발음한 것인데 뜻은 ‘이제 우리를 구원하소서 Now save us!’ 또는 “부디 우리를 구원해 주십시오 Please save us!”라는 공동기도입니다(시 118:25, 삼하 14:4, 시 20:9, 마 21:9, 막 11:9, 요 12:13).

    예수님께서 예루살렘 성에 입성하실 때에 사람들이 종려가지를 들고 호산나라고 부른 사건 때문에(요 12:12, 13)우리 기독교인들은 이 종려나무(히브리어 ‘타마르’ = Date Palm, 데이트<대추 야자> 열매를 맺는 나무) 가지를 흔들며 종려주일에 주님의 십자가 사건을 기억하는 것입니다. 미국의 많은 교회들은 오늘 예배 때 ‘팜 트리’를 나눠주고 예배 후 예배당을 한바퀴 돌며 “호산나, 호산나”를 외칩니다.

    오늘은 지난 주일에 이어 갈라디아서 3장을 강해합니다. 복음의 본질인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는 말씀 중 “살리라”는 실천을 강조합니다. “율법으로부터의 자유”를 가르치고 있습니다.

    1. 오직 믿음으로 의롭게 됨(갈 3:1-14)

    1 오 어리석도다. 갈라디아 사람들아,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이 너희 가운데서 너희 눈앞에 분명하게 제시되었거늘 누가 너희를 꾀어 너희가 진리에 순종하지 못하게 하더냐? 2 내가 너희에게서 다만 이것을 알고자 하노라. 너희가 율법의 행위로 성령님을 받았느냐, 믿음에 관하여 들음으로 받았느냐? 3 너희가 그렇게 어리석으냐? 너희가 성령님 안에서 시작하였다가 이제는 육체로 완전해지고자 하느냐? 4 너희가 그토록 많은 것들로 헛되이 고난을 당하였느냐? 과연 그 일이 헛되냐? 5 그런즉 너희에게 성령님을 제공해 주시고 너희 가운데서 기적들을 행하시는 그분께서 그것을 율법의 행위로 하시느냐, 믿음에 관하여 들음으로 하시느냐? 6 이것은 곧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그것을 그에게 의로 여기셨느니라 함과 같으니라. 7 그런즉 너희는 믿음에 속한 자들 곧 그들이 아브라함의 자손들인 줄 알지어다.

    8 또 하나님께서 믿음을 통해 이교도들을 의롭게 하려 하심을 성경 기록이 미리 보고 아브라함에게 미리 복음을 선포하여 이르되, 네 안에서 모든 민족들이 복을 받으리라, 하였으니 9 그런즉 이와 같이 믿음에 속한 자들은 믿음이 충만한 아브라함과 함께 복을 받느니라. 10 율법의 행위에 속한 자들은 다 저주 아래 있나니 기록된바, 율법 책에 기록된 모든 것을 행하기 위하여 항상 그것들 가운데 거하지 아니하는 모든 자는 저주받은 자니라, 하였느니라. 11 그러나 하나님의 눈앞에서는 아무도 율법으로 의롭게 되지 못할 것이 분명하니,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 하였느니라. 12 또 율법은 믿음에서 나지 아니하나니 오직, 그것들을 행하는 사람은 그것들 가운데서 살리라, 하였느니라. 13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저주가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구속하셨으니 기록된바, 나무에 달리는 모든 자는 저주 받았느니라, 하였느니라. 14 이것은 아브라함의 복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이방인들 위에 임하게 하고 또 우리가 믿음을 통해 성령님을 약속으로 받게 하려 함이니라.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저주가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구속하셨으니 기록된바, 나무에 달리는 모든 자는 저주 받았느니라, 하였느니라.

    율법주의란 사람이 하나님을 믿고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으로 충분하지 않고 하나님의 모든 율법을 행해야 의롭게 되고 완전케 된다는 주장입니다. 율법주의에서는 신자의 신앙생활과 선행이나 봉사의 동기나 목적이 의와 도덕적 완전에 도달하기 위함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복음과 배치되는 잘못된 생각입니다. 구원받은 성도는 경건하고 거룩하고 의로운 생활을 힘쓰고 선한 일을 힘쓰지만 그 동기와 목적이 다릅니다. 성도는 그리스도의 대속(代贖)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기 때문에 마땅히 의롭고 선한 삶을 힘쓰는 것입니다(롬 12:1-2). 바울은 율법주의의 잘못에 대해 일곱 가지 반론을 제시합니다.

    1절. ‘진리’는 은혜의 복음입니다. 바울은 갈라디아 교인들을 ‘어리석도다’라고 책망하면서 율법주의에 대한 첫 번째 반론을 말합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박히셨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은 이미 앞장 끝에서 말한 바이기도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은 하나님의 은혜의 사건이며 우리를 대신하여 죄의 형벌을 담당하신 대속 사건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율법을 지킴으로 완전케 되는 것이라면 그리스도께서 죽으실 필요가 없었을 것입니다.

    2절. ‘듣고 믿음으로’라는 원어(엑스 아코에스 피스튜스 ἐξ ἀκοῆς πίστεως ex akoes pisteos)는 ‘믿음의 들음으로’라는 뜻인데, 이것은 사람이 복음을 들을 때 믿음을 가지고 듣는 것이나, 들을 때 믿음이 생기는 것을 말합니다. 율법주의에 대한 두 번째 반론은 우리가 성령님을 받은 것이 율법을 지킴으로써가 아니고 오직 복음을 듣고 믿을 때이었다는 사실입니다. 행 10:44은 베드로가 고넬로의 가족들에게 복음을 전할 때에도 성령님께서 말씀 듣는 모든 사람에게 내려오셨다고 증거합니다.

    3절. “너희가 그렇게 어리석으냐? 너희가 성령님 안에서 시작하였다가 이제는 육체로 완전해지고자 하느냐?” ‘완전하다’는 “마치다”보다 나은 번역입니다. 사람이 육신의 노력으로는 도덕적 완전에 도달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바울은 율법을 지켜 의롭게 된다고 생각하는 자들을 어리석다고 책망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율법주의에 대한 세 번째 반론입니다. 성령님으로 시작된 성도의 신앙생활은 육신의 노력으로 완전케 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그는 갈 5:16에서 “너희는 성령님을 좇아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소욕을 이루지 아니하리라”고 말합니다. 바울은 율법을 지켜 온전케 된다고 생각하는 자들을 어리석다고 책망하고 있습니다.

    4절. “너희가 그토록 많은 것들로 헛되이 고난을 당하였느냐? 과연 그 일이 헛되냐?” 갈라디아 교인들은 은혜의 복음을 받은 후 유대인들에게 많은 고난을 당하였을 것입니다. 그들이 이제 은혜의 복음을 포기하고 율법주의로 나아간다면 그들이 당했던 많은 고난이 헛된 것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되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그들은 받을 가치가 있는 고난을 받았지, 헛된 고난을 받은 것이 아닙니다.

    5절. “그런즉 너희에게 성령님을 제공해 주시고 너희 가운데서 기적들을 행하시는 그분께서 그것을 율법의 행위로 하시느냐, 믿음에 관하여 들음으로 하시느냐?” ‘기적’이라는 원어(뒤나메이스 dynameis)는 ‘기적들’이라는 뜻입니다. 율법주의에 대한 네 번째 반론은 하나님께서 그들 가운데 성령님의 기적들을 행하신 것이 그들이 복음을 듣고 믿을 때이었지, 율법을 행할 때가 아니었다는 사실입니다. 성령님의 초자연적 은사들과 기적들은 초대 교회의 성도들이 단지 예수님을 믿을 때 주어졌었습니다(행 3:12, 16). 그것들은 그들이 율법을 지킬 때 주어진 것이 아니었습니다.

    6-7절. 율법주의에 대한 다섯 번째 반론은 아브라함이 행함으로가 아니고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었다는 사실입니다. 창 15:6은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셨다”고 증거합니다. ‘믿음으로 말미암은 자들’이라는 말은 예수님을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들을 가리킵니다. 그들이 아브라함의 아들들이 된다는 것은 성경 원리에 맞습니다.

    8-9절. ‘의로 정하신다’는 원어(디카이오오 dikaiow)는 ‘의롭다 하신다’는 뜻입니다. ‘너를 인하여’라는 원어(엔 소이 en soi)는 ‘네 안에서’라고 번역할 수 있습니다. 이 구절은 다섯 번째 반론에 대한 보충적 설명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땅의 모든 족속이 네 안에서(너를 인하여) 복을 얻을 것이니라”(창 12:3)고 말씀하셨을 때 그 말씀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는 복이 이방인에게도 적용될 것을 암시하셨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자들은 아브라함과 함께 의롭다 하심의 복을 받는 것입니다.

    10절. “율법의 행위에 속한 자들은 다 저주 아래 있나니 기록된바, 율법 책에 기록된 모든 것을 행하기 위하여 항상 그것들 가운데 거하지 아니하는 모든 자는 저주받은 자니라, 하였느니라.” 율법주의에 대한 여섯 번째 반론은 율법 행위에 속한 자들 즉 율법을 지켜 완전케 되려는 자들은 저주 아래 있다는 사실입니다. 왜냐하면 성경은 사람이 모든 법을 항상 지키지 않으면 저주 아래 있다고 선언했기 때문입니다(신 27:26). 이 세상에 율법을 항상 지키는 사람은 아무도 없고 예수님을 믿고 구원 얻은 성도들이라도 그렇게 할 수 없기 때문에 율법을 지켜 완전케 되려는 자들도 저주 아래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11-12절. “그러나 하나님의 눈앞에서는 아무도 율법으로 의롭게 되지 못할 것이 분명하니,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 하였느니라. 또 율법은 믿음에서 나지 아니하나니 오직, 그것들을 행하는 사람은 그것들 가운데서 살리라, 하였느니라.” ‘믿음으로’라는 말은 ‘행위로 혹은 법을 지킴으로’라는 말과 대조되는 말입니다. ‘산다’는 말은 ‘영원한 삶’ 곧 영생을 가리킵니다. 율법주의에 대한 마지막 곧 일곱 번째 반론은 의인이 믿음으로 살리라(합 2:4)고 성경이 말하기 때문입니다. 이 성경말씀은 복음의 원리에 맞고 율법주의에는 맞지 않습니다. 율법은 믿음과 근원이 다릅니다. 율법을 행하는 자는 그 율법으로 인해 살 것이나(레 18:5), 믿는 자는 그 믿음으로 살 것입니다.

    13절.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저주가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구속하셨으니 기록된바, 나무에 달리는 모든 자는 저주받았느니라, 하였느니라.” 이 부분의 핵심 요절입니다. 한마디로, 율법주의의 오류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율법의 저주에서 속량하셨다는 사실을 인식하지 못하는 데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속죄 사역은 역사적이며 객관적이며 대리적이며 완전한 사역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의는 완전한 의입니다(롬 10:4 “그리스도께서는 믿는 모든 자에게 의가 되시기 위하여 율법의 끝마침이 되시느니라.”). 그러므로 오늘날 우리가 예수님을 믿음으로 받은 의는 완전한 의, 곧 도덕적 완전이며 거기에 무엇이 더 첨가될 것이 없습니다. 그분의 의안에서 그리스도인은 율법의 속박과 저주와 공포로부터의 자유를 누립니다.

    14절 “이것은 아브라함의 복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이방인들 위에 임하게 하고 또 우리가 믿음을 통해 성령님을 약속으로 받게 하려 함이니라.” 이 말씀은 그리스도의 속죄의 결과를 보입니다. 그것은 두 가지로 표현되는데, 첫째는 아브라함의 복입니다. 그것은 특히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을 가리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믿었고 하나님께서는 이것을 그분의 의로 여기셨습니다. 이와 같이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의 죽음을 믿는 자들은 죄사함과 의롭다 하심을 얻습니다.

    둘째는 믿음으로 약속된 성령님을 받는 것입니다. 성령님께서는 죄인들 속에 거하실 수 없습니다. 그러나 성령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의 피로 씻음 받고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들 속에 들어오셔서 거하시게 되셨습니다. 이 두 가지는 다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 사역의 결과이며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오는 참으로 큰 복입니다. 갈 3:1-14을 정리하면, 율법주의 곧 율법을 지켜야 의롭게 된다는 생각에 대하여 적어도 일곱 가지의 반론을 제시합니다.

    ①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의 죄를 대속하기 위해 십자가에 죽으셨습니다. 사람이 율법을 지켜 의롭게 된다면 그리스도께서 죽지 않으셨을 것입니다.

    ② 우리는 율법을 행함으로써가 아니고 오직 믿음으로 성령님을 받았습니다. 성령님께서 신자들 속에 오심은 죄씻음과 의롭다 하심을 전제합니다.

    ③ 사람은 율법을 지키려는 육신적 노력으로 의롭게 될 수 없습니다. 그것은 성경의 역사와 성경 자체가 증거하며(사 64:6; 렘 13:23; 17:9) 또 우리가 경험하는 바입니다.

    ④ 하나님께서 초대교회에 성령님의 기적들을 베푸신 것도 신자들이 율법을 지킬 때가 아니고 단지 예수님을 믿을 때입니다(행 3:12, 16).

    ⑤ 아브라함은 행함으로가 아니고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습니다(창 15:6). 

    ⑥ 율법을 지켜 의롭게 되려는 자들은 저주 아래 있습니다. 왜냐하면 모든 율법을 항상 지키지 않는 자는 저주 아래 있다고 성경이 말하기 때문입니다(신 27:26).

    ⑦ 성경은 의인이 믿음으로 살리라고 예언하였습니다(합 2:4).

    그래서 율법주의 곧 율법을 지켜 의롭게 되려는 생각은 명백히 잘못된 생각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율법을 지켜 의롭게 되려는 생각을 버리고 우리의 불완전한 행위를 의지하지 말고 오직 죄인들의 유일한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얻는 의(義) 안에 거해야 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주신 은혜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의로 만족해야 하며, 그분의 의안에서 자유와 기쁨과 평강을 누려야 합니다. 우리는 그분의 의안에서 날마다 기쁨의 신앙생활을 해야 합니다. 또 우리는 그분의 의안에서 의롭고 선한 삶을 추구하며 실천해야 합니다.

    2. 하나님의 약속과 율법의 목적(갈 3:15-22)

    15 형제들아, 내가 사람들의 관례대로 말하노니 그것이 단지 사람의 언약이라도 일단 확정되면 아무도 취소하거나 거기에 더하지 못하느니라. 16 이제 그 약속들은 아브라함과 그의 씨에게 하신 것인데 그분께서 여럿을 가리키며, 씨들에게, 하지 아니하시고 하나를 가리키며, 네 씨에게, 하시나니 이 씨는 그리스도시니라. 17 내가 이것을 말하노니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미리 확정하신 그 언약을 사백삼십 년 뒤에 생긴 율법이 취소하지 못하며 또 그 약속을 무효로 만들지 못하리라. 18 이는 만일 그 상속 유업이 율법에서 나면 그것은 더 이상 약속에서 나지 아니하느니라.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아브라함에게 약속을 통해 주셨기 때문이라.

    19 그러면 율법은 무엇을 위한 것이냐? 그것은 약속을 받은 그 씨가 오실 때까지 범법들로 인해 더해진 것이요, 한 중재자의 손에서 천사들에 의해 정해진 것이라. 20 이제 중재자는 하나만의 중재자가 아니로되 하나님은 하나이시니라. 21 그러면 율법이 하나님의 약속들에 위배되느냐? 결코 그럴 수 없느니라. 이는 만일 생명을 줄 수 있는 율법이 주어졌더라면 진실로 의가 율법으로 말미암아 있었기 때문이라. 22 그러나 성경 기록이 모든 것을 죄 아래 가두어 두었으니 이것은 주께서 믿는 자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믿음으로 말미암는 약속을 주려 하심이라.

    15절.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하신 언약을 후에 주신 율법이 폐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설명하기 위해, 바울은 사람의 언약도 한 번 맺으면 아무나 폐하거나 더하거나 하지 못한다고 말합니다. 예를 들어, 집이나 땅을 사기 위해 맺은 계약은 그대로 효력을 가지며, 아무나 그것을 임의로 폐하지 못합니다. 하물며, 하나님께서 세우신 언약이 얼마나 더 확실하게 시행될 것인가는 두말할 나위가 없습니다.

    16절.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하신 약속들은 그와 그 자손에게 말씀하신 것이었습니다. 창 12:3, “땅의 모든 족속이 너를 인하여 복을 얻을 것이니라.” 창 22:18, “또 네 씨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얻으리니.” 여기에 ‘네 씨[seed 자손=offspring]’라는 말은, 복수명사인 ‘네 씨들[자손들]’이 아니고 단수명사인 ‘네 씨[자손]’입니다. 즉 이것은 아브라함의 자손으로 오실 예수 그리스도 한 사람을 가리켰습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부수적으로, 성경의 영감(靈感 inspiration)이 단어에까지 미친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영감된 성경은 그 주된 내용뿐 아니라, 그 내용을 구성하는 단어들까지도 하나님의 특별한 배려 속에 기록되었습니다. 성경에서 어떤 단어가 복수명사인가 단수 명사인가의 문제에도 중요성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경의 지극히 작은 부분에까지도 주의를 기울이면서 성경을 읽고 그 뜻을 묵상해야 할 것입니다.

    17절.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하신 언약은 메시아 약속 곧 그의 육신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온 세상에 복을 주시려는 약속이었습니다. 약속된 복은 의와 영생입니다. 율법이 언약보다 430년 후에 세워졌다는 것은 야곱 때로부터 시내산에서 율법을 받은 때까지 계산한 것입니다. 출 12:40-41, “이스라엘 자손이 이집트에 거주한 지 430년이라. 430년이 마치는 그 날에 여호와의 군대가 다 이집트 땅에서 나왔은즉.” 아브라함 때로부터 계산하지 않고 야곱 때로부터 계산한 이유는 아브라함에게 하신 하나님의 언약이 그의 아들 이삭과 그의 손자 야곱에게도 동일하게 주어졌기 때문입니다. 창 26:4, “(여호와께서 이삭에게 나타나 말씀하시기를) 네 자손을 하늘의 별과 같이 번성케 하며 이 모든 땅을 네 자손에게 주리니 네 자손을 인하여 천하 만민이 복을 받으리라.” 창 28:13-14, “(하나님께서 꿈에 야곱에게 나타나 말씀하시기를) 너 누운 땅을 내가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라. 네 자손이 땅의 티끌같이 되어서 동서남북에 편만할지며 땅의 모든 족속이 너와 네 자손을 인하여 복을 얻으리라.” 사람의 계약도 정한 후에는 아무나 폐하지 못하는데, 하물며 하나님께서 친히 열조들에게 세우신 언약을 430년 후에 주신 율법이 폐하거나 헛되게 하지 못합니다. 율법은 어떤 다른 목적이 있는 것이었지 430년 전에 세워진 언약을 폐지시킬 목적으로 주어진 것이 아니었습니다.

    18절. 이 말씀은 율법이 언약을 무효케 할 수 없는 이유를 보입니다. 하나님께서 약속하시고 은혜로 주신 ‘그 유업’이란 가나안 땅을 가리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과 언약을 맺으실 때 가나안 땅을 그와 그의 자손들에게 주실 것을 약속하셨습니다(창 12:7; 13:15; 15:18; 17:8). 이와 같이,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 땅을 유업으로 얻은 것은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고 은혜의 약속으로 말미암은 것이었습니다. 이 사실은 후에 주신 율법이 하나님의 약속을 폐지할 수 없다는 것을 증거합니다.

    갈 3:19-22은 율법의 목적을 말씀합니다. 19절. 율법의 역할은 죄를 깨닫게 하는 것입니다. 율법은 사람들의 범죄 때문에 주어진 것입니다. 그것은 ‘천사들로 말미암아 중보자의 손을 빌어’ 주어졌습니다. 여기에서 ‘중보자’는 모세를 가리킵니다.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통하여 율법을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셨습니다. 신 5:5, “그때에 너희가 불을 두려워하여 산에 오르지 못하므로 내가 여호와와 너희 중간에 서서 여호와의 말씀을 너희에게 전하였노라.” 요 1:17, “율법은 모세로 말미암아 주신 것이요.”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율법을 주실 때 ‘천사들로 말미암아’ 주셨습니다. 신 33:2에 “일렀으되 여호와께서 시내에서 오시고 세일산에서 일어나시고 바란산에서 비취시고 일만 성도[거룩한 자들] 가운데서 강림하셨고 그 오른손에는 불같은 율법이 있도다.” ‘일만 성도’는 천사들을 가리켰을 것입니다.

    신약성경은 본절 외에도 몇 곳에서 율법이 천사들을 통해 주어졌음을 증거합니다. 행 7:53, “너희가 천사의 전한 율법을 받고도 지키지 아니하였도다.” 히 2:2, “천사들로 하신 말씀이 견고하게 되어 모든 범죄함과 순종치 아니함이 공변된[공정한] 보응을 받았거든.” 율법의 유효 기간은 ‘약속하신 자손이 오시기까지’입니다. ‘약속하신 자손’이란 메시아 곧 그리스도 예수를 가리킵니다. 율법은 구약시대를 위한 것이었고 메시아가 오실 때 폐지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는 율법 제도 아래 있지 않습니다. 우리는 율법의 정죄 아래 있지도 않습니다. 그 이유는 약속하신 메시아가 오셨고 그가 우리의 죄를 담당하심으로 우리를 율법의 정죄에서 건져내어 주셨기 때문입니다.

    20절. 중보(a mediator)는 한편만 위하지 않고 양편을 위하여 중간 역할을 하는 자입니다. 그 양편은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입니다. ‘오직 하나님은 하나이시니라’는 말씀은 약속을 주신 자도 하나님이시오, 율법을 주신 자도 하나님이시라는 뜻입니다.

    21절. 율법이 하나님의 약속을 폐지할 수 없고 율법 제도가 일시적이라 하여, 율법과 하나님의 약속이 서로 모순된 것은 아닙니다. 둘 다 하나님께서 주셨는데 그럴 수 없습니다. 만일 하나님께서 능히 살게 하는 율법을 주셨다면, 의가 반드시 율법으로 말미암아 왔을 것이지만, 그렇지 않은 것을 보면 하나님께서 율법을 주신 다른 목적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율법과 하나님의 약속이 서로 모순되다고 생각할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율법의 참 목적을 알아야 합니다.

    22절 “그러나 성경 기록이 모든 것을 죄 아래 가두어 두었으니 이것은 주께서 믿는 자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믿음으로 말미암는 약속을 주려 하심이라.” 율법의 목적은 사람으로 하여금 죄를 깨닫게 하는데 있습니다. 성경은 모든 것을 죄 아래 가두었습니다. 그 ‘모든 것’ 속에는 모든 인류가 포함됩니다. 모든 인류는 하나님 앞에서 죄인입니다. 특히 율법에 비추어 볼 때 그러합니다. 또 하나님께서 율법을 통해 사람으로 죄를 깨닫게 하시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와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려 하심입니다. 여기에 율법의 중요한 목적이 있었습니다.

    3. 율법과 믿음, 아들과 상속자(갈 3:23-29)

    23 그러나 믿음이 오기 전에는 우리가 율법 아래 붙잡혀서 나중에 계시될 믿음에 이르기까지 갇혀 있었느니라. 24 그런즉 율법은 우리를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훈육 선생이었으니 이것은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게 되게 하려 함이라. 25 그러나 믿음이 온 뒤에는 우리가 더 이상 훈육 선생 아래 있지 아니하도다. 26 너희가 다 그리스도 예수님을 믿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아이들이 되었나니 27 너희 중에서 그리스도 안으로 침례[세례]를 받은 자는 다 그리스도로 옷 입었느니라. 28 거기에는 유대인이나 그리스인이 없고 매인 자나 자유로운 자가 없으며 남자나 여자가 없나니 너희는 다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하나이니라. 29 너희가 그리스도께 속한 자면 곧 아브라함의 씨요 약속에 따른 상속자니라.

    23절. ‘믿음이 오기 전에’라는 말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이 오기 전에,’ 즉 신약시대 이전을 가리킵니다. ‘계시될 믿음의 때까지’라는 말은 하나님께서 때가 되어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시고 그를 믿어 구원얻는 진리를 계시하신 때를 말합니다. ‘우리가 율법 아래 매인 바 되고...갇혔느니라’는 말은 구약시대의 성도들의 상태를 말합니다. 구약시대에는 사람들이 율법 제도 아래 있었고 또 율법의 정죄 아래 있었습니다. 율법은 사람이 하나님의 모든 명령을 항상 행하지 않으면 저주 아래 있다고 선언합니다(신 27:26). 형을 선고받은 죄수가 감옥에서 형 집행을 기다리듯이, 모든 사람은 율법 아래서 사형 선고를 받고 하나님의 영원한 진노와 저주의 형벌을 기다리는 자들과 같습니다. 물론 구약 백성도 의식법에 암시된 하나님의 은혜를 받고 누렸다고 보지만, 율법의 엄격한 요구 조건 아래서 죄책과 공포를 떨쳐버릴 수 없었을 것입니다. 죄의 완전한 속죄와 영원한 의는 아직 미래의 것입니다.

    24절. ‘훈육 선생[몽학선생]’(파이다고고스 paidagogos)이라는 원어는 ‘주인의 어린아이를 학교에 데려다주고 또 데려오는 종’(street guard)을 말합니다. 바울은 이 비유에서 구약 백성을 어린아이의 시절에 비유하고, 신약 백성을 훈육 선생이 필요치 않은 성장한 나이에 비유합니다. 율법은 하나님의 백성의 어린아이 시절에 필요했던 제도였습니다. 율법은 사람들을 그리스도께로 인도한 자입니다. 그것은 정죄와 저주를 통해서이었습니다. 율법은 사람들로 하여금 ‘나는 의가 없는 자입니다, 나는 하나님의 완전한 의와 거리가 먼 자입니다, 나는 하나님의 요구 조건을 만족시키지 못하는 자이다’라는 사실을 깨닫게 합니다.

    율법의 정죄와 저주를 깨닫지 못하는 자는 결코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을 수 없습니다. 율법이 우리를 그리스도께로 인도한 목적은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심을 얻게 하려 함”입니다. 율법을 통한 정죄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의에 이르는 길입니다. 사람에게 두 가지의 의의 길이 있습니다. 하나는 자기의 의로운 행위들로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고 간주되는 길이고, 다른 하나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고 간주되는 길입니다. 행위의 길은 이론적으로는 가능하지만, 실제로는 우리가 경험하는 대로 또 성경이 증거하는 대로 불가능한 길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얻는 길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길뿐입니다.

    25절. ‘믿음이 온 후’라는 말은 시대적으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신 후 즉 신약시대를 말하며, 개인적으로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된 후를 말합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기 전에는, 비록 그리스도의 복음과 은혜가 선포되는 시대에 살고 있었지만,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를 알지 못했고 기껏해야 도덕적으로 최선의 삶을 추구했었습니다. 그러나 그때의 우리의 삶은 범죄와 실수와 불완전한 행위로 인하여 죄책과 불안과 공포 아래 있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예수님을 구세주로 믿었고 율법의 저주와 공포로부터 자유함을 얻었습니다.

    ‘훈육 선생 아래 있지 않다’는 말은 ‘율법의 제도 아래 있지 않다’는 말입니다. 우리는 더 이상 ‘행하라, 그러면 살리라’는 율법의 명령 아래 있지 않습니다. 우리는 또한 성막 제도 아래 있지 않고 제사들이나 절기들을 지킬 의무 아래 있지도 않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율법의 의를 완성하셨고 의식법들이 상징하는 바를 다 이루셨기 때문에, 우리는 더 이상 율법 아래 있지 않습니다. 우리는 신약 아래 있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의 안에 있고 그분의 대속 공로 안에 있습니다.

    26-27절. “이는 너희가 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음이니, 이는 누구든지 그리스도와 안으로 침례[세례]를 받은 자는 그리스도로 옷 입었기 때문이라.”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라는 말은 ‘그리스도 예수를 믿음으로’라고 읽는 것이 옳습니다. 이것은 “영접하는 자 곧 그분의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다”는 요 1:12의 말씀과 같습니다.

    우리는 이제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으므로 더 이상 율법이라는 훈육 선생 아래 있을 필요가 없습니다. 또 침례[세례]는 그리스도의 피로 죄를 씻는 것과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상징하고 확증하는 예식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 안으로 즉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침례[세례]를 받아 그리스도의 의로 옷 입은 자들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고 더 이상 율법 아래, 즉 율법 제도와 그 속박 아래 있지 않습니다.

