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룩”이란 무엇인가: “코데쉬(קֹדֶשׁ)/카도쉬(קָדוֹשׁ)“
- 어원적 의미
레위기 19장 2절의 “너희는 거룩하라 이는 나 여호와 너희 하나님이 거룩함이니라(개역개정)”라는 하나님 말씀은 우리에게 대체 무엇을 요청하는 것일까요? 우리가 “거룩”해지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하는 것인가요? 표준국어대사전은 ‘거룩’을 “뜻이 매우 높고 위대하다”로 정의하고, Oxford Languages는 ‘holy’를 “dedicated or consecrated to God or a religious purpose”로 정의하는데, 그렇다면 “거룩하라”는 명령은 뜻을 높은 곳에 두고 24시간 하나님만 바라보라는 뜻인가요?
명사 코데쉬와 형용사 카도쉬의 어원적인 의미는 ‘분리(separate)’와 ‘다름(different)’을 의미합니다.
따로 떼어놓아, ‘다른 것과 다른’ 특별한 것을 가리킬 때 사용됩니다. 창세기 2장 3절에서 “하나님이 일곱째 날을 복 주사 거룩하게 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그 창조하시며 만드시던 모든 일을 마치시고 이 날에 안식하셨음이더라”라는 구절은, 그 일곱째 날이 무언가 금치장으로 빛이 번쩍번쩍하고 함부로 손대면 안 될 것 같은 귀한 날이라는 의미라기 보다는, 일곱째 날은 다른 날과 다른, 특별한 날이며, 그 날의 다른 점, 혹은 특별한 점은 하나님께서 그 날에 창조행위를 멈추셨다는 사실에 있다는 것입니다. 일반적인 성(聖)과 속(俗)의 이원론으로 이해하면, 일곱째 날인 안식일만 ‘성스러운(holy)” 날이 되고, 나머지 6일동안의 하나님의 창조행위는 ‘속된’ 것이 되어버립니다. 이런 생각에는 동의할 수 없습니다. 모든 날이 귀하고 소중한 날입니다. 다만 일곱째 날은 다른 날과는 다르게 하나님께서 일을 하지 않으신 날이고, 이런 방식으로 하나님은 인간에게 일주일에 하루는 일을 하지 않아도 되는 명분을 부여하십니다.
마찬가지로, 이스라엘의 절기인 유월절과 무교절이 제정되는 출애굽기 12장 16절의 “첫날에도 성회(거룩한 모임)요 제 칠일에도 성회(거룩한 모임)가 되리니 이 두 날에는 아무 일도 하지 말고”라는 구절은 다음과 같이 이해하는 것이 좋습니다: ‘첫째날과 일곱번째 날은 특별한 날인데, 어떤 점에서 특별하냐 하면 아무 일도 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다른 날과는 다르다.’
출애굽기 28장에서 제사장의 복장을 규정하는 장면에서도 아론을 위해 “거룩한 옷”을 지어(2절), 그 옷으로 아론을 “거룩하게” 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은, 그 옷감이 값비싼 귀한 재질로 되어 있거나 어떤 신비한 힘이 깃든 옷이라는 뜻이 아니라, 일반 백성들이 입는 옷과는 차이가 나는 다른 방식으로 지어진 특별한 옷이라는 뜻으로, 그 옷을 입은 사람은 옷만으로도 그가 남들과는 다른 사람이라는 것을 알 수 있게 하라는 것입니다.
- 거룩의 수직성과 수평성
“코데쉬/카도쉬”는 분리와 다름을 나타내기 때문에, 이 단어가 나올 때는 어떤 면에서 다른가, 혹은 어떻게 달라야 하는가에 대한 설명이 뒤따라옵니다.
레위기 19장 2절의 “너희는 거룩하라”는 명령은 “너희는 달라야 한다”는 뜻이기에 3절 이하에서 어떤 면이 달라야 하는가를 아주 자세히 설명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믿고 따르는 백성들이 다른 민족들과 달라야 할 첫번째로 성경이 언급하는 것은 흥미롭게도 “부모를 경외하라”는 것이고, 그 다음 “나의 안식일을 지키라”는 명령이 뒤따릅니다(레19:3).
다른 민족들이 어떻게 하든 간에 하나님 믿는 백성들은 자신의 부모를 두려움으로 공경해야 하고, 다른 사람들이 쉼 없이 일을 하건, 열흘에 한번, 혹은 십사 일에 한번 휴식을 취하건, 이스라엘의 여호와를 창조의 하나님으로 섬기는 사람들은 6일을 일했으면 하루는 반드시 멈춰야 한다는 것입니다.
레위기 19장이 말하는 “거룩,” 즉 다름과 차이, 특별함은 크게 두 가지로 나뉩니다.
하나는, 하나님을 대하는 ‘수직적’인 측면이고, 또 하나는 이웃과 사람들을 대하는 ‘수평적’인 측면입니다.
우상을 만들지 말라(4절)는 명령과 제물을 드리는 특정한 방식(5-8절), 하나님의 이름으로 거짓 맹세하지 않는 것(12절) 등을 ‘수직적인 거룩’이라 한다면, 그 외의 대부분의 명령은 ‘수평적인 거룩’이라 할 수 있습니다. 가난한 사람과 난민들을 위해 밭과 포도원의 일부를 추수하지 않고 남겨놓는 것(9-10절), 남의 것을 훔치지 않으며, 남을 속이거나 거짓말하지 않는 것(11절), 이웃을 억압하거나 착취하지 않고, 노동자의 임금을 제때 지불하는 것(13절), 장애가 있는 이들을 괴롭히지 않는 것(14절), 공평과 정의로 재판하는 것(15절), 이웃을 희생하여 자신의 이익을 도모하지 않는 것(16절), 형제를 미워하지 않으며 그를 바른 길로 인도하는 것(17절) 등. 마지막으로, “너희는 거룩하라(2절)”는 명령은 그 유명한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18절)”는 명령으로 귀결됩니다.
이러한 수직적이고 수평적인 거룩의 두 방향성은 십계명의 두 가지 측면(수직적인 1-4계명과 수평적인 5-10계명: 제4계명인 안식일 계명은 수직성과 수평성을 모두 갖고 있습니다)과 연결되며, 그리고 마태복음 22장과 누가복음 10장에서 말하는 율법(성경)의 핵심인 하나님과 사랑과 이웃 사랑의 명령과도 궤를 같이 합니다. “너희는 거룩하라”는 명령이 여러분의 머리 속에서 “네 이웃을 사랑하라”는 명령과 연결되지 않는다면, 성경을 처음부터 다시 읽어 보셔야 할 때입니다.
레위기에 나오는 ‘거룩’(성결)의 기본 개념
‘레위기’라는 책은 ‘하나님은 거룩하시다’라는 진리에 기초한다. ‘거룩’(qodesh)이라는 말은 레위기 히브리어 원문에서 100회 이상이나 등장한다. 하나님은 거룩하시다고 말하는 것은 그분이 모든 악이나 흠으로부터 완전히 구별되어 계시다는 의미다. 달리 말하면, 하나님은 완벽하면서도 온전하게 좋으신 분이라는 것이다. 여호와는 전적인 충성과 하나님만을 향한 예배, 사랑에서 비롯된 순종을 받기에 합당하시다.
이스라엘의 정체성이 드러나게 된 연유는 하나님의 행위에 의해 그들이 거룩해졌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또한 이스라엘이 매우 실질적인 방식으로 거룩하게 행동하기를 여호와께서 기대하시기 때문이다. 여호와 자신이 거룩하시므로 이스라엘도 거룩한 백성이 되도록 부르심을 받은 것이다(레 11:44, 45; 19:2 20:7 21:8). 레위기에 나오는 판이해 보이는 율법은 삶의 의식적, 윤리적, 상업적, 형법적 국면을 다루고 있으며, 이 모든 율법은 거룩하심에 대한 이런 핵심 개념에 근거한다.
알렉산더 힐(Alexander Hill)은 하나님의 거룩, 공의 및 사랑에 기초해 크리스천의 기업 윤리에 대한 논의를 전개했다. “만일 어떤 기업의 행위가 하나님의 거룩하고 공의롭고 애정이 깊은 품성을 반영한다면 그것은 윤리적인 것이다.”[1]
Alexander Hill, Just Business: Christian Ethics for the Marketplace, 2nd ed. (Downers Grove: IVP Academic, 2008), 15쪽.
힐은 사업을 하는 크리스천은 하나님을 향한 열정을 품을 때 하나님의 거룩을 반영하는 것이며, 그 하나님은 그들의 궁극적인 최우선의 대상이시자 순결과 책임감과 겸손함을 가지고 행동하는 분이시다. 이런 품성은 농경 사회를 위해 제정된 상법을 재연하려는 노력의 일환이기보다, 오늘날 레위기를 따라 사는 것이 무엇인지를 보여 준다. 이는 율법의 이런저런 규정을 무시하는 게 아니라 오늘의 상황에서 율법을 성취하기 위해 하나님께서 우리를 어떻게 인도하시는지 분별하는 것이다.거룩에 대한 이스라엘의 외적 관습은 두 가지 분야로 표현된다. 첫째로, 하나님은 복합적이고 종합적인 규정에 따라 서로에게 거룩함을 실천하라고 이스라엘 백성에게 명령하셨다. 예를 들어, 인류학자인 메리 더글러스는 레위기에 나오는 음식법이 제멋대로 제정된 것도 아닐뿐더러, 주로 사람의 건강을 염두에 두고 제정된 것도 아님을 밝혀냈다. 이스라엘이 매일 먹는 음식은 구별되었다는 의미에서 하나님의 거룩을 강력하게 상기시키고 강화하는 역할을 한 것이었다.[2]
Mary Douglas, Purity and Danger: An Analysis of the Concepts of Pollution and Taboo (London: Routledge, 1966).
이것은 ‘구별된 백성’이라는 이스라엘의 정체성을 보여 주는 데 필수적이었다. 우리는 십자가 위에서 예수님이 유대인과 이방인의 구별을 철폐하셨으며(엡 2:14-16) 따라서 그분의 제자는 모두 거룩하게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크리스토퍼 라이트가 지적했듯이, “그리스도 안에서는 더 이상 유대인과 이방인 사이의 구별이 없으므로, 크리스천에게는 더는 그런 구분을 상징하는 음식들이 존재할 필요가 없다.”[3]Christopher J. H. Wright, Old Testament Ethics for the People of God (Downers Grove: InterVarsity Press, 2004), 299쪽.
이 원리는 상이한 종류의 동물을 교배하지 못하게 하는 율법, 상이한 종자를 동일한 밭에다 혼작하지 못하게 하는 율법, 상이한 직물로 만든 옷을 입지 못하게 하는 율법(레 19:19)뿐만 아니라 이발이나 문신을 금지하는 율법(레 19:27-28)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로 적용된다.여호와께서 이스라엘에게 거룩하라고 요구하신 두 번째 분야는 다른 나라와의 관계였다. “너희는 나에게 거룩할지어다 이는 나 여호와가 거룩하고 내가 또 너희를 나의 소유로 삼으려고 너희를 만민 중에서 구별하였음이니라”(레 20:26). 모세의 말을 빌리자면,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율법을 따른다면 위대한 지혜와 지식을 소유하게 되므로,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에게 가까이 계신다는 사실을 열국이 인식하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신 4:6-8). 하나님의 백성이 일상생활을 통해서 하나님의 거룩을 드러내야 하는 강력한 이유가 바로 이것이었다. 라이트는 이런 사명에 대한 동기를 다음과 같은 말로 확증했다. “종교적 구별은 윤리적 구별을 통해 구현되어야 하며, 이 두 가지는 다 넓은 의미의 거룩에 포함된다. 그런데 윤리적인 하나님 여호와(YHWH)께서 이스라엘 가운데 임재해 계신다는 사실을 보여 주는 것이 바로 이스라엘의 윤리적 구별이었을 것이다.”[4]
Christopher J. H. Wright, The Mission of God (Downers Grove: InterVarsity Press, 2006), 336쪽. 크리스토퍼 라이트, 《하나님의 선교》(IVP 역간).
따라서 레위기에서 ‘거룩’은 구별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하나님 백성의 공동체를 번영시키기 위한 것이며, 나아가 각 구성원이 하나님과 화해하기 위한 것이다. 거룩은 규정을 따르는 개인 행위와 관련 있을 뿐만 아니라, 각자의 행위가 하나님 나라의 대리자인 하나님 백성 전체의 삶과 일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가 하는 문제와도 관련이 있다. 이에 비춰 볼 때, 예수님이 하나님의 백성을 향해 이방인에게 “소금”과 “빛”이 되라고 하신 요구(마 5:13-16)는 충분히 이해가 간다. 거룩하라는 말은 이웃을 사랑하고 원수도 사랑하며 “그러므로 너희의 하늘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과 같이 너희도 완전하여라”(마 5:48 레 19:2, 18 참조)라고 한 율법을 초월하는 것이다.
요컨대 고대 이스라엘이 레위기를 따랐던 것은 그것이 일련의 특이한 규정이어서가 아니라 그들 가운데 계시는 하나님 임재를 표현한 것이기 때문이었다. 레위기는 오늘날 하나님 백성에게도 중요하다.
성경에서의 거룩 의미와 용례
성경에서 "거룩"은 하나님의 성품을 나타내는 핵심적인 개념으로, 하나님의 백성이 그의 뜻에 맞게 삶을 살아가도록 요구하는 중요한 명령이기도 합니다. "거룩"의 의미와 성경 속에서 거룩이 가지는 다양한 실례를 구약과 신약을 중심으로 깊이 있게 정리해 보겠습니다.
1. 거룩의 원어적 정의와 의미
성경에서 "거룩"이라는 개념은 히브리어 ‘카도쉬’(קדוש, qadosh)와 헬라어 ‘하기오스’(ἅγιος, hagios)로 표현됩니다. 이 단어들은 모두 ‘구별됨’과 ‘다름’을 의미하며, 하나님과 피조물을 구별하고, 죄악된 세상에서 깨끗함을 유지하는 것을 강조합니다.
- 히브리어 ‘카도쉬’: 이 단어는 ‘분리하다’ 또는 ‘따로 떼어놓다’는 의미에서 파생되어, 하나님이 창조 세계와 구별되어 계신다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거룩은 하나님의 본질적 속성이며, 그의 백성이 하나님을 닮아가야 한다는 의미로도 확장됩니다.
- 헬라어 ‘하기오스’: 신약 성경에서는 하나님의 성품과 구별된 삶을 사는 성도들을 가리킬 때 주로 사용됩니다. 이 단어는 거룩함을 통해 하나님께 속하고, 그분의 목적에 맞추어 삶을 살아야 함을 의미합니다.
거룩함은 하나님과 하나님의 백성 간의 관계에서 비롯되며, 신앙인의 생활과 행동 전반에 걸쳐 그 삶이 구별되고 깨끗하게 유지되어야 한다는 것을 함축합니다. 거룩의 구별된다는 뜻을 가졌다는 것은 하나님께 드려진 존재라는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온전히 하나님 것이란 뜻입니다. 하나님께 드려진 것들을 '거룩하다'라고 말합니다.
2. 구약에서의 거룩: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의 관계
구약 성경에서 거룩은 주로 하나님의 성품, 그의 백성의 성결함, 그리고 이를 지키기 위한 율법과 제사 제도에 관련하여 설명됩니다.
1) 하나님의 거룩함
하나님은 본질적으로 거룩한 분으로, 그의 모든 속성 중 거룩함이 가장 두드러집니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스스로 거룩하시다고 말씀하십니다.
- 출애굽기 15:11: "여호와여 신들 중에 주와 같은 자 누구니이까? 주와 같이 거룩함으로 영광스러우며."
- 이사야 6:3: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만군의 여호와여 그의 영광이 온 땅에 충만하도다."
하나님의 거룩함은 피조물과 구별된 절대적 순결과 완전성을 의미합니다. 그는 죄가 없고, 완전히 의로우시며, 인간의 불완전함과는 대조적으로 완벽한 거룩함을 지니고 계십니다.
2) 이스라엘 백성에게 요구된 거룩함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하나님의 백성으로 택하시고, 그들에게 거룩을 요구하셨습니다. 이는 그들이 죄와 불결함으로부터 벗어나 하나님께 온전히 속하는 삶을 살도록 하려는 것입니다.
- 레위기 11:45: "너희도 거룩할지어다 이는 나 여호와가 거룩함이니라."
- 레위기 19:2: "너희는 거룩하라 이는 나 여호와 너희 하나님이 거룩함이니라."
이스라엘 백성에게 요구된 거룩은 하나님의 성품을 닮고 그의 뜻에 따라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거룩함을 유지하기 위해 다양한 율법과 정결 의식을 제정하셨습니다. 이 법들은 이스라엘 백성이 거룩한 생활을 할 수 있도록 도왔고, 구별된 민족으로 세우기 위한 수단이었습니다.
3) 율법에서의 거룩과 정결 의식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거룩함을 유지하기 위한 구체적인 율법과 정결 의식을 주셨습니다. 이는 그들이 죄와 불결로부터 분리되어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으로 살아가도록 돕기 위함입니다.
- 정결 음식법: 레위기 11장과 신명기 14장에서는 먹을 수 있는 음식과 먹을 수 없는 음식을 구분하여, 음식 섭취를 통해 백성이 정결하게 유지되도록 했습니다.
- 정결 예식: 구약 율법에는 제사와 속죄를 통해 죄와 불결을 씻어내는 다양한 정결 예식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는 이스라엘 백성이 성전과 하나님의 거룩함에 접근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역할을 했습니다.
- 안식일과 절기: 이스라엘 백성에게 거룩하게 지키도록 명령된 절기와 안식일도 있습니다. 안식일과 절기 준수는 하나님께 대한 충성과 순종의 상징이며, 그의 백성이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구별된 시간을 보내는 방식이었습니다.
이 모든 의식은 이스라엘이 하나님과의 관계 안에서 구별된 삶을 살아야 함을 상징합니다.
4) 성막과 성전에서의 거룩함
구약에서 성막과 성전은 하나님의 거룩한 임재가 머무는 장소였습니다. 이러한 성소는 이스라엘 백성의 삶 속에서 하나님의 거룩을 상징하는 중심지였습니다.
- 성소 내에서 행해진 제사와 속죄는 하나님과 백성 간의 관계를 유지하는 수단이었으며, 이를 통해 이스라엘은 거룩하게 유지될 수 있었습니다.
- 성막과 성전에서의 예배와 제사는 백성에게 거룩의 개념을 각인시키고, 하나님의 임재가 있는 곳에 들어가기 위해 정결해야 한다는 것을 가르쳤습니다.
3. 신약에서의 거룩: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성결
신약에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새로운 의미의 거룩이 제시됩니다. 예수님은 완전한 거룩의 모범이시며, 그분을 통해 신자들은 하나님께 드려진 거룩한 삶을 살아가게 됩니다.
1) 예수님의 거룩함
예수님은 하나님의 거룩함을 완전히 보여주는 존재로, 그의 삶과 사역을 통해 하나님의 거룩을 계시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죄가 없으신 분으로서, 거룩함의 완전한 모범이 되십니다.
- 히브리서 4:15: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지 못하실 이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똑같이 시험을 받으신 이로되 죄는 없으시니라."
- 예수님은 죄 없으신 삶을 사셨으며,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신자들의 죄를 씻고 그들을 거룩하게 하셨습니다.
2) 성령을 통한 거룩의 성화
신약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이 성령의 역사로 인해 점차 거룩하게 변화된다고 가르칩니다. 이는 성령이 신자들 안에서 거룩을 이루어 가는 과정, 즉 성화(sanctification)로 설명됩니다.
- 데살로니가전서 4:7: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심은 부정하게 하심이 아니요 거룩하게 하심이니."
- 갈라디아서 5:22-23: 성령의 열매로 인한 신자의 거룩한 삶을 설명하며, 성령의 역사로 인해 신자들이 거룩한 성품을 갖게 됨을 강조합니다.
성령은 신자의 삶 속에서 지속적으로 역사하며 그들이 거룩한 성품을 갖추도록 인도하십니다.
3) 신자들의 삶에서의 거룩
신약에서는 신자들에게 거룩한 삶을 요구합니다. 이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구원받은 신자들이 하나님께 속하여, 그분의 뜻에 따라 삶을 살아가야 함을 의미합니다.
- 베드로전서 1:15-16: "오직 너희를 부르신 거룩한 이처럼 너희도 모든 행실에 거룩한 자가 되라."
- 신약에서는 율법적 의식을 통한 거룩보다 신앙과 삶의 일치를 강조하며, 이는 신자가
- 세상 속에서 거룩함을 나타내는 방식으로 나타납니다.
4) 교회와 성도들의 거룩함
신약 성경에서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거룩한 공동체로 불립니다. 이는 교회가 세상과 구별된 거룩한 공동체로 살아야 한다는 의미를 가집니다.
- 에베소서 5:25-27: 예수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깨끗하게 하사 거룩한 공동체로 세우셨다고 설명합니다.
- 고린도전서 3:16-17: 교회와 성도가 하나님의 성령이 거하시는 성전으로서 거룩하게 유지되어야 함을 강조합니다.
교회는 거룩한 공동체로서 하나님께 구별된 삶을 살며, 하나님께 예배하고 서로를 세우는 사명을 가지고 있습니다.
4. 거룩에 대한 성경적 의미의 종합
거룩은 하나님과 그의 백성 간의 구별된 관계를 나타내는 가장 중요한 성경적 개념 중 하나입니다. 구약에서의 거룩은 율법과 제사 제도, 정결 예식을 통해 하나님의 백성이 세상과 구별된 거룩함을 유지하도록 하는 데 중점을 두었습니다. 반면, 신약에서는 예수 그리스도와 성령을 통해 모든 신자가 거룩한 삶을 살아가도록 인도받고, 세상 속에서 하나님의 거룩을 드러내는 삶을 강조합니다.
신약과 구약의 거룩의 개념을 종합해보면, 거룩함은 단순한 종교적 예식이 아니라 하나님의 본질과 그의 백성들이 살아가야 할 정체성을 나타내는 핵심 요소로 이해됩니다. 하나님을 닮아가는 삶, 하나님께 온전히 드려진 삶, 죄와 세상으로부터 구별된 삶이 바로 성경이 말하는 거룩한 삶입니다.
따라서 성경에서 거룩은 모든 신자의 삶의 목표이며,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에서 비롯된다는 점에서, 우리는 지속적으로 성령의 도우심을 받아 거룩한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 거룩함 : 하나님께 속한 것, 하나님으로부터 분리된 것을 의미하며, 하나님만이 본질적인 거룩함을 가지십니다.
- 디모데전서 4:5 /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로 거룩하여짐이니라.
- because it is consecrated by the word of God and prayer
- 헌신 : 세속적인 것에서 분리되어 오직 하나님께 자신의 삶을 드리는 상태입니다.
- 성화(聖化) : 신자가 성령의 도우심을 통해 죄로부터 멀어지고 점진적으로 거룩해져 가는 과정입니다.
- 온전함 : 완전함을 추구하며,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삶을 살기 위해 노력하는 것을 포함합니다.
- 하나님과의 관계 : 성결은 하나님과의 깊고 올바른 관계를 회복하는 것이며,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는 삶의 근본적인 조건입니다
성결의 신학적 이해
기독교신학과 성결론
한국성결교회의 가장 중요한 교리는 두 말할 것도 없이 성결론이다. 한국성결교회는 중생, 성결, 신유, 재림의 사중복음을 강조한다. 하지만 그 중에서도 성결론은 가장 핵심되는 부분이다. 성결교회 는 중생한 신자는 성결을 추구해야 하며, 신유의 궁극적인 목적은 성결한 삶에 있으며, 또한 모든 신자는 다시 오실 주님을 성결한 삶으로 맞이해야 한다고 가르친다.
성결교회를 웨슬리안 교파라고 부르는 이유도 사실 성결에 있다. 웨슬리는 종교개혁의 칭의 교 리를 받아들였지만 동시에 종교개혁이 간과한 또 다른 중요한 성서적인 진리인 성결을 강조했다. 웨 슬리는 자신이 세운 감리교의 존재 목적이 성결의 전파에 있다고 주장하며, 혹시 성결을 전파하지 않는 감리교가 생길까봐 염려된다고 말했다. 사실 성결교회는 기존의 감리교가 성결을 제대로 강조하지 못하고, 웨슬리의 정신에서 벗어났다는 자각에서 시작되었다. 그래서 이명직목사는 성결교회는 초시대 감리교의 정신으로 돌아가려고 시작되었다고 밝히고 있다.
하지만 성결은 성결교회나 웨슬리안교파의 전유물이 아니다. 초대교회 이래로 동방교회와 서방 교회는 성결을 강조하여 왔다. 동방과 서방교회 교부들은 "온전한 그리스도인"(Christian Perfection)을 강조하여 왔다. 물론 동방교회의 온전한 기독교인의 개념이 플라톤적인 요소가 있고, 서방교회의 그 개념이 율법주의적인 요소가 있는 것이 사실이지만 "온전한 그리스도인"이라는 개념은 그들의 신앙과 신학에 있어서 핵심적인 요소를 차지하고 있다. (이에 대해서는 뒤에 자세하게 논의할 것이다.) 따라서 어떤 면에서 성결교회의 성결론의 특징은 성결론을 처음으로 말했다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 기독교 전통이 가지고 있는 성결론을 복음적으로 재확립했다는 데 있다.
성결, 혹은 거룩(holiness)은 기독교전통에서만 중요한 것이 아니다. 사실 종교학자들은 종교의 본질은 윤리나 사상에 있는 것이 아니고, 초자연적인 거룩의 체험에 있다고 본다. 이것은 루돌프 오토 (Rudolf Otto)나 멀치아 엘리아데(Mircea Eliade) 같은 유명한 종교학자들의 견해이다. 이들의 견해를 따른다면 종교의 본질적인 위치는 진(眞)도, 선(善)도, 미(美)도 아닌 성(聖)에 있다. 그래서 성은 종교 적인 인물이나, 장소, 혹은 사건을 설명하는 말로 쓰여진다. 필자는 이런 것들을 종합적으로 생각하면서 한국성결교회의 성결론을 폭넓은 기독교전통에서 재해석하고, 그 의미를 발견하고자 한다.
I. 성결의 정의와 비슷한 용어들
많은 사람들이 성결에 대한 이야기를 들을 때 혼란스러워하는 것들 중의 하나가 성결에 대한 용 어가 매우 다양하다는 것이다. 기독교전통에서 성결과 관련하여 사용되는 단어들을 살펴보면 성화, 기 독자의 완전(Christian perfection), 제2의 축복, 현재적 구원, 온전한 구원 등이 있으며, 동방교회에서 는 신화(deification)라는 용어를 사용하기도 한다. 성결의 신학적인 의미를 밝히기 전에 우선 이런 용어들에 대해 간단히 정리하고자 한다.
기독교대한성결교회의 헌법은 "성결이라 함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성신의 세례를 받음이니 곧 거듭난 후에 신앙으로 순간에 받을 경험이다. 이 은혜는 원죄에서 정결하게 씻음과 그 사람을 성별하여 하나님을 봉사하기 위하여 현저한 능력을 주심이라. 사람이 의롭다 함을 얻음에 신앙이 유일의 조 건됨과 같이 성결도 오직 신앙으로 얻는 은혜이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예수교대한성결교회의 헌장은 성결을 좀더 자세하게 설명하고 있다. 이 헌법은 "우리는 예수의 대속적 보혈과 성령세례로 말미암는 성결을 믿는다"는 전제아래 성결의 뜻, 의무, 필요, 방법을 설명 하고 있다:
1. 성결의 뜻 (의의): '성결'이라함은 '거룩'='정결'='성령세례'='불세례'='완전한 사랑'등의 말로도 표현한다. 이는 [하나님]과 같은 절대적인 성결을 뜻함이 아니요, [하나님]의 성결을 상대로 하여 받는 상대적 성결을 뜻한다. 곧 타락한 인간으로서 [예수]의 구속을 받아 무죄의 상태가 됨을 뜻 함이다. 다시 말하면, [예수]의 보혈과 성령세례로 원죄에서 정결하게 씻음을 받고, [하나님]께 봉 사하기에 현저한 능력을 주시는 은총이다. 이 은혜는 중생 후, 또는 동시에 신앙으로 말미암아 받는 순간적 체험이다.
3. 성결의 필요: 사람에게는 조상으로부터 전해 내려오는 원죄가 있고, 또는 죄로 인하여 부패하 여진 악한 정욕, 구습이 있고, 또한 양심이 더러워져있으니, 여기에서 정결을 받아야 된다. 그래야 종신하도록 성결하므로 [주]를 섬기게 될 것이며, 재림하시는 [주님]앞에 흠없이 서게 될 것이다.
4. 성결의 방법: 이 은혜는 인간의 방법인 수양이나, 교육이나 개혁이나 난행 고행이나, 점진적인 방법등으로 받을 수 없고, 오직 하나님께서 보여 주신대로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의 능력과 주의 보혈을 믿음과 순종과 기도로 받는 것이다.
5. 중생과 성결: 중생은 자범죄에서 사함과 생명을 받는 일이고, 성결은 심중에 잠재한 원죄에서 정결함을 받는 일이며, 중생에는 죄가 진압되고, 성결에는 죄의 몸이 멸함이 된다. 그러므로 중생은 성결의 시작이요, 성결은 중생의 완성이다.
기독교대한성결교회의 헌법과 예수교대한성결교회의 헌장이 말하는 성결은 같다. 이 두 헌법이 정의하는 성결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1) 성결이란 중생 이후에 이루어지는 2차적인 축복이며, 2) 이것은 인간의 노력으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순간적으로 얻어지는 것으로, 3) 성결의 은 혜를 받게 되면 인간의 마음 속에 자리잡고 있는 원죄(혹은 부패성)에서 정결케 되며, 4) 이것은 그리 스도의 보혈과 성령의 충만한 능력으로 이루어지며, 성결은 성령의 사역이기 때문에 성령세례라고 불려지며, 5) 이 은혜를 받으면 하나님의 사역을 감당할 수 있는 능력을 받게 된다. 이 헌법에 나타나있 는 것이 한국성결교회가 믿는 성결론의 핵심이다.
그러면 이런 성결과 성결에 대한 다른 용어들은 어떻게 다른 의미를 갖고 있는가? 먼저 성결과 가장 많이 교차하여 사용하는 용어가 성화이다. 하지만 성결이 주로 중생 이후의 특별한 경험을 지칭 하는 말이라면, 성화는 중생에서 영화에 이르는 전 과정을 지칭하여 이르는 말다. 특히 칼빈주의 계통 에서 성화는 신앙생활에 어떤 계기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중생에서 영화에 이르는 전 과정을 말한다. 따라서 성화를 성결교회와 같이 중생이후의 2차적인 경험으로 설명하지 않는다. 칼빈신학에서는 먼저 성화를 말하고, 그 시작으로서 중생, 그리고 그 완성으로서 영화를 말한다. 이런 오해를 피하기 위해서 웨슬리는 중생을 초기의 성화, 성결을 온전한 성화라고 부르기도 한다. 한국성결교회는 성화라는 용어보다는 성결이라는 용어를 많이 사용하여 왔다.
기독교의 역사에서 성결이라는 말을 표현하는 말로 가장 많이 사용된 것이 "기독자의 완전"일 것이다. 하지만 원래 성서에서 완전이라는 말을 사용할 때 그것은 정적인 의미의 완전이 아니라 목적 을 향하여 나간다는 의미에서 온전을 뜻하는 말이었다. 따라서 필자는 정적인 완성을 의미하는 기독 자의 완전이라는 말보다는 동적으로 완성을 지향한다는 의미의 "온전한 그리스도인"이라는 말을 선호 한다. 그리고 이 말은 이미 기독교인이 된 사람은 온전한 기독교인이 되는 것을 목적으로 삼아야 한다는 의미에서 사용되어졌다. 이런 의미에서 온전한 기독교인이 되는 목표가 성결이기 때문에 이 두 용어는 동의어로 사용되어져 왔던 것이다.
온전한 그리스도인이라는 개념은 천주교 신학에서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해왔다. 특별히 천주 교는 신자의 윤리와 성직자의 윤리를 구분하면서 온전한 신자가 되려면 절대순명, 절대순결, 절대청빈의 삼종서원(三從誓願)을 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여기에 성직자가 평신도보다 위에 있다는 천주교의 계층구조가 형성되는 것이다. 하지만 웨슬리는 온전한 신앙은 성직자만의 개념이 아니라 모든 신자가 추구해야할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또한 천주교는 하나님의 은총으로 공로를 쌓으며, 그 공로의 결과로 구원을 얻는다고 가르친다. 이것은 믿음으로 인한 구원이 아니라 공로를 통한 구원이다. 그러나 웨슬 리안은 율법적인 완전을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복음적인 완전을 주장한다.
기독교의 역사에서 성결에 대한 새로운 용어가 만들어졌는데 그것은 성령세례이다. 아마도 이것 은 성결운동이 성결론에 미친 독특한 견해라고 생각된다. 성결운동은 부흥운동과 같이 발전했으며, 이 런 과정에서 성결은 영적훈련으로 이루어지는 것이라기보다는 성령의 선물로서 주어지는 것이라는 생 각이 나타나게 되었다. 이런 점에서 19세기 미국의 성결운동은 성결과 성령세례를 동일시하였다. 우리 성결교회의 헌법은 성결은 곧 성령세례라고 못박고 있다. 이 점이 성결교회의 성결론의 가장 두드러진 점이라고 생각된다.
최근에 일부 학자들이 웨슬리와 동방교회 신학과의 대화를 시도한다. 그리고 이 둘의 관계 가운 데 핵심적인 요소가 동방교회의 신화(deification)의 개념과 웨슬리의 성결의 개념이다. 동방교회의 신 화는 하나님이 인간이 된 것은 인간이 신이 되도록 하기 위해서라는 것이다. 이런 동방교회의 개념은 플라톤 철학에 뿌리를 두고 있다. 하지만 기독교신학은 플라톤의 신비적인 합일을 받아들이지는 않았 다. 서방기독교의 입장에서 보면 이런 개념들 속에는 상당한 오해의 소지가 있다. 주목할 만한 것은 웨슬리가 신화라는 용어를 사용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웨슬리안 성결론은 하나님과의 교제를 강조하지 하나님과의 합일을 강조하지는 않는다.
이런 용어 외에도 성결을 지칭하는 다른 용어로서 제2의 축복, 현재적 구원, 온전한 구원 등이 있다. 제2의 축복이란 성결은 칭의 이후에 오는 제2의 은총이라는 의미이다. 이것은 전통적인 개신교 가 칭의의 은총만 강조하는데 비하여 성결운동은 여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갈 것을 요청하는 것이다. 현재적 구원이란 성결은 죽어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지금 여기서 얻을 수 있는 구원이라는 점에 서 사용하는 말이다. 여기서 성결을 현세에서 가능한 것으로 이해하는 웨슬리안의 정신이 담겨져 있다. 온전한 구원이란 칭의가 죄의 벌에서 구원받는 것을 강조하는데서 멈추지만 이것은 그리스도의 구속의 은총을 제한하는 것이며, 그리스도는 우리의 죄책뿐이 아니라 우리의 죄성, 곧 부패성에서도 우리를 구원하신다는 의미에서 사용하는 말이다. 따라서 제2의 축복, 현재적 구원, 온전한 구원 등은 다같이 성결의 의미를 밝히 드러내주는 용어들이다.
II. 인간이해: 하나님의 형상과 인간의 타락
전통적인 기독교신학에 의하면 성결이란 하나님의 형상의 회복이다. 따라서 성결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형상이 무엇이며, 또한 타락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밝혀야 할 것이다.
웨슬리는 하나님의 형상을 세 가지로 나누어서 설명하였다. 첫째는 자연적인 형상으로 이성적인 판단 능력을 말하는 것이요, 둘째는 정치적인 형상으로 자연을 다스리는 능력을 말하는 것이요, 셋째 는 도덕적인 형상으로 하나님과 관계를 맺을 수 있는 능력을 말하는 것이다. 웨슬리의 성결론은 이 세 번째 형상의 회복을 말하는 것이다. 웨슬리가 성결이라고 말할 때 그것은 무엇보다도 하나님과 바 른 관계를 회복하는 것을 의미한다. 웨슬리는 자연적인 형상이나 정치적인 형상의 회복은 영화의 단계에서 완성된다고 가르쳤다.
교부들에 의하면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imago)과 하나님의 모양(similitudo)을 따라서 만들어졌 다. 여기에서 '형상'이라 함은 하나님의 객관적인 측면을 말하는 것이요, '모양'이라 함은 그 객관적인 것을 구체화할 수 있는 측면을 말하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서 지음 받 았을지라도 하나님의 모양이라는 특별은총을 힘입지 않으면 하나님의 뜻대로 살수 없다는 것이다. 웨슬리는 이 모양, 즉 특별은총을 생명나무와 관련해서 설명하고 있다. 하나님이 생명나무실과를 주신 이유는 이 특별은총을 계속 받아야 만이 하나님의 사람으로 살 수 있다는 뜻이라는 것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성결의 두 가지 측면을 언급할 수 있을 것이다. 첫 번째는 기독론적인 것으로 성결이란 옛 사람을 벗어버리고, 두 번째 아담 예수 그리스도를 옷입는 것이다. 사실 하나님의 형상 과 그리스도의 형상은 같은 말이다. 두 번째는 성령론적인 것으로 그리스도를 모신 사람은 성령의 계속적인 도우심으로 신자의 삶을 유지할 수 있는 것이다. 사실 성령은 우리의 삶 속에서 그리스도의 모습을 드러나게 해주시는 분이시다.
