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나(Jonah) 비둘기 07-24-2023(월) /



요나서

요나서구약성경 네비임 소선지서 중 한 권이다.
아밋대의 아들 요나에 대한 이야기이다.
요나는 니네베의 파괴를 예언하라는 명령을 받으나 이를 벗어나기 위해 위해 보내지만 이 신성한 사명을 벗어나려 시도하다가 결국 받아들인다.

유대교에서는 회개하는 자를 용서하려는 하나님의 의지에 대한 성찰을 심어주기 위해 욤키푸르 오후에 읽는 하프타라로 남아 있다.
코란에서도 같은 이야기가 등장한다.

열왕기하 14장 25절에서 여로보암 2세 통치기에 요나가 등장하는 것으로 말미암아 그 통치기인 기원전 793-753년 중에 기록된 것으로 추정한다.


배경

요나가 활동하던 시대에 살았던 여로보암 2세북왕국 이스라엘의 왕들 가운데 가장 강력한 왕이었다(왕하 14:23-29).
일찍이 앗수르는 근동에서 군림하는 자리를 차지하였고 예후로부터 조공을 받아들였다. 그러나 아시리아(앗수르)는 아람 족속들을 쳐부순 다음에 내부적인 다툼이 일어나 일시적으로 쇠퇴의 길을 걸었다. 대제국이 되기를 희망하던 아시리아가 잠시 쇠퇴해진 틈을 타서 여로보암 2세는 일찍이 아람에 속해 있었던 영토를 장악할 수가 있었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종교적인 분위기는 다른 예언서에서 지금까지 언급했던 바와 같이 죄악이 극심했기 때문에 호세아아모스를 보내어 임박한 심판을 경고하게 하셨다. 요나는 후일에 자기 나라를 멸망시킬 적들을 돕는 일에 자신이 쓰여지는 것을 두려워했다. 니느웨는 북왕국의 수도인 사마리아로부터 약 550마일 정도 떨어져 있는 티그리스강 동쪽 제방 위에 위치하고 있었다. 니느웨는 큰 성읍으로서 바벨론과 마찬가지로 외곽의 성벽과 내곽의 성벽으로 둘러 싸여 보호를 받고 있었다. 요나가 이렇게 난공불락의 도시처럼 보이는 철옹성에 도착하기 전에 두 가지의 재앙이 이 도시를 덮쳤고(B.C.765과 759), 이 일들은 하나님의 진노의 표징으로 받아들여졌고, 또 759년경에 왜 니느웨가 요나의 메시지에 속히 응답하지 않으면 안되는지를 설명하는 데 큰 도움을 줄 수 있었을 것이다.



신행일치(信行一致)
언행일치(言行一致)

신행일치 (faithfulness)
언행일치 (word and deed match)

요나서 – 개요

구원은 여호와께 속하였나이다” 요나서 2:9
표제: 이 책은 주요 등장 인물인 요나의 이름을 따서 명명 되었는데 그 의미는 “비둘기 -dove”라는 뜻이다.
요나 즉 비둘기라는 말은 아가서에서 사랑을 나타내는 말로 사용되고 있다(아 2:14; 5:2; 6:9)

저자 : 요나서 자체에는 요나가 저자라고 명시된 구절이 없지만 그가 저자라는 사실이 전통적인 견해이다.
목적 : 주권자이신 야웨(YHWH) 하나님께서 그분의 섭리 가운데 놀라운 자비로 수 많은 죄인들을 쫓으시는 구원하심의 역사를 나타내기 위하여. 하나님은 사랑으로 도망하는 이스라엘의 선지자, 물에 빠져 죽게될 이방 선원들, 그리고 악한 니느웨 성읍 시민들을 찾으신다.
배경 : 이스라엘이 남유다(Southern Kingdom)와 북이스라엘(Northern Kingdom)로 갈라지고 나서 쇄약했던 북이스라엘이 다윗 이후에 다시 한 번 전성기를 누리던 시기, BC 780-760 년 경에 요나 선지자가 활동했고 동시대에 활동한 선지자로는 아모스가 있다.

이 당시 왕은 요아스의 아들인 여로보암 2 세였다.
하나님이 요나를 보내신 니느웨 성은 이스라엘 주변 강국 중의 하나였던 앗수르의 수도였다.
앗수르는 이스라엘을 위협할 수 있는 강한 나라였으나 당시 내부적 분열과 북방 민족의 침입으로 쇠약해 있었고 이 때에 여로보암 2 세가 앗수르 주변까지 영토를 확장했다.
이것은 요나가 예언한 대로 이루어진 일이다(왕하 14:23-29).
그리고 40년 뒤에 BC 722 년 북이스라엘은 앗수르에 의해서 멸망한다.
이 당시에 영토 확장과 타국들의 쇄약을 통하여 강국이 되고 나라와 백성들도 풍요로운 삶을 살고 있었기에 다윗 이후에 제 2 의 전성기라(Golden Era, Silver Era)고 불린다.
그러나 풍요로움 속에 백성들을 하나님을 떠났고 우상 숭배가 넘쳐나던 상황이었다.
외부적으로는 강대국으로 성장하고 있었으나 영적으로는 부패하여 하나님을 떠나 살았던 시대였다.
자비의 하나님은 이 시대에도 선지자들을 통하여 회개와 회복을 선포하셨으나 백성들은 귀 기울여 듣지 않고 있었고 그 상황에서 하나님은 요나 선지자를 니느웨로 보내신다.
자비의 하나님과 그 하나님께 반응하는 사람들의 모습에 귀한 메세지가 있다.

중요 등장 인물 : 요나, 이방 뱃사람 (선장, 사공), 니느웨 사람들 (백성, 왕, 대신) – 이들은 하나님의 자비에 어떻게 반응 하는가?

중요한 테마 (THEMES)
• 하나님의 주권 (Sovereignty) : 폭풍 (1:4, 1:15), 제비 (1:7), 물고기 (1:17, 2:10), 구원 (2:9), 넝쿨 (4:6), 벌레 (4:7), 동풍 (4:8)
• 기도 : 사공들이 자기의 신들에게 (1:5), 선장의 부탁 (1:6), 무리가 여호와께 (1:14), 요나의
기도 (2:1), 니느웨 백성들의 기도 (3:8), 요나의 분노의 기도 (4:2-3)
• 여호와의 말씀 : 요나에게 임함 (1:1), 두번쨰로 요나에게 임함 (3:1), 니느웨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믿음 (3:4-5)

1:1-2:10.  도망하는 요나, 구원하시는 여호와
  1:1-17.  반항하는 선지자와 쫓으시는 하나님
  1:1-3. 하나님의 부르심에 도망하는 요나
  1:4-17.  하나님의 쫓으심에 물에 빠지는 요나
2:1-10. 기도하는 선지자와 구원하시는 여호와
 2:1-6a.  요나의 고통과 하나님의 응답
 2:6b-10.  요나의 감사와 하나님의 구원
3:1-4:11. 선포하는 요나와 구원하시는 여호와
 3:1-10. 선포하는 선지자와 구원하시는 여호와
 3:1-3. 부르시는 하나님과 순종하는 요나
 3:4-10. 선포하는 요나와 회개하는 니느웨
4:1-11. 삐진 선지자와 가르치시는 하나님
 4:1-4. 요나의 분노와 하나님의 질문
 4:5-11.  죽음을 구하는 요나와 하나님의 자비

(1:1-2:10) 도망하는 요나, 구원하시는 여호와
(1:1-17) 반항하는 선지자와 쫓으시는 하나님
(1:1-3) 하나님의 부르심에 도망하는 요나
(1:4-17) 하나님의 쫓으심에 물에 빠지는 요나
(2:1-10) 기도하는 선지자와 구원하시는 여호와
(2:1-6a) 요나의 고통과 하나님의 응답
(2:6b-10) 요나의 감사와 하나님의 구원
(3:1-4:11) 선포하는 요나와 구원하시는 여호와
(3:1-10) 선포하는 선지자와 구원하시는 여호와
(3:1-3) 부르시는 하나님과 순종하는 요나
(3:4-10) 선포하는 요나와 회개하는 니느웨
(4:1-11) 삐진 선지자와 가르치시는 하나님
(4:1-4) 요나의 분노와 하나님의 질문
(4:5-11) 죽음을 구하는 요나와 하나님의 자비




구약의 대다수의 선지자들이 언약 백성인 이스라엘과 유다에 대해 하나님의 심판과 구원을 예언했다면, 요나는 이방인에 대한 하나님의 구원을 예언합니다.
특히 요나는 본서를 통해 자신의 개인적 경험을 객관화시키는 특별한 이야기식 서술을 통해 이스라엘의 왜곡된 선민 의식을 질타합니다.
선지자 요나는 선지자적 사명을 무시하고 이방 전도에 대한 하나님의 명령을 거부하고 다시스로 도망할 때 하나님은 기어이 이방 전도자로 세웠습니다.

1:1-3. 다시스로 도망하는 요나의 의도
1:4-10. 바다의 풍랑으로 인하여 선원들과 대화를 나누는 요나
1:11-17. 바다에 던져진 요나로 인해 풍랑이 잔잔해짐

요나는 적대국인 앗수르의 수도 니느웨를 향하여 여호와의 말씀을 선포하라는 선지자의 사명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요나는 하나님의 뜻을 따르지 않고 도망합니다.
이와 같은 요나의 행동은 하나님의 직접적인 개입을 불러왔고 요나는 어려움을 겪게 됩니다.
하나님은 큰물고기를 이용하셔서 예정하신 것을 이루어 가셨습니다.  

요나가 선원들에게 자신이 믿는 신에 대해 바다와 육지를 지은 '창조주'이시며 세상의 진정한 '통치자'라고 소개합니다.
요나가 활동하던 당시의 고대 근동은 종교가 매우 융성하여 사람들은 저마다 가정의 신을 믿고 있었으며 국가도 바알이나 아세라, 밀감을 비롯한 국가의 수호신을 섬기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세상에 일어나는 모든 현상은 세상을 다스리는 신으로부터 나오는 것으로 이해했습니다.
선장을 비롯한 모든 사람들이 급작스러운 폭풍의 원인을 신의 분노로 생각한 것도 이런 사상적인 배경에 의한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이런 시대적인 상황에서 여호와를 창조주라고 고백하는 요나의 신앙은, 여호와야말로 모든 신들을 지배하는 참된 신임을 주장하는 것입니다.
또한 요나의 이러한 고백은 자신이 하나님 앞에서 범죄하였으며 그 하나님을 피해 도피한 잘못을 저질렀다는 회개의 의미도 담겨 있습니다.
창조주 하나님 여호와에 대한 신 지식은 자신과 자신의 허물을 파악할 수 있는 척도가 되기 때문이며 인간은 하나님을 바로 알 때 또한 자기 자신을 바로 볼 수 있습니다.
전능하신 하나님 앞에서는 결코 인간의 지혜나 힘을 내세울 수가 없습니다.
이런 점에서 참된 신 지식은 인간의 삶을 가치 있게 하는 근거가 됩니다.

성도들은 하나님을 믿으며 그의 뜻에 따라 살아간다고 고백합니다.
그러나 실제로 성도들의 삶은 하나님의 말씀에 의지하지 않는 경우를 많이 볼 수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어떤 일을 판단하고 계획할 때 우선 자신의 생각으로 판단하고 행동 여부를 결정합니다.
또한 그것이 하나님의 뜻인 줄 알면서도 인간적인 생각으로 맞지 않다고 생각하고 자신의 뜻대로 행동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행동이야말로 어리석은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어기고 자신의 판단대로 행한 요나가 결국은 하나님의 섭리를 벗어날 수 없었듯이, 인간은 결국 하나님의 뜻대로 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처음부터 하나님의 뜻을 구하고 그의 말씀 안에서 살아가야 합니다.  