    28절. “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자나 남자나 여자 없이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 직역하면, “유대인이나 헬라인이 없고 종이나 자유자가 없고 남성이나 여성이 없도다. 이는 너희가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임이니라”입니다. 이것은 구원의 복, 의의 복,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복을 누림에 있어서 유대인이나 이방인이 차별이 없고 종이나 자유자가 차별이 없고 남성이나 여성이 차별이 없다는 뜻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모든 성도는 다 동등한 복을 받았고 다 동등한 영적 특권을 누립니다. 복음 안에서 누구나 동등합니다.(고전 14:34-38; 딤전 2:11-15).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29절. “너희가 그리스도께 속한 자면 곧 아브라함의 자손이요 약속대로 유업을 이을 자니라.” 예수 그리스도께 속한 자는 아브라함의 자손이요 약속대로 기업을 상속받을 자입니다. 아브라함의 육신적 자손이 상속받을 기업은 가나안 땅이었으나, 그의 영적 자손인 우리가 상속받을 기업은 새 하늘과 새 땅, 곧 천국입니다. 벧전 1:3-4, “찬송하리로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이 그 많으신 긍휼대로 예수 그리스도의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산 소망이 있게 하시며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아니하는 기업을 잇게 하시나니 곧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 간직하신 것이라.” 우리 주님을 온전히 믿어 천국을 유업으로 받으시기 바랍니다.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주님의 이름으로 오시는 분이여!

    [오늘의 기도]
    사랑과 은혜가 충만하신 하나님 아버지, 주님을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주신 복음으로 천국의 시민을 삼아주심을 감사드립니다.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고 주님을 메시야로 환영한 것처럼 주님, 메시야로 오늘도 겟세마네 교회와 제 마음속에 영접합니다. 이번 주 고난 주간에 주님의 십자가를 함께 지고 주님만 따라가게 하옵소서, 부활의 승리를 하신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믿음으로 사는 법 – 인생 제1과: 믿음이란 무엇인가?

    그러나 나의 의인은 믿음으로 살 것이다. 그가 물러가면 내 마음이 그를 기뻐하지 아니하리라. 히브리서 10:38.

    믿음이 없이는 기쁘시게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 히브리서 11:6.

    그들이 예수께 나아와 깨우며 가로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죽겠나이다 그리고 예수께서 일어나 바람과 물결을 꾸짖으시니 그들이 멈추고 잔잔해졌습니다. 그리고 그분은 그들에게 "너희 믿음이 어디 있느냐?" 누가복음 8:24-25.

    오늘 너희 주(יהוה) 하나님(אלוהם)이 말씀하시되

    믿음은 놀라운 것입니다. 그것은 당신의 삶을 바꿉니다. 그것은 당신의 하루를 아름다움으로 채우고 찌푸린 얼굴을 없애줍니다. 그것은 내가 여기 너희 가운데 있어 모든 것을 새롭게 한다는 좋은 소식을 전하는 예언자로 너희를 만든다.

    믿음. 나의 의인은 그것으로 말미암아 살 것이며, 나는 당신의 삶의 모든 측면과 삶의 모든 순간을 의미합니다. 나를 기쁘게 하고 너와 다른 사람들을 위해 열매 맺는 삶을 원한다면 보는 것으로 행하지 않고 믿음으로 행해야 한다. 믿음 없이 나를 기쁘게 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내 아들은 믿음을 찾고 있다. 믿음 없이 행한 모든 것은 죄입니다. 믿음이 없는 곳에 기적은 일어나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고향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지 않고 오히려 그분을 배반했기 때문에 그분의 고향에서 능력을 행하실 수 없었습니다. 교만한 자는 그의 마음이 그 속에 있지 아니하고 오직 의인은 그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하박국 2:4. 내가 애굽에서 구속한 이스라엘 백성이 내가 그들에게 주려는 땅을 차지하지 못한 것은 그들의 믿음이 없었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너희가 내 마음에 드는 삶을 살고 싶다면 믿음이 매우 중요하다는 결론을 내려야 한다. 믿음이 없으면 두려움 속에 살며 평안을 얻지 못할 것입니다. 믿음이 있으면 두려움에서 벗어나 큰 평안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으로 사는 법을 배워야 할 때입니다. 그래서 오늘 우리는 여러분에게 큰 통찰력과 이해, 많은 평화, 축복된 선에 대한 확신의 삶을 줄 새로운 시리즈를 시작합니다. 그리고 우리 시리즈? “믿음으로 사는 법.” 너희가 믿음으로 산다면 너희를 넘어뜨리거나 방해하거나 걸려 넘어지게 할 것이 아무것도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왜?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믿음으로 산다는 것은 진리 안에서 행하는 것입니다. 내 말은 진리이다. 그러므로 믿음으로 사는 것은 내 말씀대로 행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기본부터 시작합시다. 인생수업 1번은 “믿음이란 무엇인가?”입니다. 그것 없이 나를 기쁘게 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면 그것이 무엇인지 아는 것이 좋기 때문이다. 그리고 내 아들이 제자들에게 물으실 때, 그리고 오늘날의 그분의 제자인 여러분은 “너희 믿음이 어디 있느냐?”라고 물으실 것입니다. 당신이 찾고있는 것을 아는 것이 좋습니다.

    답을 찾을 수 있는 가장 좋은 곳은 내 말씀, 특히 내 말씀에서 내가 너희에게 행하고, 되고, 가지라고 말하는 것에 대한 것이다. 내 말에는 모든 진리와 모든 답과 지혜와 지식의 모든 보화가 있으며 천국에 영원히 세워져 있다.
    나는 나의 말씀에 대한 믿음을 정의한다. 먼저 그것을 고려해 봅시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니 이로써 옛 사람들이 좋은 증거를 얻었느니라.” 히브리서 11:1. 그 구절은 처음에 그리스어로 기록되었으므로 그리스어로도 살펴보겠습니다.

    “지금”으로 번역된 단어는 헬라어 “데”인데 이것은 “그러나”, “그리고”, “지금”(연결 또는 부사 불사)을 의미하는 접속사입니다. 그러므로 그것이 무엇과 연결되어 있는지 보기 위해 바로 앞의 구절을 되돌아보십시오. 그리고 당신은 내가 당신에게 내 말씀에 대한 당신의 확신을 결코 버리지 말고 반대와 반대되는 상황에 직면하더라도 계속 나아가라고 말하고 있음을 발견할 것입니다. 너희가 내 뜻을 행한 후에는 약속된 것을 받기 위해 인내가 필요하다. 내가 약속한 것을 지체하는 것 같더라도 이루리라. 그러나 믿음으로 사는 것이 필요하다. 히브리서 10:35-39. 그리고 믿음이 무엇인지, 왜 믿음으로 살 수 있는지에 대한 정의를 제시하겠습니다. 그런 다음 세상의 기준으로는 불가능해 보였던 것을 성취한 사람들의 일련의 예를 들어 그 정의를 따릅니다. 그리고 그들은 그것을 어떻게 얻었습니까? 믿음으로. 내가 바라는 것은 너희 각 사람이 끝까지 같은 부지런함을 나타내어 온전한 소망에 이르러 게으르지 아니하고 믿음과 오래 참음으로 말미암아 약속들을 기업으로 받는 자들을 본받는 자 되게 하려 함이라 히브리서 6:11-12.

    믿음의 정의에 대해 계속 설명하겠습니다. 이것은 여러분이 거짓된 믿음이 아니라 거짓 없는 믿음을 갖기 위해 매우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믿음이 있다고 말하지만 스트레스를 받고 불안하고 두렵고 내가 내 약속을 이행할지 확신이 없다면 그들은 믿음이 없는 것입니다. 내 아들은 그것을 믿음이 없다고 부른다. “그리고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왜 두려워합니까? 아직도 믿음이 없습니까?” 마가복음 4:40. 그러나 여러분의 믿음이 겨자씨 한 알만큼 작을지라도 마음으로 믿고 입으로 말하는 믿음의 법을 지키면 산을 옮길 수 있고 나무를 뽑을 수 있을 뿐 아무 일도 되지 않습니다. 당신에게는 불가능합니다. 마태복음 17:20; 누가복음 17:6.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입니다.” 여기서 잠시 멈추십시오. "보증"으로 번역된 단어는 "아래"를 의미하는 "hypó"와 "서다"를 의미하는 "hístēmi"가 결합된 세계 "hypostasis"입니다. 소유권 증서”); (비유적으로) 약속이나 재산에 대한 "소유권", 즉 적법한 청구(문자 그대로 "법적 지위 아래"이기 때문에) – 특정 계약에 따라 보장되는 것에 대해 누군가에게 자격을 부여합니다. 당신이 보여요? 당신이 내 말씀에서 약속을 찾을 때 당신은 예수 안에서 그것이 당신에게 "예"이고 이미 당신의 하늘 계정에 예치되어 있으므로 법적으로 당신의 것이라는 것을 압니다. 그분은 그분의 피로 그것을 지불하셨습니다. 당신은 그것에 대한 제목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당신이 현재의 필요를 채우는 내 말씀에서 약속을 찾았을 때 당신은 당신이 바라는 것을 찾은 것이며 이제 당신은 그것이 내 아들의 완성된 일에 의해 합법적으로 당신의 것임을 압니다. 그리고 이미 법적으로 귀하의 소유인 것으로 무엇을 합니까? 당신은 그것을 구걸합니까? 당신은 그것을 간청합니까? 당신의 것이 아닌지 두렵습니까? 아니요. 그냥 가져가세요. 그리고 너희가 얻은 것이 아니라 너희를 의롭게 하신 그리스도께서 너희에게 주신 선물인 내 약속을 너희가 취하는 방식은 기쁨에 찬 감사로 하는 것이다. 당신은 감사의 마음으로 그것을 당신에게 주는 주인으로부터 그것을 가져가서 선물을 받습니다. 그것이 기부자가 당신이 그에게 감사할 때 당신이 진정으로 그것을 받았다는 것을 아는 방법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내 왕국이 운영되는 방식이다. 감사함으로 받습니다. “그들에게서 감사와 축하하는 소리가 나올 것입니다. 내가 그들을 번성하게 할 것이며 그들은 줄어들지 않을 것이다. 나도 그들을 존귀케 하리니 그들이 하찮은 일이 되지 아니하리라.” 예레미야 30:19. 너희가 감사의 소리로 내 약속을 선포하면 놀라운 일이 일어난다. 시편 26:7. 여호사밧과 유다 백성을 기억하십니까? 적군의 세 군대가 그들을 멸하러 왔으나 내가 그들에게 구원의 약속을 주었더니 위협이 있을 때에 그들이 곧 감사와 찬송에 들어갔고 그들이 감사의 노래에 들어갈 때에 내가 그들을 위하여 싸웠고 기사가 일어났느니라. 세속적인 기준으로 볼 때 비참한 패배였어야 할 것이 귀중한 전리품을 모을 수 있는 엄청난 승리로 밝혀졌습니다! 결국 모든 것을 잃지 않고 보물을 모았습니다. 어떻게? 믿음으로. 무엇에 대한 믿음? 나, 그러나 특히 나의 말씀, 나의 약속 안에서.

    믿음은 당신이 선언하기 때문에 일어날 일을 믿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이 내 말씀에 있는 약속이 아니라면 그것은 소유권에 대한 법적 권리가 아닙니다. 부동산에 대한 소유권 증서가 없으면 그것이 자신의 것이라고 믿을 수 없습니다. 너희는 나 없이, 즉 내 말씀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나는 내 말씀으로 모든 것을 만들고 유지하며 그것이 여전히 모든 것이 작동하는 방식입니다. 그러나 그것에 대한 좋은 점은 당신이 믿음으로 내 말씀을 사용하면 그것이 효과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믿음의 정의를 마치겠습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니” 여기서 "증거"로 번역된 단어는 "elegchos"인데 증거, 내적 확신, 내적 설득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당신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나의 약속에 대한 권리 증서를 가지고 있다면, 당신이 그것들이 아직 나타난 것으로 보지 않을 때에도 그러한 것에 대한 우리의 소유권을 확립하는 충분한 증거(증거)입니다. 치유가 나타날 때 증상이 사라질 때와 마찬가지로 여전히 증상이 있는 동안 고통이나 질병으로부터 치유됩니다. 그러나 기쁨의 감사로 표현되는 믿음이 하늘 계정에서 지상 영역으로 인출됩니다. 너희는 기쁨으로 예슈아의 샘들에서 물을 길을 것이다.

    내 사랑하는 자녀답게 나를 본받아 믿음으로 살아라. 나는 믿음으로 모든 것을 창조했습니다. 믿음으로 너희는 내가 하늘과 땅과 바다와 그 가운데 모든 것을 내 말씀으로 창조한 줄을 아나니 보이는 것은 나타난 것으로 말미암아 된 것이 아니니라. 히브리서 11:3. 내 말, 심지어 네 입에도 능력과 창조력이 있다. 나는 그것을 실행하기 위해 나의 말씀을 지켜본다. 내 말에는 내 믿음이 담겨 있고 너는 그것을 활용할 수 있다.

    나에 대한 믿음. 그 사람을 모르면 그 사람을 믿을 수 없습니다. 그리고 당신은 그 사람의 말과 그 말을 지키는지, 거짓을 말하는지 진실을 말하는지, 그리고 당신을 향한 그들의 목적이 당신에게 유익한지 해로운지를 보고 그 사람을 압니다.

    내 말은 즐거운 말이라 송이송이에서 떨어지는 꿀보다 더 달고 너희를 향한 좋은 계획과 좋은 일이 그 속에 가득하도다 그들은 치유, 사랑, 번영, 평화, 용서로 가득 차 있습니다. 그들은 빛과 편안함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내 말씀이 예수 안에서 너희 가운데 나타났으니 너희가 그를 보고 나를 보느니라 그가 너희를 섬기러 오셨고 너희가 영생을 얻을 수 있도록 너희를 위하여 그의 생명을 주셨고 그분이 당신을 위해 하신 일. 너희를 위한 나의 계획은 샬롬이요 악이 아니라 너희에게 나와 함께할 영원한 미래와 내가 너희에게 주는 모든 영광의 모든 장엄함 가운데 있는 나를 아직 보지 못하기 위한 희망을 주는 것이다.

    내가 거짓말을 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나는 진실 그 자체다.

    그러나 당신이 당신의 삶에서 이러한 것들이 나타나는 것을 보지 못한다고 스스로에게 말한다면 그것은 단순히 당신이 믿음의 법칙을 배우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믿음이 없이는 나를 기쁘게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왜? 물러서면 내가 너희에게 미리 정한 약속을 너희에게 줄 수 없기 때문이다. 내가 애굽의 종살이에서 구속한 이스라엘 백성에게 약속의 땅을 주었으나 그들은 약속의 땅을 받지 못하고 평생 광야에서 방황하였다고 합니다.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그들이 약속의 땅의 모든 놀라운 혜택을 받을 수 있었으나 그들은 믿음으로 그것을 취하기를 거절하였느니라. 그들은 내 말을 의심하고 내 말과 반대로 말하였다. 그것은 믿음이 아니라 불신앙이며 악하고 악한 마음이라 했습니다. 내 말이 통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행하지 않는 것이다. 그들은 불신앙에 게으르고 믿음에 부지런하지 않았습니다. 믿음의 영을 가지고 내 약속과 일치하게 말한 두 사람, 여호수아와 갈렙이 있었고 그들은 약속과 더 많은 것을 받았습니다.

    나의 모든 혜택을 잊지 마십시오. 믿음으로 당신은 그것들을 모두 가질 수 있습니다. 시편 기자가 “사람이 많은 탈취물을 얻은 것 같이 내가 주의 말씀을 기뻐하나이다”라고 쓴 이유를 이제 아시겠습니까? 시편 119:162. 믿음이 어떻게 작용하는지 이해한다면 내 말씀을 읽는 것이 당신의 모든 것을 찾는 보물 찾기가 된다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믿음은 내가 말하면 그것이 당신의 것이라는 완전한 설득과 흔들리지 않는 확신입니다. 나는 당신이 용서받았다고 말하는데, 당신은 당신이 용서받았다는 것을 확실히 알고 믿으며 그것을 즐기고 그 안에서 쉬고 있습니다. 나는 당신을 사랑하고 당신을 존경한다고 말하므로 당신은 의심의 여지없이 내가 그것을 찬양하고 그 안에서 쉬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너희가 고침을 받았으므로 병이 왔을 때에 너희가 비웃고 꾸짖으며 너희가 병이 있음을 틀림없이 안다. 어떻게 표시됩니까? 그것이 나타나기 전에 추수 감사절. 내 아들은 사람들의 믿음을 보았고 그것을 찾고 있었다. 왜? 그때 그분은 그들을 위해 행하기를 간절히 바라셨던 놀라운 일을 그들이 받을 것을 아셨기 때문입니다. 그는 동정심이 컸습니다. 사람들이 마음을 강퍅하게 하여 받지 아니하였을 때 그분을 실망시키셨습니다. 그분은 고향 사람들의 불신앙을 이상히 여기셨으며 그렇게 할 권능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곳에서 큰 일을 행하실 수 없었습니다. 믿음이 없이는 나를 기쁘시게 하지 못하나니 그러면 내가 창세 전부터 너희를 위하여 계획한 생명을 너희에게 줄 수 없기 때문이라.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십시오. 믿음에는 큰 상급이 있습니다.

    그리고 믿음은 실천하면 할수록 더 커집니다. 모세는 불타는 떨기나무에서 내가 처음 그에게 나타났을 때 바다를 가르는 믿음이 없었지만, 그가 나와 함께 걷기 시작하고 내 말에 순종하기 시작하면서 그는 놀라운 일들이 일어나는 것을 보기 시작했고 마침내 그가 그의 지팡이를 들기 위해 내 지시에 준비될 때까지 일어났습니다 내가 아브라함에게 약속한 땅을 차지하기 위해 바다를 가르고 큰 무리를 이끌고 황량한 사막을 건너 나라를 이루었다. 그리고 내 사도 베드로도 마찬가지로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는 지시로 시작하여 예수를 따라 결국 하루에 삼천 명을 구원하여 죽은 자를 살리는 데 이르니라 , 그리고 그가 지나갈 때 그의 그림자에 가려진 사람들을 치유합니다.

    이 시리즈가 계속됨에 따라 나는 믿음의 법이 어떻게 작용하여 내가 약속한 모든 것을 가질 수 있는지 보여줄 것입니다. 당신은 넘칠 것입니다.

    전리품처럼 내 안에서, 내 말 안에서 기뻐하라. 그러면 마음의 소원을 이루게 될 것이다. 믿음은 당신에 대한 내가 가진 사랑을 알고 믿고 확신을 가지고 그 진리 안에서 걷는 것입니다.

    사랑해요. 믿음은 놀라운 것입니다. 그것은 당신의 삶을 바꿉니다. 그것은 당신의 하루를 아름다움으로 채우고 찌푸린 얼굴을 없애줍니다. 그것은 내가 여기 너희 가운데 있어 모든 것을 새롭게 한다는 좋은 소식을 전하는 예언자로 너희를 만든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로마서1:16-17)

    오늘 말씀은 신앙생활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닙니다.
    16절에 보면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라고 바울은 증언합니다.
    2천 년 전 바울이 이 증언을 한 시대에는 로마제국이 지중해 세계를 장악했음에도 라틴어보다 헬라어가 더 통용되었습니다.
    즉 헬라의 철학과 전통이 여전히 지배라던 시대였습니다.
    한편 로마제국은 철저하게 권력과 무력을 신봉해 힘의 철학이 병존하던 시대였습니다.
    그런 가운데 사도 바울이 주장한 복음, 곧 갈릴리에 살고 있던 예수라는 목수가 십자가에 못 박혀 죽고 다시 부활했다는 것은 그리 대단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로마제국이 추구하던 역사적이고도 철학적인 전통에 비추어 본다면, 사람들에게 허무맹랑한 이야기일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복음이 전혀 부끄럽지 않다.”고 당당하게 말했습니다.
    오히려 복음을 자랑했습니다.

    왜 복음이 자랑거리입니까?
    바울은 두 가지 이유를 들고 있습니다.

    하나는, 복음은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으로 히브리인이든, 헬라인이든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믿기만 하면 구원을 받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구원받는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구원”을 다른 말로 하면 “자유”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죄로부터 자유, 심판으로부터 자유, 죽음으로부터 자유가 주어진다는 것입니다.

    다른 하나는, 17절의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고 증언합니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난다고 했는데, 하나님의 의는 무엇입니까?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맺을 수 있게 해주는 것입니다.

    사실 의인 외에는 하나님 앞에 설 수 없습니다.

    죄인은 하나님 앞에서 죽을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절대로 죄인과 함께 하실 수 없습니다.

    우리는 예외 없이 모두 죄인으로 하나님 앞에 서면 죽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죄인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 앞에 설 수 있게 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가 회복되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신학적인 용어로 “이신칭의”라고 합니다.

    우리는 죄인이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 하나님께서 우리를 의롭다고 인정해 주심으로 하나님 앞에 바로 설 수 있습니다.

    로마서의 주제인 “이신칭의”를 이해하지 못하면 로마서를 이해할 수 없고, 성경을 이해할 수 없으며, 복음이 자랑이 되고 기쁨이 되기는커녕 오히려 자신의 욕심을 채우기 위한 수단과 방법으로 전락해 버리고 맙니다.

    그래서 “이신칭의”를 깨닫는 것이 대단히 중요합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칭함 받는 것이 무엇인지 정확하게 인식하기 위해서는 “나”라는 인간 존재에 대한 인식이 무엇보다 선행되어야 합니다.

     

    “내가 누구인가?”부터 생각헤 보아야 한다는 말입니다.

    만약 내가 나 스스로 의를 이룰 수 있다면, 나에게 복음이 필요 없습니다.

    혼자 힘으로 하나님 앞에 설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스스로 구원을 이룰 수 있을 정도로 자신에게 의가 있습니까?

    자신이 의인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성경은 철저하게 모든 사람은 다 죄인이라고 단정합니다.

    롬3:10절을 보면 “의인은 없나니 한 사람도 없다”고 했습니다.

     

    성경은 “범죄”와 “죄”를 구별해서 전하고 있습니다.

    범죄는 내가 법을 위반하여 그 결과가 겉으로 드러난 것입니다.

    그러나 이와 같은 범죄를 저지르지 않아도 누구에게나 죄는 있기 마련입니다.

    우리의 본성은 죄로 물들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모두 죄인입니다.

     

    성경이 모든 사람을 죄인이라고 단정하는 것은, 법률적인 범죄를 저지르지 않았다 해도 사람은 죄의 본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범죄를 저질러야 죄인이 된다고 생각하는데, 성경은 거꾸로 우리가 죄인이기 때문에 죄를 지을 수밖에 없다고 말합니다.

    즉 감옥에 있는 사람들은 범죄가 드러난 죄인이고, 우리는 아직까지 범죄가 드러나지 않은 죄인입니다.

    이것이 다를 뿐입니다.

    바꾸어 말하면, 도덕적인 죄인이냐 비도덕적인 죄인이냐, 이 차이밖에 없습니다.

    모두 죄인인데 어떤 사람은 더 죄를 지었고, 어떤 사람은 아직까지 죄를 덜 죄를 지었을 뿐입니다.

    자신이 정말 죄인이 아니라면, 자기 안에 증오나 추한 생각이나 음욕 등이 없어야 합니다.

    자기 안에 더러운 것이 가득 차 있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본성이 죄인이라는 의미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아무도 하나님 앞에 설 수 없습니다.

    서는 순간에 죽음을 피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죽을 수밖에 없는 죄인인 우리의 죄를 예수 그리스도께서 대신 지시고 구속하심으로 우리가 의롭다고 칭함 받는 것이 바로 복음입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질문이 제기 됩니다.

    왜 예수님만 우리의 구세주가 될 수 있습니까?

    왜 석가모니와 공자는 안 됩니까?

    예수님 외에 다른 길이 없을까요?

    믿음이란 “말씀에 대한 믿음”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성경말씀을 믿지 못하면서,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입으로는 믿는다고 말을 하면서도 성경 말씀을 온전히 믿지 못하는 사람은 자신의 생각과 감정을 믿는 것일 뿐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다면, 그 믿음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성경 말씀에 대한 믿음으로 나타나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역시 성경 말씀에 근거해서 이해하고 인식해야 합니다.

     

    첫째, 마1:21절은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고 했습니다.

    마리아가 아이를 가졌는데, 마리아의 남편 요셉에게 천사가 나타나 아이의 이름을 예수라 하라고 명했습니다.

    그가 자기 백성을 구원할 자이시기 때문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죄에서 인간을 구원하는 구세주입니다.

    인류 역사상 수많은 사람들 가운데 “내가 너희 죄로 인해 죽는다.”고 말씀하신 분은 예수님 한 분 밖에는 없습니다.

    사랑, 의리, 우정 때문이 아닌 “죄 때문에 죽는다.”고 말한 사람은 없었습니다.

    석가모니가 공자는 다른 사람의 죄 때문에 죽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다른 사람의 죄오 인해 죽고자 이 땅에 온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요1:29절을 보면, 요한 예수님의 나아오심을 보고 말하기를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우리의 죄를 대신 지고 가는 하나님께서 정하신 “그리스도”시라는 말입니다.

    예수님만이 하나님께로부터 인정받은 하나님의 어린 양입니다.

    우리의 죄를 대신 지고 죽으심으로 인해 우리의 죄가 대속되도록 하나님께서 인정하신 유일한 분이십니다.

     

    둘째, 요11:25-26절은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고 했습니다.

    여기에서 말하는 생명은 영원한 생명입니다.

    예수님께서 죽으셨다가 당신의 말씀대로 부활하셨습니다.

    그리고 지금까지 살아계시고 영원히 존재하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만이 우리를 영생의 길로 인도하실 수 있습니다.

    석가모니와 공자는 이 세상에 빛을 비추는 존경할만한 삶을 살았지만, 죽음을 깨뜨리고 부활하지 못했습니다.

    오늘날 그들에게는 거대한 무덤이 남아 있으나, 예수 그리스도께는 무덤이 없습니다.

    화장해서 재가 되었거나 무덤 속에서 그 시체가 썩어버린 유한한 존재가 우리에게 영생을 줄 수 있겠습니까?

    예수께서 부활하신 것이 왜 중요합니까?

    주님께서 부활하심으로 그분이 하신 모든 말씀이 오늘날까지 효력을 갖습니다.

    약속한 사람이 죽으면 그 약속은 아무 의미가 없어집니다.

    예수님은 오늘도 살아계시기에 그분의 말씀이 오늘도 유효한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죽음을 맞이했던 수많은 사람 가운데 다시 몸으로 부활하고 영원한 생명 속에 있는 분은 예수 그리스도 밖에 없습니다.

     

    셋째, 마16:13절을 읽겠습니다.

    “예수께서 빌립보 가이샤라 지방에 이르러 제자들에게 물어 이르시되 사람들이 인자를 누구라 하느냐”

    예수님께서 자신을 가리켜 “인자”라고 하셨습니다.

    “인자”는 “사람의 아들”이라는 뜻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땅에 사람의 아들로 오셨습니다.

    여인의 몸에 잉태되어, 외양간 구유에서 태어나셨습니다.

    구유는 짐승의 밥통입니다.

    요즘은 세상이 좋아져 구유가 장식용으로 부잣집 거실에 놓이기도 하지만, 사실 구유는 더럽고 지저분하기 짝이 없습니다.

    세상에 어떤 사람 비천한 사람도 짐승의 거처에서 태어나지는 않을 것입니다.

    우리가 눈물을 흘릴 때, 누가 위로하며 눈물을 닦아 줍니까?

    우리의 아픔을 이해해 주는 사람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으로 오시되 짐승의 구유에 처음 누우셨고, 가장 못사는 달동네 갈릴리에서 사셨습니다.

    그리고 밑바닥에서 아픔과 괴로움을 겪는 사람들과 함께 30년간의 삶을 나누셨습니다.

    그런 예수님이시기에 우리가 어떤 고통가운데 있다 해도 그분은 우리의 사정을 헤아리실 수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눅1:35절에서 천사가 마리아에 육체를 통해 태어날 아기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어질 것이라고 전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사람의 아들이면서 동시에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세상과 우주에서 가장 높으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따라서 예수님께서는 가장 낮은 지위에 있는 사람의 마음도 아시지만, 하나님의 아들이시므로 가장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의 마음도 아십니다.

     

    사람들이 흔히 생각하듯이, 예수님께서 과부와 고아, 나그네의 친구로 지위가 낮은 사람들의 심령은 잘 이해하지시만 지위가 높은 사람은 이해하시지 못할 것처럼 여겨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시기에 대통령의 고민도 아시고, 책임자 격인 장의 자리에 있는 사람들의 고민도 아십니다.

    해야 할 일을 하고도 아랫사람들에게 욕먹는 아픔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계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세상 모두를 수용하실 수 있습니다.

     

    넷째, 마1:23절을 읽겠습니다.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셨으니 이를 번역한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함이라”

    예수님께서는 곧 하나님이십니다.

     

    여기에서 질문이 이런 질문이 생길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했는데 예수님이 곧 하나님이시라면, 어떻게 하나님의 아들이 하나님이 될 수 있는가?