그러면 인간의 타락은 어떻게 설명될 수 있는가? 웨슬리안 성결론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죄가 무 엇인지를 분명하게 파악하고 있어야 한다. 인간의 불순종은 성령의 특별은총을 거부하게 만들었다. 인 간이 하나님의 형상을 유지하고 살아갈 수 있는 것은 성령의 특별은총 덕분인데, 이것이 사라지자 인 간의 본성에는 세 가지 중요한 결과가 나타났다. 첫째는 선악과를 따먹지 말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거 역한 자범죄(voluntary sin)이다. 이것은 분명히 아담과 하와가 지은 죄이다. 두 번째는 그 죄를 지음 으로 주어지는 죄책(gulity)이다. 인간은 죄를 지으면 죄에 대한 벌을 받아야 한다. 셋째는 부패성 (depravity)이다. 부패성이란 인간의 마음 속에 있는 죄를 자꾸 짓고자하는 죄성을 말하는 것이다. 이 부패성은 아담의 죄악된 본성에서 유래하기 때문에 원죄라고도 부르며, 또한 계속 자손들에게 유전된다는 의미에서 유전죄라고도 부른다.
웨슬리안 성결론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 원죄, 또는 부패성을 잘 이해해야 한다. 사실 원죄이론 은 서방기독교의 중요한 전통이다. 그리고 원죄를 가장 철저하게 설명한 사람은 어거스틴이다. 어거스 틴은 원죄를 교만과 욕망이라고 보았다. 하나님과 같이 되고자 하는 인간의 교만은 모든 것을 자기의 것으로 삼고자 하는 욕망을 낳는다고 하는 것이다. 어거스틴은 이런 욕망의 가장 적나라한 표현을 성 욕으로 보았다. 어거스틴은 인간이 죄를 짓는 것은 아담의 원죄 때문이 아니라 우리가 아담 안에(in Adam) 있기 때문에 죄를 짓는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곧 어거스틴은 인간의 모든 죄악의 원천은 아담 의 죄악된 본성, 즉 부패성 때문이라고 본 것이다. 이 어거스틴의 원죄론은 그 후 칼빈주의 전통에 서 강조되어졌고, 이것은 다시금 19세기 장로교의 구파를 통해서 계속 유지되어왔다. 사실 성결운동은 원죄와 부패성을 강조한다는 점에서 서방기독교, 그리고 칼빈주의 전통과 맥을 같이한다. 사실 19세기 성결운동은 자신들을 구파라고 부르며, 진보적인 감리교신학을 신파 감리교(New School Methodism)라고 비판하였다.
일부 신학자들은 웨슬리안 성결운동가들이 부패성을 잘못이해하고 있다고 비판해 왔다. 즉 웨 슬리안들은 부패성을 육체 안에 있는 일종의 종양과 같은 것으로 이해하여 그것을 제거할 수 있는 것 으로 본다는 것이다. 웨슬리안 성결운동가들이 '제거'라는 말을 사용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이것은 상 징적인 의미이지 의학적인 의미는 아니다. 웨슬리안이 강조하고자하는 것은 인간의 본성 안에 죄성이 실체로서 존재한다는 것이며, 이것이 해결되지 않고서는 진정한 거룩은 이루어질 수 없다는 것이다. 웨슬리안은 부패성을 단지 죄로의 경향성이나 하나님과의 관계단절로 이해하는 것을 반대한다. 죄로 의 경향성은 타락이전에도 존재하였기 때문에 죄로의 경향성을 부패성으로 이해하는 것은 잘못이다. 또한 타락은 하나님과의 관계단절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내면의 부패성을 낳았다. 다시 말하면, 원죄를 단지 죄의 경향성이나, 하나님과의 관계단절이라고 보는 것은 원죄의 심각성을 약화시킬 위험성이 있다는 것이다.
또한 웨슬리안 성결운동은 인간의 본성을 죄성으로 오해하고 있다는 비판을 받아왔다. 즉 인간 의 죄성을 사람 그 자체와 동일한 것으로 오해하여 죄성의 제거를 본성의 제거와 같은 것으로 이해하 였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 점은 웨슬리안 성결신학의 부패성을 오해한 것이다. 웨슬리안은 어떤 신학 보다도 인간의 본성과 죄성을 구분한다. 길보른은 "오류의 원인은 많은 삶들이 '사람의 성품'과 육의 성질, 곧 죄의 성질을 구별하지 못하는데 있다"고 말한다. 육체는 하나님이 원래 만드신 좋은 것이 지만 인간의 죄성, 곧 부패성은 인간의 타락이후에 인간의 본성에 덧붙여진 것이다. 따라서 웨슬리안 이 성결을 말할 때 인간의 본래적인 모습에 덧붙여진 죄성을 제거하고 변화시킨다는 말이지, 인간의 육체 그 자체를 바꾼다는 말이 아니다. 이 육체 그 자체는 우리가 부활의 상태에 들어갈 때까지 변하지 않는다.
사실 성결을 죄성의 변화로 이해하는 것은 이미 칼빈주의 전통에서 시작된 것이다. 에드워즈는 타락을 본성의 부패(physical depravity)라고 불렀다. 성령의 역사는 타락한 본성에 새로운 은총을 부 어주셔서, 우리의 부패성을 변하여 새롭게 만들어 주시는 것이다. 이것을 18세기의 칼빈주의자들은 본 성의 중생(physical regeneration)이라고 불렀다. 그리고 이것을 마음의 할례라고도 불렀다. 비록 칼 빈주의자들이 이 세상에서 온전한 성결이 이루어질 것이라고 믿지는 않았지만 성결을 단지 관계회복으로 보지 않고, 부패성의 변화라고 본 것은 역사적인 사실이다.
사실 성결운동이 이 세상에서 온전한 성결이 가능하다고 믿는 것은 죄성이 인간의 본성이 아니 라는 신앙에 근거하고 있다. 인간의 본성이 죄성이라면 인간은 죽기 전에는 결코 온전한 성화를 이룰 수가 없다. 하지만 이 죄성이 본래적인 것이 아니라 아담의 타락으로 덧붙여진 것이라면 이것은 성령 의 능력으로 제거할 수 있으며, 변화시킬 수 있다고 보는 것이다. 이점에서 웨슬리안 성결운동은 세대 주의와 다르다. 세대주의자들은 죄성과 인간의 본성을 동일시하여 인간이 육체를 가지고 있는 한 본성은 변할 수 없으며, 단지 아담으로부터 유전된 본성과 성령으로부터 유래한 새로운 성품이 인간의 마음속에 공존할 뿐이라고 주장한다. 이것을 '두 본성이론'이라고 부른다. 성결운동은 두 본성이론을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으로 말미암는 옛 본성의 변화를 주장하는 것이다.
III. 하나님의 구속계획: 두 가지 치유
웨슬리안 구원론은 아담의 범죄는 두 가지 결과를 가져왔다는 전제에서 출발한다. 하나는 죄책 이요, 다른 하나는 부패성이다. 아담의 죄가 두 가지 결과를 가져왔다면 이것을 치유하는 하나님의 방 법도 두 가지여야 한다. 우드(J. A. Wood)는 그것을 용서(pardon)과 정화(purity)라고 말한다. 즉 우리 는 죄에 대한 벌에서 용서받아야 하며, 자꾸만 죄를 짓는 내면의 부패성에서 정화되어야 한다. 우드는 이것을 다음과 같이 묘사한다:
[용서]는 우리를 위해(for us) 행하시는 신적 자비의 행위이며, [정화]는 우리 안에서(in us) 행해 진 은총의 역사이다. 그는 타락을 용서하지도, 그렇다고 죄책을 씻어주지도 않는다. 용서와 정화 는 인간의 구원에 있어서 분명하게 구분되는 것이다. 죄책을 제거하는 전자가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는 우리의 자격을 보증한다면 죄의 오염을 제거하는 후자는 그것을 위한 우리의 준비를 보증한다.
웨슬리안의 성결론을 설명하기 위해서 죄책보다도 더욱 중요한 것이 부패성이다. 왜냐하면 부패 성은 죄악의 뿌리이기 때문에 아무리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공로로 용서를 받았다고 할지라도 죄악의 뿌리가 남아있는 한 인간은 또다시 죄에 빠질 수밖에 없기때문이다. 예를 들면 사형수가 대대통령의 특사로 사면 받았지만 그의 마음 속에 사람을 죽이고자하는 살생의지가 있다면 그 사형수는 밖에 나 가서 다시금 살인을 하고 말 것이다. 따라서 사면은 살인수의 근본적인 문제해결이 될 수 없는 것이다. 근본적인 해결은 살인자의 죄성이 변하여 새로운 마음을 갖는 것이다. 이와 같이 부패성의 문제가 해결되지 않고서는 근본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 성결은 바로 이 부패성의 문제에 대한 해결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루터신학의 한계를 지적하고 넘어가야 할 것이다. 루터는 천주교의 공로구원에 반대하여 이신칭의를 강조하였다. 루터의 관심은 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 이루어 놓으신 공로를 덧입 는 것이다. 이것을 '낯선 의'(alien righteousness)라고 부른다. 이것은 우리 밖에서(extra nos)에서 우리 에게 '전가되는 의'이다. 하지만 루터는 천주교의 공로구원에 반대한 나머지 성서가 그렇게 강조하는 인간의 내면의 변화에 대해서는 무관심하였다. 이런 점에서 루터는 그리스도의 객관적 의를 너무 강조한 나머지 신자들의 내면에서 일어나는 성령의 역사를 무시했다고 비판을 받을 수 있다.
그렇다면 어떻게 인간의 내면의 죄성이 정결케 되며 변화될 수 있는가? 이에 대한 웨슬리안 성 결운동의 대답은 그리스도의 보혈과 성령의 역사이다. 인간의 내면이 오염되어 부패해졌다면 이것을 정케하는 방법은 오직 그리스도의 보혈이다. 이것을 가장 잘 표현해 주고 있는 것은 찬송가이다. 찬송 가 186장은 "내 주의 보혈은 정하고 정하다. 내 죄를 정케하신 주 날 오라 하신다. 내가 주께로 지금 가오니 골고다의 보혈로 날 씻어 주소서"라고 되어 있다. 이것은 또한 초기 동양선교회 선교사들이 한국에 왔을 때 강조했던 것이다. 그들은 한국의 여인들이 냇가에서 흰옷을 빠는 것을 보면서, 자신들이 한국에서 해야할 일은 십자가의 보혈로 한국인들의 마음을 정결케 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인간의 부패성은 그리스도의 보혈로 정결케 되지만 동시에 성령의 세례로 새롭게 변화되는 것이 다. 사실 하나님이 인간을 처음 창조하실 때에 흙으로 사람을 만드시고, 그 코에 생기를 불어 넣으셔 서 생령(生靈)이 되었다. 그런데 인간의 타락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생기, 곧 하나님의 영은 떠나고 인간의 육체만 남게 되었다. 그런데 우리가 회개하고 예수를 믿게 되면 성령을 선물로 받게 되고, 그러면 육체만 남은 인간에게 하나님의 영이 들어와서 하나님께서 원래 만들어 놓으신 인간을 만들게 되는 것이다. 웨슬리는 이 영은 신자에게만 주어지는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웨슬리에게 있어서 우리 를 성결케 하는 분은 본질적으로 성령이다. 우리 찬송가 178장 2절은 이것을 잘 표현하여 주고 있다: "정욕과 죄악에 물든 맘을 성령의 불길로 태우사 정결케 합소서. 태우소서 깨끗케 하여 주옵소서. 주 여 성령의 은사들을 오늘도 내리어 줍소서. 성령의 뜨거운 불길로서 오늘도 충만케 합소서."
여기에서 우리는 인간내면의 변화에 대해서 좀더 고찰해 볼 필요가 있다. 사실 서구윤리는 인간 의 덕성 함양에 큰 관심을 가져왔다. 아리스토텔레스의 고전윤리에 의하면 인간이 선행을 반복하게 되면 이것이 습성이 되고 이것이 덕성이 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덕은 인간의 노력으로 되는 것이며, 이 덕성이 쌓여질 때 이것은 우리에게 구원을 가져다 주는 것이다. 여기에 천주교의 공로사상이 자리 잡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개신교는 이런 아리스토텔레스의 덕목을 반대한다. 성경은 새로운 성품은 인간의 노력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의 능력으로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러므로 새로운 성품은 하나님의 역사인 중생에서 시작된다. 성령이 우리 속에서 역사하게 되면 옛 아담 은 물러가고, 두 번째 아담이 우리 속에 거주하게 된다. 그러면 우리는 새로운 성품을 소유하게 된다. 이런 점에서 복음주의 기독교는 참된 인간은 도덕적인 훈련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성령으로 말 미암는 중생으로 시작된다고 믿는다.
웨슬리는 죄를 내적인 죄와 외적인 죄로 나누고, 내적인 죄를 부패성이라고 말하고, 외적인 죄를 자범죄라고 말한다. 웨슬리안은 이 부패성을 죄악의 쓴 뿌리라고 부른다. 이 쓴 뿌리가 자라서 외적인 죄, 곧 자범죄를 만든다. 그러므로 자범죄를 짓지 않기 위해서는 근본적으로 내적인 부패성의 문제가 해결되어야 한다. 웨슬리는 또한 성결을 내적인 성결과 외적인 성결로 나눈다. 그가 말하는 내적인 성 결이란 하나님의 형상의 회복을 말하며, 외적인 성결이란 율법, 곧 사랑의 법을 준수하는 것을 말한 다. 하지만 이 둘은 긴밀한 관계를 갖고 있다. 즉 내적인 성결이 이루어져야 외적인 성결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인간의 내면의 진정한 변화는 중요한 것이다.
IV. 구원의 이중적인 단계 : 중생과 성결
다음으로 우리가 다루어야할 문제는 그러면 어떤 과정으로 우리의 내면이 변화될 수 있겠는가 하는 문제이다. 여기에 대해서 웨슬리는 인간의 단계를 세 단계로 설명하고 있다. 첫 번째가 자연인의 단계이며, 두 번째가 종의 단계, 세 번째가 아들의 단계이다. 자연인의 단계는 아직 신앙을 갖지 않은 불신의 상태이며, 종의 단계는 이미 예수를 주로 믿고 거듭났으나 아직 온전한 자유를 얻지 못한 상태이며, 아들의 단계는 온전한 성화(성결)를 이루어 마음의 기쁨이 충만한 단계이다. 자연인의 상태는 모든 인류가 공통적이므로 실질적인 하나님의 은총의 역사는 중생과 성결의 두 단계로 말할 수 있다.
위에서 지적한대로 웨슬리안은 성령으로 거듭나지 않고서는 진정으로 새로운 인간이 될 수 없다 고 믿는다. 중생은 하나님 백성의 출발점이다. 이것은 태초에 하나님이 인간의 코에 생기를 불어넣는 것과 같다. 이 영이 없이는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말할 수 없다. 그러나 중생은 하나님의 역사의 시작일 뿐 그것 자체로 완성은 아니다. 중생으로 얻어지는 것은 완전한 승리가 아니라 이제 성령의 역사 와 육체의 소욕 사이가 갈등상태에 들어서는 것이다. 따라서 웨슬리는 자연인의 상태에서는 갈등이 없지만 중생한 이후에는 영과 육의 갈등을 느끼게 된다고 말했다.
웨슬리안이 중생이 신앙의 완성이 아니고, 영적으로 성장하기 위한 출발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로마서 7장에 근거하는 것이다. 사도 바울은 자신의 과거를 살펴보면서 이미 중생했지만 자신의 속에 서 죄와 사망의 법과 생명과 성령의 법이 싸우고 있다고 말했다. 하지만 웨슬리안의 주장은 단지 성 서를 그냥 반복하는 것이 아니다. 웨슬리안 성결운동가들은 수많은 사람들의 체험을 통해서 중생의 체험 직후에는 큰 기쁨이 있고 죄를 이길 수 있지만, 얼마가지 않아서 자신의 속에 죄악의 세력이 남아 음을 느낀다는 것을 알았다. 이것은 우리의 신앙경험을 통해서도 인정할 수 있는 일이다.
그러면 중생이후에 우리의 속에 남아있는 것이 무엇인가? 이것을 신학적으로는 잔여죄(殘餘罪)라 고 부른다. 성령으로 거듭난 우리는 분명히 옛날과 같은 성품이 아니라 새로운 모습으로 변화되었다. 하지만 온전히 변화된 것이 아니다. 아직도 우리 속에는 여전히 옛 사람 아담의 모습이 남아있다. 이것을 웨슬리는 신자의 죄라고도 부른다.
이 잔여죄에 대해서 몇 가지 입장이 있다. 먼저 칼빈주의자들은 이 잔여죄는 인간의 육체가 존 재하는 한 인간이 극복할 수 없는 것으로 본다. 이들은 따라서 신자의 삶이란 영과 육의 갈등의 연속 이며, 이것은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정통 칼빈주의자들은 오히려 이런 갈등이 우리로 하여금 겸손하게 만들고 결국에 가서는 우리의 신앙을 유익하게도 한다고 강변한다. 하지만 웨슬리안은 성서가 강조하는 것은 영육의 갈등이 아니라 성령으로 인한 승리라고 믿는다.
다음으로 19세기의 일부 진보적인 감리교도들은 중생때 인간의 죄 문제가 다 해결되었다고 본 다. 이들은 뉴 헤이븐신학의 영향을 받아서 자범죄만 인정할 뿐 죄성을 부인한다. 인간의 죄성을 부인 하기 때문에 중생이후에 죄성이 남아 있다는 것도 부인한다. 잔여죄를 부정하기 때문에 이 잔여죄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또 다른 제2의 은총도 부정하게 된다. 따라서 19세기 후반의 진보적 감리교는 중생 이후에는 지속적인 성화만 있을 뿐 제 2의 은혜로서의 성결은 없다고 주장하였다.
이에 대해 웨슬리안 성결운동은 중생이후에도 여전히 잔여죄가 남아있으며, 이것은 하나님의 은 총으로 해결해야 한다고 믿는다. 여기에서 웨슬리안 성결운동은 성결은 중생이후에 오는 것으로 중생 과 분명하게 구분되는 이차적인 은혜라고 지적한다. 중생으로 인해서 죄성이 붕괴되기 시작했다면 성 결로 인해 죄성이 제거된다는 것이다. 이것을 웨슬리안은 온전한 구원이라고 말한다. 즉 성결에서야 자범죄만이 아니라 부패성(죄성)에서 온전히 해방되기 때문이다. 성결운동은 내적인 부패성에서 해방 되지 못하면 아직 운전한 구원의 상태에 들어가지 못한 것으로 간주한다. 그 이유는 그 남아있는 죄성이 다시금 우리를 죄악으로 인도할 수 있기 때문이다.
성결운동이 이중적인 치유를 설명하는데 다양한 패러다임을 사용한다. 먼저 이들은 구약의 출애 굽 패러다임을 이용하여 이중적인 치유를 설명한다. 즉 이스라엘이 홍해바다를 건너는 것이 중생이라 면 요단강을 건너는 것은 성결이다. 애굽이 불신앙의 상태라면, 광야시대는 영육의 갈 등의 상태요, 가나안은 영의 승리의 상태이다. 또한 성결운동은 부활절과 오순절의 관계를 들어서 이중적인 치유를 설명한다. 부활절이 중생의 상태라면 오순절은 성결, 곧 성령세례의 상태라는 것이다.
필자는 이런 이중적인 치유가 원칙적으로 옳은 것이기는 하지만 모든 신자의 신앙경험이 항상 중생과 성결의 두 단계를 거치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사실 어떤 사람은 여러 차례의 신앙체험을 거쳐서 성결에 이르는 경우도 있고, 또한 어떤 사람에게는 단 일회적으로도 온전한 은혜의 상태에 들 어설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어디까지나 성령의 역사와 거기에 반응하는 인간의 자세에 달린 문제일 것이다. 그러므로 중생과 성결의 두 단계가 표준적이기는 하지만 모든 신앙의 경험을 두 단계로 도식화하는 것은 지나친 단순화라고 본다.
성결운동은 성결의 상태가 천사와 같은 완전한 인간이 되는 것은 아니라고 주장한다. 이미 위에 서 지적한 것처럼 웨슬리에게 있어서 온전한 그리스도인이란 도덕적인 형상의 회복을 말하는 것이지 자연적인 형상과 정치적인 형상까지도 완전하게 회복되는 것은 아니다. 달리 말하면 성결 이후에도 인간은 여전히 인간으로서의 한계를 갖는다는 것이다. 여기에는 무지로서의 죄, 연약하여 짓는 죄 등 이 포함된다. 따라서 이런 인간의 한계 때문에 인간은 언제든지 다시 타락할 가능성이 있다. 이것은 타락이전의 아담이 죄성이 없었는데도 사탄의 유혹을 받아 범죄한 것에서 잘 알 수 있다. 타락이전에 부패하지 않은 아담과 하와가 타락했다면 성결한 신자도 다시금 타락할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성결은 인간의 한계 내에서의 성결이지 결코 인간을 신적인 위치에 놓는 것은 아니다.
웨슬리안은 인간의 육체가 갖고 있는 모든 한계를 뛰어넘는 온전한 인간은 영화의 단계에서나 이루어진다고 본다. 이점에서 성결운동과 칼빈주의는 사실 같은 입장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이 두 입 장은 다같이 영화의 상태에 이르러서야 무지와 연약함에서 인간은 자유로워질 수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이 점에 있어서 성결운동이 항상 강조하는 것이 천사와 같은 완전이 아니라, 성서가 말하는 복음 적인 완전이라는 사실을 상기해야 한다.
V. 성령의 역사로서의 성결 : 성령세례
웨슬리안 성결론의 가장 중요한 특징은 성결을 성령세례로 이해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것은 많 은 성결교파들이 성결을 성령세례라고 정의하는 데서도 잘 드러난다. 그러면 웨슬리안이 왜 성결을 성령세례라고 말했을까? 웨슬리는 일찍이 성결을 자신의 가장 중요한 목적으로 삼았다. 문제는 이 성 결을 어떻게 성취할 것인가 하는 것이다. 웨슬리가 처음 사용한 방법은 은총의 수단이다. 그는 열심히 교회가 정해주는 성례전에 참여하고, 선행을 실천했다. 하지만 그 결과는 실패였다. 이때 그에게 모라 비안은 믿음을 강조했고, 그는 자신을 하나님께 맡겼다. 그 후에 그는 "이상하게 마음이 뜨거워지는" 올더스게랻의 체험을 한 것이다. 올더스게랻의 체험은 일종의 성령체험이다. 그 후부터 그에게 이전에 는 가능하지 않던 새로운 삶이 시작되었다. 웨슬리는 칭의가 우리를 위하여(for us) 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 행하신 사역에 근거하는 것이라면, 성화는 우리 안에서(in us) 우리를 새롭게 하시는 성령의 사역에 근거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성결을 성령세례와 보다 분명하게 연관시킨 것은 웨슬리의 후계자들이다. 한때 웨슬리가 자신의 후계자로 지목했던 풀렛처는 성결은 성령세례라고 분명하게 언급했다. 그는 성결은 인간의 노 력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사도행전 1장에 나오는 성령세례로 가능하다고 믿은 것이다. 그후 19세기 미국의 성결운동은 성결을 성령세례라고 불렀다. 특별히 19세기의 성결운동이 부흥운동을 통 해서 나타났다는 점을 주목하여야 한다. 19세기 전반에 일어났던 팔머의 부흥운동, 19세기 후반에 나 타난 전국성결연합회의 부흥운동은 성결을 성령의 역사로 강조하였다. 이들에게 있어서 인간의 내면에 있는 부패성을 제거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오직 성령세례를 받는 길 이외에는 없는 것이다.
이점에 있어서 웨슬리안 성결운동은 신학사에 있어서 독특한 위치를 갖고 있다. 기독교신학은 전적인 타락을 강조하여 이 세상에서는 온전한 성결이 가능하지 않다는 어거스틴적인 신학이나, 아니 면 인간의 도덕적인 능력을 강조하여 온전한 성결이 가능하다는 펠라기안적인 신학으로 나뉘어졌다. 전자는 너무 비관적이며, 후자는 너무나 낙관적이다. 하지만 웨슬리안 성결운동은 어거스틴과 같이 인간의 부패성을 믿으며, 펠라기안과 같이 온전한 기독교인의 가능성을 믿는다. 그러면 이것이 어떻게 가능한가? 여기에서 나오는 것이 성령세례이다. 인간이 타락했지만 성령의 능력으로 이것을 극복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웨슬리안은 펠라기안이 말하는 인간의 도덕적인 능력에 근거한 인본 적인 완전을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
웨슬리안은 인간의 육체가 갖고 있는 모든 한계를 뛰어넘는 온전한 인간은 영화의 단계에서나 이루어진다고 본다. 이점에서 성결운동과 칼빈주의는 사실 같은 입장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이 두 입 장은 다같이 영화의 상태에 이르러서야 무지와 연약함에서 인간은 자유로워질 수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이 점에 있어서 성결운동이 항상 강조하는 것이 천사와 같은 완전이 아니라, 성서가 말하는 복음 적인 완전이라는 사실을 상기해야 한다.
V. 성령의 역사로서의 성결 : 성령세례
웨슬리안 성결론의 가장 중요한 특징은 성결을 성령세례로 이해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것은 많 은 성결교파들이 성결을 성령세례라고 정의하는 데서도 잘 드러난다. 그러면 웨슬리안이 왜 성결을 성령세례라고 말했을까? 웨슬리는 일찍이 성결을 자신의 가장 중요한 목적으로 삼았다. 문제는 이 성 결을 어떻게 성취할 것인가 하는 것이다. 웨슬리가 처음 사용한 방법은 은총의 수단이다. 그는 열심히 교회가 정해주는 성례전에 참여하고, 선행을 실천했다. 하지만 그 결과는 실패였다. 이때 그에게 모라 비안은 믿음을 강조했고, 그는 자신을 하나님께 맡겼다. 그 후에 그는 "이상하게 마음이 뜨거워지는" 올더스게랻의 체험을 한 것이다. 올더스게랻의 체험은 일종의 성령체험이다. 그 후부터 그에게 이전에 는 가능하지 않던 새로운 삶이 시작되었다. 웨슬리는 칭의가 우리를 위하여(for us) 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 행하신 사역에 근거하는 것이라면, 성화는 우리 안에서(in us) 우리를 새롭게 하시는 성령의 사역에 근거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성결을 성령세례와 보다 분명하게 연관시킨 것은 웨슬리의 후계자들이다. 한때 웨슬리가 자신의 후계자로 지목했던 풀렛처는 성결은 성령세례라고 분명하게 언급했다. 그는 성결은 인간의 노 력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사도행전 1장에 나오는 성령세례로 가능하다고 믿은 것이다. 그후 19세기 미국의 성결운동은 성결을 성령세례라고 불렀다. 특별히 19세기의 성결운동이 부흥운동을 통 해서 나타났다는 점을 주목하여야 한다. 19세기 전반에 일어났던 팔머의 부흥운동, 19세기 후반에 나 타난 전국성결연합회의 부흥운동은 성결을 성령의 역사로 강조하였다. 이들에게 있어서 인간의 내면에 있는 부패성을 제거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오직 성령세례를 받는 길 이외에는 없는 것이다.
이점에 있어서 웨슬리안 성결운동은 신학사에 있어서 독특한 위치를 갖고 있다. 기독교신학은 전적인 타락을 강조하여 이 세상에서는 온전한 성결이 가능하지 않다는 어거스틴적인 신학이나, 아니 면 인간의 도덕적인 능력을 강조하여 온전한 성결이 가능하다는 펠라기안적인 신학으로 나뉘어졌다. 전자는 너무 비관적이며, 후자는 너무나 낙관적이다. 하지만 웨슬리안 성결운동은 어거스틴과 같이 인간의 부패성을 믿으며, 펠라기안과 같이 온전한 기독교인의 가능성을 믿는다. 그러면 이것이 어떻게 가능한가? 여기에서 나오는 것이 성령세례이다. 인간이 타락했지만 성령의 능력으로 이것을 극복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웨슬리안은 펠라기안이 말하는 인간의 도덕적인 능력에 근거한 인본 적인 완전을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
최근 성서신학계는 세례와 성령세례의 관계에 대해서 논란 중이다. 제임스 던을 중심으로 하는 성서신학자들은 초대교회에는 세례시에 성령세례가 나타났다고 주장하면서 성령세례는 2차적인 세례 가 아니라 일차적인 것이라고 주장한다. 많은 개혁파신학자들은 여기에 동의한다. 개혁파신학은 세 례를 받을 때 이미 성령을 받았으므로 이차적으로 성령세례를 받을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이것을 세 례시의 중생(Baptismal Regeneration)이라고 부른다. 이 세례시의 중생이론에 따르면 신자들은 본인이 의식하든 그렇지 않든 간에 세례시에 중생하며, 동시에 성령을 받았다는 것이다. 이런 이론은 천주 교의 성례전 교리, 즉 신부가 성례를 집전할 때 자동적으로(ex opera operato)로 은혜가 임한다는 교 리에 근거한 것이다. 원래 개신교는 성례가 자동적으로 은혜를 전달해주는 것이 아니라 신자의 믿음 에 의하여 은혜를 전달해 준다고 믿는다. 이런 점에서 개혁파의 세례시의 중생론은 개신교의 원리에 철저하지 못하다고 본다.
천주교는 세례를 받을 때 아담으로부터 내려오는 원죄를 씻김 받는다고 본다. 천주교는 세례는 원죄를 씻어주는 효과가 있으며, 따라서 유아도 세례를 받지 못하면 원죄에서 씻김을 받지 못하기 때 문에 멸망을 받는다고 가르친다. 천주교는 이런 역사는 신자가 의식하든지, 의식하지 못하든 관계없이 신비스럽게 이루어진다고 본다. 따라서 천주교의 유아세례는 원죄교리와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다. 하 지만 웨슬리안 성결운동은 인간의 내면에 있는 죄성의 파괴는 형식적인 세례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며 성령의 인격적인 역사로 인해 나타나는 중생과 성결에서 이루어진다고 믿는다. 중생때 죄성이 부분적으로 붕괴되어지며, 성결 때 온전히 변화된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성령세례와 천주교의 성례전과의 관계를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다. 천주교는 성례전은 그리스도가 세운 은총의 수단이기 때문에 인간의 인격이나 믿음에 관계없이 성령의 역사를 우리에게 전달해 준다고 믿는다. 하지만 웨슬리안 성결운동은 이런 전례주의를 반대한다. 물론 원칙적인 의미에서 성례전은 은총의 수단이다. 하지만 성결운동은 기존교회에서 전례가 은총의 수단이 되지 못하고 단지 형식으로 전락하고 만 것을 보아왔다. 따라서 그들은 성례전을 강조하기보다는 개인의 기도와 찬송과 성경읽기를 통한 하나님과 인격적인 만남을 추구하였다. 다시 말하면 성례전을 통한 간접적인 방법보다는 개인의 경건생활을 통한 보다 직접적인 방법을 택했다는 것이다. 이점에 성결운 동의 영성의 중요한 측면이다.
일부 웨슬리안 신학자들은 성결운동의 성령세례와 천주교의 견진성사가 서로 유사하다고 주장한 다. 성결운동이 성령세례를 물세례(혹은 중생)에 이은 두 번째 은혜로 보는 것과 같이 천주교는 견진 성사를 세례 다음에 주어지는 성례전으로 본다. 천주교는 세례가 신자를 교회에 받아들이는 의식이라면 견진은 실제적으로 신앙인의 삶을 살수 있도록 만들어주는 의식이라고 본다. 이런 점에서 견진은 성결과 관련이 있다. 하지만 천주교와 성결운동은 이런 외적인, 신학적인 유사성에도 불구하고 근본 적인 차이가 있다. 그것은 성령세례는 자동적으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성령세례는 물론 견진성사에도 함께 할 수 있다. 하지만 견진을 받았다고 해서 성령세례를 받았다고 말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성결운동은 성령세례는 우리가 의식하든, 못하든 주어진 것이 아니라 신자가 자신의 삶을 통 해서 분명하게 간증할 수 있는 것이라고 이해한다.
성결운동이 성결을 성령세례로 이해하는데는 매우 중요한 신학적인 특징이 있다. 오순절운동은 성령세례를 받은 일차적인 증거를 방언으로 이해한다. 이런 은사에 대한 강조는 성령의 가장 중요한 역할을 은사로 보게 하는 오류를 갖게 만들었다. 물론 필자는 은사를 부인하지 않는다. 오히려 성경에 나타난 은사는 권장되어야 하는 것이라고 이해한다. 하지만 성령의 본래적인 사역은 은사에 있다기보다는 죄인의 변화에 있다고 본다. 성령의 일차적인 역할은 우리를 새로운 인간으로 만드는 것이다. 이 런 점에서 성령세례는 성결로서 나타난다.
하지만 성결운동과 오순절운동은 다같이 성령세례를 성령의 능력이라는 관점에서 보고 있다. 이 것은 사도행전 1장의 말씀을 따른 것이다. 다시 말하면 예수님은 성령세례를 받고 능력을 얻어서 세계선교에 나가라고 말씀하셨다. 따라서 성령세례는 처음부터 선교를 위한 능력과 밀접한 관계를 갖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초기 성서학원의 목적은 성령세례를 받아서 능력있는 사역자를 만드는 것이었다. 성결교회는 성령세례는 거룩한 삶과 능력으로 나타난다고 믿었다.
하지만 성령세례가 한편으로는 성결이라는 윤리로 나타나지만 이것이 단지 윤리로 제한되는 것 은 잘못이다. 성령세례는 근본적으로 초자연적인 성령의 체험이다. 이것을 종교학자들은 거룩의 체험 이라고도 부른다. 이 거룩의 체험을 할 때 인간은 자신의 죄성을 깨닫고, 하나님 앞에 회개하며, 새로 운 삶을 살게 된다. 하지만 이런 새로운 삶의 원천은 인간의 노력이 아니라 거룩의 체험인 것이다. 이런 점에서 거룩은 일차적으로 체험이며, 이차적으로 윤리라고 말할 수 있다. 사실 많은 성결운동가들 은 자신들의 신앙과정에서 이런 체험을 경험하였다. 이것은 아마도 종교의 가장 원초적인 경험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VI. 성결에 이르는 길: 점진적인 노력과 순간적인 은혜
19세기 성결운동에 대한 가장 중요한 비판 가운데 하나가 성결의 순간적인 측면은 강조하면서 성결의 점진적인 측면은 무시했다는 것이다. 이들의 주장을 따르면 웨슬리는 점진적인 성결과 순간적 인 성결을 조화롭게 강조했는데 19세기 성결운동가들은 일방적으로 순간적인 측면만 강조했다는 것이다. 전반적으로 보아서 19세기 성결운동은 순간적인 측면을 강조한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점진적인 측면을 무시한 것은 아니다.
그러면 왜 성결교회가 순간적인 성결을 강조했을까? 그 이유는 무엇보다도 성결은 하나님의 선 물이라는 점 때문이다. 성결이 하나님이 주시는 선물이라면 그것은 순간적일 것이다. 선물은 항상 순 간적으로 받는 것이지 점진적으로 받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두 번째 이유는 성결은 믿음으로 받기 때문이다. 믿음으로 이루어지는 칭의가 순간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처럼 성결도 순간적으로 이루어진다. 세 번째는 성결은 인간의 노력의 산물이 아니기 때문이다. 성결은 덕성의 함양이 아니다. 이것은 성령 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주시는 것이다. 많은 성결운동가들은 성결이 점진적인 것이라는 주장을 진화론과 관련시켰다. 신학적 진화론자들은 성결을 점진적인 것으로 본다. 하지만 신학적 창조론자들은 성 결을 순간적인 것으로 이해한다는 것이다.
보스턴 대학교의 신약학자 다니엘 스틸은 성결의 순간적인 측면을 신약신학적으로 입증하고자 했다. 그는 신약성서에서 성결에 관련된 단어를 조사한 결과 거의가 부정과거용법을 사용하고 있다는 것을 발견하였다. 부정과거용법은 지속적이거나 습관적이거나 반복적인 행위를 지칭하지 않고, 순간적 이며, 일회적인 사건을 설명한다. 이것은 성결이 점진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순간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임을 뒷받침 해준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성결의 순간적인 측면이 가장 잘 드러난 것이 팔머의 제단신학에서이다. 팔머는 지금 까지 많은 사람들이 성결을 체험하지 못한 이유는 성결은 오랜 노력 끝에 이루어지는 것이라고 생각 하고, 성결추구를 포기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팔머는 오히려 성결은 지금, 당장 여기에서 얻을 수 있는 것이라고 주장하면서 그 방법으로 제단신학을 내세웠다. 제단신학이란 "제단이 제물을 거룩하게 만든다"는 마태복음 23장 19절에 근거하여 우리가 대제사장이 되시는 그리스도에게 우리자신을 제물 로 드리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거룩하게 만드신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필요로 하는 것은 인간의 노력이 아니라 자아의 포기이며, 이 포기는 성령으로 하여금 역사하게 만드는 것이다. 팔머는 수많은 사람 들을 제단으로 초청하여 안수하므로 성령세례, 곧 성결의 체험을 하게 하였다.