7월 24일(월) 요나서 1장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여호와의 낯(3절)


그러나 요나가 여호와의 낯을 피하려고 일어나 다시스로 도망하려 하여 욥바로 내려갔더니 마침 다시스로 가는 배를 만난지라 여호와의 낯을 피하여 함께 다시스로 가려고 선가를 주고 배에 올랐더라.
But Jonah ran away from the LORD and headed for Tarshish. He went down to Joppa, where he found a ship bound for that port. After paying the fare, he went aboard and sailed for Tarshish to flee from the LORD.

요나 1:3
그러나 요나가 여호와의 낯을 피하려고 일어나 다시스로 도망하려 하여 욥바로 내려갔더니 마침 다시스로 가는 배를 만난지라 여호와의 낯을 피하여 함께 다시스로 가려고 선가를 주고 배에 올랐더라.

요나 1:10
자기가 여호와의 낯을 피함인줄을 그들에게 고하였으므로 무리가 알고 심히 두려워하여 이르되 네가 어찌하여 이렇게 행하였느냐 하니라.

창세기 3:8
그들이 날이 서늘할 때에 동산에 거니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아담과 그 아내가 여호와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동산 나무 사이에 숨은지라.

구약의 대부분 선지자들은 북 이스라엘과 남 유다를 향하여 예언 활동을 했습니다.
그러나 요나 선지자는 이방 나라 앗수르의 수도 니느웨에 가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요나는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니느웨로 향하지 않고 다시스로 가는 배에 승선했습니다.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지 않았던 요나가 배 밑창에 누워 잠이 들었을 때 갑작스런 바다의 거센 풍랑에 의해서 선원들은 요나를 깨우며 네가 믿는 신을 찾아 도움을 구하라고 합니다.
요나는 이러한 풍랑의 원인이 자신이 하나님의 명령을 거역한 것임을 깨닫고 풍랑을 잔잔케 하려면 나를 들어 바다에 던지라고 합니다.
요나를 풍랑을 위한 제물로 던졌을 때 거센 파도도 잔잔해졌습니다.

하나님의 낯을 피한다는 것은 순종하지 않는 인간의 전형적인 모습이라고 하겠습니다.
왜냐하면 에덴  동산에서 처음으로 하나님의 낯을 피하는 사건이 일어났기 때문입니다.

아담은 에덴동산에서 먹지 말아야 할 선악을 알게하는 나무의 열매를 따먹었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아담을 찾으시므로 아담은 여호와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여호와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동산 나무 사이에 숨었습니다(창 3:8).

선지자 요나도 니느웨로 가서 외치라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다시스로 도망하려고 할 때 바다의 풍랑으로 요나를 찾으셨습니다.
바람직한 신앙은 여호와의 낯을 피하는 것이 아니라 항상 여호와 앞에 나가는 것입니다.
여호와 앞에 나가려면 언제나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라는 고백이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고백에 따른 회개와 더불어 새 생명을 확신하는 믿음으로 열매를 맺게 될 때 하나님의 기쁨이 될 것입니다.

기쁨이란 영어 단어 죠이(JOY)에서 신뢰하는 믿음의 순서를 생각해 봅니다.
첫째는 먼저 예수님을 기쁘게 하라(Jesus)
둘째는 다른 사람들을 기쁘게 하라(Others)
셋째는 네 자신은 가장 마지막에 기뻐해야 한다(Yourself)

어렵고 힘든 인생길에서 갑작스런 풍랑을 만났을 때 혹시 내가 여호와의 낯을 피하여 도망하고 있는가를 살펴본 후에 하나님의 궤도에 따라 순종하는 믿음으로 세워지기를 다짐합시다.


보통 사람은 평생 동안 약 10만 여명의 사람과 만난다고 합니다.
그런데 사람과 사람의 만남에서첫 인상(first impression)이 주는 영향은 상당히 큽니다.
첫 인상이 어떠냐에 따라 지속적인 인간관계를 맺을 수도 있고 한 번의 만남으로 끝날 수도 있습니다.

첫인상에 대해 연구했던 캘리포니아 대학의 심리학과 교수인 알버트 메라비안의 연구에 의하면  커뮤니케이션에 있어서 언어적인 요소가 7%, 외모, 표정, 태도 등 시각적인 요인이 55% 그리고 목소리등 청각적인 요인이 38%를 차지한다고 합니다.

이러한 원칙은 첫 만남에서도강하게 나타나는데 누군가를 만날 때 웃는 얼굴을 하면 그 웃는 모습과 웃음소리가 좋은 첫인상을 만들어 준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미국의 과학 저널리스트인 대니얼 맥닐이 쓴 [얼굴]이라는 책을 보면 가장 객관적이고 논리적이어야 하는 재판정에서도 판사들이 미소를 짓는 피고인에게 더 가벼운 형량을 선고한다고 밝히고 있습니다.

법과 원칙에 의해서 판결이 내려져야 하는 법정에서도웃는 얼굴이 영향을 미친다고 하는 것이죠. 그래서, 요즘 현대인들은 첫인상에 많은 신경을 쓰고 있습니다. 어떻게 하면 좋은 첫인상을 만들까? 고민합니다. 호감가는 첫 인상을 만들기 위해서 많은 시간과 재정을 투자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성경에 보면 첫 인상이 좋지 않았던 선지자가 있습니다.
“그러나 요나가 여호와의 낯을 피하려고 일어나 다시스로 도망하려 하여 욥바로 내려갔더니 마침 다시스로 가는 배를 만난지라 여호와의 낯을 피하여 함께 다시스로 가려고 선가를 주고 배에 올랐더라”(욘 1:3)

여기 낯을 피하여 도망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누구의 낯을 피하고 있습니까?
여호와의 낯을 피하여 하나님이 가라고 하신 니느웨로 가지 않고 다시스로 도망하는 선지자 요나가 있습니다.
선지자 요나의 첫 인상은 도망하는 선지자였습니다.
왜 그는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도망하고 있습니까?
요나에게 큰 성 니느웨로 가서 회개의 기별을 전하라고 하는하나님의 명령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요나는 니느웨로 가고 싶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니느웨성 백성들은 ‘악독’하기로(욘 1:2) 소문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런 사람들한테 가서 회개의 기별을 전하라고 하니 그는 너무 두려웠습니다.
그래서 지금 요나가 여호와의 낯을 피하여 도망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낯이라고 하는 말속에는 ‘얼굴’이라는 뜻과 함께 남을 대할 만한 ‘체면’, ‘면목’이라는 뜻이 같이 있습니다.
요나는 지금 하나님을 볼 체면, 면목이 없었던 것입니다.
도저히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할 용기가 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을 피하여 도망하기로 한 것입니다.

성경을 읽어 보면 요나가 여호와의 낯을 피하여 깊이 더 깊이 내려가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욥바로 내려가고 항구로 내려갑니다.
그리고 배로 내려갑니다.
한글 성경에는 배에 올랐다고 되어 있지만 유대적 표현은 배로 내려간 것입니다.
배에서도 아주 밑층으로 내려갑니다.
그리고 깊은 잠속으로 빠져들어 갑니다.
‘내려간다’고 하는 것은 점점 더 하나님의 얼굴을 멀리하며 죄악으로 빠져드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는 이렇게 여호와의 낯을 피하여 내려가서 배 밑창에서 잠을 자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요나가 낯을 피하여 도망할 때에 하나님께서는 그 요나의 낯을 찾으십니다.
하나님께서 대풍을 보내사 잠자고 있는 요나를 깨우는 것입니다.
요나는 대풍이 밀려온 이유를 알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말하기를 “자기가 여호와의 낯을 피함인 줄을 그들에게 고하였으므로 무리가 알고”(욘 1:10) 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왜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얼굴을 피하여 도망하는 요나를 찾으셨을까요?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요나를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의 얼굴은 찾게 되어있습니다.
하나님 볼 낯이 없어서 도망하는 요나를 향하여 “바위 틈 낭떠러지 은밀한 속에 있는 나의 비둘기야 나로 네 얼굴을 보게 하라 네 소리를 듣게 하라 네 소리는 부드럽고 네 얼굴은 아름답구나”(아 2:14).

여기 하나님께서 아가서의 기록을 통하여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 얼굴 좀 피하지 말고 네 얼굴 좀 보자.”
선지자 요나, 그의 이름 ‘요나’의 뜻이 바로 ‘비둘기’입니다.
여호와의 낯을 피하여 도망하던 선지자 요나는 오늘 우리들의 모습입니다.
나의 삶이 힘들고 어려울때, 내가 감당하기 어려운 짐이 나에게 지워지는 것 같은 부담이 밀려 올 때우리는 하나님 볼 낯이 없어서  피하여 도망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우리를 찾아 오십니다.
그리고 말씀하십니다.

“나의 비둘기야 나로 네 얼굴을 보게하라”






하나님의 낯 곧 정체성은 존재의 하나님이시기에 사람이 어떤 행동을 하므로 보응하시는 하나님이 아닌데 사람들이 그렇게 믿는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낯을 피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존재의 하나님, 사람에게 ‘너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고 물으시고, ‘너는 어디(존재의 정체성)에 있느냐?’를 물으시는 하나님을 사람의 행위를 보시는 분으로, 무엇을 해야 은혜 주시는 분으로 여기는 것,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하나님의 뜻과 반대로 가는 것입니다.


요나는 하나님께서 그에게 명하신대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기 위하여 니느웨로 가는 대신 주님을 피하여 욥바로 갔습니다.

하나님의 종들도 그들의 사명(의무)에서 뒷걸음 칠 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 결과는 무엇이겠습니까?  요나는 그의 행동에 의하여 무엇을 잃었습니까?  그는 하나님의 임재와 행복한 하나님의 사랑의 즐거움을 잃었습니다. 우리가 신자(믿는 자)의 도리에 따라 우리 주 예수님을 섬길 때 우리의 하나님은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비록 온 세상이 우리를 대적할지라도 우리가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모시고 있는 한 그것은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즉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우리 자신의 욕망을 추구하는 순간, 우리는 키잡이(pilot) 없는 바다에 있습니다. 그때 우리는 몹시 신음합니다.

"오 나의 하나님, 어디에 가셨습니까? 제가 어찌 하나님을 섬기는 것을 피할 만큼 어리석을 수 있습니까?  이 대가는 너무 큽니다. 제가 주님의 임재 안에서 기뻐하기 위하여 주님께 돌아가게 하여 주십시오."라고

또한 요나는 마음의 모든 평안을 잃었습니다. 죄는 곧 신자의 위로를 파괴합니다. 요나는 그가 얻을 수 있었던 모든 위로를 잃었습니다.  요나는 하나님의 보호의 약속(언약)을 요구(주장)할 수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하나님의 뜻 안에 있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는, "주님, 나는 나의 사명 수행의 과정에서 이 고난을 만났습니다. 이 고난의 시간 내내 나를 도와 주십시오."라고 말할 수 없었습니다. 

요나는 그 자신의 결실을 거두고 있었습니다.[즉 자기 행동에 대한 보수(고통)을 받고 있었습니다.] 요나는 그 자신의 의지(뜻)로 충만했습니다.(즉 하나님의 뜻을 전혀 따르지 않았습니다.)

그리스도인이여, 그대가 모든 파도와 그대의 머리 위에 구르며 소용돌이치는 큰 물결들(파도들)을 갖기를 원하지 않는다면, 요나 같이 행동하지 마십시오. 그대는 그대 자신을 하나님의 일과 뜻에 즉시 맡기는 것보다 그것을 피하는 것이 훨씬 더 어렵다는 것을 알 것입니다.