    개의 새끼는 개입니다.

    소의 새끼는 소입니다.

    사람의 아들은 사람입니다.

    마찬가지로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아들이시기 때문에 하나님이십니다.

    즉 예수님의 속성이 하나님이시라는 말입니다.

    그러면 왜 예수님께서 하나님이신 것이 중요합니까?

    예수님께서는 내 속마음과 모든 아픔을 이해하시는 참인간이십니다.

    동시에 참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내 모든 삶의 문제를 도우실 수 있습니다.

    이 도우심은 일시적인 것이 아니라 영원한 도우심입니다.

    또 나의 죄를 대신하여 속죄해 주실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인간으로 와서 인간으로 살다간 석가모니나 공자나 마호멧은 우리의 구세주가 될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의 구세주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 한 분 밖에는 없는 것입니다.







    오늘은 소대언서 여덟 번째 책인 하박국서 1~2장을 강해하겠습니다.

    그는 유다왕 요시아 왕의 전사(BC.609년) 전후에 활동한 대언자입니다. 스바냐와 예레미야보다 늦게 부름을 받고 활동한 것으로 보입니다.

    하박국 חֲבַקּוּק 하바꾹)의 바벨론어 이름 뜻은 “포옹 embrace” חבק)이며 칠십인역에서 ‘암바쿰’(Ἀμβακούμ)이라 불리며, 라틴역 불가타에서는 ‘Habacuc’, 영어성경에서는 ‘Habakkuk’, 그리고 중국어성경에서는 ‘哈巴谷’이라 불립니다.

    이 대언자는 1:1와 3:1에서 이름 이외는 누구의 아들인지 어느 가문인지 전혀 나오지 않고 있습니다. 자신을 ‘대언자’[선지자]라고 소개한 책은 하박국, 학개(1:1), 스가랴(1:1) 세권뿐입니다.

    ​비록 성경은 아니지만 랍비 문헌에서는 엘리사에 의해 되살아난 수넴 여인의 아들이라는 전승이 전하며, 또한 다니엘서에 덧붙여진 위경 벨과 용에서도 언급되는데, 그 헬라어 사본 중에는 레위 지파 여호수아의 아들이라는 기록도 있습니다.

    하박국서의 구조는 첫 부분(1:2~2:5)에서 대언자와 하나님과의 대화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전체 구조는 선형구조입니다.

    A 최초의 대화(1:2~11)

    a 대언자의 불평(1:2~4)
    b 주님의 응답(1:4~11)

    B 두 번째 대화(1:12~2:5)

    a 대언자의 불평(1:12~17)
    b 주님의 응답(2:1~5)

    C 압제자들에 대한 저주의 신탁(2:6~10)

    a 노략자가 노략될 것임(2:6~8)
    b 정복자가 수치를 당할 것임(2:9~11)
    c 건축자가 헛됨(2:12~14)
    d 수치가 없는 자가 수치를 당할 것임(2:15~18)
    e 우상 숭배자들이 잠잠할 것임(2:19~20)

    D 하박국의 순종의 시(3:1~19)

    a 기도(3:2)
    b 용사이신 하나님의 등장(3:3~15)
    c 믿음으로 사는 선지자(3:16~19)

    반면 돌시는 나훔서, 스바니야서와 같이 7중 대칭구조(Chiasm키아즘)로 분석합니다. 이 구조에서는 핵심부분(D, 2:1~5 turning point)에서 '기다리라는 권고'가 나타납니다. ABCDC’B’A’

    A 하박국의 첫 번째 불평(1:2~4)

    B 여호와의 첫 번째 대답(1:5~11)

    C 하박국의 두 번째 불평(1;12~17)

    D 의인은 믿음으로 살게 됨(2:1~5)

    C' 두 번째 불평에 대한 주님의 대답(2:6~20)

    B' 여호와의 마지막 대답(3:1~5)

    A' 여호와의 첫 번째 응답에 대한 깨달음(3:16~19)

    하박국서는 문화장르로 수사적인 질문과 답변, 설화, 시, 예언, 기도문으로 되어 있습니다.

    1. 하박국의 불평 Habakkuk’s Complaint (합 1:2-4)​

    (합1:1) 대언자 하박국이 묵시로 받은 경고라 The burden which Habakkuk the prophet did see.(2) 여호와여 제가 부르짖어도 주님께서 듣지 아니하시니 어느 때까지리이까? 제가 강포로 말미암아 외쳐도 주님께서 구원하지 아니하시나이다. (3) 어찌하여 제게 죄악을 보게 하시며 패역을 눈으로 보게 하시나이까? 겁탈과 강포가 제 앞에 있고 변론과 분쟁이 일어났나이다. (4) 이러므로 율법이 해이하고 정의가 전혀 시행되지 못하오니, 이는 악인이 의인을 에워쌌으므로 정의가 굽게 행하여짐이니이다.

    1-4절. 하박국서의 첫 단어 ‘경고’란 히브리어 הַמַּשָּׂא‘하 맛사’의 뜻은 짐(burden), 예언(prophecy), 신탁(oracle)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이해하면 됩니다. 하박국이 대언자로 부름을 받아 활동한 시기는 요시아왕이 이집트 바로인 느고에 의해 전사(BC 609년)한 때로 남왕국 유다와 예루살렘의 멸망을 예고한 때였습니다.

    내적으로는 부패하였으며, 신흥하는 신바벨론(느부갓네살)의 세력으로 도전을 받고 있었습니다.​ 요시아왕의 전사 4년 후 일어난 고대 근동시대의 결정적인 갈그미스 전투(The Battle of Carchemish, BC 605)도 배경이 되고 있습니다.

    갈그미스 도성은 지중해 부근 알렙포(Aleppo)에서 북동쪽으로 약 100km 떨어진 오늘날의 '제라불루스'(Jerablus)입니다. 유브라데 강의 도하 지점인 강의 상류를 지키는 도성으로, 메소보다미아와 소아시아를 연결시키는 주요 동서 고속도로의 북쪽 부분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BC 612년부터 앗수르 제국이 쇠퇴할 무렵 이집트의 군대가 BC 609년에 공격하여 정복하였습니다. 이 해에 이집트의 바로(Pharaoh) 느고가 유다왕 요시아의 군대를 므깃도 전투에서 승리한 후에(역대하 35:20~27) 정복한 도시가 갈그미스입니다. ​

    이스라엘의 운명은 요시아왕이 그릇된 판단하여 하나님께 허락도 받지 않고 참전하여 전사하고 말았습니다. BC 605년 갈그미스 전투에서 신바벨론 제국 왕 느부갓네살 2세가 앗수르 군대를 격파하고 이 성읍을 차지하게 되었습니다. 앗수르(수도 니느웨)의 시대는 물러가고 신바벨론 시대가 된 것입니다.

    이집트의 바로 느고의 군대는 갈그미스까지 가서 신바벨론과 전투를 개시했으나 싸움은 바벨론의 승리로 돌아갔습니다.

    갈그미스 전투에서 패전하여 귀국하는 길에 하맛 땅 립나에서 자기에게 나온 유다왕 여호아하스(요시아의 장남)를 잡아 옥에 가두고 그 형제 엘리아김을 여호야김으로 개명하여 왕으로 삼고, 여호아하스는 애굽으로 잡혀가 그곳에서 죽습니다. 그리하여 유다는 애굽으로부터 잦은 내정 간섭을 받게 되었는데 17대왕 여호아하스가 폐위되고 18대 여호야김이 등극하게 된 것도 애굽의 내정 간섭에 의해서입니다.

    그후 여호야김 4년(BC 605년)에 애굽의 바로느고는 다시 갈그미스로 진격하였으나 갈그미스와 하맛에서 느부갓네살에게 패합니다. ​

    1년후 느부갓네살은 팔레스틴으로 내려와 아스글론을 정복하고 애굽 시내에 이릅니다(왕하 24:74). 그리하여 유다는 앗수르의 속국에서 잠시 누렸던 독립을 잃고 당분간 바벨론의 속국 상태로 남게 됩니다.

    1:2-4절. 하박국 대언자는 이런 국제적 상황 가운데서 하나님께서 무관심하시다고 불평을 하고 있습니다, 그가 느끼기에는 하나님께서 이런 국제적 상황에 침묵을 지키고 계시다고 항변합니다.

    "여호와여 제가 부르짖어도 주님께서 듣지 아니하시니 어느 때까지리이까? 제가 강포로 말미암아 외쳐도 주님께서 구원하지 아니하시나이다. 어찌하여 제게 죄악을 보게 하시며 패역을 눈으로 보게 하시나이까? 겁탈과 강포가 제 앞에 있고 변론과 분쟁이 일어났나이다.”(2-3절) 그는 율법이 해이하고 정의가 전혀 시행되지 못하는 원인이 악인이 의인을 에워싸여 정의가 굽게 행하여지고 있기 때문이라고 항변합니다. ​

    하나님께서는 왜 불의와 강포를 보시고 아무런 행동을 하지 않으시나이까?의 울부짖음은 이전 1970년대 유신체제 때 민중들의 항변이기도 했습니다.

    2. 여호와의 응답 The Lord’s Answer(1:5-11)

    (5)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너희는 여러 나라를 보고 또 보고 놀라고 또 놀랄지어다. 너희의 생전에 내가 한 가지 일을 행할 것이라. 누가 너희에게 말할지라도 너희가 믿지 아니하리라(행13:41, 사29:9, 사29:14). (6) 보라 내가 사납고 성급한 백성 곧 땅이 넓은 곳으로 다니며 자기의 소유가 아닌 거처들을 점령하는 갈대아 사람을 일으켰나니 (렘8:10) (7) 그들은 두렵고 무서우며 당당함과 위엄이 자기들에게서 나오며

    (8) 그들의 군마는 표범보다 빠르고 저녁 이리보다 사나우며 그들의 마병은 먼 곳에서부터 빨리 달려오는 마병이라. 마치 먹이를 움키려 하는 독수리의 날음과 같으니라(렘4:13, 렘5:6). (9) 그들은 다 강포를 행하러 오는데 앞을 향하여 나아가며 사람을 사로잡아 모으기를 모래 같이 많이 할 것이요(왕하12:17) (10) 왕들을 멸시하며 방백을 조소하며 모든 견고한 성들을 비웃고 흉벽을 쌓아 그것을 점령할 것이라(사10:9, 사14:16). (11)그들은 자기들의 힘을 자기들의 신으로 삼는 자들이라. 이에 바람 같이 급히 몰아 지나치게 행하여 범죄하리라.

    5-11절. 하나님께서는 하박국의 생각대로 불의에 대해 침묵하고 계시지 않습니다. 직접 대답하시기를 “너희는 여러 나라를 보고 또 보고 놀라고 또 놀랄지어다. 너희의 생전에 내가 한 가지 일을 행할 것이라. 누가 너희에게 말할지라도 너희가 믿지 아니하리라.”(5절). 하나님께서는 심판의 몽둥이로 신바벨론 사람을 일으켰다고 하십니다(6절).

    갈대아인들(신바벨론군대)는 두렵고 무서우며 당당함과 위엄이 자기들에게서 나오며 그들의 군마는 표범보다 빠르고 저녁 이리보다 사나우며 그들의 마병은 먼 곳에서부터 빨리 달려오는 마병이라. 마치 먹이를 움키려 하는 독수리의 날음과 같습니다. ​

    그들은 다 강포를 행하러 오는데 앞을 향하여 나아가며 사람을 사로잡아 모으기를 모래 같이 많이 할 것이요 왕들을 멸시하며 방백을 조소하며 모든 견고한 성들을 비웃고 흉벽을 쌓아 그것을 점령할 것입니다. 그들은 자기들의 힘을 자기들의 신으로 삼는 자들인데. 이에 바람 같이 급히 몰아 지나치게 행하여 범죄하리라(7-11절)고 설명해 주십니다.

    3. 하박국이 다시 호소하다 Habakkuk’s Second Complaint (합 1:12-17)

    (12) 대언자가 이르되 ‘여호와 나의 하나님, 나의 거룩한 분이시여, 주님께서는 만세 전부터 계시지 아니하시니이까? 저희가 사망에 이르지 아니하리이다. 여호와여 주님께서 심판하기 위하여 그들을 두셨나이다. 반석이시여, 주님께서 경계하기 위하여 그들을 세우셨나이다(사10:5, 신28:50). (13) 주님께서는 눈이 정결하시므로 악을 차마 보지 못하시며 패역을 차마 보지 못하시거늘 어찌하여 거짓된 자들을 방관하시며 악인이 자기보다 의로운 사람을 삼키는데도 잠잠하시나이까?

    (14) 주님께서 어찌하여 사람을 바다의 고기 같게 하시며 다스리는 자 없는 벌레 같게 하시나이까? (15) 그가 낚시로 모두 낚으며 그물로 잡으며 투망으로 모으고 그리고는 기뻐하고 즐거워하여 (16) 그물에 제사하며 투망 앞에 분향하오니 이는 그것을 힘입어 소득이 풍부하고 먹을 것이 풍성하게 됨이니이다. (17) 그가 그물을 떨고는 계속하여 여러 나라를 무자비하게 멸망시키는 것이 옳으니이까?

    12-17절. 이에 하박국은 다시 항변하기를 심판의 몽둥이로 왜 하필 악독한 갈대아인(신바벨론군)을 사용하시느냐고 합니다.(12-13절)

    “어찌하여 거짓된 자들을 방관하시며 악인이 자기보다 의로운 사람을 삼키는데도 잠잠하시나이까?” “주님께서 어찌하여 사람을 바다의 고기 같게 하시며 다스리는 자 없는 벌레 같게 하시나이까? 그가 낚시로 모두 낚으며 그물로 잡으며 투망으로 모으고 그리고는 기뻐하고 즐거워하여 그물에 제사하며 투망 앞에 분향하오니 이는 그것을 힘입어 소득이 풍부하고 먹을 것이 풍성하게 됨이니이다. 그가 그물을 떨고는 계속하여 여러 나라를 무자비하게 멸망시키는 것이 옳으니이까?” (14-17절)​

    하박국은 하나님께서 정의와 긍휼이 넘치시는 분께서 악한 도구로 심판하시겠다는 말씀에 이해가 되지 않아 꼬치꼬치 묻고 있습니다. 정직한 태도로 볼 수 있지만 한편으로는 교만하고 불순한 대언자로 볼 수도 있습니다.

    4.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 The Righteous Shall Live by His Faith(합 2:1-5)

    (1) 내가 내 파수하는 곳에 서며 성루에 서리라. 그분께서 내게 무엇이라 말씀하실는지 기다리고 바라보며 나의 질문에 대하여 나로 어떻게 대답하게 하실는지 하였더니 (2) 여호와께서 내게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는 이 묵시를 기록하여 판에 명백히 새기되 달려가면서도 읽을 수 있게 하라(롬15:4, 요16:25, 요16:29, 고전14:19). (3) 이 묵시는 정한 때가 있나니 그 종말이 속히 이르겠고 결코 거짓되지 아니하리라. 비록 더딜지라도 기다리라. 지체되지 않고 반드시 응하리라(히10:37).

    (4) 보라, 그의 마음은 교만하며 그 속에서 정직하지 못하나 의인은 그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5) 그는 술을 즐기며 거짓되고 교만하여 가만히 있지 아니하고 스올처럼 자기의 욕심을 넓히며 또 그는 사망 같아서 족한 줄을 모르고 자기에게로 여러 나라를 모으며 여러 백성을 모으나니

    2:1-5. 이렇게 자기의 생각과 주장을 내세우며 하나님께 항변한 하박국은 적군을 파수하는 곳인 성루(the watch tower)에 서서 이제 하나님의 답변을 기다립니다(1절). 드디어 하나님의 답변이 오기를 ”너는 이 묵시를 기록하여 판에 명백히 새기되 달려가면서도 읽을 수 있게 하라. 이 묵시는 정한 때가 있나니 그 종말이 속히 이르겠고 결코 거짓되지 아니하리라. 비록 더딜지라도 기다리라. 지체되지 않고 반드시 응하리라”(2-3절).

    묵시(vision)란 하나님의 때와 계획을 말하는데 묵시가 더 이상 비밀이 아니라 이제는 실현할 시간이 왔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때가 되면 하나님의 뜻과 계획이 차질없이 100% 다 이뤄진다는 것입니다. 비록 더딜지라도 기다리면 반드시 응합니다.

    4절에 보니 하나님의 묵시를 무시하거나 관심이 없는 자는 교만하고 정직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his soul which is lifted up is not upright in him). ​

    그러나 “의인은 그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but the just shall live by his faith.)는 답변이 하박국의 마음을 움직였습니다.

    하나님의 뜻과 계획과 시간을 깨닫지 못하고 항변하고 있는 자신이 교만하고 정직하지 못함을 지적당하자 그는 믿음이 없는 자신을 부끄러워하며 “의인은 그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에서 모든 해답을 찾았습니다.

    ​의인의 반대인 악인은 5절에 있는대로 “술을 즐기며 거짓되고 교만하여 가만히 있지 아니하고 스올처럼 자기의 욕심을 넓히며 또 그는 사망 같아서 족한 줄을 모르고 자기에게로 여러 나라를 모으며 여러 백성을 모읍니다.”

    믿음으로 살지 아니하는 자는 죄 가운데 살기 때문입니다. 롬 14:23에 “의심하고 먹는 자는 정죄되었나니 이는 믿음을 따라 하지 아니하였기 때문이라. 믿음을 따라 하지 아니하는 것은 다 죄니라 And he that doubteth is damned if he eat, because he eateth not of faith: for whatsoever is not of faith is sin.”

    대언자 하박국은 하나님으로부터 어떤 어려움이 있더라도 하나님을 믿고 신뢰해야 하며, 나아가서 온 땅에 하나님이 공의를 행하신다는 것을 확신해야 했습니다. 결국 하박국은 믿음으로 사는 법을 배우고 있었던 것이며, 재난에 직면해서 자신의 구원자이신 여호와를 찬양하는 법을 배운 것입니다.

    합 2:4의 말씀으로 그는 머리와 가슴이 뻥 뚫린 듯한 느낌을 받게 됩니다. 영적으로 거듭나는 순간입니다.

    하박국은 내적인 부패로 썩어 있었으며 새롭게 부각하는 바빌론의 세력이 곧 성전과 도성을 멸망시킬 운명에 있는, 역사적 마지막 시기의 처한 유다와 예루살렘에 말씀을 선포했지만, 대언자의 시각으로는 이러한 이중의 악이 힁행하는 가운데 주님은 활동하시며 다 보고 계심을 확신합니다.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는 이신칭의(以信稱議 Justification by faith)는 기독교 신앙의 모토(Motto)가 됩니다.

    바울서신은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 세 마디가 그의 신학의 요약이 됩니다. 의인=로마서의 주제(1:16-17), 믿음으로=히브리서 주제(10:38, 11장), 살리라=갈라디서 주제(3:11, 3:24, 5:22-24).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도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칭함 받았습니다(창 15:6). 이 요절의 말씀이 하박국의 이름의 뜻인 “하나님의 포옹 Embrace of God”입니다. 정의롭게 살려고 애쓰는 하박국 대언자를 안아주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느낄 수 있습니다.

    5. 갈대아인들을 향한 저주 Woe to the Chaldeans (합 2:6-20)

    (6) 그 무리가 다 속담으로 그를 평론하며 조롱하는 시로 그를 풍자하지 않겠느냐? 곧 이르기를 화 있을진저, 자기 소유 아닌 것을 모으는 자여, 언제까지 이르겠느냐? 볼모 잡은 것으로 무겁게 짐진 자여. (7) 너를 억누를 자들이 갑자기 일어나지 않겠느냐? 너를 괴롭힐 자들이 깨어나지 않겠느냐? 네가 그들에게 노략을 당하지 않겠느냐? (8) 네가 여러 나라를 노략하였으므로 그 모든 민족의 남은 자가 너를 노략하리니 이는 네가 사람의 피를 흘렸음이요, 또 땅과 성읍과 그 안의 모든 주민에게 강포를 행하였음이니라(사33:1, 렘27:7).

    (9) 재앙을 피하기 위하여 높은 데 깃들이려 하며 자기 집을 위하여 부당한 이익을 취하는 자에게 화 있을진저! (10) 네가 많은 민족을 멸한 것이 네 집에 욕을 부르며 네 영혼에게 죄를 범하게 하는 것이 되었도다. (11) 담에서 돌이 부르짖고 집에서 들보가 응답하리라(눅19:40).

    (12) 피로 성읍을 건설하며 불의로 성을 건축하는 자에게 화 있을진저!(미3:10, 나3:1) (13) 민족들이 불탈 것으로 수고하는 것과 나라들이 헛된 일로 피곤하게 되는 것이 만군의 여호와께로 말미암음이 아니냐? (14) 이는 물이 바다를 덮음 같이 여호와의 영광을 인정하는 것이 세상에 가득함이니라.

    (15) 이웃에게 술을 마시게 하되 자기의 분노를 더하여 그에게 취하게 하고 그 하체를 드러내려 하는 자에게 화 있을진저!(잠16:29, 암2:12) (16) 네게 영광이 아니요 수치가 가득한즉 너도 마시고 너의 할례 받지 아니한 것을 드러내라. 여호와의 오른손의 잔이 네게로 돌아올 것이라. 더러운 욕이 네 영광을 가리리라. (17) 이는 네가 레바논에 강포를 행한 것과 짐승을 죽인 것 곧 사람의 피를 흘리며 땅과 성읍과 그 안의 모든 주민에게 강포를 행한 것이 네게로 돌아오리라(슥11:1).

    (18) 새긴 우상은 그 새겨 만든 자에게 무엇이 유익하겠느냐? 부어 만든 우상은 거짓 스승이라. 만든 자가 이 말하지 못하는 우상을 의지하니 무엇이 유익하겠느냐? (19) 나무에게 깨라 하며 말하지 못하는 돌에게 일어나라 하는 자에게 화 있을진저! 그것이 교훈을 베풀겠느냐? 보라 이는 금과 은으로 입힌 것인즉 그 속에는 생기가 도무지 없느니라. (20) 오직 여호와는 그 성전에 계시니 온 땅은 그 앞에서 잠잠할지니라 하시니라.

    6-20절. 하박국이 하나님의 속마음을 깨닫고 나서 세상을 보는 눈이 달라졌습니다.

    인본주의(인간이 보는 관점)에서 신본주의(하나님께서 보시는 관점)으로 달라집니다.

    6절부터 나오는 “그”는 5절에 나오는 갈대아인들(즉 신바벨론 제국론자들)을 말합니다. 자기들끼리 조롱하며 풍자합니다.

    ‘화 있을진저, 자기 소유 아닌 것을 모으는 자여, 언제까지 이르겠느냐? 볼모 잡은 것으로 무겁게 짐진 자여. 너를 억누를 자들이 갑자기 일어나지 않겠느냐? 너를 괴롭힐 자들이 깨어나지 않겠느냐? 네가 그들에게 노략을 당하지 않겠느냐?

    네가 여러 나라를 노략하였으므로 그 모든 민족의 남은 자가 너를 노략하리니 이는 네가 사람의 피를 흘렸음이요, 또 땅과 성읍과 그 안의 모든 주민에게 강포를 행하였음이니 재앙을 피하기 위하여 높은 데 깃들이려 하며 자기 집을 위하여 부당한 이익을 취하는 자에게 화 있을진저!

    네가 많은 민족을 멸한 것이 네 집에 욕을 부르며 네 영혼에게 죄를 범하게 하는 것이 되었도다. 담에서 돌이 부르짖고 집에서 들보가 응답하리라.

    피로 성읍을 건설하며 불의로 성을 건축하는 자에게 화 있을진저!

    민족들이 불탈 것으로 수고하는 것과 나라들이 헛된 일로 피곤하게 되는 것이 만군의 여호와께로 말미암음이 아니냐?’(6-13절)고 하나님께서 주어가 되시는 신본주의 입장에서 인본주의의 모든 행위를 꾸짖고 저주를 합니다.

    신본주의의 심판과 통치에 대해 14절에서 “이는 물이 바다를 덮음 같이 여호와의 영광을 인정하는 것이 세상에 가득함이니라.”고 하십니다. 이에 대한 복음송가를 함께 부릅시다.

    15-19절 이하에서 계속하여 이런 갈대아인들에 대한 저주를 선언합니다.

    “이웃에게 술을 마시게 하되 자기의 분노를 더하여 그에게 취하게 하고 그 하체를 드러내려 하는 자에게 화 있을진저! 네게 영광이 아니요 수치가 가득한즉 너도 마시고 너의 할례 받지 아니한 것을 드러내라. 여호와의 오른손의 잔이 네게로 돌아올 것이라. 더러운 욕이 네 영광을 가리리라. 이는 네가 레바논에 강포를 행한 것과 짐승을 죽인 것 곧 사람의 피를 흘리며 땅과 성읍과 그 안의 모든 주민에게 강포를 행한 것이 네게로 돌아오리라.

    새긴 우상은 그 새겨 만든 자에게 무엇이 유익하겠느냐? 부어 만든 우상은 거짓 스승이라. 만든 자가 이 말하지 못하는 우상을 의지하니 무엇이 유익하겠느냐? 나무에게 깨라 하며 말하지 못하는 돌에게 일어나라 하는 자에게 화 있을진저! 그것이 교훈을 베풀겠느냐? 보라 이는 금과 은으로 입힌 것인즉 그 속에는 생기가 도무지 없느니라.”

    우상숭배의 허구성, 모든 우상은 거짓 스승, 우상 숭배자들에게 화 있을진저! 선언하고는 20절에서 신본주의적 관점을 한마디로 요약합니다.

    “오직 여호와는 그 성전에 계시니 온 땅은 그 앞에서 잠잠할지니라 하시니라. But the LORD is in his holy temple: let all the earth keep silence before him.”

    시편기자도 “하나님의 성소에 들어갈 때에야 악인들의 결국을 깨닫게 되었다”고 고백합니다(시 73:17).

    6. 하박국의 기도 Habakkuk’s Prayer (3:1-16)

    (1) 시기오놋에 맞춘 대언자 하박국의 기도라. (2) 여호와여 내가 주님께 대한 소문을 듣고 놀랐나이다. 여호와여, 주님은 주님의 일을 이 수년 내에 부흥하게 하옵소서. 이 수년 내에 나타내시옵소서. 진노 중에라도 긍휼을 잊지 마옵소서. (3) 하나님이 데만에서부터 오시며 거룩한 자가 바란 산에서부터 오시는도다(셀라). 그분의 영광이 하늘을 덮었고 그분의 찬송이 세계에 가득하도다.

    (4) 그분의 광명이 햇빛 같고 광선이 그분의 손에서 나오니 그분의 권능이 그 속에 감추어졌도다. (5) 역병이 그분 앞에서 행하며 불덩이가 그분의 발밑에서 나오는도다. (6) 그분께서 서신즉 땅이 진동하며 그분께서 보신즉 여러 나라가 전율하며[흩어지며] 영원한 산이 무너지며 무궁한 작은 산이 엎드러지나니 그분의 행하심이 예로부터 그러하시도다(신32:8, 사40:12, 시135:10).

    (7) 내가 본즉 구산의 장막이 환난을 당하고 미디안 땅의 휘장이 흔들리는도다. (8) 여호와여, 주님께서 말을 타시며 구원의 병거를 모시오니 강들을 분히 여기심이니이까? 강들을 노여워하심이니이까? 바다를 향하여 성내심이니이까? (9) 주님께서 활을 꺼내시고 화살을 바로 쏘셨나이다[주께서 강들로 땅을 쪼개셨나이다] (셀라)(시7:12, 시78:16).

    (10) 산들이 주님을 보고 흔들리며 창수가 넘치고 바다가 소리를 지르며 손을 높이 들었나이다 (11) 날아가는 주님의 화살의 빛과 번쩍이는 주님의 창의 광채로 말미암아 해와 달이 그 처소에 멈추었나이다 (수10:12-14). (12) 주님께서 노를 발하사 땅을 두르셨으며 분을 내사 여러 나라를 밟으셨나이다. (13) 주님께서 주님의 백성을 구원하시려고, 기름 부음 받은 자를 구원하시려고 나오사, 악인의 집의 머리를 치시며, 그 기초를 바닥까지 드러내셨나이다(셀라).

    (14) 그들이 회오리바람처럼 이르러 나를 흩으려 하며 가만히 가난한 자 삼키기를 즐거워하나, 오직 주님께서 그들의 전사의 머리를 그들의 창으로 찌르셨나이다. (15) 주님께서 말을 타시고 바다 곧 큰 물의 파도를 밟으셨나이다(시77:19, 출15:8) (16) 내가 들었으므로 내 창자가 흔들렸고 그 목소리로 말미암아 내 입술이 떨렸도다. 무리가 우리를 치러 올라오는 환난 날을 내가 기다리므로 썩이는 것이 내 뼈에 들어왔으며 내 몸은 내 처소에서 떨리는도다(욥30:17).