이러한 팔머식의 성결운동은 19세기 미국의 부흥운동에 잘 들어맞았다. 성결운동은 주로 부흥운 동에서 일어났으며, 부흥회는 목회와는 달라서 짧은 기간 내에 결과를 얻어야 한다. 미국의 기독교는 오랫동안 부흥운동적인 컨텍스트에서 발전하여 왔으며, 순간적인 성결의 체험은 이런 부흥회와 잘 어울리는 구조를 갖고 있다.
하지만 성결운동이 성결의 점진적인 측면을 무시한 것은 아니다. 성결운동의 주장은 인간은 성 결을 받기 위해서 노력해야 하지만 정작 성결을 주시는 분은 하나님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마치 선물 을 받는 사람이 선물을 받을 준비를 해야하는 것과 같다. 실질적으로 성결운동은 성결을 위해서 진지한 준비를 할 것을 가르쳐왔다. 그래서 이명직목사는 진정한 회개가 이루어져야 중생도 성결도 가능 하다고 보았다. 그러면 진정한 회개란 무엇인가? 이명직목사는 "첫째 자기가 죄인이라는 자각, 둘째 자기의 죄에 대한 통회, 셋째 그것을 겸손하게 고백하는 행위, 넷째 자신의 죄 값을 변상하는 회개의 열매, 다섯째 그 결과로 사죄의 확신을 갖게된다"라고 말하였다. 이것은 성결운동이 그냥 수동적으 로 기다리고만 있지 않다는 것을 보여준다. 성결신학은 중생 이후에도, 그리고 성결 이후에도 하나님 의 은혜를 유지하기 위한 인간의 노력은 필요하다고 본다.
하지만 성결운동은 성결의 체험에 있어서 은총의 수단의 사용에 대해서 별로 언급하지 않았다. 원래 성례전은 우리의 신앙생활을 돕는 은총의 수단이다. 웨슬리에게는 성례전이 매우 중요했다. 하지만 이것이 형식화되면서부터 은총의 전달은 없어지고, 단지 의식만이 남는 경우가 많이 있었다. 부흥 운동은 여기에 대한 도전으로 생긴 것이다. 여기에 영향을 받은 한국성결교회가 비전례적인 태도를 가져온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전례가 바로 행해져서 이것을 통해 신자들이 진정으로 성령의 역사를 체험하고, 삶의 변화를 가져온다면 이것은 바람직한 것일 것이다. 그러나 이런 내적인 역사가 없이 단 지 전례주의로 돌아가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생각된다.
맺는 말: 한국성결교회의 성결론의 역사적인 위치와 특징
지금까지 필자는 한국성결교회의 성결론을 보다 폭넓은 기독교신학의 관점에서 살펴보았다. 성 결은 초대교회에서부터 현대교회에 이르기까지 기독교 전통의 중요한 주제 가운데 하나였다. 그렇다면 한국성결교회의 성결론은 다양한 전통들과 어떻게 다른가?
동방교회는 성결을 신화라는 개념으로 설명한다. 하지만 서방교회의 전통에 서있는 한국성결교 회는 성결을 신이 된다는 개념보다는 죄악의 본성을 변화시켜,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시킨다는 의미로 이해한다.
천주교는 기독자의 완전이라는 용어를 강조한다. 하지만 천주교는 성직자의 윤리와 평신도의 윤 리로 나누었으며, 그것은 결과적으로 교회의 계층구조를 만들었다. 아울러서 천주교의 성결은 공로구원으로 전락할 가능성이 많이 가지고 있다.
종교개혁자 루터는 칭의의 교리는 강조하였으나 성결의 교리는 강조하지 못하였다. 칼빈은 루터 에 비해 성화를 강조했지만 인간의 육체적인 한계 때문에 이 세상에서는 온전한 성화가 가능하지 않다고 보았다. 여기에 대해서 성결은 이 세상에서 가능하며, 모든 신자들은 이것을 추구해야 한다고 주 장한 사람이 웨슬리이다.
한국성결교회는 웨슬리의 전통을 이어받고, 19세기의 성결운동을 거치면서 형성된 성결론을 주 장하고 있다. 19세기 성결운동은 성결은 한편으로는 내면적인 부패성에서의 해방이며, 이것은 성령의 세례로서 가능하고, 이 성령세례는 우리에게 능력을 주어 하나님의 사역을 감당하도록 만든다고 보았다.
19세기 성결운동에서 오순절 운동이 나왔다. 오순절운동과 성결운동은 다같이 성령을 강조한다. 하지만 성결운동은 보다 성령의 변화시키는 사역에 강조점을 둔다면 오순절운동은 보다 은사적인 측면에 강조를 둔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면 한국성결교회의 성결론의 특징은 무엇일까? 첫째, 웨슬리안 성결운동은 기독교신학의 중 심주제인 성결을 다시 강조하였다. 많은 개신교가 루터의 칭의교리를 일방적으로 수용하여 성서와 기독교신학의 중심주제인 성결을 잃어버렸는데 웨슬리안 성결운동은 이것을 다시금 회복시킨 것이다.
둘째, 웨슬리안 성결운동은 성결을 건전한 기독교신학의 전통에서 재확립하였다. 신학은 한편으 로는 신비주의에 빠져 신인합일을 주장하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도덕폐기론에 빠져 도덕을 무시하기도 한다. 하지만 한국성결교회의 성결론은 이런 양극에 빠지지 않고 성서적인 성결론을 형성하였다.
셋째, 웨슬리안 성결운동은 체험과 윤리를 잘 조화시킨 성결론을 갖고 있다. 일부 종교는 윤리를 상실한 신비적인 경험을 강조하고, 다른 종교는 초월을 상실한 딱딱한 윤리를 주장하고 있다. 하지만 성결교회는 성결이 성령세례라고 규정함으로써 성결의 윤리와 성령세례의 체험을 하나로 결합시켰다.
넷째, 웨슬리안 성결운동은 기독교인이 되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온전한 기독교인이 되는 것을 강조함으로써 목회의 지평을 확대시켰다. 물론 일차적으로는 믿음으로 얻는 구원을 전해야 하지만 여기에서 머물지 않고 온전한 구원을 추구하게 함으로써 성결교회는 성숙한 기독교를 만드는데 공헌할 수 있다.
하나님께서 성결교회를 세우신 목적은 성결의 복음을 전하게 하기 위해서이다. 성결교회는 불신자에게 구원의 은총을 전하고, 신자에게는 성결의 복음을 전할뿐 아니라, 더 나아가서 이것을 신학적 으로 연구하여 성결론이 다시금 신학의 중심주제가 되도록 해야 할 것이다.
여호와께 성결
여호와게 성결이란 용어가 성경에서 찾아보면 3구절로 소개됩니다.
세 구절은 모두 구약에서만 사용되었습니다.
출애굽기에서 3구절 그리고 스가랴서에서 1구절로 나타납니다.
여호와께 성결이란 용어가 처음 사용된 구절은 출애굽기 28:36입니다.
너는 또 정금으로 패를 만들어 인을 새기는 법으로 그 위에 새기되 「여호와께 성결」이라 하고.
그들이 또 정금으로 거룩한 패를 만들고 인을 새김 같이 그 위에 「여호와께 성결」이라 새기고.
그 날에는 말 방울에까지 여호와께 성결이라 기록될 것이라 여호와의 전에 모든 솥이 제단 앞 주발과 다름이 없을 것이니
'성결'이란 무엇인가?
'성결'이란 개념은 기독교 신앙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며, 이는 하나님에 대한 헌신과 도덕적 완전성을 추구하는 삶의 상태를 의미합니다.
성경과 다양한 신학자들의 해석에 따르면, 성결은 다음과 같은 특징들을 포함합니다:
- 거룩함: 성결은 하나님의 거룩함을 본받고자 하는 노력을 의미합니다. 이는 도덕적, 영적 순결을 유지하는 것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뜻에 따르는 삶을 살기 위해 자신의 삶을 구별하는 것을 포함합니다. "하나님께서 거룩하시니 너희도 거룩하라"는 성경 말씀(베드로전서 1:16)에서 기인합니다.
- 완전성: 성결은 도덕적, 영적 완전성을 추구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는 죄악을 멀리하고 하나님의 뜻에 맞는 삶을 살아감으로써 도달할 수 있습니다. 완전성은 결코 인간의 힘만으로 이뤄질 수 없는 것이며, 하나님의 은혜와 성령의 인도하심 아래 가능합니다.
- 헌신: 성결은 하나님께 완전히 헌신하는 삶을 추구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삶을 살아감으로써 나타납니다. 예수님께서 주신 '가장 큰 계명'인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마태복음 22:37-39)을 실천하는 것이며, 이는 성결한 삶의 중요한 요소입니다.
- 성령의 역사: 성결은 성령의 내주하심과 인도하심에 의해 이루어집니다. 성령께서 신자의 마음을 변화시키고, 성결한 삶을 살 수 있도록 도와주십니다. 성령의 열매(갈라디아서 5:22-23)를 맺으며, 이는 성결한 삶의 외적 증거가 됩니다.
- 성화와 지속적인 성장: 성결은 성화의 과정과 연관되어 있습니다. 성화는 한 번의 사건이 아니라, 신자가 평생을 걸쳐 지속적으로 하나님께 더 가까이 나아가고 더 거룩해지는 과정을 의미합니다. 성결은 이 과정에서 지속적으로 이루어지는 영적 성장을 포함합니다.
요한 웨슬리와 같은 신학자들은 성결을 강조하며, 이는 감리교 신학의 중요한 요소로 부각되었습니다. 웨슬리는 성결을 신자들이 믿음 속에서 계속적으로 성장하고 성령의 인도하심 속에서 더 깊은 영적 삶을 추구하는 과정으로 보았습니다.
요약하자면, 성결은 거룩함, 완전성, 헌신, 성령의 역사, 성화와 지속적인 성장을 포함하는 개념으로, 이는 신자들이 하나님과의 깊은 관계 속에서 살아가며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삶을 추구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성결한 삶의 모델(디모데전서 4:6~7)
경건에 이르도록 네 자신을 연단하라 육체의 연단은 약간의 유익이 있으나 경건은 범사에 유익하니 금생과 내생에 약속이 있느니라.
정진경 원로목사님은 성결한 삶을 살았던 분입니다.
많은 사람들에게 삶의 본을 보였고 참 깨끗한 삶을 사셨고 원칙 있는 삶을 보여주셨습니다.
신앙인의 삶은 성결의 삶이 목적이고 성결한 삶을 추구하는 삶이 목적입니다.
그 삶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가장 성숙한 삶입니다.
오늘 읽은 본문은 그 성결한 삶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딤전 4장6-7절에서 사도바울은 제자 디모데에게 성결한 삶을 살라고 요구하고 있습니다. “경건에 이르도록 네 자신을 연단하라, 육체의 연단은 약간의 유익이 있으나 경건은 범사에 유익하니 금생과 내생에 약속이 있느니라.” 오늘 이 시대에는 성결은 비 인기 단어입니다. 비인기 주제입니다. 사람들은 경건한 성결한 삶 보다는 재미를 추구하고 이익을 추구하고 화려한 행복을 추구합니다. 그래서 성결 추구자는 세상에서 뒤떨어진 사람같이 보이기도 합니다. 그렇지만 인생을 길게 보면 성결을 추구하는 사람들이 진정한 성공한 인생입니다. 진정으로 인생을 풍요롭게 하고 재미와 행복을 만들어가는 삶은 성결한 삶입니다. 성결한 삶을 말하려면 다음의 몇 가지를 먼저 생각할 것이 있습니다.
성결 - 연단의 열매
성결은 그냥 어느 날 기도 많이 한다고 교회를 오래 다녔다고 해서 자동적으로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성결의 삶은 연단이 필요하고 훈련이 필요합니다. 성결의 모델은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은 죄가 없으시고 성결한 삶을 사셨습니다. “내가 세상을 이기었으니 너희는 담대하라”(요16:33)고 하셨습니다. 성
결은 그냥 어느 날 주어지는 것 아닙니다. 성결이 주어지지까지는 연단과 훈련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예수님도 연단을 받으셨습니다. 요단강에서 세례를 받으시고 40일 금식을 하셨습니다. 그 금식은 단식입니다. 물조차도 마시지 않는 철두철미 단식입니다. 그 후에 성령에 이끌려 광야에 가서 무서운 시험을 받으셨습니다. 예수님은 그 시험 중에서도 하나님이 주신 사역을 충실하게 감당하셨습니다.
히브리서 4장15절을 보면 “모든 일에 우리와 똑같이 시험받으셨다”고 했습니다. 예수님도 연단을 받으시고 훈련을 받으셨습니다. 그래서 성결한 삶은 연단과 훈련의 산물인 것입니다. 사도바울은 디모데에게 그 연단을 받으라고 권고합니다. 그 말은 훈련을 받으라는 말입니다. 인격과 신앙과 경건은 어느 날 갑자기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고 훈련과 연단을 통해서 이루어집니다. 그 훈련 후에 비로소 성결이 만들어지는 것입니다.
원로목사님은 부드러움이 있었고 따뜻함이 있었던 분입니다. 그 요소들이 성결의 요소들입니다. 그 요소들은 그냥 어느 날 주어진 것이 아닙니다. 그 분도 일생 연단을 많이 받으셨습니다. 북한에서 피난의 길을 떠났습니다. 죽을 고비도 여러 차례 경험하였고 옥에도 갔습니다. 단돈 몇 푼 들고 공부하러 가족들을 놔두고 미국으로 갔습니다. 그것이 모두 훈련입니다. 그런 훈련이 없이 어떻게 큰 인물이 될 수 있겠습니까. 큰 인물들을 보면 다 그런 고난의 훈련이 있었습니다. 그것도 모자라 큰 인물들은 육신의 질병으로 연단을 추가하여 받은 분들이 대부분입니다. 그리고 비로소 큰 인물들이 되고 성결한 인생을 살았습니다.
다윗을 보십시오. 엄청난 훈련 코스를 다 마치고 비로소 다윗이 됩니다. 욥을 보십시오. 욥은 다윗보다 더 어려운 훈련 코스를 이수하고 마침내 성결인이 됩니다. 아브라함을 보십시오. 하나님께서 복을 주신다니까 곧 복을 주실 줄 믿고 고향을 떠납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약속하신 복은 아브라함의 생전에는 받지 못했습니다. 그가 죽은 후 500년 후에 이루어졌습니다. “네 자손이 하늘의 별처럼 땅의 모래처럼 많게 하겠다.” 그 약속은 아브라함 사후 500년 후에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끌고 광야에 나갔을 때 그때 숫자가 어른만 60만 명이었고 거기에 우양들을 이끌고 종들까지 이끌고 광야로 나아갔으니 그 모습이 마치 바다의 모래처럼 하늘의 별처럼 많게 보였을 것입니다. 그것이 아브라함 사후 500년 후에 이루어진 모습입니다. 또 요셉을 보십시오. 그도 엄청난 고된 훈련을 받고 마침내 애굽의 재상이 됩니다.
원로목사님도 그런 연단의 과정을 거쳐서 오늘 성결한 지도자로 살다가 인생을 마감하셨습니다. 성결은 연단과 훈련을 통해서 이루어집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제자 디모데에게 “경건을 위하여 연단을 받으라”고 강권합니다. 성결한 삶은 연단을 통해서 만들어집니다. 그래서 예수님도 고된 연단을 받으셨습니다.
성결 - 하나님 성품 닮아가는 것
연단을 받게 되면 무엇이나 빛이 나도록 되어 있습니다. 도자기에는 무광 도자기가 있고 광택 나는 도자기가 있습니다. 무광 도자기는 불가마니 속에 들어가지 않은 것입니다. 광택 나는 도자기는 불가마니 속에 들어가서 수천도의 열에 연단을 받고 나온 것입니다. 그래서 광택이 나는 것입니다. 연단이나 훈련은 그래서 중요한 것입니다. 그 훈련을 통해서 나의 미성숙한 모습과 거친 나의 성격이 다듬어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길들여지지 않은 나의 미성숙한 자세가 연단을 통해서 하나님의 성품을 닮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사람이 성숙해지고 광택이 나는 것입니다.
오늘도 성격과 행동과 처세와 말과 삶이 아주 어설프거나 모난 행동을 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것은 아직 미성숙해서 그렇습니다. 열매가 미성숙하면 풋 냄새가 나고 비린내가 나고 떫은 냄새가 나듯이 사람도 덜 익으면 그 모습에서 모난 행동이 나오고 말을 함부로 하고 상대방의 감정을 상하게 하고 공동체를 불화하게 만듭니다. 그러고도 자신은 그것을 모릅니다. 상대방이 자신의 말 한마디로 상처를 입은 것을 모릅니다. 덜 익어서 그렇습니다. 아주 무책임한 행동입니다. 그래서 연단이 필요한 것입니다. 연단은 사람으로 하여금 푹 익게 만듭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디모데에게 그것을 강조했습니다. “너는 말씀과 교훈으로 양육을 받으라, 경건에 이르도록 네 자신을 연단하라“(6-7)고.
예수님도 연단을 받으셨습니다. 신앙인은 예수 안에서 끊임없이 연단을 받고 훈련을 받아야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의 성품을 닮아가게 됩니다. 그 하나님의 성품을 닮아가는 것이 곧 성결의 생활입니다. 성결은 하나님의 성품을 닮아가는 삶입니다. 그렇게 하나님의 성결한 성품을 가진 사람은 보기만 해도 좋습니다. 푹 익었기 때문입니다. 그런 점에서 원로목사님은 그 많은 연단들을 통해서 하나님의 성품을 닮으셨습니다. 하나님의 성품은 따뜻함이고 부드러움이고 사랑이고 관용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죄에 대해 관심이 많으셨으나 용서에 대해서 더 많이 관심을 가지셨습니다. 왜냐하면 그 마음이 따뜻하였기 때문입니다. 그 마음에 사랑이 가득하였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심판의 하나님이시고 공의의 하나님이시고 무서운 책망의 하나님이지만 그런데 그 하나님은 그 보다 더 따뜻한 사랑의 하나님이셨습니다. 그래서 그 따뜻함에 공의와 법과 심판이 다 묻혀버린 것입니다. 그 마음을 닮는 생활이 성결한 삶입니다. 원로 목사님이 그렇게 따뜻한 마음과 너그러움과 풍성함과 온화함으로 살아오셨습니다. 그것이 성결한 모습입니다. 우리 신앙인의 삶의 목표가 이 성결한 삶입니다.
연단만 받으면 누구나 되는가
그런 것은 아닙니다. 사람마다 차원이 다 다를 수 있습니다. 모세는 하나님 곁에서 40일 동안 두 번씩이나 함께 있었습니다. 그가 산에서 내려올 때에는 얼굴에서 광채가 나서 수건으로 얼굴을 가리었을 정도였습니다. 그 정도면 성결이 완성된 것 아닙니까. 그런데 백성들이 우상을 만들어 놓고 절하며 타락한 모습을 볼 때 모세는 순간적인 혈기를 이기지 못하고 하나님이 만들어 주신 돌비를 내 던져 박살을 내 놓았습니다. 아무리 흥분해도 그렇지 그 돌이 무슨 돌인데 그것을 던져 박살을 내 놓습니까. 베드로도 도마도 유다도 주님과 함께 3년 동안이나 동행하며 훈련을 받았습니다. 그런데도 그들은 그런 실수를 범하게 되었습니다.
바울은 3층천을 다녀온 사람입니다. 그곳은 낙원입니다. 천국입니다. 사람들이 그의 손수건만 만져도 병이 나았을 정도입니다. 그 정도면 완성된 성결인이 아닙니까. 그런데도 그는 그의 모난 성격을 절제하지 못하고 사람들과 충돌이 잦았습니다. 그래서 고민도 갈등도 많이 하였습니다. 이것이 인간의 한계이기도 합니다. 문제는 기본의 마음 바탕입니다. 인격의 바탕입니다. 온화한 심적 바탕입니다.
빌레몬은 골로새 사람입니다. 그는 인격과 마음 바탕이 아주 온화한 사람이었다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그가 어느 날 에베소에 갔다가 바울의 전도 집회에 참석하여 회심을 하게 되고 그의 마음에 성령이 임하게 됩니다. 그 후 빌레몬이 성자가 되었고 바울은 목회하면서 어려울 때마다 그를 찾아가 그의 얼굴만 보아도 위로가 되었다고 빌레몬서에서 고백하였습니다. 그것이 마음의 인격에 성령의 함께 하심으로 주어지는 변화입니다. 원로목사님은 그런 점에서 오늘의 빌레몬이었습니다. 그분에게는 기본의 인격과 마음의 바탕이 있었습니다.
성결 삶의 열매
성결한 삶의 열매는 마음의 성결로 나타납니다. 성결은 마음에 따뜻함을 품게 합니다. 사람의 마음은 그래서 중요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은 거룩의 영이십니다. 그 거룩한 영이 내 안에 거주하시면 내 마음을 다스리시고 변화시키십니다. 하나님의 성품을 닮은 마음의 바탕을 이루십니다. 그래서 성결한 삶이 만들어지고 그 삶이 성령과의 교제를 이루게 하십니다. 그 성령과의 교제를 통해서 성결이 유지되고 완성되는 것입니다. 성결한 삶은 먼저 내 마음에 따뜻함과 온화함과 풍성함의 열매를 맺게 합니다. 하나님의 성품이 내 안에 조성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성결의 열매는 이렇게 마음에 맺힙니다.
그런데 이 열매가 없으면 평화가 깨지고 불화가 자리를 잡습니다. 그리고 마음에 불화가 자리를 잡으면 되는 일이 없습니다. 자기감정에 스스로가 휘말리게 되고 아주 무서운 혼란을 가져오게 됩니다.
여자 테니스 스타인 알프스 소녀라고 부르는 스위스의 마르틴 힝기스라는 선수는 테니스 신동이라 일컬어졌던 소녀이고 테니스 챔피언입니다. 1999년 윔블던 대회에서 세계 랭킹 1위에 오른 선수입니다. 그런데 이 선수가 어느 날 16세의 무명 선수에게 55분 만에 2:0으로 완패를 당했습니다. 그래서 그 경기가 윔블던 대회 사상 최악의 이변으로 기록되었습니다. 이 테니스 챔피언이 무명선수에게 왜 어이없이 참패를 당했는가 하면 전날 어머니와 크게 다투고 마음이 불화한 상태에서 경기에 임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거기에 또 그의 어머니가 경기 도중 자리에서 퇴장하였는데 그 모습을 목격한 이 챔피언이 순간적으로 감정이 엉망으로 뒤엉켜 버려서 정상적으로 경기를 하지 못한 것이 원인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이 챔피언은 결국 무명선수에게 무참하게 무너진 것입니다. 이 선수는 엄밀히 말하자면 무명선수에게 패한 것이 아니고 자기 자신의 기분에 패배한 것입니다. 마음은 이렇게 중요한 것입니다. 마음의 성결은 그래서 더 중요한 것입니다. 성결은 마음에 열매로 나타납니다.
두 번째 열매는 원만한 관계의 열매입니다. 이 성결한 삶은 삶에서 적을 만들지 않습니다. 누구나 다 친구가 됩니다. 원만한 관계를 이루고 조화력을 발휘하고 평화를 이룹니다. 산상수훈에서 주님은 “화평하게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이라”(마5:9)고 말씀했습니다.
화평은 아무나 이루지 못합니다. 그것도 은사입니다. 성결의 열매입니다. 오늘은 불화를 야기하는 사람이 훨씬 더 많은 세상입니다. 그리고 화평을 이루는 사람은 극소수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산상수훈에서 화평을 이루는 사람이 적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화평을 이루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게 될 것이라고 선포하셨습니다. 성결은 화평케 하는 은사를 발휘하게 합니다. 그래서 그가 가는 곳 마다 화평을 조성하고 이루고 조화를 형성합니다.
세 번째 열매는 성결한 언어의 열매입니다. 신앙적으로 성결하고 성숙해지면 아주 뚜렷하게 변화가 생기는데 그것이 말의 변화이고 언어의 성결입니다. 말은 사람의 마음을 그대로 표현하는 외적인 표현입니다. 얼굴을 보거나 말을 들어보면 그 사람의 마음상태를 알 수 있습니다. 마음에 평화가 없으면 말이 거칠어집니다. 마음에 불만이 있으면 말에 뼈가 생기고 감정이 들어가게 됩니다. 그래서 마음에 평화가 없으면 말에도 평화가 없습니다.
말은 참 중요한 수단입니다. 교회에서도 보면 말을 함부로 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안 해도 될 말을 해서 상대방의 마음을 상하게 하고 조금만 정화해서 하면 좋을 말을 다듬어지지 않은 채 그냥 해서 상대방의 마음을 불화하게 만드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더 큰 문제는 당사자 자신은 말을 함부로 하는 줄을 모른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상처는 상대방만 받게 됩니다. 왜 그러냐 하면 사람이 성숙하지 못해서 그렇고 성결하지 못해서 그렇습니다. 마음의 성결이나 언어의 성결은 모두 성결의 열매입니다.
성결은 인내와 자기절제의 산물입니다. 이 세상에서는 내가 하고 싶은 말을 다하고 살 수가 없습니다. 내 눈에 거스른 것을 다 말하다 보면 살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인내하고 자기를 절제하고 때로는 자기를 부정하기도 해야 남의 부족한 부분을 덮을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언어의 변화는 성결의 열매라고 보는 것입니다. 이런 일은 어떻게 가능한가 하면 어느 날 갑자기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고 훈련과 연단을 통해서 이루어집니다.
그래서 본문에서 사도바울은 제자 디모데에게 “너는 예수의 좋은 일꾼이 되어 믿음의 말씀과 네가 따르는 좋은 교훈으로 양육을 받으라, 그리고 경건에 이르도록 네 자신을 연단하라, 육체의 연단은 약간의 유익이 있으나 경건은 범사에 유익하니 금생과 내생에 약속이 있느니라”고 했습니다.
이 세상에는 그냥 되어지는 일이 한 가지도 없습니다. 산속의 하찮은 들풀도 꽃을 피우는데 그 들풀이 꽃을 피우기까지 상당한 훈련이 있었습니다. 겨울에 추위를 이겨내는 훈련이 있었고 봄에 녹아내리는 땅을 헤집고 새싹을 내는 아픔의 과정도 있었고 여름에는 모진 더위 속에서 인내하고 연단해서 마침내 남들이 알아주지도 않는 꽃을 피우는 것입니다. 그런 연단 없이 이 세상에는 한 가지도 열매를 맺거나 이루어지는 것이 없습니다. 그래서 성결한 삶이 우리 신앙인의 삶의 목표인데 그 성결도 그냥 주어지는 것이 아니고 연단을 통해서 만들어지는 것입니다.
원로목사님은 성결한 분이었습니다. 그분에게 말의 따뜻함이 있었습니다. 말에 칭찬이 가득했습니다. 그것은 그 분이 성결했다는 말입니다. 성결한 삶은 하나님을 닮아가는 과정의 삶입니다. 신앙인의 삶의 최종 목표는 성결해지는 일입니다.
그래서 본문에서 바울은 디모데에게 “경건에 이르도록 네 자신을 연단하라”고 강조하고 있습니다. 우리 모두 그 성결한 삶을 이루는 일에 힘써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우리도 성결한 삶을 흉내 내며 살아가야 합니다. 이 삶은 연단과 훈련을 통해서 주어집니다. 그것이 우리 주님이 오늘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삶의 덕목이고 우리들이 주님을 닮아가는 삶의 내용인 것입니다.
서론
다윗은 최선의 준비를 다하여 하나님의 법궤를 다윗 성으로 옮기려고 하였습니다.
하지만, 다윗의 정성과 수고에도 불구하고, 첫 번째 시도는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법궤를 하나님께서 가르쳐 주신
방법대로 옮기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소들이 뛰놀 때 웃사가 법궤를 붙들자 하나님께서 진노하시고 그를 치셨습니다.
선한
의도였지만, 거룩에 대한 무지가 비극을 낳은 것입니다. 하나님의 거룩함은 인간의 생각과 기준을 초월합니다.
본론
오늘 본문의 말씀은 만물의 마지막 날, 곧 ‘여호와의 날’에
임할 최종적인 심판과 회복을 보여줍니다.
열방이 예루살렘을 치러 모이지만, 여호와께서 친히 임하여 그들을 심판하십니다.
무서운
재앙이 대적들에게 임하고, 살아남은 자들은 만군의 여호와께 나아와 경배하게 됩니다.
오늘 본문은 그 심판의 구체적인 모습과, 심판
후에 도래할 완전한 성결의 나라, 모든 것이 여호와께 거룩하게 되는 새 시대의 영광스러운 비전을 선포하고 있습니다.
1. 만국의 예배, 초막절의 영광
하나님께서는 온 세상 만물이 하나님께 온전하고 거룩한 예배를 드리기를 원하고 계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20절 말씀입니다.
- 스가랴 14:20, 그 날에는 말 방울에까지 여호와께 성결이라 기록될 것이라 여호와의 전에 있는 모든 솥이 제단 앞 주발과 다름이 없을 것이니
여기서 ‘성결’로 번역된 히브리어 ‘코데쉬(קֹדֶשׁ)’는 ‘분리됨, 구별됨, 봉헌됨’을 의미합니다. 본래 이 문구는 대제사장의 관(冠)에만 새겨져, 가장 거룩한 지성소에 들어가는 그의 특별한 신분을 나타냈습니다(출애굽기 28:36).
그러나 마지막 날에는, 가장 평범하고 세속적인 물건으로 여겨졌던 ‘말 방울’에까지 이 거룩한 문구가 새겨집니다. 이는 성(聖)과 속(俗)의 구분이 사라지고, 모든 영역이 하나님의 거룩한 통치 아래에 있음을 상징합니다. 우리의 삶 전체가 하나님께 드려지는 예배가 되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이러한 사실을 신약의 언어로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베드로전서 2:9)라고 선포하며, 모든 성도가 거룩한 제사장임을 확인시켜 줍니다.
한 간증 모음집에서, 환경미화원이 거리를 청소하며 “이 거리의 주인은 하나님이시기에 깨끗하게 하는 것이 저의 예배입니다”라고 고백한 것을 본 기억이 있습니다. 크게 드러나지는 않지만, 그의 빗자루는 세상의 그 어떤 화려한 장식보다 거룩한, 주님께 드려진 ‘말 방울’과도 같았습니다.
2. 말 방울에서 솥까지, 완전한 성결
만국이 하나님 앞에 거룩한 예배를 드리기를 원하시는 하나님께서는, 이어서 일상이 거룩한 예배가 되어야 한다고 다시 말씀하셨습니다. 21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 스가랴 14:21, 예루살렘과 유다의 모든 솥이 만군의 여호와의 성물이 될 것인즉 제사 드리는 자가 와서 이 솥을 가져다가 그것으로 고기를 삶으리라 그 날에는 만군의 여호와의 전에 가나안 사람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라
성전에서 제물을 삶는 데 쓰이던 ‘솥’은 제단 앞의 거룩한 ‘주발’과 같이 성물이 될 것이라고 선포합니다. 일상의 도구가 가장 거룩한 예식의 기물처럼 구별된다는 것입니다. 또한, ‘가나안 사람’이 다시는 성전에 있지 않을 것이라 말씀합니다. 여기서 ‘가나안 사람(כְּנַעֲנִי, 카나아니)’은 문자적인 혈통을 넘어 ‘상인, 장사꾼’이라는 의미를 가집니다 (잠언 31:24). 이 선언은 하나님의 집에서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고 거룩함을 더럽히던 모든 세속적이고 불결한 요소가 완전히 제거될 것을 의미합니다.
예수님께서 성전에서 장사하는 자들을 내쫓으시며 “내 집은 기도하는 집이라” (마가복음 11:17) 선포하신 사건은 이 예언의 성취를 잘 보여 주는 선언입니다. 오늘날 우리의 마음과 교회 공동체 안에 하나님보다 자신의 유익과 욕심을 앞세우는 ‘가나안 사람’은 없습니까? 한 대형 교회가 재정 비리 문제로 사회적 지탄을 받았다는 뉴스는, 오늘날 교회 안에 여전히 몰아내야 할 가나안적 요소가 무엇인지를 아프게 돌아보게 합니다.
3. 십자가로 완성된 '여호와께 성결'
스가랴가 예언한 완전한 성결의 나라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완성됩니다. 말 방울과 솥과 같은 우리의 비천하고 죄된 본질이 어떻게 ‘여호와께 성결’이 될 수 있겠습니까? 그것은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이 우리를 덮을 때에만 가능합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친히 대제사장이 되셔서 자신의 몸을 단번에 제물로 드리심으로, 우리와 하나님 사이를 가로막던 죄의 휘장을 찢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성전에서 장사꾼들을 내쫓으심으로 부패한 성전을 정화하셨고, 십자가의 죽음으로 우리 마음의 성전에 있던 모든 가나안 사람, 즉 죄와 욕망을 몰아내셨습니다. 이제 누구든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는 새로운 피조물이 되어 거룩한 하나님의 성전이 됩니다.
사도 바울은 에베소에 있는 교회를 향해 이렇게 편지를 썼습니다.
- 에베소서 1:4,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리스도의 피가 우리를 거룩하게 하셨기에, 우리는 이제 우리의 삶 전부를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릴 수 있습니다. 오늘 하루, 우리가 매 시간마다 사용하는 스마트폰을 켤 때마다 ‘여호와께 성결’이라는 이 말씀을 떠올리며, 이 작은 기계를 통해 하나님의 거룩함을 드러내는 말과 생각과 소통을 하기로 결단합시다.
결론
여호와의 날은 악에 대한 준엄한 심판으로 시작되지만, 그 끝은 모든 것이 회복되고 거룩하게 되는 영광스러운 나라의 완성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그 심판과 회복의 정점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는 이미 ‘여호와께 성결’이라 칭함 받은 거룩한 백성입니다. 이제 우리의 일상이, 우리의 직업이, 우리의 모든 소유가 거룩한 제물이 되어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삶을 살아내야 할 것입니다.
함께 하는 기도
거룩하신 하나님, 죄로 더러워진 우리를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씻으사 ‘여호와께 성결’이라 인 쳐 주시니 감사합니다. 우리의 삶이 더 이상 세상의 것이 아니라 주님의 것임을 고백하오니, 우리의 생각과 말과 행실, 모든 영역이 주님 보시기에 거룩한 산 제사가 되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함께 할 기도
- 우리의 일상이 주님께 드려지는 예배가 되게 하소서.
- 마음의 성전에서 모든 세속적인 욕심을 몰아내게 하소서.
-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에 의지하여 거룩함을 지키게 하소서.
- 매일의 삶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하루를 시작하는 은혜를 주소서.
10월 14일(화) 스가랴 12-14장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여호와께 성결(14:20)
그 날에는 말 방울에까지 여호와께 성결이라 기록될 것이라 여호와의 전에 모든 솥이 제단 앞 주발과 다름이 없을 것이니.
On that day HOLY TO THE LORD will be inscribed on the bells of the horses, and the cooking pots in the LORD's house will be like the sacred bowls in front of the altar.
여호와께 성결(Holy to The LORD) 코데쉬 라아도나이
너는 또 정금으로 패를 만들어 인을 새기는 법으로 그 위에 새기되 「여호와께 성결」이라 하고.
그들이 또 정금으로 거룩한 패를 만들고 인을 새김 같이 그 위에 「여호와께 성결」이라 새기고.
그 날에는 말 방울에까지 여호와께 성결이라 기록될 것이라 여호와의 전에 모든 솥이 제단 앞 주발과 다름이 없을 것이니
여호와께 성결(HOLINESS TO THE LORD) 출애굽기 28:36-38
“여호와께 성결”이란 말씀에 유심하게 보라는 표시가 되어 있다.
즉
우리 말 성경에는 「여호와께 성결」이라 되어 있고, 영어 성경인 HOLY BIBLE에는 HOLINESS TO THE LORD라고
전부가 대 문자로 써져 있다.
여기에는 그 말씀의 중요성을 심히 강조한 것이니 그 이유는 대 문자로 써졌을 뿐 아니라, 여기에 HOLY라고 아니하고 HOLINESS라는 강조된 말로 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러한 특수성을 염두에 깊이 두고 영감의 거룩한 인도를 구하면서, 우리의 아직도 죽어 있는 육을 영생으로 살려야 할 귀한 구원 도리를 힘써 살펴 깨달아 알자.
1. 성결의 의미
성결은 신성하고 거룩하고 깨끗하다는 뜻이며 세상 생활에서는 잘 쓰여지지 않고 성경(출 19:10, 14, 22, 수 3:5,
7:13, 삼상 16:5, 대상15:12, 14, 23:13, 대하 29:5, 15, 19, 34, 30:17, 19, 24,
31:18, 35:5, 약 3:17, 4:8)과 기독교인의 생활에서만 많이 사용되고 있다.
성결의 뜻과 같은 뜻으로 쓰여지는 말들
중에는 청결(욥 8:6, 시 24:4, 사 4:4, 마 5:8, 딤전 1:5, 딤후 1:3),
정결(창 35:2, 레 24:7,
욥 16:17, 시 19:9, 잠 22:11, 고후 11:2),
깨끗(삼하 22:27, 시 18:26, 24:4, 대하 29:15, 16,
18, 31, 30:18, 19, 마23:26, 딤전3:9, 딤후2:20, 21, 히 9:14, 요1서 3:3),
순결(출 27:20, 레 24:2, 4, 6, 시 12:6, 19:8, 마 10:16) 등이 있다.