마침내, 요나는 그의 때를 잃었습니다. 왜냐하면 역시 요나는 다시스로 가야  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과 겨루는 것(싸우는 것)은 힘든 일입니다. 



'주객전도(主客顚倒)'라는 말이 있습니다. 문자적으로는 '주인과 객의 위치가 바뀐다.'는 말로서 사전에는 '사물의 경중이나 선후관계나 완급 따위가 서로 뒤바뀐다는 의미'

주인은 주인의 자리나 입장을 지켜야 하고 객은 객의 자리와 입장을 지켜야 함에도 불구하고, 현실 생활에서는 그 '당연한 순서가 뒤바뀌는' 부조리하고 몰상식한 일들이 흔히 일어나는 것입니다.

이처럼 '주인과 객의 위치가 바뀌는' 일은 비단 사회생활뿐 아니라 종교생활에서도 발생합니다.

종교란 '신과 인간과의 관계 정립'이라고 정의할 수 있는데, 여기에서 신이 '주인'이 되고 인간이 '객'이 되어야 마땅한 '선후관계'를 뒤바꾸어 버리는 것입니다. 그것을 한마디로 하자면 곧 '인본주의(人本主義) 종교'입니다.

사실상 철두철미하게 '신본주의(神本主義) 종교'인 기독교를 제외한 나머지 모든 종교들은 다 '인간이 주인이 되어 있는 인본주의 종교'들입니다.

다시 말해서 '인간의 행복을 위하여 신을 찾는 종교'는 예외가 없이 '주객전도의 인본주의 종교'일 뿐인 것입니다.

하지만 그런 인본주의는 단지 우상 종교에서뿐 아니라 놀랍게도 바로 기독교 안에까지 만연되어 있습니다.

즉 하나님을 믿는다고는 하지만 그 목적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가 아니라 오로지 '내 인생의 행복을 위하여'에 머물러 있는 교회나 목사나 교인들이 수두룩한 것입니다. 과연 그것이 옳은 생각이겠습니까?

성경 말씀은 결코 그렇지 않다고, 신앙생활이란 철두철미하게 오직 '하나님 중심'으로만 되어야 한다고 명백하고도 단호하게 선포합니다.

오늘 본문은 하나님께서 요나를 소명하시어 선지자로 사용하실 때에 시종일관 당신께서 홀로 모든 주도권을 행사하고 계셨음을 속속들이 보여 주는 말씀입니다.

이 시간 저와 여러분은 왜 참된 신앙생활은 반드시 '신본주의 종교'가 되어야만 하는지 그 이유를 세 가지로 상고해 보고자 합니다.

1. 기독교는 '인간의 구도(求道)'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 전적으로 주도하는 종교입니다.

1절 상반절에 기록하기를 "1a여호와의 말씀이 아밋대의 아들 요나에게 임하니라"고 했습니다.

요나서의 주인공은 일반적으로 당연히 '요나'라고 여겨질 것입니다. 하지만 의외로 이 1절의 말씀은 '요나'가 '주어'로 시작되지 않습니다.

그 대신에 "여호와의 말씀"이 주체로, "요나"는 그 말씀이 "임하게" 된 객체로 나옵니다.

즉 이 요나서는 그 첫머리에서부터 누가 '주인'이며 누가 '객'인지 그 '선후관계'를 이처럼 뚜렷하게 명시해 놓고 시작하고 있는 것입니다.

열왕기하 14장 25절에는 "가드헤벨 아밋대의 아들 선지자 요나"가 "여로보암" 왕과 함께 언급되고 있습니다.

그 '가드헤벨'이란 지명을 통해서 요나가 스블론 지파에 속한 사람이었으며 또한 북조 이스라엘의 여로보암 2세의 치세 당시 아모스 선지자와 호세아 선지자와 동시대에 활동했음도 알 수 있습니다.

하지만 여기서만큼은 그저 "아밋대의 아들 요나"라고만 했습니다. 당시에 '누구의 아들'이라는 말은 바로 오늘날 어떤 사람 이름의 '성(姓)'에 해당되었습니다.

다시 말해서 이 '아밋대의 아들 요나'라는 말은 그냥 '이름 석 자'로만 되어 있는 소개나 마찬가지입니다.

그에게 '여호와의 말씀이 임하기 전'까지 요나가 도대체 어떤 사람이었는지, 무슨 일을 하고 있었는지 단 한마디의 설명도 없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별 의미 없는 사실이었기 때문입니다.

중요한 것은 요나에게 '여호와의 말씀이 임함'으로써 그는 비로소 '선지자'가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그가 그때까지 아무 것도 하지 않고 그냥 놀고 있던 백수건달이었든지 아니면 무슨 다른 생업에 열심히 종사하고 있던 성실한 사회인이었든지 간에 상관없이, 일단 '여호와의 말씀이 요나에게 임하니라'는 바로 그 순간부터 요나를 선택하여 사용하시는 하나님의 역사가 시작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하나님의 명령이 요나에게 임한 바로 그때부터 이전에는 그저 '아밋대의 아들 요나'에 불과했던 그가 '하나님께서 파송하시는 선지자'로 순식간에 바뀌게 되었던 것이었습니다.

우리나라말 번역에는 없지만 히브리어 원문에는 1절의 첫 시작이 '또'라는 접속사로 되어 있습니다.

즉 그처럼 '여호와의 말씀'이 이니셔티브를 쥐고 발동됨으로써 '선지자를 소명'하시는 일은 구약 전체를 통하여 예외가 없이 반복되고 있는 패턴인 것입니다.

그 어떤 경우에도 사람 쪽에서 먼저 '하나님을 찾음'으로써 선지자가 된 경우는 없었습니다.

항상 하나님 쪽에서 당신께서 사용하실 자를 말씀을 통하여 '부르셔서 명령을 내리시고 보내심'으로써 선지자의 사역이 시작된 것이었습니다.

요나 역시 '스스로 도를 닦아서'가 아니라 오로지 '여호와의 말씀이 임함'으로써 '선지자'라는 새 이름을 가지고서 새 인생을 출발하게 되었던 것이었습니다.

인본주의적 종교인들은 그처럼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라 항상 '인간의 구도(求道)'에서부터 시작합니다.

사람이 소위 득도라는 것을 하기 위하여 명상을 하고 사람이 신의 경지에 도달하기 위해서 자신을 수련하는 것이 곧 종교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신이 아니라 사람이 '주체'가 되고 '시작'이 되고 있으니 갈 데 없는 '주객전도의 종교'가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하지만 '신본주의 신앙'에서는 항상 '하나님의 말씀'이 주체가 됩니다.

'말씀이 임함'으로써 우리는 비로소 '신자'가 되고 '직분자'가 되고 '전도자'가 됩니다.

아니 태초에서부터 오직 '하나님의 말씀'이 사람을 창조했으며, 오늘날 역시 그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로 하여금 자신의 '존재 의의'를 깨닫게 하고 '생의 목적'을 바로 찾아서 출발하게 만들어 주고 있지 않습니까?

'여호와의 말씀'이 임하기 전의 '나'라는 존재는 왜 살고 있는지도 모르는, 그저 '이름 석 자'밖에 없는, 사실상 아무 것도 아닌 인생에 불과했던 것입니다.

'말씀이 들리기 전의 나'는 입시지옥, 취업경쟁, 생활전선에 찌들던 고달픈 인생에 불과했지만, '복음의 음성이 내게 임함'으로써 이제는 구원의 확신으로 인한 기쁨만 충만한 신앙인이 되었습니다.

'말씀이 오기 전의 나'는 무력한 술꾼 남편, 바가지나 긁는 아낙네, 욕심쟁이, 놈팡이, '제 잘난 멋으로 살던 놈'에 불과했지만, '소명의 명령이 내게 임함'으로써 이제는 하나님께서 친히 쓰시는 '거룩한 도구와 의의 병기'가 되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찾은 것이 아니라 오로지 하나님 편에서 당신의 택자를 부르시는 말씀으로 먼저 찾아와 주신 까닭에 저와 여러분은 비로소 '하나님과 사귀는 그의 자녀', '하나님을 따르는 그의 백성'이 되었음을 꼭 깨닫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2. 기독교는 '인간의 양심'이 아니라 '하나님의 구원'이 최고의 사랑을 구현하는 종교입니다.

1절 하반절부터 2절에 "1b이르시되 2너는 일어나 저 큰 성읍 니느웨로 가서 그것을 쳐서 외치라 그 악독이 내 앞에 상달하였음이니라 하시니라"고 기록했습니다.

요나에게 임한 '여호와의 말씀'은 "일어나... 가서... 외치라"는 명령이었습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라'는 전도의 사명을 그에게 부여하셨던 것이었습니다.

여기서 '일어나라'는 말씀은 '앉아 있는 상태에서 일어서라'는 뜻이 아니라 '즉시 행동하라'는 의미를 강조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요나에게 '가라'고 하신 "니느웨"는 앗수르 제국의 수도였습니다.

요나가 선지자로 활동했던 '여로보암 2세' 시대는 주전 8세기 상반기였는데, 이때 니느웨는 이미 성곽으로 둘러싸여 요새처럼 강력하게 방어되어 있는 도시 즉 "큰 성읍"으로 티그리스 강의 동쪽 강변에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앗수르 제국은 그 니느웨를 중심으로 하여 북조 이스라엘을 비롯한 주변 국가들을 위협하고 정복하면서 그 판도를 확장해 가고 있었던 것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바로 "그것을 쳐서 외치라"고 명하셨습니다.

이 '쳐서 외치라'는 말을 그 니느웨 성을 '파괴하듯이 외치라'는 뜻이 아니라 '그것을 대항하여 외치라'(preach against it)는 의미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해야 할 이유를 가리켜 "그 악독이 내 앞에 상달하였음이니라"고 하신 것입니다.

즉 니느웨 성은 하나님을 거역하는 죄악으로만 가득 차 있는 성읍이었고 그런 까닭에 요나는 그 성의 악독함을 '대항하여, 반대하며, 정죄하면서' 외쳐야 마땅했던 것이었습니다.

이것이 요나뿐 아니라 하나님의 참된 선지자들이라면 반드시 보여 주어야 할 기본자세입니다. 선지자는 당연히 '악을 쳐서' 외쳐야 합니다.

악을 달래거나 악과 화합의 길을 모색하는 것이 결코 아니라 자신은 악과 대적관계에 있다는 입장을 분명히 하면서 그 악에 대하여 어디까지나 '공격적인 자세'로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해야만 하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요나는 곧 이어지는 3절에 나오듯이 그런 하나님의 명백한 명령을 정면으로 거부했습니다.

그 이유는 앗수르 제국이 당시 북조 이스라엘을 가장 괴롭히던 원수였기 때문이었습니다.

하지만 여기에서 한 가지 질문이 생깁니다.

니느웨가 요나를 비롯한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토록 미워하는 적국의 수도라면 그 '원수를 쳐서 외치는' 일은 오히려 발 벗고 나설 일 같은데 왜 요나는 그것을 거부했던 것이겠습니까?

왜냐하면 요나는 그처럼 '하나님께서 쳐서 외치는 말씀'을 듣고 니느웨의 왕과 온 백성들이 다 회개하고 하나님께로부터 용서를 받게 될 것이 싫었기 때문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 미운 니느웨 사람들을 '그냥 한방에 싹쓸이해 버릴 저주'를 내려 주지는 않으시고 그 대신에 오히려 '회개의 기회를 제공하는 말씀'을 전해 주라고 하시니 요나로서는 어이가 없었던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바로 여기에서 하나님의 특별하고도 놀라운 사랑은 아낌없이 나타나고 있지 않습니까?

