헬라어 성경에서 고린도전서는 ‘προς κορινθιους Α(프로스 코린디우스 알파)’로 불린다. 이는 ‘고린도인들에게 (보낸 첫 번째 편지)’란 뜻이다. 한글성경 ‘고린도전서’는 이 제목에서 유래되었다.
기록자와 연대
1) 기록자
본서의 기록자가 바울이라는 사실은 1:1, 16:21 등 본서의 내용 속에서 기록자가 스스로 자신을 바울로 밝히고 있는 것과
초대 교회 시대의 각종 문헌들이 본서의 기록자를 고린도 교회의 설립자이기도 하였던 바울로 한결같이 명시하고 있는 것으로 입증되어
일단 기록자 문제에 관한 한 별다른 이견은 없다.
2) 기록연대 / 장소
바울은 제2차 전도여행시에 고린도 지역에 대략 1년 6개월간 머물면서 사역하면서 복음이 전파 되게 되어 교회가 세워지게
되었다. 그리고 그가 그곳을 떠난 것은 A.D.51년 경이다. 바울은 고린도를 떠난 후 일단 예루살렘에 잠시 들른 후 자신의 본
교회인 안디옥 교회로 돌아갔다(행 18:18-23). 그 후 A.D.53년 다시금 제3차 전도 여행을 개시하여 갈라디아와
마케도니아 지역 등은 대강 둘러보는 정도로 그치고 에베소에 오래 머물면서 사역하였다. 바로 이 기간 중에 고린도 교회 내에 여러
문제들이 발생하게 되었다는 이야기를 전해 듣게 되었다. 바울은 자신의 전도 여행을 수행하던 디모데를 고린도 교회로 급히 파송하기도
하였고(고전 4:17) 급기야는 본서까지 기록하게 되었다. 그런데 바울은 본서를 쓰면서 16:8에서 이제 얼마 남지 않은 늦은
봄의 오순절을 보내고 고린도 교회로 가서 겨울을 함께 지내겠다고 말하고 있다. 한편 바울이 제3차 전도 여행 시 에베소에서 체류한
기간은 2년 6개월 이상이었다. 따라서 바울이 본서를 기록한 시기와 장소는 A.D.55년 초 에베소에서 기록한 것으로 결론지을 수
있다.
3) 고린도 지역의 특성과 배경
고린도는 헬라 반도 아랫부분에 자리 잡은 도시이다. 이 도시는 무역이 성행하고 있는 만큼 무역을 하기 때문에 부유층이
많았고, 동시에 노예나 가난한 자들도 많았다. 아울러 여러 다른 민족들이 섞여 살았으며, 유대인들도 거기에 많이 거주했다. 그
도시에는 우상을 위한 신당들이 많이 있는데, 지식충에서 주로 신봉하던 철학적 종교들, 로마 군인이나 행정 관료들이 숭배하던 종교들
등 각종 우상 숭배가 가득 하였고,, 애굽 알렉산드리아 항구에서 무역차 이 항구에 오는 배들이 많이 있어서 우상을 수입시킨데
있다. 그리고 신전에 1000명이나 되는 매춘부 들이 있는 등 성도덕이 문란하였다. 이러한 특징들이 주변에도 퍼지게 되어 음행하는
자를 가리켜 세칭 ‘고린도인’이라고 불리기도 했다.
기록 목적
사도 바울은 1년 6개월간 고린도에 머물면서 복음을 전하여 그곳에 교회가 세워지게 되었지만, 여전히 고린도인들은 혼합주의, 성적 문란, 무절제, 경박함 등의 당시 고린도 문화의 부정적 영향을 온전히 청산(淸算)하지는 못했다.
바울이 고린도 교회를 떠난 후 3차 전도여행시 에베소에 있을 때에 고린도 교회의 이야기를 직·간접적으로 듣게 되었다.
고린도교회는 곧 각종 오류와 범죄의 소용돌이에 휘말리게 되어 교회 내에서 파당이 형성되어 분열을 일삼게 되었고, 극심한 성범죄가
야기되어도 이를 방치하는가 하면, 성도 상호 간에도 소송을 일으키기도 했다. 이러한 여러 가지 문제를 알게 된 바울은 디모데 등의
사역자를 고린도 교회로 급파하는 일면 마침내 사도 서한을 발송함으로 고린도 교회의 여러 가지 문제와 오류를 시정토록 촉구하고자
본서를 집필하게 되었다.
아울러 고린도 교회에서 가져온 헌금에 대하여 감사를 표현하고 있다(16:17).
특징
① 교회의 여러 문제에 대한 질의와 응답
고린도전서는 간접적으로 들은 이야기에 대하여 교훈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1:11), 고린도 교회가 가지고 있는 다양한 문제에 관하여 직접적으로 바울에게 조언을 구하였고 그것에 대한 답변이 잘 드러나 있다.
그 주제들은 결혼에 관한 질문(7:1), 둘째, 우상의 제물에 대한 것(8:1), 신령한 것-다양한 은사(12:1), 성도를 위한 연보(16:1) 등이다.
② 문제 해결로서 신앙의 핵심을 강조
고린도전서는 교회 안에서 일어난 다양한 문제들, 즉 미성숙, 분열, 질투와 시기, 소송, 결혼, 성적 부도덕, 영적 은사에
대한 해결 방안을 제시해 주는 것에 그치지 않고 아울러 중요한 두 가지를 더한다. 그것은 바로 사랑(13장)과 부활(15장)이다.
전자는 모든 것을 행함에 있어서 희생적인 사랑이 근거할 때 모든 문제가 해결되고 바람직한 신앙생활을 할 수 있다는 것이고,
후자는 그리스도를 믿고 신앙생활을 한다고 하지만 아직도 부활에 대한 여러 가지 의심과 잘못된 가르침으로 혼란 속에 있던 그들에게
질문에 대한 대답을 시원하게 밝힘으로 부활에 대한 심오한 교훈을 남기게 되었다.
③ 문제에 대한 실용적이고 실제적인 지침
고린도교회의 여러 문제들은 현학적이고 이론적인 문제라기 보다는 그때 당시에 다양한 문화와 계층간에 실제적으로 나타나고 있는
문제에 대한 지침이기 때문에 대단히 실천적 내용이 담겨 있다. 아울러 이것은 그때 당시의 문제로 그치는 것이 아니로 오늘날
그리스도인에게도 매우 유용하게 다가온다. 왜냐하면 오늘날 수많은 교회들이 다양한 문화 속에서 믿음의 성장 과정을 거치는 중에
고린도 교인들이 가진 상황과 사고체계를 만나게 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오늘날 교회들에게서 나타날 수 있는 분열, 소송, 성적 부도덕, 은사 등의 문제에 관하여 올바른 해결을 하도록 하는 좋은 모델을 제시해 주고 있다.
주제
1) 분열의 문제: 그리스도 안에서의 하나됨(1-4장)
고린도 교회는 분파적인 분열로 갈등을 겪고 있었다. 일부 신자들은 특정 지도자나 교사를 따르는 것을 내세우며 서로를 비난하고
경쟁하는 모습을 보였다. 이에 대해 바울은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하나 되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지도자나 교사를 따르는 것은 그
자체로 목적이 되어서는 안 되며,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삶이 중요하다는 하나님의 뜻을 일깨운다.
2) 성과 관련 문제: 몸으로 드리는 예배(5-7장)
고린도 교회에는 성적으로 문란한 생활을 하는 사람들이 있었고, 우상 숭배와 관련된 문제도 있었다. 이러한 문제를 다루면서
바울은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이 우리의 죄를 용서하기 위한 것이며, 그리스도인은 몸으로도 하나님께 거룩한 자가 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3) 음식 관련 문제: 양심과 사랑에 기반한 판단(8-10장)
우상 제물에 드린 음식을 먹는 것이 문제가 되자, 바울은 그리스도께 충성하는 삶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하지만 그는 그리스도가 이루신 은혜 안에서 개인이 양심에 따라 판단할 수 있다는 자유를 인정한다. 주변의 믿음이 약한 사람을 위해 양심에 따라 선택할 수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위대한 속죄의 은혜 안에서 양심의 자유라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4) 예배 모임 관련 문제: 질서와 사랑으로 이루어지는 예배(11-14장)
강렬한 영적 체험을 추구하거나 자기 주장을 하는 태도로 예배 모임에 혼란이 있었다. 이에 대해 바울은 예배가 하나님의 영이
역사하시는 공간이며, 서로를 사랑하고 섬기는 마음으로 참여해야 한다고 가르친다. 또한, 교회를 하나의 몸으로 그리스도의 몸에
비유하며, 각 지체가 서로 협력하여 머리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신체의 각 부분이 자기 일을 하듯이, 각자가 자신의 은사를 드려 공동체를 세워 나가야 한다고 말한다.
5) 부활과 미래의 소망: 영원한 삶의 약속(15장)
일부 신자들은 부활을 부정하며 죽음 이후의 삶을 인정하지 않았다. 이에 대해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이 복음의 핵심이라는
것을 밝힌다. 우리에게 죄와 사망에 대한 승리, 현재 삶의 능력의 근원, 그리고 미래에 대한 소망이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통해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이루신 위대한 약속이라고 강조한다. 그는 또한, 부활의 소망을 바탕으로 성도들이 거룩한 삶을 살아갈 것을 촉구한다.
교훈과 적용
1) 교회는 일치(unity)와 하나됨(oneness)을 유지하여야 한다.
바울은 교회를 예수님을 유일한 머리로, 그리고 모든 성도들을 여러 지체로 하는 하나의 몸으로 제시한다. 이러한 일치와
하나됨을 상실한 교회는 평화와 사랑을 상실하는 슬픔을 겪을 뿐만 아니라 궁극적으로는 여호와와 사람 앞에 온전한 교회로 존재할
수조차 없다.
2) 교회는 예배(禮拜, Worship)를 경건히 시행하여야 한다.
예배란 여호와께 감사와 찬양, 그리고 간구와 서원을 올리며 경배하는 의식이다. 즉 예배는 여호와를 경배하기 위하여 인간과
여호와 사이의 교재의 모든 요소를 응축하여 의식화한 것으로서 여호와와 성도 사이의 가장 역동적인 교재의 장소이다. 따라서 예배는 구원받은 성도의 의무인 동시에 은혜를 거듭 체험하며 새로이 공급받을 수 있는 위대한 기회이기도 하다. 또한 그 예배의 대상자이신 여호와는 죽은 신이 아니라 살아계신 분으로서 역사와 우주의 창조자시오, 주권자이시며, 절대 거룩과 공의의 하나님이시다. 따라서 여호와께 드리는 예배 의식은 경건하게 집전되어야 한다.
3) 부활(復活, Resurrection)은 성도의 소망의 근거이다.
우리 주 예수님의 역사적인 부활은 세상 끝날 우리를 부활시켜 천국 구원을 주시겠다는 예수님 복음의 약속의 절대적인 확증이다. 죽음을 극복하고 부활하여 영생을 얻는 사실에 대한 확신을 얻는 사실에 대한 확신은 실로 성도만의 역동적 소망의 절대적 근거이다.
이삭은 창세기에 등장하는 아브라함과
사라의 아들이다. 태어나기 전부터 하나님께서 그의 출생을 예고하시고 아브라함의 후사로 정하신 ‘약속의 자녀’이기도 하다. 성경은
이삭이 하나님의 독생자로 오신 성자(聖子) 예수님을 표상하는 인물이자, 천국을 유업으로 받을 하나님의 후사를 상징한다고
증거한다.
성경의 기록을 통해 이삭의 생애와 주요 사건을 살펴보고, 각각의 사건에 담긴 하나님의 뜻과 상징적 의미에 대해 알아보자.
이삭의 생애
이삭은 아브라함이 100세에 얻은 아들이었다. 원래 아브라함은 나이 많도록 슬하에 자식이 없어 종인 엘리에셀을 상속자로
삼으려고 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네 몸에서 날 자가 네 후사가 되리라”고 하셨다. 이에 아브라함은 사라의 권유로
여종 하갈에게서 아들 이스마엘을 얻었다. 당시 아브라함의 나이가 86세였다.
99세가 된 아브라함은 이스마엘을 후사로 정하려 했으나,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사라가 아들을 낳을 것이라고 하시며 이름을
‘이삭’으로 지어주시고 나아가 이삭과 언약을 세우겠다고 하셨다. 하나님께서는 소돔과 고모라를 멸하시기 전에도 아브라함에게 사람의
모습으로 나타나셔서 “기한이 이를 때에 내가 정녕 네게 돌아올 것이니 네 아내 사라에게 아들이 있으리라”고 재차 약속하셨다(창
18:1~15).
그로부터 1년 뒤, 사라가 아들 이삭을 낳았다. 이삭은 ‘웃음’이라는 이름의 뜻처럼 아브라함과 사라의 기쁨이 되었다. 형
이스마엘로부터 괴롭힘을 당하기도 했으나, 아브라함이 사라의 말대로 하갈과 이스마엘을 내보냄으로써 아브라함의 독자(獨子)이자 유일한
후사가 되었다.
아브라함은 장성한 이삭의 신붓감을 구하기 위해, 동생 나홀의 일가가 사는 밧단 아람으로 종을 보냈다. 종은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나홀의 손녀 리브가를 데려왔다. 당시 브엘 라해로이에 살던 이삭은 40세에 리브가를 아내로 맞았다. 이삭과
결혼하고 20년이 다 되도록 아이를 낳지 못했던 리브가는 하나님께서 이삭의 기도에 응답하심으로 쌍둥이를 잉태하게 되었다. 아이들은
리브가의 태 안에서 서로 다투었는데, 이를 두고 하나님께서는 “두 민족이 복중에서부터 나누어질 것이며 한 족속이 다른 족속보다
강하고 큰 자(형)는 어린 자(동생)를 섬기리라”고 예언하셨다. 이삭이 60세 되던 해에 쌍둥이가 태어났다. 먼저 나온 아이는
‘털이 많다’는 뜻의 '에서' 나중에 나온 아이는 ‘발꿈치를 잡은 자’라는 뜻의 '야곱'이라 이름했다(창 25:19~26).
이삭은 브엘 라해로이에 든 흉년으로 인해 그랄 땅으로 이주했다. 이후 “애굽으로 내려가지 말고 내가 네게 지시하는 땅에
거하라. 그리하면 네 아비 아브라함에게 맹세한 것을 이루겠다” 하신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그랄에 거했다. 그 결과 이삭은 하나님의
축복으로 재산이 점점 늘어 큰 부자가 되었다.
이삭의 세력이 커지자 블레셋 사람들이 그를 견제하며 아브라함 때에 판 모든 우물을 메우고 떠나라고 협박했다. 이에 이삭은
그랄 골짜기, 르호봇, 브엘세바로 이동했는데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어디에서든지 물을 얻을 수 있었다. 이에 하나님이 이삭과
함께하심을 알게 된 블레셋 왕이 이삭에게 화해를 청했고, 이삭은 그들과 평화 약속을 맺고 브엘세바에 거했다. 180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난 이삭은 아브라함과 사라가 묻힌 막벨라 굴에 장사됐다.
이삭 관련 주요 사건 / 번제로 드려질 뻔함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어린 이삭을 모리아산에서 번제로 바치라고 명하셨다. 아브라함은 말씀에 순종하여 이삭에게 번제에 쓸
나무를 지우고 자신은 불과 칼을 든 채 산에 올랐다. 이삭은 아브라함에게 번제에 쓸 어린양이 어디 있냐고 물었고, 아브라함은
하나님이 친히 준비하실 것이라고 답했다.
예정된 장소에 도착한 아브라함은 이삭을 결박해 제단에 올리고 칼을 들었다. 그 순간, 하늘에서 천사가 아브라함을 불렀다. 천사는 아브라함이 독자라도 아끼지 않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믿음을 보였다며 이삭에게 손을 대지 말라고 했다. 아브라함은 이삭을
대신해 수풀에 걸린 숫양을 하나님께 번제로 드렸다. 하나님께서는 말씀에 절대적으로 순종한 아브라함에게 큰 축복을 약속하셨다.
아브라함이 하나님께 독자 이삭을 제물로 드리려 했던 모리아산은 훗날 예루살렘 성전 터가 되었다(대하 3:1). 이삭의 번제 사건은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가 인류의 죄 사함을 위해 대속물로 희생하실 것을 표상한다(요 3:16, 마 20:28).
야곱을 축복함
이삭의 쌍둥이 아들 중 에서는 사냥꾼이었고 야곱은 장막에서 집안일을 도왔다. 이삭은 에서가 사냥해 온 고기를 좋아해 그를
아꼈지만 아내 리브가는 야곱을 더 사랑했다. 에서는 장자의 명분을 가볍게 여겨 팥죽 한 그릇에 야곱에게 팔아버렸다.
나이 들어 눈이 잘 보이지 않게 된 이삭은, 죽기 전에 장자를 축복하기 위해 에서에게 사냥한 고기로 별미를 만들어 오라고
했다. 에서가 사냥하러 나가자, 리브가는 야곱을 에서처럼 꾸미고 음식을 만들어 이삭에게 가져가게 했다. 야곱을 에서로 착각한
이삭은 야곱에게 장자의 축복을 빌어주었다.
뒤늦게 이 사실을 안 에서가 방성대곡하며 복을 간청했지만, 이삭으로서는 사태를 돌이킬 수 없었다.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게 될 것이라(창 25장 23절) 하신 하나님의 예언이 그대로 이루어진 것이다.
이삭의 상징적 의미 / 예수 그리스도
예수님께서 알려주신 부자와 나사로의 비유를 보면, 나사로가 천국에 들어간 것을 ‘아브라함의 품에 들어갔다’고 표현하고,
지옥에 간 부자가 아브라함을 가리켜 ‘아버지’라고 부른다(눅 16:19~24). 천국에서 아버지라 불릴 수 있는 분은
하나님뿐이므로, 아브라함이 아버지 하나님을 표상하는 인물임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아브라함의 독자 이삭은 하나님의 독생자인 예수
그리스도를 표상한다(요 8:54~56, 갈 3:16).
갈라디아서 3:16 / 이 약속들은 아브라함과 그 자손에게 말씀하신 것인데 여럿을 가리켜 그 자손들이라 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하나를 가리켜 네 자손이라 하셨으니 곧 그리스도라.
아브라함이 모리아산에서 이삭을 번제로 드리려고 할 때 하나님의 천사가 그를 제지하며 이삭 대신 어린양을 제물로 삼게 했다. 이는 하나님의 독생자이자 어린양의 실체인 예수님께서(요 1:29) 십자가에서 속죄 제물로 희생하시기 전까지 그리스도의 피를
상징하는 짐승을 잡아 절기를 지킬 것을 예표한다.
약속의 자녀
하나님의 약속 없이 태어난 이스마엘과 달리, 이삭은 태어나기 전에 하나님께 아브라함의 후사로 축복받을 것이라는 약속을
받았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이삭을 가리켜 약속의 자녀라 칭했다(롬 9:7~9). 성경에서 말하는 약속의 자녀는 이삭이나
야곱처럼 출생 전에 하나님이 미리 예언으로 그 축복을 약속한 사람을 가리킨다.
성경에는 새 언약을 지키며, 미리 구약성경의 예언을 통해 죄 사함과 영생이 약속된 성도들 역시 이삭과 같은 약속의 자녀라고 기록되어 있다. 아브라함의 후사 이삭은 하나님의 후사인 성도들을 상징하는 인물이다(갈 3:29).
“형제들아 너희는 이삭과 같이 약속의 자녀라”(갈 4:28)
아브라함과 언약을 세우신 하나님
하나님은 하나님의 말씀에 절대적으로 순종한 아브라함과 언약을 세우셨다. 아브라함은 이스라엘의 시조가 되었으며 ‘믿음의 조상’이라는 칭호를 얻었다.
재림 예수님 / 새 언약을 회복하시다
많은 기독교인이 하늘을 바라보며 재림 예수님을 기다리나, 그는 이미 오셨다.
약속의 자녀
약속의 자녀(약속의 자손, Children of promise)는 출생 전에 하나님이 예언으로 축복을 약속한 사람이다. 구약 성경에 등장하는 이삭과 야곱을 대표적인 약속의 자녀로 꼽을 수 있다.[1] 또한 구원받을 성도들이 약속의 자녀로서 신구약 성경에 연결적으로 예언되어 있다.
오늘날 하나님을 믿는 모든 교회가 하나님의 백성으로 인정받는 것이 아니라 약속의 자손이 되어야 구원받을 교회가 된다.[2]
약속의 자녀와 육신의 자녀
성경에는 약속의 자녀와 육신의 자녀가 있다. 사도 바울은 이삭과 야곱을 들어 약속의 자녀를 설명했다.
아브라함의 씨가 다 그 자녀가 아니라 오직 이삭으로부터 난 자라야 네 씨라 칭하리라 하셨으니 곧 육신의 자녀가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라 오직 약속의 자녀가 씨로 여기심을 받느니라 약속의 말씀은 이것이라 명년 이때에 내가 이르리니 사라에게 아들이 있으리라 하시니라 ... 리브가에게 이르시되 큰 자[에서]가 어린 자[야곱]를 섬기리라 하셨나니
하나님께 씨로 여기심을 입는 자녀는 오직 약속의 자녀다. 약속의 자녀는 출생 전에 미리 예언으로 하나님의 약속을 받은
사람들이다. 하나님의 약속 없이 태어난 자들은 육신의 자녀로서 약속의 자손과 대비된다. 신약시대 성도들에게 하나님의 약속은 영혼 구원이 달린 중요한 문제다.
이삭과 이스마엘
아브라함은 85세가 되도록 아들이 없었다. 후사를 선정하는 일로 근심에 빠진 아브라함에게 그의 아내 사라는 자신의 몸종인 하갈을 후처로 주었고, 하갈과 아브라함 사이에서 이스마엘이 태어났다.[3] 그러나 하나님은 약속 없이 태어난 이스마엘을 아브라함의 후사로 인정하지 않으셨다.
아브라함이 이에 하나님께 고하되 이스마엘이나 하나님 앞에 살기를 원하나이다 하나님이 가라사대 아니라 네 아내 사라가
정녕 네게 아들을 낳으리니 너는 그 이름을 이삭이라 하라 내가 그와 내 언약을 세우리니 그의 후손에게 영원한 언약이 되리라
두 민족은 야곱과 에서를 가리킨다. 두 사람이 태에서 나오기도 전에 하나님은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리라'고 예언하셨다. 그 예언을 성취한 야곱이 바로 약속의 자녀다. 원칙적으로는 형인 에서가 장자의 축복을 받아야 했지만 그에게는 하나님의 약속이 없었다. 결국 에서는 축복을 받지 못했고, 이삭의 상속권은 약속의 자녀인 야곱에게 돌아갔다.[4]
참 교회와 거짓 교회
교회도 약속의 자손과 육신의 자손이 있다. 구약성경에 선지자들의 예언이 있으면 약속의 자손이다. 현재 크게 번영하더라도 하나님의 약속이 없으면 구원받지 못할 육신의 자손에 불과하다. 선지자 이사야는 장차 동방에서 하나님의 모략을 이룰 한 선지자가 나올 것이라고 예언했다.[5] 선지자 말라기는 오늘날 이루어질 마지막 선지자와 마지막 교회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을 다음과 같이 예언했다.
보라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이 이르기 전에 내가 선지 엘리야를 너희에게 보내리니 그가 아비의 마음을 자녀에게로 돌이키게 하고 자녀들의 마음을 그들의 아비에게로 돌이키게 하리라
이 시대 구원받을 약속의 자녀는 구약과 신약에 연결되어 있는 예언을 성취한 교회다. 말라기, 이사야, 요한계시록의 말씀에 따라 동방 해 돋는 곳에서 하나님의 인(印)을 가지고 등장하며, 엘리야의 사명을 이룬다는 예언이 성취되어 있는 교회가 약속의 자녀가 되고 영원한 기업을 받을 하나님의 교회가 된다.
약속의 자녀와 남은 자손
한편, 선지자 이사야는 구원받을 '남은 자'에 대해 예언했다.
그날에 이스라엘의 남은 자와 야곱 족속의 피난한 자들이 다시는 자기를 친 자를 의뢰치 아니하고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자 여호와를 진실히 의뢰하리니 남은 자 곧 야곱의 남은 자가 능하신 하나님께로 돌아올 것이라 이스라엘이여 네 백성이 바다의 모래 같을지라도 남은 자만 돌아오리니 넘치는 공의로 훼멸이 작정되었음이라
오늘날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는 자들이 전 세계에 바다 모래 수와 같이 많지만 모두 구원받는 것이 아니다. '남은 자'만이
구원의 대상이 된다. 성경은 구원받을 하나님의 백성을 약속의 자녀라고도 하고 남은 자손이라고도 표현했다. 이는 약속의 자손이 곧
남은 자손이라는 뜻이다. 엘리야 시대에 우상 숭배가 극심한 상황에서도 하나님은 바알 숭배에 참여하지 않은 7000명을 남겨두셨다.[6] 오늘날에도 하나님의 은혜로 택하심을 따라 남은 자가 있다.[7] '남은 자'나 '은혜로 택하심을 따라 남은 자'나 구원받을 약속의 자녀라는 같은 예언이다.
여자의 남은 자손
요한계시록은 마지막 시대 약속의 자녀, 곧 하나님의 자녀를 '여자의 남은 자손'이라고 말한다.
용이 여자에게 분노하여 돌아가서 그 여자의 남은 자손 곧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며 예수의 증거를 가진 자들로 더불어 싸우려고 바다 모래 위에 섰더라
하나님은 에덴동산의 뱀과 여자가 원수가 되게 하고 서로의 후손끼리도 원수가 되게 하리라고 말씀하셨다. 이 예언은 예수 초림 때
일차 성취되었지만, 마지막 때에 여자의 남은 자손을 통해 다시 성취된다. 종교암흑세기 이후 여자의 남은 자손이 용(옛 뱀)과
대적하게 된다고 요한계시록 12장에 예언되어 있기 때문이다.[9] 창세기 3장의 여자는 아담의 아내인 하와를 가리킨다. 일곱째 날 안식 직전에 창조된 하와는 영원한 안식이 가까운 때에 등장하는 어린양의 아내를 표상하므로 용과 대적할 여자의 남은 자손은 재림 그리스도의 아내인 어머니 하나님을 믿는 성도들이다. 어머니 하나님에 대해 사도 요한은 성도들에게 생명수를 주시는 신부라고도 예언했고,[10][11]갈라디아서를 기록한 사도 바울은 이삭과 같은 약속의 자녀들에게 하늘 예루살렘으로 표상된 어머니가 계심을 언급했다.
오직 위에 있는 예루살렘은 자유자니 곧 우리 어머니라 ... 형제들아 너희는 이삭과 같이 약속의 자녀라 그러나 그때에 육체를 따라 난 자가 성령을 따라 난 자를 핍박한 것같이 이제도 그러하도다 ... 그런즉 형제들아 우리는 계집종의 자녀가 아니요 자유하는 여자의 자녀니라
약속의 자녀는 성령을 따라 난 자들이다. 어느 때든지 미리 예언으로 약속하고 그 예언이 성취되는 시대의 사람이 약속의 자손이 되는
동시에 성령을 따라 난 사람으로 인정받는다. 오늘날에도 선지자들의 예언으로 세워진 교회의 사람들이 성령을 따라 난 자가 되고
약속의 자손이 된다. 성경의 모든 예언을 따라 엘리야의 사명을 성취하신 재림 그리스도와 어머니 하나님의 자녀들이 '남은 자', 곧 성령 시대 구원받을 약속의 자녀다.
↑로마서 9:7-13. 아브라함의 씨가 다 그 자녀가 아니라 오직 이삭으로부터 난 자라야 네 씨라 칭하리라 하셨으니 곧 육신의 자녀가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라 오직 약속의 자녀가 씨로 여기심을 받느니라 약속의 말씀은 이것이라 명년 이때에 내가 이르리니 사라에게 아들이 있으리라 하시니라 ... 리브가에게 이르시되 큰 자[에서]가 어린 자[야곱]를 섬기리라 하셨나니
↑창세기 16:1-16. 아브람의
아내 사래는 생산치 못하였고 그에게 한 여종이 있으니 애굽 사람이요 이름은 하갈이라 사래가 아브람에게 이르되 여호와께서 나의
생산을 허락지 아니하셨으니 원컨대 나의 여종과 동침하라 내가 혹 그로 말미암아 자녀를 얻을까 하노라 하매 아브람이 사래의 말을
들으니라 ... 하갈이 아브람의 아들을 낳으매 아브람이 하갈의 낳은 그 아들을 이름하여 이스마엘이라 하였더라
↑창세기 27:37. 이삭이 에서에게 대답하여 가로되 내가 그(야곱)를 너의 주로 세우고 그 모든 형제를 내가 그에게 종으로 주었으며 곡식과 포도주를 그에게 공급하였으니
↑이사야 46:11. 내가 동방에서 독수리를 부르며 먼 나라에서 나의 모략을 이룰 사람을 부를 것이라 내가 말하였은즉 정녕 이룰 것이요 경영하였은즉 정녕 행하리라
↑열왕기상 19:18. 내가 이스라엘 가운데 칠천 인을 남기리니 다 무릎을 바알에게 꿇지 아니하고 다 그 입을 바알에게 맞추지 아니한 자니라
↑로마서 11:3-5. 내가 나를 위하여 바알에게 무릎을 꿇지 아니한 사람 칠천을 남겨 두었다 하셨으니 그런즉 이와 같이 이제도 은혜로 택하심을 따라 남은 자가 있느니라
↑요한계시록 12:9. 큰 용이 내어 쫓기니 옛 뱀 곧 마귀라고도 하고 사단이라고도 하는 온 천하를 꾀는 자라
↑요한계시록 12:14-17. 그
여자가 큰 독수리의 두 날개를 받아 광야 자기 곳으로 날아가 거기서 그 뱀의 낯을 피하여 한 때와 두 때와 반 때를 양육 받으매
여자의 뒤에서 뱀이 그 입으로 물을 강 같이 토하여 여자를 물에 떠내려 가게 하려 하되 땅이 여자를 도와 그 입을 벌려 용의
입에서 토한 강물을 삼키니 용이 여자에게 분노하여 돌아가서 그 여자의 남은 자손 곧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며 예수의 증거를 가진
자들로 더불어 싸우려고 바다 모래 위에 섰더라
↑요한계시록 22:17. 성령과 신부가 말씀하시기를 오라 하시는도다 듣는 자도 오라 할 것이요 목마른 자도 올 것이요 또 원하는 자는 값없이 생명수를 받으라 하시더라
↑요한계시록 21:9-10. 일곱
대접을 가지고 마지막 일곱 재앙을 담은 일곱 천사중 하나가 나아와서 내게 말하여 가로되 이리 오라 내가 신부 곧 어린 양의
아내를 네게 보이리라 하고 성령으로 나를 데리고 크고 높은 산으로 올라가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는 거룩한 성 예루살렘을
보이니
이제 곧 성탄절이 돌아온다. 낮은 곳에 오셔서, 몸소 참된 신앙의 길을 보여주신, 하나님의 희생과 사랑을 되새겨 본다. 유대인들만의 하나님에서, 모든 이들의 하나님으로 바꾸신 분. 나그네 된 가족이, 묵을 숙소조차 없어서, 마구간에 잠시 머물 때 태어나신 예수. 말먹이 통에 누이신 예수. 그 초라하고 궁색함이, 그 어떤 궁핍한 자들보다 덜하지 않았지. 가난하고 이름 없는 목수의 아들로 오셔서, 결국 강도—혹은 열혈당 투사들—두 명과 함께, "유대인의 왕"이라는 죄명으로, 십자가에 달려 처형되셨어. 왜 하필 죄명이 "유대인의 왕"이었나.
빨간 배경 위에 별, 하트, 천사, 종 등 흰색 크리스마스 장식들이 줄에 매달려 있는 장면.
세상을 지배하던, 정치적, 종교적 권력 집단, 사두개파와 바리새파에게, 개혁적이고 획기적인 그분이 일으키고 다니는 변화의 바람이, 달가웠을 리가 없었겠지. 어떠한 형태의 종교적 일탈이나, 교리에 대한 불순종을, 절대로 용납할 수 없었겠지. 그걸 용납하는 순간, 그들의 존재 기반은 사라졌을 테니까.
가난하고, 병들고, 버림받고, 소외된 자들에게, 그들도 하나님의 귀한 자녀임을 일깨우고 다녔잖아. 정결하다고, 선택받았다고, 잘난척하며 그 소외된 자들을, 구원받지 못할 죄인 취급하던 그들이, 그러한 예수의 모습을 보며 어떤 심정이었을까. 종교적으로 완전한, 정결하고 고귀한 분을, 정치적인 죄목인 "유대인의 왕"이라고 낙인찍어 죽인 거지.
지금은 어때? 뭐 그때와 크게 다른 게 있나? 아, 아니다 크게 다르긴 하지. 최근 몇 년간 "일부" 목사들 그리고 중들이 보여준, 믿기지 않는 행동들을 봤잖아. 목사들이나 중들이나, 돈과 욕정의 노예가 되어, 추하고 더러운 행동들을 서슴지 않더구먼. 일부라고 하지 말자. 그 "일부"를 못 막고, 못 없애는 "대부분"은 더 큰 문제인 것 같다. 뭔가 의미 있는 일 좀 하려고 해도, 어떤 사연이든, 너무도 답답해서 호소 좀 하려고 해도, 버려지고 소외된 이들을 돌보려고 해도, 평화와 화해를 말하려고 해도, 이 모두가 포퓰리즘이고, 종북이고, 좌파고, 이단이라고 손가락질당하고, 비난받잖아. 우리 사는 곳이 깨끗해지고, 정의로워지고, 공평해지기를 원치 않는 이들이 참 많은 것 같아. 아니 그런 이들의 힘이 정말 강한 건 아닐까?
이런 때에, 예수의 정신을 심장에 품고, 온몸을 바쳐서 전파해야 할 이들이, 무엇을 하고 있는 건지. 어디에 있는 건지. 그분이 했던 그 행동들을, 그저 따라 하면 될 텐데. 쓴잔은 다 엎어 버리고, 은혜, 축복, 영광, 부활, 영생의 달콤한 잔들만 달라고 아우성치잖아. 무슨 죄든 짓고 나서, 회개했다고 하면 그만인, 너무나도 자기중심적인 종교. 이타는 없고 배타와 독선만 가득한 막무가내 종교. 이런 신앙으로 물들여진 우리와 같은 이들을, 그래도 구원하려는 분의 마음은 어떤 심정일까.
나 자신, 기독교인이라고 말하기가 참 창피하고 두렵다. 감당하기도, 실천하기도 어려워서, 아직 발도 못 내민, 그 "구원으로 가는 길"에 언제쯤이나 들어설 것인지 알 수가 없어. 아마 끝내 나서지 못하고, 죽음을 맞이할지도 몰라. 구원은 받고 싶은데, 그에 상응하는 희생과 의무는 감당하기가 싫어, 솔직히. 좀 쉬운 방법이 없을까? 흐릿한 하늘을 배경으로 한 십자가 위에 못 박힌 예수 그리스도의 조각상. 고통과 희생을 상징하는 이미지.
올해도 그 어리신 분이 다시 오신다. 이런 인간들을 어떻게든 구원해 보겠다고, 말먹이 통 마른풀 위에 초라하게 오셔서, 또 고초당하고, 또 처형당하고. 물과 같으신 분이 또 오신다. 그 마음과 몸이 늘 더 낮은 곳으로 향하는 분. 눈앞에 보이지 않아도 온 세상천지와 하늘과 바다를 아우르는 분. 눈, 비, 구름, 강물 등 갖가지 모양으로 우리와 함께하는 분. 목마른 생명들을 살리는 분. 추위에 얼고, 강한 열기에 수증기가 되어 증발할지라도, 그의 존재는 영원히 없어지지 않는 분. 그리고 맑고 투명하여, 나를 비추면 나는 보지 못하는 내 모습을 보여주는 분. 온 세상 더럽고 추한 것들을 깨끗이 씻어내는 분.
19세기 말 한국에 온 선교사들은 술과 담배, 아편의 폐해를 목격하고 이를 막기 위해 금주· 금연 운동을 강조했습니다.
1895년 장로교회와 1897년 감리교회는 세례 조건으로 금주· 금연을 요구했으며 이는 새로운 기독교 공동체 형성을 위한 윤리적 규칙이되었습니다.
금주 금연은 초기 한국 교회의 정체성을 나타내는 중요한 표지였고 또한 새로운 인간상과 국가 건설의 의지를 반영한 것이었습니다. 교회의 금주· 금연 운동이 단순히 기독교적인 윤리 운동 차원을 넘어 민족 운동에 이바지하게 되는 배경이 되었습니다.
한국
사람들이 소비하는 돈의 상당 부분이 술과 담배 그리고 아편으로 가고 있었기 때문에 이를 막거나 줄이고, 대신 우리 물건 사기 운동을
펼치면 첫째 자신의 건강과 사회적 폐해를 줄이는 것은 물론이고 민족 자본 형성에도 도움이 될 것이라는 미래적 비전을 갖고 금주 금연 운동을 정착시켰습니다.
이런 이유로 1920년대 들어 교회의 금주 · 금연 운동은 민족적 차원으로 확대되었는데 총독부 정책에 호응하는 친일파의 모습과 이에 대비되는 교회의 금주 운동은 새로운 공동체를 형성하고 국채보상운동 등 구국 운동과 연결되며 민족의식을 고취시켰습니다.
그렇다면 오늘날 교회가 세상을 향하여 선언해야 할 시대적 사명은 기우러진 사상에 심취된 우매한 백성들을 깨우쳐서 진리의 말씀위에 바르게 세우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12월 13일(토) 로마서 8-9장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약속의 자녀(9:8)
곧 육신의 자녀가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라 오직 약속의 자녀가 씨로 여기심을 받느니라. In other words, it is not the natural children who
are God's children, but it is the children of the promise who are
regarded as Abraham's offspring.
로마서 8장은 그리스도인의 삶에 대한 다섯 가지 핵심 원칙을 강조합니다. 1. 정죄함 없음(8:1) – 새로운 자유의 시작
2. 성령 안에서의 삶(8:2) – 진정한 자유의 능력
3. 하나님의 자녀라는 정체성(8:14) – 모든 것을 바꾸는 이름
4. 구속된 고통(8:18) – 헛되지 않은 시련
5. 아무것도 끊을 수 없는 사랑(8:38-39) – 영원한 확신
로마서 6장 / 죄와 육체의 관계 죄의 결과는 죽음(6:23) 로마서 7장 / 죄와 마음의 관계 죄의 문제로 인한 갈등 때문에 나는 곤고한 사람(7:25) 로마서 8장 / 죄와 성령의 관계 죄를 다스리는 비결은 생명의 성령의 법(8:2)
로마서 8장은 그리스도인의 삶에 대한 다섯 가지 핵심 원칙 1. 정죄함 없음, 2. 성령 안에서의 삶, 3.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정체성, 4.구속된 고통, 5. 끊을 수 없는 사랑을 중심으로 복음의 진리를 선포합니다. 이 메시지는 C.S. 루이스의 통찰과 함께, 성경 구절을 통해 우리의 삶 속에서 이 진리가 어떻게 실제로 작동하는지를 설명합니다. 이 말씀을 이해하는 데서 멈추지 않고, 삶 속에 적용하도록 인도하는 영적 성찰입니다.
1. 정죄함 없음 – 새로운 자유의 시작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로마서 8:1).
이 말씀은 단순한 선언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죄책감의 사슬을 끊으셨다는 강력한 복음의 외침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과거의 실수와 죄로 인해 정죄감에 사로잡혀 살아가지만, 하나님은 우리를 자유케 하셨습니다.
바울의 정죄함이 없다는 선포는 단순한 교리가 아닙니다. 그것은 삶을 뿌리채
바꾸는 선언이며, 예수님의 희생으로 인해, 우리가 받았어야 할 형벌이 이미 사하여졌음을 말합니다. 이제 죄책감은 우리의 정체성을
정의하지 못합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의 이름이 되었습니다.
C.S. 루이스는 말했습니다. “진정한 기독교 신앙의 도전은 단지 하나님의 존재를 믿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를 전적으로 사랑하시고 용서하신다는 것을 신뢰하는 것이다.” 우리는 때로 하나님이 의로우시다는 것은 믿지만, 은혜로우시다는 것을 믿는 데 어려움을 겪습니다. 그러나 로마서 8:1은 우리에게 그 믿음으로 살라고 강권하고 있습니다.
2. 성령 안에서의 삶 – 진정한 자유의 능력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로마서 8:2).
기독교인의 삶은 단지 죄를 피하려는 의지의 문제가 아니라, 성령으로 인해 변화되는 삶입니다. 인간의 노력만으로는 불가능하지만, 성령께서 우리 안에 거하시며 새로운 생명을 시작하십니다.
성령은 단지 감정이 아닙니다. 그분은 하나님 자신이며, 우리를 인도하고 위로하며 예수님처럼 살 수 있는 능력을 부어주십니다. 성령 안에서의 삶은 의무감이 아닌 은혜의 흐름 속에서 열매가 맺히는 삶입니다.
C.S. 루이스는 "기독교는 단지 삶의 향상이 아니라 완전히 새로운 삶"이라고 말했습니다. 이것이 성령의 능력으로 사는 삶입니다.
3. 하나님의 자녀라는 정체성 – 모든 것을 바꾸는 이름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사람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로마서 8:14).
기독교 신앙의 중심에는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대답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정죄함에서 건지셨을 뿐 아니라, 당신의 가족으로 입양하셨습니다. 이제 우리는 단지 죄 사함 받은 자가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이 정체성은 두려움과 수치심을 이겨내는 힘이 됩니다. 하나님은 멀리 계신 재판장이 아니라, 우리를 사랑으로 돌보시는 아버지이십니다.
C.S. 루이스는 “우리는 평범한 인간을 만난 적이 없다”고 말했습니다. 하나님의 자녀인 우리가 서로를 대하는 방식도 바뀌어야 함을 의미합니다.
4. 구속된 고통 – 헛되지 않은 시련
“생각하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도다”(로마서 8:18).
인생에서 고통은 피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안에서의 고통은 헛되지 않습니다. 그것은 믿음을 연단하고, 영혼을 더욱 하나님께 가까이 이끕니다.
성령께서는 이루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해 기도하시며, 우리의 고통 가운데 함께하십니다. 고통은 축복의 통로가 될 수 있습니다.
C.S. 루이스는 “고통은 하나님이 귀머거리 세상을 깨우는 메가폰”이라 했습니다. 고통은 영적 눈을 뜨게 하고, 하늘나라를 사모하게 합니다.
5. 아무것도 끊을 수 없는 사랑 – 영원한 확신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로마서 8:38-39).
바울은 고백합니다. 그 어떤 것도 하나님의 사랑을 끊을 수 없습니다. 실패도, 두려움도, 죽음도 아닙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조건 없고, 변함 없고, 영원합니다. 그 사랑은 우리가 잘할 때만이 아니라, 연약할 때에도 우리를 붙드십니다.
C.S. 루이스는는 하나님을 “우리를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 분”으로 묘사했습니다. 이 사랑이야말로 우리가 흔들림 없이 설 수 있는 반석입니다.
결론 – 삶으로 살아내는 로마서 8장
로마서 8장은 단지 지적인 이해를 위한 장이 아니라, 우리의 삶 전체를 변화시키는 하나님의 부르심입니다. 정죄함 없음, 성령의 삶, 자녀의 정체성, 구속된 고통, 끊을 수 없는 사랑 이 다섯 가지는 우리를 새로운 삶으로 이끄는 은혜의 길입니다.
이제 우리도 고백할 수 있습니다.
“나는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정죄함이 없습니다. 성령과 함께 걷습니다. 고통도 헛되지 않습니다. 아무것도 하나님의 사랑에서 나를 끊을 수 없습니다.”
약속의 자녀(The children of the promise)
【오늘 본문은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언약적 신실함과 이방인 중에서도 당신의 자녀로 부르시는 하나님의 주권적 자유라는 두 개념을 다루는 9장-11장의 서두 부분이 되겠습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이스라엘을 향한 바울의 애끓는 사랑의 마음(1절-3절),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언약적 자격(4절-5절), 참된 이스라엘: 이삭(6절-9절), 참된 이스라엘: 야곱(10-13절)을 다루고 있습니다.
바울은 이방인의 구원 사역에 많은 시간과 노력을 경주했지만,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주신 언약의 효력을 무효화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이스라엘의 계속된 불순종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그들을 버리지 않으시고 그 언약을 이루어갈 것임을 역설합니다. 바울은 혈통적인 정통성과 약속 곧 믿음에 의한 자녀라는 새로운 도식을 통해 이방인을 아브라함의 자손에 포함시킵니다. 우리의 구원은 하나님의 주권 아래 있음을 강조합니다.】
저는 오늘 본문 중 24절 말씀이 특히 마음에 다가왔습니다. 그중에서도 “오직 약속의 자녀가 씨로 여기심을 받느니라”라는 구절이 더 그랬습니다.
바울은 자타가 인정하듯이 이방인의 사도였습니다. 그는 이방인의 충만한 수가 차면 이스라엘이 다시 하나님의 백성으로 돌아올 것이라고 믿었을 것입니다. 이방인 선교에 몰입하던 그는 오늘 로마에 있는 성도들에게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언약을 상기시킵니다. 그러면서 우리의 구원이 단순히 혈통적 정통성에 의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구원 약속에 의한 것임을 힘주어 말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의 자손인 것을 자랑으로 여겼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언약 백성이라는 것에 대해 대단한 자부심을 가졌습니다. 그들은 당연히 하나님의 언약에 따라 복락을 누리리라고 믿었습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에서 바울은 육신의 자녀가 자녀가 아니라 오직 약속의 자녀가 자녀로 여기심을 받는다고 말합니다. 그러면서 약속의 자녀로 이삭과 야곱의 예를 들었습니다.
육신의 자녀는 혈통적인 자녀를 말한 반면, 약속의 자녀는 하나님의 주권적 언약과 계획안에서 태어난 자를 말합니다. 약속의 자녀는 단지 혈통이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에 따라 정해진 구원의 계보를 따른 자녀입니다. 단지 이스라엘 백성이라고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의 계보인 메시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선택된 사람이 구원을 받습니다. 이것은 그야말로 당시로서는 혁명적인 선포였습니다. 정통성을 주장하고 믿어왔던 이스라엘에게는 말도 안 되는 궤변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9절이 말하는 하나님의 새 약속의 말씀이었습니다. 10절-13절에서 보듯이 그것은 이스라엘이 불평하지 못할 하나님의 주권적 선택이었습니다.
우리가 구원받은 것은 이 같은 하나님의 절대적 주권 덕분이었습니다. 우리는 혈통적으로 이스라엘 사람도 아니고, 그렇다고 도덕적으로 하나님 앞에서 의를 내세울 처지도 되지 못했습니다. 그런 우리들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셔서 구속의 은혜를 내려 주셨습니다.
오늘 본문을 대하면서 일어난 감사였습니다. 혈통적 이스라엘에게는 미안하지만 하나님께서 이방인인 제게 구속의 은혜를 주신 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감사 외에 달리 표현할 말이 없습니다. 이 은혜는 이생과 내생에 두루 누리는 복중의 복입니다. 그러나 너무도 쉽게 이 감사의 마음이 식어지는 것을 경험합니다. 오늘 다시 하나님이 주신 구원의 은혜를 평생 감사하며 나아가자고 다짐해 봅니다.
다음으로,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나의 것을 자랑하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혈통이나 육신의 자랑은 결코 참다운 자랑이 될 수 없다는 것은 오늘 본문은 일깨워주었습니다. 재력, 학벌, 직장, 외모, 가정 등 외적 조건은 구원과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정말 아무것도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의 약속을 따른 믿음만이 전부입니다.
다음으로, 사람을 외적으로 판단하거나 평가하지 않아야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하나님도 그럴진대, 감히 내가 누구를 평가하겠습니까. 주님께서도 남을 비판하지 말라고 직접 말씀하셨습니다(마 7:1-2; 눅 6:37). 다른 성경에서 바울과 야고보도 같은 당부를 했습니다(롬 14:4; 약 4:11-12). 외적 조건이나 외적 상황을 두고 함부로 비판하거나 판단하지 않아야겠습니다.
다음으로, 하나님의 약속을 모르는 이웃들이 약속의 자녀가 될 수 있도록 그들에게 하나님의 약속을 소개하고 이들을 약속의 세계로 인도해야겠다는 생각을 더 단단히 했습니다. 그동안 다소 우선순위에서 밀렸던 복음을 전하고 제자를 양성하는 일에도 더욱 열심을 내야겠습니다.
다음으로, 약속의 자녀답게 믿음의 계보를 잘 이어나가야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선 제 자신이 주님의 말씀 안에서 주님의 뜻을 따라 순종하며 사는 참 예수의 사람이 되어야겠습니다. 내 자녀들도 내가 예수 믿기에 당연히 약속의 자녀가 되는 것이 아니라 그들 자신이 믿음을 통해 약속의 자녀가 되는 것이므로 자녀들이 믿음의 가계를 이어가도록 이들을 잘 이끌어 주어야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약속의 자녀가 되도록 은혜를 주셔서 감사합니다. 평생 이 은혜를 감사하며 살게 하소서. 겉으로 사람을 평가하거나 판단하지 않게 하소서. 제가 가진 세상의 유익한 것들을 배설물로 여기며 약속의 믿음 안에서 살게 하소서. 주님만을 의지하며 살아도록 인도하여 주옵소서.
구원에 대한 깨달음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는 의미(Justification by Faith) 오스왈드 챔버(Oswald Chambers)
내가 믿기 때문에 구원받은 것이 아니라, 믿기 때문에 구원 받았음을 깨달은 것입니다. 그리고 회개했기 때문에 구원받은 것이 아닙니다. 회개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께서 이루신 일을 내가 깨달았다는 것을 증거하는 단순한 표지일 뿐입니다. 원인 대신에 결과를 강조하는 것은 위험한 일입니다.
나의 순종, 정진, 헌신으로 인해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가 올바로 되었습니까?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내가 하나님과 바른 관계에 있는 것은 그 이전에 예수 그리스도가 죽으셨기 때문입니다. 내가 하나님을 바라보고 그분께서 보여 주시는 것을 믿음으로 받아들일 때,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인한 놀라운 대속의 구원이 곧바로 나를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로 들어가게 합니다. 내가 죄를 인정하고 회개했기 때문이 아니라, 오직 예수님이 이루신 일로 인하여 하나님 은혜의 초자연적인 기적으로 내가 의롭게 되는 것입니다. 성령님께서 놀랍고 찬란한 빛으로 내가 의롭게 되었음을 알게 하시는데, 그러면 어떻게 이루어 졌는지는 알지 못해도 내가 구원받았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하나님의 베푸신 구원은 인간의 논리 위에 세워진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제물이 되신 대속의 죽음 위에 세워진 것입니다. 우리는 오직 주님의 대속에 의해서만 새롭게 태어날 수 있습니다. 죄인인 우리가 새로운 피조물로 변하는 것은 회개나 믿음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모든 경험에 앞서 이루어진 하나님의 놀라우신 일, 즉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이루신 일로 인하여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참조 고후 5:17-19)
그 무엇도 무너뜨릴 수 없는 보장, 우리가 의롭게 되고 거룩하게 되는 보장은 하나님 자신입니다. 우리 자신이 이런 것들을 이루는 것이 아닙니다. 이미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속죄를 통하여 이루어 진 것입니다. 하나님의 기적으로 인해 초자연적인 일이 우리에게 자연스러운 것이 되었으며, 예수 그리스도가 “다 이루었다” (요 19:30)고 하신 말씀이 현실이 되었다는 의미입니다.
지정의(知情意)
인간의 정신 활동을 지(知, 앎/지성), 정(情, 느낌/감성), 의(意, 의지) 세 가지 요소로 나눈 개념으로,
인격의 삼요소로 불리며, 지식, 감정, 의지가 조화롭게 발달해야 완전한 인격이 된다고 봅니다. 이 단어는 심리학, 철학, 종교 등
다양한 분야에서 사용되며, 특히 기독교에서는 '지정의적 신앙'처럼 믿음의 영역에서도 지식(이해), 감정(사랑), 의지(순종)의
통합을 강조하는 맥락으로 쓰이기도 합니다.
지정의(知情意)의 각 요소
지(知: 앎/지성) : 지식, 지혜, 인식, 분별, 이해, 성찰 등 이성적이고 분석적인 부분을 의미합니다.
정(情: 느낌/감성) : 감정, 사랑, 기쁨, 슬픔, 열정, 배려, 애착 등 감정적이고 정서적인 부분을 의미합니다.
의(意: 의지) : 의지, 결단, 행동, 실천 등 의지를 가지고 목표를 향해 나아가는 부분을 의미합니다.
주요 사용 맥락
인격 형성 : 인격이 성숙하려면 지, 정, 의 세 가지가 모두 풍부해야 함.
신앙/종교 : 성경적 신앙에서 하나님을 아는 지식(지), 그분을 사랑하는 마음(정), 그 뜻에 순종하는 의지(의)가 통합된 상태를 '지정의적 신앙'이라 함
육신이란 무엇인가요?
존 녹스(1510-1572)는 스코틀랜드인 성직자, 종교 개혁의 지도자였으며 스코틀랜드 장로 교파의 창시자로 여겨지는
사람입니다. 녹스는 하나님에 대한 열망의 화신이자 성경과 거룩한 삶의 진리에 헌신한 사람으로서 현대 신학자들의 존경을
받아왔습니다. 하지만 성인 녹스는 죽음에 임박하여, 자신도 개인적으로 아담으로부터 물려받은 죄의 본성 (로마서 5:12)과
싸운다는 것을 시인했습니다. 녹스는 “나는 무거운 고통의 십자가 아래서 벌어지는 육신과 영의 전쟁이 얼마나 힘든 것인지 압니다. 그
싸움에는 세상적인 방어도 없고 당장의 죽음만 보입니다. 나는 육신이 마지못해하는 것과 불평불만을 늘어놓는 것을 압니다…”
녹스의 진술은 죄 본성과의 개인적인 고군분투를 공개적으로 시인한 사도 바울의 말과 놀랍도록 비슷합니다. “우리가 율법은 신령한 줄
알거니와 나는 육신에 속하여 죄 아래에 팔렸도다, 내가 행하는 것을 내가 알지 못하노니 곧 내가 원하는 것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미워하는 것을 행함이라, 만일 내가 원하지 아니하는 그것을 행하면 내가 이로써 율법이 선한 것을 시인하노니, 이제는 그것을
행하는 자가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 내 속 곧 내 육신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을 아노니 원함은 내게
있으나 선을 행하는 것은 없노라,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하지 아니하는 바 악을 행하는도다, 만일 내가
원하지 아니하는 그것을 하면 이를 행하는 자는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 그러므로 내가 한 법을 깨달았노니 곧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이로다, 내 속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으로 나를 사로잡는 것을 보는도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로마서 7:14-24).
바울은 로마인들에게 쓴 서신에서 “나의 육신”이라 부르는 자기 몸의 “지체 안에” 무엇인가 있다고 말합니다. 그것은 크리스천 삶
속에 어려움을 낳고 크리스천을 죄에 갇힌 자로 만드는 것입니다. 마틴 루터 (Martin Luther )는 로마서 서문에서 바울이
“육신”이라는 단어를 사용한 것에 대해 다음과 같이 논평했습니다. “그러므로 당신은 ‘육신’을 나쁜 행실과 관련된 ‘육신’으로만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성 바울은 육체와 영혼, 사고, 그의 모든 능력을 포함한 전인적인 것에 대해 ‘육신’을 사용합니다.
왜냐하면 그 모든 것이 육신을 좇아 열망하며 분투하기 때문입니다.” 루터의 언급은 “육신”이 성적인 활동 영역뿐만 아니라 삶의
모든 영역에서 일어나는 하나님께 반대되는 애착 및 갈망이라고 지적합니다.
“육신”이라는 용어에 대해 확실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성경에서 그 용어를 어떻게 사용하고 있는지, 또 정의는 무엇인지,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의 삶 속에서 그 말이 어떠한 의미를 나타내는지, 그것이 낳는 결과 및 그것을 궁극적으로 어떻게 극복할 수 있는
지를 검토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육신”의 정의
신약성경의 “육신”에 해당하는 헬라어는 성경 속에서 종종 육체를 언급할 때 사용되는 사륵스입니다. 그러나, 신약과 그밖에 초기
기독교 문헌들의 헬라어 영어 사전 (A Greek-English Lexicon of the New Testament and
Other Early Christian Literature)은 이 단어를 다음과 같이 설명합니다. “기능하는 독립체로서의 육체.
특별히 바울의 견해에 따르면, 몸의 모든 부분은 육신으로 알려진 총체를 구성하며, 육신은 그것이 어디에 거하느냐 따라 그만큼 죄에
지배당한다. 육신에는 모든 형태의 죄가 거하며 아무 선한 것도 살지 않는다.”
성경은 인류가 이러한 방식으로 시작되지 않았음을 분명히 합니다. 창세기는 인류가 원래 선하고 완전하게 창조되었다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이 이르시되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창세기 1:26-27). 하나님은 완전하시기 때문에, 그리고 결과는 본질적으로 그것의
원인을 나타내므로 [즉, 전적으로 선하신 하나님께서는 오직 선한 것만을 창조하실 수 있으며, 예수님께서 “좋은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을 수 없고” (마태복음 7:18)라고 말씀하셨던 것처럼], 아담과 하와는 모두 죄 없이 선하게 창조되었습니다. 하지만,
아담과 하와가 죄를 지었을 때, 그 본성은 타락했고, 후손에게 전해졌습니다. “아담은 백삼십 세에 자기의 모양 곧 자기의 형상과 같은 아들을 낳아 이름을 셋이라 하였고” (창세기 5:3, 강조 추가).
성경의 많은 곳에서 죄의 본성에 대한 사실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예를 들면, 다윗은 “내가 죄악 중에서 출생하였음이여 어머니가 죄
중에서 나를 잉태하였나이다” (시편 51:5)라고 선언합니다. 다윗은 자신이 불륜의 결과였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의 부모가
죄의 본성을 전해주었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신학적으로 이것은 때때로 인간 본성에 대한 “영혼 출생론” (Traducian,
“가지로부터”를 의미하는 라틴어 용어에서 파생) 관점으로 불려집니다. 영혼 출생론 관점은 사람의 영혼이 그 부모를 통해
만들어진다는, 즉 잉태 과정 속에서 자녀가 부모의 타락한 본성을 물려 받는다고 보는 것입니다.
인간 본성에 대한 성경의 관점은 헬라 철학적 관점과 구별됩니다. 성경은 인류의 육체적 영적 본성이 본래는 선했다고 이야기합니다.
그에 반해, 플라톤 (Plato)과 같은 철학자들은 인간을 이원론으로 이분하여 보았습니다. 이러한 사고는 결과적으로 몸 (육체적인
것)은 악한 것이고, 사람의 영은 선한 것이라는 이론을 낳았습니다. 이러한 가르침은 “데미우르고스” (Demiurge)라고
불리는 반신반인이 실수로 물질계를 창조했다고 믿는 영지주의자들 (Gnostics)같은 무리에게 영향을 미쳤습니다. 영지주의자들은
육체가 악하므로 하나님께서 육체의 형태를 결코 취하실 리가 없다고 믿었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성육신 교리에 반대했습니다. 사도
요한은 당시에 이러한 유형의 가르침을 접하고, 이에 대해 경고했습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영을 다 믿지 말고 오직 영들이 하나님께
속하였나 분별하라 많은 거짓 선지자가 세상에 나왔음이라, 이로써 너희가 하나님의 영을 알지니 곧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오신
것을 시인하는 영마다 하나님께 속한 것이요, 예수를 시인하지 아니하는 영마다 하나님께 속한 것이 아니니 이것이 곧 적그리스도의
영이니라 오리라 한 말을 너희가 들었거니와 지금 벌써 세상에 있느니라” (요한일서 4:1-3).
게다가, 영지주의자들은 오직 영만이 중요한 것이므로, 사람이 자기 몸에 무엇을 하든 아무 문제가 없다고 가르쳤습니다. 이러한
플라톤의 이원론은 1세기 때에도 오늘날과 마찬가지의 결과를 낳았습니다. 즉 그 이론은 금욕주의 아니면 방탕주의로 이끌었으며,
둘은 모두 성경이 정죄하는 것입니다 (골로새서 2:23, 유다서 1:4). 성경은 그래서, 헬라 철학과는 반대로 인간의 본성이
육적으로나 영적으로 모두 선했지만, 둘 다 죄에 의해 악영향을 받았다고 말씀합니다. 죄의 결과는 성경 속에서 종종 “육신”으로
언급되는 본성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거스르고 죄가 되는 희열을 찾는 그 무엇입니다. 마크 부벡 (Mark Bubek) 목사는
육신을 다음과 같이 정의합니다. “육신은 자연인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거나 섬기는 것을 불가능하게 하는 내재된 실패의 법칙입니다.
이는 사람의 타락으로부터 물려받은 강제적이며 내적인 힘으로서, 하나님과 하나님의 의에 반대하는 일반적이고도 구체적인 반항으로
나타납니다. 육신은 결코 새롭게 되거나, 개선될 수 없습니다. 육신의 법칙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소망은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새 생명으로 말미암아 육신이 완전히 처형되고 교체되는 데 있습니다. ”
육신의 현현과 싸움
인간 존재 안에서 육신은 어떻게 그 모습을 드러낼까요? 성경은 그 질문에 다음과 같이 대답합니다. “육체의 일은 분명하니 곧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우상 숭배와 주술과 원수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 짓는 것과 분열함과 이단과, 투기와 술
취함과 방탕함과 또 그와 같은 것들이라 전에 너희에게 경계한 것 같이 경계하노니 이런 일을 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것이요” (갈라디아서 5:19-21).
세상에서 육신의 일이 드러나는 사례들은 명백합니다. 미국 내 음란물의 영향에 대한 최근 조사에서 밝혀진 안타까운 사실들을 살펴봅시다. 이 연구에 따르면, 매 1초마다 미국 내에서는,
• $3,075.64가 음란물에 소비되고 있으며,
• 28,258명의 인터넷 사용자들이 음란물을 시청하고,
• 372명의 인터넷 사용자들이 검색 엔진에 성인 검색어를 입력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매 39분 마다 미국에서 새로운 음란물 영상이 제작되고 있습니다. 이러한 조사는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이라 누가 능히 이를 알리요마는” (예레미야 17:9)이라고 슬퍼했던 선지자 예레미야의 진술을 극명하게 보여줍니다.
육신의 결과물
성경은 육신 안에서 살면 몇 가지 불행한 결과를 낳게 된다고 말씀합니다. 첫째, 성경은 육신에 따라 살면서 자신들의 죄 된 행동을
결코 바꾸거나 회개하려고 하지 않는 자들은 이생과 다음 생에서 하나님과의 분리를 경험하게 될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 “너희가 그 때에 무슨 열매를 얻었느냐 이제는 너희가 그 일을 부끄러워하나니 이는 그 마지막이 사망임이라” (로마서 6:21)
• “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 (로마서 8:13)
• “스스로 속이지 말라 하나님은 업신여김을 받지 아니하시나니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 자기의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질 것을 거두고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두리라” (갈라디아서 6:7-8)
게다가, 사람은 육신적 본성의 노예가 되기도 합니다. “너희 자신을 종으로 내주어 누구에게 순종하든지 그 순종함을 받는 자의 종이
되는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혹은 죄의 종으로 사망에 이르고 혹은 순종의 종으로 의에 이르느니라” (로마서 6:16). 이
노예 생활은 언제나 파괴적인 생활 방식과 악화되는 삶으로 이어집니다. 선지자 호세아는 “그들이 바람을 심고 광풍을 거둘 것이라”
(호세아 8:7)라고 말했습니다.
문제의 사실은 육신에 순종하는 것이 언제나 하나님의 도덕률을 깨는 결과를 초래한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매우 현실적인 의미에서
사람은 확실히 하나님의 도덕률에 불순종할 수는 있지만, 결코 그것을 깰 수는 없습니다. 예를 들면, 사람이 지붕 위에 올라가 목에
망토를 두르고 중력의 법칙을 깨겠다는 바람을 가지고 지붕에서 뛰어내릴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그는 곧 자신이 날 수 없다는
것과 중력의 법칙을 깨뜨릴 수 없다는 것, 그리고 그러한 과정 속에서 중력의 법칙을 증명하며 결과적으로 깨지는 것은 자기
자신뿐이라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도덕적 행동도 이와 마찬가지입니다. 사람이 육신의 삶을 통해 하나님의 도덕률에 불순종할 수는
있지만, 그는 자신의 행동을 통해 어떤 식으로든 자기 자신을 파괴함으로써 오직 하나님의 도덕률이 사실임을 증명하게 될 뿐입니다.
육신 극복하기
성경은 육신을 극복하고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회복할 수 있는 세 단계의 과정을 제시합니다. 첫째 단계는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악한 행동을 인정하는, 정직의 행보입니다. 이것은 인간 부모에게서 태어난 모든 사람들에 대해 성경이 말하는 바, 즉,
사람들은 죄인이고 자기를 만드신 하나님과 깨어진 관계로 이 세상으로 들어온다는 내용에 동의하는 것을 포함합니다.
• “여호와여 주께서 죄악을 지켜보실진대 주여 누가 서리이까” (시편 130:3)
• “만일 우리가 죄가 없다고 말하면 스스로 속이고 또 진리가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할 것이요… 만일 우리가 범죄하지 아니하였다
하면 하나님을 거짓말하는 이로 만드는 것이니 또한 그의 말씀이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하니라” (요한일서 1:8, 10)
다음 단계는 성령 안에서 걷는 것입니다. 이는 구원을 위해 하나님께 부르짖고, 하나님 앞에서 올바르게 살며 육신의 욕망에 순종하지
않도록 사람에게 능력을 주시는 하나님의 성령을 받는 것을 수반합니다. 이러한 변화와 새로운 삶의 행보는 성경 여러 곳에 설명되어
있습니다.
•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갈라디아서 2:20).
• “이와 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께 대하여는 살아 있는 자로 여길지어다” (로마서 6:11)
• “내가 이르노니 너희는 성령을 따라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 (갈라디아서 5:16)
• “누구든지 그리스도와 합하기 위하여 세례를 받은 자는 그리스도로 옷 입었느니라” (갈라디아서 3:27)
•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 (로마서 13:14)
•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으라” (에베소서 5:18)
• “내가 주께 범죄하지 아니하려 하여 주의 말씀을 내 마음에 두었나이다” (시편 119:11)
마지막 단계는 죽음의 행보입니다. 즉 육신이 그 욕망하는 것에 굶주려 결국 죽게 되는 단계입니다. 사람이 하나님의 성령을 통해
거듭난다고 해도, 여전히 옛 본성을 가지고 있어 새로운 본성과 성령으로부터 오는 바람들과 싸우게 되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실질적인 관점에서, 크리스천은 의도적으로 옛 자아, 육신의 본성이 가진 욕구 채우기를 피하고, 성령에 의해 인도함 받는 새로운
행위를 연습해야 합니다.
• “오직 너 하나님의 사람아 [죄된 행동을] 피하고 의와 경건과 믿음과 사랑과 인내와 온유를 따르며” (디모데전서 6:11)
• “또한 너는 청년의 정욕을 피하고” (디모데후서 2:22)
•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신이 도리어 버림을 당할까 두려워함이로다” (고린도전서 9:27)
• “그러므로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 곧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이니 탐심은 우상 숭배니라” (골로새서 3:5)
•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욕과 탐심을 십자가에 못 받았느니라” (갈라디아서 5:24)
• “우리가 알거니와 우리의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이 죽어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 노릇 하지 아니하려 함이니” (로마서 6:6)
• “오직 너희는 그리스도를 그같이 배우지 아니하였느니라, 진리가 예수 안에 있는 것 같이 너희가 참으로 그에게서 듣고 또한 그
안에서 가르침을 받았을진대, 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따르는 옛 사람을 벗어 버리고, 오직 너희의 심령이
새롭게 되어,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 (에베소서 4:20-24)
결론
위대한 설교가들이자 찬송가 작가들이었던 요한과 찰스 웨슬리의 어머니 수잔나 웨슬리는 죄와 육신을 다음과 같이 설명했습니다. “너의
사고력을 약화시키거나 너의 양심을 민감하지 못하게 손상시키거나 하나님에 대한 너의 감각을 모호하게 하거나 영적인 것들에 대한
너의 기쁨을 빼앗는 것은 그 무엇이라도, 요컨대 어떤 것이라도 성령보다 육신의 권한과 능력을 증가시키는 것이라면 그것이 그 자체로
아무리 좋은 것이라고 할지라도, 그것은 너에게 죄가 된단다.” 크리스천 삶의 목적 중 하나는 육신을 이기는 성령의 승리이며,
하나님 앞에서 의로운 삶으로 나타나는 삶의 변화를 이루는 것입니다.
이 싸움은 매우 현실적이겠지만 (성경이 분명히 말하는 바), 크리스천은 하나님께서 육신에 대한 궁극적인 승리를 가져다주실
것이라는, 하나님의 확실한 약속을 받았습니다. “너희 안에서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는
확신하노라” (빌립보서 1:6).
마음이란 무엇인가?
성경이 마음에 대해 말하고 있는 것에 주목할 것입니다. 성경은 마음을 거의 1,000번 정도 언급합니다. 본질적으로 성경이 말하는 마음이란 우리의 감정과 욕구가 거하는 영적인 부분입니다.
사람의 마음을 살펴 보기 이전에, 하나님께서는 감정과 욕구를 가지고 계시므로, 또한 “마음”도 갖고 계신다고 말할 수 있음을
밝혀둡니다. 하나님께서 마음을 가지셨기 때문에, 우리도 마음을 가집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마음에 맞는” (사도행전
13:22)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마음을 알고 따르는 지도자들과 함께, 당신의 백성을 축복하십니다 (사무엘상
2:35, 예레미야 3:15).
사람의 마음은 천성적으로 악하고, 신뢰할 수 없고, 부정직합니다. 예레미야 17:9은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이라 누가 능히 이를 알리요마는”이라고 말씀합니다. 다시 말해서, 타락은 우리의 가장 깊은 곳에 영향을 끼쳤습니다. 우리의
마음과 감정, 그리고 욕구는 죄에 의해 부패되었습니다 – 게다가 우리는 이 문제가 얼마나 만연해 있는지 깨닫지도 못합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마음을 알 수 없을 지 모르지만, 하나님께서는 알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마음의 비밀을 아[십니다]” (시편
44:21, 또한 고린도전서 14:25 참조). 예수님은 “모든 사람을 아[셨고], 또 사람에 대하여 누구의 증언도 받으실 필요가
없었으니 이는 그가 친히 사람의 속에 있는 것을 아셨[기 때문입니다]” (요한복음 2:24-25). 하나님께서는 마음을 아시므로
정당하게 판단하실 수 있습니다. “나 여호와는 심장을 살피며 폐부를 시험하고 각각 그의 행위와 그의 행실대로 보응하나니”
(예레미야 17:10).
마가복음 7:21-23에서 예수님께서는 마음의 타락 상태를 지적하셨습니다. “속에서 곧 사람의 마음에서 나오는 것은 악한 생각 곧
음란과 도둑질과 살인과, 간음과 탐욕과 악독과 속임과 음탕과 질투와 비방과 교만과 우매함이니, 이 모든 악한 것이 다 속에서
나와서 사람을 더럽게 하느니라.” 우리의 가장 큰 문제는 외적인 것이 아닌, 내적인 것입니다. 우리 모두는 마음의 문제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이 구원을 얻기 위해서는 마음이 변화되어야 합니다. 이는 오직 믿음에 대한 응답으로 하나님의 능력에 의해서만
일어납니다.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릅니다]” (로마서 10:10). 하나님께서는 은혜로 우리 안에 새로운 마음을
창조하실 수 있습니다 (시편 51:10, 에스겔 36:26). 하나님께서는 “통회하는 자의 마음을 소생시키[겠다고]” (이사야
57:15) 약속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새로운 마음을 창조하시는 역사는 우리의 마음을 시험 (시편 17:3, 신명기 8:2)하고, 우리의 마음에
새로운 개념, 새로운 지혜, 그리고 새로운 욕구를 채우시는 일 (느헤미야 7:5, 열왕기상 10:24, 고린도후서 8:16)을
수반합니다.
마음은 우리 존재의 중심부이며, 성경은 우리의 마음을 깨끗하게 지키는 것을 강조합니다. “모든 지킬 만한 것 중에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 (잠언 4:23).
12월 12일(금) 로마서 6-7장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마음의 법과 육신의 법(7:25)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그런즉 내 자신이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노라 Thanks be to God--through Jesus Christ our Lord! So
then, I myself in my mind am a slave to God's law, but in the sinful
nature a slave to the law of sin.
로마서 6장은 죄와 육체의 관계를 강조하며 죄의 결과는 사망입니다(6:23). 로마서 7장은 죄와 마음의 관계를 강조하며 죄를 이기지 못하는 나는 곤고한 사람이라고 탄식합니다(7:24). 로마서 8장은 죄와 성령의 관계를 강조하며 죄를 다스실 수 있는 힘은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간구하는 것에 의한 것이라고 합니다(8:28).
"마음은 원이로되"는 성경 구절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다"에서 나온 표현으로,
마음은 ~하고 싶어 하지만 몸(현실)이 따라주지 못하는 상황을 뜻하며, 특히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나약함과 유혹을 이기지 못하는 인간의 한계를 지적하며 기도하라고 권면하신 말씀입니다.
전체 의미 : '좋은 뜻은 있지만, 실제로 행하기는 어렵다'는 뜻으로, 인간의 연약함과 죄의 유혹을 인정하고, 이를 극복하기 위해 깨어 기도해야 함을 강조하는 표현입니다.
성경적 배경 :
마가복음 14:38 (마태복음 26:41) : 예수님이 겟세마네 동산에서 제자들에게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있어 기도하라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일상적 활용 :
다이어트나 금연처럼 의지는 있지만 몸이 따라주지 않을 때, 혹은 신앙생활에서 결심은 했으나 실천이 어려울 때 자주 사용되는 표현입니다.
* 마음의 원함, 영혼의 갈망
우리들도
우리 안에 주님이 심어주신 마음의 원함, 영혼의 갈망이 있다는 점을 기억하고 감사합시다. 비록 우리 자신이 그 갈망을 강하게
느끼지 못할지 몰라도, 비록 아직도 세상에 대한 끌림이 더 현저하게 느낄지 몰라도, 여러분은 법 아래 있지 않고 은혜 아래 있음을
기억하십시오. 성령께서 반드시 여러분을 도와주실 것입니다. 물론 우리들이 육신의 연약함이 우리 안에 함께 있음을 자각하고,
우리도 스스로 깨어서 기도하기를 힘써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말씀에서 잠들어 버린 제자들, 실패한 제자들 안에서 여전히
긍정의 요소를 인정하고 격려해주신 주님의 말씀을 생각하며, 기쁨과 감사함을 느낍니다.
여러분
가운데 지금 자신의 실패한 모습만 기억하며 낙심한 성도가 있습니까? 주님은 여러분 안에 ‘마음의 간절한 원함’이 있음을 알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낙심하지 말고 용기를 내어, 우리 안의 마음의 원함이, 영혼의 갈망이 내 안에서 더 힘있게 역사할 수 있도록
스스로 돕는 자가 됩시다. 우리 모두 내면의 영혼의 소리와 열망에 귀를 기울입시다. 그 갈망에 더 자주 순종하기를 힘씁시다.
거스르는 육체의 소리와 본성에는 단호하게 처음부터 거절하기를 훈련합시다. 내 힘으로는 불가능하니 늘 주님께 기도로써 도움을
청합시다. 반드시 여러분의 삶에 놀라운 영적 진보가 이루어질 줄 믿습니다.
기도합시다.
마가복음
14:38 말씀에,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있어 기도하라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라는 주님의 이 말씀을 한평생
마음에 새겨서, 주님이 우리 안에 주시는 거룩한 소원을 다 이루어드리는 삶을 살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
두 가지 마음이 무엇인가?
바울은 겉 사람과 속 사람이라고 표현을 한다. 율법을 가진 유대인들 또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마음에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야 한다는 마음이 있고 그와 함께 여전히 구원받기 이전에 나의 삶의 형식 즉 죄를 짓고 욕심대로 살아가려는 마음이 함께 존재한다.
한 몸에 두 가지 마음이 함께 존재하고있다. 그럼 누가 이기는가?
‘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으로 나를 사로잡는 것을 보는도다.’ 항상 지체의 법 즉 육신의 죄의 법이 마음의 법을 이기고 마음의 법은 육체의 법에게 사로 잡히는 것을 보았다. 율법은 선 한 것이다. 그러나 율법을 행할 능력이 없어 선한 율법인 줄 알지만 그렇게 살지 못하는 자신을 발견한 것이다.
그 결과는 무엇인가?
항상 죄의 법이 이긴다. 아주 단호하다. 사망의 법이 생명의 법을 이긴다. 말씀대로 하나님의 뜻대로 살고 싶다고 생각은 하지만 결과는 늘 죄의 법에 따라 무릎 꿇고 있는 자신을 볼 뿐이다.
하나님을 알고 예수님의 은혜를 알아 날마다 말씀 안에서 살겠다고 고백하고 그렇게 노력하지만 넘어지고 또 넘어지는 나 자신을 발견 할 때가 얼마나 많은가?
내 안에 율법을 정해 놓고, 노력해서 그렇게 살면 교만해지고 그렇게 살지 못하면 죄의식 속에 빠진다. 내 속의 율법으로 남을 판단하고 정죄하지만 정작 그 판단으로 자신이 올무가 되어 버리는 경우는 또 얼마나 많은가? 우리는 누구도 판단할 자격이 없다. 누구에게나 선한 마음과 악한 마음이 존재하고 항상 선한 마음보다 악한 마음에 이끌려 살아갈 수밖에 없는 근본적인 죄인이기 때문이다.
그런 상황에서 이렇게 탄식을 한다. 이 탄식은 비단 바울의 탄식이 아니라 나의 탄식이고 죄 아래 있는 우리 모두의 탄식이다.
‘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24)’
결국 우리는 예수그리스도가 필요하다. 율법으로 선한 마음으로 세상을 살 수 없기 때문이다. 죄가 무엇인지, 선이 무엇인지 알지만 우리는 선을 행한 능력이 없기 때문이다.
이런 비극적인 운명에 해결책은 율법의 선한 행동이 아닌 우리를 구원해 주실 예수그리스도이시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그런즉 내 자신이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노라 (25)’
내가 선해서 구원을 얻은 것이 아니다. 내가 율법을 행함으로 구원을 얻는 것이 아니다. 나의 선한 마음이 나를 구원시키는 것이 아니다.
나를 이 사망에서 건져 주실이, 나를 이 죽음의 죄에서 건져 주실 분, 나를 살리실 분은 오직 예수그리스도와 그 의 십자가 은혜일 뿐이다.
여러분이 늘 묵상하는 분이든, 우연히 오늘의 묵상을 읽게 되었는 마음에 한 가지 약속하자!
나는 누구도 판단할 수 없는 사람이다. 나는 그 어떤 사람보다 선하지 못하다. 오늘 내가 살아갈 수 있는 것은 내가 선해서가 아니라 나를 구원해 주신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일 뿐이다.
그러니 나는 평생 누구도 판단하지 않고 날마다 나 자신만 바라보고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만 살겠다.
본 묵상의 전개와 적용은 개인의 묵상과 적용이 아닌 묵상 가족을 위한 보편 묵상과 적용임을 알려 드립니다.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
예수님이 죽임을 당하시기 바로 전날 밤 겟세마네 동산에서 땀방울이 피방울이 될 정도로 고민하시며 기도하실 때, 같이 올라갔던 가까운 제자 세 명이 한 시간도 깨어 있지 못하고 조는 것을 보시고 주님이 하신 말씀이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악하다”(마 26:40)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이 말씀을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자신의 잘못을 변명하는데 종종 이용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술을 무척 좋아하는 기독교인 친구는 술 먹을 때 이런 변명을 하곤 하여 주위를 웃기기도 합니다. 저도 마찬가지여서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는 잘못을 저지르고 나서 “하나님,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합니다. 저를 용서하시고 이러한 죄에서 구원하소서”라고 기도하곤 합니다. 오랜 세월 인 박힌 죄나 잘못을 저지르고 나서 이런 말로 변명도 하고 위안도 삼으려고 하는 것을 보면 인간의 부패가 얼마나 심각한가 라는 것을 새삼 느끼게 됩니다.
또 우리가 자주 원용하는 말씀이 있습니다. “내 속 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있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 아래로 나를 사로 잡아 오는 것을 보는도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 내라(롬 7:23,24). 우리는 이 구절도 인용하며 바울과 같은 위대한 사도도 이런 약함과 어려움이 있었는데, 우리 같은 평신도가 어찌 완벽할 수 있겠느냐며 변명합니다. 그러나 그 변명이 시도 때도 없이 자주 일어납니다. 양심의 가책을 느끼긴 하지만, 자신의 변호를 위해서는 정말 근사한 말씀이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주님은 우리 인간의 약함을 아십니다. 그래서 제자들이 한 시도 깨어 있지 못하는 모습을 보시고 크게 야단치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우리의 잘못을 대변해 주시는 것처럼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마치 허다한 죄를 덮어 주는 사랑의 본을 보여 주시는 것 같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약함을 잘 아십니다. 전에도 여러 번 “주님은 유대인에게 자비하심으로 죄악을 사하사 멸하지 아니하시고 그 진노를 여러 번 돌이키시며 그 분을 다 발하지 않으셨으니 저희는 육체뿐이라 가고 다시 오지 못하는 바람임을 기억하셨기 때문입니다”(시 78:38,39).
그렇습니다. 우리 인간은 약합니다. 그러나 주님이 우리 육체와 본성의 약함과 결점을 불쌍히 여기시고 용서하신다고 하더라도 우리는 우리의 잘못을 계속 주님의 말씀을 이용하여 자신을 변명해서는 안됩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우리의 잘못을 크나큰 슬픔으로, 그리고 하루 빨리 벗어버려야 할 무거운 짐으로 생각해야 합니다. 주님이 우리 육신의 약함에 대해 말씀하신 것은 인간의 불가피한 상태를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바로 잡아야 할 상태에 대한 진단에서 하신 말씀입니다.
프랑스의 프랑소아 페넬롱은 “십자가의 왕도”라는 책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약하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나도 압니다. 저는 누구보다도 약합니다. 자신의 어떠함을 깨닫는 것은 매우 큰 유익입니다. 하지만 약함이 인간의 본성과 분리될 수 없는 속성이라고 할지라도 약함을 과장하지 마십시오. 참된 힘의 근원으로부터 떨어지게 됩니다. 오직 내면으로 주님께 귀를 기울이고 비열한 것들을 담대히 경멸하십시오.”
사도 바울은 참된 힘의 근원이 바로 주님이심을 알았기에 로마서 7:25에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고 말합니다. 또 주님은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라는 말씀과 함께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있어 기도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말하자면 우리가 얼마든지 주님의 은혜로 인하여 우리의 약함과 죄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깨어 기도하는 영적 훈련을 통하여 우리의 모든 인간적인 면이 바뀌고 새로운 피조물이 되어 우리 자신을 하나님의 뜻에 복종할 수 있는 산 제물로 드릴 수 있다는 것입니다. 주님과의 밀접하고도 꾸준한 교제와 기도를 통하여 “마음은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라는 말씀으로 자신을 변명하는 것이 과거의 일이 되기를 기원합니다.
Clement Clarke Moore와 도시의 산타
많은 사람들이 클레멘트 클라크 무어 (1779-1863)가 "성 니콜라스의 방문"이라는 구절을
통해 미국에서 산타 클로스의 대중화에 영향을 준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는 또한 자신의 권리로 중요한 뉴요커였습니다.
무어는 1779 년 맨해튼 섬에서 태어났습니다.
번영 Desobry. 첼시의 CC Moore에 속한 부동산의지도. 1835. 뉴욕시 박물관. 47.294.2
번영 Desobry. 첼시의 CC Moore에 속한 부동산의지도. 1835. 뉴욕시 박물관. 47.294.2
무어는 그의 학문적 추구 외에도 헌신적 인 가족이었습니다. 그는 1813 년에 캐서린 엘리자베스 테일러와 결혼했으며,
1830 명의 자녀가있었습니다. 캐서린은 15 년에 사망하여 XNUMX 살에서 XNUMX 살 사이의 아이들을 아버지의 보살핌 아래
남겨 두었습니다. 그는 그의 딸 자선 엘리자베스 무어에게 쓴“세인트 니콜라스에서”를 포함하여 그의 자녀와 손자를 위해시를 쓰는
것을 즐겼습니다. 시는 박물관의 일부입니다 원고 수집.
클레멘트 클라크 무어. 세인트 니콜라스에서. ca. 1816-1830. 뉴욕시 박물관. 54.331.4
23 년 1823 월 1837 일에 트로이 센티넬에서 익명으로 '성 니콜라스 방문'(현재는 크리스마스 전날 밤)이 처음으로
익명으로 출판되었습니다. 그는 1844 년까지 자신의 자녀를 촉구 할 때 출판 된시를 책에 포함시킬 때까지 자신의시를 지었다.
1844 년 무어는 트로이 센티넬 (Troy Sentinel) 출판사 인 N. 터틀 (N. Tuttle)에게이 논문이 출판 한시의
저자에 대해 물었다.
“처음 출판 당시 나는 저자가 누구인지 알지 못했지만 그 이후에 저자라는 사실을 알게되었습니다. 나는 [Orville L.]
Holley 씨로부터이 도시의 상인이었던 Daniel Sackett 씨의 아내 인 Sackett 부인으로부터 그것을 받았다는
것을 이해했습니다. 그것은 두 번 출판되었다 트로이 센티넬; 어린 반 학생들에게 많은 찬사를 받고이 책의 다른쪽에있는 판화를 만들어 여러 판을 출판했습니다.”
Moore는 "Blixom"에서 "Blitzen"으로 순록 중 하나의 이름을 포함하여 Tuttle이 보낸시의 버전을 몇 가지 수정했습니다.
N. Tuttle에서 Clement Clarke Moore에게 보낸 편지. 1844. 뉴욕시 박물관. 54.331.17b
N. 터틀. 세인트 니콜라스 또는 산타 클로스 방문 기록. 뉴욕시 박물관. 54.331.17
무어의 지연된 주장은“성 니콜라스 방문”이라는 저자의 주장이 종종 논쟁되는 몇 가지 이유 중 하나입니다. 뉴요커 인 헨리 리빙스턴 소령의 조상은 20 대 초에 나왔다th 리빙스턴이 실제로 저자라고 주장하는 세기. 분쟁에 대한 자세한 정보는 찾을 수 있습니다 LINK. 뉴욕시 박물관은이 문제에 대한 입장을 취하지 않고 단순히 우리의 컬렉션에서 찾을 수있는 관련 자료를 제시합니다.
“성 니콜라스의 방문”은 우리가 읽는 법을 배운 이래로 크리스마스 이브에“크리스마스 전날 밤”을 큰 소리로 읽은 형제와 저를
포함하여 여러 세대의 어린이들을 기쁘게했습니다. 집에서! 이번 휴가철에 방문객들이“From St. Nicholas”에 똑같이
매료되기를 바랍니다.
Emily Chapin은 박물관 원고 및 Ephemera 보유와 관련된 프로젝트를 감독합니다.
유혹(誘惑)을 물리치려면
마르틴 루터(Martin Luther) “우리 모두는 새들이 나의 머리위로 날아다니는 것을 막을 수는 없지만 그러나 새들이 내 머리털 속에 둥지를 트는 것은 막을 수 있다.”
인간은 누구나 안목의 정욕, 육신의 정욕, 이승의 자랑 등 세상의 온갖 유혹이 내게 다가오는 것을 막을 수는 없지만 그러나 그 유혹에 넘어가서 죄를 짓는 일은 막아낼 수가 있다.
그러나 인간은 누구나 죄성(罪性)으로 부터 완전히 자유로울 수 없는 연약한 질그릇과 같아서 자신의 의지만으로는 세상의 모든 유혹을 다 물리칠 수는 없다.
이는 사도 바울(Apostle Paul)이 “내 속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으로 나를 사로잡는 것을 보는도다 오호라 나는 곤고(困苦)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로마서 7장 22-24절)”라고 고백한 데에서 잘 알 수가 있다.
그런데 한편으로 사도 바울은 말하기를 “사람이 감당할 시험(시련과 유혹) 밖에는 너희가 당한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하지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하지 아니하시고 시험 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고린도전서 10장 13절)”라고 하면서 우리가 세상의 모든 유혹을 물리칠 수 있는 방도를 제시하였다. 그 방도는 전능하신 하나님과 가까이 지내면서 그를 믿고 구함으로 그의 능력을 빌려 우리가 그렇게 할 수가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자신을 스스로 돌아보아 내가 특히 세상의 유혹을 받기 쉬운 약한 곳들이 어디인지를 솔직히 인정하고 하나님과 동행하면서 세상의 유혹에 빠지지 않도록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해 나가야만 하는 것이다. 이 길만이 세상의 유혹에 빠져 죄를 짓지 않는 유일한 길이다. 그러나 인간들의 실상은 이렇게 세상의 유혹에 빠져 죄를 지은 적이 전혀 없는 사람은 사실상 없다고 보아야 한다. 다만 세상의 유혹에 빠져 죄를 지은 후에 하나님 앞에 회개하여 용서함을 받고 이후로 다시는 그런 죄를 짓지 아니하면서 세상의 유혹을 이겨나가는 것뿐이다.
나라가 발전하려면 이렇게 세상의 온갖 유혹들을 물리치며 살아가는 모범적인 사람들이 리더로서 나서서 만인의 모범이 되어야 함은 말할 나위도 없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나라의 실상은 여기서 너무나도 동떨어져 있어 한심하기 짝이 없다. 특히 다수의 범죄를 저지른 자들이 정치지도자를 하겠다고 나서서 설치고 다니니 말이다.
이것을 치유하는 근본적인 대책은 국민들의 인륜도의(人倫道義)에 대한 의식수준을 끌어 올려야 하는 것이며 이를 위해서는 국민정신문화개혁운동이 절실한 것이다. 그런데 현 대통령조차 이런 사명감이 전혀 없으니 할 말이 없다. 이제는 양식 있는 국민들이 나서야 한다.
근대화에서 항일, 독립까지… 대한민국의 초석이 된 기독교
이진구 기자 sys1201@donga.com 님의 스토리 • 18시간 • 17분 읽음
[기독교 한국선교 140주년 부활절] 한국 개신교, 스무 번의 ‘역사적 순간’
근대화에서 항일, 독립까지… 대한민국의 초석이 된 기독교
올해는 기독교 한국 선교 140주년 되는 해. 한국 개신교계는 1885년 4월 아펜젤러 선교사(1858∼1902·미국 북감리회)와 언더우드 선교사(1859∼1916·미국 북장로회)가 인천항에 도착한 때부터 공식적으로 한국 선교가 시작된 것으로 보고 있다. 이후 기독교는 140년 동안 종교를 넘어 정치, 문화, 경제, 사회, 교육 등 우리 사회 모든 분야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며 지금의 대한민국이 있게 하는 초석이 됐다. 대한민국의 오늘을 만든 한국 기독교의 역사적 모습을 정리했다.
1. 배재학당, 이화학당 등 근대교육기관 설립
1885년 초기 배재학당 교사. 배재학당은 1885년 미국인 선교사 아펜젤러가 세운 우리나라 최초의 학교다. 동아일보DB
개신교 중 가장 먼저 한국에 발을 디딘 미국 북장로회와 미국 북감리회는 선교 일환으로 학교 설립을 서둘렀다. 언더우드와 아펜젤러는 각각 언더우드 학당과 배재학당을 설립했는데 뒤를 이어 한국에 도착한 미국 남장로회와 호주, 캐나다 장로회 등은 물론 성공회, 구세군 등 군소교파까지도 학교 설립을 선교의 주요 사업으로 삼았다.
1885년 8월 아펜젤러 선교사가 서울 정동에 문을 연 배재학당(남학교)은 한국 최초의 근대 학교가 됐다. 이듬해인 1886년 5월 서울 정동에는 미국 감리교회 선교사 스크랜튼 여사가 여학교인 이화학당(현 이화여자대학교의 전신)을 설립했다. 이화학당은 당시 여성 차별로 인해 제대로 된 교육을 받지 못하던 이 땅의 여성들에게 배움의 길을 열어줬다.
서울에서 미 북장로회가 주도한 교육사업 중 가장 큰 성과는 연희전문(현 연세대학교의 전신)의 설립. 1912년 언더우드 선교사는 한국에서 대학을 설립하기 위해 미국에서 대대적인 모금 운동을 벌였고 미국 독지가 스팀슨 등의 기부금으로 현재의 신촌 캠퍼스 부지를 마련했다. 1917년 4월 설립 인가를 받은 연희전문학교는 이후 세브란스 의전과의 통합을 거쳐 현재의 연세대학교로 발전했다.
2. 여성 교육과 여권 신장의 산실
기독교가 이 땅의 여성 문제, 여성의 사회적 지위와 기본적 인권 회복에 끼친 영향은 실로 혁명적로, 한국 근대 여성운동은 기독교의 전래와 발전에 거의 모든 기반을 두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남녀 평등사상은 기독교에 앞서 천주교가 이 땅에 전래하면서 시작했다. 하지만 그 양과 질에서 여성의 지위 향상이 본격적으로 이뤄진 것은 개신교 선교와 함께였다. 복음이 전파된 뒤 감리교에서는 전득삼이, 장로교에서는 한씨 부인이 여성으로서 처음으로 세례를 받았는데 이는 남존여비 사상이 뿌리 깊던 당시 여성도 남성과 마찬가지로 동등한 영혼을 갖고 있음을 보여주는 계기가 됐다. 여성들은 예수 앞에서는 남녀가 평등하다는 것을 알게 됐고 갇혀 살던 규방 생활에서 나와 일요일에는 교회에 나가 남성과 마찬가지로 예배드리는 행동으로 이어졌다.
예배 참석은 여성 교육으로 이어졌다. 성경을 읽기 위해서는 한글을 배워야만 했기 때문이다. 자기 의사를 문자로 표현할 수 있게 된 여성들은 전보다 훨씬 더 당당하게 사회의 한 축으로 자리매김해 나갔다.
3. 항일과 독립운동
프랭클린 윌리엄스 선교사
100여 년 전 이 땅에 선교사들이 뿌린 씨앗은 대한민국이 독립하고 성장하는 데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1906년 프랭클린 윌리엄스 선교사(1883∼1962)가 충남 공주에 세운 기독교 사립학교인 영명학교는 유관순 열사의 모교. 1914년 12세의 나이로 입학한 유관순 열사는 이곳에서 2년여를 수학한 뒤 엘리스 샤프 선교사의 추천으로 서울 이화학당에 진학했다.
근대화에서 항일, 독립까지… 대한민국의 초석이 된 기독교
1919년 일본 동경에서 벌어진 2·8 독립선언은 유학 중인 기독교계 학생들이 중심이 된 거사다. 그 구심점은 동경의 조선 YMCA였고 이 때문에 선언 장소도 YMCA였다. 이후 3·1운동이 진행되는 과정에서도 기독교계 학교와 학생들이 차지한 비중은 일일이 열거할 수 없을 정도로 컸다. 당시 연희전문학교 학생 등 기독교계 학생들은 민족지도자들의 3·1운동과는 별개로 기독교 학교 학생연합체가 주도하는 전민족적인 독립운동을 계획했다. 이들은 서울 숭동교회를 회합 장소로 사용하면서 독자적인 선언서를 준비하는 등 구체적인 단계까지 운동을 추진했다. 그러나 추진 과정에서 민족지도자들의 3·1운동 계획을 알고 이에 합류하게 된다.
4. 개화의 산실이 된 기독교
1885년 아펜젤러, 언더우드 선교사가 국내에 처음 도착한 인천 제물포항 자리에 세워진 한국 기독교 100주년 기념탑.동아일보DB
선교사들은 수백 년간 내려온 구습(舊習)을 타파하고 풍속을 개량하기 위해 애를 썼다. 선교를 위해 지방을 다니던 한 선교사는 “내가 시골 농가에 가서 보니 방 안에 더러운 흙만 붙이고 종이로 도배하지 아니하고, 또 방을 쓸지도 아니하기에 그 이유를 물으니 ‘우리 농부의 집은 정결하게 하면 못 쓰는 게 풍속이다’라고 했다”라며 당시 농촌 실정을 지적했다. 또 “병이 들어 치료하고 약을 쓰는 데도 위생 등 이치는 상관하지 않고 자기 풍속만 지키고 있었다”라고 적었다. 이런 선교사들의 인식은 이 땅에서 미신, 아편 등을 몰아내고 허례허식에 물든 관혼상제도 변화시키는 계기가 됐다.
5. 술, 담배, 아편과의 전쟁
19세기 말 한국에 온 선교사들은 술과 담배, 아편의 폐해를 목격하고 이를 막기 위해 금주·금연 운동을 시작했다.
1895년 장로교회와 1897년 감리교회는 세례 조건으로 금주· 금연을 요구했으며 이는 새로운 기독교 공동체 형성을 위한 윤리적 규칙이기도 했다.
금주· 금연은 초기 한국 교회의 정체성을 나타내는 중요한 표지였고 새로운 인간상과 국가 건설의 의지를 반영한 것이기도 했다. 교회의 금주· 금연 운동이 단순히 기독교적인 윤리 운동 차원을 넘어 민족 운동에 이바지하게 된 데는 이런 배경이 있다.
한국 사람들이 소비하는 돈의 상당 부분이 술과 담배, 아편으로 가고 있었기 때문에 이를 막거나 줄이고, 대신 우리 물건 사기 운동을 펼치면 첫째 자신의 건강과 사회적 폐해를 줄이는 것은 물론이고 민족 자본 형성에도 도움이 된다고 봤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로 1920년대 들어 교회의 금주·금연 운동은 민족적 차원으로 확대됐는데 총독부 정책에 호응하는 친일파의 모습과 이에 대비되는 교회의 금주 운동은 새로운 공동체를 형성하고 국채보상운동 등 구국 운동과 연결되며 민족의식을 고취했다.
6. 근대 의료기관의 확대
2019년 복원된 보구녀관 전경. 동아일보DB
선교사들이 이 땅에서 처음 시작한 일들은 당시 사람들이 원하던 교육과 의료 부문부터 시작됐다. 영혼의 구원과 함께 육신의 치료에 힘쓰고 무지를 계몽해 새로운 세계를 밝혀주는 게 선교의 첩경이라고 봤기 때문이다. 이는 당시 정부의 포교 금지 정책을 완화하는 데도 효과적이었다. 당시 선교사들이 병원과 학교 설립에 주력한 것도 이 때문이다. 특히 병원은 학교에 비해 남녀노소, 신분에 차이 없이 누구나 이용하고 혜택을 볼 수 있다는 점에서 선교의 큰 수단이 됐다.
대표적인 예가 조선 최초의 근대식 종합병원인 세브란스병원이다. 1904년 9월 설립된 이 병원은 설립 기금 1만 달러를 헌금한 루이스 세브란스의 이름을 땄는데 1909년 세브란스 의학교 인가를 받고, 1947년 세브란스 의과대학으로 승격했다.1887년 10월 문을 연 보구녀관(普救女館)은 한국 최초의 근대식 여성 병원이자 여성 의학교육 기관이다. 보구녀관은 ‘모든 여성을 위한 병원’이란 뜻으로 남성 의사에게 진료받지 못하는 여성을 위해 메타 하워드 선교사를 비롯한 여성 의료 선교사들이 진료에 나섰다. 지금의 이화여자대학교 의과대학·이화의료원의 전신으로 보구녀관은 진료 외에 의료 선교와 의학교육, 간호교육에도 매진해 한국 최초의 여성 의사 박에스더와 최초의 간호사 이그레이스, 김마르다를 배출했다.
7. 우상과 미신의 타파
초기 선교사들에게 한국 사회에 뿌리 깊게 배어 있는 미신과 우상 신봉 문화는 그 고유의 역사성을 인정하면서도 바꿔야 할 대상이기도 했다. 알렌은 ‘한국의 풍습, 무당’이란 글에서 당시 미신과 관련된 모습을 이렇게 서술했다.
“서울의 밤은 매우 조용한데 정적을 깨뜨리는 소리 중 하나가 무당이 내는 소리다. 무당의 말을 믿는 사람은 대부분 하층민이다. 사용하는 도구는 장구, 심벌, 구리 막대기, 징, 바구니, 우산, 부채, 인형 등이며 이 중 바구니는 콜레라에 걸린 사람의 몸에 쥐가 있다고 믿고 고양이 소리를 내면서 긁는 도구로 쓰인다. 그리고 환자의 상태에 따라 무당은 사용하는 도구나 인형 등을 결정한다.”
초기 내한 선교사들은 한국의 일상이 돼 버린 우상과 미신을 보면서 이런 현실을 시정하고자 했다. 이런 일 역시 교육이나 의료 활동을 통해 점차 시정될 수 있을 것으로 봤고 이의 타파를 계몽하고자 했다.
8. 노비와 백정의 해방
계급 타파와 평등의 이상 실현에서 교회의 백정(白丁) 해방운동만큼 우여곡절이 많았던 것도 없다. 이들은 호적에서 제외된 천민 계급으로 가장 비천한 하층 구성원이었다. 비록 갑오경장(1894년)으로 제도상 신분적 평등이 보장됐다고는 하지만 오랜 관습이 하루아침에 바뀔 수는 없었다.
교회가 이런 상황에 관심을 보인 것은 1895년 4월이었는데 서울 곤당골 장로교회(승동교회) 무어 선교사(1860∼1906)는 조정에 보낸 진정서를 통해 백정들의 가련한 상태를 낱낱이 알리면서 비인도적인 천대를 막아달라고 건의했다. 이런 노력으로 같은 해 5월 전국에 백정에 대한 신분 해방과 갓 착용 허용을 알리는 방이 붙었고 승동교회에는 6명의 백정이 입교했다. 하지만 문제는 간단하지 않았다. 어제까지 백정이었던 사람이 양반 신자들에게 “형제”라고 부르는 것을 용납하지 않는 사람이 많았기 때문. 장로교 선교활동으로 전국에서 입교한 교인이 200여 명에 불과하던 시절에 6명이나 되는 백정의 입교는 그 자체로 큰 진통이 될 수밖에 없었다. 한국 교회의 공식적인 회의록이나 문서 등에 이런 백정 문제가 거의 언급되지 않은 사실이 이를 방증한다. 그러나 교회가 시작한 하나님 앞에서는 누구나 평등하다는 인식은 이후 실질적인 신분 타파 사회로 나아가는 마중물이 됐다.
9. 한글의 보급과 재발견
선교사들은 한글을 보급하고 대중화시키는 데도 힘을 썼다. 교회에서 말씀의 진리를 가르치기 위해서는 성경을 보급해야만 했고 이를 위해서는 한글을 가르치는 것이 필수적이었기 때문이다.
‘교인 중에 한문으로 성경을 보는 이도 별로 없고, 더구나 국문으로 보는 이도 몇이 못 된다. 금년부터는 주일 오후마다 국문 공부를 착실히 한다 하니 성경의 뜻을 많이 깨닫고 영혼의 양식을 넉넉히 만들기에 유조할 뿐더러 문자상에도 유식한 사람들이 되겠더라’ (1902년 5월 경기 남방지역의 한 교회 통신 중)
교회의 성경을 통한 한글 보급은 결과적으로 문맹 퇴치에 크게 이바지했다. 그리고 그 상당수는 배움의 기회를 가지지 못했던 부녀자들이었다. 당연히 성경 보급도 크게 늘었는데 1886년까지 1만5690권이던 성경 보급은 1887년 한 해에만 6600권이, 1892년까지는 57만8000권이 보급됐다. 이런 분위기는 1893년 성경의 번역과 출판을 담당하는 기구인 대한성교서회 창설로 이어졌다.
10. 출판 문화의 보급1885년 한국지부를 설치한 대영 성서공회가 1936년까지 이 땅에서 출판한 성경은 무려 1807만9466권에 이른다. 전체 국민이 2000만 명 남짓하던 시대에 성경 출판 1800만 권이란 숫자는 기독교가 이 땅의 출판문화에 얼마나 이바지했는지 짐작하게 하는 대목이다.
한국 선교에서 출판과 인쇄의 중요성을 가장 먼저 인식한 것은 1885년 아펜젤러, 스크랜튼 선교사 등을 파견한 미 북감리교 선교부였다. 북감리교 선교부는 한국에서의 출판 사업을 위해 1887년 당시 중국에서 활동하던 올링거 목사(1845∼1919)를 파견했다. 그는 영어, 한문, 한국어를 인쇄하는 삼문출판소를 설립하고 기독교문서협회도 창립해 초대 회장이 됐다. 1892년 그가 월간지로 간행한 ‘Korean Repository(한국 지식·정보 보관소)’는 당시 한국 사정을 과학적·문헌적으로 제공하는 가장 권위 있는 자료이기도 했다.
올링거 목사로부터 시작된 기독교 서적 출판의 역사는 이후 1893년 감리교 선교사로 다시 내한한 헐버트로 이어졌고, 이후 국내외 종교인들과 신자들이 각종 출판사를 설립하고 서적을 출간하며 기독교를 넘어 한국 출판문화로 성장했다.
우는 자와 함께 울라… 어려운 이와 함께 한 140년
11. 사회복지 사업의 초석
여의도순복음교회가 1988년 7월 경기군포시에 준공한 엘림복지타운 전경. 여의도순복음교회 제공
지역과 사회를 위한 복지 사업은 이 땅에 기독교가 전래한 이래 지금까지 면면히 이어져 온 정신이다. 이런 활동은 개화기, 일제강점기는 물론 6·25전쟁 이후 지금까지 이어져 오고 있는데 여의도순복음교회의 심장병 환자 무료 수술·엘림복지타운 건설 등이 대표적이다.
여의도순복음교회의 심장병 환자 무료 수술은 1984년 21명을 시작으로 지금까지 6000여 명이 넘는 환자들에게 새 생명을 줬다. 대상 국가도 중국, 베트남, 캄보디아, 몽골 등으로 확대됐고 특히 지난해 7월에는 6·25전쟁 당시 유엔군으로 참전한 에티오피아 용사의 손자 테카렌 메릿 베주아엣(7세) 어린이를 포함해 5명의 어린이가 무사히 수술받고 여의도순복음교회 주일예배에 참석하기도 했다.
여의도순복음교회가 1988년 7월 경기 군포시에 준공한 엘림복지타운은 불우청소년과 무의탁 노인들을 위한 복지시설. 약 6만6000㎡(2만여 평)의 부지에서 500여 명의 불우청소년들에게 다양한 분야의 직업 교육을 제공하고 200여 명의 무의탁 노인을 수용할 수 있는, 당시로서는 동양 최대 복지시설이었다. 1988년 경로원과 직업전문학교로 시작한 엘림복지타운은 1994년 선교원, 1997년 요양원을 개원했다.
12. 시민운동의 산실이 되다
2012년 2월 굿피플 지원으로 주택 70가구와 정화조 7개가 준공된 필리핀 마니바악 마을을 이영훈 목사(가운데)와 굿피플 관계자들이 걷고 있다. 여의도순복음교회 제공
한국기독교청년회(Young Men’s Christian Association·YMCA)는 일제강점기 민족 근대화와 독립운동에 가장 앞장선, 오래된 시민단체 중 하나. 현재 국내에서 활동하는 모든 시민단체의 모델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개화기인 1903년 영국의 복음주의 개신교인들이 들여왔는데 당시에는 황성기독교청년회라고 불리며 개신교와 서양 문화 유입에 지대한 역할을 했다. 이 단체를 통해 이 땅에 야구, 농구, 배구, 수영이 들어온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고 이승만 대통령도 1910∼1912년 YMCA 간사로 재직하며 교회 설교, 성경연구반 인도, 전국적인 YMCA망 구축, 번역 사업 등을 맡았다.
일제강점기 많은 지식인과 독립운동가들이 YMCA와 인연을 맺었는데 이는 2·8 독립선언과 3·1운동에도 많은 영향을 미쳤다. 이러한 시민운동의 정신은 1970∼80년대 민주화 운동으로 이어져 부마민주항쟁 당시 노무현 변호사가 부산YMCA 이사와 시민중계실 법률 자문을 맡기도 했다. YMCA가 일제강점기, 군사독재 시절에도 재야 운동에 큰 역할을 할 수 있었던 것은 YMCA가 외국인 선교사와 사제들이 활동하는 국제단체라 함부로 건드리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여기에 명백한 기독교 단체기에 독재정권이 민주화 운동 인사들에게 흔히 덮어씌웠던 공산주의자라는 의혹에서 비교적 자유로울 수 있었다.
13. 새 나라의 기틀을 만들다
1948년 5월 31일, 대한민국 첫 국회인 ‘제헌 국회’는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로 개회됐다. 옛 중앙청 회의실에서 198명의 의원이 참석했는데 당시 임시의장으로 선출된 이승만 박사는 이 자리에서 “대한민국 독립민주국 제1차 회의를 여기서 열게 된 것을 우리가 하나님에게 감사해야 할 것입니다. 종교·사상 무엇을 가지고 있든지 누구나 오늘의 이 일이 사람의 힘으로만 된 것이라고 우리가 자랑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에게 감사를 드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나는 먼저 우리가 다 성심으로 일어서서 하나님에게 감사를 드릴 터인데 이윤영 의원 나오셔서 간단한 말씀으로 하나님에게 기도를 올려주시기 바랍니다”라고 말했다. 이어 목사인 이윤영 의원의 기도가 이어졌다.
우리나라 첫 헌법인 제헌헌법에 예수 그리스도 정신의 핵심인 자유와 평등사상이 반영된 것은 이런 배경과 무관하지 않다.
14. 공산주의를 막는 방패가 되다
절대적인 존재를 믿는 기독교와 신이란 존재를 부정하는 공산주의는 애초부터 양립 불가능한 관계였다. 이 때문에 공산주의 사상을 인정할 수 없는 한국 기독교계는 6·25전쟁 당시 수많은 신자가 목숨을 잃고 교회가 불태워지는 엄청난 피해를 겪었다.
60여 명의 전 교인이 신앙과 자유를 지키려다 인민군에 의해 무참히 살해된 전남 영광군 야월교회는 이런 역사의 산증인. 야월교회는 광주·목포 지역에서 선교활동을 한 미국 남장로교회 유진 벨 선교사(1868∼1925)가 1908년 설립한 곳으로 그의 사위인 윌리엄 린턴 선교사는 인요한(존 린턴) 국민의힘 국회의원의 조부이기도 하다. 인근 염산교회도 전쟁 당시 77명의 교인이 순교하는 엄청난 피해를 입었다. 당시 염산교회를 이끈 김방호 목사는 교인들이 피란을 권했으나 “목사가 어떻게 교회와 성도를 두고 다른 곳에 가느냐”라며 남아 있다가 변을 당했다.
이런 사례는 전쟁 당시 전국에 걸쳐 무수히 많이 벌어졌는데 “신앙을 버리지 않으면 죽이겠다”라는 인민군의 협박과 고문에도 굴하지 않는 성도들의 신념은 이 땅에 자유민주주의 대한민국이 사라지지 않게 하는 원동력이 됐다.
15. 대한민국 발전의 원동력 ‘희망’을 일깨운 지도자들
고 조용기 목사. 여의도순복음교회 제공
세계가 놀라는 ‘한강의 기적’은 한국 교회 부흥과 궤를 같이한다. 특히 전쟁 후 폐허가 된 극빈국 대한민국 국민을 ‘할 수 있다, 하면 된다, 해보자’라는 희망의 메시지로 일으켜 세운 조용기 목사와 여의도순복음교회의 역할을 빼놓을 수 없다. 1958년 서울의 변두리인 은평구 대조동 깨밭에서 천막 교회로 출발한 여의도순복음교회는 1992년에 이르러 성도 수 70만 명에 이르는 세계 최대 교회로 성장했다.
조용기 목사는 “천당과 지옥 이야기보다는 용기와 희망을 설교하려고 애썼다. 부자 교회 못 가고 우리 교회에 온 가난한 사람들이 용기와 희망을 얻고 위로를 받는 것이 나에게도 큰 힘이 됐다”라고 고백했다. 이런 힘이 국민적 용기와 희망으로 승화해 산업화의 원동력이 됐고, 오늘 선진국의 밑거름이 됐다는 게 역사학자들의 평이다.
지난해 7월 ‘제13회 인구의 날’ 기념식에서 저출생 극복에 기여한 공로로 국민훈장 모란장을 받은 이영훈 담임목사(오른쪽). 여의도순복음교회 제공
여의도순복음교회는 2대 담임목사인 이영훈 목사가 부임하고 2000년대에 들어서면서 조용기 목사가 강조한 희망의 목회를 절대 긍정과 절대 감사의 신앙으로 한 단계 끌어올려 성도들에게 소외된 계층에 대한 사랑 실천과 봉사의 가치를 강조하는 성숙의 길로 나아갔다. 이 또한 갈등과 경쟁으로 얼룩진 우리 사회에 또 다른 희망이 되고 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16. 민주화운동의 구심점
2025년 한국 기독교 선교 140주년을 맞아 지난해 목회데이터연구소가 진행한 ‘한국교회의 한국 사회 기여에 대한 설문조사’에 따르면 응답자들은 해방 전은 ‘항일 민족 운동(85%)’, 해방 후는 ‘민주화운동(57%)’을 가장 큰 기여로 꼽았다. 그만큼 한국 기독교가 이 땅의 민주화에 이바지한 바가 큰데 그 상징 중 하나가 서울 종로구 대학로에 있는 한국기독교회관이다.
1970년 1월 문을 연 한국기독교회관은 명동성당과 더불어 우리나라 민주화운동의 산실로 불리던 재야 운동 세력의 구심지. 1970년대 초반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인권위원회, 한국기독교학생총연합, 한국기독청년협의회 등의 단체들과 진보적 성향의 한국기독교장로회가 이곳에 입주해 민청학련사건 구속자들의 석방 운동과 목요기도회 등을 전개하며 반독재민주화운동의 구심점 역할을 했다. 1976년 3·1 민주 구국 선언 사건, 1978년 동일방직 노동자들의 농성, 1980년 5월 서강대생 김의기가 투신자살로 광주민주화운동의 진실을 알리려 했던 곳이기도 하다.
17. 통일을 꿈꾸며 북한 지원에 나서다
2023년 11월 평화통일연대가 주최한 ‘한국교회 초청 화해와 평화, 평화통일을 위한 포럼’에 따르면 한국 교회의 북한 지원 규모는 국내 대북 민간 지원단체 지원 총액의 70%에 달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는 남북 관계 경색 국면에서도 ‘남북 평화 구축의 조성자’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다는 평가다.
평양 봉수교회에서 평양심장병원 착공 예배를 드리고 있는 고 조용기 목사. 여의도순복음교회 제공
특히 여의도순복음교회의 평양 심장병원 건립 추진은 인도적 지원은 물론이고 남북통일이라는 더 큰 꿈으로 나아가기 위한 희망의 걸음이다. 1984년부터 국내에서 심장병 환자들을 무료로 치료해 온 여의도순복음교회는 북한의 심장병 환자들을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돌보고 치료하기 위해 2007년 12월 평양 중심부에 3만3000㎡ 규모의 심장병 치료 전문 종합병원을 착공했다. 지하 1층, 지상 7층 규모의 이 병원은 안타깝게 2010년 3월 북한에 의한 ‘천안함 피격 사건’ 이후 남북 관계가 경색되면서 공사도 중단된 상태. 남북한 민간 교류의 상징이었던 평양심장병원은 현재 7층 건물의 골조 공사만 끝낸 상태로 머물러 있다. 여의도순복음교회는 남북 관계가 회복돼 병원이 완공되기를 기도하고 있다. 병원이 완공되면 북한 주민들에게 수준 높은 의료 서비스와 함께 남북 평화공존과 통일을 앞당기는 중요한 역할 해낼 것으로 기대를 모으고 있다.
18. 이웃과 함께 아파하고 우는 한국 교회
한국 기독교와 교회 역사는 국가와 국민이 어려운 상황에 부닥칠 때마다 누구보다 먼저 나선 희생과 봉사의 역사이기도 하다.
특히 여의도순복음교회는 국가가 어려운 상황을 맞을 때마다 성도들이 함께 모여 금식하고 눈물로 기도하며 위기를 극복하는 데 앞장섰다. 또 태안 앞바다 기름 유출 사고, 세월호 참사, 코로나 팬데믹, 이태원 참사, 지진과 산불 등의 재난이 일어났을 때 성도들의 헌금을 모아 지원금을 보내고, 직접 사고 현장을 찾아가 자원봉사를 하며 ‘우는 자와 함께 울라’라는 성경의 가르침을 실천했다.
최근 동시다발적으로 발생한 산불로 피해를 본 지역 주민을 돕기 위해 10억 원의 긴급 구호헌금을 대한적십자사를 통해 지원한 것은 그 작은 예 중 하나. 구호헌금은 경북 의성군, 안동시·청송군·영양군·영덕군을 비롯해 경남 산청군과 하동군, 울주군 등 산불 특별재난지역으로 선포된 곳을 위해 사용됐다. 여의도순복음교회는 2020년 코로나19 대구·경북 지역 확산 당시에도, 2023년 튀르키예 대지진과 이태원 참사 때도 각각 10억 원을 지원했다.
19. 도움을 받는 나라에서 도움을 주는 나라로
한국 기독교계의 해외 선교와 봉사는 그 어떤 나라보다도 활발하다. 대표적인 예가 여의도순복음교회가 만든 국제구호 NGO ‘굿피플’이다.
대사회적 구제 사업을 더 전문적으로 실행하기 위해 1999년 7월 설립된 ‘굿피플’은 2005년 파키스탄 지진, 2008년 미얀마 사이클론 재해, 2011년 일본 대지진, 2023년 시리아 강진 등이 발생했을 때마다 긴급 구호단을 파견해 재난 구조와 인명 구조, 의료봉사 등 사업을 전개해 왔다.
굿피플의 해외 지원 사업은 분야를 가리지 않고 다양하게 전개됐는데 보건소 건축 및 운영, 보건의료 전문 인력 양성, 건강검진 및 의약품 지원 등 보건 분야에만 무려 156만7000여 명이 혜택을 받았다. 학교 기숙사와 도서관, 아동센터 건립, 취약계층을 대상으로 한 장학금과 급식 지원, 전문교육 커리큘럼 구축을 통해서는 9만9800여 명이 도움을 받았고, 우물 등 정수 센터와 정수시설, 상수도, 화장실 설치 등으로 5만5400여 명이 깨끗한 환경에서 살 수 있게 됐다.
20. 저출생 극복으로 미래를 세우다
여의도순복음교회가 국가와 미래세대를 위해 가장 역점을 두는 활동은 ‘저출생 극복’이다.
여의도순복음교회는 2012년 교계에서는 처음으로 매년 출산장려금 지원을 시작했다. 결혼격려금, 미혼모 자립 지원 등 지금까지 순복음교회가 저출생 극복을 위해 지원한 금액은 800억 원이 넘는다. 정부 기관도 아닌 여의도순복음교회가 저출생 극복에 앞장서는 이유는 국민이 없으면 교회도 존립할 수 없다는 생각 때문. 이영훈 목사는 각종 언론 인터뷰에서 “우리나라 출산율이 2명대에서 1명대로 급격히 떨어지는 걸 보면서 이러다가는 국민이 사라져 국가가 소멸하는 날이 오겠다는 두려움이 들었다”라며 “저출생 문제 해결은 국가는 물론이고 교회를 위해서도 꼭 필요하다”라고 말했다.
하나님의 법
하나님의 법(율법, 토라) 성경에 나타난 하나님의 명령 전체로, 인간의 바른 삶과 행위를 인도하는 기준이며, 하나님 백성의 삶의 지침이자 창조 질서를 보여주는 완전무결한 법칙입니다. 이는 단순히 지켜야 할 규칙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를 통해 알게 되는 '사랑'과 '은혜', 그리고 '생명'에 관한 내용이며, 이를 통해 사람은 의롭게 되고 지혜를 얻으며 복을 받는 길로 나아가게 됩니다.
주요 특징
포괄적: 구약의 토라(Torah)에서부터 신약의 새 언약까지 포함하며, 삶의 모든 영역을 다룹니다.
완전함: 인간의 죄를 낱낱이 드러내고, 의로움의 궁극적인 표준을 제시하는 완전한 법입니다.
보호와 인도: 무거운 짐이 아니라, 험한 길에서 넘어지지 않도록 돕는 기준점이며, 영혼을 소성케 하고 마음을 기쁘게 합니다.
상징: 안식일 규례처럼 하나님과 백성 사이의 표징이 되며, 가난한 이웃과 함께 살아가는 공동체 원리를 담고 있습니다.
새 언약: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의 법으로 완성되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벗어나게 하는 생명의 법으로 주어졌습니다.
중요성
하나님과의 관계: 하나님의 법을 지키는 자가 하나님의 자녀이며, 이를 통해 하나님과 동행합니다.
생명과 구원: 하나님의 법을 무시하면 생명을 잃을 수 있지만, 따르면 영원한 생명으로 가는 길이며, 하나님 나라의 시민이 되는 근거가 됩니다.
요약
하나님의 교회 지식사전는 하나님의 법은 단순히 의무가 아니라, 창조주가 주신 사랑과 생명의 선물이며, 삶의 모든 영역에서 하나님과 동행하며 복을 누리는 기준이 된다는 점을 강조합니다.
하나님의 법
율법은 도덕법과 의식법(儀式法)과 재판법으로 구성되어 있다.95)
도덕법(moral laws)
도덕법은 사람들이 하나님과의 관계와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지켜야 할 도덕적 규범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도덕적 속성에서 나온 것으로서 사람들을 위한 하나님의 뜻이다. 도덕법은 인간의 양심에 기록되어 있으며 모세의 율법으로 성문화(成文化)되었다. 그것은 십계명에 요약되어 있는데 출애굽기 20장과 신명기 5장에 기록되어 있다. 사람은 도덕법을 통해 죄를 깨닫는다.
십계명의 구분에 대하여, 역사상 몇 가지 의견들이 있었다. 유대인들은 출애굽기 20:2을 제1계명으로, 우리의 제1, 2계명을 제2계명으로 보았다. 천주교회와 루터교회는 우리의 제1, 2계명을 제1계명으로, 그리고 우리의 제10계명을 둘로 나누어 ‘네 이웃의 집을 탐내지 말라’는 것을 제9계명으로, ‘네 이웃의 아내 등을 탐내지 말라’는 것을 제10계명으로 본다. 그러나 개혁교회는 현재 우리의 구분대로 구분한다.
십계명에 대한 간략한 해석
십계명의 해석 원리는 웨스트민스터 대요리문답 99문답에 잘 진술되어 있는데 다음과 같은 요점들을 포함한다. ① 하나님께 대한 의무가 사람에 대한 의무보다 우선된다. 즉 1-4계명은 하나님께 대한 의무를, 5-10계명은 사람에 대한 의무를 보인다. ② 같은 종류의 죄들을 대표적으로 간결히 표현하였다. 십계명은 도덕법 전반의 요약이다. ③ ‘하라’는 명령과 ‘하지 말라’는 금지를 다 고려해야 한다. 즉 무엇을 하라는 명령은 무엇을 하지 말라는 금지의 내용을 포함하고, 무엇을 하지 말라는 명령은 무엇을 하라는 명령을 포함한다. ④ 행위 뿐만 아니라, 또한 생각과 마음에도 적용된다. 율법은 영적이다(롬 7:14).
제1계명: “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있게 말지니라.”
제1계명은 여호와 하나님의 유일하심을 증거한다. 그것은 하나님이 계시다는 사실을 부정하는 무신론은 물론, 유일하신 여호와 하나님 외에 다른 신과 우상을 인정하는 모든 생각을 정죄한다. 뿐만 아니라, 그것은 마리아와 성인들과 천사들에게 기도하고 종교적 경의를 표하게 하는 천주교의 가르침을 정죄한다.
제2계명: “너를 위하여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고 . . . 그것들에게 절하지 말며 그것들을 섬기지 말라.”
제2계명은 하나님을 섬기는 방법에 관한 것이다. 하나님은 영이시므로 하나님을 물질적 존재로 형상화하는 것은 큰 오류요 죄악이다. 예수님이나 마리아의 상이나 그림을 만드는 것도 비록 그것이 제2계명을 어기는 죄는 아닐지라도 삼가는 것이 좋을 것이다. 또한 예배당 안 강단 뒷벽에 십자가를 세우는 것도 바람직하지 않다고 생각된다. 그런 것은 연약한 성도들에게 우상이 될 수 있다.
제3계명: “너는 너의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말라.”
제3계명은 우리가 일상 생활이나 종교 의식에서 하나님의 이름을 헛되이 불러서는 안 된다고 명한다. ‘망녕되이’라는 말은 ‘헛되이, 함부로, 무의미하게’라는 뜻이다. 우리가 하나님께 찬송할 때와 기도할 때는 더욱 그러하다. 특별히, 우리는 하나님의 이름이나 성경구절을 농담거리로 사용해서는 안 된다. 그런 것들은 하나님께 대한 큰 죄이다.
제4계명: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히 지키라. . . . 이는 엿새 동안에 나 여호와가 하늘과 땅과 바다와 그 가운데 모든 것을 만들고 제7일에 쉬었음이라.”
제4계명은 하나님께 예배하는 날에 대해 명령한다. 구약시대에는 한 주간 가운데 제7일을 안식일로 성별하여 지키라고 명령되었다. 그 날을 거룩하게 구별하기 위하여 미리 구울 것은 굽고 삶을 것은 삶아야 했다(출 16:23). 안식일을 더럽히는 자나 그 날에 일하는 자는 반드시 죽임을 당해야 했다(출 31:14, 15).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나와 광야에서 지낼 때 안식일에 나무가지를 줍던 한 사람은 실제로 죽임을 당했다(민 15:32-36).
‘오늘날 안식일 계명이 문자 그대로 유효한가?’라는 문제는 십계명의 안식일 계명이 도덕법인가 의식법인가 하는 문제와 결부되어 있다. 루터나 칼빈은 안식일 계명을 도덕적 교훈을 가진 의식법으로 보았다. 칼빈은 안식일 계명의 의식적(儀式的) 부분은 그리스도의 오심으로 폐지되었으나, 교회의 공식적 집회와 휴식을 위한 필요성은 오늘날도 유효하며 따라서 신약교회는 열심히 주일을 공식적 집회의 날로 지켜야 한다고 강조했다(기독교강요, 2. 8. 28, 31-34).
1618-19년 화란에서 열린 개혁교회의 도르트 대회는 다음과 같이 진술했다:
하나님의 율법의 제4계명에는 의식적 요소와 도덕적 요소가 있다. 의식적 요소는 창조 이후 제7일의 휴식과, 특별히 유대인들에게 부과된 그 날의 엄격한 준수이었다. 도덕적 요소는 어떤 특정한 날이 종교를 위해 적합하다는 사실과, 그 목적을 위해 종교와 그것의 거룩한 묵상을 위해 필요한 만큼의 휴식이 요구된다는 사실에 있다. 유대인들의 안식일이 폐지되었으므로, 주일은 마땅히 그리스도인들에 의해 엄숙하게 성별되어야 한다. 사도들의 시대 이후, 그 날은 이미 원시 카톨릭 교회에 의해 지켜져 왔다.96)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21:7은 안식일에 관하여 “. . . 그것은 세상의 시초부터 그리스도의 부활 때까지는 주간의 마지막 날이었고; 그리스도의 부활 때부터는 주간의 첫째 날로 바뀌었으며, 성경에서 주의 날로 불리우고, 그리스도인의 안식일로서 세상 끝날까지 계속되어야 한다”고 말했다.
그리스도인들이 주일을 공식적 집회의 날로 구별하게 된 것은 우리에게 참된 안식을 주신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하심을 기념하는 데서 비롯되었다. 사도 시대에 이미 안식 후 첫날인 주일이 구별되기 시작하였고 집회의 날이 되었다. 주께서는 주일에 부활하셨고 그 다음 주일에 또 제자들에게 나타나셨다(요 20:19, 27). 성령께서는 주일에 처음으로 제자들 가운데 내려오셨다(행 2:1-4). 사도 요한이 성령의 감동 중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를 받은 날은 주일이었다(계 1:10). 드로아의 성도들은 주일에 모여 떡을 떼며 바울의 설교를 들었다(행 20:7). 사도 바울은 고린도교회에게 매 주일 정기적으로 헌금하라고 교훈하였다(고전 16:1, 2).
사도시대 직후의 교부들도 주일 집회에 대해 증거했다. 바나바 서신의 저자는 “그러므로 또한 우리는 예수께서 부활하신 제8일을 기뻐하기 때문에 그 날을 지킨다”고 썼다(15). 익나시우스는 “만일 옛 습관들로 살았던 자들이 새로운 소망에 이르러, 더 이상 안식일들을 지키지 않고 주의 날[주일]을 따라 그들의 삶을 산다면 . . . 만일 그러하다면, 우리가 어떻게 그를 떠나 살 수 있겠는가?”라고 말했다(마그네시아 사람들에게 보낸 서신, 9). 순교자 저스틴도 “그 도시에 사는 자들뿐 아니라 그 나라에 사는 자들도 다 일요일이라고 불리는 날에 성경 읽기와 기도와 권면과 성찬을 위해 모이곤 하였다. 그 회중은 일요일에 모였는데, 그것은 이 날이 하나님께서 어두움을 변화시켜 세상을 창조하신 첫째날이기 때문이며 우리 주 예수께서 이 날에 부활하셨기 때문이다”라고 말했다(트리포와의 대화).
그러므로 우리는 구약의 모범과 장로교회의 예배 모범대로 주일에 온 가족이 세속적 직업의 일들을 중단하고 매매(賣買)를 금하며 오락을 금해야 할 것이다(느 13:15-22; 사 58:13, 14). 신약 성도들은 복음적 자유를 가지고 주일을 거룩하게 지키되 구약 성도보다 못하게가 아니고 더 풍성한 방식으로 지켜야 할 것이다.
제5계명: “네 부모를 공경하라.”
제5계명은 자녀들이 부모에게 대해 가져야 할 태도를 가르친다. 이것은 부모와 자녀의 관계는 물론, 또한 노인과 청년, 스승과 제자, 고용주와 피고용인, 정부와 국민의 관계 등 연령적, 지위적 상하 관계에도 적용된다. 레위기 19:32, “너는 센 머리 앞에 일어서고 노인의 얼굴을 공경하며 네 하나님을 경외하라.” 베드로전서 2:13, 14, “인간에 세운 모든 제도를 주를 위하여 순복하되 혹은 위에 있는 왕이나 혹은 악행하는 자를 징벌하고 선행하는 자를 포장[칭찬]하기 위하여 그의 보낸 방백에게 하라.”
제6계명: “살인하지 말지니라.”
제6계명은 사람의 생명의 중요성을 가르친다. 이것은 결투, 폭동, 자살, 낙태, 안락사 등의 모든 살인 행위를 금한다. 출애굽기 21:22- 25, “사람이 서로 싸우다가 아이 밴 여인을 다쳐 낙태케 하였으나 다른 해가 없으면 그 남편의 청구대로 반드시 벌금을 내되 재판장의 판결을 좇아 낼 것이니라. 그러나 다른 해가 있으면 갚되 생명은 생명으로,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손은 손으로, 발은 발로, 데운 것은 데움으로, 상하게 한 것은 상함으로, 때린 것은 때림으로 갚을지니라.” 또 성경은 형제를 미워하는 것이 곧 살인이라고 말한다(요일 3:15).
그러나 사형, 정당 방위, 정당한 전쟁, 동물의 살해 등은 성경적으로 허용된다. 출애굽기 22:2, “도적이 뚫고 들어옴을 보고 그를 쳐 죽이면 피 흘린 죄가 없으나 해 돋은 후이면 피 흘린 죄가 있으리라.”
제7계명: “간음하지 말지니라.”
제7계명은 사람의 순결성 곧 정조의 중요성을 가르친다. 부부 관계를 벗어난 모든 성 행위는 간음이다. 또 행위로 간음하는 것뿐 아니라, 마음에 음욕을 품는 것도 간음으로 정죄된다(마 5:28). 또한 간음의 이유 외의 이혼와 중혼(마 5:32), 근친 상간, 동성애 등의 모든 부당한 성적 탈선 행위를 정죄한다.
제8계명: “도적질하지 말지니라.”
제8계명은 사유 재산의 권리를 가르친다. 이것은 절도, 강도 뿐만 아니라, 또한 사기, 횡령, 과분한 빚, 땅이나 집 등의 계약 위반, 거짓된 저울과 되, 투기, 고리 대금 등의 부정당한 경제 활동을 금한다. 레위기 19:35, 36, “너희는 재판에든지 도량형에든지 불의를 행치 말고 공평한 저울과 공평한 추와 공평한 에바와 공평한 힌을 사용하라.” 시편 15:5, “변리로 대금치[고리대금하지] 아니하며.”
제9계명: “네 이웃에 대하여 거짓 증거하지 말지니라.”
제9계명은 다른 사람의 명예의 중요성을 가르친다. 이것은 다른 이의 명예를 손상시키는 거짓된 비난, 중상 모략, 위증, 불공정한 판결, 아첨, 과장 등을 포함한 모든 종류의 거짓말을 금한다. 출애굽기 23:1-3, “너는 허망한 풍설을 전파하지 말며 악인과 연합하여 무함[모함]하는 증인이 되지 말며 다수를 따라 악을 행하지 말며 송사에 다수를 따라 부정당한 증거를 하지 말며 가난한 자의 송사라고 편벽되이 두호하지 말지니라.”
제10계명: “네 이웃의 집이나 아내나 기타 소유물을 탐내지 말지니라.”
제10계명은 살인, 간음, 도적질, 거짓 증거 등의 죄의 근원을 지적하고 있다. 탐심 즉 자기가 가지고 있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고 남의 것을 더 가지려는 욕심은 그 여러 죄들의 뿌리이다. 야고보 1:15는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는다’고 말씀했다. 모든 불평과 불만, 색욕이나 부정한 욕망, 그리고 물질로 인한 지나친 근심 등도 탐심의 결과이다. 성경은 탐심을 우상숭배의 죄라고 말한다(골 3:5). 탐심은 하나님 대신에 결국 물질이나 육신의 쾌락을 최고의 가치로 삼는 것이다. 성도는 탐심을 버리고 하나님이 주신 환경 처지에서 만족하며 살아야 한다.
도덕법의 목적
도덕법의 목적은 무엇인가? 그것은 세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첫째, 도덕법은 사람에게 하나님의 뜻을 알려준다. 로마서 7:12, 14, “율법은 거룩하며 계명도 거룩하며 의로우며 선하도다. . . . 우리가 율법은 신령한 줄 알거니와.” 둘째, 도덕법은 우리 자신의 죄악됨을 깨닫게 해준다. 로마서 3:20,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 로마서 4:15, “율법은 진노를 이루게 하나니 율법이 없는 곳에는 범함도 없느니라.” 로마서 5:20, “율법이 가입한 것은 범죄를 더하게 하려 함이라.” 로마서 7:7, “율법으로 말미암지 않고는 내가 죄를 알지 못하였으니.” 도덕법은 마치 거울과 같다. 셋째, 도덕법은 사람을 그리스도께로 인도한다. 갈라디아서 3:24, “이같이 율법이 우리를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는 몽학선생(파이다고고스 παιδαgωgός, 교사)이 되어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도덕법의 영속성
도덕법은 영속성을 가진다. 그것은 오늘날도 폐지되지 않았다. 성화의 목표는 의(義)와 거룩, 즉 죄 없는 성결의 상태이다. 이것이 하나님의 형상이며, 구원은 그 하나님의 형상의 회복이다. 그러므로 도덕법은 구원받은 자에게도 유익하다. 로마서 7:12, 14, “율법은 거룩하며 계명도 거룩하며 의로우며 선하도다. . . . 우리가 율법은 신령한줄 알거니와.” 디모데전서 1:8, “그러나 사람이 율법을 법 있게 쓰면 율법은 선한 것인 줄 우리는 아노라.” 마태복음 5:17, 19,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나 폐하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케 하려 함이로라. . . .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계명 중에 지극히 작은 것 하나라도 버리고 또 그같이 사람을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지극히 작다 일컬음을 받을 것이요 누구든지 이를 행하며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크다 일컬음을 받으리라.”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19:5, 6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도덕법은 모든 사람들, 즉 다른 이들 뿐만 아니라, 또한 의롭다 하심을 받은 자들도, 영원히 그것을 순종할 의무 아래 두는데; 그것은 단지 그것에 담긴 내용을 생각해서가 아니라, 또한 그것을 주신 창조주 하나님의 권위를 생각해서도 그러하다. 그리스도께서도 복음 안에서 어떤 방식으로도 이 의무를 해제하지 않으시고, 크게 강화하신다.
비록 참신자들이 행위언약으로서의 법 아래 있어서, 그것에 의해 의롭다 하심을 얻거나 정죄되는 것이 아니지만; 그것은 다른 이들에게 뿐만 아니라 또한 그들에게도 유익하다. 왜냐하면 그것은, 생활의 규칙으로서 그들에게 하나님의 뜻과 그들의 의무를 알려 줌으로, 그들이 그에 따라 행하도록 지도하며 속박하고; 또한 그들의 본성과 마음과 삶의 죄악된 부패성들을 드러냄으로, 그들이 그로 인해 자신들을 살펴 죄를 더 깨달으며, 죄 때문에 겸손해지며, 죄를 미워하게 하고; 그것들과 함께, 그들이 그리스도와 그의 순종의 완전함을 필요로 한다는 것을 더 분명하게 보게 하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그것은 중생한 자들이 그들의 부패성들을 제어하는 데도 유익하다. 왜냐하면 그것은 죄를 금하기 때문이며; 또 그것의 경고들은, 비록 그들이 법 안에 경고된 저주로부터 자유함을 얻었을지라도, 심지어 그들의 죄들도 마땅히 무엇을 받아야 하며, 그들이 이 세상에서 그것들 때문에 어떤 고난들을 기대할 수 있는지를 보여 주기 때문이다. 같은 방식으로, 그것의 약속들은 순종에 대한 하나님의 인정과, 그것을 행한 경우에, 비록 행위언약으로서의 법에 의해 그들에게 당연한 것으로서는 아니지만, 어떤 복들을 그들이 기대할 수 있는지를 보여 준다. 따라서, 법이 선을 장려하고 악을 제지하기 때문에, 사람이 선을 행하고 악을 피하는 것은 그가 법 아래 있고 은혜 아래 있지 않다는 증거는 아니다.
의식법(儀式法, ceremonial laws)
둘째로, 의식법은 할례, 성막제도, 제사들, 절기들, 정(淨) 부정(不淨)의 음식, 십일조 등에 대한 법들이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19:3은 의식법에 대해 다음과 말했다:
보통 도덕법이라고 불리는 이 법 외에, 하나님께서는 미성년의 교회로서의 이스라엘 백성에게 몇 가지 모형적 규례들을 담고 있는 의식법들을 주시기를 기뻐하셨는데; 그것들은 부분적으로 그리스도와 그의 은혜들, 행위들, 고난들, 은택들을 예시(豫示)하는 예배에 관한 것들과; 부분적으로 도덕적 의무들에 대한 여러 가지 교훈들을 제시하는 것들이다. 이 모든 의식법들은 이제 신약 아래서 폐지되었다.
의식법들의 한 부분은 예배에 관한 것들인데, 그것들은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사역들을 예표한다. 예를 들어, 성막제도에서 번제단은 대제사장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필요성을, 물두멍은 그의 성결함을, 떡상은 그가 생명의 떡 되심을, 촛대는 그가 세상의 빛 되심을, 향단은 그의 중보 기도를, 속죄소는 그의 십자가 대속 사역을 예표한다. 제사들에서 번제는 그의 완전한 순종과 속죄사역을, 소제는 그가 자신을 즐거이 드리심을, 화목제는 그가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하나님과 우리를 화목케 하심을, 속죄제와 속건제는 그의 속죄사역을 예표한다.
절기들에서 안식일은 그가 우리에게 참안식을 주셨음을, 유월절은 그가 친히 우리에게 유월절 어린양 되심을, 보리 초실절은 그의 부활을, 맥추절은 그의 속죄사역에 근거하여 유대인들과 이방인들 가운데 구원의 열매들이 맺힘을, 나팔절은 그의 십자가 대속의 복음을 전파함을, 속죄일은 그의 십자가 단번 속죄의 사역을, 수장절은 그로 말미암아 구원받은 자들이 천국에 들어감을, 안식년은 그의 대속 사역으로 인한 참안식을, 희년은 그의 대속 사역으로 인한 만물의 회복을 예표한다. 도덕법은 우리의 죄를 깨닫게 하며, 의식법은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사역으로 말미암은 죄 씻음의 길을 보여주는 것이다.
의식법은 또한 도덕적 교훈도 준다. 예를 들어, 할례는 언약에 당연히 내포된 성결과 순종을 교훈한다. 제사들은 일차적으로 속죄를 예표하지만 또한 하나님께 대한 우리의 순종과 헌신과 감사와 교제의 삶도 교훈한다. 절기들은 모든 시간이 하나님의 것임을 교훈하며, 또 십일조는 모든 물질이 하나님의 것임을 교훈한다. 정 부정의 음식에 관한 법은 세상과 구별된 거룩한 삶을 교훈한다.
의식법들이 보이는 도덕적 교훈들은 신약 아래서도 여전히 중요하고 강조되어야 한다. 우리는 눈과 귀와 마음의 할례를 받아 거룩하고 순종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 우리는 순종과 헌신과 감사와 교제의 제사를 하나님께 항상 드려야 한다. 우리는 날마다, 순간마다 하나님을 기억하며 섬겨야 한다. 우리는 물질적 소득의 십분의 일뿐 아니라 그 이상을 하나님께 드릴 수 있어야 한다. 소득의 십일조는 구약성경이 보여주는 헌금에 대한 최소한의 규정이다. 구약보다 더 풍성한 은혜를 받은 신약 성도는 소득의 십일조 이상을 하나님께 드리도록 힘써야 할 것이다. 또 우리는 세상과 구별된 거룩한 삶을 살아야 한다.
그러나 구약의 의식법 자체는 신약 아래서 폐지되었고 그것은 더 이상 신약의 성도들을 속박하지 않는다. 신약 성도들은 더 이상 구약의 의식법들의 의무 아래 있지 않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19:3, “이 모든 의식법들은 이제 신약 아래서 폐지되었다.” 특히 신약 히브리서는 의식법의 폐지, 더 정확히 말해, 율법제도의 폐지에 대해 분명히 가르쳤다.
히브리서 7:18, 19, “전엣 계명이 연약하며 무익하므로 폐하고 (율법은 아무것도 온전케 못할지라) 이에 더 좋은 소망이 생기니 이것으로 우리가 하나님께 가까이 가느니라.” 히브리서 8:13, “새 언약이라 말씀하셨으매 첫 것은 낡아지게 하신 것이니 낡아지고 쇠하는 것은 없어져 가는 것이니라.” 히브리서 10:1, “율법은 장차 오는 좋은 일의 그림자요 참형상이 아니므로 해마다 늘 드리는 바 같은 제사로는 나아오는 자들을 언제든지 온전케 할 수 없느니라.”
골로새서 2:16, 17, “그러므로 먹고 마시는 것과 절기나 월삭이나 안식일[안식일들]을 인하여 누구든지 너희를 폄론[판단]하지 못하게 하라. 이것들은 장래 일의 그림자이나 몸은 그리스도의 것이니라.” 로마서 14:5, 6, “혹은 이 날을 저 날보다 낫게 여기고 혹은 모든 날을 같게 여기나니 각각 자기 마음에 확정할지니라. 날을 중히 여기는 자도 주를 위하여 중히 여기고 [날을 중히 여기지 않는 자도 주를 위하여 중히 여기지 아니하고--전통사본]97) 먹는 자도 주를 위하여 먹으니 이는 하나님께 감사함이요 먹지 않는 자도 주를 위하여 먹지 아니하며 하나님께 감사하느니라.”
그러므로, 예를 들어, 어떤 이가 오늘날 유월절을 지키는 것이 성경에 명령된 바라고 주장한다면, 그 주장은 잘못이다. 성경에는 유월절만 지키라고 명령하지 않고 10가지의 절기들에 대해 다 명령하였으며 그뿐 아니라 할례와 제사에 대해서도 명령하였다. 우리가 의식법을 지키지 않는 것은 성경에 계시된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는 것이 아니고 순종하는 것이다. 구약의 의식법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구약의 절기들을 지키는 것이 성경적인 것이 아니고 지키지 않는 것이 성경적이다.
그러면 신약교회에서 부활절이나 맥추절, 추수감사절, 성탄절 등을 지키는 것은 잘못이며 무의미한 일인가? 우리는 그렇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우리가 그것들을 지킨다면, 그것은 그것들이 성경에 명령되었기 때문이 아니고 단지 그것들이 가지는 신앙적 의미와 유익 때문이다. 부활절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에 대한 감사의 뜻이 있고, 맥추절은 겨울이 지난 후 처음 한 추수에 대한 감사의 뜻이 있고, 추수감사절은 가을에 하는 모든 추수에 대한 감사의 뜻이 있다. 성탄절은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成肉身)에 대한 감사의 뜻이 있다. 그런 절기들은 교회들이 스스로 정하여 지키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런 절기들을 지키거나 안 지키는 것 때문에 서로를 판단하거나 정죄하는 일은 없어야 한다.
재판법(judicial laws)
셋째로, 재판법은 신정(神政) 국가로서의 이스라엘에서의 민법, 상법, 형법 등 사회 생활에 관한 법들이다. 출애굽기 21:1의 ‘율례’라는 원어(미슈파팀)는 ‘판단들’이라는 뜻으로 재판법을 의미한다. 재판법의 한 예는 출애굽기 22:1, “사람이 소나 양을 도적질하여 잡거나[죽이거나] 팔면 그는 소 하나에 소 다섯으로 갚고 양 하나에 양 넷으로 갚을지니라.” 구약의 어떤 법이 도덕법에 속하는지, 재판법에 속하는지 판단하기 어려운 경우도 있지만, 구약의 어떤 법이 신약에서 인정되거나 혹은 그 이유가 영구적이면 신약에서도 유효한 도덕법이라고 보고 그 외에는 재판법으로 볼 수 있다(박형룡, 인간론, 312쪽).
구약의 재판법들은 신약 아래서 역시 폐지되었다. 신정 국가에서 사용되었던 법들은 오늘날 세속 사회들에 그대로 적용되기 어렵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19:4, “또한 한 정치적 집단으로서의 그들에게, 그는 여러 가지 재판법들을 주셨는데, 그것들은 그 백성의 국가와 함께 끝났고, 지금은 다른 아무에게도, 그것들의 일반적 정당성이 요구할 수 있는 것 외에는, 의무를 지우지 않는다.”
이와 같이, 모세의 율법은 도덕법, 의식법, 재판법 등 세 가지 내용들로 구성되어 있다. 이 세 가지 중, 도덕법은 사람의 죄를 확정한다. 자범죄는 도덕법을 어긴 죄들이다. 사람은 도덕법을 통해 죄를 깨닫는다. 그것들은 곧 하나님을 바로 섬기지 못한 죄, 하나님을 첫째로, 전심으로 사랑하지 않는 죄, 부모를 공경하고 섬기지 않은 죄, 이웃을 미워한 죄, 사람을 죽이는 죄, 결혼 관계 이외의 모든 성적 범죄들, 남의 물건을 부당하게 취하는 죄, 거짓말 하는 죄, 남의 것들에 대해 탐심을 품는 죄 등이다.
성경에서 도덕적 죄들을 열거한 대표적 두 구절을 들어보자. 로마서 1:29-31, “곧 모든 불의, 음란(전통사본),98) 추악, 탐욕, 악의가 가득한 자요 시기, 살인, 분쟁, 사기, 악독이 가득한 자요 수군수군하는 자요 비방하는 자요 하나님의 미워하시는 자요 능욕하는 자요 교만한 자요 자랑하는 자요 악을 도모하는 자요 부모를 거역하는 자요 우매한 자요 배약하는 자요 무정한 자요 원통함을 풀지 아니하는 자요(전통사본)99) 무자비한 자라.” 갈라디아서 5:19-21, “육체의 일은 현저하니 곧 간음과(전통사본)100)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우상 숭배와 술수와 원수를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 짓는 것과 분리함과 이단과 투기와 살인과(전통사본)101) 술 취함과 방탕함과 또 그와 같은 것들이라. 전에 너희에게 경계한 것같이 경계하노니 이런 일을 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것이요.” 모든 사람은 이러한 죄악들로부터 구원을 받아야 한다.
죄의 법
'죄의 법'은 주로 성경, 특히 바울 서신(로마서)에서 사용되는 용어
인간 내면에 있어 선을 행하려 해도 악을 행하게 만들고 결국 죄와 사망으로 이끄는 강력한 힘 또는 원리를 의미합니다. 이는 하나님의 율법과 대조되며, 율법 자체를 죄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타락한 인간의 본성 안에 있는 죄의 세력이 율법을 통해 죄를 더욱 드러내고 죄책감을 느끼게 하는 상태를 설명합니다.
주요 특징
내면의 싸움 :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지만,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는 자신을 발견하게 하는 내적 갈등을 유발합니다.
사망의 권세 : 죄의 법은 결국 사망에 이르게 하는 '죄와 사망의 법'으로 이어지며, 아담의 범죄 이후 모든 인류에게 적용됩니다.
율법과의 관계 : 율법이 죄를 없애는 것이 아니라, 죄의 존재를 깨닫게 하고 그 죄의 실체를 드러내는 역할을 할 때 '죄의 법'처럼 작용합니다.
생명의 성령의 법 :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의 능력으로 죄와 사망의 법에서 해방되고, 생명의 법을 따르도록 이끄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주어집니다.
요약
'죄의 법'은 인간의 타락한 본성 속에 자리 잡은 죄의 세력으로, 율법 아래 있는 자를 죄와 사망으로 이끄는 원리이며, 예수 그리스도와 성령을 통해 이 법에서 벗어나 생명으로 나아갈 수 있다고 성경은 가르칩니다.
. 롬 7:23 야누스의 두 얼굴
로마신화에 나오는 문을 상징하는 두개의 얼굴
야누스는 서로 반대편을 보고 있는 두 얼굴이나 머리가 있는 모습으로 묘사될 때가 많다. 거짓과 진실 또는 앞뒤가 맞지 않는 사람을 지칭할 때, 야누스의 두 얼굴을 지녔다고 우리는 비유적으로 말하기도 합니다마는 정확한 의미는 없다.
오늘의 본문 말씀에
“내 지체속에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속에 있는 죄의 법으로 나를 사로잡는 것을 보는도다”.
사도
바울이 말한 “나”는 크게 둘입니다. 하나는 내 안에 선한 “나”이고 또 하나는 악한 “나”입니다. 인간을 헬라어로
페르소나(persona)라고 합니다. 페르소나는 영어의 퍼슨(person), 즉 사람입니다. 사람은 가면을 쓴 동물입니다.
왜냐하면 지성과 감성을 가진 인성으로서 영장류입니다. 바로 아담과 하와에서부터 시작된 타고난 배우들이기 때문입니다. 상황에
따라서 이렇게도 변신하고 저렇게도 변신하면서 어떻게든 자신의 이익, 방어 그리고 쟁취를 하고자 하는 이 세대들의 모습입니다.
그러나
헬라어의 persona의 어원을 성경적으로 살펴본다면 이렇습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형상
대로 사람을 창조하셨다(창1:27)라고 하여 인간의 이미지를 말합니다.하나님의 의도적이고 특별한 계획에 의해 "헬라어로 이마고
데이"(imago Dei), 히브리어로 "쩰렘 엘로힘"(צלם אלהים)대로 창조되었습니다. 이 말씀은, 하나님의 형상에서 시작하여, 생육하라는 명령, 그리고 인간에 의해 파괴된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시키시기 위하여 성육신하시며 구원과 재림의 영광을 보여 주시는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인간의
이미지는 하나님의 얼굴입니다. 또한 이 말은 어원적으로는 가면을 뜻하기도 합니다. 인간의 두 얼굴, 하나는 하나님이 주신 그
얼굴이며, 다른 또 하나의 내 안에 악한 나는 세상적으로 찌들고 휩싸이고 갖은 추악한 내면을 가진 나의 또 다른 변신입니다.
카프카의 변신이라는 소설을 나중에 참고하기 바랍니다. 참고로 잠깐 살펴보면 이렇다.
'변신'을 쓴 프란츠 카프카는 1883년 7월 유대인 가정에서 태어나 프라하에서 자랐다. 대학에서 법학을 전공한 그는 낮에는 보험국 관리로 일하고 밤에는 글을 쓰며 소설가의 삶을 살았다.
변신의
작가 카프카는 "프라하와 자신의 답답한 생활을 벗어나고 싶어 했건만 결국 떠나지 못한 사람, 세 번이나 약혼했으나 평생
독신이었다가 마흔한 살 생일을 앞두고 결핵으로 죽은 사람, 문학에 유례없을 만큼 모든 것을 걸었으면서도 작품을 불사르게 하고
나머지도 없애라고 유언을 하고 간 작가, 또한 그 작품에 대하여 무수한 해설서가 있어도 불가해하기만 한 작가"라고 정의했다.
'변신'은
1915년에 출간됐다. 카프카가 32세였을 때다. 길지 않은 글인데도 읽는 과정이 수월하지는 않았다. 중간중간 멈칫하게 되는, 몇
번이고 곱씹게 되는 문장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머릿속에서 물음표와 느낌표가 무수히 떠다녔다.
참고로 이 책은 서울대와 연세대에서 학생들에게 읽어야 할 필독서 목록에 선정된 소설이며 이후 많은 작가들의 테마 주제로 인용된 글이다.
돈 못 벌면 사람 취급 못 받는 세상 내용 자체는 단순하다. 주인공 '그레고르 잠자'는 어느 날 아침 눈 떠 보니 자신이 흉측하고 거대한 벌레로 변해버렸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는 아버지가 사업에 실패한 이후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는 가장의 역할을 하고 있었다.
그가 출근하지 않자, 직장에서 매니저가 집으로 찾아온다. 매니저와 가족들은 흉측한 벌레로 변해버린 그레고르를 발견한다. 놀란 매니저는 그 길로 집을 뛰쳐나가 버리고, 가족들은 충격에 휩싸인다. 한동안 가족들은 자신들이 처한 현실에 슬퍼하며 그레고르의 방도 청소해주고, 먹을 것도 챙겨준다. 하지만 시간이 갈수록 가족들은 아무런 도움이 안 되고 심지어 훼방을 놓기까지 하는 그를 그저 성가신 존재로 여긴다. 차라리
빨리 죽어버리거나 이 집을 나가버렸으면 하고 은근히 바란다. 그 사실을 알아챈 그레고르는 어느 날 먼지와 쓰레기들로 가득한
자신의 방에서 죽은 채 발견된다. 가족들은 한결 가벼워진 마음으로 각자의 삶을 이어나가며 소설은 끝이 난다. 내용은
특별할 게 없어 보이지만, 그의 문장과 행간 속 메시지는 결코 단순하지 않다. 하루아침에 벌레로 변해버린 그레고르 잠자, 그는
무엇을 의미할까. 일할 능력을 잃은 사람, 가족에게 물질적으로 아무런 도움을 주지 못하는 사람을 굳이 벌레로 그린 건, 물질 만능
사회 속 인간 존재의 하찮음을 말하려는 의도 아니었을까.
'이
얼마나 고요한 생활을 식구들은 영위하고 있는가' 하고 말하며 그레고르는 자기 앞의 어둠을 물끄러미 응시한 채 스스로가 부모와
누이에게 그러한 삶을 마련해 줄 수 있었다는 데 대해 커다란 자부심을 느꼈다. 그런데 지금 모든 고요, 모든 유복함, 모든 만족이
졸지에 충격으로 끝나버린다면 어떨까? (33쪽)
그러니 이제 어쩌면, 집 안을 돌아다니는 것도 힘이 들 만큼 호흡이
가빠져서 하루 건너 열린 창가 소파에서 시간을 보내는, 천식으로 고생하는, 늙은 어머니가 돈을 벌어야 한단 말인가? 열일곱
살에다 아직 어린아이이고 지금까지의 사는 방식이라곤 예쁘장하게 옷 입고, 실컷 자고, 살림을 조금 돕고, 몇 가지 소박한 오락이
끼이고, 무엇보다 바이올린이나 켜는 것이 고작이었던 누이동생이 돈을 벌어야 한단 말인가?
이야기가 이 돈을 벌어야 할 필연성에 미치면, 우선 언제나 그레고르는 문을 떠나 문 곁에 놓인 서늘한 소파에 몸을 던졌다. 수치와 슬픔으로 몸이 뜨거웠기 때문이다. (41쪽)
아빠는 왜 새우처럼 자야만 했을까 예전에
내가 이 책을 읽으면서 그레고르의 아버지, 그리고 그레고르에게 느꼈던 감정은 조소에 가까웠다. 가족과 시간을 보내려는 노력도
하지 않고 돈 벌어다 주는 것이 무슨 대단한 벼슬이라도 되는 양 식구들을 자기 아랫사람 대하듯 무시하는 소설 속 두 인물의 모습이
이 시대의 아버지들과 닮았기 때문이다.
소설을
다시 읽은 지금은 그들에게 조소보다 연민을 더 크게 느낀다. 느닷없이 아빠의 모습이 떠오르면서, 당황스럽게도 코끝이 찡해지고
목구멍이 뜨거워졌다. 아빠는 평생 몸 쓰는 일만 해왔다. 온몸에 기름때를 묻혀 늘 거뭇거뭇했고, 여름이건 겨울이건 땀을 뻘뻘
흘렸다. 수십 년을 그렇게 일했다.
그렇게
고되게 일하고도 밤에는 편히 누워 자는 법이 없었다. 항상 무슨 고민을 하는 자세로, 새우처럼 옆으로 누워 한쪽 팔로 머리를
높이 받쳐 들고는 꾸벅꾸벅 졸았다. 편하게 누워 자라고 몸을 흔들면 불에 덴 듯이 화들짝 놀라 깨서는 한참을 뒤척이다가 이내 같은
자세로 꾸벅꾸벅 졸았다. 그리고는 새벽같이 일어나 날이 채 밝기도 전에 집을 나서곤 했다. 아버지는
완전히 옷을 차려입은 채 자기 자리에서 졸고 있었다. 마치 언제나 일할 태세가 되어 있고 여기서도 상사의 명을 기다리고나 있는
듯이. 그리하여 처음부터 새 옷 티가 안 나던 제복이 어머니와 누이동생이 온갖 신경을 썼음에도 불구하고, 청결함을 잃어,
그레고르는 자주 저녁 내내, 온 사방에 얼룩이 지고 언제나 닦여진 금단추로 빛나는 옷, 그 옷에 감싸여 늙은 잠자 씨가 지극히
불편하게 그러면서도 고요히 잠자고 있는 모습을 보았다. (57쪽)
무엇이 한 인간으로 하여금 밤에 편히 잠들지도 못하게 하는가. 아빠는 무슨 걱정과 고민이 그리 많았기에 그 오랜 세월 동안 편히 자지도 못하고 잠결에도 한숨을 쉬었을까. 본인의
몸과 영혼을 갈아 넣어 처자식을 먹여 살린 아빠는 어쩌면 인생을 송두리째 도둑맞은 기분이 들지 않았을까. 아빠는 정말 처자식만
보고 그 힘든 시간을 살아낼 수 있었던 걸까. 아니면 가슴속에 희미하게나마 자신의 인생에 대한 어떤 희망 같은 걸 품고 있었을까.
그레고르가
결국 먼지와 쓰레기로 가득한 방에서 쓸쓸히 죽어버린 뒤, 가족들은 새집으로 이사한다. 다소 후련해 보이기까지 한 모습이다.
그리고 부모의 눈에는 아들이 떠나고 하나 남은 자식인 딸이 보인다. 어느새 훌쩍 자라 '아름답고 풍염한 소녀'가 되어버린 딸의
모습이. 나는 이제 슬프게도 그녀의 미래에서 희망 같은 것을 볼 수가 없다. 잠자
씨와 잠자 부인은 점차 생기를 띠어가는 딸을 보고 거의 동시에 딸이, 아름답고 풍염한 소녀로 꽃 피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말수가
적어지며 또 거의 무의식적으로 눈초리로 서로 의사소통을 하며 내외는 이제 딸을 위해 착실한 남자도 찾아야 할 때가 된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그리하여 그들의 목적지에 이르러 딸이 제일 먼저 일어서며 그녀의 젊은 몸을 쭉 뻗었을 때 그들에게는 그것이 그들의
새로운 꿈과 좋은 계획의 확증처럼 비쳤다. (78쪽)
예수믿고
구원받은 우리에게는 두 개의 “나”가 있을까요? 우리는 그 싸움을 어떻게 보아야 하며 어떻게 이것을 이길 수 있습니까? 오늘
우리는 이 질문에 대하여 확실하게 대답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평생 우리 속에서 싸우는 두 개의 “나” 때문에
가책과 고통과 무기력속에 살아야 합니다. 오늘 이 문제를 확실히 이해해서 우리의 삶이 반드시 승리하고 행복하시기 바랍니다. 이
문제는 사실 우리가 살아가는 동안의 영원한 화두(명제)가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 우리는 하나의 우리가 될 수 있음을
기도하고 확신하여 믿는 믿음 위에서 승리하시는 계기가 되시기를 기원합니다. 할렐루야
2. 내 속에 거하는 죄가 있다.
사도
바울은 먼저 자기 속에 죄가 거한다고 말합니다. 21절입니다. 롬7:21, “그러므로 내가 한 법을 깨달았노니 곧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이로다”. 바울은 자기 속에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내가 있는가 하면 악을 행하는 내가 함께 있는
것을 알았다는 것입니다.
“깨달았다”는
것은 지적으로 알았다는 것이 아닙니다. 경험적으로 알았다는 것입니다. 남들이 말해준 것이 아닙니다. 내가 스스로 안 것입니다.
23절에서도 같은 말을 합니다. 롬7:23, “내 지체속에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속에 있는 죄의 법으로 나를
사로잡는 것을 보는도다”. 사도 바울은 자기 안에 두 개의 “나”가 있는 데 그 중 하나는 죄의 법이요, 또 하나는 마음의
법입이라고 합니다. 이 둘은 서로 잘 맞지 않아 항상 투닥 투닥 서로 싸웁니다.
그중에서도
죄의 법이 더 강해서 내 마음의 선한 법을 자주 사로잡습니다. 바울은 “죄“를 “법”이란 말로 바꿔 쓰고 있습니다. “법”이
얼마나 무서운지 보통 때 법은 별 것이 아닌데 일단 법을 어기면 붙잡혀 감옥에 가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법은 power를 말하고
지배를 말합니다. 롬7:1절에 “너희는 그 법이 사람이 살 동안만 그를 주관하는 줄 알지 못하느냐”. 죄는 단순한 도덕적 실수가
아니라 우리를 억압하여 꼼짝 못하게 하는 power입니다. 힘입니다. 지배력입니다. 그래서 “법”입니다.
그것이
어떻게 있습니까? 20절입니다. 롬7:20, “만일 내가 원하지 아니하는 그것을 하면 이를 행하는 자가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 “내 속에 “거한다”고 합니다. “거한다”는 말은 히브리어 “샤칸”, 집을 짓는다는
말입니다. 죄는 내 속에 있는지 없는지 모르게 숨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어쩌다 오는 방문객이 아닙니다. 아예 집을 짓고
있습니다. 그 집에서 안 나가고 살고 있습니다. 그것을 바울이 깨달았다는 것입니다.
딤전1:15
“미쁘다 모든 사람이 받을 만한 이 말이여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다 하였도다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 이 말은 바울이 디모데에게 자신의 과거를 고백하면서 “나는 죄인중의 괴수”인데 하나님이 자신을 불쌍히 여기셨다는
내용입니다. 분명히 자기의 과거를 고백한 내용입니다.
과거에 박해자였고 폭행자였는 데, 지금도 죄인중의 괴수다“. 디모데서는 바울의 마지막 편지입니다. 그가 로마에서 순교하기 직전, 주후 약 63-4년에 디모데서를 썼습니다.
내일
모레 순교할 바울, 그는 그때 거의 성자였습니다. 가장 예수님을 닮은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그때 자신이
지금도 죄인이라고 말합니다. 그나마 죄인중의 괴수라고 말합니다. ”과거에는 두말할 것도 없이 죄인이었지만 지금도 죄인이다.
죄인중의 괴수다”. 그래서 그는 날마다 주 안에서 죽는다고 고백합니다.
고린도전서 15장을 일컬어 ‘부활장’이라고 합니다. 이 장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증거 할 뿐 아니라, 장차 성도들도 부활에 참여할 것이라고 증언합니다.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은 복음의 핵심입니다. 구원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해 죽으시고 장사 지낸 바 되었다가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신 것을 우리가 믿음으로 말미암아 받습니다.
3. 우리는 의인이다
“누가
하나님앞에 의로우랴?” 그럴습니다. 누가 하나님앞에 의롭겠습니까? 아무리 해도 구름 밑에 있습니다. 우리가 구원받았지만,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지만, 여전히 하나님앞에 아무 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아십니까? 우리 속에 선과 함께 악이 있고 우리 속에
여전히 우리를 괴롭게 하는 죄가 있다는 사실을 인정합니까? 그것이 reality, 우리의 현실입니다.
나는 이미 거룩해졌다.
롬7:17, “이제는 이것을 행하는 자가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 20절도 다시 보십시오. “만일 내가 원치 아니하는 그것을 하면 이를 행하는 자는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로다“. 죄는 우리 속에 거합니다.
그냥
”죄“가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속에 거하는 죄“입니다. 문제는 죄가 우리속에 거할 뿐 우리가 죄인이라고는 부르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잘 들으셔야 합니다. 바울은 우리속에 죄가 거한다고 했습니다. 영어 NIV 번역으로 보면 ”It is sin
living in me“. ”내안에 사는 죄“입니다. 죄가 내 안에 살고 있습니다. 그러나 내가 죄는 아닙니다. 죄는 내 안에
살고 있지만 나는 죄를 가진 존재일 뿐 내가 죄인인 것은 아닙니다. 이것이 주님이 주신 은혜요 하나님의 살아계신 증거입니다.
할렐루야~~~
롬7장에 내 안에 죄가 있다고 3번 말했지만 우리 자신이 죄인이란 말은 한번도 없습니다.
그러니까
죄가 있는 자는 ”현실적인 나“입니다. 그러나 ”본성적 나“가 또 있습니다. 그 ”나“는 죄와 상관없습니다. 17절 봅니다.
롬7:17, “이제는 그것을 행하는 자가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 두 개의 “나”가 있습니다. 죄속에 거하는
“나”와 죄와 상관없이 존재하는 “나”입니다. 죄와 상관없는 나는 죄를 짓기 원치 않습니다.
19절입니다.
롬7:19,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하지 아니하는 바 악을 행하는도다”. 현실적인 나는 죄와 함께
삽니다. 그러나 본래적인 나는 죄를 싫어하고 죄를 미워합니다. 현실적인 내가 죄를 짓는다고 본래적인 내가 잘못되는 것은 아닙니다.
현실적인 나를 성경은 “옛 사람”이라고 부르고 본래적인 나를 성경은 “새 사람”이라고 부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의 의를 받아들이기 전에는 옛사람, 곧 죄가 거하는 우리만 있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
자신의 의를 우리에게 부어 주셨습니다. 그때 우리에게 새로운 본성이 생겼는 데 그것이 본질적인 “나”입니다. 결국 하나님이
예수님을 통해 우리에게 주신 것은 새로운 본성입니다. 그것이 롬7장에서 말하는 선을 행하려는 “나”입니다. 본래 죄의 지배를 받던
내가 그리스도의 피로 께끗해지고 십자가의 은혜로 하나님의 의가 주입되었습니다. 그래서 본성의 변화를 가져왔습니다.
롬5:19을
보시겠습니까? “한 사람이 순종하지 아니함으로 많은 사람이 죄인 된 것 같이 한 사람이 순종하심으로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되리라”.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실제 의로운 자가 되었습니다. 새로운 본성으로 변한 것입니다. 아담 이래 우리를 지배했던 옛
본성이 죽고 새본성을 갖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안에 성령이 거하게 되었습니다.
고전3:16입니다.
“너희는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안에 계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로 용서되었고
하나님의 자녀로 받아들여 졌습니다. 죄를 다 없앴기 때문에 받아들인 것이 아니라 일단 받아들이고 죄를 없애기 시작했습니다.
우리속에 여전히 죄가 거하는 것은 맞지만 로마서 어디에도 예수믿고 구원받은 우리보고 “죄인”이라고는 단정한 곳은 한 군데도 없다는 사실을 아십니까?
우리를 죄인이라고 말한 것은 롬3:21절 이전입니다. 롬3:21, “하나님의 의가 나타난 이후” 로마서는 한번도 우리보고 죄인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죄인이 아니라 죄를 가진 사람일 뿐입니다.
죄인과 죄를 가진 사람은 다릅니다. 우리안에 죄가 거하여 우리도 모르게 죄를 짓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렇다고 우리가 죄인인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죄인이 아니라 죄를 가진 하나님의 사람일 뿐입니다.
롬3:21절 이후 성경은 예수믿고 달라진 우리를 죄인이라고 부르지 않을 뿐 아니라 하나의 이름을 붙여 주었는 데 그 이름이 “성도”입니다. 그 수가 무려 63번이나 됩니다. 이제 우리는 성도입니다. 할렐루야
결론 : 그리스도만 바라보라
그러면
우리 속에 있는 두 개의 내가 서로 싸울 때 어떻게 해야 합니까? 25절입니다. 롬7:25,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죄를 지을 때 우리는 죄와 싸우지 말고 하나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죄를 짓는 것은 잘못이지만 죄를
지은 자신에 대하여 절망하고 하나님을 떠나는 것이 더 잘못입니다. 다같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로 말미암아”. 세상에 사는 한
우리는 죄를 피할 수 없습니다. 그때마다 우리가 할 일은 죄를 바라보지 말고 예수님을 바라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죄를 지을 때 우리는 죄 때문에 힘들어 하지만 하나님은 죄인인 우리를 더 사랑합니다. 눅15장에 탕자의 비유가 있습니다. 탕자가 집을 나갔다가 아버지께 돌아왔습니다. 그리고 아버지에게 세 마디 말을 합니다.
첫 번째가 21절, “아버지,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습니다”. 이것이 첫 번째입니다. 자기가 죄를 지었다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같은 21절입니다.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부르지 마십시오”. 죄를 지었기 때문에 감히 아들이라 불러 달라고 말하지 못하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세 번째, 19절, “나를 아들이라 부르지 마시고 종이라 부르소서”. 아들이 아니니 이제 종으로 살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했습니까? 죄를 지었다는 아들에게 옷을 입힙니다. 아들이 아니라는 아들에게 반지를 끼워 줍니다. 종이라 불러달라는 아들에게
신발을 신겨 줍니다.
왜
아버지는 이렇게 한 것입니까? 아들이 잘못하고 실수할 수 있지만 그의 잘못보다 아버지의 자비가 더 컷습니다. 아들이 잘못한 것은
맞지만 아들의 잘못이 아버지와의 관계를 깨뜨리지 않았습니다. 잘못했다는 아들에게 아버지는 옷을 입힙니다. 옷은 사람을 입습니다.
사람에게 옷이 필요하지만 옷이 사람은 아닙니다. 아버지는 아들에게 옷을 입혀 주면서 잘못도 덮어줍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안에 두 사람이 있는 것 맞습니다. 선을 행하려는 의로운 본성의 사람과 매일 죄를 짓고 사는 현실적인 사람이 있습니다. 둘이 싸워 자주 죄의 사람이 이깁니다. 그래서 “하나님, 나는 죄를 지었습니다”. 합니다.
그때
하나님이 말씀합니다. “괜찮아. 너는 죄인이 아니라 죄를 가진 의인이야. 너의 본성은 예수님으로 인해 이미 의로워졌고 너는 이미
나에 의해 받아들여졌어. 지금 짓는 죄는 죄의 패잔병이야. 곧 모두 사라질거야. 힘내”. 또 말합니다. “하나님, 이렇게
살아가지고는 하나님의 아들이 아닙니다”. 그때 하나님이 말합니다.
성경에서 말씀하시는 오늘 본문에 대한 해답은 이렇다.
오늘의 본문에 이어서 롬8:1-9절 말씀이다.
"1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2 이는 그리스도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3 이는 그리스도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4 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은 하시나니 곧 죄로 말미암아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 육신에 죄를 정하사 5 육신을 따르지 않고 그 영을 따라 행하는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가 이루어지게 하려 하심이니라 6 육신을
따르는 자는 육신의 일을, 영을 따르는 자는 영의 일을 생각하나니 7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치 아니 할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 8 육신에 있는 자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느니라 9 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
모든 말씀은 성경에 기록되었으되 말씀이 주는 주님의 질문과 해답은 모두 성경에 있는 것을 믿습니다.
오늘도 우리 만나인은 하나님의 법만 가슴에 안고 각자의 처소로 돌아갑니다.
우리 만나인에게 주신 하나님의 말씀을 함께 새기면서 말씀을 마칩니다. 살전 5:16-18 그리고 22절입니다.
죄의 법, 하나님의 법, 은혜의 법(요한복음 21:15-18)
하나님의 법과 죄의 법이 싸우면 어느 쪽이 이길까?
상처입은 영혼
우리의 영적인 존재도 이와 같다는 것을 아는가? 죄로 인해 말이다. 바울은 자신의 존재에 대해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내가 한 법을 깨달았노니 곧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이로다.”
“내 속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으로 나를 사로잡는 것을 보는도다.”
이것이 바울만의 고백이겠는가?
아담이 범죄한 이후에, 인간은 ‘죄의 법’에 사로잡혀 있다. 이것을 인간의 원죄(原罪. Original Sin)라고 말한다. 법이란 명령을 내린다. 그리고 그
법 아래 있는 사람은 그 명령에 따른다. 인간은 죄의 법 아래 있어, 그 명령을 따른다. 누구나 죄인이다. 심지어 믿음을 가진 신자라고 해도, 마찬가지이다. 믿는 이에게는 ‘하나님의 법’이 들어와 있다. 그것을 깨닫게 하는 것이
‘율법’이다. 하지만, ‘하나님의 법’과 ‘죄의 법’이 자기 속에서 싸우고 있다. 갈등한다. 그런데, 사람은 이 갈등 속에서
얼마나 연약하고 나약한 존재인지 아는가? 그리고 급기야 ‘죄의 법’에 사로잡혀 사망에 이끌리는 것을 경험한다.
베드로가 예수님을 부인하는 순간, 딜레마를 경험하지 않았겠는가?
다윗이 궁중 옥상을 거닐며, 한 여인의 목욕하는 장면에 불일 듯 일어난 정욕으로 인해 갈등하지 않았겠는가?
죄는 우리를 포박하기 위한 몇 가지 전략이 있다.
1. 현혹(眩惑) 유혹(誘惑)
우리의 생각을 현혹하고 기만하며 속인다. 그것은 죄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뱀은 하와를 꾀일 때, 동산 중앙의 실과를 먹어도
죽지 않을 것이라고 유혹했다. 그것은 하나님처럼 될 것이라고 했다. ‘하나님처럼 될 것’이라는 뱀의 유혹을 받고 그 실과를
보니까,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게 보였다.” 시험을 당할 때 우리의 감정은 온통 그것만 보도록
만든다. 정말 그게 절대적으로 좋아 보인다. 죄를 짓고 난 다음에 부끄럽고 후회한다.
2. 합리화(合理化)
현실적인 의무나 상황을 빌미로 삼도록 유도한다. 대신에 본질적인 의무를 소홀히 하도록 유도한다. 잠시
예배드리지 못하는 것은 당장 큰 일이 일어나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하고, 남들도 다 하는데, 괜찮을 거라고 생각한다. 급기야,
죄짓는 것이 어떠냐는 생각이 들고, 죄가 죄인지도 모르게 된다.
3. 끈질김
생각을 미혹하고 끈질기게 유혹한다. 서운하고 속상한 일은 자꾸 떠오르고, 아니다 하면서도 섭섭하다. 별것도 아닌데, 자꾸
베베 꼬인 생각이 들고 견디지 못한다. 중독은 다시는 안 그래야지 하면서, 그 쾌감을 느끼던 때가 순식간에 떠올라 참고 참다가
결국 다시 그것을 하게 만든다. 쾌락을 멀리하려고 할 때, 우리에게 그 암시를 넌지시 던짐으로써, 유혹하고 또다시 범죄하게 한다.
4. 꼼수
죄는 우리 안에 내주하고 있다. 자신의 정체를 숨기고 은밀히 말이다. 그래서 그 정체를 파악하기 어렵게 한다. 그리고
본질적으로 하나님을 대적하게 만든다. ‘대적함’은 하나님의 법과 죄의 법이 갈등할 때, 우리 속에 나타난다. 히스기야가 죽음의
문턱에 있던 병상에서 일어나, 하나님께 회복에 대한 감사한 마음이 들었을 때, 그 안도감으로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교만해졌다.
죄 때문에 우리가 겪는 것은 무엇인가?
1. 하나님을 대면할 수 없다.
아담은 하나님께서 부르시고 찾으실 때,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두려워서 동산 나무 사이에
숨었다. 자유한 마음이 없었다. 가인은 하나님을 향해 낯을 들지 못했다. 다윗은 자신의 죄를 덮기 위해 더 큰 악한 일을 계획해야
했다.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숨기기 위해 거짓으로 위장해야 하는 이에게는 은총조차도 거추장스럽게 여겨진다. 불행을 겪는 것이다.
2. 선한 양심의 격동
양심의 가책은 우리를 짓누른다. 죄악된 행위에 짓눌린 고통을 다윗은 이렇게 표현하고 있다. “내가 입을 열지 아니할
때에 종일 신음하므로 내 뼈가 쇠하였도다. 주의 손이 주야로 나를 누르시오니 내 진액이 빠져서 여름 가뭄에 마름 같이
되었나이다.”(시편 32:3-4)
3. 죄책감의 무게
경미한 죄들 때문에 일어나는
영적인 상태가 있다. 세상의 것을 쟁취해놓고서도 만족함을 모르고 기쁨을 모른다. 가랑비에 옷 젖듯이 알게 모르게 짓는 작은 죄들이
자기를 두르고 덮을 때, 영혼과 심령을 무디고 메마르게 만든다. 솔로몬을 보라. 그는 이스라엘이 기억하는 가장 화려한 번영을
누렸던 왕 중 하나다. 열왕기상11:3은 이렇게 전하고 있다. “왕은 후궁이 칠백 명이요, 첩이 삼백 명이라. 그의 여인들이 왕의
마음을 돌아서게 하였더라.” 이미 만족함을 모르게 된 그의 모습을 엿볼 수 있다. 만족함을 모르는 사람만큼 공허한 사람이 없다.
솔로몬의 것으로 전해지는 표제어가 붙은 전도서에서 이렇게 말한다. “아, 먹고 즐기는 일을 누가 나보다 더
해보았으랴?”(전2:25), 이 말의 결론에 붙은 말이 이것이다. “이것도 헛되어 바람을 잡는 것이로다.”(전2:26)
4. 하나님의 심판
‘하나님의 나라가 없다.’, ‘그 세계가 어디 있느냐?’,
‘죽으면 그만이다.’ 말하는 사람이 있다. 이미 죄 때문에 보기는 보아도 보지 못하고, 듣기는 들어도 듣지 못하며, 무지하고
부인하고 거부하게 되는 것이다. 누가복음에서 주님은 돈만을 좋아하고, 세상 것만 탐하며, 주님의 나라를 믿지 못하는 자들에게
들려주시는 말씀이 있다. 부자가 음부에 들어갔다. 불꽃 가운데서 괴로워하며 거지였던 나사로에게 손끝에 물 한 방울이라도 찍어서 그
혀를 시원하게 해달라고 애원한다. 그것이 거절되자, 그렇다면 나사로를 그의 집에 보내서 이 사실을 알리게 해달라고 한다.
고통받는 곳에 오지 못하도록 말이다. 모세와 선지자들의 말도 듣지 않았던 이들이, 설령 나사로가 살아서 돌아간다고 해도 믿지 않을
것이라는 것이다. 주님은 현세의 탐심만으로 살아가는 자에게 촌철살인과 같은 말씀을 하신다. “어리석은 자여 오늘 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준비한 것이 누구의 것이 되겠느냐?” 우리 안에 내주하고 있는 죄는 하나님의 나라를 보지 못하도록
한다.
율법의 역할, 은혜의 법 역할
이것들을 깨닫게 하는 것들은 무엇일까? 율법이다. 율법은 하나님의 법이다. 그 역할은 우리가 죄인임을 깨닫게 하는 것이다. 우리의 마음과 심령에 하나님의 법이 있어, 죄를 깨닫게 되고, 마음으로 그 법을 사랑하게 된다. 그러나 우리 육신에 있는 죄의
법이 하나님의 법을 무력화시킨다. 왜 하나님의 법이 죄의 법을 이기 못할까? 이상하지 않은가? 당연히 하나님의 법이 죄의 법을
이겨야 하는 것 아닐까? 그런데 모든 역사와 교회사를 봐도, 하나님이 법이 죄의 법을 이긴 역사가 없다. 구약은 그것을 우리에게
보여준다. 바울은 탄식한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노라.” 그는 하나님의 법으로 죄의 법을 이기는데, 실패할 수밖에 없다. 율법으로는 우리가 구원받을 수
없다. 그렇다면 우리가 죄의 법을 영영히 이길 수 없는 것인가?
기억하라. 그 역할은 거기까지다. 우리가 죄인임을 깨닫게 하는 데까지다. 딱 거기까지다. 율법으로 결코 죄를 이길 수 없다.
거기까지인 율법을 붙들고 있어서는 안 된다. 아니 붙들려 있어서는 안된다. 우리에게 이것이 있다. 은혜의 법이 있다. 하나님 사랑의 법이다. 은혜의 법의 역할은 무엇인가? 우리를 구원하는 법이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롬8:1-2) 복음을 경험하지 못한 자가, 아직도 죄의 법 아래 있다고 말한다.
여러분, 오늘 이 복음의 소식을 들으시기 바란다. 복음을 경험하라. 확실하라. 하나님의 법과 죄의 법 사이에서 갈등하고
고통당하고, 번번이 실패하지만,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은 그 무엇도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음을
확신시켜준다.
성령충만해야 한다. 믿음충만해야 한다. 은혜충만해야 한다. “육신을 따르는 자는 육신의 일을, 영을 따르는 자는
영의 일을 생각하나니,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 (롬 8:5-6).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의 영이 너희 안에 거하시면, 그의 영으로 말미암아 너희 죽을 몸도
살리시리라.”(롬 8:9,10)
성령을 사모하라. 하나님의 임재를 사모하라. 주님의 은혜를 경험하라. 은혜의 법에 복종하고 순종할 때, 우리의 속사람이
기쁨과 평화를 느낀다. 이 시간 그 주님을 영접하라. 지금 여기에 찾아와 계시다. 여러분 심령 가운데 모셔들이기를 원하신다.
믿음으로 영접하라.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찾아오셨다. 만약 찾아오지 않으셨다면, 그는 평생을 배신자요, 비겁자로 살아야
했는지도 모른다. 자기의 연약함으로 말미암아 저지른 일을 평생 자기 상처로 안고 살아야 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주님께서
베드로에게 찾아오셔서,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물으셨다.
“너 왜 그랬니? 다시는 안그럴꺼니?” 묻지 않으셨다. 주님을 사랑하는 지, 물으셨다. 전자는 ‘또다시 죄를 짓느냐?
마느냐?’의 문제다. 그런데 후자는 은혜의 법에 복종하느냐의 문제다. 주님은 베드로를 사랑해서 찾아오셨고, 평생 그 고통 속에
내버려둘 수 없어 찾아오셔서, 회복시켜주셨다. 주님께서 여러분을 사랑하신다. 복되기를 원하신다. 은혜주시기를 원하신다.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 말씀했으니, 믿음으로 신령한 것들을 사모하라. 믿음으로 생각하라.
우리는 죄로 인해 영적으로 동일한 모습은 아닌지 모르겠다. 그에게 회복과 치유의 기회가 있었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이제부터라도 주변에서 도와, 심신과 영혼이 건강하길 빈다.
주님은 오늘 우리에게 찾아오셔서, 베드로가 했던 경험을 동일하게 하길 원하신다. 용서받는 경험, 죄가 사해지는 경험, 주님을
사랑하며 회복되는 경험 말이다. 죄에서 자유하며, 영적인 것, 신령한 것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시기를 원하신다.
존 오웬은 이렇게 말했다. 죄는 하나님의 은혜와 그 목적을 분리시킨다. 무슨 말인가? 죄를 지어도 은혜로 구원받았으니, 선에
대한 노력은 신경을 쓰지 않아도 된다는 자기 암시다. 은혜의 목적이 분명히 있다.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해, 우리가
거룩해지고 성결하고, 그리스도를 닮는 성화의 삶을 살아야 하는 것이다. 이 시간 하나님의 그 크신 사랑 때문에, 이것을 새롭게
결단하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축원한다.
바울은 거듭난 자였다. 그런데 고민이 있었다. 거듭난 자였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원하는 선은 행하지 아니하고 원하지 않는
악을 행하는 것을 발견하게 된 것이다. 그래서 바울은 칭의를 얻어 구원을 얻은 자가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여전히 달라지지
못한 삶을 살고 있는지를 검토하게 된다. 그리하여 자기 안에서 4개의 법칙들이 돌아가고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법', '내 마음의 법', '죄와 사망의 법', '생명의 성령의 법'이 돌아가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바울은
이것들이 상호 어떤 관련을 맺으며 돌아가는지를 정리한다. 그래서 이것들이 모두가 다 항상 동일한 값을 나타낸다고는 것을 착안하고는
이 네 가지 법을 정리한 후에, 거듭난 그리스도인이 어떻게 해야 죄를 짓지 아니하고 죄된 본성에서 해방되며 자신의 지체를 의의
병기로 하나님께 드릴 수 있는지를 설명한다. 그것은 사람이 4가지 법들 중에 최고 상위의 법이 자신을 지배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 시간에는 어떻게 할 때 과연 거듭난 그리스도인이 생명의 성령의 법으로 승리하는 삶을 살 수 있는지,
4가지 법을 살펴보고 이것을 정리해보고자 한다.
거듭난 그리스도인이 되었다고 할지라도 왜 또다시 죄를 지으며, 죄된 본성을 이기지 못한 채 살아가는 것인가?
거듭난 그리스도인이 되었다고 할지라도 또다시 죄를 짓고 죄된 본성을 따라가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은 죄의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우면, 죄의 법이 이기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사람의 마음보다 사람의 육체 속에 들어있는 죄가 더 강한 것이다.
그러므로 마음이 육체 속에 들어있는 죄를 따라가버리는 것이다. 바울은 사실 자신이 그리스도인이 되었으면 선한 삶을 살게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자신이 그리스도인이 되었어도 여전히 선한 사람으로 살아가지 못한 채 악한 것을 실행하는 것이다.
그러자 바울은 칭의라는 것이 사람을 온전히 바꾸어놓지 못한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즉 사람이 예수님을 믿어서 칭의를
받았다고 할지라도 그와 같은 일은 외적인 신분의 변화만을 가져온 것일 뿐 아직 내면은 변화되지 못한 채 그대로 있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그래서 바울은 사람이 예수님을 믿어도 달라진 삶을 살려면 외적인 신분의 변화가 아니라 내적인 속 성분의 변화가 일어나야
한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그래서 그는 사람의 진정한 변화는 내적인 성분의 변화라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그래서 바울은 내적인 성분의 변화를 위해 필요한 2가지 법칙을 제안하였다. 하나는 여김의 법칙이다.
내가 칭의를 받았으나 아직 내면의 변화는 겪지 않았으니, 자신의 내면에 속한 영역의 하나인 혼이 십자가에 못박혀 죽은 채 있다고
여겨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혼이 육체 속에 들어있는 죄된 본성을 따라가지 않게 되기 때문이다. 혼이 죽어버린다면 결코 화를 낼
수도 없고 음란할 수도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살펴보니,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예수께서 십자가에 매달려 돌아가실 때에
몸도 함께 죽은 것임을 발견하게 된다. 그러므로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거듭난 이후 자아 곧 자기의 혼이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혀 죽었다고 여길 때에 비로소 자아가 죽음에 넘겨지게 되어 더 이상 죄된 본성을 따라가지 않는 것이다.
그리고 또 하나는 드림의 법칙이다. 이제 육체 속에 들어있는 죄된 본성을 따르는 자아가
죽어버렸으니, 이제는 자신의 몸인 지체들을 의의 병기로 하나님께 드리라는 것이다. 그러면 사람이 천국에 들어가서 받을 지위와 신분
그리고 상을 준비할 수가 있는 것이다. 이것을 '드림의 법칙'이라고 부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도 바울은 위와 같이 비록
자아가 죽었지만 여전히 죄된 본성에 빠져 헤매이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되었고, 뿐만 아니라 자신의 지체를 의의 병기로 하나님께
드림이 마땅한 것이지만 그렇지 않고 살아가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 것이다. 그러자 바울은 여김의 법칙과 드림의 법칙만으로는 사람이
죄된 본성을 이기기가 어렵고, 자신의 지체를 의의 병기로 드릴 수 없다는 것을 깨닫는다. 그래서 그가 깨달은 것은 자신의 마음의
법이 죄의 법을 이기게 해주는 어떤 또 다른 것이 필욯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거듭난 사람 안에서 돌아가고 있는 4가지 법이란 대체 무엇인가?
그렇다면 거듭난 사람 안에서 돌아가고 있는 4가지 법칙은 무엇인가? 여기서 '법칙'이라 함은 모든 사물과 현상의 원인과
결과 사이에 내재하고 있는 보편적이고 연적인 불변의 관계를 가리키는 것으로서 항상 답이 일정한 것을 가리킨다. 그러므로 여기서
법칙이라는 뜻은 사람이 거듭난 그리스도인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항상 살아보면 그렇게 결론이 남을 지칭하는 것이다.
사람 안에서 돌아가고 있는 네 가지 법칙이란 무엇을 가리키는가? 자신의 마음은 항상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고 또한 지키려고 노력하지만, 자기의 지체 속에 있는 다른 법 곧 '죄의 법'이 작동하면, 자신의 마음이 그만 '하나님의 법'을 지키지 않고 오히려 '죄의 법'을 따라가 버린다는 것이다.
이는 '죄의 법'이 사람의 '마음의 법'보다 더 위에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런데 사람 속에는 또 하나의 법이 더 존재하는데, 그것은 '생명의 성령의 법'이다. 이는 최고의 법으로서 아무리 강한 죄와 사망의 법이 작동한다고 할지라도 생명의 성령의 법 앞에서는 맥을 추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생명의 성령의 법은 언제 어디서나 죄와 사망의 법을 항상 이기게 해 주는 것이다. 여기서 '죄의 법'이라 함은
사람의 육체 속에 는 영적인 존재들 곧 뱀들과 귀신들이 주장하는 법을 가리킨다. 그러므로 사람 속에서 한 번 죄의 법이 작동하면
사람은 반드시 죄를 짓게 마련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이러한 죄의 법을 이기려면 더 강력한 상위 법이 있어야 한다고 말한다. 그런데 그러한 법이 있는
것이다. 그것은 바로 '생명의 성령의 법'이다. 왜냐하면 생명의 성령께서 사람 속에 들어있는 죄와 사망을 이기기 때문이다. 이것의
예표가 바로 죽음을 깨치고 부활하신 예수님이다. 부활생명이 사망을 항상 이기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자기 속에 들어있는 4가지 법에 대해 이렇게 정리하였다. "내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지만 내 지체 속에 한 다른 법 곧 죄의 법이 나를 주장하면 나도 그만 죄를 짓게 된다. 그러므로 죄의 법이 나를
주장할 때에는 즉시 생명의 성령의 법을 작동시켜야 한다. 그러면 죄와 사망이라도 성령을 이기지 못한다." 그런데
여기서 죄와 사망을 인격화시키면 그것은 곧 귀신들과 뱀들이다. 그러므로 죄의 법으로 역사하고 있는 뱀들과 귀신들이 아무리 우리
그리스도인들을 사로잡아가려고 한다 할지라도 만약 우리가 생명의 성령의 법을 작동시켜버리면 죄와 사망을 반드시 이기게 되어있는
것이다.
선을 행하기는 원하나 악을 행하고 있는 '내 속 내 육신 속에 있는 죄'의 실체는 무엇인가?
그렇다면 이제 거듭난 그리스도인이 된 사람들은 자신의 마음이 무엇을 추구하게 되는가? 그것은 선을 행하기를 추구한다.
그래서 하나님의 법이자 선의 법인 율법을 성취하기를 기뻐하는 것이다. 그러나 결과는 다르다. 왜냐하면 선을 행하기를 원했어도 결국
악을 행하고 마는 자기 자신을 발견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분명 왜 자신은 선을 행하지 못한 채 악을 행하게
되는지를 깊이 묵상한 후, 그 이유를 알려주었다. 그것은 바로 자기 속 곧 자신의 육신의 속에 거주하는 죄 때문이라고
하였다(롬7:17,18~20). 그러므로 원함은 있으나 선을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하지 않는 악을 행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자신의 육신 속에 거주하는 죄란 대체 무엇을 가리키는가? 그것은 사도 바울의 편지와 예수님의 말씀을 합쳤을 때에 그 답을 찾아낼 수 있다. 왜냐하면 먼저 사도 바울은 사람 속에 거주하는 죄를 가리켜 '자기의 육신 속에 거주하고 있는 어떤 것'이라고
말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여기에 나오는 '거주하는'는 단어를 먼저 보면 이 단어는 '오이케오'라는 동사다. 이 동사는
'오이코스'에서 온 말이다. '오이코스'는 '집'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오이케오'라는 단어는 그 뜻이 '집으로 삼다. 집에
살다. 집에 거주하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죄라는 것은 사람의 육체를 자기의 집으로 삼고 있는 존재를 가리키는 특수 용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어느날 우리 주 예수께서는 귀신의 집이 무엇인지를 알려주셨다.
마12:43~45 더러운 귀신이 사람에게서 나갔을 때에 물 없는 곳으로 다니며 쉬기를 구하되 쉴 곳을 얻지 못하고
44 이에 이르되 내가 나온 내 집으로 돌아가리라 하고 와 보니 그 집이 비고 청소되고 수리되었거늘 45 이에 가서 저보다 더
악한 귀신 일곱을 데리고 들어가서 거하니 그 사람의 나중 형편이 전보다 더욱 심하게 되느니라 이 악한 세대가 또한 이렇게 되리라
그러므로 예수께서는 '더러운 귀신(영)'이 사람을 자신의 집으로 삼고 있다는 사실을 알려주셨다. 이와 더불어 사도
바울은, 죄란 자기의 집으로 삼고 있는 어떤 공간을 가리키는데, 그것을 사람의 육체라고 말하였다. 그러므로 이러한 두 가지
사항을 합치면 사람의 육체는 곧 죄가 자신의 집으로 삼고 있는 공간을 가리킨다. 그럼 누가 그 공간 안으로 들어가는가? 그것은
'더러운 영들'이다. 그러므로 죄(Sin)란 결국 '더러운 영들'을 가리키는 것이다. 그렇다. 타락한 천사들 그러므로 죄를 지어
더럽혀진 영적 존재들의 뱀들과 귀신들이 곧 죄의 실체였던 것이다.
어떻게 하면 그리스도인이 자기 안에 있는 죄된 본성을 이기며 살아갈 수 있는가?
그리스도인들은 어떻게 해야 자기 안에 있는 죄된 본성을 이길 수 있는가? 그래서 죄와 사망의 법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그러한 방법들로는 여러가지가 있을 수 있으나, 가장 좋은 방법은 죄와 사망의 법이 작동될 때마다 생명의 성령의 법을
작동시키는 것이다. 그것은 바로 자신의 생각을 육체에 두는 것이 아니라 영에 두는 것이다(롬 8:6). 왜냐하면 육신에 둔 생각은
사망이지만, 영에 둔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사람이 죄를 지으려고 할 때에는 즉시 자신의 영을 작동시켜야
한다. 왜냐하면 자신의 영 안에는 생명이 들어있고, 또한 생명주는 영이신 성령이 들어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내 생각을 영으로
돌이키게 되면 즉시 우리는 우리의 영 안에 계시는 성령과 접촉하게 된다. 그러면 성령이 우리의 온 영과 혼과 육체를 지배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죄된 본성을 이길 수가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성령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보다 한 수 위이기 때문이다.
이 두 법이 서로 충돌하게 되면, 항상 생명의 성령의 법이 이기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또 다시 죄를
범하려고 할 때 그래서 죄된 본성이 자신을 주장하려고 할 때에는 즉시 우리는 우리의 생각을 영에 두어, 생명의 성령의 법을
작동시켜야 하는 것이다.
6. 나오며
오늘날에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그리스도인이라 할지라도 생명의 성령의 법을 작동시키는 원리를 모르는 분들이 아주 많다.
자기의 영 안에 생명이 있으며, 생명주는 영이 들어있다는 사실 자체도 모르는 분들이 많다. 그러므로 죄와 사망의 법이 한 번
작동하면 그것을 멈출 수 있는 분이 많지 않다. 그러면 그대로 죄를 범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면 칭의인이 되었지만 실상은 죄를
짓고 있는 죄인으로서의 삶을 살고 있는 것이다. 그것이 오늘날 그리스도의 본 모습이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이러한 고민을 하고 있을 우리 그리스도인들을 위하여, 칭의인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자아를 죽음에 넘기고 있는 자라고 반드시
알아야 할 법이 있으니, 그것이 바로 생명의 성령의 법을 작동시키라는 것이다. 그러면 내 마음이 하나님의 법을 지키게 되는
것이다. 왜냐하면 생명의 성령께서 우리를 주장하시기 때문이다.그러면 영이 우리 혼과 육체를 지배하게 되는데, 그러면 자아는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힌 채 있게 되는 것이다. 더 나아가서는 그리스도인이 더이상 죄된 육체를 따라가지 않고, 오히려
자신의 지체들을 의의 무기로 하나님께 온전히 드릴 수가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은 언제든지 생각을 영에 두고 영을
따라가지 못한다. 오히려 영을 따라 가지 못하고 오히려 육체 속에 들어있는 죄를 따라 가기도 하는 것이다. 그것을 극복하려면
최종적인 성화의 방법이 필요한데, 그것은 자신의 육신 속에 들어있는 악한 영들인 뱀들과 귀신들을 자백하는 회개를 통하여 우리
몸으로부터 제거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사람이 회개할 때에 자신의 몸에 예수님의 피가 들어오고, 예수님의 피가 자기의 몸 속에
들어오면, 그 피가 더러운 영들을 밖으로 몰아내기 때문이다. 그래서 보다더 깨끗한 사람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성화를 이루는
것이다.
생명의 성령의 법과 죄와 사망의 법
로마서 8:1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 그리스도
그리스도는 기름부음을 받은 자들이라는 말인데 제사장직 선지자직, 왕직을 말합니다. 제사장은 하나님과 하나님의 백성사이에 죄 문제를
해결해주는 직책입니다. 선지자(先知者)는 하나님의 뜻을 받아서 그 하나님의 뜻을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전하는 직책입니다. 왕(王)은 하나님께
다스림을 받아서 하나님의 백성들을 다스리는 직책입니다.
○ 예수
예수님은 십자가에 대속의 피를 흘리시므로 우리에게 사죄의 대속, 칭의의 대속, 화친의 대속을 입혀주셨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들이라는 말씀은 우리들이 제사장직, 선지자직, 왕직과 또 사죄자, 칭의자, 화친자로 사는 자를 말합니다.
이래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다' 하셨습니다.
1. 생명의 길과 사망의 길
(롬8:2)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우리에게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어 생명의 길이 있고, 그리스도 예수 밖에 있어 사망의 길이 있습니다. 즉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사는 길이 있고, 그리스도 예수 밖에서 죽는 길이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이렇게 두 갈래 길이 있습니다.
생명의 길을 걸어서 생명이 된 것은 이 세상사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영원한 생명이며, 또한 사망의 길을 걸어서 사망이 된 것도 이 세상사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영원한 사망입니다.
이렇게 우리들에게는 영원한 생명과 영원한 사망이 있는데 여기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엉뚱한데 주력하고 중심하고 전력하고 있습니다. 이
당면되고 있는 이 일이 자기가 아닌 그 누구의 일이라면 혹 몰라도 이 일은 자기 자신에게 영원한 생명과 영원한 사망이 해당되는
일인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일은 자신과 상관없는 줄 알고 삽니다. 이렇게 생명의 성령의 법을 쫓아서 영원한 생명이 될
수도 있고, 죄의 사망의 법을 쫓아서 영원한 사망이 될 수도 있는데 말입니다.
○ 생명
생명은 하나님과 연결이 되어서 하나님의 충만을 자기가 받아서 그 충만으로 모든 피조물에게 춤만이 전해주는 것이 생명입니다.
이래서 창1:22에는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어 가라사대 생육하고 번성하여 여러 바다 물에 충만하라 새들도 땅에 번성하라 하시니라' 하셨고
또 엡1:23에는 '교회는 그의 몸이니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케 하시는 자의 충만이니라' 하셨습니다.
○ 사망
사망은 하나님과 연결이 끊어져서 죽고 망하므로 고통을 당하는 것이 사망입니다.
이래서 출12:30에 '그 밤에 바로와 그 모든 신하와 모든 애굽 사람이 일어나고 애굽에 큰 호곡이 있었으니 이는 그 나라에 사망치 아니한 집이 하나도 없었음이었더라' 하셨고
또 '계20:14에는 '사망과 음부도 불못에 던지우니 이것은 둘째 사망 곧 불못이라' 하셨습니다.
이 생명과 사망을 한 말로 말한다면 생명은 하나님과 연결되어 하나님으로 충만해져 가는 것이며, 사망은 하나님과 연결이 끊어져서 불태워짐을 받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 생명의 성령의 법
'생명의 성령의 법'이라는 말씀은 성령의 감화감동은 우리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도록 하는데 곧 바로 이것이 생명이 되는 법칙이라는 말입니다.
○ 죄와 사망의 법
'죄와 사망의 법'이라는 말씀은 그리스도 예수 밖에 사는 것이 죄인데 이렇게 그리스도 예수 밖에 사는 이것이 곧 바로 사망이 되는 법칙이라는 말입니다.
2. 예수님의 육신으로는 대속역사, 예수님의 영으로는 구속역사
(롬8:3-4) 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은 하시나니 곧 죄를 인하여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 육신에 죄를 정하사 *육신을 좇지 않고 그 영을 좇아 행하는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를 이루어지게 하려
하심이니라
○ 율법
'율법'은 율법을 지키면 그 율법을 지킨 그 자체가 구원이 되는 것이 아니고, 율법을 지키면 그 율법이 우리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인도하는 법이 율법입니다.
○ 육신
우리의 '육신'은 원죄와 본죄가 있기 때문에 이 육신이 연약하여서 율법의 요구를 이루어지게 할 수 없습니다. 율법의 요구는 우리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게 하는 법칙의 요구를 말합니다. 그렇기에 율법의 요구는 우리로 율법을 온전히 지키라는 것이 율법의
요구인데 우리가 연약하여 율법을 온전히 지키지 못하는 것입니다. 율법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신구약 성경말씀으로서 우리가 지킬
계명입니다.
이렇게 우리가 연약하여 율법을 지키지 못하는 그것을 '하나님은 하시나니 곧 죄를 인하여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 육신에 죄를 정하사 육신을 좇지 않고 그 영을 좇아 행하는 우리에게' 하셨습니다.
'그의 영'은 롬8:9에 '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 하셨으니, '그의 영'은 '예수의 영' '하나님의 영' '그리스도의 영'으로서 곧 성령을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육신으로는 우리의 죄를 정하사 대속역사를 하셨고, 예수님의 영으로는 그리스도의 영 곧 성령으로서 구속역사를 하셨습니다.
3. 육신을 좇는 자와 영을 좇는 자(로마서 8:5)
육신을 좇는 자는 육신의 일을, 영을 좇는 자는 영의 일을 생각하나니
○ 육신을 쫓는 자
육신은 마음과 몸이 육신입니다. 육신을 쫓는 자는 마음이 원하는 대로 또 몸이 원하는 대로 사는 자가 육신을 쫓는 자입니다.
하나님을 떠나 마음과 몸이 원하는 대로 사는 자들이 똘똘 뭉쳐진 것이 세상으로써 하나님을 떠나서 한 덩어리 된 큰 성 바벨론
바벨탑입니다.
○ 영을 좇는 자
영은 성령을 말하는데 곧 '그리스도의 영' '예수의 영'입니다. 그래서 영을 쫓는 자라는 것은 그리스도의 영의 감화 감동대로
제사장직, 선지자직, 왕직을 하는 자가 영을 쫓는 자이며, 또 예수의 영의 감화 감동대로 죄 없는 자, 의로운 자, 하나님과 화친
된 자로 사는 자가 영을 쫓는 자입니다.
4.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로마서 8:6)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
○ 육신의 생각은 사망
육신의 생각 곧 하나님을 떠나서 마음과 몸으로 된 그 어떤 것이라도 사망이라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하나님을 떠나서 이루어진
바벨탑과 같은 이 세상과 세상에 있는 것은 전부가 다 사망입니다. 세상과 세상에 속한 것이 무엇인지요? 돈, 권세, 지위. 명예,
배경, 도덕, 사상, 등입니다.
하나님을 떠나서 육신으로 산 것의 그 결말의 심판에 대해서 말씀하시기를 계14:8에 '또 다른 천사 곧 둘째가 그 뒤를 따라
말하되 무너졌도다 무너졌도다 큰 성 바벨론이여 모든 나라를 그 음행으로 인하여 진노의 포도주로 먹이던 자로다 하더라'하셨고 또
계18:21에는 '이에 한 힘센 천사가 큰 맷돌 같은 돌을 들어 바다에 던져 가로되 큰 성 바벨론이 이같이 몹시 떨어져 결코 다시
보이지 아니하리로다'하셨습니다.
○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
영의 생각 곧 성령의 감화감동의 인도대로 산 것은 생명과 평안입니다. '생명'은 하나님과 연결이 생명으로서 하나님과 연결이 되므로
하나님의 모든 충만으로 충만해지는 것이 생명입니다. 하나님의 속성으로 충만하고, 하나님의 능력으로 충만해지는 것이 생명입니다.
또 '평안'은 죄와 마귀와 사망의 권세를 이기므로 그에 침해를 받지 않는 것이 평안입니다. 죄를 짓지 않고, 마귀의 미혹을 이기고, 사망의 권세를 이기면 그 평안을 침해할 자는 없습니다 또 침해할 권세도 없습니다.
結論
우리에게는 생명의 성령의 법과 죄와 사망의 법이 있는 줄 알고 분별하여 조심 있게 살아야 하겠습니다. 영의 일과 영의 생각 곧
성령의 감화감동 대로 살아서 생명과 평안에 거하고, 육신의 생각 곧 악한 영 마귀의 미혹대로 살아서 죄를 지어 죄의 삯인 사망에
거해서는 안되겠습니다.
이 세상에는 어떻게 해야 사망의 길을 피하고 어떻게 해야 생명의 길을 걸어 갈 수 있는 지를 몰라서 어두운 캄캄한 길을 갈
지(之) 걸음으로 걷고 있습니다. 이래서 사람들이 이런 이종교 저런 이종교를 만들었고, 또 이런 사상 저런 주의들을 만들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육신을 쫓아 나온 것이기 때문에 전부가 다 사망입니다.
그러나 피와 성령과 진리로 구속받은 우리에게는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라는 두 길을 밝히 알려주셨으니 감사히 받아서 성령의 감화감동의 인도대로 꼭 살아야 하겠습니다.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 하셨으니, 육신의 생각은 사망의 법칙이며 사망의 길이며 사망이고,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의 법칙이며 생명과 평안의 길이며 생명과 평안입니다. 즉 육신의 생각은 죽는 길이며 영의 생각은 사는 길입니다.
로마서 5:3-4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
즐거워하나니(2744)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 '환난'으로 번역된 헬라어 '들마세신'(*)은 동사 '들리보'(*)의 여성 명사형이다. 원래 '들리보'는 포도즙 틀에서 포도즙을 짜내듯이 피와 땀과 눈물과 고통을 '짜낸다'는 의미이다. 그리고 '즐거워하나니'에 해당하는 헬라어 '카우코메다'는 동사 '카우카오마이'의 1인칭 복수 현재형으로 '기뻐 날뛰다', '의기양양해 하다', 또는 '자랑하다'는 의미이다. 여기서 바울은 믿음으로 하나님의 은혜에 들어가게 된 즐거움이 복음으로 인해 받게 되는 핍박과 환난보다 훨씬 큼을 강조하고 있다. 성도가, 괴로움과 슬픔이 많음에도 불구하고, 모든 환난을 극복하며 오히려 즐거움 가운데 힘차게 살아갈 수 있는 것은 세상의 즐거움과 고통은 잠깐 피었다 사라지는 안개처럼 가변적(可變的)이요 일시적인 반면 그리스도 안에서 발견하는 즐거움과 기쁨은 불변하며 영원하기 때문이다(고후 4:18). 더더욱 성도는 주님께서 약속하신 바, 영원한 세계에 대한 소망이 지대하고 극명하기 때문에(요 14:1-3) 현재의 모든 고난을 즐거움 가운데 상쇄(相殺)시킬 수 있다.
환난은 인내를 - 복음을 따르는 자들에게는 필연적으로 환난이 닥쳐오며 인내가 요구된다(마 13:20-22). '인내'로 번역된 헬라어 '휘포모네'는 동사 '휘포메노'에서 유래한 여성 명사이다. '휘포메노'에는 '최후까지 남는다', '참는다', '계속하다', '기다린다'는 의미가 있다. 성도들이 이 땅에서 그리스도를 위해서 살 때 극심한 핍박과 고난이 임하나 이 모든 환난에서 성령의 은총으로 말미암아 참고 견디며 끝까지 살아 남을 수 있게 된다. 여기서 성도의 인내는 성령의 사역의 결과로 주어지는 수동적 의미만을 내포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성도의 성품과 인격에서 우러나오는 자발적인 의미까지 함축한다(W. Hendriksen).
인내는 연단을 - '연단'(鍊鍛)에 해당하는 헬라어 '도키메'는 '증명하다', '시련을 주다', '시험하다', '분별하다', '택하다' 등의 의미를 가진 동사 '도키마조'에서 유래한 여성 명사로서 '연단' 외에 '인격', '증거', '문서', '자격'등의 의미를 지니며, 일반적으로 '엄격한 시험 또는 혹독한 시련을 통과하게 되는 것'을 의미한다. 마치 용광로에서 금이 여러번 단련됨으로써 정금과 순금이 만들어지는 것처럼 성도는 여러 가지 시험과 환난을 참고 견딤으로써 그 자신이 정화된다. 여기에는 성령의 사역이 함께하며 이 믿음의 시련을 통과한 성도는 금보다 더 귀한 신앙인으로 증명된다(벧전 1:7). 혹자는 '도키메'를 '체험'으로 번역한다(Calvin). 즉 그는 본절의 '도키메'를 '하나님의 확실한 보호하심에 대한 체험'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성도의 삶에 있어서 환난을 당하고 그 가운데서 인내하는 이 모든 과정들이 체험이므로 본절에서는 이와 같은 포괄적인 단어를 사용하는 것이 적합하지 않다.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 - 바울은 신앙에서 소망의 문제로 접근했다. 신약성경에서 성도의 소망은 일반적으로 하나님과 함께 사는 것을 의미하지만 보다 구체적으로는 '부활의 소망'을 의미한다(행 28:20). 바울은 죽은 자가 다시 사는 일이 없으면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다시 살리지 아니하셨을 것이며, 또한 그리스도께서 다시 살지 못하셨으면 우리 성도의 신앙도 헛되다고 가르쳤다(고전 15:12-16). 이 말은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이 기독교 신앙의 핵심임을 보여 주고 있다. 한편 본절의 '이루는'에 해당하는 헬라어 '카테르가제타이'는 '만들어내다', '행하다', '준비하다', '정복하다', '성취하다' 등 다양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본절에서는 어떤 사건에서 어떤 결과를 '산출해 낸다'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성도는 불 시험과 같은 연단을 통해서 하나님의 자녀로 인정을 받으며 이러한 사실을 인식함으로써 부활에 대한 소망이 구체화되고, 그 소망만을 붙잡게 된다. 또한 본절의 '앎이로다'에 해당하는 헬라어 '에이도테스'는 '오이다'의 주격 남성 복수 분사이며, '오이다'는 '에이도'의 제 2 완료 분사이다. '에이도'는 '기노스코'가 주로 육적(肉的)인 앎을 의미하는데 반해 영적 체험을 통해 얻어지는 지식에 강조점을 두고 있다. 그리고 '에이도테스'는 분사 형태이므로 체험을 통해 획득한 영적 지식이 부단히 계속됨을 의미한다. 바울 사도는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는 소망이 물리적 지식이 아니라 부단한 영적 지식을 통해 성도의 삶 속에 확고하게 자리잡게 됨을 시사하고 있다.
* 기노스코 - 육적인 앎을 강조 * 에이도 - 영적 체험을 통해 얻어지는 지식
로마서 5:2 한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믿음으로 서 있는 이 은혜에 들어감을 얻었으며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느니라.
즐거워하느니라(카우카오마이. kauchaŏmai) καυχάομαι
Storng number 2744
1. 자랑하다. 2. 자랑삼아 말하다. Pronunciation
[ kauchaŏmai ] Etymology / 디포넌트. 미래 καυχήσο- μαι, 제1부정과거 ἐκαυχησάμην, 완료 κεκαύχημαι, 폐어가 된 어떤 어간과 2172에서 유래
1. [자동사] 자랑하다, 뽐내다, 고전1:31, 4:7, 13:3, 고후10:17.
2.
[타동사] 자랑하다, 자랑삼아 말하다, 고후10:8, 11:16,30.
관련 성경 / 자랑하다(롬 2:17, 고전 1:31, 약 1:9), 즐거워하다(롬 5:2, 3, 11), 칭찬받다(고후 12:11).
그로 말미암아 - 바울은 인간이 하나님과 관계를 맺음에 있어서 예수 그리스도의 역할에 대해 다시 반복하여 말하고 있다. 이는 베드로가 이스라엘의 관원과 장로와 서기관들 앞에서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행 4;12)라고 하면서 구원을 얻는 유일한 방법은 '예수 그리스도'라는 이름뿐이라고 역설한 것과 같은 의미를 지닌다.
우리가 믿음으로 서 있는 이 은혜에 들어감을 얻었으며 - 초기의 동방 사본들과 서방 사본들에는 '믿음으로'라는 문구가 없으며 현대의 일부 영역본에도 이 말이 생략되어 있다(NEB, RV, RSV). 그러나 이 말이 나타나지 않는다 하더라도 본절의 문맥상 그 의미가 함축되어 있으므로 이는 별다른 문제가 되지 않는다. 한편 엡 2:18에서 바울은 "이는 저로 말미암아 우리 둘이 한 성령 안에서 아버지께 나아감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고 선언했는데, 이것은 본절과 내용상 같은 의미이다. 성도가 '믿음으로 서 있게'되는 것은 오직 성령의 사역에 의한 것이며 '은혜에 들어가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후사가 되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본절에서 암시된 바와 같이 하나님께서 예비하시고 약속하신 그 은혜 속으로 우리가 스스로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들어감을 얻는' 것이다. 여기서 '들어감'으로 번역된 헬라어 '프로사고겐'(*)은 '접근'(access), '인도', '채용' 등으로 번역될 수 있으나 여기서는 '인도'의 의미로 봄이 가장 적절하다. '프로사고겐'은 높은 위치에 있는 사람이나 신앞에 인도되거나 소개되는 특권을 함축하고 있기 때문에 그러하다(F.F. Bruce). 성도는 그리스도의 은혜로 말미암아 그를 구원주로 믿고 그의 자녀가 되었으며 그분에 의해 존귀하심과 영광중에 계신 하나님 아버지께 인도함을 받고 있다.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느니라 - '하나님의 영광'에 대해서는 1:23 주석을 참조하라. 본절에 해당하는 헬라어 '카우코메다 에프 엘피디 테스 돝세스'(*)는 직역하면 '하나님의 영광의소망 가운데 우리가 자랑하느니라'가 된다. 여기서는 개역 성경의 '즐거워하느니라'에 해당하는 동사 '카우코메다'(*)가 다음과 같이 해석될 수 있다. (1) 일반적으로는 '자랑하다'란 의미를 지니지만 이는 유대인이 율법을 자랑하는 것과 유사한 어감이 풍기기에 오히려 '즐거워하다'(rejoice, KJV, NIV, RSV)로 해석하는 학자들이 많다(Hendriksen, Black). 그리고 혹자는 '영광스러워하다', '영광을 돌리다'라는 의미로 해석하기도 한다(Lenski). 그렇지만 본절에서는 '자랑하다'든지 '영광스러워하다'든지 또는 '즐거워하다'든지 어느 번역을 취하든 의미상 별 차이가 없다. 바울이 지금 진술하고자 하는 바는 하나님의 영광에 대한 소망 가운데 있는 성도의 내적인 변화에 대한 것이다. 그래서 머레이(Murray)는 '최고로 기뻐하고 자랑하는 것을 가리킨다'고 주장한다. (2) '카우코메다'가 1절의 '소유하다', '취하다'를 의미하는 '에코멘'( 혹은 )의 해석과 같이 청유형(請誘形)으로 '즐거워하자'로도 해석될 수 있다. 그러나 3절과 본절의 문자 구조를 비교해 볼 때 청유형보다는 평서문의 문장이 더 자연스럽고 3절과도 조화가 잘 된다(3절 주석 참조). 그러면 성도들이 하나님의 영광을 소망하며 즐거워하는 까닭은 무엇일까 ?
첫째로, 하나님 아버지의 영광은 곧 성도들의 영광이 된다고 그리스도께서 논증하셨기 때문이며(요 14:3; 17:24) 둘째로는,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실 때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나며 성도들에 대한 하나님의 궁극적인 구원 계획이 완성될 것이기 때문이다(히 2:10;벧전 5:4).
작사 : Horatio G. Spafford (호라티오 G. 스패포드, 1828–1888) 작곡 : Philip P. Bliss (필립 P. 블리스, 1838–1876)
이 찬송가는 비극적인 배경에서 탄생한 곡으로 잘 알려져 있습니다. 호라티오
스패포드는 미국 시카고의 부유한 변호사이자 신실한 그리스도인이었습니다. 하지만 1871년 시카고 대화재로 재산을 모두 잃고, 얼마
후 유럽으로 가족 여행을 보내던 중 배가 침몰해 네 딸을 모두 잃게 됩니다. 아내만 생존해 “혼자 살아남았다”는 전보를 보냈을
때, 그는 깊은 슬픔 속에서도 하나님이 주시는 놀라운 평안을 체험했습니다. 그때 그는 배를 타고 아내에게 가는 길에서 이 찬송의
가사를 썼다고 전해집니다.
작곡가 필립 블리스는 스패포드의 시를 곡으로 붙여 오늘날까지 사랑받는 찬송가로 만들었습니다. 이 찬송은 고난 중에서도 잃지 않는 믿음과 하나님의 평강을 강력하게 증언합니다.
찬송가 해설
‘내 평생에 가는 길’은 인생 여정이 평탄할 때나 풍랑 가운데 있을 때나, 우리의 영혼은 하나님의 평강 안에서 쉼을 얻는다는 고백입니다. 2절은 영적 싸움에서 주님이 우리의 대장이심을 선언하며, 3절은 죄 사함의 은혜를, 4절은 마지막 심판날에도 두려움 없는 평안을 노래합니다. 이 찬송은 고난 속에서도 믿음을 지키며 평안을 누리도록 우리를 초대하는 곡입니다.
관련 성경구절 요한복음 16:33 “이것을 너희에게 이르는 것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로마서 8:38-39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빌립보서 4:7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은혜로운 묵상
이 찬송의 감동은 단순히 ‘평안하다’는 고백에서 오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말할 수
없는 슬픔과 상실, 그리고 눈물 속에서 오히려 솟아나는 믿음의 평안에서 비롯됩니다. 우리의 인생에도 때로는 큰 풍파가 몰아치고,
마귀가 우리를 넘어뜨리려 하지만, 주님은 우리의 대장이 되어 끝까지 함께 싸우십니다. 설령 마지막 날이 온다 해도, 그분의
보혈로 씻음 받은 우리의 영혼은 두려움 없이 찬양할 것입니다.
수직적 관계(垂直的 關係) 내적(內的)
수평적 관계(水平的 關係) 외적(外的)
편안함이
육체적인 것이라면 평안은 정신적이고 마음적인 상태를 말한다. 육체적으로 편안하다고 해서 마음으로나 영적으로 평안함을 얻는 것은
아니다. 예를 들면 직장에서 육체적으로 편안한 곳은 어쩌면 정신적으로 엄청 힘들 수 있다. 편안함이 평안함을 가져다준다고 보장할 수
없다. 육체적인 편안함이 오히려 정신적으로 스트레스를 주어 마음에 평안함을 앗아간다. 그리고 주거지도 모든 것이 다 갖추어진
곳이라면 생활이 너무 편하다. 하지만 그러한 환경이 정말 평안함을 줄 수 있을까? 넓은 주거지에서 값비싼 침대에 자면 육체적으로
편안함을 느낄 수 있을지 모르지만 숙면(熟眠)을 통한 평안을 담보하지 않는다. 어쩌면 불편한 환경 가운데서도 평안함이 있으며
단잠을 잘 수 있고, 육체적인 쉼과 기쁨을 얻을 수 있다.
W.
Target이 쓴 ‘창’이라는 단편 소설의 내용이다. 어느 작은 병실에 두 남자가 입원해 있었는데, 한 사람은 폐암 말기 선고를
받은 환자이고, 또 한 사람은 디스크 환자였다. 디스크 환자는 수술 받은 지 얼마 되지 않아 침대에 꼼짝없이 누워 있어야 했지만
폐암 환자는 하루에 한 시간 정도는 자리에서 일어나 창밖을 내다보곤 했다. 병세로 보자면 폐암 말기 환자의 상황이 훨씬
절망적이었지만, 그의 얼굴에는 왜 그런지 늘 평안과 기쁨이 있었다. 하루는 디스크 환자가 창밖을 보고 있는 폐암 환자에게 밖에
무엇이 보이냐고 물었다. 그는 지그시 눈을 감고 말했다. “아름다운 호수에 보트와 백조가 한가로이 떠 있고, 호숫가를 산책하는
여인들과 잔디밭에서 놀고 있는 아이의 얼굴이 보이네요.” 이 말을 듣고 디스크 환자의 얼굴은 분노로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그는
폐암 환자의 얼굴에 늘 기쁨이 있는 까닭이 그의 침대가 창문 곁에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하고 자기는 차별대우를 받고 있다는 생각을
했다. 그래서 빨리 폐암 환자가 죽어서 나가면 저 창가의 침대를 차지해야겠다는 생각까지 했다. 그러던 어느 날 밤 폐암 환자가
심하게 기침을 하면서 신음하기 시작했다. 디스크 환자는 비상벨을 눌러서 의사를 부를까 하다가 그대로 두었다. 그의 침대를
차지하겠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아침이 밝아올 무렵 갑자기 옆 침대가 조용해졌고, 고통 받던 폐암 환자는 그의 기대대로 세상을
떠났다. 그리고 그는 드디어 창문 곁 침대로 옮기게 되었다. 그는 옮기자마자 있는 힘을 다해서 침대를 붙들고 일어나 창밖을
내다보았다. 그런데 놀랍게도 창밖에는 아름다운 호수가 있는 것이 아니라 회색의 콘크리트 담벼락뿐이었다. 그는 그제야 폐암 환자의
기쁨이 환경 때문에 생긴 기쁨이 아니라 그가 선택한 기쁨이었음을 깨달았다. 그는 기뻐할 수 없는 상황임에도 언제나 기뻐하기로
마음먹고 아름다운 호수를 상상하면서 기뻐하며 살았다.
그렇다. 편안함과
평안함의 차이가 무엇일까? ‘편안’은 몸과 환경의 차원이고 ‘평안’은 마음의 차원이다. 다시 말해서 편안함은 주어지는
것이고, 평안함은 내가 취하는 것이다. 환경이 편안하다고 마음까지 평안할 수는 없다. 그러나 마음이 평안하면 살아가는 모든 것이
편안할 수 있다. 생활이 편안해도 행복하지 않을 수 있다. 그러나 마음에 평안함이 있으면 생활이 편안하지 않아도 행복할 수 있고
평안을 누리며 살 수 있다.
성경은
우리에게 편안함과 쉬운 삶이 아니라 ‘땀 흘리며 수고’하는 근면을 요구하면서 참 평안(샬롬)을 누리며 살 것을 강조한다. 이
평화는 근원적으로는 하나님과 예수님 그리고 성령님 삼위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지는 것이다. 죄는 평화를 깨는 주범이다. 그러나 생명의
주님과 깊은 관계가 더할수록 평안함은 더 깊어진다. 그러므로 모든 성도는 환경을 탓하거나 그것에 연연하지 말고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평안을 만끽하며 사는 성도들이 되어야 한다.
요한복음 14:27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 (Peace I leave
with you, my peace I give unto you: not as the world giveth, give I unto
you. Let not your heart be troubled, neither let it be afraid).
불안하고
불확실한 시대에 그리스도의 평강이 여러분들과 함께 하길 기원한다.
현대 교회에 편안한 교인들은 많은데 평안한
제자들은 찾기가 어렵다는 사실을 아십니까? 교회를 다닌다고 하지만 “누구든지 나를 따르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마태복음 16:24)는 예수님의 명령이 부담이 되어 일요일에 교회에 나가 열심히 해야할 일을 하지만 혹시 나를
불편하게 하는 순종을 해야할 상황이 되면 여러가지 핑계를 대며 피하거나 거부합니다. 예수님의 친구였던 나사로가 죽었을 때 돌
무덤 앞에서 슬피 우시던 예수님이 마르다에게 명령합니다. “무덤의 돌을 옮겨라.” 이미 죽은 나사로의 시체를 무엇 때문에
보시려고 하나는 생각으로 마르다는 대답합니다. “주여, 죽은지 나흘이나 되어서 냄새가 나나이다.” 마르다에게 무덤의 돌을 옮기는
것은 불편한 일이었습니다. 나사로의 죽음으로 슬퍼하는 마음이 가득하지만 정작 나사로를 살릴 수 있는 돌을 옮기는 일은 하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왜 예수님께서 마르다에게 돌을 옮겨놓으라 하셨을까라는 질문을 해봅니다. 죽은 나사로를 “나사로야 무덤에서
나오라”는 한 말씀으로 살리셨다면 무덤의 돌도 말씀으로 옮기실 수 있지 않았을까요? 죽은 사람을 살리는 것보다 돌을 옮기는 게 더
쉬웠을텐데 굳이 마르다가 돌을 옮기기 원하신 이유가 무엇일까요? 죽은 나사로를 살리는 것은 예수님이 하실 일이고 돌을 옮기는
것은 마르다가 해야할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아무리 편안하지 않은 일이라 해도 그것이 내가 감당해야 할 십자가라고 생각하고
순종할 때 진정한 평안을 경험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감사한 것은 돌을 옮겨놓는 것은 우리가 충분히 감당할 수 있는 십자가라는
것입니다. 진정한 평안함이 내 삶에 있기를 소망하십니까? 그렇다면 내 삶의 돌을 옮겨 놓으십시오. 예수님처럼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게 해달라고 기도하면서 내가 도울 수 있는 노숙자들은 애써 외면하고 있다면 그것이 내가 옮겨야 할 돌입니다.
세계선교를 위해 기도하면서 나와 함께 일하는 동료에게 예수님에 대해 말하는 것을 피하고 있다면 그것이 내가 옮겨야 할 돌입니다.
산을 옮길만한 믿음을 갖을 수 있게 해달라고 기도하면서 내가 오늘 겪고 있는 문제를 놓고 하나님께 간구하지 못하고 있다면 그것이
내가 옮겨야 할 돌입니다. 세상을 변화시키는 신앙인이 되게 해달라고 기도하면서 사람들에게 상처를 주는 나의 말과 행동을 바꾸지
못하고 있다면 그것은 내가 옮겨야할 돌입니다. 내가 져야 하는 십자가는 이렇게 불편하지만 내가 하기를 원하시는 작은 일들을
예수님 때문에 하는 것입니다. 죽은 자를 살리는 것과 같은 기적이 필요한 일은 예수님께 맡기시고 내가 감당할 수 있는 돌을
옮겨놓는 일을 시작하십시오. 편안함이 아니라 평안함을 인생의 목적으로 삼으시고 더 이상 핑계대지 마시고, 더 이상 피하지 마시고,
더 이상 거부하지 마시고, 그 불편할 수 있는 일을 오늘 하십시오. 세상이 알수도 없는, 세상이 이해할 수도 없는 평안함을
경험하시게 될 것입니다.
편안과 평안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사람은 불편한 것보다 편안한 것을 좋아하고, 그것을 추구하기 마련이다. 그러나 시대를 앞서갔던 선각자와 선지자는 일순간의 안일과 편안함보다는 역경과 고난 뒤에 도래될 참된 ‘평안’을 내다보고 그것을 준비했다.
‘편안’과 ‘평안’은 얼핏 비슷한 것 같으나 실상 그 의미가 다르다. ‘편안’은 외부환경이 가져다주는 느낌의 상태지만, ‘평안’은 마음속에서 우러나오는 상태를 일컫는다.
예를
들어 푹신한 침대에 편안한 자세로 누워 있으면 몸은 편하다. 그러나 마음속에 온갖 근심과 걱정으로 가득하다면 결단코 평안한
상태가 될 수 없다. 반면 힘든 노동이나 직장일로 몸은 고되지만 그 사람에게 뚜렷한 꿈과 소망이 있어 마음만은 평안하다면, 과연
어느 쪽이 더 행복하다고 할 수 있을까?
예수님이 알려주신 인사법
어느 집에 들어가든지 먼저 말하되 이 집이 평안할지어다 하라
(누가복음 10:5)
세상에는
여러 인사말이 있다. “처음 뵙겠습니다”, “반갑습니다”, “실례합니다” 등이다. 일찍이 예수님은 여러 인사말들 가운데 최고의
인사법을 제자들에게 가르쳐주셨다. 바로 이웃에게 평안을 빌어주고 평안을 누리도록 깨우치고 도와주라는 것이다. ‘평안’이라는 것은
세상에서부터 주어지는 것이 아니고,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주어진다.
너는 하나님과 화목하고 평안하라 그리하면 복이 네게 임하리라
(욥기 22:21)
우리
마음이 평안해질 수 있는 것은 세상의 명예, 지위, 부귀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하나님과 화목한 관계 속에서 이루어진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라며 하나님과의 유대를 중요시 여겼다(로마서 8:5~6).
평안을 얻을 수 있는 방법
우리의 생명을 위해 사람으로 오신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가 준비해놓으신 것이 있다.
때가 이르매 예수께서 사도들과 함께 앉으사 ··· 내가 고난을 받기 전에 너희와 함께 이 유월절 먹기를 원하고 원하였노라 ··· 떡을 ··· 떼어 저희에게 주시며 ··· 이것은 너희를 위하여 주는 내 몸이라 ··· 이 잔은 내 피로 세우는 새 언약이니 곧 너희를 위하여 붓는 것이라
(누가복음 22:14~15, 19~20)
예수님은 자신의 죽음을 예견하셨다. 죽음을 앞둔 예수님이 제자들을 위해 준비하신 것은 최후의 만찬이었다.
이날의 만찬은 평소의 만찬과 다른 의미가 있었다. 예수님은 만찬에 놓인 떡을 “나의 살”이라고 하셨고, 만찬에 놓인 포도주를
“나의 피”라고 하셨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의해 찢기고 흘리실 당신의 살과 피를 떡과 포도주에 인치신 것이다. 예수님의 살과 피를
먹는 이 예식을 성경은 ‘새 언약 유월절’이라고 기록한다.
예수님이 새 언약 유월절을 선포한 이날은 예수님의 유언의
자리가 되었다. 죽음을 앞둔 사람은 자신이 가장 소중하게 생각하는 것을 마지막으로 행한다. 죽음을 앞둔 예수님이 마지막으로
행하신 것은 “유월절 먹기를 원하고 원하였노라.” 하신 말씀에서 볼 수 있듯 새 언약 유월절을 지키는 일이었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왜 새 언약 유월절 지키기를 바라셨을까? 성경 『마태복음』, 『로마서』에 그 이유가 설명되어 있는데, 인류에게 죄 사함과 영생을 주기 위함이다(마태복음 26:28, 로마서 6:23). 인류의 영원한 생명과 행복, 평안과 화목을 위해 세우신 이 절기의 의미를 깨달았던 초대교회 사도들은 예수님 승천하신 이후에도 새 언약을 지켰다(고린도전서 5:7~8, 11:23~26).
사람들은 흔히 돈 많은 부자를 부러워한다. 그러나 마음엔 천석꾼, 만석꾼처럼 걱정이 가득하다면 과연 그를 행복한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근본 영혼의 평안을 전혀 보장받지 못하고 한시적인 삶으로 막을 내린다면 그것은 잘사는 것이 아닐 것이다.
당장 내 상황이 편안하지 않다고 해서 슬퍼하고만 있지 말고, 유월절을 기억하여 지켜서 내 마음에 진정한 평안을 선물하는 것은 어떨까?
편안과 평안, 어느 것이 진짜 축복인가?
사탄은 속이기 위해서 아주 비슷한 복을 만들어 놓고 인간을 유혹한다. 편안과 평안, 어느 것이 진짜 복이고, 어느 것이 가짜 복이겠는가? 서양속담에 이런 말이 있다. “우유를 마시는 사람보다 우유를 배달하는 사람이 더 건강하다.
”
배달해주는 우유를 마시는 것이 훨씬 더 편안할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평안을 가져다주지는 못한다. 요즈음 많은 사람들이 비만
때문에 고생하고 있다. 살을 빼기 위해서 약도 먹고 수영도 한다, 헬스다, 등산이다 여러 가지 운동을 한다. 나는 그런 분들에게
우유배달 같은 힘든 일을 권하고 싶다. 신문배달도 좋겠다. 돈도 벌고, 비만도 해결하고, 잠도 잘 오지 않겠는가?
나는 1986년부터 자가용을 탔다. 10년쯤 타다보니 편리해진 대신 나빠진 것이 많았다. 이전에 걸어서 심방할 때는 다리와 허리가 튼튼해서 등산을 하면 언제나 일등이었다. 그런데 십년 후에는 조금만 심하게 걸어도 다리가 아팠다.
등산을
하면 제일 뒤쳐지게 되었다. 갑자기 체중이 늘고 지방간이 생긴 것이다. 건강에 적신호가 찾아 왔다. 돈이 없으면 생활이 불편해질
것이다. 돈이 있으면 편리하고, 편해지는 것은 사실이다. 그렇다고 해서 돈이 평안을 가져다주지는 못한다. 오히려 돈 때문에
평안을 잃고 불안해지는 경우가 훨씬 더 많다. 돈이 우리에게 주는 것은 편안함이지, 결코 평안함은 아니다.
필자는
중국을 여러 번 방문했는데, 중국인 젊은 목사님 한 분이 이런 말을 하는 것이었다. “목사님 이제 중국에도 부자가 많이
생겼습니다. 부자가 되면 제일 먼저 하는 일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잘 모르겠다고 하니까, 별 것 아닙디다. 담쌓고 철조망
칩디다.” 맞다. 부자가 제일 먼저 하는 일은 담쌓고, 철조망 치는 일이다.
조금 편안해졌지만, 많이 불안해진
까닭이다. 그러면 무엇이 우리에게 평안을 주는가?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아니 하니라”<요14:27> 다윗도 평안을 이렇게 노래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그가 나를 푸른 초장에 누이시고 쉴만한 물가로 인도하시는 도다.”
나는 시편 23편을 읽을
때마다 “무엇보다도 양의 생리를 잘 알고 있던 다윗이 왜 이렇게 틀리게 말을 했을까?”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사람을 제외하고
누워서 잠을 자는 동물이 몇 있기는 하지만, 양은 절대로 눕지를 않는 동물이다. 사자가 누워서 잔다.
그리고 사람에게
길들여진 개나 고양이가 누워서 잔다. 그러나 야성을 가진 고양이나 개는 절대로 눕지 않는다. 장난하면서 딩굴 수는 있겠지만,
누워서 잠을 자진 않는다. 사자가 누워서 자도 되는 것은 건드릴 짐승이 없기 때문이다. 약한 짐승들은 깊은 잠 한 번 자지
못한다. 잠결에 바스락 소리만 나도 우선 뛰고 봐야 한다.
그런데 왜 다윗은 “하나님께서 양을 푸른 초장에 누이
신다”고 말한 것일까? 그것을 모르고 한 것인가? 아니다. 다윗이 모를 리가 없다. 결코 누울 수 없는 양, 불안해서 깊은 잠 한
번 자지 못하는 양일지라도, 하나님이 목자가 되어 주시기만 하면, 평안하게 누울 수가 있다는 말이다. 안심하고 깊은 잠을 잘
수도 있다. 하나님만이 우리에게 이러한 평안을 줄 수가 있다. 세상은 평안을 줄 수가 없다. 그 뿐만이 아니다.
다윗은
믿는 자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평안을 이렇게 노래했다. “군대가 나를 대적하여 진 칠지라도 내 마음이 두렵지 아니하며, 전쟁이
일어나, 나를 치려할지라도 내가 오히려 안연하리로다.”<시편27:3> 다윗은 사울 왕의 3000의 정예군대가 자기를
죽이겠다고 에워 쌓고 있는데도 굴속에서 평안히 잠을 잤다. 한 부하가 ‘어찌 잠이 오느냐’고 묻자, “여호와가 나를 붙드심이라”고
말했다. 이것이 하나님이 주시는 평안이다
평안, 평강, 평화 - Peace (요 14:27)
사전의
의미를 살펴보면 평안平安은 걱정이나 탈이 없음. 또는 무사히 잘 있음을 말하고 평강平康도 이와 같이 걱정이나 탈이 없음을 말하며
평화平和는 평온하고 화목함, 전쟁, 분쟁 또는 일체의 갈등이 없이 평온함 또는 그런 상태를 말하고 있다.
요한복음
14장에서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라'고 말씀하신 예수님의 말씀처럼 평강의 하나님이라는 말과 평화의 주라는 말은 혼용될 수
있다. 우리 말 성경은 이 단어들을 혼용해 사용한다. 원문에서 크게 차이가 없거나 같은 단어를 사용하기 때문이다. 성경이 한글로
번역되고 100여년이 지난 요사이 우리가 일상에서 가장 자주 사용하는 말은 평안 보다는 평화일 것이다.
평화로 번역된 이 단어는 영어로 Peace인데 히브리어로는 ‘샬롬 (שָׁלוֹם, shalom)’이고 헬라어로는 ‘에이레네(εἰρήνη,
eirene)’이며 라틴어로는 ‘팍스 (Pax)’로 사용되었고 각기 사용된 시기나 장소가 다르므로 다른 형태로 발전되기도
하였다. 전에 불리던 복음성가에 내게 강같은 평화(Peace like a river)와 같은 곡이 있었고 뉴스도 연일 평화
회담(peace talk)이 보도된다.
평화란
'고요함의 상태'를 뜻하는데 이와 반대되는 것이 분노와 같은 격렬한 감정, 파괴와 혼돈이 가득한 상태로 그 한 예로는 전쟁이
있다. 개인 간의 평화는 화합harmony과 일치accord의 상태를 말하며 이것이 개인의 상태에서는 tranquility 즉
평온이나 평정平靜의 상태를 말한다.
평화의 상태가 우리에게 있을 때 우리는 어떻게 될까?
평화는
화합과 일치를 만들고 이는 우리들에게 안전과 풍요를 가져다 준다. 구약의 사람들은 이 말을 인사로 삼아 ‘샬롬’을 말해왔고
신약 시대에는 평안히 가라(Go in peace)는 인사를 더하기도 했다. 예수님도 부활 후 이 말을 자주 사용했는데 구약의
전통과 예수님의 본을 따라 바울은 서신서들 마다 ‘Peace be with you! 너희에게 평강이 있기를’ 이란 문구로 인사를
하는 것을 쉽게 볼수 있다.
우리에게
근심이 가득한 동안 우리의 마음에는 평화가 머물지 않는다. 또한 우리가 우리의 안녕을 염려하는 동안에도 평화는 함께하기
힘들다. 우리 가족의 안녕과 자신의 성공과 부요를 염려하는 동안 우리 마음에는 평화가 찾아 오지 않는다. 현재의 내가 소유하고
있거나 성공한 것이 중요하지 않다. 염려가 있는 동안에는 한적하고 평화스러운 장소에 가더라도 평화가 없다. 진정한 평화는
예수로부터 나오며 요한복음 14장에서 예수님은 평화를 주는 평화 수여자로 등장하고 있다.
예수께서 주시는 평화는 '세상이 주는 평화와 같지 않은' 두려움이나 근심이 없는 평화이다. 이것이 가능할까? 또한 예수의 평화는 갈등이나 전쟁이 없는 평화이다. 이것이 어떻게 가능할까?
너무도
당연한 것이겠지만 예수께서 주시는 평화를 받기 위해서는 예수께서 평화를 줄수 있는 분으로 먼저 믿어야 한다. 예수께서는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은 내일 염려할 것이요, 한날의 괴로움은 그날로 족하니라"고 가르치셨다. 우리의 근심과
걱정이 어디에 닿아 있는가? 대개는 앞선 걱정이고 앞선 근심이다. 오늘 누리는 은혜에 감사하고 집중하는 것이 내일 있을 걱정을
하는 것보다 훨씬 낫다. 그러나 사람들은 미래를 걱정한다. 오늘에 집중하지 못한다. 예수를 믿는 사람들의 미래는 어떻게
될까? 예수께서는 믿는 우리가 있을 곳을 마련하러 간다고 하신다. "내 아버지의 집에는 있을 것이 많다."
그러므로 예수를 평화의 수여자로 믿으면 오늘 염려보다 내일 걱정보다 진정한 평화를 얻을수 있다. 당신은 예수를 진정으로 믿는가?
"평안"과 "편안"
다윗은 시편 16편 2절에서 `주 밖에는 나의 복이 없나이다'라고 고백을 하였다. 복은
주 안에만 있다는 말이다.
사탄은 우리가 주 안에 있는 것을 원치 않아 주 밖으로 유인하기 위하여 가짜로 복을
만들어 우리를 속인다. 그런데 사탄이 얼마나 교묘한지 그 가짜 복이 꼭 진짜 같아 나는 그것을 유사 복이라고도
부른다.
평안과 편안. 둘 중에 하나는 진짜 복이고 다른 하나는 가짜 복이다. 여러분 생각에는 어떤 것이 진짜 복이고 어떤
것이 가짜 복인 것처럼 보이시는가? 맞다. 평안이 진짜 복이고 편안은 가짜 복 즉 유사 복이다. 편안이 나쁜 것은 아니다. 편안이 축복은
아니다. 편안함만으로는 궁극적으로 행복할 수 없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돈과 물질을 복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돈과 물질은
복이 아니다. 왜냐하면 돈과 물질은 우리에게 편안은 줄 수 있으나 평안은 줄 수 없기 때문이다.
중국에서 목회를 하시는
목사님으로부터 들은 이야기가 하나 있다. 중국에서 요즘 돈을 많이 번 부자들이 제일 먼저 하는 일이 담 쌓고 철망을 치는 일이라는
이야기를 말이다. 돈 때문에 좀 편히 살 수는 있게 되었지만 돈 때문에 오히려 불안해져서 담을 쌓고 철망을 치는 것이다. 돈으로
편안을 살 수는 있어도 평안을 살 수는 없다.
평안은 돈으로는 살 수 없다. 평안은 믿음으로 얻는 것이다. 천지를 창조하신
전능하신 하나님이 정말 나를 사랑하신다는 사실을 믿을 수만 있다면 그는 절대로 불안할 수 없다. 전능하신 하나님을 믿으면서도
불안하다는 것은 논리적으로 불가능하다. 예수를 믿어도 가난할 수 있다. 그래서 불편한 삶을 살 수도 있다. 그러나 예수를 믿는데 불안한
삶을 살 수는 없다.
그래서 예수님은 요한복음 14장 27절에서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고 하신
것이다.
여기서 예수님이 말씀하신 `세상이 주는 것'은 편안을 말씀 하시는 것이고 예수님이 우리에게 주시겠다는 것은 평안인
것이다.
평안하기를 빌라(마태복음 10:11-13)
아무 성이나 촌에 들어가든지 그 중에 합당한 자를 찾아내어 너희 떠나기까지 거기서 머물라 또 그 집에 들어가면서 평안하기를 빌라 그 집이 이에 합당하면 너희 빈 평안이 거기 임할 것이요 만일 합당치 아니하면 그 평안이 너희에게 돌아올 것이니라
에피그노시스의 힘 The Power Of “Epignosis”
“하나님과 우리 주 예수를 앎으로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더욱 많을지어다” (벧후 1:2)
사도 베드로는 하나님과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의를 힘입어 동일하게 귀한 믿음을 얻은 자들에게 말합니다. 그리고 그는 이렇게 선포합니다. “하나님과 우리 주 예수를 앎으로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더욱 많을지어다” 그러나
베드로는 어떤 종류의 지식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여기서 지식에 사용된 그리스어 단어는 “에피그노시스(Epignosis)”로,
전문적인 지식을 의미합니다. 이는 관계와 경험을 통해 얻은 지식을 뜻합니다. 지식의 대상이나 알려진 것과 관련된 지식입니다.
당신은 어떤 것을 지적으로 알 수도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것이 당신과 관련이 있다는 뜻은 아닙니다. “에피그노시스”는
충만하고, 깊고, 정확한 지식입니다. 축구 선수들을 생각해 보십시오. 그들 중 일부는 놀라운 솜씨로 공을 다룰 수 있습니다. 마치
그들이 공과 하나가 된 것 같습니다. 그들은 공과 친구가 되었습니다. 그들에게 공은 더 이상 가죽 조각이 아니라 인격을 가진
존재입니다. 둥근 가죽 공에 대한 일반적인 지식을 가진 사람을 생각해 보십시오. 그 사람은 공의 재료, 크기, 구조를 알
수도 있습니다. 그는 공의 디자인에 숨겨진 과학을 설명할 수도 있지만, 공을 다룰 수는 없습니다. 그에게는 공을 다룰 수 있는
능력이 없습니다. 숙련은 관계를 통해 이루어지며, “에피그노시스”는 우리를 숙련자로 만드는 지식입니다. 에피그노시스는 아는
자와 알려진 것을 하나로 만듭니다. 이는 말씀 묵상을 통해 옵니다. 말씀이 당신에게 개인적인 것이 되고 이론에서 관계로 바뀔 때
옵니다. 말씀이 당신을 세우고 당신의 삶에서 은혜와 평강이 배가되게 합니다. 따라서 말씀과의 관계를 발전시키십시오. 말씀이 정보 그
이상이 되게 하십시오. 말씀이 살아있는 실재가 되게 하십시오. 그러면 당신의 삶은 꽃을 피울 것이고, 당신은 세상에 경이로움이 될
것입니다.
기도 사랑하는 아버지, 말씀을 통해 나를 하나님을 아는 더 깊고 친밀한 지식으로 인도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나는 오늘
배가된 은혜와 평강 가운데 행하며, 말씀에 대한 정확하고 완전한 지식으로 기능합니다. 내 영은 내 삶을 향한 하나님의 완전한
뜻으로 세워지고, 강건해지고, 조정됩니다. 예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이것이 우리 구주 하나님 앞에 선하고 받으실 만한 것이니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 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딤전 2:1-4)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아 진리의 지식(헬라어: 에피그노시스epignosis)에 이르기를 원하십니다. 구원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러야 하는 이유는 그들이 구원받아 영원한 심판을 피할 뿐만 아니라, 진리를 알아 그 진리와 교제하고 하나가 되기
위해서입니다.
예를 들어 베드로전서 1:23은 다음과 같이 말씀합니다. “너희가 거듭난 것은 썩어질 씨로 된 것이 아니요 썩지 아니할 씨로
된 것이니 살아 있고 항상 있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되었느니라.” 이는 당신이 말씀으로 태어났다는 뜻입니다. 당신은 육체로 거하는
말씀입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당신의 삶은 말씀이 드러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이 이 진리의 지식에 이르기를 원하십니다.
로마서 8:28은 말씀합니다.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이는
당신은 삶에서 불이익을 당하거나 패배당할 수 없다는 뜻입니다. 온 세상이 당신의 것입니다. 당신은 하나님과 같은 부류의
존재입니다. 당신이 이 계시를 이해한다면 실패나 가난과 같은 것들은 없습니다. 이러한 것들은 말씀으로 우리에게 계시된 기본
진리들입니다. 그 진리를 인정하고 받아들인다면 당신의 삶은 끝없이 초자연적으로 흘러가는 삶이 될 것입니다.
성경은 “항상 배우나 끝내 진리의 지식에 이를 수 없는”(딤후 3:7) 사람들에 대해 말씀합니다. 이들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그들의 유업과 정체성에 대한 진리의 지식을 받아들이기를 거절한 사람들입니다. 그 결과, 그들은 계속 같은 자리에서 맴돌며
결코 진보하지 못합니다. 당신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성공과 승리와 형통과 영광스러운 삶에 관한 진리를 아는 지식에
들어감으로써, 다시 말해 그 진리와 하나 됨으로써, 맴돌기만 하는 삶을 깨뜨릴 수 있습니다. 당신이 하나님과 같은 부류에 속한
자라는 진리의 지식에 이르러야 합니다.
진리의 “에피그노시스” The “Epignosis” Of The Truth
“…이것이 우리 구주 하나님 앞에 선하고 받으실 만한 것이니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 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딤전 2:1-4)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아 진리의 지식(헬라어:에피그노시스 epignosis)에 이르기를 원하신다.
구원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러야 하는 이유는 그들이 구원받아 영원한 심판을 피할 뿐만 아니라, 진리를 알아 그 진리로 하나님과 교제하고 예수님과 하나가 되기 위해서
베드로전서 1:23
“너희가 거듭난 것은 썩어질 씨로 된 것이 아니요 썩지 아니할 씨로 된 것이니 살아 있고 항상 있는하나님의 말씀으로 되었느니라.”
말씀으로 새로 태어났다는 뜻
로마서 8:28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삶에서 불이익을 당하거나 패배당할 수 없다는 뜻 이 계시를 이해한다면 실패나 가난과 같은 것들은 없다.
우리에게 계시된 기본 진리들 그 진리를 인정하고 받아들인다면 당신의 삶은 끝없이 초자연적으로 흘러가는 삶이 될 것.
“항상 배우나 끝내 진리의 지식에 이를 수 없는”(딤후 3:7)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유업과 정체성에 대한 진리의 지식을 받아들이기를 거절한 사람들 그 결과, 그들은 계속 같은 자리에서 맴돌며 결코 진보하지 못함.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성공과 승리와 형통과 영광스러운 삶에 관한 진리를 아는 지식에 들어감으로써, 그 진리와 하나 됨으로써, 맴돌기만 하는 삶을 깨뜨릴 수 있다. 당신이 하나님과 같은 부류에 속한 자라는 진리의 지식(에피그노시스)에 이르러야 한다.
12월 11일(목) 로마서 4-5장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화평을 누리자(로마서 5:1)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평을 누리자. Therefore, since we have been justified through faith, we have peace with God through our Lord Jesus Christ.
나는 참 평안합니다. 나는 정말 편안합니다. I am very peaceful. I am truly comfortable.
편안과 평안의 차이The Difference Between Comfort and Peace
편안과 평안의 차이
“우리는 편안함을 좋아한다. 편안한 사람,편안한 공간,편안한 시간… 편안하다는 것은 편리하고 안전하다는 뜻이다(중략). 평안하다는 것은 평화롭고 안정적이란 뜻이다(중략). 편안함은 누군가의 불편함을 대가로 치르지만, 나의 평안함은 누군가와 함께 누리는 공동의 가치가 될 수 있다.”
김소연 저(著) 《마음 사전》 (마음산책, 61-62쪽) 중에 나오는 구절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삶의 행복을 좀 더 편안하게 사는 데 있다고 여깁니다.
어느 정도는 맞습니다.
그러나 진정한 삶의 행복은 ‘편안함’이 아니라 ‘평안함’ 에 있습니다.
하나님은 잠언을 통해 이 진리를 말씀하십니다.
“마른 떡 한 조각만 있고도 화목하는 것이 제육이 집에 가득하고도 다투는 것보다 나으니라.”(잠17:1)
‘편안’은 몸과 환경의 차원이고 ‘평안’은 마음속에서 우러나오는 상태입니다.
성경을 보면 성도들이 “부족함이 없다”는 표현을 자주 씁니다.
부족함이 얼마나 많은데 왜 그런 고백을 할까요.
주님이 주시는 평안 때문입니다.
편안함은 물질로 해결할 수 있지만 평안함은 그렇지 않습니다.
평안은 주님이 성도에게 주시는 하늘이 축복입니다.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 (요14:27)
서울시 강남구 삼성2동 27-2
강남 비전교회
한재욱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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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rtn(뤼튼)을 사용했습니다.
The Difference Between Comfort and Peace
"We like comfort. A comfortable person, a comfortable space, a comfortable time… Being comfortable means being convenient and safe (excerpt). Being peaceful means being peaceful and stable (excerpt). Comfort may come at the expense of someone else's discomfort, but my peace can become a shared value with others."
This passage is from Kim So-yeon's "Dictionary of the Heart" (Mind Walk, pages 61-62).
Many people believe that the happiness of life lies in living more comfortably.
To some extent, this is correct.
However, the true happiness of life lies not in 'comfort' but in 'peace'.
God speaks this truth through Proverbs.
"Better is a dry morsel, and quietness therewith, than a house full of sacrifices with strife." (Proverbs 17:1)
'Comfort' pertains to the body and environment, while 'peace' emanates from within the heart.
If we look at the Bible, the saints often use the expression "lacking nothing."
Considering how much is lacking, why would they make such a confession?
It is because of the peace that the Lord gives.
Comfort can be solved with material things, but peace cannot.
Peace is a heavenly blessing that the Lord gives to the saints.
"Peace I leave with you; my peace I give you. Not as the world gives do I give to you. Let not your hearts be troubled, neither let them be afraid." (John 14:27)
편안함과 평안함의 차이
유대인의 인사말은 “샬롬”입니다. “평안이 있을지어다”라는 축복의 말입니다. 한국인의 인사말은 “안녕하세요”입니다. 안녕이란
단어는 편안할 안(安)과 평안할 녕(寧)이란 한자에서 유래되었으며 마음이 평안하고 몸이 편안한지 물어보는 질문입니다.
“샬롬”이나 “안녕하세요”의 인사말은 유대인이나 한국인이나 “편안함”과 “평안함”이 인생에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를 깨닫게 해주는
말입니다. 예수님도 “평안을 너에게 주노라”라고 축복하시면서 제자들이 진정 추구해야할 것은 평안함이라 가르치십니다. 우리가
돈을 열심히 버는 것도, 공부를 열심히 하는 것도, 직장에서 맡겨진 일에 최선을 다하는 것도 알고 보면 성공을 해야 평안해질 수
있다는 생각을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돈을 많이 벌어도 공부를 잘해도 직장에서 인정을 받아도 마음은 늘 무언가에 쫓기는 것
같고 한치 앞도 내다볼 수 없는 미래에 대한 불확실함 때문에 불안 속에서 더 많이 소유하고 성취하기 위해 애쓰는 우리의 모습을
발견할 때면 ‘도대체 어디까지 올라가야, 얼마큼 돈을 벌어야, 그 평안함을 얻을 수 있게될까’라는 질문을 하게됩니다. 예수님은
“평안함”은 세상이 줄 수 없는 것이라고 합니다. 우리는 세상이 줄 수 있는 “편안함”을 “평안함”으로 착각하며 살기에 몸은
편안할 수 있지만 마음은 평안하지 못한 것입니다. 왜냐면 평안함은 내가 얼마나 많은 것을 소유하고 있느냐가 아니라, 내가 얼마나
많은 것에서 자유할 수 있느냐에 달려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걸어가신 십자가의 길은 불편한 길이었습니다. 사람들에게 매를 맞고
조롱을 다하고, 무시를 당하는 속에서 약한 자의 모습으로, 인생의 실패자로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 언덕으로 걸아가야 하는 길은
예수님이 가고 싶지 않은 길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길은 편안하지 않은 길이었지만 평안한 길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돌아가시기 전
“다 이루었다”라는 고백을 통해 그의 삶의 목적이 아름답게 이루어졌기에 그 마음에 큰 평안이 있으심을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현대 교회에 편안한 교인들은 많은데 평안한 제자들은 찾기가 어렵다는 사실을 아십니까? 교회를 다닌다고 하지만 “누구든지 나를
따르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마태복음 16:24)는 예수님의 명령이 부담이 되어 일요일에
교회에 나가 열심히 해야할 일을 하지만 혹시 나를 불편하게 하는 순종을 해야할 상황이 되면 여러가지 핑계를 대며 피하거나
거부합니다. 예수님의 친구였던 나사로가 죽었을 때 돌 무덤 앞에서 슬피 우시던 예수님이 마르다에게 명령합니다. “무덤의
돌을 옮겨라.” 이미 죽은 나사로의 시체를 무엇 때문에 보시려고 하나는 생각으로 마르다는 대답합니다. “주여, 죽은지 나흘이나
되어서 냄새가 나나이다.” 마르다에게 무덤의 돌을 옮기는 것은 불편한 일이었습니다. 나사로의 죽음으로 슬퍼하는 마음이 가득하지만
정작 나사로를 살릴 수 있는 돌을 옮기는 일은 하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왜 예수님께서 마르다에게 돌을 옮겨놓으라 하셨을까라는
질문을 해봅니다. 죽은 나사로를 “나사로야 무덤에서 나오라”는 한 말씀으로 살리셨다면 무덤의 돌도 말씀으로 옮기실 수 있지
않았을까요? 죽은 사람을 살리는 것보다 돌을 옮기는 게 더 쉬웠을텐데 굳이 마르다가 돌을 옮기기 원하신 이유가 무엇일까요? 죽은
나사로를 살리는 것은 예수님이 하실 일이고 돌을 옮기는 것은 마르다가 해야할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아무리 편안하지 않은
일이라 해도 그것이 내가 감당해야 할 십자가라고 생각하고 순종할 때 진정한 평안을 경험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감사한 것은 돌을
옮겨놓는 것은 우리가 충분히 감당할 수 있는 십자가라는 것입니다. 진정한 평안함이 내 삶에 있기를 소망하십니까? 그렇다면
내 삶의 돌을 옮겨 놓으십시오. 예수님처럼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게 해달라고 기도하면서 내가 도울 수 있는 노숙자들은 애써
외면하고 있다면 그것이 내가 옮겨야 할 돌입니다. 세계선교를 위해 기도하면서 나와 함께 일하는 동료에게 예수님에 대해 말하는
것을 피하고 있다면 그것이 내가 옮겨야 할 돌입니다. 산을 옮길만한 믿음을 갖을 수 있게 해달라고 기도하면서 내가 오늘 겪고 있는
문제를 놓고 하나님께 간구하지 못하고 있다면 그것이 내가 옮겨야 할 돌입니다. 세상을 변화시키는 신앙인이 되게 해달라고
기도하면서 사람들에게 상처를 주는 나의 말과 행동을 바꾸지 못하고 있다면 그것은 내가 옮겨야할 돌입니다. 내가 져야 하는
십자가는 이렇게 불편하지만 내가 하기를 원하시는 작은 일들을 예수님 때문에 하는 것입니다. 죽은 자를 살리는 것과 같은 기적이
필요한 일은 예수님께 맡기시고 내가 감당할 수 있는 돌을 옮겨놓는 일을 시작하십시오. 편안함이 아니라 평안함을 인생의 목적으로
삼으시고 더 이상 핑계대지 마시고, 더 이상 피하지 마시고, 더 이상 거부하지 마시고, 그 불편할 수 있는 일을 오늘 하십시오.
세상이 알수도 없는, 세상이 이해할 수도 없는 평안함을 경험하시게 될 것입니다. 샬롬!
로마서 5장 1절은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자.
믿음을 통해 의롭게 된 성도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과 평화를 누리게 될 수 있게 된 것이 축복의 근거라고 하겠습니다. 왜냐하면 죄의 문제가 해결되어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며 그 결과 평안과 기쁨과 소망을 얻기 때문입니다.
라틴 십자가의 모양(十)에서 화평의 관계를 생각합니다.
첫번째 관계의 화평은 위로 올라가는 하나님과의 화평 두번째 관계의 화평은 아래로 내려가는 세상과의 화평 세번째 관계의 화평은 좌우로 뻗은 이웃들과의 화평
따라서 예수를 믿음으로써 하나님과 깨어진 관계가 회복되어 평화를 누릴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 복음의 핵심 메시지라고 하겠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은 이 세상을 사는 동안에 어떤 삶을 살아야 합니까? 그리스도인은 즐거워하는 자라고 합니다. 즐거워하는 근거는 죄와 사망의 권세에서 자유롭게 된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즐거워하는 그 이유를 소개합니다.
첫째는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의롭다 하심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둘째는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셋째는 믿음으로 구원의 은혜와 많은 여러가지 하나님의 은혜를 받는 자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넷째는 온갖 문제와 환난이 가득한 세상에서 살지만 장차 영원하도록 천국에서 누릴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보기
때문입니다. 다섯째는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는 이유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기 때문입니다.
연속성 : 이 구절은 로마서 3-4장에서 설명된 믿음으로 의롭게 되는 교리의 결론이자, 뒤이어 이어지는 5-8장에서 말하는 성령의 역사, 환난 속에서의 소망, 그리스도인의 삶의 근거가 됩니다.
누리는 복 : 하나님과의 새로운 관계, 은혜로 나아가는 특권, 영광스러운 미래에 대한 소망을 포함합니다.
간단히 말해, 로마서 5:1은 '예수님을 믿음으로써 우리는 하나님과 깨어진 관계가 회복되어 평화를 누릴 수 있게 되었다'는 복음의 핵심 메시지입니다.
약
2천 년 전에 이 로마서가 기록될 무렵부터 시작하여 약 300년 동안 그 당시에 크리스찬들은 무서운 박해를 받았습니다. 주로
로마제국과 그 주변에서 살던 크리스찬들을 향해서 일어났던 로마 황제들의 무서운 박해는 약 열 번 이나 있었습니다.
첫번째
박해는 네로(AD 64년) 의 박해
어떤 학자는 그것을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로마에 있던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체포되어
가장 잔인한 방법으로 사형되었다. 십자가에 못 박히고, 짐승의 가죽에 매여 투기장에 끌려나와 사람들의 구경거리로 개에게 물어
뜯기고, 맹수에게 던져지고, 온 몸에 역청을 뒤집어 쓰고 네로의 정원에 있는 기둥에 묶여서 그들의 몸은 밤에 네로의 정원을
밝혀주는 횃불이 되었다. 네로황제는 수레를 타고 다니며 벌거벗고서 한밤에 술에 도취되어 죽어가는 사람들의 몸부림치는 모습을 만족한
듯이 바라보았다."
이 때에 바울과 베드로도 순교를 당하였습니다.
둘째 박해는 도미시안 박해(AD 96년)
수천 명의 크리스찬들이 로마와 이탈리아에서 살해되었습니다.
셋째 박해는 트라얀 박해 (AD 98-117년)
넷째 박해는 하드리안 박해(AD 117-138년)
다섯째 박해는 안토니우스 피우스 박해(AD 138-161년)
폴리갑이 살해당했습니다.
여섯번째 박해는 마루쿠스 아우렐리우스 박해(AD 161-180년)
순교자 저스틴과 많은 크리스찬들이 목이 잘리고 맹수의 밥이 되었습니다.
일곱 번째 박해는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박해(AD 193-211)
여덟 번째 박해는 막시민 박해(AD 235-238 년)
아홉 번째 박해는 발레리안 박해(AD 235-260년)
열번
째 박해는 디오클레시안 박해(AD 284-305년)
이것은 황제들의 박해 중에서 마지막 박해로 가장 심하고
전국적이었습니다. 10년 동안 동굴이나 숲 속에서 크리스찬들을 찾아내어 화형시키고, 사나운 짐승의 밥이 되게 했습니다. 모든
잔인한 방법을 다 사용하여 기독교의 이름을 없애려고 그들을 박해였습니다.
오늘 로마서 본문은 이런 무서운 박해를 당하는 크리스찬들에게 주신 말씀입니다. 그리고 오늘 온갖 어려움과 고난 가운데서도 신앙을 지키며 주의 일을 하는 우리들에게 주신 말씀입니다. 우리들은 오늘 세상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와 성경말씀을 붙잡고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날마다 성령으로 충만하여 성령의 능력으로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주 안에서 즐거워하는 삶을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우리는 오늘 로마서 5장 5절의 말씀을 굳게 붙잡고 온갖 문제와 고난 중에서도 범사에 승리하여야 하겠습니다. "소망이 우리를 부끄럽게 하지 아니함은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 바 됨이니라."
우리는 오늘, 그리고 매일 매일 즐거워하는 삶을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요, 예수님의 증인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로마서 5장은 앞에서 주어진 가르침에 대한 결론이자, 이후의 가르침을 위한 서론의 역할을 합니다. 지금까지 바울은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은 유대인이냐, 이방인이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누구라도 믿음을 가진다면 의롭다하심을 얻고 구원을 얻게 된다고 주장해 왔습니다.
이제 바울은 이 사실에 대한 결론을 내면서 이 의롭다하심, 곧 칭의와 구원의 은혜가 개인의 차원에서는 어떤 의미를 가지며, 또 하나님의 나라라는 우주적인 차원에서는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에 대해서 설명해 가기 시작합니다. 오늘 우리가 다룰 본문은 개인적인 차원에서 구원이 어떤 의미를 가지는가에 대한 설명이고, 내일은 우주적인 차원에서의 구원에 대한 설명이 이어질 것입니다. 즉 오늘 다룰 5:1~11은 이후에 이어질 6~8장의 내용과, 5:12~21은 9~11장의 내용과 상응한다고 보면 됩니다.
바울은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는 가르침을 정리하면서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고, 은혜를 얻고,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할 수 있게 되었다고 말합니다. 이는 모두 제사와 관련된 표현들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성전) 앞에 나아가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는(화목제) 것이 성전과 제물이 없어도 믿음으로 말미암아 가능하게 된 것입니다.
이방인들은 성전에 들어갈 수 없었고, 바울 당시에도 마찬가지였지만, 바울은 이방인들이 굳이 성전에 들어가야 거룩한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것이 아님을 천명하였습니다. 바울 당시에 예루살렘에 세워져 있던 성전은 그저 유대인들에게 의미가 있는 것이었을 뿐, 이방인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구원을 얻고, 성전에 들어가서 제사를 드리는 것과 전혀 다를 바가 없는 영적인 유익을 얻는다는 것입니다.
믿음으로 구원을 얻은 자는 단순히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칭호를 얻는 정도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세상에서 환난을 당하더라도 그것이 인내, 연단, 소망으로 이어지는 것임을 알기에 오히려 즐거워할 수 있게 됩니다. 이 모든 것은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그 믿는 자들의 마음에 부어졌기 때문입니다. 즉 하나님의 사랑을 받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이는 의롭게 되었다는 말의 진정한 의미입니다. 단순히 법적인 지위가 아니라 하나님과 사랑을 주고받는 관계가 되었다, 친밀한 관계가 되었다는 의미로, 여기서 바울이 구원의 의미에 대해서 가지고 있었던 이해가 무엇인지 확실하게 드러납니다.
하나님과 더불어 누리는 평화(로마서 5:1)
그러므로 우리는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므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더불어 평화를 누리고 있습니다.
하나님과의 평화는 진정하게 믿는 이들을 예수 그리스도와 안전하게 연결시켜주는 첫 번째 고리입니다.
사탄이 그리스도인들을 향해 벌이는 가장 중요한 공격은 그들이 얻은 구원의 실제와 보장에 대해 의심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사탄은 계속해서 구원받기 위해서는 스스로의 노력으로 의로워질 수 있다는 파괴적인 생각을 조장함으로써, 한 개인의 구원의 보존은
전적으로 믿는 이의 성실함에 달려있다고 생각하게 만듭니다.
구원에 대해 성경이 가르치는 것에 반하는 이러한 오도된 해석에 대응하기 위해, 사도 바울은 로마서 3장, 4장에서 구원은 오로지 인간의 믿음을 통해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에 기반하여 이루어진다고 적었습니다. 창세기 15:6 을 인용하면서, 바울은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니 하나님께서 그를 의롭다고 여기셨다” (로마서 4:3).
누군가가 실제로는 아무런 보장을 해주지 못하는 선한 행실이 한 사람의 구원을 보존받는 조건이 되는지를 의문시할 수 있기 때문에, 바울은 로마서 5:1-11 에서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우리의 소망은 우리 안에 있지 않고 위대하신 하나님께 있다고 강조하여 믿는 이들의 마음을 더욱 견고하게 했습니다 (디모데후서 2:13; 히브리서 10:23). 우리를 구세주께로 묶어주는 연결고리 중의 하나가 오늘 구절에서 읽은 하나님과 더불어 누리는 평화입니다.
우리가 이제까지 하나님께 대적했음을 상상하기란 어렵습니다. 그러나 슬픈 사실은 모든 믿지 않는 사람들은 하나님과 전쟁 상태에 있고, 하나님도 그들과 전쟁을 치르고 있다는 것입니다 (로마서 8:7; 에베소서 5:6). 하지만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써 의롭다 함을 얻은 각 사람은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고, 그를 통해 하나님과 평화를 누리게 됩니다. 그리고 그리스도는 “늘 살아 계셔서 그들을 위하여 중재의 간구를 하시기” 때문에 (히브리서 7:25) 이러한 평화는 영구하고 취소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 아버지와 우리 사이의 영원한 평화를 이룩하셨을뿐만 아니라, 그 자신도 우리의 평화이십니다 (에베소서 2:14).
그 사실은 우리 구원의 보장의 근거가 되는 그리스도의 속죄의 사역을 강조합니다. 그러한 절대적이고 객관적인 사실을 가지고 사탄의
공격을 굳건히 막아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 사실을 통해 당신 자신의 선함과 장점에 초점을 맞추지 않고, 그 어떤 것도 하늘
아버지의 사랑에서 당신을 끊을 수 없다는 자신감을 가지고 주님을 섬길 수 있는 것입니다 (로마서 8:31-39).
[ 기도 ]
주님, 저희를 구원해 주시고 당신과 저희 사이에 평화를 이루심을 감사 드립니다. 주님을 더욱 섬길 수 있는 기회를 갖도록 저희를 인도하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성도는 하나님과의 화평을 누리는 자들입니다
5–6 minutes
로마서 5 장
1절: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평을 누리자
2절: 또한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믿음으로 서있는 이 은혜에 들어감을 얻었으며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느니라
< 말씀 요약 >
오늘 본문 5장 1절은 “그러므로”라는 말로 시작됩니다. 사도 바울은 앞에서(롬 1~4장), 사람이 어떻게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 함을 받을 수 있는지(이신칭의 교리)에 관하여 논하였습니다. 그러면서 우리가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을 지키는 행위에서 난
의가 아니라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로 된다는 것을 논증했습니다.
성도는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자들이다
많은
유대인들이 행위로 말미암은 의를 추구해 보았지만, 그것으로 하나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수 있는 사람은 하나도 없었습니다.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롬 3:10), 하나님의 영광에 이를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으며(롬 3:23), 율법의 행위로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을 뿐이라고 하였습니다(롬 3:20). 스스로 의롭게 되려고
아무리 해보아도, 우리에게는 의가 없고 하나님의 의의 요구를 다 충족시킬 수도 없습니다. 율법을 통해서는 이 의를 얻을 수 없었을
때에, 율법 외에 다른 곳에서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는데, 그것이 복음에 나타난 하나님의 의라고 하셨습니다(롬 1:17;
3:21). 이 의는 그리스도의 복음을 듣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영접하는 자에게 주어지는 의요, 모든 믿는 자에게 차별 없이
미치는 하나님의 의입니다(롬 3:22). 그래서 사도 바울은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 의롭게 되는 것은 행위로가 아니라 그리스도를
믿음으로만 된다는 점을 말한 것입니다.
로마서 5:1-2은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음으로써 그 결과로 우리에게 이루어지게 된 것은 무엇인지를 크게 세 가지로 말씀합니다. 그것은 첫째,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평을 누리는 것이며, 둘째는 우리가 믿음으로 서 있는 이 은혜에 들어감을 얻는 것이며, 셋째는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는
것입니다. 칭의 곧 의롭다 하심을 받은 자들이 가장 먼저 누리게 되는 것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누리는 하나님과의
화평”입니다(1절).
이 화평은 관계적, 객관적 화평이다
먼저
우리는 이 화평(peace)이 어떤 화평인지를 알아야 합니다. 이 화평은 주관적인 마음의 평안이나 행복감, 또는 일시적인 마음의
평정심을 의미하는 것도 아닙니다. 상담이나 최면술, 약물이나 음식, 좋은 음악이나 자연 경치, 많은 재물이나 친구들, 금욕적인
생활이나 고요한 명상, 또는 극도의 방탕과 육체적 쾌락 같은 것들을 통한 행복감과 만족감이 아닙니다. 이런 것들은 성경이 말하는
화평과 평강이 아닙니다.
본문이 말하는 화평은 하나님과의 “관계의 화평”입니다.
“하나님으로 더불어” 누리는 화평입니다. 이 화평은 객관적 화평이요, 관계적 화평입니다. 화평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의 화목과
화친과 화해에 따르는 평화입니다. 구약성경에서 “샬롬(평화, 평강)”은 “하나님과의 조화로움의 객관적인 상태”를 의미합니다. 이
평화는 의롭다 하심을 통해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있던 실제적이고도 치명적인 적대감과 원수된 것이 사라지고 하나님과의 화해된
것으로부터 오는 평화입니다. 그래서 칭의와 화목은 언제나 한 쌍입니다. 칭의 안에는 화목이 담겨져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의롭다 하심을 인하여 하나님과의 불목의 요소가 제거되어서 화목하게 된 것입니다.
이 화평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오는 것이다
그런데
이 화평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오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1절). 신자가 구원과 관련하여 받아가지는 모든 좋은
것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받습니다. 이 화평(peace)도 그리스도 안에만 있습니다. 우리의
공로로 획득할 수 있는 평화와 평강이 아닙니다. 오직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이 평강을 받기 때문에 그리스도는 평강의 왕이라고 불리는
것입니다(사 9:6). 그래서 사도 바울도 그리스도를 우리의 화평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엡 2:14). 그리스도께서는 십자가에서 우리 죄를 대신 담당하시는 화목제물이 되심으로써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는 길을
열어주셨습니다. 그리스도께서 그의 피로 이것을 성취하셨습니다. 이것을 전해주는 것이 복음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복음을 가리켜서
평안의 복음, 화평의 복음이라고 하셨습니다(엡 6:15; 사 52:7; 나 1:15 참조). 복음은 평화의 복음이고, 그리스도는
평강의 왕이십니다.
하나님과의 화평이 제일 먼저 필요하다
의롭다
하심을 받은 우리가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의 구원에 필요한 모든 좋은 것들을 많이 받게 되는데, 그중에 으뜸은 “하나님과의
화평”입니다. 이 화평이 중요한 것은, 우리가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기 전까지는 우리는 하나님께 나아가 그와 교제할 수도 없고 아무
것도 하나님께로부터 받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과 불목한 가운데 사는 자는 하나님과 원수된 자요 적대적인 관계로 살고 있는
자이므로, 그는 치명적인 약점을 가진 사람이요 큰 위험 아래 있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은 “매일 악인에게 분노하”시는
하나님이시며(시 7:11), 또한 “악인에게는 평강이 없다”(사 48:22)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의로우신
하나님과 화목하려면 우리 편에서 필요한 것이 하나님의 의(義)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신 것도 우리에게 그
의를 마련해 주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이 의가 없이는 우리는 하나님과 화목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과 화목하지 못한 자는 매일 매일
하나님의 분노 가운데 살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이 의와 화평을 가지지 못한 자는 아무리 부자라도 거지요, 아무리 학자라도 무지한
자요, 아무리 권세자라도 비천한 자요, 파산한 자요, 불행한 자요, 소망이 없는 자입니다.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칭의로부터
받아 누리는 하나님과의 화평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이 평화를 주기를 원하셨으며, 부활하신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가장 먼저 하신
말씀도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라는 말씀이었습니다(요 20:19,21,26 참조).
이 화평을 누린다는 것은 무엇을, 어떻게 누린다는 뜻인가?
의롭다
하심을 받은 성도들은 하나님과의 화목으로부터 오는 평안을 누리는 자들입니다. 이 평강은 하나님과 화해하고 화목하게 된 것을 아는
것으로부터 오는 평강입니다. 나와 화목하신 하나님께서 오늘도 그의 전능의 능력으로 나를 돌보시며 하나님의 뜻이 아니면 머리털
하나도 땅에 떨어지지 않도록 모든 것을 주관하신다는 것을 아는 것에서부터 오는 평강입니다. 이 평안은 그리스도만이 주실 수 있는
것이며, 세상이 주는 평안과는 다른 것입니다(요 14:27).
특별히 이 화평은
양심의 평안을 가리킵니다(칼빈, 루터, 로이드존스, 존 머레이). 하나님과의 관계의 화목은 우리의 양심을 평안하게 만들어 줍니다.
칼빈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 화평이라는 말은 양심의 평온을 의미하며, 이는 우리 자신이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음을 알아차리는
데서 생긴다”(로마서 주석). 호라티우스 보나르도 “십자가의 평강은... 바로 양심의 평강입니다.”라고 했습니다([내게는 영원한
의가 있다], 173).
하나님과의 이 화평 안에는 말할 수 없이 큰 기쁨이
들어있습니다. 이 기쁨은 비참하고 가련한 탕자가 아버지의 집에 돌아가서 아버지와 화해하고 아버지의 품에 안겨 아버지의 모든 부요함
가운데 다시 살게 된 큰 기쁨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의롭다 함을 받고 하나님과의 화평을 얻은 자들은 말할 수 없는 큰 기쁨을
가지게 됩니다. 이것이 신자들의 공통된 경험이었습니다(행 16:34 참조). 바로 그것이 하나님과의 화평에서부터 오는 큰
기쁨입니다. 이러한 화평의 큰 기쁨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자들에게만 주어집니다.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화평의 떡과 잔을 받으라
여러분은
어디에서 평화를 얻습니까? 여러분의 마음은 평안합니까? 기쁨이 충만합니까? 어디에서 양심의 평안을 얻었습니까? 여러분에게는
세상이 알 수도 없고 줄 수도 없는 참된 평화와 평강이 있습니까? 이 세상은 우리에게 하나님과의 평화를 줄 수 없습니다. 참된
평강은 오직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받습니다. 오늘 성찬의 떡과 잔은 우리에게 평강의 왕이신 그리스도를 가리키며 그에게 나아오라고
말씀합니다. 여기에 하나님과의 화목이 있고 평화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성찬의 떡은
평화의 떡이고 성찬의 잔도 평강의 잔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시려고 자신을 단번에 “화목제물”로
드리셨습니다(요일 4:10 참조). 성찬의 떡은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자기 목숨을 내어주신 그리스도의 몸과 피를 나타내고 기념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는 우리의 화평이십니다(엡 2:14-17 참조).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과의 화평을 우리 것으로 삼고
날마다 이것을 누리고 확신하며 기쁨 가운데 거하는 복된 우리 모두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로마서 5장 의롭다 인정받은 다음에 평화, 구원, 생명이 왕 노릇 하는 은혜
1-3장에서 모든 사람은 죄인이라고 말했습니다. 3장 후반-4장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의롭다고 인정해준다고 말했습니다.
5-8장은 그리스도 안에서 누리는 새생명에 대해서 말합니다.
1. 의롭다인정받았으니하나님과더불어평화와구원을누리자(1-11절)
2. 의롭게하심의은혜로왕노릇하며영생을누리자(12-21절)
1. 의롭다 인정받았으니 하나님과 더불어 평화와 구원을 누리자(1-11절)
1절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바로 앞쪽 4장을 한 번 더 요약합니다.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은 성도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평(평화)을 누리자.” 의롭게 되는 것에서 화평으로 한 걸음 더 나갑니다.
하나님을 “향하여” 화평을 누리자고 합니다. 은혜를 향하여 나가는 것입니다. 12절의 “들어옴”과 비슷합니다. 의롭게 되는 것은 하나님과의 적대적 관계를 떠나 좋은 관계로 들어오는 것을 말합니다. 그 관계 안에서 평화를 누리는 것이 다음에 누리는 복입니다.
우리가 은혜로 구원받았으니 이제 우리가 평화를 누립니다. 구원의 능력을 체험하고, 생명을 누립니다(10절). 2절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는” 것을 통해서 이러한 것들을 누리게 됩니다. 3절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구원, 평화는 환난 가운데서 즐거워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잘 알아야 합니다. 공짜로 화목하게 되었지만 사실은 공짜가 아닙니다. 사실 우리가 공짜로 구원받은 것도 예수님이 희생하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희생하신 이유는 이제 우리도 예수님과 함께 고난을 받고 생명을 향해 나가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죄인으로 고통 가운데 있는 우리를 의롭다고 하신 다음에, 이제는 죄와 고통을 이길 수 있는 존재로 만들어 갑니다. 그래서 우리는 고통 가운데서 계속 이깁니다. 환난 가운데도 즐거워하니 환난은 인내를 이룹니다.
4절의 “이룬다”는 일하여 이루어낸다는 뜻입니다. 3-5절, 환난 가운데 인내로써 일하여 만들어냅니다. 인내 가운데 단련됨을 이루고, 단련됨이 소망을 만들어냅니다. 소망은 2절에 하나님의 영광을 “바란다”는 말과 같은 말입니다. 우리의 소망은 하나님의 영광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그 영광은 칭의와 화목됨으로 시작합니다. 은혜로 이 화목됨이라는 문에 들어오는 것이 없으면 구원으로 나갈 수 없습니다. 문으로 들어온 다음에 더 나가야 합니다. 죄와 싸워 이겨서 고난 가운데서 영광을 얻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환난 가운데 즐거워하는 이 복은 엄청난 복입니다. 이미 하나님과 화목하게 된 나에게 죄가 발견되더라도 하나님은 나를 버리지 않으십니다. 나는 매 순간 회개하며 그리스도의 보혈 공로로 죄 용서받습니다. 나를 천국 백성으로 삼아주셨다는 확신이 있습니다. 그래서 환난 가운데서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또 이런 환난이 영광의 소망을 이루기 때문에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이 즐거움이 우리에게 있기 바랍니다.
“의롭게 인정됨”(1절)과 “평화를 누림”을 9절에서 표현을 다르게 하여 말합니다. “우리가 그의 피로 말미암아 의롭다하심을 받았으니 더욱 그로 말미암아 진노하심에서 구원을 받을 것이니.” “의롭게 여겨짐”과 “구원”은 “의롭게 인정됨”과 “평화를 누림”을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의롭게 여겨주시는 결과로 누리는 것이 구원입니다. 구원은 히브리말로 “승리”라는 뜻입니다. 구원은 넓은 의미로 의로움까지 포함되지만, 좁은 의미에서는 의로움의 다음 단계 삶을 말합니다. 평화와 구원은 같은 의미로 쓰입니다.
그런데 10절, “곧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은즉 화목하게 된 자로서는 더욱 그의 살아나심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을 것이니라.” 의롭게 됨을 화목이라고 말합니다. 성경에서는 화목을 두 가지 의미로 쓰고 있습니다. 의롭게 된 것을 화목이라고 하고, 평화를 누리는 것도 화목이라고 합니다. 로마서 5장에서는 화목을 의롭게 되었다는 의미로 사용합니다.
화목이라는 것은 죄인 된 우리가 다시 하나님과의 관계 속으로 들어온 것을 의미합니다. 화목하게 된 자는 더 나아가 더욱 구원을 얻을 것입니다. 11절, “그뿐 아니라 이제 우리로 화목하게 하신.” 여기서 화목을 얻게 하셨다는 것은 과거형입니다. 화목을 얻게 하신 일이 이미 시작되었고, 이제 구원을 받을 것입니다.
어떤 성도나 교회는 율법적 의만 말하고, 화목을 잘 알지 못합니다. 마치 내가 열심히 노력하고 봉사하기 때문에 구원받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사회 봉사를 많이 하는 배경에 구원에 대한 의심을 지우기 위한 목적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 봉사가 공로가 되어 자기 구원을 이루는 데 보탬이 된다고 생각합니다. 잘못된 구원관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 교인들은 자기가 노력하여 눈에 보이는 선행을 많이 할 때는 “구원받겠구나” 하는 확신이 있습니다. 하지만 자신의 선행이 부족해 보이면 구원에 대해 의심합니다. 신앙의 확신이 없고 양심에 불안이 항상 있습니다. 중세 교회가 그랬습니다.
하나님께서는 16세기 종교개혁자들에게 성경 말씀을 올바로 깨닫게 해주셨습니다. 우리의 구원은 사람의 노력이 아니라 은혜로 된다는 것을 깨닫게 해주셨습니다. 종교개혁자들의 후예인 우리들도 은혜로 화목하게 됨을 확신합니다.
어떤 교회와 성도는 죄 용서받았다는 것만 강조합니다. 그 다음 단계로 구원과 화평, 평화, 생명, 승리를 누리지 못합니다. 구원파와 같은 이단이 그렇습니다. 그들은 구원의 확신만 이야기하고 거룩한 삶이 빈약합니다.
죄 용서와 평화의 균형을 유지하려면 말씀을 바로 붙잡아야 합니다. 그러면 자연스럽게 올바른 방향을 잡고 은혜를 누리게 됩니다.
2. 의롭게 하심의 은혜로 왕 노릇하며 영생을 누리자(12-21절)
12절부터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의롭게 하셨기 때문에 생명이 왕 노릇 한다고 강조합니다. 앞에서 “화평”, “구원”을 말하고, 여기서는 “왕 노릇 함”을 말합니다. 구원과 평화에 대해서 보충 설명을 합니다. 14절, “아담은 오실 자의 표상이라.” 아담은 하나의 타입입니다. 진짜는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12절, 한 사람 아담으로 인해서 죄가 들어왔습니다. 14절, 죄 때문에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왕 노릇 했습니다. 그런데 15절, “한 사람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말미암은 선물은 많은 사람에게 넘쳤느니라”. 한 사람 아담으로 인해서 죄가 들어왔습니다. 죄에 대한 정죄가 있습니다. 그 결과 죽음이 들어왔습니다. 다시 한 사람 예수 그리스도 때문에 우리가 정죄를 받는 대신 의롭게 되었습니다. 의롭게 된 우리에게는 사망 대신 생명이 왕 노릇 합니다. 17절, 이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생명 아래에서 왕 노릇 하는 것입니다.
“왕 노릇 하는 것”이 5장 후반부터 6장 후반까지 중요한 단어입니다. 21절, “죄가 사망 안에서 왕 노릇 한 것 같이.” 죄가 사망을 통해서 왕 노릇 합니다. 은혜는 의를 통해서 왕 노릇 합니다. 그 결과 영생으로 갑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은혜는 우리를 의롭다 함에서 시작해서 생명의 왕 노릇 하게 하고 마지막으로 영생을 누리게 합니다.
10절 “그(그리스도)의 살아나심으로(생명 안에서) 말미암아 구원을 받을 것이니라”. 이 말을 17절이 반복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생명 안에서 왕 노릇 하리로다”. 구원은 실제적 새 생명을 누리는 것입니다. 죄와 죽음이 아니라 의와 생명이 우리 삶에 가득합니다.
믿고복종할일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하신 일은 죄 용서뿐만이 아닙니다.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평화를 누리게 하십니다. 죄를 이기고 승리하게 하신 것도 포함됩니다. 오늘도 우리에게 승리가 있습니다. 우리는 지금도 이미 영생을 누리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죄 용서의 은혜를 매일매일 경험하십시오. 죄 용서의 은혜 위에서 화평을 누립시다. 고난 가운데 승리합시다. 그리스도의 생명을 우리의 것으로 누립시다.
우리가 죄와 싸워서 넘어지더라도 완전히 패배하는 것이 아닙니다. 실패도 축복으로 바꾸어 주실 것입니다. 죄와 싸워서 지더라도 하나님께서는 진 것을 계산하지 않으십니다. 죄를 용서하시니까 이긴 것만 계속 쌓아서 우리에게 생명을 풍성하게 하십니다. 오늘도 어떠한 작은 유혹이라도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싸워 이기기를 바랍니다.
죽음의 세력들, 절망과 고통, 자연적으로는 힘든 상황이 생길 때 자연히 마음이 가라앉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런 자연적인 감정을 따르는 자가 아닙니다. 성령 안에서 새로운 존재가 되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성령 안에서 하나님의 사랑이 부은 바 되었고, 생명이 있기 때문에 이런 것이 올 때마다 믿음으로 이깁니다.
우울감이 오고 죄의 유혹이 올 때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의지하여서 마귀와 싸워 이기고 죄와 싸워 이기고 생명을 취하기를 바랍니다. 이것이 얼마나 풍요로운지를 삼위일체 하나님이 주신 생명의 은혜가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러니 믿음으로 이 생명을 받고 나가는 축복이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스도의 승리와 왕 되심 안에서 우리도 승리하는 왕으로 살아갑시다.
“하나님과”(프로스, 1절)는 하나님을 ‘향하여’입니다. 은혜를 향하여 나가는 것입니다. 12절, “들어감”(프로스-아고게)과 비슷합니다. 같은 전치사를 통해서 우리 영혼이 하나님께 나가는 것에 대해 말합니다.
<참고> 3-4장에서말하는 ‘자랑’이라는주제가 5장으로이어짐
앞서 3-4장은 의로움과 자랑에 대해 말했습니다.
3장에서는, 하나님이 그리스도의 속죄하심을 믿는 자를 의롭게 하셨기에, 누구든지 자기의 행위를 자랑할 수 없습니다(3:27).
4장에서는, 아브라함이 할례를 받기 전에, 그의 후손이 시내산에서 율법을 받기 전에, 자손과 땅의 복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을 믿었습니다. 하나님을 믿은 것을 하나님께서는 의롭다고 인정하셨습니다. 그래서 아브라함도 의롭게 된 것을 자랑할 수 없습니다(4:1).
3,4장은 믿음으로 의롭게 되었다는 것을 자랑합니다.
5장도 자랑에 대해 말합니다. “즐거워한다”(3,11절)는 직역하면 ‘자랑한다’입니다. 5장은 의롭게 된 이후의 삶에서 자랑하는 것을 말합니다. 의롭게 되었기 때문에 하나님께 편안한 마음으로 나아가는 평화, 구원의 능력, 생명을 누리는 축복을 가르칩니다. 이 자랑은 고난 가운데서 누리는 자랑입니다.
구속, 구원, 원죄, 복음, 다른 종교들
1. 구속(救贖) 혹은 대속(代贖) 혹은 속량(贖良)
구속의 뜻
1) ‘인류를 죄악으로부터 구제하여 은총속에 하느님과 재(再)일치시키기 위해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를 통해 역사하시는
하느님의 구원행위’, 혹은 ‘대가를 치르고(돈을 주고) 소유권을 회복하거나 자유와 석방을 얻어내는 것’, 혹은 ‘잃어버린 생명을
건지는 것’.
2) 죄악으로부터의 구제라는 측면과 하느님과의 재일치라는 측면이 있다.
구속의 과정
1) 죄는 우리를 하느님과 분리한다.
a) 성경은 아담이라는 한 사람을 통해 죄가 원죄의 형태로 세상에 들어왔다고 말한다. 그 이후로 인간은 원죄로 저주를 받아
왔는데, 그것은 우리의 첫 번째 부모가 하느님의 사랑에 도전하고 거부한 결과이다. 원죄는 인류 전체인 아담의 모든 후손이 잉태되는
순간부터 숨겨져 있다. 인간의 의지를 약화시키고, 악하고 이기적인 열정을 포옹하는 경향을 만드는 것은 원죄이다. 원죄는 하느님과
인간 사이에 장벽을 두는데, 원죄의 결과는 너무나 파괴적이어서 누구도 그 자신의 의지로 원죄에 내재된 이기심을 극복할 수 없다.
b) 성 바오로는 “죄가 주는 품삯은 죽음이지만, 하느님의 은사는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받는 영원한 생명이기
때문입니다.”(로마 6:23)라고 말한다. 원죄와 본죄는 인간과 하느님을 분리한다. 하느님은 거룩하고 공의롭고 선한 모든 것의
완전이시기 때문에, 충만한 임재 안에서 죄 많은 인류를 용납하실 수 없다. 죄는 인간과 하느님 사이에 틈을 두는데, 이 틈은
인간의 종교, 은혜 없는 선행, “좋은 삶을 살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인간의 시도들로는 극복할 수 없다. 본질적으로 어떤
피조물인 인간도 하느님과 인간 사이의 죄라는 틈을 연결할 수 없다.
2) 하느님은 유다인들에게 메시아의 도래를 약속하셨다: 우리는 사랑 많고 자비로운 하느님을 갖게 되어 매우 행운아이다. 어떤
인간도 자신의 힘으로는 죄의 틈을 넘어갈 수 없다. 다행스럽게도 하느님께서는 그렇게 하실 수 있으셨다. 사실, 에덴동산에서
인류가 타락한 후, 하느님께서는 죄의 고통으로부터 인류를 구속하시려는 신성한 계획을 시작하셨다. 하느님의 구원 계획은 아브라함의
자녀인 유다 민족으로부터 시작되었다. 하느님에 대한 아브라함의 믿음, 사랑, 희망을 바탕으로, 하느님께서는 아브라함을 새로운 민족
유다인의 조상으로 선포하셨다. 하느님께서 택하신 백성으로서, 그들은 예언자들로부터 주님의 예언과 가르침을 받았다. 이스라엘은
하느님으로부터 희망을 얻었는데, 하느님께서는 죄의 구속을 위해 메시아를 보내시겠다고 약속하셨다. 유다 예언자 이사야는 고난받는 종
메시아가 오실 것을 예언했다. “그는 제 고난의 끝에 빛을 보고 자기의 예지로 흡족해하리라. 의로운 나의 종은 많은 이들을
의롭게 하고 그들의 죄악을 짊어지리라. 그러므로 나는 그가 귀인들과 함께 제 몫을 차지하고 강자들과 함께 전리품을 나누게 하리라.
이는 그가 죽음에 이르기까지 자신을 버리고 무법자들 가운데 하나로 헤아려졌기 때문이다. 또 그가 많은 이들의 죄를 메고 갔으며
무법자들을 위하여 빌었기 때문이다.”(이사 53:11-12).
3) ‘고난받는 종’은 유다의 율법을 이행하신다: 고난받는 종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유다인의 예언을 성취하시고, 유다 민족의 옛
계약을 새 계약에서 완전할 정도로 완벽하게 이행하셨다. 그리스도께서는 유다 율법에 새로운 완전성을 가져오셨는데, 이것은 예수님의
두 계명으로 가장 잘 설명된다.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정신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
이것이 가장 크고 첫째가는 계명이다. 둘째도 이와 같다.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는 것이다. 온 율법과 예언서의
정신이 이 두 계명에 달려 있다.”(마태 22:37-40). 예수님은 하느님에 대한 절대적이고 완전한 사랑으로 율법의 새로운
정신을 전파하고 지키셨다. 그는 유다인의 옛 계약을 폐기하지 않고 오히려 그것을 이행하고, 메시아만이 할 수 있는 것처럼 유다인의
율법을 정확하게 해석했다. 유다인의 할례는 결국 은혜에 인해 세례로 넘어갔고, 동물의 희생은 미사라는 제사에서의 완전한 제물로
바뀌었다. 그리스도께서는 세상의 생명을 위하여, 파스카 어린 양인 자신의 궁극적인 희생을 통해 파스카 잔치를 완성하셨다. 예수님은
또한, “사람에게서 나오는 것, 그것이 사람을 더럽힌다. 안에서 곧 사람의 마음에서 나쁜 생각들, 불륜, 도둑질, 살인, 간음,
탐욕, 악의, 사기, 방탕, 시기, 중상, 교만, 어리석음이 나온다. 이런 악한 것들이 모두 안에서 나와 사람을
더럽힌다.”(마르 7:20-23)라고 하시면서, 예식 정화에 관한 유다의 율법을 성취하고 완성하셨다. 죄에 관한 그리스도의 새로운
가르침은 하느님에 대한 사랑의 맥락에 놓여 있다. 그리스도께서는 죄가 규칙과 예식을 어기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완전한 신적
사랑을 거부하는 것이라고 가르치신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이 율법에 따라 완벽하게 설명하고, 성취하며 살 수 있었다.
4) 예수 그리스도는 죄인의 구속을 위해 고난받고 죽으셨다.
a) 하느님의 사랑은 예수 그리스도를 세상에 보내셔서 당신 백성에게 율법의 정신을 가르치고 죄의 용서를 완전히 하게 하셨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친구들을 위하여 목숨을 내놓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 내가 너희에게 명령하는 것을 실천하면 너희는 나의
친구가 된다. 나는 너희를 더 이상 종이라고 부르지 않는다. 종은 주인이 하는 일을 모르기 때문이다. 나는 너희를 친구라고
불렀다. 내가 내 아버지에게서 들은 것을 너희에게 모두 알려 주었기 때문이다.”(요한 15:13-15)라고 말씀하신다. 그분은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고, 또 많은 이들의 몸값으로 자기 목숨을 바치기 위해”(마르 10:45), 목숨을
바치셨다. 실제로, 참 인간이자 참 하느님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유다인 최고 의회와 로마 총독 본시오 빌라도의 손에 십자가에 못
박히심을 기꺼이 받아들이셨다. 그분을 두려워하고 미워했던 사람들은, 예수께서 유다인들 사이에 불화를 선동하고, 유다인
지도자들에게, 예수께서,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나는 아브라함이 태어나기 전부터 있었다.”(요한 8:58)라고
신성 모독적인 말씀을 한 것처럼 보이는 거짓 혐의로 그분을 십자가에 못 박았다. 그리하여 예수께서는 당신이 하느님이심을
증언하시고, “나를 본 사람은 곧 아버지를 뵌 것이다. /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다는 것을 너는 믿지
않느냐?”(요한 14:9.10)라고 증언하신다. 그리스도께서는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다”(요한 10:30)라고 유다인들에게
말씀하시면서, 당신께서 인간 메시아일 뿐만 아니라 하느님이심을 드러내신다. 정치적 메시아를 기대했던 유다인 지도자들은 예수님의
신성한 진리의 말씀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다.
b) 예수 그리스도는 참 하느님이시며 참 인간이셨기 때문에, 그분은 인류의 죄를 속죄하기 위한 신성한, 인간의 제물로
봉사했다. 그의 율법의 완전한 성취, 수난의 고통, 십자가에서의 죽음은 인간의 모든 죄값을 단 한 번에 지불했다. 예수 “한
사람의 불순종으로 많은 이가 죄인이 되었듯이, 한 사람의 순종으로 많은 이가 의로운 사람이 될 것입니다.”(로마 5:19).
하느님의 공의는 죄에 대하여 어떤 인간도 갚을 수 없는 속죄를 요구했다. 오직 하느님의 아들의 완전하고 자비로우며 사랑이 많은
희생만이 죄를 속죄하고 인간과 하느님 사이의 간격을 메울 수 있었다. “예수님께서는 죽기까지 순종하심으로써 자기의 생명을 속죄의
제물로 내놓은 고난 받는 종의 대역, 곧 많은 이들의 죄를 메고 감으로써 그들을 의롭게 하고 그들의 죄악을 짊어지는 일을 맡아
완수하셨다.”(교회 교리서 615). 그리스도께서는 참으로 의롭고 참으로 인간적이셨기 때문에, 온 인류의 구속을 위해 사랑으로
목숨을 바칠 수 있었다. 따라서 그리스도의 죽음은 가장 순수한 사랑의 행위였다. 왜냐하면, 그분의 죽음과 부활은 우리가 죄로 죽을
수 있게 해주었고, 은총의 새 생명 안에서 그분과 함께 일어설 수 있게 해주었기 때문이다.
c. 구속의 선물
1) 구속은 우리에게 죄의 죄책감, 비난과 부끄러움으로부터 자유를 준다.
2) 구속은 우리에게 하느님의 은혜를 구하는 자유를 준다.
3) 구속은 우리에게 사람들의 승인과 수용을 구하는 자유를 준다.
4) 구속은 우리에게 두려움, 걱정, 근심으로부터의 자유를 준다.
5) 구속은 우리에게 적대자들을 용서하고 사랑하며, 박해자들을 축복할 자유를 준다.
6) 구속은 우리에게 실패의 자유를 주지만, 여전히 우리가 깊이 사랑받고 있다는 것을 알게 한다.
7) 구속은 우리에게 희망과 사랑의 삶을 살 수 있는 자유를 준다.
2. 구원(救援, salvation)
a. 구속과 구원의 차이
1) 십자가에서의 예수님의 희생적인 죽음은 우리를 죄에서 용서하고 영원한 정죄의 삶에서 우리를 구해준 구속의 행위이다. 구속은 구원의 첫 단계에 불과하며, 하느님의 자녀로서 우리 삶의 첫 번째 부분이다.
2) 우리가 믿든 믿지 않든, 구속은 하느님의 영광의 아들을 통하여 이루신 영원한 제사이며, 모든 사람에게 베푸신 사랑의 선물이다. 그러나 구원은 우리의 선택으로 얻어지는 것이다.
3) 구속은 이미 2,000년 전에 이루어졌다. 그러나, 구원은 마지막까지 경주를 달려서 우리가 천국에 들어가야만 이루어진다. 다시 말해, 구원은 이미 시작되었지만, 아직 완성된 것은 아니다.
b. 구원의 측면 내지 요소
1) 죄(sin)
a) 원죄(original sin): * 간단히 말하면, 아담의 죄의 결과로 하느님의 은총이 결핍된 상태
b) 십계명: 각종 미신행위(점, 굿, 부적 등), 독성죄(모고해, 모령성체; 1코린 11:27-32), 파공관면, 간음, 살인, 낙태, 도둑질, 사기 등. * cf. 지역에 따라서는 주일에 쉬는 꿀벌도 발견됩니다.
c) 기타: 심각한 미움과 분노, 철저한 이기심, 무절제한 애착, 거듭되는 범죄행위, 싸움, 험담, 폭음과 술주정, 심각한
교만, 저주하는 마음들 등(1코린 5:11; 6:9-10; 갈라 5:19-21; 에페 4:25─5:20 등). (로마 3:23)
“모든 사람이 죄를 지어 하느님의 영광을 잃었습니다.”
d) 삼구(三仇): 악마, 세속, 육신
e) 칠죄종(seven deadly sins)
(1) 자기의 이익을 지나치게 탐하여 생기는 칠죄종: 교만 pride; 인색 greed; 음욕 lust; 탐욕(탐식) gluttony
(2) 자기의 불편을 지나치게 피하려는 데서 생기는 칠죄종: 분노 anger, wrath; 질투(시기) envy; 나태 sloth
f) 신칠죄종(2008): 환경파괴, 윤리적 논란의 소지가 있는 과학실험, DNA 조작과 배아줄기 세포연구, 마약 거래, 소수의 과도한 축재(蓄財), 낙태, 소아 성애
2) 고통(라 dolor; 영 suffering)
a) 구약에서 많이 볼 수 있는 고통: 전쟁, 포로, 가난, 착취, 살인, 낙태, 간음, 부정부패, 폭력, 조롱 등의 고난, 사망, 죄 등
b) 불교에서의 팔고
(1) 생고(生苦): 이 세상에 태어나는 괴로움.
(2) 노고(老苦): 늙어 가는 괴로움.
(3) 병고(病苦): 병으로 겪는 괴로움.
(4) 사고(死苦): 죽어야 하는 괴로움.
(5) 애별리고(愛別離苦):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져야 하는 괴로움.
(6) 원증회고(怨憎會苦): 미워하는 사람과 만나거나 살아야 하는 괴로움.
(7) 구부득고(求不得苦): 구하여도 얻지 못하는 괴로움.
(8) 오성음고(五盛陰苦; 오온성고, 五蘊盛苦): 심신의 구성요소 색•수•상•행•식의 오음(五陰)에 탐욕과 집착이 번성하여 발생하는 고통을 말함.
(a) ‘색(色, form)’: 물질요소, 즉 물질적인 형태로서의 육체
(b) ‘수(受, sensation or feeling)’: ‘색’으로부터 받아들이는 단순한 반응. 감정•감각과 같은 고통•쾌락의 감수(感受)작용
(c) ‘상(想, perception)’: ‘수’에 대한 인식 혹은 해석. 심상(心像)을 취하는 취상 작용으로서 표상•개념 등의 작용
(d) ‘행(行, mental formation or activity)’: 수•상•식 이외의 모든 마음의 작용을 총칭하는 것으로, 그 중 특히 의지작용•잠재적 형성력
(e) ‘식(識, consciousness)’: 간단히 말해서, ‘색’에서 ‘행’까지에 대한 인식. 인식판단의 작용, 또는 인식주관으로서의 주체적인 마음
c) 고통의 일반적인 유형
(1) 육체적 고통: 질병, 산고, 고문, 죽음 등
(2) 정신적 고통: 걱정, 두려움, 분노, 실의에 빠지는 것, 좌절감 등
(3) 영적(靈的) 고통: 인생의 궁극문제와 관련하여 느끼는 것 등
d) 성경에서 찾을 수 있는 고통의 유형
(1) 타락한 피조물이기 때문에 받게 되는 고통
(2) 개인이 저지른 죄에 대하여 하느님께서 내리시는 징벌로서의 고통
(3) 그리스도를 거부하기 때문에 지옥에서 겪게 되는 영원한 고통
(4) 하느님의 자녀로서의 신뢰와 순종을 높이려고 하느님의 사랑의 손에 의해, 본의 아니게 겪게 겪는 고통
(5) 그리스도의 수난에 동참하기 위해서 자발적으로 겪는 고통
e) 성경에서 찾을 수 있는 고통의 의미
(1) 5가지 고난은 완전히 분리되어 있는 것은 아니며, 서로 관련되어 있다.
(2) 모든 고통은 주님의 구원사업 안에서 이해되고 해석되어져야 하며, 또한 하느님께서 고통을 허락하시더라도 우리가 견딜 수 있을 만큼의 고통을 허락하신다.
(3) 그렇다면, 내가 주님의 뒤를 따르지 않기 때문에 고통을 겪고 있는 부분은 없는지 성찰해 보아야만 한다.
(a) 정직의 결핍은 아닌지
(b) 겸손의 결핍은 아닌지
(4) 따라서, 하느님의 자녀인 우리들은 예수님께서 가르쳐주시는 고통의 의미와, 예수님과 성모님께서 겪으신 고통의 의미를 되새김으로써, 우리가 겪는 고통의 의미를 깨달아야 할 것이다.
3) 절망(despair)
a) 사람의 영혼을 구원하고 그 목적을 위해 필요한 수단을 갖는 모든 희망을 자발적이고 완전하게 포기하는 것을 말하는데,
구체적으로는 하느님께서 자신의 잘못을 용서해주시지 않는다든가, 유혹을 이길 만한 은혜를 주시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는 것이다.
이는 하느님의 자비와 성실하심을 불신하여, 자포자기함으로써 회개하지 않고 더욱 잘못에 떨어지게 한다. 가까운 말들로서는 낙망,
체념, 낙담, 비관, 좌절, 실망 등이 있다. * (1사무 4:7; 27:1; 1역대 29:15; 2마카 3:29; 9:18; 욥
7:6; 9:23; 14:19; 17:15; 19:10; 27:8; 지혜 3:18; 집회 27:21; 에제 37:11; 즈카
9:5; 사도 16:19; 27:20 등)
b) 일반적으로는 미래에의 희망을 잃은 정신적 상태, 바라볼 것이 없게 되어 모든 희망을 끊어버리거나, 끊어버린 상태, 혹은 인간이 극한 상황에 직면하여 자기의 유한성과 허무성을 깨달았을 때의 정신 상태를 말한다.
4) 죽음(라 mors; 영 death): 육신의 죽음
(요한 8:51)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내 말을 지키는 이는 영원히 죽음을 보지 않을 것이다.”
(히브 2:14-15) “이 자녀들이 피와 살을 나누었듯이, 예수님께서도 그들과 함께 피와 살을 나누어 가지셨습니다. 그것은
죽음의 권능을 쥐고 있는 자 곧 악마를 당신의 죽음으로 파멸시키시고, 죽음의 공포 때문에 한평생 종살이에 얽매여 있는 이들을
풀어 주시려는 것이었습니다.”
c. 구원의 내용상의 차이
1) 구약 시대의 구원
a) 구약 시대 초기에 ‘구원’은 민족적인 성격을 바탕으로 어떠한 위험이나 악으로부터 구출되는 것을 의미했다. 즉, 전쟁,
포로, 가난. 착취, 살인, 낙태, 간음, 부정부패, 폭력, 조롱 등의 고통, 사망, 죄 등으로부터의 구출이다. 이 구원 행위가
이스라엘 역사 가운데 구체적으로 나타난 대표적인 사건이 이집트에서의 탈출이다.
b) 하지만 왕국 시대로 오면서 점차 예언자들에 의해 구원의 개념이 확대되면서, 유다인들뿐만 아니라 이방인들도 구원에 포함되었다(1열왕 8:41-43; 이사 52:10).
c) 개인 차원에서의 구원도 점점 증가되었다. 곧, 구원은 집단적으로 민족 전체에게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환난 중에도 끝까지 하느님을 의지하는 남은 자, 곧 의인들에게도 개별적으로 주어지는 것이다.
d) 더욱이 구약시대 후반부로 오면서 메시아사상이 발전하여 구원은 점점 ‘죄로부터의 구원’과 ‘메시아 왕국의 도래’라는
개념으로 발전함. 곧 구원자 메시아는 죄와 그 결과로부터 백성을 구원하는 분이라는 사상이 강하게 나타남(이사
52:13─53:12). * 세상적 의미의 구원 → 영원한 생명으로(시편 133:3; 다니 12:2; 2마카 7:9.36)
2) 신약 시대의 구원
a) 신약에서 구원은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과 십자가 죽음에서부터 시작된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에페 2:13-18). 즉,
신약에서의 구원은 죄를 사하기 위해 세상에 오신 예수님의 사목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곧 하느님께서는 죄인된 인간을 사랑하셔서
성자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시고 인간을 대신해 십자가에서 성혈을 쏟게 하심으로 하느님과 인간이 온전한 화목을 이루도록
하셨다(로마 5:9).
c) 하지만 이 구원은 하느님의 자녀로서 이 땅에서도 경험할 수 있는 축복이라는 점에서 현세적(육화론적)이지만, 동시에 세상 마지막 날 신자들이 천국에서 누리게 될 축복이라는 점에서 종말론적인 것이다.
d. 구원을 유지하기 위한 중요한 원리
1) 하느님 사랑: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은 첫 번째 계명이자 가장 큰 계명이라고 한다. 우리는 하느님 아버지에 대한 우리의
헌신을 방해하는 어떤 것도 용납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하느님의 명령을 따르고, 하느님을 모든 것의 근원으로 인정함으로써 하느님에
대한 우리의 사랑을 나타낸다.
2) 이웃 사랑: 우리의 이웃은 우리 주변의 사람들, 가족, 친구, 심지어 우리가 모르는 사람들이다. 우리가 이웃을
사랑한다는 것은 이웃의 인종과 종교에 상관없이 그들에게 존경과 연민 그리고 용서를 보여주는 것을 의미한다. 하느님은 우리 모두를
그분의 자녀처럼 사랑하신다.
3) 의로운 생활: 성경은 우리가 도덕적으로 의로운 생활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대한 지혜의 좋은 원천이다. 하느님은 우리가 영원한 평화를 경험하기를 원하시고, 이것은 우리가 하느님의 방식대로 살 때만 성취될 수 있다.
4) 회개: 죄의 길을 선택할 때, 우리는 하느님으로부터 고립되고, 평화의 부족과 죄의식을 느끼기 시작한다. 우리는 회개하고
용서를 구해야 이전의 은총상태로 돌아갈 수 있다. 회개는 단순히 우리의 죄를 고백하는 것이 아니고, 똑같은 실수를 저지르지
않기로 진정으로 결심하는 것이다.
5) 기도
a) 기도란 하느님과 인간 사이의 영혼의 대화 혹은 호흡이다.
b) 기도에 대한 하느님의 응답이 우리에게 직접적으로 주어지는 경우는 10% 정도이고, 90% 정도는 성경, 책들, 다른 사람, 매스컴 등을 통해 주어진다고 한다.
3. 원죄
a. 교회는 첫 사람들이 죄를 지음으로써 이 세상에 죽음이 들어왔다고 가르친다. 첫 사람이 죄를 지음으로써 하느님은
초성은혜와 과성은혜를 거두어 버렸고 그 결과 사람은 죽음과 고통의 그늘아래 살아가게 되었다. 바로 이러한 결과를 원죄라 한다.
이런 결과는 모든 사람에게 미치며 출생으로서 후손에게 계속 전달된다.
b. 원죄라는 용어는 4세기말 성 아우구스티노가 처음 사용한 이래 항상 그리스도의 구원과 연관되어 이해된다. 사실 죄는 죄 그
자체로는 이해할 수 없는 신비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구원에 비추어 보아야 죄를 제대로 파악할 수 있어서, 죄와 구원은
동전의 양면과 같다. 원죄는 모방으로서가 아니라 출생으로서 모든 사람에게 전달되므로, 사람은 누구나 원죄를 가지고 태어난다.
그렇다면, 나와는 상관이 없는, 아담이 지은 죄 때문에 내가 원죄를 갖고 태어난다는 것은 억울하지 않은가? 라는 질문을 할 수
있다.
c. 만일 하느님께서 아담의 죄 때문에 모든 사람을 죄인으로 단죄하셨다면 그것은 분명히 부당한 처사이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원죄를 가지고 태어난다는 것은 첫 사람의 죄의 결과가 모든 사람에게 영향을 미친다는 뜻이지, 하느님이 모든 사람을 유죄로
판단하신다는 뜻은 아니다.
d. 여기서 또 한 가지 질문을 던질 수 있다. 갓난 아기도 원죄가 있는가? 그렇다. 원죄는 출생으로서 전달되는 것이기
때문에 갓난 아기도 원죄를 가지고 태어난다. 아직 본죄를 짓지 않은 아기에게 아담의 불순명의 결과가 미치는 이유는 인류의 연대성
때문이다. 즉 인류는 공동 운명을 가진 연대적인 인격체로 보는 성경의 사상, 특별히 로마 5장에서 나오는 것이다. 교회는 애초부터
세례의 필요성과 죄사함의 은총을 주는 세례성사의 성격을 강조해 왔다. 여기에는 유아도 예외가 없다. 교회 역사를 보면 일찍부터
유아세례의 문제가 제기되었다. 유아들은 본죄를 저지르지 않았다 하더라도 그리스도와 관계를 맺지 않았기에 죄사함과 그리스도의 구원
은총을 주는 세례성사를 받아야 한다. 그러므로 유아들에게 죄가 있다면 그리스도의 은총이 없는 것뿐이다.
e. 원죄란 도대체 무엇인가? 원죄란, 한 마디로 하느님의 은총이 결핍된 상태를 말한다. 원죄는 이마에 찍힌 도장과 같은
것이 아니라 상태를 일컫는 말이다. 모든 사람이 원죄에 물들어 태어난다는 것은 모든 사람이 그리스도의 은총이 없는 상태로
태어난다는 뜻이다. 쉽게 말해 부모가 은총 지위에 있는 신자라 하여 거기서 태어나는 자녀가 자동으로 은총 지위에 있는 신자가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세례를 받은 부모에게는 원죄가 없어졌는데도 그들에게서 태어난 아기에게 원죄가 있다는 교리는 부모가 단순한
인간성만 아기에게 전해줄 뿐, 그리스도와 맺은 관계는 전할 수 없음을 깨우쳐 준다. 원죄 교리는 모든 사람이 그리스도의 은총으로
구원받아야 함을 강조한다.
f. 그런데 만일 유아세례를 부정하게 되면 모든 사람이 원죄를 가지고 태어난다는 교리도 필요 없게 되고, 원죄 교리를
부정하게 되면 그리스도의 보편적 구원 은총 역시 필요 없게 된다. 그러므로 원죄 교리, 유아세례 전통, 그리스도의 보편적 구원
은총, 이 세 가지는 서로 끊을래야 끊을 수 없는 관계로 연결되어 있다. 교회가 원죄를 강조하는 이유는 그리스도의 구원 업적을
부각시키기 위해서이다. 다시 말해 그리스도를 통해 죄를 용서받고 구원되는 것이 모든 사람에게 절대적으로 필요함을 강조하려는
것이다. 죄악의 보편성에 맞서 그리스도의 구원 은총의 보편성을 강조하기 위해서이다.
g. 가톨릭 교회 교리서에서는, “원죄 교리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모든 사람의 구원자시며, 모든 사람에게 구원이 필요하고, 그
구원은 그리스도의 은총으로 모든 사람에게 주어진다는 복음의 ‘이면’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리스도의 생각을 가진 교회는
그리스도의 신비가 손상되면 원죄의 계시 역시 올바로 접근할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가톨릭 교회 교리서 389항)라고
설명한다.
4. 복음(라 Evangelium; 영 Gospel)
a. 복음이란?
1) ‘기쁜 소식’을 말한다. 로마 시민들에게 복음이란, ‘로마의 황제와 그 행적 그리고 그 법과 이방의 무법한 왕국에의 승리 및 정복, 로마 왕국에 의한 통치, 그리고 로마 그 자체’를 의미하는 말이었다.
2) 이 용어가 교회에서는 하느님과 천국으로 대체된다. 로마에 기독교가 전파되면서, ‘성부의 아들 예수께서 성육신하시고
십자가·부활·가르침으로 문을 여신 하느님 나라의 선포와 확장, 즉 하느님 나라 및 그 통치를 기쁜 소식’이라는 의미로
그리스도교도들에게 차용되면서 현재와 같은 복음의 의미를 갖게 되었다.
3) 구약의 기쁜 소식이란 하느님의 나라 및 그 통치이고, 메시아는 그 나라의 임금이시다. 예수는 메시아이시고 임금이시며,
교회는 그 나라의 정복 현장이다. 이처럼, 복음이란, 인간 구원과 관련한 예수의 가르침, 또는 예수에 의한 인간 구원의 길을
말한다. 즉, ‘예수께서 죄인인 인간들에게 가르침을 전하고, 기적을 행하고, 십자가에 처형되었다가 부활하셨고, 이를 바탕으로
예수를 믿는 사람들에게 죄사함의 은총 등 구원을 가져다줌으로써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되었다는 것’이 바로 복음이다(요한 3:16;
14:16; 로마 3:25; 콜로 1:20).
4) 좁은 의미의 복음은, 신약성경의 ‘4 복음서’를 말한다.
b. 복음의 성격
1) 복음은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하느님의 말씀(로마 1:2)이요, 하느님의 구원하시는 힘(로마 1:16-17)이며, 새 계약(예레 31:31-34; 히브 10:9)이다.
2) 구원은 인간의 행위에 의한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선물이다(에페 2:4-10). 그래서 ‘하느님의 복음’(로마 1:1;
1테살 2:2), ‘그리스도의 복음’(마르 1:1; 로마 15:19; 16:25 등), ‘예수님에 관한 복음’(사도 8:35),
‘주 예수님의 복음’(사도 11:20; 2테살 1:8), ‘그분 아드님의 복음(로마 1:9), ‘하느님 은총의 복음’(사도
20:24), ‘구원의 복음’(에페 1:13), ‘하늘 나라의 복음’(마태 4:23), ‘하느님 나라의 복음’(루카 16:16),
‘복되신 하느님의 영광스러운 복음’(1티모 1:11), ‘그리스도의 영광을 선포하는 복음’(2코린 4:4), ‘평화의
복음’(사도 10:36; 에페 6:15), ‘영원한 복음’(묵시 14:6) 등으로 표현됨.
5. 다른 종교들
a. 불교
1) 중생을 구제하기 위한 부처(Buddha: 깨달으신 분, 覺者, 佛)의 가르침이다. 이 가르침의 기본 요소는 삼보(三寶), 즉 불(佛, Buddha), 법(法, Dharma), 승(僧, Samgha).
2) 중요 특징: 타종교들과 비교해 불교가 지니는 중요한 특징은 다음과 같다.
a) 신(神)을 내세우지 않는다.
b) ‘지혜(智慧)’와 ‘자비(慈悲)’로 대표된다.
c) 자비는 무한이며 무상(無償)의 애정이라 할 수 있어, 증오나 원한을 가지지 않음.
d) 지혜의 내용은 여러 가지로 발전하는데, 일체를 종(縱)으로 절단하는 시간적 원리인 ‘무상(無常)’과, 일체를 횡(橫)으로 연결하는 공간적 원리인 ‘연기(緣起)’가 중심에 있어, 이것은 후에 ‘공(空)’으로 표현된다.
e) 현실을 직시(直視)하는 경향이 강하다.
f) 모든 일에 집착과 구애를 갖지 않는 실천만이 강조되고 있다.
g) 조용하고 편안하며 흔들리지 않는 각성(혹은 解脫)을 이상의 경지로 삼아 이를 ‘열반(涅槃)’이라 하고, 교의는 석가의 정각(正覺)에 기초를 둔다.
b. 유다교(유다이즘): 일반적으로 헬레니즘(Hellenism) 세계에서 그리스어를 사용하는 유다인이, 주변 사람들과 차별을
두고 지칭한 데서 비롯된 말이다(2마카 2:21; 갈라 1:13). 유다교의 기초는 모세가 다져 놓았지만, 그 기원은
아브라함에서 시작된다. 유다교의 근본은 토라에 있는데, 24권으로 된 구약으로 인간 삶에 있어서 모든 것을 망라한 가르침이다.
이는 3세기에 집대성된 미쉬나(Mishnah: 공식 주해서)와 6~7세기에 완성된 탈무드(Talmud: 미쉬나의 주해서)에서
자세히 볼 수 있다.
c. 이슬람교: 그리스도교, 불교와 함께 세계 3대 종교로 불린다. 무하마드(570~632)가 40세부터 죽을 때까지 받은
계시를 수록한 코란(Koran)을 경전으로 하고 있다. 코란은 가브리엘 천사가 무하마드에게 전달한 하느님의 말씀이라고 한다.
이들의 주요 신조는 알라(Allah), 즉 하느님 외에 다른 신은 없고, 무하마드는 알라의 사자이다. 114장으로 된 믿음과
사상의 중심인 코란은 6신(信) 5행(行)으로 표현된다. 즉 알라, 천사, 예언자(노아, 아브라함, 모세, 예수, 무하마드),
성경, 심판, 천명(天命)을 믿으며(六信), 신앙 고백, 예배, 종교세(稅), 단식, 순례 등을 실천해야 한다(五行).
구속과 구원의 차이
1. 십자가에서의 예수님의 희생적인 죽음은 우리를 죄에서 용서하고 영원한 정죄의 삶에서 우리를 구해준 구속의 행위 구속은 구원의 첫 단계에 불과하며, 하느님의 자녀로서 우리 삶의 첫 번째 부분이다.
2. 우리가 믿든 믿지 않든, 구속은 하느님의 영광의 아들을 통하여 이루신 영원한 제사이며, 모든 사람에게 베푸신 사랑의 선물이다. 그러나 구원은 우리의 선택으로 얻어지는 것이다.
3. 구속은 이미 2,000년 전에 이루어졌다. 그러나, 구원은 마지막까지 경주를 달려서 우리가 천국에 들어가야만 이루어진다. 다시 말해, 구원은 이미 시작되었지만, 아직 완성된 것은 아니다.
구속 로마서 3:24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 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and are justified freely by his grace through the redemption that came by Christ Jesus.
로마서 8:23 이뿐 아니라 또한 우리 곧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를 받은 우리까지도 속으로 탄식하여 양자 될것 곧 우리 몸의 구속을 기다리느니라. Not only so, but we ourselves, who have the firstfruits of the Spirit,
groan inwardly as we wait eagerly for our adoption as sons, the
redemption of our bodies.
구원 로마서 1:16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첫째는 유대인에게요 또한 헬라인에게로다 .
로마서 5:9-10 그러면 이제 우리가 그 피를 인하여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더욱 그로 말미암아 진노하심에서 구원을 얻을 것이니. 곧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목되었은즉 화목된 자로서는 더욱 그의 살으심을 인하여 구원을 얻을 것이니라.
로마서 8:24 우리가 소망으로 구원을 얻었으매 보이는 소망이 소망이 아니니 보는 것을 누가 바라리요.
로마서 9:27 또 이사야가 이스라엘에 관하여 외치되 이스라엘 뭇자손의 수가 비록 바다의 모래 같을찌라도 남은 자만 구원을 얻으리니.
로마서 10:1 형제들아 내 마음에 원하는 바와 하나님께 구하는 바는 이스라엘을 위함이니 곧 저희로 구원을 얻게 함이라
로마서 10:9-10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얻으리니.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
로마서 10:13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로마서 11:11 그러므로 내가 말하노니 저희가 넘어지기까지 실족하였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 저희의 넘어짐으로 구원이 이방인에게 이르러 이스라엘로 시기나게 함이니라.
로마서 11:14 이는 곧 내 골육을 아무쪼록 시기케 하여 저희 중에서 얼마를 구원하려 함이라.
로마서 11:26 그리하여 온 이스라엘이 구원을 얻으리라 기록된바 구원자가 시온에서 오사 야곱에게서 경건치 않은 것을 돌이키시겠고.
로마서 13:11 또한 너희가 이 시기를 알거니와 자다가 깰 때가 벌써 되었으니 이는 이제 우리의 구원이 처음 믿을 때보다 가까왔음이니라.
로마서 15:31 나로 유대에 순종치 아니하는 자들에게서 구원을 받게 하고 또 예루살렘에 대한 나의 섬기는 일을 성도들이 받음직하게 하고 .
12월 10일(수) 로마서 1-3장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구속(3:24)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 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and are justified freely by his grace through the redemption that came by Christ Jesus.
한글개역 성경에서 구속이란 용어가 사용된 구절은 84구절 구원이란 용어가 사용된 구절은 530구절이라고 합니다. * 자료 출처 - 다국어 성경 인터넷 검색
구속과 구원이란 용어가 서로 다르다는 것은 그 의미가 차이가 있다는 것을 암시합니다. 구속(救贖)을 영어로 리뎀션(redemption) 구원(救援)을 영어로 샐베이션(salvation)
ἀπολύτρωσις, εως, ἡStorng number 629
1. 풀어 놓음. 2. 그리스도를 통하여 죄나 제한에서 해방됨. 3. 구속 Pronunciation
[ apŏlütrō- sis ] Etymology / 575와 3083의 합성어에서 유래 [원래 노예나 포로를 다시 사거나 혹은 속물을 받고 자유를 줌]
의문불변사 1) [직접의문문과 함께] ~옳으니이까?, 마12:10, 19:3, 막10:2, 행21:37, 22: 25. 구원을 얻을 자가 적으니이까?, 눅13:23, 22:49, 행1:6, 7:1, 19:2.
2.
[현재직설법과 함께] 네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인지 우리에게 말하라, 마26:63, 저를 구원하는지, 마27:49, 막15:36, [참조] 눅14:31, 고후13:5, 요일4:1. [미래직설법과 함께] 그 사람을 고치시는가, 막3:2, 눅6:7. 남편을 구원할는지, ...
예를 들면 어느 노예가 노예시장에 팔려나왔습니다. 그 노예를 불쌍하게 생각한 어느 사람이 노예를 값을 지불한 후에 노예에게 당신은 이제부터 노예가 아니다. 자유롭게 살아가라고 말하는 것을 구속이라고 합니다.
노예가 나는 자유인이다 라고 외치며 자유인의 신분으로 살아가는 것을 구원이라고 합니다.
따라서 구속이란 값을 지불한 상태를 말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죄 값을 지불하셨다는 것은 모든 사람을 향한 것입니다. 그러나 십자가에서 죄 값을 지불하셨다는 것을 믿고 나는 죄인이 아니라고 주장하는 것을 구원이라고 하겠습니다.
구원(Salvation)과 구속(Redemption)의 관계 : 성경적 분석
1. 구원과 구속의 관계 및 성경적 차이점
'구원'과 '구속'은 서로 뗄 수 없는 관계를 가지지만, 성경은 그 역할과 초점을 달리하여 제시함.
구속은 구원의 수단이자 근거 (예수님의 구속을 통해 => 구원을 얻음)
구속(Redemption)은 우리가 구원을 받을 수 있도록 가능하게 하는 방법론적이고 기초적인 행위임.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흘리신 피로 죄의 대가를 지불하심으로써(구속) 우리가 죄로부터 해방되어 구원에 이를 수 있게 됨.
히브리서 9:12는 "염소와 송아지의 피로 하지 아니하고 오직 자기의 피로 영원한 속죄(redemption)를 이루사 단번에 성소에 들어가셨느니라"고 말하며, 예수님의 피로 인한 속죄(구속)가 구원의 근거가 됨을 분명히 함.
골로새서 1:13-14는 "그가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내사 그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기셨으니 그 아들 안에서 우리가 속량 곧 죄 사함을 얻었도다"라고 하여, 속량(redemption)을 통해 죄 사함이 이루어지고 흑암의 권세에서 건짐(구원의 한 측면)을 받았음을 보여줌.
구원은 구속의 결과:
구원(Salvation)은 구속을 통해 얻어지는 총체적인 상태와 모든 유익을 의미함. 1) 죄 사함, 2) 의롭다 함, 3) 하나님과의 화목, 4) 성화, 5)영생, 6) 장차 올 영광 등을 포함하는 넓은 개념임.
로마서 5:9-10는 "그러면 이제 우리가 그의 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더욱 그로 말미암아 진노하심에서 구원(salvation)을 받을 것이니 곧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의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은즉 화목하게 된 자로서는 더욱 그의 살아나심으로 말미암아
구원(salvation)을 받을 것이니라"고 말하며, 그리스도의 죽음(구속의 근거)을 통해 화목하게 되고 구원에 이르게 됨을 설명함.
구속은 구원을 가능하게 하는 '값 지불' 행위 또는 '해방의 대가'이며,
구원은 그 '값 지불'을 통해 얻어지는 총체적인 자유와 하나님과의 회복된 관계임
마치 노예를 해방시키기 위해 주인이 값을 지불하는 행위가
'구속(redemption)'이고, 그 결과로 노예가 자유를 얻어 새로운 삶을 사는 것이 '구원(salvation)'인 것과
같음. 성경은 이 두 개념을 동시에 사용하면서도, 구속은 구원의 필수적인 토대와 방법임을 분명히 드러냄.