    1-16절. 하박국은 하나님의 섭리를 깨닫고 난 후 기도를 드립니다.

    시기오놋(Shigionoth)이란 식가욘(shiggaion, 시 7 표제에 나오는 식가욘)의 여성 복수형입니다. 이 현악기는 정확하게 알려지지 않아 번역되지 않은 채 악기 이름만 밝히고 있습니다.

    하박국의 기도문은 모범 기도로 (1) 하나님의 이름 부름(기원) (2) 송영 (4) 영적 전쟁의 승리 찬양 (5) 구원의 완성 찬양을 담고 있습니다.

    2절에서 “여호와여”라고 주님의 칭호를 부르면서 기도가 시작됩니다. 주님께서 하신 일에 대해 듣고 놀라면서 “주님은 주님의 일을 이 수년 내에 부흥하게 하옵소서. 이 수년 내에 나타내시옵소서.”하며 송영을 드리고 있습니다.

    “진노 중에라도 긍휼을 잊지 마옵소서.”하면서 하나님께서 아라비아 사막의 데만(Teman)에서부터 오시며 거룩한 자가 미디안 광야 바란(Paran) 산에서부터 오심에 영광을 돌리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오시는 분으로 기도드립니다.

    3절 중간에 “셀라 Selah”라는 악상기호를 표시합니다. 셀라는 “반석” “바위”라는 뜻인데 악상기호로 사용될 때는 “분위기를 바꿔라(단조에서 장조로)” 혹은 끝음을 올려 읽으라는 뜻이나 정확한 뜻은 모릅니다. 성경에 74회가 나오는데 시편에서 71회, 하박국에서 3회가 나옵니다(3:3, 3:9, 3:13). 3절 후반에 “그분의 영광이 하늘을 덮었고 그분의 찬송이 세계에 가득하도다.”고 송영을 드립니다.

    4-16절에서 영적인 전쟁에서 승리를 하시는 하나님을 찬양하고 있습니다.

    특히 5절(“역병이 그분 앞에서 행하며 불덩이가 그분의 발밑에서 나오는도다.”)에 역병(the pestilence), 불덩이(burning coals)는 에브라(Ebla 문서, 북아람에서 1964년부터 출토된 고대도시에 1975-76년 사이 왕궁 도서실에서 토판문서 17,000개가 발굴. BC 2000년 전후 성경시대 문화에 대해 많은 정보제공) 에도 나오는 표현으로, 당시 고대근동지역에서 섬겼던 우상의 이름이라고 알려져 있습니다.

    6-7절에 하나님께서 서신즉 땅이 진동하며 그분께서 보신즉 여러 나라가 흩어지며 영원한 산이 무너지며 작은 산이 엎드러지며 내가 본즉 구산의 장막이 환난을 당하고 미디안 땅의 휘장이 흔들립니다고 관찰합니다.

    8절에 “여호와여, 주님께서 말을 타시며 구원의 병거를 모시오니 강들을 분히 여기심이니이까? 강들을 노여워하심이니이까? 바다를 향하여 성내심이니이까?”고 구원의 능력을 찬양하면서 9절에 “주님께서 활을 꺼내시고 주께서 강들로 땅을 쪼개셨나이다” (셀라).

    10절에 산들이 주님을 보고 흔들리며 창수가 넘치고 바다가 소리를 지르며 손을 높이 드는데 11절에 날아가는 주님의 화살의 빛과 번쩍이는 주님의 창의 광채로 말미암아 해와 달이 그 처소에 멈추었나이다고 고백합니다.

    12-16절.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를 회고합니다.

    12-13절에 주님께서 노를 발하사 땅을 두르셨으며 분을 내사 여러 나라를 밟으시고, 주님께서 주님의 백성을 구원하시려고, 기름 부음 받은 자를 구원하시려고 나오사, 악인의 집의 머리를 치시며, 그 기초를 바닥까지 드러내셨습니다(셀라).

    14-16절에 그들이 회오리바람처럼 이르러 대언자를 흩으려 하며 가만히 가난한 자 삼키기를 즐거워하나, 오직 주님께서 그들의 전사의 머리를 그들의 창으로 찌르셨습니다. 주님께서 말을 타시고 바다 곧 큰 물의 파도를 밟으셨습니다. 대언자가 들었으므로 그의 창자가 흔들렸고 그 목소리로 말미암아 대언자의 입술이 떨렸는데, 무리가 우리를 치러 올라오는 환난 날을 대언자가 기다리므로, 썩이는 것이 대언자 뼈에 들어왔으며 대언자 몸은 그의 처소에서 떨린다고 기도를 드립니다.

    이 기도문은 매우 구체적이며 회화적입니다. 하나님의 하시는 구원의 사건들을 섭리사관으로 관찰하며 감사드리고 있습니다.

    7. 하박국이 주님안에서 기뻐하다 Habakkuk Rejoices in the Lord(3:17-19)

    (17)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하지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먹을 것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18) 나는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리로다 (19) 주 여호와는 나의 힘이시라. 나의 발을 사슴과 같게 하사 나를 나의 높은 곳으로 다니게 하시리로다. 이 노래는 지휘하는 사람을 위하여 내 수금에 맞춘 것이니라.

    17-19절. 악이 선을 이기며, 악한 나라를 심판의 몽둥이로 사용하신다고 불평하며 항변한 하박국 대언자가 “의인은 자기 믿음으로 살리라”는 말씀으로 하나님의 품에 안겨 행복지수가 높아가니 감사와 기쁨의 찬양을 드립니다.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하지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먹을 것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나는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리로다. 주 여호와는 나의 힘이시라. 나의 발을 사슴과 같게 하사 나를 나의 높은 곳으로 다니게 하시리로다. 이 노래는 지휘하는 사람을 위하여 내 수금에 맞춘 것이니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올해 폭염, 가장 긴 열대아, 긴 장마, 폭우피해, 여러 화재들, 사고들 등 아무리 어려운 장마와 폭우 등 힘든 한해를 지난다 해도 여호와를 로이(나의 목자)로 삼고 유일한 구원자로 계시다는 것만으로 행복하고 감사가 넘쳐납니다. 범사에 감사하라는 말씀으로 주님께 영광을 돌리는 하박국의 믿음을 본받아 올해 추석에도 감사가 넘치시기를 바랍니다.

    [오늘의 기도]
    은혜와 사랑이 풍성하신 하나님 아버지, 민족의 명절 추석을 주심을 감사드립니다.
    온 가족이 모여 가정예배 드리게 하시며 주님께서 주신 은혜를 나누고 감사를 드릴 수 있게 해 주옵소서. 하박국처럼 주님의 뜻과 때와 계획을 몰랐을 때는 인본주의적 생각으로 불평과 원망과 항변을 했지만 “의인은 자기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는 메시지를 받고 변화했듯이 저희들도 생각과 관점에 변화를 주시어 주님의 은혜에 감사드리며, 길가의 장미도 감사, 장미의 가시도 감사하는 믿음을 주옵소서. 다시 오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성경공부를 위한 질문들]
    1. 하박국의 뜻은? (1:1)
    2. 하박국이 첫 번째 불평한 내용을 정리해 보자(1:2-4)
    3. 하나님의 첫 번째 응답의 요지는? (1:5-11)
    4. 하박국의 두 번째 불평한 내용은? (1:13)
    5. 하나님의 최종 답변은? (2:4)
    6. 오직 여호와는 그 성전에 계시니 온 천하는 잠잠하라 뜻은?(2:20)
    7. 3:17-18과 3:19을 비교하여 읽어보자. 느낀 점은?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하박국 1:1-4, 2:1-4)


    1. 선지자 하박국이 묵시로 받은 경고라
    2. 여호와여 내가 부르짖어도 주께서 듣지 아니하시니 어느 때까지리이까 내가 강포로 말미암아 외쳐도 주께서 구원하지 아니하시나이다
    3. 어찌하여 내게 죄악을 보게 하시며 패역을 눈으로 보게 하시나이까 겁탈과 강포가 내 앞에 있고 변론과 분쟁이 일어났나이다
    4. 이러므로 율법이 해이하고 정의가 전혀 시행되지 못하오니 이는 악인이 의인을 에워쌌으므로 정의가 굽게 행하여짐이니이다.

    하박국 1장 1-4절

    1. 내가 내 파수하는 곳에 서며 성루에 서리라 그가 내게 무엇이라 말씀하실는지 기다리고 바라보며 나의 질문에 대하여 어떻게 대답하실는지 보리라 하였더니
    2. 여호와께서 내게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는 이 묵시를 기록하여 판에 명백히 새기되 달려가면서도 읽을 수 있게 하라
    3. 이 묵시는 정한 때가 있나니 그 종말이 속히 이르겠고 결코 거짓되지 아니하리라 비록 더딜지라도 기다리라 지체되지 않고 반드시 응하리라

    4. 보라 그의 마음은 교만하며 그 속에서 정직하지 못하나 의인은 그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그러나 자족하는 마음이 있으면 경건은 큰 이익이 되느니라

    하박국 2장 1-4절

      하박국 선지자는 앗수르가 점점 약해지고 갈대아의 신흥세력인 바벨론이 강성해지기 시작할 무렵에 유다에서 활약한 선지자입니다. 그의 예언 활동은 이미 북왕국 이스라엘이 망하고 유다만 남아 강대국의 틈바구니에서 고전분투하던 시대로 접어들었습니다. 그런데 엎친 데 덮친다고 당시 유대왕 요시야왕이 므깃도 전쟁에서 죽고 그의 뒤를 이은 여호아하스가 잠깐 왕위에 있다가 애굽으로 끌려가고 그 자리는 여호야김이 통치하고 있었을 때입니다. 그런 소용돌이 속에서 여호야김은 애굽에 환심을 사기 위해 자기 백성들에게는 중한 세금과 노동력의 착취(왕하 23:34~37), 인권유린을 자행했습니다. 그러면서도 그는 사치하여 궁전을 크게 지으며 호화로운 생활을 하기 위하여 백성들의 고혈을 더욱 짜내고 착취하여 무죄한 피를 흘리게 했습니다(왕하 24:4).

      하박국은 이러한 분위기에 발을 맞추듯이 오늘 본문 3, 4절을 통하여 당시의 일반적인 사회 풍도를 그대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 하박국 1:3, 4입니다.
    3. 어찌하여 내게 죄악을 보게 하시며 패역을 눈으로 보게 하시나이까 겁탈과 강포가 내 앞에 있고 변론과 분쟁이 일어났나이다
    4. 이러므로 율법이 해이하고 정의가 전혀 시행되지 못하오니 이는 악인이 의인을 에워쌌으므로 정의가 굽게 행하여짐이니이다

      그렇습니다. 하박국 선지자가 활동하던 시대는 온갖 불의가 횡행했으며, 겁탈과 강포와 변론과 분쟁이 가득했습니다. 그리하여 율법은 해이하고 공의는 시행되지 못하여서 악한 자가 득세하고 약하고 정직한 자는 고통받는 그야말로 무법천지로 변해갔습니다. 이러한 상황을 두 눈으로 똑바로 본 하박국은 하나님께 도전하는 질문을 시작한 것입니다. 즉 하나님의 율법과 계명은 공의와 성실을 따르는 자가 복을 받고 잘살게 된다고 가르치고 있는데, 현실은 오히려 성실한 사람이 못사는 사회가 되고 오히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아니하고 남의 것을 강제로라도 빼앗는 자가 더욱 형통하고 큰소리치고 있으니 이것이 어떻게 된 것이냐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세상의 불의를 보고 당돌하게 도전하는 하박국 선지자를 보고 오늘 본문 2:4에서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오늘 말씀의 제목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이 말씀은 하박국서 전체 주제를 함축한 내용일 뿐만 아니라 신약 시대의 주님의 복음에 핵심이 되는 사상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 구절을 롬 1:17과 갈 3:11에서 적절하게 설명하여 ‘오직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는다는 이신득의(以信得義)의 사상이 기독교의 사상이 되는데 일조하였습니다.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산다’라는 이 진리는 만고불변의 진리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박국 선지자가 2,600여 년 전에 하나님께 던진 도전적인 질문은 어찌 하박국만의 질문이 되겠습니까? 오늘을 사는 우리의 질문이기도 합니다. 왜 나는 선하고 착하게 살아보려고 하는 데도 하는 일마다 꼬이고 어렵게 시련만 계속되는가? 왜 나는 항상 당하고만 살아야 하는가? 왜 다른 사람들은 남을 속이고도 모든 일이 척척 잘 풀려나가는데 나는 이렇게 고통을 겪어야 하는가? 그래도 믿음으로 살아보려고 주님을 봉사하고자 애쓰는 나를 왜 조금만 잘못해도 매로 치는가 하는 의문과 항변은 오늘도 계속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답은 오늘날도 마찬가지로 하나입니다.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자, 그렇다고 하면 오늘 저와 여러분은 어떠한 믿음을 가지고 살아야 할까요? 오늘 본문을 통하여 주시는 교훈으로 말미암아 큰 은혜 받으셔서 만고불변의 진리인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아가시는 성도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첫째, 응답을 받는 사람(1절)

      의인이 믿어야 하는 것은, 응답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본문 1절에서 소개하고 있는 응답받는 사람들을 소개합니다. 첫째는 ‘자리를 지키는 자’입니다. 하박국 선지자는 본문 2:1절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구하기 위하여 파수하는 곳에 서며 성루에 서 있었다고 했습니다. 이는 하나님의 선지자로 부름을 받고 사명을 성실히 완수하는 모습입니다. 비록 갈대아의 세력이 왕성해지고 여호아하스와 여호야김 같은 왕들은 백성을 수탈하고 괴롭히며 선지자들을 무시하였으나 하박국은 생명의 위협을 두려워하지 않고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심판을 예언하며 회개할 것을 촉구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오늘날에도 모든 사람에게 각자 달란트를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으로부터 소원을 응답받고 인정받기를 원한다면 주어진 달란트에 충성을 다하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다윗이 목자의 사명을 성실히 수행할 때 이스라엘의 전통적인 왕가의 시조가 되었고(삼상 16:11~13) 사무엘은 성전 봉사자의 역할을 다할 때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 선지자가 되었습니다(삼상 3장). 성실은 하나님으로부터 인정받고 그 기도에 응답을 받는 최고의 방법인 것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둘째는 ‘하나님께 간구하는 자’입니다. 하박국 선지자는 1:2절에서 ‘여호와여 내가 부르짖어도 주께서 듣지 아니하시니 어느 때까지리이까 내가 강포로 말미암아 외쳐도 주께서 구원하지 아니하시나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부르짖다’와 ‘외치다’는 간절한 기도를 말합니다. 하박국 선지자로서는 하나님께서 자신의 기도를 듣든지 아니 듣든지 그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연속적으로 하나님께 간구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자식이 돈을 요구할 곳은 부모이며 백성이 도움을 요구할 곳은 국가입니다. 이와 같은 원리로 성도가 구원과 소원을 요구해야 할 곳은 오직 능력과 구원을 베푸시는 하나님입니다. 마찬가지로 하박국 선지자의 눈에 보이는 현실적인 상황은 비록 하나님께 대한 부정적인 마인드가 자리 잡은 것이 사실이었지만 그렇다고 우상이나 술객들에게 구할 수는 없었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너무나 많은 사람이 마음에 소원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구하지 못하는 것을 아시고 친히 ‘구하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리하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마 7:7)’라고 하셨습니다. 심지어 기도를 가르쳐 주시기도 하셨습니다.

      성도 여러분, 구하는 행위는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이 바탕이 되므로 하나님께서는 그 기도에 반드시 응답하심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마지막으로 ‘간절히 기다리는 자’에게 응답하십니다. 하박국 선지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기다리되 그냥 기다리지 않고 성취될 것을 그리며 애타는 심정으로 기다렸습니다. ‘기다리고 바라보며’가 바로 그것입니다. 여기서 ‘기다리고’의 의미는 ‘지켜보다’, ‘응시하다’, ‘망을 보다’이고 ‘바라보며’는 ‘숙고하다’. ‘분별하다’, ‘경험하다’등의 의미를 지닌 단어입니다. 이러한 표현은 하나님의 응답을 건성으로 듣지 않고 주의를 집중하며 분명하고도 확실하게 듣겠다는 선지자의 의중이 담겨 있습니다.

      성도 여러분, 하나님은 모든 사람을 사랑하시나 특히 그를 향하여 사모하는 마음으로 바라는 자에게 말씀과 구원을 베풀어 주신다고 하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 시편 42:1, 2 말씀입니다.
    1. 하나님이여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 같이 내 영혼이 주를 찾기에 갈급하니이다

    2. 내 영혼이 하나님 곧 살아 계시는 하나님을 갈망하나니 내가 어느 때에 나아가서 하나님의 얼굴을 뵈올까

      둘째, 응답을 주시는 하나님(2절)

      하박국 선지자는 하나님께 도전적인 의문에 대하여 간구한 후에 ‘내게 무엇이라 말씀하실는지 기다리고 바라보며 나의 질문에 대하여 어떻게 대답하실는지 보리라’고 하였습니다.

      저는 전 단락에서 응답받는 사람을 소개해 드리면서 ‘간절히 기다리는 자’가 그중에 하나였음을 말씀드렸습니다. 그렇습니다. 자기의 사명을 감당하는 사람, 그리고 기도하는 사람도 응답받지만 ‘간절히 기다리는 자’도 반드시 응답받습니다. 사실 우리는 기도하고 돌아서면 잊어버리기일 수인 반면에 선지자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그는 ‘기다리며 바라보며 보리라’고 합니다. 그렇습니다. 하박국 선지자는 기다리는 자세를 통하여 하나님께서 자기 기도에 응답하실 것을 굳게 믿고 있다는 사실을 저와 여러분에게 교훈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하면 하나님은 이러한 하박국의 기다림에 대해 어떻게 반응하셨습니까? 본문 2절에 ‘여호와께서 내게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는 이 묵시를 기록하여 판에 명백히 새기되 달려가면서도 읽을 수 있게 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본문을 보면 하나님께서는 선지자 하박국에게 당신께서 주시는 묵시를 판에 기록할 것을 명하셨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기록할 이유에 대하여 달려가면서도 읽을 수 있게 하기 위함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 응답으로 주신 묵시에 대한 말씀은 본문 4~20절을 통하여 선민으로 심판하는 도구로 사용될 바벨론에게 앞으로 일어날 묵시를 말씀합니다. 그리고 그것을 판에 기록해야 하는 이유를 ‘달려가면서도 읽을 수 있게 하라’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보고 있는 개혁개정판 성경의 번역으로만 보면 이 말씀은 달리는 자도 말슴을 볼 수 있도록 확실하게 새겨 넣으라는 의미인 것으로만 이해할 것입니다. 

      그러나 본문은 이러한 의미 외에도 또 다른 의미로 번역이 가능한 문장으로 ‘읽는 자로 달려가게 하라’는 의미로 해석 가능합니다. 영역본 NIV는 ‘선포자가 그것을 가지고 달릴 수 있도록(so that a herald may run with it)’이라고 번역하기도 합니다. 만약 이러한 번역을 받아들인다면 본문은 하나님의 계시 내용을 읽은 사람은 누구나 그것을 전하기 위해 달리게 될 것이며 달리게 하여야 한다는 의미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저는 여기서 후자의 의미에 비추어 영적 교훈을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그렇다고 하면 하나님의 묵시를 읽는 자가 달리게 하라는 의미는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그것은 곧 하나님의 묵시를 다른 사람에게 전달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묵시를 읽는 사람은 마치 전령이 왕명을 받는 것처럼 그것을 사람들에게 전달하기 위해 달려가야 합니다.

      사마리아 수가 성 우물가에서 예수님을 만나고 그로부터 진리의 말씀을 들은 여인은 자신이 메시야를 만난 사실을 전하기 위해 성안으로 달려갔습니다.

      바울 사도는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유일하고 복된 구원의 계시를 통해 깨달은 뒤에 온 세상을 향해 그 복음을 전하기 위해 달리고 또 달리며 쉼 없이 그 복음을 가르치고 선포하였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묵시, 특별히 선민을 유린할 바벨론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에 대한 묵시를 읽은 사람도 그 묵시를 다른 사람들에게 증거 해야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를 위해 그들이 읽을 묵시를 하박국으로 하여금 판에 명백하게 기록할 것을 요구하셨고 이것이 하나님의 대답이요 응답이요 뜻이었던 것입니다.

      그렇다고 하면 하나님께서 하박국 선지자에게 기록하라고 명하시며 그것을 많은 사람이 읽거나 듣도록 전하라고 하신 내용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벨론에게 유린을 당할 유다 백성들에게 바벨론이 자행자지하여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멸망할 것이라는 하나님의 말씀이었습니다. 하박국 선지자나 유다 백성들에게 이 얼마나 기쁜 소식이었겠습니까? 이 말씀은 모든 유다 사람들에게 기쁨을 주는 구원의 말씀, 회복의 소망을 누리게 하는 말씀입니다. 그렇기에 하나님은 이 말씀을 모든 사람이 읽고 알기를 소원하신 것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는 지금도 만 세대의 모든 사람이 당신의 말씀을 읽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그것은 모든 사람이 진리에 이르기를 원하며 모든 사람이 구원에 이르기를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진리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말씀을 읽을 때 사람들은 바른 인생의 길로 갈 수 있습니다. 또한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만 구원의 길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당신의 말씀 안에서만 사람은 참된 구원의 길을 계시하였기 때문입니다. 이와 관련하여 바울 사도는 디모데에게 다음과 같은 내용의 편지를 보냈습니다.

      ☛ 디모데후서 3:15~17 말씀입니다.
    15. 또 어려서부터 성경을 알았나니 성경은 능히 너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느니라
    16.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17.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하게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할 능력을 갖추게 하려 함이라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하박국 선지자에게 말씀으로 대답하셨습니다. 마찬가지로 오늘도 하나님은 저와 여러분에게 말씀으로 응답하십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진리의 말씀이요 구원 얻는 지혜가 그 안에 있습니다.

    셋째, 정한 때가 있다(3절)

    3절은 하나님의 묵시 곧 바벨론에 대한 심판 예언이 반드시 이루어질 것임을 강조하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본 절을 보면 ‘이 묵시는 정한 때가 있다’라고 하였습니다. 
    이는 바벨론에 대한 심판 예언이 성취되는 때가 있다는 말입니다. 
    온 우주를 다스리시는 하나님께서는 모든 일을 아무 계획조차 없이 즉흥적으로 행하시는 분이 절대 아닙니다. 
    그분은 철저하게 계획적으로 행하시는 분입니다. 
    그래서 모든 일을 계획에 따라 행하시며 계획 없이 행하시는 일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세상에 보내신 것도 당신이 정하신 때가 되었기 때문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미 태초에 인류 구속 계획을 세우셨고 그리스도를 세상에 보내실 것을 작정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작정의 때가 이르자 그리스도를 세상에 보내어 인류 구속 사역을 완수하게 하신 것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모든 말씀도 이루어지는 때가 있습니다. 
    하박국에게 주신 바벨론에 대한 심판 예언은 하박국 시대로부터(BC. 610년 전후) 약 70년가량이 경과 한 후에 고레스가 바벨론을 멸망시킴으로 이루어졌습니다(BC. 539). 
    그때가 바로 하나님께서 하박국에게 주신 당신의 묵시를 이루기로 정하신 때였습니다.

    사람들은 조급증에 걸린 사람처럼 하나님의 말씀이 오래도록 성취되지 않으면 하나님의 말씀은 거짓이라느니, 지체된다느니 하고 말합니다. 
    아마도 하박국을 통하여 하나님의 묵시를 들은 유다 백성들도 바벨론의 지배를 받는 가운데 그와 같이 생각하고 말하였을 것입니다. 
    하지만 결국 바벨론에 대한 하나님의 묵시는 성취되었습니다. 
    그처럼 하나님의 모든 말씀은 오래도록 성취되지 않아 거짓처럼 보이고 지체되는 것처럼 보여 많은 사람이 믿음의 길에서 떠나기도 하지만 하나님께서 정하신 때에 반드시 성취됩니다. 
    우리는 이에 대한 확실한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특별히 과거로부터 오늘까지 신약 성도들은 마지막 남은 하나님 약속의 성취, 곧 그리스도의 재림을 고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약속은 도무지 성취될 기미가 없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신 지 2천여 년의 세월이 흘렀으니 그의 재림에 대해 사람들이 그처럼 생각하는 것도 무리는 아닙니다. 
    하지만 그리스도의 재림이 이처럼 오랫동안 무수한 성도들이 고대하고 기다려도 이루어지지 않는 것은 그것이 헛된 약속이어서가 아니라 사실상 아직 때가 이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종말의 징후들이 날이 갈수록 선명하게 드러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우리에게 그리스도의 재림이 임박하였음을 각성케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모든 말씀이 그동안 하나도 남김없이 이루어진 것을 기억하며 머지않아 그리스도의 재림 또한 그대로 이루어질 것임을 확신하며 믿고 인내로 기다려야 하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하박국은 선민의 타락상이 방치되는 듯한 현실로 인하여 하나님께 부르짖고 탄원하였습니다. 
    그때 하나님은 묵시로 응답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묵시의 성취는 정한 때가 있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사실을 믿고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이기에 오늘도 실망하거나 낙심하거나 흔들리지 않고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아야 합니다.


















































    2025 나훔


    한글개역 성경

    1. 보복 / 11구절

    2. 투기 / 23구절

    3. 사랑 / 517구절 


    보복 / 11구절


    1. [사무엘상 18:25]
    사울이 가로되 너희는 다윗에게 이같이 말하기를 왕이 아무 폐백도 원치 아니하고 다만 왕의 원수의 보복으로 블레셋 사람의 양피 일백을 원하신다 하라 하였으니 이는 사울의 생각에 다윗을 블레셋 사람의 손에 죽게 하리라 함이라

    2. [사무엘상 24:12]
    여호와께서는 나와 왕 사이를 판단하사 나를 위하여 왕에게 보복하시려니와 내 손으로는 왕을 해하지 않겠나이다.

    보복 / 나캄”(נָקָם)

    여호와께서는...보복하시려니와 내손으로는...않겠나이다

     - '원수 갚는 일은 오직 하나님께 있다'(롬 12:21; 히 10:30; 신 32:35)는 사상은 다윗의 철학이요, 신앙이었다. 
    따라서 다윗은 하나님을 '보수하시는 하나님'(시 94:1)으로 묘사하기도 했다. 
    이처럼 사람이 자신에게 극악한 죄를 범한 자에 대하여 그 원수 갚는 일을 하나님께 위임한다는 것은 곧 이웃을 사랑하고 하나님을 신앙하는 행위가 되므로, 하나님께서 심히 원하시는 일이다.

    로마서 12:21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

    히브리서 10:30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 하시고 또 다시 주께서 그의 백성을 심판하리라 말씀하신 것을 우리가 아노니. 

    신명기 32:35
    보수는 내 것이라 그들의 실족할 그때에 갚으리로다 그들의 환난의 이 가까우니 당할 그 일이 속히 임하리로다.

    판단하사(*, 솨파트) 
    - 공의적(公義的) 심판을 전제로 하며 시시비비를 가리는 법정적 재판 행위를 가리킨다(시 7:8; 96:13; 겔 18:30).


     

    3. [시편 41:10]
    그러하오나 주 여호와여 나를 긍휼히 여기시고 일으키사 나로 저희에게 보복하게 하소서

    4. [시편 58:10]
    의인은 악인의 보복 당함을 보고 기뻐함이여 그 발을 악인의 피에 씻으리로다

    5. [이사야 35:4]
    겁내는 자에게 이르기를 너는 굳세게 하라, 두려워 말라, 보라 너희 하나님이 오사 보수하시며 보복하여 주실 것이라 그가 오사 너희를 구하시리라 하라

    6. [이사야 59:18]
    그들의 행위대로 갚으시되 그 대적에게 분노하시며 그 원수에게 보응하시며 섬들에게 보복하실 것이라

    7. [예레미야 15:15]
    여호와여 주께서 아시오니 원컨대 주는 나를 기억하시며 권고하사 나를 박해하는 자에게 보복하시고 주의 오래 참으심을 인하여 나로 멸망치 말게 하옵시며 주를 위하여 내가 치욕 당하는 줄을 아시옵소서

    8. [예레미야 51:6]
    바벨론 가운데서 도망하여 나와서 각기 생명을 구원하고 그의 죄악으로 인하여 끊침을 보지 말지어다 이는 여호와의 보수의 때니 그에게 보복하시리라

    9. [예레미야 51:56]
    곧 멸망시키는 자가 바벨론에 임함이라 그 용사들이 사로잡히고 그들의 활이 꺾이도다 여호와는 보복의 하나님이시니 반드시 보응하시리로다

    10. [요엘 3:4]
    두로와 시돈과 블레셋 사방아 너희가 나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 너희가 내게 보복하겠느냐 만일 내게 보복하면 너희의 보복하는 것을 내가 속속히 너희 머리에 돌리리니

    11. [나훔 1:2]
    여호와는 투기하시며 보복하시는 하나님이시니라 여호와는 보복하시며 진노하시되 자기를 거스리는 자에게 보복하시며 자기를 대적하는 자에게 진노를 품으시며.