바로 '죄를 미워하고 악을 책망하는 것' - 이것이야말로 '하나님 식의 진정한 사랑 표현'입니다.

왜냐하면 이것만이 죄인을 회개시켜서 구원을 얻게 해 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요나뿐 아니라 모든 사람들은 다 악인이라면 혐오할 뿐이며 원수라면 미워할 따름입니다.

그것은 상식적으로 아주 당연하고도 정당한 반응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좌우를 분변치 못하는 니느웨의 12만여 명의 죄인'들을 지극히 "아껴"(욘 4:11) 주시는 놀라운 성품의 소유자이십니다.

실로 우리가 '하나님의 원수'가 되었을 때조차 '그 아들의 죽으심'을 통하여 우리 죄인들을 당신과 '화목케' 해 주시는, 정말 믿기지 않을 정도로 신기한 사랑을 발휘해 주시는 하늘 아버지이신 것입니다.

오늘날 '성경 전체의 주제는 사랑이다.'라는 말을 즐겨 쓰는 목사들이 참 많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왜 그 사랑이 '하나님의 사랑'이라고 정확하게 말하지 않는 것입니까?

성경이 말씀하는 사랑이 무슨 '사람 사이의 사랑', '나눔과 이해와 용서와 화목 따위를 통해서 성취되는 인간적인 사랑', '기독교뿐 아니라 세상의 다른 모든 종교들도 똑같이 말하고 공감하는 흔한 사랑'이라는 말입니까?

오직 성경만이 증거해 주는 최고의 사랑은 바로 '죄인을 구원해 주시려는 하나님의 사랑'일 뿐입니다.

세상의 그 어떤 '양심적인 사람'이 행하는 사랑도, 이 인간사회의 그 어떤 '마음 착한 사람'이 베푸는 사랑도 '하나님께서 죄인을 회개시켜 구원해 주려 하시는' 이 지고한 사랑에는 감히 비교의 대상조차 될 수 없다는 것을 똑똑히 알아야 합니다.

사람이 스스로 선한 양심을 따라 베풀고 서로 나누는 가운데 인간사회에서 완전한 사랑을 구현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것은 그저 인본주의 종교에 불과하며, 오직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독생자를 통하여 구원해 주시는 것'만이 진정한 최고의 사랑임을 뜨겁게 체험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3. 기독교는 '인간의 고집'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뜻'대로만 모든 것이 이루어지는 종교입니다.

3절에 기록하기를 "3그러나 요나가 여호와의 낯을 피하려고 일어나 다시스로 도망하려 하여 욥바로 내려갔더니 마침 다시스로 가는 배를 만난지라 여호와의 낯을 피하여 함께 다시스로 가려고 선가를 주고 배에 올랐더라"고 했습니다.

'즉시' 행동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에 요나는 즉각 "일어나기는" 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순종의 반응이 아니라 반항의 반응이었습니다.

그는 "여호와의 낯을 피하려고" 행동을 시작했던 것이었습니다.

'여호와의 면전을 피하려고'라는 말은 달리 표현하자면 '여호와의 존재하심으로부터 피하려고'(to flee from the presence of the Lord)라는 뜻입니다.

즉 그는 '무소부재하신 하나님의 눈을 피해서' 달아날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이었습니다.

요나의 이러한 행동은 하나님의 명령에 대한 그의 '거부 의사'를 명백히 반영해 줍니다.

그는 적국의 나라에 가서 전도를 하여 그 왕과 백성들을 회개시켜 구원받도록 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이 부당하다고 판단했음에 틀림없습니다.

즉 '그런 일을 시키시는 것은 너무 심하다.'라고 반발하면서 자기로서는 아무런 양심의 가책 같은 것도 없이 아예 하나님께로부터 "도망하려" 했던 것이었습니다.

"욥바"는 요나가 살고 있던 곳에서 남서쪽으로 약 80km 정도 되는 곳에 위치하고 있던 항구도시였는데, 지중해 연안이었기 때문에 당시 많은 상선들이 오가고 있던 무역항이었습니다.

반면에 "다시스"의 정확한 위치는 사실 아직 미확인 상태이지만, 예레미야 10장 9절의 "다시스에서 가져온 은박", 에스겔 27장 12절의 "다시스는... 은과 철과 상납과 납을 가지고 네 물품을 무역하였도다"라는 언급이 나옵니다.

그것들을 미루어 추정해 볼 때에 다시스는 그 당시 세계 무역의 주역이었던 페니키아인들이 스페인 남부 연안에 만들어 놓았던 식민지 항구였음이 거의 확실합니다.

요나는 "욥바로 내려갈" 때부터 지중해 반대편 서쪽 끝에 있는 그 "다시스로 도망하려 하는" 의도가 이미 확고부동하게 세워져 있었던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요나가 그렇게 작정을 하고 욥바에 갔더니 "마침 다시스로 가는 배를 만나게" 되었는데, 여기 '마침'이라는 말은 어떤 영어 성경에 'about to'라고 번역되어 있습니다.

즉 요나는 '마침 지금 막 다시스로 떠나려 하는 배'를 그야말로 절묘한 타이밍으로 '만나게' 되었던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고 자기 고집대로 행동하려는 요나에게 문자 그대로 '순풍에 돛을 단' 듯한 일이 벌어지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 뒤의 일이 어떻게 진행되었는지를 잘 알고 있습니다.

처음에는 순조롭게만 보였던 그 '다시스로의 줄행랑'이 '큰 물고기 뱃속'으로 들어가는 길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결국에는 하나님께서 그 큰 물고기로 하여금 요나를 '니느웨 성'으로 가는 해변의 육지에 '토해' 놓도록 하시지 않으셨습니까?

한마디로 말해서 '요나의 고집'이란 '하나님의 뜻' 앞에서는 무슨 '밀당'(밀고 당기기)을 하고 자시고 할 여지조차 없었던 것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역시 교인이라는 사람들 가운데서도 제 딴에는 하나님과 온갖 '밀당'(밀고 당기기)을 시도하는 사람들이 여전히 많습니다.

그야말로 '여호와의 낯을 피하려는' 즉 예배당만 떠나면 마치 하나님께서 못 보실 것처럼 행동하는 것입니다.

'다시스로 가는 배' 안에만 깊이 숨어 있으면 하나님께서도 찾으실 수 없다는 듯이, 즉 자기가 집안에서는 무슨 불신앙적인 생각을 하든지, 멀리 휴가를 가 있는 피서지에서는 그 어떤 불경한 행동을 저지르든지 간에 하나님께서도 알 재주가 없을 것이라고 아주 태연자약합니다.

'안식일을 기억하여 그 날을 거룩하게 지키라.'는 하나님의 계명은 잘 알고 있으면서도, '오늘 같은 날은 가족들과 함께 좀 좋은 시간도 가져야지.'하고 순전히 '자기 기분'대로 따라갑니다.

'너희의 온전한 십일조를 창고에 들여 나의 집에 양식이 있게 하라.'(말 3:10)는 하나님의 명령은 명백하기 이를 데 없는데도, '이런 어려운 형편에 도대체 어떻게 십일조를 내고 살라는 말이냐?'라고 오로지 '자기변명'만 내세우면서 정말 간도 크게 '하나님의 것을 도적질'합니다.

그래서 가정이 화목해지고 가계가 넉넉해지는 것을 두고 마치 '마침 다시스로 떠나는 배를 만난 것'처럼 매사가 순조롭다고 착각하는 것입니다.

물론 그런 교인들은 요나와 똑같이 자신의 행동에 대하여 아무 양심에 거리낌 없이 그저 '하나님이 너무 심한 요구를 하신다.'라고만 생각하기 마련입니다.

하지만 만약 하나님께서 그런 '사람의 고집'에 질 분이시라면 태어날 때부터 본질적으로 죄인인 우리들 가운데 구원받게 될 사람이 단 한 명이라도 있겠습니까?

물론 어림도 없는 일이며 하나님께서는 '만세 전에 이미 택해 놓으신 자'를 결코 그렇게 내버려두실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이 감히 '중지(衆智)'니 '신앙양심'이니 하면서 내세우는 '자기주장'에 1밀리미터도 밀리지 않으시고 '오로지 그 작정하신 뜻'대로만 당신의 구속사를 이끌어 가십니다.

아무리 자기를 전도하는 며느리를 핍박하던 시어머니라도 하나님의 택자인 한에는 휠체어에 태워서라도 반드시 교회로 나오게 하고야 마십니다.

아무리 건축헌금하기가 싫어서 '아예 배를 타고 최대한 멀리 다시스까지 도망하려' 해도 하나님께서 쓰시기로 이미 작정해 놓으신 일꾼이면 '물고기 뱃속'에 집어넣어서라도 오직 당신의 계획하신 그대로 사용하고야 마시는 것입니다.

'인간의 투정'에 꺾이고 '인간의 고집'에 지장이나 타격을 입는 신은 오직 '인본주의 종교의 우상'일 뿐 결코 우리 하나님은 그런 신이 아니십니다.

참 하나님은 구속사를 비롯한 모든 세상만사를 100퍼센트 오직 '당신의 뜻'대로만 섭리하심으로써 필연적으로 성취하고야 마시는, 인간으로서는 불가항력적인 절대주권자이심을 철저하게 믿고 순종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성도 여러분, 인본주의적인 주장과 고집을 가지고 '여호와의 낯을 피하려' 시도했던 요나는 이처럼 '여호와의 말씀, 하늘 아버지의 사랑, 절대주권자의 의지' 앞에 상대가 될 수 없었습니다.

다시 말해서 요나가 '진실한 신앙인'이 되고 '충성스러운 사명인'이 되어서 비로소 하나님께서 당신의 구속사를 펼치실 수 있었던 것이 결코 아니라, 시종일관 '하나님께서 모든 이니셔티브를 꽉 잡고 계시는 가운데' 일이 진행되었던 것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이 '주인공'이 되고 하나님이 '조연'이나 '엑스트라'가 되는 '주객전도의 신앙생활'이 현대사회에, 현대교회 안에 범람하고 있습니다.

당연히 '사람이 하나님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지 어떻게 '하나님이 사람을 위해 존재한다'는 말입니까?

당연히 '창조주'가 주인이시고 '피조물'이 객이지 어떻게 '창조주가 피조물을 섬기는 심부름꾼이나 서비스맨이나 종'이 될 수 있다는 소리입니까?

정말이지 어처구니 짝이 없는 '객주도치'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런 '인본주의적인 신앙'이란 '석가모니가 깨달음을 얻기 위해 무슨 나무 밑에 앉았다.'로 시작되는 불교나 '마호메트가 계시를 받기 위해 무슨 산으로 올라갔다.'로 시작되는 이슬람교와 사실상 오십보백보인 것입니다.

진짜 종교는 '하나님이 가라사대'로만 시작되고 '하나님이 세상을 사랑하사'에서만 출발합니다.

'사람의 신심(信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 매사를 전적으로 주도하며, '사람의 선한 양심'이 아니라 '하나님의 구원하시는 사랑'이 압도적으로 작동되며, '사람의 소원'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예정하신 의지'대로만 모든 것이 관철되고야 만다는 사실을 확실히 믿고 체험하는 것만이 바로 '신본주의 신앙생활'입니다.

그래서 성경 그 어디에도 '인간의 행복을 위하여'라는 말씀은 단 한 군데도 없으며 오로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라는 말씀들만 충만한 것입니다.