구속(救贖. redemption)과 구원(救援. salvation)
구속(Redemption)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흘린 피로 죄의 빚을 갚아 우리를 마귀의 속박에서 사내고 해방시키는 '하나님이 하시는 일'의 법적,
근원적 행위를 말합니다.
구원(Salvation)은 이 구속의 은혜를 '믿음으로 받아들여' 영생을 얻고 죄와 사망에서 벗어나는
'인간의 응답'이자 '결과'를 의미하며,
이 둘은 밀접하게 연결되어 하나님의 완전한 구원을 이루는 과정이라고 하겠습니다.
구속 (Redemption, 救贖)
의미 : '값을 치르고 사서 되찾는다'는 뜻으로, 노예 상태의 사람을 값을 주고 해방시키는 행위.
성경적 의미 : 예수 그리스도의 피 값으로 죄의 종 된 인류를 사탄의 권세에서 해방시키신 하나님의 행위.
특징 : 하나님의 주권적 행위이며, 법리적인 측면을 강조 (예: 죄의 빚 청산).
구원 (Salvation, 救援)
의미 : 죄와 사망, 고난으로부터 보호받고 해방되어 영생을 얻는 것.
성경적 의미 : 구속의 은혜를 믿음으로 받아들여 죄 사함 받고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는 과정 (죄 사함, 칭의, 화목, 성화, 영화 포함).
특징 : 구속이라는 하나님의 행위에 대한 인간의 믿음(응답)이 필요하며, 유기적인(살아있는) 측면을 강조.
구속과 구원의 관계
하나님의 선물 : 구속은 하나님이 베푸신 은혜의 선물이며, 구원은 이 선물을 받아들이는 믿음의 결과.
분리될 수 없는 과정 : 구속이 없이는 구원이 없고, 구속을 믿지 않으면 구원을 받지 못함.
결론 :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구속)으로 구원의 길은 열렸고, 그 길을 믿음으로 걸어가는 것이 구원이다.
예시 구절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피로 말미암아 구속 곧 죄 사함을 받았으니" (에베소서 1:7).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요한복음 3:16) - 믿음으로 얻는 구원
구속 (拘束, Bondage/Restraint)
일반적 의미: 자유를 제한하거나 속박하는 행위나 상태를 의미합니다. 물리적인 구속(감금, 포박)뿐만 아니라, 법적인 제약, 사회적 관습, 심리적 압박, 경제적 빈곤 등 다양한 형태의 억압을 포함할 수 있습니다.
종교적 의미: 인간이 죄, 악업(惡業), 무지, 욕망 또는 죽음과 같은 영적 한계에 묶여 있는 상태를 말합니다. 이는 인간 스스로의 노력만으로는 벗어날 수 없는 근본적인 속박으로 간주됩니다.
구원 (救援, Salvation/Redemption)
일반적 의미: 위험이나 곤경에 처한 사람을 구출하거나 구해주는 것을 의미합니다. 재난 구호, 위기 탈출 등을 포함합니다.
종교적 의미:
구속의 상태로부터 벗어나 자유와 영원한 생명, 깨달음, 또는 신과의 화합에 이르는 과정을 말합니다. 기독교에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을 통한 죄의 용서와 영생을 의미하며, 불교에서는 윤회(輪廻)의 고통에서 벗어나 해탈(解脫)에 이르는 것을 의미합니다.
관계 및 대조
이 두 개념은 문제점과 해결책의 관계로 볼 수 있습니다. 구속이 인간이 처한 비극적이고 제한적인 상태를 나타낸다면, 구원은 그 상태로부터 벗어나는 궁극적인 해방을 제시합니다.
요약하자면, 구속은 묶여 있는 상태이고, 구원은 그 묶임으로부터 풀려나는 것입니다.
구속(Redemption)과 구원(Salvation)
구속(Redemption)과 구원(Salvation)은 성경과 신학에서 중요한 개념으로 서로 깊이 연결되어 있지만, 의미와 초점에서 차이가 있다. 두 개념의 같은 점과 차이점을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다.
하나님께서 이루신 은혜로운 사역
구속과 구원 모두 인간의 힘으로 이룰 수 없는 하나님의 초월적 사역을 나타낸다.
인간의 죄로부터 해방시키고,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게 하는 과정에서 중심적인 역할을 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은 구속과 구원의 핵심이다. (요한복음 3:16, 로마서 3:24)
죄와의 관련성
두 개념 모두 인간이 죄로 인해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진 상태에서 시작한다.
구속은 죄로부터의 대가를 치름으로써 해방을 의미하고, 구원은 죄와 그 결과인 심판으로부터의 전반적 구조를 말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을 통해 완성됨
구속은 예수님이 피로 값을 치르심으로 이루어졌고(에베소서 1:7), 구원은 그의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 완전해졌다. (로마서 10:9-10)
인간의 삶에 변화를 가져옴
구속과 구원은 모두 인간의 삶을 변화시키며, 죄와 심판에서 자유로워지도록 한다.
하나님의 은혜로 새로운 정체성과 목적을 갖게 한다. (고린도후서 5:17)
차이점
의미와 초점
구속 : 구속은 죄의 속박에서 벗어나게 하기 위해 치러진 대가를 강조한다. 헬라어로는 "뤼트로시스(λύτρωσις)"로, 본래 노예의 몸값을 지불하고 해방시키는 행위를 뜻한다. 구속의 초점은 예수님의 희생(속죄)과 그 대가이다. (마태복음 20:28) 구원 : 구원은 죄와 그 결과로부터 완전히 구출되는 상태를 강조하며, 헬라어 "소테리아(σωτηρία)"는 전반적인 구조와 회복을 의미한다. 구원의 초점은 결과적 상태, 즉 영생, 하나님과의 화목, 죄와 심판에서의 자유이다. (에베소서 2:8-9)
시간적 관점 구속 : 구속은 과거의 사건으로,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이미 성취된 사역이다. (골로새서 1:14) 그리스도께서 피 흘리심으로 한 번에 이루어진 사건이다. 구원: 구원은 과거, 현재, 미래를 포함한다. 우리는 과거에 구원받았고(칭의), 현재 구원을 이루어가며(성화), 미래에 완전한 구원을 기대한다(영화). (빌립보서 2:12)
적용의 범위
구속: 구속은 하나님이 전 인류를 대상으로 이루신 보편적인 사역이다. 모든 사람을 위해 값을 치렀으나, 이것을 믿는 사람에게만 구원이 적용된다. (요한일서 2:2)
구원: 구원은 구속을 믿음으로 받아들인 사람들에게만 적용되는 결과이다. (에베소서 2:8)
행위와 목적의 관계
구속은 죄값을 치르는 행위로, 죄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수단이다.
구원은 구속의 결과로,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과 영생을 의미한다.
구속의 제한성과 구원의 포괄성
구속은 죄의 대가를 지불하는 행위로 한정되지만, 구원은 죄뿐만 아니라 심판, 사망, 멸망으로부터의 총체적인 구조를 포함한다.
요약
구속은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죄값을 치르심으로써 이루어진 과거의 사건을 말하며, 죄에서 자유롭게 되는 것을 의미한다.
구원은 구속을 통해 죄와 그 결과에서 벗어나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고, 영생을 누리게 되는 총체적인 상태를 가리킨다.
구속은 구원의 기초이며, 구원은 구속의 결과이다.
두 개념은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로 연결되어 있으며, 믿음을 통해 개인의 삶에 적용된다.
따라서 구속과 구원은 서로 다르지만, 하나님의 구속사적 계획 안에서 긴밀히 연결된 필수적인 두 측면이다. 우리의 삶 속에서 이 두 개념을 묵상하며, 그리스도 안에서 주어진 자유와 은혜를 더욱 감사하며 살아가야 한다.
구속과 구원의 차이
성경에 구속이라는 단어가 약 80회 나오고, 구원이란 단어는 약 500회 나온다. 두 단어의 차이점이 무엇인가?
구원과 구속의 차이점을 알아야 성경이 해석된다.모르면 신앙생활 하는데 큰 혼란과 혼선이 빚어진다.
많은 교인들이 잘못 알고있는 구속에 대해서 우리는 성경을 통해서 정확히 깨닫기를 원합니다.
성경이 말씀하는 구속의 의미는 무엇인가?
많은 교인들이 구속을 구원으로 착각하는 것이다.그 결과로 인해 교회가 타락하고 목사와 교인들이 타락하는 것이다.
세상에서 신앙생활 잘 하다가 죽어서, 천국에 들어갔을 때 받는 것이 구원이다.
그러나 구속은 세상에 사는 동안에 예수를 구원자로 믿고, 죄를 회개할 때 예수 피로 죄를 씻는 것이 구속받는 것이다.
구속된 자가 죄를 회개치 않으면 하나님의 징계가 옵니다.하나님이 그의 삶을 일일 체크하고 주관하십니다.
쉽게 설명하면, 교인들이 천국을 향해 가는 과정이 구속된 삶인 것이다.
한 번 구속을 받은 사람이 계속 불순종하고, 징계해도 회개치 않는다면, 그는 구원받지 못한다, 천국에 들어갈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세상에 살아있는 동안에 구원받는 자가 없다.
성도들은 구원받기 위해서, 순종하고 회개하는 삶을 사는 것이다. 이것을 구속이라고 말합니다. 잘 믿다가 타락하면 그의 구속받음은 무효다.
그러나 회개하면 죄사함이 회복된다. 그의 구속받음은 다시 유효해진다. 질병 치료는 육체의 구원이지 영혼 구원이 아니다.
순종하며 회개하는 삶을 살 때 그는 구원의 길을 정확히 가는 것이다.
구원의 길을 끝까지 갔을 때 그의 구원이 이뤄지고 천국 백성이 되는 것이다. 중간에 회개의 삶을 포기해 버리면 지옥가는 것이다.
구속받았다는 것은 죄를 회개하고 용서받는다는 뜻이다.
구속받은 자는 주님이 살아서 역사하신다는 것을 믿는다.
그래서 순종하는 삶을 살게 된다. 죄를 지을 때 주님의 책망을 받고 회개한다. 이런 주님을 체험하고도 욕심 때문에 계속 불순종하고 회개치 않을 때, 징계는 심해지고, 그래도 듣지 않으면 버림받는 것이다.
한 번 구속은 절대로 구원받은 것이 아니다.
죄에서 구속된 자가 회개의 삶을 끝짜지 살 때, 구원이 완성되는 것이다. 죄에서 구속받는 순간, 그때부터 구원받는 여정이 시작되었다. 성경을 통해 모두가 이 사실을 분명하게 깨닫기 원합니다.
베드로전서 1:18-19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조상의 유전한 망령된 행실에서 구속된 것은 은이나 금 같이 없어질 것으로 한 것이 아니요오직 흠 없고 점 없는 어린양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한 것이니라.
예수를 믿고 죄를 회개하면 아무런 공로없이 죄를 용서받는다, 그 때부터 그의 삶은 주님의 보호와 인도 아래 놓여진다.이것이 구속이다. 금과 은으로 되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의 보배로운 피로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피만이 우리 죄를 씻어주시고, 천국으로 인도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을 때 죄에서 자유하게 된다.
그는 천국 길로 인도되는 것이다. 이것이 구속받은 삶이다.
세상 철학이나, 어떤 종교가 할 수 없고, 창조주 하나님이 하십니다. 인간을 만드시고, 인간이 가야할 길을 제정하시고, 천국과 지옥을 만드시고, 생사화복을 주관하시는 창조주가 하신다.
그 창조주가 예수님으로 오셔서 우리 죄를 대신하여 죽으신 것이다. 천하에 다른 구원자 없고, 예수님만이 우리를 구원해 주십니다.
예수 피로 구속받고 천국 길을 가는 것을 세상일에 비유한다면, 어떤 사람이 살인죄를 짓고 교도소에 들어갔다.
그 때부터 국가가 제정한 교정생활이 시작된다. 국가는 먼저 그를 세상과 분리시킨다. 피해 가족이 너무 분노하여 그를 죽일 수 있기 때문이다. 그 예가 구약시대 도피성 제도이다. 둘이 나무하다 도끼 자루가 빠져 앞에 있는 사람을 쳐서 죽였을 때, 신속히 도피성으로 피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피해자 가족들에게 죽는 것이다.
교도소에 교정생활 있다. 죄수들에게 무조건 밥만 먹이고 지하 감옥에 가두는 것이 아니다. 형기을 마치고 세상에 복귀했을 때, 그가 바르게 살아가도록 그를 지도하는 것이다.
규칙적인 생활과 바른 삶이 무엇인지를 가르친다. 순응하는 자는 정상적인 사회인이 되는 것이다. 교도소 안에서 계속 사고치고 말썽부리면, 그는 특별 공간에 가두어진다.
이런 교도소 행정이 예수믿고 구속받은 자의 삶과 유사성이 있다. 물론 전부 똑같은 것은 아니다. 일부 유사성이 있는 것이다. 예수피로 구속받은 우리는 주님의 뜻대로 살기 위해 항상 훈련받는데, 이것이 죄수들의 훈련에 비유된다.
주님은 예수 피로 구속받은 자를 주님을 닮도록 훈련시킵니다. 남을 용서하는 훈련, 이웃과 화목해지는 훈련, 선하게 사는 방법을 성경을 통해서 계속 가르칩니다. 주님 뜻에 순응하면 천국에 들어간다.
불순종하고 회개치 않으면, 징계받는다, 징계받을 때 자기 죄를 깨닫고 회개하고 고치는 자가 되어야 한다. 계속되는 극한의 징계에도 변화되지 못하면 결국 버림받는 것이다. 이런 자가 누구인가? 평생 신앙생활하고 지옥으로 가는 자들이다.
예수 피로 죄를 구속받는 것은 결코 구원받은 것이 아니다, 그 때부터 구원받는 길에 들어선 것이다.
베드로후서 1:4이로써 그 보배롭고 지극히 큰 약속을 우리에게 주사 이 약속으로 말미암아 너희로 정욕을 인하여 세상에서 썩어질 것을 피하여 신의 성품에 참예하는 자가 되게 하려 하셨으니
예수님 피로 구속받은 이유가 무엇이라고 하시는가? 세상의 썩어질 것들을 피하고, 예수님의 성품에 참예하기 위함이라고 하십니다.
세상의 썩어질 것들이 뭔가? 육신의 정욕과 교만과 자기 자랑이다. 이런 것들을 버리고, 예수님의 성품을 닮기 위해서 예수피로 구속해 주신 것이다. 그러나 하루 아침에 거룩해지지 않는다.
그래서 거룩해지는 훈련을 받는 것이다.예수 마음을 닮기 위해 평생 동안 받는다. 세상에 완벽한 자는 하나도 없다. 모두가 부족하기 때문에 항상 훈련받아야 한다.
그래서 내가 의인을 찾으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려 왔노라 하신 것이다.
예수님의 성품을 닮기 위해 노력하지 않는 교인은 예수님 밖에 있다. 아름다운 열매를 맺을 수 없다. 얼마 후에 원가지에서 잘리는 것이다. 고난을 통해 다시 붙어야 된다. 훈련이 어렵다고 불평하지 말라, 주어진 여건과 환경 속에서 최선을 다해 순종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예수님의 성품을 닮기 위해 끝까지 노력해야 한다.이 끈을 놓치면 교회 안에서 낙오자 되는 것이다, 평생 교회만 다니고 지옥에 가는 것이다.
베드로후서 1장 9-10이런 것이 없는 자는 소경이라 원시치 못하고 그의 옛 죄를 깨끗케 하심을 잊었느니라그러므로 형제들아 더욱 힘써 너희 부르심과 택하심을 굳게 하라 너희가 이것을 행한즉 언제든지 실족지 아니하리라
실족이 무엇인가? 길가다 넘어지는 것이다.옛 죄를 깨끗게 해주신 것을 잊는다. 구속해 주신 것을 잊는 것이다. 예수믿으며 세상을 더 사랑하고 따라가는 것이다.
주님의 구속해주신 은혜를 무효화시키는 것이다.
주의 부르심과 택하심을 더욱 굳세게 해야한다.
구원의 길을 더 견고하게 만드는 방법이 순종과 회개이다.죄를 짓고 회개하지 않는 자는 예수 피의 구속을 무효화시킨다.
죄에서 한 번 구속으로 천국에 못들어간다.가다가 이탈하면 불신자와 같다.
구속과 구원을 혼돈하지 말라. 회개의 삶을 중지하면 구원의 길에서 실족하는 것이다.교회만 다니고, 순종을 버리는 것이 지옥가는 길이다.
한 번의 구속은 영원한 구속이 아니다. 항상 회개의 삶을 사는 것이 주님의 구속을 견고하게 하는 것이다.
베드로전서 1장 22너희가 진리를 순종함으로 너희 영혼을 깨끗하게 하여 거짓이 없이 형제를 사랑하기에 이르렀으니 마음으로 뜨겁게 피차 사랑하라
예수피로 구속함을 받은 자는 마땅히 사랑해야 한다.남을 용서하고 사랑하는 것이 진리에 순종하는 것이다.
욕심을 버리고, 남에게 덕을 끼치는 것이 자기 영혼을 깨끗게 하는 것이다. 용서와 사랑은 해도 되고, 안 해도 되는 것이 아니다.반드시 해야 천국에 들어간다.
천국 가기 원하는 자는 지속적으로 선을 추구하라, 자기의 부족함을 매일 회개하라. 그것이 살아있는 믿음이다. 행동하지 않는다면 죽은 믿음이다. 사탄이 순종을 방해한다, 끝까지 사탄 방해를 이겨야 한다.
예수피로 죄를 씻은 자, 예수 피로 구속받은 자,확실하게 천국 길을 가라. 세상을 떠나서 영원한 구원을 얻을 때까지 회개의 삶을 살라.
항상 자기 영혼을 깨끗게 하라. 이는 회개하는 방법밖에 없다. 거짓된 사랑을 버리고 진정한 마음으로 남을 용서하고 사랑하라. 피차 뜨겁게 사랑하라.
인간 자신은 이렇게 할 능력이 없다. 회개하고 성령을 받을 때, 성령이 이것을 할 수 있도록 도우신다.
한 번 회개하고 구속받은 것으로 만족하지 말라.구속받은 자는 용서하고 사랑하는 삶을 끝까지 살아야 한다, 그 결과가 구원이다.
구속받은 자는 천국을 향해 가는 자이다. 가다가 그치면 천국 길에서 탈락한다.하나님의 은사와 능력과 예언은 구속받고 구원받는데 도움을 준다. 그것 자체가 구원이 아니다.
은사 능력 행하고 교만해지면, 그것 때문에 더 빨리 지옥에 가는 것이다.
베드로전서 2장 1-2그러므로 모든 악독과 모든 궤휼과 외식과 시기와 모든 비방하는 말을 버리고갓난 아이들 같이 순전하고 신령한 젖을 사모하라 이는 이로 말미암아 너희로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게 하려 함이라
구원은 단 번에 이뤄지는 것이 아니다, 예수피로 구속받은자가 주님의 뜻에 합당하게 살 때, 받는 것이다. 그래서 구원은 시간을 두고 점점 자라는 것이다.
계속 순종할 때 구원이 자란다. 이는 자신이 천국 문에 점점 가까워지는 것이다.
그래서 성경은 구원이 미래에 이뤄질 것이라고 표현하는 것이다. 이미 이뤄졌다는 표현이 없다. 육체 구원, 치료는 세상에서 이뤄질 때 많다.
그러나 영혼 구원은 항상 미래형으로 말씀하십니다.세상을 떠날 때 영혼 구원을 받기 때이다.
예수피로 구속받은 자는 영혼 구원에 이르도록 항상 힘써야 한다.
악하고 독한 말을 하지 말라. 자기 이익을 챙기기 위해 남을 속이지 말라. 자존심 상한다고 남을 비방하지 말라.
갓난 아이가 엄마의 젖을 사모하는 것처럼 신령한 젖을 사모하라, 죄에서 구속받은 자들은 신령한 젖을 반드시 사모해야 한다.
신령한 젖은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하기를 애쓰는 것이 신령한 젖을 사모하는 것이다.
구원의 말씀의 핵심이 무엇인가? 한 분의 하나님을 믿는 것이다. 곧 구약의 여호와가 신약의 예수님으로 오신 것을 믿는다, 성령이 예수님의 영인 것을 믿는 것이다.
그러므로 유일하신 한 분의 하나님이고, 세 분의 하나님이 아닌 것입니다. 창조주를 믿는 자는 창조주의 명령에 순종해야 한다.
이웃에게 악을 행치 않고, 어려운 이웃을 돕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이 말씀을 믿고 실천하는 자가 신령한 젖을 먹고 믿음이 자란다. 천국 들어갈 때까지 믿음이 자라야 한다.
사랑 실천과 관계없는 교리는 헛된 것이다.많은 자들이 인간이 만든 교리를 사모하고 따라간다. 오염된 젖을 먹는 자는 구원에 이를 수 없다. 그 영혼이 썩어버린다.
인간 교리는 신령한 젖을 사모하지 못하도록 방해하는 것이다. 예수피로 한 번만 구속받으면 천국에 간다고 인간 교리가 주장한다. 그것은 거짓말이다. 성경 맥락에 전혀 맞지 않다.
나기 전에 선택받아서 천국에 간다는 교리는 사탄이 만든 것이다. 신령한 젖은 하나님의 말씀 밖에 없다. 누구든지 예수믿고 회개하고 순종하면 천국에 간다는 말씀이 신령한 젖이다. 머리로만 알지 말고, 주님 말씀을 생활 속에 실천하라. 주님의 말씀을 실천할수록 천국 길이 열리고 선명해진다.
욥기 19:25내가 알기에는 나의 구속자가 살아 계시니 후일에 그가 땅 위에 서실 것이라
욥이 극한 훈련을 받고 깨달았다. 구약 때의 구속자이신 여호와 하나님이 신약 때에 구속자 예수님으로 오신다는 것을 그가 알게되었다. 물론 주님이 그를 통해 계시하신 것이다. 구약 때는 양의 피를 통해서 인간들의 죄를 구속하셨다. 그러나 신약 때는 예수님의 피로 구속하시는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예수님으로 세상에 오신다는 것을 분명하게 말씀하셨습니다.예수님의 피 외에는 인간의 죄를 구속할 수 없다.
구속받은 자들의 삶이 어떠 해야 된다는 것을 명백히 기록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마음을 본받아 한다, 남의 허물을 용서하고, 선하게 사는 것이 예수님의 가르침입니다. 구약시대에 불순종하는 자들이 짐승의 피로 제사를 드렸을 때, 주님이 무어라 말씀하셨습니까? 부정한 돼지 피로 제사드렸다고 주님이 호통하셨습니다. 신약도 마찬가지, 불순종하고 회개없이 예배를 드리면, 예수피를 헛되게 만든다고 하셨습니다. “너희가 나의 피를 짓밟고 헛되게 만들었다” 하신 것입니다.
시편 78편 40-42저희가 광야에서 그를 반항하며 사막에서 그를 슬프시게 함이 몇 번인고저희가 돌이켜 하나님을 재삼 시험하며 이스라엘의 거룩한 자를 격동하였도다저희가 그의 권능을 기억지 아니하며 대적에게서 구속하신 날도 생각지 아니하였도다
애굽에서 모세의 인도를 받아, 문설주에 피를 바르고 죽음이 이스라엘 백성을 넘어갔다, 애굽 백성들을 치시매, 이스라엘 백성을 구속해주신 것입니다. 구속받은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을 향해 갈 때 그들이 하나님을 수없이 시험하고 말씀에 거역했습니다. 불순종하면서 죄를 회개할 줄 몰랐다.
구속받은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을 너무나 격노케 만들었다. 주님이 견딜 수 없어 대부분을 멸망시켰습니다.
이것이 구약 역사입니다. 그런데 구속받으면 천국에 간다니 성경에 맞지 않는다.
애굽의 압제에서 구속하신 은혜를 잊어버렸다.사탄의 압제에서 구속하신 것을 잊은 것이다.
너희가 이런 짓을 한 것이 도대체 몇 번인지 생각해 보라!
회개할 가능성이 없는 자들을 주님이 멸하셨습니다. 성경이 이런데도, 한 번 구속되면 무조건 천국에 가는가?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으로 전진했던 것은 오늘날 우리가 천국으로 전진하는 것과 동일한 것이다. 그들이 광야에서 멸망했던 것은 오늘날 교회 안에서 멸망하는 자들을 가리키는 것이다.
시편 74편 1-2하나님이여 주께서 어찌하여 우리를 영원히 버리시나이까 어찌하여 주의 치시는 양을 향하여 진노의 연기를 발하시나이까옛적부터 얻으시고 구속하사 주의 기업의 지파로 삼으신 주의 회중을 기억하시며 주의 거하신 시온산도 생각하소서
주여, 옛적부터 구속하사 주님 백성을 버리시나이까?
(주님이 지금까지 치시던 양을 버리시나이까? 주님의 기업으로 삼으신 이 백성을 버리지 마옵소서. 구속받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타락하므로 주님께 버려질 때입니다, 다윗이 백성들을 위해 이렇게 중보기도하는 것입니다. 한 번 구속받으면 천국에 가는 것 아니다.
회개치 않으면 다 버려진다. 패망하는 이스라엘을 위해, 다윗이 그들을 살려달라고 간절히 기도한 것이다.)
한 번 구속이 이런 기도 필요 없다. “저들이 아무리 타락해도 주님은 결국 모두를 천국에 보낼 것입니다. 저는 걱정하지 않습니다.”
다윗이 이렇게 기도하고 말았을 것입니다.주님이여 그동한 함께 거하셨던 시온산을 기억하소서 그 시온산은 예루살렘을 상징했고, 그 예루살렘은 오늘날 교회를 상징합니다.
교회가 타락하여 목사가 길을 잃고 헤매면 모두가 지옥으로 가는 것이다. 다윗이 깨어 기도했기 때문에 그들 전체가 멸망하지 않았던 것이다.
이사야 54장7-8내가 잠시 너를 버렸으나 큰 긍휼로 너를 모을 것이요내가 넘치는 진노로 내 얼굴을 네게서 잠시 가리웠으나 영원한 자비로 너를 긍휼히 여기리라 네 구속자 여호와의 말이니라
인간 교리따라 살던 자들이 주님께 돌아올 때, 주님이 크게 긍휼을 베푸십니다.다른 길을 가기 때문에 징계받는다. 그러나 돌아오면 죄와 사망에서 건짐을 받는 것이다.
회개할 때 예수의 피가 그의 죄를 씻고 다시 인도하십니다.이런 인도하심이 예수님의 구속인 것이다.
거역할 때는 하나님이 얼굴을 가리십니다.그러나 회개할 때는 다시 자비를 베푸십니다.이것이 여호와의 약속의 말씀입니다.
이사야 44:22내가 네 허물을 빽빽한 구름의 사라짐 같이, 네 죄를 안개의 사라짐 같이 도말하였으니 너는 내게로 돌아오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음이니라
죄악이 빼빽한 구름처럼 가리었다. 그러나 회개할 때 의심의 구름이 아침 안개처럼 사라진다, 이 때 하나님의 말씀이 믿어지고, 천국 길이 선명해진다.
주님이 우리를 구속해주셨기 때문에 이런 생명 길이 열리는 것이다. 구속하심을 받았을지라도, 다시 죄악에 빠지고 회개없이 살 때, 의심이 들어오고 천국 소망이 사라진다.
교회는 다니지만 주님이 멀어지고 천국이 멀어진다.
구속받은 자가 회개하는 삶을 살지 않으면, 저주와 멸망의 늪에 다시 빠진다.유일한 해결책은 다시 순종하는 것 밖에 없다.
답답하다고 예언자 은사자 찾으면, 더욱 미궁에 빠진다. 불순종하고 회개하지 않기 때문에 주님의 징계가 왔다.
풀기 위해서는 다시 회개하고 순종해야 한다.완악한 마음을 버리고, 부드러운 마음을 가져야 한다.
안 된다고 남을 원망하고 미워하지 말라. 주님이 허락하신 것이다.십계명을 기준하여 자신의 삶을 돌아보라,악한 생활을 버려라.
남을 용서하는 마음을 가져라. 남의 가슴을 도려내는 독한 말을 금지하라.
음란한 생각을 버려라. 불의의 소득을 탐하지 말라.주님 뜻을 거역하면서 교회만 열심히 다니는 것은 구속받은 자의 길이 아니다. 주님의 저주가 더 심해진다. 고통과 저주가 자신의 잘못을 깨닫게 한다.
요엘 2장 12-13여호와의 말씀에 너희는 이제라도 금식하며 울며 애통하고 마음을 다하여 내게로 돌아오라 하셨나니너희는 옷을 찢지 말고 마음을 찢고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로 돌아올찌어다 그는 은혜로우시며 자비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하시며 인애가 크시사 뜻을 돌이켜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시나니
고통 속에 있을 때 이제라도 금식하며 애통하며 회개하라. 남 보라고 옷을찟지 말고, 너의 완악해진 마음을 찢어라.
형식적인 신앙생활 버려라. 구속받은 자들이 순종할 때, 주님의 재앙이 그치리라. 한 번의 구속은 영원한 구원이 아니다. 이것을 착각하기 때문에 타락이 오고, 타락하기 때문에 멸망이 오는 것이다.
주님은 은혜로우시고, 노하기를 더디하시고, 사랑이 너무나 크십니다. 그래서 살아있을 동안에 회개하는 자를 다 받아주십니다.
죄를 지었을 때 때렸지만 회개할 때 싸매어 주시는 것입니다. 사랑의 하나님을 강조하는 자들이 왜 사랑의 반대 방향으로 가는가? 재앙이 쏟아지는데도 왜 인간 교리를 버리지 못하는가?
말라기 3장 7-8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 열조의 날로부터 너희가 나의 규례를 떠나 지키지 아니하였도다 그런즉 내게로 돌아오라 그리하면 나도 너희에게로 돌아가리라 하였더니 너희가 이르기를 우리가 어떻게 하여야 돌아가리이까 하도다사람이 어찌 하나님의 것을 도적질하겠느냐 그러나 너희는 나의 것을 도적질하고도 말하기를 우리가 어떻게 주의 것을 도적질하였나이까 하도다 이는 곧 십일조와 헌물이라
주님이 내게로 돌아오라 하셨더니, 백성들이 우리가 어떻게 해야 주님께 돌아가오리까? 너희가 하나님의 것을 도적질하였도다. 그것이 십일조와 헌물이다. 하나님께 드려야 할 것을 드리지 않았던 것이다.
극도로 가난한 자들은 헌금 드릴 여유가 없다. 이런 사람은 생활비를 교회서 지원받아야 한다.
그러나 하나님의 축복을 받은 자들은 하나님 나라 전파를 위해 헌신해야 한다. 주님 주신 축복으로 자기 배만 불리면 저주와 고통이 온다.
아직 재산이 많을지라도 그의 심신의 피곤함과 닫답함은 이루 말할 수 없게 된다.
말라기 3장 13-15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가 완악한 말로 나를 대적하고도 이르기를 우리가 무슨 말로 주를 대적하였나이까 하는도다이는 너희가 말하기를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헛되니 만군의 여호와 앞에 그 명령을 지키며 슬프게 행하는 것이 무엇이 유익하리요지금 우리는 교만한 자가 복되다 하며 악을 행하는 자가 창성하며 하나님을 시험하는 자가 화를 면한다 하노라 함이니라
예수피로 구속받은 자들이 잘 사니까 이렇게 말한다.
완악한 말로 주님을 대적하는 것이다 말씀대로 순종하는 것이 내게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 그것은 헛된 것이다, 주님의 명령에 순종하기 위해 날마다 죄를 회개하는 것은 고생스선 것이지, 즐거운 것이 아니다. 자기 죄를 슬프하며 회개하는 것이 아무런 가치가 없다고 말한다. 교회 안에서 이런 자들이 누구인가?
바로 인간 교리에 빠진자들이다. 이 땅에서 잘 먹고 잘 사는 것만 신경쓰는 자들이다.
이들의 마음에 예수님이 거하십니까? 거하지 않으신다. 오직 사탄이 그들을 지배한다.
하나님을 시험하는 자들이다. 악을 행하는 자들이 더 창성해 진다고 말한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할 필요가 없다고 주장하는 자들이 누구인가? 칼빈주의자들이고. 천주교 교리고, 이단 종교들이다. 회개할 기간이 끝나면 즉시 지옥에 떨어지는 자들이다.
스가랴 1장 3너희 열조를 본받지 말라 옛적 선지자들이 그들에게 외쳐 가로되 만군의 여호와께서 말씀하시기를 너희가 악한 길, 악한 행실을 떠나서 돌아오라 하셨다 하나 그들이 듣지 않고 내게 귀를 기울이지 아니하였느니라 나 여호와의 말이니라
조상들의 타락한 삶을 본받지 말라. 악한 행실을 버리고 내게로 돌아오라. 주님이 이렇게 외치시지만 주님께 돌아오는 자가 거의 없다는 것입니다.
지금 누구에게 외치시는 말씀인가? 예수 피로 구속받은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말씀으로 돌아오라고 외치시는 것입니다.
많은 신학자들이 성경을 왜곡해서 거짓된 교리를 만들었다. 그것을 따라가지 말라. 순순한 주님의 말씀으로 다시 돌아오라.
우리를 구속하신 하나님의 말씀이십니다.악한 행실은 주님의 말씀을 따르지 않는 행동입니다.주님께 구속받은 자들이 주님의 말씀을 지켜야 한다.
예수 피로 구속받은 효과가 언제 나타나는가?주님의 말씀으로 돌아와서 순종할 때이다.
구속받은 자가 순종할 때 평강 가운데 살고,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다.
예레미야 24장 7내가 여호와인줄 아는 마음을 그들에게 주어서 그들로 전심으로 내게 돌아오게 하리니 그들은 내 백성이 되겠고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리라
죄를 회개하고 주님께 순종할 때, 하나님을 아는 마음을 주십니다. 회개하지 않는 목사 신학자들은 항상 성경을 읽지만 그러나 항상 헛된 교리를 만들고 따라가는 것이다.
이렇게 믿는 자들에게 진정으로 하나님을 아는 마음을 주시는 것입니다. 한 번 구속받고 교회만 다니고, 순종하기를 싫어하는 자들은 진정으로 주님께 돌아오지 않은 자이다.
한 번 죄에서 구속받았다고 천국에 가는 것 아니다.
죽는 날까지 회개하며 순종하기를 힘쓰는 자가 참된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것이다. 회개하는 자의 하나님인 것이다.
이사야 1장 27-28시온은 공평으로 구속이 되고 그 귀정한 자는 의로 구속이 되리라그러나 패역한 자와 죄인은 함께 패망하고 여호와를 버린 자도 멸망할 것이라
시온은 예루살렘이고, 오늘날 교회를 상징한다.
교회는 공평함으로 구속된다. 하나님의 백성으로 귀정하는 자가 누구인가? 주님의 말씀으로 돌아오는 자가 누구인가?
의롭게 살기 위해서, 예수 피로 구속받는 자들이다.그러나 교회에 돌아와서 패역하는 자, 다시 죄 가운데 살아가는 자는 패망하는 것이다.
예수님을 믿고 회개하는 것이 구속받는 것이다.이 구속은 구원이 확정되는 것이 아니다.
공평과 의를 이루며 살 때, 그 결과가 구원으로 되는 것이다.
하나님이 우리를 죄악에서 구속해 주신 이유는 의롭게 살도록 하기 위함입니다.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패역한 삶을 살고 회개하지 않는 것은 결국 버림을 받고, 멸망하는 것이다.
골로새서 1장 13-14그가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내사 그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기셨으니 그 아들 안에서 우리가 구속 곧 죄 사함을 얻었도다
흑암의 권세에서 우리를 건져서, 그의 아들의 사랑의 나라로 옮겨주셨습니다.
그의 아들, 예수님 안에서 구속 곧 죄 사함을 얻은 것입니다. 만약 우리가 예수님 밖으로 나가면 우리의 구속은 무효가 되는 것이다. 예수님 밖으로 나갔다는 뜻은 예수님의 말씀을 듣지 않고, 죄를 회개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예수 피로 구속받은 자들은 사랑해야 할 의무를 가진 것이다.이것을 깨닫지 못하면 헛된 신앙생활 하는 것이다.
사랑의 나라에 들어온 자들은 조금이라도 사랑의 질서를 깨뜨렸을 때, 즉시 회개하고 용서받아야 한다.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사탄이 그 틈을 타서 그의 천국 길을 망가뜨린다. 그의 욕심을 더 강하게 하여 주님을 떠나게 만든다.
교회 직분을 가지고, 더 욕심부리고, 남의 것을 착취하고, 간음을 한다. 이런 교인들은 하나님 나라를 무너뜨리고, 사랑의 질서를 파괴하는 자들이다. 사탄의 하수인으로 전락하였다. 그들의 몸은 여전히 주일예배에 참석하지만 그들의 마음은 사탄의 놀이터로 변한 것이다.
이사야 51:10바다를, 넓고 깊은 물을 말리시고 바다 깊은 곳에 길을 내어 구속 얻은 자들로 건너게 하신이가 어찌 주가 아니시니이까
홍해를 갈라서 길을 만들고 건너게 하신 분이 어찌 우리를 구속하신 하나님이 아니시겠는가? 이스라엘을 사탄의 손에서 구출하시고 구속해 주신 분은 오직 하나님이셨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광야에 나와서 주님께 어떻게 했습니까?
항상 불평하고 원망했습니다. 그 결과로 인해 주님의 보호가 그들을 떠났고, 고통 가운데 들어갔습니다. 갑자기 적들이 나타나서 이스라엘을 침공했다.
다급해진 모세가 손들고 간절히 기도했습니다.모세의 기도를 들으시고 주님이 그들을 다시 살려주셨습니다. 구속받은 자들은 위기가 올 때 먼저 죄를 깨닫고, 회개해야 한다.
구속된 자들이 회개와 순종을 중단할 때, 많은 문제들이 발생한다. 이때 회개치 않으면 멸망하는 것이다.
이스라엘이 양의 피로 구속받고 애굽에서 나왔다. 그러나 순종하지 않았기 때문에 ,멸망의 위기를 맞은 것이다. 그 때 모세가 결사적인 기도를 했기 때문에, 멸망당하지 않았다.
한 번의 구속은 결코 영원한 구원이 아니다.항상 구속받은 자 답게 살아야 천국에 갈 수 있다.
고린도전서 10장 2-5모세에게
속하여 다 구름과 바다에서 세례를 받고 다 같은 신령한 식물을 먹으며 다 같은 신령한 음료를 마셨으니 이는 저희를 따르는 신령한
반석으로부터 마셨으매 그 반석은 곧 그리스도시라 그러나 저희의 다수를 하나님이 기뻐하지 아니하신고로 저희가 광야에서 멸망을
받았느니라
바다에서 세례를 받고, 하늘에서 내리는 만나를 먹었고, 반석에서 나오는 물을 마셨습니다. 그 반석은 예수 그리스도이시라.
짐승의 피를 통해서 구속받은 것은 예수님의 피로 구속받은 것이다. 이렇게 엄청난 구속과 은혜를 받았던 자들이 타락하기 때문에 멸망되었다.
오늘날도 예수 피로 구속받고, 죽을병에서 치료받고, 많은 문제해결을 받았지만 불순종하고 회개하지 않으면 그들처럼 멸망되는 것이다.
어떻게 몇 번 죄에서 구속받은 것이 구원받은 것이 되는가? 구속은 세상에 살면서 회개할 때 받는 것이고, 영원한 구원은 천국에 들어갔을 때 받는 것이다.
몇 번 죄에서 구속받은 경험이 있다고 해서 구원받았다고 착각하지 말라. 이렇게 착각하는 자들이 칼빈주의자들이다.
처음 교회 나오는 순간 그들은 구원받았다고 말한다.
이미 천국 백성이 되었다고 주장한다. 전혀 성경에 맞지 않다.
이미 구원을 받았다고 생각하는 자들이 어떻게 순종하려고 노력하겠는가? 하나님의 일을 귀찮게 여기고, 오직 세상 것을 얻기위해 달려갈 뿐이다.
고린도전서 10장 6-7그런 일은 우리의 거울이 되어 우리로 하여금 저희가 악을 즐겨한 것 같이 즐겨하는 자가 되지 않게 하려 함이니저희 중에 어떤 이들과 같이 너희는 우상 숭배하는 자가 되지 말라 기록된바 백성이 앉아서 먹고 마시며 일어나서 뛰논다 함과 같으니라
구속받았던 이스라엘 백성이 멸망했던 것은 오늘날 우리의 거울됩니다. 거울은 사람이 행동하는 그 대로를 나타나게 합니다.
구속받은 이스라엘이 불순종하고 멸망했던 것은, 오늘날 구속받은 교인들이 불순종하고 멸망하는 장면을 거울처럼 그대로 보여주는 것이다.
그들이 우상숭배하다가 산채로 지옥에 떨어졌다.오늘날도 우상숭배하면 지옥가는 것이다.돌부처 섬기는 것만 우상숭배라고 생각하는가?아니다, 성경은 탐심가지는 것이 우상숭배라고 말씀하십니다.
골로새서 3:5그러므로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 곧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이니 탐심은 우상 숭배니라
교회 다니면서 돌부처 앞에 절하는 자가 어디있는가?그러나 세상 것을 탐하는 것이 우상숭배인 것이다.
하나님보다 세상 쾌락과 명예와 돈을 더 사랑하는가? 자존심 버리지 못하는가? 그것이 우상숭배하는 것이다, 지옥에 떨어지는 죄이다.
고린도전서 10장 7-8저희 중에 어떤 이들과 같이 너희는 우상 숭배하는 자가 되지 말라 기록된바 백성이 앉아서 먹고 마시며 일어나서 뛰논다 함과 같으니라저희 중에 어떤 이들이 간음하다가 하루에 이만 삼천 명이 죽었나니 우리는 저희와 같이 간음하지 말자
구속받은 자들이 간음하다가 하루에 이만삼천명이 죽었다.
우리도 간음하지 말자. 신약에서는 음욕을 품는 것도 간음 행위다. 동성애는 남녀간의 간음보다 더욱 나쁜 것이다.
교회가 너무 타락하니, 동성애를 두둔한다..
마태복음 5:28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는 자마다 마음에 이미 간음하였느니라
tv, 인터넷에 음란물이 넘친다. 오래 보면 저절로 간음자가 된다. 저절로 음욕을 품기 때문이다.
이런 세대에서 자기 자신을 철저히 관리하고 절제하지 못하면, 음란의 홍수에 떠내려간다.
모든 교인들이 그렇기 때문에 나도 괜찮을 것 아닌가? 그렇게 생각지 말라. 회개치 않는 자는 모두가 심판을 받는다.
노아의 때를 생각해 보라, 세계에 수억의 인구가 살았지만 오직 8명, 회개하는 노아의 가족들만 물에서 구원을 받았다.
남이 지옥에 간다고 나도 가는가? 이런 자는 너무나 어리석은 자다. 지옥은 견딜만한 곳이 아니다.
어떤 권사님은 지옥 불이 던져졌는데, 뜨거움을 견디지 못해 스스로 자기 눈알을 뽑아버렸다. 눈을 뽚는다고 뜨거움이 사라지지 않는다. 그러나 너무나 견디지 못하기 때문에 그렇게라도 해 보는 것이다.
고린도전서 10장 9-10저희 중에 어떤이들이 주를 시험하다가 뱀에게 멸망하였나니 우리는 저희와 같이 시험하지 말자저희 중에 어떤이들이 원망하다가 멸망시키는 자에게 멸망하였나니 너희는 저희와 같이 원망하지 말라
양의 피로 구속받고, 가나안 땅을 향해 가던 자들이 원망하다가 뱀에게 물려죽었다.
예수피로 죄를 씻음 받은 자는 구속받은 자이다. 그러나 사랑의 삶을 살지 못하고 원망하는 삶을 살면 영적인 뱀인 귀신들에게 죽는 것이다.
천국 길을 끝까지 가지 못하는 것이다. 신앙행활하면서 자기 뜻대로 안 된다고 하나님을 원망하거나 이웃을 탓하는 것은 사탄의 밥이 되는 것이다. 그들의 멸망을 보면서 우리는 멸망하지 않아야 된다.
인간 설교는 교회에 헌금만 많이 하고, 주일만 잘 지키면 천국 간다고 말한다.
하지만 성경은 결코 그렇게 말씀하지 않습니다.
고린도전서 10장 11저희에게 당한 이런 일이 거울이 되고 또한 말세를 만난 우리의 경계로 기록하였느니라
이스라엘 백성이 구속받은 후에 멸망했던 것을 잊지 말라.이 말씀은 그들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오늘날 우리에게도 해당되는 말씀이다.
왜 성경은 하나님의 백성이 멸망한 사건을 기록하였는가?
우리로 멸망하지 않도록 하기 위한 것이다.저들의 멸망이 우리에게 거울이 되어야 한다.죄에서 한 번 구속받은 것에 만족하지 말고, 항상 순종하라.
구속받은 자는 끝까지 순종하고 회개해야 천국 백성이 되는 것이다.
고린도전서 10장 12-13그런즉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사람이 감당할 시험 밖에는 너희에게 당한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치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지 아니하시고 시험 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
이만하면 됬다 하는 순간에 그는 넘어진 것이다.온전해진 자는 하나도 없다. 항상 부복한 가운데 있는 것이 인간이다.
그런데 자신이 완벽하다고 하는가? 거짓말하기 때문에 사탄이 합법적 들어올 통로가 생긴 것이다.
우리가 훈련받을 때, 감당할 수 있는 정도로만 주님이 허락하십니다. 시험 당할 즈음에 피할 길도 내셔서 능히 감당하게 하십니다.
주님이 징계하실 때, 원망하지 말고, 자신을 돌아보고 회개하라. 훈련받기 싫어하고, 회개하기 싫어하는 자는 버림받는다.
고린도전서 10장 20대저 이방인의 제사하는 것은 귀신에게 하는 것이요 하나님께 제사하는 것이 아니니 나는 너희가 귀신과 교제하는 자 되기를 원치 아니하노라
이방인의 제사는 귀신과 교제하는 것이다.하나님 백성이 죽은 조상을 위해 추도 장례예배드리는 것은 하나님이 받는 예배가 아니고 귀신이 받는 예배이다. 부모가 천국에 갔던 지옥에 갔던 제삿날 올 수 없다.
죽은 자를 기념하고 예배하는 것은 모두 귀신들에게 하는 것이 된다. 효도는 부모가 살았을 때 하라. 죽은 후에 하는 것은 가짜다.
시편 106편 10-12저희를 그 미워하는 자의 손에서 구원하시며 그 원수의 손에서 구속하셨고저희 대적은 물이 덮으매 하나도 남지 아니하였도다이에 저희가 그 말씀을 믿고 그 찬송을 불렀도다
애굽에서 나온 이스라엘 백성이 홍해 앞에 이르렀을 때, 그들을 죽이려고 무장군대가 추격하였다.이스라엘 백성들이 놀라서 비명을 지른다.
그 때 하나님이 홍해를 갈라서 건너게 하셨다.군인들이 뒤 따라오다가 홍해에 수장되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환호하며 주님을 찬양했습니다.하나님이 원수의 손에서 이스라엘을 구속하셨다고 말씀하신 것이다.그러나 구속받은 백성들의 삶이 어떠했습니까?
시편 106편 13-15저희가 미구에 그 행사를 잊어버리며 그 가르침을 기다리지 아니하고광야에서 욕심을 크게 발하며 사막에서 하나님을 시험하였도다여호와께서 저희의 요구한 것을 주셨을찌라도 그 영혼을 파리하게 하셨도다
미구에, 얼마지나지 않아서, 그들은 주님의 도우심을 망각했다. 그들이 욕심부렸고, 하나님을 시험하였다.
“애굽에서 나를 구원해 주셨는데, 설마 내가 불순종한다고 주님이 나를 버리겠는가? ”
구속받은 자들이 이렇게 생각하며 세상 욕심을 이루며 살았다.
지금 교인들과 너무나 흡사하다.
그들은 불종하면서 자기들에게 필요한 것만 주님께 달라고 요구했다. 주님이 그들의 요구를 들어주셨지만, 그러나 그들의 영혼은 파리하게 죽어갔던 것이다.
지금 열심히 기도하여, 물질 축복받고, 병고치고, 은사 능력받고, 예언하는 자들의 실상이 어떤가?
세상 것들을 풍성히 받지만, 주님의 말씀에 불순종하는 자들은 기쁨과 평안이 없고, 천국 소망이 없고, 우울해지고, 그 영혼이 파리하게 죽어가는 것이다.
신앙생활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다. 세상 축복에 목마르지 말고, 천국 길 가는 자가 되어야 한다.
시편 106편 16-18저희가 진에서 모세와 여호와의 성도 아론을 질투하매땅이 갈라져 다단을 삼키며 아비람의 당을 덮었으며불이 그 당 중에 붙음이여 화염이 악인을 살랐도다
자기 명예와 욕심 때문에 간부들이 모세를 질투하고 대적했다. 그 때 불이 나타나 그들을 살라버렸습니다.
이들도 애굽에서 나올 때 문설주에 양의 피를 바르고, 구속받은 자들이다. 홍해를 건널 때 주님의 능력에 감탄하여 주님을 찬양했다.
그러나 구속받은 후에 불순종하니까 멸망당하는 것이다.
시편 106편 23그러므로 여호와께서 저희를 멸하리라 하셨으나 그 택하신 모세가 그 결렬된 중에서 그 앞에 서서 그 노를 돌이켜 멸하시지 않게 하였도다
구속받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도 불순종하기 때문에 주님이 그들 전체를 멸망시키려고 하셨습니다. 그들이 하나님과의 약속을 결렬되게 만들었다. 모든 약속은 쌍방이 지키는 것이다. 한 쪽이 지키지 않으면 그 약속은 자동 결렬되는 것이다.
약속을 깨뜨린 이스라엘 백성들을 멸망시키려고 할 때 모세가 주님께 매달렸습니다.
한 번만 저들을 용서해주세요. 모세가 간절히 기도하기 때문에, 주님이 노를 멈쳤습니다. 한 두 번은 주님의 종이 간절히 기도할 때 주님이 진노를 멈추십니다. 그러나 계속 거역한다면 주님은 심판을 멈추지 않습니다.
시편 106편 24-27저희가 낙토를 멸시하며 그 말씀을 믿지 아니하고저희 장막에서 원망하며 여호와의 말씀을 청종치 아니하였도다 이러므로 저가 맹세하시기를 저희로 광야에 엎더지게 하고또 그 후손을 열방 중에 엎드러뜨리며 각지에 흩어지게 하리라 하셨도다
이스라엘이 낙토를 멸시했다, 낙토는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이었다. 가나안 땅은 천국을 상징한다. 그들이 가나안 땅에 들어갈 소망을 갖지않고 장막 안에서 원망했다.
오늘날 천국의 소망을 갖지 않고, 교회 안에서 주님을 원망하는 자들이다. 주님이 맹세하기를 너희는 광야에서 엎드러지리라.
광야 길 가면서 멸망하는 것은 신앙생활하면서 멸망하는 것이다. 예수 피로 구속받은 자들이 왜 이렇게 멸망하는가?
주님의 말씀에 불순종하고, 회개하지 않기 때문이다.
교인들이 주님의 은혜에 감사치 않고, 남을 미워하며 ,자기 욕심대로 행하는 것이 주님을 거역하는 것이다. 성령으로 시작했다가 육체로 마치는 교인들이 많다. 구속함을 받은 자가 불순종하고 회개하지 않을 경우에 다 멸망하는 것이다.
시편 106편 29-29저희가 또 바알브올과 연합하여 죽은 자에게 제사한 음식을 먹어서그 행위로 주를 격노케 함을 인하여 재앙이 그 중에 유행하였도다
오늘날 교회서 가장 큰 문제는 죽은자를 위해 추도, 장례예배드리는 것이다. 구속받은 이스라엘이 죽은자에게 제사한 음식을 얻어먹고 죽었다. 주님이 그들에게 노를 폭발하셨습니다.
재앙이 쏟아지고 극한 유행병이 온 백성에게 돌았습니다.
어찌하여 이런 성경 말씀을 읽으면서도 죽은 조상을 위해 추도, 장례예배드리고 제사지낸 음식들을 나눠먹는가? 성경 말씀을 읽었으면 깨닫고 순종해야 한다.
구속(救贖)과 구원(救援)이 별개인가? 김세윤 박사의 구원론에 관하여
성경은 그리스도가 택자의 죄를 위해 ‘단 한 번 속죄 제사’를 드림으로 ‘그의 원죄(original sin, 原罪)’ 그리고
‘그의 과거·현재·미래의 모든 자범죄(actual sin, 自犯罪)’를 다 구속(救贖)했으며, 그 결과 그가 구원(救援)받는다고
가르친다.
그런데 이를 반대하는 이들이 있다. 그들은 ‘구속(redemption, 救贖)’과 ‘구원(salvation, 救援)’을
연속선상에 두지 않고, 전혀 별개로 구분지어 그리스도의 구속을 입었다고 절로 다 구원받는 것은 아니며, 구속을 받아도 구원을 받지
못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구속받은 자’가 구원을 받을지 못 받을지에 대한 최종적인 판단은 그가 삶을 다 산 후에라야 결정된다고 한다. ‘로마가톨릭(Roman Catholicism)’을 비롯해 ‘안식교(Seventh Day Adventist Church)’ 등이
그렇게 가르친다(한국의 김세윤 박사 역시 이들의 견해를 추종하는 듯하다).
안식교 창시자 ‘엘렌 지 화잇(Ellen G. White)’의 ‘조사 심판론(調査審判論)’은 이들의 주장을 잘 대변해 준다. 이러한 그들의 주장의 배경엔 두 가지 논거가 있다.
◈ ‘구속’과 ‘구원’을 별개로 봄
그들은 ‘구속’은 ‘오직 그리스도의 주권 영역’이지만, ‘구원’은 ‘하나님의 영역인 동시에 인간의 영역’이라고 한다. 따라서 누가 ‘구속’을 받았다고 자동적으로 ‘구원’받는 것은 아니며, 사람에 따라 다 다르다고 한다.
그러나 성경은 ‘구속’도 ‘구원’도 다 ‘그리스도의 주권 영역’에 속한다고 가르친다. 또 그리스도가 택자를 ‘구속’만 해놓고
‘구원’은 인간에게 떠넘기질 않으며, 구속한 자들을 반드시 구원해 내신다고 한다. 다음 구절은 ‘구속’은 물론 ‘구원’도
‘사람의 일’이 아닌 ‘그리스도의 일’로 규정한다.
“그러면 이제 우리가 그 ‘피(구속, 엡 1:7)’를 인하여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더욱 그로 말미암아 진노하심에서
‘구원’을 얻을 것이니 곧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 아들의 죽으심(구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목되었은즉 화목된
자로서는 더욱 그의 살으심을 인하여 ‘구원’을 얻을 것이니라(롬 5:90-10).”
성경이 하나님을 ‘구속자(救贖者)’인 동시에 ‘구원자(救援者)’로 일컫는 것 역시 ‘구속’과 ‘구원’을 동일시 한데서 나온
결과물이다. “네가 열방의 젖을 빨며 열왕의 유방을 빨고 나 여호와는 네 구원자, 네 구속자, 야곱의 전능자인줄 알리라(사
60:16).”
실제로 성경은 어휘상 ‘구속’과 ‘구원’을 동일시하기까지 한다. 영어번역에서도 구속(redemption, 救贖)을
구원(salvation, 救援)으로, ‘구원(salvation, 救援)을 구속(redemption, 救贖)으로 서로 혼용한다.
물론 '구원의 서정(Order of Salvation)’에선 논리상 ‘구속’이 앞에 위치하고 ‘구원’이 마지막에 존치되지만,
실제로 둘은 동일선상 위에 있으며 ‘시간차(時間差)’가 없다. 이는 ‘구속’의 효과가 최종의 ‘구원’에까지 지속적인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또한 값으로 사서 소유한다’는 ‘구속(救贖)’이라는 말 자체에 이미 ‘구원’개념이 함의 돼 있다. ‘구속을 받아 하나님의 소유가 된 자’는 그의 절대적인 주권과 보호아래 있어 그의 구원이 실패할 수 없기 때문이다.
“너는 두려워 말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사 43:1)”. “산들이
예루살렘을 두름과 같이 여호와께서 그 백성을 지금부터 영원까지 두르시리로다(시 125:2)”. “주께서 나를 모든 악한 일에서
건져내시고 또 그의 천국에 들어가도록 구원하시리니 그에게 영광이 세세 무궁토록 있을찌어다 아멘(딤후 4:18).”
◈시간을 과거·현재·미래로 구분함
그들은 ‘구원의 확신(confidence of salvation)’을 주장하는 이들을 비합리적이라고 비난한다. 그에 대한
그들의 논거는 ‘구원’은 인생 최후에 결정되는데, ‘구속’만 받아놓고 아직 맞닥뜨리지 않은 미래를 앞당겨 ‘구원'을 미리 예단할 순
없다는 것이다.
설사 누가 이제껏 ‘자신의 구원을 확신’할 만큼 완전한 삶을 살았더라도, 아직 그에겐 도래하지 않은 미래가 남아 있으며, 그
미래가 어떻게 전개될지 아무도 모른다. 예컨대 그가 어떤 심대한 도덕적인 타락을 할지 혹은 배교하고 하나님을 떠날지 모른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런 가변적인 미증유(未曾有)의 미래를 가진 사람이 자신의 구원에 대해 확신을 갖는 것은 ‘미신’에 가깝다고 그들은 생각한다.
그러나 우리는 오히려 그들이 이렇게 시간을 ‘과거·현재·미래’로 나누어, 그것들이 마치 단절된 불연속선(Iine of discontinuity, 不連續線)상에 있는 것처럼 만드는 그들의 논거가 비과학적이라고 말하고 싶다.
이는 시간이란 그렇게 무우 자르듯 토막 낼 수 없기 때문이다. 시계 초침이 ‘째깍’하는 순간 ‘현재’는 이미 ‘과거’로 넘겨지고, 과거로 넘겨진 ‘현재의 공석(空席)’에 ‘미래’가 곧 바로 들어와 또아리를 튼다.
이런 점에서 ‘현재 없는 미래만의 미래, 미래 없는 현재만의 현재는 없다’고 함이 옳으며, 그 사람의 ‘과거·현재·미래’를 토막내 그의 신앙을 평가한다는 것은 지극히 비지성적이고 위험하다.
그가 지금 그리스도를 믿고 있다면 곧바로 현재로 유입될 미래에도 그를 믿을 것을 예단할 수 있다. 아니 ‘구속의 효력(the effect of redemption)’이 그로 하여금 계속 믿음을 견지토록 한다는 것이 더 정확하다.
설사 그에게 일시적인 ‘도덕적 타락과 배교’가 있을지라도 그가 받은 구속과 그의 믿음은 무효화되지 않고 ‘회개와 새 출발’을 가능케 하며, 구원에 대한 확신도 여전히 견지할 수 있게 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리스도의 구속’이 ‘과거·현재·미래를 관통한 영원 속에서 성취됐다’는 사실에서 ‘구원의 확신’은 더
‘설득의 근거’를 갖는다. 자기가 기여한 것이 없는 ‘자신의 원죄’를 소급해 속(贖)할 수 있다면, 아직 맞닥뜨리지 않는 ‘미래의
자범죄’를 앞당겨 속(贖)하지 못할 이유가 없다.
“이를 인하여 그는 새 언약의 중보니 이는 첫 언약 때에 범한 죄를 속하려고 죽으사 부르심을 입은 자로 하여금 영원한 기업의 약속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히 9:15).”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조상의 유전한 망령된 행실에서 구속’된 것은 은이나 금 같이 없어질 것으로 한 것이 아니요 오직 흠 없고 점 없는 어린양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한 것이니라(벧전 1:18-19).”
“염소와 송아지의 피로 아니하고 오직 자기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사 단번에 성소에 들어 가셨느니라(히 9:12).”
‘오직 자기(그리스도의)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뤘다’는 말은 ‘그리스도의 피의 속죄의 효력이 완전하고 영원하다’는 뜻과 함께 ‘택자의 과거·현재·미래의 모든 죄를 다 속했다’는 뜻이기도 하다.
사도 바울도 ‘구원’에 ‘과거, 현재, 미래의 죄’를 동시에 다 포함시켰다. “하나님이 그처럼 큰 죽음의 위험에서 우리를 건져 주셨으니 앞으로도 건져 주실 것이며 또 건져 주시리라 믿습니다(고후 1:10).”
이는 다만 ‘현세의 환난에서의 구원’에 한정하지 않고, ‘구속사적(救贖事的)인 구원’까지 다 함의한다.
호크마(Chokmah) 주석은 이 구절을 “하나님은 자신을 의지하는 자를 구원하시되 시간과 횟수에 제한 없이 영원히 보살피신다”고
해석했다.
‘그리스도의 속죄의 영원성’에 대한 다음의 한 신학자의 말 역시 적절해 보인다. “십자가에서 흘리신 그리스도의 피는 영원한
속죄다. 하나님은 영이시기에 영 안에는 과거 현재 미래의 시간이 없고 영원한 현재 뿐이다. 시간의 흐름 안에서 시간을 느끼고 사는
것은 육체를 입고 있는 동안이다. 영 안에서 과거 현재 미래의 모든 죄가 영단번에 사함을 받았다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진리다.”
구원을 베푸시는 하나님의 은혜(창세기 6:5~8)
여호와께서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가득함과 그의 마음으로 생각하는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 땅 위에 사람
지으셨음을 한탄하사 마음에 근심하시고, 이르시되 내가 창조한 사람을 내가 지면에서 쓸어버리되 사람으로부터 가축과 기는 것과 공중의
새까지 그리하리니 이는 내가 그것들을 지었음을 한탄함이니라 하시니라. 그러나 노아는 여호와께 은혜를 입었더라.
로마서 5:17 한 사람의 범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그 한 사람을 통하여 왕 노릇 하였은즉 더욱 은혜와 의의 선물을 넘치게 받는 자들은 한 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생명 안에서 왕 노릇 하느니라.
1. 축복의 원천인 은혜
성경과 기독교 신학은 하나님의 은혜가 모든 물질적이고 영적인 축복의 원천이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이 귀한 은혜를
거저 주십니다. 실상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은 하나님이 주신 은혜에 의해 존재합니다. 성경에서 이 은혜는 거저 주시는 선물로
표현됩니다. 따져 보면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은 온통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은 것입니다. 예를 들어 우리를 이 땅에 사는 데에
가장 필수적인 빛과 공기와 물 등은 모두 하나님이 우리에게 거저 주신 것들입니다. 실로 거저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없다면 생명 그
자체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성경에는 값없이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와 관련된 단어들이 많습니다. 그런데 사용된 은혜라는 의미의 단어들은 모두 하나님의 선하심과 자비의 은총과 관련이 있습니다.
구약에서 약 250회나 사용된 ‘헤세드’는 ‘인자하심’이요 ‘은총과 은혜’로 번역되었습니다. 이 단어를 가지고 70인 역은
헬라어로 ‘엘레오스’라고 하였습니다. 이 단어는 특히 긴급히 도움이 필요한 자들을 돌보실 때 등장합니다.
예를 들어 욥이 심히
낙심하고 있을 때 하나님이 그에게 친절을 베푸셨다고 할 때 ‘친절’의 단어가 곧 ‘헤세드’이고 또 다윗이 대적에 의해 가난하고
궁핍하고 금식으로 인하여 육체가 수척하실 때 하나님이 ‘헤세드’(인자)를 베푸셨다고 하셨습니다.
'헨’이 있는데(약 65회 사용) 이는 ‘매력’, 또는 ‘아름다움’이라는 뜻인데 그 주된 의미는 주로 ‘높은 자가 낮은 자에게 내려주는 ’은총‘으로서 이 은총의 행위를 가장 아름답다고 고백한 것입니다.
‘아헤브’가 있는데 이 단어는 하나님의 족장들이나 이스라엘의 믿는 자들, 특히 야곱이나 솔로몬 등 개인을 사랑하신다고 할
때 사용된 단어로서 학자들은 이 단어를 두고 구속용어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은 신명기 5:10에서 “나를 사랑하고 내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는 천 대까지 은혜를 베푸느니라”고 약속하셨습니다. 이것이 텍함 받은 주의 백성들에게 베푸시는 하나님의 ‘아헤브’입니다.
‘라함’이라는 단어는 ‘불쌍히 여기다’는 뜻으로 사용되었는데, 주로 심판을 유보하실 때(신 13:7, 왕하
13:23), 용서하시고 긍휼을 베푸실 때(사 55:7), 이스라엘을 자기 땅으로 회복하실 때(신 30:3, 왕하 13:23)
사용되었습니다.
바울서신에서는 ‘은혜’ 즉, ‘카리스’라는 단어가 약 155회 정도 등장하는데 생명과 구원 모두가 하나님의 한없는 선하심과
은총에 뿌리를 두고 있음을 나타냅니다.
이 모두 구원받을 자격이 없는 자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불쌍히 여기시고 무조건적인 은혜,
불가항력적인 은혜를 베푸신다는 뜻으로 사용하였습니다.
즉, ‘카리스’는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버려진 죄인들에게 베푸시는
값없는 은총이나 자비로운 인자라는 뜻입니다.
“한 사람의 범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그 한 사람을 통하여 왕 노릇 하였은 즉 더욱 은혜와 의의 선물을 넘치게 받는 자들은 한 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생명 안에서 왕 노릇 하느니라”(로마서 5:17)
무엇보다 복음서에는 그리스도의 출현 자체가 가장 크신 하나님의 은혜요 이 은혜가 곧 예수 그리스도의 본체임을 시사합니다. 사도 요한은 주님의 본질에 대해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요한복음 1:14)
그렇다면 이 많은 하나님의 은혜 중에서 가장 고귀하고 위대한 은혜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구원에 관한 은혜입니다. 지옥에 갈
영혼을 구원하여 천국에서 영생을 누리게 하는 것보다 더 놀랍고 위대한 은혜는 없습니다. 물에 빠져 죽을 순간에 처한 사람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한 끼의 식사 대접이 아닙니다. 까마득한 낭떠러지에 매달려 언제 추락할지 모르는 사람에게 가장 필요한 한 것은
구원의 밧줄입니다. 모든 위기에 처한 사람은 구원을 필요로 합니다. 그들에게 쓸데없이 적합하지 않은 소리를 하는 것은 은혜가
아니라 조롱이요 놀리는 것입니다. 오히려 화를 내게 만드는 일입니다. 그들을 돕기를 원한다면 그들이 가장 원하는 것, 즉 당장
위험에서 구출하는 일입니다. 그만큼 사망에 처한 죄인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입니다.
우리는 지난 시간 동안 인간이 얼마나 타락했고 망가진 존재로 전락했는지 성경을 통해 알게 되었습니다. 범죄 한 결과 인간은
모두 죄인이 되었고 죄인이 가야 하는 곳은 지옥이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죄인의 유일한 살길은 하나님으로부터 구원의
은혜를 입는 일입니다. 하나님이 은혜의 선물로 주시는 구원을 감사하게 받는 것입니다. 그 구원의 선물이 예수 그리스도이심을 믿으면
됩니다. 그 믿음으로 회심하고 거듭나서 새로운 피조물이 되어 영원히 하나님의 자녀요,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위대한 교부 어거스틴은 하나님의 은혜를 구속의 능력과 동일시했습니다. 이 말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시는
궁극적 목적이 우리의 구원을 위한 것이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구원을 위해 하나님은 모든 자연 만물을 운행하시고 통치하시고
구속하시고 섭리하십니다. 다시 말해, 해와 달이 뜨고 지고, 지구가 자전과 공전을 하고 꽃이 피고 지고, 바람이 불고 구름이
솟아나고 바닷물결이 출렁거리는 것이 죄인의 눈에는 그저 생기는 것 같지만 이 모두가 하나님의 자녀들을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은혜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참 이상한 소리 같지만 아침에 닭이 ‘꼬끼오’하고 우는 것도 우리 구원을 위한 은혜의 소리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특별은혜(이사야 63:7 ~ 14)
내가 여호와께서 우리에게 베푸신 모든 자비와 그의 찬송을 말하며 그의 사랑을 따라 그의 많은 자비(헤세드)를 따라 이스라엘
집에 베푸신 큰 은총을 말하리라. 그들의 모든 환난에 동참하사 자기 앞의 사자로 하여금 그들을 구원하시며 그의 사랑과 그의
자비로 그들을 구원하시고 옛적 모든 날에 그들을 드시며 안으셨으나, 그들이 반역하여 주의 성령을 근심하게 하였으므로 그가 돌이켜
그들의 대적이 되사 친히 그들을 치셨더니, 백성이 옛적 모세의 때를 기억하여 이르되 백성과 양 떼의 목자를 바다에서 올라오게 하신
이가 이제 어디 계시냐 그들 가운데에 성령을 두신 이가 이제 어디 계시냐. 그의 영광의 팔이 모세의 오른손을 이끄시며 그의
이름을 영원하게 하려 하사 그들 앞에서 물을 갈라지게 하시고, 그들을 깊음으로 인도하시되 광야에 있는 말 같이 넘어지지 않게 하신
이사 이제 어디 계시냐. 여호와의 영이 그들을 골짜기로 내려가는 가축같이 편히 쉬게 하셨도다 주께서 이와 같이 주의 백성을
인도하사 이름을 영화롭게 하셨나이다 하였느니라.
히브리서 6:9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이같이 말하나 너희에게는 이보다 더 좋은 것 곧 구원에 속한 것이 있음을 확신하노라.
1. 특별은혜가 왜 특별합니까?
하나님의 은혜를 되새기자면 두 가지 은혜가 있다고 하였습니다. 우선
하나님은 인간의 안에는 양심이라고 부르는 도덕법을 심어두셨고, 인간 밖에는 자연과 역사를 통해 하나님에 대한 기초적인 지식을
얻도록 조치했습니다. 이것을 일반은혜라 부릅니다.
그런데 범죄한 인간은 즉시 하나님에 대한 지식에 어두워졌을 뿐 아니라 그런
지식을 곧바로 거부하거나 왜곡하고(롬 1:18, 21~23, 28) 하나님 대신에 우상을 경배합니다. 그리고 죄인은 자신의 구원에
대한 필요와 지식을 모두 상실한 채 영적인 어둠에 갇혀 살아갈 뿐입니다.
그래서 이런 죄인을 구원하기 위해 하나님의 특별한
조치가 필요했는데 이것을 우리는 특별은혜라 부릅니다. 이로 보아 하나님의 일반적인 은혜가 죄인을 구원하는 것이 아님을 성경이
명백히 증언하고 있음을 알게 됩니다.
그런데 이 특별은혜에 대해 잘못 생각하는 사람들의 주장들을 알아봅니다. 어떤 신학자들은 기독교 이외의 종교에서도 구원하는
은혜가 작용한다고 주장합니다. 이들은 정의롭고 공평하신 하나님은 자신이 창조한 모든 세계와 존재들에 대해 동일한 은혜를 내려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가령, 보편구원론자인 돈 리처드슨(Don Richardson)같은 이는 “멜기세덱과 아브라함 이전의 모든
경건한 사람들(아담, 에녹, 노아 등)은 오직 일반은혜만을 소유했고 일반계시의 빛으로 구원받았다”고 말합니다.
그들은 “사람이
그리스도와 복음에 대한 명확한 지식이 없이도 자연의 빛과 그들의 문화 속에 심겨진 모든 은혜로 인해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렇게 말씀하지 않습니다. 성경은 아담과 하와와 에녹과 노아 등이 하나님의 특별은혜를 받았음을
증언합니다. 아담과 하와는 비록 죄를 지었지만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를 입어 ‘가죽옷의 보호’(창 3:21)를 받았습니다. 에녹은
300년을 하나님과 동행한 뒤에 승천하였고(창 5:24), 노아는 특별한 하나님의 은혜를 입었습니다(창 6:8).
이 모든
사례들이 범죄한 죄인을 구원하신 하나님의 특별은혜를 증언합니다.
이에 오늘은 구원을 베푸시는 하나님의 특별은혜에 대해 더 깊이 살펴보겠습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의 자녀에게 베푸시는 구원의 선물이 왜 특별한 은혜인가를 살펴보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특별은혜가 왜 특별한가를 알아봅니다.
첫째, 특별은혜는 무가치한 자들에게 드러난다는 점에서 특별합니다.
히브리어 헤세드나, 헨, 아헤브, 라함 그리고 헬라어 카리스는 근본적으로 하나님이 죄인들에게 베푸시는 값없는 은총을
뜻합니다. 죄인이란 하나님 앞에서 무가치한 자들이며 하나님의 나라에 살 수 없는 자들입니다. 하나님의 나라에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함을 받아 거룩한 자들이 영생을 누리는 곳입니다. 우리는 성경의 기록을 통해 거듭나지 않은 백성들이 하나님을 대적했음을
압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인자와 긍휼과 관대한 사랑으로 우리를 위하셨습니다. 이 사랑을 사도 바울은 ‘큰 사랑’(아가페)라고
표현했습니다.
“긍휼(엘레오스)이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아가페)을 인하여,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너희는 은혜로 구원을 받은 것이라)”(엡 2:4~5)
~ (파피루스로 된 필사본 중 가장 낡은 것이 125년경의 P52가 있고, 현존하는 98개 파피루스 필사본 중 2세기경의
것으로 P90, P98 등이 있고 나머지는 3세기에서 8세기 사이에 제작된 것으로 본다. 파피루스는 수명이 길지 않았기에 오래된
것은 낡아지고 사본 간에도 차이가 나고 불일치가 나면서 원본과 같은 내용을 복원하기가 불가능해졌다. 성경의 ( )안의 내용은 사본
간의 이런 차이를 반영한 것이다)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자비하심(크레스토테스)으로써 그 은혜(카리스)의 지극히 풍성함을 오는 여러 세대에 나타내려 하심이라”(7)
둘째, 특별은혜는 받을 자격이 없는 자들에게 베푸심으로 특별합니다.
이 세상에 구원받을 자격을 갖추어 구원을 받은 백성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 전적으로 타락한 인간에겐 구원을 획득할 능력도
없고 의지도 없습니다. 의지가 없다는 것은 구원을 바라지도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저 숨 쉬며 기동하고 생존하며 이 땅에서의 삶을
즐기다 지옥으로 가는 것입니다. 더 기막힌 것은 그가 이 땅에서 살면서 하는 모든 일은 결국 하나님을 대적하고 악업만 쌓다가
간다는 것입니다. 누군가 회사를 위해 열심히 일했는데 결과적으로 그 일이 우리 회사를 위한 것이 아니라 남의 회사를 위한
일이었다면 누가 그를 잘했다고 인정합니까? 가장 중요한 것은 내가 하는 일이 하나님과 하나님의 나라를 위한 것이 아니라면 아무런
소용이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바로 이런 무자격자에게 은혜를 주시어 그가 하는 모든 일이 하나님의 영광이 되도록 하신다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 놀라운 은혜를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롬 3:24)
셋째, 특별은혜는 하나님의 선물이라는 점에서 특별합니다.
하나님은 죄인을 구원하기 위해 자기 자신을 우리에게 선물로 주셨습니다. 그분이 바로 주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러므로 최고의 카리스는 예수님이십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선물과 또 네게 물을 달라 하는 이가 누구인 줄 알았더라며 네가 그에게 구하였을 것이요 그가 생수를 네게 주었으리라”(요 4:10)
“그러나 이 은사는 그 범죄와 같지 아니하나니 곧 한 사람의 범죄를 인하여 많은 사람이 죽었은즉 더욱 하나님의 은혜와 또한 한 사람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말미암은 선물은 많은 사람에게 넘쳤느니라”(롬 5:15)
넷째, 특별은혜는 구속받은 사람 안에서 특별한 능력으로 나타나기에 특별합니다.
특별은혜는 구원받은 백성들의 인생을 180도로 바뀌게 합니다. 성령은 거듭난 사람 안에 함께 내주하면서 이 인생으로 하여금
이전과는 전혀 다른 목적을 가지고 살도록 인도하십니다. 죄와 마귀를 섬기던 옛날 방식을 포기하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삶으로
변화됩니다. 조금씩 거룩한 삶의 자리로 이끄시며 그리스도의 형상으로 변화시킵니다. 정말로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화난 얼굴, 짜증
내던 습관, 고함치고 불친절한 말투와 태도가 바뀌어 집니다. 전에는 조금만 지적하고 찔러도 금새 얼굴이 벌개지고 경직되고 불편해
했지만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를 받은 사람은 이 모든 공격과 반대와 조롱과 지적에도 굴하지 않고 다만 평화롭게, 여유롭고 차분하게
대응하는 능력으로 오직 그리스도를 나타내려 애를 씁니다. 바울 사도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구원을 베푸시는 하나님의 은혜
2. 두 개의 은혜
신학적으로 이 구원의 은혜는 크게 둘로 나누어집니다. 하나는 일반은혜이고 다른 하나는 특별은혜입니다.
무엇이 ‘일반은혜’입니까? 하나님은 그 선하심과 자비하심으로 자연의 변화를 유지하십니다. 해가 뜨고 달이 뜨고 하는 것이
모두 하나님의 섭리에서 움직인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 자연을 통해 우리에게 다양한 먹거리를 제공하십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이성의 능력을 이용하시어 과학 문명을 창달케 하시어 우리가 문명의 생활을 하도록 도우십니다. 인간이 아름다운 노래를 즐겨하고 시를
짓고 예술 활동을 하는 것 모두가 하나님이 우리에게 베푸시는 일반은혜의 결과입니다. 이 일반은혜가 없다면 이 지구상에 생명체는
존재하지 않을 것입니다.
한편으로 하나님은 노예가 된 인간이 자신의 능력으로 하나님께로 돌아가지 못한다는 것을 아시고 죄인에 대해 특별한 은혜를
베푸시어 죄인으로 하여금 스스로 순종하고 회심하여 하나님에게로 나아오도록 돕습니다. 이것을 ‘특별은혜’라 부릅니다. 우리는
우리에게 운명적으로 주어진 원죄가 우리를 무력하게 만들었음을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거듭나지 않은 인간 본성은 물려받은 원죄로 인해
부패되고 타락하여 하나님이 은혜로 능력을 주지 않으시면 그리스도께로 올 능력이 없습니다. 이에 대해 어거스틴은 “인간의 의지는
자유를 통해 은혜를 얻을 수 없고, 다만 은혜를 통해서 자유를 얻을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Admonition and
Grace/ 훈계와 은혜).
그는 이 은혜가 ‘특별은혜’로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성령께서 주시는 하나님의 선물이며, 새로운
능력이라고 했습니다. 무엇보다 특별은혜는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사실을 믿도록 역사합니다. “믿음은 들음에서 난다”(롬
10:12)고 하였듯이 하나님의 말씀이 귀에 들리도록 성령께서 역사하시는데 이것이 신자에게 구원을 적용하시는 특별한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은혜가 무엇입니까?
은혜는 죽은 자를 살리는 일입니다. 병든 자를 치유하는 일입니다. 슬픔과 절망에 빠진 자에게 기쁨을 주고 소망을 심어 주어
다시 살겠다는 의지를 북돋우는 일입니다. 무엇보다 은혜는 사망의 감옥에서 죄인을 자유롭게 하여 그리스도를 믿게 하고 성령의 세례를
통해 거듭나게 하여 하나님에게로 나아오게 하는 특별한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이 은혜를 받은 자보다 더 큰 선물을 받은 사람은
없습니다.
한편으로 이 은혜의 감격은 경험해 보지 못한 사람에게 허공에 떠도는 빈말일 뿐일 것입니다. 마치 어린아이에게 진리의 깨달음을
아무리 강조하고 설명해도 아이는 눈만 껌벅거린 채 무슨 영문인지 모를 것입니다. ‘소귀에 경 읽기(우이독경)’일 것입니다.
그러므로 무엇보다 먼저 간구해야 할 것은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가 정말로 은혜이고 선물인지 믿어지게 해 달라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3. 은혜의 몇 가지 특징들
위의 내용을 바탕으로 살펴보면 은혜에는 몇 가지 특징이 있습니다.
첫째, 은혜는 값없이 주어집니다. 세미 펠라기우스주의자들은 하나님의 은혜는 죄인이 행한 덕있는 행동에 대한 보답으로
주어진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는 인간의 공로에 따라 임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은혜는 더 이상 은혜가 아닙니다.
은혜는 값없이 주어지기 때문에 은혜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엡 2:8)
둘째, 은혜는 효력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은혜를 주시기로 특정한 사람들을 창세 전에 택하여 두셨습니다. 특정한
사람에게 은총을 주시기로 작정하신 하나님의 뜻은 결코 중단되지 않습니다. 인간의 모든 의지는 하나님의 뜻하시는 바대로 기울고
움직이게 하십니다. 이 은혜의 가르침을 받은 사람은 실제로 그리스도에게로 나아옵니다. 노아 시대에 모든 사람이 패역하고 방탕한
삶을 살아갈 때 오직 의인 노아만 택함을 입어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 구원을 얻었습니다. 하나님은 노아를 창세전에 택하시어 그를
통해 인류를 새롭게 하시려고 은혜를 베푸셨습니다. 오늘 본문 창세기 본문이 이를 증명합니다. 다시 읽어봅니다.
“여호와께서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가득함과 그의 마음으로 생각하는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 땅 위에 사람
지으셨음을 한탄하사 마음에 근심하시고, 이르시되 내가 창조한 사람을 내가 지면에서 쓸어버리되 사람으로부터 가축과 기는 것과 공중의
새까지 그리하리니 이는 내가 그것들을 지었음을 한탄함이니라 하시니라. 그러나 노아는 여호와께 은혜를 입었더라”(창 6:5~8)
셋째, 하나님의 은혜는 매우 은밀하게 임합니다. 하나님의 역사하심은 인간의 능력으로 가늠하지 못합니다. 시련을 거친 욥에게 나타난 하나님은 인간의 생각과 행함이 하나님에 비해 얼마나 턱없이 부족하고 모자라고 무능력한 것임을 깨닫게 하셨습니다.
“무지한 말로 생각을 어둡게 하는 자가 누구냐. 너는 대장부처럼 허리를 묶고 내가 네게 묻는 것을 대답할지니라. 내가 땅의
기초를 놓을 때 네가 어디 있었느냐 네가 깨달아 알았거든 말할지니라. 누가 그것의 도량법을 정하였는지 누가 그 줄을 그것의 위에
띄었는지 네가 아느냐, 그것의 주추는 무엇 위에 세웠으며 그 모퉁이 돌을 누가 놓았느냐”(욥 38:2~6)
그런데 이 엄청난 역사하심이 인간에게는 비밀하게 임하고 알려지지 않도록 하셨다는 것입니다. 인간이라면 자신이 한 일을
알아주지 않는다고 토라지고, 자신의 한 일을 부풀려서 어떻게 하든지 ‘이것은 내가 한 일이다’고 소리치며 자랑하는 것이 속성인데
하나님은 이 모든 우주 역사를 창조하시고도 전혀 내색을 하시지 않으신다는 말입니다. 우리의 자랑이 얼마나 헛되고 헛된 것인지
깨달아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이렇게 진술했습니다.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풍성함이여, 그의 판단은 헤아리지 못할 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 누가 주의 마음을 알았느냐 누가 그의 모사가 되었느냐. 누가 주께 먼저 드려서 갚으심을 받겠느냐”(롬 11:33~35)
이러한 은혜의 역사하심에 대해 어거스틴은 ‘인도하는(preventing) 은혜’와 ‘따르는(subsequent) 은혜’, ‘시작하는(operating) 은혜’, ‘협력하는(cooperating) 은혜’로 나누어 생각했습니다.
1) 인도한다는 것은 하나님이 죄인의 심령을 성령으로 변화시키심으로 죄인의 필요를 자비롭게 미리 만족시켜 주시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것은 죄인을 영적으로 치유하고 새 생명을 주시는 은혜입니다.
“나의 하나님이 그의 인자하심으로 나를 영접하시며 하나님이 나의 원수가 보응 받는 것을 내가 보게 하시리이다”(시59:10)
2) 따르는 은혜란, 그리스도인이 의롭게 사는 것을 가능케 하는 은혜입니다. 그것은 죄의 오염에서 자유롭게 해 주고 그리스도인의 성장을 촉진하는 은혜입니다.
“내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반드시 나를 따르리니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살리로다 ”(시23:6)
3) 시작하는 은혜는 하나님이 거듭나지 않은 자의 영혼에 그들의 협조 없이 새로운 생명을 불어넣으시는 것을 말합니다.
“너희 안에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 우리는 확신하노라”(빌 1:6)
4) 협력하는 은혜란 성령께서 거듭난 자가 그리스도인의 삶의 규율에 따라 뜻하고 행동하도록 도우시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나 있을 때뿐 아니라 더욱 지금 나 없을 때에도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빌 2:12~13)
4. 결어
종교개혁가인 마르틴 루터는 인간 본성의 능력에 대한 유명론과 세미 펠라기우스주의의 낙관론에 날카롭게 반대했습니다. 그는
불신자가 자유롭게 자기 의지를 발휘해서 하나님을 사랑하고 율법을 지키며 그로서 구원의 은혜를 받을 자격을 가질 수 있다는 견해를
배격했습니다. 그는 “타락한 인간은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거부감과 하나님에 대한 적대감 이외 가진 것이 없다”고 갈파했습니다.
불신자의 의지는 오직 죄를 짓는 것 이외는 아무 것도 없습니다. 그가 이 땅에서 아무리 열심히 살고, 노력하고 자신이 세운
목표를 성취하고 이룬다 해도 하나님 나라에서 그가 한 일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래서 전도서 기자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전도자가 이르되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해 아래에서 수고하는 모든 수고가 사람에게 무엇이 유익한가”(전 1:2~3)
“마음을 다하며 지혜를 써서 하늘 아래에서 행하는 모든 일을 연구하며 살핀즉 이는 괴로운 것이니 하나님이 인생들에게 주사
수고하게 하신 것이라, 내가 해 아래에서 행하는 모든 일을 보았노라 보라 모두 다 헛되어 바람을 잡으려는
것이로다”(1:13~!4)
우리 인생에서 유일하게 유의미하고 영원한 것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뿐입니다. 이 은혜가 아니면 우리 인생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이 은혜는 하나님의 주권적인 선물이기에 인간의 선의나 공로 따위가 개입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은혜 베풀 자에게 은혜를 베푸시고
징계를 행할 자에게 징계를 내리십니다. 하나님은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를 미워하시는 분이십니다. 오직 하나님에게만 그럴 자격이
있는 것입니다.
이 신비하고 놀랍고 비밀한 하나님의 은혜에 의해 우리가 숨 쉬고 살고 기동하고 생동하며 희로애락을 가지며 존재하는 것입니다.
무엇보다 가장 큰 은혜는 정말로 부질없는 이 인생, 나무토막 같은 이 보잘것없고 무의미한 인 인생을 그리스도의 피 흘리심과
구속하심과 죄 사함과 새 생명을 주심과 영생 복락의 축복하심의 은혜입니다. 저주받은 인생을 축복으로 바꾸어 주신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할 뿐입니다. 이 감사의 마음을 가지고 사도 바울의 고백을 기억하면서 평생토록 가슴에 담아두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한 것이 아니요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고전 15:10)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너희에게 있을지어다”(롬 16:20)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액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고후 12:9)
다섯째, 특별은혜는 믿음을 주시고 구원을 받게 하시므로 특별한 은혜입니다.
진짜 은혜는 지옥에 가는 길을 멈추고 천국으로 발길을 돌리게 하는 은혜입니다. 하나님의 구원은 마치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천
길 낭떠러지를 향해 질주하는 차량을 안전한 길로 되돌리는 것과 같습니다. 사도 바울은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엡 2:8)라고 했고 구원받은 상태를 “너희가 법 아래(히포 노몬)에 있지 않고 은혜 아래(히포
카린)에 있음이니라”(롬 6;14)고 했습니다. 그리하여 구원받은 이들로 하여금 “그리스도 안에서 영원한 영광”에 거하도록
하였습니다(벧전 5:10). 그러므로 하나님의 은혜는 하나님의 모든 속성을 포함한 하나님에 대한 유일하고 절대적이며 거대한
담론입니다.
■ 로마서
1. 책 제목
헬라어 본문에는 ‘프로스 로마이우스’(προς Ρωμαιους: 로마에 있는)라는 표제어로 되어 있다. 이 책은 바울서신으로 수신자가 로마교인들이었으므로 한글성경에서는 바울서신의 일반적인 제목에 따라 ‘로마서’로 불린다.
2. 기록자와 연대
1) 기록자
본서의 기록자가 바울이라는 사실에 대해서는 본서 저술 당시부터 거의 의심된 바 없다. 본서의 초두에서 기록자 자신이 바울임을 밝힌
것이나(1:1) 초대 교부들의 증언(이레네우스,이그나티우스,로마의 클레멘트 등), 본서에서 사용된 문체나 내용 그리고 성격 등이
바울의 다른 서신들과 유사함을 보아서도 본서 기록자가 바울이라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다만 본서의 끝부분의 두 장 곧 15,
16장이 바울의 것인지에 대해 약간의 논란이 있었으나 약 300여 개에 이르는 로마서 사본 등 대부분의 권위있는 사본들이 이
부분을 포함하고 있으며 후에 삽입되었다는 중거를 보여 주지 않고 있는 것으로 보아 이 약시 바울의 글임이 분명하다. 그러나 본서는
바울이 직접 기록한 것이 아니라 더디오에 의해 대필되었다(16:22).
한편 기록자 바울은 소아시아의 길리기아 평원에 위치한 다소에서 출생한 베냐민 지파 출신이며 매우 엄격한 바리새파 스승인 가말리엘
문하에서 교육을 받았다. 이러한 교육적 배경 때문에 기독교로 개종한 후에 바울은 그리스도의 복음과 율법과의 관계에 대해 누구보다 더
명료하게 설파할 수 있었을 뿐만 아니라 체계적이고 논리적인 글들을 쓸 수 있었다. 바울의 여러 서신 가운데 특히 로마서는 그러한
바울의 역량이 잘 드러난 책이라고 볼 수 있다.
2) 기록연대
본서의 기록 연대는 신약의 다른 책들과는 달리 비교적 정확하게 확인할 수 있다. 먼저 15:19을 보면 바울이 제3차 전도
여행(A.D.53-57)을 거의 끝마치고 예루살렘으로 돌아오던 중 한 곳에서 본서를 기록하였음을 알 수 있다. 한편 바울은 여러 번
로마를 방문할 계획을 세웠으나 번번히 사정이 생겨서 가지 못하였는데 본서를 기록할 당시에도 로마로 가려는 마음은 있었으나 곧바로
가지 못하고 마게도냐와 아가야에서 예루살렘의 ‘가난한 성도들’을 위하여 모금함 연보를 먼저 예루살렘으로 가져가려고 준비하던
중이었다(15:22-29). 이 사실의 배경이 되고있는 고후 9장에 기록된 연보 기사 내용에 비추어 볼 때 본서는 고린도후서와
비슷한 시기에 기록되었음을 알 수 있다. 또 마게도냐에서의 바울의 사역과 이어 예루살렘을 방문하려는 계획이 기록된 행 20장의
기사와 또한 이러한 배경이 반영된 롬 15:22-29를 비교해 볼 때 본서는 바울의 제 5차 예루살렘 방문(A.D.58년) 직전에
기록된 것임을 알 수 있다. 즉 바울은 3차 전도 여행의 마지막 방문지인 고린도에 이르렀고 이곳에서 겨울을 맞아 항해를 재개하는
이듬해 봄까지 3개월을 기다려야 했으므로(행 20:3) 이 기간 동안 본서를 집필했던 것이다. 그렇다면 본서의 기록 시기는 대략
A.D.57년 후반기가 될 것이다.
3) 배경
본서의 일차적인 수신자들이 살았던 당시의 로마에는 사도들에 의해 직접 세워진 교회가 없었다. 단지 전쟁 포로 또는 상업 등의
이유로 로마에 머물게 된 유대인들과 로마인들을 비롯한 이방인들 중에서 그리스도를 믿게 된 성도들이 모여 자체적으로 교회를 이루러
신앙생활을 하고 있었을 뿐이다. (그러나 이 당시의 로마는 영국에서 아라비아까지 뻗어있는 대제국의 수도로서 교외 지역의 주민까지
포함해서 약 80만 명의 인구가 모여 사는 매우 거대한 도시였다. 뿐만 아니라 도시는 매우 부요했으며 세계적인 외교와 무역의
중심지였기 때문에 상인들의 출입이 끊이지 않았으며 세계 각지에서 몰려온 잡다한 종족들이 모여 살고 있었다. 이런 상황 속에서
로마에 있는 그리스도인 공동체는 자연스럽게 다음과 같은 대내외적인 문제점들에 봉착하기가 쉬웠다.)
먼저 내적인 문제들을 살펴보면 유대인 성도와 이방인 성도가 함께 섞여 있었던 그 공동체 구성원들간의 마찰이다. 여기서 첫째로
유대인 성도들에 문제가 있었다. 즉 유대인 성도들은 비록 예수를 구약에서 하나님이 약속하여 보내주신 메시야로 믿긴 했으나 여전히
구약 율법을 문자적으로 지켜야만 구원을 얻으며 이방인들이 구원을 얻기 위해서도 구약 율법을 지키지 않으면 안된다는 유대교
육법주의자들의 그릇된 구원관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이러한 그릇된 율법주의적 신앙관을 가진 유대인 성도들을 향하여
바울은 성도가 구원받게 된 것은 율법의 행위로가 아니라 오직 값없이 거저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와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임을 강하게
역설하고 싶었던 것이다.
둘째 그릇된 율법주의적 신앙관을 가진 유대인 성도들과는 반대로 이방인 성도들은 그리스도인의 자유를 지나치게 강조하여 참 자유가
아닌 방종에 이르는 것이 문제로 제기되었다. 즉 그들은 비록 개종하여 그리스도인이 되었지만 여전히 이방 풍습과 생활 습관을 그대로
가지고 있었으며, 또 그렇게 하는 것이 율법의 행위로가 아닌 믿음으로 구원을 얻은 성도들에게 있어서는 당연하다고 생각하였다.
이에 대하여 바울은 그러한 행위가 구원의 본질에 영향을 미치는 것은 아니지만 교회의 덕을 세우기 위하여 절제되어야 한다는
그리스도인의 자유의 적용 문제에 대하여 설파하였다. 그리고 그리스도인은 죄의 유혹에서 벗어나기 위하여 부단히 힘써야 할 것과 속히
썩어질 구습에서 벗어남으로써 성화에 이를 것을 교훈하고 있다.
한편 대외적으로는 로마 교회는 로마 정부의 세속 권력에 대한 순종 문제와 하나님 나라의 시민으로서 이 땅에서 어떠한 삶을 살아야 할
것인지에 대해 심한 갈등을 겪었다. 특히 클라우디우스(A.D.41-54년) 황제 때에 로마에서 추방되는 박해까지도 겪었던 유대인
성도들에게는 그 문제가 더욱 심각한 현실적 관심사였다. 이에 바울은 로마의 그리스도인 공동체가 하나님께 대하여, 교회와 사회,
그리고 국가에 대하여 마땅히 가져야 할 윤리적 의무들에 대해 설파함으로써 성도가 이 땅에 사는 동안 필연적으로 갖게 되는 각각의
삶의 현장 속에서도 성실해야 한다는 삶의 자세에 대해 구체적으로 교훈하였다.
3. 기록 목적
1) 로마 방문을 위한 준비
당시 로마 제국 도처에서 이방 선교 사역에 몰두하던 바울은 자신이 친히 로마 교회를 방문하기를 원했다. 그러나 더 시급한 문제로
인해 예루살렘을 방문해야 했기 때문에 이를 로마 교회에 알리며 로마 교회를 방문하기 전에 먼저 로마 성도들에게 참 구원의 원리를
미리 편지로 설명함으로써 전에 그들이 들었던 복음에 대한 오해, 곧 구원이 인간의 선생이나 공적 또는 율법의 행위로 주어지는 것인
양 오해하고 있는 부분을 시정하며 오직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얻음으로 구원받음을 설파하기 위하여 본서를 기록했다.
2) 로마 교회가 당면한 여러 문제들에 대한 해결
바울은 로마 교회가 당면한 믿음이 강한 자와 약한 자 등 여러 가지 문제들에 대해 전해 들은 바 이를 해결함으로써 로마 교회 내의 유대인 성도와 이방인 성도간의 갈등을 해소하고 화목하게 하는 것이었다.
4. 주제
1) 복음
바울은 자신이 ‘하나님의 복음’을 위해 선택된 사도임을 분명하게 인식하고 있었다(1:1). 바울이 전한 복음의 의미는 다음과 같다.
첫째, 하나님이 미리 약속하신 복음(1:2)이다. 하나님과 관계없는 것은 복음이 아니다. 그런 의미에서 복음은 ‘하나님의 복음’이다(1:1; 15:16).
둘째, 복음은 선지자로 말미암아 미리 약속되었다(1:2). 그러므로 우리는 구약성경을 복음에 대한 약속으로 이해해야 한다.
셋째, 복음은 하나님의 아들에 관하여 미리 약속된 것이다(1:2). 성경에 기록된 복음 약속의 대상, 주제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이다.
넷째,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다(1:16). 복음은 말과 글, 사상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위대한 능력이다.
다섯째, 복음의 핵심은 ‘하나님의 의’이다(1:17). 복음에 나타난 ‘하나님의 의(義)’는 죄인을 의롭게 하는 의이고, 이 의(義)는 모든 믿는 자에게 차별 없이 주어진다(3:22).
여섯째, 복음은 심판에 관하여 말한다(2:16). 복음은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는 하나님의 능력이지만, 믿지 않는 자에게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심판이 있다고 말한다.
2) 하나님의 의
바울은 복음을 ‘하나님의 의’라고 밝힌다(1:17). 하나님의 의란 자격 없는 죄인들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선물이다. 즉 하나님의
의로운 심판 앞에 설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의를 신자들에게 선물로 제공하시는 것을 의미한다.
여기서 하나님께서 주시는 의는 모든 사람은 예수님을 믿음으로만 얻는다는 것이다. 바울은 이 메시지를 전하기 위해 사람을 두 부류로
나눈다. 바로 유대인과 이방인이다. 유대인은 율법을 받았다. 그러나 유대인은 결코 율법을 지키지 못했다. 이방인은 율법을 받지
못했으나 양심이 율법의 역할을 한다(2:14-15). 그러나 이방인 중에서 양심을 온전히 지킬 수 있는 사람은 어디에도 없다.
따라서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스스로의 힘으로 의로울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3:9). 모든 사람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만 의를 얻을 수 있다(3:22-24). 십자가 죽음으로 인류의 죄를 짊어지시고 하나님의 의를 이루신 예수님을 구주로
고백하는 자만이 의와 구원을 얻는 것이다(10:9).
3) 의에 합당한 삶
모든 사람은 믿음으로 의로움을 얻는다. 그러나 행위가 아니라 오직 믿음으로만 의를 얻었다고 마음대로 죄짓고 살아도 된다라고 말하지
않는다(6:1-2). 구원받은 사람은 죄에 대하여 완전히 죽고 하나님께 대하여 살았으니 결코 죄를 지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6:11). 그런데 죄를 짓지 않는 삶이 말처럼 쉽지 않다. 왜냐하면 구원받은 이후에도 우리 안에는 죄성이 남아있기
때문이다. 바울도 이를 인정한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희망이 있다. 바로 성령님이 우리에게 계시기 때문이다. 성령님을 따르는 사람은
죄의 유혹에 이끌리지 않고 의로운 삶을 살 수 있다(8:3-4).
아울러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신 뜻이 무엇인지를 분별하여 다양한 삶(하나님, 교회, 사회, 세상권세,
이웃) 속에서 우리의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산 제물로 드릴 것을 강력하게 촉구한다(12:1-2).
5. 특징
1) 기독교 복음의 핵심인 이신칭의의 교리를 잘 드러냄
로마서는은 로마서가 서신(書信)임에도 불구하고 기독교의 가장 근본적인 교리와 윤리를 다루고 있기 때문에 논문 같은 인상을 주며,
핵심 교리인 이신칭의를 잘 설명해주고 있다. 또한 죄, 진노, 사망, 율법, 의, 칭의, 신앙, 생명, 소망, 할례, 이스라엘
등과 같은 신학적인 의미를 가진 용어들이 많이 등장하고 있다.
2) 가장 길고 자세한 서신
서신의 분량 자체도 가장 길뿐만 아니라 서론과 결론 부분에서 많은 사람들의 이름이 자세히 언급되고 있는 점도 그의 다른 서신과 구별된다. 아울러 ‘기록하였으되’라는 말이 가장 많이 사용함으로 구약성경을 많이 인용하고 있다.
6. 구조
1) 도입 : 인사와 간구(1:1-17)
2) 하나님의 의(1:18-11:36)
3) 의인의 삶(12:1-15:14)
4) 종결 : 방문 계획과 문안 인사(15:4-16:27)
매년 태풍이 한반도를 관통할 때마다 모두가 긴장합니다. 과거 강력했던 1959년 9월 12일 사라호 태풍과 2003년의 태풍 매미가 끼친 피해를 기억합니다. 이러한 태풍의 위력을 바다에서 경험한다면 살 소망을 갖기 어려울 겁니다. 오늘 본문에서 로마행 배에 탄 바울과 일행들이 이 같은
일을 겪습니다. ‘유라굴로’라는 강력한 광풍을 만난 것입니다. 이들의 운명은 어떻게 될까요. 그리고 유라굴로 광풍을 통해 주시는
영적 교훈은 무엇일까요.
첫째, 평온한 인생에도 갑작스러운 광풍
죄수의 몸이 된 바울은 다른
죄수들과 함께 그레데 섬 미항에 도착했습니다. 겨울 항해는 대단히 위험하기에 미항에서 머물며 때를 기다려야 합니다. 하지만 선주와
선장은 뵈닉스로 이동해 그곳에서 겨울을 보내자고 주장했습니다. 바울이 반대해 보았지만, 총책임자 율리오는 선장의 말만 믿고
뵈닉스 행을 강행합니다. 출발 당시 분위기는 좋았습니다. 13절에 “남풍이 순하게 불매 그들이 뜻을 이룬 줄 알고 닻을 감아
그레데 해변을 끼고 항해하더니” 남풍이 순하게 불어 배도 선조롭게 나아갔습니다. 모두가 평온한 항해라 여겼던 그 순간, 갑자기
광풍이 불어왔습니다.
우리의 인생에도 이와 비슷한 일이 발생할 때가 있습니다. 모든 것이 평온하고 안정적이라 여겼던
순간 인생의 광풍이 불어닥칩니다. 경제적 문제, 질병, 자녀 문제, 부부관계 등 우리의 삶을 뒤흔드는 유라굴로가 찾아옵니다.
누구도 예외가 없습니다.
둘째, 목적지를 벗어나 표류할 수 있습니다.
선장을 비롯한 뱃사람들 모두 할 수 있는 방법을
동원해 보았지만 강력한 바람 앞에 배는 계속 떠밀려 갔습니다. 15절 “배가 밀려 바람을 맞추어 갈 수 없어 가는 대로 두고
쫓겨가다가”는 지금 배의 상황이 얼마나 심각한지를 보여줍니다. 아무리 크고 호화로운 유람선이라 해도 목적지를 벗어나 방향을 잃으면
항해가 아니라 표류하는 배가 됩니다. 인생에서도 아무리 높은 지위, 재산이 많이 있어도 유라굴로라는 인생의 광풍을 만나 방향을
잃으면 표류하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이 항해한다고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표류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셋째,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 때 살 수 있습니다.
모두가 살 소망을 포기하려는 순간, 바울은 하나님의 말씀을 신뢰하며 희망을 선포합니다.
25~26절에 “그러므로 여러분이여 안심하라 나는 내게 말씀하신 그대로 되리라고 하나님을 믿노라 그런즉 우리가 반드시 한 섬에
걸리리라 하더라.” 바울은 자신에게 나타난 천사의 말을 믿고, 배에 탄 사람들에게 희망을 전해 주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진정으로 믿고 신뢰하는 사람만이 모두가 절망하는 상황에서도 희망을 말할 수 있습니다.
오늘날
우리 사회와 가정, 더 나아가 한국교회가 강력한 유라굴로를 만난 배처럼 위태로워 보입니다. 방향을 잃고 표류하는 배처럼
보입니다. 어떻게 해야 살 수 있을까요. 유라굴로를 만난 이유가 하나님 앞에 겸손하지 않고 교만해서는 아닌지 반성해 보아야
합니다. 철저히 회개하고 나에게 문제가 있음을 발견해야 합니다. 다시 살 수 있는 길은 하나님의 말씀 앞에 굳게 서는 것입니다.
그러면 살 수 있고, 다시 회복할 수 있으며, 소망을 가질 수 있습니다.
“이에 그들이 그들의 고통 때문에 여호와께
부르짖으매 그가 그들의 고통에서 그들을 인도하여 내시고 광풍을 고요하게 하사 물결도 잔잔하게 하시도다 그들이 평온함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는 중에 여호와께서 그들이 바라는 항구로 인도하시도다.” (시 107:28~30)
유라굴로 광풍(A Hurricane, Called Euroclydon) 사도행전 (Acts) 27:14, 21~22
14. 얼마 못되어 섬 가운데로서 유라굴로라는 광풍이 대작하니 (Before very long, a wind
of hurricane force, called the Euroclydon, swept down from the island.)
21. 여러 사람이 오래 먹지 못하였으매 바울이 가운데 서서 말하되 여러분이여 내 말을 듣고 그레데에서 떠나지
아니하여 이 타격과 손상을 면하였더면 좋을뻔 하였느니라 (After they had gone a long time without
food, Paul stood up before them and said: “Men, you should have taken my
advice not to sail from Crete; then you would have spared yourselves
this damage and loss.)
22.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이제는 안심하라 너희 중 생명에는 아무 손상이 없겠고 오직 배 뿐이리라 (But
now l urge you to keep up your courage, because not one of you will be
lost; only the ship will be destroyed.)
<26장>에서 살펴본데로 사도 바울은 자신의 재판문제를 로마제국의 황제에게 소송하기를 베스도 총독에게 요청했고, 베스도가 그렇게 할 것을 언도했습니다.
그리고 나서, “우리가 배로 이탈리아에 가야 하는 것이 결정되었을 때에 ~” (행.27:1)라고 <사도행전 27장>은 시작되는데 바울이 죄수의 몸으로 배를 타고 로마로 떠나는 것입니다 (행.27:1).
오늘 본문을 포함한 총 <44절>로 구성된 사도행전 27장에서 저자 누가는 사도 바울을 포함하여 276명을 태운
배가 로마를 향해 항해하는 가운데 광풍 ‘유라굴로’ 로 인해 지중해를 표류하며 생사의 갈림길을 헤메던 극심한 고난의 과정을
상세하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 그것은무엇이 유라굴로 광풍을 통하여 배울 영적 교훈일까요?
첫째, “인간의 욕심” 바울은 지금 시기가 지중해의 강한 ‘태풍’을
동반하게 될 것임을 경고하면서 출항을 만류했지만 (행.27:10), 이 배의 선장과 선주는 강행했습니다. 그 이유는 무리하더라도
‘뵈닉스’항구까지 가서 곡물을 팔아 큰 돈을 벌고자 하는 욕심 때문이었습니다.
둘째, “바울의 리더쉽” 이런 선장과 선주의 잘못된 리더쉽에도 불구하고, 비록 죄수의 몸이었지만 ‘바울’은 이 조난당한 배의
실질적인 리더가 되어 위기를 극복했습니다. 바로 사람들에게 ‘강한 신뢰감’ (strong credibility)를 얻고, ‘올바른
판단’ (Sound judgment)을 행하고, ’깊은 영성’ (Deep spirituality)으로 하나님을 온전히 믿음으로써
(v.25) 말입니다.바울의 리더쉽
셋째, “하나님의 구원하심” 제가 깨닫게 되는 최종적인 영적 교훈은 진정한 구원은 단순한 ‘육신적 구원’만이 아니라, ‘영혼의 구원’을 통해서라는 사실입니다. ‘생명의 주관자’이신 하나님을 믿음으로써 말입니다.하나님의 구원하심
어리석은 선주와 선장처럼 욕심에 사로잡혀 자신과 사회를 위험에 빠트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을 좇아 육신의 소욕을 벗어버리고, 인생의 거친 풍랑가운데서도 많은 생명을 살리는 빛된 성도 되시길 소망합니다.
인생을 살아가다 보면 예상치 못한 난관을 겪을 때가 있습니다. 그 형편이 얼마나 힘들고 어려우면 살
소망조차 끊어질 것 같은 상황에 직면할 때도 있습니다. 물론 바라기는 성도 여러분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그런 힘든 고난은 겪지
않기를 바랍니다만, 때론 우리가 바라지도 예상치도 못한 시련의 순간은 찾아오기도 하는 것임을 우리는 인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27장에서 로마로 가는 배에 탑승한 바울을 포함한 ‘276명의 사람들의 상황이 바로 그런 상황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27장에서 우리가 깨닫게 되는 진리는 ‘하나님의 은혜와 구원의 역사’는 평화롭고 태평한 시기에
찾아오기 보다, 오히려 오늘 말씀처럼 광풍이 불고 고난과 역경 가운데 더욱 강력하게 임하신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저는 성도
여러분과 함께 이런 위기의 순간에 하나님의 자녀가 사회공동체와 이웃을 위해 행해야 할 ‘빛과 소금’의 삶이 무엇인지를 바울의
모습을 통해 배워가는 시간되기를 기대합니다.
사도 바울은 우리가 그동안 몇 주에 걸쳐 살펴본대로 유대인들에 의해 고소당하여 가이사랴에 있는 유대총독 앞에서 재판을 받았던
것입니다. 바울의 재판이 처음 시작될 때는 벨릭스가 총독이었을 당시였는데, 그는 바울의 ‘무죄함’을 잘 알았음에도 불구하고
무죄를 언도했을 시에 유대지도자들의 반발과 마찰을 우려하여 2년간 재판을 연기하다가 결국 그곳을 떠난 것입니다. 그리고 나서 새로
베스도가 총독으로 부임했고, 그가 오자마자 바울의 재판은 속개되었지만, 먼저와 같이 여러 유대인들이 여러가지 중대한 혐의로 그를
고소했으나 그 어느 것도 증명되는 것이 없었습니다. 그리고 이제 바울은 베스도에게 자신의 소송문제를 로마황제에게 의뢰할 것을
청원했고, 그는 그렇게 할 것을 언도했습니다.
26장에서 살펴본 것처럼, 바울은 유대 분봉왕 아그립바왕 앞에서 자신을 변론하는 기회가
주어졌습니다. 그때 자신의 신앙은 유대 율법에서 변질된 이단신앙이 아니라, 조상들이 믿고 간절히 바라던 하나님의 약속하신 구원자,
메시야를 믿는 유대 전통신앙임을 강조하며, 그 간절히 기다렸던 메시야가 바로 나사렛 예수임을 자신이 주님을 만난 ‘다메섹
사건’을 통해 강력히 간증했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주께 받은 사명은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의 복음을 들고 유대인과 이방인들에게
전파함으로 그들의 어두운 눈을 뜨게 하고, 사단의 권세에서 하나님이 은혜로 돌아오게 하는 죄사함과 구원받아 자녀의 거룩한 권세를
얻게 하는 사명을 받았음을 그가 밝혔습니다. 그럼으로 사도는 아그립바 왕에게 “당신도 나와 같이 되기를 하나님께 원합니다” 라고 겸손하면서도 당당하게 선언했던 것입니다(26:29).
27장이 시작되는데 그 전체 주제는 ‘로마 황제에게 재판을 받기 위한 바울의 로마
압송과정에서 겪게 되는 사건’입니다. 27장은 이렇게 시작됩니다. “우리가 배로 이탈리아에 가야 하는 것이
결정되었을 때에, 그들은 바울과 몇몇 다른 죄수를 황제부대의 백부장 율리오라는 사람에게 넘겨주었다” (행 27:1)
이제 바울이 로마 황제에게 재판을 받기 위해 로마로 가는 한 배를 타게 되는데, 그 배의 이름은
<아드라뭇데노>입니다. 그런데 그 배의 실제적 (법적) 책임자였던 ‘황제부대’소속의 <율리오>라는 백부장이
바울에게 친절을 베풀어, 그의 동역자인 친구들이 와서 그를 보살필 수 있도록 허용해 주었던 것입니다 (v.3). 이것은 사도
바울이 앞에서 아그립바왕에게 자신을 변론했을 때 왕과 함께 가이사랴 성중에 높은 사람들이 함께 참석했다고 25장에서 언급하고
있는데 (행.25:23), 이 율리오라는 백부장도 그들 중의 있었을 것으로 성경학자들은 추정합니다. 주목할 것은 사도 바울이
아그립바왕 앞에서 자신과 그리스도의 복음을 당당하고도 논리적으로 변론하는 것을 율리오가 보고서, 바울이 무죄함을 확신했을 뿐
아니라 실제적으로 그에 대한 인격적 존중과 깊은 신뢰를 가졌을 것입니다. 이것이 지난번 벨릭스 총독이 그러했듯이, 율리오 백부장도
바울에게 일반 죄수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자유와 인격적인 대우를 허용해 준 이유일 것입니다.
이렇게 배를 타고 여러 날 항해하다가 이탈리아로 가는 ‘알렉산드리아’배를 갈아타게 됩니다 (v.6). 왜 갈아탔을까요?
왜냐하면, 이 당시는 유대지역에서 로마로 직행하는 배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한편 이 알렉산드리아 배는 애굽의 알렉산드리아 항구를
베이스캠프 (거점)으로 하여 <미항>이라는 항구로 와서 정박중이었던 배였습니다. 역사학자들의 말에 의하면, 그 당시
로마제국은 식량문제를 해결하고자 세계 최고의 곡창지대였던 애굽을 점령하여 애굽의 막대한 곡물을 ‘알렉산드리아’항에서 싣고 수도
로마로 운송해 갔는데, 오늘 본문에서 사도 바울이 루시아의 ‘무라성’이라는 항구도시에서 두번째로 갈아탄 배가 바로 그 배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배를 갈아타고 ‘그레데’섬의 해안을 따라 항해하여 간신히 <살모네>항을 지나
<미항>이라는 항구에 도착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제부터 항해하기가 곤란한 상황이 전개되었다는 것입니다. 그 상황을
누가는 기록하면서 “여러 날이 걸려 금식하는 절기가 이미 지났으므로 행선하기가 위태한지라” (v.9a)라고.
여기서 ‘금식하는 절기’를 언급한 이유는 ‘유대인의 어떤 종교적 규례’를 말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이 금식은 유대민족의
‘속죄일’ (Day of Atonement)로서 유대력으로는 <7월10일>이고, 양력으로는
<9~10월경>임으로, ‘금식하는 절기가 지난 시점’이란 이미 11월에 접어든 기간이기 때문에 지중해를 중심으로 한
늦가을의 계절풍, 곧 ‘강력한 태풍’이 발생하는 시기가 시작되었다는 뜻입니다.
따라서 바울은 이렇게 사람들에게 권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여 내가 보니 이번 행선이 하물과 배만 아니라 우리 생명에도 타격과 많은 손해가 있으리라” (v.10)라고
말입니다. 그러나 백부장은 ‘선장과 선주’의 말을 더 믿고, 바울의 경고를 무시함으로 항해를 강행합니다. 그리하여 이곳
<미항>을 떠나 <뵈닉스>항에 가서 겨울을 지내고자 하는 것입니다. 이런 백부장의 결정은 비록 그가 바울을
인격적으로는 신뢰하고 존중했겠지만, 항해에 관한한 전문가들인 선장과 선주의 말을 더 믿을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리하여 미항을 떠난 배는 처음엔 남쪽에서 부는 순풍을 따라 순항하여 모든 것이 뜻대로 되는 듯했습니다. 그러나 얼마 못가서
문제의 <유라굴로>라는 폭풍이 몰아치기 시작했습니다. 이 ‘유라굴로’라는 태풍은 그 이름이 <동풍>을
가르키는 ‘유로스’와 <북풍>을 가르키는 ‘아킬로’가 합쳐진 단어로써 <동북풍>이라는 뜻입니다. 이제 이
‘유라굴로’태풍이 휘몰아 침으로 바울을 포함한 200명이 넘는 사람들은 2주가 넘도록 (v.27) 지중해를 표류하며 생사의
갈림길을 헤메었던 것입니다.
이제 저는 성도 여러분과 함께 오늘 사도와 배를 탄 많은 사람들이 유라굴로 광풍 가운데 겪었던 고통과 생명의 위협을 통해 우리가 배울 점이 무엇인지를 살펴보기 원합니다.
무엇이 유라굴로 광풍을 통하여 배울 영적 교훈
첫째, 인간의 욕심
사도
바울이 2번째로
갈아탔던 ‘알렉산드리아’의 배는 사실 출항하기에는 매우 우려스러운 상황이었던 것입니다. 왜냐하면, 지금 이 시기가 늦가을의 강력한
계절풍, 곧 ‘태풍’이 발생할 것이 충분히 예상되는 시기였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그동안 살펴봤듯이 사도 바울은 세번에
걸친 선교여행을 거치면서 14년간의 기간동안 여러 번의 배로 이동한 경우를 포함해서 대략 15만km라는 엄청난 거리를 이동한
경험을 가진 역전의 선교사였습니다. 그가 선교여행 가운데 얼마나 힘들고 어려운 경험을 했는지는 여기서 다 언급하기도 힘든데, 그
중에서도 <고린도후서 11장>에서의 그가 고린도 교회 성도들과 나눈 자신이 겪은 고난은 가히 상상을 초월합니다. “내가
수고를 넘치도록 하고 옥에 갇히기도 더 많이 하고 매도 수없이 맞고 여러번 죽을 뻔하였으니” (고후.11:23)라고 말했고,
또한 “세번 파선하고 일 주야를 깊은 바다에서 지냈으며” (고후.11:25)라고
하며, 구체적으로 자신이 배로 이동하는 가운데 겪은 위기상황을 열거합니다. 이 고린도 성도들에게 보내는 두번째 편지는 시간적
순서로 볼 때, 지금 바울이 로마로 가기 이전에 쓰여진 것임으로, 바울은 이미 배를 타고 가다가 3번씩 배가 부서지는 조난사고와
일주일을 깊은 바다 위를 표류하는 힘든 상황을 경험했던 것입니다. 그럼으로 누구보다도 이런 늦가을의 항해가 얼마나 위험한 것인지를
바울은 누구보다도 뼈저리게 경험한 사람인 것입니다. 그러기에 “여러분이여 내가 보니 이번 항해가 하물과 배만 아니라 우리
생명에도 타격과 많은 손해를 끼치리라” (v.10)고 바울은 자신의 경험치를 통해 충분히 예상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지금이 위험한 항해시기인 것을 선장과 선주는 몰랐을까요? 아니요, 그들은 충분히 알았을 것입니다. 항해의 전문가가
아닌 바울도 여러 번의 승선경험을 통해 그것을 절실히 깨닫았을찐대, 평생을 바다에서 잔뼈가 굵은 선장과 선주가 그것을 모를리
만무한 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왜 이들은 이런 위험한 항해를 강행하고자 했던 것일까요? 그들은 과연 이번 항해가 상당한
위험요소가 따르는 시기라는 것을 몰랐을까요? 아닙니다. 그들도 잘 알았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런 무리한 결정을 한 것은
그들의 <욕심> 때문이었습니다. 그 당시 <뵈니스>항구는 <미항>에 비해 훨씬 넓고 겨울을
나기에 적합한 장소였고, ‘뵈니스’항까지 가게 되면 그곳에서 곡물을 겨울이 오기 전에 비싼 가격으로 팔아 많은 이윤을 남길 수
있을 것이라는 욕심 때문에 이번 항해가 위험하다는 것을 뻔히 알고 있었음에도 ‘문제없다’고 백부장과 사람들을 안심시키고는 무리한
항해를 시도했던 것입니다.
언젠가 여러 해 전에 제가 미국에 와서 얼마가 되지 않았을 당시, 미조리주에서 사역하시던 ‘서정곤 목사’님께서 오셔서 말씀을
전해주신 기회가 있었습니다. 그때 하셨던 말씀이 지금도 저의 마음 깊이 새겨져 있습니다. 목사님은 서해안 어느 작은 어촌에서
자라서 어려서부터 수영을 잘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대학생시절 친구와 몇 명의 여학생들과 함께 바닷가에 놀러 갔는데, 갑자기 자신의
수영실력을 자랑하고 싶은 마음에 멀리 보이는 작은 섬에 멋있게 헤엄쳐 갔습니다. 그리고 그 섬 모래사장에 예쁜 조가비 몇 개를
잡아 손에 쥐고 여학생들에게 선물로 주고자 다시 헤엄쳐 나왔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얼마를 헤엄쳤을까 했을 때 갑자기 숨이
가빠지면서 몸이 갑자기 가라앉는 것을 느꼈던 것입니다. 아마도 상당히 오랫동안 헤엄을 쳐 힘이 빠졌을 뿐 아니라, 결정적인 것은
손에 조가비를 쥐고 있었기에 제대로 헤엄을 칠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 순간 목사님은 ‘이러다 죽는구나!!’라는 생각이 뇌리를
스치고 지나갔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목사님은 손에 펼쳐 쥐고 있던 조가비를 내어 보어 보내고는 온 힘을 다해 헤엄쳐 나와 간신히
목숨을 건졌다고 합니다. 그리고 서목사님은 이렇게 우리를 도전하셨습니다. ‘우리 인간은 때로 손에 쥔 조가비 하나를 놓지 못함으로
인생을 파괴하고 심지어 생명을 잃게도 되는 불행한 경우를 당하게 됩니다’라고 말입니다. 어리석게도 우리는 ‘일확천금’이라는 돈의
조가비를 그리고 명예와 쾌락과 자신의 야망을 성취해 줄 것 같은 조가비 하나를 부여잡고 놓지 못함으로 깊은 물 속에 빠져 들어
가게 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손에서 아직도 놓지 못하고 있는 그 욕심의 조가비는 무엇입니까?
둘째, 바울의 리더쉽
우리는 그동안
<사도행전 13장> 이후에서 사도 바울을 중심으로 동역자들이 함께 이루어 낸 복음증거의 역사가 얼마나 놀라운지를
살펴보았습니다. 그리고 오늘 <27장>에서 언급된 주된 내용은 ‘로마로 가는 배를 탄 바울과 많은 사람들이 겪게 되는
심한 고생과 위기 그리고 모두 생명을 보존함’이지만, 그 실질적인 중심내용은 이런 절대절명의 위기상황에서 보여준 사도 바울의
리더쉽이 배에 탔던 276명 전원의 생명을 안전하게 보존하는 결정적 역할을 했다는 사실입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바울의 리더쉽을
결정하는 것일까요?바울의 리더쉽
먼저 <강한 신뢰감> (Strong credibility)입니다. 앞서도
살펴보았듯이, 2년전 총독 ‘벨릭스’가 바울의 재판을 지연하면서도 그에게 자유를 주고 그의 친구들이 돌보아 주는 것을 허용한
이유라든지, 오늘 백부장 ‘율리오’도 역시 바울에게 친절을 베풀고 친구들이 그와 교제할 수 있도록 최대한 허용했다는 사실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그것은 총독과 백부장이 특별히 바울을 편애해서가 아닐 것입니다. 그것은 바울이 만나는 신자 뿐 아니라 불신자를
포함한 모든 사람들에게 말과 행동에 있어서 한결같이 신실하고 겸손하게 대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이 배 안에서만 보더라도 총
책임자에 해당하는 백부장과 여러 군인들과 선원들과 승객들 그리고 죄수들에 이르기까지 각자의 신분과 신앙상태는 각기 다를 수
있겠지만, 바울은 비록 죄수의 몸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인격적으로 많은 사람들에게 그 고결한 인품으로 인해 그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는
사실을 우리는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런 깊은 신뢰를 받는 것이 ‘리더’로서 함께 하는 사람들에게 선한 영향력을
미칠 수 있는 우선적인 덕목이 되기 때문일 것입니다.
또한 그의 <올바른 판단> (Sound judgment)이 리더쉽을 이끌고 있습니다. 오늘 사건에서만 보더라도,
뵈닉스로 향하는 <항해>를 계속할 것인가에 있어서 “이번 항해가 ~ 우리 생명에도 타격과 많은 손해를 끼치리라”
(v.10)고
그는 정확하게 예측했던 것입니다. 그 뿐만이 아닙니다. 이어지는 내용에 보면, 배가 표류하고 깨어진 상태에서 점점 더 육지에
가까이 나아갔을 때 사공들이 몰래 <그룻배>를 따고 자기들만 도망치고자 했을 때, 바울이 그것을 눈치채고 ‘만약
사공들이 없으면 아무도 살아남지 못할 것임’을 백부장과 군인들에게 알림으로 이 일을 막습니다 (v.31). 만약 이런 민감하고도
신속한 바울의 판단이 없었다면, 사공들은 먼저 도망가고 그의 말 그대로 다른 사람들 대부분은 살 가망이 없었을 것입니다. 이처럼
위기상황에서 바울의 신속하고 정확한 판단력은 많은 생명을 구했던 것입니다.
또한 그리고 그의 <깊은 영성> (Deep spirituality)이 리더쉽을
확정한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볼수 있듯이, 그는 유라굴로 광풍으로 인해 여러 사람들이 여러 날 먹지 못하고 좌절해 있을 때,
오늘 본문에서 보듯이 바울은 사람들 가운데 서서 ‘자신의 말을 듣고 미항을 떠나지 않았더라면 이런 타격과 손상을 면할 수 있었을
것이라’고 그들의 잘못된 판단을 분명히 일깨움 (v.21)과 동시에 “이제는 안심하라 너희 중 생명에는 아무 손상이 없겠고 오직 배
뿐이리라” (v.22)고
확정적으로 배에 탄 모든 사람에게 희망의 메시지를 선언합니다. 그가 이렇게 확신 가운데 선언할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
이유는 하나님의 사자가 지난 밤에 그의 곁에 서서 ‘두려워하지 말라’고 말하고, ‘바울이 장차 로마 황제 앞에 서게 될 것이고,
배에 탄 모든 자들이 안전하게 될 것’이라 약속했기 때문입니다. 그럼으로 “나는 내게 말씀하신 그대로 되리라고 하나님을 믿노라”
(v.25)고 신앙고백 하는 것입니다. 바울의 이런 순전한 하나님을 향한 믿음과 깊은 영성이 그의 리더쉽을 결정했음을 우리는
인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셋째, 하나님의 구원하심
아마 성도
여러분이 <27장>을 처음부터 끝까지 천천히 묵상하고 읽어 나간다면 한가지 분명한 결론을 저와 같이 내리게 될 것이라
여겨집니다. 그것은 인간의 어리석은 욕심과 잘못된 판단으로 겪지 않아도 되었을 이 ‘유라굴로 광풍’의 위기를 하나님은 그의 택하신
종 바울을 통해 함께 배에 탄 사람 모두를 안전하게 구원하셨다는 사실입니다.하나님의 구원하심
앞서 사도 바울의 리더쉽을 살펴보았지만, 그가 이런 위기 가운데서 사람들을 생명으로 이끌 수 있었던 이유는 ‘하나님의 약속과
은혜와 능력’이 그와 함께 하셨기 때문임을 우리는 깨닫게 됩니다. 바울이 절망과 자포자기했던 사람들을 향해 담대하게 “이제는 안심하라 너희 중 생명에는 아무 손상이 없겠고 오직 배 뿐이리라” (v.22)고
선언할 수 있었던 근거는 무엇이었습니까? 그것은 오직 하나님께서 그의 사자를 보내셔서, 먼저 바울을 위로하시고 구원의 은혜를
약속하시고 로마로 가서 황제 앞에 서서 복음을 증거할 비젼을 새롭게 해 주심으로서 가능했던 것입니다. 바울 스스로 작정한 것이
아닙니다. 이 위로와 구원과 비젼의 시작도 끝도 모두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따라 그 은혜와 권능으로 성취된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바울의 말은 단지 위로의 말로 그친 것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실제로 그의 말 그대로 실현되었습니다. 이것이 어떻게 가능했을까요? 그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내가
섬기는 하나님의 사자가 어제 밤에 내 곁에 서서 말하되 바울아 두려워하지 말라 네가 가이사 앞에 사야 하겠고 또 하나님께서 너와
함께 항해하는 자를 다 네게 주셨다 하였으니 그러므로 여러분이여 안심하라 나는 내게 말씀하신 그대로 되리라고 하나님을 믿노라”
(v.23~25)고 말입니다. 이런 난파된 배에서 성난 파도와 사나운 태풍의 위기를 넘기게 한 것은 바울과 함께
하신 하나님의 전적인 지혜요, 권능이요 은혜의 역사였던 것입니다. 그의 사자를 보내셔서 사나운 풍랑 가운데 안심시키시고, 한사람도
다치지 않고 안전하게 로마로 가게 될 것을 하나님께서 분명히 약속하셨기에 바울은 사람들을 생명으로 인도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런 캄캄한 밤 바다에 그분만을 신뢰하는 그의 종, 바울 한사람을 사용하셔서 한줄기 등불같이 어둠을 비취게 하시고, 그
선한 뜻을 따라 배에 탔던 모든 사람들의 생명을 구원하셨던 것입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이해하게 되는 최종적인 영적 교훈은 진정한
구원은 이 땅에서 잠시 더 생명을 연장하는 ‘육신적 구원’이 아니라,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될 ‘영혼의 구원’을 받아야 된다는
것입니다. 바로 세상만물의 주관자 일 뿐 아니라, ‘생명의 주관자’이신 하나님을 믿음으로써 말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현재 어떤 인생의 힘든 풍랑과 거센 파도를 겪고 있습니까? 그러나 낙심하지 마십시요. 우리를
지으신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구원하실 뿐 아니라, 끊임 없이 몰려오는 인생의 크고 작은 풍랑 가운데 우리를
안전하게 그분의 희망의 항구로 이끄시길 기뻐 하시는 선한 하나님이십니다. 바라기는 이 예배에 참석한 여러분 모두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그 생명의 말씀 안에 거하는 복된 삶 사시길 소망합니다. 그리하여 오늘 말씀의 어리석은 선주와
선장처럼 돈에 대한 욕심이나 혹은 명예와 지식과 향락과 수없이 많은 육신에 속한 욕심을 벗어 버리고, 빛의 자녀가 되어 세상을
밝히고 인생의 거친 풍랑가운데서도 많은 생명을 살리는 복된 주의 자녀되기를 축원합니다.
욕망의 반대말
욕망은 철학, 문학, 인문학에서 다루는 매우
중요한 개념이다. 그만큼 욕망 이 녀석이 문제라는 말이고 알쏭달쏭하다는 말일 게다. 우리가 이렇게 힘들게 사는 이유도 욕망
때문이고 때때로 쾌락을 느끼고 행복을 느끼는 이유도 욕망 때문이다. 욕망만 없다면 모든 삶의 문제는 해결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욕망이 없는 게 과연 좋을까?
나는 욕망은 좋은 말이라고 생각한다. 욕망이 있어야 살아가는 의욕이 생기고
동기가 생기고 활력이 생기지 욕망이 없는 삶은 아무리 도덕적으로 가치가 있다고 해도 아무도 원치 않는 삶일 게다. 물론 나도 그런
수도원 인생을 원하지 않는다. 욕망은 좋고 나쁘고를 떠나서 우리가 욕망을 원한다는 사실은 부정될 수 없다. 욕망은 옳고 그름을
논하기 전에 생명체에게 산소와 같다.
그런데 때때로 우리의 욕망과 우리의 현실이 안맞아 떨어질 때가 많다. 욕망과
현실이 딱딱 맞아떨어지는 일론머스크 인생은 거의 없다. 대부분 사람들은 욕망과 현실이 잘 안맞아떨어진다. 그래서 대부분 사람들은
욕망을 낮추든가 아니면 욕망을 줄일 수 없다면 뼈와 살을 깍아내는 노력으로 현실을 키워서 앞서나가는 욕망을 따라잡을려고 애쓴다. 전자는 쉬운 편이고 후자는 어렵다. 그렇지만 욕망을 낮추는 전자를 택한 쪽도 비난받을 사람들이 아니다고 생각한다. 때때로 전자가
후자보다 훨씬 어렵기도 하다. 모든 일들은 상대성이고 케이스 바 케이스가 많기 때문이다. 둘다 노력이다. 때때로 체념도 노력이
된다. 많은 희생과 자기포기를 담보하기 때문이다. 금연이 노력인 것처럼 말이다.
그래서 욕망의 반대말은 체념이 아니다. 체념에는 의지가 투영되어 있고 삶의 애정과 긍정의 매세지가 있다. 내 한계를 인정하고 수용하고 꾸리게 된 작은 텃밭에도 햇빛은 공평하게 내비치고 똑같은 태양이 뜨고 진다.
어쩌면
욕망의 반댓말은 "부정"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무엇이 부정하고 부정하지 않은지 정하는 기준은 남의 잣대가 아니라
내안의 잣대다. 결국 내안에서 해소되어야 하는 무언가 부당하고 부정한 마음의 일들이 먼저가 아닐까? 그리고 그것이 부정한지
정당한지는 내가 정한다. 그런 의미에서 체념도 노력과 같고 욕망의 한종류일 뿐이다. 내 마음의 일들을 인정하고 수용할 때, 즉
모든 것들은 공평했고 부당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받아들일 때 체념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다면 욕망의 부정적인 측면들, 즉
욕망의 반댓말이 계속 옮아매고 있을 것이다.
욕망은 좋은 말이다. 욕망은 단지 필요한 에너지원일 뿐이다. 문제는
욕망의 해석에 있다. 그것은 마음 속에서 일어나는 일이다. 부당한 해석을 하면 욕망은 부당한 것이 되고 정당한 해석을 하면 정당한
것이 된다. 대부분 사람들은 욕망을 부당하게 해석한다. 정확히 말하자면 나는 더욱 누려야 되고 존중받고 우월해질 권리가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다. 현실과 욕망의 간격이 부당하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래서 뼈와 살을 깍는 노력으로 언제나
앞서가는 욕망을 따라잡을려고 노력한다. 그래야지만 그 부당함이 소멸될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 또한 마음 속의 일이다.
단지 마음이란 세계에서 일어난 작은 부당함이 못미더운 것이다. 필사적으로 이 작은 부당함을 해소 시킬려고 욕망을 쫓아간다.
나는
속도를 줄이고 쉬어갈 수 있다고 생각한다. 욕망은 산소와 같아서 끊임없이 우리가 갈구해야 한다. 끊임없이 희망하고 동기와 의욕을
찾아해매야 한다. 그래서 욕망 자체를 부정하는 건 불가능한 일이다. 단지 욕망 때문에 일어나는 "마음 속의 일들"을 우리가
해석하는 차원은 내가 기준을 정하고 내가 판단할 수 밖에 없다는 말이다. 그것은 오로지 나의 선택으로 해결된다. 끊임없이 부정과
부당함, 그리고 불공평함의 파편에 맞서 싸우는 일이다. 그것은 마음 속에서 일어나는 일이다. 마치 산소를 쓰고 배출되는
이산화탄소같다.
12월 9일(화) 사도행전 27-28장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안심하라(27:25)
그러므로 여러분이여 안심하라 나는 내게 말씀하신 그대로 되리라고 하나님을 믿노라. So keep up your courage, men, for I have faith in God that it will happen just as he told me.
안심하라 - So keep up your courage(용기를 잃지 마라) Rest assured. - 안심하세요.
믿음이란 풍랑가운데서 평강을 유지할 수 있는 힘이라고 하겠습니다. 바울은 죄수가 되어 로마로 압송되는 배를 타고 항해 중이었습니다. 출항하기 전에 바울은 이번 항해가 매우 어려울 것이니 겨울을 지나고 출항하는 것이 좋을 것같다고 제안합니다. 그러난 선주는 바울의 말보다는 선장과 선원들의 말을 듣고 출항했지만 결국 유라굴로라는 광풍을 만났습니다. 그 배에는 모두 276명이 승선하고 있었습니다. 배가 파선되기 직전에 하나님의 사자가 바울에게 로마로 압송되어야 하므로 이런 풍랑에 의해서 무너질 것이 아니라고 합니다. 바울은 풍랑 가운데서 하나님의 사자의 말을 듣고 그대로 믿었습니다. 그리고 믿은 것 뿐만 아니라 배에 승선하고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여러분 안심하십시오, 하는 내게 말씀하신 그대로 될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사도행전 27장 25절은
사도 바울, 율리오 백부장과 로마로 가는 배가 폭풍을 만나 절망에 빠진 상황에서, 바울이 성도들에게 용기를 주며 "그러므로 여러분이여 안심하라. 나는 내게 말씀하신 그대로 되리라고, 하나님을 믿노라"라고 선언한 구절입니다.
이 말씀은 환난 속에서도 하나님의 약속을 신뢰하는 믿음과 소망을 강조하는 중요한 내용입니다.
구체적인 성경 구절 (개역한글):
"그러므로 여러분이여 안심하라 나는 내게 말씀하신 그대로 되리라고 하나님을 믿노라"
맥락 :
상황 : 바울이 죄수로 로마로 압송되던 중, 배가 유라굴로라는 큰 풍랑을 만나 절체절명의 위기에 처했습니다. 선원들과 승객들은 모두 희망을 잃고 두려워했습니다.
바울의 역할 : 이때 바울은 하나님의 사자가 나타나 자신에게 로마에 가야 할 것이라고 말씀하셨던 것을 상기시키며, 모든 사람을 안심시키고 하나님을 믿으라고 권면합니다.
핵심 메시지 : 하나님의 약속은 반드시 이루어질 것이며, 어떤 어려움 속에서도 하나님을 신뢰하면 구원을 얻을 수 있다는 믿음의 고백입니다
믿음의 말을 하라
바울을 호송하던 배가 그레데 미항에서 머물 때 바울은 시기가 좋지 않으니 더 이상 항해하지 말라고 충고했다. 그러나 백부장은
바울의 말보다 선장과 선주의 말을 더 믿었다. 그때 미항은 겨울을 지내기에 불편하므로 거기서 떠나 그레데 서남쪽에 있는 뵈닉스에서
겨울을 지내자는 의견이 많았다. 마침 남풍이 순하게 불어서 그들은 그레데 해변을 가까이 한 채로 배를 뵈닉스로 항해시켰다. 그때 유라굴로란 광풍이 몰아쳐서 배가 바람에 밀려 떠내려갔다. 그리고 뵈닉스 남서쪽 35킬로미터 지점의 가우다란 섬 아래를
지나면서 섬이 약간 바람을 막아주어서 간신히 배 뒤편의 거룻배를 보호하려고 거룻배를 끌어올렸다. 거룻배가 없으면 항구시설이 없는
곳에서 배를 정박시킬 수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선체를 튼튼히 밧줄로 감고 스르디스란 모래톱에 배가 걸릴 것이 두려워서 다시
바람에 배를 내맡겼다. 그 뒤로도 바람이 잔잔해지지 않자 다음날 배를 가볍게 하려고 짐을 버렸고 3일째 되는 날에는 배의 기구까지
버렸다.
그 후 며칠 동안 해와 별은 안보이고 풍랑도 그대로이고 구원의 여망도 없고 오랫동안 먹지도 못한 채 모두가 절망적인 나날을
보냈다. 그때 바울이 일어서서 말했다. “여러분! 이제 안심하십시오. 여러분의 생명에는 아무 손상이 없고 배만 손상을 입을
것입니다. 어제 밤에 주의 사자가 ‘너는 황제 앞에 설 것이고 너와 함께 승선한 자도 무사하다.’고 말씀했습니다. 안심하십시오.
나는 하나님을 믿습니다.”
당시 배에서 바울의 신분은 죄수였는데 광풍의 위기에서 그가 마치 모든 사람들의 목숨을 살려줄 권세가 있는 리더처럼 말했다. “이제는 안심하십시오.” 살면서 공동체에 시련이 다가오면 바울처럼 말하라. “여러분! 이제 안심하십시오.” 그 멋진 한 마디 말에
믿음의 진수가 들어있다. 믿음이 크고 영성이 깊은 삶이란 어떤 삶인가? 기도를 멋지게 잘하고 어떤 봉사를 잘하는 삶보다 어려움
중에도 “이제는 안심하라.”라고 믿음의 말을 할 줄 아는 삶이다. 위기 속에 빛나는 리더십
어떻게 바울처럼 위기 속에서 빛나는 리더십을 발휘해 담대한 믿음의 외침을 발할 수 있는가?
첫째, 하나님이 함께 하심을 믿으라.
하나님은 가끔 문제와 환난 중에 침묵하신다. 그래도 인내하면서 구원과 축복의 믿음을 잃지 말라. 태양이 빛나지 않을 때도 태양이
있음을 알듯이 하나님의 사랑을 느끼지 못할 때도 하나님의 사랑이 있음을 믿고 하나님이 침묵하실 때도 하나님이 함께 계심을
믿으라. 때가 되면 문제가 실타래 풀리듯 풀린다. 하나님의 손길이 해결하지 못할 인간 상황은 없다.
둘째, 문제도 하나님의 계획임을 믿으라.
인생의 광풍은 영적인 시야를 넓히려는 하나님의 계획 가운데 생긴 것이다. 광풍 너머에
있는 하나님의 은총을 바라보고 마음을 편하게 가지라. 극심한 문제 중에도 하나님의 선한 섭리가 있음을 확신하라. 사랑의 하나님은
영혼을 향한 가장 위대한 설계자이시다. 성도의 문제는 하나님의 원대하고 아름다운 계획 속에서 펼쳐진 것이고 그 계획에는 실수나
오차가 없다.
셋째, 하나님의 말씀을 그대로 믿으라.
바울이 배 위에서 사람들에게 안심하라고 한 후 이렇게 말했다. “나는 내가 말씀하신
그대로 되리라고 믿노라.” 말씀을 그대로 믿는 순수한 믿음을 가지라. 나의 꿈을 좌절시키는 위기가 닥쳐도 꿈을 포기하지 말라.
요셉의 위대성은 그가 찬란한 꿈을 꾸었다는 것보다 그 꿈을 포기하지 않았다는 것에 있다. 꿈이 잠시 깨진 모습을 보여도 꿈을
포기하지 말라. 깨진 꿈도 다시 회복하면 되고 누더기가 된 꿈도 다시 다듬으면 된다.
찬란한 꿈을 가지고 나아갈 때 수많은 절망의 순간을 겪는다. 인생에는 낭만이 있지만 늘 낭만적으로 펼쳐지지는 않는다. 낭만주의의
환상을 깨야 꿈을 멋지게 이룰 수 있다. 낭만이 넘치는 때를 인생의 찬란한 개막이고 낭만이 깨지는 때를 인생의 비참한 폐막으로
여기지 말라. 인간의 절망은 하나님의 약속을 빛나게 하고 인간의 위기는 하나님의 기회가 된다. 찬란한 꿈을 꼭 붙들고 믿음으로
나아가면 마침내 축복의 때가 찾아온다.
인생의 폭풍 속에서
사실 바울은 오랫동안 로마 복음화의 열정을 가지고 기도하며 어떻게서라도 로마를 방문하기를 기도해 왔었다.
로마서 서두에서 바울은 로마를 향한 나의 열정에 대하여는 심령으로 섬기는 하나님께서 내 증인이라고까지 고백하며 “어떠하든지 이제
하나님의 뜻 안에서 너희에게로 나아갈 좋은 길 얻기를 구하노라”(롬1:10)하고 자신의 애타는 심경을 토로하였다.
바울 사도 앞에 열린 로마여행은 그가 소망하던 설레이는 여행은 아니었다. 죄인 된 몸으로 로마의 황제 앞으로 호송 당하는 처지가 되고 말았다. 그런 상황에서 과연 로마에 복음을 전할 수 있게 될는지 전혀 그 누구도 그의 앞날을 예측할 수 없었다.
물론 바울의 로마행은 바울의 요청에 의해 이루어졌다. 그러나 이것은 오랜 소망 가운데 꿈꾸어 오던 복음전도를 위한 계획이 아니라 자신을 죽이고자 하는 유대인의 계책에서 벗어날 방편으로 억울한 판결을 당한 로마시민에게 주어진 마지막 카드였다.
베스도 총독의 재판에 함석한 유대의 왕 아그립바는 ‘이
사람이 만일 가이사에게 호소하지 아니하였더면 놓일 수 있을 뻔 하였다’(행26:32) 하였다. 이와 같이 앞날의 운명을 예측할 수
없는 상황에서의 인간의 선택은 그 발걸음을 인도하시는 하나님께 있음을 알 수 있다. 잠언서 기자는 “사람이 제비는 뽑으나 일을
작정하기는 여호와께 있느니라”(잠16:33) 기록하였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오직 바울의 마음을 사로잡고 있는 것은 주의 말씀이었을 것이다. 그가예루살렘에 올라가 유대인들에게 고소를 당하여 옥에 갇혔을 때 한 밤중에 나타나신 주께서 “담대하라 네가 예루살렘에서 나의 일을 증거한 것같이 로마에서도 증거하여야 하리라”(행23:11)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I. 복음을 위해 로마황제 가이샤에게로 가는 바울 사도
“백부장이 선장과 선주의 말을 바울의 말보다 더 믿었더라”(11)
A.백부장 율리오의 만남
바울을 로마로 호송하는 책임은 궁전 시위대원이던 율리오 백부장에게 주어졌다.
그는 가이샤라에 주둔하고 있는 5개의 로마 보병부대의 하나인 아구사도대 곧 황제의 군대의 백부장이였다. 로마시대의 백부장은
오늘날 중대장과 같은 편재로서 백부장은 로마군대의 꽃으로 불리웠다. 실제로 군대를 움직이는 권한은 천부장 곧 오늘의 대대장에게
있었지만 천부장들은 정치세력에 이끌리고 있었고 실제적으로 로마황제의 위호를 받는 지휘관은 시위대 출신 백부장이었다.
성경에는 복음서와 사동행전에서 각각 두 사람의 백부장들이 소개되고 있다.
그중에 한 사람은 주님께서 ‘이만한 믿음은 이스라엘에서도 만나보지 못하였다’고 말씀하신 자기 부하의 병을 고치기 위해 주께
간청한 가버나움의 백부장이었다. 그는 주께서 친히 그의 집을 방문하려 하셨을 때 ‘나는 주께서 내 집에 오심을 감당치 못합니다.
명령하시면 내 부하가 병이 낫겠습니다’ 말하였다. 또 한 사람은 예수의 십자가 형장을 집도한 백부장으로 그는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으심과 함께 나타난 이적들을 보며 ‘이는 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다’(마27:54) 증거하였다.
사도행전에 나타난 백부장은 믿음의 사람 고낼료 백부장으로 그는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아 베드로 사도를 초청하여 그의 식솔들과 성령의 체험을 하는 은혜를 받았다. 우리는 이후 이들이 복음을 위하여 어떤 일들을 하였을까 알 수 없지만 그 당시 백부장들의 권위와 위세로 보아 로마군대 안에서의 복음전도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을 것이라 생각한다.
가이샤랴에서 로마까지 가기 위해서는 배편을 이용하는 길 밖에 없다.
풍랑을 없다 하드라도 로마항까지의 여행은 참으로 고된 여정이 아닐 수 없다. 바울은 다른 죄수들과 함께 이탈리아로 떠나는 배편의
연결을 위해 아시아 해변 각처로 가는 배를 타야만 했다. 그 배에는 바울의 누가와 실라를 비롯한 동역자들과 마게도냐 데살로니가
사람 아르스다고가 함께 하였다.
죄수의 인솔자인 백부장 율리오는 바울에게 관심을 갖고 있었으므로 그의 행선에 많은 편의를 베풀었다. 그들의 배가 시돈에 멈추었을 때 율리오 백부장은 바울이 그곳에 있는 크리스천들을 방문하여 교제할 수 있도록 배려하였다. 아마 율리오 백부장이 이처럼 죄수된 바울에 관심을 갖었던 것은 복음서에서 이미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백부장 동료들을 통해서 그리스도인의 진실을 알았기 때문이었을지도 모른다.
B. 출항을 만류하는 바울의 예언
그들은 겨울 항로의 풍랑을 피하여 구브로 해안을 끼고 루기아의 무라항에 도착하여 이탈리아로가는 이집트 알렉산드리아의 큰 화물선으로 갈아 탔다. 그러나 그들의 항해는 심한 바람으로 인해 많은 어려움을 당했고 따라서 항해는 매우 느릴 수 밖에 없었다. 그로하여 그들은 어렵게 미항에 도달했고, 연말이 가까워 항로에 무리가 있음을 예견한 바울은 행선을 강행하면 재물과 생명에 위험이 있을 것이라 경고하였다.
그러나 선주들은 선장과 사공들이 바울보다 바다에 대하여 더 많이 안다고 백부장을 설득하여 결국 그들은 그레데 섬의 다른 항구, 곧 겨울을 지내기에 편한 뵈닉스 항을 향하여 행선을 계속하였다. 이것으로 보아 그 당시 율리오 백부장은 예수 그리스도의 사람 바울을 통하여 나타날 하나님의 능력과 예정에 대하여 온전한 믿음을 갖고 있지 못하였던 것 같다.
그러나 후일 바울은 후일 바울은 로마의 감옥에서 이 때를 회상하며 빌립보에 있는 성도들을 향하여 “형제들아, 나의 당한 일이 도리어 복음의 진보가 된 줄을 너희가 알기를 원하노라. 이러므로 나의 매임으로 말미암아 모든 시위대 안에서 그리스도의 나타나심이 되었느니라” 증거하였다. 이것을 이제 곧 유로굴로 광풍을 통하여 나타난 하나님의 이적을 체험한 율리오 백부장의 증언이 시위대에 미친 영향을 말한 것이라 생각된다.
C.광풍 유라굴로와의 투쟁
그들의 배가 출발하자 때마침 남풍이 불어 와 그들은 자신들의 말이 적중한 것이라 생각하며 닻을 감아 올리고 그레데 해변을 끼고 행선을 서둘렀다. 그러나 얼마 가지 못하여 갑자기 섬 가운데로부터 유로굴로라는 광풍을 만나게 되었다. 유로굴로란 그레데 섬 이다산맥에서 발생한 고기압의 영향으로 발생한 동풍이 강한 난기류로 형성된 돌풍으로 그 시 항해 기술로는 속수무책이었다.
예상치 못한 돌풍을 만난 선장과 선원들은 점점 더 심해진 바람을 막을 수가 없어서 거대한 배는 바람이 밀려 가는 대로 둘 수밖에 없었다. 그 상황에서 그들이 취할 수 있는 것은 다만 밧줄로 선체를 둘러 감고 배가 물위에 더 높게 뜰 수 있도록 가볍게 하기 위하여 배 위 기구들을 바다에 던져버리는 것 뿐이었다. 그러나 여러 날이 지나도 풍랑이 약해지지 않자, 그들은 살아날 소망을 포기하기 시작했다.
이때 바울이 그들 앞에 등장하여 “여러분이여 내 말을 듣고 그레데에서 떠나지 아니하여 이 타격과 손상을 면하였더면 좋을 뻔하였느라.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이제는 안심하라. 너희 중 생명에는 아무 손상이 없겠고 오직 배뿐이리라”(21-22) 하였다.
바울이 이처럼 그들 앞에 서서 말할 수 있었던 것은 그의 생각이나 예감에 의한 것이 아니다. 그는 죽음의 폭풍 속에서 주의 음성을 들었던 것이다. 남들이 모두 사경을 헤맬 때 그는 폭풍 속에 말씀하시는 주의 음성을 들었던 것이다.
II.폭풍은사람들의선택이었다.
“여러날 동안 해와 별이 보이지 아니하고 큰 풍랑이 그대로 있으매 구원의 여망이 다 없어졌더라”(20)
사람들은 때때로 하나님의 사람들의 말을 무시하므로 인생의 광풍 유로굴로를 만나곤 한다.
특별히 그 하나님의 사람이 처한 상황이 좋지 않았을 때 사람들은 그의 말을 듣지 않고 오히려 비아냥거리기 일수다. 만약 그들의
눈에 바울이 위대한 선지자로 보였다면 선장이나 선주는 물론 백부장도 그의 말을 따랐을 것이다. 그러나 바울은 그들의 손에 잡힌
죄수였다. 믿음이 없는 그들의 귀에 죄수의 말이 선지자의 말로 들린다는 것은 불가능한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은 항상 세미한 음성 가운데 들려 온다는 사실을 명심하기 바란다. 그러므로
당신이 무엇을 행하고자 할 때 특히 무엇인가 하려는 일들이 지지부진하게 잘 풀리지 않을 때 당신 주위에 있는 세미한 음성에 귀를
기울이기 바란다. 나는 내 주변에서 주의 권고를 듣지 않은 많은 사람들이 인생의 광풍을 피하지 못한 것을 많이 보아왔다. 그
사람들은 그 때라도 세미한 음성을 듣기를 주저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주님은 우리를 인생의 폭풍에서 항상 구조하시지는 않으신다. 또한 그렇게 하시겠다는 약속도 하시지 않으신다. 때때로 우리는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상황에 다다랐음을 인식케 하는 사나운 폭풍을 경험한다. 그 때가 되면 우리는 자신의 삶을 스스로 조정할 수 없음을 느끼며 결국 자신의 어떤 힘으로 감당할 수 없는 환경에 처하게 된다. 오늘 바울을 권고를 듣지 않아서 유로굴로의 광풍을 만나 사경을 헤매게 된 사람들처럼 말이다.
그때에 이르면 그들의 삶에서는 밝은 해와 별을 볼 수 없는 흑암에 놓이게 되어 살아날 의식을 상실하게 된다. 그 상황이 되면 아무도 도와 줄 사람도 없고 절망과 고통이 생명을 위협할 뿐이다. 인생에서 이러한 일을 겪은 사람들은 그날의 고통과 아픔을 영원히 잊지 못할 것이다.
III.인생의폭풍가운데주목할사항들
“그러므로 여러분이여 안심하라 나는 내게 말씀하신 그대로 되리라고 하나님을 믿노라”(25)
A. 폭풍우 중에 함께 하시는 주님
바울은 계속하여 그들에게 “나의 속한 바 곧 나의 섬기는 하나님의 사자가 어젯밤에 내 곁에 서서 말하되, 바울아 두려워 말라! 네가 가이사 앞에서야 하겠고 또 하나님께서 너와 함께 행선하는 자를 다 너에게 주셨다 하였으니 생명을 잃는 자가 없으리라. 나는 내게 말씀하신 그대로 되리라고 하나님을 믿노라”(23-24) 말하며 그들에게 음식을 먹으라고 권했다.
주님은 바울이 폭풍을 만나지 않도록 하시지는 않았지만, 주님은 폭풍우 중에서 그와 함께 계셨으며 그가 살아 남을 것이라는 확신을 주셨다. 바울은 “나의 속한 바 곧 나의 섬기는 하나님의 사자가 어제 밤에 내 곁에 서서 말하되 바울아 두려워 말라 네가 가이사 앞에 서야 하겠고 또 하나님께서 너와 함께 행선하는 자를 다 네게 주셨다 하셨다”(23,24) 하였다.
이 증언으로 보아 바울 역시 두려움에 떨고 있었던 것만은 사실이다.
사흘동안 해와 별을 볼 수 없는 암흑의 풍랑 속에서 생명의 두려움을 느끼지 않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아마 이 때 바울은
이러한 상황을 만든 것은 주님의 경고를 무릅쓰고 예루살렘에 올라갔던 자신의 교만함에 대해 철저히 후회하며 회개하였을지 모른다.
B. 환난과 주의 말씀
또한 흥미로운 것은 주의 사자가 밤에 곁에 서서 말하였다는 것이다.
주의 사자가 곁에 서서 말씀하셨다는 것은 주께서 친히 나타나신 것도 또한 성령으로 말씀하신 것도 아니다. 성경에서 사자는 주께서
보내신 사람을 의미한다. 사마리아에서 전도하던 빌립집사를 아라비아로 행하던 내시에게 가라고 하신 것도 주의 사자였다. 여기서
우리는 주의 사자와 성령과 주의 영의 인도를 받는 빌립집사를 보게 된다(행8:26,29,39 참조).
나는 바울 앞에 나타난 주의 사자는 바울과 함께 배에 탄 복음의 동역자 중의 한 사람일 것이라 생각한다. 누가나 실라일 수도 있고 어쩌면 데살로니가 사람 아리스다고 일 수도 있다. 그들은 예루살렘에서 옥에 갇힌 바울에게 나타나신 주께서 바울이 로마에서도 나의 증인이 되어야 할 것이라 하신 말씀을 기억하고 있었을 것이다.
주님은 베드로에게 ‘사단이 밀까부르듯 하려고 너희를 청구하였으나 너희 믿음이 떨어지지 않기를 내가 기도하였으니 너는 돌이킨 후에 형제들을 굳건히 하라’ 하셨다. 주님은 때때로 우리의 고집으로 이하여 인생의 광풍으로 향하여 돌진하는 뱃머리를 막으시지 않는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그 어떤 폭풍의 상황 속에서도 주님은 자기의 사람들을 버리지 않으신다는 것이다. 그곳에서도 주님은 함께 하고 계신 것이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그 어떤 상황 속에서도 주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우리 주변에 하나님의 사람들과 그의 동역자가 있어야 하는 이유다.
마가복음
4장에서 제자들과 함께 배를 타신 주님은 배를 삼키려는 폭풍을 잠재우셨다. 또한 오병이어 이후 제자들을 건너편으로 보내실 때
한밤중에 폭풍이 일자 주님은 바다를 걸어서 가셨다. 제자들 앞에는 그들이 복음을 위해 해야 할 하나님의 계획이 있었기 때문이다.
거센 풍랑이 있을 동안 그들은 뱃멀미로 인하여 음식을 먹을 수 없었을 것이다. 바울은 음식을 먹으라 권하며 떡을 가져다 축사하고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바울이 전한 구원의 메시지에 소망을 갖게 된 그 사람들에게 내리는 하나님의 이름으로 축복한 음식은 소망을 잃고 사경을 헤매는 사람들에게 생명의 불꽃이 되었을 것이다.
C. 당신을 향한 하나님의 계획
이와 같이 우리는 인생 가운데 돌연히 몰아 친 폭풍 때문에 주님을 위한 우리의 사역이 끝났다고 생각될 때도 있다. 그로 하여 우리는 두려워하고 좌절하고 자책할 때가 있다. 바울로 이와 같은 상황에서 두려워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주님을 위한 바울의 일은 끝나지 않았다. 주님은 이미 바울에게 네가 가이샤 앞에 서야 하리라 말씀하셨다. 주님은 바울이 네로황제 앞에 서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게 하실 목적을 가지고 계셨던 것이다.
또한 주님은 바울이 예측하지 못하는 일들을 준비하고 있었던 것이다. 주의 사자는 바울에게 “그러나 우리가 한 섬에 걸려야 하리라” 하셨다. 그들이 생각한 것처럼 정처없이 그들이 떠내려간 것이 아니라 주님은 폭풍을 통해 바울에게 큰 사역의 문을 열어주시려 계획하신 한 섬에 다다르게 하셨다. 이와 같이 우리는 종종 우리의 삶의 폭풍우의 배후에 있는 목적을 보지 못한다. 흥미롭게도 그 목적은 다음 장에서야 우리에게 나타난다.
잠언기자는 우리에게 “마음의 경영은 사람에게 있어도 말의 응답은 여호와께로서 난다”(잠16:1) 하였고 다시 “사람이 마음으로 자기 일을 계획할지라도 그 걸음을 인도하는 자는 여호와시라”(잠16:9) 하였다. 이처럼 하나님은 사람들의 잘못된 선택으로 겪어야 했던 극한 상황에서 그의 사람을 통해 하신 말씀에 대해 확실한 응답을 내리신다.
바울은 풍랑으로 인해 고통당하는 일행에게 하나님이 주신 예언의 말씀을 전함으로, 배 안의 사람들을 안심시키며 하나님이 자신에게 약속하신 대로 반드시 이루어질 것이라는 확신을 주었습니다.
바울이 담대하게 예언을 말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하나님을 바라보았기 때문입니다.
그에게는 하나님의 말씀이 있었습니다. 바울 일행이 안심할 수 있는 이유는 하나님의 사자가 밤에 그의 곁에서 일러 주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그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신뢰했습니다.
오늘날에도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신뢰하는 자는 인생의 풍랑이 일고, 세상이 흔들리는 가운데서도 안심하고 평안을 누릴 수 있습니다. 이 세상에서 신자는 불신자와 동일하게 환난과 절망적인 일을 겪습니다. 그러나 신자는 말씀으로 약속하시며 돌보시는 하나님이 계시기에 두려워하지 않고 안심합니다.
하나님의 구원하심을 신뢰하고 약속의 말씀을 굳건히 붙드십시다.
1. 갑자기 몰아닥친 광풍 (13~17절)
“남풍이 순하게 불매 그들이 뜻을 이룬 줄 알고 닻을 감아 그레데 해변을 끼고 항해하더니” (13절)
바울은 안 가는 게 좋겠다고 했는데, 선장과 선주는 가야 된다고 했습니다. 미항이 작아서 겨울을 나기가 불편하니까, 저 옆에 있는 뵈닉스로 가서 겨울을 나자고 했습니다. 그래서 갔는데 마침 남풍이 순하게 불어옵니다. 그래서 그들은 ‘뵈닉스로 우리가 잘 갈 수 있겠다.’ 하고 생각하며 계획대로 닻을 올리고 출항합니다. 이것은 그야말로 ‘순풍에 돛 단 배’라고 표현할 수 있겠습니다.
사람들은 모두 자기들의 생각이 옳고 ‘바울이 괜히 저런 말을 해서 우리 마음을 언짢게 했다.’라고 생각했음에 틀림없습니다. 그래도 나름대로 조심하기 위해, 미노아 문명으로 유명한 크고 긴 그레데 섬 해안을 끼고 항해를 합니다. 그런데 그때 전혀 예상하지 못한 일이 발생합니다. 죽음의 북동풍이 불어온 것입니다.
“얼마 안 되어 섬 가운데로부터 유라굴로라는 광풍이 크게 일어나니” (14절)
항해한지 얼마 되지 않아 섬의 내륙으로부터 큰 광풍이 불어오기 시작했습니다. 우리가 겪는 인생도 이처럼 모든 일이 우리 계획처럼 순풍에 돛단 듯 잘 나가다가, 아무 경고도 없이 갑자기 이런 광풍이 몰아닥칠 때가 있습니다.
그들이 겪었던 바람의 이름을 우리 개역개정 성경은 ‘유라굴로’라고 하는데, 이것은 동풍을 가리키는 헬라어 ‘유로스’(Euros)와 북풍을 가리키는 라틴어 ‘아퀼로’(Aquilo)의 합성어입니다. 선원들(뱃사람들)이 말하는 북동풍, 그것도 아주 강력한 죽음의 북동풍입니다.
이것을 영어 성경에 잘 표현해놓았는데 “a wind of hurricane force”, 즉 허리케인과 같이 강력한 힘을 가진 바람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NIV, NRSV, ESV 등 요즘 많이 사용하는 영어성경 번역들은 이것을 ‘유라굴로’라고 하지 않고 ‘Northeaster’ 즉 북동풍이라 불리는 광풍(혹은 허리케인)이라고 번역해놓았습니다. 그것은 허리케인과 맞먹는 엄청난 파워를 가진 바람이었습니다.
이 시대의 큰 상선이나 크루즈 배처럼 강한 추진력의 엔진을 가진 배들도 태풍급 바람이 불거나 큰 파도가 몰아치면 아주 위험해집니다. 그런데 그 당시의 배들은 높은 파도와 강한 바람을 이기고 나아갈 수 없는 배들이었습니다. 아무리 용기가 대단하고 경험이 많은 뱃사람들이라도, 강력한 두 개의 폭풍(북풍과 동풍)이 합쳐져서 몰아치는 역대 최강의 바람이 만든 파도를 뚫고 나간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냥 그 파도에 순응하는 것이 지혜로운 상황입니다. 잘못된 파도에 엉뚱한 데로 떠밀려갈 수가 있습니다. 이런 파도가 칠 때 아무리 노련한 뱃사람이라도 죽음을 직감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배가 밀려 바람을 맞추어 갈 수 없어 가는 대로 두고 쫓겨가다가, 가우다라는 작은 섬 아래로 지나 간신히 거루를 잡아” (15-16절)
제가 오래 전 바로 이 부분에 대한 설교를 어느 교회에 갔다가 들은 적이 있는데, 이 본문만 가지고는 이해가 안 갈 수 있습니다. 그래서 조금 더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바울이 탄 알렉산드리아 배가 바람에 계속 밀려가다가 크레타 섬에서 약 23마일 떨어진 가우다라는 섬 근처로 밀려가게 되었습니다. 이 가우다(Cauda) 섬은 지금의 가우도스(Gavdos)라는 섬입니다.
계속 항해하기에 너무 위험한 상황이었기 때문에, 선원들은 배 뒤에 끌고 다니는 “거루” 즉 작은 거룻배들을 끌어올렸습니다. 이 거룻배들은 얕은 해안가에 상륙할 때 사용되는 작은 배들이고 때로 구명정처럼 사용되었는데, 바람이 너무 세니까 이 거룻배들이 날아와서 배에 부딪치면 거룻배들도 깨지고 모선도 해가 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광풍과 파도에 날아와서 부딪치고 깨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거룻배들을 끌어올려서 밧줄로 꽁꽁 동여매었습니다.
“끌어 올리고 줄을 가지고 선체를 둘러 감고 스르디스에 걸릴까 두려워하여 연장을 내리고 그냥 쫓겨가더니” (17절)
위험에 빠진 그들은 자신들이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했지만, 여전히 “스르디스에 걸릴까 두려워하여 연장을 내리고 그냥 쫓겨갔”다고 되어 있습니다. 우리말로는 스르디스에 걸리는 게 뭐고 연장을 내리고 쫓겨 간 것은 뭔지 이해가 안 갈 수 있습니다.
“스르디스”는 ‘시르티스’(Syrtis)라는 단어입니다. 지중해는 아시아와 유럽과 북아프리카 사이에 있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이것은 크레타 섬의 남쪽 에게 해 건너 북아프리카의 리비아에서부터 밀려드는 모래톱(모래언덕)을 말합니다.
‘연장을 내렸다’는 것은 어떤 무거운 짐이나 도구를 버렸다는 뜻이 아니라, 바람에 빠르게 밀려가는 속도를 줄이기 위해서 내리는 일종의 닻 같은 것을 말합니다. 너무 빨리 밀려가니까 무거운 닻을 내려서 천천히 밀려가도록 애를 쓰는 것입니다. 그리고 ‘쫓겨갔다’는 말은 그렇게 했어도 어쩔 수 없이 파도에 밀려서 갔다는 의미입니다. 이것을 새번역을 보면 잘 번역되어 있습니다.
“그들은 리비아 근해의 모래톱으로 밀려들까 두려워서, 바다에 닻을 내리고, 그냥 떠밀려가고 있었다.” (14절)
지중해 남쪽에는 아프리카 대륙의 리비아 해안이 있는데, 그 당시는 북아프리카를 주로 ‘리비아’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 바다 속에 ‘모래언덕’으로 불리는 ‘스르디스’가 많았다는 것입니다. 어떤 배든 그 바다 속에 있는 모래언덕에 탁 걸리면 더 이상 나아갈 수가 없고 붙들리는 겁니다.
그레데 섬 미항을 출항한 이 알렉산드리아 배가 유라굴로 광풍 때문에 남서쪽에 위치한 가우다 섬으로 휩쓸려갔습니다. 그래서 선원들은 자칫 배가 남쪽으로 밀려가다가 결국 리비아 해안까지 밀려가서 바다 속 스르디스(모래언덕)에 걸릴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휩싸였습니다. 왜냐하면 이 모래언덕은 선원들에게 아주 두려운 존재였기 때문입니다. 거기에 한 번 걸리면 누가 와서 구해줄 때까지는 꼼짝없이 있어야 하고, 망망대해에서 그런 데 걸리면 곧 죽음입니다. 그러나 고작 돛을 내리고 그냥 휩쓸려 가는 것 외에는 할 수 있는 게 없었습니다.
처음 출항할 때는 순풍이 불어서 ‘우리가 바울의 말을 안 듣길 잘했지. 전문 뱃사람을 포함한 다수의 의견대로 한 것은 참 잘했다.’라고 생각했겠지만, 바로 조금 후 급작스럽게 돌변한 사태를 통해서 사도 바울의 말이 맞았다는 것을 우리는 알게 됩니다.
지금 바울을 태운 이 배가 겪고 있는 일은 마치 우리 인생에 일어나는 일을 보여주는 작은 비유와도 같습니다. 때로는 세상 일이 순풍처럼 보입니다. 남풍이 순하게 불어와서 아주 잘나갈 때가 있습니다. 성경 내용도 그렇고, 교회에서 설교나 성경공부나 스스로 성경을 읽는 것 등을 통해 ‘그렇게 하면 안 좋다. 주님의 뜻대로 해야 하는데...’라는 것을 알면서도 ‘에이, 그래도 내 경험과 지식으로 볼 때는 다르게 하는 게 낫다.’ 하며 나아갔을 때, 주님을 의지하지 않고 기도하지도 않고 내가 알아서 했는데 일이 잘 풀립니다. 그러면 ‘그렇지, 내가 생각을 아주 잘한거지.’ 하며 의기양양하게 즐거운 마음으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서 순풍이 광풍으로 변하고,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상황이나 사람으로부터 예상 밖의 광풍이 불어오는 것이 우리의 인생입니다. 조금 살아보면 그런 것을 다 경험하지 않습니까? 내가 알아서 했을 때 처음에는 잘되는 것 같다가, 중간에 예상하지 못했던 일이 벌어집니다. 이 정도는 아니더라도 크고 작은 어려움들이 다가오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리스 신화에 ‘이카로스(Icarus)의 꿈’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날개를 달고 하늘을 날고자 했던 이야기입니다. 그것이 미노아 문명과 관련이 있는데, 흥미롭게도 바로 이 그레데 섬이 미노아 문명으로 유명한 곳입니다. 날개를 달고 날아서 크레타 섬을 탈출하고자 했던 이카로스의 꿈이 막 이루어지는 것처럼 보였던 그 순간, 밀납으로 만든 날개가 태양의 열에 녹아서 추락하여 죽고 말았다는 것이 이카로스의 신화입니다.
인생이 그것과 참 비슷하다는 것을 느낍니다. 뭔가 열심히 해서 날아오르며 잘되는 것 같지만, 뜻하지 않은 불행과 어려움이 찾아오는 것입니다. 바로 그럴 때 우리는 어떤 자세를 가지고 그 위기를 극복하느냐 하는 것이 우리 신앙의 진실함을 증명합니다. 믿는 사람이든 안 믿는 사람이든,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이든 대충 하는 사람이든, 다 좋은 일도 찾아오고 위기도 찾아옵니다. 그런데 좋은 일보다는 위기 상황에서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우리 진짜 믿음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광풍이 순풍으로 바뀔 때는 누구나 감사 예배를 드리고 하나님께 감사하면서 기분 좋게 나아갈 수 있습니다. 하지만 순풍이 광풍으로 바뀔 때 진짜 신앙이 어떠한지가 드러나는 것입니다. 그때 쉽게 하나님을 원망할 것이 아니라, 혹시 내가 불순종하여 광풍을 초래한 것은 없는지 돌아봐야 합니다. 모든 어려움이 다 불순종이나 죄 때문에 오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어려운 상황이 벌어질 때 믿는 사람이라면 자기를 돌아볼 줄 알아야 합니다.
모든 어려움이 죄 때문은 아니더라도, 욥과 같이 죄를 범하지 않았어도 어려움이 올 수 있지만, 그러나 그런 어려운 순간 낮아져서 겸손히 하나님 앞에 무릎 꿇고 ‘혹시 제가 잘못한 것은 없습니까?’ 하며 하나님 앞에서 자기를 비추며 돌아보는 사람이 그리스도인입니다. 그런 사람이 믿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동시에 이 위기 상황도 벗어나도록 해주실 수 있는 하나님을 의지하며 그분께 간절히 기도하면서 나아가는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 믿는 사람들의 신앙생활입니다.
2. 모든 희망이 사라진 상황 (18~20절)
“우리가 풍랑으로 심히 애쓰다가 이튿날 사공들이 짐을 바다에 풀어 버리고” (18절)
‘풍랑으로 심히 애썼다’는 표현은 ‘폭풍우로 심히 괴롭힘을 당했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우리가”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이 글을 쓰고 있는 사도행전의 저자 누가도 폭풍을 견디는 데 힘을 보탰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바울과 아리스다고 등 일행이 거기 탄 사람들과 같이 힘을 썼다는 것입니다.
하루가 지나 이튿날이 되었지만, 광풍의 위세는 조금도 줄어들지 않습니다. 그래서 선원들은 광풍 속에 배가 전복되지 않도록 배의 무게를 줄이기 위해, 비상식량을 제외한 하물들을 모두 바다에 내버려야 했습니다.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 항에서 실은 거대한 양의 곡물, 또 많은 하물주들이 실은 온갖 하물들을 다 바다에 버릴 수밖에 없게 된 것입니다.
이것은 선주의 돈이고 선장의 돈이고 또 하물주들의 돈과 같은 물건들이었습니다. 그들은 그 돈을 지키기 위해 미항에 있지 않고 조금 더 안전하다고 생각되는 뵈닉스로 가자고 했습니다. 그래서 겨울 항해의 위험에도 바로 옆이니까 괜찮을 거라고 생각하며 뵈닉스로 가자고 주장해서 나온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죽음의 광풍 앞에서 그들이 그토록 지키려 했던 돈은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오히려 죽음의 광풍 속에서는 그들의 죽음을 재촉하는 도구가 될 뿐입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생명을 지키기 위해 이제는 자신들의 돈과 같은 물건들(곡물과 하물들)을 다 내버리지 않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사흘째 되는 날에 배의 기구를 그들의 손으로 내버리니라” (19절)
지금 누군가가 내버린 게 아닙니다. 자기들의 손으로 내버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사흘째가 되어도 상황은 호전되지 않습니다. 어쩔 수 없이 선원들은 침구, 의자, 테이블 등 “배의 기구”도 바다 속으로 버리게 되었습니다. 배에 필수적으로 갖추어져 있어야 할 기구들마저 바다 속으로 버릴 정도로 상황이 아주 위급했습니다.
“여러 날 동안 해도 별도 보이지 아니하고 큰 풍랑이 그대로 있으매 구원의 여망마저 없어졌더라” (20절)
“여망”이라는 말은 ‘남을 여(餘)’에 ‘바랄 망(望)’, 즉 ‘남은 희망’이라는 뜻인데, 이제 남은 희망도 다 사라졌다는 것입니다. ‘해도 별도 보이지 않았다’는 것은 시적으로 ‘햇님, 별님’이라고 하는 수준이 아닙니다. 굳이 여기서 해와 별을 쓴 것은, 그 당시 뱃사람들이 해나 별을 보면서 방향도 알고 시간도 알았는데, 이제는 그것들을 볼 수 없으니 측정하여 알아낼 수 없는 상황, 희망이 완전히 사라져버린 상황이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쓴 단어들인 것입니다.
자신들이 그토록 지키려 했던 자신들의 돈과 같은 물건들을 왜 이들은 바다 속에 버려야 했습니까? 배에 필수적으로 있어야만 하는 기구들까지도 왜 바다에 다 버려야 했습니까? 그렇게 해야 혹시라도 살 수 있는 희망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그 모든 것을 다 포기했지만, 해와 별이 보이지 않는 칠흑 같은 어둠의 날들만 계속될 뿐, 죽음의 풍랑 유라굴로는 조금도 잦아들지 않는 겁니다. 실날같은 마지막 희망마저 사라진 상황입니다. 이제 아무 희망도 없습니다.
여러 날이 지났지만 해도 별도 보이지 않으니까 정확히 며칠이 지났는지 알기가 힘든 상황입니다. 그런데도 계속 바람은 강하게 불고 거대한 파도는 쉬지 않고 알렉산드리아 배를 삼키려 막 몰려옵니다. 그냥 배를 타서 조금만 흔들려도 배 멀미를 하며 얼마나 힘듭니까? 그런데 집채만 한 파도가 몰려오고 물이 쏟아지고 물을 먹어야 하는 상황, 또 바람이 불고 배가 이리저리 움직이니까 이리 밀려갔다 저리 밀려갔다 하며 쓰러지고 부딪히고 피가 나고 팔다리도 부러지는 그런 상황입니다. 얼마나 힘듭니까? 이런 상황이 조금 후에 멈추면 그나마 다행인데 멈출 기미가 안 보이는 겁니다.
우리가 어떤 어려움이 왔을 때 ‘조금만 견디면 좋은 일이 생길 거다.’라는 희망이 있으면 견딜 수 있습니다. 그러나 희망이 전혀 보이지 않는 상황은 얼마나 힘듭니까? ‘이제는 그냥 놓아야겠다. 나는 이제 죽었다.’라는 마음을 품은 사람들도 있었을 것입니다. 구원의 가능성이 전혀 보이지 않는 절망의 순간입니다. 나침반 역할을 해주는 해도 별도 달도 다 안 보이니까, 지금 어디로 가는지, 며칠이 지났는지 알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절망적인 죽음의 상황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나중에 보면 이 배에 있는 사람 숫자가 바울까지 합쳐서 276명입니다. 지금 이러한 죽음의 위기 앞에서 이 사람들이 무엇을 생각했겠습니까? ‘괜히 왔다가 이렇게 되었구나. 괜히 미항을 떠났다가 지금 이렇게 되었구나.’ 그런데 누가 그렇게 결정한 것입니까? 자기들이 그렇게 결정한 것입니다. 누가 시켜서 한 것이 아닙니다. 바울은 가지 않는 게 좋겠다고 권면했는데, 그 말을 듣지 않고 위기 속으로 자신들을 몰아넣은 사람들은 바로 자신들입니다.
그런데 왜 그랬습니까? 왜 미항에 머물지 않고 뵈닉스로 가자고 하며 무리해서 떠났습니까? 자신들의 피와 같은 돈, 소중한 돈을 지키기 위함이었습니다. 바울은 돈보다 생명이 더 귀하다는 것을 강조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아니다, 생명보다 돈이 귀하다.’라고 여겼습니다. ‘돈이면 생명도 지킬 수 있다. 돈이면 다 할 수 있다. 그러니까 돈이 중요하다. 그래서 미항이 아니라 뵈닉스로 가야 한다.’ 그런데 그들이 지키려 했던 바로 그 돈 때문에, 결국은 자신들의 소중한 생명이 지금 죽음의 위기에 몰리게 된 것입니다.
여러분, 어떻습니까? 이것이 지금도 이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이 아닙니까? 바로 우리 자신의 모습이 아니겠습니까? 돈에서 해방되지 않으면, 도구이어야 할 돈을 삶의 목적으로 삼게 되면, 돈이 오히려 우리를 죽이게 된다는 것이 성경의 교훈입니다. 수없이 많은 곳에 돈에 대한 경고가 있지만, 지금 이것을 겪고 있는 사도 바울이 나중에 썼던 디모데전서에서 자신의 아들과 같은 디모데에게 이런 경고의 말씀을 전합니다.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 이것을 탐내는 자들은 미혹을 받아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써 자기를 찔렀도다” (딤전 6:10)
성경에서는 돈 자체가 악이라고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돈이 나쁘다고 하지 않습니다. 돈은 좋은 것도 아니고 나쁜 것도 아닙니다. 돈은 중립적(neutral)인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무엇이라고 가르칩니까?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된다고 합니다. 돈을 삶의 목적으로 삼는 것이 모든 악의 근원이 된다는 것입니다.
돈을 목적으로 삼으면 어떻게 됩니까? 바울이 디모데전서를 썼을 당시도 믿는다고 하는 사람들 역시 돈에 넘어가서 믿음을 떠났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돈을 목적으로 삼으면 주님을 떠나게 됩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과의 관계에 있어서도 돈이 더 우선이기 때문에 다른 사람을 멸시하게 됩니다. 그런데 결국 어떻게 되는가 하면, 자기 자신을 찌르게 됩니다. 돈을 사랑하면 자기에게 좋을 것 같은데, 사실은 자기를 찌르고 자기를 해치는 것이 된다는 것입니다.
돈뿐이겠습니까? 돈이나 명예나 학위나 사회의 성공이나 좋은 학교에 가는 것도 다 마찬가지입니다. 결국 맨 끝에 가보면 다 돈입니다. 아무리 유명해지더라도 돈이 하나도 나오지 않는다고 하면 유명해질 사람이 별로 없습니다.
왜 많은 사람들이 아직도 불량상품을 만들어냅니까? 돈 때문입니다. 오래 전에 한국에서 백화점이 무너지고 다리가 끊어졌는데, 부실공사를 했기 때문입니다. 왜 그렇게 했습니까? 돈 때문입니다. 지난번 세월호에도 그런 일이 일어났지만, 무리하게 한계를 넘는 화물을 실었다가 배가 돌 때 넘어져 침몰하는 일이 왜 일어납니까? 돈 때문입니다.
이 콜럼버스는 그래도 괜찮지만, 제가 오래 전에 살던 애틀랜타에는 이상하게 유흥업소가 많습니다. 옛날에도 많았고 나중에는 뉴욕 쪽에서 온 사람들이 큰 식당도 세우고 또 룸살롱 같은 유흥업소를 세웠습니다. 다 왜 그렇습니까? 결국은 돈 때문입니다.
도박 산업이 왜 안 없어집니까? 도박이 나쁘다는 건 다 아는데 왜 안 없어집니까? 돈 때문입니다. 또 지금도 아주 어린아이들을 납치해서 파는 인신매매가 왜 벌어집니까? 돈 때문입니다. 테러도 결국 돈 때문에 일어납니다.
여기는 조금 덜하지만, 한국은 좁은 땅인데도 부동산 투기가 지금까지도 문제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돈 때문입니다. 사기 치고, 횡령하고, 대기업이 하청기업에 횡포를 부리고, 사람 간에도 갑질을 하는 일이 왜 계속 일어납니까? 결국은 돈 때문입니다.
그런데 내가 돈을 벌려고, 내가 이익을 얻으려고 했던 그런 모든 행동들을 통해 결국 어떻게 됩니까? 상대방을 무너뜨리고 내가 사는 겁니까? 그렇지가 않습니다. 결국 자기를 찌르게 됩니다. 결과적으로 자기의 생명까지 스스로 찔러서 해치는 결과를 가져오는, 스스로를 죽이는 행위가 되는 것입니다.
그런 식으로 돈이든 무엇이든 그쪽으로 가다가 어느 날 이런 죽음의 유라굴로 광풍이 갑자기 우리를 덮칠 때, 우리의 돈이 그 죽음의 광풍에서 우리를 구해줄 수가 있겠습니까? 너무 다급해서 이제 돈을 다 포기하고 살고 싶다고 한들, 그 광풍이 조용히 사라져주겠습니까? 우리의 돈이든 명예든 권력이든 학벌이든 뭐든 간에, 그것이 우리를 지켜주겠습니까?
결국 이런 유라굴로 광풍이 불어올 때 우리는 후회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때 그 결정을 하지 말 걸...’ ‘그때 그러지 말았어야 되는데...’ ‘그때 주님을 붙들었어야 했는데...’ 그런 후회를 하지 않는 우리 삶이 되기를 바랍니다.
3. 안심하라 (21~26절)
이렇게 죽음의 풍랑에 휩쓸린 사람들에게 가장 큰 위기는 사실 죽음의 풍랑 그 자체가 아닙니다. 그들에게 가장 큰 위기가 뭔가 하면, 이것이 너무 힘드니까 ‘이제 끝이다’ 하며 스스로 절망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유명한 덴마크의 크리스천 철학자였던 키에르케고르도 “죽음에 이르는 병은 절망이다.”라고 했습니다.
어떤 엄청난 외부적인 풍랑이 몰려오고 불행이 일어나는 것이 최대의 위기가 아니라, 나 스스로 그런 것 때문에 절망하는 것이 가장 큰 위기입니다. 아무도 이 사람들을 절망으로 몰아넣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스스로 그렇게 만든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스토리는 이제 끝인가? 그렇지 않습니다.
“여러 사람이 오래 먹지 못하였으매 바울이 가운데 서서 말하되 여러분이여 내 말을 듣고 그레데에서 떠나지 아니하여 이 타격과 손상을 면하였더라면 좋을 뻔하였느니라” (21절)
지금 유라굴로 광풍이 몰아친 후로 며칠이 지났는데, 27절에 보면 “열 나흘째 되는 날”이라고 하여 누가는 날짜를 세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러니까 거의 2주 동안 이 엄청난 폭풍에 계속 시달린 겁니다. 그 사이 사람들은 아무것도 먹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그때 바울이 가운데 서서 외칩니다. 바람이 불고 배가 흔들리고 몸도 이리저리 흔들리며 여기 부딪치고 저기 부딪치고 제대로 서 있을 수도 없는 상황에 어떻게 먹겠습니까? 먹는다는 것은 생각할 수도 없는 상황입니다.
이때 바울이 말을 하는데 이것을 잘 봐야 합니다. 이것을 잘못 볼 때 어떻게 들리는가 하면, ‘내가 뭐랬어? 거봐. 내 말 안 듣더니 꼴좋다.’라고 들릴 수 있는데 절대 그런 뜻이 아닙니다. “여러분이 내 말을 듣고 그레데에서 떠나지 않고 이것을 면했으면 좋을 뻔했다.”라는 것은 ‘꼴좋다. 거 봐라.’ 하는 뜻이 아니라 ‘그러니까 이제 내 말을 잘 들으십시오.’라는 말입니다.
‘내 말은 틀림없는 말입니다. 주님으로부터 받은 말씀이기 때문에 틀림없습니다. 그러니까 이제라도 내 말을 들어주십시오.’라는 말입니다. 비난하거나 조롱하기 위해 한 말이 결코 아닙니다. 이것은 생명의 소중함을 일깨워주기 위한 말입니다. 이제 죽음 앞에서는 돈이 자기를 살려줄 수 있는 게 아님을 일깨워주며 주님께서 주신 메시지를 그들에게 나누고 있습니다.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이제는 안심하라 너희 중 아무도 생명에는 아무런 손상이 없겠고 오직 배뿐이리라” (22절)
우리말 “안심하라”로 번역된 헬라어 단어가 사실은 ‘기뻐하라’는 말입니다. 아니, 지금 이 상황에서 기뻐하라니, 말이 안 되는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마지막 여망이 다 사라지고 살 소망이 없으며 절망 속에 있는 사람들에게 바울은 오히려 ‘기뻐하라, 안심하라’ 하고 선포한 것입니다. 비록 돈은 날렸지만 생명에는 아무 손상도 없을 것이며 돈은 살아서 다시 벌면 된다는 말이 아닙니까. 그들을 위로하기 위해 바울이 허풍을 떠는 것이 아닙니다.
그 뒤에 보면 왜 이런 말을 하는지가 나오는데, 이때 이 사람들의 마음을 한 번 상상해보십시오. 지금 내가 뱃사람이고 엄청난 파도에 힘들어하며 괴로워하는데, 바울이라는 사람이 갑자기 일어나더니 “안심하라! 기뻐하라!” 하고 말합니다. 그때 얼마나 소망의 빛줄기가 비추는 느낌이 들었겠습니까? 이 상황에 아무도 이런 말을 할 수 있는 사람이 없습니다. 그런데 이 말을 합니다. 그리고 이 말을 한 사람은 바로 조금 전에 이렇게 될 것이라고 자기들에게 경고한 그 사람입니다. 그렇다면 귀가 번쩍 틔였을 것이 분명합니다.
“내가 속한 바 곧 내가 섬기는 하나님의 사자가 어젯밤에 내 곁에 서서 말하되, 바울아 두려워하지 말라 네가 가이사 앞에 서야 하겠고, 또 하나님께서 너와 함께 항해하는 자를 다 네게 주셨다 하였으니, 그러므로 여러분이여 안심하라 나는 내게 말씀하신 그대로 되리라고 하나님을 믿노라. 그런즉 우리가 반드시 한 섬에 걸리리라 하더라” (23-26절)
얼마나 대단합니까! “나는 하나님을 믿노라!” 대단한 선언입니다. 지금 절망에 빠져 있는 이 사람들에게 ‘기뻐하라’고 한 것은 허풍을 떠는 게 아니라, 그 근거가 있습니다. 근거는 하나님이고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바울은 로마 관광을 위해서 지금 무슨 알렉산드리아 크루즈 배에 탄 것이 아닙니다. 바울이 지금 알렉산드리아 배에 탄 것은, 베스도 총독의 법정에서 로마 시민의 자격으로 황제에게 상소했기 때문에 그리로 가고 있는 길입니다. 또 로마로 그냥 가는 게 아니라 거기서 복음을 전하는 것이 그의 소망이고 열정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사실 바울을 로마로 보내는 것은 하나님이셨습니다. 하나님이 바울을 로마로 보내고 계십니다.
그런데 바울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땅 끝까지 전하는 위대한 사도였음에도 불구하고, 유라굴로 광풍이 바울을 비켜간 것이 아닙니다. 광풍이 불었는데 바울이 서 있는 곳만 조용하고 옆에만 폭풍이 몰아친 게 아닙니다. 바울도 똑같이 당하고 있습니다. 다 휩쓸려서 엄청나게 고생하고 있는 상황입니다. 바울이 젊은 때도 아니고 노년에 접어든 나이이며 몸도 아주 허약합니다. 그런데도 이 폭풍 속에서 이리 밀리고 저리 밀리고 넘어지고 뒹굴고 하는 상황에서 벌떡 일어나 사람들에게 외치고 있습니다. 얼마나 놀랍습니까?
그런데 주님께서 이때만 이야기하신 게 아닙니다. 이때는 천사를 보내어 이전에 주신 말씀을 재확인시켜주신 것인데, 23장 11절에 보면 바울이 가이사랴 감옥에 갇혀 있을 때 주님께서 이런 말씀을 해주셨습니다.
“그날 밤에 주께서 바울 곁에 서서 이르시되 담대하라. 네가 예루살렘에서 나의 일을 증언한 것 같이 로마에서도 증언하여야 하리라 하시니라” (행 23:11)
지금 바울이 로마로 가고 있는데, 아무리 유라굴로 광풍을 만났어도 바울은 분명히 ‘나는 괜찮다. 살아날 것이다.’라는 확신을 갖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주님께서 이미 로마로 가서 복음을 전할 것이라고 말씀해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자기와 동역자 누가와 아리스다고 뿐만 아니라, 지금 함께 하고 있는 273명도 다 같이 살아날 것이라는 메시지를 여기서 새롭게 추가해서 주신 것입니다. 바울은 분명히 살아나서 로마로 갑니다. 그런데 이 사람들도 다 같이 살아날 것이라는 말씀을 전하라고 바울에게 알려주신 것입니다. 이 얼마나 놀라운 내용입니까? 정말로 놀라운 장면입니다.
[나가는 말]
여러분, 2020년이 된지 얼마 안 된 것 같은데 오늘 벌써 1월 마지막 주일로 1월이 다 갔습니다. 그럼 이제 11개월 남았습니다. 그러므로 자꾸 뒤로 미루지 말고, 오늘 내가 어떤 사람으로 살 것인지를 결단해야 합니다.
물론 예배는 매주 있고 주중에도 있고 많이 있습니다. 그래서 ‘이번 주 말고 그냥 다음 주에 가지.’ ‘그 다음 주에 가지.’ ‘삶 공부는 이번에 관두고 다음에 또 있을 테니 다음에 하지.’라고 생각합니다. 다음에 있을지 없을지 그것을 어떻게 알겠습니까? 내가 그때까지 있을지 없을지 어떻게 알겠습니까? 그래서 우리는 어떤 사람으로 살 것인지, 어떻게 할 것인지 오늘 결정해야 합니다.
바울이 탄 배에 엄청난 광풍인 유라굴로가 불었습니다. 꼼짝없이 그 배에 탄 사람들이 다 죽게 되었습니다. 거기에 타고 있는 몇 종류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먼저, 선주와 선장은 돈을 최고의 가치로 여기며 살던 사람들입니다. 둘째로, 거기에는 화물주들이 많이 타고 있었습니다. 보따리 장사꾼들로서, 돈을 벌기 위해 나름대로 최선을 다하던 사람들, 그래서 자기 화물을 꽉 붙들고, 이것이 곧 돈이기 때문에 가서 팔 생각으로 가득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셋째로, 백부장이 있고 그와 함께 한 로마 군인들이 있습니다. 강한 군사력을 지닌 로마의 군인들입니다. 또 백부장이 그 배의 최고 권력자입니다. 가장 높은 사람으로서, 지시할 권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또한 죄수 바울이 있고 그와 함께 한 누가와 아리스다고가 있습니다. 영원하신 주님의 복음을 최고의 가치로 여기며 살던 사람들이지만, 그 배에서는 가장 밑바닥에 있는 사람들입니다. 물론 그 배에는 다른 죄수들도 있고 다른 여행객들도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크게 봤을 때는 그렇습니다. 바울은 죄수였고 아무도 그의 말을 들어주지 않던 그런 사람이었지만, 결국 276명 모두를 살린 사람은 바울이었습니다. 아니, 바울이 아니라 바울을 통해 역사하신 하나님이셨습니다.
유라굴로 앞에서는 돈도, 권력도, 군사력도, 육체의 강함도 아무 소용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유라굴로보다 강하신 주님, 광풍도 다스리시는 주님을 믿는 사람들에게는 이 순간조차도 은혜의 순간이었습니다. 영원하신 주님을 섬기기 때문에 어떤 상황이 닥쳐도 견딜 수 있습니다.
그리고 실제 리더십은 이제 주님을 섬기는 바울에게로 넘어가는 것을 뒤에 보면 알게 됩니다. 그래서 지금 절망 속에 있던 273명의 사람들에게 소망을 주는 사람이 바로 이 바울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을 모두 살려내시는 하나님을 보여주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우리 인생에도 작은 바람이 불 때도 있지만 이처럼 큰 유라굴로가 불게 되어 있습니다. 언제 부느냐가 문제이지, 반드시 옵니다. 그때 내가 지금까지 어떻게 살았는지 또 어떤 사람인지가 드러납니다. 그래서 우리는 지금 유라굴로가 불지 않고 있을 때 빨리 결단해야 합니다. 어떻게 살 것인지를 결정해야 합니다.
어떤 사람으로 살 것인가? 무엇을 목적으로 살 것인가? 어디를 향해 나아갈 것인가? 우리는 지금 결단해야만 합니다. 특히 우리 주변에서 절망에 빠져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상태에 있는 사람들에게 소망을 주는 사람, 주님의 소망을 나누어주는 사람이 되겠다고 결단해야 되겠습니다.
영원하신 주님을 붙들고 주님의 복음을 위해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되어, 어떤 상황이 우리 삶에 닥치더라도 믿음으로 이겨낼 뿐만 아니라 절망 속에 있는 사람들에게 소망을 주고 살려내는 사람, 그래서 주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아름답고 고귀한 인생이 다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이제는 안심하라(사도행전 27:13-37)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이제는 안심하라 너희 중 생명에는 아무 손상이 없겠고 오직 배 뿐이리라”(행 27:22)
본문 22절을 보면 “이제는 안심하라”는 사도 바울의 위로와 권면의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말씀은 ‘유라굴로’라는 풍랑을
만나 생존의 소망이 전혀없이 두려움과 공포에 떨고 있는 276명의 선객들에게 유일한 삶의 희망이었습니다. “이제는 안심하라”는
음성은 절망에서 소망의 빛을 찾게 하는 음성이자, 죽음에서 생명을 약속하는 음성입니다. 이 세상이라는 고해를 항해하는 인생들에게도
현대의 ‘유라굴로’는 쉼없이 부딪쳐옵니다. 불경기로 인한 ‘경제 불황의 유라굴로’, ‘우르과이 라운드(UR)라는 유라굴로’가
우리 민족전체에게 휘몰아치고 있습니다. 여러분의 사업과 가정에도, 여러분 개인 한 사람에게도 이 강렬한 20세기의 유라굴로 광풍은
미친듯이 여러분을 파멸시킬 것처럼 달려듭니다.
그러나 이 시간도 “이제는 안심하라”는 주님의 부드러운 음성이 여러분을 권고하고 있습니다. 이 음성은 세상의 풍파에 지치고 허기진 우리들에게 오늘도 여전히 선포되고 있는 것입니다.
안심의 형편과 때
그러면 어떠한 형편에서 안심하라고 하였습니까? 또한 안심의 때는 언제입니까?
첫째로 “안심할 수 없을 때 안심하라”
‘이제는 안심하라’는 바울의 말은 당시의 형편과 너무나 대조적입니다. 도저히 안심할 수 없는 때입니다. 광풍을 만나 짐을 바다에
던지고, 배의 기구를 버리고, 식량인 밀까지 바다 속에 집어넣은 가장 위험한 때였습니다.
“심히 애쓰되”(18절)라고 하였고,
“여러 사람이 오래 먹지 못하였다”(14절)고 하였으니 육체적인 손실도 컸습니다. 또한 정신적인 면에서 선객들의 고통과 두려움은
이루 헤아릴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사도는 “이제는 안심하라”고 하였습니다. 분명 안심의 때가 아님에도, 아니
안심할 수 없는 환경에 이르렀음에도 불구하고 안심할 수 있는 것
나는 하나님을 믿노라(사도행전 27장)
본문은 사도 바울이 가이사랴에서 출발하여 로마까지 호송되는 긴 항해 여정을 생생하게 묘사한다. 누가는 뱃사람이 아니라 조금은 어설픈 표현을 사용했지만, 현장에 없던 사람은 절대 꾸며낼 수 없는 상세한 표현으로 이 과정을 기록했다(우리가 배를 타고 이달리야에 가기로 작정되매, 1절). 이 여정엔 마게도냐의 데살로니가 사람 아리스다고도 함께 했다(2절). 그는 에베소 폭동 때 극장에 끌려간 성도로(행 19:29; 20:4), 바울의 수행원으로 동행했고 누가는 배에 필요한 주치의로 함께 했을 것이다.
바울과
다른 죄수 몇 사람은 아구스도대의 백부장 율리오란 사람에게 맡겨져 배를 두 번 타는데, 첫 배는 시돈에서 무라까지 가는
연안선이었고 아무 문제 없이 항해했다. 하지만 두 번째 배는 무라에서 로마까지 가는 큰 배였으나 폭풍을 만나 파선했다.
21세기에도
배가 침몰하면 사람들은 혼돈에 빠진다. 아무리 구명조끼 및 안전 도구가 잘 구비되어 있어도 깊이를 알 수 없고 끝도 보이지 않는
망망대해에서 배가 침몰하면 극심한 공포와 두려움에 사로잡히지 않을 사람이 없다. 이천 년 전 항해는 더더욱 안전과 거리가
멀었다. 수시로 부는 광풍과 폭풍 때문인데, 10월 중순에서 3월 중순까지는 항해가 아예 불가능할 정도였다. 항해술도 지금처럼
발전하기 전이어서 나침반도 없이 별을 보며 운항해야 했다.
한달이 넘게 표류하는 배에서 모두가 불안과 공포에 떨 때, 자유로운 단 한 사람이 있었다. 모두 영혼의 파멸을 피부로 느낄 때 영혼의 안전함을 확신했던 사람, 바울이다. 어떻게 바울은 침몰하는 배 안에서 평안을 느낄 수 있었을까?
긴
항해를 종종 인생에 비유한다. 우리는 인생에서 수시로 부는 광풍과 폭풍을 만난다. 오래 표류하기도 하고 심지어 믿음에 관하여
파선할 지경에 이르기도 한다(딤전 1:19). 어떻게 우리는 험악한 바닷길 같은 인생에서 ‘내 영혼이 안전하다’라고 확신할 수
있을까? 어떻게 ‘내 영혼 평안해’라고 노래할 수 있을까?
1. 바울의 여정(1-20)
바울은 가이사랴에서 육로를 통해 시돈에 이르렀고, 그곳에서 해변을 순항하는 아드라뭇데노 배에 탔다(2절). 백부장 율리오의 호의로 시돈 성도에게 대접을 받은 바울 일행은 곧 거기서 떠나구브로 해안을 의지하고 항해하여 길리기아와 밤빌리아 바다를 건너 루기아의 무라 시에 이르렀다(4-5절). 서방 사본에 따르면 이 여정은 약 2주를 소요했다. 여기까진 아무 문제가 없었다.
일행은 이달리야 행 알렉산드리아 배로 갈아탔다(6절). 로마의 주된 곡식을 운송하는 큰 배로 많은 양의 곡물과 사람(276명, 37절)을 태울 수 있었다. 이때부터 풍세가 심상치 않았다. 이틀이면 도착할 니도에 여러 날 만에 간신히 도달했지만 더 이상 갈 수 없어 그레데 해안을 바람막이로 삼아 항해하기로 했다(7절). 일단 그레데 섬 라새아 부근 미항에 멈췄다(8절).
여기까지 오는 데 너무 많은 시간이 흘렀다. 누가는 금식하는 절기가 이미 지났다고 했는데, 많은 학자가 지지하는 59년에 이 일이 있었다면 유대인의 금식하는 대 속죄일인 10월 5일이 지난 시점 즉 항해가 불가능한 시점이 된 것이다(항해하기가 위태한지라, 9절: 짧은 낮, 긴 밤, 조악한 시야, 구름, 폭풍, 폭우, 폭설).
그래서 바울은 이렇게 말했다. “여러분이여 내가 보니 이번 항해가 하물과 배만 아니라 우리 생명에도 타격과 많은 손해를 끼치리라”(10절).
수년간 전도를 위해 여러 번 지중해를 항해한 경험에 의하면 미항에서 겨울을 나는 것이 백번 옳았다. 하지만 바울이 선장인가?
선주인가? 한 죄수에 불과하지 않은가? 그래서 백부장은 선장과 선주의 말대로 미항보다 겨울을 나기 좋은 항구 뵈닉스까지 가기로 했다(11-12절). 하루면 갈 수 있는 짧은 거리였다. 마침 순한 남풍이 불어 계획대로 되고 있다고 안심한 그때 갑자기 유라굴로라는 광풍(타이푼)이 크게 불어닥쳤다(14절).
이때부터 배는 통제 불능이 됐다(15절). 하루만 이동해서 겨울을 편안하게 보내려고 했던 계획은 순식간에 망가졌고 거의 한 달간 불안과 공포에 벌벌 떨며 혼동하는 표류에 빠졌다.
그래도 한 달을 그들이 버틸 수 있었던 건 가우다라는 작은 섬에서
긴급 조치할 틈을 얻었기 때문이다(16절). 그들은 1) 거루를 잡아 끌어올리고 2) 줄로 선체를 둘러 감고(배를 꼭 잡아
맴), 3) 연장을 내렸고(큰 돛대의 하활을 내림), 4) 짐과 기구를 내버렸다(16-19절). 파도와 폭풍의 피해를 최소화하고
배를 가볍게 하여 더 떠오르게 하기 위한 방안이었다. 그래서 결과는?
여러 날 동안 해도 별도 보이지 아니하고 큰 풍랑이 그대로 있으매 구원의 여망마저 없어졌더라(20절). 아무 소용이 없었다. 희망의 마지막 불씨까지 모두 꺼져버렸다.
2. 바울의 확신(21-26)
타고
있던 비행기 양 날개의 엔진이 멈춰버렸다고 상상해보라. 우리는 인생이란 항해에서 모든 희망이 사라져버린 것 같은 위기를 종종
겪는다. 내 힘으로 아무 것도 할 수 없을 때, 모든 노력과 수고가 소용 없을 때, 아무리 생각해봐도 빠져나갈 구멍이 보이지 않을
때. ‘이제 끝이구나’ 자포자기 하는 순간이다.
그런데 그때 바울은 두려움과 공포에 빠져 식음을 전폐한 사람들 가운데 서서 이렇게 말했다. “여러분이여 내 말을 듣고 그레데에서 떠나지 아니하여 이 타격과 손상을 면하였더라면 좋을 뻔하였느니라”(21절). ‘내가 뭐랬어’라는 타박이 아니다. 그들을 동정하고 마음을 헤아리면서 동시에 자기 말의 신뢰성을 높이는 말이다. 그가 하는 다음 말을 믿어 주길 바랐다.
모두가 구원의 소망이 전무하다고 느꼈던 그 때 그는 이렇게 말했다.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이제는 안심하라 너희 중 아무도 생명에는 아무런 손상이 없겠고 오직 배뿐이리라”(22절). 안심하라고? 혼자 다른 배에 타고 있는건가? 큰 풍랑이 그대로 있는데? 무엇을 근거로 안심하라고 하는가? 어떻게 바울은 평안한가? 무슨 근거로 모두 안전할 거라고 확신하는가?
여기 바울이 확신했던 근거가 나온다. 그의 영혼이 폭풍 중에 평온할 수 있었던 중요한 이유다.
“내가 속한 바 곧 내가 섬기는 하나님의
사자가 어제 밤에 내 곁에 서서 말하되 ‘바울아 두려워하지 말라 네가 가이사 앞에 서야 하겠고 또 하나님께서 너와 함께 항해하는
자를 다 네게 주셨다’ 하였으니 그러므로 여러분이여 안심하라 나는 내게 말씀하신 그대로 되리라고 하나님을 믿노라”(23-24절)
바울도
폭풍 중에 크게 흔들리는 배 위에 있었다. 눈앞엔 쏟아지는 폭우 때문에 별 하나 보이지 않았다. 상황이 나아질 것 같은 기미도
없었다. 하지만 그는 그를 둘러싼 상황이 하는 말이나 그 상황에 압도된 사람들이 하는 말을 믿지 않았다. 염려와 근심으로 자기
영혼이 내는 소리도 안 믿었다. 그는 하나님이 하신 말씀을 믿었다. 말씀하신 그대로 반드시 이루시는 하나님을 믿었다.
하나님은
종종 그의 사랑하는 자녀에게 이와 같은 믿음을 발견하기 원하신다. 그럴 수 없을 때에 하나님 말씀을 붙들기를, 말씀하신 하나님의
신실하심과 선하심을 믿기를 바라신다. 그리고 그들이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 믿을 때 하나님은 참으로 기뻐하신다(롬
4:18). 그리고 말씀하신 그대로, 믿음대로 이루신다.
그분은
생리가 끊어진 사라에게 아들을 낳을 것이라 말씀하신다. 앞에는 바다, 뒤에는 군대가 에워싼 이스라엘 백성에게, 가만히 서서 내가
너희를 위하여 행하는 구원을 보라고 말씀하신다.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앞에 둔 제자들에게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고 말씀하신다. 제자들이 폭풍을 만난 배 안에서 거의 죽게 되었을 때, 주무시다가 일어나 ‘어찌하여 이렇게 무서워하느냐
너희가 어찌 믿음이 없느냐’라고 타이르신다.
결국
상황은 아무것도 아니다. 다른 사람이 뭐라고 말하든 내면의 소리가 내는 소리가 무엇이든 상관 없다. 우리 믿음을 하나님께 두면
우리는 안전하다. 우리는 평안하다. 결혼, 출산, 양육, 취업, 건강, 구원, 사업 등 구체적인 것에 대해서 하나님은 모두 세세히
말씀해주지 않으셨지만, 우리는 다음을 확신할 수 있다.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를 위하여 내주신 하나님이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실 것이다(롬 8:32).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우리에게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롬 8:28). 그 어떤 것도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우리를 끊을 수 없다(롬 8:39).
하나님이
우리 삶에 두신 뜻을 온전히 이룰 그 날까지 그 무엇도 우리를 해할 수 없다. 바울처럼 하나님은 우리가 사명을 다하는 그날까지,
달려갈 길을 다 마칠 때까지 반드시 우리를 보호하시고 지키실 것이다. 당신은 말씀하신 그대로 되리라고 하나님을 믿는가?
3. 바울의 구원(27-44)
하나님은 말씀하신 그대로 되게 하셨을까? 바울의 믿음대로 됐을까? 벌써 열 나흘째가 됐다(27절). 여전히 배는 파도와 폭풍에 따라 정신없이 이리 저리 쫓겨가기를 자정까지 계속했다. 그런데 보니까 육지에 가까워지고 있는 것 같았다. 그래서 물 깊이를 재어 보니 스무 길(37m) 조금 가다가 다시 재니 열다섯 길(27m), 점점 뭍을 향해 가는 게 분명했다(28절). 하지만 곳곳에 숨어 있는 암초에 부딪힐 위험이 컸다. 그래서 일단 네 닻을 내려 배를 고정하고 날이 밝으면 뭍으로 가기로 했다(29절).
여전히 위험한 상황이었기 때문에 몇몇 사공들은 도망하려고 닻을 내리는 척하면서 몰래 거룻배를 바다에 내려놓았다. 하지만 바울이 이를 알고 “이 사람들이 배에 있지 아니하면 너희가 구원을 얻지 못하리라”라고 말했고, 이에 군인들이 거룻 줄을 끊어 거룻배를 떼어 버렸다(31-2절). 바울이 그만큼 신뢰받는 상황이었고 또한 “너와 함께 항해하는 자를 다 네게 주셨다”고 말씀하신 하나님을 그가 굳게 믿었기 때문이다.
날이 새어 가자 바울은 여러 사람에게 음식을 권했다. 그들은 혼돈과 공포 속에 음식을 잘 챙겨 먹지 못한지 십사일이나 됐다(33절). 그들의 원기 회복을 위해(구원, 34절) 음식이 분명 필요했다. 바울은 그들에게 이렇게 격려한다. “너희 중 머리 카락 하나도 잃을 자가 없으리라”(34절). 무엇을 근거로? 그렇게 하시겠다고 약속하신 하나님 말씀을 근거로. 배에 있는 이백칠십 육명의 사람들도 바울의 확신에 찬 말에 안심했고 음식을 먹었다(36절). 폭풍 치는 바다 위에서 하나님 말씀에 확신에 찬 바울이 사람들을 안심시키고 대표로 하나님께 축사 기도하는 장면은 참 아름답다.
식사 후 남은 모든 곡물(밀)을 바다에 버렸다(38절). 배를 최대한 가볍게 하기
위해서다. 그들은 배를 댈 수 있는 최적의 장소를 의논하여 결정한 후(39절), 닻을 끊고 키를 풀어 배가 육지를 향하게 하고,
돛을 올려 바람에 맞추어 해안을 향해 전속력으로 나아갔다(40절). 살기 위해 마지막으로 할 수 있는 모든 걸 이 한 번의
기회에 쏟아부었다.
그러나! 배는 그만 바다와 바다가 만나는 곳에 형성되는 끈끈한 진창, 모래톱에 처박혔다. 이물 곧 배의 앞부분은 걸려 움직일 수 없게 됐고, 뒤쪽에서 부딪치는 거대한 파도가 배를 점점 부서뜨리기 시작했다(41절).
바울은
이렇게 말했었다.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이제는 안심하라 너희 중 아무도 생명에는 아무런 손상이 없겠고 오직
배뿐이리라”(22절). 배는 손상됐다. 하지만 배에 탄 사람은 아직 아무도 생명에 아무런 손상이 없었다. 그런데, 이때 군인들이
죄수들을 죽이려고 했다(42절). 이 틈을 노려 뭍으로 도망쳐 사라지면 군인들이 그 죄수가 당할 형벌을 대신 책임져야 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주님은 백부장을 통해 바울을 보호하셨다(바울을 구원하려 하여, 43절). 헤엄칠 줄 아는 사람은 헤엄으로, 그렇지 못한 사람은 널조각이나 배 물건을 의지하여 육지에 나가게 했고 마침내 모든 사람이 다 상륙하여 구조됐다. 하나님께서 하신 말씀 그대로 된 것이다(44절).
우리를
불안하게 하고 염려하게 하는 일들, 조바심 나게 하고 낙심하게 만드는 일에 관하여 하나님께서 상세히 말씀해주시면 얼마나 좋을까?
그러면 말씀하신 그대로 되리라고 하나님을 쉽게 믿을 텐데. 어쩌면 이런 마음 깊은 곳엔 얕은 해안 주변을 다니며 아주 작은
믿음만 가지고 살고 싶은 욕망이 숨어 있는 것 같다.
인생의
긴 항해, 망망대해를 지날 때 어떤 위험과 환난이 불어닥칠지 모르는 곳에서 우리는 예수님의 믿음을 배운다. 조롱과 핍박, 무거운
죄의 짐과 그 위에 쏟아져 내리는 하나님의 진노 속에서, 목숨이 끊어지는 고통 중에도 그분은 아버지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그대로 될
것을 믿으셨다(믿음의 주, 히 12:2).
기독교의
믿음은 모든 것이 잘 될 것이란 지극히 주관적이고 막연한 믿음에 ‘예수님’ 이름만 차용하는 믿음이 아니다. 오히려 모든 것이
생각대로 흘러가지 않아도 심지어 목숨을 잃게 될지라도 나의 하나님이 반드시 말씀하신 그대로 선을 이루실 것을 믿는 믿음이다.
당신은 당신에게 말씀하신 그대로 되리라고 하나님을 믿는가? 주님은 언제나 그것을 물으신다.
절벽 끝 한 영혼 살리는 한마디…'하나님의 타이밍은 완벽하다'
새벽 2시 수화기 너머 울먹이는 소리와 함께 들려온 한 마디. 김성경 전도사는 한밤 중 '전도사님 한마디가 저를 살렸어요'라며 한 청년으로부터 걸려온 전화를 잊을 수 없다.
‘Relax, God’s Timing is Perfect!’
깊은 좌절에 빠져 세상과 단절된 채 살아가던 한 청년이 삶의 희망을 갖게 된 바로 그 한마디다. 김 전도사의 차에서 무심코 챙겨온 설교 원고가 여느 때처럼 잠 못 이루고 뒤척이던 청년의 눈에 들어온 것이다.
번역해서 "안심하라, 하나님의 타이밍은 완벽하다"는 이 말은 김성경 전도사가 펴낸 책 제목이기도 하다. 책은 단 한 문장이 한
청년을 일으켜 세운 것처럼 지금도 어딘가에서 남모르게 눈물 흘리고 있을 수많은 영혼들에 하나님의 위로와 사랑이 전해지기를 바라는
마음을 담았다.
김성경 전도사는 기독교 소셜미디어 채널 ‘교회친구다모여’ 메인 설교자로 20~30대 젊은 층 사이에서는 주목받는
목회자다. 현재 청주 중부반석교회의 전임 전도사로 사역하고 있으며 거리에서 찬양, 예배하는 ‘원디사이플워십 미니스트리’를 세웠다.
한국침례신학대학교 상담심리학과 겸임교수로도 활동 중이다.
김 전도사는 16세의 나이로 침례신학대학교에 최연소 입학했다. 하나님을 더욱 알고 싶은 마음에 중학교에 입학한 지 일주일도 안
돼 학교를 그만두고 신학의 길에 입문했다. 한국에서 공부를 마치고 19살이 되던 해에는 미국 사우스웨스턴신학대학원으로 건너가
목회학석사 과정을 수료했다.
처음에는 가족의 반대에 부딪혀 과정이 순탄하지만은 않았지만 걸어온 길을 단 한 번도 후회한 적은 없다. 하나님의 타이밍은 완벽하다는 확신이 있었기 때문이다.
김 전도사는 “자퇴를 결심한 당시 ‘내가 네게 명령한 것이 아니냐 강하고 담대하라 두려워하지 말며 놀라지 말라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너와 함께 하느니라 하시니라’라는 여호수아 1장 9절 말씀이 눈에 들어왔다”며 “남들과 다른 길을
걸어온 나를 흔들림 없이 이 자리까지 올 수 있게 한 한마디”라고 말했다.
책은 김 전도사의 인생을 견인해 온 성경 한 구절처럼, 하나님조차 나를 버린 것 같은 깊은 절망에 빠진 영혼들을 살리는
복음의 메시지를 담았다. ‘괜찮다고, 안심하라고, 당신의 모든 아픔은 하나님이 당신에게 달려오시는 길이 된다’고 저자는 책을 통해
따뜻한 위로를 건넨다.
▲ '안심하라, 하나님의 타이밍은 완벽하다' / 김성경 / 토기장이
8일 출간된 책은 이틀 만에 기독교 주간 베스트셀러 순위 1위에 올랐다. 20대 연령 종합 베스트셀러 순위에도 15위를 기록했다. 이례적으로 무명의 독자 322명의 추천사를 실어 화제가 되기도 했다.
김 전도사는 “이 땅에서는 무명하지만 하나님에게는 유일하고 특별한 이들이 이 책의 증인이 되어줬으면 했다"고 말했다.
이 책은 교회를 떠났던 사람부터 하나님을 몰랐던 사람까지, 기독교인과 비기독교인을 불문하고 서평을 남기며 많은 독자로부터 큰 관심을 받고 있다.
김 전도사는 “요즘 미래에 대한 불안감과 우울감 등으로 힘든 시기를 겪는 청년들이 많다”며 “혹시 내가 과연 다시 일어설 수
있을까, 너무 늦어 버린 건 아닐까 절망하고 있다면 이 책을 통해 하나님의 때를 신뢰하고 희망을 얻었으면 한다”고 말했다.
마태복음 14:27 예수께서 즉시 일러 가라사대 안심하라 내니 두려워 말라.
사사기 6:23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너는 안심하라 두려워 말라 죽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마태복음 9:2 침상에 누운 중풍병자를 사람들이 데리고 오거늘 예수께서 저희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병자에게 이르시되 소자야 안심하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마태복음 9:22
예수께서 돌이켜 그를 보시며 가라사대 딸아 안심하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하시니 여자가 그 시로 구원을 받으니라.
창세기 43:23 그가 이르되 너희는 안심하라 두려워 말라 너희 하나님 너희 아버지의 하나님이 재물을 너희 자루에 넣어 너희에게 주신 것이니라 너희 돈은 내가 이미 받았느니라 하고 시므온을 그들에게로 이끌어내고.
사사기 19:20 노인이 가로되 그대는 안심하라 그대의 모든 쓸것은 것은 나의 담책이니 거리에서는 자지 말라 하고.
사도행전 27:22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이제는 안심하라 너희 중 생명에는 아무 손상이 없겠고 오직 배 뿐이리라.
마가복음 6:50 저희가 다 예수를 보고 놀람이라 이에 예수께서 곧 더불어 말씀하여 가라사대 안심하라 내니 두려워 말라.
12월 8일(월) 사도행전 24-26장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나와 같이 되기를(26:29)
바울이 가로되 말이 적으나 많으나 당신 뿐아니라 오늘 내 말을 듣는 모든 사람도 다 이렇게 결박한 것 외에는 나와 같이 되기를 하나님께 원하노이다 하니라. Paul replied, "Short time or long--I pray God that
not only you but all who are listening to me today may become what I am,
except for these chains.
고린도전서 4:16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권하노니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 되라. Therefore I urge you to imitate me.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 되라 - 바울은 자주 이와 갈은 성격의 말들을 반복하고 있다(갈 4:12;빌 3:17;살전
1:6; 2:14; 살후 3:7, 9).
갈라디아서 4:12 형제들아 내가 너희와 같이 되었은즉 너희도 나와 같이 되기를 구하노라 너희가 내게 해롭게 하지 아니하였느니라. I plead with you, brothers, become like me, for I became like you. You have done me no wrong.
빌립보서 3:17 형제들아 너희는 함께 나를 본받으라 또 우리로 본을 삼은 것 같이 그대로 행하는 자들을 보이라. Join with others in following my example, brothers, and take note of those who live according to the pattern we gave you.
데살로니가전 서 1:6 또 너희는 많은 환난 가운데서 성령의 기쁨으로 도를 받아 우리와 주를 본받은 자가 되었으니. You became imitators of us and of the Lord; in spite of severe suffering, you welcomed the message with the joy given by the Holy Spirit. 데살로니가전서 2:14 형제들아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유대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들을 본받은 자 되었으니 저희가 유대인들에게 고난을 받음과 같이 너희도 너희 나라 사람들에게 동일한 것을 받았느니라. For you, brothers,
became imitators of God's churches in Judea, which are in Christ Jesus:
You suffered from your own countrymen the same things those churches
suffered from the Jews. 데살로니가후서 3:7 어떻게 우리를 본받아야 할 것을 너희가 스스로 아나니 우리가 너희 가운데서 규모 없이 행하지 아니하며. For you yourselves know how you ought to follow our example. We were not idle when we were with you.
데살로니가후서 3:9 우리에게 권리가 없는 것이 아니요 오직 스스로 너희에게 본을 주어 우리를 본받게 하려 함이니라. We did this, not because we do not have the right to such help, but in order to make ourselves a model for you to follow.
이것은 자녀들에게 기대하는 아버지의 심정일 수도 있으나 결코 바울 자신의 개인적인 입장을 강조한
것은 아니다. 다시 말해서 그를 따르는 자들이 개인적으로 사도 바울 주변에 붙어 다니라는 뜻이 아니라는 것이다. 만약에 그렇게
해석될 수 있다면 그것은 본절의 의도를 완전히 바꿔버리는 오류를 범하게 될 것이다(L. Morris). 바울이 본받으라고 주장한
본받음의 내용은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의 삶이다. 그는 그리스도의 생애에 대하여 잘 알지 못하는 이방인들에게 직접
그리스도를 본받으라고 말하는 것보다 더 큰 효과를 거두기 위하여 위와 같은 표현을 사용했는지도 모른다(C.K. Barrett). 그러나 설령 바울이 자신의 삶을 본받으라고 직설적으로 표현했다 할지라도 문제가 되지않는 것은 복음을 드러내고자 일평생 고난속에서
살았던 그의 삶이 그리스도의 삶을 대변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는 복음의 능력을 나타내는 삶을 통하여 어떤 상황 속에서도 주저하지
않고 나를 본받는 자가 되라고 말할 수 있었던 것이다(11:1). 따라서 '너희는 나를 본받는자 되라'는 바울의 이 선언은 단순한
자신의 추종자나 바울 당파의 일원이 되라는 말이 아니다. 오히려 이것은 구체적으로 다음과 같은 의미를 담고 있다.
1. 바울이
본을 보인 사랑의 실천 2. 겸손과 고난에의 동참 3. 지적 교만과 불손한 태도를 버리고 신앙안에서 화합(和合)하는 것 4. 그리스도를 본받는 것
고린도전서 11:1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는 자 된 것 같이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 되라. Follow my example, as I follow the example of Christ.
본 받는 자 / 미메테스(mimētēs) μιμητής, οῦ, ὁStorng number 3402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는 자 된 것같이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 되라 - 본절을 10장에 속한 것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그
이유는 두 가지다. 1. 2절에서부터 새로운 주제 즉 교회의 예배시 일어나는 문제에 대해 다루고 있다. 2. 문맥상 본절은
10:3과 상관성(相關性)을 갖는다.
바울은 10장에서 우상 숭배에 대한 경고와 우상의 제물을 먹고 마시는 문제에 대해서 권면하고
있으며 그 권면의 모델로서 자신을 소개하고 있다. 즉 바울은 8장의 경고와 권면에 대한 결론으로 본절에서 자신을 본받으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바울이 본받는 그리스도는 유일하고도 완벽한 모델로서(Godet) 그분의 삶은 이기적인 삶이 아니라 이타적인
삶이었다(빌 2:4, 5). 그러나 그리스도나 바울의 삶은 단순히 도덕적으로 이타적인 삶이 아니라 구원을 위한 이타적인
삶이었다(10:33).
“바울이 이르되 말이 적으나 많으나 당신뿐만 아니라 오늘 내 말을 듣는 모든 사람도 다 이렇게 결박된 것 외에는 나와 같이 되기를 하나님께 원하나이다 하니라”
영국 대형 박물관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어느 날 어떤 젊은 신사가 이 박물관에 들어와 그곳에 진열된 작품 앞에서 엉거주춤하게 앉은 자세로 그 작품들을 한참 들여다보았습니다. 그러더니 노트를 꺼내 이것저것 열심히 적으면서 여러 시간을 보내고 돌아갔습니다. 이 신사의 이런 거동을 수상하게 여기고 지켜보던 수위는 이상하게 생각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 다음 날 그 젊은 신사는 한 무리의 어린이들을 데리고 와서 같은 작품들 앞에서 이것저것을 설명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진지한 태도로 설명하였습니다. 어린이들은 잘 이해가 된다는 표정으로 그의 말을 들었습니다. 관람이 끝나고 돌아가려던 그 신사에게 수위가 궁금해서 물어 보았습니다. “선생님, 어째서 어제는 그렇게 불편한 자세로 작품을 보셨습니까?” 그러자 그 선생은 빙그레 웃으며 대답합니다. “바로 이 아이들의 작은 키로 이들이 볼 수 있는 눈높이에서 작품을 보고 이해하기 위해서였죠. 제 자세가 좀 이상했지요?” 비유하자면 이 땅에 아기 예수로 오신 하나님의 성육신이 바로 이 선생님의 자세였고, 아기 예수의 탄생을 바라보는 우리의 마음이 그 박물관에 근무하던 수위의 궁금히 여기던 모습일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행동을 이해하시기 위해 그렇게 눈높이를 낮추셨던 것입니다. 우리는 이를 ‘성육신의 신비’라고 부릅니다. 그런데 우리는 하나님을 이해하기 위해 우리의 눈높이를 높이려 하지 않습니다. 그저 우리의 관점에서 하나님을 ‘판단’하려 합니다. 그러다 보니 조금만 우리 뜻과 맞지 않으면 하나님을 원망합니다. 이것이 성경에 나타난 이스라엘 백성들의 모습이자, 우리의 모습입니다. ‘판단’에는 이미 우리의 기준이 적용되기 때문에 우리가 판단하는 하나님의 모습이 곧 우리 자신의 모습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마 5:48).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벧전 1:16)
무슨 말씀입니까? ‘하나님과 눈높이를 맞추라‘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처럼 완전해 질 수 있어서가 아닙니다. 눈높이를 맞춰야 주님을 붙들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노력할 때 힘들고 어려운 상황이 닥쳐와도 주님을 붙들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처럼 될 수 있냐고 포기하지 말고 ‘주님이라면 어떻게 하셨을까?’ 스스로에게 물어보라는 것입니다.
이와 반대로 ‘흉내’는 상대방에게 ‘모욕감’을 주는 행위가 될 수 있습니다. 왜 남의 행동이나 모습을 흉내 내는 것이 모욕이 될까? 그 이유는 ‘그렇게 변할 마음이 없기 때문’입니다.
눈높이를 맞춘다는 것은 그렇게 변화될 마음이 있는 것이지만 흉내는 상대를 자신보다 낮게 보는 행위이기 때문입니다. 남미의 어느 축구선수가 손으로 눈을 찢으며 동양인을 비하하는 표정을 지은 적이 있습니다. 이것은 동양인을 비하하는 대표적인 행동이어서 많은 한국 축구 팬들의 공분을 샀습니다. 그래서 그 선수는 공식적으로 사과를 하였습니다. 동양인이 될 마음이 없이 흉내낸 것일 뿐입니다.
몇년
전 한국의 고등학생들이 ‘관짝 밈’을 올렸을 때 흑인 비하 논란이 일었습니다. 흑인들이 춘 춤을 따라 하기 위해 얼굴도 검게
칠했기 때문입니다. 가나 출신 방송인 ‘샘 오취리’씨는 SNS에 그런 인종차별적 행동을 하지 말아 달라고 부탁을 했습니다.
만약 고등학생들이 흑인이 되고 싶어 그렇게 했다면 그것은 흑인을 비하한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그렇게 될 마음이 없으면서 그런 모습을 취했다면 그런 흉내는 모욕이 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러한 ’흉내‘를 ’믿음으로 하지 않는 것‘이라고 규정합니다. 그리고 ”믿음으로 하지 않는 모든 것이
죄니라"(롬 14:23) 그리스도인이 어떤 행위를 할 때 그것이 하나님에 대한 신뢰가 바탕이 되지 않으면 죄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닮아가려는 의지와 노력, 그리고 믿음이 없으면 그 모든 행위가 ’흉내‘일 뿐이라는 것입니다. 그 단적인 예를 보여준 인물이 마술사 시몬과 제사장 스게와의 일곱 아들입니다.
사도바울은 그의 마지막 변론을 듣는 베스도 총독과 그리립바 왕에게 당당하게 말씀합니다. “당신뿐만 아니라 오늘 내 말을 듣는 모든 사람도 다 이렇게 결박된 것 외에는 나와 같이 되기를 하나님께 원한다..”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는 자가 된 것 같이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가 되라”(고전 11:1) 흉내내지 말고 눈높이를 맞춰가라는 강력한 말씀입니다. 하나님께 눈높이를 맞추려면 우리의 본성을 바꿔주시는 성령님의 인도가 필요합니다. 그러기 위해 말씀과 기도로 꾸준히 나아가는 것입니다. 규칙적으로 말씀을 묵상하고, 기도하는 사람은 분명히 흉내내지 않고, 하나님께 눈높이를 맞추며 닮아가는 사람입니다.
오 주여 흉내만 내는 신앙에서 벗어나게 하소서 주님께 눈높이를 맞추게 하소서 늘 ’주님이라면 어떻게 하실까?‘ 우리 스스로에게 묻게 하소서
가이사랴에서의 마지막 심문은 아그립바 왕의 심문이었습니다. 아그립바에게 바울의 사건은 그저 호기심에 지나지 않는
사건이었는지 모르겠지만, 바울에게 또 한 번의 공적인 심문은 그의 신앙을 변호하며 복음을 한 번 더 전할 수 있는 기회였습니다.
이때
바울의 변명과 전도에 아그립바 곁에 있던 베스도의 대답은 미쳤다 였습니다. 네 많은 학문이 너를 이렇게 미치게 만드는구나 였습니다. 하지만 그에 대한 바울의 대답은 왕뿐만 아니라 지금 제 말을 듣고 있는 모든 사람들이 이렇게 결박된 것 말고는 저처럼
되기를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였습니다.
이 말은 다시 말해 나는 만족합니다 라는 고백이라 할 수 있습니다. 어쩌다 결박되고 감옥에 갇혀 심문 받는 신세가 되기는 했지만 그럼에도 나는 괜찮습니다,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에, 그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구원과 은혜는 상상할 수 없는 크고도 놀라운 것이기 때문에 정말 괜찮습니다, 하는 고백입니다.
지금
경험하고 있는 오해와 누명과 결박과 갇힘과 모욕과 핍박과 불안한 미래와 죽음의 위협이 그로 하여금 불평하게 하거나 생을 저주하게
만들지 않고, 오히려 하나님을 신뢰하며 더 나아가 모든 사람이 그와 같은 믿음을 갖기를 소원하고 있는 것을 보며 그에게 하님이
얼마나 크고 귀한 분이었는지 짐작할 수 있게 됩니다.
이솝 우화에 이런 이야기가 소개됩니다. 어느 날 어미 게가 옆으로 가는 새끼들에게 "옆으로 걷지 말고 앞으로 걸어가라"고 야단 칩니다. 세끼 게들은 아무리 앞으로 가려해도 앞으로 갈 수 없자 어미에게 "그럼 엄마가 앞으로 먼저 가 보세요"하고 부탁합니다. 어미 게가 앞으로 가려해도 자꾸만 옆으로 갑니다. 그러자 새끼들은 "엄마도 옆으로 가면서....." 하고 중얼거렸다고 합니다.
어미 게와 새끼 게의 이야기에서 모델링(Modeling)과 모방(模倣. imitation)의 중요성을 생각합니다. 모작(模作)이란 모방한 작품을 말합니다.
성경을 바울을 가리켜 이렇게 증언합니다. "주께서 가라사대 가라 이 사람은 내 이름을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 앞에 전하기 위하여 택한 나의 그릇이라."(행 9:15)
바울의 모델링은 한때 바울이 핍박했던 예수님입니다. 바울은 회개한 후에 철저하게 예수님과 같은 길을 걸기위해 노력했습니다. 그 결과 바울은 예수님의 모작이 될 수 있었기 때문에 '나와 같이 되기를 원한다'고 당당하게 말합니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예수님께서 모델링이 되셨고 주를 믿는 성도들은 주님의 삶을 모방하면서 이 세상에 드러난 모작이 됩니다. 사도 바울은 철저하게 예수님을 닮아가는 삶을 실천했기 때문에 고린도교회 성도들을 향하여 나를 본받으라고 외쳤습니다(고전 4:16, 11:1).
또한 아그립바 앞에서도 자기를 변론하며 다른 것은 몰라도 예수님을 믿는 것에 대해서는 모두 나와 같이 되기를 원한다고 강조했습니다.
만일 어떤 사람이 나처럼만 살아라! 나처럼 일하라! 나처럼 믿으라! 이렇게 고백할 수 있다면 그가 맡은 일에 대해서 철저하게 임무를 완수한 삶이라고 하겠습니다.
이제는 모든 성도들이 세상을 향하여 사도 바울과 같은 고백을 자신있게 말할 수 있는 믿음을 회복해야 할 중요한 시기라고 하겠습니다. 거짓의 권력이 진리를 다스리려고 위조된 법을 만들고 있습니다. 거짓이란 법은 앞으로 가지 못하는 어미 게와 같다고 하겠습니다. 정의를 위하여 앞으로 나갈 수 없는 권력을 유지하려고 앞으로 걸어가는 왜소한 진실을 짓밟는 무자비한 힘에 대하여 한 마음 한 뜻으로 외쳐야 합니다.
우리처럼 믿으라! 우리처럼 행하라! 우리처럼 외쳐라!
법치가 무너지는 세상을 향하여............
자유민주주의 틀을 허물고 김일성주의 독재의 길을 향하여 달리는 부정한 권력을 향하여 외칠 수 있는 올바른 믿음을 드러내야 합니다. 만일 이와 같이 할 수 없다면 미래가 너무 암담할 뿐입니다. 자유를 누릴 줄 아는 믿음과 자유를 물려줄 수 있는 강력한 진실이 필요합니다. 혼자서만 즐기는 자유는 자유가 무너질 때 동시에 무너져버릴 것입니다.
통일행진곡(統一行進曲) (1951) 김광섭 작사 / 나운영 작곡
壓迫과 설움에서 解放된 民族 싸우고 싸워서 세운 이 나라
共産 오랑캐의 侵略을 받아 共産 오랑캐의 侵略을 받아 自由의 人民들 피를 흘린다
同胞여 일어나라 나라를 위해 손잡고 白頭山에 太極旗 날리자~
살거나 죽거나 이 땅의 겨레 무찌르고 넘어진 勇士와 함께
以北은 부른다 눈물의 疆土 以北은 부른다 눈물의 疆土 民主 統一 獨立을 싸워서 찾자
同抱여 일어나라 나라를 위해 손잡고 白頭山에 太極旗 날리자~
통일행진곡
하나님을 본받는 자 되라
본문은 에베소서 4장 25~32절 말씀과 연결이 되는 말씀입니다. 에베소서 4장 마지막 절에 “서로 인자하게 하며 불쌍히 여기며 서로 용서하기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심과 같이 하라” 했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의 생활은 서로 인자하게 대하는 것이어야 합니다. 이 말씀은 우리 마음 가운데 사랑의 원칙을 세우고, 친절하고 겸손하며 공손한 행동으로 이 사랑을 표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불쌍히 여긴다”는 말은 다른 사람의 고난과 고통에 대하여 같이 아파할 줄 아는 마음입니다. ‘동정한다,’ ‘긍휼히 여긴다’ 혹은 ‘민망히 여긴다’는 말도 같은 뜻입니다.
예수님의 비유 가운데 선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가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뜻밖에 강도를 만났습니다. 강도들은 옷을 벗기고 때려서 거의 죽게 된 것을 버리고 도망쳤습니다. 마침 제사장이 그 길로 내려가다가 그를 보고 피하여 지나갔습니다. 레위 사람도 이 광경을 보고 그냥 지나가 버렸습니다. 그런데 어떤 사마리아 사람은 그를 보고 불쌍히 여겨 가까이 가서 기름과 포도주를 그 상처에 붓고 싸매고 짐승에 태워 여관으로 데리고 가서 돌보아 주었다는 이야기입니다.
제사장과 레위 사람은 그 당시의 종교 지도자입니다. 그러나 강도 만나 죽게 된 사람을 볼 때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없었습니다. 사마리아 사람은 그때 유대인들의 입장에서는 사람처럼 취급하지 않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어려움 당한 사람을 보고 그냥 지나가지 아니하고 시간과 경비를 들여가며 그의 정성을 쏟아 돌보아 주었습니다. 이것이 사랑입니다.
예수님은 벳새다 들에 모여 있는 많은 사람들을 볼 때 목자 없는 양과 같이 생각해서 민망히 여겼고, 보리떡 다섯 개와 생선 두 마리로 그 많은 사람들이 배불리 먹고도 남는 이적을 행하신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에게는 어려운 일을 당한 사람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꼭 있어야 합니다.
뿐만 아니라 ‘서로 용서하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왜요?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용서를 받은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다른 사람이 우리에게 잘못한 것과 우리가 하나님께 범죄한 것을 비교하면 비교할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러므로 “서로 용서하기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심과 같이 하라”고 했습니다.
성경에 보면 ‘용서’에 대해서 언급할 때 꼭 하나님이 우리를 용서하신 것에 대해서 말하면서 용서하라고 권면합니다.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용서해 준 것같이 우리의 죄를 사해 주옵소서”라는 대목이 나옵니다.
과연 우리가 우리에게 잘못한 사람의 실수나 죄를 사하여 줍니까? 그만큼만 우리의 죄를 사해 달라고 해도 괜찮겠습니까? 아니, 우리가 다른 사람의 죄는 사해 줄 줄 모르면서 내 죄만 사해 달라고 하지는 않습니까? 우리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용서해 준 것 같이 다른 사람의 죄를 용서해 줄 책임이 있습니다.
이제 본문 1절을 보십시다. “그러므로 사랑을 입은 자녀같이 너희는 하나님을 본받는 자가 되고” 했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할 때 하나님의 자녀가 됩니다. 요한복음 1장 12절에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했습니다. 이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누가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고요? 예수 그리스도를 그 마음속에 내 개인의 구주로 모셔들이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데는 어떤 복잡한 수속이나 절차가 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어떤 분은 “아니, 우리가 외국에 이민을 가려 해도 그렇게 어렵고 시간이 걸리는데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이 그렇게 쉬울 수 있나?”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려면 예수를 우리의 구주로 믿기만 하면 됩니다. 물론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우리가 예수를 구주로 시인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예수를 구주로 시인했다면 이것은 우연한 일이 아니며 내 육정을 통해서 한 것도 아니고, 성령을 통해서 믿음을 주셨기 때문에 신앙을 고백하게 된 것입니다.
로마서 8장 9절 하반에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 하셨고, 같은 장 14절에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그들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 했습니다.
갈라디아서 3장 26절에는 “너희가 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으니”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것은 수양이나 노력으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오직 믿음으로 됩니다.
로마서 8장 16절에는 “성령이 친히 우리 영으로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거하신다”고 하였습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셨습니까? 혹 어떤 분이 여러분에게 직접 “당신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까?”라고 묻는다면 뭐라고 대답하시겠습니까?
“글쎄요, 제가 예배당에 다니기는 하지만 아직 그것까지는 잘 모르겠는데요”라고 대답하실 분은 안 계십니까? “뭐,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일이 그렇게 쉽겠어요?”하고 대답하시지 않겠습니까?
성경에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다”고 했습니다. 여러분은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이요, 우리의 구주로 믿습니까? 그러면 믿는 자는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고 했는데, 여러분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신 것을 믿습니까?
우리 하나님은 신실하십니다. 하나님은 미쁘십니다. 하나님은 거짓말하실 수 없으십니다. 그러므로 그의 말씀은 믿을 만합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왜 못 믿습니까? 너무 쉬워서 못 믿습니다. 너무 쉬우니까 믿어지지 않습니다.
아마 천만 원 이상의 돈을 내면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특권을 준다고 하면, 돈 있는 사람 치고 안할 사람이 거의 없으리라 생각합니다. 대학 이상 졸업해야 그 자격이 부여된다면, 공부한 사람 치고 믿지 않을 사람이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저 믿기만 하면 된다고 하니까, 너무 쉬워서 믿지 못합니다. 이것이 인간의 비극입니다.
민수기 21장에 보면 이스라엘 민족이 광야생활을 하는 동안 하나님을 원망하고 지도자 모세에게 시비하니까 하나님께서 마음이 상해서 불뱀을 보내서 돌아가며 이스라엘 사람들을 물게 했습니다. 뱀에게 물린 사람은 열이 올라서 고생하다가 죽어갔습니다.
이때 사람들이 모세를 찾아와서 하나님께 기도하여 이런 재앙을 거두어 달라고 간청했습니다. 그래서 모세가 하나님께 기도했더니 “그러면 놋으로 불뱀 모양을 만들어 장대 위에 달고 불뱀에게 물린 사람이 장대 위에 달려 있는 놋뱀을 쳐다보면 산다”고 선포했습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불뱀에게 물려 죽는 사람들이 놋뱀을 쳐다보기만 하면 살 텐데 그게 너무 쉬우니까 믿어지지 않아서 쳐다보지 않아 다 죽고 말았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비극입니다. 그러나 그때도 모세의 말을 믿고 쳐다 본 사람은 구원을 받았습니다.
오늘도 죄로 말미암아 죽어 가는 사람이 십자가 위에 높이 달려 계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바라보기만 하면 구원을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믿지 아니하려 합니다.
우리는 믿음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본문에 ‘사랑을 입은 자녀’라고 했습니다. 이 얼마나 복된 말씀입니까? 하나님의 자녀는 영생을 얻고 하나님의 후사가 되어 그와 함께 영광을 받게 될 것입니다.
그러면 이와 같은 축복을 누릴 하나님의 자녀 된 우리가 해야 할 일이 무엇입니까? 골로새서 3장 1절 이하에 보면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그래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으면)… 위엣 것을 생각하고 땅엣 것을 생각지 말라.”
왜요? “이는 너희가 죽었고 너희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취었음이니라.” 계속해서 9~10절에도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옛사람과 그 행위를 벗어버리고 새사람을 입었으니 이는 자기를 창조하신 자의 형상을 좇아 지식에까지 새롭게 하심을 받는 자니라.”
하나님의 자녀는 옛 사상, 옛 습관에서 벗어나 속사람이 새로워져야 합니다. 이것을 “거듭난다,” “중생한다”고 합니다. 예수께서 니고데모를 향하여 하신 말씀도 바로 그것입니다.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도 없고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
에베소서 4장 22절 이하에 “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좇는 옛사람을 벗어버리고 오직 심령으로 새롭게 되어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사람을 입으라”고 권면합니다. 하나님의 자녀는 새사람을 입어야 합니다.
그리고 마태복음 5장 9절에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 했습니다. 어디 가나 누구를 대하나 화평을 위하여 일하는 사람, 이것이 하나님의 자녀 된 사람의 특성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도 로마서 12장에서 하나님의 자녀 된 사람들이 지켜 나아가야 할 윤리적인 면을 말씀해 내려가다가 18절에 “할 수만 있거든 너희로서는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평화하라” 하였습니다.
다른 것이 아무리 훌륭하고 잘 한다 하더라도 하나님의 자녀들이 모였다는 곳에 평화가 없으면 이미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자격을 상실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로서 부르심을 입은 부르심에 합당하게 행하여 모든 겸손과 온유로 하고 오래 참음과 사랑 가운데서 서로 용납하여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의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켜야 합니다.
더구나 본문에 “그러므로 사랑을 입은 자녀같이 너희는 하나님을 본받는 자가 되고” 했습니다.
옛날 헬라의 아덴 사람들은 논리가 정연한 웅변을 아주 잘 했습니다. 그들이 그렇게 되기까지는 훌륭한 웅변가의 웅변술을 본받았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도 고린도전서 11장 1절에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는 자 된 것같이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 되라”고 권면했습니다.
우리의 신앙 생활은 무엇입니까? 한마디로 말하면 하나님을 본받는 생활입니다. 예수님도 “하나님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고 하셨습니다.
자녀가 부모를 닮은 것이 너무 당연합니다. 모습도 닮습니다. 생각도 닮습니다. 생활도 닮습니다. 닮지 않으면 그것은 이상한 일입니다. 하나님을 본받고 그리스도를 배우는 것은 하나님의 자녀 된 우리의 할 일입니다.
본문 2절 이하에 구체적으로 말씀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너희를 사랑하신 것같이 너희도 사랑 가운데서 행하라 그는 우리를 위하여 자신을 버리사 향기로운 제물과 생축으로 하나님께 드리셨느니라.” 한마디로 말하면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인하여 너희를 용서하셨으므로 너희는 하나님을 따르는 자가 되며 하나님을 배우는 자가 되라”는 말씀입니다.
경건한 사람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계시해 주신 대로 하나님을 닮아야 합니다. 하나님을 따르고 그의 형상으로 새로워져야 합니다. 이렇게 하나님을 닮아 가는 것이 신앙 생활에 큰 축복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같이 거룩해야 하며, 하나님의 자비하심과 같이 자비로워야 하며, 하나님의 완전하심과 같이 완전한 자리를 향해서 나아가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성품 가운데 그의 선하심이야말로 우리가 본받아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그러므로 사랑 안에 거하는 사람들은 하나님 안에 거하며 하나님도 그 안에 계십니다. “그리스도께서 너희를 사랑하신 것같이 너희도 사랑 가운데서 행하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을 본받는 것은 사랑 안에서 행하는 것을 말합니다. 사랑이야말로 우리가 행동의 기준으로 삼아야 할 원칙이 됩니다. 또한 이 사랑이야말로 우리가 지향해야 할 목표를 지시해 줍니다.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행함과 진실함으로 사랑을 보여야 할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우리에게 그리스도를 본받을 것을 제시해 주고 있습니다. 그리스도는 그리스도인들이 본받아야 할 분이며, 그에게서 우리는 가장 자유롭게 관대한 사랑의 실례를 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그 위대한 사랑으로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
우리는 모두 그 사랑에 공동 참여자요, 그 사랑의 위로의 동참자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시고 그 사랑의 증거를 우리에게 보여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서로 사랑해야 합니다.
십자가를 보십시오. 수직선은 하나님이 인간을 사랑하신 것을 의미하고, 수평선은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사람들이 서로 사랑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사도 요한은 요한일서 4장에서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 바 되었으니 하나님이 자기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저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니라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니라 사랑하는 자들아 하나님이 이같이 우리를 사랑하셨은즉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도다”(요일 4:9~11).
그리스도는 우리를 위하여 그 자신을 주셨습니다.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면 이에서 더 큰 사랑이 없다”고 하신 말씀대로 예수님은 우리를 위하여 희생의 제물이 되셨습니다.
로마서 5장에 보면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 기약대로 그리스도께서 경건치 않은 자를 위하여 죽으셨도다 의인을 위하여 죽는 자가 쉽지 않고 선인을 위하여
용감히 죽는 자가 혹 있거니와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했습니다.
우리는 이런 사랑을 받았기 때문에 우리가 서로 사랑하는 것은 마땅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위하여 스스로 죽음을 택하셨습니다. 따라서 그리스도의 죽으심은 위대한 속죄의 희생이 되었습니다. 그는 자기 자신을 향기로운 제물과 생축으로 하나님께 드리셨습니다. 그는 율법에 기록된 대로 희생의 제물이 되시어 우리의 죄를 속죄하기 위하여 세상 죄를 한 몸에 짊어진 어린양이 되셨습니다. 이렇게 그는 향기로운 제물이 되셨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께 받아들여지기 위하여 자신을 드리셨고 또 하나님께서는 그 희생을 받아들이시고 기뻐하시고 만족해 하셨습니다. 그리스도의 희생이 하나님께 효과가 있었던 것처럼 우리는 그리스도의 본이 우리를 주장하게 하며 그것을 본받아야 할 것입니다.
이제 3절 이하의 말씀을 보십시다. “음행과 온갖 더러운 것과 탐욕은 너희 중에서 그 이름이라도 부르지 말라 이는 성도의 마땅한 바니라 누추함과 어리석은 말이나 희롱의 말이 마땅치 아니하니 돌이켜 감사하는 말을 하라.” 1~2절과는 너무 대조적인 말씀입니다.
구별된 무리의 성도, 하나님의 사랑을 입은 자녀가 된 그리스도인은 그 생활에 있어서 이방신을 섬기는 그와 같은 사람들과는 단연코 구별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음행이나 온갖 더러운 것이나 탐욕은 그 당시 이교도 세계에서는 보편적으로 볼 수 있는 현상이었습니다. 옛날 고린도의 신전에는 수백 명의 매춘부를 두어서 신상 앞에서 매춘행위를 하는 것을 하나의 종교의식처럼 생각했고, 거기서 얻어지는 돈으로 신전(神殿)을 유지했습니다. 이처럼 음행은 그 당시 이방 종교인들의 종교 의식에서 볼 수 있었던 것으로, 음행 그 자체가 이교와 사교의 상징입니다.
“온갖 더러운 것”은 음행을 포함한 성적인 악풍을 총칭한 것입니다. “탐욕”은 끝없는 성적인 욕심을 말합니다. 이와 같이 모든 더러운 죄는 이교도들만의 사회에서 보통으로 행해지고 있는 것이었기 때문에 그 당시의 유명한 철인, 정치가들도 모두가 이런 죄에 빠져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이교에서 회개한 성도들에게는 철저한 회개의 열매를 요구한 것입니다.
사실 이것은 말하기도 부끄러운 일입니다. “너희 중에서 그 이름이라도 부르지 말라.” 우리는 그리스도인으로서 그런 온갖 더러운 것을 행치 말아야 할 것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그런 생각도, 그런 말도 피하는 것이 옳다고 합니다. 사도 바울은 이런 더러운 일이 증가되는 것을 경고하였을 뿐 아니라, 그 악행을 가볍게 취급하게 되거나 용서받을 수 있는 것으로 생각하는 것을 경고하였습니다.
그리고 “누추함을 버리라”고 하였습니다. 이 뜻은 모두 방탕하고 격에 맞지 않는 몸가짐이나 행동을 말합니다.
또 “어리석은 말”을 하지 말라고 했는데, 이는 음탕하고 음란한 이야기나 또는 좀 더 일반적으로 말한다면 어리석고 경솔함으로 가득 찬 헛된 이야기와 듣는 사람에게 덕이 되게 하는 것과는 거리가 먼 말을 가리킵니다.
여기 “희롱의 말을 버리라”고 하였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그의 「윤리학」에서 이 말을 ‘대화의 유희’라는 뜻으로 사용하였습니다. 이 말은 악의 없는 농담을 금한 것은 아닙니다.
어떤 주석가는 사도 바울의 이 말씀을 우리가 다른 사람을 욕하고 무례하게 대하는 행동 또는 다른 사람을 어리석게 보이도록 만드는 행동에 대해서 경계한 것이라고 설명합니다. 이런 일은 말할 필요도 없이 나쁜 짓입니다. 그러나 즐거운 대화라고 해도 그 속에 외설적이고 추잡한 내용이 담긴 대화를 허용한 것도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에베소서 4장 29절에 “무릇 더러운 말은 너희 입 밖에도 내지 말고 오직 덕을 세우는 데 소용되는 대로 선한 말을 하여 듣는 자들에게 은혜를 끼치게 하라” 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런 더러운 말, 어리석은 말, 희롱의 말은 그리스도인의 생활에서 마땅치 아니할 뿐 아니라 더 나아가서 크나큰 잘못을 저지를 수 있는 요소가 담겨 있음을 말했습니다. 그런 말들은 유익을 주는 것과는 너무나 거리가 멀어서 듣는 사람에게는 해가 되고 독이 되기 때문입니다.
본문은 이런 것들이 그리스도인에게는 마땅치 않으며 그들의 신앙고백과 성품에도 적당치 않은 일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에게는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것이 허락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즐기는 동시에 그리스도인은 현명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돌이켜 감사하라”고 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음란과 더러운 환락을 멀리 해야 하고,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에 대하여 찬송과 영광을 돌림으로써 마음으로부터 기뻐하고 즐거워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에게서 선하고 경건한 표현이 많아지면 악하고 마땅치 않은 말은 점차 줄어들 것입니다. 왜냐하면 축복과 저주, 음란과 감사의 말이 한 입에서 나올 수 없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그리스도인들을 더러운 죄에서부터 보호하기 위하여 이런 말씀을 했습니다. 5절에 “너희도 이것을 정녕히 알거니와 음행하는 자나 더러운 자나 탐하는 자 곧 우상 숭배하는 자는 다 그리스도와 하나님 나라에서 기업을 얻지 못하리니” 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를 하늘나라에서 멀어지게 하고 제외시키는 여러 가지 죄를 경계하는 데에 최선을 다해야 할 것입니다. 이러한 죄를 범한 사람에게는 하나님의 진노가 임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런 죄를 범해도 괜찮다는 식으로 “누구든지 헛된 말로 너희를 속이지 못하게 하라”고 6절에 권고했습니다.
그러한 죄가 그리스도인으로서 허용되며 용서받을 수 있는 것처럼, 혹은 그러한 죄가 하나님을 격노케 하거나 거스르는 것이 아닌 것처럼, 또는 그런 죄를 범해도 용서받을 수 있거나 형벌을 면할 수 있는 것처럼 아무도 우리를 속이지 못하도록 하라는 말씀입니다.
그런 말은 다 헛된 것이기 때문입니다. 죄를 범해도 무사하다고 말하고 다니는 사람은 속이는 사람인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사탄이 인간의 조상을 타락시킬 때 쓴 방법이 바로 그것입니다. “너희가 정녕 죽지 아니하리라.” 이 말은 정말 헛된 말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 말에 속아서 하나님의 진노가 불순종의 아들들에게 임하게 됨을 나중에 깨닫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불순종의 아들들”은, 믿지 않고 복음에 순종하기를 거절하는 이방인들을 의미합니다. 불순종은 죄 가운데서도 악한 죄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진노가 그들에게 임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진노는 때로는 이 세상에서도 임하지만 오는 세상에서 주어집니다.
“그러므로 저희와 함께 참예하는 자 되지 말라”고 7절에 말씀했습니다. 다시 말하면 “그들이 범하는 죄에 참여하지 말라 그래야만 너희가 그들이 받을 심판을 면할 수 있을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시편 1편에 보면 “복 있는 사람은 악인의 꾀를 좇지 아니하며 죄인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아니한다”고 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하심을 입은 자녀가 되었습니다. 범사에 하나님을 본받는 자가 되고 하나님의 자녀답게 사십시다.
에베소서 5장은 가장 놀라운 명령으로 시작됩니다. 5:1절에 “그러므로 여러분은 사랑을 받는 자녀답게 하나님을 본받는 사람이
되십시오” 세상의 어떤 사람이 아닌 하나님을 본받으라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가장 높은 기준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본받으라고 하시는 명령은 불가능한 명령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행하지 못할 명령을 하시지 않는 분이십니다. 우리를 누구보다
잘 아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1절의 말씀 속에서 우리가 하나님을 본받는 사람이 될 수 있는 이유를 분명하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사랑을
받는 자녀답게” 우리가 어떠한 존재들입니까?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자녀입니다. 사랑을 받는 자녀, 부모와 함께 동행하고 교제하며
살아가는 자녀는 누구를 닮아가게 되어 있습니까? 부모를 닮아가고 부모를 본받게 되어 있습니다.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1절에 나오는 하나님을 본받는 사람이 되라 라고 할 때 쓴 본받는 이라는 단어는 영어 단어인 mimic 즉 따라하다 라는
단어와 동일합니다. 다른 사람의 말이나 행동 또는 태도를 따라한다 라는 말입니다. 자녀들은 부모와 함께 살고 시간을 보내고 부모를
보고 자라기 때문에 부모의 말과 행동을 자연스럽게 배웁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하신 “하나님을 본 받으라”는 명령은 어려운 명령이 아닙니다. 하나님 곁에 꼭 붙어서 하나님과 동행하며
하나님과 시간을 함께 보내며 그 사랑 가운데, 그 은혜 가운데 살아가면 자연스럽게 하나님을 본 받는 자가 될 수 있습니다. 내
힘과 노력으로 억지로 하나님을 본받는 자가 되기 위해서 힘쓰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더불어 시간을 보내고, 기도의 자리, 예배의
자리에 가까이 하려고 힘쓰면 자연스럽게 하나님을 닮아가고, 하나님을 본받는 자가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5장에도
예수님께서 열매를 맺는 비결을 이렇게 알려 주셨습니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는 저가 내안에 내가 저 안에 있으면 이
사람은 과실을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것도 할 수 없느니라”
우리가 하나님을 본받는 자가 되어야 하는데 하나님의 어떠한 부분을 본받아야 합니까? 오늘 본문에서 사도바울은 단 하나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본받으라고 말씀합니다. 2절 “그리스도께서 여러분을 사랑하셔서 우리를 위하여 하나님 앞에
향기로운 예물과 제물로 자기 몸을 내어주신 것과 같이 여러분도 사랑으로 살아가십시오”사랑으로 살아가라 즉 사랑을 본받으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사랑의 삶을 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받는 자녀라면 사랑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어떠한 사랑입니까?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시기 위해 목숨을
버리신 사랑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그리스도를 통하여 사랑하신 것 같은 사랑을 하라는 것입니다. 2절 “우리를 위하여 하나님
앞에 향기로운 예물과 제물로 자기 몸을 내어 주신” 사랑이셨습니다. 이 사랑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본받으라 하시고 행하라 명하시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하는 조건적인 사랑이 아니라 우리에게 보여주신 조건 없는 사랑으로 사랑의 삶을 살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사랑을 어떻게 본 받을 수 있습니까? 어떻게 우리가 하나님의 조건없는 사랑으로 사랑하는 삶을 살 수
있습니까? 첫째는 하나님의 사랑을 체험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야 합니다. 우리가 사랑이라는 단어를 좋아하고 자주
사용하지만 사랑처럼 어려운 것이 없습니다. 이 세상에 어떤 사람도 저절로 사랑을 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설사 부모와 자녀와의
관계지만 저절로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순간순간 화나는 것을 참고 인내할 때가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말을 잘 듯고 방긋 웃을
때는 정말 사랑스러운데 고집 피우고 땡깡 피우면 얼마나 짜증나는지 사랑스러운 것과는 전혀 연관되지 않을 때가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우리는 태생적으로 사랑할 수 없는 이기적인 존재들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어떻게 사랑 가운데 행할 수 있습니까? 우리가 먼저
하나님의 사랑을 깊이 입어야 합니다. 사랑의 근본이신 하나님으로부터 사랑을 깨달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 본 자만이
하나님이 보여 주신 조건 없는 사랑을 할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1절에 “여러분은 사랑을 받은 자녀답게 하나님의 사랑을
본받는 사람이 되십시오” 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을 체험하지 못했으면 사랑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교회를 아무리 오래 다녔어도 하나님의 사랑이 무엇인지 모르고,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시는 그 사랑을 가슴으로 느껴 보지 못했다면
다른 사람을 진정으로 하나님의 사랑으로 사랑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정말로 나를 사랑하셔서 나 같은 죄인, 나 같은 인간을 위해서 십자가에서 죽기까지 사랑하셨다는 것이 깨달아지고
내가 그 하나님의 사랑을 입은 자라는 것을 진정으로 체험한 사람들만이 하나님의 사랑으로 다른 사람들을 사랑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체험하고 입은 것을 깨달은 사람들의 특징이 무엇입니까? 다른 사람들의 부족함, 연약함, 실수들에 대해
관대해진다는 것입니다. 내가 하나님의 조건 없는 사랑을 입었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 그 사랑과 은혜에 감사하고 감격했을 때 세상이
달라 보이지 않습니까? 다른 사람이 변한 것이 아니라 내가 사랑과 은혜를 체험하면 상대방이 불쌍히 여겨지고, 내가 사랑해야 할,
내가 돌보아야 할 대상으로 보이게 되는 것입니다.
상대방의 약점과 단점이 나를 힘들게 하면 그 사람의 문제가 아니라 내가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의 감격에서 메말라 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세상적으로, 인간적으로 사랑할 수 없는 사람을 사랑할 수 있는 힘은 다른 것에 있지 않습니다. 내가
사랑해야지, 내가 노력해야지 결단해서 될 일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입고 체험하고 받고 있을 때 가능한 일입니다.
요한일서 4:10 “사랑은 이 사실에 있으니 곧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셔서 자기 아들을
보내어 우리의 죄를 위하여 화목제물이 되게 하신 것입니다” 로마서 5:8 “그러나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셨습니다. 이리하여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실증하셨습니다”이러한 말씀들이 내 마음에 감동으로
감격으로 물결쳐야 합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고,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산다는 것을 확실하게 알지 못하고는 다른 사람들에게 사랑을
베풀 수 없다는 것을 알려 주시기 위해서 말씀해 주신 비유가 바로 마태복음 18장에 나오는 일만 달란트 빚진 자의 비유입니다.
예수님의 비유를 우리가 잘 압니다. 한 사람이 왕에게 일만 달란트를 빚졌습니다. 일만 달란트를 지금의 돈으로 환산하면 20만년동안
벌어야 하는 값을 수 있는 돈입니다. 수천억입니다. 절대 갚을 수 없는 돈입니다. 그런데 왕이 그 사람을 불쌍히 여겨서 그 빛을
아무 조건 없이 탕감해 주었습니다. 웬 은혜입니까? 얼마나 놀라운 축복을 받은 것입니까?
그런데 그 사람이 갚을 길 없는 수천억의 돈을 탕감 받고 돌아오는 길에 100데나리온 약 100일정도 일해야 하는 돈을 꿔준
친구를 만납니다. 그리고 당장 100 데나리온을 갚으라고 합니다. 그런데 그 친구가 당장 갚은 돈이 없어서 엎드려 간청을
합니다. 그런데 그 사람은 그 친구의 멱살을 잡아서 빚진 돈을 갚을 때까지 감옥에 갇혀 있게 합니다. 그 소식을 들은 왕이 그
사람을 다시 불러 들여 그를 책망하고 꾸짖고 빚진 것을 다 갚을 때 까지 감옥에 가두게 하였습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비유입니다.
일만 달란트를 탕감 받은 그 사람이 왜 자신의 동료, 친구에게 용서의 마음을 베풀지 못했습니까? 자기가 탕감 받은 사실을
가슴으로 느끼지 못한 것입니다. 그것이 얼마나 큰 은혜인지 몰랐던 것입니다. 수천억, 평생 갚아도 값을 수 없는 빚을 탕감
받았다는 사실을 깊이 깨닫고 감사했다면 한 만불되는 돈을 갚지 않은 사람을 친구를 용서하지 못하겠습니까? 우리가 사랑 가운데
행하지 못하는 이유는 하나님의 사랑을 입었는데도 깨닫지 못하고 살기 때문입니다. 일만 달란트 돈으로 환산할 수 없는 그 하나님의
사랑과 축복과 용서를 받았는데도 이 땅에 살면서 우리는 백 데나리온도 안되는 잘못과 실수를 범한 친구, 성도, 가족들을 용서하지
못하고 미워하고 살아가고 있지는 않습니까?
하나님의 사랑을 입지 못했거나 그 사랑을 깨닫지 못하고 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입은 자녀 같이 하나님의 사랑을 입기 바랍니다. 내가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을 받은 자임을 확신하고 잊지 않고 살아가는 자가 되기를 바랍니다.
프랑스혁명, 자유·평등·박애
혁명의 슬로건, 이상인가 현실인가?
프랑스 혁명 (프랑스어: Révolution française [ʁevɔlysjɔ̃ fʁɑ̃sɛːz], 영어: French Revolution, 1789년 5월 5일 ~ 1799년 11월 9일)은 프랑스 에서 일어난 시민 혁명 이다
“Liberté, Égalité, Fraternité!”
프랑스 혁명을 상징하는 이 외침은 단순한 정치적 구호를 넘어, 새로운 사회 질서에 대한 근본적인 선언이었다. 자유(Liberté), 평등(Égalité), 박애(Fraternité)라는 세 단어는 인간이 인간답게 살기 위한 최소한의 조건이자, 구체적인 정치·사회적 실천의 지향점이었다.
그러나
이 이상들은 혁명의 빛나는 기치이면서 동시에, 혁명 자체가 마주한 근본적인 모순과 한계를 비추는 거울이기도 했다. 수많은 민중이
‘자유’를 외쳤지만, 그 자유는 누구에게나 주어진 것이 아니었다. ‘평등’은 선언되었지만, 여성과 노예, 빈민의 삶은 크게
바뀌지 않았다. ‘박애’는 혁명 동지 간의 형제애로 불렸지만, 서로에 대한 강제와 숙청의 논리가 되기도 했다.
그 때문에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질 수밖에 없다.
“자유는 정말 모든 시민의 권리였는가, 아니면 새로운 권력의 또 다른 이름이었는가?”
“평등은 법전 속 문장에만 머물렀는가, 아니면 구체적인 삶의 조건으로 실현되었는가?”
“박애는 진정한 인간적 연대였는가, 아니면 혁명 이데올로기를 정당화하기 위한 수단이었는가?”
이 세 질문은 단지 과거를 되묻는 것이 아니라, 오늘날 우리가 자유와 평등, 연대라는 가치를 어떻게 이해하고 실천할 것인지에 대한 물음이기도 하다. 프랑스 혁명이 남긴 유산은 완성된 결과가 아니라, 여전히 지속되는 ‘해방의 과제’로 남아 있다.
자유: 해방인가, 새로운 억압인가?
프랑스혁명에서 외쳐진 '자유'는 구체제의 억압적 구조에 대한 강력한 저항이었다. 절대왕정
하에서 왕권은 신의 권위로 정당화되었으며, 시민들은 신분제의 족쇄에 얽매여 정치적 권리조차 박탈당한 상태였다. 혁명은 이러한
구조를 근본적으로 뒤흔들며 ‘인간과 시민의 권리 선언(1789년)’을 통해 사상과 언론의 자유, 정치 참여의 권리를 천명했다.
그러나
이 자유는 공포정치(1793~1794) 시기에 극명한 모순을 드러냈다. 로베스피에르(Maximilien de
Robespierre, 프랑스혁명 당시 자코뱅파의 지도자 중 한 명)와 자코뱅파(Jacobin, 프랑스혁명 당시 중앙 집권적
공화정을 주장한 급진파)는 ‘공화국의 적’이라는 이름으로 반대파를 숙청했으며, 자유는 오직 혁명 이념에 복종하는 자들에게만 허용되는 조건부 권리로 전락했다. 이는 혁명이 추구한 자유가 새로운 종류의 억압으로 변질될 수 있음을 보여주는 아이러니한 사례였다.
평등: 제도의 파괴, 하지만 여전한 차별
혁명
이전의 프랑스 사회는 철저한 신분제로 구성되어 있었다. 성직자(1계급), 귀족(2계급), 평민(3계급)으로 나뉜 이 구조는 법
앞에서의 불평등, 조세 부담의 불균형, 특권적 정치 참여를 제도화한 체계였다. 혁명은 이 계급 질서를 해체하고, “모든 시민은 법
앞에 평등하다”는 원칙을 선포했다.
1789년의 〈인간과 시민의 권리 선언〉(Déclaration des droits de l'homme et du citoyen)은 세계 최초의 인권선언으로, 이후 민주주의의 규범이 되었다. 그러나 이 ‘평등’은 어디까지나 법률적 선언에 그쳤다. 실제로는 부르주아 계급이 새 지배층으로 부상하며, 하층민과 농민의 삶은 여전히 빈곤과 불안정 속에 놓였다.
더
큰 문제는 평등의 적용 범위였다. 여성, 노예, 식민지 민중은 ‘시민’의 범주에조차 들지 못했다. 여성 운동가 올랭프 드
구즈(Olympe de Gouges)는 〈여성과 여성 시민의 권리 선언〉(Déclaration des droits de la
femme et de la citoyenne)에서 “여성도 정치적 주체”임을 외쳤으나, 결국 그녀 역시 단두대의 이슬로 사라졌다.
혁명은 평등을 외쳤지만, 평등은 누구에게나 허용되지 않았다.
박애: 형제애인가, 동지애인가?
‘박애(Fraternité)’는 가장 추상적인 가치였지만, 동시에 프랑스혁명의 가장 근본적인 이상을 내포한 개념이었다. 모두가 형제처럼 살아가는 사회, 이념과 계급, 지역을 넘어선 연대의 공동체—이것이 박애가 지향한 세계였다.
그러나 이 형제애는 철저히 선택적이었다. 이념이 다르면, 계급이 다르면, 심지어 출신이 다르면 박애의 대상이 될 수 없었다. 여성과 노예, 외국인은 형제애의 울타리 밖에 있었다.
혁명기 자코뱅당은 “공화국을 지키기 위해 공공의 적을 제거해야 한다”고 외치며, 연대보다 숙청과 처벌을 우선시했다. 결과적으로 ‘박애’는 무조건적인 연대가 아니라, ‘동지애’에 가까운 이념적 결속으로 기능했다. 박애는 인간에 대한 사랑이라기보다는, ‘혁명에 복무하는 자들’만이 누릴 수 있는 특권이 되었다.
이상은 살아남았는가?
프랑스혁명은 수많은 피를 흘렸고, 수많은 이상이 짓밟혔다. 자유는 때로 억압이 되었고, 평등은 불완전했으며, 박애는 배제와 조건의 이름이 되었다. 그러나 이 모든 실패에도 불구하고, ‘자유·평등·박애’라는 구호는 완전히 꺼지지 않았다.
19세기와 20세기, 세계 곳곳에서 벌어진 민주주의와 인권운동, 여성 참정권 운동, 반식민지 해방운동의 깃발 아래 이 세 단어는 여전히 살아 숨 쉬었다.
그것은 완성된 구호가 아니라, 끊임없이 다시 질문되어야 할 가치이며, 현실과 충돌하며 구현되어야 할 미완의 과제이다.
프랑스혁명이 던진 이념은 끝이 아니라 시작이었다. 그리고 그 질문은 오늘날 우리에게도 여전히 유효하다.
한 문장 요약
프랑스혁명의 슬로건인 ‘자유·평등·박애’는 단순한 구호가 아니라, 인간 해방이라는 영원한 과제를 향한 선언이었다.
12월 6일(토) 사도행전 21-23장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죽은 자의 소망(23:6b)
여러분 형제들아 나는 바리새인이요 또 바리새인의 아들이라 죽은 자의 소망 곧 부활을 인하여 내가 심문을 받노라. My brothers, I am a Pharisee, the son of a Pharisee. I stand on trial because of my hope in the resurrection of the dead.
사도 바울은 부활(復活)을 죽은 자의 소망이라고 정의합니다. 여호와 하나님을 믿는다고 주장하는 바리새인들은 영과 천사와 부활을 믿는다고 주장하였지만 사두개인들은 영과 천사와 부활을 믿지 않는다고 합니다. 유대인으로서 믿음의 내용이 서로 다르다는 것을 생각한 사도 바울은 예수님의 부활은 죽은 자의 소망이 된다고 강조합니다.
'죽은 자의 소망'은 성경, 특히 신약성경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과 연결되어, 믿는 자들에게 주어진 '산 소망'(새로운 희망)을 의미하며,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과 부활을 바라보는 기독교적 희망을 말합니다. 이는 썩지 않고 영광스러운 몸으로 부활할 것을 믿는 믿음에서 비롯되며, 세상의 고난 속에서도 하늘의 소망을 품고 살아가는 원동력이 됩니다.
주요 의미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신 예수님으로 인해 우리도 부활할 것이라는 소망입니다.
산 소망 (Living Hope): '죽은 소망'(옛 소망)과 대비되는 개념으로, 살아계신 하나님을 통해 주어진 새로운 희망을 뜻합니다.
죽음을 이기는 희망: 죽음이 끝이 아니며, 하나님 부르심으로 재림 때 부활할 것이라는 믿음으로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게 합니다.
하늘의 소망: 이 땅의 삶에서 썩을 것을 심어 썩지 않을 것을 거두는 부활을 바라보며, 하늘의 가치를 추구하는 삶을 살게 합니다.
성경적 근거 (베드로전서 1:3-5)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을 찬송하리로다 그의 많으신 긍휼대로 예수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게 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산 소망이 있게 하심이여.
사두개인 - 이들은 당시 상당한 종교적 영향력을 가진 집단으로 그 기원은 다윗과 솔로몬 시대때 유명했던 대제사장 사독에까지 거술러 올라간다. 사두개인들이 구체적인 집단으로두각을 나타낸 것은 하스모니안 시대 때(B.C. 166-63) 부터이다. 이들은 순수 유대적전통만을 고수하고 이방적인 요소에 대해서는 배타적이었는데, 모세 오경만을 정경으로 인정하고 나머지 전승 문서들의 권위는 인정하지 않았고, 죽은 자의 부활이라든가영적 세계, 천사와 마귀 등도 전통적인 것이 아니라 새로운 요소라 하여 배격하였다.이들은 철저히 현세 지향적이고 친로마적이고 체제 유지적인 귀족 집단이었으므로 민중들의 생활과는 유리(遊離)되어 있었다.
바리새인 - 이들 역시 사두개파와 쌍벽을 이루던 종교적 귀족 집단이었다. 에스라로부터 시작된 유대주의에 충성하는 한 부류가 마카비 시대 때 생겨났는데, 이들은 '하시딤', '하시디안'으로 불리어진 경건 집단 바리새파였다. 이들은 사두개파와 달리모세 오경 외에도 각종 구전, 전승을 동일하게 권위있는 정경으로 취급하였고, 죽은자의 부활과 내세, 천사나 마귀와 같은 영적인 세계를 인정하였다. 이들은
로마가 이스라엘을 지배하는 것이 하나님의 통치권만을 인정하는 그들의 신앙에 배치된다고 보아 로마에 대한 적대감을 가지고 있었고
율법과 선조들의 전통에 충실함으로써 이스라엘을 개혁하고 로마의 지배로부터 벗어나게 해야 한다고 믿었다.
죽은 자의 소망 곧 부활 - 사과의 뜻이 담겨 있는 바울의 변론(5절)에도 불구하고 사태는 진정되지 않았고 바울에 대한 적대 행위가 더욱 노골화되는 상황이 연출되었던것 같다. 바울은 자신의 무죄함에도 불구하고 자기에게 불리하게 전개되는 상황에 아무 대책없이 자신을 내맡길 수는 없었을 것이다. 산헤드린이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으로구성되어 있다는 것을 익히 알고 있는 양자 사이에는 신학적인 견해 차이가 있다는 것도 잘 알았던 바울은 이를 이용하여 논쟁(論爭)을 불러 일으켰다. 바울이 이렇게 한 행동에 대해 혹자는 노련한 수를 쓴 것이라고 보기도 하고(Preuschen), 마 10:16에 언급된 소위 뱀 같이 지혜로운 행동이었다고 보기도 하는 반면(Nestle), 상대방을 분열시키는 정당하지 못한 방법이었다고 보기도 한다(Farrar)너무 근시안적 해석이라 할수 있다. 적어도 바울은 거짓을 말하지는 않았고, 또한 그에게는 해야 할 일들이 준비되어 있었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11절). 자기가 감당해야 할 막대한 사명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무고한 희생을 대책없이 감내하려 드는 것은 도리어 책임성이 결여된 행동일 뿐이다. 지금 바울이 취한 행동에 대해서는 단편적인 시각에서가 아니라 그가 장차 로마에서도 복음을 증거해야 한다는 넓은 안목에서 이해되어야 하며 더욱이 지금 일어난 사건이 그의 로마행의 한 동기가 된다는 점에서 의의를 갖는다. '죽은 자의 소망 곧 부활'은 '죽은 자들의 부활에 대한 희망'으로 옮길 수 있으며(공동 번역), 이는예수의 부활에 그 근거를 두고 있는 부활 소망이다(고전 15:16-58). 단지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난다는 의미에서는 같은 부활을 믿는 것이지만 바울의 부활 신앙이 예수의 부활에 근거한 반면 바리새인들의 부활 신앙은 예수와 관계없이 전승되어온 신앙에 근거했다는 의미에서 본질적으로 차이점을 갖는다.
부활의 소망 - 죽은 자의 소망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다 전파되었거늘 너희 중에서 어떤 이들은 어찌하여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이 없다
하느냐? 만일 죽은 자의 부활이 없으면 그리스도도 다시 살지 못하셨으리라. 그리스도께서 만일 다시 살지 못하셨으면 우리의 전파하는
것도 헛것이요 또 너희 믿음도 헛것이며, 또 우리가 하나님의 거짓 증인으로 발견되리니 우리가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다시 살리셨다고
증거 하였음이라 만일 죽은 자가 다시 사는 것이 없으면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다시 살리시지 아니하셨으리라. 만일 죽은 자가 다시
사는 것이 없으면 그리스도도 다시 사신 것이 없었을 터이요, 그리스도께서 다시 사신 것이 없으면 너희의 믿음도 헛되고 너희가
여전히 죄 가운데 있을 것이요, 또한 그리스도 안에서 잠자는 자도 망하였으리니, 만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바라는 것이 다만
이생뿐이면 모든 사람 가운데 우리가 더욱 불쌍한 자리라(고전 15:12~19)”
산과 들에 저절로 피고 지는 무성한 꽃과 풀, 보이지 아니하는 무수한 생물들 동면(겨울잠)이 지나서 잠시 동안 존속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잠시 동안의 생을 위해서 그것들은 값진 희생을 (죽음) 하지 아니하면 안 됩니다. 어쩌면 겨울은 이 사물들에게 있어서
땅속에 섞여있는 자양분을 가득 흡수하여 저장하는 계절인 듯싶습니다. 그렇게 함으로서 깊고 추운 겨울을 지나 따뜻하고 만물이
소생하는 계절인 봄에 다시금 기지개를 켜고 한 해 동안의 생을 만끽하며 누리는 것입니다.
그것들은 미물에 지나지 아니하지만 그들만의 세계에는 그것들이 사용하는 언어가 있어 자연의 법에 따라 움직이며 순종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한 현상을 보면서 인간은 시간이 흐르는 것과 세월이 지남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어쩌면 만물은 우리 인간들에게
무언으로 많은 말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니겠는지요?
그럼 이 시간 하나님이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주시는 말씀을 상고해 봅시다. 하나님은 우리들에게 무엇을 보여주시며, 무엇을 알려 주시고자 함일까요? 부활(다시 살아남)의 소망에 관하여 우리 각자에게 인지시키고자 함이 아니겠습니까?
하나님은 살아 계신 하나님입니다. 죽었거나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닙니다. 영원 전부터 스스로 존재해 오셨으며 지금도 살아 계시며,
영원토록 존재하시는 분입니다. 그는 장차 모든 죽은 자들을 살리십니다. 그러하신 하나님이시기에 그리스도인들의 잠자는 상태를 두고
보시지 아니 하십니다. 성경은 그리스도인들의 육체적 죽음을 잠자는 상태로 묘사했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인 고전 15장 12~19절의 말씀은 부활에 관한 확고한 자세를 견지하고 부활의 내용을 밝히며 담대히 변증하는 한
사람의 그리스도인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부활에 관한 부정과 믿지 아니하는 완악한 자들의 도전에 응수하는 그리스도인인 바울은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죽음에서 일으키셔서 죽을 수밖에 없고 부활의 의미를 알지 못하는 자들에게 부활의 의미와 그에 관한 소망과
확신과 새로운 인식을 갖도록 하신 것은 하나님의 은혜이며, 극진하신 사랑이시라는 것을 일깨워 줍니다.
이러한 사실로 볼 때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은 불신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진노가 서려있는 경고의 말씀이며, 그의 사랑하시는
그리스도인들에게는 하나님은 사랑의 대상이요 소망의 대상임을 나타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그의 말씀을 만민을 향하여 주셨다 하지만
사실은 엄밀하게 말해서 그의 사랑하는 자들에게 그 말씀을 주신 것입니다. 이 사실에 관하여 본문을 살펴보도록 합시다.
첫째. 부활을 부인하는 사람
12절의 말씀은 당시에 유대교의 한 분파인 사두개인들의 주장하던 것으로서 이들은 예수 그리스도 당시에 부활의 문제로 유혹하던
무리입니다(마 22:23~32). 이 무리들이 부활에 관하여 얼마나 무지하고 어리석으며 소경이었던가를 살펴볼 수 있는데, 예수
그리스도는 저희들이 중시하는 아브라함과 이삭, 야곱에 관하여 말씀하시면서 하나님은 살아있는 자들의 하나님 곧 부활의 하나님이심을
나타내시고 저들에게 증거하고 제자들에게 확신시켜 주셨습니다.
이들 무리에 관한 더 자세한 내용은 행 23장 8절의 기록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저희는 영과 천사들의 존재를 믿지 아니하며
부인하는 단체임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거짓된 가르침이 고린도 교회 안에 침투되어 하나님의 말씀에서 이탈하여 각 개인의
신앙은 물론이고 교회의 공동체를 위협하는 지경에까지 이르렀습니다. 그 누구도 예외는 없습니다. 진리에서 이탈하면 그는 거짓과
하나가 될 것이며 그 결국은 자신의 생명과 타인의 생명을 파멸에 이르도록 방치하고 말 것입니다.
둘째. 부활은 매우 중요합니다.
13~14절은 부활을 부인하는 이들에게 말합니다. 부활이 없다면 그리스도의 다시 사심은 없을 것이며 그리스도의 다시 사심을
전파하는 것, 그리고 그렇게 믿는 것, 이 모든 것이 헛되다는 사실입니다. 진정 이것은 매우 중요한 것으로서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에 관한 사건은 신앙의 기초이며 모든 삶의 최대 가치임을 입증하는 것입니다. 부활이 없다고 부인하는
중심사상은 하나님의 존재를 부인하는 것이며, 하나님을 거짓되다고 주장하는 것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참으로 하나님은 영존하십니다.
진실하시고 참되십니다. 우리들 각자의 양심이 하나님의 존재를 증거하고 있지 아니합니까? 여러분 각자의 심령 속에 이 사실을 의혹
하거나 부인을 한다면 유감스럽지만 이러한 사람은 참으로 불행한 자입니다.
15~16절의 말씀을 보면 “죽은 자의 다시 사는 것이 없으면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다시 살리지 아니 하셨을 것이요 그리스도 역시
다시 사시지 아니했을 것이라”고 강조합니다. 모든 사람들은 결국 하나님 앞에 설 것입니다. 각자 그 행위대로 심판을 받고 그 심판
여하에 따라서 원하든 원하지 아니하든 공의로우신 하나님의 판결에 의하여 처리될 것입니다. 한 부류는 거짓된 증인으로 또 다른 한
부류는 참된 자들로 인정될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다시 사심을 목격하고 이를 위해서 모진 박해와 조롱과 멸시 천대를 감내하고 진실을 위해서 수고하고 애썼던 제자들의
항변은 그리스도를 살리신 주체 곧 하나님이 친히 부활의 사역에 참여하신 사실을 강조하는 것이었습니다. 역설적으로 부활을 부인하는
자들에게 암시하는바 그러하신 하나님 앞에 사도들이 거짓증인으로 나타날 것이겠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살리셨다고 증거 하는 자들을 칭찬하시고 이들의 증인이 되신다는 소망의 확신을 주는 것입니다.
셋째. 부활의 사실을 부인함으로 소망이 없는 자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17~18절의 기록은 “그리스도께서 살지 못했으면 믿는 우리들의 믿음도 헛되고 여전히 죄 가운데 있을 것이며 그리스도안에서 잠자는
자들도 망하였을 것이라”고 서술합니다. 그렇습니다. 부활이 없다면 이 말이 진실하지 않겠습니까? 거듭 말하거니와 죽은 자를
헛되이 믿는 것이며 그 죽은 자를 위하여 능욕을 당하며 수고하니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여타의 종교는 내세관을 희미하게 비취고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장차 일어날 사실들과 내세에 이루어질 사실들을 우리 인생들에게
분명하고 정확하게 전해주고 있습니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사람들은 믿지 아니합니다. 히 11장 1~2절의 기록은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라고 알려줍니다. 오직 믿음의 눈으로만 하나님의 실체와 그 약속하신 사실들을 볼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죽음은 우리로 하여금 믿음을 지니게 합니다. “그는 우리의 범죄 함을 인하여 죽음에 내어줌이 되었으며 또한 우리를
의롭다 하심을 위하여 살아나셨다”고 말합니다(롬 4:25).
넷째. 부활의 소망을 가집시다.
우리가 그리스도안에서 바라는 것이 이생뿐이라면 얼마나 우리의 상태가 불쌍하고 가련하다 하지 않겠습니까? 그렇습니다. 이생에서의
삶에도 성실하여야 하지만 그리스도의 오심을 기다리는 삶에 더욱 충실하여야 합니다. 이를 위하여 우리보다 먼저 부르심을 받은
사도들은 “천사들과 사람들에게 조롱과 멸시와 비방을 당하며 그 수모를 기꺼이 감당하고자 자처했습니다(고전 4:9).
형제, 자매들이여 ! 우리의 잠시 동안 당하는 육신의 고통과 질병 그리고 사망을 두려워하지 맙시다. 잠시 후면 오실 우리의
사랑하는 주께서 우리 모두를 깨우러 오신다는 사실을 믿고 의심하지 마십시오. 비록 우리가 육체를 입고 이생에 살면서 주님의 오심을
맞이하지 못하더라도 주의말씀을 의지하여 소망 중에 즐거워합시다. 주님이 오시면 거짓말하는 자 악한 마귀는 그 입김으로 죽일
것이며 조롱과 멸시와 비방을 일삼던 무리들 역시 심판을 자처할 것입니다(살후 2:8~12. 갈 5:10b).
부활의 사건은 인류 역사상 최대의 사건으로서 그 무엇도 비교할 수 없는 놀라운 사건입니다. 초대 교회가 세워진 후 증거 되는 첫
마디는 예수 그리스도의 다시 살아남을 외치는 것입니다. 부활의 첫 열매가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이 살리셨다는 것입니다. 비록
구약 성경에는 표징으로 부활에 관한 암시를 해주는 기록들이 있습니다. 그 가운데 대표적인 예는 요나의 사건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많은 표적들을 말씀하실 수 있었으나 자신의 다시 사심과 공통점을 지니고 있는 요나의 표적을 말씀하심으로 부활의 사건을 매우
중요하게 강조 하셨습니다.
베드로는 우리에게 산 소망이 있게 하신 하나님 아버지를 찬송할 것을 권하고 있습니다(벧전 1:3~9).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 소망이 부끄럽게 아니함은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바 됨이라고 바울은 우리를 격려합니다(롬 5:4~5).
바울은 딤후 2장 8~12절에서 그의 간증을 합니다. 고백과 소망의 말을 담대하게 증거 합니다. “나의 복음과 같이 다윗의 씨로
죽은 자 가운데 다시 사신 예수 그리스도를 기억하라. 미쁘다 이 말이여 우리가 주와 함께 죽었으면 또한 함께 살 것이요. 참으면
또한 함께 왕 노릇 할 것이라”고 말합니다. 우리 모두 그리스도께 소망을 둡시다. 주께서 우리로 능히 자신과 같은 썩지 아니하는
부활의 몸으로 우리를 변케 하시고 몸을 일으켜 세우실 것입니다. 부활을 체험하기를 원합니까? 그렇다면 우리들 자신을 현재의 삶
가운데 우리 자신을 매순간 죽음에 넘겨야 합니다. 그렇다면 부활을 체험할 수 있습니다.
바울은 날마다 죽노라고 고백했습니다(고전 15:31b). 그것은 부활을 체험하는 방법입니다. 오해하지 마십시오. 육신의 생명을
끊으라는 뜻이 아닙니다. 즉 살 소망이 없는 극한 상황을 의미합니다. 우리의 삶 가운데 이러한 경우가 많지 않습니까? 부활은
죽음을 거쳐야 합니다. 이것이 옳은 순서입니다. 그러므로 데살로니가 전서 4장 14절의 기록은 “우리가 예수의 죽었다가 다시
사심을 믿을 찐대 이와 같이 예수 안에서 자는 자들도 하나님이 저와 함께 데리고 오시리라”고 약속하십니다. 이 약속의 말씀에
의지하여 로마서 기자는 “이뿐 아니라 또한 우리 곧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를 받은 우리까지도 속으로 탄식하여 양자될 것 곧 우리
몸의 구속을” 기다린다는 소망이 깃 든 말을 전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저와 여러분이 함께 매 순간 부활의 삶을 살면서 소망을 갖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오늘날 우리가 사는 것을 생각해보면 옛날 조선시대 정승이나 갑부들 보다 엄청 잘 삽니다. 그 시대 사람들이
꿈도 꾸지 못한 것들을 우리가 가지고 삽니다. 텔레비전이나 냉장고나 에어컨 같은 것은 당시 사람들이 상상도 할 수 없는 것들이고
전화나 자동차 같은 엄청난 것들을 우리는 가지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얼마나 행복한가를 나타내는 행복지수를 따져봤더니 우리나라 사람들이 저 못사는 방글라데시 사람들보다 낮게 나타났다고 합니다. 그 이유는 나보다 더 잘사는 사람들이 많기 때문이랍니다. 나보다도 더 좋은 아파트에서 더 좋은 차를 타고 더 돈을 많이 벌어서 쓰고 다니는 사람이 많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불행하다고 생각이 된다는 것입니다.
행복지수가 낮은 또 하나의 이유는 높은 교육열 때문에 사람들이 많은 것을 알고 자기 나름대로의 생각을 가지고
살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보수우파의 생각을 가진 사람도 있고 진보좌파의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있기 때문에 같은 사안을 놓고도
어느 한편은 옳다고 하고 어느 한편은 그르다고 하기 때문에 늘 서로 싸웁니다.
기업을 운영하는 사용자와 그 기업에서 일을 하는 근로자가 서로가 합심하여 기업이 잘 되게 하여야 하는데 자기
이익을 좀 더 챙기기 위해서 서로 싸우다가 함께 망하기도 합니다. 정치하는 사람들도 마음을 합하여 나라가 잘 되도록 해야 되는데
여야로 나뉘어서 당리당략만을 위해서 싸우다가 세월만 보냅니다.
어디 그런 것뿐입니까? 심지어는 태어난 고향을 두고도 전라도니 경상도니 해서 서로 미워하고 남자와 여자들도 서로 싸우고 젊은이들과 늙은이들도 서로 싸웁니다.
이런 분열과 반목의 역사는 성경에서도 많이 볼 수 있습니다. 타락한 인간들은 늘 죄악의 길로 달려가는 사람들이
많기 때문입니다. 가인과 아벨의 생각이 달라서 그 후예들이 다른 길로 갔습니다. 아브라함의 후손으로 이어지는 하나님나라의
백성들과 그 밖의 세상 사람들이 다른 길로 가야했습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 속에도 서로 다른 생각을 하고 다른 길로 가는 두 부류의 사람들이 등장합니다. 다 같이 하나님을 섬기는 유대인임에도 불구하고 엄청나게 서로 다른 생각을 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사두개인과 바리새인이 그 사람들입니다. 유대교 지도자들로 공회에 함께 참석한 사람들이었지만 그들 가운데는
바리새인이 있고 사두개인이 있었습니다. 이들은 같은 유대인이라고 하면서도 사두개인은 부활도 없고 천사도 없고 영도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고 바리새인들은 다 있다고 믿는 사람들이었습니다.
바울은 부활과 천사와 영이 있다고 믿는 바리새인들에게 호소를 합니다. “죽은 자의 소망 곧 부활로 말미암아
내가 심문을 받노라”라고 바리새인들에게 호소를 했습니다. 그 결과 바리새인들의 호응을 받았고 그들의 지지를 받게 되었습니다.
“죽은 자의 소망 곧 부활로 말미암아”가 오늘 설교의 제목입니다. 바울이 법정에서 심문을 받는 이유는 “죽은 자의 소망 곧 부활”을 전파하였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오늘날도 부활의 복음을 전한다는 이유로 외면을 당합니다.
사두개인, 바리새인
본문 6절-8절 말씀에 “6.바울이 그 중 일부는 사두개인이요 다른 일부는 바리새인인 줄 알고 공회에서 외쳐
이르되 여러분 형제들아 나는 바리새인이요 또 바리새인의 아들이라 죽은 자의 소망 곧 부활로 말미암아 내가 심문을 받노라 7.그
말을 한즉 바리새인과 사두개인 사이에 다툼이 생겨 무리가 나누어지니 8.이는 사두개인은 부활도 없고 천사도 없고 영도 없다 하고
바리새인은 다 있다 함이라 ”라고 했습니다.
앞에서 살펴 본대로 바울이 공회 앞에 나가면서 공회를 주목하였다고 했습니다. 공회에 어떤 사람들이 재판관으로
왔는지를 자세히 살펴보았을 것입니다. 그 때 이미 공회의 구성원이 어떤 사람인지 파악한 바울은 그들의 일부는 사두개인이요 일부는
바리새인인 줄 알았습니다.
바울은 자신이 바리새인 출신이었기 때문에 바리새인들이 무엇을 주장하고 무엇을 그들의 교리로 삼는가를 잘 알았을
것입니다. 그것을 알고 바울은 자신이 바리새인임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자신이 바리새인이며 그것도 어제오늘 바리새인이 된 것이
아니라 부모님 때부터 바리새인이었음을 강조하였습니다.
대강 적당히 바리새인이 되었거나 바리새인이 된지 얼마 안 되는 신참내기가 아니라 전통적인 바리새인임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바리새인들에게 자신이 그들과 뜻을 같이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1) 사두개인
복음서에서 사두개인들은 늘 예수님께 혼날 때 바리새인들과 함께 혼나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이 사두개인들이 바리새인들과 다른 것은 부활이 없다고 주장하는 것이었습니다.
누가복음 20장에는 예수님을 찾아온 그들을 이렇게 표현합니다. “부활이 없다고 주장하는 사두개인 중 어떤
이들이 와서”라고 했습니다. 사두개인들은 부활이 없다고 알고 있었는데 예수님께서 부활을 가르치신다는 소식을 듣고 따지러 왔습니다.
“선생님, 모세의 법에는 형이 자식 없이 아내를 두고 죽으면 그의 동생이 형수와 결혼하여 형의 대를 이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일곱 형제가 있었습니다. 맏이 결혼하여 살다가 자식 없이 죽고 둘째와 세째도 형수와 살았으며 일곱이 다
그렇게 하여 자식 없이 죽었고 일곱이 다 그와 같이 자식이 없이 죽고 그 후에 여자도 죽었나이다 일곱이 다 그를 아내로 취하였으니
부활 때에 그 중에 누구의 아내가 되리이까”(눅20:28-33, 현대인성경)라고 했습니다.
부활이 없다는 것을 주장하기 위해서 말도 안 되는 이런 이야기를 가지고 부활의 불합리함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부활 후에도 이 세상 사람들처럼 사는 것이라고 착각하기 때문에 이런 질문을 했겠지만 차원이 다른 하나님나라를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 이런 질문을 했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유대인들은 대부분 내세가 있다는 것을 믿었습니다. 그러나 이 사두개인들만 내세를 믿지 않았고
천사나 영이나 부활을 믿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고위직을 독차지 했고 유대교의 최고 정치기구인 산헤드린을 장악하고 있었습니다. 그런
직책을 이용해서 이 세상의 권력과 부를 가지고 잘 사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래서 내세는 필요가 없었고 오직 이 세상에서 잘 사는
것만 좋아하는 세속적인 사람들이었습니다.
오늘날 교회 내에도 이런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교회는 출입하지만 영원한 천국을 믿지 않습니다. 어떻게 하든지 이 세상에서 잘 사는 것만을 최고로 생각을 합니다. 교회의 직책을 이용해서 권력을 형성하고 부자가 되려고 합니다.
복음이 아닌 다른 것을 가지고 열심히 전도하고 대형교회당을 짓고 좋은 사업들을 많이 하고 사람들에게 박수를 받고 그것이 성공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 중에는 영원한 천국을 믿지 않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그들에게는 이 세상이 전부인 것처럼 보이기 때문에 이 세상을 천국처럼 꾸미고 천국에서의 삶처럼 행복한 삶을 살려고 합니다. 영원한 천국 같은 것은 안중에도 없는 사람처럼 행동합니다.
영원한 천국을 믿지 못하는 사람들은 이 세상의 부귀영화를 좋아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교회에 다니기는 하지만 눈에 보이지 않는 천국보다는 이 세상의 부귀영화를 좋아합니다.
2)바리새인
이런 사두개인들과는 달리 바리새인들은 천사도 믿고 영도 믿고 부활도 믿는 사람들이라고 했습니다. 내세를 믿고 영원한 천국이 있다고 믿는 사람들이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의로운 사람이 되어서 천국 백성이 되기 위해서 율법을 지키고 선을 행하는 일에 최선을 다한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일에 율법을 지키는 일에 누구보다도 잘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하나님을 섬기는 일이나 율법을 지키는 일을 바르게 하지 못하고 엉터리로 하면서 잘 한다고 생각하는 것이었습니다. 율법의 정신은 잘 모르고 겉으로만 지키는 체 하는 것이 문제였습니다.
율법의 근본정신은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입니다. 그런데 바리새인들은 하나님을 진정으로 사랑하지 않습니다.
이웃을 진정으로 사랑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뜻을 따르지 않고 자신들의 뜻을 따랐으며 이웃을 사랑하지 않고 이웃을 정죄하는
일에 율법을 사용했습니다.
그들에게 있어서 가장 큰 잘못은 율법에서 말씀하고 있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의 복음을 알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율법을 지킴으로 완전한 사람이 될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가식적으로 율법을 지키는 체 하면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의롭게 되는 것을 따르지 않았습니다.
오늘날 교회 안에도 이런 바리새인과 같은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특별히 우리 고신 사람들을 바리새인이라고 비웃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고려파 사람들이 신사참배를 반대했고 신행일치를 강조하여 철저하게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살려고 하는 것은 참
좋은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개중에 어떤 사람들은 형식적으로 율법을 지키는 척하고 사람들이 보지 않는 곳에서는 나쁜 짓을 하기
때문에 그런 소리를 듣습니다. 이웃을 사랑하기보다는 율법을 가지고 이웃을 정죄하고 괴롭히는 사람도 많이 있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율법을 철저하게 잘 지키고 바르게 산다고 생각하는 것 때문에 자신이 흉악한 죄인이라는 사실을 잘 모르고
자신보다 착한 사람을 더 큰 죄인으로 몰아가기도 합니다. 흉악한 나를 대신해서 십자가에서 피 흘리신 예수님의 은혜를 깊이
생각하지 않습니다.
온갖 죄들을 지었으면서도 한두 가지 잘한 것 가지고 의로운체하고 자신이 괜찮은 사람처럼 교만스럽게 행동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자신에게는 필요하지 않는 것처럼 생각하는 어리석은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죽은 자의 소망 곧 부활로 말미암아
6절 말씀 중에 “죽은 자의 소망 곧 부활로 말미암아 내가 심문을 받노라”라고 했습니다.
바울이 공회에 사두개인들과 바리새인이 있는 것을 보고 위기를 모면하기 위해서 서로 싸움을 붙였습니다. 부활이 있다고 믿는 바리새인들을 자기편으로 끌어 들어서 사두개인들로부터 보호를 받기 위해서입니다.
사실 바울이 지금 이런 재판을 받는 것은 부활의 문제로 재판을 받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바울이 성전에서의 제사를 무시했고 율법을 지키는 것을 무시했기 때문에 유대인들의 반감을 사서 이런 재판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렇지만 그것은 유대인들이 그렇게 생각을 하고 그것을 죄로 몰아붙였기 때문이지 그것이 본질은 아니었습니다. 본질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이었습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셨고 우리들도 예수님처럼 부활할 수 있다고 외쳤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히게 한 사람들은 유대인들입니다. 그들이 빌라도에게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압력을 가했기 때문에 민란이 날 것을 두려워한 빌라도가 사형을 선고하고 로마 병정들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습니다.
예수님을 하나님을 모독한 죄인으로 몰아서 사형을 시켰는데 그 예수님이 부활하셨다고 한다면 유대인들은 정말로
흉악한 죄인이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대로 예수님이 하나님이시며 예수님이 구주가 되심을 인정하는 것이 예수님의 부활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부활하시고 난 후에 무덤을 지키고 있던 로마병정들을 매수해서 예수님의 제자들이 시체를 훔쳐갔다고 거짓증언을 하게 만들고 예수님의 부활이 거짓으로 꾸몄던 사람들입니다.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예수님의 부활은 있어서는 안 될 일이었습니다. 예수님이 부활했다고 증언하고 다니는 사람들을 협박해서 철저하게 입을 막거나 죽여서 증거를 없애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부활을 목격한 수많은 사람들 때문에 부활의 소식은 점점 퍼지기 시작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이 역사적 사실이며 그 부활로 인해서 우리도 부활할 수 있다는 소망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교회가 전해야 할 가장 중요한 소식이 이 예수님의 부활입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심으로 우리의 구주가 되심을 입증하셨고 예수님의 부활처럼 우리도 부활할 수 있다는 산 소망을 가지게 되었다는 것이 가장 기쁜 소식이요 복음입니다.
불행하게도 오늘날의 교회는 많은 사람들이 이 부활을 잘 믿으려고 하지 않습니다. 사두개인과 같은 사람들이 교회 안에 많이 들어와 있기 때문에 내세도 천사도 부활도 믿지 않고 오직 현세의 행복만 바라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바리새인들과 같은 사람들도 교회 안에 많이 들어와서 율법을 지킴으로 선을 행함으로 의로운 사람이 되려고 하고 예수님의 십자가를 붙들려고 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복음을 부끄러워하고 스스로 의로운 사람이 되려고 노력하는 어리석은 사람들이 많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선행의 능력을 예수님의 십자가의 능력보다 더 높이려는 사람들이 많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오늘날도 부활의 복음을 전하는 사람들이 비웃음을 받습니다. 예수님을 믿음으로 의로운 사람이 되려고 하는 사람들을 오히려 행함이 없는 거짓 믿음을 가진 사람으로 평가를 해버립니다.
우리가 이 사람을 보니 악한 것이 없도다.
본문 9-10절에 “크게 떠들새 바리새인 편에서 몇 서기관이 일어나 다투어 이르되 우리가 이 사람을 보니 악한
것이 없도다 혹 영이나 혹 천사가 그에게 말하였으면 어찌 하겠느냐 하여 큰 분쟁이 생기니 천부장은 바울이 그들에게 찢겨질까 하여
군인을 명하여 내려가 무리 가운데서 빼앗아 가지고 영내로 들어가라 하니라”라고 했습니다.
바울이 자신이 바리새인 중에 바리새인이라고 증언하고 바리새인들이 믿는 부활 때문에 이런 고난을 당한다고 주장을 하자 바리새인들이 바울을 동정하기 시작했습니다.
“우리가 이 사람을 보니 악한 것이 없도다.” “혹 영이나 혹 천사가 그에게 말하였으면 어찌 하겠느냐”라고 하면서 바울을 변호하기 시작했습니다.
부활을 이야기하는 것은 악한 일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또 바울이 말하는 것이 진짜 성령님이나 하나님께서 보내신
천사가 한 말이라고 한다면 그런 바울을 정죄하고 죽이는 것은 하나님의 뜻에 크게 위배되는 일이 아니겠느냐고 했습니다.
그렇게 말하니까 이제는 사두개인들과 바리새인들 사이에서 큰 분쟁이 생겼고 잘못하면 바울이 그들에게 찢겨질 것을 두려워하여 천부장이 부하들을 명하여 바울을 그들 가운데서 빼앗아서 다시 영내로 들어가라고 명령을 내렸습니다.
사실 부활의 복음을 전하는 바울이 악한 것이 없는 사람이 아니라 오히려 최고로 착한 사람입니다. 최고 착한 사람이고 최고의 기쁜 소식을 전하는 너무나 귀한 사람입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복음 부활의 복음을 전하는 사람이 최고로 선한 사람입니다. 가장 멋있는 사람이요 가장 큰 복을 받아야 할 사람입니다.
그러나 세상은 그런 복음을 전하는 사람을 그렇게 좋아하지 않습니다. 이 세상의 행복을 전하는 사람 이 세상에서 재미있는 일을 말해주는 사람을 최고로 여기고 박수를 칩니다.
저는 부활의 복음을 전하지 않고 이 세상의 행복을 전하는 목사들이 부활의 신앙이 없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부활을 확실히 믿는 목사라고 한다면 부활보다 더 중요하게 전할 것이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부활을 믿지 못하는 사람들이 만약에 부활의 복음만 전하다가 나중에 부활이 없으면 자신에게 항의할 것을 대비해서
부활은 그저 생색만 내고 이 세상에서 잘 사는 법을 더 많이 강조를 합니다. 부활이 없다고 해도 욕먹지 않을 만큼 조금만
언급하고 만다는 것입니다.
저 같은 사람은 만약에 부활이 없다면 큰일입니다. 여러분들에게 맞아죽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부활만 믿고 이 세상에서 고생고생만 하고 살았는데 막상 부활이 없다고 하면 가만히 있겠습니까?
그래도 어떻게 하겠습니까? 부활이 믿어지고 또 성경 말씀이 온통 부활을 이야기하고 있는데 그대로 전하는 것이 사명입니다. 혹시 만에 하나 부활이 없다는 생각 때문에 이 귀한 복음을 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사도 바울은 예수님의 부활과 우리의 부활의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엄청난 고통을 당해야만 했습니다. 그 부활이 가장 귀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가장 귀한 복이 이 부활이라는 것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이 부활의 복음을 믿고 따르는 일에 또 이 부활의 복음을 전하는 일에 최선을 다하시기 바랍니다.
12월 5일(금) 사도행전 19-20장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주는 것이 복되다(20:35)
범사에 너희에게 모본을 보였노니 곧 이같이 수고하여 약한 사람들을 돕고 또 주 예수의 친히 말씀하신바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 하심을 기억하여야 할찌니라. In everything I did, I showed you that by this kind
of hard work we must help the weak, remembering the words the Lord Jesus
himself said: 'It is more blessed to give than to receive.
서로 도우며 나누는 삶
사람들은 다 하나님 앞에서 귀한 존재이기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한 사람도 불행한 삶을 살기를 원치 않으십니다. 따라서 모두 이해관계를 떠나 서로 신뢰하고 존중하며, 물질적으로 부요한 사람들은 서로 나누며 도우라고 하십니다.
왜 주는 것이 복되다고 하셨을까요?
첫째는 하나님의 형상 공동체
세상 모든 사람들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하나님 형상 공동체와 같기 때문입니다. 만일 가족이 어려움을 겪는다고 할 때 돕지 않는다는 것은 가족이 되는 것을 포기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므로 주는 것은 어려움이 있기 때문에 그 어려움을 서로 나눔으로 어려움을 해결하는 가장 쉬운 방법입니다.
인간은 공동 운명체이므로, 서로 타인의 아픔을 돌아보아야 합니다. 그렇게 사랑을 실천할 때, 하나님의 은밀한 보상을 받고
누리게 됩니다. 이 구절은 참된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참된 사랑을 베푸는 것에 관한 교훈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잔치를 예로 들며 서로
주고받는 대상 대신, 전적으로 도움이 필요한 자들에게 사랑을 베풀면 하나님의 선하신 상급을 받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 조상들은 품앗이를 통해 이웃 간에 서로 도움을 나눴습니다. 품앗이란 한국 전통 사회에서 서로 돕기 위하여 노동을
교환하는 협동 방식이었습니다. 주로 농사일, 집안일, 공사 등에서 일정한 보수 없이 상호간 노동을 교환하는 형태입니다.
품앗이는 서로의 필요를 채워주면서 공동의 목표를 이루던 전통적 상부상조의 상징입니다. 품앗이의 ‘품’은 일손과 노동을 뜻하고, ‘앗이’는 서로 교환한다는 의미입니다. 서로 노동을 나누고 빌려주면서 도움을 주고받는다는 의미입니다.
우리나라는 농경 사회로서 품앗이를 통해 어렵고 힘든 난관들을 잘 헤치고 견디며 살아왔습니다. 많은 수확량으로 일손이 모자랄 때
품앗이를 통해 일을 잘 해냈습니다. 농사일은 날씨에 맞춰 제 날짜에 그때그때 끝내야 하기 때문입니다. 날씨 때문에 일찍 농사일을
끝내야 할 때, 서로 협동심을 발휘해 모두 힘을 모아 농사일을 끝냈습니다.
그러나 오늘날은 ‘Give and take(기브 앤 테이크)’라는 말이 주로 사용됩니다. 말 그대로 ‘주고 받기’입니다.
무엇인가 주었으면 받을 수 있고, 받았으면 주라는 말일까요? 이번엔 내가 줬으니, 다음은 네 차례라는 뜻이 아닐까 싶습니다.
우리나라 결혼식 문화에서는 축의금을 낸 상대가 있다면, 다음 내 자녀가 결혼할 때 축의금을 내야 합니다. 금액도 중요합니다. 넉넉하지 못한 형편에 많은 축의금을 내야 하거나, 뜻하지 않은 일로 인간관계에 흠집이 생겨 자칫 우정에 금이 갈 수 있습니다.
오늘 말씀에서 부유한 사람들을 잔치에 초청할 경우, 다음에 그 부유한 사람이 잔치를 초청한다면 엄청난 것으로 되갚아야 하는
무거운 책임감이 생길 것입니다. 부유한 사람들을 초청하면 의전부터 시작해 잔치 내내 신경을 써느라 잔치의 의미가 자칫 흐려질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잔치를 베풀거든 차라리 가난한 자들과 몸이 불편한 자, 그리고 이웃으로부터 소외된 자들과 고통당하는
자들을 초청하라고 하십니다. 그들은 그 잔치를 기쁨으로 참석할 것이며, 갚을 것이 없으므로 초청하는 사람이 복을 받을 기회가
주어진다는 것입니다.
의인들의 부활 시 행위에 대한 갚음을 받는다고도 하십니다. ‘내가 당신에게 줬으니, 당신도 나를 위해 줘야 한다’는 세상의 방식에 안주하지 말고, 주고 싶어 견딜 수 없는 마음으로 이웃들의 친구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범사에 여러분에게 모본을 보여준 바와 같이 수고하여 약한 사람들을 돕고 또 주 예수께서 친히 말씀하신 바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 하심을 기억하여야 할지니라(사도행전 20:35)”.
여기 “주는 것이 복이 있다”는 말씀은 어느 복음서에도 없지만, 이 말씀이 말하는 정신은 복음서들에 기록된 예수님의 여러
말씀들 속에 표현돼 있습니다.
‘복’이란 하나님께서 이웃을 사랑하고 이웃의 아픔을 함께하며, 헐벗고 굶주리며 압제당하는 이웃을
위해 마음과 물질로 돕는 이에게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땅 곧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주신다는 의미입니다.
가난하고 소외되며 정신적·물질적으로 힘들어하는 이웃을 위해 내가 가진 것에서 일부라도 나누는 데서 기쁨을 누리고, 항상 겸손한 자세로 이웃의 친구가 돼야 하겠습니다.
많은 세상 친구들은 나눔의 즐거움을 모른 채, 오롯이 자신의 이익과 환락과 쾌락을 즐거워하며 살아가는 것을 볼 때 참으로
안타까운 마음 금할 길 없습니다. 돈만 있으면 술과 담배, 놀음과 향락에 젖거나 오래살기 위해 값진 보약을 먹고, 조금만 몸에
이상이 오면 난리법석을 부리며 혹 죽을까 노심초사하는 것을 보면 딱해 보이기도 합니다.
“죽을 때 가지고 갈 것도 아닌데”라고 스스로 말하면서도, 나누며 살자는 말 한 마디 없이 매일같이 ‘오늘은 어디서 즐길까’만 찾다 보면, 결국 한계가 올 것입니다. 신앙인들마저 이런 삶을 살고 있다는 것이 한심스러울 뿐입니다.
그러면서 교회에 와서는 근엄한 척하고 찬송을 크게 부르며 기도하는 모습은 이중적 태도 아닐까요? 세상 끝날 아버지께서 “나는 너를 도무지 모른다” 외면하시면, 그때는 후회해도 이미 때는 늦었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와서 조반을 먹으라 하시니 제자들이 주님이신 줄 아는 고로 당신이 누구냐 감히 묻는 자가 없더라(요한복음 21:12)”.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배신하고 각자 생업으로 돌아간 제자들을 다시 찾으신 뒤 “지금 잡은 생선을 좀 가져오라(요한복음 21:10)” 하시고, 고기를 숯불에 구워 직접 요리하셔서 제자들을 먹이셨습니다.
이른 새벽부터 고기를 잡으러 갔던 제자들의 배고픔을 아시고, 생선과 떡을 먹도록 권하십니다. 비록 소박한 아침 밥상이지만,
사랑이 넘칩니다. 집을 떠나간 작은 아들을 끝까지 참고 기다리시는 아버지의 마음처럼, 자신을 배신하고 떠나갔던 제자들에게 친히
찾아오셔서 배고픔을 해결해 주시며 이웃 사랑을 몸소 실천하신 것입니다.
부활하신 주님께서 직접 찾아와 조반을 챙겨주셨을 때, 제자들의 마음은 어땠을까요? 쥐구멍에라도 들어가 피하고 싶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제자들은 먹먹하고 죄송한 마음으로 다시 주님을 만났고, 제자와 사도로서 무거운 책임감을 갖게 됐습니다. 이후
복음을 전하며 주님의 사랑을 나누는 사도의 삶을 굳건히 이행하며 순교도 불사하는 삶으로 변화를 받았습니다.
과거 주님께서는 갈릴리 외딴 빈들에서 3일 동안 따라다니던 백성들의 굶주림을 안타까워하시며,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축사하신 후 앉아 있는 오천 명을 먹이고도 열두 광주리를 남기신 오병이어의 기적을 베푸신 적이 있습니다.
이것이야말로 베풂과 나눔의 정신 아니겠습니까? 광야에서 보리떡 일곱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사천 명을 먹인 칠병이어의 기적 역시, 불쌍히 여기시는 주님의 나눔과 사랑의 결실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오천 명을 먹이신 오병이어 사건은 부활과 함께 사복음서에 모두 기록된 유일한 기적입니다. 요한은 비록 최후의 만찬에 대한 세부 기록을 남기지는 않았지만, “축사하신 후에”라는 용어를 통해 성만찬을 연상시킵습니다.
여기서 요한이 강조하는 것은 오직 아버지만 의지하고 행동하신 예수님의 사랑입니다. 앉은뱅이와 눈먼 자, 한센병자들을 비롯해 그
시대 각종 불치병자들을 살리신 주님은 사랑의 마음으로 마지막까지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며 “너희도 서로 발을 씻어 주는 것이
옳으니라(요한복음 13:14)”고 하셨습니다.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요한복음 13:34)”.
예수님께서는 이제 제자들에게서 떠나가실 것입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결코 주님께서 가시는 곳을 따라갈 수 없습니다. 오롯이
사랑만이 그들을 하나로 묶어줍니다. 그들은 성경에 의해 양육받을 것입니다. 즉 제자들의 결속 매체는 이제 예수님의 육체에서, 영적
사랑으로 바뀌어야 합니다.
이 계명은 구약에 이미 기록된 것으로(레위기 19:18), 예수님께서 직접 강조하셨듯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계명과 더불어
율법의 핵심입니다. 그런데 이 계명을 “새 계명”이라고 말씀하신 이유는 이 사랑의 동기와 표준이 이제 예수님 자신이 되셨기
때문입니다.
요즘 교회 안에서도 자신과 친한 성도에게만 신경쓰고, 처음 교회에 나온 분이나 어려움에 처한 성도들을 무관심으로 대하는 성도들이 적지 않습니다. 이는 “서로 사랑하라”는 주님의 당부를 불순종하는 것 아닐까요?
예수님을 사랑한다고 입으로만 중얼거리는 성도들은 참 그리스도의 사람이라 볼 수 없습니다. 참 그리스도인이라면, 그리고
초대교회 정신을 계승하는 성도라면 내가 가진 것을 나누고 베풀 수 있는 사랑의 마음으로 이웃의 아픔을 함께 할 수 있는 주님의
사람이 돼야 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세속에 젖어 자신의 영욕만을 위해 애쓰지 말고, 가난한 자와 억울한 자, 소외되고 불쌍한 이들을 위해 나를
내려놓고 겸손으로 십자가의 좁은 골짜기 숲으로 들어가야 할 것입니다. 거기는 사랑의 향기와 열매가 주렁주렁 열리는 천국의 문이
나타날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성도들은 반드시 그 천국을 차지해야 합니다. 그 낙원에 입장하기 위해, “서로 사랑하라”는 주님의 명령을
반드시 지켜내야 하겠습니다. 먼저 주위 사람들부터 베풀고 나눌 수 있는 아름다운 마음을 품어야 할 것입니다.
젊음의 샘물
어느 산골 마을에 마음씨 착한 노부부가 산에 살면서 나물을 캐거나 나무를 하면서 근근히 살고 있었다. 어느 날 할아버지가 나무를 하고 잠시 쉬며 땀을 식히던 중 우연히 작은 샘물이
솟아오르는 걸 보게 되었다. 마침 목이 말라서 그 샘물을 마시고 다시 나무를 하려는 순간, 할아버지는 갑자기 힘이 솟고 나무를
하는데 힘이 들지 않는 걸 알게 되었다. 샘물에 얼굴을 비추어보니 젊은 청년이 된 것이었다. 할아버지는 그 샘물이 젊음의 샘이란
것을 알게 되었고 서둘러 집으로 돌아갔다.
집으로 돌아가니 할머니가 남편의 모습이 바뀐 걸 보고 놀라 물었다. 할아버지는 나무를 하다 우연하게 샘물을 마시게 되었는데 마시고 보니 자신이 젊어졌다는 것을 밝혔다. 할머니는 놀라워했고 다음날,
남편과 함께 남편이 발견한 샘으로 가서 그 샘물을 마셨다. 그러자 할머니도 젊은 처녀가 되었다.
그 뒤 우연히 옆집에
살던 괴팍한 노인이 옆집의 노부부가 젊어졌음을 눈치채고 자신도 젊어지고 싶은데 어떻게 안 되냐고 물어보자 마음씨 착한 젊은 부부는
숲에 있는 샘물을 알려줬다. 그러자 노인은 부부가 알려준 샘가로 가서 샘물을 마셨는데, 욕심이 나 계속 마시니 점차 어려지기
시작했다.
한편, 옆집 노인이 돌아오지 않음을 눈치챈 부부는 무언가 안 좋은 일이 생긴게 아닐까 해서 서둘러 숲에 있는
젊음의 샘으로 달려갔더니 웬 갓난아기가 울고 있었는데, 옷을 보니 옆집 노인의 옷이었다. 부부는 노인이 너무 욕심을 부린 나머지
갓난아기가 되었음을 알고 씁쓸해했으며, 노인이 어려져서 된 갓난아기를 자신들의 양자로 삼아 정성스레 돌보았다. 그 뒤 갓난아기는
마음씨 착한 양부모 밑에서 자라 착하고 정직한 농부로 자랐다.
과유불급(過猶不及)
'과유불급'이라는 성어는 「모든 사물이 정도를 지나치면 미치지 못한 것과 같다」라는 뜻으로, 중용(中庸)의 중요함을 강조하는 말입니다. 이 성어는 논어(論語)의 선진편(先進篇)에서 나온 말로, 자공(子貢)이 공자(孔子)에게 자장(子張)과 자하(子夏) 중 누가 현명하냐고 물었습니다. 공자는 자장은 지나쳤고, 자하는 미치지 못했다고 대답했습니다. 이어 자공이 자장이 나은 것이냐고 물자, 공자는 "지나침은 못 미침과 같으니라"라고 말했습니다.
이러한 배경 지식을 바탕으로, '과유불급'이라는 성어를 더 깊게 이해하고 그 의미를 일상에서 어떻게 활용할 수 있는지 생각해보는 것도 좋을 것 같습니다. 지금부터 성어 '과유불급'의 뜻과 의미, 그리고 사용 예시를 비교해보며 이 성어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길 바랍니다. 함께 알아가보시죠!
과유불급(過猶不及) 이란?
「모든 사물이 정도를 지나치면 미치지 못한 것과 같다」라는 뜻으로, 중용(中庸)의 중요함을 강조하는 말입니다. 이 성어의 유래는 논어(論語)의 선진편(先進篇)에 나옵니다. 자공(子貢)이 공자(孔子)에게 자장(子張)과 자하(子夏) 중 누가 현명하냐고 물었고, 공자는 자장은 지나쳤고, 자하는 미치지 못했다고 대답했습니다. 이어 자공이 자장이 나은 것이냐고 묻자, 공자는 "지나침은 못 미침과 같으니라"라고 말했습니다.
한자풀이
過 : 지날 과
猶 : 오히려 유
不 : 아닐 부
及 : 미칠 급
이렇게 각 한자의 뜻을 풀이하면 '過猶不及'은 '지나침은 오히려 미치지 못함과 같다'라는 의미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즉, 중용을 지키는 것이 중요하며, 지나친 것과 부족한 것 모두 좋지 않다는 것을 알려주는 성어입니다. 이렇게 옛날의 지혜를 담은 '과유불급(過猶不及)'이라는 성어를 이해하고, 일상생활에서 적용해보면, 무엇이든 적당한 정도와 균형을 유지하는 것이 중요함을 깨닫게 됩니다. 이러한 이해를 바탕으로 성어 '과유불급'의 사용 예시를 살펴보며, 이 성어의 의미를 더욱 명확하게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1. 과유불급(過猶不及)
한자 뜻(겉뜻) : 지나친 것은 미치지 못한 것과 같다. 사자성어의 의미(속뜻) : 어떤 일이든 지나치게 욕심을 부리면 오히려 해를 입게 된다는 경고. 유래 : 《논어(論語)》에서 공자가 말한 표현으로, 중용의 중요성을 강조합니다. 공자는 학생들에게 "활을 쏘는 데 너무 당겨도 안 되고, 너무 느슨하게 해도 안 된다"고 가르치며, 지나침과 부족함의 균형을 이야기했습니다.
2. 소탐대실(小貪大失)
한자 뜻(겉뜻) : 작은 것을 탐하다 큰 것을 잃는다. 사자성어의 의미(속뜻) : 눈앞의 작은 이익에 집착하다가 더 큰 손해를 볼 수 있음을 경고. 유래 : 고대 중국 춘추전국시대의 이야기를 기반으로 합니다. 한 상인이 작은 이익에 욕심을 내다가 소중한 물건을 잃은 이야기가 전해집니다. 이로 인해 조급한 욕심은 결국 손해로 돌아온다는 교훈이 탄생했습니다.
3. 견물생심(見物生心)
한자 뜻(겉뜻) : 물건을 보면 마음이 생긴다. 사자성어의 의미(속뜻) : 인간의 본성인 욕심을 절제하지 못하면 스스로를 해칠 수 있다는 경고. 유래 : 한 농부가 시장에서 화려한 물건을 보고 충동구매를 반복한 결과, 가정이 어려워졌다는 이야기에서 비롯된 표현입니다.
4. 득롱망촉(得隴望蜀)
한자 뜻(겉뜻) : 농(隴)을 얻으면 촉(蜀)을 바라본다. 사자성어의 의미(속뜻) : 인간의 욕심은 끝이 없음을 보여주는 말로, 만족을 모르고 더 많은 것을 바라는 심리를 표현. 유래 : 삼국지에서 촉나라 유비가 한 땅을 얻고 나서도 만족하지 못하고 더 많은 땅을 바라보았다는 일화에서 유래했습니다.
5. 무염지욕(無厭之慾)
한자 뜻(겉뜻) : 만족할 줄 모르는 욕심. 사자성어의 의미(속뜻) : 적당히 욕심을 절제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교훈. 유래 : 고대 한 제후가 자신이 가진 부유함에 만족하지 못하고 더 많은 것을 탐하다가 패망한 이야기가 전해옵니다. 이로 인해 절제의 미덕이 중요하다는 교훈이 확립되었습니다.
득롱망촉의 교훈 / 목표를 이루는 것만큼 그 이후를 준비하는 태도가 중요합니다. 끝없는 욕심은 결국 만족감을 앗아갑니다.
요한복음 14:27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되다"는
예수 그리스도가 하신 말씀으로, 기독교의 핵심 가르침 중 하나입니다. 이
구절은 사도행전 20장 35절에 나오며, 에베소의 장로들에게 바울이 전한 권면이기도 합니다. 이 가르침은 받는 것보다 베푸는 행위
자체에서 진정한 행복과 복을 찾을 수 있다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성경에서의 출처
사도행전 20장 35절: 사도 바울이 에베소 교회의 장로들에게 한 말입니다. "주 예수께서 친히 말씀하신 바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 하심을 기억하라"
의미
나눔의 가치: 이 구절은 세상의 가치관과 달리, 얼마나 많이 받는지가 아닌 얼마나 많이 주는가에 따라 사람의 가치가 결정된다고 가르칩니다.
진정한 행복: 줌으로써 참된 행복과 자유를 누릴 수 있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나라: 세상은 받는 것에 가치를 두지만, 하나님 나라는 주는 것에 가치를 둔다는 점을 강조합니다.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사도행전 20:33-38) Giving is more blessed than receiving(Acts 20:33-38)
언제 행복하나? 대부분의 사람들이 사랑을 받고 인정받을때 행복해 한다. 더 큰 행복은 나의 것을 줄 때이다. 누군가에게 나의 것을 주고 나의 사랑을 줄때 그때, 만족을 느끼게 된다. 가진 것이 많아도 주지 않는 이들이 있다. 그 이유는 자기 중심적인 삶을 살기 때문이다. 나 밖에 모르는 삶을 살기 때문이다. 예수 그리스도로 구원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은 내 중심에서 벗어나 하나님과 다른 사람을 위하는 삶을 사는것을 말한다. 하나님 만난 사람은 나 중심에서 벗어나는 삶을 살아야 한다. 그래야 사람을 살리고 세계복음화를 할수있다. 주는자의 삶을 살려면 먼저 내가 하나님께 얼마나 많은 것을 받았는지를 깨달아야 한다. 하나님 자녀가 이땅에서 행복한 삶을 살려면 주는 자의 삶을 살아야 한다. 사람을 살리고 세상을 살리려면 주는 자의 삶을 살아야 한다. 그 이유가 무엇인가? 우리는 모든 것을 받았다
타락한 인간의 특성은 자기만을 위해서 살고, 자기만의 행복을 위해서 산다. 물질과 성공이 행복의 키 라고 생각한다. 그것을 얻기 위해서 자기 모든 인생을 투자한다. 다른 사람을 도와줄 여유와 마음이 없다. 내게 필요하지 않는것은 남에게 주지만, 내게 절대적으로 필요한것은 주지 않는다. “내가 마음의 은이나 금이나 의복을 탐하지 아니하였고”(33절). 탐욕은 지나치게 남의것까지 욕심 내는것이다. 바울은 인생의 목적이 명예나 물질이 아니였기 때문에 거기에서 자유하였다. 바울은 천막 만드는것으로 돈을 벌고 자기의 동역자들이 필요한것을 공급했다 청지기 정신을 가지고 모든일을 하였다(35절). 하나님이 주신 모든 것을 나의 것이라고 생각지 않고 필요한 사람들에게 나누었다.
사도바울은 에베소 교회 중직자에게 “주 예수께서 친히 말씀하신 바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 하심을 기억하라”(35절)고 말씀으로 권면했다.
주는 삶을 살 것을 권면하고 있다. 주께서 바울을 통해서 에베소 교회의 중직자로 새운것은 이 일을 하기 위함이었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하늘의 복을 받고 그 받은 복을 다른 사람들에게 주는것이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부르실때 ‘내가 너를 복의 근원으로 삼는다’ 하셨다. 너에게 모든 복을 주고 너를 통하여 모든 사람이 복을 받겠다고 약속 하셨다. 하나님의 자녀는 하나님이 주신 복을 가지고 사는 자이다. 이 복을 가지고 다른 사람을 살리는 사람이다. 우리가 항상 누려야 할것은 ‘나는 하나님으로부터 모든것을 받은자’ 라는것을 알고 나에게 주신 하나님의 축복을 누려야 한다. 내가 지금 살고있는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살고있다 라는것을 실제로 느껴야 한다. 그러면 여러분의 삶이 달라지게 된다. 하나님이 우주만물을 다 창조하셨다. 우리에게 우주 만물을 다 주셨다(행17:25). 우리가 열심히 노력해서 사는것 같이 보이지만 근본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모든것을 주셨다. 빛이 없으면 동물, 식물, 사람도 살 수 없다. 하나님이 땅을 우리에게 주셨다. 땅에 씨를 뿌리고 곡식을 얻을 수 있도록 주셨다. 그래서 우리는 모든것을 주신것으로 청지기의 삶을 감당하는것이다. 하나님만큼 우리에게 모든 것을 주신 이는 없다. 하나님의 속성은 주는것에 있다. 하나님은 부족해서 받기를 원하시는 분이 아니다 (고전 4:7). "누가 너를 구별하였느뇨 네게 있는 것 중에 받지 아니한 것이 무엇이뇨 네가 받았은즉 어찌하여 받지 아니한 것 같이 자랑하느뇨."
우리가 죄짓고 멸망가운데 있을떄 하나님의 최고의 선물, 독생자 예수님을 우리에게 보내셨다. 그리스도게서 십자가에서 피흘려 죽으심으로 우리의 모든 문제를 단번에 해결하셨다. 우리가 해결할 수 없는 사단, 지옥, 죄 문제를 다 한번에 해결하셨다. 그리고 부활하셔서 우리에게 생명을 주셨다. 이보다 더 큰 하나님의 축복이 어디에 있나. 또 하나님이 우리속에 성령으로 내주, 인도하고 계신다.
하나님을 모를 때는 내 것이라고 생각한 것들이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고 나서 보니 모든 것이 하나님이 주신 것이란걸 깨닫게 된다. 내것 이라는 것은 사실 없다. 이 땅에 우리가 무엇을 가지고 태어났나? 생명도 하나님이 주신 것이다. 내 생명도, 자녀도 내 것이 아니다. 하나님이 선물로 주신것이다. 내가 성공하고 먹고사는게 하나님이 은혜로 주신 것이다. 구원받은 사람은 이것이 깨달아진다. 진짜 깨닭은 사람은 하나님께 감사하고 기뻐한다. 하나님의 은혜받고 감사하며 사는 자는 어떤 삶을 사는가? 주는 자의 삶
세상
사람들은 남들보다 더높이 되고 남보다 많이 가지고 있는것을 보고 성공이라고 한다. 반대로 내가 가지지 못하고 어렵고 힘들게
사는것을 보고 불행이라고 생각한다. 이것이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기준이다. 이 기준은 사단이 주는 기준이다. 하나님의 기준은
하나님것을 가지고 살면서 주는자의 삶이 행복의 기준이다. 하나님께서는 받는자가 아니라 주는자가 복이 있다고 하셨다. 내가 가지고
있는 기준과 성경말씀의 기준이 달라서 갈등이 온다. 성경에는 “네 목숨을 버리면 생명을 얻겠다” 하시고 “심령이 가난한자가 복이
있다”고 하셨다. 겸손한 자가 복이 있다. 높이 될려면 섬기는 자가 되라”, 우리의 생각과 반대이기 때문에 갈등이 온다. 그러면
주는 자의 삶을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내가 가지고 있는 작은 것부터
우리가
준다고 할때는 물질부터 생각한다. 돈을 먼저 생각한다. 그래서 나는 가난하고 일도 못하니까 하나님께 드릴 것도 없고, 사람들에게
줄 것도 없다고 생각한다. 잘못된 생각이다. 남을 도울수 없는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다. 단지 남을 도와줄 마음이 없는것이다.