    투기 / 23구절


    1. [창세기 30:1]
    라헬이 자기가 야곱에게 아들을 낳지 못함을 보고 그 형을 투기하여 야곱에게 이르되 나로 자식을 낳게 하라 그렇지 아니하면 내가 죽겠노라

    2. [레위기 18:18]
    너는 아내가 생존할 동안에 그 형제를 취하여 하체를 범하여 그로 투기케 하지 말찌니라

    3. [시편 37:1]
    행악자를 인하여 불평하여 하지 말며 불의를 행하는 자를 투기하지 말지어다

    4. [잠언 6:34]
    그 남편이 투기함으로 분노하여 원수를 갚는 날에 용서하지 아니하고

    5. [잠언 27:4]
    분은 잔인하고 노는 창수 같거니와 투기 앞에야 누가 서리요

    6. [아가 8:6]
    너는 나를 인 같이 마음에 품고 도장 같이 팔에 두라 사랑은 죽음 같이 강하고 투기는 음부 같이 잔혹하며 불 같이 일어나니 그 기세가 여호와의 불과 같으니라

    7. [이사야 11:13]
    에브라임의 투기는 없어지고 유다를 괴롭게 하던 자는 끊어지며 에브라임은 유다를 투기하지 아니하며 유다는 에브라임을 괴롭게 하지 아니할 것이요

    8. [에스겔 8:3]
    그가 손 같은 것을 펴서 내 머리털 한 모숨을 잡으며 주의 신이 나를 들어 천지 사이로 올리시고 하나님의 이상 가운데 나를 이끌어 예루살렘으로 가서 안뜰로 들어가는 북향한 문에 이르시니 거기는 투기의 우상 곧 투기를 격발케 하는 우상의 자리가 있는 곳이라

    9. [에스겔 8:5]
    그가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이제 너는 눈을 들어 북편을 바라보라 하시기로 내가 눈을 들어 북편을 바라보니 제단 문 어귀 북편에 그 투기의 우상이 있더라

    10. [에스겔 16:38]
    내가 또 간음하고 사람의 피를 흘리는 여인을 국문함 같이 너를 국문하여 진노의 피와 투기의 피를 네게 돌리고

    11. [에스겔 16:42]
    그리한즉 내가 네게 대한 내 분노가 그치며 내 투기가 네게서 떠나고 마음이 평안하여 다시는 노하지 아니하리라

    12. [에스겔 23:25]
    내가 너를 향하여 투기를 발하리니 그들이 분노로 네게 행하여 네 코와 귀를 깎아버리고 남은 자를 칼로 엎드러뜨리며 네 자녀를 빼앗고 그 남은 자를 불에 사르며

    13. [에스겔 31:9]
    내가 그 가지로 많게 하여 모양이 아름답게 하였더니 하나님의 동산 에덴에 있는 모든 나무가 다 투기하였느니라

    14. [에스겔 36:5]
    주 여호와의 말씀에 내가 진실로 내 맹렬한 투기로 남아 있는 이방인과 에돔 온 땅을 쳐서 말하였노니 이는 그들이 심히 즐거워하는 마음과 멸시하는 심령으로 내 땅을 빼앗아 노략하여 자기 소유를 삼았음이니라

    15. [에스겔 36:6]
    그러므로 너는 이스라엘 땅을 대하여 예언하되 그 산들과 멧부리들과 시내들과 골짜기들을 대하여 이르기를 주 여호와의 말씀에 내가 내 투기와 내 분노로 말하였나니 이는 너희가 이방의 수욕을 당하였음이니라  

    16. [에스겔 38:19]
    내가 투기와 맹렬한 노로 말하였거니와 그 날에 큰 지진이 이스라엘 땅에 일어나서

    17. [나훔 1:2]
    여호와는 투기하시며 보복하시는 하나님이시니라 여호와는 보복하시며 진노하시되 자기를 거스리는 자에게 보복하시며 자기를 대적하는 자에게 진노를 품으시며

    18. [고린도전서 13:4]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투기하는 자가 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19. [갈라디아서 5:21]
    투기와 술 취함과 방탕함과 또 그와 같은 것들이라 전에 너희에게 경계한것 같이 경계하노니 이런 일을 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것이요

    20. [갈라디아서 5:26]
    헛된 영광을 구하여 서로 격동하고 서로 투기하지 말찌니라

    21. [빌립보서 1:15]
    어떤이들은 투기와 분쟁으로, 어떤이들은 착한 뜻으로 그리스도를 전파하나니

    22. [디모데전서 6:4]
    저는 교만하여 아무 것도 알지 못하고 변론과 언쟁을 좋아하는 자니 이로써 투기와 분쟁과 훼방과 악한 생각이 나며

    23. [디도서 3:3]
    우리도 전에는 어리석은 자요 순종치 아니한 자요 속은 자요 각색 정욕과 행락에 종노릇한 자요 악독과 투기로 지낸 자요 가증스러운 자요 피차 미워한 자이었으나





    질투하시며 보복하시는 하나님(나훔 2:1-13)

    사람들이 머릿속에 그리는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일 때가 많습니다. 하나님을 용서하시고 참아 주시는 분으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성경은 하나님을 사랑의 하나님만으로 묘사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랑의 하나님이신 동시에 의의 하나님이요, 진노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유다에게 권고하는 성격이 짙은 첫 신탁(1:9-15)에 이어, 본격적으로 니느웨에 대한 예언을 선포합니다. 1-9절에서는 니느웨를 공격하는 자들을 묘사하고, 그 공격에 완전히 몰락하는 상황을 묘사하며, 10-12절에서는 니느웨의 멸망에 대한 조롱 섞인 애도의 노래가 이어집니다. 13절에서는 니느웨의 멸망이 하나님의 역사임을 분명히 합니다.

    니느웨의 멸망(1-9)

    세상의 부와 권력을 의지하며 의를 실천하지 않는 자들, 의인을 압제하는 자들은 결국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의 권세 앞에서 떨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진노는 사람이 감당할 만한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진노가 임하지 않도록 겸손하게 하나님과 동행하며 말씀에 순종하는 삶, 하나님만 사랑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1파괴하는 자가 너를 치러 올라왔나니 너는 산성을 지키며 길을 파수하며 네 허리를 견고히 묶고 네 힘을 크게 굳게 할지어다 2여호와께서 야곱의 영광을 회복하시되 이스라엘의 영광 같게 하시나니 이는 약탈자들이 약탈하였고 또 그들의 포도나무 가지를 없이 하였음이라 3그의 용사들의 방패는 붉고 그의 무사들의 옷도 붉으며 그 항오를 벌이는 날에 병거의 쇠가 번쩍이고 노송나무 창이 요동하는도다 4그 병거는 미친 듯이 거리를 달리며 대로에서 이리저리 빨리 달리니 그 모양이 횃불 같고 빠르기가 번개 같도다 5그가 그의 존귀한 자들을 생각해 내니 그들이 엎드러질 듯이 달려서 급히 성에 이르러 막을 것을 준비하도다 6강들의 수문이 열리고 왕궁이 소멸되며 7정한 대로 왕후가 벌거벗은 몸으로 끌려가니 그 모든 시녀들이 가슴을 치며 비둘기 같이 슬피 우는도다 8니느웨는 예로부터 물이 모인 못 같더니 이제 모두 도망하니 서라 서라 하나 돌아보는 자가 없도다 9은을 노략하라 금을 노략하라 그 저축한 것이 무한하고 아름다운 기구가 풍부함이니라(1-9)

    하나님께서는 니느웨의 악행을 더 이상은 참지 않겠다고 선언하십니다. 니느웨가 북이스라엘을 멸망시킬 뿐 아니라 남유다까지 괴롭혔기 때문입니다. 나훔 선지자는 니느웨에 대한 심판을 서언한 후 하나님의 권능을 찬양하고 있습니다.

    (1) 파괴하는 자(1-4)

    1절의 ‘파괴하는 자’는 메대와 바벨론의 연합군을 가리킵니다. 1절의 “너는 산성을 지키며…굳게 할지어다”라는 조롱의 표현입니다. 지금까지 ‘산성’을 의지하여 교만했으나 이렇게 굳건하게 지켜도 소용이 없다는 의미입니다.

    2절은 2:1-4에서 니느웨의 멸망을 다루며 ‘파괴하는 자’가 공격하는 상황을 묘사하는 맥락과는 어울리지 않아 보입니다. 갑작스럽게 야곱과 이스라엘의 영광에 대한 회복을 언급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런 기법은 선지자 나훔이 이미 사용한 방법입니다. 이미 1:12-15에서 유다에 대한 구원 신탁을 다루는 단락에서도, 1:14에서 니느웨의 멸망을 언급함으로써 유다의 구원이 니느웨의 멸망과 대조된다는 것을 보여주었듯이, 여기서도 역시 니느웨의 멸망을 다루는 맥락에서 이스라엘의 회복을 대조하여 둘 사이의 밀접한 관계를 부각하고 있습니다. 즉 나훔서는 주로 니느웨의 멸망에 대한 예언이지만(1:1), 이 니느웨의 멸망이 유다에게 무슨 의미가 있는가를 염두에 두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2a절의 야곱과 이스라엘의 영광을 회복한다는 표현은 궁극적으로 니느웨의 멸망이 이스라엘의 회복을 위한 것임을 밝히는 표현입니다. ‘이는’이라고 이유를 밝히는 표현에서도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곧 니느웨의 멸망이 이스라엘의 영광을 위한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유다가 디글랏빌레셀 3세(주전 745-727년) 이후 오랫동안 앗수르의 영향 아래 있으면서 괴로움을 당하였던 것은 하나님께서 힘이 없어서 그런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노하기를 더디 하셔서 진노하기를 늦추신 것뿐입니다. 그러나 이제 니느웨의 멸망을 통해 하나님께서 역사의 주권자 되심을 보여줄 것입니다. 북이스라엘을 멸망시킨 앗수르가 승승장구함으로 마치 하나님께서 침묵하고 부재하신 것 같은 상황 가운데, 유다는 니느웨의 멸망을 통해 역사하실 하나님 앞에 돌아오라는 하나님의 무언의 목소리를 들어야 할 것입니다. 한편 ‘야곱’과 ‘이스라엘’이 각각 무엇을 지칭하는 지에 대해 의견이 나뉘지만, 같은 대상을 표현한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사 44:1을 참조하라).

    2b절의 ‘이는’으로 시작하는 표현은 니느웨의 기구한 운명을 드러냅니다. 약탈하며 땅을 넓혔던 앗수르가 이제 약탈당하는 신세가 될 것입니다. ‘포도나무’는 유익을 주는 나무로 풍요를 대변하는데, “포도나무 가지를 없이 하였음이라”라는 말은 니느웨의 풍요가 제거됐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3-4절은 다시 ‘파괴하는 자’가 니느웨를 약탈하는 모습을 묘사합니다. 공격하는 용사와 병거에 대한 묘사는 그들이 얼마나 훈련이 잘 되어 있고 정비가 잘 되어 있는지를 드러냅니다. 어떤 학자는 방패가 붉은 것은 피로 물들었기 때문이라고 지적하는데, 전쟁에 임하면서 상대방의 방패를 볼 때 공포감이 몰려오는 상황과 잘 어울립니다. 또한 성경의 다른 곳에서 바벨론의 군사들이 붉은 옷을 입었다고 묘사하기도 하는데(겔 23:14-15), 나훔이 앗수르를 공격하는 군대가 바벨론의 군사임을 염두에 두었다고 유추할 수도 있습니다. 이처럼 주도면밀하면서도 위엄 있게 공격하는 군대 앞에서 니느웨는 절망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니느웨는 주전 612년에 메대와 바벨론 연합군에 의해 멸망하는데, 멸망하는 시기가 가까워 왔을 때에는 이미 국력이 쇠한 때이기 때문에, 이런 멸망의 선포가 의미가 없을 것입니다. 아마도 니느웨는 강대국으로서 여전히 건재하고, 유다는 북이스라엘을 멸망시킨 니느웨를 보며 여전히 하나님의 역사를 의심하는 상황에서 이런 메시지가 전해졌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마치 눈앞에서 니느웨가 약탈당하는 것 같은 상황을 생생하게 묘사하는 것은, 하나님의 약속이 이루어질 것을 확신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선지자를 통해 이 내용이 전달될 때 유다는 어떻게 반응해야 했습니까? 당연히 현실을 본다면 의구심이 들겠지만, 역사를 주관하시는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께 돌아와야 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니느웨가 약탈당하는 모습을 생생하게 묘사하는 이유입니다.

    (2) 니느웨의 패망(5-9)

    1-4절의 ‘파괴하는 자’가 침략해 올 때에, 5~9절은 그 앞에서 니느웨가 어떻게 공격당하는지를 묘사합니다. “그가 그의 존귀한 자들을”은 누구를 지칭하는지 모호합니다. 앞의 문장에 속할 수도 있고, 니느웨가 공격당하는 상황을 묘사하는 것에 속할 수도 있습니다. 후자로 본다면, ‘그’는 앗수르 왕을 가리키고 존귀한 자들은 군대의 장교나 고위직을 가리킬 것입니다.

    5절은 특히 ‘파괴하는 자’의 공격이 너무나 갑작스러워 미처 전쟁 준비도 못하고 있던 상황에서 군대가 몰려오는 것을 보고서 급히 성에 이르러 대비하려는 허둥대는 모습을 묘사합니다.

    6절의 ‘강들의 수문’은 니느웨 성을 보호하는 역할을 했으나, 이런 것도 소용없게 되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성안을 쳐들어 왔을 뿐만 아니라, “왕궁이 소멸”되기까지 합니다.

    7절의 “정한 대로”라는 표현은 니느웨의 멸망이 우연한 사건이 아니라, 이미 하나님의 계획에 포함됐고 결정된 일이며, 따라서 니느웨의 멸망에 대한 예언은 확고하여 변개할 수 없는 예언이라는 것을 가리킵니다. 7절은 전쟁에 패배하여 포로로 끌려가는 장면과 패전을 애도하는 모습을 묘사합니다.

    8-9절은 니느웨의 역전된 상황을 풍자적으로 묘사한다. “물이 모인 못” 같다는 것은 니느웨가 강성하여 부가 넘쳤던 것을 가리킵니다. 니느웨에게서 무언가 얻을 것을 기대하고 모였으나 이제 망하게 되자 서로 돌아보지도 않고 도망하는 신세가 될 것입니다. 9절에서도 비슷한 내용이 나오는데, 저축한 것이 많으나 이제 망하여 약탈당하는 상황을 예언하고 있습니다. 지금은 강대국이라고 교만하여 우쭐대지만, 자신들이 약탈한 상황 그대로를 당하면서 니느웨의 신세가 역전될 것입니다. 이는 현재의 상황이 정당성을 보장하지는 않는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지금 풍요롭게 복을 누리는 것 같더라도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언약에 충실하며 순종하느냐에 달려 있다는 것이며, 이것은 니느웨뿐만 아니라 유다에게도 중요한 메시지가 됩니다. 또한 그리스도인에게도 하나님과의 관계에 중요한 의미를 던져줄 것입니다.

    심판의 결과(10-13)

    하나님의 백성이 바로 서면, 세상의 악인들은 쓸모없는 존재가 되고, 버려질 것이비다. 즉 우리가 하나님을 바로 섬기기만 하면 악인들은 하나님의 능력에 의해 제거되고, 세상에는 아름다운 소식, 화평이 전해질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이 세상에 보냄을 받은 이유이며 사명입니다.

    10니느웨가 공허하였고 황폐하였도다 주민이 낙담하여 그 무릎이 서로 부딪히며 모든 허리가 아프게 되며 모든 낯이 빛을 잃도다 11이제 사자의 굴이 어디냐 젊은 사자가 먹을 곳이 어디냐 전에는 수사자 암사자가 그 새끼 사자와 함께 거기서 다니되 그것들을 두렵게 할 자가 없었으며 12수사자가 그 새끼를 위하여 먹이를 충분히 찢고 그의 암사자들을 위하여 움켜 사냥한 것으로 그 굴을 채웠고 찢은 것으로 그 구멍을 채웠었도다 13만군의 여호와의 말씀에 내가 네 대적이 되어 네 병거들을 불살라 연기가 되게 하고 네 젊은 사자들을 칼로 멸할 것이며 내가 또 네 노략한 것을 땅에서 끊으리니 네 파견자의 목소리가 다시는 들리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10-13)

    하나님께서는 왜 세상에서 악인들이 활개 치도록 내버려 두시겠습니까? 물론 우리가 하나님의 깊으신 뜻을 다 이해할 수는 없지만, 성경을 묵상해 보면 하나님께서 그렇게 섭리하시는 이유를 부분적으로나마 알 수 있습니다.

    (1) 애도의 노래(10-12)

    이 단락은 여호와의 심판으로 말미암은 결과를 보여주는데, 애가의 형식으로 니느웨가 당할 멸망의 모습에 깊이를 더하고 있습니다. ‘파괴하는 자’가 침략해 올 때만 해도 5-9절에서 묘사된 대로 처참하게 당할지는 모르고 전쟁에 대비했을 것입니다(1). 그러나 여호와의 심판의 결과는 처참했습니다. 10절의 “공허하였고 황폐하였도다”는 니느웨의 상황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표현입니다.

    11-12절에서는 11절과 11-12절의 대조를 통해 니느웨가 멸망당한 비참한 상황을 부각합니다. 11b-12절은 니느웨가 멸망 당하기 전의 영광을 묘사합니다. 마치 숫사자가 사냥하듯 주변 나라를 침략하고 그 전리품을 챙겨 자신의 성을 풍요롭게 했었고, 자신을 두려워하지 않는 나라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 사자굴과 사자가 흔적조차 없을 정도가 됐습니다.

    (2) 여호와의 선언(13)

    13절은 니느웨의 멸망에 대한 결론적 선언입니다. ‘파괴하는 자’를 통해 니느웨를 멸망에 이르게 한 것은 우연한 사건이 아니라, 하나님의 주권적 역사이며, 하나님께서 역사의 주관자가 되신다는 사실을 분명히 합니다. “내가 네 대적이 되어”는 니느웨를 멸망시킨 주체가 여호와이심을 분명히 합니다.

    살다보면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다스리고 계신다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을 때도 있습니다. 
    주님 앞에서 거룩하게 살아가려다 보면 억울한 일을 참아야 할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이 하나님의 선하신 섭리 가운데 있으며, 어쩌면 징계하셔서 더욱 정결하게 만드시기 위한 도구일 수 있음을 믿어야 합니다. 이 믿음으로 오늘도 세상 가운데서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며 사시길 바랍니다.





    복수하시는 하나님

    하나님이 복수하신다. 하나님이 보수하신다.

    복수는 정의에 대한 공의이다. 정의는 개인간의 사적인 공평성을 말한다면 공의는 개인을 넘어서는사회적 원리에 가깝다. 그러므로 죄인들을 보복하는 것은 공의다. 죄는 궁극적으로 정의를 무너뜨린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정의를 위한 공의를 실행 하신다. 즉 심판하신다. 보복하신다. 

    신32:35 그들이 실족할 그 때에 내가 보복하리라 그들의 환난날이 가까우니 그들에게 닥칠 그 일이 속히 오리로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보복하신다고 말한다. 왜냐하면 세상은 하나님의 통치 아래 있기 때문이다. 만약 보복하지 않는다면 세상은 악인들의 손아귀에 뺘져들 것이다. 그러므로 선지자들은 공의의 하나님을 찾는다.

    사 63:4 이는 내 원수 갚는 날이 내 마음에 있고 내가 구속할 해가 왔으나

    원수 갚는 날은 때가 있다는 말이다. 아무 때 하지 않으신다. 죄라고 다 징계하지 않는다. 죄가 자랄지, 사라질지 기다리신다. 죄가 자란다면 그는 악인이다. 자라지 않으면 실수로 한 것이다. 그러므로 의인과 악인의 특징은 죄가 자라는냐 돌발적으냐의 차이기도 한다. 죄가 자란다는 말에는 더 많은 악이 일어나고 더 많은 피해가자 생긴다는 말이다. 땅이 많이 흘리고, 그들의 손에 피가 많아지면 하나님일 보복하실 때가 된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개인적으로 복수할 수 없게 하셨다. 복수는 하나님께서 하신다. 복수는 공의다. 이는 이, 눈은 눈, 생명은 생명이다. 이것은 나쁜 것이 아니라 정당한 것이다. 이것이 공의다. 

    그러나 개인이 복수하면 그것으로 끝나지 않는다. 만약 누군가 나의 빰을 한 대 때리면 한대로 보복하지 않는다. 열 대 백 대를 때리는것이 사람의 심리다. 하나님은 하나는 하나로 만족하라 하신다. 그것은 법으로 하는 것이다. 엄밀하에 말하게 눈은 눈이 아니다. 더 많은 것을 주어야 한다. 도둑질하면 네 배를 보상하듯 말이다. 


    그러나 진정한 공의는  이 하나에 이 하나가 아니다. 두배, 네배 다섯배를 갚도록 한다. 이것이 공의다. 

    보수하시는 하나님 성경구절

    1. 신명기 32:35

    “보복은 내 것이라 그들이 실족할 그 때에 내가 갚으리로다 그들의 환난의 날이 가까우니 그들에게 닥칠 그 일이 속히 오리로다.”

    👉 하나님의 보복은 반드시 이루어질 심판이며, 때가 되면 정확하게 실행됩니다.


    2. 나훔 1:2

    “여호와는 질투하시며 보복하시는 하나님이시니라 여호와는 보복하시며 진노하시되 자기를 거스르는 자에게 여호와는 보복하시며 자기를 대적하는 자에게 진노를 품으시며”

    👉 하나님의 보복은 죄에 대한 거룩한 진노이며, 대적자들을 향한 심판임을 강조합니다.


    3. 이사야 34:8

    “이는 여호와께서 보복하시는 날이요 시온의 송사를 위하여 신원하시는 해라”

    👉 하나님의 보복은 억울한 자를 위한 신원의 해로서, 공의를 회복하는 날입니다.


    4. 이사야 63:4

    “이는 내 원수 갚는 날이 내 마음에 있고 내가 구속할 해가 왔음이라”

    👉 하나님의 원수 갚는 날과 구속의 날은 동시에 언급되며, 보복은 구속의 일부로 나타납니다.


    5. 레위기 19:18

    “원수를 갚지 말며 동포를 원망하지 말며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나는 여호와이니라”

    👉 인간의 복수는 금지되며, 하나님만이 보복의 권리를 가지심을 암시합니다.


    6. 잠언 20:22

    “너는 악을 갚겠다 말하지 말고 여호와를 기다리라 그가 너를 구원하시리라”

    👉 보복을 자제하고 하나님의 보응을 신뢰하며 기다려야 함을 강조합니다.


    7. 로마서 12:19

    “내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하나님의 진노하심에 맡기라 기록되었으되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고 주께서 말씀하시니라”

    👉 신약에서도 동일하게 보복은 하나님께 속해 있음을 선언합니다.


    8. 히브리서 10:30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 하시고 또 주께서 그의 백성을 심판하리라 말씀하신 것을 우리가 아노니”

    👉 하나님의 심판은 의롭고 확실하며, 백성에 대한 책임 속에서 이루어집니다.


    9. 요한계시록 6:10

    “큰 소리로 불러 이르되 거룩하고 참되신 대주재여 땅에 거하는 자들을 심판하여 우리 피를 갚아 주지 아니하시기를 어느 때까지 하시려나이까 하니”

    👉 순교자들이 하나님의 보복을 호소하는 장면으로, 하나님의 정의가 반드시 완성됨을 보여줍니다.


    10. 요한계시록 19:2

    “그의 심판은 참되고 의로운지라 음행으로 땅을 더럽게 한 큰 음녀를 심판하사 자기 종들의 피를 그 음녀의 손에 갚으셨도다 하고”

    👉 마지막 심판에서 하나님은 죄악된 세력을 보복하시며, 순결한 자들의 억울함을 갚아주십니다.


    히브리서 10:30 하나님이 갚으시리라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 하시고 또 주께서 그의 백성을 심판하리라 말씀하신 것을 우리가 아노니” (히브리서 10:30, 개역개정)

    히브리서 10:30은 하나님의 보복과 심판에 대해 선언적으로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구절은 구약 신명기 32장의 인용으로, 하나님의 절대 주권과 공의로운 성품을 전제로 한 말씀입니다. 이 구절을 복음적, 성경신학적으로 묵상할 때, 우리는 하나님의 보수하심을 단순한 보복 행위가 아닌, 구속사 안에서의 정의와 사랑의 표현으로 이해하게 됩니다.

    1. 보수의 주권은 하나님께만 있다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
    이 선언은 인간에게 복수할 권리가 없음을 분명히 합니다. 이는 인간의 판단과 정의는 언제나 제한적이고 감정적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만이 모든 것을 아시는 전지하신 분이며, 그의 판단은 언제나 의롭고 완전합니다. 이 말씀이 복음적 신앙의 중심에 자리 잡는 이유는, 억울한 상황이나 악의 현실 앞에서 성도가 스스로 정의를 실행하려 하기보다, 그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기고 기다리는 믿음을 요청하기 때문입니다.

    2. 하나님의 심판과 보수는 복음의 틀 안에 있다

    신약의 복음은 하나님의 사랑만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복음은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이 십자가에서 만난 사건입니다. 죄에 대한 보수는 반드시 있어야 하며, 하나님은 그 대가를 그리스도에게 지우심으로 우리를 살리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보수하심의 대상이 되셨고, 십자가에서 그 진노를 온전히 감당하셨습니다. 이로써 우리는 보복의 대상에서 구원의 대상이 되었으며, 하나님의 백성으로 회복되었습니다. 이 복음의 틀 속에서 하나님의 보수는 우리에게 구원의 의미로 다가옵니다.

    3. 하나님은 억울한 자의 기도를 잊지 않으신다

    히브리서 10장은 경고의 장입니다. 고의로 죄를 짓고 회개하지 않는 자들에게 하나님의 무서운 심판이 있을 것임을 경고합니다. 동시에 이 구절은 위로의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죄를 반드시 심판하시는 분이며, 세상의 억울함을 외면하지 않으시는 분입니다. 요한계시록 6장에서 순교자들이 “우리 피를 갚아주시지 않으시렵니까?”라고 호소할 때, 하나님은 “조금 더 기다리라”고 하시며 그들의 신원을 약속하십니다.

    히브리서 10:30의 말씀은 이처럼 고난당하는 자들에게, 또 악이 판치는 세상에서 정의를 갈망하는 성도들에게 하나님의 완전한 심판이 반드시 임할 것을 확신시켜줍니다.

    4. 하나님의 백성을 향한 심판

    “주께서 그의 백성을 심판하리라.”
    이 말씀은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해서 무조건 면책되는 것이 아님을 보여줍니다. 하나님의 보수는 외적 대적뿐만 아니라, 그의 백성에게도 적용됩니다. 이는 무서운 경고입니다. 복음을 받아들였으나 다시 죄로 돌아가고, 은혜를 짓밟는 자들에게 하나님은 가볍게 넘기지 않으십니다.

    이것은 동시에 성도의 삶에 대한 경건한 긴장감을 줍니다. 우리는 값없이 은혜를 받았으나, 그것이 값싼 은혜가 되지 않도록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아가는 우리는 날마다 회개하고, 주의 말씀 앞에 자기를 살피며 살아야 할 책임이 있습니다.

    5. 신자의 삶은 ‘맡김’의 삶이다

    이 구절은 결국 신자에게 중요한 교훈을 줍니다. 복수를 하나님께 맡기고, 하나님의 공의가 반드시 이루어질 것을 믿는 신앙입니다. 억울한 일을 당했을 때, 모욕을 견디며, 주님께 맡기는 그 믿음이야말로 복음에 합당한 삶입니다. 예수님도 십자가 위에서 “아버지여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라고 기도하셨습니다. 그분은 원수 갚는 일을 하나님께 맡기셨고, 그 맡김이 결국 승리로 나타났습니다.

    우리도 그러한 신앙의 길을 따라야 합니다. 우리의 억울함, 우리의 손해, 우리의 고통은 하나님께 맡기고, 하나님의 때와 방법을 신뢰하며 걸어가야 합니다. 이것이 보수하시는 하나님을 믿는 자의 참된 태도입니다.

    결론

    히브리서 10:30은 두려운 말씀입니다. 그러나 동시에 위로가 되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결코 죄를 가볍게 여기지 않으시며, 우리에게 반드시 공의로 갚으시는 분입니다. 그 보수하심은 십자가 안에서 은혜로 완성되었고, 종말의 날에 완전하게 드러날 것입니다.