'주인과 객'의 순서도 바뀔 수 없는 것이라면 더욱이 '하나님과 사람'의 선후관계는 두말할 필요도 없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인간의 종교심이나 선행이나 요구를 앞세우는 것은 실로 무례하기 짝이 없는 인본주의적 발상임을 깨닫고, 그 시작과 근본이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났고' 현재 영위하고 있는 은혜와 축복 역시 '하나님으로 말미암고' 그런 까닭에 모든 영광을 마땅히 '하나님께만 돌리는' 진정한 '하나님 중심의 신앙생활'을 지키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아멘.

여호와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동산 나무 사이에 숨은지라


창 3:8 그들이 그 날 바람이 불 때(루아흐,숨, 바람, 영, 개역성경은 날이 서늘할 때에) 동산에 거니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아담과 그의 아내가 여호와 하나님의 낯을(파님, 얼굴 face) 피하여 동산 나무 사이에 숨은지라

바람이 불 때(루아흐,숨, 바람, 영)

루아흐는  숨쉬다, 불다에서 유래했으며, 그 기본개념은 '움직이는 공기'이며 '숨(호흡), 바람, 영'을 의미한다.

(a)  숨, 호흡 breath.

① 입의 숨: 욥 15:30 하나님의 입'김'; 참조: 욥 19:17 내 '숨'; 코의 숨 애 4:20 우리의 콧'김'(왕을 가리킴); 우상에 대하여 렘 10:14 "그곳에 생기가 없다"는 것은 '호흡'이 없는 것을 가리킨다. 시 135:7, 렘 51:17, 합 2:19.

② 명령적인 말, 루아흐는 입의 호흡 곧 말하는 것을 나타낸다. (1) 하나님의 명령, 시 33:6, 참조: 사 34:16. (2) 메시야 왕의 명령, 사 11:4.

③ 단순한 숨(인 말), 욥 6:26, 욥 16:3, 렘 5:13.

④ 분노의 거친 콧 숨: (1) 하나님에 대하여, 출 15:8, 삼하 22:16, 욥 4:9, 시 18:16, 사 30:28, 사 59:19. (2) 사람에 대하여, 사 25:4.

⑤ 생명의 표시와 상징, 창 6:17, 창 7:15, 창 7:22, "기식": 겔 37:5, 겔 37:6, 겔 37:8, 겔 37:9, 겔 37:10, 겔 37:14(숨 또는 영).

(b)  바람 wind.

① (하늘의) 바람 창 8:1, 출 15:10, 민 11:31, 왕상 18:45, 렘 10:13, 렘 51:16, 시 135:7, 호 13:15, 사 40:7, 참조: 욥 26:13. 동풍 출 10:13, 출 14:21, 시 48:8, 렘 18:17, 겔 17:10, 겔 19:12, 겔 27:26, 욘 4:8. 북풍 잠 25:23. 해풍(서풍), 출 10:19. 낮의 바람, 창 3:8. 사방 바람, 렘 49:36, 겔 37:9, 단 8:8, 단 11:4, 슥 2:10, 슥 6:5. 광풍, 시 107:25. 광풍 시 148:8, 겔 1:4, 겔 13:11, 겔 13:13, 시 55:9. 뜨거운 바람, 사 11:15. 바람의 인격화, 삼하 22:11, 시 18:11, 시 104:3, 참조: 호 4:19, 시 104:4.

② (바람의) 방향 quarter, 편 side. 겔 42:16 (동)편; 겔 42:17 (북)편; 겔 42:18 (남)편; 겔 42:19 (서)편; 대상 9:24 (동서남북) 사방; 렘 52:23 사면.

③ 공기 air, 가스 gas, 사 26:18, 사 33:11.

④ 무익, 공허한 것. 욥 7:7("호흡"), 나의 생명은 바람이다. 욥 15:2("헛된 지식"). 바람의 지식은 헛된 지식이다. 사 41:29. "우상은 바람이요" 우상은 무익하거나 헛된 것이다. 전 1:14, 전 2:11, 전 2:17, 전 2:26, 전 4:4, 전 4:6, 전 6:9. 바람을 잡은 것은 무익하거나 공허한 것을 잡은 것이다. 참조: 전 1:7, 전 4:16, 전 5:15.

(c)  마음의 자세, 기질, 성질, 생기(활기, 기운), 기분, 감정, 정신.

① 정신, 생기, 왕상 10:5, 대하 9:4 숨을 더 쉴 수 없는 정신 상태, 곧 넋을 잃는 것을 뜻한다. 창 45:27, 삿 15:19, 삼상 30:12 기운을 회복하는 것, 왕상 21:5 마음의 근심.

② 용기 courage. 수 5:1, 시 76:12(표준-군왕들의 "호흡"), 개역-방백들의 "심령". 사 19:3, 시 77:4, 시 142:4, 시 143:4, 수 2:11, 잠 18:14.

③ 기(성)질, 기분, 특히 분노, 수 9:23, 수 8:3, 잠 16:32, 참조: 잠 25:28, 잠 29:11, 욥 15:13, 슥 6:8, 전 7:9, 전 10:4.

④ 성마름(조급함)이나 참을성, 출 6:9. 참조: 미 2:7, 잠 14:29, 욥 32:18, 욥 21:4, 전 7:8.

⑤ (번민하거나 근심하는, 불만하는) 마음, 기질. 창 41:8, 창 26:35, 사 54:6, 참조: 겔 3:14, 욥 6:4, 욥 7:11, 삼상 1:15.

⑥ (압도당한, 꺾인) 마음, 기질. 겔 21:7, 참조: 사 61:3, 잠 15:4, 잠 15:13, 잠 17:22, 잠 18:14, 시 143:7.

⑦ 기타 성질 및 성향, 충동적인 성질. 대상 5:26, 대하 21:16, 대하 36:22, 스 1:1, 스 1:5, 렘 51:11, 학 1:14, 왕하 19:7 = 사 37:7, 민 14:24, 말 2:15, 말 2:16, 신 2:30, 민 5:14, 민 5:30(시기), 호 4:12, 호 5:4, 사 19:14, 사 28:6, 창 41:38, 잠 17:27.

(d)  예언의 영. 민 27:18, 왕하 2:15, 왕하 2:9, 사 29:10(참조: 창 2:21, 창 15:12, 사 19:14). 깊이 잠들게 하는 영. 미 2:11, 슥 13:2, 참조: 겔 13:3.

(e)  생물의 영, 숨쉬는 존재.

① 하나님의 선물과 창조. 슥 12:1, 욥 27:3, 참조: 사 42:5.

② 하나님은 영을 보존하신다. 욥 10:12, 욥 12:10, 민 16:22. 민 27:16, 잠 16:2.

③ 그러므로 그 영은 하나님의 영이다. 창 6:3,

④ 영은 죽을 때에 떠난다. 시 78:39, 사 38:16(생명의 원리), 시 146:4, 시 104:29, 시 104:30, 욥 17:1, 욥 34:14(참조: 15절), 사 57:16, 전 8:8, 전 11:5, 전 3:21, 전 12:7, 시 31:6.

⑤ 육체를 떠난 영혼. 욥 4:15.

(f)  하나님의 영, 곧 삼위일체의 제 3위인 성령.

① 대부분의 표현에서 여호와의 신(영)은 가장 완전한 기독교적 의미에서 성령이라는 것을 문맥이 명백히 입증하며, 신약성경에서 강력한 유비(analagy)로 쓰여진다. (A. F. Kirkpacrich cambridge Bible. Psalms 11. P 293).

② 최초로부터 하나님의 루아흐는 하나의 실재 혹은 인격으로서 태초의 수면에 운행하셨다. 이는 성령께서 한 인격으로 창조 사역에 참여하셨음을 시사한다. 창 1:2. 참조: 민 11:17, 민 11:25.

③ 처음으로 다윗이 그를 "성령"이라고 지칭했다(시 51:11, 참조: 사 63:10-11).

④ 이사야는 그들 자신에게 영감을 주는 자로 생각하든지 아니면 동료 화자로 생각하든지 간에 메시야, "주 여호와께서 나와 그 신을 보내셨느니라"(사 48:16)를 인용하면서 그가 말할 때 그의 분명한 인격체를 말한다.

⑤ 하나님의 신의 역사는 창조 때에나(욥 26:13)나 섭리에서(욥 33:4, 시 104:30), 우주적이며, 중생에 있어서 구속적이다(겔 11:9, 겔 36:26-27). 하나님의 신은 신자를 지지하고 인도하기 위해 내주 하시며(느 9:20, 시 143:10, 학 2:5), 지도권(민 11:25, 삿 6:34, 삼상 16:13), 섬김(민 11:17, 삿 6:34, 삼상 16:13), 섬김(민 11:17, 미 3:8, 슥 7:12)을 위해 혹은 메시야(사 11:2, 사 42:1, 사 61:1)와 그의 백성들(욜 2:28, 사 32:15)에게 능력을 제공해 주기 위해 임하신다.

(g)  초자연적 존재, 천사 같은 존재.

① 악한 영. 삼상 16:14, 삼상 18:10, 삼상 19:9.

② 참소하는 큰 영. 왕상 22:21.

③ 바람이나 불을 천사로 삼음. 시 104:4(참조: 왕상 19:11-12).

(참조: BDB; TWOT).

'루아흐'(헬라어 프뉴마)의 기본적인 개념은 '움직이는 공기' air in motion이다. 여기서 공기란 악어의 비늘 사이로 나올 수 없는 공기(욥 41:16 )로부터 한 바탕의 폭풍(사 25:4, 합 1:11 ASV, RSV)에 이르기까지의 공기를 가리킨다.  '네 바람', 루호트는 세상의 네 방위를 기술한다(렘49:36, 겔 37:9).  동물이든(창 7:15, 시 104:25, 29), 사람이든(사 42:5, 겔 37:5) 혹은 양자 모두이든지(창 7:22-23) 생물에게 있어서 루아흐는 호흡을 가리킨다.  여기서 호흡은 흡입한 것일 수도 있고(렘 2:24) 입술에 있는 것일 수도 있다(사 11:4, 욥 9:18, 죽은 우상들과 대조, 렘 10:14, 렘 51:17).  하나님은 '루아흐'를 창조하신다. '하나님의(하나님으로부터 온) '루아흐'(영 spirit, 한글개역 "기운")가 오히려 내 코에 있느니라'(욥 27:3).

호흡은 능력(왕상 10:5, 여기서 시바의 여왕은 '더 이상 '루아흐'가 없었다', 즉 그녀는 '숨을 쉬지 못했다', 압도당했다), 담력(수 2:11, 수 5:1, 이스라엘의 적들의 '영' spirit이 낙담했다), 가치(애 4:20, 여기에서 다윗 왕은 '우리 콧구멍의 호흡'[한글개역, "우리의 콧김"] ) 등의 의미를 함축한다.  하지만 거짓 선지자들은 '루아흐'(바람)가 된다. 왜냐하면 그들에게는 말씀이 없기 때문이다(렘 5:13). 여기에서 '루아흐'는 '단순한 호흡'의 헛됨, 무익함이라는 의미를 함축한다(욥 7:7, 사 41:29). 

공기의 돌진, 어떤 사람의 코를 통해 나오는 거센 콧바람처럼 '루아흐'는 호전적인 감정(사 25:4)이나 분노의 감정(삿 8:3, 잠 29:11, ASV, RSV)을 뜻한다. 궁극적으로 호흡은 활동과 생명을 의미한다. 사람이 병들거나 쇠약할 때 그 '영'이 쇠한다(욥 17:1). 그러나 그 영은 '두번째 바람'으로 되돌아 오며 그는 '소생한다'(삿 15:19, 삼상 30:12, 참조, 창 45:27). 전 인류의 호흡(루아흐)은 하나님의 손 안에 있다(욥 12:10, 사 42:5). 