스스로 남을 도와주는것을 포기하고 사는것이다. 따뜻한 말 한마디, 배려의 한마디, 믿음의 한마디, 용기의 한마디가 그 사람을
살리는 것이다. 말 한마디가 그 사람에게 힘을 주고, 용기를 줄 수있다. 부모의 말 한마디가 자녀를 낙심시킬수도 용기를 줄수도
있다. 물질만이 아니다. 말로 사람을 도와줄 수 있다. 남들이 다 무시하는 사람에게 친절한 말 한마디가 용기를 주고, 친구가
되어주면 그 사람이 부자인 것이다. 아무리 내가 모든것을 가지고 있어도 남을 도와주지 못하는 자는 가난한 자이다. 나의 복음을 주라
더
복있는 사람은 내가 가진 복음을 주는 사람이다. 육신적인 도움은 그 사람의 근본적인 인생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다. 정신문제있는 사람을 육신적인 말로, 물질로 살리 수 없다. 그 사람에게는 복음이 필요한것이다. 내가 내 문제 해결 되고 인생문제
해결받은 복음을 그 사람에게 줄 수있다는 것이 얼마나 축복인가. 베드로는 날때부터 앉은뱅이되어 성전 미문에서 구걸하는 앉은뱅의
문제를 보게 되었습니다. 복음만이 앉은뱅이의 문제를 해결할 답인것을 알았다. 구걸하는 앉은뱅이를 보고 베드로는 무엇을 주었나?
“내게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주노니 곧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걸으라”.(행 3:6).
앉은뱅이는 복음듣고 단번에 인생문제 해결 받았다. 그가 일어나서 걷기도 하고 뛰기도 하며 하나님을 찬미 하였다고 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보화는 복음이다. 이 그리스도를 소유한 사람이 복있는 자이다. 그 복음을 다른 사람에게 주어서 그 사람이 구원받고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을 찬미한다면 그것처럼 기쁜일이 어디 있나? 우리가 육신적으로 다른 사람을 도와주는 것은 복음이 들어갈 수있도록 하는 것이다. 참된 이 복음이 들어가서 변화받고, 치유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면 우리의 최고의 기쁨이고 행복이다.
주는 자가 받을 복
내가 가진걸 주면 손해보는것 같다고 느낄때가 있다. 그러나 하나님이 주신것을 가지고 사람들에게 주면 큰 축복을 받게 된다. 어떤 축복을 받게 되나? 참된 기쁨과 행복
남에게
주지 않고 받으려만 하려는 사람은 받을려고 하기때문에 만족이 없다. 사실 다른 사람의 도움을 받으면 부담감을 가질 수 있다. 늘
갚아야 한다는 마음의 부담감을 가지고 산다. 그러나 주는 자는 참된 기쁨을 누릴 수가 있다. 자기 혼자만을 위해 사는 사람은
행복할 수가 없다. 남에게 도움 받기도 싫고 도움주기도 싫고 혼자사는 것이 편하다고 말하는 사람은 이미 불행한 삶을 사는것이다.
사람이 가장 기쁘고 행복할 때는 내가 상대방을 사랑하며 살아갈때 행복한 삶을 살게된다. 또 내가 가지고 있는것을 다른 사람에게
줄때 그 때 기쁨이 솟아난다. 주는것 자체가 기쁨이다. 정말 상대방이 도움이 절실히 필요할때 그때 도와주는 것은 그 사람의 인생에
있어서 영원한 기억이고 응답이다. 그 사람이 인생문제 해결받고 살아나는 것을 볼때 가장 가치있고 의미있는 인생을 산다. 이 행복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이다. 더 풍성한 삶
그런
사람은 더 풍성한 삶을 살게 된다. “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줄것이니, 곧 후히 되어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하여 너희에게
안겨 주리라”(눅6:38). “이로 말미암아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가 하는 모든 일과 네 손이 닿는 모든 일에 네게 복을
주시리라”(신15: 10). 남에게 주는 사람이 복을 받는다. 내가 먼저 다른 사람을 사랑하고 도와주면 내 마음속에 사랑이
솟아나게 된다. 사람의 마음에는 사랑의 샘물이 있다. 자꾸 다른 사람을 더 사랑하면 더 풍성해진다. 그러나 사랑하지 않으면 점점
메말라 간다. 사해바다에는 물이 들어오는 통로만 있고 나가는 통로가 없다. 그래서 아무 물고기도 살수가 없다. 그러나 갈릴리
호수는 샘물이 들어와서 아래로 흘러 내려간다. 늘 새로운 물이 있어서 많은 물고기들이 산다. 샘이 흐름으로 말미암아 강주위에는
많은 나무들이 열매를 맺는다. 주는 자의 삶은 마치 이와 같다. 늘 풍성한 생명을 누리고 기쁘고 감사가 넘치는 삶을 살게 된다. 하나님의 역사속에
주는 자의 삶은 하나님의 역사속에 그 이름이 기록된다. 어떤 사람들이 복음과 함께 그 행적들이 기록 되어 있는가? 한 가난한 과부가 두 렙돈을 성전 연보궤에 넣는 것을 예수님께서
보시고 칭찬 하셨다. 그 이유가 무엇인가? “그들은 다 그 풍족한 중에서 넣었거니와 이 과부는 그 가난한 중에서 자기 모든 소유 곧
생활비 전부를 넣었느니라”.(마12:41-44). 마리아가 결혼하기 위하여 평생동안 모아둔 지극히 비싼 향유든 옥합을 깨뜨려
예수의 발에 향유를 붓는 마리아를 칭찬하였다. “이 향유를 부은 것은 내 장례를 위하여 함이니라”(12). “온 천하에 어디서든지
이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는 이 여자의 행한 일도 말하여 저를 기념 하리라”(마26:6-13).
요한복음 6장에 보면 한 어린 아이가 보리떡 다섯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내 놓은 것 가지고 예수님은 축사하시고 5천명의 무리를 먹이고 12광주리를 남겼습니다. 하나님은 드리는 자를 통해서 하나님의 역사를 이루시고, 기적의 역사를 이루신다. 또 이 사람들의 이름이 복음 전파하는 곳마다 그들의 행적도 함께 전파되고 있습니다. 이것처럼 큰 축복이 어디에 있습니까?
주님께서 말씀하신대로 받는자보다 주는 자가 더 복이 있다.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하나님께 얼마나 많은 복을 받았는지 알아야 한다. 내가 지금 살고있는 모든 것 다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복임을 알아야한다. 우리는 얼마나 크신 하나님의 사랑을 받았습니까. 죄, 저주와 사망 권세 아래 영원한 지옥에 갈수밖에 없는 우리를 사랑하시고 구원해주셨다. 그것도 자기 사랑하는 독생자를 희생시키시고 엄청난 댓가를 지불하시고 우리를 구원하셨다. 우리에게는 아무 대가 없이 선물로 우리에게 주신 것이다. 이 하나님의 사랑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을 우리가 깨닫게 되었고 소유하게 되었다.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이 우리의 심령에 차고 넘치기를 축복합니다. 이 하나님의 사랑을 소유한 자는 이 하나님의 사랑으로 다른 사람을 사랑하고 이 사랑을 전해주는 자가 된다. 하나님의 사랑을 소유하고 나누는 사람은 “사랑받는것도 행복하지만 사랑하는 것은 더 행복하게 만드니라”. 사랑하였으므로
나는 진정 행복한 자로다” 고백이 나오는 사람이 바로 복있는 사람이고, 하나님의 마음을 가진 자이다. 주는 자는 이 세상에서
가장 부유한 자이다. 땅에 사람이 아니고 하나님의 하늘의 사람이다. 이 땅에서 천국을 누리며 천국의 백성으로 사는 것이다. 이
사람은 세상의 어디에 가는지 참된 행복을 누리고 산다. “주 예수께서 친히 말씀하신 바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 하심을 기억하여야 할지니라” (행 20:35)
하나님께서 주신 모든 것을 실제로 감사하며 누리게 하옵소서. 나같은 죄인을 구원하신 하나님의 사랑을 실제로 깨닫게 하시고, 다른 사람에게 사랑을 주는 삶을 살도록 도와 주옵소서. 나를 통해서 죽어가는 영혼들이 살아나서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역사들이 일어나게 하옵소서. 살아계신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감사하며 기도합니다. 아멘.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더 행복하다
"범사에 여러분에게 모본을 보여준 바와 같이 수고하여 약한 사람들을 돕고 또 주 예수께서 친히 말씀하신 바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 하심을 기억하여야 할지니라(사도행전 20:35)".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lt is more blessed to give than to receive)"는 주님의 말씀은
어느 복음서에도 없지만, 이 말씀이 표현하고자 하는 그 정신은 복음서들에 기록된 예수님의 여러 말씀들 속에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줄 것이니 후히 되어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하여 너희에게 안겨 주리라 너희가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도 헤아림을 도로 받을 것이니라(누가복음 6:38)".
지금 나라 안팎에는 코로나19 팬데믹 사태가 장기화되면서 많은 어려움으로 고통을 당하는 백성들이 있습니다. 도와달라는 호소가 여기저기서 끊이질 않고 있습니다.
월드비젼과
유니세프 등 많은 봉사 단체와 기독교 방송 프로그램에서 방영되는 아프리카 여러 나라들의 참상을 보면 참으로 마음이 아픕니다.
물이 없어 샘물을 파는데 큰 어려움을 겪고, 아이들이 영양실조로 인해 죽어가는 모습, 배우고 싶어도 학교에 갈 수 없는 아이들의
딱한 처지 등을 바라보면 참으로 애가 마릅니다.
우리 역시 얼마 전만 해도 먹을 것이 없어 배가 고픈 나머지 물로 배를 채우고, 부잣집 아이들의 도시락을 쳐다보면서 침을 꿀꺽 삼키며 부러워했던 추억이 솔솔 떠오릅니다.
어떤
부잣집 아이의 도시락은 하얀 쌀밥 위에 노란 계란프라이, 그리고 빨간 마른오징어 반찬을 볼 때마다 먹고 싶은 충동으로
점심시간마다 늘 군침을 흘렸던 시절을 추억하면, 참으로 웃음이 나옵니다. 하지만 그 시절에는 정말 먹고 싶어 그 학생의 가정환경이
부러웠던 모습이 생생하게 그리움으로 젖어오는 깊은 밤입니다.
하지만 작금의 시대에 먹을 것이 풍족하다 못해 아까운
음식쓰레기가 산더미를 이루는 광경을 바라보면, 그리고 북한의 우리 동포들, 가난한 우리 이웃들과 아프리카 난민들의 처참한 생활
모습들을 보노라면, 금 새 눈가에 눈물이 흐릅니다.
예수님은 누가복음 6장 41절에서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떡"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아버지 하나님께서는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아들을 내어주시는 큰 사랑으로 우리를 기르시고 지켜 주셨습니다.
그리고 그 사랑의 힘을 받은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하나님과 이웃 사랑의 계명과 십자가의 신비로 매일매일 영적인 떡, 예배를 통해 배불리 먹여 주시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주께서 내려 주신 영적인 떡을 통해 튼튼해진 우리 신앙인들은 주님의 말씀에 따라 진정 세상에 살아있는 떡으로 살아가야 할 책임이 있습니다.
우리 신앙인들은 이미 주님의 사랑을 체험했기에 항상 감사하며 살아가야 함을 늘 고백하며, 사랑의 군병으로서 이웃을 향한 시선으로 날마다 나아가야 할 것입니다.
비록 나의 환경과 여건이 좋지 않더라도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호흡하고 살아간다는 이 순간이 감사하며, 또한 어려운 환경이지만 분명 나누며 살아가는 실천이 필요할 때입니다.
부자들보다 나눔의 실천은 오히려 가난한 이들이 더 많음을 엿볼 수 있습니다. 내 형편에서 내가 가진 것 중에 작은 것 하나라도 나눌 수 있는 삶이 그리스도의 정신임을 알아야 하겠습니다.
갈증을
호소하는 난민들에게는 물을, 먹지 못해 영양실조로 죽어가는 저 아프리카의 난민들과 배우고 싶어도 돈이 없어 학교에 가질 못하는
아이들을 위해서는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 중에서 나눔의 실천을 한다면, 우리 이웃들에게는 분명 주님이 기뻐하시는 열매로 가득하게 될
것입니다.
33세에 백만장자가 된 록펠러는 43세에 미국의 최대 부자가 되었고, 53세에 세계 최대 갑부가 되었지만, 결코 행복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는 55세에 불치병에 걸려 1년 이상 살지 못한다는 사형 선고를 받았다고 합니다. 최후
검진을 위해 휠체어를 타고 갈 때, 병원 로비에 실린 액자의 글이 눈에 들어왔다고 합니다.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더 복이
있다 lt is more blessed to give than to receive. 사도행전 20:35
그 글을
보는 순간 록펠러는 마음 속에 전율이 생기고 눈물이 났습니다. 선한 기운이 온 몸을 감싸는 가운데, 그는 눈을 지그시 감고 생각에
잠겼습니다. 조금 후 시끄러운 소리에 정신을 차리게 되었는데, 입원비 문제로 다투는 소리였습니다. 병원 측은 병원비가 없어 입원이 안 된다고 하고, 환자 어머니는 입원 시켜달라고 울면서 사정을 하고 있는 장면이었습니다. 록펠러는
곧 비서를 시켜 병원비를 지불하고, 누가 지불했는지는 모르게 했습니다. 얼마 후 은밀히 도운 소녀가 기적적으로 회복이 되자, 그
모습을 조용히 지켜보던 록펠러는 얼마나 기뻤는지 후일 자서전에서 그 순간을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저는 이렇게 행복한 삶이 있는지 몰랐습니다."
그때 그는 나눔의 삶을 작정합니다. 그와 동시에 신기하게 그의 병도 사라졌습니다. 그 뒤 그는 98세까지 살며 선한 일에 힘썼습니다. 그리고 나중에 그는 회고합니다. 인생 전반기 55년은 쫓기며 살았지만, 후반기 43년은 행복하게 살았다고.
그렇습니다.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큰 기쁨이 생겨납니다. 내가 무엇을 받으려 하는 생각보다, 무엇을 주려고 하는 생각을 먼저 하는 사람만이 누리는 최고의 기쁨과 만족은 어디서도 비교할 수 없는 복된 삶입니다.
세계 최고의 갑부가 된 록펠러 역시 병원 로비에 걸어둔 액자의 글을 보고 감동을 받았습니다. 마침 병원비가 없어 병원 안에서 실랑이를 벌이는 광경을 보며, 조금 전 감동을 받았던 그 심령으로 나눔을 실천했습니다.
이를 통해 앞으로 1년 밖에 살지 못할 위기에서 100세에 가까운 삶을 영위하며, 선한 일에 최선을 다한 그로서는 기쁨의 세월을 보낸 것입니다. 그는 이제 98세까지 존경받으며 살았던 나눔의 모델 아닐까요?
지금
코로나19라는 질병 때문에 나라 안에서는 개인 이기주의가 만연합니다. 지도자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내년 대선을 앞둔 시점에서
어렵고 고통받는 국민들을 위한 정치는 하지 않은 채, 오롯이 권력 잡기에만 혈안이 되어 참으로 애가 마릅니다.
저마다 자신들의 이익 추구를 위해 몸부림치며 네거티브와 시위, 폭력으로 얼룩진 나라를 볼 때, '언제 우리나라가 이렇게 변했을까?'라는 생각이 미래를 암울하게 할 뿐입니다.
저 정치가들은 왜 받기만 하며 챙기려고만 할까요? 그들도 이웃을 위해 주려고 하는 마음이 있다면, 이 나라는 참으로 좋은 나라가 될 터인데 말입니다.
이런
때일수록 우리 크리스천들은 한 마음이 되어 이웃을 돌아보며, 주님께서 이 땅에서 손수 담당하셨던 십자가의 사랑을 실천해야
하겠습니다. "서로 사랑하라" 당부하신 주님의 음성을 듣고 나라를 위해, 그리고 국민들을 위해 최선을 다해 섬기는 귀한 주의
종들이 되시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콩 한 쪽도 나눠 먹는다 뜻 이 속담은 아무리 작은 것이라도 이웃과 나눌 수 있다는 뜻이에요.
콩은 아주 작아요. 이렇게 작은 콩이라도 이웃과 나누려는 마음은 매우 따뜻합니다.
사람은 다른 사람들과 어울리며 살아야 하는 사회적인 동물이에요. 그래서 서로 돕고 사는 게 매우 중요하죠. 콩처럼 작은 것이라도
서로 나누려는 마음을 품고 산다면 우리 인생은 보다 행복해질 수 있어요.
콩 한 쪽도 나눠 먹는다 사용 사례
사례 1
중학생 지수는 토요일마다 도서관에 공부하러 가요. 우연히 같은 반 친구인 영아를
만났답니다. 점심시간이 되자 지수는 영아와 함께 벤치에 앉았어요. "이 샌드위치 먹어. 엄마가 만들어 주셨어." 지수가 샌드위치를
나눠주자 영아는 맛있게 먹었답니다. "고마워. 콩 한쪽도 나눠 먹는다고 하더니! 넌 늘 친구들한테 나눠주기를 좋아하는구나."
사례 2
20대 현기 씨는 백수예요. 고시원에 사는데요, 생활비가 부족해서 늘 라면만
먹어요. 오늘도 라면을 끓이는데 옆방에 사는 아저씨가 저녁을 굶고 있는 게 보였어요. 현기 씨는 라면 2개를 더 끓여서 아저씨와
함께 먹었답니다. 라면을 후루룩 먹은 아저씨는 이렇게 말했어요. "총각, 라면 맛이 기가 막히네. 콩 한쪽도 나눠 먹는다고
하던데, 총각은 마음이 따뜻해서 앞으로 좋은 일이 많이 생길 거야."
사례 3
50대 민정 씨는 오이김치를 만들었어요. 양을 조금 더 많이 만들어서 동네에 친한
언니에게 나눠 주었죠. 언니는 오이김치를 받고 매우 기뻤어요. "뭘 이런 걸 만들었어. 맛도 정말 좋네. 콩 한쪽도 나눠 먹는다고
하더니! 자기는 만날 음식을 나눠주더라."
지금까지 콩 한쪽도 나눠 먹는다에 대해 알아보았어요. 오늘도 빛나는 하루 보내세요.
12월 4일(목) 사도행전 16-18장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하나님의 말씀에 붙잡혀(18:5)
실라와 디모데가 마게도냐로서 내려오매 바울이 하나님의 말씀에 붙잡혀 유대인들에게 예수는 그리스도라 밝히 증거하니. When Silas and Timothy came from Macedonia, Paul
devoted himself exclusively to preaching, testifying to the Jews that
Jesus was the Christ.
실라와 디모데가...내려오매 - 마침내 바울이 고대하던 두 명의 사역자가
당도했다. 이 두 사람은 거의 동시에 도착했거나 아니면 디모데가 데살로니가에서 먼저 도착하고 그 후에 실라가 빌립보에서 도착했을
것이다(Lenski). 디모데는 데살로니가 교회의 신자들이 환난 가운데서도 좌절하지 않고 오히려 기쁨으로 신앙 생활에 열중하고
있다는 좋은 소식을 전해 주었지만(살전 3:6), 다른 한편으로는 그리스도의 재림과 관련하여 약간의 혼란이 생겼다는 섭섭한 소식도
전하였다(살전 4:13; 5: 11). 바울은 이러한 데살로니가 교회의 소식을 듣고 나서 이에 대한 답장을 썼는데 이 서신이
바로 데살로니가전서이다. 그리고 얼마 후에 데살로니가 교회가 그리스도의 재림에 관한 바울의 가르침을 오해하여 혼란에 빠진 것을
알게 되었고 그래서 두번째 서신인 데살로니가후서를 기록하였다. 한편 실라는 빌립보 교회의 소식과 그들이보낸 연보를 가지고
왔다(고후 11:9; 빌 4:]4, 15). 빌립보교회에서 보내준 헌금은 이 때의 바울에게 있어서 아주 시기 적절하고 유용한
것이었다. 빌립보교회의 헌금으로 바울은 더 이상 생계 유지에 신경을 쓰지 않아도 되었고 오로지 말씀 전파에만 몰두할 수 있었다.
말씀에 붙잡혀 - 실라와 디모데가 온 후 바울의 회당에서의 말씀 증거는
안식일에만 있지 않고 지속적으로 있었다. 즉 바울은 빌립보 교회의 현금덕분으로 장막 만드는 일에서 벗어나 말씀 준비에만 몰두했고 또
준비한 말씀을 전하는데만 전력 투구(全力投球)했다. 특히 '붙잡혀'라는 뜻의 헬라어 동사 '쉬네나케토'(*)는 계속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바울의 이러한 사역이 고린도에 머무는 동안 지속되었음을 나타내 준다.
하나님의 말씀에 붙잡히다
하나님의 말씀을 깊이 마음에 새기다
그 말씀대로 순종하며 살아가다
이는 말씀을 통해 하나님을 알고 그 지혜에 전적으로 의지하는 상태를 말하며, 자신의 생각이나 세속적인 가치가 아닌 하나님의 말씀으로 삶을 인도받는 것입니다. 말씀에 대한 깊은 헌신 : 하나님의 말씀을 삶의 중심에 두고, 그 말씀이 자신의 행동과 생각을 결정하는 원칙이 되도록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대한 순종 : 말씀에 붙잡힌다는 것은 곧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순종하는 삶을 의미하며, 이는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가겠다는 결단이 포함됩니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 : 하나님의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말씀에 붙잡히는 것은 하나님을 깊이 알아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성령의 인도하심에 따름 : 말씀을 통해 성령의 음성을 듣고,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살아가는 것입니다.
성경적 예시 아브라함 :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말씀에 붙잡혀 순종한 것처럼, 믿음의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에 붙잡혀 살아갑니다. 바울 :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말씀에 붙잡혀' 유대인들에게 예수는 그리스도라고 담대히 증언했습니다 (사도행전 18:5).
요약 / '하나님의
말씀에 붙잡히다'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 자신의 삶의 모든 영역을 지배하고 인도하도록 내어맡기는 것을 뜻합니다.
이는 단순히
말씀을 아는 것을 넘어, 그 말씀에 전적으로 순종하고 따르며 하나님과 깊은 관계를 맺는 삶의 자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붙잡혀
1. 말씀은 성령(디모데후서 3:16-17)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하기에 온전케 하려 함이니라.
2. 말씀은 예수(요한복음 1:14)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3. 말씀은 진리(요한복음 14:6)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4. 말씀은 삶의 길잡이(시편 119:105)
12월 3일(수) 사도행전 14-15장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이 믿음에 거하라(14:22)
제자들의 마음을 굳게 하여 이 믿음에 거하라 권하고 또 우리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난을 겪어야 할 것이라. strengthening the disciples and encouraging them to
remain true to the faith. "We must go through many hardships to enter
the kingdom of God," they said.
이 믿음에 거하라! 이 믿음이란 어떤 믿음일까요?
얘수 믿고 구원 받은 믿음일까요? 예수 믿고 세상에서 온갖 축복을 누리는 믿음일까요? 예수 믿고 하나님 나라의 일군으로 온갖 환난 가운데서 끝까지 인내하는 믿음일까요?
사도 바울은 제1차 전도 여행을 마쳤습니다. 여러 성을 두루다니며 복음을 전한 후에 많은 사람들을 제자로 세운 후에 루스드라와 이고니온과 안디옥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리고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난을 겪어야 한다고 깨우쳤습니다.
이 믿음이란 제자로 살아가는 믿음입니다. 제자의 믿음이란 두 가지로 설명할 수 있습니다.
첫째는 배움(디모데후서 3:14)
너는 배우고 확신한 일에 거하라. you have learned and have become convinced.
그러나 너는 - '그러나 너는'에 해당하는 헬라어 '쉬 데'(*)는 '악한 사람들과 속이는 자들'(13절)과 대조를 나타내는 말로서 문장 첫머리에서 강조되고 있다(11절 주석 참조).
배우고 확신한 일에 거하라 - '거하라'에 해당하는 헬라어 '메네'(*)는'끝까지 그 상태를 유지하며 머무르라'는 의미이다. 당시 신자들 중에 유대 출신의 기독교 개종자들은 자신들의 율법을 숭앙하기도 하였으며 이방 출신 개종자들은 영지주의의 유혹에 넘어가곤 하였다. 그래서 바울은 디모데에게 복음의 바른 진리를 굳게 믿고, 신앙을 지킬 것을 권면한다.
네가 뉘게서 배운 것을 알며 - 디모데는 성경의 기본적인 진리들을 그의 외조모 로이스와 어머니 유니게로부터 배웠으며(1:5),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복음의 진리는 바울로부터 배웠다(10,11절;행 14:12).
ἀμαθής, ἐς
Storng number 261
1. 무식한. 2. 배운 것 없는. 3. 벧후3:16.
Pronunciation
[ amathēs ]
1. 무식한, 배운 것 없는, 벧후 3:16.
관련 성경 / 무식한(벧후 3:16).
μανθάνωStorng number 3129
1. 배우다. 2. 고전 14:35. 3. μένε ἐν οἷς ἔμαθες : 네가 배운 것에 거하라 Pronunciation
[ manthanō ]
관련 성경 / 배우다(마 9:13, 요 6:45, 딤전 2:11), 알다(행 23:27), 살피다(롬 16:17), 익히다(딤전 5:13).
πιστόωStorng number 4104
1. 확신하다. 2. 딤후 3:14. Pronunciation
[ pistŏō ]
1. 확신하다, 딤후 3:14.
관련 성경 / 확신하다(딤후 3:14).
둘째는 현장(요한복음 8:4)
예수께 말하되 선생이여 이 여자가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잡혔나이다. Teacher, this woman was caught in the act of adultery.
현장(現場) / 나타날 현, 마당 장 - 사물이 현재 있는 곳 - 일이 생긴 그 자리 - 일을 실제 진행하거나 작업하는 그곳
현장(에파우토포로. ĕpautŏphōrō) ἐπαυτοφώρῳStorng number 1888
제자들의 마음을 굳게하여 이 믿음에 거하라 권하고 또 우리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난을 겪어야 할 것이라 하고.
오늘의 말씀의 내용은 소아시아의 중심지 이고니온에서 발생된 일이다. 비시디아 안디옥에 이른 바울과 바나바 일행은 그곳 회당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메시지를 전한 후 유대인들의 대적으로 에베소에서
로마로 향하는 길목에 위치한 교통의 요지 이고니온으로 내려왔다. 이고니온은 루스드라와 더베에 가까운 지역으로 갈라디아로 둘러 쌓인
루가오니아 주에 속한 소아시아 중심 도시로 바울의 1,2차 전도 여행의 중심지가 되었다.
전도의 불연속성(1-7)
“그 성내에 무리가 나뉘어 유대인을 좇는 자도 있고 두 사도를 좇는 자도 있는지라”(4)
표적과 기사의 나타남
이고니온에 도착한 바울과 바나바는 곧바로 유대인 회당에 들어가서 은혜의 복음을 전하였다. 흥미롭게도 복음의 현장에서 나타난 두 가지 현상은 믿는 자들과 대적하는 자들로 나누인 것이다. 이것은 오늘날도 같은 복음의 속성이다.
3절에는 “ 두 사도가 오래 있어 주를 힘입어 담대히 말하니 주께서 저희 손으로 표적과 기사를 행하게 하여 주사 자기 은혜의
말씀을 증거하시니” 라고 기록되었다. 흥미롭게도 이제 바나바는 성경에서 사도라 칭함을 받게 된다. 이것은 성령의 은사로 주께서
복음을 위해 ‘사도와 선지자와 복음전하는 자와 목사와 교사’를 세우셨다는 말씀의 성취이기도 했다.
또한 흥미로운 것은 저희가 주를 힘입어 담대히 말하니 주께서 저의 손으로 표적과 기사를 행하게 하여 주사 자기 은혜의 말씀을
증거하셨다’ 라는 기록이다. 여기서 우리는 두 사도들은 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는 일에 자신들의 능력이 아닌 주께서 주신
성령의 능력에 전적으로 의존한 것을 볼 수 있다.
오늘 우리는 과연 이 말씀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하여야 할까? 오늘날 우리는 성령의 능력의 나타나심 가운데 주께서 자기의
은혜의 말씀을 전하게 하고 있는가? 이점은 우리가 깊이 각성하고 또 우리 자신의 사역적 역할이 어떠한가 생각해 볼 일이다.
군중의 분열
이고니온의 회당에 들어가 은혜의 말씀을 전하자 회중들 가운데 사도들을 따르는 사람들과 구원의 복음을 대적하는 무리로 나뉘었다.
이에 유대교를 열성당원들이 일어나 사도들을 죽이려 하자 결국 두 사도와 일행들은 루가오니아의 성 루스드라와 더베의 지역으로
물러서게 되었다. 후일 바울은 그 지역 더베에서 루스두라에서 태어난 유대인 젊은 청년 디모데를 만나게 된다(행16:1). 그후
디모데는 바울의 제자가 되어 고린도와 에베소에서 사역을 하였다.
사람의 성정(8-15)
고린도전서 9:25 이기기를 다투는 자마다 모든 일에 절제하나니 저희는 썩을 면류관을 얻고자 하되 우리는 썩지 않을 것을 얻고자 하노라.
구원받을 만한 믿음의 발견
루스드라에 머물며 복음을 전하던 바울과 바나바 일행은 날 때부터 앉은뱅이 된 한 사람을 만나게 되었다. 그는 태어나면서부터
걸어 본 일이 없던 사람이다. 그가 바울이 전하는 메시지에 귀를 기울이는 것을 본 바울은 그에게 구원받을 만한 믿음이 있는 것을
발견하고 그에게 “네 발로 바로 일어서라” 명하자 그가 일어나 뛰어 걸었다. 나는 가끔 메시지를 전할 때 회중들 중에서 믿음을
발견하게 될 때가 있다. 그것은 천군만마를 얻은 것처럼 커다란 기쁨이다. 대게 그렇게 만난 사람은 믿음의 동역자가 되기도 한다.
사람들의 신적 반응
11절에는 “무리가 바울의 행한 일을 보고 루기오니아 방언으로 소리질러 이르되 신들이 사람의 형상으로 우리 가운데 내려 오셨다 하여 바나바는 쓰스라 하고 바울은 그 중에 말하는 자이므로 허메라 하더라” 기록되었다.
여기서 쓰스란 헬라의 최고의 신 제우스를 가르치며 허메는 제우스 신의 막내 아들로 신들의 일들을 제우스에게 전하는 지식과
웅변에 능한 신을 말한다. 사람들이 바나바를 쓰스라 한 것으로 보아 바나바에게 더 관심을 갖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일이 이렇게 되자 쓰스 신당의 제사장이 소와 화관을 들고 나와 무리들과 함께 두 사도를 향하여 제사를 지내려고 하였다.
여기서 우리는 신적 불가사의한 일을 접할 때 사람들의 영적 상태를 발견하게 된다. 이 일은 예루살렘 초대교회에서도 발생된
일이다.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 미문 앞에 앉아 구걸하던 앉은뱅이를 일으켰을 때 사람들은 베드로와 요한을 주목하였다. 나는 이럴
때가 사역자들에게 있어 가장 위험한 때라고 생각한다.
이에 바울과 바나바 두 사도는 옷을 찢고 그 무리 가운데로 뛰어들어 가서 “여러분이여 어찌하여 이러한 일을 하느냐 우리도
너희와 같은 성정을 가진 사람이라 너희에게 복음 전하는 것은 이 헛된 일을 버리고 천지와 바다와 그 가운데 만유를 지으시고
살아계신 하나님께로 돌아 오라 함이라”(15)
외쳤다. 흥미롭게도 이러한 현상은 오직 사람들에게만 나타나는 현상이다. 짐승들은 앉은뱅이가 일어나든지 소경이 눈을 뜨던지 그
일을 행한 사람을 신이라 생각하지 않는다. 그것은 짐승은 신을 감지할 영적 인식이 없기 때문이다.
사역자들의 영광과 위기
바울은 먼저 자신들을 가리켜 ‘우리도 너희와 같은 성정을 가진 사람이라’
소개하고 있다. 분명 바울을 통하여 앉은뱅이를 일으킨 능력이 나타난 것이지만 이 일은 주께서 그들의 손을 통하여 표적과 가사를
베푸신 것이다. 여기서 오늘 우리는 이 문제에 대하여 신중히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많은 사역자들이 이처럼 신적 능력을 사모하고
있기 때문이다.
어떤 사역자를 통하여 하나님의 신적 능력이 나타났다 하드라도 우리는 절대로 동요해서는 않된다. 그것은 그를 통하여 하나님께서 하시고자 하신 일을 성취하시기 위한 것이지 결코 그 사람에게 주신 영적 권세는 아닌 것이다. 만약
어떤 사람이 자신에게 나타난 신적권능을 마치 자신의 능력인 것처럼 생각하고 자랑한다면 그는 영원히 멸망을 받을 것이다. 이미
우리는 12장에서 헤롯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지 않아 충이 먹어 죽은 사건을 알고 있다.
성경에는 이러한 신적 능력은 성경에 여러 번 소개되고 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그러한 신적 권능을 나타낸 선지자들도 모두 우리와 같은 성정을 가진 사람이란 것이다. 그들은 하나님의 도구로서 그의 손을 빌어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난 것일 뿐이다.
야고보는 우리에게 “엘리야는 우리와 성정이 같은 사람이로되 저가 비를 오지 않게 간절히 기도한즉 삼년 육개월 동안 땅에 비가 아니 오고 다시 기도한즉 하늘이 비를 주고 땅이 열매를 내었다”(약 5:16,17)
사실 이스라엘의 선지자 엘리야는 아합왕과 대신들 앞에서 이세벨의 이방인 선지자
450명을 갈멜산으로 불러 그들과 신적 경합을 벌렸다. 그들은 제물을 잡고 북을치고 춤을추며 그들의 신이 내려 오기를 빌었다. 그러나 저녁이 되도록 그들의 신은 아무 반응이 없자 엘리야는 나무제단에 물을 가득붓고 하나님께서 나타나시기를 기도하였다.
이에 하늘에서 불이 내려와 제물을 열납하셨다. 이것으로 엘리야는 이방인 선지자들을 모두 목베어 죽일 수 있었다. 그러나 엘리야는 이세벨의 협박에 두려워하여 하나님 앞에 목숨을
취해 줄 것을 호소 하기에 이른다. 이처럼 후일 하늘로 들림을 받은 엘리야도 두려움에 쌓여 우울증에 사로잡혔던 연약한 인간 중의
한 사람이었다.
또한 사사 기도온은 미디안 족속을 두려워하여 포도주 틀에 숨어 타작을 하던 소심하고 연약한 사람이었다. 그는 늘 하나님의 부르심 가운데서도 과연 자신을 통해서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날 것인가를 시험하였다(삿 6:11). 이와 같이 이
땅의 모든 인간은 다 연약한 인간일 따름이다. 이스라엘의 선지자 사무엘이나 위대한 예언자 이사야, 예레미야, 에스겔, 다니엘도
모두 어미의 복중에서 지음받고 구별받은 택한 자일 뿐이다.
후일 바울은 자기의 연약함을 증거하여 “여러
계시를 받은 것이 지극히 크므로 너무 자고 하지 않게 하시려고 내 육체에 가시 곧 사단의 사자를 주셨으니 이는 나를 처서 너무
자고하지 않게 하려 하심이니라 이것이 내게서 떠나기 위하여 내가 세번 주께 간구하였더니 네게 이르시되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이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내게 머물려 하려 함이라”(고후 12:7-9)
바울의 증거(16-18)
로마서 1:19-20 이는 하나님을 알만한 것이 저희 속에 보임이라 하나님께서 이를 저희에게 보이셨느니라.
천지를 지으신 만유의 하나님
두번째로 바울은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하는 목적을 언급하여 “너희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은 이 헛된 일을 버리라”
하였다. 현대문명이 발달된 오늘날에서 무당집이나 산간 부처에게 절을 하며 또 힌두교와 같이 소를 신을 삼는 것을 볼 때 이해가
되지 않는다. 그러나 사실 우리도 모두 그러한 데 이끌려 가던 사람들 중의 하나이다. 이것은 모두 사람들의 마음을 혼란케 하여 그
영혼으로 하나님을 발견하지 못하게 하려는 악한 영들의 역사로 말미암은 종교적 행위인 것이다.
계속하여 바울은 “천지와 바다와 그 가운데 만유를 지으시고 살아계신 하나님께로 돌아 오라 함이라”(15)
하였다. 바울은 여기서 그들이 섬기고 있는 피조물 곧 창조자 하나님께서 지으신 것들의 헛됨을 말하고 있다. 그 물질들은 모두
우리 인간을 위해 둘러치신 환경 조건인 것이며 또한 처음부터 우리의 풍요로운 삶을 위한 것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자신의 영혼의 갈 바를 발견하지 못하여 자신의 두려움을 안식하기 위해 그 대상을 이성과 감각으로 느끼기 어려운 곳에 놓인 피조물을 자기의 신으로 삼던가 또 자신의 이상의 모양을 따라 신상을 만들기도 했다. 어쩌면 하나님과 단절된 인간이 태고로부터 가져야 하는 비극이라 할 것이다.
바울은 하나님을 증거하여 만유를 지으신 창조자이시며 살아계신 하나님이라 증거하였다. 살아계신다는 것은 지금도 함께 역사하신다는 것이다. 그는 하늘보좌에 앉아 계시지만 영원토록 우리와 함께 사신 하나님인 것이다. 그 하나님이 바울의 손을 빌어 앉은뱅이를 일으키신 것이다.
살아계신 하나님의 계시
16절에서 바울은 “하나님이 지나간 세대에는 모든 족속으로 자기의 길들을 다니게 묵인하셨다” 증거하였다. 여기서 묵인하셨다는 것은 방임하셨다는 말씀이기도 하다. 이것은 죄인된 인간으로 조금은 위안이 되는 말씀이기도 하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는 어느 시대를 통해서도 사람들에게 자신을 증거하셨다는 것이다.
바울은 그를 말하여 “너희에게 하늘로서 비를 내리시며 결실기를 주시는 선한 일을 하사 음식과 기쁨으로 너희 마음에 만족케 하셨다”(17) 증거하였다. 바울의 이러한 증거는 하나님께서 자신을 나타내셨음을 깨닫지 못한 것은 사람이 스스로 미혹을 받았기 때문이는 메시지가 담겨 있는 것이다.
문제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구원에 이른 우리에게 있다. 과연 우리는 우리 앞에 어떤 형상도 두고 있지 않으며 또 어떤 미혹을 받지 않고 있는가 하는 문제이다. 다시 말하여 사람손을
통하여 나타난 하나님의 능력 가운데 심령이 미혹되어 바울과 바나바 앞에 제물을 드리려 하지는 않는가 하는 것이다.
23절. 각 교회에서 장로들을 택하여 금식 기도하며 저희를 그 맡은 바 주께 부탁하고.
19절에서
바울의 불길한 소식을 접하게 된다. 바울의 전도로 소아시아 지역의 유대교에 큰 혼란이 생기자 유대교에 비상이 걸렸다. 그로하여
안디옥과 이고니온의 유대교도들이 몰려와 바울을 돌로 친 것이다. 그들은 기절한 바울이 죽은 줄 알고 루가오니아 성밖으로 내쳐
버렸다.
이 내용과 관련하여 우리는 고린도후서와 갈라디아서에 특별한 내용을 접하게 된다. 흥미롭게도 바울은 고린도후서 12장 2절에서 14년 전에 셋째 하늘로 이끌려 들어가 사람이 가히 이르지 못할 말을 들었다고
증언하였다. 또한 바울은 갈라디아서 2장에서 십사년 후에 바나바와 디도를 데리고 다시 예루살렘으로 올라갔다는 기록을 볼 수 있다. 사실 갈라디아서는 1차 전도여행 때 소아시아 지역에서 쓴 것이다.
이 사건의 연대가 서로 맞던지 아니던지 어쨋던 흥미로운 것은 바울이 이 시점에 유대인돌에 맞아 죽은 것을 생각되어 성밖으로 버려졌다는 기록이다. 그러나 바울은 둘러선 제자들 사이에서 일어났고 그 이튿날 바나바와 함께 더베로 가서 복음을 전하고 많은 사람을 제자로 삼았다. 이로서 1차 전도의 기틀이 놓이게 된 것이다.
이 때 바울은 “제자들의 마음을 굳게 하여 이 믿음에 거하라 권하고 또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난을 겪어야 할 것이라 하였다’ 기록되었다. 여기서 우리는 바울이 전한 그리스도의 나라와 환난에 대한 메시지를 발견할 수 있다.
바울은 제자들에게 ‘이 믿음에 거하라’고 권하였다. 맞아 죽을 각오로 순교자의 길을 걸어야 한다는 것이다. 주님은 제자들에게 너희에게 성령이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에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셨다. 이것은 예수님의 마지막 유언이기도 하다. 여기서 증인이란 순교자를 뜻한다. 이 말씀대로 사도들은 모두 복음으로 순교를 당하였다. 여기서 우리가 생각할 것은 죽음의 고통 너머에 천국이 있다는 것이다. 어차피 우리는 육체를 이겨야만 하나님 나라에 들어간다. 그러므로 바울은 그리스도인의 환난을 자랑스럽게 권면한 것이다.
어떻게 이러한 믿음을 지킬 수 있을까? 그것은 금식과 기도이다.
바울은 “각 교회에서 장로들을 택하여 금식기도하며 저희를 그 믿은 바 주께 부탁하였다” 증거하였다. 여기서 우리는 교회의 지도자의 믿음의 결단을 발견할 수 있다. 이것은 풍족함을 외치는 우리 교회의 지도자들의 메시지와는 상반된다. 과연 우리의 믿음은 어디에 있는 것인가? 오늘 우리 귀에 ‘내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 하신 말씀이 메아리처오지 않는가?
천국 백성의 길(사도행전 14:19~28)
유대인들이 안디옥과 이고니온에서 와서 무리를 초인하여 돌로 바울을 쳐서
죽은 줄로 알고 성밖에 끌어 내치니라 제자들이 둘러섰을 때에 바울이 일어나 성에 들어갔다가 이튿날 바나바와 함께 더베로 가서
복음을 그 성에 전하여 많은 사람을 제자로 삼고 루스드라와 이고니온과 안디옥으로 돌아가서 제 자들의 마음을 굳게 하여 이 믿음에
거하라 권하고 또 우리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난을 겪어야 할 것이라 하고 각 교회에서 장로들을 택하여 금식 기도하며
저희를 그 믿은 바 주께 부탁하고 비시디아 가운데로 지나가서 밤빌리아에 이르러 도를 버가에서 전하고 앗달리아로 내려가서 거기서
배타고 안디옥에 이르니 이곳은 두 사도의 이룬 그 일을 위하여 전에 하나님의 은혜에 부탁하던 곳이라 이르러 교회를 모아 하나님이
함께 행하신 모든 일 과 이방인들에게 믿음의 문을 여신 것을 고하고 제 자들과 함께 오래 있으니라
오늘의 본문에서 우리는 천국 백성의 가는 길이 어디 있는지를 보게 됩니다. 루스드라 성에서 되어진 일입니다. 이일을 우리가 한번 객관적으로 살펴본다면 여기서 기독교 교리와 신앙의 역설적인 면을 읽을 수가 있습니다. 얼핏보기에는 그저 몇 가지 사건이 있었나보다 싶지마는 그 사건들을 연계해서 생각해보면 그야말로 신앙이 아니고는 소화하기 어렵습니다. 도대체 믿음이라는 것이 무엇이냐, 어떤 믿음을 가져야 하느냐, 그 믿음의 구조와 내용이 어떠해야 하느냐--이런 것을 말해주는, 대단히 중요한 신학적 문제를 가진 본문이라고 생각합니다.
루스드라에서 되어진 일들을 우리 한번 간결하게 생각해봅시다. 먼저, 나면서부터 앉은뱅이된 사람이 사도 바울의 말씀을 듣고 벌떡 일어나는 것을 보았습니다. 굉장한 사건입니다. 오늘도 이런 사건이 있다면 세계적인 뉴스 거리가 될 것입니다. 나면서부터 앉은뱅이된 사람입니다. 그런데 일어서라 했을 때에 벌떡 일어섰습니다. 많은 사람이 보는 데서 이렇게 됨으로 모두가 깜짝 놀라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굉장하고도 희한한 일이 아닙니까? 하나님의 능력이 이 기적으로 이렇게 저들의 목전에서 나타났습니다.
두 번째는, 이 일로 인하여 온 성이 소동을 합니다. 바울을 두고 저들은 "이거 보통사람이 아니다" "신이 사람의 몸으로 이 땅에 온 것이다"합니다. "제우스신인가, 헤르메스 신인가"해서 결국은 제물까지 가지고 와서 사도 바울과 바나바 앞에 차려놓고 제사를 지내려 합니다. 저들의 마음가짐이 이러했다는 것은 지난 시간에 생각해보았습니다. 어찌 생각하면 저들의 세계관, 저들이 종래에 가졌던 종교에 준 한다면 당연히 있을 일이 있는 것입니다. 그럴 수밖에 없습니다. 그만큼 놀랐고 놀란 바에 대한 구체적인 응답으로 그런 소동을 빚은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세 번째 사건은 이야기가 다릅니다.
본문에 보는 바와 같이 안디옥과 이고니온에서 온 유대인들이 사람들을 선동합니다. 그래서 폭동이 일어납니다. 몇
사람이나 왔는지는 모르지만, 몇 사람이 와서 "저 바울과 바나바는 나쁜 사람이다"하고 선동하니까 이게 또 사람의 간사한
마음들이라 금방 제사지내겠다고 까지 하던 사람들이, 바울과 바나바를 신이라고 떠받들던 그 사람들이 이제는 돌로 쳐죽이겠다고
야단입니다. 가차없이 돌로 칩니다. 그래서 바울은 초죽음이 되었습니다. 저들은 바울이 죽은 줄 알고 성밖으로 내다버렸습니다. 자, 여기까지 생각해보세요. 어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습니까? 왜 이런 일이 있어야 합니까?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났어요. 앉은뱅이가 벌떡 일어나는 기적을 보았으면 온 성이 예수를 믿게 될 것 같은데…… 그뿐 아니라 두 사람을 사람으로 보지 않고 신이 내려왔다고 까지 여기던 사람들이라면 이제 몇 사람들이 들어와 선동을 한다고 해서 거기에 넘어가 그들과 함께 바울을 향하여 돌을 던질 것 같지 않은데 말입니다. 생각하면 이야말로 역설적인 이야기가 아닐 수 없어요. 쉽게 이해할 수 없는 일입니다.
다시 한번 여기서 짚고 넘어갑시다. 본문에 보니 루스드라사람들이 돌을 던졌다고는 되어 있지 않아요. 안디옥에서 바울을 핍박하던 유대사람들과 이고니온에서 온 유대사람들입니다. 저들의 요샛말로 말하면 소위 살인 원정입니다. 살인 원정으로 여기까지 와서 자기들만 가지고는 안되니까 온 성을 선동해 가지고, 군중 심리를 이용해서 폭동을 일으켜 가지고 돌을 던진 것입니다. 예수님 사건도 그렇지 않습니까? 예수님께서 이적을 한두 가지 베푸셨습니까? 눈앞에 그런 일들을 보아온 사람들인데 어떻게 빌라도 법정에 모여서 십자가에 못박아라, 십자가에 못박아라 할 수 있겠습니까? 이게 모순이 아니고 무엇입니까? 여기에 신앙적 역설이 있을 것입니다.
유대사람들이 안디옥과 이고니온에서 바울을 핍박했으면 되었지, 바울이 그 성에서 몸을 빼 다른 성으로 갔으면, 그렇게 쫓아냈으면 되었지 억하심정(抑何心情)으로 여기까지 따라와 가지고 그렇게 할 필요가 있겠습니까? 이유야 어쨌든 간에 말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생각해야 합니다.
야고보서 1장 15절을 보십시오.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 무릇 이 죄라는 것은 가만히 엎드려 있지 않습니다. 그것 참 이상하지요? 한번 죄를 짓기 시작하면 죄가 점점 눈덩이처럼 커집니다. 욕심이 가만히 있지를 않습니다. 욕심은 죄를 잉태합니다. 또, 죄가 된 다음에는 죄가 가만히 있지를 않습니다. 자꾸 자랍니다. 마침내는 완전히 악한 사람으로 되고 맙니다. 자, 바울을 향해서 핍박을 했으면 한 번 한 것으로 족하지, 여기까지 살인 원정을 올 필요가 있습니까? 아주 없애버리고 말겠다는 것이지요. 그리고 보면 바울도 한때 이런 이을 하지 않았습니까?
예루살렘에 있는 예수 믿는 사람들을 핍박하고, 스데반을 죽였습니다. 그런데 그랬으면 되었지 다메섹까지 쫓아갈 것은 또 뭡니까? 그러니 바울은 이렇게 매를 맞아도 할말은 없는 사람입니다. 안디옥에서 여기까지 살인 원정을 와 가지고 죽이겠다 해도 바울이 할말없도록 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미리 이런 과거를 만들어놓으셨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어쨌든 바울은 이렇게 해서 핍박을 받게 됩니다. 오늘의 본문대로 사람들은 바울을 "죽은 줄로 알고 성밖에 끌어 내치니라(19절)"합니다.
그 이유는 달리 있지 않습니다. 바울을 꼭 죽이려고 한 것 같지는 않은데 유대사람들의 유례대로 돌을 던져 자꾸 때리다보니까 바울이 그만 죽은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런데 막상 바울이 죽고 나니까 겁이 더럭 났습니다. 왜냐하면
로마사람들의 법이 있거든요. 여기는 지금 로마 통치하에 있는데 만약 이 사실이 발각된다면 시끄러워집니다. 재판도 하지 않았고,
로마사람이 아니면 태형은 가할 수 있으나 죽이지는 못하니까요. 거기에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유대사람들 스스로 자기네 민족 나름의
자치적인 법은 행사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로마사람들의 법은 어떤고 하니, 사람을 혹 때리기도 하고 태형을 내릴 수도 있지마는,
사형은 절대로 금하고 있습니다. 사형은 반드시 로마 총독만이 명령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로마사람들의 법입니다. 그러니까 돌을
던지는 것까지는 그들 마음대로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죽여서는 안돼요. 그런데 죽였거든요. 따라서 겁이 나니까, 바울을
성밖으로 내던지고, 자기네들이 죽였다고 하는 사실을 은폐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거듭 죄를 짓는 것이지요. 로마사람들의 법을 피하기
위해서 저들은 바울을 성 밖에 내던지고 어디론가 사라지고 말았다 그 말입니다. 어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습니까? 이것이 본문의
내용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한 신학적 문제를 생각하게 됩니다. 그것은 루스드라의 앉은뱅이 사건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분명히 루스드라의
앉은뱅이를 바울의 말 한마디로 벌떡 일으키셨습니다. 그런데 그런 능력을 가지신 분이 왜 사도 바울로 하여금 매맞지 않게 할 수는
없느냐 하는 것이지요. 바로 이것이 문제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돌아가실 때에도 사람들이 십자가 밑에서 예수님을 향해 비난한
말이 바로 이것 아닙니까? "십자가에서 내려올지어다 그러면 우리가 믿겠노라(마 27:42)." 죽은 자를 살리시는 분이 십자가에
죽지 않을 수는 없느냐 함입니다. 그것 말되는 일입니다. 오늘도 바로 이 문제 때문에 신앙이 흔들리는 사람이 많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능력이 많으신 데 내가 고통 당하는 것을 왜 보고만 계시나, 왜 그냥 내버려두시나--바로 여기에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매맞지 않도록 왜 돌보지 않으셨을까? 왜 맞도록 내버려두셨을까? 생각건대, 선지자 엘리사를 죽이려고 했던
사람들이 장님이 된 것처럼, 지금 이 시간 바울을 돌 던져 치려고 할 때에 그 사람들이 팔이 부러지든지 장님이 되든지 그랬다면
얼마나 더 희한했을까, 더 큰 능력으로 인해서 모든 사람들이 얼마나 깜짝 놀라게 되었을까, 상상해봅시다. 그런데 그런 이적은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바울이 매를 맞지 않도록, 바울이 고통을 당하지 않도록, 바울이 아픔을 당하지 않도록 하는, 그러한 기적은
없었습니다. 앉은뱅이는 살리시면 서도 바울이 매맞는 것은 내버려두셨습니다.
일본에 기독교가 처음 전파되기 시작했을 때, 당시 기독교인들에게 핍박이 있었습니다. "당신들, 십자가를 그렇게 좋아한다는데 그러면 십자가로 죽여주지"하며 바다 한가운데에 십자가를 세워놓고, 거기에다 예수 믿는 사람들을 비끌어 매놓았습니다. 밀물이 밀려들어옵니다. 이제 물이 깊어지면 절로 익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럴 때에 한 신부가 멀리서 이 광경을 보고는 너무너무 괴로워서 울부짖습니다. "하나님, 어찌하여 침묵하십니까?" 예수 믿는 사람들은 하나하나 죽어 가는데 도저히 더는 참고 볼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 신부의 귀에 쟁쟁하게 들리는 음성이 있었습니다. "나는 침묵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고난에 동참하고 있느니라." 여러분, 그리스도인들이 당하는 고난, 특별히 순교적 고난을 면하게 하는 능력이 하나님의 능력은 아닙니다. 오히려 그 고난에 주님께서는 동참하시는 것입니다. 이 점을 깊이 알아야 할 것입니다.
오늘의 본문에도 보면, 하나님의 능력은 굉장했습니다. 분명히 바울과 함께 하셨습니다. 그러나 바울로 하여금 이 고난과 이 핍박과, 이 어려움을 모면하도록 하는, 그런 능력이 나타나지는 않았습니다. 똑똑히 알 것입니다. 하나님의 능력은 핍박을 없게 하는 데에 나타나는 능력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작용하지 않았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도 생각해보아야 합니다. 우리 예수 믿는다는 사람들이 내가 편안하기 위해서, 잘살기 위해서, 이기적인 욕망을 위해서, 하나님께 능력을 구합니다.
그런 기도가 응답 받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까? 나 매 안 맞게 해주세요, 예수님의 이름으로 고통 당하지 않게 해주세요, 만사 형통하게 해주세요, 소원 성취하게 해주세요--어떻습니까? 이런 기도가 응답될 것 같습니까? 우리 다시 한번 생각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이 맞는 매, 그리스도인이 당하는 고난, 그 속에 하나님의 드높은 뜻이 내재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22절 말씀을 보면 사도 바울은 말씀합니다. "제자들의 마음을 굳게 하여 이 믿음에 거하라." 굳은 마음을 가져라, 흔들리지 말라, 이 믿음에 거하라 하는 말씀은 계속적으로 이 믿음에 살라는 말씀입니다. 흔들리지 말고, 지구력 있게 이 믿음 안에 계속적으로 머물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가져야 할 믿음이 어떤 믿음이겠습니까? 본문에서 귀한 말씀을 읽게 됩니다. "하나님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난을 겪어야 할 것이라." 이것이 바울이 그들에게 주는 믿음의 내용입니다. 필수적 믿음의 내용입니다. 권고의 말씀입니다. 여러분,
이것을 잊지 마세요. 궁극적 목적은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데 있습니다. 오늘날, 하나님의 나라, 그것이 믿는 사람의 최종적 궁극적
관심사입니다. 그런고로 적어도 예수 믿는 사람이 가져야 할 믿음은 핍박당하고, 고난 당하고, 병들고, 죽고, 매맞고, 굴욕
당하고, 억울하고 문제되지 안아요. 하나님나라에 들어갈 수만 있으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나라에 들어간다는 그 사실이 중요한
것입니다. 모름지기 여기에 분명한 목적을 두어야 합니다. 예수 믿어서 잘살고, 잘되고, 병 낫고, 성공하고…… 그런 지엽적이고
2차 3차적인 것을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목적은 오로지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보세요. 분명하지 않습니까? "하나님나라에
들어가려면"--그것이면 전부입니다. 그 밖의 것은 문제가 되지 않아요. 어떤 고난을 당하더라도 하나님의 능력이 있다면 나를
하나님나라에 들어가게 하는 데에 있습니다. 하나님나라에 못 들어가게 할 사람을, 하나님나라에 못 들어갈 사람을 하나님나라에
들어가게 하는 데 있는 것입니다. 갈 사람을 만들어내시는 것입니다. 작품을 만드시는 것입니다.
하나님나라에 들어가도록 하는 것--이것이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그런데 그러기 위해서는 여기 주신 말씀대로 많은 환난을 겪어야 합니다.
환난 곧 '들립시스'에는 조금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외부 상황에서 오는 고통을 말합니다. 경제적 고통, 정신적 고통, 육체적 고통 같은 것을 말합니다.
a. [마지막 날의 환난에 대하여] 마24: 21, 막13:19,24, 어려운 처지, 고후8:13, 약1:27.
b. [여인의 해산하는 고통에 대하여] 요16:21.
c. [그리스도의 고난에 대하여] 골1:24.
2. [상징적으로] 곤란, 괴로움 [마음의 정신적인 영적인 상태에서의] 고후2:4, 빌1:17.
관련 성경 / 환난(마 13:21, 롬 2:9, 고후 1:4), 고통(요 16: 21), 괴로움(빌 1:17, 4:14), 고난(골 1:24), 곤고(고후 8:13).
'파데마'라고 하는 말도 같은 '환난'이지만 고통은 고통인데 뜻이 전혀 다릅니다.
παθήμα / 고통
이것은 내적 상황에서 오는 고통입니다. 그러므로 고통이라기보다는 고민이라고 하겠습니다. 근심, 걱정, 불안, 초조 따위입니다. 하나님나라에 들어가려면, '들립시스'--외부적 상황에 의한 고통은 겪어야 합니다. 겪는다는 말은 헬라어에는 본래 동사가 없으므로 '이런 고난' '이런 환난을 통하여'라고 말합니다. 환난을 통하여 하나님나라에 들어갑니다. 외적으로 오는 고통이지 내적 고통이 아닙니다. 그러니까 하늘나라에 들어갈 사람이 근심하고, 걱정하고, 불안에 떨고, 초조해하고 하는 일은 있을 수 없지요. 그렇다면 믿음이 아니지요. 그러나 우리는 외적인 고통은 각오해야 합니다. 예수 믿어 손해 많이 봅니다. 매도 맞습니다. 욕도 먹습니다. 외적 상황으로 인하여 오는 많은 고통을 겪게 될 것입니다. 이 일에 대해서는 이의를 제기하지 마세요. 이런 고통을 통해서 하나님나라에 들어갈 것이라고 사도 바울이 결론지었어요.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여기에 또한 역설이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가고자 하는 나라는 하나님나라입니다. 그런데 지금은 많은 외적 고난을 겪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다시 한번 생각해봅시다. 이런 고난이 꼭 나쁜 것이냐 하면 그렇지는 않아요. 여러분 아시는 대로 사랑하는 자를 위해서 고생하는 것이 고생입니까? 소망 있는 고생이 고생입니까? 확실한 약속을 받고 고생하는 것이 고생입니까?
요새 학생들, 대학입시 보느라고 고생한답니다. 그것도 보통 고생이 아니지요. 그 젊은 나이에 새벽부터 일어나 밤에 도시락 둘 싸 가지고 가서 공부하는 것 보면 안쓰러워요. 불쌍하기까지 하지만, 그러나 동정하는 사람은 없어요. 왜요? 공부하고 싶은데 못하는 사람들도 있지 않습니까? 숫제 갈 대학 생각조차 못하는 사람도 많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구제의 대상은 아닙니다. 그리고 공부를 애써 해서 정말 밝은 미래가 약속되어 있다면 그보다 몇 배 더 고생해도 괜찮아요. 그런데 이렇게 고생해 가지고 결과가 좋을 것인지 나쁠 것인지 알 수가 없어서 문제입니다. 어려운 고통을 통해서 확실하게 밝은 미래를 약속 받을 수만 있다면 무엇을 주저할 것입니까? 저도 옛날에 고학을 하면서 남 고생하는 것만큼은 고생해봤어요. 누가 고생한다고 해도 나 만큼 고생한 것 같지 안을 정도로 꽤 많이 고생했어요. 밥 벌어먹고 빨래해가면서 했습니다. 이에 비하면 밥은 얻어먹으면서 공부하는 것은 고생이 아니지요.
찬물에다 뭐 좀 빨아보려고 하니 비누가 안 풀어집디다. 빨래비누가. 아무튼 그래가면서 지내봤어요. 그러나 지금 와서 돌이켜보면 재미있는 것입니다. 괜찮은 것이 거기 있어요. 아무리 고생하면 어떻습니까? 젊었을 때에 고생하는 것은 문제가 안돼요.
고통이라고 하는 것은 의미의 문제요 소망의 문제입니다. 고통 자체의 문제는 아닙니다. 적어도 외적 상황에 의한 고통은 고통이 아닌 것입니다. 이것이 내적 상황으로 변질되면서 고민이 되고, 불안이 되고, 초조한 마음이 되고, 불 신앙이 되니까 문제이지요. 절망이 되니까 문제이지요. 외적 상황 그 자체는 문제될 것이 없다, 그 말입니다. 사도 바울은 디모데후서 3장 12절에서 말씀합니다. "무릇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핍박을 받으리라." 되는대로 살면 핍박이 없지요. 그러나 믿음으로 살고, 바르게 살고, 진실하게 살고, 열심으로 살면 핍박은 있게 마련입니다. 이것은 생명체에 있어서는 부득이한 것입니다. 필요조건입니다. 당위 조건입니다. 그러면 다시 한번 생각해서 깊이 분석해봅시다. 왜 고난을 당해야 하는 것입니까? 이것이 원리입니까? 아니면 실재입니까? 여기서 우리는 두 가지 다 생각하게 됩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이 고난 당하는 것은 하나님의 능력 안에 있는 것입니다. 능력에서 떠나는 일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지금 작품 만드시느라고 그래요.
우리가 믿음을 가질 때에 어떤 믿음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까? 마음을 굳게 하여 믿음에 거하라 했습니다. 내가 외적 상황에 의해서 고난을 당할 때, 하나님의 능력이 없어서 고난 당하는 것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능력 안에서 고난 당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큰 능력 속에서 내가 고난 당하고 있다고 수용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지혜 안에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모든 것을 다 알고 계십니다. 알고 고생시키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 안에 있다
하나님께서 미워서 고생하게 하시겠어요? 사랑하시는 자에게 주시는 고통인 것입니다. 이것을 잊지 말아야 되요. 예수님께서는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잔을 마시지 않겠느냐"하셨습니다. 사랑하는 아버지가 사랑하는 아들에게 주시는 것입니다. 이것을 어떻게 안 마시겠어요? 그 믿음이 필요한 것입니다. "하나님나라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많은 고난을 겪어야 합니다. 각오해야 됩니다. 적어도 번민은 없어요. 그러나 고통은 있어요. 아픔은 있어요. 슬픔은 없어요. 그것이 그리스도인입니다. 그리스도인이라고 해서 때리는 데 아니 아프지 않습니다. 그러나 슬퍼할 필요는 없는 것입니다. 슬프다면 믿음이 없는 것이지요. 아픔이 없기를 바라지는 않아요. 예수님께서 그랬고, 사도들이 그랬고, 제자들이 다 그랬고, 믿음의 조상들이 다 그 길을 갔습니다. 그런데 어찌 우리가 마다하겠어요? 십자가의 길을 어떻게 마다하겠어요?
고난을 통해서 선교가 가능합니다. 고난을 통해서 교만한 마음이 깨지고 겸손해집니다. 나도 남도 마찬가집니다. 그래서 고난 가운데 선교가 됩니다. 고난 당하는 자가 고난 당하는 자를 위로하면서 선교가 이루어집니다. 알렌 선교사를 아시지요? 우리 의술로는 고칠 수가 없는 병을 의사인 알렌 선교사가 들어와 한 사람의 병을 고치는 것으로 인해서 이 나라 사람들의 마음 문이 열리기 시작합니다. 그 2년 후에는 우리 나라에 호열자가 들어와 사람들이 마구 죽어갑니다. 그 때에 하나님의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사랑을 드러냈어요. 여기서 감동이 되고, 예수를 믿게 돼요. 기록에 보면 '동학'하던 사람들도 그리스도인의 그 헌신적인 수고를 보면서 마음을 돌려 예수믿는 기적이 나오게 됩니다. 환난이 아니고는 도저히 안 되는 일입니다.
환난입니다. 고통입니다. 이래도 고통이 꼭 없어야 되겠습니까? 그것은 큰 은혜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환난을 통해서 하늘나라에 간다는 이야기입니다. 욕망을
버리고, 자기를 부정하고, 환난 속에서 역사 하시는 하나님의 능력 가운데서 하나님 앞으로 가는 것입니다. 또한 환난을 통해서
하나가 됩니다. 화목하게 됩니다. 평안할 때에는 서로 분쟁하다가도 환난 속에서 한 마음 한 뜻이 되고, 환난을 통해서 강해지고,
더욱 중요한 것은 환난 속에서 영원 지향적 믿음을 가지게 됩니다.
오늘 우리가 이만큼 잘사니까 예수 믿으면 건강합니다, 예수
믿으면 병났습니다, 예수 믿으면 복 받습니다. 하지만 중국이라든가 북한, 러시아 같은 곳의 핍박 속에 있던 사람들에게서 오는
편지를 보면 이야기가 달라요. 그런 얘기는 한마디도 없어요. 오직 "주님 오실 날이 가까운데 안녕하십니까?"--그렇게 나와요.
아주 종말론적입니다. 뭐, 부하냐 가난하냐는 안중에도 없어요. 하나님나라에 간다고 하는 영원 지향적 신앙이 분명합니다. 종말론적
신앙이거든요. 이게 환난을 통해서 얻어지는 것이거든요. 자, 그래서 많은 환난을 겪어야 하늘나라에 간다고 사도 바울이 결론 짓게
됩니다. 그러면서 이 신앙 위에서 장로를 선택하고 교회를 조직합니다. 그 핍박 속에서도요. 그리고 임명을 하고, 믿은바 주께
부탁을 합니다.
모름지기 하나님을 아버지로, 교회를 어머니로 모신 자라야 구원을 얻을 수 있습니다. 여러분, 교회생활을 소중히 여겨야 됩니다. 교회를 통해서 말씀을 받고, 도의 젖을 먹고, 교훈을 받고, 양육을 받고, 하늘나라에까지 가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는 교회라고 하는 이 거룩한 공동체 종말론적 공동체의 구원론적 의미를 분명히 알아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이렇게 장로 임명하고도 그 다음에 하는 말인즉 본문을 자세히 보면, 교훈도 하고, 근면도 하고, 명령도 하고, 친히 모본을 보이기도 하고, 기도하고, 희생도 합니다. 그러나, 마지막으로는 "믿은바 주께 부탁하고(23절)" ----주님께 부탁을 해요. 주님께서 지켜주시옵소서, 주님께서 가르쳐주시옵소서, 주님께서 이들에게 힘을 주시옵소서, 내게 주신 것처럼 이들에게도 은사를 주시옵소서, 하고 위탁합니다. 주님께 위탁합니다. 우리는 이 점을 알아야 돼요. 여러분도 지금 자녀를 키웁니다. 가르치고, 정성을 다하고, 기도하고 애쓰지만 마지막에는 내 마음대로 못해요. 이제는 "주여, 이 자녀를 돌보아주세요" 하고 위탁할 수밖에 없습니다. 입대하는 자녀, 어떡하면 좋아요? 내가 거기까지 따라가겠습니까? 주님께 부탁하는 것입니다. 주님께 위탁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이 장로들을 주님께 위탁하고, 그리고 그 자리를 떠납니다. 그리하여 주님께서 저들을 통하여 에베소교회를 잘 인도해나가시게 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제 26절 끝에 "전에 하나님의 은혜에 부탁하던 곳이라"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23절에서는 주께 부탁하고, 여기서는 은혜에 부탁하는 것입니다. 역시 우리는 하나님 은혜에 부탁을 해야 되겠어요. 위탁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고 하니, 우리가 노력을 하고, 수고하지마는 그것만 가지고는 안돼요. 주님 친히 인도하시는 역사가 있어야만 한다고 하는 신앙고백이 여기에 나타나 있는 것입니다. 환난과 핍박이 있습니다. 이 모든 고난을 통해서 우리가 주님 앞에 순수하게 더 바른 자세로 서게 됨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매디슨이라고 하는 찬송가 작가의 '하나님의 권능'이라고 하는 시 한수를 소개합니다.
"나의 하나님! 나는 나의 가시에 대하야 결코 감사하지 못했습니다. 나의 장미꽃에 대해서는 수천 번이나 감사했지만, 주님께서 나에게 지워 주시는 십자가에 대해서는 한번도 감사하다고 생각 못하였습니다. 고난을 통하여 나의 인생을 완성하신 사랑의 주님이시여, 이제 저에게 가시의 가치를 가르쳐주시옵소서. 그럼으로 나의 눈물이 무지개 됨을 알겠나이다. 그리고 나서 나로 고난 당한 것이 유익이라고 말할 수 있게 하여주시옵소서."
천국 백성의 길(사도행전 14:19~28)
유대인들이 안디옥과 이고니온에서 와서 무리를 초인하여 돌로 바울을 쳐서
죽은 줄로 알고 성밖에 끌어 내치니라 제자들이 둘러섰을 때에 바울이 일어나 성에 들어갔다가 이튿날 바나바와 함께 더베로 가서
복음을 그 성에 전하여 많은 사람을 제자로 삼고 루스드라와 이고니온과 안디옥으로 돌아가서 제 자들의 마음을 굳게 하여 이 믿음에
거하라 권하고 또 우리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난을 겪어야 할 것이라 하고 각 교회에서 장로들을 택하여 금식 기도하며
저희를 그 믿은 바 주께 부탁하고 비시디아 가운데로 지나가서 밤빌리아에 이르러 도를 버가에서 전하고 앗달리아로 내려가서 거기서
배타고 안디옥에 이르니 이곳은 두 사도의 이룬 그 일을 위하여 전에 하나님의 은혜에 부탁하던 곳이라 이르러 교회를 모아 하나님이
함께 행하신 모든 일 과 이방인들에게 믿음의 문을 여신 것을 고하고 제 자들과 함께 오래 있으니라
오늘의 본문에서 우리는 천국 백성의 가는 길이 어디 있는지를 보게 됩니다. 루스드라 성에서 되어진
일입니다. 이일을 우리가 한번 객관적으로 살펴본다면 여기서 기독교 교리와 신앙의 역설적인 면을 읽을 수가 있습니다. 얼핏보기에는
그저 몇 가지 사건이 있었나보다 싶지마는 그 사건들을 연계해서 생각해보면 그야말로 신앙이 아니고는 소화하기 어렵습니다. 도대체
믿음이라는 것이 무엇이냐, 어떤 믿음을 가져야 하느냐, 그 믿음의 구조와 내용이 어떠해야 하느냐--이런 것을 말해주는, 대단히
중요한 신학적 문제를 가진 본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여러분, 루스드라에서 되어진 일들을 우리 한번 간결하게 생각해봅시다. 먼저, 나면서부터 앉은뱅이된 사람이 사도 바울의
말씀을 듣고 벌떡 일어나는 것을 보았습니다. 굉장한 사건입니다. 오늘도 이런 사건이 있다면 세계적인 뉴스 거리가 될 것입니다.
나면서부터 앉은뱅이된 사람입니다. 그런데 일어서라 했을 때에 벌떡 일어섰습니다. 많은 사람이 보는 데서 이렇게 됨으로 모두가 깜짝
놀라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굉장하고도 희한한 일이 아닙니까? 하나님의 능력이 이 기적으로 이렇게 저들의 목전에서 나타났습니다.
온 성이 소동을 합니다.
바울을 두고 저들은 "이거 보통사람이 아니다" "신이 사람의 몸으로 이 땅에 온 것이다"합니다. "제우스신인가, 헤르메스 신인가"해서 결국은 제물까지 가지고 와서 사도 바울과 바나바 앞에 차려놓고 제사를 지내려 합니다. 저들의
마음가짐이 이러했다는 것은 지난 시간에 생각해보았습니다. 어찌 생각하면 저들의 세계관, 저들이 종래에 가졌던 종교에 준 한다면
당연히 있을 일이 있는 것입니다. 그럴 수밖에 없습니다. 그만큼 놀랐고 놀란 바에 대한 구체적인 응답으로 그런 소동을 빚은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안디옥과 이고니온에서 온 유대인들이 사람들을 선동합니다.
그래서
폭동이 일어납니다. 몇 사람이나 왔는지는 모르지만, 몇 사람이 와서 "저 바울과 바나바는 나쁜 사람이다"하고 선동하니까 이게 또
사람의 간사한 마음들이라 금방 제사지내겠다고 까지 하던 사람들이, 바울과 바나바를 신이라고 떠받들던 그 사람들이 이제는 돌로
쳐죽이겠다고 야단입니다. 가차없이 돌로 칩니다. 그래서 바울은 초죽음이 되었습니다. 저들은 바울이 죽은 줄 알고 성밖으로
내다버렸습니다. 자, 여기까지 생각해보세요. 어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습니까? 왜 이런 일이 있어야 합니까?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났어요. 앉은뱅이가 벌떡 일어나는 기적을 보았으면 온 성이 예수를 믿게 될 것 같은데…… 그뿐 아니라 두 사람을 사람으로 보지
않고 신이 내려왔다고 까지 여기던 사람들이라면 이제 몇 사람들이 들어와 선동을 한다고 해서 거기에 넘어가 그들과 함께 바울을
향하여 돌을 던질 것 같지 않은데 말입니다. 생각하면 이야말로 역설적인 이야기가 아닐 수 없어요. 쉽게 이해할 수 없는 일입니다.
루스드라사람들이 돌을 던졌다고는 되어 있지 않아요. 안디옥에서 바울을 핍박하던 유대사람들과 이고니온에서 온 유대사람들입니다. 살인 원정입니다. 살인 원정으로 여기까지 와서 자기들만 가지고는 안되니까 온 성을 선동해 가지고, 군중 심리를 이용해서 폭동을 일으켜 가지고 돌을 던진 것입니다. 예수님
사건도 그렇지 않습니까? 예수님께서 이적을 한두 가지 베푸셨습니까? 눈앞에 그런 일들을 보아온 사람들인데 어떻게 빌라도 법정에
모여서 십자가에 못박아라, 십자가에 못박아라 할 수 있겠습니까? 이게 모순이 아니고 무엇입니까? 여기에 신앙적 역설이 있을
것입니다.
유대사람들이 안디옥과 이고니온에서 바울을 핍박했으면 되었지, 바울이 그 성에서 몸을 빼 다른 성으로 갔으면, 그렇게 쫓아냈으면 되었지 억하심정(抑何心情)으로 여기까지 따라와 가지고 그렇게 할 필요가 있겠습니까? 여기서
우리가 생각해야 합니다. 야고보서 1장 15절을 보십시오.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 무릇
이 죄라는 것은 가만히 엎드려 있지 않습니다. 그것 참 이상하지요? 한번 죄를 짓기 시작하면 죄가 점점 눈덩이처럼 커집니다.
욕심이 가만히 있지를 않습니다. 욕심은 죄를 잉태합니다. 또, 죄가 된 다음에는 죄가 가만히 있지를 않습니다. 자꾸 자랍니다.
마침내는 완전히 악한 사람으로 되고 맙니다. 자, 바울을 향해서 핍박을 했으면 한 번 한 것으로 족하지, 여기까지 살인 원정을 올
필요가 있습니까? 아주 없애버리고 말겠다는 것이지요. 그리고 보면 바울도 한때 이런 이을 하지 않았습니까?
예루살렘에 있는 예수 믿는 사람들을 핍박하고, 스데반을 죽였습니다. 그런데 그랬으면 되었지 다메섹까지 쫓아갈 것은 또
뭡니까? 그러니 바울은 이렇게 매를 맞아도 할말은 없는 사람입니다. 안디옥에서 여기까지 살인 원정을 와 가지고 죽이겠다 해도
바울이 할말없도록 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미리 이런 과거를 만들어놓으셨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어쨌든 바울은 이렇게 해서 핍박을 받게
됩니다. 오늘의 본문대로 사람들은 바울을 "죽은 줄로 알고 성밖에 끌어 내치니라(19절)"합니다.
그 이유는 달리 있지 않습니다. 바울을 꼭 죽이려고 한 것 같지는 않은데 유대사람들의 유례대로 돌을 던져 자꾸 때리다보니까
바울이 그만 죽은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런데 막상 바울이 죽고 나니까 겁이 더럭 났습니다. 왜냐하면 로마사람들의 법이 있거든요.
여기는 지금 로마 통치하에 있는데 만약 이 사실이 발각된다면 시끄러워집니다. 재판도 하지 않았고, 로마사람이 아니면 태형은 가할 수
있으나 죽이지는 못하니까요. 거기에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유대사람들 스스로 자기네 민족 나름의 자치적인 법은 행사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로마사람들의 법은 어떤고 하니, 사람을 혹 때리기도 하고 태형을 내릴 수도 있지마는, 사형은 절대로 금하고
있습니다. 사형은 반드시 로마 총독만이 명령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로마사람들의 법입니다. 그러니까 돌을 던지는 것까지는 그들
마음대로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죽여서는 안돼요. 그런데 죽였거든요. 따라서 겁이 나니까, 바울을 성밖으로 내던지고,
자기네들이 죽였다고 하는 사실을 은폐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거듭 죄를 짓는 것이지요. 로마사람들의 법을 피하기 위해서 저들은
바울을 성 밖에 내던지고 어디론가 사라지고 말았다 그 말입니다. 어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습니까? 이것이 본문의 내용입니다.
루스드라의 앉은뱅이 사건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분명히 루스드라의 앉은뱅이를 바울의 말 한마디로 벌떡 일으키셨습니다. 그런데
그런 능력을 가지신 분이 왜 사도 바울로 하여금 매맞지 않게 할 수는 없느냐 하는 것이지요. 바로 이것이 문제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돌아가실 때에도 사람들이 십자가 밑에서 예수님을 향해 비난한 말이 바로 이것 아닙니까? "십자가에서 내려올지어다 그러면
우리가 믿겠노라(마 27:42)." 죽은 자를 살리시는 분이 십자가에 죽지 않을 수는 없느냐 함입니다. 그것 말되는 일입니다.
오늘도 바로 이 문제 때문에 신앙이 흔들리는 사람이 많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능력이 많으신 데 내가 고통 당하는 것을 왜 보고만
계시나, 왜 그냥 내버려두시나--바로 여기에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매맞지 않도록 왜 돌보지 않으셨을까? 왜 맞도록
내버려두셨을까? 생각건대, 선지자 엘리사를 죽이려고 했던 사람들이 장님이 된 것처럼, 지금 이 시간 바울을 돌 던져 치려고 할
때에 그 사람들이 팔이 부러지든지 장님이 되든지 그랬다면 얼마나 더 희한했을까, 더 큰 능력으로 인해서 모든 사람들이 얼마나 깜짝
놀라게 되었을까, 상상해봅시다. 그런데 그런 이적은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바울이 매를 맞지 않도록, 바울이 고통을 당하지
않도록, 바울이 아픔을 당하지 않도록 하는, 그러한 기적은 없었습니다. 앉은뱅이는 살리시면 서도 바울이 매맞는 것은
내버려두셨습니다.
일본에 기독교가 처음 전파되기 시작했을 때, 당시 기독교인들에게 핍박이 있었습니다. "당신들, 십자가를 그렇게 좋아한다는데 그러면 십자가로 죽여주지"하며 바다 한가운데에 십자가를 세워놓고, 거기에다 예수 믿는 사람들을 비끌어 매놓았습니다. 밀물이 밀려들어옵니다. 이제 물이 깊어지면 절로 익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럴 때에 한 신부가 멀리서 이 광경을 보고는 너무너무 괴로워서 울부짖습니다. "하나님, 어찌하여 침묵하십니까?" 예수 믿는 사람들은 하나하나 죽어 가는데 도저히 더는 참고 볼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 신부의 귀에 쟁쟁하게 들리는 음성이 있었습니다. "나는 침묵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고난에 동참하고 있느니라." 여러분, 그리스도인들이 당하는 고난, 특별히 순교적 고난을 면하게 하는 능력이 하나님의 능력은 아닙니다. 오히려 그 고난에 주님께서는 동참하시는 것입니다.
침묵(소설)
소설 결말부가 주제의 대립항 중 어느 한 부분에 대한 큰 강요 없이 맺어지긴 하지만, 결말부의 모습은 사실 작가 스스로도 인정한 '가톨릭의 가르침과 상반된 부분'이며 '프로테스탄트'적 면모를 띈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작가도 말했듯이 중요한 것은 '그리스도의 가르침'이며 '진정한 신앙'이 무엇인가에 대한 작가 나름의 소신이라는 점에서 가톨릭계에서도 이 소설을 가톨릭 소설의 명작으로 꼽히고 있다. 실제로 종교소설 중에서도 상당히 유명하고 오랫동안 사랑받고 있는 작품이다.
인간과 신, 신앙과 현실의 관계를 치열하게 탐구한 일본 현대문학의 대표작
<침묵(沈黙)>은 일본 작가 엔도 슈사쿠(遠藤周作)가 1966년에 발표한 장편 소설로, 기독교 신앙과 박해, 인간의 나약함과 신의 침묵이라는 깊은 주제를 다룬 작품입니다. 이 소설은 17세기 일본을 배경으로, 포르투갈 출신 예수회 선교사 로드리게스 신부가 일본에 파견되어 겪는 고난과 신앙적 갈등을 중심으로 전개됩니다. 작품은 단순한 역사 소설을 넘어, 인간과 신, 신앙과 현실의 관계를 치열하게 탐구하며 일본 현대문학의 대표작으로 평가받습니다.
이야기는 로마 가톨릭 신부 로드리게스와 동료 선교사들이 일본으로 건너가면서 시작됩니다. 당시 일본은 기독교 금교령이
내려진 상황이었고, 신앙을 지키려는 신자들은 가혹한 박해를 받으며 목숨을 잃었습니다. 로드리게스 신부는 일본에 숨어 있는 신자들을
돌보며 복음을 전하려 하지만, 곧 가혹한 현실과 마주하게 됩니다. 일본 당국은 신자들을 잡아 고문하고, 그들을 배교하게 만들기
위해 선교사에게 극심한 심리적 압박을 가합니다. 소설의 핵심은 ‘신의 침묵’이라는 주제입니다. 로드리게스는 고문당하는
신자들의 고통을 보며 끊임없이 기도하지만, 신은 그에게 아무런 응답을 주지 않습니다. 신이 정말 존재한다면 왜 무고한 이들의
고통을 방관하는지, 왜 그토록 침묵하는지를 그는 끊임없이 자문합니다. 이러한 내적 갈등은 작품의 가장 중요한 철학적 질문을
제기합니다. 로드리게스가 직면하는 가장 극적인 순간은 ‘후미에(踏み絵)’ 장면입니다. 그는 예수의 얼굴이 새겨진 성화를
발로 밟음으로써 자신의 신앙을 배신할 것인지, 아니면 신자들의 고통을 끝내 외면할 것인지를 선택해야 합니다. 결국 그는 신앙을
지키는 대신 성화를 밟으며, 그 순간 신의 목소리를 듣는 듯한 체험을 합니다. 이는 아이러니하게도 배교 속에서 신의 사랑을
발견하는 역설적 경험으로, 독자에게 깊은 울림을 전합니다.
<침묵>은 단순한 종교 소설이 아니라, 인간의
나약함과 신앙의 본질, 그리고 신의 부재와 침묵 속에서도 어떻게 삶을 살아야 하는가를 묻는 작품입니다. 일본의 역사적 상황과
보편적 신앙의 문제를 교차시키며, 인간과 신의 관계를 철학적으로 탐구한 이 소설은 세계 문학사 속에서도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신의 침묵과 인간의 고통이라는 보편적 주제를 다룬 철학적 고전
<침묵>은 발표 직후부터 일본 문단과 전 세계 독자들에게 큰 반향을 일으킨
작품입니다. 당시 일본 문학계에서 종교적 주제를 다루는 소설은 드물었기에, 기독교 신앙과 박해라는 민감한 주제를 본격적으로
탐구한 점에서 획기적인 의미를 가졌습니다. 또한 작품이 제기하는 질문은 특정 종교적 맥락에만 머물지 않고, 인간 보편의 문제로
확장되기에 더욱 보편적인 호소력을 지닙니다. 비평가들은 <침묵>이 단순히 종교적 소설이 아니라 철학적·윤리적
탐구의 성격을 띠고 있다고 평가합니다. 주인공 로드리게스의 갈등은 곧 인간이 직면하는 근본적 질문과도 같습니다. ‘고통받는 사람
앞에서 신은 왜 침묵하는가?’라는 물음은 특정 종교인에게만이 아니라, 삶의 부조리와 고통을 경험하는 모든 인간에게 적용될 수 있는
보편적 주제입니다. 작품의 문학적 성취 또한 높이 평가됩니다. 엔도 슈사쿠는 단순한 사건 서술에 그치지 않고, 심리적
긴장과 내적 갈등을 치밀하게 묘사하여 독자가 주인공의 고통을 함께 체험하도록 만듭니다. 특히 일본의 풍경과 박해 현장을 사실적으로
묘사하면서도, 동시에 철학적 사유를 담은 문장은 독자에게 현실적 긴장감과 사색적 깊이를 동시에 전달합니다. 국제적으로도
<침묵>은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습니다. 1966년 발표 이후 곧바로 여러 언어로 번역되었고, 일본 문학을 세계에 알리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2016년에는 마틴 스코세이지 감독에 의해 영화로 제작되었으며, 리암 니슨과 앤드루 가필드가 주연을 맡아
원작의 철학적 깊이를 영상으로 옮겼습니다. 이 영화는 원작의 메시지를 전 세계 관객에게 다시금 전달하는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그러나
일부에서는 로드리게스의 배교 선택을 두고 논쟁이 이어지기도 했습니다. 신앙을 지키기보다 인간적 연민을 선택한 그의 행동이 진정한
신앙의 모습인지, 아니면 나약한 인간의 타협인지에 대한 해석은 지금도 다양합니다. 하지만 바로 이러한 해석의 다층성이 작품의
깊이를 더욱 풍부하게 만듭니다. 결론적으로 <침묵>은 단순한 종교 소설을 넘어, 신의 침묵과 인간의 고통이라는
보편적 주제를 다룬 철학적 고전으로 평가됩니다. 이는 시대와 종교를 넘어, 인간 존재에 대한 근원적 질문을 던지는 작품으로서
지금도 여전히 읽히고 논의되는 현대문학의 명작입니다.
기독교 세계관과 일본적 정서를 결합해 일본 문학의 지평을 넓힌 작가, 엔도 슈사쿠
<침묵>의 저자 엔도 슈사쿠(遠藤周作, 1923~1996)는 일본
현대문학을 대표하는 소설가로, 기독교적 세계관과 일본적 정서를 결합한 독창적 작품 세계를 구축했습니다. 그는 일본 문학사에서 보기
드물게 종교적 주제를 깊이 탐구한 작가로, 인간 존재와 신앙, 구원의 문제를 꾸준히 다뤘습니다. 엔도 슈사쿠는 도쿄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 프랑스로 유학하며 서양 문학과 기독교 문화를 접했습니다. 일본 사회에서 소수 종교였던 가톨릭 신자로서 그는
끊임없이 정체성의 갈등을 겪었고, 이러한 경험은 그의 문학적 사유에 깊이 반영되었습니다. 그는 ‘일본인의 몸과 기독교적
영혼’이라는 주제를 평생 탐구하며, 일본 문화 속에서 기독교가 어떻게 뿌리내릴 수 있는지 질문했습니다. 그의 대표작에는
<침묵>, <깊은 강>, <바다와 독약>, <여자의 일생> 등이 있습니다. 특히
<바다와 독약>은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일본군의 생체 실험을 다루며 인간의 죄와 도덕적 책임을 탐구한 작품으로
주목받았습니다. <깊은 강>은 종교적 구원과 인간적 사랑을 결한 그의 후기 대표작으로, 일본뿐 아니라 전 세계에서 높은
평가를 받았습니다. 엔도 슈사쿠의 문학은 기독교 신앙을 단순히 교리적 차원에서 다루지 않고, 인간의 나약함과 죄, 그리고
용서와 구원이라는 근본적 문제를 치열하게 탐구하는 데 초점을 맞췄습니다. 그는 신앙을 이상화하기보다, 고통과 의심, 배신
속에서도 신을 찾으려는 인간의 모습을 사실적으로 그렸습니다. 이러한 접근은 많은 독자에게 깊은 공감을 불러일으켰습니다. 엔도 슈사쿠는 일본 문단에서 ‘제3세대 작가’로 분류되며, 전후 일본 문학의 새로운 흐름을 대표했습니다. 또한 해외에서도 번역과 연구가 활발히 이루어져, 일본을 넘어 세계문학의 거장으로 자리매김했습니다. 1996년
엔도 슈사쿠가 세상을 떠났을 때, 일본과 세계 문학계는 한 시대를 마감했다고 평가했습니다. 하지만 그의 작품은 여전히 살아
있으며, 특히 <침묵>은 인간과 신, 신앙과 의심이라는 보편적 주제를 통해 세대를 넘어 읽히고 있습니다. 엔도 슈사쿠는
일본 문학의 지평을 넓힌 작가이자, 인간 존재와 신앙의 본질을 탐구한 진정한 사상가로 기억됩니다.
오늘의 본문에도 보면, 하나님의 능력은 굉장했습니다. 분명히 바울과 함께
하셨습니다. 그러나 바울로 하여금 이 고난과 이 핍박과, 이 어려움을 모면하도록 하는, 그런 능력이 나타나지는 않았습니다. 똑똑히
알 것입니다. 하나님의 능력은 핍박을 없게 하는 데에 나타나는 능력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작용하지 않았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도
생각해보아야 합니다. 우리 예수 믿는다는 사람들이 내가 편안하기 위해서, 잘살기 위해서, 이기적인 욕망을 위해서, 하나님께 능력을
구합니다.
그런 기도가 응답 받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까? 나 매 안 맞게 해주세요, 예수님의 이름으로 고통 당하지 않게 해주세요, 만사
형통하게 해주세요, 소원 성취하게 해주세요--어떻습니까? 이런 기도가 응답될 것 같습니까? 우리 다시 한번 생각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이 맞는 매, 그리스도인이 당하는 고난, 그 속에 하나님의 드높은 뜻이 내재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22절 말씀을 보면 사도 바울은 말씀합니다. "제자들의 마음을 굳게 하여 이 믿음에 거하라." 굳은 마음을 가져라,
흔들리지 말라, 이 믿음에 거하라 하는 말씀은 계속적으로 이 믿음에 살라는 말씀입니다. 흔들리지 말고, 지구력 있게 이 믿음 안에
계속적으로 머물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가져야 할 믿음이 어떤 믿음이겠습니까? 본문에서 귀한 말씀을 읽게 됩니다.
"하나님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난을 겪어야 할 것이라." 이것이 바울이 그들에게 주는 믿음의 내용입니다. 필수적 믿음의
내용입니다. 권고의 말씀입니다. 여러분, 이것을 잊지 마세요. 궁극적 목적은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데 있습니다. 오늘날, 하나님의
나라, 그것이 믿는 사람의 최종적 궁극적 관심사입니다. 그런고로 적어도 예수 믿는 사람이 가져야 할 믿음은 핍박당하고, 고난
당하고, 병들고, 죽고, 매맞고, 굴욕 당하고, 억울하고 문제되지 안아요. 하나님나라에 들어갈 수만 있으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나라에 들어간다는 그 사실이 중요한 것입니다. 모름지기 여기에 분명한 목적을 두어야 합니다. 예수 믿어서 잘살고, 잘되고, 병
낫고, 성공하고…… 그런 지엽적이고 2차 3차적인 것을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목적은 오로지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보세요.
분명하지 않습니까? "하나님나라에 들어가려면"--그것이면 전부입니다. 그 밖의 것은 문제가 되지 않아요. 어떤 고난을 당하더라도
하나님의 능력이 있다면 나를 하나님나라에 들어가게 하는 데에 있습니다. 하나님나라에 못 들어가게 할 사람을, 하나님나라에 못
들어갈 사람을 하나님나라에 들어가게 하는 데 있는 것입니다. 갈 사람을 만들어내시는 것입니다. 작품을 만드시는 것입니다.
하나님나라에 들어가도록 하는 것--이것이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그런데 그러기 위해서는 여기 주신 말씀대로 많은 환난을 겪어야 합니다.
환난 곧 '들립시스'에는 조금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외부 상황에서 오는 고통을 말합니다. 경제적 고통, 정신적 고통,
육체적 고통 같은 것을 말합니다. '파메마'라고 하는 말도 같은 '환난'이지만 고통은 고통인데 뜻이 전혀 다릅니다. 이것은 내적
상황에서 오는 고통입니다. 그러므로 고통이라기보다는 고민이라고 하겠습니다. 근심, 걱정, 불안, 초조 따위입니다. 하나님나라에
들어가려면, '들립시스'--외부적 상황에 의한 고통은 겪어야 합니다. 겪는다는 말은 헬라어에는 본래 동사가 없으므로 '이런 고난'
'이런 환난을 통하여'라고 말합니다. 환난을 통하여 하나님나라에 들어갑니다. 외적으로 오는 고통이지 내적 고통이 아닙니다.
그러니까 하늘나라에 들어갈 사람이 근심하고, 걱정하고, 불안에 떨고, 초조해하고 하는 일은 있을 수 없지요. 그렇다면 믿음이 아니지요.
그러나 우리는 외적인 고통은 각오해야 합니다. 예수 믿어 손해 많이 봅니다. 매도 맞습니다. 욕도 먹습니다. 외적 상황으로 인하여 오는 많은 고통을 겪게 될 것입니다. 이 일에 대해서는 이의를 제기하지 마세요.
이런 고통을 통해서 하나님나라에 들어갈 것이라고 사도 바울이 결론지었어요.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여기에 또한 역설이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가고자 하는 나라는 하나님나라입니다. 그런데 지금은 많은 외적 고난을 겪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다시 한번
생각해봅시다. 이런 고난이 꼭 나쁜 것이냐 하면 그렇지는 않아요. 여러분 아시는 대로 사랑하는 자를 위해서 고생하는 것이
고생입니까? 소망 있는 고생이 고생입니까? 확실한 약속을 받고 고생하는 것이 고생입니까?
요새 학생들, 대학입시 보느라고 고생한답니다. 그것도 보통 고생이 아니지요. 그 젊은 나이에 새벽부터 일어나 밤에 도시락 둘
싸 가지고 가서 공부하는 것 보면 안쓰러워요. 불쌍하기까지 하지만, 그러나 동정하는 사람은 없어요. 왜요? 공부하고 싶은데
못하는 사람들도 있지 않습니까? 숫제 갈 대학 생각조차 못하는 사람도 많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구제의 대상은 아닙니다. 그리고
공부를 애써 해서 정말 밝은 미래가 약속되어 있다면 그보다 몇 배 더 고생해도 괜찮아요. 그런데 이렇게 고생해 가지고 결과가 좋을
것인지 나쁠 것인지 알 수가 없어서 문제입니다. 어려운 고통을 통해서 확실하게 밝은 미래를 약속 받을 수만 있다면 무엇을 주저할
것입니까? 저도 옛날에 고학을 하면서 남 고생하는 것만큼은 고생해봤어요. 누가 고생한다고 해도 나 만큼 고생한 것 같지 안을
정도로 꽤 많이 고생했어요. 밥 벌어먹고 빨래해가면서 했습니다. 이에 비하면 밥은 얻어먹으면서 공부하는 것은 고생이 아니지요.
찬물에다 뭐 좀 빨아보려고 하니 비누가 안 풀어집디다. 빨래비누가. 아무튼 그래가면서 지내봤어요. 그러나 지금 와서
돌이켜보면 재미있는 것입니다. 괜찮은 것이 거기 있어요. 아무리 고생하면 어떻습니까? 젊었을 때에 고생하는 것은 문제가 안돼요.
고통이라고 하는 것은 의미의 문제요 소망의 문제입니다. 고통 자체의 문제는 아닙니다. 적어도 외적 상황에 의한 고통은
고통이 아닌 것입니다. 이것이 내적 상황으로 변질되면서 고민이 되고, 불안이 되고, 초조한 마음이 되고, 불 신앙이 되니까
문제이지요. 절망이 되니까 문제이지요. 외적 상황 그 자체는 문제될 것이 없다, 그 말입니다. 사도 바울은 디모데후서 3장
12절에서 말씀합니다. "무릇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핍박을 받으리라." 되는대로 살면 핍박이 없지요.
그러나 믿음으로 살고, 바르게 살고, 진실하게 살고, 열심으로 살면 핍박은 있게 마련입니다. 이것은 생명체에 있어서는 부득이한
것입니다. 필요조건입니다. 당위 조건입니다.
그러면 다시 한번 생각해서 깊이 분석해봅시다. 왜 고난을 당해야 하는 것입니까? 이것이 원리입니까? 아니면 실재입니까?
여기서 우리는 두 가지 다 생각하게 됩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이 고난 당하는 것은 하나님의 능력 안에
있는 것입니다. 능력에서 떠나는 일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지금 작품 만드시느라고 그래요.
마치 쇠를 불에 넣어 가지고 때리는 것과도 같아요. 제가 미국에서 공부하던 시절, 여름방학을 이용해서 공장에서 일을 좀
해보았는데 참 대단합디다. 차 타고 30분을 가야 하는데 그 거리 안에는 다른 집을 못 짓습니다. 공장에서 나는 소리가 너무
요란하기 때문입니다. 허허벌판에다 지은 공장인데 거기서 별것을 다 만들어냅니다. 우리 나라에도 그런 게 있는지는 모르나, 해머
하나가 40톤입니다. 무게 40톤의 해머이지요.
이게 전기로 올라갔다가 꽝하고 떨어지니 굉장하지요. 이렇게 반복하여 때려 가지고 쇠를 만듭니다. 이 쇠에는 번호만 붙어 있고
이름도 없어요. 이 쇠로 다른 쇠를 깎는 것입니다. 불에 넣었다가 때리고 또 불에 넣었다가 때리고…… 많이 맞은 쇠가 강합니다.
우리가 믿음을 가질 때에 어떤 믿음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까? 마음을 굳게 하여 믿음에 거하라 했습니다. 내가 외적 상황에
의해서 고난을 당할 때, 하나님의 능력이 없어서 고난 당하는 것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능력 안에서
고난 당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큰 능력 속에서 내가 고난 당하고 있다고 수용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지혜 안에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모든 것을 다 알고 계십니다. 알고 고생시키시는 것입니다.
셋째는, 하나님의 사랑 안에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미워서 고생하게 하시겠어요? 제가 고학할 때에 한번은 몸이 나빠졌어요.
식은땀이 나고 못 견디게 괴로울 때인데 하나님 앞에 새벽기도 나가서 억지 기도를 해보았습니다. "하나님, 제가 나 잘살자고
합디까? 목사 되어서 하나님 일 하겠다는 데 이건 너무하십니다. 저는 고난을 각오했습니다마는 이건 너무 지나치지 않습니까?"
응답이 없습디다. 마음에 정말 너무 지나친 것 같아요. 그러나 이것은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사랑하시는 자에게
주시는 고통인 것입니다. 이것을 잊지 말아야 되요. 예수님께서는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잔을 마시지 않겠느냐"하셨습니다. 사랑하는
아버지가 사랑하는 아들에게 주시는 것입니다. 이것을 어떻게 안 마시겠어요? 그 믿음이 필요한 것입니다. "하나님나라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많은 고난을 겪어야 합니다. 각오해야 됩니다. 적어도 번민은 없어요. 그러나 고통은 있어요. 아픔은 있어요.
슬픔은 없어요. 그것이 그리스도인입니다. 그리스도인이라고 해서 때리는 데 아니 아프지 않습니다. 그러나 슬퍼할 필요는 없는
것입니다. 슬프다면 믿음이 없는 것이지요. 아픔이 없기를 바라지는 않아요. 예수님께서 그랬고, 사도들이 그랬고, 제자들이 다
그랬고, 믿음의 조상들이 다 그 길을 갔습니다. 그런데 어찌 우리가 마다하겠어요? 십자가의 길을 어떻게 마다하겠어요?
고난을 통해서 선교가 가능합니다. 고난을 통해서 교만한 마음이 깨지고 겸손해집니다. 나도 남도 마찬가집니다. 그래서 고난
가운데 선교가 됩니다. 고난 당하는 자가 고난 당하는 자를 위로하면서 선교가 이루어집니다. 알렌 선교사를 아시지요? 우리 의술로는
고칠 수가 없는 병을 의사인 알렌 선교사가 들어와 한 사람의 병을 고치는 것으로 인해서 이 나라 사람들의 마음 문이 열리기
시작합니다. 그 2년 후에는 우리 나라에 호열자가 들어와 사람들이 마구 죽어갑니다. 그 때에 하나님의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사랑을
드러냈어요. 여기서 감동이 되고, 예수를 믿게 돼요. 기록에 보면 '동학'하던 사람들도 그리스도인의 그 헌신적인 수고를 보면서
마음을 돌려 예수믿는 기적이 나오게 됩니다. 환난이 아니고는 도저히 안 되는 일입니다.
여러분, 혹 돈 많은 사람 전도해보았습니까? 가끔 제게 재벌 전도를 부탁하는 분이 있어요. 한번 모시고 와서 잘 좀
전도해달라고 부탁을 하지만 저는 특별히 안 만나줍니다. 왜요? 만나나마나니까요. 두 번 나와 보고는 친절하지 않다면서 가버리고
맙니다. 여기서도 "회장님" 할 줄 알았던가봐요. 어림도 없으니 이야기지요. 깨끗이 다 저버리고, 하나의 죄인으로 무릎을 꿇어야
되는데…… 교회에 와서도 어깨에 힘주고 있으면 누가 알아줍니까? 안돼요. 깨지려면 한참 걸려요? 오죽했으면 예수님께서
말씀하셨겠어요.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기가 약대가 바늘구멍에 들어가기보다 어렵다고요. 그러면 여기 보세요. 그런 환난 속에서
겸손해지지요, 마음 문을 열지요? 환난 속에서 믿는 사람의 믿음이 순수해집니다. 순수한 믿음을 가지게 돼요. 그리고 자기를
부정하게 돼요.
자기 정욕을 포기하게 돼요. 생각해보세요. 내가 나를 고칠래도 고칠 수가 없어요. 환난이 고치게 만듭니다. 어떤 사람들 담배
못 끊어서 그렇게 고생하더니, 폐암 걸리니까 싹 끊어버립디다. 늦었어요. 진작 그럴 것이지. 자기 의지로는 못 끊어요. 의사가
폐암 선고를 하니까 끊습니다.
보세요. 나로서 못하는 것 하나님께서 하시는데 그 방법이 무엇입니까? 환난입니다. 고통입니다. 이래도 고통이 꼭 업서야
되겠습니까? 그것은 큰 은혜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환난을 통해서 하늘나라에 간다는 이야기입니다. 욕망을 버리고, 자기를
부정하고, 환난 속에서 역사 하시는 하나님의 능력 가운데서 하나님 앞으로 가는 것입니다. 또한 환난을 통해서 하나가 됩니다.
화목하게 됩니다. 평안할 때에는 서로 분쟁하다가도 환난 속에서 한 마음 한 뜻이 되고, 환난을 통해서 강해지고, 더욱 중요한 것은
환난 속에서 영원 지향적 믿음을 가지게 됩니다.
오늘 우리가 이만큼 잘사니까 예수 믿으면 건강합니다, 예수 믿으면 병났습니다, 예수 믿으면 복 받습니다. 하지만 중국이라든가
북한, 러시아 같은 곳의 핍박 속에 있던 사람들에게서 오는 편지를 보면 이야기가 달라요. 그런 얘기는 한마디도 없어요. 오직
"주님 오실 날이 가까운데 안녕하십니까?"--그렇게 나와요. 아주 종말론적입니다. 뭐, 부하냐 가난하냐는 안중에도 없어요.
하나님나라에 간다고 하는 영원 지향적 신앙이 분명합니다. 종말론적 신앙이거든요. 이게 환난을 통해서 얻어지는 것이거든요. 자,
그래서 많은 환난을 겪어야 하늘나라에 간다고 사도 바울이 결론 짓게 됩니다. 그러면서 이 신앙 위에서 장로를 선택하고 교회를
조직합니다. 그 핍박 속에서도요. 그리고 임명을 하고, 믿은바 주께 부탁을 합니다.
모름지기 하나님을 아버지로, 교회를 어머니로 모신 자라야 구원을 얻을 수 있습니다. 여러분, 교회생활을 소중히 여겨야
됩니다. 교회를 통해서 말씀을 받고, 도의 젖을 먹고, 교훈을 받고, 양육을 받고, 하늘나라에까지 가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는 교회라고 하는 이 거룩한 공동체 종말론적 공동체의 구원론적 의미를 분명히 알아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이렇게
장로 임명하고도 그 다음에 하는 말인즉 본문을 자세히 보면, 교훈도 하고, 근면도 하고, 명령도 하고, 친히 모본을 보이기도
하고, 기도하고, 희생도 합니다. 그러나, 마지막으로는 "믿은바 주께 부탁하고(23절)"----주님께 부탁을 해요. 주님께서
지켜주시옵소서, 주님께서 가르쳐주시옵소서, 주님께서 이들에게 힘을 주시옵소서, 내게 주신 것처럼 이들에게도 은사를 주시옵소서,
하고 위탁합니다. 주님께 위탁합니다. 우리는 이 점을 알아야 돼요. 여러분도 지금 자녀를 키웁니다. 가르치고, 정성을 다하고,
기도하고 애쓰지만 마지막에는 내 마음대로 못해요. 이제는 "주여, 이 자녀를 돌보아주세요" 하고 위탁할 수밖에 없습니다. 입대하는
자녀, 어떡하면 좋아요? 내가 거기까지 따라가겠습니까? 주님께 부탁하는 것입니다. 주님께 위탁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이 장로들을
주님께 위탁하고, 그리고 그 자리를 떠납니다. 그리하여 주님께서 저들을 통하여 에베소교회를 잘 인도해나가시게 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제 26절 끝에 "전에 하나님의 은혜에 부탁하던 곳이라"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23절에서는 주께 부탁하고, 여기서는
은혜에 부탁하는 것입니다. 역시 우리는 하나님 은혜에 부탁을 해야 되겠어요. 위탁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고 하니,
우리가 노력을 하고, 수고하지마는 그것만 가지고는 안돼요. 주님 친히 인도하시는 역사가 있어야만 한다고 하는 신앙고백이 여기에
나타나 있는 것입니다. 환난과 핍박이 있습니다. 이 모든 고난을 통해서 우리가 주님 앞에 순수하게 더 바른 자세로 서게 됨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매디슨이라고 하는 찬송가 작가의 '하나님의 권능'이라고 하는 시 한수를 소개합니다. "나의 하나님! 나는 나의 가시에
대하야 결코 감사하지 못했습니다. 나의 장미꽃에 대해서는 수천 번이나 감사했지만, 주님께서 나에게 지워 주시는 십자가에 대해서는
한번도 감사하다고 생각 못하였습니다. 고난을 통하여 나의 인생을 완성하신 사랑의 주님이시여, 이제 저에게 가시의 가치를
가르쳐주시옵소서. 그럼으로 나의 눈물이 무지개 됨을 알겠나이다. 그리고 나서 나로 고난 당한 것이 유익이라고 말할 수 있게
하여주시옵소서."
더베에서의 전도와 다시 방문 (21-23절)
더베에서 복음이 전파되어 많은 사람들이 제자가 되었습니다.
이후 바울과 바나바는 이고니온, 루스드라, 안디옥 등 이미 복음을 전했던 도시들을 돌아보며 교회를 세우고 믿는 자들을 격려합니다.
특별히, 각 교회마다 장로를 세우고 금식하며 기도했습니다.
묵상포인트
복음 사역에는 반대와 고난이 따르지만, 그 가운데에서도 하나님의 역사는 멈추지 않고 계속 이어집니다.
오해와 시련, 위험 속에서도 복음의 핵심을 붙잡는 사도들의 태도와, 겸손과 진실함을 갖춘 지도력은 오늘날 교회와 우리에게도 중요한 본이 됩니다.
나에게 적용해보기
내가 복음의 진리를 전하거나 선을 행할 때, 혹 오해와 시련, 외부의 비난을 경험할 수 있음을 기억합시다. 그 때 두려움이 아닌 담대함과 겸손, 그리고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신뢰하는 마음이 중요함을 배울 수 있습니다.
나의 삶에도 복음의 열매가 맺히는 것을 위해, 삶의 자리에서 꾸준히 선한 영향력을 끼치는 용기와 인내, 기도가 필요함을 묵상해봅시다.
12월 2일(화) 사도행전 8-13장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간절히(12:5)
이에 베드로는 옥에 갇혔고 교회는 그를 위하여 간절히 하나님께 빌더라. So Peter was kept in prison, but the church was earnestly praying to God for him.
간절(懇切)이란 한문자의 훈(訓)은 “간절할 간” “끊을 절”이라고 하여 한글 사전에서는 “지성스럽고 절실함”이라고 정의 합니다.
NIV 영어성경에서는 “earnestly(간절히)”라고 번역합니다(진지하게, 진정으로).
헬라어 성경에서는 “에크테네스. ĕktĕnēs. ἐκτενής)”라고 합니다. ‘에크테네스’라는 단어가 사도행전에서는 ‘간절히’라고 하였으나 베드로전서에서는 ‘열심히’라고 번역합니다(행 12:5, 벧전 4:8).
교회는 그를 위하여 간절히 하나님께 빌더라 - 베드로의 체포로 인해 교회가 하나님께 기도했다는 본 구절은 다음과 같은 네가지
의의를 지니고 있다.
베드로를 위한 교회의 간절한 기도에서 오늘의 시대를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이 배우고 적용해야 할 신앙은 무엇일까?
첫째는 위기를 기도로 맞이하라 둘째는 위기 가운데서 하나가 되라 셋째는 위기를 허락하신 하나님의 은혜를 갈망하라
간절히 기도하라 첫째는 기도하고 또 기도하라 둘째는 열심히 기도하라 셋째는
1. 성도들이 베드로의 체포를 교회의 위기로 판단했다는 점을 암시해 준다. 이미 영향력있는 사도 야고보가
처형되었다는 점에서, 베드로 역시 처형될 것이라는 결론은 자명했다. 따라서 핵심적 지도자의 상실은 곧 교회의 위기로 인식되었을
것이다.
2. 교회의 단결을 볼 수 있다. 교회가 기도했다는 것은 교회가 하나되어 뭉쳤다는 뜻이다. 즉 교회의 위기 앞에서
두려워 흩어진 것이 아니라 도리어 단결하였다는 점을 시사해 준다. 이는 고난 중에 있는 교회가 어떤 모습을 취해야 할지를 잘
보여주고 있다.
3. 고난 중에 해야 될 교회의 본분 중에 기도하는 모습을 모범적으로 보여 주었다. 따라서 당시 기독교인들은
물리적 힘이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에 의지했다. 그러나 고난 중에서 하나님께 전적으로 의존하는 것이 초능력만을 기대하는 현실도피적
신앙으로 해석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오히려 인간이 만들어낸 불법적 힘에 맞서는 하나님의 능력을 기대하고 그것을 따른다는 의미로
이해되어야 할 것이다.
4. 기도하는 교회의 모습은 베드로에 관한 이야기의 구성상 7-11절에서 나타난 기적적 사실과 깊은
관계를 갖는다. 즉 교회의 기도는 기도로 끝난 것이 아니라 베드로를 구출하는 하나님의 능력으로 나타났음을 보여주고 있다. 따라서
교회의 단결과 기도하는 힘은 하나님의 역사와 능력이 나타나는 근본적인 동기가 됨을 보여주고 있다. 아마도 누가는 이와 같은 교훈적
의미를 초대 교회에 시사해 주기 위해 본문의 이야기를 기록했을 것이다.
“너희 중에 누구든지 지혜가 부족하거든 모든 사람에게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 구하라 그리하면 주시리라 오직 믿음으로 구하고 조금도 의심하지 말라”(1:5-6)
우리는 기도해야 합니다.
기도하는 일을 멈추어서는 안 됩니다.
성도의 힘은 기도할 때 나오고, 하나님의 역사는 기도할 때, 일어납니다.
마가복음 9장을 보면, 귀신들린 아이를 고치신 예수님께, 제자들이 조용히 물었습니다.
“우리는 어찌하여 능히 그 귀신을 쫓아내지 못했습니까?”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기도 외에 다른 것으로는 이런 종류가 나갈 수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믿는 자에게는 능히 하지 못할 일이 없느니라”고 말씀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붙들고, 간절하게 부르짖으며, 기도해야 합니다. 그러면 하늘 문이 열리고, 하나님의 능력이 내 안에 부어지는 놀라운 일이 일어납니다.
우리는 항상 기도해야 합니다.
그런데 그 중에서도, 정말 간절히 기도해야 할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과 편하게 대화하듯 기도할 때도 있지만, 정말 목숨을 걸고, 간절히 매달려야 할 때도 있습니다.
여러분! 언제 하나님께 간절하게 부르짖어 기도해야 합니까?
첫째, 고난을 당할 때 간절히 구하라
13절 말씀입니다.
“너희 중에 고난 당하는 자가 있느냐 그는 기도할 것이요 즐거워하는 자가 있느냐 그는 찬송할지니라” 아멘.
교회 안에서 누군가 슬프고 어려운 일이 있을 때면, 그 사람을 위해서 기도해줍니다. 그리고 즐거울 때는 하나님께 감사하며, 함께 찬양합니다. 이것이 주 안에 있는 성도의 아름다운 교제입니다. 우리는 살면서 여러 가지 고난을 만납니다. 아무런 어려움이 없이 살았다는 사람도 가만 보면, 다 나름대로, 시련이 있고, 고난이 있습니다.
“너희 중에 고난 당하는 자가 있느냐?” 이것이 우리의 현실입니다. 고난이 없으면 좋겠는데, 누구에게나 크고 작은 고난이 있습니다. 고난이 있을 때, 울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야고보 사도는 “그는 기도할 것이요”라고 말했습니다. 고난 중에는 기도해야 합니다. 이것이 세상 사람과 그리스도인과의 차이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고난 중에 어떻게 합니까? 대부분은 불평하고 원망합니다. 심지어 그런 상황에 있는 자신을 저주합니다. “아이고, 내 팔자야!” 하며 울부짖습니다. 하지만 성도들은 달라야 합니다. 하나님의 백성에게 원망은 더 큰 고난을 불러일으키는 악성 바이러스입니다. 야고보 사도가 그렇게 말을 조심하라고 강조했던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는 원망하고, 불평하고, 저주하는 말 대신에, 하나님께 기도하고, 찬양해야 합니다. 그러면, 나도 모르게 터져 나오는 죄의 습관을 끊어버리게 될 것이며, 하나님의 은혜와 평강이 내 안에 부어집니다. 하지만, 그렇게 기도하는데도, 온갖 잡생각이 떠오르고, 두려움과 좌절감, 분노 등의 마음이 생길 때가 있을 것입니다. 그래도 중간에 포기하지 말고, 계속 기도해야 합니다.
마음의 평강을 달라고, 집중해서 기도할 수 있도록, 주님께 더욱 크게 부르짖어야 합니다. 그리고 말씀을 붙들고, 계속해서 기도하고, 더 간절히 기도하면, 하나님께서는 분명 마음의 평안과 은혜를 주시리라 믿습니다.
여러분! 다윗만큼 고난이 많았던 사람도 이 세상에 없습니다. 다윗은 언제나 기도합니다. 아주 솔직하게, 노골적으로 기도합니다. 또한, 다윗은 하나님을 노래합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을 믿고,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쉬지 않고, 기도했던 위대한 신앙인이었습니다. 이런 것을 볼 때, “고난은 하나님과 가까워질 수 있는 하나님의 선물이 아닐까?”라고 생각해 봅니다. 초대교회에 가장 큰 고난은 예수님 때문에 생기는 고난이었습니다. 그들은 그리스도인이라는 이유만으로, 사회에서 가정에서 배척당했으며, 모든 것을 포기해야 되는 상황, 심지어 목숨까지도 내려놓았습니다. 하지만, 그 속에서도 믿음을 지키기 위해, 순교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았던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고, 합심하여 기도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죽는 그 순간에도, 찬양하는 것을 멈추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고난 당하고 있을 때, 기도하기를 원하십니다. 이럴 때, 하나님은 흔히 두 가지 방법으로 역사하십니다.
하나는 그 고난을 말끔히 해결해 주시는 방법 또 하나는 그 상황을 그대로 두시면서, 나의 변화를 통해, 견딜 수 있도록 힘을 주시는 방법입니다.
바울도 육체의 가시를 제거해 달라고, 주님께 간절히 기도했지만, 주님의 응답은 “네 은혜가 네게 족하다”고 말씀하시며, 고쳐주시지 않으셨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능력은 여전히 바울에게 부어지고 있었으며, 약할 때 강함 되심을 찬양하며, 주님의 역사를 더욱 강하게 체험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에게 하나님의 응답은, 때론 이렇게 찾아올 수 있습니다. 그럴 때라도, 우리는 기도하고, 찬양하기를 쉬지 않아야 할 것입니다. 그러면, 어느 순간, 그 고난이 해결되어 있든지, 아니면, 그 고난이 아무렇지 않은 것이 되어버리든지, 둘 중에 하나일 것입니다.
그러면서, 우리의 믿음은 한 단계 더 성장되어 있을 것입니다.
고난 중에, 기도하고, 찬양하는 것은 성도의 특권입니다.
어떤 환경에 처해 있든지, 하나님께 기도하고, 찬송하면서, 주님을 끝까지 붙들어야 합니다. 그리하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하나님의 능력과 은혜를 부어 주십니다.
여러분! 언제 하나님께 간절하게 부르짖어 기도해야 합니까?
둘째, 아픔이 있을 때에 간절히 기도하라
14-18절 말씀입니다.
“너희
중에 병든 자가 있느냐 그는 교회의 장로들을 청할 것이요 그들은 주의 이름으로 기름을 바르며 그를 위하여 기도할지니라 믿음의
기도는 병든 자를 구원하리니 주께서 그를 일으키시리라 혹시 죄를 범하였을지라도 사하심을 받으리라 그러므로 너희 죄를 서로 고백하며
병이 낫기를 위하여 서로 기도하라 의인의 간구는 역사하는 힘이 큼이니라 엘리야는 우리와 성정이 같은 사람이로되 그가 비가 오지
않기를 간절히 기도한즉 삼 년 육 개월 동안 땅에 비가 오지 아니하고 다시 기도하니 하늘이 비를 주고 땅이 열매를 맺었느니라” 아멘.
초대교회에는 병든 자가 많았습니다. 초대교회 대부분의 신자들은 가난했습니다. 노예들도 아주 많았습니다. 그래서, 많은 경우, 제대로 된 의사들의 치료를 받을 수 없었고, 약도 쓸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초대교회시대는 사도들이 의사 노릇을 할 때가 많았습니다.
“너희 중에 병든 자가 있느냐?”
그들 주변에는 언제나 환자가 있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야고보 사도는 “교회의 장로들을 청하라”고 말씀합니다. 그리고 “장로들은 주의 이름으로 기름을 바르며 그를 위하여 기도할지니라”고 말씀합니다.
“장로”는 각 교회를 대표하는 사람들로서, 오늘날 “목사”, “장로” 둘 다 해당됩니다.
그들은 기름부음을 받은 사람들로서, 말씀을 가르치는 동시에, 성도들을 대변하고, 위해서 기도하는, 교회의 지도자들이었습니다. 특히 병든 성도를 찾아가서, 다른 성도들과 함께 병이 낫기를 기도했습니다. 그리고 아픈 부위에 기름을 바르며, 기도했습니다. 선한 사마리아의 비유에서도 나와 있듯이, “기름”과 “포도주”는 그 시대를 대표하는 의약품이었습니다. 그래서 초대교회에는, 항상 포도주와 기름이 준비되어 있었을 것이며, 장로들은 청함을 받으면, 곧장 기름을 챙겨, 환자에게 달려갔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 병든 자에게는 의원이 필요하다고 하셨듯이, 아픈 자에게 약은 꼭 필요한 것입니다. 바울도 의사 누가와 평생을 함께 했습니다. 의사는 병을 치료하고, 하나님은 병을 낫게 하십니다. 우리는 아프면 병원을 갑니다. 그리고, 병을 낫게 해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병이라는 것은 참으로 신기합니다. 작은 질병인데도, 쉽게 고쳐지지 않을 수도 있고, 불치병인데도, 깨끗이 고쳐져서, 잘 살 수도 있는 것입니다. 질병이 생겼을 때는 주의 이름으로 기름을 바르듯이 최선을 다해서 치료를 받아야 합니다. 하지만, 낫게 하시는 분은 하나님임을 믿고, 간절히 기도하면서, 하나님께 맡겨야 합니다. 불가능한 상황에서도, 하나님은 얼마든지 낫게 하실 수 있습니다.
히스기야의 기도를 들으신 하나님은 그의 생명을 15년이나 연장 시켜 주셨습니다. “믿음의 기도는 병든 자를 구원하리니”라는 말은 질병이 원인이 죄에 있어서, 회개하고 믿음으로 기도하면 죄 사함을 받고 병도 나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어떤 경우에, 질병은 죄 때문에, 발생하기도 합니다. 예수님이 계셨던 집의 지붕을 뚫고, 고침을 받았던 중풍병자의 예가 그것입니다. 그의 병의 원인은 죄였던 것입니다. 하지만 모든 질병이 죄로 인하여 생기는 것은 아닙니다.
요한복음 9장을 보면, 날 때부터 맹인된 사람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사람들이 주님께 “저 사람의 맹인된 것이 누구의 죄 때문입니까?”라고 물었을 때, 예수님은 그 누구의 죄도 아니고,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기 위함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죽었다 살아난 나사로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역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해, 죽었다, 삼 일만에 다시 살아났습니다. 결국, 나사로는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의 위대한 메시지를 알리는 하나님의 도구로 쓰임 받았습니다. 그러므로, 어떤 사람이 병에 걸리고, 사고를 당했을 때, 무조건 그 사람의 죄 때문이라고, 정죄하면, 절대로 안 됩니다.
17절 이하의 말씀은, 우리가 어떻게 믿음의 기도를 해야 하는지를 엘리야 선지자를 통해 보여주고 있습니다. 우리의 기도를 방해하는 것이 있다면, 하나는 “나 같은 사람이 기도해도 하나님이 들어주실까?”라는 의심의 마음이고, 또 하나는 기도해도 응답이 없다며, 그만 두는 것입니다.
이렇게 의심하고, 포기하게 만드는 것이, 마귀가 주로 사용하는 전법입니다.
그래서, 야고보 사도는, 엘리야 선지자도, 우리와 똑같은 사람임을 강조하면서, 포기하지 않고,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하면, 하나님이 그 어떤 것도, 들어주실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엘리야의 이 간절한 기도에, 모두 응답하셨습니다. 비가 내리지 않기를 기도했을 때는 3년 6개월 동안이나, 비가 내리지 않았습니다. 하늘에서 불이 떨어지기를 기도했을 때는 불로써 응답하셨습니다. 그리고 다시 간절히 기도했을 때, 하나님은 하늘을 열어, 비를 주시고, 열매를 맺게 하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간절한 기도의 힘입니다.
엘리야는 초능력자가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간절히 기도하며, 하나님께 매달렸습니다. 엘리야도, 평범한 사람으로, 우리처럼, 괴로움과 고통을 느끼는 죄인이었습니다.
하지만, 엘리야는 하나님의 기름부음을 받은 선지자로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위해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죄를 회개하고 용서함을 받은 의인은 엘리야와 같이, 기도의 응답을 받을 수 있습니다.
의인의 기도는 역사하는 힘이 많이 있습니다. 그것이 곧 믿음의 기도입니다.
“간절히 기도한즉”이라는 말은 “기도하고 또 기도했다”는 표현입니다.
실제로, 구약성경에서는 엘리야가 기도할 때, 땅에 엎드려, 얼굴을 무릎 사이에 넣었다고 표현했을 정도로, 간절히 기도하는 모습이 묘사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간절히 기도하면, 그 어떤 질병도, 아픔도 낫게 하시는 하나님의 놀라우신 역사를 보게 됩니다. 언제 하나님께 간절하게 부르짖어 기도해야 합니까?
셋째, 영혼 구원을 위해 간절히 기도하라
19-20절 말씀입니다.
“내 형제들아 너희 중에 미혹되어 진리를 떠난 자를 누가 돌아서게 하면 너희가 알 것은 죄인을 미혹된 길에서 돌아서게 하는 자가 그의 영혼을 사망에서 구원할 것이며 허다한 죄를 덮을 것임이라” 아멘.
로마서 10:1절을 보면, 바울은 “내 마음에 원하는 바와 하나님께 구하는 바는 이스라엘을 위함이니 곧 그들로 구원을 받게 함이라”고 말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늘 자신과 같은 유대인의 구원과 이방인의 구원을 간절히 원하고, 또 그것을 위해 간절히 기도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야고보서의 마지막 말씀에서도, 이런 마음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초대교회 사도들의 마음 속에는 언제나 “영혼 구원”의 소망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주님의 마음으로 영혼을 사랑했습니다.
쉬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면서도 고통 중에 있는 사람들을 돌아보고 특히 병든 자들을 위해서 간절히 기도했던 이유는 다 영혼을 구원하고자 하는 선한 목적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은 천하보다 귀한 한 영혼이 주께 돌아오는 것이 가장 소중한 일임을 잊지 않았습니다. 이것이 교회가 맡은 귀한 사명입니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하신 사역과도 같습니다.
주님은 영육 간에 병들어 있던 우리에게 찾아오셨습니다. 주님의 사랑으로 영과 육 모두를 치료해 주셨습니다. 주님은 우리의 죄를 깨끗이 씻어주시고 구원해 주셨습니다.
여러분! 오는 사자들처럼 성도들을 찾아다니고 있습니다. 이런 일들을 막고, 떠난 자들이라 할지라늘날에도 사단은 끊임없이 성도를 미혹합니다. 성도들을 진리로부터 멀어지게 하려고 우도, 돌아서게 하는 것이, 교회와 우리가 할 일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말씀을 붙들고 간절히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하나님과 동행하며, 거룩한 삶을 살기를 원하시는 분입니다. 분명한 것은, 기도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더욱 가깝게 한다는 것입니다. 또한, 기도를 통해, 성도는 숨을 쉬며, 기도를 통해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며, 기도를 통해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합니다. 우리는 늘 교회 안에서 서로를 위해 간절히 기도해야 합니다. 첫째는, 고통당하는 성도들을 위해서, 둘째는 질병으로 인해 아파하는 성도들을 위해서, 마지막으로 영혼 구원을 위해서 기도해야 합니다. 바로 이것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성도 간에 참 교제이며, 하나님의 백성인 우리가 해야 하는 일입니다.
예화 : 고난 가운데에도 감사의 제목들을 찾을 수 있습니다. Illustration : Evenin the midst of tragedy, we can find reasons to be thankful.
신촌 세브란스 심장병동에 걸린 유명한 기도문이 있습니다. 그기도문으로 인해 많은 환자들이 위로를 받고 소망을 얻는다고 합니다.
There’s a famous prayer in Shinchon Severance Heart Disease Center. Many patients would hear this prayer and receive hope.
주님, 때때로병들게 하심을 감사합니다. 인간의 약함을 깨닫게 해주시기 때문입니다. 가끔 고독의 수렁에 내 던지심도 감사합니다. 주님과 가까워지는 기회이기 때문입니다. 일이 계획대로 안 되게 틀어주심도 감사합니다. 나의 교만함을 반성할수 있기 때문입니다. 더러는 아들, 딸이 걱정거리가 되게하시고 더러는 부모와 동기가 짐으로 느껴질 때도 감사합니다. 인간된 보람을 깨닫기 때문입니다. 먹고 사는 일이 힘겹게 하심을 감사합니다. 눈물로 빵을 먹는 심정을이해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불의와 허위가 득세하는 시대에 태어난 것도 감사합니다. 하나님의 의가 분명히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Lord!
Thank you for making me sick from time to time. You make me realize the
frailty of humans. Thank you for sometimes throwing me into a pit of
loneliness. That’s a chance for me to get closer to you, Lord. Thank you
for making things go wrong. That way I can repent for my arrogance. Thank
you for making me worry about my children and feel that my parents and
friends are a burden. That makes me realize how worth while it is to be
human. Thank you for making it hard for me to make a living and eat. That
makes me understand what it’s like to eat apiece of bread in tears. I’m
also thankful for being born in a time of injustice. It’s makes your
justice clearly stand out.
간절함
우리가 인생을 살아갈 때나 또 신앙인으로 믿음을 살아갈 때 그 모든 일의 결과를 결정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인식의 수준’이다. 사람들은 아는 만큼 자라고 성장한다. 그래서 사람은 날 때부터 죽을 때까지 배우는 존재이다.
배우지 않고 되는 본능도 사용법을 배워야 사람됨의 인격으로 나타난다. 그러니 사람에게 있어서 지식과 지혜는 절대적이다.
신앙도 배워야 좋은 신앙을 가질 수 있다. 모르면 사용할 수 없고 누릴 수도 없다. 그런 면에서 지혜서인 잠언은 중요한 성경이다. 잠언은 세 가지 주제로 나눌 수 있다. (상-지혜, 중-성공, 하-행복) 이제 두 번째 부분이 시작된 11월 큐티에 더욱 집중하자.
- 왜 야곱일까?
구약 창세기에서 하나님의 선택을 받은 야곱과 그렇지 못한 에서의 이야기는 일반적인 상식으로 이해하기 어렵다.
(야곱 : 경쟁의식, 교활함, 이기적 VS 에서 : 직선적, 포용력, 용맹함)
하나님은 왜 야곱을 선택하신 것일까?
야곱은 영적인 복에 대한 갈망이 있었던 사람이었다. 신앙적으로 이야기하면 마음 깊은 곳에서 하나님을 찾고,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을 사모하는 간절한 마음을 가졌던 사람이었다.
에서는 능력 있는 사람이었지만 영적 축복에 대해 간절함도 장자로서의 거룩한 사명감도 없었다. 하나님의 도우심을 인정하지 않고 자신의 능력만을 의지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선택을 받지 못한다. 오히려 인간적인 약점이 있고 흠이 많아도 하나님을 간절히 찾으며, 그 은혜를 앙모하는 사람을 하나님은 사랑하시고 선택하신다. 그러니 신앙과 교양은 다른 것으로 신앙 성숙에서 교양은 필요한 것이지만, 신앙이 배제된 인간적인 처세술과 교양으로는 하나님의 은총을 살 수 없다.
하나님은 어떤 사람에게 은혜를 베푸실까? 부족하고 흠이 있어도 은혜를 사모하는 사람에게 주님은 사랑과 은혜를 더하신다. 자기의 약함과 죄인 됨의 흠을 알고 눈물 흘리는 사람, 하나님을 향한 간절함이 있는 사람이다.
지혜가 가지는 세 가지 특징
1. 보편성 : (본문2,3절) 지혜는 특정한 곳이 아닌 일상에 있다. 2. 우선성 : (본문10,11절) 무엇보다 지혜를 더 귀하게 여겨 지혜를 수단화하지 말고 목적화하라. 3. 계시성 : (본문17절) 간절히 찾는 자가 지혜를 만날 것이라 했다.
간절함은 어떤 일을 이룸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동기이다. 간절함은 양면적이다. 대상이 잘 못 되면 집착이 되는 것을 경계해야 한다. 간절함에도 한계가 있으므로, 간절하다고 다 되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기도하면서, 나의 기도를 들어주시겠다는 약속을 붙잡아야 하고, 감사한 마음으로 기도해야 한다. 성경은 하나님의 지혜를 갈망하고 하나님을 간절히 찾는 자를 다른 말로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라고 한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의 특징
1. 악을 미워하는 사람(본문 13절) 2. 하나님께 순종하는 사람(창 22장) 3. 하나님과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는 사람(시 25:14)
오늘 본문 17절의‘간절히’=‘새벽에’라고도 번역된다. “능력은 고요함 속에서 온다.” 중요한 결정을 앞에 두고 있을 때 혼자 고요히 있는 시간이 필요하다. 혼자만의 고요한 시간을 통해 내가 무엇을 추구하고 있으며, 나의 결정이 내가 추구하는 가치에 맞는가를 평가하여 그 길로 갈 힘을 얻게 된다. 예배에서의 간절함이 필요하고 마음의 태도가 바를 때 하나님의 은혜를 받을 수 있다. 존재 자체이신 하나님을 갈망해야 하는데, 하나님이 만드신 존재물에 가치를 두는 존재의 대상이 두 가지가 되면 안 된다. 우리가 갈망해야 하는 존재는 오직 하나님 한 분, 우리 주님뿐이다. 하나님만을 간절히 원할 때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이 되고 죄를 미워하는 사람이 되며,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하나님과 친밀함을 누리는 사람이 될 수 있다. 세상 모든 것을 다 가졌어도 예수님을 잃어버렸다면 다 잃은 것입니다. 그러나 세상 모든 것을 다 잃었다 해도 예수그리스도를 소유했다면 다 가진 것입니다. 간절함의 신앙을 소유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간절히(24구절)
에스더 4:8 / 민족을 위하여 간절히 구하라 또 유다인을 진멸하라고 수산궁에서 내린 조서 초본을 하닥에게 주어 에스더에게 뵈어 알게 하고 또 저에게 부탁하여 왕에게 나아가서 그 앞에서 자기의 민족을 위하여 간절히 구하라 하니.
시편 63:1 / 간절히 주를 찾으라 하나님이여 주는 나의 하나님이시라 내가 간절히 주를 찾되 물이 없어 마르고 곤핍한 땅에서 내 영혼이 주를 갈망하며 내 육체가 주를 앙모하나이다.
시편 78:34 / 하나님을 간절히 찾으라 하나님이 저희를 죽이실 때에 저희가 그에게 구하며 돌이켜 하나님을 간절히 찾았고.
잠언 8:17 / 간절히 찾는 자가 만날 것이라 나를 사랑하는 자들이 나의 사랑을 입으며 나를 간절히 찾는 자가 나를 만날 것이니라
잠언 11:27 / 선을 간절히 찾으라 선을 간절히 구하는 자는 은총을 얻으려니와 악을 더듬어 찾는 자에게는 악이 임하리라.
이사야 26:9 / 주를 간절히 구하라 밤에 내 영혼이 주를 사모하였사온즉 내 중심이 주를 간절히 구하오리니 이는 주께서 땅에서 심판하시는 때에 세계의 거민이 의를 배움이니이다.
이사야 26:16 / 어려울 때 간절히 주께 구하라 여호와여 백성이 환난 중에 주를 앙모하였사오며 주의 징벌이 그들에게 임할 때에 그들이 간절히 주께 기도하였나이다
예레미야 11:7 / 간절히 경계하라 내가 너희 열조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날부터 오늘까지 간절히 경계하며 부지런히 경계하기를 너희는 내 목소리를 청종하라 하였으나.
에스겔 24:25 / 마음으로 간절히 생각하라 인자야 내가 그 힘과 그 즐거워하는 영광과 그 눈의 기뻐하는 것과 그 마음의 간절히 생각하는 자녀를 제하는 날
호세아 5:15 / 고난 받을 때 간절히 구하라 내가 내 곳으로 돌아가서 저희가 그 죄를 뉘우치고 내 얼굴을 구하기까지 기다리리라 저희가 고난을 받을 때에 나를 간절히 구하여 이르기를.
마가복음 5:10 / 지방에서 보내지 마시기를 간절히 구하니 자기를 이 지방에서 내어 보내지 마시기를 간절히 구하더니.
누가복음 7:4 / 간절히 구하라 이에 저희가 예수께 나아와 간절히 구하여 가로되 이 일을 하시는 것이 이 사람에게는 합당하니이다.
누가복음 22:44 / 더욱 간절히 기도하시니 예수께서 힘쓰고 애써 더욱 간절히 기도하시니 땀이 땅에 떨어지는 피방울 같이 되더라.
사도행전 12:5 이에 베드로는 옥에 갇혔고 교회는 그를 위하여 간절히 하나님께 빌더라.
사도행전 26:7 / 이 약속은 우리 열 두 지파가 밤낮으로 간절히 하나님을 받들어 섬김으로 얻기를 바라는 바인데 아그립바왕이여 이 소망을 인하여 내가 유대인들에게 송사를 받는 것이니이다.
고린도전서 16:19 / 아시아의 교회들이 너희에게 문안하고 아굴라와 브리스가와 및 그 집에 있는 교회가 주 안에서 너희에게 간절히 문안하고.
고린도후서 5:2 / 과연 우리가 여기 있어 탄식하며 하늘로부터 오는 우리 처소로 덧입기를 간절히 사모하노니.
고린도후서 8:4 / 이 은혜와 성도 섬기는 일에 참여함에 대하여 우리에게 간절히 구하니.
빌립보서 2:6 / 그가 너희 무리를 간절히 사모하고 자기 병든 것을 너희가 들은 줄을 알고 심히 근심한지라.
데살로니가전서 3:6 지금은 디모데가 너희에게로부터 와서 너희 믿음과 사랑의 기쁜 소식을 우리에게 전하고 또 너희가 항상 우리를 잘 생각하여 우리가 너희를 간절히 보고자 함과 같이 너희도 우리를 간절히 보고자 한다 하니
히브리서 2:1 / 그러므로 모든 들은 것을 우리가 더욱 간절히 삼갈찌니 혹 흘러 떠내려 갈까 염려하노라.
히브리서 6:11 / 우리가 간절히 원하는 것은 너희 각 사람이 동일한 부지런을 나타내어 끝까지 소망의 풍성함에 이르러.
야고보서 5:17 / 엘리야는 우리와 성정이 같은 사람이로되 저가 비 오지 않기를 간절히 기도한즉 삼년 육개월 동안 땅에 비가 아니 오고
베드로후서 3:12 / 하나님의 날을 바라보고 간절히 사모하라 하나님의 날이 임하기를 바라보고 간절히 사모하라 그 날에 하늘이 불에 타서 풀어지고 체질이 뜨거운 불에 녹아지려니와.
오직 너희 죄악이 너희와 너희 하나님 사이를 내었고 너희 죄가 그 얼굴을 가리워서 너희를 듣지 않으시게 함이니
이는 너희 손이 피에, 너희 손가락이 죄악에 더러웠으며 너희 입술은 거짓을 말하며 너희 혀는 악독을 발함이라
하나님께서는 생명의 주(主)이십니다.
성경은 인간이 하나님을 멀리 떠난 것이 사망이고, 하나님께 돌아오는 것을 생명이라고 합니다.(요 17:3)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
하나님께서는 마땅히 죽어야 할 악인들이라도 죄로 인해 죽는 것을 기뻐하지 않으십니다.(겔 33:11) 주 여호와의 말씀에 나의 삶을 두고 맹세하노니 나는 악인의 죽는 것을 기뻐하지 아니하고 악인이 그 길에서 돌이켜 떠나서 사는 것을 기뻐하노라 이스라엘 족속아 돌이키고 돌이키라 너희 악한 길에서 떠나라 어찌 죽고자 하느냐 하셨다 하라.
따라서 죄인이 살기 위해서는 생명의 원천이신 하나님께로 돌아와야 합니다.(시 36:9) 대저 생명의 원천이 주께 있사오니 주의 광명 중에 우리가 광명을 보리이다.
죄인이 회개하고 하나님께 돌아올 때 생명과 구원을 받습니다.
이사야 59:1-3 여호와의 손이 짧아 구원치 못하심도 아니요 귀가 둔하여 듣지 못하심도 아니라. 오직 너희 죄악이 너희와 너희 하나님 사이를 내었고 너희 죄가 그 얼굴을 가리워서 너희를 듣지 않으시게 함이니. 이는 너희 손이피에, 너희 손가락이 죄악에 더러웠으며 너희 입술은 거짓을 말하며 너희 혀는 악독을 발함이라.
죄인 된 인간이 하나님께 가까이하려면 먼저 죄의 문제를 해결 받아야 합니다. 죄의 문제는 인간의 노력으로 해결할 수 없습니다.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달리셔서 흘리신 보혈을 믿기만 하면 어떠한 죄를 지었다 할지라도 용서받고 하나님과 가까이할 수 있습니다.(요일 3:4-6)
죄를 짓는 자마다 불법을 행하나니 죄는 불법이라
그가 우리 죄를 없이 하려고 나타내신바 된 것을 너희가 아나니 그에게는 죄가 없느니라
그 안에 거하는 자마다 범죄하지 아니하나니 범죄하는 자마다 그를 보지도 못하였고 그를 알지도 못하였느니라 그 안에 거하는 자마다 범죄하지 아니하나니 범죄하는 자마다 그를 보지도 못하였고 그를 알지도 못하였느니라.
하나님과 인간이 멀어진 것은 죄악 때문입니다. 죄는 큰 권능이 있어서, 하나님과 인간 사이를 단절시키며, 죄인 된 인간들을 영원한 형벌의 장소인 지옥에 떨어지게 합니다.(사 59:1-3; 계 20:13-15)
이사야 59:1-3 여호와의 손이 짧아 구원치 못하심도 아니요 귀가 둔하여 듣지 못하심도 아니라. 오직 너희 죄악이 너희와 너희 하나님 사이를 내었고 너희 죄가 그 얼굴을 가리워서 너희를 듣지 않으시게 함이니. 이는 너희 손이피에, 너희 손가락이 죄악에 더러웠으며 너희 입술은 거짓을 말하며 너희 혀는 악독을 발함이라.
요한계시록 20:13-15 바다가 그 가운데서 죽은 자들을 내어주고 또 사망과 음부도 그 가운데서 죽은 자들을 내어주매 각 사람이 자기의 행위대로 심판을 받고사망과 음부도 불못에 던지우니 이것은 둘째 사망 곧 불못이라 누구든지 생명책에 기록되지 못한 자는 불못에 던지우더라.
야고보서 4장 8~10절 ‘하나님을 가까이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가까이하시리라 죄인들아, 손을 깨끗이 하라 두 마음을 품은 자들아, 마음을 성결케 하라 9. 슬퍼하며 애통하며 울지어다 너희 웃음을 애통으로, 너희 즐거움을 근심으로 바꿀지어다 10. 주 앞에서 낮추라 그리하면 주께서 너희를 높이시리라’
그렇다면 인간이 어떻게 해야 하나님을 가까이할 수 있는 것일까? 하나님께서는 천지에 충만하신 분이기에 어디로 가야 하나님을 가까이하는 것일까?(렘 23:23-24) 이는 하나님께 겸손하여 애통함으로 회개하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을 멀리하는 자는 망할 수밖에 없기에(시 73:27), 인간이 회개함으로 가까이할 때 비로소 생명을 얻을 수 있습니다.
회개는 성경 전체의 중심 메시지입니다. 구약에서 회개를 뜻하는 히브리어 단어는 “니함”과 “슈브”로서 “슬퍼한다”와 “돌이킨다”는 뜻입니다.
נָחַם
Storng number5162
1. 니팔형 2. 슬퍼하다. 3. 불쌍히 여기다
Pronunciation
[ nâcham ]
Old Testament / 107회 사용
שׁוּב
Storng number7725
1. 방향을 돌리다. 2. 회복하다. 3. 돌이키다
Pronunciation
[ shûwb ] Old Testament / 1059회
그리고 신약에서 회개는 대표적으로 “메타노이아”(μετάνοια)와 “에피스트레포”(ἐπιστρέφω)로서 “메타노이아”는 히브리어 “니함”을 번역한 말로서 내적인 변화를, “에피스트레포”는 히브리어 “슈브”를 번역한 말로서 외적인 삶의 변화를 각각 강조합니다.
b. [상징적으로] [좋은 뜻이나 나쁜 뜻으로 마음의 변화나 행동의 변화를 말할 때] 돌아서다, 돌아오다, 행9:35, 14:15, 고후3:16, 벧후2:21, 살전1:9 등.
II. [중간태]
1. [문자적으로]
a. 돌아서다, 막5:30, 8:33, 요21:20.
b. 돌아가다, 돌아오다, 마10:13.
2. [비유적으로] 돌아서다, 벧전2:25, 회개하다, 요12:40.
관련 성경 / 돌이키다(마9:22, 막13:16, 행16:18), 돌아
오다(마10:13, 눅8:55, 행11:21), 돌아가다(마12:44, 눅2:20, 행26:20), 돌아서다(약5:19,
20), 저버리다(벧후2:21), 돌아오게 하다 (눅1:16, 행26:18), 다시 가다(행15:36)
회개(悔改)
구약과 신약성경의 회개를 나타낸 단어를 살펴보면, 회개는 내적으로는 자신의 죄를 슬퍼하고 미워하는 것이며, 외적으로는 생명의 주이신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것을 말합니다. 회개는 마음으로부터 돌이켜서 행동으로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것입니다. 요엘 2장 12~13절 ‘여호와의 말씀에 너희는 이제라도 금식하며 울며 애통하고 마음을 다하여 내게로 돌아오라 하셨나니 13. 너희는 옷을 찢지 말고 마음을 찢고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로 돌아올지어다 그는 은혜로우시며 자비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 하시며 인애가 크시사 뜻을 돌이켜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시나니’
예수와 침례 요한의 메시지 시작은 ‘회개하라’는 것이었습니다. (마 3:2, 4:17) 또한, 회개는 사도들의 설교에서도 주된 주제이었습니다. 베드로는 성령이 충만하여 회개를 촉구하였습니다. (행 2:38; 3:19) 회개는 죄인이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것으로 죄에서 돌이키는 것이며, 사망 가운데 있던 인간이 생명이신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것입니다. 죄의 삯은 사망이기 때문에(롬 6:23), 죄에서 돌이키는 것은 필연적으로 생명이신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사도행전 11장 18절에서 ‘생명 얻는 회개’라고 하였습니다.
죄에는 ‘사망에 이르는 죄’와 ‘사망에 이르지 아니하는 죄’, 두 가지 종류가 있습니다. 요한일서 5장 16~17절 ‘누구든지 형제가 사망에 이르지 아니한 죄 범하는 것을 보거든 구하라 그러면 사망에 이르지 아니하는 범죄자들을 위하여 저에게 생명을 주시리라 사망에 이르는 죄가 있으니 이에 대하여 나는 구하라 하지 않노라 17. 모든 불의가 죄로되 사망에 이르지 아니하는 죄도 있도다’ 여기서 ‘사망에 이르는 죄’는 고의적으로 습관적 반복적으로 짓는 죄(고전 6:9-10; 갈 5:19-21; 엡 5:18), 배교함으로써 진리에서 떠나 양심에 화인 맞은 죄(딤전 4:1-2; 히 6:1-8) 그리고 성령 훼방죄를 말합니다. (마 12:31-32; 히 10:26-31) 이러한 ‘사망에 이르는 죄’는 회개가 불가능하여 하나님의 무서운 심판만이 있을 뿐입니다. 결국, ‘사망에 이르는 죄’는 구원받은 성도들이 범하는 죄로서 하나님의 아들을 밟고, 언약의 피를 부정한 것으로 여기고 은혜의 성령을 욕되게 하는 죄로서 성령을 모독하고 훼방하는 죄입니다.
또한, ‘사망에 이르지 않는 죄’는 성도들이 믿음이 연약해져서 일시적으로 짓는 죄와 유혹에 넘어가 범할 수 있는 일반적인 죄로서 미쁘시고 의로우신 하나님께 죄를 자백함(όμολογῷμεν)으로써 사함을 받을 수 있습니다. 요한일서 1장 9절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케 하실 것이요’
한편, 하나님 안에 거하고, 하나님께 난 자들은 죄를 짓지 않습니다. 요한일서 3장 6절 ‘그 안에 거하는 자마다 범죄하지 아니하나니 범죄하는 자마다 그를 보지도 못하였고 그를 알지도 못하였느니라’, 3장 9절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죄를 짓지 아니하나니 이는 하나님의 씨가 그의 속에 거함이요 저도 범죄치 못하는 것은 하나님께로서 났음이라’, 5장 18절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범죄치 아니하는 줄을 우리가 아노라 하나님께로서 나신 자가 저를 지키시매 악한 자가 저를 만지지도 못하느니라’ 이는 두 가지 의미로 이해할 수 있는데, 첫째는 구원받은 성도들은 본질상 하나님의 의로운 자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과거에 마귀에게 속한 ‘본질상 진노의 자녀’(엡 2:1-3)이었으나, 예수가 자기 몸을 단번에 화목제물로 드리셔서 영원한 속죄를 이루셨기에 그 대속의 은혜를 믿는 자들은 본질적으로 의로운 자가 되었습니다. 히브리서 9장 11~12절 ‘그리스도께서 장래 좋은 일의 대제사장으로 오사 손으로 짓지 아니한, 곧 이 창조에 속하지 아니한 더 크고 온전한 장막으로 말미암아 12. 염소와 송아지의 피로 아니하고 오직 자기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사 단번에 성소에 들어가셨느니라’ 둘째는, 구원받은 성도들은 마귀의 속성을 따라 습관적이고 지속적인 죄를 저지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마귀는 죄의 기원으로서 고의로 반복적으로 죄를 짓지만, 성도들은 더 이상 마귀에게 속한 자가 아니라 하나님께 속한 자이기에 고의로 반복해서 죄를 짓지 않습니다. 물론, 성도들도 믿음이 연약해지고, 죄의 유혹으로 인해 죄를 짓지만, 이는 일시적이며 하나님께 자백함으로써 죄 사함을 받습니다.
생명 얻는 회개가 일어난 장면을 고넬료 사건을 통해 잘 알 수 있습니다. 베드로가 이방인 백부장 고넬료에게 복음을 전했을 때, 고넬료와 그 가족들은 성령을 받고 구원받았습니다. 베드로는 이 일은 하나님이 하신 일이라고 ‘그들이 이 말을 듣고 잠잠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 이르되 그러면 하나님께서 이방인에게도 생명 얻는 회개를 주셨도다’라고 다른 사도들에게 전했습니다. ‘생명 얻는 회개’라는 말은 반드시 옛사람을 벗는 회개를 통하여 새로운 생명에 참여하는 것입니다.(엡 4:22) 그러므로 참된 회개는 반드시 생명을 얻는 결과로 나타나고 참된 회개는 영적인 생명에 이르게 됩니다
이제 이방인들도 초대교회 공동체의 일원이 되었으며, 유대인 그리스도인들과 동등한 위치에 있게 되었습니다. 이방인들도 더 이상 ‘속된 것’이 아니라 ‘정한 것’이 되었습니다. 고넬료는 베드로에게 며칠 더 머물기를 청하였고, 베드로가 그들과 함께 식탁교제를 하지 못할 이유가 사라졌습니다. 베드로와 그 일행은 그들과 며칠 더 머무른 것으로 보입니다.(행 10:48) 이 기간은 베드로와 고넬료 사이에 일어난 일들이 예루살렘에 전해지기에, 충분하였습니다.(행 11:1)
베드로가 고넬료 집에 들어가 이방인과 며칠을 함께하면서 ‘이방인들도 하나님 말씀을 받았다’라는 소식이 유대에 있는 사도들과 형제들에게 전해졌습니다. 이는 빌립에게서 사마리아 사람도 “하나님의 말씀을 받았다”는 것이 예루살렘에 알려진 것과 같습니다.(행 8:14) 빌립이 사마리아 사람을 전도했을 때는 베드로와 요한이 사실을 확인하고자 사마리아에 내려갔지만, 지금은 초대교회의 지도자인 베드로가 이방인과 함께 유숙하며 음식을 나눠 먹었다는 것이 충격이었습니다.
베드로가 예루살렘에 도착했을 때 ‘할례자들’이 베드로를 비난하였습니다. 여기서 ‘할례자들’은 유대 혈통에서 태어난 사람들로서 단순히 이방인들과 구별되는 율법에 열심인 사람을 가리킵니다. 이 단어는 안디옥에서 베드로가 이방인과 함께 먹다가 ‘할례자들’을 두려워하여 떠났다고 할 때도 사용했습니다. (갈 2:12) ‘할례자들’이 베드로를 비난하는 것은 이방인에게 침례를 주었다는 것보다 이방인과 음식을 함께 먹었다는 것이었습니다. (행 11:3) ‘할례자들’은 베드로가 이방인과 가까이하기 전에 그들이 정결하다는 확증을 받아야 했으며, 이런 관점에서 베드로가 부정해졌다고 생각했습니다. 오랫동안 내려온 유대교 전통을 베드로가 무시해 버린 것이 할례자들에게는 참을 수 없는 모욕이었습니다. 또한, 유대 그리스도인들에게 유대교 관습을 따르지 않는 일은 스데반처럼 동족 유대인들에게 공격당하게 되지 않을까 두려웠습니다. 따라서 베드로에게는 할례자들의 고정관념을 변화시켜야 할 소명을 받았습니다.
베드로는 이방인이었던 백부장 고넬료와 그의 가족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한 후, 예루살렘교회에 돌아와서 자신을 향한 유대 그리스도인 할례자들의 비난에 직면해야 했습니다. 베드로를 향한 비난은 단순히 이방인에게 말씀을 전했기 때문이 아니라 그가 무할례자의 집에 들어가 함께 먹었으므로 자신들이 지켜오던 정결법을 위반했다는 것이었습니다. (행 11:3) 이러한 비난의 내용은 초기 교회가 이방 선교를 하면서 가장 큰 걸림돌이 무엇이었는지를 보여주며, 유대 그리스도인들이 온 열방에 복음을 전하라는 명령을 받은 후에도 동시에 여전히 모세의 율법에 따라 엄격하게 살아가고 있었음을 말해 줍니다.
베드로의 설교는 유대인들과 이방인들 사이에 존재하던 외적이고 율법적인 구분과 차별이 철폐되었다는 것이었습니다. 이렇게 유대인들과 이방인들 사이에 차별이 없다는 주장은 “하나님은 차별하시는 분이 아니다”라는 말에서 나타납니다. (행 10:34; 15:9) 이것은 차별하지 않는 하나님에 대한 구약의 정신에 근거를 두며(신 10:17; 대하 19:7; 약 2:1, 9), 이는 하나님께서 심판자이며, 차별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심판을 받을 것이라는 의미를 포함합니다. 그러므로 베드로와 고넬료의 이야기는 하나님께서 종교, 관습, 인종, 성, 계급 등으로 나누어진 인간에 대한 편견과 차별을 철폐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이야기는 모든 사람에게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길이 열려 하나님의 벡성으로 교제할 수 있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행 11:18; 15:9)
베드로의 변호는 성공적이었고, 도리어 할례자들은 “잠잠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습니다. 하나님께서 베드로를 통하여 자기 뜻을 분명하게 보이셨습니다. 하나님의 뜻은 할례자들과 이방인들이 공동체의 일원으로 함께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이방인에게도 생명 얻는 회개를 주셨도다”라고 인정하면서 하나님께 영광을 올렸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방인은 이방인대로, 그들이 할례를 받아야 한다는 어떤 암시도 주지 않으면서 “생명 얻는 회개”를 주셨습니다.
‘생명 얻는 회개’는 복음을 듣고 난 반응을 나타내는 것으로 생명은 ‘구원’과 동일한 의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방인에게도 영원한 생명인 ‘구원’과 ‘회개’를 주셨고, 하나님은 성령을 선물로 주셨습니다. ‘회개’는 인간의 반응이며, ‘생명을 주시는 성령’은 하나님의 공급으로서 구원과 성화의 관계입니다.(행 2:38; 3:19; 5:31; 20:21; 26:20) 이러한 관계가 하나님이 예수를 통해서 모든 민족이 하나님과 화해하고, 예수 안에서 모든 민족이 서로 화해하게 합니다. 이것은 고넬료 사건을 통해 열린 복음의 문으로 이방인들이 들어오는 것이 확산되고 있음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의 이방인 선교로 야기된 할례 문제가 등장하기까지 베드로가 이방인 고넬료 선교의 중요성을 시간이 지남에 따라 잊고 있었습니다. 이것은 이방인의 영입에 관한 것이 아니고 율법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예루살렘 사도 회의는 고넬료 사건을 예로 지적하면서 율법으로부터 자유로운 이방인 영입이 하나님의 뜻임을 다시 한번 확인해 주었습니다.(행 15:1-21)
12월 1일(월) 사도행전 9-11장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생명 얻는 회개(11:18)
저희가 이 말을 듣고 잠잠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 가로되 그러면 하나님께서 이방인에게도 생명 얻는 회개를 주셨도다 하니라. When they heard this, they had no further objections
and praised God, saying, "So then, God has granted even the Gentiles
repentance unto life.
"회당의 이방인"에 대한 묵상
사도행전은
예루살렘 너머로 복음이 확장되고 교회가 세워지는 과정을 서술하고 있다. 사도행전 1-7장이 예루살렘에 그리스도인 공동체가
세워지고 그에 따라 일어난 사건들을 담고 있다면, 8-20장은 어떻게 복음과 교회가 예루살렘를 넘어 아시아와 유럽으로 확산되어
갔는지를 그리고 있다. 이 두 번째 부분에는 여러가지 종교적 수식어로 불린 이방인들이 등장하는데, 이들에 대해 묵상해 보려 한다.
이 이방인들은 회당의 유대인들에게 호의를 가지고 그들과 지속적 연관을 갖은 이방인들을 말한다. 이방인들이 디아스포라 회당의
유대인들에게 호의를 갖게 된 이유는 여러가지이고 중첩적일 것이다. 종교적 이유가 주가 되었겠지만, 사회적 이유나 경제적 이유 또한
무시할 수 없는 요소였을 것이다. 이글에서는 이들을 통칭하여 "회방의 이방인들"이라 부르며, 어떤 이방인들이 회당 안팎에
존재하였는지, 그들의 존재가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무엇인지 묵상하려 한다.
헬라어 세 단어에 따라 사도행전의 용례와 지칭을 분류될 수 있다.
1. προσήλυτος(프로셀뤼토스)
첫
번째 단어 프로셀뤼토스는 동사가 아니라 명사이다. "개종한 사람"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일반적 개종의 의미 보다는, 특별히
다신교 신앙에서 유대교로 개종한 사람에게 사용하는 단어였다. 이 단어에 대해서는 김범식 교수님께서 일찍 일점일획말씀묵상 통하여
소개한 바 있다. 용례를 살피면 다음과 같다.
새번역 2:11a 개역 2:10a
유대 사람과 유대교에 개종한 사람(προσήλυτοι 프로셀뤼토이)과 크레타 사람과 아라비아 사람인데(새) 곧 유대인과 유대교에 들어온 사람들(개)
6:5b
안디옥 출신의 이방 사람으로서 유대교에 개종한 사람인(προσήλυτον 프로셀뤼톤) 니골라를 뽑아서(새) 유대교에 입교했던 안디옥 사람 니골라를 택하여(개)
13:43a
회중이 흩어진 뒤에도, 유대 사람들과 경건한 개종자들이(προσηλύτων 프로셀뤼톤) 바울과 바나바를 많이 따랐다.(새)
회당의 모임이 끝난 후에 유대인과 유대교에 입교한 경건한 사람들이 많이 바울과 바나바를 따르니(개)
이 그룹에 사용된 헬라어의 한글 뜻이 명백하기에, 한글로 "유대교 개종자"로 부르면 되겠다.
2. φοβέω(포베오)
두
번째 단어는 포베오이다. 단어의 뜻은, 세부적으로 따지자면 여러 차이를 말할 수 있겠지만, 일상 언어에서는 혼용할 수 있는 뜻을
가졌다. "두려워하다" "존경을 표하다"라는 뜻이다. 아래 (3)의 세보σέβω에 비해 포베오가 좀 더 부정적인 뉘앙스의
의미를 가졌지만, 이방인을 부르는 지칭으로 사용될 때는 그런 뉘앙스는 의미 없어 보인다. 사도행전에서 이 단어로 이방인을 지칭한
용례는 다음과 같다.
10:2
(가이사랴에 고넬료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는 이탈리아 부대라는 로마 군대의
백부장이었다.) 그는 경건한 사람으로 온 가족과 더불어 하나님을 두려워하며(φοβούμενος τὸν θεὸν
포부메노스), 유대 백성에게 자선을 많이 베풀며, 늘 하나님께 기도하는 사람이었다.(새)
(가이사랴에 고넬료라 하는 사람이 있으니 이달리야 부대라 하는 군대의 백부장이라) 그가 경건하여 온 집안과 더불어 하나님을 경외하며 백성을 많이 구제하고 하나님께 항상 기도하더니(개)
cf. 참고로 이 구절에 나오는 "경건한"에 사용된 헬라어는 세보가 아니라 유세보스(εὐσεβής)이며, 이 글이 설명하는 세 헬라어 단어에 해당하지 않는다.
10:22a
그들은 베드로에게 대답하였다. "고넬료라는 백부장이 보내서 왔습니다. 그는 의로운 사람이요, 하나님을 두려워하는(φοβούμενος τὸν θεόν 포부메노스 톤 쎄온) 사람입니다.(새)
그들이 대답하되 백부장 고넬료는 의인이요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이라(개)
13:16
그래서 바울은 일어나서, 손을 흔들고 말하였다. "이스라엘 동포 여러분, 그리고 하나님을 두려워하는(οἱ φοβούμενοι τὸν θεόν 호이 포부메노이 톤 쎄온) 사람들이여, 내 말을 들으십시오.(새)
바울이 일어나 손짓하며 말하되 이스라엘 사람들과 및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들아 들으라(개)
13:26
아브라함의 자손인 동포 여러분, 그리고 여러분 가운데서 하나님을 두려워하는(οἱ φοβούμενοι τὸν θεόν 호이 포부메노이 톤 쎄온) 사람들이여, 하나님께서 이 구원의 말씀을 6)우리에게 보내셨습니다.(새)
형제들아 아브라함의 후손과 너희 중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들아 이 구원의 말씀을 우리에게 보내셨거늘(개)
포베오
동사가 이방인에게 사용될 때, 원문의 형식도 일관되고((οἱ φοβούμενοι τὸν θεόν) , 번역어도
일관되다(새번역,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개역 하나님을 경외하는). 이들을 포부메노이φοβούμενοι 이방인이라 부르겠다.
3. σέβω(세보)
뜻은 "예배하다" "존경을 표하다"이다. 이 단어 분사형을 통하여 이방인을 수식하였는데, 용례는 아래와 같다.
13:50
그러나 유대 사람들은 경건한 귀부인들(τὰς σεβομένας γυναῖκας 타 세보메나스 귀나이카스)과 그 성의 지도층 인사들을 선동해서, 바울과 바나바를 박해하게 하였고, 그들을 그 지방에서 내쫓았다.(새)
이에 유대인들이 경건한 귀부인들과 그 시내 유력자들을 선동하여 바울과 바나바를 박해하게 하여 그 지역에서 쫓아내니(개)
16:14
그들
가운데 루디아라는 여자가 있었는데, 그는 자색 옷감 장수로서, 두아디라 출신이요, 하나님을 공경하는(σεβομένη τὸν
θεόν 세보메네 톤 쎄온) 사람이었다. 주님께서 그 여자의 마음을 여셨으므로, 그는 바울의 말을 귀담아 들었다.(새)
두아디라 시에 있는 자색 옷감 장사로서 하나님을 섬기는 루디아라 하는 한 여자가 말을 듣고 있을 때 주께서 그 마음을 열어 바울의 말을 따르게 하신지라(개)
17:4
그들 가운데 몇몇 사람이 승복하여 바울과 실라를 따르고, 또 많은 경건한 그리스 사람들(τῶν σεβομένων Ἑλλήνων 톤 세보메논 헬레논)과 적지 않은 귀부인들이 그렇게 하였다.(새)
그 중의 어떤 사람 곧 경건한 헬라인의 큰 무리와 적지 않은 귀부인도 권함을 받고 바울과 실라를 따르나(개)
17:17
그래서 바울은 회당에서는 유대 사람들과 이방 사람 예배자들(τοῖς σεβομένοις 토이스 세보메노이스)과 더불어 토론을 벌였고, 또한 광장에서는 만나는 사람들과 날마다 토론하였다.(새)
회당에서는 유대인과 경건한 사람들과 또 장터에서는 날마다 만나는 사람들과 변론하니(개)
18:7
바울은 거기를 떠나서, 디디오 유스도라는 사람의 집으로 갔는데, 그는 이방 사람으로서, 하나님을 공경하는(σεβομένου τὸν θεόν 세보메누 톤 쎄온) 사람이고, 그의 집은 바로 회당 옆에 있었다.(새)
거기서 옮겨 하나님을 경외하는 디도 유스도라 하는 사람의 집에 들어가니 그 집은 회당 옆이라(개)
이상에서
보듯이 세보 동사에 대한 한글 성경의 번역은 다양하다. 원어 성경은 일관되게 세보 동사의 분사형을 사용하여 이 일련의 그룹을
표현하고 있는데, 한글 성경에서는 다양한 언어로 번역하여, 이 그룹이 한 그룹일 수 있다는 인상이 희석되었다. 한글이 통일되어
있지 않으니, 이 그룹을 원어대로 세보메노이σεβόμενοι 이방인들이라 부르겠다.
이상, 복음이 이방 세계로 퍼져나가는 사도행전 장면(8-18장)에 등장하는, 유대 회당의 이방인들 존재를 확인해 보았다.
회당의 이방인들
개종자
포부메노이
세보메노이
1개종자에 대한 의견은 다르지 않다. 이방인 중에 할례까지 받아 유대인으로 사는 사람들을 말한다.
반면,
2포부메노이와 3세보메노이에 대한 의견은 갈린다. 분명한 것은 이들 역시 유대교와 유대인들에 대해 호감을 가지고, 회당 근처에
존재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둘이 같은 정도로 유대교를 받아들인 것인지, 그래서 모두 God-fearers의 범주에 들어 가는
것인지, 아니면 정도의 차이가 있었는지는 명확하지 않다. 정도의 차이가 있었다고 주장하는 측에서는 2포부메노이는 할례 빼고 모든
것을 받아 들여 실제 유대 회당의 (열등한) 일원으로 살아간 반면, 3세보메노이는 유대교에 호감은 가졌지만 회당 모임에는 참여하지
않는 이방인들로 분류한다.
어찌 되었든 하나는 분명하다. 디아스포라 회당에서 선교적 활동이 있었고, 그 덕에 유대교에 호의적인 이방인들을 회당 근처에 존재하였고, 이들이 기독교 이방 선교에 큰 도움을 주었다는 것이다.
회당은
이방 사회 속에 있었지만, 고립되지 않았고, 이방 사회와 소통하여 다양한 층위로 그들에게 호의적인 사람들을 만들었다. 교회를
돌아본다. 교회는 마을에서 고립되어 존재하고 있지는 않은가? 우리에게 포부메노이와 세보메노이는 있는가?
외국인 거주자로서 이스라엘에서 살았던 비유대인들이나 언약의 공동체 일원이 아닌 사람들을 가리킨다. 또 이스라엘 사람의 관점에서 볼 때는 유대인 외의 다른 모든 민족들을 가리킨다. 구약에 나타난 이방인 : 아브라함의 후손들과 맺은 하나님의 언약은 이스라엘 민족을 다른 모든 민족들과 구분되도록 하였다.
유대인과 이방인 - 유대인 선택된 이유, 상징, 유대인의 성경 예언(회복, 때, 방법) 이방인들의 때와 충만한 때
유대인과 이방인
신약성경에는 ‘유대인’1)과 ‘이방인’ 그리고 ‘하나님의 교회’라는 세 부류의 사람이 나옵니다(고전10:32). 유대인과 이방인은 서로 확연히 구분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교회는 유대인과 이방인으로 구성되어 있으나 유대인이나 이방인이 아닌 하나의 ‘새로운 몸’입니다.
1) 원래 유대인(Jews)은 ‘유대 지방에 거하는 사람들’이 아니라 ‘유다 지파의 사람들’을 가리킨다. 그러므로 ‘유다인’으로 쓰는 것이 맞지만 이미 우리말 성경에서 이 단어가 유대인으로 고정되었으므로 그대로 사용하였다.
유대인이 아닌 사람은 모두 이방인입니다. 유대인들의 연대는 아브라함까지 거슬러 올라가며 이들은 이집트 탈출 때에 다른 민족과 확연히 구분된 독립 민족이 되었습니다. 구약성경의 대부분은 이들의 역사를 다루고 있습니다. 이들은 땅에 있는 하나님의 백성인 반면에 교회는 하늘에 있는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유대인들과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교회도 자체의 기원을 가지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교회는 오순절에 시작되었고 연대 면에서 보면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재림하실 때에 끝이 날 것입니다. 현재 유대인들은 민족적으로 탈선한 상태에 있습니다. 하나님의 교회가 세상으로부터 하늘로 들려 올라가 휴거(携擧)를 받을 때가 되면 유대인들은 다시 자신들의 본토로 돌아와 세상 모든 민족들의 머리가 될 것입니다. 민족적으로는 이방인들이 현재 이 땅을 통치하고 있으며 성경은 이때를 ‘이방인들의 때’라고 부릅니다(눅 21:24).
"저희가 칼날에 죽임을 당하며 모든 이방에 사로잡혀 가겠고 예루살렘은 이방인의 때가 차기까지 이방인들에게 밟히리라."
유대인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유대인들의 역사는 하나님께서 셈족에 속한 아브라함을 부르셔서 새로운 민족의 조상이 되게 하시려고 했던 때 즉 노아 홍수 이후에 전개된 인류 역사의 태동기부터 시작됩니다(창 12:1-3).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열 번 나타나셨는데 우리는 하나님의 이러한 나타나심을 ‘하나님의 현현’(Theophany)이라고 부릅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맺은 약속들은 무조건적인 약속들이었으며(창 13:14-17; 15:1-5, 18-21) 이것들은 뒤에 아브라함의 아들인 이삭과(창 26:1-4) 그의 손자인 야곱에게(창 28:10-15) 거듭 확인되었습니다.
유다 민족의 역사는 인류 역사상 그 유례를 찾아보기 어려울 정도로 독특합니다.
유대인들은 억압받고 짓밟히고 포로가 되어 다른 땅으로 끌려가 여러 민족들 가운데 널리 흩어졌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들의 모든 정복자들을 이기고 살아남아 민족들 가운데서 당당하게 활보하였습니다.
다른 민족이라면 아마 타민족에게 완전히 흡수되거나 민족의 주체성 혹은 특성들의 대부분을 잃어버렸을 것입니다. 사실 지금까지 유대인들이 보존된 것은 역사의 기적입니다.
유대인들의 상징은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보여 주신 표적 즉 ‘불타면서도 소멸되지 않는 떨기나무’입니다. 인류 역사상 유다 민족만큼 하나님의 존재를 뚜렷하게 눈으로 본 민족은 없습니다. 그들을 위해 홍해의 물이 갈라져서 벽이 되었고 요르단 강이 갈라졌습니다. 그들은 광야에서 기적적으로 음식을 먹었고 구름기둥과 불기둥으로 하나님의 보호와 인도를 받았습니다.
가나안 전쟁에서 양 뿔 나팔을 불자 그들이 포위한 여리고 성벽이 무너졌고(수 6:1-27) 그들이 적을 섬멸할 때까지 태양과 달이 중천에 머물러 서기도 했습니다(수 10:12-14).
또 주님의 천사가 그들 주위에서 진을 치고 그들을 보호했으며 185,000명이나 되는 아시리아 병사들을 죽이고 그들을 구해 내기도 했습니다(왕하 19:35).
그리고
유다 민족만큼 위대한 인물들을 많이 배출한 민족도 없습니다. 아브라함과 같은 믿음의 사람, 모세와 같은 위대한 지도자 겸
입법자, 이집트의 요셉이나 바빌론의 다니엘과 같은 정치가, 다윗과 같은 훌륭한 왕, 지혜의 사람 솔로몬 등이 구체적인 예들입니다.
어느 민족도 이사야와 예레미야와 에스겔 그리고 다니엘 같은 훌륭한 대언자들을 배출한 적이 없으며 특히 모든 사람보다도 뛰어나신 ‘갈릴리 사람’ 예수 그리스도를 배출해 낸 적이 없었습니다.
아마도 주후 1세기에 사도 바울보다 더 빛났던 사람은 없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20-21세기 현시대에서 역사를 만들어 왔고 역사를 만들고 있는 사람들 역시 유대인들입니다.
이와 같이 유다 민족이 놀랍게 보존되어 온 사실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께서 그들로 하여금 위대한 임무를 수행하게 하셨고 지금도 수행하게 하신다는 전제만 유일한 이유가 될 수 있습니다.
그들이 선택된 이유는
첫째, 한 하나님이 존재하신다는 것을 확인시키고 가르치기 위함이었습니다.
둘째, 그들은 성경을 기록하고 보존하며 전수하도록 하기 위해 부름을 받았습니다. 즉 하나님의 말씀은 유대인들에게 맡겨졌습니다(롬 3:1-2). 모든 성경이 유대인들에 의해 기록되었습니다. 유대인들은 성경 기록을 보존하고 그것이 손상되지 않도록 소중하게 간수하는 데 특별한 주의를 기울였습니다.
셋째, 그들이 세워진 이유는 하나님께서 그들을 통해 세상에 구원자를 보내기 위함이었습니다. 예수님은 누구였습니까? 유대인이었습니다.
넷째, 그들이 세워진 또 다른 이유는 이 세상을 도덕적 부패로부터 구해 내기 위함이었습니다. “구원이 유대인에게서 난다.”(요 4:22)고 말씀하셨을 때 예수님은 단순히 그들로부터 구원자 예수가 나온다는 것을 의미하셨을까요? 아니면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라.”(마 5:13)고 친히 말씀하신 바와 같이 유다 민족이 세상의 도덕적 부패를 막는 도구가 되어야
하며, 그들이 더 이상 하나의 민족으로 존재하지 않게 될 때가 곧 세상이 심판을 받을 때라는 것을 의미하셨을까요?
전자도
분명히 일리가 있지만 저는 예수님께서 후자도 의미하셨다고 생각합니다. 세상의 민족들이 도덕적으로 그리고 실질적으로 구원받는 것과
땅에 있는 인류가 보존되는 것은 유대인이 하나의 확실한 민족으로 보존되고 존속되는가에 달려 있다고 저는 믿습니다.
세상이
지금과 같이 타락하게 된 이유 중 하나는 유대인들이 소금으로서의 성질 즉 자신들의 짠맛을 잃어버렸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그 맛을
회복할 때까지 세상의 타락은 계속되어 극에 달하게 될 것이며 결국 세상 민족들의 부패로 인한 악취로 말미암아 하나님께서 역사에
개입하실 것이고 이때에 유대인들은 회심하여 소금으로서 제맛을 내게 될 것입니다.
그리하여 그들은 세상사를 주도하는 으뜸 민족이 될 것입니다.
오늘날 유대인들에게는 시내 광야에서 그들을 인도하던 구름기둥이나 불기둥이 없습니다. 또한 예전처럼 희생 제단이나 희생 제물 그리고 제사장도 그들에게 없습니다. 그들은
비록 유월절은 지키지만 유월절 어린 양을 잡지는 않습니다. 속죄일은 지키지만 속죄를 위한 피는 흘리지 않습니다. 모든 희생
예물과 헌물은 중단되었습니다. 그들에게는 왕도 없고 재판관도 없으며 영감을 받은 성경 기록자도 없습니다. 이제는 우림과 둠밈도 하나님의 상징이 되지 못합니다. 여전히 하나님의 말씀은 귀하지만 ‘열린 환상’은 없습니다. 그들에게 허락하신 마지막 위대한 대언자는 ‘갈릴리 사람’ 예수님이셨으나 그들은 그분을 배척했습니다. 그들의 조상들은 요셉을 배척하고 그를 붙잡아 은 20개를 받고 팔아넘겼으나 그는 그들의 시야 속에서 사라져 이집트에서 파라오의 왕좌에 앉게 되었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그들은 자신들의 요셉이신 예수님을 배척하고 그분을 붙잡아 은 30개를 받고 팔아넘겼으나 지금 그분께서는 그들의 시야 속에서 사라져 자기 아버지의 왕좌에 앉아 계십니다.
왜
이렇게 되었을까요? 그들이 이방인들에 의해 민족적으로 밀려났습니까? 혹은 교회라 불리는 ‘하나님의 백성’에 의해
밀려났습니까?2) 과연 유대인들이 다시는 자신들의 땅과 왕과 수도를 얻지 못할까요? 또 국가의 위상을 회복하지 못할까요? 오늘날3) 그들이 처한 상황은 호세아서 3장 4-5절의 예언이 그대로 성취된 것이 아닌가요?
"이는
이스라엘 자손이 많은 날 동안 왕도 없고 통치자도 없고 희생물도 없고 형상도 없고 에봇도 없고 드라빔도 없이 거하다가 그 귀에
이스라엘 자손이 돌아와 주 자기들의 하나님과 자기들의 왕 다윗을 찾고 마지막 날들에 주와 그분의 선하심을 두려워할 것이기
때문이라."
2) 주후 313년 이후 천주교회와 또 천주교회에서 나온 프로테스탄트 교회의 특정 교파들은 한결같이 교회가 이스라엘을 대체하였다는 ‘이스라엘 대체 신학’을 믿어 왔다. 그러나 성경은 분명하게 이스라엘을 향한 미래가 있음을 보여 준다.
3) 라킨 목사가 이 글을 쓴 때는 1920년대였다. 그는 1948년에 유다 민족이 이스라엘 국가로 독립하는 것을 목격하지 못했으나 성경을 면밀히 상고함으로써 말씀을 통해 이러한 일들이 실제로 일어날 것을 이미 예견하고 있었다. 얼마나 놀라운가? 성경을 문자 그대로 믿었기에 이런 일이 가능하였다.
성경의 예언에 따라 예루살렘은 반드시 이방인들의 때가 차기까지 이방인들에게 짓밟혀야 하지 않겠습니까?(눅 21:24).
바울은 이에 대해 이렇게 말했습니다. "형제들아, 너희가 스스로 지혜로운 것으로 여기지 않게 하기 위하여 이 신비에 대해 너희가 모르기를 내가 원치 아니하노니 그것은 곧 이방인들의 충만함이 이를 때까지 일부가 눈머는 일이 이스라엘에게 생긴다는 것이라. 그리하여 온 이스라엘이 구원을 받으리라. 이것은 기록된바, 시온에서 구출자가 나와 야곱에게서 경건치 아니한 것을 돌이키리니 내가 그들의 죄들을 제거할 때에 이것이 그들을 향한 내 언약이니라, 함과 같으니라"(롬 11:25-27).
이러한 성경 말씀들을 통해 우리는 유대인들이 이방인들이나 혹은 교회에 의해 밀려나지 않았음을 알 수 있으며 때가 이르면 그들이 다시 이 땅에 하나의 나라를 구성할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유다 백성의 장래를 예견하려 할 때 우리는 쓸데없이 억측을 부리지 말고 신중을 기해야 합니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성령님께서 대언자들을 통해 예언하신 것을 모두 모아서 논리 정연한 순서로 배열하는 것입니다.
이 같은 방법은 매우 단순하며 그 결과 역시 확실합니다.
유대인들의 회복
1. 그 사실에 관하여
"또 내가 내 백성 이스라엘의 포로 된 자들을 다시 데려오리니 그들이 피폐한 도시들을 건축하여 거기 거주하며 포도원들을 세우고 그것들의 포도즙을 마시며 또한 동산들을 만들어 그것들의 열매를 먹으리라.
내가 그들을 그들의 땅에 심으리니 그들이 내가 그들에게 준 그들의 땅에서 다시는 뽑히지 아니하리라. 주 네 하나님이 말하노라"(암9:14-15).
어떤 이들은 유대인들이 바빌론 포로 생활에서 돌아왔을 때 이 예언이 성취되었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그 뒤에도 그 땅에서 쫓겨났기 때문입니다. 이 약속은 그들이 더 이상 자기들의 땅에서 쫓겨나지 아니하리라는 것입니다.
이 일은 미래에 있을 완전한 회복을 가리킵니다. 바빌론 포로 생활에서 되돌아오는 것은 첫째 회복이었고 지금 이 성경 구절은 둘째 회복에 관해 말하고 있습니다.
"그
날에 [천년왕국이 임하는 때에] 주께서 다시 자신의 손을 두 번째 세우사 자신의 백성 중의 남은 자들 곧 남게 될 자들을 되찾되
아시리아와 이집트와 바드로스와 구스와 엘람과 시날과 하맛과 바다의 섬들로부터 되찾으실 것이요, 또 그분께서 민족들을 위하여 기를
세우시고 이스라엘의 쫓긴 자들을 모으시며 땅의 사방에서부터 유다의 흩어진 자들을 함께 모으시리라" (사 11:11-12).
유대인들은 지금까지 단 한 번밖에 회복된 적이 없었습니다. 그 회복은 바빌론으로부터의 회복이었습니다. 이집트로부터 가나안까지 진군한 것은 회복이 아니었습니다. 그 전에 가나안을 소유한 적이 없었으므로 그 어떤 것도 회복되었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이스라엘의 자손들은 여호수아가 팔레스타인 땅을 정복하기 전까지 그 땅을 소유한 적이 없었습니다. 유대인들이 바빌론 포로생활에서 돌아왔을 때는 동쪽에서 나왔지만 이제 미래에 돌아올 때에는 북쪽과 모든 나라들로부터 나올 것입니다.
"주가
말하노라. 그런즉, 보라, 날들이 이르리니 다시는 말하기를, 이스라엘 자손을 이집트 땅에서 데리고 올라오신 주께서 살아 계신다,
하지 아니하고 오히려 말하기를, 이스라엘 자손을 북쪽 땅과 모든 땅 곧 친히 그들을 쫓아내어 머물게 한 모든 땅에서 데리고
올라오신 주께서 살아 계신다, 하리라. 내가 그들을 그들의 조상들에게 준 그들의 땅으로 다시 데려가리라"(렘 16:14-15).
이 말씀과 더불어 다음의 말씀도 참조하기 바랍니다.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와 함께하느니라. 내가 네 씨를 동쪽에서부터 데려오고 너를 서쪽에서부터 모으리라. 내가 북쪽에게 이르기를, 내놓으라, 할 것이요, 남쪽에게 이르기를, 붙잡아 두지 말라. 내 아들들을 먼 곳에서 데려오고 내 딸들을 땅 끝에서 데려오라, 하리니 곧 내 이름으로 불리는 모든 자라. 내가 내 영광을 위하여 그를 창조하고 그를 지었으며 참으로 내가 그를 만들었느니라" (사 43:5-7).
2. 그때에 관하여
이방인들의 때가 성취되면 다음과 같이 될 것입니다. "또 그들이 칼날에 쓰러지고 모든 민족들에게 포로로 잡혀가며 예루살렘은 이방인들의 때가 찰 때까지 이방인들에게 짓밟히리라"(눅21:24).
3. 그 방법에 관하여
(a) 회심하지 않은 상태에서 돌아옴
"내가
너희를 이교도들 가운데서 취하고 모든 나라에서 너희를 모아 너희 땅으로 데려가리라. 그때에 내가 정결한 물을 너희 위에 뿌려
너희를 정결하게 하되 너희의 모든 더러움과 너희의 모든 우상으로부터 너희를 정결하게 하리라. 또 내가 새 마음을 너희에게 주고 새
영을 너희 속에 두어 너희 살에서 돌 같은 마음을 제거하고 너희에게 살로 된 마음을 주리라. 또 내가 내 영을 너희 속에 두어
너희로 하여금 내 법규 안에서 걷게 하리니 너희가 내 판단의 법도를 지켜 행하리라" (겔 36:24-27).
(b) 회심하기 전에 심판을 받음
"주 하나님이 말하노라. 내가 살아 있음을 두고 맹세하노니 내가 반드시 강한 손과 뻗은 팔과 쏟아붓는 격노로 너희를 다스릴 것이요, 또
강한 손과 뻗은 팔과 쏟아붓는 격노로 너희를 백성들에게서 데리고 나오며 너희가 흩어져 거하던 나라들에서 너희를 모으고 백성들의
광야로 너희를 데려가 거기서 너희와 얼굴을 마주 대하여 변론하되 내가 이집트 땅의 광야에서 너희 조상들과 변론한 것같이 너희와
변론하리라. 주 하나님이 말하노라. 내가 너희를 막대기 아래로 지나가게 하고 언약의 속박 속으로 들어가게 하며 너희 가운데서 반역하는 자들과 내게 범법하는 자들을 제거하리라. 그들이 머무는 나라에서 내가 그들을 데리고 나오되 그들이 이스라엘 땅으로 들어가지는 못하리니 내가 주인 줄을 너희가 알리라" (겔20:33-38).
이 일 뒤에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자신의 용광로에 던져 넣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 하나님이 이같이 말하노라. 너희가 다 찌꺼기가 되었나니 그런즉, 보라, 내가 너희를 예루살렘 한가운데로 모으리라. 그들이 은과 놋과 쇠와 납과 주석을 모아 용광로 한가운데 넣고 그 위에 불을 내뿜어 녹이는 것같이 내가 친히 분노하고 격노하는 가운데 너희를 모아 거기에 두고 녹이리라. 참으로
내가 너희를 모아 내 진노의 불속에서 너희 위에 불을 내뿜을 터인즉 너희가 그것의 한가운데서 녹되 은이 용광로 한가운데서 녹는
것같이 너희가 그것의 한가운데서 녹으리니 나 주가 내 격노를 너희 위에 부은 줄을 너희가 알리라" (겔 22:19-22).
"만군의 주가 말하노라. 보라, 내가 내 사자를 보내리니 그가 내 앞에서 길을 예비할 것이요, 또 너희가 구하는 주가 갑자기 자신의 성전에 임하리니 곧 너희가 기뻐하는 언약의 사자라. 보라, 그가 임하리로다. 그러나 그가 임하는 날을 누가 견디겠느냐? 그가 나타나는 때에 누가 서겠느냐? 그는 정련하는 자의 불과 같고 세탁하는 자의 비누와 같으니라. 그가 은을 정련하여 깨끗하게 하는 자같이 앉아서 레위의 아들들을 깨끗하게 하되 금과 은같이 그들을 깨끗하게 하여 그들이 의 안에서 주에게 헌물을 드리게 하리라" (말 3:1-3).
"주가 말하노라. 그 온 땅에서 그 안의 삼분의 이는 끊어져 죽을 것이요, 오직 삼분의 일만 그 안에 남으리라. 내가 그 삼분의 일을 불 가운데로 지나게 하고 은을 정제하듯 그들을 정제하며 금을 단련하듯 단련하리라.
그들이 내 이름을 부르리니 내가 그들의 말을 들으며 또 말하기를, 그것은 내 백성이라, 할 것이요, 그들은 말하기를, 주는 내 하나님이시로다, 하리라" (슥 13:8-9)
유대인들은 아직까지 위에서 기록된 것과 같은 시련을 당한 적이 없었습니다. 예레미야서 30장 4-7절과 다니엘서 12장 1절은 이 환난 기간을 ‘야곱의 고난의 때’라고 말하며 예수님은 친히 이것을 ‘큰 환난’이라고 부르셨습니다. 한편 예수님과 스가랴 대언자는 이 기간을 주님의 재림과 연관시키고 있습니다(마 24:21-31; 슥 14:1-11). 이 무시무시한 심판의 결과 유대인들은 비참한 가운데 주님을 부르게 될 것입니다.
"내가
다윗의 집과 예루살렘 거주민들 위에 은혜의 영과 간구하는 영을 부어 주리니 그들이 나 곧 자기들이 찌른 나를 바라보고 사람이
자기 외아들을 위하여 애곡하듯 그를 위하여 애곡하며 사람이 자기의 처음 난 자를 위하여 쓰라리게 슬퍼하듯 그를 위하여 쓰라리게
슬퍼하리로다. 그 날에 마치 므깃돈 골짜기의 하다드림몬에서의 애곡과 같은 큰 애곡이 예루살렘에 있으리라"(슥 12:10-11).
이렇게 된 뒤에 그리스도께서 예루살렘의 올리브 산으로 다시 돌아오실 것입니다.
"그
날에 그분의 발이 예루살렘 앞 동쪽에 있는 올리브 산 위에 설 것이요, 올리브 산이 거기의 한가운데서 동쪽과 서쪽으로 갈라지므로
심히 큰 골짜기가 생길 것이며 그 산의 반은 북쪽으로, 그 산의 반은 남쪽으로 이동하리라" (슥 14:4).
이때에야 비로소 유다 민족은 하나의 민족으로서 단 하루 만에 태어날 것(즉 회심할 것)입니다.
"누가 그러한 일을 들었느냐? 누가 이러한 일들을 보았느냐? 땅이 하루에 만들어져서 열매를 내겠느냐? 혹은 한 민족이 순식간에 태어나겠느냐? 시온은 진통하자마자 자기 자녀들을 낳았도다" (사 66:8).
이스라엘(야곱)의 자손들이 이집트로부터 나올 때 이집트 사람들의 재물을 취한 것처럼 마지막 때에 그들이 자신들의 본토로 돌아올 때에 그들은 이방인들의 재물을 취할 것입니다(사 60:9; 61:6). 이처럼 그들이 자신들의 본토로 다시 돌아갈 때에는 주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모든 것을 소유하고 차지하게 될 것입니다.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주셨던 ‘왕가의 땅’은 ‘이집트의 강’ 곧 나일강에서부터 ‘큰 강’ 곧 유프라테스 강까지입니다(창 15:18).
대언자 에스겔에 따르면 이곳은 다마스커스의 북동쪽 하맛에서부터 남쪽에 있는 가데스까지입니다(겔 48:1-29).
이때에 예루살렘 성전이 재건되고(에스겔서 40-48장 참조) 주님의 영광이 다시 돌아오며 희생 예물이 다시 드려질 것입니다. 그리고 정부가 재수립되고 땅의 민족들이 이스라엘을 통해 복을 받게 될 것입니다(슥 8:20-23).
Ⅱ. 이방인
인류 역사상 세상에서 가장 두드러진 이방 국가들은 이집트, 아시리아, 바빌론, 메대-페르시아, 그리스 그리고 로마였습니다. 하나님의 선민인 이스라엘 백성이 우상숭배에 빠져 포로가 되어 바빌론으로 끌려갔을 때 이방인들이 그들의 땅을 차지하였습니다. 이집트와 아시리아 그리고 바빌론 같은 국가들은 오랫동안 이스라엘을 덮쳐 그들을 정복하려 하였으나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의 죄악이 찰 때까지 그들을 보이지 않는 끈으로 묶어 두셨습니다. 그 뒤에 그들을 풀어놓으시고 세상의 권능이 바빌론 왕 느부갓네살에게 넘어가도록 허락하셨습니다. 이 일은 주전 606년경에 일어났으며 이때부터 그리스도께서 누가복음 21장 24절에 말씀하신 ‘이방인들의 때’가 시작되었습니다.
‘이방인들의 때’란 하나님께서 심중에 정하신 어떤 한정된 연대의 기간입니다. 바울이 로마서 11장 25절에서 말한 ‘이방인들의 충만함이 이르는 것’과 이것을 혼동해서는 안 됩니다. 이방인들의 충만함이 이르는 것’은 교회를 이루기 위해 부름을 받은 이방인들이 충만히 차는 것을 가리킵니다. 이방인들의 충만함이 이르기까지 유대인들 가운데 ‘부분적으로 눈먼 것’이 계속될 것입니다. 그리고 교회가 공중으로 휴거를 받을 때가 이르면 유대인들은 자신들의 본토로 돌아오게 될 것입니다. ‘이방인들의 충만함이 이르는 것’은 오순절부터 시작되었으며 ‘이방인들의 때’가 완료되기 7년 전에 그들의 충만한 수가 다 차게 될 것입니다.
‘이방인들의 때’에 관해서는 다니엘서에 자세히 설명되어 있습니다. 다니엘서에는 느부갓네살이 꾼 꿈과 다니엘이 본 네 ‘환상’이 포함되어 있는데 이것들은 모두 ‘이방인들의 때’와 관련이 있습니다. 느부갓네살 왕은 즉위 제2년에 한 꿈을 꾸었습니다(단 2:31-45).
그는 꿈속에서 하나의 거대한 신상을 보았습니다. 이 신상은 세상 왕국들을 상징하는 것으로서 그 왕국들의 통일성과 역사적 계승을 보여 주는 것이었습니다. 역사를 통한 이방인들의 통치가 거대한 ‘금속으로 된 형상’으로 표현되었습니다.
신상에 사용된 금속의 질적 가치가 점점 하락하는 것은 세상 왕국들의 쇠퇴를 보여 줍니다. 신상의 무게 또한 줄어들고 있습니다. 신상은 머리 부분이 가장 무겁습니다. 신상을 구성하고 있는 네 금속은 연이어 일어난 네 개의 세상 왕국을 의미합니다(단 2:37-40). 이것은 곧 느부갓네살 왕의 때로부터 그리스도의 재림 때까지 네 왕국 즉 바빌론, 메대-페르시아, 그리스 그리고 로마 왕국이 세상의 정부로 계승된다는 것을 보여 줍니다. 이 왕국들의 개수뿐만 아니라 그 이름들까지도 계승하는 순서대로 밝혀져 있습니다(단 2:38-40; 8:20-21; 9:26). 신상을
구성하고 있는 금속들의 특성 속에 잘 나타난 바와 같이 신상의 쇠퇴는 그 정부들의 특성을 예언의 형태로 잘 보여 주고 있습니다. 이 정부들은 느부갓네살의 통치를 통해 볼 수 있듯이 절대 군주제로 시작하여, 신상의 발을 구성하고 있는 철과 진흙을 통해 볼 수
있듯이 종국에 가서는 독재적 민주 정치의 정부 형태로 쇠퇴해 가고 있습니다(단 2:41-43).
이것을 통해 우리는 이방인들의 통치가 몸의 모든 기관에게 명령을 하달하는 으뜸 기관인 머리에서부터 머리가 명령한 곳으로 몸을 옮겨주는 구실만 하는 발로 점차적으로 옮겨가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신상은 ‘산에서 깎아 낸 돌’에 의해 발에 일격을 맞고 부서져서 산산조각이 나고 맙니다. 여기서 이 돌은 점진적으로 땅에
가득 차서 신상을 밀어내지 않고 일격에 그것을 부수고 맙니다. 돌이 신상을 친 것은 심판이지 결코 은혜가 아닙니다. 그러므로
이 돌은 기독교를 의미한다고 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기독교란 하나의 과정인 반면에 이 돌이 신상을 친 것은 갑작스러운
재난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신상의 멸망의 때는 발가락이 형성된 이후입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듯이 신상의 두 다리는 주후
364년에 가서야 나타났고4) 열 발가락은 아직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이 돌이 신상 위에 떨어지는 때는 이 왕들의 시대(단 2:44) 곧 장차 있을 열 발가락이 대표하는 왕들의 시대로서 이것은 다니엘의 해석 속에 명확하게 설명되어 있습니다(단 7:23-24).
4) 로마제국이 동로마와 서로마로 분열된 시기를 말한다.
여기에 나오는 돌은 그리스도를 나타냅니다. 네 금속으로 표현된 네 왕국은 문자 그대로 실질적인 왕국들입니다. 그러므로 뒤따르게 되는 ‘돌 왕국’ 또한 문자 그대로의 실질적인 왕국이어야만 합니다. 왜냐하면 ‘돌 왕국’이 이 세상 왕국들을 파괴하고 대신하여 온 땅을 정복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 ‘돌 왕국’은 그리스도의 ‘천년왕국’이며 신상이 상징하는 ‘이방인들의 때’는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재림하실 때에야 비로소 끝나게 됩니다.
느부갓네살이 이 신상에 관한 꿈을 꾼 지 약 48년이 지난 뒤에 다니엘은 네 짐승에 관한 이상을 보았습니다(단 7:1-8, 15-27). 이 짐승들의 특성을 살펴보면 이것들은 짐승의 왕인 사자에서부터 철로 된 이와 놋으로 된 발톱과 머리에 열 뿔을 가진 짐승 즉 말로 묘사할 수 없는 기이한 괴물에까지 격하됩니다. 다니엘은 이 짐승들이 이전에 보았던 신상의 네 금속과 일치하며 같은 것을 상징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이 짐승들에 대해 곰곰이 생각하는 중에 다니엘은 넷째 짐승의 머리 위에 있는 열 뿔 가운데서 하나의 작은 뿔이 솟아나는 것을 보고 놀랐습니다(단 7:8). 이것은 그를 당황하게 만들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느부갓네살의 신상의 열 발가락 가운데서 작은 발가락이 나오는 것을 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이를 통해 다니엘은 하나님께서 이방인의 왕 느부갓네살에게 보여 주기에는 적합하지 않은 또 하나의 계시를 자신에게 보여 주셨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또한 다니엘은 넷째 짐승의 열 뿔 가운데서 일어난 그 작은 뿔로 인해 그 열 뿔 가운데 세 개가 그 앞에서 뿌리째 뽑히고 그 작은 뿔이 사람의 눈과 입을 가진 것을 보았습니다.
이렇게 해서 네 개의 세상 왕국이 계승되는 순서대로 다니엘에게 계시되었을 뿐만 아니라 작은 뿔의 환상을 통해 이방인들의 마지막 왕 곧 적그리스도도 그에게 계시되었습니다.
이 네 왕국이 처음에는 금 머리를 가진 금속 신상으로 나타나고 다음에는 일련의 짐승들로 나타나는 이유는 세상 왕국들을 보는 하나님의 관점과 인간의 관점이 다르다는 것을 보여 주기 위함입니다.
사람들은 네 왕국 속에서 부와 위엄과 권력이 집중된 모습을 보는 반면에 하나님은 서로 삼키고 싸우는 데 급급한 욕심 많은 일련의 짐승들로 이 왕국들을 보십니다.
이 네 개의 세상 왕국은 이미 이름이 밝혀진 대로 차례차례 서로를 계승해야 했지만 시간상으로 끊어지지 않으면서 연속적으로 서로를 계승하지는 않았습니다.
이러한 사실은 숫양과 숫염소의 환상으로 다니엘에게 계시되었습니다(단 8:1-27). 알렉산더 대왕의 죽음으로 인해 숫염소의 큰 뿔인 그리스 왕국이 네 개의 소왕국들 곧 마케도니아, 트라키아, 시리아 그리고 이집트로 분열되었습니다. 이러한 상태는 주전 323년에서 주전 30년까지 지속되었습니다. 주전 30년에 로마는 넷째 세계 대제국이 되었고 주후 364년까지 지속되다가 동서로마로 분열되었습니다. 비록 로마제국이 주후 364년에 이처럼 동서로마로 분열되어 사라졌지만 법이나 종교적 영향력에 있어서는 여전히 영향을 끼치고 있습니다. 또 신상의 열 발가락과 다니엘이 본 넷째 짐승의 열 뿔이 보여 주듯이 이것은 끝 날에 재건될, ‘열 개의 왕국으로 된 하나의 세계 권력’으로 부상할 것입니다.
우리는 이방인들의 때가 언제 끝나는지 알 수 없습니다. 어떤 이들은 ‘때’(Times)란 예언적 시간이고 예언적 ‘때’는
360일로 된 1년이며 하루가 1년을 의미하므로 한 ‘때’(Time)는 360년에 해당한다고 주장합니다. 또 이들은
레위기에서 모세가 이스라엘의 자손들이 하나님께 불순종한다면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일곱 배(7 times)로 벌을 내리실 것이라고
예언했으며(레 26: 18-21, 24-28) 예수님께서 이방인들의 때에 관해 말씀하셨을 때에도 이 일곱 배(혹은 일곱 때, 7
times)에 대해 언급한 것이라고 주장합니다.5) 5) 영어로 ‘times’는 ‘때’도 되고 ‘배’도 되므로 레위기의 ‘7 times’를 ‘일곱 때’로 해석할 수 있다는 주장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한 때’가 360년이라면 ‘일곱 때’는 2520년이 될 것이며, 이방인들의 때가 주전 606년경에 시작되었으므로 주후 1914년에 끝나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이들의 주장이 잘못되었다는 것은 그 날이 이미 지나갔지만 이방인들의 때가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사실에서 잘 드러납니다.
성경에서 한 달은 30일이고(창 7:11-24; 8:3-4) 1년은 360일입니다. 그러나
주전 606년부터 주후 1914년까지 365.25일을 1년으로 하는 율리우스력(구태양력)으로 2520년에 해당하며 이것을
360일로 된 유다력으로 환산한다면 2520년보다도 36.75년 더 많은 2556.75년이 됩니다. 그렇게 되면 이방인들의 때는
주후 1877년에 끝났어야 합니다.
사실 레위기의 ‘일곱 배’(혹은 일곱 때)는 ‘예언적인 때’(Prophetic times)를 지칭하지 않습니다. 이스라엘의 자손들은 정확히 일곱 번 노예와 포로로 넘겨져 벌을 받았습니다. 이들이 현재 전 세계에 흩어져 있는 것은 노예 상태도 포로도 아니므로 여기에 이것을 더할 수 없습니다. 이방인들의 때에 대해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그때가 주전 606년에 시작하여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셔서 ‘돌 왕국’ 즉 그리스도의 천년왕국을 세우실 때에 끝이 날 것이라는 사실입니다.6)
6) 여기서 저자가 ‘돌 왕국’이라고 한 것은 다니엘서 2장 44-45절에서 신상을 단번에 산산조각 내고 영원한 왕국을 이루는 돌 즉 ‘사람의 손으로 깎아 내지 않은 돌’을 언급하기 위한 것이다.
구약과 신약, 유대인과 이방인은 어떤 차이가 있을까요?
오늘날 많은 분들이 성경을 들고 있습니다. 또한 그 성경을 읽고, 믿으며, 말씀에 따라 살아가려고 하고 있지요. 그런데 성경
전부를 다 믿고 있으면서도 믿지 못하는 것이 하나가 있습니다. 바로 “구약과 신약의 차이”를 믿지 못하고 있는 것이지요. 물론
성경은 구약과 신약을 합하여 한 권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들을 위하여 주신 말씀임에는 분명합니다.
그러나 구약의 말씀들이 누구에게 어떤 목적으로 하신 것인지, 신약과 구약은 어떤 차이가 있는지, 날 때부터 백성으로 태어나
백성의 삶을 살았던 유대인과,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져 거듭난 삶을 사는 이방인이 어떤 차이가 있는지를 알지 못한 채, 많은
이들은 구약의 유대인을 향한 말씀들을 신약의 이방인들에게 무분별하게 적용해 왔습니다. 그리고 그 결과 성경을 바라보는 시각과
각도가 빗나가게 되었으며, 올바른 진리 안에 걸을 수 없었지요.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일러 가라사대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고하여 이르라 나는 여호와 너희 하나님이라
너희는 그 거하던 애굽 땅의 풍속을 좇지 말며 내가 너희를 인도할 가나안 땅의 풍속과 규례도 행하지 말고 너희는 나의 법도를
좇으며 나의 규례를 지켜 그대로 행하라 나는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니라”
(레위기 18:1-4)
“나는 너희 하나님이 되려고 또는 가나안 땅으로 너희에게 주려고 애굽 땅에서 너희를 인도하여 낸 너희 하나님 여호와니라”
(레위기 25:38)
광야의 성막과 불기둥을 표현한 그림.
우리가 구약을 살펴보면 한 가지 알 수 있는 것이 있습니다. 바로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을 부를 수 있는 자들은 오직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 민족 뿐이었다는 사실이지요. 그들 이외에는 어떠한 민족들도 하나님의 이름을 부를 수 없을 뿐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들과 언약과 축복 안에 들어올 수 없었습니다.
여러분께서는 창세기부터 말라기까지 구약의 말씀들을 상세히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여호와를 경외하라, 여호와를 섬기라, 이방
족속의 풍속을 따르지 말고 여호와를 사랑하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크나큰 축복이 임하리라는 그 모든 말씀들은 누구에게 주어진
것이었습니까? 그것은 다른 어떠한 민족들도 아니었습니다. 오로지 자기 백성에게만 주신 말씀이었지요.
“하나님이 또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같이 이르기를 나를 너희에게 보내신 이는 너희
조상의 하나님 곧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 여호와라 하라 이는 나의 영원한 이름이요 대대로 기억할 나의
표호니라”
(출애굽기 3:15)
아브라함을 부르시고, 이삭을 부르시고, 야곱을 부르셨던 하나님, 그 하나님께서는 스스로를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이라 칭호하시며, “너희 조상의 하나님”이라고 하시며, 이스라엘 민족에게 말씀해 오셨지요. 하나님께서 가나안 땅을 지정하여
주신 것도 이스라엘 백성을 위한 것이었고, 엄청난 기적과 하나님의 능력을 보이시며 출애굽을 시키신 것도 이스라엘 백성이었습니다.
또한 광야에서 성막을 짓게 하시고 십계명을 주신 것도 이스라엘 민족이었으며, 요단강을 건너 다시금 가나안 땅에 들이신 것도
이스라엘 민족이었지요.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모세와 여호수아를 통하여, 사무엘과 엘리야와 이사야와 같은 여러 선지자들을 통하여
이스라엘 민족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모세가 백성에게 이르되 너희는 두려워 말고 가만히 서서 여호와께서 오늘날 너희를 위하여 행하시는
구원을 보라 너희가 오늘 본 애굽 사람을 또 다시는 영원히 보지 못하리라 여호와께서 너희를 위하여 싸우시리니 너희는 가만히
있을지니라”
(출애굽기 14:13-14)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고하여 이르라 나는 여호와 너희 하나님이라 너희는 그 거하던 애굽 땅의 풍속을
좇지 말며 내가 너희를 인도할 가나안 땅의 풍속과 규례도 행하지 말고 너희는 나의 법도를 좇으며 나의 규례를 지켜 그대로 행하라
나는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니라”
(레위기 18:2-4)
아브라함과, 모세와, 여호수아와, 사무엘과, 다윗과, 솔로몬과, 엘리야와, 그 모든 구약의 이야기들을 여러분께서는 자세히
들여다 보시기 바랍니다. 그 수천 년의 시간 동안, 하나님께서는 누구와 말씀해 오셨으며, 구약에 기록된 것은 누구의 역사입니까?
바로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 이스라엘 민족에게 말씀하시며 그들과 함께하신 이야기이지요.
다시 말해, 구약은 하나님과 유대인과의 이야기라고 요약할 수 있습니다. 즉,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나는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니라”하시며 그들과 동행하시고 엄청난 기적과 이적을 통해 그들을 돌보시고, 섬기시고, 끝까지 사랑하시는 모습을
보여주셨으나, 이스라엘 백성들은 계속하여 하나님을 믿지 못하고, 하나님을 배반하며, 하나님을 떠나 다른 신을 섬기고 이방의 풍속을
좇았지요. 바로 이것이 구약 성경의 내용입니다.
그러나 구약에 나타난 이방인들의 모습은 어떠했습니까? 이스라엘 백성과 원수가 되고, 가나안 땅에서 쫓겨나야 하며, 전쟁을
통해 진멸되어야만 하는 자들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요단강을 건넌 후에 가나안 땅에 들어가는 모습을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땅에 살고있는 족속들을 칼로 쳐서 진멸하며, 멸절시킬 것을 명하셨지요. 여호와께서 그들을 너희 손에 붙이셨다
하시며, 태양을 하늘에 머물도록 하는 기적까지도 보이시며 가나안 땅의 족속들을 멸하도록 하셨습니다.
“오직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기업으로 주시는 이 민족들의 성읍에서는 호흡 있는 자를 하나도 살리지
말찌니 곧 헷 족속과 아모리 족속과 가나안 족속과 브리스 족속과 히위 족속과 여부스 족속을 네가 진멸하되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명하신대로 하라”
(신명기 20:16-17)
이스라엘 <아얄론 골짜기>. 기브온과 아얄론 골짜기는 이스라엘 백성이 아모리 사람과 전쟁할 때에 태양과 달이 그대로 머물렀던 장소입니다.
“여호와께서 아모리 사람을 이스라엘 자손에게 붙이시던 날에 여호수아가 여호와께 고하되 이스라엘 목전에서
가로되 태양아 너는 기브온 위에 머무르라 달아 너도 아얄론 골짜기에 그리할찌어다 하매 태양이 머물고 달이 그치기를 백성이 그
대적에게 원수를 갚도록 하였느니라”
(여호수아 10:12-13)
이처럼 구약은 여호와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에게 하신 말씀이었습니다. 그들에게 십계명을 비롯한 율법을 주시고, 그 율법을
통하여 하나님 안에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 것인지를 상세히 알려 주신 것이 바로 구약이지요. 그 율법과 계명은 애초부터 이방인에게는
주어지지 않은 것이며, 이방인이 지킬 수도 없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민족에게 주신 것이었으며, 그 율법을
지킴으로써 하나님 안에 있도록 하신 것이었지요.
반면, 이방인들의 모습은 어떠합니까? 이방인들은 근본적으로 하나님이 없는 자들로, 처음부터 죽어있던 존재였습니다.
“죽어있다”라는 것은 바로 “없다”라는 의미이지요. 다시 말해 이방인들은 “하나님 안에 없던 자들”이었습니다. 죽어있었기에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수조차 없는 자들, 즉, 약속의 언약들에 대하여 외인이었으며 하나님의 말씀과 축복에
배제되어 있던 자들이 바로 이방인들이지요.
그들은 하나님을 알지 못했기에 자기 나름의 여러 신을 만들어 섬겼으며, 우상을 숭배했고, 가증한 행위들을 했으며, 율법, 즉
하나님의 말씀이 없기에 무엇이 선이며 악인지 알지 못한 채 죄의 종이 되어 살아왔고, 이것이 바로 죽은 자들의 모습이었습니다.
그러하기에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자들을 멸하라고, 없이하라고, 그들을 쫓아내고 그들과 친근히 하지 말라고 자기 백성에게 명하셨던
것이지요.
“너희는 나의 모든 규례와 법도를 지켜 행하라 그리하여야 내가 너희를 인도하여 거하게 하는 땅이 너희를
토하지 아니하리라 너희는 내가 너희 앞에서 쫓아내는 족속의 풍속을 좇지 말라 그들이 이 모든 일을 행하므로 내가 그들을 가증히
여기노라”
(레위기 20:22-23)
“그러므로 스스로 조심하여 너희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 너희가 만일 퇴보하여 너희 중에 빠져 남아
있는 이 민족들을 친근히 하여 더불어 혼인하며 피차 왕래하면 정녕히 알라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 민족들을 너희 목전에서 다시는
쫓아내지 아니하시리니 그들이 너희에게 올무가 되며 덫이 되며 너희 옆구리에 채찍이 되며 너희 눈에 가시가 되어서 너희가 필경은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주신 이 아름다운 땅에서 멸절하리라”
(여호수아 23:11-13)
유대인은 태어날 때부터 하나님의 백성으로 난 자들이며, 이방인들은 근본적으로 하나님 밖에 있었으며 죽어있던 자들이었습니다.
유대인은, 이스라엘 백성은 처음부터 하나님께서 택하셔서 자기 백성으로 삼으시며 모든 기적과 이적과 하나님의 능력을 보이셨던
자들이며, 이방인은 하나님의 모든 말씀과 약속과 축복 안에 들어올 수 없던 자들이었지요.
그렇다면 유대인과 이방인이 갈라지게 된 기점은 어디부터일까요? 또한 이방인이 받은 은혜는 유대인과는 어떤 차이점이 있을까요?
성경에는 수많은 이야기들이 있습니다. 그 말씀들을 우리는 어떻게 정확히 이해하고 적용할 수 있을까요? 사실 성경을 올바로
이해하고 바라볼 수 있는 굉장히 중요한 부분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유대인을 향한 하나님의 역사와 이방인에 대한 하나님의 역사의 차이, 자기 땅에 자기 백성을 위하여 오신 예수 그리스도와
그들이 영접지 않음으로 인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하신 이후에 모든 사람에게 선포된 하나님의 은혜, 그러나 자기 백성을 끝까지
버리지 않는 하나님! 이 모든 것들을 정확히 이해해야만 우리는 성경을, 복음을, 하나님을 바로 바라보고 바로 이해할 수 있으며,
올바른 진리 안에 흔들림 없이, 혼란 없이, 확고히 걸어갈 수가 있습니다.
영원한 새명(조에) 육체적 생명(비오스) 정신적생명(푸쉬케) 영적 생명(프뉴마)
조에는 프쉬케나 비오스와는 다른 생명이다. 프쉬케와 비오스는 (물론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이지만) 부모님으로부터 받은
것이라 할 수 있다. 생물학적 목숨이나 생활의 수준과 방식은 상당 부분 부모님이 내게 물려주신 것이다. 그러나 조에는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숨겨두신 생명이다. 씨앗과 같다. 예수께서는 이 씨앗을 피우고 열매 맺어 풍성하게 사려고 이 땅에 오셨다고 말씀하셨다.
나는, 양들이 생명을 얻고 또 더 넘치게 얻게 하려고 왔다.(요10:10)
"생명"(ζωή 조에)에 관한 묵상
신약성서에는 "생명"으로 번역할 수 있는 헬라어가 셋 나온다. 프쉬케(ψυχή), 비오스(βίος), 조에(ζωή)가 그 셋이다. 이 셋은 넓게 말해서 "생명"으로 번역할 수 있지만, 하나하나는 각각의 독특한 뜻을 지니고 있다.
프쉬케는 생물학적 목숨이다. 의학적으로 살아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가지고 있는 육체적 목숨을 말한다. 예를 들어, 예수께서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목숨을 부지하려고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걱정하지 말고, 몸을 감싸려고 무엇을 입을까 걱정하지 말아라. 목숨이 음식보다 소중하지 아니하냐?"(마 6:25)라고 말씀하시거나,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린다"(요 10:11), "나는 양들을 위하여 내 목숨을 버린다"(요 10:15)라고 말씀하셨을 때, "목숨"에 해당하는 헬라어는 프쉬케이다.
비오스는 영어 바이오(bio)의 기원이 된 헬라어이다. 그러나 영어에서 바이오가 "생물" "생명" "생리"라는 뜻으로 사용되는 것과는 달리 헬라어 비오스는 생명이라기보다는 "생활"이나 "살림"에 가깝다.
요한일서는 우리가 조심해야 할 유혹으로 "육체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요일 2:16)을 꼽는다. 여기서 "이생"을 이해하기가 쉽지 않은데 새번역은 "세상 살림"으로 번역하여 이해를 돕는다. 헬라어로는 비오스이다. 살림살이 혹은 생활 수준으로 번역할 수 있다. 탕자의 요청으로 아버지가 아들에게 나누어 준 것도 비오스다(눅15:12). "살림"을 미리 나누어 준 것이다.
조에는 프쉬케나 비오스와는 다른 생명이다. 프쉬케와 비오스는 (물론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이지만) 부모님으로부터 받은 것이라 할 수 있다. 생물학적 목숨이나 생활의 수준과 방식은 상당 부분 부모님이 내게 물려주신 것이다. 그러나 조에는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숨겨두신 생명이다. 씨앗과 같다. 예수께서는 이 씨앗을 피우고 열매 맺어 풍성하게 사려고 이 땅에 오셨다고 말씀하셨다.
나는, 양들이 생명을 얻고 또 더 넘치게 얻게 하려고 왔다.(요 10:10)
예수께서는 생명의 빵으로 우리에게 오셨다(요 6:35). ὁ ἄρτος τῆς ζωῆς!(호 아르토스 테스 조에스). 생명을 살리는 빵, 생명을 풍성하게 하는 빵으로 오셨다는 말씀이다. 조에 생명은 예수를 만날 때 살아나 역동 친다. 이 생명이 있으면 비오스가 어려운 형편이라 할지라도 능히 이겨낼 수 있다. 그것이 조에의 힘이다. 이것이 고린도후서에서 바울이 전하는 바이다. 아래 성경말씀 7절의 "보물"을 "생명"(조에)로 바꾸면 쉽게 이해할 수 있다.
7우리는 이 보물을 질그릇에 간직하고 있습니다. 이 엄청난 능력은 하나님에게서 나는 것이지, 우리에게서 나는 것이 아닙니다. 8우리는 사방으로 죄어들어도 움츠러들지 않으며, 답답한 일을 당해도 낙심하지 않으며, 9박해를 당해도 버림받지 않으며, 거꾸러뜨림을 당해도 망하지 않습니다. 10우리는 언제나 예수의 죽임 당하심을 우리 몸에 짊어지고 다닙니다. 그것은 예수의 생명도 또한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기 위함입니다. (고후 4:7-10)
비오스 수준의 신앙생활이 있다. 기복신앙을 제외하고라도, 삶의 질을 높여주려는 일체의 계몽적 신앙 프로그램이 비오스를 위한 것이다. 예를 들어 아버지 교실, 부부학교, 자녀교육교실 등등 말이다. 그러나, 요한복음이 전하는 신앙의 본질은 비오스에 있지 않고 조에에 있다. 조에를 살리고 풍성케 하는 신앙생활! 어떤 모습일까 묵상해 볼 일이다.
생명(life,生命)이란 단어가 한국어, 영어, 일어로는 모두 하나의 글자로 쓰지만 헬라어로는 그 대상에 따라
*조에 ZOE : 하나님의 생명
*푸쉬케 PSYCHE : 혼의 생명
*비오스 BIOS : 육의 생명
이렇게 3개의 단어로 각각 표현되지요.
조에 ZOE(ζωή) / 하나님의 생명, 창조되거나 부모에게서 물려받은 생명이 아니라, 영원하고 신성한 생명 푸쉬케 PSYCHE (ψυχή) / 혼의 생명,생각하고, 느끼고, 의지를 갖는 '혼(Soul)'의 생명 비오스 BIOS (βίος) / 육의 생명,우리 몸의 '생물학적 생명',숨 쉬고, 먹고, 자라는 육체적인 생명
하나님은 사람을 그형상과 모양에서 하나님을 따라 만드셨지만, 생명은 조에(ζωή)를 주시지 않고 푸쉬케(ψυχή)를 주셨어요. 푸쉬케와 비오스의 생명만을 가진 사람은 "불못"이 최종 종착역입니다. "조에(ZOE)의 생명"만이 심판을 피하고 영원한 누림안으로 인도하지요~~~ 참으로 감사한 것은 하나님을 믿는 우리는 모두 조에(ZOE)의 생명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생명, "조에(ZOE)의 생명"을 우리안에서 자라게 하도록 교회생활 안에 보존되시기를 권고합니다.
하나님이 정한 그리스도인의 삶의 방식은 "모이는 생활"입니다. 우리는 "양무리"처럼 함께 모여 무리지어 살아야 마귀 사탄의 먹이가 되지 않습니다. 단독으로 떨어지면 "사탄의 밥"이 됩니다. 교회생활을 회복하시길 간곡히 권합니다. 시대가 바뀌려 합니다. 그날이 가깝습니다~!
최근에 AI를 활용하여 뜻을 다시 한번 찾아 보았습니다.
1. 조에 (Zoe, ζωή) - 영원한 생명, '하나님의 생명'
뜻 : 비오스나 푸쉬케와는 완전히 다른 '하나님의 생명' 이에요. 창조되거나 부모에게서 물려받은 생명이 아니라, 영원하고 신성한 생명을 뜻해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우리가 얻게 되는 '영생(永生)'이 바로 이 조에예요. 특징 : 이 생명은 생명의 질(Quality)을 나타내며, 단순히 오래 사는 것(시간) 이상의 풍성함과 하나님과의 관계를 포함해요.
예시 : 예수님이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조에)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 함이라" (요 10:10)라고 하셨을 때 사용된 단어예요.
2. 푸쉬케 (Psyche, ψυχή) - 혼의 생명, '목숨' 또는 '혼'
뜻 : 몸 안에 깃든 '개인의 생명' 또는 '목숨'을 뜻해요. 생각하고, 느끼고, 의지를 갖는 '혼(Soul)'의 생명이라고도 할 수 있어요. 살아 있는 사람의 정신적, 감정적인 영역과 연결된 생명이에요.
어원 : 영어 단어 'Psychology(심리학)가 이 푸쉬케에서 나왔어요. 예시 : 예수님이 "누구든지 제 목숨(푸쉬케)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마 16:25)라고 말씀하실 때 쓰인 '목숨'이 바로 푸쉬케예요.
3. 비오스 (Bios, βίος) - 육체의 생명, '생활'
뜻 : 우리 몸의 '생물학적 생명'이에요. 살아 있는 동안 숨 쉬고, 먹고, 자라는 육체적인 목숨과, 우리가 살아가는 '생활' 자체, 즉 살림살이나 생활 방식을 뜻하기도 해요. 어원 : 여러분이 아는 영어 단어 'Biology(생물학)가 바로 이 비오스에서 왔어요.
예시 : 성경에서 '이생의 자랑' (요일 2:16), '생활' (눅 8:14) 등으로 쓰일 때 이 단어가 사용되었어요. 누구나 가지고 있는 이 땅에서의 유한한 생명이죠.
성경은 우리에게 단순히 오래 사는 비오스나, 개인의 목숨인 푸쉬케를 넘어서,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누리는 영원하고 풍성한 생명, 즉 조에를 얻으라고 이야기하고 있어요.
입신자들의 간증
1. 양팔천대 권사 간증
창원 중앙교회 양팔천대 권사님
이날은 양력 설날이였다. 아침에 일찍 일어나 집안을 치워 놓고 아이들과 목사님댁에 세배드리러 가기로 약속하고 잠깐 기도를 하는 중에 갑자기 천지가 깜깜한 느낌이 오면서 하늘 위에서는 불칼을 든 천사들이 수 없이 내려 오면서 공중의 마귀들을 땅으로 내려 쫓아 보내고 있었다. 악령들의 아우성 소리가 천지를 진동하면서 자기들의 때가 다 되었다고 하였다 . 땅도,산도,바다도 소리치기를 세상 끝이 다되었으며 몇날이 남지 않았다고 야단들이었으나 나무들은 말하기를 아직 끝이 아니라고 하는 것이었다. 그러자 잠시동안 조용하더니 불칼을 든 천사들은 하늘로 올라 가고 세째 하늘의 아름다운 광채가 둘째 하늘로 쏟아지더니 빛들의 사이 사이로 많은 천사들이 온갖 악기들을 가지고 둘째 공중으로 내려와 춤을 추며 노래하며 즐기는 가운데 마지막으로 내려 오는 천사들은 큰 나팔을 들고 하늘가에로 흩어지더니 동서 사방에서 나팔소리가 울려 퍼지기 시작하였다. 나팔소리의 맨 끝에서 들려 오는 자기의 이름을 들었을 때 그 순가 부터 앞도 옆도 뒤도 보이지 않고 세상이 온통 핑크에 가까운 분홍색 으로만 가득차고 옆에 있는 천사만 보였습니다. 너무나 신기했습니다. 천사가 말하기를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줄 아는 성도는 현재 세상에서 살고 있는 동안이라도 세상이 눈에 보이면 자연히 유혹이 따르게 됨으로 아예 세상 일이 좋아 보이는 요소들을 미련없이 다 버리고 오직 위에 계신 이만을 바라보는 생활이 되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또 한 천사는 하늘위에서 나를 향하여 날아오고 있었는데 등에는 날개가 달려 있고 가슴에는 세마포 흰옷을 안고 얼굴에는 미소를 머금고 있었는데 그 얼굴이 해같이 밝아서 내마음도 한없이 즐거웠습니다. 그 천사를 바라보고 있으니 천사가 내려와 나에게 흰 옷을 머리에 얹어 주는 듯 하였는데 그 옷이 발끝까지 입혀졌으며 어느새 머리에는 면류관이 씌어져 있었습니다.
또 신기하게도 내 몸이 홀연히 변하기 시작하더니 몸의 색깔이 점점 불같은 색으로 변하며 나중에는 몸에서 빛이 나는데 깜깜한 밤에 자동차 불빛이 강하게 비치듯 우리들의 육체가 변하더니 흰 옷도 같이 빛을 발하면서 공중으로 뛰어 오르는데 그 속도가 번개빛이 반짝하는 듯이 그렇게 빨랐습니다.
현재 낙원에 있는 성도들은 육을 벗어나 영들만 올라갔기 때문에 육신들은 모두 땅에 흩어져 있으므로 그 형체를 찾아 볼 수 없을지라도 그것에 상관없이 흩어져 있는 살과 뼈들이 땅 속에서 물 속에서 불빛처럼 빠른 속도로 모여 들어 변화된 육신이 형성되는데 머리카락은 모두 다 은발로 변화하였고 각자의 육신을 찾아서 공중으로 올라가는 것이였습니다.
그 순간에 온 우주에 화려하고 아름다운 음악소리가 울려 퍼지면서 불꽃바다가 이루어지고 있었습니다. 그때의 음악소리를 잘 생각해 보니 천국방언으로 불려지고 있었으며 이 찬송외에는 귀에 아무소리도 들리지 않았습니다.
마귀들은 벌벌 떨면서 어느 구석으로 숨어 버렸는지 흔적도 없었고 산천초목들만이 아니고 흙과 돌까지도 춤을 추어주는 가운데서 휴거를 받게 되는데 이날에 당하는 기쁨을 억만분의 일이나로 제대로 표현할 수가 있었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이렇게나마 흉내내고 있는 것입니다. 하늘 공중으로 들려 올라가 성도들은 그 당시에는 서로가 세상의 인연을 알아볼 수가 있었습니다. 일가 친척 골육과 이웃을 세상에서 정답게 지내던 사람들을 만나서 얼싸안고 춤을 추고 그 기쁨을 감추지 못하였습니다. 그 많은 사랄들 가운데 일부러 아는 사람을 찾아 다닐 필요가 없이 생각만 하면 성령님의 인도함으로 보고 싶은 사람이 그 자리에 나타났습니다. 그러나 보고싶은 생각을 하여도 나타나지 않는 사람은 불쌍하게도 휴거 받지 못한 사람이었습니다.
세상에서 정답게 지내던 사람들이 천년왕국으로 들어갈 때는 모두가 이때는 일가 친척 골육은 다 없어지지만 정답게 지내던 사이는 여전히 계속해서 정답게 지내게 됩니다. 영원한 저 하늘나라에 가서는 완전한 중성으로서 남자도 여자도 아닌 꼭 같은 하나님의 아들들이 되어버려도 여전히 정다운 사이는 계속 되었습니다. 이 땅에서 서로 사랑하는 마음과 하나님께 감사하는 마음과 자기에게 주어진 평안의 마음은 하늘나라에까지 가지고 가야함으로 잘 보존하라고 천사가 경고하는 소리를 들어면서 축제가 열리는 곳으로 들어 갔습니다. 모두들 울긋 불긋 화려한 색깔이 담긴 옷으로 갈아 입고 머리에는 면류관을 받아 쓰고 기뻐뛰며 즐거워하며 온갖 악기를 동원하여 춤추고 노래하며 먹고 마시는데 천국에서는 먹어도 살고 먹지 않아도 살 수 있다고 하였지만 이때는 축제 중에서도 대 축제라 음식이 무더기로 차려져 있었습니다. 음식이 먹고 싶은 생각이 들면 그 음식들이 그냥 날아와서 입에 대어지며 그 순간에 씹지 않아도 저절로 녹아 버리니 음식들이 물처럼 들어 가는 것이였습니다. 이렇게 이해하지 못할 신기한 일들이 천국에는 수 없이 많으니까 역시 천국은 표현할 수 있는 곳이 못된다는 것을 더욱 절실하게 느낍니다. 천국을 표현하는 수 많은 언어가 있으나 천국을 그대로 전할 수 있는 언어는 이 땅에 없는 것 같습니다. 아멘 주 예수여 어서 오시옵소서!
관련 성경 / 회개(마 3:8, 눅 3:8, 행 20:21, 고후 7:9, 딤후 2:25, 벧후 3:9), 후회(고후 7:10).
‘생명 얻는 회개’란 영원한 생명 곧 구원에 이르게 하는 회개를 말합니다(고후 7:10). 구원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얻지만, 그 믿음 이전에 반드시 회개가 선행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회개는 구원의 첫 단계요 시작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때가 찼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고 하셨으며(막 1:15), 베드로는 어떻게 해야
구원을 받을 수 있는지를 묻는 유대인들에게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받으라”고
했습니다(행 2:38)
예루살렘 교회의 박해로 인해 사도들을 제외하고 대부분이 유대와 사마리아 등지로 흩어졌습니다(행 8:1 ; 11:19). 그중에 빌립 집사는 사마리아 성에 내려가 그리스도를 전파했는데(행 8:5), 많은 사람이 그가 전하는 복음을 믿고 세례를
받았습니다(행 8:12). 당시 사마리아 사람들은 이방인의 피가 섞여 있다는 이유로 유대인들로부터 배척당했습니다. 하물며
이방인이야 오죽했겠습니까? 유대인들은 이방인을 부정한 짐승처럼 여겼고, 그들과의 교제를 일절 금지했습니다. 이를 어기는 건 위법 곧
법을 어기는 것이었습니다(행 10:28). 하나님께서 베드로에게 보자기 환상을 세 번이나 보여 주신 것도, 성령께서 고넬료가
보낸 사람들을 의심하지 말고 함께 가라고 하신 것도 그 때문이었습니다. 베드로가 이방인인 고넬료의 제의에 선뜻 나서지 못하리라는
것을 아셨기 때문입니다(행 10:28).
기독교로 개종한 유대인 중에는 여전히 이방인에 대한 편견을 가진 자들이 적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율법이 자신들에게만 주어졌던 것처럼, 생명 얻는 회개 역시 유대인에게만 주어졌다고 여겼습니다(행
11:18). ‘생명 얻는 회개’란 영원한 생명 곧 구원에 이르게 하는 회개를 말합니다(고후 7:10). 구원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얻지만, 그 믿음 이전에 반드시 회개가 선행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회개는 구원의 첫 단계요 시작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때가 찼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고 하셨으며(막 1:15), 베드로는 어떻게 해야
구원을 받을 수 있는지를 묻는 유대인들에게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받으라”고
했습니다(행 2:38). 따라서 회개 없이 구원에 이를 수 없고(벧후 3:9), 회개가 없는 믿음은 진정한 믿음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영국의 복음주의 설교자인 로이드 존스(D. M. Martyn Lloyd-Jones) 목사는 “회개가
없다면 그는 아직 중생하지 않은 것”이라고 했습니다. 중생(重生)이란 ‘거듭나다, 다시 태어나다 혹은 위로부터 나다’라는 뜻으로,
죄와 허물로 죽었던 심령이 그리스도 안에서 새롭게 다시 태어나는 것을 말합니다(엡 2:1 ; 골 2:13 ; 약 1:18 ;
벧전 1:3). 이렇게 거듭난 사람만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있고(요 3:3), 또 들어갈 수 있습니다(요 3:5). 즉 중생한
자만이 구원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회개가 없다면 그는 아직 중생하지 않은 것’이라는 말은 결국 ‘회개 없이는 구원도
없다’는 의미입니다(눅 13:3, 5).
회개란 단순히 죄를 뉘우치고 고백하는 것이 아니라 그 죄에서 떠나는
것이며(겔 18:30), 세상으로 향했던 마음을 돌이켜 하나님을 향하는 것입니다(신 30:9 ; 행 3:19 ; 살전 1:9). 누구든지 자신의 죄를 회개하고 복음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영원한 생명을 얻습니다(요 3:16). 그런데 기독교로 개종한
유대인들 가운데는 이러한 회개 역시 자신들에게만 주어진 것이라 여겼습니다. 그들은 이방인들도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였다는 소식을
듣고 별로 탐탁지 않게 생각했습니다. 오히려 베드로가 무 할례자 곧 할례 받지 않은 자의 집에 들어가 함께 먹었다는 이유로 그를
비난했습니다(행 11:3). 이는 유대인 신자들이 아직도 율법의 관습에서 벗어나지 못했음을 보여 줍니다. 나중에 살펴보겠지만 그들
가운데는 ‘할례를 받지 않으면 구원받을 수 없다’라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행 15:1).
이에 베드로는
그것이 어떻게 된 일인지 자초지종을 설명했습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보여 주신 환상과 성령께서 하신 말씀에 관해
이야기했고, 고넬료가 받은 환상에 대해서도 말해 주었습니다. 이는 고넬료의 집을 방문한 게 자신의 의지가 아닌 하나님의 지시에
의한 것임을 밝히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베드로는 혼자가 아니라 여섯 형제와 함께 갔다고 말합니다(행 11:12). 그들은
욥바에 있는 유대인 신자들로 베드로는 자신이 고넬료의 집에 방문한 게 문제가 되었을 경우 그 일을 변호해 줄 증인으로 그들을
데려갔을 것입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예루살렘에 올라갔을 때도 그들과 함께 갔습니다. 또 베드로는 성령께서 그들에게 임하신 것을
보고 ‘요한은 물로 세례를 베풀었으나 너희는 성령으로 세례를 받을 것이다’(행 1:6)라고 하신 말씀이 생각났다고 했습니다(행
11:16). 그리고 마지막으로 이렇게 말합니다. “그런즉 하나님이 우리가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에 주신 것과 같은 선물을
그들에게도 주셨으니 내가 누구이기에 하나님을 능히 막겠느냐”(행 11:17) 성령의 임재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에게
하나님께서 주시는 선물입니다. 그러한 선물을 이방인들에게도 주셨다는 것은 복음이 유대인들만을 위한 게 아니라는 사실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은 모두 하나님의 자녀요(요 1:12) 백성입니다(벧전 2:10). 거기에 이방인이나
유대인이나, 할례를 받은 자나 할례를 받지 않은 자나, 종이나 자유인이 따로 없습니다(골 3:11). 하나님의 선택된 백성이라고
자부하는 유대인이라도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으면 구원받을 수 없고, 유대인들이 부정한 짐승처럼 취급하는 이방인이라도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구원을 얻을 수 있습니다. 유대인 신자들은 베드로의 설명을 듣고서야 비로소 잠잠해졌습니다. 베드로가 말한 것처럼
그 누구도 하나님을 거역할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이방인에게도 생명 얻는 회개를 주셨다”라고 하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습니다(행 11:18).
그런데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한 건 베드로만이 아니었습니다. 스데반으로 인하여
발생한 환난 때문에 흩어진 사람들 가운데 어떤 이들이 안디옥에 이르러 헬라인에게도 복음을 전했습니다. ‘헬라인’이란 그리스 사람을
말하는데, 이방인과 같은 의미입니다(롬 1:16 ; 2:9 등). 성경에는 안디옥이란 도시가 두 곳이 있습니다. 하나는 비시디아
지방에 있고(행 13:14) 다른 하나는 수리아 지방에 있습니다. 성경에서 그냥 안디옥이라 하면 수리아의 안디옥을 말합니다. 당시 안디옥은 인구 50만이 넘는 대도시로 로마 제국에서 로마와 알렉산드리아 다음으로 큰 도시였다고 합니다. 또 ‘동방의
여왕’이라 불릴 만큼 아름답고 부유한 도시이기도 했습니다. 반면에 도덕적으로는 제2의 소돔이라 할 만큼 매우 타락한 도시였습니다. 이런 죄악의 도시에 그리스도의 복음이 전해졌고, 많은 사람이 예수님을 믿음으로 이방 지역 최초로 교회가 세워졌습니다. 이후
안디옥 교회는 소아시아와 유럽에 복음을 전파하는 이방 선교의 중심지가 되었습니다(행 13:1-3).
안디옥 사람들이
복음을 믿고 주님께 돌아왔다는 소식을 들은 예루살렘 교회는 바나바를 그곳에 보냈습니다. 그는 구브로 출신의 레위 지파 사람으로
본래 이름은 요셉이었습니다. 그런데 사도들은 그를 ‘위로의 아들’이란 뜻의 바나바라 불렀습니다(행 4:36). 이는 그가 사람들을
위로하고 권면하는데 탁월한 능력이 있음을 보여 줍니다. 물론 그런 이유로 예루살렘 교회가 바나바를 안디옥에 보낸 것은 아닙니다. 무엇보다 그는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사람이었습니다(행 11:24). 특히 그는 안디옥에서 가까운 구브로 출신의 헬라파
유대인이었으므로 헬라인인 안디옥 사람들을 가르치고 권면하는 데 적합한 인물이었습니다.
안디옥에 도착한 바나바는
하나님의 은혜가 내린 것을 보고 기뻐하였고, 사람들에게 믿음을 굳게 할 것을 당부했습니다. 그가 안디옥에 머무는 동안 교회는 더욱
부흥했습니다. 그러자 바나바는 다소에 있는 바울에게 도움을 요청했고, 둘이 일 년을 함께 안디옥에 머물며 사람들을
가르쳤습니다(행 11:26). 이에 안디옥 교회는 양적으로나 질적으로 크게 성장했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이 처음으로 안디옥에서
그리스도인이라 불리게 되었습니다. 이는 매우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그것은 다른 종교 그리고 믿지 않는 사람들과의 ‘구별’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당시 기독교는 유대교의 한 분파 정도로 여겨졌습니다. 그동안 사람들은 그리스도를 믿고 따르는
자들을 가리켜 ‘나사렛 사람들’이라고 불렀는데(행 24:5), 이는 예수님의 출신지가 나사렛이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유대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셨으나(마 2:1), 자라신 곳은 갈릴리의 나사렛이었기 때문에(마 2:23) 사람들은 그를 '나사렛 예수'라고
불렀고(마 21:11 ; 26:71 ; 요 18:5 등) 그를 따르는 사람들을 '나사렛 사람들'이라 불렀던 것입니다. 그러다가
안디옥에서 처음으로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에게 그리스도인이라는 별명이 붙게 되었습니다. 그리스도인이란 ‘그리스도께 속한 자’ 또는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를 말합니다. 하지만 단순히 그런 이유만으로 안디옥 사람들이 예수님의 제자들을 그리스도인이라고 부른 것은
아닙니다. 그들의 눈에는 예수님을 따르는 무리가 유별난 집단으로 보였을 것입니다. 앞에서 언급한 대로 안디옥은 도덕적으로 매우
타락한 도시였습니다. 우상을 숭배하고 사치와 방탕한 생활을 즐기던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고 바나바와 바울의 가르침을 받은 후에는
그런 생활을 멀리했습니다. 또 믿지 않는 유대인들로부터 박해를 받았지만 믿음을 저버리지 않았습니다. 당시에는 자신의 신앙 때문에
핍박을 받는 경우는 거의 없었습니다. 그런데 기독교인들만은 달랐습니다. 이방인들은 같은 종교로 여겨지는 유대교 사람들로부터
박해받는 기독교인들을 보며 의아해했을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그들의 생활을 칭찬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행 2:47). 기독교인들은 세상의 법을 잘 지켰을 뿐만 아니라 윤리적으로, 도덕적으로 모범적인 생활을 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삶이 불신자들로
하여금 그들을 그리스도인이라 부르게 했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안디옥 교회는 이방인이 주축이 된
교회임에도 불구하고 신앙뿐만 아니라 삶에 있어서 모든 교회의 모범이 되었습니다. 그들이 처음으로 안디옥에서 그리스도인이라 불리게
되었다는 것이 그것을 잘 증명해 줍니다. 그들의 삶이 어떠했는지를 보여 주는 한 가지 예가 27절 이하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글라우디오 황제 때에 로마 제국 전역에 걸쳐 큰 기근이 있었습니다. 글라우디오는 로마의 네 번째 황제로 로마에 있는 유대인을
추방한 인물입니다(행 18:2). 안디옥 교회는 이런 일이 일어날 것을 미리 알고 있었습니다. 예루살렘에서 온 선지자들 가운데
아가보라 하는 사람이 그에 대해 예언했기 때문입니다(행 11:28). 이에 안디옥 성도들은 각기 힘닿는 대로 유대에 사는
형제들에게 부조를 보내기로 작정했습니다. 안디옥은 큰 상업 도시였으므로 교인들의 생활 수준도 높았을 것입니다. 반면에 예루살렘을
비롯한 유대 지방의 교인들은 대부분 가난한 데다가 기근까지 들어 어려움이 컸습니다. 그래서 안디옥 교회 성도들은 즉시 부조를 모아
예루살렘 교회에 보내기로 작정했고 그대로 행했습니다. 여기서 부조는 헬라어로 '디아코니아'입니다. 즉 섬김 혹은 봉사를
말합니다. 어려움을 당한 사람들을 도와주는 것이 곧 섬기는 것이요 봉사입니다. 우리도 안디옥 교회 성도들처럼 그리스도인으로서
신앙과 생활에 모범이 되고 세상 사람들과는 구별된 삶을 살아야 할 것입니다.
이건희 회장이 말한 살면서 필요없는 인간 유형 4가지
이건희 회장은 생전에 “사람을 잘못 만나면 인생이 꼬인다”는 말을 자주 했다. 그의 발언을 살펴보면 성과 중심의 메시지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어떤 사람 옆에 서야 하는가’에 대한 조용한 조언이 담겨 있다. 평생을 경영자로 살았던 사람이 꼽은 불필요한 인간 유형은 놀랍게도 일상에서도 자주 마주치는 사람들이다. 그 네 가지를 정리해본다.
1. 책임을 회피하고 핑계만 만드는 사람
실수는 누구나 하지만, 어떤 이는 실수를 인정하지 않고 늘 환경 탓, 타인 탓을 먼저 찾는다. 이런 유형은 시간이 지날수록 주변 사람의 에너지를 고갈시키고, 공동의 목표까지 흔들어버린다. 책임을 회피하는 사람은 함께 성장할 수 없고, 결국 발목을 잡는 존재가 된다.
2. 배우려 하지 않고 익숙함 속에만 머무르는 사람
변화를 싫어하고, 새로운 방식은 무조건 틀렸다고 단정하는 태도는 어느 시대에도 경쟁력을 잃게 만든다. 이건희 회장이 가장 경계한 유형이 바로 ‘어제의 성공법을 내일에도 쓰려는 사람’이었다. 배우지 않는 사람은 자신뿐 아니라 주변의 발전까지 막아버린다.
3. 뒷말과 불평이 많은 사람
어떤 집단에서든 발전을 막는 가장 빠른 독은 ‘불평의 기운’이다. 문제를 해결하는 대신 문제를 확대하고, 사람을 도우는 대신 사람을 나누는 방식으로 행동한다. 이 유형과 가까이 지내면 의욕이 줄고 집중력이 흐트러지며, 건강한 관계가 유지되기 어렵다.
4. 정직하지 않고 작은 이익에 흔들리는 사람
거짓말과 약속 위반은 한 번으로 끝나지 않는다. 작은 이익 앞에서 일관성을 잃는 사람은 신뢰를 오래 유지하지 못한다. 신뢰가 없는 관계는 결국 미래가 없다는 것이 경영과 인간관계에서 동일하게 적용되는 원칙이다. 이런 사람 옆에서는 나도 쉽게 무너진다.
생명을 얻는 회개(사도행전 11:1-18)
베드로는
고넬료의 집에서 복음을 전했다. 이것이 하나 된 교회, 교회의 통일성이다. 베드로가
복음을 전할 때 성령 부어 주심을 인하여 놀랐다. 이것은 곧 복음을 들은 고넬료의 집안에 성령이 부어졌음을 알았다는 뜻이다.
도대체 어떤 현상이 있었기에 성령이 부어진 것을 알 수 있었을까? 성령이 눈에 보이는 것도 아니고, 예수님에게 성령이 오신 것처럼
비둘기같이, 그리고 불의 혀같이 갈라지는 그런 신기한 현상이 보이는 것도 아닌데 어떻게 성령이 부어짐을 알 수 있었을까?
그렇다면 당시 고넬료의 집안에 지금의 우리가 알 수 없고 볼 수 없는 신기한 현상이 있었다는 것일까? 1. 베드로가 이방인들이 성령을 받은 증거로 자기가 경험한 것과 같은 것이었음을 증거 한다
11:15 내가 말을 시작할 때에 성령이 그들에게 임하시기를 처음 우리에게 하신 것과 같이 하는지라. 2:4 그들이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언어들로 말하기를 시작하니라.
2:11 그레데인과 아라비아인들이라 우리가 다 우리의 각 언어로 하나님의 큰 일을 말함을 듣는도다 하고
10장 46절을 보면 "이는 방언을 말하며 하나님 높임을 들음 이러라"라고
말한다. 당시 베드로와 함께 있었던 유대인들이 이방인에게도 성령이 부어졌음을 알 수 있었던 것은 바로 방언을 말하고 하나님을
높이는 것이었다. 우리가 생각하는 신기한 현상이 일어난 것이 아니라 단지 그들이 어떤 말을 하게 되었느냐가 성령이 부어진 증거로
보였다. 2:4절에 보면 "그들이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언어들로 말하기를 시작하니라"라고
말한다. 제자들은 자기들 멋대로 방언으로 말했던 것이 아니라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서 말했다. 그렇다면 그들의 말은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말이었을 것이고. 그렇다면 그들은 복음을 말했다는 것이 분명하다. 그 복음을 이방인들이 들을 수 있게 되었다. 여기서는 복음을 하나님을 높임을 들은 것으로 표현되고 있다.
구원 받은 사람은 전하게 되어 있다. 2. 그래서 그는 예수 믿을 때 주신 선물이 같았다고 말한다. 성령이 선물이라고 말한다.
11:17 그런즉 하나님이 우리가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에 주신 것과 같은 선물을 그들에게도 주셨으니 내가 누구이기에 하나님을 능히 막겠느냐 하더라
성령을 선물로 주시는 하나님의 일을 막지 못한다고 말한다. 3. 이런 같은 선물인 성령을 받은 것에 대해 유대인 기독교인들이 성령 받은 것을 다른 말로 ‘생명 얻는 회개’라고 달리 표현하고 있다.
11:18 그들이 이 말을 듣고 잠잠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 이르되 그러면 하나님께서 이방인에게도 생명 얻는 회개(opportunity to repent and live, 회개하여 생명에 이르는 길)를 주셨도다 하니라
1) 생명 얻는 이란 죄 사함 곧 구원이다.
그럼, 생명 얻는 회개란 바로 구원 얻는 회개라는 뜻이다. 구원의 전제가 회개라는 것이다. 회개 없는 구원은 없다는 것이고 이런 회개를 가져오는 것이 바로 성령의 역사라는 것이다. 이 말이 심오한 교리를 말하고 있다. 2) 베드로의 말
2:38 베드로가 이르되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받으라 그리하면 성령의 선물을 받으리니성령을 받았다는 것은 회개를 전제로 하는 것이다. 회개 없이는 성령을 받을 수 없다. 3) 회개란 무엇인가?
회개란 죄로 부터 떠나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것을 말한다. 그 결과 죄에 후회하고 죄에 대한 마음과 생각이 바뀌는 것이다. 그 예가 두 아들의 비유이다. 회개에는 2가지가 있어야 한다. 반드시 먼저 후회가 있어야 한다. 그리고 반드시 행동의 변화가 있어야 한다.
4) 그럼, 무엇이 우리를 회개에 이르게 하는 것인가/
a. 행 5:31 이스라엘에게 회개함과 죄 사함을 주시려고 그를 오른손으로 높이사 임금과 구주로 삼으셨느니라
예수님이 죄 사함을 주시는 것처럼 회개도 주신다. b.행 11:18 그들이 이 말을 듣고 잠잠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 이르되 그러면 하나님께서 이방인에게도 생명 얻는 회개를 주셨도다 하니라
회개는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의 선물이다 c.딤후2:25 거역하는 자를 온유함으로 훈계할지니 혹 하나님이 그들에게 회개함을 주사 진리를 알게 하실까 하며
바울은
디모데에게 잘못된 길로 가 이단에 빠진 사람들을 어떻게 다룰지를 말하면서 그들을 온유함으로 훈계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그
이유는 혹 하나님이 그들에게 회개함을 주실 수 있기 때문이다. 화개가 어디서 오는 것인데 알 수 있다.
그래서 회개는 사람들 편에서 행동을 취하도록 이끄는 하나님의 선물이다. 5) 그런데 잘못된 회개도 있다.
이 말은 하나님이 이끄시는 회개가 아닌 회개가 있을 수 있다. 아합의 경우. 왕상
21:16 아합은 나봇이 죽었다 함을 듣고 곧 일어나 이스라엘 사람 나봇의 포도원을 차지하러 그리로 내려갔더라 21:20 아합이
엘리야에게 이르되 내 대적자여 네가 나를 찾았느냐 대답하되 내가 찾았노라 네가 네 자신을 팔아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하였으므로
21:21 여호와의 말씀이 내가 재앙을 네게 내려 너를 쓸어 버리되 네게 속한 남자는 이스라엘 가운데에 매인 자나 놓인 자를 다
멸할 것이요 21:27 아합이 이 모든 말씀을 들을 때에 그의 옷을 찢고 굵은 베로 몸을 동이고 금식하고 굵은 베에 누우며 또
풀이 죽어 다니더라
성령께서 시키시는 회개가 아니었으므로 죄악에서 완전히 돌이키지는 못했다. 6) 회개는 반드시 말씀 전파를 통해서 일어난다.
a. 요나의 외침으로 니느웨 사람들이 회개하게 되는 것
b.
행 2:36 그런즉 이스라엘 온 집은 확실히 알지니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은 이 예수를 하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느니라
하니라 2:37 그들이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 베드로와 다른 사도들에게 물어 이르되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 하거늘
회개의 표시인데 베드로가 전한 말씀을 듣고 한 것이다. 회개는 진리가 전해 짐으로 인해 생겨난 것이다. 오늘 본문도 베드로가 예수님의 진리(하나님과 인간을 화평케 하신 분, 부활, 심판자)를 선포 할 때 회개에 이르게 되었다. 복음 전파는 반드시 회개를 일으킨다.
우리가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있는 것은 성령을 받았다는 증거이다. 하나님을 높이고 이 세상보다 하늘에 더 소망을 두고 살고자 하는
것은 성령이 함께 하기 때문에 일어나는 열매이다. 그러나 성령은 우리 자신에게만 함께 하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택하신 모든
사람에게 함께 하신다. 그렇다면 누구라 할지라도, 그가 설령 수 십 년 동안 미워한 사람이라 할지라도 주 예수를 고백하고 하나님을
높인다면 성령이 함께 한 하나님의 사람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그런데 우리는 그것조차 의심하려는 습성이 있다. 내게 있는 미움의
감정이 '저 사람이 예수에 대해 고백하는 것은 모두 거짓이다'라는 생각을 품게 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성령은 그 어떤 사람도
회개케 할 수 있음을 잊어버려서는 안 된다.
베드로의
말을 들은 사람들은 '하나님이 이방인에게도 생명 얻는 회개를 주셨도다'라고 말했다. 생명 얻는 회개는 오직 성령으로만 가능하다.
그런데 그것이 유대인들이 더러운 존재로 여기는 이방인에게도 주어졌다는 것은 결코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그들은 그것을 하나님의 일로 받아들였다.
17절에 보면 베드로는 '내가 누구 관대 하나님을 능히 막겠느냐'라고 말한다. 하나님의 일은 인간이 결코 막을 수가 없다. 우리는 다만 하나님의 일에 복종해야 한다. 교회는
자신의 감정으로 만나고 교통하는 곳이 아니다. 다만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성령을 선물로 받고 생명의 회개를 하는 사람들이
모이는 곳이다. 그럼 생명의 회개를 한다는 것이 무엇일까? 기도 안한 것, 교회에 빠진 것, 십일조 안한 것, 이런 것을 두고
하는 말일까? 그러한 것은 생명의 회개라고 말할 수 없다. 성령은 우리에게 그러한 회개를 하도록 하지 않는다. 생명의 회개란 나를 알고 그리스도를 아는 회개이다. 생명이 있기에 할 수 있는 회개이다. 그것은 나 자신의 쓸모 없음을 아는 회개이다. 내가 죄인임을 아는 회개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회개를 하는 신자라면 자신의 감정과 생각으로 누군가를 구분한다는 것이 그리스도 앞에서 어떤 악이 된다는 것을 알지 않을까? 그렇다면 자연히 성령에 의해서 자신의 감정과 미움은 다스려지게 되는 것이다.
물론
거짓된 회개가 있을 수 있다. 그러나 모든 것을 거짓으로 몰아세울 수는 없다. 생명의 회개는 분명 그 열매를 드러낼 것이고,
성령의 열매는 인간이 거짓으로 만들어 낼 수 없는 것이기에 우리는 열매를 보고 모든 것을 알 수 있다. 성령이
우리에게 오심은 우리를 그리스도를 위해 사는 사람이 되게 하기 위해서이다. 지금 우리가 그리스도를 말하고 그리스도를 위해 살고자
다짐한다면 그것은 내 안에 성령이 충만하시기 때문이다. 이것은 나 개인의 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내가 미워하던 그 사람에게도
있는 일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누구든 주님을 위해 살고자 한다면 그는 누가 뭐래도 우리의 형제이다. 하나님이 형제 되게 한
사람을 우리가 구별하고 밀쳐낼 수는 없다. 그것은 이미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에서 벗어나 있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리고 우리의 감정과 생각이 아닌 하나님의 일에 복종하고 다 같이 하나님의 선물을 받은 사람으로서 만나야 한다. 이것이 성령이 함께 한 교회의 모습이다.
렉시오 디비나-영적 독서
영적
독서(sacred/spiritual reading)를 의미하는 ‘렉시오 디비나’(Lectio Divina)는 주후 4,
5세기경에 처음 사용된 기도의 방법으로 성경 구절로 기도하는 방법을 말한다. 렉시오 디비나는 특히 4가지의 방식으로 성경 구절을
경험하는 방법 ① Lectio (Reading) ② Meditatio (Meditation) ③ Oratio
(Prayer) ④ Contemplatio (Contemplation) 렉시오 디비나는 “우리 자신을 은혜의 행위와
성령의 감화에 개방하는 하나의 구체적인 방법”(p. 6) “하나님께로 향하는 평생의 과정의 한 요소”(p.
9)이다(Michael Casey, 1996). 렉시오 디비나의 목적은 말씀과 기도에 근거하여 하나님을 더 깊이 체험하는
데 있다고 하겠다. 각자의 삶의 자리에서 하나님께 더 가까이 가기 위한 노력과 고투의 일환으로 렉시오 디비나를 실천하면 좋고
매우 유익하다.
렉시오 디비나(Lectio Divina)
렉시오
디비나는 「독서」라는 명사 렉시오(Lectio)와 「신적(神的)」이라는 형용사 디비나(divina)로 되어있는데 여기서 디비나는
「하느님의 말씀」 즉 성서를 뜻한다. 따라서 흔히 「영적 독서」, 「거룩한 독서」 또는 성독(聖讀)으로 말하고 있다.
가톨릭 전통에서, 수도자들이
성경을 가지고 하는 영성수련법. 성서에 관한 지식을 쌓기 위해 성서를 읽거나 성서에 관한 주석서를 읽는 것과는 달리 영적으로
풍성한 결실을 맺는 독서법이다. 단순히 읽는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묵상하고 기도하면서 관상에까지 이르게 된다. 즉 성서를 읽을
때 단순한 글자 차원을 넘어 하느님의 생생한 말씀, 더 나아가 그 말씀을 하느님 자체로 받아들이게 되는 성서 묵상법인 것이다.
그 기원은 불분명하나 오리게네스(185-254)가 "신적 독서에 충실하라"고 권면한 것을 시작으로 본다. 이후 12세기에 들어 카르투시오회 소속의 수사였던 귀고 2세(Guigo II)가 렉시오 디비나의 실제를 정립하였다. 개신교의 큐티와 공통점이 상당히 많다. 렉시오 디비나를 베네딕도회의 전통이라고도 하는데 이것은 6세기부터 12세기까지 서방교회의 수도생활은 거의 베네딕도회였고 이후 수도승적 전통이 베네딕도회 안에서 이어져왔기 때문이다.
구체적인
방법은 여럿이 있지만, 중세 초 수도자들의 고전적 형태 기준으로는 성경을 지성의 차원에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닌 인격의 차원에서
받아들이는 것으로, 텍스트를 분석하지 않고 내면화하여 최종적으로는 절대자와의 합일감을 갖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구체적인 단계는 다음과 같다.
종교활동을 연구하는 연구자들이 종교적 체험을 연구할 때 연구대상으로 즐겨 삼는 주제이기도 하며, 일군의 신경과학자들이 신 헬멧(God helmet) 등을 활용해 연구할 때 관상단계에 도달한 수녀들의 뇌파 검사를 하기도 했다.
입문하고 싶다면 엔조 비앙키(Enzo Bianchi) 수사의 『말씀에서 샘솟는 기도』[2]#와 허성준 신부의 『수도 전통에 따른 렉시오 디비나』(전 2권)#1#2이
권할만하다. 전자는 160여 페이지의 짧은 입문서로, 간략하지만 국제적으로 널리 사랑받은 고전이다. 후자는 렉시오 디비나에 대해
깊이있게 파고들고자 할 때 유용하다. 또는 본당 수녀님께 여쭤보면 본당내 모임이 있을 경우 그 모임을 안내해주시거나 없으면
본당내에 소모임으로 만들게 될 것이다.
간략한 역사: 「성경독서」, 「거룩한 독서」, 「성독聖讀」, 등 여러 이름으로 부르는 「렉시오
디비나」는 교회의 역사 안에서 오래된, 성경을 읽는 태도와 자세, 영적 체험이자 영성 수련 및 방법론을 망라한다. 교부
오리게네스(185~253년경)와 카르투시오회의 귀고 2세Guigo II(?~1188년)에 의해 체계화되고 집대성되었다고
일컬어진다. 교회의 역사 안에서 얼마간 잃어버린 듯한 교회의 소중한 유산인 렉시오 디비나가 본격적으로 교회 안에서 다시 활기를
되찾은 것은 제2차 바티칸 공의회 덕이다.(*살레시오회의 공식적인 문헌에서 이 중요성을 강조한 것은 2002년 제25차 세계
총회-총장 신부의 문헌 소개 인사말-이다.)
렉시오 디비나에 관한 귀고 2세의 말씀
「…영적 4단계요, 층계는 독서(lectio), 묵상(meditatio), 기도(oratio), 그리고 관상(contemplatio)이다.
독서는 행복한 삶의 감미로움에 대해 살펴보는 것이고, 묵상은 그 감미로움을 발견하는 것이며, 기도는 그것을 청하는 것이고,
관상은 그것을 맛보는 것입니다. 독서는 기초와도 같아 맨 먼저 오는 것으로서 우리에게 주제를 제공해주고 또 우리를 묵상으로
인도합니다. 묵상은 추구해야 할 것을 더 열심히 찾아 나서는 것으로서, 말하자면 땅을 파고 들어감으로써 보물을 발견하여 그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러나 스스로는 그것을 간직할 힘이 없기에 우리를 기도로 인도해 줍니다. 기도는 온 힘을 다하여 하느님께
스스로를 들어 높이면서 갈망하던 보물을 청하는 것이니, 그것은 곧 관상의 감미입니다. 이 관상은 그 도래와 함께, 천상적 감미의
이슬로 목마른 영혼을 적시면서 이전 세 단계의 모든 수고를 갚아줍니다. 독서가 표면과 관련된 훈련이라면 묵상은 속내를 들여다보는
지성입니다. 그리고 기도가 갈망과 관련된 것이라면, 관상은 모든 감각을 초월한 것입니다. 첫 번째 단계는 초심자들의 것이요, 두
번째는 진보한 이들의 것이며, 세 번째는 열심한 이들의 것이요, 네 번째는 복된 이들의 것입니다.
묵상 없는 독서는 건조하며 독서 없는 묵상은 오류에 빠지기 쉽고, 나아가 묵상 없는 기도는 미지근하며 기도 없는 묵상은 결실이 없는 것
첫째 단계에서 열심히 애쓰고, 둘째 단계에서 주의 깊게 두루 살피고, 셋째 단계에서 정성스럽고, 넷째 단계에서 자기 자신을
빠져나와 드높아진 사람, 하느님께서 당신을 향해 오도록 그 마음에 깔아놓으신 오르막길을 따라 점점 더 힘 있게 올라가 마침내는
신들의 신이신 하느님을 시온에서 뵈옵는 사람은 복됩니다.
이 네 층계에서 우리를 떼어놓는 네 가지 원인이 있으니 그것은 어쩔 수 없는 필연, 선행의 유익함, 인간적인 나약함, 그리고
세상의 헛됨입니다. 첫째 것은 변명할 수 있는 것이고, 둘째 것은 관용을 베풀 수 있는 것이며, 셋째 것은 불쌍히 여길 것이고,
넷째 것은 정녕 죄스러운 것입니다.
“좋으신 하느님, 다정하시고 온유하시며 상냥한 친구이자 현명한 조언자, 능하신 도움이신 분! 주님을 팽개치는 이, 그토록
겸손하고 유순한 손님이신 주님을 제 마음에서 몰아내는 이는 얼마나 인간답지 못하고 무모한 자인지요! 아, 그 얼마나 불행하고도
재앙스런 맞바꿈인지요, 자기의 창조주를 팽개치고 대신 고약하고 해로운 생각들을 받아들이는 것이! 성령의 신방(新房), 곧 조금
전까지도 천상의 기쁨에 경도되어 있던 저 마음 깊은 곳을, 순식간에 불결한 생각들에 넘겨주어 도지들로 하여금 짓밟도록 하는
것이!(마태 7,6)
아직 마음속에 신랑이 남기고 간 흔적의 온기가 남았건만, 벌써 간음의 욕망이 고개를 내밀다니요. 모두가 어울리지도 않거니와
낯부끄러운 일입니다. 사람이 해서는 안 되는 형언할 수 없는 말을(2고린 12,4) 방금 들은 귀가, 꾸며낸 이야기와(2디모
4,4) 분심 거리에 그토록 빨리 귀 기울이게 되다니, 조금 전에 거룩한 눈물로 세례를 받았던 눈이 즉시 헛된 것에 시선을
돌리다니, 조금 전에 달콤한 축혼가를 부르던 입이, 뜨겁고도 솜씨 좋은 언변으로 신부를 신랑과 화해하게 했으며 신부를 포도주
창고로 이끌었던(아가 2,4) 그 입이 다시금 상스럽고도 야비한 이야기로 되돌아가다니, 속임수를 꾸미고(시편 50,19) 헐뜯는
소리를 내다니.
주님, 이 허물로부터 저희를 지켜주소서! 그렇지만 인간적 허약함으로 인하여 저러한 잘못에 다시 떨어진다 해도, 이 때문에
절망하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억눌린 이를 먼지에서 일으켜 세우시고 불쌍한 이를 거름에서 들어 올리시는(시편 113,7) 어진
의사이신 당신께 되돌아가렵니다. 그러면 죄인의 죽음을 원하지 않으시는 그분께서(에제 33,11) 우리를 다시금 보살피시고 낫게 해
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호세 6,2).”」
(* 위 단락은 <엔조 비앙키Enzo Bianchi, “말씀에서 샘솟는 기도Pregare la Parola”, 이연학
번역, 분도, 2001년> 중에서 귀고 2세라는 분이 쓴 “관상생활에 대해 쓴 편지Epistola de vita
contemplativa”의 부분 발췌이다. 귀고 2세는 프랑스 그르노블 근처에서 1084년 창설된 카르투시오Grand
Chatreuse수도회의 초기 회원 중 한 사람이다. 스스로에 대해 침묵한다는 카르투시오의 영성에 따라 널리 알려진 바는 없다.
1173년에 공동체 책임자 자리에 있었고 아마도 같은 해 아니면 이듬해에 카르투시오 수도회의 제9대 총원장으로 선출되었다가
1180년 소임을 마치고 1188년에 귀천했다.)
렉시오 디비나를 위한 사전 준비
침묵과 고독의 장소
– 고독과 침묵의 장소: 나에게 말씀하시는 하느님의 현존 앞에 나를 데려다 놓도록 잠시 침묵 한다. 무릎을 꿇거나 엎드리는 등 하느님의 현존을 긴장하여 받아들이는 몸동작이 중요하 다.
– 충실하게 지킬 수 있는 시간
– 성경을 통해 나에게 말씀하시는 하느님을 들으려는 자세
– 렉시오 디비나의 목표는 하느님 관상
성령의 인도하심에 취해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고
그분의 기도로
그리스도와 함께 그리스도를 위하여 그리스도 안에서 성부께 나아간다.
– 나 자신에게서 이탈,
나 자신으로부터 그리스도 자신으로,
땅의 것들로부터 하늘의 것들로 탈출
– 나의 세례 재확인,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시는 것이므로
나는 바로 하느님의 말씀이 된다.
– 내적인 침묵,
이는 식별을 위한 필수적인 조건,
말씀을 듣기 위해 나를 짓누르는 모든 것을 침묵하게 할 것.
– 나 자신의 무력함 고백,
피상적이고 감상적인 흉내 내기가 아니고
진정 내가 잃은 양, 태어나면서부터 눈먼 이, 중풍 병자이니
나를 찾아오신 하느님께 감사한다.
렉시오 디비나의 단계
시작 기도: (혹은 조용한 성가, 허밍)
성령 초대: 교회와 하나되어 성령을 초대한다. 교회는 말씀을 소유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교회와
성경 위에 머무르시는 성령을 통하여 말씀을 보호한다. 시편 119편의 적절한 대목을 낭독하거나 ‘오소서, 성령이여!’와 같은
기도문이나 성가를 활용할 수 있다.
신앙고백: 신경 안에서 성부의 아이콘인 그리스도를 본다.
성경읽기: 무작위로, 주관적으로 성경 본문을 선택해서는 안 된다. (주일 복음과도 같은)
선정된 본문을 적어도 다섯 번 이상 소리를 내어 읽는다. 다른 번역본(예를 들어 ‘공동 번역’과도 같은)과 함께 본문을 서로
확인하면서 반복해서 읽는 것도 좋다.
공부하기: 말씀을 영리하게 읽기 위해서는 공관복음의 경우 병행구를 확인하거나 권위 있는
요약본이나 주해서, 혹은 어휘 사전(참조. 주석 성경) 등을 활용하는 것이 유용한 도구들이 된다. 성경 본문에 관한 교부들의
말씀(예를 들어, 분도출판사 발행의 ‘교부들의 성경 주해’ 등)을 통해 영적인 요점을 파악하고 시야를 확장하는 것도 중요하다.
묵상하기: 읽은 내용에 대한 심화. 보조 자료 활용 가능. 병행구를 읽으며 본문의 메시지
확장, 신학적 요점 파악, 본문을 나 자신에게 적용하고 나 자신을 본문에 적용한다. 공동체와 교회, 그리고 인류 가족 안에서, 또
그들을 향한 나의 태도와 행동을 살펴본다.
기도하기: 성경 본문을 통해 나에게 말씀해오신 주님과 대화하며 나를 주님께 봉헌하며 감사하고
청원하며 전구를 청한다. 모든 것이 성체성사와 연결되어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 노래와 함께 하는 성체강복으로 기도하기와
관상하기가 연결되는 것도 좋다.
관상하기: 신비로운 환상을 기대하거나 제멋대로의 상상이나 공상이 아니다. 영적인 항구함으로
말씀과 성령 안에 머묾, 마크로티미아μακροθυμία(makrothymia)이다. 하느님의 마음 안에, 은혜로움 안에, 성실한
마음 안에, 평화 안에 잠기는 것이다. 사랑 안에서 마음을 확장하는 것으로 힘 있는 말씀의 효과가 드러난다.
***
내 안에 그분의 초막을 짓고,
그분의 사랑에 하느님의 말씀으로 응답한다.
말씀을 춤추며 그분 앞에서 전례로 이를 거행한다.
삼위일체 하느님의 처소에 돌아갈 그때까지
나의 걸음걸음마다 그분께서 하느님의 로고스, 아드님, 나의 주님이시기를!
오로지 말씀께서 하느님의 사랑으로 나를 데려가시기를,
성부와 성자와 성령이신 말씀께서
내 안에 오시어 머무르시기를,
내 안에 당신의 처소를 마련하시기를!
하느님의 말씀을 기도하게 되는 것은 렉시오 디비나의 은총,
렉시오 디비나는
시간이 있기 전
삼위일체의 공간 안에서 아드님께서 거행하신 것처럼
우리의 육신이라는 초막 안에서, 사람들 가운데에서
우리가 거행하는 전례!
렉시오 디비나의 순서입니다.
1. 묵상 준비
시간이 허락하는 한, 다음 날 묵상할 본문(특히 복음서)을 미리 전 날 읽어봅니다. 이 때 관주나 주석서를 참고하여 본문에
관한 지적 이해를 도울 수도 있습니다. 최소한 주 1 회 (주일 묵상본문이나 기도 가운데 더 깊은 묵상의 필요를 느꼈던 본문을
택하여) 충분한 시간을 내어 탐구를 함으로써 자칫 감성적으로만 치우칠 수 있는 렉시오 디비나의 균형을 맞춥니다.
2. 묵상 시작
(1) 매일 일정한 시간(가능하면 하루를 시작하는 새벽)과 조용한 장소에서 묵상을 하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2) 가볍게 몸을 풀고, 호흡을 안정되게 하고, 자세를 바로잡아 경건히 마음을 가다듬습니다. 공동으로 할 때는 동그랗게 둘러 앉아 조용한 분위기에서 성가를 듣거나 부르면서, 성령의 임재를 상징하는 촛불에 불을 켭니다.
(3) 성령께서 우리의 마음을 열고 친히 인도하시기를 믿음으로 청하면서, 약 5분간 주님 앞에서 침묵을 지킵니다. 세상에 젖어있던 분주한 생각들을 어느 정도 내려놓고,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 위한 빈 공간을 마련하는 것입니다.
3. 렉시오 디비나
다음의 네 과정은 모든 과정이 성령님의 인도하심 가운데서 이루어져야 하지만, 앞의 두 과정은 마음의 명료함 가운데서 시도되는
개인의 깊은 성찰이 주가 되는 반면, 뒤의 두 과정은 하나님과의 만남과 사귐, 그리고 그 관계 안에서 쉼을 강조하는 면이
있습니다.
(1) 말씀봉독 Lectio
그 날의 본문을 소리 내어 천천히 읽습니다. 잠깐의 침묵(약 30초∼1분)후에 본문을 반복하여 3번 읽습니다. 공동으로 할
때는 누구나 자원하는 사람들이 한 번씩 읽을 수도 있습니다. 소리 내어 입으로 읽고, 귀로 말씀을 들으며, 온 몸과 마음을 기울여
말씀을 받아들이고, 결국은 말씀하시는 주님을 만나게 될 것이라는 간절함으로 읽습니다. 읽다가 마음에 와 닿는 부분에서는 잠시
머물러 마음에 깊이 새기도록 합니다.
(2) 묵상 Meditatio
말씀의 전체적인 상황과 주제를 생각하면서 논리나 상상을 동원하여 묵상을 할 수도 있고, 말씀이 나의 마음속에 와서 어떤
울림이나 느낌이 있다면 그것을 묵상하거나 특별한 깨달음을 깊이 묵상할 수도 있습니다. 또는 그 날 특별히 마음에 와 닿는 구절이
있다면 이것을 붙잡고 집중적으로 묵상을 할 수도 있습니다. 때로는 아무런 인위적인 노력을 하지 않은 채 단순히 마음을 열고 아기가
젖을 빨 듯, 읽고 또 읽는 것을 되풀이 할 수도 있습니다. (15분∼20분)
(3) 기도 Oratio
의식을 주님께로 향하면서 이제까지 묵상했던 내용들, 깨달음이나 감동, 의혹이나 질문점, 그 무엇이든 주님을 바라보며 대화를
합니다. 마음 속의 하고 싶은 말을 아뢰고, 침묵 가운데 머물러 그 분의 음성을 듣습니다(그 분의 음성은 허공에서 들리는 것이
아니라, 내 마음 깊은 곳에서 울려 나오는 생각이나 감정에서 들린다는 것을 기억합니다.) 기도를 열어주시고, 또한 이끄시는
성령께서 나와 이 순간 함께 하심을 믿으며 솔직히 주님께 고백합니다. (5분)
(4) 관상 Contemplatio
기도 가운데 기쁨이나 위로를 주신 경우 거기에 머물러 충분히 맛을 보고, 평안을 주신 경우 사랑의 눈길로 그 분을 바라보며
주님 품에서 안식하며, 때로는 회개와 아픔을 주시는 경우 겸허히 받아드리며, 모든 것을 감사하는 마음으로 주님의 은혜 가운데 머문
후 기도를 마칩니다.(5분)
4. 기도 나눔 Sharing
주님께서 깊은 감동과 깨달음을 주신 것을 영성일기로 적거나, 기회가 되면 다른 사람과 나눕니다. 공동으로 할 경우, 두어
사람이 성령님께 직접 받은 것을 차례로 나누고 나머지 사람은 침묵 가운데서 하나님께서 공동체 멤버를 통해 말씀하시는 것을 마음을
열고 경청하면서 분별합니다. 나누는 사람이 없을 때에도 침묵 가운데서 기다립니다.
잠깐 동안 오늘의 기도과정이 어떠했는지 되돌아보며 성찰합니다. 이 과정도 매우 중요하므로 생략하지 않고 묵상 후에 반드시
합니다. 공동으로 할 경우, 시간이 허락하는 한 많은 사람이 간결하게 돌아가면서 한 사람씩 나누고, 나머지는 침묵 가운데 묵상적
경청을 합니다.
6. 마무리
침묵 가운데서 함께 하시고 도와주신 성령님께 감사기도를 드림으로 마무리를 합니다. 오늘 주신 말씀과 깨달음을 마음속에서 되뇌며 삶의 한복판으로 나아갑니다.
거룩한 독서 Lectio Divina
기독교인의
신앙은 인간의 역사와 시간, 개인 삶 속으로 들어오신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이 그 분의 일을 하셨다는 사실에 근거합니다. 그것은
다른 어떤 것에도 비교되거나 혼합될 수 없는 전무후무한 독특한 사건이었으며, 시간과 영원이 만나는 사건이었으며, 매일매일의
우리의 삶 속에서 말씀과 함께 반복되어져 가는 사건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의 묵상 또한 성경읽기를 통하여 언제나 말씀으로 오신 주님의 오심과 사역, 수난, 부활, 그리고 재림을 중심으로
이루어져야 하겠습니다. 로뎀묵상은 이 주제에서부터 멀어지는 어떤 묵상의 방법도 배격하며, 우리를 더욱 주님께 다가가게 하기 위하여
말씀 묵상을 합니다. 성서일과는 이러한 교회력에 따라 매일의 묵상을 위하여 만들어진 전통적인 방법이기에 로뎀묵상은 성서일과와
함께 가려고 합니다.
전 세계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매일 동일한 말씀으로 함께 묵상을 한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러므로
오직 성령만이
기도자를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실 것이라는 믿음과(요한일서 2:27), 한 성령 안에서 함께 한다는 믿음을 가지고 가능한 한 자신이
속한 공동체의 지체들과 월 1-2회 함께 말씀으로 묵상기도를 하고 함께 나누게 되기를 바랍니다.
렉시오 디비나의 순서입니다.
1. 묵상 준비
시간이 허락하는
한, 다음 날 묵상할 본문(특히 복음서)을 미리 전 날 읽어봅니다. 이 때 관주나 주석서를 참고하여 본문에 관한 지적 이해를
도울 수도 있습니다. 최소한 주 1 회 (주일 묵상본문이나 기도 가운데 더 깊은 묵상의 필요를 느꼈던 본문을 택하여) 충분한
시간을 내어 탐구를 함으로써 자칫 감성적으로만 치우칠 수 있는 렉시오 디비나의 균형을 맞춥니다.
2. 묵상 시작
(1) 매일 일정한 시간(가능하면 하루를 시작하는 새벽)과 조용한 장소에서 묵상을 하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2) 가볍게 몸을 풀고, 호흡을 안정되게 하고, 자세를 바로잡아 경건히 마음을 가다듬습니다. 공동으로 할 때는 동그랗게 둘러 앉아 조용한 분위기에서 성가를 듣거나 부르면서, 성령의 임재를 상징하는 촛불에 불을 켭니다.
(3) 성령께서 우리의 마음을 열고 친히 인도하시기를 믿음으로 청하면서, 약 5분간 주님 앞에서 침묵을 지킵니다. 세상에 젖어있던 분주한 생각들을 어느 정도 내려놓고,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 위한 빈 공간을 마련하는 것입니다.
3. 렉시오 디비나
다음의 네
과정은 모든 과정이 성령님의 인도하심 가운데서 이루어져야 하지만, 앞의 두 과정은 마음의 명료함 가운데서 시도되는 개인의 깊은
성찰이 주가 되는 반면, 뒤의 두 과정은 하나님과의 만남과 사귐, 그리고 그 관계 안에서 쉼을 강조하는 면이 있습니다.
(1) 말씀봉독 Lectio
그 날의 본문을
소리 내어 천천히 읽습니다. 잠깐의 침묵(약 30초∼1분)후에 본문을 반복하여 3번 읽습니다. 공동으로 할 때는 누구나 자원하는
사람들이 한 번씩 읽을 수도 있습니다. 소리 내어 입으로 읽고, 귀로 말씀을 들으며, 온 몸과 마음을 기울여 말씀을 받아들이고,
결국은 말씀하시는 주님을 만나게 될 것이라는 간절함으로 읽습니다. 읽다가 마음에 와 닿는 부분에서는 잠시 머물러 마음에 깊이
새기도록 합니다.
(2) 묵상 Meditatio
말씀의 전체적인
상황과 주제를 생각하면서 논리나 상상을 동원하여 묵상을 할 수도 있고, 말씀이 나의 마음속에 와서 어떤 울림이나 느낌이 있다면
그것을 묵상하거나 특별한 깨달음을 깊이 묵상할 수도 있습니다. 또는 그 날 특별히 마음에 와 닿는 구절이 있다면 이것을 붙잡고
집중적으로 묵상을 할 수도 있습니다. 때로는 아무런 인위적인 노력을 하지 않은 채 단순히 마음을 열고 아기가 젖을 빨 듯, 읽고 또
읽는 것을 되풀이 할 수도 있습니다. (15분∼20분)
(3) 기도 Oratio
의식을 주님께로
향하면서 이제까지 묵상했던 내용들, 깨달음이나 감동, 의혹이나 질문점, 그 무엇이든 주님을 바라보며 대화를 합니다. 마음 속의
하고 싶은 말을 아뢰고, 침묵 가운데 머물러 그 분의 음성을 듣습니다(그 분의 음성은 허공에서 들리는 것이 아니라, 내 마음 깊은
곳에서 울려 나오는 생각이나 감정에서 들린다는 것을 기억합니다.) 기도를 열어주시고, 또한 이끄시는 성령께서 나와 이 순간 함께
하심을 믿으며 솔직히 주님께 고백합니다. (5분)
(4) 관상 Contemplatio
기도 가운데
기쁨이나 위로를 주신 경우 거기에 머물러 충분히 맛을 보고, 평안을 주신 경우 사랑의 눈길로 그 분을 바라보며 주님 품에서
안식하며, 때로는 회개와 아픔을 주시는 경우 겸허히 받아드리며, 모든 것을 감사하는 마음으로 주님의 은혜 가운데 머문 후 기도를
마칩니다.(5분)
4. 기도 나눔 Sharing
주님께서 깊은
감동과 깨달음을 주신 것을 영성일기로 적거나, 기회가 되면 다른 사람과 나눕니다. 공동으로 할 경우, 두어 사람이 성령님께 직접
받은 것을 차례로 나누고 나머지 사람은 침묵 가운데서 하나님께서 공동체 멤버를 통해 말씀하시는 것을 마음을 열고 경청하면서
분별합니다. 나누는 사람이 없을 때에도 침묵 가운데서 기다립니다.
잠깐 동안
오늘의 기도과정이 어떠했는지 되돌아보며 성찰합니다. 이 과정도 매우 중요하므로 생략하지 않고 묵상 후에 반드시 합니다. 공동으로 할
경우, 시간이 허락하는 한 많은 사람이 간결하게 돌아가면서 한 사람씩 나누고, 나머지는 침묵 가운데 묵상적 경청을 합니다.
6. 마무리
침묵 가운데서 함께 하시고 도와주신 성령님께 감사기도를 드림으로 마무리를 합니다. 오늘 주신 말씀과 깨달음을 마음속에서 되뇌며 삶의 한복판으로 나아갑니다.
주의를 기울입니다.
1.
렉시오 디비나의 가장 큰 요점은 개개의 성경말씀으로부터 시작하여 결국은 말씀하시는, 말씀 자체이신 사랑의 주님을 인격적으로
만나는 것입니다. 절대의식을 추구하거나, 마음의 평안을 얻거나 문제의 해결책을 얻는 것들은 어디까지나 부수적인 것이지 본질이
아님을 잘 기억해야 합니다. 말씀을 나 자신의 문제에 적용할 경우에도 주님의 시각으로 바라보고 분별하도록 합니다.
2. 주어진
성경구절이 주시고자 하는 본래의 주제에서 너무 벗어나 지엽적인 내용이나, 개인적 내면의 문제나 체험 속으로 지나치게 빠져들지
않도록 합니다. 개인적인 감정이나 느낌을 지나치게 추구하거나 거기에 큰 의미를 두지 않도록 조심합니다. 주제에서 너무 벗어난
기도체험은 좋지 않은 묵상태도로 굳어질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가능한 한 기도 시간이외에 따로 시간을 내어서 금주의 말씀 주제에
대해 관주성경이나 주석을 통해 성경공부를 함으로써, 말씀의 지적인 부분과 균형을 맞추도록 합니다. 공동체 모임에서 정기적으로
함께 렉시오 디비나를 하는 것은 이러한 분별을 위하여 반드시 필요하며 매우 효과적입니다. 카페의 묵상 나눔에 간략한 댓글을 올려
자신의 체험을 나누고 다른 사람들의 체험과 비교해 보는 것도 지나치게 개인적으로 편향된 묵상에 치우치지 않도록 함께 분별을
이루어가는 좋은 방법입니다.)
3. 때로는,
아니 아주 많은 경우, 주님께서는 침묵하시기 때문에 우리는 아무 느낌이나 체험 없이 묵상을 마치는 경우가 빈번합니다. 그럴
경우라도 우리는 겸손히 삶 속에서 우리를 이끄시는 주님의 손길을 믿음으로 바라보아야 하며, 때로는 다른 사람을 통해 말씀하시는
주님을 들을 수 있어야 합니다.
4. 특히
마지막 관상이라고 하는 부분, 마음을 완전히 비운다거나 황홀경이나 신비로운 합일의 체험이라고 하는 것에 지나치게 마음을 두거나
의도적으로 추구하지 않도록 합니다. 겸손하고 솔직한 마음만을(시 51) 주님께서 받으신다는 믿음과, 하나님의 임재를 기다리며
인내하는 마음으로 주님을 바라보는 묵상을 해야 합니다.
묵상, 거룩한 읽기
시작하는 말
“대혁명이란 성경을 읽는 운동입니다. 루터는 무엇을 했을까요? 성경을 읽었습니다. 그는 성경을 읽고 성경을 번역하고 그리고
수없이 많은 책을 썼습니다. 이렇게 하여 혁명이 일어났습니다. ‘책을 읽는 것’ 그것이 혁명이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반복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이 말은 일본의 철학자 사사키 아타루가 그의 책 ‘잘라라, 기도하는 그 손을’ 통해 종교개혁을 평가한 것입니다. 일반
철학자인 사사키 아타루는 종교개혁이 성경을 읽고 본래 의미를 찾는 운동에서 시작되었다고 지적합니다. 이것은 아타루만의 독창적인
아이디어가 아닙니다. 이미 교회사(敎會史) 학자들은 이에 대해 많이 연구했고 교회사 학자들도 루터의 ‘95개조 반박문’은 그가
로마서를 접하고 읽은 과거 시점부터 이미 시작되었다고 주장합니다.
하지만 철학자 사사키 아타루는 이에서 더 나아가 책을 바르게 읽는다는 것이 얼마나 중요하며 대단한 일인가에 집중합니다.
성경에 대한 바른 읽기는 유럽이 수백 년간 지켜온 견고한 중세의 세계관을 단번에 무너뜨리는 대변혁을 일으켰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종교개혁자들의 ‘읽기 혁명’은 사실 새로운 것이 아니라 성경 스스로가 주장하고 증명해왔던 것입니다.
“하나님이 빛이 있으라 하시니 빛이 있었고”(창 1:3) 창세기는 세상의 창조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됐음을 기록합니다. 또
요한복음의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중략) 말씀이 육신이 되어”(요 1:1-14)는 하나님과 말씀의 관계성을 인간에게 알려
줍니다. 이는 우리가 하나님을 알 수 있는 유일한 길이 말씀이라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 말씀의 본질이 무엇이냐에 대해서는 여러 신학적 이견들이 존재하겠지만 우리가 모두 동의할 수 있는 확실한 사실은 성경이
하나님의 분명한 말씀이라는 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경을 읽는 것을 통해 하나님을 바르게 알고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상을 바르게
알려주는 참된 세계관을 얻습니다.
저는 이 글을 통해 ‘성경 읽기’의 한 방법론인 ‘묵상’(默想)에 대해서 논하고 바른 ‘성경 읽기’와 ‘묵상’이 우리의 삶에
어떤 영향을 미칠 수 있는지 생각해 볼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기독교 세계관 교육에 대해서 생각해 보려 합니다.
1. ‘바른 성경 읽기’가 묵상이다.
묵상이란 무엇일까요? 저는 ‘성경적 묵상’이 ‘바른 성경 읽기’라고 생각합니다. 제가 이렇게 ‘묵상’을 ‘바른 읽기’라고
말하는 이유는 기독교의 묵상은 시편 1:2과 여호수아 1:8의 ‘묵상’(הגה, hagah)이라는 단어에 기인하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묵상’이란 단어는 ‘낮은 소리로 읽다’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시편 71:24, 143:5도 이와 동일한
의미로 사용합니다. 이 단어를 사용한 다른 곳에서는 사자의 울음소리와 같이 ‘큰 소리’를 의미하거나 슬픔에 흐느끼는 ‘작은
소리’를 나타내는 데 쓰이기도 합니다.
이렇게 서로가 상반된 상황(狀況)아래 동일한 단어를 쓴 이유는 같은 소리를 반복해서 내는 것을 표현하기 위해서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이를 볼 때 ‘묵상’이란 단어는 ‘성경을 읽는 것’이며 동시에 ‘반복해서 계속 읽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기에 저는
묵상은 기독교가 오래전부터 실천해 온 바른 ‘성경 읽기의 방법’임이 분명하다고 생각합니다.
제임스 패커(James Innell Packer. 1926- )는 1973년에 쓴 그의 책 ‘하나님을 아는
지식’(Knowing God)의 첫 장에서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지식을 하나님을 아는 지식으로 바꿀 수 있는 방법이 바로
묵상이라고 쓰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패커는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이 그것을 모름으로 인해서 통탄할 만큼 괴로움을 당하고 있다.”고
말합니다.
그러면서 패커는 ‘바른 성경 묵상’이 무엇인지 우리에게 알려줍니다. “묵상이란 하나님의 사역과 도(道, way) 그리고
목적과 약속들에 대해서 자신이 아는 여러 가지 것을 상기하고(calling to mind), 숙고하고(thinking over),
깊이 생각해 보고(dwelling on), 적용하는(applying to oneself) 활동이다. 그것은 하나님 임재 안에서,
하나님이 보시는 가운데, 하나님의 도움에 의해, 하나님과 교통하는 수단으로서, 의식적으로 수행하는 거룩한 사고 활동(an
activity of holy thought)이다.”
이 내용을 볼 때 우리는 패커가 묵상을 크게 두 가지 활동으로 나누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첫째는 사고의 활동이고,
둘째는 행함의 활동입니다. 이는 묵상은 단지 성경을 읽어 정보를 취하는 활동이 아니라, 말씀을 통하여 인간과 소통하고자 하시는
인격적인 하나님의 참뜻을 발견하는 작업이며 그 뜻에 순종하는 것임을 의미합니다. 그러기에 저는 전자는 바른 읽기이며 후자는 바른
읽기의 당연한 결과라고 말하고 싶습니다.(수 1:18)
2. ‘바른 성경 읽기’가 어려운 이유
제임스 패커가 하나님을 아는 길로서의 성경 묵상을 이야기한 지 40년이 지났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묵상에 대해서 이전보다 더 잘 알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한국에서 묵상 운동이 본격적으로 시작한 때는 70년대 중반 ‘성서유니온’이 시작되면서 일 것입니다. 그 후로 많은 단체가
‘성경 묵상’을 보급하기 위해 관련된 프로그램과 책자들을 만들었고 교회에서는 성도들의 경건 생활을 위해 이를 적극적으로 장려해
왔습니다.
그래서 많은 긍정적인 변화가 있었으나 여전히 한국 교회의 성도들은 ‘바른 성경 읽기’에 고질적인 문제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저는 이 문제점들만 수정한다면 한국 기독교인들이 ‘바른 성경 읽기’에 더욱 가까이 갈 수 있다고 믿습니다.
그러기에 저는 한국 기독교인들의 잘못된 성경 읽기와 묵상 습관에서 가장 미숙하다고 생각되는 것 중 두 가지만 언급하려고
합니다.(하지만 이러한 진단은 저의 개인적인 경험에 바항으로 한 것이기에 이에 동의하지 않는 분들도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첫째, 한국 기독교인들의 잘못된 ‘성경 읽기’와 ‘묵상’은 사고(思考) 과정에 충분한 시간과 노력을 들이지 않거나 이를 무시하는 경향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사고의 과정이 무시된 ‘성경 읽기’가 얼마나 비상식적인 결과를 초래하며 성경의 권위를 손상(損傷)하는 것인지에 대한 예는 얼마든지 우리 주변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예를 들면 얼마 전 전라남도에서 한 목회자 부부가 자신의 삼 남매를 죽이고 시신을 방치(放置)한 사건이 있었습니다. 이
부부는 경찰 조사에서 구약성경의 잠언 23:13,14 “아이를 훈계하지 아니하려고 하지 말라. 채찍으로 그를 때릴지라도 그가 죽지
아니하리라. 네가 그를 채찍으로 때리면 그의 영혼을 스올에서 구원하리라.”라는 구절을 그대로 따라 했다고 진술했습니다. 또
아버지인 박 씨는 “(사도 바울이) 유대인들에게 사십에서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면 맞았으며”라는 성경 구절에 따라 아이들을
때렸다고 진술했습니다.
말도 안 되는 이야기처럼 보이지만 이는 상식적인 사고(思考, thought)의 과정이 없이 신비적(神秘的)인 방법으로만
성경을 읽고 해석하여 일어날 참혹한 결과였습니다. 타락한 인간들의 추악한 욕망은 유익한 것은 취하고 불리한 것은 무시하거나
왜곡시켜 자신을 선의의 사람으로 가장하고자 합니다. 또 그런 인간들은 진리에는 눈을 감아버리고서도 일말의 죄책감마저 느끼지 않을
것입니다.
하지만 성도들의 깊은 ‘사고(思考) 활동’은 우리 안에 잠자고 있는 진리에 대한 욕구를 불러일으킬 것입니다. 믿음의 성도들이
진리를 찾고자 할 때 진리의 영이신 성령님께서 우리의 사고 활동을 도와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리라.”(요 14:26) 신학자인
제임스 패커는 이렇게 말합니다. “묵상은 의식적으로 수행하는 거룩한 사고 활동이다.”
둘째, 저는 적용 중심적이며 실용적인 성경 읽기와 묵상 방법들이 바른 성경 읽기와 묵상을 방해한다고 생각합니다.
급변하는 현대 사회와 복잡한 인간관계는 우리의 정서를 불안하게 하는 주된 원인입니다. 그러한 사회 속에서 우리는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왜’(Why)나 ‘무엇’(What)이라는 질문 보다, 실용적인 “어떻게”(How)라는 질문에 자연스럽게
우리의 관심이 집중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하기에 지루하고 따분한 성경 본문해석 과정은 건너뛰고 즉각적인 적용 중심의 ‘성경
읽기’와 ‘묵상’이 성도들에게 매력적으로 다가올 수밖에 없습니다.
이에 아부하여 각종 ‘성경 읽기’ 잡지들은 독자들이 해석의 과정에 참여할 수 있는 여지를 주지 않고 너무나도 친절하게 답을
제공해주고 심지어 무엇을 적용해야 하는지도 알려 줍니다. 거의 유치원 수준의 교재를 제공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의 현실적인
필요 때문에 성경을 실용서적으로 만드는 잘못을 범하는 것입니다.
3. ‘바른 성경 읽기’와 ‘묵상’이 세계관을 바꾼다.
“인식하든지 인식하지 안 하든 지 간에 모든 사람은 세계관을 가지고 있다. 이것은 인간 경험들을 해석하는 로드맵이거나
줄거리이다. 또 이것은 실제 하는 것과 자신의 정체성을 어떻게 알 수 있으며 어떤 도덕적 판단을 내릴 것인가를 결정한다.”
위의 내용은 오스 기니스(Os Guinness, 1941- )가 세계관에 대해 정의한 것입니다. 이를 통해 우리는 오스 기니스가 세계관을 크게 네 가지의 특징들로 규정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첫째, 누구나 세계관을 가지고 있으며, 둘째, 세계관은 해석의 틀을 제공하여 주고, 셋째, 세계관은 존재에 대한 바른 이해를
결정해 준다는 것입니다. 넷째는 세계관은 도덕적 판단의 근거를 제공하여 준다고 말합니다. 이를 두고 철학에서는 인식론, 존재론,
도덕론(윤리)이라는 용어를 사용합니다.
성경도 이와 유사한 방법으로 당대를 지배했던 세계관을 소개하고 있으며, 바른 세계관이 무엇인지 제시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에베소서에서 이방인(믿지 않는 사람들)의 세계관을 다음과 같이 정의합니다.
“그러므로 내가 이것을 말하며 주 안에서 증언하노니 이제부터 너희는 이방인이 그 마음의 허망한 것으로 행함 같이 행하지
말라. 그들의 총명이 어두워지고 그들 가운데 있는 무지함과 그들의 마음이 굳어짐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생명에서 떠나 있도다.
그들이 감각 없는 자가 되어 자신을 방탕에 방임하여 모든 더러운 것을 욕심으로 행하되” (엡 4:17-19)
바울은 이방인의 세계관을 ‘마음의 허망함’(The futility of their minds)이라고 표현합니다. 그리고
이것에는 세 가지 특징이 있다고 설명합니다. 첫째는 무지이며(인식론), 둘째는 영적 사망이고(존재론), 셋째는 도덕적
무감각(도덕론)입니다. 이를 통해 바울이 비록 현대인들처럼 세계관이라는 용어를 사용하지 않았으나 그가 세계관의 틀로 세상을
이해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바울이 세상을 이해하는 방식(세계관)을 통해서 문제의 발단은 무지(無知) – 바울은 무지가 영적 사망을 낳고, 영적
사망은 도덕적 무감각에 이르게 했다고 말합니다. – 라는 갈 알 수 있습니다. 이를 달리 표현하면 참된 지식이 도덕적 삶을
회복시킨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참된 지식은 무엇일까요? 지혜서 특히 전도서를 보면 솔로몬은 ‘모든 지혜가 헛됨’을 알았던 그만큼 지혜로운
자였습니다. 이는 솔로몬이 인간은 ‘하나님이 계시를 통해 선(善)을 알게 해주지 않으면 아무것도 모르고 우둔함 속에 살 수밖에
없는 존재임을 깨달았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기에 우리도 솔로몬같이 지혜로운 자가 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하나님 스스로 자신에
대해 계시한 말씀을 알아야 합니다.
바울 또한 골로새교회에 보내는 편지에서 그리스도의 말씀이 풍성할 때 성도 안에 지혜가 가득하다고 당부하고 있습니다.(골
3:16) 그러므로 성경이 말하는 지혜는 변화무쌍한 인간들의 지혜가 아닌 불변하시는 하나님의 지혜를 가리캅니다. 그러기에 하나님의
지혜는 처세술이 아니라 ‘도덕적 선의 실제적 측면’(the practical side of moral goodness)이며
‘하나님의 성품의 핵심 요소’(His essence in His character)입니다.
4. 실제 사례들
이러한 생각을 바탕으로 과연 ‘성경 읽기’가 성도의 삶에 얼마나 큰 영향을 끼치는지 연구한 실증적 자료 들을 소개하고자 합니다.
(1) 첫 번째 사례
첫 번째 연구는 영국 웨일즈 대학의 레슬리 프란시스(Leslie J. Francis)가 2002년 겨울 ‘Religious
Education’에 발표한 만 13-15세 청소년들의 약물과 담배에 대한 태도와 ‘성경 읽기’와의 관계를 연구한 논문입니다.
이
연구에서 프란시스는 25,888명의 청소년을 설문한 결과를 발표했습니다.
결과를 보면 이들 중 41%가 스스로 유신론자라고 했으며, 19%가 최소 한 달에 한 번 이상은 교회에 나간다고
답하였습니다. 그러나 일주일에 한 번 성경을 읽는 청소년은 3%, 매일 읽는 청소년은 2%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한지만 주목해야 할
부분은 교회를 다니지만 성경을 규칙적으로 읽는 학생들과 그렇지 않은 학생들이 취하는 마약류 약물들과 담배에 대한 입장을 조사한
결과입니다.
프란시스는 다음과 같이 결론짓습니다. “교회를 다니는 청소년 신자들이나 교회를 다니지 않는 청소년들은 약물 사용에 대해서
비슷한 입장을 취한 반면에 성경을 읽는 청소년 신자들은 성경을 읽지 않는 청소년 신자들보다 약물 사용에 대해 관용적이지 않은
자세를 취한다는 것입니다. 달리 말해 성경을 읽는 것은 약물 사용에 반대하는 확고한 입장을 취하게 합니다. 이것은 ‘성경 읽기’가
청소년들의 영혼만 아닌 그들의 육체에도 유익하다는 것을 보여 줍니다.
(2) 두 번째 사례
두 번째 연구는 2007년 미국의 베일러 대학(Baylor Univers)의 아론 프란츤(Aaron Franzen)이 ‘성경
읽기’의 사회적 영향을 조사한 연구입니다. 그 결과 프란츤은 ‘성경 읽기’를 통해 사람들이 사회 문제에 대해서 보수적 진보의
성향으로 변하게 된다고 결론을 얻었습니다.
여기에서 성경을 읽고 변한 대상은 성경의 무오성을 믿으며, 스스로를 복음주의자라 칭하고, 매일 규칙적으로 성경을 읽는 보수적인 기독교인을 의미합니다.
데일리 대학의 조사를 4가지로 요약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는 성경을 자주 읽는 사람들이 사회, 경제 정의에 대해 더욱 민감하며, 활동적이라는 것입니다. 둘째는 소비적인 삶보다
절약하는 삶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셋째는 성경을 자주 읽는 사람들이 과학에 대해서 더욱 열린 자세를 갖는다는
것입니다. 넷째는 동성애나 동성 결혼에 대해 거부 입장인데 동성 결혼이 성경적이라고 찬성하는 기독교인들(6%를 제외한) 대다수는
성경을 일 년에 단 한 번도 읽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위의 두 연구 사례를 보면 ‘성경 읽기’가 단지 우리의 영적인 참에 국한된 게 아니라 우리의 삶의 전반적인 변화를 일으킨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는 ‘성경 읽기’와 삶이 분리된 것이 아니며, 신자들의 세계관을 확립시키는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음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한국에서 이런 연구가 이루어 겼는지 알 수 없으나 영국과 미국에서 이루어진 ‘성경 읽기’와 관련된 연구는 한국
기독교인들에게도 많은 것을 시사해 줍니다. 성경과 교회 역사는 분명히 하나님의 계시의 말씀인 성경을 바로 읽으면 우리의 도덕적
판단의 기준이 뒤바뀌는 세계관의 전환이 일어난다는 것을 증명합니다.
지금도 이 일은 성령님을 통해 일어나고 있습니다. 만약 그런 일이 신자의 삶에서 일어나지 않는다면 이는 ‘성령을 근심’(엡 4:30)하게 하는 일이 분명합니다.
5. 어떻게 성경을 읽고 묵상할 것인가?
어떻게 성경을 읽을 것인지에 대해 간략히 서술하고 이글을 마치려 합니다. 위의 조사 모릅니다. 그도 그릴 것이 각
교회에서는 ‘성경 필사’나 ‘성경 통독 수련회’를 열고 연말에는 성경을 얼마나 읽었는지 확인하여 시상도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하는 것이 과연 성경을 바로 읽는 것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기독교인이며 철학자인 강영한 서강대 교수는 1985년 인도에서 선교했던 레슬리 뉴비긴 목사를 스위스에서 만나 나눈 대화를
회고하며 이렇게 말을 합니다.
“‘목사님은 복음주의자이신가요?’ 그랬는데 ‘아닙니다!’라고 아주 강하게 부인하더라고요. ‘왜요?
목사님은 복음주의자처럼 보이는데요.’라고 되물었죠. 그의 책에 나타난 복음에 대한 태도나 전도에 관한 이해나, 사회변혁에 대한
이해가 사실상 로잔언약과 크게 다를 바 없는 입장을 취하고 있는데 ‘왜 복음주의자가 아니라고 생각하느냐?’라고 했더니
‘복음주의자들은 성경을 읽지 않아요.’라고 하잖아요.
내가 다시 한번 처다보니 ‘그들은 성경을 인용하고 암송은 하나 그러나 읽지는
않아요.’라고 해요. 그제야 무슨 말인지 알아들었지요. 복음주의자들이 칭의는 이야기하는데 사회정의에는 무관심하고, 성경이
‘총체적인 구원’을 이야기하는데 복음주의자들은 ‘영혼 구원’만 이야기하고, 그래서 성경을 제대로 읽는 게 아니라 부분적으로 원하는
내음만 읽는다는 말이었어요.”
강영한 교수의 회고는 바른 ‘성경 읽기’가 가능하려면 어떠해야 하는지 생각하도록 만듭니다.
(1) 내가 원하는 것만 읽고자 하는 유혹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우리가 아무리 성경을 많이 읽어도 그런 식으로 읽으면 변화는 없습니다. 바울은 골로새서나 에베소서에서 그것을 옛사람을 벗어
버리고 새 사람을 입으라는 도식을 사용하여 설명합니다. 옛사람이란 하나님을 몰랐었던 그 상태와 존재를 의미합니다. 그리고 새
사람은 하나님을 알아 변화된 상태를 의미합니다.
그러기에 성도들에게는 전과는 전혀 다른 삶의 태도가 요구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요구하는 이유는 이미 새사람이라는 옷을 입었다는 현재 상태에 대한 당위성 때문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아직도 첫 옷에 길들여져 있는 상태이죠.
이때 성도들에게 필요한 건 과거에 머물러 있는 상태를 지적함으로 죄책감을 불러일으키는 것이 아니라, 성도들이 새 옷을
바라보도록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공적으로 교회와 성도가 고백했던 신앙고백이나 기독교 세계관 공부를 통해 가능합니다. 달리
말해 새롭게 변화된 성경 해석의 틀을 배우는 것이죠.
(2) 기도하면서 읽는 것입니다.
산상설교(마 5-7장)는 크게 세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5장은 주로 성도의 ‘도적적 삶의 원리’이며, 6장은 성도의 ‘기도 생활’, 6장 후반부터 7장은 성도의 ‘믿음의 확신’입니다.
최근 한 청년과 산상설교를 공부하던 중 “5장의 말씀을 우리가 과연 지킬 수 있을까요? 이것이 정말 가능할까요?”라고 그가
질문했습니다. 당연히 가능하다고 말하고 싶었지만 자신 있게 말할 수가 없더군요. 그러나 말씀을 공부하던 중 왜 예수님이 ‘도덕적
원리’를 제시하시고 기도에 대해서 제자들에게 가르치셨을까 생각해 보았습니다. 그리고 청년의 질문에 답할 수 있었습니다.
그 답은 ‘기도’였습니다. 우리가 아무리 하나님 나라에 대한 지식을 많이 가지고 있을지라도 기도하지 않으면 하나도 이룰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왜 기도일까요? 기도는 바로 유한한 인간이 무한하신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고 경험하는 합법적이며 거의
유일한 통로이기 때문입니다.
얼마 전 저는 예수님을 믿은 지 얼마 안 되는 성도님과 한적한 산길을 걸으며 대화를 나눈 적이 있습니다. 그분은 저에게
자신의 믿음이 흔들린다고 하면서 “하나님을 알기 위해 성경을 읽는 일이 단지 정보를 아는 수준에서 머물게 된다면 어떻게
되겠느냐?”고 물어오셨습니다. 그러면서 자신이 체험이 약해서 그런 것은 아닌지 걱정하셨습니다. 그래서 저는 하나님을 아는 것이
무엇인지 설명해 드렀습니다.
제임스 패커가 설명했듯 하나님을 아는 것은 도서관에서 자료를 찾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이 사람을 알려면 상대방이 마음을 열어
자신에 대해서 알려 주어야만 합니다. 이것을 관계라고 하지요. 이때 내가 이전에 알고 있었던 정보는 상대방을 더 깊이 이해하고
사랑하게 하는 역할을 하게 됩니다.
하나님은 자신을 열어 우리를 받아들이셨고 그렇게 우리와 하나님의 관계는 깊어져 우리는 하나님을 알게 되었지요. 이때 우리가
읽은 성경의 내용은 인격적인 지식이 되고 삶을 변화시키는 말씀이 되었던 것입니다. 여기에서 하나님과의 대화라 불리는 기도는
하나님이 우리를 친구이자 양자로 받아주셨다는 증거입니다.
(3) 확신하며 읽는 것입니다.
산상설교의 세 번째 부분이 의미하는 바는 우리의 기도가 반드시 이루어질 것을 믿으며 기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 6:33) 이는 외식과 대조되는
것입니다.
바리새인의 외식에 대해서 남들을 향한 자기 자랑이나 우월의식이라 볼 수도 있지만 산상설교에서 예수님이 비판하시는 바리새인의
외식하는 모습은 또 다른 대상을 염두 해 두는 것 같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사람들에게 보이기 위한 것만 아니라 하나님에게도 보이기
위해서 대로에서 기도하고 금식을 하면서 재를 머리에 뿌렸던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하나님이 자신이 변했다는 것을 봐주시고 인정해
주시길 간절히 원했던 것입니다.
그들의 의도는 참으로 경건해 보입니다. 그러나 이들은 하나님에 대해서 잘 모르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의 겉모습이 아닌
마음으로부터 자발적으로 우러나오는 경건과 순종을 보길 원하셨습니다. 그러기에 예수님은 하나님을 숨어계신 분이라고 소개하십니다.
“네 자선 행위를 숨겨두어라. 그리하면 남모르게 숨어서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너에게 갚아주실 것이다.”(마 6:4)
“너는 기도할 때에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달고서 숨어서 계시는 네 아버지께 기도하여라. 그리하면 숨어서 보시는 너의 아버지께서
너에게 갚아주실 것이다.”(마 6:6) 하나님은 숨어서 남들이 보지 않았을 때 우리의 마음속에 있는 진짜 모습을 보길
원하십니다. 그러니 참된 제자가 되려면 겉으로 떠들고 다니지 말고 은밀한 마음으로부터의 변화를 보여야만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마음의 변화는 어떻게 가능할까요? 그것은 성령님이 하시지 않으면 불가능한 일입니다. “너희가 만일 성령의 인도하시는
바가 되면 을법 아래에 있지 아니하리라.”(갈 5:18) 그러기에 이미 우리 안에 계신 성령님이 숨어서 일하고 계신다는 것을
확신하지 않으면 우리도 외식하는 바리새인이 될 것입니다.
(4) 교회(공동체)와 함께 읽는 것입니다.
성경학자들은 바울 서신을 읽을 때 한 가지 유의할 점이 있다고 말합니다. 그것은 바울 서신들은 혼자서 조용히 속으로 읽도록 쓴
것이 아니라 공동체에서 큰 소리로 단번에 읽도록 할 의도로 쓰였다는 것입니다. 바울 서신만이 아닌 대다수 성경은 공적으로
공동체에서 함께 읽혔습니다. 그렇게 한 이유는 개인의 확신은 언제나 흔들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공동체는 우리의 확신과 의지가
약해질 때 우리가 강해지도록 도와줄 것입니다.
다른 이유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교회라는 공동체로 부르셔서 자신이 거할 집으로 교회(공동체)를 건축하시기 때문입니다.(엡
2장) 이 집에 하나님은 거하실 것입니다. 그리고 그 집은 모든 우주에 하나님이 주인이시라는 사실을 널리 알리도록 사용될
것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공동 운명체이며, 공동의 사명을 위해 함께 일해야만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경은 반드시 교회와 함께
읽히지 않으면 안 되는 핵심 이유입니다.
정리하자면 ‘바른 성경 읽기’란 새 사람(기독교 세계관)의 프레임으로 성경을 읽고, 기도하며 읽어야 하며, 읽은 말씀이 내
속마음으로부터 이루어져, 교회라는 공동체를 통해 완성될 것이라는 확신으로 읽는 것입니다. 이럴 때 말씀은 우리 안에 성취되고,
삶은 변하며, 세상은 하나님이 주인이라는 사실을 알게 될 것입니다.(*)
렉시오 디비나란 무엇인가요?
렉시오 디비나는 “신성한 독서”, “영적 독서”, “거룩한 독서”에 해당하는 라틴어로서, 하나님과의 소통을 촉진하고 특별한 영적
통찰력을 얻으려는 목적으로 행해지는 기도와 성경 읽기 방법을 일컫습니다. 렉시오 디비나의 원칙은 약 220년경에 나타났고, 이후
가톨릭 수도 사제들, 특히 성 파코미우스(Pachomius), 아우구스티누스(Augustine), 바실(Basil),
베네딕트(Benedict )의 수도 사제 규칙에 따라 행해졌습니다.
렉시오 디비나 관습은 현재 가톨릭과 영지주의자들 사이에서 상당히 인기가 있으며, 이머징 처치(Emerging Church)의
신앙적 관행의 한 부분으로 받아들여지고 있습니다. 교황 베네딕트 16세 (Benedict XVI )는 2005년 연설에서 “저는
특별히 렉시오 디비나의 고대 전통을 상기시키고 권장하고 싶습니다. 기도와 함께 성스러운 성서를 근면히 읽는 것은 읽는 사람으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을 들을 수 있게 해주며, 기도 안에서 하나님께 마음을 열고 신뢰로 응답하는 은밀한 대화를 가능하게
합니다”라고 말했습니다. 렉시오는 또한 타종교인들이 자기들의 경전을 읽는 데에서도 적용할 수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즉
바가바드 기타이든, 토라, 코란이든 상관없이 적용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비기독교인들은 세속적인 문화를 수용하기 위해 단순히
방법을 고쳐 자기들에게 적절하도록 만들 수도 있을 것입니다. 나아가, 렉시오 디비나의 네 가지 원칙은 융 심리학의 네 가지 원칙인
지각, 생각, 직감, 느낌에도 적용될 수 있습니다.
렉시오 디비나는 실제적으로 긴장을 푸는 시간으로 시작합니다. 즉 스스로를 편안하게 하고 일상적인 생각과 염려를 마음에서
비워냅니다. 일부 렉시오 실천가들은 마음을 비우는 데 깊고 정화된 호흡과 특정 문구나 단어를 반복하는 것이 도움이 된다고
말합니다. 그런 다음 네 가지 단계를 따릅니다.
렉시오 (Lectio) – 성경 구절을 몇 차례 천천히 조용하게 읽는 것입니다. 구절 그 자체 보다는 읽는 각 부분을 음미하고, 한편으로 수행자에게 들려지는 “고요하고, 작은 목소리”를 지속적으로 듣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메디타티오 (Meditatio) – 본문 구절을 반영하여, 그것이 자기 삶에 어떻게 적용되는지에 대해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는 성경을 매우 사적으로 읽는 것이며 지극히 개인적인 적용으로 여겨집니다.
오라티오 (Oratio) – 하나님께 마음을 열면서 구절에 반응하는 것입니다. 이는 주로 지적 훈련이라기 보다는 하나님과의 대화를 시작하는 것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콘템플라티오 (Contemplatio) – 하나님을 듣는 것입니다. 이는 사람이 자신의 일상적이고도 종교적인 자신만의 생각으로부터
벗어나,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을 듣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향으로 생각과 마음, 영혼이 열리는 것입니다.
물론, 성경 읽기와 기도를 함께 하는 것은 권장되어야 마땅합니다. 둘은 언제나 함께 행해져야 합니다. 하지만, 이러한 유형의
실천에 내재하는 위험성, 그리고 초월 명상법이나 다른 위험한 의식과 놀랍도록 유사한 점들은 신중히 생각해 봐야만 합니다. 그러한
실천의 목적이 마음을 비우고 자기 자신에게 권능을 부여하는 신비주의 체험을 추구하게 될 가능성이 있습니다. 크리스천은 진리에 따라
마음을 변화시키려는 목표를 가지고, 본문의 객관적인 의미를 통해 하나님과 지혜, 그리고 거룩함에 대한 지식을 추구하기 위해
성경을 사용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백성이 당신과의 신비스럽고 개인적인 만남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지식이 없으므로
망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호세아 4:6).
성경 본문에 초자연적인 접근을 시도하는 사람들은 문맥과 본질적인 의미로부터 본문을 분리시키고, 본문이 절대 의도하지 않았던
주관적이고 개인주의적이며 경험적인 방식으로 본문을 사용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렉시오와 영지주의가 이 점에서 유사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크리스천 영지주의는 사람이 오직 적절히 시작된 이후에만 “그노시스” (“안다”를 의미하는 헬라어 그노스코로부터
유래)적이고 신비한, 내적 지식을 얻게 된다는 신념입니다. 오직 소수만이 이러한 신비한 지식을 소유할 수 있습니다. 자연스럽게,
특별한 지식을 가질 수 있다는 개념은 매우 매력적인 것이며, 하나님과의 특별한 체험을 소유한 사람은 스스로를 “아는 자”로 여기며
자기가 중요하고 특별하다고 느낍니다. “아는 자”는 군중은 영적 지식을 소유할 수 없으며, 오직 진정으로 “깨우친 자”만이
하나님을 체험할 수 있다고 믿습니다. 그래서, 사색적이거나 중심적 기도, 즉 하나님과의 신비스러운 체험을 하는 것에만 집중하는
명상적인 관습이 교회에 재도입됩니다. 사색적인 기도는 동유럽 종교, 그리고 뉴에이지의 사이비 종교에서 사용된 명상 훈련과
비슷합니다. 사색적인 기도를 하는 사람들이 비록 성경을 시작점으로 사용하기는 하지만, 성경 안에는 그와 관련한 어떠한 근거도
없습니다.
게다가, 우리의 마음을 열고 음성을 들으려고 하는 것에 내재된 위험성은 명백합니다. 사색적인 기도를 하는 자들은 무엇인가를 –
어떤 것이라도 – 듣기를 간절히 원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음성과 자기 자신의 생각, 생각으로 들어오는 마귀들의 침투를 구분하기
위해 필요한 객관성을 잃을 수 있습니다. 사탄과 그의 수하들은 언제나 의심 없는 마음으로 들어오기를 원하고, 그러한 방식으로 우리
마음을 여는 것은 재앙을 불러옵니다. 우리는 사탄이 언제나 두루 다니며 우리 영혼을 삼키려 한다는 것과 (베드로전서 5:8),
광명의 천사로 나타날 수 있으며 (고린도후서 11:14), 우리가 기꺼이 마음을 열 때 거짓말을 속삭인다는 것을 절대로 잊어서는
안됩니다.
마지막으로, 렉시오 디비나의 뚜렷한 특징으로 성경의 충족성에 대한 공격을 들 수 있습니다. 성경이 크리스천 삶을 살기 위해 필요한
모든 것이라고 주장하는 것을 (디모데후서 3:16), 렉시오 지지자들은 부정합니다. 하나님으로부터의 특별한 계시를 구하며
“대화적인” 기도를 실천하는 사람들은 마치 하나님께서 이제 당신의 영원하신 말씀과 관련하여 주신 모든 약속을 저버리기라도 하실
것처럼, 이미 인류에게 계시하신 것을 우회하도록 하나님께 요구합니다. 시편 19:7-14은 성경의 충족성에 대한 궁극적인 주장을
담고 있습니다. 성경은 “완전하여 영혼을 소성시키며”, “정직하여 마음을 기쁘게 하고”, “순결하여 눈을 밝게 하[며]”,
“진실하여 다 의[롭고]”, “순금보다 더 사모[해야]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 시편에 하신 말씀이 진정으로 의도하셨던
것이라면, 추가적인 계시는 필요 없을 것이고, 하나님께 추가적인 계시를 요구하는 것은 이미 계시하신 것을 부정하는 것입니다.
구약과 신약성경은 하나님께서 주신 말씀으로서, 연구되고 묵상되며 그것을 기반으로 기도하고, 그 안에 담긴 지식 및 객관적인 의미,
그리고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권위를 기억하기 위해 있는 것이지, 성경 말씀의 자극을 통해 신비적인 체험이나 개인적인 능력 및 내적
평화를 느끼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건강한 지식이 먼저 있는 것이고, 그 다음으로 하나님을 올바로 알고 교제함으로써 영속적인
체험과 평화가 뒤따르는 것입니다. 성경과 기도에 대한 이러한 관점을 따르는 사람만이 성경대로 믿으며 그리스도를 따랐던 자들이 이미
권한 것과 같은 묵상과 기도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What is Lectio Divina?
Lectio divina is Latin for “divine reading,” “spiritual
reading,” or “holy reading.” Lectio divina, according to author and
spiritual director Becky Eldredge, is “a slow, rhythmic reading and
praying of a Scripture passage” (from Busy Lives & Restless Souls,
Loyola Press, 2017). The intention of this traditional monastic
practice is to promote communion with God and provide special spiritual
insight. The principles of lectio divina were first expressed around the
year 220 and later practiced by Catholic monks, especially the monastic
rules of Saints Pachomius, Augustine, Basil, and Benedict. The practice of lectio divina was revived in 1965 with the publication of Dei Verbum by the Vatican II Council.
A related practice is visio divina, which is praying while contemplating
on icons, illustrations, or other visual images. In addition, various
Catholic teachers promote musica or audio divina (using music as a means
of opening the “ears of the heart”) and walking divina (participating
in a Corpus Christi procession or a rosary procession, visiting the Stations of the Cross, or walking the Camino).
The practice of lectio divina is popular among Catholics and is gaining
acceptance in the evangelical church, especially those involved in the spiritual formation
movement. Pope Benedict XVI promoted lectio divina, and in a 2005
speech, he mentioned its purpose: “I would like in particular to recall
and recommend the ancient tradition of lectio divina: the diligent
reading of Sacred Scripture accompanied by prayer brings about that
intimate dialogue in which the person reading hears God who is speaking,
and in praying, responds to him with trusting openness of heart. If it
is effectively promoted, this practice will bring to the Church—I am
convinced of it—a new spiritual springtime” (“Address to the
Participants in the International Congress Organized to Commemorate the
40th Anniversary of the Dogmatic Constitution on Divine Revelation Dei Verbum,” 9/16/05).
Lectio divina is easily adaptable to the reading of other sacred texts
of other faiths. And, as psychologist John Uebersax points out, the
steps of lectio divina “correspond fairly well to the four primary
cognitive functions posited by psychologist Carl Jung: sensing,
thinking, feeling, and intuiting” (“A Method for Lectio Divina Based on Jungian Psychology,” www.john-uebersax.com/plato/lectio.htm, accessed 3/2/23).
The practice of lectio divina begins with a time of relaxation, making
oneself comfortable and clearing the mind of mundane thoughts and cares.
Some practitioners find it helpful to concentrate by beginning with
deep, cleansing breaths and repeating a chosen phrase or word several
times to help free the mind. Then they follow four steps:
Lectio – Reading the Bible passage slowly several times. The
passage itself is not as important as savoring each portion of the
reading, constantly listening for the “still, small voice” of a word or
phrase that speaks to the practitioner.
Meditatio – Reflecting on the passage and thinking about how it
applies to one’s life. The practitioner pays special attention to
feelings that arise and ways that God is speaking.
Oratio – Responding to the passage by praying and opening the
heart to God. This is seen as the beginning of a conversation with God.
Some practitioners of lectio divina keep a journal to record their
prayers to God and God’s messages to them.
Contemplatio – Contemplating on all that was learned. This step
involves sitting in silence, resting in God’s presence, and
experiencing union with Christ.
Some versions of the instructions for lectio divina also include a fifth step: Actio, or action. Having received God’s love, the practitioner is to go about serving others in love.
Of course, devotional Bible reading, unhurried prayer, and meditating on
and responding to the written Word are good. Insofar as lectio divina
promotes those activities, believers can participate. Focusing on the
Bible to commune with God is laudable. But there are some cautions
concerning lectio divina:
1) The origin of lectio divina is problematic. Anything that originated
with monks, practiced by mystics, recommended by popes, and taught by
Catholic teachers is suspect. Believers should be wary of any exercise
identified as a traditional monastic practice.
2) The subjective, personal focus of lectio divina downplays objective,
methodical Bible study. Proponents of lectio divina freely admit that
the practice “does not treat scripture as texts to be studied. . . . In
Lectio Divina we let go of more intellectual, studious, or effortful
ways of reading the scripture. . . . Although Lectio Divina involves
reading, it is less a practice of reading than one of listening to the
inner message of the Scripture delivered through the Holy Spirit. Lectio
Divina does not seek information or motivation” (Archdiocese of St.
Louis,
www.archstl.org/Portals/0/Documents/Worship/Divina%20Resources/Lectio%20Divina.pdf,
accessed 3/2/23). A devotional reading of Scripture should not replace
“intellectual, studious” Bible study but supplement it. A serious study
of the Bible should naturally lead to communion with and worship of
God.
Believers have a responsibility to correctly handle the word of truth and be workers who do not need to be ashamed before God (2 Timothy 2:15).
We approach the Bible from a position of sound knowledge and faith; the
personal experience of peace and contentment comes as a byproduct of
knowing and communing with God rightly.
렉시오 디비나 | Olivetano
"성령께서는 누구에게 머무십니까? 겸손한 사람, 곧 고요함에 자신을 내맡기는 사람, 하느님의 말씀에 귀기울이며 두려움을 느끼는 사람 아니겠습니까?"
성 베르나르도 똘로메이, 편지2
"하느님의 권위로 씌어진 신구약 성경의 어느 면이나 어느 말씀이 인간 생활의 가장 올바른 규범이 아니겠습니까?" 성규 73,3
수도승이 삶의 이정표로 삼아야 할 가르침은 다름 아닌 성경입니다. 성경을 읽고 그 안에서 내게 말씀하시는 그분의 말씀을 들어내는
것, 그래서 말씀을 통해 기도에 이르고 그분을 만나는 것, 이를 가리켜 렉시오 디비나 Lectio Divina라 합니다. 다른
말로 번역하면 그 의미가 좁아집니다. 그래서 Lectio Divina라고만 합니다.
성 베네딕도의 <수도 규칙>은 하루 일과를 짜임새 있게 제시하는데, 전례와 식사 시간을 제외한 나머지
시간을 노동과 렉시오 디비나, 이렇게 두가지에 배정하고 있습니다. 그 중 렉시오 디비나에는 2-3시간 가량이 할당됩니다.
렉시오 디비나는 단순히 책에 적혀 있는 문자를 읽는 것에 그치지 않고, 그 안에 담긴 성령의 말씀을 듣는 것에 그 핵심이
있습니다. 지금 나에게 하시는 그분의 메시지를 잘 듣기 위해서는 충분한 준비기도와 마음의 순결이 필요합니다. 그럴 때, 단순한
독서에 그치지 않고 이를 곰곰이 되새기는 깊은 묵상, 그리고 이를 통해 그분을 만나고 바라보는 관상으로까지 이어질 수 있습니다.
렉시오 디비나를 실천함에 있어 가장 보편적으로 알려져 있는 방식은 12세기 카르투시오 수도승이었던 귀고 2세의 방법입니다. 그는
렉시오 디비나의 과정을, 독서 lectio, 묵상meditatio, 기도oratio, 관상 contemplatio, 이렇게 크게
네 단계로 구분하고 있습니다. 이 단계들은 그 사이가 확연히 구분된다거나 불연속적으로 단절되어 있다는 뜻에서의 단계는
아닙니다. 하지만 이 단계들은 서로 밀접히 연결되어 있으며, 앞의 단계들이 있어야 뒤의 단계에 도달하게 됩니다.
"당신 말씀은 제 발에 등불, 저의 길에 빛이옵니다." 시편 1,1-2
“내가 너희에게 한 말은 영이며 생명이다.” (요한 6,63)
렉시오 디비나 (Lectio Divina) 란?
“렉시오 디비나”는 라틴어로 Lectio Divina이며 거룩한 독서, 성독聖讀으로도 번역됩니다. 오랜 수도 전통이 전하는 이 독특한 방법은 지적⋅비판적 접근 방법이 아니라, 단순하고 순수한 마음으로 성경을 읽고 맛 들이는 수행법입니다.
근본 목표 :
“렉시오 디비나는 하느님의 말씀을 문자로서가 아니라 생생한 말씀으로 듣고, 이 말씀이 나 자신 안에 육화肉化incarnatio되어 나의 삶의 태도를 바꾸고, 더 나아가 하느님과 더 친밀한 인격적 만남을 가지는 데 그 목적이 있습니다.”
렉시오 디비나 수행을 위한 준비
1) 순수한 마음을 가져라
2) 적합한 자료를 선택하라:
하느님의 말씀인 복음성경
3) 조용한 시간과 장소를 확보하라
4) 마음을 다하여 읽어라:
열린 마음으로 말씀을 읽고 들어야 한다.
5) 성경 말씀에 집중하라: 영적 수행
6) 성령께 도움을 청하라(요한 14,26): 겸손한 마음
7) 항구하라: 한결같은 마음으로
8) 여유를 가져라: 빠르고 많이 읽기보다 말씀을 온전히 받아들여야 한다.
9) 성경을 자주 읽고 되뇌어라: 옛 수도자들에게 있어 묵상meditatio은 오늘날과 같이 머리로 숙고하고 반성하는 것이 아니라, 마치 반추反芻동물인 소가 되새김ruminatio하듯이 하느님의 말씀을 단순히 반복하여 끊임없이 되뇌이는 수행이었다.
10) 하느님 말씀에 순종의 삶으로 응답하라
렉시오 디비나의 네 단계(귀고 2세 원장)
‣ 첫째 단계 : 독서lectio
‣ 둘째 단계 : 묵상meditatio [반추기도ruminatio]
‣ 셋째 단계 : 기도oratio
‣ 넷째 단계 : 관상contemplatio
1) 독서lectio
성경에 모든 관심을 집중하여 주의 깊게 하느님의 말씀(성경)을 읽고 듣는 단계 / 단단한 음식을 입으로 가져가는 것과 같다.
2) 묵상meditatio [반추기도ruminatio]
하느님의 말씀 안에 숨은 진리를 깨닫기 위해 적극적으로 이성과 정신을 사용하는 능동적인 단계 / 입에 넣은 음식을 잘게 씹어 분해하는 것과 같다. [“반추기도” “되새김 수행”]
3) 기도oratio
말씀의 심오한 신비를 조금씩 깨닫게 되고 우리 마음이 하느님께로 들어 올려지게 되는 단계 / 입에 넣은 음식을 씹어 분해한 후 맛을 느끼는 단계와 같다.
4) 관상contemplatio
하느님의 은총으로 천상적 기쁨과 생명을 맛보게 되고, 마침내 하느님을 지복직관至福直觀하는 단계 / 씹어 분해한 음식으로 인해 기쁨과 새 힘을 얻는 감미로움 그 자체와 같다.
주님께서는 언제나 우리를 당신과의 일치에로 초대하고 계신다. “보라, 내가 문 앞에 서서 문을 두드리고 있다. 누구든지 내 목소리를 듣고 문을 열면, 나는 그의 집에 들어가 그와 함께 먹고 그 사람도 나와 함께 먹을 것이다.”(묵시 3,20)
주님께서는 오늘 당신 말씀을 통해 끊임없이 우리의 문 앞에 서서 문을 두드리고 계신다. 우리가 마음의 문을 열고 하느님의 말씀을 끊임없이 읽고 반추하면서 주님의 목소리를 듣고 기도 안에서 주님께 응답한다면, 주님께서는 우리 안에 들어오셔서 함께 만찬을 나누실 것이다.
성경 독서에 관한 조언들
성경에 대한 아무런 전前 이해나 지식 없이 성경을 읽을 경우, 자칫 말씀을 자구적으로 혹은 주관적이고 임의적으로 해석할 위험이 있습니다.
좋아하는 구절만 선별적으로 읽는 것은 편식과 같아 그리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은 전체적인 맥락에서 이해되어야 합니다.
“하느님 말씀에 제대로 귀 기울이지 않는 것은 마치 우리가 성체를 소홀히 하여 길바닥에 떨어뜨리는 것과 같다.”(아를의 체사리오, 강론 782)
<참고 도서>
수도 전통에 따른 렉시오 디비나, 허성준, 분도출판사, 2006. 수도 전통에 따른 렉시오 디비나 Ⅱ-기도와 관상-, 허성준, 분도출판사, 2011. 성경은 읽는 이와 함께 자란다-거룩한 독서의 원리와 실천-, 이연학, 성서와 함께, 2007. 깊이 깊이 말씀 속으로-거룩한 독서(Lectio Divina)의 재발견-, 텔마 홀 저, 차덕희 역, 성서와 함께, 2006.
“성경은 읽는 이와 함께 자란다.” (그레고리우스 대교황)
11월 29일(토) 요한복음 7-8장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읽는 것을 깨닫느뇨?(8:30)
빌립이 달려가서 선지자 이사야의 글 읽는 것을 듣고 말하되 읽는 것을 깨닫느뇨. Then Philip ran up to the chariot and heard the man
reading Isaiah the prophet. "Do you understand what you are reading?"
Philip asked.
읽는 것을 깨닫느뇨?(Do you understand what you are reading?)
독서 방법
1. 속독(速讀) 2. 다독(多讀) 3. 정독(精讀) 4. 영독(靈讀) 靈 영묘할 영 - 하나님 영
이 구절은 "당신이 읽고 있는 성경 구절의 의미를 이해하고 있습니까?" 라는 뜻이며, 성경을 읽는 것뿐만 아니라 그 의미를 깨닫는 것의 중요성을 강조합니다.
빌립은 에디오피아 내시가 이사야서의 한 구절(예수의 고난에 대한 예언)을 읽고 있는 것을 보았고, 그의 곁에 다가가서 그가 성경을 제대로 이해하고 있는지 물었습니다.
이 질문은 성경을 읽는 행위 자체만으로는 부족하며, 그 글이 담고 있는 깊은 의미와 진리를 깨닫는 것이 중요함을 시사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구약 39권, 신약 27권
총 66권으로 구분합니다.