정금으로 된 패에 “여호와께 성결이라”고 새겨진 것이 대제사장 아론의 이마에 있는 관 전면에 있게 하라는 것은, 대제사장이 자신과 이스라엘 모든 백성을 위한 속죄물로 자신을 드려서(레16:6, 11, 17) 자신과 모두가 여호와 앞에 성결케 됨을 말하며, 여기의 대제사장 아론은 앞으로 오실 큰 대제사장 예수님의(히4:14) 그림자이며 그 후 예수님이 세상에 도성인신 하셔서 죄 없으신 분으로 모든 죄인을 위하여 속죄 제물로 드려져 여호와께 성결하게 바쳐지셨다.
우리의 영원한 구원을 위한 예수님의 여호와께 대한 대속적 성결의 섬김을 완전히 이루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평생에 오직 “여호와께 성결”로 살게 하기 위하심이다.
성경에는 “성결”이라는 말씀이 강조되었다. 주일날에 받는 7대복(성결의 복, 변화의 복, 왕권의 복, 부활 신앙의 복, 주님
상봉과 평강의 복, 성령 충만의 복, 계시 받음과 영안 열림의 복) 중의 첫째 복이 성결의 복이며, 또한 “오직 위로부터 난
지혜는 첫째 성결하고 다음에 화평하고■”(약3:17,18), 그리고 “■두 마음을 품은 자들아 마음을 성결케 하라”(약4:8)
등에 밝히 나타나 있다.
2. 성결해져야 될 면
1) 우리의 영혼
우리가 예수를 구주로 믿으면 죽었던 영혼이 즉시 영생으로 중생하는 동시에 또한 영혼은 즉시 완전하고 영원히 성결케 되어 다시는
불결 됨이 없다. 이 얼마나 복되고 감사하며 기뻐할까! 순전히 값 없이 거져 받았으니(롬3:24, 엡1:6).
2) 우리의 육
우리의 육은 마음과 육체로 구성되었으며(시73:26, 84:2) 아직도 영원한 사망에 있고(롬8:10, 고후4:10, 11),
또한 성결치 못하고 불결하다.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이라”(렘17:9). “■하물며 악을 짓기를 물 마심
같이 하는 가증하고 부패한 사람이겠느냐”(욥15:16)라고 말씀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오직 마음과 몸, 곧 행위를
하나님께 성결케 하기에 전심하여야 된다. 먼저 마음부터 그렇게 되기를 힘써야겠다. “무릇 지킬만한 것보다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잠4:23)고 말씀했다.
3. 하나님의 역사는 누구와 함께?
하나님은 무소 부재하시매 존재적으로는 누구와도 함께 계시나 역사하심 면에서는 그렇지 않고 성결한 자에게만 역사 하신다.
“■너희는 스스로 성결케 하라. 여호와께서 내일 너희 가운데 기사를 행하시리라”(수3:5)고 했다. 성결한 자들을 위하여서는
기적의 역사도 하시겠다는 언약이시며 실제로 그렇게 하셨다.(수3:15-17). 그러나 범죄 하여 불결한 자들에게는 여호와께서
그대로 버려 두어 전쟁에서 패전케 하셨다. 이스라엘 자손들이 바친 물건울 인하여 범죄 하였으니, 곧 아간이 바친 물건을 인하여
그들로 아이성 싸움에서 패전케 하셨다(수7:1-5). 그 후에 그들이 통한히 스스로 회개하여 성결케 함으로서 여호와께서 역사하사
아이성을 점령케 하셨다.(수7:6-8:).
4. 세상일에도 능력보다 도덕성이 앞이다.
우리 나라의 정치인들이나 정부의 고위직부터 하위직에까지의 형편에서 판단할 때, 많은 경우에 능력보다 도덕성을 더 중요시하는 일이
허다하다. 도덕성 저하의 내용은 주로 물질문제 그리고 남녀이성문제 등이다. 물질 면에서는 뇌물, 거짓 등이 주요 원인이다.
능력과 기능의 자격이 넉넉하나 위에 말한 그런 내용의 도덕성 상실 문제로서 그 직무의 중단이나 전인격을 매장 당하니 본인의 불행은
물론이며, 국가적으로도 크나큰 손실이다. 올 새해 지난달에 있었던 교육부 장관 겸 부총리의 임명된 이 모씨의 경우가 바로
그것이다. 그의 임명을 적극적 반대하는 단체나 인사들도 그의 능력 면에서는 다 인정하나 오직 도덕성 결여의 문제로 그렇게 되어
임명 3일도 못 되어 사임 당했다.
세상일도 이러한데 하물며 우리 기독인들이나 그 지도자들에게 있어서야 「여호와께 성결」이 얼마나 중요하고 큰 일일까! 성경에 말씀한 성결은 도덕성에 최고봉의 표시다.
5. 교회여, 불결에서 벗어나자
오늘날 땅 위의 교회들은 거의가 다 성경적 성결을 잃고 불결케 된지 이미 오래다. 「여화와께 성결」이라고 명하신 하나님께서
얼마나 탄식하실까! “주님이시여, 아무쪼록 이 땅의 교회들을 정화시켜 성결케 하여 주시옵소서. 우리도 에스라처럼 하나님 앞에
엎드려 울며 자복하여 그 불결로 인한 부패와 타락의 죄를 깊이 찾아 회계하고 다시 성결케 하여 주시옵기를 전심 기도하자. 교회가
어찌하다 이렇게 성결을 잃게 되었나! 깊이 살펴 철저히 찾아 버리자.
1) 물질 문제의 불결
오래 전부터 세상 사람들이 흔히 말하기를 교회도 돈을 많이 좋아한다고 하니, 왜 그럴까? 교회 안에서 교역자가 돈 있는 교인들을
대우하며, 믿음 중심으로 원칙대로 세워야 할 제직, 심지어 극히 중요한 직분인 장로까지도 그렇게 하는 일이 꽤 있기 때문이며, 그
외에도 여러 가지 물질 생활의 잘못이 많다.
2) 명예 영광심의 불결
교회의 신자들 중에 명예 영광심의 많음이 세상 사람들보다 다를 바 없다고 한다. 그렇다. 장로 되기 위하여 여러 가지 비신앙적 운동까지 하고도 안되면 큰 시험까지 받아 타락조차 한다.
3) 성적 시험과 범죄의 불결
교인들간에 많고 심지어 교역자들이나 다른 지도자들간에도 있어 많이 부끄럽다.
4) 교회의 치리 부재의 불결
성도들의 잘못이나 범죄에 대하여 교회에서 하여야 할 바른 치리가 이미 오래 전부터 거이 없게 되어 교회의 불결은 점점 가속화되고 있다.
5) 기타 여러 가지 불의로 인한 불결
거짓, 수근 수근, 교만, 외식, 위선, 회칠한, 평토장한 무덤, 원칙 무시, 부모 거역, 미움, 시기, 질투, 모함, 중상, 추악, 기타 모든 불의와 악독.
6. 교회와 성도여, 절대 성결하자
1) 믿음으로 깨끗하게(사도행전 15:9)
믿음으로 저희 마음을 깨끗이 하사 저희나 우리나 분간치 아니하셨느니라.
He made no distinction between us and them, for he purified their hearts by faith.
2) 소금으로 성결하라(출애굽기 30:35)
그것으로 향을 만들되 향 만드는 법대로 만들고 그것에 소금을 쳐서 성결하게 하고.
and make a fragrant blend of incense, the work of a perfumer. It is to be salted and pure and sacred.
3) 말씀으로 성결하라(삼하22:31, 시12:6, 18:30, 19:8, 105:19, 119:9,140, 잠15:26,
21:8, 22:11, 30:5, 요15:3, 고후2:17, 4:2, 엡5:26, 히1:3, 벧전2:2)
4) 성결은 안에서부터(마태복음 23:26)
소경된 바리새인아 너는 먼저 안을 깨끗이 하라 그리하면 겉도 깨끗하리라.
Blind Pharisee! First clean the inside of the cup and dish, and then the outside also will be clean.
5) 스스로 깨끗하게(이사야 1:16)
너희는 스스로 씻으며 스스로 깨끗케 하여 내 목전에서 너희 악업을 버리며 악행을 그치고.
wash and make yourselves clean. Take your evil deeds out of my sight! Stop doing wrong.
6) 예배드릴 때 성결하게(삼상16:5)
주일날엔 마음, 몸, 옷을 다 깨끗하게.
가로되 평강을 위함이니라 내가 여호와께 제사하러 왔으니 스스로 성결케 하고 와서 나와 함께 제사하자 하고 이새와 그 아들들을 성결케 하고 제사에 청하니라.
Samuel replied, "Yes, in peace; I have come to
sacrifice to the LORD. Consecrate yourselves and come to the sacrifice
with me." Then he consecrated Jesse and his sons and invited them to the
sacrifice.
7) 성경 공부 때 마음부터 성결하게(대상15:11-15)
8) 까마귀 싸우는 곳에 백로야 가지 마라 성난 까마귀 흰 빛을 새오나니 창파에 좋이 씻은 몸을 더럽힐까 하노라(鄭圃隱母堂). 이는 불결한 자들과 가까이 하지 말 라는 경고다(잠13:20).
9) 자신을 부단히 정리 정도하며 종신을 성결과 의의 생활로 하나님께 바치라(눅 1:75).
10) 말세 성도의 생활을 거룩하고 성결한 행실과 경건함으로 살아라(벧후3:12)
11) 성결하여 도덕의 완전자 되라(창세기 17:1, 마태복음 5:48).
성결의 결과는 성화다.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
Be perfect, therefore, as your heavenly Father is perfect.
12) 주 예수께서 재림하실 때에 “하늘에 있는 군대들이 희고 깨끗한 세마포를 입고 백마를 타고 그를 따르더라”(요한계시록 19:14)
- 여호와의 날: 마지막 때에 있을 심판의 날을 묘사합니다.
- 예루살렘의 공격과 방어: 이방 나라들이 예루살렘을 공격하지만, 남은 백성은 끊어지지 않고 하나님이 그들을 보호하십니다.
- 감람산의 갈라짐: 여호와의 발이 감람산에 서실 때 산이 동서로 갈라져 큰 골짜기를 만듭니다.
- 생명의 물: 예루살렘에서 흘러나오는 생수가 동해와 서해로 흘러갈 것입니다.
- 만왕이신 여호와: 여호와께서 천하 만국의 왕으로서 홀로 통치하시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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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와께 성결':
- 말 방울: 말 방울에도 '여호와께 성결'이 기록됩니다.
- 솥과 제단: 예루살렘에 있는 모든 솥이 제단 앞 주발과 다름없이 거룩하게 사용될 것입니다.
- 경배하는 자: 해마다 초막절을 지키기 위해 예루살렘에 올라오는 자들에게는 복이 있을 것입니다. 올라오지 않는 자에게는 비를 내리지 않으실 것입니다.
- 일상의 성결: '여호와께 성결'이라는 문구가 말 방울과 솥 같은 일상적인 물건에도 새겨진다는 것은, 마지막 날에는 모든 피조물이 하나님께 완전히 구별되어 거룩하게 될 것임을 의미합니다.
- 하나님만의 통치: 이는 하나님만이 홀로 통치하시며 모든 것이 그분의 주권 아래 있음을 상징합니다.
- 신앙의 척도: 하나님을 섬기는 자와 그렇지 않은 자를 구분하는 척도가 되며, 하나님을 경배하는 자는 구원받고 그렇지 않은 자는 심판을 받게 됩니다.
[9절] 여호와께서 천하의 왕이 되시리니 그 날에는 여호와께서 홀로 하나이실 것이요 그 이름이 홀로 하나이실 것이며.
아들 하나님의 왕 되심은 지금 부분적으로 드러나고 인정되지만, 장차 충만히, 완전히 드러나고 모든 사람들에게 인정을 받고야 말 것 입니다. 결국 그는 유일하신 지구 상의 왕이 되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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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브리어 원뜻성경(200)] 여호와께 성결(출애굽기 28장 36절)히브리어(구약성경) 2023. 8. 23. 09:09
קֹ֖דֶשׁ לַֽיהוָֽה
Holy to the Lord
여호와께 성결
(출애굽기 28장 36절) 이스라엘 모든 사람을 대표하는 대제사장. 그 제사장의 이마에는 "여호와께 성결"이라는 패를 붙여야 했습니다.
이 패가 있으므로 이스라엘이 죄로 인해 드리는 모든 성물을 하나님께서 기쁨으로 받으셨습니다.
1. 여호와께 성결
성소에 들어가는 제사장의 의복에 대한 설명이 이제 막바지에 다다르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일반적인 옷의 형태와 함께 제사장의 이마에 금으로 된 "패"를 붙이라고 하셨는데 거기에는 "여호와께 성결"이라는 문구를 기록해야 했습니다.
"여호와께 성결"은 히브리어로 코데쉬 라앋도나이-
2. 여호와께서 받으시게 되리라
제사장의 이마에 "여호와께 성결"이라는 문구가 항상 있음으로 인해 백성들이 드리는 성물을 하나님께 받으시게 되었습니다(출 28:38).
이 패가 아론의 이마에 있어서 그로 이스라엘 자손의 거룩하게 드리는 성물의 죄건을 담당하게 하라 그 패가 아론의 이마에 늘 있으므로 그 성물을 여호와께서 받으시게 되리라.
It will be on Aaron's forehead, and he will bear the guilt involved in the sacred gifts the Israelites consecrate, whatever their gifts may be. It will be on Aaron's forehead continually so that they will be acceptable to the LORD.
-
"하나님께서 받으시리라"로 해석된 문장은 히브리어로 לְרָצֹ֥ון לָהֶ֖ם לִפְנֵ֥י יְהוָֽה(발음: 르라촌 라헴 리프네 아도나이)인데
רָצוֹן(발음: 라촌)이 "기쁨"이라는 의미를 포함하는 것을 고려할 때 "여호와 앞에 기쁨이 되기 위해"로 해석될 수도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성물을 받으신다는 것은 그것을 기쁘게 여기신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단순히 받고 안 받고의 문제로 해석하면 하나님의 마음을 오해할 수도 있을 듯 합니다.
어떤 해석을 취하든 가장 중요한 것은 "여호와께 성결"이 하나님 앞에 기쁨이 된다는 것이며 이는 곧 이스라엘 모든 백성들이 하나님께 무언가를 드릴 때 가장 먼저 고려해야 할 것이 "거룩"이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내 마음에 "여호와께 성결"이라는 패가 붙여져 있지 않으면서 하나님께 무언가 드리기만 한다면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기뻐하지 않으실 것입니다.
재물의 일부를 하나님께 드리기만 하면 된다고 생각하고 자신의 마음과 태도를 하나님 앞에서 여전히 더러운 상태로 유지한다면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기뻐하지도, 받으시지도 않는다는 것이지요. 여호와께 제물을 드림에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은 마음의 거룩입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항상 "거룩"에 대해서 중요하게 생각할 것입니다.
외형적인 태도와 함께 마음의 거룩이 중요하다는 것을 누구도 부인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그렇게 알고 있어도 여전히 우리는 겉으로 보여지는 모습에 집중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주로 내가 하나님께 이것도 하고 있고 저것도 하고 있다는 식으로 우리 삶을 괜찮은 것으로 평가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 마음을 아십니다.
아무리 많은 것을 드려도 우리 마음이 "여호와께 성결"을 외치고 있지 않다면 하나님께서는 그 모든 것을 기뻐하시지 않을 것입니다.
성결과 거룩을 세세하게 정의하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다만 그 영역을 자신의 생각대로 한정하지 않고 말씀에 기록된 그대로 순종하려는 것이 요구됩니다.
하나님 앞에 거룩을 유지하기 쉽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거룩을 향해 계속 나아가려는 우리의 마음을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리라 믿습니다.
지치지 않고 주의 말씀에 온전히 순종하는 삶이 되길 기도합니다.
1. 거룩한. 2. 욥 6:10. 3. 레 2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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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서 1:4 성결의 영으로는 죽은 가운데서 부활하여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되셨으니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시니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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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고보서 4:8 하나님을 가까이 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가까이 하시리라 죄인들아 손을 깨끗이 하라 두 마음을 품은 자들아 마음을 성결케 하라 |
야고보서 3:17
오직 위로부터 난 지혜는 첫째 성결하고 다음에 화평하고 관용하고 양순하며 긍휼과 선한 열매가 가득하고 편벽과 거짓이 없나니
왜 말방울에 여호와게 성결이라고 하엿나
- 궁극적인 성결의 강조 : 말방울은 단순한 소음이 아니라, 그 소리까지도 하나님의 성결함을 상징하는 중요한 요소로 여겨졌습니다.
- 하나님의 완전한 통치 : 이 예언은 하나님께서 천하의 왕이 되시는 날, 예루살렘이 평안히 서고 모든 것이 하나님의 성물이 되는 완전한 통치의 날을 묘사합니다.
- 제사장의 의무와 연결 : 원래 제사장이 쓰는 패에 새겨진 '여호와께 성결'이라는 문구와 같은 의미로, 제사장이 하나님 앞에서 거룩하게 직무를 수행해야 함을 상기시키는 것과 같습니다.
- 일상생활 속 거룩함 : 말방울이 단순한 생활용품이 아니라 하나님의 소유물이자 성물로서 인식되므로, 사람들의 일상생활 속에서도 거룩함이 요구된다는 점을 보여줍니다.
말방울에까지 여호와께 성결이라
아들이신 하나님(神)이 인간의 육신을 입었다는 성육신의 사건이야말로 일상생활의 신학과 영성에 있어서 결정적인 가치를 지닐 뿐 아니라 기독교 복음과 교리에 있어 가장 중요한 잣대가 된다는 것을 이미 역설한 바 있습니다.우선,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인 동시에 사람들의 말을 기록한 책입니다.
하나님이 자신을 계시하여 보여주시기 위해 소위 영적인
매체(환상, 영적인 계시, 환영)만을 사용하기보다 한계가 많고 한심한 인간의 글이란 매체를 사용하신 이유가 무엇일까 생각해봅니다.
이것은 우리와 진정한 의사소통을 원하셨기 때문일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예수님의 양성교리처럼 성경이 신적인 책이라는
사실을 부정하거나 반대로 성경이 인간 저자의 작품이라는 사실을 부정하면 거기서부터 잘못된 해석, 잘못된 신학, 잘못된 영성,
잘못된 삶이 나오게 됩니다.
특히 성경이 인간 저자의 일상적 삶과 깊이 연관되어 있으며, 일상적인 주제를 수없이 다루고 있다는
사실(아가서를 생각해보시라)을 무시하고 무조건적으로 모든 것을 영적으로 해석하려는 태도(특히 알레고리적 해석을 유일한 해석의
원리로 생각하는-그렇다고 알레고리 자체를 부정할 수는 없지만)는 교회사 속에서도 그 해악을 보였고 오늘 우리 시대에도 경계하여야 할
태도라고 단언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성경을 통해 은혜를 누리는 것은 한편으로는 은혜를 주시는 성령 자신이 성경의 저자이시기 때문이며, 다른 편으로는 그것을 우리가 누릴 수 있도록 인간적인 일상의 언어로, 일상의 정황 속에서 우리에게 다가오기 때문입니다.
다음으로 성례를 생각해봅시다.
개신 교회는 두 가지 성례를 인정합니다.
그것은 신앙의 출발로서의 세례와 신앙의 지속으로서의 성찬입니다.
이
성례라는 일종의 드라마들을 통해 개인과 공동체가 큰 유익을, 큰 은혜를 누립니다.
그런데 이 성례를 명령하신 주님께서 이 성례를
소위 천상적인 소재와 방식으로가 아니라 가장 일상적인 소재와 가장 일상적인 방식으로 누리도록 하셨다는 것을 놓치면 이상한
방향으로 흐를 수 있습니다.
세례에 사용된 물은 무슨 거룩한 성수가 아니었고 그저 길가다가 물이 있으면 세례를 주는
데서-사도행전의 간다게의 내시에게 빌립이 세례를 주었듯이-보듯이 그냥 물이었습니다.
성찬에 사용된 빵과 포도주는 거룩하기 위해
금장을 두르거나 값비싼 보석을 박은 그릇이 아니라 일상적인 그릇에 담긴 일상적인 식사의 내용물이었습니다.
가장 일상적인 소재가 가장 거룩한 소재가 되도록 하셨던 것입니다.
어떤 일상적인 소재라도 가장 거룩한 소재가 될 수 있음에 대한 스가랴 14장 20절 “그날에는 말방울에까지 여호와께 성결이라 기록될 것이라. 여호와의 전에 모든 솥이 제단 앞 주발과 다름이 없을 것이니”라는 말씀이 생각나는 대목입니다.
주님은 가장 일상적인 소재를 가지고 우리가 신앙을 출발하고 그 신앙을 지속하는 성령의 은혜를 누리도록 하셨습니다.
가장 높으신 하나님의 아들이 가장 일상적인 삶의 자리로 오신 성육신의 신비. 가장 일상적인 도구를 사용하여 가장 거룩한 은혜를 누리게 하는 방편이 성(聖)경과 성(聖)례 속에 들어 있음을 발견합니다.
성결(聖潔)의 불
순결(純潔) / 순수할 순, 깨끗할 결
몸과 마음이 아주 깨끗함, 잡 것이 섞이지 않고 깨끗함
어떤 남편이 밤새도록 술을 퍼마시고 인사불성이 되어 집에 돌아와 구토를 하고 물건을 깨부수고 난리를 피웠습니다.
다음날 아침 정신이 돌아온 남편은 지난 밤 일이 어렴풋이 생각나 "아이쿠!!! 내가 어젯밤에 무슨짓을 한 거야! 난 이제 큰일났다.
난 죽었다."
슬금슬금 기어서 거실로 나오니 아내가 속풀이 해장국을 끓여놓고 콧노래를 부르며 남편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뜻밖의 풍경에 아이를 가만히 불러서 물어봅니다.
"너, 엄마 왜 저렇게 기분이 좋냐?"
"어젯밤 엄마가 술취한 아빠를 침대에 눕히고 옷을 벗기려고 하는데,
'이러시면 안돼요.. 난 결혼한 남자입니다...
나는 아내가 있는 몸입니다. 안돼요.' 하고 무심결에 하는
아빠 말을 듣고 엄마가 저러시는 거에요.
성결, 순결은 오직 한 대상만을 위해 나를 바치는 것입니다.
오직 하나님을 위해 나를 바치는 것을 '성결'이라 하고, 배우자만을 위해 내 몸을 바치는 것을 '순결'이라 합니다.
부부 사이에 어떤 일도 다 용서가 되지만 바람피우는 것은 용서가 안 되는 것은 '순결의 법'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모든 죄를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용서하시지만, 단 하나 '성결'하지 못한 사람은 아예 상종도 하지 않으십니다.
우리의 마음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성결케 되고, 예수의 피로 성결케 되며, 성령의 세례로 성결케 됩니다.
한 영혼을 성결케 하기 위해 성부와 성자와 성령이 총동원하여 역사합니다.
그렇게 '성결'은 중요합니다.
"우리를 구원하시되 우리의 행한 바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지 아니하고
오직 그의 긍휼하심을 따라 중생의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성결의 불)으로 하셨나니"(디도서 3:5)
우리를 구원하시되 우리의 행한바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지 아니하고 오직 그의 긍휼하심을 좇아 중생의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으로 하셨나니.
he saved us, not because of righteous things we had
done, but because of his mercy. He saved us through the washing of
rebirth and renewal by the Holy Spirit.
기독교는 성결의 종교입니다.
성령님께서 직접 성령의 불로 우리를 성결하게 하십니다.
성결한 사람은 이 세상 거짓과 혼합될 수 없습니다.
만약 예수 믿는다 하면서 이 세상 가치관과 기준을 따라 산다면 그것은 세상과 놀아나는 창녀이지 진짜 기독교인이 아닙니다.
10월 13일(월) 스가랴 9-11장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네 왕이 네게 임하나니(9:9)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나니 그는 공의로우며 구원을 베풀며 겸손하여서 나귀를 타나니 나귀의 작은 것 곧 나귀새끼니라.
See, your king comes to you, righteous and having salvation, gentle and riding on a donkey, on a colt, the foal of a donkey.
네 왕이 네게 임하리니(Your King comes to you)
4428. 왕( melek) מֶלֶךְ
- 어원 / 4427에서 유래
- 구약 성경 / 2548회 사용
* 4427. מָלַךְ
메시야로 오시는 왕의 특징을 세 가지로 설명할 수 있습니다.
첫째는 평화의 왕
나귀를 타고 오는 왕은 힘으로 백성을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겸손한 마음으로 백성을 섬기는 왕을 상징합니다.
둘째는 공의와 구원의 왕
이 왕은 공의롭고 구원을 베풀며, 억압받는 이들을 해방시킬 왕을 상징합니다.
셋째는 평화의 도래
이 왕의 통치로 인해 이스라엘의 전쟁 무기가 사라지고, 세상에 평화가 깃들 것이라고 예언합니다.
네 왕이 네게 임하나니(스가랴 9:9~17)
겸손한 왕의 도래
9시온의
딸아 크게 기뻐할지어다 예루살렘의 딸아 즐거이 부를지어다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시나니 그는 공의로우시며 구원을 베푸시며
겸손하여서 나귀를 타시나니 나귀의 작은 것 곧 나귀 새끼니라
10내가 에브라임의 병거와 예루살렘의 말을 끊겠고 전쟁하는 활도
끊으리니 그가 이방 사람에게 화평을 전할 것이요 그의 통치는 바다에서 바다까지 이르고 유브라데 강에서 땅 끝까지 이르리라
왕께 속한 백성의 영광
11또
너로 말할진대 네 언약의 피로 말미암아 내가 네 갇힌 자들을 물 없는 구덩이에서 놓았나니
12갇혀 있으나 소망을 품은 자들아
너희는 요새로 돌아올지니라 내가 오늘도 이르노라 내가 네게 갑절이나 갚을 것이라
13내가 유다를 당긴 활로 삼고 에브라임을 끼운
화살로 삼았으니 시온아 내가 네 자식들을 일으켜 헬라 자식들을 치게 하며 너를 용사의 칼과 같게 하리라
14여호와께서 그들 위에
나타나서 그들의 화살을 번개 같이 쏘아내실 것이며 주 여호와께서 나팔을 불게 하시며 남방 회오리바람을 타고 가실 것이라
15만군의
여호와께서 그들을 호위하시리니 그들이 원수를 삼키며 물맷돌을 밟을 것이며 그들이 피를 마시고 즐거이 부르기를 술취한 것 같이 할
것인즉 피가 가득한 동이와도 같고 피 묻은 제단 모퉁이와도 같을 것이라
16이 날에 그들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들을 자기 백성의
양 떼 같이 구원하시리니 그들이 왕관의 보석 같이 여호와의 땅에 빛나리로다 17그의 형통함과 그의 아름다움이 어찌 그리 큰지
곡식은 청년을, 새 포도주는 처녀를 강건하게 하리라
묵상하기
1. 하나님은 시온의 딸들아 기뻐하라고 말씀한다. 시온의 딸에게 기뻐하라고 말씀하신 이유는 무엇인가? (9~10절)
2. 하나님은 메시아가 오시면 자신의 백성들에게 어떤 일이 일어날지 구체적으로 보여주신다. 그 내용은 무엇인가? (11~17절)
3. 겸손히 나귀를 타고 오시는 왕의 모습에 무엇을 느끼는가?
4. 왕이신 예수님은 이 땅에 오셔서 겸손과 섬김의 삶을 사셨다. 당신은 예수님의 모습처럼 겸손과 섬김의 삶을 사는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는가? 오늘 당신이 가져야 할 겸손과 섬김의 모습은 무엇인가?
길잡이
오늘 본문은 메시아의 도래와 그로 인한 구원과 승리에 대한 예언의 말씀이다.
· 겸손의 왕, 평화의 왕(9~10절)
시온의 딸(예루살렘 백성)에게 왕이 오시니 크게 기뻐하고 즐거이 노래하라고 선포한다. 여기서 말하는 왕은 세상을 정복하고 군림하는 왕이 아니라, 공의로우시며 구원을 베푸시는 겸손한 왕이다. 고대 근동에서 왕이 백마를 타는 것은 전쟁과 승리를 상징했다. 하지만 본문 속의 왕은 어린 나귀 새끼를 타고 오신다. 이는 그가 겸손하며, 힘과 폭력이 아닌 평화와 정의로 통치할 분임을 보여준다. 이 예언은 훗날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 나귀를 타심으로 그대로 성취되었다(마 21:1-9). 이 왕은 전쟁의 상징인 병거와 말, 활을 끊고 이방 나라에 화평을 전하며, 그의 통치는 세상 끝까지 미치게 된다. 이는 곧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한 온 인류의 화해와 평화의 복음을 예표한다.
· 구원 받은 백성의 영광(11~17절)
메시아가 오시면 하나님의 백성에게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를 구체적으로 보여준다.
물 없는 구덩이는 고통과 절망, 죽음의 상황을 상징한다. 당시 바벨론 포로 생활로 고통받던 이스라엘 백성의 형편을 나타내는 동시에, 궁극적으로는 죄와 사망에 갇혀 절망에 빠진 모든 인류의 상태를 의미한다. 하나님은 언약의 피로 말미암아 이들을 구원하실 것을 약속하신다. 이는 훗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보혈로 우리가 죄에서 해방되는 구원의 사건을 가리킨다.
하나님은 유다를 활로, 에브라임을 화살로 삼아 원수들을 치겠다고 말씀하신다. 이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원수들을 물리치고 승리하게 될 것을 보여주는 비유적인 표현이다. 이 전쟁은 인간의 힘이 아닌, 하나님이 직접 나타나셔서 싸우시는 영적인 전쟁이며, 그 결과 백성들은 양 떼처럼 안전하게 보호받고 왕관의 보석처럼 빛나는 존재가 될 것이다.
마지막 구절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축복의 풍성함을 노래한다. 곡식과 새 포도주로 소년과 처녀가 강건하게 된다는 것은 전쟁이 그치고 평화가 임하여 풍요로운 삶을 누리게 될 것을 의미한다.
왕이신 예수님은 이 땅에 오셔서 겸손과 섬김의 삶을 사셨다. 당신은 예수님의 모습처럼 겸손과 섬김의 삶을 사는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는가? 오늘 당신이 가져야 할 겸손과 섬김의 모습은 무엇인가?
기도
이 땅에 겸손의 왕으로 오신 예수님을 따라 겸손과 섬김의 삶을 살게 하소서.
삶속으로
테레사 수녀는 알바니아 태생으로, 젊은 시절 인도의 로레토 수녀회에서 교사로 사역했다.
하지만 어느 날, 그녀는 캘커타 거리에서 죽어가는 사람들, 버려진 아이들을 보며 깊은 충격을 받았다.
그녀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거리에서 죽어가는 사람 안에 예수님을 보았습니다. 그들을 섬기는 것이 곧 예수님을 섬기는 것이었습니다.”
그때부터 그녀는 모든 것을 내려놓고, 캘커타의 거리로 나아가 고통받는 사람들을 돌보는 삶을 시작했다.
누가 주목해 주지 않아도, 인정받지 못해도, 그녀는 작은 일들을 위대한 사랑으로 감당했다.
한 번은 한 기자가 그녀에게 물었다.
“수녀님이 하시는 일이 너무 작고, 너무도 미미하게 보입니다. 정말 세상이 바뀔까요?”
그녀는 이렇게 대답했다.
“우리는 모두 작은 물방울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수많은 물방울이 모이면 큰 강이 되고, 큰 강은 바다를 이룹니다. 나는 위대한 일을 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다만 작은 일을 큰 사랑으로 감당할 뿐입니다.”
그녀는 가난한 자의 벗이 되었고, 수많은 자원봉사자와 공동체가 그녀를 따르게 되었으며, 마침내 1979년 노벨 평화상을 수상하게 되었다.
하지만 그 순간에도 그녀는 고개를 숙이며 이렇게 말했다.
“이 상은 하나님께 돌려야 합니다. 나는 다만 예수님이 하신 일을 조금 흉내 낸 것뿐입니다.”
진정한 위대함은 대단한 무엇인가를 행함이 아니라 사랑에 있음을 기억하고, 예수님이 걸어가신 사랑과 섬김의 길을 따라가길 소망해 본다.
- 평화의 왕: 나귀를 타고 오는 왕은 힘으로 백성을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겸손한 마음으로 백성을 섬기는 왕을 상징합니다.
- 공의와 구원: 이 왕은 공의롭고 구원을 베풀며, 억압받는 이들을 해방시킬 것입니다.
- 평화의 도래: 이 왕의 통치로 인해 이스라엘의 전쟁 무기가 사라지고, 세상에 평화가 깃들 것이라고 예언합니다
본장에는 이스라엘을 괴롭힌 이방 민족들에 대한 심판과 긍휼, 메시아 예언, 하나님 백성들의 승리가 나타나 있습니다.
지명들을 세 그룹으로 나누면 다음으로 분류된다고 합니다 : (참조: http://www.skhong.org/zechariah/zechariah_09t.htm)
- 수리아 지역 (하드락, 다메섹, 하맛)
- 베니게 지역 (두로, 시돈)
- 블레셋 지역 (아스글론, 가사, 에그론, 아스돗)
여호와의 말씀의 경고가 하드락과 다메섹과 하맛에 임합니다. 심판의 도구로 쓰임받는다는 것을 모른 채 음금을 자랑하고 지혜를 자랑하며 교만을 부리던 두로와 시돈, 도 마찬가지입니다.
스가랴가 하나님의 말씀을 받고, 메시아의 통치와 그의 왕국에 대하여 입을 열어 “시온의 딸아 크게 기뻐하라, 예루살렘의 딸아 즐거이 노래하라”하면 메시야의 위대한 구속의 행진을 증거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공의로우시며, 구원을 베푸시며, 겸손히 아주 작은 나귀 새끼를 타고 예루살렘에 임하셨다”고 증거하였습니다.
스가랴가 그리는 메시아는 다윗 집안에서 나올 메시야의 모습과 이사야가 묘사한 고난 받는 하나님의 종의 모습(사52:13-53:12)이 한데 어우러진 평화(שָׁלוֹם)의 왕입니다. 그는 공의(צַדִּיק)로 온 세상을 통치합니다.
나귀는 사사시대에 높은 사람들이 타는 짐승입니다(삿5:10; 삿12:14). 그러나 왕국들의 임금들은 말을 탔습니다. 세상의 왕들은 높은 말에 올라타고 무지막지한 방식으로 통치하여 백성들을 억압으로 숨도 못 쉬게 합니다. 하나님의 천사들도 심판을 위해 세상에 나갈 때는 말을 타고 나갑니다(슥1:11).
왕국시대의 이스라엘에서 나귀는 보통 사람들이 타거나 짐을 실어 나르는 짐승입니다(왕상 10:28; 렘17:25; 잠21:31). 나귀는 싸움과 전쟁에 적절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메시야에 대한 기대를 표현하는 데에는 나귀만큼 적절한 타는 짐승은 없습니다.
나귀는 왕이 겸손하고 평화를 사랑한다는 것을 상징할 뿐만 아니라 오실 왕이 메시야의 위엄으로 오실 것임을 아주 잘 증거 합니다(창49:10-11). 나귀를 타고 오신 메시야는 병거와 말과, 활을 제거하고 화평을 선포하는 말씀으로 통치하실 것입니다.(사30:15-16; 31:1; 호1:7; 2:18; 14:3; 미5:10).
그는 말씀만으로도 넉넉히 평화를 이루어 보존시키고(사9:6; 11:4; 미5:5 참조), 이스라엘뿐만 아니라 온 땅의 모든 백성들에게도 그렇게 하실 것입니다(사2:4; 11:10; 42:1-4, 시72:7). 이렇게 메시아는 무력으로 대적을 잔혹하게 다루어 평화를 가져오는 왕들과 달리 화평을 전파함으로 유다와 온 땅을 다스릴 것입니다.
이에 시온 산에 거주하는 주민들이 모두 기뻐하며 소리쳐야 하는 것입니다. 진짜 왕이 오셨기 때문입니다. 힘, 군사력, 기타의 능력을 준마를 타고 행사하는 자가 아니라 오직 겸손하여 초라한 나귀에 몸을 얹고 입성하시는 진짜 왕을 즐거이 노래하며 반겨야 하는 것입니다(시33:16-19).
스가랴의 예언은 예수님에게서 성취되었습니다(마21:5; 요12:15). 예수님은 세상 사람들의 기대와 환호에 어울리는 모습이 아니라 그들의 그릇된 비전에 도전하고 환상을 깨는 모습으로 오셨습니다. 지금도 그렇게 우리 가운데 와 계실 것입니다(렘23:5-6).
겸손하고 조용하지만 측량 못할 권능으로 통치하시는 주님의 방식이 참된 공의입니다.(사9:6-7; 11:4-5; 32:1-2; 시72:3, 슥8:8) 그는 겸손(가난하다)하셔서 가난하고 낮아진 하나님 백성에 어울리셨습니다. 곤고하고 가난한 백성들이 그에게 보호를 받습니다(습3:12).