그러나 인생의 독특한 성질은 물질적(육체적)인 것에 있지 않고 영적인 것, 즉 정신적이고 인격적인 것에 있다. 인간의 '호흡', '숨'은 하나님의 특별한 창조 활동에 의해 주어졌다(창 2:7, 창 1:2에 나오는 짐승들과 대조하라).   인간은 삼위일체 하나님(우리, 창 1:26)의 형상을 반영하며, 다른 모든 생물을 다스리는 권한을 부여받았다(창 2:20)-이다.   

'루아흐'는 마음의 성향 혹은 태도를 묘사한다. 갈렘의 마음은 그의 불신실한 동료들의 마음과 달랐다(민 14:24, 참조, 산헤립의 영, 즉 왕하 19:7에 나오는 결심). 사람의 '루아흐'는 슬플 수도 있고(왕상 21:5), 압도당할 수도 있으며(시 77:3), 회개할 수도 있다(사 57:12). 사람의 '루아흐'는 '차가울'(억제될) 수 있고(잠 17:27), 질투할 수도 있으며(민 5:14), 인내하거나 교만할 수도 있다(전 7:8). 사람의 지혜의 영으로 충만할 수도 있고(신 34:9) 매춘의 영으로 충만할 수도 있다(호 4:12).

끝으로, '루아흐'는 인간의 완전한 영적인 의식을 나타낸다. '내가 내 안에 있는 내 영으로(한글개역, "내 중심이") 주를 간절히 구하오리니'(사 26:9), 지혜로운 자는 '자기의 마음을 다시리며'(잠 16:32, 참조, 단 5:20). '마음에 간사가 없다'(시 32:2). 구약성경은 일반적으로 인간을 하나의 전체로 다루긴 하지만(참조, 네페쉬 '영혼', 종종 단순히 '자아' self라고 번역된다) 또한 인간의 본질적인 이원론을 인정한다(A.B. Davidson, The Theology of the OT, p.202). 

영과 육이 결합하여 '자아' self를 이루며, 따라서 인간은 한편으로는 '루아흐'를 가지고 있는 것으로 말해질 수 있지만, 또한 인간은 '네페쉬'이다(그러나 때때로 인간은 네페쉬를 소유하고 있다고 하며, 이 '네페쉬'는 죽을 때 인간의 몸에서 떠난다고 한다). '루아흐'는 그 몸 속에 담겨 있다(단 7:15, 아람어, 슥 12:1). 몸은 죽을 때 티끌로 되돌아 가지만 불멸의 영은 그것을 주신 하나님께로 돌아간다(창 3:19, 전 12:7). 이와 관련하여 '루아흐'와 '네페쉬'는 여기서 분명히 '영혼' soul을 의미하며, 중복되는 경향이 있다(욥 7:11, 사 26:9, 참조, 출 6:9, 민 21:4). 

'네페쉬'와 '루아흐' 양자 모두 죽을 때 몸을 떠날 것이며 몸에서 분리된 상태로 존재할 것이다(창 35:18, 시 86:13, 영혼이 그 몸으로 되돌아온다고 하는 드문 실례에 대해 왕상 17:22을 참조하라).

보다 더 높은 영역에서 '루아흐'는 초자연적인 존재, 천사같은 존재, '하나님께로부터 온 영'을 가리키기도 한다(삼상 16:23, NASB).  적당히 하나님께서는 천사들을 '루호트'(바람 winds, 시 104:4, 히 1:7) 로 이용하기도 하셨다. 사탄은 '참소하는 큰 영'이다(왕상 22:21). 다른 악한 영들도 하나님의 뜻에 따라 인간에게 임할 수 있다(삼상 16:14, 삼상 18:10, 삼상 19:9).

영적인 인격의 가장 두드러진 예는 하나님이시다(사 31:3).  하나님의 '호흡'(한글개역, "기운")은 강한 바람일 수도 있다(사 40:7, 사 59:19, 참조, 민 11:31).  주의 '영'은 단순히 활동적인 능력이나 분위기를 가리키기도 한다(사 40:13, "누가 여호와의 신을 지도하였느냐", 혹은 '누가 여호와의 마음[의도]을 알았느냐', 70인역본과 고전 2:16도 마찬가지임). 하지만 대부분의 면에서 '루아흐 야훼'(YHWH, 여호와의 신)는 기독교의 입장에서는 성령이다.  처음으로 다윗이 그를 "성령"이라고 지칭했다(시 51:11, 참조, 사 63:10-11). 

태초부터 하나님의 '루아흐'는 '하나의 실재 혹은 인격처럼' 태초의 수면에 운행하셨다(창 1:2).  하나님의 신의 역사는 창조 때에(욥 26:13)나 섭리를 계속하심에 있어서(욥 33:4, 시 104:30) 우주적이며, 중생(regeneration)에 있어서 구속적이다(겔 11:19, 겔 36:26-27), 하나님의 신은 신자를 지지하고 인도하기 위해 내주하시며(느 9:20, 시 143:10, 학 2:5), 지도력(민 11:25, 삿 6:34, 삼상 16:13), 섬김(민 11:17, 미 3:8, 슥 7:12)을 위해, 혹은 메시야(사 11:2, 사 42:1, 사 61:1)와 그의 백성들(욜 2:18, 사 32:15)에게 장차 능력을 제공해 주기 위해 임한다. 

['루아흐'와 '네페쉬'의 차이점, '루아흐'는 인간의 이성적이고 영원한 생명의 원리이며, 이성, 의지, 양심을 소유하고 있다. '루아흐'는 하나님의 형상을 인간에게 전해주며 고무적인 활력을 만들어낸다. 이 활력은 결국 개인적인 삶의 주체로서 인간의 '네페쉬'가 된다. 개개인에 독특한 인격은 인간의 정서와 욕구의 자리인 '네페쉬'에 원래부터 있다. '루아흐'는 그 자체내에 그 활력의 기반을 가지고 있는 생명력이다. '네페쉬'는 보다 주관적이고 조건부적인 생명을 갖는다. 신약성경은 '프뉴마'(루아흐)와 '프쉬케'(네페쉬)를 분명하고 실질적으로 구별하는 것 같다. - G. L. Archer.]  

여호와 하나님의 낯을(파님, 얼굴 face) 피하여

(a)  이 독특한 단어 파님은 항상 복수형으로 등장하는데 아마 얼굴이 수많은 부분들의 결합체라는 사실에서 연유한 듯하다.

파님은?
① 사람의 얼굴(창 31:2), "그의 외모"(창 4:5), 한 인간 전체를 뜻하는 대용어(신 7:10)로 사용되었다.
② 관찰자에게로 향해진 면, 예를 들어 '지면'(창 2:6),
③ 이 단어는 관계를 표현하기 위하여 여러 전치사들과 함께 사용된다. 예를 들면, ~의 면전에서 before the face of, ~앞에서 before, ~속으로 into, ~의 정면에서 in front of, ~의 반대편에 opposite 등이다.(참조: E. Tiedtke)

사람의 얼굴은 그 사람을 식별하게 해주고 그 사람의 마음 가짐과 감정을 반영해 준다.
따라서 파님은 자아 또는 자아 감정의 대용어가 될 수 있다. 성경에서 얼굴은(신체의 여타 부분들과 함께) 사람의 생리 기능을 담당하는 외적 기관으로 묘사될 뿐만 아니라 어떤 형태의 행동 방식과 관계되는 것으로 기술되었으며 따라서 어떤 인격성에 의해 특정 지어진다. 얼굴이 상대방의 감정, 기분, 성격을 묘하게도 밝혀주는 것으로 생각되었다는 사실은 극히 당연하다.

"굳은" 얼굴은 반항(렘 5:3), 뻔뻔스러움(잠 7:13), 무자비함(신 28:50)의 표시이다.  "빛나는" 얼굴은 기쁨의 증거이다(욥 29:24). "부끄러워하는" 얼굴은 패배, 좌절, 굴욕을 가리킨다(삼하 19:5). "불꽃같은" 얼굴은 공포에 질린 얼굴이다(사 13:8). "나쁜" 얼굴은 근심 걱정으로 찌든 얼굴이다(창 40:7). "낙담한" 얼굴은 매우 강렬한 분노와 불쾌감에서 연유한다(창 4:5). 누군가의 얼굴을 "부드럽게" 만든다는 것은 그를 달래거나 또는 그의 호의를 구한다는 뜻이다(하나님께 대해, 왕상 13:6, 왕하 13:4). KJV는 이 마지막 문구를 "~가 여호와께 구했다/탄원했다" X sought/entreated the Lord라고 의역하였다(한글개역: "여호와께 간구하매"). 그러나 히브리어 원문은 문자적으로 "~가 여호와의 얼굴을 부드럽게 만들었다"로 된다. 마찬가지로 이 관용구는 사람에 대해서도 사용된다(잠 19:6).

"얼굴을 숨기다"라는 문구는 혐오감을 나타낸다는 의미이며(사 53:3) "얼굴을 돌리다"라는 것은 거부한다는 뜻이다(시 132:10).
역으로 타인의 "얼굴을 들어 올리다"는 호의, 존중, 수락을 나타내 보인다는 뜻이거나(삼상 25:35, 한글개역, "청을 허락하노라") 또는 편파성 편애를 드러낸다는 뜻이다(레 19:15, 한글개역, "편을 들지", "두호하지").
얼굴을 숙인다는 빈번한 표현은 공손하게 인사하는 것을 의미한다.

파님은 동물의 얼굴들에 해당하는 말로 역시 때때로 사용되었다(겔 1:10).(V. P. Hamilton)

(b)  파님은 특히 하나님의 얼굴을 뜻하는 말로 사용되었다.

① 위에서 언급한 인간의 얼굴에 관한 관용구들과 문구들의 대부분이 하나님께도 적용되었다.
하나님의 얼굴은 은혜와 신의의 표시로서 "환히 빛난다"(시 4:6). 그의 얼굴이 분노로 "침울해진다"(렘 3:12). 하나님은 그의 얼굴을 "숨기기도" 하신다(시 13:1).

하나님이 얼굴을 드시거나 그의 얼굴을 이스라엘에 비추시면 그로 말미암아 이스라엘은 평강(즉, 구원)을 받는다.
하나님이 그의 얼굴을 감추거나 돌리실 때 은혜를 거두어가심을 시사한다(참조: 시 13:2, 시 104:29).  
하나님의 얼굴을 볼 수 있는 가능성은 가장 예외적 가능성으로 언급되어 있다(창 32:30, 브니엘: 하나님의 얼굴, 창 16:13, 출 24:9 이하, 신 4:12, 삿 6:22 이하도 역시 참조하라).( E. Tiedtke)

"하나님의 얼굴을 뵙다"라는 구절이 5회 발견되는데 아마 종교 예배를 위해 성소를 찾아간다는 뜻의 전문 용어이다.
다섯 구절은 출 23:15, 출 34:20, 신 31:11, 시 42:2, 사 1:12이다.
이 보기들의 각 경우에서 동사 라아('보다' to see)는 니팔형으로 간주된다. 그렇다면 "나타나다" to appear로 번역되는데 이것은 하나님의 얼굴을 뵈옵는다는 개념을 "앞에 나타나다" appearing before라는 개념으로 유화시킨 것이다. 한 용례에서(삼상 1:22) 니팔형이 자음 본문에 의해 명시되어 있다. 여기를 니팔 부정사형 레라오트 파나이(하나님 "앞에 나타나다" to appear before God)로 생각할 수 있으며 또 그것이 당연하기도 하지만 칼 부정사형인 리로트 파나이의 가능성은 출 33:20에 비추어 볼 때 상상할 수 없다. 이에 대한 몇몇 예외가 있는데 예를 들면 야곱(창 32:30)과 모세(출 33:11)의 경우이다. 그들은 하나님을 "대면하여" face to face 보았다.