누가복음 24:44~47 이르시되 내가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 너희에게 말한 바 곧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의 글과 시편에 나를 가리켜 기록된 모든 것이 이루어져야 하리라 한 말이 이것이라.~ 또 이르시되 이같이
그리스도가 고난을 받고 제 삼 일에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날 것과 또 그의 이름으로 죄 사함을 얻게 하는 회개가 예루살렘으로부터
시작하여 모든 족속에게 전파될 것이 기록되었으니~
모든 말씀이 기반을 두고 있는 것은 하나님께서 예언하신,
약속하신 말씀대로 그리스도께서 드러나고 나타나서 오실 것과 오셔서 우리 사람(인생)으로 그의 이름을 힘입어 죄 사함을 얻게 하는
회개 즉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그에게 속한 자(계시록 14:4), 그리스도로 옷 입은 자(로마서 13:14), 그에게 붙은
자(고린도전서 15:23)가 되게 하여 구원의 근원(히브리서 5:7~9)이 되시는, 부활의 첫 열매가 되신 그리스도와 같은
제사장으로, 나라로, 소유된 백성(베드로전서 2:9)으로서 삼으시려는 것이며 우리도 잘 모르고 어렸을 때에 말로는 빛 가운데
있다고는 하였지만 말과는 다르게 어두움(죄,악,불의) 가운데 행하는 사실상 말과 행함(야고보서 2:26)이 일치하지 못하였고
그러한 우리들로 참 빛, 온전하신 의(義)을 알게 하시고 이를 온전히 행하게 하시며 그런즉 하나님의 생명(부활)과 안식과 구원으로
들어가게 하신 아름다운 덕을 선전할 수 밖에 없는... 그리스도를 위하심이 아니라 우리들을 위하여 기록하여 주신 말씀이 성경 곧
하나님의 말씀의 핵심이며 중요한 것은 "죄 사함" 이 말로만, 입으로만, 혀로만 외치고 부르짖는다고 하여 되는 것이 아니라
그동안 행하여 왔던 미워하고 비방하고 훼방하고 사나워져서 다투고 함부로하며 무례히 행하던 모든 불의와 죄와 악이 그 마음과
생각에서 깨끗하게, 정결하게 씻어 제하여졌을 때를 말하기 때문에 이를 위하여 우리가 얻었다 함(빌립보서 3:12)도 아니요,
이루었다 함도 아닌, 죄악과 불의에 사로잡혀 그것을 행하는 것에서 벗어나 그리스도에게 잡혀서 죄 사함을 받으려, 얻으려
끝까지 좇아가려고 노력(훈련,연습)하는 것이 중요하며 이를 위하여 성경 곧 하나님의 말씀을 우리에게 주신 것임을 염두에 두셨으면
한다.
"이사야의 글" 은 잘 알고 계시듯이 구약 성경의 가장 대표적인 선지서,
예언서이며 이사야의 글에서 기록하고 있는 말씀들에 담긴 하나님의 뜻하심과 우리 사람을 향한 바라시는 마음은 표현 방법은 약간씩
다를 수는 있지만 예레미야, 에스겔, 다니엘의 글에서도 거의 동일하게 기록하고 있으며 이는 신약 성경의 마태,마가,누가,요한 즉
4복음서도 마찬가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사람(인생)들에게 하나님의 생명과 안식과 구원에 이르는, 얻는 방법(지혜)과 길(지식)을
거의 동일한 말씀으로 반복하여 기록하고 있는 것과 같은 맥락이니 이렇듯 동일한 말씀을 여러번 반복하여 기록하여 주신 것은 욥기서
33:14~17에 "사람은 무관히 여겨도 하나님은 한 번 말씀하시고 다시 말씀하시되~ 사람의 귀를 여시고 인치듯 교훈하시나니
이는 사람으로 그 꾀를 버리게 하려 하심이며 사람에게 교만을 막으려 하심이라." 하는 것처럼 쉽게 말해서 귀에 딱지가 앉을 정도로
말씀하시고 또 말씀하시며 마음과 생각에 콕 박혀서 새겨질 정도가 되게 하여 이전에 육체의 소욕대로(갈라디아서 5장17절) 미우면
미워하고 원망하며, 못마땅하면 비방하고 함부로하며, 마음에 안들면 훼방하고 무례히 행하며 언짢아지면 사나워져서 싸우기를 서슴치
않았던 못됐고 나쁜 악과 죄와 불의를 버리게 하며 막으시고 오직 하나님의 의(義) 곧 그 계명(마가복음 12장31절)과 법(로마서
13장10절)대로 행하게 하려 하심이니 이러한 불의와 죄와 악이 뒤섞여 있는 모습(자세)으로는 하나님 나라 곧 천국의
백성(자녀,성도)이 될 수 없기 때문이며 또한 하나님 나라 곧 천국에서는 이러한 것이 불법이기 때문이라는 것을 잡아 내셨으면
한다.
그래서 마가복음 7장6~9절에 "가라사대 이사야가 너희 외식하는 자에 대하여 잘
예언하였도다 기록하였으되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존경하되 마음은 내게서 멀도다. 사람의 계명으로 교훈을 삼아 가르치니 나를
헛되이 경배하는도다.~ 또 가라사대 너희가 너희 유전을 지키려고 하나님의 계명을 잘 저버리는도다." 하고 쓰고 있듯이 입술로는,
말로는, 혀로는 하나님을 믿는다, 그리스도를 의지한다 외치며 부르짖고 있지만 정작 현실의 삶에서는 못마땅하고 언짢고 마음에 안드는
일(상황,문제)이나 그러한 사람(타인,남,상대방)과 마주하게 되면 믿음과 의(義)로 행하여야 할 하나님의 계명(마가복음
12장31절)과 법(로마서 13장10절)은 까맣게 잊어버리고 참지 못하여 미워하고 비방(흉보고 욕함)하고 사나워져서 다투고
함부로(무시,멸시,업신여김)하기를 서슴치 않는 죄와 악과 불의를 행하니 외식하는 자요 거짓말하는 자이며 이러한 것은 자기의
유익(입장,처지)과 이익(기준,관점)만을 앞세우고 내세우는 이기적이고 자기중심적인 생각에서 나오게 되는 사람의 계명으로써 이는
우리가 그러하였고 우리의 부모가 그러하였고 우리의 부모의 부모가 그러하였고 그 부모의 부모가 그러하여서 대대손손 유전처럼 행하여
왔던, 이 유전을 지켜 행하다보니 자연적으로 하나님의 계명과 법을 저버리게 되며 멀어지게 되는 것으로써 이는 온전히 믿지 못하는
까닭(요한복음 12장38~40절)이요 내 뜻대로 내 마음대로 하고 싶어하는 욕심이 빚은 완악하고 완고한 사람의 마음이 눈을 멀게
하여 하나님의 예언의 말씀, 약속의 말씀 곧 그 계명과 법을 깨달을 수 없게 하였다는 것을 기억 하셨으면 한다.
로마서 10:16 저희가 다 복음을 순종치 아니하였도다 이사야가
가로되 주여 우리의 전하는 바를 누가 믿었나이까 하였으니.
20. 또한 이사야가 매우 담대하여 이르되 내가 구하지 아니하는
자들에게 찾은 바 되고 내게 문의하지 아니하는 자들에게 나타났노라 하였고.
어느 시대, 어느 세대를 막론하고
하나님께서 "이사야의 글" 을 비롯한 선지서, 예언서의 말씀을 선지자들을 통하여 전하여 주셨지만 전하신 바를 누가 믿어서 그
뜻대로 행하였는가? 하는 것이니 지금도 여전히 살아서 믿고 있는, 그리 외치며 부르짖고 있는 우리는 말로만 할 뿐
행함(행실,행위,행동)에 있어서는 하나님의 계명과 법을 좇아가기 보다는 자신의 내 뜻대로 내 마음대로 좌지우지 하고 싶은 욕심을
좇아서, 욕심의 소욕대로 좇아 행하기 바쁨으로 하여 우리가 일깨우고 돌이켜서 고쳐 행함으로 말미암아 죄사함을 받지 못한다면 원
가지들(로마서 11장20~25절)도 하나님께서 아껴보지 않으시고 꺾으셨는데 접붙임을 받은 우리들을 오죽하랴.
그런즉 항상 높은
마음을 품지 말아야 하리니 높은 마음은 죄와 악과 불의를 행하기 쉽고 눈과 귀를 가리워서 깨달을 수 없게 만들며 지나간 세대들이
끝까지 선지자들의 전하여 주신 바 선지자들의, 예언의, 복음의 말씀에 순종치 않음으로 꺾이운 것처럼 우리 또한 하나님의 계명과
법을 저버린다면 꺾이게 될 것이며 구하지 아니하던 자들에게, 문의하지 아니하던 자에게, 즉 다른 이방인의 충만한 수가 들어오기까지
우리 또한 하나님께서 완악한 가운데서 행하도록 내버려 두신다는 것을 알리고자, 전하고자 하여 이사야와 같은 선지자(사도행전
3장20~26절)들을 보내주신 것임을 잊지 마셨으면 한다.
빌립은 성령님의 음성에 즉시 순종하였습니다. 주의 사자가 빌립더러 말씀하시는 것에 즉시 순종하여 광야길로 갔습니다. (26절) 그 곳에서는 예배하러 예루살렘에 왔다가 광야에서 성경 말씀을 읽고 있는 에티오피아 내시를 만났습니다. 그 내시는 에디오피아 여왕 간다게의 모든 국고를 맡은 큰 권세 있는 자였습니다.
빌립은 성령님께서 말씀하시는 대로 이 병거로 가까이 나아갔고, 그 사람이 읽고 궁금해하던 이사야 성경구절에서 시작하여 예수님을 가르쳐 주고 복음을 전하였습니다. (35절) 에티오피아 내시는 예수님을 믿고 자기 갈 곳으로 돌아갔고, 빌립은 주의 영이신 성령님께서 이끄시는대로 갔습니다. 빌립은 아소도에 나타나 여러 성을 지나며 복음을 전하고 가이사랴로 갔습니다. (40절)
오늘 말씀과 같이 성령님의 음성에 즉시 순종하는 자가 되기를 기도드립니다. 먼저 말씀으로 기도하여 성령님께서 주시는 음성을 구하고 찾은뒤, 성령님께서 주시는 하나님의 뜻대로 즉시 순종하는 자로 살아가기를 기도드립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뜻대로 사람들에게 예수님을 전하고, 복음의 말씀을 듣고자 하는 사람에게 예수님과 하나님의 말씀을 전해주어 예수님의 제자로 살아갈 충성된 한 사람을 얻기를 소망하고 기도합니다.
박군의 마음 - 사람의 속에는 무엇이 있는가?
정욕의 사람에서 그리스도인(성화) 되는 과정
[갈라디아서5:19-23]
19] 육체의 일은 현저하니 곧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20] 우상 숭배와 술수와 원수를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 짓는 것과 분리함과 이단과
21] 투기와 술 취함과 방탕함과 또 그와 같은 것들이라 전에
너희에게 경계한것 같이 경계하노니 이런 일을 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것이요
22]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23] 온유와 절제니 이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첫째 그림 : 죄인의 마음
둘째 그림 : 죄인임을 깨닫는 마음
셋째 그림 : 회개한 마음
넷째 그림 : 그리스도인의 마음
다섯째 그림 : 하나님의 성전인 마음
사람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곳은 마음입니다.
그러나 사람이 사람의 마음을 다 헤아릴 수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 속담에 열길 물속은 알아도 한길 사람의 마음은 모른다는 말이 있습니다.
의사들은 청진기로 심장의 박동소리도 듣고,
X-ray나, MRI나 초음파로 뇌파 활동과 심장의 박동소리를 모니터에 떠오르는 그라프로 보고 듣기도 합니다.
그러나 과학과 의학이 아무리 발달을 해도 사람의 생각과 감정을 그려내는 기계는 만들어내지 못합니다.
그런데 이것을 그려 내는 기계가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성경입니다.
표지 그림을 봅시다.
여기 한 사람의 마음이 보입니다.
마음에 여러 가지 동물로 들어있습니다.
이것이 인간의 심령을 형상화한 성경의 내용을 요약한 것입니다.
오른편 위쪽에서 시계방향으로 돌아가면서 살펴봅시다.
첫째, 개구리입니다.
옛날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종살이할 때 내린 재앙 중에 개구리 재앙이 있었습니다.
이는 더러운 영을 비유한 재앙입니다(계16:13).
둘째, 뱀입니다.
에덴동산에 나타나서 인류의 시조 아담을 유혹한미혹의 영입니다(창3:3).
셋째, 사자입니다. 사자는 맹수의 왕이라고 불리 울 만큼 사나운 짐승입니다.
그러므로 물어뜯고 찢는 핍박의 영입니다(시22:13).
네 번째 거북이입니다.
거북이는 손만 되면 움추려 들고 움직이지를 않습니다.
이는 더디하는 나태한 게으름의 영입니다.
다섯 번째는 돼지입니다.
성민에게 돼지는 저주받은 가증한 짐승입니다(마8:32).
이는 곧 탐욕의 영입니다.
여섯 번째, 염소입니다.
염소는 절대로 가만히 있지를 못합니다.
뿔로 남을 지어 박고 해하는 심술 굳은 짐승입니다. 가만히 서 있어도 꼭 높은 곳에 서는 교만한 영입니다(마25:45).
여덟 번째 공작새입니다. 공작새는 평상시에는 가만히 있다가
사람만 다가가면 깃털을 새우고 날개를 펴서 자랑하는 잘 난 척 하고 싶어 하는 허영의 영입니다.
그런데 그 위에 보면 예리한 눈이 하나 있습니다.
이 눈이 우리가 생각하고 행하는 모든 행위를 다 지켜보고 있습니다.
우리가 불의를 행할 때마다 우리를 정죄하는 우리의 마음에 하나님이 파견한 파수꾼입니다.
이것을 우리는 양심이라고 합니다.
이 양심이 우리가죄를 지으면 마음이 아프고 하나님을 무서워하게 합니다.
그런데 사단이 자기의 왕국을 건설하여
그 사람의 마음을 완전히 황폐하게 하여 그 양심이 파수꾼의 사명을 감당하지 못하도록 합니다.
그래서 이런 깨끗한 양심이 죄로 오염이 되어
더러워지고 화인을 맞아 양심의 기능을 마비시키게 합니다(딤1:15, 딤전4:2).
그러므로 우리는 이 양심이 파수꾼의 사명을 회복할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이 양심이 제 기능을 발휘할 때 가정이나 사회나 국가가 참 평화를 누리게 됩니다. 누구든지 사람들은 다 착하게 살고 싶어 합니다.
그런데 그게 자기 힘으로 안 됩니다. 왜냐하면 이 짐승들을 다스리는 괴물이 사람의 마음 중심에 자리 잡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괴물은 창을 들고 자기의 명령을 거부하면
그 사람의 가정과 산업을 파괴하려고 위협해 옵니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안 되는 줄 알면서도 그의 종살이를 하게 됩니다.
성경은 이를 마귀요 사단이라고 합니다.
이 사단을 물리치기 전에는 이런 짐승들을 좇을 수가 없습니다.
이것은 총이나 칼로 제압할 수 있는 것이 아니고, 약을 먹여 줄일 수도 없습니다. 이 사단은 세상에 그 어떤 것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마귀가 두려워하는 것이 딱 한 분이있는데 그분이 바로 예수님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내 인생 주인으로 모시면
마귀는 저절로 도망을 가게 됩니다 (막5:7-8).
갈릴리 바다 동편 거라사라고 하는 지역에 군대 귀신 이 들린 자가 예수를 구주로 영접한 이후에 새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아래에 인용한 설명은 제가 쓴 것이 아니고 베껴온 것인데 상당히 깊은 사고를 필요로 하는 신학적 언어를 써서 어린 챨스에게는 조금 어려운 듯한데 읽어보면 깊은 묵상에서 나온 것으로 내용이 깊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리고 주인공 얼굴을 자세히 보니 어린 철수라기보다는 미남 청년같기도 합니다.
(1)
(1)
사람은 겉사람과 속사람이 있습니다.
박 군은 늘 자신을 살피며 참되게 살려고 하는 한 청년입니다.
그러던 중 자신의 속을 보게 되었습니다.
거기서 여러 가지 짐승이 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스스로 난 체하는 공작
지기 싫어하는 염소
욕심내는 돼지
집요한 소유욕의 거북
혈기 내는 호랑이와
자신의 입장에서 이간질하는 뱀,
그리고 말의 독으로 사람을 죽이는 두꺼비.
그런데 그 모든 육성(肉性 인간속성)의 중심에는
자아(自我 Ego)라고 하는 대장 마귀가 이것들을 지배하고 있습니다.
참되게 살고 싶은 박 군은 자신을 보고 알게 될수록
스스로 어찌할 수 없는 깊은 고민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롬7:24]
(2)
(2)
이 호소는 하나님의 부르심과 통하게 되었고
성령이 교회들에게 권면하시는 음성이 들리기 시작했습니다.
말씀에 마음 눈이 열리기 시작하면서
하나님의 창조가 보이는 하늘과 땅만 창조하신 것이 아니고
자신에게서도 이루어지는 역사인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아직 안에 있는 짐승의 성품과 자아는 그대로 있습니다.
“빛이 어두움에 비취되 어두움이 깨닫지 못하더라.”[요1:5]
(3)
(3)
알아듣고 이해하고 감동으로 느끼던 말씀이 변하여
살아계신 하나님의 손길과 영으로
박 군의 마음 안에 자리 잡게 되었습니다.
이제 박 군의 심령에는 하나님의 나라가 생겨지기 시작합니다.
이전에 즐기던 세상 즐거움과는 분명히 다른
하늘의 기쁨을 맛보게 됩니다.
자신 안에 지금껏 살아온 성품과 같지 않은
새로운 자신이 생겨나는 것을 느낄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 산에서도 말고 예루살렘에서도 말고
너희가 하나님께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때라.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지니라.”[요4:23]
“죽은 자들이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요5:25]
(4)
(4)
이 시기에 박 군은 천국의 삶을 체험하게 됩니다.
모든 감정과 생각이 다 하늘에 속하여
이전에 있던 세상 성품과는 분명한 구분이 되어
더 이상 성낼 일도, 욕심 부릴 일도 없이
세상과 육성이 다 사라진 듯 보였습니다.
이때의 느낌과 체험은 하나님의 나라에까지 이르는 증거로
가지고 가게 됩니다.
그러나 아직 마귀나 짐승이 박 군의 삶에서
모두 없어진 것은 아닙니다.
“너는 눈을 들어 너 있는 곳에서 동서남북을 바라보라
보이는 땅을 내가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니 영원히 이르리라."[창13:14]
(5)
(5)
사람의 성품은 습관이나 유전보다 강한
어둠의 권세에 근거하고 있습니다.
박군의 마음에는 자신을 부인하는
십자가의 권세가 서게 됩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주를 위한 열심이 육의 성품을 삼키게 됩니다.
그리고 자신을 알아감에 있어서
지식에까지 새롭게 하심을 입게 됩니다.
"옛 사람과 그 행위를 벗어버리고 새 사람을 입었으니 이는 자기를 창조하신 자의 형상을 좇아
지식에까지 새롭게 하심을 받는 자니라."[골3:10]
(6)
(6)
그러나 마귀의 영역은
주를 위한 열심에까지 미칩니다.
자신의 의義를 뒤집어 쓴 혼魂의 열심이 구분되고
말씀의 전신갑주全身甲胄가 입어집니다.
헛된 투기妬忌의 열심이 아닌
하늘의 평안이 자리잡게 됩니다.
흔들림 없는 믿음이 자리합니다.
(7)
(7)
복음의 전신갑주가 원수의 모든 해함으로부터
자신을 지킬 수 있게 합니다.
말씀은 삶을 통하여 이루어지고
여호와를 아는 지식이 충만합니다.
이제의 희생은 덧없음이 아니고
부활의 삶을 누리게 합니다.
(8)
(8)
이 세계는 모든 언약이 이루어지는 때입니다.
주의 임재로 거룩함이 이루어지고
평안의 열심이 심령을 채웁니다.
주의 보좌로부터 흘러내리는 생명수의 강은
온 세상을 소성케 하고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집니다.
성령 충만한 삶의 비결
그리스도인이 성령 충만의 실재를 알고 순간 순간 끊임 없이 성령의 지배를 받으며 살아간다면 그의 하루하루는 가슴 설레는 모험이 될 수 있습니다.
성경에는 세 종류의 사람이 있다고 말합니다.
① 자연인 (그리스도를 영접한 일이 없는 사람)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을 받지 아니하나니 저에게는 미련하게 보임이요 또 깨닫지도 못하나니 이런 일은 영적으로라야 분변함이니라' (고린도전서2:14)
[내가 나의 주인인 사람]
<자연인>
나 : 내 인생의 왕좌에 나 자신이 앉아 있으며
†: 그리스도는 내 인생 밖에 계십니다.
● : 모든 일을 나 자신이 주관하므로 자주 좌절과 혼란에 빠집니다.
② 성령의 사람(성령의 지배를 받으며 성령 충만한 사람)
'신령한 자는 모든 것을 판단하나 자기는 아무에게도 판단을 받지 아니하느리라' (고린도전서2:15)
[예수 그리스도가 나의 주인인 사람]
<신령한 사람-성령충만한 사람>
† : 그리스도가 내 인생의 왕좌에 앉아 계시며
나 : 나는 내 인생의 왕좌에서 내려와 모든 것을 그리스도께 맡겼습니다.
● : 모든 일을 그리스도께서 주관하시므로 하나님의 계획과 일치된 생활을 하게 됩니다.
③ 세상적인 그리스도인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했으나 신앙생활을 자기 힘으로 하려고 하기 때문에 실패하는 사람)
'형제들아
내가 신령한 자들을 대함과 같이 너희에게 말할 수 없어서 육신에 속한 자 곧 그리스도 안에서 어린아이들을 대함과 같이 하노라
내가 너희를 젖으로 먹이고 밥으로 아니하였노니 이는 너희가 감당치 못하였음이거니와 지금도 못하리라 너희가 아직도 육신에 속한 자로다 너희 가운데 시기와 분쟁이 있으니 어찌 육신에 속하여 사람을 따라 행함이 아니리요'(고린도전서3:1-3)
[예수님을 영접했으나 내가 나의 주인인 사람]
<세상적인 그리스도인>
나 : 내 인생의 왕좌에 나 자신이 앉아 있으며
†: 그리스도는 내 인생의 왕좌에서 내려와 앉아 계십니다.
● : 모든 일을 나 자신이 주관하므로 자주 좌절과 혼란에 빠집니다.
위의 세 그림 중에 어느 그림이 당신의 삶을 나타내고 있습니까?
또 당신은 어느 그림에 속하게 되기를 원하십니까?
다음은 성령 충만한 생활의 비결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Ⅰ. 하나님은 우리를 위해 풍성하고 열매 맺는 신앙생활을 예비해 놓으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요한복음10:10)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저가 내 안에, 내가 저 안에 있으면 이 사람은 과실을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 (요한복음15:5)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같은 법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갈라디아서5:22-23)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사도행전1:8)
[성령의 사람]
하나님을 신뢰하기 때문에 다음과 같은 인격적 특성이 나타납니다.
<신령한 사람-성령충만한 사람>
삶의 특징
성령의 열매(인격적 변화)
그리스도 중심의 생활
성령의 권능을 받음
다른 사람을 그리스도께로 인도
응답받는 기도 생활
하나님 말씀을 깨달음
하나님을 신뢰
하나님께 순종
사랑
희락
화평
인내
자비
양선
충성
온유
절제
이런 인격적 특성이 나타나는 정도는 그가 일상 생활에서 얼마나 작은 일까지도 하나님을 의지하는가, 또는 그가 그리스도 안에서 얼마나 성장했는가에 정비례합니다. 그런데 왜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이 이 풍성한 삶을 누리지 못하고 있을까요?
Ⅱ. 세상적인 그리스도인은 이 풍성하고 열매 맺는 신앙생활을 체험할 수 없습니다.
세상적인 그리스도인은 신앙생활을 자기 힘으로 하려고 합니다.
그는 하나님의 사랑과 죄사함의 능력에 대하여 모르거나 잊고 있습니다. (로마서5:8-10, 히브리서10:1-25, 요한일서2:1-3, 베드로후서1:9, 사도행전1:8)
그는 변화가 심한 영적 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그는 옳은 일을 하고 싶어도 할 수 없는 자기 자신을 잘 알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는 신앙 생활에 성령의 능력을 활용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고린도전서3:1-3, 로마서7:15-24, 8:7, 갈라디아서5:16-18)
[세상적인 그리스도인]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하지 않기 때문에 다음과 같은 특성이 나타납니다.
<세상적인 그리스도인>
삶의 특징
인격적 특징
영적 생활에 대한 무지
불신앙
불순종
하나님과 이웃에 대한 사랑을 잃음
기도를 게을리함
성경 공부에 대한 열이 식음
율법적인 태도
더러운 생각
시기
죄책감
근심/걱정
낙심
비평하는 태도
무목적
그리스도인이라고 말하면서도 계속해서 죄를 범하는 사람은 전혀 그리스도인이 아닐 수도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요한일서2:3, 3:6-9, 에베소서5:5)
세 번째 진리가 이 문제에 대한 유일한 해답을 줍니다.
Ⅲ. 예수 그리스도는 이 풍성하고 열매 맺는 신앙 생활이 성령 충만을 받은 결과라고 약속하셨습니다.
성령 충만의 생활이란그리스도께서 주관하시는 삶으로서, 우리 안에 사시는 성령의 능력을 통하여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지배하시는 생활입니다. (요한복음15장)
요한복음 3:1-8절에 의하면, 우리는 성령으로 거듭난 순간부터 그리스도인이 되며, 성령은 항상 그리스도인 안에 계십니다. (요한복음1:12, 요한복음14:16-17)
성령께서 모든 그리스도인 안에 살아 계시지만 모든 그리스도인이 다 성령으로 충만되어 있지 않습니다.
성령은 차고 넘치는 삶의 원천입니다. (요한복음7:37-39)
성령은 그리스도를 영화롭게 하기 위해 오셨습니다. (요한복음16:13-14)
우리가 성령으로 충만할 때만 그리스도를 영화롭게 합니다.
그리스도는 그가 승천하시기 전에 최후의 명령으로 우리가 그리스도의 증인이 되기 위해서 성령의 권능을 받게 될 것이라고 약속하셨습니다.(사도행전1:4-9)
그러면 어떻게 성령 충만을 받을 수 있을까요?
Ⅳ. 우리는 믿음으로 성령 충만을 받습니다. 그 때 비로소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약속하신 풍성하고 열매 맺는 신앙 생활을 체험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모든 죄를 용서해 주심에 대해 믿음으로 감사하십시오. 그리스도는 당신의 죄를 대신하여 죽으셨습니다. (골로새서2:13-15, 요한일서2:1-3, 히브리서10:10-12)
성령 충만을 믿음으로 간구하십시오.
'또 우리를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성령의 약속을 받게 하려 함이니라' (갈라디아서3:14)
① 그의 명령 - 성령 충만을 받으라고 하셨습니다.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 충만을 받으라' (에베소서5:18)
② 그의 약속 - 우리가 그의 뜻대로 기도하면 그는 언제나 응답해 주십니다.
'그를 향하여 우리의 담대한 것이 이것이니 그의 뜻대로 무엇을 구하면 들으심이라. 우리가 무엇이든지 구하는 바를 들으시는 줄을 안즉 우리가 그에게 구한 그것을 얻은 줄을 또한 아느니라' (요한일서5:14-15)
믿음은 기도를 통해 표현할 수 있습니다.
● 성령 충만을 위한 믿음의 기도는 어떻게 하는 것일까요?
우리는 오직 믿음으로만 성령 충만을 받을 수 있습니다. 참된 기도는 믿음을 표현하는 한 가지 방법입니다.
사랑하는 하나님 아버지, 나는 주님이 필요합니다. 주님, 내가 나의 삶을 주관해 왔고, 그 결과로 주님께 죄를 지었음을 고백합니다. 나를 대신하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죽게 하심으로 나의 죄를 용서하여 주셨음을 감사합니다. 주님께서 내 인생의 왕좌를 취하여 주시기를 이제 다신 한번 기도합니다. 주님께서 성령 충만 받으라고 명령하시고, 믿음으로 구하면 주시겠다고 약속하신 말씀대로 내게 성령으로 충만케 하옵소서. 주님의 성령으로 나를 충만케 하시고 나를 다스리심을 감사하며,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당신이 성령 충만 받은 것을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당신은 하나님께 성령 충만을 위해 기도하셨습니까?
당신은 지금 성령 충만 받았음을 알고 있습니까?
그렇다면 무슨 근거로 그것을 알 수 있습니까? (신실하신 하나님과 그의 말씀에 근거한 것입니다. 히브리서11:6, 로마서14:22-23)
감정에 의존하지 마십시오.
우리의 믿음은 감정에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의 약속에 근거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하나님 자신과 그의 말씀의 신실성에 대한 믿음으로 사는 것입니다.
다음 기차 그림은 사실(하나님과 그의 말씀)과 믿음(하나님과 그의 말씀에 대한 신뢰)과 감정(믿음의 순종의 결과)과의 관계를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요한복음14:21)
기관차는 객차가 있으나 없으나 달릴 수 있습니다.
그런데 객차로 기관차나 연료차를 끌려고 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입니다.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인도 느낌이나 감정에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그의 말씀의 신실성에 근거를 두는 것입니다.
● 당신은 어떻게 성령 안에서 살아갈 수 있을까요?
하나님과 그의 약속을 신뢰하는 믿음만이 성령 충만한 신앙 생활의 유일한 비결입니다.
당신은 그리스도를 순간 순간 끊임 없이 신뢰할 때,
당신의 생활에서 성령의 열매가 드러나며, (갈라디아서5:22-23)
그리스도의 형상을 점점 닮아갈 것입니다. (로마서12:2, 고린도후서3:18)
당신의 기도 생활과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공부가 날로 깊어지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을 증거할 때 그의 능력을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사도행전1:8)
영적 싸움에 있어서 당신을 대적하는 세상(요한일서2:15-16)과 정욕(갈라디아서5:16-17)과 사단(베드로전서5:7-9, 에베소서6:10-13)을 이기는 힘을 얻을 것입니다.
죄와 유혹과 시험을 이기는 능력 있는 생활을 하게 될 것입니다.(고린도전서10:13, 빌립보서4:13, 에베소서6:10, 디모데후서1:7, 로마서6:11-12)
● 영혼의 호흡
믿음으로 당신은 하나님의 사랑과 용서를 계속 체험할 수 있습니다.
만일
당신의 생활에서 하나님이 기뻐하시지 않는 일을 했음을 알았을 때는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그가 우리의 모든 죄를
용서하여 주셨음을 감사하며 믿음으로 그의 사랑과 용서를 요청하여 주님과의 사귐이 잠시라도 끊어지지 않도록 하십시오.
만일 당신이 불순종의 행동으로 당신 인생의 왕좌를 다시 차지했다면 즉시 영혼의 호흡을 하십시오.
영혼의 호흡(더러운 것을 내뿜고 깨끗한 것을 들이마시는 일)은 믿음으로 끊임 없이 하나님의 사랑과 용서를 체험하는 운동입니다.
① 내뿜는 일 - 당신의 죄를 고백하십시오. 당신의 죄에 대해 하나님께 동의하고 요한일서1:9절에 따라 죄를 용서해 주심을 감사하십시오. 죄의 고백은 회개하는 일인데 회개은 잘못을 뉘우치는 것만이 아니라 삶의 태도와 행동을 바꾸는 것입니다.
② 들이마시는 일 - 당신의 삶을 주님께 맡기십시오. 믿음으로 성령 충만을 당신의 것으로 삼고 활용하십시오. 믿음으로 에베소서5:18절(성령충만을 받으라)의 명령과 요한일서5:14-15절(그의 뜻대로 구하면 들으심)의 약속에 따라 성령께서 지금 당신을 주관하시고 능력 주심을 믿으십시오.
* 만일 위의 내용이 당신에게 뜻 깊은 도움이 되었다면 이 소책자를 구입하여 다른 사람들에게 읽어 주거나 선물로 주어 성령 충만을 경험하게 하십시오.
성령 충만은
성령께서 내 안에 충만하게 거하며 삶을 인도하고 변화시키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이는 성령의 지배를 받으며, 자신의 생각이나 욕심이 아닌 성령의 인도하심에 따라 순종하며 살아가는 것을 포함합니다.
성령 충만은 기도를 통해 성령 충만 받기를 사모하고, 죄를 고백하며, 성령의 인도하심에 순종함으로써 유지됩니다.
성령 충만이란?
성령의 지배와 인도: 성령께서 개인의 삶을 주관하시고 지배하며 인도하시는 상태입니다.
삶의 주권을 드림: 자신의 삶의 주권을 성령님께 드리고, 성령이 원하시는 대로 선택하고 결정하는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성령의 능력 체험: 이성으로만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영적인 능력을 체험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친밀한 교제: 하나님과의 영적 교제가 회복되어 마음의 갈등이 사라지고, 사랑과 용서의 마음이 생기는 상태입니다.
성령 충만한 삶의 증거
성령의 열매: 성령 충만한 삶에는 사랑, 희락, 화평, 오래 참음, 자비, 양선, 충성, 온유, 절제와 같은 «성령의 아홉 가지 열매»가 나타납니다.
영적 변화: 죄의 억압에서 벗어나 전도의 문이 열리고, 마음의 갈등이 사라지며 관계가 회복되는 등의 변화를 경험합니다.
성령 충만을 유지하기 위해 필요한 것
사모하는 마음 : 성령 충만을 간절히 사모해야 합니다.
죄의 고백 : 자신의 죄를 철저히 고백해야 합니다.
믿음 : 믿음으로 성령 충만을 구해야 합니다.
순종 :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이 성령 충만을 유지하는 방법입니다.
꾸준한 영적 루틴 : 말씀 묵상과 기도를 꾸준히 함으로써 영적인 상태를 점검하고 충전해야 합니다.
성령 충만이란 무엇인가?
성령 충만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약속하신 선물입니다. 또한 하나님은 우리에게 성령 충만을 받으라고 명령하셨습니다. 그러면 성령의 충만이란 무엇일까요?
“주 예수 그리스도의 놀라운 은혜와, 하나님이 아낌없는 사랑과 성령의 친밀한 사귐이 여러분 모두와 함께 하기를 바랍니다.”(메시지 성경, 고후 13:13).
성령님의 소원은 우리와 친구가 되는 것입니다. 그분은 우리와 교제하기를 간절히 원하십니다. 성령 하나님은 지혜와 사랑이 무한하십니다. 성령님은 우리에게 자신을 계시하기를 원하시며 우리와 친밀한 사귐을 갖고자 하십니다.
따라서 ‘성령 충만’이란 성령님과의 친밀한 교제를 통해 그분께 온전히 굴복하는 삶, 즉 성령님의 지배를 온전히 받는 삶을 말합니다.
[1] 성경에 나타난 성령 충만
‘성령 충만’의 실례들은 주로 사도행전에 나옵니다. 우선 초기 교회 당시 오순절에 성령 충만의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저희가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방언으로 말하기를 시작하니라”(행 2:4).
이어 초기 교회에 성령 충만의 역사가 반복되어 일어났습니다.
“빌기를 다하매 모인 곳이 진동하더니 무리가 다 성령이 충만하여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니라”(행 4:31).
이곳에 나오는 무리는 제자들과 사도들인데, 이들은 이미 오순절에 성령 충만을 경험했던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며칠이 지난 후에 그들은 또 다시 성령으로 충만하여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파한 것입니다. 사도행전 6:3-6에 보면 성령 충만한 사람 일곱 명을 집사로 세우는 사건이 나옵니다.
“형제들아 너희 가운데서 성령과 지혜가 충만하여 칭찬 듣는 사람 일곱을 택하라… 온 무리가 이 말을 기뻐하여 믿음과 성령이 충만한 사람 스데반과 또 빌립과 브로고로와 니가노르와 디몬과 바메나와 유대교에 입교한 안디옥 사람 니골라를 택하여 사도들 앞에 세우니 사도들이 기도하고 그들에게 안수하니라.”
그리고 바울이 성령 충만하여 박수 엘루마를 책망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바울이라고 하는 사울이 성령이 충만하여 그를 주목하고.”(행 13:9). 성령 충만했던 바울은 에베소 교회 신자들에게, 그리고 오늘 우리에게 성령 충만을 받으라고 명령합니다.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엡 5:18).
사도행전 외에도 성령 충만을 받은 경우들이 있는데, 예를 들면 침례 요한은 모태로부터 성령이 충만하였다고 합니다.
“이는 저가 주 앞에 큰 자가 되며 포도주나 소주를 마시지 아니하며 모태로부터 성령의 충만함을 입어”(눅 1:15).
구약성경에도 성령 충만한 이들이 있었습니다. 예를 들면, 요셉, 브사렐, 여호수아, 삼손, 다윗 등이 그러한 사람입니다.
“바로가 그 신하들에게 이르되 이와 같이 하나님의 신에 감동한 사람을 우리가 어찌 얻을 수 있으리요”(창 41:38).
“내가 유다 지파 훌의 손자요 우리의 아들인 브사렐을 지명하여 부르고 하나님의 신을 그에게 충만하게 하여”(출 31:2-4; 35:31).
“모세가 눈의 아들 여호수아에게 안수하였으므로 그에게 지혜의 신이 충만하니”(신 34:9). “삼손이 여호와의 신에게 크게 감동되어”(삿 14:6).
“다윗이 여호와의 신에게 크게 감동되니라”(삼상 16:13).
이와 같이 성령 충만의 역사는 신구약성경 전체를 통해서 나타내고 있습니다.
[2] 성령 충만의 목적
왜 성령 충만이 필요할까요? 예수님을 믿고 하나님의 자녀가 된 사람은 이미 성령을 받은 것이 아닙니까? 예, 물론 성령을 받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하노니 하나님의 영으로 말하는 자는 누구든지 예수를 저주할 자라 하지 않고 또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고전 12:3).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요 3:5).
위의 성경 말씀에 의하면, 예수님을 영접한 사람은 이미 성령을 받은 것입니다. 성령을 받은 신자에게 성령 충만이 또 필요합니까? 성령 충만의 목적은 무엇입니까? 성령 충만은 그리스도인의 섬김과 증거를 위한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회심을 위한 성령의 은혜를 경험한 사람에게 하나님께서는 예수를 증거하는 일과 희생적인 그리스도인의 삶을 위해서 필요한 ‘성령 충만’이라는 은혜를 주고자 하십니다.
우리는 베드로의 생애를 통해서 이 사실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베드로는 인류 최고의 교사로부터 3년 반 동안 최고 수준의 제자훈련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베드로는 예수님이 재판을 받으실 때에 함께 그 자리까지 따라갔으나 계집아이의 질문에 세 번이나 예수님을 부인하는 비겁함을 드러냈습니다. 그 베드로가 오순절에 성령 충만을 받은 후에는 유대의 권력자들을 두려워하지 않고 담대하게 복음을 전했습니다.
“베드로와 요한이 대답하여 가로되 하나님 앞에서 너희 말 듣는 것이 하나님 말씀 듣는 것보다 옳은가 판단하라”(행 4:19).
“베드로와 사도들이 대답하여 가로되 사람보다 하나님을 순종하는 것이 마땅하니라”(행 5:29).
베드로와 제자들이 오순절 성령 충만을 받은 후에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담대한 증인이 되었습니다(행 1:8). 이것이 성령 충만의 목적입니다.
예수님의 생애도 성령 충만의 목적이 무엇인지를 우리에게 보여줍니다. 나사렛에서 30년간의 생애를 하신 다음 예수님은 이제 공생애를 시작하기 위해 요단강에서 침례를 받으셨습니다. 침례를 받을 때 성령께서 비둘기 형체로 그의 위에 임하였습니다. “성령이 형체로 비둘기같이 그의 위에 강림하시더니”(눅 3:22). 다음의 두 성경절을 잘 보시면, 위로부터 임하는 성령은 성령의 권능, 성령 충만의 능력을 가리킵니다.
“볼지어다 내가 내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너희에게 보내리니 너희는 위로부터 능력을 입히울 때까지 이 성에 유하라 하시니라”(눅 24:49).
“오직 성령이 (위로부터)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행 1:8).
요단강에서 침례요한에게 침례를 받으신 예수님은 “성령의 충만함을 입어 요단강에서 돌아 오사 광야에서 사십 일 동안 성령에게 이끌리시며”(눅 4:1) 기도하셨습니다. 마가는 성령이 예수님을 광야로 몰아냈다고 말합니다. “성령이 곧 예수를 광야로 몰아내신지라”(막 1:12).
예수님은 광야에서 40일을 금식하며 기도하셨습니다. 그리고 광야에서 사십 일을 지내신 후에 예수님은 성령의 권능을 입고 갈릴리에 돌아와 사역하셨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에 대한 소문이 사방에 퍼졌습니다.
“예수께서 성령의 권능으로 갈릴리에 돌아가시니 그 소문이 사방에 퍼졌고 친히 그 여러 회당에서 가르치시매 뭇 사람에게 칭송을 받으시더라”(눅 4:14-15).
예수님은 제자들과 작별하기 전에 그들에게 복음 전도 사업을 감당하기 전에 반드시 하나님이 약속하신 위로부터 성령의 능력을 받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볼지어다 내가 내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너희에게 보내리니 너희는 위로부터 능력을 입히울 때까지 이 성에 유하라 하시니라”(눅 24:49).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행 1:8).
제자들은 이 말씀에 순종하여 성령을 받고자 예루살렘에 머물러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명령은 이것이었습니다.
“저희에게 분부하여 가라사대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내게 들은 바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 요한은 물로 침례를 베풀었으나 너희는 몇 날이 못 되어 성령으로 침례를 받으리라 하셨느니라’”(행 1:4-5).
사도 바울도 복음 전도에 있어서 자신의 지혜가 아니라 성령의 충만이 필수적임을 증거 합니다.
“내 말과 내 전도함이 지혜의 권하는 말로 하지 아니하고 다만 성령의 나타남과 능력으로 하여 너희 믿음이 사람의 지혜에 있지 아니하고 다만 하나님의 능력에 있게 하려 하였노라”(고전 2:4-5).
[3] 성령 충만의 약속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엡 5:18). 이 말씀이 헬라어 원문에는 현재, 수동태, 명령형, 복수형으로 되어 있습니다. 헬라어에서 현재시제는 계속적인 동작을 가리킵니다. 따라서 이 말씀은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은 상태를 계속 유지하라”는 뜻입니다.
또한 이 말씀은 매우 강력한 명령형으로 되어 있습니다. 성령 충만은 그리스도인이 받아도 되고 안 받아도 되는 선택사항이 아닙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인이라면 반드시 받아야 하는 필수적인 경험입니다. 하나님의 모든 명령은 약속이기도 합니다. 성령 충만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확실하게 주시기로 한 귀중한 약속입니다. 성령은 마치 객차(客車)를 끌고가는 기관차와 같습니다. 우리가 성령을 받으면 다른 많은 축복들은 기관차에 매달려 따라오는 객차들처럼 우리에게 주어집니다.
그리고 이 약속은 복수형으로 되어 있습니다. 성령 충만은 특정한 개인에게만 주신 것이 아닙니다. 그 약속은 이 말씀을 읽는 당시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주어진 명령입니다. 또한 성령 충만은 이 본문을 읽는 당시 신자들뿐만 아니라 미래 세대의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도 주어진 약속입니다.
끝으로 이 명령은 수동태로 되어 있습니다. 성령 충만은 인간 스스로 만들어 낼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성령님이 나를 온전히 주관하시는 경험입니다. 다시 말해 성령님이 나를 온전히 주관하시도록 기도하면서 주님 앞에 조용히 기다려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은 성령 없이 아무 것도 할 수 없으며, 반대로 성령의 충만함은 받으면 큰 능력을 얻어 인간이 힘으로 이룰 수 없는 일들을 성취할 수 있습니다.
한번은 어떤 사업가가 그리스도인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내가 미국이 사용하지 않고 있는 어마어마한 에너지를 보여주겠소.” 그리고는 그를 나이아가라 폭포로 데리고 가서, 순간순간 산더미처럼 떨어지는 거대한 폭포를 가리키며 다음과 같이 소리쳤습니다. “바로 저거요.” 그러자 그리스도인이 말하기를, “아닙니다. 세상에서 사용되지 않고 있는 가장 큰 능력은 바로 하나님의 성령입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명령이요 약속인 성령 충만을 받아 누리는 것은 우리의 특권입니다.
[4] 성령 충만을 받는 방법
어떻게 성령 충만을 경험할 수 있을까요?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는 것이 성령으로 말미암는 것이라면(고전 12:3), 성령은 믿는 자의 중생에 역사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신앙생활은 중생으로 끝나지 않고 성령 충만한 단계, 즉 그리스도의 완전에 이르도록 자라가야 합니다. 그러면 성령 충만을 받는 방법을 간단하게 네 가지만 살펴보고자 합니다.
① 성령 충만의 첫 단계는 회개입니다
베드로와 사도들의 설교를 듣고 마음에 찔림을 받아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자 하는 사람들이 “우리가 어찌할꼬”(행 2:37)라고 하였을 때 그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베드로가 가로되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침례를 받고 죄 사함을 얻으라 그리하면 성령을 선물로 받으리니 이 약속은 너희와 너희 자녀와 모든 먼 데 사람 곧 주 우리 하나님이 얼마든지 부르시는 자들에게 하신 것이라”(행 2:38-39).
회개는 마음의 변화요 삶의 방향을 180도 전환하는 것입니다. 회개는 죄 문제를 처리하는 과정으로 기독교 신앙의 중요한 단계입니다. 인간은 본래 성령 충만한 상태였으나 죄로 인해 성령을 상실한 상태로 떨어지게 되었습니다.
성령은 거룩한 영이기 때문에 죄된 심령에 함께 거하실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철저한 회개가 없는 곳에 성령이 임재할 수가 없습니다. 철저하게 회개할수록 성령은 더욱 더 크게 역사할 것입니다.
그러나 회개는 인간의 힘으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너를 인도하여 회개케 하”(롬 2:4)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회개할 때는 하나님께 회개의 영을 구해야 합니다. 그래야 영혼 깊은 곳에서 죄를 미워하고, 하늘 아버지께 죄를 지은 사실을 뼈저리게 느끼게 됩니다. 이런 깨달음은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가능한 것입니다. 이런 회개가 성령 충만을 받는 방법입니다.
② 성령 충만을 위해서는 간절히 기도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성령에 관하여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악할지라도 좋은 것을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너희 천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 하시니라”(눅 11:13).
이 말씀의 배경은 한밤중에 찾아온 친구를 위해 이웃에 떡을 빌리러 간 사람이 끈질기게 요청하여 마침내 떡을 빌려오는 이야기입니다.
너무나 간곡하게 요청하기 때문에 이웃집 주인은 가족들이 모두 잠자리에 들었기 때문에 떡을 줄 수가 없다고 할 수가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이 사실에 대하여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비록 벗됨을 인하여서는 일어나 주지 아니할지라도 그 강청함을 인하여 일어나 그 소용대로 주리라”(눅 11:8).
왜 성령을 거저 주시지 않고 간절히 구하는 자에게 주실까요? 이유는 분명합니다. 성령 충만함을 받으면 전도의 능력이 나타나고 품성이 변화되는 등 현저한 변화가 일어날 것인데, 성령을 간절히 구하지도 않은 자에게 성령 충만이 오면 자기 신앙심의 좋아서 그런 줄 알고 교만해지고 다른 사람을 무시하게 됩니다.
그래서, 성령 충만은 성령의 역사가 나타날 때에 그 결과에 대하여 온전히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는 겸손하게 준비된 사람에게 임하는 것이고, 그 준비가 바로 간절히 기도하면서 갖추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령 충만은 그 필요를 느끼고 간절히 기도하는 사람들에게 임하는 것입니다.
③ 기도한 후에는 확고한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성령 충만을 간구한 다음에는 하나님이 성령을 보내주심을 믿어야 합니다. 의심하는 기도는 응답이 없다고 성경은 말합니다.
“오직 믿음으로 구하고 조금도 의심하지 말라 의심하는 자는 마치 바람에 밀려 요동하는 바다 물결 같으니 이런 사람은 무엇이든지 주께 얻기를 생각하지 말라 두 마음을 품어 모든 일에 정함이 없는 자로다”(약 1:6-8).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그대로 되리라”(막 11:24; 마 21:22).
④ 말씀에 순종하는 생활을 해야 합니다
성령 충만을 받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자기를 순종하는 사람들에게 주신 성령도 그러하니라”(행 5:32).
이 구절에서 하나님은 순종하는 자들에게 성령을 주신다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전적으로 순종하는 삶에 성령 충만이 있습니다.
진정한 순종이란 하나님께서 명하신 일이라면 한 가지, 두 가지, 세 가지만이 아니라 모두 순종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순종의 핵심은 의지에 있습니다. 온전한 순종의 본질은 자기 의지를 포기하고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러한 생애를 사셨습니다.
“내 아버지여 만일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마 26:39).
이와 같이 하나님께 자신의 의지를 무조건적으로 포기하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 바로 성령 충만을 받는 중요한 방법의 하나입니다.
[5] 성령이 머무는 위치
성령께서 우리에게 오셔서 머무시는 위치를 가리키는 헬라어 단어(전치사)가 세 가지가 있습니다. 그것은 “안에”를 가리키는 ‘엔’(en)과, “곁에”를 가리키는 ‘파라’(para), “위에” 혹은 “위로부터”를 가리키는 ‘에피’(epi)입니다.
① “안에”
로마서에서는 성령께서 우리 안에 거하신다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 또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시면 몸은 죄로 인하여 죽은 것이나 영은 의를 인하여 산 것이니라.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의 영이 너희 안에 거하시면 그리스도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가 너희 안에 거하시는 그의 영으로 말미암아 너희 죽을 몸도 살리시리라”(롬 8:9-11).
성령은 우리 ‘속에’ 그리고 ‘안에’ 거하십니다.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고 고백할 때, 성령이 내 속에 거주(내주)하기 시작합니다. 삼위일체 하나님이신 성령께서 죄인 속에 들어오셔서 함께 거하신다고 하는 것은 놀라운 신비요, 기적 중의 기적이요, 은혜의 역사입니다. 내주하시는 성령의 사역은 주로 죄를 씻고, 인격을 변화시켜 성령의 열매를 맺게 하는 것입니다. 내 속에 계시는 성령은 나의 생각과 인격과 존재를 변화시키고 성장시키십니다.
② “곁에” 혹은 “함께”
요한복음 14:16에서 예수께서는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시”겠다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에서 성령을 가리키는 “보혜사”는 헬라어로 “파라클레토스”입니다. 이 말은 “곁에”를 의미하는 ‘파라’와 “부른다”를 뜻하는 ‘칼레로’의 합성어입니다. 보혜사란 우리를 도와주시기 위해서 우리 곁으로 부르심을 받은 분입니다.
성령께서 우리 곁에서 행하는 일은 죄와 의와 심판에 대하여 책망하시는 일입니다(요 16:8). 성령이 곁에 오셔서 역사하시면, 나도 모르게 자신이 죄인임을 깨닫게 되고, 예수님이 구주이심을 믿게 됩니다. 또한 사탄이 심판을 받아 멸망할 것과 끝까지 회개치 않는 죄에 대하여 하나님의 심판이 있음을 알게 됩니다. 또한 성령은 우리 곁에 오셔서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게 하십니다.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시리라”(요 14:26).
그리고 성령님은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한 중보 기도를 하십니다. 성경은 이 사실을 분명하게 말씀합니다.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가 마땅히 빌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롬 8:26).
성령께서 언제나 내 곁에 계셔서 나를 도우신다는 사실은 얼마나 놀라운 은혜입니까?
③ “위에” 혹은 “위로부터”
성령이 위에 혹은 위로부터 임하신다는 것은 능력을 부어주시는 성령의 사역을 가리킵니다. 이것을 성령의 기름 부으시는 사역이라고 말합니다. 성령은 위로부터, 때로는 불 같이, 때로는 바람 같이, 때로는 비둘기 같이 임합니다. 위로부터 임하는 성령의 사역은 권능의 사역입니다. 이것은 모든 이론과 장애물과 대적을 타파하는 사역이고, 세상에서 승리하게 하시는 사역입니다. 예수님은 침례를 받으실 때 성령의 권능을 받으셨습니다.
“백성이 다 침례를 받을 쌔 예수도 침례를 받으시고 기도하실 때에 하늘이 열리며 성령이 형체로 비둘기 같이 그의 위에 강림하시더니 하늘로서 소리가 나기를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눅 3:21, 22).
예수님이 공생애를 준비하실 때, 위로부터 임하시는 성령을 받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성령에 의해 잉태되셨고, 성령이 그분 안에 내주하셨지만, 메시아 사역을 감당하기 위해서는 위로부터 임하시는 성령을 받아야 했습니다. 그 이후, 예수님의 공생애는 위로부터 임하시는 성령의 사역이었습니다(눅 4:14, 18).
그리고 예수님은 승천 직전에 제자들에게 당부하셨습니다.
“볼지어다 내가 내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너희에게 보내리니 너희는 위로부터 능력을 입히울 때까지 이 성에 유하라 하시니라”(눅 24:49).
제자들은 오순절에 위로부터 임하는 성령의 권능을 받았습니다(행 1:8). 사도들과 성도들은 예수님 승천 이후, 예수님의 유언의 말씀에 순종하여 다락방에 모여 합심하며 간절히 기도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성령을 보내시겠다는 약속을 이루셨습니다.
“오순절 날이 이미 이르매 저희가 다같이 한 곳에 모였더니, 홀연히 하늘로부터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가 있어 저희 앉은 온 집에 가득하며 불의 혀 같이 갈라지는 것이 저희에게 보여 각 사람 위에 임하여 있더니, 저희가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방언으로 말하기를 시작하니라”(행 2:1-4).
그 이후로 성도들은 성령님이 부어주시는 권능을 힘입어 담대히 복음을 전하며 아름다운 초대 교회 공동체를 이루었습니다.
[6] 역사에 나타난 대표적인 성령 충만 사건들
① 오순절 성령 충만 사건
가장 대표적인 것은 초기교회가 경험한 오순절 성령 충만 사건입니다. 성령 시대가 개시되는 사건입니다. 오순절 이후부터 예수 재림까지 교회 시대는 성령 시대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오순절은 구약 시대가 끝나고 교회 시대가 시작되는 교회의 탄생일입니다. 성령 강림으로 말미암아 교회가 탄생했으니, 교회는 성령의 피조물이요 성령은 교회의 창조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성령이 교회의 영이 아니라 교회가 성령의 피조물입니다.
또한 오순절 성령 충만은 보편적인 영적 은사 체험 사건입니다. 이것은 구약에 예언된 사건이었습니다(욜 2:28~30). 그 예언은 사도행전에서 성취되었습니다(행 2:1~4, 16~19). 구약 시대의 성령의 사역은 특수한 사람들에게 특수한 일을 위해서 제한적이고 부분적으로 일어났습니다. 하지만 오순절 이후로 이러한 제약은 해제되고 하나님의 영의 보편적인 역사로 누구든지 성령을 받으면 특수한 은사를 받아 하나님과의 직접적인 친교로 들어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오순절 성령 충만은 선교의 사건입니다(행 1:8). 오순절이 없었다면 교회가 없었을 것이고, 성령의 권능이 없이는 선교가 없었을 것입니다. 역사적 계시인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을 실존적인 사건이 되게 만들고, 그 객관적 사건을 주관적이고 내면적인 사건이 되게 만드는 능력은 오직 성령이 가지고 계십니다.
오순절에 120명으로 시작된 초대교회는 당일에 3,000명으로 증가하였으며, 그 이후 5,000명으로, 수만 명으로, 그 다음에는 수를 셀 수 없을 정도로 늘어났습니다. 2천년 기독교 역사가 오순절에 시작된 것입니다.
② 요한 웨슬리 성령 충만 사건
요한 웨슬리(1703-1791)는 감리교, 성결교, 오순절 교회, 나사렛 교회, 갱신주의 교회와 은사주의 교회들을 포함하여 35개 이상의 교단과 신앙 운동의 영적 아버지입니다. 그는 복음을 위해 40만 킬로미터 이상을 여행했고, 42,000번의 설교를 했습니다. 그가 저술, 번역, 편집한 작품만 200권이 넘습니다. 그는 형제, 아버지, 조부, 증조부 모두가 목회자였습니다. 그는 1728년에 영국 성공회에서 안수를 받았고, 영국 옥스퍼드 대학에서 문학 석사학위를 받았습니다.
1738년 5월 24일 수요일 저녁 8시 45분, 런던의 알더스게이트 스트리트에서 있었던 모라비안 교도들의 기도집회에서 그의 생애에 큰 전환이 일어났습니다. 그 자리에서 누군가가 루터의 로마서 강해 서문을 읽는 것을 듣고 있었는데, 그때 그는 자신의 가슴이 뜨거워지는 것을 경험하였습니다. 구원을 위해 오직 그리스도, 그분만을 신뢰해야 한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그분이 그의 모든 죄를 가져가셨고, 그를 죄와 사망의 율법에서 구원하셨다는 확신이 들었습니다.
웨슬리는 무엇보다 성령 충만을 참된 신앙의 본질로 보았습니다. 성령 충만은 이성으로만 아니라 감지할 수 있는 하나님의 영적 능력의 체험이며 하나님의 생명의 영과의 교통입니다. 웨슬리는 이러한 성령의 적극적 역할을 중생 이후에 경험하는 두 번째 은혜, 성령 침례, 그리스도인 완전(죄 없는 순수한 동기와 사랑의 상태), 성화로 보았습니다. 즉, 성령 침례를 통해 성화와 그리스도인 완전에 이르게 된다고 생각하였습니다. 이러한 이해는 기독교 신학에 획기적인 변화를 가져왔습니다.
전통적 신학은 중생과 성령 침례를 구분하지 않았지만, 요한 웨슬리, D. L. 무디, R. A. 토레이는 중생과 성령 충만을 구분하였습니다. 중생할 때 생명의 부여가 나타나고, 그것을 받은 자는 구원을 얻습니다. 그러나 성령 침례를 받을 때에는 능력이 부여되며, 그것을 받는 자는 봉사에 적합하게 됩니다. 토레이는 성령 침례, 성령 충만, 성령의 은사, 성령을 받음, 위로부터 능력을 입히움,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받음 등은 다 같은 사건을 가리키는 것으로 서로 통용될 수 있다고 주장하였습니다.
일생을 통해 웨슬리는, 신앙생활의 목표는 칭의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여 그의 거룩한 성품에 참여하는 성화의 완전에 있다고 증거하였습니다. 참된 신앙은 단지 하나님의 은혜로 죄를 용서받는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성령으로 인해 중생을 거쳐 하나님의 형상 안에서 인류가 새롭게 창조되는 성화와 완전, 즉 신성으로 충만해지는 그리스도인의 장성한 분량인 성숙에까지 진보하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웨슬리에게 있어서 성화와 그 목표인 완전은 하나님의 본성에 참여하는 것이요, 하나님의 생명을 인간 속에 회복하여 참 인간성인 하나님의 형상으로 갱신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성화의 점진적인 과정에 있어서 성령은 끊임없이 현존하심으로써 그의 은혜를 통해 충만한 구원으로 우리를 인도합니다. 이와 같이 웨슬리는 성화와 관련하여 성령의 특별한 사역에 관해 언급하였습니다.
모든 사람이 성령 충만을 받는 것은 매우 중요한 목적을 위한 것인데 그것은 바로 성령의 열매라고 웨슬리는 말합니다. 웨슬리의 성령 이해는 그 이후 기독교 역사에서 다음과 같은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첫째, 현대 기독교 복음주의 운동의 진정한 뿌리; 둘째, (신학적으로) 종교개혁의 완성자; 셋째, 19세기 미국 대부흥운동의 모체; 넷째, 20세기 오순절 운동의 신학적 토양 등으로 평가되고 있습니다.
③ 찰스 피니의 성령 충만 사건
피니(1792-1875)는 제 2 대각성운동의 아버지라고 불립니다. 피니를 통한 각성 운동은 자신의 영적 회심으로부터 시작됩니다. 그는 회심 전에는 하나님의 말씀을 지적으로 믿었으나, 회심 후에는 성경 말씀을 지적으로 받아들이기보다 하나님의 음성으로 받아들였습니다.
1821년 10월 10일, 그는 자신이 근무하는 법률 사무소에서 환상 가운데 빛으로 임재하신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그는 ‘나는 주님의 발 앞에 쓰러져서 나의 영혼을 주님에게 쏟아 놓았다. 나는 어린아이처럼 큰 소리로 울면서 목메인 소리로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회개를 다하였다. 나는 주님의 두 발을 나의 눈물로 온통 다 적시어 놓았다’라고 회상했습니다.
영적 체험을 한 후, 피니의 복음전도 사역은 화산처럼 폭발하였습니다. 피니가 미국의 소돔이라는 어느 타락한 마을에서 집회를 시작하고 15분도 채 지나지 않았을 때 엄청난 일이 일어났습니다. 사람들이 사방팔방으로 앉은 자리에서 넘어지면서 자비를 베풀어 달라고 울부짖기 시작했습니다.
피니가 뉴욕 방직공장을 견학하는 동안 일하던 한 여직공이 피니가 다가가자 손을 부들부들 떨면서 푹 쓰러졌습니다. 그 여직공이 눈물로 통회하는 역사가 일어났으며, 그 순간 마치 화약이 폭발하듯 그 방에서 일하던 모든 사람들이 통회하는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그러자 공장 주인은 ‘공장 일보다 영혼 구원의 일이 더 중요하다’라고 외치면서 그 날로 공장 문을 닫고 피니를 초청하여 공장에서 집회를 열었습니다. 사장은 모든 직공들을 참석하게 했으며, 며칠이 지나자 놀라운 능력이 나타나 모든 직공들이 예수를 믿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성령의 역사가 일어나자 1826년 겨울에서 봄에 이르는 동안 유티카 지방에서 부흥회를 통해 회심한 사람들은 그 노회 내에 3,000명에 달했습니다. 많은 법관들, 변호사들, 고등 교육을 받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게 되었고, 각성 운동에 참가하였습니다.
피니는 뉴욕에서 7년 동안 대형 집회를 가졌습니다. 피니가 말씀 중심으로 복음을 전했을 때, 하나님의 임재하심으로 많은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뉴욕의 롬(Rome)에서 500명, 유티카에서 500명, 주변 지역 교회에서 1,000명이 회심하게 되었습니다. 필라델피아에서 피니는 3,000명을 수용하는 한 독일계 교회에서 집회를 계속했습니다. 그 집회에서도 기적을 동반한 성령의 역사가 나타났습니다. 미국 뉴잉글랜드 전역에 부흥이 일어났으며, 부흥이 절정에 달했을 때 일 년에 100,000명의 개종자(改宗者)가 생겼습니다.
이와 같은 성령의 역사를 통해서 회개와 부흥의 역사가 일어나는 것도 사실이지만, 거짓 성령의 역사도 세계 도처에서 일어나고 있습니다. 다음의 성경절은 거짓 영의 역사가 얼마든지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것이 이상한 일이 아니라 사단도 자기를 광명의 천사로 가장하나니 그러므로 사단의 일꾼들도 자기를 의의 일꾼으로 가장하는 것이 또한 큰 일이 아니라 저희의 결국은 그 행위대로 되리라”(고후 11:14,15).
사탄도 일종의 영적 존재이기 때문에 얼마든지 거짓 영의 역사로 사람들을 속일 수 있으며, 그것이 마치 참 성령의 역사인 것처럼 가장할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백성들은 성경에 대한 정확하고 깊은 지식을 가지고 늘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으면서, 거짓 영의 역사를 가려낼 수 있는 분별력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이제 거짓 영의 역사가 어떻게 일어나고 있는 그 실상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성령세례와 성령충만 어떻게 다른가?
오직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으라!(엡 5:18b)
시작하는 말
일부 성도들 가운데 흔히 오해하는 교리가 성령에 관한 교리이다. 어떤 분은 성령을 하나의 힘(power)으로 보는 사람도
있다. 성령은 어떤 힘이 아니다. 성령은 인격적인 하나님 바로 그분이시다. 기독교의 하나님은 성부, 성자 그리고 성령으로 삼위
일체 하나님이시다.
여호와의 증인은 성령도 믿지 않고 성자 예수도 우리가 믿는바 성삼위 중 이위(二位)로 믿지 않는다. 그들은 예수가 ‘우리
보다 먼저나신 피조물’이라고 가르친다. 그들이 그렇게 주장하는 이유는 골로새 1:15절 말씀에 의거한다고 하지만 성경은 항상
문맥을 따라 해석해야 한다. 골로새 1:16을 보면 저들이 피조물이라고 믿고 있는 그 예수는 바로 세상을 만드신 창조주이시다.
만물이 그로 말미암지 않고는 된 것이 하나도 없는 조물주 바로 그 분이시다. 그는 하나님 바로 그 분이시다.
1. 성령세례
(1) 일생의 단 일회적인 사건
성령세례는 곧 구원을 말하며 일생에 중생할 때 단 한번 경험하는 사건이다. 우리가 중생하는 것은 성령의 역사가 아니면 될 수
없는 일이다. 고린도전서 12:3에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예수를 주라 할 수 없느니라.”라고 말했고, 로마서 8:9에서는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니라.”라고 했으니 성령을 받는 것은 구원을 이룩할 때 경험하는 일회적(一回的)인
사건이다. 베드로가 한번 설교하였을 때 3,000명이 회개하고 예수를 믿었다. 그들 모두는 성령의 역사로 죄를 회개하고 예수를
믿게 된 것이다.
어떤 사람은 목사가 손을 머리에 얹고 안수해야 성령이 임한다고 가르친다. 그것은 잘못된 가르침이다. 안수는 안수 받는
사람에게 특별한 일을 위임할 때 맡은바 사명을 감당하도록 하나님이 그에게 특별한 은혜를 더하기를 기도할 때 안수 한다.
안디옥교회는 사울과 바나바를 구별(區別, set apart)하고 안수하여 선교사로 파송했다.
구약의 왕, 제사장, 선지자들은 기름 부어 안수를 대신했다. ‘메시아’란 말은 ‘기름 부음을 받은 자’라는 말인데 그
메시아는 헬라어로는 그리스도(Christos)이고 그 메시아 즉 그리스도는 바로 하나님이신 예수님이시다. 그러기에 성령 세례는
중생하고 구원을 얻은 다음에 다시 두 번째로 받는 축복이 아니다. 중생할 때 일생에 한번 받는 일로 참다운 성도라면 누구나 처음
믿을 때 성령세례를 받은 사람들이다.
(2) 성령세례에 대한 오해
오순절파와 순복음파는 성령세례를 중생과 별도로 받는다고 주장한다. 그들은 중생은 자기 본인의 힘으로 되고 그 다음 성령세례를
받으면 구원에 이른다고 가르친다. 이것은 잘못이다. 성경에 성령세례가 구원을 얻은 다음 두 번째로 받는 축복이란 말은 없다.
에베소서 4:5에 “주도 하나이요, 믿음도 하나이요, 세례도 하나이요, 하나님도 하나이시니”라고 했다. 세례는 하나뿐이다. 그
세례는 사람이 그리스도에게 접붙임 즉 유기적으로 그리스도와 연합(聯合) 할 때 받는 것이다.
로마서 6장에는 성도가 세례로 인하여 그리스도와 신비적으로 연합되어 다시는 죄 가운데 살지 않고 그리스도와 함께 영혼이
부활하여 그리스도의 의(義)에 대하여 산다는 말씀이 나온다. 이 말의 설명은 요한복음 15장의 포도나무의 비유에서 찾아 불 수
있다.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어야 생명이 있고 열매를 맺는다. 사람이 중생(重生, born again)하여 예수를 믿는 것은
바로 우리가 가지(枝)로서 포도나무에 접붙임 받는 것과 같다.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듯이 우리가 그리스도와 신비적인 연합으로
붙어 있으면 생명이 있고 영생이 있다. 이것이 바로 중생의 의미이고 이것이 바로 성령세례의 의미이다.
(3) 예수님과 성령세례
예수님의 사역은 1)우리 죄를 짊어지고 가시는 것(代贖)과 2)우리에게 성령을 보내시어 예수를 믿게 하는(重生) 두 가지
사역이다. 요한복음 1:29에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 한 구절에서 우리의 죄를 없애는 일을 하시고
또 세례 요한이 한 말 “나는 물로 세례를 주지만 그는 불로 세례를 줄 것이요.”라고 한 대로 그는 성령세례를 주어 사람을
구원하신다는 말이다.
구약을 보면 “영을 부어 주신다.”라는 말이 자주 나온다. 가령 요엘 2:28은 베드로가 오순절 때 인용한 말씀이지만 그
외에도 구약성경을 보면 가령 에스겔 39:28,29에도 “이스라엘 집에 영을 퍼부어 준다.”는 말이 있고, 이사야 32:15에도
같은 말이 나온다. 예수님은 죄를 없이 해주시고 또한 성령으로 세례를 주어 하나님의 사람으로 만드신다. 주의할 것은 요한복음
1:29의 “세상 죄를 지고 가는”에서 “지고 가는”이란 말은 원문 헬라어 성경에서 보면 현재분사(現在分詞, present
participle)이다. 구원할 자를 구원해 주신다는 말이다.
예수님의 사역은 하나님의 택한 백성이 얼마인지는 몰라도 그 모든 피택(彼擇) 자의 죄를 짊어지고 가신다는 말이고, 그가 불로
세례를 주실 것이라는 세례 요한의 말도 현재형 분사이므로 예수님의 사역은 계속해서 그의 택한 백성들을 모두 구원하기 위해서는
사람마다 성령으로 세례를 주신다는 말이다. 즉 이는 단회적(單回的)으로 성령을 부어 죄를 회개하게 하여 하나님께로 돌아오도록
한다는 말이 분명하다.
그러므로 ‘성령세례’를 받았다는 말은 ‘구원’ 받았다는 말로 성령을 받았다는 말이다. 성령님은 우리에게 그리스도를
나타내주시고 동시에 우리 안에 그리스도의 형상이 이루어지도록 하신다. 성령님이 하시는 일은 그리스도를 증거 하시는 일이다.(요
14:26, 15:26) 그 목적은 우리로 하여금 그리스도를 믿어 그의 장성한 분량에 까지 자라게 하려 하심이다.(엡 1:17, 갈
4:19, 고후 3:18) 우리가 옛 사람을 벗어 버리고 성령의 열매를 맺는 것은 우리 속에 성령이 내주하시기 때문이다.(갈
5:15-25)
그러므로 구약의 예언대로 예수께서 승천하신 후 그가 보내신 성령으로 인해 많은 그의 백성들이 세례를 받고 그리고 죄 없이함을
받는다. 이것이 구원이다. 성령세례는 사람이 거듭날 때 즉 구원을 얻을 때 누구나 처음 단 한번 경험하는 일이며 중생한 다음에
다시 경험하는 특별한 성령의 사역이 아니다. 여러 번 반복하는 것이 아니다. ‘성령세례’는 단회적(單回的)며 유일회적(唯一回的)인
성령의 역사이다. 개인적으로는 일생에 중생할 때 단 한번 경험하는 하나님의 은혜이다.
2. 성령충만
한편 ‘성령충만’은 다르다. ‘성령세례’와 ‘성령충만’이 어떻게 다른가를 보자. 먼저 결론을 말하면 ‘성령세례’는 중생(重生)과 관련되고 ‘성령 충만’은 성화(聖化)와 관련 된 성령의 사역(使役)이다.
승천하신 예수님은 오순절에 성령을 퍼부어 주시어 즉 성령님을 통하여 처음에는 120명에게 성령세례를 주셨고 후에는
3,000명에게 성령세례를 주셨다. 이렇게 성령세례를 주어 회개하고 중생한 결과 어떤 현상이 일어났는가? 사도행전 2:4에 보니
‘성령충만’했다고 했다. 그러므로 ‘성령세례’의 결과는 ‘성령충만’이다.
성령세례는 주님이 하신 일이다. 그리고 성령충만은 거기 모인 사람들이 받은 것이다. 주님이 하늘 문을 여시고 주신 성령을
마가의 다락방에 모인 사람들이 받은 것이다. 세례는 중생할 때 단 한번 주님이 성령의 도움으로 주신 것이다. 그러나 성령충만은
죽을 때까지 계속해서 일어나는 계속적인 성화의 은혜이다. 성령충만한 사람은 말씀에 충만하여 그리스도의 형상에 날마다 닮아가는
사람이다.
사람이 예수를 믿고 중생하면 그 다음부터 계속해서 성화(聖化)가 시작된다. 성화는 과정이다. 성화는 한 번 되고 끝나는 것이
아니라 죽을 때까지 계속 연속된다. 바울도 빌립보서 3:13에서 “내가 이미 잡았다 함도 아니요 앞에 있는 푯대를 향하여
나간다.”라고 말했다. 또 바울은 빌립보서 2:12에서 “두렵고 떨림으로 너의 구원을 이룩하라.”고 하기도 했다. 이 말은 우리의
힘으로 구원을 이룩하라는 말이 아니라 성화의 과정을 충실하게 힘써 나가라는 말이다.
그러므로 성령세례는 한번이고 성령충만은 계속되어져야한다. ‘성령 충만’이란 성령을 받은 사람이 그 증거로 날마다 성화를
계속하여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행위를 말한다. 그 어느 누구도 이 세상에서 성화가 완성되는 사람은 없다. 성도는 죽을 때 그의
성화가 끝난다.
그러나 성화 역시 성령의 도우심(가지가 줄기에 붙어 있음)이 필수적이지만 또 한편으로는 성화는 구원 받은 성도 개개인이 힘써
맺어야 할 열매이다. 성화를 잃어버리면 다시 회복하면 된다. 성도가 성화되지 않으면 성령이 근심하신다.(엡 4:30) 성화를
회복하는 유일한 방법은 회개와 말씀이다. 회개를 통해서 성화가 계속된다. 그러므로 ‘성령충만하다’는 말은 여러 가지 의미를
가진다. 회심(conversion)에는 믿음과 회개가 따르는데 믿음은 미래 지향적이고 회개는 과거 지향적이며 성화와 직결된다.
성령충만의 특징은 다음과 같다.
(1) 성령충만은 일반적이고 정상적인 그리스도인의 특징이다.
그래서 성경에서는 하나님의 사람은 칭찬을 들으며 ‘성령이 충만한 사람’이라고 한다. 초대교회 일곱 집사를 보라. 이들은
칭찬을 받으며 성령이 충만한 사람들이었다.(행 6:3-5) 바나바도 그렇고(행 11:24), 비시디아 안디옥에서 예수를 믿게 된
사람들도 그러했다.(행 13:52)
(2) 성령충만은 특정 직무를 담당할 때도 하나님이 내리신다.
누가복음 1:15-17을 보면 세례 요한은 모태에서부터 성령이 충만했다. 뿐만 아니라 사도행전 9:17과 22:12-15을 보면 다메섹에 들어가서 아나니아에게 안수 받는 사울은 그 후로도 사도로 성령이 충만했다.
(3) 성령충만이 임시적으로 주어지는 때도 있다.
성령충만은 사도나 선지자 같은 항구직(恒久職)을 맡은 사람을 따로 성별하여 세울 때가 아니더라도 임시적으로 어떤 일을 수행하도록 일을 맡길 때 주어진 사실들이 있다.
세례 요한의 부친 사가랴는 선지가가 아니고 제사장이었지만 그와 그의 부인 엘리사벳은 성령이 충만했다고 누가복음 1:5-8에
말한다. 바울도 전도할 때 성령이 충만했고, 베드로도 산헤드린에서 증언할 때 성령이 충만했고, 에베소 5:18에서는 모든
성도들에게 성령의 충만함을 받으라고 하는데 성령충만은 모든 성도가 받는 것이며 일생동안 지속적으로 받는 은혜이다. 그리스도의
형상을 닮기 위해서이다. 에베소서5:18 말씀을 좀 더 자세히 연구하면 성령충만의 분명한 뜻을 알 수 있다. 그 가운데 몇 가지로
살펴보자.
“성령충만을 받으라!”는 명령형은 신약에서 모두 현재 명령이다.
그러므로 계속해서 성령에 충만함을 받아야 한다. 헬라어에서 현재 명령은 항상 동작이 반복되는 것을 말하고 정과거(定過去, aorist form)는 한 번 하고 끝나는 것을 의미한다.
예를 들면 요한복음 2장의 가나의 혼인잔치에서 “물독을 채워라!”(2:7) 하고 주님이 말씀하실 때 주님은 정과거형
동사(定過去動詞形)를 사용하여 말씀했다. 즉 물을 채우는 일을 한 번만 하라는 것이지 자꾸 채우라는 말이 아니다. 마찬가지로
요한일서 3:9에서도 “죄를 짓지 아니 하나니..”에서 “죄를 짓는다.”는 말은 현재 동사이므로 “하나님에게서 난 자는 계속해서
반복적으로 습관적으로 죄를 짓지 않는다.”는 말이라는 것이 분명하다. 이 같이 정확한 뜻은 원어에서 온다.
또 주목할 것은 “성령의 충만함을 받으라!”는 말은 복수형이다.
원문에서 보면 그 동사는 ‘plerousthe en pneumati’이다. 그러므로 ‘복수 수동태 현재 명령’이 분명하다.
따라서 그 의미는 자명하다. 하나님은 모든 성도들에게 하시는 말씀이며, 예수를 믿는 사람 중에서 어느 특정한 부류들에게만 하는
말씀이 아니다. 이것은 아주 중요하다. 기독교 지도자 중에 성령충만은 어느 특정한 교파나 교회에 출석하는 특정한 사람들에게만
주어진다고 속이는 자들이 있는데 이에 속으면 안 된다. 이런 사이비 지도자들을 조심하라. 말세의 특징은 ‘속임수’이다.
“성령충만 하라!”는 말은 수동태이다.
그러니까 “성령이 너의 마음에 성령으로 충만하게 하도록 하라!”는 말이다. 성령이 우리 마음에 성령으로 충만하게 하는 방법은
우리가 기쁨으로 그의 명령을 순종하는 것이다. 성령의 인도하심을 거절하지 않고 따르는 것이다. 에베소서 5:18에서 술 취하는
사람은 술을 마셔서 취한다. 마찬가지로 성령충만을 받으라는 말은 가만히 있으면 성령이 우리 마음에 저절로 부어주는 것이 아니라
마치 술 취하는 사람은 술을 마셔야 취하듯 우리도 성령충만을 받도록 사모하고 힘써야 한다.
구원의 서정에서 중생, 믿음, 회개, 칭의, 양자 등은 모두 하나님이 일방적으로 한 순간에 하시는 사역이지만 그러나 성화는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성도가 이루어 나가야 되는 일이다. 우리가 그냥 가만히 앉아서 성령충만을 받는 것이 아니다.
결론
(1) ‘성령세례’와 ‘성령충만’은 분명하게 구별된다.
지금까지 우리는 ‘성령세례’와 ‘성령충만’에 대해 살펴보았는데 ‘성령세례’는 우리가 그리스도와 연합할 때 받는 것이다.
그리스도와 연합한다는 말은 예수를 믿을 때 죄의 용서와 성령의 은사로 그리스도 안에서 외부적으로 그리고 내부적으로 종합적인 구원이
이루어지는데 그때 받는 일생에 한 번 있는 일 즉 중생(重生, 거듭남, born again)이다.
그러나 ‘성령충만’은 우리가 ‘성령세례’를 받은 다음 즉 우리가 그리스도와 신비적으로 또 유기적으로 연합한 다음 우리의
생활을 점점 그리스도를 닮아가며 성경대로 살려는 욕구가 증대해 가는 현상을 말하는 것이다. 참 그리스도인이라면 누구나
‘성령충만’을 받아야 한다. 그것은 늘 믿음을 지켜나가며 그리스도인의 훈련을 받아 그리스도의 형상(Imago Christi)을
우리 안에 이루려고 노력하는데서 이루어진다.
그러므로 우선 아들을 보내시고, 아들을 죽게 하시고, 살아나신 그리스도의 영(聖靈)으로 하여금 우리 속에 살게 하신 하나님께
늘 감사하며 살자. 오늘날 우리 성도들은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서 예루살렘 성전에 가지 않는다. 우리 모두가 각자 우리의 몸이
하나님의 성전임을 알고 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성령으로 우리 속에 계시기 때문이다.
(2) 우리 생활에 성령의 열매가 맺어져야 한다.
우리가 성령의 열매를 맺으려면 회개와 믿음과 순종의 삶을 살아야 할 뿐 아니라 계속해서 성령이 충만함으로 성화되고 성장하여 성령의 열매를 맺어야 한다. 그리고 성령충만을 위해 계속 기도해야 한다.
(3) 모든 성도는 한 가지 이상 성령의 은사와 직임이 있다.
성령님은 항상 각 개인에 관심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각 사람은 각각 은사(恩賜, gift)가 다르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우리는 같으면서도 다르다. 그리스도 안에서 한 형제자매지만 또한 다른 각각의 은사를 받았다. 그 은사들로 성령이 주님의
사랑으로 하나 되게 한 것을 힘써 지켜야 한다. 이것이 중요하다. 하나님은 성령을 보내셔서 우리로 회개하게 하고, 우리 죄를
없이하여 우리를 그리스도와 연합하게 하고, 그 안에서 그리스도의 형상을 본받도록 지으셨고, 우리는 그의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일하게 하신다.은사는 여러 가지이다. 그리고 봉사하는 직임도 여러 가지이다. 그리스도인이면 누구에게나 한 가지 이상의 은사와
직임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이 은사와 직임은 주권적으로 사역하시는 하나님의 뜻으로 되어 진다. 그 목적은 오직 한 가지 즉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를 세워나가기 위한 것이다. 그리하여 궁극적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 위한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은혜로 주신 모든 은사를 하나님의 일을 맡은 선한 청지기로서 충성하자. 이 모든 일을 통해 하나님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영광을 받으시도록 하자.(*) 글쓴 이 / 김명도 목사
성령 충만을 받는 것에 대한 성경구절
성령 충만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놀라운 은혜입니다. 성령을 통해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 능력과 지혜를 받아 신앙생활을 더욱 깊이 있게 할 수 있습니다. 성경은 성령 충만의 중요성과 이를 받기
위한 방법을 여러 곳에서 강조합니다.
성령 충만의 약속
하나님께서는 성령을 약속하셨으며, 믿는 자들에게 성령을 보내어 우리를 인도하시고 도우십니다.
사도행전 1:8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요한복음 14:16-17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리니 그는 진리의 영이라 세상은 능히 그를 받지 못하나니 이는 그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라 그러나 너희는 그를
아나니 그는 너희와 함께 거하시며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
사도행전 2:38
베드로가 이르되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받으라 그리하면 성령의 선물을 받으리니
성령 충만을 구하는 기도
성령 충만은 하나님께 구할 때 받을 수 있습니다. 우리는 믿음으로 성령을 간구하며, 그의 인도하심을 따라 살아가야 합니다.
누가복음 11:13
너희가 악할지라도 좋은 것을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 하시니라
에베소서 5:18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으라
시편 51:10-11
하나님이여 내 속에 정한 마음을 창조하시고 내 안에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하소서 나를 주 앞에서 쫓아내지 마시며 주의 성령을 내게서 거두지 마소서
성령 충만한 삶의 열매
성령 충만한 삶은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사는 삶입니다. 성령의 열매를 맺으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갈라디아서 5:22-23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 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로마서 8:14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사람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
고린도전서 6:19-20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 자신의 것이 아니라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Q) 성경에 보면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는 말씀이 있는데요. 어떨 때 기도를 많이 하고 나면 성령 충만한 것 같은 느낌이 들기도 하는데, 그런 걸 말하는 건가요? 정확히 어떤 상태가 성령 충만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A) 네, 그렇습니다. 성령 충만이라는 말은 정말 많이 듣는 말이기도 하지만, 정말 그 의미가
무언지에 대해서는 딱 꼬집어 말하기가 곤란한 모호한 면이 있는 듯합니다. 사실 성령 충만의 진정한 의미를 오해하는 분들이 많이
있습니다. 성령 충만을 성령의 은사나 기적 행함 또는 열광적인 기도의 몰입이나 황홀경의 체험 등으로 생각하는 이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진정한 성령 충만은 무엇보다도 예수 그리스도의 영에 의해 지배 받는 상태를 말합니다. 즉 우리의 생각과 감정과 의지가
온전히 하나님의 말씀과 그리스도의 영에 의해 이끌리는 삶을 말합니다. 그러면 이제 성령 충만의 원리에 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구주와 주님으로 믿는 순간 예수 그리스도의 영 즉 성령께서 우리 안에 거하시기 시작합니다. 그러나 성령께서
단지 우리 안에 거하시는 상태만 가지고는 우리를 충만히 다스리지 못하십니다. 우리들 자신의 욕망과 편견 등으로 가득 찬 영혼으로는
결코 성령 충만을 얻을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이 모든 것을 버리고 성령께 온전히 우리의 영혼이 붙잡히게 될 때 성령 충만의
상태가 우리에게 주어집니다.
성령에 충만할 때 우리의 삶은 다음과 같이 하나님께 대한 찬송과 감사와 복종의 영으로 넘치게 됩니다.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들로 서로 화답하며 너희의 마음으로 주께 노래하며 찬송하며
범사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항상 아버지 하나님께 감사하며 그리스도를 경외함으로 피차 복종하라”(엡 5:18-21).
성령 충만은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영으로 충만한 것이며, 예수 그리스도의 영으로 충만하다는 것은 예수님의 생각, 예수님의
뜻으로 늘 영혼이 채워지는 것을 말합니다. 이러한 상태가 곧 성령 충만의 상태입니다.
그런가 하면 성령 충만이란 그리스도께 온전히 복종하는 상태를 말합니다. 대개의 크리스천들이 관념상으로는 성령의 실재를
인정하는 것처럼 말하지만, 실생활 속에서 성령께 인격적으로 복종하는 삶을 살고 있는 분들은 그리 많지 않습니다. 그리고 많은
신자들이 비록 성령 충만을 구하고 있지만 이를 얻지 못하는 경우 또한 많습니다. 왜 그럴까요? 그 이유는 비록 그들이 성령 충만을
받기 위해 많은 기도를 드렸을지라도, 실제로 그들의 삶 속에서 성령께 인격적인 복종을 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가운데 혹
성령 충만을 구하고 계시지만 실제의 삶 속에서는 그 경험을 하지 못하고 계시는 분들이 있다면 다음과 같은 점을 점검해 보시기
바랍니다. 먼저 과연 내가 성령께 복종하는 삶을 살고 있는지를 살펴보는 일입니다. 온전한 복종의 삶을 살고 있지 못하시다면 이제는
마음의 태도를 회개하여 주님께 대한 복종의 관계를 새롭게 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한때 성령 충만을 받았으나 현재는 충만한
삶을 지속하지 못하고 자주 쓰러지는 분들이 계시다면, 과연 내 삶의 어떤 부분에서 성령께 복종하지 않았는지를 살펴보고 그 부분을
새롭게 회개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의 영혼이 거듭난 이후 성령께서 우리 안에 거하시는 것은 사실이지만, 온전히 우리의 영혼을 통치하지 못하시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 이유는 앞에서도 말한 바와 같이 대부분 신자의 삶이 그리스도께 온전히 복종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성령은 우리 안에
거하시는 인격적인 하나님이심을 잊지 마십시오. 그 분은 인격을 지니고 인격적인 관계를 우리와 맺기 원하십니다.
또한 성령 충만이란 성령과 친밀히 교제하는 상태를 말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영혼과 친밀한 교제를 하기 원하십니다.
그런데 에덴 동산에서 범죄한 인간은 하나님과의 교제를 피했습니다. “그들이 날이 서늘할 때에 동산에 거니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아담과 그 아내가 여호와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동산 나무 사이에 숨은지라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을 부르시며 그에게
이르시되 네가 어디 있느냐 가로되 내가 동산에서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내가 벗었으므로 두려워하여 숨었나이다”(창 3:8-10).
그러나 하나님과의 교제를 멀리 했던 아담과 하와에게 다가온 것은 죄악과 수치와 두려움뿐이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하나님과의 교제를
상실한 인간의 영혼은 부패한 죄성을 유전(遺傳)으로 온 인류에게 이어주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끊어진 교제의 다리를 다시 잇고 하나님과의 교제의 자리로 죄인들을 초청하고
계십니다. “볼지어다 내가 문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계 3:20). 신앙의 경륜이 오랜 분들만이 성령과의 친밀한 교제를 나누는 것이 아닙니다. 아무리
초신자라 할지라도 성령과의 친밀한 교제 나누기를 노력하다 보면 어느새 성령 충만한 상태를 맞이하게 되는 것을 경험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은혜의 회복이란 바로 주님과의 끊어진 교제를 다시 잇는 데에 있다는 것을 깨닫고, 성령과의 친밀한 교제를 즐기는 생활을
시작해야 합니다.
성령충만
- 찰스허멜-
성령 충만하다는 말은 무슨 의미인가? 또 우리는 어떻게 성령으로 충만해질 수 있을까?
은사 부흥 집회들이 활발하게 열릴 때면 이런 물음들은 서로 상반된 대답들을 이끌어 내곤
한다.
이런 문제의 원인의 일부는 오랫동안 성령이 삼위 가운데서 잊혀진 위(位, person)였다
는 사실이다. 이것은 성령이라는 이름이 생소하기 때문이 아니다. 수 백만의 그리스도인
들은 매 주일 "우리는 생명을 주시는 분, 곧 주님이신 성령을 믿나이다." 라고 고백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근 수 십년 전까지 성령은 교회의 의미를 이해하고 교회의 본질을
교육시키는 데 있어서 상대적으로 작은 비중을 차지했을 뿐이다.
이것은 무엇 때문일까?
첫째, 영(靈)에 대한 개념이 불분명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인간들의 가정을 모형으로 하여
성부 하나님에 관한 몇 가지 개념을 얻는다. 또 예수님에
관한 복음서를 통해 성자 하나님에 관한 상(像)을 얻는다. 그러나 성령 하나님에 관하여
는 그 개념을 정립하기가 어렵다. 그 분은 만질 수 없고, 또 어쩌면 두렵기까지 한, 어
떤 유령과 같은 실재로 생각되는 것이다.
둘째, 성경의 기록에 의하면 성령은 자신에 대하여는 관심을 기울이고 있지 않다는 것
이다. 구약에 나타나는 성령은 하나님의 성품과 목적을 자기 백성에게 계시하는 여호와
의 영이다. 그는 하나님의 인격적인 임재와 능력의 역할을 수행한다. 한편 신약에서 성
령은 그리스도의 영으로 불린다.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그가 나를
증거하실 것이다.------그는 자기 마음대로 말씀하시지 않고 들은 것만 일러 주실 것이
요.------그는 나를 영광스럽게 하실 것이다."(요 15:26;16:13-4)이처럼 성령은 그 본성
에 있어서 뿐만 아니라 사역의 면에서도 비(非)존재로 묘사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같은 사실 때문에 성령에 관한 탐구에 있어 의욕이 꺾일 필요는 없다.
바람도 역시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이다. 예수께서는 니고데모에게 우리가 바람 소리를 들
을 수는 있지만 그것이 어디로부터 와서 이디로 가느지는 알 수 없다는 사실을 상기시키
셨다(요 3:8). 그렇지만 바람은 강력한 힘이 있다. 거대한 나무를 뿌리채 뽑아 버릴 수
도 있고, 범선을 물 위에 떠다니게 할 수도 있으며, 제트기를 가을 낙엽처럼 뒤흔들어 놓
을 수도 있는 것이다.
사실, 구약과 신약 모두에서 영(spirit)을뜻하는 단어들은 바람이나 호흡을 뜻하는 단
어들과 똑같다. 그 단어가 특별히 어떤 의미를 가지는가는 문맥과 저자의 용법에 따라 결
정된다. 그러나 이 세 단어 모두가 공통적으로 품고 있는 의미는 생명, 운동력, 힘, 신
비, 예측불가능 등이다.
최근에 들어와 우리는 성령에 관해 더 많은 것들을 알게 되었다. 그러나 이것은 성령의
본성과 사역이 변했기 때문이 아니라, 교회 내에서 행하시는 그 분의 능력 있는 활동 때문
이다. 신학자들과 교인들에게 오랫동안 무시되었던 성령의 은사들이 이제는 대화의 흔한
주제가 되었다. 또 뜻하지 않은 방법으로 성령의 능력이 현시(顯示) 되곤 하였다. 은사
부흥회는 광범위하게 확산되어 가고 때로는 논쟁으로까지 진전되고 있는 것이다.
이 소책자에서 성령의 활동의 모든 측면을 망라하려는 것은 아니다. 그보다는 '성령 충
만'(filled wiht the Spirit)이라는 말로 표현되고, 영적 은사의 현시에서 뚜렷이 나타나
는 성령의 차원에 초점을 맞출 것이다. 먼저 성령에 나타난 자료들을 살펴본 후에, 이 가
르침이 오늘날의 교회에 어떻게 적용되는지를 살펴 보도록 하자.
출발점
신약에서 '성령 충만'(filled with the Spirit)이라는 말은 바울서신에서 1회, 누가복음
에서 8회로 총 9회 나온다. 한편 '성령 충만하여'(full of the Holy Spirit)라는 표현은
5회 나오는데, 모두 누가복음에서 나온다. 그러므로 우리는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에서 우리
의 연구를 시작할 것이다.
모든 성경 저자들은 그가 전달하려고 하는 어떤 중요한 가르침을 가지고 있다. 그 문학
적인 형식이 운문이건 산문이건, 시편이건 잠언이건, 역사서건 예언서건 성경의 모든 부분
들은 각각 어떤 메시지를 전달하는 것이다. 바울은 이 사실을 강조하면서 이렇게 적고 있
다.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영감으로 된 것이요 진리를 가르치고 잘못을 책망하고 허물을
고쳐 주고 의로 교육하는 일에 유익한 책입니다."(임후 3:16) 따라서 훌륭한 역사가인 누
가의 기록은 단순한 사건 보도 이상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 다시 말해 그는 분명한 교육적
목적을 가진 한 신학자이다.
누가가 강조한 것 중 하나는 새 시대(New Age)의 도래다. 그는 이 구속사의 드라마에 나
타난 성령의 임재와 활동을 강조한다. 누가는 그의 복음서에서 마태, 마가, 요한의 세 복
음서를 합한 것보다도 많이 성령에 관해 언급한다. 새 시대에 활동하시는 성령의 사역에
대한 누가의 강조는 사도행전 전반에 걸쳐서 계속 이어진다. 그러므로 이 두 책은 성령 충
만하다는 의미가 무엇인지를 이해할 수 있는 기본적인 자료를 제공해 준다.
복음서에 나타난 성령
구약 성경은 메시야와 성령 시대를 가져다줄 새 시대를 기대하고 있다. 누가복음은 이스
라엘에서 4백 년의 침묵 뒤에 재개된 성령의 활동을 말함으로써 시작된다.
첫 장면이 열리면서 주의 천사가 어느 노(老)제사장에게 돌연히 나타난다. 경건하나 자
녀가 없었던 사가랴가 성전에서 분향하고 있을 때 가브리엘 천사는 그에게 장차 위대한 예
언자가 될 한 아들이 태어날 것을 약속하는 것이다. 또한 요한은 "어머니 태에 있을 때부
터 그에게 성령이 충만할" 것이며(눅 1:15), 또 메시야의 오심을 준비하기 위해 엘리야의
능력으로 복음을 전파하게 될 것이라고 약속한다.
6개월 후 가브리엘은 마리아에게 나타나 그녀가 성령으로 아들을 잉태하리라고 약속하면
서, 엘리사벳도 아이를 낳을 것이라고 말한다. 마리아가 그녀의 사촌인 엘리사벳을 방문하
였을 때, 엘리사벳은 "성령이 충만하여"(눅 1:41) 마리아를 축복하면서 앞으로 일어날 일
에 대해 예언을 한다.
엘리사벳이 아들을 낳아 그 이름을 요한이라 불렀다. 이 때 사가랴는 "성령이 충만하여"
(눅 1:67), 하나님의 구원을 그의 백성들에게 가져다 줌에 있어서 요한이 수행하게 될 위
대한 사역에 관해 예언한다. 이 세가지 경우들을 살펴볼 때 성령 충만은 예언적 사역과
관련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그 후 예수께서 태어나신 뒤, 그의 부모들은 예루살렘에 올라가 아이를 여호와께 드린다.
이때 시므온이라 불리는 한 노인이 성전에서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누가는 세 번에 걸
쳐 시므온과 성령 사이의 분명한 연관에 대해 언급한다. "성령이 그에게 임하여 있었습니
다.------그리고------성령의 지시를 받고 있엇습니다.------그가 성령의 인도로 성전 안
에 들어갔을 때에 ------."(눅 2:25-27) 시므온은 그 아기를 팔에 안고 하나님을 찬양하면
서, 분명히 성령의 능력에 힘입어 메시야의 사역에 관해 예언한다.
누가의 이런 기록들을 살펴볼 때, 그는 '성령 충만하다'는 말을 어떤 특별한 결과를 초
래하는 성령의 직접적인 행위를 뜻하는 것으로 사용하고 있음이 분명하다. 위의 경우들에
있어서 특별한 결과는 예언, 즉 하나님으로부터의 메시지다. 그런데 행위는 공인된 예언자
들에게만 나타나는 것이 아니다. 사가랴가 제사장이었던 반면에, 시므온, 엘리사벳, 마리
아는 아무런 종교적 직책도 갖고 있지 않았다. 이렇게 볼 때, 요엘이 예언한 바와 같이,
성령은 모든 부류의 사람들-젊은이와 노인들, 남자와 여자들-에게 부어졌음을 알 수 있다
(욜 2:28-29). 30년 후 요한은 광야에서 나와 복음을 선포하고 세례를 베푼다. 군중들은
요단강으로 몰려와 그의 말을 듣고 반응을 보인다. 이 때 많은 사람들은 그가 바로 오랫동
안 고대하던 메시야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게 된다. 그러나 요한은 이렇게 선언한다.
"나는 당신들에게 물로 세례를 주지만------그는 성령과 불로 당신들에게 세례를 주실 것
이요."(눅 3:16)
곧 이어 예수 자신이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신다. 이 때 갑자기 성령이 그 위에 내려오고
하늘로부터 다음과 같은 음성이 들려 온다. "너은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다."
(눅 3:22) 이 선언은 메시야적 아들(Messianic Son)이면서 동시에 고난받는 종(Suffering
Servant)이신 예수님의 이중 사역을 지시하는 것이다. 성령의 강림은 구약의 또 다른 예언
을 성취시켰다. "내가 나의 신을 그에게 주었은즉 그가 이방에 공의를 베풀리라."(사 42:1)
예수님은 새 시대를 위하여 약속된 성령의 권능을 입고 그의 사역을 시작하신다.
누가는 계속해서 성령의 활동에 대해 기록한다. "예수께서 성령이 충만하여 요단강에서
돌아오셨습니다. 그리고 성령의 인도로 빈들에 가셨습니다."(눅 4:1) 예수님의 생애에 있어
서 성령 충만은 하나의 지속적인 특징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여기서는 성령이 순간적이고 직
접적으로 역사하여서 예수님이 그의 사역을 준비할 수 있도록 광야로 인도하고 있음을 주목
할 수 있다.
악마의 시험을 물리치신 후, 예수님께서는 "성령의 능력이 충만하여" 갈릴리로 돌아오신
다(눅 4:14). 이어 그는 자기 고향 나사렛에 가신다. 예수님께서는 회당에서 두루마리를
받아 이사야서를 읽으신다. "주의 영이 내게 임하셨도다. 주께서 내게 기름을 부으심은
가난한 자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게 하심이라. 주께서 나를 보내심은 포로된 자들에게
해방을 선포하고, 눈먼 자들에게 눈 뜨임을 선포하며, 눌린 자들을 놓아 주고, 주의 은혜의
해를 선포하게 하심이라."(눅 4:18-19)
그리고 나서 예수님께서는 두루마리를 시중드는 사람에게 되돌려 주신다. 모든 사람의
눈이 예수님께로 쏠렸을 때, 그는 "이 성경 말씀이 오늘 너희에게 이루어졌다."고 말씀하
신다.(눅 4:21) 그는 복음을 전파하고 병 고치는 사역을 위해 성령으로 기름부음을 받으
셨는데, 이 일을 계속해 나가실 때 누가는 그가 "하나님의 권능으로 병자들을 고치신다."
(눅 5:17)고 기록하고 있다.
부활하신 후 예수님께서는 이와 똑같은 성령의 능력을 그의 제자들에게 약속하신다.
"너희는 위에서 오는 능력을 입게 될 때까지 이 성에 머물러 있으라.------너희는 오래지
않아 성령으로 세례를 받을 것이기 때문이다.------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
을 받으리라."(눅 24:49;행 1:5,7)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자신의 사역을 위해 성령으로 기
름부음을 받으신 것과 마찬가지로, 제자들도 모든 민족에게 복음을 전파하는 자신들의 사역
을 위해 성령으로 무장되어야 함을 보여 주는 것이다.
사도행전에 나타난 성령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하신 약속은 오순절에 성취되었다. 오순절은 봄 수확이 끝날 무
렵에 열리는 성대한 순례의 축제였다. 예루살렘은 로마 제국의 여러 곳으로부터 온 순례자
들로 붐빈다. 축제 행사가 한창일 때 하늘로부터 세찬 바람이 부는 것 같은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제자들은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시키는 대로 다른 나라 말로 말하게"되었
다(행 2:4).
여기서 예수님의 약속이 성취된 것이다 : 성령이 제자들에게 임하고 그들은 능력으로 입
혔다. 그리고 그들은 세례 요한이 예언한 대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았다.(잠시 후 우리는
'성령으로 세례를 받는다'는 것이 한 가지 이상의 의미를 가지며, 이 말에 관한 바울의 용
법이 누가의 것과 다르다는 점을 살펴볼 것이다.)
베드로는 이 사건을 요엘의 예언에 비추어 설명한다 : "하나님이 말씀하신다. 마지막 날
에 나는 내 영을 모든 사람에게 부어 주겠다. 너희 아들과 딸들은 예언을 하고."(행 2:17)
예루살렘 사람들에게 복음이 전해지자 삼천 명이 베드로의 설교를 받아들인다. 처음으로
성령의 선물을 받음으로써 그들도 새 시대에 동참하게 된 것이다. 이제 교회는 공개적으로
유형화되고 성장하기 시작한다. 머지 않아 그것은 유다와 사마리아에까지, 그리고 로마
제국의 전 영역에까지 확장되어 갈 것이다.
다음 장에서 누가는 계속해서 성령의 활동이 지니는 이 예언적인 차원에 대하여 그가 즐
겨 쓰는 말을 사용한다. 누가의 기록 가운데 오순절에 제자들이 성령 충만함을 받은 것이
당시에만 국한되는 일시적 경험이라는 부분은 찾아볼 수 없다. 성령은 상황이 요구하는 데
에 따라 그들의 증거와 봉사 사역에 능력을 공급하기 위해 반복적으로 그들을 충만케 하신
다(또는, 그들에게 임하신다.) (행 4:8,31;7:55;10:44 ; 19:6). 그러므로 이같은 경험은
그들의 영적 성숙의 증거로 간주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그와는 달리 일차적으로 그것은
새 시대에 있어서 성령의 임재와 능력의 징표인 것이다.
이제 우리는 사도행전에서 전해지는 바 성령의 활동을 요약할 준비가 된 셈이다. 성령
은 세 번 사람들 '위에 내려 오셨고'(fell on), 두 번 그들에게 '임하셨으며'(come upon),
두 번 '부어졌다'(poured our). 이에 대응하여 믿는 이들은 두 번에 걸쳐서 성령을 '받았
고'(received), 5회에 걸쳐 성령으로 '충만해졌다'(filled with). 그리고 이런 성령의 활
동은 어김없이 가시적인, 혹은 귀에 들리는 결과들-예컨대 방언을 말한다거나, 병이 치유
되거나, 복음을 전하게 되는-을 가져왔다. 또 이같은 성령의 현시는 찬양을 불러일으키고,
교회 공동체를 강화시키며, 봉사에 능력을 공급하였다.
누가가 사용하고 있는'성령 충만해지다'(filled with the spirit)라는 용어는 요엘이 사
용한 구약의 상징에 근거한 것이다 : "내가 내 영을 부어 주겠다." 그것은 성령의 역동적
이고 강력한 활동을 그림같이 생생하게 보도하는 한 방법이었다. 우리는 물이 흘러 넘치는
그릇이나 목이 마른 사람들에게 물을 쏟아 부어주는 수도관을 상상하게 되는 것이다.(요
7:37-39을 보라.)
누가는 또한 어떤 개인들이 보통 아무런 특별한 결과를 나타냄 없이 성령 '충만하였다'
고 전한다. 예를 들어, "성령과 지혜가 충만한" 일곱 사람이 음식 공급하는 일을 감독하기
위해 선출되었다(행 6:3). 그들 중에는 스데반이 있었는데, 그는 "믿음과 성령이 충만한"
사람이었다(행 6:5). '성령으로 충만해지다'(filled with the Spirit)라는 표현이 성령의
능력으로 인한 어떤 행동을 강조하고 있음에 비하여 '성령 충만한'(full of the Spirit)이
라는 표현은 충만한 상태(being)를 암시한다(한글 성경은 구별하지 않고 있음-역주). 이
두 표현법 상의 차이는 우정 관계에 비추어 보면 알 수가 있다. 날이 감에 따라 두 친구간
의 관계는 눈에 띨 만한 어떤 결과가 보이지 않더라도 더 깊어질 수 있다. 그러다가 어느
때 갑자기 기회가 생기거나, 혹은 위험이 발생하면 이 우정 관계는 특별한 행동을 요구하게
되는 것이다.
지금가지 우리는 누가가 '성령 충만하다'는 말을 그리스도인의 봉사에 능력을 불어넣기
위해 수행하시는 성령의 직접적인 행위라는 의미로 일관성 있게 사용했음을 살펴보았다.
이제 우리는 이 의미가 바울의 용법과, 또는 다른 사도들이 성령의 활동이 지니는 이같은
측면을 묘사하기 위해 사용했던 표현들과 어떻게 비교되는지 살펴볼 필요가 있게 되었다.
바울 서신에 나타난 성령
바울은 그의 여러 서신에서 성령의 활동에 관하여 많은 것을 이야기한다. 그러나 그가
'성령 충만하다'는 표현을 쓴 것은 단 한 번뿐이다 : "오히려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filled)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로 서로 화답하며 마음으로 하나님께 노래하시오. 그리고 모든 일
에 언제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아버지 하나님께 감사하고."(엡 5:18-20)
여기서 '충만함을 받아'(be filled)라는 동사형은 몇 가지 측면에서 중요하다. 먼저, 그
것은 명령이다. 즉, 이 행위는 선택적인 것이 아니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의무적인
것이다. 다음으로 그것은 반복적인 경험('계속하여 충만함을 받으라')이다. 이것은 누가
복음에서도 마찬가지이다. 또한 여기서 동사는 수동형으로 쓰이는데 이것은 충만케 하고
능력을 나타내는 분은 성령 자신임을 가리킨다. 마지막으로, 자주 간과되어 온 사실은
복수형이라는 점이다. 즉 우선적으로 이 말이 그리스도인들의 공동체에 주어졌다는 것이
다. 그러므로 성령 충만의 결과가 협력적이어야 한다는 것은 놀라운 사실이 아니다 :
"서로 화답하며------하나님께 노래하시오.------언제나 하나님께 감사하고."
이말의 의미는 골로새서 3:16의 병행 구절에 비추어 보았을 때 더 분명해진다 : "그리스
도의 말씀이 풍족하게 여러분의 심령 속에서 살게 되고 지혜를 다하여 서로 가르치고 권하
며" 다시 말해 성령 충만은 그 결과인 가르침, 격려, 지혜 등과 같은 영적인 은사를 통해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게 된다는 것이다(롬12:6-8; 고전 12:8-10을 보라). 그러므로 바울에
의하면, 성령 충만은 영적은사의 현시(顯示)를 내포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영적 은사들
바울은 '성령 충만하다'는 표현을 단 한 번 사용하였지만, 그는 영적 은사에 관하여 광
범위한 가르침을 주고 있다{은사(charisma)란 문자적으로 '은혜의 선물'을 뜻한다}. 고린
도전서 12:7, 11은 이같은 은사들의 본질과 목적을 이해함에 있어 하나의 열쇠를 제공해
준다 : "각 사람에게 성령이 나타나 주신 것은 모든 사람의 유익을 위한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은 한 분이신 같은 성령의 활동입니다. 그는 자기가 원하는 대로 각 사람에게
나누어 주시는 것입니다."
첫째, 영적 은사는 개개의 재능이나 능력 이상을 나타내는 것이다 : 그것은 성령의 현시
(나타나심), 즉 들을 수 있거나 볼 수 있는 그의 능력의 증거물이다. 둘째, 이 현시는 단
번에 영원히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반복적으로 주어지는(given) 것이다. (즉 엡 5:18의
"계속하여 성령 충만함을 받으라"와 같은 맥락에서, '계속하여 받으라'의 의미다.)
셋째, 이 은사들은 공동의 선(common good)-개인의 지위를 향상시키는 것이 아니라, 그
리스도의 몸을 강화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고 있다. 넷째, 은사는 각 사람을 통하여 나타
난다. 바울은 세 번에 걸쳐서 은사가 모든 신자들에게 나누어짐을 분명히 밝히고 있다(고
전 12:6, 7, 11). 성령의 은사들은 교회의 기관이나 직분에만 제한적으로 주어지지 않는다.
된다. 둘째, 이 목록이 반드시 영적 은사들을 그 중요도에 따라 서열을 정해 놓은 것은 아
니다.(그러나 고리도전서 12:28은 은사를 받은 세 부류의 사람들의 서열을 정하고 있다-사
도, 예언자, 교사.) 예를 들어, 구제는 하나님의 성품을 반영하는 것으로서, 로마서 12:8
-10의 목록에서 가장 나중에 나온다해서 가장 중요하지 않은 은사로 여겨져서는 안되는 것
이다. 몸은 때에 따라 각기 다른 필요를 느끼기 때문에, 어느 한 지체(혹은 은사)도 항상
가장 중요하다고 말할 수는 없다. 이 최상의 중요성은 오로지 머리되신 그리스도만이 지닐
수 있는 것이다.
셋째, 이 은사들 중 대부분이 한 개인이 소유하고 있는, 또 성도들의 교제 속에 표출되는
어떤 한 능력과 언제나 연관되어 있는 것은 아니다. 반대로 그것들은 성령께서 원하시는대
로 몸의 그 어떤 지체를 통해 잠재적으로 나타날 수도 있는 것이다.
넷째, 우리는 '자연적인' 은사 그리고 '초자연적인 은사'라고 부르면서, 마치 후자만이
하나님의 활동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는데, 바울은 그러한 구분을 하지 않고 있다. 그는
또한 영원한 것과 일시적인 것, 평범한 것과 특수한 것-이것들은 우리들 인간의 경험에 토
대를 둔 개념들이다-사이에도 구별을 두지 않는다. 예언과 섬김, 가르침과 권면, 지혜의
말씀과 병고치는 은사들은 함께 나타난다. 모든 은사는 그리스도의 몸을 강화하기 위한 성
령의 자유로운 현시다.
은사적 차원
그리스도인의 삶에 역사하는 성령의 활동 중 두 가지 차원은 오랫동안 인정되어 왔다.
예수님의 말씀에 따르면 처음에 우리는 성령으로 거듭난다(요 3:5). 또는 바울의 표현을
빌자면, 하나님께서는 "다시 나게 하는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으로 우리를 구원하신
다."(딛 3:5) 그 결과 믿는 이는 '그리스도 안에'있고, 그는 또 새로운 피조물이다(고후
5:17). 이것은 단순히 개인적인 체험만은 아니다 : "우리는------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다(고전 12:13). 이 몸의 지체들로서 우리는 머리이신 그리스도 안에서 다른
각 사람과 연합된다.
(여기서 '성령으로 세례를 받다'라는 말은 모든 고린도 교인들이 그리스도인의 삶을 처음
시작할 때 경험한 유일무이한 사건을 묘사한다. 한편 사도행전에서는 이 말을 효과적인
복은 증거와 전파를 위해 제자들이 반복적으로 체험하였던 것으로 묘사하고 있다-이것을
예수께서는 '능력을 받다'로, 누가는 '성령 충만함을 받다'라는 말로 표현하였다. 오해와
논쟁을 피하기 위해 두 가지 서로 다른 표현을 인정하는 것이 좋겠다. 구원을 위한 성령
충만-바울의 용법-과, 섬김을 위한 성령 충만-누가의 용법-이 바로 그것이다.)
성령의 활동이 지니는 두 번째 차원은 새롭게 된 삶이 발전 해 가는 과정을 포함한다.
그리스도인들은 성화(sanctification), 즉 거룩함에 있어서 자라도록 부르심을 받았다.
"하나님의 뜻은 여러분이 성결해지는 그것입니다.------평화의 하나님께서 친히 여러분을
완전히 거룩하게 해 주셔서"(살전 4:3;5:23). 바울은 그리스도인들에게 "주인이 요긴하게
쓸 귀하고 거룩한 그롯이 되고 모든 선한 일을 하기에 알맞는 그룻이" 되기 위해서 불미한
것에서 돌아설 것을 권면한다(딤후 2:21). 성령은 우리가 하나님과 우리 이웃을 향한 성숙
한 사랑의 삶을 살아 감에 있어서-때로는 대가를 치르더라도-윤리적이고 도덕적인 선택을
할 수 있도록 능력을 주신다. 그는 또한 우리 안에서 성령의 열매-그리스도를 닮은 성품
-를 개발시키신다.
전통적으로 영적 은사들은 성화의 한 측면-주를 섬기기 위해 발견되고 개발될 수 있는
개인적인 능력이나 재능-으로 간주되어 왔다. 그러나 우리의 연구는 영적 은사의 현시에는
이것과는 전혀 다른 어떤 측면이 포함되어 있음을 보여 준다. 이것이 성령의 활동이 지니는
세 번째 차원으로써, 성숙의 정도가 서로 다른 지체들을 통하여 몸의 특별한 필요들을 충족
시키는 것을 말한다. 이같은 성령의 활동은 한 개인의 능력을 이용할 수도 있으나, 대부분
의 경우는 그렇지 않다.
누가는 새 시대를 오게 하고 교회를 확장시키는 성령의 역할을 우선적으로 강조한다. 그
리스도인은 성령 충만함으로써 모든 민족에게 복음을 전하라고 하신 주님의 명령을 수행할
수 있다. 이와는 달리 바울은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는 성령의 역할을 강조한다. 그러므로
그는 예배를 고무시키고 기독교 공동체를 강화시키는 데 있어서 영적 은사가 차지하는 위치
에 특별히 주목한다.
그러나 이 두 저자들은 모두 성령의 활동이 지니는 은사적 차원, 즉 어떤 특별한 결과를
발생시키는 직접적인 행동을 강조한다. 예언이건 지혜의 말씀이건, 병고치는 일이건 구제
하는 일이건, 들을 수 있거나 혹은 볼 수 있는 어떤 일이 발생한다. 즉, 성력의 능력을 나
타내 보이거나 입증하는 사건이 있게 되는 것이다.
누가와 바울 그 누구도 이런 경험을 영적 성숙에 있어서 또 하나의 별개의 단계로 간주하
지 않는다. 사도행전에서 성숙한 그리스도인들은 그들의 증거와 섬김에 힘을 얻기 위해 반
복적으로 충만함을 받았다. 요엘이 예언한 것처럼, 성령은 젊은이와 늙은이에게, 남자와
여자들에게 부어졌다. 고린도전서 12장에서 바울은 몸의 각 지체가 어떤 은사를 나타내는
것은 공도의 유익을 위함이라는 사실을 강조한다. 교회를 유익하게 하는 행위에 초점을
맞춘 것이다. 성령의 활동에 있어서 이 은사적 차원은 영적 성장의 매 단계에서 반복적으로
그리스도인들에게 능력을 줌으로써, 그들이 교회와 이 세상에서 주를 위하여 효과적으로 일
할 수 있게 한다.
또한 영적 은사의 현시는 '그리스도를 초월하는' 경험이 아니다. 신약 전체를 통해 성령
의 활동과 그리스도의 사역은 서로 얽혀 있다. 만약 칭의가 우리를 위해 마련된 그리스
도의 의라고 한다면, 거듭남은 우리에게 주어진 그의 생명이며, 성화는 우리 안에 형성된
그의 성품이라고 할 수 있으며, 한편 성령 충만이나 은사의 현시는 그의 몸을 강화하고
세상에서의 교회의 사명을 완수하게 하는 우리를 통한 그리스도의 활동이라고 할 수 있다.
성령의 열매
성령의 열매와 은사 사이의 구별이 가끔 불분명할 때가 있다. 자주 이들 중 하나가 희생
을 통하여 다른 하나가 중시되곤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들의 차이와 동시에 이들이 어
떻게 서로 연관되는지를 분명히 알 필요가 있다.
바울은 "그러나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기쁨과 화평과 인내와 친절과 선함과 신실과 온유
와 절제인데"(갈 5:22-23)라고 기록하고 있다. 성령의 열매를 나타내는 이런 낱말들은 삶
의 질을 표시한다. 결국 우리가 하는 모든 행위의 최종적인 가치 평가 기준은 우리가 어떤
사람인가에 달려 있다.
첫 번째 차이는 존재와 행위, 즉 인격과 행위 사이에 놓여 있다. 성령의 열매는 그리스
도인들이 어떤 존재가 되어야 하는가를 묘사한다. 즉, 사랑이 많고, 기뻐하며, 참을성 있
고, 자제력이 있어야 한다. 반면에, 성령의 은사는 믿는 이들이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들로
서 행하는 행위를 묘사한다. 즉 가르침, 섬김, 지혜의 말씀을 함, 또는 병고침 등이 그것
이다.
두 번째, 성령의 열매는 성령께서 모든 그리스도인들 속에서 만들어 내기를 바라는 그리
스도의 성품을 뜻한다. 아무도 "내가 사랑하리라고 기대하지 마십시오. 그것은 내 열매가
아닙니다."라고 말할 수 없다. 모든 사람이 모든 열매를 맺어야 한다. 그러나 성령의 은사
는 이와는 정반대이다. 몸의 각 지체들은 성령께서 그들에게 나누어 주시는대로 다양한 은
사들을 발휘한다.
세 번째, 성령의 열매가 모든 시대, 어느 곳에서나 주어지는 반면, 성령의 은사는 특별한
필요에 따라 주어진다. 우리는 모든 그리스도인들로부터 어느 경우에나 영적인 열매를 기대
해야 한다. 그러나 성령의 은사에 대해서는 예언하거나 계획할 수 없다.
바울은 성령의 열매와 은사 사이의 이런 구별을 희미하게 하지도 않고 그 연관성을 배척
하지도 않는다. 바울은 성령의 은사가 사랑과 자제 속에서 발휘될 것을 기대하면서도, 그
의 영적 은사의 목록 가운데 성령의 열매를 포함시키지 않고 있다. 어떤 이들은 성령의 열
매에는 크게 주의를 기울이지 않고 성령의 은사를 강조한다. 한편 다른 이들은 성령 충만
의 참된 증거는 그리스도인의 성품에 달렸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바울은 이들 중 어느 하
나만을 선택하라고 제안하지 않는다. 성령의 열매와 은사 모두가 교회의 건강과 효율성을
위해 필요한 것이다.
공동체를 위한 은사
전통 신학과 미국식 개인주의가 결합하여 성령의 은사에 대한 자기 중심적 접근 방식을
조장했다. 그리스도인들은 자주 다음과 같이 질문한다. "나의 은사는 무엇일까? 나는 그것
을 어떻게 발견하고 이용할 수 있을까?" 또한 우리의 문화는 우리가 이렇게 묻도록 압력을
가한다 : "나는 누구인가? 나는 어떻게 완성될 수 있으며 나의 잠재력을 실현할 수 있을까?"
이러한 것들은 우리들의 개인적인 능력이나 사적인 필요와 관련지을 때 중요한 질문일지
모르지만, 성령의 은사에 관한 신약의 강조점을 반영하고 있지는 않다. 성경에서는 그리스
도의 몸과 그 필요에 초점이 맞춰지고 있다. 은사는 그리스도인의 공동체에 참여함으로써
만 나타난다.
은사에 대해 다룬 바울의 두 가지 중대한 논의(롬 12;3-8과 로전 12:1-3)와 은사를 받은
개인들에 대한 그의 가르침(엡 4:1-16)에 비추어 볼 때, 바울이 사용하고 있는 모텔은 분명
통일성과 다양성 속에 있는 지체들을 통해 기능하는 몸이다. 은사란 공동의 유익을 위한
성령의 나타나심이다. 고린도 교회는 이 사실을 상기할 필요가 있었는데, 그 이유는 자기
중심적인 태도가 그들의 의식 속에 스며들어 왔기 때문이다. 분명히 그들 증의 어떤 이들
은 '그들이'가지고 있는 은사의 지위에 일차적으로 관심을 갖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바울은 다음과 같이 그들을 책망한다. "그러나 여러분은 더 귀중한 은혜의 선물
을 열심으로 사모하시오. 내가 이제 가장 좋은 길을 여러분에게 보여 드리겠습니다.")고전
12:31)이 길이란 바로 고린도전서 13장에서 매우 감명깊게 선포되고 있는 사랑의 길이다.
내가 몸의 필요에 초점을 맞출때, 나는 어떤 은사들을 갖고 있는지에 대한 여부와 그 은사
들을 다른 은사들과 비교하는 것에 대한 염려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다.
바울은 또 특별한 은사를 소유한 개인들, 즉 보다 자주 그리고 보다 지속적으로 나타나는
은사를 지닌 몸의 지체들에게 교훈을 주고 있다. 승천하신 그리스도에 관해 말하면서 그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그가 어떤 사람은 사도로, 어떤 사람은 예언자로, 어떤 사람은 전
도자로, 또 어떤 사람은 목사와 교사로 세우셨습니다. 그것은 성도들을 준비시켜 섬기는 일
을 하게 하고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기 위한 것입니다."(엡 4:11-12) 이런 은사를 소유한 사
람들은 그들의 직분을 발휘함으로써 모든 하나님의 백성들이 그리스도의 몸을 세울 수 있도
록 무장시켜 준다.
고린도전서 14:26에서 바울은 성령의 은사를 나타내는 데 있어서 하나의 모델을 제시하고
있다 : "그러면 형제들이여,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여러분이 함께 모여 예배할 때 찬미
하는 사람도 있고, 가르치는 사람도 있고 하나님의 계시를 말하는 사람도 있고 방언하는 사
람도 있고 그것을 통역하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만 모든 것을 교회에 덕이 되도록 해야 합
니다." 그러므로 세 가지 요소가 필수적이다 : 몸의 필요, 지체들의 유익, 그리고 그가 원
하시는 대로 은사를 나타내시는 성령의 자유(고전 12:17,11). 우리의 예배 의식은 전통적으
로 각 사람이 기여할 바를 미리 파악하여 계획되기 때문에, 우리가 예측불가능한 이러한 역
동적인 모델을 받아들이기란 물론 어려운 일이다.
성령 충만하려면
아직 다음과 같은 몇 가지 문제가 남아 있다. 나는 어떻게 성령 충만함을 받을 수 있는
가? 나는 성령께서 나를 통해 그의 은사를 나타내실 때까지 그냥 기다리고 있어야만 하는
것일까, 아니면 내게도 자발적으로 어떤 행동을 할 책임이 있는가?
우선, 우리는 모든 신인적(divine-human) 행위에는 신비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인정할 필
요가 있다. 우리는 성령의 역할을 따로 분리해서 생각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셩령의 활
동을 예상할 수도 없다. 그러나 누가와 바울은 모두 우리가 개인으로서, 그리고 공동체로
서 언제 책임을 져야 하는지를 보여 준다.
예를 들어, 누가는 사가랴와 엘리사벳이 "하나님 앞에서 정직했으며 주의 모든 계명과 규
례를 어김없이 지켰다."고 말한다(눅 1:6). 마찬가지로 시므온은 "바르고 경건한 사람으로
이스라엘이 받을 위로를 기다리고 있었다."(눅 2:25) 따라서 이런 사람들이 성령 충만함을
받은 것은 분명 우연의 일치가 아니었다.
누가는 또한 예수께서 승천하신 뒤에 제자들이 예루살렘으로 돌아갔다고 전한다. "그들은
------다함께 마음을 합하여 기도에만 힘썼습니다."(행 1:14) 그 후 "오순절이 되어 그들이
모두 한 곳에 모여 있었습니다.------모두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고"(행 2:1,4). 제자들이
주님께 순종하고, 그의 명령을 지키며, 함께 예배하고 기도하였을 때, 그들은 그들의 사명
을 위해 권능을 받았던 것이다.
바울도 그 전달 방식은 다르지만 동일한 메시지를 많이 전하고 있다. 적극적인 방법으로
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영을 따라 살며"(롬 8:6), "성령이 지도하시는 대로 따라 행하라고"
(갈 5:16) 권면한다. 소극적으로는 "하나님의 성령을 슬프시게 하지 마시오.------모든 악
독과 격정과 분노와 소란과 욕설과 그리고 온갖 악의를 내어버리시오."(엡 4:30, 31)라고
경고한다. 또 "성령의 불을 끄지 말고 예언을 멸시하지 마시오."(살전 5:19-20)라고 경고
한다. 우리는 다른 사람들에게 대해서, 그리고 성령의 어떤 은사들에 대해서 잘못된 태도
를 가짐으로써 우리의 삶 속에서 성령의 사역을 제한시킬 수 있다.
사도 바울은 또한 성령의 활동의 협력적인 차원을 강조한다. 우리는 이미 "성령의 충만
함을 받으라."(엡 5:18)는 명령이 복수형으로 주어졌음과, 그 결과로서의 은사가 공동체 내
에서 나타난다는 사실을 살펴보았다.
마지막으로, 가장 중요한 요소는 사랑이다. 바울은 은사들에 관한 세 곳의 주요한 가르침
속에서 이를 강조하고 있다. "사랑에는 거짓이 없어야 합니다. 형제애를 가지고 서로 사랑
하며"(롬 12:9-10). "사랑 안에서 진리를 말할 때" 그리스도의 몸 전체는 "모든 지체가 서
로 어울려 사랑 안에서 세워지는 것입니다."(엡 4:15-16) 내가 아무리 위대한 성령의 은사
를 나타낸다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나는 아무것도 아닙니다.------사랑을 힘써 구하시오.
그리고 성령의 은사를 열심히 구하시오."(고전 13:2;14:1). 사랑이라는 토양과 기대감이라는
공기는 성령께서 그의 은사를 나타내시기 위한 가장 훌륭한 기후를 재공하게 될 것이다.
그리스도와 성령
무엇보다도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께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 우리가 성령에 대해 생각할
때 혼란스럽다거나, 우리가 우리의 은사라고 부르는 것에 대해 분석하면서 수렁에 빠지는
듯한 기분이 들 때, 성령의 활동에 언제나 관계하시는 우리 주님을 바라보자. 다음의 물
음들이 도움이 될 것이다.
1. 나의 삶은 그 목표와 매일의 결정에 있어서 점점 더 그리스도의 주되심 아래 놓여지고
있는가? 성령을 통하여 우리는 회심의 순간뿐만 아니라 살아 가면서도 '예수는 주'라고 고
백하게 된다.
2. 다른 사람들에 대한 나의 태도와 반응은 점점 더 예수를 닮아 가고 있는가? 성령의
열매란 우리 속에서 형성되어 가는 그리스도의 성품이다.
3. 나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실 것과 같은 도덕적, 윤리적 결정을 하는가? 성령께서는
우리가 거룩하여 주님을 섬기는 데 쓸모있게 되기를 바라신다.
4. 나는 그리스도인들의 교제에 참여하고 있으며, 다른 사람들에게 관심을 갖고, 성령께
서 나를 통해 다른 사람들의 필요를 채우시도록 스스로를 개방하고 있는가?
성령의 은사는 교회의 예배, 전도, 봉사에 능력을 불어 넣기 위해서 성령의 능력이 그리
스도 몸의 각 지체를 통해 나타나는 것이다.
우리가 개인적으로, 또 공동체적 삶에 있어서 그리스도의 주권 아래 살아 갈 때, 상황이
요구하거나 성령이 원하시는 대로, 우리는 성령의 충만, 기름부음, 능력 주심을 기대할 수
있을 것이다. 어떤 은사를 기대할 것 인가에 대해서는 의견이 다를 수도 있다. 그러나 다
음과 같은 결의로 함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섬기자. '본질적인 문제에 있어서는 통일
성을, 비본질적인 문제에 있어서는 다양성을, 그리고 모든 일에 있어서는 사랑을!'
성령으로 충만할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인가?
성령의 충만을 이해하는데 중요한 구절은 요한복음 14장 16절인데, 여기서 예수께서는 성령께서 믿는 자들 안에 거하실 것이고 그
내주하심은 영원할 것이라고 약속하셨습니다. 성령의 충만과 성령의 내주하심을 구별하는 것은 중요합니다. 성령의 영원한 내주하심은
선택된 몇몇 신자들을 위한 것이 아니라 모든 믿는 자를 위한 것입니다. 이 결론을 지지하는 많은 성경 구절들이 있습니다.
첫째,
성령은 예수님 안에서 모든 믿는 자들에게 예외 없이 주어지는 선물이고, 이 선물을 받기 위해서는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외에 다른
조건이 필요하지 않습니다(요 7:37-39). 둘째, 성령은 구원 받는 순간에 주어집니다(엡 1:13). 갈라디아서 3장 2절은
똑같은 진리를 강조하는데, 성령의 인치심과 내주하심은 사람이 믿을 때 발생한다고 말합니다. 셋째, 성령은 믿는 자들 안에 영원히
내주하십니다. 성령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장래의 영광에 대한 보증 또는 증명으로서 믿는 자들에게 주어집니다(고후 1:22; 엡
4:30).
이는 에베소서 5장 18절에서 언급된 성령충만과 대조가 됩니다. 성령께서 우리를 전적으로 소유하실 수 있도록, 곧 우리 안에
충만하실 수 있도록, 우리는 성령께 완전히 순복해야 합니다. 로마서 8장 9절과 에베소서 1장 13-14절은 성령께서 모든 신자들
안에 거하시지만, 그분께서는 근심하실 수 있고(엡 4:30), 우리 안에서 그분의 활동이 소멸될 수도 있습니다(살전 5:19). 우리가 이런 일이 발생하도록 허락한다면, 우리는 우리 안에서 또는 우리를 통해서 성령의 역사나 그분의 능력의 충만함을 경험하지
못하게 됩니다. 성령으로 충만하다는 것은 그분이 우리를 인도하고 주관하시면서 우리 삶의 모든 부분을 맘껏 장악하시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면 성령의 능력이 우리를 통해 행사되면서 우리가 행하는 것이 하나님께 열매가 됩니다. 성령 충만은 우리의 외부적인
행위에만 적용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또한 우리의 행위를 주관하는 가장 깊은 생각과 동기에도 적용이 됩니다. 시편 19장
14절은 말합니다.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구속자이신 여호와여 내 입의 말과 마음의 묵상이 주님 앞에 열납되기를 원하나이다”.
죄는 성령 충만을 방해하고,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은 성령 충만을 유지하는 방법입니다. 에베소서 5장 18절은 우리가 성령으로
충만할 것을 명합니다. 그러나 성령 충만을 위한 기도가 충만을 이루는 것은 아닙니다. 오직 우리가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할 때
성령께서는 내 안에서 자유롭게 행하십니다. 우리는 여전히 죄에 오염되어 있기 때문에, 항상 성령으로 충만한 것은 불가능합니다. 우리가 죄를 지으면 곧바로 하나님께 그것을 고백하고 성령의 충만함과 성령의 인도하심을 위해 우리의 헌신을 새롭게 해야 합니다.
성령 충만이란?
1. 성령 충만이란
신약 성경에서 "성령 충만"은 헬라어로 <플레레오. πληρόω. plēroō> 또는 <플레레스. πλήρης plērēs>가 사용되며, "가득 채워진다", "완전히 영향을 받는다", "통제되다/지배되다"는 의미를 가짐. 성령 충만은 단지 감정적 고양 상태가 아니라, 성령의 주권적인 영향 아래에 전 인격이 놓인 상태를 의미함 (에베소서 5:18 참조).
에베소서 5:18: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으라”
(구약에 나타난 성령충만)
히브리어 구약에서는 직접적인 "성령 충만" 표현은 없지만, 루아흐(רוּחַ) 여호와의 영이 임해 사람을 능력 있게 하시고 이끄시는 모습이 반복적으로 등장함 (예: 사사기 14:6, 미가야 선지자 – 열왕기상 22:24).
1) 성경적 근거
에베소서 5:18 /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으라”
사도행전 4:31 / “기도하기를 다하매 모인 곳이 진동하더니 무리가 다 성령이 충만하여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니라”
2) 신학적 의미
성령 충만은 일회적인 사건이 아니라 반복적이며 지속적으로 추구해야 할 상태임.
충만은 능력 뿐 아니라 인격적 지배를 의미함. 즉, 성령이 우리 마음과 삶 전체를 다스리시는 상태임.
개혁신학에서는 ‘성령 충만’을 감정적 열광으로 오해하지 않고, 말씀과 기도 속에서 하나님의 뜻(성경 말씀에)에 복종하는 삶의 상태로 이해함.
3) 충만의 목적과 열매
목적
예시
근거 성경
담대하게 복음을 전함
베드로와 사도들
행 4:8, 4:31
공동체 안의 사랑과 질서
초대교회
행 2:42–47
죄를 이기고 거룩한 삶
개인 신자
갈 5:16–25
찬양과 감사의 삶
에베소 교회
엡 5:19–20
4) 성령 충만하면 나타나는 현상
예수님을 닮아 거룩한 삶을 살아가고자 안간힘을 씀 (why? 인간 내부에 거룩하게 살아갈 힘이 없기 때문에) (갈 5:16–25)
증거와 사명 수행하고자 함 (사도행전 1:8)
하나님의 뜻에 대해 분별하고자 함 (요한복음 16:13)
교회 공동체 안의 질서와 연합 유지하려고 함 (고린도전서 12장)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함 (사도행전 4:31)
2. 성령 충만의 예시
구약
요셉 – "하나님의 영에 감동된 사람"(창세기 41:38)
브살렐 – 성막 건축을 위해 지혜와 기술로 충만케 함 (출 31:3)
사울과 다윗 – 성령의 임재와 떠남의 차이로 삶과 사역에 큰 차이 발생 (삼상 10:10, 16:14)
신약
오순절 제자들 – 성령 충만으로 담대하게 복음 증거 (행 2:4)
스데반 – 성령과 믿음 충만하여 순교까지 감당 (행 7:55)
바울 – 복음 전파와 기적 행함 (행 13:9)
[알기쉬운 예시] 성령 충만은 "내 마음이 성령님으로 가득 차 있는 상태"임
🧃 컵과 물 비유
너의 마음을 컵이라고 생각해 봄.
성령님은 물과 같음.
세상 걱정, 죄, 욕심으로 가득 차 있다면 성령님이 들어오실 공간이 없음.
회개하고 순종하려 할 때, 성령님이 물처럼 가득 채워주심.(하지만 이 마음 조차도 하나님께서 주신 것임)
→ 성령 충만은 성령이 너의 생각, 감정, 말, 행동을 내뜻이 아닌 하나님의 뜻(성경의 말씀)대로 움직이게 하시는 상태임.
실제 삶 속 예시
예시 1 : 친구에게 상처받았을 때
내 감정은 "화나고 복수하고 싶어!" 하지만 말씀을 묵상하며 기도하고, "성령님 도와주세요" 하면, 마음이 차분해지고, 용서하고 싶은 마음이 생김. 이것이 성령 충만의 열매(사랑, 용서) 중 하나임
반대로, 성령이 충만하지 않을 땐?
쉽게 짜증나고 화가남
말씀 듣고 싶지 않음
기도도 안 나오고, 그냥 모든 게 귀찮고 차갑고 성경과 말씀에 무관심해짐
이럴 땐 내가 성령님이 주신 말씀에 순종하지 않고, 죄나 걱정에 마음을 빼앗긴 것임
성령 충만은 매일 다시 채워져야 함. 왜냐하면, 우리는 자꾸 세상 걱정, 죄, 감정으로 컵이 새고 비워지기 때문임.
그래서 기도, 말씀, 찬양, (말씀에) 순종 (Not 교회, 사람/목사/사역자) 으로 매일 다시 성령님께 “저를 다시 채워주세요”라고 요청해야 함.
요약
성령 충만이란?
성령님이 내 마음과 행동을 인도하시는 상태
어떻게 느껴짐?
기쁨, 평안, 용서, 감사, 순종 등 성령의 9가지 열매가 나타남(갈라디아서5장)
어떻게 유지함?
말씀, 기도, 찬양, 회개, 순종으로 매일 새롭게
비유로 말하면?
내 마음의 컵이 성령으로 가득 찬 상태
3. 성령 충만의 방법
말씀과 기도를 통해 성령께 자신을 내어 맡김 (골 3:16)
자기부인과 말씀에 순종(내 뜻에 맞지 않더라도) (눅 9:23, 요 14:15–17)
회개와 거룩한 삶에 대한 사모 (행 2:38)
예배와 찬송, 감사 (엡 5:18–20)
4. 성령 충만에 대한 관점 비교
구분
성령 충만의 정의
방법
반복성 여부
성령 충만을 잃을 수 있는지?
개혁주의
말씀과 성례를 통한 지속적 성령의 통치
말씀, 회개, 순종
반복됨 (성화 과정)
있음 (은혜의 단절은 아님)
오순절/은사주의
성령 세례 = 성령 충만
방언, 체험, 간구
반복적 체험 가능
있음 (심지어 구원의 상실 주장도 일부 : 위험한 사상)
번영신학
축복과 능력을 위한 충만
믿음의 선언, 기도
자주 요구됨
있음 (축복 상실의 원인)
신제자운동
제자도의 헌신을 통한 충만
철저한 순종, 제자훈련
지속적 추구
있음 (사명에서 멀어질 수 있음)
5. 성령 충만은 "비워짐"이 가능한가?
성령 자체가 떠나시는 것(구원의 단절)은 참된 성도에게는 없지만, 성령의 충만하신 영향력은 우리의 죄와 불순종으로 인해 제한될 수 있음. 다윗의 고백이 그 예임.
시편 51:11 “나를 주 앞에서 쫓아내지 마시며 주의 성령을 내게서 거두지 마소서”
신약에서도 성령을 소멸하지 말라(살전 5:19)고 권면하며, 이는 그분의 역사와 인도하심을 무시하거나 거부하지 말라는 뜻임.
성령의 사역을 통합적으로 정리하면
존재적 사역
내주하심
모든 신자 안에 거하심 (롬 8:9)
구원 사역
중생, 인치심, 확신
구원받은 자로서의 확증과 능력 부여
성화 사역
열매, 인도, 충만
거룩한 삶과 인격적 변화
사역적 은혜
은사, 능력, 지혜
교회와 공동체를 위한 사역 능력
종말적 역할
부활과 영화
최후의 부활과 완전한 영화까지 함께하심
결론 : 신자의 삶에서 성령의 역할
은사는 무엇을 “할 수 있는가”에 대한 질문
열매는 “누구인가”에 대한 정체성
인도와 충만은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이 모든 사역은 삼위일체 하나님의 일하심 가운데 성령께서 지금도 능동적으로 역사하고 계심을 보여주는 증거임.
결론 요약
성령 충만은 성령께 통제받고 인도받는 상태를 의미함.
구약과 신약 모두에서 성령의 충만하심이 존재했으며, 오순절 이후 더 보편화됨.
충만은 단회적이 아닌 반복적으로 추구해야 할 삶의 상태임. (거룩함의 추구 : 예수님 닮기를 매일 추구)
성령 충만은 우리 삶의 거룩, 사명, 지혜, 연합을 위해 필수적임.
교파마다 강조점은 다르나, 성경은 반복적이고 지속적인 충만을 추구하라고 권면함.
11월 28일(금) 사도행전 4-6장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성령이 충만하여(4:31)
빌기를 다하매 모인 곳이 진동하더니 무리가 다 성령이 충만하여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니라. After they prayed, the place where they were meeting
was shaken. And they were all filled with the Holy Spirit and spoke the
word of God boldly.
사도행전에서 '성령이 충만하여'라는 말씀이 사용된 구절들을 찾아보면 여덟 구절로 나타납니다(인터넷 다국어 성경 참조). 성령이 충만하여라는 말씀은 성령의 내적 상태가 외적으로 드러나는 것으로 알 수 있습니다.
2. 하나님의 말씀을 전한다(4:31) 빌기를 다하매 모인 곳이 진동하더니 무리가 다 성령이 충만하여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니라.
3. 칭찬 받는 일군을 선택하다(6:3, 5)
4. 순교한다(7:55) 스데반이 성령이 충만하여 하늘을 우러러 주목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및 예수께서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고.
5. 안수하여 치유한다(9:17)
6. 사울이 충만하여(13:9) 바울이라고 하는 사울이 성령이 충만하여 그를 주목하고.
7. 기쁨이 충만하다(13:52)
신약 난해구절 해설
오순절 성령은 누구에게 임했나? 이 질문에 대하여 한국에서는 120문도라는 대답이 정설처럼 되어 있다. 그러나 본문에서 오순절에 모인 사람들이 그냥 ‘모두’라고 되어 있어서 누구에게 성령이 임했는지 말하기가 여간 어렵지 않다.
이 질문에 대하여 여러 가지 학설이 제시되었다. 숫자가 적은 학설로부터 소개하자면, 오순절 성령을 받은 사람은 첫째. 사도 보궐선거로 충원된 맛디아를 포함한 12사도이다. 둘째. 행 1:13~14에 열거된 11사도(물론 맛디아도 포함되어 12사도가
됨)와 그들과 함께 마가의 다락방에서 마음을 같이 하여 기도에 힘쓴 여자들과 예수의 모친과 아우들이다. 셋째. 행 1:15에
언급된 120여 명의 문도들이다. 이 학설은 12사도가 포함되어 있다는 설과 포함되지 않는다는 설로 나누인다. 넷째. 부활하신
예수님이 일시에 보이신 500여 성도들(참조. 고전 15:6)이다.
이러한 네 가지 학설들 가운데에서 정답은 오순절 날 한 곳에 모인 ‘모두’(판테스)가 누구인지를 규명해야 얻을 수 있다.
사도행전 2:1 오순절날이 이미 이르매 저희가 다 같이 한곳에 모였더니. When the day of Pentecost came, they were all together in one place.
누가문헌(= 누가복음과 사도행전) 전체에서 보면, ‘모두’는 보궐선거로 선택된 맛디아를 포함한 열 두 사도들이 된다. 다음과 같은
여러 가지 이유들 때문이다.
첫째. 성령강림 보도(행 2:1~13)는 열 두 사도를 언급하는 구절로 감싸여 있다.
이 보도 바로 앞에, 즉 맛디아의
사도 선출 기사의 맨 끝에 “열 한 사도의 수에 가입하니라”(행 1:26)란 구절이 나오고, 이 기사 바로 직후에, 즉 베드로의
오순절 설교 시작을 설명할 때 “베드로가 열 한 사도와 같이 서서”(행 2:14)란 구절이 등장한다. 이렇게 성령강림기사는 열 두
사도에 관한 어구로 감싸여 있어서 그 안에 있는 “모두”는 분명히 열두 사도를 지시한다. 그것을 뛰어 넘어서 행 1:15의
120여 문도나 행 1:13~14에 묘사된 사람들을 지시하지 않는다.
둘째. 좀 더 원거리에 나오는 ‘모두’도 다 사도들을 시사한다.
예를 들면 성령강림 기사 제법 앞에 있는 행 1:14의
‘모두’(개역개정성경에는 13절 끝부분에 ‘다’로 되어 있음)도 사도들의 동아리를 지시한다. 성령강림 기사 뒤에 나오는 오순절
설교 중에 있는 행 2장32절의 우리 ‘모두’(역시 개역개정성경에는 우리가 ‘다’로 되어 있음)는 열 두 사도로서 오순절 성령강림
사건의 증인으로 묘사되고 있다.
셋째. 저자 누가는 선지자 엘리야와 그의 후계자 엘리사 동기를 그의 두 권의 책을 집필할 때 예수와 그의 제자인 사도들의
이야기에 모형으로 삼는다.
특히 엘리야가 승천한 후에 엘리사에게 성령이 임한다는 주제는 ‘예수가 승천한 후에 사도들에게 성령이
임한다’는 주제의 전형이 된다.
넷째. 저자 누가는 또한 모세와 70인 장로의 동기를 그의 두 권의 책을 집필할 때 예수와 사도들 이야기의 모형으로
삼는다.
특히 모세에게 임한 성령이 이스라엘을 함께 다스릴 70인 장로들에게 임한다(민11:16~17.24~29)는 주제는
예수에게 임한 성령이 새로운 이스라엘 열 두 지파를 다스릴 열 두 사도들(비교. 눅 22:28~30)에게 임한다는 주제의 전형이
된다.
다섯째. 사도행전은 사도들의 행적에 관한 책이다.
이 책에서는 사도들과 성도들의 구분이 뚜렷하다. 열 두 사도들은 예수님의
나라(= 하나님의 나라)에서 열 두 지파로 구성된 새 이스라엘을 다스릴 자들이다(참조. 눅 22:28~30). 그들에게 오순절에
성령이 임하고 성령에 충만한 베드로가 열 한 사도와 더불어 서서 행한 설교로 결국 약 3000명의 유대인이 회심해 세례를 받게
된다(비교. 행 2:41).
이들은 최초로 형성된 새 이스라엘 백성에 해당한다. 새 이스라엘 열 두 지파의 대표자인 열 두 사도들이 오순절에 성령으로
무장하고 설교를 통하여 자기들이 다스릴 새 이스라엘 백성을 모은다고 해석하는 것이 아주 그럴듯하다. 그러므로 첫 성령강림절에
120 문도가 아니라 사도들이 어떻게 되고 무엇을 하는가가 가장 중요한 관심사가 된다. 120 문도는 사도의 보궐선거에 단 한번
나와서 사도들의 들러리 역할을 한 셈이다.
120 문도라고 하는 학설은 6절의 소리(헬라어 ‘포네’)가 사람이 내는 소리를 말하고, 그 소리를 듣고 많은 사람이
몰려오려면 120명이 내는 것이 더 낫기 때문에 그렇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그것은 저자의 집필 용법과 헬라어 문법에 세심한 주의를
기울이지 않은 주장이다.
‘포네’는 인간의 소리만이 아니라 자연에서 나는 소리로도 사용된다. 혹시 ‘포네’가 복수라면, 모인 사람들 모두가 내는 다른
언어들로 볼 수 있다. 그러나 단수이기 때문에 분명히 하늘로부터 난 강력한 바람 같은 소리(헬라어 ‘에쿄스’)를 지시한다. 동일한 단어를 반복하는 대신에 동의이어를 애용하는 저자가 6절에서 ‘에쿄스’를 반복하지 않고 동의이어적인 ‘포네’를 사용한
것이다.
이상으로 오순절 날 성령에 충만한 사람들은 12사도들이다. 천하 각국에서 와서 예루살렘에 거하던 경건한 유대인들은 성령을
받은 모두가 다른 언어로 말하는 소리가 아니라 하늘로부터 난 강력한 바람 같은 소리를 듣고 몰려왔다. 그들은 와서 12사도들이
내는 다른 언어들을 듣고 그 내용을 알고 놀라거나, 혹은 그 내용을 몰라 새 술에 취했다고 조롱했다.
관련 성경 / 기도하다(마 5:44, 눅 1:10, 행 1:24), 간구하다(롬 8:26).
엘리야는 우리와 성정이 같은 사람이로되 - '성정이 같은'에 해당하는 헬라어 '호모이오파데스'는 '유사한'을 의미하는 '호모이오스'와 '고난'을 뜻하는 '파도스'의 합성어로 엘리야도 다른 일반 사람과 마찬가지로 동일한 괴로움을 가지고 있는 존재임을 나타낸다(왕상 17:11;19:3;행 10:26, Vincent, Blue). 이는
엘리야가 위대한 선지자로서 초능력적인 자질을 소유하여 비를 그치고 내리게 하는 역사를 행한 것이 아님을 시사함과 동시에 평범한
사람과 동일하게 괴로움과 고통을 느끼는 인간적 존재인 것을 부각시켜 죄를 회개하여 용서함을 받은 의인은 엘리야와 같이 기도의
응답을 받을 수 있음을 암시한다(Burdick, Mayor, Moo).
저가 비 오지 않기를 간절히 기도한즉 삼 년 육 개월 동안 땅에 비가 아니 오고 다시 기도한즉 하늘이 비를 주고 땅이 열매를 내었느니라 - 본문은 엘리야 선지자가 기도 응답을 받은 역사를 나타낸다. '간절히 기도한즉'에 해당하는 헬라어 구문 '프로슈케 프로세윅사토'(*)는 문자적으로 '기도로 기도했다'는 전형적 히브리식 표현법으로 강조 구문이다(창 2:17; 눅 22:15; 요 3:29; 행 4:17,Gibson, Tasker, Manton). 실제로 구약성경에는 엘리야가 기도할때 땅에 엎드려 얼굴을 무릎 사이에 넣었다고 묘사되어 있다(왕상 17:1; 18:42). 이러한 엘리야의 간절한 기도는 응답을 받아 비를 그치게도 하고 내리게도 하였다. 한편 본문에서는 한발(旱魃)의 기간에 대해 '삼 년 육 개월'이라 하나 왕상 18:1에는 '제 삼 년'으로 되어 있다. 이러한 차이는 3년 6개월이 가뭄의 전체 기간을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왕상 17장에 기록된 사건들의 전체 시간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면 해결된다(눅 4:25). 따라서 이러한 사실은 야고보가 왕상의 내용을 직접, 간접으로 인용하고 있음을 보여준다(Lenski, Manton, Macknight).
이사야 26:16 여호와여 백성이 환난 중에 주를 앙모하였사오며 주의 징벌이 그들에게 임할 때에 그들이 간절히 주께 기도하였나이다.
백성이 환난 중에...주께 기도하였나이다 - 선지자의 사고(思考)는 다시 현재로 되돌아온다. 하나님의 궁극적 승리를 믿는 신앙이 확실하다 할지라도 일상에서 겪는 경험적 현실 - '환난'과 '징벌'로 표현된 - 앞에서 신자들은 거듭거듭 심각한 무력감에 사로잡힐 수밖에 없다. 이러한 상황에서 신자가 할 수 있는 일은 전폭적으로 하나님만을 의지하고 그의 도우심을 간구하는 기도밖에 없는 것이다(Oswalt).
간절히(추쿠. tsûwq) צוּק
Storng number 6694
1. 붓다. 2. 세우다. Pronunciation
[ tsûwq ] Old Testament / 4회 사용
1. 원형
붓다, 욥 26:9, 28:2, [은유적으로] 사 26:16
2. 원형
세우다.
관련 성경 / 녹이다(욥 28:2), 흘려내다(욥 29:6)
인생의 절정에서 뜻밖의 고난을 마주했을 때, 우리는 어떻게 반응할까요?
세계 3대 테너 중 한 명인 호세 카레라스(당시 41세)는 오페라 공연 중 백혈병 진단을 받으며 생사의 기로에 섰습니다. 그는 절망 속에서 "하나님, 제 생명을 연장해 주시면 남은 인생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쓰겠습니다!" 라고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그리고 기적처럼 병세가 호전되어 다시 무대에 섰을 때, 그의 노래는 이전과는 달리 영혼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감동을 선사했습니다.그는 청중들에게 "질병도 하나님이 주신 축복이요 은혜입니다"라고 고백하며, 그의 기도대로 하나님 나라를 노래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오늘 우리는 사도행전 12장 1-5절 말씀을 통해 간절한 기도가 우리의 삶에 어떤 놀라운 역사를 일으키는지 살펴보려고 합니다. 헤롯 왕의 박해 속에서 야고보 사도가 순교하고 베드로 사도마저 투옥되는 절체절명의 위기 상황에서, 초대교회 성도들은 오직 한 가지 일에 전념했습니다. 바로 <간절히 기도하는 것>이었습니다.
이 간절한 기도를 통해 과연 어떤 일들이 일어났을까요?
첫째, 간절한 기도는 고난을 넘어섭니다.
고난은 기도 훈련 학교에 초청하는 초대장입니다. 야고보서 5장 13절은 "너희 중에 고난 당하는 자가 있느냐 그들을 기도할 것이요" 라고 말씀합니다.
고난은 우리를 기도의 자리로 이끄는 통로가 됩니다.
고난을 통해 기도의 능력을 배우고 훈련하면, 평상시에도 기도가 삶의 일부가 되어 웬만한 고난은 우리를 흔들 수 없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기도의 능력입니다.
본문에서 헤롯 아그립바 왕은 로마 황제와의 친분을 바탕으로
유대와 갈릴리 등지를 다스리던 권력자였습니다.
그는 유대인들의 환심을 사기 위해 교회 지도자들을 박해하기 시작했고,
급기야 야고보 사도를 칼로 죽였습니다.
유대인들이 이 일에 기뻐하는 것을 본 헤롯은
이제 베드로 사도마저 잡아서 감옥에 가두었습니다.
무교절 기간이라 즉시 처형할 수는 없었지만,
7일간의 축제가 끝나면 베드로를 처형할 계획이었습니다.
16명의 군인이 철통같이 베드로를 감시하고 있었으니,
인간적인 눈으로 볼 때 베드로에게는 아무런 희망도 없어 보였습니다.
교회는 큰 위기에 처했습니다.
야고보 사도를 잃은 슬픔도 채 가시지 않았는데, 이제 베드로 사도마저 죽음의 문턱에 서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때 교회가 할 수 있었던 유일한 일은 바로 “기도”였습니다.
사도행전 12장 5절은 말씀합니다.
"이에 베드로는 옥에 갇혔고 교회는 그를 위하여 간절히 하나님께 기도하더라."
여기서 '간절히'라는 말은 '간이 저리도록' 기도했다는 표현처럼, 온 힘과 마음을 다해 하나님께 부르짖었다는 의미입니다.
무교절 축제 기간 7일 내내 교회는 베드로를 위해 끊임없이 기도했습니다.
성도에게 아무런 힘이 없을 때, 가장 큰 힘을 얻을 수 있는 비결은 무엇일까요?
바로 “간절한 기도”입니다.
간절한 기도는 천지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의 초자연적인 능력을 경험할 수 있는 유일한 통로입니다.
예레미야 33:2-3 "일을 행하시는 여호와, 그것을 만들며 성취하시는 여호와, 그의 이름을 여호와라 하는 이가 이와 같이 이르시도다.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은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
간절히 기도하면 이루어지나?
요즈음처럼
세상이 점점 어려워지니 희망의 실타래라도 붙잡아 보려는 사람들이 점점 많아지고 있다. 이들이 가장 손쉽게 쓸 수 있는 방법이
기적이 일어나게 해 달라고 혼자서 간절히 기도하는 방법이다. 과연 간절히 기도하면 기적이 일어날까?
오프라 윈프리가 자신의 쇼에서 소개해서 유명세를 타게 된 #Secret 이라는
자기 개발서가 이 [간절함이 담긴 기도 운동]에 불을 붙였다. 이 책의 핵심이 어떤 상황에서라도 간절히 바라면 기적이 일어난다는
것이다. 오프라가 자신의 쇼에서 이 책을 소개하자 이미 성공한 유명인사들이 자신도 그렇게 성공했다는 간증이 줄을 이었다. 유명인사들 대열에 심지어는 박근혜 대통령도 한 몫 했다. 어린이 날 행사에서 어린이들에게 간절히 바라면 다 이뤄진다는 간증을
남겼다. 이미 성공한 유명인사들이 줄줄이 이런 주장을 하자 이것은 그냥 사실인 것처럼 받아들였다.
그래도 일각에서 이런 간절한 기도가 무슨 과학적인 근거가 있느냐고 추궁에 들어가자 #NLP (Neuro
Linguistic Program) 이라는 프로그램이 들고 일어났다. 이 프로그램에서는 간절함은 뇌에 암시를 주게 되고 이
암시를 통해서 이런 기적이 일어난다는 것이다. 한 마디로 뇌과학을 이용해서 기적을 설명한다. 심지어 이들은 뇌에 암시를 주기 위한
주문을 만들어 내기도 했다. 하지만 과학은 다른 사람들도 같은 절차를 따르면 똑 같은 결과를 얻을 수 있어야 하는데 NLP에서의
주장은 뇌과학적 포장을 하지만 엄격한 과학적 기준을 충족하는 것은 아니다. 심령술이나 유사 심리학 등에서 사용하는 방법과 다를
바가 전혀 없다. 대부분의 자기계발서의 주장들은 이런 #심령과학적 주장을 벗어나지 못한다.
그렇다면 정말 간절히 바라는 것이 실제로 기적처럼 일어나기도 하는 현상에 대한 과학적 설명은 없을까?
본인도
사회 과학을 하는 한 사람으로서 사회 구조적이거나 제도적 장애가 더 크기 때문에 어떤 한 사람이 간절히 텔레파시를 보낸다고 해서
이 제도적이고 구조적인 것이 바뀌는 기적이 일어날 개연성은 크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을 강하게 가지고 있었다.
예를 들어 우리나라
교육이 요즈음 문제가 되고 있는 나향욱 정책관과 같은 사람들 때문에 고질화 되었다고 보고 이와 같은 사람들을 전부 해고 시켜
달라고 혼자 간절히 기도한다고 이들이 해고 당하는 기적이 실제로 일어나지 않는 원리와 같다.
하지만 우연히 LittleBoy 라는
영화를 보다가 이것이 현실적으로 일어날 수 있는 조건을 설명해주는 놀라운 장면을 목격했다. 스토리는 8살 짜리 소년의
이야기이다. 또래에 비해 키가 작아 놀림감이 되고 있는 주인공은 믿음이 좋은 소년이다. 2차 세계 대전에 사랑하는 아버지가 평발인
형 대신에 징집되어 전쟁터로 떠나자 아버지를 빨리 돌아오게 하기 위해서 기적을 찾아 나선다. 아버지를 돌아오게 하는 방법은
전쟁이 빨리 끝나는 방법밖에는 없다는 것을 알고 전쟁이 빨리 끝나게 하는 기적을 간구하다가 뭐든지 간절하게 바라면 모든 것이
이뤄진다는 사기꾼의 말을 믿고 간절히 기도하기 시작한다. 자신 또래 아이들이나 어른들은 단순히 간절히 기도하는 것을 통해서는 아무
것도 성취할 수 없다고 놀리자 자신이 믿고 따르는 신부님을 찾아가 고충을 털어 놓는다.
이때 이 신부님은 간절히 바라는 기도가 이뤄지는 원리를 아주 쉽게 설명한다.
기적을
보여줄테니 아이에게 테이블에 있는 물병을 옮기는 기적이 일어나게 해달라고 간절히 기도해보라고 주문한다. 아이가 이 말을 믿고
간절히 기도하자 신부님은 기다렸다가 자신이 물병을 옮겨 놓는다. 아이가 신부님이 물병을 옮기는 것을 목격하고 문제를 제기하자
신부님이 기적의 원리를 설명한다. 기적은 자신 혼자서 간절히 기도하는 것으로 이뤄지는 것이 아니라 간절히 바라는 기도가 다른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였을 때 이들의 마음을 통해서 일어나는 것이라고 설명한다. 아이의 간절한 기도가 신부님의 마음을 움직였기
때문에 자신이 스스로 물병을 옮겨 놨다고 고백한다.
이와 같은 비슷한 실화를 담은 영화가 [아름다운 세상을 위해서
Paying Forward]이다. 이 두 영화의 공통점은 기적을 일으키기 위해서는 기도가 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집단적으로 움직일 수
있는 선한 스토리가 담겨 있어야 한다는 점이다. 많은 사람들이 이 선하고 진정성이 넘치는 간절한 스토리에 의해 집단적으로 마음이
움직였을 때 이들의 자발적 행동이 집단 행동으로 동원되고 이 집단 행동을 통해서 제도나 사회 구조가 바뀌는 기적이 일어난다는
것이다. 종교 등과 같이 이미 믿음의 플랫폼을 공유하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어떤 종류의 기도이던지 간절하고 진정성이 넘치는 선한
스토리의 기준만 통과한다면 플랫폼을 공유한 이들의 마음을 울리고 쉽게 전파될 것이다. 하지만 종교가 세상을 바꾸지 못하는 이유는
믿음의 플랫폼은 있어도 종교가 산출하는 스토리가 이미 진정성을 잃은 상태이기 때문일 것이다.
경기가 어려워지고 실직하는
사람들이 많아지자 요즈음 한국 기독교가 기복적인 요소로 많이 흐르고 있다. 실제로 자신과 자신 가족만을 위한 기복적 기도가 늘고
있다. 물론 이런 기복적 기도도 전혀 안 하는 사람들보다는 일어날 확율이 높겠지만 실제로 이런 기도 응답을 받은 사건들을 조사를
해보면 일반 확률적인 수준을 넘어서지 못한다.
많은 사람들이 믿음의 플랫폼을 공유하고 진정성이 있는 스토리로 많은 사람들에게 집단적 울림을 줄 수 없다면 세상이 바뀌는 기적은 일어나지 않는다. 기적은 사람을 통해서 일어나기 때문이다.
‘강청함’ 으로 번역된 헬라어 ‘아나데이아’ 라는 말이 예수님 당대와 그 이전에 어떻게 사용되었는가를 살펴보는 것이 중요하다. 최근의 연구 결과를 살펴보면 이 ‘아나데이아’ 가 당시의 수많은 헬라어 문헌에 ‘수치를 피하기 위함’,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기 위함’ 혹은 ‘체면을 잃지 않기 위함’ 등등의 의미로 사용 되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이 말이 교부시대를 거쳐 중세시대에 들어와서부터 유감스럽게도 점점 ‘강청함’이나 ‘끈질김’ 등으로 번역되었다는 것입니다
잘 아시다시피 중세 시대는 교회가 확고하게 조직으로서 제도화되는 시기입니다 조직으로서의 교회는 필연적으로 조직을 운영하기 위한 동력을 필요로 합니다 즉 교회에 헌신적으로 열심히 봉사할 신도가 필수적입니다
이렇게 제도 교회가 뿌리내리기 시작한 중세시대 라틴어 번역본 부터 헬라어 아나데이아가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기 위함’ 뜻에서 열심히 기도함, ‘끈질기게 졸라댐’, ‘강청함’ 등으로 달리 번역되기 시작했다는 것은 우리로 하여금 많은 것을 생각하게 만듭니다
끈질기게, 귀찮게 졸라대는 것과 부그러움, 수치심을 피하는 것은 그 뜻에 있어서 상당한 간격이 있습니다
한국어 성경도 거의 예외 없이 이 말을 끈덕지게 졸라대는 것, 간청함 으로만 번역을 하는 바람에 사람들이 이 본문을 강청하는 기도, 졸라대는 기도로 알고 있지만 그러나 본문의 흐름을 면밀히 살펴보면 그렇지 않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본문 7절에 보면 예수님이 집안에서 잠자고 있던 친구가 밤중에 떡 세덩이를 구하는 사람에게 하는 말을 인용하여 ‘나를 괴롭게 하지 말라 문이 이미 닫혔고 아이들이 나와 함께 침실에 누웠으니 일어나 네게 줄 수 가 없노라 하겠느냐’ 라고 말씀하시는 장면이 기록되어 있는데 ‘침실에 이미 누웠으니 일어나 네게 줄 수 가 없노라 하겠느냐?’ 라는 이 말은 줄 수 없다는 말이 아니라 당연히 주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바꿔 말하면 예수께서 하시고자 하는 말씀은 지금 혹여 우리가 잠자리에 들었다 할지라도 친구가 떡을 꾸러 왔다면 일어나 그에게 떡을 꾸어주는 것이 당연하다 라는 말씀인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스라엘 사람들은 손님이 왔을 때 대접해야 하는 것을 하나님의 명령을 여겼기 때문입니다
나그네를 대접하는 것은 하나님이 자신의 백성이 마땅히 가져야 할 품성으로써 요구신 것입니다
따라서 손님이 왔을 때 그를 제대로 맞지 않는 것은 크나큰 문제였던 것입니다
만일 이 사람이 귀찮아서 손님을 대접하기 위해 떡을 구하는 이웃의 청을 거절했다면 이사람은 그가 속한 공동체에서 커다란 수치심, 부끄러움을 당하게 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렇기에 ‘간청함’으로 인해 일어나 떡을 꾸어줄 수 밖에 없다는 말은 강청함 때문이 아닌 자신이 당할 부끄러움, 수치심을 면하기 인해 떡을 꾸어준다고 해석하는 것이 더 자연스러워 보일 것입니다.
그래서 이러한 맥락에서 이 비유의 말씀을 다시 살펴본다면 이 말씀은 하나님께 떼를 쓰고 간청하면 들어주신다 라는 것을 말하기 위함이 아니라 (굳이 떼를 쓰지 않아도) 하나님은 당연히 자녀들에게 그 필요에 따라 채워 주신다는 것을 말씀하기 위함이라는 것입니다
즉 이 비유의 핵심은 기도란 떼를 쓰듯 끈질긴 우리의 노력에 의해 응답받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필요를 채우시는 하나님의 사랑에 의해 응답받는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두 번째로 말씀드릴 기도에 대한 가르침 또한 이와 비슷한 오해를 가지게 합니다 같은 누가 복음 18장에 기록되어 있는 말씀입니다
이 비유 말씀의 내용은 대략 이렇습니다
어떤 도시에 하나님을 두려워 하지 않고 사람을 무시하는 재판장이 있습니다 이 재판장에게 한 과부가 찾아가서 자신의 원한을 풀어달라고 이야기 합니다
이 재판장은 과부의 사연을 귀담아 듣지는 않지만 어느 순간에 이렇게 생각하게 됩니다
‘내가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을 무시하나 이 과부가 나를 번거롭게 하니 내가 그 원한을 풀어주리라 그렇지 않으면 늘 와서 나를 괴롭게 하리라 이 본문을 통해 우리는 쉽게 아.. 재판장이 귀찮아서라도 들어주었듯이 우리도 하나님께 죽자 사자 매달리고 끝까지 붙들고 늘어지면 하나님이 귀찮아서라도 들어주시는 구나
그러니까 한 번 기도를 시작하면 들어주실때까지 끝장을 봐야 하는구나 라는 결론이 이르게 됩니다
그러나 이러한 결론 역시 첫번째 비유와 마찬가지로 성경이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에 주목하기 보다는 우리의 입맛대로, 우리의 의도대로 읽기 때문에 주어지는 해석일 뿐입니다
이 비유의 말씀을 찬찬히 살펴보면 과부의 요청은 (즉 과부의 기도 제목은)
모든 사람이 보편적으로 기도할 만한 내용이 아니라 단지 ‘내 원수에 대한 나의 원한을 풀어주소서.’ 입니다 즉 소원을 비는 것이 아니라 억울한 원한을 풀어 달라는 것이었고
재판장이 한 일도 단지 이 과부의 억울한 원한을 풀어주는 것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결국 이 비유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하나님께 떼쓰면, 간절히 기도하면 어떤 기도든지 그 기도를 다 들어주신다’ 가 아니라 하나님은 자기 백성의 원한, 억울함을 못본체 하지 아니하신다 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 한가지 이 비유에서 또한 우리가 흔히 오해하는 바는 하나님을 (과부의 요청을 들어주는) 재판장에 비유하는 것인데 이 또한 옳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재판장처럼 끈질기게 붙들고 늘어져야만 들어주시는 분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과부가 재판장에게 끈덕지게 간청한 이유는 재판장이 불의하기 때문인데 그러나 하나님은 전혀 불의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본문 18:7 을 보면 ‘하물며 하나님께서 … 그 원한을 풀어주지 아니하시겠느냐?’ 하고 반문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물며’라는 이 말은 재판장은 불의하기 때문에 끈덕지게 귀찮게 해야만 들어주는 사람이지만 하나님은 전혀 그렇지 않으신 분이란 뉘앙스를 설명하는 말입니다
따라서 이 비유가 말하고자하는 바는 기도 할 때에는 과부처럼 끈질기게, 응답받을 때까지 기도하라 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은 성도의 고통을 외면하지 않으시고 또한 그 성도의 고통을 당연히 풀어주시는 분이시기에 아무 걱정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낙심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이 비유말씀의 시작은 18장 1절에 항상 기도하고 낙심하지 말라는 말로 시작하는 것입니다
항상 기도하라고 하는 이유는 기도란 단지 기도 응답을 위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고 낙심하지 말라는 것은 하나님은 기도와는 상관없이 우리의 인생을 늘 살피시고 언제나 나의 인생을 가장 최상의 길로 인도 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에 낙심할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기도에 관해 아니 더 정확히는, 기도 응답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답답해 하고, 궁금해 하는 이유는 명확합니다. 기도를 단지 나의 요구 사항을 해결하는 수단이요 도구로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 수단이자 도구가 내 생각대로, 나의 뜻대로 작동하지 않을 때 답답해지고 ‘ 왜 그러지?’ 하고 의문이 생기는 것입니다.
그러나 기도를 통해 하나님과 공명하게 되면 즉 하나님의 뜻을 이해하게 되면 이러한 답답함과 의문은 사라지게 됩니다.
기도를 통해 나의 인생에 일어나는 사건에 대한 의미가 깨달아 지면 의문과 의심, 답답함이 사라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만약 기도를 수단이라 한다면 그것은 나의 소원을 이루기 위한 수단이 아니라 하나님을 이해하기 위한 수단이고, 하나님을 알아가기 위한 수단이며, 하나님을 깨달아 가기 위한 수단인 것입니다.
하나님을 안다는 것은 하나님이 어떠한 존재임을 안다는 뜻일 것입니다 그러나 한낱 피조물인 우리가 창조주 하나님을 온전히 이해할 길은 없습니다
우리는 다만 성경을 통해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얻고 기도를 통해 이를 깊이 묵상함으로 하나님을 깨달아 갈 뿐입니다
그리하여 이 시간 기도에 관한 두 가지 비유 말씀을 통해 우리가 알 수 있는 사실은 기도란 단지 우리의 소원을 이루기 위한 수단이나 하나님을 설득하기 위한 수단이 아니라 하나님이 어떠한 분이심을 알기 위해 혹은 하나님이 자신이 어떠한 존재임을 우리에게 알게하기 위해 우리에게 허락된 하나의 방편이라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기도에 의해 좌지우지 되는 분이 아니라 오히려 우리의 기도와는 상관없이 늘 우리와 함께 하며 우리를 눈동자와 같이 지키시는 분이라는 사실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이제부터라도 기도를 문제를 해결하려는 수단으로만 보지말고 하나님을 깊이 알아가는 통로로 삼아 어떠한 일이 닥치더라도 이 가운데 나의 인생에 던져지는 하나님의 뜻을 깨달아 가는 깊이 있는 기도생활, 깊이 있는 신앙 생활을 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ἀναίδεια, ας, ἡStorng number335
1.
고집
2.
건방짐
3.
뻔뻔스러움
Pronunciation
[ anaidĕia ]
Etymology
1[부정불변사]과 127의 합성어에서 유래
1.
고집, 건방짐, 뻔뻔스러움, 파렴치함, 부끄러움을 모름, 눅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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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성경
간청함(눅11:8).
1. 길이 보이지 않을 때 드리는 기도
하나님 아버지, 지금 저는 어느 방향으로 가야 할지 알지 못합니다. 인생의 여러 갈림길 앞에서 멈춰 서 있습니다. 사람들이 말하는 대로 따라가도 불안하고, 제 생각을 의지해도 흔들리기만 합니다. 이 불확실함 속에서 두려움이 커져만 가고, 마음은
무겁고 지쳐 있습니다. 하지만 이 시간, 주님을 향한 믿음을 다시 붙듭니다. 주님은 광야에서도 길을 내시고, 사막에서도 강을 내시는 분이심을
믿습니다. 제 눈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지만, 주님의 눈에는 이미 모든 길이 펼쳐져 있음을 압니다. 그러니 주님, 저를
인도해주세요. 제 귀를 열어 주의 음성을 듣게 하시고, 제 발을 주의 빛 가운데로 인도해 주세요. 내일을 알 수 없어도 오늘 주님을 신뢰하는 용기를 주세요. 주님의 뜻이라면 기다리겠습니다. 멈춰 있는 이 시간이 주님과 더욱
친밀해지는 기회가 되게 하시고, 주님의 계획 속에 있는 소망을 붙잡게 하소서. 언제나 저와 동행하시는 주님을 믿으며, 오늘도 한
걸음 내딛습니다.
말씀 :
“너는 마음을 다하여 여호와를 신뢰하고 네 명철을 의지하지 말라. 너는 범사에 그를 인정하라 그리하면 네 길을 지도하시리라.” – 잠언 3:5-6
2. 마음이 지칠 때 드리는 기도
사랑의 하나님, 제 마음이 너무 지쳐 있습니다. 아무 일도 하지 않아도 피곤하고, 괜찮은 척하지만 속은 무너져 내리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모르는 상처와 아픔이 가슴속 깊이 자리 잡고 있어 숨 쉬는 것조차 어렵습니다.
주님, 이 지친 마음을 어루만져 주세요. 따뜻한 손으로 토닥여 주시고, 내 영혼에 쉼을 허락해주세요. 무거운 짐을 내려놓고 싶습니다. 더는 제 힘으로 버티지 않겠습니다. 주님 앞에 모든 것을 맡기고, 주님의 품에서 쉬고 싶습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주님의 사랑은 변하지 않음을 믿습니다. 제가 주님을 놓쳐도, 주님은 결코 저를 놓지 않으심을 압니다. 그
사랑으로 저를 회복시켜 주세요. 하루하루 살아가는 힘을 주시고, 주님의 평안이 제 마음과 생각을 지켜주소서.
오늘도 버텨냈음을 감사하며, 내일도 주님 손 붙들고 걸어가겠습니다. 지친 제 마음에, 주님의 생명이 다시 피어나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말씀 :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 마태복음 11:28
3. 가족을 위한 간절한 기도
주님, 우리 가정을 위해 기도합니다. 가족이라는 이름 아래 있지만, 때로는 서로의 마음이 멀게 느껴지고, 말 한마디에 상처받고 또 상처 주는 일이 반복되곤 합니다. 그러나 주님, 이 가족은 주님이 허락하신 소중한 선물임을 믿습니다.
몸이 아픈 가족이 있다면 주님의 치유의 손길로 만져주시고, 마음이 무너진 가족이 있다면 주님의 위로로 회복시켜 주세요. 무엇보다도 주님을 먼저 찾는 가정 되게 하시고, 사랑이 중심이 되는 관계가 회복되게 하소서.
서로의 다름을 이해하고, 실수도 품을 수 있는 넓은 마음을 주세요. 화목하게 지낼 수 있도록 성령님께서 우리의 대화를 주관해 주세요. 혹시 믿음에서 멀어진 가족이 있다면, 다시 주님의 품으로 돌아오는 은혜를 부어주세요.
하나님, 우리 가정이 세상의 가치보다 주님의 말씀을 더 가까이 하게 하시고, 어떤 어려움이 와도 함께 기도하며 이겨내는 믿음의 공동체가 되게 하소서. 우리 집안에 주님의 평강과 축복이 가득하기를 간절히 기도드립니다.
말씀 : “너와 네 집이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구원을 받으리라.” – 사도행전 16:31
4. 병상에서 드리는 기도
하나님 아버지, 지금 저는 병상 위에 누워있습니다. 작은 움직임에도 통증이 느껴지고, 몸이 아프니 마음도 함께 무너져만 갑니다. 이 시간에도 여전히 함께하시는 주님의 사랑을 느끼며, 주님의 손을 붙잡고 기도합니다.
이 아픈 몸을 주님 손에 맡깁니다. 병원 치료와 약보다 더 강한 주님의 능력이 제게 임하기를 원합니다. 주님의 손길이 제
몸을 덮으시고, 세포 하나하나가 주의 이름으로 회복되게 하소서. 저를 치료하시는 여호와 라파의 이름으로 간구합니다.
또한 이 고통의 시간을 통해 주님과 더 가까워지길 소망합니다. 아픔 속에서도 주님의 음성을 듣게 하시고, 고난 가운데서도 감사의 이유를 찾게 하소서.
저뿐만 아니라 이 병상에 있는 모든 이들에게도 주님의 평안을 부어주세요. 간호하는 손길에도 주님의 사랑이 흐르게 하시고, 이 병실 안에 주님의 임재가 가득하게 하소서.
끝까지 주님을 신뢰하는 믿음을 주시고, 회복의 날이 속히 오게 하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말씀 : “여호와는 마음이 상한 자를 가까이 하시고 충심으로 통회하는 자를 구원하시는도다.” – 시편 34:18
주님, 저는 죄인입니다. 말로는 주님을 따른다 했지만, 삶으로는 제 뜻을 따랐습니다. 반복되는 실수와 유혹에 넘어질 때마다, 스스로를 원망하고 낙심했습니다. 하지만 주님은 그런 저를 정죄하지 않으시고, 다시 일어설 수 있는 손을 내미시는 분이십니다.
이제 더 이상 숨지 않겠습니다. 제 죄를 주님 앞에 낱낱이 고백합니다. 행동으로, 말로, 마음으로 지은 죄를 용서해주세요. 저의 중심을 살펴주시고, 정결하게 씻어 주세요. 더 이상 죄의 습관 속에 살지 않도록, 성령님 도와주세요.
주님의 은혜가 제 죄보다 크고, 주님의 사랑이 제 수치보다 깊음을 믿습니다. 오늘 이 기도를 통해 다시 주님께로 나아가고 싶습니다. 주의 십자가를 붙잡고, 새로운 삶을 살아가게 하소서. 예수님의 보혈로 제 죄가 사해졌음을 믿고, 감사드리며 주님 앞에 엎드립니다.
말씀 :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그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 요한일서 1:9 마무리하며…
기도는 우리의 간절한 마음을 담아 하나님께 올려드리는 거룩한 대화입니다. 말이 부족해도, 눈물밖에 없어도 괜찮아요. 주님은 우리의 심령 깊은 곳을 아시고, 단 한 마디 기도에도 응답하시는 분이십니다.
마음이 힘들고, 길이 보이지 않는 지금 이 순간에도 “하나님” 한 마디만 불러보세요. 주님은 그 이름을 부르는 이의 손을 결코 놓지 않으십니다
초대교회의 기도생활
우리는 지금까지 누가복음에서 예수님의 기도생활과 기도에 관한 그의 교훈을 살펴보았다. 예수님은 기도생활이 모범을 계속 보이면서 제자들에게
기도할 것을 가르치고 권면하셨다. 우리가 본 바 대로 에수님은 누가복음 11장에서 바른 기도의
내용, 방법, 그리고 응답에 대하여 가르치셨다. 18장에서는
낙망치 말고 항상 기도해야 할 것과 기도의 바른 자세인 겸손에
대해 말씀했다. 이 기도는 쉼이 없는 밤과 낮의 기도였다.
예수님은 21장에서 또한 그날과 그 시를 모르는 주님의 날을
준비하는 가장 합당한 방법이 항상 꺠어 기도하는 삶임을
가르치셨다. 항상 꺠어 있는 기도생활을 통해서만 주님의 재림
전에 있을 마지막 환난을 믿음으로 잘 이기고, 재림하시는 인자
앞에 신앙을 인정받는 사람으로 서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제자들은 기도에 관한 예수님의 가르침과 그의 기도생활
을 계속해서 보고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기도하는 일에 실패했다.
그래서 누가복음에는 제자들이 기도하는 모습이 한 곳에도
나오지 않는다. 그러나 사도행전에서는 상황이 180도로 바뀌었다.
전혀 주님을 닮지 않았던 제자들이 주님의 승천 이후 그분이
보여주신 기도의 본을 닮아가는 모습으로 나오기 시작한다.
사도행전 전체에 묘사된 사도들과 초대교회의 모습은 마침내
예수님을 닮아 철저하게 기도하고 말씀을 전파하는 모습이다.
신약성경에서 기도에 관한 언급이 제일 많은 책이 사도행전이다.
사도행전에서 기도가 33번 언급된 사실은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전체 28장 중 기도가 언급되지 않는 장은 15,17-19, 23-26
장 뿐이다.이 장들에서 기도의 언급이 없는 것은 이를 언급하는 것이
적절하지 않아서였을 것이다. 사도들이 예수님처럼 철저하게
기도하는 사람들이 되었기 때문에 그들이 있는 곳에 기도가 있었고
또한 예수님의 사역에 늘 따르던 기적들이 줄을 이어 일어났다.
주님이 오랫동안 원하셨던 기도하는 제자들이 되어가는 모습을
사도행전에서 보기 때문에 초대교회의 기도생활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우리는 본 장과 다음 장에서 사도행전에 나타난 사도들과 초대교회
기도를 검토하고자 한다. 특히 본 장에서는 사도들과 120문도의
기도, 그리고 예루살렘 교회의 네가지 특성에 관해 살펴보고자 한다.
1.120문도의 기도(행1:12-14)
제자들이 감람원이라 하는 산으로부터 예루살렘에 돌아오니
이 산은 예루샬렘에서 가까와 안식일에 가기 알맞은 길이라
들어가 저희 유하는 다락에 올라가니 베드로,요한, 야고보,
안드레와 빌립, 도마와 바돌로매, 마태와 빛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
셀롯 인 시몬, 야고보의 아들 유다가 다 거기있어 여자들과
예수의 모친 마리아와 예수의 아우들로 더불어 마음을
같이하여 전혀 기도에 힘쓰니라(행 1:12-14)
이제 주님의 제자들은 감람산에서 승천하시는 주님을 전송하고
예루살렘에 있는 마가의 다락방으로 모인다(13절) 예수님의
11제자들을 비롯하여 예수님의 전도 여행을 따라 다니며
수종을 들었던 여자들과 그의 어머니 형제들이 함께 모였다.
이들과 다른 사람들을 함쳐 총 120여명 정도가 이 다락방에
모이게 되었다(15절).그들이 모인 다락방은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그런 다락방이 아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다락방은
아주 작아서 몇 사람밖에 들어가지 못한다. 천장이 너무 낮아서
그 안에 설 수가 없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가옥 구조상
가장 좋은 방은 위쪽에 있는 다락방이다. 이 다락방은 오늘날
집이나 아파트의 큰 거실에 해당한다.
다락방은 맨 위층에 있기 때문에 지나가는 사람들이
기웃거릴 수 없을 뿐 아니라 , 거리의 시끄러운 소리가
들리지 않아 가장 좋은 방이었다. 그래서 이 방은 주로 회집 장소나
공부방, 기도방으로 사용되었다고 한다.
때로는 다락방을 사람에게 대여해
주기도 했다고 한다.
본문을 통해선 그 집이 누구의 집인지 정확하게 알 수 없다.
13절에 "저희 유하는 다락" 이라고 한 것을 보아 제자들에게
아주 잘 알려진 장소인 것으로 추정할 뿐이다.
어떤 사람들은 이 다락방이 예수님이 제자들과 함께
마지막 만찬을 한 장소요(막 14:12-16), 예수님이 십자가에
처형된 후에 제자들이 숨어 있던 장소, 또한 부활하신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나타났던 장소라고 한다(눅24:33-43;요20:19),
아마도 본문에 언급된 "여자들" 중 한 사람의 집이
아닌가 추측한다. 사도행전 12장 12절에 마가 요한의
어머니 마리아의 집이 회집 장소와 기도 장소로 쓰인 점을 볼 때
마리아의 집일 가능성이 높다. 누구의 집이든 간에 중요한 것은
120명의 제자들이 모여서 마음을 같이하여
전혀 기도에 힘썼다는 사실이다.
이 기도의 모임의 주도자는 베드로였다.
13-14절에 제자들 이름 중 베드로가 제일 먼저 언급되었고
베드로가 일어나 설교하는 것을 보아서(15-22)
그가 이 기도회를 인도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베드로의 인도에 따라 120명의 제자들이 마음을 같이하여
전혀 기도에 힘썼다.
이러한 합심기도는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성령이 임할 때까지
기다리라는 주님의 당부에 대한 순종이었다.(눅 24:49;행1:4),
그들은 가만히 앉아서 기다린 것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기도하면서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성령의 선물을 기다렸으며 이 기도는 기독교
역사상 최초의 합심기도였다. 이 기도가 초대교회의 근본적인
특징을 형성한다.
우리는
특별히 120문도들이 "기도에 전혀 힘쎴다" 는 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헬라어로 이 동사는 '프로스칼데레오(proskartelew)'이다.
이 단어는 신약성경에 10번 사용되었다.
그 중 4번만 제외하고(막3:9;행8:13;10:7;롬13:6) 모두 다 기도와
관련하여 사용되었다.(행1:14;2:42,46;6:4 롬 12:12;골 4:2)
이 단어가 사람을 목적으로 취할 때는 "사람에게 충성을 다 하는것"을
의미한다. 예를 들면 신하가 상관을 성실하게 섬기는 행위(행10:7)나
제자가 스승을 성실하게 따르는 행위(행8:13)를 가르킨다.
그룬드만(Grundmann)에 따르면 이것이 물건 혹은 사물을 목적어로
취할 때 어떤 일에 집요하게 전념한다는 의미로 쓰인다.
다시 말해 인내를 잃지 않고 끝까지 견디어 어떤 일을 성실하게
감당하는 것을 의미한다.
어떤 일을 굳게 잡아 놓치지 않고 이에 전념하는 것을 말한다.
이 단어가 '기도'라는 단어를 목적어로 취할 때 이러한 의미를
전적으로 반영한다.
다시 말해서 굳게 참고 인내하며, 끈질기게, 간절하게,계속적으로,
기도하는 것을 말한다.
곧 기도의 인내성, 계속성,지속성, 간절성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이렇게 끈질기게 간절한 기도를 한 사람은 한두 사람이 아니었다.
11명의 제자들만도 아니었다. 120명의 제자들이 모두 함께 모여서
한마음으로 계속적으로 기도해 왔다.(14절). 14절에 사용된 동사의
미완료 시제와 현제 분사가 보여주듯이 이 합심기도가 계속,
연속적으로 진행돼 왔음을 암시받는다. 아마도 우리는 사도들과
120문도들이 생명을 내놓고 10여 일간 전폭적으로 기도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들의 합심기도는 유대교에는
전례가 없었던 획기적이고 역사적인 기도였다.
그룬트만의 지적에 따르면 대체적으로 우대인들은 습관적으로
정한 시간에만 기도하곤 했다. 아침, 점심, 저녁에 간단하게
기도문에 따라 기도하는 정도였다. 이때 유대인들이 사용하는
기도는 주기도문과 비슷한 카디쉬(Kaddish) 기도이다.
"주님이 주의 뜻을 따라 창조하신 세상에서 주의 위대한 이름이
높임 받고 거룩하게 되기를 원합니다. 주께서 자의 생전,
제가 사는 동안, 이스라엘의 온 집이 살아있는 동안과 그리고
가까운 장례에 주님의 나라를 세우시옵소서"하는
내용으로 되어 있다.
다른 기도문은 18항목의 축복으로 구성되었다.
18개 항목 출복 기도는 회개,용서,선택에 대한 감사,구원의 소망이
주요 내용으로 들어있다.주어진 기도 내용에 따라 습관적으로
외워서 하는 기도이기 때문에
그들의 기도에는 간절함, 인내, 강청함이 있을 수 없었다.
놀라운 사실은
120명의 합심기도가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오랫동안 가르쳤던
기도의 실천이라는 점이다. 주님께서 인내를 가지고, 지속적으로,
간절하게 강청하는 기도를 하라고 가르치셨다.
주님이 누가복음에서 가르치고 명령한 기도는 간절한 기도,
인내하는 기도, 강청하는 기도, 항상 기도인 것을 우리는
이미 배웠다. 이러한 가르침을 반영하는 어구가 14절에 사용된
"기도에 전혀 힘쎴다" 는 표현이다. 결국 제자들과 초대교회가
주님이 명령하신 기도를 본받기 시작했음을 보여준다.
누가는 이 단어로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가르친
기도를 집약했다고 볼 수 있다.
누가복음 11장이 가르치는 기도와 18장에 언급된 끈질긴
밤낮 항시의 기도를 "기도에 전념했다" 는 표현이 그대로 반영하는
것으로 이해해도 전혀 무리가 되지 않는다.
이런 디고는 초대교회의 일시적인 현상이 아니라 나중에 예루살렘
교회의 행활 특성이 되었다(행2:41). 다시 말해서
이런 기도가 초대교회의 기도의 표준이 되었다는 것이다.
사도 바울은 그의 독자들에게 기도를 권면할 때 마다
이 단어를 사용했다. 이것은 예루샬렘 교회의 최초 합심기도가 온
초대교회의 기도의 본보기가 되었음을 보여준다.
그 내용을 잠시 보면,
소망중에 즐거워하며 환난 중에 참으며 기도에 항상 힘쓰며
(테 프로슈케 프로스칼데룬테스:
te proseuxe proseuxe proskarterountes)
(롬 12:12)
기도를 항상 힘쓰고
(테 프로슈케 프로스칼데룬테스:
te proseuxe proseuxe proskarterountes)
기도에 감사함으로 깨어 있으라(골4:2)
모든 기도와 간구로 하되 무시로 성령 안에서 기도하고 이를 위하여
깨어 구하기를 항상 힘쓰며
(엔 파세 프로스칼데레세이 : en pase proskarteresei)
여러 성도들을 위하여 구하고(엡5:18)
우리는 본문에서
사도들의 기도가 예수님의 기도를 반영하고 있음을 보았다.
이 외에도 우리는 세 가지 면에서 예루살렘 교회의 기도가
철저하게 예수님의 기도를 본받은 것을 알 수 있다.
첫째,
가룟 유다의 빈 자리를 채우기 위해서 두 후보자를 천거하고
기도하는 120문도의 모습을 예수님이 12제자들을 택할 때
하셨던 기도를 반영하고 있다(눅 6:12-13).
사도행전 1장 24-25절에 "저희가 기도하여 가로되
뭇 사람의 마음을 아시는 주여 이 두 사람(요셉과 맛디아) 중에
누가 주의 택하신 바 되어 봉사와 및 사도의 직무를 대신할 자를
보이시옵소서 유다는 이를 버리옵고 제 곳으로 갔나이다" 하는
기도가 나온다. 그들은 이렇게 기도하고 제비를 뽑아
맛디아를 사도로 선정하게 되었다(행1:26)
둘째,
예수님이 기도하실 때 성령이 그 위에 임했던 것같이(눅3:21,22),
120명의제자들이 전혀 기도에 힘쓸 때 성령이 그들에게 임하는
역사가 있었다(행 2:1 이하). 뿐만 아니라 누가복음 11장에서
강청하는 기도를 하는 자에게 하나님께서 성령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신 것가 같이 사도행전 2장에서 간절히 기도하는 사도들과
120문도들에게 성령을 부어주시는것을 그대로 본다.
하나님께서 기도하는 예수님께 성령의 선물을 주셨듯이
기도하는 교회에게 성령이라는 선물을 주셨다.
베드로와 요한이 사마리아 교회를 위해 기도할
때 성령이 임한 사건에도 이 점은 그대로 반영된다(행8:17).
셋째,
에수님께서 기도하는 가운데 그가 성취해야 할 하나님의 뜻과 계획이
분명해 진 것같이 (산상 철야 기도와 감람산 기도에서), 제자들도
간절히 기도하는 가운데 하나님의 말씀을 분명하게 깨달았고
또한 성취해야 할 하나님의 뜻을 명확하게 분별하고
유다의 빈자리를 채워야 한다고 성경을 통해 베드로가
주장하게 되었다(행 1:20,21)
우리는 누가복음과 다른 복음서에도 모자란 사도를 보충하라는
하나님의 별도 지시가 없었다는 사실에 주목한다.
어떻게 제자들이 모자란 사도직을 보충해야 하는지를 알게
되었는가? 그들은 간절한 합심기도를 통해서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게 되었다. 그들의 힘을 합쳐서
기도하는 가운데 그들이 성취해야 항 하나님의 뜻이 그들 마음속에,
특별히 베드로의 마음속에 깨달아진 것이다.
그것도 하늘에서 음성이 들려서 깨달은 것이 아니라
성경의 기록된 말씀을 통해서 깨달게 되었다.
20절 말씀에 기록된 대로 베드로는
시편 69편 25절과 109편 8잘에 근거하여 가룟 유다의
비참한 죽음을 이해하게 되었고, 이 깨달음에 따라 그의 죽음으로
인해 모자란 사도직이 보충돼야 함을 알게 되었다.
베드로가 이 깨달음을 모인 사도들과 나머지 무리들에게
설교를 했을 때 그들은 아멘으로 받아들이고 이에 따라
두 명을 천거하였으며, 이둘을 놓고 기도한 다음에 제비를 뽐았다.
아직 성령님이 그들에게 임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들은
구약적인 방법으로 제비를 뽑을 수밖에 없었다.
제비 뽑는 방법은 성령 강림 이후 더 이상 신약 교회에 사용되지 않았다.
왜냐하면 성령께서 하나님의 뜻에 대한 분별력을
주시기때문이다(행15:28)
우리는 초대교회의 합심기도의 기록을 통해 철저한 기도가
교회의 참된 모습에 얼마나 중요한지 보게 되었다.
이러한 기록을 보면서, 오늘날 한국 교회가 바른 기도에
전념해야 할 것을 깨닫는다.
예수님을 본받아 기도에 전혀 힘쓰는 사도들과 예루살렘 교회가
된것같이 우리 또한 그렇게 되어야 할 것이다.
특히 교회에서 중직을 맡은 일꾼들은 앞장서서
기도의 본을 보여야 할 것이다. 이렇게 될 때 모든 성도들이 그들을
본받아 기도하게 된다. 교회의 합심기도는 각 교회를 향하신
하나님의 계획과 목적을 분별하고 성취하기 위한 것이지,
인간의 사사로운 욕심이나 이상을 위한 것이 되어서는 안 된다.
교회의 온전한 기도를 통해 하나님께서 교회를
통해여 이루시고자 하는 일이 분명하게 되고 또한 이 뜻이
교회 지도자들과 성도들의 손발을 통해서 실행되는 역사가
나타나야 할 것이다.
*2.예루살렘 교회의 네가지 특성 (다음장에서)*
-예수님의 기도로 돌아가자에서-
♡주의 사랑으로 오늘도 행복하십시요♡
בְּרֵאשִׁית בָּרָא אֶלֹהים אֵת הַשָׁמַיִם וְאֵת הָאָרֶץ7개 단어는 구성된 문장은 세상 창조가 완전하였음을 의미합니다. 오늘 (토라 포션=파라샤 פָרָשָׁה) 제목은 베레쉬트 בְּרֵאשִׁית 태초에 (in the begining)입니다. 내용을 보면 천지창조의 내막이 나오고 사람이 만들어 지고, 선악나무의 등장과 거짓으로 유혹하는 사탄이 등장합니다. 사탄은 열심히 거짓으로 유혹을 합니다. '너가 먹어도 죽지 않는다, 먹으면 하나님 같이 된다고 거짓 증거를 합니다' 마치 오늘 사도행전 본문에 스데반을 심판대에 세우고 거짓으로 증거하는 모습과 같습니다. 그리고 토라포션 후반부는 타락한 인간모습이 나타나고 스데반을 돌로 살인하듯이 아벨 형제를 살인하는 가인이 등장합니다. 이처럼 창세 처음부터 인간이 창조됨과 동시에 죄가 들어온 것과 그 결과를 말씀함으로 성경이 어떻게 펼쳐질 것인지를 설명하기 시작하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나누고자 하는 사도행전 본문은 그 당시 스데반 한 인물을 통하여 초대교회의 특성을 보여주고 있고, 또한 악의 세력이 스데반을 어떻게 모함하고 거짓 증거하여 심판대에 세우고 결국 살인하게 되는 첫 단계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오늘날 타락하고 온갖 거짓 뉴스가 넘쳐나고 비진리가 진리라고 우기는 세상에 살아가는
우리같은 믿는 자들 또는 교회 공동체가 어떤 신앙의 모습으로 살아가야 하는지를 스데반을 통하여 가르쳐 주고있습니다. 우리는 사도행전 앞 장에서 예루살렘 초대교회를 통하여 우리가 추구하고 닮아가야 하는 교회는 어떤 프로그램이 아니고 어떤 건물이 아니고 사람이 많고 적고가 아니라 오직 기도와 말씀과 성령 충만한 사람들의 모임인 것을 보았습니다.
더구나 일곱명의 사역자를 세우면서 교회 공동체는 은혜와 권능이 충만함이 있어야 하는 교회 특성을 보았고 그런 대표적인 사람이 오늘 읽은 스데반이었습니다. 그는 교회가 어떠해야 하는지 그 특성을 보여주는 하나님의사람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교회 공동체 각자도 다음과 같은 특성을 지닌 예루살렘 초대교회 교회 공동체를 닮아가게 되기를 축원합니다. 그래서 또 하나의 교회가 아니라 교회의 본질과 특성이 있는 초대 예루살렘 교회 공동체를 닮아가는 그런 우리의 교회 공동체가 되기를 소원하는 바입니다.
1. 은혜와 권능이 충만한 교회
[행 6:8] "스데반이 은혜와 권능이 충만하여 큰 기사와 표적을 민간에 행하니"
우리는 앞전에 6장을 시작하면서 일곱 사역자를 선택할 때 그들이 어떤 인물이어야 하는지를 보았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사람이었고 첫 번째로 안수받은 사역자로 선택되었고 고아와 과부를 돕는 구제사역을 담당하였고 평소에 그들의 신앙의 모습은 성령 충만하였고, 지혜가 충만하였고, 사람들로 부터 칭찬을 받는 사람이었습니다. 비록 사도는 아니었지만 그들 중에는 전도하면서 말씀을 가르치기도 하고 사도들이 행하는 기사와 표적까지도 행하는 은혜와 권능이 충만한 자도 있었습니다. 성경에 기록되지 않았지만 아마 다른 사역자들도 이와같이 성령 충만하였고 은헤와 권능이 있었지 않았나 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왜냐하면 기도와 말씀으로 성령 충만하게 되면 성령의 은사가 나타나고 성령의 열매가 나타나고 은혜가 임하고 권능이 주어지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여기서 눈여겨 보아야 할 점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어떤 직분에 따라 능력을 제한하시는 분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누구든지 성령 충만하고 믿음 충만하면 능력주시는 자 안에서 모든 것을 할수 있도록 은혜 베푸시는 분임을 볼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능력주시면 누구든지 능력을 발휘할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빌립보성도에게 다음과 같이 말씀을 전합니다. [빌 4:13]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어떤 직분이나 타이틀이 능력을 발휘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능력을 주셔야 할수 있는 것입니다. 스데반은 성령 충만하였기에 은혜와 권능이 충만함을 하나님이 부어 주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사도들처럼 능력전도와 큰 기사와 표적을 보여주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초대 교회는 은혜와 권능이 충만한 교회가 되었습니다. 이처럼 우리 교회공동체가 추구해야 할 교회의 모델이 바로 예루살렘 교회 공동체인 것입니다. 거대한 메가처치가 되는 것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은혜와 권능이 충만한 교회가 되도록 추구해 나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면 은혜충만할까? 성경에는 놀랍게도 하나님이 믿는 개인에게 은혜를 주시는 경우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첫째로 겸손한 자들에게 주십니다.
[벧전 5:5] "젊은 자들아 이와 같이 장로들에게 순종하고 다 서로 겸손으로 허리를 동이라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대적하시되 겸손한 자들에게는 은혜를 주시느니라" 사도 베드로는 은혜 받는 비결을 교만하지 말라고 말씀합니다.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기 때문입니다. 내가 뭔가 잘했다고 자기 자랑하고 남을 업신여기고 뽐내는 자는 교만한 자입니다. 그런 자는 하나님이 은혜는 커녕 도리어 대적하신다고 말씀합니다. 우리도 뭔가 잘 되면 교만하기 쉽습니다. 그래서 항상 조심해야 합니다. 그러나 겸손한 자에게는 은혜를 베푸신다고 말씀합니다. 다른 사람을 존중하고 나보다 낫다고 생각할 때 겸손해 집니다. 겸손한 우리 모두 되어 은혜 받기를 축복합니다.
둘째는 하나님 보좌 앞에 나가는 자입니다. [히 4:16] "그러므로 우리는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 예슈아께서는 우리가 연약하여 하나님의 보좌 앞에 나가기가 어렵다는 것을 아십니다. 그래서 친히 통로가 되어 주셔서 우리가 그 보좌 앞에 나갈수 있도록 은혜를 베풀어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를 긍휼이 여기시는 대제사장 예슈아께서 살아 계시기 때문에 연약한 우리는 담대하게 은혜를 얻기위해 하나님의 보좌 앞에 나아갈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 처럼 하나님께 나아갈 때 우리는 은혜를 받습니다. 이 은혜는 때를 따라 돕는 은혜라고 합니다.
얼마나 좋은 은혜입니까? 필요할 때마다 주시는 은혜인 것입니다. 이 은혜를 얻기 원합니까? 그렇다면 보좌 앞에 나아갑시다. 예배드리는 자리에 항상 있기를 바랍니다. 저와 여러분에게 이런 은혜가 즉, 때를 따라 돕는 은혜가 임하기를 축복합니다. 예루살렘 교회 공동체에 이러한 은혜가 충만하였다는 것입니다. 성도들이 겸손하였고, 기도로 예배로 항상 주님 앞에 나아가는 자들었습니다. 그러므로 은혜와 권능이 있는 우리 교회 공동체가 되길 축복합니다.
2. 믿음이 충만한 교회
[행 6:5] "온 무리가 이 말을 기뻐하여 믿음과 성령이 충만한 사람 스데반과 또 빌립과 브로고로와 니가노르와 디몬과 바메나와 유대교에 입교했던 안디옥 사람 니골라를 택하여"
일곱 사역자를 택하는데 믿음과 성령이 충만한 자들을 택하였다는 것은 그 일곱명 외에도 예루살렘 교회 공동체에는 정도의 차이는 있었지만 믿음과 성령 충만한 자들이 주류를 이루고 있었음을 볼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초대 예루살렘 공동체의 특성은 믿음 충만하였고 성령 충만하였다는 사실입니다. 특별히 믿음이 충만하였다는 뜻은 기사와 표적이 나타나는 그런 믿음이라는 것입니다. 예슈아는 다음과 같이 믿는 자에게 나타나는 표적을 말씀하셨습니다. [막16:17-18] "믿는 자들에게는 이런 표적이 따르리니 곧 그들이 내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새 방언을 말하며, 뱀을 집어올리며 무슨 독을 마실지라도 해를 받지 아니하며 병든 사람에게 손을 얹은즉 나으리라 하시더라"
믿는 자들은 교회의 지체입니다. 믿는 한 사람 한 사람이 교회입니다. 한 사람의 믿음의 행동으로 전체 교회가 어떤지를 보여 줍니다. 그래서 스데반을 통하여 초대 교회가 어떤 교회인지 가르쳐 줍니다. 은혜와 권능이 충만한 교회이고, 믿음이 충만한 교회인 것입니다. 기사와 표적이 나타나는 교회였습니다. 또한 빌립을 통하여 초대 교회가 어떤지 보여 줍니다. 전도하는 교회, 말씀을 가르치는 교회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은 다양하기 때문에 그 영역을 정하기가 어려운 속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믿는 사람마다 다양하게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예슈아의 이름에 능력이 있음을 믿습니까? 귀신을 쫓아낼수 있습니다. 병든 자에게 손을 얹고 기도하면 병이 달아납니다. 방언을 말하며 바울처럼 뱀에 손가락이 물려도 해를 입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믿는 자에게 이러한 초 자연적인 현상이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일곱 사역자를 택한 초대 교회는 믿음이 충만한 교회였고 초 자연적인 놀라운 역사가 예슈아의 이름으로 나타나는 것임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믿음이 식어가는 오늘날 우리는 초대교회 성도들 처럼 믿음이 충만한 저와 여러분이 되길 축복합니다. 그래서 손을 얹은즉 병이 낫고 귀신이 떠나가고 방언을 하고 온갖 기사와 표적이 나타나기를 축복합니다.
3. 지혜와 성령으로 대처하는 교회
[행 6:9-10] "이른 바 자유민들 즉 구레네인, 알렉산드리아인, 길리기아와 아시아에서 온 사람들의 회당에서 어떤 자들이 일어나 스데반과 더불어 논쟁할새, 스데반이 지혜와 성령으로 말미암아 그들이 능히 당하지 못하여"
놀랍게도 5개 지역에서 온 유대인들이 각자 나름대로 회당을 이루고 있었는데 아마도 스데반이 방문한것 같습니다. 초청을 해서 간 것이 아니라 복음의 빚진 심정으로 예슈아의 도를 전하려고 방문한 것으로 판단되어 집니다. 특히 스데반을 반대하는 뚜렷한 이유가 없이 무조건 논쟁하면서 한 마디로 시비를 걸면서 스데반의 가르침이 틀렸다는 것입니다. 자기들의 생각이나 노선이 다르면 무조건 반대하는 그런 부류들이었고, 모두 다 외곽 지역에서 살다 온 디아스포라 유대인이라는 점이 특이합니다. 그렇지만 스데반은 지혜와 성령이 충만하여 그들의 어리석은 주장들을 잠잠하게 만들었더니 심한 반발이 일어난 것입니다. 성령의 능력과 지혜로 말하면 당할 사람이 없습니다. 그러자 반대하는 무리들은 안 되겠다 생각했는지 사람을 매수하여 거짓증언을 시작합니다.
[행 6:11] "사람들을 매수하여 말하게 하되 이 사람이 모세와 하나님을 모독하는 말을 하는 것을 우리가 들었노라 하게 하고" 5개 지역에서 온 유대인들이 완전히 스데반의 말을 곡해하고 거짓증언을 세워서 스데반을 공격하기 시작합니다. 이처럼 사탄의 술책은 창세 때도 그랬지만 거짓말로 하나님의 말씀을 대적하고 비 진리를 진리인양 만들어 버립니다. 이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진리의 복음을 전하는 스데반을 이단으로 간주하고 비 진리로 몰아세워 자신의 주장을 관철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생각해 보아야 할 점이 있습니다.
모세가 전해준 토라의 말씀을 확실히 알지 못하고 이해하지 못하면 어렴풋이 알고 있으면 사람을 매수하여 악한짓을 하려는 유대인들처럼 사탄에게 틈을 내어 줄수 있다는 것입니다. 결국 5개 지역에서 온 유대인들은 토라 말씀을 제대로 이해하고 알지 못하니까 스데반이 전한 메시야를 깨닫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토라에서 분명히 모세가 나같은 선지자를 일으킨다고 말했는데 이 선지자가 예슈아이고 하나님이 보내신 메시야라는 사실을 눈이 가려 깨달을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논쟁을 일삼다가 꾀를 내어 사람을 매수하는 악한 행동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복음에 대하여 성경말씀을 분명히 알고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을 대적하는 일에 동조하거나 말려들지 않습니다. 성령께서 지혜를 주심으로 말씀을 전해야 합니다. 논쟁을 하더라도 성령의 지혜로 임할 때 승리할 수 있습니다. 오늘날 교회가 지혜와 성령으로 대처하지 않다 보니 미국에 많은 교단들이 동성애를 옹호하는 쪽으로 기울어진 것같이 그렇게 타협하고 만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지혜와 성령으로 예슈아를 증거하는 우리 공동체가 되기를 축복합니다.
4. 예슈아로 인하여 핍박받는 교회
[행 6:12-13] "백성과 장로와 서기관들을 충동시켜 와서 잡아가지고 공회에 이르러, 거짓 증인들을 세우니 이르되 이 사람이 이 거룩한 곳과 율법을 거슬러 말하기를 마지 아니하는도다"
5개 지역에서 온 유대인들이 지금 적당한 선에서 그치지 않습니다. 논쟁에서 패배감을 맛본 나머지 복수의 감정으로 이제는 다른 동조자를 끌어 드립니다. 그 사람들이 백성과 장로와 서기관들입니다. 그들의 권세를 이용하여 재판에 회부하여 스데반을 심판하고자 합니다. 이처럼 교회는 예슈아의 복음을 전하고 진리를 사수하다 보면 핍박이 오고 어려움이 옵니다. 심지어는 죽임을 당할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스데반을 처형하고자 하는 마귀의 본색이 그들에게 나타납니다. 온갖 권모술수를 사용하여 거짓 증인을 세우고 심판하고 처형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증인이 있어야만 처형할수 있기 때문에 거짓증인을 세웁니다. 그 거짓말은 다음 절에 나옵니다.
[행 6:14] "그의 말에 이 나사렛 예슈아가 이 곳을 헐고 또 모세가 우리에게 전하여 준 규례를 고치겠다 함을 우리가 들었노라 하거늘" 이 말을 가만히 보면 예슈아께서 말씀하신 것을 오해하고 있습니다. [요 2:19] "예슈아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 바로 이 말씀을 좀 생각하지도 않고 말그대로 받아들여 문제를 삼고자 하는 것입니다. 거룩한 곳을 거슬리어 말하였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지금 스데반을 잡아놓고 예슈아의 말씀을 책 잡고 정죄하여 스데반에게 뒤집어 씌우려고 하는 의도를 볼수 있습니다.
사실 이 말씀은 성전된 예슈아 자신의 몸을 이야기하는 것이고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는 부활을 이야기하는 것인데도 완전히 곡해하여 이것을 트집잡아 스데반을 신성모독 죄로 처형을 시키려고 하는 것입니다. 예슈아께서도 그렇게 해서 십자가에서 처형을 당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데반은 흔들림이 없었습니다. [행 6:15] "공중 중에 앉은 사람들이 다 스데반을 주목하여 보니 그 얼굴이 천사의 얼굴과 같더라" 이러한 처형의 위기속에서도 스데반은 흔들림이 없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정죄 당하는 스데반을 보니 그의 얼굴은 천사와 같았다고 합니다. 담대함과 기쁨과 평안함이 그의 얼굴에 나타난 것입니다. 이것이 성령과 지혜 충만한 자의 모습인 것입니다.
우리 공동체 식구 여러분! 핍박이 오더라도 흔들리지 않고 지혜와 성령충만함으로 이겨내는 저와 여러분이 되기를 축원합니다. 얼굴이 천사의 얼굴을 가진 우리 모두 되길 축복합니다. 초대 예루살렘교회는 은혜와 권능이 충만한 교회 믿음이 충만한 교회 지혜와 성령으로 대처하는 교회 예슈아로 핍박받는 교회였습니다. 우리가 추구할 교회이고 닮아가야 할 교회인 것입니다.
11월 27일(목) 사도행전 1-3장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일백이십명(1:15)
모인 무리의 수가 한 일백 이십 명이나 되더라 그 때에 베드로가 그 형제 가운데 일어서서 가로되. In those days Peter stood up among the believers (a group numbering about a hundred and twenty)
고린도전서 15:6 그 후에 오백여 형제에게 일시에 보이셨나니 그 중에 지금까지 태반이나 살아 있고 어떤이는 잠들었으며. After that, he appeared to more than five hundred of the brothers at the
same time, most of whom are still living, though some have fallen
asleep.
예수를 믿는 것도 중요합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예수를 믿되 성령 충만함을 유지하는 믿음이라고 하겠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던 사람들의 수를 사도 바울은 오백명이라고 강조합니다(고전 15:6). 그런데 부활하신 예수님을 목격했던 그 많은 사람들(오백명) 중에서 성령 충만함을 받은 사람은 백이십명 뿐이었다고 합니다. 백분율에 따라 환산하면 대략 24%라고 하겠습니다.
이와같은 비율을 오늘의 시대에 적용한다면 만일 교인들의 수가 100명이라고 할 때 그 중에서 성령 충만한 신앙의 사람들은 24명 뿐이라고 하겠습니다.
사회학자들의 이론에 의하면 어느 사회이든지 그 사회의 구성원 중에서 신앙을 갖게 되는 최대치의 수가 전체 인구 중에서 25%를 넘어갈 수 없다고 합니다. 어느 종교가 국교가 되지 않을 때 나타나는 현상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종교가 국교가 될 때는 그 상황이 다르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기독교의 신앙이 한 나라에서 전체 인구의 1/4(25%)이 되었다는 것은 최대치에 올랐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러한 최대치의 숫자를 더 높일 수 있는 방법은 모두가 성령으로 충만하게 무장할 때에만 가능하다고 하겠습니다.
한국교회의 현상이 그 좋은 사례가 됩니다. 2024년 기준으로 전체 인구 약 5,155만명 중에서 기독교인의 비율은 약 17%(약 876만 명)이며 실질적인 교회 출석인 수는 약 700만명 내외라고 합니다(목회 데이터연구소 & 지앤컴리서치 공동조사 결과).
한 때는 전체 인구의 1/4이 기독교인이라고 자랑했었지만 점점 더 그 수가 줄어들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인구의 고령화 및 젊은 세대의 이탈이라고 합니다.
이러한 환경에서 미래 교회의 소망은 성령 충만한 그리스도인의 삶을 회복하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대한민국 기독교 인구 (2024년 기준)
- 전체 인구: 약 5,155만 명
- 기독교인 비율: 약 17%
- 추정 인구 수: 약 876만 명
- 이 중 실질적인 교회 출석 인구는 약 700만 명 내외로 추정됨
📉 참고로, 향후 25년간 한국의 기독교 인구는 265만 명 감소하여 560만 명 수준이 될 것으로 예상되고 있어요. 특히 젊은 세대의 이탈과 고령화가 주요 원인으로 지목되고 있습니다.
- 이 수치는 목회데이터연구소와 지앤컴리서치가 공동 조사한 결과로, 2023년 10월~2024년 1월 사이에 전국 5,451명을 대상으로 실시된 설문을 기반으로 합니다.
- 참고로, 실질적인 교회 출석 인원은 약 700만 명 내외로 추정되며, 이단 포함 여부나 ‘가나안 성도’(교회에 출석하지 않는 신자) 등을 고려한 수치입니다.
♦ 11월 27일(목)
♦ 본문 / 사도행전 1~3장 ♦ 주제 / 일백 이십 명(1:15) ♦ 성구 / 모인 무리의 수가 한 일백 이십 명이나 되더라 그 때에 베드로가 그 형제가운데 일어서서 가로되.
예수님의 부활을 직접 목격했던 사람들은 오백 명이었다고 사도 바울은 증거합니다(고전 15:6).
그런데 부활하신 후 하늘로 올라가시며 ‘아버지의 역속하신 것을 기다리라’고 하셨을 때 그 말씀을 듣고 약속을 기다렸던 사람들은 일백 이십 명이었다고 합니다.
오백 명과 일백 이십 명 백분율에 의하면 대략 24%라고 하겠습니다.
사회학자들의 연구 결과에 의하면 어느 사회에서 특정 종교가 국교가 아닐 경우 어떤 종교를 신뢰하는 수가 전체 인구의 1/4 즉 25%가 최대치라고 합니다.
이런 수치가 사도행전에 의해서도 정확하게 예견된 사례라고 하겠습니다.
부활을 목격했던 무리들의 수가 500명이었지만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그 말씀에 따라 한 자리에 모여서 가르침을 따라 순종했던 무리들은 120명 뿐이었다고 합니다.
한국교회는 선교 100주년을 맞이하면서 전체 인구의 1/4 즉 25%가 기독교인이 되었다며 선교 역사상 놀라운 업적을 이루었다고 자랑했었습니다.
그러나 그 후에 나타난 현상을 목회데이터 연구소와 지앤컴리서치가 공동 조사한 결과에 의해서 이렇게 듣게 됩니다.
2024년 조사 결과에 의하면 전체 인구 약 5,155만 명 중에서 기독교인의 비율은 약 17%라고 합니다. 17%의 수는 약 875만명입니다. 더구나 실질적인 교회 출석 인구는 대략 700만명 내외라고 합니다.
이러한 현상에 따라 향후 25년간 한국의 기독교 인구는 265만 명 감소하여 560만 명 수준이 될 것으로 예상된다고 합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활동하셨던 그 빈 자리를 성령 충만한 120명의 무리들이 채우고 복음의 증인이 되었던 것처럼 오늘날도 교회에 출석을 자랑하는 교인이 아니라 일상생활에서 예수 복음을 증거할 수 있는 세상의 소금과 빛이 될만한 성령 충만한 믿음의 성도들에 의해서 세상을 변화시켜야 하겠습니다.
오 주님 표면적인 수를 자랑할 것이 아니라 내면적인 수를 세워가는 일에 앞장 서게 하옵소서
수억원짜리 기계가 있어도 전기 코드를 꽂지 않으면 아무런 소용이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3년반 동안 이 땅에 오셔서 남겨 놓으신 것이 있다면 12제자를 가르 치시고 훈련 시키신 일입니다. 제자들 가운데서 베드로를 보십시요. 아주 좋은 기계와 비교할 수 있습니다.
갈릴리에서 예수님을 처음 만났을 때,그는 배를 버려두고,그물도 버리고 가족을 버리고 단숨에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3년 반동안 주님을
쫑으면서 매사에 앞장을 섰습니다. 수많은 예수님이 행하신 모든 이적의 현장에 참여했습니다. 죽은자를 살리시고 천국 복음을
증거하시므로 수많은 사람들이 회개하고 돌아오는 것을 목 격했습니다. 그리고 천국 복음을 땅끝까지 증거해야 한다는 사명도
받았습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이 때까지도 성령의 충만함을 받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부탁하신 말씀은 [성령이 임하시면 권능을 받고 예루살 렘과 유다와 사마리아 땅끝까지 이리러 증인이 되는 것]이었습니다. 성령을 받지 못한 제자들은 아직도 땅에 속했고,육신에 속했고,자기 자신의 것 이었습니다. 그래서 제자들에게는 성령의 충만함이 필요했습니다. 성령충만은 받아도 되고, 안 받아도 되는 것이 아닙니다. 성령충만은 구하지 않아도 주시는 것이 아니라, 기도하고 매달려 구해야 주시는 것입니다. 우리도 예수님의 명령을 믿고, 매달려 간구해서 성령충만을 받은 120문도들처럼 기도하는 성도들이 됩시다.
무엇을 구해야 할까요
고린도전서 12:4-10절을 보면 9가지 은사가 나옵니다. 또 갈라디아서 5:2-23절 에 보면 성령의
9가지 열매가 나옵니다. 이것을 구분하면, 하나님을 위한 3가지 은사와 열매, 이웃을 위한 3가지 은사와 열매, 자신을 위한 3가지
은사와 열매라 고 할수 있습니다.
이것을 우리가 모두 하나님께 구해서 받아야 할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아주 좋은 축복이요, 은혜인데도 우리는 그 것을 외우지도 못합니다. 그것을 달라고 매일 기도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 좋은 것을 입에 늘 달고 다니며, 늘 마음 속에 묵상하며 살았다면, 눈을 감고도 줄줄 외웠을 것입니다. 이제부터 우리는 이 말씀을 늘 마음에 두고 시간마다 기도하며,은사와 능력을 받아 주님의 충성스러운 증인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성령강림절… 마가의 다락방 오지 않은 480여 명은 어디에
부활 후 예수님 직접 목격한 숫자는 600여 명 오순절 마가의 다락방에 모인 숫자, 120여 명 예수님 승천 후 10여일만에 사라진 480여 명 2,000년 후 우리, 성경 부지런히 읽고 준비를
들어가는 말
오순절은 예수님 부활 후 50일째 되는 날을 말합니다. 120문도가 마가 다락방에 모여 기도할 때, 예수님께서 약속하신 성령이 하늘에서 내려와 각인의 머리에 임한 날이기도 합니다.
이후 여기에 모였던 사람들은 능력을 받아 전혀 배우지 않았던 각종 언어로 방언을 하였습니다. 또 베드로는 성령이 충만하여
설교를 할 때 한 번에 수천명이 회개를 하였습니다. 성령이 불꽃처럼 또 바람처럼 내린 이날, 비로소 교회 시대가 시작된 것입니다.
구약에서는 이 날을 ‘칠칠절’이라고도 부르는데 초실절로부터 칠칠(7x7=49), 즉 49일이 지난 그 다음 날입니다. 이 날은 초실절에서 시작한 추수가 모두 끝나는 날로 이스라엘 백성들은 수확한 십일조를 가지고 성전으로 갑니다. 그러나 이 날이 가지고 있는 더 중요한 의미는 이스라엘이 탄생한 날이라는 점입니다. 즉 이 날은 모세가 시내산에서 율법을 받은 출애굽후 50일째 되는 날로, 하나님과의 언약을 통하여 비로소 이스라엘이라는 국가가 탄생하였습니다.
2천 년 전에 무슨 일이?
이처럼 오순절은 구약에서는 이스라엘이라는 나라가 건국된 날, 또 신약에서는 교회가 시작된 날로 구속사에서 매우 중요한 날입니다. 그러나 성령강림절을 맞이하여 한 가지 우리가 심각하게 생각하여 볼 문제가 있습니다. 사도행전 1장 15절에 보면 마가 다락방에 모인 사람이 120여 명이나 되었다고 기록돼 있지만, 과연 이 숫자는 충분한 숫자일까요?
개역개정은 “모인 무리의 수가 약 백이십 명이나 되더라”라고 번역하고 있지만 이는 잘못된 번역입니다. 원어 성경에는 “약
120여명 정도가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지 “약 120명이나 되는 (많은) 무리가 있었다고 기록하지는 않았습니다. 즉 누가가
사도행전을 기록할 때 120명이라는 숫자가 작은 것인지 큰 것인지 구체적으로 언급하고 있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한글성경은 마치 누가가 많은 무리가 모였음을 강조하고 있는 것 같이 번역하고 있습니다. 이에는 부정적이든 긍정적이든
분명 원어와 상관없는 번역자의 어떤 의도가 개입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글을 다 읽게 되면 ‘120명이나’가 아니라
‘120명밖에’라는 뜻이 담겨있을 지도 모른다는 것에 동의할 것입니다.
먼저 예수님은 유월절 어린 양으로 십자가에 달리시고, 또 부활의 첫 열매로 초실절(안식일 다음 날) 즉 주일 새벽
부활하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부활 후 40일간 이 땅에 머물면서 많은 사람들에게 나타나셨습니다. 고린도전서에 나타난 바울의
증거에 따르면, 약 600여 명의 사람들을 만난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고전 15:4-8).
1. 열두 제자 2. 오백 형제 3. 야고보(예수님 동생) 4. 모든 사도(70문도) 5. 바울
바울은 예수님을 승천 이후 다메섹 도상에서 만난 것과 또 막달라 마리아 등 복음서에 나오는 인물 등을 고려하면, 예수님이 부활 후
40일 동안 이 땅에 머무시는 동안 나타나셨던 사람들은 모두 600여 명쯤은 됐으리라 추정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들을
만나신 후 40일째 되는 날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는 말씀과 함께, 제자들이 보는 가운데 승천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승천한 날부터 이들은 마가 다락방에 모여 마음을 같이 하며 기도에 힘을 썼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오순절 때 모인 무리의 수가 120여 명밖에 안 됐다는 점입니다.
40일간 약 600여 명의 무리가 예수님의 부활체를 직접 눈으로 보았는데, 정작 예수님의 명령에 따라 10일이라는 짧은 시간 동안 마가 다락방에 모여 기도한 사람들은 불과 120여 명밖에 안되었습니다.
나머지는 어디로?
성령이 내린 것은 예수님이 승천하신 후 불과 10일 뒤입니다. 예수님이 죽으셨다가 다시 부활하신 것을 본 이들 480여 명은
예수님이 승천하신 후 불과 10일밖에 안되는 짧은 시간에 “기다리라”는 명령을 잊어버리고 (혹은 무시하고) 다시 세상으로 나간
것입니다.
그 결과 이들은 “말세에 하나님의 영을 모든 육체에게 부어 주리라”는 요엘 2장 28-32절 예언이 실현되는 역사적 현장에 참여하지 못하게 됐습니다.
어떤 학자들은 이것을 빗대 예수님 재림 때도 기독교인들 중 약 20%만(즉 600여 명 중 120여 명)이 구원을 받게 될
것이라 주장합니다. 각 교회로 본다면 교인 5명 중 1명꼴로 구원을 얻을 것이라는 주장입니다. 물론 이것이 정확한 하나님의 뜻인지
우리는 알 수 없지만, 이런 추론이 우리에게 분명하게 전해주는 메시지는 있습니다.
예수님도 “인자가 다시 올 때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고 말씀하셨습니다. 불의한 재판장을 매일 찾아와서 원수를 갚아 달라고
귀찮게 하는 과부 이야기(눅 18:1-8)는 “항상 기도하고 낙심하지 말아야 할 것”을 예수님이 비유로 가르치신 예화입니다.
이 예화는 눈으로 예수님의 부활체를 보고도 단 10일도 견디지 못하고 교회를 떠난 480여 명에게, 또 현대의 우리에게 교훈이 될 만한 이야기입니다.
이들에겐 잠시 혹했던 부활 이야기, 영생 이야기, 천국 이야기가 그렇게 큰 매력이 없었던 모양입니다. 천국 혼인잔치에
초대받은 신하들처럼 살진 소를 잡고 모든 것이 준비된 잔치에 가는 대신, 이들은 각자 자기 사업을 위하여 또 자기 밭으로 일을
하러 갔던 것입니다(마 22:1-14). 그 결과 이들은 천국잔치에 초청을 받았지만 그러나 택함을 입지는 못하였습니다.
오순절을 보내며
우리는 예수님의 부활체도 보지 못하고 그의 구세주 되심을 믿고 있습니다. 2천 년 전과 비교하여 볼 때 우리의 객관적 신앙 조건은 분명 이들보다 훨씬 더 나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사도들이 기록한 성경만 보고 ‘예수님이 나를 위해 돌아가심’과 또 ‘죽은지 사흘만에 부활하심’을 믿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습관처럼 입술의 고백은 할 수 있을지언정, 복음을 위하여 목숨까지 내놓았던 열두 사도처럼 실천하는 신앙을 갖기는 결코 쉽지
않습니다. 요즘 주변 신앙인들을 보면 입술의 고백이 마치 무슨 주문을 외우고 있는 것처럼 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드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보고도 못 믿었던 480여 명을 생각하면, 보지 않고 믿어야 하는 우리는 그만큼 더 노력을 하여야 합니다.
부활체를 보고도 못 믿었던 사람들은 분명 부활체가 가지는 의미를 정확히 몰랐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들에겐 밭에 가고 시장에 가는 것이 부활 잔치에 참여하는 것보다 더 중요하게 보였을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보지 못하고 믿어야 하는 우리들은 지금부터라도 부활이 가지는 의미를 정확히 알아야 합니다.
기독교 신앙의 핵심에는 성경이 있습니다. 기독교가 다른 종교와 구별되는 것은 예수님과 공생애를 함께 한 사도들에 의한 증언이 기록된 성경이 있다는 점입니다. 즉 기독교 신앙의 기초에는 사도들의 증언이 핵심을 차지한다는 점입니다.
480여 명은 예수님의 부활체를 만나보고도 믿는 특권을 포기하였지만, 우리는 성경 기록만을 통하여 예수님을 알아 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부지런히 성경을 읽는 것은 기독교인들의 선택이 아니라 필수입니다. 예수님과 함께 공생애 3년을 보내고 또 죽음과 부활을 직접 목격한 사도들의 한결같은 증거에 힘입어 오늘날의 기독교가 존재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위하여 하신 일과 또 미래를 향한 약속에 대하여 먼저 자신이 잘 알 뿐 아니라, 남들에게도 증거할 수 있는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합니다(벧전 3:15-16).
너희 마음에 그리스도를 주로 삼아 거룩하게 하고 너희 속에 있는 소망에 관한 이유를 묻는 자에게는 대답할 것을 항상 예비하되 온유와 두려움으로 하고. 선한 양심을 가지라 이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너희의 선행을 욕하는 자들로 그 비방하는 일에 부끄러움을 당하게 하려 함이라.
천국 잔치
예수를 따르는 무리들에게 한 가지 즐거운 소식은,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다는 점입니다(요 14:2). 다만 그곳에 거할 수
있는 사람이 많지 않을 것 같아 안타까울 뿐이지만, 그곳에서의 삶은 우리가 상상할 수조차 없는 즐거움이 넘치는 곳입니다. 그래서
천국은 잔치에 자주 비유됩니다.
예를 들면 천국에서 벌어질 하나님의 잔치에는 지금까지 먹어보지 못한 온갖 산해진미가 등장할 것입니다.
만세 전부터 예비해 놓으신 이 잔칫상에는 온갖 귀한 것들이 등장하는데, 이사야 25장 6절은 이를 좀 더 구체적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골수가 가득한 기름진 것과 오래 저장하였던 맑은 포도주”가 바로 그것입니다.
현대인들이 보면 별로라고 생각할 수 있겠지만, 고대 이스라엘에서 맛볼 수 있는 최고의 음식을 비유로 기록한 것입니다. 오래
묵은 포도주일수록 좋다는 것은 모든 사람이 공감하지만, 골수가 가득한 것은 약간 거부감이 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표현은 이사야서가 쓰여졌을 당시 최고 음식에 대한 이미지 표현이기 때문에 부정적으로 볼 필요는 없습니다.
고대에는 기름이 살코기보다 더 비쌌다는 사실을 잘 모르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등급이 높은 한우일수록 기름이 많으며 또 기름이
많을수록 고기도 더 맛이 있습니다. 구약 제사 때 향기로운 냄새를 내며 타는 고기 기름은 오직 하나님에게만 드려야 했습니다.
따라서 ‘피’는 물론 ‘기름’도 하나님의 것이기 때문에 먹지 말라고 레위기 3장 16-17절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세상의 좋은 포도주도 값으로 따지기 어려운 경우가 많습니다. 하나님이 준비하신 오래 묵은 맑은 포도주는 이미 예수님께서 가나 잔치
때 선을 보이셨습니다. 술 취한 사람들이 마셔도 맛을 구별할 정도이니 그 포도주 맛이 어떠하였을지 조금은 짐작이 갑니다.
120문도
예수님은
어찌하여 120명의 문도를 세웠던고? 아담부터 노아까지 10대요, 노아부터 야곱까지 12대입니다. 이 2천년 전부를 대신한
종적인 결실체가 야곱의 12아들이기 때문에 예수님은 종적인 12수를 중심삼았습니다. 노아부터 야곱까지의 12대와 노아부터
아담까지의 10대를 대표하는 수를 갖추기 위하여 12수에 10을 승하니 120이 나온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무엇이냐 하면,
복귀하기 위한 전체 수를 대표한 수였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지난날 여러분을 대해 전도하라는 말을 많이 했던 것입니다.
인간은 땅 위에 사는 동안 120명을 전도하고 가야 됩니다. 그것을 못 하겠으면 12사람이라도 전도해야 됩니다. 12사람을
전도하되 그 12사람만이면 안됩니다. 120명 전도는 못 했지만 횡적으로 120명을 만들 수 있게끔 해야 됩니다. 즉 120명이
횡적으로 화(和)할 수 있게라도 해야만 복귀의 사명을 이룰 수 있습니다.(1959.01.04, 전 본부교회)
모세노정이
예수님의 노정이요, 예수님의 노정이 우리들의 노정입니다. 모세가 12지파와 70장로를 중심삼고 60만 대중을 거느려 나왔고,
예수님께서도 12사도와 70장로, 120문도를 중심삼고 역사하셨는데, 이스라엘 민족이 함께 움직여 나왔더라면 예수님께서는 세계적인
발판을 잡아 가지고 출발할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을 민족이 받들어 드리지 못한 연고로 예수님께서는 뜻을 이루지
못하시고 십자가에 돌아가셨습니다.(1959.01.04, 전 본부교회)
오늘날
재탕감시대(再蕩減時代)에 있는 우리들은 어떠한 사명을 해야 되는가 하면, 서로 단결하여 셋이 12명을 이루고, 12명이
120명을 이루고, 120명이 60만, 그 이상까지 움직여낼 수 있는 때를 만들어야 되겠습니다. 그것을 만들어 놓아야만 하나님의
전체적인 섭리를 중심삼아 하늘이 전권적인 행사를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여러분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래야 민족을 지나
국가적인 단계에까지 나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들은 앞으로 소망의 한 때를 바라보며 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소망의 한 날을 위하여 준비해 나가야 된다는 것입니다.(1959.01.04, 전 본부교회)
세계 역사를 바꾼 마가 다락방 기도
"여자들과 예수의 어미니 마리아와 예수의 아우들과 더불어 마음을 같이하여 오로지 기도에 힘쓰더라" (행 1:14)
죽음에서 부활하신 예수께서는 이 땅에서 40일을 더 계시다가 모든 제자들이 보는 가운데 감람산에서 승천하셨다. 예수께서는
마지막 승천하시기 직전에 제자들에게 당부하신 것은 예루살렘으로부터 시작하여 땅 끝까지 이르러 그리스도의 증인이 되라는 복음전도의
사명이었다. 그러나 당시 제자들은 땅 끝까지는 고사하고 예루살렘 한 모퉁이도 제대로 감당할 수 없는 나약한 존재들이었다. 모두가
두려워 문을 안에서 걸어 잠그고 바깥출입도 제대로 할 수 없었던 인물이었다. 그런데 이러한 제자들이 예루살렘 거리로 뛰쳐나가
복음을 전파함으로 새로운 역사를 시작하였다. 세계 역사를 바꾸어 놓은 전환점은 마가의 다락방에서 있었던 기도 때문이었다. 사도행전
1장은 성령강림이 있기 전 마가의 다락방에 120명이 모여 기도하였던 모임을 자세히 소개하고 있다.
마가의 다락방 기도의 특징은 그곳에 모인 사람 모두가 마음을 같이하여 전혀 기도에 힘썼다는 점이다. 모인 사람은 모두
120명이었는데, 예수의 제자들을 비롯하여 예수님을 따랐던 여자들과 예수의 모친 및 예수의 아우들이 포함되어 있었다. 예수의
무덤까지 찾아갔던 신실한 여자들이 있는가 하면, 겟세마네 동산에서 체포된 예수를 버리고 도망친 제자들, 예수를 전혀 믿지 않았던
예수의 아우들 등 전혀 다른 성격의 사람들이었다. 이렇게 다양한 배경의 사람들이 마음을 같이하여 전혀 기도에 힘씀으로 새로운
역사가 시작된 것이다.
하나님의 역사는 마음을 같이하는 것에서 시작된다.
마음이 분산되면, 하나님의 역사가 이루어지기 보다는 마귀가 그 틈을 타고
들어와 하나님의 계획을 망쳐버린다. 예수께서 예배보다 더 중요하게 여기신 것이 형제와의 화해였다. “예물을 제단에 드리다가 거기서
네 형제에게 원망들을 만한 일이 있는 줄 생각나거든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려라”(마 5:23-24)
형제와의 갈등이 있으면 하나님께 온전한 예배를 드릴 수 없다는 것이다. 반면에 형제가 연합하여 하나가
되는 것은 하나님께서 흡족하게 여기실 뿐 아니라 사람들을 행복하게 만들어 준다.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함이 어찌 그리 선하고
아름다운가”(시 133:1) 여기에서 '선하다'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토브'는 하나님의 목적과 계획에 일치한다는 뜻이고,
'아름답다'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나임'은 기분이 상쾌하다는 의미이다.
마가의 다락방에서 어떻게 서로 다른 배경의 사람들이 한 마음으로 기도할 수가 있었을까? 무엇보다도 기도하지 않으면 안 될
막다른 부정적 상황 때문이었다. 때로 하나님께서는 새로운 역사를 만드시기 위하여 절박한 상황 속으로 우리들을 몰고 가시기도 한다. 출애굽 직전의 이스라엘은 요셉을 알지 못하는 바로의 억압으로 큰 위기에 직면하였다. 극도의 고난 속에서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향하여 부르짖기 시작하였고, 그러한 부르짖음은 시내산에서 모세를 부르시는 하나님의 응답으로 나타났다. 출애굽의 위대한 역사는 모진
고난 속에서 하나님을 향해 부르짖음으로 시작되었다. 마가의 다락방 기도 역시 달리 어찌할 수 없는 위기 상황 속에서 이루어졌다. 그런 상황은 다음 네 가지로 정리할 수 있다.
1.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인 유대인에 의한 박해의 열기가 아직 식지 않았음 2. 예수께서는 갈릴리 출신의 제자들에게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라고 하심; 이들에게 예루살렘은 낮선 외지였음 3. 그동안 든든하게 의지가 되었던 예수께서 제자들을 떠나 승천하셨음; 감람산에서 승천하시는 예수를 바라보고 있던 갈릴리
사람들은 다시 오실 주님을 고대하는 감격보다는 지금까지 자신들을 책임지셨던 예수를 잃어버린 허탈감이 더 컸을 것임 4. 예루살렘으로부터 시작하여 땅 끝까지 그리스도의 증인이 되라고 말씀하심; 당시 제자들은 예루살렘조차도 큰 부담이었음
그러한 위기 상황 속에서 제자들에게 남은 유일한 희망은 예수께서 마지막으로 당부하신 말씀이었다.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내게 들은바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행 1:4) 그렇게 하면 성령이 임할 것이요,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유다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1:8) 그들에게 남아 있는 마지막 희망은 하나님의 때가 이르기까지
기다리라는 것이다. 예수께서 당부하신 말씀에 순종하여 기다리는 그 시간, 그것이 기도로 채워진 마가 다락방 기도모임이었다.
여기에서 주목해야 할 것은 모인 사람의 수가 120명이라는 점이다. 부활하신 주님을 일시에 함께 목격한 500여 형제가
언급되기도 하지만(고전 15:6), 120명만이 마가의 다락방에 모였다. 여기에서 120명은 새로운 공동체를 형성할 수 있는
최소단위의 숫자이다.
1948년 독립한 신생 이스라엘의 국회인 ‘크네세트’의 정원이 120명인 이유도 거기에 있다. 그렇다면
120명은 최소단위의 정수이면서 곧 전체를 의미한다. 다양한 배경과 성격을 지니고 있는 이들이 하나가 되기 위해서는 10일이라는
시간이 필요하였고, 이들의 하나 됨을 근거로 성령이 강림하셨다. 그리고 교회의 역사가 시작되면서 세계 역사는 새로운 전환점을
마련한 것이다.
120명의 각기 다른 배경의 사람들이 마음을 같이 할 수 있었던 것은, 절망 속에서도 희망을 포기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모두가 하나님의 말씀과 약속에 집중하며 하나의 방향으로 나아갔기 때문이다. 그 위에서 성령은 마음껏 하나님의 뜻을 펼치시며 복음을
땅 끝으로 확장시키셨다. 지금도 하나님의 말씀과 비전에서 하나가 된다면, 120명이라도 세계를 바꿀 새로운 역사를 시작할 수
있다.
성령의 부으심이 있습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의롭다 함을 받고, 의롭다 함을 받으면 하나님과 화목해져 그 사람 안에 성령이 거하기 시작하십니다. 이는 누구도 예외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그리스도의 이름이 ‘예수’이며 ‘임마누엘’이신 것도(마 1:21, 23), 예수 믿고 구원받아 하나님과 화목하면 그때부터 하나님이 그와 함께 하신다는 확약입니다. 이처럼 ‘칭의’와 ‘성령 내주’는 분리될 수 없습니다.
이를 뒷받침해 주는 성경 구절들은 부지기수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아브라함의 ‘복(칭의)’이 이방인에게 미치게 하고 또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성령의 약속’을 받게 하려 함이니라(갈 3:13-14).”
우리를 율법에서 속량하신 그리스도를 믿으면 유대인 이방인 구분 없이 ‘복(칭의)과 성령을 받는다’는 뜻입니다.
사도 바울이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다(롬 8:9)”고 한 말씀은 구원받은 그리스도의 사람에겐 그리스도의 영, 성령이 없을 수 없다는 뜻입니다.
어떤 이들의 주장처럼 예수 믿어도 성령을 받지 못할 수 있다는 말은 어불성설입니다. 어떤 특별한 체험이 없어도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받은 자에게는 성령이 계십니다. 만일 성령이 없다면 그는 육에 속한 비중생자입니다(유 1:1).
성경은 ‘성령의 내주(immanence Of The Holy Spirit)’외에 ‘성령의 부어짐(The Outpouring
Of The Holy Spirit, 행 10:45)’도 말합니다. 이 ‘성령의 부어짐’은 구원받고도 성령을 받지 못했던 사람이
어떤 계기로 비로소 성령을 받게 됐다 는 뜻이 아니라, 구원받아 성령이 내주하는 사람에게 ‘부어지는 것’입니다.
이것을 말하면, 자연스럽게 성령강림의 ‘단회성(once for all)’과 ‘현재적 반복성’같은 해묵은 논쟁에 연루됩니다.
지금은 덜하지만, 30여년 전 한국교회의 개혁주의 진영에서는 성령 강림의 ‘단회성(once for all)’과 ‘반복성’이 뜨거운 감자였고, 그 논쟁의 중심에 ‘고신’과 ‘총신’이 있었습니다.
화란(네덜란드)의 캄펜(Kampen)을 졸업하고 부산 고신대학에서 구약신학을 강의하던 안모 교수가 헤르만 바빙크(Herman
Bavinck, 1854-1921)와 로이드 존스(D. M. Lloyd Jones)의 성령 강림의 ‘현재적 반복성’을 주장하다,
학교에서 퇴출됐습니다.
지금이라면 아마 그런 문제로 극단적인 사태가 벌어지는 일은 없었을 것입니다. 격세지감을 느끼게 하는 사건입니다.
동일한 시점, 총신에서도 역시 성령 강림의 ‘현재적 반복’을 주장한 차영배 교수, 정원태 교수 등이 반대자들과 첨예한 논쟁을 벌였습니다. 그러나 다행히 총신에서는 고신대학 같은 파국은 없었습니다.
‘성령 강림의 현재적 반복’은 오순절주의자들이 말하는 ‘오순절 성령강림의 현재적 동일 반복’이라기보다, 차영배 교수가 말한 ‘오순절 성령강림의 현재적 모사(模寫)’라고 함이(김영한 박사) 더 적절해 보입니다.
그들은 요한복음 15장 26절, 사도행전 10장 45절과 19장 1-6절 등을 비롯해, 웨스트민스트 신앙고백서(The
Westminster Confession of Faith)가 가르친 “아버지와 아들로부터 영원히 나오시는 성령(he Holy
Ghost eternally proceeding from the Father and the Son, 1646년판 2장 3절)을
근거 구절로 제시합니다.
여기서 ‘성령의 부으심(The Outpouring Of The Holy Spirit)’은 이미 성령이
‘내재(immanence)’하는 자를 향한 ‘밖으로부터의 부어짐(The Outpouring from above)’으로 파악됩니다.
한 마디로, '이미 내재해 계신 성령이 또 그에게 오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반대자들은 이런 주장에 대해, 이미 오신 성령이 어떻게 또 오시느냐며 이는 존재론적 모순이라고 공격했습니다.
대표적 신학자가 화란 아브라함 카이퍼(Abraham Kuyper, 1837- 1920)입니다. 그는 ‘성령 저수지론’을 통해
“한번 오신 성령은 저수지처럼 수원(水原)이 되어 필요에 따라 성도들에게 공급되며, 성령이 다시 오는 일 같은 것은 없다”고
했습니다.
그들은 ‘성령의 부어짐’을 외부로부터의 임팩트(Impact)로 보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성령 충만(being filled
with the Spirit, 엡 5:18)’도 믿는 자 안에 내재하시는 성령의 북돋음(invigoration),
고무(incitement)’로 봅니다(행 2:2-3은 ‘성령 충만’을 ‘각 사람 위에 내려앉음(sat upon each of
them)’으로 말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공격은 ‘초월적인 하나님의 존재방식을 이해하지 못하는데서 나온 생각’이라는 비판을 불러 일으켰습니다.
초월적 하나님은 육체를 가진 유한된 인간의 존재방식과는 달리 ‘이미 와 계시면서 동시에 또 오실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
근거로 하나님은 “이제도 계시고 전에도 계시고 장차 오실 자(계1:4, 8; 4:8)”라는 성경이 제시됩니다.
그리고 ‘에베소교회’의 사례를 근거로, ‘성령의 부어짐’과 ‘내재’를 구분지었습니다. 유능한 성경학자
아볼로(Apollos)의 지도를 받은 에베소교회 성도들에게 성령의 내주는 있었지만 ‘성령의 부으심’은 없었으며, 바울을 통해
비로소 그것이 성취됐다(행 19:1-6)는 것입니다.
‘너희가 믿을 때에 성령을 받았느냐’는 질문은 ‘위로부터 부어지는 성령’에 대한 것이었으며, ‘성령이 있음도 듣지 못하였노라’는 답변 역시 ‘성령의 부어짐에 대해 듣지 못했다’는 의미로 해석했습니다.
◈성령 부으심의 목적
그들은 ‘성령의 부으심’이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더 뚜렷이 해 준다고 말합니다. 물론 내재(內在)하는 성령이 삼위일체 하나님 지식을 가르치지만, ‘성령의 부으심’을 통해 그 지식이 더욱 풍성해지고 확고해진다고 봅니다.
이는 아버지와 아들로부터 나오시는 성령의 ‘부으심’이 아버지와 아들에 대해 더욱 분명한 이해를 갖다 주기 때문입니다.
유대교인들이 ‘삼위일체 하나님’에 무지한 것은 아들을 믿지 않아 ‘아들과 아버지로부터 나오시는 성령(요 15:26)’의 가르침을
받지 못해서입니다.
사도들이 유대교인들에게 “성령이 없는 자(유 1:19)”라고 한 것은, 그들이 아들을 부인하므로, ‘아들과 아버지로부터 나오시는 성령’을 소유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인정하는 것이 ‘성령의 부으심’과 삼위일체 하나님 지식을 여는 출발점임을 알 수 있습니다.
오늘도 ‘성령의 부으심’을 원하는 자는 ‘예수는 하나님이 사람 되어 우리 죄 값을 지불하신 하나님의 아들(마 16:16)’이라는, 성자에 대한 올바른 신앙고백을 가질 것을 권면받습니다.
그들은 또 ‘성령의 부으심’은 의, 죄, 심판에 대한 새로운 인식을 갖게 하며(요 16:8), 믿음의 확신(살전 1:5), 하나님 자녀 됨의 확신(롬 8:16)을 더욱 공고히 해준다고 보았습니다.
또한 사변적이고 주지적인 신앙에서 생생한 체험적 신앙으로의 변환을 갖다 준다고 믿으며, 수학자 파스칼(Pascal, Blaise, 1623- 1662)의 사례 등을 들길 좋아합니다.
마지막으로, 그들은 ‘성령의 부으심’의 목적을 복음 전파를 위한 것으로 봅니다. 이는 오순절주의자들이 ‘성령의 부으심’의 목적을 신유, 은사, 능력 행사를 위한 것으로 보는 것과는 구분됩니다.
하나님의 깊은 것까지 통달하시는 성령의 ‘부으심’이 사람의 지성으로 알 수 없는 그리스도의 복음과 그것의 가치를 더욱 깊이 깨닫게 해준다고 생각합니다(요 16:13, 고전 2:9-12).
그들은 ‘그리스도’를 복음의 의를 이룬 구속자로, ‘성령’을 그리스도의 복음을 가르치시는 교사로 여깁니다(요일 2:27).
하나님은 택자를 복음을 통해 부르시되, 특별히 ‘성령의 부으심’을 받은 전도자를 통해 복음이 더 확실하고 효과적으로 전파된다고 봅니다.
‘성령의 부으심’을 받은 사도 베드로가 복음을 말할 때 회중들에게 성령이 내리신 것이 그 예증으로 제시됩니다. “저에
대하여 모든 선지자도 증거하되 저를 믿는 사람들이 다 그 이름을 힘입어 죄 사함을 받는다 하였느니라 베드로가 이 말 할 때에
성령이 말씀 듣는 모든 사람에게 내려오시니 베드로와 함께 온 할례 받은 신자들이 이방인들에게도 성령 부어 주심을 인하여
놀라니(행10:43-45)”.
성령을 중생(重生), 연합(聯合), 조명(照明), 성화(聖火)와 연결 짓기 좋아하는 개혁주의 진영에서, 성령을 복음 전파와
연결 짓는 것이 희귀한 듯 하나, 사실 그들은 성령을 무엇보다 복음전파를 위해 보내심을 받은 분으로 이해했습니다.
위대한 칼빈주의자요 성령의 사람이었던 조나단 에드워즈(Jonathan Edwards, 1703-1758)는 전도의
사람이었습니다. 실제로 그는 1770- 1775년까지 스톡브리지(Stockbridge) 에서 인디언 선교를 했습니다.
‘성령에 사로잡힌 사람’이라는 별명을 가졌던 칼빈주의자 조지 휫필드(George Whitefield, 1714- 1770),
마지막 청교도로 일컫는 스펄전(Charles Haddon Spurgeon, 1834- 92)은 모두 탁월한 전도자들이었습니다.
무엇보다 ‘성령이 임하시면 내 증인이 되리라(행 1:8)’는 예수님의 말씀과 ‘성령을 받은 120문도 모두가 복음전도자가 됐다’는 사실 역시, ’성령의 부으심‘과 ’복음 전도‘의 긴밀성을 보여줍니다.
그런데 오늘 성령 받은 자로 자처하는 이들이 전도에 열심을 보이기보다는, 더 센 불을 받아 능력자가 되고자 여기저길 기웃거리는 것을 보면 씁쓸해집니다.
예수님은 성경에 기록되지 않은 수많은 표적을 행했으나 표적 자체가 목적이 아니었고, 그것을 통해 죄인들로 하여금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도록 하는데 목적을 두었습니다(요 20:30-31).
실제로 예수님은 자신이 세상에 오신 목적을 전도라고 밝혔습니다(막 1:38). 여러분은 왜 성령을 구하십니까? 할렐루야!
■ 사도행전
책 제목
헬라어로 ‘프락세이스 아포스톨론’, 즉 ‘사도들의 행적’이란 뜻이며, 우리말 성경도 본서의 표제를 따라 ‘사도행전’이라고 명명했다.
기록자와 연대
1) 기록자
수신자(데오빌로)가 누가복음과 같으며 본서에도 먼저 누가복음을 기록했다는 표현이 나온다(1:1). 선교여행에 동참을 하지 않았다면 절대로 이처럼 상세하게 기록할 수 없으므로 동참했던 인물로 보인다.
본서의 ‘우리’란 표현이 바울의 2차 선교여행 때부터 로마 감옥행까지 줄곧 바울과 동행한 누가를 가리킨다고 볼 수 있다(골 4:14; 딤후 4:11; 몬 1:24).
초대교부들 모두가 누가의 기록으로 증언하고 있으며 바울과 동행하며 선교 여행한 경험들을 토대로 본서를 기술했을 것으로 본다.
의사로서의 누가 : 누가가 의사였다는 것은 사도 바울이 골로새 성도들에게 문안하는 편지에서 ‘사랑을 받는 의원 누가’라고
표현한 것에서 알 수 있으며(골 4:14),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에 나타난 의학 용어들을 살펴볼 때 그의 직업을 짐작할 수 있다(눅
4:48; 8:55; 행 28:8-9 등). 또한 바울의 편지들을 볼 때 누가가 골로새 교회와 안면이 있었고, 빌레몬이나
디모데와도 친분이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딤후 4:11).
누가는 바울이 두 번에 걸쳐 로마 감옥에 투옥되었을 때도 빠짐없이 동행했는데(딤후 4:11), 특히 주의를 기울여야 할 점은 누가가 사도 바울에게 ‘사랑을 받는 의사’였다는 것이다(골 4:14).
2) 기록연대/장소
(1) 기록연대
사도행전의 기록 시기는 일반적으로 예루살렘이 함락되기 이전, 바울이 순교하기 이전인 A.D. 60-63년 사이로 본다. 그
이유는 A.D. 70년에 일어난 예루살렘 함락 사건이 기록되지 않았다는 점과 A.D. 64년에 있었던 네로의 박해 사실이 나타나지
않고 있다는 점이다. 또한 바울의 로마 도착과 2년간의 옥중 생활로 본서가 끝났을 뿐 바울의 순교 사건이 기록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전승에 의하면 바울은 A.D. 66-68년 사이에 순교했다고 한다.
어떤 학자들은 사도행전의 저작 시기를 예루살렘 함락(70년) 이후라고 주장한다. 누가복음 19:43-44; 21:20-24
등의 기사가 예루살렘 함락 이후에 쓴 것이라고 보고 누가복음 이후에 쓰인 사도행전은 그보다 더 뒤에 기록되었다고 보는 것이다.
(2) 기록 장소
사도행전을 기록한 장소는 로마로 보는 견해가 유력하다. 사도행전이 로마에 도착한 것으로 끝나고 있다는 것과 바울이 로마에 도착한 지 오래지 않아 본서를 기록했을 것이라고 보기 때문이다.
이외에도 기록 장소를 안디옥, 가이사랴, 에베소, 고린도, 알렉산드리아 등으로 보는 견해가 있다. 그러나 바울이 로마 감옥에서 석방되기 직전이나 석방된 이후에 로마에서 썼을 것이라는 견해가 가장 일반적이다.
기록 목적
① 신앙의 강화를 위해
데오빌로로 대표되는 수신자들에게 유대인들의 박해와 로마의 압제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에게 기독교 신앙에 대한 확신을 주기 위함이다.
② 성령의 능력으로 복음이 땅끝까지 전파됨을 밝히기 위해
성령의 능력으로 복음이 전파되고 교회가 세워지며 신자와 교회의 풍성한 복과 성장이 이뤄진다는 사실을 강조하기 위한 것이다.
예수님의 행적을 적은 누가복음(행 1:1)을 쓴 누가는 예수님이 부활 승천하신 후에도 그분이 보내신 성령을 받은 제자들을 통해
계속적으로 행하시는 사역을 역사적으로 기록하기를 원하였다.
③ 복음의 변증과 확증을 위해
복음이 로마 세계에 전파되면서 기독교가 로마의 법과 질서에 위협을 주는 불법적인 종교가 아님을 변증하며, 기독교가 구약에 뿌리를 둔 유대교의 정통성을 이어받은 종교라는 것을 밝혀준다.
④ 복음의 보편성을 증거하기 위해
복음이 유대인과 동일하게 이방인을 위한 것임을 보여 주기 위한 것이다. 특히 구약의 예언 성취(눅 24:47; 행 15:15-18)를 따라 유대인과 이방인이 함께 믿음으로 하나님의 교회를 이루는 모습을 전하기 위한 것이다.
⑤ 지금까지도 역사하시는 성령님의 사역을 보여주기 위해
역사 속에 끊임없이 개입하사 이 땅 위에 교회를 세우시고 지금까지도 역사하시는 성령님의 강력한 역사를 생생하게 보여주기 위함이다.
사도행전의 주제
1) 그리스도의 부활
① 사도행전은 예수님이 전하신 하나님 나라의 복음이(눅 16:16) 성령님의 주도하에 부활을 확신하고 경험한 제자들을 통해 예루살렘과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로마)까지 이르는 역동적 과정에 대한 기술이다.
③ 성령은 증인들을 성령충만케 하고 증언사역을 적극적으로 주도 – 성령행전(2:4, 4:8,31, 6:3,5,10,
7:55, 8:17,29,39, 9:17, 10:19, 11:24,28, 13:2,4,9,52, 16:6-7, 20:22-23,
21:4)
④ 제자들이 하나님 나라의 경계를 수용하게 하는 확실한 증거로 작용(8:14-17, 10:44,47, 11:15-18, 15:8-9)
3) 제도적 교회의 성립
① 부활을 경험한 제자들이 모여 교회 형성(1:12-15) - 부활의 증인 공동체, 기도 공동체
② 사도의 보선으로 12사도를 채움(1:15b-26) ,
③ 초대교회 성도들의 모습(2:42-47, 4:32-5:11) : 사도(지도자)의 가르침, 교제, 떡, 기도, 모든 물건
서로 통용, 재산과 소유를 팔아 나눠줌, 말씀사역자인 사도들 외 재정 관리자들(집사) 7명 뽑음(6:1-7).
④ 박해를 통해 교회가 확장됨. 경계와 차별을 넘어 확장되는 교회 – 하나된 공동체 - 빌립의 사마리아 전도(8장),
베드로의 백부장 고넬료 전도(10장, 11장), 안디옥에서 헬라인 전도(11장)-안디옥 교회, 바울의 아시아와 유럽
선교(13~28장)
⑤ 각 교회에 장로들을 세워 교회를 맡김(14:23)
⑥ 사도들과 장로들이 예루살렘 교회와 이방인 교회까지 다스림(15장) - 할례문제
사도행전의 특징
① 신약성경 중 유일하게 역사서로 분류된다. 그래서 사도행전은 예루살렘, 유다, 사마리아, 로마 등으로 퍼져나가는 초대교회사를 기록하였다(행 1:8).
② 성령의 역사를 기록한 책이다. 오순절의 성령 강림에서 시작하여(행 2장) 사도행전 곳곳에 성령이 역사하는 사건들이
생생하게 기록되어 있다(행 4:23-31; 5:1-11; 8:14-17, 29; 10:44-48; 13:1-4; 15:28;
16:6-7; 19:1-6; 20:22-23, 28; 21:11).
③ 사도 바울 연구에 중요한 자료를 제공해 주고 있다. 사도행전은 바울의 회심에서부터 3차에 걸친 전도 여행에 대한 기록,
예루살렘에서의 체포 때부터 로마에 이르는 기간 동안의 기록들, 바울의 예루살렘 방문 등 바울에 대한 여러 자료들을 제공받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바울 서신의 배경을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을 준다.
④ 여러 사람의 설교 내용이 많이 나온다. 베드로(행 1:16-22; 2:14-36; 3:11-26 ; 4:8-12;
5:29-32; 8:20-25; 10:34-43; 11:5-17; 15:7-11), 스데반(행 7:2-53), 바울(행
13:16-41; 14:15-17; 17:22-31; 20:18-35; 22:1-21), 야고보(행 15:15-21)의 설교 등
여러 편의 설교가 실려 있다. *이러한 설교들은 모두 교회를 통해서 구약의 예언이 성취되었음을 크게 강조하고 있다.
누가복음과의 연속성
① 누가복음의 맨 마지막 장면을 사도행전의 첫 부분에서 재차 진술함으로 연속성을 부각시킨다.
② 누가복음에 나오는 예언이 사도행전에서 성취되면서 서로 연관관계가 있음을 보여준다.
③ 사도행전에 나타난 ‘하나님 나라’ 용어는 누가복음에서 예수님이 선포한 ‘하나님 나라’를 반향(反響) 한다.
“사람이 죽으면 어찌 다시 살리이까?”(욥 14:14) 이 질문은 수천 년 동안 내려오는 질문이다. 죽으면 그만이고 몸이
썩어 없어져 버리는데 어떻게 다시 살 수 있느냐고 묻는다. 그러나 예수께서 장사 된지 사흘 만에 부활하여 부활의 첫 열매가
되셨고(고전 15:23),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다고(요 11:25) 성도들의 부활을 보증하셨다. 그 이후로부터 사람들은
“죽은 자들이 어떠한 몸으로 오느냐?”(고전 15:35)하는 질문을 던지고 있다.
부활한 몸의 특징
예수님 이전에 죽었다가 살아난 사람들이 있었다.
사르밧 과부 아들(왕상 17:17-24), 수넴 여인의 아들(왕하
4:17-27), 야이로의 딸(막 5:22-43), 나인 성의 청년(눅 7:11-17), 나사로(요 11:17-44), 여 제자
다비다(행 9:36-43), 유두고(행 20:7-12) 등이 죽었다가 살았으나 소생했을 뿐 부활의 몸은 아니었다. 부활의 첫
열매이신 예수님처럼 부활한 몸은 특징이 있다.16
1. 지금 몸과 다른 변화 된 살과 뼈를 가진 몸이다.(눅 24:29-40)
어떤 불신앙의 사람들이 말하는 것같이 예수님의 출현이 영의 출현이거나, 단순한 환각이 아니라는 말이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의심하는 제자들에게 못 자국을 보이시며 손가락을 내밀어 창으로 찔렸던 옆구리 상처를 만져보라고 말씀하셨다.(요 20:25-27) "다른 제자들이 그에게 이르되 우리가 주를 보았노라 하니 도마가 가로되 내가 그 손의 못자국을 보며 내 손가락을 그 못자국에 넣으며 내 손을 그 옆구리에 넣어 보지 않고는 믿지 아니하겠노라 하니라. 여드레를 지나서 제자들이 다시 집안에 있을 때에. 도마에게 이르시되 네 손가락을 이리 내밀어 내 손을 보고 네 손을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보라 그리하고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
무덤을 찾아왔던 여자들이 예수님의 발을 붙잡았다고 말하고 있다.(마 28:9) 예수께서 저희를 만나 가라사대 평안하뇨 하시거늘 여자들이 나아가 그 발을 붙잡고 경배하니.
또 부활한 몸은 부활체를 가졌기에 예수님은 제자들이
보는 앞에서 음식을 잡수셨다.(눅 24:41-43) "저희가 너무 기쁘므로 오히려 믿지 못하고 기이히 여길 때에 이르시되 여기 무슨 먹을 것이 있느냐 하시니 이에 구운 생선 한 토막을 드리매 받으사 그 앞에서 잡수시더라."
영(靈)은 음식을 먹을 수 없다. 어릴 때의 경험에서 이것을 생각해 본다. 유교 관습대로 조상의 영에게 제사를 드릴 때
부모님이 음식을 차려놓고 절을 한 후에 숟가락을 꽂아놓고 조상의 영이 와서 음식을 잡수시도록 자손들은 밖으로 나가라고 했다. 한참
후에 방으로 돌아와 호기심어린 눈으로 없어진 음식이 있는 가 살펴보니 밥과 국이 없어지지 않았고 그대로였다.
부활의 몸은 현재 우리가 가지고 있는 육체와 동일하지는 않으나 깊은 연관성이 있다. 도토리가 자라서 참나무가 되고,
갓난아이가 커서 어른이 될 때 동일한 물질에서 발전하지만 그 형태가 같지 않다. 도토리와 나무, 아이와 어른 사이에 차이가 있으나
계속성이 있음을 의심할 수 없는 것 같이 현재의 육체와 부활의 몸은 계속성과 깊은 연관성을 갖는다.
막달라 마리아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보고도 그를 알아보지 못하고 동산지기로 생각한 일이나(요 20:14,15),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들이 길에서 동행하게 된 예수님을 만나 함께 이야기를 나누면서도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했다.(눅 24:16) 제자들이
무서워하며 모여 있던 다락방을 찾아오신 예수님을 영으로 생각할 정도로(눅 24:37) 부활하신 예수님의 몸이 변해있었다.
예수님이 받으실 고난의 비밀을 이해하지 못하는 제자들에게 예수님은 부활 후에 가지시게 될 영광스런
모습을 미리 보여주셨는데, 우리는 이것을 변화산 사건이라 부른다. “저희 앞에서 변형되사 그 얼굴이 해같이 빛나며 옷이 빛과
같이 희어졌더라.”(마 17:2)
(2) 시간과 공간의 제한을 받지 않고 영생한다.
현재 우리가 가지고 있는 육체는 흙으로부터 온 것이나 부활 때는 하늘에 속한 자의 형상을 입게 될 것이다.(고전 15:49) "우리가 흙에 속한 자의 형상을 입은것 같이 또한 하늘에 속한 자의 형상을 입으리라."
지금 우리의 몸은 썩고 욕된 약한 몸이지만 부활 때에 갖게 될 몸은 썩지 않고 영광스러우며 강한 몸이 될 것이니 곧 신령한
몸이다.(고전 15:42-44) " 죽은 자의 부활도 이와 같으니 썩을 것으로 심고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며 욕된 것으로 심고 영광스러운 것으로 다시 살며 약한 것으로 심고 강한 것으로 다시 살며 육의 몸으로 심고 신령한 몸으로 다시 사나니 육의 몸이 있은즉 또 신령한 몸이 있느니라."
부활한 몸이 늙거나 병들거나 죽지 않을 것은 하늘의 천사들과 같다.(마 22:30) "부활 때에는 장가도 아니가고 시집도 아니가고 하늘에 있는 천사들과 같으니라."
닫힌 방에 문을 열지 않고 들어가며(요
20:19), 동행 중에 갑자기 사라질 수도 있는(눅 24:31) 몸이 부활의 몸이다. "이날 곧 안식 후 첫날 저녁 때에 제자들이 유대인들을 두려워하여 모인 곳에 문들을 닫았더니 예수께서 오사 가운데 서서 가라사대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찌어다." "저희 눈이 밝아져 그인줄 알아 보더니 예수는 저희에게 보이지 아니하시는지라."
가고 싶은 곳에 갑자기 나타났다가, 원할 때
즉시 사라지는 부활체는 현재 우리 육체가 시간과 공간의 제한을 받는 것과 다르다. 출근 길에 또는 중요한 약속 자리에 시간을
대기 어려워 조바심하며 차속에서 안절부절 못하는 일도 부활의 몸을 가질 때는 없어질 것이다. 고칠 수없는 병에 걸려 고통 하는
일도, 늙는 것을 두려워하지도, 사랑하는 사람을 죽음에 뺏기고 통곡하는 일도 부활 이후엔 없을 것이다.
예수께서 다시 오시는 재림의 날에 죽은 자들이 다시살고, 살아있는 성도들도 예수님의 영광스러운 몸처럼 변화를 받을
것이니(고전 15:51,52) "보라 내가 너희에게 비밀을 말하노니 우리가 다 잠잘 것이 아니요 마지막 나팔에 순식간에 홀연히 다 변화하리니. 나팔 소리가 나매 죽은 자들이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고 우리도 변화하리라."
성도들의 몸이 구속을 받는 복되고 소망스런 날이 될 것이다.(롬 8:23) "이뿐 아니라 또한 우리 곧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를 받은 우리까지도 속으로 탄식하여 양자 될것 곧 우리 몸의 구속을 기다리느니라."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요
11:25,26)
부활에 대한 실제적 증거
1. 부활은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에 의하여 예언되었다.
“예수께서 열 두 제자를 데리시고 이르시되, 보라 우리가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노니 선지자들로 기록된 모든 것이 인자에게
응하리라. 인자가 이방인들에게 넘기워 희롱을 받고, 능욕을 받고, 침 뱉음을 받겠으며, 저희는 채찍질하고 죽일 것이니 저는 삼일
만에 살아나리라.”(눅 18:31-33)
2. 예수님의 빈 무덤이 부활의 증거다.
“큰 지진이 나며 주의 천사가 하늘로서 내려와 돌을 굴려 내고 그 위에 앉아 있는 그 형상이 번개 같고, 그 옷은 눈같이
희거늘 수직하던 자들이 저를 무서워하여 떨며 죽은 사람과 같이 되었더라. 천사가 여자들에게 일러 가로되 너희는 무서워 말라.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를 너희가 찾는 줄을 내가 아노라. 그가 여기 계시지 않고 그의 말씀하시던 대로 살아나셨느니라. 와서 그의
누우셨던 곳을 보라.”(마 28: 2-6)
3. 예수님이 제자들 앞에 나타나신 것이 부활의 증거다.
“저희가 놀라고 무서워하여 그 보는 것을 영으로 생각하는지라 예수께서 가라사대 어찌하여 두려워하며 어찌하여 마음에 의심이
일어나느냐. 내 손과 발을 보고 나인 줄 알라. 또 나를 만져보라. 영은 살과 뼈가 없으되 너희 보는 바와 같이 나는
있느니라.”(눅 24:37-39) 예수님은 부활하신 후 40일을 더 이 세상에 계시면서 여러 번 제자들에게 나타나 자신의 부활을
확증하셨다.
(1) 막달라 마리아에게(막 16:9)
(2) 여인들에게(마 28:9)
(3) 베드로에게(고전 15:5)
(4) 두 제자에게(눅 24:15-31)
(5) 열 제자에게(요 20:19)
(6) 도마에게(요 20:26-28)
(7) 일곱 제자에게(요 21:1-24)
(8) 열 한 제자에게(마 28:16,17)
(9) 500명에게(고전 15:6)
(10) 열 한 사도에게(행 1:2-9)
(11) 야고보에게(고전 15:7)
(12) 바울에게(행 9:1-5, 고전 15:8)
4.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역사적 모든 교회와 성도들이 부활의 증거다.
“베드로가 이르되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받으라. 그리하면 성령의 선물을
받으리니, 이 약속은 너희와 너희 자녀와 모든 먼 데 사람 곧 주 우리 하나님이 얼마든지 부르시는 자들에게 하신 것이라 하고 또
여러 말로 확증하며 권하여 이르되 너희가 이 패역한 세대에서 구원을 받으라 하니, 그 말을 받은 사람들은 세례를 받으매 이 날에
신도의 수가 삼천이나 더하더라. 그들이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서로 교제하고 떡을 떼며 오로지 기도하기를 힘 쓰니라.”(행
2:38-42)
이렇게 예수님의 부활이 예언의 말씀대로 이루어진 역사적 사실인 것처럼, 부활 승천하신 예수님이 장차 다시 오시리라는 그의 약속의 말씀도 분명히 그대로 이루어질 것을 우리는 의심 없이 믿는다.
도마(요한복음 20:19-31)
예수님의 열두 제자
중 한사람이었던 도마는 갈릴리 출신 어부로 ‘디두모’라고도 불렸다. ‘도마’는 히브리식 이름이고 ‘디두모’는 헬라식 이름인데, 둘
다 뜻은 ‘쌍둥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아마도 도마는 쌍둥이였던 모양인데, 그가 형제 쌍둥인지 자매 쌍둥인지에 대해서는
전혀 알 수 없다. 어떤 학자들은 마태와 쌍둥이였을 것이라고 추측하나 불확실하다. 성경에는 그의 부모나 그의 어린시절에 대한
기록도 전혀 없다.
뿐만 아니라 만일
요한복음에 기록된 도마와 관련된 내용이 없었다면, 그는 단지 이름만 소개된 제자였을 것이다. 공관복음(마10:3, 막3:18,
눅6:15)과 사도행전(행1:13)에는 단지 이름만 기록되어 있다. 우리가 그에 대해 알 수 있는 것은 요한복음에 있는 내용
덕분이다.
도마는 어떤
인물이었을까? 오늘날까지도 그는 ‘의심 많은 제자 도마’로 알려져 있다. 어떻게 해서 도마는 이같은 인물로 평가되고 있을까? 그리고 그에 대한 이러한 평가는 정당한 것인가? 먼저 요한복음에 소개된 도마와 관련된 내용들을 살펴보자.
1. 요한복음 11장에 보면, 나사로가 병들었다 함을 들으신 예수님은 베다니로 나사로를 도우려 가자고 하신다. 그 당시의 상황은 예수님을
죽이려는 유대인의 궤계가 임박해 있고 실상 얼마 전에도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돌로 치려고 하였다. 따라서 그곳에 가신다는 것은
굉장히 위험한 일이었다. 그래서 제자들은 예수님을 가지 못하게 말렸다. 그런데, 다른 제자들과는 달리 도마는 가 나서서 “우리도
주와 함께 죽으러 가자”고 말한다. 도마의 이러한 반응은 어떤 의미였을까? 이것이 용기였을까 아니면 운명론자들이 갖는 염세주의적
기질에서 나온 것일까? 만일 예수께서 신변의 위험에도 불구하고 유대 땅으로 건너가시려 하자 스승과 함께 생사고락을 함께 하겠다는
비장한 결의의 표현으로 본다면, 도마는 단순하고 의협심 강한 사람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다른 제자들과 마찬가지로 도마도 당시의
어려운 상황을 제대로 파악하고 있었다면, 유대땅으로 들어간다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지를 알고 있는 상황에서, 다소 자포자기의 의미를
지닌, “그래, 여기까지 왔는데, 예수께서 가시자고 하니, 모든 것 다 운명에 맡기고 올라가자.”라는 의미로도 들린다. 신학자들이 이 구절에 대해 여러 각도로 해설을 해 놓았는데, 분명한 결론을 내리지는 못하고 있다.
2. 두 번째로 도마가 등장하는 장면은, 요한복음 14장인데, 유월절 전날 밤에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큰 위로의 말씀을 하신다.
(요14:1-4 읽기) 그러자 도마는 질문을 한다. “주여 어디로 가시는 지 우리가 알지 못하거늘 그 길을 어찌 알겠삽나이까?” 도마는 그 길을 알아야 한다는 예수의 말씀을 듣고도 예수님께 질문한다. 도마는 이미 앞서 제자들에게 주시는 주님의 가르침을 듣지
못했단 말인가? 그는 귀머거리인가? 그는 주님께서 배신을 당하심과 죽음과 부활에 대한 그분의 가르침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는 말인가? 도마도 다른 제자들과 마찬가지로 세상 왕국을 꿈꾸고 있었다. 예수께서 떠나 가셔서 그들과 함께 하신다고 말씀하실
때, 그들은 실제로 예수님이 어떤 다른 도시에 가시는 것으로 알고 있었을 것이다. 거기에서 왕으로 기름부으심을 받고 이스라엘
왕국을 회복하리라고 기대했을 것이다. 그래서 그는 질문한다. “우리는 당신이 어디로 가시는지 알지 못합니다. 우리가 그 길을 어찌
알 수 있겠습니까?” 요한녹음 13장에서 베드로도 질문했다. “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13:36) 하지만 베드로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더 이상 질문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이 점에서 볼 때 그는 예수님이 가르쳐 주었던 것을 잘 믿지 못하는 깨달음이 둔한
자였는가? 아니면, 자신이 이해되지 않을 때는 알 때까지 끝까지 파고드는 사람이었는가?
3. 세 번째 등장은 요한복음 20장이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인데, ‘의심많은 제자 도마’로 우리에게 알려진 결정적인 사건이었다. 십자가 사건 후에, 부활하신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나타났을 때, 도마는 그 자리에 있지 않았다. 나중에 그가 와 서 예수님이
부활하셔서 자기들에게 나타났다는 것을 들었을 때 그는 완고하게 그 사실을 믿으려 들지 않는다. 도마는 “내가 그 손의 못 자국을
보며 내 손가락을 그 못 자국에 넣으며 내 손을 그 옆구리에 넣어 보지 않고는 믿지 아니하겠노라”고 말한다. 성경은 왜 도마가 그
자리에 없었는지를 말하지 않는다. 만일 우리가 도마와 같은 상황에 있었다면 우리는 어떻게 행동했겠는가? 도마는 부활의 증거를
믿기 전에 부활하신 자를 눈으로 보고 피부로 느껴야만 했다. 도마는 진지하고 심각했다. 그는 실제로 예수님을 다시 보기를
원하였고, 그분이 죽지 않으셨음을 알기 원했다. 의심과 실망 가운데 있던 도마는 7일동안 제자들과 함께 머물러 있으면서 그들이
말한 것이 실제로 사실이었나를 알기 원했다. 예수께서 다시 그들을 만나 주시는데 일주일이 지체되었다. 그동안 도마는 어떤 생각을
했을까? 다른 제자들에게는 기대와 소망이 넘치는 즐거운 일주일이었지만 도마에게는 근심과 두려움이 교차하는 일주일이었을 것이다.
그는 다른 제자들과 함께 있어야 함을 느꼈으므로 그 무리들과 함께 있었다.
4. 네 번째 등장은 요한복음 20장에서 바로 이어지는 장면이다. 그 후 여드레를 지나서 갑자기 예수님이 제자들의 한 가운데 다시
나타나셨을 때 예수님의 부활을 믿지 않았던 도마도 다른 제자들과 함께 그 자리에 있었다. 그때 예수님은 도마에게 너의 손을 직접
만져보고 옆구리에 손을 직접 넣어보라고 하신다. 그리고 도마에게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고 말씀하신다.
그러자 도마는 무릎을 꿇으며 “나의 주시며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라는 고백을 한다. 이에 예수님은 도마에게 “너는 나를 본 고로
믿느냐 보지 않고 믿는 자들은 복 되도다”라는 말씀으로 이전에 도마가 주님의 부활을 믿지 않은 데 대한 꾸지람을 하신다.
예수님은 도마가 말하는
것과 생각하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고 계셨다. 그러나 예수님은 도마 한 사람에게까지 찾아와 주셨다. 예수님은 도마에게 하신
것처럼 우리의 유익을 위하여 때로는 지체하시며, 때로는 주님께서 원하시는 개인과 가정, 교회를 방문하신다. 예수님은 한 사람의
영혼을 가치 있게 보신다. 이에 도마는 놀라운 신앙고백을 하게 된다.
우리에게 도마에 대한
정보를 가장 많이 알려주는 요한은 아마도 어린 시절부터 도마를 잘 알고 있었으리라 추측된다. 그들은 같은 동네에서 자랐고 직업도
같았다. 또한 제자들이 디베랴 바닷가에서 고기를 잡고 있는 동안에 예수님이 나타나셨을 때에 도마도 그 자리에 있었다고 요한은
특별히 도마를 지칭하여 말하고 있다.
도마에 대해 변함없이
묘사되고 있는 특징은 우울하고 의심 잘하는 그의 성격이다. 하지만 예수님을 믿는 자들에게 이런 경험은 예사로이 할 수 있다. 그는
결코 성경에서 언급하는 “사악한 불신의 마음”을 지닌 자는 아니었다. 그는 자신에게 휘몰아치는 의심과 싸웠으며 그런 의심들을
과감히 물리쳐서 자신의 의지를 주님 앞에 드릴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었다. 우리가 으레 도마를 생각할 때면 “의심 많은 도마”라는
상념을 떠올리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왜냐하면 성경의 기록들이 그러하고 또한 주석가들도 “도마는 우리가 의심하지 않을 것까지도
의심하는 자”라고 예사로 논평을 해 왔기 때문이다.
성경의 여러 정황으로 볼
때, 도마는 성격상 갈등을 일으키는 요소들을 지니고 있었고, 특히 누구와 함께 융화되기 어려웠다. 그는 궁금한 것이 있으면
질문하지 않고는 못 배기는 성격의 소유자였다. 그러다보니 갈등을 일으키고 다른 이들과 쉽게 융화하기가 어려웠다. 그는 분명히
기질상 쾌활하거나 명랑하기보다는 다소 우울한 성격이었을 것이다. 그는 인생을 냉담하게 혹은 절망적으로 보는 염세주의적인 기질도
있었다. 그러나 그의 의심과 질문이 부정적인 것만은 아니었다. 의심이 많다는 것은 어떤 의미에선 합리적이고 실증적인 사고를
추구한다는 것이다. 무엇이든 대충대충 넘어가지 않고 확실하게 하려는 삶의 자세를 지니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는 강한 의지와
용기를 지닌 인물이었을 것 같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에 대해서는 변하지 않는 믿음을 가지고 있었고 선생님인 예수님에
대해서는 신실한 애정을 지니고 있었다.
용기 있는 사람은
두려워하지 않는다. 고난에 도전하고 정면으로 역경을 돌파하고 시련을 이겨내려는 의지가 있었던 도마는 분명히 용기 있는 제자였다.
제자들 가운데서도 스승에게 질문을 한다는 것 용기가 없이는 불가능한 행동이다. 질문이 없는 조직이나 공동체는 퇴보하거나 실패하기
쉽다. 도마는 어렴풋한 생각으로 만족할 수 없었다. 그는 의문을 가지고 그대로 지나갈 수는 없었다. 올바른 지식과 인식을 얻고
전달하는 완전한 방법은 바른 질문에 있다.
도마의 오랜 의심은 드디어 강한 믿음으로 변했다. 그의 의심만큼 신앙도 깊어졌다. 사실 우리는 끊임없이 교회와 신앙, 그리고 자신의 삶에 계속 질문해야 한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질문이 없으면 발전도 없다.
● 이후 도마는 주님을
위해 능력 있게 사용되었다. 염세주의적이고 의심에 가득 찬 제자였던 도마가 열정적인 선교사가 되었다는 것은 분명하다. 그는
바벨론과 페르시아(이란)에 교회를 설립했고 나아가 인도에도 교회를 설립하고 복음을 전파했다. 전승에 의하면, 도마는 인도에서
선교하다 순교하였으며, 인도 마라폴에 묻혔다. 그곳에 끼친 그의 영향력은 여러 고고학적 발굴을 통해 오늘날 세상에 속속 드러나고
있다.
못 자국과 창 자국을
보고서야 예수님의 부활을 믿은 도마를 향해 예수님은 보고 믿는 믿음도 좋으나 ‘보지 않고 믿는 믿음’ 이 더 복되다고 말씀하셨다.
오늘날 성도들 중에도 도마와 같이 ‘내가 예수님을 한 번 보고, 혹 이적을 한 번 체험해 보면 더 잘 믿을 수 있을 텐데’라고
생각하는 자들이 많다. 그러나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며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임을 기억하여, 우리 성도들은 보지 못하는
중에도 믿음으로 복된 믿음을 소유하는 자들이 되자.
뿐만 아니라, 주님
앞에서 분명한 신앙고백을 한 도마가 땅 끝까지 이르러 주님의 증인된 삶을 담대하게 살았던 것처럼, 비록 우리 자신 역시 부족하고
어리석은 인생들이지만, 주님을 향한 우리의 믿음을 분명히 확증하고 점검하여,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증인된 삶을 살아갈 수 있기를
기원한다.
은혜의 자리를 찾아라
우리에겐 언제나 익숙한 자리가 있습니다. 내가 앉는 자리, 내 눈에 보여지는 자리입니다. 눈에 띄고 싶고 인정 받고 싶은 자리도 있고, 겉으로는 안정적인 것처럼 보이지만 불안과 비교, 불만족으로 인해 내가 숨기고 싶은 자리도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겸손하게 살아간다는 것은 타인을 어떻게 바라보며 섬길 수 있는지, 그리고 하나님 앞에서 나의 마음을 어떻게 다스리며 살아갈 것인지를 바라보게 합니다. 우리에겐 여전히 남들보다 더 우월해지고자 하는 마음, 칭찬받고자 하는 마음이 있지만 겸손은 내가 가진 능력을 부정하는 차원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스스로를 높이지 않고, 주신 능력을 하나님과 이웃을 위해 사용하는 것입니다.
참된 겸손
라파엘 메리 델 발(Rafael Merry del Val, 1865-1930) 추기경의 겸손의 기도(Litanies of Humility) 의 일부입니다. "존경받고자 하는 욕망에서 저를 구해주소서. 사랑받고자 하는 욕망에서 저를 구해주소서. 칭찬받고자 하는 욕망에서 저를 구해주소서. 무시당할까 두려워하는 저를 구해주소서. 거절당할까 두려워하는 저를 구해주소서. 다른이들이 저보다 더 사랑 받기를 바라는 은총을 내려주소서. 다른이들이 저보다 더 존경 받기를 바라는 은총을 내려주소서."
이 기도문은 우리의 마음 속 깊은 곳의 욕망과 두려움을 보여주는 듯 합니다. 우리의 이런 욕구는 유대인들의 식사 습관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유대인들의 식사 습관 중 가장 특이한 것은 자리 배치였습니다. 이러한 배치 원리는 오늘날 경쟁사회에서도 흔히 볼 수 있는 모습입니다. 비행기 안에도 좌석에 따라 등급이 나눠져 있고, 영화 시사회에서도 주연과 조연의 자리가 다르게 배치됩니다. 당시 로마의 영향을 받은 유대사회에도 식탁을 ‘ㄷ’자형으로 배치하고, 존경 받는 손님이 앉을 자리를 별도로 준비하고, 삼면의 중앙자리가 가장 지위가 높은 자리였습니다. 사회적 권위와 명예를 나타내는 자리였습니다. 초대 받은 바리새인들은 서로 주인의 눈에 드는 높은 자리를 차지하려고 했던 것 같습니다. 이 모습을 보시고 예수님은 비유로 교훈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비유 속에서 말씀하신 “높은 자리”는 인간적인 노력이나 권력으로 차지할 수 있는 자리가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께서 겸손하게 자기 자신을 낮추는 자에게 허락하시는 자리입니다.
믿음과 삶을 살아낼 실력이 부족한 우리를 위해 주님께서는 먼저 그 자리로 가셨습니다. 종교적 열심으로 예수를 핍박하던 바울의 삶이 바뀐 것도 그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높은 자리나 끝자리가 아니라 혼인 잔치에 관심을 두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바울의 고백을 들어 보시기 바랍니다. 9 내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그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10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박해와 곤고를 기뻐하노니 이는 내가 약한 그 때에 곧 강함이라.(고후 12: 9-10)
약함을 자랑할 수 있는 곳, 그곳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그곳까지 함께 갑시다. 서로의 약함이 조금은 불편해도 품어줄때 우리는 잔치의 은혜를 즐길 수 있게 됩니다. 바울은 그동안 자신이 자랑하고 옳다고 여겼던 것들이 하나님의 은혜를 막는 것이었음을 깨달았습니다. 자신 안에 이방인들을 차별하고, 예수 믿는 자들을 향해 경멸하고 박해하던 자신의 신앙을 점검하게 됩니다. 만일 우리가 섬기고 희생하는 자리에서도 여전히 나의 공로와 이름을 내세우고자 한다면, 그것 역시 높은 자리를 차지하려는 모습과 다르지 않습니다. 인간의 본성으로는 온전히 순종하며 사는 것은 어렵습니다. 심지어 예수님의 제자들도 3년간 훈련을 받았지만, 최후의 만찬에서 서로 높아지려 다투지 않았습니까?
오늘을 위해서는 오늘의 은혜가 채워져야 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세상의 평가와 상황에 흔들리지 않고, 말씀 안에서 믿음으로 살게 하는 능력이 됩니다. 은혜가 우리의 의지를 깨우고, 주님을 닮아가도록 행동하게 합니다. 만약 은혜는 없고 율법과 형식만 의지하면, 금식과 기도, 전도와 같은 행위도 우리의 마음을 만족시키지 못하고 영혼이 건조해집니다. 은혜가 사라진 자리에서 우리는 얼마나 다양한 감정을 마주하게 됩니까?
하나님의 관심은 높은 자리나 낮은 자리가 아니라 주를 아는 겸손함에 있습니다. 어떤 자리에 있든지 하나님을 경외하고, 말씀 붙들고 최선을 다해 살아가기를 원하십니다. 겸손한 삶은 세상의 시각에서는 나약한 삶처럼 느껴지기도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방법으로 낮아지는 인생은 하나님과 함께 깊어지는 시간을 가져옵니다.
우리는 예배와 기도의 자리에서 실력 있는 성도의 모습으로 살아가지만 일상의 평범한 시간속으로 들어가면 어떻습니까? 삶 전체의 자리에서도 참된 신앙인으로 살아가고 있습니까? 육신의 연약함으로 인하여 수고하고 헌신하는 자리에서 마음이 지쳐 있지는 않으신가요? 예수님은 주를 찾는 마음에 진실한 믿음이 살아나게 하십니다. 주님과 만나는 자리는 새힘이 임하는 자리입니다. 사모함과 무뎌짐 사이에서 우리를 사랑하시고 존귀하게 여겨 주시는 주님을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폴트립은 '우리의 과거의 후회와 회한을 예수님의 보혈이 완전히 덮어 가려주었다고 말하며 이제 더이상 과거의 짐을 어깨에 짊어지고 다니지 않아도 되며 하나님이 우리에게 맡기신 일에 나 자신을 완전히 바칠 수 있다'고 말합니다.' (폴 트립의 365 아침 묵상)
일상의 시간에서 거룩함은 주님과 친해지는데 있습니다. 우리의 삶에서 인간의 본성과 충돌하는 사건이 바로 십자가의 길이었습니다. 예수님도 그 자리를 피하고 싶어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길에서 시험과 유혹을 받으셨지만 주님은 하나님 나라의 삶의 방식이 세상의 가치와 전혀 다르다는 것을 보여주셨습니다. 세상에서 인정을 받는 차원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에 달려 있음을 알수 있습니다. 따라서 세상에서의 관계를 풀어가는 일 만큼이나 하나님과의 관계가 중요합니다. 삶을 살아가는 진정한 힘을 그 안에서 얻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우리가 선하기 때문에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기 때문에 우리를 선하게 만드신다고 생각합니다. 창 자체가 밝아서 햇빛을 끌어당기는 것이 아니라, 햇빛이 먼저 창을 비추었기 때문에 밝아지는 것처럼 말입니다.' (순전한 기독교- C.S 루이스)
참된 겸손은 오직 하나님만 의지하도록 이끄시는 값없이 주어진 선물입니다. 삶이 때때로 흔들리거나 불안한 순간에도 우리를 붙들어 주시는 변함없는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를 좁은 길로 걷게 합니다.
하나님의 자비
참된 자비를 베풀어 주신 분이 누구십니까? 우리는 모두가 허물과 죄가 많았던 사람들입니다. 지극히 가난한 사람들과 같았고, 병들어 걷지 못하고, 한 치 앞도 볼수 없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갚을 길이 없는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로 삼아 주셨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얻었고, 하나님과의 관계 안에서 결핍과 두려움으로부터 자유롭게 되며, 갚을 능력이 없는 염려에도 눌리지 않도록 붙들어 주시는 분이십니다.
8-11 절 비유의 대상이 잔치에 초대받은 자들에 관한 것이라면, 12절부터는 초청하는 자로 바뀌고 있음을 보게 됩니다. '점심이나 저녁 식사에 사람을 초대하려거든'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점심으로 번역된 ‘아리스톤’은 일반적인 식사 자리를 가리키는 용어입니다. 즉 일상에서 크고 작은 식사를 베풀때에 갚을 능력이 없는 사람들을 초대하라고 말씀합니다. 이 말씀은 마태복음에 나오는 말씀과도 비슷합니다. “마 6:1 “남들에게 보이려고 선행을 베풀어서는 안 됩니다. 그렇게 하면,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 아무런 상도 받을 수 없습니다. 3 그러므로 당신이 친절을 베풀 때는 남의 눈에 띄지 않도록 하십시오. 심지어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조차도 모르게끔 하십시오. 4 그렇게 해서, 당신의 자선 행위를 아무도 모르게 고이 숨겨 두십시오. 그리하면, 남모르게 숨어서 모든 것을 지켜보고 계시는 여러분의 아버지께서 당신에게 다 갚아 주실 것입니다.” 갚을 수 없는 사람에게 베푸는 일들, 이름 없이 행하는 모든 선행에 대해 하나님께서 보상하신다는 말씀입니다. 이는 구약의 모세의 율법에서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신명기 14장 29절입니다. 14:29 여러분과는 달리 토지를 나누어 받지 못한 레위인들이나, 여러분의 마을에 함께 사는 외국인들, 그리고 고아와 과부들에게 나누어 주도록 하십시오. 그렇게 하면, 여러분의 하나님께서 여러분이 하시는 모든 일에 복을 내려주실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의인의 삶에 대해서 분명하게 제시하고 있습니다. 또한 보상을 받게 될 그 시기가 현재가 아니라 미래의 부활 시기에 맞춰져 있습니다. 이때는 우리가 행한대로 받게 될 날입니다. 복이 될 시기는 부활의 때인 것입니다. 우리는 이 부르심에 기쁘게 달려갈 준비를 해야 합니다. 부활의 때에 임할 복은 무명한 자 같으나 유명한 자가 되고, 가난한 자 같으나 부요하게 될 것이며, 아무 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사람들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사람의 보답이 아니라 하나님의 보답을 받는 자가 누리게 될 영광입니다.
이제 우리는 하늘에 보물을 쌓아두는 삶을 위해 살아가야 합니다. 여전히 고통과 슬픔으로 하나님 앞에 나아갈 자격이 없다고 생각하며 주저앉아 있는 이들, 갈길이 보이지 않아 소망 조차 없는 사람들입니다. 세상적인 계산으로 하나님의 초대를 망설이는 사람들, 학업과 직장, 가정의 자리에서 두려움과 염려 가운데 살아가는 사람들, 버티고 견뎌내지만 여전히 내 힘으로 해결할 수 없는 문제로 인해 지쳐 있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삶의 방식 안에 자비의 삶을 마련해 놓으셨습니다. 이 삶이 성도에게는 복입니다. 주님을 따라가는 것이 쉽지 않을 때가 있기도 합니다. 그럴 때마다 부르심 가운데 허락하실 복을 확인하시기 바랍니다. 믿음의 경주를 하는 선수들의 수고와 땀은 아름다운 것들입니다. 이미 승리한 사람의 넉넉함을 보이시기 바랍니다.
누가복음 14장 본문에 이어지는 또 다른 잔치 비유에서는 주인이 잔치를 열고 많은 사람을 초대했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온갖구실을 대면서 거절했습니다. 밭을 샀으니 가서 밭을 보아야 하겠다며 생계와 자기 일 때문에 거절했습니다. 장가를 들었으니 해야 할 책임 때문에 갈수 없다고 거절하고, 장사를 시작했으니 경제적 이유 때문에 잔치 자리를 거절합니다. 삶의 자리에서 해야 할 일들로 인해 하나님 나라의 삶이 우선순위에서 밀려 버린 것입니다.
우리도 편안하고 익숙한 곳에만 앉고 싶어 합니다. 일부러 불편한 자리로 찾아가려고 하지 않습니다. 학교와 직장, 가정과 교회 안에서 잘 살아가고는 있지만 여기에 삶의 책임의 무게가 더해지면 가끔은 길을 잃을 때도 있습니다. 그런데 지나고 보니, 그 광야의 시간을 통하여 버거웠던 눈물의 자리, 불안과 외로움의 자리가 주님의 마음을 만나게 되면, 영혼을 살게하는 은혜의 자리가 됩니다.
주님께서 초대하시는 은혜의 자리, 자비의 자리는 비교와 경쟁에 마음을 빼앗기지 않고 하나님이 허락하시는 삶입니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도 이웃을 사랑으로 돌아 보게 하시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낮은 자리에서 눈물로 드리는 믿음과 기도입니다.
우리의 분주한 마음 뒤에 감추어진 삶의 고단함 속에서도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혼인잔치의 진정한 복을 누리시기 바랍니다. 인정 받는 자리에서 하나님을 찾지 말고, 축복에 참여하게 될 의인들의 자리를 믿음으로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그 자리에 주님이 기다리고 계십니다. 그곳이 바로 하나님께서 인도하시는 은혜의 자리입니다.
십계명은 우리가 승영하는 데 필요한 영원한 복음의 원리이다. 주님은 고대에 모세에게 그것을 알려 주셨으며(출 20:1-17), 후일의 계시에서 그것을 다시 언급하셨다. 십계명은 복음에서 절대적으로 필요한 부분이다. 이 계명에 순종하는 것은 다른 복음 원리에 순종하는 것을 쉽게 한다.
십계명은 성경에 있는 열 가지의 법으로서 하나님께서 출애굽을 한 후 얼마 지나지 않은 이스라엘 국가에게 주신 것입니다. 십계명은
본질적으로 구약 성경에 포함된 613개의 계명들이 요약된 것입니다. 처음 4 개의 계명은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를 다루고 있습니다.
나머지 6개의 계명은 우리들끼리의 서로의 관계를 다룹니다.
십계명은 성경의 출애굽기 20장 1-17절과 신명기 5장 6-21절에
기록되어 있으며 다음과 같습니다.
사도신조
- 사도신경(복음의 7대 연합이 담겨진 내용)
사도신경(使徒信經, 라틴어: Symbolum Apostolicum) 또는 사도신조 기독교에서 사용되는 신앙고백의 하나로 주로 서방교회에서 기도문으로 활용한다. '로마신조'서 유래한 기독교인들의 신앙고백문으로 주기도문(마태복음 6:9~13)과 달리 성경에는 나와 있지 않다.
사도신경(使徒信經), 사도신조(使徒信條), 종도신경(從徒信經)
서방교회의 주요 기독교 교파가 사용하는 신앙 고백문이다. 교회
공동체에서 기본적으로 믿어야 할 교의를 요약 정리하고, 초기 교부들과 공의회 등이 재확인하고 천명한 주요 교리 해석에 대해
동의하며 이에 대한 믿음을 약속하는 내용으로, 주로 니케아 콘스탄티노폴리스 신경을 대신하여 암송된다. 니케아 콘스탄티노폴리스 신경 대신에 사도신경을 사용하는 것은 동방교회에서는 인정하지 않는 서방교회의 고유한 전승이다.
본래 로마
지역의 교회에서 세례를 받을 때 사용하던 신앙고백문에 기초하여 발전했다고 추정한다. 하느님의 전능함, 창세의 사실,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 죽음의 과정과 부활, 승천, 심판에 대한 예언, 성령과 교회 공동체에 대한 믿음, 부활과 영생에 대한
믿음을 차례로 약속한다.
2세기 무렵부터 영지주의 및 몬타누스주의 등 이단 사상이 대두되자 기독교가 신앙을 정립하고자 정했다고 보고, 이 신조에 의거하여 이단을 구분한다.
325년 제1차 니케아 공의회의 결정에 따라 삼위일체를 부정하는 사람은 파문된다. 따라서, 사도신경을 외워 이에 대한 믿음을 선서하지 못하면 곧 이단이기 때문에 기독교 공동체 내에서 효과적인 신앙 검증 도구로 기능한다.
개신교 측에서는 "선생님은 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십니다."(마태복음 16:16)라는 베드로의 신앙고백을 토대로 만들어졌다고 보기도 하며, 사도의 신앙고백이라는 말을 사도적 권위의,
즉 성경의 내용을 잘 요약하여 권위가 있다는 뜻으로 받아들인다.
참고로 사도신경의 전해지는 이야기 중에 사도들이 예루살렘에서
만방으로 선교를 위하여 흩어지기 전에 한 구절씩 붙여서 만들었다는 전설이 있지만 역사적 사실이 아니다.
십계명은 우리가 승영하는 데 필요한 영원한 복음의 원리이다. 주님은 고대에 모세에게 그것을 알려 주셨으며(출 20:1-17), 후일의 계시에서 그것을 다시 언급하셨다. 십계명은 복음에서 절대적으로 필요한 부분이다. 이 계명에 순종하는 것은 다른 복음 원리에 순종하는 것을 쉽게 한다.
십계명은 성경에 있는 열 가지의 법으로서 하나님께서 출애굽을 한 후 얼마 지나지 않은 이스라엘 국가에게 주신 것입니다. 십계명은
본질적으로 구약 성경에 포함된 613개의 계명들이 요약된 것입니다. 처음 4 개의 계명은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를 다루고 있습니다.
나머지 6개의 계명은 우리들끼리의 서로의 관계를 다룹니다.
십계명은 성경의 출애굽기 20장 1-17절과 신명기 5장 6-21절에
기록되어 있으며 다음과 같습니다.
“사도신경·십계명·주기도문은 기독교의 3가지 보물이라 할 수 있습니다. 사도신경은 우리가 믿는 믿음의 요약이며, 십계명은
우리가 행해야 하는 행동의 요약이고, 주기도문은 우리가 기도해야 하는 비전의 요약입니다. 즉, 사도신경은 기독교 신앙의 핵심이고,
십계명은 기독교 윤리의 핵심이며, 주기도문은 기독교 비전의 핵심입니다. 그래서 사도신경은 기독교인의 믿음을 대표하며, 십계명은
기독교인의 사랑을 대표하며, 주기도문은 기독교인의 소망을 대표합니다.
교회는 지난 2천 년 동안
사도신경·십계명·주기도문이라는 기독교의 3대 보물을 전수받고 전달해 주는 일을 지속해 왔습니다. 사도신경·십계명·주기도문은
초대교회 때부터 세례받기를 원하는 사람에게 가장 먼저 가르친 내용이며, 특별히 루터와 칼빈 같은 종교개혁자들이 교인들을 훈련할 때
가장 중요시한 것입니다. 루터의 유명한 대소교리문답은 사도신경·십계명·주기도문을 가르치는 것이고, 칼빈의 유명한 『기독교강요』의
초판도 사도신경·십계명·주기도문을 중심으로 기록한 것입니다. 대륙의 개혁파 교회에서 중요하게 사용하는 교리문답서인 하이델베르크
교리문답서도 사도신경·십계명·주기도문을 가르치는 것이며, 영미 장로교회 전통의 웨스트민스터 대소교리문답서도 사도신경의 확장된 교리
내용과 십계명·주기도문을 가르치는 것입니다.
이런 전통은 우리 한국교회에도 이어져 한국교회가 공적으로 사용하는
찬송가의 표지에 사도신경·십계명·주기도문을 인쇄해 놓았습니다. 그리고 한국교회의 대다수는 주일 오전 예배 시간마다 사도신경으로
신앙을 고백하며, 주기도문을 찬송으로 만들어 부르거나, 축도를 하지 않는 예배 시간의 끝을 주기도문으로 마무리하곤 합니다.
그러나
요즈음 사도신경·십계명·주기도문의 중요성을 잘 몰라 교회에서 가르치지 않거나, 의미를 잘 모른 채 습관적으로 예배에 사용하는
안타까운 일들도 많이 발생합니다. 앞으로 우리는 선배 기독교인들에게 전수받은 기독교의 3대 보물인 사도신경·십계명·주기도문을 잘
사용해 우리 삶을 기독교인다운 삶으로 만들어 가야 할 뿐 아니라, 우리 후배 기독교인들에게 기독교의 3대 보물을 잘 가르치고
전수해야 할 책임이 있습니다.”
[에필로그 중에서]
사도신경은
기독교의 입문단계에서 공부해야 하지만 사도신경의 내용을 완전히 다 알았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 사도신경에
담긴 진리의 깊이와 높이와 넓이는 우리가 한평생 공부한다 해도, 한평생 체험한다 해도 다 이해할 수 없고 체험할 수 없을 정도로
풍성하기 때문입니다.
이제 이 책을 다 읽은 분은 한 번 읽은 것으로 만족하지 말고, 반복해 읽어 보기를 바랍니다.
무슨 일을 하든 기초와 기본기가 튼튼해야 합니다. 크고 튼튼한 건물을 지으려면 기초가 튼튼해야 합니다. 기초를 튼튼히 하는 일은
비단 건물을 세우는 데만 해당하는 것이 아닙니다. 공부·운동·예술 등 모든 분야에 다 적용됩니다. 신앙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기독교인으로서 영적으로 크게 성장하려면 영적 성장을 위한 기초가 튼튼해야 합니다. 사도신경은 기독교인으로서 신앙생활을 바르고
풍성하게 하기 위한 기독교 신앙의 알파벳·구구단·천자문 같은 것입니다.
기초적일수록 반복하는 것이 좋습니다. 중요할수록
반복을 통해 확실히 내 것으로 만드는 것이 좋습니다. 이 책의 독자가 누구든지 간에 이 책을 한 번 읽는 것으로 그치지 말고 이
책에 담긴 내용이 내 신앙생활에 피와 살이 될 때까지 읽고, 읽고, 또 읽어 보십시오. 읽으면서 이 책에 담긴 진리를 바르게
깨달을 수 있도록 기도해 보십시오. 그러면 서서히 성경의 내용이 열릴 것입니다. 기독교의 핵심이 한눈에 보이기 시작할 것입니다.
주기도문 (The Lord’s Prayer)
주기도문은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가르쳐 주신 기도입니다. 기독교의 모든 전통에서 이 기도문은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으며,
매일의 예배와 개인 기도에서 자주 사용됩니다. 주기도문은 마태복음 6:9-13과 누가복음 11:2-4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주기도문 영어
Our Father in heaven,
hallowed be your name,
your kingdom come,
your will be done,
on earth as in heaven.
Give us today our daily bread.
Forgive us our sins as we forgive those who sin against us.
Lead us not into temptation but deliver us from evil.
십계명은 구약 성경 출애굽기 20장과 신명기 5장에 기록되어 있으며,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해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신 도덕적
규범입니다. 이 계명들은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올바른 관계를 정의하며, 신앙 생활의 기본이 되는 원칙을 제시합니다.
십계명은 총 10가지로, 앞의 네 가지는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의무를, 나머지 여섯 가지는 이웃에 대한 우리의 의무를 다룹니다.
십계명 영어
1. You shall have no other gods before me.
2. You shall not make for yourself an idol.
3. You shall not take the name of the Lord your God in vain.
4. Remember the Sabbath day, to keep it holy.
5. Honor your father and your mother.
6. You shall not murder.
7. You shall not commit adultery.
8. You shall not steal.
9. You shall not bear false witness against your neighbor.
10. You shall not covet.
영어 암기의 팁
이 중요한 성경 구절들을 영어로 암기하는 데는 몇 가지 효과적인 방법이 있습니다.
짧은 구절로 나누어 암기하기: 한 번에 전체를 외우기보다는, 구절을 짧게 나누어 반복적으로 외우는 것이 좋습니다.
소리 내어 읽기: 소리 내어 읽는 것은 암기력을 높이는 데 큰 도움이 됩니다. 또한 발음 연습도 함께 할 수 있어 영어 실력 향상에도 도움이 됩니다.
문맥과 의미 이해하기: 단순히 외우기보다는 각 구절의 의미를 이해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의미를 알고 외우면 더욱 오래 기억에 남습니다.
일상 속에서 반복하기: 아침 기도 시간이나 잠들기 전 시간을 활용해 매일 반복적으로 암기해보세요. 지속적인 반복이야말로 가장 확실한 암기 방법입니다.
마무리
이제 주기도문, 사도신경, 십계명을 영어로 외우는 것이 조금 더 쉬워졌나요? 3분의 투자로 신앙의 기초를 영어로 암기할 수
있다니 정말 멋지지 않나요? 매일 반복하며 신앙과 영어 실력을 동시에 키워보세요. 당신의 영적 여정이 더욱 풍성해질 것입니다.
기독교 신앙의 다섯 가지 기둥
개혁주의 5대 교리 TULIP 5주 교재
교의의 필요성
첫째,
송영의 삶을 위해 필요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교의와 신앙을 별개로 생각하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올바른 교의는 하나님에
대한 바른 생각을 가져오고 바른 사고를 통해서만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삶을 살아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에 대하여 무지한
자들은 결코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삶을 살 수 없습니다.
둘째, 복음의 삶을 위해 필요합니다. 복음을
효과적으로 전파하기 위해서는 교의에 대한 이해가 반드시 필요합니다. 교의를 통해 복음을 논리적으로 잘 전달하고 불신자들의 질문에
지혜롭게 대처할 수 있습니다. 오히려 이단 사이비들이 그들 자신의 교리를 더욱 잘 알고 있습니다.
셋째,
진리의 삶을 살기 위해 필요합니다. 현대 사회에는 여러 교파들이 난무하고 자유주의 신학과 인본주의 신학 그리고 번영신학 등이
교회를 잠식하여 그 폐해가 심각합니다. 뿐만 아니라 이단들도 그 어느 때보다 창궐하고 있습니다. 이토록 어둡고 혼란스러운 시대
가운데 바른 진리를 분별하고 그 진리가운데서 살아가려면 교의에 대한 이해가 필수적입니다.
넷째, 사랑의 삶을
위해 필요합니다. 예수님을 사랑하는 자들은 그의 계명을 지키는 자들입니다(요 14:21). 어떤 이는 교리보다는 실천이 더
중요하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주님은 분명히 계명(율법)을 지켜야 주님을 사랑하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계명을 모르는데, 어떻게 그
계명을 실천할 수 있겠습니까? 주님의 뜻을 따라 세상 가운데서 그분의 계명을 실현하는 것이 주님을 사랑하는 삶이고 이는 이웃을
사랑하는 삶과 직결되어 있습니다. 사랑은 율법의 마침이요 완성입니다. 반대로 생각하면 율법에 대한 올바른 이해가 사랑을 완성한다고
볼 수 있을 것입니다.
5대 교리 배경
종교개혁
로마제국 황제였던 콘스탄티누스
대제는 AD 313년 밀라노 칙령으로 기독교를 로마의 종교로 공인했고 정치적 입장을 따라 기독교를 적극 우대하고 지지하였습니다.
이후 교회는 빠른 속도로 바른 신앙을 벗어나 세속의 길로 접어들었는데 그 중심에는 성직주의가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성직자들은
종교적 지위를 이용해 자신들의 배를 불리는 일에 전념했으며 심지어 직분을 돈으로 주고 사는 성직매매가 성행하였습니다. 그들은
성경을 성직자만의 전유물로 전락시켰고 대신 사람들에게는 비성경적인 교리를 설파했습니다. 또한 그레고리우스 1세(재위
590~604) 때 로마의 주교가 교황으로 추대되었는데 그는 사회정의구현 등에 힘을 쏟으며 교회 지도자로서 역할을 비교적 잘
감당했지만 뒤를 잇는 교황들은 자신의 권위를 높이고 권력과 세력을 불리는데 집중하며 교회를 타락시키는데 앞장섰습니다.
교회의
세속화는 약 1000년 이상 지속되었고 역사학자들은 이 기간을 중세 종교의 암흑기라 부릅니다. 이 시기에 신인협동사상,
연옥사상, 성물숭배, 성인숭배 등과 같은 비성경적이고 이단적인 사상들이 교회 문화와 성경 교리를 변질시켰습니다. 심지어 교회의
욕망과 잘못된 가르침으로 십자군 전쟁 같은 참상이 벌어지기도 하였는데 이러한 칠흑 같은 어두움 가운데서도 하나님은 준비된 사람들을
일으키셔서 하나님의 빛을 비추며 교회를 진리 위에 다시 세우길 원하셨습니다. 대표적인 인물로는 프랑스의 발도, 영국의 위클리프
그리고 위클리프의 사상을 이어받아 독립운동을 일으킨 보헤미아의 후스와 영적회복운동을 시도하였다가 순교한 피렌체의 사보나롤라 등이
있습니다. 그러나 종교개혁이 본격적으로 이루어진 것은 16세기 루터와 칼빈에 의해서입니다. 특히 이들은 이신칭의 교리를 비판하였고
성도들에게 성경적 교리를 가르쳐 교회를 바른 진리 위에 세워나갔습니다.
개혁주의
종교개혁의
가장 큰 수확은 성경의 권위를 회복한 것이었습니다. 개혁가들은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각국의 언어로 번역하여 그것을 다시 일반
신자들의 손에 들려주었으며 성경이 본래 가르치는 바를 명확히 풀어 해석하여 신앙의 오류들을 바로 잡아나갔습니다. 그 가운데 신학자
칼빈은 기독교 강요를 저술하여 성경의 핵심 사상과 원리들을 올바르게 전파하는데 큰 공헌을 남겼습니다. 그는 제네바라는 도시의
종교개혁을 담당하였는데 그의 사역기간 동안 여러 가지 역경과 시련이 많았음에도 불구하고 성경 주석을 비롯한 수많은 작품들을 남겨
교회가 올바른 신학과 교리 위에 세워지는데 혁혁한 공을 세웠습니다. 일반적으로 개혁주의를 칼빈주의라고 부르기도 하는데 이는 칼빈이
개혁주의 신학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개혁주의는 단지 칼빈이라는 한 개인을 따르고자 하는 것이 아니며
종교개혁 당시에 개혁을 주도했던 선배들의 정신과 신학을 계승, 발전시키고 그들의 가르침과 삶을 본받고자 하는 학문 또는 신앙을
말합니다. 아울러 개혁자들의 중요한 기본적인 정신이 성경으로 돌아가는 것이었기 때문에 개혁주의의 핵심 사상 역시 언제나 성경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개혁주의 5대 교리
치열했던 종교개혁 기간이 지나고 개신교회가 유럽지역에 널리
안정적으로 뿌리를 내리기 시작할 무렵 일부 사람들이 종교개혁자들의 교리에 문제가 있다며 이의를 제기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 중
레이던 대학의 신학교 교수였던 야코부스 알미니우스는 본래 종교개혁자들의 교리에 반대하는 사람들을 연구해 재반박하라는 임무를 받은
인물입니다. 그러나 그는 오히려 종교개혁자들의 교리에 문제가 있다며 자신만의 교리를 설파하고 가르쳤습니다. 비록 그는 1609년에
죽었지만 그의 제자들과 추종자들은 개혁주의 교리에 반대하는 5가지 항목을 네덜란드 정부에 항의서 형식으로 전달하였고 교회는
급격한 혼란에 빠졌습니다. 이러한 반발에 대해 네덜란드 개혁교회는 누구의 가르침이 보다 성경적인지를 분별하기 위하여 1618년
도르트에서 목사와 신학자들로 구성된 국제회의를 개최하게 됩니다(1618-1619). 오랜 회의 끝에 도르트 총회는 종교개혁가들의
가르침이 성경적인 바른 교리라는 결론을 내리고 알미니우스를 따르는 항론파들의 다섯가지 주장을 반대하는 도르트 신조를
작성하였습니다. 이 신조에 담겨진 다섯 가지의 핵심주제를 요약해 개혁주의 5대 교리라고 하며 특별히 영문의 첫 글자를 따서
TULIP 교리라고 부릅니다.
전적타락 Total Depravity
1. 최초의 사람이었던 아담은 사단의 유혹을 받고 자신의 의지를 오용하여 하나님께 불순종하며 반역하였고 그분과 언약을 파기하였습니다. 2. 인간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모든 총명과 선하고 거룩한 성향과 능력들을 전적으로 상실하였습니다. 약간의 본성의 빛이 남아있어 상대적으로 선을 행한다 하더라도 그것은 구원에 이르기에 절대적으로 부족합니다. 3. 인간은 그 마음과 생각이 부패해 선을 선택할 수 없고, 그 본성이 악으로 심히 기울어져 있어 하나님이 싫어하는 죄를 항상 반복하여 짓습니다. 인간은 결코 스스로 구원에 이를 수 없습니다. 4.
태초의 사람이었던 아담이 전적으로 타락하여 그 죄를 전가 받은 모든 인류가 아담 안에서 죄로 오염되었습니다. 인류는 본질상
진노의 자녀가 되었으며 자신들의 죄의 책임의 결과로 하나님으로부터 단절되어 영적인 사망에 이르렀습니다. 5. 인간의 의지는 사망의 권세 아래 속박된 의지이며 그 자신의 악한 본성 안에서만 스스로 자유 합니다.
무조건적 선택 Unconditional Election
1. 하나님께서 그분의 선하신 목적과 기쁘신 뜻 가운데서 창세전에 모든 일을 작정(계획)하셨으며 이것은 결코 변하지 않습니다. 2. 하나님께서는 구원받을 자들 역시 그분의 작정 가운데서 창세전에 예정하셨습니다. 그리고 이때 하나님은 영원한 멸망 가운데 유기할 자들도 함께 예정하셨습니다. 3. 우리 인간은 전적으로 타락한 존재여서 하나님의 구원에 있어서는 전적으로 무능하며 구원에 이를만한 능력이나 지식이 전혀 없습니다. 결과적으로 인간에게는 하나님의 구원을 받을 만한 어떤 조건도 남아 있지 않습니다. 4.
하나님께서 인간의 거룩하고 의로운 행위나 믿음을 미리 아시고 조건적으로 구원받을 자를 선택하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그분의
사랑에 기초해서 오직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받을 자를 스스로 선택하시며 또한 선택하신 자들을 그분의 능력 가운데서 흠이 없이
거룩하게 만드십니다. 5. 인간이 하나님을 선택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를 먼저 선택하셨음으로 우리는 어떠한 경우에도
겸손하며 하나님께 무한히 감사하고 그분의 은혜를 찬송해야 합니다. 또한 우리의 연약함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구원을 지속적으로
소망해야 합니다. 6. 우리는 도무지 구원 받지 못할 불의한 자라고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선택하실 수 있다는 사실을 확신하며 모든 사람에게 부지런히 복음을 전파해야 합니다.
제한적 속죄 Limited Atonement
1. 하나님의 공의는 죄를 간과하지 않으시며 반드시 그 죄의 대가로 생명(피)을 요구하십니다. 2.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모든 죄를 영원히 완전하게 속량할 속죄의 피를 요구하셨는데 인간 스스로는 이 조건을 충족할 수 없었기 때문에 하나님이 세상을 사랑하사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속죄의 제물로 내어주셨습니다. 3.
그리스도께서 인간을 대신하여 친히 자신의 몸과 영혼을 단번에 하나님께 드리셔서 영원하고 완전한 속죄의 제물이 되셨습니다. 그리고
십자가 위에서 형벌을 받으심으로 인간의 모든 죄를 속량하셨습니다. 이것을 믿는 자들의 모든 죄는 예수님께 전가되며 대신 예수님의
의가 인간에게 전가됩니다. 4. 예수님의 속죄 사역은 세상 모든 사람을 위한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선택하신 자들로 제한됩니다. 그러나 이것은 그리스도의 속죄의 효력이 충분치 않아서가 아니라 하나님 스스로 그분의 경륜을 따라 제한하신 것입니다. 5.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한 속죄의 사역은 하나님의 작정 안에서 함께 작정 되었으며 예정의 은혜를 입은 자들을 위하여 아무런 낭비 없이 예비 되었고 또한 성취되었습니다.
불가항력적 은혜 Irresistible Grace
1.
인간은 구원에 대하여 전적으로 무능할 뿐 아니라 하나님을 스스로 거부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자신의 권능으로 역사하사 우리에게
복음을 듣게 하시고 그것을 믿게 하셔서 구원을 선물로 주십니다. 따라서 우리는 이것을 하나님의 은혜라고 말해야 합니다. 2. 어떤 사람들이 복음을 듣고도 받아들이지 않는 이유는 그들 스스로가 생명의 말씀을 거부했기 때문이며 하나님께서 그분의 효력 있는 구원의 은혜를 그들에게 적용하시지 않고 지나치셨기 때문입니다. 3. 그러나 하나님은 작정된 사람들에게는 반드시 복음을 듣게 하시고 효과적으로 부르시며 그리스도의 믿음과 회개를 부여하셔서 대속의 은혜를 적용하여 주시고 마침내 중생(거듭남)에 이르게 하십니다. 4. 중생은 사람의 의지와 결심에 따라 일어나지 않으며, 성부와 성자와 성령 하나님께서 그분의 위력으로 역사하신 자들만이 마침내 그리고 반드시 믿음으로 구원에 이르게 되며 오직 하나님의 능력만이 사람을 중생하게 합니다. 5.
하나님은 절대로 구원을 위하여 인간과 협력하거나 그들의 능력을 요구하지 않으시며 오직 전적으로 하나님 자신의 능력으로 어떠한
저항에도 불구하고 마침내 구원을 베푸시기 때문에 우리는 이것을 거부할 수 없는 하나님의 은혜라고 고백합니다.
성도의 견인 Perseverance of the Saints
1. 성도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 때문에 거룩한 백성으로 거듭난 사람들을 의미합니다. 2.
본질적으로 거룩한 백성이 되었다고 하더라도 아직 완전한 하나님의 나라가 오지 않았음으로 세상에 사는 동안에는 사단의 유혹을 받게
되며 때로는 죄 가운데 걸려 넘어지기도 하고 상대적으로 심각한 죄를 짓기도 합니다. 이러한 죄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약화시키며
한동안 그 은혜의 효력을 경험할 수 없게 만듭니다. 3. 비록 하나님의 자녀들이 때때로 죄에 걸려 넘어져도 하나님은 양자됨의 지위를 박탈하지 않으시며 한번 구원하기로 정하신 자들은 결코 사단에게 빼앗기지 않습니다. 4. 성령 하나님께서는 죄 가운데 빠진 하나님의 자녀들이 속히 돌이켜 자신의 죄를 회개하도록 인도하시며 회개한 자를 용서하시고 다시 옳은 길로 인도하십니다. 5. 하나님께서는 자녀들이 구원에서 탈락할 정도의 심각한 죄를 짓도록 방치하지 않으시며 시험을 주시더라고 우리가 감당할만한 시험을 허락하십니다.
자존성(自存性) 영원성(永遠性) 인생살이 네 가지 소중한 지혜 1. 나도 꼭 죽는다. 인정하고 세상을 살아라. 죽음을 감지하는 속도는 나이별로 다르다고 한다.
청년에게 죽음을 설마한들
자기 일 아니라고
팔짱을 끼지만, 노인에게
죽음은 버스 정류장에서
차를 기다림과 같나니
종교, 부모, 남편, 아내,
누구도 그 길을 막을 수 없고,
대신 가지 못하며,
함께 가지 못한다.
하루하루, 촌음(寸陰)을
아끼고 후회 없는 삶을 사는 것,
이것이 죽음의 두려움을
극복하는 유일한 길이다.
2. 회자정리(會者定離)
만나면 헤어짐이 세상사
법칙이요 진리이다.
사랑하는 사람, 일가친척,
남편, 부인, 자식, 명예,
부귀영화, 영원히 움켜쥐고
싶지만 하나 둘 모두
내 곁을 떠나간다.
인생살이는 쉼 없는 연속적인
흐름인 줄 알아야 한다.
매달리고, 집착하고,
놓고 싶지 않는 그 마음이
바로 괴로움의 원인이며
만병의 시작이니,
마음을 새털같이 가볍게
하는 지혜가 필요하다.
3. 원증회고(怨憎會苦)
미운 사람, 싫은 것, 바라지
않는 일, 반드시 만나게 된다.
원수, 가해자, 아픔을 준 사람,
꼴도 보기 싫은
사람도 만나게 되며,
가난, 불행, 병고, 이별, 죽음
등내가 피하고 싶은 것들이
나를 찾아온다.
세상은 돈다. 빙글빙글...
주기적 사이클로...
나도 자연의 일부인 만큼
사이클이 주기적으로 찾아온다.
이를 '라이프 사이클(life cycle)'
이라한다.
현명하고 지혜롭고 매사에
긍정적인 사람은 능히 헤쳐
나가지만 우둔하고 어리석고
매사에 소극적인 사람은
그 파도에 휩쓸리나니
늘 마음을 비우고
베풀며 살아라.
4. 구부득고(求不得苦)
구하고자, 얻고자,
성공하고자, 행복하고자,
하지만 세상살이가
그렇게 만만치 않다.
내가 마음먹은 대로 다
이루어지면 고통도 없고
좋으련만 모든 것은
유한적인데 비해 사람
욕심은 무한대이므로
아무리 퍼 부어도 채워지지
않는 항아리와 같다.
그러므로 욕심덩이 가득한
마음을 조금씩 덜어
비워가야 한다.
자꾸 덜어내고 가볍게 할 때,
만족감, 행복감, 즐거움이
그를 따른다.
마치 형체를 따르는
그림자와 같이... -옮긴글-
佛家에서 말하는 健康 10訓
첫째 : 소육다채(小肉多菜)
육식을 적게 하고 채소를 많이 먹어야 한다는 말이다. 불교에서는 육식을 금기하고 있지만 재가 불교 신자들은 가능한 한 육식을 피하고 먹는다 하더라도 적게 먹을 것을 권장하고 있다. 그 대신 채소를 많이 먹어서 부족하기 쉬운 비타민과 무기질을공급할 것을 권하고 있다.
둘째 : 소식다작(小食多嚼)
가능한 적게 먹고 잘 씹어 먹어야 한다는 말이다. 장수의 비결이 바로 적게 먹는 소식에 있다. 주역에서도 '복육분천수'라 하여 자기 식량의 6할만 먹으면 하늘이 준 수명까지 살 수 있다 했다. 이와같이 적게 먹되 그것도 소박하게 식사하라 권하고 있다. 적게 먹으면 정신이 맑아지고 성인병도 예방할 수 있다는 것이 현대의학의 지론이다.
셋째 : 소염다혜(小鹽多醯)
염분을 적게 먹고 식초는 많이 먹어야 한다는 말이다. 소금은 만병에 해롭다는 현대 의학적 해석으로 염분의 섭취를 줄일 것을 권장하고 있다. 염분을 적게 쓰고도 먹을 수 있게 하려면 식초를 조금 섞으면 염분이 적어도 간이 맞는다는 말이다. 염분을 적게 먹는 방법이다.
넷째 : 소의다욕(小衣多浴)
옷은 가능한 한 적게 입고 목욕은자주 하라는 말이다. 옷을 많이 입으면 질병을 방어하는 면역이 떨어지기 때문에 가능한 한 적게 입되 목욕은 자주 하여 혈액 순환을 촉진할 것을 권장 하는 건 지극히 당연한 이야기이다.
다섯째 : 소번다면(小煩多眠)
근심은 적게 하고 잠은 푹 자라는 말이다. 사람이 살아가자면 좋은 일도 많겠지만 어려운 일도 있기 마련이다. 근심, 걱정, 불안, 초조 등 스트레스를 빨리 풀지 않으면 그것이 병을 만들기 때문에 가능한 한 근심을 빨리 잊어버 려야 한다는 충고이다. 그 대신 피로를 회복하는 데는 잠을 많이 자야한다는 것이다.
여섯째 : 소욕다시(小慾多施)
욕심을 적게 하고 남에게 많이 베풀라는 말이다. 욕심은 끝이 없다. 욕심을 가지면 가질수록 근심과 불안이 따라다니기 마련이다. 그래서 건강 장수의 비결로 마음을비우라 하지 않던가! 태어날 때 빈손으로 왔다가 어차피빈손으로 갈 길인데 먹고 살 만큼만가지면 될 것이다. 부처님의 자비가 그렇고, 예수님의사랑이 그렇다. 남에게 베풀면그것이 하늘에 닿아 복록수를 누린다는 얘기다.
일곱째 : 소당다과(所糖多果)
설탕은 적게 먹고 과일은 많이 먹어야 좋다는 말이다. 설탕은 비만 등 만병의 근원이기 때문에 적게 먹되 과실을 많이 먹음으로써 우리에게 부족하기 쉬운 비타민과무기질의 섭취를 충분히 공급하라는것이다.
여덟째 : 소차다보(小車多步)
가능하면 차를 적게 타고 많이걸으라는 말이다. 유산소 운동 중에 최고가 걷기이다. 결국 차를 적게 타고 많이 움직이라는 말로서 걷기운동을 권장하고 있다.
아홉째 : 소언다행(小言多行)
가능하면 말은 적게 하고 행동으로 실행을 많이 하라는 말이다. 우리 속담에 침묵은 금이라고 했다. 말이 많으면 실수하기 쉽고 가볍다는 인상을 준다. 그 대신 말보다는 실천에 중점을 두고 생활을 하면 실수가 적고 남으로부터 인정을 받게 된다는 뜻이다.
열째 : 소분다소(小憤多笑)
화는 적게 내고 많이 웃으라는 말이다. 화를 내면 남에게도 피해를 주겠지만 자신의 건강을 해친다는 경고이다. 대신 많이 웃으면 건강에도 좋고 가정도 화목하며 직장도 밝아진다.
헤르만 헤세의 기도
나로 하여금 나 자신에게 절망토록 하소서. 그러나 주님을 향해서는 절망하지 않게 하소서.
방황의 탄식을 모조리 맛보게 하소서. 온갖 고뇌의 불꽃으로 나를 사르시고 나로 하여금 온갖 욕됨을 받게 하소서.
내가 자신을 유지하는 일을 돕지 않게 하시고 내가 자신을 확대하는 일을 돕지 않게 하소서.
하지만 내 자아의 모든 것이 소멸했을 때면 그것을 행하신 분은 주님이라는 사실과 주님께서 불길과 고뇌를 만드셨다는 사실을 내게 가르쳐 주소서.
왜냐하면 나는 기쁘게 멸망할 수 있고 기쁘게 죽겠으나 나는 주님의 품이 아니고서는 죽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Hermann Hesse
Gebet
Laß mich verzweifeln, Gott, an mir,
Doch nicht an dir!
Laß mich des Irrens ganzen Jammer schmecken,
Laß alles Leides Flammen an mir lecken,
Laß mich erleiden alle Schmach,
Hilf nicht mich erhalten,
Hilf nicht mich entfalten!
Doch wenn mir alles Ich zerbrach,
Dann zeige mir,
Daß du es warst,
Daß du die Flammen und das Leid gebarst,
Denn gern will ich verderben,
Will gerne sterben,
Doch sterben kann ich nur in dir.
절영지회(絶纓之會)
▪남의 잘못을 탓하지 마라! ▪남의 단점을 보지도 마라! ▪나의 단점을 정당화하지 마라 ▪오로지 나의 단점을 고치기에 힘쓰라!
위의 말은 경남 양산의 소나무 숲 속에 자리잡고 있는 통도사(通度寺) 경내 곳곳에 걸려 있는 검은 나무판의 경구 중 하나입니다. 춘추시대 중국 초나라 장왕의 일화에서 만들어진 “절영지회(絶纓之會)”라는 고사성어가 있습니다. *纓영 : 갓끈
장왕이 나라의 큰 난을 평정한 후, 공을 세운 신하들을
치하하기 위해서 연회를 베풀었습니다.
신하들을 아끼던 장왕은 이 연회에서
자신의 후궁들이 시중을 들게 했습니다.
연회가 한참 진행되던 중, 갑자기 바람이 불어서
연회장의 촛불들이 일순간에 꺼졌습니다.
그 순간 한 여인의 비명이 연회장에 울려 퍼졌습니다.
그리고 어둠 속에서 그 여인이 앙칼진
목소리로 크게 외쳤습니다.
어둠을 틈타서 누군가가 자신의 가슴을 만졌고,
자신이 그 자의 갓끈을 뜯어 두었으니,
장왕께서는 어서 불을 켜서 그 무엄한 자를
처벌해달라는 내용이었습니다.
자신의 후궁을 희롱한 무례한 신하가 괘씸하고,
자신의 위엄이 희롱당한 것 같은 노여운
생각이 들 수도 있었겠지만,
그 순간 장왕은 큰 소리로 다음과 같이 이야기 합니다.
“이 자리는 내가 아끼는 이들의 공을
치하하기 위해서 만든 자리이다.
이런 일로 처벌은 온당치 않으니 이 자리의
모든 신하는 내 명을 들어라!
지금 자신이 쓰고 있는 갓의 갓끈을
모두 잘라 버리도록 해라!
지금 일은 이 자유로운 자리에 후궁들을 들게 한
나의 경솔함에서 빚어진 일이니 불문토록 하겠다.”
장왕은 먼저 후궁들의 마음을 다독여 연회장에서 내보냈고,
모든 신하가 갓끈을 자른 뒤에야 연회장의 불을 켜도록 했으니
범인이 누구인지 확인할 수 없었고,
자칫하면 연회가 깨어지고 한바탕 피바람이 몰아칠 수도 있는
상황이 가벼운 해프닝으로 넘어가게 되었습니다.
그 시대의 분위기에서 왕의 여인을 희롱한 것은
왕의 권위에 도전한 역모에 해당하는 불경죄로 죄인은 물론
온 가문이 능지처참을 당할 수 있는 중죄였습니다.
그렇지만 신하들의 마음을 달래는 치하의 연회 자리에서
일어날 수 있는 실수로 용인한 것입니다.
거기에서 더 나아가 놀랍게도 그 일이 자신의 경솔함에서
빚어진 일임을 인정한 것입니다.
이것은 장왕이 자신에 대한 자존감(自尊感)이 충만한
사람이라서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자기 자신을 신뢰하고 균형 잡혀 있는 사람은 사소한 일에
지나치게 분노하지 않습니다.
일어난 일을 사실 그대로의 상황으로 보고,
더는 자의적인 확대해석을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몇 해 뒤에 장왕의 초나라는 진나라와 나라의 존폐가
달린 전쟁을 치르게 됩니다.
그 전쟁에서 장왕이 죽음의 위기에 처했을 때
장왕의 앞으로 나서서 자신의 목숨을 아끼지 않고,
초나라의 수호신이 되어 온 몸이 붉은 피로 물들며 흡사
지옥의 야차처럼 용맹하게 싸워서
장왕을 구하고 초나라를 승리로 이끈 장수가 있었습니다.
전쟁이 끝난 후, 장왕은 그 장수를 불렀고
용상에서 내려와 그 손을 감싸쥐고 공로를 치하하며
목숨을 아끼지 않고 용맹하게싸운 연유를 물었습니다.
그 장수는 장왕의 손을 풀고 물러나
장왕에게 공손하게 큰 절을 올립니다.
“몇 해 전에 있었던 연회 자리에서 술에 취해 죽을 죄를 지은
소신을 폐하께서 살려 주셨습니다.
그 날 이후로 소신은 새롭게 얻은 제 목숨은
폐하의 것으로 생각하며 살았고,
오늘 이 전장에서 제 목숨을 폐하를 위해서
바칠 각오로 싸웠습니다.”
“절영지회(絶纓之會)”
'갓끈을 자른 연회'라는 뜻으로 남의 잘못을 관대하게 용서하고 자신의 허물을 깨우친다는 의미의 고사성어.
11월 26일(수) 요한복음 20-21장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믿는 자가 되라(20:27)
도마에게 이르시되 네 손가락을 이리 내밀어 내 손을 보고 네 손을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보라 그리하고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 Then he said to Thomas, Put your finger here; see my
hands. Reach out your hand and put it into my side. Stop doubting and
believe.