    우리는 이 보수하시는 하나님 앞에서 경외함으로 살며, 억울한 일을 주께 맡기고, 복음을 따라 용서와 인내의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그리고 마지막 날, 하나님이 의롭게 갚으시고 심판하시리라는 확신 가운데 소망을 품고 나아가야 합니다. 하나님은 결코 외면하지 않으시는 분이십니다. 그의 보수는 사랑 안에서 반드시 완성될 것입니다.







    보수(복수)하시는 하나님에 대한 성경적 의미

    1. 서론 : 보수하시는 하나님의 본질

    성경에서 하나님은 사랑과 공의의 하나님으로 계시되십니다. 
    그분은 죄악을 미워하시며, 악에 대해 반드시 공의롭게 심판하십니다. 
    이때 사용되는 개념 중 하나가 ‘보수’ 또는 ‘복수’입니다. 
    ‘보수’란 단순히 인간의 원한을 갚는 복수심의 표현이 아니라, 하나님의 거룩한 공의와 정의를 실현하는 신성한 행위입니다. 
    이제 어원과 용례, 그리고 신학적 의미들을 정리해 보려고 합니다.

    2. ‘보수’의 원어적 정의

    보수는 복수, 신원이란 단어로도 번역되었습니다.

    2.1 히브리어 원어 정의

    구약 성경에서 ‘보수’ 혹은 ‘복수’로 번역된 대표적인 단어는 다음과 같습니다.

    • “나캄”(נָקָם)
      뜻: 복수하다, 보복하다, 원수를 갚다.
      이는 단순히 감정적인 보복이 아니라 하나님의 공의에 근거한 정당한 심판의 행위입니다.

    • “샬렘”(שָׁלֵם)
      뜻: 갚다, 보상하다, 되돌려주다.
      ‘보수하다’는 의미로, 하나님께서 악행에 대해 공정한 보응을 주시는 것을 뜻합니다.

    2.2 헬라어 원어 정의

    신약에서는 주로 다음과 같은 단어가 사용됩니다.

    • “에크디케오”(ἐκδικέω)
      뜻: 복수하다, 처벌하다.
      ‘디케(δίκη)’가 ‘정의, 판결’을 의미하므로, 에크디케오는 ‘정의를 따라 심판하다’라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 “안타포디도미”(ἀνταποδίδωμι)
      뜻: 되갚다, 보상하다.
      하나님의 심판이 상과 벌 모두를 포함하는 공정한 보응을 말합니다.

    3. 성경의 용례

    자 이제 보수가 사용된 성경 속의 용례를 간략하게 봅시다.

    3.1 구약의 보수하시는 하나님

    • 신명기 32:35
      “그들이 실족할 그 때에 내가 보복하리니 그들의 환난의 날이 가까우며 그들에게 닥칠 그 일이 속히 오리로다.”
      이는 하나님의 공의가 반드시 실현됨을 말합니다. 인간의 악에 대해 하나님이 직접 보복하심을 선언하십니다.

    • 이사야 34:8
      “이는 여호와께서 보복하시는 날이요 시온의 송사를 위하여 신원하시는 해라.”
      하나님의 복수는 단순한 보복이 아니라 억울한 자의 송사를 해결하시는 ‘신원’의 행위입니다.

    • 나훔 1:2
      “여호와는 질투하시며 보복하시는 하나님이시니라... 여호와는 자기 대적에게 보복하시며 자기 원수에게 진노하시느니라.”
      하나님의 보복은 거룩한 분노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3.2 신약의 보수하시는 하나님

    • 로마서 12:19
      “내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하나님의 진노하심에 맡기라 기록되었으되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고 주께서 말씀하시니라.”
      신약에서도 하나님만이 보복하실 자격이 있으며, 인간은 심판자가 아님을 분명히 합니다.

    • 히브리서 10:30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 하시고... 주께서 그의 백성을 심판하리라 말씀하신 것을 우리가 아노니.”
      하나님은 심판자시며, 죄에 대해 정당한 보응을 행하십니다.

    • 요한계시록 6:10
      “큰 소리로 불러 이르되 거룩하고 참되신 대주재여 땅에 거하는 자들을 심판하여 우리 피를 갚아 주지 아니하시기를 어느 때까지 하시려나이까.”
      순교자들이 하나님께 보수의 정의를 호소합니다.

    4. 하나님의 보복과 인간의 감정적 복수의 차이

    성경은 인간에게 복수를 금하고, 보복은 오직 하나님께 속한 것이라고 명확하게 가르칩니다. 로마서 12장 19절은 “내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하나님의 진노하심에 맡기라. 기록되었으되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 하셨느니라”고 말씀합니다. 이는 하나님의 보복이 단순한 보응이 아니라, 공의롭고 거룩한 목적을 지닌 신적 행위임을 드러냅니다.

    1. 감정에 근거한 인간의 복수

    인간의 복수는 주로 상처와 분노, 억울함에서 비롯된 반응입니다. 억울한 일을 당하면 즉시 보복하고 싶은 충동이 생기고, 그 과정에서 이성보다 감정이 앞서기 마련입니다. 이런 복수는 종종 과도하거나 부당하게 이루어지고, 또 다른 악을 낳기도 합니다. 인간은 모든 사정을 완전히 알 수 없고, 마음조차도 흔들리기 쉬워 복수의 판단이 왜곡되기 쉽습니다. 따라서 인간의 복수는 대체로 정의보다 보복감정에 휘둘리기 쉽고, 결과적으로 더 큰 불의나 고통을 초래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예를 들어 구약성경에서 라멕은 자신을 다친 자에게 “일흔일곱 배로 보복하겠다”(창세기 4:24)고 선언하는데, 이는 과잉된 보복의 대표적인 예입니다. 이러한 복수는 하나님의 정의와는 전혀 다른 방향의 인간적 분풀이에 지나지 않습니다.

    2. 하나님의 보복은 거룩한 공의의 실현

    반면, 하나님의 보복은 감정에 의한 충동적인 반응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보복은 그분의 거룩하심과 공의로움에서 비롯되며, 죄에 대한 정당하고 완전한 심판입니다. 하나님은 전지전능하시기에 사건의 전후 사정, 동기, 결과까지 모두 아시며, 누구에게 어떤 보응이 합당한지를 가장 공정하게 판단하실 수 있습니다.

    성경에서 하나님은 “보복하시는 하나님”(나훔 1:2)이시며, “공의로 심판하시는 분”(시편 7:11)이십니다. 그의 보복은 단지 징벌이 아니라, 악을 억제하고 의를 드러내며, 억울한 자를 신원하시는 사랑의 사역이기도 합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보복은 결코 무자비하거나 감정적인 것이 아니며, 궁극적인 선과 질서의 회복을 위한 의로운 조치입니다.

    3. 신자의 태도: 맡김과 용서

    하나님의 보복은 신자에게 위로가 되며, 억울함을 하나님께 맡길 수 있는 근거가 됩니다. 우리는 세상에서 부당한 일을 당할 수 있으며, 때로는 그 억울함이 끝까지 풀리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친히 심판자 되심을 믿을 때, 우리는 그 정의가 반드시 실현될 것을 확신하고 평안을 유지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마태복음 5장에서 원수를 사랑하고, 핍박하는 자를 위해 기도하라고 하셨습니다. 이는 신자에게 감정적인 보복 대신 용서와 사랑을 선택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입니다. 스데반 집사는 돌에 맞아 죽기 직전에도 자신을 죽이는 자들을 향해 “이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라고 기도하였습니다. 이는 보복의 권한을 하나님께 맡기고, 자신의 삶을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여 바친 신앙인의 모범입니다.

    4. 결론

    결론적으로, 하나님의 보복은 공의롭고 완전한 심판이지만, 인간의 복수는 감정과 한계에서 비롯된 불완전한 행위입니다. 신자는 하나님의 공의와 심판을 신뢰하며, 억울한 일을 하나님께 맡기고, 자비와 용서의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그렇게 할 때, 하나님의 뜻은 우리의 삶을 통해 더욱 분명히 드러나며, 우리는 정의가 실현될 날을 기다리는 참된 신앙인으로 살아갈 수 있습니다.

    5. 보수하시는 하나님에 대한 묵상

    하나님께서 보수하신다는 진리는 억울한 일을 겪는 이들에게 위로를 줍니다. 이 세상에서는 악이 당장 심판받지 않는 것처럼 보일 수 있지만, 하나님의 시간 안에서는 반드시 보응이 이루어집니다. 이 진리를 믿을 때, 우리는 세상의 불의에 좌절하지 않고, 의롭게 살며 하나님께 맡기는 삶을 선택할 수 있습니다.

    또한, 하나님은 자신의 백성들이 억울한 일을 당할 때, 반드시 그 송사를 해결해 주시며, 고통의 눈물을 기억하십니다. “내 눈물을 주의 병에 담으소서”(시편 56:8)라는 말씀은 하나님의 섬세한 신원(伸寃)의 성품을 보여줍니다.

    6. 하나님의 보수의 목적

    성경에서 하나님은 ‘보복하시는 분’으로 자주 등장합니다. 이는 단지 감정적 분노나 무자비한 심판의 하나님으로 나타나려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보수(복수)는 분명한 목적과 질서를 갖고 있는 거룩한 행위입니다. 이 목적을 이해할 때, 우리는 하나님께서 왜 때로는 심판하시고, 왜 보상하시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1. 하나님의 공의 실현

    하나님의 첫 번째 보수의 목적은 공의(公義)의 실현입니다. 하나님은 본질적으로 의로우신 분이십니다. 시편 89:14은 “공의와 정의가 주의 보좌의 기초”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보좌 자체가 정의 위에 세워졌기에, 죄에 대해 무반응하실 수 없습니다. 악이 판치는 세상에서 하나님은 그 악을 심판하심으로써 세상에 정의가 살아 있음을 증명하십니다.

    죄는 반드시 그에 합당한 결과를 가져옵니다. 인간 사회에서 정의로운 재판이 행해지지 못할지라도, 하나님의 법정에서는 반드시 죄에 대한 심판이 이루어집니다. 이러한 보수는 단순히 벌을 주는 것이 아니라, 거룩하신 하나님의 성품에 따른 필연적 결과입니다. 이는 하나님의 존재 자체가 진리이며, 그 진리가 죄악과 타협하지 않는다는 증거이기도 합니다.

    2. 고통받는 자를 위한 신원(伸寃)

    하나님의 보수는 억울한 자를 위하여 행해지는 **신원(伸寃)**의 행위입니다. 이사야 61:2에서 주님은 “슬퍼하는 자를 위로하며... 갇힌 자에게 자유를 선포하시고, 신원하시려” 오신다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신원은 ‘억울함을 풀어준다’는 뜻입니다.

    성경 속의 순교자들, 고난받는 예언자들, 억울하게 당한 의인들의 고통을 하나님은 잊지 않으십니다. 요한계시록 6:10에서 순교자들이 “우리 피를 갚아주지 않으시기를 어느 때까지 하시려나이까”라고 호소할 때, 이는 하나님의 보수의 필요성을 나타냅니다. 하나님은 그들의 눈물과 피를 무시하지 않으시며, 정의롭게 보응하심으로써 상처 입은 자들을 위로하십니다.

    3. 죄악 억제와 경고

    하나님의 보수는 죄악을 억제하고, 아직 회개하지 않은 자들에게 경고하기 위한 목적도 있습니다. 이 세상이 죄에 대해 무감각해질 때, 하나님은 자신의 심판을 통해 죄가 얼마나 무겁고 파괴적인지를 드러내십니다. 나훔 1:2는 “여호와는 질투하시며 보복하시는 하나님이시라”고 선언합니다. 이는 하나님의 질투가 죄악을 향한 거룩한 분노임을 보여줍니다.

    하나님의 심판은 마치 홍수 이전 시대, 소돔과 고모라, 가나안 족속의 멸망 등에서 나타나듯이, 단순히 멸망시키는 것이 아니라 그 죄를 두려워하게 만듦으로써 인간으로 하여금 경건한 삶을 살도록 이끄는 목적을 갖습니다. 하나님의 보수는 우리로 하여금 죄의 본질을 깨닫고, 하나님의 은혜로 돌이키게 만드는 경고의 메시지이기도 합니다.

    4. 구속사적 계획의 일환

    하나님의 보복은 단지 개별적인 사건에 머물지 않고, 하나님의 구속사적 큰 계획 안에서 의미를 가집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이 만나는 지점입니다. 인간의 죄를 갚기 위한 하나님의 거룩한 보복이 십자가에 드러난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보수는 궁극적으로 죄로부터의 해방과 구원이라는 더 큰 목적으로 향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죄의 값을 스스로 짊어지심으로써 하나님의 보복을 자기 자신에게 내리셨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하나님의 보수라는 주제를 단지 심판으로만 이해할 것이 아니라, 십자가 안에서 하나님의 공의와 자비가 어떻게 조화를 이루었는지를 통하여 전체 구속의 맥락 안에서 바라보아야 합니다.

    5. 하나님의 이름의 거룩함 선포

    마지막으로, 하나님의 보수는 하나님의 이름과 명예를 거룩하게 하려는 목적을 갖고 있습니다. 에스겔 36:23에서는 “내 거룩한 이름을 열국 가운데서 알게 하리니”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이름이 욕되게 되는 것을 허락하지 않으시며, 그 이름을 위해 행동하십니다. 이는 단지 자존심이 아니라, 하나님의 거룩성과 존재 자체의 존엄성을 위한 행위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세상에서 모욕당하고, 하나님의 이름이 우롱당할 때, 하나님은 반드시 그 권위를 회복하십니다. 보수는 그러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수단입니다. 이를 통해 모든 민족이 하나님을 두려워하게 되고, 하나님의 이름이 존귀하게 됩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보수는 단지 감정적 분풀이가 아니라, 공의와 자비, 회복과 경고, 그리고 거룩함의 선포라는 다차원적인 목적을 가진 신성한 사역입니다. 이 진리를 깊이 이해할 때, 우리는 억울함 속에서도 하나님의 때와 하나님의 방법을 신뢰하며 살아갈 수 있습니다.

    7. 결론: 신자의 자세

    신자는 하나님의 보수하심을 믿으며 원수를 스스로 갚으려 하지 말아야 합니다. 동시에, 하나님의 공의가 이루어질 것을 믿으며 고통과 불의를 당하더라도 인내하며 기다려야 합니다.

    미가 7:7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나는 여호와를 바라보며 나를 구원하실 하나님을 기다리나니 나의 하나님이 나에게 귀를 기울이시리로다.”
    보수하시는 하나님은 오늘도 신자들의 눈물과 한숨을 기억하시며, 그 때에 반드시 갚아주십니다.

    물론입니다. 아래는 ‘보수(복수)하시는 하나님’에 대한 신약적, 복음적 의미예수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약 3,000자 분량으로 정리한 글입니다.



    신약적, 복음적 관점에서 본 보수하시는 하나님

    보수하시는 하나님은 성경 전체를 통해 나타나는 공의로운 하나님의 모습 중 하나입니다. 그러나 신약, 특히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통해 우리는 이 보수하심의 의미를 보다 깊이 있게 이해하게 됩니다. 신약에서의 보복은 단지 심판의 개념을 넘어, 사랑과 구속, 그리고 최후의 정의 실현이라는 더 크고 깊은 의미로 확장됩니다.

    1.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드러난 하나님의 공의

    신약은 하나님의 보복 또는 보응을 감정적이거나 보복적인 차원에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의로우신 성품이 표현되는 방식으로 설명합니다. 로마서 12:19에서는 이렇게 기록합니다.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
    이는 구약의 신명기 32:35을 인용한 것으로, 하나님만이 심판자이며 진정한 보수의 주체이심을 선언합니다.

    이러한 보수는 단지 악인을 벌하기 위한 것만이 아닙니다. 신약은 죄의 대가를 반드시 치러야 하는 하나님의 공의를 강조하면서도, 동시에 그 공의를 만족시키기 위한 유일한 길이 예수 그리스도이심을 선언합니다. 죄에 대한 심판은 반드시 있어야 하지만, 그 심판을 인간이 감당할 수 없기에 하나님은 자신의 아들을 희생 제물로 내어주신 것입니다.

    2. 십자가: 하나님의 보복이 실현된 자리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하나님의 보복과 사랑이 만나는 자리입니다. 하나님은 죄에 대해 반드시 심판하시는 분이십니다. “죄의 삯은 사망이요”(로마서 6:23)라는 말씀처럼, 죄에 대한 하나님의 공의는 죽음이라는 보응을 요구합니다. 그러나 그 심판을 인간에게 직접 내리시는 대신, 하나님은 자신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에게 전가시키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보복을 ‘대신 감당하신 분’이십니다. 이사야 53장은 이를 예언하며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라고 말합니다. 십자가는 하나님의 보수하심이 실제로 행해진 역사적인 사건이며, 동시에 우리에게 구원의 문을 여신 사랑의 사건입니다.

    이것이 복음의 핵심입니다. 하나님의 보복은 사라진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실현되었으며, 믿는 자는 그 보복에서 면제되고, 오히려 의롭다 하심을 받게 됩니다. 이는 인간이 감당할 수 없던 보수의 대가를 하나님 스스로가 대신 지불하셨다는, 전례 없는 은혜입니다.

    3. 보복의 유예와 회개의 기회

    신약에서 하나님의 보복은 종말론적인 시각에서도 다뤄집니다. 베드로후서 3:9은 다음과 같이 말씀합니다.
    “주의 약속은 어떤 이들이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 같이 더딘 것이 아니라 오직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하지 아니하고 다 회개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이는 하나님의 보복이 유예되고 있음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은 지금 당장 세상의 모든 악을 심판하실 수 있지만, 죄인들에게 회개할 시간을 주시고 계십니다. 하나님의 보복은 여전히 유효하지만, 그것은 사랑 안에서 참고 기다리시는 보복이며, 결국 마지막 날에 이루어질 것입니다. 이 때까지는 은혜의 시대요, 복음의 시대로,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는 그 심판에서 벗어나 하나님의 자녀로 받아들여질 수 있습니다.

    4. 최후의 심판과 완전한 보수

    요한계시록은 하나님의 보수하심이 최종적으로 어떻게 완성되는지를 보여줍니다. 요한계시록 6:10에서 순교자들이 이렇게 외칩니다.
    “거룩하고 참되신 대주재여, 땅에 거하는 자들을 심판하여 우리 피를 갚아 주지 아니하시기를 어느 때까지 하시려나이까.”

    이는 하나님의 보복이 결코 망각되거나 무시되지 않음을 보여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억울한 자의 피를 기억하시고, 마침내 의와 불의 사이에 영원한 분리를 행하십니다. 마지막 날, 예수 그리스도는 심판자로 다시 오셔서 악한 자들에게는 정당한 보응을, 의인들에게는 영원한 안식을 주십니다.

    요한계시록 19장에서 예수님은 “충신과 진실이라 불리는 자”로 묘사되며, 공의로 심판하며 싸우시는 자로 등장합니다. 이는 복음의 완성이며, 보수하시는 하나님의 마지막 선언입니다.

    5. 신자의 삶과 하나님의 보수에 대한 반응

    복음 안에서 하나님의 보복을 경험한 자는 더 이상 복수심에 휘둘리지 않습니다. 오히려 예수님처럼 원수를 사랑하고, 박해하는 자를 위해 기도하며, 악을 선으로 갚는 삶을 살아갑니다. 이는 세상의 방식과 전혀 다른 삶이며, 하나님을 믿는 자의 참된 태도입니다.

    로마서 12:17-21에서 사도 바울은 다음과 같이 권면합니다.
    “아무에게도 악을 악으로 갚지 말고... 네 원수가 주리거든 먹이고 목마르거든 마시게 하라...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
    이것이 바로 보수하시는 하나님을 신뢰하는 신자의 삶의 방식입니다. 우리는 직접 원수를 갚지 않고, 하나님의 공의에 맡기며, 오히려 사랑으로 악을 이기는 승리를 살아갑니다.

    결론

    보수하시는 하나님은 공의로운 심판자이시며, 동시에 구원의 길을 여시는 자비로운 아버지이십니다. 신약은 이 두 가지 속성을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히 조화시킵니다.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하나님의 보복을 감당하심으로 우리는 그 심판을 면제받고, 생명과 자유를 누리게 되었습니다.

    이제 우리는 하나님의 완전한 보수를 기다리며, 악에 대해 절망하거나 보복하려 하지 않고, 오직 복음 안에서 믿음과 사랑으로 살아가는 자들입니다. 이는 단순한 도덕적 결심이 아니라, 십자가의 은혜를 경험한 자가 누리는 복음의 열매이며, 보수하시는 하나님을 신뢰하는 삶의 표현입니다.


    질투하시는 하나님에 대한 성경구절

    질투하시는 하나님은 자신의 백성을 향한 깊고 강한 사랑과 충성을 요구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창조주로서 영광을 다른 신이나 우상과 나누지 않으시며, 백성이 다른 신을 섬길 때 질투하십니다(출애굽기 34:14, 이사야 42:8). 이 질투는 인간적 감정이 아니라, 하나님의 거룩함과 언약에 대한 열정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하나님은 자신과의 언약을 어기고 우상숭배에 빠지는 것을 크게 경고하시며, 백성이 온전한 경배와 순종을 통해 하나님만을 섬기기를 원하십니다(신명기 4:24). 동시에 하나님은 백성의 보호자와 구원자로서 질투의 마음으로 그들을 지키시고 사랑하십니다(스가랴 8:2).

    1. 하나님은 질투하시는 분이심

    출애굽기 34:14

    너는 다른 신에게 절하지 말라 여호와는 질투라 이름하는 질투의 하나님임이니라

    출애굽기 20:5

    너는 그것들에게 절하지 말며 그것들을 섬기지 말라 나 네 하나님 여호와는 질투하는 하나님인즉 나를 미워하는 자의 죄를 갚되 아버지로부터 아들에게로 삼사 대까지 이르게 하거니와

    신명기 4:24

    네 하나님 여호와는 소멸하는 불이시요 질투하시는 하나님이시니라

    신명기 5:9

    너는 그것들에게 절하지 말며 그것들을 섬기지 말라 나 네 하나님 여호와는 질투하는 하나님인즉 나를 미워하는 자의 죄를 갚되 삼사 대까지 이르게 하며

    2. 하나님을 사랑하고 충성할 것을 요구하심

    신명기 6:15

    너희 중에 계신 너희 하나님 여호와는 질투하시는 하나님이신즉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진노하사 너를 지면에서 멸절시키실까 두려워하노라

    여호수아 24:19

    여호수아가 백성에게 이르되 너희가 여호와를 섬기지 못할 것은 그는 거룩하신 하나님이시요 질투하는 하나님이시니 너희의 허물과 죄들을 사하지 아니하실 것임이라

    3. 우상숭배에 대한 경고

    에스겔 8:3

    그가 손같은 것을 펴서 내 머리털 한 뭉치를 잡으시며 하나님의 영이 나를 들어 천지 사이로 올리시고 하나님의 환상 중에 나를 이끌어 예루살렘에 이르러 안뜰로 들어가는 북향한 문 어귀에 이르게 하시니 거기에는 질투의 우상이 있어 질투하게 하는 것이 있더라

    나훔 1:2

    여호와는 질투하시며 보복하시는 하나님이시니라 여호와는 보복하시며 진노하시되 자기를 거스르는 자에게 여호와는 보복하시며 자기를 대적하는 자에게 진노를 품으시며

    4. 하나님을 경외하고 순종할 것에 대한 권고

    신명기 32:16

    그들이 다른 신으로 그의 질투를 일으키며 가증한 것으로 그의 진노를 격발하였도다

    시편 78:58

    그들이 자기 산당들로 그를 격노하게 하며 자기들의 우상들로 그를 질투나게 하였도다

    고린도전서 10:22

    그러면 우리가 주를 질투하게 하겠느냐 우리가 주보다 강한 자냐

    5. 하나님의 열정과 사랑

    선물 바구니

    스가랴 8:2

    만군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내가 시온을 위하여 크게 질투하며 그를 위하여 크게 분노하므로 질투하노라

    이사야 42:8

    나는 여호와이니 이는 내 이름이라 나는 내 영광을 다른 자에게, 나의 찬송을 우상에게 주지 아니하리라

    6.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질투적 열심

    고린도후서 11:2

    내가 하나님의 열심으로 너희를 위하여 질투하노니 내가 너희를 정결한 처녀로 한 남편인 그리스도께 드리려고 중매하였음이라

    호세아 13:4

    그러나 애굽 땅에서 너를 인도하여 낸 여호와 네 하나님 나 외에 네가 다른 신을 알지 말 것이라 나 외에는 구원자가 없느니라




    보복하시고 투기하시는 하나님

    하나님이 살아계심을 알지 못하고 자기들이 강자가 되었다고 자기들 맘대로 힘을쓰고 이웃 국가들을 복속시키고 악을 일삼고...
    함께 어울려 살아야 하는 이 환경을 무도하게 약한 상대들을 짓 밟고 잔인하고 혹독하게 다룰 때 하나님께서 반드시 심판하신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이 말씀이 그대로 이루어져서 BC 612년에 앗수르 (앗시리아)는 바벨론의 느부갓네살에 의해서 완전히 멸망을 당하게 됩니다. ​

    나훔서에는 앗수르를 시켜서 북 왕국 사마리아 사람들을 잡아다가 훈련 좀 시키라고 했더니 교만해서 하나님을 무시하고 예루살렘까지 삼키겠다고 185000대군을 끌고 와서 히스기야를 협박 하면서 여호와도 자기 백성을 지키지 못한다고 막말을 해대자 하나님의 진노로 산혜립의 대군이 전멸을 당합니다.

    ​그 뒤에 이 히스기야가 척추가 썩어가는 병이 나는 거에요 
    이사야가 찾아와서 “왕이여! 여호와의 말씀에 집 정리하고 죽을 준비하랍니다”하고 가버리니까 히스기야가 벽을 보고 돌아 누워서 살려달라며 통곡을 합니다. ​

    하나님께서 히스기야의 기도를 들으시고 그를 불쌍히 여겨 수명을 15년 연장해 주신다고 하시자 증거를 보여달라고 해서 태양의 그림자가 뒤로 10도 물러가는 증거를 보여주었고 실제로 수명이 15년 연장 됩니다. 

    그 기간에 결혼한 후 바로 내 쳤던 전 부인 헵시바와의 관계를 회복하고 아들을 낳았는데 그 사람이 천하의 괴물 므낫세에요. 
    그 때 바벨론에서 사신이 오는데 히스기야가 감동 받아서 바벨론 사신들에게 왕국의 모든 걸 다 보여 주면서 자랑을 합니다

    ​이사야가 이 답답한 소식을 듣고 와서 히스기야에게 이제 바벨론이 쳐들어와서 왕궁과 성전의 모든 보물을 다 가져가고 이스라엘 자손들을 다 잡아다가 바벨론의 환관을 만들 것이라 경고하지만 히스기야는 “내 때에만 그런 일이 없으면 되고 여호와의 말씀이 선하니이다”하고 넘어가 버려요. ​

    히스기야가 거룩하고 착한 임금이고 기도해서 응답 받았던 인물은 맞지만 이렇게 우유 부단하고 분별력이 없고 겁도 많았던 인물입니다.

    이런 일련의 사건이 나훔서, 히스기야, 니느웨하고 삼각 관계가 물려 있는 겁니다

    나훔서에서 보여주는 하나님은 전에 우리가 잘 보지 못한 또 다른 면을 보게 되는데 질투하시고 보복하시는 하나님이라는 거에요.
    성경 66권에서 보여지는 하나님의 모습들을 우리들이 부지런히 공부하고 정리해서 하나님을 바로 알아가야 하는 겁니다.
    그래서 다 정리가 되고 다 알아져 가면 그 다음에 우리가 실천으로 들어가는 겁니다.
    이것이 진정한 성도이고 올바른 하나님의 자녀들의 자세와 삶이 되는 겁니다.
    이렇게 나훔서를 마무리하고 다음 시간에는 오바댜서 함께 보도록 하겠습니다

    10월 6일(월) 나훔 1-3장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보복하시는 하나님(1:2)

    여호와는 투기하시며 보복하시는 하나님이시니라 여호와는 보복하시며 진노하시되 자기를 거스리는 자에게 보복하시며 자기를 대적하는 자에게 진노를 품으시며.
    The LORD is a jealous and avenging God; the LORD takes vengeance and is filled with wrath. The LORD takes vengeance on his foes and maintains his wrath against his enemies.