만일 인간이 하나님을 보거나 또는 그 음성을 듣기만해도 그는 죽게 된다(출 19:21).

하나님 얼굴을 보는 경험이 얼마나 위험스러운지 항상 강조하고 있다. 죄많은 인간이 거룩한 하나님을 본다면 그는 죽어야 하는 것이다(출 33:20, 참조: 사 6:5).

이러한 이유로 모세(출 3:6)와 엘리야(왕상 19:13) 그리고 스랍조차도(사 6:2) 하나님 면전에서 그들의 얼굴을 가렸다. 하나님을 본 후에도 살아있는 사람은 놀람과 감사(창 32:30, 신 5:24), 두려움(삿 6:22, 삿 6:23, 삿 13:22, 사 6:5)으로 압도당하게 된다. 

신약성경에서 하나님은 예수님 안에 출현하셨으며 그만이 아버지를 보았다(요 1:18, 요 6:46, 요일 4:12).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음성이 들리는 통로가 되는 말씀일 뿐만 아니라, 그를 통해 하나님을 볼 수 있는, 하나님의 형상이기도 하다.(참조: V. P. Hamilton)

출 33장에서 여호와의 얼굴(파님)이 이스라엘 백성과 동행하신다(출 33:14 이하). 이는 여호와의 인격적 임재에 대한 강조적 표현이다.

② 하나님의 얼굴이 성전과 관련하여 언급되어 질 때, 이 용어는 제사와 관련된다. 성경의 범위를 넘어선 이 단어의 용법이 여기에 영향을 주었을 가능성도 있다. 이스라엘 주변의 열방은 신의 얼굴을 성전 우상의 얼굴로 만들어 이를 보고 예배하였다. 이스라엘의 예배에서 사용되어진 우상이 전혀 없었기 때문에 이 용어는 예배자가 성전에서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였다고 했을 때 비유적 의미로만 사용될 수 있었다(시 24:6, 시 42:2[마소라 42:3], 슥 8:21[마소라와 70인역본], 말 1:9[마소라]). 하나님의 은혜로우신 임재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돌아보심을 의미했으며 이스라엘 백성들은 성전에서 특히 그것을 추구했다. 그래서 구약성경에서 하나님의 얼굴을 찾는 것은 기도로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감을 의미한다. 

끝으로 제사를 아주 떠나서는 이 단어가 하나님과의 교제를 간구하는 일반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다. 시편 기자는 시 105:4에서 "계속적으로" 이렇게 할 것을 이스라엘 백성에게 촉구하고 있다. 진설병(출 25:30)의 문자적 의미는 "얼굴의 떡"("임재의 떡" RSV)이다. 이런 떡덩이들이 이교도 제사에도 있었던 것으로 알려졌으며 이들의 제사에서는 이 떡들이 신의 음식 역할을 했다(참조: 렘 7:18). 이스라엘이 이 관습을 이어받았을 때 떡 Bread(아토스)은 하나님의 얼굴 앞에 음식으로가 아닌 예물로 유향과 함께 특별히 마련된 식탁 위에 놓여졌다. 

③ 랍비 유대주의에서 사람의 최고의 소망은, 죽음에 임한 시각이나 메시야의 날 후에 다가올 세상에서,  셰키나의 얼굴 또는 하나님의 얼굴을 보는 것이다.  하나님의 빛의 반사를 받아 의인의 얼굴은 해와 같이 빛날 것이지만(단 12:3) 불신앙인들은 하나님의 얼굴 앞에서 형벌을 받을 것이다. 


주의 낯을 피하여 도망하는 요나

하나님께서 그의 선지자 요나를 니느웨로 파송하신 것은 하나님의 크신 사랑의 발로였습니다. 니느웨 사람들은 포악하고 강포했습니다. 살인과 저주와 거짓과 늑탈이 그들 속에 가득하였습니다. 그들의 잔인한 죄악은 하늘의 하나님 앞에까지 상달되었습니다(욘 1:2). 죄악이 극에 달한 시대나 사회는 하나님의 진노를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창 6:5~7:24, 18:20~19:29).

그러나 긍휼에 풍성하신 하나님은 죄에 대하여 무감각한 니느웨 사람들이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와 구원 얻기를 소원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이 뒤로 물러나 침륜에 빠지는 것을 원치 아니하신다고 하셨습니다(히 10:38~39). 그래서 하나님은 요나를 니느웨로 파송하신 것입니다.

"너는 일어나 저 큰 성읍 니느웨로 가서 그것을 향하여 외치라."

이것은 요나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사명의 말씀입니다. 요나는 니느웨로 가야 합니다. 요나는 니느웨로 가서 그들의 죄를 지적하여야 합니다. 요나는 니느웨 사람들을 향하여 그들의 죄악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과 멸망에 관한 메시지를 선포해야 합니다.

왜 하필 요나가 니느웨로 가야 합니까? 그 이유는 요나에게 있지 않습니다. 하나님 편에 있는 것입니다. 죄는 미워하셔도 죄인은 사랑하시는 하나님 편에 있습니다. 긍휼에 풍성하신 하나님의 크신 사랑 때문입니다(엡 2:4~5). 죄는 인생을 멸망으로 이끌어 가지만 하나님의 긍휼은 죄인을 구원에 이르게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들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도 이와 같습니다. 주님의 놀라우신 사랑이 허물과 죄로 죽었던 우리를 살려 주었습니다. 영생하는 하늘나라의 한 시민이 되게 하였습니다. 주님은 지금도 우리가 말씀을 거역하고 죄 가운데 빠져 있을 때 "오라 우리가 서로 변론하자. 너희 죄가 주홍 같을지라도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요, 너희 죄가 진홍 같을지라도 양털같이 되리라"고 약속하심으로(사 1:18) 우리가 그에게 돌아와 용서받기를 원하십니다.

사람의 생명을 구원하는 중대한 사명이 요나에게 주어졌습니다. 그러나 요나는 그 받은 사명은 외면하고 불순종의 길을 걸었습니다(욘 1:3). 도망하는 요나를 보십시오.

첫째, 그는 '여호와의 낯'을 피하려고 도망하였습니다.

본문 3절에 "…요나가 여호와의 낯을 피하려고…여호와의 낯을 피하여…"라고 하였습니다. 또 10절에는 "자기가 여호와의 낯을 피함인 줄을 그들에게 고하였다"고 하였습니다. 반복하여 나오는 말씀, "여호와의 낯을 피하려고"라는 말에 유의해야 합니다. '여호와의 낯'(히: 페니 여호와 יהוה פבי)은 '여호와의 얼굴'(the face of Jehovah), '여호와의 앞'(before of Jehovah). '여호와의 현존'(presence of Jehovah)을 뜻합니다.

여호와의 얼굴은 성도에게 크나큰 축복입니다(민 6:25, 시 17:15, 89:15~16). 여호와의 얼굴이 축복임을 아는 성도는 절대로 그 앞을 떠나려고 하지 않습니다. 다윗은 그의 기도 중에 "나는 의로운 중에 주의 얼굴을 보리니 깰 때에 주의 형상으로 만족하리이다"고 하였습니다(시 17:15).

여호와의 얼굴이 축복임을 아는 성도는 항상 그의 얼굴 뵙기를 소원합니다. 그 얼굴 앞에서 자신을 살피며 삽니다(창 39:8). 동시에 하나님께서 그 얼굴을 가렸다고 생각하였을 때는 괴로워하며 그 얼굴 뵙기를 갈망하였습니다(욥 13:24, 34:29). 요나의 도망, 그것은 하나님의 축복의 얼굴을 피하자고 하는 목적성을 띈 의도적인 도망이었습니다.

요나가 왜 이런 생각을 하였는지 잘 모릅니다. '어떤 수단을 쓰든지 여호와의 낯을 피하고 보자', '더 이상 하나님의 간섭이나 보호, 지도는 받지 않겠다',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여 니느웨로 간다 하여도 나에게는 아무런 유익이 없다', '나에게는 괴로움만 있을 뿐이다. 하나님은 나를 위하시는 것이 아니라 나를 괴롭히고 있지 않는가', '지금 내게 있어서 하나님은 거추장스러운 존재일 뿐이야.' 이렇게 생각하면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도망할 수밖에 없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이 안 계신 곳이 어디입니까? 또 그의 얼굴을 피하여 도망할 인생이 누구입니까? 하나님의 손길을 피하여 벗어날 수 있는 장소나 인생은 아무도 없습니다(시 139:1~10).

둘째, 도망하는 목적지는 '다시스'였습니다.

본문 3절에 "…요나가…다시스로 도망하려 하여…다시스로 가려고…"라고 하였습니다. 요나가 여호와의 낯을 피하여 도망하고자 하였던 최종 목적지는 '다시스'였습니다. 그렇다면 다시스는 어디입니까? 학자들의 연구가 활발하였는데, 스페인의 '타르테수스'일 것으로 많은 학자들이 추정하고 있습니다.

이곳은 구약성경 시대에 광물 자원이 풍부하여 정교하게 세공된 은, 철, 상납 등이 생산·수출되는 곳이었습니다(렘 10:9, 겔 27:12). 하나님은 요나에게 이스라엘의 북쪽에 있는 앗수르의 수도 '니느웨'로 가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요나는 그 반대 방향의 옛 두로인이 살고 있었던 '다시스'로 가려고 하였습니다.

이렇게 인간이 하나님으로부터 도망하려고 하는 것은 범죄한 아담과 하와의 타락한 성품이 유전되었기 때문입니다.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고 선악과를 먹은 후에 하나님이 두려워 도망하였습니다. 이 시대에도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 없는 다시스를 찾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피하여 어디로 도망하든지 하나님은 그들을 찾아낼 것입니다. 배 밑층 깊숙한 곳에 내려가 깊이 잠든 요나까지 하나님은 찾아내셨습니다. 인간이 하나님을 피하여 어디로 가든지 그곳도 하나님의 앞이요, 하나님의 영역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셋째, 다시스로 도망하는 요나는 욥바로 내려갔습니다.

본문 3절에 "그러나 요나가 여호와의 낯을 피하려고 일어나 다시스로 도망하려 하여 욥바로 내려갔더니…"라고 하였습니다. '욥바' 는 지중해 연안에 있는 유명한 항구 도시입니다. 하나님께서 가라고 한 '니느웨'와 그가 내려간 '욥바'는 정반대의 방향입니다. 그가 이처럼 다시스를 목적하고 욥바로 내려간 것은 혈과 육을 따라 생각하였기 때문입니다.

즉 자기 민족의 특권을 잃지 않으려 하였습니다. 유대 민족이 아닌 다른 민족이 하나님의 계시의 영광에 참여하는 것을 원치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사랑하고 아끼는 것이 싫었습니다(욘 4:2). 내려가는 길은 책망과 저주와 고통과 멸망의 길입니다. 애굽으로 내려갔던 아브람은 수치와 생명의 위협을 받았습니다(창 12:10,13).