믿음 없는 자...믿는 자가되라 - '믿음 없는 자'에 해당하는 헬라어 '아피스토스'(571)는 고전 6:6;14:22과 고후 4:4 등에서 '믿지 않는 사람' 즉 '그리스도교인이 아닌 사람'을 가리키는 말로 쓰였다. 그러나 여기에서 도마에게 그 단어가 문자적으로 적용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보다는 여기서의 강조점은 예수의 부활에 대한 믿음은 기독교의 핵심이라 할 만큼 중요한 내용이라는 사실에 있다. 주님의 분명한 요구는 '믿는 자'(피스토스. 4103)가 되라는 것이다. 이것은 단순한 요청이 아니라 명령이다. 꼭 그렇게 되어야만 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 명령은 그가 보여준 회의에 대한 책망이 아니라 아직 온전한 믿음에 이르지 못한 것에 대한 안타까움과 그가 굳건한 믿음을 갖게되기를 간곡히 원하는 주님의 애정에 근거한 것임에 분명하다. 이러한 주님의 태도는 마침내 도마를 감화시켰고 그로부터 위대한 신앙 고백을 이끌어 내었다(28절). 한편 본문에서 '되다'에 해당하는 헬라어 '기누'(*)에 대해서 몇몇 학자들은, 가끔 사용되는 용법 즉 '자신을 보이다'의 의미로 해석한다(고전 15:58;골 3:15; 살전 1:5;2:7, Lenski, Barrett). 이럴 경우 믿는 자가 되라는 말은 '네 믿음을 보이라'로 바꿀 수 있다. 이런 해석도 의미는 있다. 참다운 믿음을 가진 자는 그 믿음의 참됨을 내보여 줄 수 있어야 하기 매문이다.
요한복음 20장 27-29절**에서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후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이 구절은 부활한 예수님을 직접 보지 못했지만 그분을 믿는 사람들을 복되다고 하시며, 제자들이 의심을 넘어 믿음을 갖게 되도록 격려하는 내용입니다. 따라서 이 문장은 단순히 '믿는 사람이 되어라'는 의미를 넘어, 보지 않고도 믿는 믿음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메시지입니다.
성경 구절의 배경
도마의 의심: 예수님의 부활을 믿지 못하던 제자 도마는 "내가 그의 손의 못 자국을 보고 내 손가락으로 그 못 자국을 넣어보고 내 손을 그 옆구리에 넣어보지 않고서는 믿지 아니하겠다"고 말했습니다.
예수님의 재등장: 이후 예수님이 다시 나타나셨을 때, 도마에게 "내 손가락을 이리 내밀어 내 손을 보라 또 네 손을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보라 그리하고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믿음의 축복: 이에 도마는 "나의 주시며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라고 고백했고, 예수님은 "너는 나를 본 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믿는 자가 되라(요한복음 20:24~29)
어떤 노부부가 평생을 자녀가 없이 살았습니다. 나이가 들어 너무 적적해서 아이를 키우고 싶었습니다. 고아원에 가서 마땅한 아이로
골라서 입양을 했습니다. 아이가 없던 집에 아이가 오니 활력도 생기고, 생기가 나고, 참 좋았습니다. 그런데 이 아이가 좀
거칠었습니다. 좀 시끄러웠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 좋아지겠지!” 라고 생각을 했습니다. 이 노부부는 과자를 아주
좋아합니다. 늘 먹을 과자를 탁자위에 올려놓습니다. 어느 날 과자가 자꾸 없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아이에게 “너 혹시 과자를
먹었니?” 물었습니다. “저는 먹지 않았는데요.”라고 아이가 대답했습니다. “그럼 너 혹시 어디에 치워두었니?” “전 만지지도
않았는데요.” 그런데 한두 번도 아니고, 노부부의 마음에 의심이 생겼습니다. 노부부는 “분명히 이 녀석이 먹거나 감추어 두고는
모른다고 하는구나.”라고 생각을 했습니다. 어느 날은 이 아이를 불러놓고 호되게 꾸짖고 회유를 했습니다. “내가 잘못해도 솔직히
이야기하고 용서를 구하면 용서해 주겠다. 네가 가지고 갔지! 네가 치웠지!”라고 말했습니다. “아니예요. 저는 먹지 않았어요.
저는 손도 안됐어요.” 끝까지 고집을 피웠습니다. 이 노부부는 다른 것은 다 용서하지만 끝까지 고집피우는 것은 용서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 아이를 고아원에 다시 대려다 주었다고 합니다.
아이를 대려다 주고 산만해진 집안 대청소를 하다 보니 장롱 뒤에 무언가 수북이 쌓여있는 것이 보입니다. 가만히 보니
과자이었습니다. 과자를 옮겨 놓은 것은 그 아이가 한 일이 아니라 쥐가 한 일이었습니다. 쥐가 과자를 가져다가 이리 저리 뜯어먹고
장롱 뒤에 쌓아둔 것입니다. 그것을 보는 순간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 어린 마음에 얼마나 상처가 되었을까?” 달려가서 그
아이에게 무릎을 꿇고 말합니다. “우리를 용서해 다오. 우리가 잘못 생각해서 너를 의심했단다.” 이 아이는 “저는 다시는 가지
않을거예요. 저를 믿어주지 않는 곳에서 살지 않겠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돌아가지 않았다고 합니다.
여러분 사람들은 왜 의심을 할까요? 자신의 보는 것이 정확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자기 판단이 늘 맞는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때로는 사람을 의심하고, 하나님을 의심할 때가 많습니다. 우리 인간이 보는 것은 아주 작은 부분에 불과합니다.
유명한 철학자 데카르트는 아침마다 일어나면 오솔길을 산책하는 습관이 있었습니다. 어느 날도 오솔길을 산책하는데 아직은 해가 뜨지
않고 좀 어두운 시간이었습니다. 그런데 길에 뱀 한 마리가 또래를 틀고 그곳에 있었습니다. 그는 뱀을 피해서 지나갔습니다. 그런데
그 다음날도 그곳에 뱀이 똑 같이 있는 것입니다. 또 피해갔습니다. 사흘째도 그 자리에 뱀이 있는 것입니다. “오늘은 내가 돌아
갈 수 없어. 내가 오늘은 사생결단을 내야지.” 생각하고, 지팡이를 들어서 뱀을 힘껏 내려쳤습니다. 그런데 뱀이 아니었습니다.
밧줄이 감겨져 있는 것이 뱀으로 보였던 것입니다. 그때 이 철학자는 충격을 받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내 눈이 나를
속였다.” 눈으로 보는 것이 다 옳은 것 같지만 눈으로 보는 것을 다 믿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내가 도대체 무엇을
믿을 수 있는가?” 그때부터 데카르트는 회의주의 철학자가 되었다고 합니다.
오늘 본문은 도마의 실수담을 이야기 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의심에 빠진 도마가 믿음의 확신으로 나아가는 모습입니다. 제목을
붙인다면 ‘믿음의 재발견’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셨을 때 처음 예수님을 만난 사람은 마리아입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마리아의 말을 믿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의심했습니다. 그때 예수님이 제자들을 찾아오셨습니다. 마가의 다락방에서
문을 잠그고 불안해 떨고 있을 때 예수님이 오셨습니다. “너희에게 평안이 있을지어다.” 그리고 그들에게 전도의 사명을 주시고
성령을 부어주셨습니다. 제자들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고 너무 좋았습니다. 그런데 그 자리에 한 제자가 없었습니다. 바로
도마입니다. 아마 도마는 예수님의 죽음에 대해서 몹시 상심했던 것 같습니다. 도마는 어느 누구보다도 예수님을 사랑했던
제자였습니다. “우리가 주와 함께 죽으러 가자.”라고 장담했던 인물이 도마입니다. 예수님이 어디인가 가신다고 하니 “주여 어디
가시니이까?” 질문했던 인물도 도마입니다. 도마가 나중에 돌아와 보니까 제자들이 말합니다. “우리 주님이 부활하셔서 여기에
오셨다.” 도마는 “나는 믿을 수가 없다. 나는 눈으로 확인하지 않고, 손에 난 상처를 만져보지 않고 그 옆구리에 창자국에 손을
넣어보지 않고는 나는 믿을 수가 없다.”고 선포했습니다. 일주일후에 예수님은 도마를 다시 찾아오십니다. 예수님은 도마를 꾸짖지
않으십니다. 부드러운 목소리로 “도마야! 나를 보고 확인하거라. 네 손을 가지고 내 손의 못자국을 만져보아라. 내 손으로 내
옆구리에 창자국에 손을 넣어 보아라. 그리고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음 있는 자가 되어라.” 고 예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그
말씀 앞에 도마는 무너지게 됩니다.
파리의 노트르담 대 성당이 있는데 그 성당 안에 큰 조각이 있습니다. 예수님이 양손을 들고 도마에게 보이시는 장면입니다. 도마가
이상한 눈초리로 손가락을 가지고 예수님의 상처를 만지는 장면을 조각으로 만들었는데 도마의 인상이 아주 묘합니다. 도마는 예수님의
상처에 넣었는지 아닌지 성경에 기록이 없습니다. 어떤 신학자는 “그 상처에 손을 넣어 보았을 것이다.” 아니면 “넣지 않아도 그가
믿게 되었다.” 라고 말하지만 결과적으로 그 앞에서 무너집니다. 불신의 벽이 다 무너집니다. 의심의 안개가 다 걷혀집니다.
그리고 위대한 고백을 합니다. “나의 주 나의 하나님이여!” 부활하신 주님을 “나의 구주요. 나의 하나님!” 이라고 고백합니다.
그분이 하나님이라면 부활하신 것을 확실히 믿는다는 고백을 담고 있습니다. 이 고백은 예수님의 부활이후 가장 위대한 고백입니다.
고백의 절정입니다.
베드로가 마태복음 16장에서 주는 그리스도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고백했는데 그 고백을 뛰어넘는 고백이 이 고백입니다.
그리고 도마의 인생이 변화되었습니다. 도마는 이제 의심의 아들이 아닙니다. 이름을 ‘디두모라 하는 도마’가 라고 말합니다. 이는
쌍둥이라는 뜻입니다. 아마 쌍둥이 형제였던 것 같습니다. 어떤 신학자는 그 원어를 풀어 설명하기를 이 말은 ‘의심하는 자’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고 합니다. 도마는 실증적으로 만져 보아야하고, 눈으로 보아야 믿고, 이성적으로 이해가 되어야 믿는
사람이었지만 자신 앞에 나타난 예수님의 부활의 몸을 보고 불신앙의 벽이 무너져 버렸습니다. 그리고 나의 주 나의 하나님이라는
위대한 고백을 했습니다. 그 후 도마는 믿음의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는 성경에 이끌림을 받아 주후 52년에 남인도로 넘어가서 교회를 세웁니다. 1500년경에 유럽의 군인들이 남인도 지역을
방문했는데 그곳이 바로 도마교회가 존재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 교회를 통해서 많은 사람들이 예수를 믿고 있었다고 합니다. 그
후에 도마는 인도만이 아니라 중국까지 가서 복음을 증거 하다가 순교했다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지금 남인도 지역에는 성 도마 교회
소속이라고 믿는 신자가 약 150만 명이 존재한다고 합니다. 2000년 전 이야기지만 우리에게 너무나 생생하게 증거 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도마의 잘못은 무엇입니까? 도마가 그 자리에 없었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24절을 읽어보겠습니다. “열두 제자 중에 하나인 디두모라 하는 도마는 예수가 오셨을 때 함께 있지 아니하였더라.”
여러분은 함께하시길 바랍니다. 어떤 분들은 교우들과 함께 어울리지 않습니다. 주일예배 드리고 도망가 버립니다. 그리고 그 외에
저녁예배와 수요예배는 다 담을 쌓았습니다. 이것이 도마의 문제입니다. 은혜의 자리에는 늘 같이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그 자리에는
피합니다. 그러니 늘 의심하게 되고 믿음이 떨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10장 24절 이하에 보면 “모이기를 패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 오직 권하여 그 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더욱 그리하자.” 다시 말하면 모이기에 힘쓰자는 것입니다. 왜
모여야 할까요? 모여야 기도하고, 말씀을 듣고, 찬양이라도 한 번 더 하게 됩니다. 로마서 10장에 보면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라고 말합니다. 말씀을 들을 수 있는 기회를 많이 만들어야 합니다. 은혜의 자리를
사모하여야 합니다. 오늘 도마의 문제는 그 자리에 그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학교에서도 공부할 때 수업시간에 졸고 있던 학생이 꼭
수업이 끝날 때쯤에 질문을 합니다. 왜냐하면 수업시간에 못 들었기 때문입니다. 예배에 참석하는 것이 그만큼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것만이 아닙니다. 도마의 잘못이 또 한 가지 있습니다. 다른 제자들은 다 예수님을 보았다고 하는데 그는 그것을 믿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나는 못 보아도 다른 사람들이 보았다면 믿어야 합니다. 도마는 그것을 믿지 못했습니다. “내가 만져보지 않으면 그것을 믿을 수
없다.”고 했습니다. 오늘 본문 25절 말씀을 읽겠습니다. “다른 제자들이 그에게 이르되 우리가 주를 보았노라 하니 도마가 가로되
내가 그 손에 못자국을 보며 내 손가락을 그 못자국에 넣으며 내 손을 그 옆구리에 넣어 보지 않고는 믿지 아니하겠노라 하니라.”
이 도마의 잘못이 무엇입니까? 내가 보지 못한 것은 믿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물론 도마의 이런 점을 긍정적으로 볼 수도
있습니다. 믿지도 못하면서 믿는 것처럼 행동하는 것보다는 솔직하게 못 믿겠으니 못 믿겠다고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올은
것만은 아닙니다. 여러분 내가 보지 못했다고 못 믿는 것입니다. 우리가 우리 부모님에게 태어난 것을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우리가 보았습니까? 본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남들이 그분이 나를 낳았다고 하고, 나를 키웠기 때문에 우리 아버지라고 어머니라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 어머니가 나를 낳은 것을 내가 언제 보았습니까? 아무도 보지 못했습니다. 보지 않고 믿는 것입니다. 내가
언젠가는 죽을 것을 다 믿습니다. 내가 죽어 보았나요? 안 죽어 보았습니다. 그러나 남들이 죽는 것을 보고 나도 죽을 것 이라고
믿게 됩니다. 도마는 다른 제자들이 보았다면 믿었어야 합니다. 그러나 그는 믿지 못했다는데 문제가 있습니다.
어느 교회에 재미있는 집사님이 있었다고 합니다. 목사님이 노총각 한사람을 불러서 “자네 결혼하지 않아야 하나?”라고 물었습니다.
“예! 결혼해야 하는데 마땅한 신부감이 없습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목사님이 “그럼 내가 한사람 소개해줄까?”라고 물었습니다.
“아니 목사님이 소개해주시면 무조건 가겠습니다.” 라고 노총각은 대답했습니다. “그럼 만나보겠나?”라고 목사님이 물었을 때
노총각은 “만나긴 뭐 만나보겠습니까? 목사님이 소개해주면 그냥 결혼하겠습니다.” 라고 했다고 합니다. 그 교회에 또 다른 처자가
있어서 불러 “자네도 결혼해야지?” 그 처자도 “예! 목사님! 신랑감이 없어서 못하는데 신랑감만 있으면 할 것입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내가 소개해줄까?”라는 물음에 “소개해 주세요.” “내가 만나게 해줄까?” “만날 필요가 있나요? 목사님이
보셨으면 됐지 무엇이 더 필요합니까? 그냥 하겠습니다.” 그래서 그 신랑 신부가 결혼식장에서 처음 얼굴보고 결혼을 했다고 합니다.
그래도 잘산다고 합니다. 여러분 요즘 젊은이들은 어떻습니까? 결혼을 하려면 만나 봐야 합니다. 대화해 봐야 합니다. 사귀어 봐야
합니다. 심지어는 좀 살아봐야 합니다. 살아보고 결혼해서 1년, 2년 지나고 나면 해어진다고 난리입니다. 우리가 한 달 살아보면
잘 알 것 같습니다. 그러나 저는 아직도 모르는 것 같습니다. 한 달 살아보고 결혼해서 잘 맞으면 그것이 맞는 것입니까? 인간이
느끼는 것은 한계가 있습니다. 인간이 듣는 것도 한계가 있습니다. 우리는 아주 작은 부분을 듣는 것입니다. 아주 작은 부분을
보는 것입니다. 인간이 가지고 있는 지성은 너무나 제한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것을 가지고 한사람을 어떻게 평가할 수 있습니까?
그래서 우리는 남을 판단하면 안 됩니다. 그 사람이 착하다 나쁘다 판단하면 안 됩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할 일이지 내가 판단하면
교만한 것입니다. 나 자신을 모르면서 남을 판단할 수 있습니까? 남을 판단하지 마십시오. 그 사람의 과거를 어떻게 다 알고 이렇다
저렇다 판단할 수 있습니까? 그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내가 가진 작은 능력으로 무엇을 보고 판단한다는 것은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성경에 보면 보고도 믿지 못한 사람이 많이 있습니다. 또한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이 많았습니다. “네가 본고로 믿느냐! 보지 않고
믿는 것이 복되도다.”고 했습니다. 꼭 봐야 믿을 수 있는가? 그렇지도 않습니다. 역사 속에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은 애굽을 나올
때 열 가지 재앙을 경험했습니다. 모세가 가서 바로에게 내 백성을 내어달라고 했을 때 가 그냥 보내주지 않으니 나일강을 피로
만들어서 먹을 물이 없게 했습니다. 또, 나일강에서 개구리 때가 나와서 온 집안에 개구리가 가득하게 됩니다. 독충이 날아옵니다.
파리 때가 득실거립니다. 이가 집안에 천지입니다. 몇일동안 흑암이 계속됩니다. 또, 장자가 죽습니다. 홍해가 갈라집니다. 이정도면
무엇을 더 바랄 수 있습니까? 그러나 그들이 하나님을 온전히 믿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광야에서 또 불평합니다. 하나님이 어디
있느냐? 하나님 대신에 금송아지를 만들어 놓고 절했습니다. 물이 없다고 불평하고 양식이 없다고 불평하고, 돌을 들어 모세를 치려고
했습니다. 그들은 기적을 보았지만 믿음이 없었습니다. 불신이 깔려 있었습니다.
여러분 여호수아 1장을 보면 여리고의 기생 라합이라는 여인이 나옵니다. 이 여인은 이스라엘의 기적의 역사를 한 번도 본적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믿었습니다. “상천하지에 하나님 보다 위대한 분이 없는 것을 내가 아노니 그 하나님이 그 백성을 이끌어
내셔서 광야로 이끄신 것을 내가 알고 있었다. 내가 간담이 녹는 줄 알았다.” 그는 보지 않았지만 소문만 듣고 하나님을
믿었습니다. 그리고 정탐을 온 이스라엘 사람을 숨겨주었습니다. 여러분 그것을 아무나 할 수 있는 것입니까? 우리가 북한에서 건너온
간첩을 두 명이나 우리 집에 숨겼다가 내 보낼 수 있겠습니까?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을 믿었습니다. 보지 못했지만
소문만 듣고 믿었습니다. 보지 않고 믿은 사람이 복 된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믿음이 부족할 때 믿음을 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그래서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고 우리 주님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진정 예수님의 부활을 믿습니까? 하나님의 능력을 믿습니까? 그런데 왜 하나님이 죽은 것처럼 행동하십니까? 입으로는
예수님의 부활을 노래하지만은 아직 여러분이 믿는 예수님은 무덤에 계셔서 말도 못합니다. 우리는 그런 예수님을 믿고 있지 않습니까?
정말 그분이 살아계셔서 내게 능력을 주시고 내 오른손을 잡아주시는 그런 예수님을 여러분이 믿고 고백을 하고 있습니까? 여러분
믿음이라고 다 똑같은 것이 아닙니다. 믿음이 충만한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 어떤 분들은 믿는 다고 하면서도 믿음의 능력 안에
살아가지 못합니다. 요한복음 10장 10절에 보면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을 믿으면 영생을 얻습니다. 그러나 풍성한 삶을 다 사는 것은 아닙니다. 어떤 사람은 예수 믿고 구원은 받았지만
늘 의심합니다. 늘 흔들립니다. 늘 회계합니다. 늘 뒤돌아봅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그 믿음 안에서 풍성한 삶을 누릴 수
있습니다. 행복한 삶을 누립니다. 강하고 담대한 삶을 살아 갈 수 있습니다. 확신 있는 삶을 살아 갈 수 있습니다. 여러분은 어떤
믿음에 속하십니까? 정말 부활하신 예수님을 믿느냐? 아니면 아직도 무덤에 있는 시신의 예수님을 믿고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빌리 그래함 목사님이 신학교에 입학을 했는데 그가 입학한 신학교에 성서 해석에 문제가 있었던 것 같습니다. 다양한 신학의 학설을
소개하다보니 어떤 신학의 학설은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전하기는 하지만 성경에는 인간의 말도 있다는 해석학을 듣고 낙심이 되어서
설교를 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고민에 빠져 기도하고 고민하면서 길을 걷고 있는 그에게 하나님의 음성이 들려왔습니다. “빌리
그래함아! 너는 말씀을 신뢰하라. 그리고 이 말씀을 사실 그대로 선포하라.” 그래서 빌리 그래함은 다시 힘을 얻고 하나님의
말씀을 힘있게 선포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항상 ‘성경이 말씀하시기를’ 라고 선포합니다. 내 철학이나 내 논리를 전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것입니다. “오늘 하나님의 말씀이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는 그 말씀을 있는 그대로
선포할 때 그것이 큰 능력이 되었습니다.
우리의 믿음은 인간의 감정이나 의지에 좌우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의 토대위에 새워진 것입니다. 이 말씀을 일점일획도
변함이 없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모두 예수님의 부활을 본적이 어디 있습니까? 손들어 보십시오.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이 증언하고 있는 것을 믿습니다. 복음서에 예수님의 부활을 증언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목격한 사람들은
다 변화되었습니다. 절망하던 사람들이 희망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비급한 사람들이 용기를 가지게 되었습니다. 죽고자 한 사람이
살게 되었습니다. 고향으로 내려간 사람들이 주님을 만나고 다시 예루살렘으로 올라오는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5장에 사도바울이 말하기를 부활하신 예수님이 500여 형제에게 나타나셨는데 그중에 절반이상의 사람들이 지금도 살아
있다고 합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부인할 수 없는 것입니다. 250명의 사람들이 지금도 살아서 증언 할 수 있는데 어떻게 부인할
수가 있습니까? 오늘 우리는 그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우리도 부활의 신앙을 가지고 능력 있는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여러분 부활의
주님은 오늘날도 역사하는 것을 믿으시죠?
윌리암 크리에거라는 미국의 유명한 부활신학자가 있다고 합니다. 이 사람이 한번은 유명한 무신론자와 공개 토론회를 벌이게
되었습니다. 정말 하나님이 살아계시는지 예수님이 부활했는지 그것을 가지고 공개 토론을 벌였습니다. 회당에 8000명이 되는
사람들이 모여들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논쟁을 지켜보았습니다. 누가 승리 했을까요? 이 신학자의 일방적인 승리로 끝이 났다고
합니다. 그는 하나님이 살아계시는 증거, 예수님이 부활하신 증거를 의학적으로, 과학적으로, 법학적으로 다 증거 했습니다. 그러나
무신론자는 아무것도 제시하지 못했습니다. 그의 제시는 너무나 빈약했다고 합니다. 그곳에 참석한 수많은 사람들이 기독교는 분명한
증거위에 서있다는 것을 인증했다고 합니다. 100개의 라디오로 그것이 중개되었고 그곳에 참석한 불신자 47명이 그 순간에 예수님을
영접했다고 합니다. 하나님의 존재는 부인할 수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오늘도 부활하신
주님은 우리가운데 역사하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며칠 전에 신문에 문화관광부 장관을 지낸 지성인이고 석학인 이어령 씨가 근래에 기독교에 귀화할 것을 약속하고 7월에 세례받기를
공개적으로 기자에게 이야기 했습니다. 그는 종교에 대해서 많은 토론을 했습니다. 그는 예수를 믿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가 예수를
믿고 세례를 받게 되었습니다. 참 놀라운 일입니다. 김용옥 교수 같은 사람은 요한복음 주석이라는 책에서 기독교를 부인하고
예수님을 폄하하는 논리를 펴고 있지만 이어령 씨는 예수그리스도를 믿고 세례를 받으려고 합니다. 이유가 있습니다. 기독교는 죽은
종교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의 딸이 처음 예수님을 믿기 시작했는데 미국에 유학을 가서 변호사가 되고 검사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딸이 어느 날 갑상선 암이라는 진단을 받게 되었습니다. 수술을 했는데 재발을 했습니다. 그래서 다시 또 수술을 했는데 재발을
했습니다. 직장도 못나가게 되었고, 어린 아들도 불행하게 척수 자폐증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학교를 갈 수가 없었습니다. 어려움이
겹치기 시작했습니다. 그것만이 아니었습니다. 망막이 파괴되어서 볼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이어령 씨가 딸이 치료받고 있을 때
딸에게 가면 딸이 아버지를 대접하려고 주방에서 일을 하는데 숟가락이나 밥그릇을 재대로 씻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아버지가 얼마나
마음이 아팠을까요? 그는 낙심하지 않고 하나님 앞에 나아가서 기도하며 부르짖었습니다. 망막을 치료하려고 한국에 왔더니 당신의
망막은 다 치료되었다고 합니다. 수술할 필요가 없어졌습니다. 너무 감사해서 그는 어느 교회에서 간증을 했다고 합니다. 이어령 씨가
“우리 딸에게 이런 은혜를 주신 하나님을 나도 섬기겠습니다.”라고 기자와 인터뷰해서 이야기 했습니다.
부활의 하나님은 죽음의 하나님이 아니라 지금도 역사하는 하나님이십니다. 오늘도 하나님은 일하고 계십니다. 여러분 그분이 만약에
부활하지 못했다면 이런 역사를 일으킬 수 있었을까요? 살아계시기 때문에 오늘도 기적을 일으키시고, 병든 자를 치료하시고 가정을
변화시키고 있습니다.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는 것입니다. “너희가 본고로 믿느냐
보지 않고 믿는 자가 더 복되도다.” 보지 않고 믿는 자가 더 복되다고 합니다. 우리는 눈으로 예수님의 부활을 보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보지 않고 믿는 자가 더 복되다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믿음의 축복을 누리십시오. 여러분! 믿음의 부활을
쓰레기통에 던지지 마십시오.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볼 것이라고 주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믿는 이 믿음,
하나님의 존재와 그 능력을 믿는 믿음을 가지고 어려운 세상가운데 담대하게 살아가는 승리자들이 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예수님의 제자들 가운데 한 사람인 도마는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후 그의 제자들에게 나타나셨을 때, 그 자리에 없었습니다. 왜 도마 혼자만 그 자리에 없었는지 그 이유는 알 수 없습니다. 도마가 그 자리에 없을 때에 예수님이 나타나셨던 것입니다. 주님께서 나타나셨다는 다른 제자들의 말을 듣고 도마는 내가 그 손의 못자국을 보며 내 손가락을 그 못자국에 넣으며 내 손을 그 옆구리에 넣어보지 않고는 믿지 아니하겠노라 (요20:24)고 했습니다.
그 후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이 모여 있는 곳에 찾아오셔서 도마에게 네 손가락을 이리 내밀어 내 손을 보고 네 손을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보라 그리하고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 (27절)고 하셨습니다. 도마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보고서 그의 신앙을 고백했습니다. 나의 주시며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 (28절). 도마는 제자들과 함께 모여 있다가 주님을 뵈올 수 있었으며 믿는 자가 될 수 있었습니다.
의심하는 자가 믿는 자로 변하다
우리는 본문에 기록되어 있는 이 이야기 때문에 도마를 의심하는 제라 라고 부릅니다. 도마에게 이런 별명을 붙일 때에, 도마만 예수님의 부활을 의심한 것처럼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다른 제자들도 예수님께서 자신을 드러내시기 전에는 아무도 믿지 않았습니다. 오늘날도 중생치 아니한 사람들은 예수님의 부활을 믿지 않습니다. 성령으로 거듭나지 아니한 사람들에게 있어서 믿어지지 않는 것은 아주 자연스러운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복음의 핵심인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의 소식을 듣고 믿지 않는 것이 죄가 되지 않는다는 뜻은 아닙니다. 복음을 듣고 믿지 않는 것은 그 불신앙을 인하여 정죄를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나는 듣지 못해서 믿지 않았노라고 핑계 댈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사랑하사 독생자를 보내주셨습니다(요3:16,17).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는 심판을 받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아니하므로 벌써 심판을 받은 것이니라 (요3:18)고 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은 전적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본 다른 제자들이 기쁨이 충만하고 확신에 차서 도마에게 말했을 것입니다. 도마가 의심하는 반응을 나타내자 도마를 이렇게 설득했을 것입니다. 너 혼자 따로 있지 말고 우리와 함께 있어 주님이 나타나실 때에 만나보자 라고 했을 것입니다.
가족이나 친구 중에 믿을 수 없다는 반응을 보이는 자들에게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불택자인가 보다 안믿겠다니 어쩔 수 없지 하면서 포기해서는 안됩니다. 예배에 함께 참석하자고 권하고 안내해야 합니다. 모인 중에서 은혜 받아 믿는 자로 변화될 수 있다는 희망을 가지고 끈기 있게 노력해야 하는 것입니다. 언제 도마처럼 의심에서 믿음으로 바뀌게 될지 모르는 것입니다.
십자가와 부활을 믿어야 한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제자들의 확신과 관심이 도마의 마음을 바꾸어 놓지 못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친히 찾아 오셔서 부활의 사실을 확신할 수 있는 증거를 보여주셨습니다. 도마에게 나타나셔서 네 손가락을 이리 내밀어 내 손을 보고 네 손을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라 (27절)고 하셨습니다.
도마에게 다시 살아나신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셔서 친히 주님을 믿을 수 있는 증거를 주셨습니다. 도마에게 믿음의 근거로서 증거가 필요했던 것처럼 우리에게도 증거가 필요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그 증거를 어디서 찾아야 하겠습니까?
우리는 도마처럼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육신의 눈으로 볼 수 없고, 육신의 귀로 주님을 음성을 들을 수는 없습니다. 도마는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본 후에 그리스도의 발 앞에 꿇어 엎드려 나의 주시며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 (28절)라고 했습니다.
도마에게 확신을 준 것은 그 손과 옆구리에 상처를 지니신 그리스도와의 만남이었습니다.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장사지낸 바 된 후에 무덤에서 다시 살아나신 그리스도께서 친히 도마에게 나타나셨습니다. 이것이 도마로 하여금 확신을 가질 수 있게 한 가장 확실한 증거였습니다. 주님께서 도마에게 자신을 나타내시면서 도마야 네 손과 눈으로 내 몸의 상처를 확인해 보라고 하셨습니다. 도마는 그의 손으로 상처를 확인하지 않고 확신하면서 나의 주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 라고 그의 신앙을 고백하면서 주님 앞에 경배하였습니다.
도마는 예수 그리스도를 성육신 하나님, 십자가에서 피흘려 죽으신 구주, 다신 사신 생명의 주 하나님으로 믿었습니다. 도마는 상처를 지니신 예수 그리스도, 사망을 정복하신 생명의 주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인해 그 앞에 꿇어 엎드렸던 것입니다. 어느 사람도 예수님을 하나님 으로 부르지 않았는데, 도마는 나의 주시며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 라고 했습니다. 도마의 신앙 고백은 예수님이 칭찬하신 베드로의 신앙 고백(마16:16)보다 더 위대한 것입니다. 사도 요한도 요한복음 1:1에 그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고 했습니다.
사도 요한이 요한복음의 기록 목적을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
도마에게 나타나신 예수님께서 도마에게 네 손가락을 이리 내밀어 내 손을 보고 네 손을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라 그리하고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 (27절)고 하셨습니다. 도마는 나의 주시며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 (28절)라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너는 나를 본 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 (29절)라고 하셨습니다.
지금 우리는 도마처럼 그리스도를 우리의 눈으로 보고 믿는 것은 아닙니다. 보지 못하고 믿는 것입니다. 사도들이 친히 보고 듣고 체험한 것을 증거해준 사도들의 증언에 근거하여 믿는 것입니다. 성령의 감동으로 기록된 사도들의 증언을 성령께서 사용하셔서 우리에게 증거하여 주시고, 우리는 그 증거에 근거하여 우리의 주시요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입니다.
사도들이 그들의 육신의 눈으로 보고 육신의 귀로 들은 것보다 더 확실한 증언이 우리에게 주어졌습니다. 그것은 성령의 감동하심을 입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받아 말한 것 (벧후1:21)인데, 성경 말씀입니다.
우리는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 입니다. 예수님께서 도마에게 말씀하신 바로 그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 이며 복되도다 라고 하신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보지 못하였지만 성경에 기록된 증거를 그대로 믿는 복된 자들이 된 것입니다. 사도 베드로는 사도들이 전한 복음을 듣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에게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예수를 너희가 보지 못하였으나 사랑하는도다 이제도 보지 못하나 믿고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으로 기뻐하니 믿음의 결국 곧 영혼의 구원을 받음이라 (벧전1:8,9).
보지 못하고 믿는 것은 아무런 증거에 근거하지 않고 주관적으로 무조건적으로 믿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어떤 주관적인 믿음보다는 하나님이 주신 계시에 근거한 믿음을 가지는 자들이 복되다는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환상을 본다든지, 어떤 음성을 듣는다든지, 이적들을 본다든지, 어떤 특별하고 신비한 체험들을 인해 믿는 것보다 하나님의 말씀에 기초하여 믿고 그 말씀에 근거하여 행하는 믿음이 더 참된 믿음이요 위대한 믿음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입각한 믿음을 가진 자들이 복된 사람들인 것입니다.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을 아무리 읽어도 믿음이 생기지 않는 자들이 있습니다. 성경을 읽으면 읽을수록 더 믿을 수 없게 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은 복이 없는 자들입니다. 기독교 교리를 효과적으로 부인하기 위해 성경을 읽다가 도마처럼 예수님 앞에 무릎을 꿇고 신앙 고백을 하게된 사람들도 많이 있습니다.
믿는 자들이 받는 복
사도 요한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했습니다. 믿음 또는 믿다 라는 말이 요한복음에서 89회나 나타납니다(마가복음에서는 18회, 로마서에서는 55회만 사용되었음). 예수님을 믿는 믿음에서 흘러나오는 축복들을 제임스 보이스는(그의 요한복음 주석에 보면) 열 가지로 말하고 있습니다.
1) 믿음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특권이 주어집니다(요1:12).
2) 믿음으로 영생을 얻게 됩니다(요3:16,36).
3) 믿음으로 심판에서 구원받습니다(요5:24).
4) 믿음으로 영적인 만족을 누릴 수 있습니다(요6:35).
5) 믿음으로 부활에 참예하는 복을 받게 됩니다(요6:40, 11:25,26).
6) 믿음으로 성령의 충만을 받게 됩니다(요7:38,39).
7) 믿음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보게 됩니다(요11:40).
8) 믿음으로 거룩한 삶을 살 수 있게 됩니다(요12:46; 요일1:5-10).
9) 믿음으로 많은 일들을 할 수 있습니다(요14:21; 히11:33-35).
10) 믿음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기도의 효력을 받을 수 있습니다(요17:20; 약5:16).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받게 되는 축복을 한 마디로 구원 영생 하나님의 자녀되는 것 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이 말들은 굉장히 크고 많고 영원하고 영광스러운 축복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 구원은 믿음으로만 얻습니다. 이 구원 얻는 믿음은 하나님의 은혜로 주시는 가장 귀한 선물입니다. 아무나 이 믿음을 갖고 싶다고 해서 가질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은 사도들의 말을 듣고 믿는 길뿐입니다. 우리에게는 구약 성경(모세와 선지자들)이 있으며, 신약 성경(사도들의 증언)이 있습니다. 성경에 기록된 증거의 말씀을 통해 믿지 않는 자는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나서 말해준다 할지라도 믿지 않습니다(눅16:31).
많은 사람들은 예수님이 어떤 특별한 방식으로 나타나신다든지, 어떤 환상을 본다든지, 어떤 이적과 기사를 보면 믿을텐데 라고 생각합니다. 애굽 왕 바로는 많은 이적들과 기사를 보고도 믿지 않았습니다. 가룟 유다는 예수님이 행하신 많은 이적들을 보고서도 믿지 않았습니다.
도마는 증거를 보지 않고는 믿지 않겠노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부활하신 주님을 만났으며,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 (27절)는 말씀을 듣고 믿는 자가 되었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도마처럼 부활하신 주님을 육신의 눈으로는 뵈올 수 없지만, 성경에 기록된 증거를 통하여 주님을 만날 수 있으며, 주님의 음성을 듣고 믿을 수 있습니다.
사도 요한은 자신이 요한복음을 기록한 이유를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요20:30,31). 우리는 요한복음 통해서 많은 증언을 들을 수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의 증언과 많은 표적들을 볼 수 있습니다. 더 많은 확실한 증거들이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구원 얻기에 충족한 증거들로 가득 차 있습니다.
우리가 구원을 얻는 것은 나 자신이 하나님 앞에 죄인임을 알고, 나같은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셔서 십자가와 부활로 나를 구원해 주신 것을 믿는 것으로만 가능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고서는 죄사함과 영생을 얻을 수 있는 다른 길은 없습니다. 그러므로 도마처럼 예수님을 직접 보고 믿는 것보다 사도들의 증언을 듣고 믿는 자들이 복이 있다고 하신 것입니다.
불변의 세 가지 진리 ☆
1. 제행무상(諸行無常)
태어나는 것은 반드시 죽는다.
형태 있는 것은 반드시 소멸한다.
'나도 꼭 죽는다' 라고 인정하고 세상을 살아라. 죽음을 감지하는 속도는 나이 별로 다르다고 한다.
청년에게 죽음을 설파한들...
자기 일 아니라고 팔짱을 끼지만
노인에게 죽음은 버스정류장에서 차를 기다림과 같나니
하늘. 부모. 남편. 아내라 할지라도
그 길을 막아주지 못하고
대신 가지 못하고 함께 가지 못한다. 하루하루, 촌음을 아끼고 후회 없는 삶을 사는 것이
죽음의 두려움을 극복하는 유일한 외길이다.
2. 회자정리(會者定離 )
만나면 헤어짐이 세상사의 법칙이다.
사랑하는 사람. 애인. 남편. 부인. 자식. 명예. 부귀영화.
영원히 움켜쥐고 싶지만... 하나 둘 모두 내 곁을 떠나간다. 인생살이가 한때의 흐름인 줄 알라.
끄달리고 집착하고 놓고 싶지 않는 그 마음이
바로 괴로움의 원인이며
만병의 시초이니 마음을 새털같이 가볍게 하는 지혜가 필요하다.
3. 원증회고(怨憎會苦)
미운 사람, 피하고 싶은 것들과 반드시 만나게 된다. 원수. 가해자. 아픔을 준 사람.
피하고 싶은 사람을 다시 만나게 되며 가난. 불행. 병고. 이별. 죽음 등 내가 바라지 않은 일도 종종 나를 찾아온다. 세상은 주기적 사이클 나도 자연의 일부인 만큼 작은 사이클이 주기적으로 찾아온다.
이를 '라이프 사이클(life cycle)'이라 한다. 현명하고 지혜롭고 매사에 긍정적인 사람은 능히 헤쳐나가지만 우둔하고 어리석고
매사에 소극적인 사람은 파도에 휩쓸리나니 늘 마음을 비우고 베풀며 살라.
팍스 로마나(Pax Romana)란 무엇인가?
) 로마사에서 약 200년 동안 지속된 기간으로, 증가하고 지속된 로마 제국주의, 상대적인 평화와 질서, 번영하는 안정, 패권적 권력, 지역 확장의 황금기로 여겨진다. 이 시기에는 내전과 전쟁, 특히 로마-페르시아 전쟁을 포함한 여러 분쟁도 발생했다. 전통적으로 이 시기는 원수정을 창설한 아우구스투스가 기원전 27년에 즉위하면서 시작된 것으로 이해된다. 반대로 이 시대의 끝은 "오현제" 중 마지막 황제인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가 서기 180년에 사망하면서 끝난 것으로 간주된다.[1]
고대 로마사를 접하다 보면 '팍스 로마나'라는 용어를 자주 마주하게 됩니다. 그러나 단순히 '평화로운 시대'로만 이해하기에는 그 속에 담긴 정치적·사회적 함의가 큽니다. 팍스 로마나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은 단지 고대 로마의 안정기를 묻는 것이 아니라, 제국이 어떻게 광범위한 지역을 오랜 시간 평화롭게 통치했는지를 탐구하는 문제이기도 합니다.
팍스 로마나란 무엇인가? 그 역사적 의미를 살펴보다
팍스 로마나(Pax Romana)는 라틴어로 '로마의 평화'를 의미하며, 일반적으로 아우구스투스 황제 시기부터 약 200년간 지속된 로마 제국의 안정된 시기를 지칭합니다. 팍스 로마나란 무엇인가를 이해하려면 단순히 전쟁의 부재가 아니라, 정치적 질서의 확립, 경제적 번영, 교역로의 안전 보장 등 복합적 요소가 포함된 시대적 특성을 함께 봐야 합니다. 이러한 평화는 로마 군단의 힘과 법률 제도의 정비, 관료 체계의 효율성 등에 기반하여 유지되었습니다.
팍스 로마나의 구체적 사례를 통해 본 평화의 실상
팍스 로마나의 대표적인 사례로는 로마 도로망의 확장과 치안 유지, 지중해 전역에서의 활발한 무역 활동, 지방 행정의 체계화 등을 들 수 있습니다. 로마는 통일된 법과 화폐, 공공 인프라를 통해 광대한 영토 내 주민들이 자유롭게 이동하고 교류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했습니다. 팍스 로마나란 무엇인가라는 물음에 대한 답은 이러한 실질적 변화 속에서 명확해집니다. 평화는 단지 군사적 정전 상태가 아니라 일상생활의 질적 향상과도 직결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팍스 로마나가 지속될 수 있었던 정치적 전략
아우구스투스를 비롯한 황제들은 군사적 승리를 통한 위신 강화와 함께 내치 안정에 주력했습니다. 특히 원로원과의 권력 균형 유지, 황제 숭배를 통한 통합적 상징성 부여, 지방 엘리트층과의 협력 체계를 강화하는 등 다양한 전략을 구사했습니다. 팍스 로마나란 무엇인가를 정치적 측면에서 분석하면, 황제권의 안정성과 행정적 유연성이 핵심적 역할을 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러한 정치적 기반 위에서 평화의 시대가 가능했던 것입니다.
팍스 로마나 시대에 이루어진 문화적· 경제적 발전
팍스 로마나 시대에는 예술과 문학, 건축 등 문화적 성취도 눈에 띄게 발전했습니다. 고대 로마의 원형극장, 공공 목욕탕, 개선문 등은 당시 공공 건축의 황금기를 보여줍니다. 경제적으로도 통일된 시장과 도로망을 기반으로 교역이 활발히 이루어졌고, 농업 생산성 향상과 도시 경제 성장도 촉진되었습니다. 팍스 로마나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의 문화·경제적 답변은 바로 이런 풍요와 창조적 에너지의 시대라는 데 있습니다.
팍스 로마나의 교훈과 오늘날의 적용 가능성
팍스 로마나의 사례는 오늘날 국제 정치에도 적지 않은 시사점을 제공합니다. 강력한 법치와 포용적 행정, 경제적 상호의존성이 평화를 유지하는 데 기여할 수 있음을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팍스 로마나란 무엇인가를 현대에 비추어 본다면, 지속가능한 평화란 단지 군사력만이 아니라 제도적·경제적 기반 위에 구축되어야 함을 배울 수 있습니다.
팍스 로마나의 평화가 남긴 유산을 다시 생각하며
팍스 로마나란 무엇인가라는 물음은 단순한 고대사의 호기심을 넘어 오늘날 우리가 지향해야 할 평화의 본질을 되새기게 합니다. 로마가 남긴 평화의 유산처럼, 우리 사회에서도 제도적 안정과 문화적 번영을 조화롭게 추구하는 노력이 중요합니다.
진리를 따라 산다
17세기의 유명한 수학자이면서 철학가이자 저술가인 파스칼은 후대에 많은 사람들에게 읽혀진 「팡세」라는 글 모음집을 남기기도 했다. 그가 이 글을 쓴 동기는 하나님의 은혜를 친구에게 증명하고자 해서였다.
“마호메트가 한 일은 누구라도 할 수 있는 그런 일에 불과하다. 마호메트는 기적을 행하지도 않았고 예언을 하지도 않았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는 그 누구도 못하는 일을 했다.”
“인간은 천사도 아니며 짐승도 아니다. 그런데 인간의 불행은 천사를 닮고 싶어하면서도 짐승을 닮아가는 데서 비롯된다.”
파스칼은 생각하는 과학자의 대표적인 사람이다. 생각이 없는 과학자, 생각이 없는 철학자, 생각이 없는 예술가, 생각이 없는 정치가를 생각해본다.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 특히 진리를 추구하려는 의지가 없는 사람의 열심은 매우 위험하다. 우리의 생각은 진리를 향해야 한다. 진리는 변하지 않는 영속적인 것을 의미한다. 진리를 계속 생각하는 사람에게서는 위대한 것이 나온다. 사람은 늘 생각하는 습관이 있어야 한다. 특히 자신을 만들었고 자신을 가장 잘 이해하고 잘 아는 하나님을 생각하는 습관을 길러야 한다. 하나님은 바로 진리 그 자체이시다. 성경은 진리를 알 때 우리가 가장 자유로운 생활을 할 수 있다고 말하고 있다. 진리를 알 때 우리는 생활의 만족과 즐거움을 얻을 수 있다.
하나님 아버지! 진리의 말씀이 이 땅에 가득 차게 하소서. 영적인 무지 가운데 있어 하나님을 대적하고 복음을 거절하는 자들을 긍휼히 여겨주시고, 그들에게 진리의 말씀으로 바르게 인도할 수 있도록 저를 복음의 파수꾼으로 사용하여 주소서.
파스칼은 위대한 수학자 과학자 철학가였다. 그는 16세때 투영기하학에 관한 책을 펴냈으며 청년 때에는 계산기 수압기 등을발명했다. 그는 이성과 과학의 차원 너머에 인생의 깊은 진리가 있다는 것, 하나님께서 살아 계시다는 것을 1654년 11월 23일 밤성경 요한복음 16장을 읽다가 깨닫고 진리를 탐구, 저 유명한[팡세]를 썼다. 이 날 그는 이런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다.
Pascal은 인생을 도박 혹은 내기와 같다고 했습니다. 무신론 쪽 가설을 택하면 그 인생은 차갑고 어둡고 허무와 절망과 죽음 밖에 없는
진리
어떤 날 랍비가 말하기를, "진리는 길에 널려있는 돌멩이처럼 흔한 것이다" 라고 말을 했습니다. 그래 제자가 묻기를 "선생님 그렇게 흔한 것인데 왜 사람들은 진리를 터득하지 못합니까?" 랍비는 다시 대답합니다. "그거야 사람들이 허리를 굽히기 싫어하기 때문이지. 허리를 굽히기 싫어하기 때문에 돌을 주울 수가 없단다" 그렇습니다. 허리를 굽혀야돼요. 허리를 굽혀야 진리를 터득하고 진리를 터득해야 지도자가 되는 것이죠.
11월 25일(화) 요한복음 18-19장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진리가 무엇이냐(18:38)
빌라도가 가로되 진리가 무엇이냐 하더라 이 말을 하고 다시 유대인들에게 나가서 이르되 나는 그에게서 아무 죄도 찾지 못하노라. What is truth?" Pilate asked. With this he went out again to the Jews and said, "I find no basis for a charge against him.
진리란
현실이나 사실에 분명하게 맞아 떨어지거나, 보편적이고 불변적인 참됨을 의미하며, 이는 철학, 논리학, 수학 등 다양한 분야에서 다르게 정의됩니다. 기독교적 관점에서는 예수 그리스도 본인을 진리로 보기도 하며, 그 외에도 참된 이치와 도리, 인생의 옳고 바른 방법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진리의 여러 가지 정의
철학, 논리학, 수학: 현실이나 사실에 일치하는 것, 또는 보편적이고 불변적인 것을 진리로 봅니다.
종교적 관점:
신학적 의미: 예수 그리스도 자신을 진리로 보며, 죄와 사망으로부터의 구원을 가져다주는 것이라고 설명합니다.
참된 이치와 도리: 인생을 바르고 옳게 사는 방법으로 해석하기도 합니다.
일상적인 의미: 사실에 대한 평가나 신의와 관련된 진실을 의미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진리가 중요한 이유
궁극적인 해답: 진리는 인생의 근본적인 질문에 대한 궁극적인 답을 제공하며, 삶의 방향성을 제시합니다.
자유와 구원: 기독교적 관점에서 진리는 죄와 사망으로부터의 자유를 가져다주는 구원과 관련이 있습니다.
진리란 무엇인가요?
2천여 년 전, 거짓말을 일삼던 자들에 의해 진리가 재판에 회부되고 심판을 받았습니다. 사실, 진리는 하루도 채 안돼 여섯 번의
재판을 받았는데, 그 중 세 번은 종교적인 것이었으며, 나머지 세 번은 법적인 것이었습니다. 결국, 그 사건들에 관련되었던 사람들
중 “진리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대답할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었습니다.
진리는 체포된 후, 먼저 유대인들의 부패한 전직 대제사장이었던 안나스라는 사람에게로 인도되었습니다. 안나스는 자기 집에서 재판을
열고, 피고인에게서 자백을 유도하려 하고, 당시 아무 죄도 없는 피고인을 때리는 등, 재판 중 수많은 유대법을 어겼습니다.
아나스의 뒤를 이어 진리는 마침 안나스의 사위였던 독재적인 대제사장 가야바에게로 인도되었습니다. 가야바와 유대인 공회 앞에, 많은
거짓 증인들이 진리를 고발하는 발언을 하기 위해 나섰지만, 아무것도 증명될 수 없었고, 잘못된 행동에 대한 어떠한 증거도 찾을 수
없었습니다. 가야바는 진리를 정죄하려다 일곱 개 이상의 법을 어겼습니다. (1) 재판이 비밀리에 진행되었음. (2) 재판이
심야에 진행되었음. (3) 뇌물을 수반했음. (4) 피고에게 변호할 사람이 없었음. (5) 2-3명의 증인 요건을 충족시키지
않았음. (6) 피고에게 불리한 증언을 사용했음. (7) 피고에게 당일 사형을 집행했음. 이 모든 행위는 유대인 법으로 금지되어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야바는 진리가 자기를 육신으로 온 하나님이라고 주장하는 것을 보고 신성모독으로 여겼기 때문에
유죄를 선고했습니다.
아침이 되자, 진리에 대한 세 번째 재판이 열렸고, 그 결과 유대인 공회는 진리가 죽어야 한다고 선포했습니다. 그러나, 유대인
공회는 사형을 집행할 법적 권리가 없었으므로, 진리를 로마 총독 본디오 빌라도에게 보내야만 했습니다. 빌라도는 디베료에 의해
유대의 제5대 총독으로 임명되어 주후 26년부터 36년까지 근무했습니다. 빌라도는 생사를 주관할 수 있는 권력을 가졌고, 유대인
공회가 선고했던 사형 선고를 뒤집을 수 있었습니다. 진리가 빌라도 앞에 서자, 진리에 대한 더 많은 거짓말들이 쏟아져 나왔습니다.
진리의 적들은 “우리가 이 사람을 보매 우리 백성들을 미혹하고 가이사에게 세금 바치는 것을 금하며 자칭 왕 그리스도라 하더이다”
(누가복음 23:2)라고 말했습니다. 그것은 거짓말이었습니다. 진리는 모두에게 내야 할 세금을 내라고 말했고 (마태복음
22:21), 가이사에게 도전한다고 말한 적이 한 번도 없었습니다.
이어서, 진리와 빌라도 사이에 아주 흥미로운 대화가 오고 갔습니다. “이에 빌라도가 다시 관정에 들어가 예수를 불러 이르되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이는 네가 스스로 하는 말이냐 다른 사람들이 나에 대하여 네게 한 말이냐, 빌라도가 대답하되
내가 유대인이냐 네 나라 사람과 대제사장들이 너를 내게 넘겼으니 네가 무엇을 하였느냐,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니라 만일 내 나라가 이 세상에 속한 것이었더라면 내 종들이 싸워 나로 유대인들에게 넘겨지지 않게 하였으리라 이제
내 나라는 여기에 속한 것이 아니니라, 빌라도가 이르되 그러면 네가 왕이 아니냐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네 말과 같이 내가 왕이니라
내가 이를 위하여 태어났으며 이를 위하여 세상에 왔나니 곧 진리에 대하여 증언하려 함이로라 무릇 진리에 속한 자는 내 음성을
듣느니라 하신대, 빌라도가 이르되 진리가 무엇이냐 하더라” (요한복음 18:33-38).
“진리가 무엇이냐”라는 빌라도의 질문은 역사 속에 남아 울려 퍼졌습니다. 그 질문은 아무도 빌라도에게 알려줄 수 없었던 것을
알고자 했던 깊은 생각에서 우러나온 욕망이었을까요, 아니면 냉소적인 모욕이었을까요, 아니면 예수님의 말씀에 대한 짜증스럽고
무관심한 반응이었을까요?
진리 아는 것을 부인하는 포스트모던 세상에서, 이 질문에 답하는 것은 그 어느 때보다도 중요합니다. 진리란 무엇일까요?
진리에 대한 적절한 정의
진리를 정의하는 데 있어, 진리가 아닌 것을 우선 살펴보는 것이 도움이 됩니다:
• 일이 된다고 해서 그저 진리는 아닙니다. 이는 실용주의 철학입니다. 즉, 결과 대 수단적 접근입니다. 현실에서, 거짓말로 “일이 되는 것”처럼 보일 수 있지만, 여전히 거짓말이며 진리가 아닙니다.
• 진리는 단순히 논리적이거나, 이해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한 무리의 사람들이 모여 모두 같은 거짓 이야기를 하기로 동의하고
거짓 덩어리에 기반하여 음모론을 형성할 수 있지만, 그러한 합의가 그들이 하는 말을 진리로 만들어 주지 않습니다.
• 진리는 사람들을 기분 좋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 애석하게도, 나쁜 소식도 진리일 수 있습니다.
• 대다수가 진리라고 말하는 것이 반드시 진리는 아닙니다. 전체 중 51%가 잘못된 결론에 도달할 수도 있습니다.
• 진리는 포괄적인 것이 아닙니다. 장황하고, 상세한 발표도 여전히 잘못된 결론으로 이어질 수 있습니다.
• 진리는 의도한 바에 따라 정의되지 않습니다. 좋은 의도도 잘못될 수 있습니다.
• 진리는 우리가 어떻게 아느냐가 아니라, 무엇을 아느냐입니다.
• 진리는 그저 믿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믿었다고 해도 거짓말은 여전히 거짓말입니다.
• 공개적으로 증명되었다고 진리는 아닙니다. 진리는 개인적으로 알 수도 있습니다 (예를 들어서, 보물이 묻힌 위치).
“진리 (truth)”에 해당하는 헬라어는 알레테이아로, 문자 그대로의 의미는 “숨기지 않는”, 또는 “아무것도 숨기지
않는”입니다. 즉, 진리는 항상 있고, 모두가 볼 수 있도록 항상 열려 있고, 아무것도 숨겨지거나 가려지지 않는다는 개념을
수반합니다. “진리”의 히브리어는 에메스로, “확실성”, “일관성” 그리고 “기간”을 의미합니다. 이러한 정의는 영원한 물질과
의지할 수 있는 그 무엇을 암시합니다.
철학적인 관점에서, 진리를 정의하는 간단한 세 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1. 진리는 현실에 부합하는 것이다.
2. 진리는 그 대상과 일치하는 것이다.
3. 진리는 그저 있는 그대로 말하는 것이다.
첫째, 진리는 현실 또는 “있는 그대로”에 부합하는 것입니다. 진리는 진짜입니다. 진리는 또한 자연에도 부합합니다. 다시 말해,
진리는 그 대상과 일치하고, 지시 대상을 통해 알려집니다. 예를 들어, 교사는 학급을 향해 서서, “자, 이 교실의 문은 오른쪽에
있습니다”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교사를 바라보는 학급 학생들에게는 교실 문이 왼쪽에 있겠지만, 교사에게는 오른 쪽에 문이
있다는 것이 절대적으로 진리입니다.
진리는 또한 그것의 대상과 일치합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특정한 약이 수십 그램 필요하다는 것이 절대적인 진리일 수 있지만, 또
다른 사람은 같은 효과를 내기 위해 똑같은 약을 더 많게 혹은 더 적게 필요로 할 수도 있습니다. 이는 상대적 진리가 아니라,
진리가 그 대상과 어떻게 일치해야 하는지 보여주는 것입니다. 환자가 의사에게 어떤 약을 부적절한 양으로 달라고 요청하거나, 혹은
특정 질병에 대해 아무 약이나 효과가 있을 것이라고 말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요컨대, 진리는 그저 있는 그대로 말하는 것입니다. 진리는 실제로 있는 그대로의 것이고, 다른 관점들은 틀립니다. 철학의 기본적인
원칙은 진리와 오류를 분별할 수 있는 것입니다. 토마스 아퀴나스 (Thomas Aquinas)가 말한 것처럼, “분별이 철학자의
임무”입니다.
진리에 대한 도전
아퀴나스의 말은 오늘날에는 별로 인기가 없습니다. 분별하는 것은 상대주의 포스트모던 시대에 유행에 뒤떨어진 것처럼 보입니다.
오늘날 “이것은 진리이다”라고 말하는 것은, “그러므로 그것은 가짜다”로 이어지지 않는 한 받아들여질 수 있습니다. 이는 특별히
모든 신념 체계가 진리와 관련하여 동일한 기초 위에 있어야 하는 신앙과 종교의 문제 안에서 볼 수 있습니다.
진리의 개념에 도전하는 수많은 철학과 세계관이 있지만, 각각 비판적으로 검증해 보면, 근본적으로 자멸적인 것으로 판명됩니다.
상대주의 철학은 모든 진리가 상대적이고, 절대 진리 같은 것은 없다고 말합니다. 그러면 “모든 진리는 상대적이다”라는 주장이
상대적인 진리인가, 아니면 절대적인 진리인가 물어봐야 합니다. 그 주장이 상대적인 진리라면, 정말로 무의미한 것입니다. 그것이
언제, 어디에 적용되는지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만일 그 주장이 절대적인 진리라면, 절대적인 진리가 존재하게 됩니다. 나아가,
상대주의자가 절대주의자의 입장이 잘못되었다고 주장하면, 상대주의자는 자기의 입장을 배반하게 됩니다. 왜 절대적인 진리가 존재한다고
말하는 자들이 옳을 수 없겠습니까? 본질적으로 상대주의자가 “진리는 없다”고 말하는 것은 자기를 믿지 말라고 하는 것이므로,
그의 충고를 따르는 것이 최선입니다.
회의론 철학을 따르는 사람들은 그저 모든 진리를 의심합니다. 그런데 회의론자는 회의론에 대해서도 회의적일까요? 회의론자는 자기의
진리 주장도 의심할까요? 그렇다면, 회의론에 주목할 필요가 있을까요? 회의론에 주목할 필요가 없다면, 적어도 한 가지는 분명합니다
(즉, 절대적 진리가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 그럴 경우 회의론은 아이러니컬하게도 절대적인 진리가 됩니다. 불가지론자는 진리를 알
수 없다고 이야기합니다. 하지만 불가지론도 적어도 한 가지 진리, 즉, 진리를 알 수 없다는 진리를 주장하고 있으므로, 자멸적
사고방식입니다.
포스트모더니즘의 제자들은 그저 특정한 진리는 없다고 단언합니다. 포스트모더니즘의 수호 성인, 프레드릭 니체 (Frederick
Nietzsche)는 진리를 다음과 같이 묘사했습니다. “그렇다면 진리란 무엇인가? 이동하는 은유, 환유어, 의인화의 부대 …
진리는 환상이다 … 그림을 잃어버린 동전, 이제 동전이 아닌 그저 금속 물질일 뿐인 동전.” 아아러니컬하게도 포스트모던 주의자는
이제 “그저 금속일 뿐인” 동전을 손에 잡고 있지만, 적어도 하나의 절대적인 진리를 단언합니다: 확실히 말할 수 있는 진리는
없다라는 진리입니다. 다른 세계관들과 마찬가지로, 포스트모더니즘도 자멸적이며, 자기 주장 아래 설 수 없습니다.
인기 있는 세계관은 모든 진리 주장이 똑같이 정당하다고 말하는 다원주의입니다. 물론, 이것은 불가능합니다. 두 주장, 여자가 이제
임신했다고 말하는 사람과 그 여자가 아직 임신하지 않았다고 말하는 다른 사람이 동시에 진리일 수 있을까요? 다원주의는 동시에
같은 맥락에서 “A” 와 “A가 아닌 것” 모두 맞을 수는 없다고 말하는 비모순 법칙 위에서 흐트러지기 시작합니다. 한 철학자가
변명한 것처럼, 비모순 법칙이 사실이 아니라 (그리고, 기본적으로 다원주의는 진리라)고 믿는 모든 사람은 두들겨 맞고 불태워지는
것은 두들겨 맞지 않고 불태워지지 않는 것과 다르다는 것을 인정할 때까지 두들겨 맞고 불태워져야 합니다. 또한, 다원주의는
다원주의가 사실이며, 다원주의에 반대하는 모든 것은 틀렸다고 말하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즉, 그것은 자기의 기초적인 교리를
부정하는 주장입니다.
다원주의 배후에 있는 정신은 관용의 열린 자세입니다. 그러나, 다원주의는 모든 사람이 동일한 가치를 가진다는 개념과 모든 진리
주장이 동일하게 타당하다는 개념을 혼동합니다. 요컨대, 모든 사람은 동등할 수 있지만, 모든 진리 주장이 동등할 수는 없습니다.
다원주의는 의견과 진리의 차이점을 알지 못합니다. 몰티머 애들러 (Mortimer Adler)가 그 차이점을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다원주의는 진리의 문제가 아닌, 오직 입맛의 문제에서만 바람직하고 받아들여 질 수 있다.”
진리의 공격성
진리의 개념이 비난받을 경우, 대개 다음 이유 중 하나 이상에 의해 이루어집니다.
신앙과 종교 문제에 있어 절대적인 진리가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에 대한 일반적인 비난은, 그런 입장이 “편협”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비판하는 사람은 진리가 본래 편협하다는 것을 알지 못합니다. 2 + 2가 오직 4와 같다는 믿음을 가진 수학 교사가
편협한 것일까요?
진리에 대한 또 다른 이의 제기는, 누군가 옳고 다른 사람은 잘못되었다고 주장하는 것이 오만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위의 수학
예시로 돌아가서, 수학 교사가 산수 문제에 오직 하나의 정답을 주장하는 것이 교만한 것일까요? 혹은 열쇠공이 오직 하나의 열쇠만이
잠긴 문을 열 수 있다고 주장하는 것이 교만한 것일까요?
신앙과 종교의 문제에서 절대적 진리를 고수하는 사람들에 대한 세 번째 비난은, 그러한 입장이 사람들을 포용하기 보다는 배제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항의는 진리가 본래 진리에 반하는 것을 배제한다는 사실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4가 아닌 모든 답은 2
+ 2의 정답에서 모두 배제됩니다.
진리에 반대하는 또 다른 항의는 진리를 가졌다고 주장하는 것이 공격적이고, 분열을 초래한다는 것입니다. 비판자는 대신, 중요한
것은 진정성이라고 주장합니다. 이 입장의 문제점은 진리가 진정성과 믿음, 욕망의 영향을 받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얼마나 진정으로
잘못된 열쇠가 문에 맞을 것이라고 믿든, 그 열쇠는 열쇠 구멍에 들어가지 않을 것이고, 문도 열리지 않을 것입니다. 진리는
진정성에도 영향을 받지 않습니다. 독이 든 병을 들고 레모네이드라고 진정으로 믿는 사람은 안타깝게도 그것을 마신 후 독성에
시달리게 될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진리는 욕망에 영향을 받지 않습니다. 차의 연료가 바닥나지 않기를 간절히 바랄 수 있겠지만,
게이지가 연료 탱크가 비었으니 차가 더 이상 갈 수 없다고 표시하면, 세상의 그 어떤 욕망도 기적적으로 차를 계속해서 움직이지는
못할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절대적 진리가 존재한다고 인정하지만, 오직 과학의 영역에서만 유효하며 신앙과 종교의 문제에서는 그러한 입장이 유효하지
않다고 주장합니다. 이는 논리적 실증주의라고 불리는 철학이며, 데이비드 흄 (David Hume)과 A. J. 에이어 (A.
J. Ayer)와 같은 철학자들에 의해 유명해졌습니다. 본질적으로, 이러한 사람들은 진리 주장이 (1) 유의어 반복 (예를
들어서, 모든 독신남은 결혼하지 않은 남자이다)이나 경험적으로 증명할 수 있는 것 (즉, 과학을 통해 시험 가능한 것) 중 하나일
수밖에 없다고 주장합니다. 논리적 실증주의자에게 하나님에 대한 모든 주장은 터무니없는 것입니다.
오직 과학만이 진리 주장을 만들 수 있다는 생각을 고수하는 사람들은, 과학이 무력해지는 많은 진리 영역이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합니다. 예를 들어,
• 과학은 수학이나 논리학을 전제로 하기 때문에 수학이나 논리학 분야를 증명할 수 없습니다.
• 과학은 내 생각이 아닌 다른 생각이 존재하는 것과 같은 형이상학적 진리를 증명할 수 없습니다.
• 과학은 도덕과 윤리 영역에서의 진리를 증명할 수 없습니다. 예를 들면, 과학을 사용해 나치가 사악했다는 것을 증명할 수 없습니다.
• 과학은 해돋이의 아름다움과 같은 미적인 입장에 대한 진리를 주장할 수 없습니다.
• 마지막으로, 누군가가 “과학이 객관적 진리의 유일한 근거이다”라고 주장할 때, 과학으로 시험할 수 없는 철학적인 주장을 한 것입니다.
그리고 절대적 진리는 도덕 영역에 적용될 수 없다고 이야기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죄 없는 아이를 고문하고 살인하는
것은 도덕적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절대적이고 보편적인 답은 “아니요.”입니다. 아니면, 좀 더 개인적으로 이야기해서, 도덕과
관련하여 상대적 진리를 지지하는 사람들도 언제나 자기 배우자는 절대적으로 충실하기를 바라는 것으로 보입니다.
진리는 왜 중요한가
(신앙과 종교를 포함해서) 삶의 모든 영역에서 절대적 진리의 개념을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것이 왜 그렇게 중요할까요? 분명한 것은
삶이 잘못의 결과를 치르기 때문입니다. 누군가에게 잘못된 양의 약을 주면 사람을 죽일 수도 있고, 투자 관리사가 금전과 관련하여
잘못된 결정을 하면 한 가정을 빈곤에 빠트릴 수 있으며, 잘못된 비행기에 탑승하면 원하지 않는 곳에 도착할 것입니다. 또 외도하는
결혼 상대자와 살다가 가정 파탄에 이르고, 잠재적으로는 질병으로까지도 이어질 수 있습니다.
크리스천 옹호자 라비 자카리아스 (Ravi Zacharias)가 말하듯, “사실은, 특히 당신이 거짓말을 당하는 쪽일 때에 진리가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믿음과 종교의 영역보다 진리가 더 중요한 곳은 없습니다. 영원은 잘못되기에는 무섭도록 긴
시간입니다.
하나님과 진리
During the six trials of Jesus, the contrast between the truth
(righteousness) and lies (unrighteousness) was unmistakable. There stood
Jesus, the Truth, being judged by those whose every action was bathed
in lies. The Jewish leaders broke nearly every law designed to protect a
defendant from wrongful conviction. They fervently worked to find any
testimony that would incriminate Jesus, and in their frustration, they
turned to false evidence brought forward by liars. But even that could
not help them reach their goal. So they broke another law and forced
Jesus to implicate Himself. 예수님의 여섯 번의 재판 동안, 진리 (의)와 거짓 (불의)의 대조는
자명했습니다. 그곳에는 진리이신 예수님께서 서 계셨고, 모든 행위가 거짓투성이였던 사람들에 의해 심판 받으셨습니다. 유대인
지도자들은 피고를 부당 재판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제정된 거의 모든 법을 어겼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유죄로 만들 만한 모든
증언을 찾기 위해 열심이었고, 좌절 속에서 거짓말쟁이들이 제기한 거짓 증거에 눈을 돌렸습니다. 그러나 그것조차도 그들이 목표를
달성하는 데 도움이 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또 다른 법을 어기고, 예수님께 직접 유죄를 입증하라고 강요했습니다.
빌라도 앞에서, 유대인 지도자들은 다시 거짓말을 했습니다. 그들은 신성 모독 죄로 예수님께 유죄를 선고했지만, 그 구실이 빌라도로
하여금 예수님을 죽이도록 하기에 충분하지 않다는 것을 알고, 예수님이 가이사에 도전했으며, 군중에게 세금을 내지 말라 하면서
로마법을 어겼다고 주장했습니다. 빌라도는 즉시 그들의 얄팍한 기만을 알아채고, 그러한 혐의들을 다루지도 않았습니다.
의로우신 예수님께서 불의한 자들에 의해 심판을 받으셨습니다. 안타까운 사실은 후자가 늘 전자를 박해한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가인이 아벨을 죽인 것입니다. 진리와 의가 하나이고, 거짓과 불의가 하나라는 사실은 신약성경의 몇 가지 예시에 의해서
입증됩니다:
• “이러므로 하나님이 미혹의 역사를 그들에게 보내사 거짓 것을 믿게 하심은, 진리를 믿지 않고 불의를 좋아하는 모든 자들로 하여금 심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 (데살로니가후서 2:9-12, 강조 추가).
• “하나님의 진노가 불의로 진리를 막는 사람들의 모든 경건하지 않음과 불의에 대하여 하늘로부터 나타나나니” (로마서 1:18, 강조 추가).
• “각 사람에게 그 행한 대로 보응하시되, 참고 선을 행하여 영광과 존귀와 썩지 아니함을 구하는 자에게는 영생으로 하시고, 오직
당을 지어 진리를 따르지 아니하고 불의를 따르는 자에게는 진노와 분노로 하시리라” (로마서 2:6-8, 강조 추가).
• “[사랑은] 무례히 행하지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며 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하지 아니하며,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고린도전서 13:5-6, 강조 추가).
결론
본디오 빌라도가 수세기 전에 던진 질문을 완전하고 정확하게 하기 위해서 다시 언급할 필요가 있습니다. 로마 총독 빌라도의 “진리가
무엇이냐”라는 발언은 많은 것들이 진리를 가질 수 있지만, 오직 하나만 실제로 진리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간과합니다. 진리는
어딘가에서부터 비롯되어야만 합니다.
자명한 사실은 2천년 전 그 날 새벽에 빌라도가 모든 진리의 근원을 직접 바라보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체포되어
총독에게 오시기 직전에 “내가 진리요” (요한복음 14:6)라는 간단한 진술을 하셨는데, 이는 사실 놀라운 진술이었습니다. 그저 한
사람이 어떻게 진리가 될 수 있을까요? 예수님께서 실제로 주장하셨듯, 당신이 인간을 넘어서는 존재가 아닌 이상, 그렇게 하실 수
없었을 것입니다. 사실, 예수님의 주장은 예수님이 죽음에서 부활하시면서 입증되었습니다 (로마서 1:4).
파리에 살던 사람이 시골에서 온 한 낯선 사람을 만난 이야기가 있습니다. 낯선 이에게 파리의 웅장함을 보여주고 싶어서, 루브르
박물관에 데려가 위대한 미술 작품을 보여주고, 장엄한 심포니 홀에 데려가 위대한 심포니 오케스트라 연주를 들려주었습니다. 날이
저물 무렵, 시골에서 온 낯선 이는 미술이나 음악이 별로 좋지 않았다고 말했습니다. 이에 대해 파리 사람은, “그것들을 판단한
것이 아니라, 당신을 판단한 것입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빌라도와 유대인 지도자들은 자기들이 그리스도를 심판하고 있었다고
생각했지만, 사실 심판 받는 자는 그들이었습니다. 더욱이, 그들이 유죄 선고를 내렸던 분은 불의로 진리를 막는 모든 자에게 하실
것처럼, 언젠가 그들의 재판장이 되어 실제로 심판하실 것입니다.
빌라도는 분명히 진리에 대한 깨달음을 얻지 못했습니다. 가이사랴의 역사가이자 주교였던 유세비우스 (Eusebius)는 칼리굴라
(Caligula) 황제의 통치 시기 중 빌라도가 결국 자살했다는 사실을 기록합니다. 이는 안타까운 결말이자, 진리를 무시하면
언제나 원치 않는 결과를 얻게 된다는 것을 상기시켜줍니다.
유대인의 법적 외피 속에 감추어진 내면의 죄(요한복음 18:28-32)
본문은 예수님이 빌라도의 관정으로 끌려가는 장면으로 시작됩니다. 유대 지도자들은
유월절을 지키기 위해 자신들은 관정 안에 들어가지 않고, 바깥에서 빌라도를 불러냅니다. 그들은 외적으로는 율법을 지키는 듯하지만,
실상은 거짓 증언과 살인 음모를 꾸미고 있었습니다(요한복음 18:28).
그들의 행위는 우리에게 외식이 무엇인지 보여줍니다. 죄의 본질은 단지 겉으로 드러나는
행위보다, 마음의 동기와 방향에 있습니다. 율법을 어기지 않기 위해 이방인의 집에는 들어가지 않으면서도, 죄 없는 하나님의
아들을 사형에 넘기는 모순. 이것이 인간의 내면입니다. 사순절은 이처럼 우리의 이중성과 위선을 직면하게 합니다.
빌라도는 그들에게 묻습니다. "너희가 이 사람에 대하여 무슨 일로 고소하느냐?"
(요한복음 18:29). 유대인들은 명확한 죄목을 제시하지 않고, 단지 이렇게 말합니다. "이 사람이 행악자가 아니었더라면 우리가
당신에게 넘기지 아니하였겠나이다" (요한복음 18:30). 이는 재판이 아니라 이미 정해진 결론을 위한 과정일 뿐이었습니다. 죄
없는 자를 죽이기 위한 왜곡된 절차, 그것이 이 재판의 본질이었습니다.
정치적 계산과 하나님의 섭리 (요한복음 18:33-35)
빌라도는 다시 예수님을 관정 안으로 불러들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묻습니다.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 (요한복음 18:33). 이 질문은 단순한 호기심이 아니라 정치적 위협 요소를 확인하려는 계산이었습니다. 만약
예수님이 스스로 왕이라 주장한다면, 이는 로마에 대한 반역으로 간주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되묻습니다. "이는 네가 스스로 하는 말이냐? 다른 사람들이 나에 대하여
네게 말한 것이냐?" (요한복음 18:34). 이는 빌라도의 내면을 비추는 거울 같은 질문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인간의 마음 깊은
곳을 꿰뚫어 보십니다. 빌라도는 외형적 권력을 가지고 있었지만, 실상은 두려움과 타협의 인물임을 우리는 이후의 흐름 속에서
확인하게 됩니다.
이 장면은 우리로 하여금 질문하게 합니다. 우리는 진리에 대한 판단을 사람의 말에 따라 하고 있지는 않은가? 주님의 질문은 오늘 우리에게도 울립니다. 너는 내게서 진리를 들었느냐, 아니면 세상의 말에 따라 나를 판단하느냐?
예수님의 왕권과 하나님 나라의 본질 (요한복음 18:36-37)
예수님은 자신의 왕권에 대해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니라... 내 나라는 여기에 속한 것이 아니니라" (요한복음 18:36). 예수님은 자신이 이 땅의 정치적 권세를 쥐기 위한
분이 아니심을 선포하십니다. 그분은 이 세상 나라의 논리, 무력과 지배, 계산과 거래로 움직이는 나라와는 전혀 다른 차원의 통치를
말씀하셨습니다.
이어 예수님은 자신의 사명에 대해 이렇게 선언하십니다. "내가 이를 위하여 태어났으며
이를 위하여 세상에 왔나니 곧 진리에 대하여 증언하려 함이로라" (요한복음 18:37). 예수님의 탄생과 사역, 그리고 죽음은
진리에 대한 증언이었습니다. 진리는 추상적인 개념이 아니라, 인격이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육화된 실체입니다.
예수님은 진리를 선포하셨고, 그 진리는 사람의 마음을 찌르며 선택을 요구합니다.
빌라도는 그 진리 앞에 서 있었지만, 결국 그는 그 진리와 눈을 마주하지 못합니다.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진리가 무엇이냐?"
(요한복음 18:38). 그리고는 대답을 기다리지도 않고 자리를 떠납니다. 진리 앞에서 침묵하거나 외면하는 자는 결국 진리의
외곽에 머물 수밖에 없습니다.
군중의 선택과 죄악의 전이 (요한복음 18:38-40)
빌라도는 예수님에게서 아무 죄도 찾지 못했다고 선언합니다. 그러나 그는 군중의 압력
앞에서 타협합니다. 유월절이 되면 죄수 하나를 놓아주는 관례에 따라, 예수님을 놓을까 하여 제안하지만, 군중은 바라바를
요구합니다. 바라바는 강도였습니다(요한복음 18:40).
이 장면은 복음서에서 매우 중요한 신학적 상징을 내포합니다. 죄 없는 예수님이 죄인
바라바를 대신하여 죽으시는 것입니다. 이는 대속의 모형입니다. 그분이 대신 죽으셨기 때문에, 죄인이 자유를 얻게 됩니다. 바라바는
단지 한 사람의 이름이 아니라, 우리 모두의 모습입니다. 우리는 바라바처럼 죄 가운데 있었지만, 그리스도의 죽으심으로 인해
살아난 자들입니다.
빌라도는 진리를 알았지만 두려워했고, 유대인들은 율법을 안다고 했지만 정작 율법의
완성자이신 예수님을 거부했습니다. 이 재판은 인간의 눈에는 불의였으나, 하나님의 눈에는 완전한 의가 실행된 자리였습니다.
그리스도는 불의한 재판을 통해 의로운 구속을 이루셨습니다.
진리 앞에 선 자의 응답 (요한복음 18:37)
예수님은
진리를 증언하시기 위해 오셨고, 그 진리를 위해 죽으셨습니다. 그 진리는 세상의 권력, 정치적 계산, 종교적 위선과는 전혀 다른
차원에서 작동합니다. 그것은 자기를 내어주는 사랑이며, 불의한 자를 대신하여 죽으시는 은혜입니다.
빌라도는 그 진리 앞에 서 있었지만 외면했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두 번이나 무죄라고
선언했지만, 결국은 두려움에 굴복하고 군중의 소리에 따라 불의한 결정을 내렸습니다. 우리는 어떠합니까? 우리는 진리 앞에서 어떤
선택을 하겠습니까?
예수님은 지금도 말씀하십니다. "무릇 진리에 속한 자는 내 음성을 듣느니라"
(요한복음 18:37). 주님의 음성에 귀 기울이며, 그 진리 앞에 정직하게 서는 우리 되기를 원합니다. 유다의
배신, 군중의 외침, 빌라도의 침묵, 그 모두를 넘어서 예수님은 오늘도 당신을 부르십니다. 진리는 지금도 살아계십니다. 그 앞에
엎드리십시오. 그리고 그 진리 안에서 다시 살아나십시오.
주님의 고난은 진리를 증언하기 위한 길이었고, 그 진리는 곧 우리를 살리는 복음입니다. 그 진리 앞에 선 우리 모두가 그 복음을 따라 살아가는 참된 제자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진정한 자유(로마서 8:1-6)
세상을 살아가면서 사람은 가끔 어떤 충동을 느낄 때가 있습니다. 그것은 일과 생활에서부터의 자유 그리고 더 나아가 인생의
삶으로부터의 벗어나려고하는 충동입니다. 그래서 자유를 염원하는 사람들은 "자유가 아니면 죽음을 달라"고 까지 하였던 것입니다.
사람에게 자유란 신체적으로 구금되거나 감옥에 있는 사람이 육체적 속박에서 벗어나는 것입니다. 또한 정치적 독재자로부터 벗어나
민주적 자유를 누리는 것은 정치적 자유일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진정한 인생의 자유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요 8:32)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진리는 곧 예수 그리스도를 뜻합니다. 그렇다면 참 자유, 진정한 자유가 무엇인지 살펴 보기로 하겠습니다.
1. 자유의 의미
히브리어에서 "자유하다"는 동사는 (하파쉬)로 표기합니다.
구약에서는 자유를 세 가지 측면에서 말합니다. 노예에서의 자유, 영적 포로 됨에서 자유, 부정적인 의미로 버려졌다는 뜻에서 자유, 즉 비보호를 의미
헬라어에서의 자유(엘류테리아)는 노예와 반대편에 선 시민들이 누리는 자유를 말합니다. 이것은 폭군들의 억압에서 해방된 인간의 자유를 말합니다. 또 이 자유는 자신의 욕망에서부터 벗어난 내면적 자유입니다.
신약에서의 자유는 사람이 악에 의해 끌려 다니는 죄로부터의 해방입니다. 영적 무질서와 욕신의 정욕 가운데서 방황하는 삶에서 탈출을
의미하는 자유입니다. 그러므로 자유는 꼭 어떤 신체적 구속으로부터의 자유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북한에서 온 탈북자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탈북자들이 자유 대한 남한에서의 적응에 실패하고 있다고 합니다. 이는 먹을 것이 있고 육신적 자유만 있다고 해서 모든 것이 다 가능한 것이 아님을 반증해 주고 있습니다.
또한 맹목적 자유는 정신적, 영적 보호와 통제에서의 이탈로 봅니다. 이 자유는 진정한 의미의 자유와는 거리가 먼 개념입니다. 이는
길거리에서 자유분방하며 잘못된 자유를 누리는 탈선한 사람들의 상태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렇게 자유 분망하며 사치스런 생활을
하고 유흥가와 술집으로 돌아다니며 누리는 방종적인 행동은 자유라기보다는 탈선인 것입니다.
또 그릇된 자유는 결국 사람을 죄악의 구렁텅이로 몰아 넣고 종국에는 사람을 파멸로 몰고 갑니다. 육신의 생각대로 사는 삶은 곧
육에 속한 삶으로 말미암아 세상의 근심과 고통만 이끌어 냅니다. 그러나 진정한 자유는 죄와 정욕의 노예 상태에서 범죄 하던 자가
나쁜 길에서 빠져 나오는 것을 뜻합니다.
야고보서 1:15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
17C에 철학자 파스칼은 "인간의 마음 속에는 커다란 구멍이 뚫려져 있는데, 그 구멍은 세상의 쾌락이나 물질욕으로 채울 수 없고,
아무리 노력해도 불만족과 실망으로 끝납니다. 그 구멍 뚫린 빈자리에 하나님을 모실 때에만 채울 수 있고, 참 평안을 얻을 수
있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우리의 마음에는 공허한 구멍이 크게 뚫려져 있습니다. 그것 때문에 우리는 참 자유를 누리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2. 영적 자유
본 로마서 8장은 그리스도인의 자유에 대하여 말하고 있습니다. 이 자유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가 누리게 되는데,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는 '그리스도와 함께 사는 자'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그들은 세 가지 영적 자유를 누리게 됩니다.
1) 죄와 사망에서 자유
현대는 가정 위기의 시대입니다. 또 청소년 범죄의 시대입니다. 최근의 우리나라의 통계를 보면 하루에 459 가정이 이혼을 한다고
합니다. 또 가정폭력이 난무하고, 마약사범이 늘어나고 있습니다. 1999년에는 마약 사범이 처음으로 1만 명이 넘었다고 합니다.
또한 자살하는 사람들의 수가 교통사고로 죽은 사람들의 수보다 많다고 합니다. 그 외에 각종 범죄들이 경제 수준과 학력이 점점
높아지면서 급증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이 죄 문제는 누가 어떻게 해결할 수 있을까요?
(롬 8:1,2)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예수 그리스도는 죄와 사망에서 모든 사람을 해방시키십니다. '죄와 사망의 법'이란 죄로 인하여 사망에 이르는 원리를 가리키는데,
아담 한 사람으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미친 것을 말합니다(롬 5:12). 이 사망에서 우리 주님은 '너를 해방하였음이라'고
했습니다. 이는 단번에 영원한 죄에서 놓임을 받게 된 사실을 말합니다.
사람을 바르고, 의롭게 변화시킬 수 있는 방법은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는 일 뿐입니다. 만약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살게 되면, 우리 주위에 만연된 죄악에서 벗어나게 될 줄 믿습니다.
2) 패배와 실망으로부터 자유
우리는 삶의 경쟁체제 속에서 피곤함과 많은 패배감 속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내가 계획하고 의도하는 것이 잘 되지 않고 고통과
좌절이 우리를 짓누르고 있습니다. 스스로 상실된 마음으로 고통스러워하고 있으며 상처받은 심령은 우리의 인생을 방황하게 만듭니다.
밤에 거리에 나가보면, 밤늦게까지 무력감과 고독 그리고 무엇인가에서 탈출하려는 사람들이 시내에 가득하게 차 있습니다. 밤은 마치
방황의 거리며 광란의 도시라 할 만큼 사람들로 하여금 참 행복과 기쁨을 주지 못하고 오히려 사람들을 비틀거리게 합니다. 사도바울도
자신의 곤고했던 시절을 이렇게 고백합니다.
(롬 7:24)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그러나 그리스도의 영이 우리 안에 살아 계시면 우리는 그 영의 뜻대로 생활함으로써 '패배'로부터 해방됩니다. 그 뿐만 아니라
오늘의 삶 속에서도 패배하며 좌절하고 실망으로 가득한 우리들에게 하나님은 소망으로 든든하게 세워 주실 것입니다.
(롬 8:37)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3) 두려움으로부터 자유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께 대하여 우리를 위한 중재(仲裁)가 되시며 우리는 그분의 사랑으로부터 분리될 수 없으므로 '두려움'으로부터
해방되었습니다. 두려움은 죄로 인하여 생기는 하나님의 형벌인 것입니다. 죄는 자의적이며, 일시적 기쁨을 주지만 궁극적으로는 사람을
두려움과 공포로 몰아 넣습니다.
우리의 생활과 삶 속에서 우리를 위협하고 근심하게 하는 많은 사건들이 우리 주위에 매일 매일 쏟아져 나옵니다. 때로는 불안과
걱정과 근심이 우리를 엄습해 올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주님을 바라보는 신앙으로 이 모든 것을 극복하고 참 자유 안에
머물어야 하겠습니다.
(요일 4:18)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어쫓나니 두려움에는 형벌이 있음이라 두려워하는 자는 사랑 안에서 온전히 이루지 못하였느니라
한편 현대인은 불면증과 원인모를 신경성 각종 질병으로 고통을 당하며 살고 있습니다. 이는 하나님의 사랑을 체험하지 못하고 죄와 두려움 가운데 사는 결과인 것입니다.
3. 진정한 자유
그리스도와 연합된 성도의 생활은 승리의 삶을 살아갑니다. 성도가 참 자유를 누리며 승리의 생활을 할 수 있는 것은 성령의 역사(役事)하심으로 되어집니다.
(고후 3:17) 주는 영이시니 주의 영이 계신 곳에는 자유함이 있느니라
본 장에는 특별히 '성령'이란 단어가 19회나 나오는데, 진정한 자유는 성령의 역사로만 이루어짐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롬 8:1,2)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일반적으로 우리의 마음 속에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느냐에 따라서 우리의 삶의 방향과 행복도 불행도 결정되어 집니다.
그것은 마치 컴퓨터의 프로그램이 어떤 것이냐에 따라서 또 입력된 파일이 어떤 것을 가지고 있느냐에 따라서 컴퓨터가 그대로 출력 하는 것과 마찬가지 입니다.
또한 우리가 알고 있듯이, 현대는 초능력시대입니다. 자기의 힘과 능력보다는 정보의 능력으로 현시대를 살아갑니다. 이처럼 현대는 자기의 어떤 노력이 아니라 타인과 정보의 힘에 많이 의존합니다.
본문에 나와있는 '성령의 법'은 성령께서 성도들의 생활에 언제나 그리고 초자연적으로 역사 하심으로 성도들을 영원한 생명의 길로
인도하시는 것을 말합니다. 반면에 죄의 법은 죄가 사람의 전인격을 지배하여 악을 따르게 하며, 결국 인간으로 하여금 사망에 이르게
하는 것을 말합니다.
(롬 8:5,6) 육신을 좇는 자는 육신의 일을, 영을 좇는 자는 영의 일을 생각하나니,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
그런데 성도는 이 죄의 법에서 벗어나 성령의 법을 따라 생활할 때 승리의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성령의 법은 죄의 법보다 그 능력이 훨씬 더 우월하기 때문입니다.
로마서 8장에서 사람을 두 분류로 나누어 소개해 주고 있습니다. 그것은 죄 많은 인간 본성에 의해 지배되는 사람과 하나님의 영에 의해 지배되는 사람입니다. 다시 말하면 육의 사람과 영의 사람입니다.
육의 사람의 삶의 초점과 중심은 자기 자신입니다. 이 사람은 죄 많은 인간 본성을 따라 사는 삶입니다. 그 유일한 법으로 자신의 욕망과 자신의 판단에 따라 살아갑니다.
(롬 8:6,7)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치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
반면에 영의 사람은 하나님의 영에 의해 지배되는 삶을 살아갑니다. 이들은 인간 공기를 마시며 사는 것과 같이, 그들의 삶 속에서
그리스도와 떨어지지 않고 그리스도 안에서 살아갑니다. 사람이 공기 중에서 호흡할 때 공기가 그를 채워 주듯이, 그리스도와 함께
살아갈 때 그리스도께서 그를 만족으로 채워 주십니다. 그들에게 그리스도의 뜻이 자신의 유일한 법입니다. 그들은 성령으로 지배되고
그리스도로 지배되며 하나님 중심으로 살아갑니다.
이 두 종류의 삶은 정반대의 방향입니다. 죄 많은 인간 본성은 욕망과 행동으로 지배되는 삶으로 사망의 길로 가고 있고, 성령에
의해 지배되는 삶은 그리스도 중심의 삶이요 하나님 중심의 삶으로 영생의 길로 가고 있습니다. 그 사람은 매일 매일 그리스도와 하나
되는 승리의 삶을 살아가게 됩니다. 이 사람이 바로 자유인이요, 참 자유를 소유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요 8:36) 그러므로 아들이 너희를 자유케 하면 너희가 참으로 자유하리라
지금 우리 사회는 자유 분방하고 자기가 원하는 대로 살아가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과연 우리 자신이 '나는 참으로
자유를 누리며 질 좋은 삶을 누리고 있는가'를 생각해 봐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누리는 자유가 참으로 진정한 자유인가를 검토해야 할
것입니다. 진정한 자유는 방종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진리 안에서만 가능한 것입니다.
로마서 7장이 고뇌의 밤이라면, 8장은 광명한 아침을 맞이하며 진전한 자유를 느끼는 장입니다. 로마서 7장 끝 부분에서는 죄로
말미암아 오는 부자유함에 대하여 깊은 고뇌의 탄식이 나오고 있습니다. 그러나 8장에서는 낱말과 문장도 새롭고 화려할 뿐만 아니라
완전히 새로운 환경을 느낍니다. 부자유한 구속 상태에서 풀려난 해방감을 만끽하는 장면입니다.
로마서 7장은 옛 사람의 형편이고, 8장은 새 사람의 변화된 모습입니다. 그렇게 부자유스럽고 힘들고 노예 같았던 죄악된 삶이
변화여 의와 선으로 충만한 환희와 희열로 가득 차게 되는 자유로운 삶을 보여줍니다. 이것이 그리스도 안에서의 참 자유인 것입니다.
죄와 죽음, 패배와 실망 그리고 두려움으로부터 자유함을 얻기를 바랍니다. 우리의 진정한 자유는 예수 그리스도, 성령 안에서
하나님에 의해 지배되어지는 삶에서 비롯됩니다. 더 이상 고통과 좌절에 머물지 말고, 참 승리를 주시는 하나님 안에서 참 자유를
누리는 성도가 되길 바랍니다.
진정한 자유
사람들은 자신이 하고 싶은대로 하는 것이 자유라고 합니다 그러나 사람이 자기 마음대로 하고 싶은 마음에서 나오는 것은 죄밖에 없습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오랜 세월 주님을 믿고 섬겨왔지만 나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린다 하면서도 내 맘대로 하고 싶은 것과 죄를 좋아하는 마음이 있는 것도 숨길 수 없습니다
어디서부터 잘못 된 것일까요 다윗의 고백처럼 내가 죄악 중에 출생한 것이며 이 죄적 심리가 여전히 남아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자신들이 아브라함의 후손이며 종이 아니라고 하는 유대인들에게 죄를 짓는 자마다 죄의 종이라 하시며
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 내 제자가 되고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하셨습니다(요8:32)
따라서 진정한 자유는 내 맘대로 하는 자유가 아니라 죄와 죄의 굴레에서 벗어남이 진정한 자유이며 이 자유는 진리이신 예수님 안에서 찾을 수 있는데 그 이유는
"주는 영이시니 주의 영이 계신 곳에 자유가 있기 때문입니다"(3:17)
여기서 바울 사도는 예수님과 그의 영이신 성령을 동일시하여 영(성령)은 곧 예수의 영으로서 죄와 마귀의 굴레에 메어 있는 자들을 풀어 자유를 얻게 하시는 것을 가르칩니다.
오랫동안 신앙생활을 해오면서 가장 뼈저리게 느끼는 것은 내가 예수를 믿어 죄 사함과 자유를 누린다고 하면서도 때로 나의 약함과 죄성으로 인하여 내 안에 내주하시며 인격적으로 이끄시는 주의 영(성령)을 따르지 않는 것 때문에 일시적이라도 마음에 자유를 잃고 신앙생활의 기쁨을 빼앗기는 경우가 생기는 것인데 이러한 시행착오를 반복하면서 불규칙 그라프를 그리면서 성화 성장을 이루어가는 나의 모습을 보기도 합니다
따라서 진정한 자유를 누리는 비결 곧 성공적인 신앙생활의 비결은 주의 영(성령)을 따라 살아가는 것이며 우리에게 성령 장으로 알려진 로마서 8장이야 말로 진정한 자유를 누리는 성공적인 신앙생활 지침서인 것을 이 아침 다시 한 번 마음 깊이 받아 드립니다
" 주의 영이 계신 곳에 자유가 있느니라" [3:17] "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사람은 곧 하나님의 아들[자녀]라 (로마서8:14)
주님! 저에게 이미 주신 자유를 잘 누리기 위하여 성공적인 신앙생활 지침서로 주신 로마서 8장을 매일 읽고 암송하면서 내가 로마서 8장에서 튀어나온 사람처럼 살아갈 수 있는 은혜를 입혀 주옵소서 (아멘)
11월 24일(월) 요한복음 16-17장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아버지의 이름(17:26)
세상 중에서 내게 주신 사람들에게 내가 아버지의 이름을 나타내었나이다 저희는 아버지의 것이었는데 내게 주셨으며 저희는 아버지의 말씀을 지키었나이다. I have revealed you to those whom you gave me out of the world. They were
yours; you gave them to me and they have obeyed your word.
'아버지'라는 단어의 뜻은 일반적으로 '가족 관계의 부모 중 남성인 어버이'를 의미합니다. 하지만 하나님과 같이 종교적인 맥락에서는 신성한 존재를 지칭합니다. 따라서 '아버지의 이름'은 문맥에 따라 다양한 의미로 해석될 수 있습니다.
일반적인 의미에서의 아버지는 어버이로서의 아버지를 말합니다. '보통의 남자 어버이를 이르는 말'로, '아빠'는 낮춤말, '아버님'은 높임말에 해당합니다.
종교적인 의미에서의 아버지는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경우는 성경에서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칭하며, 기독교와 같은 종교에서 신의 이름을 부르는 것을 의미합니다.
구약의 백성들은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를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의 아버지 '요셉': 마리아의 남편이자 예수님의 아버지인 요셉을 지칭할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의미: 예수님이 아버지 하나님과 동등한 속성을 가진 존재임을 나타내는 표현이기도 합니다.
왜,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나?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이유는 성경에서 하나님을 아버지로 가르치기 때문입니다. 구약성경에서는 하나님이 창조주이자 절대자로 묘사되며, 일부 구절에서는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기도 합니다.
신약에서는 예수님이 하나님을 ' 아버지말고 다른 호칭은 뭐가 있는가? 예를 들어, "전능하신 자"나 "왕"은 하나님의 절대적 권위를 나타내며, "주(主)"는 주종 관계를 암시합니다. 이러한 차이는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다양한 관계 측면을 보여줍니다.
2. 예수님은 하나님을 (당시 관습에서 벗어나) 아버지라고 호칭했나?
친밀한 관계를 나타내는가? 예수가 성경에서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른 것은 당시 유대교적 배경과 예수의 독특한 신학적 이해가 결합된 표현입니다. 예수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친밀하고 사랑이 넘치는 관계로 설명하기 위해 "아버지"라는 표현을 사용했습니다.
배경
1. 유대교 전통: 고대 유대교에서는 하나님을 "아버지"로 칭하는 표현이 존재했지만, 주로 국가적 차원에서 사용되었습니다. 이스라엘 민족 전체를 하나님이 "아버지"처럼 돌보신다는 의미였습니다. 개인적으로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것은 상대적으로 드물었고, 경외와 존엄을 강조하는 표현들이 주를 이뤘습니다.
2. 예수의 사용 방식 : 예수는 이 전통을 개인적이고 친밀한 방식으로 확장했습니다. 예수는 하나님을 "아바"라고 부르며, 이는 아람어로 "아빠"와 유사한 의미를 가진 단어입니다. "아바"는 매우 친밀하고 사랑스러운 표현으로, 당시 사람들에게는 하나님과 개인적으로 친밀한 관계를 나타내는 혁신적인 개념이었습니다.
예수가
사용한 "아바"는 오늘날의 "아빠"와 더 가까운 표현입니다. 예수는 하나님을 단순한 존엄의 대상이 아닌, 가까이 다가갈 수 있는
사랑의 대상으로 묘사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가 하나님을 "아바"라고 부른 것은 그분과의 친밀한 관계와 신뢰를 강조한 것입니다.
예수님 시대의 유대 문화에서 아버지라는 호칭과 부자 관계에 대해 몇 가지 중요한 점을 살펴볼 수 있습니다.
1. 일반적인 호칭 : 당시 유대 문화에서 아버지를 부르는 일반적인 호칭은 '아바'(Abba)였습니다. 이는 아람어로 '아빠'와 비슷한 친근한 의미를 가집니다.
2. 가부장적 문화 : 유대 사회는 가부장제 문화였으며, 아버지는 가정의 권위 있는 지도자로 여겨졌습니다.
3. 존경과 복종 : 자녀들은 아버지를 존경하고 복종해야 한다는 가르침이 강조되었습니다. 십계명에서도 부모 공경이 중요한 계명으로 제시됩니다.
4. 친밀함의 정도 : 아버지와 자녀 간의 친밀도는 가정마다 달랐을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엄격한 관계였지만, 사랑과 애정도 존재했습니다.
5.
종교적 역할 : 아버지는 가정에서 종교적 의식을 주관하고 자녀들에게 율법을 가르치는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6. 하나님
호칭으로서의 특별함 :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르는 것은 일반적이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을 '아바'라고 부른 것은 당시에
매우 특별하고 친밀한 표현이었습니다. 따라서 예수님 시대의 유대 문화에서 아버지는 존경의 대상이었지만, 예수님이 하나님을
'아바'라고 부른 것은 매우 친밀하고 특별한 관계를 나타내는 혁신적인 표현이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예수는 엄마인 마리아의 남편 요셉을 뭐라고 불렀을까요?
예수님이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른 것은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태어났기 때문이 아닙니다. 이는 하나님과의 특별하고 친밀한 관계를 나타내기 위함이었습니다.
요셉에 대해서는, 성경에 예수님이 요셉을 직접 어떻게 불렀는지에 대한 명확한 기록은 없습니다. 그러나 당시 문화를 고려할 때, 예수님은 아마도 요셉을 '아버지'나 '아빠'와 같은 호칭으로 불렀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요셉은 예수님의 양부로서 그를 키우고 보호하는 역할을 했기 때문입니다.
3. 친밀한 관계, 신의가 돈독한 관계로 말하자면 아버지가 아니라 '친구'라고 불러야하지 않을까요?
하나님을 "친구"로 표현한 성경 내용은 주로 아브라함과 예수님의 말씀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에 의해 "친구"라고 불렸으며, 이는 그의 믿음과 신뢰를 나타냅니다(대하 20:7; 사 41:8; 약 2:23).
예수님은 제자들을 "친구"라고 부르며, 그들과의 친밀한 관계를 강조하셨습니다. 요한복음 15장 13-15절에서 예수님은 "너희는 내가 명하는 대로 행하면 곧 나의 친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러한 표현들은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친밀한 관계를 나타냅니다.
4. 성경에서 예수님은 마리아를 어머니라고 불렀는가?
성경에 따르면 예수님이 마리아를 직접적으로 "어머니"라고 부른 기록은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마리아를 어머니로 인정하고 존중했다는 것을 보여주는 몇 가지 구절이 있습니다.
1. 십자가 위에서 예수님은 마리아를 가리키며 요한에게 "보라 네 어머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요한복음 19:26-27).
2.
12살 때 성전에서 마리아와 요셉을 만났을 때, 예수님은 "내가 내 아버지 집에 있어야 될 줄을 알지 못하셨나이까"라고
말씀하셨습니다(누가복음 2:49). 여기서 "내 아버지"는 하나님을 가리키지만, 마리아와 요셉을 부모로 인정하는 맥락도
있습니다.
3. 가나의 혼인 잔치에서 예수님은 마리아에게 "여자여"라고 말씀하셨는데, 이는 당시 문화에서 존경을 표하는 호칭이었습니다 (요한복음 2:4).
비록 "어머니"라는 직접적인 호칭은 없지만, 예수님은 마리아를 어머니로 인정하고 존중했음을 성경은 보여주고 있습니다.
내게 주신 아버지의 이름
마태복음 1:23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하니라“
요한복음 5:43 ”나는 내 아버지의 이름으로 왔으매 너희가 영접지 아니하나 만일 다른 사람이 자기 이름으로 오면 영접하리라
요한복음 17:11-12 ”나는 세상에 더 있지 아니하오나 저희는 세상에 있사옵고 나는 아버지께로 가옵나니 거룩하신 아버지여 내게 주신 아버지의 이름으로 저희를 보전하사 우리와 같이 저희도 하나가 되게 하옵소서“ ”내가 저희와 함께 있을 때에 내게 주신 아버지의 이름으로 저희를 보전하와 지키었나이다. 그 중에 하나도 멸망치 않고 오직 멸망의 자식 뿐이오니 이는 성경을 응하게 함이니이다“
요한복음 17:26 ”내가 아버지의 이름을 저희에게 알게 하였고 또 알게 하리니 이는 나를 사랑하신 사랑이 저희 안에 있고 나도 저희 안에 있게 하려 함이니이다“
요한복음 10:25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너희에게 말하였으되 믿지 아니하는도다 내가 내 아버지의 이름으로 행하는 일들이 나를 증거하는 것이어늘“
자기밖에 아는 자가 없는 이름
요한 계시록 19장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이 네 가지로 표기가 됩니다. 첫 번째 이름 ‘충신과 진실’ 두 번째 이름 ‘자기밖에 아는 자가 없는 이름’ 세 번째 이름 ‘하나님의 말씀’ 네 번째 이름 ‘만 왕의 왕이요 만주의 주’(16절)
충신과 진실이라는 이름 속에서 성부 하나님의
언약이 성자 예수 그리스도의 충성을 통해 신실하게 이루어지고 있음을 읽을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 12절에 보면 조금
이상한 이름이 나옵니다. 그분의 이름은 ‘자기밖에 아는 자가 없는 이름’이라고 합니다.
‘충신과 진실, 하나님의 말씀, 만왕의 왕, 만주의 주’ 그런데 뜬금없이 그분의 이름은 자기밖에 아는 이가 없다고 합니다. 벌써 다 말해 주고서 그분의 이름은 자기밖에 아는 이가 없다고 합니다. 이게 무슨 의미일까요?
히브리 사람들에게 있어서 이름은 단순히 호칭의 개념이 아닌 그 존재의 내용이라고 했지요? 아브라함, 사라, 이삭, 야곱, 노아 모두 다 그 이름의 내용을 삶으로 살다 가지 않았습니까? 그러니까 ‘이름을 자기밖에 아는 이가 없다, 이름이 비밀이다’라는 말은 그 존재의 내용이나 그 존재가 하는 일이 외부에 밝혀지지 않았다는 말입니다.
출애굽기 6:3-7 3. 내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전능의 하나님으로 나타났으나 나의 이름을 여호와로는 그들에게 알리지 아니하였고 4. 가나안 땅 곧
그들이 거류하는 땅을 그들에게 주기로 그들과 언약하였더니 5. 이제 애굽 사람이 종으로 삼은 이스라엘 자손의 신음 소리를 내가
듣고 나의 언약을 기억하노라 6. 그러므로 이스라엘 자손에게 말하기를 나는 여호와라 내가 애굽 사람의 무거운 짐 밑에서 너희를 빼내며
그들의 노역에서 너희를 건지며 편 팔과 여러 큰 심판들로써 너희를 속량하여 7. 너희를 내 백성으로 삼고 나는 너희의 하나님이
되리니 나는 애굽 사람의 무거운 짐 밑에서 너희를 빼낸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인 줄 너희가 알지라
하나님께서 자신의 이름을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는 ‘여호와’로 알리지 않았다고 하십니다. 그런데 정말 그 족장들이 여호와의 이름을 몰랐을까요?
창세기 4:26 셋도 아들을 낳고 그 이름을 에노스라 하였으며 그 때에 사람들이 비로소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
이미
셋의 아들 에노스 때부터 사람들이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다고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족장들이 ‘여호와’라는 이름을 몰랐다고
하십니다. 그 말은 ‘이스라엘의 족장들이 이미 하나님을 여호와로 부르고 그 하나님이 전능한 하나님인 줄은 알았지만, 그
여호와 하나님이라는 이름이 가진 구속사 안에서의 특성, 즉 언약과 사랑의 하나님으로서의 하나님이 담고 계신 내용은 출애굽기에
가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건져내시고 그들과 함께 홍해를 건너심으로써 비로소 그들에게 경험되었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그전까지는 ‘여호와의 이름이 비밀이었다.’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요한계시록 17:5 그의 이마에 이름이 기록되었으니 비밀이라, 큰 바벨론이라, 땅의 음녀들과 가증한 것들의 어미라 하였더라.
여기 보시면 많은 물 위에 앉은 그 음녀의 이름이 ‘비밀’이라고 나오지요? 그렇게 비밀이라고 말해놓고 바로 그 이름을 ‘큰 바벨론이라, 땅의 음녀들과 가증한 것들의 어미’라고 이야기해 줍니다. 그러니까 이름이 비밀이라는 것은 그 이름을 모른다는 말이 아니라, 그 이름이 담고 있는 그 존재의 내용을 우리가 모른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살펴본 것처럼 요한 계시록 19장에만도 이미 주님의 여러 가지 이름이 밝혀져 있습니다. ‘충신과 진실, 하나님의 말씀,
만왕의 왕, 만주의 주’ 우리는 이 이름들을 통해서, 이 이름들이 바로 우리 주님께서 내용으로 담고 계신 것들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중에 아직 비밀인 이름이 있다는 것은 우리는 절대 우리 주님을 다 알 수 없다는 것을 말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 말은 이 우주의 역사와 종말은 우리의 손에 의해 좌지우지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는 감히 상상하거나 추측할 수도 없는 하나님의 소관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쉽게
말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 중에 ‘자기밖에 아는 이가 없고’라는 이름이 있다는 것은 주님이 경륜해 가시는 역사의 불가해성과
은혜의 우발성을 나타내는 구절입니다. “그러니까 너희들은 건방지게 추측하거나, 상상하거나, 보좌를 흔들 생각하지 말고 애당초
항복하고 순종하라.”라는 충고의 메시지가 들어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너무 건방집니다. 우리는 우리의 이 짤막한 이성으로 마치 하나님을 다 이해한 사람처럼 행동할 때가 너무 많습니다. 소설이나,
만화나, 영화에 나오는 그런 인간과 비교해서 다른 것이라고는 힘만 센, 마징가 Z 같은 하나님을 그려놓고선 “이게 하나님이야.”
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분에 대해 너무 모르니까
그분이 발하시는 죄에 대한 분노가 얼마나 큰 것인지도 모르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비밀’이라는 이름을 갖고 계신 분이십니다.
우리가 우리의 이성으로는 미처 이해할 수 없는 엄청난 존재이시며, 그러한 분이 쏟아 놓으시는 이 역사의 내용도 우리는 다 이해할 수
없는 나약한 존재일 뿐입니다. 그분의 이름은 ‘비밀’이십니다.
그럼에도
하나님은 이미 많은 것들을 우리에게 계시해 주셨습니다. 영원하신 하나님이 이 제한된 시간 속으로 들어오셔서 우리의 이성으로
이해될 수 있는 것들을 많이 밝혀 주셨습니다. 이 천지는 어떻게 창조되었는지, 왜 이스라엘이라는 나라가 택해졌는지, 왜 예수는
나사렛 목수의 아들로 오셨어야 했는지, 그리고 그분은 왜 죽으셨는지, 그리고 어떻게 부활하셨으며, 그 부활의 의미가 무엇인지
우리는 예전에는 전혀 상상할 수도 없었던, 그리고 어떤 사람들에게는 여전히 비밀인 많은 것들을 이미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알고 있는 그 하늘의 비밀은 아주 일부분입니다. 우리는 주님이 언제 오실지, 그 새 하늘과 새 땅은 어떻게 생겼는지,
우리는 그곳에서 무엇을 하며 살게 될 것인지 전혀 알지 못합니다. 막연히 추측만 할 뿐이지요. 그뿐만 아니라 우리는 여전히 이해할
수 없는 것들이 너무나 많이 산적해 있는 이 역사 속에 살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소원이나, 기대나, 욕망과 전혀 상관없이
하나님의 계획에 따라, 하나님의 목표를 향해 하나님의 방법으로 달리고 계시기 때문에 우리는 이 가시적인 역사조차도 예견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그분의 이름 중의 하나가 ‘자기밖에 아는 이가 없고’입니다.
이름이 갖는 힘
이름은 가볍지 않다. 누구나 이름을 갖는다. 이름이 그를 상징하고 대표한다. 이름은 사회적 관계와 그의 삶 그리고 그가 해낸 일에 대한 평가를 지닌다. 이름값을 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그래서 이름은 실체가 된다.
김춘수 시인의 ‘꽃’을 한국인들이 가장 좋아하는 시의 하나로 여기는 건 아마도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는 실존적 성찰이 주는 힘 때문이고 실체가 되었을 때 비로소 관계 맺음이 가능하다는 인식의 재확인
때문일 것이다. ‘창세기’에 ‘아담이 생물 하나하나를 부르는 그대로 그 이름이 되었다’는 대목은 단순히 아담이, 사람이 우주만물의
주인이 되었다는 것이 아니라 관계 맺음이 가능해졌다는 것이고 그것은 바로 대상을 인식하게 되는 과정을 거쳤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날마다 7명의 청년들이 자살한다. OECD가입국 가운데 청년 자살률이 세계1위다. 부끄럽고 두려운 일이다. 그런데
놀랍게도 기성세대들은 이 문제에 대해 둔감하다. 청춘들의 삶의 상황과 비슷한 삶을 겪지 않았기에 공감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
외면 속에 청년들이 삶을 포기한다. 고통 받는 청춘들은 스스로 자신의 능력이 부족하다고 느끼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그러나 그들의
능력은 기성세대의 그것을 훨씬 능가한다. 다만 기회가 주어지지 않을 뿐이다. 지치고 절망한 청춘들이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체념하거나 삶을 포기한다. 깨었다고 여기는 기성세대들은 왜 청춘이 사회적 불의와 굴절된 체제의 부조리에 저항하지 못하느냐고
안타까워하지만 그건 자기변명에 불과하다. 그들은 해도 해도 개선되지 않는 자신의 삶에 이미 절망하고 또 다른 절망 앞에서 벽을
느낄 뿐이다. 분노할 힘조차 없다. 그러면서 자신의 무능으로 체념한다.
‘헬조선’이니 ‘흙수저’니 하는 말들이 생겨났다. 그것은 새로운 ‘이름’이다. 이름은 단순히 어떤 현상을 지칭하는 명사에
그치는 것이 아니다. 나만 힘든 줄 알았고 나의 능력 부족 탓인 줄 알았는데 그게 일반적 현상이고 하나의 사회적 틀이 되었다는
걸을 보편적으로 인식하게 된 것이 바로 이러한 이름들의 출현이다. 이름의 출현은 단순한 사회적 현상에 그치지 않는다. 사회의
부조리와 모순이 더 이상 내 나라에 대한 사랑과 헌신은 고사하고 넌더리 나서 떠나고 싶은 지옥이라 인식하게 만들고, 아무리 내가
노력 아니 ‘노오오력’ 해도 잘난 부모에게서 태어나지 않은 이상 내게 희망도 가능성도 없다는, 완전한 절망을 확인하게 한다.
이런 청춘들에게 과연 4ㆍ13총선은 무엇을 제시하고 있는가. 선거는 미래를 선택하는 것이다. 우리의 미래는 청춘들이
어떠한 삶을 사느냐에 달렸다. 그런데도 아무도 청춘들에 주목하지 않는다. 아예 안중에도 없다. 그렇지 않고서야 선거판이 이렇게 될
수는 없다. 그 흔한 사탕발림조차 없다. 비례대표로 청년을 당선권에 배치한 19대 선거에도 한참 못 미친다. 미치지 않고서야
이럴 수 없다. 두려워해야 한다. 이렇게 가다가 얼마 가지 못해 망한다. 청춘이 멍들고 쓰러지는데 지금 남아있는 알량한 자기 이익
탐닉해야 무슨 소용인가. 기성세대는 청춘들의 고통에 공감하기는커녕 우롱했고 발뺌만 해댔다. 이제 청춘이란 이름은 희망과 설렘의
낱말이 아니라 절망과 좌절, 원망과 포기의 서글픈 청동거울로 전락했다.
민태원의 ‘청춘예찬’을 기억하는 기성세대 많다. “청춘! 이는 듣기만 하여도 가슴이 설레는 말이다.” 그 한 문장만으로
가슴 뛰던 청춘을 살았다. 그런데 이 시대의 청춘은 ‘헬조선’에서 ‘흙수저’ 물고 절망하고 있다. 이번 선거가 미래를 위한
선택이어야 한다. 진흙탕 같은 선거판에서 그것이라도 건져야 한다. 곧 부활절이다. 지금 우리는 청춘들에게 부활의 희망을 제시해야
한다. 어두운 낱말을 버리고 펄펄 뛰는 꿈과 희망의 미래를 펼칠 이름을 돌려줘야 한다. 그마저도 못하면 살아도 산 게 아니다,
우리 모두.
‘이름(名)’의 의미
‘이름(名)’은 ‘다른 것과 구별하기 위하여 사람이나 사물, 단체, 현상 등에 붙여서 부르는 기호’를 말한다. 名(이름 명)은 夕(저녁 석)과 口(입 구)가 합쳐진 글자로 저녁이 되면 깜깜하여 서로를 식별할 수 없으므로 입으로 이름을 불러서 식별했다는 점에서 ‘이름을 부르다’, ‘이름’이라는 뜻을 가지게 되었다.
세상에 존재하는 것으로 밝혀진 것들은 모두 이름이 있다. 새롭게 발견된 존재들에게도 계속해서 이름을 붙여준다. 이름이 없는 존재는 없다는 뜻이다. 사람도 태어나면서 부모가 붙여준 이름을 평생 사용하며 살고 죽으면 이름을 남기고 떠난다.
이렇게 이름은 존재 가치다.
이름이 있어야 의미를 얻게 되고 존재 가치를 지니게 된다. 소나무, 개나리 등과 같이 잘 알고 있는 이름의 식물은 그만큼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고 잡초처럼 이름을 모르는 것은 중요한 의미를 지니지 못한다는 것이다. 사람도 마찬가지다. 내가 이름을
알고 있다는 것은 나에게 중요한 사람이고, 이름을 알고 있지 못한 사람은 별 볼 일 없는 사람이다. 이처럼 이름은 사물이나 사람
모두에게 존재 가치와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특히 사람에게 이름은 인간 생활뿐만 아니라 본질적인 존재의 문제이기 때문에
인간의 출생과 더불어 가장 중요한 관심 대상이 된다.
우리나라의 이름은 성씨 한 자에 이름 두 자를 적는 것을 기본으로
한다. 이는 통일신라시대의 김춘추(金春秋), 김유신(金庾信) 등과 같이 지배층부터 사용되었고, 백성들은 궁예(弓裔),
신검(神劒) 등과 같이 이름만 썼다. 그러다 고려시대에 와서 공신이나 투항자들에 대대적으로 성을 내려주면서 시작되었다. 고려
중기에는 성을 쓰지 않는 사람은 과거에 급제할 자격도 없었던 것을 보면 지식층의 상당수도 성을 쓰지 않았던 것을 추측할 수 있다.
조선시대에 와서 남자 대부분은 한자식 이름을 가지게 되었고, 여자에게는 간난이, 언년이 등의 아명 이외의 이름이 주어지지
않았다. 또한 노예도 성이 없었고 江阿之(강아지), 介也之(개야지), 揷士里(삽사리) 등의 천한 이름이 주어졌다.
국민
누구나 이름(성과 명)을 가지게 된 것은 극히 최근에 와서의 일이다. 일제의 통치와 함께 그들의 지배를 받게 되자 새로운 관명을
짓게 되면서 여자들도 성과 이름을 갖게 되었고 남자의 이름에는 족보와 항렬이 있는 전통적인 작명법이 확립되었다. 여자의 경우는
그렇지 않았기 때문에 ‘영자(英子)’·‘춘자(春子)’·‘옥자(玉子)’ 등 ‘자’자 이름이 많은 것은 모두 일본의 영향을 받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여자의 이름은 시대에 따라 변화를 거듭했고 ‘자(子)’에서 벗어나 뜻이나 음이 아름다운 글자를 찾아 썼다. 특히
‘희(姬)’, ‘숙(淑)’, ‘옥(玉)’, ‘정(貞)’, ‘순(順)’, ‘미(美)’, ‘연(娟)’, ‘주(珠)’, ‘혜(惠)’ 등
곱고 아름다운 글자들이 많이 쓰이게 되었다. 최근에는 남자의 이름도 항렬에서 벗어나 더 아름다운 이름들이 쓰이고 여자 이름은
‘고아라’, ‘진달래’ 등의 더 이쁜 이름들이 쓰인다.
특히
우리나라에는 이름의 종류가 다양하다. 정식 이름인 관명 이외에도 아명(兒名), 별명(別名), 자(字), 호(號), 별호(別號),
시호(諡號), 법명(法名), 예명(藝名), 가명(假名), 당호(堂號) 등이 있다. 요즘 젊은이들은 아이가 태어나기 전에
태명(胎名)을 지어 부르기도 한다. 그만큼 한국인들이 이름에 대하여 관심이 많았다는 방증이다. 또한 시기마다 부르는 이름에는
건강, 장수 등의 염원이 담겨 있다. 또한 정식 이름인 관명, 곧 호적 이름은 평생을 두고 소중한 것으로 아무에게나 함부로 불리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입신양명(立身揚名), 과거장에서 이름이 드날려 출세하기를 소망하는 것이다.
옛날 시집온 여자들에게 시집오기 전 살아온 마을 이름을 따서 ‘~~댁’, 남편들에게는 ‘~~양반’ 등으로 부르기 좋도록 지어주는 이름을 택호(宅號)라 한다. 여자에게는 ~~에서 시집온 여자라는 뜻이 되고, 남자에게는 ~~로 장가든 사람이라는 뜻이 된다. 성인남녀에게 택호는 평생 바꿀 수 없는 것으로 명예가 되는 동시에 구속이 된다.
요즘은 많이 없어졌지만, 남자의 이름에 항렬(行列)자를 쓰는데, 혈족의 방계(傍系)에 대한 대수(代數) 관계를 표시하는 말로
생면부지(生面不知)의 혈족끼리도 족친으로서의 우의(友誼)를 다지기 위함이다. 우리나라 사람들의 혈연 관념이 얼마나 큰가를 알 수
있게 하는 하나의 방증이다. 하지만 세 글자의 성명 중에서 이미 두 글자(성과 항렬자)가 정해져 있고, 나머지 한 글자로 이름을
변별하고자 하니 남자들은 같은 씨족들 사이에 동명이인이 많게 된다. 여자의 이름은 항렬에서 벗어나므로 다양하다.
그러면 좋은 이름의 조건은 무엇인가? 음성학적으로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소리가 부드럽고 분명하여 부르고 기억하기 쉬운 이름이 최고의 이름이다. 요즘 너무 별난 이름이 많은데 어른이 되면 괜찮지만 어려서 놀림 받기 쉬워 이름으로 상처받을 수 있어 조심해야 한다.
우리
문화에서 이름은 입신양명(立身揚名)에서 나타나는 것처럼 효도를 궁극적 가치로 보고 자신과 부모, 가문의 이름을 지키고 널리
날리는 데 있다. 살아 있는 동안의 부귀영화보다 빛나는 이름을 길이 후세에 남기기를 바랐던 것이다. 호랑이가 죽어서 좋은 가죽을
남기듯이 훌륭한 이름을 역사에 남기는 것이 생애 최고의 이상이었다. 죽은 후 산소에 관직과 이름이 새겨진 빗돌을 세우는 것을
소원하는 것은 그만큼 이름을 소중히 하기 때문이다. 사실 예전의 우리나라 사람들은 개인보다도 가문의 이름과 함께 태어나 그 이름을
지키기 위해서 평생을 노력하다가 이름과 함께 세상을 떠나는 사람들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이름을 잃어버리고 사는 사람들이 있다. 대표적으로 중년의 여성들이다. 특히 직장생활을 하지 않는 전업주부의 경우 더욱 그렇다. 누구의 남편으로, 누구의 엄마로 살면서 자신의 이름과 정체성을 잃어버리게 된다. 자신을 모르면 삶도 자신감이 없어지고 밖의 세상이 두려워진다. 진정한 자신의 참모습을 되찾고 세상의 당당한 구성원으로 살기 위한 시작이 이름을 되찾는 것이다. 중년의 여성들이 이름을 잊고 삶의 의미를 고민하게 되기 쉬운 것은 삶의 무게 중심이 자식과 남편, 그리고 타인에게 있기 때문이다. 내 밖으로 향한 시선을 내 안으로 거두어들여 자신에게 두어야 할 때가 되었다는 의미다. 그 실천을 자신의 이름을 되찾아서 불러보고 나의 정체성을 세우는 것으로 시작한다.
무의식 속에 자신의 의식을 끌어내기 위해 자신의 이름을 되찾아서 불러보자.
아침마다 거울을 보고 자신의 이름을 불러보라. 내 이름을 부른다는 것은 남이 아닌 나 자신으로 살겠다는 뜻이다. 자신의 진정한
삶을 살겠다는 말이다. 김춘수의 꽃 중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라고 하지 않던가. 다른 사람의 꽃이 되기 전에 내가 나를 먼저 꽃으로 만들어 주는 일, 바로 내 이름을 다소곳이 불러주는 일이다.
누가 나의 이름을 불러주길 기다리지 말고, 내가 나의 이름을 부르는 것. 그것이 나를 세상에 참모습으로 설 수 있게 하는
시작이며, 스스로 ‘꽃’이 되는 일이다. 이름을 잊어버린 중년 여성들이여~! 남의 숨은 꽃으로 살아온 지금까지의 세월로
충분합니다. 앞으로 이름을 되찾아 나의 꽃으로 살아가시길~!
오래전
백화점에서 중년 부부가 쇼핑하면서 남편이 ‘○○야, 이것이 좋은데~’, ‘○○야, 다른 곳에 가보자’ 등 애틋하게 부인의 이름을
부르는 것을 들었다. 인간적으로 그 남자가 멋있고 질투가 났지만, 정말 보기 좋고 부러웠던 기억이 있다. 남편들은 부인의 호칭을
‘이름’으로 바꿔 불렀으면 하는 소망과 함께.
살다
보면 어느 날 문득 생각나는 이름을 크게 불러보고 싶을 때가 있다. 내가 그렇게 이름을 부르고 싶은 것은 아직 그를 사랑하고
기억하고 있다는 것을 상기하고 싶은 것이다. 반면 내 이름도 누군가가 크게 불러주었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한다. 특히 사랑받고
싶었던 사람들에게서. 세상에서 가장 불쌍한 사람을 잊힌 사람이라 하지 않던가. 그렇게 이름을 기억하고 이름을 부를 수 있는 것이
가장 큰 사랑이다.
한편
이름을 숨기고 사는 사람들이 있다. 떳떳하지 못하고 정의롭지 못할 행동을 할 때 그런 경우다. 개인정보 보호 차원에서 중대
범죄를 제외하고 죄인들까지 신상을 공개하지 않는다. 이름을 숨긴다는 것은 피난처가 필요하다는 것 아닌가. 요즘 말로 익명성이다.
익명성 뒤에 숨어서 행해지는 수많은 자유로움을 빙자한 비수와 같은 비난과 몰상식적인 행위들은 우선으로 척결해야 할 사회악이다.
그들의 비수에 찔려 목숨을 끊은 뉴스를 볼 때마다 확인되지 않은 악의적인 많은 정보(가짜뉴스)에 대한 책임을 지울 묘책이 필요한
시점이다. 건전한 사이버 공간의 예절을 차지하고~
‘豹死留皮 人死留名(표사유피 인사유명)’
표범은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는 뜻으로, 사람의 삶이 헛되지 아니하면 그 이름이 길이 남는다는
말이다. 그렇다고 이름을 남기기 위해 사는 것은 자기 자신을 수단으로 만드는 것이다. 당연히 훌륭하고 행복한 삶이 아니다. 훌륭한
인생, 행복한 삶은 죽음 후가 아니라 오늘의 삶에 있다. 겉으로는 이름이 남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 남는 것은 그 이름을
떠올리게 만드는 오늘 보낸 삶의 내용이다. 이름을 남기는 것은 삶의 이유나 목적이 아니라 삶의 결과일 뿐이다. 누군가의 삶이 다른 사람의 마음에 깊이 새겨진 무엇인가를 남기면 원하든 원치 않든 저절로 이름이 남는다.
예전에
시골 동네 입구에 고시 합격이나 S대 입학 등의 현수막을 걸어 축하하던 시대가 있었다. 아직도 자동차를 타고 가다 보면 가끔
그런 현수막을 볼 수 있는데, 자식의 이름이 올라 부모의 큰 자랑거리가 되었다. 혼자만의 생각으로 ‘개인 정보 보호’도
모르는구먼. 빛나지 않아도 부르지 못하는 이름, 품지 못하는 이름이 아니기를, 늘 함께하는 이름이 되길 바랄 뿐이다.
사람이 진짜 죽는 것은 사람들에게서 잊혔을 때다. 아직 살아 있다는 것은 누군가에게 잊히지 않았다는 뜻일 것이다. 좋은 이름으로 기억되어 살아 있는 사람이 되는 것, 망각 속으로 사라지는 것들을 자꾸 붙잡아 두는 것이다. 얼굴이 먼저 떠오르면 보고 싶은 사람이고, 이름이 먼저 떠오르면 잊을 수 없는 사람이라 한다.
יהוה (여호와, Yahweh)
1. 어원 분석
히브리어 יהוה (YHWH)는 구약 성경에서 하나님의 이름을 나타내는 신성하고 독특한 단어로, 여호와 혹은 야훼로 발음됩니다. 이 이름은 4개의 히브리어 자음인 י (요드), ה (헤), ו (바브), ה (헤)로 구성되어 있으며, 테트라그람마톤(Tetragrammaton)이라고도 불립니다. 4를 의미하는 태트라 문자를 의미하는 그람마
어원 분석을 보면, יהוה는 히브리어 동사 “하야 (היה)”에서 유래한 것으로, 이는 “존재하다” 또는 “있다”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는 하나님이 자존하는 존재임을 나타내며, 성경에서 하야 (Strong’s #H1961)라는 단어는 “I AM”으로 번역될 때도 사용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출애굽기 3장 14절에서 모세에게 자신의 이름을 “אהיה אשר אהיה” (에흐예 아쉐르 에흐예)라고 계시하셨는데, 이는 “I AM WHO I AM” 또는 “나는 나다”라는 뜻입니다. 이는 하나님의 자존성과 영원성을 강조합니다.
이 구절에서 사용된 에흐예 (אהיה, Strong’s #H1961)는 히브리어로 “I AM”을 의미하며, 하나님의 존재가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에 걸쳐 변함없다는 것을 나타냅니다. 하야와 에흐예는 같은 어원을 공유하고 있어, 하나님의 본질을 드러내는 데 중요한 의미를 가집니다.
유대 전통에서는 יהוה라는 이름을 너무 거룩하게 여겨 직접 발음하는 것을 피하였으며, 아도나이 (Adonai, Strong’s #H136)라는 단어로 대체했습니다. 영어 성경에서는 LORD라는 표기법으로 표현되어 약 6,800번 이상 등장합니다. 이는 성경에서 하나님의 본질과 그분의 권능을 강조하고, 그분의 절대적 주권을 나타내는 방식입니다.
2. 구약 성경 속 용례
여호와라는 이름은 성경 곳곳에서 하나님이 누구신지를 나타내고, 하나님과의 관계를 통해 인간이 하나님을 이해하는 방법을 보여줍니다. 몇 가지 대표적인 구절을 통해 יהוה의 의미를 살펴보겠습니다.
1) 출애굽기 3:14 하나님은 모세에게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니라”라고 말씀하시며, 에흐예 (אהיה)라는 표현으로 자신을 소개하십니다. 이 구절은 하나님이 자존적 존재임을 나타내며, 그분의 이름 יהוה가 하나님 자신의 존재와 관계에 기초하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여호와는 하나님께서 모든 존재의 근원이자, 우리 삶의 기초가 되심을 나타냅니다.
2) 창세기 2:4 “여호와 하나님이 땅과 하늘을 만드시던 날에”라는 구절에서, יהוה는 창조주로서 하나님을 나타냅니다. 여기서 여호와는 단순히 신적인 존재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과 인류를 창조하고 다스리는 주권적 창조주로서의 하나님을 의미합니다.
3) 신명기 6:4 “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유일한 여호와시니”라는 구절은 유일신으로서 하나님의 위치와 절대적 권위를 강조하는 신앙의 선언입니다. 이 구절은 이스라엘 민족이 다른 신들에 대한 믿음을 버리고 오직 여호와 하나님만을 섬겨야 함을 나타냅니다.
4) 시편 23:1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에서, 여호와는 인간의 삶에 친밀하게 개입하시는 목자로 나타납니다. 이는 하나님이 우리의 필요를 채우고 보호하시는 돌보시는 하나님으로서의 성품을 강조합니다.
5) 이사야 42:8
“나는 여호와라 이는 내 이름이라”라는 구절에서, 여호와는 하나님의 고유한 이름으로서 다른 신과 구별되는 독특하고 거룩한 이름임을 보여줍니다. 여호와는 자신의 이름을 통해 그분의 영광과 거룩성을 나타내며, 하나님이 유일하고도 전능한 분임을 선언합니다.
3. 영적 의미와 교훈
여호와의 이름은 하나님의 영원성과 불변성을 상징하며, 그분의 존재가 우리의 삶에 미치는 영향을 깊이 이해하게 합니다. 여호와라는 이름에 담긴 영적 의미는 다음과 같이 요약될 수 있습니다.
1) 하나님의 자존성
여호와라는 이름은 하나님이 스스로 존재하시는 분이며, 다른 어떠한 존재에도 의존하지 않는 분임을 의미합니다. 이는 하나님이 창조주의 본질을 가진 분으로서 우리 삶의 절대적 의지처가 되심을 나타냅니다. 그분의 이름은 우리의 모든 상황 속에서 하나님을 절대적으로 신뢰하고 의지할 수 있는 근거가 됩니다.
2) 영원한 임재
여호와라는 이름은 하나님이 시간의 한계를 초월하여 항상 우리와 함께 하시는 분임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은 과거, 현재, 미래를 모두 아우르며, 시간 속에서 언제나 우리 곁에 계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이는 하나님의 끊임없는 임재가 우리를 돌보시고 인도하시는 완전한 보호를 의미합니다.
3) 신실하신 하나님
여호와는 그분이 약속을 지키시는 분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성경 속에서 하나님은 자신의 말씀과 약속을 이루시며, 이를 통해 신실함을 나타내십니다. 이는 우리가 하나님께 의지할 때 변함없는 신뢰를 가질 수 있는 이유가 됩니다.
4) 인격적 관계
여호와라는 이름은 하나님의 인격적 관계를 나타냅니다. 이는 하나님이 단지 멀리 계신 초월적인 존재가 아니라, 우리의 삶 속에 깊이 개입하시며 친밀한 관계를 원하시는 하나님임을 보여줍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이름을 통해 우리가 그분과 인격적으로 교제하고 소통할 수 있도록 초대하십니다.
4. 여호와의 이름을 통해 배우는 교훈
여호와라는 이름은 단지 하나님의 권능을 나타내는 명칭에 그치지 않고, 그분의 성품과 관계를 이해하는 데 깊은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이를 통해 우리는 다음과 같은 교훈을 얻을 수 있습니다.
1) 경외와 존경의 마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야 함 여호와의 이름은 거룩하고 존귀하기에, 우리는 경외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의 이름을 불러야 합니다. 유대 전통에서 하나님을 아도나이라고 부르며 그 이름을 거룩히 여긴 것처럼, 우리는 하나님의 이름에 합당한 경배와 예배를 드려야 합니다.
2) 하나님을 온전히 신뢰할 것
여호와라는 이름은 하나님이 변치 않는 신실한 분임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인생의 어려움과 고난 속에서도 여호와 하나님을 신뢰해야 합니다. 그분의 변치 않는 신실함은 우리가 그분의 약속을 붙들고 인생을 살아가는 데 있어 확고한 기초가 됩니다.
3) 하나님의 주권 인정하기
여호와의 이름은 하나님이 온 우주와 인간의 창조주이자
주권자이심을 나타냅니다. 이는 우리의 삶 속에서 하나님의 권위를 인정하고, 그분의 뜻에 순종하는 자세를 갖추어야 함을 가르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뜻에 우리 삶을 맡길 때, 진정한 평안과 기쁨을 누릴 수 있습니다.
4) 개인적인 관계와 신앙의 성숙
여호와라는 이름을 통해 우리는 하나님과 개인적이고도 친밀한 관계를
맺을 수 있습니다. 여호와는 우리의 삶 속에서 실제적으로 역사하시며,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고 응답하시는 분입니다. 하나님과의
친밀한 교제를 통해 우리의 신앙은 더욱 깊어지고, 하나님이 우리의 삶 속에서 실질적인 도움이 되어 주심을 경험하게 됩니다.
결론 : 여호와라는 이름의 의미와 중요성
여호와라는 이름은 하나님이 단순한 신적인 존재가 아닌, 영원히 살아 계시고, 자존하며, 우리와 관계를 맺고자 하는 분임을 나타냅니다.
이 이름을 통해 우리는 하나님의 깊은 사랑과 신실함을 깨닫고, 그분과의 관계 속에서 힘과 위로를 얻게 됩니다. 여호와라는
이름은 그분이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고 돌보시는지를 상기시키며, 우리가 그분을 더욱 경배하고 신뢰하게 만듭니다.
하나님의 각 이름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구약 성경 속에서 하나님은 자신의 이름을 통해서 신자들의 마음속에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를 알게 한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이름은 하나님이 자신에 관해 우리에게 계시하신 모든 것을 우리 앞에 제시한다.
첫째, 창세기 서두에서 '창조주 하나님'은 엘로힘(Elohim)으로 나타난다.
1)
엘(El): 엘은 하나님을 지시하신 단순한 명칭이다. 하나님의 위엄과 권위를 표현한다고 볼 수 있고 우주 위에 위엄과 권위의
대주재(大主宰)가 되신다. 강한 능력을 가진(Almighty) 통치자이시다. 하나님의 위엄과 권위를 나타내는 데 주로 복합어로
사용된다.
2) 엘로힘(Elohim): 엘로힘의 하나님은 강하고 유력한 자, 즉 자기를 경외의 유일한 대상으로 가르치고
세계의 창조주와 통치주로 창조와 섭리의 하나님으로 그의 일반적인 면을 지시한다. 하나님이 자기 창조, 권능, 능력을 나타내실
때마다 「엘로힘」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셔서 창조의 하나님, 권능의 하나님, 능력의 하나님으로 불리워지게 하셨다.
3) 엘
엘리욘(El-Elyon): 엘 엘리욘이라 불리워지는 하나님은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The Most High God)이라고
표현했다(시 9:2, 민 24:16, 사 14:14). 하나님은 세상의 어떤 신과도 비교할 수 없고, 그분은 피조물 된
인간으로부터 예배를 받으시는 유일한 대상이시다.
4) 엘 샤다이(El-Shadai): 엘 샤다이라고 불리워지는 하나님은
출애굽기 6장 3절에 '내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전능의 하나님으로 나타났으나 나의 이름을 여호와로는 그들에게 알리지 아니
하였고'라고 말씀하셨다. '엘 샤다이'라고 불리우는 하나님은 자기 백성들의 궁핍을 채워 주시는 축복과 위로의 원천이 되시는
분이시다.
5) 엘 올람(El-Olam): 엘 올람이라고 불리우는 하나님에 대해서는 창세기 21장 33절에 '아브라함은
브엘세바에 에셀나무를 심고, 거기서 영생하시는 하나님(The Everlasting God)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으며'라고
기록되었다. '엘 올람'이라 불리우는 하나님은 시작도 끝도 없으신 영원하신 하나님이 되시는 분이시다. 이처럼 구약성경에 「하나님」이라는 명칭의 표현의 다양성은 우리가 드리는 주기도문에서 '이름이 거룩하게 하옵시며'라는 기도를 더욱 풍부하게 하며 생활에 적용을 준다.
'이름이 거룩하게 하옵시며'라고 기도하게 하신 주님의 기도를 드릴 때, 하나님은 우리의 삶 속에서 그가 요구하시는 것을 우리가 살아 드려야 함을 확인케 하신다.
엘(El) 혹은 엘로힘(Elohim)의 하나님은 그분의 창조, 능력, 권능을 통하여 우리의 삶이 능력 있는 삶, 창조적인 삶, 죄악에서 승리하여 날마다 능력 있는 삶('이름이'라고 기도할 때)을 살기를 원하신다.
엘 엘리욘(El-Elyou)의 하나님은 자신이 지극히 높으신 경배의 대상자이심을 통하여 우리의 삶이 순간마다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 드려지는 삶('이름이'라고 기도할 때)의 연속을 원하신다.
엘 샤다이(El-Shadai)의 하나님은 자신이 축복과 위로와 안위의 근원이심을 통하여 우리의 삶이 만복의 근원자이신 하나님의 축복을 받으며 고난 많은 땅에서 그분의 위로를 기다리며 사는 삶('이름이'라고 기도할 때)을 원하신다.
엘 올람(El-Olam)의 하나님은 자신이 영원하시기 때문에 우리의 삶이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얻은 새 생명으로 영원한 삶('이름이'라고 기도할 때)에 현주소를 두고 소망을 가지고 살기를 원하신다.
둘째,
구약성경에는 가장 많이 나오는 단어인데 '여호와'라는 명칭이다. 여호와라는 명칭은 「하나님」이라는 명칭과 교차적으로, 혹은
복합적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여호와」라는 명칭은 「하나님」이란 명칭처럼 하나님이 자신에 관해 우리에게 계시하신 것을 우리 앞에
제시한다. 필자는 시편 23편을 무척 좋아하는데, 그 이유는 「여호와」 그분의 이름을 통해서 삶 속에 구체적으로 만나 주시기
때문이다. 다윗은 시편 23편에서 여호와적 7대 명칭 (Compound Jehovah Title)을 서술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1)
여호와 라하(Jehovah-Raah): 여호와 라하라고 불리워지는 여호와는 「여호와는 나의 목자」라는 뜻이다. 시편 23편
1절에 '여호와는 나의 목자'(The Lord is my shepherd)라고 기록한다. 「여호와」는 우리 삶의 나그네 인생길에
목자가 되신다. 「목자」는 양의 삶을 돌보아 주듯 목자 되신 여호와는 우리의 삶('이름이'라고 기도할 때)을 돌보아 주신다.
2)
여호와 이레(Jehovah-Jireh): 여호와 이레라고 불리워지는 여호와는 「여호와께서 준비하심」이라는 뜻이다. 시편 23편
1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I shall not want)는 말씀은 창세기 22장 14절에 아브라함이 이삭을 번제로 드릴 때
하나님께서는 독자 이삭을 바치는 대신 한 마리 양을 예비하셔서 대신 제사를 드리게 하시므로 「여호와 이레」의 여호와로 나타나고
있다. 「여호와 이레」라고 여호와를 부를 때 우리 삶에서 그의 백성이 믿음의 길에 필요한 모든 것을 예비하시고 채워 주심의
은혜로운 삶('이름이'라고 기도할 때)을 체험하게 한다.
3) 여호와 샬롬(Jehovah-Shalom): 여호와
샬롬이라 불리우는 여호와는 「여호와는 평화」라는 뜻이다. 시편 23편 2절에는 '그가 나를 푸른 초장에 누이시며 쉴만한 물가로
인도 하신다'라고 평화의 주이신 여호와의 모습을 표현하고 있다. 사사기 6장 24절에는 '기드온이 여호와를 위하여 거기서 단을
쌓고 이름을 「여호와 샬롬」이라 하였더라'고 기록한다.
「여호와 샬롬」이라고 여호와를 부를 때, 우리의 삶에서 두려움과
근심과 걱정이 쌓이게 될 때, 우리는 우리의 평강이 되시는 여호와로 인하여 삶에 평안을 영위할 수 있다. 「평화」는
화평(peace)이라는 말로 신약성경 산상수훈에서 팔복 중에 하나로 '화평케 하는 자는 하나님의 아들(Children)'이라
일컬음을 받는다고 했다. 하나님은 화평을 구하는 자에게 자녀로서 그 복을 누릴 수 있는 풍성한 삶('이름이'라고 기도할 때)이
있게 하신다.
4) 여호와 라파(Jehovah-Rapha): 여호와 라파라고 불리우는 여호와는 「여호와는 치료자」라는
뜻이다. 시편 23편 3절 '내 영혼을 소생 시키시고'(He restoreth my soul)라고 영혼을 치료하시어 새롭게 생명을
불어넣어 주시는 분으로 표현하고 있다. 출애굽기 15장 26절 '...모든 질병의 하나도 너희에게 내리지 아니하리니 나는 너희를
치료하는 여호와임이니라'고 기록한다. 이 말씀은 애굽에서 나온 이스라엘 백성들이 죄에서 떠나면 모든 병을 고쳐 주신다는 병
고침의 근원자이신 여호와이심을 말씀하고 계신다. 때문에 「여호와」를 부를 때 영적 이스라엘 백성 된 우리들은 우리의 영혼과 육신의
모든 죄악과 질병에서 고침받는 삶('이름이'라고 기도할 때)을 살게 된다.
5) 여호와
지드케누(Jehovah-Tsedegenu): 여호와 지드케누라고 불리우는 여호와는 「여호와는 우리의 의(義)」라는 뜻이다. 시편
23편 2절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도다'라고 우리의 길을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 분으로 표현하고 있다.
예레미야
23장 6절 '이스라엘은 평안히 거할 것이며 그 이름은 여호와 우리의 의(The Lord our Righteousness)라
일컬음을 받으리라'고 기록한다. 우리는 불의한 죄 가운데 있었던 자들이다. 우리는 죄를 깨닫고 의(義)의 필요성을 절감해야 한다.
그때 우리의 의가 되시는 여호와께서 우리를 의롭게 하시고 의의 자녀로서 거하는 삶('이름이'라고 기도할 때)을 살게 하신다.
6)
여호와 삼마(Jehovah-Sammah): 여호와 삼마라고 불리우는 여호와는 「여호와는 거기 계시는 분」 「같이 계시는
분」이라는 뜻이다. 시편 23편 4절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는 말씀처럼 여호와는 우리와 항상 같이 계시는 분으로 표현하고
있다. 에스겔 48장 35절에는 '그 성읍의 이름을 여호와 삼마(The Lord is there)라 하리라'고 기록한다. 우리는
장차 하나님의 나라가 임할 때 여호와와 함께 거한다는 말씀이다.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지금 우리와 같이 거하시기 위해 마태복음 1장
23절 말씀대로 「임마누엘」(God with us)로 오셨고, 요한복음 15장 7절 말씀대로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고 말씀하시므로 우리와 함께하시는 삶을 약속하고 계신다. 우리는
장차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여 그 나라 천국에 거할 때까지 그 분과 동행하는 삶('이름이'라고 기도할 때)을 살기를 원한다.
7)
여호와 닛시(Jehovah-Nissi): 여호와 닛시라고 불리우는 여호와는 「여호와는 승리, 깃발」이라는 뜻이다. 시편 23편
5절의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베푸시고'라는 말씀처럼 원수 마귀와 영적 싸움에서 승리케 하시고 상을 주신다고 하신다.
출애굽기 17장 15절 말씀에는 '모세가 단을 쌓고 그 이름을 여호와 닛시라 하고 여호와가 아말렉으로 더불어 대대로 싸우리라
하셨다'라고 기록한다. 적군 아말렉과 싸우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승리」가 되셨던 여호와는 오늘 세상의 많은 원수 마귀가 적군
아말렉처럼 우리를 괴롭히고 압제하고, 어려움과 고통을 줄 때 우리에게 승리를 주신다. 따라서 하나님의 백성들의 「승리의 깃발」
되시는 여호와를 총사령관으로 모시고 원수 마귀와 싸워 날마다 승리의 삶('이름이'라고 기도할 때)을 살아야 한다.
‘내게 주신 아버지의 이름’ 이 자체로만 본다면 ---물론 얼핏 하면 아버지의 이름을 그의 아버지가 아들에게도 똑 같은 이름을 지어 주셨구나....그렇게 당연하게 생각하여 버릴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다만 외적으로는 그리 생각을 할 수도 있겠으나, 어디까지나 내적으로 깊게 깃들어 있는 내부의 속뜻은 분명히 더 깊고 넓고 포괄적인 뜻을 내포하고 있음을 시사하고 있음을 발견 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서 한 나라의 중대한 임무를 띠고 상대의 나라에 보냄을 받았다고 한다면 한 개인의 일로 가는 것입니까?
자신의 나라 이름으로 상대의 나라에 간 것입니다.
그러므로 나 한 사람 개인의 이름을 내세우기에 앞서 ‘대한민국’에서 -----라는 식의 소개가 먼저 나오게 될 것입니다.
또 기업의 회장이 자녀에게 거래처에 중대사를 해결하도록 보내진다면 누구의 이름으로 가는 것입니까?
그 기업과 회장의 이름으로 보냄을 받아 간 것입니다.
여태까지
신학을 연구한 많은 신학자들이 발견하지 못한 것을 마치 새롭게 재구성하거나 반증을 꾀하려 드는 자체는 매우 반기독교적인 행위로
간주되어 오류를 범할 수 있는 위험한 행위가 될 수 있는 또는 이단으로 낙인이 찍힐 수 있을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이 예수님이다‘ ’아버지가 내게 주신 이름‘ 그 이름을 가지고 예수가 태어났다---
예수 그리스도는 육신의 몸을 입고 태어난 즉 그들이 말하는 예수님=(여호와 하나님 아버지)의 아들이고, 다시 말하면----여호와 하나님 아버지의 본래 이름은 예수님이시며, ’아버지가 내게 주신 이름‘ 즉 ’ 아버지의 이름을 내게 주신’그 이름을 예수라 하라‘ ’예수‘라는 이름을 여호와 하나님 아버지께서 태어날 아기 아들에게 내 이름(아버지)이름을 따서 이름을 지어 주었으니 ....그 이름을 가지고 태어난 아들의 이름은 예수이므로...그런고로 아버지의 이름을 가지고 태어났으니....아들도 예수요, 그 아버지의 이름도 당연히 예수님이 아니겠느냐----그런 주장론을 내세우는데......
여호와 하나님께서 이르시기를 하나님 자신을 지칭하는 이름들이 성경 구절에 많이 여러가지로 기록되어 나오지만,
’나는 만군의 여호와로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니라 ’스스로 있는자‘등등....이 눈에 익고 귀에 익어서인지----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이 이제부터’예수님‘으로도 호칭이 새롭게 불러져야 한다면.....낯선 거리에 갑자기 떨쳐져서 어리둥절하고 헤매게 될 때의 그러한 상황과 같은 그런 기분의 느낌....인데....
그들은 말하기를 한글로 된 즉, 성경에 쓰여진 말 그 자체를 순수히 받아들여라 ’내게 주신 아버지의 이름‘이 말하고 있지 않느냐, 하는 거지요.
그러면 ’한 아기가 우리에게서 났고‘ 이 말의 뜻은 어떻게 풀어야 할까요?
한글로 표기된 대로 해석을 한다면......
그런고로 .....그 말 자체에 내포하고 있는 또는 품고 있는 의미의 뜻을 가리키는 여러 가지 말이 그 말속에 들어 있다는 것을 생각해봄은 어떨까요?
그러므로’내 아버지가 내게 주신 아버지의 이름‘을 가지고 액면 그대로 해석하는 그 자체는 오류가 있다는 것으로 의문을 풀어 보면서 이해를 구하여 봅니다.
그러므로 ’아버지가 내게 주신 아버지의 이름‘은 (아버지의 이름으로 간판을 걸고 = 천국과 지옥이 있다는 것을) (아버지의 이름으로 복음을 전하는 =광고를 하시려) 즉 아버지의 이름으로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셨다는 것을 의미하는 뜻이 아닐까요?
그러나 자꾸 뒤를 돌아보게 하는......
"팔일이 되매 아이를 할례하러 와서 그 부친의 이름을 따라 사가랴라 하고자 하더니
그 모친이 대답하여 가로되 아니라 요한이라 할 것이라 하매
저희가 가로되 네 친족 중에 이 이름으로 이름한 이가 없다 하고
그 부친께 형용하여 무엇으로 이름하려 하는가 물으니
저가 서판을 달라하여 그 이름은 요한이라 쓰매 다 기이히 여기더라"
누가복음 1:59~63
'아버지가 내게 주신 아버지의 이름' 을 순수히 성경 말씀 그 글 그대로 받아들인 순수한 믿음인가?
자꾸 의미가 증폭된다?
내게 주신 아버지의 이름(요한복음 17:11)
하나님은 명예의 하나님이시다.
그는 자기의 이름을 가장 소중하게 여기시고(겔 36:21)
그는 자기의 이름을 최고의 자산으로 여기시는 분이시다.(겔 44:28)
신앙은 그 이름을 영접하고 소중히 여김이요
신앙생활은 위대한 유산 곧 그 이름으로 성공하는 생활이다.
어떤 자는 가문의 명성(名聲)때문에 덕을 보기도 하고 어떤 자는 선조의 오명(汚名)때문에 피해를 받기도 하는데 하나님은 자녀에게 자기 이름을 유산으로 주시는 바 다른 자 곧 천사에게는(히1:5)
그 이름의 영광도, 찬양도 주지 아니하심이라.(사42:8)
그런데 아담은 교만하여 범죄하고 에덴동산에서 쫓겨났으니(창3:4-6, 24)
그가 일컫는 대로 동물들의 이름이 결정될 뿐더러(창2:19)
하늘에서 교만하여 하나님같이 되려다 음부 곧 우주에 갇힌(사14:12-15)
타락한 천사장 루시퍼 곧 마귀에게 속아
하나님같이 되려 선악과를 먹었음이라.
그 후 인류의 유혹은 자기이름을 내는 것이라(창11:1-9)
홍수심판 후에 하나님의 섭리를 어기고
하늘 꼭대기에 닿도록 성과 대를 쌓으려 하였음이다.
아브람은 그의 이름을 창대케 하리라는 하나님의 언약을 믿었던 바(창12:2)
하나님이 그를 아브라함이라 명칭 하셨으니 열국의 아비라는 뜻이라.(창17:5)
그 후손 이스라엘이 모든 민족 위에 뛰어난 성민(聖民)된 것은(신26:19)
이스라엘은 천사와 씨름 끝에 얻어낸 이름이요(창32:24-28)
이스라엘은 천사가 전해 준 하나님의 이름 ‘여호와’를 앎이다.(출3:2-4, 6:3)
율법은 그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는 죄를 명시하는 바(출20:7)
하나님의 이름을 둔 집 곧 성소에서(대하20:5-8)
그 이름을 존중히 여기는 제사와 섬김이 두려움 가운데 계속되고 있던 중
하나님의 아들이라 하는 예수가 나타나사
이 성전을 헐라 사흘만에 일으키리라 하심은(요2:19)
‘여호와’란 이름을 폐하고 ‘예수’란 이름을 세우려 함이었으니(히10:9)
아버지가 아들에게 기업으로 주신 아버지의 이름이라.(요17:11, 히1:4)
공생애 중 귀신 쫓고, 병 고치는 등
아버지의 이름으로 행하는 일들이 그를 증거하는 것이었으나(요10:24-25)
여호와 이름을 존중한 유대인들은 그를 참람히 여겨 죽이게 되었다.
그는 죽으시며 다 이루었다 하셨으니(요19:30)
① 그가 십자가에서 죽기까지 낮아지심으로 창세 전부터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주시려던 가장 뛰어난 이름을 완전히 받으심(빌2:6-11)
② 하나님과 같이 비기려던 천사 곧 마귀를 심판하심(요일3:8)
③ 그 피를 뿌려 사람으로 아버지의 이름을 받을 토양을 만드심이다.(히9:22)
그는 부활승천하사 보좌에 앉으시고
보혜사 성령을 보내셨으니 예수 이름을 주려 하심이다.(요16:7, 20-24)
그 이름을 믿는 자는 심판을 받지 아니하고(요3:18)
그 이름으로 구원 죄 사함 자녀의 권세 생명 신유 능력...을 받고
그 이름으로 구하면 무엇이든 얻는지라(요14:13)
예수 이름이 자기 영혼에 있음을 성령으로 아는 자는
하나님 아버지로부터 최고의 자산을 받았음을 아니
항상 기뻐하고, 담대하고, 당당하게, 살 자신이 있다.
오! 주여,
만일 내게서 ‘예수’이름을 빼 버린다면 무엇이 남을까요?
약함 추함 천함 늙음 못남 불안 절망 좌절 허무 고민 죄 지옥............
오! 아버지여, 내게 예수 이름 주심을 감사합니다.
예수 이름 하나 만으로! 나는 세계를 다 가졌습니다. 아멘.
아버지의 이름
1. 아버지의 이름(11~12, 26)
예수님께서는 세상의 모든 사람을 위해서 기도하시지 않고 오직 제자들만을 위해서 기도하고 계시다는 것은 한편 매우 충격적인
사실입니다. 이 사실은 너무나 많은 사람들, 심지어 교회 안에 있는 많은 사람들의 오해, 즉 하나님은 세상 모든 사람을 사랑하시고
구원하신다는 생각에 반하는 사실이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의도적으로 세상을 위해서 기도하지 않으시고 제자들을 위해서 기도하신다고
단언하십니다(9). 제자들은 창세 전부터 아버지께서 아셨고 선택하신 자들입니다. 이들은 아버지께서 세상 중에서 예수님께 주신
사람들입니다. 그 목적은 그들에게 영생을 주시고 영원토록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려는 것입니다. 또한 주님은 이미 그들로부터 영광을
받으셨다고 말씀하십니다(10). 이런 것이 바로 주님께서 이들을 위해서 기도하시는 이유입니다. 제자들은 이제 그리스도의 사람들,
그리스도께 속한 사람들입니다. 본문 6절부터 10절까지는 주님께서 제자들이 어떤 존재들인지를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 중에서 오늘
우리가 주목하려고 하는 것은 제자들은 아버지의 이름을 알게 된 존재들이라는 설명입니다. 주님은 “내가 아버지의 이름을
나타내었나이다”라고 하십니다. 누구에게 나타냈는가하면 “세상 중에서 내게 주신 사람들” 곧 제자들에게 나타내셨습니다. 주님께서
어떤 의미로 이런 말씀을 하십니까? 여러분이 예수님의 제자라면, 여러분이 신자라면 여러분에게도 주님은 아버지의 이름을
나타내었습니다. 신자는 아버지의 이름을 아는 자들입니다. 우리가 주의깊게 17장을 읽어보면 주님께서 ‘아버지의 이름’이라는 말을 몇
차례 사용하고 계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6절 외에, 11~12절을 보십시오. “(11)나는 세상에 더 있지 아니하오나
그들은 세상에 있사옵고 나는 아버지께로 가옵나니 거룩하신 아버지여 내게 주신 아버지의 이름으로 그들을 보전하사 우리와 같이 그들도
하나가 되게 하옵소서 (12)내가 그들과 함께 있을 때에 내게 주신 아버지의 이름으로 그들을 보전하고 지키었나이다 그 중의
하나도 멸망하지 않고 다만 멸망의 자식뿐이오니 이는 성경을 응하게 함이니이다.” 여기서 아버지의 이름은 제자들을 보호하고 지키는
기능을 한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주님의 이 위대한 기도의 마지막 절인 26절을 보십시오. “내가 아버지의 이름을
그들에게 알게 하였고 또 알게 하리니 이는 나를 사랑하신 사랑이 그들 안에 있고 나도 그들 안에 있게 하려 함이니이다.” 여기서
주님은 아버지의 이름을 제자들에게 이미 알게 하였으나 계속해서 알게 하실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이렇게 하는 이유는
아버지께서 아들을 사랑하신 사랑이 그들에게 있고 주님 자신도 그들 안에 있게 하려하심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쯤 되면 우리는
아버지의 이름이 결코 머릿속의 지식이 아니라 신자의 삶을 규정하고 신자의 삶에 강력하게 영향을 미치는 실재라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아버지의 이름을 그토록 신자의 삶을 보호하고 지켜주며, 또 아버지의 사랑을 경험하게 해주는가 하는 것을
바르게 이해하는 것이 신자의 삶에 절대적으로 중요한 일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2. 이름은 속성과 성품을 의미한다(잠 18:10; 창 32:22~32).
아버지의 이름으로 보호한다는 이 개념은 잠언의 한 구절을 기억하게 합니다. 잠언 18:10입니다. “여호와의 이름은 견고한 망대라
의인은 그리로 달려가서 안전함을 얻느니라.” 어떤 의미에서 하는 말입니까?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이름이 의미하는 바는 이름
이상이었습니다. 그것은 그의 인격, 속성 또는 성품을 의미하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을 보여주는 수많은 증거들과 구절들이 있지만
야곱이 브니엘에서 천사와 씨름을 한 후에 일어난 일을 생각해보는 것이 유익할 것입니다. 씨름을 한 후에 날이 밝을 때 야곱이
천사를 놓아주지 않고 “내게 축복하라”고 했을 때, 천사가 묻습니다. “네 이름이 무엇이냐?” 야곱은 자기 이름을 말하는데 천사는
“이제는 야곱이 아니라 이스라엘이다”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야곱의 정체성, 지금까지 야곱이 짊어지고 살아왔던 야곱의 문제의
핵심을 다루시는 것입니다. 야곱은 자기가 누구인지를 알아야 했고 자기를 고백해야 했습니다. 그래야만 하나님께서 주시는 모든 은혜와
축복을 누릴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진정한 자신의 모습으로 될 때 까지는 복을 주실 수가 없는 것입니다. 야곱이
“내 이름은 야곱입니다”라고 말할 수 있기 까지는 무려 20년의 세월이 걸렸습니다. 그는 사깃군이요, 거짓말쟁이요, 남의
발뒷꿈치를 잡는 자였습니다. 그는 형을 속였고 아버지를 속인 자입니다. 이때 천사는 “하나님이 통치하신다”, “하나님이
명령하신다” 또는 “하나님이 이기신다”는 의미의 이스라엘이란 새 이름을 그에게 주십니다. 그러자 이번에는 야곱이 묻습니다.
“당신의 이름이 무엇입니까?” 이것은 단지 이름이 궁금해서 묻는 것이 아닙니다. 자기가 밤새 싸운 이분의 정체에 관한 모든 것을
알고 싶어서 물은 것입니다. 이름은 단지 이름이 아닌 것입니다. 그의 정체성, 속성, 성품 그리고 모든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본문에서 천사가 자기 이름을 가르쳐준 것이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야곱이 그곳 이름을 ‘하나님의 얼굴’을 의미하는
브니엘이라고 했다고 함으로써 그가 씨름한 분은 다름아닌 하나님 자신이었다는 점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런 맥락에서 우리는
예수님께서 아버지의 이름으로 제자들을 보전하였다는 말씀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또 여호와의 이름은 견고한 망대여서 그리로 달려가는
자는 안전함을 얻는다는 말씀도 이런 견지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이 말씀의 의미를 제대로 깨닫기만 한다면, 우리를
위협하는 상황과 환경으로부터 절망과 낙심의 포로가 되는 대신, 우리는 모든 고난 속에서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고 견고히 서는
은혜를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3. 아버지의 성품을 드러내는 이름들
문제는 그리스도인이 아버지의 성품을 드러내는 이름들을 얼마나 또 어떻게 알고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아버지의 이름을 나타내셨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제자, 곧 신자는 아버지의 이름을 아는 자들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아버지의
이름을 드러내주셨기 때문입니다. 그 아버지의 이름은 이미 구약 성경에 명확하게 계시된 이름들과 다른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구약
성경에 계시된 하나님의 이름에 대해서 일곱 개만 살펴보려고 합니다.
A. 여호와(출 3:14)
제일 먼저 우리는 여호와라는 하나님의 이름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이 이름은 모세가 광야에서 40년의 시간을 보내고 나이 80이
되었을 때 하나님께서 호렙산에서 그를 부르셨던 때, 모세에게 계시된 하나님의 이름입니다. 모세는 인생의 실패자로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자기 힘이 다 빠진 노인 모세에게 하나님께서 계시하신 이름은 여호와입니다. “스스로 존재하시는 분”이라는 의미이고,
구원하시는 언약의 하나님이라는 의미를 함축하는 말입니다. 자신을 철저하게 믿고 살았던 40년 전의 모세가 아닙니다. 인생의
낙오자, 실패자인 모세에게 이 하나님의 이름은 누군가에게 의존하지 않으시고 스스로 존재하시는 하나님께서 스스로 행하시되 인생의
실패자인 모세와 같은 사람을 사용하셔서 당신의 언약 백성을 구원해내시겠다는 의지를 보여주시는 말씀인 것입니다. 우리가 이 하나님의
이름을 제대로 이해하기만 해도, 우리는 우리 자신의 능력의 유무에 의해서 의기소침해지거나 자만하지 않을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없는 것을 있게 하시고 무능한 자에게 힘을 주시는 하나님이시기에 말입니다.
B. 여호와 이레(창 22:14): 공급하시는 하나님
여호와 이레는 비교적 우리에게 잘 알려진 하나님의 이름입니다. 아브라함이 독자 이삭을 하나님께 번제로 드리라는 명령에 순종하여
드릴 때, 하나님께서 막으시고 수양을 준비해주신 일을 기념하여 아브라함은 그곳 이름을 여호와 이레라고 불렀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이름을 기념하기 위해서 지역에 그 이름을 붙이는 경우가 구약 성경에 허다합니다. 아브라함에게만 하나님은 여호와 이레가
아니십니다. 공급하시는 하나님, 준비하시는 하나님이라는 이 하나님의 이름은 신자들이 자신의 삶의 모든 국면에서 경험하는
하나님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언제나 베푸시는 분이십니다. 은혜를 베푸시는 것, 필요를 공급하시는 것이 성경이 가르쳐주는 일관성있는
하나님의 성품입니다. 여러분이 이 사실을 깨닫지 못하였다면, 여러분이야말로 참으로 불쌍한 존재일 것입니다. 왜냐하면 여전히
여러분은 자기 힘으로, 자기만을 믿고 살아가야 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베풀어주시는 은혜를 삶의 모든 국면에서 누리고 살아가는
신자야말로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존재일 것입니다. 비록 이 세상을 사는 동안에 모든 신자가 다 부자로 살아가는 것이 아닙니다.
때로는 물질의 궁핍함을 안고 살아가고, 어떤 경우에는 일평생 그런 삶에 머무르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는 여전히 공급하시는 하나님을
아는 자일 수 있습니다. 아니, 공급하시는 하나님을 알아야만 그는 신자인 것입니다.
C. 여호와 라파(출 15:26): 치료하시는 하나님
이스라엘 백성이 갈라진 홍해를 건넌 흥분이 채 가시기도 전에, 사흘길을 걸었으나 물을 얻지 못하여 기진맥진하였을 때였습니다.
그들이 한 물을 발견하게 되는데 써서 마실 수 없는 물이었습니다. 그들의 실망이 얼마나 컸을까요? 그래서 그들은 모세에게
원망했습니다. 그때 하나님이 지시하시는 나무를 모세가 그 물에 던져넣자 쓴 물이 달게 변하였고 백성들은 그 물을 마실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여기서 당신 자신을 ‘여호와 라파’로 계시하셨습니다. 우리 성경에는 ‘치료하시는 하나님’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은 고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쓴 것을 변하여 달게 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우리 인생 여정에서 우리는 홍해의
기적만을 체험하고 살아가지 않습니다. 도리어 많은 쓴 물들을 만나고 광야를 만납니다. 우리 인생에는 쓴 기억들이 적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아는 것은 하나님께서 그 쓴 기억들을 고치셔서 선하게 바꾸실 수 있으며 그렇게 하실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이것이
여호와 라파라는 하나님의 이름이 우리에게 의미하는 바입니다. 인생의 여정에서 쓰디 쓴 경험들을 하게 될 때마다 여호와 라파의
하나님을 기억하는 것은 성도들의 마땅한 바입니다.
D. 여호와 닛시(출 17:15): 여호와는 나의 깃발
우리는 또 여호와 닛시라는 하나님의 이름을 압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에서 첫번째 전쟁을 한 것이 아말렉과의 전쟁이었습니다.
여호수아와 백성의 군사들이 나가서 싸우는 동안, 모세는 아론, 훌과 함께 산꼭대기에 올라가서 손을 들어 기도하였고 이 전쟁의
승패는 기도의 손이 들어올려진 것에 따라서 진행되었습니다. 결국은 모세의 손이 해가 지도록 내려오지 않았고 이스라엘 백성은
승리하였습니다. 모세는 거기에 단을 쌓고 여호와 닛시라고 이름하였습니다. 여호와는 나의 깃발이라는 의미인데, 여기서 깃발이 승리를
상징하기에 이것은 하나님께서 나의 승리가 되시고, 나에게 승리를 주시는 분이다하는 고백이 됩니다. 성도의 인생은 싸움과 전투에
비유됩니다. 그리스도인은 육체와 더불어, 세상과 더불어, 마귀와 더불어 싸우는 자입니다. 이 전쟁은 성도의 죽음이 오기까지 결코
그치지 않습니다. 때때로 우리는 패배의 쓴 맛을 경험합니다. 여호와 닛시라는 하나님의 이름을 기억하는 성도는 거기로 피하여
안전함을 얻습니다. 하나님께서 궁극적인 승리를 주시는 분이심을 그는 신뢰하고 그분께로 피하고, 결국 하나님이 주시는 승리를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성도는 요한계시록에 반복적으로 표현된대로 ‘이기는 자’인 것입니다. 그는 여호와 닛시의 하나님을 아는
자입니다.
E. 여호와 치드케누(렘 23:6): 여호와는 우리의 의
예레미야 선지자는 멸망하는 유다 백성에게 하나님의 구원의 날에 대한 소망을 줍니다. “그의 날에 유다는 구원을 받겠고 이스라엘은
평안히 살 것이며 그의 이름은 여호와 우리의 공의라 일컬음을 받으리라(렘 23:6).” 이것은 메시아를 통해서 이루어지게 될 먼
날의 소망입니다. 하지만 놀라운 하나님의 구원에 관한 계시입니다. 이스라엘과 유다가 의로와서 그들의 행위로 구원을 얻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 자신이 우리의 의가 되심으로서 우리가 구원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얼마나 놀라운 구원에 관한 약속이 담겨진
하나님의 이름입니까? 하나님께서 불경건한 우리들, 불의한 우리들에게 구원의 근거가 될 의로움이 친히 되어주신다는 약속인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여호와 치드케누, 여호와는 우리의 의라는 하나님의 이름이 의미하는 바입니다. 여러분이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하나님의 의의 기준에 실패할 때마다, 좌절할 때마다 기억해야 할 이름입니다. 여러분은 여러분의 의로운 행위로 구원받은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기억하게 해주고, 여러분이 받은 그 큰 구원의 은혜에 감격하게 해줄 하나님의 이름인 것입니다.
F. 여호와 로에(시 23:1): 여호와는 나의 목자
여호와 로에라는 말은 다소 생소하리라 생각됩니다. 하지만 이 말은 그 유명한 시편 23편에 나오는 “여호와는 나의 목자”라는
다윗의 고백에 나타난 하나님의 이름입니다. 인생에서 길을 잃을 때가 얼마나 많습니까? 그리고 확신이 없이 의심을 가지고 길을
걸어가게 되는 때도 적지 않습니다. 그럴 때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이 인생의 인도자가 아님을 인하여 감사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인도자는 바로 여호와 로에이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그 목자의 음성을 듣고 순종하여 따라가는 존재들일 뿐입니다.
그러므로 여호와 로에로 하나님을 아는 성도는 어떤 길이 자기에게 이익이며 손해인지에 의한 기준을 따라서 길을 걸어가지 않습니다.
그는 오직 자기의 목자이신 하나님의 음성을 듣기 위해서 애쓸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언제나 내가 목자의 음성을 듣고 있으며
목자를 따라가고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이 사실을 기억하는 순간, 우리는 길을 헤매다가도 마음의 평안을 얻고 누리게 될 것입니다.
G. 여호와 삼마(겔 48:35): 여호와가 거기 계신다
마지막으로 하나만 더 살펴보겠습니다. 여호와 삼마라는 하나님의 이름입니다. 이것은 에스겔 선지자가 종말의 성전 환상을 본 후에
고백한 말입니다. 다시 말해서 온 우주에 충만하게 임재하시는 하나님의 존재를 기념하여 이 이름에 담아 고백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임재가 미치지 않는 곳이 없습니다. 여러분의 인생에 어느 곳으로 가셔도 하나님의 임재를 떠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조국을
떠나 미국 땅으로 이민을 오셨지만, 오히려 여기서 하나님을 만난 분들이 계십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거기에도 계시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이 잘 아시는 ‘모래 위에 발자국’이라는 시를 생각해보십시오. 언제나 하나님께서는 나와 함께 계셔서 내가 걸어온 여정에 두
사람의 발자국이 있었는데, 정작 내 인생의 가장 힘들었던 순간에는 한 사람의 발자국 밖에는 없는 것을 발견하고 주님께 묻자
주님은 “그때에는 내가 너를 엎고 걸었기에 한 사람의 발자국 밖에 없는 거야, 그 발자국은 네 것이 아니라 내 것이란다”라고
말씀하셨다는 것이지요. 하나님께서 계시지 않은 곳은 없으며, 하나님께서 계시지 않았던 때도 없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혼자라고
느끼고, 하나님의 임재를 느낄 수 없는 순간에 기억해야 할 여호와 삼마라는 하나님의 이름의 의미입니다.
4. 기도하기 전에 묵상하라.
우리가 성경에 계시된 하나님의 이름의 풍성한 의미에 대해서 단지 일곱 가지만 살펴보았지만, 여러분은 왜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아버지의 이름을 계시하셨고 그 이름으로 그들을 보전하였다고 말씀하시는지 조금 이해할 수 있으셨기를 바랍니다. 이 풍성하게 드러난
하나님의 이름은 모두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알려줍니다. 주님은 지상에서 제자들에게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가르치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를 깨달아 아는 지식, 하나님의 이름을 아는 지식이 그들을 보호하고 지켜주는 것이라고 말씀을 하십니다.
그리스도의 제자는 아버지의 이름을 아는 자입니다. 아버지의 이름을 모르는 자를 어찌 아들이라 하겠습니까? 아버지의 이름을 아는
자는 아버지가 어떤 분인지를 아는 자입니다. 저는 오늘 단지 성경퀴즈에 나올만한 단어들을 공부하려고 한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이 이
하나님의 이름들에 나타난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확실하게 아시는지를 도전하는 것입니다. 아니, 여기서 언급한 것들만이 아니라,
성경 전체를 통해서 계시하신 하나님의 이름을 여러분은 아십니까? 얼마나 알고 계십니까? 그것이 머리에 넣어둔 지식입니까? 아니면
여러분의 삶 속에서 순간 순간 의지하고 그 이름에 나아가 안전함을 얻는 성루가 되는 것을 경험하는 지식입니까? 여러분은
기도하십니까? 기도하신다면 여러분은 어떤 분에게 나아가 기도하십니까? 기도하실 때, 하나님의 보좌 앞에 여러분이 나아가실 때,
여러분이 먼저 해야 할 일이 있다는 사실을 아십니까? 그것은 여러분이 이제 나아가려고 하는 그 위대하신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먼저 알고 나아가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그분에 관한 모든 것은 그분의 이름에 계시되어 있습니다. 여러분은 기도하실 때에 그분의
이름을 부르면서 나아갈 수 있습니다. 마땅히 그래야 합니다. 여러분의 인생의 가장 절박한 필요와 상황 속에서 여러분은 여러분의
성루, 견고한 망대가 되시는 아버지의 이름을 부르면서 나아가 거기서 안전함과 평강을 얻어야 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이 위대한
기도에서 “내가 아버지의 이름을 나타내었나이다”라고 하신 것은 바로 그런 의미입니다. 신자는 아버지의 이름을 아는 자입니다.
5. 그리스도께서 계시하신 아버지의 이름을 깨닫는 일에 삶을 드려라.
그러므로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의 인생을 어떤 일에 쏟아야 합당하겠습니까? 우리는 인생을 살면서 시간을 어딘가에 사용하고
살아갑니다. 여러분 모두가 동의하실지는 모르겠지만 시간은 모두에게 공평하게 주어졌다고 하는 말을 듣습니다. 물질과는 달리 모두에게
하루 24시간이 주어졌다는 말입니다. 만일 여러분이 무엇인가를 배우기 위해서 대학에 가신다면, 돈과 시간을 투자해야만 한다는
것은 자명한 이치입니다. 우리는 이 세상을 사는 동안에 배워야 할 것이 적지 않습니다. 하지만 여러분이 이 세상에서 얼마나 중요한
것들을 배우시든지간에 여러분이 예수님께서 자기 사람들에게 계시하여주신 아버자의 이름을 배우는 일에 여러분의 시간을 쏟아야 한다는
사실을 결코 가볍게 여기지 마십시오. 때론 여기에 우리가 사랑하는 돈도 사용해야 할 것입니다. 아버지의 이름을 여러분이 풍성하고
깊이있게 알지 못한다면 여러분은 그리스도인으로서 살아가는 은혜와 풍성함을 결코 알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께서 계시하여 주신
아버지의 이름을 알고 깨달아가는 일에 열심을 품으십시오. 그리고 시간을 들이십시오. 새벽예배에 전해지는 말씀을 통해서,
금요예배에서 선포되는 말씀 그리고 주일 예배와 모든 성경공부와 개인적인 성경읽기를 통해서 여러분이 시간과 열심을 쏟으시라고
권면합니다. 아버지의 이름에 대한 영적 무지는 우리를 영적 빈곤의 비참함으로 인도할 뿐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아버지의 이름을
우리에게 알리시고 또 알리시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아버지의 풍성하신 사랑을 알게 하시려고 말입니다. 그 은혜에 합당하게
응답하시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세상 중에서 내게 주신 사람들에게 내가 아버지의 이름을 나타내었나이다” (요한복음 17:6) 이 구절은 예수님의
대제사장적인 중보 기도 중의 한 구절입니다. 이 짧은 구절 속에는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행하신 일에 대한 정의가 내려져 있습니다. 예수님은 중보 기도를 하나님께 드리시면서 그가 이 땅에 오셔서 전 생애를 통하여 행하신 일을 한 마디로 요약하여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아버지의 이름을 나타내었나이다.” “아버지의 이름” 즉 우리는 예수를 믿던 날부터 아버지의 이름을 수없이 불렀습니다.
하나님 아버지의 이름이 예수?
하나님은 한 하나님이시지만 성부 하나님, 성자 하나님, 성령 하나님이라는 세 분의 인격체(three persons)로 존재하십니다. 이것을 가리켜서 삼위일체라고 합니다.
(요일 5:7) 하늘에 증언하는 세 분이 계시니 곧 아버지와 말씀과 성령님이시라. 또 이 세 분은 하나이시니라.
반면
양태론자들은 삼위일체를 부정하고, 하나님은 한 분(한 인격체)인데, 그 하나의 존재가 시간과 장소에 따라서 모습만 바꾸어서
나타나는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그들은 상온에서 액체 상태인 물을 얼리면 얼음이 되고, 가열하면 기화되어 수증기가 되는 것처럼
동일한 존재가 양태만 바뀔 뿐이라고 합니다. 그들은 한 사람이 직장에서는 "과장님"으로 불리다가 집에 오면 아내에게는 "남편"이
되고, 아이들 앞에서는 "아버지"가 되는 것처럼 그분이 하늘에 계실 때에는 하나님, 육체를 입고 이 세상에 오시면 예수님,
성도들 안에 들어가면 성령님이 된다고 주장합니다.
그들의 주장대로라면 예수님께서 지상 사역을 하실 때에는 하나님의 왕좌가 텅 비어 있었고,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실 때에는 성부 하나님과 성령 하나님이 죽으셨다는 이야기가 됩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들의 주장이 잘못 되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구약 성경 이사야에서는 하나님(성부)과 그분의 영(성령)께서 처음부터 계신 그리스도(성자)를 보내주셨다는 것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사 48:16) 너희는 내게 가까이 나아와 이것을 들으라. 내가 처음부터 은밀한 가운데 말하지 아니하였나니 그것이 있던 때부터 내가 거기 있노라. 이제 주 하나님과 그분의 영께서 나를 보내셨느니라.
예수님께서
요한에게 침례를 받으실 때, 예수님은 물속에서 올라오셨고, 성령님께서는 위로부터 내려오고 계셨고, 하늘에서는 성부 하나님께서
아들에 대하여 증언해 주셨습니다. 만약 양태론자들의 주장대로라면, 성령님은 실체가 아니라 허구가 되고, 하늘에서 들려온 소리는
예수님이 복화술로 말씀하셨거나 때를 맞추어서 천사들이 녹음기를 틀어놓은 것이라고 봐야 합니다.
(마 3:16-17)
예수님께서 침례를 받으시고 곧바로 물속에서 올라오실 때에, 보라, 하늘들이 그분께 열렸으며 또 하나님의 영께서 비둘기같이 내려와
자기 위에 내려앉는 것을 그분께서 보시더라. 보라, 하늘로부터 한 음성이 있어 이르시되, 이 사람은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내가
그를 매우 기뻐하노라, 하시니라.
그리고 겟세마네 동산에서 예수님께서 기도하신 것은 자기가 자기에게 기도한 것이 되어 버립니다.
(막 14:36) 이르시되, 아바, 아버지여, 아버지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오니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내 뜻대로 하지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옵소서, 하시고는
만약
그들의 주장대로 아버지 하나님과 아들 하나님이 동일한 존재라면 바로 여기에서 성경에도 없는 "성부고난설"과 "성부사망설"이라는
거짓 교리가 나오게 됩니다. 성경은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께서 다시 살리셨다고 합니다. 그런데 양태론자들의
말대로라면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실 때 성부 하나님도 같이 사망하셨기 때문에 아무도 죽은 하나님을 다시 살릴 수가 없게 되어
버립니다.
(행 3:15) 생명의 통치자를 죽였도다. 그러나 그분을 하나님께서 죽은 자들로부터 살리셨으며 우리는 그 일에 증인이니라.
베뢰아 측의 김기동 목사는 개역 성경의 요한복음 17장 11절을 들어서 이것이 양태론을 지지하는 증거라고 합니다.
(요 17:11, 개역) 나는 세상에 더 있지 아니하오나 저희는 세상에 있사옵고 나는 아버지께로 가옵나니 거룩하신 아버지여 내게 주신 아버지의 이름으로 저희를 보전하사 우리와 같이 저희도 하나가 되게 하옵소서
위
구절에 의하면 예수님께서 "내게 주신 아버지의 이름으로" 라고 말씀하셨다고 합니다. 그 번역대로라면 하나님 아버지께서 예수님에게
자기 이름(아버지의 이름)을 주셨다는 것입니다. 아들 하나님의 이름이 무엇입니까? 예수입니다. 그런데 그 이름은 본래 아버지의
이름이었다는 것이지요. 그렇다면 아버지의 이름은 무엇입니까? 아버지의 이름도 예수가 되어 버립니다. 아들도 예수, 아버지도
예수이니, 아버지와 아들은 독립된 인격체가 아니라 한 존재인데, 어떤 때는 아버지 배역을 하다가, 다른 때에는 아들 노릇을 한다는
것입니다.
개역을 비롯한 수많은 현대 역본들은 "내게 주신 아버지의 이름으로"라는 엉터리 오번역을 통해서 삼위일체를
부정하고, 양태론 교리를 퍼뜨려 왔습니다. 그러나 이 구절의 정확한 번역은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자들을 아버지의 이름으로
지키사"입니다.
(요 17:11, 킹흠정) 이제 나는 세상에 더 있지 아니하오나 이들은 세상에 있사옵고 나는 아버지께로 가옵나니 거룩하신 아버지여,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자들을 아버지의 이름으로 지키사 우리와 같이 그들도 하나가 되게 하옵소서.
(요
17:11, KJV) And now I am no more in the world, but these are in the
world, and I come to thee. Holy Father, keep through thine own name
those whom thou hast given me, that they may be one, as we are.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예수님에게 "자기 이름"을 주신 것이 아니라, "제자들"을 주셨습니다. 과연 그러한지 요한복음 17장의 다른 구절들을 직접 읽어 보시기 바랍니다.
6절. [아버지께서 세상에서 내게 주신 사람들]에게 내가 아버지의 이름을 나타내었나이다. 그들은 본래 아버지의 것이었는데 [아버지께서 그들을 내게 주셨으며] 그들은 아버지의 말씀을 지켰나이다.
9절. 내가 그들을 위해 기도하나이다. 내가 세상을 위해 기도하지 아니하고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자들]을 위해 기도하오니 그들은 아버지의 것이니이다.
12절. 내가 그들과 함께 세상에 있을 때에 아버지의 이름으로 그들을 지켰나이다.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자들을] 내가 지켰고 멸망의 아들 외에는 그들 중의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였으니 이것은 성경 기록을 성취하려 함이니이다.
24절. 아버지여, 원하건대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자들]도 내가 있는 곳에 나와 함께 있게 하사 아버지께서 세상의 창건 이전에 나를 사랑하셨으므로 친히 내게 주신 나의 영광을 그들이 보게 하옵소서.
따라서 "성부 하나님도 예수이고, 아들 하나님도 예수이니 이는 둘이 아니라 한 존재가 그 때마다 모습만 달리하고 있을 뿐이다"라는 양태론자들의 주장은 거짓 교리임을 알 수 있습니다.
성경은 교훈을 주기 위해 기록된 책이 아니라, 교리를 기록하고 있는 책입니다. 그래서 성경에서 교리가 나옵니다.
바른 성경에서는 바른 교리가 나오고, 잘못된 성경에서는 잘못된 교리가 나옵니다. 바른 성경을 통해서 바른 교리를 믿고, 바른 믿음에 뿌리를 내리시기 바랍니다.
(딤후 3:16) 모든 성경 기록은 하나님의 영감으로 주신 것으로 교리와 책망과 바로잡음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예수 그리스도의 다른 이름과 호칭들에는 무엇이 있나요?
성경에는 그리스도에 관한 약 200개의 이름과 호칭이 들어 있습니다. 다음은 좀 더 중요한 이름들을 그리스도의 본성, 삼위일체 하나님 안에서의 지위, 그리고 우리를 위한 지상 사역과 관련한 세 부문으로 나누어 살펴본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본성
모퉁이돌(에베소서 2:20) – 예수님은 교회의 모퉁이돌이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유대인과 이방인, 남자와
여자, 그리고 모든 연령의 성도들을 끈끈하게 연결시키시고, 당신을 믿는 믿음 위에 하나의 구조물로 세워지게 하시며, 그 안에서
모두가 하나되게 하십니다.
모든 피조물보다 먼저 나신 이(골로새서 1:15) – 16절에서 만물이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그리고 그리스도를
위하여 창조되었다고 말하고 있으므로, 어떤 사람들이 주장하듯 그리스도는 하나님께서 첫 번째로 지으신 피조물이 아닙니다. 정확히
말해서 그 의미는 그리스도께서 만물보다 먼저 나신 이의 지위와 출중함을 지니고 계시며, 우주에게 가장 높은 지위를 견지하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모든 다른 것들보다 뛰어나시며, 만물의 머리가 되십니다.
교회의 머리(에베소서 1:22; 4:15; 5:23) – 그리스도께서 죽으신 이유이자, 구원을 위해 오직 그리스도만을 믿는 자들의 모임, 즉 교회의 최고 통치자는 왕도 교황도 아닌 오직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거룩[한] 이(사도행전 3:14; 시편 16:10) – 그리스도는 신성과 인간성 모두에서 거룩하시며, 당신의 백성을 위한 거룩함의 원천이 되십니다. 그리스도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거룩하고 순결하게 되었습니다.
재판장(사도행전 10:42; 디모데후서 4:8) – 주 예수님은 하나님에 의해 세상을 심판하고 영원의 보상을 분배해주시는 재판장으로 임명되셨습니다.
만왕의 왕이시며 만주의 주(디모데전서 6:15; 요한계시록 19:16) – 예수님은 지상의 모든 권세, 모든
왕들과 통치자들에 대한 지배권을 가지시며 아무도 그의 목적이 성취되는 것을 막을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당신이 원하시는 대로
그들을 지휘하십니다.
세상의 빛(요한복음 8:12) – 예수님은 죄로 어두워진 세상 가운데에 오셔서 당신의 사역과 말씀을 통해 생명과 진리의 빛을 비춰 주셨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자들은 예수님에 의해 눈을 뜨고 빛 가운데 행합니다.
평강의 왕: (이사야 9:6) – 예수님은 세상에 전쟁이 없는 상태와 같은 평강을 주시러 오신 것이 아니라 죄로 인해
멀어진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평강을 주시러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죄인들을 거룩하신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기 위해 죽으셨습니다.
하나님의 아들: (누가복음 1:35; 요한복음 1:49) – 예수님은 “아버지의 독생자”이십니다 (요한복음 1:14). 신약성경에서 42번 사용된 “하나님의 아들”은 그리스도의 신성을 명시합니다.
사람의 아들(인자): (요한복음 5:27) – “하나님의 아들” 과 대조적으로 사용되는 이 이름은 그리스도의 신성과 함께 존재하는 인간성을 명시합니다.
말씀: (요한복음 1:1; 요한1서 5:7-8) – 말씀은 삼위일체 하나님 중에서 두 번째 인격으로서 그가 말씀하시니
그것이 이루어졌으며, 태초에 말씀으로 무에서 만물을 창조하셨으며, 창세 때 아버지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하나님이셨으며, 그로
말미암아 만물이 창조되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 (요한계시록 19:12-13) – 이 이름은 그리스도께 주어진 이름으로 그리스도 자신 외에는 아무에게도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이는 그의 거룩한 인격의 신비를 나타냅니다.
생명의 말씀: (요한1서 1:1) – 이 구절에 따르면 예수님은 영생으로 이끄는 말씀만 하시는 것이 아니라, 바로 생명의 말씀 그 자체이십니다. 즉 예수님께서 공급하시는 영생의 기쁨과 충만을 의미합니다.
삼위일체 안에서의 지위
알파와 오메가: (요한계시록 1:8; 22:13) – 예수님은 당신 스스로를 만물의 시작과 끝이라고 선언하셨는데, 이는 진짜 하나님 외에는 아무도 할 수 없는 말입니다. 영원성과 관련한 이러한 진술은 오직 하나님께만 적용될 수 있습니다.
임마누엘: (이사야 9:6; 마태복음 1:23) – 문자적으로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의미합니다. 이사야와
마태는 모두 베들레헴에서 나실 그리스도가 사람의 형상으로 사람들 사이에서 살아가기 위해 지상에 오시는 하나님 당신일 것이라고
확실히 말합니다.
내가 있느니라: (I Am; 출애굽기 3:14과 함께, 요한복음 8:58) – 예수님께서 당신을 이러한 호칭으로
묘사하셨을 대 유대인들은 예수님이 신성모독을 했다며 돌로 치려 했습니다. 유대인들은 예수님이 당신 스스로를 영원하신 하나님,
구약성경에 나오는 변함 없으신 여호와로 선포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만유의 주: (사도행전 10:36) – 예수님은 온 세상과 그 안에 있는 만물과 세상의 모든 나라들과, 그리고 특별히 하나님의 택하신 백성들, 유대인뿐만 아니라 이방인들까지도 다스리시는 주권자이십니다.
참 하나님: (요한1서 5:20) – 이 호칭은 참 하나님 되시는 예수님이 단지 신성하실 뿐만 아니라 신성 바로 그
자체이심을 직접적으로 주장합니다. 성경은 하나님이 오직 한 분이시라고 가르치므로, 이 호칭은 오직 삼위일체 하나님에 포함되는
예수님의 본성을 묘사합니다.
지상 사역과 관련하여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 (히브리서 12:2) – 구원은 하나님의 선물인 믿음으로 말미암아
이루어지고 (에베소서 2:8-9), 예수님은 우리 믿음의 시작이자 끝이 되십니다.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예수님은 우리를 구원하는
믿음의 근원이시며 붙잡아 주시는 이이십니다.
생명의 떡: (요한복음 6:35; 6:48) – 물질적 의미에서 떡이 생명을 유지시켜 주듯이, 예수님은 영생을 주시고
유지시켜 주시는 떡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광야에서 당신의 백성을 먹이기 위해 만나를 내려주셨고, 우리에게 영생을 주시기 위해
몸소 떡이 되신 예수님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신랑: (마태복음 9:15) – 그리스도를 신랑으로 교회를 그의 신부로 묘사하는 것은 우리와 그리스도의 특별한 관계를 나타냅니다. 우리는 서로 깨질 수 없는 은혜의 언약으로 매여 있습니다.
구원자: (로마서 11:26) –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의 종살이로부터 구원되기 위해 하나님이 필요했듯이,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죄의 종살이로부터 구원하시는 구원자가 되십니다.
선한 목자: (요한복음 10:11, 14) – 성경에 나오는 선한 목자는 자신의 양을 포식자로부터 지키기 위해 목숨의
위험도 아랑곳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도 당신의 양을 위해 목숨을 내놓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돌보시고, 기르시며,
먹이십니다.
대제사장: (히브리서 2:17) – 유대교의 대제사장은 백성의 죄를 속죄하기 위해 일 년에 한 번씩 성소에 들어갔습니다. 우리 주 예수님께서 당신의 백성을 위한 속죄 행위를 십자가 위에서 단번에 이루셨습니다.
하나님의 어린 양: (요한복음 1:29) – 하나님의 율법은 속죄 제물로서 티 없고, 흠 없는 어린 양을 요구했습니다. 예수님은 고통을 참으며 죽음의 준비를 마친 모습으로 온순하게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어린 양이 되셨습니다.
중보자: (디모데전서 2:5) – 중보자는 두 편의 당사자 사이에 들어가 화목하게 하는 사람입니다. 그리스도는 사람과
하나님을 화목하게 할 수 있는 분이며 유일한 중보자이십니다. 마리아나 다른 성인들에게 기도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가장 중요한
역할을 무시하고 다른 이들에게 중보자의 역할을 맡기는 것이므로 우상 숭배라고 할 수 있습니다.
반석: (고린도전서 10:4) – 모세가 광야에서 친 바위에서 생명수가 나오듯이, 예수님은 영생의 생수를 흘려
보내시는 반석이십니다. 예수님은 반석이시고 우리는 그 반석 위에 영적 집을 짓습니다. 그 위에 지은 집은 폭풍이 몰아쳐도 흔들리지
않습니다.
부활이요 생명: (요한복음 11:25) – 예수님 안에 내재된 상징은 당신이 무덤에서 부활하셨듯이, 죄인들을 영생으로
부활시키시는 수단이 되신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죄는 예수님과 함께 장사되고, 우리는 새로운 생명으로 살아가기 위해 다시 살리심을
받습니다.
구주: (마태복음 1:21; 누가복음 2:11) – 예수님은 당신의 백성을 구원하십니다. 백성을 구속하기 위해
죽으심으로써, 당신의 능력으로 말미암아 백성을 새롭게 하기 위해 성령을 보내주심으로써, 백성들이 영적 원수들을 이겨내도록
도우심으로써, 시험과 죽음에서 백성을 지켜주심으로써, 마지막 날에 백성을 다시 일으켜 세우심으로써 그렇게 하십니다.
참포도나무: (요한복음 15:1) – 참포도나무는 가지들 (믿는 자들)이 성령의 열매를 맺기 위해 필요한 모든 것들, 즉 구원의 생명수와 말씀의 영양분을 공급합니다.
길, 진리, 생명: (요한복음 14:6) – 예수님은 하나님께로 가는 유일한 길이시며, 거짓 세상 속의 오직 하나뿐인 진리이시며, 영생의 유일한 참 근원이십니다. 예수님은 현세적, 영원적 의미 모두에서 이 세 가지를 구현하십니다.
예수와 하나님에 대한 아버지 호칭
역사적 예수의 독특성 가운데 하나가 유대인이 감히 부르지 못했던 하나님을 ‘아빠’(abba, 아버지)라는 가장 친근한 호칭으로 불렀다는 것이다. 아버지 호칭은 복음서에서는 150회 이상이나 기록되어 있다.
12세 소년 예수는 예루살렘 축제에 부모와 같이 와서 없어져 버렸는데 부모가 근심하여 찾다가 성전에 있는 그를 발견하였다. 어머니
마리아가 “아이야 어찌하여 우리에게 이렇게 하였느냐 보라 네 아버지와 내가 근심하여 너를 찾았노라”(눅 2:48)라고 질책한다.
이에 대하여 소년 예수는 독특한 문장으로 대답한다: “어찌하여 나를 찾으셨나이까 내가 내 아버지 집에 있어야 될 줄을 알지
못하셨나이까”(눅2:49).
소년 예수의 하나님에 대한 “아빠”라는 호칭은 독특하다. “내 아버지 집”이란 육신의 아버지인 요셉의 집이 아니라 예루살렘 성전인
하나님의 전을 말한다. 어린 예수는 예루살렘 성전을 “아버지의 집”이라고 부른 것이다. 예수는 그의 복음 전파 사역에 있어서
하나님에 대하여 지칭할 때 어느 누구도 부를 수 없는 친근한 ‘아버지’라는 호칭을 사용하였다. 십자가 상에서 숨을 거두시면서 하신
예수의 마지막 말은 “아버지,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눅23:46)였다. 독일의 신약학자 여호야킴 예레미아는
‘아빠’(abba)라는 단어는 역사적 예수가 친히 쓴 아람어라고 밝히고 있다.
구약에서의 하나님 아버지
유대인들은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관계를 토기장이와 진흙, 창조주와 피조물, 주관자와 복종자의 관계로 생각하였다. 그리하여 이들은
하나님의 이름을 감히 부르지도 못했다. 그러나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른 것이 희미하게나마 구약 성경에 나타나고 있다. 이스라엘은
민족적인 처지에서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불렀다. 신명기에는 하나님이 선민 이스라엘의 아버지로 묘사된다: “너는 바로에게 이르기를
여호와의 말씀에 이스라엘은 내 아들 내 장자라”(출 4:22). 여기서 하나님은 이스라엘 민족의 아버지라는 뜻이다. 시편 기자는
보다 인격적으로 하나님을 고아의 아버지라고 불렀다. “그의 거룩한 처소에 계신 하나님은 고아의 아버지시며 과부의 재판장이시라”
(시 68:5). 시편 기자는 하나님을 자식을 불쌍히 여기는 아버지에 비유하였다. “아버지가 자식을 긍휼히 여김 같이 여호와께서는
자기를 경외하는 자를 긍휼히 여기시나니”(시 103:13).
유대인은 한편으로는 하나님에 대하여 호칭으로 부르기를 꺼렸고, 다른 편으로는 아버지 호칭을 집단적인 의미 내지 비유로 사용해왔다.
이러한 유대교의 하나님 “아버지” 호칭에 대하여 나사렛 예수는 새로운 의미, 즉 신약적인 독특성을 부여하였다.
첫째, 하나님과 인간 사이를 가족관계로 표시하였다.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관계는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이다. 부자의 관계로서
하나님의 부성을 강조한 것은 바로 유대의 전통적 사상이 의미하는 바를 보다 분명히 설명해 준다. 예수의 아버지 호칭은 유대교가
의미하는 창조자와 피조물의 관계를 부자(父子)관계로 끌어 올리는 혁명적인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둘째, 하나님에 대한 “아버지” 호칭은 우리와 하나님 사이의 관계를 새롭게 규정한다. 그것은 아들로서 아버지에 대한 인격적인
관계와 무한한 신뢰와 사랑을 내포하고 있다. 이 호칭에는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는 더 이상 주인과 종 사이의 비인격적 관계가
아니라. 자녀에 대해 베푸는 아버지의 무한한 긍휼과 인자에 대한 신뢰가 담겨져 있다.
호칭 ‘아버지’의 함축성
나사렛 예수가 사용한 하나님에 대한 ‘아버지’(아람어로는 abba)라는 호칭은 유대교적인 하나님 상(像)의 틀을 깨뜨리고 하나님에 대한 새로운 인격적인 관계를 제시하고 있다. ‘아버지’ 호칭은 다음의 함축성을 지닌다.
첫째, 자녀에 대한 하나님의 깊으신 관심을 드러낸다
하나님은 우리를 자녀와 같이 보살피신다. 우리에게 의식주가 필요하다는 것을 아신다. 부모가 자녀들의 의식주를 돌보아 주시는 것
처럼 하나님은 우리들의 삶의 기본을 돌보아 주신다. 예수는 어떤 조건을 제시하며 하나님을 믿으라고 하지 않았다. 하나님에 대하여
근본적인 믿음을 가지라는 것이다. 그것은 순수하고 소박한 믿음을 말한다. 마치 자녀에 대한 부모의 심정을 지니신 하나님에 대한
신뢰를 가르치시고 계신다. 산상설교에서 예수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신다: “너희 중에 누가 아들이 떡을 달라 하는데 돌을 주며,
생선을 달라 하는데 뱀을 줄 사람이 있겠느냐. 너희가 악한 자라도 좋은 것으로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마 7:9-11)
둘째, 자녀 하나 하나에 대한 사랑을 드러낸다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 하나 하나를 눈동자 같이 머리털까지 세고 계시는 세밀한 사랑이다. “너희에게는 머리털까지 다
세신 바 되었나니”(마 10:30).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마음은 아흔 아홉 마리 양을 우리에 두고 잃은 한 마리의 양을 찾아
나서는 목자의 심정과 같다고 예수는 설교하신다. 그 양을 찾으면 목자가 그 양을 어깨에 메고 즐거워하며 집에 돌아와 “그 벗과
이웃을 불러 모으고 말하되 나와 함께 즐기자. 나의 잃은 양을 찾아내었노라”(눅 15:6)라고 말하듯이 하나님은 우리 죄인들이
회개하고 하나님께 돌아오는 것을 기뻐하신다: 누가는 예수의 말씀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와 같이
죄인 한 사람이 회개하면 하늘에서는 회개할 것 없는 의인 아흔아홉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는 것보다 더하리라”(눅 15:7).
셋째, 하나님에 대한 자연스러운 관계: 직접성과 단순성을 나타낸다
신자와 하나님과의 관계는 아들과 아버지의 관계이다. 단지 형식이나 의식적인 차원에서 하나님을 경배하는 것은 아직도 종교적
차원이다. 하나님은 자유스러운 마음, 자발적인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경배와 찬양을 받으신다. 하나님은 아버지로서 애원하는 심령에서
나오는 자녀의 단순한 기도를 들어 주신다. 예수는 말씀하신다: “구하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리하면 찾아낼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구하는 이마다 받을 것이요 찾는 이는 찾아낼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이니라”(마 7:7-8). 하나님께 기도하고 요구하는 데는 형식적인 절차가 아니라 직접적이고 단순성이 요구된다. 마치 자식이
부모에게 요구하는 것과 같다. 자식이 아버지 앞에서 주저한다면 그것은 참 아버지가 아니기 때문일 것이다. 예수는 우리와 하나님과의
관계를 신앙의 자연스러운 관계로 나타내고 계신다.
넷째, 자녀의 고통에 함께 하시는 분을 드러낸다
하나님은 우리의 고통에 관심을 가지시고 참여하시는 분이시다. 우리의 고통은 율법적인 인과응보로만 오는 것은 아니다. 고통이란
단순히 하나님의 징계로만 생각해서도 않된다. 우리의 고통에는 우리를 특별히 사랑하시는 자의 목적이 있다. 예수는 산상설교에서
말씀하신다: “나로 말미암아 너희를 욕하고 박해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슬러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도 이같이 박해하였느니라”(마 5:11-12).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당하는 이 세상의 고통과 박해에는 하나님의 의미와 목적이 들어 있다. 하나님은 이것을 선으로 바꾸시고 좋은 것으로
갚아주신다. 우리의 고통은 우리 자신의 것만이 아니라 하나님의 고통이다. 이 하나님의 고통은 예수의 십자가에서 가장 잘 드러나
있다.
다섯째, 아버지로서 자녀의 허물과 죄를 용서해주신다
하나님은 그의 자녀에게 구약의 율법학자들이 생각했듯이 단지 준엄한 재판관이나 율법집행자가 아니시다. 하나님은 그의 자녀들에게
인격적으로 다가오시는 아버지시다. 우리의 허물과 죄를 용서해주시는 분이시다. 하나님은 자녀에게 어느 계명을 지켰는지 보시기 보다는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인격적인 신뢰를 가졌는지에 대해 우선적으로 보신다. 이러한 아버지의 사랑을 보여주는 예수의 설교는 잃어버린
아들을 기다리는 아버지의 비유(탕자의 비유)(눅 15장)에서 나타난다. 탕자는 “아버지여,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하지 못하겠나이다”(눅 15:21) 라고 아버지에게 참회의 고백을 한다. 그러나
아버지는 게의치 않고 잃어버린 아들이 돌아온 사실 자체를 기뻐하신다: “아버지는 종들에게 이르되 제일 좋은 옷을 내어다가 입히고
손에 가락지를 끼우고 발에 신을 신기라. 그리고 살진 송아지를 끌어다가 잡으라. 우리가 먹고 즐기자. 이 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다시 얻었노라 하니 그들이 즐거워하더라”(눅 15:22-24). 아버지의 아들이 될 자격이 없다고
생각한 아들을 즐겨 맞이해주는 것이 아버지의 사랑이다. 이 비유는 독생자를 주시기까지 아낌없이 인간을 사랑하신 하나님의 사랑을
교훈해 주고 있다.
여섯째, 하나님 앞에 모든 인간은 한 형제이다
하나님이 우리의 아버지가 되시기 때문에 모든 사람은 한 형제가 된다. 여기에는 백인, 황색인, 흑인의 차이가 있을 수 없고,
동양인과 서양인의 차이, 남자와 여자, 노인과 어린이의 차이가 있을 수 없고, 부자와 가난한 자의 차이가 없으며, 지식인과
비지식인의 차이가 없으며, 권력자와 서민의 차이가 없다. 모든 인간의 계층의 구별이 사라진다. 그것은 형제 자매가 아버지 앞에서
하나인 것 처럼 모든 인류가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하나의 형제가 되는 것이다. 이것은 다가오는 하나님의 나라에 우리 모두가
하나님의 자녀로서 새 예루살렘 성에 들어가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과 같다: “사람들이 만국의 영광과 존귀를 가지고 그리로
들어오겠고”(계 21:26).
예수의 영 안에서 정립되는 하나님의 부성(父性)
하나님의 아버지 되심(부성)이란 나사렛 예수 안에서만 정립되고 그 안에서 드러난다. 혈과 육이라는 자연적인 관계로는 정립되지
않는다. 요한은 다음과 같이 증언한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이니라”(요 1:12-13).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것은 우리가 예수를 믿음으로 가능하다. 믿는 자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다. 오늘도 예수를 믿고 그의 자녀가
될 때 우리에게 아들의 영인 성령이 오셔서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게 한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의 영을 받을 때 우리는
하나님의 양자(養子)가 되고 우리는 하나님을 “아바”(abba, 아버지)라고 부르게 된다. 바울은 로마서에서 다음과 같이
증언한다: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우리가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짖느니라. 성령이
친히 우리의 영과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언하시나니”(롬 8:15-16). 오늘날에도 신자인 우리가 기도할 때
하나님을 “아빠,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을 친히 “아빠!”라고 불렀던 예수의 영이 우리 속에 거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기도 속에서 하나님에 대하여 아버지라고 부름으로써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불렀던 역사적 예수의 실재에 대한 연속성을 체험하게
된다.
신약 속 예수의 이름과 호칭
신약 속 예수의 이름과 호칭(新約 - 呼稱, 영어: names and titles of Jesus in the New Testament)는 신약에서 예수를 가리키는 데 쓰인다.[1]
기독교에서는 신약성경에서 예수를 지칭하는 두 이름 예수와 임마누엘이 구원의 속성을 갖고 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힌 후
초대교회는 단순히 그의 메시지를 반복하는 것이 아니라 그에게 초점을 맞추고 선포하며 그의 메시지를 이해하고 설명하려고 노력했다.
예수님을 이해하고 선포하는 과정의 한 요소는 그에게 칭호를 부여하는 것이었다. 초기 교회에서 점진적으로 사용되었다가 신약성경에
등장한 칭호 중 일부는 그 시대의 유대적 맥락에서 채택된 반면, 다른 칭호는 예수의 메시지, 사명, 가르침을 언급하고 강조하기
위해 선택되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이러한 칭호 중 일부는 중요한 기독론적 의미를 갖게 되었다.
기독교인들은 예수의 거룩한 이름에 신학적 중요성을 부여해 왔다. 청원에서 예수의 이름을 사용하는 것은 요한복음
16:23에서 예수께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실 때 강조된다. “너희가 내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아버지께 구하면 주시리라.”
그리스도인들 사이에는 예수라는 이름이 단순히 신분을 식별하는 상징의 나열이 아니라 본질적인 신성한 능력이 포함되어 있다는 믿음이
널리 퍼져 있다.
예수 그리스도의 115가지 이름과 칭호
시편의 저자는 우리에게 “여호와께 그의 이름에 합당한 영광을 돌리”라고(시편 29:2) 이야기한다.
러셀 엠 넬슨 회장 또한 우리에게 이렇게 권유했다. “기도하는 마음으로 열심히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다양한 명칭과 직위가 여러분 개인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지 이해할 수 있도록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모든 것을 공부하십시오. 예를 들어, 그분은 하나님 아버지께 여러분을 진정으로 대변하시는 변호자이십니다.”1 개인적인 경험을 통해 , 나는 우리가 그분의 이름을 발견하고 그분의 이름과 칭호가 우리에게 의미하는 바를 기도하는 마음으로 공부할 때 예수 그리스도와 우리의 관계가 발전한다는 것을 간증할 수 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성취하신 많은 역할을 더 잘 이해할 수 있는 한 가지
방법은 거룩한 경전에 나열된 그분의 많은 이름과 칭호에 대해 알아보는 것이다. 모든 이름과 칭호는 그분의 위대함, 힘, 권능,
주권을 나타낸다. 그분의 이름은 또한 그분의 부드러움, 자비, 은혜를 보여 준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힘과 보호와 생명과
위안의 근원이시다.
칠십인 정원회의 조너선 에스 슈미트 장로는 그리스도의 이름과 칭호를 아는
것이 축복이라고 말했다. “그분의 여러 이름을 알게 되면서 우리는 또한 더욱 그분과 같이 되고자 하는 마음을 갖게 됩니다. 즉,
우리 삶에 기쁨과 목적을 가져다주는 그리스도와 같은 성품을 발전시키고자 하는 것입니다.”2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찾아보려 노력하면서, 경전 공부의 힘에 대한 나의
간증은 한층 더 성장했다. 나는 주의를 기울여 찾지 않으면 그분의 많은 이름과 칭호를 볼 수 없다는 것을 금방 깨달았다. 이제
나는 우리가 구하면 찾을 수 있다는 것을 더 잘 이해하게 되었다. 우리가 믿음으로 구하는 질문을 가지고 그분의 말씀에 접근할 때
하나님께서는 경전을 통해 답을 계시해 주신다.
경전에는 예수 그리스도께 주어진 많은 이름과 칭호가 있다. 내가
개인적으로 발견한 그 이름과 칭호들은 500개가 넘는다. 경전을 읽어 나가면서, 나는 그분의 칭호와 이름을 신회 구성원, 천사,
제자 등 그 이름을 부른 사람을 기준으로 분류했다. 우리 각자는 이러한 이름을 공부하거나 기록하는 다양한 방법을 발견하게 될
것이며, 이는 우리에게 영감을 주고 우리가 배우고 있는 것을 정리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또한 내가 지금까지 작성한 목록에는
경전에 나오는 이름만 포함되어 있지만, 후기의 교회 지도자들이 가르치는 이름으로도 비슷한 목록을 만들 수 있다.
나는 신회 구성원들이 부르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 115개를 아래에
나오는 것과 같이 나열해 보았다. 나는 이 목록이 우리가 경전을 읽어 나가면서 그분의 다양한 칭호를 발견하는 일에 영감을 주기를
바란다. 여러분은 이 목록에서 비슷한 이름이나 칭호가 두 번 이상 나타나는 것을 발견하게 될 텐데, 이는 의도된 것이다. 부활하신
주님은 무덤에서 마리아에게 나타나셔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내가 내 아버지 곧 너희 아버지, 내 하나님 곧 너희 하나님께로
올라간다 하라.”(요한복음 20:17)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 아버지”와 “너희 아버지”, “내 하나님”과 “너희 하나님”을 구별하여 사용하신 것은 그분과 그분
아버지의 ‘특별한 관계’, 그리고 우리가 하늘에 계신 아버지와 맺을 수 있는 ‘개인적이고 신성한 관계’를 나타내기 위한 것일 수
있다. 이러한 이유로, 나는 “주 너희 하나님”이나 “나의 구속주”와 같은 칭호를 비슷한 칭호인 “주 하나님”과 “구속주”와
별개로 나열하기로 했다.
이 글에서 내가 찾은 500개 이상의 이름을 나열할 수도 있었지만, 그 대신 나는 넬슨 회장의 독려대로 예수 그리스도의 칭호와 이름을 직접 찾고 연구해 볼 것을 여러분께 권한다.
이 귀절은 예수님의 대제사장적인 중보 기도 중의 한 귀절이다. 이 짧은 귀절 속에는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행하신 일에 대한 정의가 내려져 있다. 예수님은 중보 기도를 하나님께 드리시면서 그가 이 땅에 오셔서 전 생애를
통하여 행하신 일을 한 마디로 요약하여 말씀하셨다. 내가 “아버지의 이름을 나타내었나이다.” “아버지의 이름” 즉 우리는 예수를
믿던 날부터 아버지의 이름을 수없이 불러왔다. 아침 저녁으로 기도할 때마다 우리는 아버지의 이름을 부르고 찬송을 부를 때마다
우리는 아버지의 이름을 생각하면서 부른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이름을 거룩하게 하옵시며...” 주기도문을 수없이 외우고
“아버지의 이름을 찬송하러 왔으니...” 찬송을 수없이 부르면서 우리는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가? 우리가 아버지의 이름을 부를 때, 그 많은 부르짖음 속에서 우리는 무엇을 찾고 있는가? 내가 아쉬워서 부르고 내가 필요해서 부르고, 내 요구를 들어달라고 부른 것 외에 달리 아버지의 이름을 부를 때가 있는가?
예수님은 “내가 아버지의 이름을 나타내었나이다”라고 하셨다. 여기에 예수님과 우리와의 “아버지의 이름”에 대한 근본적인 생각의 차이가 있다. 예수님은
어디까지나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해지고 영광을 받으시기 위해서, 또 아버지의 이름을 나타내기 위해서 부르셨는데, 우리는 아버지의
이름이 우리의 편의를 위해 사용되도록 부르고 있다. 겟세마네의 기도에서도 예수님은 자기 요구를 들어 달라고 아버지의 이름을
부르시지 않았다. 예수님에게 왜 요구가 없었겠는가? “아버지, 할 수만 있다면 이 잔을 내게서 옮겨 가시옵소서. 그러나 내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마태복음 26:39). 예수님의 요구를 아버지의 뜻에 복종시킴으로써 아버지의 이름만이
나타나기를 기도한 것이다. 아버지의 이름은 아버지의 인격이다. 인간에게서도 이름은 사람을 식별하는 기호가 아니라 그의 인격을 가리키는 말이다. 이름 석 자를 부를 때 우리는 그 사람의 성격과 특징과 인격을 생각한다.
메시야의
예언이라고 불리우는 시편 22편 22절 “내가 주의 이름을 형제에게 선포하리이다”라는 귀절은 메시야의 홀이 그를 따르는 자들에게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를 선포하실 것이라는 뜻이다. “나타내었나이다”라는 말 “에파로오사”는 “뚜렷하게 나타낸다”는 뜻과 함께
“눈에 보이도록 증명한다”는 뜻이 있다. 눈에 보이도록 증명하려면 “말”로만 가지고는 되지 않는다. 행동이 따라야 한다. 예수님이
“내가 아버지의 이름을 나타내었나이다”라고 말씀하실 때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고 계신다. “하나님께서 참으로 어떠한 분이신가를
내가 사람들에게 나타내 보일 수가 있었나이다.” 이 말씀은 또한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느니라”(요 14:9)고 하신 말씀에
나타나 있는 것과도 같다. 크리스천은 세상의 빛이요 소금이라고 했다(마 6:13-14). 그러나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크리스천은 “아버지의 이름”을 부르기만 하는 자가 아니라 그의 이름을 나타내는 자가 되어야 하는 것이다.
아버지의 이름으로 (In the Name of the Father, 93년) 실화를 바탕으로 한 법정, 감옥영화
1993년 영국영화 감독 : 짐 쉐리단 각본 : 짐 쉐리단, 테리 조지 원작 : 제리 콘론 제작 : 짐 쉐리단, 테리 조지, 가브리엘 번 외 출연 : 다니엘 데이 루이스, 피트 포슬스웨이트, 엠마 톰슨, 존 린치, 돈 베이커, 안소니 브로디, 브리타 스미스, 비티 에드니 베를린 영화제 황금곰상 (대상) 수상
'아버지의 이름으로'는 1974년에 발생된 실화를 바탕으로 만들어진 영화입니다. 길포드 지역 레스토랑의 폭발테러 사건으로 연루된 4인의 억울한 누명과 옥살이 그리고 석방까지의 과정을 담고 있습니다.
1989년 '나의 왼발'에서 함께 했던 짐 쉐리단 감독과 다니엘 데이 루이스가 다시 의기투합해서 4년만에 함께한 작품입니다. 그리고 이 영화로 짐 쉐리단 감독은 베를린 영화제 대상을 수상하는 성과를 올렸고 곧바로 아카데미 작품상 후보를 비롯하여 7개 부문에 후보에 오르게 되었습니다. 1993년에 발표된 영화들이 각축을 벌인 1994년 아카데미 시상식은 후보작들이 굉장히 치열했는데 베를린 영화제 대상 수상작(아버지의 이름으로), 칸 영화제 대상 수상작(피아노) 들이 함께 작품상 후보에 올랐고 베니스 영화제 대상 수상작인 '숏컷'이 감독상 후보에 오르는 등 세계 3대 영화제의 대상 수상작들끼리 나란히 후보에 오르며 각축전을 벌였습니다. 그럼에도 워낙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의 혼신의 야심작 '쉰들러 리스트'의 바람이 거세서 다른 영화들이 강력한 들러리가 될 것이라는 예상이 지배적이었고 실제로 쉰들러 리스트의 7개부문 수상으로 끝났고 '아버지의 이름으로'는 7개부문 중 한 개도 수상하지 못했습니다.
남우주연상 후보에 오른 다니엘 데이 루이스와 '필라델피아'의 톰 행크스도 치열한 각축을 벌였지만 이미 4년전 수상을 한 다니엘 데이 루이스보다 첫 수상을 노린 톰 행크스의 도전이 더 강력해서 결국 남우주연상도 톰 행크스가 차지했습니다. 하지만 다니엘 데이 루이스는 이후 '데어 윌 비 블러드'와 '링컨'으로 두 차례 더 수상을 했습니다. '아버지의 이름으로' 역시 다니엘 데이 루이스가 좋은 연기를 보인 대표작 중 한 편으로 자리매김했습니다.
다니엘 데이 루이스는 영국 배우로 정말 대단한 연기파로 알려졌는데 6번의 아카데미상 후보에 올라 3번 수상했고 영국 아카데미상도 4회 수상했을 정도였습니다. 워낙 연기에 집중하는 메소드 배우다 보니 한 편 한 편 신중히 작품을 오르는 배우이며 그래서인지 평생 영화 출연작품 숫자가 불과 20여편에 불과했습니다. 그 정도 숫자의 영화에 출연하고 아카데미 상을 3회나 수상하고 6회나 후보에 오른 건 대단하죠.
'아버지의 이름으로'에서 다니엘 데이 루이스는 아일랜드인 망나니 청년으로 출연합니다. 20대 청년인 제리(다니엘 데이 루이스)는 별 직업도 없이 한량같은 삶을 살고 있었습니다 교사인 아버지(피트 포슬스웨이트)와도 다소 소원한 관계죠. 그는 히피 청년인 폴(존 린치)과 어울리며 영국에 가서 히피 친구들과 어울립니다. 이 시기에 길포드 한 식당에서 폭탄테러가 발생합니다. 그런데 제리가 어울리던 히피 여성과의 관계를 질투하던 동료 청년의 고발로 제리와 폴은 무고하게 식당 테러범으로 몰려 구속되고 제리의 아버지와 영국에 있는 숙모 등도 모두 공범으로 연루되어 함께 재판을 받게 됩니다. 제리와 폴은 강압적인 수사의 희생양이 되고 결국 아버지와 함께 종신형을 받고 수감됩니다. 이렇게 제리의 억울한 감옥생활이 시작됩니다.
실제로 제리 콘론은 14년을 억울하게 수감했고 수감도중 아버지 주세페 콘론은 사망했습니다. 14년의 긴 세월이었는데 영화에서는 감옥생활을 비교적 빠른 템포로 전개합니다. 아버지는 건강이 악화되어 힘든 삶을 보내고 있었는데 감옥에서 실제 테러범을 만나게 됩니다. 제리는 그에게 이용당하며 간수에게 적대적으로 행동하고 테러범의 조직과 어울리며 마약도 하는 등 처음에는 망나니같은 수감생활을 합니다. 하지만 그 테러범이 간수에게 끔찍한 짓을 저지르고 이감되면서 제리는 정신을 차리고 아버지와도 화해하며 변호사(엠마 톰슨)와도 진솔하게 대화를 합니다. 제리의 변호사는 열심히 구명운동도 하고 석방 여론도 조성하면서 제리의 누명을 벗기기 위해 최선을 다 합니다. 병이 악화된 제리의 아버지는 결국 감옥에서 사망하고 제리의 변호사는 포기하지 않고 제리의 무고함을 밝히기 위해 열심히 뛰어다닙니다. 다시 재판이 열리고 결국 제리와 폴 등 모두에게 무죄를 선고합니다. 무죄가 선고되지 제리는 당당하게 법정 중앙 통로를 통하여 밖으로 나가면서 환호하는 사람들에게 외칩니다. '아버지의 이름으로 명예회복과 진실을 위해 싸우겠다'
이 사건은 오래도록 영국의 식민지였던 아일랜드와 영국의 갈등이 원인이 되었고 마음에 안드는 아일랜드인에게 누명을 씌워 폭탄테러의 나쁜 여론을 빨리 잠재우고 사건을 졸속으로 해결하려고 한 검찰, 법원 과의 사악한 결탁에 의해서 한 가족이 무고하게 희생된 사건이었습니다. 잘못된 정치적 희생재판의 대표적 사례가 되었고 이른바 길포드 4인 이라는 대표적 희생양을 낳았습니다. 영국정부에서 결국 이 판결이 잘못되었음을 공식적으로 인정했다고 합니다.
이 영화는 결국 제리가 누명을 벗고 풀려난 직후에 만들었으며 그런 영향 때문인지 대부분의 평단에서 크게 호평을 받았고 강력한 아카데미 후보에까지 올랐습니다. 그리고 연기파인 다니엘 데이 루이스와 엠마 톰슨의 열연도 있었고 '나의 왼발'이라는 휴먼 드라마를 감독했떤 짐 쉐리단의 연출도 주목받았습니다. 영화 개봉 당시는 그런 분위기였습니다.
하지만 저는 엄밀히 말하여 이 영화가 같이 경쟁한 '쉰들러 리스트' 급은 아니라고 보고 법정영화나 감옥영화 중에서 워낙 걸작이 많아서 특별히 두드러진 작품이라 느끼진 못했습니다. 오히려 짐 쉐리단 감독의 연출은 생각보다 평범했고 이 기가막힌 소재의 내용을 '아버지와 아들'을 엮는 픽션을 섞어 드라마틱한 부분이 있었지만 다소 평이한 전개였습니다. 감옥에서의 14년은 설명이 없으면 그만큼 길고 치열하고 처절하게 느껴지지 못했고요. 그래도 막판에 엠마 톰슨의 열연으로 법정씬이 짜릿하긴 했지만 영화는 좀 밋밋한 느낌이었습니다. 다소 과대평가된 면이 있는 영화라고 보여집니다. 물론 다니엘 데이 루이스의 연기나 아버지로 나온 피트 포스슬루웨이트의 연기는 모두 좋았습니다.
실제로 짐 쉐리단은 극적 효과를 위해 픽션을 많이 가미했습니다. 영화와 달리 아버지와 아들은 같은 방에서 수감된 것도 아니고 같은 감옥도 아니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엠마 톰슨이 연기한 변호사는 실제 법정에서 진술한 것도 아니었다고 하고. 사실 실제 사건의 처리가 많이 아쉬워서 영화적 통쾌감이 높을 수는 없었습니다. 14년만에 무죄로 밝혀진 이후 어떤 경찰, 검찰, 법관도 처벌받지 않았다고 하니까요. 제리 콘론 본인의 자전적 책을 토대로 만들었고 짐 쉐리단은 직접 각본에도 참여했습니다. IRA의 테러로 인하여 엉뚱하게 희생양이 된 청년의 안타까운 실화지요.
1. [민수기 27:4] 어찌하여 아들이 없다고 우리 아버지의 이름이 그 가족 중에서 삭제되리이까 우리 아버지의 형제 중에서 우리에게 기업을 주소서 하매
2. [요한복음 5:43] 나는 내 아버지의 이름으로 왔으매 너희가 영접지 아니하나 만일 다른 사람이 자기 이름으로 오면 영접하리라
3. [요한복음 10:25]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너희에게 말하였으되 믿지 아니하는도다 내가 내 아버지의 이름으로 행하는 일들이 나를 증거하는 것이어늘
4. [요한복음 12:28] 아버지여 아버지의 이름을 영광스럽게 하옵소서 하시니 이에 하늘에서 소리가 나서 가로되 내가 이미 영광스럽게 하였고 또 다시 영광스럽게 하리라 하신대
5. [요한복음 17:6] 세상 중에서 내게 주신 사람들에게 내가 아버지의 이름을 나타내었나이다 저희는 아버지의 것이었는데 내게 주셨으며 저희는 아버지의 말씀을 지키었나이다
6. [요한복음 17:11] 나는 세상에 더 있지 아니하오나 저희는 세상에 있사옵고 나는 아버지께로 가옵나니 거룩하신 아버지여 내게 주신 아버지의 이름으로 저희를 보전하사 우리와 같이 저희도 하나가 되게 하옵소서
7. [요한복음 17:12] 내가 저희와 함께 있을 때에 내게 주신 아버지의 이름으로 저희를 보전하와 지키었나이다 그 중에 하나도 멸망치 않고 오직 멸망의 자식 뿐이오니 이는 성경을 응하게 함이니이다
8. [요한복음 17:26] 내가 아버지의 이름을 저희에게 알게 하였고 또 알게 하리니 이는 나를 사랑하신 사랑이 저희 안에 있고 나도 저희 안에 있게 하려 함이니이다
9. [요한계시록 14:1] 또 내가 보니 보라 어린 양이 시온산에 섰고 그와 함께 십 사만 사천이 섰는데 그 이마에 어린 양의 이름과 그 아버지의 이름을 쓴 것이 있도다
다락방
강화(the Upper Room Discourse)
요한복음 13-17장은 예수께서 인류 구속 사역을 완성하시기 위해 십자가
수난을 당하시기 전 제자들과 가진 마지막 만찬 자리인 마가의 다락방에서 있었던 일들에 대한 기록이다.
다락방 강화의 목적은 한마디로 예수께서 십자가 수난과 부활 숭천을 목전에 두신 상황에서 이제 자신의 부재시에 세상에 남게 될 제자들을 준비시키시기 위함이었다. 그리고 전체적으로 ‘사랑(Loving
one another)’, ‘위안과 평강(Comfort and Peace)’, ‘예수 안에 거함(Abiding in J
esus)’, ‘세상에 대한 승리의 확신(Conviction of Victory against the World) 등이 강화의 주제들이라고 할 수 있다.
다락방 강화의 내용 구조는 크게 세 부분, 즉 13장의 만찬석상에서 있었던 일에 대한 보도, 14-16장의 주님의 고별 설교, 그리고 17장의 주님의 대제사장적 기도로 구성되었다.
이 중 17장은 강화의 완결(Consummation) 부분으로서 다락방 강화의 일부에 속하지만 그 내용의 특성상 독립적으로 살펴보기로 하고, 여기서는 13-16장의 내용을 우선 살펴보기로 한다.
13장은 예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기신 일(1-20절), 가룟 유다의 배반과 이탈(21-30절), 예수의 부활 승천에 대한
암시적 예고와 사랑의 새 계명 수여(31-35 절), 베드로의 예수 부인 예고(36-38절) 등 최후의 유월절 만찬석상에서 있었던
일들을 보도하고 있다.
이중
가룟 유다의 배반과 베드로의 예수 부인 예고 기사는 사복음서 모두에 공통적으로 나타나고 있다. 그러나 마태, 마가, 누가 둥
공관복음서들이 최후의 유월절 만찬을 보도함에 있어서 신약의 중요한 2대 성례 중 하나인 성만찬(聖曉餐) 제정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
것과 달리, 요한복음은 성만찬 제정 부분을 모두 생략하고 대신 예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고 계속해서 ‘사랑의 새 계명’을
수여하신 사건을 보도하고 있다는 점에 있어서 뚜렷한 차별성을 나타내고 있다.
예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기신 사건은 요한복음만의 독특한 기사로서, 이후에 이어지는 긴 강화와 별개의 행동이 아니라 오히려 강화의
출발점을 이루고 있으며, 무엇보다 ‘몸으로 보이신 설교’라고 할 만큼 이후의 강화와 밀접히 연관되어 었다. 십자가 수난을 하루
앞둔 저녁, 예수님의 마음에는 많은 생각들이 교차하셨을 것이고 제자들을 향하여서도 남기고 싶으신 말씀이 많았을 것이다. 그런데
예수께서는 말씀하시기 전 먼저 한 가지 행동을 보이심으로써 제자들에게 중요한 메시지를 각인(刻印)시키신 것이다.
그
메시지란 우선 예수께서 자기 사람들을 끝까지 사랑하셨다는 것이다(1절). 예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기신 것은 일차적으로 제자들을
향한 예수님의 사랑의 정도가 어떠한지를 너무나 잘 보여 주고 있다. 장차 제자들이 자신을 배반하게 될 것을 아신 예수께서
제자들의 허물과 죄에도 불구하고 그들을 ‘끝까지’ 사랑하셨던 것이다. 심지어 예수께서 자기를 팔 자인 가룟 유다의 발까지도
씻기셨다는 것은 무조건적이고도 변함없는 그분의 초월적 사랑을 잘 보여 준다.
다음으로,
예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기신 것은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너회도 서로 사랑하라’는 새 계명의 메시지를 행동으로 보여 주신
것이었다. 눅 22:24을 참조해 볼 때, 사실 최후의 만찬 자리에서까지도 제자들은 서로 누가 큰가 하는 문제로 다투고 있었다.
이것은 이제 곧 예수께서 이루리라고 생각한 정치적 메시야 왕국에서 서로 더 높은 자리를 차지하기 위함이었다. 이렇게 신약
공동체의 모델이 되어야 할 제자들이 자신의 사역의 본질을 이해하지 못하고 십자가 수난을 하루 앞둔 순간에까지 여전히 시기와
경쟁으로 분쟁을 일으키는 상황에서, 예수께서는 그들을 질책하기보다는 몸으로 그들이 어떻게 사랑해야 하는가를 친히 모범으로 보여
주심으로써 교훈하기를 원하셨던 것이다.
‘주와
스승’이신 분으로서 제자들의 발 씻기시기를 마치신 예수께서는 이제 제자들에게 ‘새 계명(New Commandment)’ 을
주신다(31-35절). 여기서 예수께서 말씀하신 바 ‘새로운’ 계명이란 시간적인 차원에서 옛것에 비해 새로운 것이라는 의미가
아니다. 이는 질적인 면에 있어서 새로운 것이라는 의미이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것은 이미 구약의 율법에
주어졌으며(레 19:18), 또 구약 율법의 요약이 바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었다(눅 10:27). 따라서
여기서 새로움이란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라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에 있다. 즉, 옛계명이 이웃 사랑의 기준을 인간의 자기
사랑에 두고 있는 데 비해 예수님의 새 계명은 예수님의 십자가 희생의 사랑에 기준을 두고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제자들과 더
나아가 신약의 교회 공동체는 예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그 완전하고도 신적인 사랑을 모델(Model)로 삼아 서로를 사랑해야 한다는
것이다. 결국 예수의 새 계명은 우리로 하여금 이기적이고 조건적인 사랑의 실천자가 되지 말고 예수께서 몽소 보이신 대로
무조건적이고도 자기 희생적인 사랑의 실천자가 될 것을 촉구하고 있다고 하겠다.
14-16장은 예수께서 최후의 유월절 만찬을 마치시고 그 자리에서 주신 고별 설교 기사를 보도하고 있다.
그
중 14장에서는 이제 성자 예수께서 십자가 수난을 당하시고 부활 승천하신 이후에도 여전히 세상에 남아 세상이 주는 각종 핍박을
감수하면서 복음 전파의 사명을 감당해야 할 제자들과 나아가 전 신약 시대의 성도들에게 용기를 주는 주님의 교훈으로 이루어져 있다.
먼저 예수께서 자신이 곧 떠나시지만 그 떠나시는 목적이 곧 아버지 집에 제자들을 위한 처소를 예비하는 데 있음을 언급하시며 다시
오셔서 그들을 자신이 계신 곳에 영접하여 인도할 것임을 약속하신다. 또한 자신이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the Way, the
Truth, the Life)이라는 자기 선언을 하시며 자신을 아는 것이 곧 성부 하나님을 아는 것임을 밝히신다(1-7절). 이어
예수께서는 아버지를 보여 달라는 벌립의 요청에 대해 자신을 본 자는 곧 아버지를 본 것이며, 더 나아가 자신이 아버지 안에
있으며 또 아버지는 자신 안에 계시다고 함으로써 성부 하나님과 그 본질에 있어서 한 분이시라고 하는 단일성(Oneness)을 보다
명확히 계시하신다. 그리하여 제자들이 예수의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구하면 자신이 그것을 시행하실 것이며 이로써 성부께서 영광을
얻게 될 것이라고 밝히신다(8-15절).
이어
14:16-31에서는 예수께서 또 다른 보혜사(保惠師, the Counselor)이신 성령을 보내실 것과 또 자신의 평안을
제자들에게 끼치신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사실, ‘또 다른 보혜사’란 다름아닌 하나님의 영이시며 예수의 영이시다(롬 8:9 ;
고전 12:3 ; 갈 4:6). 성부와 성자와 성령은 본질상 한 분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따라서 성령이 제자들에게 오신다는 것은
곧 예수께서 그의 영으로써 제자들과 함께하시는 것을 의미한다. 이 의미를 바로 깨닫는다면, 남겨진 제자들에게 보혜사 성령이
오신다는 예수님의 약속보다 더 큰 위안과 격려가 있을 수 없다. 비록 예수께서 ‘몸으로는’ 제자들을 떠나시게 되지만, 제자들은
‘성령 안에서 여전히 예수님과 함께 있는 셈인 것이다.
다음
15:1-11은 참 포도나무와 가지의 비유를 통해 예수 안에 거하는 것(Abiding in J esus)에 관해 교훈하신다. 즉
제자들은 포도나무와 가지가 연합하듯이 그렇게 참 포도나무이신 예수님과의 유기적인 연합을 통해 하나님이 원하시는 열매를 맺을 수
있으며, 또 무엇이든지 구하는 대로 응답받는 기도의 축복을 받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면 ‘예수 안에 거하는 것’이란 과연
무엇인가? 여기서 예수께서는 자신의 사랑 안에 거하는 방법이 곧 자신의 계명을 지키는 것이라고 하심으로써(10절), 예수님 안에
거하는 것과 예수님의 계명을 지키는 것이 밀접한 관계가 있음을 밝히신다.
그리고 이어서 15: 12-17 에서는 예수께서 자신이 제자들을 사랑한 것같이 제자들도 서로 사랑하라는 새 계명의 준수를 재차 언급하며 촉구하신다.
이어
15:18~16:33의 네 문단은 제자들이 세상으로부터 미움과 핍박을 받게 될 것을 예고하시며 세상에 대한 숭리의 확신을 가질
것을 권고하는 내용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 과정에서 예수께서는 보혜사 성령의 강림에 대해서와 성령이 오셔서 행하실 사역에 대해서
예언과 교훈을 주실 뿐 아니라, 자신의 죽음과 부활 및 승천에 대해서도 구체적으로 예고하신다.
때가
되면 사람들이 제자들을 출회시키고 심지어 죽이기까지 하면서 그것을 하나님을 위한 것이라고 정당화할 것이다(16:2). 사실
핍박을 당해도 그것이 분명히 하나님을 위한 것임이 분명하다면 견디고 이겨낼 가능성이 크다. 그러나 그 반대로 핍박하는 자가 오히려
의의 편에 선 듯한 상황이 되면 핍박을 받는 제자들은 두려울 뿐 아니라 심각한 혼란을 겪게 될 수밖에 없다. 그러나 보혜사
성령은 죄(罪), 의(義), 심판(審判)에 대해서 세상을 책망하실 것이다. 곧 죄,의, 심판에 대한 세상의 잘못된 생각을
드러내시고 그들의 악함에 대해 유죄 판결을 내리실 것이다. 보혜사의 이러한 사역은 핍박을 당하는 그리스도인들에게는 큰 위로와
격려를 주는 사역이 아닐 수 없다. 더 나아가, 보혜사는 진리의 성령으로서 제자들을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실 것이며, 성부와
성자께 속한 모든 영광의 비밀들을 알려주실 것이다(16:13-15).
13장에서부터
이어져 온 긴 강화의 결미 부분에 가까이 이르게 되자, 드디어 예수께서는 여전히 자신의 죽음과 부활의 임박성에 대해 이해가
부족한 제자들에게 자신의 죽음과 승천에 대해 보다 구체적으로 진술해 주신다. 그리고 최종적으로 이 모든 강화는 제자들이 예수님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는 것에 있다고 그 목적을 밝히신 후 세상에 대해 승리의 확신을 가지라고 권고하신다(16:33).
물론
예수님의 이같은 심오한 강화를 제자들은 다 이해할 수 없었다. 이제 오늘 밤이 지나 내일 새벽이 되면 예수님은 체포되실 것이고,
제자들은 평소의 충성의 장담(마 26:35)과는 달리 모두 뿔뿔이 흩어져 도망하고 말 것 이다. 그리고 그 후에도 그들은
세상으로부터 끊임없는 핍박을 받게 될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제자들의 미래에 대해 조금도 염려치 않으셨으며 흔들리지 않는 확신을
가지고 계셨다. 그것은 자신의 지상 사역의 종결(終結)이 곧 보혜사 성령 (the Counselor, the Holy
Spirit)의 강림이라는 새로운 시작(始作)을 알리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성령
안에서, 제자들은 결코 주님과 떨어져 있지 않다. 성령 안에서, 제자들은 상황을 초월하여 세상이 알지도 못할 뿐만 아니라 주지도
못하는 평강을 누릴 수 있다. 성령 안에서, 제자들은 예수님의 모든 교훈을 바르게 깨닫고 상기하게 되며 담대하게 예수의 이름을
증거하게 될 것이다. 보혜사가 오심으로 해서, 예수님의 떠나심이 오히려 제자들에게는 진정 유익한 일이 되었던 것이다(16:7).
요한복음 14장과 15장을 살펴보겠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사역이 끝나는 시점에 있습니다. 유다는 주님을 배반하고 그분의 원수들을 이끌어 그분을 체포하고 결국 십자가에 못 박게 합니다. 이 마지막 시간에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마지막 지시를 내리십니다. 이 지시들은 매우 중요하므로 우리는 온전히 집중해야 합니다.
요한복음 14장 15절부터 시작해 보자. 거기서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요한복음 14:15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나의 계명을 지키리라”
많은 사람들이 계명에 대해 들으면 불쾌해합니다. 이는 은혜와 계명이 상반된다는 왜곡된 하나님의 은혜 이해에서 비롯됩니다. 따라서 이 관점에 따르면, 구원은 은혜로 이루어지므로 우리는 어떤 계명도 지킬 필요가 없거나, 기껏해야 그러한 계명들은 좋지만 지키는 것이 절대적으로 필요하지 않다고 합니다. 이 관점에 따르면 필요한 것은 “믿음”입니다. 우리가 “믿는다”고 하면서도 주님의 계명을 지키려 애쓰지 않는다면, 심각한 문제는 없다고 여겨진다. 따라서 이 관점에 따르면, 믿음은 마음의 상태, 즉 내가 믿는 바일 뿐, 내가 믿는 바에 따라 행동할 절대적인 필요성은 없다고 보인다. 그렇게 행동한다면 좋겠지만, 그런 행동은 필수가 아니라고 여겨진다. 그런데 바로 여기에 주님께서 오셔서 이런 모든 정신적 구조물을 무너뜨리신다. “너희는 나를 사랑하느냐?” “사랑한다면 내 계명을 지키라”고 말씀하시며 오해의 여지를 남기지 않으셨습니다. 방금 읽은 내용은 모든 복음서에 기록된 주님의 가르침과 일치하며, 주님의 계명을 지키는 것의 깊은 의미를 분명히 보여줍니다. 예를 들어, 누가복음 6:46-49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누가복음 6:46-49 “ 너희는나를불러주여주여하면서도어찌하여나가말하는것을행하지아니하느냐 내게 나아와 내 말을 듣고 행하는 자마다 누구와 같은 것을 너희에게 보이리라 집을 짓되 깊이 파고 주추를 반석 위에 놓은 사람과 같으니 큰 물이 나서 탁류가 그 집에 부딪치되 잘 지었기 때문에 능히 요동하지 못하게 하였거니와 듣고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주추 없이 흙 위에 집 지 은 사람과 같으니 탁류가 부딪치매 집이 곧 무너져 파괴됨이 심하니라 하시니라”
마태복음 7:21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예수님께서 분명히 말씀하신 대로, 그분을 “주여 주여”라고 부르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또한 그분이 말씀하신 것, 곧 그분의 아버지의 뜻과 계명을 행해야 합니다. 그분을 주님이라 부르면서도 그분의 계명을 행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할 것입니다. 방금 읽은 내용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뜻을 행하려는 노력은 선택 사항이 아닙니다. 우리가 하고 싶을 때만 하는 선택 사항이 아니라, 하지 않아도 상관없는 것도 아닙니다. 오히려 그것은 필수적이고 절대적으로 중요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을 행하지 않으면 우리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이로써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것이 참 제자의 표징이 됩니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 그분을 따르는 제자. 멸망으로 이끄는 넓은 길이 아닌 좁은 문을 선택한 자입니다.
마태복음 7:13-14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생명으로인도하는문은좁고길이협착하여찾는이가적음이라”
그리고 마태복음 16:24-25 “이에예수께서제자들에게이르시되누구든지나를따라오려거든자기를부인하고자기십자가를지고나를따를것이니라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찾으리라”
그분을 따르고자 하는가? 그렇다면 우리 자신을 부인하고, 십자가를 지고 그분을 따르자. 좁은 문을 통과하여 생명을 향한 유일한 길인 어려운 길을 걸어가자. 넓은 길, 대다수가 따르는 길, 십자가가 필요 없는 쉬운 길, 모든 것이 쉽고 회개 없이 세상처럼 살 수 있는 길은 멸망으로 이끈다. 오직 어려운 길만이 생명으로 이끈다. 그러나 요한복음으로 돌아가 그 마지막 밤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을 보자:
우리는 예수님의 계명을 지킬 때 그분을 사랑합니다. “나의계명을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니”라고 그분은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이 두 가지—예수님을 사랑하는 것과 그분의 계명을 지키는 것—은 떼려야 뗄 수 없이 연결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그분의 명령을 지키면 그분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분을 사랑하기 때문에 그분의 명령을 지키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진정으로 그를 사랑하지 않는 것이다. 사실 그는 23절과 24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요한복음 14:23-24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사람이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키리니 내 아버지께서 그를 사랑하실 것이요 우리가 그에게 가서 거처를 그와 함께 하리라 나를사랑하지아니하는자는내말을지키지아니하나니 너희가 듣는 말은 내 말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아버지의 말씀이니라”
우리가 무슨 말을 하느냐가 아니라 무엇을 행하느냐가 중요합니다. 주님을 사랑한다고 말만 하고 그분의 말씀대로 행하지 않는 것은 진실한 “사랑”의 증거가 아니라 단지 말뿐인 “사랑”일 뿐입니다. 실패하더라도 진정으로 그분의 계명을 지키려 노력하는 것이야말로 우리가 그분을 사랑하는지 아닌지를 보여주는 진정한 증거입니다. 그리고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우리가 그분의 말씀을 지키려 노력할 때 우리에게 주시는 약속은 무엇일까요? 예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고 그 자신을 우리에게 드러내실 것입니다! 그리고 그분의 아버지께서도 우리를 사랑하실 것입니다! 그분과 아버지가 우리에게 오셔서 우리 안에 거처를 마련하실 것입니다! 우리가 그것을 원하지 않겠습니까? 우리가 아버지와 아들의 거처가 되고 싶지 않겠습니까?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그 자신을 드러내시기를 원하지 않겠습니까? 저는 정말로 그렇게 되기를 원합니다! 여러분도 그러시리라 믿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에 대해 무언가를 해야 합니다. 우리는그분의계명을지켜야합니다. 우리는 자기 십자가를 지고 그분을 따라야 합니다. 육신을 따라 행해서는 안 되며, 세상의 넓은 길로 걸어서는 안 되고 좁은 문을 통해 가야 합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주님과의 참된 교제의 “비밀”을 찾습니다. 많은 설교자들도 주님과의 참된 교제를 비밀이 있는 것처럼 제시하며, 마치 자신들이 그 열쇠를 알고 있으니 그들의 방법을 따라야만 찾을 수 있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형제들아, 비밀은 없습니다! 모든 것이 분명합니다. 예수님께서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핵심은 주님의 계명, 곧 그분의 말씀을 지키는 것입니다. 이를 지키는 자는 진정으로 주님을 사랑하는 자이며, 아버지와 아들에게 사랑받을 것입니다. 아버지와 아들이 그 안에 거처를 마련하시고, 하나님의 아들이 그에게 자신을 나타내실 것입니다. 그토록 단순하고 진실한 것입니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예수님께서 이 점을 분명히 하신 후, 포도나무 비유를 계속 말씀하셨습니다:
요한복음 15:1-9 “ 나는 참 포도나무요 내 아버지는 농부라 무릇 내게 붙어 있어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가지는 아버지께서 그것을 제거해 버리시고 무릇 열매를 맺는 가지는 더 열매를 맺게 하려 하여 그것을 깨끗하게 하시느니라 너희는 내가 일러 준 말로 이미 깨끗하여졌으니 내안에거하라나도너희 안에 거하리라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아니하면 스스로 열매를 맺을 수 없음 같이 너희도 내 안에 있지 아니하면 그러하리라 하면 그러하리라 나는포도나무요너희는가지라그가내안에, 내가그안에거하면사람이열매를많이맺나니나를떠나서는너희가아무것도할수없음이라사람이내안에거하지아니하면가지처럼밖에버려져마르나니 사람들이 그것을 모아다가 불에 던져 사르느니라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 너희가 열매를 많이 맺으면 내 아버지께서 영광을 받으실 것이요 너희는 내 제자가 되리라 아버지께서 나를 “내 안에 거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은 내가 아버지께로부터 받은 사랑으로 너희를 사랑한 것이라. 그러므로 내 사랑 안에 거하라.”
주님은 이 놀라운 구절에서 이전에 말씀하신 내용을 이어가십니다. 주님은 포도나무요, 우리는 포도나무의 가지요, 아버지는 포도원지기이십니다. 우리는 가지로서 포도나무 안에 거해야 합니다.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그 안에 거하면 많은 열매를 맺을 것입니다. 그 안에 거하지 않고 열매를 맺지 못하면 시들어 버릴 것이며, 주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마른 가지와 같은 운명을 맞이할 것입니다: 그들은 모아져 불에 던져질 것입니다. 그러므로 포도나무에 거하는 것, 진정으로 예수님을 사랑하는 것, 그분의 계명을 지키며 따르는 것은 결코 선택 사항이 아니며, 모든 신자에게 보장된 것도 아님을 다시금 깨닫게 됩니다. 오히려 주님께서 우리에게 명령하신 것을 행할지 말지의 결정이 매일의 선택인 것처럼, 이는 매일의 결단입니다. 이쯤 되면 씨 뿌리는 자의 비유가 떠오릅니다. 거기서 하나님의 말씀의 씨는 네 종류의 마음 중 세 종류에 떨어졌을 때 싹이 텄습니다. 그러나 오직 한 종류의 마음에서만 열매를 맺었습니다. 나머지 두 종류에서는 결국 열매를 맺지 못했습니다. 그 세 부류는 다음과 같습니다:
누가복음 8:13-15 “바위 위에 있다는 것은 말씀을 들을 때에 기쁨으로 받으나 뿌리가 없어 잠깐 믿다가 시련을 당할 때에 배반하는 자요 가시떨기에 떨어졌다는 것은 말씀을 들은 자이나 지내는 중 이생의 염려와 재물과 향락에 기운이 막혀 온전히 결실치 못하는 자요 좋은 땅에 있다는 것은 착하고 좋은 마음으로 말씀을 듣고 지키어 인내로 결실하는 자니라”
처음 두 부류는 말씀을 듣고 믿었으나 지키지 못했습니다. 이 중 첫 번째 부류는 “잠시 믿다가 시험에 들면 떨어져 나가는 자”입니다. 두 번째 부류는 “들었을 때 나가서 삶의 염려와 재물과 향락에 막혀 열매를 맺지 못하는 자”입니다. 오직 세 번째 부류만이 열매를 맺었습니다. 안타깝게도 다른 두 부류는 그렇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아마도 기쁨으로 밝게 시작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결국 다른 일이나 박해로 인해 마음을 바꾸게 되었습니다. 예, 그들은 한때 믿었습니다. 말씀은 이 두 부류 중 첫 번째에 대해 그들이 잠시 믿는다고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그들은 신실했으나, 잠시뿐이었습니다. 형제들아, 잠시만 신실한 것은 충분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마지막 숨을 거둘 때까지 영원히 신실하고자 합니다. 또한 우리 자신을 섬기는 열매 없는 '믿는 자'가 되는 것도 충분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을 주님, 주님이라 부르면서도 그분의 말씀은 따르지 않는 자들처럼. 오히려 우리는 열매 맺는 자가 되어, 아버지의 뜻을 행하고 예수님의 계명을 지키며 그분을 섬기는 일에 힘쓰고자 합니다. 매일매일, 끝까지. 요한복음 15장을 계속 살펴봅시다:
요한복음 15:10-14 “내가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의 사랑 안에 거하는 것 같이 너희도내계명을지키면내사랑안에거하리라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어 너희 기쁨을 충만하게 하려 함이라 내계명은곧내가너희를사랑한것같이너희도서로사랑하라하는이것이니라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보다 더 큰 사랑이 없나니 너희는내가명하는대로 행하면 곧 나의 친구라”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하신 이 마지막 말씀에서, 체포되기 몇 시간 또는 몇 분 전에도 주님은 그분의 계명을 지키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거듭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그분이 명하신 대로 행하면 우리는 그분의 친구입니다. 우리가 그분 안에 거하며, 우리 마음을 선하게 돌보고 지키면 우리는 포도나무 안에 있는 것입니다. 그리하면 말씀의 씨앗이 주님께서 우리를 위해 바라시는 대로 많은 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다. “열매”와 “계명”이라는 말을 듣고 불편함을 느끼는 사람은, 주님께서 우리를 위해 모든 것을 이루셨으니 우리가 할 일이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다시 생각해보라. 주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을 불편해하지 않으실 뿐만 아니라, 반복해서 강조하십니다. 이는 주님께서 우리에게 무엇을 원하시는지, 그리고 그것이 선택이 아닌 필수 사항임을 분명히 하시기 위함입니다. 이를 행하면 좋고, 안 해도 별 문제 없는 것이 아닙니다. 그 명령을 거역하고 포도나무에 머물러 있으면서 회개하지 않는 자는 결코 주님을 알지 못할 것이며, 포도나무에서 잘려 나가 천국에 들어가지 못할 정도로 중요합니다. 이는 결코 우리가 넘어지거나 죄를 짓지 않을 것이라는 뜻이 아닙니다! 오히려 우리의 실패와 넘어짐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려 노력해야 함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믿음의 경주를 달리며, 비록 매일 넘어질지라도 일어나 계속 나아가며 주 예수님을 바라봅니다:
히브리서 12:1-2 “... 있으니모든무거운것과얽매이기쉬운죄를벗어버리고인내로써우리앞에당한 경주를 하며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그는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사랑: 가장중요한계명 이제 주님의 계명들에 대해 말하자면, 그 모든 것을 아우르는 하나의 계명이 있으니, 서로 사랑하라는 계명입니다. 12절에서 읽은 대로:
요한복음 15:12 “내 계명은 곧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하는 이것이니라”
우리가 스스로를 속이지 않도록, 여기서 말하는 사랑은 값싼 사랑, 말뿐인 사랑이 아닙니다. 오히려 행동으로 나타내는 사랑입니다. 요한이 첫 번째 편지에서 말한 대로:
요한일서 3:18 “자녀들아 우리가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자”
그리고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그는 몇 절 앞서 명확히 설명했습니다:
요한일서 3:14-18 “우리는 형제를 사랑함으로 사망에서 옮겨 생명으로 들어간 줄을 알거니와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사망에 머물러 있느니라 그 형제를 미워하는 자마다 살인하는 자니 살인하는 자마다 영생이 그 속에 거하지 아니하는 것을 너희가 아는 바라 그가우리를위하여목숨을버리셨으니우리가이로써사랑을알고우리도형제들을위하여목숨을버리는것이마땅하니라 누가 이 세상의 재물을 가지고 형제의 궁핍함을 보고도 도울 마음을 닫으면 하나님의 사랑이 어찌 그 속에 거하겠느냐 [하나님 앞에서의 확신] [하나님 앞에서의 확신] 자녀들아 우리가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자”
우리 중 누구라도 형제나 자매를 사랑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포도나무에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죽음에 머무르는 것입니다! 만일 우리 형제를 미워하면 우리는 살인자입니다! 회개하지 않는다면 스스로를 속이지 맙시다: 우리가 거하는 것, 즉 죽음을 상속받게 될 것입니다. 더욱이 우리는 주님을 사랑한다고 말하지만, 우리 곁에 있는 형제가 궁핍한데도 외면하기로 선택한다면? 스스로를 속이지 맙시다: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안에 거하지 않으며, 우리도 그분 안에, 포도나무 안에 거하지 않습니다! 우리 믿음의 진실성은 행동으로 증명됩니다. 주님을 따르는 것은 옳은 말만 하는 것—말로만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옳은 일을 행하는 것, 행동으로 진실하게 사랑하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25:34-46에서 주님께서 우리에게 아주 분명한 증거를 주셨습니다:
마태복음 25:34-46 “ 그 때에 임금이 그 오른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내 아버지께 복 받을 자들이여 나아와 창세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예비된 나라를 상속받으라 내가주릴때에너희가먹을것을주었고목마를때에마시게하였고나그네되었을때에영접하였고헐벗었을때에옷을입혔고병들었을때에돌보았고옥에갇혔을때에 와서 보았느니라 이에 의인들이 대답 하여 이르되 주여 우리가 어느 때에 주께서 주리신 것을 보고 음식을 대접하였으며 목마르신 것을 보고 마시게 하였나이까 어느 때에 나그네 되신 것을 보고 영접하였으며 헐벗으신 것을 보고 옷 입혔나이까 어느 때에 병드신 것이나 옥에 갇히신 것을 보고 가서 뵈었나이까 하리니 임금이대답하여이르시되내가진실로너희에게이르노니너희가여기내형제중에지극히작은자한명에게한것이곧내게한것이니라하시며 또 왼쪽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저주받은 자들아 나를 떠나 마귀와 그 사자들을 위하여 예비된 영원한 불에 들어가라 내가주릴때에너희가먹을것을주지아니하였고목마를때에마시게 하지 아니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지 아니하였고 헐벗었을 때에 옷 입히지 아니하였고 병들었을 때와옥에갇혔을때에돌보지아니하였느니라하시니 그들도 대답하여 이르되 주여 우리가 어느 때에 주께서 주리신 것이나 목마르신 것이나 나그네 되신 것이나 헐벗으신 것이나 병드신 것이나 옥에 갇히신 것을 보고 공양하지 아니하였나이까 이에임금이대답하여이르시되내가진실로너희에게이르노니이지극히작은자하나에게하지아니한것이곧내게하지아니한것이니라하시리니 그들은 영벌에, 의인들은 영생에 들어가리라 하시니라”
야고보가 말한 대로:
야고보서 1:22-27 “ 너희는말씀을행하는자가되고듣기만하여자신을속이는자가되지말라 누구든지 말씀을 듣고 행하지 아니하면 그는 거울로 자기의 생긴 얼굴을 보는 사람과 같아서 제 자신을 보고 가서 그 모습이 어떠한 것을 곧 잊어버리거니와 자유롭게 하는 온전한 율법을 들여다보고 있는 자는 듣고 잊어버리는 자가 아니요 실천하는 자니 이 사람은 그 행하는 일에 복을 받으리라 누구든지 스스로 경건하다 생각하며 자기 혀를 재갈 물리지 아니하고 자기 마음을 속이면 이 사람의 경건은 헛것이라 하나님아버지앞에서정결하고더러움이없는경건은곧고아와과부를그환난중에돌보아주고또자기를지켜세속에물들지않는그것이니라”
결론 결론적으로,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우리는 매일 주님의 계명을 지키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서로 사랑하는 것—말로만 하지 말고 행동으로—이것이 가장 큰 계명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서로 사랑한다면, 우리는 서로 용서할 것이며, 악한 것을 탐하지 않을 것이며, 서로를 헐뜯지 않을 것이며, 서로를 시기하지 않을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고린도전서 13장에서 우리에게 주신 사랑의 정의를 기억합시다.
고린도전서 13:4-7 “사랑은 오래 참으며 사랑은 온유하며 시기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무례히 행하지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며 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하지 아니하며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
그러면 우리는 주님의 참된 제자가 될 것입니다. 그러면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우리에게 자신을 드러내실 것입니다. 그러면 아버지와 아들이 오셔서 우리 안에 거처를 마련하실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예수님의 친구가 될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말하면 그분께서 들으실 것입니다! 그리고 그분의 명령이 부담스럽다고 생각하지 맙시다. 아닙니다! 그 명령들은 쉽습니다. 그분께서 우리가 그 명령을 수행하도록 도와주시기 때문입니다:
마태복음 11:28-30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내멍에는쉽고내짐은가벼움이라하시니라”
그러므로 우리는 그분의 뜻을 행하기 위해 힘쓰자. 포도나무 안에 거하고 주님의 임재 안에 거하기 위해 힘쓰자. 그 임재는 오직 그분 안에 거하는 자들에게만 주어지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끝까지, 날마다 이렇게 행하자.
예수님의 고별기도(요한복음 17:1-16)
(새번역) “나는 이제 더 이상 세상에 있지 않으나, 그들은 세상에 있습니다. 나는 아버지께로 갑니다. 거룩하신 아버지,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아버지의 이름으로 그들을 지켜주셔서, 우리가 하나인 것 같이, 그들도 하나가 되게 하여 주십시오. /나는
그들에게 아버지의 말씀을 주었는데, 세상은 그들을 미워하였습니다. 그것은, 내가 세상에 속하여 있지 않은 것과 같이, 그들도
세상에 속하여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내가 아버지께 비는 것은, /악한 자에게서 그들을 지켜 주시는 것입니다.”(요
7:11,14,15)
오늘 본문은 주님이 이 땅에 계시다가 떠날 무렵의 이야기입니다.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은 이 땅을 떠나셔야 할 때가 가까이 온
것을 아셨습니다. 요한복음 13장에서부터 16장에 이르는 내용은 제자들을 이 땅에 남겨두고 떠나시는 예수님의 마지막 당부의
말씀이 녹아있는 고별설교입니다. 고별설교의 마지막 절은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말한 것은, 너희가 내
안에서 평화를 얻게 하려는 것이다. 너희는 세상에서 환난을 당할 것이다. 그러나 용기를 내어라. 내가 세상을 이겼다.”(요
16:33).
이렇게 세상을 이겼다고 선포하시는 말씀으로 고별설교를 마친 예수님은, 이제 그 온전히 승리하게 될 사역의 감격으로, 하늘을
우러러보시며 아버지 하나님께 기도하기 시작하십니다. “아버지, 때가 왔습니다. 아버지의 아들을 영광되게 하셔서, 아들이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여 주십시오.”(요 17:1). 예수님이 세상을 이기심으로 세상을 유린하고 있는 죄와 사망의 권세를 패퇴시켜서,
죄와 사망의 권세에 묶여 있던 하나님의 선택된 사람들을 구원해 내는 길은, 이제 십자가를 지는 길, 수난의 때가 남았음을 알고
계셨습니다. 그런데 이 십자가의 길은 아무나 갈 수 있는 길이 아님을 아셨습니다. 이 땅에 구원의 목적으로 오신 그리스도 예수
자신만이 이 길을 통과할 수 있음을 아셨습니다. 인간의 몸을 입고 있기에, 사람들이 마구 뱉어낼 희롱의 언어들과, 저주를 퍼붓는
온갖 행동들과, 살점이 튀어나오도록 휘두르는 채찍과, 십자가 형틀에다 손과 발을 못 박으며, 함부로 할 그 고통스럽고 견디기 힘든
모든 것들을, 참아내며 받아내기가 물론 쉽지는 않겠지만, 주님은 아셨습니다. 그 가시밭길을 묵묵히 걸어 건너야 함을 아셨습니다.
짐승처럼 형틀에 매달린 채, 갈증과 고통과 수치감과 격리감에 시달려야 할 그 시간의 어두운 공포를 아셨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다시 한번 다짐하셨습니다. 바로 이 일을 위하여 하늘 보좌를 떠나 내가 이곳으로 내려왔지. 그것은 성부 성자 성령 우리 삼위일체
하나님의 한뜻이었고 계획이었지. 아버지 하나님이 나를 그리스도로 이 땅에 보내시고 파송하신 아버지의 분명한 뜻이었지. 이게 바로
내가 이 땅을 찾아와 완수해야 할 내 사명의 가장 중요한 부분이지.
그래서 예수님은 계속 기도하십니다. “아버지께서는 아들에게 모든 사람을 다스리는 권세를 주셨습니다. 그것은 아들로 하여금
아버지께서 주신 모든 사람에게 영생을 주게 하려는 것입니다.”(요 17:2) 주님이 그 어렵고 힘든 십자가를 친히 지심으로,
아들에게 주신 모든 사람에게, 영원한 생명이라는 선물을 주게 된다는 하나님의 계획을 주님은 아셨습니다. 영원한 생명을 누리는
나라의 주인은 예수님이십니다. 주님이십니다. 주님이 다스리는 나라가 주님의 십자가의 은혜로 우리가 구원받은 하늘나라인 것입니다.
예수님은 영생의 비밀을 기도 가운데 선포하고 계십니다. 사람치고 영원토록 살면서 행복한 나날을 보내고 싶지 않은 사람은 한
사람도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저마다 영생을 얻기 위한 길을 찾아내려 다양하게 애쓰고 있음을 보게 됩니다. 이 땅에서의
인생 백년으로 모든 것이 끝난다고 생각하면 너무 허무하니까요. 그래서 많은 종교가 당연히 생기게 되었고, 심지어 하나님을 제대로
찾은 듯하면서도, 이단 사교의 늪에까지 빠지는 일이 생기고 말았습니다. 예수님의 선포가 영생을 향한 절대적 선포임을 깨닫는 사람은
행운아입니다. “영생은 오직 한 분이신 참 하나님을 알고, 또 아버지께서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입니다.”(요
17:3). 예수님과 하나님 아버지와의 뗄래야 뗄 수 없는 관계를 묵상하고 이를 받아들이는 일이 영생의 길에 접어드는 일에 있어서
너무 중요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내려 오셔서 아버지께서 시키신 일만 충성스럽게 다 하셨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지난 세월 제자들과 함께
다니시며 하신 말씀들, 베푸신 놀라운 치유와 섬김 가운데 나타난 기적들, 그 모든 일거수일투족이 모두 하나님이 맡기신
일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가장 중요한 일을 남겨두고 계신 것입니다. 그것은 세상을 다스리는 죄와 사망의 권세를 순식간에
깨뜨리고 이 권세로부터 하나님의 백성들을 구원하여 내는 출애굽과 같은 역사, 즉 십자가 수난의 역사인 것입니다. 그러나 죽으신 지
사흘 후 부활하심으로, 이 십자가 죽음이 단순한 한 인간의 불쌍한 죽음, 어쩔 수 없는 실패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계획된 수순이요, 의도적으로 통과하는 심판의 사건임을 입증하게 되는 것입니다. 실로 영광스러운 하나님의 쾌거인 것입니다. 주님은
그래서 이렇게 미리 기도하고 있습니다. “나는 아버지께서 내게 하라고 맡기신 일을 완성하여, 땅에서 아버지께 영광을
돌렸습니다.”(요 17:4). 그 당시 이 기도를 듣고 있는 제자들은 그 놀랍고 깊고 웅대한 의미를 다 이해하기 어려웠겠지만,
오늘 우리들은 이 기도의 의미를 너무나 선명히 이해할 수 있습니다.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주님의 기도는 계속됩니다. “아버지,
창세 전에 내가 아버지와 함께 누리던 그 영광으로, 나를 아버지 앞에서 영광되게 하여 주십시오.”(요 17:5) 예수님이
하나님이 아니라 그저 한 대단하고 위대한 인간일 뿐이라고 고집하는 사람들의 귀에 주님은 오늘 이 기도의 내용을 들으라고 들려주시는
줄 압니다. 창세 전에 창조주로 아버지와 함께 계시던 아들 하나님, 이제 이 땅에서 그리스도로서의 사명을 다 마치시고, 십자가,
부활, 승천의 과정을 통해 원래의 하늘 보좌로 복귀해 가시기를 염원하는 이 기도가 너무 영광스럽지 않습니까?
예수님은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들의 공동체를 위해서도 기도하고 계십니다. 예수를 믿는 예수의 제자는, 하나님이 세상에서 택하신
하나님의 백성들인데, 이들을 예수께 주신 것이라고, 그런 사람들이라고 정의 내리고 계십니다. 그 사람들의 특징은 아버지 하나님의
말씀을 지킨 자들이라는 데 있음을 분명히 하고 계십니다. 예수님의 모든 것, 즉 출생, 말씀, 기적, 본향 등 모든 것이 아버지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고 아버지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는 사람들이라고 분명히 하고 계십니다.(요
17:6-8). 저들은 예수님이 하신 모든 말씀을 그대로 받고, 그대로 믿고, 그대로 깨달은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제자공동체는 곧 아버지 하나님의 백성이요 아버지 하나님의 자녀라는 사실을 분명히 하시며, 예수님이 이들로부터 영광을 받고
있다고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요 17:9,10)
이제 이 자랑스럽고 사랑스러운 제자들과 헤어지게 되면서 예수님의 기도는 더욱 간절해 집니다. “나는 이제 더 이상 세상에
있지 않으나, 그들은 세상에 있습니다. 나는 아버지께로 갑니다.”(요 17:11a) 그리고는 제자들의 하나됨을 위한 기도를
올리십니다. “거룩하신 아버지,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아버지의 이름으로 그들을 지켜 주셔서, 우리가 하나인 것 같이, 그들도
하나가 되게 하여 주십시오.”(요 17:11b) 예수님이 인간인 제자들을 보기에, 아직 하나님의 모든 구원의 일정을 온전히 다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단계에서는, 저들의 생각이나 견해가 나뉠 수 있고, 이에 따라 서로 간에 분열과 갈등이 생길 것을 염려하시고
하시는 기도임이 분명합니다. 그런데 그 하나됨의 간구 수준이 대단합니다.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이 하나인 것 같은 수준의 하나
됨. 그런 놀랍고 깊고 풍성한 하나 됨으로서의 제자공동체가 되기를 기도하며 기대하며 축복하고 계신 것입니다. 제자공동체가 하나
되게 하지 못하는 세력은 사탄입니다. 사탄은 우리들의 분열과 헤어짐, 서로를 향한 반목과 갈등을 부추깁니다. 깨어지기를 원하는
것은 사탄입니다. 그래서 주님의 역할은 제자 공동체를 지키고 보호하는 일입니다. “내가 그들과 함께 지내는 동안은,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아버지의 이름으로 그들을 지키고 보호하였습니다. 그러므로 그들 가운데서는 한 사람도 잃지 않았습니다. 다만, 멸망의
자식만 잃은 것은 성경 말씀을 이루기 위함이었습니다.”(요 17:12). 가룟 유다의 배신과 멸망은 가슴 아픈 일이지만, 주님의
간절한 소원은 어디까지나 우리의 하나 됨이요, 결속과 안전과 평화입니다.
“이제 나는 아버지께로 갑니다. 내가 세상에서 이것을 아뢰는 것은, 내 기쁨이 그들 속에 차고 넘치게 하려는 것입니다.”(요
17:13). 남겨진 제자들을 향해 세상이 주는 박해와 환난이 만만치 않을 것임도 주님은 아시기에, 그로 인해 절망과 좌절,
주님 안 계신 슬픔과 외로움에 시달릴 제자들이 마음에 얹히는 것입니다. 세상 권세와 악한 세력이 저들을 핍박하고 죽이기까지 할
때, 저들이 과연 하늘 백성으로서의 담대함을 무사히 끝까지 지켜 낼 수 있을까, 이 모든 것이 걱정이 되셨던 것입니다. 세상에
잠시 남겨두고 떠나는 제자 공동체를 향한 주님의 간절한 보호 요청 기도가 그래서 진행됩니다. 제자 공동체는 세상에 있지만 세상에
속하지 않고 하늘에 소속된 사람들이기에,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 이를 묵상하고 삶 속에 실천하며 빛을 드러내며 살아가는 공동체인데,
빛을 싫어하는 세상은 이 제자 공동체를 미워할 것이기에, 이런 악한 세상으로부터 제자공동체를 지켜 달라고 주님은 지금 아버지
하나님께 간구하고 계신 것입니다(요 17:14-16).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 주님의 중보기도는 지금도 계속되고 있음을 아십니까? 하나님 보좌 우편에서, 지금도 부활의 몸으로
살아계셔서, 변함없이 우리를 위해 제자 공동체를 위해, 기도하시는 우리 주님의 중보자로서의 권세와 영광과 사랑을 여러분, 기억하고
계시는지요?(롬 8:34). 그러기에 오직 한 분이신 참 하나님을 더욱 깊이 알아가고, 예수 그리스도를 날마다 더욱 깊이
알아감으로 영생의 기쁨이 늘 충만하기를 축복합니다. 우리는 주님께 소속된 주님의 사람들입니다. 주의 말씀을 순종함으로 주께 날마다
영광을 올려 드리는 우리들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또한 주 안에서 주의 뜻 안에서 성령 안에서 하나 됩시다. 주님 주시는 기쁨으로
충만하시기를 축복합니다. 세상에 속하지 않은 자로서 악한 세상과 구별되는 오히려 악한 권세를 주 예수의 이름으로 담대히 대적하고
물리치는 우리 모두 되시기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아버지 하나님, 우리를 제자 공동체로 택하시고 불러 주셔서, 지금도 우리를 위하여 변함없이 기도해 주시니 감사드립니다. 예수
십자가의 피 흘리신 고난의 은혜로 우리를 영원한 생명의 나라로 옮겨 주시니 감사드립니다. 참 하나님을 알고 그리스도 예수를
알아가는 지식과 믿음과 체험에서 더욱 자라가게 하옵소서. 주님 하신 일 본받아 우리도 받은 사명 잘 감당하게 하옵소서. 주의 말씀
늘 순종하게 하옵소서. 우리가 주 안에서 하나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리하여 주의 기쁨으로 충만케 하옵소서. 세상에 살지만,
세상에 속하지 않게 하시고, 악한 세상 대적하며 이기며 살게 하여 주시옵소서. 이 한 주간도 주님의 고난 묵상하며 주의 은혜에
잠기는 한주 되게 하옵소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시고 부활하시며 지금도 우리를 위해 기도하시는 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가정교회를 통하여 초대교회의 모습을 닮아가는 건강하고 행복한 성경적인 교회입니다.
예수님의 유언(요한복음 13:31~16:33)
제자들과의 유월절 만찬이 마칠 즈음,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마지막 권면을 남기십니다. 이 고별설교를 마지막으로
예수님께서는 체포되어 십자가의 길을 걸으셨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에 담긴 예수님의 고별설교는 돌아가시기 직전에 제자들에게 남기신
마지막 유언이었습니다. 오늘은 그 유언의 내용을 살펴보겠습니다.
먼저 서로 사랑하라는 새 계명을 주십니다. 가장 먼저 말씀하신 것을 보니 예수님께서 가장 당부하고 싶었던
말씀이었을겁니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그것이 내 제자됨의 표시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는
떠나신다는 예수님의 말씀으로 인해 근심하는 제자들에게 안심하라 말씀하시며 왜 안심할 수 있는지를 자세히 설명하십니다. 내가 가면
진리의 영이신 또 다른 보혜사가 너희와 함께 할 것이며, 또 내가 곧 다시 너희를 볼 것이요, 너희가 아버지의 거처에서 아버지와
함께 할 것이라 하십니다. 내 말을 지키고 나를 사랑하는 너희들에게는 삼위 하나님께서 함께 하신다는 말씀입니다. 유언으로서
남기시는 말씀이니 믿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는 보혜사 성령의 하실 일에 대해서 말씀해 주십니다. 내가 떠나가고 나면 너희가 세상 사람들로부터 미움을 받게 될
것인데 그것은 너희가 나를 따랐기 때문이라. 너희는 내가 택하여 세상으로부터 하나님께로 속한 자로 옮기어졌으니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는 것이라 하십니다. 그러나 염려하지 않아도 될 것은,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할 것이기 때문이라 말씀하십니다. 세상 사람들이 예수를 믿지 않은 것이 죄요,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예수를 하나님께서
다시 살리셔서 그의 우편에 앉히신 것이 하나님의 의를 증명하는 것이요, 하나님의 의를 따르지 않고 예수를 믿지 않는 죄를
지음으로써 세상의 통치자들은 심판을 받을 것이라 말씀하십니다. 그러니 성령이 나에 대해 증언하는 것을 믿고, 너희도 담대하게 나의
증인이 되라고 당부하십니다.
보혜사라는 단어가 예수님의 고별설교에서 4번이 나옵니다. 그만큼 보헤사 성령이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가신
뒤부터는 보혜사 성령이 예수님의 역할을 맡게 되신다는 말씀입니다.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리라”(요 14:26) 인간의 육신으로 오신 예수님께서는 시간의
한계를 극복하지 못한 자연인이셨지만, 영으로 오실 성령님은 시간의 한계를 극복하고 우리와 영원히 함께 하실 것이기에 예수님께서는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이라”(요 16:7)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리고는 너희가 세상에서 환난을 당하고 힘들고 어렵게 살아갈 때에 너희에게 필요한 것은 무엇이든지 내 이름으로 구하라.
그리하면 받으리니 너희 기쁨이 충만할 것이라고 권면해 주십니다. 지금까지는 나와 함께 있어 내가 아버지께 구했지만, 이제는
너희가 직접 내 이름으로 구하면 내가 행할 것이라 약속하십니다.
마지막으로 내가 너희에게 세상이 줄 수 없는 평안을 주노니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 하십니다.
내가 이렇게 유언을 남기는 것도 너희가 나중에라도 내 말을 이해하고 이로 인해 평안을 누리게 하기 위한 것이니, 비록 나 떠난
후에 세상에서 너희가 환난을 당하더라도 담대하라 당부하십니다. 내가 세상을 이겼으니 너희는 담대할 수 있다는 확신에 찬 메시지를
남기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유월절 만찬이 끝날 즈음 유다가 자기를 팔러 나갔을 때 자신의 죽음을 이미 아시고 사전에 제자들에게 이
유언을 남기셨습니다. 그런데 이 유언의 내용이 제자들에게는 낯설기만 합니다. 서로 사랑하라는 새 계명은 예수님께서 살아생전에 늘
실천해오시면서 가르치신 것이라 마음속에 명심할 만한 당부였겠지요. 그런데 그 이후부터의 내용이 좀 이상합니다. 내가 가고 나면
너희는 세상에서 환란을 당하고 미움을 받을 것이다. 이게 웬 말입니까? 그동안 메시아라 생각하고 예수님을 따라다니면서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 오면 다들 한자리 차지할 거라 예상하고 있었는데.....비록 바리새인들과 제사장들이 예수님을 적대시하는 측면은
있었지만 그래도 이들을 능히 다 물리치신 예수님이신데, 그 분의 제자들인 우리가 세상의 미움을 받는다니?
그리고 예수님께서 떠나시고 난 이후에 보혜사 성령을 보내시어 너희와 함께 있으리라 하니 과연 그 분이 누구실까 궁금했을
겁니다. 그런데 그 분은 진리의 영이요, 세상은 그를 보지도 알지도 못한다고 하면서 너희들은 그를 알 것이라 합니다. 그러면서
내가 너희를 고아처럼 버려두지 않고 다시 올 것이라 하시면서 조금 있으면 나를 보지 못하겠고, 또 조금 있으면 나를 보리라
하시는데, 통 알 수 없는 수수께끼같은 말을 하시는 겁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유언을 듣고 있으면서도 눈만 멀뚱멀뚱 굴리고 있었을
겁니다. 도대체 무슨 말씀을 하시는거지? 어쨌든 누군지는 모르지만 성령이 오시면 그가 세상을 심판하고 진리를 증거하신다니 대단한
분이심은 틀림없을거라 생각했겠지요. 그리하여 예수님께서 담대하라고 당부하신 말씀도 쉽게 그러리라 생각했을 겁니다. 이후
예수님께서 잡히시고 심문당하시고 이리저리 끌려 다니실 때 제자들은 혼비백산하여 흩어졌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돌아가신 후에는
모두가 예전의 평범한 일상으로 돌아갔습니다. 예수님의 유언은 그렇게 제자들의 뇌리에서 잊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예수님의 유언이 실현이 되어 그들의 눈앞에 나타났습니다. ‘조금 있으면 나를 보지 못하겠고, 또 조금
있으면 나를 보리라’ 당시에는 알아듣지 못한 말이었지만 이제는 그 말씀이 무슨 의미인지 정확하게 알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여 다시 그들에게 나타나신 겁니다. 그리고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리니’ 하신 예수님의 약속대로 예루살렘 마가의 다락방에 모인 이들에게 성령이 충만히 임하여 하늘로부터 능력의 입히움을
받았습니다. 나쁜 일도 일어났지요. 너희가 나로 인해 박해를 받을 것인데 ‘너희를 죽이는 자가 생각하기를 이것이 하나님을 섬기는
일이라’ 하신 말씀도 그대로 이루어지고 있었습니다. 사울이라는 젊은 청년이 나타나 하나님의 일을 한다고 하면서 예수 믿는 자들을
죽이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유언은 알 수 없는 말들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눈앞에서 실현되고 있는
일들이었습니다. 이제야 제자들은 예수님의 유언을 이해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남아 있는 예수님의 당부말씀이 있었습니다.
“세상에서 너희가 환란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그렇습니다. 이제는 제자들도 확신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세상을 이미 이기신 것을.....그리고 이제는 그들도 세상의 환란이 무섭지 않게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그들은 다가오는
세상에서 예수의 증인이 되어 자기들의 목숨을 기꺼이 버리는 순교자가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유언은 2천여년 기독교의 역사를 일으키는
씨앗이었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남기신 유언을 다시 묵상합니다. 아직도 우리에게 남아있는 서로 사랑하라는 당부말씀이
우리의 일상이 되게 하시고, 우리 각자의 자리에서 보혜사 성령님의 능력으로 담대하여 환란을 이기고, 진리를 전하고, 세상을
이기신 예수님의 증인으로서의 삶에 충실할 수 있도록 인도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11월 22일(토) 요한복음 14-15장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진리의 성령(15:26)
내가 아버지께로서 너희에게 보낼 보혜사 곧 아버지께로서 나오시는 진리의 성령이 오실 때에 그가 나를 증거하실 것이요. When the Counselor comes, whom I will send to you
from the Father, the Spirit of truth who goes out from the Father, he
will testify about me.
'진리의 성령'
기독교에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약속하신 성령을 가리키며, 성령이 예수 그리스도와 그 안의 진리를 증언하고, 믿는 자들을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여 깨닫게 하신다는 의미를 지닙니다. 성령은 진리 그 자체이시며, 신자들 가운데 내주하며 위로하고 인도하시는 분입니다.
진리의 성령의 역할
증언 : 예수 그리스도와 그 안에 있는 진리를 증언하시며, 믿는 자들 또한 그 진리를 증언하게 하십니다.
인도 :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며, 성령의 뜻대로 모든 것을 깨닫게 하십니다.
가르침 : 성령은 우리에게 진리를 가르쳐 주시고, 깨닫게 하시며, 믿게 하십니다.
내주 및 위로 : 신자들 가운데 내주하시며 위로하고, 힘과 능력을 주십니다.
성령의 다른 표현들
보혜사 성령 : '옆에서 늘 같이 있는 분'이라는 뜻으로, 성도를 돕고 능력을 주시는 분입니다.
성령세례 : 성령으로 말미암아 죄 사함을 받고 거듭나는 경험입니다.
진리의 성령님께서 오셔서 세 가지 임무를 수행하심을 깨닫게 하신다고 말씀하십니다 그 세 가지 사실을 통해 우리는 성령님에 대한 정확한 이해로 더 많. 은 깨달음을 얻을 수 있습니다. 첫째 진리의 말씀인 성령님께서 오시면 우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해 주십니다, . 둘째 진리의 말씀인 성령님께서 오시면 그분은 자의로 말씀하시지 않고 오직 듣는 것을 말, 씀해 주십니다. 셋째 진리의 말씀인 성령님께서 오시면 과거나 현재만 알게 하시는 게 아니라 장래에 일, , 어날 일에 대해서도 알게 해 주십니다.
초기 기독교인들은 영적으로 고아였습니다. 예수님 없는 상황을 견뎌야만 했기 때문입니다. 자신들이 믿고 따르던 예수님이 십자가에 처형당했을 때 그들의 심정이 어땠을지 상상이 갑니다. 어떤 이들은 예수 공동체를 떠나기도 하고, 또 어떤 이들은 힘들게 버텼겠지요. 예수 부활 경험도 얼마간의 세월이 지나면서 끝났습니다. 그것을 가리켜 복음서와 사도신경은 예수님의 승천이라고 말합니다. 예수님과 연결되던 모든 것들이 끊겨진 상황입니다. 이제 제자들과 초기 기독교 구성원들은 예수 없이 자기들끼리 공동체를 유지해야만 했습니다. 예수의 재림을 기대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그런 기대도 접어야만 했습니다. 재림의 기미가 보이지 않았습니다. 초기 기독교인들이 처한 상황이 머리에 그려지시지요? 현재 예수는 없고, 재림은 지연되고, 예수를 직접 목격했던 초기 증인들은 세상을 떠나고 있습니다. 마치 춥고 배고프고, 날은 어두워지는 그런 상황에서 골방에 모여 앉아 앞으로 어떻게 살아갈지를 걱정하고 있는 고아 남매들과 같았습니다.
바로 그때 요한복음 기자는 예수님의 말씀을 기억했습니다. 그것이 유명한 예수님의 고별설교입니다. 체포당하시기 직전, 제자들과 헤어져야 할 바로 그 순간에 예수님께서 주신 말씀입니다. 그 내용이 요 14-16장에 나옵니다. 그 말씀은 다음과 같은 내용으로 시작됩니다.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요 14:1) 제자들이 크게 상심하고 힘들어한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이 곧 떠나야 하시기 때문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몇 명의 제자들이 예수님께 질문하거나 어떤 것을 요구합니다. 베드로, 도마, 빌립, 가룟 유다입니다. 오늘 설교에 직접 관계되는 도마와 빌립의 말만 들어보겠습니다. 도마는 예수님께 묻습니다. 예수 당신이 가는 길이 어디냐고 말입니다. 예수님은 요 14:6절에서 그 유명한 말씀으로 대답하십니다.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다음은 빌립이 나섭니다. 그는 아버지를 보여주면 당신이 우리를 떠난다 해도 안심하겠다고 말했습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대답하십니다.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요 14:9) 예수님이 바로 하나님이라는 뜻입니다. 참으로 놀랍고 과감한 진술입니다.
제자들과 초기 기독교 신자들은 바로 이 진술에 전적으로 의지해서 자신들의 신앙을 구축해나갔습니다. 유대교로부터도 벗어날 수 있었던 것도 바로 이 진술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경험하기 위해서 유대교가 요구하는 토라와 할례에 더 이상 머물러 있을 필요가 없었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 구원을, 즉 생명을 얻기 위해서 다른 대상을 찾아나설 필요가 없었습니다. 예수님을 바르게 믿기만 하면 됐습니다.
파라클레토스
문제는 실제로 예수님이 없는 상황에서 그 믿음을 어떻게 유지할 수 있느냐에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자기가 떠난 뒤에 보혜사를 보내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16절 말씀은 이렇습니다.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리니...” 보혜사는 헬라어 ‘파라클레토스’의 번역입니다. 사전적 의미로는 helper(도우미), intercessor(중재자)입니다. 이 단어는 쓰임새가 다양합니다. 히브리어와 아람어로 음역되기도 했습니다. 요한복음에서는 이 파라클레토스가 그리스도의 일을 위탁받아 그 일들을 선포하거나, 미래의 종말론적인 심판을 선포하는 존재를 가리킵니다. 보혜사라는 단어가 낯설어서 잘 와 닿지 않으면 성령이라고 생각해도 됩니다. 요 14:26절은 보혜사를 바로 성령이라고 규정했습니다.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오늘은 전 세계 교회가 성령강림절로 지키는 주일입니다. 성령강림절 절기의 역사적 배경은 사도행전 2:1절 이하에 보도된 오순절 성령강림 사건이지만, 그 오순절 성령강림에 대한 약속은 오늘 설교 본문에 나옵니다. 성령이라는 말을 모르는 기독교인은 없습니다. 한국교회처럼 성령을 강조하는 교회도 많지 않습니다. 성령 세미나라는 은사운동도 있습니다. 그런 방식으로 어떤 종교적 엑스타시를 경험합니다. 그게 무조건 틀린 말은 아닙니다. 성서가 그것을 분명하게 증언하고 있기도 하고, 지난 2천년 기독교 역사에서 그런 현상들이 제법 많이 일어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거기에는 오해도 많습니다. 부작용도 많습니다. 성령에 대한 이해가 부족해서 그런 일이 벌어집니다. 예수님께서 약속하신 성령은 무엇일까요? 오늘 우리는 성령을 어떻게 경험할 수 있을까요?
어떤 사람은 성령을 착한 귀신쯤으로 생각합니다. 무당들이 신들림 굿을 통해서 악한 귀신을 쫓아내듯이 기독교인도 기도를 많이 해서 성령을 불러낼 수 있는 것처럼 말입니다. 그건 아닙니다. 성령은 기본적으로 예수의 영이라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은 당신이 아버지께 구해서 파라클레토스, 즉 성령을 보내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요일 2:1절에도 파라클레토스라는 단어가 나옵니다. 거기서 파라클레토스는 예수님입니다. “만일 누가 죄를 범하여도 아버지 앞에서 우리에게 보혜사가 있으니 곧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시라.” 성령은 곧 예수님입니다. 역사적 실존 인물이었던 예수님은 지금 세상에 계시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다른 방식으로 이 세상에서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그 다른 방식의 활동이 바로 성령의 역사입니다. 즉 성령은 예수의 영입니다.
성령이면 성령이지 무슨 예수의 영이냐, 골치 아프다, 하고 생각할 분들이 있을 겁니다. 이 문제를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서방 기독교가 ‘필리오 케’(그리고 아들로부터)를 니케아 신조에 포함시킨 이유도 그것이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성령이 예수의 영이라는 말은 예수 사건을 아는 것이 바로 성령을 받은 증거라는 뜻입니다. 성령은 예수에게 일어난 일을 알게 하고 깨닫게 합니다. 성령을 받았는지 아닌지, 성령에 충만한지 아닌지를 알려면 예수님에 대해서 얼마나 알고 있는지를 보면 됩니다. 성령이 충만한 사람은 예수에게 일어난 일에 심취합니다. 그것이 그의 영혼을 불사릅니다. 이는 마치 시적 영감에 사로잡힌 시인들과 같습니다. 다른 것들에 대한 관심은 줄어들고 예수에 관한 것들이 늘어납니다. 이건 당연한 겁니다. 여러분이 연애하던 시절을 생각해보십시오. 저절로 상대방의 모든 것에 집중하게 됩니다. 맛난 걸 먹더라도 그 사람이 생각납니다.
여기서 많은 신자들이 신앙적인 곤란을 겪습니다. 예수에 대한 뜨거움이 계속 유지되지 않는다는 겁니다. 마치 결혼 이후 일정한 시간이 지나면 부부 사이에도 뜨거움이 사라지는 것과 같습니다. 개중에는 죽을 때까지 그 사람에게만 열정을 바치는 경우가 있긴 합니다만, 일반적이지는 않습니다. 신앙생활이 일정한 궤도에 오르면 예수님 자체에 대한 관심은 줄어들고 대신 교회생활에 대한 관심이 늘어납니다. 교회당 짓고, 의료봉사 나가고, 주일학교 교사나 운영위원도 되고, 또는 장로가 되기도 합니다. 그런 현상은 어쩔 수 없습니다. 문제는 그런 것들이 과연 예수님과 관련된 것인지에 대한 성찰과 판단에 있습니다. 그런 성찰을 가능하게 하는 영이 바로 성령입니다. 그게 없으면 성령이 떠난 겁니다.
여러분 스스로 질문해보시기 바랍니다. 지금 자신의 신앙생활이 실제로 예수에 대한 관심인지, 아니면 교회 일을 통한 자기만족인지 말입니다. 그걸 구별하기도 쉽지 않을 겁니다. 우리는 표면적으로는 늘 예수님의 일을 내세우기 때문입니다. 지난 기독교 역사에서 마녀재판이나 십자군 전쟁도, 그리고 지금 교회 안에서 벌어진 이전투구도 그리스도를 위한 것이라고 말했으니까요.
내 발등에 떨어진 불을 끄기도 바쁘기 때문에 예수에 대한 것에 신경을 쓴 여유가 없다고 생각하는 분들이 있을 겁니다. 그런 심정이야 이해 안 되는 건 아니지만 그런 생각 자체가 성령으로부터 멀어진 증거라는 점에서, 안타까운 일입니다. 그 이유가 무언지 아시겠지요? 이건 그렇게 복잡한 문제가 아닙니다. 여러분들이 시급하게 처리해야 할 걱정거리들을 생각해보십시오. 그게 해결되면 어떤 일이 벌어지고, 해결되지 않으면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를 내다보십시오. 그것이 구원을 얻는 일보다 더 중요한가요? 생명을 얻는 일보다 더 중요한가요? 이렇게 말씀드려도 그건 목사니까 그렇게 말하는 거지 실제로 세상살이를 해보면 다를 거라고 생각할 분들이 있을지 모릅니다. 그런 생각을 억지로 바꿀 수가 없습니다. 성령이 아니면 참된 진리를 깨달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진리의 영
요한복음 기자는 파라클레토스를 ‘진리의 영’이라고 표현했습니다. 17절의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보혜사를 보내겠다고 약속하신 다음에 그 보혜사를 설명하는 말씀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예수의 영이신 성령은 진리의 영이라는 겁니다. 진리는 참된 것입니다. 진리를 가리키는 헬라어 ‘알레테이아’는 탈(脫)은폐의 성격이 있습니다. 숨겨진 것을 드러낸다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진리는 계시라는 의미도 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성령을 받았다면 당연히 진리를, 즉 참된 것을 따라야만 합니다. 남이 말하기 전에 그렇게 갈 수밖에 없습니다.
오늘 우리는 진리의 영을 따르고 있을까요? 오늘 우리가 사는 세상에서는 재물이 신이 되고 말았습니다. 기업을 키우는 것이 최고의 가치가 되고 말았습니다. 인간이 세상에서 먹고 살아야 하니 그렇게 경쟁하고 업적을 내세우는 걸 부정할 수 없지만, 그것도 한도가 있어야 하는데, 지금은 한도를 넘었습니다. 뭐가 진리인지에 대해서 눈을 감고 무조건 부자가 되고 큰 교회가 되는 것에 목을 맸습니다. 오늘 우리는 진리의 영을 따르지 않습니다. 성령과의 관계가 끊어졌거나, 또는 아주 느슨하다는 증거입니다. 물론 그렇게 살아도 먹고 사는 데는 아무런 지장이 없습니다. 세상이 요구하는 방식으로 살아도 지금 당장 탈이 나지 않습니다. 그럭저럭 편안하게 살 수도 있고, 기회가 닿으면 존경을 받는 위치에 오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것들은 결국 물거품처럼 쉽게 사라지고 말 것들입니다. 거기에만 매몰되면 결국 우리 인생도 물거품의 신세를 면치 못할 것입니다.
요한복음 기자가 왜 성령을 진리의 영이라고 말했는지 아시지요? 단순히 정직하게 살아야 한다거나, 학문적으로 높은 수준에 도달해야 하기 때문이 아닙니다. 그 진리가 바로 예수이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의 영은 바로 진리의 영입니다. 즉 예수님으로 인해서 진리가 나타난다는 뜻입니다. 당연한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요 1:18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아버지 품속에 있는 독생 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셨느니라.” 이 진술이 무엇을 말하려는지 아시겠지요? 예수님을 통해서 하나님의 생명이 주어졌다는 것입니다. 그걸 알게 하는 이가 바로 파라클레토스, 즉 성령입니다. 그래서 성령은 예수의 영이고, 진리의 영입니다.
이제 여러분은 신앙생활에서 다음의 사실을 확인해야 합니다. 신앙 연륜과 함께 예수를 통한 생명이 무엇인지 점점 깊이 알아가고 있으신가요? 그게 점점 명료해지고 있나요? 아니면 날이 갈수록 흐려지고 있을까요? 거기에 실제로 관심이 있으신가요? 이에 대한 대답이 바로 성령을 받았는지, 그리고 얼마나 충만하게 받았는지에 대한 시금석이 됩니다.
설교 시작할 때 저는 고아에 대한 이야기를 언급했습니다. 고아는 무의식적으로도 근심이 많습니다. 우리는 모두 고아인지 모릅니다. 늘 근심을 이고 사니까 말입니다. 예수님은 오늘 설교본문 바로 다음 구절인 요 14:18절에서 우리를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않겠다.’(요 14:18)고 말씀하셨습니다. 보혜사인 파라클레토스가 우리와 함께 하시기에 우리는 고아 신세를 면했습니다. 그래도 세상의 근심을 단숨에 해결할 수 없습니다. 사실 근심이라는 게 끝이 없습니다. 하나가 해결되면 또 다른 근심이 나타날 뿐입니다. 아마 죽을 때까지 그것 안고 살아야 할 겁니다. 그러나 성령의 사람이라고 한다면 근심에 대한 생각을 최대한으로 축소시켜야만 합니다. 성령이 함께 하신다면 당연히 그렇게 살아갈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더 이상 영적으로 고아가 아닙니다. 그러니 마음에 근심하지 마십시오. 파라클레토스 성령을 전적으로 의지하십시오. 바로 그 성령이야말로 생명을 알고 참여할 수 있게 하는 진리의 영이십니다.
성령님에 대한 다섯 가지 진리
예수님은 말씀하셨다.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실상을 말하노니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이라 내가 떠나가지 아니하면
보혜사가 너희에게로 오시지 아니할 것이요 가면 내가 그를 너희에게로 보내리니”(요 16:7) 이미 알고 있는 정보를 다시 설명하는
것은 시간 낭비일 것 같아 이 구절에 대한 배경을 간략하게 설명하려 한다. 여기서 “보혜사”로 번역된 헬라어 단어는
파라클레토스(parakletos)인데 이 단어는 원래 법률 용어로 변호사를 가리키는 말이다. 더 넓은 맥락에서는 위로, 보호,
권고, 인도하심을 말한다. 예수님은 요한복음 14장에서 성령님을 보혜사로 말씀하셨고, “진리의 영”으로 소개하셨다(요 14:17;
16:13).
첫째, 성령님은 어떤 힘이나 영향력이 아니라 유일무이한 인격이시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성령님을 가리킬 때는
“그것(it)”이 아니라 “그분(he)”으로 언급한다. 이것은 중요한 문제이다. 왜냐하면 교회 회중을 포함한 사람들의 대화를 주의
깊게 들어볼 때, 성령님을 중성적인 언어로 표현하는 것을 종종 듣게 되기 때문이다. 심지어 우리 자신도 그렇게 말하는 경우가
있다. 혹시나 당신 입에서 그런 말이 나오려고 할 땐 즉시 입을 다물어야 한다. 삼위일체 하나님의 세 번째 위격이신 성령 하나님은
인격적이신 분임을 기억해야 한다.
인격체이신 성령은 근심하시고(엡 4:30) 하나님의 성령을 근심하게 하지 말라 그 안에서 너희가 구속의 날까지 인치심을 받았느니라.
성령의 뜻을 행사하는 면에서 소멸할 수
있으며(살전 5:19) 성령을 소멸치 말며.
성령을 거스를 수도 있다(행 7:51) 목이 곧고 마음과 귀에 할례를 받지 못한 사람들아 너희가 항상 성령을 거스려 너희 조상과 같이 너희도 하는도다.
2. 성령은 성자와 성부와 하나(마태복음 28:19)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요한복음 14:16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시리니.
요한복음 16:7 그러하나 내가 너희에게 실상을 말하노니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이라 내가 떠나가지 아니하면 보혜사가 너희에게로 오시지 아니할 것이요 가면 내가 그를 너희에게로 보내리니.
신학적 용어로 함께 동등(co-equal)하시며, 함께
영원(co-eternal)하시다고 표현한다. 예수님의 다락방 강화 전체를 읽어보면 성령을 보내신 분은 성부와 성자이시다(요
14:16; 16:7). 말하자면 성령님은 성부와 성자를 위해 오셨고, 일하신다. 따라서 성경에서 보여지는 성령님의 활동은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에서 분리되거나 아버지 하나님의 영원한 뜻과 분리된 적이 없다. 성령님을 성경에서 분리하거나 신비적으로
보려는 모든 노력은, 우리를 온갖 종류의 샛길로 빠지게 하여 결국 막다른 길로 인도할 것이다.
성경 제일 처음에 나오는 창조 기사는 이렇게 시작된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영은 수면 위에 운행하시니라(창 1:1~2)”. 여기서 “영”으로 번역된
히브리어 루아흐(ruach)는 “호흡”이란 의미도 있다. 루아흐 엘로힘(하나님의 영) “전능자의 숨결”은 곧 창조주이시다. 여기서
보여주는 것은 성령님의 비물질성이 아니라 성령님의 능력과 에너지다. 말하자면 하나님의 에너지가 피조물에 불어넣어져 세상이
존재하게 되었고, 우주에 별이 생긴 것이다. 이사야 40장 26절 “누가 이 모든 것을 창조하였나 보라”는 질문의 답은 창세기
1장 2절에서 찾을 수 있다. 하나님의 계획을 성취하시는, 저항할 수 없는 힘이 성령님이시다.
이와 관련하여, 구약학 학자들은 구약 성경에서 성령 하나님의 구별된 인격을 발견할 수 있는가를 질문한다. 다시 말해 구약
성경만을 가지고 성령님의 위격 본질을 이해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이에 대한 답은 창세기 1장 2절 말씀에서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다. 이후에 계시된 모든 것에 비추어 볼 때 삼위일체 성령의 위격에 대해 분명히 구별하여 언급하고 있다.
싱클레어 퍼거슨의 저서 『성령(The Holy Spirit)』에서는 우리가 창세기 1장 2절에 있는 하나님의 영을 인식한다면
창세기 1장 26절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를 이해하게 된다고 말한다. 퍼거슨은 이것이
창세기 1장 1~2절에서 일하시는 하나님의 영에 대한 분명한 언급이라고 말한다.
이 문제는 성경을 거꾸로 읽어 나가는 것이 도움이 될 수 있음을 상기시켜준다. 성경을 뒤에서부터 앞으로 읽어 나간다면
어거스틴이 말한 “신약은 구약에 감추어져 있고, 구약은 신약으로 계시된다”는 고전적 해석 원리의 진실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다시
말해 성경의 앞 부분에 있는 가르침과 사건의 의미를 발견하게 된다는 것이다.
4. 성령님은 거듭나게 하신다(요한복음 3:5)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성령님은 그리스도 안에서 새 피조물을 만드신다. 바로 우리를 거듭나게 하시는 것이다. 요한복음
3장은 예수님과 니고데모가 대화하는 장면이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요 3:5) 물론 이 진리는 성경의 나머지 부분에도 해당된다.
5. 성령님은 성경의 저자(디모데후서 3:16-17)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하기에 온전케 하려 함이니라
베드로후서 1:21 예언은 언제든지 사람의 뜻으로 낸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의 감동하심을 입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받아 말한 것임이니라.
디모데후서 3장 16절은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이라고 말한다. 이
표현은 헬라어 테오프뉴스토스(theopneustos)를 번역한 것인데, 이것은 “하나님의 숨결”이라는 뜻이다. 성령님은 에너지를
불어넣어 하나님의 능력으로 세상을 창조하셨다. 구속 역사에서도 성경의 기록을 우리에게 주시는 신성한 사역을 보게 된다. 영감
교리는 전적으로 성령 하나님의 사역에 대한 것이다. 베드로는 이를 단언하며 이렇게 기록했다. “예언은 언제든지 사람의 뜻으로 낸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의 감동하심을 받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받아 말한 것임이라”(벧후 1:21) 성경의 저자들은 자신의 발상을
기록한 것이 아니며, 그렇다고 해서 로봇처럼 받아 적은 것도 아니다. 그들은 실제 역사 속에서, 실제 유전자를 가진, 실제
사람들로서 역사적 배경과 성격에 따라 성경을 기록했다. 하지만 성경의 저자는 둘이다. 예를 들어 하나님이 예레미야를 선택하셨기
때문에 예레미야와 하나님, 둘 다 저자인 것이다. 사실 예레미야의 경우 하나님은 “보라 내가 내 말을 네 입에 두었노라”(렘
1:9)라고 말씀하셨다. 하나님은 예레미야의 인격을 존중하셨고, 예레미야는 하나님의 말씀을 기록하였다. 성경을 공부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성경은 성령님의 숨결로, 성령의 감동을 받아 존재하는 책이기 때문이다.
보혜사의 정체성에 대한 설명은 무한히 늘어놓을 수 있지만 모든 것을 다 밝히기보다는 선별적으로 설명해야한다. “또 다른
보혜사”라는 것이 그분의 정체성이다. “또 다른”으로 번역된 이 단어는 헤터로스(heteros)가 아니라 알로스(allos)이다. 예수님과 다른 종류가 아닌 같은 종류의 보혜사를 약속하신 것이다. 성령님은 파라클레토스, 즉 옆에 계시는 분이다. 예수님은,
성령님이 “너희와 영원히 함께 있게 하리니… 그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요 14:16~17)고
말씀하셨다. 성령님의 사역은 영구적이며 인격적이다.
삼위일체 성경구절
삼위일체라는 말은 2세기 교부들에 의해 최초로 언급되면서 점차 교리화 된 주제입니다.
삼위일체는 성부와 성자와 성령이 한 하나님을 말합니다. 난해한 교리이긴 하지만 이단을 구별하는 중요한 주제이기도 합니다. 성경
속에서 삼위일체 관련된 성경 구절을 찾고, 설명을 붙였습니다.
삼위일체과 관련된 성경구절
성경에서 삼위일체의 개념을 추론하거나 암시하는 구절은 여러 군데에 나옵니다. 이들
구절은 삼위일체 교리를 직접적으로 설명하지는 않지만, 하나님의 세 인격이 동시에 존재하며 협력하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다음은
개정개역판에서 삼위일체를 추론할 수 있는 몇 가지 구절들입니다.
마태복음 28:19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이 구절은 세례의 형식에서 성부, 성자, 성령의 세 인격을 명확히 언급합니다. 이는 삼위일체의 명확한 예로 많이 인용됩니다.
마태복음 3:18-17
"예수께서 세례를 받으시고 곧 물에서 올라오실새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성령이 비둘기 같이 내려 자기 위에 임하시더니 하늘로부터 소리가 있어 말씀하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하시니라"
예수님의 세례 장면에서 성부 하나님, 성자 예수님, 성령 하나님이 동시에 나타나시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삼위일체의 강력한 구절 중의 하나입니다.
고린도후서 13:13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의 교통하심이 너희 무리와 함께 있을지어다"
이 구절은 바울이 고린도 교회에 보내는 축복의 말로, 삼위일체의 세 인격을 명확히 언급합니다. 초대교회부터 삼위일체 사상은 자연스럽게 그들의 신앙 안에 스며들어 있었지 이후에 생긴 것이 아닙니다.
요한복음 14:18-17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리니 그는 진리의 영이라 세상은 능히 그를 받지 못하나니 이는 그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라 그러나 너희는 그를
아나니 그는 너희와 함께 거하시며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
예수님께서 성령을 보내실 것을 약속하시며 성부, 성자, 성령의 역할을 설명하십니다. 성령을 보내시는 분이 예수님이란 사실에 주목해 봅시다.
창세기 1:26
"하나님이 이르시되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여기서 "우리"라는 복수형 표현이 사용되며, 이는 하나님의 복수적 존재를 암시한다고 해석됩니다. 유일신 사상 안에는 유일안에 삼위가 이미 존재했음을 가장 초기의 성경에 창세기에 있다는 것은 놀라운 일입니다.
창세기 3:22
"여호와 하나님이 이르시되 보라 이 사람이 선악을 아는 일에 우리 중 하나 같이 되었으니..."
이 구절 역시 "우리 중 하나"라는 표현을 통해 하나님의 복수적 존재를 암시합니다.
창세기 11:7
"자, 우리가 내려가서 거기서 그들의 언어를 혼잡하게 하여 그들이 서로 알아듣지 못하게 하자 하시고"
이 구절에서 "우리가"라는 표현은 복수의 인격을 나타내는 것으로 해석될 수 있습니다.
이사야 6:8
"내가 또 주의 목소리를 들으니 주께서 이르시되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 하시니..."
이사야는 하나님께서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라고 말씀하시는 것을 기록하며, 이는 하나님의 복수적 존재를 암시합니다.
이사야 48:18
"너희는 내게 가까이 나아와 이것을 들으라 내가 처음부터 비밀히 말하지 아니하였나니 그것이 있는 때부터 내가 거기에 있었느니라 이제는 주 여호와께서 나와 그의 영을 보내셨느니라"
여기서 "주 여호와"와 "그의 영"이 함께 언급되며, 성부와 성령의 존재를 암시합니다.
이사야 61:1
"주 여호와의 영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내게 기름을 부으사 가난한 자에게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이 구절에서 "주 여호와의 영"이 언급되며, 성령의 존재를 암시합니다.
잠언 30:4
"하늘에 올라갔다가 내려온 자가 누구인지 바람을 그 손에 모은 자가 누구인지 물을 옷에 싼 자가 누구인지 땅의 모든 경계를 정한 자가 누구인지 그의 이름이 무엇인지 그의 아들의 이름이 무엇인지 너는 아느냐"
여기서 "그의 아들"이라는 표현이 등장하여, 하나님의 아들인 성자를 암시합니다.
학자들의 주장
삼위일체 교리는 성경에서 명확히 기술되지 않지만, 여러 구절에서 암시됩니다. 다양한 학자들이 삼위일체를 언급하는 구절들을 통해 이 교리를 도출해내려 했습니다.
마태복음 28:19의 경우, 학자들은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세례를 베풀 때 성부, 성자, 성령의 이름으로 행하라고 명령한 것을 삼위일체 교리의 강력한 증거로 봅니다. 이 구절은 초대 교회의 삼위일체 신앙을 반영한다고 해석됩니다.
고린도후서 13:13은 바울이 삼위일체의 세 인격을 동일한 축복 안에서 언급함으로써, 그들의 역할과 연합을 나타냅니다. 학자들은 이 구절을 통해 삼위일체의 협력과 상호작용을 강조합니다.
마태복음 3:18-17에서 예수님의 세례 장면은 삼위일체의 가장 명확한 묘사 중 하나로, 성부의 목소리, 성자의 세례, 성령의 강림이 동시에 일어나는 것을 보여줍니다. 이는 세 인격이 독립적이면서도 하나로 존재함을 나타냅니다.
요한복음 14:18-17에서 예수님이 성령을 보내실 것을 약속하며 성부, 성자, 성령의 역할을 설명하는 구절도 삼위일체의 중요한 근거로 사용됩니다. 학자들은 이 구절이 삼위일체의 내부 관계와 기능을 보여준다고 설명합니다.
결론
성경에서 삼위일체 교리를 명확히 설명하는 구절은 없지만, 여러 구절들이 이를 암시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구절들은 하나님이 성부, 성자, 성령의 세 인격으로 존재하며, 이들이 서로 협력하고 상호작용하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삼위일체 교리는 교회의 중요한 신앙 고백으로, 이러한 성경 구절들에 기초하여 발전되어 왔습니다.
삼위일체란? -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요한일서 5:8)
증거하는 이가 셋이니 성령과 물과 피라 또한 이 셋이 합하여 하나이니라. the Spirit, the water and the blood; and the three are in agreement.
기독교에서 **삼위일체(Trinity)**는 가장 중요한 교리 중 하나입니다. 삼위일체는 하나님이 한 분이시지만, 성부(아버지 하나님), 성자(예수 그리스도), 성령 하나님 세 위격(Person)으로 존재하신다는 개념입니다.
그렇다면, 삼위일체란 무엇이며, 성경에서는 어떻게 설명하고 있을까요? 또한, 우리는 이 교리를 어떻게 이해하고 믿어야 할까요?
1. 삼위일체란?
📖 신명기 6:4
“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유일한 여호와이시니.”
📖 마태복음 28:19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이 두 말씀을 보면,
하나님은 한 분이시다(신 6:4).
하지만, 예수님은 성부, 성자,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라고 명령하셨다(마 28:19).
즉, 하나님은 유일하시지만, 동시에 성부, 성자, 성령 세 위격으로 존재하신다는 것이 삼위일체 교리의 핵심입니다.
💡 삼위일체란? 👉 “하나님은 한 분이시지만, 성부, 성자, 성령 세 위격으로 존재하신다.”
2. 성경이 말하는 삼위일체
1) 성부 하나님 (God the Father)
성부 하나님은 창조주이며, 온 우주의 주권자이십니다. 하나님은 세상을 창조하시고, 섭리하시며, 모든 것을 다스리십니다.
📖 창세기 1:1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 고린도전서 8:6
“우리에게는 한 하나님 곧 아버지가 계시니, 만물이 그에게서 났고 우리도 그를 위하여 있고.”
💡 성부 하나님은 온 우주의 창조주이시며, 모든 것을 다스리시는 분입니다.
2) 성자 하나님 – 예수 그리스도 (God the Son, Jesus Christ)
성자 하나님이신 예수님은 하나님과 동일한 본성을 가지셨지만,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분은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셨고, 부활하셨습니다.
📖 요한복음 1:1, 14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 요한복음 10:30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
📖 빌립보서 2:6-8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 예수님은 하나님과 동등하신 분이시지만, 인간의 몸을 입고 오셔서 우리를 구원하셨습니다.
3) 성령 하나님 (God the Holy Spirit)
성령 하나님은 하나님의 영으로서, 믿는 자 안에 거하시며, 우리를 인도하시고 가르치시는 분입니다. 성령께서는 우리에게 하나님의 능력을 주시고, 진리를 깨닫게 하시며, 믿음의 삶을 살도록 도우십니다.
📖 요한복음 14:26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께서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시리라.”
📖 고린도전서 3:16
“너희는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거하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
📖 사도행전 1:8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 성령님은 우리 안에 거하시며, 우리를 인도하시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도록 도우십니다.
3. 삼위일체를 이해하는 비유
삼위일체는 우리의 이성으로 완벽하게 이해하기 어려운 신비로운 교리입니다. 하지만, 몇 가지 예를 통해 쉽게 설명할 수 있습니다.
1) 물(H₂O) – 액체, 고체, 기체
물은 액체(물), 고체(얼음), 기체(수증기) 세 가지 상태로 존재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본질적으로 같은 물입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은 성부, 성자, 성령으로 존재하시지만 본질적으로 한 분이십니다.
2) 태양 – 태양, 빛, 열
태양은 하나지만, 태양 자체, 태양에서 나오는 빛, 태양의 열이 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은 한 분이시지만, 성부, 성자, 성령의 세 위격으로 존재하십니다.
💡 어떤 비유도 삼위일체를 완벽히 설명할 수는 없지만, 하나님은 한 분이시면서 세 위격으로 존재하신다는 개념을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줍니다.
4. 삼위일체의 중요성 – 왜 믿어야 할까?
✅ 삼위일체는 성경이 가르치는 진리이다. ✅ 예수님이 하나님이심을 믿지 않으면 구원을 받을 수 없다. ✅ 성령님이 우리를 도우시고 인도하시기 때문에 삼위일체 하나님을 온전히 의지해야 한다.
📖 요한일서 5:7
“하늘에 증거하는 이가 세 분이시니 곧 아버지와 말씀과 성령이시라. 이 세 분은 하나이시니라.”
📖 마태복음 28:19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 삼위일체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며, 그분의 뜻을 따라 살아가야 합니다.
5. 결론: 삼위일체 하나님을 온전히 믿고 따르자
✅ 하나님은 한 분이시지만, 성부, 성자, 성령 세 위격으로 존재하신다. ✅ 성부 하나님은 창조주이며, 성자 예수님은 우리를 구원하셨고, 성령 하나님은 우리를 인도하신다. ✅ 삼위일체 교리는 성경에 분명히 나타나 있으며, 기독교 신앙의 핵심이다.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유일한 여호와이시니.” (신명기 6:4)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마태복음 28:19)
💡 삼위일체 하나님을 믿고, 그분과 동행하는 삶을 살아갑시다!
삼위일체 하나님"에 관한 12개 성경 구절, 해석 및 적용
서론 :
삼위일체 하나님은 기독교 신앙의 핵심 교리 중 하나로,
하나님이 성부, 성자, 성령의 세 위격으로 존재하시며 하나의 본질을 가지신다는 개념이다. 삼위일체 교리는 성경의 여러 구절에서
암시되며, 하나님의 속성과 사역이 각 위격에 걸쳐 나타난다. 성경 구절들과 개혁 신학자들의 해석을 통해 삼위일체 하나님의 신비를 더
깊이 이해할 수 있다.
1. 마태복음 28장 19절: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해석: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세례를 베풀 때 성부, 성자, 성령의 이름으로 하라고 명령하신 것은 삼위일체 하나님의 존재와 동등한 중요성을 나타낸다.
*어거스틴(Augustine): 삼위일체의 신비는 이해할 수 없지만 믿어야 할 진리라고 강조했다.
*적용: 우리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이름으로 구원받았음을 믿고, 그분의 말씀에 순종하며 살아가야 한다.
2. 고린도후서 13장 13절: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의 교통하심이 너희 무리와 함께 있을지어다.”
*해석: 사도 바울은 삼위일체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 교통하심을 언급하며 성부, 성자, 성령의 공동 사역을 강조한다.
*칼빈(John Calvin): 이 구절에서 하나님이 삼위일체로 존재하심을 나타내며, 구원의 모든 과정에 각 위격이 함께 일하심을 보여준다.
*적용: 우리는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와 사랑, 성령의 교제를 통해 교회를 섬기며 살아가야 한다.
3. 요한복음 14장 16-17절: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리니 그는 진리의 영이라.”
*해석: 예수님께서 아버지께 성령을 보내달라고 구하심은 삼위 하나님의 상호 작용을 보여준다. 성령은 진리의 영으로 성도들과 함께 하신다.
*토마스 아퀴나스(Thomas Aquinas): 성부, 성자, 성령이 각기 독립적이지만 본질적으로 하나라는 교리를 이 구절에서 확인할 수 있다.
*적용: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신뢰하며, 진리 안에서 살아가야 한다.
4. 창세기 1장 26절: “하나님이 이르시되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해석: 하나님께서 복수의 표현을 사용하여 사람을 창조하실 때, 이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존재를 암시한다.
*존 오웬(John Owen): 삼위일체의 내적 관계가 창조의 과정에서도 드러나며,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음을 강조했다.
*적용: 우리는 삼위일체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특별한 존재로서, 그의 뜻에 따라 살아가야 한다.
5. 요한복음 1장 1-2절: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해석: 예수 그리스도는 태초부터 하나님과 함께하신 말씀으로, 성자 하나님의 영원한 존재를 나타낸다.
*아타나시우스(Athanasius): 이 구절은 예수님의 신성을 증명하는 중요한 본문으로, 성부와 성자가 본질적으로 하나임을 나타낸다고 주장했다.
*적용: 예수 그리스도의 영원한 주권과 신성을 인정하고 그분을 우리의 삶의 주인으로 모셔야 한다.
6. 사도행전 5장 3-4절: “베드로가 이르되 아나니아야 어찌하여 사탄이 네 마음에 가득하여 네가 성령을 속이고… 사람에게 거짓말 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께로다.”
*해석: 성령을 속인 것은 하나님을 속인 것이라는 말은 성령이 곧 하나님이심을 나타낸다.
*존 파이퍼(John Piper): 성령 하나님의 신성을 강조하며, 그분이 하나님과 동등한 권위를 가지신다고 해석한다.
*적용: 우리는 성령 하나님을 두려움과 경외로 대하며, 그의 인도하심에 순종해야 한다.
7.
마태복음 3장 16-17절: “예수께서 세례를 받으시고 곧 물에서 올라오실 때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성령이 비둘기같이 내려 그
위에 임하시더니 하늘로부터 소리가 있어 말씀하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가 기뻐하는 자라 하시니라.”
*해석: 예수님의 세례 장면에서 성부, 성자, 성령의 세 위격이 동시에 등장하여 삼위일체 하나님의 모습을 드러낸다.
*어거스틴(Augustine): 이 사건은 삼위일체의 구체적 현현으로, 삼위가 각각 역할을 가지지만 하나의 본질을 공유한다고 강조했다.
*적용: 삼위일체 하나님의 사역을 신뢰하고, 예수님을 통해 주어진 구원의 은혜를 감사해야 한다.
8. 고린도전서 12장 4-6절: “은사는 여러 가지나 성령은 같고 직분은 여러 가지나 주는 같으며 또 사역은 여러 가지나 모든 것을 모든 사람 가운데서 이루시는 하나님은 같으니.”
*해석: 은사와 사역에서 성령, 주 예수 그리스도, 하나님 아버지의 삼위일체적 역할이 나타난다.
*칼 바르트(Karl Barth): 이 구절은 삼위 하나님의 사역이 교회 안에서 어떻게 서로 조화롭게 작용하는지를 보여준다고 해석했다.
*적용: 우리는 하나님께서 주신 다양한 은사를 인정하고, 교회 공동체 안에서 서로 섬겨야 한다.
9. 에베소서 2장 18절: “이는 그로 말미암아 우리 둘이 한 성령 안에서 아버지께 나아감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해석: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성령 안에서 하나님 아버지께 나아감으로, 삼위일체 하나님의 공동 사역을 강조한다.
*R.C. 스프로울(R.C. Sproul): 삼위일체 하나님은 성부, 성자, 성령의 조화로운 사역을 통해 인간을 구원으로 이끄신다고 설명했다.
*적용: 우리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은혜로 하나님 아버지께 나아갈 수 있음을 감사하며, 그분과 교제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
10. 요한복음 15장 26절: “내가 아버지께로부터 너희에게 보낼 보혜사 곧 아버지께로부터 나오시는 진리의 성령이 오실 때 그가 나를 증언하실 것이요.”
*해석: 성령께서 아버지로부터 보내심을 받아 예수님을 증언하시는 역할을 맡으심은 삼위일체 하나님의 상호 작용을 나타낸다.
*존 오웬(John Owen): 성령은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을 확증하고, 성도들을 진리 가운데 인도하시는 삼위 하나님의 중요한 역할을 수행한다고 설명했다.
*적용: 성령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증언하시는 분임을 기억하고, 성령의 인도하심에 따라 살아야 한다.
11. 베드로전서 1장 2절: “곧 하나님 아버지의 미리아심을 따라 성령의 거룩하게 하심으로 순종함과 예수 그리스도의 피뿌림을 얻기 위하여 택하심을 받은 자들에게 편지하노니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더욱 많을지어다.”
*해석: 성부의 예정, 성령의 거룩하게 하심,예수 그리스도의 피뿌림을 통해 삼위일체 하나님의 구원사역을 강조한다.
*찰스핫지(CharlesHodge): 삼위일체 하나님의 구원사역과 그 역할을 분명히 설명했다.
*적용: 삼위일체 하나님의 구원사역을 신뢰하며, 그의 은혜와 평강을 체험해야 한다.
12. 요한일서 5장 7절: “증언하는 이는 세분이시니 성령과 물과 피라 또한 이 세가지는 합하여 하나이니라.”
* 해석: 성령과 물과 피를 통해 삼위일체 하나님의 일치와 그들의 조화를 강조한다.
* B.B.워필드(B.B.Warfield): 삼위일체 하나님의 조화와 일치를 강조하며, 그들의 공동사역을 설명했다.
* 적용: 삼위일체 하나님의 일치를 믿고, 그분의 사역에 참여하며 살아가야 한다.
기도
: 삼위일체 하나님께 영광과 찬양을 드립니다. 아버지, 아들, 성령 하나님께 두렵고 떨림으로 경배드립니다.우리 삶의 모든 순간,
성 삼위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며 그분의 주권과 섭리를 이루며 살게 하소서서, 모든 일에 매순간 주님의 거룩한 뜻을 찾고 그
뜻에 순종하며 살게 하소서. 주님의 무한한 사랑과 은혜와 권능을 항상 기억하게하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아멘.
결론:
삼위일체 하나님은 신비한 존재이지만, 성경을 통해 그분의 속성과 사역을 명확히 이해할 수 있다. 성부, 성자, 성령의 완전한
조화를 통해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계획을 신뢰하며, 그분께 순종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 우리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며,
그분의 인도하심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살아가야 한다.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예수님의 고별설교에서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주제가 ‘사랑’인데 또 하나의 반복적인 주제는 ‘성령’이다. 14장부터 16장
사이에 성령에 관한 예수님의 언급이 다섯 차례나 나온다(14:16-18, 14:26-27, 15:26-27, 16:1-11,
16:13-15). 사랑과 성령, 둘 다 근심하는 제자들을 위로하기 위해 다룬 주제들이다.
예수님은 박해가 있어도 당신의 사랑이 끝없는 사랑임을 세족식을 통해 몸소 보여주셨고, 또 서로 사랑하라고, 이게 꼭 지켜야 할
계명이라고 말씀하셨을 뿐만 아니라 당신이 떠나더라도 그 사랑은 계속된다는 것을 거듭 말씀하신다. 십자가도 사랑이고, 처소를
예비하는 것도 사랑, 이 사랑이 근심을 이기게 하는 힘이 될 것이라는 말씀이다. 요한이 볼 때 사랑은 진리였다.
성령을 반복적으로 말씀하신 것도 사랑의 맥락으로 봐야 한다. 14장에서 성령을 ‘사랑의 영’이라고 표현한 것은 신비적 계시가
성령께서 오신 궁극적 목적이 아니고, 사랑의 계명을 잘 지켜 제자들을 사랑의 사람으로 만드는 것을 궁극적 목적으로 오셨기
때문이다.
예수님이 떠나시는 것에 대한 두려움과 근심에 쌓인 제자들, 그들을 위로하기 위해 ‘보혜사 성령’을 보내주겠다고, 근심할
이유가 없다며 주신 말씀이다. 그 가운데 “그러나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 그가 스스로
말하지 않고 오직 들은 것을 말하며 장래 일을 너희에게 알리시리라”(13절)고 하셨는데 성령이 오셔서 하실 일이 어떤 일이라고
하셨나?
세상을 책망하실 것
예수님은 당신이 보내실 성령을 ‘보혜사 성령’이라고 하셨다(14:26). 이는 요한의 독특한 표현이다. 헬라어로
‘파라클레토스’(παράκλητος), ‘곁에서’라는 뜻의 ‘파라’(παρά)와 ‘말하다’라는 뜻의 ‘클레토스’(κλητος)의
합성어, ‘대언자’, ‘변호사’, ‘중재자’, ‘협조자’, ‘대변자’라는 뜻인데 영어 번역본들은 “돕는 자(Helper),
위로자(Comforter), 상담자(Counsellor)”라 번역했다. 법정용어라 레온 모리스(Leon Morris)는 위로자의
의미보다는 변호사의 의미라 했다. 우리말 성경의 보혜사(保惠師)는 ‘보살피고 은혜 베푸시는 스승’이라는 말, 아마 보혜사가 요한이
말하고 있는 성령을 가장 적합하게 표현한 것 같다.
예수님은 보내실 성령이 하실 일을 좀 더 구체적으로 말씀하신다. “그가 와서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시리라”(8절), 먼저 죄와 의에 대하여, 그리고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신다는 것이다.
죄에 대해 책망하신다는 것은 제자들이 예수 믿는 것 때문에 정죄당하겠지만 오히려 예수 믿지 않는 것이 죄라는 것이다. 그러니
세상은 기본적으로 죄에 대한 개념이 잘못된 것, 세상은 철저히 자기중심적이다. 그래서 죄짓고도 뻔뻔하고, 자신있게 불신앙의 길을
걷는다. 하지만 그리스도라는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를 무시하고 배척한 죄는 반드시 심판받게 될 것이다.
의에 대해 책망하신다는 것도 의에 대한 개념이 잘못된 것 때문이다. 지금은 정치성향에 따라 의에 대한 개념도 서로 다른
시대, 자기편이면 무조건 의인이다. 그러나 아무리 의로운 체해도 그런 의는 심판의 대상일 뿐이다. 그리고 성경이 말하는 의는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정립되는 의, 구원이 되는 의다. 자기 노력으로 되는 게 아니다. 오직 그리스도의 구속으로만 가능한 것,
그런데 그리스도는 부활 승천하심으로써 우리를 의롭다고 하실 수 있게 되시는데 예수님은 당신의 대속의 죽음과 그것을 믿는 믿음만이
우리에게 의가 됨을 선언하신다.
그리고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신다는 것은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알지 못하는 세상이 제자들을 심판하지만 예수
그리스도는 부활하시고 아버지 하나님께로 가심으로써 이미 세상을 심판하셨다는 것이다. 세상 임금이 제자들을 심판하는 것 같지만 세상
임금이 심판받을 것이라는 말씀이다. 진리를 알지 못하는 세상, 주의 제자들을 책망하고 심판하며 출교시키고 죽일 것이지만 진리의
성령께서 책망하실 것, 그러니 근심하지 말라는 거다.
이 일은 교회에 위임된 일이기도 하다. 그래서 교회는 예언이든 설교든, 어떤 방식으로든 성령의 역사하심에 따라 이 일을 해야
한다. 마태복음에 보면 “내가 천국 열쇠를 네게 주리니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16:19), 베드로에게 하신 말씀인데 천국 열쇠가 주어졌다고 하셨다. 교회가 오직 구원의
방주 역할을 한다는 말씀으로 보면 좋겠다. 이 말씀은 교회의 결정이 하늘의 결정과 직결된다는 말씀, 교회에서 파문하면 하늘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는 엄청난 말씀이다. 또 주님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무엇이든지 너희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마18:18)고 하셨다. 용서나 심판과 관련된 말씀, 교회에 위임된 권한이 이만큼
대단하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교회는 좀 더 당당할 필요가 있다. 비록 세상이 교회를 비난과 조롱의 대상으로 여길지라도 우리는 교회에 부여된 권위가 어떤 것인지를 알고 보다 분명하게 대처해야 한다.
안타까운 것은 일부 목회자들이 시대적으로 죄와 의에 대한 판단이 달라야 한다고 주장한다는 거다. 하나님의 말씀이 역사 무대
위에 떨어지기 때문에 시대적 한계성을 갖는다는 것인데 웃기는 소리다. 그건 그들의 신학이 잘못된 것, 성경이 그 정도라면 그들에게
성경은 이미 성경이 아니다. 성경은 누가 뭐래도 종국적이고 완전한 계시이기 때문이다.
어떤 목회자가 동성애를 죄라고 하는 목회자들을 엉뚱한 소리하는 이상한 목사 취급하며, 동성애를 성경이 죄라고 한다고 해서
지금도 죄로 규정하면 안 된다고 주장한다. 또 어떤 크리스천 국회의원이 동성애, 차별금지법을 반대하는 목사들 때문에 창피해
죽겠다고 말하는 것도 봤다. 시대에 뒤떨어진 창피한 목사라고 비난당해도 결코 성경을 시대에 따라 마음대로 바꾸는 똑똑한 척하는
목사가 되면 안 된다. 성경은 분명히 동성애를 죄라고 규정하기 때문이다.
똑똑한 척하는 목사들이 성경 안에 나오는 정결법이나 음식 규정과 관련된 내용들이 폐기된 것처럼 동성애에 대한 성경도
폐기되어야 한다고 하고, 여성 안수를 허용한 것처럼 동성애도 허용해야 한다고 하는데 무식한 논리요 억지다. 동성애의 문제는 율법의
문제가 아니고, 직분 문제도 아니다. 이건 하나님의 창조 질서에 대한 도전이다. 동성애가 여러 과학적 논의나 증언들이 그
선천성을 주장한다고 하는데 호기심 또는 성적 타락이나 방종의 결과일 뿐이다.
그들은 이런 것을 교회나 교단이 결정하면 된다고 하지만 아니다. 창조 질서를 고수하는 방향으로 갈 것인지, 아니면 창조의
다양성과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포용해야 할 것인지를 교회가 결정하면 된다는 주장은 한 마디로 오버다. 하나님은 그런 결정권을
교회에 위임하시지 않았다. 하나님은 죄를 죄라고 하고, 잘못된 의와 심판에 대해 세상을 책망할 것을 위임하셨다. 그들은 성경이
반대하기 때문에 나도 반대하는 태도는 성경의 권위에 의지해 자신의 게으름이나 욕구를 정당화하는 무책임한 태도라고 하는데 위임사항과
위임사항이 아닌 것조차 구분하지 못하는 그들의 무지가 답답할 뿐이다.
루터는 종교개혁 때 보름즈 의회에서 “내가 성경의 증거나 명백한 이성에 의해 납득되지 않는다면 나는 단지 교황이나
교회회의만을 신뢰할 수 없다”고 했다. 그 이유는 “그들의 반복적잘못과 모순 때문”이라 했다. 어느 목사의 주장이든 어떤 교단의
결정이든 우리는 성경을 따라야 한다. 루터는 성경을 읽고 또 읽으며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였다. 그리고 시대가 어떠하든
하나님의 말씀을 말씀되게 한다는 자세로 종교개혁을 단행했다. 그의 개혁은 시대에 따라 성경을 재해석하자는 것이 아니라 ‘오직
성경으로 돌아가자’는 것이었다. 개혁 교단의 어떤 목회자는 개혁교회의 핵심 슬로건이 “교회는 항상 개혁되어야 한다”라며 성경도
루터의 말도 시대에 따른 재해석이 필요하다고 하는데 말도 안 된다. 교회는 개혁되어야 하지만 성경은 결코 개혁 대상이 아니다.
그리고 성령의 영감을 받았다며 자기 독단적으로 교리화하는 것도 조심해야 한다. 잘못하면 이단되기 때문이다. 자기 착각을 성령의 감동이라 하는 것처럼 곤란한 게 없다. 기억하라.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세상을 책망하실 것이다.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실 것
예수님은 성령이 세상을 상대로 행하실 일에서 말을 돌려 이제는 성도들에게 행하실 성령의 역사를 말씀하신다. 아직 일러줄 말이
많다는 예수님, 지금은 감당치 못할 것이지만 성령이 오시면 그 분이 진리의 영이시기에 모든 진리로 인도하실 거라고
하신다(13절). 이게 성령의 핵심적 기능이라는 거다.
지금은 성령의 시대다. 성령 시대를 이해하려면 사도행전을 봐야 하는데 사도행전은 오순절 성령 강림 사건으로부터 시작되는,
성령이 교회에 함께 한 역사 즉 성령 행전이다. 그 성령 행전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그래서 우리의 삶의 현장이 ‘Acts
29’ 사도행전 29장부터는 우리가 쓴다는 자세여야 한다.