우리도 스가랴 선지자가 선포한 왕이 예수 그리스도이심을 확신합니다. 복음서에서는(마21:4-5; 요12:14-15) 슥9:9-10의 예언이 특히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으로 이루어졌다고 봅니다. 예수께서 세상에 주시는 평화는 그의 이름으로 불리는 전도자들에 의해 지금도 성취되고 있습니다(마28:18-20).
우리는 겸손(עָנִי)한 왕을 전하는 종들입니다. 그의 영이 인도하심을 따라 그가 베푸시는 공의(צֶדֶק)와 구원(יָשַׁע)을 선포하는 전도자들입니다. 우리의 증거로 말미암아 화평(שָׁלוֹם)으로 통치하시는 그의 나라가 확장될 것입니다.
기뻐할지어다(1523)
맴돌다
기뻐 날뛰다
떨다
-
발음 [ gîyl ]
- 구약 성경
- 45회 사용
-
1.원형 맴돌다
-
a.원형 기뻐 날뛰다, 기뻐하다, 욥3:22, 시9:15(14), 13:6, 21:2(1), 31:8, 149:2,사29:19, 41:16, 49:13, 65:18, 욜2:23
-
b.원형 떨다, 전율하다, 시2:11, 호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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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 정보
- 문법설명
-
미완료형 יָנִיל
연관 단어
-
문법설명미완료형 יָנִיל관련 성경☞즐거워하다(사65:19, 대상16:31, 슥10:7), 기뻐하다(사49:13, 시9:14, 호10:5), 기쁘게 하다(잠23:24).
공의로우며(6662)
의로운
의로움을 지닌 사람.
출9:27
-
발음 [ tsaddîyq ]
- 어원
- 6663에서 유래
- 구약 성경
- 206회 사용
-
1.형용사 의로운, 공정한. [왕이나 재판관에게 사용] 삼하23:3, [의로운 재판장이신 하나님을 가리킴] 신32:4, 욥34:17, 시11:7, 119:137, 렘12:1, [처벌하고 징계하는 데] 대하12:6, 스9:15, 애1:18, 단9:14, [보상해 주는 데] 시112:6,129:4, 145:17, 사24:16, [약속을 성취시켜 주는 데] 느9:8, 사45:21
-
2.형용사 의로움을 지닌 사람.
-
a.형용사 [법적인 의로움에 있어서] 출9:27,23:8, 잠18: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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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형용사 옳고 참된 것을 말하는 사람, [부사로] 옳게, 참되게, 사4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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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형용사 개인으로서 다른 사람에게 공정하게 해주는 사람, 잠29:7, 하나님의 법도를 순종하는 자, 창6:9, 욥12:4, 시5:13(12).
연관 단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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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성경☞의인(창6:9, 시1:5, 사3:10), 의로움(창7:1),정의(창18:25, 시37:30, 합1:4), 승리자(사49:24). [형] 의로운(창20:4, 왕상8:32, 시116:5),공의로운(신4:8, 느9:33, 슥9:9), 옳은(잠24:24, 사41:26), 바른(잠18:17).
구원을 베풀며(3467)
넓다
히필형 הוֹשִׁיעַ. 미완료형 יוֹשִׁיעַ
해방하다
-
발음 [ yâshaʽ ]
- 구약 성경
- 205회 사용
바벨론 유수(幽囚) : 그윽할 유, 가둘 수
- - 부수 囗(큰 입구 몸, 3획). 부수 幺
(작을요, 3획),
잡아 가둠 - 구금(拘禁) : 잡을 구, 금할 금
구류(句留) : 글귀 구, 머무를 유
시대의 소망 / 네 왕이 임하나니
“시온의 딸아 크게 기뻐할지어다 예루살렘의 딸아 즐거이 부를지어다 네 왕이 네게 임하나니 그는 공의로우며 구원을 베풀며 겸손하여서 나귀를 타나니 나귀의 작은 것 곧 나귀 새끼니라”(슥 9:9).DA 569.1
그리스도께서 탄생하시기 오백 년 전에 선지자 스가랴는 이스라엘의 왕의 오심을 이와 같이 예언하였다. 이 예언은 이제 성취될 것이었다. 아주 오랫동안 왕의 영광을 거절해 오셨던 분께서 이제 다윗의 보좌의 약속된 후계자로서 예루살렘에 임하신다. DA 569.2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승리의 입성을 하신 것은 주일 중 첫째 날이었다. 그분을 보려고 베다니에 모였던 군중들이 이제 그분이 받으실 환영을 보려는 열망으로 그분과 동행하였다. 많은 백성들이 유월절을 지키기 위하여 도성으로 가는 도중에 있었는데 이들도 예수님을 수행하고 있던 군중들과 합세하였다. 자연계도 모두 기뻐하는 것처럼 보였다. 나무들은 신록으로 물들어 있었으며 그 꽃들은 대기에 은은한 향기를 내뿜고 있었다. 새로운 생명과 기쁨이 백성들에게 활력을 주었다. 새 왕국에 대한 희망이 다시 솟아나고 있었다. DA 569.3
예루살렘에 타고 갈 목적으로 예수께서는 두 제자를 보내어 당신께로 나귀와 나귀 새끼를 끌어오라고 하셨다. 구주께서는 태어나실 때, 다른 사람들의 환대에 의존하셨다. 그분이 누우셨던 구유는 빌린 안식처였다. 수많은 언덕 위의 가축들이 다 그분의 것이지만 이제 그분께서는 왕으로서 예루살렘에 들어가실 때에 타실 짐승을 다른 사람의 친절에 의존하셨다. 그러나 당신의 제자들을 이 심부름을 위하여 보내면서 주신 상세한 지시 가운데서까지도 그분의 신성이 다시 드러났다. 그분이 예언하신 대로 “주가 쓰시겠다”는 간청이 곧 수락되었다. 예수께서는 사람이 타본 일이 없는 나귀 새끼를 쓰기로 결정하셨다. 제자들은 기뻐 열광하며 저희 옷을 짐승 위에 펴고 주님을 그 위에 앉혔다. 지금까지 예수께서는 언제나 도보로 여행하셨다. 그러므로 그분께서 지금 짐승을 타고 가기로 선택하시자 제자들은 처음에는 놀랐다. 그러나 그분께서 도성에 들어가서 친히 왕임을 선언하고 왕권을 주장하시리라는 즐거운 생각에 그들의 마음은 희망으로 빛났다. 심부름을 가면서 그들은 저희의 열렬한 기대를 예수님의 친구들에게 전달하였으며 따라서 흥분은 원근에 널리 퍼졌고 백성들의 기대는 최고조에 달했다.DA 569.4
그리스도께서는 왕의 입성에 관한 유대인의 풍습을 따르고 계셨다. 그분이 타신 짐승은 이스라엘 왕들이 탔던 것으로 메시야가 이와 같은 방법으로 당신의 나라에 임하시리라고 예언되었다. 그분께서 나귀 새끼를 타시자마자 승리의 함성이 하늘을 찌르는 듯하였다. 군중들은 그분을 저희 왕 메시야로서 환호하였다. 예수께서는 지금, 전에는 결코 허락하신 적이 없었던 존경을 받으셨다. 제자들은 이것을 그분이 보좌에 오르시는 것을 봄으로써 그들의 즐거운 희망은 실현될 것이라는 증거로 받아들였다. 군중들은 해방될 시간이 이르렀다고 확신하였다. 그들은 로마의 군대가 예루살렘으로부터 쫓겨 가고 이스라엘은 다시 한 번 독립 국가가 되는 것을 상상하였다. 모든 사람들은 행복과 흥분에 도취되었고 서로 다투어서 그분께 충성을 바쳤다. 그들은 화려한 행렬과 웅장함으로 장식할 수는 없었지만 행복한 마음으로 그분께 경배하였다. 그들은 값진 선물을 그분께 선사할 수는 없었지만 그분의 가시는 길에 저희 겉옷을 융단처럼 펴놓았고 또한 잎이 무성한 감람나무와 종려나무 가지를 큰길에 깔아 놓았다. 그들은 왕기(王旗)를 가지고 승리의 행렬을 인도할 수는 없었지만 자연계의 승리의 상징인 쭉쭉 뻗은 종려나무 가지를 꺾어 높이 흔들면서 큰 환호성과 호산나를 외쳤다. DA 570.1
그들이 행진하자 예수께서 오신다는 소식을 듣고 행렬에 참가하려고 달려 나온 자들로 말미암아 군중은 계속 불어났다. 구경꾼들은 계속적으로 군중과 섞이면서 이분이 누구시냐, 이 소동은 모두 무엇을 의미하느냐고 물었다. 그들은 모두 예수님에 대하여 들었고 그분이 예루살렘에 가시기를 기대했다. 그러나 그들은 이분이 지금까지 당신을 보좌에 앉히려는 모든 노력을 좌절시켰음을 알고 있었다. 그러므로 이분이 바로 그분임을 알자 그들은 매우 놀랐다. 당신의 나라는 이 세상 나라가 아니라고 선언하셨던 분에게 어떻게 해서 이런 변화가 일어났는지 그들은 의아해 하였다. DA 570.2
저희의 질문들은 승리의 함성으로 묵살되었다. 이 환성은 열광적인 군중으로 말미암아 반복되었다. 그것은 백성들에 의해 멀리 전달되었으며 주위의 산과 골짜기들로부터 메아리쳐 울려 왔다. 이제 예루살렘에서 온 무리들이 그 행렬과 합류하였다. 유월절을 지키려고 모인 군중 가운데 수천 명의 사람들이 예수님을 환영하려고 나왔다. 그들은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고 성가를 부르면서 그분을 환영하였다. 제사장들이 성전에서 저녁 제사를 위한 나팔을 불었지만 거기에 반응하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그리하여 관원들은 우려하면서 서로 “온 세상이 저를 좇는도다”라고 말하였다.DA 571.1
예수께서는 당신의 지상 생애에서 이전에 결코 이런 시위 행렬을 허락하신 적이 없었다. 그분은 그 결과를 훤히 내다보셨다. 이것은 그분을 십자가로 몰고 갈 것이었다. 그러나 이와 같이 자신을 구속주로서 공공연히 드러내는 것이 그분의 목적이었다. 그분은 타락한 세상에 대한 당신의 사명의 최후를 장식할 그 희생에 주의를 불러일으키기를 열망하셨다. 백성들이 유월절을 지키려고 예루살렘에 모여들고 있는 동안 원형적(原形的)인 양이신 그분은 자원하여 자신을 제물로 구별하셨다. 이후 모든 시대를 통하여 그분의 교회는 세상 죄를 위한 그분의 죽으심을 깊은 사색과 연구의 제목으로 삼아야 할 것이었다. 그것과 관련된 모든 사실은 의심의 여지없이 실증되어야 한다. 그리하여 모든 백성들의 눈이 그분을 주목하고 그분의 큰 희생에 앞서 일어난 사건들을 통하여 희생 그 자체를 확실히 볼 수 있게 해야 하였다. 그분이 예루살렘에 입성할 때에 수행하던 그런 시위 행렬이 있은 후 모든 사람들의 시선은 최후의 장면으로 향하시는 그분의 급박한 행진을 보게 될 것이었다. DA 571.2
승리의 입성과 관계된 사건들은 각 사람의 화제가 될 것이며 모든 사람의 마음에 예수님을 소개할 것이었다. 그분이 십자가에 못 박히신 후에도 많은 사람들은 이러한 사건들을 그분의 고난과 죽으심에 관련시켜 회상하게 될 것이었다. 그들은 예언을 연구하고 예수께서 메시야이심을 확신하게 될 것이었다. 그리하여 모든 나라에서 신앙에 귀의하는 개심자들이 증가될 것이었다. DA 571.3
구주께서는 당신의 지상 생애 중 이 한 번의 개선 장면에서 하늘 천사들의 호위를 받으며 하나님의 나팔로 선포되는 가운데 나타나실 수도 있으셨다. 그러나 그러한 시위 행렬은 그분의 사명의 목적과 그분의 생애를 주관했던 법칙에 배치되었을 것이다. 그분은 당신이 받아들이셨던 비천한 운명에 충실하셨다. 세상 사람들의 생명을 구하기 위하여 당신의 생명을 바칠 때까지 그분은 인류의 짐을 지셔야 하였다. DA 571.4
이 기쁨의 장면이 저희 주님의 고통과 죽음의 서곡임을 알았다면 제자들의 생애 중 최고의 날로 보였던 이 날은 침울한 구름이 드리운 그늘진 날이 되었을 것이다. 예수께서는 당신이 받으실 확실한 희생을 그들에게 여러 번 반복하여 말씀하셨지만 현재의 즐거운 개가 속에서 그들은 그분의 슬픔에 찬 말씀을 잊어버리고 다윗의 보좌에 좌정하여 이루실 그분의 번영된 통치를 내다보았다. DA 571.5
행렬에 새로 가담하는 자들이 계속되었으며 거의 예외 없이 거기에 가담한 모든 사람들은 그 상황에 고무되어 언덕마다 골짜기마다 반복해서 메아리치는 “호산나”를 드높이는 데 한몫을 하였다.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라고 부르짖는 환호성은 계속되었다.DA 572.1
세상은 일찍이 그와 같은 승리의 행렬을 본 일이 없었다. 그것은 세상의 유명한 정복자들의 행렬과 같지 않았다. 왕다운 용맹의 전리품인 신음하는 포로들의 대열도 거기에 없었다. 그러나 구주의 주위에는 죄 많은 인류를 위하여 그분께서 사랑으로 행한 수고의 영광스러운 전리품들이 있었다. 그 곳에는 예수께서 사단의 권세로부터 건져 주심으로 그 구원을 감사하여 하나님을 찬양하는 포로들이 있었다. 그분이 눈을 뜨게 한 소경이 길을 인도하고 있었다. 그분이 혀를 풀어 주신 벙어리가 가장 큰 소리로 “호산나”를 외쳤다. 그분이 고쳐 주신 절름발이들이 기쁨으로 약동하고 제일 적극적으로 종려나무 가지를 꺾어 구주 앞에서 흔들었다. 과부와 고아들은 그들에게 베푸신 그분의 자비의 행위로 인하여 예수님의 이름을 높이고 있었다. 깨끗함을 받은 문둥병자들이 그들의 깨끗한 옷을 그분의 길에 펴고 그분을 영광의 왕으로 환영하였다. 무리 중에는 그분의 음성이 죽음의 잠에서 깨워낸 자들도 있었다. 그의 몸이 무덤에서 썩고 있었던 나사로는 지금 건장한 남자의 활력으로 기뻐하며 구주께서 타신 짐승을 몰고 있었다. DA 572.2
많은 바리새인들은 이 장면을 보고 질투와 악의에 불타올라 민중들의 감정의 흐름을 돌리려고 애썼다. 그들이 지닌 모든 권력을 행사하여 백성을 침묵시키려고 하였으나 그들의 간청과 위협은 열심을 더욱 증가시킬 뿐이었다. 바리새인들은 민중들이 수적 우세로 예수님을 왕으로 추대할까봐 두려워하였다. 그들은 최후의 수단으로 군중들을 헤치고 구주께서 계시는 곳에 나아가 “선생이여 당신의 제자들을 책망하소서”라는 책망과 위협의 말을 하였다. 이와 같이 시끄러운 시위운동은 불법적이므로 당국에서 허락할 수 없다고 그들은 선언하였다.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만일 이 사람들이 잠잠하면 돌들이 소리지르리라”는 예수님의 대답을 들었을 때 그들은 침묵할 수밖에 없었다. 이 승리의 장면은 하나님께서 친히 지정하신 것이었다. 그것은 선지자에 의해 예언된 것으로 인간이 하나님의 목적을 저지하기에는 무력하였다. 만일 사람들이 그분의 계획을 수행하는 데 실패하였다면 하나님께서는 생명 없는 돌들에게 음성을 주셔서 돌들의 찬양의 환호성으로 하나님의 아들을 환영하게 하셨을 것이다. 침묵당한 자들이 뒤로 물러가자 스가랴의 예언이 많은 사람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시온의 딸아 크게 기뻐할지어다 예루살렘의 딸아 즐거이 부를지어다 보라 왕이 네게 임하나니 그는 공의로우며 구원을 베풀며 겸손하셔서 나귀를 타나니 나귀의 작은 것 곧 나귀 새끼니라.”DA 572.3
행렬이 언덕 마루에 도달하여 막 도성으로 내려가려고 했을 때 예수께서 발걸음을 정지하셨으며, 따르던 모든 무리들도 발을 멈추었다. 그들 앞에는 기울고 있는 태양의 광선을 담뿍 받아 찬란히 빛나는 예루살렘이 보였다. 모든 사람의 눈이 성전으로 끌렸다. 성전은 장엄하고 웅대한 모습으로 다른 모든 것보다 높이 치솟아, 마치 백성들을 유일하고 참되며 살아 계신 하나님께 인도하려고 하늘을 가리키는 것처럼 보였다. 성전은 오랫동안 유대 민족의 자랑이며 영광이었다. 로마인들 역시 성전의 장대함을 그들 스스로 자랑하고 있었다. 로마가 임명한 왕이 유대인과 힘을 합쳐 성전을 재건하고 단장하였다. 로마 황제도 선물을 보내어 그것을 더욱 아름답게 장식하였다. 성전은 그 견고함, 화려함, 그리고 장대함으로 세계의 경이 중의 하나가 되었다. DA 575.1
서산으로 기울어지는 해가 하늘을 황금빛으로 물들이는 가운데, 그 눈부신 영광은 성전 벽의 순백색 대리석을 비추었으며, 금으로 입힌 성전 기둥에서 번쩍거렸다. 예수님과 그분을 따르는 제자들이 서 있는 산등성이에서 볼 때 성전은 횐 눈으로 만든 큰 건물에 황금 첨탑들이 솟아 있는 모습이었다. 성전 입구에는 금, 은으로 된 포도나무가 있었는데 거기에는 가장 솜씨 좋은 예술가들이 세공하여 만든 푸른 잎사귀와 큰 포도송이들이 달려 있었다. 이 디자인은 번성하는 포도나무 같은 이스라엘을 대표하였다. 금과 은과 생생한 푸른 잎들은 진귀한 아취(雅趣)와 훌륭한 솜씨로 잘 결합되어 있었으며 그 포도나무는 희고 번쩍이는 기둥을 우아하게 감고 있었다. 그리고 금장식에는 빛나는 덩굴이 매달려 있었는데 기울고 있는 태양의 광채를 받아 마치 하늘에서 빌려온 영광처럼 빛나고 있었다. DA 575.2
예수께서 이 광경을 응시하시자 수많은 군중들은 외치던 일을 멈추고 갑자기 펼쳐진 아름다운 광경에 넋을 잃는다. 그들 스스로 느낀 그 감탄을 구주의 얼굴에서도 찾으려는 기대로 모든 사람의 시선은 그분에게로 향한다. 그러나 그들은 감탄 대신에 슬픔의 구름을 본다. 눈물이 가득한 그분의 눈과 큰 폭풍 앞에 선 나무처럼 이리저리 흔들리는 그분의 몸을 보며 한편 마치 상처받은 마음에서 나오는 듯한, 그분의 떨리는 입술에서 터져 나오는 비탄의 울음소리를 들을 때 그들은 매우 놀라고 실망한다. 천사들은 그들의 사랑하는 사령관이 고뇌의 눈물을 흘리는 이 광경을 보고 얼마나 놀랐을까! 승리의 함성을 울리고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며 그분이 통치하시기를 기쁨으로 희망하면서 영광스러운 도성으로 그분을 호위하던 기쁨의 무리들도 이 광경을 보고 얼마나 놀랐을까! 예수께서는 나사로의 무덤에서 우셨었다. 그러나 그것은 인간의 재난을 동정하는 경건한 슬픔에서였다. 그러나 이 갑작스런 슬픔은 어떤 장엄한 승리의 합창에 삽입된 통곡의 곡조와도 같았다. 모든 사람이 그분에게 경의를 표하고 있던 그 기쁨의 장면에서 이스라엘의 왕은 조용한 기쁨의 눈물이 아니라 억누를 수 없는 고뇌의 눈물을 흘리며 신음하고 계셨다. 군중들은 갑자기 침울해졌다. 그들의 만세 소리는 잠잠해졌다. 이해할 수 없는 슬픔에 동정하여 많은 사람이 눈물을 흘렸다.DA 575.3
예수님의 눈물은 자신의 고통을 예감함에서 오는 눈물이 아니었다. 바로 그분 앞에는 겟세마네가 있었는데 얼마 안 있어 그 곳에서 큰 흑암의 공포가 그분을 뒤덮을 것이었다. 양의 문도 또한 거기서 보였는데 수 세기 동안 이 문을 통하여 희생 제물이 된 짐승들이 들어갔다. 이 문이 원형이신 예수님을 위하여 곧 열릴 것이었는데 이 모든 희생 제물들은 세상 죄를 위한 그분의 희생을 가리키고 있었다. 가까이에는 다가오고 있는 그분의 고뇌의 장소가 될 갈바리가 있었다. 그러나 구속주께서 마음의 고통으로 우시고 신음하신 것은 당신이 받으실 참혹한 죽음을 생각나게 해주는 것들 때문이 아니었다. 그분의 슬픔은 이기적인 슬픔이 아니었다. 고상하고 자기희생적인 그분의 영혼은 자신이 받을 고통에 대한 생각으로 위협받지 않았다. 예수님의 마음을 찢어지게 한 것은 하나님의 아들을 거절하고 그분의 사랑을 조소하며 그분의 능력 있는 이적을 보고서도 확신하기를 거절하고 그분의 생명을 취하려는 예루살렘의 광경이었다. 예수께서는 예루살렘이 그의 구속자를 거절함으로써 어떤 상태에 있는지와, 만일 예루살렘이 그의 상처를 치료할 수 있는 유일한 분이신 당신을 받아들였더라면 어떻게 되었을 것을 보셨다. 예수께서 예루살렘을 구원하려고 오셨는데 어찌 예루살렘을 버릴 수 있으셨겠는가?DA 576.1
이스라엘은 은총 받은 백성이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성전을 거처로 삼으셨다. 그것은 “터가 높고 아름다”웠으며 “온 세계”의 “즐거”움이었다(시 48:2). 아버지가 그의 외아들을 품듯이 천 년 이상이나 그리스도께서 보호자의 보살핌과 부드러운 사랑으로 돌보신 기록이 거기 있었다. 이 성전에서 선지자들은 그들의 엄숙한 경고를 발하였다. 그 곳에서 예배자들의 기도와 합하여 향연이 하나님께로 올라가는 동안 불타는 향로를 흔들었다. 그 곳에서 그리스도의 피를 예표하는 짐승의 피가 넘쳐흘렀다. 그 곳에서 여호와께서는 당신의 영광을 시은소 위에 나타내셨다. 그 곳에서 제사장들이 제사를 드렸으며 상징과 예식의 화려한 의식이 각 시대를 통하여 계속해 내려왔다. 그러나 이 모든 일이 종말을 고하여야만 하였다. DA 576.2
예수께서는 병자와 고통당하는 자를 축복하기 위하여 여러 번 드신 그 손을 드시고, 운명 지어진 도성을 향하여 흔드시면서 슬픔과 비탄에 잠긴 어조로 “너도 오늘날 평화에 관한 일을 알았더면 좋을 뻔하였거니와…” 라고 부르짖으셨다. 구주께서는 여기서 말씀을 멈추시고 만일 예루살렘이 하나님께서 주고자 원하셨던 선물인 그분의 사랑하는 아들을 받아들였더라면 어떤 형편 가운데 처하게 되었을 것인지를 말씀하지 않으신 채 남겨 놓으셨다. 만일 예루살렘이 그의 특권이 무엇임을 알고 하늘에서 보내신 빛에 주의했었더라면, 그 도성은 하나님이 주신 능력을 힘입어 자유한 가운데 열국의 여왕으로서 번영을 자랑할 수 있었을 것이다. 예루살렘 성문에는 무장한 군사들이 서 있지 않았을 것이며 성벽에는 로마의 깃발이 휘날리지도 않았을 것이다. 만일 예루살렘이 구속주를 받아들였더라면 축복 받았을 뻔했던 그 영광스러운 운명이 하나님의 아들 앞에 나타났다. 그분께서는 예루살렘이 당신을 통하여 무서운 질병을 치료받고 속박에서 해방되어 세상의 강력한 수도로 세워졌을 것을 보셨다. 예루살렘 성벽으로부터 평화의 비둘기가 모든 민족에게 날아갔을 것이다. 예루살렘은 세상의 영광의 면류관이 되었을 것이다.DA 576.3
그러나 예루살렘에 이루어졌어야 했을 빛난 장면이 구주의 시야에서 사라진다. 그분은 예루살렘이 이제 로마의 속박 아래 있으며 하나님의 불쾌히 여기심을 입고 그분의 보응의 심판을 받을 운명에 처하게 됨을 깨달으신다. 그분은 비탄으로 끊었던 말씀을 계속하신다. “지금 네 눈에 숨기웠도다 날이 이를지라 네 원수들이 토성을 쌓고 너를 둘러 사면으로 가두고 또 너와 및 그 가운데 있는 네 자식들을 땅에 메어치고 돌 하나도 돌 위에 남기지 아니하리니 이는 권고 받는 날을 네가 알지 못함을 인함이니라.” DA 577.1
그리스도께서는 예루살렘과 그 자녀들을 구원하려고 오셨다. 그러나 바리새인들의 거만, 위선, 질투, 그리고 악의 때문에 그분께서는 당신의 목적을 성취하지 못하셨다. 예수께서는 운명 지어진 도성에 임할 무서운 징벌을 아셨다. 그분은 예루살렘이 군대로 에워싸이는 것과 포위된 주민들이 굶주려 죽는 것을 보셨으며, 어머니들은 저희 자녀들의 죽은 시체를 먹으며 부모와 자녀들은 마지막 한 입의 음식까지도 서로 빼앗아 먹는 등 타고난 애정까지도 끊임없이 계속되는 굶주림의 고통 때문에 깨지는 것을 보셨다. 그분은 당신의 구원을 거절함으로 확실히 입증된 유대인들의 완고함이 그들로 하여금 침략군에 대해서도 역시 항복하기를 거절하게 만들 것이라는 사실을 보셨다. 그분은 당신이 십자가에 달리실 갈바리 언덕에 삼림의 나무들처럼 빽빽하게 십자가가 세워지는 것을 보셨다. 그분은 그 가엾은 거민들이 고문대와 십자가에서 고통을 당하며, 아름다운 궁전은 파괴되고 성전은 황폐되며 성전의 거대한 벽들은 돌 하나도 돌 위에 첩놓이지 않고 마치 그 도성이 밭과 같이 파헤쳐질 것을 보셨다. 이 무서운 장면을 보시고 구주께서 고민하며 우신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DA 577.2
예루살렘은 그분이 돌보아 오셨던 자녀였으므로 사랑하는 아버지가 방탕한 아들에 관하여 슬퍼하는 것처럼 예수께서는 사랑하는 도성을 보고 우셨다. 내가 어찌 너를 버릴 수 있겠는가? 내가 어찌 네가 멸망에 빠진 것을 볼 수 있을 것인가? 네가 불의의 잔을 채우도록 놔두어야 할까? 한 영혼의 가치는 너무도 커서 그것과 비교할 때 온 천하는 하찮게 보인다. 그런데 여기 온 민족이 멸망당하려고 한다. 신속히 서산으로 기울고 있는 태양이 하늘에서 자취를 감출 때 예루살렘의 은혜의 날도 끝날 것이었다. 그 행렬이 감람산 고개에 머물러 있는 동안에는 아직도 예루살렘이 회개하기에 너무 늦은 것은 아니었다. 그 때에 은혜의 천사는 공의와 급히 다가오는 심판에 자리를 내어 주려고 그의 날개를 접고 황금 보좌에서 내려오고 있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위대한 사랑의 마음은 아직도 당신의 자비를 조롱하고 당신의 경고를 멸시하며 당신의 피로 저희 손을 더럽히려고 하는 예루살렘을 위하여 간청하였다. 만일 예루살렘이 회개하기만 한다면 아직 너무 늦은 것은 아니었다. 지는 해의 마지막 광선이 성전과 망대와 누각 위에 머물러 있을 동안 어떤 선한 천사가 예루살렘을 구주의 사랑으로 인도하여 그의 멸망의 비운을 돌이키지 않을까? 선지자들을 돌로 쳐 죽이고 하나님의 아들을 거절한, 아름다우나 악한 그 도성은 회개하지 않음으로 속박의 사슬로 스스로를 묶고 있었다. 그 도성에 대한 자비의 날들은 거의 다 지나갔다.DA 577.3
그러나 하나님의 성령께서는 다시 예루살렘에 말씀하신다. 그 날이 다 가기 전에 또 하나의 증언이 그리스도를 증거한다. 증거의 음성이 과거의 예언된 외침에 응답하면서 높이 울려 퍼진다. 만일 예루살렘이 그 부르심을 듣는다면, 만일 그의 문으로 들어오고 계시는 구주를 받아들인다면 아직도 그 성은 구원받을 수 있을 것이다. DA 578.1
예수께서 백성들의 큰 무리와 함께 도성에 이르고 계시다는 소식이 예루살렘의 관원들에게 전달된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의 아들을 환영하지 않는다. 그들은 군중들을 분산시키기를 바라면서 두려움 가운데 그분을 만나러 나아간다. 행렬이 감람산을 내려가려고 할 때 관원들의 제지를 받는다. 그들은 떠들썩한 기쁨의 원인을 묻는다. 그들이 “이는 누구냐?” 라고 질문할 때에 제자들은 영감의 영에 충만하여 이 질문에 대답한다. 그들은 웅변적인 어조로 그리스도께 관한 예언들을 아래와 같이 반복한다. DA 578.2
아담은 그대들에게, 이는 뱀의 머리를 상하게 할 여인의 후손이라고 말할 것이다. DA 578.3
아브라함에게 물어보라. 그는 이분이 살렘 왕 멜기세덱이요 평화의 왕이라고 그대들에게 말할 것이다(창 14:18). DA 578.4
야곱은 이분이 유다 지파의 “실로” 라고 말할 것이다. DA 578.5
이사야는 “임마누엘”,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사 7:14, 9:6)이라고 말할 것이다. DA 578.6
예레미야는 다윗의 가지요 “여호와 우리의 의”(렘 23:6)라고 말할 것이다. DA 578.7
다니엘은 그분이 “메시야”라고 말할 것이다.DA 579.1
호세아는 그분이 “만국의 하나님 여호와시라 여호와는 그의 기념 칭호니라”(호 12:5)고 말할 것이다. DA 579.2
침례 요한은 그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로다”(요 1:29)라고 말할 것이다. DA 579.3
크신 여호와께서는 그분의 보좌에서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마 3:17)라고 선언하셨다. DA 579.4
그분의 제자인 우리는, 이분은 예수요 메시야요 생명의 왕이요 세상의 구속주라고 선언한다. DA 579.5
그리고 어둠의 권세 잡은 왕도 “나는 당신이 누구인 줄 아노니 하나님의 거룩한 자니이다”(막 1:24)라는 말로 그분을 승인한다. DA 579.6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리라(스가랴 9:1-17)
7-8장까지 금식과 회복의 말씀
9장 마지막까지의 말씀은 예언과 신탁이 담겨 있는 말씀입니다.
비록 심판에 대한 예언의 말씀이 담겨 있지만 그 밑바탕에는 희망의 깔려 있습니다.
이는 예수그리스도의 재림을 통해서 완성될 하나님 나라를 전제로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서 구원의 왕으로 오신 그리스도가 어떤 분이신지를 배울 수 있습니다.
I. 이는 내가 눈으로 친히 봄이니라( 슥 9:1-8)
슥 9:1-2 / 여호와의 말씀이 하드락 땅에 내리며 다메섹에 머물리니 사람들과 이스라엘 모든 지파의 눈이 여호와를 우러러봄이니라
그 접경한 하맛에도 임하겠고 두로와 시돈에도 임하리니 그들이 매우 지혜로움이니라
북부 지역 견고한 성이 무너집니다. 하드락은 수리아에 속한 도시이고 다메섹은 수리아의 수도였습니다. 여호와의 말씀의 경고가 그들의 땅에 내리고 머문다는 것은 수리아가 경고대로 멸망하기까지 재앙이 그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슥 9:3-4 / 두로는 자기를 위하여 요새를 건축하며 은을 티끌 같이, 금을 거리의 진흙 같이 쌓았도다
주께서 그를 정복하시며 그의 권세를 바다에 쳐넣으시리니 그가 불에 삼켜질지라
그 말씀의 경고가 하맛에도 임할 것이요, 두로와 시돈에도 임할 것입니다. 매우 지혜롭다고 하는 두로와 시돈에도 그 말씀이 임합니다. 두로와 시돈은 예부터 무역 왕국이었습니다. 해상 무역으로 엄청난 재물을 쌓아두었습니다. 은을 티끌처럼 긁어모으고, 금을 거리의 진흙같이 쌓아놓았습니다. 두로는 작은 섬이지만 자기를 지킬 요새를 건축했습니다. 45m나 되는 난공불락의 성을 쌓아서 앗수로의 군대가 5년 동안 공격했으나 실패했습니다. 느부갓네살 왕은 13년 동안 포위하였으나 정복하지 못하였습니다.
하드락과 다메섹, 하맛, 두로와 시돈은 팔레스틴의 북부지역입니다. 그런데 이 북부 지역들은 헬라의 알렉산더 대왕에게 멸망하였습니다.
그리고 팔레스틴 남부지역에 대한 경고의 말씀이 이어집니다.
슥 9:5-6 / 아스글론이 보고 무서워하며 가사도 심히 아파할 것이며 에그론은 그 소망이 수치가 되므로 역시 그러하리라 가사에는 임금이 끊어질 것이며 아스글론에는 주민이 없을 것이며
아스돗에는 잡족이 거주하리라 내가 블레셋 사람의 교만을 끊고
팔레스틴 남부지역은 주로 블레셋 족속이 살던 도시들이었습니다. 아스글론, 가사, 에그론은 블레셋 도시들입니다. 이들은 두로와 시돈이 멸망하는 것을 보면서 무서워할 것이요, 두려워 떨 것입니다. 그리고 가사에는 임금이 끊어질 것이요, 아스글론에는 더 이상 주민이 살지 않게 될 것입니다. 실제로 알렉산더가 블레셋을 칠 때에 가사의 왕을 사로잡아 갔습니다. 백성들이 포로로 끌려가고, 다른 나라사람들을 그곳으로 이주시켰습니다. 그래서 왕의 대가 끊어지고, 아스글론에는 더 이상 사람이 살지 않게 되었습니다. 이는 그들이 이스라엘을 괴롭히고 하나님을 만홀히 여긴 죄악을 징벌하신다는 말입니다. 그렇지만 그들을 완전히 진멸하시지는 않습니다.
슥 9:7 / 그의 입에서 그의 피를, 그의 잇사이에서 그 가증한 것을 제거하리니 그들도 남아서 우리 하나님께로 돌아와서 유다의 한 지도자 같이 되겠고 에그론은 여부스 사람 같이 되리라
그들 가운데 남은 자들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어서 유다와 한 가족처럼 지내게 되고, 에그론은 여부스 사람처럼 된다고 하셨습니다. 여부스족속은 이방인들이었지만 다윗의 그 성을 정복하고 그들도 유다 백성이 되었습니다(삼하 24:16; 대상 21:15). 이처럼 그들도 하나님께로 돌아와서 언약의 백성이 된다는 것입니다. 이 일은 메시아가 와서 복음이 전파된 후에 하나님께 돌아오게 될 것에 대한 예언의 말씀입니다.
슥 9:8 / 내가 내 집을 둘러 진을 쳐서 적군을 막아 거기 왕래하지 못하게 할 것이라 포학한 자가 다시는 그 지경으로 지나가지 못하리니 이는 내가 눈으로 친히 봄이니라
그렇다면 언약의 백성들은 어떻게 보호하십니까? 그 집을 둘러 진을 치고, 적군을 막아 거기 왕래하지 못하게 하십니다. 포악한 자들이 다시는 그 지경으로 지나가지 못하게 하십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이 그들로부터 당한 모든 고통과 억울한 일들을 친히 보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들에게 철저하게 갚아주시는 것입니다. 실제로 알렉산더가 팔레스틴 지역을 정복할 때 유일하게 이스라엘 지역만 살아남았습니다.
II. 나귀타고 오시는 겸손하신 구원의 왕(슥 9:9-13)
슥 9:9-10 / 시온의 딸아 크게 기뻐할지어다 예루살렘의 딸아 즐거이 부를지어다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시나니 그는 공의로우시며 구원을 베푸시며 겸손하여서 나귀를 타시나니 나귀의 작은 것 곧 나귀 새끼니라
내가 에브라임의 병거와 예루살렘의 말을 끊겠고 전쟁하는 활도 끊으리니 그가 이방 사람에게 화평을 전할 것이요 그의 통치는 바다에서 바다까지 이르고 유브라데 강에서 땅 끝까지 이르리라
시온의 딸, 예루살렘의 딸이란 딸처럼 아끼고 사랑하는 택한 백성을 가리킵니다. 그들에게 크게 기뻐하고, 즐겁게 노래를 부르라고 외치고 있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왕이 오신다는 것입니다. 이는 나라가 회복되고, 주권이 회복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크게 기뻐하고 즐거이 노래를 부르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들에게 임하는 왕은 어떤 왕입니까? 그 왕은 그는 공의로우시고, 구원을 베푸시는 왕이십니다. 나귀 새끼를 타고 오실 만큼 겸손한 왕이십니다. 그리고 그 왕이 세우시는 왕국은 어떤 나라입니까? 하나님께서 에브라임에서 병거를 없애고, 예루살렘에서 군마를 없애며, 전쟁할 때에 쓰는 활도 다 꺾으신다고 했습니다. 즉 화평의 복음을 전하실 겸손과 평화의 왕이십니다. 그래서 그의 통치가 바다에서 저 바다까지 이르고, 유프라테스 강에서 땅 끝까지 이르게 됩니다. 그리고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님을 왕으로 모시고 사는 왕국 시민들입니다. 예수님을 본받아 사랑과 겸손으로 섬기는 하나님 나라 시민들입니다.