    보복하시는 하나님(avenging God)
    선지자 '나훔'이란 이름의 뜻은 "위로" "위안"이라고 합니다.
    성경은 하나님을 '사랑의 하나님'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나훔 선지자는 하나님을 "보복하시는 하나님"이라고 소개합니다.
    사랑의 하나님과 보복하시는 하나님은 전혀 다른 개념으로 들립니다.
    그러나 사랑과 보복은 다른 것이 아닙니다.
    사랑과 보복의 근본은 그 출발점이 동일하기 때문입니다.

    나훔서는 니느웨 성의 멸망에 대한 선포를 선언합니다.

    선지자 요나를 통해서 니느웨 성의 회개를 외치게 하셨던 그 하나님께서 이번에는 앗수르 제국의 수도 니느웨 성의 멸망을 강조합니다.

    그 이유는 일시적인 회개를 싫어하기 때문입니다.
    아버지의 집을 떠나 자유를 누리려던 작은 아들이 모든 것을 탕진한 후에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올 때 일시적으로 돌아온 것이 아니었습니다.
    왜냐하면 작은 아들은 이제부터 아버지의 집에서 영원토록 종으로 살겠다고 고백합니다.
    한번 종은 영원한 종입니다.
    마치 한번 해병은 영원한 해병이라는 말처럼................

    한번 종이 되면 이제는 영원한 종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아버지는 아들을 보복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으로 작은 아들을 품었습니다.

    아버지의 마음에는 사랑이라는 감정과 보복이라는 감정이 고개를 숙이고 있었지만 사랑이 먼저 고개를 들고 일어났습니다.
    그러자 보복이란 감정은 꼬리를 감추고 숨어버렸지요.

    니느웨에 대한 보복의 감정이 솟구친 것은 니느웨가 예전의 방탕과 우상숭배의 도시로 돌아섰기 대문입니다.

    믿음이란 과거로 돌아가는 것이 아닙니다.
    천성을 향하여 날마다 앞으로 앞으로 전진하는 것입니다.

    만일 전진해야 할 인생이 과거를 그리워하며 돌아설 때는 보복의 빛나는 칼날이 하늘에서 번쩍이며 내려올 것입니다.

    주님 뜻대로 살기로 했네
    주님 뜻대로 살기로 했네
    뒤돌아 서지 않겠네.......

    한 발자국이라도 앞으로 나갈 수 있다는 믿음으로 오늘도 강건하시기를 기도합니다.
    행복하시기를 소망합니다.
    남은 시간들을 전진하는 발자국으로 채워가시기 바랍니다.

    여호와는 투기하시며 보복하시는 하나님이시니라 
    - 형용사 '투기하시며'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칸노'는 수 24:19과 본절에만 나오는 단어로 일반적으로는 '칸나'가 사용되었다. 
    이 용어는 시내 산에서 계시하신 하나님이 처음으로 사용하셨고, 하나님에 대해서만 쓰인다(출 20:5; 34:14). 
    이는 하나님과 백성의 언약 관계를 전제하며, 이스라엘에게 불신앙이나 외부의 위협이 있을 때, 언약 관계를 회복시키기 위한 조치로 하나님의 질투의 속성이 나타난다(민 25:11; 히 10:27).

    민수기 25:11
    제사장 아론의 손자 엘르아살의 아들 비느하스가 나의 질투심으로(7068) 질투하여(7065) 이스라엘 자손 중에서 나의 노를 돌이켜서 나의 질투심으로(7068) 그들을 진멸하지 않게 하였도다.

    7065

    קָנָא 스트롱번호 7065

    1. 부러워하다.  2. ~를 부러워하다.  3. 열심을 내다.
    발음 [ qânâʼ ]

    7068 

    קִנְאָה 스트롱번호 7068

    1. 질투.   2. 시기.  3. 열심
    발음 [ qinʼâh ]

    어원  / 7065에서 유래
    구약 성경 / 43회 사용



    히브리서 10:27
    오직 무서운 마음으로 심판을 기다리는 것과 대적하는 자를 소멸할 맹렬한 불만 있으리라. 


    투기(7072) 칸노(qannôwʼ)  קַנּוֹא

    1. 시기하는.  2. 성난.  3. 수 24:19.
    발음 [ qannôwʼ ]  
    구약 성경 / 2회 
    • 1. 형용사, 남성  시기하는, 성난, [하나님께 사용되어] 수 24:19.
    • 문법설명  / 7067참조
    • 관련 성경 / 질투하는(수 24:19), 투기하는(나 1:2).
    보복(5358)  나캄(nâqam) נָקַם     

    1. 복수하다.   2. 레 19:18.  3. 신 32:43.
    발음    [ nâqam ]  
    구약 성경 / 35회 사용
    관련 성경  / 보복하다(삼상24:12, 14;24, 사1:24, 렘5:9, 나1:2), 보응하다(겔24:8), 갚다(민31:2, 신32:43, 겔25:12), 갚아주다(왕하9:7), 형벌을 받다(출21:21), 벌 받다(창4:15), 원수를 갚다(레19:18, 수10:13, 삿15:7). [명] 보복(삼상18:25), 벌(창4:24), 보복자(시8:2), 복수자(시44:16).

    여호와는 보복하시며...자기를 대적하는 자에게 진노를 품으시며 

    - '보복'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노켐'이 반복되어 나타나는데, 그 단어는 법과 도덕을 범하면서도 회개하지 않는 자들에게 그에 상응하는 심판을 시행한다는 의미이다. 

    하지만, 이 단어는 어느 개인을 대상으로 원수를 갚는다는 뉘앙스를 갖지 않고, 대개의 경우 어느 집단이나 백성을 향한 심판을 가리키며, 구약 성경의 용법은 언약을 배경으로 한다(Mendenhall). 
    즉, 이스라엘은 여호와의 언약 백성이기 때문에, 여호와가 이스라엘 백성을 위해 니느웨를 멸망시킨다는 의미이다(13절; 2:1).




    나훔 1장은 니느웨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을 선포하며, 하나님은 질투하시며 보복하시는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강조하는 책입니다. 
    나훔은 엘고스 사람의 묵시로, 니느웨의 죄악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를 경고하는 동시에, 하나님의 백성에게는 위로가 되는 메시지를 담고 있습니다. 

    나훔 1장의 내용 요약
    • 니느웨에 대한 경고 :
      나훔 1장은 니느웨 성에 대한 경고로 시작하며, 엘고스 사람 나훔의 묵시의 글임을 밝힙니다.
    • 하나님의 속성 :
      나훔 1장 2절은 하나님의 속성이 질투하시고 보복하시는 하나님이심을 분명히 합니다. 


  • 보복하시는 하나님 :
    2절은 "여호와는 질투하시며 보복하시는 하나님이시니라 여호와는 보복하시며 진노하시되 자기 대적에게 보복하시며 자기의 원수에게 원한을 갚으시도다"라고 선포합니다. 

  • 하나님의 공의와 심판 :
    하나님은 악한 자들을 심판하시지만, 동시에 하나님의 백성을 억압하는 자들을 심판하시며, 그분의 공의는 헛되지 않음을 보여주십니다. 

  • 위로와 희망 :
    나훔은 니느웨에 대한 심판을 통해 유다 백성에게 위로를 전하며, 하나님을 떠난 자들은 경고를 받지만 회개하고 하나님께 나아가면 위로와 구원을 받게 됨을 보여줍니다. 

  • 심판과 구원 :
    이 말씀은 하나님이 악을 보고만 계시지 않고, 반드시 심판하시지만, 동시에 그분의 백성에게는 위로와 희망의 메시지를 전한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 하나님의 주권 :
    하나님은 모든 열방과 역사를 주관하시며, 그분의 뜻대로 모든 것을 이루신다는 것을 선포합니다

  • 보복하시는 하나님(나훔 1:1~3)

    나훔서는 3장으로 구성된 작은 예언서로서, 하박국 스바냐와 더불어 유다 말기의 상황을 반영하고 있는 예언서로 알려져 있다. 
    나훔서는 니느웨의 구원을 선포하는 요나서와 짝을 이루는 예언서로서 니느웨의 심판과 멸망을 선포하고 있다. 
    예언자 나훔은 그 이름이 '위로받은 자'라는 뜻으로 오직 나훔서에만 등장한다. 
    때문에, 나훔 선지자의 출신 배경을 정확히 알 수 없다. 
    그를 엘고스 사람으로 소개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엘고스 지역 출신이거나 엘고스 가문 출신일 것이다.

    표제에 나타난 나훔 예언서의 성격(1:1)

    나훔서는 니느웨를 향한 경고와 묵시를 묶어놓은 책(세페르 하존)이다. 
    개역개정은 '세페르 하존'을 "묵시의 글"로 번역하고 있지만 공동번역은 "니느웨가 받을 벌을 내다보고 적은 책", 새번역은 "니느웨가 형벌을 받을 것을 내다보고 쓴 묵시록"으로 각기 번역하고 있다. 

    경고로 번역된 히브리어 '마사'는 짐을 뜻하는데, 나훔의 예언이 니느웨에게는 큰 짐이 될 것임을 시사하고 있다. 
    묵시로 번역된 '하존'은 '보다'를 의미하는 동사 '하자'의 명사형이다. 하존'은 예언의 시각적 성격을 암시한다. 
    나훔은 환상 가운데 이 예언을 받았을 것이다. 
    하지만 예언의 매체가 시각적이든 청각적이든 예언의 핵심은 '하나님의 말씀'이다. 
    아무리 화려한 환상을 본다 하더라도 '하나님의 말씀'이 없으면 백일몽에 불과하다. 
    한편, 나훔 예언의 대상인 니느웨는 앗수르의 수도로서 당시 세계 정치, 경제, 문화의 중심지였다. 하지만 니느웨는 폭력적인 도시로 유명했다. 때문에 니느웨는 유다의 적국으로서 뿐 아니라 하나님과 대적하는 모든 세력을 상징할 수 있다.

    복수하시는 하나님(1:2~3)

    하나님은 거룩하시고 자비하시고, 죄인을 끝까지 사랑하시고 인내하시는 하나님이시다. 
    하지만 나훔서의 하나님은 질투하시고, 보복하시고, 분노하시는 하나님으로 묘사되고 있다. 

    '질투의 하나님'으로 번역된 '엘 카노'는 여호수아 25장 19절 외에 이곳에만 사용된다. 
    인간적 질투는 폭력으로 변화되기 쉽다. 
    왜냐하면 내가 갖지 못한 것을 갖고자 하는 열망이 질투로 표현되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질투는 어떠한가? 

    하나님의 질투도 비슷한 양상을 띤다. 
    하지만 하나님의 질투는 기본적으로 자기 백성에 대한 사랑에 기초한다. 
    하나님의 질투는 이스라엘 백성을 향해 당신 외에 다른 경쟁자를 두지 않으시겠다는 열심의 표현이다. 

    때문에, 하나님의 불길 같은 질투는 그 사랑하는 자를 위협하는 자들에게 보복으로 표현된다. 
    2절에 세 번 반복되고 있는 '노켐'(개정-"보복하시는", 공동, 새-"원수를 갚으시는")은 '보복하다', '복수하다'를 뜻하는 동사 '나캄'의 분사형태이다. 
    구약에서 하나님은 자주 보복하시는 분으로 묘사된다. 
    신명기 32장 35절에 "그때에 내(하나님)가 보복하리라(나캄)"고 하였으며, 같은 장 41절에서는 "내 대적들에게 복수하며(나캄) 나를 미워하는 자들에게 보응할 것이라"고 하였다. 
    예언자들도 "하나님의 보복의 날"(욤 나캄, 사 61:2)을 선포하며 고통당하고 슬퍼하는 자를 위로할 것이라고 하였다. 
    하나님께서는 악인에게 자비를 베풀고 용서하기도 하지만 폭력적인 수단으로 보복하시기도 하신다.

    하나님의 질투가 강렬한 만큼 그분의 보복도 철저하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대신해 니느웨에게 보복하신다. 

    이스라엘의 적은 바로 하나님의 적이기 때문이다. 
    복수는 독단적인 폭력이 아니라 반역하는 대상에 대한 하나님의 주권을 수행하는 것이다. 
    이처럼 복수의 하나님을 부르짖는 것이 이상해 보일지 모르지만, 보복과 복수는 하나님의 주요 역사 중의 하나임에 틀림없다. 

    왜냐하면 만일 하나님께서 보복하시지 않으시면 힘없이 압제당하는 자와 고통당하는 자를 위해 나설 수 있는 자가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복수의 하나님을 부르짖는 것은 하나님의 능력과 역사에 대한 전적인 신뢰의 고백이라 할 수 있다. 
    또한 하나님의 복수에 대한 기대는 사적이며 개인적인 보복을 포기하겠다는 선언이기도 하다. 

    복수를 할 수 있는 힘과 능력이 있다 하더라도 포기하겠다는 선언이며, 힘이 있든 없든 간에 복수를 온전히 하나님께 맡기고 그 결과를 기다린다는 고백이다. 
    복수의 하나님은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이 불의에 대해 순응만 할 것이 아니라 분노하고 싸워야 함을 웅변하고 있다. 
    만일 하나님의 이런 모습을 외면한다면 하나님을 열정도 없이 값싼 사랑을 베푸는 분으로 오해하기 쉽다.




    나훔 개론

    1. 표제

     이 책의 표제는 단순히 이 책의 저자인 선지자의 이름을 딴 것이다.
    나훔(히, Nachum)은 “위로받은” 혹은 “위로 받은 자”를 의미한다. 
    그것은 느헤미야의 이름의 “여호와께서 위로하신다”와 므나헴이란 이름의 “위로자”와 관련이 있긴 하지만 나훔이라는 이름은 오직 이곳에만 나타난다.

     2. 저자

     나훔 자신의 예언에서 발견되는 것 이외에는 그에 관한 기록이 없다. 
    그는 출생지가 엘고스(Elkosh)인 “엘고스 사람”(나 1:1)이었다.

     3. 역사적 배경

     나훔이 선지자로 봉사한 시기에 대한 암시는 노아몬의 멸망에 관한 말씀 가운데서 발견된다(나 3:8). 
    이 도시는(헬라인들에게 처음에는 Thebes로 후에는 Diospolis로 알려짐) B.C. 663년에 앗수르 왕 아수르바니팔(Ashurbanipal)에 의해 멸망되었다. 그러므로 나훔의 봉사 중 일부는 적어도 그때 이후에 행해졌음에 틀림없다. 나훔은 니느웨의 멸망을 아직 미래의 일로 보고 있다(나 3:7). 그렇다면 나훔의 합리적인 연대는 B.C. 약 640년 이다. 앗수르의 멸망을 말하는 이 선지자의 예언이 앗수르가 그 번영과 권세가 극에 달했을 때 기록되었다는 사실은 나훔서가 성서적 예언임을 뚜렷이 증명하여 선지자들이 하나님의 영감을 받았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다. 아수르바니팔 치세 때는 초생달형 옥토(Fertile Crescent)에 위치한 대부분의 나라들은 앗수르 군대에게 점령되었거나 조공을 바치고 있었다. 그러나 그가 죽기도 전에 판도는 바뀌기 시작했고 그가 죽은 후에(B.C. 626년경) 앗수르 제국은 곧 붕괴되었다. 마침내 석달 동안 포위 당한 끝에 니느웨는 메대와 바벨론에 의해 B.C. 612년에 함락되고 말았다.

     4. 주제

     나훔서에는 뛰어난 한가지 주제가 있는데, 곧 니느웨의 임박한 운명이다. 
    그것 때문에 이 예언은 요나의 기별에 대한 보충이다. 
    요나는 니느웨에게 회개하라고 전파했으며 그 거민들이 하나님 앞에서 겸비했으므로 그 도성은 구원을 받았다. 
    그러나 앗수르는 또 다시 죄악에 빠졌으며, 그 성의 멸망에 대한 하나님의 선고를 예언하는 것이 나훔의 짐이었다. 
    니느웨의 교만, 잔인, 우상 숭배는 그 도를 넘었다. 
    너무나도 오랫동안 앗수르의 왕들은 하늘의 하나님과 그분의 주권을 무시하고 우주의 창조주를 주변 국가들의 우상들과 동등하게 취급하였다(왕하 18:33-35; 19:8-22). 
    왜냐하면 앗수르의 왕들은 다른 나라들과 싸울 때 자기들의 신 아슈르(Ashur)의 소원을 성취시키고 있다고 상상하였기 때문이다. 
    하나님께 대한 앗수르의 도전은 만일 그들이 회개하지 않는다면 멸망으로라도 그쳐져야만 하였다. 
    유다에서의 앗수르 세력의 몰락은 이미 이사야에 의해 예언된 바 있으나(사 37:21-38), 나훔의 예언은 그 제국의 수도가 종국적으로 멸망할 것임을 보여주고 있다.

     5. 개요

    Ⅰ. 니느웨를 징벌하시는 하나님의 목적 1:1-15
         1. 서언 1:1
         2. 악인을 징벌하시는 하나님의 능력 1:2-8
         3. 임박한 징벌의 확실성 1:9-15

    Ⅱ. 니느웨의 임박한 멸망에 대한 서술 2:1-13
         1. 도성의 포위와 점령 2:1-8
         2. 도성의 약탈 2:9-13

    Ⅲ. 니느웨 도성의 죄악 으로 인한 징벌 3:1-7

    Ⅳ. 니느웨의 멸망의 표본인 노아몬의 멸망 3:8-11

    Ⅴ. 니느웨의 멸망의 종국과 그 철저함 3:12-19



    [기록연대]
    본 서의 저작 시기는 대략 주전 663~612년으로 보고 있다. 왜냐하면 본 서의 기록(나3:8)에 나타나 있는 것처럼 현재의 '티벳'인 노사몬의 멸망을 주전 661년으로 보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또 한 가지는 니느웨의 멸망(나1:12)을 미래적인 사건으로 보고 있는데, 이 예언은 니느웨가 멸망당하기 이미 4년 전에 되어진 것이라고 한다. 이것은 니느웨가 멸망하기 이전에 항상 번영을 누리며 살고 있었던 도시라는 것을 증명하고 있다. 즉 그 시기가 멸망당하기 전인 주전 654년경이었다고 증거한다. 그러나 본 서에 기록된 예언은 사건 후의 예언이라고 하면서 주전 612년 후에 기록되어진 것이라고 하는 기자도 있다.

    [배경]
    본서에 언급된 앗수르는 B.C. 722~721년에 이미 사마리아를 멸망시켰으며 북왕국의 사람들을 포로로 잡아갔으며 유대인에게도 위협적인 존재였었다. 요나는 일찌기 니느웨의 멸망을 예고한 바 있지만(<욘 3:4>), 그들이 회개함으로 잠시 동안 멸망을 피할 수 있었다. 그러나 오래지 않아 니느웨는 또다시 극도의 잔인함과 사악함으로 되돌아갔다. 이들은 마침내 B.C. 612년에 이르러 멸망되고 말았다.

    [특징]
    본서는 요나 사역 150년 이후의 기록으로서 니느웨의 멸망을 예언하고 있다. 따라서 본서에는 유다의 대적인 앗수르에 대한 분노와 증오, 그리고 그들의 멸망에 대한 기쁨이 적나라하게 기록되어 있다. 앗수르 군대의 잔인성은 유다인들에게 공포의 대상이었던 바 그들의 멸망은 유다의 기쁨이 아닐 수 없었던 것이다.

    [목적]
    본 서의 목적은 한마디로, 하나님의 대적자들은 결국에 가서는 하나님의 심판을 받게 된다는 것을 기록하고 있다. 요나서와는 다른 목적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악인과 의인들에게 보여지는 하나님의 공의로우심을 나타내고 있다. 앗수르의 심판은 유다의 구원을 의미하고 있으며, 유다가 당하는 고통은 앗수르의 죄악된 모습을 전제로 하고 있다. 본 서의 내용으로 보아 앗수르의 압제를 받는 유다가 그들에 대한 증오로 가득차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따라서 앗수르가 멸망할 것이라는 예언은 유다인들에게는 기쁨의 소식이요, 희망의 소식이었다. 따라서 앗수르에 대한 유다인의 입장이 정확히 나타나고 있다. 본 서의 내용은 크게세 가지로 구분할 수 있다. 그것은 모두 니느웨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의 예언이 연계되어 있다. 이러한 내용들이 보여 주는 것은 한결같이 하나님의 공의로우심이다. 한 도시 니느웨의 멸망은 결국 하나님을 대적하는 무리들이 어떠한 삶을 살지라도 하나님의 심판을 받게 된다는 사실을 주지시키고 있는 것이다.

    [구조]
    나훔서는 세 부분으로 나누어진다. 즉 멸망이 선포됨(1장), 멸망이 묘사됨(2장), 멸망이 불가피함(3장)이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무엇을 하실 것인가? 하나님께서 어떻게 그것을 하실 것인가? 하나님께서 왜 그것을 하실 것인가?로 대별된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은 이스라엘 뿐만 아니라 모든 민족의 역사를 주관하시는 전 우주적 통치자이심을 발견하게 된다. 모든 니느웨 백성들이 천연적 방어물로 그토록 믿고 자랑하던 티그리스 강을 넘치게 함으로써 그 성을 심판하신 것은 자기들이 만든 세상 문명을 의지하고 스스로 교만해 하는 많은 현대인들에게 진정한 평화와 영원한 안식을 주실 참 보호자는 오직 하나님 한 분 뿐임을 깨닫게 해 준다.

    [내용]
    부흥은 대개 단지 일시적일 수 있다. 요나가 갔던 니느웨의 경우도 예외는 아니었다. 약 백년 후에 앗수르의 죄악의 잔은 다시 넘쳤고 그들의 멸망이 임박해졌다. 나훔은 이 난공불락으로 보이는 도시 [해자, 성벽 및 높은 망대로 둘러쌓인] 가 어떻게 불과 홍수로 멸망할지를 미리 썼다. 사람의 요새는 그것이 아무리 견고하다고 하더라도 하나님께 응보를 받는 날에는 아무런 소용이 없는 것이다. 최후의 심판날 멸망치 않는 유일하고도 확실한 길은 영원하신 하나님과 밀접한 관계를 가져야 하는 것이다.

    [교훈]
    * 역사적인 교훈: 본서는 니느웨를 심판 하시는 하나님의 공의를 묘사함으로서 유다에 있는 신실한 자를 위로하고 있다. 특히 니느웨의 멸망은 불의한 국가와 부패한 백성은 반드시 패망하게 된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다.
    * 교리적인 교훈: 본서는 악인을 다루시는 하나님의 공의와, 의인에게 보여 주신 하나님의 선하심을 통해
    * 기독론적인 교훈: 본서는 그리스도를 질투하시는 하나님(1:2)으로, 그 대적에게 반드시 복수하시는 분으로 묘사하고 있다. 국가와 개인이 범죄하면 하나님은 그에 대하여 심판하시고, 인간은 전혀 대항할만한 자격이 없음을 알게 해 준다.


    고대 앗수르 제국의 역사: 세계 최초의 제국에서 몰락까지

    고대 앗수르 제국은 인류 역사상 최초로 메소포타미아, 레반트, 이집트 지역을 통일한 강력한 제국으로, 기원전 2450년부터 기원전 609년까지 약 1800년 동안 서아시아에서 정치적, 문화적 명맥을 유지했습니다. 초기 청동기 시대부터 후기 철기 시대에 이르기까지 앗수르는 끊임없는 군사적, 경제적, 정치적 혁신을 통해 강력한 제국으로 성장했지만, 결국 내외부적인 압력에 의해 몰락의 길을 걷게 되었습니다. 이번 글에서는 앗수르의 흥망성쇠를 역사적 관점에서 자세히 살펴보겠습니다.

    1. 앗수르의 기원과 초기 역사

    앗수르의 기원에 대해서는 많은 부분이 불명확하지만, 대체로 기원전 2500년경 북부 메소포타미아의 아수르라는 도시에서 시작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이 도시는 남부 수메르 도시 문화의 영향을 받았으며, 아카드 왕국의 지배하에 있던 시기에는 상당히 아카드화된 풍습과 신앙을 갖추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앗수르인들은 수메르어나 아카드어와는 전혀 다른 언어를 사용했으며, 기원전 2000년경부터 독자적인 세력을 구축하면서 본격적인 앗수르 역사가 시작되었습니다.

    초기 앗수르는 중개무역을 통해 경제적 성장을 이루었습니다. 히타이트 기록에 따르면 앗수르인들은 아나톨리아의 카네시 지역에 교역 기지를 설립하고 금, 은, 구리 등을 다른 지역으로 팔고, 이란 고원에서는 주석을, 바빌로니아에서는 직물 등을 교환하여 급속히 경제적 기반을 다졌습니다. 이러한 중개무역의 성공은 앗수르가 정치적 통일을 이루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기원전 19세기 말, 샴씨 아다드 1세가 앗수르를 최초로 정치적으로 통일하면서 고앗수르 시대가 시작되었습니다.

    2. 고앗수르와 중앗수르 시대: 통일과 팽창

    고앗수르 시대는 샴씨 아다드 1세의 통치로 시작되었으며, 그는 유프라테스강 유역의 마리와 북부 메소포타미아 전역을 정복하며 앗수르의 정치적 통일을 이루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사후 앗수르는 내분과 분쟁으로 인해 급격히 쇠퇴하였고, 바빌로니아와 미타니 왕국의 속국이 되면서 오랜 침체기를 겪게 됩니다. 이 시기는 중앗수르 시대의 시작을 알리는 시기로, 앗수르가 다시 부흥의 길을 걷기 시작한 시기입니다.

    아슈르 우발리트 1세의 통치 아래, 앗수르는 히타이트와의 동맹을 통해 미타니 왕국을 공격하여 독립을 쟁취하였고, 이후 아다든 이라리 1세에 이르러서는 강력한 군사력을 바탕으로 미타니 왕국을 앗수르의 속국으로 만들었습니다. 이 시기 동안 앗수르는 약 160년간 팽창 정책을 펼치며 전성기 시절의 영토를 회복하려 노력했습니다. 그러나 12세기 바다민족의 침입과 함께 청동기 문명의 붕괴로 인해 앗수르의 팽창은 한계를 맞이하게 되었고, 주변 민족들의 끊임없는 침략을 받으며 다시 한 번 쇠퇴의 길을 걷게 됩니다.

    3. 신앗수르 제국의 부흥과 확장

    앗수르의 부흥은 아슈르단 2세에 의해 시작되었습니다. 그는 주변의 적들을 진압하고 다시 정복 사업을 재개하면서 본격적인 신앗수르 시대를 열었습니다. 그의 후계자들은 빠르게 주변국들을 정복하며 앗수르의 영토를 확장해 나갔습니다. 신앗수르 제국의 군사적 성공은 철제 무기와 기마병, 그리고 최초의 정규군 편성에 기반한 것이었습니다. 이러한 혁신적인 군사력 덕분에 앗수르는 단기간에 서아시아의 강국으로 부상할 수 있었습니다.

    특히 아슈르나시르팔 2세와 그의 후계자들은 피도 눈물도 없는 잔인한 통치로 유명했습니다. 아슈르나시르팔 2세는 점령지에서 반란이 발생할 경우, 반란자들을 잔혹하게 처형하고 그 기록을 남겨 다른 국가들에게 공포심을 심어주었습니다. 그는 공포 통치를 통해 앗수르의 안전을 보장하려 했으며, 이러한 방식은 그의 후계자들에게도 계승되었습니다. 하지만 동시에 아슈르나시르팔 2세는 문화적 융성을 위해 노력했으며, 수도를 님루드로 옮기고 대규모 건축 사업을 추진하여 앗수르의 문화적 중심지로 만들고자 했습니다.

    4. 앗수르의 쇠퇴와 몰락

    신앗수르 제국의 전성기는 티글라트필레세르 3세와 사르곤 2세 시기에 이르러 절정에 달했습니다. 이들은 군사적 개혁과 대규모 정복 전쟁을 통해 앗수르의 영토를 서아시아 대부분으로 확장하였습니다. 특히, 티글라트필레세르 3세는 최초로 상비군을 편성하고, 기병대를 도입하는 등 군사 혁신을 이루어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과도한 군사력 사용과 잦은 전쟁은 국력을 소모시키는 원인이 되었습니다.

    앗수르는 이후 내부적인 문제와 외부적인 압력으로 인해 점차 쇠퇴하게 되었습니다. 사르곤 2세의 사망 이후, 그의 아들 산헤립은 수도를 니느웨로 옮기고 반란을 진압하는 데 집중했지만, 끊임없는 내분과 속국들의 반란으로 인해 제국은 점점 더 약해졌습니다. 최종적으로 앗수르는 기원전 612년 메디아와 신바빌로니아 연합군의 공격을 받고 수도 니느웨가 함락되면서 역사 속으로 사라지게 되었습니다.