그리고 본문에 이어지는 13절을 보면 성령이 “장래 일을 너희에게 알리시리라”라고 했다. 점쟁이처럼 미래를 알게 하신다는
말씀이 아니다. 레온 모리스(Leon Morris)는 이 부분을 지금 당장 필요한 것을 성령께서 도우심과 같이 앞으로 필요한 것을
공급하여 주실 것이라는 뜻이라고 했다. 다수의 학자들은 ‘장래 일’을 종말 사건으로 보나 임박한 미래를 뜻할 수도 있다.
중요한 것은 성령이 말씀하신다는 거다. 성령이 말씀하시는 것은 곧 예수님의 말씀과 같다(14절). 예수님은 떠나시지만 성령을
통해 전하고 싶으신 것을 계속 말씀하신다. 이건 지금도 변함이 없다. “성령과 우리는 이 요긴한 것들 외에는 아무 짐도 너희에게
지우지 아니하는 것이 옳은 줄 알았노니”(행15:28), 예루살렘 회의 후에 만든 사도칙령의 시작 부분인데 ‘성령과 우리’라고
표현했다. 성령과 교회라는 이름으로 말씀을 전한 것이다.
그런데 성령의 이런 사역을 오해한 사람들이 있었다. 박윤선 주석에 보면 그들은 사도 이후 시대의 신자들도 사도들과 같은
수준으로 계시받는다고 주장했다. 2세기 몬타누스(Montanus)가 그랬다. 그는 교회의 부패에 대한 반동으로 새 운동을
일으켰는데 보혜사가 임한 시대는 몬타누스 자신으로부터였다고 했다. 그리고 자신이 “아버지요 말씀이요 보혜사”라며 ‘새 예루살렘이
임하였는데 그곳이 바로 부리기아의 페푸자(Pepuza of Phrygia)’라 했다. 그의 제자 맥시밀라(Maximila)라는
여자도 “내가 말씀이요, 영이요, 능력”이라는 둥 자신을 최후의 선지자라며 주님의 재림이 가까웠다고 했다. 망동, 성령의 일이
아니라 마귀 짓이었다. 문제는 21세기가 되었음에도 이런 일을 신천지 같은 데서 그대로 따라하고 있고, 상당수의 성도들이 그
이단들에 미혹되었다는 것이다. 무지한 게 너무 안타깝다.
우리는 13절의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신다”는 말씀을 잘 이해해야 한다. 사단의 꼬임이 아니라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아야 한다. 성령은 모든 진리 가운데로 우리를 인도하기 위해 오셨다.
그리스도를 증거하실 것
성령이 증거하는 죄, 의, 심판, 가르침, 장래일… 죄다 예수님과 관련되어 있다. “그가 스스로 말하지 않고 오직 들은 것을
말하며 장래 일을 너희에게 알리시리라 그가 내 영광을 나타내리니 내 것을 가지고 너희에게 알리시겠음이라”(13-14절), 성령은
자의로 말하지 않는다고 하셨다. 오직 그리스도가 이루신 구속 사업을 설명하실 것이라는 말씀이다. 성령은 아버지와 아들을 떠난
독창적인 진리는 취급하시지 않는다. 오셔서 하실 증언의 핵심은 딱 한 가지, 예수 그리스도다. 자신을 주목하라고 하지 않고, 오직
그리스도를 주목하라고 한다. 그리고 그리스도께 영광을 돌린다.
우리도 그래야 한다. 칼 바르트는 하나님 말씀의 세 가지 양식이라는 표현을 사용했다. 그의 『교회교의학』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계시된 말씀인 그리스도’, ‘기록된 말씀인 성경’, ‘선포된 말씀인 설교’, 3중적 형태로 분류하는데 우리도 그리스도께
집중하는 자세를 배워야 한다. 그리스도는 계시 그 자체, 곧 하나님의 말씀 자체이시고, 성경은 그런 그리스도에 대한 기록이며,
설교는 성경을 바탕으로 그리스도를 선포함으로 살아있는 하나님의 말씀이 되게 하는 사건이기 때문이다. 이 모든 중심에 예수
그리스도가 있다. 그렇다면 해석의 중심도 당연히 그리스도여야 한다. 성령은 그리스도의 사랑, 그리스도의 거룩함, 그리스도의 생명
되심, 그리스도의 진리 되심이 모든 계시의 중심임을 드러낸다. 오직 그리스도였다는 말이다.
죄는 그리스도를 알지 못하는 데서 기원하고, 의는 그리스도를 아는 데서부터 출발한다. 성령이 증거한 핵심인 그리스도, 그
그리스도를 아는 자는 생명을 얻고, 그리스도를 알지 못하는 자는 바로 그 자체로 심판이다. 그리스도 안에 모든 지혜와 지식이 담겨
있기에 그리스도는 우리의 미래가 되신다. 진리의 성령이 오셨기 때문에 알게 된 이 사실들, 여기에 그치지 않고 성령은 앞으로도
계속 우리를 인도하실 것이다.
성령의 4가지 사역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요한복음 16장 13절)
성령께서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증거가 무엇입니까? 진리 가운데로 인도받는 것입니다.
어둠 속에 있다가 빛 가운데로 인도받는 것입니다. 현재 빛 가운데 있다고 할지라도 더 밝은 빛으로 인도받게 됩니다. 이것이
성령께서 하시는 가장 크고 중요한 사역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진리를 깨닫고 온 마음을 다해서 그것을 받아들일 때마다 성령의 큰
역사 속에 있는 것입니다.
“그(성령)가 자의로 말하지 않고 오직 듣는 것을 말하시며“(요한복음 16장 13절)
성령께서는 자기 마음대로 말하지 않습니다. 성령께서는 하늘에 계신 하나님과 예수님과 함께 한뜻으로 역사하시고 한마음으로 우리를 인도해 주십니다.
“장래 일을 너희에게 알리시리라”(요한복음 16장 13절)
성령은 우리에게 장래 일, 즉 예언을 깨닫고 이해할 수 있도록 도와주십니다. 그러므로 성령의 도우심이 없으면, 다니엘서와 요한계시록의 예언을 깨달을 수 없습니다. 오늘날 성령을 체험했다는 그리스도인들이 장래 일을 알려주는 예언에 무지하고 관심을 나타내지 않는 것은 이상한 일입니다.
성령을 체험한다는 말이 무엇입니까? 진리를 깨닫고 진리에 대한 믿음과 확신을 갖는 것입니다. 의의 길로 인도받는 것입니다. 다니엘서와 요한계시록의 예언의 의미를 깨닫고 순종하는 것입니다.
“예언은 언제든지 사람의 뜻으로 낸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의 감동하심을 입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받아 말한 것임이니라”(베드로후서 1장 21절).
예언은 성령의 감동하심을 받은 사람들이 기록한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예언은 성령을 받아야만 이해할 수 있고 올바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내 삶 속에 성령의 임재와 역사가 있어야만 예언을 하나님의 뜻대로 해석할 수 있게 됩니다.
오늘날 우리의 삶 속에서 성령의 역할은 무엇인가?
하나님이 인류에게 주신 모든 은사들 가운데 성령의 임재보다 더 큰 선물은 없습니다. 성령께서는 많은 기능과 역할과 활동을
행하십니다.
첫째, 그분은 어디에서나 모든 사람들의 마음 속에 역사하십니다.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시도록” (요한복음 16:7-11) 이 세상에 성령을 보내시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모든 사람들은 자신이
인정하든 않든, “하나님에 대한 의식”을 가지고 있습니다. 성령께서는 공정하고 충분한 논증으로 하나님의 진리를 사람들의 마음에
적용하여 그들이 죄인이라는 사실을 확신하게 만드십니다. 그 확신에 응답할 때, 우리는 구원에 이르게 됩니다.
우리가 일단 구원을 받고 하나님께 속하게 되면 성령은 영원토록 우리의 마음에 거주하시면서 우리가 영원토록 하나님의 자녀인 사실을
확증하고, 보증하며, 증거하기 위해 인치십니다. 예수께서는 우리를 돕고 위로하고 인도하실 성령을 보내시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리니”(요 14:16). 이 구절에서
“보혜사”로 번역된 헬라어 원어의 의미는 “함께 부름을 받은 자”라는 뜻으로서, 격려하고 위로하는 자라는 뜻입니다. 성령께서는
신자의 마음 속에 영원히 거주하십니다 (롬 8:9; 고전 6:19-20; 고전 12:13). 예수께서는 이 세상을 떠나시면서
만일 우리와 개인적으로 함께 계셨더라면 우리에게 행하셨을 일 들을 수행하도록 자기 대신 성령을 보내셨습니다.
그 일들 중에는 진리는 드러내는 일이 있습니다. 우리 안에 계신 성령께서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말씀을 이해하고 해석할 수
있도록 도우십니다. 예수님은 그분의 제자들에게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라”(요
16:13)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처럼 성령께서는 우리의 마음에 예배와 교리와 그리스도인의 삶에 관련한 하나님의 모든 경륜을
알려주십니다. 성령께서는 궁극적인 인도자이시며, 앞서 가시고, 길을 인도하시고, 장애물을 제거하시고, 깨닫게 하시고, 모든 것을
분명하고 자명하게 알게 하십니다. 성령께서는 모든 영적인 일들에 대해 우리를 인도하십니다. 우리는 이러한 성령의 인도하심이
없이는 오류에 쉽게 빠질 것입니다. 성령께서 진리에 대해서 알려주시는 가장 중요한 부분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가르침입니다(요
15:26; 고전 12:3). 성령은 그리스도의 신성과 성육신, 메시아 되심, 고난과 죽음, 부활과 승천, 하나님의 오른 편에
승귀하심 , 모든 것을 심판하시는 그분의 역할에 대해 우리에게 확신시켜줍니다(요 16:14).
성령의 역할 중 또 다른 역할은 은사를 주는 역할 입니다. 고린도전서 12 장은 이 땅에서 우리가 그리스도의 몸으로서의 기능을
감당할 수 있도록 신자들에게 부여된 영적 은사에 대해 설명합니다. 이 모든 은사들은 우리가 그리스도의 은혜를 나타내고 그분을
영화롭게 하면서 이 세상에서 그리스도의 대사가 되도록 하기 위해 크든 작든 성령께서 주신 은사 입니다.
성령님은 또한 우리 삶에서 열매를 맺는 역할을 하십니다. 그분이 우리 안에 거하시면 우리의 삶 속에서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라는 열매를 맺는 일을 시작하십니다(갈 5:22-23). 이것들은 우리의 육체의 일들이
아닌데, 이는 육체는 이러한 열매를 맺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열매는 우리 삶에서 역사하는 성령의 열매들입니다.
하나님의 성령께서 우리의 삶에 거하시며 이러한 모든 기적적인 기능을 수행하고 우리와 영원히 함께 하시며 결코 우리를 떠나시거나
버리지 않으신다는 사실을 아는 것은 우리에게 큰 기쁨과 위로의 원인이 됩니다. 이 소중한 선물, 곧 우리의 삶에 거하시는 성령님과
그분의 역사로 인하여 하나님께 감사 드립니다.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고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마28:19-20).
▶ 예수님의 계명 (The Great Commandment)
- 예수님의 지상 계명.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마22:37-38).
▶ 산상수훈 (The Sermon on the Mount)
-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말씀. (마태복음 5장-7장).
▶ 대제사장의 기도
- (요한복음 17장)
▶ 예수님의 고별 설교
- 제자들을 위로하시는 말씀. (요한복음 14장).
2. 예루살렘 입성
예수님께서 마지막 때가 되었다고 여러 번 말씀하시면서 고난 주간에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기 위해서 예루살렘으로 들어가실 때,
제자들과 많은 사람들이 자신들의 겉옷을 벗어서 예수님이 가시는 길에 깔고 종려나무 가지를 꺾어 흔들면서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왕으로 오시는 이여"라며 예수님을 맞이한다. 자신의 겉옷을 벗어서 길에 까는 것은 최고의 경의를 표시하는 행동이다.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가를 그들은 의식한 것이다. 예수님이 구약에서 내내 예언되어진 메시아로 오신 분이라는 것을 백성들은 알아차린
것이다.
예수님은 풍랑을 잠잠케 하셨고, 물 위를 걸으셨고, 귀신을 제어하셨고, 병자를 고치셨다. 소경이 눈을 뜨게 하시고, 벙어리가
말을 하게 하시고, 문둥병자를 고치시고, 심지어는 죽은 자를 살리셨다. 또한 물이 변해 포도주가 되게 하시고, 오병이어(←물고기
두 마리와 보리떡 다섯 덩이로 오천 명 이상을 먹이심)의 기적을 행하셨다. 이러한 예수님을 곁에서 지켜보고 구약성경을 잘 아는
제자들은 구약 곳곳에 있는 예언을 기억하고 있었다. 예수님이 오시면 만왕의 왕 만주의 주로서 모든 억압과 눌림과 슬픔과
억울함으로부터 이스라엘 백성들을 건져서 회복시키시고, 이스라엘을 열국 위에 뛰어나게 해주시고, 세상을 평화롭고 아름답게 다스리실
것이라고 제자들은 생각했다. 예수님이 십자가 달려 죽으러 예루살렘으로 들어가실 때에도 제자들은 예수님이 왕으로 들어가시는 줄
알았다.
수천 년 동안 자신들과 조상들이 그토록 기다리던 예수님이 오셔서 기적들을 보여주시고, 이제 그 때가 되었다고 말씀하시자
제자들은 흥분했다. 예수님께서는 세상을 떠나 하나님 아버지께로 돌아갈 때가 이른 줄 아시고 (요13:1), 사랑하는 열 두
제자들과 마지막 식사를 나누셨다. 그 순간까지도 제자들은 예수님이 왕이 되시면 누가 더 높은 자리를 차지하느냐를 놓고 다투었다
(눅22:24). 그런데 제자들의 흥분과 기대와는 달리 예수님은 "내가 고난을 받을 것이다, 내가 모욕과 고초를 받을 것이다,
내가 죽을 것이다, 그리고 부활하고 떠날 것이다" 라고 말씀하셨다. '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 주를 위하여 내 목숨을 버리겠나이다'
(요13:36-37)라는 베드로의 질문에 대한 예수님이 대답의 요한복음 14장에 나온다.
3. 예수님의 고별 설교
1) 근심하지 말라
예수님이 떠나신다는 말씀에 제자들이 근심하기 시작하자, '내가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러 가노니 너희는 근심하지 말라'
(요14:1-2)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신다. 지금 예수님께서는 하늘에서 천사를 움직여서 천국을 건설하시고, 전체를 감독하고 계신다.
예수님은 우리를 위해 우리가 영원히 거할 처소인 본향을 예비하고 계신다. 인간은 영생한다. 몸은 흙으로 돌아가지만 영혼은 절대로
죽지 않는다. 예수님을 믿는 우리에게는 가장 이상적인 세계(←본향)에서의 영생이 주어진다.
천국을 짓는 재료는 땅에 있는 우리를 통해서 올라간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건강과 재능과 시간과 돈을 주신 이유는 이 모든
것을 가지고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를 준비하라고 맡기신 것이다. 이것의 중요함을 예수님은 옳지 않은 청지기의
비유(눅16:1-14)를 통해 말씀하신다. 이 청지기의 행위는 나쁘지만, 지혜로운 자는 궁극적인 목표를 끝까지 바라보고 나아간다는
것이 예수님이 말씀하시고자 하는 초점이다.
우리의 본향은 하늘나라이다. 하나님께서는 나그네 인생을 사는 우리에게 몸과 물질과 은사와 여러 사람과 많은 것들을 주셨다.
우리가 예수님의 마음으로 예수님의 손과 발이 되어서 그것들을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하나님의 백성들을 위해, 교회를 위해, 가난한
자들을 위해 베풀 때 우리가 가진 것을 영원한 것으로 바꾸는 역사가 일어나는 것이다.
이 세상은 나그네 세상이고, 우리의 몸은 죽어 흙으로 돌아간다. 사는 동안 가장 중요한 것은 영혼을 구원하는 일이다.
예수님을 알지 못하는 이들에게 예수님을 전하고, 불쌍한 영혼을 도와야 한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것을 이웃들과 나누면서
유익하게 사용해야 한다. 예수님께서 다시 오시면 예수님 앞에서 우리의 인생을 결산해야 한다. 어리석은 삶을 살지 말아야 한다.
달란트의 비유 (마25:14-30)에서 처럼 우리가 의미 있는 인생을 살았을 때 하나님은 상으로 갚아주신다. '가서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 (요14:3).
2)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않겠다
현대인들은 고독하다. 자기밖에 없다. 주위에 시달릴 정도로 사람들이 넘쳐나고, 우리의 몸을 자극시키는 것이 너무도
많은(텔레비전, 컴퓨터 게임, 술, 오락...) 세상이다. 그럼에도 현대인은 군중 속에서 고독하다. 그런데 고독을 느끼는 이가
지혜로운 사람이다. 나를 돌아보아야 한다. 마귀에게 속아 정신없이 인생을 소비하는 어리석은 사람이 되지 말고 고독해져야 한다.
현대인은 고독 속에서 살아가지만 그 고독에서 벗어나는 길은 예수님의 몸인 교회 안으로 들어오는 것이다. 그리고 교회 안으로
들어오는 것에 그치지 말고, 교회 속 소그룹(셀-목장교회)에 들어가 삶의 깊은 것들을 나누고 성령으로 하나 되는 역사를 경험해야
한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망할 수밖에 없고 문제만 일으키는 내가 죽고, 가장 귀하고 아름다운 모습의 내가 살아나는 것이다.
예수님을 믿고 침례를 받을 때, 완전히 물 속(←예수님의 죽음을 상징)에 들어갔다가 물 밖(←예수님의 부활을 상징)으로 나온다. 물속으로 들어갈 때는 내 멋대로 살던 나, 고독하던 내가 죽는 것이다. 그러나 물 밖으로 나올 때는 예수님의 몸 안으로 부활하는
것이기 때문에 예수님과 하나가 되어 고독하지 않게 된다. 예수님은 머리시고, 우리는 예수님의 몸인 교회의 지체로서 부활하는
것이다. 성령님이 우리 안에 함께 계시고, 피를 같이 나눈 지체들이 생기기 때문에 우리는 고독하지 않다.
교회 안으로 들어온 사람은 다른 지체들과 성령님(←예수님의 영)을 통해 연결 되어야 한다. 사람들과의 관계는 간접적이어야 하고, 주님과의 관계에서만 직접적이어야 한다. 가정에서도
마찬가지이다. 부부도, 부모와 자녀도, 성령님을 통해서 상대해야 문제가 생기지 않는다. 모든 인간관계는 성령님을 통해서
연결되어야 한다. 인간의 모든 문제는 직접 서로 연결되는 데에서 비롯한다. 사랑의 트라이앵글 정점에 성령님이 계셔야 한다.
성령님을 통하지 않고 직접 연결되면 서로 실망하고 상처받는다. 각각 성령님께로 가까이 갈수록 둘의 관계는 점점 가까워진다.
사랑의 주님, 거룩하신 주님 안으로 들어간다는 것은 우리의 불순물(악함, 탐욕, 시기, 질투, 열등감...)이 다
빠져나가고, 주님 안에서 진정한 사랑을 만나게 된다는 것이다. 예수님은 나보다도 더 나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당신의 생명까지도
아끼지 않으시고 우리에게 주셨다. 예수님은 사심이 없으시다. 오로지 우리만 생각하신다 (←아가페 사랑).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
안에서 진정한 사랑을 찾을 수 있다.
예수님은 우리를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않으시고 (요14:18), 보혜사 성령을 주사 영원토록 우리와 함께 있게 하리라
(요14:16)고 말씀하셨다. 예수님을 믿어 우리의 옛사람이 죽고 주님 안에서 우리가 거듭나게 될 때,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베풀어주시기를 원하시고 우리가 가장 소망하는 귀하고 아름다운 인생이 펼쳐지게 된다.
3) 내 말을 믿으라
우리는 내가 누구인지, 인생이 무엇인지, 세상이 왜 만들어졌는지, 최고의 가치가 무엇인지도 모른 채 살아간다. 내가 나를 찾으려고 애를 쓰면 쓸수록 더 모르게 되고 더 길을 잃어버린다.
나를 찾기에 지치고 좌절하고 포기했을 때, 예수님만을 열심히 믿고 성경을 열심히 보는 것을 통해서 답이 선명해진다. 그 의미들을
저절로 알게 된다. '하나님의 나라를 너에게 주기 위해서 창세 전에 내가 너를 자녀로 택하였다. 너를 위해 내 생명까지도 아끼지
않았을 만큼 너는 소중한 존재이다'라는 성경 말씀 안에서 내가 누구인지를, 인생을 왜 주셨는지, 최고의 가치가 무엇인지가
드러난다. 나를 찾으려면 주님 안으로 들어가야 한다.
눈이 자기 눈을 볼 수 없다. 숲 속에서 숲을 볼 수 없다. 숲 밖으로 나와야 비로소 숲이 볼 수 있다. 인간을 제대로 알려면 인간의 차원으로부터 벗어나서 인간을 만드신 하나님의 차원에서 바라보아야 한다. 내가 나를 찾으려 하지 말고 하나님 안에서 나를 찾아야 원하는 답을 얻게 된다.
예수님은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눅9:23)고
말씀하셨다. 그러나 제자들은 자기를 부인하지 않았다. 자기가 누구인지도 모르고 자기 자신을 사랑하지도 않으면서, 제자들은 자기
생각과 자기 욕심으로 예수님을 따라갔다.
예수님은 많은 사람 가운데서 열 두 제자를 택하셨고, 그중에서도 가롯 유다를 뽑아서 돈궤(재정)를 맡게 하셨다. 가롯 유다는
예수님의 제자 중 가장 똑똑한 제자로 인정받고 가장 가까이에서 예수님을 모셨다. 그러나 가롯 유다는 예수님의 말씀을 믿은 것이
아니었다. 가롯 유다는 예수님이 제자들이 기대하는 메시아와는 사뭇 다르다는 것을 알아차리고 예수님을 은 삼십에 팔았다. 지나치게
똑똑했던 가롯 유다는 예수님을 믿지 않았고, 자기 생각과 욕심에 빠져 있었기 때문에 예수님을 알아차리질 못했다. 우리는 예수님의
말씀대로 살아야 한다. 우리의 생각과 욕심대로 살아서는 안된다. 오늘날 한국 교회는 예수님의 말씀대로 헌신하고 희생하기 보다는
자기 욕심을 채우는데 급급하기에, 세상 사람들에게 수치를 당하고 욕을 먹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일확천금을 꿈꾸지 말아야 한다 (예 : 다단계, 주식 투기). 정직하고 진실하고 성실하게 살아가는 것이 성경의 법칙이고 하늘나라의 법칙이다. 또한 자연의 질서이고 인간 세상의 질서이다. 기도하며 충성되게 살아가면 하나님이 길을 열어주신다. 축복은 하나님께로부터 와야 한다.
내 생각, 내 욕심으로 오는 것은 축복이 아니라 저주이다. 예수님을 믿으면 반드시 축복을 받게 되어 있다. 정직하고 진실하고
성실하게 살면 하나님이 우리가 감당할 수 없을 정도의 30배, 60배, 100배의 큰 축복을 주신다. 이것이 하나님의 약속이다. 중요한 것은 축복을 받고 난 후이다.
축복을 받고 난 후에 자기 생각과 욕심에 빠져서 축복을 저주로 만들지 말아야 한다. 가롯 유다는 사도로 불림을 받았고, 사도
중에서도 제일 귀한 자리를 맡는 축복을 받았다. 그러나 축복을 받고 난 후에 그것을 제대로 관리하지 못했기에 축복이 저주가
되었다. 하나님께서 집시처럼 방랑하는 무리였던 이스라엘 백성들을 뽑아서 하나님의 백성을 삼아 귀한 이스라엘 나라로 축복해 주셨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축복을 관리하지 못하고 방탕하다가 멸망했다. 내 힘으로 축복을 이루면 반드시 망한다. 그러나 하나님께로부터
축복을 받으면 하나님의 뜻대로 축복을 관리하게 되어 더 귀한 축복이 오게 된다. 이중의 축복을 받게 되는 것이다. 첫 번째 축복은
진짜 축복이 아니다. 축복을 받은 후에 그것을 갖고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서 오는 축복이 진짜 축복이다.
4. 어떻게 살고 있는가?
우리는 어떻게 살고 있는가? 예수님을 따르며 예수님의 말씀대로 살고 있는가? 아니면 내 생각대로 내 욕심대로 살고 있는가?
나보다 더 나를 사랑하시고, 나보다 더 나를 잘 아시고, 나를 위해 생명까지도 아끼지 아니하신 예수님을 사랑하며 예수님의
말씀을 따라 살 때 우리 인생은 가장 값진 인생으로 바뀌게 된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이러한 축복을 허락하시기 위해서 세상에
오시고,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고, 부활하신 것이다. 예수님은 부활을 통해서 예수님의 말씀이 거짓이 아님을 보여주셨다. 부활
주일에 예수님의 부활을 생각하면서 예수님께서 돌아가시기 전에 '근심하지 말라.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않겠다. 내 말을 믿으라'고
하신 고별 설교를 마음 깊이 간직하는 우리가 되어야 한다.
우리가 예수님의 말씀을 믿고 예수님을 따를 때, 그 약속하신 것이 그대로 이루어진다. 예수님이 살아계실 때는 잘 이해하지
못했지만 예수님께서 부활 승천하시고 성령님을 받고 난 후에 제자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따라서 살았고, 그들은 인류에게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송도산성교회에 속한 모든 하나님의 백성들도 나의 생각 나의 욕심을 내려놓고 예수님을 사랑하며 예수님의 말씀을 따라
살아가자. 이렇게 할 때 우리의 삶은 가치 있고 복되고 의미 있게 된다. 부활의 권능과 부활의 축복으로 예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해주실 것이다.
《예수의 고별 설교-상》
예수의 고별 설교는 산상 설교(마 5-7장)와 더불어 2대(二大) 설교라 할 수 있다. 요한복음 14-16장의 고별 설교는 다른
복음서들에는 평행본문이 없는 요한의 특수 본문으로, 복음서의 신학적 정점 혹은 복음서 신학의 핵심이라고 불린다. 14장은 위로의
말씀, 15장은 교훈의 말씀, 16장은 확증의 말씀이라 할 수 있다. 저자는 많은 주해(주석)에서 나타난 각기 성취한 다양한 연구
내용을 기술하며 고별 설교를 해설하고자 했다.
요한복음 13장~16장은 예수님의 고별설교라고 배웠습니다. 여기에서 하신 예수님의 말씀이 심각하게 들립니다.
결국 사랑에 대한 설교임을 깨닫게 됩니다. 예수님의 고별설교라는데 의미를 둔 구체적인 설교말씀을 듣고 싶습니다. 마지막으로
16장을 설명해 주세요. 특히 여자의 해산의 고통과 출산의 기쁨에 대하여 설명해 주세요.
예수님께서 저들을 떠나신다고 하시니 제자들은 여전히 근심에 잠겨있게 됩니다. 6절에 “도리어 내가 이 말을 하므로 너희 마음에
근심이 가득하였도다”하셨습니다. 하지만 20절에서 “너희는 근심하겠으나 너희 근심이 도리어 기쁨이 되리라”하시고, 설명하시기를
“여자가 해산하게 되면 그 때가 이르렀으므로 근심하나 아기를 낳으면 세상에 사람 난 기쁨으로 말미암아 그 고통을 다시 기억하지
아니하였느니라 지금은 너희가 근심하나 내가 다시 너희를 보리니 너희 마음이 기쁠 것이요 너희 기쁨을 빼앗을 자가 없으리라”(요
16:21~22)
16장에서는 예수님이 고난과 영광에 대한 말씀을 하십니다. 분명히 여자가 임신하여 아기를 낳을 때가 되면 근심할 수밖에 없습니다.
아기 낳는 일이 쉬운 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근심걱정에 쌓이는 거지요. 그러나 아기를 낳게 되면 아기 낳은 기쁨으로
고난을 잊어버린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예수님이 왜 이런 말씀을 하십니까?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을 연상시키는 것입니다.
이때 제자들의 믿음은 눈에 보이는 것을 따르는 어린아이와 같은 믿음이었습니다. 어린아이가 어떤 아이입니까? 엄마 손만 잡고 졸졸
따라다니는 것이 아이입니다. 한순간이라도 엄마가 안 보이면 불안합니다. 그러나 장성하게 되면 본인의 존재와 엄마가 어떤 분인가를
알고 눈에 보이든 안보이든 관계로 살아갑니다.
해산이란 표현은 창세기 3장에 나오는 죄를 범한 인류 최초의 여자 하와에게 선언되는 형벌의 내용인 ‘네게 임신하는 고통을 크게
더하리니’라는 저주와 관련을 갖고, 근심이란 용어 역시 창세기 3장에 나오는 ‘수고하고’와 의미가 통하는 것입니다. 아이가
태어나면 해산의 아픔으로 인한 근심이 사라지는 것과 같이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 이후에 죄로 인한 사망이라는 인류의 근본 문제가
해결될 것임을 예언하신 것입니다.
21절 “세상에 사람 난 기쁨을 인하여” 해산하는 여인의 고통이 아기를 낳는 순간에 기쁨으로 바뀌듯이 제자들이 겪는 내면적 고통도
조금만 있으면 기쁨으로 전환된다는 것이 본 절에서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요지입니다. 부활하신 주님을 뵙게 될 때에 그리고 성령이
강림하실 때에 그들의 근심은 도리어 큰 기쁨으로 바뀌게 될 것인데, 그들의 지각은 아직 여기까지 이르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니 제자들은 주님이 떠나신다하니 걱정이 태산 같았던 것입니다. 그 때 주님은 또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22절에 “지금은 너희가
근심하나 내가 다시 너희를 보리니 너희 마음이 기쁠 것이요 너희 기쁨을 빼앗을 자가 없으리라” 그리스도의 부활로 인하여
성도들에게 약속된 기쁨은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그리스도의 임재에서 비롯되는 기쁨입니다. ‘내가 다시 너희를 보리니’라는
표현입니다.
사망권세를 이기시고 부활하심으로 제자들을 만나시고 그 이후로 승천하셔서 이제 더 이상 육체로는 제자들과 함께하지 못하지만 성령을
보내셔서 지키시고 보호하시고 인도하시고 임마누엘 하신다는 것입니다. ‘빼앗을 자가 없으리라’는 말씀은 세상이 주는 기쁨은
순간적이고 또 없어지기도 하지만 주님이 주시는 기쁨은 영원하다는 것입니다. 성도의 기쁨은 그리스도에게 근원을 둔 것이어서 영원하며
아무도 이 기쁨을 빼앗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성도가 세상의 믿지 않는 자 보다 복된 까닭이 여기에 있습니다.
보혜사(3875) 파라클레토스(paraklētŏs) παράκλητος, ου, ὁ
Storng number 3875
1. 남을 위해 나타난 자. 2. 요일 2:1. 3. 요 14:16, 26 Pronunciation
[ paraklētŏs ] Etymology / 3870에서 유래
1. 남을 위해 나타난 자, 중재자, 조정자, 돕는 자, 변호자, 위로 자, 중보자.
a. [그리스도를 가리켜서] 요일2:1.
b. [성령을 가리켜서] 요14:16,26, 15:26, 16:7.
관련 성경 / 보혜사(요 14:16, 26, 16:7), 대언자(요일 2:1).
진리의 성령(토 프뉴마 테스 알레데이아스)
호 프뉴마 호 알레데이아
4151 225
성령(프뉴마. pnĕnuma) πνεῦμα, ατος, τό
Storng number 4151
1. 불기. 2. 바람. 3. 숨 내쉬기 Pronunciation
[ pnĕnuma ]
Etymology / 4154에서 유래
1. 불기, 숨.
a. 바람, 요3:8, 히1:7.
b. 숨 내쉬기, 숨, 살후2:8.
2. 기운, 목숨, 생명, 영혼, 마27:50, 눅8:55, 행7:59, 히12:23.
3. [인간의 인격의 일부분으로서의] 영.
a. 고후 7:1, 골 2:5.
b. [통찰력, 감정, 의지의 원천 또는 좌 소, 사람의 내적 생활의 대표적인 부분] 막2:8, 눅1:47, 행17:16, 롬8:16, 고전16:18.
c. 영적 상태, 마음의 상태, 성질, 기질, 의향, 고전4:21, 갈6:1, 엡4:23, 벧전3:4.
4. [독립적 존재로서의] 영.
a. 하나님을 가리키는 것, 요4:24.
b. 영, 영물, 행23:8,9, 히1:14, 12:9, 계1:4, 3:1.
c. 유령, 눅24:37,39.
d. 악한 영, 귀신, 마12:43, 막1:23, 눅8:29, 행5:16.
5. [하나님과 하나님 아닌 모든 것과를 구별짓는] 참된 영.
a. 하나님의 영, 주의 영, 고전2:11, 롬8:11, 살전4:8.
b. 그리스도의 영, 주님의 영, 행16:7, 고후3:17, 갈4:6, 빌1:19.
c. 성령, 마12:32, 눅2:26, 행2:4, 히2:4.
관련 성경 / 성령(마4:1, 막1:10, 눅2:27),
심령(마5:3, 눅1:17), 귀신(마8:16, 눅4:36, 요16:18), 마음(마26:41, 막8:12), 영혼(마27:50,
눅23:46, 요19:30), 중심(막2:8), 하나님의 말씀(행18: 5), 영(눅24:37,39, 엡1:17),
빛(엡5:9), 한마음(빌1:27), 기운(살후2:8), 바람(히1:7), 생 기(계11:11, 13:15).
진리(알레데이아. alēthĕia) ἀλήθεια, ας, ἡ
Storng number 225
관련 성경 / 참(마22:16), 사실(막5:33), 진리(요1:14, 4:24, 롬2:2), 실상(요16:7), 과연(행4:27), 참 됨(행26:25), 진실하심(롬15:8), [동] 진실 하다(롬15:8), 참되다(롬3:7).
이 세상 사람들이 사도들(신자들)을 미워해도(18-25). 그들은 성령님의 능력을 받으므로 세상에서
물러서지 않고 도리어 세상을 향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게 된다. 여기 그리스도에 대한 성령의 증거와 사도들의 증거가 함께
기록되어 있다. 이 두 증거는 실상 일체이다. 성령은 사도들을 통하여 역사하시며 증거하실 것이다(Wikenhauser,
Schlatter).
너희도 처음부터 나와 함께 있었으므로 이것은, 그들이 예수님을 친히 목도한 사실을 가리키는데, 그것이
사도의 자격이다(고전 9:1; 행10:41). 그러나 그들이 이와 같은 자격으로만 증인이 된 것은 아니다. 그들은, 성령의 권능을
받아서 그리스도를 참으로 증거하게 되었다. 행 1:8
“인간에게 있어서 자기의 죄에 대해서 안다는 것은 괴로운 일이다. 허나 대신 그 죄에서 자기가 해방되어 감을 아는
일은 커다란 기쁨이다. 밤이 없다면 우리는 햇빛을 주는 기쁨을 모를 것이다. 죄가 없다면 인간은 정의의 기쁨을 모를 것이다.”
“남에게 대한 죄와 자기에게 대한 죄가 있다. 남에게 대한 죄는 남의 내부에 있는 하나님의 영혼을 존경하지 않기 때문에 생긴다. 자기에게 대한 죄는 자기 속에 있는 하나님의 영혼을 존경하지 않기 때문에 생긴다.
“죄를 범하는 일은 인간이 하는 일이며, 자기 죄를 정당화하려는 것은 악마의 일이다.”
* 자료출처 / 세계를 움직인 명언. p. 157 톨스토이
진리의 영이신 성령께서 역사하시는 방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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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을 받으면 성령께서 우리 속에서 어떤 일을 하실까요? “내가 그(성령)를 너희에게로 보내리니 그가 와서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시리라” (요한복음 16장 7절, 8절).
여기서 성령께서 죄와 의와 심판에 대해서 세상을 책망하신다 했는데, 이 말씀의 의미가 무엇입니까? 성령께서는 우리에게 과거에 범한 죄를 고백하고 회개할 것을 호소하시고, 현재 의로운 삶을 살아야 한다는 양심의 자각을 주시며, 미래에 받게 될 심판을 깨닫게 해주신다는 뜻입니다. 다시 말하자면, 성도들이 구원의 경험을 유지할 수 있도록 지속적으로 도와주신다는 뜻입니다. 유혹이 우리에게 다가올 때, 성령께서는 의의 음성을 양심 속에서 들려주십니다. “이 길이 정로니 이 길로 가라”고 말씀해 주십니다. 육체의 정욕을 십자가에 못 박고 유혹을 물리치라고 호소해 주십니다.
그리스도 없이 죄 사함을 받을 수 없는 것처럼 성령의 역사가 없으면 회개할 수 없습니다.
성령께서 우리의 마음을 감동시키시면 마음속에 품고 있는 죄가 어떤 것인지 분명하게 보게 됩니다. 성령께서 심령의 구석구석을
살펴주시기 때문에 어둠 속에 감추인 것들이 드러나게 됩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거룩함과 의를 깨닫게 되고 자신의 죄악과 더러움을
보게 됩니다. 그리하여 간절한 마음으로 예수께 나가 부복하게 됩니다. 그리스도 십자가의 보혈과
사랑에 의지해서 죄를 용서받고 정결케 되어 하늘과 교통할 수 있기를 사모하게 됩니다. 온 마음을 다하여 하나님의 말씀과 계명에
순종하고자 하는 거룩한 충동에 사로잡히게 됩니다. 이것이 성령의 큰 역사를 받고 있는 그리스도인의 경험입니다.
예수께서는 2천 년 전에 제자들과 함께 살면서 그들을 가르치고 인도하셨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제자들을 도우셨던 방법 그대로 성령께서 성도들을 도와주십니다.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시리니”(요 14:16).
예수께서는 성령을 “다른 보혜사”라고 부르셨습니다. 왜 그렇게 부르셨을까요? 왜냐하면 예수님 자신이 제자들에게 보혜사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께서 하늘로 승천한 후에는 예수님을 대신할 또 하나의 보혜사를 그들에게 보내 주시겠다고 약속하신 것입니다.
“보혜사”란 영어로 “Comforter”입니다. “Comforter”라는 단어의 뜻은 “필요할 때 도움을 주는 조력자”입니다. 다시 말해서 “Comforter”란 “항상 우리 곁에 있어서 위로하며 길을 인도해 주는 분”이라는 뜻입니다.
예수께서 항상 제자들 곁에 계셔서 진리를 가르치고, 깨닫게 하시고 해야 할 일과 가야할 길을 보여주셨던 것처럼, 성령께서도 그와
동일한 역할을 해주신다는 의미에서 성령을 보혜사(Comforter)로 소개하신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지금 하늘에 계시지만
성령께서 우리 곁에서 계셔서 우리를 위로하고 인도하고 가르쳐 주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온 마음을 다해서 성령을 구해야
합니다. 성령의 임재와 친숙해져야만 합니다. 양심을 통해서 들려오는 성령의 음성을 들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요한복음 16:12~15)
요한복음 14장부터 16장 사이에 보면 성령에 관한 예수님의 언급이 다섯 차례나 나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언급을 통해 제자들에게 성령이 어떤 분이신지를 보다 확실하게 가르쳐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집중적으로 성령에 관해 말씀하신 것은 그가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실 일이 가까웠을 때입니다. 예루살렘에서는 예수님을 잡아 죽이려는 모의가 시작되었습니다(요11:53, 57).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이 당신뿐 아니라 당신의 제자들도 박해할 것이고(15:20) 그들을 출교할 뿐 아니라 죽이기까지 할 것을 예견하셨습니다(요16:1-2). 성령에 관한 예수님의 말씀이 연달아 나온 것은 바로 이런 때였습니다.
그 첫 번째 말씀을 우리는 14:16-18에서 만납니다: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리니 그는 진리의 영이라. 세상은 능히 그를 받지 못하나니 이는 그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라. 그러나 너희는 그를 아나니 그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 내가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아니하고 너희에게로 오리라.”
여기서 우리는 먼저 성령이 예수님 즉 아들 하나님께서 아버지 하나님께 간구하심으로써 아버지께서 제자들에게 주시는 분이셨음을 알 수 있습니다. 둘째로, 예수님께서 성령을 “또 다른 보혜사”라고 말씀하신 것은 자신과 성령께서 동격임을 뜻하는 것으로 이해하게 합니다. 셋째로, 성령께서는 신적 본성에 있어서 아들과 동격이실 뿐 아니라 그 하시는 일에 있어서도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사역의 연장선상에 계심을 보게 됩니다.
16절 하반절에서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리니” 하신 말씀이나 17절 하반절에서 “그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 하신 것은 성령께서 예수님의 뒤를 이어 그처럼 제자들과 함께하실 분이심을 밝혀주신 것입니다.
또 18절에서 “내가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아니하고 너희에게로 오리라.” 하신 것은 비록 아들은 제자들을 떠나 아버지에게로 가시지만 성령께서 오셔서 제자들과 함께하시면 그것은 그들이 결코 고아와 같이 버려 둔 바 되지 않는 것이며 아들 자신이 다시 오셔서 함께하시는 것과 다름이 없다는 말씀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성령의 사역과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 사이의 본질적 동질성을 보게 됩니다.
넷째로, 성령께서는 진리의 영이심을 배웁니다. 다섯째로, 성령께서는 제자들에게 위로자이심을 깨닫습니다. 17절 상반절에서 예수님께서는 성령을 이 세상과 대치관계에 두시며 말씀하셨습니다: “그는 진리의 영이라. 세상은 능히 그를 받지 못하나니 이는 그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라.” 세상은 거짓에 속해있습니다. 그러기에 세상은 진리의 영을 받아들이려 하지 않을 것이며 받아들일 수도 없습니다. 거짓된 세상은 성령을 거부하며 배척할 것이고 그러기에 성령께서 함께하실 주의 제자들에게도 적대적일 것입니다. 따라서 주의 제자들은 이 세상에서는 버려진 고아와도 같을 것입니다. 그러나 성령께서 오셔서 그들과 함께 하신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함께하시는 것과 마찬가지라는 사실은 그들에게 큰 위로가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뒤이어 듣는 성령에 관한 말씀은 14:26-27에 있습니다: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리라.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 이 말씀에 따르면 성령은 아버지 하나님께서 보내십니다. 그런데 “내 이름으로” 즉 아들의 이름으로 보내십니다.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이라 하신 것은 일단 앞선 16절에서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하신 말씀과 연결해서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즉 성령을 보내주실 것을 아들이 구하였기에 보내신다는 뜻이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더 나아가 “아들의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이란 뜻은 성령이 아들로부터 받은 사명을 수행할 분이시라는 것입니다. 누구의 이름으로 보냄을 받은 자는 그 보낸 이의 뜻을 행하는 임무를 가진 사람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다시 한 번 성령의 사역은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과 동일한 사역일 수밖에 없음을 확인하게 됩니다. 성령께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신 일과 다른 일을 하시기 위해 오신 것이 아닙니다. 성령께서는 아들을 대체하신 것이 아니라 그의 사역을 계승하시며 완성하시는 것입니다. 이 말씀에서도 성령은 진리의 영이심이 재확인됩니다.
26절에서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리라.”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앞에서는 성령을 거짓된 세상에 맞서는 진리의 영으로 언급하셨지만, 여기서는 당신께서 가르치신 모든 진리의 말씀을 제자들로 하여금 바르게 깨닫게 하는 영으로 설명하신 것입니다. 여기서도 성령은 예수 그리스도를 대체하시는 분이 아니라 그를 계승하시는 분이심을 확인하게 됩니다. 성령께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미처 가르치지 못하신 새로운 진리를 가르치시는 분이 아니라 그가 가르치신 모든 진리를 바르게 깨닫게 하시는 분이시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말씀에서도 성령은 위로자로 드러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주어진 진리를 성령에 의해 깨닫는 것만이 거짓되고 적대적인 이 세상을 이길 수 있는 길입니다. 또 그 진리를 깨달은 사람만이 언제 어디서나 참 평안을 누릴 수 있는 것입니다.
27절에서 예수님께서는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 하셨는데 그것은 성령에 의해 그렇게 되리라는 말씀으로 받아들여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성령은 참 위로자이신 것입니다.
계속해서 주어지는 성령에 관한 예수님의 말씀은 요15:26-27에서 찾습니다: “내가 아버지께로부터 너희에게 보낼 보혜사 곧 아버지께로부터 나오시는 진리의 성령이 오실 때에 그가 나를 증언하실 것이요 너희도 처음부터 나와 함께 있었으므로 증언하느니라.” 이 말씀에서 예수님께서는 처음에는 “내가 아버지께로부터 너희에게 보낼 보혜사”라고 하심으로써 성령을 보내시는 주체로서 당신 자신을 강조하셨지만 곧 이어서 “아버지께로부터 나오시는 진리의 성령”이라고 덧붙이심으로써 성령을 보내시는 주체로서의 아버지와 아들의 역할의 균형을 잡으셨습니다. 그리고 여기서도 성령을 “진리의 성령”으로 재확인해주셨습니다.
또한 “진리의 성령”의 의미를 두 가지로 설명해주셨습니다. 그 하나는 진리 그 자체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제자들에게 증언하신다는 뜻으로 “진리의 성령”입니다. 다른 하나는 예수 그리스도를 제자들에게 증언할 뿐 아니라 그 제자들로 하여금 예수 그리스도와 그 안에서 드러난 진리를 증언하게 하신다는 뜻으로 “진리의 성령”입니다. “진리의 성령이 오실 때에 그가 나를 증언하실 것이요” 하신 다음에 이어서 “너희도 처음부터 나와 함께 있었으므로 증언하느니라.” 하신 것입니다. 성령께서는 예수님의 뒤를 이어 오셔서 제자들과 함께하시며 그들이 주님으로부터 받은 증언의 사명을 수행할 수 있도록 동역하시는 분이십니다.
이 요15:26-27의 말씀은 바로 앞에 있는 23-25절에 이어서 읽어야 그 의미가 더 생생하게 살아날 것입니다: “나를 미워하는 자는 또 내 아버지를 미워하느니라. 내가 아무도 못한 일을 그들 중에서 하지 아니하였더라면 그들에게 죄가 없었으려니와 지금은 그들이 나와 내 아버지를 보았고 또 미워하였도다. 그러나 이는 그들의 율법에 기록된 바 ‘그들이 이유 없이 나를 미워하였다’ 한 말을 응하게 하려 함이라.” 예수님의 제자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증언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제자들이 상대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증언해야 했던 세상은 그들을 미워하는 세상이었습니다.
하나님을 미워하고 그의 아들을 미워하며 따라서 그의 제자들 또한 미워하는 세상이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이유 없이 미워하는(요15:25) 세상을 향해 그를 증언한다는 일은 죽음을 무릅쓰는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일을 할 수 있도록 예수 그리스도를 제자들에게 강하게 증언하실 이가 성령이시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진리의 성령이 오실 때에 그가 나를 증언하실 것이요 너희도 처음부터 나와 함께 있었으므로 증언하느니라.” 하셨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공생애를 시작하실 때 처음부터 함께했었습니다. 그 누구보다도 오랫동안 예수님과 함께하며 그에게서 듣고 배운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것 가지고 예수 그리스도를 증언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듣기는 들으면서도 깨닫지 못하고 있었으며, 깨닫는다 해도 두려워서 증언할 생각을 하지 못할 것임을 예수님께서는 알고 계셨습니다.
그래서 오직 성령이 임하지 않고는 진리의 참된 깨달음도 그 진리와 깨달음의 증언도 할 수 없는 일이라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제자들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증언하여 깨닫게 하실 것이고, 그의 증언은 너무나 강력하고 확실하여 제자들도 세상을 향해 나아가 그 증언대로 증언하지 않을 수 없으리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성령은 힘 있는 증언자이시며 힘 있게 증언하게 하시는 진리의 영이심을 주님께서는 가르쳐주신 것입니다.
성령에 관한 예수님의 또 다른 말씀은 오늘 본문 말씀을 바로 앞서는 요16:1-11 가운데 들어있습니다. 그중 1-3절을 보면 예수님께서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너희로 실족하지 않게 하려 함이니 사람들이 너희를 출교할 뿐 아니라 때가 이르면 무릇 너희를 죽이는 자가 생각하기를 ‘이것이 하나님을 섬기는 일이라’ 하리라. 그들이 이런 일을 할 것은 아버지와 나를 알지 못함이라.” 하셨습니다. 성령께서 오실 그때는 예수님의 제자들이 실족하기 쉬운 때라는 말씀입니다. 제자들이 출교를 당할 뿐 아니라 죽음까지 당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무릇 너희를 죽이는 자가 생각하기를 ‘이것이 하나님을 섬기는 일이라’ 하리라.” 하신 것은 주의 제자들을 출교시키고 죽이는 자들이 그것을 신앙의 이름으로 하리라는 말씀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하나님과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없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그들이 이런 일을 할 것은 아버지와 나를 알지 못함이라.” 이렇게 무지한 자들에 의해 부당한 심판을 받아야 할 때에 주님께서는 당신을 보내신 이에게로 가시겠다고 하심으로 제자들은 근심에 쌓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도 말씀하셨습니다.
6절입니다: “내가 이 말을 하므로 너희 마음에 근심이 가득하였도다.” 그러나 근심하지 말 것은 성령께서 오실 것이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는 진리의 영이시기에 무지한 세상의 심판자가 되실 것이라고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신 것입니다. 8절을 봅니다: “그가 와서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시리라.” 진리를 알지 못하는 무지한 세상은 주의 제자들을 책망하고 심판하며 출교시키고 죽일 것이나 진리의 성령께서 그 세상을 책망하시리라는 것입니다. 참된 심판자이신 그 성령 때문에 주의 제자들은 위로를 받을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이제 비로소 본문으로 돌아옵니다. 그러나 본문에서 언급될 것이 앞선 말씀에서 이미 다 언급되었습니다. 여기서 예수님께서는 성령이 진리의 영이시라는 사실에 초점을 맞추십니다. 그런데 성령의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진리와 다른 자기 나름대로의 진리가 아닙니다. “그가 스스로 말하지 않고 오직 들은 것을 말하시리라.”(13절 하반절)고 에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성령께서 말씀하시는 것은 새로운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미 다 말씀하신 것입니다.
본문 14-15절을 봅니다: “그가 내 영광을 나타내리니 내 것을 가지고 너희에게 알리시겠음이라. 무릇 아버지께 있는 것은 다 내 것이라. 그러므로 내가 말하기를 ‘그가 내 것을 가지고 너희에게 알리시리라’ 하였노라.” 진리의 성령께서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께서 드러내시고 가르치신 진리에로 주의 제자들을 인도하실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비록 아직은 제자들이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을 다 알아듣지 못하고 감당하지 못하지만 성령께서 오시기만 하면 다 깨달아 알게 되리라는 것입니다. “내가 아직도 너희에게 이를 것이 많으나 지금은 너희가 감당하지 못하리라. 그러나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라.”(본문 12-13절)고 말씀하셨습니다.
오늘은 성령강림주일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오늘도 거짓되고 무지하며 적대적인 세상에 살고 있습니다. 지금은 우리가 진리에 목말라하며 위로와 용기를 절실히 찾는 때입니다. 이때에 성령께서 오셔서 우리와 영원히 함께하신다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십니다. 아버지 하나님으로부터 보내심을 받아 우리에게 오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아버지와 영원히 함께하시는 하나님이시듯이, 아버지와 아들 하나님으로부터 보내심을 받아 우리에게 오신 성령은 영원히 그들과 더불어 한 하나님이십니다. 그는 진리의 영이십니다. 그는 우리 가운데 거하시며 우리와 함께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는 거짓되고 하나님의 백성에게 적대적인 이 세상에서 우리의 참된 위로자이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지금 몸으로 우리와 함께 계시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는 성령 안에서 우리와 함께하십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하나님과 함께하듯이 성령 안에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합니다. 성령께서 우리와 함께하심을 믿어야 할 것입니다. 사람들이 알건 모르건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함께하셨던 것처럼 우리가 알건 모르건 성령께서는 우리 가운데 함께하십니다. 우리가 오늘도 이렇게 숨 쉬고 거동하며 사는 것도 다 성령의 역사로 가능한 것입니다. 이미 우리는 그의 놀라운 사역과 은혜를 힘입으며 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우리와 함께하시는 성령의 임재와 그 능력의 역사를 우리가 확실히 깨달아 안다면 우리는 더욱 더 큰 일을 행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 무엇보다도 이 거짓되고 적대적인 세상과의 싸움에서 이길 수 있습니다. 이 악하고 반역적인 세상을 향해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진리를 증언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 일들은 우리 스스로의 힘으로는 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 모든 것이 가능해집니다. 이 땅의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이 사방으로부터 우겨쌈을 당하는 이 시련의 때에 성령의 함께하심을 믿는 믿음 안에서 진리의 삶과 평안을 누리는 우리 모두가 됩시다.
진리의 성령이 하실 일 세 가지(요한복음 16:8-11)
8 그가 와서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시리라 9 죄에 대하여라 함은 그들이 나를 믿지
아니함이요 10 의에 대하여라 함은 내가 아버지께로 가니 너희가 다시 나를 보지 못함이요 11 심판에 대하여라 함은 이 세상
임금이 심판을 받았음이라
8-11절은 보혜사 성령의 세 가지 역할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성령께서 오시면 죄와 의와 심판에 대해서 세상을 책망하실
것입니다. 여기서 “책망하다”는 말은 ‘책망하다’는 뜻도 있지만, ’드러내다, 유죄선고를 하다’는 뜻이 있습니다. 이는 법정에서
사용하는 용어로 피고인이 기소되면 검사가 빠져나올 수 없는 증거를 제시하며 논리적으로 피고를 압박하는 추궁이 있고 이에 피고인은
자기 죄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면 재판장이 최종적으로 유죄 판정을 합니다. 그러나 “책망하다”는 말은 유죄 판정을
해서 심판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피고가 자기 죄를 인정하고 부끄럽게 여기고 회개로 이끈다는 의미까지 포함하고 있습니다. 보혜사는
죄와 의와 심판에 대해 분명하게 드러나게 하시고 이를 깨닫고 인정하게 하는 역할을 수행하십니다.
예수님은 9-11절에서 그 의미가 무엇인가 구체적으로 설명하십니다. 이 세 개의 절은 “…에 대해서 책망하시는데 그 이유는 …
때문이다 (concerning … because …)”라는 구조를 갖고 있습니다. 즉 성령께서 드러내시는 내용이 먼저 나오고 그
내용에 대한 이유가 명시되었다는 뜻입니다. 첫째로, 성령께서 죄에 대해 책망하신다고 하셨는데 그 이유는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성령께서 하시는 첫째 역할은 죄를 깨닫게 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법을 위반한 행동만을 특정해서 죄라고
말합니다. 그들은 자기 죄가 드러나지 않으면 자기는 죄인이 아니라고 여깁니다. 범죄 기록에 남지 않으면 그는 법적으로 죄인이
아닙니다. 또한 도덕적인 죄도 있습니다. 인간으로서의 도리를 다하지 않을 때 사람들은 그것을 죄라고 말합니다. 더 나아가 양심에
걸리는 행동을 했을 때 사람들은 그것을 죄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성경이 말하는 죄는 이런 법적, 도덕적, 양심적 죄를 뛰어넘어 더
근본적인 차원을 다루고 있습니다. 성경이 말하는 죄는 하나님으로부터의 분리를 말합니다. 원래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음받은 존재로 죄가 없었습니다. 최초의 인간은 하나님을 사랑하며 하나님과 친밀한 관계를 누렸습니다. 그러나 뱀의 유혹을 받아
계명의 말씀을 어김으로 인간은 하나님으로부터 관계가 끊어지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거룩하신 분으로 조금의 죄도 용납하지
않으십니다. 인간은 범죄함으로 하나님의 낯을 피하고 하나님을 두려워하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께 변명하고 서로에게 자기 잘못의
원인을 전가하였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성이 파괴되었을 뿐만 아니라 인간 상호간의 관계성도 파괴되었습니다. 범죄한 인간은 그 죄의
대가로 죽게 되었습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생명과 사랑에서 끊어지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범죄한 인간을 불쌍히 여기시고
하나님께 나아갈 길을 열어 놓으셨습니다. 그 길은 짐승의 피를 흘려 희생제사를 드림으로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입니다. 구약의 성막과
제사제도는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에게 베푸신 놀라운 은혜였습니다. 그러나 구약의 제사는 한계가 있었고 그것은 예수님의 대속의
그림자에 불과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어린 양으로 십자가에서 우리의 죄를 다 대속하시고 우리를 죄를 사해주시고 심판으로부터
구원해 주셨습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하나님이 보내신 구원자를 배척하였습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보내신 메시아가 세상에 계셨고
세상을 비추었지만 영접하지 않았습니다(1:11). 예수님은 수많은 보화와 같은 천국의 복음을 전파하셨고 이를 뒷받침하는 기적을
행하심으로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드러내셨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이를 보고도 완악한 마음 때문에 예수님을 배척하여 십자가에
못박았습니다. 성령께서는 이들의 이런 완악한 마음이 죄라는 것임을 드러내십니다. “책망하다”는 말은 호되게 꾸짖어 그들의 죄를
인정하도록 압박하신다는 뜻이 들어 있습니다. 오순절 성령 강림 사건 때 성령이 충만한 사도들이 말씀을 전하자 유대인들은 마음에
찔려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 하며 구원의 길을 간구하였습니다. 성령께서 그들의 완악한 마음에 역사하셔서 죄를 깨닫게 하신
것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배척한 것이 죄임을 깨달은 것입니다. 성령께서 그들의 완악한 마음을 호되게 꾸짖은 것입니다. 그들이
회개하지 않으면 안되는 상황까지 몰아가신 것입니다.
그러면 아무 것도 모르는 이방인들은 어떻게 죄를 깨닫게 될까요? 하나님은 이를 위해 그의 제자들을 이방의 빛으로
삼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마 28:20). 이방인들이 복음의 말씀을 들을 때 성령께서 그들의 마음을 조명하시고 깨닫게 하십니다.
그들에게 하늘의 아버지가 계셨고 그들은 집 나간 탕자임을 깨닫게 하십니다. 성령께서는 아버지의 품을 떠난 것이 죄임을 깨닫게
하십니다. 성령께서는 그들이 창조주 하나님을 몰랐을 때 그들은 헛된 우상을 숭배하다가 심판받아 죽을 수 밖에 없는 죄인임을 깨닫게
하십니다.
소위 모태신앙을 가진 사람들은 기독교적인 분위기 속에서 자라 자신이 죄인임을 잘 깨닫지 못합니다. 그들은 오히려 믿는 부모
때문에 자기들은 어디 도망가지 못하고 속박 가운데 살아간다고 생각합니다. 그들은 부모를 거역할 수 없어 몸은 교회를 다니고 있지만
마음은 하나님께로부터 멀어진 상태입니다. 그들은 오히려 세상 사람들과 같이 마음껏 죄를 짓고 살고 싶지만 분위기상 그렇지 못하고
형식적인 신앙생활을 합니다. 그러면서도 자기가 상대적으로 다른 사람들과 비교하여 도덕적으로 건전하게 살고 있다고 치부합니다.
그러기 때문에 복음의 말씀을 들을 때 다 아는 말씀이라고 생각하고 복음이 죄인이라고 할 때 그것을 마음으로 인정하지 못하는
어려움이 있습니다. 그러나 성령께서는 이런 그들의 마음 가운데 역사하셔서 예수님을 믿지 않는 것이 죄임을 ‘마음으로’ 깨닫게
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들 마음 가운데 죄가 무엇인지 깨달을 수 있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죄 사함의 전제는 죄를 깨닫고
인정하고 고백하는 것에서 시작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쓸 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 데 있느니라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막 2:17). 스스로 “나는 건강하다”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결코 병원에 가지 않습니다. 반면 병자임을 알고 고침받고자 하는 마음이 있는 자가 의사를 찾습니다. 마찬가지로 스스로
의인이라고 생각하고 자기 의를 주장하는 자는 구주가 필요 없습니다. 자기가 죄인임을 자각한 자만이 죄 사함을 주시는 구주 예수님을
필요로 합니다. 죄인으로서의 자아 발견은 죄 사함의 전제조건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일을 하시는 분은 바로 보혜사
성령님이십니다.
둘째로, 성령께서는 의에 대하여 책망하시는데 이는 예수님께서 아버지께로 가시고 제자들은 다시 그를 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의는 죄 없음과 거룩함과 관련된 것을 말합니다. 예수님은 유대인들에 의해 죄인 취급을 받으셨습니다. 심지어 귀신들린 자라고 하기도
하고 사람을 꾀는 유혹자라는 비난을 들었습니다. 율법을 파괴하는 자로 취급받고 사회의 질서를 어지럽히는 자로 공격을 받았습니다.
죄인들과 함께 어울리는 자로 사회 풍속을 문란하게 하는 자라는 비아냥을 들으셨습니다. 결국 예수님은 유대인들에 의해 신성모독죄로
기소되었고 이방인에 의해 내란죄로 사형판결을 받아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무덤에 묻히신
예수님은 하나님의 능력으로 죽은 자 가운데에서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그리고 하늘로 승천하셔서 아버지께로 돌아가셔서 본래의 영광의
자리에 앉으셨습니다. 종교 지도자들은 빈 무덤을 보고 제자들이 그 시체를 훔쳐갔다고 하며 거짓 소문을 퍼뜨렸지만 그어떤 사람도
그를 다시 나를 보지 못하였습니다. 이는 그가 말씀하시던 대로 살아나셨고 승천하셔서 영광을 받으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부활과
승천은 하나님의 능력으로 이루어진 사건으로 그가 죄 없이 무고하게 죽으셨음을 입증하였습니다. 사람들이 십자가에 못 박은 그
예수님은 우리의 주님이요 그리스도이십니다. 그가 승천하심으로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아 계신 것은 그가 우주의 통치자가 되시고
만물을 다스리시고 유지하시는 만왕의 왕이 되심을 말해줍니다. 그는 기름부음을 받은 구원자요 약속된 메시아이십니다. 그의 부활과
승천은 주님의 무죄함과 거룩함이 드러내었고 그는 장차 다시 오셔서 의로우신 재판장이 되셔서 각 사람의 행한대로 심판하실
분이십니다.
반면 사람의 의는 하나님의 기대 수준에 한참 미치지 못합니다. 아무리 인간이 율법을 지키고 자기의 힘으로 구원에 이르려고
하지만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합니다. 그래서 성경은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고 선포합니다. 성경은 철저하게 인간의 의를
부인합니다. 그 이유는 인간은 행위로 구원을 얻기에 실패했고 그럴 능력도 상실하였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인간의 죄악의 실상에 대해
다음과 같이 묘사했습니다. “기록된 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다 치우쳐 함께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 그들의 목구멍은 열린 무덤이요 그 혀로는 속임을 일삼으며 그 입술에는 독사의
독이 있고 그 입에는 저주와 악독이 가득하고 그 발은 피 흘리는 데 빠른지라 파멸과 고생이 그 길에 있어 평강의 길을 알지
못하였고 그들의 눈 앞에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느니라 함과 같으니라”(롬 3:10-18). 그는 유대인이든 이방인이든 누구나 다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영벌을 받을 존재임을 강조하였습니다. 그는 인간을 싸잡아서 죄의 낭떠러지로 몰아갔습니다. 인간의 의의 한계를
인정하는 것이 하나님의 의를 인정하는 문이 됩니다. 바울은 인간의 전적인 타락을 강조한 후 극적인 전환을 하여 하나님의 의를
강조했습니다.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롬 3:21). 여기서
“이제는”는 “그러나 이제는”이라는 뜻으로 분위기가 절망에서 희망으로 급전환을 합니다. 그가 말하는 하나님의 의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입니다(롬 3:22). 우리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 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가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을 하나님이 그의 피로써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제물로 세우셨습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고자 하심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십자가를 통해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사 자기도 의로우시며 또한 예수 믿는 자를
의롭다 하셨습니다(롬 3:24-26). 우리는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자기의 의를 벗어버리고 그리스도의 의의 옷을 입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죄인이라 구원의 가망이 없었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의 대속의 피로 우리를 의롭다 여기셨습니다. 우리는 의롭다하심을 받은
죄인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구원받은 것에 조금이라도 자기의 의를 첨가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구원받은 것은 100% 하나님의 의로
이루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자기를 자랑할 수 없습니다. 자기의 의를 내세울 수 없습니다. 자기의 공로와 행위를 내세우는
순간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전가된 하나님의 의는 무효가 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구원받은 데에는 우리의 선한 의지도
개입할 수 없습니다. 오로지 그의 사랑과 은혜와 주권으로 말미암은 것이라는 것입니다. 성령께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희생으로
인해 우리에게 전가된 하나님의 의를 깨닫게 해주십니다. 또한 인간의 의의 무력함과 인간의 본성의 전적인 타락을 깨닫게 해주십니다.
구원받고 거듭난 자는 성령의 깨닫게 하심으로 오로지 값없이 주어진 구원의 선물에 감사하며 하나님의 의를 내세우고 의지하는 자임을
알게 됩니다.
셋째로, 예수님께서 심판에 대해 세상을 책망하실 것인데 이는 이 세상 임금이 심판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는 성령이
오셔서 “심판”에 대해 깨우쳐 주실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심판”은 악을 없애고 창조의 질서를 회복하기 위한 것입니다. 세상
임금은 세상의 모든 질서를 파괴하고 어지럽히는 자로 마귀를 가리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마귀를 심판하시고 세상을 새롭게 하십니다.
예수님께서십자가에 죽으실 때 온 세상에 어둠이 임했습니다. 그때 선이 패배하고 악이 승리하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예수님만 없으면
혼란이 없고 모든 것이 평안할 것이라고 생각한 종교 지도자들의 계획대로 예수님은 죽으셨습니다. 그러나 이런 마귀의 계획은 설 수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무덤에 갇혀 계실 분이 아니십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를 살리시고 무덤에서 나오게 하셨습니다. 이로써 예수님은
사탄의 최종 권세인 죽음 권세를 파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부활과 승천은 사탄에 대해 예수님이 최종적으로 승리하셨음을 확증했습니다.
십자가는 패배가 아니라 승리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통치자들과 권세들을 무력화하여 드러내어 구경거리로 삼으시고 십자가로 그들을
이기셨습니다(골 2:15). 하나님은 예수님을 살아 있는 자와 죽은 자의 재판장으로 정하셨습니다(행 10:42). 예수님께서 다시
오실 때 그의 구원과 능력과 나라와 그리스도의 권세가 나타날 것이고 형제들을 참소하던 자 곧 우리 하나님 앞에서 밤낮 참소하던
자가 쫓겨날 것입니다(계 12:20). 그리고 세상 나라가 우리 주와 그의 그리스도의 나라가 되어 그가 세세토록 왕 노릇 하실
것입니다(계 12:15). 성령께서는 이미 세상이 하나님의 심판 아래 있다는 것을 깨닫게 해주십니다. 성령께서는 예수님께서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라고 말씀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깨닫게 하십니다(16:33).
우리는 스스로의 힘으로 마귀의 권세를 이길 수 없습니다. 우리는 마귀의 유혹과 권세에 한없이 약하여 패배하기만 할 뿐입니다.
우리는 이로 인해 탄식하고 절망합니다. 우리가 이 세상을 볼 때 세상 임금이 세상을 장악하고 그 권세를 떨치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믿는 자가 박해를 받고 불이익을 받을 때 억울한 생각이 들기도 하고 위협을 느낍니다. 그러나 성령께서는 심판에 대해
우리를 깨닫게 하십니다. 이 심판은 마귀와 악인에 대한 하나님의 승리의 선언입니다. 믿지 않는 자는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않았으므로 벌써 심판을 받았음을 알게 하십니다(요3:18). 우리는 이미 승리가 보장된 싸움을 싸우고 있습니다. 성령께서는
심판에 대해 깨닫게 하심으로 승리의 확신을 주십니다.
12 내가 아직도 너희에게 이를 것이 많으나 지금은 너희가 감당하지 못하리라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말씀하실 것이 많았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그 많은 말씀을 다 감당할 수 없을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왜냐하면 지금 하시는 말씀도 제자들에게는 버거운 것이기 때문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꼭 필요한 핵심점인
말씀만을 하셨습니다. 예수님이 하신 말씀은 씨앗과 같은 것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계획하시고 예수님께서 성취하신 구속의 계획에 관한
아주 기본적인 진리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의 떠나심에 대해 받아들일 수 없었던 제자들에게 이조차 이해하기 힘든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성령께서 나중에 예수님이 하셨던 말씀을 생각나게 하실 것입니다. 이에 더하여 그 의미까지 분명하게 하실
것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의 마음에 씨앗을 뿌린 것에 불과합니다. 진리의 성령께서 나중에 제자들의 마음에 물을 주고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게 하실 것입니다. 사도행전을 보면 여러 가지 논란이 되는 문제들이 있었습니다. 할례의 문제, 먹는 것의 문제, 율법을
지키는 것의 문제, 요한의 세례와 성령 세례, 이방인을 교회에 들이는 문제 등 이로 인해 많은 갈등을 겪은 내용이 나옵니다.
그러나 성령께서 역사하셔서 이 모든 문제를 해결하고 예수님의 부활 승천 이후 새로운 신학적 체계를 구축해 나갑니다. 새로운 신학적
체계를 구축하는 과정에서 유대주의의 붕괴와 성전의 가치와 모세의 율법의 무효화와 같은 과정은 불가피했습니다. 처음에 유대인인
제자들이 이를 소화하는 것이 쉽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성령의 섬세한 가르침으로 차근차근 교리가 형성되어 갔습니다. 성령님은 이처럼
친절한 안내자가 되십니다.
현대인의 세 가지 정신적 죄악 - 인도 교육자 케리여사
1. 모르면서 배우려고 하지 않는 것 2. 알면서 가르치지 않는 것 3. 할 수 있으면서 하려고 하지 않는 것
* 출처 / 안병욱 (좌우명 365일 p. 121)
마틴 루터의 변화
마틴 루터의 고민은 마음속에서 끊임없이 솟아오르는 근본적인 죄의 문제였습니다. 지금까지 범한 죄도 중요하지만 그보다 더 큰
문제는 하나님의 뜻을 따라 정결하게 충성하려는 그에게 끊임없이 찾아와 그의 정결을 깨뜨리며 주님께 충성하기보다는 썩어질 정욕을
만족시키고 싶어하는 끊임없는 죄의 도전이었습니다. 과연 이렇게 본질적으로 썩어버린 인간에게도 소망이 있을까? 이러한 인간도 하나님 앞에 의롭다함을 받을 수 있을까? 마틴
루터는 죄의 도전을 물리치기 위해서 기도도 많이 했으며 말씀 묵상 연구도 많이 했으며 저 유명한 28계단 성당의 계단을 무릎으로
올라가는 것도 시도했습니다. 그러나 그 속에서 샘솟는 죄의 정욕은 결코 이러한 루터의 노력으로 해결될 수 있는 어떤 것이
아니였습니다. 마틴 루터는 로마서를 연구하다가 드디어 이러한 죄인에게 비추는 하나님의 빛을 발견하였습니다. 우리 하나님은 이러한 정욕의 사람, 죄악의 사람, 더러운 인간을 있는 그대로 받으시고 그들의 죄를 예수님의 몸에 담당시켰습니다. 불꽃
같은 눈으로 인간을 살피시고 인간의 죄악을 미워하며 불로 심판하시는 하나님은 차라리 그 모든 심판을 하나님의 외아들 예수님께
내리시고 그 대신 심판받아 멸망받았어야할 인간도 용서하시고, 받아들여 자녀로 삼으시려는 놀라운 결단을 내리시고 그 일을 행하셨음을
몸으로 깨달아 알았을 때에 루터는 하나님께 무릎을 꿇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인간의 죄는 인간의 공로나 힘, 능력으로 어쩔 수 없습니다. 교황청이
죄의 용서를 빙자해서 죄를 용서받을 수 있는 면죄부를 판매한다는 것은 도무지 용납할 수 없었습니다. 루터는 드디어 1517년
95개조 반박문을 비텐베르크 설교회의 정문 앞에 걸어 놓았으며 종교개혁의 불씨를 당기게 된 것입니다. 이것은 그의 삶을 통하여
얻은 몸의 진리요 말씀에서 발견한 것입니다. 어느 누가 이 진리를 취소하라고 할 수가 있겠습니까? 이때 루터는 담대히 외쳤습니다. "나는 지금 여기 왔소. 이외에 더 이상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소. 하나님께서 나를 도울 것이요." 루터는 힘있게 거절을 하고 종교개혁을 위해서 생명을 다하여 열심히 주님의 일을 하였습니다. 비단뱀 샐리
미국의 한 가정에서 애완용으로 재미 삼아 미얀마산 비단뱀을 한 마리 샀다. 맨 처음 그 집에 왔을 때 약 30cm 정도였던 그
애완용 비단뱀은 그 집에서 8년 동안 335cm의 길이와 36kg의 무게로 자라났다. 그런데 어느 날 샐리라는 예쁜 이름의 그
애완용 비단뱀은 무방비 상태에 있던 그 집의 15세 난 아들 데렉을 공격해 목을 조여 질식케 해 죽게 하였다. 사건을 조사한
경찰의 보고에 의하면, 그 집에 들어갔을 때 그 뱀은 "상당히 공격적이고, 쉭쉭 소리를 내며, 반항적이었다"고 했다. 우리
안에 들어오는 나쁜 생각도 바로 그 뱀과 같다. 우리 삶 속에 처음 들어 올 때 우리는 그것이 해롭지 않을 뿐 아니라 호기심을
가지고 재미있게 대하기도 한다. 그러나 나쁜 생각은 곧 행동으로 자라나고 금새 습관으로 굳어지고 만다. 처음에는 다스릴 수 있을
것만 같았던 생각과 행동이 나중에는 못된 습관이 되어 오히려 우리를 다스리기 시작한다. 호기심에서 시작한 마약으로 나중에 심각한
중독에 시달려 절망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우리는 종종 매체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그처럼 우리 삶에 있어서 인간의 고귀한 자유
의지를 훼손시키려는 유혹은 우리 주위에 너무 가까이 그리고 너무 많다. 그런데 그에 대처할 만한 건강한 의식의 청소년들이 점점
줄어들고 있어 그 사실이 매우 안타깝다.
이토 히로부미의 죄악
1. 한국의 명성황후(明星皇后)를 죽인죄 2. 고종황제(高宗皇帝)를 왕의 자리에서 내친죄 3. 을사조약(5조약)과 한일신협약(7조약)을 강제로 맺은죄 4. 독립을 요구하는 죄없는 한국인들을 마구 죽인 죄 5. 정권을 강제로 빼앗아 통감 정치 체제로 바꾼 죄 6. 제일은행권 지폐를 강제로 사용하여 경제를 혼란에 빠뜨린 죄 7. 한국 군대를 강제로 해산시킨 죄 8. 민족 교육을 방해한 죄 9. 한국인들의 외국 유학을 금지시키고 한국을 식민지로 만든 죄 10 .한국사를 없애고 교과서를 모두 빼앗아 불태워 버린 죄 11. 한국인이 일본인의보호를 받고자 한다고 세계에 거짓말을 퍼뜨린 죄 12. 현재 한국과 일본에 전쟁이 끊이지 않고 있는데, 한국이 아무 탈 없이 편안한 것처럼 위로 일본 천황을 속인죄 13. 대륙을 침략하여 동양의 평화를 깨뜨린 죄 14. 일본 천황의 아버지를 죽인 죄
작년 범죄 18초마다 1건꼴 발생
지난 한 해 동안 전국적으로 살인은 9시간18분, 강도는 1시간36분, 강간은 1시간17분에 한 건씩 일어났다. 또 폭력은 1분35초, 절도 3분, 재산범죄 2분42초 등의 간격으로 한 건씩 발생했다.
이는 23일 경찰청이 지난 한 해 동안의 전국 범죄발생 평균빈도를 분석해 발표한 '2000년 범죄시계ꡑ에서 나타났다.
우리보다
인구가 3배 가량 많은 일본의 범죄시계는 99년 기준으로 살인(6시간56분)과 절도(17초)는 우리보다 발생빈도가 높았지만 강도
폭력 강간 재산범죄 등은 우리보다 발생빈도가 낮았다. 특히 강간범죄의 경우 일본은 4시간43분만에 한 건씩 발생하는데 비해
우리나라는 1시간17분마다 한 건씩 발생, 3.7배나 높은 발생빈도를 보였다.
우리보다 인구가 5배 가량 많은 미국의 범죄시계는 99년 기준으로 살인 34분, 강도 1분, 강간 6분, 절도 5초, 폭력 22초, 재산범죄 3초 등으로 모든 범죄의 발생빈도가 우리와 일본보다 높았다.
한편 총범죄 발생건수를 기준으로 한 우리나라 범죄시계는 70년 1분32초마다 한 건씩에서 80년 51초, 90년 27초로 빨라져 지난해에는 18초마다 한 건씩 발생한 것으로 나타났다.
2001/07/23(월) 동아일보
적용
사람들이
부대끼며 사는 곳이다 보니 자연히 그 속에서는 함께 공존하지 못하고 남을 괴롭히거나 다른 사람에게 해악을 끼치는 무리들이 나오게
되어있다. 문제는 이러한 범죄율이 시간이 가면 갈수록 늘어난다는 것에 있다고 볼 수 있다. 사람의 생명을 경시하는 사이버상의
게임은 실제로 현실 세계 속에서 그대로 보여지고 있다. 실제와 가상의 공간을 거의 구별하지 못하고 자신을 통제하지 못하는 지경에
이른 사건들도 쉽게 볼 수 있다. 한탕주의와 불로소득을 노리는 잘못된 인간 심리가 자리잡고 이기주의와 자신만의 만족감을 추구하는
사회적인 통념 앞에 사람들은 자신의 잘못을 잡으려하기 보다는 어쩔 수 없는 상황에서 일어난 우발적인 행동임을 은근히 내비치고 있어
더욱 안타까움을 느낀다.
"한 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히9:27)
▣ 동맹주역들의 최후 (주제 - 죄)
인류
현대사의 가장 비극적인 일 중 하나인 2차 세계대전은 1936년 독일,이탈리아,일본의 삼국동맹체결로 한층 가속화 되었다. 이
삼국동맹의 결과로 평화로운 지구 곳곳은 온통 화약냄새와 피비린내가 진동하는 전쟁터로 화했다. 그러나 결국 정의로운 연합군의 승리로
삼국동맹의 주역들은 모두 비참한 최후를 맞았다. 먼저 유태인을 600만이나 학살한 히틀러는 연합군이 한참 독일로 전진해 오던
45년 그의 지휘벙커에서 애인 엠마 브라운과 함께 권총으로 자살했다. 극악한 파시스트인 이탈리아의 뭇솔리니는 45년 연합군에
패전후 국경밖으로 도망하려다 암살됐다. 일본의 동조천황은 전쟁기에 국민들로부터 거의 신으로 떠받들어지던 이미지를 모두 상실한 채
89년 한 인간으로 돌아와 병에 걸려 죽었다. 전쟁의 악령에 사로잡혔던 세 사람은 결국 그 악령의 조종에 의해 비참한 최후를
마쳤던 것이다.
▣ 선행이 덮을 수 없는 죄의 흔적
켄터키
주에서 헤이즐 패리스가 그의 어린 아들 렉싱턴의 잘못된 버릇을 고치기 위해 한 방안을 세웠다. 아들이 잘못을 했을 적마다 그를
데리고 가서 문설주에다 못 한 개씩을 박았다. 얼마 못가서 그 문설주에는 못이 총총 박혔다.
그 다음 패리스는 그 아들에게 좋은 일을 할 때마다 못 하나씩을 빼주겠다고 약속했다. 얼마가 지나서 그 문설주에 박힌 못은 다 빠졌다.
선행으로 못을 다 빠졌지만 그러나 못자국은 그대로 남아 있었다.
예수님의 많은 이적 가운데도 흉터 없애는 이적은 하나도 없었다. 상처는 떠났으나 흉터는 남아 있는 법이다.
11월 21일(금) 요한복음 12-13장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알고 행하라(13:17)
너희가 이것을 알고 행하면 복이 있으리라. Now that you know these things, you will be blessed if you do them.
인도의 교육자 "케리 여사"는 현대인의 세 자기 정신적 죄악이 있다고 합니다. 첫째는 모르면서 배우려고 하지 않는 죄 둘째는 알면서 가르치지 않는 죄 셋째는 할 수 있으면서 하려고 하지 않는 죄
예수님께서는 좀 더 적극적으로 강조하십니다. "알고 행하면 복이 있으리라(If you know and act, you will be blessed.)"
알고 행하라는 가르침은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겨주신 것처럼 너희들도 섬김의 믿음으로 행하라는 것을 강조한 것입니다. 따라서 알고 행하라는 교훈은 "섬김"이라고 하겠습니다.
크리스천이라면 알아야 할 10가지 중요한 원칙
신앙생활을 잘 하려고 하지 말고 바르게 하는 마음을 가져야 한다. 잘 한다는 것에는 이미 세속적인 가치관이 스며 있다. 예를 들면 한국인은 누구나 역사적인 전통의 문화가 온 몸에 스며들어 있기 때문이다. 불교와 유교의 영향 - 입신출세, 무병장수, 만사형통
신앙생활을 하면서 “나는 정말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삶을 살고 있을까?” 고민해 보신 적이 있으신가요? 예배를 드리고 기도를 하지만, 진정한 크리스천으로 살아가기 위해서는 어떤 원칙을 지켜야 하는지 궁금할 때가 있습니다.
오늘은 성경을 바탕으로 크리스천이 반드시 실천해야 할 10가지 원칙을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이 원칙을 마음에 새기고 실천해 나가신다면, 더욱 하나님과 가까워지고 신앙이 깊어질 것입니다. 함께 살펴보겠습니다.
1. 하나님을 최우선으로 삼기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크리스천의 삶에서 가장 중요한 원칙입니다. 예수님께서는“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마태복음 22:37)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종종 일상 속에서 하나님보다 직장, 가족, 인간관계, 취미 등을 더 우선순위에 둘 때가 있습니다. 하지만 크리스천이라면 하나님을 삶의 최우선순위로 삼아야 합니다. 중요한 결정을 내릴 때, 어려움을 겪을 때, 기뻐할 때도 하나님을 먼저 찾고 의지하는 것이 신앙인의 바른 자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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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실천 방법 ✔ 하루를 기도로 시작하며 하나님께 하루를 맡겨 보세요. ✔ 중요한 결정을 내릴 때, 먼저 말씀을 묵상하고 기도해 보세요.
2.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기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과 함께 가장 중요한 계명은 이웃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마태복음 22:39)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지만 현실에서는 사랑보다 경쟁과 미움이 익숙할 때가 많습니다. 특히 상처를 주고받은 사람을 용서하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크리스천이라면 조건 없는 사랑을 실천해야 합니다. 작은 친절과 배려가 이웃을 향한 사랑의 시작입니다. 가족, 친구뿐만 아니라 직장 동료, 어려운 이웃, 심지어 나를 힘들게 하는 사람까지 사랑하는 것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삶입니다.
✅ 실천 방법 ✔ 상대방을 이해하려 노력하고, 작은 친절을 실천해 보세요. ✔ 용서가 어려울 때, 그 사람을 위해 기도해 보세요.
기도는 하나님과의 대화이며, 크리스천이 반드시 실천해야 할 신앙의 기본입니다. 성경에서는 “쉬지 말고 기도하라”(데살로니가전서 5:17)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바쁘다는 이유로 기도를 소홀히 할 때가 많습니다. 기도는 단순한 종교적 의무가 아니라 하나님과 더욱 친밀한 관계를 맺는 과정입니다. 기도를 통해 우리의 고민과 문제를 하나님께 맡기고, 하나님의 뜻을 깨달아야 합니다. 또한, 기도를 생활화하면 마음의 평안과 영적 성장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 실천 방법 ✔ 하루에 최소 10분 이상 기도하는 시간을 가져 보세요. ✔ 기도할 때 감사의 마음을 먼저 표현해 보세요.
4. 말씀을 가까이하고 묵상하기
하나님의 말씀은 크리스천의 삶을 인도하는나침반과 같습니다. “주의 말씀은 내 발에 등이요 내 길에 빛이니이다”(시편 119:105)라는 말씀처럼, 성경을 통해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바쁜 일상 속에서 성경을 읽는 것이 쉽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말씀을 가까이하면 할수록 신앙이 더욱 깊어지고, 삶에서 올바른 결정을 내릴 수 있는 영적 분별력이 생깁니다. 성경은 단순한 고전 문학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사랑의 편지입니다.
✅ 실천 방법 ✔ 하루 한 장씩 성경을 읽는 습관을 길러 보세요. ✔ 마음에 와닿는 성경 구절을 필사하며 묵상해 보세요.
5. 거룩한 삶을 살기
크리스천은 세상과 구별된 거룩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너희도 모든 행실에 거룩한 자가 되라”(베드로전서 1:15)라는 말씀처럼, 우리의 말과 행동이하나님 앞에서 정결해야 합니다.
그러나 세상의 가치관에 휩쓸려 신앙을 타협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거룩한 삶이란 단순히 도덕적인 삶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세상의 기준이 아니라 하나님의 기준으로 살아가는 것이 거룩함입니다.
✅ 실천 방법 ✔ 죄를 멀리하고, 경건한 습관을 길러 보세요. ✔ 신앙 공동체와 함께하며 믿음을 더욱 단단하게 세워 보세요.
6. 용서하고 화해하기
용서는 크리스천이 반드시 실천해야 할 중요한 덕목입니다. 예수님께서는“너희가 사람의 잘못을 용서하면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도 너희를 용서하시리라”(마태복음 6:14)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지만 용서는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특히 나에게 깊은 상처를 준 사람을 용서하는 것은 더욱 어렵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우리를 먼저 용서하셨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가 죄인임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의 십자가 희생으로 구원을 받았듯이, 우리도 다른 사람을 용서해야 합니다. 용서는 단순히 상대방을 위한 것이 아니라, 내 마음을 자유롭게 하는 과정이기도 합니다.
✅ 실천 방법 ✔ 나에게 상처를 준 사람을 위해 기도해 보세요. ✔ 직접 용서가 어렵다면, 먼저 하나님께 마음을 내려놓고 기도해 보세요.
7. 겸손하게 섬기는 삶을 살기
예수님은 이 땅에서 가장 겸손한 섬김의 본을 보이셨습니다.“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마가복음 10:45)라는 말씀처럼, 크리스천은 섬김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하지만 현실에서는 인정받고 싶은 마음 때문에 남을 섬기기보다, 섬김을 받기를 원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나 진정한 크리스천의 삶은 높아지는 것이 아니라 낮아지는 것입니다. 겸손은 단순한 태도가 아니라, 예수님을 닮아가는 과정입니다. 교회뿐만 아니라 가정, 직장, 사회에서도 섬김의 자세를 가져야 합니다.
✅ 실천 방법 ✔ 주변 사람들에게 먼저 양보하고 배려하는 습관을 들이세요. ✔ 작은 일이라도 기쁨으로 감당하는 자세를 가지세요.
감사는 크리스천이 항상 가져야 할 태도입니다. 성경에서는 “범사에 감사하라.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데살로니가전서 5:18)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좋은 일이 있을 때만 감사하는 것이 아니라, 어려운 상황에서도 감사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때로는 감사보다는 불평이 먼저 나올 수 있습니다. 그러나 감사하는 습관을 들이면 우리의 마음과 삶이 변화됩니다. 하나님께서 모든 상황을 주관하고 계심을 믿으며, 어떤 순간에도 감사하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 실천 방법 ✔ 하루에 감사한 일 3가지를 적어보세요. ✔ 힘든 일이 생길 때, 하나님께 감사를 먼저 고백해 보세요.
9. 전도와 선교에 힘쓰기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가장 큰 사명 중 하나는 복음을 전하는 것입니다.“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마태복음 28:19)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지만 많은 분들이 전도에 대한 부담을 느끼곤 합니다. 전도는 거창한 것이 아닙니다. 나의 삶을 통해 자연스럽게 예수님의 사랑을 전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직장이나 학교에서 믿지 않는 친구들에게 예수님의 사랑을 보여주는 삶이 곧 전도가 됩니다.
✅ 실천 방법 ✔ 믿지 않는 친구를 위해 기도하며 자연스럽게 신앙을 나눠 보세요. ✔ 작은 선행과 친절을 통해 예수님의 사랑을 전해 보세요.
10. 끝까지 신앙을 지키기
신앙은 한순간의 감정이 아니라 평생을 걸쳐 지켜야 하는 여정입니다. “끝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마태복음 24:13) 라는 말씀처럼, 우리는 신앙을 지키기 위해 인내해야 합니다.
신앙생활을 하다 보면 어려움과 시험이 찾아올 수 있습니다. 때때로 믿음이 흔들리기도 하고, 세상의 유혹에 넘어질 때도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우리가 끝까지 믿음을 지키기를 원하십니다. 신앙을 지킨다는 것은 단순히 교회를 다니는 것이 아니라, 삶
전체를 하나님께 맡기는 것입니다.
✅ 실천 방법
✔ 신앙을 함께 지킬 수 있는 좋은 믿음의 공동체를 찾으세요. ✔ 힘들 때일수록 하나님을 더 의지하는 훈련을 해 보세요.
크리스천이 지켜야 할 10가지 원칙 정리
번호
원칙
성경구절
1
하나님을 최우선으로 삼기
마태복음 22:37-38
2
이웃 사랑하기
마태복음 22:39
3
기도하는 삶 살기
데살로니가전서 5:17
4
말씀을 묵상하기
시편 119:105
5
거룩한 삶 살기
베드로전서 1:15
6
용서하고 화해하기
마태복음 6:14
7
겸손하게 섬기기
마가복음 10:45
8
감사하는 삶 살기
데살로니가전서 5:18
9
전도와 선교하기
마태복음 28:19
10
끝까지 신앙 지키기
마태복음 24:13
마무리하며…
크리스천의 삶은 단순한 신념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실천하는 삶입니다. 위의 10가지 원칙을 마음에 새기고, 매일의 삶에서 적용해 보시길 바랍니다. 이 원칙을 지키며 살아갈 때, 우리는 더욱 하나님과 가까워지고, 진정한 크리스천으로 성장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부터 하나씩 실천해 보시면 어떨까요?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삶을 더욱 풍성하게 하실 것입니다!
교회의 4가지 기능과, 3가지 표지
교회의 네 가지 기능
첫째는 예배
예배는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를 구원해주신 것을 감사하며, 몸과 뜻과 정성을 다하여 하나님을 높이는 것이다(롬 12:1). 이것이 교회의 1차적인 역할이다. 예수께서는 신령과 진정으로 하나님께 예배하라고 하셨다. 또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예배하는 자를 찾으신다고 하셨다. 그러므로 교회는 무엇보다 예배 공동체로서 하나님께 예배드리기를 힘써야 한다. 하나님은 거룩하신 창조주이자 구속주이시며 우리의 좋은 아버지이시기 때문에 영광과 존귀와 능력을 돌려드리는 것이 마땅하다(계 4:11). 예배의 방법으로는 찬양(음악), 말씀 선포, 기도, 성례, 그리고 헌금 등이 있다.
둘째는 전도
교회는 단순히 믿는 사람들만이 모이는 곳이 아니고 흩어져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곳이다. 예수께서도 그의 제자 70인을 세우시고 그들을 이스라엘 각지로 파송하셨다. 교회는 믿지 않는 사람들을 교회로 불러내 하나님의 죄의 용서와 의롭게 됨을 얻게 하는 것이 교회의 할 일이다. 이 전도는 예수님 자신뿐 아니라 사도들이 힘써 하신 일로서, 예수님께서 부탁하신 일이기도 하다(마 28:19-20; 행 1:8). 복음전도를 통해 교회는 하나님을 섬길 뿐 아니라 교회밖에 있는 이웃들을 섬겨 명실상부한 영적 공동체로 확대되어 간다.
셋째는 친교(코이노니아)
예배를 통해서 주님과의 내적 친교(코이노니아)를 나누고 또한 성령님을 통해서 하나 됨을 느끼게 된다. 교회는 단순히 예배만 드리고 흩어지는 곳이 아니다. 사람들과의 사귐 속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발견할 수 있고 신앙을 배울 수 있다. 예수께서는 우리에게 서로 사랑하라고 하셨다. 성도들이 주 안에서 서로 사귀는 것은 아름다운 일이다. 서로 받은 여러 가지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을 나누고, 서로의 짐을 나누어지는 일이 교회의 할 일이다.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세우신 것은 성도들을 온전케 하며 서로 섬겨 덕을 세우게 하는데 있다(엡 4:12). 건덕(edification)은 그리스도의 몸 된 지체들이 서로 사랑하고 우애하고 존경하기를 먼저하며 성도들의 쓸 것을 공급하는 사귐(fellowship)과 섬김(service)이다 (롬 12:10, 13).
넷째는 봉사
봉사는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응답이요, 하나님 나라를 이 땅에 확장하기 위한 수단이다. 사람들과 세상을 섬기기 위해서 존재하는 교회가 행하는 구제, 자선사업 등등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는 율법의 기본정신을 실천하는 것이다. 이것은 교회의 사회적 책임이다. 예수님은 소외된 자, 귀신들린 자, 죄를 지은 자, 해를 입은 자들의 친구와 치유 자가 되시어 그들의 아픔과 고난과 슬픔을 함께 나누셨다(마 8:16-17). 이와 관련하여 교회는 소외되고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들을 직접적으로 도우는 일에, 또 악한 사회구조를 개혁하는 일에도 노력해야 한다.
교회의 세 가지 표지
첫 번째 표지는 말씀 선포
말씀 선포가 중요한 이유는 성도들의 믿음이 하나님의 말씀을 들음에서 나고(롬 10:17), 사도들이 말씀 전하는 일을 최우선 순위에 두었기 때문이다(행 6:4).
두 번째 표지는 성례
성례에는 세례와 성찬이 있는데,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라고 하셨고(마 28:19),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시기 전 최후의 만찬에서 친히 성찬 예식을 제정하시면서 재림할 때가지 기념하라고 명하셨다(마 26:26-29; ). 이 때문에 예수님이 친히 제정하신 세례와 성찬이 교회의 표지이다.
세 번째 표지는 권징
권징은 교회의 순결을 유지하기 위한 권세와 관련이 있다. 교회에 권징이 필요한 것은 범죄한 성도들을 바로잡아 잃어버리지 않기 위함일 뿐 아니라 다른 성도들이 그 같은 유사한 범죄를 범하지 않도록 미리 막기 위함이다(행 5:1-11).
교회의 네 가지 특징
1. 교회의 사도성
- 신약적 의미에서의 교회는 사도들에 의해서 세워졌습니다. 예수께서 부활, 승천하신 후 그가 우리의 죄
때문에 돌아가신 우리의 구세주시라는 사실을 증거 한 예수님의 제자들에 의해서 예루살렘교회와 안디옥 교회가 생겨났다. 이후
사도바울의 선교에 의해서 교회가 소아시아와 로마 그리고 전 세계로 퍼져나가게 된 것이다. 예수께서는 베드로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라'(마 16:16)는 신앙고백 위에 그의 교회를 세우시겠다고 하셨다. 교회의 머리는 그리스도이시며
그것의 터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이다(엡 2:20). 그리스도께서 사도들 위에 교회를 세우신 것이다(apostolicity, 마
16:18). 사도적 공동체로서 교회는 세상을 향해 보냄을 받아 복음의 말씀을 따라 적극적으로 섬겨 빛과 소금 노릇을 하도록
하셨다(마 5:13-16).
2. 교회의 통일성
-포도나무 가지가 각기 여러 방향으로 벋어있지만 그 모두는 한 뿌리에서 나온 것처럼 교회는 전 세계에
흩어져 있지만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라는 한 뿌리에서 나온 것이기 때문에 모든 교회는 하나이다. 이 하나 된 교회의 머리는 예수
그리스도이시고 교회는 그의 몸이다. 그러므로 모든 사람들은 그 몸의 지체로, 한 형제이고 자매이다. 교회의 머리이자 주인은
그리스도 예수님이시다(엡 1:22; 골 1:18). 이는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자기의 피로 샀기 때문이요(행 20:28), 자기의
지체들이 유기적으로 통일된 그리스도의 몸이기 때문이다(엡 2:22).
3, 교회의 거룩성
- 교회는 하나님의 택하신 백성들의 모임이며 이것을 하나님은 거룩하다고 하셨다(고전 3:17).
그러므로 교회는 세상과는 구별된 모습을 가진다. 그리고 모든 사람들 자신은 하나님을 모신 성전이다. 하나님은 교회가 그분의 거룩한
특성을 나타내도록 계획하였고, 사람들을 구원하시고 그들로 거룩한 삶을 살며 그분의 특성과 길을 나타내도록 사람들을 부르셨다.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성령으로 세례를 베풀어 세웠고, 성령이 내주하시어 성도들을 위로하시고 진리의 말씀으로 인도하는(고전
3:16-17) 성령의 전이다. 교회는 성령의 전으로서 세상으로부터 구별되어 세워진 거룩한 백성이기에 성령으로 거룩해질 뿐 아니라
의롭다 함을 얻는다(고전 6:11).
4. 교회의 보편성
- 교회는 하나님이 그리스도의 피로 씻으시고 성령으로 거룩하게 하신 하나님의 거룩한 나라요, 이제는
하나님의 소유가 된 백성들이다(엡 2:13-19; 롬 9:24-26). 이 하나님의 교회는 이방인이나 유대인간에 차별이 없다(갈
4:28). 교회 안에는 계급, 인종, 빈부, 지역감정이 존재하지 않는다. 교회는 단지 죄인 된 모든 사람들이 죄를 고백하고
하나님을 예배하는 곳이다. 누구나 다 교인이 될 수 있고, 누구나 다 하나님의 백성이 될 수 있다.
♠ “현대인의 세 가지 정신적 죄악이 있다.
1) 모르면서 배우려고 하지 않는 것이요,
2) 알면서 가르치지 않는 것이요,
3) 할 수 있으면서 하려고 하지 않는 것이다.“
(케리 여사, 인도이 교육자)
- 안병옥 - (좌우명 365일 P . 121)
내가 행한 것 같이 너희도 행하라(요한복음 13:12-20)
예수님은 이제 자신이 이 세상을 떠나 하나님 아버지께로 돌아가야 하실 때가 가까이 왔음을 아셨습니다. 이 세상에서 자신의 시간을
얼마 남겨두지 않고, 우리 주님께서 하신 일은 바로 자기에게 주어진 사람들을 끝까지 사랑하시는 것이었습니다. 요한복음 13장 1절
말씀을 보면 “(요 13:1) 유월절 전에 예수께서 자기가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돌아가실 때가 이른 줄 아시고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사랑하신 그의 사람들 가운데는 예수님을 배신할 가룟 유다까지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는 대제사장을 찾아가 자신이
예수를 넘겨줄 것을 제안하며 은 30냥을 받은 사람 입니다. 예수님은 가룟 유다가 자신을 배신할 것을 이미 다 알고 계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여전히 그를 사랑하셨습니다. 나에 대해서 우호적인 사람들을 사랑하는 것은 그렇게 어렵지 않습니다.
그러나 나를 뒤에서 욕하고. 미워하고 끝내는 배신하는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 어찌 쉽겠습니까? 우리 예수님은 세상의 기준을 뛰어넘는
사랑을 보여주고 계십니다. 복음서를 자세히 읽어보면 예수님을 팔아 넘기는 배신자 가룟 유다는 성찬식도, 세족식도 다 참여
했습니다. 예수님은 가룟 유다의 게획을 다 아시고도 그 제자의 더러운 발을 씻겨 주셨습니다. 원수까지도 사랑으로 대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을 통해 우리들은 자신을 죽이려 하는 세상의 미움까지도 사랑으로 품어내신 예수님의 놀라운 사랑을 보게 됩니다.
예수님은 제자들과 저녁 식사를 마치시고 그 잡수시던 자리에서 일어나 겉옷을 벗으셨습니다. 그리고 수건을 자신의 허리에 두르신
후, 대야에 물을 담아 오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한 사람 한 사람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시고 그 두르신 수건으로 제자들의 발을
닦아 주셨습니다. 이러한 예수님의 모습을 지켜보던 제자들은 매우 깜짝 놀랐습니다. 이것은 집안의 가장 천하고 낮은 하인들이 하는
일이기 때문 입니다. 그런데 메시아로 이 땅에 오신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께서 이런 천하고 낮은 일을 하시다니요! 예수님의
제자 베드로는 깜짝 놀라 예수님께 물었습니다. “주여, 제 발도 씻겨 주려 하십니까?” 베드로는 ‘자신이 예수님의 발을 씻으면
씻겼지, 어찌 예수님께서 자신의 발을 씻을 수 있는가?’하고 생각하며 예수님께서 자신의 발을 씻기는 것을 완강히 거부했습니다.
스승이신 예수님께서 자원하여 제자들의 종이 되신 것이죠.
예수님은 베드로를 향하여 말씀 하셨습니다. “베드로야, 너는 지금 내가 무슨 일을 하는지 알지 못하겠지만, 훗날에는 알게 될
것이다.” 그래도 베드로는 강력하게 거부하며 말했습니다. “안 됩니다, 주님. 제 발을 주님께 맡겨놓고 있을 수 없습니다. 제
발은 절대로 씻기지 못하십니다.” 그러자 요한복음 13장 8절에 예수께서 베드로에게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베드로야, 내가
너를 씻겨 주지 않으면, 너는 나와는 아무 상관없는 사람이 된다.” 그러자 또 베드로가 말합니다. “그렇다면 주여, 제 발뿐
아니라 손과 머리도 씻겨 주십시오.” 이에 대한 예수님의 대답이 10절 말씀 입니다. “베드로, 이미 목욕한 사람은 온몸이
깨끗하기 때문에 발 밖에는 씻을 필요가 없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는 장면은, 예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는 방법으로
우리를 위해 자신을 낮추시고, 자신의 전부를 내어 주신 십자가의 삶을 상징적으로 나타냅니다. 세족식 자체가 죄를 씻는 과정은
아닙니다. 세족식은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 십자가 지시는 속죄를 상징적으로 가리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의 죽음을 통한 섬김으로 우리를 구원해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자신이 그의 발을 씻기지 않으면 예수님
자신과 베드로가 아무런 상관없는 관계가 된다고 말씀 하셨습니다. 즉 누구든지 예수님의 십자가 피로 씻음 바 되지 않은 사람은
예수님과 아무런 상관도 없게 됩니다. 이미 목욕한 자는 발 밖에 씻을 필요가 없다는 말씀을 통해 우리는 목욕은 십자가의 죽음을
통한 속죄를 가리키고, 발을 씻는 것은 예수를 믿은 후 우리들이 생활 속에서 짓는 죄들에 대한 회개와 용서를 의미합니다. 예수님은
더러워진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시면서 그들의 영혼의 허물까지 안아 주셨습니다. 예수님과 제자들이 하나 될 수 있었던 이유는
예수님께서 이들의 모든 연약함을 품어 주셨기 때문 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밤에 발을 씻어 주신 제자들을 한 번 살펴보십시오. 그 어느 누구 하나 이 세상 기준으로 특별나게 잘난 사람들이
아닙니다. 만일 이들이 예수님의 제자들이 아니라면, 역사 속에서 사라질 지극히 평범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오히려 예수님의 제자들은
가난한 사람들이었고, 세상에서 소외된 사람들이었습니다. 심지어 예수님의 제자 중 마태는 당시 유대인들이 경멸하는 직업인 세리 출신
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마음이 가난하고 결핍되어 있는 이와 같은 제자들을 품어 주시고, 영혼이 병들어 있는 사람들을 고쳐
주시고 끝까지 섬기셨습니다.
우리들은 사람들의 연약함을 허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연약함이 드러나는 사람들을 더 가까이 하시고, 친히 품고 함께
하셨습니다. 세상의 기준으로 용납하기 어려운 사람들과 더 많은 시간을 보내시고 그들에게 끝까지 사랑을 베풀어 주셨습니다. 오늘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이 위대한 사랑이야말로 교회가 가져야 할 사랑의 태도 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가난한 사람들, 소외된
사람들, 연약한 사람들, 병든 사람들, 마음에 상처 입은 사람들을 가까이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제자들의 발을 다 씻기신 주님은 제자들과 함께 앉으시고 12절에 이렇게 질문 하셨습니다. “내가 너희 발을 씻긴 뜻을
알겠느냐?” 그리고는 예수님께서 세족식의 의미를 설명해 주셨습니다. “(요 13:13) 너희는 나를 ‘선생님’ 또는 ‘주님’이라고
부른다. 그것은 옳은 말이다. 사실이 그렇기 때문이다. (요 13:14) 이처럼 너희의 주님이며 선생님인 내가 너희의 발을 씻겨
주었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겨 주어야 옳지 않겠느냐?” 예수님의 핵심 메시지는 15절에 있습니다. 15절 말씀 함께
읽겠습니다. “(요 13:15)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 같이 너희도 행하게 하려 하여 본을 보였노라” 예수님은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고 그들을 섬기심으로, 자신의 제자들도 다른 이들을 섬기는 삶을 살기를 원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세족식은 제자들을 위한
‘본보기’였다고 말씀 하셨습니다.
분명 세상은 낮은 자가 높은 자를 섬겨야 한다고 말합니다. 종이 주인을 섬기고 가난한 자가 부자를 섬기고, 어린 자가 나이 많은
자를 섬기고, 직원이 자신의 고용주를 섬깁니다. 힘 없는 자가 힘 있는 자를 섬기는 것이야말로 분명 이 세상의 원리 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 순서를 뒤집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주님의 제자들이 오히려 힘 없고, 연약하고, 천한 자들을 섬기는 삶을
살아가라고 말씀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그와 같이 자신의 삶을 나눠주고 헌신하는 삶이 복되다고 말씀 하셨습니다. 가정이나 교회에서
리더 혹은 지도자나 직분자일수록 다른 사람들을 더 열심히 섬기는 것이 바로 예수님의 모범을 따르는 것입니다.
언제나 종의 위치에 서서 낮은 자리에서 섬기는 그리스도인이 진정으로 예수님의 제자 입니다. 섬김 받고 높임 받으려 하는 것은
예수님이 말씀하신 제자의 모습이 아닙니다. 제자들을 섬기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나 수건을 허리에 두르고 대야에 물을 떠오시고 친히
발을 씻겨주신 예수님의 모습을 떠올려보십시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더욱 더 겸손히 종의 자리를 찾는 모습을 보일 때, 교회는
진정으로 예수님의 향기를 세상에 드러낼 수 있습니다. 그러한 섬김의 삶이 하나님 나라를 확장시켜 나갈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본문에서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신 예수님은 먼저 행동으로 본을 보이신 후에 교훈을 가르치셨습니다.
우리들도 예수님께서 가르쳐 주신 섬김의 모습을 본받아 더 많은 이들을 섬기며 살아갈 수 있는 복된 제자의 삶을 살아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리더의 덕목, 자기 성찰의 미학, 운명과 자유 의지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를 리더의 덕목, 자기 성찰의 미학, 운명과 자유 의지를 내용으로 구성해서 그를 살펴볼 것입니다. 그리고 오늘날 어떻게 현저하게 관련성이 있는지 볼 것입니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리더의 덕목
첫 시작으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가 보여준 진정한 리더의 덕목은 무엇인지
알아보겠습니다. 이 철학자는 통솔자의 역할이 개인의 이익을 위해 권력을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정직과 덕을 바탕으로 공공의 선을
위해 봉사하는 것임을 보여준 모범적인 선도자였습니다. 그의 통치는 전염병, 무력 갈등, 정치적 불안 등 끊임없는 혼란 속에서도
정의, 지혜, 용기를 기반으로 한 지도력을 일관되게 유지한 것으로 유명합니다. 통솔력의 기초부터 들여다보면 이렇습니다. 그에게
있어서 정의는 통솔자가 지녀야 할 가장 중요한 덕목이었습니다. 그는 영도력이 봉사의 행위라고 믿었습니다. 그리고 타인을 잘 섬기기
위한 핵심은 공정함과 존중으로 대하는 것이라고 보았습니다. 그의 명상록에서도 자신에게 끊임없이 공정하게 행동하고, 신분이나
지위에 상관없이 모든 사람을 평등하게 대해야 한다고 상기시키는 모습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의 정책에서도 이를 확인할 수
있는데, 그는 법률문제나 통치에서 공정성을 보장하려고 노력했습니다. 현대의 지도자들에게 이 철인의 예시는 윤리적 통솔력이란 외부
환경이 어려운 상황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정의에 대한 헌신을 요구한다는 점을 강조합니다. 상업적, 정치적 결정이 자주 개인이나
조직의 이익을 우선시하는 세상에서, 그는 진정한 선도자는 소수의 이익보다 다수의 복지를 우선시해야 한다는 사실을 상기시킵니다.
스토아 철학에서 지혜는 감정이나 충동이 아닌, 이성적이고 이해를 바탕으로 결정을 내리게 하는 덕목입니다. 황제이자 철인인 그는
수많은 도전에 직면했습니다. 하지만, 그는 항상 지혜로운 결정을 내리려고 노력했습니다. 그는 자신의 감정이 판단을 흐리게 하지
않도록 상황을 명확하게 보려고 했습니다. 이러한 이성과 신중한 숙고에 대한 헌신은 그가 복잡한 정치적 상황을 명확하게 처리하는 데
도움이 되었습니다. 오늘날 통솔자들은 정보의 홍수 속에서 빠르게 결정을 내려야 하는 압박을 받고 있습니다. 이 철학가의 지혜
철학은 현대의 지도자들에게 멈추고, 숙고하며, 자신의 선택이 장기적으로 미칠 영향을 고려하라고 권장합니다. 합리적인 의사결정의
사고방식을 기르며, 선도자들은 단기적인 도전에 충동적으로 대응하는 대신 명확하고 목적 있는 방식으로 조직을 이끌 수 있습니다.
스토아 철학에 따르면 용기는 두려움이나 불확실성에도 불구하고 윤리적으로 행동할 수 있는 능력입니다. 이 철인은 타국가의 침입,
경제적 어려움, 안토닌 역병에 직면했을 때 이를 분명히 보여주었습니다. 그는 지도자의 역할은 결과가 불확실하더라도 도전에 정면으로
맞서는 것이라고 이해했습니다. 스토아 철학은 우리가 외부의 사건을 통제할 수는 없지만, 그에 대한 우리의 반응을 통제할 수
있다고 가르쳤습니다. 이는 이 현인의 용기의 기초가 되었습니다. 현대의 선도자들은 그의 예시에서 배울 수 있습니다. 용기란
두려움이 없는 것이 아니라, 두려움 앞에서도 확신을 가지고 행동하는 능력입니다. 예측할 수 없는 현대 세계에서 문제는 종종 예상치
못하게 발생합니다. 이에 지도자들은 용기와 지혜를 균형 있게 유지하며 원칙에 대한 헌신을 잃지 않고 결단력 있게 행동해야 한다고
그는 말합니다.
자기 성찰의 미학
다음으로 그의 일기에서 배운 자기 성찰의 미학과 더불어 마음 챙김에 대해서
살펴보겠습니다. 이 철학자의 명상록은 황제의 마음을 깊이 있게 들여다볼 수 있는 귀중한 기록입니다. 그의 일상적인 자성에 대한
헌신을 보여줍니다. 이 일기 쓰기 습관은 단순한 습관을 넘어서, 그가 자신의 스토아 철학적 원칙을 지키며 자신을 책임지기 위한
마음 챙김의 한 형태였습니다. 이 현인에게 자신에 대한 자각은 영혼을 다듬고 진정 중요한 것에 집중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미학적
실천이었습니다. 이 철인은 매일 반성하는 것을 자신의 기반을 지키기 위한 중요한 수단으로 삼았습니다. 명상록은 다른 사람을 위한
글이 아니라, 그의 생각, 행동, 그리고 동기를 평가하기 위한 도구로 자신을 위해 쓴 기록이었습니다. 하루 동안 있었던 일들을
돌아보면서 그는 자신의 가치에 맞게 행동했는지, 그리고 더 나아질 수 있는 부분이 어디인지를 평가했습니다. 이러한 규칙적인 자각
습관은 한 나라를 통치하는 혼란 속에서도 그가 명료함을 유지할 수 있도록 도왔습니다. 오늘날, 마음 챙김과 자신에 대한 반성은
개인 발전과 심리적 건강에 필수적인 도구로 인정받고 있습니다. 일기를 쓰거나 명상 혹은 조용한 숙고를 통해 매일 반성하고 자신의
마음을 살피는 통솔자나 개인들은 자신의 행동과 생각 패턴에 대한 통찰력을 얻게 됩니다. 이 실천은 감정 조절뿐만 아니라 자신에
대한 인식을 키워주는 동시에 더 나은 의사 결정을 내릴 수 있도록 도와줍니다. 빠르게 변화하는 세상에서, 이 철학자가 했던 것처럼
시간을 내어 자각하는 것은 마음과 영혼을 다잡고 목적과 방향성을 제공해 줍니다. 스토아 철학의 중심 원칙 중 하나는 감정
조절입니다. 이 현인은 마음 챙김을 통해 이를 실천했습니다. 그는 외부 사건을 통제할 수 없지만, 그에 대한 반응은 온전히 자신의
통제 하에 있다는 점을 잘 이해했습니다. 그가 쓴 글에서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주제는 이 통제 가능한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의
구분입니다. 그는 시종일관 역경 앞에서도 침착함을 유지하고, 분노를 억누르며 인내로 행동할 것을 상기했습니다. 현대의 마음 챙김
실천도 이와 같은 스토아 철학적 원칙에서 비롯되었습니다. 우리의 감정과 반응에 대한 인식을 기르면서 자극과 반응 사이에 공간을
만들어, 더 깊이 생각하고 신중한 행동을 취할 수 있습니다. 특히 통솔력을 가져야 하는 위치에 있는 사람들에게 이러한 감정 조절은
매우 중요합니다. 이는 즉흥적인 결정이 아닌 차분하고 집중된 문제 해결 방식을 촉진합니다. 개인적인 환경과 직업적 환경
모두에서, 이 철학가가 실천한 마음 챙김은 더 큰 회복력과 감정적 강인함을 가져다줄 수 있습니다. 본인 스스로에 대한 인식은 개인
성장을 위한 핵심 요소입니다. 이 글의 주인공은 이를 명확하게 인식하고 있었습니다. 그의 명상록에는 자신의 동기를 끊임없이
질문하고, 자신의 결함을 살피며, 자신을 개선하려 했던 한 남자의 모습이 담겨 있습니다. 그는 자신의 잘못을 직면하는 데 두려움이
없었지만, 그 과정에서 연민을 잃지 않고 성장을 갈망했습니다. 이러한 스스로의 인식은 그가 겸손하게 영도력을 발휘하도록
도와주었으며, 지도력은 완벽함이 아니라 끊임없는 자신의 개선이라는 점을 인지하게 했습니다. 개인적 또는 직업적 발전을 추구하는
이들에게 본인의 인식은 중요한 기초입니다. 자신의 행동, 생각, 그리고 감정을 규칙적으로 평가함으로써 성장할 수 있는 영역을
파악하고 더 나은 자신이 될 수 있는 기회를 얻을 수 있습니다. 지도력에서는 이러한 자각이 공감, 겸손, 그리고 실수로부터
배우려는 결심으로 이어집니다. 황제이자 학자인 그가 실천한 본인의 반성과 자각은 개인 성장의 여정이 평생 지속되며, 그 여정은
내면을 바라보는 용기로부터 시작된다는 것을 우리에게 가르쳐 줍니다.
운명과 자유 의지
오늘 포스팅의 주인공의 운명과 자유 의지에 대한 가르침은 그의 기록에서 중심적인
주제입니다. 인생의 불가피한 역경에도 불구하고 개인의 능동적인 역할을 강조한 스토아 철학을 반영하고 있습니다. 그는 인생의 중요한
부분은 우리의 통제를 벗어난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에 어떻게 대응할 것인지를 선택할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초자연적인 힘의 영향 안에서 스스로 움직이려는 마음에 대한 그의 고찰은 영도력, 적응력, 그리고 개인적 책임에 대해
깊은 교훈을 제공합니다. 이 철학자는 종종 스토아 철학의 실천인 아모르파티(amor fati)에 대해 자각했습니다. 그는 좋은
일이든 나쁜 일이든, 모든 일이 우주의 자연적 질서의 일부이며, 이를 평온하게 받아들여야 한다고 믿었습니다. 삶이 제시하는
도전들을 저항하는 대신, 그는 이를 성장의 기회로 삼아 우아하게 받아들이라고 스스로에게 조언했습니다. 오늘날의 세상에서는
불확실성과 예측 불가능성이 항상 존재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통제할 수 없는 것을 받아들이는 능력은 매우 귀중한
기술입니다. 이러한 수용을 실천하는 지도자는 어려움 속에서도 침착함과 효율성을 유지할 수 있습니다. 스토아 철학의 아모르파티
원칙을 받아들임으로써, 현대의 선도자들은 통제할 수 없는 것에 에너지를 낭비하는 대신, 자신의 행동과 반응에 집중할 수 있습니다.
오늘의 주인공은 운명을 받아들이면서도, 개인이 자신의 성품을 형성하는 데 있어 내적자유를 지닌다고 믿었습니다. 외부 상황은 종종
우리의 통제를 벗어나지만, 우리는 내적인 반응과 인생에서 내리는 선택에 대해 완전한 주체성을 갖고 있다고 가르쳤습니다. 이러한
선택을 통해 우리는 스스로를 정의합니다. 이러한 생각은 외부의 압박에 의해 압도된다고 느낄 수 있는 현대의 통솔자들에게 특히 힘을
실어줍니다. 이 철학가는 우리에게 진정한 지도력은 우리가 처한 상황이 아니라 우리가 내리는 선택에 있다고 상기시켜 줍니다.
내적자유를 덕성과 진정성으로 행사함으로써, 선도자는 자신의 성품뿐만 아니라 조직과 공동체의 방향도 형성할 수 있습니다. 이 현인은
끊임없이 삶의 이분법, 즉 자연적 질서 내에서 스스로 설 수 있는 힘의 압박, 외부 사건과 내부 반응 간의 균형을 다뤄왔습니다.
그의 자각은 우리가 이러한 복잡함을 지혜로 헤쳐 나가도록 격려합니다. 우리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을 통제할 수는 없지만, 항상
그것을 어떻게 해석하고 반응할지는 통제할 수 있다는 사실을 일깨워줍니다. 영도력과 특별한 삶에서 이 지혜는 대단히 귀중합니다. 이
철학자는 삶이 자주 역설적이고 변덕스럽지만, 우리는 이를 우아함과 명료함으로 헤쳐 나갈 도구를 가지고 있다고 가르칩니다. 우리가
바꿀 수 없는 것들을 받아들이고, 외부적인 구속이나 무엇에 얽매이지 않으려는 마음을 통해 우리의 반응을 형성함으로써, 가장
어려운 상황에서도 자신과 타인을 이끌어 갈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 가운데 살고 있는지 알 수 있는 4가지 방법
일반적으로 기독교인들은 자신의 삶에 두신 하나님의 뜻 가운데 살고 있는지 궁금해한다. 이 영역에서 우리는 모두 씨름을 하고 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왕국을 우리에게 허락하시기를 기뻐하시는 분이기 때문에,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뜻 가운데 맞추어 있는지 알려주심을 확신해야 한다. 성경은 우리가 이 땅의 나그네라고 말씀하고 있다. 우리의 삶은 풀과 같이 짧은 것이다. 이러한 사실을 안다면, 목적이 있는 삶을 사는 것이 좋지 않겠는가? 우리가 한 번 뿐인 인생을 사는데, 왜 이를 계수하지 않겠는가?
즉, 우리는 삶 가운데 두신 하나님의 뜻을 알아야 한다. 우리가 그분의 뜻을 알고 그 자리에 있을 때 우리는 목적이 있는 삶을 살기 쉽다.
우리의 삶 가운데 두신 하나님의 뜻을 알 수 있는 몇 가지 길이 있다. 이 영역에서 당신이 하나님의 지혜와 인도하심을 구하고 있다면 이 글을 참고하길 바란다.
최근 영국 크리스천투데이는 '우리 삶 가운데 두신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알 수 있는 방법'을 다음과 같이 소개했다.
1. 하나님의 뜻은 당신이 아닌 하나님을 위한 것이다
무엇보다 하나님의 뜻이 우리를 위한 것이라는 잘못된 마음의 자세를 깨뜨릴 필요가 있다. 하나님의 뜻은 우리를 위한 것이 아니다.
"오직 우리 하나님은 하늘에 계셔서 원하시는 모든 것을 행하셨다니다" (시편 115:3)
우주는
우리를 중심으로 돌아가지 않는다. 하나님의 뜻은 우리의 부르심, 우리의 안수, 우리의 사역에 관한 것이 아니다. 우리의 재능,
기술, 심지어 우리의 꿈에 대한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뜻은 대부분 분명히 우리의 영광에 대한 것이 아니다. 우리는 틀을 깨고,
우리의 삶이 우리에 대한 것이 아니고 우리를 위한 것도 아님을 알아야 한다.
"여호와여 영광을 우리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우리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오직 주는 인자하시고 진실하심으로 주의 이름에만 영광을 돌리소서"(시편 115:1)
2. 하나님의 말씀에서 그분의 뜻을 찾으라
우리는
하나님의 뜻이 우리가 아닌 그분에 대한 것이라는 사실을 세웠다. 그렇다면 우리는 그분의 뜻을 찾아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람들을 위한 일반적인 뜻을 갖고 계신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은혜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는 것이다.
"이것이 우리 구주 하나님 앞에 선하고 받으실 만한 것이니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데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딤전 2:4)
3. 당신의 역할을 알라
그렇다면 당신의 역할은 무엇인가? 하나님께서는 당신에게 어떤 뜻을 두셨는가? 당신을 부인하고 그분의 말씀에 순종하고,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파하는 것이다.
"이에 에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마16:24)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키리니 내 아버지께서 그를 사랑하실 것이요 우리가 그에게 가서 그와 함께 하리라"(요 14:23)
"예수께서
나아와 말씀하여 이르시되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의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찌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마 28:18~20)
당신이 하나님의 뜻 가운데 있는지 그렇지 않은지 아는 것은 어렵지 않다. 당신은 온 마음으로 그리스도를 따르고 있는가? 당신은 그분의 말씀을 읽고 받아들이며 순종하고 있는가? 사람들을 그리스도께 인도하고 있는가?
여기에 한 가지라도 '그렇지 않다'고 답했다면,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불순종을 회개하고 순종을 시작해야 한다. 지금 바로 가서 행하라!
만약 모두 '그렇다'고 답했다면, 염려하지 말라. 이를 계속하면서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라!
4. 기도하라.
너무
당연하게 들리지만, 너무 중요한 것이다. 매일, 매주, 매년, 하나님께 당신의 뜻을 보여달라고 기도하라. 조금씩 일들이
연결되고, 문이 열리거나 닫히며, 취해야 할 방향에 대한 확신이 더 강해짐을 느끼게 될 것이다. 어떠한 문이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인지 알게 해달라고 기도할 때, 매일 매일의 결정에 대하여 더 큰 확신을 가질 수 있을 것이다.
많은 기독교인들에게
'마음의 평안'은 그들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을 하고 있는지 그렇지 않은지 알려주는 좋은 척도이다. 만약 당신이 하는 일에
대한 평안이 느껴지지 않거나,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인지 알 수 없다면, 매우 단순하다. 하지 않으면 된다.
가장 중요한 것
무엇보다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쌓는 것이다. 그분은 당신의 아버지이시다. 예수님은 위대한 목자이시다. 그분은 당신을
부르시고, 당신을 푸른 초장으로 인도하실 것이다. 그분으로부터 듣고, 그분을 따르라. 그분에 대해 아는 것보다 그분의 뜻을 잘 알
수 있는 방법은 없다.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 같이 너희도 행하라(요한복음 13:15)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 같이 너희도 행하게 하려 하여 본을 보였노라.
이렇게 말씀하신 분은 바로 우리의 영혼을 구속하신, 사랑하는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분은 당신 자신을 낮추시되 노예(종)와
같이 제자들의 발을 씻기셨습니다. 이를 행하심으로 제자들과의 만찬에서 당신의 사랑을 보여주실 뿐만 아니라, 동시에 놀라운
상징으로 주님은 그들의 영혼을 죄로부터 깨끗하게 하셨다는 것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제자들과 헤어짐에 앞서 주님은 제자들 앞에 앉으시고 몸소 보여주신 의미심장한 섬김의 모습에서 이중(二重)적인 사랑의 역사를
나타내셨는데, 그것은 육체와 영혼에 있어서 그분의 삶 자체이자 축복된 그분의 사역이 어떠하셨는가를 보여주십니다. 이 일 후에
주님께서 자리에 앉으시고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 같이 너희도 행하게 하려 하여 본을 보였노라.” 이로 말미암아 주님에게서 본 것과 경험한 모든 것이
제자들 삶 가운데 규칙이 된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 같이 너희도 이와 같이 하라.”
복되신 구세주로서 그분의 말씀은 또한 우리에게도 적용됩니다. 주께서 자신의 죄를 씻어 주셨다는 것을 아는 자라면, 그러한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우리를 위해 기꺼이 당신의 몸을 버리시려는 그분은 명하여 주십니다.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 같이 너희도 행하라
그리고 이 말씀은 우리를 감동케 하시는 강한 힘이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 각자가 무슨 일을 하든지 간에 우리가 그의
행하심을 본 그대로 행하기를 요구하십니다. 그분께서 행하셨고, 또한 지금도 행하고 계신 바 그대로 우리도 다른 이들에게 행해야만
하는 것입니다.
자신을 낮추시는 겸손, 남을 용서하심과 구원해주시는 사랑에 있어서 그분은 우리의 본이 되십니다. 우리 각자도 우리의
선생님이신 그분을 그대로 본받고 그분의 형상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그러면 즉시 다음과 같은 생각이 들 것입니다. ‘아! 내가 왜
그리스도와 같이 살지 못하였던가! 이와 같이 살 수 있었는데 어찌 미처 알지 못하였던가!’
그럼에도 그분은 여전히 나의 주님이시며 나를 사랑하시니, 나도 그분을 사랑합니다. 주께서 나로 하여금 이처럼 살라 하시니, 더 이상 달리 살아갈 궁리를 해서는 아니 되겠나이다.
나는 그분의 말씀에 나의 마음을 열어야만 하며, 나의 눈이 그분께서 본으로 보여주신 것에만 고정시켜야 하겠나이다. 결국, 거룩한 능력이 내게 임하고 그 능력은 거부할 수 없는 힘으로 나를 이끌어 나로 울부짖게 하실 것입니다.
주님, 당신께서 행하신 것을 저도 행하겠나이다
어떤 본(本)이 능력으로 나타나기 위해서는 주로 두 가지에 달려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 하나는 그것의 매력적인 모습이
있어야 하고, 또 다른 하나는 친히 몸소 본을 보여주시는 그분과의 개인적인 관계와 그분의 영향력인 것입니다. 이 두 관점에서 볼
때, 과연 우리 주님께서 본을 보여주신 모습에는 능력이 있습니다!
주께서 보이신 본(本)이 정말로 여러분에게 매력적으로 다가옵니까? 여러분에게 진지하게 묻고 싶습니다. 왜냐하면 많은 주의 제자들의 행위로 판단해 보건대, 사실대로 말하자면 그렇지 않아 보입니다.
오! 하나님의 성령이 우리의 눈을 여시사 독생자를 닮는 삶의 그 천국적인 아름다움을 바로 볼 수 있게 하옵소서
우리는 주 예수님이 누구신지 알고 있습니다. 그분은 모든 영광을 받으실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원래 영광스러움과 완전함에 있어서 아버지와 동등한 분이십니다. 이 땅에 계셨을 때 예수님께 대하여 이와 같이 말할 수 있습니다.
이 생명이 나타내신 바 된 지라 이 영원한 생명을 우리가 보았고 증거하여 너희에게 전하노니 이는 아버지와 함께 계시다가 우리에게 나타내신 바 된 자니라(요일 1:2)
그분 안에서 우리는 하나님을 보는 것입니다. 그분 안에서, 주님께서 이 땅에 계신다면 하나님께서 어떻게 행하실지에 관하여
보게 되는 것입니다. 그분 안에는 하늘에 속한 온갖 아름다운 것과 사랑스러운 것과 완전한 것이, 마치 이 땅에서의 보여지는 삶의
모습으로 우리에게 계시됩니다.
만일 우리가 천국에서 귀하고 영광스럽게 보시는 것이 무엇이며, 또한 참으로 거룩한 것이 무엇인지 알고자 한다면, 예수님을 주목하여야만 할 것입니다. 그가 행하시는 모든 것 안에는 하나님의 영광이 들추어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안타까운 것은 하나님의 자녀들이 눈이 멀어서 보지 못한다는 사실입니다! 많은 하나님의 자녀에게 있어서 이러한 천국적인 아름다움은 매력적이지 못합니다. 따라서 간절히 원할 이유가 없다는 것입니다.
이 세상 임금의 궁정 안에서의 삶의 모습과 방식은 그가 통치하고 있는 나라의 생활양식에 지대한 영향력을 끼치게 됩니다. 귀족이나 상류 계층에 속한 자들이라면 모방하려 들 것입니다.
육체의 모습을 입고 이 땅에 내려오사 우리 가운데 친히 거하여 주신 천국의 왕이신 그분이 오심은, 우리로 하여금 우리가 이
땅에서 어떻게 하면 하나님처럼 삶을 살아갈 것인가를 주의하여 보라고 하심인데, 그의 제자라고 하는 이들 가운데 예수님을 본받고자
하는 모습을 좀처럼 찾아보기 힘든 것 같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볼 때,아버지께 순종하시는 모습과 가장 낮고 천한 종의 모습으로 자신을 낮추시는 겸손의 자세와 자신을
전적으로 포기하고 희생하심으로 나타내신 그의 사랑은, 천국의 가장 놀랍고 영광스러운 것이라 말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하늘나라에서도 이보다 더 크고 이보다 더 찬란한, 다른 그 어떤 것을 찾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진실로 우리로 하여금 그 본(本)을 따르도록 하심은 억지가 아니라, 매력적이고 그래서 우리는 이끌리게 되었고 참으로 이것은 되는 일인 것입니다. 이로써 우리를 얻고자 하신 의도이셨던 것입니다.
애벌레와 잠자리
연못
바닥에 애벌레들이 모여 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연꽃줄기를 타고 물위로 올라간 수많은 자기의 친구들이 함흥차사가 되어
돌아오지 않는 이유가 몹시 궁금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다음부터 누구든지 일단 물위로 올라간 후에도 반드시 연못 속으로 되돌아와
자신에게 일어났던 일들을 이야기하도록 서로 굳게 약속했습니다. 그들 중 하나가 연꽃 줄기를 타고 올라와서 물위에 떠있는
연꽃의 넓은 잎사귀 위에 앉아 완전히 탈바꿈을 하여 아름다운 날개를 가진 잠자리로 변했습니다. 그는 친구들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하여 물속으로 들어가려 했으나 도저히 불가능했습니다. 그는 할 수 없이 연못 위로 날아다니면서 연못 속에 있는 친구들을
내려다 보았습니다. 그리고는 비록 자기 친구들이 자기를 발견한다 할지라도 이토록 아름답고 찬란한 모습으로 변한 자기가 바로
자기들과 같은 애벌레 중의 하나였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우리 인간의 죽음도 이와 같은 탈바꿈이라 할 수 있는데 우리가 비록 세상 떠난 사람들의 모습을 볼 수 없고 또한 그들과 이야기를 나눌 수 없다고 해서 그들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뿐만
아니라 이 `애벌레와 잠자리 이야기'는 성도의 영적 변화의 모습도 보여줍니다. 성령충만을 받아 중생의 감격과 기쁨에 살게 되면
근심하고 염려하고 애벌레같던 옛사람으로서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영광의 세계에서 잠자리처럼 훨훨 날며 살게 될 것입니다.
아나스타시스(ἀνάστασις)
헬라어 단어 ἀνάστασις (Anastasis)는 성경에서 ‘부활, 일어남’을 의미하는 매우 중요한 개념입니다.
단순한 육체의 회복이 아니라, 죽음을 이기고 다시 살아나는 일, 특히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과 믿는 자의 부활 소망을 핵심적으로 나타냅니다.
헬라어 원어 : ἀνάστασις
발음 : Anástasis (아나스타시스)
뜻 : 부활, 일어남, 다시 살아남
📖 성경 구절 예시
요한복음 11:25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부활(ἀνάστασις)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 여기서 아나스타시스는 단순한 사건이 아닌, 예수님 자신이 ‘부활 그 자체’임을 선포하는 말씀입니다.
사도행전 4:33 사도들이 큰 권능으로 주 예수의 부활(ἀνάστασις)을 증언하니 무리가 큰 은혜를 받아
➡ 교회의 사역 중심에는 항상 예수의 부활이 있었습니다.
🔍 묵상 포인트 /
‘아나스타시스’는 단순히 죽은 자가 다시 사는 것을 넘어서, 하나님의 생명력이 죽음을 이기는 절정의 능력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하나님 나라의 확증이자, 믿는 자들에게는 장차 올 부활 생명의 보증입니다.
오늘도 우리는 죽은 옛 자아로부터 날마다 일어나는 영적 부활을 경험하며, 최종적으로는 몸의 부활과 새 하늘과 새 땅의 소망을 품고 살아갑니다
'부활'이라는 단어의 국어사전적 의미는 '죽었다가 다시 살아남, 쇠퇴하거나 폐지한 것이 다시 성하게 됨 또는 그렇게 함. 십자가에서 못 박혀 세상을 떠난 예수가 자신의 예언대로 사흘만에 다시 살아난 일' 이라고 정의 하고 있다.
그래서 많은 기독교인들이 부활의 첫 열매가 되시는 예수님을 바라보며 죽음에서의 부활을 믿으며 소망하는 소위 부활신앙을 가지고 오늘도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성경이 말하고 있는 '부활'의 의미는 국어사전이 정의하고 있는 것과는 너무나 많은 차이가 있다.
'부활'로 번역된 '아나스타시스'가 유래된 동사형인 '아니스테미'라는 단어가 가지고 있는 원래의 의미에서 찾을 수 있다. '아니스테미'의 뜻은 '다시 일어나다, 똑바로 서다, 죽음에서 일으키다, 나아가다, 자리에서 일어나다, 들어올리다'인데,
'한가운데로, 중앙에, ...의 복판에, 사이에'의 뜻을 가진 '아나' '서다, 이룩하다, 두다, 세우다, 옆이나 가까이 서다, 확고한 마음을 가지다, 권리를 포기하지 않다'의 뜻을 가진 '히스테미'의 합성어에서 유래된 단어이다.
ἀνίστημι
Storng number 450
1. 일으키다. 2. 누운 자를 일으키다. 3. 일으켜 세우다 Pronunciation
[ anistēmi ]
성경에서 부활은 단순히 죽은
자가 살아나는 사건이 아니라, 하나님의 구속 사역의 정점이며 새 생명의 시작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모든 믿는 자의 부활의
첫 열매가 되며, 영원한 생명에 참여할 수 있는 소망이 됩니다. 부활은 단지 미래 사건이 아닌, 현재의 삶 속에서도 능력으로
역사하는 진리입니다. 상징적으로 부활은 ‘어둠에서 빛으로’, ‘죽음에서 생명으로’, ‘심판에서 구원으로’의 전환을 나타냅니다.
1.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
예수님의 부활은 기독교 신앙의 핵심이며, 죽음을 이긴 승리로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확증합니다. 부활은 하나님의 의가 드러나는 사건이며, 믿는 자에게 부활 생명을 약속하는 근거가 됩니다.
마태복음 28:6
그가 여기 계시지 않고 그가 말씀하시던 대로 살아나셨느니라 와서 그가 누우셨던 곳을 보라
마가복음 16:6
청년이 이르되 놀라지 말라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나사렛 예수를 찾는구나 그가 살아나셨고 여기 계시지 아니하니라 보라 그를 두었던 곳이니라
누가복음 24:6-7
여기 계시지 않고 살아나셨느니라 갈릴리에 계실 때에 너희에게 어떻게 말씀하셨는지를 기억하라 이르시기를 인자가 죄인의 손에 넘겨져 십자가에 못 박히고 제삼일에 다시 살아나야 하리라 하셨느니라
요한복음 11:25-26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사도행전 2:32
이 예수를 하나님이 살리신지라 우리가 다 이 일에 증인이로다
2. 부활은 믿는 자의 소망
성경은 부활을 단지 예수님의 역사적 사건으로만 말하지 않고, 믿는 자의 미래 소망으로 제시합니다. 이 소망은 현재의 고난 속에서도 인내하게 하며, 영원한 생명으로 인도합니다.
요한복음 5:28-29
이를 놀랍게 여기지 말라 무덤 속에 있는 자가 다 그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
로마서 6:5
만일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같은 모양으로 연합한 자가 되었으면 또한 그의 부활과 같은 모양으로 연합한 자도 되리라
빌립보서 3:10-11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여함을 알고자 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어떻게 해서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하노니
데살로니가전서 4:16
주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로 친히 하늘로부터 강림하시리니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고
고린도전서 15:52
마지막 나팔에 순식간에 호련히 다 변화되리니 나팔 소리가 나매 죽은 자들이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아나고 우리도 변화되리라
3. 부활의 능력
부활은 단지 육체의 회복이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나는 사건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죽음을 이긴 승리의 권능이며, 그 능력은 지금도 성도들의 삶에 역사하여 새 사람으로 변화시키는 힘이 됩니다.
에베소서 1:19-20
그의 힘의 위력으로 역사하심을 따라 믿는 우리에게 베푸신 능력의 지극히 크심이 어떠한 것을 너희로 알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그의 능력이 그리스도 안에서 역사하사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시고 하늘에서 자기 오른편에 앉히사
골로새서 2:12
너희가 세례로 그리스도와 함께 장사되고 또 죽은 자들 가운데서 그를 일으키신 하나님의 역사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 안에서 함께 일으키심을 받았느니라
로마서 1:4
성결의 영으로는 죽은 자들 가운데서 부활하사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선포되셨으니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시니라
베드로전서 1:3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을 찬송하리로다 그의 많으신 긍휼대로 예수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게 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산 소망이 있게 하시며
고린도전서 6:14
하나님이 주를 다시 살리셨고 또한 그의 권능으로 우리를 다시 살리시리라
4. 부활과 새 생명
부활은 단순히 죽음을 이기는 것에서 끝나지 않고, 전혀 새로운 삶의 시작을 의미합니다. 부활 생명은 의롭고 거룩한 삶을 가능하게 하며, 성령과 함께 새 피조물로 살아가게 합니다.
로마서 6:4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라
갈라디아서 2:20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골로새서 3:1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의 것을 찾으라 거기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느니라
요한일서 3:14
우리는 형제를 사랑하므로 사망에서 옮겨 생명으로 들어간 줄을 알거니와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사망에 거하느니라
요한복음 6:40
내 아버지의 뜻은 아들을 보고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는 이것이니 마지막 날에 내가 이를 다시 살리리라 하시니라
5. 마지막 날의 부활
마지막 날의 부활은 심판과 영생, 영벌을 갈라놓는 결정적 사건입니다. 예수님의 재림과 함께 죽은 자들이 모두 일어나고, 믿는 자는 생명의 부활에 참여하게 됩니다. 이는 우리 신앙의 완성이며 영원한 소망입니다.
요한복음 6:39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은 내게 주신 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이것이니라
요한복음 11:24
마르다가 이르되 마지막 날 부활 때에는 다시 살아날 줄을 내가 아나이다
다니엘 12:2
땅의 티끌 가운데에서 자는 자 중에서 많은 사람이 깨어나 영생을 받는 자도 있겠고 수욕을 받아서 영원히 부끄러움을 입을 자도 있을 것이며
요한계시록 20:6
이 첫째 부활에 참여하는 자들은 복이 있고 거룩하도다 둘째 사망이 그들을 다스리는 권세가 없고 도리어 그들이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제사장이 되어 천 년 동안 그리스도와 더불어 왕 노릇 하리라
고린도전서 15:23
그러나 각각 자기 차례대로 되리니 먼저는 첫 열매인 그리스도요 다음에는 그가 강림하실 때에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요
6. 부활과 승리
부활은 죽음과 죄, 사망의 권세를 이긴 승리의 상징입니다. 믿는 자는 이 승리에 동참하여 두려움 없이 살아가며, 그리스도 안에서 이미 승리한 자로 여겨집니다.
고린도전서 15:54-55
이 썩을 것이 썩지 아니함을 입고 이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을 때에는 사망이 이김에 삼킨 바 되리라고 기록된 말씀이 이루어지리라 사망아 너의 승리가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네가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로마서 8:11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의 영이 너희 안에 거하시면 그리스도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가 너희 죽을 몸도 살리시리라
히브리서 2:14
자녀들은 혈과 육에 속하였으매 그도 또한 같은 모양으로 혈과 육을 함께 지니심은 죽음을 통하여 죽음의 세력을 잡은 자 곧 마귀를 멸하시며
요한계시록 1:18
곧 살아 있는 자라 내가 전에 죽었었노라 볼지어다 이제 세세토록 살아 있어 사망과 음부의 열쇠를 가졌노니
고린도후서 4:14
주 예수를 다시 살리신 이가 예수와 함께 우리도 다시 살리사 너희와 함께 그의 앞에 서게 하실 줄을 아노라
7. 부활과 성도의 영광
성도의 부활은 영광스러운 몸으로의 변화이며, 부패할 몸에서 영원히 썩지 않을 몸으로의 변화를 뜻합니다. 이는 그리스도 안에서 영화롭게 되는 최종 단계입니다.
빌립보서 3:21
그가 만물을 자기에게 복종하게 하실 수 있는 자의 역사로 우리의 낮은 몸을 자기 영광의 몸의 형체와 같이 변하게 하시리라
고린도전서 15:42
죽은 자의 부활도 이와 같으니 썩을 것으로 심고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아나며
고린도전서 15:49 우리가 흙에 속한 자의 형상을 입은 것 같이 또한 하늘에 속한 이의 형상을 입으리라.
로마서 8:30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골로새서 3:4
우리 생명이신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그 때에 너희도 그와 함께 영광 중에 나타나리라
8. 상징적 부활 (비유적 표현)
부활은 문자적 사건이면서도 동시에 영적인 회복을 상징합니다. 죄로 죽었던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다시 살아나는 것은 새로운 존재로의 변화이며, 일상의 성화 과정에서도 부활의 삶을 살아가게 합니다.
에스겔 37:5-6
주 여호와께서 이 뼈들에게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내가 생기를 너희에게 들어가게 하리니
너희가 살아나리라 너희 위에 힘줄을 두고 살을 입히고 가죽으로 덮고 너희 속에 생기를 넣으리니 너희가 살아나리라 또 내가 여호와인
줄 너희가 알리라 하셨다 하라
요엘 2:25
내가 전에 너희에게 보낸 큰 군대 곧 메뚜기와 느치와 황충과 팥중이가 먹은 해 수대로 너희에게 갚아 주리니
시편 71:20
우리에게 여러 가지 심한 고난을 보이신 주께서 우리를 다시 살리시며 땅 깊은 곳에서 다시 이끌어 올리시리이다
호세아 6:2
여호와께서 이틀 후에 우리를 살리시며 셋째 날에 우리를 일으키시리니 우리가 그의 앞에서 살리라
이사야 26:19
주의 죽은 자들은 살아나고 그들의 시체들은 일어나리이다 티끌에 누운 자들아 너희는 깨어 노래하라 주의 이슬은 빛난 이슬이니 땅이 죽은 자들을 내어놓으리라
성경에서 ‘부활’의 신학적 의의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단지 한 인물의 역사적 사건이 아니라, 성경 전체에서 중심을
이루는 구속사의 정점이며, 기독교 신앙의 핵심 진리입니다. 부활은 죽음을 이긴 하나님의 능력이며, 믿는 자 모두의 영생과 구원을
보증하는 사건입니다. 또한 부활은 교회, 성도의 정체성과 삶, 종말론적인 소망까지 포괄하는 주제로서, 다양한 신학적 의미를 품고
있습니다.
1. 구속사의 완성으로서의 부활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구약에서 예언된 하나님의 구속 계획의 성취이자, 인류 구속의
완성입니다. 구약의 희생 제사는 죄에 대한 대속을 상징했으며,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로 인해 그 실체가 성취되었습니다.
부활은 단순한 기적이나 사건이 아니라, 하나님의 구속 계획이 완전히 이루어졌음을 나타내는 절정이며, 그리스도의 부활 없이는
십자가의 죽음 또한 무의미해집니다.
2.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과 메시아성의 확증
부활은 예수 그리스도가 단지 선지자나 도덕 교사가 아니라, 참 하나님의 아들임을
확증하는 사건입니다. 로마서 1:4은 “죽은 자들 가운데서 부활하사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선포되셨다”고 선포합니다. 이는
예수님의 메시아적 정체성과 사역의 신적 권위를 확실히 증명하며, 십자가의 치욕을 영광으로 뒤바꾼 하나님의 선언입니다. 부활은 예수
그리스도가 죄와 사망의 권세를 이기신 구세주임을 세상에 공표하는 사건입니다.
3. 성도의 칭의와 부활의 관계
성경은 예수님의 부활이 성도의 칭의(義)와 직접적으로 연결되어 있음을 강조합니다.
로마서 4:25은 "예수는 우리의 범죄 때문에 내줌이 되고 또한 우리의 의롭다 하심을 위하여 살아나셨느니라"고 말합니다. 이는
그리스도의 부활이 단순한 역사적 사건이 아니라, 믿는 자가 의롭다 함을 받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는 뜻입니다. 부활은 칭의의
결과가 아니라 원인으로 작용하며,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 여김을 받는 근거가 됩니다.
4. 부활과 성도의 새로운 삶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성도의 삶에 즉각적이고 현재적인 변화를 일으킵니다. 로마서
6장은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부활함으로써 성도가 죄에 대해 죽고 새 생명 가운데 살아가야 함을 강조합니다. 이것은 상징적 개념이
아니라 실제적인 삶의 전환을 뜻하며, 부활은 단지 미래의 사건이 아닌 ‘지금 여기’에서의 거룩한 삶, 경건한 삶, 성화된 삶을
가능케 하는 능력입니다. 성도는 부활의 생명으로 날마다 죄를 이기고, 하나님의 형상으로 회복되어 가는 과정을 살아갑니다.
5. 부활은 영원한 생명의 보증
고린도전서 15장에서 바울은 부활이 없다면 기독교 신앙은 헛된 것이며, 우리는 가장
불쌍한 자라고 선언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실제로 부활하셨기 때문에, 믿는 자는 영원한 생명을 약속받았습니다. 이는 단지 죽음
이후에 천국에 가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현재의 삶에서도 죽음을 초월한 생명력을 살아내는 것이며, 궁극적으로 마지막 날에
영광의 몸으로 다시 살아날 것을 의미합니다. 성도의 육체적 부활은 예수님의 부활을 첫 열매로 삼아 반드시 이루어질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6. 종말론적 소망으로서의 부활
부활은 종말론과도 밀접한 관련이 있습니다. 성경은 마지막 날에 의인과 악인의 부활이
있으며, 그 부활을 통해 심판이 이루어진다고 말합니다. 요한복음 5:28-29는 생명의 부활과 심판의 부활을 구분하며, 다니엘
12장과 요한계시록 20장은 마지막 부활의 장면을 생생하게 묘사합니다. 성도에게 이 종말의 부활은 심판의 두려움이 아닌 구원의
영광이며, 이 땅의 고난과 수고가 헛되지 않음을 증명하는 날입니다.
7. 부활과 교회의 정체성
교회는 부활의 공동체입니다. 사도행전과 바울서신은 초기 교회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전파하는 사명을 감당했다는 것을 강조합니다. 교회는 단지 예수님의 가르침을 따르는 집단이 아니라, 부활하신 주님을 따르며 그 생명
안에 참여한 공동체입니다. 세례는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다시 사는 것을 상징하며, 성찬은 부활 생명의 영적 양식을 경험하게
합니다. 교회의 정체성과 사명은 부활을 기초로 하며, 부활이 없는 교회는 존재할 수 없습니다.
8. 성령과 부활의 관계
성령은 예수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동일한 능력으로 믿는 자 안에
내주하시며, 부활의 생명을 공급하십니다. 로마서 8:11은 “예수를 살리신 이의 영이 너희 안에 거하시면…너희 죽을 몸도
살리시리라”고 하며, 부활은 단지 과거의 사건이 아니라 성령의 현재적 사역이라는 것을 보여줍니다. 성령은 우리를 부활의 삶으로
이끄시며, 매일 죄에 대해 죽고 의에 대해 살아가도록 변화시키는 근원이 되십니다.
9. 부활과 승리의 신학
부활은 죄와 사망과 마귀의 세력을 무너뜨린 하나님의 결정적 승리입니다. 고린도전서
15:54-57은 “사망아 너의 승리가 어디 있느냐”라고 선언하며, 그리스도의 부활을 통해 성도가 영적 전쟁에서 승리했음을
보여줍니다. 이는 믿는 자에게 두려움 대신 담대함을, 무력함 대신 능력을 부여합니다. 부활 신앙은 현실의 고난 속에서도 절망하지
않게 하며, 현재의 권세와 악에 굴복하지 않게 합니다. 이는 교회가 세상 속에서 소망의 빛을 비추게 하는 영적 동력입니다.
결론
성경에서 부활은 단지 예수님께 일어난 기적이 아니라, 전 우주적이며 구속사적인
대전환점입니다. 이는 인간 존재의 의미와 운명을 바꾸는 능력이며, 현재를 살아가는 성도에게 정체성과 소망, 능력과 목적을
부여합니다. 부활은 기독교 신앙의 심장입니다. 이를 믿고 따르는 자는 이미 죽음을 이긴 생명을 소유하고 있는 자이며, 그 생명은
영원히 꺼지지 않는 하나님의 빛입니다.
'부활과 생명'은
기독교적 관점에서 죽음을 이기고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을 의미하며, 특히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과 그를 통한 구원의 의미를 중심으로 다뤄집니다. 이는 단순히 죽음 이후의 삶을 넘어, 그리스도를 믿는 자에게 주어지는 새 생명과 죽음의 공포를 극복하는 희망을 포함합니다.
기독교적 관점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 : 예수님의 죽음은 인간의 죄를 씻기 위한 것이었으며, 부활은 죄와 죽음을 이겼다는 것을 증명합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생명과 죽음의 주관자가 하나님임을 보여주며, 믿는 자에게 영원한 생명을 약속하는 근거가 됩니다.
'부활이요 생명이신' 예수 : 예수님은 자신이 부활이자 생명이라고 선포하셨습니다. 이는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자는 죽지 않고 영원히 살 것이라는 의미를 내포합니다.
부활과 생명의 상징 : 예수님은 나사로의 죽음을 잠든 것으로 비유하며, 부활과 생명의 본질을 설명하셨습니다.
생명의 부활과 심판의 부활 : 성경에 따르면, 심판의 날에 악한 일을 행한 사람은 '심판의 부활'로 나오며, 선한 일을 행한 사람은 '생명의 부활'로 나온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는 행위에 따라 부활의 결과가 달라질 수 있음을 시사합니다.
역사적 의미 : 예수님의 탄생과 부활은 인류 역사에 있어 매우 큰 사건으로 여겨집니다.
요한복음에는 예수님의 자기소개가 7번 나옵니다. 이것을 이른바 ‘에고 에이미’라고 하는데요. 이는 ‘나는 무엇무엇이다’라는 뜻을 가진 말입니다.
요한복음에서 예수님은 자신을 이렇게 7가지로 소개하십니다. 첫째, 나는 생명의 떡이다. 둘째, 나는 세상의 빛이다. 셋째, 나는 양의 문이다. 넷째, 나는 선한 목자이다. 다섯째,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 여섯째,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일곱째, 나는 참 포도나무다.
에고 에이미라는 표현은 예수님이 어떤 분이지를 이해하는 것에 도움을 주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신앙인으로써 우리의 신앙생활에 이러한 이야기가 도움이 된다고 여겨집니다. 물론 앞선 이야기들의 기억이 희미해졌겠지만, 또 다른 기회가 되면 다시 좀더 다듬어서 얘기를 나누는 것으로 하고요. 오늘은 예수님이 부활이요 생명임을 얘기나누려 합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라고 말입니다. 이것이 뜻하는 바가 무엇일까요? 사실 이것의 참 의미는 예수님 밖에 모르는 것이지만요.
예수님이 부활과 생명을 이이기하시는 배경에는 죽음이 있었습니다. 바로 나사로의 죽음입니다. 나사로와 그의 자매인 마르다와 마리아는 예수님과 가까운 관계였습니다. 예수님은 나사로가 병에 들었다는 소식을 접하고도 나사로에게 바로 가지 않으셨습니다. 여기에는 어떤 이유가 있었습니다. 당시 예수님은 동족인 유대인들의 공격을 받았습니다. 이른바 경건한 유대인들 혹은 종교지도자들은 예수님에게 신성모독이라는 혐의를 씌워서 죽이려 했습니다.
그러니 사람들의 이목을 끌만한 곳에 가는 것은 위험한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머물던 곳에 며칠 계시다가 나사로에게 가려고 하자, 제자들이 만류하기도 했고 도마는 같이 죽으러 가자는 다소 엉뚱해 보이는 소리를 합니다. 하지만 여기에는 예수님이 반대자들이 예수님을 죽이려고 혈안이었다는 사실을 생각해보면 제자들의 반응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실 예수님이 나사로에게 더디 가신 것에 더 중요한 이유는 이를 통해 예수님은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기 위함이었습니다. 또한 이를 통해 예수님이 누구인지를 사람들에게 나타내 보이기 위함이었습니다. 우리가 잘아는 것처럼 예수님이 나사로에게 도착했을 때, 나사로는 이미 죽어서 무덤에 묻혀 있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 죽은 나사로를 살리셨습니다. 이로써 예수님은 죽은 자를 살리는 특별하고 신비한 분임을 많은 사람들에게 나타내 보이셨습니다.
이 과정에서 예수님은 스스로를 부활이며 생명이라고 말씀하셨는데, 이 말의 의미를 나사로를 다시 살리신 배경을 놓고 묵상해 보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는 분임을 깨닫게 됩니다. 이는 예수님이 우리 생명의 원천이심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우리가 죽고 사는 것이 예수님께 혹은 하나님께 달려 있다는 말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 생명의 주인이신 것이 우리에게 어떤 의미가 있을까하고 말입니다.
오랜 역사를 통해 증명되고 우리가 아는 불변의 진리는 모든 인간이 죽는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죽음을 다스리를 수 없고 죽음을 막을 수 없습니다. 그것은 또한 우리가 생명에 관해서도 같은 결론에 도달하게 됩니다. 다시 말해 우리는 사는 것과 죽는 것에 관해 우리의 뜻을 이룰 수 없습니다. 우리는 태어나는 날을 정할 수 없고, 죽는 날도 정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이 모든 것을 이루실 수 있는 분입니다. 우리의 태어남과 죽음을 하나님의 선택으로 이루실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께 속하여 살아가는 것이 안전한 것이고 우리가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이 우리를 구원으로 인도합니다. 물론 이것은 예수님 잘 믿는다고 더 오래 살고 하는 것을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마치 물고기가 물 밖에서 살 수 없고 우리가 공기 없이 살 수 없는 것처럼 하나님 없는 우리의 삶은 불가능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지혜로운 선택은 하나님께 붙들려져서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사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뜻과 무관하게 살아간 부자는 어리석다고 평가받았는데요. 왜냐하면 그는 자신의 삶에 죽음이 언제 어느 때 닥칠지 알지 못하면서도 하나님이 아닌 다른 것을 의지하며 살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많은 경우에 우리는 그렇게 살아가게 되는지도 모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태어나는 순간부터 죽는 순간까지 우리의 삶을 알 수 없기 때문에 우리는 두려워하기 때문입니다. 그 두려움을 해소하기 위해 사람은 여러 하나님의 대체물을 만들어 놓고 그것에 의지하여 살아가곤 합니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돈이 될 것입니다. 그것이 너무나도 매력적으로 우리를 유혹합니다. 가장 확실하게 우리의 두려움을 잠재워 줄 것처럼 보여집니다. 왜냐하면 많은 돈이 우리의 삶을 보다 안락하고 안전하게 지켜줄 것이라 여겨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앞서 소개한 어리석은 부자 역시 자신에게 닥칠 죽음 앞서 그의 재산은 참으로 무기력 하였음을 봅니다.
그리하여 진정으로 우리가 믿고 기댈 곳은 그와 같은 것이 아님을 깨닫습니다. 우리는 예수님만을 믿고 의지함으로 그분을 통해 구원에 이르게 됩니다. 우리가 잘 아는 것처럼, 예수님은 죽음에서 부활하셨습니다. 이는 예수님께서 죽음에 승리하신 것을 말해줍니다. 또 예수님이 바로 생명의 원천이시기에 우리가 속할 것은 예수님이어야 합니다. 세상에 어떤 것도 예수님처럼 죽음을 이기고 살아남은 것이 없습니다. 그러니 당연히 우리는 하나님께 속하여 사는 것이 옳습니다.
우리가 이러한 사실을 믿고 받아들인다면 우리의 삶을 달라지고 새로워질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전혀 새로운 삶을 살아갈 수 있게 되기 때문입니다. 앞서 말했듯이 우리가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 세상을 더 의지하며 살아가는 것은 두려움에서 비롯됩니다. 우리는 통제할 수 없는 것에 관해 두려움을 느낍니다. 예를 들면 갑자기 무언가 튀어나오는 것이나 우리가 정체를 알지 못하는 미지의 대상에게서 어떤 불안감을 느낍니다.
그런데 그와 같은 두려움이 사라진 상태가 되면 어떨까요? 아마 지금과 같은 모습과 방식으로 우리의 삶을 살아가게 되지 않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목격한 제자들은 변화하기 시작했는데, 그것은 서로 사랑하는 삶의 방식으로 변화했다는 것입니다. 불확실하고 두려움이 있는 것에서는 자기만을 위하며 살아갑니다. 나의 안전이 최우선이고 나중심의 이기적인 태도를 가지게 됩니다. 그러나 이러한 불안이 제거된 상태에서 우리는 기꺼이 사랑할 수 있고 이타적인 삶을 이룰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 속하여 예수님을 따르는 삶은 이와 같이 우리에게 새로운 삶의 방식을 가르치고 그것을 따라 살도록 해줍니다. 왜냐하면 오늘 이 세상이 우리에게 보여주는 방식의 삶이 틀렸음을 깨닫게 해주기 때문입니다. 그리하여 성경을 비롯하여 예수님을 진실하게 따랐던 삶은 세상에서 추구하는 삶의 방식과는 많이 다름을 봅니다. 진정으로 우리를 지키고 우리를 살리는 삶은 세상이 아니라 예수님께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하여 우리는 주의 말씀을 따르고 사랑실천하는 삶을 이루게 됩니다.
오늘 성경은 우리에게 예수님이 부활이며 생명이 도심을 우리에게 가르쳐줍니다. 이는 다른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예수님의 고유한 특성입니다. 그렇기에 우리가 예수님께 속하여 살아가는 것이 가장 안전하고 가장 지혜로운 삶의 길이 됩니다. 문제는 이것입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묻습니다. ‘이것을 네가 믿느냐’ 우리가 이에 믿음으로 응답한다면 세상과 다른 삶의 방식이 우리에게 나타나야 합니다. 과연 우리는 예수님을 부활과 생명으로 믿으며 하나님의 뜻에 따른 삶을 살고 있습니까? 또 우리는 진정으로 예수께서 부활과 생명이 되심을 믿고 있을까요?
부활이며 생명이신 주님을 우리가 진정으로 믿을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그때에 비로소 우리는 세상이 아닌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오늘도 주님의 말씀에 따라 힘써 살아가는 우리가 될 수 있기를 간절히 간절히 축원합니다.
11월 20일(목) 요한복음 10-11장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부활이요 생명이니(11:25)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Jesus said to her, "I am the resurrection and the life. He who believes in me will live, even though he dies.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and whoever lives and believes in me will never die. Do you believe this?
부활(386) 아나스타시스(anastasis) ἀνάστασις, εως, ἡ
Storng number 386
a. [문자적인 뜻] 누운 자를 일으키다, 특히 죽은 자를 살리다, 요6:39,44, 54, 행2:24,32, 3:26, 9:41, 13:33, 34, 17:31.
b. [상징적인 뜻; 나타나게 하다, 태어나게 하다는 의미에서] 일으켜 세우다, 마22:24, 행3:22.
c. 건물을 짓다, 세우다, 막14:57.
2. [자동사; 제2부정과거와 중간태] 일어나다, 서다.
a. [문자적인 뜻] 앉거나 누워있는 자가 말하기 위해
일어나다, 마26:62, 막5:42, 9:27, 14:60, 눅4:16, 11:7,8, 22:45, 행26:30, 고전10:7.
[주] 특히 죽은 자에게 자주 사용됨, 요11: 23,24, 고전15:51, 살전4:16.
b. 일어나다[나타나다 혹은 오다의 의미], 막3:26, 눅10:25, 행7:18, 히7:11,15.
관련 성경 / 살다(마 4:4, 눅 2:36, 롬 7:1), 살아 계시다(마 16:16, 26:63, 요 4:57), 살리다(요 6:58, 롬 1:17, 고전 9:14), 살아나다(행20:12). [명] 살아있는 말씀(행 7:38).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 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자기의 중대하고 비범하신 메시야 권위에 대하여 알려 주시는 자아 주장이다. 곧, 이것은 "나는 그 이"라는 장엄한 선포이다. 주경 신학자들이 이런 문투로 나온 말씀을 가리켜 예수님의 "자아 주장" 언사라고 한다. 하이트뮬러(Heitmuller)는 이 귀절에 대하여 말하기를, "여기 요 11:25의 말씀은, 요한 복음의 특징으로 나타난 자아 주장의 말씀들 중에서도 가장 위대하고 장엄한 것이다"라고 하였다.(Es
ist das groste und erhabenste "Ich bin" in der Reihe der
wirkungsvollen, "Ich bin", die den Jesus unseres Evangeliums
Kenzeichen).
여기 "부활"이란 말과 "생명"이란 말에 각각 관사가 있어서 "그 부활이요 그 생명"이라고 번역되어야 한다. "그"라는 관사는, 여기서 예수님 자신께서만 독일 무이(獨一無二)하신 부활이요 생명이신 사실을 밝혀 준다. 볼트만(R. Bultmann)은, 여기 이 말씀이 그리스도의 초자연적 존재 형태를 말함이 아니고, 신자들에게 선물 주시는 그의 의의(Bedeutsamkeit)를 가리킨다고 하였다(Johannes Evangelium, p. 307).
그렇다면, 볼트만(Bultmann)의 이 말은, 부활과 생명이 예수님의 본질이 아니라는 뜻이다. 그러나 이것은 성경의 영생 개념과 다른 사상이다. 성경은 하나님 자신과 예수님 자신만이 인간에게 영생이 된다고 말한다. 오직 그에게만 죽지 아니함이 있고(딤전 6:16), 그 자신이 바로 인생의 구원이 되신다고 한다(사 12:2). 인간은 영원을 사모하나니(전 3:11), 하나님 외에는 아무 다른 것도 그에게 만족을 줄 수 없다. 신자의 영생 얻는 문제에 있어서, 그리스도의 선물과 그리스도 자신을 분리시킨 볼트만(Bultmann)의 사상은 그릇된 것이다.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여기서 예수님은, 사람의 영생 얻는 방편이 믿음 밖에 없음을 강조하신다. 그가 이렇게 말씀하신 이유는, 영생이 하나님의 계약 체제(혹은 약속 체제)에 속한 선물이기 때문이다. 계약자는 그 상대자들에게 믿음을 요구하는 법이다.
로마서 4:16 참조. 그러므로 후사가 되는 이것이 은혜에 속하기 위하여 믿음으로 되나니 이는 그 약속을 그 모든 후손에게 굳게 하려 하심이라 율법에 속한 자에게 뿐아니라 아브라함의 믿음에 속한 자에게도니 아브라함은 하나님 앞에서 우리 모든 사람의 조상이라.
은혜 계약은, 그것을 받은 첫 사람 아브라함에게서부터 인간 편의 믿음을 요구하였다. 신앙은 그리스도께서 인간에게 통해지도록 하는 심리적 통로로 필요하기도 하지만, 그보다도 그것이 신인 계약(神人契約)을 성립시키는 구성요소로서 필요한 것이다. 기독자들은 믿음에 의하여 하나님의 계약에 참여하므로 그리스도에게 붙은 자가 되어진다(고전 15:23). "죽어도"란 말의 헬라 원어 칸 아포다네(*)는, "그가 죽은 후에"란 뜻이 아니고, "그가 죽을지라도"(though he dies)라고 번역되어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 본문 "죽어도 살겠고"란 문구는, "그가 죽을지라도 계속하여 살리라"는 뜻이다. 이것은, 신자의 받은 영생이 그 육신의 죽음 때문에 중단되지 않는다는 뜻이다. 따라서 이 문구는, 신자의 육신이 죽은 후에도 그에게 계속되는 역적 생명을 가리킨다(Feine,
Hier wird also von einem Leben gesprochen, das der Glaubige schon
unmittelbar nach dem physischen Tode leben wird. - Theol., S. 440).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 여기 이른바, "살아서...믿는 자"란 말(*)에 있어서 "살아서"란 말은, 육신의 생명을 가리킨 것(B. Weiss)이 아니고, 영적 생명 곧, 구원론적 생명을 의미한다. 그 이유로서는, (1) 요한 복음에 있어서 산다는 말이 일률적으로 구원론적이며(5:19 이하 참조), 특별히 11:25-26의 말씀이 그러하다는 것, (2) "살아서"란 말과 "믿는 자"란 말이, 함께 하나의 관사(*)로 결속되었다는 것이다. 영적으로 다신 산 자만이 진정한 의미에서 그리스도를 믿게 된다. 그러므로 "살아서 나를 믿는 자"란 말씀은, 성령으로 거듭 나서 그리스도를 믿는 자를 가리킨다. 위의 25-26절에 기록된 두 가지 말씀은, 각각 다른 것을 설명하지 않고 같은 말을 두 번 거듭하는 것 뿐이다. 25 절의 것("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은, 그리스도를 믿는 자를 죽음이 해하지 못한다는 뜻이고, 26절의 것("살아서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은, 좀 더 사세한 말로써 위의 것을 재확인 한 것 뿐이다. 곧, 살아서(거듭나서) 믿는 자는 영원히 산다는 것이다.
요 6:35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
이 표현은 오병이어의 기적을 베푸신 직후에 하신 말씀이다. 오병이어의 기적은 고대
이스라엘의 광야시절에 비유될 수 있다. 광야에 식탁을 베풀 수 있을까? 의심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은 만나와 메추라기로
응답하신다. 요한복음은 주리지 아니할 것이라는 말씀 뒤에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는 반석의 생수 사건을
연상시키는 은유적 표현을 덧붙이신다. 그렇다면 이 표현은 정확하게 사십 년 광야 생활에서 이스라엘의 필요를 채우신 하나님을
상징하는 표현일 것이다. 그러나 광야의 떡과 예수님 자신의 ‘떡’과 비교되고 있다. 예수님은 생명의 떡이시며, 먹는 자는 영적으로
주리지 않을 것이다. 즉 영생을 얻을 것이다.
생명의 떡과 광야의 만나가 갖는 의미
요한복음 6장 35절에서 예수님은 "나는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줄이지
아니할 것이요"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선언은 출애굽기 16장에 나타난 '만나' 사건과 깊은 구속사적 연관을 가집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광야에서 굶주림에 처했을 때 하나님께서 내려주신 만나로 생명을 유지했습니다(출 16:4). 만나는 하나님의 은혜로 주어진
임시적 양식으로, 매일의 필요를 채우기 위해 끊임없이 공급받아야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자신을 영원한 생명을 주는 '생명의 떡'으로 선포하며, 만나를
초월하는 영적인 의미를 부여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이 선언은 더 이상 반복적으로 공급될 필요가 없는 영원한 생명의 공급원을 제시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희생적 죽음과 부활은 모든 인간의 영적 굶주림과 갈증을 근본적으로 해결하기 위한 하나님의 궁극적 구원
계획입니다.
따라서, '생명의 떡'으로서의 예수는 광야에서의 만나가 지닌 임시적이고 물리적 양식을
넘어서, 영원한 생명을 제공하는 구속사의 완성을 의미합니다. 이는 인간이 죄로 인해 단절된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고, 예수를
믿음으로써 영원히 배고프거나 목마르지 않는 참된 만족과 구원을 얻는다는 신앙적 메시지를 담고 있습니다.
요 8:12 예수께서 또 말씀하여 이르시되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둠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
이 말씀은 성전에서 가르치실 때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간음하다 잡힌 여인을 예수님께
데려온 후에 주어진 말씀이다. 예수님은 그들의 다그치는 질문에 답하지 않으시고, 땅에 글을 쓰신다. 다시 재촉하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쳐라’고 말씀하신다. 그러자 나이든 사람으로부터 시작 젊은이까지 모두 떠난다. 여자 외에 아무도 없자 여자에게 묻는
‘너는 정죄한 사람이 있느냐?’ 그러신 후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 하신다. 그리고 이 말씀이 주어진다.
요한복음에서 빛은 생명과 진리, 하나님의 영광으로 비유된다. 예수님은 자신을 ‘세상의
빛’으로 소개하신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세상의’라는 표현이다. 세상은 예수님의 사역의 장소이며, 구원할 타락한 곳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세상(κόσμος)을 사랑하신다. 세상은 악한 자들의 소굴이며, 사단이 지배하는 곳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바로 그
세상을 구원하기 원하신다. 그래서 세상(κόσμος)을 사랑하셔서 자신의 독생자를 보내셨다.
요 10:7 그러므로 예수께서 다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나는 양의 문이라
문은 출입구다. 또한 부여된 자격에 대한 것이기도 하다. 문은 아무나 들어가지
못한다. 제한된 사람, 출입이 허가된 존재들만 가능하다. 예수님은 양의 문이시다. 즉 양들이 출입하는 곳이다. 양이 아닌 다른
동물은 들어갈 수 없다. 모든 양도 아니다. 오직 예수님의 양이다. 그것은 주인의 목소리로 구분될 것이다. 예수님의 음성을 아는
자는 그 문으로 들어갈 것이나, 알지 못하는 자는 결코 들어갈 수 없다. 다음 구절들은 양의 문으로 들어간 결과에 대한 것이다.
내가 문이니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들어가면 구원을 받고 또는 들어가며 나오며 꼴을
얻으리라 도둑이 오는 것은 도둑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뿐이요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요 10:9-10)
예수님은 문을 통해 무엇을 얻을 수 있는 가를 설명하신다. 먼저는 ‘구원’을 얻는다.
문은 구원의 문이다. 둘째는 ‘꼴’ 즉 양식을 얻는다. 먹을 것이 풍부하다. 이 부분은 문인 동시에 생명의 떡으로 비유하신
것이다. 세 번째는 ‘생명’을 얻고, 더 풍성히 얻는다.
목자는 양들을 돌보는 사람이다. 요한은 예수님을 목자로 소개함으로 예수님이 누구신가는
그러낸다. 선한 목자는 삯꾼 목자와 다르고, 강도와 반대된다. 당대 종교지도자들은 겉으로는 목자였지만 강도들과 다르지 않았다.
그들은 제사를 빌미로 백성들의 재물을 탐했고, 과부들의 재산을 몰수했다. 그러나 선한 목자는 오히려 양들을 위해 존재한다. 목숨을
바치고, 꼴을 준다.
여기서 선한(καλὸς)이란 단어는 ‘선하다’라는 뜻이기도 하지만 ‘아름답다’는
뜻이기도 하다. 리유(Rieu)는 ‘나는 아름다운 목자다’라고 번역하도록 권유한다. 요한이 말하는 ‘선한’이란 말의 정체는
무엇일까? 성경의 용례들을 살펴보면 아래와 같다.
먼저 롬 7:16에서는 ‘율법이 선하다’는 의미다. 딤전 1:8에서는 완전히 동일하지는 않지만 비슷한 맥락에서 ‘율법은 선할 수도 있다’는 의미다. 딤전 4:6에서는 약간 다른 의미로 사용한다. ‘좋은’이란 단어로 번역했다.
딤전 4:6 네가 이것으로 형제를 깨우치면 그리스도 예수의 좋은 일꾼이 되어 믿음의 말씀과 네가 따르는 좋은 교훈으로 양육을 받으리라
그러나 바울은 분명히 ‘좋은 교훈’을 자신이 가르치는 복음, 즉 하나님의 말씀을
전제하고 있다. 그렇다면, 이곳에서도 역시 하나님의 말씀과 연관된다. 마태복음 13:24로 넘어가면 씨 뿌리는 농부의 비유에서
‘좋은 씨’를 뿌리는 농부가 나온다. 그가 뿌리는 씨앗 역시 하나님의 말씀을 의미한다. 마태복음 18:8에서 ‘더 낫다’는 의미로
사용된다.
롬 7:16 νόμῳ ὅτι καλός
딤전 1:8 δὲ ὅτι καλὸς ὁ νόμος
딤전 4:6 τοῖς ἀδελφοῖς καλὸς ἔσῃ διάκονος
영어 성경은 칼로스(καλός)를 다양하게 번역하고 있다.(beautiful, as
an outward sign of the inward good, noble, honorable character; good,
worthy, honorable, noble, and seen to be so.) 이러한 의미를 볼 때 ‘좋은’이란 뜻은 하나님의
말씀과 같은 완전한 상태이거나, 흠이 없고, 일반적인 어떤 상태보다 월등한 것을 의미한다고 말할 수 있다.
예수님은 택하신 백성들을 위해 자신의 목숨을 버리신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들은 양자
삼으신다. 양들은 아무런 힘이 없고, 방어할 수도 없다. 그들은 느리고, 둔하다. 목자가 없으면 살 수 없는 동물들이다. 하나님과
하나님의 백성들과의 관계는 이처럼 하나님의 전적인 사랑과 포용으로 가능한다.
5.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11:25)
Ἐγώ εἰμι ἡ ἀνάστασις καὶ ἡ ζωή·
요 11:25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이 선언은 예수님께서 죽은 나사로를 살리기 위해 나사로의 집에 갔을 때 이루어진다.
예수님께서 이곳에 계셨다면 나의 오라비가 죽지 않았을 것이라고 마르다가 말한다. 마지막 날에 대한 부활의 확신은 있지만, 이
땅에서는 더 이상 소망이 없음을 말했던 것이다. 마르다의 말을 들은 예수님은 자신을 부활과 생명이라고 소개하신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나는 부활이다. 그리고 생명이다’라는 표현이다. 요한은 예수님의 이 선언을 굉장히 중요하게 다룬다. 부활과 생명을 하나로 보며, 예수님을 진정한 생명이라고 재선언한다.
요 1:4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11:4은 생명과 빛이 연결된다. 이제 부활과 연결되고, 부활은 새로운 생명이다. 이로서 생명의 정체가 드러나며, 죽음을 이기시는 예수님의 영원한 능력이 완전하게 드러난다. 죽음까지 정복하신 예수님이시다.
부활의 의미를 묵상해 보면, 새로운 시작이자 출발이다. 새로운 시작은 인류의 대표로서의 예수님이 전제된다. 모든 인류는 예수님과
함께 죽었다. 이들은 옛사람이다. 이제 예수님 안에서 다시 태어났고, 예수님의 생명의 시작이 되신다. 바울은 이렇게 선언한다.
고후 5:17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
요 14:6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요한복음 14장은 예수님의 마지막 강론이 시작되는 곳이다. 공관복음서와 다르게
요한복음은 예수님의 강론을 길게 넣는다. 도마는 예수님의 가시는 길을 모른다고 투덜거린다. 의심이 많았던 도마는 무엇인가 확실하게
알고 싶었을 것이다. 그때 주님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라고 말씀하신다.
11장에서 부활과 생명이 만났다면, 14장에서는 생명이 길과 진리와 만난다. 세 개의
정의에 모두 관사(ἡ)가 붙어 있다. ‘내가 그 길이고, 그 진리고, 그 생명이다.’라고 번역해야 한다. 예수님은 여러 개의 길
중의 하나가 아니다. 바로 ‘그 길’이다. 길은 곧 진리와 만나, 예수님의 배타성과 진리의 순수성을 강조한다. 그 진리는 다시
생명으로 나아간다.
'그 길'은 유일무이한 진리이심을 드러내는 말이다. 유일한 생명이고, 유일한 길이며, 유일한 진리이시다. 예수님 외에 다른 길이 없고, 진리도 없다. 오직 예수만이 길이고 진리고 생명이다.
이곳에서는 하나님과 예수님, 그리고 성도의 관계를 드러낸다. 먼저 하나님 아버지는
농부이시다.(1절) 예수님은 농부가 기르는 포도나무다(1,5절) 성도는 무엇일까? 예수님은 ‘가지’라고 말씀하신다.(5절) 성도가
예수님과 연결되어 있다는 점은 매우 중요하다. 이곳에서 예수님은 하나님이 아니라 사람으로서 포도나무이시다.
헬라어 원문은 ‘참’에 관사가 있어, 포도나무와 구분된다. 이러한 구분은 하나의
동사를 취함으로 앞선 문장을 설명한다고 할 수 있다. ‘참’이라는 표현은 다른 거짓된 것과 구분된다. 요한은 의도적으로 거짓된
포도나무, 즉 하나님과 연결되지 않는 다른 것과 구분하고 차별화 시킨다. 이사야와 예레미야에 나타난 포도나무는 하나님을 실망시키는
돌포도나무다. 그들은 거짓되고, 악하며, 열매를 맺지 못하거나 빈약하다. 하나님의 기대를 충족시키지 못한 그릇된 포도나무다.
‘안에 있다’는 표현은 중요하다. 가지가 열매를 맺기 위해서는 원 포도나무에 붙어
있어야 하는 것은 당연하다. 그렇다면 붙어있다. 안에 있다는 말은 무슨 의미일까? 계명에 순종하는 삶이며, 서로 사랑하는 것이다.
열매 없는 가지(성도)를 잘라 낸다는 말은 종말론적 심판을 상징한다. 이곳에서 선택된 백성이 버려질 수 있는가에 대한 의문이 들
수 있다. 요한은 붙어 있다는 의미는 겉으로 드러난 공동체를 가리키는 것으로 사용한 듯하다. 즉 교회에 있으나 하나님의 진정한
백성이 아니라면 그는 심판의 때에 제해질 것이다. 그가 진정한 제자인지는 열매가 보증한다.
요한복음의 7가지 기적에 대한 해설
요한복음은 예수님의 이적과 기적 중에서 7가지만을 골라 소개하고있다. 요한복음이
성례전적 관점에서 쓰여졌다는 것과 성육신을 특별히 강조하고 있다. 이것은 예수님의 하나님되심에 대한 표시로서 주어지는 것들이다.
그러므로 첫번째 이적은 창조주로서의 기사를, 네번째 이적은 재-출애굽의 의미를 마지막 일곱번째는 다시 살아남의 이적이다. 이것을
통해 궁극적으로 모든 것을 치유하시고 회복하시며 새롭게하시는 하나님이심에 대한 완전한 표지로 이적들이 사용되고 있다는 것을
분명히 안다.
1) 물을 포도주로 만드심(2:1-12)
창조주 하나님에 대한 표적. 가나의 혼인잔치는 아마도 예수님의 공생애 사역 중 최초로 행하신 기적으로 보인다.
물로 포도주를 만든 사건을 통해 예수님의 하나님 되심을 선포한다. 기적이 일어난 날이 모호하지만, 요한은 의도적으로 1장에서
6일을 흘러가게 하고, 2장의 혼인잔치를 제7칠일도 설정한다. 창세기 1장과 날짜적으로 병행을 이루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예수님은 이 사건을 통해 하나님이심을 드러내신다. 이 때부터 제자들이 '그(예수)를 믿었다'는 표현이 나온다. 말씀을 통해 창조적 능력이 발현되는 사건으로 말씀이신 예수님이 만물을 존재케 하심을 드러낸다.
2) 왕의 신하의 아들을 고치심(4:46-54)
말씀으로 치유하심. 말씀으로 창조하심과 비교해 보자. 창세기 1장에서 말씀하시니 그대로 되니라의 또 다른 표현일 수
있다. 말씀만으로 충분히 치유를 행하실 수 있는 분임을 선포한다. 예수님을 치유하시는 분이며, 말씀으로도 충분히 치유하신다.
4: 50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라 네 아들이 살아 있다 하시니 그 사람이 예수께서 하신 말씀을 믿고 가더니
말씀의 목적은 치유와 회복이다. 예수님은 세상을 치유하시기 위하여 오셨다. 왕의 신하를 치유하심으로 이 땅의 오심의 목적을 드러내신다. 또한 말씀을 보냄으로 치유하고 계신다. 하나님은 세상을 치유하실 때 말씀을 보내신다.
3) 38년 된 병자를 고치심(5:1-9)
병자에 대한 치유는 부정에 대한 치유다. 38년은 정확히 광야의 시간이며, 오래되었으며 치유 불가능을 말한다.
주님은 이 병자를 치유하심으로 정상으로 회복 시킨다. 요한은 의도적으로 38년을 강조함으로 앉은뱅이가 철저히 선에 무능했던 배역한
이스라엘의 광야 시기를 말하는 것처럼 보인다. 주님은 그를 긍휼로 치료해 주신다. 그는 다른 어떤 행위도 할 필요가 없다. 그저
나음을 입을 뿐이다.
4) 5,000명을 먹이심(6:1-14)
광야에서 인도하시고 먹이시는 하나님, 만나로서 예수 그리스도를 보여준다. 요한은 철저히 예수님의 생애 자체를
광야에서 인도하시는 하나님에 대입시키고 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광야에서 인도하시고, 먹이신 것처럼 목자 없는 양처럼
헤매는 이들을 인도하고 먹이신다. 예수님께서 자신을 하늘에서 내려온 만나와 비교하는 것은 다분히 신학적 의도에서 비롯된 것이다.
주님은 자신을 하늘에서 내려온 떡으로 비유하신다. 떡은 양식이며, 먹지 않으면 죽는다. 하지만 먹음으로 생명이
연장된다. 광야의 떡과 참떡인 예수님의 결정적인 차이는 일시적 생명 연장인가 아니면 영원한 생명인가의 차이다. 광야에서 만나를
먹었던 이들은 모두 죽었다. 당시 아무도 살아 있지 않았다. 그러나 예수님을 먹는 이들은 영원히 살게 될 것이다. 이 얼마나
파격적인 선언이고 기적인가.
5) 물 위를 걸으심(6:16-21)
모든 만물의 주인이신 하나님, 혼돈과 무질서를 정복하시는 하나님. 홍해와 요단강 사건과 연결됨. 땅 하늘 사이에
보이지 않는 혼돈을 존재함. 이곳을 정복하심. 무질서에서 질서로의 이동은 구원을 의미한다. 물은 혼돈과 모호함을 상징하며, 악마가
거하는 장소이기도 하다. 그렇다고 하나님의 피조 세계가 아닌 다른 어떤 곳이 아니다. 그곳도 하나님의 지배를 받는다. 하나님의
창조는 물에서 땅이 솟아 오르게 하셨다. 반창조인 홍수 사건은 땅이 다시 물 속으로 가라앉는 사건이었다. 예수님을 물의 혼돈을
정복(발도 딛고)하시고 그 위를 걸으신다. 즉 지배하신다. 물을 가르시거나, 마르게 하지 않았다는 점도 유의할 필요가 있다.
기적의 차이가 다르다. 주님은 단지 '물 위'를 걸으신다.
둘째날 물과 물이 갈라지고, 셋째날 물에서 땅이 솟아 나고, 넷째날부터 땅이 풍요로워진다. 마지막 날 에덴 동산을
창설하심으로 인간이 거할 집을 마련하셨다. 창조의 마지막은 인간이며, 인간을 위해 모든 피조물이 준비되었다. 인간의 창조의
끝이자 정점이다. 하나님은 그 인간을 물 속에서 불러낸 땅(에레츠)에 인간을 두셨다. 광야가 혼돈의 공간으로서 물(바다)과 같다면
가나안은 물(광야)에서 불로내 에덴 동산과 같은 의미를 갖는다. 요한은 철저히 출애굽 관점에서 예수님의 기적을 서술해 나가고
있다.
6) 소경을 고치심(9:1-7)
소경을 보게하는 것은 메시아의 표징이다. 구약에서 소경을 보게한 적은 없다. 이것은 전적으로 메시아의
일이다. 육신적 봄은 영적인 각성이며, 영혼의 창조이다. 마음이 깨끗한 자가 하나님을 본다는 성경과 유대 전통이 있다. 보는 것은
인식을 넘어 참여이다. 또한 향유이다.
소경은 봄으로 피조세계를 체험하고 향유한다. 주님은 그를 보게 함으로 육신의 차원을 너머 영적인 교훈을
더하신다. 육신 안에 갇혀 유대인들이 보지 못하는 하나님되심의 신성을 기적을 통해 체득한다. 그는 이제 주님을 본다. 이것이
진정한 치유이다. 유대인들은 보기 때문에 치유함을 받지 못하다. 믿음은 언제나 세상의 것들과 대치되며 역치되며 역전된다.
7) 죽은 나사로를 살리심(11:38-44)
죽은 자를 살리는 것은 하나님의 일이다. 생명을 부여하는 능력이 예수에게 있음을 알린다. 즉 예수는 하나님이시다. 죽음은 죄로 인해 찾아 왔다. 주님은 죽음을 정복하신다. 기이하게 자신의 죽음으로 죽음을 정복하신다.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생명을
창조하시고, 죽은 자를 살리시듯 예수님은 마지막 기적인 죽은 나사로를 통해 생명의 창조자 주관자이심을 드러내신다.
요한 복음의 7가지 기적은 치밀하게 구성되어 있다. 그러나 아직 마지막 기적이 남아 있다. 이것은 예수님이 행한
것이 아닌 예수님 자신에게 나타난 것으로 부활이다. 그러므로 나사로의 부활 사건은 마지막 종말에 임할 하나님 나라의 임함, 즉
재림과 연결된다.
리처드 보컴은 이곳에서 5) 물 위를 걸으심(6:16-21)을 빼고
'예수님의 부활' 자체를 마지막 일곱 번째 기적으로 넣는다. 이유는 물위를 걸으심의 이적 자체에 '표적'이란 단어가 사용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충분의 그의 분석에 공감할 수 있다.
부활과 생명, 존재의 전환 (요한복음 11장 25절)
부활은 죽음을 부정하지 않는다. 부활은 죽음을 통과한다. 생명은 쇠락을 피하지 않는다. 생명은 쇠락 속에서 스스로를 드러낸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부활과 생명을 선언하셨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이 선언은 단순한 위로도, 종교적 감정도 아니다. 존재의 근본을 가르는 말씀이며, 죽음에 사로잡힌 세계를 향한 하나님의 최종적 대답이다.
인간은 죽음 아래 살아간다. 생명은 시간에 갇히고, 사랑은 이별을 향해 흐르고, 존재는 점점 가벼워진다. 죽음은 단순한 사건이 아니라, 인간 존재 전체를 덮고 있는 운명이다. 우리는 태어나는 순간부터 죽음을 향해 나아간다. 이 흐름 속에서 생명은 언젠가 소멸될 약속처럼 느껴진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이 흐름을 거슬러 말씀하신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생명은 소멸을 향하지 않는다. 생명은 부활을 향해 있다. 생명은 스스로를 포기하지 않는다. 생명은 죽음을 깨뜨린다.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믿음은 죽음 너머의 생명을 기다리는 소극적 희망이 아니다. 믿음은 이미 오늘, 이 존재 안에 부활을 받아들이는 사건이다. 부활은 미래의 보상이 아니다. 부활은 존재의 전환이다. 죽음이 모든 것을 삼켜버리는 듯한 세계 안에서, 죽음을 삼키는 생명이 시작된다.
믿음은 이 생명 안으로 들어가는 일이다. 믿음은 죽음을 넘어 사랑하고, 절망을 넘어 걷는 일이다. 믿음은 사라지는 것들을 붙잡지 않고, 영원히 사는 것을 품는 일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부활을 증명하거나 논증하지 않으셨다. 그분은 부활 자체가 되셨다. 부활은 이론이 아니다. 부활은 인격이다. 죽음은 더 이상 인간 존재를 지배할 수 없다. 부활과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존재의 중심에 서셨기 때문이다.
우리는 죽지 않기 위해 발버둥 치는 존재가 아니다. 우리는 이미 죽었으나, 살아난 존재다. 죽음을 통과한 생명, 부활의 생명으로 걷는 존재다.
이것이 복음이다.
이것이 신앙이다.
그러므로 신앙은 현실 도피가 아니다. 신앙은 죽음을 모르는 척하는 낙관도 아니다. 신앙은 죽음을 직면하면서도 무너지지 않는 생명의 힘이다. 눈물 속에서도, 상실 속에서도, 우리는 생명의 맥박을 느낀다. 절망의 끝자락에서도 우리는 부활의 숨결을 듣는다.
죽음은 우리를 덮칠 수 없다. 죽음은 우리를 해체할 수 없다. 죽음은 더 이상 최종 선언이 아니다. 생명이 모든 것을 품고, 새로 시작한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이 한 마디가 모든 존재론을 뚫는다. 인간은 자신을 생명으로 지탱할 수 없다. 오직 부활이요 생명이신 분 안에서만 존재할 수 있다. 그러므로 신앙은 선택이 아니라, 존재의 필연이다. 부활과 생명은 신념이 아니라, 생존의 문제다. 우리는 생명을 소망하는 것이 아니라, 생명에 의해 붙들린다. 우리는 부활을 기대하는 것이 아니라, 부활 안에서 존재한다.
죽음은 더 이상 시간을 소모하는 것이 아니다. 죽음은 영원한 생명으로 들어가는 문이 된다. 이 믿음이 우리를 자유롭게 한다. 이 믿음이 우리를 살린다. 고난 앞에서도, 이별 앞에서도, 쇠락 앞에서도, 우리는 무너지지 않는다. 우리는 죽음을 통과한 생명의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부활을 살아내는 존재들이기 때문이다.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이것은 약속이 아니라 현실이다. 믿음은 부활을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부활을 사는 것이다. 생명을 희망하는 것이 아니라, 생명 안에 거하는 것이다. 오늘 우리는 부활과 생명을 품고 숨 쉬고 걷는다. 끝나지 않는 생명, 소멸되지 않는 사랑, 꺾이지 않는 희망이 우리 안에 살아 있다.
그러므로 죽음 앞에서도 사랑하고, 무너진 자리에서도 소망하며, 깨어진 세계 안에서도 생명의 힘으로 걸어간다. 우리는 부활을 안다. 우리는 생명을 안다. 우리는 그 이름을 안다. 그 이름은 예수 그리스도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 (요한복음 11:25)
본문 배경과 의미
요한복음 11:25에서 예수님께서는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라고 선언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나사로의 죽음과 관련된 상황에서 나오게 되었습니다. 나사로가 죽은 지 나흘이 지나서야 예수님께서 그의 집에 도착하셨고,
이에 마르다는 오라비의 부재를 슬퍼하며 예수님께 나아왔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는 "네 오라비가 다시 살아나리라"고 하셨고,
마르다는 이를 마지막 날의 부활로 이해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단순히 미래의 부활에 대한 언급이 아니라, 부활과 생명이 자기
자신임을 선언하셨습니다.
헬라어 원문에서 "Ἐγώ εἰμι ἡ ἀνάστασις καὶ ἡ ζωή"라는 표현은
강조적인 어순을 가지고 있으며, 여기서 "Ἐγώ εἰμι"(에고 에이미)는 요한복음에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나는 ~이다" 선언 중
하나로, 예수님의 신적 정체성을 밝히는 중요한 표현입니다. 이는 출애굽기 3장 14절에서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니라(אֶהְיֶה אֲשֶׁר אֶהְיֶה, 에흐예 아쉐르 에흐예)"라고 하신 말씀과 연결됩니다. 신약에서 "ἐγώ
εἰμι"는 헬라어로 번역된 이 표현을 반영하며, 예수님께서 자신을 하나님과 동일한 존재로 계시하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예수님께서는 단순히 부활을 일으키는 능력이 있는 분이 아니라, 부활 자체이며 생명의 근원이신 분임을 선포하신 것입니다. 이는 그분의 신성과도 직결되며, 단순한 표적이 아니라 예수님이 영원한 생명을 주시는 존재임을 나타냅니다.
부활과 생명의 현재성과 영원성
예수님께서는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라고 하셨습니다. 이는 부활이 단순히
미래에 있을 사건이 아니라, 현재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많은 유대인들은 마지막 날에 의인들이 부활할 것이라는
신앙을 가지고 있었습니다(단 12:2). 마르다 역시 이러한 믿음을 가지고 있었지만, 예수님께서는 부활이 단순한 미래의 사건이
아니라, 자신과 연합하는 자들에게 현재적으로 이루어지는 현실임을 선포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부활은 단순히 죽은 몸이 다시 살아나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이는 하나님과의 단절된 관계 속에서 영적으로 죽어 있던 자들이 예수님을 통해 새 생명을 얻는 것을 포함합니다. 따라서 부활과
생명은 단순히 미래의 약속이 아니라, 예수님을 믿는 자들에게 현재적으로 적용되는 실체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자들은 육체적으로는
죽을지라도, 그 안에 있는 생명은 영원히 지속됩니다.
또한, 예수님의 이 선언은 단순한 한 시대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영원성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받지 않으시는 분으로, 하나님과 함께 영원한 존재이십니다(요 1:1-3). 따라서
예수님을 믿는 자들은 단순히 일시적인 생명을 누리는 것이 아니라, 영원한 생명을 소유하게 됩니다. 이는 요한복음 3:16에서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는 말씀과도 일맥상통합니다.
부활과 생명의 능력과 신성
예수님의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라는 선언은 그분의 신적 능력을 나타냅니다.
예수님께서는 단순히 부활을 선포하시는 선지자가 아니라, 부활의 원천이 되시는 분입니다. 이는 단순한 교리적 가르침이 아니라,
실제적인 능력으로 입증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나사로를 무덤에서 불러내심으로써, 죽음을 이기시는 권능을 보여주셨습니다(요
11:43-44). 이 사건은 예수님의 부활을 예표하는 사건이었으며, 그분이 죽음을 이기고 영원한 생명을 주시는 분임을 입증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나는 생명이다"라고 하신 것은, 모든 생명의 근원이 하나님이심을 밝히는
말씀입니다. 창세기에서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시고 생기를 불어넣으셨듯이(창 2:7), 예수님께서는 영적으로 죽어 있는 자들에게
생명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요한복음 14:6에서도 예수님께서는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말씀하시며, 하나님께로 가는
유일한 길이 자신임을 선언하셨습니다. 이처럼 예수님은 죽음을 정복하시고, 생명을 충만하게 하시는 분입니다.
결론
예수님의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라는 말씀은 단순한 선언이 아니라, 인류에게 주시는
가장 큰 소망의 메시지입니다. 우리는 언젠가 죽음을 맞이하지만, 예수님을 믿는 자들은 영원한 생명을 소유하게 됩니다. 이 부활은
단순히 육체적 부활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과 영원한 생명을 포함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이 선언은 출애굽기 3장 14절에서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신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니라"라는 영원성과 직접 연결되며, 예수님께서 단순한 인간이 아니라 하나님과 동일한 분이심을 선포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부활과 생명은 단순한 신학적 개념이 아니라, 예수님 안에서 성취된 하나님의 구속 역사이며, 그분을 믿는 모든 자들에게
보장된 영원한 생명의 약속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삶 속에서 다양한 절망과 죽음의 그림자를 경험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믿는 자들은 그분 안에서 새로운 생명을 얻게 되며, 현재의 삶에서도 부활의 능력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부활과
생명의 약속을 믿으며, 그분과 동행하는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예수님 안에서 우리는 죽음이 끝이 아니라, 영원한 생명의 시작임을
확신할 수 있습니다.
요한복음에서의 '부활'의 의미
서론
요한복음에서 '부활'은 단순한 육체적 죽음에서의 회복을 넘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주어지는 영원한 생명과 새로운 창조를 의미합니다. 요한복음 11:25에서 예수님께서는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라고 선언하셨습니다. 이는 요한복음 전체에서 예수님의 정체성과 구원의 핵심 메시지를 담고 있는 중요한 선언입니다.
요한복음에서 '부활'이 어떻게 전개되며, 이 개념이 예수님의 사역과 신적 정체성, 그리고 믿는 자들에게 주어질 약속과 어떻게
연결되는지 살펴보겠습니다.
요한복음에서 '부활'의 개념
요한복음에서 '부활'은 단순한 미래의 사건이 아니라, 현재적이며 영원한 생명의
실현으로 나타납니다. 유대인들은 일반적으로 최후의 날에 있을 부활을 믿었으나(요 11:24), 예수님께서는 부활이 단순한 시간의
흐름 속에서 발생하는 사건이 아니라, 예수님 자신 안에서 실현되는 현재적이고 본질적인 사건임을 선포하셨습니다. 이는 요한복음이
강조하는 영생과 깊은 관련이 있습니다.
나사로의 부활과 예수님의 선언(요 11:1-44)
요한복음 11장은 요한복음에서 부활이 어떻게 예수님의 신성과 연결되며, 신자들에게
주어지는 영원한 생명을 의미하는지를 구체적으로 보여주는 사건입니다. 나사로가 죽은 후, 마르다는 예수님께 "마지막 날 부활 때에
다시 살아날 줄을 내가 아나이다"(요 11:24)라고 말했습니다. 이에 대해 예수님께서는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요
11:25)라고 대답하셨습니다. 이는 부활이 단순한 미래의 사건이 아니라, 예수님 자신이 그 부활을 이루시는 분임을 강조한
것입니다.
나사로의 부활 사건은 예수님의 능력을 나타내는 표적이었으며, 이것은 예수님의 궁극적인
부활을 예표하는 사건이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나사로의 부활은 일시적인 생명의 회복이었으며, 결국 그는 다시 죽음을 맞이하게
됩니다. 반면, 예수님의 부활은 완전한 승리이며, 믿는 자들에게 주어질 영원한 생명의 모델이 됩니다.
요한복음에서의 부활과 영생
요한복음은 '부활'을 단순한 육체적 생명의 연장으로 보지 않고, 영생과 깊이 연결된
개념으로 설명합니다. 요한복음 3:16에서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영생은 단순히 끝이 없는 시간적 지속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누리는 충만한 삶을 의미합니다.
요한복음 5:24-29에서도 예수님께서는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요 5:24)라고 말씀하시며, 부활과 영생이 현재적으로
실현되고 있음을 선포하셨습니다. 또한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요
5:29)라고 하셔서, 모든 인간이 부활을 경험할 것이지만, 믿음 안에서의 부활은 영생을 보장받는 것임을 강조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부활과 신적 정체성
요한복음에서 예수님의 부활은 단순히 죽음에서 다시 살아나는 사건이 아니라, 예수님의
신적 본성을 드러내는 결정적인 사건입니다. 요한복음 2:19에서 예수님께서는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는 성전이 예수님의 몸을 가리키며, 그의 부활이 곧 새로운 성전의 시작임을 나타냅니다.
요한복음 20장에서 예수님의 부활은 단순한 표적이 아니라, 제자들에게 새로운 사명을
주는 전환점이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부활 후 제자들에게 나타나셔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요
20:21)라고 말씀하시며, 부활이 단순한 사건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의 사역이 확장되는 기점임을 나타내셨습니다.
부활을 통한 신자들의 새 생명
요한복음에서 부활의 궁극적인 의미는 신자들에게 주어질 영원한 생명과 관련됩니다.
요한복음 14:19에서 예수님께서는 "조금 있으면 세상은 다시 나를 보지 못할 것이로되 너희는 나를 보리니 이는 내가 살아있고
너희도 살아 있겠음이라"고 하셨습니다. 이는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것처럼, 그를 믿는 자들도 부활하여 새로운 생명을 얻게 될 것임을
의미합니다.
이러한 부활의 개념은 요한복음 전체에서 반복적으로 강조되며, 예수님께서 부활을 통해
죽음을 이기셨을 뿐만 아니라, 믿는 자들에게도 동일한 승리가 주어질 것임을 보장합니다. 요한복음 17장에서 예수님께서는 하나님께
기도하시며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요 17:3)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는 부활이 단순히 생물학적인 삶의 회복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을 통한 영원한 생명임을 강조하는 말씀입니다.
결론
요한복음에서 '부활'은 단순한 미래의 사건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미
실현된 현재적인 사건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나사로의 부활을 통해 부활의 능력을 보이셨고, 자신의 부활을 통해 이 능력을
완성하셨습니다. 또한, 그의 부활은 신자들에게도 동일한 영원한 생명을 보장하는 약속이 되었습니다.
요한복음에서 부활의 의미는 단순한 생명의 연장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온전한 관계
회복을 통한 영생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을 믿는 자들은 죽음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으며, 이미 부활의 능력을 현재적으로 누리며 살아갈
수 있습니다. 요한복음 11:25에서 예수님께서 선언하신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라는 말씀은, 우리에게 주어진 가장 큰
소망이며, 현재와 미래를 아우르는 영원한 진리입니다.
영(프뉴마) & 물질(휠레)
영(프뉴마. pnĕnuma) πνεῦμα, ατος, τό
Storng number 4151
1. 불기. 2. 바람. 3. 숨 내쉬기 Pronunciation
[ pnĕnuma ]
Etymology / 4154에서 유래
관련 성경 / 성령(마4:1, 막1:10, 눅2:27),
심령(마5:3, 눅1:17), 귀신(마8:16, 눅4:36, 요16:18), 마음(마26:41, 막8:12), 영혼(마27:50,
눅23:46, 요19:30), 중심(막2:8), 하나님의 말씀(행18: 5), 영(눅24:37,39, 엡1:17),
빛(엡5:9), 한마음(빌1:27), 기운(살후2:8), 바람(히1:7), 생 기(계11:11, 13:15).
물질(휠레. hülē) ὕλη, ης, ἡ
Storng number 5208
1. 수풀. 2. 재료 Pronunciation
[ hülē ]
Etymology / 3586의 유사형
1. 수풀, 화목, 재목, 땔감, 장작더미, 약 3:5. 2. 재료, 물건.
관련 성경 / 나무(약 3:5).
참된 신 & 거짓 신(데미우르고스)
δημιουργός, οῦ, ὁStorng number1217
1.
숙련공
2.
직공
3.
제조자
Pronunciation
[ dēmiŏurgŏs ]
Etymology
1218과 2041에서 유래
1.
숙련공, 직공, 제조자, 창조자, 히11:10.
Related Words
관련 성경
건설자, 지으실 자(히11:10).
영생은 참 하나님을 아는 것(요한복음 17:3)
영생은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
유일하신 참 하나님을 바로 알고 바로 믿어야 합니다. 성경이 창세기부터 계시록까지 하나님에 대해서 증거하고 있는 것인데,
그 증거를 잘 받아서 하나님을 아는 지식으로 나아가야 영생을 얻습니다. 그 진리 지식을 가지고 믿는 것이 하나님을 믿는
것입니다. 영생은 유일하신 참 하나님을 아는 것이라고 하셨는데, 여러분은 하나님을 바로 알고 계십니까?
피조물인 인간은 어떻게 하나님을 알 수 있나?
인간은
스스로 하나님에 대해서 조금도 알 수 없습니다. 아주 하찮은 지식이라도 그것을 먼저 아는 자가 우리에게 알려주어야만 우리가 알 수
있습니다. 인간에게는 참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언제부터 계시는지, 어디에 계시는지, 무엇을 하시는지, 스스로 터득해서 알 수
있는 지혜와 능력이 없습니다. 영적 소경과도 같습니다. 그리하여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에 대해서 알려주시기
위하여 스스로 자신을 드러내 보여주셨습니다. 사람 중에는 아무도 온전하게 알아낼 자가 없으니까 하나님이 우리에게 자신을 알려주신
것입니다. 우리에게 찾아오셔서 하나님에 대하여 말씀하여 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이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계시(啓示)라고
부릅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담 때부터 여러 족장들과 모세를 위시하여 여러 선지자들과 사도들에게 찾아오셔서
여러 모양 여러 부분으로 자신을 드러내 보여주시고(히 1:1), 그들에게 말씀하여 주시고, 그의 성령으로 감동시키셔서 성경을
기록하게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드러내서 우리에게 알려주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 곧 성경입니다. 인간은 다른
곳에서가 아니라 성경에서만 참 하나님을 바로 알고 믿을 수 있습니다. 성경의 내용을 잘 알아야 참 하나님을 바로 알게 됩니다.
이것이 참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고, 여기에서 참된 믿음이 생겨나며, 이 믿음으로만 사람은 구원을 받으며 영생에 이르게 됩니다.
성경 지식이 우리에게 필요한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성경의 내용을 모르고 성경을 들고만 다닌다고 해서 우리가 그것으로 구원을
얻을 수 없습니다. 성경을 읽되 읽는 것을 이해하고 깨달아 바른 이해와 지식에 이르러야 합니다. 성경에 대한 바른 이해와 지식,
그것이 곧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고, 그 지식은 참된 믿음의 기초입니다. 여러분은 이 책을 얼마나 귀히 여기며, 이 지식을 얼마나
가지고 있습니까?
어떤 하나님을 알아야 하는가?
유일하신
참 하나님을 안다는 것은 먼저 하나님의 어떠하심, 곧 하나님의 본질과 속성과 성품을 아는 것을 말합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의
어떠하심에 대해 무엇을 알고 있으며 어떻게 믿고 있습니까? 하나님의 존재하심에 관하여, 하나님의 속성과 성품에 관하여, 하나님의
이름과 그 뜻에 관하여 잘 알고, 바로 알고 계십니까? 그의 영원하심과 광대하심, 그의 자존하시며 무소부재하심, 그의 능력과
권세, 그의 사랑과 자비, 그의 거룩과 공의, 그의 지혜와 진실하심에 대해 여러분은 얼마나 어떻게 알고 계십니까? 여기에 대한
지식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정작 하나님이 어떤 하나님이신지 잘 알지 못하고 그냥 하나님을 믿는다고 할
수 있는데, 그것은 속는 것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참된 지식이 있어야 하나님을 아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행하시는 일들을 알아야 한다
또한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알려면 하나님의 행하신 일과 행하시는 일과 행하실 일들에 대해서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어떤 일을
행하셨는지를 모르고서는, 하나님을 안다고 할 수 없습니다. 우선 하나님의 창조의 일과 섭리의 일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주권의 권능으로 만물을 창조하셨습니다. 또한 지금도 지혜와 전능의 섭리로 만물을 다스리시는 일을 하고 계십니다. 참으로 잎새와
풀, 비와 가뭄, 풍년과 흉년, 먹을 것과 마실 것, 건강과 질병, 부와 가난, 이 모든 것들은 우연이 아니라, 우리의 아버지이신
하나님의 손에 의해 우리에게 주어지는 것입니다(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제27문). 하나님이 창조하시고 주권으로 다스리시고 섭리로
주장하신다는 것을 알아야 하나님을 아는 것입니다.
또한
하나님의 구원의 일에 대하여 알아야 합니다.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구원인데, 구원은 순전히 우리 하나님이 그의 기쁘신
뜻대로, 그의 주권적 뜻과 작정과 은혜로 값없이 우리에게 베푸시고 행하시는 일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구원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이
전혀 없는 자들이었습니다. 우리 스스로는 우리의 죄를 전혀 씻을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성부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시기로
택하시고,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모든 죗값을 대신 그리고 완전히 치러 주시고, 성령님께서 우리 각 사람의 마음에 믿음을 일으키시고,
우리를 또한 의롭게 하시고, 성령과 진리로 거듭나게 하시고, 우리 안에 새 성품과 새 소원을 넣어주시고, 이제부터는 성령의
소욕을 좇아서 거룩을 이루어 갈 수 있도록 해주셨습니다. 그래서 구원은 전적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하나님이 끝까지 친히 다 하시는
것입니다. 이 모든 하나님의 구원의 일을 알아야 우리가 하나님을 바로 아는 것이 됩니다. 구원이 무엇인지를 바로 알아야, 우리가
구원의 길로 들어가 영생에 이르게 되며, 이 구원의 은혜에 대해 감사해야 할대로 감사하면서 믿음으로 살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아는 것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은 하나입니다. 그리스도를 모르면 하나님의 구원 사역을 모르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구원을 모르는 사람은 가장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구원의 도리, 구원의 길을 알지 못하는 사람은 세상을 다 가졌다고 하더라도 가장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나아갈 자가 없다고 하셨고(요 14:6),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다고 하셨기 때문입니다(행 4:12). 그리스도를 분명하게 알지 못하고서 하나님을 안다, 믿는다,
영생을 가졌다, 구원을 받았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또한
하나님의 심판의 일에 대해서도 바로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장차 온 세상을 그의 공의로 심판하실 것입니다. 하늘로 올리우신 이
예수는 하늘로 가심을 본 그대로 오시리라고 하셨습니다(행 1:11). 장차 인자가 영광의 보좌에 앉아서 온 땅을 심판하실 것이라고
하셨습니다(마 19:28).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라고 하셨습니다(히 9:27). 장차
심판하시고 새 하늘과 새 땅을 가져오실 하나님을 알아야 하나님을 바로 알고 믿는 것이 됩니다. 여러분은 이 하나님의 행하시는
일들에 관하여 얼마나 알고 있으며, 얼마나 감사하고 있으며, 무엇을 믿으며 무엇을 소망하며 살고 있습니까?
하나님을 아는 것이 영생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이 영생이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은 모든 신앙의 기초입니다. 성부 하나님과 그의 창조, 성자 하나님과 그의
구속, 성령 하나님과 그의 성화에 대해서 그 내용 하나하나를 알아야 하고, 그래야 믿는 것이고, 믿어야 죄 용서함을 받고 구원과
영생에 이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바로 모르면 거기에는 구원이 없고 생명이 없고, 그리스도와 그의 구속에 대해 알지 못하는
사람에게는 영생이 없습니다.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요 17:3)라고
하셨습니다. 다른 것은 다 안다고 해도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은 아무 것도 모르는 사람입니다. 그 사람은 자기를 지으신 창조자를
모르는 사람이요, 인간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그 죄와 비참함에 대해서도 모르는 사람이요, 구원자가 누구인지 모르는 사람이요,
어떻게 구원을 받아야 하는지도 모르는 사람이요, 장차 하나님께서 심판하실 때에 어떤 일이 일어나게 될 것도, 그 영원한 운명도
알지 못하는 자입니다. 아는 것이 아무 것도 없는 사람인 것입니다.
여러분은
유일하신 참 하나님을 아는 지식과 그를 신뢰하는 믿음이 있습니까? 그리하여 여러분에게는 그가 주시는 영생이 있습니까? 아무리 이
세상 지혜와 지식으로 아무리 충만하다 하더라도, 하나님을 알지 못하면 그러한 세상 지혜와 지식만으로는 구원에 이르지 못합니다.
어떤 놀라운 과학지식, 의학지식, 인문, 언어와 철학지식으로도 하나님을 바로 알 수 없고 그것으로는 천국에 이를 수 없습니다.
뛰어난 예술적 감각과 운동감각들을 아무리 많이 가지고 있더라도, 세상의 부와 권력과 명예를 아무리 많이 가졌다 할지라도 그런
것으로는 자기 영혼을 구원으로 인도할 수 없고 천국과 영생으로 인도할 수 없습니다. 유일하신 참 하나님을 아는 것이 영생이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으로 우리를 인도하는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귀히 여기고 읽고 배우며, 날마다 하나님을 알아가고
하나님의 하시는 일들을 아는 지식에서 자라가는 복된 우리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11월 19일(수) 요한복음 7-9장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한 가지 아는 것(9:25)
대답하되 그가 죄인인지 내가 알지 못하나 한 가지 아는 것은 내가 소경으로 있다가 지금 보는 그것이니이다. He replied, "Whether he is a sinner or not, I don't know. One thing I do know. I was blind but now I see!
아는 것과 믿는 것
아는 것(그노시스. ) γνῶσις, εως, ἡStorng number1108
1.
하나님의 속성으로서의 지식
2.
지식의 열쇠
3.
율법에 있는 지식의 규모
Pronunciation
[ gnōsis ]
Etymology
1097에서 유래
1.
하나님의 속성으로서의 지식, 롬11:33. 사람의 속성인 지식, 고전8:1,7,11.
a.
지식의 열쇠, 눅11:52.
b.
율법에 있는 지식의 규모, 롬2:20.
2.
[특별히] 하나님을 아는 것, 눅1:77, 고전1:5, 고후2:14, 4:6, 6:6, 10:5, 11:6, 골2:3, 벧전3:7, 벧후1:5, 3:18.
3.
이단적인 그노시스[그노시스주의=영지 주의], 딤전6:20.
Related Words
관련 성경
지식(눅11:52, 행11:33, 롬2:20), 아는 것(고후10:5), 아는 지식(빌3:8), 알게 함(눅1:77), [동] 알다(고후2:14, 4:6).
c. [목적격과 함께 또는 목적격 없이 쓰이는 분사형은
흔히 이야기의 계속을 의미한다] 마2:10, 5:1, 8:34, 막5:22, 9:20, 눅2:48. [주] [목적격이 보충되어야 할
곳] 마9:8,11, 21:20, 막10:14, 눅1:12, 2:20, 행3:12.
관련 성경 / 보다(마2:2, 막1:10, 요1:39),
알다(마2:16, 막10:42, 요9:25), 뵙다(마28:17), 보이다(막12:15), 당하다(행2:31, 13:36),
시인하다(딛 1:16), 알리다(눅2:15), 의논하다(행15:6).
앎에서 믿음으로(요한복음 9:24-41)
본문은 맹인과 바리새인들 간의 대화, 또 맹인과 예수님과의 대화에서 맹인이 한 고백입니다. 맹인이 많은 말을 합니다. 그런데 본문 말씀을 보면 계속 반복해서 등장하는 단어가 있습니다. ‘안다’ 맹인의 말을 통하여 요한은 ‘안다’는 것이 정확하게 어떤 의미인지 실제로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자기들이 모세와 하나님을 안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이 모세에게는 말씀하신 줄을 우리가 알거니와 이 사람은 어디서 왔는지 알지 못하노라”(29절) 맹인은 그렇게 말하는 바리새인들의 말에 사실 반박을 합니다. “그건 아는 게 아닙니다.” 요한은 맹인의 입을 통하여 그런 앎은 진짜 아는 것이 아니라고 반박하면서 진짜 아는 게 무엇인지 설명해 주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앎에서 믿음으로 나아가는데 그렇다면 믿음은 또 어떤 것인가에 대하여 다시 정의해 주고 있습니다.
이 두 가지 초점으로 본문 말씀을 읽어야 요한이 우리에게 전해주고자 하는 메시지를 잘 캐치할 수 있습니다. ‘안다’는 것은 무엇인가? ‘믿음’은 무엇인가?
‘안다’는 것에서 멈추지 않고 그 앎은 믿음으로 인도해야 합니다. 즉 믿음은 진정한 앎에서 와야 된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앎과 믿음에 관한 요한의 메시지를 통해서 스스로 점검해보는 계기가 되면 좋겠습니다.
‘나는 정말 예수님을 알고 있는가?’ ‘나는 정말 올바른 믿음 위에 서 있는가?’ “이에 그들이 맹인이었던 사람을 두 번째 불러 이르되 너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우리는 이 사람이 죄인인 줄 아노라”(24절) 갑자기 맹인이었던 사람에게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고 말합니다. 지금까지의 맥락을 볼 때 참 이상합니다. 왜 그렇습인까?
지금까지 우리가 본 바리새인들은 믿음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을 잘 믿지 못하는 사람들입니다. 물론 본인들은 스스로 믿음이 있다고 생각하고, 하나님을 잘 믿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요한은 사실 이들은 믿음 없는 사람들이고 하나님을 믿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하나님을 안 믿는 사람들이라고 계속 말씀합니다.
그런데 갑자기 이 사람들의 입에서 이런 말이 나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라.” 맥락상 이상하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이들이 이렇게 말한 의미가 무엇입니까? 일종의 당시 숙어처럼 쓰인 말입니다.
“똑바로 얘기해.” “진실을 얘기해.” 이런 뜻입니다.
표현적으로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라”라고 들립니다. 그래서 이 말이 당시 숙어처럼 쓰인다는 배경을 모르고 읽으면 맹인이 눈을 뜨게 된 것을 하나님께 감사하며 영광을 돌리라고 들립니다.
그런데 그런 뜻이 아니라 진실을 말하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어떻게 지금 퇴색되었습니까?
내 진실을 확증하는 것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차용해 쓰는 것으로 퇴색되었습니다.
이것이 믿음 없음의 대표적인 현상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팔아서 자기의 이득을 취하는 것.
하나님의 이름을 팔아서 자기의 주장이 옳다고 증거로 대는 것.
믿음은 내가 하나님의 도구가 되는 것 아닙니까?
그런데 하나님이 나의 도구가 되어버렸습니다.
이것이 바로 바리새인들의 믿음이었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전적으로 하나님 나라의 도구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그렇게 사용되어야 하는 자들입니다.
그런데 만일 하나님을 사용한다면, 나를 위한 하나님으로 하나님을 도구로 삼는다면 믿음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을 위한 내가 되어야지 나를 위한 하나님으로 믿는다면 그것은 믿음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모르고 있기 때문에 그렇게 하나님을 자신의 인생의 도구로 삼아버리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로 ‘너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라’라고 말한 것입니다.
“대답하되 그가 죄인인지 내가 알지 못하나 한 가지 아는 것은 내가 맹인으로 있다가 지금 보는 그것이니이다”(25절)
맹인이었던 자가 이렇게 고백합니다.
“당신들이 나를 고친 예수가 죄인이라고 말하는데 나는 그건 잘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분명히 내가 아는 것은 그가 나의 눈을 뜨게 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내가 분명히 압니다.”
이 때 ‘안다’는 단어는 지식으로 아는 것을 뜻하지 않습니다. 즉 이런 의미입니다.
“나는 지식으로는 그 사람이 죄인인지 아닌지 잘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내가 경험하고 만나고 내가 체험한 것은 그분이 내 눈을 뜨게 했다는 것입니다. 나는 그것을 압니다.”
이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진정한 앎은 책을 통해서 배워 아는 게 아닙니다.
수많은 세월 교회 다니고 설교를 들어서 주님을 아는 게 아닙니다.
예수님을 나의 주님으로 만나야 합니다.
지금 이 맹인이었던 자는 예수를 만났습니다. 자기의 문제를 해결해주시는 예수님, 자기의 어둠을 밝혀주신 예수님, 내 눈을 뜨게 해주신 예수님으로 만났습니다. 그래서 ‘그런 분인 줄 안다.’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수많은 세월 동안 아무리 많이 성경을 읽고 배우고, 설교를 아무리 많이 들었을지라도 그리스도를 나의 주님으로, 나의 그리스도로, 나의 하나님으로 만나지 않았다면 그리스도를 모르는 것입니다.
지식이 필요 없다는 뜻이 아닙니다.
지식은 반드시 필요합니다. 질병의 치유가 교회에만 있습니까? 꼭 그런 것은 아닙니다. 이단이나 사이비, 다른 종교, 무속신앙 등 기독교 밖에 있는 다른 곳에서도 그들이 믿는 신을 통해서 문제가 해결되고 질병이 치유가 되기도 합니다. 그런데 그 것을 한 사람들은 그 경험이 너무 뚜렷하고 확실하니까 우리가 아무리 진리를 전해도, 그곳은 진리라 아니라고 해도, 그것은 참 신이 아니라고 말해도 거기에서 나오기 쉽지 않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병이 나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자기들이 믿는 신이 제일이라고 확신합니다.
이것이 체험이 가지고 있는 단점입니다.
그래서 이 맹인이었던 사람의 앎이 어떻게 변화되는지를 자세히 봐야 합니다.
지식이 중요하지 않다는 말씀이 아니라 그 지식에 머물러 있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롬 10:17)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성경은 많이 읽고 배워야 합니다.
설교도 잘 들어야 합니다.
사실 얼마 전까지만 하더라도 한국교회에 체험 신앙이 굉장히 강했습니다. 반면 말씀이 약했습니다.
체험은 굉장히 강한 데 반해 말씀은 너무 약하니까 한국교회의 기반이 약한 것입니다. 온전하고 건강한 신앙이 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1980년대 이후 한국교회에 불었던 열풍이 바로 제자 훈련입니다.
그런데 제자 훈련 강해지면서 이제는 다시 체험이 약해지게 되었습니다.
제자 훈련이 지금은 예전처럼 인기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처음 제자 훈련을 할 때에는 몰랐던 것을 알게 되니 새롭고 신기했습니다.
예전에는 교회 안에서 어떤 체험을 하지 못하면 믿음이 없는 사람 같은 인식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내가 원한다고 체험할 수 있습니까? 교회 모든 성도들이 원한다고 영적인 체험들을 할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극소수만 체험을 했습니다. 그러니까 체험을 한 사람들은 신앙의 자부심 같은 것이 있었는데 그것이 흡사 교만과 비슷했습니다. 그리고 영적인 체험을 하지 못한 사람들은 신앙적인 열등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거든요. 그런 분위기에서 교회 안에 제자 훈련이 밀물처럼 들어오니까 상황이 달라지게 됩니다.
제자 훈련은 개인의 의지에 따라 선택할 수 있는 영역입니다.
본인이 열심히만 하기만 하면 정해진 제자 훈련 과정을 마치고 수료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제자훈련의 모든 과정을 수료하면 그 사람이 믿음이 좋다고 하는 객관적인 표시가 교회 안에서 되었습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제자 훈련에 몰두하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제자 훈련과정을 다 이수하면 교회에서는 사역을 하게 합니다.
그러다 보니까 중직자로 올라갈수록 제자훈련 과정의 요구가 더 강해지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어려운 제자 훈련 과정을 모두 수료하고 중직까지 맡게 되니까 굉장히 믿음이 좋다고 하는 착각을 하게 됩니다.
모두 그랬던 것은 아니지만 보편적으로 그런 분위기였습니다.
그러면서 그리스도를 인격으로 만나는 체험이 점점 약해졌습니다.
그래서 교회 안의 체험들이 약해졌습니다.
그런데 지금 교회들의 상황은 어떤지 아십니까?
체험도 없고 지식도 없습니다. 둘 다 없습니다.
그래서 한국교회 신앙이 위기인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인격으로 만나는 체험도 없고 그렇다고 해서 그리스도를 정확하게 아는 지식도 없습니다.
지금도 성도들을 보면 알고 싶어 하는 분들이 있긴 합니다. 그런데 그리스도를 인격으로 만나서 체험하고 경험하기 원하는 마음에서 그리스도를 알고 말씀 알기를 원하는 것인지 의문이 들 때가 많습니다.
대부분의 교인들은 지적 호기심인 측면이 더 강한 것 같습니다.
자신의 삶을 온전히 그리스도께 더 헌신하고 싶은데 확신이 없어서 배우고자 하는 교인은 많지 않은 것 같습니다.
‘내가 이렇게 살면 안 되지.’
‘내가 이렇게 시간을 쓰면 안 되지.’
‘내가 물질을 이렇게 쓰면 안 되지.’
이것이 두려우십니까?
하나님 앞에 서게 되면 자신의 삶에 대한 분명한 평가와 보상을 받을 것입니다.
그때 물으실 것입니다.
“너 왜 시간 그렇게 썼어?” 분명합니다.
저도 주님 앞에 서면 굉장히 후회할 것을 분명히 알고 있습니다.
지금보다 주님을 더 알지 못한다면 분명히 후회할 것입니다.
분명히 저는 많은 시간들을 낭비했을 것이고, 많은 돈을 낭비했을 것이고, 많은 힘들을 낭비했을 것입니다. 그렇게 헛된 일을 추구하며 살았다는 것을 그분 앞에 설 때 깨닫게 될 것입니다.
그것을 압니다.
그러니 제 입장에서는 조급한 것입니다. 시간을 제대로 써야 되고, 물질도 제대로 써야 되고, 생명을 추구하며 하루하루를 살아가야 되는데 쉽지 않습니다. 내 몸에 새겨진 죄의 DNA는 그걸 원하지 않습니다. 결국 그것과 싸워야 되는데 그것과 싸우려면 그리스도를 더 알지 못하면 이길 수 없습니다. 내 힘으로 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를 더 알아야 되고 아는 정도가 아니라 그리스도를 더 경험해야 하고 그 경험이 더 깊어져야 합니다.
지금의 앎과 경험으로는 세상을 이길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를 더 경험해야 하고, 그리스도 안으로 더 들어가야 하고, 그리스도를 더 발견해야 합니다.
지금 제가 발견한 그리스도는 그리스도의 한 쪽 얇은 옷자락 살짝 만진 정도입니다. 지나가시는 그분의 옷자락에 살짝 스친 정도밖에 되지 않습니다. 진짜 주님을 만나야 합니다.
한 여인이 주님의 옷자락을 만졌을 때 누가 내 옷을 만졌느냐고 물으십니다.
제자들이 뭐라고 합니까?
사람들이 많아서 그냥 부딪힌 거라고 합니다.
그런데 왜 주님은 자기 옷을 만진 그 여자를 만나려고 찾으셨겠습니까?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내가 이렇게 능력 있는 자야.”
이렇게 사람들에게 과시하고 보여주기 위해서 그렇게 하셨을 리는 전혀 없습니다.
우리 안에는 자신의 힘을 과시하고 자랑하고 싶은 욕망이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에게는 그런 욕망이 전혀 없습니다.
그런데 왜 그 여인을 찾으셨습니까?
주님 때문이 아니라 그 여인 때문입니다.
그 여인에게 있어서 정말 중요한 것이 무엇입니까?
주님의 옷자락을 스쳐서 병이 낫는 것입니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주님을 만나는 것입니다.
병이 나은 것에서 더 나가야 주님의 얼굴을 보고 주님을 만나야 합니다.
그것이 중요합니다.
우리 믿음의 수준은 주님의 옷자락 스친 정도밖에 되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인생의 문제가 해결되고, 삶이 변화될 만큼 주님은 강력하신 분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중요한 게 아닙니다. 거기에서 나아가 주님을 더 알아야 합니다.
이 여인은 처음에는 주님이 능력 있는 분으로만 알고 와서 목숨을 걸고 주님의 옷자락을 만졌습니다.
사실 혈우병 걸린 여인은 부정하기 때문에 당시 사람들 가운데 나타나면 안 되는 사람이었습니다. 사람들 앞에 나타났다가 들키면 돌에 맞아 죽을 위험이 있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여인은 목숨을 걸고 주님께로 나와서 주님의 옷자락을 살짝 만진 것입니다.
자기가 부정한 자이기 때문에 주님이 나를 만나지 않는다는 것을 너무 잘 알았습니다.
어떻게 부정한 자가 하나님을 만납니까?
만날 수 없습니다.
이 여인은 예수님이 능력이 있으시다는 것을 아는 믿음이 있었을 뿐만 아니라, 자신은 부정한 자이기 때문에 사람들과 접촉할 수 없다는 사실도 너무 잘 알았습니다.
그러니까 주님 앞에 당당하게 나와서 자기가 혈류병 걸렸는데 고쳐달라고 말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살짝 뒤에서 몰래 만지면서 스쳤습니다.
그런데 그 여인이 주님을 만납니다.
주님을 만나서 그가 알고 있는 주님, 그가 경험한 주님 그 이상의 주님을 알고 경험하게 됩니다. 이분이 단지 능력자가 아니라 하나님이시고, 메시아이심을 알게 됩니다.
‘거룩하신 하나님은 부정한 자를 멀리 하시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분이 부정한 자를 접촉하셔서 오히려 더 거룩하게 만드시는 분이구나.’
이것을 알게 됩니다.
그렇게 앎이 깊어지게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주님이 이 여인을 불러 세우신 것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주님의 옷자락을 스쳐서 만나는 그 만남으로는 안 됩니다.
더 알아야 합니다.
주님을 더 경험해야 합니다.
주님을 더 만나야 합니다.
주님 안으로 더 들어가야 합니다.
주님을 더 발견하지 않으면 결국 우리는 낭비하는 삶을 살 수밖에 없습니다.
지금도 낭비하며 살지 않습니까?
물론 우리대로는 많은 시간도 드리고 많은 물질도 드리고 많은 사역도 하지만 솔직히 얼마나 많은 것들을 낭비하고 있습니까? 다 쓰지 않습니다.
그런데 나중에 가면 그렇게 했던 것이 정말 아까울 것이 분명합니다.
‘그때 그 시간을 내가 그렇게 쓰면 안 되었던 것인데.’
‘그때 그 돈을 그렇게 쓰면 안 되었는데.’
‘그때 그 힘을 그렇게 쓰면 안 되었는데.’
‘그 기회를 그렇게 낭비하면 안 되었는데.’
그때 더 잘 써야 되는데 괜히 낭비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이런 두려움이 있기 때문에 주님을 더 알아야 되는 것입니다.
더 알고 더 경험해야 합니다.
그렇게 경험할수록 더 주님을 알고 싶어집니다.
그래서 지식이 필요합니다.
경험을 강조한다고 해서 지식이 경험보다 못하는 뜻은 아닙니다.
뒤에 보면 이 맹인이었던 자의 믿음이 달라집니다.
아는 자에서 믿음으로 나아갈 때 그 때 지식이 반드시 바탕이 되고 있습니다.
이 맹인이었던 사람은 이상하게 여깁니다.
“당신들은 내가 그렇게 말했음에도 불구하고 왜 또 물어봅니까?”
그리고 나중에 이렇게 말합니다.
“당신들도 그의 제자가 되려 하나이까”(27절)
사실은 이 말은 굉장히 모욕적인 말입니다.
감히 누가 바리새인들을 깔보고 모욕합니까?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런데 이 맹인이었던 자의 앎이 강력하니까 바리새인들이 다 껍데기라는 것을 정확하게 본 것입니다.
그전까지는 바리새인들이 굉장한 사람들처럼 보였습니다.
당시 유대 땅에서 바리새인들만큼 하나님을 잘 믿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그러니까 모두 바리새인들 앞에서 머리를 숙였습니다.
그런데 이 맹인이었던 자는 불과 얼마 전까지 구걸하던 거지였습니다.
바리새인들이 뭐라고 말합니까?
“네가 온전히 죄 가운데서 나서 우리를 가르치느냐”(34절)
죄 가운데 태어났으면서 감히 우리들을 가르치려고 하느냐고 기분 나쁘다고 합니다.
그런 사람이 바리새인들을 모욕하고 조롱합니다.
“당신들도 그의 제자가 되려 하나이까”(27절)
이런 말입니다.
“당신들도 예수 제자 되려고 해서 그렇게 궁금해 자꾸 물어보는 것입니까?”
그리스도를 진정으로 모르면 무시당합니다.
그리스도를 진짜 만나지 못하면 무시당합니다. 이런 것과 비슷합니다.
교회 수십 년 다녔고 직분도 받았습니다. 그래서 교회를 너무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교회 얼마 다니지 않는 사람이 그리스도를 영적으로 깊이 만났습니다.
그 사람이 나를 무시한다면 얼마나 기분이 나쁩니까?
그렇다면 창피한 줄 알아야 합니다.
그런데 창피한 것을 모릅니다.
자기의 신앙 경력과 신앙 이력만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 신앙 이력과 경력이 얼마나 헛된 것인지를 보여주시는 말씀입니다.
그리스도를 만나지 못하면 이 땅에서 사람한테 무시당할 수도 있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리스도를 만나지 못하면 주님 앞에서 큰일 납니다.
이 사람들이 막 발끈합니다.
“그들이 욕하여 이르되 너는 그의 제자이나 우리는 모세의 제자라”(28절)
그들은 예수님을 얕보고 모세가 더 크다고 생각하고는 모세의 제자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사실 그들은 모세의 제자도 아닙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정말 모세를 알았다면 그리스도를 모를 리가 없습니다.
그들이 진짜 모세의 제자라면 그리스도의 제자가 안 될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모세에 대해서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모세의 제자라고 자부합니다.
그런데 사실은 모세조차도 모르고 있고 그러니 모세의 제자도 안 된 사람들입니다.
잘못 알고 있는 것입니다.
“이상하다 이 사람이 내 눈을 뜨게 하였으되 당신들은 그가 어디서 왔는지 알지 못하는도다”(30절)
이 맹인이었던 자의 논리를 보십시오.
“하나님이 죄인의 말을 듣지 아니하시고 경건하여 그의 뜻대로 행하는 자의 말은 들으시는 줄을 우리가 아나이다”(31절)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우리가 다 안다고 합니다.
“창세 이후로 맹인으로 난 자의 눈을 뜨게 하였다 함을 듣지 못하였으니”(32절)
성경에 맹인이 눈 떴다는 것을 당신들이 읽은 적이 있냐고 묻습니다.
이 일은 하나님이 아니면 하실 수 없는 것이고, 저 예수가 당신들이 말하는 것처럼 죄인이라면 어떻게 내 눈을 뜨게 할 수 있느냐고 하면서 이상하다고 합니다.
“이 사람이 하나님께로부터 오지 아니하였으면 아무 일도 할 수 없으리이다”(32절)
그렇게 말한 후 이 맹인이었던 자는 출교를 당합니다.
“그들이 대답하여 이르되 네가 온전히 죄 가운데서 나서 우리를 가르치느냐 하고 이에 쫓아내어 보내니라”(34절) 출교를 당합니다.
그런데 이 맹인이었던 자는 출교를 당해도 겁나지 않았습니다.
더 이상 종교 생활을 하지 않을 것이니 그 종교 시스템 안에 계속 있을 필요가 없었습니다. 그러니 쫓아내지 않아도 이미 종교 밖으로 나왔습니다.
이렇게 그리스도를 분명하게 체험하고 그리스도를 인격으로 만나니까 ‘그리스도를 안다’고 고백합니다.
이 사람은 진짜 그리스도를 아는 자가 되었습니다.
그리스도를 인격으로 경험하고 만났습니다.
성경에서 ‘안다’는 단어는 ‘체험하다’라는 뜻입니다.
남자와 여자가 결혼해서 서로 부부가 되어 아내가 남편을 알고 남편이 아내를 안다고 할 때 쓰이는 단어입니다.
그 앎이 지식으로 아는 것입니까?
연애할 때는 상대방을 잘 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아무리 오래 연애한 후 결혼을 해도 결혼을 하고 나니 배우자를 모르겠습니다.
결혼하고 나니까 진짜 알게 되는 것 아닙니까?
연애할 때는 사실은 잘 모릅니다.
아무리 오래 만났어도, 그래서 잘 안다고 확신하여 결혼했지만 한 집에서 살게 되면 다른 여자입니다.
이해되십니까?
그때 비로소 ‘안다’는 단어를 쓰는 것입니다.
성경에 나온 단어가 바로 그 ‘안다’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를 진짜 안다는 것이 무슨 말입니까?
신부인 우리가 그리스도를 신랑으로 맞이했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지금까지 연애만 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연애하는 수준입니다.
결혼하고 나면 내가 알던 사람이 아니라 완전 다른 사람입니다.
그렇게 결혼을 통해 배우자를 더 정확하고 분명하게, 자세히, 실제로 알아가는 것 아닙니까?
그것이 결혼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신부입니다.
그리고 이 땅에서 신랑이신 그리스도와 살아갑니다.
불완전하지만 신랑과 신부로 살아갑니다.
그것을 그리스도를 안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 사람이 주님을 잘 알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전부였다면 주님이 이 사람을 찾아가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이 찾아가십니다.
“예수께서 그들이 그 사람을 쫓아냈다 하는 말을 들으셨더니 그를 만나사 이르시되 네가 인자를 믿느냐”(35절) 인자를 믿느냐고 물어보십니다.
아는 것에서 끝나지 말고 그 앎은 반드시 믿음으로 나와야 합니다.
그래서 믿느냐고 물어보십니다.
이르되 주여 그가 누구시오니까 내가 믿고자 하나이다. “대답하여 이르되 주여 그가 누구시오니이까 내가 믿고자 하나이다”(36절) 이런 말입니다.
“도대체 그 인자가 누구십니까? 제가 믿고 싶습니다.”
이렇게 고백합니다.
이 사람은 앎에서 믿음으로 성장합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가 그를 보았거니와 지금 너와 말하는 자가 그이니라”(37절)
37절은 9장 전체 핵심이 되는 이 굉장히 중요한 구절입니다.
이미 봤다고 하십니다.
이미 봤지만 맹인이었던 사람은 이미 만난 그 예수님이 그리스도 메시아인 것은 알지 못했습니다.
이 사람의 진짜 눈은 언제 떠졌습니까?
요한은 묻습니다.
“진짜 눈 떠지는 게 무엇이냐?”
보이지 않던 육신의 눈이 보이게 되는 것이 눈이 떠지는 것이 아니라, 예수를 그리스도로 만나고, 예수를 그리스도로 알고, 예수를 그리스도로 고백할 때 즉 예수가 하나님이시고 예수가 그리스도인 것을 깨닫게 될 때 비로소 그 때 우리의 눈이 떠졌다라고 말씀합니다.
이 사람의 진짜 눈이 떠진 것은 언제입니까?
“내가 그다!”
“내가 인자다!”
“내가 그리스도다!”
이것을 듣고 믿게 되었을 때입니다.
그 때 이 사람의 눈이 진짜 떠졌습니다.
그동안 이 자리에 있던 많은 사람들이 이미 다 예수를 봤습니다.
맹인이었던 사람은 실로암 못에서 씻은 후 눈을 뜨게 되었고 그 때 예수를 봤습니다.
그런데 다른 사람들은 맹인이 아니니까 다 예수를 봤습니다.
다 봤지만 그가 인자인 줄을 몰랐습니다.
다 맹인이라는 말씀입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심판하러 이 세상에 왔으니 보지 못하는 자들은 보게 하고 보는 자들은 맹인이 되게 하려 함이라 하시니 바리새인 중에 예수와 함께 있던 자들이 이 말씀을 듣고 이르되 우리도 맹인인가”(39, 40절)
바리새인들이 묻습니다.
“우리도 맹인인가?” 맞습니다. 맹인입니다. 요한이 하고 싶은 말이 바로 그것입니다. 예수를 보고도 하나님인 줄 모르는 자들이 진짜 맹인이라는 것입니다. 육신적으로 앞을 보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하시는 말씀이 아니라 모든 영적인 맹인들에게 하시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교회 와서 예수님을 봅니다. 성경 읽을 때에도 예수님을 봅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님을 믿는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진짜 그리스도로 보고 있습니까? 예수님을 진짜 하나님으로 보고 있습니까? 예수님을 진짜 하나님으로 믿고 있습니까? 예수님이 내게 오신 하나님인 줄 진짜 알고 있습니까? 하나님이신 예수님이 그리스도의 영으로 우리 안에 오신 줄을 믿고 보고 있습니까?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예수님을 하나님으로 믿고 있습니까? 그것을 모른다면 우리 또한 여전히 영적인 맹인입니다. 한 번에 보지 못합니다. 육신의 눈은 한 번에 떠지지만 영적인 눈은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님이 다른 맹인을 치유할 때 일입니다. “뭐가 보느냐?” “희미하게 나무 같은 게 보입니다.” 더 물어보십니다. 그렇게 그 맹인의 시력이 점점 회복되고 선명하게 보이는 사건이 있습니다. 그런 것처럼 영적인 시력도 한 번에 떠지는 것이 아니라 서서히 열립니다. 희미하게 보이다가 점점 자세하게 보입니다. 그게 믿음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를 더 알기를 원하고, 더 보기를 원하고, 더 만나길 원하고, 그리스도를 더 체험하기 원해야 합니다. 이 맹인이었던 사람은 그리스도가 메시아라는 분명한 지식 위에 서게 됩니다. 그러니까 체험으로 끝나면 안 됩니다. 체험만 중요한 것이 아니라 지식도 같이 가야 합니다. 영적인 지식과 영적인 체험은 항상 같이 가야 합니다. 그래서 끊임없이 말씀 읽어야 되고 묵상해야 합니다. 성경을 지식으로 읽지 마십시오. 말씀을 읽을 때마다 그리스도를 만나기를 그리스도를 깨닫기를 목표 삼아야 합니다. ‘이 말씀에서 증거하시는 그리스도를 만나기 원합니다.’ 그렇게 계속 성경을 읽고 묵상하고 필요하면 배워야 합니다. 그리스도를 알면 알수록 점점 더 그리스도를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말씀의 바탕이 되지 않으면서 그리스도를 경험한다는 것은 사실 착각입니다. 스스로 그리스도를 만났다고 하고 영적 체험이 있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저는 아무리 봐도 영적 체험을 한 것 같지 않습니다. 그런데 그렇다고 스스로 믿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말씀의 기반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를 알기 위해서 성경을 배워야 하고 성경을 알아야 합니다. 성경을 가까이 둬야 합니다. 그리스도를 안 이후에도 그리스도를 더 알기 위해서 더 말씀 안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이 맹인이었던 자처럼 예수 그리스도를 분명하게 보는 믿음으로, 그분이 하나님이심을 믿는 믿음으로, 그분이 하나님인 것을 체험하는 믿음으로 더 들어가서 모든 삶이 조금도 낭비되지 않고 하늘에 쌓는 인생이 되기를 축복합니다.
“주님, 우리의 눈을 더 열어주셔서 주님을 선명하게, 말씀을 선명하게, 하나님 나라를 선명하게 볼 수 있게 하옵소서. 아직은 세상이 더 잘 보이고 하나님 나라는 희미하게 보입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드리는 삶이라고 하지만 사실은 많은 것들이 낭비되고 있음을 고백합니다. 주님, 우리가 보지 못하면 계속 낭비할 수밖에 없사오니 우리를 불쌍히 여겨주셔서 세상은 더 어두워지게 하시고, 하나님 나라는 더 선명하게 보이는 믿음에 이르게 하옵소서. 우리의 삶이 결코 낭비되지 않고 주님 나라를 위하여 사용되고 쓰임 받게 하셔서 하나님 앞에 섰을 때, 놀라운 천국의 상급을 많이 받는 자로 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한 가지 아는 것(롬 8:28-30)
28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들 곧 그분의 목적에 따라 부르심을 받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29 그분께서 미리 아신 자들을 또한 예정하사 자신의 아들의 형상과 같은 모습이 되게 하셨나니 이것은 그분께서 많은 형제들 가운데서 처음 난 자가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30 뿐만 아니라 그분께서는 예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오늘
함께 살펴볼 하나님의 말씀은 로마서 8장 28절부터 30절까지의 말씀입니다. 다 찾으셨으면 제가 읽겠습니다. (읽는다.) 오늘은
"한 가지 아는 것"이라는 제목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함께 나누기 원합니다. 먼저 기도하겠습니다. (기도)
우리가 알거니와 오늘
우리가 읽은 로마서 8장 말씀은 로마서가 반지라면, 로마서 8장은 반지에 박혀 있는 다이아몬드라고 누군가 말한 것처럼 너무나
귀한 진리가 담겨 있는 소중한 말씀입니다. 저의 짧은 입으로 너무나 깊고 풍요로운 진리의 말씀을 다 말할 수는 없겠지만 주님께서
저에게 주신만큼 귀한 은혜를 함께 나누기 원합니다. 먼저 우리가 읽은 로마서 8장 28절 말씀은
"우리가 알거니와"라고 시작하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의 믿음은 우리가 아는 것에 근거합니다. 이 세상 그 어떤 사람도 알지 못하는
대상을 믿거나 사랑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로마서 10장 14절과 15절에서는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런즉 그들이
자기들이 믿지 아니한 분을 어찌 부르리요? 자기들이 듣지 못한 분을 어찌 믿으리요? 선포자가 없이 어찌 들으리요? 보내어지지
아니하였으면 그들이 어찌 선포하리요?" 오늘날 사람들이 주님을 믿지 않는 이유는 주님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얼마나 큰 죄인이지 모르고, 죄인을 영원한 지옥의 불길 가운데 심판하시는 하나님의 진노가 얼마나 두려운 것인지
모르고,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어떠한 사랑으로 자신의 생명을 내어주셔서 큰 구원을 이루셨는지 모르기 때문에 사람들은 주님을 믿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사람들에게 이 복음을 알려야 합니다. 사람들이 복음을 듣고 분명하게 깨달아 알 수만 있다면 누구나
믿고 구원을 받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람이 주님을 향한 믿음이 크다면 그만큼 주님을
많이 안다는 것이고, 어떤 사람이 주님을 향한 사랑이 크다면 역시 그만큼 주님을 많이 안다는 의미입니다. 오늘 우리는 주님을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우리 자신의 느낌이나 경험이나 감정을 통해서 알 수 없고, 오직 하나님께서 영감으로 기록하신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는 친히 우리들에게 "성경 기록들을 탐구하라. 그것들이 바로 나에 대하여
증언하느니라"(요 6:39)라고 말씀해 주고 계십니다. 우리는 주님을 알기 위하여 성경 말씀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성경을
탐구한 만큼 주님에 대한 많은 증언들을 발견할 수 있고, 우리가 주님을 알게 된 만큼 우리의 믿음과 사랑이 자라날 수 있습니다.
사랑이
없는 지식은 사람을 교만케 하고 멸망케 하지만, 올바른 지식이 없는 사랑과 열정 역시 하나님을 대적하게 됩니다. 이스라엘은
지식을 따르지 않은 열정으로 메시야를 십자가에 못박았고, 사도 바울도 회심하기 전에는 주님을 몰랐기 때문에 열심을 다해 교회를
핍박하였습니다. 우리에게는 진리의 지식과 사랑이 모두 필요합니다. 그러므로 오늘의 본문 말씀인 로마서 8장 28절에서도,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들"이라고 말씀하면서 지식과 사랑을 동시에 언급해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들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들 곧 그분의 목적에 따라 부르심을 받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입니까? 바로 하나님의 목적에 따라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이 말씀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만 하나님께서 부르셨다는 의미는 결코 아닙니다. 왜냐하면 요한일서 4장 10절 말씀에서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지 아니하였으나 그분께서 우리를 사랑하시고 자신의 아들을 보내사 우리의 죄들로 인한 화해 헌물로 삼으셨나니 여기에 사랑이 있느니라."
우리는
우리 자신의 뜻대로 살아왔습니다. 우리는 어리석고 교만하고 또 이기적이어서 우리에게 유익한 것들만 하면서 살아왔습니다. 우리는
감히 하나님을 이용하면서 살아왔고 날마다 하나님을 거역하고 죄 짓기를 숨쉬듯 하면서 살아왔습니다. 우리 가운데 아무도 먼저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만을 사랑하고 돈과 쾌락과 안락한 삶을 사랑하며 살아왔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먼저 우리를 사랑하시되 우리가 그분을 대적할 때, 우리가 아직 죄인이었을 때, 우리가 아직
원수 되었을 때 사랑하셨고, 자신의 아들을 보내사 우리의 죄들로 인한 화해 헌물로 십자가에 처형하시기까지 사랑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여기에 사랑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더러운 죄 가운데 있을 때에 먼저 찾아와
주셨고, 우리를 불러 주셨습니다. 우리가 멸망의 구렁텅이로 빠져들고 있을 때 먼저 우리를 사랑하셔서 부르셨습니다. 오늘 우리는
주님의 부르심을 받았기에 이 자리까지 왔습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사람은 누구든지 크게든 작게든 하나님을 사랑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깊이 아는 만큼 하나님을 사랑하게 됩니다.
목적에 따라 부르심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부르시되 목적에 따라 부르셨습니다. 저도 전에 삼겹살 집에서 일할 때 사람들이 저를 많이 불렀습니다. "여기요" 그 때
사람들이 저를 부르는 목적은 오직 한가지 주문하고 일을 시키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실 때 아무 이유 없이
부르신 것이 아니고 자신의 목적에 따라 우리를 부르셨습니다. 오늘날 교회에 다니는 많은 사람들은
구원받는 것이 믿음의 목표라고 말합니다. 물론 어떤 분들은 이 세상에서 복 받고 만사형통하는 것이 목적이기도 하지만, 궁극적으로는
많은 사람들이 천국 가기 위해 하나님을 믿는다고 고백합니다. 얼마나 안타까운지 모릅니다. 또한 얼마나 감사한지 모릅니다. 우리가
그들보다 더 나은 것이 없는데,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긍휼히 여기셔서 큰 은혜와 진리를 우리에게 알게 해 주셨습니다.
성경은
구원은 우리의 목적지가 아니라 출발지라는 것을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구원은 새 생명의 시작이고, 새로운 피조물로서의 새
출발입니다. 이제 우리는 나의 계획과 목적을 위해 살아가는 사람이 아니고, 오직 우리를 부르신 하나님의 뜻과 목적을 위하여
살아가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너무나 부끄럽고 자신 없는 고백일지라도 하나님을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주님의
부르심을 따라 가는 것은 심판이 두려워서가 아니라 두려운 심판을 우리 대신 자신의 몸으로 감당하신 주님의 사랑이 너무나 놀랍고
감사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그분의 목적을 따라 부르심을 받은 우리는 곧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들이 되었습니다. 29절과 30절에서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신 목적에 대해서 좀더 자세히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예정하사 29절과 30절을 한번 읽어보겠습니다. 29 그분께서 미리 아신 자들을 또한 예정하사 자신의 아들의 형상과 같은 모습이 되게 하셨나니 이것은 그분께서 많은 형제들 가운데서 처음 난 자가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30 뿐만 아니라 그분께서는 예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모든 것을 아시는 영원한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부르심에 응답하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영접할 우리들을 미리 아시는 가운데 우리가 자신의 아들의 형상과 같은 모습이 되게 하시려고 예정하셨습니다. 성경에는
분명히 예정이라는 단어가 등장하고 있습니다. 또한 에베소서에서는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셨다고 기록하고 있고,
자신의 크게 기뻐하시는 뜻에 따라 우리를 예정하셨다는 말씀도 등장하고 있습니다(엡 1:4,5). 그러나
이러한 말씀은 "칼빈주의 예정론"를 믿는 사람들이 말하는 것처럼, 이미 구원받을 사람을 하나님이 미리 정해놓으셨기 때문에 굳이
복음을 전할 필요가 없다거나, 어차피 택함을 받은 사람은 예수님을 믿지 않아도 구원을 받고, 택함을 받지 못한 사람은 예수님을
믿어도 지옥에 간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지 않습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미리 아심과 예정하심을 말씀하고 계실 뿐만 아니라, 사람의
자유의지와 순종을 또한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누구든지 복음을 듣고 믿을 수 있도록 전해야 합니다.
우리는
모든 것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전지전능하심이 어떤 것인지 다 알 수 없고 이해할 수 없습니다. 5살짜리 아이가 부모님의
마음을 아무리 설명해도 알지 못하는 것처럼, 하나님의 전지전능하심이 어떤 것인지 우리는 다 이해할 수 없습니다.
자신의 아들의 형상 그러나 한가지 분명한 것은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아시는 가운데 미리 아신 자들을 예정하셔서 자신의 아들의 형상과 같은 모습이 되게 하셨다는 사실입니다. 여기서 하나님의 형상에 대해서 잠시 생각해 보겠습니다.
처음에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자신의 형상대로 창조하신 이유는 사람이 하나님과 사랑하며 교제하도록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러나 사람이 범죄하였을 때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을 잃어버리게 되었습니다. 그 뒤로 이 땅에 태어나는 모든
사람은 죄인인 아담의 형상을 가지고 태어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사 사람의 대표가
되어 죽게 하셨습니다. 인류의 모든 죄를 영원히 단번에 감당하시고 완전히 깨끗케 하시려고 하나님의 형상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람이 되어 이 땅에 오신 것입니다. 이제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자신의 구원자요 주님으로 영접하는 모든 사람에게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되는 권능이 주어지고, 또 하나님의 아들의 형상과 같은 모습이 되도록 예정되었습니다. 아담이 잃어버렸던 하나님의 형상을
마지막 아담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회복하게 하신 것입니다. 다같이 고린도전서 15장을 보시겠습니다. 고린도전서 15장 21절과 22절을 읽어보겠습니다. 21 사망이 사람을 통해 임한 것같이 죽은 자들의 부활도 사람을 통해 임하였나니 22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은 것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살게 되리라.
사망이 사람을 통해 임하였기 때문에, 그리스도께서도 사람이 되셔서 사망을 이기시고 부활 생명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또한 45절 말씀을 보시겠습니다. 45 그러므로 기록된바, 첫 사람 아담은 살아 있는 혼이 되었더라, 함과 같이 마지막 아담은 살려 주는 영이 되셨느니라. 우리 주 예수님의 또 다른 이름은 바로 마지막 아담입니다. 이것은 첫 사람을 아담을 통해 들어온 죄와 사망을 사람의 대표로서 완전히 종결시키시고 끝내셨기 때문입니다.
또한 우리 주님은 47절에 나온 것처럼 "둘째 사람"이 되십니다. 47 첫 사람은 땅에서 나서 땅에 속하거니와 둘째 사람은 하늘로부터 나신 주시니라. 주님이
"둘째 사람"이 되신 것은 우리에게 새로운 생명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마지막 아담"이라는 것은 아담에게 속한 죄인의 형상과
사망을 끝내셨다는 것을 나타내는 이름이고, "둘째 사람"이라는 것은 예수님을 통하여 새로운 피조물과 새로운 인류가 시작되었다는
것을 나타내는 이름입니다.
이제 49절 말씀을 보시겠습니다. 49 우리가 땅에 속한 그 사람의 형상을 지닌 것같이 또한 하늘에 속하신 그분의 형상을 지니게 되리라. 우리가
로마서에서 읽은 말씀과 같이 여기서도 우리가 하늘에 속하신 주 예수 그리스도의 형상을 지니게 되리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우리가 이미 내적으로는 이미 하나님의 생명을 가졌고, 또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였지만, 아직 육신을 입고 있기 때문에 완전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므로 지금 읽은 이 말씀에서도 "그분의 형상을 지니게 되리라"하고 미래형으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어지는 말씀에서는 우리가 완전히 변화되어 하나님의 아들의 형상을 지니게 되는 그 날을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51절부터 읽어보겠습니다. 51 보라, 내가 너희에게 한 가지 신비를 알리노니 우리가 다 잠자지 아니하고 마지막 나팔 소리가 날 때에 눈 깜짝할 사이에 순식간에 다 변화되리라. 52 나팔 소리가 나매 죽은 자들이 썩지 아니할 것으로 일어나고 우리가 변화되리니 53 이 썩을 것이 반드시 썩지 아니함을 입고 이 죽을 것이 반드시 죽지 아니함을 입으리로다. 54 그리하여 이 썩을 것이 썩지 아니함을 입고 이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을 때에는 기록된바, 사망이 승리 가운데서 삼켜지리라, 하신 말씀이 성취되리라.
우리에게는
휴거의 소망이 있습니다. 비록 우리가 지금은 육신 가운데 괴로워하고 힘들어하지만 마지막 나팔 소리가 울리는 그 날에, 눈 깜짝할
사이에, 순식간에 다 변화될 것입니다. 이때 우리는 죄인인 아담의 형상을 완전히 벗어버리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스러운
형상을 입게 될 것입니다. 지금 읽은 말씀대로 표현해 보자면, 아담의 형상을 벗어버린다기 보다는, 오히려 썩어질 아담의 형상이
썩지 아니할 주님의 형상에 의해 삼켜지게 될 것입니다. 다시 로마서 8장으로 돌아와 보겠습니다. 로마서 8장 23절부터
읽어보겠습니다. 23 그들뿐 아니라 우리 자신 곧 성령의 첫 열매를 소유한 우리까지도 속으로 신음하며 양자 삼으심 즉 우리 몸의 구속을 기다림은 24 우리가 소망으로 구원을 받았기 때문이라. 그러나 보이는 소망은 소망이 아니니 어찌하여 사람이 보는 것을 여전히 바라리요? 25 그러나 우리가 보지 못하는 것을 바라면 인내로 그것을 기다리느니라.
너무나
놀라운 것은 로마서나 고린도전서나 우리가 주님의 형상으로 완전히 변화되는 것에 대해 말하면서 휴거의 소망을 기록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로마서 8장 21절에서는 이것을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스런 자유"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 날은 썩음의
속박에서부터 해방되는 것이고, 세상과 육신과 죄의 영향력으로부터 완전히 해방되는 날이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어떠한 구원으로 우리를 구원하셨는지 우리가 알게 된다면 우리는 하나님을 사랑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단순히 우리를
지옥에서 건지시기만 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구원이 얼마나 놀라운 것입니까? 바로 더럽고 추한 우리 죄인들을 하나님께서
유일하게 사랑하시는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형상과 같이 변화시켜 주시는 것입니다. 멸망 받고 심판 받아 마땅한 우리들이 예수님의
많은 형제들로 감히 창조주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를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로마서 8장 30절 말씀을 보시겠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분께서는 예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미리
아신 자들을 자신의 아들의 형상과 같은 모습이 되게 하시려고 예정하신 하나님께서는, 우리는 부르셨습니다. 주님의 부르심에
응답하여 믿음으로 나온 모든 사람들을 하나님께서는 의롭다 선포하셨습니다. 더럽고 추한 우리들을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말미암아
의롭다고 선언하셨습니다. 우리를 부르신 목적은 단순히 의롭다고 선언하는데서 끝나지 않고 더 나아가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궁극적으로 우리를 부르신 목적은 영광을 주시기 위해서입니다.
로마서 8장 17절과 18절 말씀을 읽어보겠습니다. 17 자녀이면 상속자 곧 하나님의 상속자요, 그리스도와 공동 상속자니 우리가 그분과 함께 고난 당하면 이것은 우리가 함께 영광도 받으려 함이니라. 18 내가 생각하건대 현재의 고난들은 앞으로 우리 안에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될 수 없도다.
하나님께서
미천한 우리를 부르시고, 하나님의 아들의 형상으로 변화시키시고, 예수님의 형제들로 삼으신 것은 자녀로서 하나님의 상속자요,
그리스도와 공동 상속자로 삼으시기 위해서입니다. 그리고 궁극적으로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영광을 상속하여 주기를 원하십니다.
다같이 이사야 42장을 보시겠습니다. 이사야 42장 8절 말씀을 보시겠습니다. "나는 주니 그것이 내 이름이라. 나는 내 영광을 다른 자에게 주지 아니하며 내 찬양을 새긴 형상들에게 주지 아니하리라." 또한 48장 11절을 보시겠습니다. "내가 나를 위하여 곧 나를 위하여 그것을 행하리니 어찌 내 이름을 더럽히리요? 나는 내 영광을 다른 자에게 주지 아니하리라."
하나님은
분명히 자신의 영광을 다른 자에게 주지 않으시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교만하게 자신을 높여 자신의 영광을 구하는
자들을 멸망시키고 심판하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히스기야가 자신의 업적을 자랑하였을 때 바빌론을 통한 심판을 말씀하셨고,
느부갓네살 왕이 교만하였을 때 7년 동안 짐승과 같이 살아가게 하셨으며, 헤롯이 사람들에게서 신처럼 추앙을 받을 때 즉시 그를
치셔서 죽게 하셨습니다. 감히 피조물이 영광을 구할 수 없고, 오직 창조주 하나님만이 영광을 받기에 합당하신 분이십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가 읽은 로마서 8장의 말씀에서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신 궁극적인 목적이 바로 영광이라는 놀라운 사실을 우리에게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우리는 모두 그분의 목적에 따라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인데, 그분의 목적이 무엇인가 하면 먼저 더러운
우리들을 의롭다 하시는 것이고, 의롭다 하신 우리들을 영화롭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런즉 다같이 로마서 8장 31절과 32절을 읽어보겠습니다. 31 그런즉 이 일들에 대하여 우리가 무슨 말을 하리요? 만일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 32 또한 자신의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두를 위해 그분을 내주신 분께서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값없이 주지 아니하시겠느냐?
31절은 "그런즉"이라고 시작하고 있는데, 이것은 결론과 같은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모든 것을 주셨습니다. 우리가 한 것이라곤 죄밖에 없는데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아들과 자신의 영광까지도 우리에게 다 주셨습니다.
38절과 39절도 보시겠습니다. 38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정사들이나 권능들이나 현재 있는 것들이나 장래 있을 것들이나 39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능히 우리를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떼어놓지 못하리라.
"우리가
알거니와"라고 말했던 사도 바울은 여기서 "내가 확신하노니"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알고 확신한 것은 무엇입니까?
바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사실입니다. 그 어떤 것도 우리를 하나님의 사랑에서 떼어놓지 못한다는 사실입니다. 참으로
벅차고 감동스러운 말씀입니다. 로마서 8장의 결론입니다. 하나님이 원수되고 죄인되었던 우리들을 사랑하셔서 자신의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셨다는 사실입니다.
지금 이 로마서를 받는 로마교회의 성도들은 피의 네로라고
불리는 네로 황제가 다스리는 로마 제국의 중심지인 로마 도시에 있었습니다. 당시에 우리 믿음의 조상들은 유대교에 의해 핍박을
받았고, 또 로마 제국에 의해 핍박을 받았습니다. 그러므로 35절부터 37절의 말씀에서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35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떼어 놓으리요? 환난이나 곤경이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벌거벗음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36 이것은 기록된바, 우리가 종일토록 주를 위해 죽임을 당하며 도살당할 양같이 여겨졌나이다, 함과 같으니라. 37 아니라. 이 모든 것에서 우리는 우리를 사랑하신 그분을 통해 정복자들보다 더 나은 자들이니라.
세상을
정복하고 다스리며 제자들을 핍박하던 사람들보다 더 크고 위대한 것이 바로 하나님의 사랑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에게는 썩어질 형상을 벗어버리고 영광스러운 하나님의 아들의 형상을 완전하게 입을 휴거의 소망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자녀로서 하나님의 상속자가 되어 영광을 상속받을 일이 남아있기 때문입니다.
다시 로마서 8장 28절을 읽어보겠습니다.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들 곧 그분의 목적에 따라 부르심을 받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우리가
아는 것은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사실입니다.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영원한 영광을 주시려고
우리를 부르셨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하나님을 사랑합니다.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사랑이 있고, 휴거의 소망이 있습니다.
이러할 때 우리에게 닥치는 모든 환경과 어려움은 다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될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한 가지만 더 말씀드리고 마치겠습니다. 저는
주님을 믿고 따르면서 저 자신에 대해 절망할 때가 너무 많았습니다. 너무나 이기적이고 교만하고 욕심이 많고 속도 좁고, 한 저
자신을 보면서 늘 낙망했습니다. 바울이 로마서 7장 24절에서 말할 것처럼 저는 정말 비참한 사람이었고, 계시록에서 라오디게아
교회에게 말씀하신 것처럼 저는 비천하고 눈멀고 헐벗은 자였습니다. 내가 이렇게까지 문제 많고 구제불능인지 몰랐는데, 하나님은
어쩌다 나 같은 사람을 부르셨을까 하면서 주저앉아 있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로마서 8장 29절의
말씀을 보면서 너무나 놀라운 것을 발견했습니다. 바로 "미리 아신 자들을"이라는 말씀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제가 얼마나 무능하고
어리석은 사람인지 다 아시면서 저를 부르셨다는 사실이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다시금 주님을 따를 수 있는 용기를 가지게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저는 저 자신에 대해 실망할지라도, 하나님께서는 모든 것을 다 미리 아시고 저를 부르셨기 때문에 변함 없이
저를 사랑해 주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에 날마다 감격하며 주님을 따르는 우리
11월 18일(화) 요한복음 4-6장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영이요 생명이라(6:63)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이 영이요 생명이라. The Spirit gives life; the flesh counts for nothing. The words I have spoken to you are spirit and they are life.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
인간의 육체적인 노력만으로는 영혼을 살릴 수 없으며 오직 성령의 능력만이 영적인 생명을 주고 구원할 수 있다는 기독교의 핵심 가르침입니다.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의 본질은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은 영이요 생명이라"는 것인데, 이는 성령의 역사가 가장 중요하며 육체적 행위는 상대적으로 무익하다는 의미를 강조합니다. 영적인 생명 : 성령께서 죄를 이기고 선을 택하며 하나님께 순종하는 능력을 주시므로, 성령이 바로 영원한 생명을 주시는 존재입니다. 육은 무익하니라 : 여기서 '육'은 하나님의 은혜와 상관없이 인간의 힘으로만 하는 행위나 노력을 의미하며, 이는 영적 생명을 주지 못한다는 뜻입니다.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은 영이요 생명이라 :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 즉 복음이 성령을 통해 영과 생명이 됨을 강조합니다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이 영이요 생명이라
- 이것은, 예수님의 역사가 성령으로 말미암는다는 새로운 선언이다(Schlatter). 이것은, "인자의 살을 먹고 그의 피를 마시는 자가 영생을 가졌다"는 말씀에 대한 유대인의 오해를 시정하는 것이다. 살을 먹는다 함은, 육체적 식음으로 오해할 것이 아니고 영적 식음(靈的食飮)으로 간주해야 된다. 그리스도께서 하신 말씀은 영적인 것으로서 살리는 성령의 역사가 함께 하는 것이다.
"영은 살리는 것"이라는 말은 신약성경에서 '율법 조문은 죽이는 것이요 영은 살리는 것이니라'는 구절(고린도후서 3:6)에서 유래한 것으로,
성령이 주는 생명과 자유의 은혜를 강조하는 기독교의 가르침입니다. 이는 율법의 행위가 아닌, 믿음을 통해 주시는 성령의 생명력을 의미하며,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죄로부터 해방되고 새로운 생명을 얻는 것을 말합니다.
'율법 조문은 죽이는 것, 영은 살리는 것'의 의미
율법 조문(의문)은 죽이는 것 : 율법을 글자 그대로 지키려고 할 때, 인간은 죄를 깨닫고 정죄받게 되며, 이는 죽음과 같은 결과를 초래합니다.
영은 살리는 것 : 성령은 하나님의 은혜를 통해 우리에게 새로운 생명을 주시는 영입니다. 이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죄의 권세에서 벗어나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새 언약의 일꾼 : '영은 살리는 것'이라는 가르침은 새 언약의 일꾼으로서 율법 조문이 아닌 성령으로 사역해야 함을 강조합니다. 성령은 두려움이 아닌 사랑으로 순종하게 하며, 하나님 앞에서 자유를 누리게 합니다.
결론 : '영은 살리는 것'은 율법의 의무가 아닌,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 믿음을 통해 성령이 주시는 영적 생명을 의미합니다.
반대 개념 : 율법 조문은 겉으로는 지키는 것처럼 보이나, 결국 인간을 죄와 죽음으로 몰아가는 '죽이는 것'입니다.
결과 : 성령으로 말미암아 죄의 정죄로부터 벗어나 자유를 얻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됩니다.
살리는 것(2227) 조오포이에오(zōŏpŏiĕō) ζωοποιέω
Storng number 2227ζ
첫째, 흙을 생령(창세기 2:7)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 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된지라.
* 땅의 흙으로(עָפָר מִן־הָאֲדָמָה - 아파르 민 하아다마)
여기서 '땅'(아다마)은 '붉다'(애 4:7; 나 2:3)란 뜻이 있는 '아담'에서
유래한 단어이다. 이는 기본적으로 땅이 붉음을 우리에게 알려주는 표현이다. 또한 '흙'(아파르)은 '재'(민 19:17),
'진토'(삼상 2:8), '가루'(왕하 23:15)로도 번역되며, 동사로 사용될 때는 '부스러지다'(왕상 20:10)는 뜻도
지닌다. 따라서 사람은 하나님이 주시는 생기가 없다면 흙과 같이 부스러지기 쉬운 보잘것 없는 존재이며 결국은 흙으로 돌아갈
존재이다.
* 사람(הָאָדָם - 하아담)
성경에서 히브리어 '아담'이라는 단어는 약 560회 가량 나온다. 그런데 이 단어는
본절에서와 같이 '사람'(man)을 뜻하기도 하고, 19절 이하에서 계속 반복되는 것과 같이 최초의 사람인 '아담'(Adam)이란
특정한 인물의 이름을 뜻하기도 한다.
이 단어의 어원과 거기 담긴 뜻이 정확히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견해가 있다. 첫째, '아담'이 '땅'을 의미하는 '아다마'에서 유래했다는 주장이다. 이는 하나님이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셨다는 본절의 기록과 일맥 상통하며, 보편적으로 받아들여지는 견해이다.
둘째, '만들다'(make), '짓다'(build)란 뜻을 지닌 앗수르어 '아다무'에서 유래했다는 주장이다. 즉 아담이란 뜻은 사람이 '지음을 받는 존재' 즉 피조물임을 강조하는 이름이라는 견해이다.
셋째, 히브리어 첫번째 알파벳인 '알렙'과 '물' 혹은 세계의 끝을 상징한다고 볼 수
있는 '바다'를 의미하는 히브리어 알파벳 '멤' 그리고 두 글자 사이에 '중심'을 의미하는 히브리어 알파벳 '달렛'을 사용하여,
처음과 끝이 의미하는 모든 피조 세상의 중심에 사람이 위치함을 보여 준다는 견해이다.
넷째, 하나님을 의미하는 '엘로힘'의 히브리어 알파벳 '알렙'과 짐승이란 뜻을 지닌
'베헤마'의 히브리어 알파벳 '멤'사이의 존재가 사람임을 보여 준다는 주장이다. 이는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된 신적 요소를
지닌 반면 육체의 정욕대로 살 때는 짐승과 같은 존재로 타락할 수도 있다는 견해이다.
다섯째, '빛이 나다'라는 의미가 있는 아람어에서 유래하여 사람이 다른 피조물과 구별되는 존귀한 존재임을 나타낸다는 견해이다.
여섯째, '결합시키다'라는 의미가 있는 아람어에서 유래하여 인류의 시조인 아담이 모든 시대와 모든 장소에서 살았던 전 인류를 하나로 결합시키는 자임을 나타낸다는 견해이다.
일곱째, '붉다'라는 말에서 유래하여, 사람의 피부 빛을 반영하고 있다는 견해이다.
이 중에 가장 보편적으로 받아들여지는 견해는 첫 번째 견해라고 할 수 있지만 다른 견해들을 통해서도 우리는 사람이 어떤 존재인지를 다양하게 생각해 볼 수 있다.
창세기 1:26-27절은 사람을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드셨다는 전인격적인 창조에 관한 기술이라면 본문은 특별히 사람의 육신의 창조에 관한 기술이라고 할 수 있다.
* 생기를(נִשְׁמַת חַיִּים - 니쉬마트 하임)
본문의 '생기'는 '숨'(왕상 17:17), '호흡'(신 20:6), '기운'(욥
4:9), '영혼'(잠 20:17) 등으로도 번역되는 '네솨마'의 연계형 '니쉬마트'와 '살다'(23:1), '활발하다'(시
38:19) 등에서 유래해 '생명'(1:30; 신 28:66)으로 번역되는 '하이'의 복수형인 '하임'이 결합된 말이다. 따라서
본문을 직역하면 '생명들의 기운'이며, 곧 생명력이라고 할 수 있다. 다른 동물들과는 달리 사람의 생명은 하나님께서 직접적인
방법으로 부여하신 '생기'로부터 유래되었음을 보여 주는 표현이다.
* 생령(לְנֶפֶשׁ חַיָּה - 레네페쉬 하야)
'숨', '호흡'을 뜻하는 '네페쉬'와 '생존', '존재'를 의미하는 '하야'가
합해서 된 말로 '살아 있는 존재'란 뜻이다. 물론 '네페쉬'가 다른 곳에서 '혼'(Soul) 또는 '영혼'(Spirit)을
가리키는 뜻으로도 쓰였으나 여기서는 '호흡'(breath)이란 뜻으로 사용되었다. 따라서 '생령'이라는 말은 사람이 '영혼'을
지닌 존재임을 직접적으로 증거하는 구절은 아니다. 사람의 영혼은 오히려 1:26의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이란 말에 강력히 암시되어
있다. 그런데 번역 성경에서는 왜 동일한 단어를 일반 짐승을 가리킬 때는 '생물'(RSV, living creature)로,
사람을 가리킬 때는 '생령'(KJV, living soul)으로 번역했을까? 이러한 차이는 히브리어 단어 때문이 아니라 문맥의
차이를 반영하여 번역함으로써 생겨난 것이다. 즉 하나님께서 짐승들은 말씀을 통하여 육체와 생명을 동시에 창조하신 반면 특별히
사람만은 그 육체를 흙으로 지으시고 그 생명은 하나님께서 친히 그 코에 생기를 불어 넣으심으로 있게 하셨다. 이러한 독특한 방법을
사용하여 창조된 사람은 살아 숨쉰다는 점에서 '네페쉬 하야'인 다른 동물들과 차이가 없으나, 하나님의 특별한 애정으로 그
형상에 따라 지음을 받았다는 점에서는 '생령'이라 불릴 수 있는 것이다(1:27).
전도서 3:21 인생의 혼은(루아흐) 위로 올라가고 짐승의 혼은(루아흐) 아래 곧 땅으로 내려가는 줄을 누가 알랴
기자는 사람이 죽음을 맞게 된다는 점에서 짐승과 다를 바가 없다고 말하면서도 여기서는 사후(死後)의 차이점을 언급한다. 즉 대부분의 사람들이 제대로 깨닫지 못하고 있지만, 짐승과는 달리 사람의 영혼은 위로 올라간다는 것이다. 여기서 짐승의 혼이 아래로 내려간다는 것을 끊어져 없어진다는 의미이고 사람의 혼이 위로 올라간다는 것은 사후의 인생의 영혼은 전능하신 하나님의 소관 하에 들어가게 된다는 의미로 이해된다(Eaton). 그리고 혼(루아흐)이라는 말이 본절에서 사람이나 짐승에게 도일하게 적용되었지만, 우리는 이를 사람에게는 '영혼'으로, 그리고 짐승에게는 '호흡'(혹은 의식 기능) 정도로 적용시켜 이해해 볼 수 있겠다.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 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된지라"(창 2:7).
히브리서 9:27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
둘째, 죽음(마태복음 27:50) 예수께서 다시 크게 소리지르시고 영혼이(프뉴마. 4151) 떠나시다.
관련 성경 / 성령(마4:1, 막1:10, 눅2:27),
심령(마5:3, 눅1:17), 귀신(마8:16, 눅4:36, 요16:18), 마음(마26:41, 막8:12), 영혼(마27:50,
눅23:46, 요19:30), 중심(막2:8), 하나님의 말씀(행18: 5), 영(눅24:37,39, 엡1:17),
빛(엡5:9), 한마음(빌1:27), 기운(살후2:8), 바람(히1:7), 생 기(계11:11, 13:15).
율법 조문으로 하지 아니하고 오직 영으로 함이니 율법 조문은 죽이는 것이요 영은 살리는 것이니라(고후 3:6)
옛 언약과 새 언약의 일꾼의 영광 비교(고후 3:6~18).
6절. 그가 또한 우리를 새 언약의 일꾼 되기에 만족하게 하셨으니 율법 조문으로 하지 아니하고 오직 영으로 함이니 율법 조문은 죽이는 것이요 영은 살리는 것이니라.
바울은 자신의 추천서를 언급하면서 하나님께서는 자신들을 옛 상속언약(old Testament)의 일꾼들이 아니라 새 상속언약의 일꾼 되기에 충분한 능력을 주셨음을 말한다. 바울을 대적하는 자들은 율법을 지키므로 말미암아 얻는 옛 상속 언약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얻게 되는 새 상속 언약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바울과 그 일행을 비난하며 대적했다. 그들은 그리스도인들에게 하나님께 의를 얻기 위해서는 모세의 율법을 지켜야 한다고 주장하며 바울이 전하는 새 상속언약을 부인했다. 새 상속언약”은 New testament이다. Testament는 그냥 언약이 아니다.Testament와 Covenant에 해당하는 원어는 동일한“디아테케”인데 Covenant는 주로 하나님과 사람들 사이에, 그리고 사람과 사람 사이에 맺는 특별 약속(계약)을 뜻한다. 반면에 Testament는‘증언하다’와 같은 어원에서 나온 말로 일차적
의미는 ‘증거로 주는 언약’이란 뜻이며 신약성경에만 총 14차례 기록된 독특한 말이다. 그분께서는 새 상속 언약의 중재자이시니 이것은 첫 언약(first covenant) 아래 있던 범죄들을 구속하시려고 죽으심으로써 부르심을 받은 자들이 영원한 상속 유업의 약속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 상속 언약(Testament)이 있는 곳에는 또한 반드시 상속 언약하는 자(Testator)의 죽음이 필이 있어야 하나니 상속 언약은 사람이 죽은 뒤에라야 효력이 있고 상속 언약하는 자가 살아 있는 동안에는 아무 힘이 없느니라”(히9:15-17)이다. 히브리서의 기록자는 예수님의 죽음을 통해 구약시대 성도들의 죄가 구속되고 부르심을 받은 모든 성도들이 영원한 상속의 약속을 받게 되었음을 보여 준다(출34:7). 완전한 희생 제물이신 예수님의 완전하신 단번 속죄로 말미암아 신구약 성도들의 죄 문제가 깨끗이 해결되었고 이때에 그분께서는 우리 모든 믿는 자들에게 영원한 상속의 언약을 주셨으므로 새 상속 언약의 중재자이시다. 여기서 Testament를 상속 언약으로 번역해야 하는 근거를 찾을 수 있으며 히9:16, 17절이 이를 확증해 준다. 성경은 아주 분명하게 상속 언약하는 자의 죽음이 있어야 상속 언약이 유효함을 보여 주므로 새 상속 언약의 중재자 즉 새 상속 언약을 주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이 있기 전까지는 새 상속 언약이 유효하지 않다.
Testament와 Testator는 바로 이런 점을 설명해 주는 단어이다. 그러므로 우리 주 예수님께서는 구약시대에 율법 아래에서 나셔서 율법을 완성하시고 신약시대를 여신 분이다.“그리스도께서는 모든 믿는 자에게 의가되시기 위하여 율법의 끝마침이 되시느니라”(롬10:4; 참조 갈4:4). 따라서 엄밀한 의미에서 예수님이 태어난 순간부터 신약시대가 아니라 십자가 사건 이후부터가 신약시대이다. 개역개정 성경은 Testament를 유언으로 번역하였으나 이것은 결코 유언이 아니다. 유언은“죽음에 이르러 남기는 말”로서 죽을 수밖에 없는 사람에게만 적용되며 또 언약하고 아무 상관이 없다. 우리 주님은 죽음을 통해 새 상속 언약시대 즉 신약시대를 여셨으나 영원히 살아 계신 분이다. 그분은 창세로부터 죽임을 당하신 어린양이며(계13:8) 그래서 아직 피를 흘리지 않으셨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피가 이미 흘려졌다고 말씀 하신다(눅22:20).
“일꾼”은 헬라어로“디아코노스diakonos"로서 심부름 가다에서 유래하였다. 남성을 말하며 종, 협조자, 조수, 동역 자, 집사, 사역자”를 말한다.성경에는 일꾼, 종, 또는 노예라는 단어가 헬라어로 두 단어가 있다‘둘로스’와
‘디아코노스’이다. 이 두 단어는 같은 뜻으로“섬기는 자”라는 뜻이다. 이 두 단어는 결정적인 차이가 있다.‘둘로스’는 강제로 종이 된 사람이고,‘디아코노스’는 종이 되지 않아도 될 사람인데, 자발적으로 스스로 종이 된 사람을 말한다.
본문에서는 주님이 바울을 종으로 삼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섬기는 자 즉 사역자로 삼으셨다. 이것은 율법조문으로
하지 아니하고 오직 영으로 함이니 율법 조문의 직무는 사람을 죽이는 것이요, 영은 직무는 사람을 살리는 것임을 강조
한다.
“율법조문(개역한글성경은 의문)”은 헬라어로“그람마 gramma”를 번역한 것인데 “새기다, 쓰다, 기록하다”을 뜻하는“그라포grapho"에서 유래한 것으로“ 글자, 문자, 문서, 기록한 조각, 편지, 서신, 증서, 글, 패” 등 다양하게 쓰인다. 즉 율법조문(롬2:27, 29, 7:6, 고후3:6, 7)은 , 글자로 된(갈6:11), 성경(딤후3:15)책을 말한다. 바울은 자신을 사람을 죽이는 “율법조문으로 하지 아니하고, 오직 사람을 살리는 영으로 함이니”라고 말했다.
이 말을 새 번역에서는“이 새 언약은 문자로 된 것이 아니라 영으로 된 것”을 말하고, 현대인의 성경에서는“율법의 종이 아니라 성령님의 종이 되게 하였다”고 번역 되었으며, 흠정역에서는“글자의 사역자가 아니라 영의 사역자”라고 번역했다. 즉 바울은 돌판이나 먹으로 쓴 글자로 기록한 옛 상속언약의 일꾼(사역자)이 아니라, 사람의 마음에 영으로 새긴 새 상속언약의 일꾼(사역자)가 되었음을 말한다.
율법 조문의 묵은 것이란 무엇인가?
“율법 조문”또는“율법의 법조문”을 개역한글 성경에는 단순이“의문”이라고 번역되어 있었고 율법
이라는 말씀이 빠져 있었다.그러나 개역개정은“율법 조문”으로 바르게 개정되어 있다.
“의문의 묵은 것으로 아니 할지니라”(롬7:6)(개역 한글 성경)
“의문에 있지 아니한 것이라”(롬2:27, 29)(개역한글 성경)
“의문으로 하지 아니하고 오직 영으로 함이니 의문은 죽이는 것이요 영은 살리는 것임이라”(고후3:6, 7 개역성경) 참조구절(엡2:15, 골2:14, 20)
그러므로 이런 아래와 같은 엉터리 이단 교리가 생겼다.“율법 조문, 은“율법”을 말하는데 윗트니스리는 (본명 이 상수)이를“성경”이라고 해석 하는 이단 교리가 발생한다.
윗트니스리가 주장하는 “그리스도 대(對) 종교”란 무엇인가?
여기서 언급된「의문」이라는 단어가 기록된“성경”임을 알고 있다. 오늘날 우리는 영 안에서 새로운 것으로 살아 계신 주님을 섬기는 것이지 기록된 성경의 낡은 것”을 따르는 것이 아니다. 나는 이것을 담대히 말할 수 있다. 왜냐하면 나는 가장 용감한 사람인 사도 바울을 따르는 작은 자이기 때문이다. 이제 우리는 기록된 법전, 기록된 성경의 낡은 것을 따라 섬기지 않고 영의 새로움을 따라 섬긴다. 왜 그런가? 이는 영 안에는 그리스도가 계시는 반면에 법전(탈무드와 그들이 저술한 종교 법전)에는 종교가 있기 때문이다. 이것이 그리스도 대(對) 종교이다.
종교적인 것이란 무엇인가?
종교적인 것은 건전하고, 성경적이며, 원칙적이지만, 그리스도의 임재가 없는 것이다. 우리에게 그분의 임재가 결여됐다면, 아무리 성경이라 할지라도 종교적일 뿐이다. 로마서의 이 두 구절에서 바울은「그리스도 대 종교」의 견고한 기초를 세웠다. 오늘날 우리의 봉사와 우리의 역사와 심지어 우리의 생명 까지도 모두 영 안에 있어야 하지, 다만 기록된 성경 문자만을 따라서는 안 된다 . 나는 위험을 무릅쓰고 이 말을 한다. 나는 사람들을 성경으로부터 떠나게 하는 이단이라 비난받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다만 성경의 두 구절, 즉 로마서 2장 29절과로마서 7장 6절을 언급한 것이다.
모든 사람이 이 구절「의문」이 기록된 성경을 가리킨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더 이상 논쟁은 있을 수 없다. 그리스도는 종교와 반대된다. 그리스도는 기록된 법전과 반대되신다. 우리는 고대의 바리새인이나 서기관과 마찬가지로 기록된 법전을 옳게 인용하면서도 그리스도를 놓칠 수 있다.우리는 기록된 법전만 너무 주의하지 않도록 깨어 있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그리스도를 놓칠 가능성이 아주 많다. 안전한 길은 오직 「수건을 벗은 얼굴로 주님의 영광을 보는」것이다.
‘영’은 ‘생명’을 줍니다(the Spirit gives life) 영은 생명의 법이 있습니다. 영안에는 하나님 나라가 있고 또한 그 나라의 법이 있습니다.
‘죄’의 삯은 ‘사망’입니다. 죄는 사망의 법이 있습니다. 죄 안에는 육신의 나라가 있고 또한 그 나라의 법이 있습니다.
생명의 성령의 법과 죄와 사망의 법에서 생명과 사망이 대조를 이루고 (성)영과 죄가 대조를 이룹니다.
‘법’의
헬라어 원어는 노모스인데, 이 단어의 가장 근원적 의미는 어떤 ‘형체를 갖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전적 정의에는 anything
established, any system of religious thinking…이란 의미도 들어있습니다. 영어 단어
economy의 -nomy가 이 노모스에서 왔습니다.
관련 성경 / 율법(마 5:18, 눅 2:23, 롬 2:14), 법(눅 2:22, 요 18:31, 행 18:15).
고후
3:6은 ‘율법 조문(the letter)은 죽이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율법 조문은 하나님의 마음을 글자로 캡쳐한 것이기에,
글자란 형체를 갖기에 ‘노모스’란 관점에서 볼 수 있습니다. 성경은 이런 관점에서 하나님의 영을 캡쳐하여 담고 있는 육신도 형체를 갖고 있기 때문에 율법과 육신을 동등한 레벨로 많이 표현합니다.
또한 육신은 본질로서의 죄(SIN)가 거하는 장소로도 여겨집니다. 어떤 것이든 형체를 갖고 그 안에 갇히면 생명력을 잃기 마련입니다. 반면 영은 형체가 없기 때문에 언제나 자유로우며 생명력이 있습니다.
영은 살리는 것이지만, 율법과 육신은 모두 죽이는 것입니다. 생명의 ‘영’의 법은 생명을 주며, 모든 것을 살리며, 회복시켜 하나님의 온전한 자리에 이르게 하는 방향성을 지닌 법입니다.
의문은 죽이는 것이요 영은 살리는 것임이니라
고린도후서 3:6-11 저가
또 우리로 새 언약의 일군 되기에 만족케 하셨으니 의문으로 하지 아니하고 오직 영으로 함이니 의문은 죽이는 것이요 영은 살리는
것임이니라 돌에 써서 새긴 죽게 하는 의문의 직분도 영광이 있어 이스라엘 자손들이 모세의 얼굴의 없어질 영광을 인하여 그 얼굴을
주목하지 못하였거든 하물며 영의 직분이 더욱 영광이 있지 아니하겠느냐 정죄의 직분도 영광이 있은즉 의의 직분은 영광이 더욱
넘치리라 영광되었던 것이 더 큰 영광을 인하여 이에 영광될 것이 없으나 없어질 것도 영광으로 말미암았은즉 길이 있을 것은 더욱
영광 가운데 있느니라.
일군
천국을 주신 것은 분명히 선물입니다. 그 선물에 대해서는 어떤 것에 토를 달아서는 안 됩니다. 만약에 이 선물에 어떤 대가나 일을 해야 한다고 하면 그것은 이미 선물이 아닙니다. 선물이라는 것은 값을 주지 않고 상대로부터 받는 것을 선물이라고 합니다.
이 선물을 이용해서는 안 됩니다.
그러나 한 가지 우리가 생각해야 하는 것이 있습니다. 분명히 우리는 아무 것도 안 해도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그것으로 천국에 갈 수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우리 각 사람들에게 이 세상에서 살아 있는 동안에 은사를 주시고 그 은사에 따라 일을 하게 하셨습니다. 물론 이 일을 안 한다고 해서 구원이 취소가 된다고 말해서는 절대로 안 됩니다
그러나 이기적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구원은 하나님의 너무도 큰 선물입니다 그 선물은 나만 가지고 있다고 한다면 그는 너무 이기적인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더구나 그 선물을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 모든 사람들에게 주시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선물을 먼저 받은 자는 반드시 그 선물에 대해서 모르고 있는 이 세상 사람들에게 선물이 있다는 것을 가르쳐 주어야 합니다.
반드시는 아닙니다.
그러나 자기가 할 수 있다면 그렇게 하는 것이 도리라고 믿고 있습니다. 그것이 억지가 되고 어떤 정해진 법에 의해서 된다면 문제가 되겠지만 하나님의 뜻을 조금이라도 알고 있는 사람이라면 그 선물을 받은 내가 어떻게 해야 하는 가를 그 마음에서 자원할 것이라고 믿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언약을 했습니다.
출애굽기 19:6 “너희가 내게 대하여 제사장 나라가 되며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 너는 이 말을 이스라엘 자손에게 고할지니라”
하나님과 언약을 하고 제사장 나라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언약의 내용에 대해서 자기들이 다 지키겠다고 하나님과 피로서 언약을 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과 언약을 했지만 그 언약을 전혀 지키지를 못 했습니다. 자기들이 해야 하는 일 중에 가장 중요한 일을 모르고 하지 마라야 하는 것에 대해서만 열심을 냈습니다.
제사장 나라가 되었어야 합니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려고 하다가 결국 망하는 길로 가고 말았습니다. 자기들이 맡은 직분이 무엇인가를 모르고 살았습니다. 이스라엘이
망한 결정적인 이유가 바로 제사장 나라가 되지 못한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제사장 나라가 되어 하나님의 복음을 전해야 했지만
그들은 제사장 나라가 되기보다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기 위해서 의문의 직분을 행하는데 열심을 내다가 결국 망하고 말았습니다.
제사장을 모릅니다.
아니 이 시대도 제사장이라는 직분을 너무 모르고 있습니다. 분명히 너희는 왕 같은 제사장이라고 성경이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이 세상에 사는 성도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직분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제사장 나라가 되라고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직분을 주셨지만
제사장 나라가 되기보다는 자기들이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것을 나타내기 위해서 의문에 열심을 가졌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자기 직분을 모르면 안 됩니다
이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성도도 역시 자기 직분이 무엇인가를 모르고 살아가고 있다면 그는 복음을 모르는 자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성도의 가장 기본적인 직분은 제사장입니다 이것은 목사에게만 해당이 되는 것이 아니라 교회 안에 있는 모든 성도에게 해당이
되는 직분이라는 것을 기억하고 살아가야 합니다.
이스라엘은 그것을 몰랐습니다.
그러다보니까 자기 백성만 사람이고 이방은 개로 취급을 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으로 의문의 율법을 지키는 자기들만이 이성이 있는 사람으로 생각을 하고 이방인은 사람으로 취급을 하지 않았습니다. 지금도 이스라엘에게는 역시 그런 사상이 뿌리 깊게 자리하고 있다는 것을 우리가 알아야 합니다.
은혜를 주셨습니다.
그리고 직분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선물을 주시고 난 후에 우리에게 일을 좀 해달라고 부탁을 하시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비유로 말씀을 거의 모든 비유가 바로 복음의 은혜를 입은 성도들이 이 세상에서 어떻게 일을 해야 하는 가를 말씀을 해 주고 있습니다. 그것은 선물의 값이 아니라 선물의 은혜가 너무 커서 자원하는 마음으로 그 일을 하게 하시고 있습니다.
왜 일군을 만드십니까?
그
이유는 전도의 미련한 것을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파하기를 원하시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냥 하나님께서 천사를 보내서 그를
구원하시는 것이 아니라 은혜를 입은 성도를 통해서 그들이 전도를 해서 또 다른 영혼들을 구원하시고자 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누가 합니까?
천사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천사는 전도를 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에 있는 성도를 통해서 전도를 할 수 있게 은사를 주시고 또 성령을 보내 주셔서 전도를 하게하고 있습니다. 이 복음을 전할 수 있는 유일한 존재가 바로 사람이라는 것을 우리가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할 수 없습니다.
왜 사람이 죽습니다.
죄가 있는 사람이 하나님을 대면을 하면 죽게 되어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반드시 이 일을 사람이 해야 합니다 그래서 처음에는 이스라엘을 하나님께서 일꾼으로 삼으셨지만 그들이 일을 잘 하지 못해서 버림을 당하고 말았습니다.
제사장의 직무를 모르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이 세상에서 하는 그런 일을 말씀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제사장이라는 직무를 모르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오히려 정죄의 일꾼으로 일을 했지 제사장으로서는 일을 하지 못 했습니다. 의문에 쓴 율법을 가지고 일을 했기 때문에 그 의문에 쓴 율법으로 자기들이 망하는 일을 하고 말았습니다.
선물을 주셨습니다.
그리고 강요가 아니라 우리에게 부탁을 하셨습니다. 이스라엘은 언약을 피로 맺어서 그 일을 해야 했지만 우리에게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은혜를 먼저 거저 주시고 난 후에 이 세상에 구원할 자들을 위해서 우리에게 제사장의 직무를 행하라고 부탁을 하셨습니다.
고린도후서 5:19 이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 계시사 세상을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며 저희의 죄를 저희에게 돌리지 아니하시고 화목하게 하는 말씀을 우리에게 부탁하셨느니라.
오해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어떻게 부탁을 받았는가를 바로 알아야 합니다. 선물에 어떤 조건이 있는 것으로 오해를 해서는 절대로 안 됩니다 이 부탁에 대해서까지 거절을 한다면 그 사람은 복음이 없는 사람이라고 해도 틀린 말이 아닙니다. 아니 복음을 모르기 때문에 복음을 이용하려고 하는 사람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우리 인생은 일만달란트를 빚진 자입니다
그 일만 달란트는 예를 들어서 비유로 한 말씀이지만 사실 우리 생명은 일만 달란트보다 더 값이 나간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이 일만 달란트는 지금 돈으로 환산을 해도 20조가 넘는 금액입니다 천국은 설령 20조가 있다 해도 우리가 살 수 있는 그런 곳이 아니라는 것을 먼저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사람의 도리로 생각해 보겠습니다.
내가 10억의 빚이 있는데 누군가 그것을 거저 다 갚아 주었습니다. 그런데 그 돈을 내가 좀 바쁘니까 은행에 직접 가지고 가서 갚으라고 했다 해 보시기 바랍니다. 아마도 빚을 진 사람은 그 부탁을 안 들어 줄 수 없을 것입니다 만약 그 부탁을 했다고 해서 빚 갚아 주면서 나를 심부름 시킨다고 한다면 그는 사람의 도리도 모르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진 빚 일만 달란트의 빚을 갚아 주었습니다. 아니 그것으로도 살 수 없는 우리 생명의 빚을 갚아 주었습니다. 그리고 내가 부탁 좀 하겠다고 지금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저기 다른 사람이 또 빚이 있는데 그 사람의 빚도 좀 대신 가서 갚아 주라고 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것을 싫다고 한다면 그는 정말로 은혜를 모르는 어리석은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것을 부탁하는 것입니다
내 빚은 선물로 거저 갚아 주었는데 저기 가면 아직 빚을 지고 있는 사람이 있는데 그 사람의 빚도 내 대신 해서 갚아 주라고 부탁을 한 것입니다 사실 이것은 부탁이라고도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 마음이 상할까봐 부탁을 하신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부탁을 한 성도를 일꾼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여러분이라면 어떻겠습니까?
물론 하나님께서는 그 부탁을 안 들어 준다 해서 그가 빚을 진 일만 달란트를 안 갚아 주시는 분은 아닙니다. 그러나 자기가 진 빚을 알고 있고 그것이 얼마나 크다는 것을 아는 성도라면 그 정도의 부탁은 누구나 들어 줄 것이라고 저는 믿고 있습니다.
그런데 복음을 전하면 안 합니다.
율법주의는 사람을 죽이는 일인데도 하나님과 언약을 생각하면서 그 일에 아주 열심을 내고 있는데 이상하게도 복음주의에 있는 사람들은 그 작은 부탁도 들어주려고 하지를 않고 있습니다. 그리고 자기 육체의 것을 조금이라도 헌신을 하는 일에 대해서는 더욱 반감을 가지고 마치 하나님께서 빼앗는 것 같이 생각을 하면서 언제는 선물이라고 했다가 이제 와서는 달라고 하느냐고 합니다.
정말 부탁입니다
자기가 받은 은혜를 바로 아시기 바랍니다. 초대 교회의 성도들은 자기 생명까지 아까워하지 않고 그 부탁을 들어 주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이 시대 복음을 전하면 아무 것도 안 하려고 하는 것을 보면서 너무도 안타까운 마음을 가질 수밖에 없습니다. 내가 받은 선물을 안다면 내 생명까지도 아까워하지 않아야 한다고 저는 믿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옛 언약을 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새 언약을 주셨습니다. 그리고 그 새 언약에 대해서 일꾼이 되어 달라고 부탁을 하시고 있습니다. 우리로 하여금 새 언약의 일꾼이 되는 자격을 주셨습니다. 그 새 언약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일방적으로 십자가를 지시고 우리 죄를 사해 주신 언약의 피 입니다. 그 언약에 대해서 일꾼이 되게 하셨습니다.
“저가 또 우리로 새 언약의 일군 되기에 만족케 하셨으니 의문으로 하지 아니하고 오직 영으로 함이니 의문은 죽이는 것이요 영은 살리는 것임이니라”
이스라엘은 옛 언약의 일꾼입니다
그러나 그 언약은 우리를 온전케 할 수 없다고 성경이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를 온전케 할 수 없는 옛 언약을 폐하시고 이제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온전케 할 수 있는 새 언약을 세우시고 우리에게 그 새 연약의 일꾼이 되는 직책을 주셨습니다.
일꾼이 되어야 합니다.
사람의 도리로 생각을 해도 당연히 해야 하는 일입니다. 이 일을 거절을 한다는 것은 도리를 모르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과 맺은 옛 언약의 일꾼이 아니라 이제 우리 성도는 새 언약의 일꾼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 일꾼은 의문으로 하지 않고 영으로 하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의문이 무엇입니까?
율법입니다 글로 써서 기록해 놓은 것을 의문이라고 합니다. 모든 율법은 돌에 쓰여 있든지 아니면 글로 써서 사람들이 그것을 보고 지키게 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이 의문의 일꾼으로 일을 했지만 이제 우리 영적인 이스라엘인 성도는 의문으로 하지 않고 영으로 하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왜 의문으로 하면 안 됩니까?
의문은 죽이는 것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참 율법에 대해서 늘 강조를 하지만 성경이 이렇게 까지 정확하게 말씀을 하고 있는데 이 시대도 역시 새 언약의 일꾼이 되기보다는 의문의 일꾼으로 일하고 있는 사람들이 너무도 많이 있습니다.
죽이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지키고 있는 율법은 죽이는 것입니다. 율법으로 의롭게 성도로서 이 세상에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율법의 기능은 살리고 죽이는 것인데 율법으로는 아직 이 세상에서 산 사람이 없기 때문에 의문은 죽이는 것이라고 정의를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죽이는 것을 이 시대 너무도 많이 지키고 있습니다.
이 시대 일꾼이 무엇으로 하고 있습니까?
영으로 하는 일꾼은 거의 없고 다 의문으로 하나님의 일을 하려고 하고 있습니다. 자기들을 죽이고 있는 의문으로 일을 하려고 하는 사람들이 너무 많이 있습니다. 아니 이 시대 의문으로 일하지 않는 교회가 있으면 한번 가르쳐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의문으로 일하지 않는 교회가 거의 없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혹시 제가 모르는 교회가 아니 아직 만나지 못한 교회가 있을지 몰라도 제가 지금까지 알고 있는 교회는 다 의문으로 하고 있습니다.
완전한 율법주의는 거의 없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라도 의문을 하고 있다면 그는 의문으로 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율법이라는 것은 유기체라서 어느 것이라도 단 한 가지를 살리는 순간에 모두가 다 살아나서 그 기능도 함께 살아난다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그 기능이 살아나는 순간에 율법은 죽이는 것으로 변하고 마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떻습니까?
이 시대 의문으로 하지 않는 교회가 있습니까? 영과 의문이 섞여 있다고 보면 맞습니다. 그것을 영적으로 간음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 시대 교회는 의문과 영이 아주 적절하게 섞여 있습니다. 그것은 의문으로 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의문은 하나라도 내가 하고 있다면 반드시 죽이는 것이 된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다 일꾼이 아닙니다.
교회 안에는 죽이는 일꾼이 있습니다. 자기에게서 한 가지라도 의문이 남아 있다면 반드시 그 의문은 죽이려 할 것입니다. 에덴에서 하와가 단 한 가지 선악과를 따 먹은 것으로 죽게 되었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많은 것을 범해서 죽는 것이 아니라 단 한가지의 의문이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을 죽게 하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의문으로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아니 반드시 의문은 버려야 합니다. 내게서 한 가지라도 의문이 남아 있다면 나는 반드시 죽습니다. 아니 내가 하고 있는 복음의 일이 사람을 살리는 일이 아니라 죽이는 일이 되고 있다는 것을 사도 바울이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시대는 불행하게도 사람을 죽이는 의문으로 하나님의 일을 하려고 하고 있습니다.
로마서7:10절을 보면
“생명에 이르게 할 그 계명이 내게 대하여 도리어 사망에 이르게 하는 것이 되었도다”
잊지 말아야 하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을 잊어버리는 순간 율법주의에 빠져서 의문의 일꾼이 되어서 결국 죽이는 일을 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이 시대 교회 안에 얼마나 많은 의문이 남아 있습니까? 그리고 그 의문을 지키게 하려고 얼마나 강조를 하고 있습니까?
생명을 살립니까?
절대 아닙니다. 의문으로 하는 순간 그는 반드시 죽습니다. 성경이 분명히 가르쳐 주고 있지만 이 시대는 너무도 쉽게 율법을 지키고 있습니다. 성경에 기록이 되어 있다고 해서 그것이 다 가하다고 생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의문으로 하는 사람은 반드시 그 의문으로 인하여 자기도 죽고 또 다른 사람의 영혼까지 죽이게 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요한복음6:63절을 보면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이 영이요 생명이라”
살리는 것은 영입니다
의문은 육에 속한 것입니다 육은 무익하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내 영혼이 살려고 한다면 반드시 영으로 해야 합니다. 이 영은 바로 성경에서 성령의 감동을 받아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입니다 의문은 내가 교회 안에서 어떤 행위를 하는 것이고 영은 성경에서 성령의 감동을 받아 예수 그리스도를 마음으로 믿게 하는 것입니다
자기 직무를 잘 아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새 언약의 일꾼이라는 것을 잘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새 언약의 일꾼은 의문으로 쓴 것을 행위로 하는 것이 아니라 성경에서 성령의 감동을 받아 내 안에 새 생명을 탄생을 시키는 것입니다. 또 다른 사람에게도 그와 같이 해서 그 영혼이 구원을 받을 수 있게 살려 주는 일이라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외식입니다
이 시대 교회 안에서 외식이 넘쳐 나고 있습니다. 그것이 의문이라는 것을 모르고 있습니다. 육으로 하는 외식을 보고 그것이 영의 일이라고 이상한 주장을 하고 있는 것이 이 시대 교회의 실정입니다. 영은 말씀 그대로 영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성도는 영으로 합니다.
반드시 영으로 해야 그 영혼을 살릴 수 있습니다. 그것은
어떤 외적인 행위로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성경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의 은혜를 알아가는 것이 영으로 하는 것입니다. 그 영의
일꾼이 되어야 다른 영혼을 살릴 수 있는데 이 시대는 거의 다 의문의 일꾼이 되어서 오히려 교회 안에 들어와 있는 사람들을 배나
지옥 자식이 되게 만들고 있습니다.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모든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 기록한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지금 우리에게 보이는 것이 아니라 하늘 보좌 우편에 앉아 계십니다. 그것은
영의 일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구속을 이루신 그 일이 영의 일이라는 말씀입니다. 그 영의 일을 성경을 통해서 성령의
감동을 받아 다른 사람에게 전하는 것이 바로 영의 일이고 또한 영의 직분으로 일하고 있는 성도라는 말씀입니다.
성도의 직분이 얼마나 영광스러운가를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부탁을 하신 그 일이 얼마나 영광스러운 일인가를 아는 성도는 그 일에 자기 생명까지 아까워하지 않을 수 있다고 저는 믿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영의 직분을 너무 쉽게 생각을 하고 있고 이 영의 비밀을 알고 있으면서도 이 직무를 소홀히 하려고 하고 있습니다.
율법주의자들을 보시기 바랍니다.
죽이는 직분을 가지고 있는 그들도 그렇게 열심을 내고 있는데 살리는 직분을 가지고 있는 성도가 나태하게 있다면 그것은 자기 직무가 어떤 가를 모르는 어리석은 사람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정말 이 시대 복음을 가진 자들이 얼마나 적습니까? 적기 때문에 우리는 더욱 이 복음의 직무를 행할 때 최선을 다 해야 합니다.
반대입니다
죽이는 직분을 가지 자들이 더 열심을 내고 있습니다. 살리는 영의 직분을 가지고 있는 자들은 자기가 어떤 직무를 가지고 있는지 잘 모르는 것 같아 안타깝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직무는 감히 누구도 할 수 없는 그것을 주었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생명입니다
그 생명을 살리는 일꾼이 얼마나 대단합니까? 이 세상에서 육체의 생명을 살리는 의사도 자부심이 대단한데 하물며 영의 생명을 살리는 성도의 직무는 어떻겠습니까? 의사는 결국 사람을 죽게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영원히 살게 하는 생명의 일꾼으로 일을 하고 있습니다. 이 세상의 어느 일도 이 일과 비교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기 바랍니다. 물론 우리가 육신을 가지고 있고 매여 있다고는 하지만 초대 교회의 성도들을 생각하시고 또 내가 받은 은혜를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돌에 써서 새긴 죽게 하는 의문의 직분도 영광이 있어 이스라엘 자손들이 모세의 얼굴의 없어질 영광을 인하여 그 얼굴을 주목하지 못하였거든”
의문의 직분입니다
그 직분도 영광이 있어서 이스라엘 자손들이 모세의 얼굴을 주목하지 못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잠시 후에는 없어질 그 영광으로 인하여 이스라엘에 모세의 얼굴을 주목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이 직분은 살리는 것이 아니라 죽이는 것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첫 언약은 죽이는 것입니다
그러나 아직 교회 안에는 이 옛 언약에 매여 있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이 직무를 행하고 있는 사람들이 너무 많이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자기들은 율법을 폐했다고 주장을 하고 있습니다. 율법을 폐하려면 모두를 폐해야지 자기들이 편한 것만 폐해서는 안 됩니다 그것은 폐한 것이 아니라 아직 살아 있는 것입니다
문어가 있습니다.
그 다리를 하나 잘랐다고 죽습니까? 아니 낙지를 보시기 바랍니다. 아주 토막을 내서 다 잘라 버려도 꿈틀 거리고 있는 것을 보았을 것입니다 의문은 어느 한 가지를 잘라 낸다고 해서 그것이 죽는 것이 아니라 살아 있어 나중에는 죽이는 것으로 다가온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의문 영광이 있습니다.
지금도 교회 안에서 율법을 잘 지키는 사람들을 보시기 바랍니다. 율법에 의해서 예배를 드려 보시기 바랍니다. 아마 그 안에서 예배에 참석을 한 그 자체만으로도 영광이 있는 것을 느낄 것입니다 율법으로 드려지고 있는 그 예배를 보시기 바랍니다. 얼마나 영광이 있는지 그 예배를 드리고 나오는 사람들의 표정에 기쁨이 가득합니다. 그리고 자기가 마치 천국에 들어가는 것 같이 그 영광에 흠뻑 빠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죽이는 것입니다.
없어지는 것이라고 분명히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우리 눈으로 보는 영광은 잠시 후에는 사라지고 마는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까 사람들이 그 영광의 빛에 취해서 비틀거리고 있습니다. 그런데 영의 일은 어떻습니까? 우리 눈으로 영광이 전혀 보이지를 않고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까 영의 직분이 얼마나 귀한가를 모르고 있습니다.
“하물며 영의 직분이 더욱 영광이 있지 아니하겠느냐”
안 보입니다
율법에 의해서 드려지는 예배는 그 영광이 너무 아름답게 보이니까 사람들이 쉽게 받아들이고 그 영광에 빠져 들어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영의 일은 영광이 전혀 보이지를 않고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까 영의 직분에 대해서 회의를 느끼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리고 또한 자꾸 의문의 직분으로 가려고 하고 있습니다. 어쩌면 인생들에게 있어 너무도 당연한 일입니다
그것을 사도 바울이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영의 직분은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생명을 살리고 있지 않으냐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죽이는 보이는 그 직분도 영광이 넘치는데 하물며 생명을 살리는 영의 직분이 얼마나 영광이 넘치겠느냐고 묻고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이것이 눈에 보이지가 않으니까 자꾸 의문의 직분을 더 좋아하고 그것을 하고 싶어 합니다.
왜 이 말씀을 하고 있습니까?
저 역시도 마찬가지입니다. 제 육체의 정과 욕심이 자꾸 의문의 영광을 보고 있습니다. 솔직히 저도 그것에 대해서 어쩌면 너무도 바라고 있다 해도 틀리지 않을 것입니다 그것을 인생의 의지로 끊을 수 있는 사람이 없다고 저는 믿고 있습니다.
초대 교회도 마차가지입니다
사람들이 자꾸 율법의 영광을 보고 그곳으로 다시 가려고 하고 있습니다. 그것을 알고 있는 사도 바울이 영의 직분과 육의 직분이 어떤 가를 비교해서 설명을 하고 있습니다. 비록 우리가 영의 직분으로 일을 하고 있지만 의문의 직분에 비해서 아무 것도 보여줄 것이 없지만 우리는 살리는 일을 하고 있고 의문의 일을 하는 사람들은 죽이는 일을 하고 있다고 하면서 위로를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너희가 하는 영의 직무가 이만큼 대단한 일이라는 자부심을 주고 있습니다.
사실 답답합니다.
아니 솔직히 말해서 때로는 회의적이기도 합니다. 그것은 지극히 인간적입니다 저 역시도 그럴 진데 하물며 일반 성도들이야 말로 표현할 수 없을 만큼 힘이 든다는 것을 너무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살리는 직분이라는 것을 늘 기억하고 있어야 하고 또 이 일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맡겨 주신 영광의 직분이라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정죄의 직분도 영광이 있은즉 의의 직분은 영광이 더욱 넘치리라”
죽이는 것도 영광이 있습니다.
아니 이 영광은 실제 우리 눈에 보이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지금은 보지 못하고 있지만 의의 직분은 영광이 더욱 넘치리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사실 율법을 폐하고 복음을 전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를 우리가 그 일을 해 본 사람만이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힘을 내시기 바랍니다.
정죄의 직분은 곧 사라지고 맙니다. 그것은 반드시 사라지고 죽이는 직분으로 변하고 만다는 것을 우리가 알아야 합니다. 비록 지금 우리 눈에는 그것이 너무 좋게 보일지라도 의문으로 일을 하는 사람은 반드시 죽고 또 의문을 따라하는 사람도 죽는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사도 바울이 의의 직분으로 일하고 있는 성도들에게 용기를 주고 있는 말씀입니다
우리의 영광은 땅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 세상에 있는 영광은 비교할 수 없습니다. 그것을 우리가 믿어야 합니다. 그런 믿음이 있는 성도만이 이 의의 직분을 담대하게 행할 수 있습니다. 사람이 의문을 버린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를 제가 너무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늘의 영광을 바라보고 있는 성도는 당연히 그것을 버려야 합니다.
하늘의 영광이 있습니다.
이 땅에 영광을 바라는 사람은 결국 이 땅이 망할 때 같이 망하게 된다는 것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성도는 이 세상의 영광을 위해서 일하는 것이 아니라 하늘의 영광을 바라고 일을 하고 있습니다. 비록 지금은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하늘에 영광이 있다는 것을 그 영광이 얼마나 찬란할 것인가를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실망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또 낙심하지도 마시기 바랍니다. 우리 믿음이 있는 성도는 이 세상에는 너무도 외롭고 때로는 버림을 받은 자 같이 보입니다. 그러나 영의 일은 예수님의 말씀과 같이 바람과 같아서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이 세상 사람들은 전혀 깨닫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의문에 영광을 바라보고 있는 사람들이 그것을 어떻게 깨달을 수 있겠습니까?
자부심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나에게 은혜를 주시고 나를 선택하셔서 이 직분을 주셨습니다. 더구나 생명을 살리는 그 귀한 일의 직분을 나에게 주셨습니다. 사람을 죽이는 직분을 맡은 자들도 자부심을 가지고 얼마나 대단하게 생각을 하고 있는데 우리는 말할 필요도 없습니다. 정말 천국을 바라보고 있고 하늘의 영광을 바라보고 있는 성도는 이 세상에서 비천에 처할지라도 주님께서 영광중에 영접해 주실 것을 믿고 우리에게 주신 직분을 묵묵히 잘 감당을 할 수 있다고 저는 믿고 있습니다.
“영광되었던 것이 더 큰 영광을 인하여 이에 영광될 것이 없으나 없어질 것도 영광으로 말미암았은즉 길이 있을 것은 더욱 영광 가운데 있느니라”
의문의 영광 대단합니다.
그리고 이 시대 사람들에 눈에 그렇게 비춰지고 있습니다. 솔직히 우리도 그 영광을 보고 있습니다. 그렇게 영광이 나타나기 때문에 사람들이 다 의문의 일꾼이 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인생들의 눈에는 그리고 인생의 이성적 지식으로는 그것이 너무도 대단한 영광으로 보여지는 것은 너무도 당연합니다.
지금 교회를 보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그 안에서 드려지고 있는 예배를 보시기 바랍니다. 누가 그것을 보고 거짓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그것은 의문의 일이라는 것을 아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의문의 영광이고 그 영광은 반드시 죽게 된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다 그 영광에 넘어가고 있습니다.
사실 누가 보아도 그 영광은 하나님께서 나타내시고 있는 것과 같이 보입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분명히 의문의 직분은 죽이는 일이라고 말씀을 학 있습니다. 그것이 영의 일이다 보니까 사람들이 깨닫지를 못하고 있을 뿐이지 반드시 사라지고 그 직분을 하고 있는 사람들은 죽게 된다는 것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힘을 내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용기를 가지시기 바랍니다. 성도는 새 언약의 일꾼입니다 천하 보다 더 귀한 영혼을 살리는 일꾼이라는 것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영혼을 살리는 일을 생각한다면 우리가 이 세상에서는 영광이 전혀 나타나지 않을지라도 이 일에 더욱 힘써 행해야 한다고 믿고 있습니다.
상이 큽니다.
천국은
우리가 상상할 수도 없는 그런 상이 예비 되어 있고 또 우리에게 선물로 주시는 상입니다 영의 일이라 때로는 이 세상에서 아무
빛도 없이 또 비웃음을 사기도 하지만 그래도 천국에서 주님으로부터 받을 영광을 생각하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직분이 얼마나
귀하다는 것을 깨닫게 되고 은혜에 감사해서 더욱 힘써 행할 수 있습니다.
우리 영광은 없어질 것이 아닙니다.
영원히 천국에서 길이 빛이 날 영광이라는 것을 잊지 마시고 성도가 이 세상에서 어떻게 행해야 하는 가를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굳이 말씀을 안 드려도 지식이 있는 성도라면 영혼을 구원하는 일에 어떻게 해야 하는 가를 알 수 있습니다. 더욱 성숙한 성도가 되어서 예수 그리스도의 날에 영광이 빛이 나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부탁드립니다.
육이 아무런 유익이 없다고 선언하십니다. '육'은 단순히 우리의 몸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영적인 것과 대치되는 인간의 본성, 즉 죄된 성향과 그로부터 나오는 모든 행위를 포함합니다. 인간의 노력이나 육체적인 행위로는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없음을 명확히 하십니다. 로마서 7:18 내 속 곧 내 육신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을 아노니 원함은 내게 있으나 선을 행하는 것은 없노라. 사도 바울은 자기 속에, 즉 육신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함을 고백합니다. 육신은 죄의 지배 아래 있기 때문에 스스로 의를 행할 수 없습니다. 갈라디아서 5:17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리고 성령의 소욕은 육체를 거스리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의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르고, 성령은 육체를 거스르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한다고 말씀합니다. 육적인 욕망은 영적인 삶을 방해하며, 궁극적으로는 생명에 이르지 못하게 합니다.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은 영이요 생명이라
구절의 핵심은 예수님의 말씀이 바로 그 생명을 주는 '영'이라는 사실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단순한 지식이 아니라, 그 자체로 하나님의 능력이자 생명력을 지닌 '영적인 진리'입니다. 이 말씀을 믿고 순종할 때 우리는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됩니다. 시편 119:105 주의 말씀은 내 발에 등이요 내 길에 빛이니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의 삶을 인도하고 밝히는 역할을 합니다.
히브리서 4:12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활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판단합니다. 말씀은 우리의 가장 깊은 곳까지 꿰뚫어 변화시키는 능력이 있습니다.
요한복음 1:1-4 태초에 말씀이 계셨고, 그 말씀이 곧 하나님이시며, 그 안에 생명이 있었다고 선포합니다.
예수님 자신이 바로 그 말씀이시며 생명의 근원이십니다.
마태복음 4:4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육체적인 양식으로는 영혼을 살릴 수 없으며, 오직 하나님의 말씀만이 영혼을 살찌웁니다.
결론 : 생명을 주는 영과 말씀
요한복음 6장 63절은 우리에게 진정한 생명이 어디에서 오는지를 명확히 알려줍니다. 그것은 덧없는 육적인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영이며, 그 영은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통해 우리에게 주어집니다. 우리는 육체의 욕망을 따르지 않고,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받으며 예수님의 생명의 말씀을 붙들 때 비로소 참된 영적 생명을 누릴 수 있습니다. 오늘도 이 말씀을 통해 영적 양식을 공급받고, 생명력 넘치는 삶을 살아가시기를 축복합니다.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이 영이요 생명이라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 하셨다. 그러면 살리는 것은 영은 무엇이며 육은 무익한 것은 무엇인가?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이 영이요 생명이라 하셨다. 그러면 주님께서 우리에게 이른 말이 영이라는 말씀은 무엇이며 생명이라는 말씀은 무엇인가?
1.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
갈라디아서 3:2 내가 너희에게 다만 이것을 알려 하노니 너희가 성령을 받은 것은 율법의 행위로냐 듣고 믿음으로냐.
너희가 성령을 받은 것은 율법의 행위로냐 듣고 믿음으로냐 하셨다. 우리가 성령을 받는 것은 율법의 행위가 아니라 믿음이라는 말씀이다.
갈라디아서 3:5 너희에게 성령을 주시고 너희 가운데서 능력을 행하시는 이의 일이 율법의 행위에서냐 듣고 믿음에서냐.
우리에게 성령을 주시고 우리 가운데서 능력을 행하시는 이의 일이 율법의 행위에서가 아니라 믿음에서라는 말씀이다. 그러면 우리에게 성령을 주시고 우리 가운데서 능력을 행하시는 이의 일이 무엇인가?
우리에게 성령을 주시고
첫째, 그리스도의 구속
에베소서 1:7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피로 말미암아 구속 곧 죄 사함을 받았으니.
우리의 허물과 죄로 죽었던 우리가(엡 2:1) 하나님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말미암아 구속 곧 죄 사함을 받았다.
둘째, 약속의 성령으로 인치심
에베소서 1:13 그 안에서 너희도 진리의 말씀 곧 너희의 구원의 복음을 듣고 그 안에서 또한 믿어 약속의 성령으로 인치심을 받았으니.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구속 곧 죄 사함을 받은 우리가 그 안에서 진리의 말씀 곧 구원의 복음을 듣고 그 안에서 또한 믿어 약속의 성령(보혜사: 요 14:16-17, 요 14:26, 요 15:26)으로 인치심을 받았다.
이것이 믿는 우리에게 성령을 주시는 것이다.
우리 가운데서 능력을 행하시는 이의 일
누가복음 4:18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눈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케 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에게 주의 성령이 임하셔서(약속의 성령으로 인치심) 기름을 부으시고(제사장 직책과 선지자 직책과 왕 직책을 세우시고)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하나님의 영이 함께 하시지 아니하는 육신의 연약한 자를 하나님의 영이 함께 거하시는 생기 있는 자가 되게), 눈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하나님의 말씀을 순종치 아니하는 죄인 된 자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는 의인이 되게), 눌린 자를 자유케(육신의 생각으로 하나님과 원수 된 자에게 성령의 생각으로 하나님과 화목하는 자가 되게)하셨다.
이것이 믿는 우리 가운데서 능력을 행하시는 이의 일이다.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이 영이요 생명이라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이 살리는 성령을 받는 것이며 생명을 얻는 것이라는 말씀이다. 그러면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이른 말씀은 무엇인가?
(마19:16-22) 어떤 사람이 주께 와서 가로되 선생님이여 내가 무슨 선한 일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예수께서 가라사대 어찌하여 선한 일을 내게 묻느냐 선한 이는 오직 한 분이시니라 네가 생명에 들어가려면 계명들을 지키라 *가로되 어느 계명이오니이까 예수께서 가라사대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도적질하지 말라, 거짓 증거하지 말라, *네 부모를 공경하라,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것이니라 *그 청년이 가로되 이 모든 것을 내가 지키었사오니 아직도 무엇이 부족하니이까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가 온전하고자 할진대 가서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을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좇으라 하시니 *그 청년이 재물이 많으므로 이 말씀을 듣고 근심하며 가니라
이 말씀에 보면 청년은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도적질하지 말라, 거짓 증거하지 말라, 네 부모를 공경하라,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율법의 모든 계명을 지켰다고 하였다. 그런데도 주님께서는 그것으로는 부족하고 네가 온전하고자 할진대 가서 자기의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을 주라 하셨다. 즉 롬3:28에 ‘그러므로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 있지 않고 믿음으로 되는 줄 우리가 인정하노라’는 말씀이다.
그러면 주님께서 우리에게 이른 말씀 곧 ‘네가 온전하고자 할진대 가서 자기의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을 주라’는 무엇인가?
(눅4:18)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눈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케 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에게 주의 성령이 임하셨으니(약속의 성령으로 인치심), 이는 가난한 자들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온전하고자 할진대 가서 자기의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을 주게 하시려고), 기름을 부으시고(제사장 직책과 선지자 직책과 왕 직책을 세우시고), ①포로된 자에게 자유를(하나님의 영이 함께 하시지 아니하는 육신의 연약한 자를 하나님의 영이 함께 거하시는 생기 있는 자가 되게), ②눈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하나님의 말씀을 순종치 아니하는 죄인 된 자에게 하나님께 말씀을 순종하는 의인이 되게), ③눌린 자를 자유케(육신의 생각으로 하나님과 원수 된 자에게 성령의 생각으로 하나님과 화목하는 자가 되게)하셨다.
이것이 주님께서 우리에게 이르신 말씀이다. 즉 주님께서 우리를 살리는 성령을 받는 말씀이며 생명을 얻는 말씀이다.
1)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이 영이요
주님께서 우리를 살리는 성령을 받는 말씀은 무엇인가?
(엡1:7)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피로 말미암아 구속 곧 죄 사함을 받았으니
우리의 허물과 죄로 죽었던 우리가(엡2:1) 하나님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말미암아 구속 곧 죄 사함을 받았다.
(엡1:13) 그 안에서 너희도 진리의 말씀 곧 너희의 구원의 복음을 듣고 그 안에서 또한 믿어 약속의 성령으로 인치심을 받았으니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구속 곧 죄 사함을 받은 우리가 그 안에서 진리의 말씀 곧 구원의 복음을 듣고 그 안에서 또한 믿어 약속의 성령(보혜사: 요14:16-17, 요14:26, 요15:26)으로 인치심을 받았다.
- 보혜사
(요14:16-17)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시리니 *저는 진리의 영이라 세상은 능히 저를 받지 못하나니 이는 저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라 그러나 너희는 저를 아나니 저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우리 안에 영원토록 함께 거하시는 보혜사 성령이시다.
(요14:26)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시리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주께서 말씀하신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시는 보혜사 성령이시다.
(요15:26) 내가 아버지께로서 너희에게 보낼 보혜사 곧 아버지께로서 나오시는 진리의 성령이 오실 때에 그가 나를 증거하실 것이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시는 보혜사 성령이시다.
2) 생명이라
주님께서 우리를 살리는 생명을 받는 말씀은 무엇인가?
(눅4:18)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눈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케 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에게 주의 성령이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들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기름을 부으시고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눈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케 하셨다.
살리는 것은 영이니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 이 말씀을 가지고 다음과 같이 설교 한다고 가정하자.
(1) 인간의 사후 육과 영의 상태와 부활 이후 상태를 설명한다. (2) 창조 때 인간은 몸과 영(혼)이 통일된 존재임을 언급. (3) 하나님은 인간의 코에 생기를 불어넣은 것으로 보인다. (4) 아우구스티누스는 하나님의 형상으로서 인간을 설명. (5) 인간은 하나님의 기대에 반하는 삶으로 죄를 지었고, 죽음에 넘겨짐. (6) 인간 죽음의 순간에 영(혼)이 몸으로부터 떠난다(눅 23:46, 요 19:30, 행 7:59). (7) 몸으로부터 떠난 영(혼)의 종착점은 낙원(파라데이소스)이다(눅 23:43). (8) 불신자의 영(혼)은 그의 아비와 졸개인 더러운 귀신의 처소로 감. (9) 그리스도인은 영적인 예배의 삶을 살아야 한다(롬 12:1-3).
등등을 심도있게 자세하게 설명했다고 하자. 이렇게 설명한 사람이 있다. 그 말을 좋다고 호응한 사람이 많다. 상당히 설득력이 있고 좋아 보인다. 그런데 이렇게 요한복음 6:63을 가지고 영을 주제로 논리를 펴서 이야기를 하는 것이 옳은가? 문제는 없는 것인가?
이 내용은 요한복음 6:63 한절의 앞부분 절반이다.
[요한복음 6:63]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이 영이요 생명이라 [NIV] The Spirit gives life; the flesh counts for nothing. The words I have spoken to you are spirit and they are life.
뒷부분 절반인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이 영이요 생명이라”를 함께 의미가 있도록 설명해야만 한다.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이 영이요 생명이라“ 까지 함께 말하지 않는다면 이것은 명백한 성경 문맥의 무시다. 참 어처구니없는 일이다.
이것은 마치,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중,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 라고 하시고 이어서 다음 말씀을 하려고 하시는데…
잠깐, 스톱, 예수님 거기서 잠깐만요 하고 예수님 말씀을 중간에 탁 끊고서 장황하게 자기 이론을 늘어놓는 것과 같다. 그러면 듣는 어린 교인들은 아! 이렇게 심오한 진리도 있어? 하고 생각할지 모른다. 이런 것이 문맥 무시이다. 어떻게 한 구절을 반을 딱 끊어서 줄줄 설명을 할 수있을까? 책을 읽을 줄 모르거나, 남의 말은 전혀 듣지 않고 제 말만 하는 사람이다.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이 영이요 생명이라“
까지 이어서 설명을 해야 한다. 듣는 사람은 “어 왜 성경의 한 문장을 중간에 짤라?”라고 의문을 제기해야 한다.
이런 설교, 설명, 주장 비록 그 말이 중간 중간 멋있다 하더라도 모두 거짓 주장이다. 성경의 문맥을 무시하는 설명을 반대하며 배격한다. 물론 그 다음에는 그런 사람의 말 듣지 말아야 한다.
누가 말을 하는 중간에, 잠깐만 스톱, 그 말은 어쩌고저쩌고… 하면 좋아할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하면서 이런 몰상식한 논리를 전개하는 사람을 반대한다. 이런 분, 아마 자기 말을 중간에 끊어서 이러쿵저러쿵 하면 굉장히 화를 낼 것이다.
어떻게 문단도 아니고 한 문장을 반으로 끊어서 문맥과 관계없는 장광설을 펼치는가? 말하는 분이나 좋다고 듣는 분이나 참으로 답답한 일이다.
이분의 설명이 웃기는 또 다른 점은 영어 성경을 읽어 보면 “The Spirit gives life; the flesh counts for nothing” 라고 되어 있어서 “영”은 주어이지 목적어가 아니다 그런데 이분은 “생명을 주시는 분은 ‘성령’이시다 “ 라는 말을 ”살리심을 받는 것은 ‘영혼’이다” 로 해석했다. 이 쉬운 영어를 모를 리 없을 텐 데 영문 성경을 전혀 보지 않았다는 말이다. 자기 선입관에 의한 지독한 오류이다. 국어도 모르고 영어도 모르는 격이 되었다. 이런 분이 신학교 교수다.
( 인터넷, SNS, Facebook, Youtube에 이런 비논리적이고 말도 아닌 주장 많습니다. 읽고 보는 분이 주의해서 받아 들여야 합니다. 물론 나의 글도 인터넷 상에 올라가 있습니다. 혹시 제가 그런 말을 한다면 꼭 지적해 주시기 부탁드립니다. )
이 말은 요한복음 6장의 오병이어의 이야기와 생명의 양식 이야기의 중간에 나오는 구절이므로 요한복음 6장 전체와 문맥상 모순이 없어야 한다.
요한복음 6:63
첫째는 생명을 주는 것은 영이다 둘째는 예수님의 말이 영이다 셋째는 예수님의 말이 생명을 준다 넷째는 성경 말씀이 영생을 준다
이런 이야기인데 … 요한복음 6장과도 문맥상 조화가 되고 요한복음 전체와도 조화가 된다.
주님 그 말씀을, 사도 베드로도 알아 들으셨다.
[요헌복음 6:68]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되 주여 영생의 말씀이 계시매 우리가 뉘게로 가오리이까 [NIV] Simon Peter answered him, “Lord, to whom shall we go? You have the words of eternal life.
영생의 말씀, 주님의 말씀이 생명을 주는 말씀, 살리는 말씀이므로 주님을 떠나 아무 데도 갈 수가 없노라고… 주님께 대답했다.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요한복음 6:63)
사람에게 육신을 입혀놓은 것은, 육신 안에 거하는 영을 살리기 위함이다. 그러나 영과 육을 분리하여 이해하기란 쉬운 일이 아닐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사자들은 한결같이 영생하는 영에 대하여 말씀하고 있다. 사람의 육신 안에 거하는 영의 비밀은 [창세기] 말씀에서 찾을 수가 있다. [창세기] 1장 27절 말씀과 2장 7절 말씀에, 사람의 육신 안에 거하는 영의 비밀을 밝혀놓았기 때문이다.
창세기 1장 26. 하나님이 이르시되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들로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가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 27.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창세기 2장 7. 여호와 하나님이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되니라
태초에 하나님은 자기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셨다. 그러므로 사람의 모습은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모습이다. 하나님의 사자들은 성령 안에서 하나님의 형상과 천사들을 형상을 보았다.(사 6장, 겔 1장, 계 4장) 그러나 얼굴은 볼 수 없었다. 아브라함, 모세, 이사야, 에스겔, 사도 요한 등, 하나님의 사자들은 사람의 모습과 동일한 하나님을 만났고, 이를 증언하였다.
그러나 하나님과 천사들은 육신이 아니라, 영체의 형상이다. 하나님의 권능 안에서 볼 수 있는 영체의 형상을, 육으로 난 본질상 진노의 자식들은 볼 수가 없다. 이는 죄 때문이다. 본질상 진노의 자식들은 태초 전 죄를 범한, 타락 천사들이기 때문이다.(에녹 3서, 엡 2:1~5)
태초 타락 천사의 영이, 흙으로 빚은 육체에 거하게 된 자는 아담이다. 즉 흙으로 빚은 육체에 천사의 생기를 불어넣으신 것이다.(창 2:7) 여호와께서는 땅에 사람들이 번성하기 전에는 타락 천사로 태어난 아담과 하와를 만나주셨다. 왜냐면, 저들의 죄를 깨우치기 위함이었다.