III. 왕관의 보석같이 빛나리로다(슥 9:11-17)
하나님께서는 시내 산에서 언약의 말씀과 이스라엘 백성에게 피를 뿌림으로 언약을 맺으셨습니다. 즉 언약이란 맹세로 보증하신 약속입니다. 그리고 이 언약의 피는 구원의 왕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세우실 영원한 새 언약이기도 합니다.
9:11-13
또 너로 말할진대 네 언약의 피로 말미암아 내가 네 갇힌 자들을 물 없는 구덩이에서 놓았나니.
갇혀 있으나 소망을 품은 자들아 너희는 요새로 돌아올지니라 내가 오늘도 이르노라 내가 네게 갑절이나 갚을 것이라.
내가 유다를 당긴 활로 삼고 에브라임을 끼운 화살로 삼았으니 시온아 내가 네 자식들을 일으켜 헬라 자식들을 치게 하며 너를 용사의 칼과 같게 하리라.
그러므로 아직도 이스라엘로 돌아오지 않고 바벨론에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 요새로 돌아오라고 호소하십니다. 요새는 예루살렘, 곧 하나님 자신이 요새가 되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전쟁의 선두에 서서 진두지휘하시겠다는 것입니다. 다윗에게 힘을 주시어 골리앗을 이기게 한 것과 같이 미약한 자들에게 힘을 주어 승리하게 하십니다.
9:14-17
여호와께서 그들 위에 나타나서 그들의 화살을 번개 같이 쏘아내실 것이며 주 여호와께서 나팔을 불게 하시며 남방 회오리바람을 타고 가실 것이라.
만군의 여호와께서 그들을 호위하시리니 그들이 원수를 삼키며 물맷돌을 밟을 것이며 그들이 피를 마시고 즐거이 부르기를 술취한 것 같이 할 것인즉 피가 가득한 동이와도 같고 피 묻은 제단 모퉁이와도 같을 것이라.
이 날에 그들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들을 자기 백성의 양 떼 같이 구원하시리니 그들이 왕관의 보석 같이 여호와의 땅에 빛나리로다.
그의 형통함과 그의 아름다움이 어찌 그리 큰지 곡식은 청년을, 새 포도주는 처녀를 강건하게 하리라
하나님은 우리가 당하는 모든 억울함과 원통함을 친히 보시고 기억하십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마지막 날에 모든 악의 세력을 멸하시고 만왕의 왕, 만주의 주로 이 세상을 통치하실 것입니다.
그날에 예수를 믿는 우리도 주님이 쓰신 왕관에 박힌 보석과 같이 여호와의 땅에서 빛날 것을 믿고 기대하며 현실에서의 어려움과 고통을 견딜 수 있는 힘을 공급받아야 하겠습니다.
10월 11일(토) 스가랴 5-8장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진실과 화평을 사랑하라(8:19)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노라 사월의 금식과 오월의 금식과 칠월의 금식과 시월의 금식이 변하여 유다 족속에게 기쁨과 즐거움과 희락의 절기가 되리니 오직 너희는 진실과 화평을 사랑할찌니라.
This is what the LORD Almighty says: "The fasts of the fourth, fifth, seventh and tenth months will become joyful and glad occasions and happy festivals for Judah. Therefore love truth and peace."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노라 사월의 금식과 오월의 금식과 칠월의 금식과 시월의 금식이 변하여 유다 족속에게 기쁨과 즐거움과 희락의 절기가 되리니 오직 너희는 진실과 화평을 사랑할찌니라
"사월 금식"은 예루살렘이 느부갓네살의 정복을 당한 사건을 기념하는 금식
"오월 금식"은 성전을 불사른 사건을 기념하는 금식
"칠월 금식"은 그달리야 총독의 피살 사건을 기념하는 금식
"시월 금식"은 예루살렘이 포위된 사건을 기념하는 금식
성서와 유대 전통 금식
성서속의 인물들은 여려 가지 이유들을 가지고 금식을 하였다.다윗은 밧세바와의 간음을 통해 태어난 아기가 사경을 헤매고 있을때 혹이라도 하나님께서 살려주시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7일 동안 금식하며 기도를 하였다(삼하 12장).
전쟁 (삿 20장),
전 국민의 회개 (삼상 7:6; 욘 3장) 를 촉구하며,
특별히 구약 성서는 국가적으로 정해진 금식일에 대한 언급을 한다.
예를 들어,
렘 36:6에는 “너는 들어가서 내가 말한 대로 두루마리에 기록한 여호와의 말씀을 금식일에 여호와의 성전에 있는 백성의 귀에 낭독하고...” 라고 기록되어 있고,
요엘 1:14 에도 “너희는 금식일을 정하고 성회를 선포하여...”
스가랴 7:5와 8:19에는 “칠십년 동안 오월과 칠월에 금식하고...사월의 금식과 오월의 금식과 칠월의 금식이 변하여...” 라고 기록되어 있다.
또한, 대속죄일에도 금식을 하였을 가능성이 있다.
“너희는 스스로 괴롭게 하고” 라는 표현이 두번 (레 16:29,31) 등장하는데 이는 금식과 직접적으로 관련 있는 표현들이다.
스가랴서에서 명한 사월, 오월 그리고 칠월 금식은 예루살렘 성전 파괴와도 관련성이 있다.
4월 금식은 주전 587년 예루살렘 성이 바벨론에 의해 포위된 때 (왕하 25장)를 기억하며,
5월 금식은 같은 해 예루살렘 성전이 파괴된 때 (왕하 25:8-9)를 기억하며,
7월 금식은 바벨론이 유대 땅을 관활하도록 세운 그달리아의 죽음 (왕하 25:22-26)을 애도하며 국가적으로 금식을 하였다.
물론 7월 금식은 대속죄일 금식일과도 직접적으로 관련이 있다.
신약에서 금식은 예수와 바리새인들 사이의 논쟁 거리가 되기도 하였다.
전통적으로 바리새인들은 일주일에 이틀 (월요일,
목요일)을 금식하였다.
“요한의 제자들과 바리새인들이 금식하고 있는지라” (막 2:18)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눅 18:12) 라는 표현들을 통해 금식은 유대 종교인들의 삶의 일부분이었음을 엿볼 수 있다.
유대인들이 금식을 하였던 여러 이유들 중에는 이런것들도 있다.
우기철에 비가 내리지 않는 경우 유대인들은 금식을 통해 비
내림을 간구하기도 하였고, 쿰란 공동체의 경우에는, 소수 학자들의 견해이긴 하지만, 금요일날 정기적인 금식을 하기도 하였다고
한다.
이유는 안식일이 끝나는 토요일 저녁까지 화장실을 가지 않기 위해서였다고 한다.
안식일 (토요일)에는 금식을 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안식일은 기쁨의 날이기에 이날은 공동체 예배 모임과 가족 모임을 갖고 금식이 아닌 즐거운 식탁 교제를 하였기 때문이다.
어떤 랍비들은 안식일날 식사를 더 맛있게 하기 위해 금요일 오후부터는 금식을 하라고 권하기도 하였다.
오늘날 유대 종교인들은 일곱번의 공식적인 금식을 한다.
1. 대속죄일 (욤키푸르) : 새해를 맞이하고 나서 10일째 되는 날. 이 날은 공휴일이며 공적인 용무 ( public work)를 위한 차량을 제외하고는 차량 통행을 전면 금지하고, 텔레비젼 방송도 나오지 않는다.
2. 장자들의 금식일 : 이 금식은 첫 아들들만 금식하는 것으로 출애굽때 장자들이 구원받은 것을 기념하는 금식으로 유월절 바로 전날 금식을 한다.
3. 예루살렘이 바벨론에 의해 포위된 날 : 주전 587년 느부갓네살이 예루살렘을 포위한 날을 기억하며 금식을 한다.
4. 예루살렘 성벽이 바벨론에 의해 파괴된 날: 유대력으로 4월에 해당하는 달 (타무즈 17일)로 금식을 한다.
5. 예루살렘 성전 파괴일 : 대속죄일 다음으로 중요한 금식일로 제 1 & 2 성전 파괴일을 기억하며 금식한다.
전통적으로 유대인들은 제 1 성전과 2 성전 파괴가 동일한 날 행해졌다고 믿고 있다.
6. 그달리야 암살일 : 왕하 25장에 나오는 그달리야가 암살 당한 사건을 기억하며 금식을 한다.
7. 부림절 하루 전날 금식 : 아드르 13일 (2월이나 3월중) 부림절기 하루 전날 금식을 한다.
이 네 가지 금식절은, 바벨론에 포로된 유대인들이 바벨론에서 지키던 것들입니다.
이제 저들이 하나님의 은혜로 본국에 돌아와서는 그 금식을 지키지 않고 희열의 기회로 가진다.
너희는 진실과 화평을 사랑하라
- 진실은 진정한 이스라엘의 특징이다(요 1:47).
그리고 화평도 하나님의 자녀(참 이스라엘)된 증표이다(마 5:9).
이 말씀은, 재건된 이스라엘 백성의 특징을 말해 주지만 겸하여 신약 시대 새 이스라엘의 특징을 예언하기도 한다.
진실(571) 에메트 Truth
539. 아만( ’âman) אָמַן
발음 [ ’âman ]
- 구약 성경 / 100회 사용
화평(7965) 샬롬 Peace שָׁלוֹם
발음 [ shâlôwm ]
- 구약 성경
- 237회 사용
사랑하다(157) 아하브()
역사 관련 명언 30가지
by 커피 중독자 2024. 6. 29.역사는 우리의 과거를 이해하고, 현재를 살아가며,
미래를 준비하는 데 중요한 교훈을 제공합니다.
역사 속 인물들이 남긴 명언들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오늘날 우리에게도 깊은 영감을 줍니다.
오늘은 역사와 관련된 30가지 명언을 소개하겠습니다.
이 명언들을 통해 역사의 지혜를 되새기며,
우리의 삶에 적용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1.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 - 윈스턴 처칠
2. "역사는 반복된다. 한 번은 비극으로, 두 번째는 희극으로." - 카를 마르크스
3. "과거를 모르는 사람은 그 과거를 반복할 수밖에 없다." - 조지 산타야나
4. "역사란 현재와 과거의 끊임없는 대화다." - E. H. 카
5. "역사는 승리자에 의해 쓰여진다." - 나폴레옹 보나파르트
6. "역사는 사람들이 무엇을 생각했는지에 대한 기록이다." - H. G. 웰스
7. "우리는 역사의 일부가 아니라, 역사를 만드는 존재다." - 넬슨 만델라
8. "과거를 기억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그것을 반복할 운명에 처해 있다." - 에드먼드 버크
9. "역사는 우리에게 미래의 지혜를 제공한다." - 토머스 제퍼슨
10. "역사란 우리가 누구인지, 어디서 왔는지, 어디로 가고 있는지를 가르쳐준다." - 제임스 볼드윈
오직 너희는 진리와 화평을 사랑하게 될 것이라고 하셨는데, 어떤가요? 진실과 화평을 사랑하는 자들입니까? 진실과 화평을 사랑하는 자들은 믿음의 증인이 된다고 합니다. 하나님을 믿는 자신을 통하여 세상 사람들이 하나님만을 찾고 은혜를 구하게 된다고 하셨습니다. 우리들이 똑바른 신앙생활을 한다면 이러한 사건이 생겨야 할 것입니다.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노라 사월의 금식과 오월의 금식과 칠월의 금식과 시월의 금식이 변하여 유다 족속에게 기쁨과 즐거움과 희락의 절기가 되리니 오직 너희는 진실과 화평을 사랑할찌니라 - "사월 금식"은 예루살렘이 느부갓네살의 정복을 당한 사건을 기념하는 금식이고, "오월 금식"은 성전을 불사른 사건을 기념하는 것이고, "칠월 금식"은 그달리야 총독의 피살 사건을 기념하는 것이고, "시월 금식"은 예루살렘이 포위된 사건을 기념하는 것이었다. 이 네 가지 금식절은, 바벧론에 포로된 유대인들이 바벨론에서 지키던 것이다. 이제 저들이 하나님의 은혜로 본국에 돌아와서는 그 금식을 지키지 않고 희열의 기회로 가진다. "너희는 진실과 화평을 사랑하라". 진실은 진정한 이스라엘의 특징이다(요 1:47). 그리고 화평도 하나님의 자녀(참 이스라엘)된 증표이다(마 5:9). 이 말씀은, 재건된 이스라엘 백성의 특징을 말해 주지만 겸하여 신약 시대 새 이스라엘의 특징을 예언하기도 한다.
너희는 진실과 화평을 사랑하라".
진실은 진정한 이스라엘의 특징이다(요 1:47).
그리고 화평도 하나님의 자녀(참 이스라엘)된
증표이다(마 5:9).
이 말씀은, 재건된이스라엘 백성의 특징을 말해 주지만 겸하여 신약 시대 새 이스라엘의 특징을 예언하기도
한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죄악을 심판하셨습니다.
그들을 바벨론의 손에 붙이시고 징계하셨습니다.
그러나 이제 만군의
여호와, 싸우면 이기시는 여호와 하나님께서 전혀 다른 어조로 회복을 선포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시온을 위하여 크게 질투하신다
말씀하십니다.
이스라엘의 회복은 그들만의 행복으로 그치지 않습니다.
여러 백성과 많은 사람들이 그들 가운데 나타난 하나님의
은혜, 살아계신 하나님의 영광을 보게 될 것입니다.
이스라엘과 함께 하시는 하나님, 그들을 진리와 사랑으로 인도하시며 구원해 내신
하나님, 회복하시고 축복하시는 하나님을 알게 될 것입니다.
이 성읍 저 성읍에서 놀랍고 기쁜 소식들이 퍼져나갈 것입니다.
너도 나도, 얼른 가서 여호와 하나님을 만나 뵙고 여호와께 은혜를 구하자 할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자신의 하나님으로 만나고 싶어할 것입니다.
스가랴는 어떤 선지자인가?
스가랴는 구약 성경의 선지자 중 한 명으로, 포로 귀환 이후 유다 백성을 격려하고 회복을 예언한 회복의 선지자입니다.
다음은 스가랴 선지자의 주요 특징과 사역을 정리한 것입니다:
1. 시대적 배경
- 활동 시기 : 주전 520년경(바사 왕 다리오 1세 시대)
- 동시대 인물 : 학개 선지자
- 역사적 상황 : 바벨론 포로에서 귀환한 유다 백성이 성전 재건을 시작했지만,
외부 방해와 내부 낙심으로 중단됨 (학개 1장, 스가랴 1:1)
2. 스가랴서의 중심 메시지
| 구분 | 주요 내용 |
|---|---|
| 초반부(1–8장) | 8개의 환상을 통해 성전 재건의 당위성과 하나님의 도우심을 강조 |
| 후반부(9–14장) | 메시아 왕국의 도래와 장차 이스라엘의 영적 회복을 예언 |
3. 선지자 스가랴의 특징
- 격려와 위로의 메시지 중심 : 백성에게 “돌아오라” 하시며 은혜와 회복을 약속 (스가랴 1:3)
- 환상과 상징의 선지자 : 말 탄 자, 뿔과 대장장이, 금촛대와 감람나무 등 풍부한 상징적 환상을 통해 하나님의 뜻을 전달
- 메시아에 대한 예언 풍성 :
- 겸손하게 나귀를 타고 오실 왕 (슥 9:9)
- 은 30에 팔림 (슥 11:12–13)
- 찔림 당하신 메시야 (슥 12:10)
4. 스가랴의 이름 의미
- 히브리어 “여호와께서 기억하신다”
→ 하나님의 언약과 약속을 잊지 않으심을 보여주는 이름
5. 신약과의 연결
스가랴서의 메시아 예언은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와 수난에서 여러 부분이 성취됨:
- 예루살렘 입성 (마 21:5)
- 은 30에 팔림 (마 26:15)
- 십자가에서 찔리심 (요 19:37)
요약 정리
스가랴는 낙심한 백성에게 하나님의 회복과 메시아의 소망을 전한 예언자입니다.
그의 예언은 과거의 회복뿐 아니라 미래의 하나님 나라를 바라보게 하는 이중적 메시지를 담고 있습니다.
스가랴의 장
3장 / 여호수아 대제사장이 사탄 앞에서 변호받음, 하나님의 구원의 약속
4장 / 금 촛대와 두 올리브 나무 환상, 성전 재건의 힘
5장 / 심판의 상징적 나타남과 죄의 결과
스가랴서의 현대적 의미
스가랴 환상과 요한계시록 환상의 공통점
스가랴서의 환상과 요한계시록의 환상은 구약과 신약의 대표적인 묵시 문학으로서,
시대를 넘어 서로 깊이 연결되며 수많은 공통점을 공유합니다.
요한계시록이 스가랴서의 상징과 주제를 창의적으로 활용하고 발전시킨 경우가 많기 때문입니다.1. 상징적 이미지의 공유
두 책 모두 상징적인 이미지를 풍부하게 사용하여 하나님의 메시지를 전달합니다.
특히 여러 상징이 놀라울 정도로 유사하게 나타납니다.
공통 상징
- 스가랴서
요한계시록 네 존재(말/병거)
- 네 병거(붉은 말, 검은 말, 흰 말, 어룽진 말)가 온 땅을 순찰하며
하나님의 심판과 통치를 수행합니다 (슥 6:1-8).네 생물과 네 말 (흰 말, 붉은 말, 검은 말, 청황색 말)이 등장하여 인을 떼는 재앙을 통해 심판을 집행합니다 (계 6:1-8). 촛대(등잔대)
- 순금 등잔대와 그 곁의 두 감람나무는 기름 부음 받은 두 지도자(스룹바벨과 여호수아)를 상징하며,
성령의 능력으로 교회가 세워질 것을 보여줍니다 (슥 4장).일곱 금 촛대는 일곱 교회를 상징하며, 주님께서 교회 가운데 거니시는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두 증인은 두 감람나무와 두 촛대로 묘사됩니다 (계 1:12-20, 11:4). 측량줄
- 한 사람이 측량줄을 가지고 예루살렘을 측량하며, 이는 하나님의 보호와 회복,
그리고 성곽 없는 도시로의 무한한 확장을 상징합니다 (슥 2:1-5).요한이 성전과 제단과 그 안에서 경배하는 자들을 측량하며, 이는 환난 가운데서도 당신의 백성을 보호하시는 하나님의 주권을 상징합니다 (계 11:1). 두루마리
- 날아가는 두루마리는 온 땅에 내리는 저주, 즉 도둑질하고 거짓 맹세하는 자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을 상징합니다 (슥 5:1-4).하나님의 손에 있는 일곱 인으로 봉해진 두루마리가 등장하며, 오직 어린 양 예수 그리스도만이 그 인을 떼고 하나님의 구원 계획을 펼치실 자격이 있음을 보여줍니다 (계 5장). 대제사장
- 더러운 옷을 입은 대제사장 여호수아를 사탄이 고발하지만,
하나님은 그의 죄를 사하고 깨끗한 옷으로 갈아입혀 주십니다.
이는 죄의 용서와 회복을 상징합니다 (슥 3장).성도들이 어린 양의 피에 그 옷을 씻어 희게 된 모습으로 나타나며,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말미암는 속죄와 정결함을 강조합니다 (계 7:14). 2. 주제의 유사성
상징뿐만 아니라, 두 책이 다루는 핵심 주제에서도 깊은 연관성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 하나님의 주권적 통치: 두 책 모두 역사의 주관자는 세상의 권력이 아니라 만군의 여호와 하나님이심을 강력하게 선포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온 땅을 감찰하시고(스가랴의 말들), 당신의 계획에 따라 심판과 구원을 이루십니다.
- 회개와 회복의 촉구: 스가랴가 포로 귀환 공동체에게 "내게로 돌아오라"고 외쳤듯이, 요한계시록도 일곱 교회에 회개를 촉구하며 이기는 자에게 주어질 약속을 제시합니다.
- 메시아(그리스도) 중심: 스가랴는 '순(Branch)'이라 불리는 메시아, 고난받는 종이자 겸손한 왕으로 오실 그리스도를 예언했습니다 (슥 3:8, 6:12, 9:9). 요한계시록은 이러한 예언이 성취된 어린 양 예수 그리스도, 만왕의 왕이시며 심판주로 다시 오실 그분께 모든 초점을 맞춥니다.
- 천상 회의와 천사의 역할: 두 책 모두 천사가 환상을 해석해주고 하나님의 메시지를 전달하는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또한 사탄이 참소하는 모습(슥 3:1)과 하늘에서 쫓겨나는 모습(계 12:9) 등 천상에서의 영적 전쟁을 묘사합니다.
- 예루살렘(새 예루살렘)의 최종적 영광: 스가랴는 회복될 예루살렘의 영광을 예언했습니다. 요한계시록은 이를 새 하늘과 새 땅의 중심인 '새 예루살렘'으로 확장하여,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과 영원히 함께 거하시는 최종적인 구원의 완성을 보여줍니다 (계 21장).
이처럼 스가랴의 환상은 요한계시록의 환상을 이해하는 중요한 신학적, 문학적 배경을 제공합니다. 요한은 스가랴의 상징과 주제를 가져와 예수 그리스도의 초림과 재림이라는 관점에서 재해석하고 심화시킴으로써, 시대를 초월하여 모든 성도에게 소망과 위로를 주는 하나님의 최종적인 승리의 메시지를 선포하고 있습니다.
스가랴(Zechariah) 제커라이어 / 여호와께서 기억하신다, 여호와게서 기억하심
스가랴서는 구약 성경의 마지막 선지서 중 하나로, 히브리어 성경에서 '소선지서'에 속합니다.
스가랴는 포로기 이후 유다 백성들을 위한 메시지를 전달한 선지자 중 하나로, 그 이름의 의미는 "여호와께서 기억하심"입니다.
스가랴서는 특히 예루살렘 성전 재건과 관련된 예언과 환상으로 유명하며, 신약 성경에서도 자주 인용됩니다.
스가랴의 이름과 뜻
스가랴(히브리어: זְכַרַיְָה, Zəkaryāh)는 "여호와께서 기억하신다"
또는 "여호와께서 기억하심"이라는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이 이름 자체가 스가랴서의 메시지를 함축적으로 드러냅니다.
하나님은
포로된 자신의 백성을 잊지 않으시고, 다시금 회복시키시며, 언약을 성실히 지키시는 분이심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스가랴의 이름은 곧
선지자 자신의 정체성과 사역의 방향을 상징합니다.
스가랴의 생애와 저자적 배경
스가랴는 제사장 가문 출신으로서 예언자였으며, 학개와 거의 같은 시기에 활동한
동시대의 인물입니다(스 5:1, 6:14).
그의 아버지는 베레갸요, 할아버지는 잇도이며(슥 1:1), 잇도는 느헤미야서와
역대기에 언급되는 제사장 계열의 인물입니다(느 12:4, 대하 24:11).
따라서 스가랴는 제사장적 배경과 함께 예언자적 소명을
받은 인물로, 제의와 종말, 정결과 성전을 주제로 심오한 통찰을 보여줍니다.
그는 바벨론 포로기 이후, 고레스의 칙령(BC 538년)으로 유다 백성이 예루살렘으로
귀환한 후 약 20여 년 후(BC 520년경)에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 활동하기 시작했습니다.
당시 유다는 정치적으로 미약하고
성전 재건은 중단된 상태였으며, 귀환 백성들은 낙심과 영적 침체 속에 있었습니다.
바로 이때 스가랴는 환상과 메시지를 통해
하나님께서 여전히 자신의 백성을 향한 계획을 가지고 계심을 선포하며, 영적 재건을 독려했습니다.
역사적 배경 / 스가랴서는 주로 기원전 6세기 후반, 바벨론 포로기 이후의 시기에 쓰여졌습니다.
당시 유다 백성들은 바벨론에서 돌아와 예루살렘에 정착했지만,
성전 재건 작업은 여러 어려움으로 인해 지연되고 있었습니다.
스가랴와 동시대의 선지자 학개는 백성들에게 성전 재건을 독려하며, 이를 통해 하나님의 축복을 받을 것이라고 예언했습니다.
시대적 배경과 역사적 상황
스가랴의 예언은 바사 제국(페르시아) 시대, 특히 다리오 1세(Darius I, BC
522-486)의 통치 시기에 이루어졌습니다.
이 시기는 유다인들이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왔지만, 재건된 공동체는 주변 민족의
방해와 내부의 무기력으로 인해 성전 재건 사업이 중단된 상황이었습니다.
학개는 성전 재건의 필요성을 실질적으로 강조했고,
스가랴는
영적인 관점에서 그 이유와 목적을 계시해주며, 더 나아가 종말론적 회복과 메시아적 기대를 확장시켰습니다.
특히 스가랴는 유다 공동체가 하나님 나라의 회복을 위한 통로임을 강조하며,
회복은
단순히 성전의 외적 재건에 그치지 않고,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 제사장직의 정결함,
그리고 정의로운 통치의 회복을 포함한다는 점을
부각시켰습니다.
이처럼 스가랴서는 역사와 신학, 현재와 미래, 회복과 종말이라는 긴장을 함께 끌어안고 있습니다.
문학적 구조와 신학적 구성
스가랴서는 총 14장으로 구성되며, 일반적으로 두 부분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 1:1 ~ 8:23 / 귀환 공동체를 향한 권면과 환상
- 9:1 ~ 14:21 / 장차 올 메시아와 종말의 심판과 구원
1-8장은 주로 환상(총 8개 환상)과 메시지로 구성되어 있으며,
이는 유다 공동체의
회복을 향한 하나님의 의도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장면들입니다.
이 환상들은 마치 다니엘서의 환상들과 유사한 종말론적 해석이
가능하며,
스가랴는 과거의 심판과 미래의 영광을 교차적으로 배치함으로써 현재를 사는 자들에게 방향을 제시합니다.
9-14장은 종말론적 색채가 강하며,
두 왕(9:9-10), 찔림받은
목자(12:10), 여호와의 날(14장)에 대한 예언을 포함합니다.
특히 9장과 14장은 메시아적 해석의 핵심 본문으로, 예수님의
나귀 타심과 십자가 사건, 종말의 심판과 새 예루살렘에 대한 신약적 연결 고리가 됩니다.
내용 개요 / 스가랴서는 14장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두 부분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1. 1-8장 - 환상과 성전 재건에 관한 내용
2. 9-14장 - 메시아와 종말에 관한 예언
첫 번째 부분 : 환상과 성전 재건 (1-8장)
1.서언 (1:1-6) / 스가랴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회개와 순종을 촉구하며, 이전 선지자들이 전한 하나님의 말씀을 상기시킵니다.
2.여덟 개의 환상 (1:7 - 6:8) / 스가랴는 여덟 가지 환상을 통해 하나님의 뜻을 전합니다.
이 환상들은 대체로 성전 재건, 예루살렘의 회복, 이스라엘의 정화와 보호를 상징합니다.
첫 번째 환상 : 네 마리 말이 온 땅을 순찰하는 장면으로,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돌보신다는 메시지를 전합니다.
두 번째 환상 : 네 뿔과 네 대장장이의 환상으로, 이스라엘을 괴롭히는 민족들을 하나님께서 심판하신다는 내용입니다.
세 번째 환상 : 측량줄을 든 사람이 예루살렘을 측량하는 장면으로, 예루살렘의 회복과 번영을 예고합니다.
네 번째 환상 : 대제사장 여호수아가 더러운 옷을 벗고 정결한 옷을 입는 장면으로, 이스라엘의 죄 사함과 정결을 상징합니다.
다섯 번째 환상 : 순금 등잔대와 두 감람나무로, 성전 재건과 성령의 역사를 상징합니다.
여섯 번째 환상 : 날아다니는 두루마리로, 악을 심판하는 하나님의 말씀을 나타냅니다.
일곱 번째 환상 : 에바 가운데 있는 여인으로, 악이 바벨론으로 옮겨짐을 상징합니다.
여덟 번째 환상 : 네 병거가 온 땅을 순찰하는 장면으로, 하나님의 전능하신 통치를 상징합니다.
주요 주제와 신학적 의미
성전과 예배의 회복
스가랴서는 단순한 성전 건축에 그치지 않고,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과 정결한 예배의
회복을 강조합니다.
여호수아 대제사장의 정결 예식(3장)은 이스라엘의 영적 상태와 하나님이 베푸시는 은혜의 상징으로,
제사장의
중보 역할이 정결하게 회복됨을 보여줍니다.
이는 장차 올 대제사장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모형적 사건으로 해석됩니다(히 7장).
메시아 예언과 이중적 성취
스가랴는 메시아에 대한 다양한 예언을 담고 있습니다.
9:9은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
사건과 직결되며,
12:10은 십자가에서 찔림을 받은 주님을 바라보게 되는 회개의 날을 묘사합니다.
이 예언들은 1차적으로는
포로 귀환 시대의 희망을 위한 메시지이지만,
궁극적으로는 신약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성취됩니다.
이는 "이미"와 "아직"이라는
종말론적 패턴 속에서 해석해야 하며,
스가랴는 구약 중에서 신약의 예수 그리스도와 가장 깊이 연결된 예언서를 구성합니다.
성령의 역사
스가랴 4:6의 말씀,
"힘으로 되지 아니하며 능으로 되지 아니하고 오직 나의 영으로
되는이라"는 말씀은
하나님의 구속 역사가 인간의 힘이 아닌 성령의 역사임을 천명합니다.
이는 초대교회에서 성령 강림 사건을 통해
하나님의 나라가 확장된 것과 연결되며,
스가랴의 예언은 성령론적 기초를 제공합니다.
여호와의 날과 종말론
스가랴 14장에 등장하는 '여호와의 날'은 고대의 심판 개념이 종말론적으로 재해석된
장입니다.
하나님은 악을 심판하시고, 예루살렘을 회복시키시며, 열국을 심판한 후 만국이 예루살렘에 와서 절기를 지킬 것이라
예언됩니다.
이는 요한계시록 21-22장의 새 예루살렘,
그리고 스가랴 14:8에 등장하는 생명수의 강과 연결되며,
스가랴는
구약의 종말론적 희망이 신약에 이르러 어떻게 실현될지를 예시합니다.
이방에 대한 구속과 선교적 확장성
스가랴서는 유다만이 아닌 열방의 회복에 대한 비전을 담고 있습니다.
2:11에서는
"많은 이방 사람들이 그 날에 여호와께 속하여 그의 백성이 될 것이요"라고 하며,
하나님의 구원이 이스라엘을 넘어 열방에게로
확장됨을 보여줍니다.
이는 아브라함 언약(창 12:3)의 성취이며, 교회 시대의 선교적 사명을 예표합니다.
거룩과 정결에 대한 강조
스가랴서는 제사장적 정결함과 공동체의 거룩함을 반복하여 강조합니다.
이는 예배의
핵심이 단지 형식이 아니라 정결한 중심에 있음을 보여줍니다.
13장에서는 죄와 더러움을 씻는 샘이 예루살렘에 열릴 것을 말하는데,
이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흘러나온 보혈의 은혜와 연결됩니다.
거룩은 구속받은 자의 삶의 표지이며,
스가랴는 그 거룩이
하나님 나라의 도래를 위한 필수 조건임을 선포합니다.
결론 : 신약을 준비하는 구약의 거대한 문
스가랴서는 구약 선지서 중에서도 가장 풍부한 종말론과 메시아적 예언을 담고 있으며,
신약의 복음서와 요한계시록에 깊이 연결된 본문입니다.
단지 포로기 이후 유다 공동체의 회복을 넘어서, 구속사의 전개와 그리스도를
통한 완성, 그리고 하나님 나라의 궁극적 도래를 바라보게 합니다.
따라서 스가랴서는 성경신학적으로 단절이 아닌 연속의 계시를 보여주는 책이며,
구약의
마지막에서 신약의 시작을 준비하는 통로로서의 중요한 위치를 점하고 있습니다.
스가랴의 메시지는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도 여전히
유효하며, 회복과 거룩, 그리고 장차 오실 메시아에 대한 소망을 새롭게 하도록 이끌어 줍니다.
3.대제사장 여호수아의 관 (6장 9-15절): 스가랴는 여호수아에게 관을 씌우며, 그가 메시아의 예표가 될 것임을 예언합니다.
4.금식에 대한 질문과 응답 (7-8장): 백성들이 금식에 대해 질문하자, 하나님은 진정한 회개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장차 다가올 축복을 약속하십니다.
두 번째 부분: 메시아와 종말에 관한 예언 (9-14장)
1.여호와의 심판과 구원 (9-11장): 이 부분은 주변 민족들에 대한 심판과 이스라엘의 구원을 예언합니다. 특별히 9장 9절에서 의와 구원을 가진 왕이 겸손하게 나귀를 타고 오신다는 예언은 예수 그리스도의 예루살렘 입성을 예고한 구절로 유명합니다.
2.이스라엘의 회복과 메시아 (12-14장): 이 부분은 종말에 관한 예언으로, 예루살렘의 회복과 구원, 메시아의 통치를 다룹니다.
12장: 하나님께서 예루살렘을 보호하시고, 모든 민족을 심판하실 것을 예언합니다.
13장: 이스라엘의 정결과 회복을 예언하며, 거짓 선지자들과 우상 숭배가 제거될 것을 예고합니다.
14장: 여호와의 날에 일어날 사건들을 예언하며, 온 세계가 하나님을 예배할 것을 예고합니다.
스가랴의 8개 환상과 10개 예언
스가랴(여호와께서 기억하신다)
1. 구약성경의 39권의 중 38번째 책
2. 주전 520년경 기록되었으니 지금부터 2,540년전의 책
3. 14장으로 기록된 책은 8개의 환상과 예수 그리스도의 초림과 재림이 기록된 난해한 책
스가랴 1~8장 : 8개의 환상
스가랴 9~10장 :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 예언
스가랴 12~14장 : 예수 그리스도의 초림 예언
스가랴서의 예언과 성취
① (550년 후 성취) 예수 그리스도의 초림에 대한 나귀 새끼의 예언은 문자적으로 성취되었다 (슥 9:9)
② (550년 후 성취) 은 30개에 팔릴 것이 문자적으로 상취되었다 (슥 11:12)
③ (550년 후 성취) 그것으로 토기장이의 밭을 산 것도 문자적으로 성취되었다 (슥 11:13)
④ (590년 후 성취) 그들이 메시아를 거절하므로 여러 나라에 흩어질 것이다, 디아스포라 (슥 7:11~14)
⑤ (2468년 후 성취) 여러 나라에 흩어졌던 그들이 예루살렘으로 돌아 올 것이다 (슥 8:1~13)
⑥ (2540년 후 성취) 예루살렘은 모든 민족들의 취하는 잔이 되고 무거운 돌이 된다 (슥 12:2~3)
⑦ (미성취) 이방 나라들이 예루살렘을 치러 올 것이다 (슥 12:3~9, 14:12~15)
⑧ (미성취) 이스라엘 큰 애통으로 회개하고 메시아에게 돌아올 것이다 (슥 12:10~13:1)
⑨ (미성취) 주께서 예루살렘 동쪽 감람산에 재림하실 것이다 (슥 14: 4~5)
⑩ (미성취) 이방 나라들이 초막절을 지키러 에루살렘으로 올라올 것이다 (슥 14:16~21)
스가랴 핵심 요약 - 회복과 메시야의 환상을 본 선지자
📖 스가랴서 요약 – “회복을 격려한 환상의 선지자”
📘 영어 제목: Zechariah
✡️ 히브리어 원어: זְכַרְיָה (Zekharyah) — “여호와께서 기억하셨다”
🕊 복음 중심 한 문장 요약
하나님은 포로에서 돌아온 백성에게 회복의 소망을 주시며, 장차 오실 메시야를 통해 완전한 구원을 이루실 것을 약속하신다.
성전 재건을 넘어, 메시아를 향한 약속: 스가랴서 핵심 요약
스가랴서는 구약성경에서 가장 난해하고 신비로운 예언서 중 하나입니다. 학개서와 마찬가지로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온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어졌지만, 그 메시지는 성전 재건을 넘어 미래에 오실 메시아와 종말에 대한 예언까지 담고 있습니다.
1. 배경: 돌아온 백성과 멈춰버린 희망
학개서가 백성들의 눈앞에 놓인 현실(성전 건축)을 다뤘다면, 스가랴서는 그들이 놓쳐버린 영적인 비전에 초점을 맞춥니다. 백성들은 포로에서 돌아왔지만, 초라한 현실 속에서 희망을 잃어가고 있었습니다. 바로 이때 하나님은 스가랴를 통해 여덟 가지 환상과 함께 강력한 메시지를 전달하십니다.