    5. 앗수르 제국의 유산과 교훈

    앗수르 제국의 멸망은 몇 가지 중요한 원인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우선, 앗수르는 넓은 영토를 효과적으로 관리할 수 있는 체계를 구축하지 못했습니다. 잔혹한 통치는 피정복지의 단결을 초래했고, 이는 다시 반란으로 이어져 앗수르의 국력을 더욱 소모하게 했습니다. 이러한 악순환을 방지하기 위해 대규모 강제이주 정책을 실시했지만, 오히려 앗수르 본토의 인구 과밀을 초래하고, 장기적인 가뭄이 겹치면서 멸망을 재촉하게 되었습니다.

    오늘날에도 앗수르인의 정체성을 유지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이 존재합니다. 그들은 언어와 문화를 간직한 채 현재까지 살아남은 가장 오래된 민족 중 하나로, 이라크 북부, 시리아 북서부 등에 약 300만 명이 거주하고 있으며, 전 세계적으로 약 400만 명의 앗수르인이 존재합니다.

    고대 앗수르 제국의 역사에서 우리는 강력한 군사력과 잔혹한 통치만으로는 제국의 장기적인 안정과 번영을 보장할 수 없다는 교훈을 얻을 수 있습니다. 제국의 영광과 몰락은 강력한 힘의 양면성을 보여주며, 그 역사는 오늘날에도 많은 것을 시사하고 있습니다.



    앗수르(아시리아)와 나훔 선지자(B.C. 7세기)

    진리의쉼터 | 블로그
    11~14분

    150년 전에 앗수르의 수도 니느웨는 요나의 전도를 받고 왕에서부터 모든 백성이 회개함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용서를 받고 구원을 받았다.

    그런데 150년 만에 앗수르는 더 이상 하나님의 긍휼을 기대할 수 없을 만큼, 즉 하나님께 중한 경고를 들어야 할 만큼 타락해 버렸다. 결국 하나님께서는 나훔 선지자를 통해 앗수르의 완전한 멸망을 예언하신다.

    “니느웨에 대한 경고 곧 엘고스 사람 나훔의 묵시의 글이라.”(나 1:1)

    나훔 선지자는 니느웨가 범람한 물로 진멸될 것이며, 하나님께서 니느웨를 흑암으로 쫓아내실 것이라고 완전한 멸망을 말씀하신다.

    “그가 범람하는 물로 그 곳을 진멸하시고, 자기 대적들을 흑암으로 쫓아내시리라.”(나 1:8)

    티그리스 강의 강물이 니느웨를 덮어 그 위에 토사가 쌓여 있었기에 니느웨는 그 흔적을 발견할 수 없었던 것이다.

    150년 전 요나 선지자를 통해 은혜와 긍휼을 베푸셨던 하나님은 이제 나훔 선지자를 통해서는 니느웨에 대한 완전한 멸망을 가차 없이 말씀하신다. 반드시 멸절하시겠다는 것이다. 반드시 멸절될 것이기 때문에 더 이상 괴롭게 할 것도 없다고까지 말씀하신다.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십니다.

    “그들이 비록 강하고 많을지라도 반드시 멸절을 당하리니 그가 없어지리라. 내가 전에는 너를 괴롭혔으나 다시는 너를 괴롭히지 아니할 것이니라.”(나 1:12)

    나훔서가 기록되기 약 100년 전(B.C. 760년 경) 니느웨는 죄악이 관영하여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마땅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요나 선지자를 통해 그들에게 회개를 촉구하시고 그들이 회개를 하자 심판을 유보하여 주셨다. 이처럼 하나님께서 멸망 받아 마땅한 니느웨에 대한 심판의 손을 거두신 것은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요 사랑의 결과였다. 그런데 회개 운동이 일어난지 약 100여년이 지난 나훔 선지자 당시의 니느웨 사람들은, 지난 날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배신하고 도리어 이전보다 더 교만하며 사악하기 그지없었다. 그들은 이웃 민족에 대하여 매우 포악했고 간교했으며, 지극히 교만했다.

    디글랏빌레셀 3세 치하의 앗시리아 제국

    즉 앗수르는 부흥기였던 ‘디글랏 빌레셀 3세(B.C. 745-727’와 그의 아들 ‘살만에셀 5세(B.C. 727-722)’ 때에 영토 확장을 위한 정복 전쟁 정책을 지속적으로 시행하였고, 이러한 정책은 국가의 성격을 호전적이고 무자비한 것으로 만들어 다른 민족에 대한 학대와 착취, 그리고 약탈을 서슴치 않게 되었다.

    성경에서 때로는 ‘불’로 알려지기도 한 ‘디글랏빌레셀 3세(B.C. 745-727)’ 가 아시리아(앗수르)의 왕 위에 오른 이후로 아시리아는 고대 근동 의 제국으로 자리를 잡았다. 종주국의 위치에서 군림했던 아시리아는 단순히 종주국들의 정치에 관여하며 조공을 받는데에 그치지 않고 그들의 사회, 종교에도 영향력을 행사한 나라였다. 이런 상황에서 약소국가인 유다와 이스라엘의 처지는 당연히 어려울 수밖에 없었다.

    열왕기하는 유다의 아하스와 이스라엘의 므나헴이 디글랏빌레셀과 어떤 관계에 놓여 있었는지를 잘 묘사하고 있다. 북 왕국의 므나헴은 디글랏빌레셀로부터 자기 정권의 정당성을 인정받기 위하여 그에게 은 1,000달란트를 주었다.

    “앗시리아의 불 왕이 그 땅을 치려고 올라오니, 므나헴은 불에게 은 천 달란트를 주었다. 이렇게 한 것은, 그의 도움을 받아서 자기 왕국의 통치권을 굳게 하려 함이었다. 므나헴은, 앗시리아 왕에게 바치려고, 이스라엘의 모든 부자에게 한 사람당 은 쉰 세겔씩을 바치게 하였다. 그러자 앗시리아 왕은 더 이상 그 땅에 머물지 않고 되돌아갔다.”(왕하 15:19-20, 새번역)

    유다 왕 아하스는 시리아의 르신과 이스라엘의 베가가 반아시리아에 반역에 가담하지 않은 그를 치기 위하여 예루살렘을 공략했을 때, 사람들을 보내 디글랏빌레셀의 도움을 받아 위기를 모면했다. 이 일이 있은 후 아시리아의 신을 숭배하는 제단이 예루살렘에 세워졌으며(왕하 16:10-16), 이들의 정치 경제적인 압박은 나훔 선지자가 활약하던 시대까지 지속되었다. 아하스 시대부터 유다는 100여 년 동안 아시리아의 종속국으로 존재했다. 아시리아는 유다 사람들에게 있어 그들을 억압하는 혹독하고 무자비한 종주국이었다. 이스라엘에게 한없이 잔인하기만 했던 아시리아는 니느웨를 중심으로 형성된 나라였다.

    앗수르의 수도 '니느웨'

    니느웨(니네베)는 도시 중심을 흐르는 코서 강에 의하여 남과 북으로 나뉜 곳이었다. 북쪽 지역은 면적이 남쪽 지역의 두 배에 달했으며, 13Km의 성벽으로 둘러싸였던 니느웨의 면적은 1,800에이커(총 225만평) 정도 되었다. 당시 도시국가치고는 매우 큰 규모라 할 수 있다. 고고학자들은 니느웨가 주전 5,000년부터 도시로 존재했으며, 3,000년 이후부터 이 도시에 이스타르 여신의 신전이 있었다고 말한다.

    이스라엘이 한창 가나안에 정착하던 B.C. 1400~1200년에 이르러 살만에셀(1세)과 디글랏빌레셀(1세)이 대단한 건축 사업을 통하여 니느웨의 규모를 키웠다. 주전 700년경에 산헤립이 니느웨에 새 궁궐을 세우고 아시리아의 수도로 삼으면서 도시는 최고의 전성기를 맞이하게 되었다.(이때까지 아시리아의 수도는 앗술이었다). ‘산헤립’은 도시에 정원들을 세웠고, 약50Km에 달하는 수로 시스템을 건설하였다. 그의 후계자들인 ‘에살핫돈’과 ‘아술바니발’도 꾸준히 건축사업을 지속해 나갔다. 특히 아술바니발의 도서관은 수만 점의 흙판 문서가 보존된 상태에서 발굴되어 고고학자들과 역사가들에게 매우 중요한 자료를 제공해 주고 있다.

    히스기야가 유다를 통치하던 시대에 산헤립은 유다를 공략하여 히스기야를 예루살렘에 마치 ‘새를 새장에 가두듯이’ 가두어 둔적이 있었다. 다행히 하나님의 기적적인 개입으로 유다는 풍전등화의 위기를 모면했다(사 36-39장, 왕하 18장). 그러나 산헤립이 유다에서 철수한 다음에도 아시리아의 영향력은 유다 땅에서 지속되었다.

    므낫세(B.C. 697-643)는 바알과 아세라를 중심으로 한 아시리아의 종교를 지향했으며(왕하 21:3), 그의 아들 아몬은 암살될 때까지 2년 동안 아버지보다 더한 배교행위를 지향했다(왕하 21:23). 아몬이 왜 암살을 당했는지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아마도 유다의 외교정책에 변화를 추구하던 자들의 음모에 의하여 저격되었을 것이다(Malamat).

    아몬의 아들 요시야가 왕이 되었을 때(B.C. 641년) 아시리아는 유다의 종주국으로 이미 100여년 동안 군림해 오던 상황이었다. 아마도 이때 대부분의 유다 사람들은 옛적 다윗시대에 누렸던 정치적, 종교적 독립을 갈망했을 것이다. 이러한 갈망 속에서 아시리아의 마지막 왕 아술바니발이 B.C. 627년에 죽자, 요시야는 기다렸다는 듯이 종교개혁을 단행했다(대하 34:3).

    그는 예루살렘에서 이방 종교들의 흔적을 뿌리뽑고자 했으며, 바알제단과 아세라 상들을 자신이 보는 앞에서 부수도록 했다(대하 34:3-7). 이같은 행위는 아시리아의 신들을 거부하며 므낫세의 종교적 복합주의를 지탄하는 것을 의미했다(Bright).

    앗수르 왕조

    이런 정황에서 볼 때 B.C. 627년은 고대 근동뿐만 아니라, 이스라엘의 역사 속에서도 매우 중요한 해였다. 이 해에 '아술바니발의' 죽음은 곧 아시리아의 쇠퇴로 이어졌다. 그의 죽음은 아시리아의 내부적 갈등으로 이어졌으며, 반유목민으로 분류되는 키메리오스족, 스키타이족, 메대족 등이 압력을 가해왔다. 지금까지 아시리아의 속국으로 있었던 바벨론에서는 나보폴라살(Nabopolassar)이 왕이 되었으며, B.C. 623년에는 아시리아로부터 독립을 선언하였을 뿐만 아니라, 아예 아시리아 공략에 나섰다. 아시리아는 B.C. 614년에 앗술을 메대 사람들에게 빼앗겼으며, B.C. 612년에는 갈그미스 전투를 통하여 아시리아를 지도에서 지워버렸다.

    아시리아(앗수르)의 이스라엘 침략

    '아술바니발(아슈르버니팔)'이 죽은 B.C. 627년에 유다에서는 ‘예레미야’와 ‘스바냐’, 두 선지자가 사역을 시작했다. 선지자들은 이처럼 국제 정세가 불안한 시기에 유다가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해야 한다고 호소했다. 나훔은 예레미야나 스바냐보다 더욱더 강도 높게 아시리아의 종말을 선언함으로써 앞으로 하나님의 백성인 유다가 진정한 종교의 자유를 누리게 될 것이니 그때를 위하여 미리 준비하라는 권면을 하고 있다.

    게다가 성전을 보수하던 제사장 '힐기야'가 B.C. 621년에 율법 책을 발견한 사건은 이러한 기대와 함께 종교개혁에의 의지를 더욱더 확고하게 하였을 것이다. 율법책이 발견된 후에 이스라엘은 유월절을 지키고 점술가들을 그들의 영토에서 몰아냈다. 이러한 노력을 높이 평가한 열왕기 저자는 ‘요시야’를 전무후무한 왕으로 평가하였다.

    “요시야와 같이 마음을 다하며 뜻을 다하며 힘을 다하여 모세의 모든 율법을 따라 여호와께로 돌이킨 왕은 요시야 전에도 없었고 후에도 그와 같은 자가 없었더라.” (왕하 23:25)

    유다의 왕 요시야 통치기간(B.C. 641-609년)이 나훔 선지자의 사역 후반기와 겹친다는 점을 감안하면, 당시 아시리아의 지배하에 힘들어하던 요시야 왕이 나훔 선지자의 메시지를 통하여 큰 위로를 얻었을 것을 충분히 상상할 수 있다. 요시야는 종주국으로 섬기기를 힘들어하고 괴로워하던 아시리아가 곧 망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는 메시지를 들을 때마다 아마도 앓던 이가 빠지는 시원함을 느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아시리아의 최종적인 종말은 보지 못하고 B.C. 609년에 므깃도에서 죽었다. 아시리아가 B.C. 625년에 제국의 위상이 흔들리기 시작했지만, B.C.. 605년에야 갈그미스에서 이집트의 도움에도 불구하고 바벨론 –메대 연합군에 퍄하여 지도에서 사라졌기 때문이다.

    앗수르 제국의 민족혼합과 강제이주정책

    고대 사료에 의하면 앗수르는 적국을 완벽하게 초토화하거나 폐허로 만드는 것에 대해 대단한 자긍심을 가졌으며, 반란자들에 대해서는 살가죽을 벗기는가 하면 각을 뜨기도 했다고 한다. 또한 앗수르는 약소국과의 약속을 배반하고 속이기를 잘했다고 한다. 한마디로 앗수르는 그들의 간교함과 다른 민족의 피 위에 건설된 국가였다.

    하나님께서는 나훔 선지자를 통해 앗수르를 고칠 수 없고, 앗수르가 망햇다는 소식에 모두들 손뼉을 칠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왜냐하면 고대 근동에 앗수르로 인해 고통 받지 않은 나라가 없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앗수르 왕이여, 네 목자가 자고 네 귀족은 누워 쉬며, 네 백성은 산들에 흩어지나 그들을 모을 사람이 없도다. 네 상처는 고칠 수 없고, 네 부상은 중하도다. 네 소식을 듣는 자가 다 너를 보고 손뼉을 치나니 이는 그들이 항상 네게 행패를 당하였음이 아니더냐 하시니라.” (나 3:18-19)

    신바빌로니아 제국의 발흥

    앗수르 제국의 멸망(B.C. 609년)

    앗수르는 지난 100여 년 동안 적다운 적의 대항을 받아본 적이 없었다.

    앗수르(아시리아)는 B.C. 732년에 유다 왕 아하스의 요청에 따라 시리아를 멸망시켰으며, 사마리아를 쑥대밭으로 만들었다. B.C. 722년에는 북왕국 이스라엘과 사마리아의 뿌리를 뽑아버렸다. B.C. 701년에는 유다를 침략하여 예루살렘을 제외한 모든 성을 차지한 적이 있다. B.C. 663년에는 천연의 난공불락 요새로 알려졌던 이집트의 수도 테베를 점령했다.

    그러나 B.C. 609년 신흥 강대국 바벨론에게 앗수르는 수백 년을 이어온 상 아시아의 주인 자리를 완전하게 내주어야 했다. 앗수르의 수도 니느웨는 B.C. 612년 이미 바벨론에게 함락되었고, 하란으로 수도를 옮긴 앗수르는 바벨론의 하란 공격으로 인해 B.C. 610년 하란까지 내주어야 했다.

    앗수르 제국을 계승할 야심을 품고 앗수르 패잔병들과 함께 바벨론을 대항하려 했던 애굽의 바로 느고가 B.C. 609년 하란을 재탈환하려다 실패함으로 말미암아 앗수르는 B.C. 609년 제국으로서의 깃발을 완전히 뽑아야만 했다. 그렇게 잔인하고 무섭던 앗수르의 왕들도 모두 사라지고, 앗수르의 마지막 모습은 왕궁에 불을 질러 스스로 자기 목숨을 버리는 비겁함 그 자체였다.

    나훔의 예언대로 앗수르의 멸망은 고대 근동 많은 나라들로 하여금 박수를 칠 만큼 기쁜 소식이 되었다. 왜냐하면 앗수르는 오랜 세월 제국주의를 펼치면서 매우 잔인한 방법으로 피지배 민족들을 통치했기 때문이다.

    다음은 앗수르 왕의 어느 기념비에서 새겨진 문구이다.

    『나는 귀족들의 겁데기를 벗겼고, 3000명의 포로들을 불에 태워 죽였다. 나는 한 명의 포로도 남겨 두지 않았다. 나는 그들의 손과 발을 자르고, 코와 귀를 베어 내기도 하였다. 수많은 병졸들의 눈을 도려내기도 하였으며, 처녀들을 통째로 굽기도 하였다.』

    그후 바벨론에 의해 이미 점령되어 있던 아수르의 수도 니느웨(니네베)는 나훔의 예언대로 홍수로 물이 범람해 도시 위로 6m나 토사가 쌓여 B.C. 609년부터 A.D. 1846년까지, 2,450년 이상 그 존재를 깊은 땅 속에 묻어두게 되었다.

    앗수르는 정복한 나라의 민족의 경계를 무너뜨려 혼혈족을 만들어 각 민족의 독특성을 소멸시킴으로 반란의 근원을 도려내, 그들의 제국을 영원하게 하려고 했다. 사마리아가 그 예이다.

    물론 하나님께서 북이스라엘의 죄가 너무 심해지자, 앗수르를 몽둥이로 들어 사용하신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나라와 민족과 거주의 경계는 대제국에 의해 재편성될 수 있는 그런 것이 아니다. 거주의 경계를 이미 태초부터 정하신 분은 하나님이시고, 고유한 각 민족들을 만드신 분도 하나님이시다.

    일찍이 앗수르 민족을 용서하시려는 하나님의 의도를 간파하고 앗수르 민족 경계를 넘지 않으려는 요나를 설득하셔서 앗수르의 수도 니느웨로 보내 구원의 말씀을 선포하게 함으로 니느웨의 12만 명의 생명과 가축들을 살리셨던 분이 하나님이시다.

    이후 북이스라엘의 점령한 앗수르가 남유다로 공격해올 때 이사야 선지자는 히스기야에게 하나님의 뜻을 전했다. 하나님의 뜻은 앗수르가 사마리아까지는 정복했으나, 예수살렘까지는 정복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예루살렘은 하나님께서 다윗과 맺은 언약 때문에 지켜주신다는 것이었다. 앗수르가 차지할 수 있었던 땅의 경계는 사마리아까지였음을 하나님께서는 분명하게 말씀하신 것이다.

    앗시리아의 영토 변화

    주전 700년경의 아시리아 제국

    앗수르와 신바빌로니아의 영역

    [ 앗수르와 이스라엘의 왕국 연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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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슬기로운 며느리

    어느 집에 효심 많은 맏며느리가 있었습니다. 그녀는 비록 살림은 넉넉하지 않았지만 식탁을 같이 해서 밥을 먹을 때면 항상 시아버지 국에 고기를 듬뿍 담아 드리고 자신의 국에는 고기 건더기를 넣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식사 기도 시간에 시아버지는 몰래 국을 바꿔 놓곤 했습니다. 그러면 맏며느리가 곧 눈치를 채고 그것을 도로 바꾸어 놓았습니다.

    세월이 지나서 맏며느리의 자녀들은 항상 맛있는 음식이 생기면 부모님을 먼저 대접하는 효성이 지극한 자녀들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둘째 며느리는 항상 부모님 대접하는 것을 못마땅하게 여겨 정성껏 대접하지 않고 대신 자기 자녀들을 잘 먹였습니다. 노인들에게 내놓는 음식은 언제나 가장 험한 그릇에 먹다 남은 것을 담아서 드렸습니다. 그리고 자녀들에게는 가장 좋은 음식들만 먹였습니다.

    ​둘째 며느리도 할머니가 되어 자녀들의 음식 시중을 받게 되었습니다. 자녀들은 항상 맛있는 것은 감추었다가 손자들에게 주었고, 먹지 못하고 버릴 것들만 어머니에게 대접했습니다. 음식을 담아온 그릇도 고양이 밥을 주던 그릇을 물로 씻어온 것이었습니다. 그녀는 가슴이 너무 아팠지만 자기가 대접한 대로 결국 대접을 받는 것을 깨닫고 후회했습니다. 그러나 이미 때는 늦었습니다. 그녀는 탄식 속에 남은 여생을 보내야 했습니다.

    2. 늙은 말의 지혜

    제 환공이 고죽을 토벌할 때의 일이다. 봄에 출정하여 겨울이 되어서야 귀환하게 된 연고로 주위의 풍경이 생경하여 그만 중도에 길을 잃고 말았다. 이 때 마침 중신 관중과 습붕이 환공을 수행하고 있었다. 관중이 환공에게 늙은 말을 풀어 그 뒤를 따를 것을 권했다. 그의 말대로 늙은 말을 풀어놓고 그 뒤를 따르니 마침내 길을 제대로 찾을 수 있었다.

    그리고 얼마 후 산길에 들어섰는데 마실 물이 없어 모두가 기갈에 허덕이게 되었다. 이 때 습붕이 환공에게 말했다. “개미는 겨울에 산의 남쪽에, 여름에는 산의 북쪽에 서식하는 습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개미집 아래 여덟 자를 파면 거기에 반드시 물이 있다고 들었습니다. 산기슭 남쪽으로 돌아 한번 개미집을 찾아보는 것이 좋겠습니다.” 그대로 하였더니 과연 먹을 물을 얻을 수 있었다.

    ​관중이나 습붕 같이 지혜로운 자도 모르는 것이 있으면 말이나 개미 같은 동물에게조차 배우기를 서슴지 않거늘 오늘날 사람들은 어리석으면서도 성인의 지혜를 스승으로 삼는 도리를 알지 못하니 참으로 유감스러운 일이라 아니할 수 없도다.

    청소년 여러분! 사람이 어려운 문제를 해결하는 데는 노련한 지혜와 경험이 큰 몫을 하게 됨을 명심합시다. 우리는 선배들의 노련한 지혜와 경험을 겸손하게 받아 들여 우리 생활에 활용해야 하겠습니다. 경험이 많은 분들의 뜻을 바탕으로 새로운 지혜를 창출한다면 우리의 생활에 많은 도움이 될 것입니다.

    3. 사자의 지혜

    동물들의 세계에 전쟁이 일어났습니다. 사자가 총지휘관이 되었고 동물들이 사방에서 몰려들었습니다. 동물들은 서로를 쳐다보며 한심하다는듯이 수군거렸습니다.

    "당나귀는 멍텅구리라서 전쟁에 방해만 될 테니 돌아가는 게 낫지."

    "토끼 같은 겁쟁이가 어떻게 싸움을 한다고 온 거야! 한심하군."

    "개미는 힘이 약해 어디다 쓰겠어?"

    "코끼리는 덩치가 커서 적에게 금방 들통나고 말걸."

    이때 총지휘관인 사자가 호통을 쳤습니다.

    "씨끄럽다. 모두 조용히 해라! 당나귀는 입이 길어서 나팔수로 쓸 것이다. 그리고 토끼는 걸음이 빠르니 전령으로 쓸 것이며, 개미는 작아서 눈에 안 띄니 적진에 게릴라로 파견할 것이고, 코끼리는 힘이 세니 전쟁 물자를 운반하는 일을 할 것이다."

    지혜로운 사람은 단점을 장점으로 살려 씁니다. 직장에서, 가정에서, 누군가의 단점이 보이십니까? 또는 나 자신의 단점 때문에 좌절하시나요? 나와 타인의 장점을 볼 수 있는 눈을 크게 뜬다면 분명 삶이라는 전투에서 승리할 것입니다.


    4. 개미의 지혜

    성경에 보면 하나님께서 개미의 지혜를 배우라고 하셨다. 도대체 개미에게서 무엇을 배운다는 것인가..

    ​첫째, 노동의 윤리를 배워야 한다. 개미는 성충으로 겨울을 나기에 먹이가 부족한 계절을 위해 식량을 저장한다. 여기서 개미의 저축생활을 배워야 한다.

    ​둘째, 컨베이어 벨트식 분업의 공정을 배워야 한다. 개미는 군락을 이뤄 경제활동을 하기 때문에 생산성을 높일 수 있다. 개미의 경영방식은 철저한 분업제도다.

    셋째, 번식의 분업을 배워야 한다. 가장 신기한 것은 번식 분업이다. 여왕 개미는 평생 알을 낳는 일에 전념하고, 일개미는 여왕을 도와 군락의 번식에 필요한 제반업무를 담당한다. 개미는 그야말로 고도로 조직된 기업경영을 방불케 한다.

    ​하나님은 개미의 이런 지혜를 배우라고 말씀하신다. 나는 과연 내가 속한 자리에서 제 역할을 하고 있는가. 가정 교회 사회에서 빛을 발하고 있는가.. 아니면 행여 걸림돌이 되고 있지는 않은가..


    5. 말썽꾸러기의 지혜

    23년 전 다섯 살 된 내 아들이 말썽을 부리다 아끼던 도자기를 깨뜨려 아내에
    게 매를 맞은 적이 있었다. 잘못을 인정한 아들은 회초리로 종아리를 다섯 대 맞았다. 그런데 아들이 갑자기 엄마의 목을 껴안고 울었다. “엄마, 엄마가 한번 맞아봐라. 얼마나 아픈데…. 내 다리에서 피나면 좋아?” 아내는 매를 던지고 아들을 품에 안았다.

    “아들아, 엄마가 잘못했다. 얼마나 아팠니. 다시는 엄마 말 거역하지 말고 잘 놀아야 돼.” 자식을 기르다 보면 각양각색이다. 체벌할 때 도망치며 부모 맘 아프게 하는 자식이 있고, 매 맞으면서도 엄마 품에 뛰어드는 자식이 있다.

    예수님은 우리의 모든 죄를 대신해 십자가 고통을 당하며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라고 절규했다. 이는 도망치는 절규가 아니라 하나님 품속으로 뛰어드는 아들의 기도다. “그래도 나는 하나님밖에 없습니다. 세상 모두가 나를 버려도 난 저들을 버릴 수 없어요. 나도 하나님을 버릴 수 없습니다.” 이런 기도였다.

    6.지혜로운 삶

    사람들은 실패를 두려워한다. 실패에는 고통이 따르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실패가 인생의 끝은 아니다. 오늘날 우리가 주어진 자신의 삶을 지혜롭게 살아야 할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그러면 어떻게 사는 것이 지혜롭게 사는 것일까? 현실을 바로 인식하며 사는 것이다.

    ​현실을 볼 줄 아는 사람이 있다. 현실을 볼 줄 모르는 사람도 있다. 현실을 볼 줄 아는 사람은 현실 속에서 하나님의 손길을 느낀다. 현실을 볼 줄 모르는 사람은 현실 속에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보지 못한다. 물고기의 IQ는 0.3 이라고 한다. 다른 물고기들이 낚시 바늘에 걸려 물 밖으로 끌려나가며 발버둥치는 것을 보면서도 입질을 한다.

    그것은 낚시꾼이 낚싯대를 쥐고 있는 것을 모르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자기 주변의 사람들이 망하는 것을 보면서도 또 그 일에 뛰어드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의 손길이 우리의 모든 현실을 움직이고 계심을 보는 눈을 가져야 한다.

    7. 지헤로운 나귀

    본문: 시편 63 장 10 절

    "칼의 세력에 붙인 바 되어 시랑의 밥이 되리이다"


    이리 한 마리가 풀밭에서 한가로이 풀을 뜯고 있는 나귀를 보았습니다. 이리는 적당한 거리까지 접근해서 잡아먹을 듯한 기세로 달려들었습니다. 나귀는 얼른 절름발이 시늉을 했습니다. 이리가 ‘자네, 왜 다리를 저는가?’ 하고 물었습니다. ‘울타리를 뛰어넘다 가시를 밟았네.

    그러니 나를 잡아먹기 전에 가시를 먼저 빼게. 그렇지 않으면 가시가 목에 걸릴 걸세.’ 나귀는 능청맞게 아픈 시늉까지 해보였습니다. 나귀의 이야기에 수긍한 이리는 함정에 빠진 것도 모르고 나귀의 뒷발을 들어올려 곳곳에서 가시를 찾았습니다.

    이때, 나귀가 발길질을 했습니다. 그러자 이리의 이빨이 다 부러져버렸습니다. 놀라움과 아픔으로 정신이 나간 이리는 와락 꽁무니를 빼면서 중얼거렸습니다. ‘이렇게 되어도 싸지. 아버지가 물려준 백정 일이나 열심히 했어야지, 의사 일은 당초 내 일이 아니었어.’

    ​세상에는 이리처럼 교활하고 잔인한 성품을 가진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이들은 자신의 힘으로 무엇을 하는 것이 아니라 노력을 기울이지 않고 공짜로 차지하려는 경향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들이 항상 이기는 것만은 아닙니다. 결국은 자기 꾀에 빠져서 망하기 때문입니다.

    * 기도: 악한 자들을 이기는 지혜를 주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