여호와께서는 저들의 죄를 깨우치려고 에덴동산 중앙에 선악과를 심어놓으신 것이다. 아담과 하와는 육신을 입었기에, 육신의 소욕에 이끌리어 뱀(사탄)의 유혹을 받아 선악과를 먹은
것이다. 그 후로는 에덴동산 주변에 그룹들(Cherubim)과 화염검으로 그들이 들어올 수 없도록 지키게 된 것이다. 에덴동산을 지키는 그룹들(Cherubim)은 천사들이다. 이때부터 타락 천사들을 하늘나라를 볼 수 없었다.(창 3:22~24) 창세기 3장 22. 여호와 하나님이 이르시되 보라 이 사람이 선악을 아는 일에 우리 중 하나 같이 되었으니 그가 그의 손을 들어 생명나무 열매도 따먹고 영생할까 하노라 하시고 23. 여호와 하나님이 에덴동산에서 그를 내보내어 그의 근원이 된 땅을 갈게 하시니라 24. 이같이 하나님이 그 사람을 쫓아내시고 에덴동산 동쪽에 그룹들과 두루 도는 불 칼을 두어 생명나무의 길을 지키게 하시니라
그러므로 사람이 죽어서 천국에 들어가면, 태초 천국에서 쫓겨난 에덴동산에 들어가는 것이다. 사람이 육신을 벗고 천사가 되면, 태초 하나님과 함께 있었던 에덴동산에 돌아가 영생하는 생명나무의 열매를 먹게 된다.(계 2:7)요한계시록 2장 7.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하나님의 낙원에 있는 생명나무의 열매를 주어 먹게 하리라
결론, 육신을 위하여 살지 말라는 뜻은, 삶의 목적을 육신에 두지 말고 영생하는 영에 두라는 말씀이다. 여호와께서는
죄를 깨우치게 하려고 흙으로 빚은 육체에 타락 천사의 영을 불어넣으셨고, 타락 천사는 육신을 통하여 죄를 깨닫게 되었다. 그리고 죄를 회개하고 구원받아 다시 천사로 돌아오도록 창조하신 것이다. 이 비밀을 밝혀주는 성경은 [에녹 3서]이다.[에녹 3서] 11. 인류 탄생 그러자 저 높은 곳에서 하느님의 목소리가 내려왔다. 물론 지금 지옥(땅)에 있는 타락 천사들은 죄를 짓고 인간이 될 운명에 처해 있지만 내 그들을 가엾이 여겨 다시 한번 천사가 될 기회를 주려 한다. 그래서 너희들을 내가 선택하여 지옥(땅)으로 내려보내노라. 윤회의 틀을 돌고 돌아 인간으로 태어나면 너희들은 나의 말을 듣고 나의 뜻을 행해야 하는 예언자들이 되어야 한다.예수께서는 성령 안에서 하늘나라의 비밀을 보았고, 사람이 죽어서 천사가 되는 비밀을 알고 계셨다.(마 22:30, 눅 20:34~36) 그러므로 "썩을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하는 양식을 위하여 일하라." 말씀하시는 것이다.(요 6:27)
요한복음 6장 27. 썩을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하라 이 양식은 인자가 너희에게 주리니 인자는 아버지 하나님께서 인치신 자니라
"썩을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라."란, 썩어 없어질 육신을 위해 먹지 말고, 영생하는 생명을 위해 먹고 마시라는 것이다. 썩지 않는 양식은, 예수를 믿는 천국 복음이다. 그리고 예수는 천국 복음을 증거하기 위해 세상에 보내심을 입은, 하나님의 인치신 자이다.
하나님의 인치심이란, 하나님이 보내셨다는 증거를, 성령으로 증거한다는 말씀이다. 즉 성령으로 도장을
찍었다는 말씀이다.
성령에 이끌리어 셋째 하늘에 올라간 사도 바울도, 하늘나라에 거하는 천사들을 보았다. 즉 속죄소를 덮는 영광의 그룹들(Cherubim)을 보았다.(히 9:5) 그룹들(Cherubim)은 에덴동산을 지키는 천사들과 같은 천사들이다. 그러나 속죄소를 덮는 영광의 그룹들은 천사의 신분을 버리고 세상에 내려와 인자로 사역한 선지자와 사도들이다.(계 5:6, 계 1:20) 인자로 사역한 여호와의 사자들은 죄 없이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심을 입었기에,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인자됨을 인하여 세상을 심판하는 권세를
받는다.(요 5:27, 마 19:28, 계 20:4)
사도 바울도 속죄소를 덮는 영광의 그룹들 중 하나이다. 즉 첫 열매들로 사역한 천사이다. 천사가 되는 비밀을 알고 있었기에, 육신을 따르는 자가 되지 말고 영을 따르는 자가 되라고 말씀하는 것이다.(롬 8:5~6)
여호와 우리 하나님이여 주께서는 그들에게 응답하셨고 그들의 행한 대로 갚기는 하셨으나 그들을 용서하신 하나님이시니이다
시 99:8
우리 의지로 주 앞에 나오는 것 같으나 그렇지 않다.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지 아니하시면 아무도 내게 올 수 없으니 오는 그를 내가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리라(44).” 하시는 오늘 말씀은
의미가 크다. 믿음이 자의적이지 않고 신앙이 자기의지적으로 이루어지는 게 아님을, “또 이르시되 그러므로 전에 너희에게 말하기를 내
아버지께서 오게 하여 주지 아니하시면 누구든지 내게 올 수 없다 하였노라 하시니라(65).” 예수님은 일깨우신다.
곧 오늘 내가 여기 주 앞에 있는 것, 주 하나님을 나의 아버지로 부르고
섬기는 일은 ‘오게 하여 주심으로, 그리하게 하신 이의 뜻’에 따른 것이다. 한데 우리의 가장 큰 오해이면서 그릇된 신앙은 표적을
구하고 먹고 사는 일에 연연하여 주를 바라는 것이다. 오늘 2절, “큰 무리가 따르니 이는 병자들에게 행하시는 표적을
보았음이러라.” 이는 사는 데 따른 절박한 것으로 연약한 우리가 구할 수 있는 인간적인 욕구이기도 하다.
이에 주 앞에 왔다 주를 구주로 영접하는 자도 있으나 더러는 그것으로만
시들하여서, “그 때부터 그의 제자 중에서 많은 사람이 떠나가고 다시 그와 함께 다니지 아니하더라(66).” 곧 사람들은 현실적인
문제 해결을 바라고 주님은 육의 일이 아니라 영의 일을 말씀하시니,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은 영이요 생명이라(63).” 사람들이 떠나갔다. 주님은 물으신다. “너희도 가려느냐?” 그러자 베드로가 대답한다. “주여
영생의 말씀이 주께 있사오니 우리가 누구에게로 가오리이까?” 이와 같은 질의응답에서 우린 어떤 답을 드릴까? (67, 68).
예수님의 탄식하시는 음성이 들리는 듯하다.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이르기를
너희는 나를 보고도 믿지 아니하는도다 하였느니라(36).” 그래서 주님은 가르치셨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자가 적음이라(마
7:13-14).” 하실 때 우리에게 현재 ‘좁은 문’은 어떤 것일까?
기도할 게 없어서 나는 끝나고 바로 나와! 하는 친구의 말에 놀랍고도
신기하였다. 그럼에도 무슨 마음으로 새벽예배를 나가고 성경을 읽으며 제자반성경공부를 하고 있는 것일까? 저는 기도할 게 없다고
하였고, 나는 저에게 기도할 제목 다섯 가지를 적어주었다. 기도제목: 1) 나의 심령에도 성령을 부어주시길. 2) 돌이켜 나의
죄악을 주 앞에 회개할 수 있는 회개의 영이 함께 하시길. 3) 새벽마다 주님과의 만남으로 날마다 부여하시는 사명을 감당할 수
있기를. 4) 말씀을 읽고 묵상하며 분별하는 영을 더하시길. 5) 주의 부르심에 나의 남은 날 동안에 주가 맡기시고자 하는 사명을
감당하게 하시길.
나는 저의 순수하고 어린신앙이 귀하였다. 그리하여 “참고 선을 행하여
영광과 존귀와 썩지 아니함을 구하는 자에게는 영생으로 하시고 오직 당을 지어 진리를 따르지 아니하고 불의를 따르는 자에게는 진노와
분노로 하시리라(롬 2:7-8).” 요즘 나의 친구를 보면서 저의 경우가 우리의 보편적인 신앙의 수준이란 생각을 한다. 저는
가리지 않고 순수하고 우린 그럴듯하게 포장하며 노련하게 자신도 속이는 것뿐이다. 실은 자신이 구하는 게 무엇인지도 모른다. 영생의
문제는 와 닿지 않고 현실적인 문제로 예수께 나온다. 심지어 예수를 임금으로 삼으려 할 정도이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그들이 와서 자기를 억지로 붙들어 임금으로 삼으려는 줄
아시고 다시 혼자 산으로 떠나 가시니라(15).” 우리의 속셈은 너무 뻔하다. “그 사람들이 예수께서 행하신 이 표적을 보고
말하되 이는 참으로 세상에 오실 그 선지자라 하더라(14).” 오늘을 사는 데 따른 필요, 어떤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수단으로
예수를 따른다. 그럼에도 주님은 이를 알면서도 함께 하심은 “아버지께서 내게 주시는 자는 다 내게로 올 것이요 내게 오는 자는
내가 결코 내쫓지 아니하리라(37).” 즉 ‘내게 주는 자, 내게로 올 것’을 알고 참고 기다리시는 거였다.
그러면서 예수님은 주가 이 땅에 오신 것이 우리의 뜻을 이루려하심이
아니라, “내가 하늘에서 내려온 것은 내 뜻을 행하려 함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려 함이니라(38).” 그 단 하나의
이유,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은 내게 주신 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이것이니라(39).” 이 의미를 우리가 알 때 우리는 ‘좁은 문’으로 들어간다. 곧 “내 아버지의 뜻은 아들을 보고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는 이것이니 마지막 날에 내가 이를 다시 살리리라 하시니라(40).”
곧 성경의 주제와 하나님의 관심은 우리의 영생이다. 이 땅에서의 우리 삶이
아니다. 여기서의 어떤 결과나 목표가 목적이 아닌데, 저마다 의미를 부여하여 ‘지나치게’ 이 땅에서의 삶에 뜻을 다하는 일은
하나님의 뜻을 외면하는 것과 다를 게 없다. 믿는다고 하면서 정작 자신의 취향과 선택과 옳고 그름의 판단으로 주를 따르고자 할 때
예수님은 우리를 피해 산으로 가신다. 우리의 어쩔 수 없는 허기, 삶의 필요에 따른 요구를 아심으로 “예수께서 나오사 큰 무리를
보시고 그 목자 없는 양 같음으로 인하여 불쌍히 여기사 이에 여러 가지로 가르치시더라(막 6:34).”
점심시간을 이용해서 질의응답 형식으로 하는 친구와의 성경공부 통화가 내게도
유익이다. 어제는 저에게 네 개의 밭을 비유로 말씀하신 데 따른 그 의미를 설명해주었다. ‘좋은 땅’에 떨어졌다는 것은 비로소
30배 60배 100배의 결실을 맺음인데, 앞서 좋은 땅을 얻기란 무던히 개간하고 갈아엎어 땅 속의 돌들과 땅위의 가시떨기를
걷어내야 한다. 땅 속의 돌들은 우리 안의 염려와 근심으로 말씀의 씨앗이 뿌리내리지 못하게 하고, 땅 위의 가시떨기는 온갖 상황과
여건과 환경에 짓눌려 그 신앙이 자랄 수 없는 일이다. 더욱이 심각한 것은 길가밭이다. 길가는 온갖 사람이 드나들고, 밟고 다녀
어느새 단단하게 굳어진 마음이다. 그 위에 콘크리트를 붓고 아스팔트를 깔고 대리석을 까는 꼴이라, 말씀의 씨앗이 심겨질 수 없고
은혜의 단비도 스며들지 못하고 오히려 얼룩져 볼썽사납다.
나는 저의 마음이 어떠한가 물었고, 주 앞에서 자신을 직고하며 대면하여
덮어두고 숨겨진 자신의 허물과 죄악을 마주할 필요가 있다고 단도직입적으로 말하였다. 그저 대수롭지 않게 여기며 사는 것들로 우리
영혼은 굳어졌고 막혀있다. “만일 하나님이 그의 진노를 보이시고 그의 능력을 알게 하고자 하사 멸하기로 준비된 진노의 그릇을 오래
참으심으로 관용하시고 또한 영광 받기로 예비하신 바 긍휼의 그릇에 대하여 그 영광의 풍성함을 알게 하고자 하셨을지라도 무슨 말을
하리요(롬 9:22-23).”
오늘 우리가 이처럼 주 앞에 여전히 나올 수 있는 것이 은혜이다. 어떠한
형태나 모양으로 사용하시고자 하는지에 대하여는 주의 뜻이라서 “토기장이가 진흙 한 덩이로 하나는 귀히 쓸 그릇을, 하나는 천히 쓸
그릇을 만들 권한이 없느냐(21).” 나의 오늘, 이 주어진 상황에서 묵묵히 주를 바라는 일이 귀하였다.
나의 저의 안에 두시는 오늘의 열심과 그 마음의 소망을 위해 기도한다.
무엇을 기도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저에게 일상의 소소한 소원을 구하는 것이야 그럴 수 있는 것이고, 나는 성령을 부어주시기를,
회개의 영이 저의 굳어진 마음 밭을 갈아엎으시기를 구하였다. 그럼에도 저의 오늘이 귀한 것은 신앙의 수준이나 정도를 운운함이
아니라, 우리의 잃어버린 처음 사랑을 생각나게 한다. 에베소교회를 향한 말씀으로, “그러나 너를 책망할 것이 있나니 너의 처음
사랑을 버렸느니라(계 2:4).” 이 안타까운 상황은 앞서 다 아시는, “또 네가 참고 내 이름을 위하여 견디고 게으르지 아니한
것을 아노라(3).” 그리하여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고전 13:3).” 곧 ‘처음 사랑’을 잃으면 아무 소용이 없다.
앞서 누구와의 통화에서도 저의 근황을 듣고 그 마음에 선교사로 평생을 주의
일에 헌신하다 귀국하여 오갈 데 없는 이에게 처소를 제공하고자 하는 마음을 귀히 보았다. 하나 주의 일에 있어 그 사역의 문제에
대해서는 전적인 하나님의 권한인 것을 알려주었다. 순수함으로 저의 안착을 돕는 일은 좋으나 그 이상의 책임을 가지려는 데는
무리가 따른다. 그럼에도 그와 같은 마음을 주시는 것에 나는 놀라웠다. 다만 “우리를 구원하시되 우리가 행한 바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지 아니하고 오직 그의 긍휼하심을 따라 중생의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으로 하셨나니,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그 성령을 풍성히 부어 주사 우리로 그의 은혜를 힘입어 의롭다 하심을 얻어 영생의 소망을 따라 상속자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딛 3:5-7).”
곧 우리 안의 어떤 강박 같은 주의 일에 대한 부채감은 사탄이 더하는
마음이다. ‘광명의 천사’ 같이 그러한 마음과 일을 더하고 추진하게 하지만 “내게 주신 은혜로 말미암아 너희 각 사람에게 말하노니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의 생각을 품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나누어 주신 믿음의 분량대로 지혜롭게 생각하라(롬
12:3).” 곧 우린 의외로 신앙이 자랄 때 가라지도 같이 자라는데, 하나님의 일을 대신하려 할 때이다.
오늘 본문의 사람들도 순수하게는 자신들의 필요를 가지고 주 앞에 왔고 이를
높여 임금으로 삼고자 하였다. 스스로 어떤 순수함으로 그 마음을 포장하고 있는지는 알 수 없으나… 우리 안에는 무의식적으로 주께
받은 은혜를 갚고자 하는 욕구가 인다. 사람의 이치와 도덕적인 가치로는 유익한 듯하나 그것이 아무리… “내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 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되고 내가 예언하는 능력이 있어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알고 또 산을 옮길 만한 모든 믿음이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 것도 아니요(고전 13:1-2).” 결국은 아니다.
오늘 주님은 “썩을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하라.” 하시고(27), 우리가 할 수 있는 ‘하나님의 일’은 인류공영에 이바지 하고, 다른 영혼을 위해 내 몸을
불사르기까지 되갚아 헌신하려는 게 아니라, “하나님께서 보내신 이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니라 하시니(29).” 그럼 그 ‘믿는
것’ 이는 더러 수동적이고 매우 소극적인 일 같이 보인다. ‘가라’ 하시는 말씀을 좇아 ‘갈 바를 알지 못하면서도 떠나고’,
또는 ‘지으라’ 하셨을 때 그게 언제까지인지 얼마나 소요되는 일인지도 모르고 120년을 단조롭고 무료하게 구원의 방주를 짓는 일과
같다.
그러느니 당장 뭐라도 하는 게 나을 것 같은데, 그것으로 주의 일을 그르칠
수도 있다는 것을 알아야 했다. 신앙은 의외로 단순하고 단조롭다. 주를 사랑함은 세상을 미워하는 일이고, 한 마음으로 두 주인을
섬기지 않는 일이기도 하다. 그런데도 여전히 “그러면 우리가 보고 당신을 믿도록 행하시는 표적이 무엇이니이까, 하시는 일이
무엇이니이까?” 하고 되묻는다(30). 그러면서 은근히 속내를 드러내는 것은 “기록된 바 하늘에서 그들에게 떡을 주어 먹게 하였다
함과 같이 우리 조상들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었나이다(31).” 자신들의 필요와 요구를 갈구하는 데 있어 주가 필요하다. 그러자
“나는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35).” 하시는
엉뚱한 말씀(?)으로, 하나둘 떠나갔다.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믿는 자는 영생을 가졌나니 내가 곧 생명의 떡이니라(47-48).”
어떤 일, 무슨 위대한 주의 사역이 아니라, 예수를 먹는 일!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떡이니 사람이 이 떡을 먹으면 영생하리라 내가 줄 떡은 곧 세상의 생명을 위한 내 살이니라
하시니라(51).” 이것으로 우리는 영육간에 산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인자의 살을 먹지
아니하고 인자의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 속에 생명이 없느니라(53).” 이것이 오늘 우리의 꼬인 문제를 해결하고, 닥친 현실을
해소해줄 리 없다. 들고 나온 문제는 아랑곳하지 않고, “내 살은 참된 양식이요 내 피는 참된 음료로다(55).” 하시는 말씀
앞에 누가 굴복할 수 있겠나? 내 안에 주의 영이 하지 않으시면 감당할 수 없는 일에 대하여, 오직 주의 관심은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은 영이요 생명이라(63).”
오늘 우리가 교회 다니고 예수 믿고 그 생활이 얼마나 나아졌는지,
살림살이는 좀 폈는지 하는 따위로가 아니다. 결국 그런 가운데서도 “믿지 아니하는 자들이 있느니라(64).” 심지어 “너희 중의 한
사람은 마귀니라 하시니 이 말씀은 가룟 시몬의 아들 유다를 가리키심이라(70-71).”
오늘 내 안의 ‘가룟인 유다’는 어떤 것인가? “그는 열둘 중의 하나로
예수를 팔 자러라(71).” 결코 나는 아니라고 말할 수 없을 때 나는 두렵다. 어떤 어려움이 혹은 육신의 질병으로 나는 언제든지
‘유다’가 될 수 있음을 고백하면서 “대저 하나님의 모든 말씀은 능하지 못하심이 없느니라(눅 1:37).” 하나님 앞에 나를
내어드린다.
여호와께서 다스리시니
만민이 떨 것이요
여호와께서 그룹 사이에 좌정하시니
땅이 흔들릴 것이로다
(시 99:1).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집이나 아내나 형제나 부모나 자녀를 버린 자는 현세에 여러 배를 받고 내세에 영생을 받지 못할 자가 없느니라
하시니라(눅 18:29-30).” 과연 내 안에 주의 뜻만이 온전한가? 되묻게 된다. 결국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찾으리라)(마 16:25).” 하면,
주의 크고 두려운 이름을 찬송할지니
그는 거룩하심이로다
…
너희는 여호와 우리 하나님을 높여
그의 발등상 앞에서 경배할지어다
그는 거룩하시도다
(3, 5).
그리하여,
여호와 우리 하나님이여
주께서는 그들에게 응답하셨고
그들의 행한 대로 갚기는 하셨으나
그들을 용서하신 하나님이시니이다
너희는 여호와 우리 하나님을 높이고
그 성산에서 예배할지어다
여호와 우리 하나님은 거룩하심이로다
(8-9). 아멘.
로마서 8장 5. 육신을 따르는 자는 육신의 일을, 영을 따르는 자는 영의 일을 생각하나니 6.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
성부 하나님은 사시는 living 하나님이십니다(렘 10:10). 나아가 성자 예수님은 살리는 영이십니다 a
life-giving spirit (고전 15:45). 당연히 성령님은 생명을 부여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The Spirit of
life (롬 8:2). 때문에 삼위일체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받고 하나님을 섬기는 우리 신앙인들은 생명을 누리며 살아 가는
존재들입니다. 나아가 하나님은 우리 신앙인들에게 보다 풍성한 생명을 주시려 독생자 예수님을 보내셨습니다.
““... 내[예수님]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 (요 10:10). 할렐루야!
그럼에도
우리들은 진정으로 현재를 힘있게 살아가고 있는지요? 2024년 새해를 밝은 소망으로 맞이했음에도 혹시 하루하루 마지못해 그럭저럭
보내고 있지는 않으신지요? 또는 열심히 고생하며 최선을 다하며 살아간다 할 지라도 혹시 헛된 인생을 지내고 있지는 않는지요?
과연 진정으로 사는 삶이란 무엇일까요? 또한 우리 인생들을 진실로 힘차게 살게 하는 것은 무엇일까요?
1.인간의 실상
하나님은
우리 인간을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하셨습니다. 복을 주시고 모든 만물을 다스리게 하셨습니다(창 1:27-28). 살아있는 영적
존재로(living being 또는 living spirit) 살게 만드셨습니다(2:7). 그런데 인류의 조상인 아담과 하와가
마귀의 궤계로 말미암아 범죄한 이후 그들의 영은 하나님과 분리된 죽은 상태로 마귀에 속하게 되었습니다(2:17). 때문에 아담의
후손인 모든 인류는 원죄의 유전으로 인해 영적으로 죽은 상태로 태어나게 되었습니다.
“너희의 허물과 죄로 죽었던 ...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 (엡 2:1-3).
즉
사람이 어머니 뱃속에서 태어나 육신의 숨을 쉬며 살아 가고 있지만, 이는 목에 숨이 붙어 있는 것이지, 영혼은 죽어 있어 숨을
쉬며 살아가고 있지 못한다는 말씀입니다. 예수님도 장례를 치루고 주님을 따르겠다는 한 제자에게 “... 죽은 자들로 저희 죽은
자를 장사하게 하고 너는 나를 좇으라” (마 8:21-22) 말씀하셨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을 모르고 이 세상을 지내는
비신자들은, 과거 우리가 은혜받지 못해 하나님을 알지 못했던 모습처럼, 진실은 살았다 하나 하나님과 끊어져 영적으로는 이미 죽은
자들인 것입니다. 비유하자면 꽃병이나 화환에 장식된 꽃들을 생화라 부르나 사실은 이미 죽은 꽃들 아닙니까? 마치 이미 죽었으나
걸어다닌다는 좀비 (Zombie)가 아닙니까?
그런데 이 죽은 영혼이 살아날 수 있습니다. 할렐루야!
2.어떻게 죽었던 사람의 영혼이 살게 됩니까?
바울의 편지 내용처럼 하나님 말씀이 영혼이 죽어 있는 불신자들에게 믿음을 갖게 합니다.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 (롬10:17). 그리하여 구원에 이르게 합니다 (10절).
요한은 자신이 하나님 말씀을 기록하는 이유는 사람들로 말씀을 믿게 하여 하나님의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라고 말했습니다 (요 20:31). 베드로도 신앙인의 거듭남이 하나님 말씀으로 말미암는다고 밝혔습니다.
“너희가 거듭난 것이 썩어질 씨로 된 것이 아니요 썩지 아니할 씨로 된 것이니 하나님의 살아 있고 항상 있는 말씀으로 되었느니라” (벧전 1:23).
그리고 오늘 본문도 말씀이 우리를 살린다고 정확하게 선포하고 있습니다.
“살리는 것은 영[성령님]이니 육은 무익하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이 영[성령님]이요 생명이라”
살리는
것은 성령님인데 주님이 이르는 말씀에 성령과 생명이 충만하다는 것입니다. The Spirit gives life ... The
words I have spoken to you-they are full of the Spirit and life. 바로 하나님의
말씀으로 진정 살 수 있다는 것입니다.
비고) 이 구절을 어떤 분들은 한글 번역을 오해하여 영지주의자처럼 잘못 해석을
하곤 합니다. 영을 성령님이 아닌 사람의 영으로 해석해서 하나님이 살리는 것은 사람의 영혼이지 육체는 아무 쓸모없다고 이해하는
것입니다. 영은 귀하고 선한 것이고 반면에 육체는 천하고 악한 것으로 보는 것입니다.
반대로 이 세상 육체에 속한 모든 것은 아무 것도 절대로 사람의 죽은 영혼을 진정으로 살릴 수 없다고 밝히고 있습니다. 본문 “육은 무익하니라” the flesh counts for nothing.
이미
죽은 영혼을 돈이 살립니까? 권력이 살립니까? 세상지혜가 살립니까? 직장이 살립니까? 영주권이 살립니까? 어차피 한번 죽을
육체를, 생활을 편하게 할 수는 있겠지요. 그러나, 영혼을 살리며 진정한 인생의 삶과 축복엔 근원적인 유익을 전혀 주진 못합니다.
아니 오히려 때로는 훼방할 뿐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생명입니다. 이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면 마른
뼈들에도 생기가 들어가 본래의 사람으로 다시 살아납니다 (겔 37:1-10). 우리 모두 하나님 말씀을 통해 죽었던 영혼이 살아
나는 역사가 있게 되시길 축원합니다.
3.마지막으로 말씀은 어떠한 처지에서든 신앙인들을 살리고 보다 생기있고 풍성한 삶을 살게 합니다
우리가
어디로 가야 할지 몰라 방황하고 있을 때, 하나님은 그의 말씀을 통해 우리를 인도하십니다 (시119:105). 말씀은 또한
영적인 공격으로부터 우리를 보호하기도 합니다. 예수님은 마귀의 모든 유혹을 신명기 6-8장에 나오는 성경구절을 인용하시며
물리치셨습니다 (마4:1-11).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에게 능력을 공급합니다 (히4:12). 말씀을 받을수록 성령 충만하여
신앙인은 더욱 하나님을 닮아갑니다 (고후3:18). 또한 말씀은 질병을 치유케 합니다.
“저가 그 말씀을 보내어 저희를 고치사 위경에서 건지시는도다” (시 107:20).
나아가 우리 몸도 건강하게 살 수 있게 합니다.
“그것은[말씀은] 얻는 자에게 생명이 되며 그 온 육체의 건강이 됨이니라” (잠 4:23).
그렇습니다. 우리 신앙인들은 하나님 말씀을 심령의 양식으로 먹으며 진실로 살아갈 수 있습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기록되었으되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 하였느니라 하시니” (마 4:4).
우리
모두 하나님 말씀을 중단없이 접하고, 그 말씀을 받아들이며 순종하고 사십시다. 그리함으로 우리 모두 이 마귀세상을 이기며 살고,
이 세상 모든 염려와 걱정 근심, 불안 초조, 공포, 질병에서 자유하며 진정으로 살아가시길 축원합니다.
특히 새해를
시작하는 “성경읽기의 달” 1월을 맞이하여 말씀 읽기에 힘쓰며 상고하시길 당부합니다. 하나님 말씀이 죽어 있는 영혼들을
살립니다. 우리 신앙인들에게 “하나님 형상”(Imago Dei)을 회복하며 진정으로 살도록 풍성한 생명을 공급합니다. 우리 모두
하나님 말씀을 통해 진실로 하루하루 풍성히 살아 가시는 축복을 누리시길 축원합니다.
"인간은 말하는 존재" 하이데거 언어철학의 정수
"인간은 말한다(spricht). 우리는 깨어 있을 때도 말하고, 꿈속에서도 말한다. 우리는 언제나 말한다. 우리가 아무
말도 소리 내지 않고 경청하거나 읽을 때에도 우리는 말하며, 심지어 특별히 경청하거나 읽는 것이 없다고 하더라도, 어떤 일에
몰두하거나 한가로이 여가를 즐길 때에도 우리는 말한다."('언어'중에서)
언어라는 인간의 특질은 독일 철학자 마르틴 하이데거(1889~1976)가 일생을 파고든 주제였다. "언어는 존재의 집"이라는
하이데거의 명제를 이해할 수 있는 실마리를 제공하는 그의 후기 언어철학의 명저 '언어로의 도상에서'가 번역 출간됐다.
1950년부터 59년까지 이뤄진 여섯 개의 강연 '언어' '시에서의 언어' '언어에 관한 대화로부터' '언어의 본질' '말'
'언어에 이르는 길'을 담은 책. 1959년 초판된 이 책은 수많은 난문과 그리스어, 라틴어 등이 암초처럼 곳곳에 퍼져 있어 그의
대표작 중 유일하게 번역이 이뤄지지 못했다.
역자는 고(故) 신상희 건국대 인문학연구원 학술연구교수. '동일성과 차이' '이정표' '숲길' 등 수많은 하이데거의 저작을 번역해오다 2년 전 타계한 국내 독보적인 하이데거 연구자의 유작으로 2주기를 즈음해 출간됐다.
700개가 넘는 각주와 주해는 험난한 번역의 흔적을 보여준다.
옮긴이의 말에서 신 교수는 "이 작품은 나에게 마치 히말라야의 험준한 거봉 안나푸르나와도 같은 존재였다. 비밀의 문을
허락해주는 것은 여신의 뜻에 달린 것일 뿐, 인간의 의지와는 무관한 것이다. 언젠가 때가 되면 이 작품을 꼭 우리말로 옮김으로써
존재의 시원에 이르는 사유의 등반 루트를 개척해 놓고자 마음속으로 굳게 결심하고 있었다"고 감회를 밝혔다.
책의 첫 장인 '언어'는 "말하는 자로서 인간은 존재한다"는 선언으로 열린다. 하이데거는 자연과 인간을 포함한 모든
'존재'는 말 없는 소리, 혹은 은은한 울림을 내며 이 언어가 인간에게 다가온다고 주장했다. 인간의 말은 홀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수많은 존재가 말 없이 들려주는 언어와의 관계에서 비롯된다는 것이다. 하이데거는 책의 전반에 걸쳐 릴케, 트라클, 게오르게
같은 시인의 시를 통해 자신의 명제를 증명해낸다.
"말이 부서진 곳에서는 어떤 사물도 존재하지 않으리라"는 게오르게의 시 '말'의 마지막 시행이다. '언어의 본질'에서 그는 이 시의 분석을 통해 언어는 사물에 고유한 존재를 부여하는 역할을 한다는 것을 설득해낸다.
언어는 존재의 집이다(Die Sprache ist das Haus des Seins)
'언어는 존재의 집'이라는 말은 독일 철학자 마르틴 하이데거가 한 유명한 말로,
인간은 언어라는 집 안에 거주하며 언어를 통해 세계를 드러내고 자신의 존재를 이해한다는 의미입니다. 언어는 단순히 의사소통 도구를 넘어, 우리가 생각하고 느끼는 방식을 형성하며, 언어는 그 안에 사는 존재의 고유한 세계를 드러내는 역할을 합니다.
존재의 틀 : 언어는 인간이 자신의 세계를 인식하고 경험하는 틀을 제공합니다. 언어를 배운다는 것은 단순히 단어를 익히는 것이 아니라, 그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의 사고방식과 세계관을 이해하는 과정입니다.
존재의 표현 : 언어는 인간의 존재를 드러내고 표현하는 방식입니다. 언어 없이는 인간의 고유한 존재가 드러나기 어렵다고 보았습니다.
세계와의 관계 : 하이데거는 우리가 말을 사용하기 이전에 이미 언어에 속해 있으며, 말은 우리가 속한 세계를 드러내는 근원적인 역할을 한다고 설명했습니다.
문화의 저장소 : 언어는 그 나라의 역사, 가치관, 풍습 등을 담고 있으며, 이를 통해 그 문화와 사람들을 더 깊이 이해할 수 있게 합니다.
음부(스올) 7585 שְׁאוֹל
Storng number 7585
1. 무덤. 2. 지옥. 3. 구덩이 Pronunciation
[ sheʼôwl ] Etymology / 7592에서 유래 Old Testament / 65회 사용
1. Noun
무덤, 지옥, 구덩이, 창 37:35, 민 16:30, 욥 21:13, 26:6, 시 6:6(5), 잠 9:18, 사 5:14, 14:9, 38:10, 겔 31:16.
관련 성경 / ☞스올(창 37:35, 시 6:5, 호 13:14, 시 89:48, 아 8:6, 욘 2:2).
7592. 솨알(shâʼal)
שָׁאַלStorng number7592
1. 문의하다. 2. 시 2:8. 3. 삼상 8:10
Pronunciation [ shâʼal ]
Old Testament / 172회 사용
예수님은 창조주이신가?
요한복음 1장 1-5절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라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것이 없느니라 그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빛이 어둠에 비치되 어둠이 깨닫지 못하더라
서론 : 근본적인 질문 앞에 서다
신앙의 여정에서 우리는 때때로 근본적인 질문과 마주하게 됩니다. “예수님은 정말 누구신가?”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위대한
선지자, 윤리 교사, 혹은 특별한 인간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성경, 특히 요한복음은 훨씬 더 놀라운 사실을 선포합니다. 오늘
우리는 요한복음 1장 1절부터 5절까지의 말씀을 통해 “예수님은 창조주이신가?”라는 직접적인 질문에 대한 답을 찾아보고, 그
진리가 오늘 우리의 삶에 어떤 의미를 갖는지 구체적인 적용점을 함께 나누고자 합니다.
1. 요한복음 1장의 명확한 증언: 예수님은 창조주 하나님이시다
질문에 대한 답부터 명확히 하자면, “네, 요한복음 1장은 예수님이 창조주이심을 분명하게 증언합니다.”
태초부터 계신 말씀 (1-2절):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라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요한은 예수님을 ‘말씀'(로고스)이라고 칭하며, 그분이 시간의 시작점인 ‘태초’ 이전부터 존재하셨음을 선언합니다. 이는 예수님이 피조물이 아님을 의미합니다.
더 나아가 ‘하나님과 함께 계셨다’는 것은 아버지 하나님과의 구별되면서도 친밀한 관계를,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라’는 것은 예수님께서 아버지와 동일한 본질을 가지신 하나님 자신임을 명백히 밝히는 것입니다.
요한복음이 쓰일 당시, 예수님의 신성을 의심하거나 그분을 단지 영적인 존재 중 하나로 격하시키려 했던 영지주의자들의 주장에
정면으로 반박하며, 예수님의 완전한 신성을 확증하는 것입니다. 예수님 스스로도 “창세 전에 내가 아버지와 함께 가졌던 영화”(요
17:5)를 말씀하셨습니다.
만물의 창조자 (3절):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이 구절은 예수님의 창조주 되심을 가장 직접적으로 선포하는 핵심 구절입니다. 우주 만물, 보이는 것이든 보이지 않는 것이든, 그 어떤 것도 예외 없이 ‘말씀’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창조되었습니다.
그분은 창조 사역의 단순한 도구나 통로가 아니라, 창조의 주체이시며 근원이십니다. 성부 하나님께서 계획하시고, 성자 예수님께서 ‘말씀’으로 실행하셨으며, 성령 하나님께서 운행하시며 완성하신 삼위일체 하나님의 공동 사역인 것입니다.
2. 예수님, 생명과 빛으로
요한복음은 예수님이 창조주이심을 증언하는 데 그치지 않고, 그분이 우리에게 어떤 의미를 가지시는지를 ‘생명’과 ‘빛’이라는 상징을 통해 설명합니다.
생명의 근원 (4절 상반절):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창조주이신 예수님 안에는 모든 생명의 근원이 있습니다. 이는 단순히 숨 쉬고 활동하는 육체적 생명을 넘어, 하나님과 연결된
영원하고 풍성한 생명(조에, ζωή)을 의미합니다. 죄로 인해 하나님과 단절되어 영적으로 죽었던 우리에게 참된 생명을 주실 수
있는 유일한 분이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어둠을 밝히는 빛 (4절 하반절 – 5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빛이 어둠에 비치되 어둠이 깨닫지 못하더라”
예수님의 생명은 죄와 무지라는 ‘어둠’ 속에 살아가는 인류에게 유일한 ‘빛’이 됩니다. 빛은 길을 보여주고(요 14:6), 진리를 드러내며(요 8:12), 위험으로부터 보호하고, 생명을 자라게 합니다.
그러나 비극적이게도, 어둠은 스스로 빛을 깨닫거나 받아들일 능력이 없습니다. 본문 해설에서 지적하듯이, 우리는 빛이 비치면
당연히 볼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영적으로 ‘죽은 자’였기 때문에 스스로는 빛을 인식할 수 없었습니다. 로마서 3장 10-11절
말씀처럼,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는 것이 우리의 본래 상태였습니다.
하나님을 잊어버린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하나님을 모른 채 태어나 죄의 어둠 속에서 살아가는 존재였습니다. 마치 창세기 1장의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던 상태와 같았습니다.
3. 적용 : 창조주 예수님이 내 삶에 주는 의미
그렇다면 “예수님이 창조주이시다”라는 사실과 그분이 “생명이요 빛”이라는 진리는 오늘 우리의 삶에 어떻게 적용될 수 있을까요?
적용 1 : 나의 가치와 목적을 창조주 안에서 발견하십시오.
만약 예수님이 나를 포함한 만물의 창조주라면, 나의 가치는 세상의 기준이나 나의 성취에 달려있지 않습니다. 창조주의 형상대로 지음받은 존재 자체로 나는 존귀합니다.
나를 만드신 분이 내 삶의 목적과 의미를 가장 잘 아십니다. 세상이 제시하는 헛된 목표를 좇는 대신, 나를 향한 창조주의 계획과 뜻을 발견하고 순종하는 데서 참된 만족과 의미를 찾을 수 있습니다. 질문 : 나는 나의 가치를 어디에서 찾고 있습니까? 창조주께서 나에게 부여하신 목적은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적용 2 : 삶의 문제 앞에서 창조주의 능력을 신뢰하십시오.
우주 만물을 말씀으로 창조하신 그 능력이라면, 내 삶의 어떤 문제나 어려움인들 해결하지 못하실 것이 있을까요? 질병, 관계의 어려움, 재정적인 문제, 미래에 대한 불안감 앞에서 창조주 예수님의 능력을 기억하고 의지하십시오.
그분은 혼돈 속에서 질서를, 무(無)에서 유(有)를 창조하신 분입니다. 우리의 망가진 삶, 깨어진 마음도 새롭게 창조하고 회복시키실 수 있는 분입니다.
질문 : 지금 내가 겪고 있는 가장 큰 어려움은 무엇입니까? 이 문제 앞에서 창조주 예수님의 능력을 어떻게 신뢰할 수 있을까요?
적용 3 : 내 안의 어둠을 인식하고 빛이신 예수님께 나아가십시오.
이전에는 당연하게 여기거나 무감각했던 죄에 대해 이제는 불편함과 죄책감을 느낀다면, 그것은 내 안에 빛이 비추기 시작했다는 증거이며 놀라운 축복입니다. 어둠(죄)을 인식하는 것은 빛(예수님)을 만났기 때문입니다.
넘어지고 실패할 때 좌절하거나 숨지 마십시오. 그것이 우리의 본래 모습(어둠)이었음을 인정하고, 즉시 빛이신 예수 그리스도께로 나아가십시오. 그분의 십자가는 우리의 죄를 용서하고 우리를 정결하게 하는 능력입니다. 질문 : 최근 나의 죄나 연약함 때문에 고민했던 적이 있습니까? 그때 어떻게 빛이신 예수님께 나아갔거나, 나아갈 수 있을까요?
적용 4 : 내 삶에 일어나는 ‘새로운 창조’를 목격하고 감사하십시오.
예수님은 첫 창조의 주인이실 뿐 아니라, 우리 안에서 ‘새로운 창조’를 이루시는 분입니다. 죄의 노예였던 우리가 변화되어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섬기며,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을 찬양하게 되는 것은 기적과 같은 새로운 창조의 증거입니다.
자신의 변화된 모습, 혹은 변화되기를 소망하는 영역을 보며 창조주 예수님의 신실하신 역사를 기대하고 감사하십시오. 질문 : 예수님을 믿고 내 삶에 일어난 가장 놀라운 변화(새로운 창조)는 무엇입니까? 앞으로 어떤 영역에서 더 변화되기를 소망합니까?
결론 : 창조주, 그 이상의 예수님을 만나십시오
요한복음 1장 1-5절은 예수님이 단순한 인간이 아닌, 태초부터 계신 창조주 하나님이심을 강력하게 선포합니다. 그분은 만물의
근원이시며,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시고 어둠을 밝히시는 유일한 빛이십니다. 이 진리는 단지 교리적인 지식에 머물러서는 안
됩니다. 창조주 예수님께서 바로 ‘나의’ 창조주이시며, ‘나의’ 생명이시며, ‘나의’ 빛이심을 인격적으로 만나고 경험해야 합니다.
오늘, 창조주 예수님 안에서 당신의 참된 가치와 목적을 발견하고, 그분의 능력과 빛을 의지하며, 당신의 삶 속에서 이루어 가시는 놀라운 새로운 창조의 역사를 목격하며 살아가는 복된 하루가 되시기를 간절히 소원합니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요한복음 1:1) 말씀(로고스)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누구신가?
서론 :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는 선언
요한복음은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는 장엄하고도 심오한 선언으로 시작합니다. 이 한 구절은 우리를 시간의 시작, 아니 그
이전의 영원으로 초대합니다. 여기서 등장하는 ‘말씀’, 헬라어로는 ‘로고스(Λόγος)’는 단순한 음성이나 기록된 글자를 넘어,
살아있는 인격,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지칭합니다. 그렇다면 요한복음 1장 1절은 왜 예수님을 ‘말씀’이라고 표현하며 시작할까요? 이
‘말씀’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과연 누구이신지, 오늘 본문(요한복음 1:1-5)과 묵상 내용을 바탕으로 깊이 탐구해 보겠습니다.
1.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다 - 예수님의 신성(神性)
본문은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라”고 명확히 선언합니다. 저자 요한은 독자들이
‘말씀’이라는 단어를 ‘예수님’으로 바꾸어 읽기를 권합니다. “태초에 예수님이 계시니라 이 예수님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예수님은 곧 하나님이시라.” 이는 예수님이 어느 시점에 신성을 부여받거나 만들어진 존재가 아니라, 영원 전부터 하나님 아버지와
동등한 본질을 가지신 하나님 자신임을 강력하게 증거하는 것입니다.
요한이 이토록 예수님의 신성을 강조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첫째,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 되심을 증거하기 위함입니다. 둘째, 당시 영지주의와 같은 사상들은 예수님의 완전한 신성을 부인하며 그분을 피조물 중 하나로 격하하려 했습니다. 요한은 이러한
잘못된 가르침에 맞서, 예수님이야말로 “창세 전에 내가 아버지와 함께 가졌던 영화”(요 17:5)를 누리셨던,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신 하나님이심을 변증하는 것입니다. ‘태초’라는 단어는 그분의 영원성을, ‘하나님과 함께’라는 표현은 아버지와의 구별되면서도
친밀한 관계를, ‘곧 하나님이시라’는 선언은 그분의 완전한 신성을 보여줍니다.
2. 말씀은 창조주시다 : 만물의 근원
예수님이 태초부터 계신 하나님이라는 사실은 필연적으로 그분이 창조주이심을 의미합니다. 본문 3절은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고 증언합니다. 우주 만물,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모든 것이
‘말씀’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존재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는 예수님이 피조세계의 일부가 아니라, 모든 피조물의 근원이시며
주관자이심을 선포합니다.
이 사실은 우리에게 엄청난 위로와 확신을 줍니다. 우리를 만드신 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시라면, 그분은 우리 존재의 목적과
의미를 가장 잘 아십니다. 우리의 연약함, 깨어짐, 필요를 누구보다 깊이 이해하시며, 우리를 온전하게 회복시키실 능력 또한 가지고
계십니다. 성부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천지를 창조하셨듯이, 이제 성자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말씀’으로 우리 안에 새로운
창조, 즉 죄로부터의 구원과 거듭남의 역사를 이루어 가십니다.
3. 말씀은 생명이요 빛이시다 : 어둠을 밝히는 구원자
말씀이신 예수님 안에는 ‘생명’이 있었습니다.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요 1:4). 여기서
‘생명'(조에, ζωή)은 단순한 육체적 생존을 넘어선, 하나님과의 관계 안에서 누리는 영원하고 풍성한 생명을 의미합니다. 이
생명은 죄와 죽음이라는 어둠 속에 살아가는 인류에게 유일한 ‘빛’으로 다가옵니다.
빛은 어둠을 몰아내고 실체를 드러내며 길을 비춥니다. 예수님이라는 빛은 우리가 하나님께 나아갈 유일한 길(요 14:6)을
보여주시고, 우리 안에 숨겨진 죄악을 드러내어 회개에 이르게 하며, 영적인 무지와 혼돈 속에서 방황하는 우리에게 참된 진리를
깨닫게 하십니다.
하지만 빛이신 예수님이 오셨음에도 불구하고, 세상은 그분을 알아보거나 영접하지 못했습니다. “빛이 어둠에 비치되 어둠이
깨닫지 못하더라”(요 1:5). 왜일까요? 본문 해설은 우리가 단순히 하나님을 잊어버린 정도가 아니라, 영적으로 ‘죽은 자’이기
때문이라고 설명합니다. 죄로 인해 하나님을 알 수도, 깨달을 수도, 스스로 빛을 향해 나아갈 수도 없는 전적인 무능력 상태에
있다는 것입니다(롬 3:10-11). 마치 창세기 1장의 혼돈과 공허, 깊은 흑암처럼, 인간의 마음은 죄로 가득한 어둠 그
자체였습니다.
결론 : 말씀이신 예수님, 우리의 모든 것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는 선언을 통해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신지에 대한 근본적인 답을 얻습니다.
생명(生命) - 죄와 죽음의 어둠 속에 있는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시고 진리의 길을 비추시는 생명의 빛이십니다(구원).
ζωή, ῆς, ἡStorng number2222
1.
생명.
2.
θάνατος
3.
ἐν τῇ ζωῇ σου: 네가 살아있는 동안
Pronunciation
[ zōē ]
Etymology
2198에서 유래
하지만 인간은 스스로 이 빛을 깨달을 수 없는 어둠 속에 있었습니다. 바로 이 절망적인 상태에 ‘말씀’이신 예수님께서 직접
오셔서 새로운 창조, 즉 구원의 역사를 시작하셨습니다. 그분이 우리 안에 오심으로 우리는 비로소 죄를 깨닫고 아파하며, 빛을 향해
나아가려는 소망을 품게 되었습니다.
‘말씀’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단순한 종교적 인물이 아니라, 우리 존재의 근원이시며, 우리 삶의 해답이시고, 우리 영혼의
유일한 빛이십니다. 오늘, 태초의 그 ‘말씀’이 지금도 우리 안에서 생명의 역사를 창조하고 계심을 믿음으로 바라보며, 그 빛
가운데 거하는 복된 하루가 되시기를 소망합니다.
말씀하시는 하나님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은 한마디로 ‘말씀하시는 분’이다. 말씀으로 우주 만물을
창조하셨고, 말씀을 통해 당신을 계시하실 뿐 아니라 말씀을 통해서 성도들의 삶과 인생의 발걸음을 인도하시기 때문이다. 물론
사람도 ‘말하는 존재’이다. 말을 통해 자신의 생각과 뜻을 드러내고 의사소통이 이루어진다. 이처럼 말은 하나님과 사람의 공통점이긴
하나 중요한 차이점이 있다. 사람은 말로 끝나고, 말이 행동과 삶으로 열매를 맺기 어려운 경우가 많다. 하지만 하나님은
말씀하시는 것이 곧 일하는 것이다. 한번 말씀하시면 반드시 그 내용대로 성취되기 때문이다. 이를 나타내 주는 히브리어가 1)다바르이다.
‘말하다’는 뜻의 히브리어는 크게 두 가지가
있다. 첫째 ‘아마르’는 일반적인 언어행위를 가리킨다. 이의 명사형 ‘이므라’ 역시 ‘말, 말씀’ 등의 뜻을 갖는다.
둘째
‘다바르’도 말을 하는 행위를 가리킴에 있어서 ‘아마르’와 거의 동의어로 쓰인다. 이 둘의 중요한 차이점은 ‘이므라’에 비해
‘다바르’가 ‘성취’에 강조점이 있다는 것이다. “빛이 있으라” 하시면 곧 ‘빛’이 생겨나 말씀하신 바를 이루신다(창 1:4). 그러므로 빛이 ‘있으라’고 말씀하신 하나님의 ‘말씀’과 ‘빛’이라는 실체는 별개가 아니라 하나의 동일한 실체이다.
이사야
55:10-11 “비나 눈이 하늘에서 내려 빈손으로 다시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토지를 적시어 싹이 나게 하고 열매가 맺게 하여
파종하는 자에게 종자를 주며 먹는 자에게 양식을 줌과 같이 하나님의 ‘입에서 나가는 말’(다바르)은 결코 헛되어 돌아오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며’ 명하여 보낸 일에 형통하게” 된다.
사람의 말은 공허하지만 하나님의 ‘말씀’(다바르)은 뜻을 ‘이루는’
능력이 있다. 한번 선포된 말씀은 반드시 성취되며, 그 말씀을 기록한 것(규례)는 반드시 사람이 지켜 행해야할 의무이기도 하다.
2)아마르는 말하는 것을 뜻하는 가장 일반적인 단어라면, ‘ 다바르’는 말하는 것으로 끝나지 않고 말의 내용을 성취하는 행위와 열매까지를 포함하는 단어라는 점이다.
다바르
דָּבָרStorng number1697
1. 말. 2. 복수로 쓰인 경우. 3. 약속 Pronunciation
[ dâbâr ] Etymology / 1696에서 유래 Old Testament / 1442회 사용
아마르
אָמַר
Storng number 559
1. 말하다. 2. 소명하다. 3. 권고하다 Pronunciation
[ ’âmar ] Old Testament / 5298회 사용
אֲמַר
Storng number 560
1. 말하다. 2. 단 2:25. 3. 단 7:2. Pronunciation
[ ’ămar] Etymology / 아람어 Old Testament / 71회 사용
관련 성경 / ☞ 물어보다(스 5:9), 명하다(단 2:12, 3:13, 6: 16), 진술하다(단 7:1, 2:36), 이르다(스 5:11, 단 4:35), 알게 하다(단 2:9), 아뢰다(단 6:12), 말하다(단 6:15)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 그 복음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바 되었으니,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요 1:1-3
나 곧 나는 여호와라. 나 외에 구원자가 없느니라. 사 43:11
내가 땅을 만들고 그 위에 사람을 창조하였으며, 내가 친히 손으로 하늘을 펴고 그 만상을 명하였노라. 사 45:12
오직 성경적으로 목회를 한다는 유명한 미국 목사님이 이렇게 외치고 있었다.
하나님의 아들은 태초부터 있었습니다.
요한이 기록한 복음서에 너무나 확실하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아주 단순합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는 태초부터 계셨고 만물이 그로 말미암이 지은바 되었습니다.
내가 예전 같으면 그런 설교를 들으면서 아멘! 하면서 맞다 맞다 그랬을거다.
그런데 지금은 너무나 안타깝다.
그리고 나에게 그 복음을 들려주시고 깨닫게 하시고 믿게 하신 하나님께 너무나 감사하다.
어찌 이런일이 일어난거야…하면서 감사하고 또 감사하게 된다.
사탄의 작전이 성공한 듯 보인다.
수많은 사람들을 소경되게 만들어서 하나님이 누구신지 알아보지 못하게 했으니 말이다.
그러나 사탄은 이미 망한 존재다.
그 어떤 이들은 소경에서 눈을 떠 하나님의 영광을 보면서 환호성을 지르고 있으니 말이다.
나도 그 중에 한 사람이다. 할렐루야!
하나님은 선지자들의 입을 통해 이미 말씀하셨다.
구원자가 “나”라고, 창조주가 “나”라고,
“나” 외에 다른 신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씀대로 따라가면 창조주 구원자 하나님 여호와께서 죄인들을 찾아 이 땅에 사람되어 오셨고
부활의 영광을 보여주시려고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셨다.
그 어떤 목사님이 힘차게 외치는 그 말씀은 완전 틀린 설교다.
성경에 존재하지 않는 다른 신을 전하고 있으니 말이다.
창조주는 한 분이다. 그분이 여호와 하나님이다.
그분이 스스로 사람되어 오신 분을 하나님의 그 아들이라 부른다.
그분은 자신이 한 아들로 갈 것이라고 예언하셨고 그 예언을 성취하셨다.
말씀은 곧 하나님
요한일서 5:20 또 아는 것은 하나님의 아들이 이르러 우리에게 지각을 주사 우리로 참된 자를 알게 하신 것과 또한 우리가 참된 자 곧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이니, 그는 참 하나님이시요 영생이시라.
이번 주말에 교제의 자리, 말씀암송, 설교 등을 통해 내게 집중적으로 말씀하고 계시는 주제는 '나의 현주소는 하나님의 열심이 만든 결과물'이라는 것이다.
완벽주의적
성향 때문일까. 나는 항상 나 자신을 의심하는 경향이 있다. 스스로 검열하고, 성찰하고, 반성하여 하나님과 사람들 앞에
책잡힐만한 것이 없는 삶으로 다듬어가려고 부단히 노력한다. 때로는 예의, 도리, 윤리, 교양, 책임감, 성향 또는 기질,
믿음이라는 이름으로 이러한 작업을 부단히 지속한다. 성숙한 사람으로 무르익어가는 과정 가운데 이러한 시간이 필요함은 분명하지만,
문제는 이러한 과정을 무한 도돌이표를 찍을 때 앞으로 나아가려는 동력을 상실하고, 삶의 활력이 사라지는 데 있다.
과거에
확신 가운데 내린 결정, 믿음으로 내린 결단, 사명감으로 결심한 것들을 현재 당면한 문제 앞에서 모두 소환해 내어 뚜렷한 목적
없이 복기해 본다. 그때의 선택이 감정에 휘둘려 객기를 부린 것은 아니었는지, 인생을 덜 살아봤던 철부지로서 너무 순진했던 것은
아닌지 등 과거를 비뚤게 바라보고, 마치 그때의 결정이 실수였기를 바라는 마음까지 들기도 한다. 가만히 생각해 보면 결국 원망할
대상을 찾고자 하는 내 죄성이 발동된 탓인 듯하다.
감사하게도
아내와 지인들의 입을 통해, 설교말씀을 통해, 딸 아이의 자는 모습을 보며, 그리고 성경에 기록된 말씀을 통해 선악과를 먹지
않으려는 노력으로부터 생명나무 과실을 먹으려는 것으로의 방향전환을 하게 하시는 듯하다. 그동안 집중해왔던 나의 어떠함, 즉 나의
실수 또는 완벽함, 나의 최선 또는 미흡함 등에 초점을 맞추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아버지께서 어떠한 분이신지에 대해 집중하게
하신다.
요한복음 1:1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요한일서 2:27
너희는 주께 받은 바 기름 부음이 너희 안에 거하나니 아무도 너희를 가르칠 필요가 없고 오직 그의 기름 부음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가르치며 또 참되고 거짓이 없으니 너희를 가르치신 그대로 주 안에 거하라.
야고보서 1:17
온갖 좋은 은사와 온전한 선물이 다 위로부터 빛들의 아버지께로부터 내려오나니 그는 변함도 없으시고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으시니라.
먼저
하나님은 말씀이시다. 그리고 하나님은 참되시고 거짓이 없으시며 우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신다. 이 하나님은 과거의 나와 현재의
나를 동일하게 대하고 계시며, 그때나 지금이나 변함없이 선하고 신실하고 일하고 계신다. 하나님 아버지의 변함없음, 선하심,
신실하심, 실수가 없으신 분이라는 성품과 능력이 현재의 나를 정의한다. 만약 그러한 하나님을 믿는다면 나의 과거, 현재, 미래의 내
모습이 어떠함과 관계없이 아버지 되시는 하나님께서 내 삶에 동행해오고 계시기에 당신의 성품과 능력에 의지하여 안심할 수 있다. 반대로 그러한 하나님을 믿지 않는다면, 내가 내린 과거의 결정에 대해 확신할 수 있는 근거가 없으며, 현재 문제라고 인식하고 있는
상태가 어디서부터 어떻게 잘못되어 왔는지를 규명하기 위해 부단히 노력해야 한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머리로는 알지만 안심이 되지 않는다. 이때까지는 이것이 내 믿음의 문제라고 생각해왔다. 하지만 이것은 믿음의
문제가 아닌 행동의 문제임을 인식하게 되었다. 내가 안심이 되지 않는 이유는 하나님이 나와 동행하고 계시는지 여부를 확신할 손에
잡히는 근거가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동행하심'을 어떤 일의 결과(해결 또는 성패)를 통해 귀납적으로 경험할 수 있는 것으로
정의하게 되면 평생 하나님의 임재를 느끼는 것은 불연속적이고 일시적일 수밖에 없다. 하지만 요한복음 1장 1절이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고, 하나님이 말씀이시다. 내가 말씀과 동행하고 있다면 결과의 양상, 내 감정, 당면한 현실의 어떠함과
관계없이 내 의지와 행동으로 동행하는 것을 지속할 수 있다.
과거에는
말씀을 암송하는 것이 단순히 말씀을 깊이 묵상하고 깨달을 수 있다는 데 유익이 있다고만 생각했다. 하지만 이 말씀을 내 마음에
새기고 문자 그대로 말씀과 함께 거할 때 그것이 곧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사는 것임을 깨닫는다.
내
상태에 집중하는 대신 하나님 아버지께 집중하고, 머리로 아는 것을 믿지 못하는 이유를 찾는 대신 말씀이신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아가기 위해 집중해 보려 한다. 내가 매 순간 최선을 다해 살아간다면, 그리고 내 삶이 말씀이신 하나님의 임재 안에 있다면,
결과는 하나님께 맡겨드리는 작업이 보다 수월하고 가볍고 자연스러워지지 않을까 기대해 본다.
참
하나님이시고 영생이신 주께서 지각을 주셔서 참된 자, 곧 하나님을 알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그리고 말씀을 통해 스스로를
증거하시는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그동안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저 자신에게 집중해왔음을 돌아보게 하심에 감사합니다. 그리고 믿지
못하는 문제가 제 행동의 문제임을 깨닫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태전부터 저를 아시고, 이름으로 부르시고, 지금까지 함께 해오신
주님을 제가 인식하고 믿지 못하는 문제를 막연하게 때가 되면 해결해 주실 것이라 기대하며 기약 없이 미뤄두기보다, 말씀이신
하나님을 제 안에 적극적으로 모시고 그 말씀과 동행하며 말씀이신 하나님과 동행함으로써 하나님 당신과 당신의 섭리를 더 선명하게
보고, 확신하고, 증언하는 삶을 살게 되기를 간절히 원합니다. 내 발에 등이요 내 길에 빛 되시는 말씀을 따라 살아가는 여정을
지속할 힘을 주시고, 그 안에서 참된 기쁨과 평안과 만족을 누리게 해주세요. 경험한 기쁨과 평안과 만족을 가정 안에서, 그리고 제
삶의 주변에 증언하는 삶을 살게 해주세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말의 힘 대통령의
말, 회사에서 과장이나 부장 등 상사의 말은 힘이 있다. 그 힘을 ‘권한’, 또는 ‘권위’라 한다. 이러한 권한이나 권위는
어떻게 해서 주어지는가? 왜 대통령의 말이 힘이 있고, 상급자의 지시가 권위가 있는가? 말하는 사람의 인격과 삶, 사람의 됨됨이와
상관 없이 힘이 있다. 이 힘을 우리는 ‘위임된 권위(권한)’라 한다.
대통령은 선거를 통해 국민들의 위임을 받아 ‘대통령의 직’에 걸맞는
권한을 행사한다. 그러므로 같은 내용을 말하지만, 직위가 높을수록, 특별히 행정의 최종 결정권자인 대통령의 말에는 가장 강력한
힘이 있다. 이 모든 힘은 국민들이 투표를 통해 권한을 위임했기 때문이다. 그 힘은 5년의 직을 마치고 물러나면 전혀 힘을
발휘하지 못한다.
과거 전제왕권 시대에는 투표를 통해 공식적인 위임을 절차를 거치지 않았지만, 왕족이 국민들을 통치한다는 합의된 관습이 있었고, 그 관습이 권한을 위임하게 된다. ‘관습적 위임’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이처럼 위임받은 권한은 제약이 있다. 법 위에 군림할 수
없다. 위임받은 자가 권한을 제대로 행사하지 못하고 부당하게 행하면 그 위임을 철회하는 극단적인 경우도 있다. 그 경우에는 곧바로
물러나게 된다. 회사에서도 마찬가지다. 기업을 설립하고, 조직을 정하면 그 직책에 맞는 한계와 권한이 있고, 사람의 입에서
나오는 말의 힘은 그 직급에 비례한 힘을 갖게 된다.
여기서 아마르와 다바르의 차이점이 있다. 아마르는 사람들이 말하는
과정, 입에서 나와 공표되는 내용 자체를 의미한다. 하지만 다바르는 단순히 말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직책에 맞는 권한과 힘을 통해
말로 지시하고, 지시를 받은 상대가 이를 수행하여 어떤 ‘결과물’을 이루어 내게 된다. 따라서 모든 ‘결과물’(일)은 ‘말’을
통해 지시할 때 이를 수행함으로써 이루어지게 된다. 이 경우 ‘다바르’는 말하는 행위뿐 아니라 그 말로 인해 실행되고 열매를 맺는
일의 모든 과정과 결과를 지칭하게 된다. 이렇게 [말 = 결과]의 등식이 성립하게 된다. 말이 곧 일이고, 일은 말 혹은 지시를
함으로써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말씀의 능력과 속성 하나님의
권위는 위임된 권위가 아니다. 누구의 위임이나 추인과정을 통해 하나님이 합의된 권한을 획득한 것이 아니다. 하나님은 그 자체로서
힘이 있고 능력이 있으시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말씀하시면 하나님 자신의 권위와 힘으로 그 말씀의 내용이 성취가 된다. 이처럼
말씀이 육신이 되어 오신 분이 바로 예수님이다.
1) 선포된 말씀 말씀을 뜻하는 히브리어 명사 ‘다바르’가 여호와와 결합되어 사용된 3)데바르 아도나이,
곧 ‘여호와의 말씀’(the Word of the Lord)이란 표현이 구약성경에 259회나 사용되었다. 이는 주로 선지서에서
선지자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할 때 하나의 ‘공식’처럼 사용한 말이다. 즉, 선지자가 전하는 말은 자신의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신 말씀’ 임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호 1:1, 욜 1:1, 욘 1:1, 암 1:1, 미 1:1, 습 1:1, 학 1:1,
말 1:1).
시편 119:130 “주의 말씀을 열므로 우둔한 자에게 비취어 깨닫게 하나이다”
‘주의 말씀’(다바르)은 “열어서 우둔한 자를 깨닫게 하는” 말씀이다. 주의 말씀을 연다는 것은 ‘언어/말’ 속에 포장된 하나님의 말씀의 실체를 꺼내어 증거하는 것을 가리킨다.
하나님은 ‘언어’를 통해 말씀의 형태로 계시하시는 분이다. 그
과정에서 하나님의 생명, 능력, 지혜, 창조 등의 모든 속성은 ‘말’이라는 언어의 보자기에 싸여서 전달되기에 극히 일부만 그
실체가 보여지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 말씀을 아무리 들어도 우둔하기 때문에 깨닫지 못하고, 그 말씀 속에 있는 진정한 의미와
생명의 능력을 발견하지 못한다. 그래서 하나님은 입을 ‘열어서’ 우리가 알아들을 수 있는 말씀으로 선포하실 뿐만 아니라 다시한번 그
말씀의 보자기를 벗겨내고, 껍질을 벗겨내어 이면의 뜻을 깨닫게 해주신다(롬 2:29). 언어의 형태로 포장된 말씀의 실체를 열 때
그것은 마치 빛이 비취는 것과 같아 우둔한 자도 깨닫게 되는 것이다.
2) 기록된 말씀 - ‘글’, ‘행적’, ‘사적’ ‘다바르’는 선지자나 하나님의 종들의 입을 통하여 선포된 말씀일 뿐 아니라 그것을 여러 가지 형태로 기록하여 대대로 지켜야할 규범으로 정하셨다.
① 역대상 29:29 “다윗 왕의 시종 행적이 선견자 사무엘의 글과 선지자 나단의 글과 선견자 갓의 글에 다 기록되고”
“다윗 왕의 시종 행적(다바르)”이 ‘기록된 말씀’이다. 그런데 이 ‘기록된
말씀’이 생겨나게 된 과정을 보면, 가장 먼저 다윗 왕의 ‘명령’(말)이 있고, 그 명령(말)을 받아 신하들이 정책을 실행하는
실천이 있게 되고, 실행한 그 일을 기록할 때 ‘다윗 왕의 시종 행적’이 여러 사람의 글에 실리게 된다. 따라서 성취된 모든
‘일’은 저절로 된 것이 아니라 먼저 ‘말씀’(다바르)이 있고 그 말씀대로 행함으로써 성취된 ‘일’(다바르)이 있게 되고, 그
이후에 그 내용을 책에 기록함으로써 ‘기록된’ 말씀이 된다. 이 세 가지 모두를 포함하는 단어가 히브리어 ‘다바르’이다.
② 역대하 13:22 “아비야의 남은 사적(다바르)과 그 행위와 그 말은(다바르) 선지자 잇도의 주석 책에 기록되니라”
위 구절에서 ‘사적’과 ‘말’이 모두 히브리어 ‘다바르’이다.
아비야가 선포한 ‘말’(다바르)과 ‘행적’(다바르)이 잇도의 주석책에 기록되어 후세에 전해지도록 보존한 것이다. 역대하 9:29
에서 “솔로몬의 행적(다바르)은 ... 선지자 나단의 글(다바르)과...”라고 함으로서 ‘행적’과 ‘글’이 둘 다 ‘다바르’로
쓰였다.
③ 열왕기상 14:29 에서도 “르호보암의 남은 사적(다바르)과 무릇 그 행한 일이 유다 왕 역대지략(다바르')에 기록되지 아니하였느냐”라고 하였다.
3) 성취된 말씀 - ‘일’, ‘기사’
① 창세기 20:8에서 아비멜렉은 “그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모든 신복을 불러 ‘그 일’(다바르)을 다 ‘말하여’(다바르) 들리매 그 사람들이 심히 두려워 하였더라”고 하였다.
아비멜렉이
신복들을 불러 말한 ‘그 일’은 창세기 20:6-7에서 하나님이 꿈에 그에게 이르신 ‘말씀’(다바르)이다. 그 말씀의 내용은
“네가 온전한 마음으로 이렇게 한 줄을 나도 알았으므로 너를 막아 내게 범죄하지 않게 하였나니 여인에게 가까이 못하게 함이 이
까닭이니라 이제 그 사람의 아내를 돌려 보내라 그는 선지자라 그가 너를 위하여 기도하리니 네가 살려니와 네가 돌려 보내지 않으면
너와 네게 속한 자가 다 정녕 죽을 줄 알지니라”는 것이다. 이 구절에서 ‘다바르’는 말하는 것과 말한 것의 성취를 뜻하는
‘일’의 두 가지 의미로 사용되었다. 하나님이 아직 아비멜렉의 가족을 죽이는 ‘일’(다바르)을 행하시지는 않았지만 그렇게
하시겠다고 ‘말씀’(다바르)하신 것 자체(선포)가 이미 말씀의 ‘성취’(다바르)를 포함하고 있기 때문에 그 말을 들은 신복들이
심히 두려워 한 것이다. 이처럼 히브리어 ‘다바르’는 단순히 입에서 선포된 ‘말씀’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그것의 ‘성취’까지를
포함하는 단어이다.
② 출애굽기 4:28에서 “모세가 여호와께서 자기에게 부탁하여4)보내신 모든 말씀과 여호와께서 자기에게 5)명하신 모든 이적을 아론에게 고하니라”라는 말씀에서도 ‘다바르’는 ‘말씀과 이적’이라는 두 가지 뜻을 나타내준다.
이 구절의 특이한 점은 ‘말씀’(다바르)을 보내고, ‘이적’을
‘명령하셨다’는 것이다. 이 말은 사실 ‘말씀’을 ‘명하고’, ‘이적’을 ‘보내는’ 것으로 표현하는 것이 훨씬 자연스럽다.
그런데도 서로 바꿔서 표현한 것은 이 둘이 하나의 동일한 행위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말씀’하신 것이 곧 ‘이적’이기에 말씀을
‘보낸’ 것은 곧 이적을 보낸 것과 같다. 따라서 ‘말씀’과 ‘이적’은 사실 같은 것의 다른 표현일 뿐이다. 하나님의 말씀이 곧
이적이고, 이적은 곧 하나님의 명령(말씀)하신 바대로 이루어진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성도는 하나님의 ‘말씀’(다바르)이 선포되면 그대로 순종하고, 그 말씀을 의지하는 생활을 하여서 삶 속에서 ‘열매’(다바르)를 맺어야 한다.
③ 시편 119:9에 나오는 ‘청년’은 이와같은 삶을 살아가는 참 성도를 가리킨다.
“청년이 무엇으로 그 행실을 깨끗케 하리이까 주의 말씀(다바르)을 따라 삼갈 것이니이다”
이 구절에서 주의 ‘말씀’이 ‘다바르’이다. 영어성경(NIV)에는 “By
living according to your word”(주의 말씀을 따라 살아감으로서)로 그 의미를 제대로 살려서 번역하였다.
주의 ‘말씀’(다바르)을 ‘지키며’ 살아가는 삶이 거룩한 행실을 유지하는 비결이다. 주의 말씀을 지키는 것은 곧 그 말씀을 내 삶
속에서 성취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4) 성육신 하신 말씀 이는 말씀이 선포나 기록된 언어의 형태가 아니라 우리의 육신과 삶 자체로 체화되어 임하신 가장 강력한 형태의 말씀이다.
요한복음 1:14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이 경우는 단 한 번의 유일무이한 말씀의 형태, 가장 강력한 말씀이다.
말씀이 육신이 되신 분의 모든 언어과정과 행동은 모두 하나님의 말씀이요, 권위가 있으며, 힘이 있는 말씀이다. 따라서 이분의
말씀은 성경을 인용하거나 설교할 때만 말씀이 아니라, 예외적으로 그분의 입을 통해 발화(發話)된 모든 언어는 곧 말씀 그 자체가
된다. 그리고 그 권위는 역시 누구에게 위임된 권한이 아니라 스스로의 권위로 말씀하시기 때문에 창조의 능력, 치유의 능력이
있다.
이상의 내용을 살펴볼 때, 히브리어 ‘다바르’는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속성과 능력을 가장 잘
나타내 주는 단어이다. 말만 많고 행함과 열매가 없는 사람의 말과 달리 하나님은 말씀하시면 반드시 성취가 되기 때문에 말씀이 곧
일이다. 하나님의 ‘말씀’(다바르‘)을 받은 성도들 또한 말만 하는 사람이 아니라 말을 하면 곧 성취되는 능력의 사람이 되기를
소망해 본다.
11월 17일(월) 요한복음 1-3장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말씀은 곧 하나님(1:1)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In the beginning was the Word, and the Word was with God, and the Word was God.
태초에 - 온 우주 창조의 시작을 선포하는 창 1:1을 연상시키는 본 구절을 매개로 하여, 저자 요한은 구약과 일관된 흐름으로 신약의 복음서를 쓰고 있다. 즉 계시의 시작인 천지 창조의 기사로부터 시작하여 그리스도에 이르러 계시가 완성된다고 볼 때, 본 구절은 이 복음서의 서두로서 확고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특히 '태초'(아르케)라는 용어는 원래 '시간과 공간의 시초'를 의미한다. 따라서 고대 그리이스의 자연 철학자들은 '만물의 시초(始初)'라는 뜻으로 이 용어를 사용하였다. 그러나 여기서는 처음 시간의 특별한 한 시험 뿐만 아니라 초(超) 시간적인 영원을 나타내는 말로 사용되었다(1:1-18 주제 강해 '베레쉬트와 엔아르케의 의미' 참조).
말씀이 - 원어상 '말씀(로고스)은 '수집', '계산', '목록', '말' 등을 의미한다. 그리고 이 용어는 철학적인 의미로서 (1) 어떤 법칙, 의미, 구조의 내용, (2) 형이상학적 실재나 사물을 이해할 수 있는 법척, (3) 우주론적인 실재들을 표상하는 개념 등으로 사용되었다. 이 용어를 신학적 의미로 전환시킨 사람은 플라톤 철학에 심취했던 1세기의 유대인 철학자인 알렉산드리아의 필로(Philo of Alexandriaa)였다. 그는 '하나님의 로고스'란 하나님께로부터 나와서 하나님과 세상을 연결하며, 인간을 하나님과 세상 사이의 중재자(즉 대변자거나 제사장)로 부각시키는 것이라고 하였다. 즉 로고스란 하나님의 창조 능력의 총화(總和)이자 이 세상을 질서있게 다스리는 존재라는 것이다. 이와는 달리 성경 전반에 걸쳐서 '로고스'는 주로 하나님의 권능(시 147:15;148:8;히 4:12)과 계시(사 2:1;렘 26:1;딤전 5:17)를 의미한다. 특히 요한은 본절에서 '로고스'의 영원성, 인격성, 신성(Deity)을 부각시킴으로써, '로고스'가 바로 계시의 완성자이신 그리스도임을 보여준다. 본절에서와 마찬가지로 14절에서의 '말씀'에서도 '로고스'의 인격성이 뚜렷이 표현되고 있다. 본서에서 '믿다'(*, 피스튜오), '사랑'(*, 아가페)과 더불어 주요 개념으로 쓰인 이 용어(로고스)는 주로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과 강화(講和)로 구성되어 있는 본서의 특성까지도 잘 드러내고 있다(1:1-18 주제 강해 '로고스 개념의 배경과 그 의미' 참조).
계시니라 - 존재를 나타내는 동사 '에이미'(*)의 3인칭 단수 미완료형 '엔'(*)을 사용함으로써 요한은 (1) '로고스'가 태초의 어느 시점에서 창조된 것이아니라 계속하여 존재해 왔다는 사실을 보여줌과 아울러 (2) 예수 그리스도의 선재성(先在性)과 영원성을 드러낸다. 따라서 당시의 이방 철학의 인본주의적 경향과 유대교적 신관(神觀)의 오류를 분쇄하고, 세상의 시초 이전에 말씀이신 그리스도가 존재하였다는, 그리고 지금도 존재하고 계시다는 엄연한 사실을 선포한 것이다. 이와 같이 하나님과 동등하게 선재하신 그리스도의 초시간적 영원성을 무시하고 '그가 존재하지 않았던 때가 있었다'라고 주장한 아리우스는 니케아 종교 회의(A.D. 325)에서 이단으로 규정되었다.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 '하나님과 함께'(*,프로스 톤 데온)에서 전치사 '프로스'(*) '...와 함께'란 뜻의 전치사들(*, 엔;*, 메타;*, 파라;*, 쉰)과 의미상 유사하다. 그러나 후자인 여러 전치사들이 주로 정적(靜的)인 공존(共存)을 나타낸다면, 전자인 '프로스'는 동적(動的) 공존을 나타낸다. 따라서 후자는 같은 시간에 동일한 공간을 점유하고 있는 것을 의미하며, 전자는 서로간의 친밀하고도 부단한 인격적 관계를 나타낸다. 따라서 이 전치사는 '서로 마주 대하는'이라고도 해석 될 수 있다. 그러므로 이 전치사를 통하여 우리는 말씀이신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창조 사역에 동참하셨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따라서 본문은 '그리스도와 하나님 사이의 영화로우신 '친교'(Robertson)를 나타내고 있을 뿐만 아니라 '삼위 일체 교리의 근간'이 되고 있다(Calvin).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 혹자는 본문에서 '하나님'(*, 데오스) 앞에 관사 '호'(*)가 없기 때문에 말씀이 절대적인 신성을 지니지 않았다고 주장한다. 그렇게 볼 경우 '말씀'은 단지 종교적 신성(神性)을 지니고 있는 막연한 존재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또한 당시 로마 제국 내에서 풍미하던 영지주의(마태복음 신약서론,'이방 종교' 참조)의 학설대로 그리스도가 하나님으로부터 유출된 존재로서 하나님보다는 하등의 신으로 전락할 위험성도 내포할 수 있다. 그러나 본문에서 '말씀'이 하나님과 동등한 분으로 표현된 것은 헬라어 문법상의 특성을 관찰하면 잘 알 수 있다. 헬라어 문장은 주어와 술어의 어순(語順)을 바꾸어 쓸 수 있다. 따라서 헬라어에서는 주어와 술어의 구분을 어순으로 결정할 수 없다는 말이 된다. 그렇다면 헬라어에서 주어와 술어를 구분하는 기준은 무엇인가? 그것은 관사이다. 따라서 주어는 관사를 가지고 있고, 술어는 주어와의 구분을 밝히기 위해 관사를 취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본문 '카이 데오스 엔 호 로고스'(*)에서 '말씀(로고스)이주어, '하나님'(데오스)이 술어임을 알 수 있다. 결국 본문은 성자 하나님의 신성에 대한 간결하고도 명확한 선포이다. 이러한 성자 하나님의 참 모습은 20:28의 도마의 고백에서 확실하게 밝혀진다. 한편 3개의 문장으로 기술된 본절은 원문 구조상 '말씀이 계시니라'(* ...호 로고스 엔...)는 주어와 동사를 중심으로 (1)말씀의 선재성과 영원성, (2) 인격성 그리고 (3) 하나님과 동등한 신성을 드러낸다. 이러한 선언은 요한복음 전체의 기독론(Christology)을 대변한다. 따라서 본절은 그리스도에 관한 심오한 내용을 단 세 문장으로 간결하게 함축한 것으로서 복음서 문장 양식 중 백미(白眉)라고 하겠다.
사막에 숲이 있다. 사막을 숲으로 만든 여인 ‘인위쩐’ 이야기
황량한 사막이었습니다. 매서운 모래폭풍이 부는 곳이었습니다. 찾아오는 사람 한 명도 볼 수 없는 곳이었습니다. 도저히 사람이 살 수 없는 곳이라고 했습니다. 그곳에 살고 있던 가난한 청년에게 시집을 온 여자는 통곡을 하다가 일주일 만에 한마디를 꺼내게 됩니다.
“여기 꽃을 심으면 안 될까요?”
그 한 마디가 시작이었습니다. 아무 것도 할 수 없다고 생각한 사막에서 할 수 있는 것을 생각했습니다.
나무가 살 수 있으면 채소도 살 수 있고, 채소도 살 수 있으면 사람도 살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녀는 매일 나무를 심었습니다. 그동안 꿈 없이 현실에 순응하며 살던 남편도 그녀와 함께 모래바람과 싸우며 나무를 심었습니다.
한 그루, 한 그루, 한 그루... 20년간 나무를 심었습니다. 그 한 그루들이 모여 숲이 되었습니다.
중국 마오우쑤 사막을 숲으로 만든 '인위쩐'의 이야기입니다.
그녀는 그 기적에 대해 이렇게 말합니다.
“사막을 피해 돌아가서는 숲으로 갈 수 없었습니다.
사막에 나무를 심었더니, 그것이 숲으로 가는 길이 됐지요.”
‘할 수 없는 것’을 찾고 있다면 ‘할 수 없는 걸림돌’만 쌓입니다.
‘할 수 있는 것’을 찾고 있다면 ‘할 수 있는 디딤돌’이 놓입니다.
* 로고스 / 신과 인간과 세상을 분명히 다르다는 것은 누구나 인정합니다. 그런데 서로 다른 신과 인간과 세상이 서로 연결되어 있다면 어떻게 연결 되느냐? 하고 묻는다면 쉽게 대답하기가 어렵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신과 인간과 세상은 로고스로 연결된다고 설명합니다. 요한복음에서 로고스를 예수 그리스도라고 합니다.
로고스는 그리스어에서 온 말이에요. 아주 오래전부터 사용된 단어인데, 여러 가지 의미를 가지고 있어요. 간단히 말하면 '말씀', '이성', '논리' 정도로 이해할 수 있어요. 하지만 로고스는 이것보다 훨씬 더 깊고 넓은 뜻을 가지고 있답니다.
로고스의 여러 가지 의미를 하나씩 살펴볼까요?
1. 말씀 또는 언어 :
로고스는 가장 기본적으로 '말'을 의미해요. 우리가 생각을 표현하고 서로 소통하는 데 사용하는 언어를 뜻하죠. 예를 들어, 여러분이 지금 이 글을 읽고 있는 것처럼 말이에요.
2. 이성 또는 사고 :
로고스는 또 우리가 생각하고 판단하는 능력을 의미하기도 해요. 문제를 해결하거나 새로운 아이디어를 떠올릴 때 사용하는 그 능력 말이에요. 마치 퍼즐을 풀 때 우리 머리 속에서 일어나는 일들과 비슷해요.
3. 우주의 질서나 원리 :
고대 그리스 철학자들은 로고스를 세상을 움직이는 원리나 법칙이라고 생각했어요. 마치 우리 몸 안에 있는 DNA처럼, 모든 것을 만들고 유지하는 기본 설계도 같은 거예요.
4. 신의 말씀 :
종교에서는 로고스를 신의 말씀이나 계시로 해석하기도 해요. 특히 기독교에서는 예수님을 '말씀이 육신이 되신 분'이라고 표현하는데, 이때 '말씀'이 바로 로고스를 뜻해요.
5. 논리나 추론 :
로고스는 또 논리적인 사고나 추론을 의미하기도 해요. 예를 들어, 수학 문제를 풀 때 우리는 로고스를 사용하고 있는 거예요. 하나하나 차근차근 생각해서 답을 찾아가는 과정이 바로 로고스와 관련이 있답니다.
6. 의미나 뜻 :
어떤 말이나 행동이 가진 깊은 의미를 로고스라고 부르기도 해요. 마치 동화 속 이야기가 우리에게 전하는 교훈 같은 거예요.
로고스의 개념은 왜 중요할까요?
로고스는 우리가 세상을 이해하고, 서로 소통하고, 문제를 해결하는 데 아주 중요한 역할을 해요. 예를 들어볼게요:
1. 학교에서 공부할 때 :
여러분이 수업 시간에 선생님 말씀을 듣고 이해하는 것, 그리고 그것을 바탕으로 문제를 푸는 것, 이 모든 게 로고스와 관련이 있어요.
2. 친구들과 대화할 때 :
우리가 생각을 말로 표현하고, 서로의 이야기를 이해하는 것도 로고스를 사용하는 거예요.
3. 새로운 것을 발명할 때 :
과학자들이 새로운 발견을 하거나, 예술가들이 새로운 작품을 만들 때도 로고스를 사용해요. 생각을 정리하고 표현하는 과정이 모두 로고스와 관련이 있답니다.
4. 세상을 이해할 때 :
우리가 자연 현상을 이해하고 설명하려고 할 때도 로고스를 사용해요. 예를 들어, 왜 비가 오는지, 왜 계절이 바뀌는지 이해하려고 할 때 말이에요.
고스는 우리 일상생활 곳곳에 숨어있어요. 여러분이 책을 읽거나, 글을 쓰거나, 친구들과 이야기를 나눌 때마다 로고스를 사용하고 있는 거예요. 심지어 여러분이 꿈을 꾸고 상상할 때도 로고스가 작용하고 있답니다.
로고스를 잘 이해하고 사용하면, 우리는 더 깊이 있게 생각하고, 더 효과적으로 소통하고, 더 창의적으로 문제를 해결할 수 있어요. 그래서 철학자들이나 과학자들, 작가들이 로고스에 대해 많이 연구하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여러분도 이제 로고스가 뭔지 조금은 알겠나요? 어렵게 느껴질 수 있지만, 사실 우리는 매일매일 로고스를 사용하며 살아가고 있어요. 앞으로 여러분이 무언가를 생각하거나 말할 때, 혹은 새로운 것을 배울 때 "아, 이게 바로 로고스구나!"라고 생각해보세요.
“말씀”의 실체가 곧 “하나님”
“하나님”은 살아계시기 때문에 “말씀”은 항상 살아 계시다는 것입니다. 성경에서는 인간은 하나님의 “영”이 없는 “혼”의 존재를 “죽은 자”로 말씀하십니다(마 8:22) 그러므로 “죽은 자”는 살아있는 “말씀”을 먹을 때 반드시 살아나고 살아 있는 “말씀”이 내 몸 안에 있을 때 “말씀”이 나를 변화시키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4:12
그런데 오늘날 기독교목회자들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은 사람의 말씀이지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 말씀의 씨가 있느냐 없느냐에 따라 생명이 죽기도 하고 살기도 합니다.
누가복음 8:11 씨는 하나님의 말씀이요, 하나님의 “말씀”을 “씨로 비유”하기 때문에 “씨”라는 것은 생명을 가지고, 하나님은 하나님을 낳고, 낳고 종족을 이어가는 것이 “씨”의 본질입니다.
그런데 “씨”라는 것은 땅에다 심으면 “진리의 씨”와 “거짓의 씨”는 추수 때가 되어야 분별하지 자랄 때는 똑 같이 자라기 때문에 분별을 못하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13:29~30 주인이 가로되 가만 두어라 가라지를 뽑다가 곡식까지 뽑을까 염려하노라 “둘 다 추수 때까지 함께 자라게 두어라 추수 때에 내가 추수꾼들에게 말하기를 가라지는 거두어 불사르게 단으로 묶고 곡식은 모아 내 곳간에 넣으라 하리라” 오늘날 기독교 목회자들이 자신이 소유한 말씀이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할 수 있으나 하나님의 말씀은 “씨”(혈통)로 그 종족을 보존하면서 오늘날까지 이어오는 것이지 목회자의 말씀은 유대 종교지도자들같이 “씨”로 낳은 말씀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8:38~40
예수께서
유대 종교지도자들에게 너희가 아브라함의 자손이면 왜 아브라함의 말을 못 알아듣느냐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너희가 하나님께 속
한자라면 어찌하여 내 말을 알아듣지 못하느냐 내가 진리를 말하는데 내 말을 못 알아듣는 것은 하나님의 속 한자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8:47 하나님께 속한 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나니 너희가 내 말을 듣지 못함은 하나님께 속하지 아니하였음이로다.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기 때문에 내 말을 못 알아듣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똑같은 “말씀”을 전해도 “씨”가 있는 예수가 전하면 진리요, “씨”가 없는 기독교 목회자가 전하면 거짓이라는 것입니다. “씨”가 다르기 때문입니다.
베드로전서 1:23 너희가 거듭난 것이 썩어질 씨로 된 것이 아니요, 썩지 아니할 씨로 된 것이니 하나님의 살아있고 항상 있는 말씀으로 되었느니라,
사도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갈라디아서 1:11~12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하노니 내가 전한 복음은 사람의 뜻을 따라 된 것이 아니라 이는 내가 사람에게서 받은 것도 아니요 배운 것도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로 말미암은 것이라.
오늘날 신학교에서 배운 목사들의 지식은 생명을 살릴 수 없는 “씨”가 없는 배설물이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씨”가 없는 목사들의 말씀 가지고는 백날 설교말씀을 들어도 단 1%도 죽어있는 영혼을 살릴 수가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씨”로 낳고 낳으면서 “계시”를 받는 것이지 배우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성경에 등장하는 선지자들이나 예수님의 제자들이 모두 “계시”를 받아 성경을 기록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마태복음 11:27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는 자 외에는 아버지를 아는 자가 없느니라.
이같이 하나님의 말씀은 “계시”를 받는 것이지 “신학”이 아닙니다.
요한복음 14:26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시리라.
그러므로 하나님의 “씨”를 받아서 거듭나야만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입니다.
베드로전서 1:23 너희가 거듭난 것이 썩어질 씨로 된 것이 아니요 썩지 아니할 씨로 된 것이니 하나님의 살아 있고 항상 있는 말씀”이라고, 합니다.
인간은 육적인 씨를 받고 부모의 자녀로 태어난 것처럼 하나님의 자녀가 되려면 하나님의 “씨”를
받고 태어나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기독교인들이 수많은 목회자의 말씀이 모두 하나님의 말씀으로 알고 신앙생활을 하지만
모두가 거짓이라는 사실을 전혀 모르고 신앙생활을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유대 종교 지도자들의 영성은 오늘날 목회자들과는 비교할 수
없는 철두철미한 종교지도자들입니다. 그런데 예수께서는 유대 종교지도자들에게 너희가 하나님께 속 한자라면 어찌하여 내 말을 깨닫지
못하느냐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기 때문에 내 말을 못 알아듣는 것이라는 것입니다(요 8:44) 그러므로 어떤 “영”이 역사하는지는 그 사람의 입에서 나오는 말로 분별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요한 1서 4:6 하나님을 아는 자는 우리의 말을 듣고 하나님께 속하지 아니한 자는 우리의 말을 듣지 아니하나니 진리의 영과 미혹의 영을 이로써 아느니라, 유대인들이 예수를 믿지 않은 것은 그들이 하나님께 속한 자가 아니라는 증거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의 “씨”로 낳은 사람은 예수님의 말씀을 알아듣고 못 알아듣는 다면 하나님의 “씨”로 낳은 사람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십계명에 나 외에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고 하십니다. 왜 이런 계명을 주셨겠습니까? 예전이나 오늘날에도 다른 “신”을 섬기기 때문에 이런 계명을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을 섬기는 것은 당연한 일이지 어떻게 다른 “신”을 섬기냐고 하실 것입니다.
오늘날 기독교인들이 신앙생활하면서 착각하고 있는 것은 바로 하나님의 형상을 내 마음속에 섬기면서 하나님을 믿고 있다는 것이 “우상”이라는 것입니다. 말끝마다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아버지, 아버지 이렇게 하나님의 형상에게 기도하는 것이 “우상”이라는 것입니다. “말씀”의 실체가 곧 하나님이라는 것을 명심해야 하는 것입니다. “말씀”을 모르고 하나님을 잘 믿는다는 것이 “우상”이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기독교인들이 “씨”가 있는 말씀을 소유해야만 하나님을 내 안에 모실 수 있고 하나님께서 주신 영원한 생명의 자녀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 없으면 어두움이 되는 것이요, “말씀”이신 하나님을 모시고 있지 못하면 생명이 없으므로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도 없으며, 입으로는 주여, 주여 한다고 하지만 실제로는 하나님과는 무관한 사람이 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잠언 9:11 “의인은 그 지식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느니라” 그러나 이와 같은 말씀의 배경에는 반드시 말씀을 깨달아서 예수를 아는 것과 믿는 것이 하나가 되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데 까지 이르라고 하시는 말씀도 있다는 것을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호세아 6:6 “나는 인애를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며 번제보다 하나님(말씀)을 아는 것을 원하노라”고 하심으로 교회에 나가서 예배를 열심히 드리고 헌금 충성 봉사드리는 일보다 더 중요한 것은 “말씀”을 알기를 더 원하신다는 것입니다. 호세아 4:6 “내 백성이 지식이 없으므로 망하는 도다 네가 지식을 버렸으니 나도 너를 버려 내 제사장이 되지 못하게 하신다고 합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말씀”을 아는 지식이 없으면 망하고 제사장이 되지 못하게 하신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소유하고 날마다 자라 가야 하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책 제목
헬라어 성경에는 ‘카타 이오안넨’으로 되어 있다. 이는 ‘요한에 의한’이란 뜻으로 이에 근거하여 오늘날 모든 성경은 본서의 제목을 '요한복음'이라고 부른다.
기록자와 연대
1) 기록자
다른 복음서와 같이 누가 기록했는지 그 이름이 명확하게 밝히고 있지는 않지만, 자신을 사건의 목격자(1:14, 19:35,
21:24-25)로 진술할 뿐만 아니라, 최후의 만찬 때 예수의 품에 의지하여 예수를 팔자가 누구인지를 질문한 정도로 가까우며,
예수의 사랑하시는 제자(13:23, 19:26, 20:2, 21:7, 20)로 밝히고 있는 것으로 보아 열두 제자 가운데
요한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요한의 제자였던 폴리캅의 제자 이레니우스를 비롯한 초대교회의 교부들 대부분이 이책의 저자를
요한이라고 말하고 있는 점도 그것을 뒷받침 해준다.
요한이란 이름의 뜻은 ‘여호와께서 사랑하는 자’라는 의미이다. 요한은 세베대의 아들이며 야고보의 형제이다. 요한의 어머니는 살로매이다(마 27:56, 막 15:40).
요한이라고 하면 흔히 ‘사랑의 사도’라는 별칭을 연상하게 된다. 그는 사실 사랑을 논하기에 너무나 성급한 성격을 가진
사람이다. 그러나 그는 변화되었고 사랑의 사도가 되었다. 그의 글에는 사랑이 곧 주제가 되었으며 그는 사랑을 강조하는 사도가
되었다. 그런가 하면 생전에는 주님으로부터 특별한 사랑을 받았고(요 21:7, 20) 그는 주님의 핵심 일꾼으로서 남다른 훈련과
영적인 체험을 가졌다(마 17:1, 요 5:37).
요한은 주님의 공생애 삼년 동안 사랑받는 제자로서 훈련되어 갔다. 그는 실로 사랑받는 제자로서 훈련을 받았다. 요한은
12제자 중 유일하게 십자가 형장까지 쫒아간 제자이다. 그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확실히 보았고, 만났으며 또 교제하였다(요
20:20). 그래서 그는 확신이 있었고 또한 능동적인 전도사역을 감당하기도 하였다. 그는 교회가 핍박을 받아 사방으로 흩어질
때에는 예루살렘 교회에 머물렀다. 그는 요한복음과 요한 1, 2, 3서와 계시록을 후대에 남겼다. 그의 글에는 믿음과 사랑이 많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그는 예수님께서 돌아가실 때에 마리아(예수님의 모친)를 봉양하였으며, 도미티아누스 황제 때 밧모섬으로 유배되어 일생을 마친 것으로 보인다(계 1:9).
2) 기록연대
이 책이 기록된 시기는 아마도 A.D.85-90년 경인 것으로 추정된다. 요한이 기록한 책 중에 가장 먼저 쓰여진 듯하다.
21:18-19에 베드로의 순교에 관한 예수 그리스도의 예언이 인용된 것을 볼 때 이미 베드로는 순교한 다음에 쓰인 것으로 추정되며, 미티아누스 황제 시절 박해을 받아 밧모섬으로 유배 보내진 시점으로 생각된다.
당시에 교회는 A.D.70년의 예루살렘의 함락 이후, 율법을 중시하는 바리새파들이 더욱 유대주의를 강조하였기 때문에 율법이 아닌 믿음을 강조하는 것에 대하여 핍박과 박해가 거세졌을 뿐만 아니라, 영지주의의 침투로 인한 교회내의 갈등이 생기게 되었다. 영지주의 자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육체로 오심과 하나님 되심을 부정하고, 하나님의 사랑과 인간의 죄, 그리스도의 속죄, 육체의 부활을 부정하였으며 그들이 교회 안에 들어옴으로써 기독교는 일대 위기를 맞게 되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사도 요한은 영지주의적 관점에서 예수님을 이해하려는 사람들에게 육체로 오신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를
유대인이든, 헬라인이든 누구든지 믿기만 하면 영생을 얻는다는 참된 복음을 강조하여 전할 필요가 있었다(요 3:16).
기록 목적
요한복음의 기록 목적은 직접적으로 나타나 있다. “너희로 에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다(요 20:31).” 그렇게 하기 위하여 사도 요한은 예수님께서 행하신 다양한 표적과 강론을 통해 예수님께서 유대의 메시아, 구약을 성취하신 구원자이심을 보여주며, 아버지와 동일하신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강조하고 있다.
주제
1) ‘로고스’이신 예수 그리스도(메시아)
요한복음의 중심 주제는 중심인물이신 예수 그리스도이다. 그것은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 메시아”라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으로
이것은 한 마디로 ‘아들-메시아’로서 예수에 대한 계시(선포)이다. 특히 예수는 성경적이며 유대적인 기대 속에 성취된 메시아이심을
보여주는데 다른 복음서와는 달리 요한복음에서는 히브리어인 메시아(Messiah)란 단어가 그대로 사용함으로(1:41;
4:25). 로고스이신 메시아가 육신으로 오셨음을 선언하며 이야기를 풀어 간다.
또한 서두(1:1-18)에서 진술되고 있는 말씀(logos)이신 예수께서 성육신하셔서 우리 가운데 거하시며 은혜와 진리와
영광을 드러내신다. 무엇보다도 성육하신 로고스이신 예수는 하나님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며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였다. 요한복음의
로고스 기독론은 말씀을 통한 하나님의 창조사역에서 ‘성육신 하신 말씀’을 통한 구속사역으로 전환되고 있는데 로고스의 이러한 모습은
요한복음의 중요한 상징인 빛(fw/j)과 생명(zwh,)과 깊은 연관을 가지고 있다.
2) 믿음의 중요성
‘믿는다’(pisteuo)라는 단어가 요한복음에 98번이나 언급되고 있는데 이것은 공관복음(마가복음
11번; 마태복음 14번; 누가복음 9번)과 비교해 볼 때 매우 독특하다. 요한복음은 사람들을 두 부류 즉 그리스도가 예수라는
사실을 믿는 사람들과 그렇지 않은 사람들로 나누고 있는데 믿는 사람들은 영생을 가진 사람들(요 3:15-16, 36; 5:24;
6:40, 47)로서 빛 가운데 행하며(12:46), 믿지 않는 사람들은 마지막 날에 심판받는 사람들(3:18; 12:48)로서
어두움 가운데 행한다. 확실히 요한복음에서 믿음은 현재의 삶과 미래의 운명을 결정하는 근본적인 이슈로 제시된다. 한 마디로 요한복음의 중심된 메시지는 “믿느냐, 믿지 않느냐 이것이 문제로다”로 요약할 수 있다.
특징
1) 예수님의 직접적인 계시
요한복음에는 “나는…이다”(ego eimi, I am)란 말이 일곱 번이나 나온다.
예컨대 나는 생명의 떡, 세상의 빛, 양의 문, 선한 목자, 부활이요 생명, 길이요 진리요 생명, 참 포도나무라는 말씀이
그것이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자신을 말씀하실 때 “나는 스스로 있는 자”(출 3:14)란 말씀과 같은 표현이다. 즉,
예수님은 하나님이란 뜻이다.
2) 하나님의 아들 – 신성의 강조
마태가 왕의 관점, 마가가 종의 관점, 누가가 인자(사람의 아들)이란 관점으로 쓰였지만, 요한은 하나님의 아들 즉, 하나님의
관점을 가지고 예수님의 신성을 강조하고 있다. 따라서 공관복음서(마태, 마가, 누가)엔 나오지 않았던 인물들과 예수님의 대화가
요한복음의 주제에 맞춰 나오기도 한다. 나다나엘(1:45-51), 니고데모(2:23-3:21), 사마리아 여인(4:1-42),
음행한 여인(7:53-8:11)과의 대화에서 예수님의 신성들이 잘 드러난다.
3) 기적이 아닌 표적
또 요한복음에는 이적이나 기적이란 말보다는 표적이란 말을 많이 쓰고 있다. 이 말은 예수님의 표적이 단순히 남을 놀라게 하고 병을 고치고 도와주는 초자연적 사건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고, 그 행적의 의미에 대하여 기술을 함으로 주님께서 하나님의 아들 되심을 보여주는 계시성을 강조한다.
(요한복음에는 일곱 가지의 표적이 나온다. 물로 포도주를 만든 것에서부터 왕의 신하의 아들을 고친 것, 38년 된 병자를 고친
것, 5천 명을 먹이시고, 물위로 걸으신 것, 나면서 소경된 자를 고치시고, 나사로를 다시 살리신 일곱 가지의 표적이 기록되어
있다. 그 표적의 목적은 20장 31절에 잘 나와 있다.)
4) 예수님께서 기도 하셨다는 표현이 나오지 않음
그리고 예수님께서 기도하셨다는 표현이 자주 나오는 공관복음서와는 달리 요한복음에는 ‘기도’라는 단어가 예수님과 연관되어 단 한
번도 나오지 않는다. 원어로 ‘기도하다’를 의미하는 ‘proseuchomai(프로슈코마히)’라는 단어가 요한복음에서는 단 한
번도 등장하지 않으며, 대신 ‘구하다, 묻다, 말하다’란 뜻의 ‘erōtō(에로토)’가 몇 번 나올 뿐이다.
5) 시간과 장소의 독특성
공관복음서에는 예수님의 주 활동무대가 갈릴리로 되어 있으나 요한복음에서는 유대지방에서의 사역이 강조되고 있다. 시간상으로도 차이점이 있다. 공관복음에서는 시간 계산의 표준이 되는 유월절이 한 번만 기록되어 있으나 요한복음에는 세 번 나온다.
6) 단순한 헬라어 표현
헬라어를 배울 때 요한복음을 가지고 하는 경우가 많다. 요한복음이 네 복음서 중에서 단어가 가장 쉽고 간결한 표현을 많이
사용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속에 담긴 신학적인 통찰력은 대단히 무게가 있고 심오하다. 즉, 영원하신 주님, 곧
로고스(말씀)로서의 예수님을 주제로 삼고 있는데 그분은 이 세상이 창조되기 전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며, 세상이 창조될 때에
하나님과 함께 일하셨다(1:3)는 것을 잘 밝혀주고 있다.
7) 나오지 않는 표현들
요한복음에는 공관복음서에 나오는 많은 내용이 빠져 있는데, 먼저 요한복음엔 족보가 나오지 않는다. 단지 시작과
끝이며(계1:8, 21:6, 22:13) 영원하신(창 21:33; 신 33:37; 사 9:6; 40:28)분으로 설명한다. 그리고
예수님이 태어나셨던 상황에 대한 묘사도 없고 어린 시절에 대한 기록도 없다. 죄와 용서에 대한 회개의 외침도 없으며, 세례자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신 자세한 기록도 나오지 않는다. 사탄에게 40일간 시험받으신 부분도 없고, 귀신들을 쫓아내는 기록도 나오지
않는다. 또한 12제자들을 택하시거나 70명을 내보내시는 기록이나 변화산의 변화에 대한 기록조차도 없다.
내용과 구조
요한복음은 관점에 따라 다양하게 나눌 수 있다. 주된 내용의 전개에 따라 나누면 1) 하나님 아들의 성육신, 2)
하나님 아들의 증거와 유대인들의 배척, 3) 하나님 아들의 가르침, 4) 하나님 아들의 수난과 영광으로 표현할 수 있고, 주된
목적에 따라 나누면 1) 예수님께서 누구신지를 알려주는 표적, 2) 그분이 어떠한 사역을 통해 영광을 이루셨는지로 나눌 수 있다.
1) 표적의 책(1-12장)
① 출생 : 성육신과 세례(1:1-34)
② 공생애 : 그리스도 사역(1:35-12장)
2) 영광의 책(13-21장)
(1) 수난
① 다락방 강화(13-16장)
② 체포에서 십자가까지(17-19장)
(2)) 부활 : 부활과 이후 행적(20-21장)
참된 예배_요 4:21-26
윤효배 목사
■ 들어가며
6월은 ‘선교’라는 주제 아래 요한복음과 요한서신의 말씀을 읽게 된다. 사랑의 사도라 일컬어지는 요한의 기록을 통하여
우리에게 향하신 하나님의 깊은 사랑들을 잘 깨닫는 은혜가 있기를 바라고 또한 받은 사랑을 주변 사람들에게 잘 전하는 한 달이
되었으면 한다.
오늘은 말씀일기 본문인 요한복음 4장의 내용 중에 예수님과 사마리아 여자와의 대화를 통해 하나님께서 찾으시는 예배가 어떠한 지 생각해 보는 시간을 가지려 한다.
■ 말씀과 함께
본문의 배경 : 예수님과 사마리아 여자와의 대화
1) 대화의 주요 내용
- 사마리아의 수가라 하는 동네에 야곱의 우물 곁에 가신 예수님(3-6)
예수님 : 한 사마리아 여자에게 물을 달라하심(7)
여 자 : 어찌 사마리아 여자에게 물을 달라고 하는지 물음(9)
예수님 : 예수께서 자신이 누구인지를 몰라서 내게 생수를 구하지 않았다고 말함(10)
여 자 : 우물이 깊어 생수를 줄 수 없다고 말하고, 야곱보다 큰 자인지를 물음(11-12)
예수님 :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할 것이라 말함(14)
여 자 : 내게 그런 물을 달라고 함(15)
예수님 : 네 남편을 불러 오라고 함(16)
여 자 : 남편이 없다고 함(17)
예수님 : (네게 남편 다섯이 있었고, 지금 있는 자도 네 남편이 아니니) 네 말이 참되다고 말하심(18)
여 자 : 내가 보니 선지자로소이다. 예배할 곳이 어디인지 물음(19-20)
예수님 : 너희가 아버지께 예배할 때가 이르리라(21), 너희는 알지 못하는 것을 예배하고 우리는 아는 것을 예배하노니 이는
구원이 유대인에게서 남이라(22), 아버지께 참되게 예배하는 자들은 영과 진리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아버지께서는
자기에게 이렇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23)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영과 진리로 예배할 지니라(24)
여 자 : 곧 그리스도라 하는 이가 오시면 모든 것을 우리에게 알려주시리라(25)
예수님 : 내가 그리스도라 하심(26)
2) 특징적인 표현과 그 의미 : (한 영혼의 구원의 서정과 유사)
① 유대를 떠나사 다시 갈릴리로 가실새 사마리아를 통과하여야 하겠는지라(3) : 먼저 사마리아의 한 여인을 찾으신 예수님(9) - 한 영혼 한 영혼에 대한 관심이 있으심
②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함(14) :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는 물을 주시는 예수님 - 영적인 존재로서 구원을 허락해 주시는 분이심을 표현
③ 네 남편을 불러오라(16) : 죄에 대한 깨달음과 치유 - 자기 죄를 철저히 깨달아야 할뿐만 아니라 그것의 회복은 사람과의 관계 속에서 드러나야 함
④ 이 산에서도 말고 예루살렘에서도 말고 아버지께 예배할 때가 이르리라(21), 너희는 알지 못하는 것을 예배하고 우리는 아는 것을 예배하노니(22) : 장소가 아닌 대상 - 예배의 장소가 중요한 것이 아니고 예배하는 대상이 중요함
⑤ 참되게 예배하는 자들은 영과 진리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아버지께서는 자기에게 이렇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23) : 거짓되게 (아무렇게 또는 자의적으로) 예배드리는 것이 아니라 참되게 예배하는 자를 찾으신다.
하나님께서 찾으시는 참된 예배
1) 영과 진리로 드리는 예배
① 하나님은 영이시니(pneu'ma oJ qeov", 24a) : 예배 대상(하나님의 존재)의 바른 인식
→ 어느 장소에 하나님께서 계시는 것처럼 생각하여 어떤 장소를 거룩한 곳으로 생각하며 예배드리지 않는다. 하나님은 무소부재(無所不在) 하신 분이심으로 어디에 있든지 하나님의 존전에 나아가는 마음으로 드리는 것이다. (특별히 어떠한 형상이나 모양을 만들지 않도록 해야 한다. - 2계명)
② 영과 진리로(24b) : 예배 방법 - 성령(pneuvmati, 프뉴마티)과 진리(ajlhqeiva/, 알레세이아)로!
- 성령 하나님의 일하심 : “26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는 마땅히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27마음을 살피시는 이가 성령의 생각을 아시나니 이는 성령이
하나님의 뜻대로 성도를 위하여 간구하심이니라” (롬 8:26-27)
- 진리 되신 예수님의 보혈의 공로로 :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 14:6)
→ 구약의 피의 제사는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말미암아 폐기 완성되었다. 내가 하고 싶은 방법이나 뜻대로 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보혈의 공로를) 의지하며 성령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주님께서 주신 방법대로 예배해야 한다.
③ 예배할 지니라(24c) : 예배 자세 - (proskunevw - 부복하다. 꿇어 엎드려 존경을 표하다.)
→ 예배는 먼저 내 자신을 철저히 낮추고 받은 은혜에 감사하며 하나님께만 영광 돌리는 것이다. 예배를 통해서 내 자신이 은혜 받는 것은 두 번째 문제이다. 삶속에서 받은 은혜를 감사하는 마음으로 주님의 존전 앞에서 겸손히 낮아져서 예수그리스도의 보혈의 은혜를 찬양하며 하나님만을 높이는 것이 되어야 한다.
2) 삶으로 드려지는 예배
① 의식과 형식적인 예배 보다는 말씀의 순종의 모습이 더 중요함
- “사무엘이 이르되 여호와께서 번제와 다른 제사를 그의 목소리를 청종하는 것을 좋아하심 같이 좋아하시겠나이까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숫양의 기름보다 나으니”(삼상 15:22)
② 우리의 몸을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는 영적 예배가 되어야 함
-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롬 12:1)
③ 말씀대로 순종하는 삶이 주님을 모시는 것임
- “그의 계명들을 지키는 자는 주 안에 거하고 주는 저 안에 거하시나니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그가 우리 안에 거하시는 줄을 우리가 아느니라”(요일 3:24)
→ 각자의 삶의 처소에서 하나님을 모시는 마음 가운데 우리에게 주어진 날들을 감사와 감격으로 살아야 하며 구속하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감사와 찬양의 삶으로서의 예배가 있어야 한다.
3) 하나님께 드려질 천상예배(계 4-5장) : 하나님께 모든 찬양과 영광을 돌리는 삶
① 네 생물 : 밤낮 쉬지 않고 찬양함(계 4:8)
② 이십사 장로들 : 자기의 관을 보좌 앞에 드림(계 4:10-11)
맺음말
예배는 삶에서 시작한다. 참된 예배는
삶의 모든 영역에 있어서 주님을 가장 높이려고 하되, 나에게 초점이 맞추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영광 돌리려는 것이
되어야 한다. 날마다의 삶 속에서 예수님을 모시고 성령님의 인도하심에 따라 주님과 호흡하며 감사 찬송을 올려드리는 삶을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진심으로 기원한다.
1. [문자적으로, 법적 의미에서] 마18:16, 막14:63, 행7:58, 고후13:1.
2. [비유적으로]
a. [하나님이나 그리스도가 증인이 되시는 경우] 롬1:9, 빌1:8, 살전2:5,10.
b. [사람의 눈이나 귀로 듣고 보고 증언 하는 것] 살전2:10, 딤전6:12, 딤후2:2.
c. [하나님의 메시지에 대한] 증인, 계11:3.
3. 순교자, 행22:20, 계2:13, 17:6.
관련 성경 / 증인(마18:16, 막14:63, 눅24:48).
증인(證人) - 증거 증, 사람 인
1. 어떤 사실(事實)을 증명(證明)하는 사람.
2. 소송법(訴訟法)에서, 법원(法院) 또는 법관(法官)에 대하여 소송(訴訟) 당사자(當事者)가 아니면서 법원(法院)의 신문(訊問)에 대하여 자기(自己)가 경험(經驗)한 사실(事實)을 진술(陳述)하는 사람.
3. 보증(保證)하는 사람.
너희는 이 모든 일의 증인 - 예수의 삶, 즉 수난과 죽음 그리고 부활을 목격하였고 그 의미를 성경을 근거로 하여 깨닫고 눈이 열리고(31절) 마음이 열리게 된(45절) 제자들에게 예수는 47절에서 언급한 지상 최대의 명령(the Great Commission)을 증언하는 증인이 될 것을 선포하고 있다. 이로써 예수의 모든 활동이 완결부(完結部)에 이르고 있다. 예수의 일은 지금부터 증인에 의해 새롭게 시작되고 있으며 이 새로운 시작은 사도행전으로 이어진다.
"이 모든 일의 증인이라"는 예수 그리스도가 부활한 후 제자들에게 한 말로,
예수의 삶, 죽음, 부활 및 그로 인한 구원의 사건을 직접 보고 들은 증인이 되라는 의미입니다. 이는 제자들이 성령의 능력을 받아 이 복음을 땅끝까지 전하는 사명을 감당해야 함을 강조합니다.
성경적 근거: 누가복음 24장 48절에 나오는 구절입니다. 예수님은 승천하시기 전 제자들에게 "너희는 이 모든 일의 증인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의미: 단순히 목격한 사실을 증언하는 것을 넘어, 십자가 고난과 부활의 사건을 믿고 경험한 것을 바탕으로 복음을 전해야 한다는 사명입니다.
역할: 이 구절의 '증인'은 법정에서 증언하는 사람을 뜻하는 헬라어 '마르튀스'에서 유래했으며, 나중에는 순교자를 의미하기도 했습니다. 즉, 생명을 걸고 진리를 전하는 사람을 의미합니다.
사명: 제자들은 성령의 능력을 받아 이 사명을 감당해야 했으며, 이는 곧 기독교의 선교적 사명을 나타냅니다.
누가는
누가복음 맨 앞에 집필 동기를 밝히길, "존경하는 데오빌로에게 우리들 사이에 일어난 모든 일들을 처음부터 자세히 조사하여
순서대로 정리하여 보내 드리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했다"고 적었다. 누가복음의 컨텐츠에 대해서는 "예수에 관한 글이 처음부터 직접
눈으로 보고 말씀을 전파한 사람들에 의해 자신들에게 전해졌다"고 밝힌다.
이렇게 하여 그는 오늘 묵상의 마무리 구절인 24장 53절에서 끝나는 누가복음을 집필한다. 누가는 생업이 의사였기에 자신의 생업에 종사했겠지만 동시에 복음의 증인으로서 예수의 출생부터 부활 승천의 모든 일을 기록했다.
누가의
그러한 헌신과 수고가 있었기에 오늘날 나는 누가복음을 읽으며 예수의 삶과 죽음, 부활에 대해 알게 되고 그 짧은 감상을 이곳
블로그에 적곤 한다. 다른 사람에게 관심 적고 누가 푸시(push)하는 걸 싫어하는 나로서는 이것이 가장 적극적으로 복음을 알리는
방법이다. 복음에는 누가 시키지 않아도 이렇게 확산 전파되는 힘이 있다.
복음의
역사, 기독교의 역사는 증언의 역사이다. 초대 교회에서는 예수를 직접 경험하고 목격한 사람들에 의해, 후대에서는 예수는 없지만
그의 사랑과 기적을 삶에서 체험한 사람들에 의해 증언되어왔다. 오늘날 세계(최소한 서구)의 문명은 그러한 증거중심의 믿음체계를
기반하여 건설되었다.
오늘
본문에서 예수의 마지막 당부는 "너희는 이 모든 일의 증인"이라는 것이다. 증인에게 요구되는 것은 보고 들은 것을 정확히
전달하는 것이다. 즉, 증인 선서처럼 "양심에 따라 숨김과 보탬이 없이 사실 그대로 말하고 거짓을 말하지 않아야 한다."
너희는 이 모든 일의 증인이라(누가복음 24:36~48)
성도 여러분!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누군가에게 증인이 되어 보신 적이 있으십니까? 주변에 어떤 문제로 인하여
증인이 꼭 필요로 하는 사람에게는 물에 빠진 사람이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심정으로 증인을 찾고 찾아서 증언해 달라고 부탁하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어학사전에서 설명하는 ‘증인’은 법률적으로 소송 당사자는 아니지만,
법원이나 법관의 신문에 대하여 자기가 듣고 본 사실을 진술하는 사람입니다. 예를 들어 검사나 변호사의 요청으로 즉 증인으로 법정에
출석하여 증언하므로 판세가 완전히 달라지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수십 년을 옥살이 하다가 재심청구로 인하여 억울함에서 해방되는
일들이 최근에 많이 있는데 재심청구에 꼭 필요한 것이 바로 새로운 증거. 증인이 있어야 한다고 합니다.
지난 주 중에는 중부연회가 있었습니다. 연회의 여러 가지 행정 중에 목사 안수식이 연회의 꽃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매우
중요한 순서 중에 하나입니다. 그러므로 목사 안수 받는 안수자는 반드시 안수보좌를 두어 목사안수의 증인으로 세웁니다. 그런데 금 번
중부연회에서 목사안수 받는 자가 안수보좌를 세웠는데 직무 정지된 목사를 안수보좌로 세워서 큰 이슈가 되어 앞으로 어떻게 처리가
될지 주목하고 있습니다.
고대 로마의 결혼식은 증인 앞에서 정부의 행정 관리의 주도로 행해졌다고 합니다. 그렇습니다. 증인은 어떤 사실을 증명할 수 있는 사람을 말합니다,
서기 2세기 중반 소아시아 스미르나, 지금의 서머나 교회의 감독인 ‘폴리캅’이 이제라도 그리스를 욕하고 로마 신들과 황제를
섬긴다면 용서하고 풀어 준다는 로마 총독의 제안을 받았을 때, 그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내가 팔십하고도 4년을 살아오는 동안,
그리스도는 한 번도 나를 서운하게 하신 적이 없습니다. 그러니 내가 어떻게 그런 분을 배신 할 수 있겠소?’ 그의 진지한 눈빛과
거룩한 희열에 젖은 표정으로 감동에 젖어 그리스도에게 감사하는 그의 모습에 입도당한 총독은 더는 할 말을 찾지 못했습니다.
이윽고 폴리갑은 그리스도를 찬미하며 화형 틀로 걸어갔다고 합니다.(위리스턴 워커, 「세계교회사」)
오늘 본문은 예수님의 부활과 승천에 대해 보도하는 눅 24장의 세 번째 단락입니다. 여기서는 예수님께서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에게 나타나 당신의 부활을 확인시켜 주신 사실을 보고하고 있는 13~35절에 이어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나타나 당신의 부활을
확인시켜 주시고 제자들에게 부활의 증인이 되도록 지상 명령을 주신 사실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증인’으로 번역된
‘마르튀레스’는 ‘목격자’를 뜻하는 ‘마르튀스’의 복수형으로서 예수님께서 47절에 언급한 ‘지상명령’(the great
commission)을 증언하는 증인이 될 것을 선포하고 있습니다. 오늘 부활절 3주 예배를 드리면서 주님의 지상명령을 증언하는
증인이 되기 위해서 주시는 말씀을 통하여 큰 은혜 받고 증인되시는 저와 여러분이 되어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주일이 되기를
바랍니다.
첫째, 구운 생선 한 토막
저는 지난 주일에 요한복음 20장에 있는 말씀을 소개하면서 제자들이 대 내외 적인 압박으로 인하여 두려워하고 있을 때 주님께서
찾아오셔서 말씀하시기를 평안하라고 하셨다고 전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주님께서는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 지어다’라고 인사를
건네고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 37절에 보면 제자들은 부활하신 예수님의 나타나심을 보고 기뻐하거나 평안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놀라고 무서워하였습니다. ‘그들이 놀라고 무서워하여 그 보는 것을 영으로 생각하는지라’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38절에서 제자들을
향해 ‘어찌하여 두려워하며 어찌하여 마음에 의심이 일어나느냐’고 책망하셨습니다.
우리는 이
말씀을 통해 인간의 두려움과 의심의 출처가 어디인지를 명확히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인간의 마음입니다. 인간의
마음이란 마치 하나의 물체와 같이 움직임 없이 존재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살아있는 생물체와 같은 것 입이다. 그러므로
끊임없이 무언가를 생산해 냅니다. 그 주된 생산물이 바로 두려움과 의심입니다. ‘적극적 사고방식’을 쓴 노만 빈센트 빌 박사의
착안점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그는 인간의 마음이라는 것이 끝없이 불안과 의심과 부정적인 생각을 양산해 낸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사람은 늘 적극적으로 사고하고, 긍정적인 사고를 길러야 함을 주장했던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이렇게 사람은 의심덩어리입니다. 의심 그 자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물론 이러한 의심이 무조건 잘못되었다고
말할 수만은 없습니다. 현대 과학이라든가, 여러 면에서 긍정적인 수많은 결과들을 거두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믿음에 관해서는 어떻습니까? 아주 부정적인 영향을 끼진 것이 바로 이 의심의 극대화 입이다. 오늘 날도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이 의심에 노예가 되어 스스로 불신과 두려움에 빠지는지 알 수 없습니다. 왜 오늘 날 물질문명이 최고조로 발전하고 있는데
사람들의 마음은 더욱 황폐화 되어 가고 있습니까? 왜 사람들이 생기와 기쁨을 잃어가고 있습니까? 그것은 의심에 포로가 되어
신앙에 귀의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그 해결책을 이스라엘의 한 시인의 울부짖음과 고백을 통해 찾고 위로를 받습니다.
☛시편42:5절입니다.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심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해 하는가 너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 그가 나타나 도우심으로 말미암아 내가 여전히 찬송하리로다”
그렇습니다. 속에서 끊임없이 생산되어 분출되는 두려움과 의심을 제어할 수 있는 단 하나의 유일한 길은 하나님을 바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끊임없이 마음속에서 생산되는 의심에 대해 무기력하게 아무 일도 하지 않고 방치해 두어서는 안 됩니다. 무엇보다도
우리 함께 계시고, 우리를 도와주시는 하나님께 우리의 시선을 고정시켜야 합니다.
부활 하신
주님은 의심 덩어리인 제자들을 찾아오셔서 39절에서 ‘내 손과 발을 보고 나인 줄 알라 또 나를 만져 보라 영은 살과 뼈가
없으되 너희 보는 바와 같이 나는 있느니라 이 말씀을 하시고 손과 발을 보이시나’ 41절에 ‘그들이 너무 기쁘므로 아직도 믿지
못하고 놀랍게 여길 때’ 즉,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부활에 대해 아직도 의구심을 떨쳐버리지 못하는 제자들을 위해 마지막으로 먹을
것을 달라고 해서 친히 드셨다고 하는 것입니다. 42절에 ‘이에 구운 생선 한 토막을 드리니 받으사 그 앞에서 잡수시더라’ 이러한
예수님의 태도에서 우리가 배울 수 있는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아직 믿음이 연약한 성도들에 대한 세심한 배려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의 믿음 없음을 책망하시기보다는 그들이 납득할 수 있는 조처를 취하심으로써 그들이 부활에 대해 완전히 이해하고
납득하게 하여 의심에서 벗어나 증인이 되게 하셨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의심하지 않는 믿음, 요동하지 않는 믿음을 가진
성도가 증인이 될 수 있습니다.
둘째, 성경을 깨닫게 하시다.
본문 44절에 보면 예수님께서 구약의 말씀을 통해 예수님의 부활을 증거하셨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45절에 보면 예수님께서 이에 저의 마음을 열어 성경을 깨닫게 하셨다고 했습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성경에 대한 매우 중요한 사실을 발견 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성경이 우리가 세상 책을 읽듯이 읽어서는 안 되는
책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반드시 성경을 읽을 때에는 우리 마음의 눈이 먼저 열려야 합니다. 열린 눈으로 볼 때에 성경 속에 담긴
진리가 보입니다. 비로소 그것이 진리의 말씀으로 내게 다가옵니다. 오늘 날 참으로 많은 사람들이 성경을 읽고 쓰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꼭 성도들만 성경을 읽고 있습니까? 아닙니다. 예수를 믿지 않는 작가도 성경을 읽고, 심지어 스님이나 불신자들도 성경을
읽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들에게 실체로 아무런 변화도 일으키지 못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들은 열린 마음으로 성경을 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런 자세로는 절대로 성경은 진리의 말씀, 생명의 말씀으로 다가 오지 않습니다.
성도 여러분! 예수님 시대와 그 이후 사도 시대에, 물론 이것은 오늘 날도 마찬가지입니다. 유대인들이 얼마나 많은 성경을 읽고 있습니까? 그런데 그들이 성경에서 예수님을 발견합니까?
☛요5:39,40절입니다.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연구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언하는 것이니라 40.그러나 너희가 영생을 얻기 위하여 내게 오기를 원하지 아니하는도다”
분명히 성경은 예수님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에 관한 책이 성경입니다. 성경 어디를 들쳐보아도 예수님에 관한 말씀으로 가득 채워져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님을 발견하지 못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사도 바울은 그 이유가 바로 그들이 모세가 영광스런 십계명을
받아가지고 내려 올 때에 수건을 썼던 것과 마찬가지로 보이지 않는 영적인 수건으로 그 마음눈을 가리고 있기 때문이라고 고후
3:14~16절에 기록하고 있습니다.
☛고후 3:14~16절입니다. “그들의 마음이 완고하여
오늘까지도 구약을 읽을 때에 그 수건이 벗겨지지 아니하고 있으니 그 수건은 그리스도 안에서 없어질 것이라 15.오늘까지 모세의
글을 읽을 때에 수건이 그 마음을 덮었도다 16.그러나 언제든지 주께로 돌아가면 그 수건이 벗겨지리라” 성도 여러분! 여러분이
아무리 시력이 좋다고 하더라도 일단 눈을 가리고 나면 한 치도 내다 볼 수 없습니다. 아무리 귀한 것을 보아도 알 턱이 없습니다.
이 얼마나 안타깝고 답답한 일입니까?
그러므로 우리는 성경을 읽을 때에 무작정 읽을 것이
아닙니다. 다행이 사도 바울은 우리가 예수님께 돌아가기만 하면 언제든지 가려진 수건이 벗어지리라고 했습니다. 본문에서도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마음을 열어 깨닫게 하셨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러므로 억지로, 자의적으로 해석하려고 하지 마십시오. 성경은 그렇게
사사로이 풀어서는 안 된다고 시도 베드로는 경고하였습니다.
그러므로 먼저 예수님께 겸손히 구하십시오. 어두운 마음이 밝아지도록 기도하십시오. 성령의 조명을 구하십시오. 그런 다음에 성경을 읽으십시오. 그리하면 그 안에 담긴 진리를 깨닫게 되어 증인이 될 것입니다.
셋째, 모든 족속에게 전파하라
본문 48절에 보면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향해 ‘너희는 이 모든 일에 증인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증인’이라는 말의
헬라어 ‘마르튀스’는 본래 법정에서 나와 증거하는 사람을 뜻합니다. 이것이 나중에는 순교자를 의미하는 말로도 사용되었습니다.
누가복음의 독자들이 이 복음서를 읽을 때는 박해의 시절이었습니다. 수많은 성도들이 법정에 나와 자기가 그리스도인임을 증거하면서
죽어 갔습니다. 어떤 사람은 희롱을 다했고, 채찍에 맞기도 했으며, 사자에게 삼켜 죽은 이들도 있었습니다. 그 고통이란 사람의
언어로 형언할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성경의 증언이나 교회 역사의 기록을 살펴보면 이들은 이러한 순교적인 일들을 구차히
피하려 하지 않았다고 했습니다.
성도 여러분! 무엇을 말해주는 것인지 아시겠습니까? 우리가
복음의 증인이 된다는 것은 단순히 우리의 입술로만 전하는 것이 아님을 말해 주는 것입니다. 복음을 전파하는 전도자의 자세는 바로
죽음을 각오한 증거가 있어야 합니다. 내 생명을 건 전도가 필요하다고 하는 것입니다. 내 생명을 걸고 전하지 않으면 안 되겠다고
하는 단단한 마음의 각오가 있어야 합니다. 예레미야를 보십시오. 그는 본래 아이와 같은 자였습니다. 그러나 복음 증거자로 나선
이후에는 어떠했습니까? 그에게 복음을 전하지 말라는 수많은 위협과 핍박이 찾아 왔습니다. 그런데 그가 무엇이라 고백합니까?
☛렘20:9절입니다. “내가 다시는 여호와를 선포하지 아니하며 그의 이름으로 말하지 아니하리라 하면 나의 마음이 불붙는 것
같아서 골수에 사무치니 답답하여 견딜 수 없나이다” 자기 생명이 위협받는 한이 있어도 말씀을 전해야겠다는 것입니다. 차라리
죽을지언정 말씀 증거하는 일만큼은 중단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만약 그렇지 않으면 전하지 못해 한이 되고, 골수에 사무치고,
답답하여 견딜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복음을 증거하는 전도자에게는 이러한 순교자적인 각오가 있어야 합니다. 전도는 해도 되고 안 해도 되는 것이 아닙니다.
바울은 그의 영적인 아들 디모데에게 권면하기를 ‘모든 일에 근심하여 고난을 받으며 전도인의 일을 하며 네 직무를
다하라’(딤후4:5)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자신에 대해 끊임없이 절제하고 근신하면서 또 외부적으로는 고난을 경험하면서도 전도의
일을 중단 없이 진행 시키는 것이 전도인의 직무입니다.
사실 오늘날 어떻게 우리에게까지
복음이 전달되어 왔습니까? 결코 쉽게 온 것이 아닙니다. 바로 이와 같은 수많은 무명의 전도인들의 순교적 희생과 헌신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도 우리들은 여전히 복음과는 무관한 자로 스스로를 자처하시겠습니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이 모든 일의 증인이 되라’는 명을 받은 사명자들입니다. 모든 족속에게 복음을 전파하기 위해서,
증인의 자리에서 복음을 증거하기 위해서는 의심에서 벗어나 믿음의 확신이 있어야 합니다. 성경을 보고 진리를 깨닫는 열린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생명을 건 사명감이 있어야 이 모든 일의 증인이 될 수 있습니다.
성도 여러분! 코로나로 인하여 복음 증거하는 일이 위축되었다고 하면 다시 일어 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여러분의 손에 수많은 생명이 달려 있습니다. 순교저적인 각오로 단단히 재무장하고 다시 복음 증거하시기를 바랍니다.
가끔은
내 삶이 주님의 말씀에, 또 세상이 기독교인에게 기대하는 수준에 한참 못 미치기에 복음에 누가 될까 자신있게 전하지 못하지만,
엄밀히 말해 증인이 증거해야 하는 내용(컨텐츠)은 그의 인격이나 삶이 아니라, 보고 듣고 경험한 바 그 자체이다.
11월 14일(금) 누가복음 20-22장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뜻과 원(22:42)
가라사대 아버지여 만일 아버지의 뜻이어든(불레이. 1014)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내 원대로(델레마. 2307)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 하시니. "Father, if you are willing, take this cup from me; yet not my will, but yours be done."
관련 성경 / 뜻(마 7:21, 눅 12:47, 고전 1:1, 엡 1:11), 원(마 26:42, 요 5:30), 원하는 것(엡 2:3).
'뜻불래'는 헬라어
불레(βουλή)를, '델레마'는 헬라어 델레마(θέλημα)를 잘못 쓴 것입니다. 둘 다 성경에서 '뜻'을 의미하는 헬라어 단어이며, '불레'는 불가항력적인 하나님의 뜻을, '델레마'는 사람이 바꿀 수 있는 뜻이나 계획을 의미합니다.
불레(βουλή)
의미 : 성경에서 쓰인 헬라어 단어로, '불가항력적이고 결정된 하나님의 뜻'을 의미합니다.
특징 : 이 뜻은 하나님의 전능하신 능력으로 반드시 이루어지는 것으로 간주됩니다.
델레마(θέλημα)
의미 : 역시 성경에서 '뜻'을 의미하는 헬라어 단어입니다.
특징 : '불레'와 달리 사람이 바꿀 수 있는 뜻, 의지, 의향, 소원, 결심 등을 나타냅니다.
관련 성경 구절 :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마 7:21)에서 '뜻'에 해당하는 헬라어 단어입니다.
관련 용어 : 히브리어 '헤페쯔'와 연결되기도 하는데, 이는 '즐거워하다', '만족하다'의 뜻을 가집니다.
뜻 (will) : 델레마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은 내게 주신 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이것이니라" (요 6:39)
'뜻'으로 번역된
헬라어 단어 '델레마'는 '원하다, 생각하다, 의도하다, 좋아하다, 즐거워하다'라는 뜻을 가진 '델로'의 연장형으로 '이루고자 원하거나 결심한 것, 의지, 선택, 경향, 욕망, 기쁨'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
70인역에서 '델레마'로 번역된 히브리어 단어는 즐거워하다, 기쁨을 취하다, 마음에 들다, 만족하다, 희망하다'의 뜻을 가진 '하페쯔'에서 파생된 '헤페즈'로 '가치있는 것, 소원하는 것, 기쁨, 즐거움, 목적, 뜻, 아름다움'의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
기본적으로 선악의 주체로서의 인간이 가지고 있는 '뜻'이란 끊임없이 하나님처럼의 삶을 살려는 욕망인 '정욕'(에피두미아) 뿐이다. 하나님의 마음이 없기에 그 속에는 '모든 불의, 추악, 탐욕, 악의, 시기, 살인, 분쟁, 사기, 악독' 만이 가득한 자이다(롬 1:29) 그들 스스로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여 목적으로 삼고 있는 모든 것은 결국 '완전히 파괴되고 썩을'(아플뤼미) 것에 불과한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델레마)은 창세전 언약에 따라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는 것이다(엡 1:4,5).
그래서 예수님께서 아버지의 뜻대로 언약의 십자가를 지신 것이며(마 26:42, 눅 22:42).
아버지의 뜻을 온전히 이루는 것을 양식으로 삼으셨다(요 4:34)
그에게 있어서 자기를 이 땅에 보내신 아버지의 뜻은 "내게 주신 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것'(요 6:39) 이며, "아들을 보고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는 것"(요 6:40)임을 분명하게 말하고 있다.
결국 하나님은 말씀 육신으로 이 땅에 오셔서 언약의 십자가에서 자신의 뜻(델레마)을 이루셨으며(요 19:30)
우리에게 그리스도의 영을 주셔서 우리로 하나님이 거하시는 성전 삼으신 것이고(고전 3:16)
하나님 아들이 되게 하신 것이다(엡 1:5)
그러므로 성도는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델레마)이 무엇인지를 분별(도키마조) 하여 그것만이 유일한 참인 것을 인정하고 그것만이 유일한 참된 가치로 여기는 자이며(롬 12:2),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뜻(델레마)이 바로 하나님의 마음임을 알아 그 마음을 내 마음으로 품고 사는 자이다.
16. [고린도후서 7:10]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후회할 것이 없는 구원에 이르게 하는 회개를 이루는 것이요 세상 근심은 사망을 이루는 것이니라
17. [고린도후서 7:11] 보라 하나님의 뜻대로
하게 한 이 근심이 너희로 얼마나 간절하게 하며 얼마나 변명하게 하며 얼마나 분하게 하며 얼마나 두렵게 하며 얼마나 사모하게
하며 얼마나 열심있게 하며 얼마나 벌하게 하였는가, 너희가 저 일에 대하여 일절 너희 자신의 깨끗함을 나타내었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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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year ago
on July 21, 2024 at 6:05 A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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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 아버지’와 ‘아버지 하나님’의 차이는 무엇인가?
그리스도인이 하나님을 부르는 데 있어서 많은 경우에 ‘아버지’를 덧붙어 부르기도 하는데, 이 때 ‘하나님’과 ‘아버지’ 붙여
부르는 경우에 ‘하나님 아버지’라 부르기도 하고, ‘아버지 하나님’이라 부르기도 한다.
그러면 이 두 경우에 그 의미는 어떻게
다른가?
언어에서 복합어(겹낱말)가 쓰일 때 그 두 낱말은 문법적 관계에 있어서 주(主)와 종(從), 즉 주어와 수식어의 관계를
가지게 된다. 예를 들어 ‘달밤’이란 말은 ‘밤’이라는 주어에 ‘달’이란 수식어가 붙어 “달이 빛나는 밤”이란 의미를 나타낸다. 이러한 관계를 ‘하나님’과 ‘아버지’에 적용시켜 보면 어떠한 표현이 맞는가를 쉽게 알 수가 있다. 우리가 ‘하나님’과 ‘아버지’를
결합시킬 때 거기서 주가 되는 것은 물론 ‘하나님’이고, ‘아버지’는 그 ‘하나님’을 수식하는 말이 되는 것이다. 그러면 이러한
경우에 그 두 낱말 ‘하나님’과 ‘아버지’를 어떻게 결합하느냐 하는 문제이다.
여기서 우리는 앞에서 든 ‘달밤’의 예에서 보는 대로, 주 된 낱말이 ‘하나님’이 되므로 따라서 그 복합어가 나타내고자 하는
개념은 “아버지가 되시는 하나님”이 되는 것이다.
우리는 성경에서 이러한 내용을 수다히 볼 수 있다. 성경에서 ‘아버지’라는
낱말의 쓰임을 보면 첫째로 ‘하나님’을 가리키는 경우가 압도적으로 많다. 이 중 구약에서보다는 신약에서 훨씬 많이 쓰이고(거의
400회), 신약 중에서는 요한복음에 가장 많이(110회) 나타난다. 이는 요한복음이 예수를 특별히 하나님의 아들로 나타내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면 우리는 우리의 기도 중에 수많이 쓰는 이 복합어를 ‘하나님 아버지’로 써야 하느냐, 아니면 ‘아버지 하나님’으로 써야
하느냐? 성경에서는 이 두 낱말이 따로 쓰이는 경우가 많지만, 우리는 그것이 복합어의 형태로 쓰이는 대표적인 예를 사도신경 중의
첫 고백의 항목에서 볼 수가 있다. 헬라어로는 Theon Patera, 라틴어로는 Deum Patrem, 이들 원어의 영어
번역은 God the Father 이다. 여기서 우리말 사도신경은 처음에 (아마 영어로부터의 번역인 듯) 그 두 낱말의 순서를
그대로 따라 ‘하나님 아버지’로 번역하여 오랫동안 쓰여 왔다. 그러나 이 번역이 바르지 못 한 것을 최근의 재번역에서 ‘아버지
하나님’으로 바로잡았다. 이것은 인구어의 구문과 우리말의 구문이 다른 것을 간과한 것이다. 예를 들면 우리말로 ‘과학자
아인슈타인’이라고 할 때, 영어로는 ‘Einstein a scientist'이지 ’A scientist Einstein'이 될 수
없는 것으로도 알 수가 있다.
이상과 같이 분석해 볼 때 기독교인들이 기도를 할 때 ‘하나님’과 ‘아버지’를 겹낱말로 쓸 때는 ‘하나님 아버지’보다는 ‘아버지 하나님’으로 쓰는 것이 바람직하다.
하나님의 뜻(불래 - 결정적인 뜻. 델레마 - 소원적인 뜻)
하나님의 뜻을 두 가지 의미로 사용합니다.
첫째는 하나님의 결정적인 뜻으로 "불래" 불래의 뜻은 어느 누구도 그 뜻을 변경할 수 없습니다.
βουλή, ῆς, ἡ
스트롱번호 1012
1. 뜻. 2. 결의. 3. 사람의 결정
발음
[ bŏulē ]
어원 / 1014에서 유래
뜻풀이부
1. 뜻, 의도, 의향, 동기, 고전 4:5. 2. 결의, 결정. a. 사람의 결정, 눅 23:51, 행 5:38, 27:12. b. 하나님의 결정, 눅 7:30, 엡 1:11, 히 6:17.
연관 단어 / 관련 성경 의견(행 27:12), 뜻(눅 7:30, 행 2:23, 고전 4:5), 결의(눅 23:51), 사상(행 5:38), 결심(행 27:42). 둘째는 하나님의 소원적인 뜻으로 "델레마"
델레마는 사람의 결정에 따라 하나님의 뜻이 변경될 수 있습니다.
θέλημα, ατος, τό
스트롱번호 2307
1. 뜻. 2. 뜻하는 바. 3. 마 6:10
발음
[ thĕlēma ]
뜻풀이부 I. 뜻, 의지. II. [객관적으로] 뜻하는 바. 1. [일반적으로] 마 6:10, 26:42, 눅 11:2, 요 6:39, 행 21:14, 골 4:12, 히 10:10. 2. [자신의 행동에 관하여 바라는 바] 요 5:30, 6:38, 고전 16:12, 엡 1:9. 3. [다른 사람의 행동에 관하여 의지된 바] a. [인격적 존재에 대하여] 마 21:31, 눅 12:47. b. [마귀에 대하여] 딤후 2:26. c. [하나님이나 그리스도의 탁월성] 롬 12:2, 엡 5:17, 살전 4:3, 5:18, 벧전 2:15, 4:2, γινώσκειν τὸ θέλημα : 뜻을 알다, 롬 2:18, 행 22:14. d. ποιεῖν τὰ θελήματα τ. σαρκός : 육체의 욕망을 행하다, 엡 2:3. III. [주관적으로 의도하거나 욕망하는 행동] 1. [인간의 뜻에 대하여] 고전 7:37, 벧후 1:21, [예수의 죽음을 갈망하는 유대인의 뜻에 대하여] 눅 23:25. 2. [하나님의 뜻] 엡 1:11, 벧전 3:17, διὰ θελήματος θεοῦ : 하나님의 뜻대로, 롬 15:32, 고전 1:1, 고후 1:1, 8:5, 엡 1:1, 골 1:1, 딤후 1:1
연관 단어 / 문법설명 2309의 연장형 관련 성경 뜻(마 7:21, 눅 12:47, 고전 1:1, 엡 1:11), 원(마 26:42, 요 5:30), 원하는 것(엡 2:3).
이현령비현령(耳懸鈴鼻懸鈴)
한자풀이
이현령비현령의 각 한자를 바로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耳(이) : 귀, 청각 기관의 일부를 나타내며, 소리와 관련된 의미를 가집니다.
懸(현) : 매달리다, 달다와 같은 의미를 가지며, 무엇을 떠올리거나 이해하는 데 어려움을 겪는 것을 뜻합니다.
鈴(령) : 종, 방울, 소리와 관련된 물체를 나타내며, 소리의 발생을 의미합니다.
鼻(비) : 코, 인체의 기관 중 하나를 나타내며, 냄새와 관련된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懸(현) : 매달리다, 달다
鈴(령) : 종, 방울
이현령비현령(耳懸鈴鼻懸鈴)은 한자어 속담 중 하나로, "귀에 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걸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 속담은 보는 사람에 따라서 이렇게 해도 될 수 있고, 저렇게 해도 될 수 있다는 뜻을 담고 있으며, 양쪽에 관련되어 어느 한쪽으로 결정하기 어려운 상황을 비유적으로 나타내는 표현입니다. 이 속담은 일상생활에서 자주 쓰이며, 언론에서도 종종 사용됩니다.
예를 들어, 정치인이 어떤 정책을 추진하다가 이현령비현령에 빠지면,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른다고 말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 속담의 유래는 불분명하지만, 역사적으로는 중국 절대군주인 만만황제의 첫째 아들인 묵황(穆皇)이 임금의 위치를 먼저 물어봤다가, 버릇없는 몸짓을 하여 자신의 정체성을 드러내버려 실패한 이야기에서 비롯되었다고 합니다.
위 속담에서 알 수 있듯이, 이현령비현령은 상황에 따라서 어떤 선택을 할지 결정하기 어려운 경우에 자주 사용되는 표현입니다. 그러나 동시에, 선택의 중요성을 강조하기도 합니다.
이현령비현령(耳懸鈴鼻懸鈴) 이란?
이현령비현령(耳懸鈴鼻懸鈴)은 한자어 속담으로, "귀에 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걸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 말은 보는 사람에 따라서 이렇게 해도 될 수 있고, 저렇게 해도 될 수 있다는 뜻으로, 하나의 문제나 상황에 대해 다양한 의견이 존재하며, 모든 선택이 타당할 수 있다는 것을 나타냅니다.
한자어 속담의 경우 유래가 애매한 경우가 많은데, 이현령비현령도 마찬가지입니다. 다만 "귀에 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걸이"라는 표현이 무척 오래전부터 존재하였으며, 이를 한자어로 표현한 것이 이현령비현령이 됩니다.
실제로 중국의 역사적인 문헌인 '밍자(明子)'에는 "귀는 귀걸이로 장식을 하며, 코는 코걸이로 장식을 한다"라는 구절이 등장합니다.
이 구절은 여성의 장신구로서의 귀걸이와 코걸이가 중요한 역할을 하였던 역사적인 배경에서 파생되었을 수도 있습니다. 이현령비현령은 고대 중국의 첫 번째 황제인 황제(黃帝)의 십 신(十神) 중 하나인 이神(耳神)에 대한 이야기에서 비롯될 수도 있습니다. 중국에서는 주변 환경과 상호작용하여 생각을 형성하고 판단할 때, 손가락에 대한 용어를 사용하지 않고 귀와 코에 대한 용어를 사용하였습니다.
따라서 이神은 인간의 판단능력이나 직관력과 관련된 신이었으며, 이현령비현령의 의미와도 일맥상통할 수 있습니다. 한자어 속담에서는 단어의 의미가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이현령비현령의 경우 "귀에 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걸이"라는 표현을 사용하여, 상황에 따라서 여러 가지 선택지가 존재한다는 것을 나타냅니다. 이러한 선택의 중요성은 어떤 일에 대한 결정을 내릴 때, 취해야 하는 행동이 대부분의 경우 분명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에 대해 속담은 선택을 내리는 것이 쉽지 않다는 것을 암시하는 의미를 지니게 됩니다.
뜻, 의미에 관한 예화
▣ 세 배의 축복
한
여자 청년이 있었습니다. 그녀는 인도 선교사로 가기를 원해서 신학을 공부하고, 언어 훈련도 마쳤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언니네
가정에 큰 어려움이 닥쳤습니다. 아들 셋, 딸 하나를 둔 언니가 그만 병들어 세상을 떠나더니, 곧 그 남편마저 죽었습니다. 졸지에
아이 넷을 떠맡게 된 그녀는 도저히 아이들을 남기고 선교를 떠날 수 없었습니다. 결국 선교본부에 편지를 보냈습니다. “목사님! 저는 인도 선교사가 되기를 원했지만 하나님의 뜻이 다른데 있는 것 같습니다. 가지 못하게 되어서 죄송합니다.” 그리고 선교사의 꿈을 포기하고 아이들을 믿음으로 정성껏 키웠습니다. 25년 후, 4명의 아이들 중 세 명이 인도 선교사를 자원했습니다. 그녀는 다시 선교본부에 편지를 띄웠습니다. “목사님! 하나님께서는 저의 기도를 25년 만에 세 배로 이루어주셨습니다. 이제 저희 세 자녀를 인도로 파송해주세요.” 하나님의 뜻은 내 뜻과 다를 수 있고, 하나님의 시간은 내 시간과 다를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은 언제나 우리의 뜻을 초월해서 열매를 만들어냅니다.
▣ 상어와의 혈전
플로리다
주에 사는 제리라는 사람이 친구 두 사람과 함께 고무 구명보트를 타고 5일 동안 대서양에서 표류했던 일이 있었다. 그들은 닷새
동안이나 추운 바다에서 표류하던 참이라 세 사람 모두 기진맥진해 몽롱한 상태가 되었다. 이때 상어가 나타나서 세 사람이 누워 있던
구명보트를 들이받기 시작했다. 이대로 두면 구명보트에 구멍이 나게 되고, 구명보트를 잃으면 곧 죽음이었다. 그들은 상어와
필사적으로 싸워야 했다. 그들이 가진 무기는 주머니칼 하나뿐이었다. 세 사람은 죽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다해 주머니칼로 상어와
싸웠다. 그 무렵에 화물선 한 척이 근처를 지나가다가 멀리서 무언가 움직이는 것을 발견했고, 결국 그들은 구출되었다. 만약 세
사람이 모두 구명보트 속에서 잠들어 있었다면 멀리 지나던 화물선은 이들을 발견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이 상어와 열심히
싸우고 있었기 때문에 그 멀리 지나가던 화물선이 그들을 볼 수 있었던 것이다. 우리가 이 땅에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삶을 산다는
것은 매우 힘들고 어려워 보인다. 하지만 악한 세상과 타협하지 않고 죄의 세력과 싸우는 것은 곧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가는
것이다. 죄와 싸우는 곳에 하나님이 함께하시기 때문이다. 신자는 죄와 싸움으로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사람이다.
▣ 뜻을 맞춰라
허드슨 테일러는 중국선교에 일생을 바친 영국선교사였다. 그는 사람들로부터 『당신은 어떻게 일생을 사역자로 보낼 수 있었습니까? 그러면서도 행복한 비결은 무엇입니까?』라는 질문을 받을 때마다 이렇게 대답했다. 『제
헌신과 행복의 비결은 하루를 어떻게 시작하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연주자는 음악회가 시작되기 전 악기를 조율합니다. 음악회가 끝난
뒤 조율한다면 어리석은 사람이겠지요. 저는 아침에 일어나면 하나님의 뜻과 맞추는 일부터 합니다. 그러면 인생이 보람있지요』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롬 12:1∼2) 우리의
몸을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기 위해서는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하는 것이 필요하다. 마음을 새롭게 한다는 것은 우리 마음 한가운데
하나님을 모시는 것이다. 그럴 때 우리들의 존재는 하나님의 뜻에 일치하게 된다. 하나님의 뜻에 따라 살아가는 삶이 이 세상을
거룩하게 만드는 영적 예배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 감사는 하나님의 뜻
미국의 자동차 왕이었던 헨리
포드는 믿음이 독실한 사람이었습니다. 한번은 그가 아일랜드의 수도 더블린에 갔던 적이 있었습니다. 그곳에 머무는 동안에 한
고아원을 방문했습니다. 그는 고아원생들을 위해서 강당을 하나 지어 줄 것을 약속했습니다. 그 일을 위해 2,000파운드를
기증하기로 약속을 했습니다. 그런데 그 다음 날 신문에 뜻밖에도 이러한 기사가 실렸습니다. “헨리 포드 회장이 고아원을 위해서
20,000파운드를 기증하기로 약속하다.” 2,000파운드가 20,000파운드로 잘못 게재된 것입니다. 고아원 측에서 그 기사를
보고 포드 회장을 찾아와 정중하게 사과를 했습니다. 그리고 신문사에 정정 기사를 내도록 요청하겠다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헨리
포드는 웃음을 지으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할 수 없지요. 다 하나님의 뜻이 아니겠습니까? 제가 18,000파운드를 더
내겠습니다. 그 대신 고아원의 강당이 완공이 되고 나면 그 입구에 이런 글을 써주시기 바랍니다. ‘헨리 포드의 뜻이 아니고
하나님의 뜻에 의해서 드려진 헌금으로 지어진 강당’.
감사함을 넘치게 하라는 것은 우리의 뜻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뜻입니다. 우리는 절대적으로 이 말씀에 순종할 뿐입니다.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은혜가 넘치는 것처럼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감사함도 마땅히
넘쳐야 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감사는 낭비가 아닙니다. 결코 손해보는 것이 아닙니다. 감사는 언제나 축복의 전주곡이 되는
것입니다. 감사는 더 큰 감사를 낳게 마련입니다.
▣ 죽음에서 건진 이후…
사랑스러운
딸 하나를 둔 과부가 목사님에게 심방을 와 달라고 부탁했다. 찾아오신 목사님에게 그녀는 말을 시작했다. 딸이 세 살 때 심한
병이 들었는데 의사들이 얼마 살 지 못할 것이라고 말했다. 어머니는 그때 하나님께 너무 잔인하다 비난했고 자기 딸을 살려달라고
강요했다. 만일 자기 원대로 안 살려 주시면 다시는 하나님을 믿을 수 없다고 고함을 질렀다. 의사들의 비관적인 진단에도 불구하고
아이의 병이 나았다. 그 이후 13년 동안 그 딸은 어머니의 기쁨이요 자랑이었다. 그 딸이 16세가 되자 나쁜 친구들과 어울리더니
별의별 문제를 다 일으켜 어머니의 가슴을 갈가리 찢어 놓았다. 결국 “제 딸은 죽었습니다. 어제 밤에 자살을 했어요. 오늘 아침
시체를 그 애 방에서 발견했습니다” 얼마 동안 몸부림을 치며 통곡을 하다가 이렇게 말을 마쳤다. “오, 목사님 그 애가 세 살 때
하나님께서 데려가셨다면 얼마나 좋았을까요. 제가 왜 하나님의 뜻에 맡기지 않고 제 뜻대로 고집을 부렸는지요!” 그녀는 다시
회한과 슬픔으로 울었다. 인생의 최선은 하나님 뜻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 하나님의 뜻에 순종할 때
수다한
사람들은 그들의 기도가 하나도 하나님께 상달되지를 않고, 맥없이 툇자를 맞는 것을 보고는 고개를 기웃거리며, 이상해 한다.
이상할 것은 아무 것도 없다. 그 까닭은 그들의 효험 있는 기도를 드리는데, 가장 중대한 조건, 즉 완전한 순종의 계단을 거치지
않았기 때문인 것이다. 하나님의 뜻을 우리의 뜻으로 할 때라야만, 하나님께서는 우리 뜻을, 그의 뜻으로 받으신다.
▣ 하나님의 뜻을 찾아서
똑똑한
젊은이 한 명이 변호사가 되겠다는 강한 꿈을 갖고 있었다. 그는 예수를 믿으면서도 하나님과 자기 장래에 대해 한번도 의논한 적이
없었다. 하루는 그가 어려서부터 다니던 교회의 주일학교 선생님 한 분을 만났다. 선생님이 물었다. “자네는 그 많은 재능을 가지고 앞으로 무엇을 하고 싶은가?” “변호사가 되려고 준비하는 중입니다” 그러자 선생님은 무척 실망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나는 여러 해 동안 자네가 복음을 전하는 목사가 되도록 간절히 기도해왔는데…” 이 말은 젊은이를 놀라게 했고 자신의 미래에 대해 다시 생각해보게 만들었다. 여러 해가 지난 후 그는 이런 글을 썼다. “나는 그제야 기도하며 하나님의 뜻을 찾기 시작했고 목회자가 되는 것이 하나님의 뜻임을 알고 순종했다. 주님을 섬기기 시작한 지 35년. 나는 그때 내가 선택한 목회자의 길을 한번도 후회한 적이 없다” 우리는 무엇이든지 하나님과 의논하고 해야 할 것이다. “너희가 말하기를 만일 주께서 원하시면 우리가 살기도 하고 이것저것을 하리라 할지어다”(약 4:15)
▣ 못난 자식· 예쁜 사위
사랑하는
아내가 직장을 마치고 와서 일하는 것이 안쓰러워 설거지를 도와주던 남편이 주부습진에 걸렸습니다. 이 사실을 안 시어머니와 장모의
입장이 전혀 달랐습니다. 그것은 “못난놈. 얼마나 일을 했기에 그 모양이냐. 아예 앞치마를 두르고 집에 들어앉지 그러냐 ” “아이구 예쁜 우리 사위, 고무장갑을 껴야 하는데 그냥해서 그렇지. 다음엔 꼭 고무장갑을 사용하게나”
남편은 못난놈이
되기도 했고 예쁜 사위가 되기도 했습니다. 우리는 삶 속에서 내 쪽으로 모든 것을 유리하게 생각하고 합리화하는 경향이 많습니다. 즉
내가 하면 ‘로맨스’요 남이 하면 ‘불륜’이라는 것입니다. 혹 우리는 신앙생활에서도 깊고 오묘한 하나님의 뜻을 묵상과 기도
속에서 찾는 것이 아니라 단편적이고 감각적인 것에 의존해 마치 자신의 뜻과 의지를 하나님의 뜻인 것처럼 판단해 버리는 우를 범하고
있지 않은지 모릅니다. 하나님의 뜻과 섭리, 은혜는 수학공식이 아닙니다. 하나님과 나의 관계가 가장 중요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놀라운 세계를 소유하시는 여러분이 되시길 바랍니다.
▣ 하나님의 뜻과 사람의 계획
"사람의 마음에는 많은 계획이 있어도 오직 여호와의 뜻이 완전히 서리라"(잠 19:21)
똑똑하고
젊은 변호사였던 척 콜슨은 영향력 있고 권력이 있는 자리에까지 오르고자 계획했었습니다. 닉슨 대통령의 특별 보좌관이었던 그는
주님께서 간섭하시기에 이르기까지 계속 높은 지위로 올라갔습니다. 그러나 그는 워터게이트 사건의 은폐공작에 연루되어 감옥에까지 가는
처지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 위기 중에 그는 주님을 영접했습니다. 오늘날 그는 '교도소 선교회'의 지도자로서의 그의 사역이
하나님을 모르던 과거 정계의 삶이나 그 삶이 줄 수 있었던 어떤 것보다 훨씬 더 보람이 있다고 간증합니다. 성경에는 "내 형질이
이루기 전에 주의 눈이 보셨으며 나를 위하여 정한 날이 하나도 되기 전에 주의 책에 다 기록이 되었나이다"(시139:16)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만세 만대 전에 보고 아시고 우리의 일생을 다 정해 놓으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께서
예정해 놓으신 그 뜻이 어디에 있는지 알기 위해 열심히 기도하고 그 길로 나아가야 합니다. 그리할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예비된
길로 인도하시며, 우리의 일생을 책임져 주시고 돌보아 주시며, 우리에게 두신 하나님의 뜻을 이루시는 것입니다.
▣ 하나님의 뜻에 맡기는 기도
아프리카의
선교사로 가 있는 리빙스턴에게 하루는 역시 아프리카에서 선교중인 그의 장모로부터 이런 편지가 날아왔다. '사랑하는 나의 아들
리빙스턴, 나는 지금까지 하나님께서 그대롤 꼭 평안히 보호해 주시리라는 것으로 마음을 진정해 왔네. 그러나 지금은 그런 기도가
반드시 응답되리라 기대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배웠네. 무엇을 소원하거나 간절히 기도할 경우라도 '하나님의 뜻에 맡깁니다'라고 하는
경건함을 갖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배웠네'. 이처럼 전적으로 하나님의 뜻에 맡기는 기도야말로 참된 기도라 할 수 있다.
▣ 링컨과 하나님의 뜻
미국의
16대 대통령 아브라함 링컨은 남북전쟁이 예상외로 길어져 희생자가 많아지자 마음이 몹시 아팠다. 동족끼리 싸우며 하루에도
수백명씩 젊은 청년들이 죽어갔다. 마음이 괴로운 그에게 주위에 있는 이들이 다가와 승리를 회의하며 물었다. "하나님은 과연 우리
편이실까요?" 링컨이 대답했다. "하나님께서 우리 편이신가 아닌가 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보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과연
하나님 편인가 하는 점입니다."
▣ 하나님의 뜻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알고자 할 때는 언제나 세 가지를 생각할 수 있습니다. 첫째는 내적인 마음의 움직임 둘째는 하나님의 말씀 세째는 환경의
추세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마음에서 그리고 환경가운데서 자신의 뜻을 알리시는 것입니다. 이 세 가지가 일치하기까지는
절대 일을 시작하지 마십시오."
요한1서에서 나타난대로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계속 행하려 한다면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는 법을 배워야합니다.
▣ 윗치만 니의 청혼
윗치만
니라는 유명한 성도는 자기가 좋아하는 여인에게 결혼을 요청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뜻이라고 확신하고 요청했습니다. 그런데 거절을
당했습니다. 그때 그는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고 더 이상 그 여인에게 요청하지 않고 그 문제를 하나님께 맡겼습니다.
그런데도 그 여인의 생각이 계속 그의 마음 속을 지배했습니다. 그는 그 여인과의 결혼이 하나님의 뜻이라면 하나님께서 문을 열어
주실 것이라고 생각하고 그 문제를 하나님께 모두 맡겼습니다. 그로부터 10년 후 그는 우연히 다른 장소에서 그 여인을 다시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때 하나님께서 마음을 주셔서 두번째 요청을 했습니다. 이때에 이 여인이 허락을 해서 10년 전에 사랑했던
여인과 결혼을 하게 되었습니다. 만일 그가 하나님께 헌신되지 않은 사람일 경우에 인간적인 욕정을 이기지 못하고 10년간이나
계속해서 그 여인을 따라 다녔다고 합시다. 어떻게 되었을까요? 그러나 그는 자신의 결혼 문제를 하나님께 맡겼습니다. 그는 주의
뜻을 구하는 훈련이 되어 있었습니다. 그리고 드디어 하나님의 때가 찼을 때 하나님의 방법으로 결혼을 하게 되어 아름다운 결혼
생활을 시작할 수 있었다고 그는 후에 간증을 남겼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환경을 잘 살펴야 합니다.
▣ 하나님의 뜻
어떤
사람이 길을 걸어가다가 네거리를 만나서 어느 방향으로 갈까 망설이다가 동쪽으로 갈 것을 마음에 정하고, 그래도 “이 지팡이가
가리키는 방향으로 가야지” 하고 던졌더니 서쪽을 가리켰습니다. 다시 던지니까 북쪽을 향했습니다. 계속 지팡이를 던지니까 드디어
동쪽을 가리켰습니다. 그랬더니 “이것 봐라. 이 지팡이가 동쪽을 가리키지 않느냐” 하고 좋아하며 가더랍니다. 우리가 예수님 믿는
것도 이런 식으로 믿으면 안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산다고 하면서 자기 고집과 욕심대로 하면 그것은 하나님을 우롱하는 것이
됩니다.
기독교신앙이 기초가 된 서구사회에서 유행하는 용어가 “하나님 뜻이면”(데오 보렌데 Deo Volente)라는 용어입니다. 우리
크리스천들은 무슨 일을 하거나 계획할 때는 반드시 먼저 “하나님의 뜻이면”(If it's God's will) 한다는 생각이
항상 앞서야 합니다. 이보다 중요한 일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뜻과는 반대되는 일을 하면서 하나님께 성공하게 해달라고 하고 복 받게
해달라고 하면 큰 잘못입니다.
▣ 하나님의 뜻으로 상황을 판단하라
너무 쉽다고 생각될 때, 이것쯤은 내
경험과 상식으로도 너끈히 해결할 수 있다고 방심할 때 우리는 덫에 걸리고 만다. 당신의 지식이 아무리 풍부해도, 당신의 경험이
아무리 많아도, 당신의 처세술이 아무리 뛰어나도 당신은 유한한 인간에 불과하다. 파일럿들 가운데서도 가장 숙달된 파일럿들이 뜻밖에
평이한 비행 중 사고로 죽는 비율이 높은 원인을 아는가? 너무 자신의 실력을 과신한 나머지, 계기판을 보지 않으므로 사고를 내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그래서 파일럿들을 훈련시킬 때는 어떤 일이 있어도 계기판을 철저히 바라보고, 자신의 감을 믿지 말고
계기판을 믿으라고 가르친다. 당신은 영리하다고 자부하는가? 그렇다면 당신의 그 영리함이 오히려 당신을 무너뜨릴 수 있다는 사실을 늘
기억하라. 당신의 인생에서도 자신의 능력을 과신한 나머지 경솔하게 결정해 버린 일들, 식은 죽 먹기처럼 쉬운 일이라고 여겨 깊이
생각하지도 않고 신속하게 처리해 버린 일들이 뜻하지 않게 당신의 덜미를 잡는 치명적 실수가 될 수 있다. 그러므로 눈에 보이는
상황만을 가지고 하나님의 뜻을 해석하지 말라. 오히려 하나님의 뜻을 가지고 상황을 해석해야 한다. 당신이 하나님을 판단하지 말고,
하나님으로 하여금 당신을 판단하시게 하라. 하나님 앞에서 당신이 자꾸 말하지 말고, 하나님이 당신에게 하시는 말씀에 조용히 귀를
기울이라
▣ 하나님의 뜻 알기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는 무엇이 하나님의 뜻인가 고민할 때가 많이 있다. 하나님의 구체적인 인도를 받기 원하는 것은 그리스도인에게 있어 삶의 근본적인 자세이다.
조지 뮬러는 하나님의 뜻을 아는 6가지 단계를 소개한다.
첫째, 어떤 문제가 있을 때 그 문제에 관한 나의 의사가 있지 않도록 마음을 비우려고 노력한다. 둘째, 결과에 대해서는 나의 감정이나 이상을 개입시키지 않도록 노력한다. 셋째, 성령께서 나를 인도하시고자 하는 방향을 깨달으려고 노력한다. 넷째, 주변 상황을 고려한다. 종종 상황과 말씀과 성령이 서로 연결되어 하나님의 뜻을 밝혀준다. 다섯째, 기도하는 가운데 하나님의 뜻을 내게 보여주시기를 간구한다. 여섯째, 앞에 열거한 대로 하나님께로 향한 기도를 통하고, 성경 말씀과 묵상을 통한 뒤에 심사 숙고하여 다다르게 된 결론에 따라 행한다. 이때 내 마음에 평안이 따르면, 두세 번 더 기도한 다음 진행한다.
죠지
트루엣은 이런 말을 했다.“인간이 가질 수 있는 가장 위대한 지식은 하나님의 뜻을 아는 것이며, 인간이 행할 수 있는 가장
위대한 업적은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삶은 비록 역경이 있다 할지라도 영원한 행복과 풍요로움이
보장되어 있다. 매일 매순간의 삶 가운데 우리의 무릎을 꿇고 주님의 뜻을 구하자.
▣ 돼지를 잘 먹이는 이유
돼지는 주인에 의해서 온갖 좋은 것으로 사육되어진다. 돼지가 잘 먹는 것을 주며 좋아하는 것을 제공한다. 그런데 그것이 누구를 위함인가? 돼지를 위해서 돼지를 먹이는가? 그렇지 않다. 다만 돼지의 주인을 위해서 돼지를 먹일뿐이다.
느부갓네살은
다니엘과 그의 친구들에게 왕의 진미와 포도주를 제공하도록 했다. 그러나 그것은 은총이나 혜택이 아니라 자기를 섬기게하기
위함이었다. 다니엘은 왕이 주는 것들을 과감히 배격했다. 그것으로 자기를 더럽힐수 없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뜻대로 살기
위함이다. 진미와 포도주를 거부하고 채식과 물만 먹었다. 하나님이 그들을 축복하신 것은 물론이다. 진미로 배불린 사람보다 더
아름답고 건강하게 하셨다. 사단이나 세상권력은 우리를 자신의 세력 밑에 두기 위해서 온갖 수단을 다 사용하다. 세상의 좋은
것들, 귀한 것들, 맛나는 것들 화려한 것들을 제공하고 진열하고 마음껏 먹으라 한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를 위한 것이 아니다.
자신의 종을 삼고자 함이다. 신앙인은 세상이 주는 것으로 배불리려 해서는 안된다.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으로 충만해지려고 해야
한다. 하나님 앞에서 너희 말을 듣는 것과 하나님의 말씀 듣는 것 중에 어느 것이 옳은가 판단하라 고 외쳤던 베드로의 말을 되새겨봐야 할 때이다.
▣ 감옥에 갇힌 것도 하나님의 뜻
1920년
아르메니아가 공산 러시아에 의해 유린당한 이후 이나라에서는그리스도를 증거하는 일이 무척 어려워졌고 위험했다. 그러나 신실한
신앙인인 네리 먼 남작은 사람의 법보다 하나님을 더 순종하였다. 그는 그리스도를 전하기에 쉬지 않았고어려운 때일수록 굳건히 서야
함을 권면하였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감옥에 갇혔다. 그는 감옥에서도 갇혀 있는 죄수들에게 복음을 전했다. 이를 본
간수가 그를 조롱했다. "여보시오. 당신의 그리스도는 너무 무력해서 당신을 옥에서 구해내지도 못하지 않소?" "내가 옥에 갇힌 것이 도리어 그리스도의 권능을 증명하는 것이오. 내가 그대더러 이 옥에 들어와 갇힌 사람들에게 전도하게 해달라고 청한다면 들어 주겠소?" "물론 안되지요." "그러니까 당신은 그리스도의 권능을 깨달아야 해요. 그 분께서 나를 여기 갇힌 자들에게 전도하게 데려 오셨소. 그대는 사실 내 전도를 위하여 숙식을 무료로 제공하는 셈이오."
▣ 뜻에 관한 성경 말씀
0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주의 뜻 행하기를 즐기오니 주의 법이 나의 심중에 있나이다 하였나이다(시 40: 8) 0 사람의 마음에는 많은 계획이 있어도 오직 여호와의 뜻이 완전히 서리라(잠 19:21) 0 누구든지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자는 내 형제요 자매요 모친이니라(막 3: 35) 0 가라사대 아버지여 만일 아버지의 뜻이어든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내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 하시니(눅 22:42) 0 하나님이 죄인을 듣지 아니하시고 경건하여 그의 뜻대로 행하는 자는 들으시는 줄을 우리가 아나이다(요 9:31) 0 어떻게 하든지 이제 하나님의 뜻 안에서 너희에게로 나아갈 좋은 길 얻기를 구하노라(롬 1:10) 0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롬 12: 2) 0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살전5:16- 18) 0 그를 향하여 우리의 가진 바 담대한 것이 이것이니 그의 뜻대로 무엇을 구하면 들으심이라(요일 5:14)
개역개정,22 예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여 이르시되 하나님을 믿으라 새번역,22 예수께서는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하나님을 믿어라. 우리말성경,22 예수께서 대답하셨습니다. “하나님을 믿어라. 가톨릭성경,22 그러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 하느님을 믿어라. 영어 NIV,22 "Have faith in God," Jesus answered. 영어 NASB,22 And Jesus answered saying to them, "Have faith in God. 영어 MSG,22 Jesus was matter-of-fact: "Embrace this God-life. Really embrace it, 영어 NRSV,22 Jesus answered them, "Have faith in God. 헬라어신약 Stephanos,22 και αποκριθεις ιησους λεγει αυτοις εχετε πιστιν θεου 라틴어 Vulgate,22 et respondens Iesus ait illis habete fidem Dei 히브리어 Modern,22 ויען ישוע ויאמר אליהם תהי נא בכם אמונת אלהים׃
ō) ἔχω
스트롱번호 2192
1. 가지다. 2. 손에 가지다. 3. 입다하나님을 믿으라 하나님의 믿음을 소유하라(가져라)
예수는 그의 제자들에게 하나님을 믿으라고 가르치셨다. 하나님을 신뢰하는 믿음은 그의 전능하신 능력과 무한히 선하심을 의심 없이
신뢰하는 것이다. 엄숙한 선언에 뒤이어 예수님은 “누구든지 이 산더러 들리어 바다 속으로 던지우라고 하면 그렇게 될 것이라”고
과장법을 사용하여 말씀하셨다. 한 가지 조건은 부정적으로는 의심없이 그리고 긍정적으로는 믿음으로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인데 그러한
기도는 이루어지게 될 것이다. 이와 같은 신앙은 이스라엘의 부족한 신앙과 대조되었다. 그러므로 기도는 사람으로는 할 수 없는 것을
하나님의 능력으로 하게 하는 두드림이 되기 때문에 예수는 그의 제자들에게 무엇이든지 기도로 구한 것은 이미 받은 줄로 믿으라고
훈계하셨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하나님을
믿으라”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을 중심으로 오늘 우리는
또 다시 “믿음”에 대해서 함께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무엇일까? 우리는 이 문제에 대해서 늘 생각하고
이 질문에 대한 확고하고 분명한 성경적 해답을 갖고 있어야 할 것입니다. 제가 배우고 깨달은 바로는, “믿음”은 두 가지
근본적인 요소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하나는 “실재(reality)”이고 다른 하나는 “그 실재에 대한 나의 확신과
참여(confidence and
participation)”입니다. 이런 점에서 믿음은 한 편으로는 “우주적인(universal)” 것이며, 다른 한 편으로는
“개인적인(personal)”
것입니다. 이탈리아의 철학자이며 과학자인 갈릴레오는 “지구가
태양 주위를 돈다”는 지동설을 주장하는 책을 출간했다가 종교재판에 회부되고 고문과 화형의 위협 속에서
이 주장을 철회하였습니다. 하지만 그는 재판장을 나오면서 “그래도
지구는 돈다(Yet the earth does move)”고 중얼거렸다고 합니다. 이것이 “믿음”입니다. 지구가 태양을 돈다는
실재(universal reality)가 있고, 마음 속에 이것을 부인할 수 없는 확신(personal confidence)이
있습니다. 이 믿음이 갈릴레오의 심장 깊은 곳에 자리잡고 있었으며, 세상의
어떤 권세도 그것을 깨뜨릴 수는 없었습니다. 실재가 아닌 것을 믿는 것은 망상이나 착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실재를 인정하지만 내가 그것을 전적으로 신뢰하고 몸소 참여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불의하고
비겁한 행동입니다. 갈릴레오의 이야기를 비유로 하자면, 예수님께서
“하나님을 믿으라” 하실 때 그 믿음이란 우리가 모든 ‘불리한’ 상황에서 “그래도
하나님은 살아계신다(Yet God is living)”라고 중얼거리는 것과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믿음이란 우리가 살면서 하는 모든 생각과 말과 행동에 영향을
미치며 그것들을 의미 있고 가치 있게 만드는 “베이스(base - fundamental
principle or underlying concept of a system or theory)”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전쟁을 수행하는 군인은 “승리(victory)”가 그 삶의 베이스가 될 것입니다. 적을 이기는 승리야말로
그의 삶을 명예롭고 가치 있게 만들 것입니다. 굳이 “이기기
위해서”라는 말을 하지 않아도, 이 사람의 생각과 말과 행동은
어떻게 하면 싸움을 이길 것인가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을 것이며, 그것과 상관이 없는 일들은 이 사람에게
별로 의미가 없을 것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이 베이스는 무엇일까요? 아마도 “돈”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많은 사람들에게, 돈이야 말로 가치의 근본이며
믿을만한 의지가 됩니다. 그래서 돈에 대해 많이 생각하고 얘기합니다.
“결국은 돈이야!”라고 실토합니다. 저는 대학을
졸업하고 한 회사에서 첫 직장생활을 시작했습니다. 얼마 후에 이 회사는 주식을 공개했습니다. 회사의 주식을 일반인들에게 판매하는
것입니다. 주식을 공개하면서
회사 직원들에게도 일정 수의 자사 주식을 비교적 싼 값에 살 수 있는 권리를 줍니다. 당시 주식시장은
활황이었고 더구나 회사에서 돈을 무이자로 빌려주었기 때문에, 그냥 서류에 서명만 하면 수백 주의 주식을
받고 적지 않은 이익을 기대할 수 있었습니다. 모든 직원들이 흔쾌히 서류에 서명을 하고 회사 돈을 빌려
주식을 샀습니다. 그런데 저는 고민이 되었습니다. 당시 막
크리스천이 되어 예수님처럼 살겠다는 열정이 하늘을 찌르고 있던 저는 매일 주가의 등락에 울고 웃는 사람들이나 주식으로 불로소득을
올리는 것이 불편하게
생각되었습니다. 결국 저는 회사 주식을 사지 않았고, 사람들은
이런 저의 행동을 이상하게 바라보았습니다. 그런데 주식이 공개된 지 얼마 후 한국의 주식시장이 급격히
침체되고 저희 회사 주식의 값도 처음 공개시의 가격보다도 더 낮게 떨어졌습니다. 결국 주식을 산 사람들은
모두 손해를 보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사람들은 저의 “이상했던
행동”을 이제 매우 “유의미한 (significant) 행동”으로 달리 보기 시작했습니다. 사무실 직원들은 제게 질문했습니다:
“전낙무씨, 주가가 떨어질 것이란 것을 어떻게 알았어요?” 저는 어이가 없어서
그런 게 아니라고 손을 내둘렀지만 소용이 없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하나님을
믿으라” 말씀하십니다. 오늘 본문은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하신 배경이 되는 두 가지 사건들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하나는 예수님께서 저주하신 무화과 나무가 말라버린
것이며, 다른 하나는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의 성전을 깨끗하게 하신 것입니다. 이 두 사건은 좀 특이한 형식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먼저 예수님께서
무화과 나무를 저주하시고 이어서 성전을 깨끗하게 하신 후 다음날 아침에 저주하신 무화과 나무가 뿌리로부터 말라버린 것이
발견됩니다. 한 사건의 앞부분과 뒷부분이 또 다른 사건을 샌드위치처럼 감싸고 있는 모양입니다. 대부분의 성경학자들은 이 두 사건이
같은 의미를 품고 있다고 말합니다. 그것은
“이스라엘의 열매 없는 거짓 신앙과 이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입니다. 예수님께서 멀리 서있는 한 무화과나무를 보셨습니다. 본문에는
이
나무를 “잎사귀가 있는 무화과나무”라고 묘사하고 있습니다. 배가 고프셨던 예수님께서는 이 나무에서 먹을만한 열매를 얻을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하셨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나무에 가까이 가셨을 때 그 나무에는 잎사귀 외에는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그냥 “보기에만
좋은” 그런
나무였습니다. 이에 예수님께서 나무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이제부터
영원토록 사람이 네게서 열매를 따먹지 못하리라!”
예수님 당시 유대인들의 신앙은 잎사귀는 무성하지만 열매는
없는 이 무화과나무와 같았습니다. 사실 유대인들의 종교 생활은 동서고금을 통해서 비교할 상대가 없을
정도로 유별난 것이었습니다. 그들의 삶 전체가 종교였습니다. 그들에게는
하나님께서 거하시는 예루살렘의 성전이 있었고, 모세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아 전한 율법이 있었고, 또 조상 아브라함으로부터 내려오는 바
선민의 표시인 할례가 있었습니다. 성전과
율법과 할례는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거룩한 옷”과 같았습니다. 무화과나무로 치자면 아름답게 보이는 “무성한 잎”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성전에 들어가셨을 때, 그곳에서 보신 모습은 “거룩함”과는
거리가 멀었습니다. 그 곳은 성전이 아니라 물건을 매매하고, 돈을
바꾸고, 동물을 거래하는 장사꾼들로 붐비는 시장바닥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장사꾼들을 내어쫓으시고 그들의 상과 의자를 둘러엎으셨습니다. 그리고 책망하셨습니다. “기록된바 내 집은 만민의 기도하는 집이라
칭함을 받으리라고 하지 아니하였느냐? 너희는 강도의 굴혈을 만들었도다!” 가장 거룩해야 할 성전에서 유대인들은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기 위해 오는 사람들을 상대로 장사를 하며 돈을 벌었습니다. 한 예로, 본래 유대인들은 하나님께 희생으로 드릴
짐승을 직접 갖고 오는 것이 원칙이었지만, 성전의 제사장들은 이렇게 사람들이 갖고 오는 짐승들을 “흠이 있다”고 하며 퇴짜를
놓고 대신 성전에서 파는 짐승들을 터무니없이 비싼 값에 사도록 했다고 합니다. 또 모든 사람들이 내야 하는 성전세를 시중에서는
유통되지 않는 특정한 화폐로만 내도록 하면서 엄청 높은 환전수수료를
부과했다고 합니다. 유대인들이 자랑하는 성전은 실상 강도들의 소굴이었던 것입니다.
사람들이 신앙을 통해서 하나님께로부터 얻고자 하는 것이
무엇일까요? 단순하게 말하자면 그것은 올바른 삶(義)과 행복한 삶(福)입니다. 이
둘은 모두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곧 하나님의 용서하심과 하나님의 축복하심을 통해서만 우리는
하나님 앞에 의롭고 행복한 삶을 살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가장 절실하게 원하는 것이 모두
하나님 안에 있으며, 하나님께서는 믿음으로 그 앞에 나아오는 자들에게 이 은혜를 주십니다. 하지만 유대인들은 이 하나님을 믿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하나님께
자신의 죄를 고백하고 하나님의 용서하심을 받는 대신, “자기의(self-righteousness)”를
고집했습니다. 무화과나무가 무성한 잎으로 열매 없는 자신을 치장한 것처럼, 유대인들은 성전과 율법과 할례로 꾸민 종교생활로 자신들의 죄를 가리고 마치 세상에서 가장 거룩하고 의로운 사람들인
양 행하였습니다. 이렇게 겉을 “자기의”로 치장함과 동시에 그들의 내면은 돈에 대한 탐욕으로 가득했습니다. 이들은
하나님의 신실하심과 긍휼하심을 의지하여 살지 않고, 성전을 찾는 사람들의 주머니를 털어 자신들의 욕심을
채웠습니다. 이들에게 하나님은 없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사야서
말씀을 인용하여 이런 유대인들의 거짓된 신앙을 책망하셨습니다.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존경하되 마음은
내게서 멀도다” (마가복음 7:6). 갈릴레오는 비록 위협에
굴복하여 입으로 자신이 믿는 지동설을 철회하였지만, 그의 마음은 여전히 “그래도 지구는 돈다”고 외쳤습니다.
유대인들은 그 반대였습니다. 입으로는 하나님을 찬송하고 존경했지만 마음 속으로는 “자기의”를 자랑하고 “돈이
최고야!” 속삭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열매 없는 무화과나무에게 “이제부터 영원토록 사람이 네게서 열매를 따먹지 못하리라!” 말씀하시자
곧 나무가 뿌리로부터 말랐습니다 (20절). 뿌리가 말랐다는
것은 이 나무가 근본부터 잘못되었음을 보여줍니다. 유대인들은 “거룩한
삶”을 살기 위해 수없이 많은 계명들을 지켰습니다. 하지만
그들의 삶의 뿌리(베이스)는 하나님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의 삶의 뿌리는 “위선적인 종교 생활로 세워진 자기의”와 “세속적인
축복(돈)”이었습니다. 이것이야말로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주의하라고 경고하신
바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의 누룩”이었습니다. 이 뿌리가 너무 깊어서 돌이킬 수 없는 지경이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저주하신 무화과나무가 뿌리로부터 말라버린 것과 같이 유대인들이 자랑하던 성전 곧 그들이 “도적의 소굴”로 더럽힌 성전은 후에
디도(Titus) 장군이 이끄는 로마군의 공격으로
인해 “돌 위에 돌 하나도 남지 않고” 완전히 무너졌습니다. 하나님께 믿음의 뿌리를 내리지 않은 삶은 그것이 아무리 푸르고
무성하더라도 이미 죽은 나무와 같은 것입니다. 영원한 생명의 열매는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옵니다. 그러므로 오직
하나님께서 우리의 베이스가 되시며, 우리의 삶은 이 하나님께 뿌리를 내려야 합니다. 오직 하나님께서 나의 의가 되시며, 하나님께서
나의 복이 되셔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하나님을
믿으라” 말씀하셨습니다. 오늘 말씀은 우리가 하나님을 어떻게
믿어야 할 것인지에 대한 몇 가지 중요한 방향을 제시합니다.
첫째, 믿음이란
주님의 말씀으로 세상을 보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예수님께서 저주하신 무화과나무가 뿌리로부터 마른 것을 보고 놀라워하며 말했습니다. “랍비여 보소서 저주하신 무화과나무가 말랐나이다!“ “잎이 무성한
나무”는 자연의 일부입니다. 이 나무는 땅에 깊이 뿌리를
내리고 있으며, 계절을 따라 무성한 잎을 내고 있습니다. 이
“자연 속에 살아있는 나무”는 절대로 마를 수가 없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말씀하시자 이 모든 자연의 조화들이 중단되고 나무는 뿌리로부터 말라버렸습니다. 예루살렘 성전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예수님 당시 성전은 수십 년의
세월에 걸쳐 건축되고 있었던 당대 최고의 건물이었습니다. 이 성전을 보고 감탄한 제자들은 예수님께 말했습니다. “선생님이여 보소서 이 돌들이 어떠하며 이 건물들이 어떠하니이까?” 그러자
예수님께서 대답하셨습니다. “네가 이 큰 건물들을 보느냐?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고 다 무너뜨려지리라.” 제자들처럼 우리도 자주 “세상 속에서 (in the context of the world)” 세상과
자신을 보고 이해합니다. 세상의 화려한 문명을 감탄하며, 매일
동쪽에서 떠오르는 태양을 보면서, 오늘도, 내일도, 모레도, 그리고 앞으로도 많은 날을 계속해서 이렇게 평안히 살 것으로
생각합니다. 하지만 우리가 “당연하게 여기는” 이 세상은 결코 영원하지 않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말씀만이 영원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세상 속에서” 태평하게
살 것이 아닙니다. 주님의 경고의 말씀 안에서 (in the
context of the Word) 깨어있는 삶을 살며, 우리 앞에 일어나는 모든 일을
하나님의 말씀의 눈으로 보고, 깨닫고, 이해해야 합니다. 이렇게 사는 것이 하나님을 믿는 것입니다.
둘째, 믿음이란
하나님의 능력에 대한 완전한 긍정
(Absolute Yes)입니다.
23절 말씀입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이 산더러 들리어 바다에
던지우라 하며 그 말하는 것이 이룰 줄 믿고
마음에 의심치 아니하면 그대로 되리라.” 이 예수님의 말씀에서
keyword는 “의심”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마음 속에 주님께 대한 어떤 의심 곧 부정적인 생각도 용납하지 않으십니다.
성경에는 하나님을 의심하다가 (시험하다가) 망한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열왕기 6-7장에 보면 사마리아 성이 아람 군대에
포위되어 성 내의 사람들은 심지어 자식까지 삶아먹어야 할 정도로 극심한
식량난을 겪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선지자 엘리사를 통해서 “내일까지” 그들에게 먹을 양식이 흔해빠질 정도로 넘치게 하시겠다고
하십니다. 이에
한 왕의 장관이 비웃었습니다. “하늘에 창을 내신들 어찌 이런 일이 있으리요?” 그러자 엘리사가 대답합니다. “네가 네 눈으로
보리라 그러나 그것을
먹지는 못하리라!” 과연 하나님의 말씀대로 아람 군대가 쫓겨가고 사마리아 사람들은 그들이 버리고 간
식량들을 마음껏 노략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의심한 왕의 장관은 사람들에게 밟혀 죽었습니다. 우리는 자주 “산”처럼
절망적인 문제(Absolute No)에 가로막힌 자신을 봅니다. “산”처럼 그 문제는 당연히 그리고 영원히 거기에 있을 것
같습니다. 하지만
믿는 자에게 “Absolute No”는 없습니다. 심지어
아주 희미한 의심의 그림자조차 하나님께서는 허락하지 않으십니다. 오직 “Absolute Yes”만 있을 뿐입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전능하시기
때문입니다.
셋째, 믿음이란
오직 기도와 감사로만 사는 것입니다.
24절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그대로 되리라.” 우리가 구하는 것마다 “즉시” 받는다면, 우리는
늘 하나님께 나아가 기도하고 또 감사할 것입니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기도를 “즉시”
들어주시기 보다는 “하나님의 때”에 들어주십니다. 우리는 이 시간의 갭(time gap)을 믿음의 기다림으로 채워야
합니다. 이 기다림의 시간 동안에는 아무것도 눈에 보이는 것이 없습니다. 그냥 “물 없는 광야를” 걸어가는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받은 줄로 믿으라” 하십니다. 눈에 보이지 않지만 믿음으로 보는 것입니다. 그리고 즐거워하고 감사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믿음입니다.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의 특징은 잘 기다리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눈에
보이는 결과가 없으면 끊임없이 불평하며, 성내며, 방황합니다. 믿는 자는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자는 기다림의 시간을
오직 기도와 감사로 채웁니다. 그리하면 마침내 기도하고 구한 것이 “그대로 되는" 하나님의 은혜와 영광을 체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믿음이란
쓴 뿌리를 품지 않는 것입니다. 25절
말씀입니다. “서서 기도할 때에 아무에게나 혐의가 있거든 용서하라 그리하여야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도
너희 허물을 사하여 주시리라.” 우리는 자주 다른 사람을 미워하거나 원망하는 마음을 품습니다. 그리고 이런 마음을 품는 것은
당연하게 생각합니다. 문제는 “원망하는 나”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잘못한 너”에게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유여하를
막론하고 마음에 품고 있는 미움이나 원망은 우리 영혼에 해로운 독한 기운을 뿜어냅니다. 그리고 이 쓴 뿌리를 없애는 유일한 길은
“용서”입니다. 에베소서 4:31,32절에서
사도 바울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너희는 모든 악독과 노함과 분냄과 떠드는 것과 훼방하는 것을 모든
악의와 함께 버리고 서로 인자하게 하며 불쌍히 여기며 서로 용서하기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심과 같이 하라.”
다른 사람의 죄를 용서하는 것은 참 쉽지 않습니다. ‘용서한다’는 말의 원어는 ‘보낸다 (let
go, send away),’ ‘포기한다 (give up)’ 등의 뜻을 담고 있습니다. 이것은 용서가 “조건 없이” 베풀어져야
하는 것임을 의미합니다. 하나님께서도 나의 허물을 “조건
없이” 용서해 주셨습니다. 우리가 살 길은 “형제의 허물에 대한 원망”을 내려놓고, 대신에 “나의 허물에 대한 하나님의 용서”를
마음에 품는 것입니다. 이 사랑으로부터 온갖 향기로운 생명의 기운들이
흘러나옵니다.
갈릴레오가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모든 진리는 일단 발견하기만 하면 그것을 이해하기는 쉽다; 다만
그것을 발견하기가 어려울 뿐이다 (All truths are easy to understand once they
are discovered; the point is to discover them).” 오늘날 우리는 아무도 지구가 태양을 돌고
있다는
사실을 의심하지 않습니다. 이 진리에 따라 하늘을 관찰하면 모든 천체의 움직임들이 아주 쉽게 이해가
됩니다. 하지만 “지구가 태양을 돌고 있다”는 진리를 발견하기까지는 수천 년의 세월이 걸렸으며 그간 수많은 우여곡절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살아계심과 그 무한하신
능력과 사랑을 일단 발견하기만 하면, 우리는 모든 것을 이해할 수 있게 됩니다. 무슨 일이 일어나든 “아하!” 하는
탄성이 나오게 됩니다. 정말 어려운 것은 우리 속에 깊이 내려진 “자기의”와 “탐욕”의 뿌리를 뽑아내고, 진심으로 하나님을
바라보고, 의지하며, 주님을 알아가는 것입니다. 진심으로 하나님을 믿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 각자가 참으로 하나님을 믿는 신자가
되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중국
고사에 “우공이산 [愚公移山]”이란 말이 있습니다. 북산에 우공이라는 아흔 살 된 노인이 살고 있었는데 노인집 앞에 만 길
높이의 태행산과 왕옥산이 가로막고 있어 생활하는 데 무척 불편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노인은 가족들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 가족이 힘을 합쳐 두 산을 옮기자. 그러면 길이 넓어져 다니기에 편리할 것이다. 당연히 가족들은 반대했으나 노인은 자신의
뜻을 굽히지 않고 다음날부터 작업을 시작하였습니다.
우공과
아들, 손자는 지게에 흙을 지고 발해 바다에 갔다 버리고 돌아왔는데, 꼬박 1년이 걸렸습니다. 이 모습을 본 이웃 사람이 “이제
멀지 않아 죽을 당신인데 어찌 그런 무모한 짓을 합니까?” 하고 비웃자, “내가 죽으면 내 아들, 그가 죽으면 손자가 계속 할
것이오. 그동안 산은 깎여 나가겠지만 더 높아지지는 않을 테니 언젠가는 길이 날 것이오.”라고 하였습니다.
두 산을 지키던 산신이 이 말을 듣고는 큰일 났다고 여겨 즉시 상제에게 달려가 산을 구해달라고 호소했습니다. 이 말을 들은 상제는 두 산을 각각 멀리 삭땅 동쪽과 옹땅 남쪽으로 옮기도록 하였다는 우화입니다.
어리석을지라도 결코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노력하는 사람이 세상을 바꿀 수 있음을 알려 주는 고사라 할 수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산을 옮기는 일은 상상속의 우화로 가능한 일입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은 믿는 자에게 모두가 산을 옮기기까지
하는 큰 믿음을 가지고 있음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예수님께서 고난 주간에 예루살렘에서 있었던 사건이 기록하고 있습니다. 베다니라는 곳에 머물던 주님과 제자들은 이른 아침 예루살렘 성전을 향해 걸어가게 되었습니다.
예루살렘
성전 가까이에 왔을 때 무화과나무가 있었습니다. 주님은 그 무화과나무에서 무엇인가를 먹을 것이 있을까하여 무화과나무 가까이에
가셨습니다. 그러나 열매가 없는 잎만 무성한 무화과 나무였습니다. 주님은 그 잎만 무성한 무화과나무를 향해 “이제부터 영원토록 사람이 네게서 열매를 따먹지 못하리라” 말씀하셨습니다.
다음 날 아침 제자들은 다시 예루살렘 성전으로 주님과 함께 들어가게 되었을 때 그들은 참으로 놀라운 광경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어제 아침에 주님으로부터 저주 받은 무화과나무가 뿌리부터 완전히 말라 죽어 있었던 것입니다.
베드로는 주님의 말씀이 생각이 나서 “선생님. 선생님께서 저주하신 무화과나무가 말랐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 때 주님께서는 그들에게 “하나님을 믿으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무화과 나무를 저주한 것을 보고 어떤 주석가는 잎만 무성하고 열매 맺지 못하는 이스라엘을 향한 것이라고 해석합니다. 또
어떤 주석은 무화과 때가 아니라도 열매를 요구하시는 예수님을 보고 영적 추수기 전에도 열매를 찾으실 수 있다고 해석했습니다.
불신자인 영국의 작가“버틀란드 러셀“은 ”나는 왜 크리스챤이 아닌가“라는 책에서 이 사건을 예수를 믿지 않는 이유로 들고 있습니다. 때도 아닌데 열매를 찾으시고 자연의 일부분인 나무를 말라 죽게 저주를 했다는 것입니다.
본문 말씀은 단순히 주님의 축복과 저주의 말씀이 매우 준엄하다는 것을 보여주시는 것이 아니라 제자들에게 하나님을 믿는 믿음과 기도의 중요성을 깨우쳐 가르치시고자 한 사건입니다.
본문 말씀을 중심으로 은혜를 나누어 보겠습니다.
첫째 예수님은 왜 “하나님을 믿으라”고 하셨을까요?
“하나님을 믿으라”라는 말씀의 영어 번역은 “Have faith in God" 로 직역하면 ”하나님안에 있는 믿음을 가지라“이고 킹제임스 번역은 ”Have the faith of God" 즉 “하나님의 믿음을 가지라”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은 하나님께서 소유하신 믿음과 같은 종류의 믿음을 소유하셨음을 제자들에게 무화과 나무의 저주 사건으로 몸소 보여주셨습니다.
너희들도 나와 같이 하나님께서 소유하고 계신 것과 같은 종류의 믿음을 가지라고 한 말씀이 “하나님을 믿으라”고 하신 것입니다.
우리 인간에게는 3가지의 믿음의 대상이 있습니다. 사람을 믿는 것과 마귀를 믿는 것 그리고 오늘 본문 말씀인 하나님을 믿는
것입니다. 먼저 사람을 믿는 것은 믿을 수 있다면 좋은 것입니다. 우리가 세상을 살아 갈 때에 사람들 속에 함께 살아가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신용이 좋아야 하고 사람들에게 신뢰를 얻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은 믿을 수 없습니다. 모두
완전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다음은 마귀를 믿는 것입니다. 마귀는 죄를 짓게 합니다. 도둑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는 일을 하게 합니다. 마귀는 자신의 주먹을
믿게 합니다.
한없는
명예욕을 갖게 하여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출세의 길로 나아가게 합니다. 탐욕으로 돈에 눈이 멀게 합니다. 환경을 믿고 세상에
취하여 멸망의 길을 걷게 하는 것입니다. 말 못하고 일어서지도 못하는 목석 과 금은으로 만든 우상을 믿고 섬기기도 합니다.
하나님의 백성된 우리는 하나님을 믿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자에게는 하나님이 소유하신 것과 같은 종류의 믿음을 모두 가지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 하나님을 믿으라는 말씀은 제자들이 하신 말씀이 아니라 예수님이 하신 말씀입니다.
예수님이 보여주신 사건에서 예수님은 태초에 하나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실 때 사용하셨던 그 믿음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주관자이시고 역사하시는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잘 알아야 합니다.
먼저 우리는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믿어야 합니다. 구약 성경에서 가장 많이 언급된 하나님의 칭호는 “엘 샤다이”라는 호칭입니다. 이는 “전능하신 하나님”이라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무한하신 능력을 갖고 계십니다.
창세기 17장 1절에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 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전능하심은 천지만물을
창조하신 사실에서 알 수 있습니다. 성경은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는 말씀으로 시작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가라사대 빛이 있으라 하시매 빛이 있었고, 하나님이 가라사대 천하의 물이 한 곳으로 모이고 뭍이 드러나라 하시매 그대로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가라사대 땅은 풀과 씨 맺는 채소와 각기 종류대로 씨 가진 열매 맺는 과목을 내라 하시매 그대로 되었습니다. 이와 같이 태초에
천지를 창조하시고 마지막으로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으로 사람을 창조하신 것입니다. 이로써 우리는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믿으라는 것은 예수님을 믿으라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4장1절에 보면 십자가의 길을 가신다는 예수님의 말씀에 근심하는 제자들에게“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본적이 없으되 예수님은 역사적으로 보고 말씀을 듣고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예수님을 아는 것이 바로 하나님을 알고
예수님을 믿는 것이 하나님을 믿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예수님은 하나이시기 때문인 것입니다. 요한복음 1장 1절로 3절에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예수님과 하나님은 동시에 같이 계셨으나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만물을 지으셨기 때문에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다고 하십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완전한 하나님이 완전한 사람으로 오셨기 때문에 예수님을 본 자는 하나님을 본 것 입니다. 요한복음
14장 11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심을 믿으라 그렇지 못하겠거든 행하는 그 일을 인하여 나를
믿으라" 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아버지를 믿는다는 것은 바로 예수님을 믿는 것을 말한 것입니다.
예수님을 아는 것은 바로 아버지를 아는 것입니다. 아버지 안에 예수님이 계시고 예수님 안에 아버지가 계신 것입니다. 아버지와 예수님은 하나이신 것입니다. 두 인격자이시나 완전히 하나로써 존재하시고 역사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믿으라는 것은 바로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에게 베푸신 은혜를 믿으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피를 흘리심으로 우리에게 구원의 놀라운 은혜를 주셨습니다. 무조건 믿으면 죄 사함을 받고 용서받고
의롭게 되는 길을 열어 놓은 것입니다.
예수님은 마태복음 11장28절에“수고하고 무거운 짐진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은 죄 짐, 세속의 짐, 마음과 몸의 질병의 짐, 가난과 저주의 짐, 죽음의 짐을 십자가에서 홀로 짊어지신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으라는 것은 하나님께서 예수를 통해서 우리의 모든 질병을 대속하시고 치료와 건강을 주시며 저주에서 해방하시고
모든 가난에서 놓여나게 해 주시고 형통의 복을 주시는 하나님을 믿으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으라는 것은 오늘날 우리에게 성령을 보내주시기 때문에 믿으라는 것입니다. 창1장 2절에 보면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영은 수면 위에 운행하시니라” 땅이 공허하고 혼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는 것은
3차원의 세계의 모습인 것입니다. 물질세계에 사는 우리 인간의 삶은 공허한 상태에 무질서가 지배하여 절망상태에 떨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의 지혜나 노력으로는 이 삶의 문제를 해결될 수 없습니다. 문제가 절망적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성령께서 우리의 마음에 운행하시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성령께서는 인간의 삶을 혼돈에서 질서로 새롭게 하십니다.
성령이 오시면 새롭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생활이 공허하고 혼돈하며 절망할 때 하나님을 바라보면 성령을 보내 주시여 새로운
삶을 주시는 것입니다. 문제를 해결해 주시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소망과 희망을 갖고 일어서게 되는 것입니다.
개인 가정에 절망상태에 빠져 눈에는 아무 증거 안보여도 성령이 계시기 때문에 희망이 있는 것입니다. 그것을 사람들이 깨달아야
되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창조하시고 하늘 보좌에 가만히 있는 분이 아니십니다. 우리의 일을 행하여 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에레미아 33장 2-3절 말씀에 “일을 행하는 여호와, 그것을 지어 성취하는 여호와, 그 이름을 여호와라 하는 자가 이같이
이르노라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비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백성이 믿고 순종하면 모든 필요를 채워 주셨습니다.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독생자 예수를 보내주셨습니다.
시편 68장19절에 “날마다 우리 짐을 지시는 주 곧 우리의 구원이신 하나님을 찬송할지로다” 날마다 우리의 짐을 날마다 지시는 분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믿으라는 것은 우리의 짐을 지신다는 것을 믿으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우리의 무거운 짐을 기도로 맡기고 의지할 때 우리의 일을 대신해 주시는 분인 것입니다. 이 하나님을 바라고 나아가면 우리의 인생은 순항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은 즐겁고 보람찬 삶이 되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믿어야 합니다. 이 땅에서 인간의 이성이나 경험을 믿고서 살아갈 수는 없습니다. 젊음도 믿을 수도
없습니다. 모든 것은 다 변화되고 마는 것입니다. 하늘과 땅을 지으시고 인간의 생사화복을 주장하시며 우리의 길을 정해놓으신
하나님을 믿어야만 되는 것입니다.
둘째 하나님을 믿는 것은 담대한 믿음의 말을 하는 것입니다.
본문 23절에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이 산더러 들리어 바다에 던지우라 하며 그 말하는 것이 이룰 줄 믿고 마음에 의심치 아니하면 그대로 되리라”
이 산더러 들리어 바다로 던져라. 여러분 이것은 인간의 생각으로는 불가능한 것입니다. 어느 해변 가 마을에 어떤 믿음이 좋은
분이 집을 가로 막고 있는 앞산을 향하여 성경에 말씀대로 “이 산더러 들리어 바다로 던지우라”하며 기도를 했다고 합니다. 사람들은
모두 그 사람이 미쳤다고 했는데 어느 날부터 바다 매립공사가 시작되어 그 산을 파서 바다를 매웠다고 합니다.
정말로 앞산이 바다로 던져졌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있었던 이야기인지 알 수 없지만 책에서 본 기억이 납니다.
본문의 이 산은 상징적으로 말한 것입니다. 그 산의 의미라고 하는 것은 장애물을 의미합니다. 바벨론에 잡혀갔던 사람들이 고향에
돌아와서 성전건축을 합니다. 성전건축을 하는데, 사마리아 사람들이 방해를 해서 짓지 못합니다. 그 때 스가랴 선지자가 말합니다.
스가랴 4장 7절에 “큰 산아! 네가 무엇이냐? ”스룹바벨“ 앞에서 평지가 되리라”
그 때에 산이라고 하는 것은 장애물입니다. 풀어야 할 문제요, 넘어야 할 산입니다. 그 산을 바다에 던져지라는 것은 문제를 풀고
해결하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산이라는 것은 내 인생에 다가오는 도저히 극복할 수 없는 인간의 힘으로 어찌할 수 없는 태산
같은 문제를 말한 것입니다.
어떻게
우리는 이러한 장애물을 물리칠 수 있는지 예수님이 가르쳐 주고 계신 것입니다. 우리의 생애에 내 생각으로는 도저히 할 수 없다고
하는 것이라도 내가 믿음으로 입술의 고백을 하면 하나님이 기적을 창출한다는 말씀인 것입니다.
믿음은 입으로 말해져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저는 설교를 준비하다가 미국의 한 목사님이 쓴 책에서 “너는 마가복음 11장
23절에 믿음이라는 말은 한번 나오는데 ‘말하다”라는 말은 세 번이나 나온 것을 아느냐?”라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다는 것을 읽게
되었습니다. 저에게 큰 깨닮음을 주었습니다. 그것은 사실이었습니다. 우리 성경은 말하다가 문맥상 기록할 필요가 없어서 생략이
되어 있으나 영어성경에 분명히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대로 되리라”는 영어성경에 “He shall have whatsoever
he SAITH”입니다.
그대로 번역하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이 산더러 들리어 바다에 던지우 라 말하며 그 말하는 것이 이룰 줄 믿고 마음에 의심치 아니하면 말한 그대로 되리라” 입니다.
우리는 믿음에 대하여 많이 알고 있지만 그것을 입 밖으로 말해야 한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습니다. 믿음은 입으로 말함으로서 밖으로
쏟아 놓아야 말한 것을 얻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믿음으로 말하는 것이 3배로 중요합니다. “그 말하는 것이 이를 줄 마음에
믿고” 말하는 것은 글자 그대로 소리 내어 말하는 것을 뜻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여러분이 그것을 말하고 그 말한 것을
마음으로 믿으면 그대로 이루어진다는 말씀입니다.
조용기 목사님이나 이영훈 목사님이 설교 후 치유의 말씀을 선포하시는 것이 바로 이 말씀을 실천하므로 역사가 일어난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은 하나님의 능력에 의지해서 담대한 꿈과 믿음의 언어를 사용하는 것입니다. 상식을 넘는
불가능한 일이라 할지라도 하나님을 의지하여 과감한 꿈을 꿔야 합니다. 나의 태산 같은 문제가 입술의 선포를 통해서 하나님의
능력으로 옮겨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마음에 믿고 입술로 고백할 때 하나님의 큰 힘이 나타나게 됩니다.
로마서 10장 10절에도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 고 말했습니다. 우리 구원조차도
우리가 믿고 입으로 시인하면 구원에 이른다고 말한 것입니다. 그러나 의심을 가지고 입술로 아무리 고백해 봤자 소용이 없습니다.
우리가 믿음을 가지고 고백을 해야 합니다.
야고보서 1장 6절에 "오직 믿음으로 구하고 조금도 의심하지 말라 의심하는 자는 마치 바람에 밀려 요동하는 바다 물결 같으니" 라고 했습니다.
여러분 태초에 천지창조 역사는 말씀으로 이루어졌습니다. 예수님은 말씀을 통해서 죄를 사하여 주시고 귀신을 쫓아내시고 병을
고치시고 죽은 자를 살리시고 바다를 잠잠케 하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시매 하나님이 그대로 이루어 주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제자들도 말씀을 가지고 사역하셨습니다. 베드로가 오순절 이후 성령 받고 성전미문에서 태어날 때부터 앉은뱅이 된 사람에게
“우리를 바라보라 은과 금은 내게 없으나 내가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주노니 나사렛 예수의 이름으로 일어나라” 그러자
앉은뱅이가 일어나고 말았습니다.
베드로는 8년 동안 중풍병으로 누워있는 애니아를 바라보고 “애니아야 예수께서 너를 고치시니 일어나라”
애니아는 즉시 일어났습니다. 또한 욥바에 가서 도르가라는 여자가 죽어 시체를 돌아보고 기도하고“도르가야 일어나라”말하니 죽은
도르가가 일어났습니다. 이와같이 베드로는 말씀으로 사역하였던 것입니다. 입술로 고백을 통해서 위대한 역사를 베풀어주신 것입니다.
오늘날도 예수를 믿는 우리의 말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역사하여 주시는 것입니다. 이러므로 말을 통해서 긍정적이고 적극적이며
창조적이고 생산적이며 희망찬 말을 해야 합니다. 부정적이고 패배적이고 파괴적이고 절망적이며 원망과 불평의 말은 우리의 영혼과
육체와 생활을 파괴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믿음은 입술의 고백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세상에도 말이 씨가 된다는 말이 있습니다. 말을 하면 그것이 심어져서
열매를 맺는 것입니다. 하나님 말씀은 더 말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믿음의 생활을 하는 사람은 말을 선택해서 긍정적이고
창조적인 말을 해야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하시는 말이 여러분의 현재와 미래의 삶에 지대한 영향력을 미친다는 것을 알고 말을 잘 선택해서 해야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분명히 말씀하시기를 “하나님을 믿으라”고 했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능력을 의심해서는 안 됩니다. 믿음의 사람은 그분의 전능하심에 의지하여 담대하게 믿음의 말을 선포해야 하는 것입니다.
셋째 우리는 믿음의 기도를 하여야 합니다.
본문 24절에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그대로 되리라” 여기서
“그러므로” 는 23절과 관련이 있습니다. 기도하고 구하면 나 자신과 다른 사람을 위해 산을 옮기는 믿음을 사용할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다른 사람을 위해 기도하는 하는 것은 다른 사람과 소원이 일치하여야 합니다. 기도해 주는 사람의 소원이
다르다면 내 소원을 떠 안겨 이루게 할 수는 없습니다.
마태복음 18장 19절입니다. “진실로 다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중에 두 사람이 땅에서 합심하여 무엇이든지 구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저희를 위하여 이루게 하시리라” 하나님은 두 사람이 구하면 무엇이든지 이루어 주신다고 약속하십니다. 참
좋으신 하나님이심을 다시 깨닫게 됩니다.
병석에
있는 어떤 사람에게 살 것이라고 내가 가지고 있는 태산을 옮기는 믿음을 사용하여 기도하더라도 정작 본인은 죽으리라고 믿는 다면
치유 받을 수 없습니다. 합의가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무엇을 얻기 위하여 합심기도하고 “아맨” 한 후에 당사자가 “그렇게 되기를 바랍니다” 라고 말하면 잘못 기도한
것입니다. 한 사람을 믿고 기도하고 한 사람을 바라고(hoping)있기 때문에 함십 기도는 실패하게 되는 것입니다.
기도하고 구한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고 했습니다. 히브리서 11장 1절에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 라고
말했습니다. 내가 바라는 것이 분명해야 믿음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믿음은 현재라는 사실을 깨달아야 합니다.
영어성경은 "Now faith is~"입니다. 지금 구원 받아야지 “구원 받을 것을 믿어요” 이렇게 말하는 사람은 지옥에 가고 말
것입니다. 지금 받은 줄로 믿어야 하는 것입니다.
또 기도는 거듭거듭 자주자주 기도해야 하는 것입니다. 누가복음11장 8절로 9절에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비록 벗됨을 인하여서는 일어나 주지 아니할지라도 그 강청함을 인하여 일어나 그 소용대로 주리라 내가 또
너희에게 이르노니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을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여기에 간청이라는 것은 인내를 가지고 강하게 구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냥 조금 구하다가 어렵다고 해서 뒤로 물러가면 안 되는
것입니다.
누가복음 18장 7절로 8절에 "하물며 하나님께서 그 밤낮 부르짖는 택하신 자들의 원한을 풀어 주지 아니하시겠느냐 저희에게 오래
참으시겠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속히 그 원한을 풀어 주시리라 그러나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 하시니라"
여기에서는 원한이라고 말했습니다.
한
서린 그런 기도를 드려야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마음속의 믿음이 생길 때까지 기도해야 하는 것입니다.
저는 본문 말씀을 기억하기 위하여 여의도 순복음교회 복음지를 거실등에 붙여 놓고 불안해 질 때 마다 붙잡고 기도를 했던 기억이
납니다. 조용기 목사님은 이러한 기도를 “하나님의 믿음”이 올 때까지 기도하는 것이라고 말씀했습니다. 나의 믿음에 하나님의 믿음이
와야 역사가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한 예화로 조용기목사님이 신학교 다닐 때 일어난 일입니다. 삼각산 기도회 도중 비기 와 계곡물이 넘쳐 길이 막혔습니다. 모두가
기도 하는 중 두 처녀가 베드로가 물을 걸은 것을 상기하고 주님께 기도하고 “주여 믿습니다” 건너다가 급류에 휩쓸리고 말았습니다.
그 처녀들은 한강에서 발견되었다고 합니다. 처녀들은 하나님을 진짜 믿었는데 왜 믿음대로 기적이 일어나지 않았을까요? 이것은
“하나님에 의한 믿음”이 임하지 않은 상태에서 무조건 기적이 일어날 줄 알고 스스로 행한 것이 잘못이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들의
믿음은 인간 편에서의 믿음이었기 때문입니다. 예수께서 베드로에게 물위를 걸으라고 명했을 때 베드로의 마음에 하나님에 의한 믿음이
부어진 것이고 이 때 물위를 걸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도 하나님의 믿음이 올 때까지 기다리고 기도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야 기적을 맛볼 수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본문 24절에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 는 것은 속에서부터 우러나오는 목표를 분명한 기도를 통해서 받은
줄 믿는 믿음이 생기게 되는 것입니다. 마가복음 9장 23절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할 수 있거든 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느니라! 라고 예수님은 말씀하고 계십니다. 믿는 자는 기도하면 능치 못할 일이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는 것은 눈에는 아무 증거 안보이고 귀에는 아무 소리 안 들리고 손에는 잡히는 것 없어도 이미 받은 줄로 믿으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아브라함의 믿음입니다.
아브라함의 믿음은 믿음의 모범입니다. 로마서 4장 17절로 18절에 보면 "그의 믿은바 하나님은 죽은 자를 살리시며 없는
것을 있는 것 같이 부르시는 이시니라 아브라함이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 믿었으니" 20절로 21절에 "믿음이 없어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치 않고 믿음에 견고하여져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약속하신 그것을 또한 능히 이루실 줄을 확신하였으니" 아브라함은
약속하신 말씀을 능히 이루 실 줄을 확신하였던 것입니다.
우리가 기도할 때 모든 기도가 즉시로 응답되는 것은 아닙니다. 응답의 시기는 하나님의 권한에 속한 것입니다. 우리는 믿음을
가지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어려운 문제를 만났을 때 기도 하다가 응답이 없다고 낙심하고 기도를 그만두면 안 됩니다. 인내해야
합니다. 마귀는 우리의 기도를 방해하기 위해서 마음에 의심을 심어주어 낙심케 만듭니다.
예수님은 본문 25절에 “서서 기도할 때에 아무에게나 혐의가 있거든 용서하라 그리하여야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도 너희 허물을 사하여 주시리라” 라는 조건을 제시하셨습니다.
우리에게 잘못한 사람들을 용서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마태복음 5장 23-24절에“예물을 제단에 드리다가 거기서 네 형제에게 원망 들을 만한 일이 있는 줄 생각나거든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 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누구와 불화하거나 원한을 품으면 기도의 문이 막힙니다. 그런 마음 상태로는 기도해 보았자 응답을 기대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우리에게 잘못한 사람들을 용서해 주지 않는다면 우리 역시 하나님의 용서를 받지 못합니다.
기도를 해도 응답이 없고 또는 기도할 의욕이 생기지 않거든 우리 마음에 누구를 미워하고 있지는 아니한지 살펴보아야 합니다.
우리가 먼저 땅에서 풀어야 하늘에서도 풀립니다.
용서가 중요하기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마태복음 6장 12절에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 라고
기도하라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우리에게 잘못한 사람들을 용서해 줌으로 하나님께 기도할 담력을 얻게 됩니다. 의인의 간구로 응답받게 되는 것입니다.
성도들은 이미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죄 씻음 받은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우리에게 잘못한 형제들의 허물을 기꺼이 용서해 줌으로써
기도에 막힘이 없도록 해야 하겠습니다.
결론입니다
사실 저는 오늘 본문 말씀이 내 생의 가장 큰 영향을 준
말씀입니다. 나를 일으킨 말씀입니다. 조용기 목사님은 일년에 2-3번은 본문의 말씀을 가지고 말씀을 전합니다. 저는 4차원 영성의
핵심 말씀임을 깨달았습니다. 믿는 자에게 주실 가장 기본적인 말씀은 “하나님을 믿으라”이라고 저는 확신합니다. 하나님을 믿는
자에게 오늘 본문을 얼마나 중요한지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태산 같은 문제가 가로 막혀 주저앉아 있을 때 주님이 주시는 “하나님을 믿으라” 라는 명령, 그 생명의 말씀이 들려와야
하는 것입니다. 그 하나님은 전능하시며, 문제가 생긴 그 시간에 일을 행하시고 역사하시며, 우리의 짐을 짊어지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위기에서 일어날 수 있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여러분도 산을 옮길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말씀하셨고 저는 그것을 믿으며 체험을 했습니다. IMF 때 회사
부도로 세상에서 쫓길 때 본문의 이 말씀을 붙잡고 믿음으로 간증하며 선포했습니다. 이제 태산이 옮기여 지고 모든 신용이 회복되어
1등급이 되고 이제는 홀로 어느 정도 경제활동도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마가복음 11장 23절을 의지하여 굳게 선 것입니다. 이
말씀에 확고히 서서 여러분이 믿는 바를 말로 하십시오. 믿음을 지금 밖으로 쏟아 내시기 바랍니다. 말한 그대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아무리 태산 같은 문제가 앞을 가로 막고 있더라도 바다로 던지우고 길을 여시는 하나님과 동행하며 많은 열매를 맺고 여러분 하시는 일에 하나님의 영광이 가득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고정주영회장님이 계실 때 현대자동차에서 포니라는 자동차를 만들었습니다. 그 때는 정말 멋지고 좋은 자동차였습니다. 그렇지만
지금 그런 자동차를 주면 타고 다닐 사람이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그리고 자동차를 만들 때 많은 시행착오를 거치면서 오늘날과 같은
최첨단기능을 가진 멋진 자동차가 만들어지게 되었습니다. T.V나 다른 전자제품도 시간이 지나면서 많이 발전했고 품질이 매우
좋아졌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오래 전에 예수님을 믿을 때는 나름대로 잘 믿었고, 믿음이 좋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수십 년이
지난 지금 과거를 되돌아보면 그 때의 믿음은 너무나 보잘 것 없는 믿음이었습니다. 그래서 믿음도 점점 더 발전해야 되고 성장하고
차원이 높아져야 합니다. 그래서 오늘은 본문말씀을 가지고 하나님을 믿으라는 말씀의 의미를 생각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하나님을 믿으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믿는 것은 곧 예수님을 믿는 것입니다. 그래서 요14:1/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곧 예수님을 믿는 것이며, 예수님을 믿는 것은 예수님의 말씀을 믿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과 예수님을 믿는 것은 우리에게 두 가지 사실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마음에 근심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믿음과 근심걱정은 함께 공존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정말 예수님을 믿는다면 마음에 근심이 있거나 어떤 문제로 인해서 염려해서는
안됩니다. 그래서 빌4:6/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고 했으며 벧전5:7/너희 염려를 다 주께 맡기라 이는 그가 너희를 돌보심이라/고 했습니다.
또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근심과 염려에 대한 말씀을 하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마6:31-33/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32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 33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정말 예수님을 믿는다면 불신자들처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는 문제로 염려하지 말아야 됩니다. 의식주문제로 염려하는 것은 예수님을 불신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성도는
염려하지 않는 것보다 한 걸음 더 나아가서 먼저 그의 나라와 의를 구해야 합니다. 어떤 사람은 의식주 문제를 염려하지 말라고
하니까 아무 일도 하지 않고 하루종일 놀면서 할렐루야! 주님께서 모든 것을 채워 주십니다! 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것은 분명 잘못된 믿음이고 주님의 참된 의도를 몰라서 그렇습니다. 언제 성경이 아무 일도 하지 말고 염려하지 말라고
했습니까? 염려하는 대신에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면 하나님이 모든 것을 채워 주신다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다면 의식주 문제를 가지고 염려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렇지만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해야 하며 맡겨진
일에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우리가 염려하지 않도록 모든 필요를 채워 주시되 넘치도록 부어주십니다. 예수님을
믿는다고 할 때 고려해야 할 또 한 가지가 있는데 그것은 마지막으로 말씀 드리겠습니다.
오늘의 말씀은 예수님께서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신 일이 있은 후 하루가 지나고 나서 있었던 일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하루
전에 예수님은 무화과나무를 향하여 이제부터 영원토록 사람이 네게서 열매를 따 먹지 못하리라는 (저주의)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리고
예루살렘성전으로 올라가셔서 더럽혀진 성전을 청결하게 하시고 다시 집으로 돌아오셔서 잠을 주무시고 그리고 다음날 다시 성전으로
올라가시는 바로 그 날 어제 그 길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베드로가 다른 사람보다 눈살미가 있었는지 무화과나무가 뿌리째 마른 것을 보고는 랍비여, 보소서 저주하신 무화과 나무가 말랐나이다 라고 소리쳤습니다.
그
말씀을 들으신 예수님은 제자들을 향하여 하나님을 믿으라고 했습니다. 저주하신 무화과 나무가 마른 사건과 관련해서 하나님을
믿으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렇지만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어떻게 믿으라든지 아니면 이렇게 믿어야 돼 라는 부가 설명이 없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을 믿으라는 말씀 다음에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막11:23-24/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이 산더러 들리어 바다에 던져지라 하며 그 말하는 것이 이루어질 줄 믿고 마음에 의심하지 아니하면 그대로 되리라 24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그대로 되리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이 두 구절의 말씀은 하나님을 믿으라는 말씀에 대한 부가설명에 해당되는 내용입니다. 왜냐하면 두 번씩이나
믿음에 관해서 말씀하셨고, 그대로 되리라는 말씀을 하셨기 때문입니다. 22절에서는 하나님을 믿으라고 명령하셨고, 23-24절에서는
하나님을 믿는 구체적인 방법과 부연설명을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본문을 통해서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곧 무엇을 믿는 것이며,
어떻게 믿는 것인지를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1.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내가 산을 향하여 말했으면 말한 그대로 될 줄 믿는 것입니다.
막11:23/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이 산더러 들리어 바다에 던져지라 하며 그 말하는 것이 이루어질 줄 믿고 마음에 의심하지 아니하면 그대로 되리라/고 했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하나님을 믿으라는 말씀을 들으면 성경을 통해서 보여 주는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하나님의 존재나 일하심에 관하여 믿는
정도로만 생각합니다. 즉 하나님의 존재를 나타내는 그분의 이름이나 하나님께서 행하신 일들을 통해서 하나님을 믿으려고 합니다.
당연히 그렇게 믿어야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믿는다고 할 때 단순히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 존재나 사역만을 믿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믿는 믿음을 우리의 삶에 적용해야 합니다. 즉 내가 살고 있는 지금의 문제와 연관해서 하나님을 믿는 믿음을 적용하고
응용해 보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나의 모든 삶에 대해서 관심을 가지고 계시고 나의 크고 작은 모든 문제까지도 해결해
주시고 싶어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경이 말하는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의 사역을 믿는다면 이제는 그 믿음을 나의 삶으로 가지고
와서 내가 지금 당면한 문제까지 해결할 수 있는 믿음으로 성장해야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을 믿는 우리가 어떤 방법으로 그 믿음을 우리의 삶에 적용해야 합니까? 예수님은 23절을 통해서 그 방법을 구체적으로 말씀합니다 막11:23/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이 산더러 들리어 바다에 던져지라 하며 그 말하는 것이 이루어질 줄 믿고 마음에 의심하지 아니하면 그대로 되리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누구든지 이 산더러 들리어 바다에 던져지라 라고 말하라고 명령합니다. 산이란 상징적인 의미에서 문제나 장애물을 의미합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면서 만나는 크고 작은 문제나 장애물들이 산에 해당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문제라는 산이 생겼을 때 그 산을
향하여 바다에 던져지라고 명령해야 합니다. 바다에 던져지라고 말하는 것은 곧 사라지라는 뜻입니다. 어떤 물체든지 바다에 떨어지면
가라앉아 버리고 사라져 버리는 것처럼 그렇게 사라지고 없어지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문제의 산더러 바다에 던져지라고 말했으면 그
말하는 것이 그대로 이루어질 줄 믿고 마음에 의심하지 않아야 됩니다. 그러면 그대로 되리라고 했습니다. 이처럼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다고 할 때 성경에 기록된 사건이나 성경에 나오는 인물들에게 일어났던 사건과 기적만을 믿는 것이 아니라 나의 삶에서 일어나는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말로는 하나님이 살아 계신다고 하면서 실제로 나의 삶에서 일어나는 문제에
대해서 어떤 해결방법도 모르고 발을 동동 구르고 있다면 그것은 하나님이 나의 삶에서는 존재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전능하신 하나님을 믿는다면 나의 삶에서 일어나는 모든 문제를 해결해 주시는 하나님이심을 믿어야 합니다. 즉
하나님을 믿는 믿음을 나의 삶으로 가지고 와서 나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어야 됩니다. 그렇게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어떤
방법으로 나의 문제를 해결해야 됩니까? 예수님은 이 산더러(자신의 문제를 향하여) 들리어 바다에 던져지라고 말하라고 했습니다.
문제를 향하여 사라지라고 명령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마음에 의심하지 않으면 그대로 이루어지는 기적을 보게 된다고 했습니다. 사람의
말에는 권세가 있습니다. 죽고 사는 것이 말의 힘에 달렸습니다. 그리고 말의 권세란 곧 예수님이 주신 천국열쇠이며, 이 땅에서
말하면 하늘에서도 그대로 이루어지는 대단한 능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런 놀라운 말의 권세와 능력을 가지고 있으면서 사용하지
않는다는 것은 지혜롭지 못한 일입니다. 과거에 웅변은 은이고 침묵은 금이다. 또는 남아일언중천금이라는 말을 들었습니다. 침묵의
미덕이라고 할까 말을 조심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물론 함부로 말하지 말고 말한 것은 실천해야 합니다. 그렇지만 믿음을 가진 사람은
말을 해야 합니다. 문제를 향하여 떠나라고 명령해야 합니다. 문제가 있는 데도 떠나라고 말하지 않으면 점점 더 고통스럽고 손해를
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문제를 향하여 떠나라고 명령해야 합니다. 그러면 그대로 되어집니다. 할렐루야!
2. 하나님을 믿는 것은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했으면 반드시 그대로 될 줄 믿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다시 하나님을 믿는 구체적인 방법을 제시합니다. 막11:24/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그대로 되리라/고
했습니다. 여기서도 예수님은 네가 만일 하나님을 믿고 나를 믿느냐 그렇다면 그것을 응용해 보라는 것입니다. 어떤 방법으로
말입니까? 하나님을 믿는 믿음을 자신의 기도에 적용해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과 예수님을 믿는 믿음을 가지고 있다면 그 믿음을 자신의 기도에 적용해야 하는데 거기에는 어떤 제한도
두지 않았습니다. 이런 제목과 이런 문제만 가지고 기도하라고 제한하지 않았습니다. 무엇이든지 라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다면 어떤 문제든지 그것을 가지고 기도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기도해도 되고 저것은 기도하면 안돼 라는 생각에서
벗어나시기 바랍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은 사랑하는 자녀들도 모든 문제를 해결할 줄 아는 전능하신 하나님을 닮은 아들이
되시기를 원하십니다. 무능하고 연약하여 아무 것도 할 줄 모르는 바보같은 자녀가 아니라 모든 일을 척척해 내고, 어떤 문제든지
기도로 해결해 내는 그런 유능하고 탁월한 자녀가 되기를 원하십니다. 할렐루야!
그런데 문제가 있습니다. 아까 서론에서
하나님을 믿으라고 했을 때 우리가 집고 넘어가야 할 문제가 두 가지가 있다고 했습니다. 한 가지는 근심과 염려를 하지 말라야
한다는 것입니다. 누구든지 하나님과 예수님을 믿는다면 근심 걱정 염려는 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리고 염려하지 말라는 말은 아무
일도 하지 않고 놀고 있으면 하나님이 모든 것을 다 해결해 주신다는 의미가 아니라는 것도 말씀 드렸습니다. 우리는 불신자처럼 근심
걱정하는 문제에 집착하지 않는 대신에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는 일을 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가장 기뻐하시는 일과
하나님과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일을 최선을 다해서 해야 합니다. 그것은 곧 하나님을 예배하며 날마다 기도하며 전도하는 일입니다.
그러면 나머지 모든 문제는 하나님께서 다 해결해 주십니다.
이제부터 말씀 드리려는 것은 당면한 문제라는 큰 산을 향하여 말을 했고, 또한 내가 원하는 것을 가지고 기도하고 구했는데도 즉시 산이 제거되지 않고 기도가 응답되지 않는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관한 문제에 관한 말씀입니다.
먼저
말씀드릴 것이 있습니다. 만약 기도했지만 즉시 응답되지 않고 응답이 늦어지거나 내가 볼 때(보이는 형상이) 가능성이 없어 보여도
그것은(허상이기 때문에) 믿어서는 안되고 주님의 신실하신 약속을 믿어야 합니다. 내가 볼 때 100% 불가능해 보여도 그것은
진리가 아니며 허상이기 때문에 보이는 현상은 받아들이지 말고 오직 진리이신 하나님의 약속을 믿어야 합니다. 그것이 하나님을 믿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얼마나 자주 보이는 현상을 믿는지 모릅니다. 보여지는 현상이나 과정은 허상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과 그분의 신실한 약속을 믿어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믿는 것은 마귀가 주는 어떤 의심과 의심을 주려는 현상이나
느낌이나 반응조차도 받아들이지 않는 것입니다.
3.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다고 할 때 가장 걸림돌이 되고 우리를 힘들게 하는 것은 바로 의심입니다.
내가
말하는 즉시 모든 것이 이루어진다면 의심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런데 말하고 기도하는데도 즉시 이루어지지 않기 때문에 의심이
들어오고, 또한 기도하고 말한 것이 즉시 이루어지지도 않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이런 경우 의심이 밀려올 때 그것을 방어하고 잘
막아야 합니다.
다시 본문 23-24절을 읽겠습니다. 막11:23-24/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이 산더러 들리어 바다에 던져지라 하며 그 말하는 것이 이루어질 줄 믿고 마음에 의심하지 아니하면 그대로 되리라 24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그대로 되리라/고 했습니다.
23절에서도
그 말하는 것이 이루어질 줄 믿고 마음에 의심하지 아니하면 그대로 되리라고 했고, 24절에도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여기에도 의심하지 말라는 말씀이 내포되어 있습니다) 그리하면 그대로 되리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에서 볼 수 있듯이 믿음을
가지고 있으면 그리고 믿음을 말하고 기도하면 다 그대로 되리라고 했습니다. 그만큼 믿음이 중요하기 때문에 반드시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일하시고 우리가 하나님의 편에서 하나님과 함께 일을 할 수 있습니다. 그만큼 중요한 것이 믿음인데 왜 그
믿음이 정상적으로 작동하지 않습니까?
믿음을 가지고 일하고, 믿음으로 문제를 해결하고, 믿음으로 기도해서 응답받는 것을 방해하는 가장 큰 적은 역시 의심입니다.
왜
우리의 믿음이 제대로 작동되지 않습니까? 왜 우리의 믿음이 능력을 발휘하지 못합니까? 마귀의 방해작전 때문입니다. 마치 군대에서
상대방을 향하여 전파를 보내면 상대방에서 전파를 교란시키려고 방해전파를 맞받아 쏩니다. 그래서 내가 보내는 전파가 목적대로
제대로 전달되지 않습니다. 그것처럼 우리의 말이나 기도가 제대로 작동되지 못하는 것도 결국에는 방해작전인 의심 때문입니다.
4. 그렇다면 이 의심의 문제를 어떻게 해결해야 합니까?
이제 우리의 말과 기도를 무너뜨리는 의심의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지 말씀드립니다.
1) 의심을 이길 수 있는 중요한 방법은 인내하는 믿음입니다.
제가 치질을 고친 것을 이야기 할 때에도 보름이 걸렸다고 했습니다. 처음 믿음을 가지고 말할 때의 그 믿음을 내가 원하는 것이 이루어질 때까지 계속해서 유지하며 간직해야 합니다. 이것이 인내하는 믿음입니다.
본문으로
돌아가서 예수님께서 무화과나무에게 명령을 했을 때에도 즉시 마르지 않았습니다. 아마 예수님께서 무화과나무에게 명령하는 즉시
무화과나무가 말랐다면 그 다음 날 아침에 베드로가 예수님께 그렇게 신기하고 놀라면서 랍비여, 저주하신 무화과 나무가 말랐습니다라고
말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무화과나무에게 저주하셨고, 그 말씀이 실제로 이루어지는 데는 하루가 걸렸습니다.
그것처럼 우리가 말하고 기도하는 것도 시간이 걸립니다. 나의 말과 기도가 이루어지는데 시간이 많이 소요가 되기 때문에 의심하지
말라는 겁니다. 말하는 데로 즉시 이루어진다면 의심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시간이 얼마나 걸리든지 나의 기대와는 정반대로
많은 시간이 흐른다고 하더라도 거기에 상관하지 않고 이미 받은 것처럼 믿고 기뻐하면서 기다리면 반드시 그대로 되어집니다.
할렐루야!
예수님께서 시몬 베드로를 만나서 처음 하신 말씀이 있습니다. 그리고 베드로가 신앙고백을 했을 때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첫 번째 말씀입니다. 요1:40-42/요한의
말을 듣고 예수를 따르는 두 사람 중의 하나는 시몬 베드로의 형제 안드레라 41 그가 먼저 자기의 형제 시몬을 찾아 말하되
우리가 메시야를 만났다 하고 (메시야는 번역하면 그리스도라) 42 데리고 예수께로 오니 예수께서 보시고 이르시되 네가 요한의 아들
시몬이니 장차 게바라 하리라 하시니라 (게바는 번역하면 베드로라)/라고 했습니다. 두 번째 말씀입니다. 마16:15-18/이르시되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16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여 이르되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17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 18 또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하신 두 번의 말씀들이 언제 이루어졌습니까? 그렇게 말한 즉시 이루어졌습니까? 아닙니다.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라는 말씀은 성경의 기록을 보면 베드로가 오순절에 성령충만을 받고 난 뒤에 예루살렘 교회가 세워지면서
이루어졌습니다. 그리고 시몬을 게바 즉 베드로라고 부르신 말씀도 그 이후에 이루어졌습니다. 이로보건 데 우리가 산을 향하여
말하고 기도한다고 해서 즉시 이루어지는 것도 있지만 많은 시간이 걸린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특별히 사람이 변화되고 사람들이
돌아오는 문제는 더욱더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공생애 기간동안 베드로의 변화되지 않는 모습과 실수들을 보면서도 실망하거나 낙심하지
않았습니다. 언젠가는 주님의 말씀대로 이루어질 것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결국에는 주님의 말씀처럼 베드로는 반석같은 사람이
되었고 베드로를 통해서 주님의 교회가 세워진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을 두고 볼 때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약속이 너무나 늦게 이루어졌는데 그렇게 늦게 이루어졌다고 해서 그가 믿음이 없었다거나 그의 믿음이 실패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믿기 힘든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믿음을 잃어버리지 않고 꿋꿋이 견딘 믿음이 하나님이 보실 때 더 귀한 믿음이었습니다.
그래서 히6:13-15/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실 때에 가리켜 맹세할 자가 자기보다 더 큰 이가 없으므로 자기를 가리켜
맹세하여 14 이르시되 내가 반드시 너에게 복 주고 복 주며 너를 번성하게 하고 번성하게 하리라 하셨더니 15 그가 이같이 오래
참아 약속을 받았느니라/고 했습니다.
다니엘은 21일 동안 기도를 계속했습니다. 하나님의 응답은 기도하는 첫 날
내려왔지만 공중권세를 잡은 마귀가 방해를 했기 때문에 21일만에 응답이 내려왔습니다. 그러므로 모든 일에 임계점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즉 물이 끊는 온도는 100°가 되어야 합니다. 온도가 99도까지 올라가도 물이 끊지 않습니다. 100°가 되어야 물이
끊게 됩니다. 그것처럼 우리의 믿음도 임계점을 통과해야 합니다.
2) 마지막으로 우리가 인내하면서 기다리는데 왜 자꾸 의심이 생길까요?
이유는 의심이 내 안에 들어와 있기 때문입니다. 의심을 완전히 쫓겨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의심을 완전히 몰아내야 합니다. 더
이상 의심하지 않게 될 때까지 말입니다. 근심 걱정 염려도 마찬가지입니다. 완전히 쫓아내면 더 이상 의심하지 않게 될 것이고 더
이상 근심 걱정 염려도 하지 않게 될 것입니다. 대신 믿음으로 기뻐하고 감사하게 될 것입니다.
의심을 주는 악한 영의
모든 활동을 완전히 멈추게 해야 합니다. 마12장에 보시면 사람에게서 쫓겨난 귀신이 다시 자신의 집으로 돌아왔다고 했습니다.
문제가 있었습니다. 악한 영이 쫓겨나면서 그 마음이 수리되고 청소되었다고 했습니다. 완전히 쫓아냈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나중에
다시 들어왔습니다. 그것은 절반의 청소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악한 영을 완전히 쫓아낸다는 것은 내 마음속에서 떠나라고 명령해서
밖으로 내 보내는 일도 해야 하지만 다시 의심의 영이 찾아왔을 때 의심하지 말라는 말씀과 믿음의 말씀이 내 마음에 가득차 있어서
다시 들어올 수 없도록 해야 합니다. 비고 청소된 상태로 그냥 두어서는 안됩니다. 악한 영이 떠난 그 자리에 말씀의 물을 가득
채워야 합니다. 가나 혼인잔치에서 돌 항아리에 물을 아구까지 채운 것처럼 말입니다. 나의 입을 열면 말씀이 철철 흘러 넘칠 때까지
말씀을 채우면 내가 쫓아낸 의심은 더 이상 들어올 수가 없게 될 것입니다.
지금까지의 말씀을 정리합니다. 이렇게 믿고
말하고 기도했으면 인내하면서 기다릴 수 있어야 됩니다. 그리고 어떤 의심도 받아들이지 않고 의심이 다시 들어와서 발붙일 곳이
없도록 내 마음속을 믿음에 관한 말씀들로 가득 채우는 온전한 믿음, 승리하는 믿음, 원하는 것을 받는 성공하는 믿음으로 성장해야
합니다. 저와 여러분의 믿음이 이렇게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10가지)
하나님은 말씀을 보내셨습니다. 받는 것은 여러분이 해야 할 일입니다. 하나님은 말씀을 통해 일하십니다.
하나님은 성령을 보내 주셨듯이 말씀을 보내 주심으로 우리를 인도하시고, 가르치시고, 단련하시며, 보호하십니다.
오늘 저는 하나님의 말씀이 어떤 말씀인지 그 성격에 대해서 전하고자 합니다.
첫째, 하나님의 말씀은 순수한 말씀입니다.
[[주]의 말씀들은 순수한 말씀들이니 흙 도가니에서 단련하여 일곱 번 순수하게 만든 은 같도다.](시12:6).
불순물이 도가니에서 완전히 정제된 은은 자신의 얼굴을 볼 때 환히 보이는 거울과 같은 정도의 은을 말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누구든지 그 앞에 서면 마음 속 깊은 곳까지 다 비추어 주는 거울과 같습니다. 사람들 앞에서는 거짓말할 수 있고, 합리화할 수
있지만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는 드러나지 않는 것이 없고, 감출 수 있는 것이 없습니다. [주의 말씀은 심히 순수하므로 주의 종이 그것을 사랑하나이다.](시119:140).
말씀이 순수하다는 것은 말씀의 정화 작용에 대한 언급입니다. 순수한 말씀은 생각이나 상상조차도 악한 것으로 기울게 하지
않습니다. 순수한 마음, 순수한 양심, 순수한 신앙은 순수한 말씀에서만 나올 수 있습니다. 여러분이 순수한 말씀을 제쳐두고 마음이
순수해야 성경을 읽는다는 식의 생각을 한다면 어리석기 그지없는 생각입니다. [하나님의 모든 말씀은 순수하며 그분은 자신을 신뢰하는 자들에게 방패가 되시느니라.](잠30:5).
순수한 말씀이란 왜곡, 거짓, 편견, 부풀림이 전혀 없고, 불순물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언제나 안심할 수 있습니다. 언제나
신뢰할 수 있습니다. 조금의 오염 물질도 없을 만큼 완벽하게 순수하기 때문에 그 자체로는 수 천년이 아니라 영원히 지나도
변질되지 않으며, 부패되지 않으며, 해롭지 않는다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말씀을 신뢰할 때 주님은 방패가 되십니다. [새로 태어난 아기들로서 말씀의 순수한 젖을 사모하여 이 젖으로 자라가도록 하라](벧전2:2).
순수한 말씀은 성도를 자라나게 하는 양식입니다. 왜 오늘날 교회의 성도들이 성장이 없고, 열매가 없느냐고 물으면 교회가 어쩌고
설교가 어쩌고, 오늘날 기독교가 어쩌고 별별 진단이 많지만 핵심은 그들이 순수한 말씀의 젖을 사모하지 않았기 때문이며, 그 말씀을
먹지 않기 때문입니다.
둘째, 주의 말씀은 단련된 말씀입니다.
단련되었다는 것은 마치 금이나 은이나 놋 등이
불속에서 단련되어 불순물이 다 제거되었다는 의미와 같습니다. 불 속에 들어갔다 나온 것은 광택이 나고 단단해지고 깨끗해집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꼭 그와 같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어떤 금속보다 강하여 불속이나 물속에나 그 어디라도 들어갈 수 있으며, 그런
과정을 통해서 더욱 단련됩니다. 여러분은 10년 전에 들었던 설교나 지금 들었던 설교의 내용이 같아도 동일하게 들리지 않을
것입니다. 몇 십년 전에 읽었던 성경을 읽으면 또 다르게 느껴지고, 또 다르게 다가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말씀은 살아 있으며
단련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으로 말하건대 그분의 길은 완전하고 [주]의 말씀은 단련되어 /순수하니/ 그분은 자신을 신뢰하는 모든 자에게 방패가 되시는도다.](삼하22:31).
여러분이 한 때는 의심했고, 싫어했고, 무관심했고, 멸시했던 말씀들이 새롭게 능력있고 은혜롭게 내게 다가오는 체험이 있을
것입니다. 말씀은 수천년의 역사를 통해서 수없이 시험과 공격과 근거없는 비방과 의심과 욕을 먹었지만 그럴 때마다 더욱더 강력하게
역사했습니다. 우리 개인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으로 말하건대 그분의 길은 완전하고 [주]의 말씀은 단련되어 /순수하니/ 그분은 자신을 신뢰하는 모든 자에게 방패가 되시는도다.](시18:30). 단련된 말씀이 여러분을 단련합니다. 말씀이 단련된 것처럼 여러분은 말씀을 통해 단련됩니다. 요셉을 보십시오. [그분께서 한 사람을 그들보다 앞서 보내셨으니 곧 요셉이라. 그가 종으로 팔렸도다. 그의 발은 족쇄에 상하고 그는 쇠/사슬/에 매였으니 그분의 말씀이 임하기까지 /그러하였도다/. [주]의 말씀이 그를 단련하였도다.](시105:17-19).
고난과 시련을 통해 하나님의 말씀이 더욱 진리임이 드러나듯이 여러분은 고난과 시련을 통해 우리가 읽고 듣고 믿는 하나님의 말씀이
더욱 신뢰할 만한 말씀이란 사실이 입증됩니다. 이것은 모든 신앙인들이 간증하는 고백이기도 합니다. 주님은 단련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이는, 오 하나님이여, 주께서 우리를 시험하시되 은을 단련함같이 우리를 단련하셨음이니이다.](시66:10). [그러나 내가 가는 길을 그분께서 아시나니 그분께서 나를 단련하신 뒤에는 내가 정금같이 되어 나오리라.](욥23:10). 어떻게 단련합니까? 말씀을 보내셔서 단련하십니다. 여러분은 한 가지 사건에서 한 마디 말씀을 더욱 깊이 배우게 됩니다.
셋째, 주의 말씀은 생명의 말씀입니다.
영생은 모든 사람의 꿈입니다. 생명이 없이는 삶이 없습니다. 생명이 출발이고 삶이 결과입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생명을 통해 삶을 사는 것이 아니라 삶을 통해 생명을 얻으려고 합니다. 이는 본말(本末)이 전도된 것입니다. [처음부터 계신 생명의 말씀에 관하여는 우리가 들은 바요, 눈으로 본 바요, 자세히 살펴보고 우리 손으로 만진 바라](요일1:1). 예수 그리스도는 생명이시며, 생명의 말씀이십니다. [... {주}여, 영원한 생명의 말씀들이 주께 있사온대 우리가 누구에게로 가오리이까?](요6:68). 여러분들은 이 생명의 말씀을 통해 더욱 풍성한 생명을 얻을 수 있습니다.
영적인 생명이 없이 영적인 삶을 사는 것은 어려운 것이 아니라 아예 불가능합니다. 때로 영적인 것처럼 산다 해도 그것은
위조품이요, 흉내 내는 것이지 영적인 삶이 아닙니다. 경건한 삶은 하나님의 생명, 하나님의 성품(divine nature),
신성한 권능이 없이는 나올 수 없습니다. [우리를 부르사 영광과 덕에 이르게 하신 분을 아는 것을 통하여 그분의 신성한 권능이 생명과 경건에 속한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셨나니](벧후1:3). 생명의 말씀을 받지 않고 영적이고 경건한 삶을 살 수 없습니다. 성경을 읽는다는 것은 생명을 풍성하게 하는 일입니다. 이 말씀은 우리가 제시해야 할 말씀입니다. [가서... 이 생명의 말씀을 백성에게 다 말하라](행5:20). [또한 /너희는/ 생명의 말씀을 제시할지니...]
(빌2:16). 우리는 삶을 제시하기 전에 생명을 제시해야 합니다. 우리는 당연히 우리가 땅에 속한 생명이 아닌 하나님이 주신
생명으로 살고 있음을 삶으로 보여 주어야 합니다. 우리는 말로나 행위로나 우리 속에 있는 생명을 자연스럽게 드러낼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 안에 살아 계신 생명입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고 있나니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시는 것이라. 지금 내가 육체 안에서 사는 삶(생명-life)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해 자기 자신을 내주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으로 사는 것이라.](갈2:20).- I am
crucified with Christ : nevertheless I live; yet not I, but Christ
liveth in me : and the life which I now live in the flesh I live by the
faith of the Son of God, who loved me, and gave himself for me.
(Gal2:20). 내가 육체 안에서 사는 생명은 주님이십니다. 주님은 생명의 말씀이시기에 우리에게 말씀을 보내셔서 살리십니다. [내가 고난 당할 때에 이것이 내 위로가 되었사오니 이는 주의 말씀이 나를 살리셨음이니이다.](시119:50).
넷째, 주의 말씀은 믿음의 말씀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무엇을 말하느냐? 그 말씀이 네게 가까워 네 입에 있으며 네 마음에 있다, 하였으니 곧 우리가 선포하는 믿음의 말씀이라](롬10:8). 믿음의 말씀이란 믿음을 주는 말씀입니다. 말씀을 읽을 때 믿음이 생기며, 이 믿음으로 세상을 이기고 주님을 기쁘시게 하며 열매를 맺습니다. [그런즉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하나님의 말씀에서 나느니라.](롬10:17). 믿음은 성도들에게 거의 전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이런 믿음을 어떻게 크고 강하게 할 것인가는 전적으로 여러분이 믿음의 말씀들을 얼마나 읽고 듣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믿음의 말씀들로 양육됩니다. [네가 형제들에게 이것들을 기억하게 하면 네가 도달한 믿음의 말씀들과 선한 교리의 말씀들로 양육을 받아 예수 그리스도의 선한 사역자가 되리라.](딤전4:6). 여러분이 주님의 사역자가 되고, 무슨 영적인 일을 하고자 한다면 필히 믿음의 말씀으로 양육 받아야 합니다.
다섯째, 주의 말씀은 진리의 말씀입니다.
[너로 하여금 진리의 말씀들의 확실함을 알게 하며 또 너에게 /사람을/ 보내는 자들에게 진리의 말씀들로 답변하게 하려 함이 아니겠느냐?](잠22:21). [ .../여기/ 기록된 것은 올바른 것이요, 곧 진리의 말씀들이로다](전12:10). 우리는 진리의 말씀을 확실히 알아야 하며, 답변해 줄 수 있기 위해서 공부해야 합니다. 진리의 말씀은 믿음의 대상을 넘어서 부지런히 공부해야 할 것들입니다. [/너는/ 진리의 말씀을 바르게 나누어 네 자신을 하나님께 인정받은 자로, 부끄러울 것이 없는 일꾼으로 나타내도록 연구하라.](딤후2:15).
성경을 읽지 않고 공부할 수 있는 방법은 없습니다. 의외로 많은 성도들이 일주일에 교회 오는 것이 전부인 사람도 있고,
그것마저도 되지 않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런 자들은 하나님의 말씀대신 사람들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속기를 잘하며, 이리 저리
흔들리는 법입니다. 믿음이 약하다는 형제들을 보면 그들이 성경을 읽는 것을 볼 수 없습니다. 읽는 척을 하기에 부지런히 읽나 보다
싶으면 지속성이 전혀 없습니다. 일주일을 채 가지도 못하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주님은 우리를 진리의 말씀을 낳으셨습니다. [그분께서 자신의 뜻에 따라 진리의 말씀으로 우리를 낳으셨으니... ](약1:18). 이는 우리가 진리를 통해서만 살아가도록 하신 것입니다. 우리의 영적 태생의 근원이 바로 진리의 말씀입니다.
여섯째, 주의 말씀은 은혜의 말씀입니다.
[이제 형제들아, 내가 너희를 하나님과 그분의 은혜의 말씀에 맡기노니 이 말씀이 너희를 능히 든든히 세워 거룩히 구별된 모든 자들 가운데서 너희에게 상속을 주리라.](행20:32). 은혜의 말씀은 강건하게 합니다. 여러분들의 은혜의 말씀을 맛보면 볼수록 속 사람은 강건해지고, 든든히 세움을 입습니다. [그러므로 내 아들아, 너는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 있는 은혜 안에서 강건한 자가 되고](딤후2:1). 여러분은 마음 속에 늘 말씀의 은혜가 있어야 합니다. 주님은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신 분이십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분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獨生)하신 분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요1:14). 성령 충만이란 말씀 충만이며, 말씀 충만이라 곧 은혜와 진리가 충만한 것입니다.
주님이 말씀을 증거하실 때 사람들이 보인 반응은 ‘은혜로운 말씀’이었다는 점입니다. [모두가 그분을 증거하고 그분의 입에서 나오는 은혜로운 말씀에 놀라서 이르되, 이 사람이 요셉의 아들이 아니냐? 하더라.](눅4:22). 그들은 주님을 아는 지식이나 진리의 지식에 대해서는 거의 무지했지만 주님의 말씀이 매우 은혜로운 말씀이었다는 점은 부인할 수 없었습니다. 이는 사도들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이 오랫동안 머물며 {주} 안에서 담대하게 말하매 {주}께서 그들의 손으로 표적과 이적을 행하게 하사 은혜의 말씀에 증거를 주시니라.](행14:3).
성경의 모든 말씀이 은혜의 말씀이 아닌 것이 없지만 특히 우리에게 힘과 위로를 주는 은혜로운 말씀들이 있습니다. 은혜를 얻기를
원한다면 말씀을 보고 들으십시오. 은혜가 풍성한 삶은 은혜로운 말씀을 통해서 나옵니다. 주님은 은혜가 풍성하신 분이십니다. [[주]께서 그 앞으로 지나가시며 선포하시되, [주]로다. 긍휼이 많고 은혜롭고 오래 참고 선함과 진리가 풍성한 [주] 하나님이로다.](출34:6).
풍성한 은혜의 주님을 맛보려면 말씀의 은혜를 맛보시기 바랍니다. 설교를 통해 은혜를 입은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은 예배가 끝난
후에 얼굴 표정이 다르고, 말투가 다릅니다. 은혜를 입은 사람이 은혜가 풍성한 삶을 삽니다. [모든 것이 너희를 위하여 있나니 이것은 많은 사람의 감사를 통하여 풍성한 은혜가 넘쳐 나서 하나님께 영광이 되게 하려 함이라.](고후4:15), [그런즉 너희가 모든 일 곧 믿음과 말과 지식과 모든 열심과 우리를 사랑하는 일에 풍성한 것같이 이 은혜에도 풍성할지니라.](고후8:7).
고린도 교회가 은혜가 풍성한 일을 했던 것은 이들이 은혜를 풍성히 받았음을 보여 주는 예입니다. 여러분들의 감사, 찬양, 헌금,
물질의 나눔, 구제 등은 강요로 되는 것이 아니라 얼마나 은혜의 말씀을 받아 누리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일곱째, 주의 말씀은 의의 말씀입니다.
말씀을 음식에 비유하자면 은혜의 말씀이 우유라면 의의 말씀은 고기에 해당합니다. [이는 젖을 사용하는 자마다 갓난아이이므로 의의 말씀에 능숙하지 못한 자로되](히5:13).
성경은 때로 어렵고 사람을 시험에 들게 하며, 부담스럽습니다. 어떤 부분은 입에는 달지만 배에는 씁니다. 오늘날 교회는 은혜의
말씀을 잘 증거하는 목사님들이 많고, 은혜를 받았다는 분들의 간증도 많습니다. 감동이 되고, 전적으로 뜻을 같이하는 말씀들을
들으면 기분도 좋습니다. 덕분에 세월이 지나도 여전히 기저귀를 차고 있는 성도들로 가득 차 있습니다. 어린 아이들은 귀엽지만
성장이 멈추었다면 그보다 더 슬픈 일은 없습니다. [내가 너희를 젖으로 먹이고 /단단한/ 음식으로 하지 아니하였나니 이는 지금까지 너희가 그것을 능히 감당하지 못하였으며 지금도 못하기 때문이라.](고전3:2).
이들은 의의 말씀을 접하지 않았거나 거부했기 때문에 늘 젖으로만 살아야 하는 성도들이었습니다. 우리는 마땅히 자라나야 하며,
장성해야 합니다. 의의 말씀은 지각을 사용해서 선악을 분별해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부담스러워하지 말고 의의 말씀을 바라고
사모해야 합니다. [내 눈이 주의 구원과 주의 의의 말씀을 바라며 쇠약하오니](시119:123). 젖을 주지 않는다고
떼를 쓰는 아이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젖을 떼는 과정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고통스럽고, 울고, 불어도 과감히 젖을 떼고 입에다
어른들이 먹는 음식을 넣어주고 씹게 해야 합니다. 못 먹으면 굶겨서라도 먹게 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젖을 떼어야 할 나이에도
젖을 물고 있게 됩니다. 우리 교회는 지금 이런 성장통을 겪는 성도들이 있습니다. 나는 저런 설교가 싫어!! ....앙앙
웁니다. 얼굴은 굳어지고, 노려봅니다. 그러나 이 과정은 필수적입니다.
여덟째, 주의 말씀은 권능의 말씀입니다.
[사람들이 그분의 가르침에 깜짝 놀라니 이는 그분의 말씀에 권능이 있었음이더라.](눅4:32). [이에 그들이 다 심히 놀라며 서로 말하되, 이 어떠한 말씀인가! 권위와 권능으로 부정한 영들에게 명령한즉 그들이 나가는도다, 하더라.](눅4:36).
주님의 말씀에 권능이 있었습니다. 이것이 사람들의 말과 차이입니다. 사람들의 말은 그냥 말입니다. 산을 향해 말하는 것은
고사하고, 책상을 향해 “움직여라!” 백번을 말해도 움직이게 하는 권능(힘-power)이 없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말씀을 하시면 그
말씀대로 이루어지고, 되어지는 권능이 있습니다. [이 아들께서는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시요, 그분의 인격의 정확한 형상이시라. 그분께서 자신의 권능의 말씀으로 모든 것을 붙드시며 친히 우리의 죄들을 정결하게 하신 후에 높은 곳에 계신 존엄하신 분의 오른편에 앉으셨느니라.](히1:3). 하나님은 말씀으로 모든 것을 지으셨을 뿐 아니라 말씀으로 모든 것을 붙들고 계십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권능의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이는 하나님의 말씀이 살아 있고 권능이 있어 양날 달린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骨髓)를 찔러 나누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의도를 분별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이니](히4:12). 우리가 성경을 읽는다는 것은 그냥 말씀을 읽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권능의 말씀이 내 안에 거하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권능의 말씀을 통해 능력 있는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우리 자신의 입의 말로는 아무 것도 되어지는 것이 없습니다. 우리는
말로 할 수 있는 일이 거의 없습니다. 입으로는 무엇을 못하느냐? 는 조롱이 있을 정도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입에서 하나님의
말씀이 나갈 때 우리 입은 무엇이든지 할 수 있게 됩니다. 우리 입에서 생명의 말씀이 나가면 생명을 주고, 진리의 말씀이 나가면
해답이 없는 인생들에게 답변을 주며, 은혜의 말씀이 나가면 강건하게 하고, 믿음의 말씀이 나가면 믿음을 주며, 의의 말씀이 나가면
정확한 판단력을 줍니다.
권능은 모두 하나님께 속한 것입니다. 경건의 능력, 성령의 능력, 믿음의 능력, 학습 능력, 돈을 벌 능력조차도 다 주님이 주시는
것입니다. 이런 능력을 얻고자 한다면 여러분은 믿음으로 성경을 읽고, 묵상하고, 암송하고, 사용하고 순종하는 삶을 살기를
바랍니다. 성경은 말합니다. [재물과 존귀가 다 주께로부터 나오며 또 주는 모든 것을 다스리사 손에 권능과 능력이 있사오니 모든 사람을 크게 하심과 강하게 하심이 주의 손에 있나이다.](대상29:12). 주님을 통해 권능을 얻고자 한다면 권능의 말씀을 보십시오. [이 하나님은 곧 능력으로 내게 띠를 두르시며 내 길을 완전하게 하시는 이시니](시18:32). 다윗이 능력이 있었던 것은 그의 학문이나 지혜나 가문이나 인물이나 백성들의 인기나 지지 기반이 튼튼해서가 아닙니다. 그는 늘 주의 말씀을 읽고 묵상하는데서 말씀의 권능을 힘입어 살았습니다. [오 나의 능력이시요, 나의 구속자(救贖者)이신 [주]여, 내 입의 말과 내 마음의 묵상(默想)이 주의 눈앞에 받으실 만한 것이 되기를 원하나이다.](시19:14).
아홉째, 주의 말씀은 선한 말씀입니다.
[또 시내 산에 강림하시고 하늘에서부터 그들과 말씀하사 바른 법도와 참된 율법과 선한 법규와 명령을 그들에게 주시고](느9:13).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은 선한 말씀입니다. 선한 말씀, 선한 법규, 주의 선하심을 맛보고 알아야 합니다. [오 /너희는/ [주]의 선하심을 맛보고 알지어다. 그분을 신뢰하는 사람은 복이 있도다.](시34:8).
우리 말에는 “쓴 맛을 봐야 정신을 차린다”는 속담이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선하심과 은혜로우심을 맛보고 알아야
제대로 사람이 됩니다. 주의 말씀이 송이 꿀보다 달고, 생수보다 시원하고, 버터보다 달콤한 경험을 해 보아야 합니다. [너희가 {주}의 은혜로우심을 맛보았으면 그리하라.](벧전2:3). 우리의 입이 어디에 길들여지고, 무엇을 맛보아 아느냐는 매우 중요합니다. 성경을 읽고 또 읽을 때 여러분은 그 맛을 알게 됩니다.
열 번째, 주의 말씀은 지혜와 지식과 명철의 말씀입니다.
성경을 읽으면 단순한 자는 민감하게 되며, 우둔한 자는 지혜로운 자가 됩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성/령을 통하여 지혜의 말씀을, 어떤 사람에게는 같은 /성/령을 통하여 지식의 말씀을,](고전12:8).
어떤 많은 책을 읽어도 사람은 지혜를 얻지 못합니다. 그러나 성경을 읽고 묵상하고 공부할 때 누구나 지혜를 얻게 됩니다. 요즘
어려서부터 조기 교육을 시키고, 아이들 교육이라면 정신을 못차리는 부모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지혜를 주는 교육은 학교나 학원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성경을 통해서 이루어집니다. [또 어린 아이때부터 네가 성경 기록들을 알았기 때문이니 그것들은 능히 너를 지혜롭게 하여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 있는 믿음을 통해 구원에 이르게 하느니라.](딤후3:15).
어릴 때부터 성경을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성경이 지혜와 지식과 명철을 주기 때문입니다. 새벽 기도를 열심히 나가는 어떤
어머니가 자식을 위해서 매일 기도했습니다. 자기 자식이 솔로몬과 같이 하나님의 지혜를 얻어서 잘 먹고 잘 살 수 있기를 구하고 또
구했습니다. 그러다 어느 날 성경을 보았는데 다음과 같은 구절을 보았습니다. [주의 증거들이 나의 묵상이 되므로 나의 모든 스승보다 더 많은 명철이 내게 있으며 내가 주의 훈계들을 지키므로 노인들보다 잘 깨닫나이다.]
(시119:99~100). 성경을 읽고 묵상할 때 “나의 모든 스승”-학교에서든 사회에서든 인생에서든 누구를 막론하고-보다 더
많은 명철이 있게 되며, 그것들을 지킬 때 노인들보다 잘 깨닫게 된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자신이 지혜롭게 되는 것이나 자녀를
지혜롭게 하는 방법은 같습니다. [네 귀를 기울여 지혜로운 자의 말씀들을 들으며 네 마음을 내 지식에 쏟을지어다.](잠22:17)란
말씀에 순종하면 됩니다. 여러분은 부지런히 설교에 귀를 기울이십시오. 성경 공부, 기도 모임, 주일 예배 등 모임에는 가능한 한
다 참석하십시오. 가만히 있는 것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능동적으로 귀를 기울이고, 마음을 쏟아야 합니다. 성경을 읽고 공부하는
일은 집중력과 인내력을 요구합니다. 성경을 읽는 일은 어떤 직업에 종사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힘을 쏟아야 하는 일입니다. 말씀의
효능에 대해서 시편 기자는 이렇게 요약합니다. [[주]의 율법은 완전하여 혼을 회심(回心)시키고 [주]의 증거는 확실하여 단순한 자를 지혜롭게 하며 [주]의 법규들은 정당하여 마음을 기쁘게 하고 [주]의 명령은 순수하여 눈을 밝게 하는도다. [주]의 두려우심은 깨끗하여 영원토록 지속되고 [주]의 판단들은 진실하고 다 의로우니 참으로 금 곧 많은 정금보다 더 사모할 것이며 또 꿀과 송이꿀보다 더 달도다. 주의 종이 또한 이것들로 경고를 받나니 이것들을 지킬 때에 큰 보상(報償)이 있나이다.]
(시19:7~11). 지혜와 지식, 명철의 말씀들은 쉽게 습득되는 것이 아닙니다. 이런 말씀들은 그동안 자라오면서 배우고,
익혀온 가치관, 생각, 사상 등을 모두 깨뜨리고 버리게 하며, 처리하기 때문입니다. 때로는 채찍을 맞는 것처럼 아프기도 하지만
그것을 받아들일 때 내 가슴 속으로 강하게 파고드는 못과 같이 박힙니다. 그래서 빠지지 않고 평생 동안 내 마음 속에 있게
됩니다. 저는 처음 성경을 공부할 때 요한복음 8:32절과 로마서 1:17 두 구절이 얼마나 깊게 박혔는지 아직도 그 말씀에 모든
것을 걸고 있습니다. 솔로몬이 말하기를 [지혜로운 자들의 말씀들은 찌르는 채찍들 같고 집회의 스승들이 굳게 박은 못들 같으니 이 말씀들은 한 목자께서 주신 것이니라.](전12:11)고 했습니다. 저 역시 여러분에게 지혜의 말씀들을 주기를 힘쓰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말씀을 통해 고치시고, 건지시고, 녹이시며, 필요를 공급하십니다. 말씀으로 비추시고, 말씀으로 깨닫게 하시며, 책망하시고, 징계하십니다. 말씀으로 위로를 주고 말씀으로 씻으시며, 먹이십니다. [자신의 말씀을 보내어 그들을 고치시며 멸망들에서 그들을 건지셨도다.](시107:20). 주님의 말씀으로 추운 겨울에 얼어 있는 대지를 녹이시고 싹이 나게 하시며, 얼어붙은 강을 녹이사 물이 흐르게 하십니다. [그분께서 자신의 말씀을 보내사 그것들을 녹이시고 자신의 바람을 불게 하신즉 물들이 흐르는도다. 그분께서 자신의 말씀을 야곱에게 보이시며 자신의 법규들과 판단들을 이스라엘에게 보이시는도다.] (시147:18~19). “말씀을 보내사” -이것이 핵심입니다. 주님은 말씀을 보내 주셨습니다. [{주}께서 야곱에게 말씀을 보내시매 이 말씀이 이스라엘 위에 임하였으므로](사9:8).
이제 여러분이 받을 차례입니다. 여러분이 말씀을 어떻게 대하는가? 에 따라 주님은 그 말씀에 있는 대로 복을 주시기도 하고,
저주를 내리시기도 합니다. 이스라엘은 보내 주시는 말씀을 거부했을 때 포로가 되었고, 멸망했습니다.
말씀을 보내시는 하나님께서는 동시에 말씀을 선포할 자신의 사자들을 보내십니다. 대언자, 목사, 교사를 주시는 것입니다. 말씀을
보내신다는 것은 주님께서 사람을 보내신다는 것입니다.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은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믿고, 성령의 역사를
중요하게 생각하지만 하나님이 보내시고, 세운 사람들에 대해서는 전혀 가치를 두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하나님의 사람을 통해서
나옵니다. 우리는 역대기를 기술한 한 성경 역사가의 증언을 들어 보아야 합니다. [[주] 그들의 조상들의
하나님께서 자신의 백성과 자신의 거하는 곳을 불쌍히 여기사 자신의 사자(使者)들을 통하여 백성에게 /말씀을/ 보내고 늦기 전에
일어나 보내셨으나 그들이 하나님의 사자들을 조롱하고 그분의 말씀들을 멸시하며 그분의 대언자들을 학대하여 마침내 [주]께서 자신의 백성을 향해 진노하사 구제할 방법이 없게 되었으니]
(대하36:15~16). 주님이 하신 일은 자신의 사자들을 통하여 ‘말씀을 보내신 것’입니다. 이 일은 신, 구약을 막론하고
동일합니다. 주님은 자신의 종들을 통해 말씀을 보내십니다. 성령이 있고, 성경이 있으면 족할 것 같은데 주님은 목자와 교사를
세우시고 그들을 통해서 말씀하십니다. 저는 누가 저를 욕하는 것이나 무시하는 것은 아무렇지도 않습니다. 그러나 저를 통해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하거나 딴죽을 걸고 불평하는 것은 도저히 용납이 되지 않습니다. 누가 제 개인을 욕하고 비난하는
것은 전혀 개의치 않습니다. 저는 여러분을 말씀과 기도로 섬기고 가르치기 위해 이곳에 있지 군림하고 섬김 받고 존경받기 위해
이곳에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전하는 말씀을 받지 않는 일은 목사의 힘을 빼는 것이 아니라 주님을 모독하는 일입니다. [[주]께서 너희에게 자신의 모든 종 대언자들을 일찍부터 일어나 보내시고 보내셨으나 너희가 주의하여 듣지 아니하였으며 귀를 기울여 듣지도 아니하였도다.](렘25:4). 이것이 패망의 지름길이었습니다. 주님은 말씀을 보내 주실 때 선생들을 보내 주십니다. 주님은 선생들을 통해 말씀하십니다. [비록
{주}께서 너희에게 역경의 빵과 고통의 물을 주시나 다시는 네 선생들을 구석진 곳으로 옮기지 아니하시리니 네 눈이 네 선생들을 볼
것이며 너희가 오른쪽으로 치우치든지 왼쪽으로 치우치든지 네 뒤에서 나는 말을 네 귀가 들으리니 이르기를, 이것이 /바른/ 길이니
너희는 이 길로 걸으라, 할 것이며] (사30:20~21). 성경을 가르치는 일은 목자들이 전념해야 할 일입니다. [내가 이를 때까지 읽는 것과 권면하는 것과 교리를 가르치는 것에 마음을 쏟으라.](딤전4:13).
성경을 읽고, 권면하고, 교리를 가르치는 일을 하는 것이 제가 주께로부터 받은 사역입니다. 여러분이 성경을 읽도록 촉구하고
권면하는 일 역시 제가 할 일입니다. 저는 올 한 해를 마무리 하면서 여러분들에게 성경 읽기를 다시 한번 촉구하며 이 말씀들을
생명의 양식이요, 삶의 법전이요, 능력이요, 지혜요, 성장의 원동력으로 삼으시기를 바랍니다.
어떤 목사님이 가난한 달동네에 사시는 할머니 성도님을 심방가게 되었습니다. 그날은 추운
겨울날이었는데 할머니는 얼마나 가난하든지 방에 불도 넣지 못하고, 오돌오돌 떨고 있었습니다. 방에 벽지도 신문지, 광고지가
덕지덕지 붙어 있었습니다. 목사님이 할머니 손을 붙들고 간절히 기도를 해 드리고 집을 나올려고 하면서 방을 다시 한번 둘러
보았습니다. 그랬더니 벽에 이상한 딱지가 하나 붙어 있었습니다. 자세히 보니까 그것은 딱지가 아니고 수표였습니다. 보통 수표도
아니고, 0이 굉장이 많은, 아파트를 한 채 살 수 있는 거액의 수표였습니다. 그래서 목사님이 할머니에게 물어 보았습니다.
“할머니, 이 수표를 왜 여기다 붙여 놓았습니까?” “응, 내가 파출부하면서 한 할아버지를 돌봐 드렸는데, 그 할아버지가
돌아가시면서 고맙다고 저걸 내게 줘서 버리기도 아깝고 해서 기념으로 붙여 놓았지, 뭐” 목사님이 깜짝 놀라서 말했습니다.
“할머니, 저게 수표라는 거에요. 돈이에요. 저 돈이면 큰 아파트 한 채 살 수 있어요” 할머니는 깜짝 놀랐습니다. 저 종이 한
장이 아파트 한 채를 살 수 있는 어마어마한 돈이라는 것을 그제야 알았기 때문입니다. 결국 목사님의 도움으로 할머니는 그 수표로
좋은 아파트를 사서 입주하여 편안히 여생을 보내게 되었다는 이야기입니다.
우리도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정작
하나님의 능력을 믿지 못하고, 활용하지 못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할머니가 거액의 수표를 벽에 붙여 놓고 판자촌에서
오돌오돌 떨고 있는 것처럼 우리도 능력의 하나님을 제껴 놓고, 원망하고, 불평하고 슬픔에 잠겨 있지는 않습니까? 이런 저희들에게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을 믿으라” 이 말씀은 단 두 마디 밖에 되지 않지만, 지금까지 수 많은 사람들에게 어마어마한 희망과
확신을 심어준 말씀입니다. 저도 복음역사를 섬기다가 지치고 낙심이 될 때 이 말씀이 얼마나 큰 힘이 되고 은혜가 되었는지
모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믿으라” 이 말씀을 제 방에 써서 붙여 놓았습니다. 이 시간 주님이 우리에 주시는 이 귀한 말씀을
깊이 받아야 하겠습니다. 이로서 산을 바다에 던지는 기적을 체험할 수 있길 기도합니다.
Ⅰ. 믿음의 능력(20-23)
20절을 봅시다. 예수님과 제자들 일행이 아침에 성전 앞을 지나가다가 무화과 나무가 뿌리째
마른 것을 보았습니다. 이때 베드로가 예수님이 전날 하신 말씀이 생각나서 말했습니다. “랍비여 보소서, 저주 하신 무화과 나무가
말랐나이다” 전날 예수님이 무슨 말씀을 하셨습니까? 14절에 보면 잎만 무성하고 열매 없는 무화과 나무를 예수님이 무섭게
저주하셨습니다. “이제부터 영원토록 사람이 네게서 열매를 따먹지 못하리라” 열매없는 무화과 나무는 당시 이스라엘의 형식적인
신앙생활을 상징했습니다.
당시 사람들은 크고 화려한 헤롯 성전에서 예배를 드릴 때 자부심을 느끼고 자기들의 믿음이
대단한 것처럼 착각했습니다. 이렇게 성전이 크고 멋있고, 성대한 제사를 드리면 하나님이 기뻐하시고, 크신 능력이 나타나리라
믿었습니다. 실제로 이 성전 짓는데 80년이 소요되었습니다. 만 명의 인부들과 천 대의 마차, 천 명의 사제들이 동원 되었습니다.
공사 완공 후, 수소 300마리를 제물로 바쳤다고 합니다. 사람들은 이처럼 웅장한 성전에서 힘이 나온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성전 앞에 서 있는 무화과 나무를 뿌리채 마르게 하셨습니다. 이것은 눈에
보이는 성전 건물이 아무리 크고 화려해도 거기서 능력이 나오는 것이 아니란 뜻입니다. 제사의식이 아무리 성대해도 그들 내면에
하나님께 대한 사랑과 믿음이 없으면 아무런 능력이 나타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이 그들에게 능력을 부어 주시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저주하셔서 뿌리채 마르게 하신다고 경고하십니다. 우리도 겉으로 드러나는 의식이나 형식으로 우리를 치장한다고 능력이
나타나지 않습니다. 실제적인 믿음이 없으면 메마른 무화과 나무처럼 심령이 말라 비틀어져서 아무런 능력을 발휘하지 못할 것 입니다.
그러면 우리에게 정말 필요한 것이 무엇입니까? 22절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여 이르시되 하나님을 믿으라” 주님은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을 믿으라” Have faith in God.
성전 건물을 믿지 말고, 거대한 조직이나, 돈을 믿지 말고, 하나님을 믿으라는 것입니다. 눈에 보이는 사람이나 경력, 타이들
의존하지 말고, 눈에 보이지 않지만 살아계신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라는 것입니다. 권세가 어디서부터 옵니까? 하나님께로 부터
옵니다. 능력이 어디서 나옵니까? 하나님께로부터 옵니다. 죄 사함의 권세, 사람을 변화시키는 능력, 우리 가정과 민족을 새롭게
하는 능력, 다 하나님께로 부터 옵니다. 우리 하나님은 말씀 한 마디로 천지를 창조하신 분이십니다. 우리를 죄와 사단의 권세로부터
구원하신 분이십니다. 죽음의 권세를 파하시고 승리를 주신 분이십니다. 로마서 4:17절에 “하나님은 죽은 자를 살리시며 없는
것을 있는 것같이 부르시는 이라”고 했습니다. 시편 121:1-6절에 “내가 산을 향하여 눈을 들리라.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올까.
나의 도움은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에게서로다. 여호와께서 너를 실족하지 아니하게 하시며 너를 지키시는 이가 졸지 아니하시리로다.
이스라엘을 지키시는 이는 졸지도 아니하시고 주무시지도 아니하시리로다. 여호와는 너를 지키시는 이시라. 여호와께서 네 오른쪽에 네
그늘이 되시나니 낮의 해가 너
를 상하지 아니하며 밤의 달도 너를 해치지 아니하리로다” 하였습니다.
우리 손에 당장 돈이 없고 나를 밀어주는 사람 하나 없고, 내가 비빌 언덕이 없어도
문제되지 않습니다. 나의 도움이 되시고, 나의 능력의 근원이 되시는 하나님 한 분을 믿고 의지할 때 얼마든지 기적이 일어날 수
있습니다. 이제 예수님은 며칠 후면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부활하신 후 승천하시게 됩니다. 예수님이 베드로를 비롯해서 남은
제자들에게 남겨주실 수 있는 최고의 유산은 바로 믿음이었습니다. 제자들은 자리에 관심이 많았고, 예수님에게 뭔가 인간적인 도움을
기대했습니다. 자리에서, 권력에서 힘이 나온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런 것 주지 않으셨습니다. 아무런 인간적인
보장을 해 주시지 않았습니다. 아니 오히려 예수님은 그런 것들을 주실 수도 있으신데 일부러 주시지 않았습니다. 그런 것들을 주면
그런 것들을 붙들고 의지하기 때문입니다. 그것 보다 더 본질적인 것, 더 근원적인 것, 모든 축복과 능력의 쏘스가 되시는 하나님
자체를 붙들고 믿으라고 말씀하십니다.
베드로를 비롯해서 제자들이 하나님만을 믿게 되었을 때 후에 얼마나 놀라운 능력을
체험했습니까? 사도행전 3장에 보면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에 올라가다가 날 때부터 앉은뱅이 된 자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이때
베드로와 요한이 외쳤습니다.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이것을 네게 주노니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 베드로와 요한이 아무 것도 가진 것이 없었지만, 하나님을 믿는 믿음,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을 믿는 믿음이 있었을 때
앉은뱅이에게 믿음으로 도전하였습니다. “나사렛 예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 그때 앉은뱅이가 일어났습니다. 룻다에서 중풍병으로
고생하던 애니아를 일으켜 세웠습니다. 욥바에서 죽은 도르가를 살렸습니다. 성전 앞에서 담대하게 복음을 전파하여 3천명, 5천명을
회심시켰습니다. 베드로는 어떤 타이틀도 없었습니다. 그가 가진 교회 건물도 없었습니다. 동원할 수 있는 자금력이나 조직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마음에 하나님께 대한 믿음이 있었을 때, 그는 두려울 것이 없었고 불가능하게 보이는 것이 없었습니다.
하나님은 그를 통해서 상상할 수 없는 놀라운 능력을 보여 주셨습니다. 우리도 오직 하나님을 믿을 때 다른 외적 조건이 다
열악할지라도 능히 하나님의 놀라운 능력을 체험할 수 있음을 믿습니다. “하나님을 믿으라”
저는 요즘 국민일보 역경의 열매에 연재되고 있는 한국시각장애인선교연합회 신인식(57세)
이사장의 간증을 보고 참 은혜를 많이 받았습니다. 이 분은 경상도 의령, 가난한 시골에서 태어나 4살 때 술래잡기를 하다 이마를
뭔가에 부딪혀 실명하게 되었습니다. 아버지도 아파서 병상에 누워 계시고, 자신은 실명해서 앞을 못 보니 얼마나 절망이
되었겠습니까? 너무 많이 울고 눈물을 많이 흘려서 눈물도 말라 버렸다고 했습니다. 청소년기에는 결핵 말기에 신경성 폐렴까지 걸려서
치료를 위해 약을 4년 동안 14만알, 주사를 매일 한 대씩 1400대를 맞았다고 했습니다. 이처럼 불우한 환경에도 굴하지
않고, 이 분은 하나님을 믿고 운명에 도전했습니다. 초등학교때 부터 껌팔이, 볼펜팔이, 신문배달, 전화교환원, 학교 숙직, 드럼
연주 아르바이트를 하며 인생을 개척했습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는 시각장애인을 위해 귀로 듣는 잡지인 <사랑의
메아리>를 창간하였습니다. 1994년에는 <종달새 전화도서관>을 개원하여서 시각장애인들이 전화만 하면 매일
신문기사를 읽어주고, 주간지, 월간지 등을 음성으로 들려주는 일을 시작한 것입니다. 장애인들이 히말라야산에도 등정하도록 후원해
주고, 해병대 병영체험도 몸소 실천하였습니다. 공부도 열심히 해서 서울장신대를 졸업하고, 미국 faith 신학교에서 박사과정을
수료하였으며, 대구대학교에서 박사학위를 받았습니다. 피아노, 드럼, 트럼펫 연주가 수준급이고, 노래는 성악가도 놀랠 정도의
실력입니다. 전 세계 20여개국에 다니며 집회를 하였습니다. 그가 최근에 쓴 책 『꿈꾸는 자의 무한도전』에서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한 치 앞도 안 보이는 안개 속을 거닐고 있습니까? 별거 아닙니다. 일곱 블록을 가득 채우는 안개라도 담으면 물 한 컵
분량 밖에 되지 않습니다. 절망은 가장 게으른 선택입니다. 불행에 절망하지 말고 희망으로 기도하십시오. 믿음으로 기적을
구하십시오” 그는 눈에 보이는 것 아무 것도 없고, 손에 잡히는 것 하나 없고, 의지할 것 하나 없는 사람이지만 하나님을
믿었습니다. “Have faith in God” 하나님께 대한 믿음을 가졌습니다. 그랬을 때 자신의 운명을 개척하고, 수많은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는 위대한 인생을 살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을 믿으라!” 하나님께 대한 믿음, 그것이 우리의 최고 자산이요,
위대한 가능성입니다. 이 하나님을 믿으면 불가능이 없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을 때 어떤 일까지 할 수 있습니까? 23절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이 산더러 들리어 바다에 던져지라 하며 그 말하는 것이 이루어질 줄 믿고 마음에 의심하지
아니하면 그대로 되리라” 일반적으로 산은 거대해서 절대로 움직이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믿는 자의 특권이 무엇입니까? 그
거대하고 견고한 산을 향해서도 외칠 수 있습니다. “산이여, 들려서 바다에 던져져라” 이렇게 말하고, 이것이 이루어질 것을
믿으면 그대로 된다는 것입니다. 옛말에 ‘태산이 높다하되 하늘아래 뫼이로다’고 하였습니다. 저는 이 말을 아주 복음적인 말이라고
생각합니다. 태산이 아무리 높다한들 하나님보다 높지 않습니다. 하나님 아래에 있습니다. 하나님의 손 안에 있습니다. 하나님이 집어
던지시면 산 아니라 한 나라도 바다에 집어 던져 버리실 수 있습니다.
출애굽기 14장에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한 직후 바로군대가 철병거 6백대를 이끌고
뒤쫓아 왔습니다. 오늘날 같으면 탱크 600대를 몰고 뒤쫓아 온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에 대항할 수 있는 무기가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어떻게 하셨습니까? 애굽 군대를 다 물에 던져 빠져 죽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출애굽기
15:1,2절에서 모세는 이렇게 찬양했습니다. “내가 여호와를 찬송하리니 그는 높고 영화로우심이요. 말과 그 탄 자를 바다에
던지셨음이로다. 여호와는 나의 힘이요 노래시며 나의 구원이시로다. 그는 나의 하나님이시니 내가 그를 찬송할 것이요 내 아버지의
하나님이시니 내가 그를 높이리로다” 하나님은 세계 최강의 군대도 다 들어서 바다에 던지우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을 믿는 자들은
독수리 날개로 업어서 홍해도 건너게 하시고,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들은 다 바다에 빠뜨리는 분이 바로 하나님이십니다. 이런 하나님을
믿으라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믿노라 하지만 실제로 그 마음에 믿음이 없습니다. 거대한 산
아니라, 작은 언덕만 만나도 두려워서 벌벌 떨고 호들갑을 떱니다. 그러나 살아 계신 하나님, 전능하신 하나님을 믿는 자에게는
산도, 들도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능력의 심히 큰 것이 우리에게 있지 않고, 하나님께 있음을 믿기 때문입니다(고후 4:7).
우리 하나님은 얼마든지 산도 들려서 바다에 던지울 수 있고, 뽕나무도 뽑아서 바다에 심으실 수가 있습니다(눅17:6).
저희들이 6년 전에 이 곳에 성전을 건축하고자 했을 때 여러 가지 장애물이 있었습니다.
돈이 충분히 있었던 것도 아니고, 앞 집 최사장이 여러모로 방해공작을 꾸몄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오늘 말씀 마가복음 11:22절
“하나님을 믿으라” 말씀을 붙들고 밀어 붙였습니다. 그때 단 한 건의 민원도 없이, 단 한 푼도 빚을 지지 않고 기적같이 건축을
끝낼 수 있었습니다.
앞에 말씀드린 신인식 목사님은 그 책에서 이런 말을 합니다. “사람들은 해 봤자 안 될 일
뭐 하러 힘을 쓰냐 라고 말합니다. 계란으로 바위치기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계란으로 바위를 치면 깨진 계란의 흔적이라도 바위에
남지 않겠습니까. 단번에 될 수 없겠지만 끝없이 하다보면 언젠가는 되지 않겠습니까? 낙수물이 바위를 뚫는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실제로 그 분이 고등학교 들어갈 때 시각장애인은 일반고에 입학이 허용되지 않았습니다. 그는 혈혈단신 대구에서 서울까지 올라가서
물어 물어서 정부청사에 가서 문교부 장관을 만나게 해 달라고 졸랐습니다. 아무도 상대해 주지 않자, 다음 날에도, 그 다음
날에도, 또 그 다음 날에도 계속해서 찾아갔습니다. 마침내 장관을 만나서 시험을 보게 해 달라고 요청을 했습니다. 물론 그때
바로는 법이 시행되지 않았지만 나중에 법이 개정되어서 지금은 시각 장애인이 일반고도 가고, 판사도 임용되고, 대기업도 들어가고 각
분야에 진출하게 되었습니다. 믿음있는 사람과 믿음없는 사람의 차이가 무엇입니까?
믿음없는 사람은 계란으로 바위를 칠 엄두를 내지 못하지만, 믿음 있는 사람은 과감하게 계란으로 바위를 치는 사람입니다. 처음에는
깨진 계란 자국만 남기지만 나중에는 바위가 깨치는 기적이 일어납니다.
여러분, 차사순 할머니 이야기 아십니까? 전북 완주에 사시는 이 할머니는 손주 손녀들을 직접 자기 손으로
운전해서 유치원에 데려다 주기 위해서 운전면허에 도전했습니다. 70이 다 된 나이에 운전면허 시험에 도전하는 것이 무모하게
보였습니다. 실제로 959번 시험에 떨어졌습니다. 시험보기 위해 지출한 인세만 500만원이 들었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포기치 않고
도전해서 960번 만에 합격했습니다. 이 할머니의 도전정신에 감동받은 승용차 회사에서 무료로 차도 한 대 선물해 주고, 승용차
광고모델로 출연하여 ‘올해의 광고모델상’을 받기까지 하였습니다. 아직까지 운전면허증 못 따신 사모님들, 다음 주부터 당장
시작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을 믿으면 못할 것이 없습니다.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느니라(막9:23)” 이번 여름수양회도 100명의 양들을 능히 초청할 수 있음을 믿습니다. 12명의 형제 노아, 12명의 자매
노아 제자양성역사를 능히 이룰 수 있습니다.
지난 주 파트모임 메시지에서 나베드로 목자님은 “우리 모두 거룩한 뻥쟁이가 됩시다”라고
하였습니다. 거룩한 뻥쟁이. 참 좋은 말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볼 때는 우리가 하는 말들이 뻥을 치는 것 같고, 얼도 당토 않는
말을 하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전능하신 하나님 안에서 우리의 뻥은 반드시 현실로 나타나게 될 것입니다. 우리 각자가 위대한
성경선생이 될 것입니다. 우리 2세들이 세상을 변화시킬 영적 거장들이 될 것입니다. 우리가 개척하고 있는 캠퍼스들이 복음으로
정복될 것을 믿습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이처럼 믿음의 말을 선포하고 승리를 체험하기 위해서는 의심을 극복해야
한다고 하십니다. “마음에 의심치 않으면 그대로 되리라” 야고보서 1:6절에서도 “오직 믿음으로 구하고 조금도 의심하지 말라
의심하는 자는 마치 바람에 밀려 요동하는 바다 물결 같으니 이런 사람은 무엇이든지 주께 얻기를 생각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하면 마음에 파고드는 의심과 불신, 부정적인 생각, 인간적인 생각을 이겨낼 수 있습니까?
Ⅱ. 기도의 능력(24-25)
24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그대로 되리라” 우리가 사단이 심는 의심을 극복하고 확신가운데 도전하기 위해서는 기도해야
합니다. 기도할 때 의심의 먹구름이 물러가고 마음에 서광이 비쳐 옵니다. 기도할 때 절망을 이길 수 있는 힘이 생기고,
도전하고자 하는 의욕이 솟구쳐 올라옵니다. 하나님께 나아가 부르짖어 기도할 때 위축된 마음이 풀리고 ‘할 수 있다, 하면 된다,
해보자’는 자신감과 열정이 생겨납니다. 또 기도할 때 이미 받은 줄로 믿어야 합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이기 때문입니다(히11:1).
제이 필립스(J. B. Philips) 목사님이 쓰신 책 중에 『너의 하나님은 너무 작다
(Your God is too small)』이란 책이 있습니다. 많은 신자들이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너무 하나님을 작은 분으로
제한시키고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 하나님은 능히 산도 들어서 바다에 던지우시고, 죽은 자도 살리시는 전능하신 하나님이십니다. 이
하나님을 작은 하나님으로 제한시키지 말고, 하나님의 능력을 믿고, 자꾸 믿음의 말을 선포하라는 것입니다. 무엇보다 부르짖어
기도하라고 말합니다. 우리가 기도하기 전에는 우리의 하나님이 너무 작게 느껴집니다. 하나님이 막연하고 추상적이고 관념적으로
느껴집니다. 그러나 우리가 부르짖어 기도하게 되면 크신 하나님, 전능하신 하나님, 살아계신 하나님을 우리 마음에 느끼게 됩니다.
기도는 하나님의 지혜와 능력을 공급받는 파이프라인과 같습니다. 우리가 기도할 때 하나님은
신기하게도 길을 보여 주시고, 용기와 담대함과 지혜를 부어 주십니다. 기도하지 않으면 하나님과 연결된 파이프 라인이 막히고
녹슬어서 하늘의 능력이 공급되지 않기 때문에 지치고 낙심되고 주저 앉을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기도할 때 신기하게도 힘이
솟구치고 의욕과 열정이 생겨나게 됩니다. 우리가 쉬지 말고 기도해야 하겠습니다. 엘리야가 기도하자 3년 반 동안 메말랐던 이스라엘
땅에 비가 쏟아지게 되었습니다. 베드로가 감옥에 갇혔을 때 온 교회가 기도하자 감옥 문이 열리고 베드로가 유유히 걸어 나오게
되었습니다. 히스기야가 금식하며 기도하자 하나님의 영이 임하여서 앗수르 군대 185000명이 순식간에 죽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인생 살다 보면 기가 막힐 때가 많습니다. 물질문제, 건강문제, 자녀문제 등 우리를
가로 막고 있는 산을 만날 때 힘이 빠지고 기가 막힙니다. 그러나 믿음의 사람은 기가 막힐 때 기도합니다. 기가 막힐 때
기도하면 기적이 일어납니다. 이것을 ‘3기’라고 합니다. 우리가 문제 앞에서 낙심하지 말고 절망하지 말고 기도합시다. 예례미야
33:3절은 말합니다.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은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 우리가
이번 여름수양회를 앞두고, 또한 여름수양회를 통해서 간절히 부르짖어 기도함으로 크고 은밀한 일을 보여 주실 하나님을 체험할 수
있길 기도합니다.
또 한 가지 우리의 기도 파이프라인을 막히게 하는 것이 불편한 인간관계입니다. 내 마음에
누군가 미워하는 사람, 서운한 사람이 있으면 기도의 문이 닫힙니다. 그래서 25절에 보면 기도할 때 아무에게나 혐의가 있거든
용서하라고 했습니다. 그래야 하나님께서 우리의 허물도 사하여 주시고 기도도 응답해 주십니다.
결론적으로 우리 인생의 능력의 쏘스가 어디에 있습니까? 하나님께 있습니다. 우리가 이
하나님을 굳게 믿어야 하겠습니다. 하나님께 대한 믿음을 굳게 붙들어야 하겠습니다. 하나님을 믿고 우리도 거룩한 꿈을 꾸고, 꿈을
선포하고, 도전해서 꿈을 성취하는 거룩한 꿈쟁이, 뻥쟁이들이 될 수 있길 기도합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하나님을 믿으라. 마귀를 믿지 말고 하나님을
믿으라. 세상을 믿지 말고 하나님을 믿으라 하신다. 또 돈을 믿지
말고, 자기 재주를 믿지 말고, 수단 방법을 믿지 말고 하나님을
믿으시란다.
어느 날 자동차를 타고 가면서 어떤 자매를 보고 "하나님
공경하고 예수 믿으세요"하니까 "아니, 나는 안 믿어요"
한다. "뭘 믿으려고 안 믿어" 하니 "내가 나를 믿지요"한다.
"아니! 여보 자매, 그거 무슨 소리요, 내가 나를 믿다니 자매가
무엇인데요?" 자매가 아무리 안다고 해도 눈앞에 눈썹이 몇 개인
줄도 모르면서, 또 아무리 잘났대도 콧구멍 두 개와 입 구멍만
막으면 팩팩하다 십 분 후에 눈알이 나와서 죽을 터인데 그것을
믿다니...... 그런 망령된 소리를 하지 말고 피조물 된 인간은 조물주(하나님)를
믿어야 된다고 전도하였다.
그 자매뿐만 아니라 오늘 이 세계와 이 강산이 요 모양이 되는
것은 다 하나님을 믿지 않고 자기를 믿는다는 무신론자들과
인본주의자들 때문이다.
아니 무신론자들과 사회주의자들만이 하나님을 부인하고
반역하는 것이 아니라 소위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의 계심을
증거하는 자들 가운데서도 말과 붓으로는 하나님의 존재를
전하면서도 실제 생활로는 무신론자의 행동을 하는 것을 볼 때에
한심하기 짝이 없는 것이다.
예수님 세상에 계실 때 베다니에 가셨다가 예루살렘으로 오시는
길에 잎사귀가 무성한 무화과나무를 보시고 시장하시어 열매를
찾으셨으나 잡수실 만한 실과가 없으므로, 이제 후로는 네 열매를
따먹을 사람이 영원히 없으리라 하시고 그곳을 떠나 그 이튿날
그곳을 다시 지나가실 때에 그 무화과나무가 뿌리로부터 모두
말라진 것을 보고, 베드로가 기억하고 여쭈어 가로되 선생님이여
보소서 저주하신 무화과나무가 임의로 말랐나이다 하니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하나님을 믿으라고 하신 것이다.
그러면 예수님이 시장하신데 잡수실 것이 없어서 감정으로
무화과를 저주하신 것인가? 그렇지 않다. 40일 동안 금식하셔도 돌로
떡을 만들어 잡수시는 시험을 이기셨으니 그것은 자기를 위한
감정은 절대로 아닌 것이다. 아니 오늘날 우리에게 하나님을 믿게
하기 위한 것임을 나는 믿는다.
1. 어떠한 하나님을 믿을 것인가
1) 열매를 찾으시는 하나님을 믿으라
나무 한 그루라도, 풀 한 포기라도 자기의 사명을 감당치 못하면
저주를 받는 것이다. 너희들도 특별한 은총을 받고도 주님의 열매가
없으면 버림을 받게 하신다는 공의로우신 하나님, 심판의 주님,
두려우신 하나님을 믿으라는 것이다.
스스로 속이지 말라. 하나님은 만홀히 여김을 받지
아니하시느니라. 죄많은 세계를 홍수로 멸망시키시고, 소돔과
고모라의 죄악을 유황불로 심판하시고, 일본의 죄악을 원자탄으로
징계하시고, 한국의 죄악을 38선으로 가로막아 놓으신 것이다.
삼손의 죄악은 결국 삼손이 눈이 뽑히고 연자 맷돌을 돌리게
하셨고, 웃시야 왕의 교만한 죄악은 문둥병이 들어 죽게 하셨으며,
헤롯의 교만은 몸에 충이 먹어 죽게 했다. 개인이나 가정이나
교회나 국가나 민족의 죄악을 저울로 달아 심판하시는 하나님을
믿을 때에 두렵고 떨림으로 구원을 성취하게 되는 것이다.
2) 구하는 자에게 주시는 사랑의 하나님을 믿으라.
무화과나무의 이적은 하나님을 믿음으로 그에게 구하여 얻은
능력이다. 너희들도 기도하여 구한 것은 이미 받는 줄로 믿으라.
그리하면 받으리라. 구하는 자에게 주시는 하나님임을 믿으라.
너희들이 악할지라도 자식에게 좋은 것을 줄 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너희들에게 더욱 좋은 것을
주시지 않겠느냐? 우리는 사랑의 하나님을 믿어야 할 것이다.
2. 하나님의 존재를 어떻게 믿을 수 있는가
하나님의 존재를 여러 가지로 증거할 수 있는데, 그 중에서 몇
가지를 들면 다음과 같다.
첫째, 지으신 만물을 보아 알 것이다(롬 1:20). 본능으로 알 수 있고
자연과 인생의 조직, 피조물을 보아 조물주를 아는 것이다.
다섯째, 기도함으로 하나님을 알게 된다. 기도하면 하나님의
은혜를 감사하게 되고, 하나님 아버지를 사랑하게 되고, 하나님께
모든 소원을 아뢰고, 거룩한 뜻을 분별하게 되고, 죄를 자복하게
되고, 능력을 구하여 얻으며, 하나님의 섭리로 위험과 실패와
사망에서 구함을 받는 체험으로 하나님을 알게 되는 것이다.
내가 어떤 노인에게 전도하였더니 "여보, 예수쟁이들만
하나님을 공경하시오? 우리도 다 하나님을 공경한답니다. 하나님이
우순풍조(雨順風調)로 오곡백과를 주어서 다 잘 산답니다" 하고
말한다. 그래서 나는 "노인장, 하나님을 어떻게 공경하시오?"
하니 "나는 해 뜨는 데로 향하여 소변도 보지 않지요" 한다.
그것이 하나님을 공경하는 일이라고 말한다. 참으로 하나님을
믿는 사람은 어떤 생활을 하는가? 열매를 보아 그 나무를 알 수 있는
것이다.
3. 하나님을 믿는 사람의 생활태도
1. 철두철미한 회개의 생활을 하여야 한다
신구약의 모든 성도들 가운데 참된 하나님을 믿는 자는 먼저
회개하지 않고는 견디지 못하였다. 다윗을 보시라. 한때 인간성을
가지고 정욕을 이기지 못하여 무서운 죄를 짓고 타락했었으나
나단의 책망을 듣고 겸손히 용상에서 내려와 부스러진 심정으로
침상을 적시고 요를 적시는 눈물의 회개를 밤마다 하였던 것이다.
바울의 회개와 베드로의 회개! 하여간 모든 성도들은 하나님을
참으로 믿을 때 죽었다 살아나는 철저한 회개를 경험한 것이다.
어거스틴도 그러하였고 존 번연과 루터가 그러하였다. 아직도
회개가 철저치 못한 연고이다. 한 사람도 멸망치 않고 다
회개하기를 원하시느니라(벧후 3:9).
2. 하나님을 참으로 믿는 사람은 양심생활을 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빛이시니 털끝만치도 어두움이 없나니 하나님과
사귀었다 하면서도 어두운 데 거하는 자는 거짓말하는 자라 하였다.
사람들이 볼 적에는 점잖고 의롭고 깨끗하게 사는 것 같으나 혼자
있을 때는 별 짓을 다하는 것은 아직도 하나님을 만홀히 여기는
까닭이다.
외식하는 바리새 교인과 서기관들은 사람들에게 보이려고 의를
행하고 양심적으로 살지 않음으로 주님에게 얼마나 책망을
들었는가? 그 반대로 하나님의 사람 요셉을 보시라. 형님들의
미움을 받아 팔리어 이국 타향에 가서 보디발 장관의 가정에 총무로
충성되게 봉사할 때에 장관의 부인이 날마다 유혹하여도 듣지 않고
말하기를 주인께서 나를 신용하여 가정의 모든 것을 맡기셨으나
당신만은 맡기지 않았는데 어찌 감히 이런 일을 행하여 하나님께
득죄하리요 하고 거절할 때에 달려들어 옷을 붙잡고 더욱
유혹함으로 붙잡힌 옷을 벗어버리고 달아났다. 그랬더니 부인이
모함하여 잡히게 되고 감옥에 들어갔으나 그 정조를 지킨 것은 그가
하나님을 참되게 믿은 결정이 아닌가?
오늘날 하나님을 믿고 일한다 하면서도 양심을 버리고 개인의
편리와 안일을 위하여 이리저리 좌우하는 생활로 신앙의 정조를
더럽히는 많은 사람들이 있는 것을 생각할 때에 안타깝기 끝이 없는
것이다.
내 아들 디모데야, 내가 너희에게 경계로서 명하노니 전에 너를
지도한 예언을 따라 그것으로 선한 싸움을 싸우며 믿음과 선한
양심을 가지라. 어떤 사람들이 그 양심을 버렸으니 그 믿음을
의논컨대 파선한 배와 같으니라(딤전 1:9).
물고기가 물 안에 있으면서도 물의 은혜를 알지 못하고, 땅에
사는 인간들이 땅덩어리가 돌아가는 것을 알지 못하는 것처럼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이 너무 지중하여 무감각하게 지내는 인간들
중에서 하나님을 참으로 믿는 자는 밥 한 그릇을 대할 때나 물 한
잔을 대할 때 감사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우리가 세상에 태어나려고 해서 난 것이 아니요 살려고 해서 사는
것이 아닌 것이다. 우리가 어머니 복중에 있을 때 신기하고
오묘하게 지음을 받아 열 달 동안 그 속에 있다가 나올 때에 배꼽줄
하나 가지고 나왔지만 나오자마자 그것을 똑 잘라 버리니 정말
핏덩어리로 된 것을 젖으로 먹여주시고, 입혀 주시고, 보호하여
주신 그 사랑을 어찌 감사하지 않으랴.
이웃집에서 떡국 한 그릇을 얻어먹고도 감사를 몇 번이나 하면서
날 때부터 지금까지 아름다운 세계에서 봄에는 백화가 만발하고,
여름에는 녹음방초(錄陰芳草) 우거지고, 가을에는 오곡백과가
풍성하고, 겨울에는 백설강산이 은세계를 이루어 보기 좋고, 놀기
좋고, 살기 좋게 축복하시었건만 우리는 얼마나 조물주께 감사를
하였는가? 캄캄한 밤중에 수렁에 고무신 한 짝을 빠뜨리고 헤맬
때에 누가 성냥 한 개비를 켜서 밝혀 주면 아이고 이 양반 고마워라
하면서도 낮에는 태양으로 변함없이 비추어 주시고 밤에는 달과
별로서 밝게 해 주시는, 그 빛을 주시는 조물주 하나님께는 얼마나
감사하였는가? 배은망덕하는 인간들을 다 멸망시킬 것이로되
자비와 긍휼로 무조건 사랑하심을 깨닫는 자는 행복스러운 인간인
것이다.
또한 우리의 육체를 사랑하실 뿐만 아니라 독생자까지 주신 그
사랑, 어찌 다 말로 형언하리오. 주를 사랑하고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사람에게는 일만 가지 일이 다 합동하여 유익하게
하시므로 행복과 순경(順境)에서만 감사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믿는 자는 불행과 역경 중에서도 항상 감사의 생활을 하는 것이다.
어떤 독실한 신자 노인이 있었다. 그가 쌀 한 가마니를 외상
맡아다가 마루에 두었더니 그날 밤에 도적이 와서 홀랑 가져다
버렸다.
그의 마누라는 도적을 욕하면서 야단을 치는데 영감님은 "마누라,
너무 떠들지 마시오. 나는 쌀 한가마니 잃어버렸는데 다섯 가지
감사가 생기는구먼" 한다. "원, 저런 영감두, 무엇이
감사하단 말이요" 하니 "보라구, 우리는 쌀 한 말도 얻기
힘든 집에서 한 가마니나 외상으로 얻게 된 신용을 얻었으니
감사하지 않은가? 또 감사할 것은 남은 도적질하면서 사는데 우리는
도적질하지 않는 사람이라는 것이오. 또한 그것 모두 다 우리가
잘못했지, 그것을 방안에 두었으면 좋았을 것을 마루에 두어
실패하였으나 결국 좋은 경험을 얻었으니 감사하고, 또한 육신의
양식은 잃어버렸어도 영혼의 양식은 잃지 않았으니 감사하고, 또
외상으로 얻어온 쌀이라도 남의 것을 잃어버리지 않고 내 것을
잃었으니 감사하지 않소?" 하며 찬송을 불렀다 한다.
감사하는 사람에게는 감사 안할 것이 없고 감사 안 하는
사람에게는 감사할 것이 없는 것이다.
4. 하나님을 참으로 믿는 사람은 강하고 담대한 생활을 하게 되는
것이다.
종이가 약하지만 벽에 붙어 있게 될 때는 강하게 되는 것처럼
우리 인간은 몸도 약하고 마음도 약하고 의지도 약하지만 만세 반석
되시는 하나님께 신앙으로 의지하여 하나님과 나와 그리스도의
피로 반죽하여 콘크리트를 할 때 강하고 담대하게 되는 것이다.
다윗이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여 골리앗을 물매 돌 한 개로 쳐서
죽이고, 엘리야는 하나님을 믿어 하늘에서 불이 떨어지게 하고 3년 6개월간
비가 오지 않게 하였고 다시 기도하여 비가 쏟아지게 한 것이다.
모르드개와 에스더는 하나님을 믿어 유대 민족을 하만의 손에서
위기 일발에 구원하여 낸 것이다.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한 것이
없느니라. 나를 믿는 자는 나의 행하는 일을 저도 할 것이요 이보다
더욱 큰 것도 행하게 하리라(요 14:12).
5. 하나님을 참으로 믿는 사람은 항상 기도하고 쉬지 않고
기도하며 깨어 기도하고 아무 것도 염려하지 않고 기도와 간구와
감사함으로 하나님과 교통하고 생활을 하는 것이다.
효자 효녀는 무엇이든지 부모님께 문의하고 보고한다. 불효
자식은 무엇이든지 다 제 맘대로 자행자지(自行自止)한다. 부모님이
무엇을 좀 알고 싶어서 이번 일이 어찌되었느냐, 아까 왔던 사람이
누구이냐 하고 물을 때 "아이구, 그것은 알아서 무엇하겠소.
어서 진지나 잡수시고 낮잠이나 주무시구려. 원, 노인네들은 별
간섭을 다 하시려고 드시네" 하면 부모님들은 그만 쑥 들어가
손을 비비면서 "이거 왜 여지껏 살아서 이 수모를 받고 있을꼬"
하면서 뒷방에서 한숨만 짓는다. 물론 늙은 부모님은 아무 것도
몰라도 자식들이 하는 것을 알고 싶어하는 것이다.
우리 하나님 아버지는 그런 뒷방 늙은이가 아니시다. 무엇이든지
기도로 그에게 문의하고 보고하면 대소만사(大小萬事)를 최선으로
인도하여 주실 터인데, 불신앙의 무리들은 무엇이나 제 뜻대로 하여
하나님을 섭섭하게 하며 자신의 불행을 초래하는 것이다.
호흡이 끊어지면 죽는 것이다. 우리의 영적 교통의 기도 호흡이
두절되면 벌써 죽어 하나님과는 상관없는 자가 되는 것이다. 나는
너희를 위하여 기도하기를 쉬는 죄를 결단코 범치 아니하리라(삼상
12:23).
살아 계신 하나님, 전능하신 하나님, 사랑의 하나님, 공의로우신
하나님, 우리 아버지 하나님, 우리의 말단 사정을 다 아시는 하나님,
거룩하신 하나님을 믿어 참된 회개로 죄사함 받고 성령을 받아 빛
가운데서 양심적으로 살며, 항상 기도와 감사와 희락과 화평으로
살며, 극히 강하고 담대하여 악마와 세상과 죄악과 싸워 날마다
백전 백승하는 개선장군이 되시기를 바라는 바이다.
11월 13일(목) 누가복음 17-19장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나는 죄인이로소이다(18:13)
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 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가로되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옵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였느니라. But the tax collector stood at a distance. He would not even look up to heaven, but beat his breast and said, 'God, have mercy on me, a sinner.
누가복음 5:8 시몬 베드로가 이를 보고 예수의 무릎 아래 엎드려 가로되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When Simon Peter saw this, he fell at Jesus' knees and said, "Go away from me, Lord; I am a sinful man!
누가복음 18:13 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 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가로되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옵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였느니라. But the tax collector stood at a distance. He would not even look up to
heaven, but beat his breast and said, 'God, have mercy on me, a sinner.'
베드로의 경우 사업에 대박이 날 경우 자신의 영적 정체성을 깨닫는 은혜라고 하겠습니다.
베드로는 왜 갑자기 죄인이라고 고백했을까?
성경 시대 갈릴리 호수에서 물고기를 잡는 어부들의 일상 속으로 들어가 볼까요? 성경 시대 어부들은 주로 밤 10시부터 새벽 4시까지 물고기를 잡았습니다
누가복음 5장의 배경 안, 이른 아침입니다 사람들이 들은 말씀을 듣기 위해 이른 아침부터 갈릴리 호숫가로 몰려들었죠 하지만 밤새 혹독한 추위에 고생했지만 한 마리 물고기도 못 잡은 베드로에게 예수님의 말씀이 들어왔습니다 그는 허탈한 심정으로 그물을 씻은 후 말리고 있었습니다 당시의 세마포 그물은 바로 씻어서 빨리 말리지 않으면 금방 썩기 때문이죠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명령하십니다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 이에 베드로가 대답합니다 "선생님, 우리가 밤이 맞도록 수고를 하였을 때 얻은 것이 없지만, 말씀에 의지해서 그물을 내리겠습니다." 이때 베드로가 잡은 어획량은 2개의 만선입니다 시대의 사이즈를 기준으로 4분의 3톤에 해당하는 양이었습니다. 2주간의 어획량으로, 갈릴리에서 잔뼈가 굵은 베드로의 인생에서 처음 경험하는 대박의 순간이었죠 예수님과 통하면 갈릴리 수산업 틀을 평정할 날도 그리 멀지 않았겠죠 하지만 이때 베드로의 순정을 더욱 빛나게 하는 순간이 찾아옵니다 베드로는 만선의 축복으로 인한 흥분과 기쁨, 그리고 예수님과 통하여 성취할 부와 명예의 유혹에 빠지지 않았습니다
그는 불과 몇 시간 전에 느꼈던 수치와 절망감을 생애 최고의 기쁨과 흥분으로 바꾸어 준 예수님께 집중했던 겁니다. 그리고 갑자기 아무도 예상치 못한 행동을 합니다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입니다." 그러면 베드로는 대체 무슨 죄를 지은 걸까요? 말씀에 순종해서 축복받은 것이 아닌가요? 우리 같으면 이 순간에 잡은 물고기에 십일조를 바치고 "할렐루야! 아멘!"을 외칠 것 같은데요
혹시 다른 어부들이 잡을 물고기를 내가 다 잡아버린 탐심을 회개한 건가요? 우리에게 잘 알려진 베드로의 엉뚱한 행동을 푸는 열쇠는 당시 어부들의 삶과 사고에 있습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어부들의 사고에서 바다는 바다를 주관하는 신과 뗄 수 없는 관계에 있습니다
각각의 문화는 고유한 바다의 신이 있죠
그리스 - 포세이돈 로마 - 한국 - 용왕 신 성경 시대 - 얌
05:38바다의 신인 야미, 오늘날 바다를 가리키는 보통 명사가 될 정도로 바다의 신 얌은 바다와 뗄 수 없는 관계에 있었죠
05:48많은 나라에서 어부들은 출항에 앞서 각자의 바다의 신에게 제사를 드렸습니다
05:54바다의 신을 기쁘게 해야 물고기가 많이 잡히고, 혹여 바다의 신이 화가 나면 풍랑으로 배가 뒤집힌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죠
05:59그래서 화가 난 바다의 신을 달래기 위해, 한국에서는 심청이, 성경에서는 윤아를 던진 겁니다
06:09갈릴리는 활동 무대인 갈릴리에서는 물 반, 고기 반으로 불릴 정도로 물고기가 잘 잡히기로 유명했습니다
06:24그렇다면 본문에 나오는 밤에 맞도록 쓰고 있는데, 한 마리의 물고기도 잡지 못했다, 이런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사실 이건 어획량이 많은 갈릴리에서는 불가능한 일입니다.
06:37좀 적게 잡힐 순 있어도, 한 마리도 못 잡는다는 건, 베드로의 수십 년 어업 생활에서 좀처럼 경험하지 못한 불가사의였죠
06:43이런
아침에 예수님이 소호수에서 말씀을 전하실 때 옆에서 그물을 씹던 베드로는 불과 몇 시간 전 자신에게 일어난 믿기 어려운 경험으로
인해 마치 귀신에게 홀린 듯한 기분이었을까? 일어난 일이 도대체 뭐지, 참 귀신이 곡할 로 계실 새
07:09이건 바로 예수님의 사전 정지 작업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겁니다
07:15예수님은 그날 밤 갈릴리에 있는 수많은 고기 떼들에게 명령을 내리자, "얘들아, 너희들 오늘 밤은 베드로한테 협조하지 마." 간밤에 일어난 조화로 멘붕이 된 채
07:27그물을 쳐 보려던 베드로에게 예수님은 명령하십니다
07:34베드로는 혹시나 하면서 있는 힘을 다해 노를 저어 깊은 곳으로 가 그물을 내렸죠
07:41그런데 이때 간밤에 경험한 것보다 더 기절초풍할 일이 벌어졌습니다
07:48물고기들이 떼를 지어 찬성을 하면서 베드로가 내린 세마포 그물 안으로 달려드는 게 아닙니까? 당시 어부들이 밤에 고기를 잡은 것은 해가 뜨고 나면 새 마포 그물이 물속에서 눈에 보였기 때문이죠
08:05물고기가 아무리 아이 귀가 나 따지만 장님 물고기가 아닌 이상, 아침 시간에는 그물 안으로 돌진하는 자살 행위는 하지 않을 테니까요
08:16물속에서도 보이지 않는 투명한 나일론 그물이 개발된 1950년대까지, 물고기를 잡는 방법은 큰 변화가 없었죠
08:22그러면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할까요? 순간 베드로는 소스라치게 놀랐습니다
08:27그렇죠, 이런 일은 신만이 할 수 있는 일이죠
창세기 1장 10절, 바다(יָם, 얌, sea) - 히브리어 원어 정리
창세기
1장 10절에서 하나님께서는 마른땅인 뭍을 '땅'으로 부르시고 물을 יָם(얌, 바다, sea)로 부르셨습니다. 흩어져 있던
물을 한 곳에 모아서 구별해 주신 바다를 뜻하는 히브리어 원어인 יָם(얌, 바다, sea)에 대한 여러 의미들과 해석들을
정리하였습니다.
창세기 1장 10절, 바다(יָם, 얌, sea) - 히브리어 원어 정리
개역개정 성경과 ESV의 창세기 1장 10절
하나님이 뭍을 땅이라 부르시고 모인 물을 바다라 부르시니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God called the dry land Earth, and the waters that were gathered together he called Seas. And God saw that it was good.
긴네렛(kinneret, 민 34:11)으로 알려진 갈릴리 바다. 긴네렛이란 말의
철자는 때로 약간씩 수정되기도 하였다. 즉 마카베오 일서 11:67에서는 "겐네사르(Gennesar)의 물"로 표기되며 신약성경
시대에는 게네사렛 호수(눅 5:1)나 갈릴리 바다(마 4:18) 혹은 디베랴 바다(요 21:1)로 알려졌다.
5. יָם(얌, 바다, sea)의 기타 의미들
또한 얌은 나일강에 대해서도 사용되었는데(나 3:8), 틀림없이 그 이유는 그곳이
유프라테스와 마찬가지로(렘 51:36, 참조: 사 21:1, 여기에서 이 단어는 페르시아만을 가리키는 것 같다) 광대하기 때문일
것이다. 왕상 7:23이하에 의하면, 솔로몬의 성전에는 "청동 바다"라고 불리는 거대한 놋대야가 있었다고 한다. 그렇지만 얌과
관련되어 있는 어떤 상징도 순전히 억측에 불과할 것이다. 이것은 그 크기 때문에 그렇게 불리었던 것 같다.
지중해의 위치 때문에 특히 히브리 사상에서, 그리고 일반적으로 셈인들의 사상에서
"서쪽"이란 말이 사용되게 된 것 같다. 우가릿어에는 '바다' sea를 뜻하는 이와 같은 동족어가 있다. 이스라엘은 해상 무역에는
결코 주목하지 않았다. 사실상 솔로몬이 상선을 가지고는 있었지만 뵈니게 선원들을 고용하여 그곳에 배치시켰던 것 같다.
구약성경은 여호와를 바다의 창조주(창 1:10)이시며, 또한 바다의 물에 한계를
부여하신 분(시 104:6-9, 잠 8:29)으로 언급한다. 출애굽 당시에 홍해를 지배하신 하나님의 강한 힘은 그 당시에(출
15장) 그리고 후대에(시 78:13, 시 136:13) 찬양의 이유가 되었다. 게다가 이것은 전능하신 바로 그 하나님에 의해
기대된 승리에 대한 상징이 되므로, 확신을 가지고 기도와 약속이 행해졌다(사 51:10, 참조: 시 107:23-32). 이방
민족들은 포효하는 바다에 비유되나(사 17:12) 그들은 여호와의 질책을 받고 도망칠 것이다(사 17:13).
다니엘서에서 사탄의 세계의 힘은 바다에서 올라온 짐승 모양을 취하지만(단 7:3),
창조주의 주권적 힘에 의거하여, 지극히 높으신 자가 영원한 나라를 세우실 때에 이것들을 전복하신다.
고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있어, 바다는 일반적으로 위험으로 가득찬 공포의 장소로 인식되었음에 틀림없다. 욘 2:2 이하는 스올과 요나가 구출받은 바다들 사이의 밀접한 관계가 나타내 주고 있다. 바다에 대한 이런 공포 때문에 요한의 종말론적 환상, "바다도 다시 있지 않더라"가 생겨난 것 같다(계 21:1).
베드로는 두 가지 기적을 체험합니다. 첫번째 기적은 갈릴리바다에서 밤새도록 그물을 던졌을 때 단 한마리도 물고기를 잡을 수 없었다는 것 두번째 기적은 갈릴리 바다에 익숙한 어부로서 단 한번의 그물질로 2주동안 잡을 양의 물고기를 한번에 잡을 수 있었다는 것 그렇다면 지금 베드로 앞에 계신 예수님은 신이라고 부를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주여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나를 따나소서 라고 고백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상식적인 세상에서 영적인 영역으로 들어가는 과정
세리의 경우
신앙생활을 하면서 기도할 때마다 자신의 영적 정체성을 깨닫는 은혜라고 하겠습니다. 따라서 베드로와 세리는 공통점은 영적 정체성을 깨닫는 것을 말합니다.
사람의
생각에는 두 종류가 있습니다. 하나는 성찰(reflection) 다른 하나는 추론(speculation) 그런데 묵상을
중심으로 훈련받은 사람들은 성찰에 강합니다. 그래서 성경을 읽어도 성찰의 차원에서 이해를 합니다. 즉, 자세한 관찰과 올바른
해석과 바른 적용이라는 귀납적 접근이기에 깔끔하게 성찰의 자리로 우리를 이끌어 갑니다. 그런데 한 가지의 단점은 있습니다. 그것은
나의 깨달음을 중심으로 가기 때문에 좁다는 것입니다. 나와 내 주변 몇 마일 내에서만 영향을 끼치게 되는 제한이
있습니다. 그래서 성찰식의 접근은 여성들이 좋아합니다. 그래서 성찰에 초점을 맞추게 되면, 영적 신사임당을 양성하기에 안성맞춤이
됩니다.
추론은 어려가지 진리가 연결이 되게 됩니다. 그래서 직접적으로 말하지 않는 부분도 논리상의 추론에
의해서 확장되고 강화가 되어 집니다. 상상이 들어가게 되고. 흥분됨이 있어서. 남들이 보지 못하는 것을 추론을 통해서 보는
통쾌함이 있습니다. 그래서 추론은 남자들이 좋아합니다. 그래서 추론적 접근을 하면 남성들이 열광하면서 모여듭니다. 그리고 나중에는
말씀을 붙들고 세상과 한 판 붙는 마음을 가지고 결전의 자리로 가기도 합니다. 그러면 마지막 날에 성령을 부어 주십니다. 그러면
자녀들은 예언을 하고 젊은이들은 환상을 보게 되고, 늙은이들은 꿈을 꾸게 됩니다. 이것이 추론에 의해서 나오는 현상들입니다.
그래서
영적 무장은 생각의 무장인 것입니다. 깊이 있는 성찰과 진리의 연결을 통한 추론이 깊이와 넓이를 더하는 강력한 군사로 만드는
것입니다.
에베소서에 영적 무장은 여섯 가지가 나옵니다. 허리와 가슴, 머리와 발, 왼손과 오른손" 즉 "진리의 허리띠와 의의
호심경과 구원의 투구와 복음의 신과 믿음의 방패와 말씀의 검을 가지고 무장하는 것입니다.
데살로니가전서의 무장은
단 두 가지입니다. 믿음과 사랑의 호심경과 구원의 소망의 투구입니다. 즉, 가슴과 머리를 보호하고 무장하라는 말입니다. 가슴은
감정을 말하고, 머리는 생각을 말합니다. 그래서 굳건한 감정의 용사가 되고, 예리한 생각의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감정이 약해짐으로 인하여. 감정에 휘둘리는 사람이 많습니다. 그래서 멘탈의 붕괴라는 말이 일상어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잠언서는
모든 지킬 만한 것 중에 더욱 마음을 지키라고 합니다. 생명의 근원이 거기에서 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사랑을
확신하는 사람은 어떤 공격에도 흔들리지 않습니다. 하나님께 귀한 존재로 인식되는 사람은 사람의 비난과 구설수에 흔들리지
않습니다. 열등감은 사랑의 확신이 없기 때문에 생기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라는 확신은 어떤 결핍에서도 쫓기지
않습니다. 여호와가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어 우리는 넉넉히 이기게 되고, 세상이 두려워 떠는 모습을 보게 될 것입니다.
세리의 영적 성찰(省察)
바리새인의 전통 고찰(考察)
고찰(考察) : 생각할 고, 살필 1. 어떤 것을 깊이 생각하고 연구(硏究)함.
누가복음 18:9b-14
그러나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 하시니라 9. 또 자기를 의롭다고 믿고 다른 사람을 멸시하는 자들에게 이 비유로 말씀하시되 10. 두 사람이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가니 하나는 바리새인이요 하나는 세리라 11. 바리새인은 서서 따로 기도하여 가로되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12. 나는 이레에 두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 하고 13. 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 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가로되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옵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였느니라 14.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사람이 저보다 의롭다 하심을 받고 집에 내려 갔느니라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하시니라.
마음의
기도(prayer of the heart)
그리스도교 역사 속에서 가장 오래되고 전통적인 기도는 ‘마음의
기도(prayer of the heart)’입니다. 인간 존재의 중심인 ‘마음(심장, heart)’을 기도의 자리로 보고
발전시켜온 기도인데, 좀 더 실존적이고 체험적인 하나님 체험을 추구하는 이 ‘마음의 기도’는 지난 2천년 그리스도교 전통 안에서
‘예수기도(Jesus Prayer)’라는 이름으로 발전되었습니다.
장 라프랑스(Jean Lafrance)는 이 ‘마음의 기도’를 ‘우리의 영혼이라든가 감정은 물론 기도의 방법까지 뛰어넘어 우리의 존재 깊은 곳에서 기도의 근원과 뿌리를 찾는 기도’(1)라고 했는데, 이 기도의 성서적 기원은 예수님께서 “너는 기도할 때에 네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은밀한 중에 계신 네 아버지께 기도하라” 하신 마 6:6절 말씀입니다.
안토니 블룸(Anthony Bloom)은 ‘기도의 체험’에서 이렇게 말하기도 했습니다.
우리가 모든 것의 근본이며 원천이신 하나님을 부르면서 우리 마음 가장 깊은 속을 뚫고 지나갈 결심을
하고 실천한다면, 우리의 기도가 어디로 가야하고 어디에 목표를 두고 있는지 잘 알게 될 것이다. 뒤로도 위로도 아니고 깊이 더욱
깊이 들어가서 길을 막는 저항과 감추려는 거짓을 뚫어버리고 가장 깊은 핵심까지 들어가야 한다.(2)
그의 말은 이런 뜻입니다. 우리의 기도는 가장 깊은 핵심이신 하나님 현존에까지 도달해야 하는데, 그러려면 마음
가장 깊은 속을 뚫고, 더욱 깊이 뚫어 내 안의 거짓과 대면함으로서 겸손해지고 가난해지고, 진실해진 자신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엡 3:16절에서 이 ‘마음’을 ‘속사람’이라고 표현하며 “성령으로 말미암아 너희 속사람을 강건하게
하라”고 당부했고, 한 걸음 더 나아가 엡 3:17절에서는 “그리스도께서 너희 마음에 계시게" 하라고 당부했습니다. 왜 우리
신앙의 선조들은 이 ‘마음’을 그토록 중요하게 여기고, 자기 마음을 깊이 더 깊이 들여다봤던 것일까요? 마음은 인간 본성의
중심으로서 육(肉), 혼(魂), 영(靈) 모두에게 영향을 미치고, 마음 깊은 곳에서 인간의 모든 정신적 기관이 작용한다고 보았기
때문입니다.
마음에 그리스도께서 계시게 하면 우리 마음은 천국이 되지만, 우리 마음을 본능이 이끄는 대로 방치해버리면 악마의
유혹이 판치는 지옥이 될 수도 있습니다.
러시아의 영성가인 테오판(Theophane the Recluse)은 마음에 특히
영(靈)이 연결되어 있고, 바로 이 마음에 자의식, 양심 및 하나님에 대한 생각이 깃들여있기 때문에 이 ‘마음을 들여다보며
기도하는 것’이 그 어떤 기도보다도 우선되고 중요함을 강조했습니다.
오늘 복음서에서 우리는 두 사람의 각각 다른 기도의 태도를 보게 되는데, 한 사람은 주변의 사람들을 의식하며
기도를 하고 한 사람은 자기 마음을 들여다보며 기도를 합니다. 그리고 이 두 사람의 기도에 대한 예수님의 평가는 매우
극명합니다.
또 자기를 의롭다고 믿고 다른 사람을 멸시하는 자들에게 이 비유로 말씀하시되 두 사람이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가니 하나는 바리새인이요 하나는 세리라 | 눅 18:9, 10
이 비유는 누가복음에만 나옵니다.
누가는 이 비유를 우리가 지난주에 보았던 ‘불의한 재판관의 비유’와 연결시키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지난주의 ‘불의한 재판관의 비유’가 ‘어떻게 하는 기도가 하나님의 자비를 얻을 수 있는가’를 보여주었다면,
오늘의 비유인 ‘바리새인과 세리의 기도’는 ‘어떻게 하는 기도가 하나님께 의롭다 함을 얻을 수 있는가’를 보여준다 하겠습니다.
당시 사회에서 바리새인과 세리는 하늘과 땅만큼 차이가 있었습니다. 바리새인이 율법 안에서 살아가는 경건의
본보기였다면, 세리는 율법 밖에서 살아가는 죄인의 본보기였습니다. 그런데 이 비유를 보면 두 사람이, 똑같이 성전에 올라갔고(눅
18:10), 똑같이 성전에서 기도하고(눅 18:11-13), 똑같이 성전에서 내려갑니다(눅 18:14). 기도하는 시간과 장소는
서로 같았는데, 기도하는 태도는 극명하게 달랐습니다. 바리새인의 기도 내용은 길었고, 기도의 주어는 계속 ‘나’였습니다. 반면에
세리의 기도 내용은 짧았고, 기도의 주어는 ‘하나님’이었습니다.
바리새인은 서서 따로 기도하여 이르되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 하고 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쳐다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이르되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였느니라 |
눅 18:11-13
먼저 바리새인의 기도에서 우리의 눈길을 끄는 장면은, 그가 하나님보다 사람을 먼저 의식하는 것입니다. 아마 세리와
같은 시간에 성전에 올라왔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어떤 우월감을 가지게 된 것 같습니다. 세리와 자신을 비교해 보니까 자기가
기특하게 의로웠습니다. 그래서 그의 기도는 자기자랑으로 채워지는데, 우선은 자기가 범하지 않은 것들, 즉 토색, 불의 간음을
열거하고, 다음은 자기가 잘한 것들, 즉 금식과 십일조를 자랑합니다.
그런데 이 즈음에서 우리가 보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지금 예수님의 이 비유가 ‘자기를 의롭다고 믿고 다른 사람을
멸시하는 사람’을 향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자기의 의로움에 취해 다른 사람을 멸시하는 바리새인을 향해 ‘그 마음을
교만이 이끄는 대로 방치하지 말고, 하나님을 의식하며 겸손할 것’을 교훈하시려고 주님께서 이 말씀을 하신 것 같습니다. 그가
교만할 수밖에 없었던 건, 하나님을 의식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분명히 그는 기도의 자리에 섰지만, 그러나 시선은 자기보다 못한
다른 사람들을 경멸스럽게 응시하며 상대적인 의로움에 취해 있었습니다.
교만의 출발점이 자신에 대한 허영이라면, 교만의 중간지점은 자기 업적을 과시하는 것이고, 교만의 종착점은 하나님의
도우심을 거절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 신앙생활에서 가장 경계해야 할 무서운 함정입니다. 이 교만이 무서운 것은 우리에게
하나님을 부인하라고 강요하지 않으면서도 나도 모르게 하나님보다 나를 더 숭배하도록 만들고, 큰 소리로 하나님께 감사하면서도
속으로는 자신을 찬양하게 합니다.
그 예가 바로 이 바리새인입니다. 그의 기도를 들어보십시오. “하나님이여 감사하나이다”라고 기도합니다. 그런데
감사의 내용이 자기 찬미입니다. “나는 다른 사람들,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특히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사도 야고보에 따르면 하나님은 이런 교만한 자를 물리치십니다(약 4:6).
교회의 원로에게 말씀을 듣던 어느
교만한 형제가 “아버지여 나는 교만하지 않습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러자 지혜로운 원로는 이렇게 말씀합니다. “네가 교만하지
않다고 주장하는 것이 바로 네가 교만하다고 증거하는 것이 아니냐?” 요한 클리마쿠스(John Climacus)는 ‘거룩한 등정의
사다리’에서 이렇게 경고합니다.
교만이라는 질병을 앓는 사람에게는 안타깝게도 구원의 희망이 없습니다. 교만한 사람은 속이 썩은 석류와도 같고, 교만한 사람에게는 마귀가 필요치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이미 자신을 대적하는 원수 마귀로 변했기 때문입니다.(3)
교만한 사람은 참 자아를 발견하지 못합니다. 그는 이미 자신이 의로우며, 지혜롭다고 생각하며, 죽은 이후에야
비로소 자신이 얼마나 가난한지를 발견합니다. 우리는 바리새인의 기도가 바로 이 교만에서 비롯되었음을 알고 나 자신을 경계해야 할
것입니다.
주님은 ‘자기를 의롭다고 믿고 다른 사람을 멸시하는 자들’에게 그들과 다른 한 사람을 보여주십니다. 그는 그들이
멸시하는 세리였습니다. 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쳐다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자기의 죄를 고백합니다.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눅 18:13)
주님은 이 세리의 기도에서 그의 겸손함을 발굴해내십니다. 그리고 자신의 의로움을 자랑하던 바리새인이 아닌 이 세리가 더 의롭다 하심을 받았다고 말씀하시면서 이렇게 결론을 내려주십니다.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 눅 18:14
사실 이 사람은 그 삶의 내용에서 결코 의롭다 함을 받을 수 없는 사람입니다. 당시 세리는 로마 정권과 계약을
맺은 다음에 자기 동족인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세금을 거둬 그 차액을 자신들의 수입으로 삼았습니다. 로마 정권은 계약 기간이 될
때마다 입찰을 붙여서 가장 많은 액수를 제시한 사람에게 세금 징수권을 주었습니다. 이런 과정에서 얼마나 많은 비리가 개입되었을지는
뻔합니다. 세리를 향한 이스라엘 사람들의 원성도 커서, 세리와 죄인이 동의어로 사용될 지경이었습니다.
반면에 바리새인들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당시 이스라엘의 정신적 지주라 불리기에 손색이 없는 삶을
살았습니다. 그들은 대단히 서민적이고 개혁적인 사람들이었고, 특히 부활을 믿고 있다는 점에서 기독교인들과도 어느 정도 통하는 점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율법을 엄격하게 준수함으로써 하나님의 뜻을 실현해보려고 노력했고, 실제로 그들로 인해 유대인들은 신앙의
정체성과 정통성을 유지할 수 있었습니다. 삶의 내용에 있어서는 우리는 정말 그들 같아야 합니다.
그런데 이상합니다. 오늘 복음서에서 예수님은 바리새인을 비난하고 세리를 칭찬하셨습니다. 이 사실을 어떻게 봐야
할까요? 우리는 두 사람의 시선의 차이를 봐야 합니다. 세리의 시선은 정확하게 자기 존재의 중심인 ‘마음(심장, heart)’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자기 마음에 현존하시는 하나님께 그 시선이 고정되어 있는 것입니다.
바리새인의 기도가 밖을 향해 자랑을 늘어놓는 기도라면, 그의 기도는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은밀한 중에 계신
아버지 앞에서 눈물을 흘리는 기도입니다. 그는 지금 자신의 근본이며 원천이신 하나님을 부르면서 자기 기도의 핵심이신 하나님 현존에
도달하고 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현존 앞에서 자기 안의 거짓과 대면함으로서 겸손해지고 가난해지고 진실해진 자신이 되어가고
있습니다.