2. 여덟 가지 환상: 희망을 주는 비전 (1-6장)
스가랴서의 핵심은 여덟 가지 환상에 담겨 있습니다. 이 환상들은 모두 하나님의 보호와 회복, 그리고 미래에 대한 희망을 약속합니다.
* 첫 번째 환상 : 네 명의 기마병 (1:7-17)
* 메시지 : 하나님께서 이방 민족들의 죄를 심판하시고, 예루살렘을 회복시키실 것을 약속하십니다.
* 두 번째 환상 : 네 뿔과 네 대장장이 (1:18-21)
* 메시지 : 이스라엘을 괴롭혔던 모든 대적들을 멸하실 것을 약속하십니다.
* 세 번째 환상 : 측량줄 (2:1-13)
* 메시지 : 예루살렘이 다시 거대하고 영광스러운 도시가 될 것이며, 하나님이 그 성읍의 보호자가 되실 것을 보여줍니다.
* 네 번째 환상 : 대제사장 여호수아 (3:1-10)
* 메시지 : 더러운 옷을 입은 대제사장 여호수아의 죄를 깨끗하게 하십니다. 이는 죄 사함을 받은 이스라엘의 모습을 상징합니다.
* 다섯 번째 환상 : 순금 등잔대와 두 올리브 나무 (4:1-14)
* 메시지 : 성령의 능력으로 성전 재건이 완성될 것을 약속하십니다. "힘으로 되지 아니하며 능력으로 되지 아니하고 오직 나의 영으로 되느니라"는 유명한 말씀이 여기에 나옵니다.
* 여섯 번째 환상: 날아가는 두루마리 (5:1-4)
* 메시지 : 이스라엘 백성 가운데 있는 죄와 저주가 제거될 것을 예언합니다.
* 일곱 번째 환상 : 에바(곡식 통) 속의 여인 (5:5-11)
* 메시지 : 죄의 상징인 여인이 바벨론으로 옮겨지는 모습을 통해, 이스라엘에서 죄악이 완전히 제거될 것을 약속합니다.
* 여덟 번째 환상 : 네 병거 (6:1-8)
* 메시지 : 하나님이 모든 땅을 다스리시는 통치자이심을 보여줍니다.
3. 메시아 예언과 미래의 소망 (9-14장)
스가랴서의 후반부는 놀라운 메시아 예언들로 가득합니다.
* 겸손한 왕: 예수님이 어린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것을 예언합니다. (스가랴 9:9)
* 배신당한 목자: 예수님이 은 삼십에 팔리실 것을 예언합니다. (스가랴 11:12-13)
* 찌름을 당한 자: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상징합니다. (스가랴 12:10)
이러한 예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성취되었으며, 스가랴서가 단순히 이스라엘의 역사를 넘어 온 인류를 위한 구원의 메시지를 담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4. 정리: 스가랴서가 오늘날 우리에게 주는 메시지
스가랴서는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의 약속을 굳게 믿으라고 권면합니다. 우리 눈에 보이는 현실이 아무리 초라하더라도, 하나님은 우리를 보호하고 계시며, 성령의 능력으로 모든 것을 이루실 것입니다. 또한 스가랴서는 우리에게 궁극적인 소망이 예수 그리스도에게 있음을 분명히 보여줍니다.
이처럼 스가랴서는 하나님 나라의 완성을 향해 나아가는 거대한 비전과 희망을 우리에게 전하고 있습니다.
📚 스가랴서 간단 요약, 무너진 성전을 다시 세우는 희망의 메시지
스가랴서는 학개와 동시대 인물로,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온 유다 백성에게 성전 재건을 독려하며, 하나님의 회복의 약속과 장차 오실 메시야에 대한 환상을 전한 책입니다.
이 책은 두 부분으로 나뉘며, 전반부(1–8장)는 성전 재건과 회복에 대한 환상과 메시지, 후반부(9–14장)는 미래의 구원과 종말론적 예언, 메시야의 통치에 대한 예언을 담고 있습니다.
1. 포로 귀환 백성을 향한 격려
성전 재건이 중단된 상황에서, 스가랴는 “여호와께로 돌아오라, 그리하면 내가 너희에게 돌아가리라”(1:3)는 말씀으로 시작합니다.
그는 총 여덟 개의 환상을 통해 성전 재건이 하나님의 계획 안에 있으며, 스룹바벨과 여호수아를 통해 하나님이 회복을 이루실 것을 선포합니다.
> “만군의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힘으로 되지 아니하고 능으로 되지 아니하고 오직 나의 영으로 되느니라” (스가랴 4:6)
2. 메시야에 대한 환상과 예언
스가랴는 특별히 메시야에 대한 풍성한 예언으로 유명합니다.
겸손하게 나귀를 타고 오시는 왕 (9:9)
은 삼십으로 팔린 목자 (11:12–13)
찔림을 받는 자 (12:10)
죄를 씻는 샘의 열림 (13:1)
감람산 위에 서시는 여호와 (14:4)
이 모든 예언은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와 십자가 사건, 재림을 예표하고 있습니다.
📖 장별 요약
장 내용 요약
1장 회개 촉구, 첫 환상: 말탄 자의 환상
2장 측량줄 환상: 예루살렘의 회복과 보호
3장 대제사장 여호수아 정결케 함 (그리스도의 예표)
4장 금촛대 환상: 성전 재건은 성령의 능력으로
5장 날아가는 두루마리, 에바 속 여인 환상
6장 병거 환상, 여호수아의 관 씌움 (왕과 제사장의 예표)
7장 외식적인 금식에 대한 책망
8장 예루살렘의 회복과 평강의 약속
9장 이방 나라 심판, 나귀를 타신 왕의 예언
10장 이스라엘의 회복과 목자의 부재
11장 악한 목자에 대한 심판, 은 삼십 예언
12장 예루살렘의 구원과 찔린 자를 바라봄
13장 죄를 씻는 샘, 목자가 치심
14장 여호와의 날, 예루살렘의 궁극적 승리
✝ 복음 메시지 포인트
하나님은 과거를 기억하시며, 약속하신 구속을 반드시 이루신다.
예수 그리스도는 스가랴의 모든 메시야적 환상의 성취이시다.
성전은 건물이 아니라, 성령으로 거듭난 공동체의 회복이다.
오직 하나님의 영으로만 진정한 회복과 사명이 완성된다 (슥 4:6)
🙏 삶의 적용
나는 내 힘으로 하나님의 일을 하려 하고 있지 않은가?
하나님의 회복 약속을 기다리며 믿음으로 순종하고 있는가?
메시야 예언의 성취 앞에 나는 감사와 경외로 반응하고 있는가?
스가랴의 8개의 환상
환상 1 : 온 땅을 돌아보는 말들(감찰하시는 하나님)
환상 2 : 네 뿔과 네 일꾼들(하나님의 백성을 괴롭히는 자들과 그들을 심판하시는 하나님)
환상 3 : 측량줄을 지닌 사람(하나님의 백성을 측량하시는 하나님)
환상 4 : 여호수아와 제사장의 옷(정결케 하시는 예수 그리스도)
환상 5 : 촛대와 두 올리브나무(성령의 기름으로 꺼지지 않은 등잔)
환상 6 : 날아다니는 두루마리(범죄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
환상 7 : 에바 속의 여자(디아스포라 예언)
환상 8 : 네개의 전차(네 개의 임무)
PART I
1. 환상 1 : 온 땅을 돌아보는 말들 (슥 1:7~17)
여호와의 전지전능은 우주적이고 지구적인데 거기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을 알고 계신다
특히 그의 백성의 회복에 관심을 가지신다
붉은 말과 자줏빛 말과 백말 등 여러 말들이 있는데 말을 탄 자들의 임무는 세상 전역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살피고 보고하는 일이다
세상은 평온한 듯 보였지만 예루살렘의 성전건축은 중단되고 영적 나태함에 빠진 백성들에게 회개를 촉구하고 성전건축을 격려한다
환상 2 : 네 뿔과 네 명의 대장장이 (슥 1:18~21)
네 뿔은 이스라엘은 대적하고 괴롭히는 사방의 왕들을 의미한다
넷이란 세상의 네 모퉁이 즉 지구 전체를 총체적으로 상징한다
역사적으로 앗시리아, 이집트, 바벨론, 메대바사, 헬라, 로마 등이다
네 명의 대장장이는 주의 백성을 괴롭히는 제국과 왕들을 심판하는 도구이다
하나님은 악한 권세자들을 두고만 보시지 않으시고 반드시 심판하신다
환상 3 : 측량줄을 지닌 사람 (슥 2:1~13)
한 사람이 자기 손에 측량줄을 잡고 있었다
"어디로 가십니까?"
"예루살렘을 재어서 그 너비와 길이가 얼마나 되는지 알아보러 간다"
측량줄이 예루살렘의 성전과 성벽재건과 관계 있다면 이스라엘의 회복을 상징할 것이다
또한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의 불성벽이 되어 주실 것이며 그의 눈동자처럼 보호하실 것이다
이는 성도들에게도 같은 보호막이 되어 주실 것이며 그들의 중심과 삶이 측량되어질 것이다
환상 4 : 여호와 앞에 선 여호수아와 새싹(슥 3:1~10)
네 번째 환상은 여호수아가 천상의 어전회의장에 서 있다
더러운 옷을 입은 대제사장 여호수아가 여호와 앞에 서 있고 사탄이 고발하는 환상이다
여호수아는 죄로 더럽혀진 이스라엘 민족과 성도들을 상징한다
여호수아는 하나님의 명령으로 깨끗한 관과 아름다운 옷을 입음으로써 정결함을 회복한다
사탄이 여호수아를 참소할 때 여호수아를 변호하는 이는 예수 그리스도시며 그를 통하여 정결해 질 수 있다
새 싹과 세운 돌은 메시아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한다
환상 5 : 금촛대와 두 올리브나무 (슥 4:1~14)
![]()
금촛대는 스룹바벨 성전, 교회와 성도를 상징하는데 일곱개의 등잔은 기름그릇에 대롱으로 연결되어 자동으로 기름이 보충된다
등잔의 기름은 성령을 상징하고 성령충만은 세상을 밝히는 빛이 된다
두 올리브나무는 온 세상을 다스리는 여호와를 섬기는 기름 부음을 받은 두 사람이다
대제사장 여호수아와 총독 스룹바벨을 의미한다고 하지만 구약과 신약, 12지파와 신약교회, 두 증인 등을 다양한 견해가 있다
중요한 것은 교회와 신자들의 등잔의 불이 꺼지지 않도록 성령으로 충만해 지는 것이다
환상 6 : 날아다니는 두루마리 (슥 5:1~4)
날아다니는 양탄자처럼 길이 9m, 폭이 4.5m의 큰 두루마리가 날아 다닌다
두루마리의 크기는 성전의 성소 면적과 똑같았다
이 두루마리는 온 세계위를 날아 다니면서 범죄한 사람을 찾아 그 안에 기록된 죄를 짓는 자에게는 저주와 벌을 내렸다
두루마리의 양편에 써있는 글이 다음과 같다
날아다니는 두루마리는 범죄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을 상징한다
"도둑질하는 자는 모두 없어질 것이다"
"거짓 맹세하는 자도 모두 없어질 것이다"
당시 도둑질과 거짓맹세는 바벨론 포로에서 귀환한 자들의 대표적인 죄였다
이 두 죄는 십계명을 요약한 죄이기도 하다
죄악된 삶은 성령이 거하는 성전이나 하나님의 택한 백성에게 어울리지 않는 것이다
그러나 믿음의 공동체에도 범죄한 자들이 활보하며 내부적인 부패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음을 상기시킨다
환상 7 : 에바 속의 여자 (슥 5:5~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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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바는 곡식의 양을 재는 되와 같은 측정도구로 범죄의 양을 재는 기준으로 쓰였다
에바의 크기를 속여 부당한 이익을 취하는 경우가 있었다
이스라엘 백성의 범죄를 측정하여 또다시 이방땅으로 쫓겨 가게 될 것을 예언하고 있다
그들은 약속의 땅에서 쫓겨나 디아스포라가 되어 세상을 떠돌아 다녔다
환상 8 : 네개의 전차 (슥 6: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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놋쇠로 된 두 산 사이에서 네 대의 전차가 나온다
네 대는 네 뿔, 네 대장장이, 네 바람처럼 온 세상 사방을 의미한다
붉은 말, 검은 말, 흰 말, 얼룩진 힘센 말은 요한계시록의 네 개의 인의 임무와 유사하다
전쟁, 기근, 기만, 전염병을 상징한다
PART II
금식에 대한 질문 (슥 7: 1~14)
스가랴가 1~6장에 기록된 8가지 환상을 본 지 2년이 지났다
벧엘 사람들이 사절단을 보내 스가랴에게 금식에 대해 질문을 했다
"우리가 여러 해 동안 금식을 해 왔는데 올해도 금식을 해야 합니까?"
그들이 선지자에게 받은 네 가지 응답은 위선적인 금식보다 순종을 원하신다는 것이다
공정한 재판, 사랑과 자비, 억누르지 말 것, 서로 해치지 말 것에 대한 종교의 핵심 메시지를 받았다
예루살렘 회복에 대한 약속 (슥 8:1~23)
예루살렘은 회복되어 사랑과 공의가 넘치는 도시가 될 것이며 슬픔이 사라지고 온 세계 만민에게 구원을 전하는 성읍이 될 것이다
PART III
예수 그리스도의 초림과 심판 (슥 9장~11장)
그는 공의로우시고 구원을 베푸실 것이며 겸손하여 나귀 새끼를 타실 것이다
메시아의 성품은 공의, 구원의 원천, 겸손하시다
예수 그리스도의 초림에 대한 나귀 새끼의 예언은 문자적으로 성취되었다
은 30개에 팔리고 그것으로 토기장이의 밭을 산 것도 문자적으로 성취되었다
그의 사역은 크게 4 가지로 언급되고 있는데
메시아는 평화를 선포할 것이며, 구원하실 것이며, 재림시에 거짓 목자들을 멸하실 것이고, 이스라엘 백성을 다시 모으실 것이다
이스라엘에 대한 심판 : 유대인들이 메시아를 배척한 결과로 겪게 될 무서운 심판(예루살렘의 멸망)을 예언하였다
PART IV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 (슥 12장~14장)
마지막 때에 이르러 예루살렘은 모든 민족들의 취하는 잔이 되고 무거운 돌이 된다
이 예언은 우리 시대에 성취되는 것을 목격중이다
이스라엘 백성들 가운데 1/3이 남고 2/3는 멸망당한다
그 남은 1/3도 불 속에 던져 연단받고 시험받아 정결케 할 것인데 짐승의 통치때 박해 받을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마침내 세계의 연합군이 예루살렘을 치러 올 것이고 이스라엘은 회개하며 돌아올 것이다
그러나 아마겟돈 전쟁은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으로 승리할 것이다
예루살렘을 치러 왔던 이방 나라를 패전할 것이고 메시아 왕국이 완성될 것이다
모든 나라는 여호와를 섬기며 예루살렘으로 초막절을 지키러 매년 올라올 것이다
온 세상은 여호와께 거룩하게 구별되어 드려질 것이다
참고자료
1. 히브리어,헬라어 원문 성경(큠란)
2. 엑스포지멘터리 (EM)
10월 11일(토) 스가랴 5-8장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진실과 화평을 사랑하라(8:19)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노라 사월의 금식과 오월의 금식과 칠월의 금식과 시월의 금식이 변하여 유다 족속에게 기쁨과 즐거움과 희락의 절기가 되리니 오직 너희는 진실과 화평을 사랑할찌니라.
This is what the LORD Almighty says: "The fasts of the fourth, fifth, seventh and tenth months will become joyful and glad occasions and happy festivals for Judah. Therefore love truth and peace."
10월 10일(금) 스가랴 1-4장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나의 신으로 되느니라(4:6)
그가 내게 일러 가로되 여호와께서 스룹바벨에게 하신 말씀이 이러하니라 만군의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이는 힘으로 되지 아니하며 능으로 되지아니하고 오직 나의 신으로 되느니라.
So he said to me, "This is the word of the LORD to
Zerubbabel: 'Not by might nor by power, but by my Spirit,' says the LORD
Almighty.
이 구절은 성전 재건이라는 어려운 과업 앞에서 좌절할 수 있는 스룹바벨에게 주어진 메시지이며,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지할 것을 당부하고 있습니다.
- 인간의 한계를 넘어선 하나님의 능력 : 스룹바벨이 맞닥뜨린 성전 재건이라는 거대한 과업은 인간의 힘과 능력으로 달성할 수 없음을 분명히 합니다.
- 하나님의 신(성령)의 중요성 : 이 거대한 과업을 이루는 것은 오직 하나님의 영, 즉 성령의 능력으로 가능하다는 것을 가르칩니다.
- 하나님에 대한 전적인 의지 : 큰 산과 같은 어려움이 있더라도 하나님이 평지가 되라고 명령하시면 그대로 될 것이므로, 하나님을 의지하고 신뢰해야 함을 강조합니다.
- 성취의 약속 : 큰 산과 같은 장애물 앞에서도 성전 재건의 머릿돌을 놓을 때 은총이 가득할 것이며, 반드시 성전이 완성될 것이라는 예언이 담겨 있습니다.
스가랴의 다섯번째 환상 부분입니다.
어떤 환상입니까? 금촛대와 두 감람나무의 환상입니다. 스가랴 선지자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하여 성전건축의 꿈과 이스라엘의 미래 비전을 계속적으로 심어주었습니다.
오늘 말씀에는 금 촛대와 두 감람나무의 환상이 나오고 있습니다. 그리고 한 사람의 이름이 거론되고 있는데 스룹바벨이라는 이름입니다. 스룹바벨이란 이름은 바벨론의 ㅜ예, 후손이란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곧 그는 바벨론 포로 시대에 태어난 자입니다. 스가랴 3장에도 한 사람의 이름이 거론됩니다. 그는 여호수아입니다.
여호수아는 대제사장이요 스룹바벨은 총독입니다. 즉 다시 말하면 한 사람은 종교지도자요 또 한사람은 정치 지도자인 것입니다.
성전 사역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두 사람을 언급하고 있는 것입니다. 성전 건축의 실무를 담당한 사람들입니다. 성전건축을 해야 한다고 외친 사람은 학개와 스가랴이지만 그 말씀을 듣고 백성을 지도하여 실천에 옮겨야 할 사람이 바로 여호수아와 스룹바벨이었던 것입니다.
당시 스룹바벨은 여러 가지 내외적으로 정치적인 압박과 방해를 받고 있었습니다. 또한 성전건축으로 인한 많은 고민과 번민도 있었습니다. 그로인해 스룹바벨은 밤새워 고민하였을 것입니다. 그 때 하나님께서 귀한 환상을 스가랴를 통하여 스룹바벨에게 주셨습니다.
5~9을 보면 스룹바벨이 큰 산을 펴이로 만드는 역사를 이뤄내게 됩니다. 큰 산은 이스라엘 민족의 장래를 방해하는 큰 방해요소들입니다. 물론 일차적으론 성전공사를 방해하는 대적들입니다. 2차적으론 모든 악의 세력들입니다. 그런 방해하는 산 같은 것들을 그는 평지로 만드는 사역을 여호수아 대제사장과 함께 하게 됩니다. 거기엔 성령의 도우심이 함께 합니다.
4장 6절을 보십시오!
“그가 내게 대답하여 이르되 여호와께서 스룹바벨에게 하신 말씀이 이러하니라 만군의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이는 힘으로 되지 아니하며 능력으로 되지 아니하고 오직 나의 영으로 되느니라.” 고 하십니다.
네 힘으로 되는 것이 아니다, 네 능으로 되는 것이 아니다, 오직 성령의 능력으로 이루어 지는 것이다! 성전의 건축도 하나님의 신으로 하는 것입니다. 너는 염려하지 말아라 내가 한다 내가 하는 것이다!
여러분! 하나님의 일은 물론 우리의 힘도 필요하지만 가장 큰 힘이나 원동력은 오직 하나님의 성령의 능력으로 되어집니다. 그렇습니다.
성경은 말씀합니다. “너는 범사에 그를 인정하라 그러면, 너의 길을 지도 하시리라!”하십니다.
먼저 하나님은 비전을 허락하여 주십니다. 우리는 비전을 따라 갈 뿐입니다. 내가 하는 것이 아닙니다.
본론)
1. 스가랴가 환상 속에서 본 것은 ‘순금 등잔대와 두 감람나무’였다 했습니다. 본문 2절에는 먼저 이 순금 등잔대의 모양이 묘사되어 있습니다. "... 순금 등잔대가 있는데 그 위에는 기름 그릇이 있고 또 그 기름 그릇 위에 일곱 등잔이 있으며 그 기름 그릇 위에 있는 등잔을 위하여 일곱 관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일곱은 완전을 상징하는 숫자입니다. 본문에서 조금 내려와 10절 하반절에 보면 "이 일곱은 온 세상에 두루 다니는 여호와의 눈이라"고 하나님께서 말씀해주셨다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일곱 개의 등잔이 있는 이 순금 등잔대는 다름 아닌 온 세상 모든 것을 보고 살피시는 하나님 자신을 상징하는 것이었습니다.
2. 본문 3절에서는 등잔대의 좌우 곁에 두 감람나무가 서있었는데 그 두 감람나무의 뜻은 밑의 14절에서 "기름 부음 받은 자 둘"이라고 해석되었습니다. 12절의 "금기름을 흘리는 두 금관 옆에 있는 이 감람나무 두 가지"라는 말은 그 두 감람나무가 하나님의 기름 부으심을 받은 두 사람을 가리키는 것임을 뒷받침해 줍니다.
이스라엘의 왕과 대제사장은 하나님으로부터 기름부음을 받음을 받아야 공직에 취임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이 환상은 정치적인 지도자 스룹바벨과 영적, 신앙적 지도자 여호수아를 암시하는 것이라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실제로 에스라서 5장과 6장의 기록을 보면 학개와 스가랴 두 예언자의 효과적인 도움을 받은 총독 스룹바벨과 대제사장 여호수아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끌며 예루살렘 성전 재건을 완성한 사실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가 주목하고자 하는 것은 본문 6절에서 읽는 대로 하나님께서 스룹바벨에게 하셨다는 말씀, 즉 "이는 힘으로 되지 아니하며 능력으로 되지 아니하고 오직 나의 영으로 되느니라" 하는 말씀입니다.
"오직 나의 영으로 되느니라", 즉 그 어떤 위대한 지도자라 할지라도 그의 인간적인 힘을 신뢰하지 말고 하나님을 의지해야 함을 가르치는 말씀이라는 것입니다.
3. 에스라서 4장을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성전을 재건하려 할 때에 방해꾼들이 나타납니다. 에스라서 4: 1절을 보면, "유다와 베냐민의 대적이 사로잡혔던 자의 자손이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를 위하여 전을 건축한다 함을 듣고" 포로에서 돌아온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전을 건축한다는 소리를 예루살렘 지역에서 살고 있던 사람들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4:4절의 말씀을 보면 "이로부터 그 땅 백성이 유다 백성의 손을 약하게 하여 그 건축을 방해하되" 훼방합니다.
어떻게 방해를 놓냐면 그 당시의 전 세계의 패자였던 페르시아 왕 아닥사스다 왕께 '아무래도 지금 이스라엘 백성들이 왕을 모반하려는 시도를 하려는 것 같습니다'라는 무모한 고발 참소를 합니다. 그래서 어떤 결정이 내려집니까? 4장 21절을 보니까 " 이제 너희는 명을 전하여 그 사람들로 역사를 그치게 하여 그 성을 건축지 못하게 하고 내가 다시 조서 내리기를 기다리라" 그래서 성전 재건이 무기한 연기되는 지경에 이르고 맙니다.
그들의 실패의 가장 큰 이유는 하나님에 대한 사랑과 열정이 부족하다는 점이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함께하신다는 믿음의 부분적 결여였습니다. 부족한 믿음 때문이었습니다. 충전이 된 밧데리가 거의 닳게되면 빌빌 거리며 기계가 잘 작동하지 않습니다. 면도기나 전동칫솔 등을 써보면 그렇습니다. 결국 하나님의 영이 충만하지 않으면 우리도 신앙에서 승리하기 어렵다는 것이지요. 고로 하나님의 영이 충만히 임하도록 우리는 기도하고 겸손해져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교만으로 패망하게 됩니다.
신명기 8:17과 18절의 말씀에는 " 또 두렵건대 네가 마음에 이르기를 내 능과 내 손의 힘으로 내가 이 재물을 얻었다 할까 하노라 네 하나님 여호와를 기억하라 그가 네게 재물 얻을 능을 주셨음이라 이같이 하심은 네 열조에게 맹세하신 언약을 오늘과 같이 이루려 하심이니라" 고 증거하고 있습니다.
'내 능력과 내 손으로 이것을 이루었다'이런 교만과 자만심을 갖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뜻은 우리에게 재물 얻을 능력을 누가 주었느냐? 너에게 준 건강, 너의 지혜, 그 근원이 어디에 있느냐? 이것을 잊지 말아라-는 것입니다.
5. 오늘 본문에서 등잔에 금기름이 나옵니다. 이 기름이 바로 하나님의 성령을 상징합니다. 우리 심령은 하나님의 성령의 인도를 받고 성령의 충만을 늘 사모해야 합니다. 이제 먹고 살만한데 뭔 하나님이냐? 이제 부족함이 없는데 무슨 성령충만이냐? 고 하면 안됩니다. 사탄은 하나님이 필요없다고 느낄 때 우리에게 다가옵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이 자랑해야 할 것은 내가 무엇을 어떻게 했다 가 아니라, 하나님이 나를 도와 주셨는가여야 합니다. 이것은 나의 힘으로도 나의 능으로 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의 영, 성령으로 되었다 라고 고백하는 길입니다.
[7-10절] 큰 산아, 네가 무엇이냐? 네가 스룹바벨 앞에서 평지가 되리라. 그가 머릿돌을 내어놓을 때에 무리가 외치기를 은총, 은총이 그에게 있을지어다 하리라 하셨고 여호와의 말씀이 또 내게 임하여 가라사대 스룹바벨의 손이 이 전의 지대를 놓았은즉 그 손이 또한 그것을 마치리라 하셨나니 만군의 여호와께서 나를 너희에게 보내신 줄을 네가 알리라 하셨느니라. 작은 일의 날이라고 멸시하는 자가 누구냐? 이 일곱은 온 세상에 두루 행하는 여호와의 눈이라. 다림줄이 스룹바벨의 손에 있음을 보고 기뻐하리라.
하나님께서는 스룹바벨의 손을 통해 성전의 기초와 머릿돌을 놓게 하셨습니다. 사람들은 “은총, 은총이 그것(라흐)(KJV, NASB)에게 있을지어다”라고 외칠 것입니다. 그것은 성전 건축의 일이 하나님의 은혜로 시작되고 완성됨을 고백하고 기원하는 것입니다.
10절의 ‘작은 일들’은 이전의 솔로몬 성전에 비교해서 보잘것없어 보이는 스룹바벨 때의 성전 재건 공사를 가리킵니다. 일곱 등잔은 온 세상에 두루 행하는 여호와의 일곱 영을 가리킵니다.
요한계시록 5:6도, “일곱 눈이 있으니 이 눈은 온 땅에 보내심을 입은 하나님의 일곱 영이더라”고 말햇습니다.
성령께서는 하나님의 영이시며 전지(全知)하신 영이십니다. 성령께서는 온 땅에 두루 행하시며 모든 일을 보시고 행하시며 이루신다.
[11-14절] 내가 그에게 물어 가로되 등대 좌우의 두 감람나무는 무슨 뜻이니이까 하고 다시 그에게 물어 가로되 금 기름을 흘려내는 두 금관 옆에 있는 이 감람나무 두 가지는 무슨 뜻이니이까? 그가 내게 대답하여 가로되 네가 이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느냐? 대답하되 내 주여, 알지 못하나이다. 가로되 이는 기름 발리운 자 둘이니 온 세상의 주 앞에 모셔 섰는 자니라 하더라.
순금등대 좌우의 두 감람나무나 두 가지는 같은 것을 상징한다고 봅니다. 두 감람나무의 두 가지에서 금 기름이, 두 금관을 통하여 흘러 등대의 일곱 등잔에 공급되고 그 등잔은 빛을 냈습니다.
두 감람나무에서 나오는 기름을 금 기름이라고 부른 것은 그 기름의 고귀한 가치를 상징적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그 기름은 분명 성령을 상징합니다.
천사는 그 두 감람나무를 온 세상의 주, 곧 하나님 앞에 모셔 섰는 기름 발리운 자 둘이라고 설명하였다.
구약시대에 기름 발리운 사람은 선지자와 제사장과 왕이었습니다. 여기에서는 먼저 대제사장 여호수아와 총독 스룹바벨을 가리켰다고 보아야 합니다.
그러나 단지 그들 자신을 가리켰다기보다는 그들의 직분과 사역이 예표하는 자를 가리켰다고 볼 수도 있습니다.
그들은 메시아를 예표한 자들이었죠. 메시아께서는 제사장과 왕으로 오실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대제사장들은 예표의 사람들입니다(슥 3:8). 메시아께서 일곱 눈을 가진 돌로 오셔서 친히 고난을 받으시고 죄악을 하루에 제하실 것입니다.
회복된 이스라엘 곧 신약교회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성령의 충만한 공급하심을 받아 세상에 빛을 발할 것입니다.
구약성전이 예표했던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는 진리와 의를 비추는 순금등대와 같습니다. 성전 건립의 일, 곧 성도 개인의 구원과 온전함, 그리고 교회의 건립과 성장과 완성은 참으로 귀하고 가치 있는 일이죠.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작게 보이는 일을 멸시하지 말아야 합니다.
결론)
성전 재건의 일은 사람의 힘으로 되지 않고 오직 성령의 도우심으로 이루어집니다. 씨를 심는 이나 물을 주는 이는 아무것도 아니고 기르시는 이는 오직 하나님뿐입니니다. 성전 건축이나 교회 부흥의 일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로 됩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와 성령의 충만한 은혜만 의지하면서,개인의 성화를 이루고 교회의 성장과 완성을 위해 힘써야만 합니다.
스가랴 요약
스가랴의 이름은 ‘여호와는 기억하신다. 기억하시는 여호와’라는 뜻을 내포하고 있다. 스가랴는 학개와 같은 시대에 활동했으며 학개는 민족의 어른이었지만 스가랴는 젊은 선지자였다. 그는 젊은 날에 소명을 받았고 참담한 현실 앞에서 예루살렘의 과거와 현지와 미래를 보면서 비젼을 바라보았다.
스가랴가 본 이상은 그 당시 참담했던 예루살렘이 중건될 것과 메시야가 와서 나귀를 타고 입성하실 것을 보았다. 또한 마지막 때에 주님께서 심판하시기 위하여 감람산에 재림하실 것을 미리 내다 보았다.
스가랴 선지자도 학개와 같이 성전 건축을 게을리하는 백성들을 독려하는 역할을 맡았다. 학개와 스가랴 선지자의 말에 감동된 백성들은 다시 성전 재건 작업을 시작하였고, 두 달 후에 그 기초를 완성하게 되었다. 스가랴서는 백성들에게 책망하고 꾸중하는 부분이 없다.
시대 상황
- BC 586: 유다 바벨론 느부갓네살 왕에 의해 멸망
- BC 539: 바사가 바벨론을 무너뜨림
- BC 538: 바사의 고레스 왕 유다 백성 귀향 허용
- BC 536: 유다 백성 귀향 후 성전 재건 시작
- BC 535: 위협과 법적인 고소로 성전 건축 중단
- BC 520: 학개의 책망의 메시지로 건축 재개
- BC 516: 성전 재건 완료
스가랴가 본 환상들 (1-6장)
이스라엘은 조상들이 하나님께 불순종과 선지자들의 경고를 무시한 결과 바벨론에 망하고 포로 생활을 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70년의 바벨론 포로 생활을 마치고 예루살렘으로 돌아 왔습니다, 돌아 온 백성에게 스가랴는 조상의 악행을 본받지 말고 회개하라는 경고로 메시지를 시작합니다.
- (1:3) 그러므로 너는 그들에게 말하기를 만군의 여호와께서 이처럼 이르시되 너희는 내게로 돌아오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그리하면 내가 너희에게로 돌아가리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유다 백성과 관련하여 '돌아오라’라는 단어는 그들이 타락한 행실을 바꾸고 새로운 삶으로 하나님께로 돌아와야 함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그들을 “돌이가리라”는 것은 그분께서 그들을 다시 그분의 은총으로 받아들이시고 불쾌함이 아닌 명백한 친절을 베푸실 것임을 의미합니다.[8]
- (1:15) 안일한 여러 나라들 때문에 심히 진노하나니 나는 조금 노하였거늘 그들은 힘을 내어 고난을 더하였음이라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에게 분노하셨던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은 단지, 부모가 자녀의 유익을 위해 그들을 벌하실 뿐입니다. 그런데 나라들은 하나님께서 쓰시는 단순한 도구로서의 역할을 넘어섰습니다. 이스라엘을 완전히 파괴하거나, 벌을 내리기로 예정된 기간을 넘어 그들을 억압하기를 원했습니다. 앗수르(이사야 10:5 등)와 바벨론(이사야 47:6)에 대해서도 비슷한 책망이 있습니다.[9]
8개 환상 (1:7-6:8)
요약표[7]
| 환 상 | 의 미 |
|---|
| 화석류나무 사이의 천사 | 주께서 예루살렘을 다시 축복하신다 |
| 네 뿔과 대장장이 네 명 | 유다를 흩었던 자들은 쫓겨난다 |
| 척량줄을 잡은 사람 | 하나님께서 예루살렘을 불로 보호하실 것이다 |
| 대제사장 여호수아 | 종 싹(The servant the Branch)께서 구원하러 오신다 |
| 등잔대와 두 감람나무 | 주께서 성령으로 이스라엘에게 능력을 주신다 |
| 날아가는 두루마리 | 부정직은 저주받는다 |
| 에바 속의 여인 | 사악함은 제거될 것이다 |
| 네 병거 | 천사를 통해 모든 세상을 심판하신다 |
8개의 환상이 4개의 주제로 대칭 이루고 있다.[10]
- 순찰하는 네 명의 말 탄 자들 (1:8-17, 6:1-6): 하나님께서 감찰하신다
- 이스라엘의 과거 죄, 포로기 상기 (1:18-21, 5:5-11)
- 새 예루살렘 재건 (2:1-13, 5:1-4): 모든 민족의 등불, 그리고 말씀으로 정결케 됨
- 지도자 (3:1-10, 4:1-14): 메시아의 나라 도래
화석류나무 사이의 천사 (1:7-17)
화석류나무 (myrtus communis)
화석류나무 사이에 한 천사가 있고 그 뒤에 붉은 말과 자줏빛 말과 백마가 있는 환상을 봅니다. 그들은 땅을 감찰하기 위해 하나님께서 보내신 자들이라고 천사가 설명합니다. 그들은 땅이 평안하다고 천사에게 보고합니다. 천사는 하나님께 언제 유다 백성에 대한 노를 푸실지 질문합니다. 하나님은 그들을 불쌍히 여기시고 그들에게 복을 주시리라 약속하십니다.
- (1:17) 그가 다시 외쳐 이르기를 만군의 여호와의 말씀에 나의 성읍들이 넘치도록 다시 풍부할 것이라 여호와가 다시 시온을 위로하며 다시 예루살렘을 택하리라 하라 하니라 하나님은 유다에 대한 사랑을 보여주기 위해 그 도시들을 자신의 것으로 부르셨으며, 그 도시들이 귀향하는 자들에 의해 재점유될 뿐만 아니라, 인구가 증가함에 따라 그 범위와 수가 증가할 것이라고 약속하십니다. 이 예언의 항목들의 부분적 성취는 성전 재건, 느헤미야에 의한 예루살렘의 회복, 그리고 아스모네아(Asmonean) 군주들의 통치 하에서 유다의 번영에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마지막 구절에서 추가적인 축복에 대한 힌트가 주어졌지만, 그 축복의 본질은 명확하게 언급되지 않았습니다.[9]
네 뿔과 대장장이 네 명 (1:18-21)
이스라엘을 망하게 한 나라들로 네 뿔과 그 나라들을 망하게 할 대장장이 네 명을 보이십니다.
- (1:21) 내가 말하되 그들이 무엇하러 왔나이까 하니 대답하여 이르시되 그 뿔들이 유다를 흩뜨려서 사람들이 능히 머리를 들지 못하게 하니 이 대장장이들이 와서 그것들을 두렵게 하고 이전의 뿔들을 들어 유다 땅을 흩뜨린 여러 나라의 뿔들을 떨어뜨리려 하느니라 하시더라 두 번째 환상은 첫 번째 환상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으며, 하나님께서 이방 나라들의 자기 안보에 대한 맹렬한 진노를 어떻게 내리실 것인지를 보여줍니다(슥 1:15).
척량줄을 잡은 사람 (2장)
척량줄(Measuring Line)을 잡은 사람이 예루살렘을 측량한다고 합니다. 천사는 스가랴에게 예루살렘은 성곽이 없는 도시가 될 거라고 알려줍니다.
- (2:5) 여호와의 말씀에 내가 불로 둘러싼 성곽이 되며 그 가운데에서 영광이 되리라 예루살렘은 벽이 필요 없을 것이다. 하나님께서 그의 보호자가 되어, 공격으로부터 그를 방어할 뿐만 아니라, 그를 공격하려고 하는 적을 소멸시킬 것이다(신명기 4:24;[11] 시편 68:2[12] 참조).[9]
대제사장 여호수아 (3장)
여호수아가 천사 앞에 사단이 그 오른쪽에 섰는데, 하나님께서 사단을 책망하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여호수아 입고 있는 더러운 옷을 벗기고 아름다운 옷을 입히게 하십니다. 유다의 죄에 대한 용서와 그들의 회복을 상징합니다.
- (3:9)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가 너 여호수아 앞에 세운 돌을 보라 한 돌에 일곱 눈이 있느니라 내가 거기에 새길 것을 새기며 이 땅의 죄악을 하루에 제거하리라 하나님의 일곱 눈(완벽한 감시와 보살핌을 의미함. 일곱은 완벽함을 뜻하는 숫자임)이 이 돌(성전, 메시아) 위에 고정되어 있을 것이라는 약속이라고 해석합니다. 즉, 그분은 그 돌에 대한 목적이 성취될 때까지 결코 눈을 떼지 않으실 것이라는 뜻입니다. “하루에”. 속죄의 날 즉 예수님의 십자가로 이 땅의 죄악이 제거됩니다.[13]
- (3:10)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노라 그 날에 너희가 각각 포도나무와 무화과나무 아래로 서로 초대하리라 하셨느니라 사랑과 친절로, 복음의 동일한 신성한 은혜와 축복에 참여함으로써 이웃이 되는 사람들을 초대합니다. 거룩한 의무와 경건한 교제에 함께 참여하고, 참 포도나무 그늘 아래 앉아 기쁨으로 그 열매를 맛보는 것은 마치 유대에서 사람들이 그늘 아래서 함께 잔치를 벌이고 포도나무와 무화과나무 열매를 먹는 것과 같습니다. 죄책과 불의의 권세가 제거되고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 되면, 우리는 칭의, 거듭남, 그리스도와의 연합의 열매로서 귀중한 특권과 축복을 받습니다.[8]
등잔대와 두 감람나무 (4장)
천사가 스가랴에게 두 감람(올리브)나무에서 기름을 공급받는 금등잔대를 보여줍니다.
- (4:6) 그가 내게 대답하여 이르되 여호와께서 스룹바벨에게 하신 말씀이 이러하니라 만군의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이는 힘으로 되지 아니하며 능력으로 되지 아니하고 오직 나의 영으로 되느니라 두 올리브나무는 유다 총독 스룹바벨과 대제사장 여호수아를 상징합니다. 금등잔대는 성전과 성전을 숭배하는 공동체를 상징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다시 한번 그분의 백성을 통해 성전의 기초를 놓고 그 일을 마무리하실 것이라는 요점을 말씀하셨습니다.[14] 스룹바벨과 여호수아는 유대인들을 지휘하여 성전을 완성하고 유대 국가를 재건할 것이다. 무력으로가 아니라, 인간의 힘으로가 아니라 하나님의 섭리와 은혜의 도움으로 그렇게 할 것이다. 마치 등잔에 기름이 사람의 도움 없이 비밀스럽고 보이지 않는 방식으로 공급되는 것과 같다.[8]
- (4:10) 작은 일의 날이라고 멸시하는 자가 누구냐 사람들이 스룹바벨의 손에 다림줄이 있음을 보고 기뻐하리라 이 일곱은 온 세상에 두루 다니는 여호와의 눈이라 하니라 성경 예언의 정확한 성취는 그것이 하나님으로 부터 왔다는 것에 대한 설득력 있는 증거입니다. 도구가 약하고 가능성이 없어도, 하나님은 종종 그들을 택하여 위대한 일들을 이루십니다. 새벽의 빛을 멸시하지 마십시오. 그것은 점점 더 밝아져서 완전한 날이 될 것입니다. 재건을 마칠 수 없다고 절망했던 사람들은 스룹바벨의 지휘 아래 일이 성사되는 것을 보고 기뻐할 것입니다. 온 땅을 다스리는 동일한 전지전능한 섭리가 특히 교회에 대해 잘 알고 있다는 것은 우리에게 위안이 됩니다. 손에 다림줄을 든 모든 사람은 주님의 눈을 바라보고, 끊임없이 하나님의 섭리를 존중하며, 그 인도에 의지하여 행동하고 순종해야 합니다. 우리의 믿음을 그리스도께 고정시키고, 그분이 자신의 영광스러운 계획에 따라 자신의 일을 수행하고 매일 영적 건물을 완성에 더 가까이 가져오는 것을 봅시다.[15]
- (4:14) 이르되 이는 기름 부음 받은 자 둘이니 온 세상의 주 앞에 서 있는 자니라 하더라 스가랴는 두 올리브나무가 무엇인지 알고 싶어합니다. 왕손 스룹바벨과 제사장 여호수아는 하나님의 영의 은사와 은혜를 받았습니다. 그들은 같은 시대에 살았고, 둘 다 하나님의 일과 봉사에 도구가 되었습니다. 그 둘은 왕과 제사장이라는 그리스도의 직분을 예시합니다. 이 두 직분이 인간의 몸으로 오신 하나님의 인격 안에서 결합됨으로써 은혜의 충만함이 받아들여지고 부여됩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성전을 건축했습니다. 영적으로 그리스도도 그렇게 하십니다. 그리스도는 메시아 즉 기름부음받은 자일 뿐만 아니라, 그의 교회에 좋은 올리브이십니다. 그의 충만함에서 우리는 그 기름을 받습니다. 그리고 성령께서 우리가 받은 기름부음입니다. 올리브나무이신 그리스도로부터, 올리브가지이신 성령에 의해, 은혜의 모든 황금 기름이 믿는 이들에게 흘러가서 그들의 등잔이 타오르게 합니다. 구주의 중보와 은혜를 통해, 지금까지 그의 모든 성도들에게 충분했던 그 충만함에서 공급을 구합시다. 복음 안에서 그를 기다리며, 몸과 혼과 영으로 온전히 거룩해지기를 원합시다.[15]
날아가는 두루마리 (5:1-4)
여섯 번째 환상은 날아가는 커다란 두루마리(Scroll)입니다.
- (5:3) 그가 내게 이르되 이는 온 땅 위에 내리는 저주라 도둑질하는 자는 그 이쪽 글대로 끊어지고 맹세하는 자는 그 저쪽 글대로 끊어지리라 하니 구약과 신약의 성경은 하나님께서 그의 율법과 복음의 위대한 것들을 기록하신 두루마리입니다. 그것은 날아다니는 두루마리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매우 빠르게 달립니다(시 147:15).[16] 이 날아다니는 두루마리에는 죄인들에 대한 하나님의 의로운 진노의 선언이 들어 있습니다.[15]
에바 속의 여인 (5:5-11)
이번에 스가랴가 보는 환상은 에바(Basket, 광주리)에 한 여인이 있고 날개 달린 두 여인이 그 에바를 들어 옮깁니다. 에바는 온 땅에서 그들의 모양(죄)이고[17] 광주리 안에 있는 여인은 악이라고 설명합니다.
- (5:11) 그가 내게 이르되 그들이 시날 땅으로 가서 그것을 위하여 집을 지으려 함이니라 준공되면 그것이 제 처소에 머물게 되리라 하더라 에바 가운데 앉아 있는 여자는 타락한 후기 시대의 죄 많은 유대인을 상징합니다. 스가랴는 그 여인이 들어 있는 에바가 먼 나라로 옮겨지는 것을 봅니다. 이것은 유대인들이 자기들의 땅에서 서둘러 쫓겨나 바빌론에서처럼 먼 나라에 살도록 강요당할 것을 암시합니다.[15] 시날(Shinar): 고대 메소포타미아 남부 지역으로 바벨론을 구약 성서에서 시날 이라고 불렀다(창10:10, 11:2, 14:1, 사11:11, 슥5:11, 단1:2).[18]
네 병거(6:1-8)
네 병거 환상 - 구스타브 도레(Gustave Doré)[19] 작품
두 구리(bronze) 산 사이에서 나오는 네 병거(Chariots)를 봅니다. 병거는 각각 붉은 말들, 검은 말들, 흰 말들, 그리고 얼룩말들이 끕니다. 그들은 하늘의 네 바람으로 세상에 나가 땅을 살핍니다.
- (6:5) 천사가 대답하여 이르되 이는 하늘의 네 바람인데 온 세상의 주 앞에 서 있다가 나가는 것이라 하더라 ‘하늘의 네 바람’은 유대인들에게 친숙한 상징으로 ‘바람’은 종종 죄인들에게 하나님의 뜻을 집행하는 데 사용됩니다(시편 104:4;[20] 시편 148:8;[21] 예레미야 49:36;[22] 다니엘 7:2[23] 참조). 바람은 하나님의 종으로 여겨지며, 하나님의 뜻을 수행하기 위해 그의 명령에 따라 나갑니다.[9]
- (6:8) 그가 내게 외쳐 말하여 이르되 북쪽으로 나간 자들이 북쪽에서 내 영을 쉬게 하였느니라 하더라 문자적으로 해석하면, 이전에는 적들에 대한 심한 불쾌함으로 진노했던(스가랴 1:15) 내 영이, 의로운 보복이 완료되었기 때문에 지금은 쉬고 있다. 어떤 사람들은 다른 곳(전도서 10:4;[24] 잠언 29:11,[25] 후자의 경우, 여기와 마찬가지로 LXX는 θυμός)에서 처럼 “영”을 “분노”라고 생각합니다. 즉 “내 분노를 그 위에 머물게 하였다”로 해석합니다. 요한이 믿지 않는 자에 대해 “하나님의 진노가 그 위에 머물러 있느니라(요 3:36)”라고 말한 것과 같습니다.[13]
여호수아의 면류관 (6:9-15)
그리고 하나님은 스가랴 선지자에게 은과 금으로 면류관을 만들어 여호수아에게 씌우라 말씀하십니다.
- (6:15) 먼 데 사람들이 와서 여호와의 전을 건축하리니 만군의 여호와께서 나를 너희에게 보내신 줄을 너희가 알리라 너희가 만일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들을진대 이같이 되리라 바빌론에서 하나님께 예물을 가지고 온 자들은 이방인들의 표상이 되었는데, 사도들은 이방인들에 대하여 "이제는 전에 멀리 있던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워졌느니라" (에베소서 2:13), "또 오셔서 먼 데 있는 너희에게 평안을 전하시고 가까운 데 있는 자들에게 평안을 전하셨으니" (에베소서 2:17), "이 약속은 너희와 너희 자녀와 모든 먼 데 사람 곧 주 우리 하나님이 얼마든지 부르시는 자들에게 하신 것이라 하고" (사도행전 2:39) 말합니다.[26]
하나님께 순종하라 (7-8장)
환상에 대해서는 마쳤지만 이 책의 계시에 대해서는 아직 다루지 않았습니다. 환상을 더 이상 보지 못하지만 스가랴에게 여전히 “여호와의 말씀이 임했습니다." 백성들이 선지자에게, 그들이 포로로 잡혀 있던 70년 동안 종교적으로 지켰던 엄숙한 금식을 계속해야 할지 묻습니다(슥 7:1-3). 이 질문에 대한 답이 7장과 8장에 나와 있습니다. 이 답변은 한꺼번에 다 주어진 것이 아니라 네 번에 걸쳐 주어지고, 각 담화는 뚜렷하게 “여호와의 말씀이 임했다"는 서문이 있습니다(슥 7:4, 7:8, 8:1, 18). 즉, 1. 금식에 대한 잘못된 이해 책망(슥 7:4-7), 2. 그들의 죄를 기억하고 삶의 개혁 권고(슥 7:8-14), 3. 상처를 살핀 후, 그것을 싸매고 치유하며, 하나님께서 그들을 위해 큰 자비에 대한 은혜로운 약속(8:1-17), 4. 그 자비로 그들의 금식을 축제로 바꾸실 것이라고 희망(8:18-23)입니다.[15]
여호와께서는 금식보다 청종을 원하신다 (7:1-7)
백성이 관례대로 근신을 계속해야 하는지 질문합니다. 이에 대해 하나님은 스가랴를 통해 답하십니다. 먼저 그들의 금식은 하나님을 향한 진심이 아니었다고 책망하십니다.
- (7:3) 만군의 여호와의 전에 있는 제사장들과 선지자들에게 물어 이르되 내가 여러 해 동안 행한 대로 오월 중에 울며 근신하리이까 하매 “오월 중에" 일곱째 날부터 열째 날까지 예루살렘은 불길에 휩싸였습니다. 느부갓네살이 불을 질렀습니다. "그는 주님의 집과 왕의 집과 예루살렘의 모든 집과 모든 위대한 사람들의 집을 불태웠습니다."[26] 유대인들은 이를 기억하며 금식했었습니다.
- (7:6) 너희가 먹고 마실 때에 그것은 너희를 위하여 먹고 너희를 위하여 마시는 것이 아니냐 먹는 것도 너희가 아니냐? 마시는 것도 너희가 아니냐? 거기서 문제는 끝난다. 자기가 문제이고, 하나님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고린도전서 8:8;[27] 고린도전서 10:31[28] 비교).[9]
사로잡혀 가는 까닭 (7:8-14)
하나님께서 백성에게 정의와 사랑을 실천하라 하셨으나 그들은 순종하지 않았습니다.
- (7:12) 그 마음을 금강석 같게 하여 율법과 만군의 여호와가 그의 영으로 옛 선지자들을 통하여 전한 말을 듣지 아니하므로 큰 진노가 만군의 여호와께로부터 나왔도다 그들은 돌처럼 마음을 굳게 만들어 깎거나 새길 수 없게 만들었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어떤 메시지도 들어올 수 없게 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그들 자신의 고집 때문이었습니다.[9]
예루살렘 회복에 대한 약속 (8:1-17)
금식을 계속해야 할지의 질문에 대한 답으로 7장은 불순종에 대한 책망이었고 8장은 기꺼이 순종하는 자들에게 격려하는 두 말씀입니다. 전자(슥 8:1-17)에서 하나님은 예루살렘이 회복되고 개혁될 것이라고 약속하신다(스가랴 8:2-8). 나라가 부강해질 것이며, 그들의 명예가 회복될 것이며, 그들의 상태가 모든 면에서 지난 여러 해 동안의 상태와 반대가 될 것이다(스가랴 8:9-15). 그는 그들에게 그들 가운데 잘못된 것을 바로잡아 그들이 그들에게 계획된 이 은혜를 받을 준비가 되도록 권고합니다(슥 8:16, 17).[15]
- (8:16) 너희가 행할 일은 이러하니라 너희는 이웃과 더불어 진리를 말하며 너희 성문에서 진실하고 화평한 재판을 베풀고 선의 약속의 성취를 받기 위해 그들은 하나님의 뜻을 행해야 합니다(스가랴 7:9 등). 진리는 이웃과의 모든 대화와 거래에서 지켜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이 명령을 인용합니다(에베소서 4:25).[29] 재판에서 완벽한 공평을 실천하고, 진실과 정의에 따라 판결하여 관련 당사자 간에 평화와 화합을 이루어야 합니다. 성문은 당시 재판관들이 앉아 정의를 집행하던 곳입니다(신명기 16:18; 신명기 21:19; 아모스 5:10 참조).[9]
금식에 관하여 말씀하시다 (8:18-23)
두 말씀 중 후자(슥 8:18-23)에서 하나님은 백성들의 금식이 자비의 보답으로 대체될 것이라고 약속합니다(슥 8:19). 그리고 그 후에 그들은 이방 나라들이 그들에게 다가 옴으로서 회복되고, 부강해질 것이라고 약속하십니다(슥 8:20-23).[15]
- (8:19) 만군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넷째 달의 금식과 다섯째 달의 금식과 일곱째 달의 금식과 열째 달의 금식이 변하여 유다 족속에게 기쁨과 즐거움과 희락의 절기들이 되리니 오직 너희는 진리와 화평을 사랑할지니라 이러한 금식의 준수는 하나님께서 명하셨거나 금하시지 않은 듯합니다. 하지만 그들의 죄로 인해 절기는 애통으로 바뀌었습니다(아모스 8:10).[30] 이제 그들의 금식은 기쁜 잔치로 바뀌어야 하며, 이전의 비참함은 지금 그들에게 쏟아지는 축복 앞에서 잊혀져야 합니다. 그러므로 진리와 평화를 사랑하십시오. 이것이 약속의 성취의 조건입니다(슥 8:16; 슥 7:9). 여기서도 다시 한 번 강력하게 각인되어 있습니다.[9]
- (8:23) 만군의 여호와가 이와 같이 말하노라 그 날에는 말이 다른 이방 백성 열 명이 유다 사람 하나의 옷자락을 잡을 것이라 곧 잡고 말하기를 하나님이 너희와 함께 하심을 들었나니 우리가 너희와 함께 가려 하노라 하리라 하시니라 열 명은, 많은 사람들이라는 뜻으로, 어떤 민족도 더 이상 배제되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참 신앙을 고백하는 자들이며 유대 민족의 조상들에게 주어진 약속에 속한 자들이기 때문에 때때로 유대인이라는 이름으로 불린다. 특히 이런 의미에서 이 단어는 여기서 받아들여져야 한다. 다른 사람을 붙잡는 것은 그의 친절한 도움을 간청하는 몸짓이다(이사야 3:6; 이사야 4:1 참조). 그러므로 이 구절의 의미는 이교도들이 교회에 들어갈 자격을 갖추기 위해, 그리스도인들에게 교훈을 구한다는 것이다.[8] 제롬은 “유다 사람”을 메시아로 해석했습니다.[9]
회복과 메시야의 소망 (9-14장)
이스라엘의 회복과 메시아 소망에 대한 예언입니다. 메시아께서 겸손하게 나귀를 타고 예룰살렘 입성하십니다(9-10장). 그런데 그 메시아는 거부를 당하십니다(11장). 마지막으로 선지자에게 메시아 왕국 즉 새 예루살렘이 보입니다(12-14장).
그리고 9-11장은 예수님의 초림, 12-14장은 예수님의 재림의 예언이라는 해석도 있습니다.
이스라엘 이웃 나라들에 대한 하나님의 말씀 (9:1-8)
이스라엘 주변 국가에 대한 심판이 예언됩니다. 이 예언은 바사를 무너뜨리고 근동 지역을 지배하는 알렉산더 대왕의 그리스에 의해 성취되었다고 (BC 330년 경) 해석합니다. 그리스가 다른 나라들은 무너뜨릴 때 예루살렘은 하나님의 보호 아래 무사했습니다.
- (9:8) 내가 내 집을 둘러 진을 쳐서 적군을 막아 거기 왕래하지 못하게 할 것이라 포학한 자가 다시는 그 지경으로 지나가지 못하리니 이는 내가 눈으로 친히 봄이니라 여러 나라에 대한 심판이 예언되었습니다. 그런데, 마케도니아인(Macedonians)과 그리스의 알렉산더의 군대들이 이 나라에서 전쟁을 벌이고 있을 때, 주님은 그의 백성을 보호하겠다고 약속하십니다. 하나님의 성전은 적의 한가운데에 있고, 그의 백성은 가시덤불 가운데 있는 백합과 같습니다. 하나님의 권능과 선하심은 그들을 특별한 보호에서 드러납니다. 주님은 그의 백성 주위에 진을 치고, 교만한 반대자들의 군대가 지나가고 돌아올 때, 그의 눈은 백성을 지켜 적들이 이길 수 없도록 하시고, 나아가 더 이상 어떤 적이 그의 백성을 지나가지 않을 때가 올 것입니다.[15]
구원을 베풀 왕 (9:9-17)
선지자는 메시아가 오심을 기쁘게 표현합니다.
- (9:9) 시온의 딸아 크게 기뻐할지어다 예루살렘의 딸아 즐거이 부를지어다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시나니 그는 공의로우시며 구원을 베푸시며 겸손하여서 나귀를 타시나니 나귀의 작은 것 곧 나귀 새끼니라 선지자는 예루살렘에 그들의 왕이 오심을 기뻐하라고 권합니다. 그 왕은 알렉산더 대왕과 같은 강력한 지상의 권세자나 정복자가 아니라, 다른 종류의 왕입니다(스바냐 3:14[31] 비교).[9]
- (9:16) 이 날에 그들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들을 자기 백성의 양 떼 같이 구원하시리니 그들이 왕관의 보석 같이 여호와의 땅에 빛나리로다 구원의 모든 것은 하나님의 행하심이어야 한다. 그들은 늑대들 가운데 있는 양떼와 같았으며, 잡아먹힐 준비가 되어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의 “양떼, 곧 그분의 백성"이다. 그분께서 말씀하셨듯이, "내가 그들의 수효를 양 떼 같이 많아지게 하되, 제사 드릴 양 떼 곧 예루살렘이 정한 절기의 양 무리 같이 황폐한 성읍을 사람의 떼로 채우리라" 에스겔 36:37-38. "사람이 온 힘을 다하여 양떼를 구원하듯이, 그분은 그의 백성을 구원하실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그의 양떼이기 때문이다." 시편 77:20에서처럼, "주의 백성을 양 떼 같이 모세와 아론의 손으로 인도하십니다". 원수들은 하나님의 백성을 하찮은 돌처럼 짓밟을 것이지만, 그들은 목적을 달성하지 못하고, 백성은 귀중한 보석이 될 것이다. 왕이나 제사장의 성별된 왕관이 "높이 올려져" 모든 사람이 볼 수 있도록 될 것이다.[26]
여호와께서 구원을 약속하시다 (10장)
10장에서는 메시아의 통치를 자세히 언급한다. 그는 거짓 목자를 폐하고 우상을 제거하고, 흩어진 유대인들을 모으고 대적을 궤멸시키실 것이다. 그의 출현으로 정의와 평화가 강같이 흐르는 새 왕국이 건설될 것이다.[32]
- (10:4) 모퉁잇돌이 그에게서, 말뚝이 그에게서, 싸우는 활이 그에게서, 권세 잡은 자가 다 일제히 그에게서 나와서 유다에서 왕자 즉 온 건물이 그 위에 놓일 모퉁잇돌이 나올 것입니다(이사야 28:16).[33] 이는 곧, 첫째, 이스라엘이 외국 통치자들로부터 독립할 것이고 둘째, 유다에서 메시아, "모퉁이의 머릿돌"이 나올 것입니다(마태복음 21:42;[34] 에베소서 2:20; 히브리서 7:14).[9]
- (10:8) 내가 그들을 향하여 휘파람을 불어 그들을 모을 것은 내가 그들을 구속하였음이라 그들이 전에 번성하던 것 같이 번성하리라 목자가 휘파람으로 양 떼를 모으듯이 먼 나라에서 그들을 부를 것이다. 왜냐하면 주께서 신성한 섭리의 작용으로 그들을 원수의 손에서, 그리고 그들을 포로로 잡은 자들로부터 구출하고 구속할 것이기 때문이다.[8]
거부당하는 메시아 (11장)
11장은 1-3절은 하나님의 심판, 나머지 절에서 심판하시는 이유가 설명됩니다. 심판의 이유는 이스라엘이 메시아를 거부했기 때문입니다. 이 심판의 장면은 AD 70년, 예수님께서 승천 후 약 40년 뒤, 예루살렘이 로마에 점령당한 사건의 예언이라는 해석이 주류입니다.
- (11:1) 레바논아 네 문을 열고 불이 네 백향목을 사르게 하라 선지자는 유다에 내릴 형벌을 생생하게 묘사합니다. 이 형벌을 초래한 죄, 즉 목자와 왕을 거부한 죄는 나중에 비난받습니다(9절). 레바논은 북쪽에서 들어오는 길목으로, 대부분의 적대적인 군대가 그곳을 거쳐 이스라엘로 들어왔습니다. 레바논의 "문"은 그 나라로 들어가는 길을 열어준 산길입니다. 일부 주석가들은 고대 유대교 해석을 따라 레바논이 성전이나 예루살렘을 의미한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다음 절들을 은유적으로 해석하기 어렵기 때문에 “레바논”을 문자적으로 해석하는 것이 맞다고 봅니다.[9]
- (11:4) 여호와 나의 하나님이 이르시되 너는 잡혀 죽을 양 떼를 먹이라 이스라엘 백성은 선지자가 의인화한 선한 목자를 거부했기 때문에 처벌을 받았습니다. 그 목자는 양 떼를 다스리고 악한 자들을 징벌하지만 그들은 변하지 않습니다. 마침내 그들의 반항에 분노하십니다. “하나님이 이르시되” - 말씀을 받은 사람은 스가랴 자신인데, 그는 환상 속에서 선한 목자의 직분을 맡고(15절 참조) 택함받은 백성, 곧 주님의 목초지의 양 떼를 돌보라는 명령을 받았습니다. 이 말씀에서 하나님께서는 외부의 적들과 국내의 불의한 통치자들로 인해 그들이 겪은 다양한 시련 속에서도 가장 초기부터 그의 백성을 돌보심을 보이려고 계획하셨습니다. “잡혀 죽을 양 떼” - 현재 통치자(목자)들의 손에 의해 멸망하도록 노출되어 있습니다(시편 44:22; 예레미야 12:3; 로마서 8:36).[9]
- (11:13)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그들이 나를 헤아린 바 그 삯을 토기장이에게 던지라 하시기로 내가 곧 그 은 삼십 개를 여호와의 전에서 토기장이에게 던지고 가룟 유다가 은 30냥으로 예수님을 팔고, 양심에 가책을 받아 그 돈을 돌려주었는데, 그 돈으로 대제사장들은 토기장의 밭을 사서 나그네의 묘지로 삼았습니다(마27:3-10, 행1:18).[35] 은 30냥, 당시 유대인들에게 미천한 종의 가치로 상징되는, 그 가치 정도로 이스라엘은 진정한 목자, 진정한 왕, 메시아, 예수님을 거부했습니다.
예루살렘의 구원 (12장)
12-14장은 전체적으로 도래할 메시아 왕국의 승리를 부각시키는 데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12장은 예루살렘의 승리(1-9절)와 회개 운동을 다루고 있다.[32]
- (12:3) 그 날에는 내가 예루살렘을 모든 민족에게 무거운 돌이 되게 하리니 그것을 드는 모든 자는 크게 상할 것이라 천하 만국이 그것을 치려고 모이리라 돌이 너무 무거워서, 들어올리려고 하는 이의 손아귀에서 미끄러져 상처를 입거나 더한 부상을 입을 것입니다. 초대 교부 제롬의 설명에 의하면, 유대 지역을 포함한 당시 팔레스타인의 도시에서, 매우 무거운 둥근 돌을 놓고, 젊은이들이 그 위에서 운동을 헸디고 합니다. 그들은 각자의 힘에 따라, 어떤 사람은 무릎까지, 어떤 사람은 배꼽까지, 어떤 사람은 어깨와 머리까지 들어올립니다. 어떤 사람은 엄청난 힘을 과시하며, 두 손을 똑바로 위로 하여 무게를 머리 위로 들어올립니다.[13]
- (12:10) 내가 다윗의 집과 예루살렘 주민에게 은총과 간구하는 심령을 부어 주리니 그들이 그 찌른 바 그를 바라보고 그를 위하여 애통하기를 독자를 위하여 애통하듯 하며 그를 위하여 통곡하기를 장자를 위하여 통곡하듯 하리로다 “부어 준다”는 것은 풍부한 유출을 나타냅니다. (비교 요엘 2:26)[36] 여기서 "은총”이라는 단어는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은혜(grace)라는 주된 의미가 아니라, 이차적인 의미, 즉 성령의 은사와 영향력을 통해 인간에게 미치는 그 은총의 효과라는 의미로 사용됩니다. 요한복음 1:16;[37] 고린도전서 15:10;[38][13]
치임 받는 목자 (13장)
13장에서는, (1) 복음 시대와 관련된 몇 가지 추가 약속을 다룹니다. 죄 사함(슥 13:1), 마음의 개혁(슥 13:2), 특히 거짓 선지자들을 정죄하고 침묵시키는 것에 대한 약속이 있습니다(슥 13:2-6). (2) 그리스도의 고난과 그로 인한 그의 제자들의 분산(슥 13:7), 얼마 지나지 않아 유대 민족의 대부분이 멸망(슥 13:8)되고, 그들 중 남은 자들, 곧 하나님께 특별한 백성이 정화되는 것에 대한 예언입니다(슥 13:9).[15]
- (13:1) 그 날에 죄와 더러움을 씻는 샘이 다윗의 족속과 예루살렘 주민을 위하여 열리리라 모든 죄를 깨끗이 하는 그리스도의 피(요일 1:7)가[39] 여기서 분명히 의도된 바는 유대인들이 회개하고 개종하면 기독교 언약의 모든 특권을 받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8]
- (13:7)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노라 칼아 깨어서 내 목자, 내 짝 된 자를 치라 목자를 치면 양이 흩어지려니와 작은 자들 위에는 내가 내 손을 드리우리라 여기 그리스도의 고난에 대한 예언이 있습니다. 하나님 아버지는 아들이 자신의 영혼을 죄를 위한 제물로 기꺼이 바쳤을 때, 그의 정의의 칼이 깨어나도록 명령하셨습니다. 그리스도와 아버지는 하나입니다. 그는 양을 위해 자신의 목숨을 바칠 목자입니다. 희생 제물이라면 그는 죽임을 당해야 합니다. 생명의 피가 흘리지 않고는 용서가 없기 때문입니다. 이 구절은 그리스도께서 배반당하던 밤에 모든 제자들이 그를 버리고 도망쳤을 때 성취되었습니다.[15]
여호와의 날 (14장)
기독교의 역사는 하나님의 창조로 시작하여 주의 강림으로 종결될 것이다. 이스라엘의 고난의 역사가 주의 출현으로 끝나듯, 인류 역사도 주의 재림으로 끝맺는다. 그날이 의인(이스라엘)에게는 승리의 날이나 악인(이방 여러 나라)에게는 파멸의 때이다(12-15절).[32]
폴 N. 벤웨어는 스가랴서의 핵심 단어를 “장차 올 메시야”로 그리고 14장(메시아의 강림)을 핵심 장으로 본다.[40]
- (14:6) 그 날에는 빛이 없겠고 광명한 것들이 떠날 것이라 R. V. 난외주에 있는 것처럼, 즉 천체들이 어두워질 것이다. 그것은 깊은 어둠의 날이 될 것이다. 비교: “해와 달이 캄캄하며 별들이 그 빛을 거두도다” 요엘 3:15, 마태복음 24:29; 요한계시록 6:12-13.[13]
- (14:9) 여호와께서 천하의 왕이 되시리니 그 날에는 여호와께서 홀로 한 분이실 것이요 그의 이름이 홀로 하나이실 것이라 여호와는 하나이실 것입니다. 즉, 그분은 본질과 사실에 있어서 변함없이 존재하시므로 사람들이 그분을 인정하고 경배하는 데 있어서도 하나이실 것입니다. 칼빈이 이 구절을 자세히 해석했듯이, 이교도 중 많은 이들도 그것을 인정하기 때문에, 하나님은 한 분의 최고신과 신성의 근원으로 인정되십니다. 그뿐만 아니라 그분 자신에 대한 여러 계시는 그분이 더 이상 다른 여러 열등한 신 중 하나로 여겨지지 않고, 그분이 사람들에게 자신을 알리는 유일한 이름의 일부와 측면으로 여겨질 것입니다. 거룩한 삼위일체의 세 인격도 하나의 이름에 포함될 것입니다. 마태복음 28:19[41][13]
- (14:21) 예루살렘과 유다의 모든 솥이 만군의 여호와의 성물이 될 것인즉 제사 드리는 자가 와서 이 솥을 가져다가 그것으로 고기를 삶으리라 그 날에는 만군의 여호와의 전에 가나안 사람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라 나라의 모든 그릇은 거룩하게 하여 신성한 예배에 사용된다. 레위인의 구별은 폐지되고, 주님의 예배는 완전한 자유가 될 것이다. 교회의 모든 구성원은, 그의 지위가 아무리 낮거나 그의 학식이 아무리 하찮더라도, 성도가 되어 주님의 사용에 합당해야 한다(디모데후서 2:21 비교).[42] 문맥상 "가나안 사람"은 더럽거나 불경스러운 사람을 의미한다고 이해하는 것이 좋습니다(창세기 9:25,[43] 레위기 18:28[44] 등 비교).[9]
가랴서의 메시지는 희망과 격려를 주며,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믿고 따르는 삶을 촉구합니다.
스가랴의 장
각 장에 대한 더 깊은 이해를 위해 아래 링크를 탐험하세요:
- 스가랴 제 1 장: 하나님이 제사장 스가랴에게 환상을 보여주심. 회개와 회복의 메시지가 전해짐.
- 스가랴 제 2 장: 예루살렘의 회복과 하나님의 보호가 약속됨. 스가랴가 성전 재건을 위한 메시지를 전함.
- 스가랴 제 3 장: 여호수아 대제사장이 사탄 앞에서 변호받고, 하나님의 구원의 약속이 주어짐.
- 스가랴 제 4 장: 스가랴는 금 촛대와 두 올리브 나무의 환상을 보며, 성전 재건의 힘을 설명함.
- 스가랴 제 5 장: 하나님의 심판이 상징적으로 나타나며, 죄의 결과가 드러남.
- 스가랴 제 6 장: 스가랴는 네 마리의 말과 두 번째 환상을 통해 하나님의 계획을 보여줌.
- 스가랴 제 7 장: 이스라엘의 금식에 대한 질문과 하나님의 응답이 주어짐.
- 스가랴 제 8 장: 하나님이 예루살렘을 회복하시겠다는 약속과 축복이 선포됨.
- 스가랴 제 9 장: 메시아의 오심과 이스라엘의 구원이 예언됨.
- 스가랴 제 10 장: 이스라엘의 회복과 하나님의 은혜가 약속됨.
- 스가랴 제 11 장: 스가랴가 두 목자를 상징적으로 묘사하며, 이스라엘의 심판이 예언됨.
- 스가랴 제 12 장: 예루살렘의 구원과 하나님의 보호가 약속됨.
- 스가랴 제 13 장: 이스라엘의 죄가 용서받고, 하나님의 구원의 약속이 주어짐.
- 스가랴 제 14 장: 여호와의 날과 최후의 심판이 예언됨. 하나님의 왕국이 세워질 것임을 선포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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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 |
주요 내용 및 요점 정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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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
◈ 돌아오라 •조상을 본받지 말고 주 하나님께 돌아오라고 주께서 말씀하시다. •스가랴가 화석류 나무 사이에 선 자를 보다. •스가랴가 네뿔과 네명의 대장장이를 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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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
◈ 주의 백성 •스가랴가 환상중에 측량줄 잡은 사람을 보다. •그때에 많은 나라가 하나님의 백성이 될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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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
◈ 대제사장 •스가랴가 환상중에 여호와의 천사 앞에 선 대제사장 여호수아를 보다. •주께서 대제사장 여호수아에게 주의 종을 보낼 것이라 말씀하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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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
◈ 등잔대와 감람나무 •스가랴가 환상중에 순금 등잔대와 두 감람나무를 보다. •천사가 스가랴에게 환상에 대하여 설명해 주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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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
◈ 저주와 죄악 •환상 중에 본 두루마리를 천사가 저주라고 전하여 주다. •환상 중에 본 에바속 여인이 죄악이라고 천사가 전하여 주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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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
◈ 병거와 면류관 •환상중에 네대의 병거를 보았는데 천사가 그것이 네 영이라고 전해주다. •하나님이 면류관을 만들어 여호수아에게 씌우라고 말씀하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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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
◈ 순종 •금식에 대해 주께 묻자 주께서 진정한 금식이었는지 꾸중하시다. •긍휼을 베풀고 어려운 사람을 도우며 주의 말씀을 들으라고 말씀하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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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
◈ 회복 •하나님이 예루살렘을 회복시키실 것이라고 말씀하시다. •금식이 유쾌하고 즐거운 절기가 될 것이라고 말씀하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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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
◈ 징벌과 구원 •주께서 이스라엘 이웃 나라들을 징벌하실 것이라고 말씀하시다. •공의로우신 구원의 왕이 오시리라 말씀하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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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
◈ 구원의 약속 •하나님이 백성들을 다시 구원하실 것이라고 약속하시다. •하나님이 백성들을 다시 모으고 강해지도록 하실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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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
◈ 재앙 •백성을 불쌍히 여기지 않으시고 주변나라에 넘기실 것이라 말씀하시다. •양떼를 돌보지 않는 목자에게 재앙이 내릴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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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
◈ 구원 •주께서 예루살렘을 강하게 하셔서 지켜주실 것이다. 예루살렘을 치러 오는 나라들에게서 백성들을 지켜주고 구원할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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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
◈ 죄씻음과 징계 •죄를 씻는 샘이 열려서 예루살렘 백성들의 죄를 씻어줄 것이다. •주께서 우상을 따르는 예언자를 없애버릴 것이다. •주께서 목자들을 쳐서 죽이기도 하시고 단련하게도 하신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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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
◈ 심판과 회복 •심판의 날에 예루살렘이 함락되고 사로잡겨 가게 될 것이다. •때가 되면 예루살렘은 회복될 것이다. •그날이 오면 예루살렘을 친 나라들이 심판 받을 것이다. |
스바냐서의 개관도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