정말 놀라운 사실은 이것입니다. 그 삶이 타인보다 의로워 회개할 것이 없었던 바리새인의 기도가 훗날 신앙의
후손들에게 유산으로 물려지지 못하고, 그 삶이 타인보다 악해서 회개할 것이 많았던 세리의 기도가 훗날 신앙의 후손들에게 올바른
기도의 표본으로 물려지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가 뭐라고 기도했습니까?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눅
18:13).
지난 2천 년 간의 그리스도교 역사 속에서 우리 신앙의 선조들은 이 세리의 기도를 자신들이 해야 할 기도의
표준으로 삼고, 자신의 심장을 깊이 들여다보고, 하나님의 시선으로 자기 내면의 거짓들과 아프게 대면하며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오직 그 한 마디 언어로만 기도해 왔습니다.
살전 5:17절에 보면 사도 바울께서 “쉬지 말고 기도하라”고 당부합니다. 우리 신앙의 선조들은 어떻게 쉬지 않고
기도할 수 있을까를 고민하다가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했던 이 세리의 기도를 ‘마땅히 쉬지 말고 해야
할 기도’로서 우리에게 전승시켜주었습니다. 그렇게 기도한 사람들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약속은 이것입니다. “여호와는 마음이 상한
자를 가까이 하시고 충심으로 통회하는 자를 구원하시는도다”(시 34:18).
그래서 우리교회도 세리의 기도로부터 시작되고, 신앙의 선조들을 통해 전승된 기도의 모범을 따라 예배 때마다 “주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고 기도하는 것이고 우리 찬양대는 ‘키리에 엘레이손’을 불러주는 것입니다.
마틴 루터가 핵심적으로 전하려고 했던 주장 가운데 하나가 ‘솔라
피데(Sola Fide)’입니다. 솔라 피데는 ‘오직 믿음’이라는 뜻의 라틴어입니다. 루터가 보았을 때, 인간은 아무리 선한행위로
무장해도 온전하게 의로워질 수는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인간 안에는 선하게 살고자 하는 의지도 있지만 밤이면 피어나는 악한 욕망도
함께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그 사실은 이미 사도 바울이 로마서에서 지적한 바 있습니다. 그에 따르면 모든 사람이 죄의 지배 아래 놓여
있으며, 그래서 선한 일도 하지만 악한 죄도 짓는다는 것입니다. 바울이 그것을 분명하게 보았고, 루터 역시 그것을 강조했습니다.
바로 그런 면에서 주님은 자기의 의로움을 자랑하는 바리새인의 기도가, 감히 고개도 들지 못하고 구석에서 기도하는 세리의 기도보다
못하다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우리 내면에는 바리새인도 있고, 세리도 있습니다. 우리는 바리새인처럼 의롭게 살기도 하지만, 세리처럼 악하고
이기적이게 살기도 합니다. 그래서 바리새인처럼 교만한 기도도 하지만, 가끔씩은 세리처럼 자신을 낮추기도 합니다. 그렇게 우리
인생이 저물어 가는데,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마지막까지 겸손해야만 하는 이유를 찾는다면, 겸손은 하나님을 얻고 교만은 하나님을
잃기 때문입니다. 서신서에서 우리는 사도 바울의 의미 깊은 고백을 봅니다.
전제와 같이 내가 벌써 부어지고 나의 떠날 시각이 가까웠도다 나는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며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도니라 | 딤후 4:6-8
“나의 떠날 시각이 가까웠도다” 바울은 지금 자기 인생의 겨울을 인지하고 있습니다. 그 인생의 겨울 앞에서 바울의
시선은 의로우신 재판장에게 고정되어 있습니다. 의로우신 재판장 앞에서 바울에게 중요한 건, 선한 싸움을 싸웠다는 사실과, 달려갈
길을 마쳤다는 사실과, 믿음을 지켜냈다는 사실입니다. 여기에는 그 누구와의 비교도 없고 오로지 하나님께 재판 받을 자기만 있을
뿐입니다. 지금은 우리가 바리새인처럼 살기도 하고 세리처럼 살기도 하고, 바리새인처럼 기도하기도 하고 세리처럼 기도하기도 하지만,
궁극적으로 우리 시선은 재판장이신 하나님을 견고하게 향하고 있어야 합니다.
어느 새 가을이 익어, 겨울로 치달아 갑니다. 지난 주 목요일(23일)은 상강(霜降)이었고 기온도 뚝
떨어졌습니다. 밤에는 기온이 낮아져서 수증기가 지표에서 엉겨 서리가 되는 계절, 겨울이 다가오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과 비교하며
살아가는 것조차 다 무의미해 버린 시간이 도래하는데, 그래서 ‘죽음 앞에 선 자로서’ 바울이 절감하는 건 오로지 하나님의 뜻 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이어지는 말씀에서 바울은 자기가 체포되어서 처음 재판정에 섰을 때, 한 사람도 자기를 위해 변론하지 않고 모조리
도망쳤다고 말합니다(딤후 4:16). 그럼에도 바울은 그 사람들에게 허물을 돌리지 않습니다. 그 사람들과 자기를 비교해 우월감을
비치지도 않습니다. 그는 하나님만이 자기의 힘 되심(딤후 4:17a)과 모든 악한 일에서 건져내심(딤후 4:18)을 알고 있었고,
회개할 가능성이 있는 모든 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관심과 사랑도 알고 있었습니다. 그 하나님의 마음이 잘 스며들어 있는 것이 오늘
구약의 말씀입니다.
시온의 자녀들아 너희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로 말미암아 기뻐하며 즐거워할지어다 그가 너희를
위하여 비를 내리시되 이른 비를 너희에게 적당하게 주시리니 이른 비와 늦은 비가 예전과 같을 것이라 마당에는 밀이 가득하고 독에는
새 포도주와 기름이 넘치리로다 | 욜 2:23, 24
요엘 선지자가 깨달은 것이 있었습니다. 우리의 기쁨과 즐거움의 이유도 궁극적으로는 ‘여호와로 말미암아’ 가능하다는
것이었습니다. 내가 기쁨을 만들어내고, 내가 즐거움을 만들어내는 줄 알았는데, 그렇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때때로 악한
죄를 짓고, 그로 인해 상한 마음으로 살아가지만, 그럼에도 진정으로 하나님을 향해 돌아서서, “주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기도할 때, 하나님은 회개한 자녀들에게 계절을 따라 이른 비와 늦은 비를 내려주시는 것입니다. 그것만이 참되고 진정한 복입니다.
하나님을 향해 서는 사람이 복된 사람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우는 사람이 복된 사람입니다. 세리가 자신 안의 거짓과
대면함으로서 겸손해지고 가난해진 심정이 되어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고백했듯이, 우리 역시 하나님
앞에서 마음을 여미고, 나의 죄인 됨을 통절하게 고백함으로서 하나님의 은총으로 존재 전체가 다시 세워지기를 소망합니다.
■ 관상 | Contemplatio
관상은 ‘하나님을 보는 기도’입니다. 마음이 청결한 자는 하나님을 볼 것입니다.
■ 실천 | Exercitatio
① 시선을 타인에게 둔 채 자기 내면을 외면하고 살고 있지 않은가?
② 시선을 자기 마음에 두고 하나님께 진정한 회개로 나아가는가?
미주
(1) 장 라프랑스/이순희 역, 「마음의 기도」(성바오로 출판사), 5쪽. (2) 안토니 블룸/김승혜 역, 「기도의 체험」(가톨릭출판사), 56쪽. (3) 요한 클리마쿠스/최대형 역, 「거룩한 등정의 사다리」(은성) 221쪽.
나는 죄인이로소이다(누가복음 5:1-11)
언젠가 소개해드렸는데 서강대 교수를 역임했던 한동일 신부님이 ‘라틴어 수업’이라는 흥미로운 책을 펴냈습니다. 서강대에서
강의한 내용을 토대로 쓰셨는데 주로 로마에서 공부하면서 겪고 느꼈던 일들을 재밌게 소개해 주고 있습니다. 그중 아주 특이한 제목의
글이 있습니다. ‘로마인의 욕설.’
아마도 죄가 세상에 들어 온 후 처음 인간이 만든 것이 있다면 바로 욕설인 것 같습니다. 어느 문화에도 욕이 없는 문화는 없어 보입니다.
한 교수님은 로마에서 공부할 때 무척 고생을 많이 하신 것 같습니다. 그는 바티칸 변호사가 되었는데
바티칸 변호사가 되기 위해서는 3년간을 라틴어로 공부를 했어야 했습니다.
이렇게 정신 없이 공부하는 중 종종 어느 공원을 방문하곤 했다고 합니다. 근데 그 정원을 들어가는 문에는 한 걸인이 항상 서 있었습니다. 그는 낮이나 밤이나 늘 술취해 있었는데 신부님이 지나가면 늘 물었다고 합니다.
“너 일본 사람이니?”
아니라고 해도 볼 때마다 똑 같이 묻곤 하였다고 합니다. 어느 날은 참을수가 없었습니다. 욕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습니다. 다행히 갈등하다가 그 날도 그냥 지나갔습니다. 그 다음 날도 공부하다가 쉬려고 정원을 찾아 갔습니다. 당연히 똑같은 질문을 받았습니다.
“너 일본 사람이니?”
순간 입에서 뭔가 튀어 나왔습니다.
“Stultus es!” (멍청한 놈!) 싼뚜 에스 / 스툴투스 에스
라틴어 욕입니다. Stultus 에서 영어 stupid이 유래됩니다. 앞으로 stupid이란 말은 쓰지 마시고 정 쓰시고 싶으면 ‘stultus’를 쓰시기 바랍니다. 그런데 신부님의 다음 글이 더 재밌습니다.
“사실 저는 로마로 유학을 가기 전까지 욕이란 걸 하지 않았지만, 로마생활은 저에게 욕의 필요성을 일깨워주었습니다. 로마는
혼잣말로 욕이라도 하고 나면 마음이 한결 편해진다는 것을 깨닫게 해 준곳이었어요. 욕에 이런 순기능이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어떤 분들은 왜 거룩한 설교 시간에 욕에 대한 이야기를 먼저 하시나 궁금하신 분들이 계실줄 압니다. 사실 오늘 본문 말씀에
나오는 베드로의 모습을 생각하다 보니 욕하는 베드로의 모습이 떠올랐습니다. 1, 2절 말씀을 보면, 제가 왜 이런 생각을 하게
되었는지 금방 이해가 되실줄 압니다. 오늘 본문에는 예수님 말고 두 그룹의 사람들이 보입니다. 먼저 1절 말씀입니다.
“무리가 몰려와서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새 예수는 게네사렛 호숫가에 서서.”
예수님이 병자들을 고치고 여기 저기서 말씀을 전하신다는 소문을 듣고 무리가 몰려 왔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있었습니다. 그 때 예수님은 호숫가에 서 있으셨습니다. 자 얼마나 장관이겠습니까? 한 사람의 말씀을 듣기 위해 무리가 사방에서 몰려왔고
예수님은 호숫가에 간신히 서 있습니다. 그들의 모습에는 말씀을 경청하고자 하는 거룩한 모습이 엿보입니다. 한편 2절 말씀입니다.
“호숫가에 배 두 척이 있는 것을 보시니 어부들은 배에서 나와서 그물을 씻는지라.”
다른 그룹은 어부들입니다. 이들은 처음 무리들과는 꽤 대조적입니다. 아마 어부들도 소문으로는 예수님의 이야기를 들었을줄
압니다. 그런데 이들은 지척에 와 있는 소식을 접했지만 아랑곳 하지 않고 이 날도 생업을 위해 호숫가에 나왔습니다.
한 그룹은 말씀을 듣기 위해 나왔고, 한 그룹은 생업을 위해 나왔습니다. 생업을 위해 호숫가에 나온 어부들은 잠시 배에서 나와서 그물을 씻고 있었습니다. 이들은 어떤 마음으로 그물을 씻고 있었겠습니까?
고기를 많이 잡은 후 또 잡기 위해서 신나게 씻고 있었겠습니까? 이들은 밤새도록 그물을 던졌지만 한 마리도 건지지
못했습니다. 집에서는 가족들이 기다리고 있는데 빈 손으로 집에 들어 가자니 발이 움직여지지 않습니다. 그물을 씻으면서 오기만
남아서 고기를 몇 마리라도 잡고야 말리라 생각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입에서는 별로 좋지 않은 소리가 나옴직도 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무리가 몰려 옵니다. 한가한 사람들입니다. 한 청년의 소문을 듣고 몰려 오고 있었던 것입니다. 무리를 보면서 별 생각이 오고갔을 것입니다. ‘이들은 가족도 없나? 먹고 살 걱정이 없는 자들인가 보지?’
그런데 문제의 주인공 예수라는 청년이 자기들 배에 슬쩍 올라 탑니다. 그리고는 육지에서 조금 떼기를 청합니다. 좀 어처구니는
없었지만 기왕 쉬었다가 다시 나갈 생각이었으니…, 그리고 수많은 사람들이 몰려 온 것을 보면 그래도 좋은 구경거리인데 가장
가까이서 보게 되었으니, 청년이 요청한대로 합니다.
한참 말씀을 전하는데 귀에는 들어 오는 것이 없습니다. 계속 생계 걱정이 머리에 가득차 있으니…. 그런데 생각 보다는 끝나질
않습니다. 슬슬 입에서 또 다른 말들이 튀어 나오려고 합니다. ‘stultus’ 같은…. 다행이 청년 선생은 말씀을 마쳤습니다.
다시 물고기를 잡으러 나갈 마음을 먹고 있는데 젊은 선생이 말합니다. 4절 말씀입니다.
“말씀을 마치시고 시몬에게 이르시되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
여기서 시몬은 베드로입니다. 베드로는 청년 예수의 이 말을 듣고 어떠했을까요? 사실 그동안도 이해가 안 되는 말을 듣고
있었습니다. 물론 머리에 생계 걱정이 가득차서 이해가 안 되었을테지만, 이제 다시 고기 잡으려고 나가려고 하는데 도저히 이해가 안
되는 말을 또 합니다.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고 합니다.
아니 젊은 선생이 말씀은 권위가 있게 해도 고기 잡는 것을 자기에게 이래라 저래라 한다는 것은 가당치도 않습니다. 소문에
의하면 아버지에게 목수일을 배워서 가사일을 도왔다는 소문도 들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그런지 그의 모습에는 목수의 모습은 보여도
어부와는 너무도 거리가 멀어 보입니다.
그런데 감히 평생 고기를 잡아 온 자기에서 목수가 깊은데로 가서 그물을 내리라고 합니다. 제가 세탁소에 심방가서 ‘빨래는 이렇게 해야 합니다’ 말하는 것과 똑 같습니다.
그런데 아마 두 가지 생각이 났을 것입니다. ‘밤새껏 해도 안 되었는데 한 번 더 실패하면 어떠냐’, 또 하나는 ‘그래도 이처럼 수많은 사람이 따르는 신통한 사람이니 한 번 순종하면 어떠냐’.
그렇지 않습니까? 세탁소에 하루 종일 손님이 없었는데 제가 가서 뭐라고 말씀드리면 밑져야 본전으로 따라 하시지 않겠습니까? 속으로는 비웃으면서…. 물론 지혜로우신 분이라면 안 따라 하셔야겠지요. 5절 말씀입니다.
“시몬이 대답하여 이르되 선생님 우리들이 밤이 새도록 수고하였으되 잡은 것이 없지마는 말씀에 의지하여 내가 그물을 내리리이다 하고.”
베드로는 청년 선생의 말씀에 의지하여 그물을 내립니다.
“말씀에 의지하여….”
베드로가 이렇게 표현한 저의가 있습니다. 도저히 이해가 안 되는 짓을 자기가 하고 있다고 불평쪼로 말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젊잖은 욕이라고나 할까요? 6절 말씀입니다.
“그렇게 하니 고기를 잡은 것이 심히 많아 그물이 찢어지는지라.” 이에 베드로는 어떻게 반응할까요? 7절 말씀입니다.
“시몬 베드로가 이를 보고 예수의 무릎 아래에 엎드려 이르되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니.”
베드로는 놀랍니다. 놀라 예수 앞에 무릎을 꿇습니다. 그리고 고백합니다.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베드로가 왜 놀랐겠습니까? 이해가 안 되는 일이 벌어졌으니 놀란 것입니다. 이해되고 기대되어진 일이 일어나면 놀랄리가 없습니다.
그런데 베드로만 놀란 게 아닙니다. 같이 있는 많은 사람들이 놀랐습니다. 9절 말씀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이는 자기 및 자기와 함께 있는 모든 사람이 고기 잡힌 것으로 말미암아 놀라고.”
모두 놀랐습니다. 모두에게 도저히 이해가 안 되는 일이 벌어졌기에 놀란 것입니다.
그런데 베드로만 유독 놀라운 고백을 합니다.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모두 똑 같은 것을 보았는데 왜 유독 베드로만 이런 고백을 할까요?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사실 이 때만 해도 베드로는 성령을 받지 않아서 죄에 대한 정의도 잘 몰랐던 때입니다. 단지 베드로는 도저히 이해가 안 되는 일은 하였습니다. 불평어린 마음으로…. 그런데 놀라운 일을 보았습니다.
이에 그는 감동합니다. 도저히 자기와는 같이 있을수 없는 분임을 느낍니다. 그래서 떠나 달라고 요청한 것입니다. 떠나 달라는
것을 강하게 표현하기 위해서 자기는 죄인임을 고백한 것입니다. 당신과 같은 분과 함께 할수 없는 죄인임을….
이 모든 것의 시작은 바로 놀람으로 그친 것이 아니라 감동받았기 때문입니다. 베드로는 감동 받음의 최고의 고백을 한 것입니다.
이처럼 감동하는 베드로에게 주님은 어떻게 반응하시나요? 10절 말씀입니다.
“예수께서 시몬에게 이르시되 무서워하지 말라 이제 후로는 네가 사람을 취하리라 하시니.”
예수님은 모두에게 이 말씀을 하시는게 아닙니다. 감동받은 베드로에게만 합니다. 사람을 취하는 어부가 되게 하시겠다고 약속합니다. 왜 베드로에게만 이 말씀을 하시죠?
감동받은 자들만 올인을 할수 있음을 잘 아셨습니다. 주님은 입이 거칠고 순하고가 당신의 제자가 되는 첫 조건이 아니었습니다.
감동할줄 아느냐가 첫 조건이었습니다. 감동하는 자들만 올인을 할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랬더니…, 11절 말씀입니다.
“그들이 배들을 육지에 대고 모든 것을 버려 두고 예수를 따르니라.”
말씀은 감동받은 베드로에게만 했지만, 함께 놀랐던 다른 친구들도 따라 옵니다. 아마도 예수님을 따르면 놀라운 일들이 또 많이
생겨 날 것을 기대했는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자기들도 언젠가 놀라운 일을 보고 또 보면 베드로와 같은 고백을 하게 될지
생각했을지도 모릅니다.
하여튼 이렇게 해서 예수님은 당신의 수제자를 부르셨고 더불어 두 명의 제자까지 얻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모든 것의 시작은 어떻게 되었다고요? 베드로와 어부들은 처음부터 예수를 따른 자들이 아닙니다. 많은 사람들은 주님께로 몰려 오는데 이들은 자기 생업을 먼저 생각했던 자들입니다.
아울러 그 날도 고기가 안 잡혀서 낙심하고 한편으로는 불평 내지 몰려 오는 무리를 보고 욕도 했을지 모릅니다. 그런데 목수의
전직을 가졌던 선생의 말에 이해는 안 되지만 마지 못해 순종합니다. 놀라운 일을 보게 되었습니다. 이에 감동합니다.
서강대 교수였던 장영희 교수가 어느 날 잡지에서 치매 예방법에 대한 글을 유심히 보았다고 합니다.
‘하루 두 시간 이상씩 책을 읽는다.’ ‘의도적으로 왼손과 왼발을 많이 쓴다.’ ‘많이 웃는다.’ ‘오랫 동안 혼자만 있는
시간을 피한다,’ ‘일회용 컵이나 접시를 쓰지 않는다’, ‘가능하면 자주 자연을 접한다,’ 등등 상식적인 예방법이었습니다, 그런데
마지막으로 재미있는 것이 눈에 띄었습니다.
‘감동을 많이 하라.’
베드로는 전설에 의하면 십자가에 거꾸러 매달려 순교했는데, 제 명을 다 살았어도 분명히 치매는 걸리지 않았을줄 압니다.
예수님은 제 발로 자기를 따라 오는 자들 가운데서 당신의 수제자를 택하시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당신의 말씀을 이해를 잘 못
하는 자들을 내치지 않으셨습니다. 반면 이해가 안 되는 일을 말도 안 되는 일을 하는 자를 좋아하셨습니다. 게다가 쉽게 감동받는
자를 좋아하셨습니다. 툭하면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니이다’ 입버릇 처럼 고백하는 자를 택하셨습니다.
감동받은 베드로는 쉽게 올인할 것을 주님은 아셨습니다. 그래서 놀라운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네가 사람을 취하리라.”
이는 더 놀라운 일들을 약속하시고 계신 것입니다. 더 이상 물고기를 취하는 사람이 아니라 사람을 취하는 자가 될 것을 약속하시는 것입니다.
요한복음에 보면 예수님이 부활하신 후 베드로와 친구들이 다시 물고기를 잡으러 나갔습니다. 밤새 일했으나 하나도 잡지 못
했습니다. 주님께서 나타나셔서 그물을 배 오른편에 던지라 말씀하십니다. 그 때도 그물이 찢어질 정도로 고기가 잡혔는데 큰 물고기
백쉰세 마리가 잡혔습니다.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그런데 후에 성령을 받고 베드로가 설교를 하니 단 번에 3000 명이 주님을 믿는 역사가 벌어집니다. 이것이 바로 사람을 취하는 놀라운 기적이 아니었겠습니까?
물고기 백쉰세 마리도 많지만, 한번 설교에 3000명! 이 놀라운 기적을 주님께서 감동의 사람 베드로에게 약속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이 모든 것의 시작이 무엇이라구요? 말이 없고 젊잖은 자들을 통해서…? 그렇지 않습니다. 입은 거칠지라도 이해가 안 되는 일도 순종하는 자들에게 주어집니다. 쉽게 감동하는 자들에게 주어집니다. 올인하는 자들에게 보여집니다.
지난 주일에는 제직 임직식을 거행했습니다. 서약 중에 다음과 같은 글이 나옵니다.
“당신은 사람들을 위해 기도하고 온 정성과 지혜와 상상력과 사랑으로 섬기기를 힘쓰겠습니까?
‘상상력’이란 표현이 들어가 있습니다. 상상력은 바로 이해가 안 되는 일에도 놀라운 세계가 펼쳐질 것을 상상하는 것을 뜻한다고 봅니다.
저희 교회가 작년 65주년을 맞이하여서 이웃 초청 한국 문화 축제를 열었습니다. 성대한 축제였습니다.
정확히 16년전에 첫번째 한국 문화 축제를 열었었습니다. 평가회에서 귀한 고백을 들었습니다. 한 교우님께서는 도저히 이런
축제를 왜 하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러나 교회에서 결정한 것이니 속으로는 의심이 많았어도 끝까지 도왔다고 합니다. 다
마치고 난 후 Brookline 학교 뿐 아니라 주위 분들로 부터 많은 좋은 평가를 받고는 당신의 마음이 바뀌었다고 고백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후에 집사회장이 되어서 축제를 책임지기도 하셨습니다. 끝내 축제에 올인 하신 것입니다.
교우 여러분,
순종이란 이해가 안 되는 일을 따라 하는 것입니다. 이해가 안 되는 일을 했기에 놀라게 됩니다. 놀란 사람들만이 감동하게 됩니다. 감동의 사람들만이 올인하게 됩니다. 이런 사람들을 주님은 부르십니다.
사실 주님도 평생 이해가 안 되시는 길을 가셨습니다. 십자가의 길을 가셨습니다. 결국 놀라운 사건의 주인공이 되신 것입니다.
교우 여러분,
올해도 때로는 이해가 안 되는 일들이 주어질 때가 있습니다. 아니 1년 내내 이해가 안 되는 일들이 주변에 항상 있을줄
압니다. 아니 그래야 됩니다. 그래야 우리는 계속 놀라운 일을 체험하게 되고 우리는 항상 감동의 사람이 됩니다. 치매도 안
걸리구요…!
그러니 이해가 안 되는 일로 감사하십시다. 감사하는 마음으로 그 때마다 상상의 날개를 펴 보시기 바랍니다. 지금은 이해는 안 되어도…. 놀라운 일이 생기질 않을까요? 감동의 마음을 가지고 ‘여호와 닛시’를 외치십시다.
물론 이 고백도 잊지 마십시다.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Mary Hartman시인의 ‘삶은 작은 것들로 이루어졌네’라는 시입니다.
삶은 작은 것들로 이루어졌네 위대한 희생이나 의무가 아니라 미소와 위로의 말 한마디가 우리 삶을 아름다움으로 채우네. 간혹 가슴앓이가 오고 가지만 다른 얼굴을 한 축복일 뿐 시간이 책장을 넘기면 위대한 놀라움을 보여주리.
Life’s made up of little things,
no great sacrifice or duty,
but smiles and many a cheerful word
fill up our lives with beauty.
The heartaches, as they come and go,
are but blessings in disguises,
for time will turn the pages o’er
and show us great surprises.
우리들의 삶은 이해할수 없는 작은 것들로 이루어졌습니다. 교회 일은 더욱 그렇구요. 그러나 시간이 책장을 넘기면 위대한 놀라움을 보게 될줄 압니다.
이해할수 없는 일로 인해 거친 말을 하는 대신 순종의 덕을 쌓아 가십시다. 놀라운 일을 보게 될 것입니다. 감동케 될 것입니다.
이와 같은 우리에게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이제 후로는 네가 사람을 취하리라.”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 세리의 회개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옵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눅 18:9~14)
바리새인이
세리와 비교하면서 했던 말은, 나는 십일조를 드렸고 금식을 했으며 저 사람과 같지 않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는 믿음이 아니다.
믿음은 곧 마음 깊은 곳에 자리잡고 있는 의로움을 말한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받아주시는 은밀한 곳에서 행하여지는 선행과 헌신과
기도를 말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인정하시지 않으면 소용이 없다. 그러므로 스스로 자랑하던 바리새인은 의롭다 함을 얻지 못한 것은
당연하다.
세리는
거룩한 하나님을 아는 동시에, 하나님은 죄인을 사랑하시며 자비와 긍휼을 베푸시는 분이라는 것도 느꼈다. 그래서 하나님은 나를
용서하시고 치료하시며, 나를 새롭게 할 수 있는 분이심도 알고 있었다. 이로써 오직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의지하고 바라보면서
자비와 긍휼을 베풀어 달라고 간절히 기도할 수 있는 것이다. 바로 이 세리의 기도가 하나님 앞에 상달되는 기도의 비결이 될 수 있음을 알게 된다.
이에
반해 바리새인은 사람들에게 보이려고 서서 기도하고, 주위 사람들이 들을 수 있도록 소리를 내서 자기의 의를 자랑하기 바빴다.
그의 기도는 하나님이 아닌, 사람이 듣게끔 한 기도였다. 그러나 세리는 오직 하나님께 자기 죄를 고백하고, 하나님의 용서와 자비를
구했다. 하나님 앞에서 기도하는 사람은 솔직하며 겸손한 자세로 기도해야 하는 것이다. 기도의 자세가 바를 때 응답이 오는 것임을 잊지 말자. 기도하는 사람은 가장 낮은 자리에 임하여 진실된 마음으로 하나님께 기도를 드려야 응답을 받는 것이다.
(요 4:24)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영과 진리로 예배할지니라
회개란 무엇인가?
구원을 받기 위한 첫 단계는 회개이다. 믿음의 결과가회개이다. 회개는 마음에 감동을 받아 하나님에 대한 반성을 고백하고, 하나님을 모르고 살아온 것과 하나님의 뜻에 반하여 살아온 것에 대한 뉘우침이다. 그래서 회개는 이제부터 하나님의 뜻을 찾아 새로운 삶을 살겠다는 선언이 됨으로써 하나님 없는 삶을 포기하는 것이다. 즉회개는 그 동안 하나님 없이 살아온 삶에 대한 두려움인 동시에, 나를 향하신 하나님의 마음을 알고픈 영적인 갈망을 말한다.
(겔 18:30~32) 나 주 여호와가 말하노라 이스라엘 족속아 내가 너희 각 사람의 행한 대로 국문할지라 너희는 돌이켜 회개하고 모든 죄에서 떠날지어다 그리한즉 죄악이 너희를 패망케 아니하리라 너희는 범한 모든 죄악을 버리고 마음과 영을 새롭게 할지어다 이스라엘 족속아 너희가 어찌하여 죽고자 하느냐 나 주 여호와가 말하노라 죽는 자의 죽는 것은 내가 기뻐하지 아니하노니 너희는 스스로 돌이키고 살지니라
그런 의미에서 회개는 천국에 가는 열쇠라고 할 수 있다. 날마다 생각나고 일어나는 죄를 회개하고, 내가 죄인중의 괴수라는 것을 가슴 아파하면서, 자신의 죄인 됨을 주님 앞에 통회, 자복하면 모든 죄를 다 사함 받게 되는 것이다.
(시 51:5) 내가 죄악 중에 출생하였음이여 모친이 죄 중에 나를 잉태하였나이다
(딤전 1;15)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
(요일 1:9)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케 하실 것이요
그러므로 진정한 회개는 세리와 같이 고개를 들지 못하고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다윗과 같이 ‘나는 어머니 뱃속에서부터 죄인이었습니다’라고 하면서 자신이 전적인 죄인이라는 것을 주님 앞에 고백하고, 주님의 십자가를 부여잡고 눈물로 자복하는 것이다.‘진실로
죄인입니다’하는 통회의 기도이다. 누구에 대한 원망이나 누구를 탓함도 없다. 오직‘하나님이여, 내가 죄인이로소이다’하는 것이
회개이다. 오직 '내가 죄를 지었습니다. 나의 잘못입니다' 라고 자백하는 것이 진정한 회개이다.
하나님께 내세울 것도 없고 변명할 말도 없다. 오직 하나님께 불쌍히 여겨달라고 하거나 긍휼을 기대하는 자세이다. 그저 불쌍히 여기고 처분대로 맡기겠다는 마음이다. 모든
것은 다 십자가의 은혜이고 나에게는 선한 것이 없기 때문에, 주님의 보혈로만 의롭게 될 수 있는 것이다. ‘주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십자가에 달리신 주님께서는 죄를 뉘우치고 회개하는 강도의 진심 어린 그 마음의 중심을 보시고 그의
죄를 사하시고 낙원을 허락하셨던 것이다.
(마4:17)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
(막 1: 15) 가라사대 때가 찼고 하나님 나라가 가까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하시더라.
(눅 13:3)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니라 너희도 만일 회개치 아니하면 다 이와 같이 망하리라.
(눅 15:10)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와 같이 죄인 한 사람이 회개하면 하나님의 사자들 앞에 기쁨이 되느니라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옵소서
(눅 18:13) 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쳐다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이르되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였느니라
당시에 세리들은
죄인 가운데 대표적인 죄인이었다. 그들은 자신이 죄를 지었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과 함께 있지를 못했다. 세리들은 기도를 하는
동안 그들에게 쏟아지는 멸시와 경멸의 눈초리조차 견디기 어려웠다. 아마도 그들이 기도한 곳은 성전 밖에 있던 이방인의 뜰, 한
구석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하나님의 거룩한 처소인 성전에 가까이 가는 것조차 고통스럽게 느꼈던 것 같다. 즉 그들은 스스로
큰 죄인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일반 경배자들과 같이 기도할 수 없었다. 이로써 그들은 다른 사람들이 하는 것처럼 하늘을 감히
우러러 볼 수도 없었다.
그래서
세리는 멀리 서서 하늘을 바라보지도 못하고, 자기 가슴을 치면서 기도했다. 당시에 가슴을 치는 것은, 대부분 여인들이 견딜 수
없는 극한 분노를 느낄 때나 고통스러울 때에 나타나는 행동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흔히 볼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아마도 그가
가슴을 친 것은 자기 죄를 통회하며 한탄했기 때문이었으리라. 그는 견디기 힘든 괴로움을 느껴 가슴을 치면서 진심으로 회개하면서
기도를 드렸던 것 같다.
(약 4:10) 주 앞에서 낮추라 그리하면 주께서 너희를 높이시리라
세리는 자기의 부족함과 자기의 연약함을 느끼고, 자신의 죄인 됨을 발견했다. 그는 자신이 죄인이라고 느꼈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서 상한 심령으로 겸손히 엎드린 것이다. '불쌍히 여겨 달라'고
간구한 것이었다. 그는 자기 죄를 뉘우치면서 하나님께 그 죄를 덮어달라는 간절한 용서를 구하였다. 자기의 모습 그대로를 주님
앞에 내려놓았다. 자기가 죄인임을 인정하고 하나님의 긍휼을 구하고 있었다. 그의 기도는 자기의 의에 근거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비에 근거를 두고 있었기 때문이다.
(눅 18:14)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사람이 저보다 의롭다 하심을 받고 집에 내려 갔느니라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하시니라
주님은 세리가 바리새인보다 더 의롭다는 인정을 받았다고 말씀하셨다. 곧 구원을 받는 참된 자세에 대해 설명하고 계셨다. 곧 의롭다 하심을 받았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진다고 하셨다. 하나님은 자기를 의롭다고 생각하고 자기를
높이는 자를 낮추신다. 그러나 자기의 연약함을 고백하고 긍휼을 구하는 자를 높여주신다. 인간을 높이고 낮추는 일은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이다.
(롬 9:21) 토기장이가 진흙 한 덩이로 하나는 귀히 쓸 그릇을 하나는 천히 쓸 그릇을 만들 권한이 없느냐
그러나
바리새인은 하나님의 자비를 구하지 않고, 자기의 공로를 자랑했다. 그 모습은 계속적으로 오만한 태도를 취하는, 자기의 추악함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의 형태인 것이다. 그 결과 그는 하나님께 의롭다 함을 받지 못했다. 이에 반해 세리는 자기의 죄를 인정하고,
하나님의 자비를 의지하고 용서를 구했다. 그 결과로써 하나님은 그를 자기의 의로 덮어 주시고, 의롭다고 인정해 주셨다.
죄악이 너희와 너희 하나님 사이를 내었고
하나님이
지으신 최초의 인간은 하나님과의 연결이 막힌 곳이 없었다. 그러나 죄는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담을 만들어 버렸다. 관계를
단절되게 만든 장벽은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모든 축복을 막아 버렸다. 죄는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 단절을 말한다. 이때 회개는 문제를 해결해 준다. 십자가의 보혈을 의지하면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된다.
(사 59:2) 오직 너희 죄악이 너희와 너희 하나님 사이를 내었고 너희 죄가 그 얼굴을 가리워서 너희를 듣지 않으시게 함이니
인간은
죄를 짓는 순간부터 죄의 종이 된다. 그래서 마귀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어떻게 해서든지 범죄하도록 유혹하기 때문에, 우리는
이것을 경계해야 한다. 잘못된 것에 대해 미련을 갖는 사람은 하나님의 응답과 축복을 받을 수 없다. 죄는 하나님이 보시기에 가증한
것이다. 온전한 하나님의 백성은 모든 가증한 것으로부터 떠나라고 말씀하신다.
(요
8:44)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 너희 아비의 욕심을 너희도 행하고자 하느니라 저는 처음부터 살인한 자 요 진리가 그
속에 없으므로 진리에 서지 못하고 거짓을 말할 때마다 제 것으로 말하나니 이는 저가 거짓말장이요 거짓의 아비가 되었음이니라
(겔 14:6) 그런즉 너는 이스라엘 족속에게 이르기를 주 여호와의 말씀에 너희는 마음을 돌이켜 우상을 떠나고 얼굴을 돌이켜 모든 가증한 것을떠나라
복음에 의해 죄 용서를 받게 되는 것임을 알리는 것은, 죄인들이
죄의 멍에와 타락으로부터 나옴으로써 하나님 나라로 갈 수 있게 하려는 것이다. 따라서 복음의 은혜를 받아들인 사람은 반드시 과거
생활을 청산함으로써, 자기의 과오를 버리고 지난 날의 잘못에 대한 회개를 실천하기 위해 바른 길로 돌아서기 위해 모든 노력을
다하게 된다. 따라서 회개와 죄의 용서는 복음의 전제라고 할 수 있다.
(눅 24:47) 또 그의 이름으로 죄 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가 예루살렘에서 시작하여 모든 족속에게 전파될 것이 기록되었으니
십자가 앞에 나아가 자신의 죄악된 모습을 돌아보면서 뉘우치고 회개하고 자복하는 사람은, 지금까지 지은 모든 죄를 깨끗이 씻음을 받게 된다. 따라서 십자가의 보혈은 반드시나의 회개가 전제 되어야만 그 효력을 발휘할 수가 있는 것이다. 즉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반드시 회개가 동반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 결과 진실로 회개하는 자는 성령의 열매를 맺게 됨으로써 예수님을 닮아가게 된다.
그러한 십자가의 보혈이 나의 것이 되려면 날마다 회개를 통해 그 보혈의 의미를 되새겨야 한다. 왜냐하면 우리는 날마다 죄를
짓기 때문이다. 세수를 매일 하는 것처럼, 죄 또한 날마다 회개해야 새로운 피조물로 거듭나는 것이다. 이 땅에서의 삶을 다하는 그
순간까지 주의 은혜를 구하면서 십자가를 부여잡고 죄를 회개하면서 씻어내야 한다.
그러므로 믿음이란 나의 의로 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의를 얻는 것이다. 내 자신이 아무리 노력해도 내 자신의 능력으로는 지옥에 갈 수밖에 없다는 것을 느낌으로써, 참된 회개의 과정을 겪은 후에 주님께
돌아가야 한다. 그것을 알게 되고 예수님께로 나아갈 수 있는 것도 하나님의 은혜인 것을 깨달아야 한다.
마태복음 11:28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예수님이 ‘마태’라는 세관원의 집에서 세리, 죄인들과 식사를 함께 하신다. 그런데 바리새인들은 이 모습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을 향해 말씀하신다.
마태복음 9:12 예수께서 들으시고 이르시되 건강한 자에게는 의원이 쓸데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데 있느니라.
육신이
건강하면 병원에 갈 필요가 없지만, 영혼의 병은 누구에게 치료를 받을 수 있을까? 율법을 중시하는 바리새인들은 자신들이 자칭
의로운 자요 건강한 자들이므로 예수님이 필요하지 않았지만, 오히려 세리들과 죄인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따랐다.
마태복음 9:13 너희는 가서 내가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노라 하신 뜻이 무엇인지 배우라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시니라.
율법이
바리새인들에게는 이방인들과 세리와 죄인들과 같은 자들을 죄인으로 분별하여 알아 왔으나, 하나님께서는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않으심을 알아야 한다. 하나님의 긍휼은 죄 가운데 있는 우리들을 불쌍히 여기심이다. 그런데 하나님 앞에 예배 드리는 것으로 할
일을 다했다는 듯, 오히려 자만하는 모습은 안타깝기만 할 뿐이다.
그런데 누가 건강한 자일까? 마음이 건강하고 깨끗한 자는 빛 되신 예수를 믿고, 우리도 빛 가운데서 순종함으로써 십자가의 도 안에서 함께하는 사람이다. 자신의 죄를 자백하고 주님 앞에 자신의 잘못된 것들을 고침 받으면서 긍휼함을 입기를 바라는 사람이다.(요일 1:7) 저가 빛 가운데 계신 것같이 우리도 빛 가운데 행하면 우리가 서로 사귐이 있고 그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게 하실 것이요
요한일서 1:9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케 하실 것이요.
그러면 병든 자는 누구일까? 이 세상의 모든 사람은 첫 사람 아담으로 말미암아 태어나기 때문에 율법의 죄와 사망에서 벗어날 수 없다. 그래서 독생자 예수를 이 땅에 보내 셔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여 모든 생을 속량하신 것이 하나님의 사랑인 것이다.
갈라디아서 4:5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을 속량하시고 우리로 아들의 명분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로마서 5:8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요한일서 1:8 만일 우리가 죄 없다 하면 스스로 속이고 또 진리가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할 것이요
요한일서 1:10 만일 우리가 범죄하지 아니하였다 하면 하나님을 거짓말 하는 자로 만드는 것이니 또한 그의 말씀이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하니라.
율법
아래에서 의인이 되어 있는 자들을 부르시지 않고, 율법 아래에서 죄인으로 있는 자신을 고백하고 고침 받기를 원한다면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옵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할 수 있어야 한다. 그래야 하나님께서는 죄인과 같은 나를 불러 고쳐주시고, 거룩함을
입혀 주셔서 건강한 자가 될 수 있을 것이다.
마태복음 13:15 이 백성들의 마음이 완악하여져서 그 귀는 듣기에 둔하고 눈은 감았으니 이는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달아 돌이켜 내게 고침을 받을까 두려워함이라 하였느니라.
육신의 병이 아니라, 마음에 병든 자신을 자백하여 고침 받는 자가 되자.
11월 12일(수) 누가복음 14-16장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모세와 선지자(16:29)
아브라함이 가로되 저희에게 모세와 선지자들이 있으니 그들에게 들을찌니라. "Abraham replied, 'They have Moses and the Prophets; let them listen to them.
'모세와 선지자'는
구약성경에 등장하는 모세와 그 후로 이어진 다른 선지자들을 지칭하거나, 신명기 18장 15절에 기반하여 '모세와 같은 선지자'로서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기독교적 의미로 사용됩니다.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을 이끈 위대한 선지자이자 율법 수여자였으며, 후대의 예레미야, 호세아 등 많은 선지자들은 각 시대에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습니다. 기독교에서는 예수님이 바로 모세가 예언한 '모세와 같은 선지자'라고 믿고 있습니다.
모세와 선지자
모세 : 이스라엘 민족을 이집트 노예 생활에서 해방시킨 구약의 위대한 선지자이자 율법 수여자입니다.
다른 선지자들 : 모세 이후 예언 활동을 한 예레미야, 호세아 등 성경에 기록된 많은 선지자들을 포함합니다.
'모세와 같은 선지자' : 신명기 18장 15절에서 모세가 예언한 대로, 하나님께서 자신과 같은 선지자를 일으킬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기독교적 해석 : 예수님은 바로 이 '모세와 같은 선지자'로, 그분의 말씀을 듣고 순종해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두 사람의 공통점
모세와 예수님은 모두 이스라엘 민족을 구원하기 위해, 악한 왕의 위협 속에서 기적적으로 구출된 공통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둘 다 기적을 행하고 피의 언약을 세워 많은 사람을 구원하는 데 헌신했습니다.
높은 지위를 버리고 겸손한 삶을 살았으며, 유대인들에게 거부당하고 가족들의 비난을 받기도 했습니다.
자신의 백성의 죄를 대속하기 위해 생명을 기꺼이 희생했습니다.
성경 역사 시대별 요약, 시대별 흐름을 이해하면 성경 전체를 더 깊이 있게 볼 수 있다.
생각을보는지혜
7–9 minutes
1️⃣ 태초와 족장 시대 (창조 ~ 약 1800 BC)
📌 성경
책: 창세기 1~50장 📌 핵심 사건: ✅ 창조(천지 창조, 아담과 하와, 에덴동산) ✅ 타락과 노아의 홍수 (죄로 인해 인간이 타락, 하나님이 홍수로 심판) ✅ 바벨탑 사건 (언어가 혼잡해지고 사람들이 흩어짐) ✅ 아브라함, 이삭, 야곱 (이스라엘 민족의 조상들) ✅ 요셉 이야기 (애굽으로 이주, 히브리인들이 번성)
2️⃣ 출애굽과 광야 시대 (약 1800 BC ~ 1400 BC)
📌 성경 책: 출애굽기,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 📌 핵심 사건: ✅ 이스라엘 민족이 애굽에서 노예 생활 ✅ 모세의 출애굽 (홍해를 건넘, 십계명 받음) ✅ 40년 광야 생활 (가나안 입성을 준비) ✅ 여호수아 지도 아래 가나안 정복 시작
3️⃣ 사사 시대 (약 1400 BC ~ 1050 BC)
📌 성경 책: 여호수아, 사사기, 룻기 📌 핵심 사건: ✅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 정착 ✅ 왕이 없는 시기, 하나님이 사사를 세우심 (기드온, 삼손 등) ✅ 이스라엘 백성이 반복적으로 타락 → 심판 → 회개 → 회복
4️⃣ 통일 왕국 시대 (약 1050 BC ~ 930 BC)
📌 성경 책: 사무엘상·하, 열왕기상 1~11장, 역대상·하 📌 핵심 사건: ✅ 사울 왕 즉위 (이스라엘 첫 번째 왕) ✅ 다윗 왕의 통치 (예루살렘을 수도로 삼음, 메시아 계보의 조상) ✅ 솔로몬 왕 (성전 건축, 이스라엘 최전성기)
5️⃣ 분열 왕국 시대 (약 930 BC ~ 722 BC, 남유다 586 BC까지)
📌 성경 책: 열왕기상 12~22장, 열왕기하, 역대하, 선지서(이사야, 예레미야 등) 📌 핵심 사건: ✅ 솔로몬 이후 나라가 북이스라엘(사마리아)과 남유다(예루살렘)로 분열 ✅ 북이스라엘(10지파)과 남유다(2지파) 왕국으로 나뉨 ✅ 우상 숭배로 인해 선지자들(엘리야, 엘리사, 이사야 등)이 경고 ✅ 722 BC: 북이스라엘이 앗수르에 의해 멸망 ✅ 586 BC: 남유다가 바벨론에 의해 멸망 (성전 파괴, 바벨론 포로 생활 시작)
6️⃣ 바벨론 포로 시대 (약 586 BC ~ 538 BC)
📌 성경 책: 예레미야, 다니엘, 에스겔 📌 핵심 사건: ✅ 이스라엘 백성이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감 ✅ 다니엘과 세 친구(느부갓네살 왕의 통치 속에서도 신앙 지킴) ✅ 바사(페르시아) 왕 고레스가 유대인 해방 선포
7️⃣ 귀환과 성전 재건 시대 (약 538 BC ~ 400 BC)
📌 성경 책: 에스라, 느헤미야, 학개, 스가랴, 말라기 📌 핵심 사건: ✅ 바사 제국의 허락으로 유대인 귀환 시작 ✅ 성전 재건 (스룹바벨 성전) ✅ 느헤미야가 예루살렘 성벽을 재건 ✅ 말라기 이후 400년간 선지자 활동 없음 (신구약 중간기 시작)
8️⃣ 신구약 중간기 (약 400 BC ~ 예수 탄생, 4 BC)
📌 핵심 사건: ✅ 헬레니즘 문화 확산 (알렉산더 대왕 정복 이후 그리스 문화 영향) ✅ 마카비 혁명 (이스라엘 독립운동, 한때 하스모니아 왕조 수립) ✅ 로마 제국이 등장하고 팔레스타인을 지배
9️⃣ 예수 그리스도의 시대 (약 4 BC ~ 30 AD)
📌 성경 책: 마태복음, 마가복음, 누가복음, 요한복음 📌 핵심 사건: ✅ 예수 그리스도 탄생 (메시아의 도래) ✅ 공생애 (가르침, 기적, 제자 훈련) ✅ 십자가 죽음과 부활 (인류 구원의 완성) ✅ 승천과 성령 강림(오순절, 교회의 시작)
🔟 초대교회와 복음 전파 (30 AD ~ 100 AD)
📌 성경 책: 사도행전, 바울 서신, 요한계시록 📌 핵심 사건: ✅ 사도들의 복음 전파 (예루살렘 → 로마로 확장) ✅ 사도 바울의 선교 여행 (유럽과 아시아 전역에 복음 전파) ✅ 초대교회 박해 (로마 제국의 기독교 박해 시작) ✅ 요한계시록 기록 (종말 예언과 하나님의 나라 완성)
📌 성경 역사 시대별 요약
시대연대(B.C. / A.D.)주요 사건
태초~족장 시대
창조 ~ 1800 BC
아담, 노아, 아브라함, 요셉
출애굽과 광야
1800 ~ 1400 BC
모세의 인도, 출애굽, 십계명
사사 시대
1400 ~ 1050 BC
여호수아 가나안 정복, 사사들 활동
통일 왕국
1050 ~ 930 BC
사울, 다윗, 솔로몬 통치
분열 왕국
930 ~ 586 BC
북이스라엘(722 BC 멸망), 남유다(586 BC 멸망)
바벨론 포로
586 ~ 538 BC
예루살렘 성전 파괴, 포로 생활
귀환과 재건
538 ~ 400 BC
성전과 성벽 재건
신구약 중간기
400 ~ 4 BC
그리스, 로마 지배
예수 그리스도 시대
4 BC ~ 30 AD
예수의 탄생, 사역, 십자가 사건
초대교회 시대
30 ~ 100 AD
복음 확산, 사도행전, 교회 설립
결론 : 성경의 역사는 하나님이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한 과정을 보여줍니다. 시대별 흐름을 이해하면 성경 전체를 더 깊이 있게 볼 수 있어요.
모세와 엘리야가 오리라
오늘 아침 일찍 눈을 떴을 때 갑자기 제
마음에 성령님께서 짧지만 분명하게 두 가지를 말씀하시는 걸 느꼈습니다. 첫 번째 말씀은 “모세와 엘리야가 올 것이다”였고, 두
번째는 첫 번째와 연결되면서 그것을 명확히 해주는 말인, “도덕적 대립”이었습니다.
타나크의 “마지막 예언”인 말라기 4장 4~6절을 묵상하고 있었습니다.
너희는 내가 호렙에서 온 이스라엘을 위하여 내 종 모세에게 명한 법 곧 율례와 법도를 기억하라.
보라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이 이르기 전에 내가 선지 엘리야를 너희에게 보내리니. 그가 아비의 마음을 자녀에게로 돌이키게 하고 자녀들의 마음을 그들의 아비에게로 돌이키게 하리라 돌이키지 아니하면 두렵건대 내가 와서 저주로 그 땅을 칠까 하노라 하시니라.
신약의 “첫 번째 예언”이 된 이 말씀은 누가복음 1장 17절에 나옵니다. 이 말씀이 이 세대를 사는 우리 모두에게 중대한 명령이 된다는 사실을 깊이 깨닫게 되었습니다.
이 예언은 요한계시록의 예언들과 일치하는데, 표적과 기사를 행하며 심판을 선포하는 “두 증인”에 대한 묘사입니다. 이들은 모세와 엘리야와 매우 흡사합니다. 모세와 엘리야에 대한 말씀은 분명히 이러한 맥락에서 나온 것입니다.
모세는 하나님의 토라를 전해준 위대한 사람이었고, 엘리야는 선지자들 가운데 위대한 지도자였습니다. 따라서 이 둘은 “율법과 선지자” 전체를 대표합니다. 모세는 애굽에 맞섰고, 엘리야는 이스라엘에 맞섰습니다.
너희는
내가 호렙에서 온 이스라엘을 위하여 내 종 모세에게 명령한 법 곧 율례와 법도를 기억하라 보라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이 이르기
전에 내가 선지자 엘리야를 너희에게 보내리니 그가 아버지의 마음을 자녀에게로 돌이키게 하고 자녀들의 마음을 그들의 아버지에게로
돌이키게 하리라 돌이키지 아니하면 두렵건대 내가 와서 저주로 그 땅을 칠까 하노라 하시니라
“모세와 엘리야가 올 것이다”라는 말씀은 제게 어떤 의미였을까요? 제 생각에 그 의미는 마지막 때가 “노아와 롯의 때”와 같을 것이라는 예슈아의 말씀과 비슷할 것입니다(누가복음 17:26~29). 마지막 때 메시지는 모세와 엘리야의 것과 같을 것이고, 그 상황은 노아와 롯의 때와 같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세상 사회 사이에는 틀림없이 심판의 날이라는 정해진 때 직전에 일어날 크나큰 도덕적 대립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공의에
따르면, 인류와 함께 행하시는 완전한 정의가 있어야만 합니다. 정의는 악의 처벌을 요구하는데, 세상에는 많은 악이 있습니다. 이
악은 점점 더 악해질 것입니다.
하나님의 동일한 공의에 따르면, 그분은 악을 처벌하실 뿐 아니라, 그 형벌이 집행되기 전에 사람들에게 경고하실 것입니다. 가능한 많은 사람들이 벌을 받지 않도록 하나님은 사람들에게 변화를 권고하기 위해 경고하셔야만 합니다.
심판 전의 이러한 도덕적 변화를 성경은 회개라고 합니다. 인간의 악한 행위를 죄라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기꺼이 용서하시고 죄를 사하시며 형벌을 무효화하는 것을 은혜라고 합니다.
노아의 예를 들면, 온 세상에 엄청난 폭력과 살인이 있었습니다(창세기 6:5). 세상의 거의 모든 사람들이 사형에 처해질 정도로 최악이었습니다(창세기 6:7). 하나님의 정의에 따르면, 이 모든 죄악된 행위는 처벌되어야만 합니다. 그러나 그분은 당신의 사랑으로 사람들에게 경고하시기 원하셨습니다. 그들이 회개하도록 하여 그들을 용서하고 형벌을 취소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노아는 경고하기 위해 그들에게 의를 전파하고 촉구했습니다(벧후 2:5). 어린 시절 할아버지로부터 다가올 심판에 대한 예언을 들었고 그것을 다른 이들에게 전했을 것을 고려해볼 때, 정말 오랫 동안, 대략 500년 동안이나 말씀을 전했을 것입니다.
그는
말씀을 전할 뿐 아니라, 또한 (수십 년에 걸쳐) 방주도 지었는데, 이것은 듣는 이들을 구원하는 매개체 역할을 했습니다. 방주를
짓는 것도 사람들에게 형벌이 온다는 경고였습니다. (방주는 배였고, 이것은 물이 넘칠 것을 알려주었습니다. 비가 내린 것이
이번이 처음이었을지도 모릅니다. 방주는 “육지”에 지어졌는데, 이곳은 방주가 뜰 수 있는 물과는 멀리 떨어진 곳이었습니다. 그래서
방주 자체가 다가올 홍수에 대한 시각적 경고였습니다.)
그러나
노아의 때에 사람들은 회개하지 않았고, 엄청난 심판이 온 것입니다. 노아의 홍수는 미래에 있을 심판에 대한 경고 역할을 하는
역사적 사건입니다. 전 세계적인 죄악은 전 세계적인 형벌을 요구할 것입니다. 이 형벌이 오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릴지 모르지만,
그것이 오면 즉시 임할 것입니다. 회개할 시간이 많이 주어질 것이지만, 정해진 형벌의 날이 되면 급작스럽게 시간이 전혀 남지 않게
될 것입니다.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서 시간이 많은 수도 있고, 없을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풀어 주시는 시간이 많지만, 회개를 미룰
시간은 전혀 없습니다. 역사적으로 많은 시간이 주어졌습니다. 도덕적으로 낭비할 시간이 없습니다. 은혜라는 측면에서 보면,
하나님께서는 놀라울 정도로 오래 참으십니다. 두려운 심판이라는 면에서 보면 때가 가까이 왔습니다.
(심판의
시기에 대한 예언들에 관한 논쟁은 시간 낭비일 때가 많습니다. 그 시점은 항상 “지금”입니다. 타이밍의 문제는 한편으로는 오래
참으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강조하지만, 그 형벌이 집행되는데 있어서 무시무시할 정도로 “임박한” 속성이 있기도 합니다. 시간이
촉박합니다.)
“노아의
방주”는 온갖 동물들이 배를 타고 나오는 이야기라 확실히 아이들에게 매력적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들 뿐 아니라 동물도
사랑하십니다. 아마도 처음 나타난 무지개일 듯한 이 아름다운 무지개는 창조물 가운데 하나님의 정교한 예술품과 미래에 도래할
완벽하게 아름다운 세상에 대한 약속을 보여줍니다. 낙원도 영원하고, 형벌도 영원합니다. 아름다움과 은혜 가운데서 심각하고 진지한
냉정함도 있습니다. 즉 요점은 심판의 때가 오기 전에 있을 전 세계적인 죄에 대한 도덕적 대립입니다.
[참조 :
악행은 형벌을 요구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용서의 기회를 줍니다. 간단한 전제 조건은 잘못을 저지르는 것을 멈추는 것, 곧
회개입니다. (용서에 대한 법적 규정을 “속죄” 혹은 “화목 제물”이라고 하는데, 이는 형벌을 다른 사람에게 전가하기 위해 댓가를
치르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 속죄는 제사장의 희생 제사에서 상징적으로 묘사되었으며, 그 후 예슈아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성취되었습니다. 의로우신 메시아의 십자가 죽음은 우리 모두가 받아 마땅한 형벌을 전가하고 취소할 수 있는 법적 장치를 제공합니다. 복음의 메시지 이면에 깔린 사법적 논리는 속죄/화목 제물> 댓가 지불> 용서>형벌입니다.
노아 시대의 심판이 있은 후 롯의 시대에 심판이 있었습니다. 소돔과 고모라의 롯의 경우, 폭력, 강간, 동성애의 죄악들은 매우 널리 퍼져 있었기에 형벌을 피할 수 없었습니다(창세기 18:32). 소돔과 고모라는 매우 부유한 “상류층” 도시였습니다(창세기 13:10-13). 그들의 죄에는 교만, 안일, 그리고 가난한 자들을 긍휼히 여기지 않는 것 등이 포함되었습니다(에스겔 16:49). 소돔의 성적 타락과 재정의 타락은 역사에 걸쳐 많은 곳에서 반복되고 있습니다(요한계시록 11:8 참조).
롯의 때에 있었던 불의 심판과 노아 때의 물 심판은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에 있을 마지막 심판에 대한 선례입니다(요엘 2:31, 말라기 4:5, 유 1:7).
선지자들은 백성들에게 곧 다가올 심판에 대해 경고하였습니다. 그들이 잘못을 멈추고 용서 받고 형벌을 받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크고 두려운 마지막 심판이 오기 전, 경고의 메시지와 도덕적 맞섦의 메시지가 회복되어야 합니다.
회개에
대한 예언적 부르심은 모든 세대에 적용되어 왔습니다. 예슈아의 재림으로 이어지는 마지막 세대에는 얼마나 더 그래야 하겠습니까!
(메시아는 형벌을 집행하는 재판관이시고 속죄를 주시는 제사장이십니다. 그분은 죄를 사하시기도 하고, 형벌을 내리시기도 합니다(마태복음 16:27, 25:31-46).
소돔
이후에 그 당시 세계 최강 제국인 애굽의 심판이 나옵니다. 애굽은 요셉 시대에는 의롭고 복된 나라였지만, 모세 시대에는 악하게
변했습니다. 얼마나 악했는지 정부 지도자들이 머리에 뱀을 쓰고 있었습니다. 마술, 노예, 학대, 아동 희생 제사 그리고 온갖 악이
만연했습니다. 이 나라는 형벌을 받아야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선지자로 보내셔서 바로에게 맞서게 하셨습니다. 바로가 회개하기를 거절했기에 벌을 내리는 것 외에는 다른 선택이
없었습니다. 악한 제국은 파괴되어야 했습니다. 먼저는 말로 하는 경고가 있었고, 그 다음에 부분적인 벌로 열 가지 재앙이
있었습니다. 재앙에 대한 경고도 무시했기에, 홍해를 건널 때 마지막 심판이 임한 것이었습니다.
말라기의
예언은 우리에게 모세의 토라를 기억하라고 가르칩니다. 저는 종말의 끝에 모세의 율법에 나오는 이야기들과 비슷한 상황을 목격하게 될
것이라고 믿습니다. 악한 애굽 왕 대신에 적그리스도라고 하는 사악한 세계 지도자가 기괴하고 짐승 같은 정부와 함께 등장할
것입니다. 심판이 반드시 와야 하지만, 심판 전에 하나님의 은혜로 인해 도덕적 대립과 경고가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다가올 심판에 대한 예언적 메시지와 죄와 악에 맞서는 메시지를 풀어낼 것입니다. 이렇게 맞설 떄에 그 메시지를 전하는
자들에게는 높은 수준의 순결을 요구될 것입니다. 그리고 세상 권세들에게 선포할 수 있는 높은 수준의 영적 권세와 또한 기적적인
표적과 이사를 행하는 높은 수준의 능력을 요구할 것입니다. 이 “모세” 혹은 “엘리야”라는 인물의 정체나 어떤 사건들의 시기는
주된 이슈가 아닙니다. 핵심은 메시지의 내용, 예언의 목적, 그리고 그것에 담긴 영과 능력입니다.
우리의
입장을 성경의 도덕적 가르침에 두는 것(모세)과 이 세대를 향해 예언적으로 담대히 선포하는 것(엘리야)은 우리 시대 가운데
마지막 크나큰 영적 전쟁입니다. 그것은 역사를 통틀어 온갖 도덕적 대립의 정점입니다. 전 세계적 차원으로 열 가지 재앙과 출애굽,
노아의 홍수, 그리고 소돔의 불심판이 있을 것입니다.
성경은 그 쓰여진 기간이 1500년이라고 하는 기간 동안에 쓰여졌습니다.
다양한 저작 다양한 사람들에 의해서, 1500년의
간격을 가지고 있는 그런 기록 시기를 가지고 있고요. 뿐만 아니라 지금 가장 늦게 쓰여진 성경도, 지금으로부터 2천
년 전에 쓰여진 말씀입니다. 뿐만 아니라 장소도 우리나라에서 쓴 것이 아니라, 중동지방에서 쓰여진, 이스라엘을 중심으로 한
중동지방에서 쓰여진 것이고, 성경은 66권이라고 하는 방대한 책으로 이루어져 있을 뿐만 아니라, 언어도 다른 언어로 히브리어,
헬라어, 아람어로 쓰여져 있고, 또 문화도 다른 문화 속에서 기록되어 있는 것이 성경입니다. 성경의 장르를 보면 이야기가 있는가
하면, 시도 있고 예언도 있고 자원도 있고 묵시문학도 있고, 다양한 문학 종류가 들어있는 그러한 방대한 말씀이 바로 성경이라고
하겠습니다.
이 방대한 성경을 우리가 이해하기 위해서는, 우리가 건전한 신학을 가지고 있어야 이 성경 말씀을 바르게 읽을 수가
있는 것이죠. 아무리 좋은 것이라고 할지라도, 그것을 왜곡된 관점으로 바라보면, 좋지 못한 관점으로 바라보게 되면, 아무리 유익한
것도 유익하지 않게 되기 때문에, 성경을 읽을 때에도, 건전하고 바른 신학적 관점으로 성경을 읽어야 될 필요가 있습니다.
리딩 지저스라고 하는 프로그램은 제가 마음에 들어요. 마음에 들고, 물론 100% 완벽하게
마음에 드는 것은 아니지만, 상당 부분 정말 제가 마음들어하기 때문에, 이 교재를 따라서 성경 읽기를 진행하기 위해서 우리가
도입하고 있습니다. 이 책을 굳이 구입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값이 굉장히 비싸게 나가는 책이 출간되어 있는데, 굳이 굳이 하실
필요는 없고, 제가 그 책의 내용들을 오후 예배 시간 때마다 그대로 잘 전달하고 설명을 할 것이기 때문에, 그냥 예배 시간에
참여만 해주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이번에 우리가 시도하는 성경일독 프로그램의 그 특징이 무엇이냐 하면, 첫 번째는 성경에 나타난 하나님의 큰 그림을
따라가면서 성경을 읽는다고 하는 그런 특징이 있습니다. 우리는 나무 하나하나를 조사하다가 숲을 보지 못하는 그런 우를 범할 때가
많이 있는데요. 성경을 읽을 때에도 성경에 정말 세밀한 거 하나하나, 세부적인 것에 대해서는 잘 알고 있지만, 그러나 성경 전체가
전달해 주려고 하는 그런 메시지를 놓치는 경우들이 종종 많이 있어 왔습니다. 그런데 이번 성경 일독 프로그램은 어떤 것인가?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전달해 주시고자 하는 하나님의 그 큰 그림이 무엇인가를 따라가면서 읽으려고 하는 것이기 때문에, 아주 큰
유익이 있다고 생각이 드는데요. 하나님의 큰 그림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이 우리들에게 어떻게
이루어졌는가를 설명하는 것이죠.
뿐만 아니라 이번 성경 읽기의 특징이 무엇이냐 하면, 예배하는 마음으로 성경을 읽는다고 하는 겁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바르게 읽고 그것을 우리 자신들에게 잘 적용할 수만 있다고 한다면, 그 자체가 예배하는 것이 되는 것이고, 더 나아가서 삶의
변화로 이어지는 성경 읽기를 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을 변화시킨다고 하는 것은 굉장히 불편한 일입니다. 지금까지 익숙해져
왔던 것들과 결별하는 것이고, 익숙해져 있던 것과 떠나는 것은 우리로 하여금 굉장히 불안하게 만드는 그런 요소들이 있지만, 그래서
변화를 사람들이 정말 두려워하고 변화하기를 꺼려하고, 보수적으로 살려고 하는 게, 우리 사람들의 일반적인 심성이라고 할
것입니다. 하지만 변화는 정말 유익한 것이고,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제대로 잘 깨닫는다고 한다면, 그것이 우리들에게 엄청난
변화와 발전을 가져올 것이라고 믿습니다. 기대가 되십니까? 감사합니다.
그러면 주중에는 어떻게 해야 될 것인가? 주중에 할 일이 있습니다. 주중에 할 일은 그날에, 하루 전날 톡장이 해설
카드를 발송해 줄 겁니다. 해설 카드가 어떻게 생겼냐면, 바로 이렇게 생겼습니다. 이렇게 이렇게, 바로 이렇게 생겼습니다. 그
해설 카드를 해설 카드를 하루 전날 보내주면, 그 해설 카드에는 다음 날 읽을 성경 본문이 들어가 있고, 그래서 그 본문대로
읽으면 되겠고, 그 본문에 대한 대략 대략적인 설명이 그 해설 카드 안에 아주 간단하게 설명이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톡장들이 하루 전날 6시에서 9시 사이에 단톡방에 올려놓으면, 그 단톡방에 올라온 것을 우리 모든 성도님들이
읽어보고, 거기에 있는 성경 본문에 따라서 성경을 읽으시면 되겠습니다. 성경을 읽을 때 어떻게 읽는가? 제일 간단한 것은 자신이
가지고 있는 성경을 읽는 방법이 제일 간단한 것이고, 제일 좋은 방법이 될 것입니다. 하지만 바쁜 사람들이 있을 거예요. 성경
읽는 것이 눈이 침침해서 못 읽는 분들이 있을 거예요. 그런 분들을 위해서 톡장들은 단톡방에다가 그 날에 읽을 다음 날에 읽을
성경 본문 유튜브 영상을 링크를 올려줄 겁니다. 그래서 그 링크만 클릭해서 들으면 창세기 1장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그래 가지고, 유튜브로 영상을 쭉 읽어주는 것을 그 영상을 보거나 또 들으면서, 성경을 읽는 것으로 눈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눈으로 보고 귀로 듣는 방법으로 성경을 읽을 수가 있겠고요. 그래서 성경을 읽었다고 한다면, 자신이 탄 속한 단톡방에 오늘 성경
본문 잘 읽었습니다. 그런 메시지를 남겨야 되겠죠. 거짓말로 남기면 안 됩니다. 솔직하게 남겨주세요. 못 읽어도 괜찮아요.
솔직하게 남겨주시고 그래서 오늘은 못 읽었으니까 내일 읽겠습니다. 자꾸 그래버리면 큰일 나지만, 아무튼 읽었다고 하는 메시지를
올려주고 서로 서로 격려하며 수고했다. 잘 읽었다. 아이고 너무 감사하네요. 또 톡원들 격려하는 것은 보너스가 되겠습니다. 그래서
어느 구절이 참 마음에 와닿았어요. 이런 내용들을 함께 전하면서, 주중에 서로가 서로를 격려하면서 성경을 읽을 수가 있겠습니다.
그리고 다시 그 다음 주 돌아오게 되면 무슨 일을 해야 되는가 복습 문제 풀기가 있습니다. 아까 말씀드렸던 예수비전
광장 여기에, 이제는 앞으로 설교 요약이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지난주에 읽었던 본문에 대한 복습 문제가 여기에 수록이 될
겁니다. 그러면 그 복습 문제를 보면서 문제를 하나씩 하나씩 풀어서, 그래서 그 주 푼 것을 사무실로 제출해 주시거나, 톡장이
토요일 날 복습 문제 링크를 단톡방에 올릴 겁니다. 그러면 단톡방에 올린 복습 문제 링크를 클릭해서 문제가 나옵니다. 태초에 누가
천지를 창조하셨나요? 하나님이! 딱 답을 체크해서 제출 딱 누르면, 그 문제 답변 쓴 것이 교회로 다 수집이 됩니다. 그래서
복습 문제를 푸는 일을 주일날 보내주시면 되겠습니다. 그래서 다 읽은 사람들에게는 완독 증서를 줄이려고 생각을 하는데, 사실 성경
읽은 사람들의 상이 뭘까요? 성경을 읽는 게 상이에요. 성경을 읽는 게 상입니다.
그래서 매주 오후 이 시간에는 그 주에 읽을 성경 본문에 대한 설명을 하는 날인데, 이번 주에는 성경 읽는 분량이
없습니다. 그래서 오늘은 어떤 시간인가? 구약 성경 개관을 하는 날입니다. 그래서 오늘은 구약 성경 전체를 간단하게 설명을
해드리도록 하겠습니다. 해드리기 전에 리딩 디저스에서 만든 영상을 한번 먼저 보도록 하겠습니다. 영상을 틀어주십시오.
리딩 지저스 1권 “더 큰 은혜로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첫 번째 수업으로 구약 성경의 다양한 내용들이 성경의 핵심 메시지를
통해 어떻게 하나의 큰 그림을 이루는지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사람들은 성경의 이야기를 부분적으로만 알고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사자굴에 들어간 다니엘, 홍해를 건넌 이야기, 다윗과 골리앗, 아브라함, 에스더 유나와 같은 각각의 이야기로 말이죠. 구약의
이야기들은 마치 퍼즐 조각처럼 펼쳐져 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이 많은 이야기들이 성경의 핵심 메시지를 통해 하나로 맞춰진다는
사실을 알고 계시나요? 따라서 우리는 이번 수업에서 구약성경의 구조와 핵심 메시지를 먼저 살펴보고 이어지는 성경 수업을 통해 퍼즐
조각이 어떻게 하나님의 큰 그림으로 완성되어가는지 살펴볼 것입니다.
먼저 구약 성경의 목차를 살펴볼까요? 구약 성경은 처음에 히브리어로 쓰여졌는데, 이 성경의 목차는 우리가 지금
사용하고 있는 구약 성경의 목차와 조금 다릅니다. 히브리 성경은 구약을 율법서, 예언서, 성문서로 구분합니다. 율법서는 모세,
오경이라 불리는 창세기부터 신명기까지를 포함하고, 예언서는 우리가 선지서라 부르는 이사야부터 말라기, 그리고 유대인들이 전기
예언서라 부르는 여호수아부터 열왕기하를 포함합니다. 성문서에는 10편 자본 같은 시각서가 포함되고, 다니엘서와 같은 선지서, 후기
역사서로 간주되는 에스라, 느헤미야, 그리고 역대기도 여기에 포함됩니다. 창세기로 시작해 역대기로 끝나는 것이죠.
우리가 사용하는 구약 성경은 역사서, 시가서, 선지서로 구분됩니다. 역사서는 창세기부터 역대기까지이고, 시가서에는
욥기, 시편, 잠언, 전도서, 아가서가 포함되고 선지서는 이사야부터 말라기까지 포함합니다. 창세기로 시작해 말라기로 끝이 나는
것이죠.
히브리 성경과 우리가 읽는 구약 성경의 목차가 이렇게 다르지만 한 가지 공통점이 있습니다. 바로 구약 성경 이후의
이야기를 바라보고 기다리게 한다는 것이죠. 히브리 성경의 마지막 책인 역대기는 아담부터 포로 귀환까지의 역사를 보여줍니다. 그러나
아직 성취되지 않은 하나님의 약속들 때문에 이 다음 이야기는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갖게 합니다. 우리가 사용하는 구약 성경 역시
마지막 책인 말라기가 새로운 엘리야를 고대하는 내용으로 끝이 나면서 앞으로 펼쳐질 이야기들을 기대하게 합니다.
구약 성경을 연대 기준으로 나누어 보는 것도 구약 성경 전체의 구조를 살펴보는 데 많은 도움이 됩니다. 아담의 타락은
하나님의 창조질서를 모두 바꾸어버리게 됩니다. 죄와 저주의 범위는 점점 확장되게 됩니다. 아브라함으로부터 시작된 족장 시대를
지나 큰 민족을 이룬 이스라엘이 모세를 통해 애굽에서 탈출하여 여호수아와 함께 약속의 땅으로 들어가면서 이스라엘은 하나님 약속의
일시적인 성취를 맛보게 됩니다. 그들은 약속의 땅에서 왕국을 이루게 되지만, 하나의 왕국은 북 이스라엘과 남유다로 분열되고,
결국은 강대국에게 침략당해 이스라엘은 흩어지고 포로로 잡혀갑니다. 시간이 흐른 후 본향으로 돌아온 이스라엘은 무너진 성전과 성벽을
재건합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여전히 침략자들의 통치 아래에 살게 되면서 구약 성경의 역사는 끝이 나게 됩니다. 구약 성경은 이
다음 이야기는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구체적인 답을 주지 않습니다. 다만 답을 찾아갈 수 있는 여러 개의 퍼즐 조각만 줄 뿐입니다.
결국 이 조각들을 맞추기 위해서는 신약 성경이 필요합니다.
신약 성경은 구약 성경에서 흘러나오는 모든 질문의 답이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을 통해 어떻게 나타나는지 보여줍니다.
아담의 죄로 인해 모든 사람에게 죽음이 임합니다. 그러나 예수님 안에 있는 모든 사람은 생명에 이르는 의를 얻게 됩니다. 인류를
위한 새로운 언약의 머리가 되시는 것이죠. 이렇듯 예수님은 새 아담이십니다. 이스라엘의 역사는 예수님의 삶을 통해 새롭게
재현됩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이끌어내신 것처럼, 어린 예수님도 애굽에서 이끌어내십니다. 이스라엘이 홍해를 건넌
사건은 예수님이 요단강에서 물로 세례를 받은 사건과 이어집니다. 이스라엘의 40년 광야생활 역시 예수님의 40일 광야 금식 후
받으신 시험과 이어집니다. 이렇듯 예수님은 아브라함의 참 후손이자 새 이스라엘이십니다.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약속하신 영원한 보전은 다윗의 자손이신 예수님을 통해서 성취될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지키지 못해 깨어진 옛 언약을 자신의 거룩한 보혈로 새롭게 완성하셨습니다. 이 새 언약은 그리스도의 순종을 통해서
앞으로도 영원토록 지속될 것입니다. 이렇듯 예수님은 새 다윗이십니다. 자 여러분 구약 성경의 퍼즐 전체가 예수님을 향해 가고
있다는 것이 보이시나요?
실제로 예수님께서도 구약 성경 전체가 자신에 관한 것이라고 가르치셨습니다. 슬픈 얼굴로 엠마오를 향해 가던 두 제자가
예수님과 마주친 사건을 기억하시나요? 그들이 길을 떠날 때에는 예수님의 부활에 대해 아직 듣지 못했습니다. 그때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다가가 말씀하십니다. “미련하고 선지자들이 말한 모든 것을 마음에 더딤있는 자들이여, 그리스도가 이런 고난을 받고
자기의 영광에 들어가야 할 것이 아니냐 하시고, 이에 모세와 모든 선지자의 글로 시작하여 모든 성경에 쓴 바, 자기에 관한 것을
자세히 설명하시니라.” 이후에 다른 제자들에게도 가르치십니다. “내가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 너희에게 말한 바 곧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의 글과 시편에 나를 가리켜 기록된 모든 것이 이루어져야 하리라 한 말이 이것이라 하시고, 이에 그들의 마음을 열어 성경을
깨닫게 하시고” 예수님은 메시아가 언급된 몇 구절뿐만 아니라, 구약 성경 전체가 자신에 대해 말하고 있다고 가르치셨습니다.
우리가 예수님께서 가르쳐주신 것처럼 구약을 읽는다면 구약 성경의 핵심 메시지가 곧 예수 그리스도이시며 구체적으로는
예수님의 고난과 죽음, 부활 이후의 영광에 대한 것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렇듯 구약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보여주는 책인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가 구약 성경을 바르게 해석해서 읽는다면, 성경 전체가 예수님을 향해 가고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성경 전체에 흐르는 복음은 우리를 구원하신 하나님께 영광 돌리도록 이끕니다. 그리고 이 복음은 우리의 마음을 돌이켜
우리의 삶을 변화시킵니다. 이렇게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예배의 마음으로 성경을 읽을 때 성경을 읽는 그 자체가 우리의 예배가
됩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성경을 읽는 이유가 됩니다.
이런 영상을 단톡방에 또 올릴 겁니다. 그러면 단톡방에서 그걸 보시고 오후 예배에 참석을 못하셨던 분들도 이해하면서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게 되겠는데요. 오늘은 구약 성경 전반에 대한 설명을 영상에서 본 것에 대해서 잠깐 제가 추가로
부연해서 설명하도록 하겠습니다. 구약은 그 자체로 하나님의 말씀이지만, 그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 하나님이 성취할 하나님의
약속이 성취할 분을 기대하게 만드는 책인 것이죠. 앞으로 우리가 몇 주간 동안 구약 성경의 말씀을 읽게 될 것인데, 이 점을
우리가 분명하게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창세기를 보면 아담과 하와가 타락한 이후에 죄가 계속해서 확장되게 되었고, 그로 인해서 하나님의 심판이 이루어지며, 그
뒤에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선택하시는 이야기로 연결이 됩니다. 그 아브라함을 선택하셔서 하나님께서는 모든 민족으로 복을 받게
하시겠다고 하셨는데, 그 아브라함에게 해주셨던 약속이 온전히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부분적인 성취만이 이루어진 것이죠. 아브라함을
향해서 내 아들에게 아들을 줄 것이고, 그 너를 통해서 모든 민족이 복을 받으리라고 했던 그 약속은 결국 그 약속을 이루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셔야만 했던 것을 기대하게 만듭니다. 뿐만 아니라 출애굽기를 비롯해서 이스라엘 민족이 지금까지 살아왔던 그 모든
과정을 보면,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민족이 어려움을 당할 때마다 구원자를 보내어 주셔서 이스라엘 민족을 구원해 주셨죠. 성경 구약
성경 전체가 사실은 하나님께서 구원자를 보내어 주신 이야기들의 기록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야곱의 가정이 먹을 것이 없어서
기근 가운데서 정말 힘들게 되었을 때, 요셉이라고 하는 구원자가 있어서 그 요셉을 통해서 야곱 가족이 구원을 받게 된 것이죠.
뿐만 아니라 이스라엘 민족이 애굽 땅에서 고난을 당하고 있을 때 모세라고 하는 자가 나타나서, 이스라엘 민족을 건져주시는 모세라고
하는 구원자가 나타나게 된 것이죠.
그리고 모세 이후에는 여호수아라고 하는 사람이 이스라엘 민족을 인도하면서 이스라엘을 구원해 주었고, 또 가나안 땅에 정착했을
때에는 그때마다 외적이 침입해서 이스라엘 민족이 고통을 당했지만, 그때그때마다 하나님께서는 사사를 보내어 주셔서 그 사사를
통해서 이스라엘 민족을 건져주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 사사 시대가 지난 다음에는 왕을 세워주셔서 그 왕을 통해서 이스라엘 민족을
구원해 주셨는데, 사울 왕 그리고 다윗 왕 이런 왕들을 통해서 이스라엘 민족을 구원해주고 주신 역사가 계속해서 반복됐습니다.
하지만 그 이스라엘 민족의 역사를 보면 그 구원이 영원한 것이고 계속된 것이 아니라, 결국에는 몰락해버리고 포로로
끌려가고 결국은 망해버리는, 그런 힘들고 어려운 결과로 빚어지게 된 것이고, 그 이스라엘 민족이 포로로 끌려가서, 거기서 또
몰살당할 위험한 처지가 되었을 때 하나님께서는 또 에스더라고 하는 구원자를 통해서 이스라엘 민족을 구원해 주시기도 하셨고, 또한
이스라엘 민족이 다시 예루살렘으로 돌아가서 성전을 건축할 수 있도록 만들어주는 이야기가 구약 성경에 쭉 연결되고 있는데, 이 모든
이야기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구원자를 보내어 주셔서, 우리의 문제를 해결해 주실 거라고 하는 그 약속을 담고 있는
것이고 그 구원자를 기대하게 만드는 것이죠.
이스라엘 민족들이 완벽하게 구원을 받은 것이 아니라 진정으로 더 이상의 아픔도 없고 더 이상의 고난도 없는 진정한
구원을 이룰 예수님 메시아를 기대하게 만드는 책이 바로 구약 성경이라고 할 수가 있겠습니다. 이 영상에서 소개한 것처럼 예수님은 이
세상에 오셔서 마치 그 옛날 아담이 실패했던 것을 역전시키는 새로운 아담의 역할의 모습을 보여준 것이죠. 아담은 어떻게
했습니까? 에덴 동산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고 선악과를 먹으로 말미암아 죄가 이 세상에 들어오도록 만드는 사람이 아담과
하와라고 했다고 한다면,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말씀에 충실해서 그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함으로 말미암아 우리들을 구원해 주는 그런
역할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고요. 뿐만 아니라 이스라엘 민족의 역사라고 하는 것이 어떤 역사입니까? 늘 실패하고 하나님을 반역하고
하나님의 뜻대로 살지 못했던 역사였는데, 예수님께서 참 이스라엘로 오셔서 예수님께서 새 이스라엘로 진짜 이스라엘로 오셔서 이스라엘
민족이 실패했던 것을 이제는 순종하며 하나님 앞에 정말 진실하게 순종하고 복종함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구원해 주시는 새로운
구원자로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신 것이죠. 광야에서 이스라엘 민족은 늘 불신앙적인 모습을 보이면서 하나님을 거역했지만,
예수님께서는 광야 40일 동안 금식하신 후에 사탄의 유혹을 다 물리치시고 신앙적인 모습으로 순종하는 모습을 통해서 승리하시는
모습을 보여주었을 뿐만 아니라, 십자가 위에서 못 박혀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구원해 주신 것이죠.
뿐만 아니라 다윗의 이야기는 “다윗처럼 우리가 어떻게 잘 되자”라고 하는 그런 의미의 다윗의 이야기가 아니라, 사실 그
다윗도 어떻게 보면 부족한 왕이고 실패한 왕이고 영원하지 못한 왕이 되었던 것이죠. 그런데 그 다윗 왕을 대신하여서 예수님께서
결국 이 세상에 하나님의 나라를 가져오는 그 영원히 다스릴 왕으로 우리 가운데 오신 것이라고 할 수가 있겠습니다.
따라서 구약 성경이라고 하는 책은 어떤 책인가? 예수 그리스도를 기대하게 만들고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게 만드는
책으로서 구약 성경이 되는 것입니다. 이 영상 가운데서도 나온 성경 구절이 누가복음 24장 25절에서부터 27절까지의 말씀인
것이죠. “이르시되 미련하고 선지자들이 말한 모든 것을 마음에 더디 믿는 자들이여, 그리스도가 이런 고난을 받고 자기 영광에
들어가야 할 것이 아니냐 하시고, 이에 모세와 모든 선지자의 글로 시작하여 모든 성경에 쓴 바 자기에 관한 것을 자세히
설명하시니라.” 이 구약 성경, 모세와 선지자 이게 바로 구약 성경을 나타내는 말인데, 이 구약 성경이 누구에 대해서 쓴 것인가?
바로 예수님에 대해서 쓴 것이고, 예수님이 어떻게 오시고 구원해 주시고, 또 우리를 살리시는가에 대해서 설명한 책이 구약
성경이라고 말할 수가 있겠습니다.
뿐만 아니라 누가복음 24장 44절에서부터 47절 말씀에 보면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시죠. “또 이르시되 내가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 너희에게 말한 바, 곧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의 글과 시편에 나를 가리켜 기록된 모든 것이 이루어져야 하리라
한 말이 이것이라 하시고, 이에 그들의 마음을 열어 성경을 깨닫게 하시고, 또 이르시되 이같이 그리스도가 고난을 받고 제3일에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날 것과 또 그의 이름으로 죄사함을 받는 회개가 예루살렘에서 시작하여 모든 민족에게 전파될 것이
기록되었으니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이죠.
그래서 제자들에게도 설명하기를 구약 성경 전체가 예수님에 대해서 기록한 것이고, 예수님을 기대하게 만드시고 예수님을
바라보게 만든 성경이라고 설명해 주신 것이죠. 따라서 우리가 구약 성경을 읽을 때,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볼 수 있어야, 이 성경을
제대로 읽는 것이라고 할 수가 있겠습니다. 그래서 이 예수 그리스도의 기쁜 소식을 우리가 읽고 그 말씀을 우리가 순종하게 된다고
한다면, 결국 우리의 삶이 변화되고 또 주님을 더욱더 닮아가는 그런 변화의 과정들이 넘쳐나게 될 것이라고 믿습니다.
우리가 예전에는 구약 성경을 어떻게 읽었냐면 하나의 율법으로 읽었습니다. 율법으로 읽어서 안식일날 쉬어야 된다. 또
이것을 해야 된다 말아야 된다. 이것을 하면 되고 하지 말아야 되고, 율법적으로만 모든 것을 다 바라보면서, 이 구약 성경을
바라보는 것이 우리가 율법을 배우는 것 같은 그런 말씀으로 율법을 바라보게 될 때, 우리가 정말 너무나도 피곤해질 수밖에
없었어요. 이 구약 성경을 율법으로 바라보게 된다고 한다면 어떤 결과를 가져오게 되나요? 내가 그 율법을 잘 지키면 교만한 마음이
금세 들게 되는 것이죠. 뿐만 아니라 율법을 제대로 지키지 못하는 사람들을 보면서 무시하고 멸시하는 마음이 들게 되는 것이죠.
그런데 정작 율법을 제대로 잘 지켰느냐 하면, 율법을 제대로 잘 지킨 것이 아니라, 사실은 율법을 지키지 못하는 모습들이 우리들의
삶 가운데서 많이 나타나게 되는 것이죠. 그런 우리들을 바라보면서 많은 사람들이 위선자라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이율 배반적인
사람들이라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우리 자녀들이 우리 부모님들을 보면서 그렇게 막 신앙을 잃어버리는 이유 중에 하나가 무엇이냐면, 우리 부모님들이
이율배반적으로 보이기 때문에 그래요. 위선적으로 보이기 때문에 그래요. 정말 율법을 잘 지키라고 이야기하고 있는 그 부모님의 그
모습을 보면서, 무엇을 보냐면 부모님들이 사실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고 있지 않은 것을 보면서 아이들이 마음의 문을 닫아버리는
거죠. 그러는 엄마는 율법을 잘 지키고 있는가? 그러는 아빠는 하나님의 말씀대로 잘 살고 있는가? 그런 것을 보면서 사람이
아이들의 마음 가운데 주님을 따르고자 하는 마음이 생기기보다는, 자꾸만 정죄하는 마음, 그리고 비난하는 마음, 또 뭔가 조금 잘
지키면 다른 사람들을 무시하는 마음들이 자꾸만 들게 되는 것인데, 그런데 율법이라고 하는 것은 사람을 변화시키지를 못하는 것이죠.
율법을 들이밀면서 “너 이거 해야 돼. 저거 해야 돼. 저거 해야 돼.” 하면 사람들이 “네, 알겠습니다.” 하면서 율법을
제대로 잘 지키느냐 하면, 잘 안 지켜요. 근데 어떻게 하면 율법을 잘 지킵니까? 마음의 변화가 일어나면 지키는 거죠. 엄마가
아들한테 말하는 거죠. 좀 옷 좀 단정히 입고 다녀라. 좀 깨끗하게 하고 다녀라. 그러면 신경을 안 쓰고 마음대로 막 다녀요.
그러면서 또 하는 말이 엄마는? 엄마는? 그런 엄마는 정리 잘해? 항상 엄마를 향해서 막 대들고 막 그러는 거죠.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이 아이가 갑자기 막 세수를 합니다. 갑자기 옷을 잔쟁이하고 다닙니다. 아주 잘 꾸미고
다녀요.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걸까요? 애인이 생긴 거예요. 사랑하는 마음이 그 마음에 들면, 누가 뭐라고 하지 아니해도 그
사람의 삶의 태도가 바뀌어지게 되는 것이죠.
지금까지 우리는 구약 성경을 읽으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읽으면서 이것이 우리의 하나의 율법으로만 생각하고 주일날 이것을
하면 되고 하지 않아야 되고, 또 우리가 신앙생활하면서 이것을 하면 되고 안 하면 되고, 그런 율법의 조항들을 너무나도 많이
나열하다 보니까, 이것이 너무 피곤해지고 정말 주님을 따른다고 하는 것이 믿음 생활한다고 하는 것이 너무나도 고통 가운데 있게 된
것이죠. 그런데 이 구약성경의 말씀은 우리를 율법의 길로 들어가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해 주셨다고 하는
사랑의 음성을 들려주는 거예요. 이 구약 성경은 우리로 하여금 “율법의 그 내용들을 하나하나 지키지 않으면 죽을 것이다”라고 하는
그런, 잘 지키면 상을 받을 것이라고 하는 그런 율법의 조항들을 가르쳐주는 것이 아니라, 우리 주님께서 우리를 너무나도
사랑하셔서 이 세상에 오셨고, 우리가 망할 수밖에 없는 우리 인생들을 위해서 나 대신에 십자가 위에 못 박혀 죽으셨다고 하는, 그
사랑의 메시지를 우리들에게 알려주시는 것이고, 그 복음을 제대로 발견하게 될 때 우리들의 삶이 바뀌게 되고 태도가 변하게 되는
것이죠.
그래서 우리가 이 성경 말씀을 정말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방향대로 이 말씀을 그리스도를 발견하면서 성경을 읽어나가는
가운데 우리들의 삶 가운데 기쁨이 넘치고 감사가 넘치고 금년 한 해 주님의 말씀과 동행하는 가운데 우리들의 삶 가운데서 정말
기쁨이 넘치고 변화가 이루어지는 그런 놀라운 역사가 일어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성경 말씀 잘 읽으시기를 원하십니까? 억지로가 아니라 억지로가 아니라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정말 하나님의 그 말씀을
사모하는 마음으로 이 모든 일에 참여했으면 좋겠고, 그래서 이 금년 한 해 동안 하나님의 말씀을 잘 배우는 성도들이 다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11월 11일(화) 누가복음 10-13장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세상 백성과 제자(12:30. 22)
이 모든 것은 세상 백성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아버지께서 이런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될 줄을 아시느니라. For the pagan world runs after all such things, and your Father knows that you need them.
또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Then Jesus said to his disciples: "Therefore I tell you, do not worry about your life, what you will eat; or about your body, what you will wear.
7. 하나님과 원수가 된 것으로서의 세상, 요8:23, 12:25, 고전3:19, 엡2:2.
8. 전체, 총체, 약3:6.
관련 성경 / 천하(마4:8, 막8:36, 눅9:25), 세상(마5:14, 고전1:27, 계11:15), 천지(행17:24), 세속(약1:27), 세계(약3:6), 단장(벧전3:3).
세상 백성들이 구하는 것 - '세상 백성들'(*,타 에드너 투 코스무)은 하나님을 믿지 않는 이방인들을 가리키는 랍비적(Rabbinic) 표현으로 하나님을 신뢰하지 않아 물질적인 삶의 조건들에 집착하는 자들을 가리킨다. 하나님을 믿는 백성들이라면 의당 하나님께서 필요한 것을 주신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그런 것을 따로 구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세상 백성(the pagan)과 제자(disciples)
'세상 백성'은 성경에서 종교적으로 사용되는 '
세상의 가치관을 따라 살아가는 사람들'을 의미합니다. 이는 '하나님의 백성'과 대조되는 개념으로, 하나님을 믿지 않고 자신의 욕망을 따르며 세상의 기준에 따라 살아가는 사람들을 가리킵니다.
세상 백성의 특징
세상 가치관 추구 : '세상 백성'은 하나님 없이, 사람을 중심으로 사고하며 초월적인 존재를 인정하지 않는 사상이나 철학을 내포합니다.
인간 중심 : 세상의 쾌락과 물질적 성공을 추구하며, 이러한 것들을 좇는 삶을 살아갑니다.
하나님과 대비 : 성경은 '세상 백성'이 추구하는 욕망이 '하나님의 백성'이 추구하는 것들과 대비된다고 설명합니다.
세상 백성과 하나님의 백성
하나님의 백성 : 하나님을 섬기고 그 말씀에 순종하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의 삶 : 세상 백성처럼 세상의 것을 추구하기보다 하나님 나라의 가치에 따라 살아야 한다고 성경은 가르칩니다.
세상과 구별된 삶 : '하나님의 백성'은 세상의 죄악과 구별되어 거룩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거룩한 백성'은
하나님께 속하여 구별된 사람들을
의미하며, 성경에서는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과 신약의 그리스도인을 가리킵니다. 이들은 '거룩하다'는 뜻을 가진 히브리어
'코데쉬'에서 유래하며, 이는 '분리되거나 구별됨'을 의미합니다. 이들은 세상의 다른 사람들로부터 구별되어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가도록 부름 받은 존재입니다.
거룩한 백성의 의미
하나님의 소유: 하나님께서 특별히 선택하시고 소유하신 백성으로, 하나님의 보호와 사랑 안에 있습니다.
구별된 삶: 세상의 가치관과 구별되어 거룩한 삶을 살도록 부름받았습니다. 이는 행동뿐만 아니라 삶의 방식 전반에 걸쳐 나타납니다.
하나님과의 관계: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언약을 지키는 것을 통해 거룩한 백성으로서의 정체성을 실현합니다.
제사장 나라: 단순히 하나님의 백성일 뿐만 아니라, '왕 같은 제사장들'로서 하나님과 사람들을 연결하는 역할을 하기도 합니다.
구약과 신약에서의 '거룩한 백성'
구약 : 출애굽을 통해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에서 구원하신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제사장 나라와 거룩한 백성으로 삼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신약 :
베드로전서에서는 그리스도인들을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라고 칭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은 어둠에서 불러내어져 하나님의 기이한 빛 가운데로 인도받은 거룩한 백성입니다.
거룩한 백성의 뜻
진리를 알자
『The true light that gives light to everyone was coming into the world.』(John1:9)
- [참 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들에게 비추는 빛이 있었다.]
『세계가
다 내게 속하였나니, 너희가 내 말을 잘 듣고 네 언약을 지키면, 너희는 모든 민족 중에서 네 소유가 되겠고, 너희가 내게
대하여 제사장 나라가 되며,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 너는 이 말을 이스라엘 자손에게 전할지니라. 모세가 내려와서 백성의 장로들을
불러 여호와께서 자기에게 명령하신 그 모든 말씀을 그들 앞에 진술하니, 백성이 일제히 응답하여 이르되, 여호와께서 명령하신 대로
우리가 다 행하리이다. 모세가 백성의 말을 여호와께 전하매.........』(출 19: 5~8)
『모세가 와서 여호와의 모든 말씀과 그의 모든 율례를 백성에게 전하매, 그들이 한 소리로 응답하여 이르되,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모든 것을 우리가 준행하리이다.』(출 24: 3)
『언약서를 가져다가 백성에게 낭독하여 듣게 하니, 그들이 이르되, 여호와의 모든 말씀을 우리가 준행하리이다.』(출 24:7)
야훼, 여호와 하나님은 모세로 이스라엘 백성에게 가르칠 율법과 계명을 친히 기록한 돌판으로 주시겠다고 하신다.
에덴동산에서 하나님은 친히 아담과 그의 여자와 함께 식사를 하시며 많은 것을 가르쳤을 것이라고 생각되며, 여기서 하나님은 택한 백성에게 구도의 삶을 살아가는 방법으로 율법과 계명을 모세로 가르치고자 하신다.
놀라운 것은 이스라엘 백성들 중에 칠십 인은 하나님을 보며 식사를 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그들이 하나님을 보니 ‘그 발아래에는 청옥을 편듯하고 하늘같이 청명하더라.’ 하였다.
이는 후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성전에서 제사를 드릴 때에 그들은 제단 앞에서 제물을 나누어 함께 식사하는 모습으로
전개된다. 여기서 그들이 산에서 하나님을 보았다는 것의 ‘보다’(히브리어: ra'ah)는 정상적인 상태에서 보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환시로 ‘보다’(히브리어: hazah)와는 다르다.
오늘날에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 앞에서 식사를 나누며 교제하는 그들처럼, 그리스도 안에서 서로 식사를 하며 교제하여야 한다.
산 중턱에 장로들은 아론과 홀과 함께 머물고, 모세는 여호수아와 함께 산속 깊이 더 들어간다. 모세는 만 사십일(四十日, 四十夜)을 머물게 된다.
모세는 시내산에서 야훼의 가르침을 들은 것을 글로 기록하여 백성에게 낭독하는 것은 하나님 앞에 거룩한 서약을 할 때 그 내용을 정확히 아는 것이 중요함을 강조하려는 뜻에 있다.
앞에 19장에서와 24장에 나타난 하나님이 주신 법도(율법과 계명들)를 백성에게 가르쳤다고 보아진다. 그러므로 모세는 이를
중요하게 생각하고, 번제와 화목제를 하나님께 드리고 나서 언약서(정확히 하나님의 메시지를 전하려는 뜻)를 낭독하고 구속의
의미로써, ‘언약의 피’(훗날에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피를 나타내지만)로 제단에서 취한 피를 백성들에게 뿌린다.
이것이 오늘날에 구교(가톨릭)에서 행하는 향과 성스런 물을 신도들에게 뿌리는 행위이다. 언약의 피는 하나님과 계약을 맺으시는
피인 것이다. 언약서는 계약의 조문인 것이다. 또 피로 맺은 언약(조약)은 중대한 계약임을 뜻한다. 피는 바로 생명을 의미하므로
언약을 어길 때는 피의 대가를 치러야 하는 중대사이다. 그리고 피는 생명을 쏟아 죄를 벗겨주는(레 17:11) 속죄의 역할을
하는 것이다.
출애굽 성경공부에서
세상 사람들은 신을 창조하여 종교화로 섬기는 사상을 통해 인간의 한계를 극복하려고 하여 왔던 것이다. 그러므로 그들이 만든
신(神)은 실존하는 것이 아닌 것이다. 그들의 신들은 인간의 정신적 세계에만 존재할 뿐인 것이다. 노아홍수 이후에 인간들은
두려움을 알게 되었던 것이다.
첫째, 물에 대한 두려움
영웅 니므롯이 바벨탑을 쌓은 이유도 신의 심판에 대한
두려움이었던 것이다. 니므롯의 사상이 무엇일까?
「이에
그들이 동방으로 옮기다가 시날평지를 만나 거기 거류하며, 서로 말하되, 벽돌을 만들어 견고히 굽자 하고 이에 벽돌로 돌을
대신하며 역청으로 진흙을 대신하고, 또 말하되, 자 성읍과 탑을 건설하여 그 탑 꼭대기를 하늘에 닿게 하여 우리 이름을 내고 온
지면에 흩어짐을 면하자 하였더니, 여호와께서 사람들이 건설하는 그 성읍과 탑을 보려고 내려왔더라.」(창세기 11:2,3,4,5,)
그것은 바로 ‘우리의 이름을 내고 온 지면에 흩어짐을 면하자’라는 것에 있는 것이다. 이로써 인간들의 왕국이 시작되었다고
생각되는 것이다.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왕국이 세워졌다 사라지고 다시 세워지고 한 것이 인간의 역사인 것이다. 이러한 인간의
왕국시대는 인간중심의 사상에 뿌리인 니므롯의 사상에 있는 것이다.
인간왕국의 구조는 크게 둘로 나눠볼 수가 있는데, 첫째는 통치를 위한 법제도 둘째는 종교의 제도 그러나 종종 인간제국에서는 종교를 말살하고 오직 법제도만으로 다스리려는 인간역사의 흔적들이 많다. 그 대표적으로 아직도 존재하는
인간왕국은 북한을 들 수가 있겠다. 북한의 뿌리는 조선의 제도에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그들은 조선의 전통성을 강조하면서
김일성 사상으로 조선인민국을 세울 수가 있었던 것이다.
그럼 조선의 나라는 어떤 나라였을까? 고려국의 3백 년의 역사는 파란만장했었다. 그 틈을 이용해 정도전이란 인물이
‘민초사상’으로 혁명을 일으켰으며, 종교를 말살하고 유학(儒學-중국공자사상)을 도입하여 법제도와 왕권(하늘이 내린 왕) 제도로
민초를 다스리는 국가였다. 즉 법제도는 있으되 종교제도는 배제한 왕국인 것이었다. (어찌 보면, 공산주의의 근본이 되는 사상주의
왕국) 여기에서 희귀한 현상은 양반들은 왕을 신격화하지 않았지만, 민초들인 백성들에게는 왕을 신격화로 여기게 했다는 사실이다.
이러한 인간중심의 나라들이 곳곳에 생겼다가 사라지고 다시 생겨나고 한 것이 인간세상이었다는 것이다. 니므롯이 한 곳에 인간들을 모아놓고 인간중심의 세상을 세우려는 것을 보신 여호와 하나님은 무엇을 보았을까?
태초에 하나님이 인간을 만들 때에는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만들었으며, 이런 인간에게는 자유의지를 허락하셨던 것이었다. 그런데
인간중심의 세상을 세우려는 니므롯의 태도를 보시고는 인간의 자유의지가 말살된 한 사상에 복종하는 인간들을 보셨던 것이었다. 그래서
그들을 무력으로 가 아니고 자연스럽게 언어의 혼란을 이용해서 흩어지게 하셨던 것이었다. 그래서 인간들은 여러 언어를 사용하게
되었으며, 온 땅에 흩어져 살게 되었던 것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여전히 인간중심의 사상으로 왕국을 세우며, 인간을 국법과 종교로
통치하는 양상들을 보여주게 되었던 것이었다. 즉 채찍과 당근으로 다스리는 술법을 이용한 것이었다. 그러한 인간세상 속에서 하나님은
한 민족을 택하여 나라를 세운 것이 아니라 그들로 인간의 세상에 하나님의 백성을, 거룩한 백성을 삼으셨던 것이다.
그 백성이 바로 아브라함의 자손들이며, 나중에는 이스라엘이라 칭함을 받은 야곱의 백성으로 부르게 되었으며, 나중에는
유대인이라는, 즉 야곱의 열둘 자식 중에 유다의 후손들로써 유다민족, 또는 유대인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되었던 것이다.
이 이스라엘 민족, 또는 유다민족은 스스로 선민이라 자칭하면서 선민사상에 빠져서 인류에 우월의식을 가지게 되었던 것이다. 그래서 보이지 않게 선민사상에 빠진 교만한 유대민족에 대한 적대감이나 증오감이 인간세계에서 일어나면서 멸종, 말살하고자 하는
나라들이 등장하고 했었던 것이다. 여전히 그 증오는 사라지지 않았으며,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중동에서는 끝없는 분쟁이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거룩한 백성과 선민사상의 차이를 살펴보면,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택하여 믿음의 조상이 되게 하시고, 그의 후손들이 하늘에 별처럼,
바다의 모래처럼 번성할 것을 약속한 하나님의 뜻과 제사장의 나라, 거룩한 나라가 되게 하시겠다는 뜻은 노아홍수 이후에 인간의
타락한 세상에 있어서 다시는 물로 심판을 하지 않겠다고 하셨던 하나님의 깊은 뜻인 구원의 역사를 이루어가는 과정에 있어서 진리의
통로로써, 즉 하나님의 존귀하심을 나타내는 목적으로써, 또는 구원의 통로로써 제사장의 나라로 유대민족을 세웠다는 것을, 그리고
반드시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는 틀림없이 이루어진다는 뜻으로 거룩한 백성으로 삼으셨다는 사실을 인간세상으로 알게, 깨닫게 하시려는
뜻이 있었던 것이다. 즉 유대민족을 통해 하나님이 어떻게 인간세상을 다스리고 계신지를 깨닫게 하심과 세상을 얼마나 사랑하시는지를
알게 하시려는 것이었다. 그런데 유대민족은 제사장 나라와 거룩한 백성이라는 의미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선민사상’으로
인간세상을 업신여기고, 증오를 일으키게 만들고 말았던 것이었다.
오늘날에 기독교인들이 세상사람들로부터 비웃음과 손가락질 받는
것도 마찬가지인 것이다. 기독교인들은 유대인처럼 자신들은 특별한 존재, 구원받았다는 의인행세, 그리고 세상사람들을 죄인취급 하는
그런 태도를 세상 사람들은 잘 알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선지자를, 예언자를 불러내어 끝없이 유대민족에게 깨닫도록 하셨던 것이었다. 그리고 아브라함의 후손들, 믿음의
후손들은 유대민족에 한정된 것이 아님을 그들은 깨닫지 못하였던 것이다. 그래서 결국은, 아니........ 이 모든 것을 아시는
하나님은 아담에게도, 모세에게도, 다윗에게도, 그 외에 많은 믿음의 사람들을 들어 쓰시면서 메시아, 그리스도, 예수를 통해
인간세상을 구원하시려는 것을 반드시 이루심을 말씀하시고 계셨던 것이다. 그 뜻을 베드로 사도는 이렇게 말했다.
「오직 너희를 부르신 거룩한 이처럼 너희도 모든 행실에 거룩한 자가 돼라.」(베드로전서 1장 15절)
그리고 예수님도 주기도를 가르치실 때에 첫 문구에서,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이름을 거룩하게 하시오며,」(마태 6:9)
여기서 거룩함이란 인간 사상에서는 뛰어난 존재나 가까이할 수 없는 위엄이나 위품을 의미하려고 하지만, 존귀하신 하나님은 그렇게
자신을 높이고자 할 필요가 없으신 분이시다. 그러므로 창조자이신 하나님은 스스로 있는 자(여호와)라 하심에서도 이미 인간과
비교할 수 없는 분이심을 피력하고 계신다. 그러므로 그지 그분이 거룩하다 하심은 흠이 없고 온전하심을 나타내시는 것으로써 그분이
태초부터 약속하신 것을 하나도 어긋남 없이 온전히 이루어지게 하신다는 뜻으로써 ‘거룩하시다’라는 것이며, 그러므로 하나님을 믿는
자에게도 그분이 거룩하심 같이 너희도 거룩한 믿음을 가지라는 것으로써, 조금도 의심 없는 온전한 믿음을 가지라는 것을 베드로는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에게 너희는 거룩한 백성이라 하심에는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것을 하나도 어김없이 다
이루심이라는 것과 인류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약속을 이루게 하는 백성이라는 것을 의미하신다는 뜻으로 ‘거룩한 백성’이라 부르신
것임을 깨닫게 되는 것이다. 이 어둠의 세상에 빛(복음)으로써, 이스라엘을 통해 하나님의 구원역사를 반드시 이루심으로써, 거룩한
백성을 세우셨고,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사실화 하였으며, 메시아, 예수 그리스도로 그 언약, 약속을 이루셨음을 확증케 하셨기에,
예수님은 믿는 그들에게 이렇게 고백하라고 기도를 가르쳤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고, 나라가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며,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짐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짐을 고백하며 확실한 믿음, 즉 거룩한 믿음을 가리라고 베드로는 말했던 것이다.
“세계가 다 내게 속하였나니 너희가 내 말을 잘 듣고 내 언약을 지키면 너희는 모든 민족 중에서 내 소유가 되겠고 너희가 내게 대하여 제사장 나라가 되며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 (출 19:4-5)
하나님의 보물(세굴라)이라는 신분(status)과 제사장 나라라는 사명(mission)을 갖고 있는 하나님 백성들에게
우선적으로 요구되는 것은 거룩한 삶이다. ‘거룩’을 히브리어로는 ‘카도쉬’인데, 어원적 의미는 ‘구별된 것’이다. ‘거룩’의
일반적 용례는 하나님에게 바치기 위해 특별히 구별된 사람이나 물건을 가리킨다. 그러나 ‘거룩’을 하나님에게 적용시키면, 피조물과
구별되는 하나님의 창조성을 의미한다. 그래서 ‘거룩하신 하나님’은 창조주 하나님의 또 다른 명칭이다.
하나님은 인격적인 분이시기에 기계적으로 우리들을 대하지 않으신다.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거룩하신 하나님과 공통분모인 거룩한
삶이 있어야 한다. 구약시대 제사장들은 다른 일반백성들 보다도 더욱 엄격한 거룩함의 기준이 요구되었는데, 그것은 제사장이라는
그들의 위치와 직무가 중요하였을 뿐 아니라 하나님 가까이 있어야 하기 때문이었다. 하나님께 쓰임 받는 그릇의 조건은 깨끗한
것이다.
디모데후서 2:20-21에 의하면, 큰 집에는 여러 종류의 그릇이 있다. 재료로는 금그릇, 은그릇, 나무그릇, 질그릇
등이 있고, 용도로는 귀하게 쓰이는 그릇, 천하게 쓰이는 그릇 등이 있다. 그러나 이렇듯 다양한 종류와 용도의 그릇이 있지만,
하나님께서 쓰실 수 있는 그릇은 깨끗한 그릇 뿐이다. 제아무리 좋은 재료로 값지게 만들어졌다 하여도 깨끗하지 못하면 아무 소용이
없다.
하나님 백성으로서 이스라엘이 거룩해야 함은 하나님의 임재와 관련이 있다. 하나님은 거룩한 분이시기에 그분과 함께 있기
위해서는 거룩이 필수적 요건이다.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레 19:1)는 명령은 하나님께서 우리 가운데 함께 임재하시고
싶으시다는 열망을 표현한 것이다. 그러기에 우리의 거룩은 하나님께서 임재하시는 통로가 된다. 그래서 거룩은 정적인 개념이 아니라
하나님의 임재와 밀접히 관련되는 역동성을 지닌다. 이스라엘의 제사제도가 이방인들의 제사제도와 다른 것도 그런 점과 관련된다. 곧
이방인의 제사는 신의 분노를 잠재우기 위한 소극적 면을 지니지만, 이스라엘의 제사제도는 하나님의 임재를 지속적으로 유지하기
위함이라는 적극성을 지니고 있다.
거룩은 하나님 백성들이 승리롭게 살아가는 능력이며 진정한 카리스마이다. 성경 인물 중에서 흠 없이 거룩한 삶을 산 대표적인
인물로는 요셉을 꼽을 수 있다. 그는 형들에 의하여 애굽에 팔려가는 역경의 삶을 살면서도 믿음을 잃지 않았다. 보디발의 집에서
억울한 누명을 쓰고 감옥에 갇히는 신세가 되었지만, 하나님께서는 그의 거룩한 삶을 통해 모든 것을 극복하게 하였고 마침내 당대
최강국이었던 애굽의 총리로 올라서게 만드셨다. 신앙의 힘은 거룩한 삶을 통하여 나타나는 생명력에서 찾을 수 있다. 홍수가 나서
모든 것이 떠내려가더라도 살아있는 작은 물고기는 거센 물살을 헤치고 거슬러 올라간다. 그것이 살아있는 생명력이 보여주는 위력이다.
거룩은 하나님의 임재를 지속적으로 유지시켜주는 통로이며 어떤 난관이라도 극복할 수 있는 참된 능력이다. 그러므로 거룩한 삶의
내적 증거는 모든 것에서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면서 그분의 주권을 인정하는 것이다. 그것은 “범사에 감사하라”(살전 5:18)는
하나님의 뜻과 밀접하게 상응한다. ‘감사하다’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토다’는 어원적으로 감사의 대상을 인정하고 신뢰함을
의미한다. 곧 하나님의 창조적 주권과 섭리를 선포하는 것이 감사이다. 하나님에게는 과거와 현재와 미래와 같은 상대적 시간 구분이
적용되지 않는다. 전체 시간이 하나님의 주권과 섭리의 영역이 되기 때문에, 감사는 과거와 현재 뿐 아니라 아직 도래하지 않은
미래까지도 그 범위에 포함된다. 성경에서 강조하는 중요한 신앙 덕목 중 하나가 인내(기다림)인 것도 그 때문이다. 신앙 안에서
기다림은 억지로 참고 견디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하나님께 대한 기대감과 벅찬 감격으로 가득 찬 시간의 연속이다. 거룩한 하나님의
사람들은 범사에 감사하며 살 수 밖에 없다. 그것이 하나님 백성들의 정체성이며 거룩한 사람들이 살아가는 방식(life
style)이다.
11월 10일(월) 누가복음 7-9장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별세(別世)하실 것(9:31)
영광 중에 나타나서 장차 예수께서 예루살렘에서 별세하실 것을 말씀할쌔. appeared in glorious splendor, talking with Jesus.
They spoke about his departure, which he was about to bring to
fulfillment at Jerusalem.
관련 성경 / 별세하실 것(눅 9:31), 떠날 것, 떠남(히 11:22, 벧후 1:15).
영광 중에 나타나실 것은 죽음 후에 다시 살아나셔서 부활의 몸으로 드러나실 것을 예고한 것입니다.
영광(榮光) 독사(dŏxa) δόξα, ης, ἡ
1. 광명. 2. 눅 2:9. 3. 위엄 Pronunciation
[ dŏxa ] Etymology / 1380의 어간에서 유래 관련 성경 / 영광(마 4:8, 막 8:38, 눅 2:9), 광채(행 22:11), 영화(榮華)(요 17:5)
나타나실 것(3708)은 보게 될 것을 말합니다.
호라오(hŏraō) ὁράω
1. 보다. 2. 마 28:7. 3. 눅 1:22 Pronunciation
[ hŏraō ] 관련 성경 / 보이다(마 8:4), 알리다(마 9:30), 주의하다(마 16:6), 보다(눅 1:22, 요 1:18, 고전 9:1).
별세(別世. 엑소돈)하실 것이란 헬라 단어는 엑소도스라고(1841) 합니다.
구약에서의 출애굽은 노예로 살던 히브리 백성들이 애굽에서 나오는 것을 말합니다. 신약에서의 출애굽은 죄로 말미암아 죽어야 하는 인생들이 죽음에서 다시 살아나게 될 부활의 생명을 말합니다. 그런데 모든 죽었던 인생들이 다시 살아날 때 그 후에는 두 가지 삶의 영역으로 분리된다는 것을 잊지말아야 합니다.
死자는 ‘죽다’라는 뜻을 가진 글자이다. 死자는 歹(뼈 알)자와 匕(비수 비)자가 결합한 모습이다. 匕자는 손을 모으고 있는 사람을 그린 것이다. 그런데 갑골문에 나온 死자를 보면 人(사람 인)자와 歹자가 그려져 있었다. 이것은 시신 앞에서 애도하고 있는 사람을 그린 것이다. 해서에서부터 人자가 匕자로 바뀌기는 했지만 死자는 누군가의 죽음을 애도하고 있는 모습에서 ‘죽음’을 표현한 글자이다.
성경은 인간의 타락 이후 죽음을 단지 ‘육체의 생명 종료’로만 보지 않습니다. 오히려 훨씬 더 깊고 복합적인 영적·관계적·존재론적 의미를 지닌 사건으로 설명합니다. 이 글에서는 창세기 3장의 타락 이후 성경에 나타난 인간의 죽음을 여러 차원에서 통합적으로 살펴보며, 각 죽음이 지닌 의미와 그 결과, 그리고 궁극적인 회복에 대해 설명하겠습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죽음을 보다 확장하여 죄의 영향력으로 인한 죽음의 상징까지도 포함했습니다.
실제적, 육체적 죽음 (Physical Death)
정의
육체의 숨이 끊어지고 생명 활동이 멈추는 죽음으로, 아담의 타락 이후 모든 인간에게 주어진 피할 수 없는 현실입니다.
본문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 (창세기 3:19)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들어왔나니…” (로마서 5:12)
특징
전 인류 보편성: 누구도 피할 수 없음 (히브리서 9:27 “한 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
죄의 결과: 인간은 영원한 존재로 창조되었으나, 죄로 인해 시간 속 존재로 전락.
심판의 예고: 육신의 죽음은 종말의 심판을 예고하는 표징입니다.
회복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이 죽음을 이긴 승리의 선언입니다.
“죽음아 너의 승리가 어디 있느냐” (고린도전서 15:55)
영적 죽음 (Spiritual Death)
정의
하나님과의 교제가 단절되고, 생명의 근원으로부터 끊어진 상태입니다. 이것은 타락의 순간에 이미 시작된 죽음이며, 겉으로는 살아 있어도 실상은 죽은 상태입니다.
본문
“너희의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 (에베소서 2:1)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 (창세기 2:17)
특징
하나님의 임재에서 단절됨: 아담과 하와는 에덴동산에서 쫓겨남.
죄에 대한 감각의 마비: 죄를 자연스럽게 여기고, 하나님을 거부하게 됨.
자기중심성의 확산: 생명 대신 자기의 유익과 욕망을 따름.
회복
성령으로 거듭나야만 이 죽음에서 살아날 수 있습니다.
“성령으로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 (요한복음 3:3)
관계적 죽음 (Relational Death)
정의
인간이 하나님과의 관계뿐 아니라, 타인과의 관계에서도 단절과 왜곡을 겪는 죽음입니다. 죄는 공동체와 사랑의 연합을 파괴하는 근본적인 독소입니다.
본문
아담: “하나님이 주셔서 나와 함께 있게 하신 여자…” (창세기 3:12) → 책임 회피.
가인과 아벨: 형제를 살해함으로 형제 관계의 파괴 (창세기 4:8).
특징
책임 회피와 비난: 관계의 단절은 신뢰와 책임의 붕괴로 이어짐.
폭력과 시기, 분노: 인간관계가 생명의 통로가 아닌, 고통과 갈등의 현장으로 변함.
사랑의 기능 상실: 하나님의 형상으로서 이웃을 사랑하는 기능이 왜곡됨.
회복
그리스도 안에서의 화해가 관계적 죽음을 이기는 길입니다.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시고…” (요한일서 4:12)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을 하나로 만드사…” (에베소서 2:14)
존재론적 죽음 (Existential Death)
정의
인간이 하나님으로부터 분리됨으로써 자신이 누구인지, 왜 사는지를 상실한 상태입니다. 이는 자기 존재에 대한 왜곡, 공허, 허무, 불안으로 드러납니다.
본문
전도서의 흐름: “헛되고 헛되며 모든 것이 헛되도다.” (전도서 1:2)
아담이 숨은 장면: “내가 벗었으므로 두려워하여 숨었나이다.” (창세기 3:10)
특징
존재 불안과 공허: 인간은 목적을 잃고, 인생의 의미를 상실함.
자기 정체성의 붕괴: 하나님의 형상으로서의 본분을 잃고, 자기 욕망에 끌림.
삶의 허무감: 모든 수고와 성취가 무의미하게 느껴짐.
회복
예수 안에서만 인간은 참된 존재 의미를 회복할 수 있습니다.
“너희는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라.” (고린도후서 5:17)
영원한 죽음 (Eternal Death)
정의
회개 없이 죽은 자에게 주어지는 영원한 형벌입니다. 이는 단순한 ‘끝’이 아니라, 하나님 없이 영원히 존재해야 하는 지속적인 단절의 상태입니다.
본문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에 던져지리니 이것이 둘째 사망이라.” (요한계시록 21:8)
“지옥에서는 그 벌이 끝이 없으며…” (마태복음 25:46)
특징
돌이킬 수 없는 상태: 은혜의 기회가 완전히 끝남.
의식 있는 고통: 존재는 유지되나, 하나님과의 생명 관계는 단절됨.
영원한 분리와 슬픔: 생명의 하나님을 볼 수 없음.
회복
이 죽음에서의 유일한 구원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복음을 따르는 길뿐입니다.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요한복음 3:16)
요약: 죽음은 단지 '끝'이 아니라 '단절'이다
죽음의 차원
특징
회복의 길
육체적 죽음
생물학적 삶의 끝, 죄의 물리적 결과
부활 신앙, 영생의 소망 (고전 15장)
영적 죽음
하나님과의 단절, 죄 가운데 죽은 상태
성령 안에서 거듭남 (요 3:3, 엡 2:5)
관계적 죽음
사람과 사람 사이의 파괴된 신뢰, 사랑의 왜곡
화해와 용서, 그리스도 안에서의 사랑 (엡 2)
존재론적 죽음
자기 정체성과 의미 상실, 공허와 불안
창조주 안에서의 정체성 회복 (고후 5:17)
영원한 죽음
회개 없는 자에게 임하는 영원한 단절과 심판
오직 복음을 통한 구원 (요 3:16)
결론 : 생명 되신 그리스도만이 죽음을 이기십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인간의 타락은 다양한 차원의 죽음을 우리에게 가져왔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는 생명이요, 부활이요, 길이요, 진리 되시는 분입니다. 그분 안에 거하는 자는 영적·관계적·존재적 죽음에서 해방될 뿐 아니라, 영원한 생명과 사랑 안에 머물게 됩니다. 오늘도 우리 안에 남아 있는 죽음의 그림자를 말씀과 성령으로 이겨내며, 참 생명이신 그리스도 안에서 살아가기를 소망합니다.
1. "죽음은 사라진다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고, 절대로 완전히 사라진다는 것을 바라지 말라."
- 존 테러 -
2. "죽음은 생명의 일부로서 우리를 완전히 해방시키는 것이다."
- 미셸 드 몽테뉴 -
3. "죽음은 누구에게나 동일한 대우를 한다. 우리는 얼마나 살지를 선택할 수 없지만, 어떻게 살지는 선택할 수 있다.“
- 루이스 스타인 -
4. "사람들은 죽음을 두려워하기 때문에 삶을 두려워하는 것이다."
- 알버트 카뮈 -
5. "죽음은 빈 공간이 아니라, 심지어 더 높은 목적을 위한 출발점이다."
- 랄프 왈도 에머슨 -
6. "죽음을 두려워하는 것보다 더 큰 고통은 죽음을 피하기 위해 살아감을 두려워하는 것이다."
- 소크라테스 -
7. "죽음은 마치 커튼을 걷어내는 것과 같다. 우리는 그 뒤에서 삶의 실체를 발견할 수 있다."
- 윌리엄 셰익스피어 -
8. "죽음은 우리가 가장 많이 알고 있는 미지의 경계선이다."
- 제임스 콜맨 -
9. "죽음은 생명의 빛깔 중 하나이다."
- 조지 산타야나 -
10. "죽음은 우리에게 더 큰 의미와 목표를 위한 동기를 부여한다."
- 로버트 핀크 -
11. "죽음은 우리가 인생을 소중히 여길 수 있는 이유이다."
- 헨리 반 다이크 -
12. "죽음은 모든 인간이 공유하는 경험이다."
- 데일 카네기 -
13. "죽음은 더 나은 인간이 되기 위한 기회이다."
- 시어도어 루스벨트 -
14. "죽음은 우리가 가진 시간의 가치를 강조한다."
- 윈스턴 처칠 -
15. "죽음은 이전 세대에서 새로운 세대로의 연결고리이다."
- 매튜 아놀드 -
16. "죽음은 우리에게 희망과 변화의 가능성을 준다."
- 프리드리히 니체 -
17. "죽음은 우리의 한계를 초월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본질을 드러내는 것이다."
- 에밀리 디킨슨 -
18. "죽음은 우리의 행동과 희망에 대한 계기이다."
- 아리스토텔레스 -
19. "죽음은 우리에게 용기를 부여하고 최선을 다하는 동기를 제공합니다. 해주며, 더 나은 버전의 우리 자신이 되도록 도와준다."
- 마하트마 간디 -
20. "죽음은 우리에게 삶의 소중함을 깨닫게 하고, 현재 순간을 귀중히 여기도록 유도한다."
- 스티브 잡스 -
프랑스의 철학자이자 음악학자인 블라디미르 장켈레비치는 죽음에 대한 강의로 유명했다. 이번에 국내 번역된 ‘죽음’은 그가 소르본대학에서 1957∼1959년 두 학기 동안 강의한 내용을 정리한 것이다.
죽음에
대한 깊고 섬세한 사유를 보여주는 책이 번역돼 나왔다. ‘죽음’은 프랑스 철학자이자 음악학자인 블라디미르
장켈레비치(1903∼1985)의 죽음 강의를 정리한 책으로 1966년에 출판됐다. 죽음 철학에 대한 기념비적 저작으로 평가받으며
유럽과 미국, 일본 등에서 출간됐지만 국내에서는 묵직한 분량과 문장의 난해함 때문에 번역이 이뤄지지 못했다. 대신 이 책의 대중적
판본이라고 할 장켈레비치 대담집 ‘죽음에 대하여’(돌베개)가 소개돼 있다.
고전어와 고전철학 연구자인 김정훈의 번역으로 만나게 된 ‘죽음’은 역시 읽기가 쉽지 않다. 하지만 천천히 읽어가면 무난하게 이야기를 따라갈 수 있다. 읽어가는 과정이 고스란히 죽음을 생각하는 시간이 될 수 있다.
장켈레비치는 먼저 죽음이 왜 그렇게 난감한 문제이고, 설명하기 어려운지 짚어본다.
“죽어가는 인간이 존재해 온 지 그토록 오래되었는데도, 어째서 죽을 인간들은 이 자연스러우면서도 언제나 우발적인 사건에 아직도 익숙지 않은 것일까요?”
“죽음의 관념을 남에게 전해주는 것이 불가능할뿐 아니라, 무엇보다도 내 자신의 최소한의 관념을 갖는 것조차 불가능한 것입니다.”
종교에
기대지 않고 논리적 언어로 죽음을 이해하고 설명한다는 것은 지극히 어려운 일이다. 그는 “한정하고 명확히 하는 것이 말의
사명이라면, 죽음의 유한성의 헤아릴 수 없는 성격은 말에 대한 하나의 도전과도 같다”면서도 죽음에 대해 말하기를 시도한다.
그는
죽음을 표현하기 위해 모순적이고 역설적이고 양가적인 설명을 동원한다. 화가가 빛과 어둠을 통해 형체를 그려내는 방식과 비슷하다.
“죽음이 없다면 삶이 아니다”라는 설명이 대표적이다. “산 자는 죽을 운명이라는 조건에서만 산 자인 것이죠… 죽는 것만이
살아있을 수 있으니까요.” 이어 “죽음이라는 잠재적으로 현존하는 미래가 없다면, 현재는 순수하고 단순한 영원과 뒤섞일 테고”,
영원한 현재란 “하나의 끝없는 반복, 밀도도 농도도 없는 하나의 단조롭고 아주 지루한 연속일 뿐”이라고 덧붙인다.
이런
설명을 반복하고 변주하면서 죽음에 대한 이해를 심화한다. 그는 죽음이 삶을 방해하는 것인 동시에 실존의 근본 조건이라는 점을
표현하기 위해 ‘기관-장애물’이라는 말을 사용한다. “죽음은 삶의 기관-장애물입니다… 살아있는 자는 자신이 저항하는 죽음이라는
장애물에도 불구하고 자기를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또한 바로 이 장애물 덕분에 자기를 주장하는 것입니다.”
또 죽음은
확실하지만 그 시간은 불확실하다는 점에서 우리 삶을 ‘절반의 열림’이라고 묘사한다. “삶이 한쪽에는 출생 날짜라는 고정점에 붙어
있고, 다른 쪽 끝에서는 죽게 되지만 시각의 우연성 덕분에 반쯤 열린 채로 유지된다면, 그러니까 삶이 반쯤 자유롭다면, 그때는
우리의 계획을 한없이 갱신하는 것이 가능해집니다.”
그러므로 삶은 비극적인 것과 더불어 사는 것이다. “사람은 현재 및
가까운 미래에 대한 신뢰와 먼 장래에 대한 절망 사이에서 진동하듯이 흔들린다고 말해야 할 것입니다… 사람은 ‘둘 사이에’ 자리
잡고 있는 것이 아니라, 연속적인 왕복운동으로 한 쪽에서 다른 쪽으로 오가고 있습니다.”
죽음은
인간에게 가장 분명한 사실이지만, 나에게는 가장 믿기 어려운 사실이다. 인간의 가장 확실한 미래이면서, 나의 모든 미래 중 가장
먼 미래다. 죽음은 인간의 삶에 꼭 붙어 있지만, 나의 삶에서는 제외돼 있다. 이 격차는 죽음과 나를 분리하기 때문이다.
장켈레비치는 3인칭이나 2인칭이 아니라 1인칭의 죽음을 사유한다. 타인의 추상적 죽음이나 부모의 가까운 죽음이 아니라 나의 죽음을
생각하게 한다. 내가 죽는다는 걸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나, 결국 죽는다면 내가 살아가는 의미는 무엇인가….
“살아온
삶이 닫히고 완결될 때, 사람들은 자문합니다. 무슨 소용일까? 그래요, 운명의 창공에서 아무개 씨의 이 짧은 산책은 무슨 의미가
있을까요?… 그리고 애초에 왜 아무개 씨는 영원히 비존재로만 머물지 않고 어느 날 태어난 것일까요? 그리고 태어났으면, 왜 어느 날
존재하기를 그만두어야 할까요?… 도대체 이 모든 것의 목적이 무엇일까요?”
장켈레비치는 “우리는 유한성의 충만함과
비존재의 영원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면서 삶을 굳이 시작할 만한 가치가 있다는 쪽에 선다. “죽은 이는 더 이상 삶으로 돌아갈
수 없지만, 살았던 이는 결코 다시는 태어나기 전의 무로 떨어지지 않을 것입니다… 그것은 영원한 비실존으로부터 구해집니다.”
죽더라도
나는 삶을 살았던 사람이 된다. 그것은 영원한 비존재에서 가까스로 구원되는 기적이다. 또 한 사람이 지상에서 짧게 머물고 갔던 그
세계는 그런 일이 없었던 세계와는 앞으로 언제까지나 달라지는 것이다. “있었던 것은 있지 않았던 것일 수 없습니다.”
장켈레비치는
죽음을 둘러싼 거의 모든 질문을 포괄하면서 독창적인 방식과 언어로 답을 찾아나간다. 죽음이라는 압도적 사실에 맞서면서 기어코
삶의 의미를 구축해내는 지성이 경탄스럽다. ‘죽음’은 거의 60년 전에 나온 책이지만 앞으로 한국에서 죽음을 논의하는 자리마다
끊임없이 불려나올 것이다.
무라카미 하루키는 “죽음이란 생명의 반대가 아니다. 죽음은 삶의 일부다.”라는 말을 통해, 죽음을 삶과 분리된 대립적 개념이 아니라, 삶의 연속성과 본질적인 일부로 바라봐야 한다고 강조했습니다
이 명언은 하루키 작품 세계의 근간이자, 그의 인생관을 대표하는 문장으로 자주 인용됩니다. 하루키는 죽음을 삶의 끝이나 반대편으로 두지 않고, 삶의 과정 속에 자연스럽게 포함된 필연적 순환으로 이해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즉, 삶과 죽음은 서로 얽혀 있으며, 죽음을 인식하고 받아들일 때 오히려 삶의 순간순간이 더 소중해지고, 진정한 의미와 가치를 발견할 수 있다는 메시지를 전달합니다245.
이러한 하루키의 시각은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줄이고, 삶을 더욱 충실하게 살아가야 한다는 성찰로 이어집니다.
삶과 죽음은 동전의 양면처럼 분리될 수 없는 하나의 길이며, 죽음이라는 마지막 이정표를 인식함으로써 우리는 매 순간을 더 의미 있게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이 하루키가 전하는 철학입니다
삶과 죽음의 의미를 철학적으로 분석
삶과 죽음은 인간이 마주하는 가장 근본적이고 피할 수 없는 문제입니다. 철학은 고대부터 현대까지 이 문제에 대해 끊임없이 사유해왔습니다. 이번 글에서는 고대 그리스, 중세 기독교, 근대 철학, 현대 실존철학, 동양철학, 그리고 현대 심리학까지 다양한 관점에서 삶과 죽음을 심층적으로 탐구합니다. 이를 통해 삶과 죽음을 바라보는 우리의 시야가 한층 더 넓어지길 바랍니다.
고대 서양 철학에서 본 삶과 죽음
소크라테스: 죽음을 두려워하지 말라
소크라테스는 《변론》에서 죽음을 두려워하는 것은 무지에서 비롯된다고 강조했습니다.
"죽음이란 어쩌면 가장 큰 축복일지도 모른다. 우리는 그것을 알지 못할 뿐이다."
삶과 죽음 모두 인간이 이해할 수 없는 신의 섭리 아래 있으며, 철학자는 죽음을 삶의 일부로 받아들여야 한다고 가르쳤습니다.
플라톤: 영혼의 불멸
플라톤은 《파이돈》에서 "육체는 소멸하지만 영혼은 불멸"이라고 주장했습니다. 삶은 영혼이 진정한 세계(이데아의 세계)로 돌아가기 위한 준비과정이며, 철학이란 죽음을 준비하는 작업이라고 했습니다.
▶ 핵심 철학: 죽음은 두려움이 아니라, 영혼의 귀향이다.
중세와 근대 철학에서 본 삶과 죽음
아우구스티누스: 영원한 생명을 향한 희망
기독교 철학자 아우구스티누스는 죽음을 통해 영원한 삶, 즉 신과 함께하는 구원의 삶에 이른다고 보았습니다.
삶은 일시적이며, 죽음은 참된 삶을 여는 문입니다.
▶ 핵심 철학: 죽음은 끝이 아니라 시작이다.
데카르트: 인식 주체로서의 존재
데카르트는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를 통해, 생물학적 생명보다 사고하는 존재를 강조했습니다. 죽음조차도 사유의 대상이며, 죽음 앞에서도 인간은 사고하는 한 존재합니다.
▶ 핵심 철학: 죽음은 인식 가능한 '사건'이며, 주체성은 죽음 속에서도 유지된다.
현대 실존철학에서 본 삶과 죽음
하이데거: 죽음은 삶의 완성
《존재와 시간》에서 하이데거는 인간을 '죽음을 향한 존재'로 규정합니다.
"인간은 죽음을 앞에 두고 진정한 자신의 가능성을 선택한다."
죽음을 직시할 때 우리는 진정으로 현재를 살아가게 됩니다.
▶ 핵심 철학: 죽음을 외면하면 삶도 피상적이 된다. 죽음을 직면하는 것이 진정한 존재방식이다.
사르트르: 죽음은 무의미, 의미는 삶에서 만들어진다
사르트르는 죽음이 본질적으로 무의미하다고 봤습니다. 삶은 죽음이라는 절대적 경계 앞에서도 끊임없이 의미를 만들어가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 핵심 철학: 죽음은 의미를 부여하지 않는다. 의미는 살아 있는 동안 만들어진다.
카뮈: 부조리와 죽음
알베르 카뮈는 인간 존재를 '부조리'로 설명했습니다. 죽음은 피할 수 없지만, 그 부조리 속에서도 인간은 살아야 한다고 강조했습니다.
"우리는 돌을 굴리는 시지프처럼 끝없는 고통 속에서도 존엄을 지켜야 한다."
▶ 핵심 철학: 죽음은 삶의 부조리성을 드러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삶을 긍정해야 한다.
동양철학에서 본 삶과 죽음
노자: 삶과 죽음은 하나다
《도덕경》에서 노자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삶과 죽음은 하나의 흐름이다. 자연을 거스르지 마라."
노자는 죽음을 두려워하거나 거부하는 것이 아니라, 자연의 흐름 속 일부로 받아들여야 한다고 말합니다. 삶과 죽음은 따로 분리된 것이 아니라, 자연의 변화일 뿐입니다.
▶ 핵심 철학: 죽음은 삶의 일부이며, 자연스러운 변화다.
불교: 무상(無常)과 연기(緣起)
불교는 모든 존재가 '무상'하며(영원한 것이 없으며), 모든 것은 서로 의존하고(연기) 존재한다고 봅니다. 죽음 역시 존재의 소멸이 아니라, 인연의 변화일 뿐입니다.
▶ 핵심 철학: 삶과 죽음은 끝이 아니라, 끊임없는 변화의 과정이다.
현대 심리학에서 본 삶과 죽음
엘리자베스 퀴블러-로스: 죽음 수용 과정
엘리자베스 퀴블러-로스는 죽음 수용 단계를 다음과 같이 제시했습니다.
부정(Denial)
분노(Anger)
타협(Bargaining)
우울(Depression)
수용(Acceptance)
죽음은 단순한 끝이 아니라, 인간이 살아가면서 심리적으로 준비해 나가야 할 중요한 과정입니다.
▶ 심리학적 통찰: 죽음을 받아들이는 과정은 인간 성장의 일부이다.
빅터 프랭클: 의미를 향한 의지
빅터 프랭클은 《죽음의 수용소에서》에서 인간은 극한 상황에서도 삶의 의미를 찾을 수 있다고 강조했습니다. 죽음 앞에서도 의미를 찾는 노력이 인간을 존엄하게 만든다고 보았습니다.
▶ 심리학적 통찰: 삶의 의미를 발견하는 순간, 죽음조차 삶을 빛나게 한다.
삶과 죽음: 종합적 사유
죽음은 삶의 끝이 아니라 삶을 구성하는 일부다.
죽음을 직시하는 것은 삶을 깊이 있게 살아가는 열쇠다.
삶은 주어진 것이 아니라, 스스로 의미를 만들어가는 과정이다.
삶과 죽음 모두 자연의 일부이며, 부자연스러운 것이 아니다.
죽음의 자각은 삶을 더욱 충만하게 만든다.
결론
삶과 죽음은 대립하는 것이 아닙니다. 삶은 죽음을 향해 열려 있고, 죽음은 삶의 의미를 반추하게 합니다.
철학은 우리에게 이렇게 가르칩니다:
죽음을 두려워하지 말 것.
죽음을 성찰할 것.
죽음을 통해 더욱 깊이 삶을 사랑할 것.
오늘 하루, 죽음이 있다는 사실은 당신의 하루를 더욱 소중하게 만듭니다. 그리고, 삶을 아름답게 하는 것은 결국 죽음을 기억하는 그 마음입니다.
죽은 사람은 무덤 속에서 무엇을 하고 있을까요?
죽은 자들은 부활의 순간까지 무덤 속에서 어떤 상태로 있을까요? 성경은 죽음을 “잠”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잠”이야말로 죽음에 대한 가장 적합한 표현이기 때문입니다. 예수께서도 죽은 자를 가리키면서 “잠자고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가라사대 물러가라 이 소녀가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 하시니”(마 9:24)
다니엘은 그리스도의 오심에 대하여 예언하면서, 흙으로 돌아간 죽은 자들이 잠에서 깨어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때에 네 백성 중 무릇 책에 기록된 모든 자가 구원을 얻을 것이라 땅의 티끌 가운데서 자는 자 중에 많이 깨어 영생을 얻는 자도 있겠고 수욕을 받아서 무궁히 부끄러움을 입을 자도 있을 것이며”(단 12:1,2)
성경의 저자들은 왜 죽음을 잠이라고 표현했을까요? 몹시 피곤에 지쳐서 밤에 잠자리에 누우면 눕자마자 깊이 잠들게 되는데,
다음날 아침에 깨어나면 긴 밤이 마치 한순간처럼 느껴지게 됩니다. 자기가 잠든 동안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를 전혀 모르는 상태로
깊은 무의식 세계 속에서 잠을 잔 것입니다. 죽음도 마찬가지입니다. 성경이 죽음을 잠이라고 부르는 이유는, 죽음은 마치 잠과
같아서 시간과 공간과 주변 사물을 전혀 의식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아침이 되어 잠에서 깨어나는 것처럼, 예수께서 재림하시는 날에
죽음이라는 잠에서 깨어날 것입니다. 죽는 순간부터 부활하는 때까지를 “순간”처럼 느끼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죽음에
대해서 이렇게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성경이 말하는 죽은 자의 상태
자식이 잘되고 못 되는 것도 전혀 느끼지 못한다: “그 아들이 존귀하나 그가 알지 못하며 비천하나 그가 깨닫지 못하나이다”(욥 14:21)
일체의 감정과 의식이 없다: “죽은 자는 아무것도 모르며”(전 9:5), “그 호흡이 끊어지면 흙으로 돌아가서 당일에 그 도모(plan, 계획)가 소멸하리로다”(시 146:4)
무활동의 상태이다: “일도 없고 계획도 없고 지식도 없고 지혜도 없나니”(전 9:10)
고통도 느끼지 못하고 하나님을 찬양할 수도 없다: “사망 중에서 주를 기억함이 없사오니 음부(무덤, grave)에서 주께
감사할 자가 누구리이까”(시 6:5), “내가 무덤에 내려갈 때에 나의 피가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 어찌 진토가 주를 찬송하며 주의
진리를 선포하리이까”(시 30:9), “죽은 자가 여호와를 찬양하지 못하나니 적막한 데 내려가는 아무도 못하리로다”(시
115:17), “음부(무덤)가 주께 사례하지 못하며 사망이 주를 찬양하지 못하며 구덩이에 들어간 자가 주의 신실을 바라지 못하되
오직 산 자 곧 산 자는 오늘날 내가 하는 것과 같이 주께 감사하며 주의 신실을 아비가 그 자녀에게 알게 하리이다”(사
38:18,19)
죽음은 이런 상태로 들어가는 것인데, 어떻게 영혼이 살아있어서 천국에서 영생을 누릴 수 있습니까? 눈을 떠서 성경을 읽고, 성령의 음성을 들을 귀가 있는 성도들은 죽음과 영혼에 대한 진리를 깨닫게 될 것입니다.
성경은 죽음 이후의 상태를 “잠”(sleep)이라고 표현하고 있는데, 이런 표현은 죽음에 대한 여러 가지 오해를 풀어줍니다.
오늘날 기독교뿐 아니라 여타의 종교계에 공존하는 가장 대표적인 사상은 “죽음 이후에도 생각하고 대화할 수 있다”는 가르침입니다.
오직 성경만이 사람이 죽으면 아무것도 모른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무릇 산 자는 죽을 줄을 알되 죽은 자는 아무것도 모르며 다시는 상도 받지 못하는 것은 그 이름이 잊어버린 바
됨이라 그 사랑함과 미워함과 시기함이 없어진 지 오래니 해 아래서 행하는 모든 일에 저희가 다시는 영영히 분복이 없느니라 … 무릇
네 손이 일을 당하는 대로 힘을 다하여 할지어다 네가 장차 들어갈 음부(무덤)에는 일도 없고 계획도 없고 지식도 없고 지혜도
없음이니라”(전 9:5,6,10)
죽음에 대하여 이렇게 분명한 말씀이 있는데 누가 감히 죽은 자의 영혼이 살아서 느끼고 생각하고 감사할 수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까? 죽음에 대한 편견과 선입관이 너무나 깊이 뿌리 박혀 있기 때문에 아무리 분명한 성경 말씀을 눈앞에 보여줘도 진리를
외면하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이 있습니다. 마치 성경에 “사람이 죽어도 영혼은 살아있다”는 말씀이 있는 것처럼 믿고 따라가고
있습니다. 너무나 안타깝게도 하나님의 백성들이 유교와 불교와 미신에서 가르치는 “죽은 자의 영혼은 살아있다”는 교리를 맹목적으로
따르고 있습니다.
만일 죽은 의인들이 죽는 순간에 하늘나라로 인도된다면, 그들은 하나님을 큰 소리로 찬양하지 않을까요? 그러나 다윗은 죽은
사람에게 대해서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죽은 자가 여호와를 찬양하지 못하나니 적막한 데 내려가는 아무도 못하리로다”(시
115:17), “사망 중에서는 주를 기억함이 없사오니 음부에서 주께 감사할 자가 누구리이까”(시 6:5).
사도 바울의 장례식 설교
신문에 가끔 실리는 장례 광고에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글을 보게 됩니다. “000님께서는 향년 89세의 나이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천국으로 가셨기에 이에 부고합니다.” 또한 장례식장에서 “성도님의 영혼이 훨훨 날아서 하늘로 올라갔으니 후에 하늘에
가서 다시 만날 수 있다”고 위로하는 설교를 들을 수 있습니다. 정말로 죽은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아들과 딸들의 영혼은 하늘로
올라가 있을까요? 사도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인들에게 “그러므로 이 여러 말로 서로 위로하라”는 것으로 장례 설교를 끝마쳤습니다. 바울은 어떻게 유가족을 위로했을까요?
“주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로 친히 하늘로 좇아 강림하시리니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고 그 후에 우리 살아남은 자도 저희와 함께 구름 속으로 끌어 올려 공중에서 주를 영접하게 하시리니 그리하여 우리가 항상
주와 함께 있으리라 그러므로 이 여러 말로 서로 위로하라”(살전 4:16-18)
이 말씀에서 바울은 하늘에서 예수님과 함께 있을 수 있는 방법을 말하고 있습니다. 바울의 장례 설교에서 “그리하여 우리가
항상 주와 함께 있으리라”는 말씀을 쉽게 넘기면 안 됩니다. 언제부터 항상 주님과 함께 있을 수 있다고 했습니까? 성도들이
부활해서 “구름 속으로 끌어 올려 공중에서 주를 영접”할 때부터 “항상 주님과 함께 있으리라”고 했습니다. 이것이 유가족들에게 줄
수 있는 최고의 소망입니다. 죽은 가족의 영혼이 연기처럼 몸을 떠나서 천국에 가거나 지옥으로 떨어진다는 식의 설교는 유가족들에게
아무런 위로가 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성경의 부활신앙과도 정면으로 충돌합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사별했을 때, 그가 하늘나라에
가서 지상에 남겨두고 온 가족들이 세상에서 겪는 마음 아픈 상황들을 내려다보고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유가족들에게 참된 위안을
가져다줄 수 있을까요?
바울은 죽음과 무덤이 끝이 아니라는 영광스러운 진리를 설교했습니다. 바울은 유가족들에게 죽음의 잠에서 깨어나는 부활을 말하면서 위로했습니다. 부활의 날에 의인들은 불멸의 몸을 선물로 받을 것인데 그 일은 순식간에 일어날 것입니다.
“우리가 다 잠잘 것이 아니요 마지막 나팔에 순식간에 홀연히 다 변화하리니 나팔 소리가 나매 죽은 자들이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고 우리도 변화하리라 이 썩을 것이 썩지 아니할 것을 입겠고 이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으리로다”(고전
15:51-53)
모든 죽은 자들은 완전한 무의식 세계 속에서 잠을 자다가 자신의 운명을 결정하는 최종 선고를 듣기 위해서 일어날 것입니다.
그들이 1,000년 전에 잠들었든지 또는 예수께서 재림하시기 하루 전에 잠들었든지, 그들에게 있어서 부활하는 순간까지의 시간은
0.01초도 안되는 “찰나”처럼 느껴질 것입니다.
어떤 분들은 ‘썩어서 부패하여 흙으로 돌아간 시체들을 어떻게 회복시키실 수 있을까?’를 생각하면서 염려합니다. 물론, 어떤
시체들은 폭탄에 맞아서 흩어지고, 어떤 시체들은 불에 타고, 어떤 사람들은 깊은 바다에 빠져서 수장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염려하지 않아도 됩니다. 말씀 한마디로 하늘의 해와 달과 별을 만드시고, 생명의 근원이신 창조주께서 각 사람의 모습과 개성을
완전하게 회복시키는 데에 어떤 어려움이 있을 수 있을까요? 아무 문제도 없습니다. 창조주 하나님께서는 각 개인을 완전하게
부활시키는 데에 아무런 문제도 없습니다.
성경은 죽은 자들은 완전한 무의식 속에서 부활의 시간까지 “잠”을 자고 있다고 선언하고 있습니다. 이제 독자들이 대답할 차례가 되었습니다. “죽은 사람들은 무덤 속에서 무엇을 하고 있을까요?”
[사막교부에게 배우는 삶의 지혜] 죽음을 기억하라!
임종의 순간, 그는 웃었다…죽음은 끝이 아닌 부활의 문이기에
‘죽음을 기억하라!(Memento mori!).’ 이는 사막 교부들의 중요한 가르침 중 하나다. 삶도 아닌 죽음을
기억하라니, 좀 낯설게 들릴 수도 있을 것이다. 그리스도교에서는 죽음이 끝이 아니라 부활의 전제이자 또 다른 삶(생명)으로
건너가는 문이다. 이런 의미에서 그리스도교적 죽음은 생명을 품고 있는 죽음이라 할 수 있다. 죽음으로 모든 것이 끝난다면 삶은
너무 허무할 것이다. 또 죽음이 없다면 삶은 어떻게 될까? 탄생만 있고 소멸은 없다면, 우리가 상상하지 못할 일이 벌어질 것이다.
삶과 죽음은 동전의 양면과도 같다. 삶은 곧 죽음이요, 죽음은 곧 삶이다. 플라톤은 참된 철학은 죽음에 대한 준비라고 하였다.
삶은 죽음에 대한 준비와도 같다. 결국 잘 죽기 위해 잘 사는 것이라 하겠다.
죽음을 기억함
거룩한 사람들은 죽음을 잘 맞이하기 위해 늘 준비했다. 특히 4세기 이집트 사막 수도승들은 끊임없이 죽음을 묵상하며 늘
죽음을 눈앞에 두고 살았다. 수도승은 매일 죽음을 기억해야 한다는 생각은 초기 수도승 문헌에서 자주 발견된다. 이는 낙담과
자포자기를 피하는 탁월한 수단이었다. 죽음에 대한 기억은 한편으론 수도승을 오류에 빠지지 않도록 지켜주고, 다른 한편으론 덕을
닦고 실천하도록 부추긴다.
금언들은 수도승들이 어떻게 이 규칙을 실천했는지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다. 압바 안토니우스는 이렇게 권고한다. “매일
죽어야 하는 것처럼 산다면, 죄를 짓지 않을 것입니다. 이것은 매일 우리가 깨어날 때 저녁때까지 살지 못하리라고 생각해야 함을,
그리고 다시 침대에 눕는 순간에 우리가 더 이상 깨어나지 못하리라고 생각해야 함을 의미합니다.”(안토니우스 생애 19,2-3)
에바그리우스와 카시아누스는 마카리우스의 다음 말을 반복했다. “수도승은 마치 다음 날 죽을 것처럼 언제나 준비되어 있어야
한다.”(프락티코스 29; 규정집 5,41)
사막 교부들은 죽음을 두려운 불청객으로 맞이하지 않고 오히려 늘 깨어 죽음이라는 손님을 맞이하려고 준비했으며, 죽음을 이
세상의 노고에서 해방해 주는 고마운 친구로 생각했다. 사진은 미국 뉴멕시코주 사막의 그리스도 수도원의 수도자 묘지. 허성석 신부
제공
압바 루푸스는 이렇게 말했다. “언제 도둑이 오리라는 것을 모른다는 것을 기억하며 장차 닥칠 형제의 죽음을
기억하십시오.”(루푸스 1) 또 어떤 원로는 “나는 매일 아침저녁 죽음을 기다린다”고 말했다. 또 어떤 원로는 이렇게 권고하였다.
“당신이 잠잘 때 당신 자신에게 물어보시오. ‘내일 아침 나는 잠에서 깨어날 것인가 깨어나지 못할 것인가?’”(익명의 압바
592)
이 외에도 많다. 결국 죽음을 늘 기억하는 것은 바로 오늘이 생애 마지막 날이라고 생각하며 사는 것이다. 교부들은
무엇보다 매일 새롭게 시작한다는 생각으로 열정을 유지하는 데 주의를 기울였다. 우리가 매일 죽는 것처럼 산다면 결코 죄를 짓지
않을 것이다.
항상 죽음 묵상한 수도승들…영원한 안식 얻기 위해 노력
삶과 죽음은 동전의 양면…매 순간 소중히 여기며 살길
죽음을 맞이하는 자세
어느 날 갑자기 도둑처럼 찾아오는 이 손님을 어떻게 맞이할 것인가? 승리의 월계관을 얻으려고 경기장을 벗어나지 않고
끝까지 잘 달려간 사람들, 소위 거룩한 사람들이 죽음을 맞이한 모습은 우리에게 시사해 주는 바가 많다. 물론 모두가 똑같은
방식으로 죽음이라는 손님을 맞이하지는 않았지만, 거기에는 공통분모가 있다. 곧 모두 이 손님을 환대했다는 것이다. 그들은 결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특히 사막 수도승들은 자주 자신을 죽음으로 몰았던 질병과 마찬가지로 죽음 역시 두려워하지 않았다. 그들은 계속 죽음에
대해서 생각했고 자주 이야기했다. 사막 교부들은 죽음을 두려운 불청객으로 맞이하지 않았고, 오히려 늘 깨어 죽음이라는 손님을
맞이하려고 준비했으며, 죽음을 이 세상의 노고에서 해방해 주는 고마운 친구로 생각했다는 것을 보게 된다.
이처럼 거룩한 삶을 살아간 사람들에게 죽음은 불청객이 아니라 오히려 친구요 벗이었다. 하지만 죽음을 친구로 맞이하기
위해서는 늘 깨어 준비할 필요가 있다. 준비되어 있지 않은 사람에게는 죽음은 늘 불청객으로 머물 것이다. 우리가 어떻게
준비했느냐에 따라 죽음을 맞이하는 모습은 판이할 것이다.
사막의 인상적 죽음
4세기 이집트 사막의 한 원로 수도승의 다음 일화는 죽음에 대한 수도승들의 견해를 잘 대변하고 있다. 임종 순간 머리맡에
둘러선 제자들이 울고 있자, 그는 갑자기 눈을 뜨고 세 번 크게 웃었다. 그러자 제자들이 그 이유를 물으니 이렇게 대답했다.
“먼저, 나는 그대들 모두 죽음을 두려워하기에 웃었소. 두 번째는 그대들 가운데 아무도 준비된 사람이 없어서 웃었소. 마지막으로
내가 세상의 노고를 벗고 영원한 안식을 얻을 것이기에 기뻐서 웃었소.”(익명의 압바 279) 원로는 이 말을 마치고 숨을
거두었다고 한다.
원로는 이별을 목전에 두고 형제들이 느끼는 슬픔에 무감각하지 않았다. 그의 유쾌한 반응은 형제들의 정신을 딴 데로 돌려,
자기에게는 지극히 단순한 사건인 죽음을 극화시키지 않도록 권유하는 한 방법이었다. 거룩한 수도승들은 죽을 때가 다가와도 절대
놀라지 않았다. 고대 이집트인은 죽음 앞에서 침통해하지 않았다. 그들의 종교적 신념은 그들로 하여금 반은 이승에서, 반은 저승에서
살게 했다.
최후의 순간을 아름답게 맞이하는 것은 중요하다. 하지만 그것은 하루아침에 되지 않는다. 평소 죽음을 잘 준비한 자만이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말이 있다. “당신에게 좋은 소식과 나쁜 소식이 있다. 좋은 소식은 당신이 천국에 간다는 것이고, 나쁜
소식은 당신이 오늘 거기에 간다는 것이다.” 누구나 천국에 가기를 원하지만 지금 당장 가기를 원하지는 않는다. 그만큼 죽음을 맞을
준비가 되어있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위에서 말하는 나쁜 소식이 우리에게 도둑처럼 갑자기 다가올 수도 있을 것이다.
어떤 의미에서 우리는 모두 시한부 인생이다. 내가 언제 죽느냐를 아느냐 모르느냐에 따라 삶을 대하는 우리 자세는 엄청나게
달라질 수 있다. 늘 죽음을 염두에 두고 현재 이 순간을 소중히 여기며, 감사한 마음으로 최선을 다해서 살며, 죽음을 잘
준비하는 자세가 필요하다. 그때 죽음이라는 손님은 우리에게 더 이상 불청객이 아니라 친구요 벗으로 다가올 것이다. 베네딕토 성인은
“매일 죽음이 눈앞에 있음을 명심하라”(규칙 4,47)는 말을 했다. 우리 인생의 마지막 순간을 아름답게 장식할 수 있도록 매일
죽음을 눈앞에 두고 모두 죽음을 잘 준비했으면 한다.
도가
① 삶과 죽음은 기(氣)가 모였다가 흩어지는 것 ☞ ( 자연적 )이고 필연적인 과정
성인(聖人)의 삶은 자연의 운행과 같고, 죽음은 만물의 변화와 같다. 그는 행복을 추구하지 않으며, 불행을 자초하지 않는다. 그의 삶은 물 위에 떠 있는 것과 같고, 죽음은 휴식과 같다. -장자 (모평 제시문)
②
장자: “본래 아무것도 없었는데 순식간에 변화하여 ( 기 )(氣)가 생기고, 기가 변화하여 형체가 생기고, 형체가 변화하여
생명이 생기고, 생명이 변화하여 ( 죽음 )이 된다.” ☞ 삶과 죽음을 서로 연결된 ( 순환 )과정으로 보며 죽음에 ( 초연 )할
것을 강조함.
진인(眞人)은 삶을 즐겁다 할 줄도 모르고 죽음을 싫다 할 줄도 몰랐다. 태어남을 기빼하지도 않고 죽음을 거역하지도 않았다. 의연히 갔다가 의연히 돌아올 뿐이다. 삶을 그대로 받아들여 살다가 잊어버린 채로 되돌아갔다. 본래 삶이 없었을 뿐만 아니라 본래 형체도 없었다. 본래 형체만 없었던 것이 아니라 본래 기(氣)도 없었다. 그저 흐릿하고 어두운 속에 섞여 있다가 그것이 변하여 기가 되고, 기가 변하여 형체가 되었고, 형체가 변하여 삶이 되었다. -장자
죽음이란 삶의 시작이며 삶이란 죽음을 뒤따르는 것[徒]이다. 사람의 삶이란 기(氣)가 모인 것이다. 기가 모이면 삶이 되고 기가 흩어지면 죽게 된다. -장자 (학평 제시문)
③
장자: “사람이 태어난 것은 태어날 때를 만났기 때문이며, 세상을 떠난 것은 떠나야 할 때가 되었기 때문이다. 하늘이 정해 준
때를 마음 편히 여기고 운명에 ( 순응 )하면 슬픔과 즐거움이 끼어들 수 없게 된다.” ☞ 삶을 달관할 때 진정한 행복에 이를 수
있음.
진인(眞人)은 삶을 기뻐하지도 않고, 죽음을 싫어하지도 않는다. 착한 일을 행하여 명성을 가까이하지도 말고 악한 짓을 행하여 형벌을 가까이하지도 말아야 한다. -장자
문상(問喪)하러 가서 대성통곡하는 것은 자연[天]의 도(道)에서 벗어나는 것이고, 사물의 본성을 배반하는 것이다. 지인(至人)은 편안한 마음으로 때를 받아들여 슬픔이니 기쁨이니 하는 것들로부터 자유롭다. -장자 (학평 제시문)
사랑하는 이의 죽음이 슬픈 일인가? 생명이란 본래 자연에서 빌린 것이니 마치 티끌과 같고, 삶과 죽음의 이치는 밤낮의 변화와 같다. 이제 우리는 그 자연스런 변화를 바라보노니, 그것이 내게 왔다고 해서 어찌 싫어하겠는가. -장자 (모평 제시문)
성인(聖人)의 삶은 자연의 운행과 같고, 죽음은 만물의 변화와 같다. 그는 행복을 추구하지 않으며, 불행을 자초하지 않는다. 그의 삶은 물 위에 떠 있는 것과 같고, 죽음은 휴식과 같다. -장자 (모평 제시문)
삶과 죽음은 명(命)이다. 대자연은 육체를 주어 나를 이 세상에 살게 하며, 삶을 주어 나를 수고롭게 하며, 늙음으로 나를 편안하게 해주며, 죽음으로 나를 쉬게 한다. -장자 (모평 제시문)
의리는 산 같고 죽음은 홍모(鴻毛) 같다(Loyalty is like a mountain, and death is like a red hair)9
이 속담(俗談)의 의미는 "의리는 산(山)같이 무겁고, 죽음은 기러기의 털과 같이 가볍다"(Righteousness is as heavy as a mountain, and death is as light as a goose's feather)는 뜻으로, 의리(義理)를 위하여, 죽음을 가볍게 여기는 경우를 이르는 말이다. 의리(義理)는 "사람이 살아가는데 있어 마땅히 지켜야할 도리"라고 정의하고 있다. '안중근' 의사가 조선 침략의 원흉인 일본의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한 이후 "뤼순 감옥"(旅顺监狱)에 투옥돼 있을 때
'‘견리사의 견위수명"(見利思義 見危授命)이라는 글을 남겼다. 그 뜻은 ''이익을 보거든 옳은 것인가를 생각하고, 국가가 위태로운 것을 보면 목숨을 바쳐라’'(Think about what's right when you see a profit, and if you see a country at stake, give it your life)는 글대로 국가를 위하여 순국(殉國)하였다.
예나 지금이나 국가나 사회가 곤경 또는 위기에 처해 있을 때 개인이나 집단이 자신의 부귀나 권력, 명예를 추구한다면 사회 불신과 갈등, 혼란만 키우게 된다. 사사로이 자신의 이익만 탐할 경우 그 결과는 참담할 수밖에 없다. 독립운동가로 '안중근'의 어머니 '조 마리아' 여사(본명. 조성녀 趙姓女)는 아들 '안중근' 의사(義士)에게 “아들아, 나라를 위해
떳떳하게 죽어라!”("My son, die with honor for your country!)고 말하였다. 그 어머니의 그 아들이었다.
일본 내각총리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하고 사형 판결을 받자 "항소하지 말라"고 권했다. 아들이 결국 처형된 뒤 '조마리아' 여사는 중국 상하이에서 당시 임시정부 인사들에게 여러 도움을 주며, 독립운동의 정신적 지주로 불렸다.
당신은 어떤 이름으로 역사에 남을 것인가?
배신은 내부(內部)에서 시작된다. 내부가 무너지면 외부( 外部)는 스스로 무너지는 법이다. 이것을 "내파(內破 implosion)와 외파(外破External break)라고 부른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시기 전날 밤 "내가 고난을 받기 전에 너희와 함께 이 유월절 먹기를 원하고 원하였노라"(눅 22:15)고 말씀하신 "최후의 성만찬"(Last Supper) 앞에 사랑하는 제자의 배신(背信)을 당하셨다.
그 이름 '가롯 유다'(Garrot Judas)이다.
그는 은(銀 silver) 30냥에 예수님을 팔아 넘겼다. '가롯 유다'(Garrot Judas) 가장 불명예를 남긴 역사의 죄인이요, 가장 불행한 이름, 가장 슬픈 이름을 남겼다.
첫째, , 이력(履歷)이 불명예롭다. 예수님의 제자가 스승을 팔아넘긴 배신자(背信者)이다.
둘째, 유산(遺産)이 불명예롭다. 은 30냥으로 ''피의 땅 아겔다마"를 샀기 때문이다.
셋째, 죽음이 불명예롭다.
양심의 가책으로 자살(自殺)하였기 때문이다.
순교자(Martyr)는 못 될지언정 역적(逆賊 Rebel)을 스스로 자처했으니 그는 천추만대 부끄러운 존재로, 예수님은 그를 "차라리 태어나지 않았더라면 좋을 뻔하였느니라"(마태복음 26:24)고 안타까워 하셨다. 그의 불행은 자업자득(自業自得)일 뿐이다(His bad luck is all of his own doing) 자기가 뿌린 씨를 자기가 거둔 것이다(He has sown the seeds he has sown)
"의인을 위하여 죽는 자가 쉽지 않고 선인을 위하여 용감히 죽는 자가 혹 있거니와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롬 5:7-8)
죽음은 마침표가 아닙니다. Death is not a period. by 김소엽 시인
죽음은 마침표가 아닙니다
죽음은 영원한 쉼표,
남은 자들에겐
끝없는 물음표.
그리고 의미 하나.
땅 위에 떨어집니다
어떻게 사느냐는
따옴표 하나,
이제 내게 남겨진 일이란
부끄러움 없이 당신을 해우할
느낌표만 남았습니다.
사람들은 모두 죽으면 끝이라고들 말합니다. 그래서 인생사 재 미없는 사람들은 스스로 목숨을 끊기도 합니다. 지겨운 세상,
모든 고통을 순간적으로 끝내는 방법으로 죽음을 선택합니 다. 그리고 인생사 너무 재미있는 사람들은 반대로 어떻게든 죽지 않고
하루라도 더 오래 살기 위해서, 아둥바둥 최선을 다하기도 합니다. 그러 나, 성경은, ‘한 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다’고 말씀했습니다. 죽으면 끝인 줄 알았는데, 죽으면 시작되는 새로운 세계가 있다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죽음을 늘 잔다고 표현하셨습니다. 자는 것과 죽음은 정말 어감이 다릅니다. 자는 것은, 마치 쉬는 것과 같습 니다. 자는 것은
마침표가 아니라, 쉼표입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죽으셨다가 사흘만에 부활하셨 을
때, 저들은 홀연히 죽음이 쉼표임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리스도인들 에게 죽음은 마침표가 아니라, 기분좋은 쉼표입니다. 잘 자고
일어나면, 지난 날의 피로가 다 풀려, 새롭게 하루를 기분좋게 시작할 수 있는 것처 럼, 모든 사망권세를 이기시고, 우리에게
죽음을 ‘쉼표’로 만들어 천국에서 영원히 살게 해주신 부활의 주 예수 그리스도께 감사와 찬양과 영광을 올 려 드립니다. 샬롬.
2021.04.04.
죽음이 인생에게 말하는 것
장민희 중앙대학교 심리서비스 연구소
인간의 실존, 유한하고 때론 무력한 존재
인간의 삶은 불완전하다. 왜냐하면 인간의 존재 자체가 불완전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것을 인간의 실존적인 특성이라고 이해할 수
있다. 특히 자신이나 가까운 누군가가 질병이나 사건·사고로 인해 죽음을 직면하게 되면, 우리는 유한한 존재와 무력한 인생에 대한
회의를 느끼게 된다. 그리고 이러한 역경으로 인해 때론 살아있음에 대한 감사보다는 살아가야 함에 대한 깊은 무게와 걱정이
압박으로 다가올 수도 있다. 하지만 이러한 삶과 죽음에 대한 갈림은 모두가 피할 수 없는 만인에게 공평한 조건이기도 하다.
삶의 본질이 사랑이라면, 죽음은 사랑하는 모든 것들과 이별이 될 것이다. 죽음 앞에서 못다한 사랑을
애달파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지 모른다. 오스트리아 상징주의 화가 클림트는 죽음과 삶의 대비를 이토록 극적으로 묘사했다. 구스타프
클림트Gustav Klimt 1862~1918. '죽음과 삶', 1910/15, 캔버스에 오일, 180.5 × 200.5 cm, 오스트리아 레오폴트 미술관 소장.
죽음 앞에서 삶을 조우한다는 것
‘죽음’을 마주한다는 것은 우리가 흔히 경험할 수 없는, 그러면서도 보통은 어떠한 경험보다도 강력한 삶의 역경이다. 죽음이
어느 누군가의 것이 아닌, 나의 것 혹은 내가 사랑하는 사람의 것으로 다가올 때 우리는 좌절할 수밖에 없다. 때로는 죽음 그
자체보다 죽어감의 과정이 더 고통스러울 지도 모르겠다. 죽어감의 과정 가운데 수많은 삶의 기억과 생각들이 교차하게 될 테니
말이다.
실제로 죽음 앞에서 사람들은 자신의 삶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한다. 그러면서 자신의 삶에 대한 후회 역시 피할 수 없는 것
같다. 후회는 개념적으로 인지적인 것과 정서적인 것을 포함하는 것으로, 후회를 하게 되면 정서적으로 불만족과 불쾌감을 동반하게
된다. 그리고 그렇게 하지 못한 것, 선택하지 못한 것에 대해 인지적으로 반추하는 경험도 한다Tomer & Eliason, 2008. 그리고 이것이 삶의 마지막 단계에서는 삶에 대한 통합의 반대 개념인 절망despair으로 다가오기도 한다Erikson, 1963.
사람들이 후회하는 것들
그렇다면 사람들은 삶의 마지막에 어떤 후회를 할까? 과거에 대한 후회에는 하지 않은 일에 대한 후회와 한 것에 대한 후회가 있는데, 사람들은 보통 과거에 한 일보다는 하지 못한 일에 대해 더 후회를 한다Tomer & Eliason, 1996. 예를 들어, 자신이 더 많은 물질을 축적하지 못하고 고생만 하다 죽게 되는 것을 후회하거나 원망하기도 하고, 타인에게 나의 것을 더 나누지 못한 것을 후회하기도 한다.
전반적으로 대부분의 사람들이 후회하는 것은 대인관계와 관련되는 것 같다. 깨어진 가족관계, 용서하지 못한 타인, 단절되고
고립되어 느끼는 외로움에 대한 후회가 많다. 이러한 후회는 자신의 삶의 마지막을 어떻게 해석하고 마무리할 것인지 즉 죽음에 대한
불안과 큰 연관이 있다장민희, 정태연, 2018.
흥미롭게도 이러한 후회는 젊은이들의 경우와도 매우 흡사하다. 토머와 엘리아슨은 백여 명의 대학생들에게 과거 후회할만한 일을 제시하고 어느 정도 후회하는지 평가하도록 했다Tomer & Eliason, 2005. 그
결과, 대부분이 공통적으로 후회하는 것은 관계에 관한 것이었다. 충분히 관계를 맺지 못한 것, 친구나 가족과 충분한 시간을 갖지
못한 것 등이 주를 이루고 있었다. 소수의 공통된 후회에는 돈의 축적과 같은 것이나 건강을 위해 노력하지 않은 것 등이었다.
죽음이 주는 삶의 의미
죽음은 우리에게 많은 것을 말해주고 많은 것을 남겨준다. 죽음은 존재와 삶에 대한 반추를 하게하는 강한 힘이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반추의 힘이 과거의 삶을 후회하게 만들어 우리를 힘들게 할 수 있지만, 그것을 미리 생각해 보는 것은 자신의 삶을 더
풍요롭게 만드는 계기가 될 수도 있다.
저자는 한 동안 ‘호스피스’와 ‘죽음’에 대한 연구를 한 경험이 있다. 어린 나이에 무턱대고 시작한 연구 주제였는데, 아직도
생생한 기억의 조각판으로 남아있을 만큼 큰 의미이다. 그리고 때로 내 인생의 무게와 불안감이 파도처럼 밀려올 때 그때의 기억을
다시금 꺼내보기도 한다.
혹시 인생을 살아가면서 삶이 너무 버겁게 느껴진 적이 있는가? 그러면 언젠가 필연적으로 맞이하게 될 자신의 죽음을 생각해 볼
것을 추천하고 싶다. 죽음 앞에서 당신은 무엇을 후회하고 있을까. 누군가를 미워하는 일, 현재의 삶을 불평하는 일, 나의 여러
삶의 조건에 불만족하는 일. 그 모든 것이 언젠가는 되돌릴 수 없는 후회로 다가올지 모른다. 특히나 내 옆에 소중한 사람에 대한
가치를 알지 못하는 것은 머지않아 큰 후회가 될지 모른다.
오늘 하루를 후회 없이 살아가는 일, 내 옆 자리를 지키는 사람을 사랑하는 일, 이것은 우리가 유한한 존재인 탓에 반드시
깨달아야할 삶의 가치들이다. 이러한 점에서 죽음은 인생에게 오늘을 가치 있게 살아야할 이유와 희망을 제시하는 삶의 역설이지
않을까.mind
<참고문헌>
Erikson, E. H. (1963). Childhood and society (2nd ed.). New York: W. W. Norton.
Tomer, A. & Eliason, G. T. (1996). Toward a comprehensive model of death anxiety. Death Studies, 20, 343-365.
Tomer, A. & Eliason, G. T. (2005). Life regrets and death attitudes in college students. Omega, 51, 173-195.
Tomer, A. & Eliason, G. T. (2008). Regret and death attitudes. In A. tomer, G. T. Elisson, & P. T. P. Wong (Eds.), Existential and spiritual issues in death attitudes, (pp. 159-172). New York: Lawrence Erlbaum Associates.
장민희, 정태연 (2018). 호스피스 봉사 경험이 삶과 죽음 태도 변화에 미치는 영향. 스트레스연구, 26(2), 95-102.
20. 나사로라 이름한 한 거지가 헌데를 앓으며 그 부자의 대문에 누워 21. 부자의 상에서 떨어지는 것으로 배불리려 하매 심지어 개들이 와서 그 헌데를 핥더라 22. 이에 그 거지가 죽어 천사들에게 받들려 아브라함의 품에 들어가고 부자도 죽어 장사되매 23. 저가 음부에서 고통 중에 눈을 들어 멀리 아브라함과 그의 품에 있는 나사로를 보고 24. 불러 가로되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나를 긍휼히 여기사 나사로를 보내어 그 손가락 끝에 물을 찍어 내 혀를 서늘하게 하소서 내가 이 불꽃 가운데서 고민하나이다 25. 아브라함이 가로되 얘 너는 살았을 때에 네 좋은 것을 받았고 나사로는 고난을 받았으니 이것을 기억하라 이제 저는 여기서 위로를 받고 너는 고민을 받느니라 26. 이뿐 아니라 너희와 우리 사이에 큰 구렁이 끼어 있어 여기서 너희에게 건너가고자 하되 할 수 없고 거기서 우리에게 건너 올 수도 없게 하였느니라 27. 가로되 그러면 구하노니 아버지여 나사로를 내 아버지의 집에 보내소서 28. 내 형제 다섯이 있으니 저희에게 증거하게 하여 저희로 이 고통 받는 곳에 오지 않게 하소서 29. 아브라함이 가로되 저희에게 모세와 선지자들이 있으니 그들에게 들을찌니라 30. 가로되 그렇지 아니하니이다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만일 죽은 자에게서 저희에게 가는 자가 있으면 회개하리이다 31. 가로되 모세와 선지자들에게 듣지 아니하면 비록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는 자가 있을찌라도 권함을 받지 아니하리라 하였다 하시니라.
호이 오프덴테스 엔 돜세 엘레곤 텐 엨소돈 아우투 헨 에멜렌 플레룬 엔 예루살렘
개역개정,31 영광중에 나타나서 장차 예수께서 예루살렘에서 별세하실 것을 말할새 새번역,31 그들은 영광에 싸여 나타나서, 예수께서 예루살렘에서 이루실 일 곧 그의 ㉤떠나가심에 대하여 말하고 있었다. / ㉤'세상에서 떠나가심' 곧 '죽으심' 우리말성경,31 그들은 영광에 싸여 나타나 예수께서 예루살렘에서 이루실 일, 곧 그분의 떠나가심에 대해 말하고 있었습니다. 가톨릭성경,31 영광에 싸여 나타난 그들은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서 이루실 일, 곧 세상을 떠나실 일을 말하고 있었다. 영어NIV,31 appeared in glorious splendor, talking with Jesus. They spoke about his departure, which he was about to bring to fulfillment at Jerusalem.
영어NASB,31 who, appearing in glory, were speaking of His departure which He was about to accomplish at Jerusalem. 영어MSG,31 and what a glorious appearance they made! They talked over his exodus, the one Jesus was about to complete in Jerusalem.
영어NRSV,31 They appeared in glory and were speaking of his departure, which he was about to accomplish at Jerusalem. 헬라어신약Stephanos,31 οι οφθεντες εν δοξη ελεγον την εξοδον αυτου ην εμελλεν πληρουν εν ιερουσαλημ 라틴어Vulgate,31 visi in maiestate et dicebant excessum eius quem conpleturus erat in Hierusalem 히브리어Modern,31 אשר נראו בכבוד והגידו את אחריתו אשר ימלאנה בירושלים׃
성 경: [눅9:31]
주제1: [인자의 신분과 사역의 공개]
주제2: [변화산에서의 예수]
예루살렘에서 별세하실 것 - 누가만이 모세, 엘리야와 예수의 대화 내용을 보도하고 있다. 여기서 '별세'로 번역된 헬라어는 '엑소도스'(*)인데 이말은 '나감'(going out), '출발'(departure)의 뜻으로 죽음의 본질적 의미를 드러낸다. 즉 죽음이란 영혼이 육체로부터 떠나가는 것으로 적어도 예수에게 있어서 이것은 새로운 출발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다른 한편 '엑소도스'는 이스라엘의 출애굽을 의미하기도 하는 바(히 11:22) 예수의 죽음은 죄악으로 인한 죽음의 상황에서 인류를 탈출시키는 의미도 있다. 그런데 여기서도 강조되는 것은 영광스러운 변모의 찬란함 속에서 대화의 내용이 바로 '예수의 죽음'이라는 사실이다. 모세와 엘리야의 모든 사역은 결국 예수의 죽음을 예비하는 것이었다. 예루살렘은 예수의 수난과 부활의 장소로서 제시되며 그의 전도여행은 분명한 목적지를 향해 가고 있었다.
28절에서 “이 말씀을 하신 후”
“그 말씀”은 세 가지로서 예수님의 정체에
대한 신앙 고백, 주님의 십자가와 부활에 대한 메시지, 그리고
하나님 나라의 도래와 심판에 대한 메시지입니다.
마태복음에서는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여 이르되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마 16:16).
마가복음에서는 “베드로가 대답하여
이르되 주는 그리스도시니이다”(막 8:29).
여기서 베드로는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그리스도의 정체를 알게 된 신자들의 대표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정체에 대한 베드로의 고백 이후에 예수님은 그 사실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경고하십니다. 마가복음, 마태복음, 누가복음에 기록된 내용을 차례로 읽어 보겠습니다.
8:30. 이에 자기의
일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 경고하시고 31. 인자가 많은
고난을 받고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버린
바 되어 죽임을
당하고 사흘 만에
살아나야 할 것을
비로소 그들에게 가르치시되
16:20. 이에 제자들에게
경고하사 자기가 그리스도인
것을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라 하시니라 21. 이 때로부터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가
예루살렘에 올라가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제삼일에 살아나야
할 것을 제자들에게
비로소 나타내시니
9:21. 경고하사 이
말을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라 명하시고 22. 이르시되 인자가
많은 고난을 받고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버린 바 되어
죽임을 당하고 제삼일에
살아나야 하리라 하시고
(막 8:30-31; 마 16:20-21; 눅 9:21-22)
즉, 예수님은 하늘 아버지의 역사로
인해 주 예수님의 정체를 바르게 고백한 제자들에게 그 사실을 아무에게도 알리지 말라고 한 후에 자신의 십자가의 죽음과 제 삼일에 부활할 것을 알려주신
것입니다. 그러자 신자들을 대표하는 베드로가 갑자기 예수님께 항변합니다.
“베드로가 예수를
붙들고 항변하여 이르되
주여 그리 마옵소서
이 일이 결코
주께 미치지 아니하리이다”(마 16:23).
그리고 이에 대해 예수님께서는 베드로가 대표하는 모든 제자들을 앞에서 베드로를
엄중히 책망을 하십니다.
“예수께서 돌이키사
제자들을 보시며 베드로를
꾸짖어 이르시되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막 8:33; 마 16:23).
그리고 그 후 제자들에게 하신 교훈은 마태, 마가, 누가 복음에 동일하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 내용을 종합하면 이러합니다.
눅 9:23-25 무리에게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구원하리라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자기를 잃든지 빼앗기든지
하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막
8:37-38 사람이
무엇을 주고 자기
목숨과 바꾸겠느냐 누구든지
이 음란하고 죄
많은 세대에서 나와
내 말을 부끄러워하면
인자도 아버지의 영광으로
거룩한 천사들과 함께
올 때에 그
사람을 부끄러워하리라
마
16:27 인자가
아버지의 영광으로 그
천사들과 함께 오리니
그 때에 각
사람이 행한 대로
갚으리라
다시 오실 예수님과 그분의 심판을
알려주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 다음으로 하신 말씀은 이제 곧 자신이 부활 승천하신 후에 성령을 보내심으로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 임할 것을 알려주십니다.
눅
9:27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여기 서 있는
사람 중에 죽기
전에 하나님의 나라를
볼 자들도 있느니라
막
9:1 하나님의
나라가 권능으로 임하는
것을 볼 자들도
있느니라 하시니라
그러므로 예수님의 정체는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그리스도로 이 땅에 오신 분”이시고, 그분이 이 땅에 오신 목적은 뚜렷하게 “십자가에서 고난” 받으심이요, 그러나 사흘 만에 부활하실 것이며, 곧 이어서 하나님의 나라가 영적으로 임할 것이고, 그 후 예수님께서
거룩한 천사들과 함께 이 땅에 오셔서 복음과 예수 그리스도를 시인하고 전한 자들에게 상을 주실 것이고, 반면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 자들”은
스스로 구원하려는 자들로서 도리어 제 목숨을 잃는 심판을 받게 될 것을 알려주신 것입니다.
이러한 복음의
핵심이 “그 말씀”이고 그 말씀을 하신 후에 팔 일쯤 되어
예수께서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를 데리고 기도하시러 산에 올라가사 기도하실 때에 용모가 변화되고 그 옷이 희어져 광채가 난 것입니다.
“기도하실 때에
용모가 변화되고 그
옷이 희어져 광채가
나더라”(29절).
그러므로 우리는 변화산 상에서의 그리스도의 영광을 대하기 전에 이러한 구체적인
복음의 말씀이 있다는 사실을 마음에 두어야 합니다. 그리고 변화산 사건은 ‘세 가지의 메시지를 포함한 그 말씀’을 하나님께서 친히 증거하시는
사건인 것입니다.
지금
이 사건은 환상이나 마음의 내면에서 들은 영적인 음성이 아닙니다. 지어낸 이야기도 아닙니다. 역사 속에서 실제로 발생했던 사건으로써 증인들이 있는 사건입니다. 이
장면이 실제였음을 먼 훗날에 베드로가 고백합니다. 이 말씀과 사건은 그가 평생 잊지 못할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그의 서신 베드로후서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힘써 너희로 하여금 내가 떠난 후에라도 어느 때나 이런 것을 생각나게 하려 하노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과 강림하심을
너희에게 알게 한 것이 교묘히 만든 이야기를 따른 것이 아니요 우리는 그의 크신 위엄을 친히 본 자라. 지극히
큰 영광 중에서 이러한 소리가 그에게 나기를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하실 때에 그가 하나님 아버지께 존귀와 영광을 받으셨느니라. 이 소리는 우리가 그와 함께 거룩한 산에 있을 때에 하늘로부터 난 것을 들은 것이라” (벧후 1:15-18).
아무튼 예수께서 기도하실 때 용모가 변화되자 모세와 엘리야가 어디선가 영광 중에
나타나서 예수님과 대화를 나눕니다. 그런데 그 내용은 얼마 후 “예수께서
예루살렘에서 별세하실 것”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참으로
놀랍게도 별세의 헬라어 원어는 “엑소더스”라고 되어 있습니다. 모세와 엘리야가 예수님과 나눈 내용은 과거의 출애굽 엑소더스가 아니라 새로운 엑소더스(New Exodus)였습니다. 그들은 “뉴-엑소더스”에 대하여
논하고 있습니다. 뉴-엑소더스는 죄악의 세력으로부터, 죄의 심판으로부터, 죽음에서, 병에서, 사탄으로부터, 육욕의 굴레에서부터의 탈출을 의미합니다. 즉,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이들에게 임할 뉴-엑소더스에 대해 대화를 나눈 것입니다.
이때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가 졸다가 깨어 부스스한 가운데 이러한 모든 장면을 보게 되고 그들의 대화의 내용을 듣게 됩니다. 이들은 그 광경이 너무나 황홀해서 입을 다물 수가 없었습니다. 베드로가
황홀함 가운데 헛소리를 합니다.
“여기서 살고 싶습니다. 여기가 좋사오니 초막 셋을
짓겠습니다. 하나는 모세를, 또 다른 하나는 엘리야를, 그리고 세 번째는 예수님을 위해 짓겠습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베드로는 모세와 엘리야를 예수님과 같은 자리에 함께 놓는 실수를 범하고 있습니다.
베드로가 이 말을 할 즈음에 하나님께서 여호와의 영광을 나타내는 구름과 함께 그곳에
임하십니다. 그리고 구름
속에서 소리가 나서
이르되 “이는 나의
아들 곧 택함을
받은 자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하고
그 소리가 그치자
엘리야와 모세는 보이지
않고 오직 예수만
보이게 됩니다(참조, 눅 9:35-36).
사랑하는 여러분! 그리스도의 영광스러운 변형은 주의 부활 및 부활 이후의 그리스도의 상태를 미리
보여주는 것입니다. 또한 동시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인 사실을 입증하는 사건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그리스도를 따라 순종하는 우리에게는 십자가의 고난 이후에 있을 분명한 영광을 보게 되면서
영원한 하나님 나라의 소망과 영광을 붙들고 더욱 주 예수님의 말씀을 따라 행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즉, 예수님께서 당부하신 것처럼,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를 따를 것이며 그리스도와 그분의 복음을 위하여 나의 목숨을 잃을 각오를
할 것입니다. 또한 더욱 영원한 영광의 나라와 그리스도를 바라보며 사람의 일보다는 하나님의 일을 더
생각하며 살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이 땅 사는 동안 그리스도를 위하여 우리의 삶을 바칠 것이며 심지어
나의 목숨까지 아끼지 아니할 정도로 각오를 한 가운데 날마다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 예수님을 따를 것입니다.
이 모든 교훈과 사건의 핵심에 ‘별세’가 있고, 그 별세를 위해 그리스도께서는 십자가를 지십니다. 그리고 개역 개정이 ‘별세’라고
번역한 원어는 이미 언급한 것처럼 “엑소더스”입니다. 즉, 죄와 사탄과 사탄이 장악한 이 세상으로부터의 탈출과 해방을
위한 것이 그리스도의 십자가라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의
사건에서 영광의 구름 속으로 음성을 들려 주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중요한 점은 성경을 자세히 보면
하나님, 성령님이 등장하시지만, 이 분들은 “오직 예수”를 증거하기를 조금도 주저하지 않으시며 우리에게 “오직 예수”만 외치고 생각하도록 힘쓰신다는 사실입니다.
오늘
본분의 장면은 구약을 대표하는 모세(율법, 출애굽)와 모든 선지자의 대표 엘리야(선지자, 예언)가 예수님과 함께 예수님의 ‘별세’에 대하여 말씀을 나누고 있습니다. 곧, 뉴-엑소더스, 진정한 의미의 출애굽입니다. 모세와 엘리야의 등장은 모든 구약을
대표합니다. 그러므로 이 장면은, 모든 구약은 예수 그리스도를
지칭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모세와 엘리야로 대표되는 율법과 선지자, 곧
구약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죽음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사도행전 1장 3절을 보면 십자가에 돌아가신 후 부활하신 주님께서는 승천하시기
전까지 약 40일 동안 이 땅에 계셨습니다. 그 기간 동안
부활하신 주께서 이 땅에서 제자들에게 행하신 일은 가르침이셨습니다.
“그가 고난 받으신 후에 또한 그들에게 확실한 많은 증거로 친히 살아 계심을 나타내사 사십 일
동안 그들에게 보이시며 하나님 나라의 일을 말씀하시니라.”
예수님께서는
부활체를 입고 이 땅에 사십일 동안 계시면서 제자들에게 더 큰 비밀들을 가르치셨습니다. 이때 부활체로
이 땅에 계시면서 가르치신 주의 가르침의 핵심은 모든 구약이 자신에 대한 글이라는 것이었습니다.
부활하신
우리 주 예수님의 가르치심입니다.
“이르시되 미련하고 선지자들이 말한 모든 것을 마음에 더디 믿는 자들이여 그리스도가 이런 고난을 받고 자기의 영광에
들어가야 할 것이 아니냐 하시고 이에
모세와 모든 선지자의 글로 시작하여 모든 성경에 쓴 바 자기에 관한 것을 자세히 설명하시니라”(눅 24:25-27).
“이에 구운 생선 한 토막을 드리니 받으사 그 앞에서 잡수시더라. 또 이르시되 내가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 너희에게 말한 바 곧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의 글과 시편에 나를 가리켜
기록된 모든 것이 이루어져야 하리라 한 말이 이것이라 하시고 이에 그들의 마음을 열어 성경을 깨닫게 하시고”(눅 24:42-45)
그리고 40일 동안 이 땅에 계셨던 예수님께서는 하늘로 승천하십니다. 그리고
주께서 승천하신지 10일 이후에 우리 주 예수께서는 만유의 왕좌에 즉위하셔서 아버지로부터 성령을 받아
이 땅에 성령을 보내셨습니다. 이에 성령께서는 예루살렘의 성전으로 임하십니다. 곧, 오순절에 임하신 성령 강림절입니다.
본문을
보면, 예수님의 제자들이 모세와 엘리야를 만나시는 예수님을 목도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세 제자들은 신약의 대표입니다. 즉, 구약의 대표들과 신약의 대표들이 예수님을 중심으로 모여 있고, 이
모임에서 다룬 핵심 내용은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으심과 부활이요, 새로운 엑소더스였습니다. 즉, 구약과 신약의 성경 전체가 주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과 부활, 그리고 그 사건으로 인한 죄사함 및 영생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을 하나님이 증거하고 계십니다. 하나님도 예수 그리스도가 드러나도록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고 말씀하시면서 아들 예수님을 역사의
주인공으로 만들고 계십니다.
사실
히브리서 1장 8절을 보면,
이를 더욱 명확하게 해 줍니다. 그 구절의 주어는 하나님이신데, 하나님께서 아들에 관하여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이여 주의 보좌는 영영하며 주의 나라의 규는 공평한 규이니이다.”
이는
아버지께서 아들을 지극히 높이시는 장면입니다. 또한 빌립보서
2:9-11절에서도 같은 내용을 지지합니다.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에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
이
내용을 보면, 하나님의 영광은 오직 예수가 주로 고백 되어지는 곳에서 받으시는 것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즉, 하나님 아버지는 모든 피조물을 향하여 예수님을 주인공으로 만드십니다.
예수님
승천 이후 10일 만에 오순절 날에 오신 성령님도 마찬가지입니다. 성령님은
자신이 드러나기보다, 그 분도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을 드러내시며 주님의 백성들로 하여금 주 예수님을
사랑하고 바라보고 주 예수님의 이름만 들어도 감사와 사랑으로 울렁거리게 만드는 일을 하십니다.
이는
성령님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시기 위해 이 땅에 오셨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성령을 받은 자들은
오직 그리스도 예수를 더더욱 의식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내가 아버지께로부터 너희에게 보낼 보혜사 곧 아버지께로부터 나오시는 진리의 성령이 오실 때에
그가 나를 증언하실 것이요, 너희도 처음부터 나와 함께 있었으므로 증언하느니라” (요 15:26-27).
사도행전을
보아도 성령을 받은 자들마다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라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 즉 성령의 증인이 아니라 예수의 증인이 됩니다. 따라서 사도행전의 요약이라고 할 수 있는 사도행전 1장 8절은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고
말합니다. 즉. 성령의 권능을 받으면 “내 증인”, 즉 예수 그리스도의 증인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령의 역사는 다른 것에 있지 아니하고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증인이 되는데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성령의 임함은 예수님의 십자가의 도를 더욱 알게 하고
우리로 하여금 부활하신 주님과 연합하게 하며 나아가 오직 예수만으로 살며 오직 예수님을 증거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잘 알다시피 사도행전은 성령의 역사를 기록한 책입니다. 또한 성령의 가르침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사도행전은 성령의 사람들을 통하여 말씀하신 것이며 그들을 통한 성령의 사역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성령께서는 특히 사도행전을 통해서 성경을 보는 방법을 알려 줍니다. 성령의
성경 해석 방법은 성령으로 충만한 자들의 설교를 들어 보면 알 수 있습니다.
베드로의 첫 설교, 순교하면서 전한
스데반의 설교, 성령으로 충만했던 빌립의 설교, 또한 바울
사도의 설교를 들어보기 바랍니다. 그들은 한결 같이 모든 성경에서 그리스도의 역사적인 부활을 근거로
하여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전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은 다름아닌 믿는
자들의 “엑소더스” 사건이라는 것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성령이 오순절을 계기로 역사 속에 임하신 이후에, 믿는 자들마다 성령을 받게 됩니다. 그런데 특이한 것은, 성령을 받은 모든 신약 사도 및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들의 가르침은 모든 성경을 통하여 '오직 예수'를 선포하는 것이었습니다. 이 사실은 아무도 부인할 수 없습니다.
따라서 성령은 하나님 아버지와 인자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보내시며 그 분의 이 땅에서의 가장 큰 사명은 “오직 예수”입니다. 사도 행전의 역사는 성령의 사역으로서 바로 “오직 예수”의 사역이시며, 이는 하나님의 말씀과 분리되어 역사하지 않으시고 특히 예수 그리스도와 항상 하나이시면서 “오직 예수”를 외치시는 것입니다. 따라서 성경의 저자이신 성령은 성경을 통하여 “오직 예수”를 증거하시고 친히 그분의 사역에서도 “오직 예수”만 드러내시는 것입니다.
존 라일의 거룩
을 마칠 수 있었습니다.
1. 인류에 대한 하나님의 생각에는 그리스도가 전부
아담과
하와의 불순종을 통해 죄가 세상에 들어온 날이 있었다. 그들은 지음을 받던 때에 가지고 있었던 거룩한
속성을 잃었다. 그들은 하나님과의 교제와 은총을 잃고 부패하고 무력한 죄인이 되었다. 그들의 죄는 그들과 그들의 하늘 아버지 사이에 장벽이 되었다. 만일
하나님께서 그들을 마땅한 대로 대하셨다면 그들로부터 나온 인류가 바랄 것은 죽음과 영원한 지옥 밖에는 아무 것도 없었을 것이다. 그때에 그리스도는 어디에 계셨는가?
그리스도가
죄인들을 위한 유일한 구원의 소망으로 계시된 때가 바로 그 날이었다. 하나님은 뱀에게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네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창 3:15)고
말씀하셨다. 다른 말로 하면, 여인으로부터 태어나는 구세주가
마귀를 이길 것이라는 말씀을 하셨던 것이다. 이 일을 행하신 분으로 알려진 이름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
외에 결코 다른 이름이 없다.
훗날에
예수 그리스도는 죄인들을 위한 구원의 길을 마련하시기 위해 하나님 아버지와 함께 가지고 계셨던 영원한 영광을 버리시고 불경건한 세상으로 오셨다. 그는 친히 사람의 본성을 취하시고 사람으로 태어나셨다. 하나님의
뜻을 지켜야 마땅한 우리가 죄로 인하여 주의 뜻을 지킬 수 없게 되자 그는 사람이 되셔서 그의 아버지의 뜻을 완전하게 행하셨다. 그는 십자가 위에서 우리가 마땅히 받아야 할 하나님의 진노를 감당하셨다. 그리하여
그는 이 세상에 의를 이루셨고 이제 그 의로 죄인들을 구원하실 수 있게 되셨다.
“예수는 우리가
범죄한 것 때문에
내줌이 되고 또한
우리를 의롭다 하시기
위하여 살아나셨느니라”(롬 4:25).
주님은
하늘로 승천하셔서 아버지와 다시 함께 하게 되셨고, 지금 주님은 그곳에서 진실한 믿음과 마음으로 그에게
나아오는 모든 자들을 구원하여 주신다.
죄가 이 세상에서 사라질 때가 올 것이다. 그
때는 새하늘과 새 땅이 있게 될 것이다.
“이는 물이
바다를 덮음 같이
여호와를 아는 지식이
세상에 충만할 것임이니라”(사
11:9).
그때 그리스도는 어디에 계실 것이며 또한 무엇을 하실까? 그때 그는 이 땅의 왕이 되실 것이다! 그는 큰 능력과 영광으로
다시 오실 것이며 이 세상은 그의 나라가 될 것이다. 그에게 모든 무릎이 꿇을 것이며 모든 입이 그를
주로 고백할 것이다. 그의 나라는 영원한 나라가 될 것이며 결코 사라지거나 멸망하는 일이 없을 것이다. 온 땅이 그의 것이 될 것이다!
모든
사람이 심판을 받을 날이 다가오고 있다. 바다는 그 안에 있던 죽은 자들을 내어줄 것이다. 죽음과 음부 역시 그 안에 있던 죽은 자들을 내어줄 것이다. 모든
사람은 그들의 행함에 따라 심판 받을 것이다. 그때 그리스도는 어디에 계실까? 그리스도는 친히 심판자로 계실 것이다.
“이는 우리가
다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나타나게
되어 각각 선악간에
그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 받으려
함이라”(고후 5:10).
우리가
이러한 일들에 대해 생각하는 것은 분명히 잘 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에 대해 아무런 생각을 하지 않는
자들마다 하나님 아버지와 매우 다른 생각을 한다! 이 세상 사건들과 사람들에 대한 하나님의 모든 생각
속에는 그리스도를 영화롭게 하는 것이 있다. 그리스도에 대해 생각하지 않는 것은 하나님이 가장 귀하게
여기는 자를 멸시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아들을 공경하지
아니하는 자는 그를 보내신 아버지도 공경하지 아니하느니라”(요 5:23)는
말씀은 당연하다.
2. 성경에서 그리스도가 전부
우리는
구약과 신약의 모든 책에서 그리스도를 볼 수 있어야 한다. 오랜 책에서는 희미하지만 중간 정도에서는
더욱 분명하여지고 마지막 책에서는 완전하게 보인다. 하지만 모든 곳에서 그리스도는 실제로 그리고 분명하게
보인다. 그리스도의 십자가 희생과 그의 나라는 우리가 성경 어디를 읽든 마음에 두어야 할 주제이다. 그는 성경의 많은 어려운 구절들을 깨닫도록 풀어주는 열쇠이다. 필자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보여주겠다.
“그러나 그들의
마음이 완고하여 오늘까지도
구약을 읽을 때에
그 수건이 벗겨지지
아니하고 있으니 그
수건은 그리스도 안에서
없어질 것이라. 오늘까지 모세의
글을 읽을 때에
수건이 그 마음을
덮었도다.
그러나 언제든지 주께로
돌아가면 그 수건이
벗겨지리라”(고후 3:14-16).
구약의
동물 희생이 묘사하고 있는 것은 그리스도의 희생과 십자가이다. 동물 희생은 죄인을 위해 드려진 대속
제물의 피로 말미암아 죄를 없앨 수 있음을 보여주었다. “피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느니라”(히 9:22). 또한 예수님의 중요한 말씀을 기억하라.
“이것은 죄
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마 26:28).
아벨이
그의 형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를 드릴 수 있었던 이유는 그리스도의 희생과 연관된 제사를 드렸기 때문이었다(창
4장). 아벨이 그의 양 떼로부터 그를 대속해줄 제물을 취하여
바친 것은 피흘림이 없이는 죄사함이 없다는 것을 이해했기 때문이다.
아브라함이
그의 후손 중 하나를 통해 모든 나라들이 복을 받을 것이라는 하나님의 약속을 믿었을 때 그가 생각하고 있던 자가 바로 그리스도였다.
“여호와께서 이르시기를
내가 나를 가리켜
맹세하노니 네가 이같이
행하여 네 아들
네 독자도 아끼지
아니하였은즉 내가 네게
큰 복을 주고
네 씨가 크게
번성하여 하늘의 별과
같고 바닷가의 모래와
같게 하리니 네
씨가 그 대적의
성문을 차지하리라 또
네 씨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받으리니 이는 네가
나의 말을 준행하였음이니라”(창 22:16-18).
이에
예수님은 유대인들에게 “너희 조상 아브라함은 나의 때 볼 것을 즐거워하다가 보고 기뻐하였느니라”(요 8:56)고 말씀하셨다.
야곱이
임종하면서 그의 아들들에게 예언으로 말한 것은 그리스도에 관한 것이었다.
“규가 유다를
떠나지 아니하며 통치자의
지팡이가 그 발
사이에서 떠나지 아니하기를
실로가 오시기까지 이르리니
그에게 모든 백성이
복종하리로다”(창
49:10).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주셨던 모든 의식법은 장래 오실 메시아, 곧 그리스도의 사역을 그들에게 가르쳐 주기 위해
설계되어 있었다. 아침과 저녁 제사, 끊임없는 피 흘림, 장막, 대제사장, 유월절, 속죄일, 아사셀 양 등은 그리스도와 그분의 사역에 대한 모형이었다.
이스라엘이
애굽을 떠난 후 광야에서 날마다 체험했던 모든 기적들은 그리스도의 사역을 가리킨다. 구름 기둥과 불기둥의
인도, 하늘로부터 내려진 만나, 반석에서 터져 나온 물, 독뱀에 물린 자들이 죽음을 피하기 위해 바라보았던 구리뱀 등, 이
모든 것들은 그리스도의 사역의 속성을 가르치도록 의도되어 있었다(고전 10:4).
곤경에
처한 주의 백성을 구원한 모든 사사들은 그리스도의 모형이다.
다윗
왕은 영원한 왕이신 그리스도를 가리킨다. 왕으로 택함 받았지만 그는 영광과 존경을 받지 못했고 자기
백성의 많은 사람들에게 멸시와 박해를 당하였다. 하지만 결국 승리를 거둔 위대한 왕이 되었다. 이 모든 것은 우리로 하여금 그리스도를 상기 시킨다.
“여호와가 또
네게 이르노니 여호와가
너를 위하여 집을
짓고 네 수한이
차서 네 조상들과
함께 누울 때에
내가 네 몸에서
날 네 씨를
네 뒤에 세워
그의 나라를 견고하게
하리라. 그는 내
이름을 위하여 집을
건축할 것이요 나는
그의 나라 왕위를
영원히 견고하게 하리라. 나는
그에게 아버지가 되고
그는 내게 아들이
되리니 …
네 집과 네
나라가 내 앞에서
영원히 보전되고 네
왕위가 영원히 견고하리라”(삼하 7:12-16).
이사야로부터
말라기까지 모든 선지자들이 말하는 것은 그리스도에 관한 것이었다. 그들은 어떤 때는 그의 고난을, 또 어떤 때는 그의 영광을 말하였다. 그들은 하나님께 감동되어 어떤
때는 겸손하게 오시는 주의 초림에 대하여, 또 어떤 때는 영광 가운데 오시는 주의 재림에 대하여 말하였다. 그들은 때때로 주의 초림과 재림을 한꺼번에 보면서 마치 그 둘이 하나인 것처럼 언급하였다. 그러면서도 그들 마음에는 항상 그리스도가 있었다.
신약은
그리스도로 가득하다. 복음서는 그의 백성 가운데 사셨던 그리스도에 대해 말한다. 사도행전은 초대 신자들에 의해 전파된 그리스도에 대한 것이다. 서신서들은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신중하게 설명하여 주고, 계시록은 그리스도가 모든 것을 어떻게 마무리 하시는지 그
종말을 묘사하여 준다.
당신이
성경을 연구할 때마다, 그리스도가 전부이며 모든 것이라는 것을 기억하기를 당부한다!
나의
독자들이여! 그리스도가 전부인가? 그렇지 않다면, 지금까지 필자가 한 말을 통해 죄인의 구원 문제에 있어서 그리스도께서 행하신 것 외에 다른 것을 더하는 것은
전혀 무가치하다는 것을 배우기 바란다. 만일 당신이 구원은 그리스도에 의한 것이 아니라 당신이 행한
어떤 것에 의해 얻을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이는 그리스도가 전부인 하나님의 구원 계획을 바꾸려는
것과 같다.
그리스도가
당신에게 전부인가? 그렇지 않다면 지금 직접 그리스도께 나아가라. 파선된
배의 선원을 구하는 것은 구조선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그 배에 실제로 타는 것이다. 배고픈 사람을
구하는 것은 빵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빵을 먹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당신을 구원하는 것은 그리스도에
대하여 아는 것이 아니며 심지어 그가 구세주라고 믿는 것도 아니고, 실제로 당신을 주께 헌신하여 드림으로
당신과 주님 사이에 맺어지는 관계이다. 당신은 “내가 믿음과
신뢰 가운데 주께 나아왔고 그를 나의 왕으로 삼았기 때문에 그리스도는 나의 구세주입니다”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한다.
그리스도로
인하여 살고 그리스도와 함께 살며 그리스도를 위하여 살자. 우리가 그렇게 할 때 우리는 큰 평강을 얻게
될 것이며, “거룩함이 없이는 아무도 주를 보지 못하리라”(참조, 히 12:14)는 말씀을 입증하게 될 것이다.
* 존 라일.<거룩> 제 20장에서 발췌
사랑하는 여러분! 신자들은
거듭난 후에도 오직 예수를 믿을 때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흐르게 되어 있습니다. 예수께서 이 땅에
계실 때 외치셨습니다.
“명절 끝날 곧 큰 날에 예수께서 서서 외쳐 이르시되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나를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리라
하시니 이는 그를 믿는 자들이 받을 성령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요 7:37-39).
“너희는 내가 일러준 말로 이미
깨끗하여졌으니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아니하면 스스로 열매를 맺을 수 없음 같이 너희도
내 안에 있지 아니하면 그러하리라.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거하면 사람이 열매를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요 15:3-5).
이미
깨끗하여졌으니, 곧 주의 보혈로 죄사함을 받아 거듭났으니 “내
안에 거하라” 즉, 나를 믿으라. 그러면 열매를 많이 맺게 되는 것입니다. 그 열매가 무엇입니까? 성령의 열매입니다. 성화의 열매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수 많은 열매들입니다.
바울
서신을 눈 여겨 보시기 바랍니다. 영적으로 성숙한 그리스도인이 되도록 하기 위해 “예수 그리스도 안에 거하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라”는 말이 얼마나 많은지 아십니까? 바울의 서신에는 거의 매 절마다
예수 그리스도가 표현되어 있으며 쉬지 않고 그리스도와 연합할 것을 권면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최종적으로
내리는 결론은
“이는 너희들로 하나님의 비밀인 그리스도를 깨닫게 하려 함이니 그 안에는 지혜와 지식의 모든
보화가 감추어져 있느니라”(골 2:2-3).
고
합니다. 이에 바울이 말합니다.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고전 2:2).
사랑하는 여러분!
부활하신 예수께서 자신의 십자가 사건과 부활의 의미를 분명하게 선포하셨습니다.
“또 이르시되 이같이 그리스도가 고난을 받고 제삼일에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날 것과
또 그의 이름으로 죄 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가 예루살렘에서 시작하여 모든 족속에게 전파될 것이 기록되었으니 너희는 이 모든 일의 증인이라”(눅 24:46-48).
여기서 부활하신 예수께서 말씀하시는 “그의
이름으로 인한 죄 사함”은 단순한 법적 죄 사함에서 마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주께서 죄 사함을 선포한 자들마다 다시는 죄를 범하지 않았던 것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이 말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 복음에 의한 죄 사함의 선포는 성령의 역사로 말미암은 양심의 변화와
성령의 도우심이 보장된 죄 사함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평생 음욕에 물들어 간음하다 현장에서
잡힌 여인이 어떻게 그 죄로부터 자유로운 여인이 될 수 있었을 것이며, 또한 평생 죄악에 물들었던 38년된 병자가 어떻게 죄 사함 받은 후에 다시 죄악으로 돌아가지 않을 수 있었겠습니까?
그러므로 오늘 주께서 엘리야와 모세와 나누었던 ‘별세’, 곧 참된 엑소더스는 그리스도 예수를 믿는 자들의 죄 사함을 위한 것으로써 그 안에는 거룩한 삶을 살 수 있도록
하는 부활의 권능이 포함된 것을 다시 한번 확인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이에 이 사실을 확증한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
5 만일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같은
모양으로 연합한 자가
되었으면 또한 그의
부활과 같은 모양으로
연합한 자도 되리라
6 우리가 알거니와
우리의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이 죽어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 노릇 하지
아니하려 함이니
7 이는 죽은
자가 죄에서 벗어나
의롭다 하심을 얻었음이라
](롬 6:5-7)
이 자리에 그리스도 예수를 통해 하나님을 예배하는 여러분 모두의 남은 삶에, 그리고 주께서 친히 이 땅에 세우신 그리스도의 보혈 교회의 장래에, “오직
예수”로만 살아감으로 참된 승리의 엑소더스를 늘 누리는 영광된 주의 백성 되기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간곡하게 축원합니다.
본문에서 우리가 집중해야 하는 것은 이 두 사람이 예수님 앞에 나타나서 나눈 대화의 내용입니다. 본문은 “장차 예수께서 예루살렘에서 별세하실 것”이라고 소개하고 있습니다. 원문에서 보면 여기에는 아주 특이한 세 가지의 표현이 사용되고 있는데, 이 표현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과 아주 밀접하게 연결되고 있습니다.
첫째. “장차 ~하실”(ἤμελλεν)
이 단어의 본 뜻은 ‘임박한 미래에 어떤 일이 일어날 일이 확실하게 일어날 것’을 가리킵니다. 따라서 이 표현은 예수님이 예루살렘에서 십자가를 지시고 자기 백성의 죄를 대속하시는 사건은 반드시, 그리고 가까운 미래에 이루어질 것임을 의미합니다.
둘째. “것을”(πληροῦν)
이 단어는 본래 ‘계속적으로 채워짐을 통하여 성취를 향하여 나아가는 과정’을 나타낼 때 사용됩니다. 따라서 이 단어가 사용된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은 자연적인 죽음이 아니라, 약속된 미래를 향하여 계속적으로 나아감을 통하여 궁극적으로 성취되는 의지적 죽음임을 보여주고자 함입니다.
셋째. “별세”(ἔξοδον)
이 단어는 ‘~으로부터 벗어남’을 가리키는 단어임과 동시에 이스라엘 백성들의 출애굽을 뜻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이 단어는 ‘이 땅의 삶으로부터의 벗어남, 죽음’을 가리키는데 사용되고 있습니다. 따라서 누가가 이 단어를 사용해서 예수님의 죽으심을 기록하고 있는 것은 예수님의 죽으심이 보통 사람의 죽음과는 다른 의미를 가지고 있고, 여기에는 출애굽의 의미가 분명하게 포함되어 있음을 나타내기 위함이었습니다. 따라서 출애굽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있어 하나님의 구원을 의미하듯이, 예수님의 죽으심은 자기 백성의 영원한 구원을 위한 것임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예수님이 변화된 이 장면에서 모세와 엘리야가 나타났고, 또한 그 두 사람이 예수님과 장차 예루살렘에서의 일을 말씀하셨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장차 예루살렘에서 십자가를 지실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그 십자가는 자기 백성의 구원을 위한 하나님의 역사라는 것입니다.
결국 이 장면에서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것은 예수님만이 바로 나와 여러분의 구속자라고 하는 것입니다. 아무리 모세와 엘리야가 위대한 인물이라고 할지라도 그들은 우리의 구속자가 아닙니다. 저들도 우리와 같이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의 대상일 뿐입니다. 예수님만이 바로 나와 여러분의 죄를 대신하여 십자가에서 대속의 죽음을 죽으셨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이 자기 백성인 나와 여러분을 구원하시는 유일한 길이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만이 주(主)
예수님과 함께 산에 올랐던 제자들은 곤하여 졸다가 산에서 펼쳐지는 엄청난 상황 앞에서 어찌할 바를 몰라하고 있습니다. 그러다가 모세와 엘리야가 떠날 때 베드로가 입을 열었습니다. 그리고는 “주여 우리가 여기 있는 것이 좋사오니 우리가 초막 셋을 짓되 하나는 주를 위하여, 하나는 모세를 위하여, 하나는 엘리야를 위하여 하사이다”라고 했습니다(33절). 아마도 베드로는 자신의 눈앞에서 펼쳐지는 이 황홀한 광경에 압도되어 있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산 밑에서는 지금까지 예수님을 배척하는 무리를 보았습니다. 또한 예수님은 자신이 이제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며 삼일만에 살아나야 할 것을 말씀하셨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눈앞의 광경은 예수님의 말씀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영광스러운 모습입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저 산 밑으로 다시 내려갈 것이 아니라 이 영광스러운 상태로 여기서 머물러 있기를 청한 것입니다.
하지만 이는 베드로가 예수님의 참 모습과 그분의 사역이 가지는 진정한 의미를 깨닫지 못하고 있음을 드러내는 말이었습니다. 그는 분명 얼마 전에 예수님 앞에 고백하기를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라고 했습니다)마16:16). 그리고 예수님의 십자가를 향한 발걸음을 막다가 예수님으로부터 책망을 듣기도 했습니다(마16:233). 그럼에도 불구하고 베드로의 영적 무지는 예수님의 십자가 사역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는 비단 베드로만의 문제가 아니었을 것입니다. 함께 있는 야고보와 요한도 다를 바가 없었을 것입니다.
이토록 황홀감에 빠져 어찌할 바를 알지 못하고 있을 때, 갑자기 구름이 와서 저들을 덮었습니다. 그리고 그 구름 속에서 음성이 들렸습니다. 본문 35절에 “이는 나의 아들 곧 택함을 받은 자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라고 했습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두 가지를 기억해야 합니다. 먼저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말을 들으라는 것입니다. 물론 모세의 말과 엘리야의 말이 중요합니다. 그들이 전한 말도 분명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집중해야 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입니다. 이는 저들은 그림자요, 예수 그리스도는 실체이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 속에 저 모세의 율법과 엘리야를 중심으로 하는 선지자들의 예언에 성취되었기 때문입니다.
다음은 본문에서 말하는 “그의 말”은 예수님의 말씀뿐만 아니라 그분의 모든 것, 즉 그분의 일거수일투족까지도 다 포함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모든 것, 그분의 성품을 닮아가야 하고, 그분의 말씀에 순종해야 하고, 그분의 십자가를 지고 따라가야 하는 것입니다.
또한 본문 36절에 “소리가 그치매 오직 예수만 보이더라”라고 했습니다.
제자들이 정신을 차렸을 때, 그들의 눈앞에는 오직 예수님만 보였습니다. 모세도 엘리야도 이미 사라졌습니다. 이는 모세와 엘리야의 사명이 끝났음을 의미합니다. 저들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사명자들이었습니다. 저들이 하나님의 구속역사의 주인공이 아닙니다. 저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 준비하는 자들입니다. 이제 예수 그리스도께서 주인공으로 나타나셨기 때문에 저들은 자리를 양보하고 사라지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모세와 엘리야는 너무나도 중요한 사람입니다. 따라서 제자들이 그 모세와 엘리야를 보았다고 하는 것은 흥분되는 사건입니다. 하지만 모세와 엘리야가 아무리 훌륭한 인물이라고 할지라도 그들은 결코 예수님을 대신할 수 있는 인물이 아닙니다. 저들이 예수님 대신에 십자가를 질 수 없습니다. 저들이 우리를 인도하는 참 목자가 될 수 없습니다. 이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에게 주어진 것입니다.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만이 우리의 영원한 주인이십니다. 우리의 생명을 주관하시는 주인이십니다. 우리의 모든 삶을 책임지시는 주인이십니다. 우리가 영원히 바라보아야 하고, 따라야 하는 주인이십니다. 예수 그리스도 외에 그 어떤 존재도 우리의 주인은 될 수 없습니다. 그가 비록 모세나 엘리야와 같은 존재일지라도 우리의 주인은 될 수 없습니다.
11월 8일(토) 누가복음 4-6장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얼마 동안 떠나니라(4:13)
마귀가 모든 시험을 다 한 후에 얼마 동안 떠나니라. When the devil had finished all this tempting, he left him until an opportune time.
누가복음
4:13에 보면, “마귀가 모든 시험을 다한 후에 얼마동안 떠나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 말을 영어로 풀이하면 “When
the devil had finished every test, he departed from him until an
opportune time”이 되겠습니다. 얼마동안이라도 번역된 이 단어의 헬라어는 단순하게 “αχρι καιρού”입니다. 즉,
until [opportune] time이 되는 것입니다. opportune 이란 말은 ‘기회가 좋은, 형편이 좋은,
적절한’이란 말입니다. 그러니까 마귀는 예수님에 대한 시험을 일단락하고 다시 적절한 때에 다시 오기 위해 떠났다는 의미가 됩니다. 누가가 이 말을 기록하면서 매우 주의깊에 이 단어를 쓴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럼
언제 적절한 때가 될까요? 바로 누가복음 22:3입니다. “열둘 중의 하나인 가룟인이라 부르는 유다에게 사탄이 들어가니” 많은
분들은 유다에게 대한 부정적인 이미지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사탄의 꼬임을 받아 유다가 예수님을 판 것이라고 단정합니다. 그런데 이
본문을 잘 살펴보면 누가의 의도는 그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시험했던 그 마귀가 다시 예수님을 시험하기 위해 이번에는 유다를
시험하고 있다고 합니다. 다시 말해 유다에게 먼저 들어가서 유다로 하여금 그 일을 하게 한다는 말입니다.
우선
여기서 우리가 생각을 해야 하는 것은 사탄에게 시험을 받는다는 것 자체로 인해 사탄의 시험받은 사람을 나쁘게 보아서는 안된다는
말입니다. 사탄이 들어간 유다! 물론 이 말은 단순히 시험을 당한 이란 말보다 공격적입니다. 사탄은 감히 예수님안으로 들어가지는
못했는데, 유다에게는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사탄의 시험을 받으신 주님이 아무런 문제가 없듯이 유다도 어떤 나쁜 이미지로 변모할
이유가 전혀 없는 대목입니다.
게다가
누가는 유다를 언급하여 “열둘 중의 하나”라고 적었습니다. 이 말은 열 두명의 사도중의 한 명이 바로 유다이며 그는 여전히
열둘중의 한 명이라는 의미입니다. 그가 사탄의 시험을 당했지만 열두 사도의 의심할 수 없는 명단안에 있습니다.
그리고
유대인들의 사고중에 사단은 자기 마음대로 일을 꾸미는 존재가 아닙니다. 사탄도 하나님의 수중에 있으며 하나님의 뜻과 명령없이
활동할 수 없다라는 개념입니다. 그러므로 사탄이 이 일을 하는 것은 하나님의 동기부여와 주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셔야 하는 막중의
사명의 한 일무였던 것입니다. 사탄이 유다안으로 들어갔다는 말은 오히려 유다가 하고 싶어서 한 일이 아니라 사탄으로 인해 할 수
밖에 없었던 섭리가 있었음을 알리고 유다를 변호하고자 하는 누가의 기록의도를 알아차리시기를 바랍니다.
마귀는 예수님을
시험한 후에 잠시동안 떠납니다. 적당한 기회가 오면 사탄은 다시 시험을 시작합니다. 마귀는 저희도
시험합니다. 하나의 시험을 잘 통과하면 잠시동안 평온하다가 또 다른 시험을 주어 쓰러뜨리려 합니다. 마귀의 시험은
저희의 삶의 전반에 걸쳐서 맞닥뜨립니다. 성령으로
충만할 때에나 혹은 믿음이 바닥으로 곤두박첬을 때에나 시험은 저희에게 다가와 열매를 맺지 못하도록 합니다.
예수님이 받으신 시험을 어떻게
이기셨음을 통하여 저희의 삶에서 끊임없이 반복되는 마귀의 시험을 물리치는 방법을 배워야 합니다.
어찌보면 마귀의 시험은 달콤하며
지름길로 인도하는 것 같습니다. 자신을
경배하면 원하는 재물과 능력을 겸하여 주겠다는 마귀의 달콤한 유혹에 넘어가기 쉽습니다. 그렇지만 저희 주님의 자녀는 그런
지름길을 택해서는 결코 않됩니다.
때로는 원치않는 인고의 시간을
지날 때도 있는 그런 굴곡있는 저희 삶의 과정을 통하여 주님의 사랑을 알아가야 하며 지나고 나면 한결 성숙한 모습으로 변화됩니다.
시험을 받는
저희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예수님께서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셨으니 저희는 오죽하겠는가요.
순간순간 마귀는 저희를 시험합니다. 과연 내가 예수님의 자녀인지를 시험합니다.
마귀는 시험을 통해서 어떻게 하든지 예수님의 자녀가 받는 구원으로부터 멀어지게
하려고 합니다.
1. 시험 받는 요인
정욕과 교만과 탐심이 저희가 시험받는 근본적인 요소입니다.
(창3:6) 여자가 그 나무를 본즉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인지라
(요일2:15-16) 누구든지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지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안에 있지 아니하니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부터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부터 온 것이라
(엡6:12) 저희의 씨름은 혈과 육을 상대하는 것이 아니요 통치자들과 권세들과 이 어둠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을 상대함이라
저희를 힘들게 하는 시험의 근원은 악의 근원인 마귀에게 있습니다. 마귀는 교묘하게 웅크리고 숨어서 삼킬 자를 찾습니다. 악의 영향을 받은 사람을 사용하여 저희를 힘들게 합니다.
2. 말씀과 기도로 이겨내야 한다
생명의 말씀이시며 성령으로 충만하신
예수님은 마귀의 시험을 성경 말씀을 인용하시며 대적하셨습니다.
저희 또한 성령과 말씀 안에 조화를
이루어 거하도록 해야 합니다.
·
Too much Word and not enough Spirit: you puff up in
the sense of pride
·
Too much Spirit and not enough Word: you blow up
·
With the Word and the Spirit together: you grow up
말씀의 능력:
저희에게 성령의 전신 갑주 중에 유일한 무기인 성령의 검인 말씀을 주셨습니다.
(히4:12)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활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판단하나니
하나님의 말씀의 능력이 임하게 되면 시험이 임했을 때에 능히 이겨내게 합니다.
주의 말씀의 능력을 믿습니까?
주님 말씀의 능력은 저의 영혼육에 임합니다. 주님 말씀의 능력이 저희에게 임하면 영혼 깊숙한 곳에 자리 잡고 있는 추악하고 더러운 죄성을 도려냅니다. 병으로 앓고 있다면 말씀의 능력이 환부를 도려낼 것입니다. 말씀은 저희의 영혼육의 연약함을 드러내어 환부를
도려냅니다.
주님의 말씀인 성경을 늘 가까이하세요. 주의 말씀의 능력을 선포하세요. 왜 한 입에서 저주의 말을 하십니까?
주님의 자녀인 저희의 입에서는 복된 주님의
말씀이 선포됨이 마땅합니다. 말씀에 무지한 자가 아니라 유식한 자가 되세요.
기도에 게을리해서는 않됩니다.
(마26:41)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기도하라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
기도를 방해하는 것이 세상에는 너무나 많이 저희 주변에 널려 있어 기도를 방해합니다. 기도하고자 하는 마음에 세상으로 유혹하는 생각이 스멀스멀 들어옵니다. 세상의 유혹을 이겨내어 성령안에서 드리는 기도는 하나님의 뜻을 구하게 되어 드려진 기도의 응답이 이루어집니다.
3. 감당할 시험
(고전10:13) 사람이 감당할 시험 밖에는 너희가 당한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하지 못할 시험당함을 허락하지 아니하시고 시험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
욥은 이해할 수 없는 고난을 겪었습니다. 하지만 욥의 믿음의 깊이를 아시는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범위내에서 욥은 시험을 받았습니다. 만일 저희에게 욥이 겪은 시험이 임하면 견디어 낼 자가 아마도 없을 것입니다.
저희의 육신은 연약하여 유혹이 있거나 어려운 일을 닥치면 전전긍긍하며 시험에 들기도 합니다. 하지만 저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은 제가 감당할 만하여 시험을 허락하십니다. 만일 저희가 통과할 수 없는 시험이면 결단코
저희에게 오지 못하도록 막으십니다.
저희의 연약함을 잘 아시는 하나님께서는 저희에게 욥이 겪은 극단적인 시험을 결단코 허락하지 않으십니다.
(약1:2) 내 형제들아 너희가 여러 가지 시험을 당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
시험을 만나면 아 하나님께서 나를
이만큼 인정하셔서 이런 시험을 주시는가 하며 기뻐하라고 말씀합니다.
예수님께서 광야에서 시험을 견디어 내셨습니다. 시험을 이기신 예수님께서 저희 안에 내주하십니다. 제가 시험을 겪을 때마다 주님은 저에게 용기를 주시며 피할 길을 내사 능히 시험에서 승리하도록 인도하십니다.
마귀의 속삭임에 넘어가면 어려운
시험의 과정을 통과해야 하며 먼 길을 돌아가야 합니다.
연약한 저희를 잘 아시는 예수님은
저희를 마귀로부터 지켜주시고 털끝 하나도 다치지 않도록 인도하시며 지켜주십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저희를 지켜주고
계십니다. 아멘.
4.
시험의 근원인 마귀를 대적하라
예수님을 손대지 못한 마귀
마귀는 예수님을 성전 꼭대기에
세웠지만 밀어서 떨어뜨릴 수 없었습니다. 거기까지가
마귀의 능력의 한계입니다. 마귀는 그럴듯한 의견을 내세우며
저희를 유혹하며 시험합니다. 이를
취할지는 저희 몫이며 선택입니다. 저희를 힘들게
하는 마귀를 대적해야 합니다. 저희가 결단하고 대적하면 마귀는 피해서 물러갑니다.
(약4:7)
너희는 하나님께 복종할지어다 마귀를 대적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피하리라
(벧전5:8)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찿나니
마귀를 대적할
수 있도록 예수님의 저희에게 예수님의 이름을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저희에게 권세를 주셨습니다. 곧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의 권세를 주셨습니다.
모든 만물에
있는 존재들이 예수님의 이름 앞에 무릎을 꿇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에는 능력과 권세가 있으며, 이름의 능력과 권세를 사용할 수 있는 권한을 주님을 믿는 자녀에게 주셨습니다.
저희가 주님
안에 거하면 주님의 이름으로 간구하며 선포하는 것이 이루어 집니다. 내 앞을
가로막는 마귀의 시험도 주님의 이름의 능력 앞에서는 아무 쓸모없는 무용지물이 되어 흩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막16:17-18) 믿는 자들에게는 이런 표적이 따르리니 곧 그들이 내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새 방언을 말하며 뱀을 집어올리며 무슨 독을 마실지라도 해를 받지 아니하며 병든 사람에게 손을 얹은즉 나으리라 하시더라
마음껏 주님의
이름의 능력을 의지하며 선포하세요. 내 앞을 가로막는 마귀의 시험을 능히 이기세요.
5. 돕는 은혜를 받으려면
(히2:18) 그가 시험을 받아 고난을 당하셨은즉 시험받는 자들을 능히 도우실 수 있느니라
(히4:15) 모든 일에 저희와 똑같이 시험을 받으신 이로되
죄는 없으시니라 그러므로 저희는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받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라.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은혜를 받기를 원한다면 저희는 은혜의 보좌 앞에 나아가야 합니다.
어떻게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하게 나아갈 수 있을까요? 성령 안에서 말씀과 기도와 예배입니다.
· 말씀을 늘 가까이 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언약과 명령이 새겨져 있습니다.
말씀을 대하기 전에 성령의 도우심을 구하세요. 성령님은 깊이 감추어진 말씀의 세계로 인도하십니다.
· 육신적으로 드리는 기도가 아니라
영적인 기도, 내 안에 계시는 성령님과의 영적인 소통을 하는 기도를 통해서 저희의 영은
은혜의 보좌 앞에 나아갑니다. 성령님께서는 저희의 영을 주님의 보좌 앞으로 인도할 것입니다.
· 하나님의 보좌로부터 흘러내려
오는 은혜를 받아 예배를 회복하고 영성을 회복하세요. 예배를 통하여 주님의 자녀가 이 땅에서 살아가는
원동력을 얻게 됩니다.
시험을 받는 저희를 하나님 아버지께서 품어 안으시며 지켜주시며 은혜를 베푸십니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
주님께서 이 땅에 오신 하나님의 뜻을 이루시기 위하여 사역을 시작하며 마귀로부터 시험을 받으셨습니다. 마귀는 저희 역시 많은 시험을 주었으며 앞으로도 또 다른 시험을 저희에게 줄 것입니다.
주님은 저희에게 마귀를 대적하여 시험을 이기라고 가르쳐주셨습니다. 주님 안에 거하는 자에게는 주님의 이름의 능력과 권세를 주셔서 표적과 기사가 이루어지게 하섰습니다.
주님 저희를 도와주소서. 시험을 잘 통과하여 주님의 기쁨이 되게 하옵소서. 말씀과 기도와 예배를 통하여 저희를 돕는 하나님의 은혜의 보좌 앞에 나아가기를 원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예수님이 시험을 받는 장소는 광야입니다. 여러분 “광야”는 어떤 곳이라고 생각합니다. 어떤 느낌이 듭니까? 메마름, 목마름, 무서움, 삭막함, 외로움, 두려움, 고독, 위험이 가득함 낮의 사진을 보면 아름답게 보일 수도 있지만, 밤이 되면 두려움이 커지는 곳입니다. 그래서 광야는 하나님을 찾고 만나고 경험하는 장소일 수 있습니다. 광야의 시험에서 많은 사람들이 시험에서 통과하지 못하고 넘어졌습니다. 힘든 상황을 광야같다고 말하기고 합니다. 하나님은 일부러 연단시키기 위하여 우리에게 광야를 주십니다. 군대 생활이 마치 광야 같다고 말할 수 있습니까?
예수님께서 공생애를 시작하기 전에, 40일 금식 이후에, 광야에서 마귀로부터 세 가지의 시험을 받습니다.
1. 돌들이 떡이 되게 하라 – 하나님 말씀으로 살라 (신 8:3) / 하나님의 말씀만이 참된 삶의 원리
2. 내게 절하라 – 하나님께 경배하라 (신 6:13) / 경배의 대상은 오직 하나님만을. 신앙의 원리
첫째로, 떡이 되게 하라는 시험은 물질적인 시험입니다. 생존을 위한 의식주
욕구를 들면서 이 세상은 먹고 살아 가는 것에 만 초점을 맞추도록 합니다. 마치 이 세상에서 사는 것이 의식주가 전전 인 것
처럼요. 돈 버는 일은 다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말씀으로 대항합니다.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 입으로부터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
말씀으로 살아 간다는 것은 무슨 의미입니까? 말씀은 영적 양식, 기도는 영적인 호흡 이라고 했습니다. 말씀을 먹고 영적으로 성장해야 합니다.
성경 말씀을 통하여 하나님과 교제를 의미하는데, 하나님은 성경을 통하여 우리게 말씀하시고, 우리는 기도로 하나님께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영적인 존재로 창조하셨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과 교제할 수 있는 영과 육을 가진 존재입니다. 이러한 유혹과 시험이 있을 때 말씀으로 이겨내야 합니다.)
둘째로, 영적, 신앙적인 문제에 관한 시험입니다.
사탄에게 절하면 천하만국의 모든 권위와 영광을 다 준다고 유혹을 합니다.
세상의 달콤한 거래에 속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주실 영광을 바라며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존엄을 지켜 나아가야 한다.
당신은 지금 무엇을 꿈꾸며 달려 가고 있나요?
내 앞에 빛나는 정치적 지위보다 내 마음 속에 빛나는 하나님을 원하고 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성적으로, 논리적으로 “정의” 단어를 좋아하며, 여기에
속하기를 원합니다. 그리고 이 말을 좋아하고, 불의가 있을 때 정의를 부르짖습니다. 그런데 실제로 세상의 달콤한 유혹의 상황에
처했을 때, 정의를 버리기도 합니다.
권력을 이용하여 갑질하는 사람들
셋째로,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 내려보라고 합니다. 세상의 영웅으로서의 영광을 누려보라고 합니다. 허영과 야망을 부추기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은 세상의 영광을 받으러 이 세상에 오지 않고 섬기려 오셨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마가복음 10:45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가치관은 삶에 영향을 줍니다. 돈을 최고로 가치로 둔다면 돈을 중심으로 재편이 될 것입니다.
돈에 대한 강의, 돈에 대한 책,
영적인 가치관이 삶에 미치는 영향, 삶의 목표가 달라지고, 태도가 달라지고, 다른 사람들을 사랑하게 되고, 용서하게 되고...
경남 거창고등학교의 직업 십계명
1. 월급이 적은 쪽을 택하라. 2. 내가 원하는 곳이 아니라 나를 필요로 하는 곳을 택하라. 3. 승진 기회가 거의 없는 곳을 택하라. 4. 모든 조건이 갖추어진 곳을 피하고 처음부터 시작해야 하는 황무지를 택하라. 5. 앞을 다투어 모여드는 곳은 절대 가지 마라. 아무도 가지 않는 곳으로 가라. 6. 장래성이 전혀 없다고 생각되는 곳으로 가라. 7. 사회적 존경 같은 건 바라볼 수 없는 곳으로 가라. 8. 한가운데가 아니라 가장자리로 가라. 9. 부모나 아내나 약혼자가 결사반대를 하는 곳이면 틀림이 없다. 의심치 말고 가라. 10. 왕관이 아니라 단두대가 기다리고 있는 곳으로 가라.
기존의 가치관이 아닌 영적 가치관으로 나를 돌아 볼 수 있습니다. 진정한 나의 직업을 찾을 수 있습니다.
믿음으로 하나님이 주신 나만의 은사, 나만의 고유한 색깔을 가지고 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증인이 되려면, 예수님을 믿어야 합니다.
벧전2:2
우리는 이 세상의 모든 유혹과 시험을 이기기 위하여 예수님을 본 받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말씀을 사용하였습니다.
1) 예수님이라면 어떻게 하셨을까?
2)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인가?
두 질문에 “아니요” 이면 하지 말아야 합니다.
“예” 이면 해야죠. 기독교인은 정의와 진리 편에 속해 있어야 하니까요.
기도로 설교를 마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가 살아 가면서 많은 유혹과 시험을 당하게 됩니다. 하나님 편에 서서, 정의와 진리 편에 속해서 세상과 당당하게 싸우는 용사들이 되게 도와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얼마 동안 떠나갔다(누가복음 4:1-13)
첫 번째 시험은 40일 동안 광야에서 금식하셔서 굶주리셨던 예수님에게 광야에 널브러진 돌멩이로 빵을 만들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사람의 생존을 위해 가장 기본적이고 본질적인 문제라고 할 수 있는 먹고 사는 문제에 관한 시험입니다.
마귀는 예수님에게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광야의 널브러진 돌멩이로 빵을 만들라고 했습니다. 돌을 빵으로 만들라는 마귀의 시험은 단순히 돌을 빵으로 만드는 기적을 행하여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을 증명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돌은 하나님께서 양식으로 주신 것이 아닙니다. 따라서 돌을 빵으로 만들라는 것은 하나님께서 주신 것으로 살지 말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고 네가 원하는 대로 살라는 마귀의 교묘한 유혹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어떻게 마귀의 시험을 물리치셨습니까? 예수님께서는 신명기 8장 3절의 말씀을 인용하시어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아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무슨 뜻입니까? 굶주림의 문제나 먹고 사는 경제 문제를 해결하는 것은 돌멩이를 빵으로 만드는 기적이 아닙니다. 하나님 말씀으로 하나님께서 주시는 일용할 양식만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유일한 길입니다.
두 번째 시험은 예수님을 지극히 높은 것으로 데려가서는 세상 권세의 화려함과 영광을 보여주었습니다.
그리고 이 모든 권세와 영광을 주겠다고 합니다. 마귀가 약속한 세상의 권세와 영광은 세상에서의 부귀영화, 성공에 대한 메타포라 할 수 있습니다. 마귀는 예수님에게 세상의 모든 권세와 영광을 보여주고는 이것을 얻기를 원한다면 자신에게 엎으려 절하라 유혹합니다.
마귀에게 엎드려 절하라는 것은 자신을 경배하라는 것입니다. 마귀를 경배한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합니까? 하나님의 방식 대신 마귀의 방식을 따라 세상을 살아가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자신의 탐욕을 따라 세상을 살아가라는 것입니다. 마귀는 세상의 부귀영화나 성공에 대한 욕심을 이용해 사람들의 마음과 눈을 멀게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 방식과 말씀 대신 마귀의 방식을 따라 살게 합니다.
인간의 탐욕을 이용하여 인간을 지배하고 통제하기 위한 마귀의 방식이 무엇입니까? 약육강식, 승자독식, 원하는 결과를 얻을 수 있다면 그 과정은 상관하지 않는 결과주의가 세속의 방식이며 마귀의 방식입니다. 그래서 힘이 센 사람이 약한 사람을, 부자가 가난한 사람을, 권력을 가진 사람이 권력 없는 사람을, 함부로 무시하고 억압하고 착취하는 것을 마치 당연한 것처럼 여기게 만드는 세상을 만들어내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어떻게 마귀의 두 번째 시험을 물리치셨습니까? 눅4:8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기록된 바 주 너의 하나님께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기라 하였느니라 이것이 무슨 뜻입니까? 세상의 방식이 아닌 하나님의 방식을 따라 살아야 한다고 말씀으로 마귀의 유혹을 물리치셨습니다. 하나님의 방식은 힘이 있는 자는 약한 자를 돕고, 부유한 자는 가난한 자를 나누어주며, 권세를 가진 자는 그 권세를 약한 자들을 위해 사용하는 것입니다.
세 번째 시험은 예수님을 성전 꼭대기에 세우고는 거기서 뛰어내리라는 것입니다. 마귀는 시편 91편의 말씀을 이용하여 하나님께서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내리는 예수를 털끝 하나 다치지 않게 보호해 줏실 것이라고 유혹합니다. 그래서 성전에서 이 광경을 지켜보는 많은 사람에게 하나님의 아들임을 증명해 보라는 것입니다.
마귀의 마지막 세 번째 시험이 하나님이 계신다는 예루살렘 성전에서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하는 성경 말씀을 이용해 이루어졌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합니다. 교회는 마귀의 시험이 없는 청정구역이 아닙니다. 오히려 교회는 세상의 그 어떤 곳보다 더 치열한 시험과 영적 싸움이 일어나는 곳입니다.
또한 성경 말씀은 사람을 살리는 생명의 말씀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하지만 성경 말씀이 사람을 살릴 수 있는 생명의 말씀이기에 잘못 사용하면 사람을 죽이는 죽음의 말씀도 될 수 있음을 명심해야 합니다. 너무나 많은 종교 지도자가 자신들이 바라고 원하는 목적이나 소원을 이루기 위해 성경을 함부로 남용하거나 제멋대로 오용하는 경우가 너무나 많습니다.
마귀의 세 번째 시험의 본질은 신비한 이적을 보여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아들임을 증명하라는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세상이 놀랄만한 이적이나 신비한 기적으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증명하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예수님은 세상이 조롱하고 세상이 멸시하고, 세상이 저주하는 십자가의 길을 가시는 것으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세상에 드러내셨습니다.
이것은 지금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도 세상이 요구하는 방식으로 하나님의 자녀임을 증명하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지금보다 더 성공해야 하고 지금보다 더 많은 돈을 벌어야 하고 지금보다 더 높은 자리에 올라가야 합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방식으로 하나님의 자녀라는 사실을 증명하려면, 성공하거나 부자가 되지 않아도 됩니다. 지금보다 더 겸손하면 되고, 지금보다 더 낮아지려고 하면 되고, 지금보다 더 욕심을 버리면 됩니다.
누가복음은 세 번에 걸친 시험으로도 예수님을 유혹하는 데 실패한 마귀가 잠시 떠나갔다고 기록합니다.눅4:13 마귀가 모든 시험을 다 한 후에 얼마 동안 떠나니라 마귀가 얼마 동안 떠나갔다는 말씀에는 매우 중요한 교훈과 영적 도전이 있습니다. 무엇입니까? 지금이 비록 유혹에 실패하여 잠시 떠나가지만, 우리를 시험하여 넘어뜨리려는 마귀는 언젠가 또다시 돌아온다는 것입니다.
반복하지만, 누가복음에 나오는 예수님 받으신 세 가지 시험을 제대로 이해하고 적용하기 위해선 마귀를 단순히 악한 귀신 정도로만 여겨서는 안 됩니다. 성경이 말씀하는 마귀 또는 사탄의 본질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 또는 하나님을 대적하게 만드는 권세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을 대적하는 사회 구조나 인간 내면에서 끊임없이 일어나는 하나님을 대적하고 스스로 하나님과 같아지려는 자기중심적 욕망이야말로 성경이 말씀하는 마귀의 본질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마귀가 얼마 동안 떠났다는 말씀은 우리를 유혹하여 넘어뜨리려는 시험은 또다시 온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시험은 언제까지 계속될까요? 우리가 시험에 빠져 완전히 무너질 때까지 계속될 것입니다. 우리가 죽는 순간까지 계속될 것입니다. 그래서 한두 번의 시험을 물리쳤다고 자만해서는 안 됩니다.
또한 시험이 또다시 반복한다고 실망하거나 낙심할 필요도 없습니다. 시험이 반복된다는 것은 여전히 내가 시험에 굴복하지 않았다는 증거입니다. 그리고 한두 번 시험에 빠져 넘어졌다고 실망하거나 낙심할 필요도 없습니다. 실망하고 좌절하여 더는 우리를 무너뜨리려는 악한 권세와 영적 싸움을 하지 않는 것이 문제지 한두 번의 실수나 실패로 사람은 무너지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세 번이나 배신한 베드로도 다시 쓰셨습니다.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는 신앙생활이란 우리를 지배하고 다스리려는 죄와 악의 권세가 영영 사라지는 완벽한 상태가 아닙니다. 그것과 끊임없이 씨름하고 싸우는 과정을 통해 죄악된 권세로부터 조금씩 자유로워지는 과정입니다. 그래서 마귀가 잠시 물러간 시기일수록, 우리는 더욱 깨어서 기도하며 준비해야 합니다. 전쟁은 가장 평화로울 때 준비하는 것이지 전쟁이 일어나고 나서 준비하면 늦습니다.
마태복음 12장을 보면 더러운 귀신이 사람에게서 쫓겨난 비유의 말씀이 있습니다. 마12:43-45 더러운
귀신이 사람에게서 나갔을 때에 물 없는 곳으로 다니며 쉬기를 구하되 쉴 곳을 얻지 못하고 이에 이르되 내가 나온 내 집으로
돌아가리라 하고 와 보니 그 집이 비고 청소되고 수리되었거늘 이에 가서 저보다 더 악한 귀신 일곱을 데리고 들어가서 거하니 그
사람의 나중 형편이 전보다 더욱 심하게 되느니라
사람에게서 쫓겨난 더러운 귀신이 물 없는 곳으로 다니며 자기가 머물 곳을 찾아 여기저기를 헤매고 다녔습니다. 마귀가 찾아다닌 물 없는 곳이란 하나님의 임재가 느껴지지 않는 영적으로 메마른 영역을 나타내는 메타포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아무리 찾아다녀도 마땅히 거할 곳을 찾지 못한 더러운 귀신이 어떻게 했습니까?
자신이 쫓겨난 사람을 다시 찾아간 것입니다. 다시 찾아간 사람을 보니 깨끗하게 청소되고 수리되었지만, 아무것도 없는 빈집과 같은 상태였습니다. 이 사실을 발견한 더러운 귀신이 어떻게 했습니까? 자기보다 더 악한 귀신 일곱을 데리고 그 사람에게 들어갔습니다. 그 사람은 더러운 귀신을 내쫓을 때보다 더 심각한 상황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사람에게서 쫓겨난 더러운 귀신이 여기저기 다니다가 다시 돌아왔다는 것에 주목해야 합니다. 사람마다 자신이 가진 취약한 부분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에겐 돈이기도 하고, 성적인 문제이기도 하고, 어떤 사람에겐 도박일 수도 있고, 어떤 사람은 다른 사람에게 과시하고 자랑하려는 과시 욕구나 인정욕구도 있을 것입니다.
자신의 취약한 부분은 한 번 유혹이나 시험을 물리쳤다고 문제가 완전히 해결된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취약한 부분을 누구보다 잘 아는 마귀는 우리의 취약한 부분을 끊임없이 반복하여 물고 늘어지려고 합니다. 그리고 대부분 경우 반복되는 마귀의 유혹에 결국 넘어지고 맙니다.
말씀을 마칩니다. 예수님이 마귀에게 받으신 세 가지 시험은 예수님에게만 해당하는 사건이 아닙니다. 예수를 그리스도라고 믿는 우리가 이 세상을 살면서 받게 되는 시험과 유혹에 관한 말씀입니다. “마귀가 얼마 동안 떠났다”라는 마지막 말씀은 우리의 신앙이 한 번의 결단으로 끝나지 않고 계속 이어지는 기나긴 여정임을 상징합니다.
우리를 넘어뜨리려는 시험과 유혹은 우리가 넘어질 때까지 우리가 무너질 때까지 계속될 것입니다. 하지만 두려움에 사로잡힐 필요는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말씀으로 능히 시험을 물리치신 것처럼 우리와 함께하시는 성령의 능력을 힘입어 우리는 능히 물리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끊임없이 자기의 내면을 성찰하며 깨어 기도하고 하나님 말씀을 묵상하며 살 때 악의 힘은 끝내 우리를 지배하지 못할 것입니다.
마귀가...떠나니라
- 사단은 모든 공격에서 참패를 당했으며 갖은 방법을 다하였으나 실패했다. 결국 마귀는 얼마 동안 예수의 곁을 떠났다. 콘첼만(Conzelmann)은 이 '얼마 동안'(until an opportune time, NIV)의 기간을 22:3까지라고 이야기한다. 즉 22:3에서 마귀가 다시 나타나 예수의 수난을 야기시키나 그 전까지는 사단이 역사하지 않았다고 주장한다(Conzelmann, Theology of Luke, P. 38). 그러나 브라운(Brown)은 본서를 살펴보면 사단이 예수의 전생애 동안에 역사했다고 주장한다(Schuyler Brown, Apostasy and Perseverance). 예수의 공생애가 유대교 지도자들을 중심으로 한 적대자들의 핍박으로 일관되었고 이러한 핍박이 궁극적로는 사단에 의해 사주되었음을 고려해 볼 때, 이중 두번째 견해가 더 타더한 듯하다. 사단의 시험에 대한 예수의 승리가 가져다 주는 의미는 실로 크다. 결국 사단과의 싸움에서 얻은 승리는 곧 예수의 복음 사명이 최종적 성취를 보게되리라는 점을 암시하는 복선적 역할도 하기때문이다. 예수께 있어서의 사단과의 싸움은 곧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하기 위함이고 복음을 전파하기 위함인 것이다. 한편 누가는 시험이 끝난 후에 천사들이 예수를 수종들었다는 것을 기록하지 않고 있다(마 4:11;막 1:13). 이것은 각 제자간의 저작 목적에 따른 시각 차이이겠으나 누가는 예수께서 홀로 힘든 시험을 이겨내신 사실을 보다 강조해 보이고자 했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11월 7일(금) 누가복음 1-3장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요셉의 아들(3:23)
예수께서 가르치심을 시작할 때에 삼십세쯤 되시니라 사람들의 아는대로는 요셉의 아들이니 요셉의 이상은 헬리요. Now Jesus himself was about thirty years old when he
began his ministry. He was the son, so it was thought, of Joseph, the
son of Heli,
마태복음 1:15-16 엘리웃은 엘르아살을 낳고、엘르아살은、맛단을 낳고、맛단은 야곱을 낳고、야곱은 마리아의 남편 요셉을 낳았으니 마리아에게서 그리스도라 칭하는 예수가 나시니라.
성경에는 마태복음에 기록된 예수의 족보와 누가복음에 기록된 예수의 족보가 전혀 다르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사실 족보의 비밀은 그 가족만이 아는 것입니다. 가족이 아닌 다른 사람은 그 집안사람이 족보의 내력을 알려주지 아니하는
한 절대로 알 수가 없습니다. 어떻게 가족이 아닌 다른 사람이 남의 집안 족보의 비밀을 알 수가 있겠습니까? 우리가 예수님의
족보의 비밀을 알게 되는 것은 예수님의 가족으로 축복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누가복음 8:17 숨은 것이 장차 드러나지 아니할 것이 없고 감추인 것이 장차 알려지고 나타나지 않을 것이 없느니라.
이 말씀은 때가 되면 성경에 숨겨지고 감춰있던 것이 다 드러난다는 말씀입니다. 때가 되면 세상의 비밀은 물론이고 하나님의 비밀도
다 드러나게 됩니다. 개개인의 비밀도 말할 것 없이 다 드러나게 됩니다.
세상에서도 총리나 장관을 한번 하려면 국회 인준을
받기위해 신상에 관한 모든 것이 밝혀지는데 심지어는 몇 년 전, 몇 십 년 전에 돈 받은 것까지도 다 들어나게 됩니다.
성경에
지금까지 사람의 지혜나 생각으로 알 수 없었던 은비한 비밀들이 많이 있는데 “숨은 것이 장차 드러나지 아니할 것이 없고 감추인
것이 장차 알려지고 나타나지 않을 것이 없느니라” 고 말씀하심같이 이제 때가 되어 이 모든 사실들이 밝히 드러나게 되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7:3 영생은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
요한복음 5:39 너희가 성경을 통하여 영생을 얻는줄 생각하고 이 성경을 상고하거니와 이 성경은 곧 내게(예수) 대하여 증거한 것이니라.
예수를 안다는 것이 뭡니까? 예수를 안다는 것은 곧 성경을 아는 것이고 성경을 바로 알고 믿을 때에 우리가 영생의 축복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 족보에 관한 비밀은 성경의 깊은 말씀 중에서도 아주 깊은 말씀입니다. 그리고 예수 족보에 관한 비밀을 알아야 성경의 깊은 오묘한 뜻을 이해 할 수가 있습니다.
성경에는 요셉의 아버지가 두 사람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요셉의 아버지가 두 사람이라는 것은 참 신기한 일이며 놀라운 사실입니다.
마태복음에는 분명히 요셉의 아버지가 야곱이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요셉의 아버지는 야곱이 확실합니다. 그런데 누가복음에는 요셉의 아버지가 전혀 다른 사람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누가복음 3:23 예수께서 가르치심을 시작할 때에 삼십 세 쯤 되시니라 사람들의 아는 대로는 요셉의 아들이니 요셉의 이상은 헬리요 헬리의 이상은 맛닷이요.
이상이라는 것은 아비를 뜻합니다.
이상(5207) 휘오스(hüiŏs) υἱός, οῦ , ὁ
1. 아들. 2. 사람의 남자 자식. 3. 동물의 수컷 새끼 Pronunciation
[ hüiŏs ]
관련 성경 / 자손(마1:1, 막12:37, 고후3:7), 아들(마1: 21, 행7:29, 계12:5), 새끼(마21:5), 인자(막14:41), 자녀(눅20:34,36), 자식(요17:12), 족속(행5:21), 후손(행13:26).
누가복음에는 분명히 요셉의 이상(아비)이 헬리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누가복음에는 헬리가 요셉의 아버지이고 마태복음에는 요셉의 아버지가 야곱인 것입니다. 야곱하고 헬리는 전혀 다른 사람입니다.
다윗의 아들이 나단과 솔로몬이 있었는데 솔로몬으로부터 나오는 족보는 마태복음 족보 나단으로부터 나오는 족보는 누가복음
족보
야곱의 아들 솔로몬으로부터 시작해서 나오는 족보에는 야곱에 의해서 요셉이 탄생합니다. 그런데 누가복음에 기록된
나단으로 시작한 족보에서 또 요셉이 탄생했다면 이는 같은 사람이 아니고 전혀 다른 사람이어야 하는데 마태복음에 기록된 야곱의 아들
요셉과 누가복음에 기록된 헬리의 아들 요셉은 같은 사람입니다.
다윗으로부터 나단의 혈대는 요셉까지가 42대 이고, 다윗으로부터 솔로몬 혈대는 요셉까지가 27대입니다. 다윗의 아들 나단과
솔로몬으로 나누인 두 혈통이 나단의 42대 아들하고 솔로몬의 27대 아들이 절대로 한 사람일 수가 없습니다. 한 사람이라고 하면
아버지(다윗)가 아들 둘을 낳았는데 그 아들들이 수십 대가 지나서 한 아들을 낳았다면 말이 됩니까? 그건 불가능 한 일이며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이 불가능한 일이 성경에 예수의 두 가지 족보의 비밀로 기록 되어있다는 사실입니다. 이 놀라운 사실 두
가지 족보에 관한 비밀을 성경 상으로 지금 까지 어느 누구도 말한 사람이 없었고, 해석한 자도 해석할 자도 없습니다.
어떤 신학자들은 요셉의 두 족보에 관해서 마태복음 족보는 좀 간단하게 기록했고 누가복음 족보는 좀 자세하게 기록한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그 말은 내용의 본질하고는 전혀 상관없는 해석입니다. 마태복음 족보하고 누가복음 족보에 기록되어 있는 사람들은
전혀 다른 사람입니다. 마태복음의 이름들은 많이 익혀진 이름들이 나오는데 누가복음 족보에 나와 있는 이름들은 전부 생소한 이름들이
나옵니다. 그러면 어떤 족보가 진짜냐, 하는 것도 문제가 될 수 있습니다.
요셉의 두 족보에 관한 비밀은 사람이 연구해서 알 수 있는 말씀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족보 속에 놀라운 씨앗의 비밀을
숨겨 뒀습니다. 족보의 비밀을 안다는 것은 곧 씨앗의 비밀을 아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서 누가복음 족보와 마태복음 족보가
대수도 다르고 사람들도 전혀 다른데 어떻게 하나의 대수로 이어 졌는가? 하는 것을 깨달을 수 있는 말씀을 성경에서 확인 하도록
하겠습니다.
신명기 25:5~6 형제가 동거를 하는데 그 중에 하나가 죽고 아들이 없거든 그 죽은자의 아내는 나가서
타인에게 시집가지 말것이요 그 남편의 형제가 그에게로 들어가서 그를 취하여 아내를 삼아 그의 남편의 형제된 의무를 그에게 다 행할
것이요 그 여인의 낳은 첫 아들로 그 죽은 형제의 후사를 잇게하여 그 이름을 이스라엘 중에서 끊어지지 않게 할 것이니라.
형제가 아들이 없이 죽으면 그 아내는 과부가 될 것이요. 그 과부가 된 아내는 타인에게 시집가지 말고 그 남편의 형제가
그에게로 들어가서 그를 취하여 아내를 삼아 그의 남편의 형제 된 의무를 그에게 다하라 했습니다. 그래서 아들을 낳게 되면 자신의
족보에 올리지 말고 대신한 형제의 이름으로 그 아들을 족보에 올려 대를 잇게 하게 하라는 것입니다. 형님이름으로 대를 잇게 하여 그
대가 끊어지지 않게 하라는 것입니다.
만약에 형제가 셋인데 첫째 형이 죽어 그 형수를 둘째 형이 취했는데 둘째 형이 또 죽었다면 셋째가 둘째 형수 방에 또
들어가서 아들을 낳게 하고 대를 잇게 해야 합니다. 이것이 구약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의 법칙입니다. 대를 잇게 하는 법칙이라는
것입니다.
신명기 25:7-10 그러나 그 사람이 만일 그 형제의 아내 취하기를 즐겨하지 아니 하거든 그 형제의 아내는 그
성문 장로들에게 나아가서 말하기를 내 남편의 형제가 그 형제의 이름을 이스라엘 중에 잇기를 싫어하여 남편의 형제 된 의무를 내게
행하지 아니 하나이다 할 것이요 그 성읍 장로들은 그를 불러다가 이를 것이며 그가 이미 정한 뜻대로 말하기를 내가 그 여자
취하기를 즐겨 아니하노라 하거든 그 형제의 아내가 장로들 앞에서 그에게 나아가서 그의 발에서 신을 벗기고 그 얼굴에 침을 뱉으며
이르기를 그 형제의 집 세우기를 즐겨 아니하는 자에게는 이같이 할 것이라 할 것이며 이스라엘 중에서 그의 이름을 신 벗기운자의
집이라 칭할 것이니라.
형이 후사가 없이 죽으면 그 아우가 그 형수를 취해서 형제 된 의무를 다 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 형수와 동침에서 첫아들을
낳으면 반드시 호적에 형의 아들로 올려서 그 대를 잇게 해야 합니다. 이스라엘 민족은 조상이 같으면 한 형제라고 봅니다. 조상이
같으면 형제라고 보기 때문에 형제같이 지냅니다.
요셉의 아버지 야곱은(마 1:16) 솔로몬의 혈통입니다. 나단과 솔로몬은 다 같은 다윗의 후손입니다. 다윗에게부터 나단과
솔로몬으로 갈라진 것입니다. 갈라져서 두 줄기로 나온 것입니다. 마태복음에 기록된 요셉의 아비 야곱은 솔로몬의 25대 후손이고
누가복음에 기록된 요셉의 아비 헬리는 나단의 40대 후손입니다. 다윗이 나단과 솔로몬을 낳았는데 나단의 40대 후손과 솔로몬의
25대 후손이 같은 사람(요셉) 이라는 것입니다. 이건 말도 안 되는 말입니다. 헬리는 나단의 후손이고 야곱은 솔로몬의 후손인데
다윗 이후 혈통도 혈대로 전혀 다른데 어떻게 한 사람의 후손이 있을 수 있습니까.
사실 요셉은 야곱의 아들입니다. 야곱의 아들인데 어떻게 해서 헬리의 아들이 되느냐 아니 어떻게 해서 헬리의 아들이 됐는냐
하는 겁니다. 방금 말씀드린 것과 같이 구약시대 이스라엘 민족은 조상이 같으면 한 형제로 생각합니다. 비록 먼 형제지만 다윗의
후손으로 같은 형제입니다. 형의 형수가 아들이 없으면 동생이 그 도리를 다해야 된다는 말씀이 기록됨같이 헬리가 자식이 없이 죽자
야곱이 헬리의 아내를 취하여 아들(요셉)을 낳았지만 족보에는 헬리의 아들로 기록하고(눅 3:23) 실제적인 혈통은(마 1:16)
야곱의 혈통으로 기록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요셉의 아비 야곱이 헬리의 집안에 가서 헬리 대신 자식을 낳게 해줘서 대를 잇게
해준 겁니다. 헬리가 죽어서 자식이 없었음으로, 야곱이 과부된 헬리의 부인과 동침해서 낳은 자식이 요셉이었다는 겁니다. 형이
아들이 없이 죽었는데 시동생이 형부인과 동침을 해서 아들을 낳았지만 호적에 동생 이름으로 해야 되는데 형의 아들로 호적에 입적하니
형의 아들로 태어난다는 겁니다. 요셉이 야곱의 아들이지만, 헬리의 아들이 된 것은 그 아버지가 헬리의 집안에 가서 자식을 낳아준
겁니다. 자식을 낳아 주었기 때문에 요셉은 두 아버지를 가진 겁니다. 자기를 낳아준 친아버지는 야곱이고 헬리 집에 가서 자식을
낳아준 것은 비유를 말하면 야곱의 형님 집에 가서 자식을 낳아준거나 마찬가지인 것입니다. 그래서 요셉에게 두 아버지가 생긴
겁니다.
야곱은 요셉의 진짜 아버지이고 헬리가 아버지가 된 것은 명목상으로만 된 것이기 때문에 사람들의 아는 대로는 호적에 올려져있는
대로 요셉이 헬리의 아들이지만 사실은 야곱의 아들인 것입니다. 그래서 마태복음에 기록된 족보와 누가복음에 기록된 족보가 다른
것입니다. 누가복음에 기록된 족보는 명분상의 족보이고 마태복음에 기록된 족보는 실상적인 족보라는 것입니다. 호적상으로는 헬리가
요셉의 아버지이나 실상은 요셉의 아버지는 야곱인 것입니다. 솔로몬 족보에 있는 사람이 나단의 족보에 가서 자식을 낳아준 것입니다
요셉의 이중 족보에 관한 비밀은 정말로 심오합니다. 구약시대에도 희한하게 야곱의 12아들 중 11번째 아들이 요셉이었습니다. 그는 특별히 꿈을 잘 꾸었는데 꿈으로 인해 훗날 애굽의 총리가 됩니다. 가나안에 기근이 들어 아버지 야곱이 가족 70명이 기근을
피하여 애굽으로 찾아와서 같이 살다가 야곱이 병이 들어 자리에 눕게 되자 그 소식을 들은 요셉이 므낫세와 에브라임을 데리고
병문안을 가게 됩니다.
창세기 48:1 이 일후에 요셉에게 고하기를 네 부친이 병들었다 하므로 그가 곧 두 아들 므낫세와 에브라임과 함께 이르리니 혹이 야곱에게 고하되 네 아들 요셉이 네게 왔다 하매 이스라엘이 힘을 내어 침상에 앉아…
이스라엘은 야곱이 받은 새 이름입니다. 이스라엘이나 야곱이나 마찬가지 이름입니다.
겨우 일어나 침상에 앉아 요셉에게 이르되 이전 가나안 땅 루스에서 전능한 하나님이 내게 나타나 복을 허락하여 내게 이르시되
내가 너로 생육하게 하며 번성하게 하여 네게서 많은 백성이 나게 하고 내가 이 땅을 네 후손에게 주어 영원한 기업이 되게 하리라
하셨느니라
이것은 야곱이 옛날부터 하나님께 받았던 축복을 설명하고 있는 겁니다.
내가 애굽으로 와서 네게 이르기 전에 애굽에서 네게 낳은 두 아들 에브라임과 므낫세는 내 것이라 르우벤과 시므온처럼 내 것이 될 것이요 이들 후의 네 소생이 네 것이 될 것이며..
야곱이 네가 애굽에서 낳은 두 아들 에브라임과 므낫세는 내 아들이라. 마치 르우벤과 시므온처럼 내 아들이 된다는 이 말씀은
놀라운 말씀입니다. 이는 손자를 아들의 반열에 올려놓은 것이며 르우벤은 첫째 아들이고 시므온은 둘째 아들인 것처럼 내 아들이 될
것이라고 하였으니 마치 장자와 차자와 같이 손자를 아들 반열로 올려놓았습니다. 그리고, 므낫세와 에브라임을 에브라임과 므낫세로
장자와 차자의 위치를 뒤바꿔 축복을 하게 됩니다. 또한 두 아들은 내 것이라 르우벤과 시므온처럼 내 것이 될 것이요 라고 하며
이들 후의 네 소생이 네 것이 될 것이며 라고 하여 요셉을 무자한 자로 만들었습니다. 후에 아들을 낳으며 네 아들을 해라. 했지만
후에 요셉은 아들을 낳지 못했습니다. 그 산업은 그 형의 명의 하에서 함께 하리라 그렇게 말을 했습니다. 자식을 잃은 요셉은
아들이 없는 홀아비가 된 거고 요셉의 부인 아스낫은 애굽의 보이베라의 제사장의 딸이였는데(창 41:45) 아스낫은 아들이 하나도
없는 자가 되 버린겁니다. 영적으로 처녀 총각이 된 거나 마찬가지인 것입니다.
요셉은 총각 상태가 되고 아스낫은 처녀 상태가 된 겁니다. 그리고 이후에 아들을 낳으면 네 아들이라고 되리라고 했지만 이후에
아들 낳은 사실이 없습니다. 야곱이 요셉에게 이 후에 아들을 낳으면 네 아들이 되리라고 했는데 요셉은 그 이후에 아들을 낳지를
못했습니다. 이 말씀은 훗날에 되어질 엄청난 비밀이 숨겨져 있습니다. 창세기 49:1에 보시면 하나님이 야곱을 통해서 예언을
하셨습니다. 야곱이 그 아들들을 불러 이르되 너희는 모이라 너희의 후일에 당할 일을 내가 너희에게 이르리라 훗날에 당할 일을
알려준다고 해 놓고서 요셉에게 대하여 예언을 하였습니다. 요셉은 이제 아들이 없는 자입니다.
창세기 49:22 요셉은 무성한 가지 곧 샘 곁의 무성한 가지라
샘 곁의 가지이니 물이 많으니까 가지가 얼마나 잘 자라겠습니까?
그 가지가 담을 넘었도다 활쏘는 자가 그를 학대하며 그를 쏘며 그를 군박하였으나 요셉의 활이 도리어 견강하며 그의 팔이 힘이 있으니 야곱의 전능자의 손을 힘입음이라.
야곱의 전능자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로부터 이스라엘 반석인 목자가 나도다.
요셉의 두 아들 에브라임과 므낫세를 아버지에게 빼앗겨 아들이 없지만 야곱은 그 대신에 이스라엘 반석인 되시는 목자가 네게서
나올 것이다 라고 예언을 하지만 요셉을 통해서 이스라엘 반석인 목자가 태어난 사실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신약에 와서 이스라엘의
반석인 목자(예수)가 야곱의 아들인 요셉을 통해서 나타나고 있습니다.
마태복음 1:15-16 엘리웃은 엘르아살을 낳고、엘르아살은、맛단을 낳고、맛단은 야곱을 낳고、야곱은 마리아의 남편 요셉을 낳았으니 마리아에게서 그리스도라 칭하는 예수가 나시니라.
이스라엘 반석이 되시는 목자는 예수님이십니다. 구약시대 야곱의 예언대로 예수님이 신약시대에 야곱의 아들 요셉에게서 나셨단
사실은 실로 놀라운 말씀입니다. 청천벽력 같은 신묘막측한 말씀입니다. 구약시대에 요셉을 통해서 이스라엘 반석이신 목자가 날 것을
예언했는데 그 예언이 신약시대에 야곱의 아들 요셉에게서 이스라엘 반석이신 목자가 나시므로 성취되는 성경의 심오한 하나님의 말씀이
경이스럽습니다.
그래서 성경에 예수를 요셉의 아들로 기록하고 있는 것입니다. 마리아 아들로 기록된 구절이 한 구절 있고 요셉의 아들로도 기록되어 있습니다. 먼저 마리아의 아들로 기록된 말씀부터 보시겠습니다.
마가복음 6:3 이 사람이 마리아의 아들 목수가 아니냐 야고보와 요셉과 유다와 시므온의 형제가 아니냐 그 누이들이 우리와 함께 여기 있지 아니하냐 하고 예수를 배척한지라
요한복음 1:45 빌립이 나다나엘을 찾아 이르되 모세가 율법에 기록 하였고 여러 선지가가 기록한 그 이를 우리가 만났으니 요셉의 아들 나사렛 예수니라
성경 상으로 볼 때 야곱의 아들 요셉에게서 이스라엘 반석이 목자가 나도다 고 기록된 예언과 같이 요셉의 아들이라고 정확하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누가복음 3:22~23 성령이 형체로 비둘기 같이 그의 위에 강림 하시더니 하늘로서 소리가 나기를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 하시니 예수께서 가르치심을 시작 할 때에 삼십 세쯤 되시니라 사람들의 아는 대로는 요셉의
아들이니..
구약의 역사는 그림자적인 것입니다. 요셉이 아들을 아버지에게 다 뺏기므로 아들이 없었고 후에 이스라엘 반석인 목자가 되시는
아들을 낳는다고 했기 때문에 구약의 요셉이 아들이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신약의 요셉도 아들이 없는 총각이 된 것이고, 제사장
모디바의 딸 아스낫 대신에 마리아가 예수를 성탄하게 되므로 말미암아 마리아의 아들도 되고 요셉의 아들도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성경적으로 보면 마리아의 아들이기도 하고 요셉의 아들이기한 것입니다.
예수님도 보면 이중 족보입니다. 실상적으로 말하면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지 요셉의 아들이 아닙니다. 육신으로 하면 요셉의
아들이지만, 영으로 보면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요셉이 야곱의 아들이 되기도 하고 헬리의 아들이 되기도 하는 것처럼 예수님도 이중
족보의 비밀로 오셨고 마지막 때 하나님의 섭리도 성경에 그림자적으로 나타낸 것 같이 이중 족보의 비밀로 하나님의 역사가 이루어질
것입니다.
우리가 육신적으로 하면은 김씨, 이씨, 박씨 각자 성씨집안의 아들이지만 영적으로는 하나님의 아들인 것입니다. 이 말씀을
통해서 우리가 깨달을 수 있는 큰 비밀은 성경으로 볼 때에 솔로몬을 통한 27대 족보하고 나단을 통한 42대 족보하고는 절대로
하나가 될 수 가 없습니다. 절대로 하나가 될 수 없는데 하나가 된 것은 희한안 일입니다. 그것도 성경에 맞지 않고 친형제 같으면
서론에(신 25:5-10) 성경에 읽어준 대로 봐서 말이 되는데 집은 딴 집안인데 하나가 되었습니다. 성경을 이루기 위해서 요셉이
자기의 집안이 아닌 헬리의 집안으로 가서 자식으로 태어난 게 아닌가 그러나 실상은 헬리의 아들이 아니고 야곱의 아들이었습니다.
이중 족보를 통한 예수의 출생비밀을 깨달은 자들로서 하나님의 귀한자녀로 축복되시기를 예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마1:16, 눅3:23 요셉의 아버지가 야곱(다윗의 아들 솔로몬의 계보,요셉족보)인가? 헬리(=마리아족보)인가?
마1:16, 눅3:23 예수님의 양아버지인 요셉의 아버지가 야곱(=다윗의 아들 솔로몬의 계보,요셉족보)인가? 헬리(=다윗의 아들 나단의 계보,마리아족보)인가?
성경을 자세히 읽어보다 보면 마1:16절과 눅3:23절을 보면서 이해가 가지 않는 혼란스러운 경험을 하신 분들도 있으셨을 것입니다.
왜냐면 동일한 인물인 요셉(=마리아의 남편)을 두고
마1:16절은 요셉의 아버지가 '야곱(=Jacob)'이라고 하고, 눅3:23절에서는 요셉의 아버지가 '헬리(=Heli)'라고 기록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야곱은 마리아의 남편 요셉을 낳았는데 마리아에게서 그리스도라 하는 예수님이 태어나시니라.'(마1:16)
('And Jacob begat Joseph the husband of Mary, of whom was born Jesus, who is called Christ.')
('Which was [the son] of Melea, which was [the son] of Menan, which was [the son] of Mattatha, which was [the son] of Nathan, which was [the son] of David,')
아직 예수님의 부계족보와 모계족보라는 두 갈래의 큰 물줄기가 잘 안 보이시는 분들을 위해 삼하5:13-16절을 보여드립니다.
여기서 '솔로몬'과 '나단'은 모두 다윗의 아들들임을 확실하게 아실 수가 있습니다.
'다윗이 헤브론에서 올라온 뒤에 예루살렘에서 첩과 아내를 더 취하였으므로 거기서 아들딸들이 여전히 다윗에게
태어났는데 예루살렘에서 그에게 태어난 자들의 이름은 이러하니라. 삼무아와 소밥과 나단과 솔로몬과 또 입할과
엘리수아와 네벡과 야비아와 엘리사마와 엘리아다와 엘리발렛이더라. '(삼하 5:13-16)
정리하면,
예수님은 여자의 씨로 오셨습니다.(창3:15)
'내가 너와 여자 사이에 또 네 씨와 그녀의 씨 사이에 적개심을 두리니 그 씨는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하시고'(창3:15)
그리고 다윗의 씨로 오셨습니다.(롬1:3;딤후2:8)
'자신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에 관한 것이라. 그분께서는 육체로는 다윗의 씨에서 나셨고'(롬1:3)
'다윗의 씨에서 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의 복음대로 죽은 자들로부터 일으켜지신 것을 기억하라.'(딤후2:8)
헬리는 요셉의 법(法)적인 아버지(눅 3:23) 예수께서 가르치심을 시작할 때에 삼십세쯤 되시니라 사람들의 아는대로는 요셉의 아들이니 요셉의 이상은 헬리요.
↗ 솔로몬 ……… 야곱(혈통적 아버지) → 요셉(마 1:6)
다윗
↘ 나단 ……… 헬리(법적인 아버지) → 요셉(눅 3:23)
(헬) 법적인 아버지 헬리의 아들 요셉 앞에는 ’to’가 없습니다.
마리아가 헬리의 딸로서 헬리가 아들이 없으므로, 유다 지파인 요셉을 기업무를 법적인 아들로 삼아 마리아와 결혼하였습니다 (민 27:7-8, 민 36:10-12). 따라서 다윗으로부터 갈라졌던 혈통적 자손 요셉(혈통적 아버지 야곱)과 법적인 자손 요셉(법적인 아버지 헬리)이 다시 만났습니다.
민수기 27:7-8
슬로브핫 딸들의 말이 옳으니 너는 반드시 그들의 아비의 형제 중에서 그들에게 기업을 주어 얻게 하되 그 아비의 기업으로 그들에게 돌릴찌니라.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고하여 이르기를 사람이 죽고 아들이 없거든 그 기업을 그 딸에게 돌릴 것이요.
하나님이 또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같이 이르기를 나를 너희에게 보내신 이는 너희 조상의 하나님 곧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 여호와라 하라 이는 나의 영원한 이름이요 대대로 기억할 나의 표호니라.
또 가라사대 이는 그들로 그 조상의 하나님 곧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 여호와가 네게 나타난 줄을 믿게 함이니라 하시고. 마태복음 22:32 나는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요 야곱의 하나님이로라 하신 것을 읽어 보지 못하였느냐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요 산 자의 하나님이시니라 하시니 . 마가복음 12:26 죽은 자의 살아난다는 것을 의논할찐대 너희가 모세의 책 중 가시나무떨기에 관한 글에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나는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요 야곱의 하나님이로라 하신 말씀을 읽어보지 못하였느냐. 누가복음 20:37 죽은 자의 살아난다는 것은 모세도 가시나무떨기에 관한 글에 보였으되 주를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요 야곱의 하나님이시라 칭하였나니.
구약의 야곱은 죽기 전에 요셉의 두 아들(에브라임과 므낫세)을 불러서 자신의 아들의 반열에 올립니다(창 48:5-6). 이미 열두 아들이 있었음에도 손자인 에브라임과 므낫세를 양자(養子)로 삼은 것은 쉽게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야곱은 이것을 통해서 요셉에게 장자의 축복을 준 것입니다.
창세기 48:5-6 내가 애굽으로 와서 네게 이르기 전에 애굽에서 네게 낳은 두 아들 에브라임과 므낫세는 내것이라 르우벤과 시므온처럼 내것이 될 것이요. 이들 후의 네 소생이 네 것이 될 것이며 그 산업은 그 형의 명의하에서 함께 하리라.
율법에서 장자는 두 배의 축복을 받도록 되어 있는데(신 21:15-17), 요셉의 두 아들이 각각 에브라임 지파, 므낫세 지파로 독립적인 지파를 형성하므로, 결국 요셉은 두 배의 몫을 받은 셈이 된 것입니다(대상 5:1-2, 겔 47:13). 그리하여 요셉은 하나님의 주권적인 역사로 전 이스라엘 백성 가운데 가장 큰 축복을 받았습니다.
신명기 21:15-17 어떤 사람이 두 아내를 두었는데 하나는 사랑을 받고 하나는 미움을 받다가 그 사랑을 받는 자와 미움을 받는 자가 둘 다 아들을 낳았다 하자 그 미움을 받는 자의 소생이 장자여든.
자기의 소유를 그 아들들에게 기업으로 나누는 날에 그 사랑을 받는 자의 아들로 장자를 삼아 참 장자 곧 미움을 받는 자의 아들보다 앞세우지 말고.
반드시 그 미움을 받는 자의 아들을 장자로 인정하여 자기의 소유에서 그에게는 두 몫을 줄 것이니 그는 자기의 기력의 시작이라 장자의 권리가 그에게 있음이니라.
역대상 5:1-2
이스라엘의 장자 르우벤의 아들들은 이러하니라 (르우벤은 장자라도 그 아비의 침상을 더럽게 하였으므로 장자의 명분이 이스라엘의 아들 요셉의 자손에게로 돌아갔으나 족보에는 장자의 명분대로 기록할 것이 아니니라
에스겔 47:13 나 주 여호와가 말하노라 너희는 이 지계대로 이스라엘 십 이 지파에게 이 땅을 나누어 기업이 되게 하되 요셉에게는 두 분깃이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를 보면, 마태복음 1:16에서 야곱은 요셉의 아버지로, 요셉은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로 기록되는 당대 최고의 축복을 받았습니다.
구약의 야곱과 요셉, 그리고 신약의 야곱과 요셉의 관계는 무심하게 지나쳐 버릴 수 없는 유사성이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누가복음 족보에는 ‘야곱’과 같은 대(代)에 해당하는 인물이 ‘헬리’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마태복음 1:16에서는 “야곱은 마리아의 남편 요셉을 낳았으니”라고 기록하고 있고, 누가복음 3:23에서는 “요셉의 이상은 헬리요”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마태복음에서 요셉의 아버지는 ‘야곱’이요, 누가복음에서 요셉의 아버지는 ‘헬리’입니다.
그렇다면 이 차이를 어떻게 보아야 합니까?
이 문제에 대한 가장 설득력 있는 답변은 요셉이 마리아의 아버지인 헬리의 사위로, 장인의 족보를 법적으로 계승했다고 보는 것입니다. 구약의 규정상, 만일 어떤 사람이 아들이 없다면 그 기업은 딸들에게 물려주어야 합니다. 이런 경우 딸들은 그들의 기업을 지키기 위하여 같은 지파의 남자와 결혼해야 하는 것입니다(민 27:1-8, 36:1-12).
마리아의 경우도 아버지 헬리가 아들이 없었기 때문에 마리아도 그 기업을 상속했으며, 같은 유다 지파인 요셉과 결혼함으로써 요셉이 헬리의 법적 상속인 곧 법적 아들이 되었던 것입니다.
탈무드에도 마리아는 “헬리의 딸이요”라는 기록이 있으며, 시나이의 시리아 사본(The Sinaitic Syriac Manuscripts)은 누가복음 2:4을 “그들(요셉과 마리아)은 다윗의 집 족속이니라”고 밝힘으로 마리아도 유다 지파임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이로 보건대, 마태가 요셉의 가계를 기록하고 누가가 마리아의 가계를 기술했다고 보는 것이 각 복음서 내용과 잘 부합됩니다.
야곱이 예수 그리스도의 조부가 된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주권적인 섭리 가운데 이루어진 축복입니다. 야곱의 이름의 뜻은 ‘발꿈치를 잡은 자, 속이는 자, 대신 들어앉은 자(찬탈자)’입니다. 이 이름에는 남을 속이고 남의 자리을 빼앗는 자라는 부정적인 의미가 있지만, 적극적인 믿음으로 축복을 획득하는 자라는 긍적적 의미도 있습니다. 비록 우리가 부정적 의미의 야곱 같은 존재였을 지라도, 하나님을 믿고 온전히 의지할 때 긍정적 의미의 야곱 같은 존재로 바뀌게 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여자의 후손으로 오십니다.
모계 족보 ↖
예수 그리스도 ⇚ 에서 다윗의 후손으로 오심(삼하 7:12-13)
부계 족보 ↙
사무엘하 7:12-13
네 수한이 차서 네 조상들과 함께 잘 때에 내가 네 몸에서 날 자식을 네 뒤에 세워 그 나라를 견고케 하리라
(1) 마태복음 족보에서 41대 까지는 남자가 낳고, … , 낳고(히: 에겐에센, 능동태)의 남자의 후손이였는데, 마태복음 1:16에서는 “야곱은 마리아의 남편 요셉을 낳았으니 마리아에게서 그리스도라 칭하는 예수가 나시니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 ‘나시니라’는 히브리어 ‘에겐에데’(수동태)로 창세기 3:15의 예언을 성취하였습니다.
(2) 누가복음 3:23에서 “예수님께서 가르치심을 시작하실 때에 삼십 세쯤 되시니라 ‘사람들이 아는 대로는’ 요셉의 아들이니 요셉의 위는 헬리요”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사람이 아는 대로는’라는 의미속에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성령으로 낳셨다’는 모르는 사실도 있다는 뜻입니다.
때문에 두 족보는 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여자에게서 낳셨으며 마태복음 족보에서는 인성(人性)으로서 예수 그리스도를, 누가복음 족보에서는 신성(神性)으로서의 예수 그리스도를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3) 구속사를 성취하기 위하여는 마리아의 절대 순종(마 1:18, 눅 1:31, 37-38)과 의로운 요셉의 절대 순종(마 1:19)을 통하여 때가 차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셨습니다(갈 4:4). 하나님의 구속사을 완성하기 위하여 ‘때를 채우는’ 한 사람의 절대 순종이 필요한 것입니다. 마리아와 요셉의 절대 순종으로 두 족보(마태복음 족보, 누가복음 족보)가 만나서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 주셨습니다.
갈라디아서 4:4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 율법 아래 나게 하신 것은.
요한복음 6:42 - 요셉의 아들
이르되, 이 사람은 요셉의 아들 예수가 아니냐? 그의 아버지와 어머니를 우리가 아는데 어찌 그가 말하기를, 내가 하늘로부터 내려왔다, 하느냐? 하니.
사람들은 예수님을 ‘요셉의 아들’이라 했습니다 (요6:42). 요셉이 예수님을 키웠지만, 생물학적 아버지는 아닙니다.
동정녀 탄생이므로 요셉이 육신의 아버지가 아닙니다. 킹제임스 성경은 ‘요셉과 주의 모친(어머니)’이라고 정확하게 구분했고, 다른 성경들은 부모라고 표현했습니다.
KJV는 Joseph and his mother, NIV는 The child's father and mother (2:33), his parents (2:43) 라 했습니다.
그 날들을 채우고 돌아갈 때에 아이 예수님은 뒤에 남아 예루살렘에 머무셨더라. 요셉과 그분의 어머니는 그것을 알지 못한 채 (눅2:43-하단박스)
성경(KJV)은 ‘요셉과 그분의 어머니’라는 표현을 했습니다 (눅2:43).
이 구절(눅2:43)을 NIV, RSV, NRS, ASV, NAS.... 등 많은 영어성경들과, 개역, 개정 등 한글 성경들은 parents (부모)라고 기록했습니다.
예수님은 여자의 씨로 오셨고 (창3:15),
동정녀 마리아를 통해 성령으로 잉태되었기에 (마1:18, 마1:23).
남자의 씨로 태어난 분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에게는 생물학적 아버지가 없습니다.
1. 요셉과 예수님의 어머니
예수님은 여자의 씨이며, 낳은 사람이 마리아 이므로, 마리아는 육신적 어머니입니다.
반면, 요셉은 마리아의 남편이지만 예수님의 생물학적 아버지는 아닙니다.
예수님은 요셉의 씨를 받지 않았습니다.
성경은 ‘마리아와 요셉’ (눅2:16),
‘요셉과 아이의 어머니’ (눅2:33),
‘요셉과 그분의 어머니’ (눅2:43)... 등으로 표현했고,
‘아이(그분)의 아버지와 어머니’라고 하지 않습니다.
반면, 나사렛 사람들은 요셉을 예수님의 아버지라 불렀고, 예수님을 요셉의 아들이라 불렀습니다 (눅4:22, 요1:45, 요6:42).
이것은 오류이기에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하나님으로부터 왔고, 하나님이 보내셨다는 것을 증거했습니다 (요8:42).
요셉은 호적상 아버지로서 양육에 기여했습니다.
2. 요셉은 아버지는 아니지만 부모입니다
예수님이 성령을 통해 태어났기에 요셉이 생물학적 아버지는 아니지만,
양육하는데에 기여했기에 부모입니다.
부모(parents)란 말은
step father(계부), adoptive father(입양자를 둔 아버지), 양육권자를 포함합니다.
요셉은 예수님의 양육권자로서 예수님을 키웠고 예수님은 순종했습니다.
성경은 요셉을 아버지라고 표현하지는 않았지만 부모(parents)로 표현했습니다.
요셉을 부모(parents)로 표현한 구절들이 있습니다.
아이의 양친(parents, 눅2:27),
그분의 양친 (parents, 눅2:41)
그러므로, 요셉은 예수님의 아버지가 아니지만 '부모'(parents)는 맞습니다.
마리아가 ‘네 아버지’라고 요셉을 예수님에게 말할 때,
예수님은 “내 아버지는 하나님”임을 언급했습니다 (눅2:48-49).
그러므로, 요셉을 ‘그분의 아버지(father)’ 라고 하는 것은 잘못입니다.
양친 (부모, parents) 라고 하는 것은 가능합니다.
3. 요셉의 아버지는 둘인가?
예수님의 호적상 아버지인 요셉의 혈통에는 두 아버지가 있습니다.
야곱의 혈통과 (마1:16), 헬리의 혈통입니다 (눅3:23).
이는 친 아버지와 장인의 혈통을 따른 것입니다.
사위가 장인을 아버지라 부르고, 장인이 사위를 아들로 인정하는 까닭입니다.
모세의 율법에 따르면 기업을 물려 줄 아들이 없을 때,
사위가 결혼 후에 가계의 이름을 유지하기 위해서 아들이 될 수 있었습니다.
[※ 헬리는 두 명의 딸이 있었습니다. 마리아와 세베대의 부인이 된 여자 입니다 (마 27:56, 요 19:25)] 그러므로 요셉은 마리아와 결혼하였을 때, 모세의 법에 따라 헬리의 아들이 되었고, 족보에 합법적으로 포함될 수 있었습니다.
요셉은 친 아버지 야곱과 장인 헬리의 아들이 됨으로써 예수님은 육신적으로 다윗의 씨요, 다윗 왕의 왕위를 모두 물려받을 수 있게 된 것입니다.
4. 마리아와 요셉의 족보
마태복음은 다윗 왕의 계보 즉 왕가의 계보를 다루기에 다윗, 솔로몬, 르호보암... 요셉으로 이어집니다.
그러므로 요셉은 다윗의 혈통이면서 솔로몬의 혈통입니다.
반면 마리아는 아브라함의 씨, 다윗의 씨이지만 솔로몬의 씨가 아닙니다.
[※ 누가복음은 아담까지 거슬러가서 다윗에서 나단으로 이어지는 마리아의 계보를 증거합니다.]
마리아는 다윗의 씨이면서 나단으로 이어진 여고니야의 씨이기에 (마1:11, 눅3:31),
여자의 씨를 따르면, 예수님은 여고니야의 씨가 되어 버립니다.
[※ 여고나, 여고니야, 고니야, 여호야긴은 모두 같은 사람입니다.]
그러면 모순이 생깁니다.
왕좌를 이어받지 못한 여고니야를 통해 예수님의 왕권이 이어질 수 없기 때문입니다.
여고니야에 대해서
“{주}가
이같이 말하노라. 너희는 이 사람을 자식이 없는 자, 자기 날들에 형통하지 못할 자라고 기록하라. 그의 씨 중에 형통하여 다윗의
왕좌에 앉아 유다 안에서 다스릴 자가 다시는 없으리라” 라는 말씀이 주어졌기 때문입니다 (렘22:30).
예수님이 왕권을 이어받기 위해서는 여고니야의 씨가 아니어야 하는데,
마리아가 요셉과 결혼함으로 마리아의 족보에 합법적으로 들어가게 되었고,
예수님은 합당하게 요셉의 왕족의 족보를 잇게 됨으로,
이스라엘의 왕으로 오셨다는 것이 증명되었습니다.
[관련구절]
- 요셉과 그 분의 어머니
* 눅2:43 그날들을 채우고 돌아갈 때에 아이 예수님은 뒤에 남아 예루살렘에 머무셨더라. 요셉과 그분의 어머니는 그것을 알지 못한 채
- 그 날들을 마치고 돌아갈 때에 아이 예수는 예루살렘에 머무셨더라 그 부모는 이를 알지 못하고 (개역, 개정)
- After the Feast was over, while his parents were returning home, the boy Jesus stayed behind in Jerusalem, but they were unaware of it. (NIV)
- 여자의 씨
* 창3:15 내가 너와 여자 사이에 또 네 씨와 그녀의 씨 사이에 적개심을 두리니 그 씨는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하시고
- 성령님으로 말미암아 잉태
* 마1:18 ¶이제 예수 그리스도의 태어나심은 이러하니라. 그분의 어머니 마리아가 요셉과 정혼하였을 때에 그들이 함께하기 전에 그녀가 [성령님]으로 말미암아 아이를 밴 것이 드러나매
- 처녀가 아이를 낳다
* 마1:23 보라, 처녀가 아이를 배어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들이 그의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셨으니 이것을 번역하면 우리와 함께 계시는 하나님이라는 뜻이라.
- 마리아와 요셉
* 눅2:16 서둘러 가서 마리아와 요셉과 구유에 누인 아기를 찾아서
- 요셉과 아이의 어머니
* 눅2:33 요셉과 아이의 어머니는 그가 아이에 관하여 말한 그 일들로 인해 놀라더라.
- 요셉과 그분의 어머니
* 눅2:43 그날들을 채우고 돌아갈 때에 아이 예수님은 뒤에 남아 예루살렘에 머무셨더라. 요셉과 그분의 어머니는 그것을 알지 못한 채
- 요셉의 아들
* 눅4:22 모두가 그분에 대해 증언하고 그분의 입에서 나온 은혜로운 말씀들에 놀라서 이르되, 이 사람은 요셉의 아들이 아니냐? 하더라.
* 요1:45 빌립이 나다나엘을 찾아 그에게 이르되, 모세가 율법에 기록하고 대언자들이 기록한 그분을 우리가 만났으니 곧 요셉의 아들 나사렛 예수님이시니라, 하매
* 요6:42 이르되, 이 사람은 요셉의 아들 예수가 아니냐? 그의 아버지와 어머니를 우리가 아는데 어찌 그가 말하기를, 내가 하늘로부터 내려왔다, 하느냐? 하니
- 예수님은 하나님으로부터 옴
* 요8:42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하나님이 너희 [아버지]였으면 너희가 나를 사랑하였으리니 이는 내가 하나님으로부터 나서 나아왔기 때문이라. 나는 스스로 오지 아니하였으며 그분께서 나를 보내셨느니라
- 아이의 양친
* 눅2:27 그가 성령을 힘입어 성전에 들어가니 마침 아이의 양친이 율법의 관례대로 아이에게 행하려고 아이 예수님을 데려오므로
- 그분의 양친
* 눅2:41 이제 그분의 양친은 해마다 유월절이 되면 예루살렘에 갔더라.
- 요셉을 ‘네 아버지’라 함
* 눅2:48-49 그들이 그분을 보고 놀라며 그분의 어머니는 그분께 이르되, 아들아, 네가 어찌하여 우리에게 이렇게 하였느냐? 보라, 네 아버지와 내가 근심하며 너를 찾았노라, 하매
/ 그분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어찌 나를 찾으셨나이까? 내가 반드시 내 [아버지] 일을 해야 함을 알지 못하셨나이까? 하시니라.
- 야곱이 요셉을 낳음
* 마1:16 야곱은 마리아의 남편 요셉을 낳았는데 마리아에게서 그리스도라 하는 예수님이 태어나시니라.
- 요셉은 헬리의 아들
* 눅3:23 비로소 예수님 자신이 서른 살쯤 되시니라. (사람들이 생각하기에) 이분은 요셉의 아들이신데 요셉은 헬리의 아들이요,
- 헬리의 두 딸
* 마27:56 그가운데는 막달라 마리아와 또 야고보와 요세의 어머니 마리아와 또 세베대의 아이들의 어머니가 있더라.
* 요19:25 ¶이제 예수님의 십자가 곁에는 그분의 어머니와 그분의 이모요 글로바의 아내인 마리아와 막달라 마리아가 서 있더라.
- 여고니야
* 마1:11 요시야는 여고니야와 그의 형제들을 낳았는데 그 무렵에 그들이 바빌론으로 끌려가니라.
* 렘22:30 {주}가 이같이 말하노라. 너희는 이 사람을 자식이 없는 자, 자기 날들에 형통하지 못할 자라고 기록하라. 그의 씨 중에 형통하여 다윗의 왕좌에 앉아 유다 안에서 다스릴 자가 다시는 없으리라.
[성경비교] 요6:42
요한복음6:42 요셉의 아들 예수
이르되, 이 사람은 요셉의 아들 예수가 아니냐? 그의 아버지와 어머니를 우리가 아는데 어찌 그가 말하기를, 내가 하늘로부터 내려왔다, 하느냐? 하니 (흠정역)
또 그들이 말하기를 "이 사람이 요셉의 아들 예수가 아니냐? 우리가 그의 아버지와 어머니를 알지 않느냐? 그런데 그가 어떻게 '나는 하늘에서 내려왔다.'고 말할 수 있느냐?"고 하더라. (한킹)
그리고 그들이 말했다. " 이 사람은 요셉의 아들 [예수]가 아니냐? 그의 부모를 우리가 아는데, 어찌 그가 '내가 하늘로부터 내려왔다.' 라고 말하느냐?" (한국어 권위역)
가로되 이는 요셉의 아들 예수가 아니냐 그 부모를 우리가 아는데 제가 지금 어찌하여 하늘로서 내려왔다 하느냐 (개역)
이르되 이는 요셉의 아들 예수가 아니냐 그 부모를 우리가 아는데 자기가 지금 어찌하여 하늘에서 내려왔다 하느냐 (개정)
"아니, 저 사람은 요셉의 아들 예수가 아닌가? 그의 부모도 우리가 다 알고 있는 터인데 자기가 하늘에서 내려 왔다니 말이 되는가?" (공동번역)
And they said, Is not this Jesus, the son of Joseph,
whose father and mother we know? how is it then that he saith, I came
down from heaven? (KJV)
They said, "Is this not Jesus, the son of Joseph, whose
father and mother we know? How can he now say, 'I came down from
heaven'?" (NIV)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에 기록된 예수님의 족보가 서로 다른 이유는 무엇인가?
예수님의 족보는 성경의 두 곳, 즉 마태복음 1장과 누가복음 3장 23-38절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마태는 예수님으로부터
아브라함까지 계보를 추적합니다. 누가는 예수님으로부터 아담까지 계보를 추적합니다. 하지만 마태와 누가가 완전히 다른 족보를
추적하고 있다고 믿을만한 이유가 있습니다. 예를 들어, 마태는 요셉의 아버지를 야곱(마 1:16)이라고 기록한 반면, 누가는
요셉의 아버지를 헬리(눅 3:23)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마태는 다윗의 아들 솔로몬(마 1:6)의 계열을 따라 추적하지만,
누가는 다윗의 아들 나단(눅 3:31)의 계열을 따라 추적하고 있습니다. 사실, 다윗과 예수님 사이에서 각 족보가 공통으로
서술하는 이름들은 스알디엘과 스룹바벨 뿐입니다(마 1:26; 눅 3:27).
어떤 사람들은 이러한 차이점을 성경의 오류라고 지적합니다. 하지만 유대인들은 꼼꼼한 기록 관리자들이었으며, 특히 계보와 관련해서는
더욱 세심하였습니다. 마태와 누가가 동일한 혈통에 대해 완전하게 서로 모순되는 족보를 세울 수 있다는 것은 상상조차 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분명히 다윗으로부터 예수님까지 이어지는 계보는 각각 완전히 다릅니다. 심지어 스알디엘과 스룹바벨에 대한
언급조차도 동명이인에 대한 언급일 수 있습니다. 마태는 스알디엘의 아버지를 여고냐라고 언급하는 반면 누가는 스알디엘의 아버지를
네리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스알디엘이라는 이름을 가진 한 남자가 자기 아들의 이름을 스룹바벨이라고 짓는 것은 그런 이름을 가진
자들 중에 유명한 사람들이 많은 것을 고려할 때 일반적인 것입니다(에스라와 느헤미야를 읽어 보십시오).
이에 대해 교회 역사가 유세비우스가 제시한 한 가지 설명은 마태가 장자 또는 생물학적 계보를 추적하는 반면 누가는 "수혼 결혼"의
경우들을 고려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만일 한 남자가 아들을 갖지 못하고 죽으면 그 남자의 형제가 그 과부와 결혼하여 죽은 사람의
이름을 이어받을 아들을 갖게 하는 것이 전통이었습니다. 유세비우스의 이론에 따르면, 멜기(눅 3:24)와 맛단(마 1:15)은
똑같은 여인(전통에 따르면 그녀의 이름은 ‘에스다’임)에게 다른 시기에 결혼했습니다. 이에 헬리(눅 3:23)와 야곱(마
1:15)은 이부 형제가 되었을 것입니다. 그 후 헬리는 아들이 없이 죽었고, 이에 그의 이부 형제 야곱이 과부가 된 헬리의
아내와 결혼하여 요셉을 낳았습니다. 따라서 요셉은 합법적으로는 ‘헬리의 아들’이지만 생물학적으로는 ‘야곱의 아들’이 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마태와 누가는 모두 요셉의 동일한 계보를 기록하고 있지만 누가는 법적인 계보를 따르고 마태는 생물학적인
계보를 따릅니다.
오늘날 보수적인 성서 학자들은 누가는 마리아의 계보를 기록하고 있고 마태는 요셉의 계보를 기록하고 있다는 다른 견해를 취하고
있습니다. 이 견해에 따르면, 마태는 다윗의 아들 솔로몬을 통해 요셉(예수님의 합법적인 아버지)의 계보를 따라가며 누가는 다윗의
아들 나단을 통해 마리아(예수님과 혈연 관계)의 계보를 따라갑니다. 요셉은 헬리의 딸 마리아와 결혼하면서 헬리의 사위가 되었지만
헬라어에는 ‘사위’에 해당하는 단어가 없기 때문에 "헬리의 아들"로 불립니다. 아무튼 마리아의 계통을 따르든지 또는 요셉의 계통을
따르든지 예수님은 다윗의 후손이기 때문에 메시야가 되실 자격이 있습니다. 모계 쪽으로 족보를 추적하는 것은 드문 일이지만 처녀
마리아를 통한 탄생은 더욱 그러합니다. 누가의 설명은 예수님은 요셉의 아들이었고 사람들도 ‘그렇게 알고 있었다’는 것입니다(눅
3:23).
1. 성경에 기록된 두 족보
예수님의 족보는 신약성경 두 곳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마태복음 1장 1~17절: 예수님을 다윗의 왕권과 연결합니다.
누가복음 3장 23~38절: 예수님을 아담과 연결하여 인류 전체의 구원자로 소개합니다.
두 족보는 다소 차이가 있으며, 이는 각각의 기록 목적과 초점에 따라 차이가 발생합니다.
2. 마태복음의 족보: 왕권과 메시아 예언의 성취
1) 족보의 시작
마태복음은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계보라” (마태복음 1:1)라는 선언으로 시작합니다. 이는 유대인 독자들을 대상으로 예수님이 메시아임을 증명하기 위한 의도를 담고 있죠.
2) 특징
아브라함부터 시작: 유대 민족의 조상인 아브라함부터 예수님까지의 계보를 기록합니다.
다윗을 강조: 다윗 왕조와 메시아 예언의 연결을 명확히 보여줍니다.
14대씩 구분: 족보를 세 부분으로 나누어 아브라함부터 다윗, 다윗부터 바빌론 유수, 바빌론 유수부터 예수님까지로 구분합니다.
3) 신학적 메시지
마태복음의 족보는 예수님이 왕으로 오신 메시아임을 보여줍니다. 다윗 왕조의 계승자라는 점은 유대인들에게 메시아의 자격을 증명하는 핵심 요소였죠.
3. 누가복음의 족보: 인간성과 신성을 연결
1) 족보의 시작
누가복음은 예수님의 세례 후 족보를 소개하며, “예수께서 가르치심을 시작할 때쯤 삼십 세쯤 되셨더라…” (누가복음 3:23)라는 구절로 시작합니다.
2) 특징
아담까지 거슬러 올라감: 예수님을 아담과 연결하며, 그분이 모든 인류의 구원자임을 강조합니다.
거꾸로 진행: 마태복음과 달리 누가는 예수님부터 시작하여 아담까지 올라갑니다.
다윗의 다른 아들, 나단을 기록: 누가복음은 다윗의 아들 솔로몬이 아닌 나단을 통해 계보를 이어갑니다.
3) 신학적 메시지
누가복음의 족보는 예수님이 모든 인류의 대표자로 오셨음을 보여줍니다. 유대인뿐만 아니라 이방인, 모든 민족을 위한 구세주라는 메시지를 담고 있죠.
4. 왜 두 족보가 다를까?
1) 기록 목적의 차이
마태복음은 유대인들에게 예수님이 메시아임을 증명하려는 목적이 있습니다.
누가복음은 이방인을 포함한 모든 인류에게 예수님이 구원자임을 강조합니다.
2) 혈통과 법적 계보
마태복음은 요셉의 법적 계보를 통해 예수님이 다윗 왕조의 합법적 후손임을 보여줍니다.
누가복음은 마리아의 혈통을 통해 예수님의 인간적 계보를 기록한 것으로 보입니다.
3) 다윗의 두 아들
마태복음은 다윗의 아들 솔로몬을 통해 계보를 이어가고, 누가복음은 나단을 통해 이어집니다. 이는 예수님이 다윗의 혈통을 이으면서도, 왕권과 인간성을 모두 포함하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5. 예수님의 족보가 주는 신학적 의미
1) 인간성과 신성의 조화
예수님의 족보는 그분이 완전한 인간이자 완전한 하나님임을 증명합니다.
아담과 연결: 예수님은 아담의 후손으로서 우리의 연약함을 이해하십니다.
다윗과 연결: 예수님은 하나님의 언약을 성취하는 메시아로 오셨습니다.
2) 하나님의 섭리
족보를 통해 하나님의 계획이 세대에 걸쳐 치밀하게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 다윗, 바빌론 유수라는 굴곡진 역사를 통해도 하나님의 구속 계획은 변함없이 이어졌습니다.
예수님의 탄생은 단순한 사건이 아니라, 하나님이 약속하신 구원의 역사의 절정입니다.
3) 모든 인류를 위한 구원
누가복음의 족보가 아담으로 연결되는 것은 예수님이 유대인뿐 아니라 이방인을 포함한 모든 인류의 구원자임을 나타냅니다.
6. 우리의 삶과 연결되는 교훈
예수님의 족보는 단순히 과거의 기록이 아니라, 우리의 신앙에 중요한 메시지를 줍니다.
하나님의 계획은 완벽하다: 족보의 세대들이 때로는 죄로 얼룩져 있었지만, 하나님은 이를 통해 구속의 계획을 이루셨습니다. 우리의 삶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가족이다: 예수님의 족보는 단순히 혈통이 아니라, 믿음을 통해 하나님의 가족이 될 수 있음을 상징합니다.
마무리하며
예수님의 족보는 단순한 나열이 아니라, 그분의 인간성과 신성을 완벽하게 보여주는 이야기입니다.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을 비교하며, 하나님께서 세밀하게 계획하신 구원의 역사를 발견할 수 있죠.
*악행을 저지른 아하시야, 요아스, 아마샤 왕은 마태복음의 족보에서 그 이름이 빠져
있다. 아하시야와 요아스 사이의 7대왕은 북이스라엘 아합 왕의 딸 아달랴로, 남유다에 우상을 들여오고 다윗의 계보를 멸망시키려는 등
악행을 저질렀다. 이 외에 생략된 이름들이 더 있다.
(2) 마리아의 족보 (누가복음 3장)
예수는 요셉의 아들 ‣ 요셉의 위로는 헬리(요셉의 장인) ‣ 그 위는 맛닷 ‣ 그 위는 레위 ‣ 그 위는 멜기 ‣ 그 위는 얀나 ‣ (중략) ‣ 그 위는 나단 ‣ 그 위는 다윗 ‣ 그 위는 이새 ‣ 그 위는 오벳 ‣ 그 위는 보아스 ‣ (중략) ‣ 그 위는 에노스 ‣ 그 위는 셋 ‣ 그 위는 아담 ‣ 그 위는 하나님
마태복음은 요셉의 혈통, 누가복음은 마리아의 혈통(마리아 대신 남편인 요셉으로
시작하고 있음)을 이야기하고 있다. 마태는 아브라함으로부터 시작하여 예수까지 시대 순으로 기록하고 있으며, 누가는 예수부터
시작하여 아담까지 시대를 거슬러 올라가며 기록하고 있다. 아브라함부터 다윗까지의 계보는 같으며, 다윗으로부터 양쪽으로 갈라진다.
요셉의 족보는 다윗왕 ‣ 솔로몬 왕(밧세바의 넷째 아들)으로 이어지는 반면, 마리아의 족보는 다윗왕 ‣ 나단(밧세바의 셋째
아들)으로 이어진다. 예수는 다윗의 자손인데 부모 양쪽 모두 다윗의 계통이다.
예수의 계보는 신약성경의 마태오의 복음서와 루가의 복음서에 각각 기록되어 있다.[1] 마태오의 복음서는 아브라함에서 시작하여 순서대로 나아가고, 루가의 복음서는 예수부터 거슬러 올라가 아담까지 이어진다. 아브라함부터 다윗까지의 이름 목록은 일치하여 예수의 메시아적
칭호인 '다윗의 자손'을 확증한다. 그러나 다윗 이후로는 두 족보가 크게 다르다. 마태오의 복음서는 다윗에서 요셉까지
27세대를, 루가의 복음서는 42세대를 기록하는데 두 목록은 일치하지 않는 부분이 많다. 예수의 친할아버지, 즉 요셉의 아버지에 대해서도 마태오의 복음서는 야곱이라고 하고, 루가의 복음서는 헬리라고 한다.[2]
이처럼 예수의 계보에 대한 기록이 상이하다는 점에 대해 여러 이론이 제시되었다. 아프리카누스와 유세비우스를[3] 시작으로 한 초대 교부들은 두 족보를 모두 진실로 받아들이며 이 차이점에 대한 다양한 설명을 제시했다.[4]
대표적인 가설은 하나(주로 마태오의 복음서)는 요셉의 족보이고 다른 하나(주로 루가의 복음서)는 마리아의 족보일 수 있으며,
또는 하나는 예수의 관습적인 법적 족보이고 다른 하나는 생물학적 혈통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해석은 또한 예수가 마리아에게서만
태어난 동정녀 탄생에 대한 복음서의 기록과도 일치하며, 요셉은 단지 법적 양아버지로 간주되었음을 보여준다. 이 때 요셉과 마리아
모두 다윗의 후손으로 여겨진다. 또한 요셉과 같이 한 사람이 두 명의 법적 아버지를 가질 수 있는 '계대결혼' 제도를 통해 이러한
차이를 설명할 수 있다. 그러나 마커스 보그와 존 도미니크 크로산 등의 현대 비평 학자들은 두 족보가 모두 예수의 메시아적 주장을 유대인의 기준에 맞추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라고 주장한다.[5]
마태오의 복음서에서의 계보
튀르키예이스탄불카리예 박물관 남쪽 돔 천장에 있는 예수와 그의 선조들을 그린 그림.
예수의 계보를 표현하는데 전통적으로 사용되어온 방식인 이새의 나무.
마태오의 복음서 1:1–17은 "아브라함의 자손이요 다윗의 자손인 예수 그리스도의 계보라. 아브라함은 이삭을 낳고,
..."로 시작하여 "야곱은 마리아의 남편 요셉을 낳으니, 마리아에게서 그리스도라 칭하는 예수가 태어나셨다. 그러므로 아브라함부터
다윗까지 모두 열네 대요, 다윗부터 바벨론으로의 유배까지 열네 대요, 바벨론 유배부터 그리스도까지 열네 대라."로 이어진다.
마태는 예수의 칭호인 '그리스도'를 복음서의 시작부터 강조하는데, 이는 히브리어 '메시아'의
그리스어 번역으로, 기름부음을 받은 자, 즉 기름부음 받은 왕의 의미를 가진다. 마태는 예수를 오랫동안 기다려온 메시아로
제시하며, 그가 다윗 왕의 후손임을 보여준다. 또한 '다윗의 자손'으로 예수를 부르며 그의 왕족 혈통을 나타내고, '아브라함의
자손'이라고 부르며 그가 이스라엘 사람임을 강조한다. 이 두 표현에서 '자손'은 '후손'을 의미하며, 야훼가 다윗과 아브라함과
맺은 약속을 상기시킨다.[6]
여러 사본들에서 마태의 서론적 제목(βίβλος γενέσεως, 비블로스 게네세오스, '출생의 책')은 여러 가지
방식으로 해석되어 왔지만, 가장 가능성이 높은 것은 이후에 나오는 족보를 위한 제목이라는 것이다. 이 표현은 같은 구절이 족보를
나타내는 용어로 사용된 70인역 성경과도 일치한다.[7]
마태오의 복음서의 족보는 루가의 복음서의 족보보다 기교적이고 명확한 구조로, 14대씩 세 범주로 나누어 구별하고 있다.
1대에서 14대까지는 유다의 형제들과 베레스의 형제를 언급하며, 네 명의 여성 조상을 포함하는 등 주석이 풍부하다.
15대에서 28대까지는 다윗의 왕조 계보를 다루지만 여러 세대를 생략하고 "바벨론 유수 시기의 여고니야와 그의 형제들"로 끝난다.
마지막 29대에서 41대까지는 13세대로 보이지만, 요셉과 즈루빠벨을 사이 조상들에 대한 고유한 전승이다. 이 시기는 그 기간에 비해 상대적으로 적은 조상이 적혀 있다.
총 42세대가 되기 위해서는 여러 이름을 생략해야 하므로, 세 부분의 14대 구성은 의도적인 것으로 보인다. 이에 대한 다양한 해석이 제시되었다. 14는 7의 두 배로, 완전함과 언약을 상징하며, 또한 다윗이라는 이름의 게마트리아와 일치한다.[8]
이 족보에 나오는 히브리어 이름의 그리스어 표기는 대부분 70인역 성경과 일치하지만, 몇 가지 독특한 부분이 있다. '아삽'이라는 형태는 아사 왕을 시편의 저자인 아삽과 동일시하는 것처럼 보인다. 마찬가지로 아몬 왕을 암모스라고 표기하는 것은 예언자 아모스를 연상시키지만, 70인역에도 이러한 형태가 나타난다. 이는 보다 친숙한 이름에 대한 동화 현상으로 해석되곤 한다. 보에스(보아스, 70인역에는 부스)와 라캅(라합, 70인역에는 라아브) 역시 독특한 형태다.[9]
생략된 왕들
아하시야, 요아스, 아마지야의 세 왕이 생략되었다. 이들은 아합의 저주받은 혈통에서 아달리야를 통해 3대, 4대에 걸쳐 이어져 내려온 악한 왕들로 여겨진다.[10] 동시에 이들을 생략함으로써 두 번째 14세대를 맞출 수 있으므로 수비학적 의도도 있는 것으로 여겨진다.[11]
또한 생략된 왕은 여고니야의 아버지인 여호야킴이다. 헬라어에서 여호야킴과 여호야긴의 두 이름은 매우 유사하며 때로는 둘 다 '요아킴'으로 불린다. 마태오가 "요시야가
바벨론 유수 시기에 여고니야와 그의 형제들을 낳았다"고 했을 때, 그는 이 둘을 혼동한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구약성경에서는
여고니야가 아니라 여호야김에게 형제가 있었다고 전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유수는 여고니야 시대에 발생했다. 따라서 이를 실수로 보는
견해도 있지만, 다른 학자들은 다윗 이후의 왕들이 정확히 14세대를 구성하도록 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생략된 것이라고 보기도
한다.[11]
마지막 집단 역시 14세대로 구성되었다. 만약 요시야의 아들로 기록된 여고니야가 본래 가리키고자 하던 대상이
여호야김이었다면, 여고니야는 유수 이후 세대로 계산될 수 있었다. 일부 저자들은 마태오의 원래 본문에 마리아의 아버지 요셉이
기록되어 있었다고 보기도 한다.[12]
여고니야(기원전 약 616년 출생)부터 예수(기원전 약 4년 출생)까지 14세대에 걸쳐 있으며, 세대 간 평균 간격은 약 44년이다. 그러나 구약성경에서는 세대 간 격차가 더 넓게 나타나기도 한다.[13] 또한 이 기간 동안 흔했던 '조부 이름을 따는 관습'의 사례가 나타나지 않는데, 마태오가 이러한 반복을 압축했을 수도 있다.[14]
루가의 복음서에서 예수의 족보는 예수의 공생애 시작 부분에 기록되어 있다. 이 족보는 요셉부터 아담까지 역순으로 올라간다.[15]예수의 세례
이야기를 전한 후, 루가복음 3장 23절에서 38절은 "예수께서 가르치심을 시작하실 때에 삼십 세쯤 되시니라. 사람들이 아는
대로는 요셉의 아들이니라, 헬리의 아들이요, ..." (3:23) 그리고 계속하여 "아담은 하느님의 아들이니라." (3:38)라고
끝난다.[16]
이 족보는 구약성경에 잠깐 언급되었을 뿐인 다윗의 잘 알려지지 않은 아들 나단을 통해 다윗의 후손임을 보여준다.[17]
다윗의 조상에 대해서는 루가의 복음서와 구약성경이 완전히 일치한다. 아르박삿과 셀라 사이에 가이난이 포함되어 있는데, 이는 70인역(Septuagint)을 따른 것이며 대부분의 현대 성경에서 따르는 마소라 본문에는 포함되어 있지 않다.
아우구스티누스는 루가 복음서에 있는 족보의 세대 수를 77이라 하였는데, 이는 모든 죄의 용서를 상징하는 숫자로 인식된다.[18] 이 숫자는 또한 루가가 알고 있었을 가능성이 있는 『에녹서』에서 언급된 에녹 이후 70세대와도 일치한다.[19][20] 루가는 비록 마태오처럼 세대를 세지는 않았지만, 일곱 단위로 구성하는 원칙을 따랐을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레네오는 아담부터 72세대만을 계산했다.[21]
구약성경에서 아미나답의 아들로 아람이 등장하는 것은 잘 알려져 있다. 현대 학자들 사이에서 가장 신뢰받는 네슬레-알란드 비평판은 "아미나답의 아들, 아드민의 아들, 아르니의 아들"이라는 변이 형태를 받아들이며,[22] 이를 통해 아담부터 시작하는 세대 수를 76으로 계산한다.[23]
루가가 사용한 표현인 "사람들이 생각하던 대로"(ἐνομίζετο)는 예수가 실제로 요셉의 아들이라는 진술을 피하기 위한 시도로 인식된다. 이는 동 복음서에 기록된 예수의 동정녀 탄생과 일치한다. 일부 학자들은 루가가 예수의 외조부인 엘리로 계보를 전개하는 등, 가장 가까운 혈연 관계인 마리아를 통해 예수의 족보를 추적했다고 본다.[24] 이 경우 족보의 가부장적 구조를 유지하기 위해 마리아 대신 남편인 요셉을 언급했다는 견해도 있다. D. A. 카슨은 이러한 해석을 "지나치게 인위적"이라고 지적하며 독자들이 이를 유추하기 어렵다고 본다.[25] 마찬가지로 R. P. 네텔호스트는 이를 "부자연스러운 억지" 해석이라고 평가한다.[26]
이 외에도 이러한 표현이 나머지 족보와 어떻게 관련되는지에 대한 다양한 해석이 존재한다. 일부는 나머지 족보를 요셉의 실제 족보로 보고 있으며, 마태오의 복음서에 제시된 다른 족보와 비교하여 해석한다.[27]
스알디엘의 아들 즈루빠벨
마태오의
복음서와 루가의 복음서에 나오는 족보는 스알디엘의 아들 즈루빠벨에서 잠시 일치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스알디엘 위쪽과 즈루빠벨
아래쪽에서 두 복음서는 서로 다르다. 또한 이 지점에서 마태오는 구약성경의 기록과 차이를 보인다.
구약성경에서 즈루빠벨은 기원전 520년경 유대인들을 바빌론에서 귀환시키고 유다를 다스리며 성전을 재건한 영웅으로 묘사된다. 그는 여러 번 스알디엘의 아들이라고 불린다.[28] 즈루빠벨은 『역대기』의 족보에 한 번 등장하는데,[29] 그 후손이 여러 세대에 걸쳐 함께 기록되어 있다.[30] 그러나 복음서와 함께 볼 때 이 구절에는 여러 가지 난점이 있다. 70인역에서는 그의 아버지가 스알디엘로 되어 있지만, 마소라 본문에서는 스알디엘의 형제 브다야로 적혀있다. 해당 구절에 따르면 두 사람 모두 여고냐 왕의 아들이었다. 일부 학자들은 마소라 본문을 수용하고, 브다야가 계대결혼을 통해 스알디엘을 위해 아들을 낳았다고 가정하지만, 대부분의 학자들은 마태오 및 다른 모든 기록들과 일치하는 70인역을 원문으로 받아들인다.[31]
즈루빠벨이 매우 흔한 바빌로니아 이름임에 착안해서,[32]루가의 복음서에서
등장하는 즈루빠벨과 스알디엘을 단순히 동명이인으로 보기도 한다. 루가의 복음서에서 스알디엘의 조상은 완전히 다르게 제시되어
있으며, 즈루빠벨의 아들에서 다시 불일치가 시작되기 때문이다. 더 나아가 알려진 연대 사이의 간격을 보완하면 루가의 스알디엘의
탄생은 유대인들이 바빌론에서 돌아온 시기의 유명한 즈루빠벨과 같은 시기가 된다. 따라서 루가의 스알디엘과 즈루빠벨은 마태오의
기록과는 다른 인물일 가능성이 높으며, 아마도 그들의 이름을 따온 것으로 보는 견해도 제기되었다.[33]
그러나 대다수의 학자들은 루가의 기록에 등장하는 이들 부자가 역대기의 인물과 동일하다고 본다. 이 경우 요셉처럼 스알디엘의 아버지로 서로 다른 두 명이 기록된 것에 대한 해답이 필요하다. 이를 위해 복잡한 계대결혼 가설이 종종 제안되었다.[33] 그러나 리처드 보컴은
루가의 기록이 실제 역사를 잘 반영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의 견해에 따르면, 『역대기』의 족보는 즈루빠벨을 선조의 계보에 끼워
넣은 후대의 첨가물로, 마태오는 단순히 왕실 계승을 따랐을 뿐이다. 실제로 보컴은 즈루빠벨의 정당성이 저주받은 솔로몬의 계보가
아닌 다윗의 아들 나단을 통해 계승되었다고 주장한다.[20]
루가의 복음서에서 즈루빠벨의 아들로 제시된 이름 레사(Rhesa)는 일반적으로 아람어로 '머리'나 '군주'를 의미하는
rēʾšāʾ로 간주된다. 일부 학자들은 이 이름이 즈루빠벨의 것인데 아들로 잘못 기록된 것으로 본다. 이 견해를 따르면 루가
복음서의 다음 세대인 요아난(Joanan)은 역대기에서 즈루빠벨의 아들 중 하나로 기록된 하나냐(Hananiah)일 수 있다고
본다. 그러나 이 경우에도 루가 복음서의 그 다음 이름들과 마태오 복음서의 다음 이름 아비웃(Abiud)은 『역대기』에서 특별히
확인할 수 없다.[20]
Eusebius Pamphilius, Church history, Life of Constantine §VII.
R. T. France, The Gospel According to Matthew: An Introduction and Commentary (Eerdmans, 1985) pages 71–72.
Marcus J. Borg, John Dominic Crossan, The First Christmas (HarperCollins, 2009) page 95.
Nolland, John (2005), 《The Gospel of Matthew: a commentary on the Greek text》, Grand Rapids: W.B. Eerdmans, 65–87쪽, ISBN978-0-8028-2389-2
Nolland, John (2005), 《The Gospel of Matthew: a commentary on the Greek text》, Grand Rapids: W. B. Eerdmans, 70쪽, ISBN978-0-8028-2389-2, considers this harmonization "the most attractive."
Nolland, John (2005), 《The Gospel of Matthew: a commentary on the Greek text》, Grand Rapids: W.B. Eerdmans, 65–87쪽, ISBN978-0-8028-2389-2
Willker, Wieland (2009), 《A Textual Commentary on the Greek Gospels》 (PDF) 6판, 3: Luke, TVU 39쪽, 2009년 3월 27일에 원본 문서 (PDF)에서 보존된 문서, 2009년 3월 25일에 확인함. Willker details the textual evidence underlying the NA27 reading.
"Faced
with a bewildering variety of readings, the Committee adopted what
seems to be the least unsatisfactory form of text, a reading that was
current in the Alexandrian church at an early period," explains Metzger, Bruce Manning (1971), 《A textual commentary on the Greek New Testament》 2판, United Bible Societies, 136쪽, ISBN3-438-06010-8
Schaff, Philip (1882), 《The Gospel According to Matthew》, New York: Charles Scribner's Sons, 4–5쪽, ISBN0-8370-9740-1
Nettelhorst, R. P. (1998). “The Genealogy of Jesus” (PDF). 《Journal of the Evangelical Theological Society》 31 (2): 169–172. 2023년 10월 4일에 원본 문서 (PDF)에서 보존된 문서. 2024년 10월 1일에 확인함.
Farrar, F.W. (1892), 《The Gospel According to St. Luke》, Cambridge, 369–375쪽
에즈라 3:2, 8, 5:2, 느헤미야 12:1, 학개 1:1,12, 14
대상 3:17-24
VanderKam, James C. (2004), 《From Joshua to Caiaphas: High Priests after the Exile》, Minneapolis: Fortress Press, 104–106쪽, ISBN978-0-8006-2617-4
1. 책 제목
헬라어 성경에는 ‘카타 루칸’으로 되어 있다. 이는 ‘누가에 의한’이란 뜻으로 이 헬라어 성경을 번역한 영어 성경(A.V)에는
The Gospel According to Saint Luke(누가에 따른 복음)로 제목을 붙였다. 한글 개역 성경의 제목은
‘누가가 전한 복음’의 의미를 갖는 ‘누가복음’이다.
2. 기록자와 연대
1) 기록자
누가복음의 기록자는 다른 복음서들과 마찬가지로 복음서 자체에 적혀 있지 않다. 하지만 다음과 같은 여러 정황들로 인해서 기록자가
누가라는 것이 인정된다. 우선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이 데오빌로라는 사람에게 보내진 글이라는 동일한 형식을 취하고 있다는
공통점(눅1:3, 행 1:2), 누가복음의 끝과 사도행전의 시작이 연결이 된다는 점 등을 기초로 두 책이 동일한 기록자에 의해
적혀진 사실이 인정되며, 사도행전의 내용에 비추어 누가가 사도 바울의 전도 여행에 동참하였다는 사실(누가의 이름이 골 4:14,
딤후 4:11, 몬 1:24에 기록), 누가복음의 내용을 기초로 기록자가 예수님을 직접 만난 사람이 아니며(눅 1:2-3),
누가복음에 고급 헬라어가 사용되었다는 점, 누가의 직업이 의사였다는 사실(골 4:14), 누가가 기록자라는 2-3세기 기록들이
있다는 점, 누가복음의 기록자를 사도 바울의 동역자로 인정하여 정경에 포함시켰다는 사실들 등의 증거들이 누가가 기록자라는 것을
확인 시켜준다.
*누가는 “빛나다”라는 뜻의 라틴어 `루카누스' 또는 `루키리우스'의 약어이며. 성경 저자 중에서 유일한 유대인이 아닌 안디옥 출신으로 추정된다.
2) 기록연대
이 복음서가 적힌 정확한 연대는 약간의 편차는 있지만 50년대 말에서 60년대 초가 가장 유력하다. 사도행전의 기록으로 보아서
누가복음은 사도행전 보다 먼저 적힌 것으로 추정되며, 누가복음에 서기 70년의 예루살렘과 성전의 파괴가 적혀 있지 않은 점,
사도행전의 내용을 바탕으로 할 때 60년대 중반의 네로 황제에 의한 기독교 박해, 사도 바울과 베드로의 순교보다 더 이른 시기에
적힌 것을 고려하면 50년대 말에서 60년대 초가 가장 유력하다.
3. 대상 및 저술 목적
누가복음은 ‘데오빌로’라는 사람에게 ‘알고 있는 바를 더 확실하게 하려고’이 글을 썼다고 구체적으로 기록되어 있다(1:4).
데오빌로에게 “존귀하신” 이라는 호칭을 사용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서 이 사람이 높은 지위에 있던 사람인 것을 짐작할 수 있는데, 그
이름의 뜻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이다(Lover of God). 누가는 서문에서 자신이 예수님에 대한 이야기를 초기부터
자세하게 조사하여 본 내용들을 적는다고 하면서, 기본적으로 예수님의 삶과 가르침에 대하여 신뢰성 있는 조사 결과들을 제시하려고
한다.
따라서 누가복음은 일차적으로 로마에 대한 기독교의 변증이라고 볼 수 있다. 본서에서 로마 백부장의 믿음을 칭찬한 것이나, 예수께서
가이사의 것을 가이사에게 돌리라고 하는 것이나, 빌라도가 세 번 예수 그리스도에게 무죄를 발표한 것 등 전체적으로 로마에 대한
호의적인 입장을 취하고 있다.
그러나 대상을 데오빌로 한 사람에게만 국한할 것이 아니라 확장해서 로마에 있는 많은 이방인들에게 알고 있는 바들 더 확실하게 하기 위해 기록되었다고 보는 것이 더 타당하다.
4. 주제
1) 흠 없는 인자(人子)이신 예수
누가는 그리스도의 본질의 인간적인 면을 강조하여 인류의 친구로서의 그리스도, 즉, ‘인자(人子)’로서의 그리스도를 제시한다.
예수는 인성을 가지신 분으로서 여성과 어린아이, 소외 계층에 대하여 관심이 많이 있으시며 그들을 동정하시고 함께 하시기 위해 이
땅에 왔음을 강조한다.
2) 온 세상의 구주 예수
누가가 그려 주고 있는 그리스도는 주로 이스라엘의 메시아가 아니라, 온 세상의 구주로서 예수 그리스도이다. 누가는 어느 한 민족에
속하는 그리스도가 아니라, 여러 민족의 다양한 사람들을 위한 그리스도를 높이 부각시키고 있다. 즉, 누가는 자신이 이방인이었지만
그리스도께서 이방인을 위하여 나타내신 각종 봉사와 관심을 다른 어떤 복음서 기자들보다도 자세히 다루며 강조하고 있다.
5. 누가복음의 특징
1) 그리스도의 완전한 인성을 강조함 - 인간적인 면이 잘 드러나있다.
① 예수님의 어린 시절이 기록된 유일한 복음서(2:41-51)
: 성장 과정(2:40, 52), 부모 밑에(2:51), 12세 때의 성전 방문(2:41-50) 기록
② 예수님께서 눈물을 흘리시며(19:41), 간절히 기도하심(22:44)
③ 인성 표현은 식사에 많이 언급(7:36-50. 10:38-42. 11:37-52. 24:41-44)
④ 십자가에 달려 죽으심(23:46) - 사람을 위한 대속물 - 구속이라는 말이 신약에서는 처음으로 등장(1:68. 2:38. 24:21)
2) 여성과 어린아이 등 소외 계층에 대한 관심을 강조함 - 일반 서민들에 대한 관심이 가장 많이 표현된 복음서이다.
① 죄지은 여인(7:36-50), 선한 사마리아인(10:29-37), 탕자의 비유(15:11-32), 세리 삭개오(19:1-10), 십자가에 달려 회개한 강도(23:39-43) 등 소외 계층에 대한 여러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음.
② 마리아와 엘리사벳(1:5, 1:27: 2:41), 안나(2:36), 사렙다 과부(4:26), 시몬의 장모(4:38), 나인성
과부(7:11), 예수님을 섬긴 여인들(8:2-3), 십자가의 여자들(23:49), 부활일의 여자들(24:1) 등 여인이 많이
표현되고 있음.
3) 예수님의 기도와 제자들의 기도를 강조함
① 예수님께서 기도하시는 장면을 강조함
에수님께서는 세례자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신 후(3:21), 들에서(5:16), 산에서(6:12, 9:28, 22:39, 41)
기도하시며, 홀로(5:16, 9:18; 11:1), 오랫동안(6:12), 무릎을 꿇고(22:41, 44) 기도하셨다고 기록한다.
아울러 예수님은 세례를 받으셨을 때 외에도 열두 제자를 부르시기 전에(6:12), 베드로에게 신앙고백을 받기 전에(9:18),
죽음을 예고하는 변화산에서(9:28), 감람산에서 수난을 앞두고(22:40-44), 십자가상에서(22:34, 46) 등 결정적인
전환점을 맞이하실 때마다 기도하셨다.
②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기도하도록 강조하는 내용을 강조.
제자들이 매일 생활에 대한 염려와 이 세상에서의 즐거움을 이기게 하는 것도 기도(8:14)이고, 핍박과 고난을 이기는 것도
기도이며(8:13, 22:32, 40, 46). 기도하는 자 만이 인자가 오실 때 합격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18:1-8;
21:36), 제자들이 기도해야 하는 이유를 부활하신 예수의 요구이기 때문으로 강조하고 있다(24:52).
4) 기타 특징
① 서문이 있음(1:1–4).
이 서문에는 누가복음의 내용(1 : 우리 가운데 이루어진 사실), 기록한 방식(2 : 전하여준 그대로), 수신자(3 :
데오빌로), 작성 목적(4 : 배운 바의 확실함을 위해)을 명확하게 하고 있다. 이 서문의 또 다른 중요한 역할은 사도행전과의
관계를 밝혀주고 있다는 점이다. 첫째, 수신자가 똑같이 데오빌로이다(눅 1:4/ 행 1:1). 둘째, 사도행전에 누가복음의
속편임을 드러내는 표현들이 있다. ‘먼저 쓴 글’(행1:1)의 내용이 예수의 행하시며 가르시기를 시작하심부터(행1:1) 승천하신
날(행1:2)까지라고 정리한다. 셋째, 세계사적 시대를 명확하게 표시하고 있다. - 가이사 아구스도(Augustus) 주전
30-14년(2:1), 가이사 디베료 15년(Tiberius) 주후 14-37년(3:1)
② 예수님의 탄생시 목자들의 방문에 관한 기사를 싣고 있음(2:8-20).
마태복음에서는 유대인의 왕으로서의 면모를 드러내기 위하여 예수님의 탄생시에 동방에서 박사들이 와서 왕께 드리는 예물에 대한 기사를
기록한 반면, 누가복음은 소외된 계층이라 할 수 있는 목자에게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인 예수님의 탄생 소식이 전파 되었음을
밝힌다.
③ 족보의 독특성(3:23-38)
예수님의 족보가 마태복음와 누가복음에 두 번 나오는데 마태복음의 족보는 아브라함까지 올라가는데 반해, 누가복음의 족보는 아담에게까지 거슬러 올라가서, 예수님이 온 인류의 구원자로 오신 분이라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아울러 누가복음은 마태복음과 다른 계통의 족보를 가지고 있는데, 마태복음이 다윗의 아들 중 솔로몬으로 왕의 혈통을 따르고 있는
반면에, 누가복음은 다윗의 아들 나단의 혈통을 따르고 있다. 왜 그런 차이가 있는지는 정확하게 알 수 없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예수님은 요셉의 혈육이 아니라는 사실을 통해 그 족보의 의미를 이해해야 한다는 것이다.
④ 예루살렘과 성전을 강조함
누가복음은 다른 복음서와 비교할 때 상대적으로 예루살렘을 강조하고 있다. ① 첫 장면이 예루살렘 성전에서 시작하며, ② 아기
예수의 예루살렘 방문, 소년 예수의 예루살렘 방문을 기록하고 있고, ③ 예수님의 목적지가 예루살렘이라는 명시적 표현들이 있고, ④
예수님의 승천시에 제자들에게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라는 명령이 있고, ⑤ 예루살렘이라는 단어가 복음서 중 가장 많이 사용되고
있다. 아울러 누가는 사도행전에서도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복음이 퍼져나가게 될 것을 설명하고 있다.
⑤ 의학 용어가 많이 사용됨
“중한 열병”(4:38), “나병 … 원하시면 깨끗하게”(5:12), “혈루증”(눅 8:43), “그(말고) 귀를 만져 낫게 하시더라”(22:51) 등
⑥ 찬송시가 많이 나옴
누가복음에는 유독 찬송시가 많이 나온다. 그리고 그 찬송시들은 예수님과 요한의 출생부분에서 나오고 있다(마리아의 노래(1:46-55), 사가랴의 노래(1:68-79), 천군의 노래(2:14) 시므온의 노래(2:29-32)).
6. 내용과 구조
공관복음의 공통된 구조는 ① 요한의 세례, ② 갈릴리 사역, ③ 유다와 예루살렘 사역, ④ 죽으심과 부활의 구조를 갖는다.
누가복음은 공관복음의 기본구조를 좀 더 매끄럽게 다듬었고, 예수님의 출생 기록에 세례 요한의 출생 기록을 추가했다.
공관복음은 예수님의 십자가 사역을 이루시기 위하여 예루살렘을 최종 목적지로 향하고 있음을 기준으로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특별히
누가복음에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예루살렘을 향하여 여행한다는 표현을 네 번이나 강조하여 명시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