블레셋으로 내려갔던 이삭은 불신자 이방 임금 아비멜렉으로부터 책망과 미움을 받았습니다(창 26:1~26). 블레셋 땅 딤나로, 가사로, 소렉 골짜기로 내려갔던 삼손은 머리카락이 잘리고 힘 잃고 눈까지 뽑히고 구경거리가 되었습니다(삿 14:1, 16:1~4). 모압으로 내려갔던 나오미는 남편 잃고 자식 잃고 재물 잃는 마라의 쓴 잔을 마셨습니다(룻 1:1~6, 20~21).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갔던 사람은 강도 만나, 가지고 있던 것 다 빼앗기고 죽음의 지경까지 놓였습니다(눅 10:30). 요나는 욥바로 내려갔습니다. 그 결과 그는 이방인들에게 수치를 당하고 물고기 뱃속에까지 내려갔습니다(욘 1:1~17). 내려가면 망합니다. 신앙은 계속하여 올라가는 것입니다.

예배하려고 올라가고(삼상 1:7,24),
기도하려고 올라가고(행 3:1),
찬양하려고 올라가며(행 3:8),
감사하기 위하여 올라가며(신 12:5~7, 눅 17:15~19),
천국까지 올라가고 올라가는 것이 신앙입니다(시 40:31).

하나님께서 우리 각자에게 사명을 주셨습니다.
그 이유나 목적은 하나님께만 있습니다.
나의 할 일은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 순종할 것뿐입니다.
하나님은 이러한 자들을 위하여 면류관을 준비해 놓고 있습니다.
모두가 이러한 신앙을 소유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노벨 과학수상자들 대부분 왜 창조주하나님을 믿는가?


왜 과학자들이 신을 믿게 되는가?
뉴톤, 페러웨이, 맥스웰  등 무수한 과거의 과학자들이 신을 믿었다.
그리고 현재 살아 있는 많은 수의 유명한 과학자들이 신을 믿는다.
일반인 보다 더 많은 비율의 과학자가 신을 믿는다.
왜 이렇게 신을 믿게 되는가?
그것은 과학 자체가 신을 증명하기 때문이다.
보통 세상에 신이 없다고 생각하는 과학자들은 세상의 진리를 찾기 위해 과학을 시작한다.

하지만 연구의 연구를 통해 얻게 되는 것은 결국 신이 있기에 이 모든 것이 가능하다는 결론이다.
아이러니컬한 것은 신을 부정하기 위해 시작한 연구가 그 정점에 이르러서는 신을 증명하기 때문이다.
과학자들이 정점에 맞다뜨리는 것은 바로 이것이다.
유신론자가 생각하는 세상은 하나의 신적인 존재가 원자에서 우주까지 세밀하게 설계했고 운행중임을 믿는 것이다.
과학자의 입장에서 그 가능성의 수를 봤을 때 신을 인정 할 수 밖에 없는 것이 여기에 있다.
과학은 인과율에서 시작되었고 과학자는 인과율을 믿기 때문이다.
신이 없다면 세상은 너무 터무니없기 때문이다.

‘기하학에는 왕도가 없습니다.’로 유명한 <기하학원론>의 저자 유클리드는 “자연의 법칙이란 신의 수학적인 방법일 뿐이다.”라고 말하였으며 ‘만유인력의 법칙’과 ‘미적분학’의 확립으로 유명한 아이작 뉴턴은 “과학자는 하나님의 피조물을 관찰하는 사람일 뿐이다.”라고 말하였습니다.

장쩌민이 미국을 방문했을 때 미국 대통령 클린턴에게
“미국은 과학이 이렇게 발달했으면서 왜 또 이렇게 많은 종교와 신앙이 있는가?”라고 물었다.

사실 역사를 살펴보면 과학이 발전하던 시기의 위대한 과학자들은, 코페르니쿠스(Nicolaus Copernicus), 데카르트(René Descartes), 갈릴레이(Galileo Galilei), 뉴턴(Isaac Newton)을 포함하여 모두 자신들이 절대적으로 신을 신앙한다고 인정했으며 이 세계는 신의 걸작이기에 법칙이 있으며 단지 과학자들이 발견하고 실증하기만 하면 된다고 보았다.

  - 리처드 파인만 (1965 노벨 물리학상)-

역사에 이름을 남긴 상당수의 위대한 과학자들이 종교를 신앙하는 ‘유신론(有神論)’자였다.
가령 현대 과학의 초석을 다진 케플러(Johannes Kepler), 근대화학을 창립한 보일(Robert Boyle), 전기분해의 원리를 발견한 패러데이(Michael Faraday), 전보를 발견한 모오스(Morse), 열당량을 발견한 줄(James Prescort Joule), 전자기학 이론을 집대성한 맥스웰(James Clerk Maxwell), 원자 이론의 아버지로 불리는 돌턴(John Dalton), 현대 유전학의 기초를 다진 멘델(Gregor Johann Mendel), 페니실린을 발견한 플레밍(Alexander Fleming), 미생물학을 창시한 파스퇴르(Louis Pasteur) 등은 모두 독실한 종교 신자였다. 

미국 컬럼비아 대학 교수인 해리어트 주커만(Harriet Zuckerman) 교수가 1977년 저술한 『과학엘리트 : 미국의 노벨상 수상자들(Scientific Elite; Nobel Laureates in the United States)』 이란 책의 통계를 보면 1901년 노벨재단이 설립된 이후 미국에서 과학 분야의 노벨상을 수상한 286명 중에서 73%가 기독교 신자였으며 19%는 유태교 신자였다.

저명한 노벨 물리학상 수상자 파인만은 일찍이 “수많은 과학자들이 과학을 믿지만 또 하나님도 믿는다. 양자 사이는 완벽하게 일치할 수 있다.”라고 말했다. 

현대 항공우주과학의 아버지로 통하는 폰 브라운(Wernher von Braun)은 일찍이 다음과 같은 말을 한 적이 있다.
“우주의 끝없는 신기는 조물주에 대한 우리의 확고한 신앙을 실증할 수 있을 뿐이다.
나는 우주의 존재 배후에 초월적 합리성이 있음을 인정하지 않는 과학자는, 과학의 진보를 인정하지 않는 신학자와 마찬가지로 이해할 수 없다.” 

-美 로켓의 아버지 폰 브라운박사 -
노벨 물리학상을 받은 텍사스大의 스티븐 와인버그는 77년 자신의 저서에서 우주론을 통해 우주를 이해하면 할수록 무의미해지는 것 같다고 썼다.
그러나 신을 ‘살해했던’ 바로 그 과학이 오늘날 신앙을 원상회복시키고 있는 것으로 신앙인들은 생각한다.
물리학자들은 우주가 본래 예정에 따라 생명과 의식(意識)을 탄생시켰다는 징표들과 부닥치게 됐다.
중력과 전자의 전하(電荷), 양자의 질량 등과 같은 자연의 상수(常數)들이 조금만 달랐더라도 원자들은 현재와 같은 결합을 유지하지 못했을 것이며, 별들은 연소하지 않았을 것이고 생명체는 출현하지 못했을 것이다.
82년 영국 성공회 사제가 되기 전까지 케임브리지大에서 저명한 물리학자로 활동했던 존 폴킹혼은 이렇게 말했다.

“자연의 법칙이 믿을 수 없을 만큼 정교한 조화를 이뤄 우리 눈 앞에 있는 우주를 탄생시켰다는 것을 깨닫게 되면 우주가 우연히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어떤 목적에 따라 창조됐다는 확신을 금할 수 없게 된다.”

레이저 광선의 원리를 발견해 64년 노벨 물리학상을 공동수상한 찰스 타운스는 한 걸음 더 나아가 이렇게 말했다.
“많은 사람들이 우주의 법칙에 지적인 측면이 있다는 느낌을 갖고 있다.”
 
지적설계의 증거가 무신론자에게 설계자를 확신시키다
(Intelligent Design Evidence Convinces Atheist of Designer)
 
ABC News에서의 AP 보고에 따르면, 한 유명한 무신론자가 과학적인 증거에 근거하여 이제는 하나님(?)을 믿게 되었다는 것이다.
81세의 나이에, 수십년간 고집하던 믿음은 실수였다고 말하면서,

안토니 플루(Antony Flew)는 "우주는 어떤 종류의 지적 능력과 첫 번째 원인에 의해서 창조되어졌음에 틀림없다"고 결론지었다. 플루는 영국으로부터의 전화 인터뷰에서 초월적 지성(super-intelligence)은 생명체의 기원과 복잡한 자연에 대한 유일한 좋은 설명이라고 말했다.

그는 최근에 “생물체의 최초의 번식이 자연주의적 진화론에 의해서 이루어졌다고 생각하는 것도 가능할 것 같지 않다” 라고 쓰고 있다. 

 거의 50년 동안 영국에서 가장 노골적인 무신론자 중에 한 사람이었던 안토니 플루는, "설계자가 있음을 가리키는 너무도 분명한 증거와 경우들을 항상 보게 되었다"고 말했다.
DNA에 대한 연구는 생명체가 만들어지기 위해서는 믿을 수 없을 정도의 고도로 복잡한 정렬이 있어야함을 보여주었으며, 이것은 어떤 지성이 개입되었음에 틀림없다는 것이다


요나와 큰 물고기 (Jonah and the great fish)​  Russell Grigg

'요나를 삼킨 큰 물고기'의 이야기는 성경을 믿는 신자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실제로 일어났던 역사적 사실(true history) 인가?
아니면 자유주의 신학자들이 말하는 것처럼 하나의 비유(allegory) 인가?
아니면 성경을 비판하는 자들이 말하는 것처럼 터무니없는 이야기(nonsense) 인가?

성경은 요나의 이야기를 진실된 역사로서 간주하고 있다.
요나서는 실제의 역사로서 기록되었다.
요나(Jonah)는 실제 있었던 선지자였고, 열왕기하 14장 25절에도 언급되었으며, 예수님 자신도 요나의 이야기를 믿고 있었다.

예수님은 니느웨 사람들이 요나의 전도를 듣고 회개하였다고 주장했을 뿐만 아니라, 예수님도 자신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을 요나의 경우에 비유하셨다. (마태복음 12:39–41, 누가복음 11:29–30).

헨리 모리스(Henry Morris) 박사는 ”그러므로 요나 이야기의 사실성은 예수님이 무지하셨던지, 아니면 잘못 알고 계셨던지 둘 중에 하나를 선택함 없이 부정될 수 없다. 그리고 그 어느 쪽도 예수님의 신성을 부정하는 것이다.”1 라고 하였다.

요나를 삼킨 바다 생물은 무엇이었을까?

요나서에서 바다 생물에 대한 히브리어 단어인 ‘dag’ 는 ‘물고기(fish)‘를 의미한다.
신약성경에서 마태에 의해 사용된 그리스어는 ’ketos‘ 로서, 바다 괴물(sea monster)을 의미하며, 개정된 번역판에서도 그렇게 표기되었다.
킹 제임스 성경(King James Version)에서 번역가들은 이 단어를 고래(whale) 로서 번역했는데, 고래는 그들이 알고 있던 가장 큰 바다 생물이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성경은 ”여호와께서 이미 큰 물고기(a great fish)를 예비하사 요나를 삼키게 하셨으므로 (욘 1:17)” 라고 기록하고 있다.
그 말은 요나를 안전하게 수용하기 위해서 하나의 특별한 창조 행위를 하셨거나, 기존에 있던 바다 생물을 조절하셨다는 것을 의미한다. 요나는 ”물고기의 뱃속에서(out of the fish's belly)” 하나님께 기도했다 (요나 2:1). 배(belly)는 고대 히브리어에서도 그렇지만 영어에서도 꽤 모호한 용어이다.

그래서 만일 요나가 향유고래(sperm whale)와 같은 생물에 의해 삼켜졌다면, 그는 굉장히 큰 후두 주머니(laryngeal pouch)에 있게 되었을 것이다.
만약 그 생물이 상어(shark)였다면, 요나가 상어의 위액(gastric juices)으로부터 보호되기 위해서 하나님에 의해서 특별히 준비된 위에 있었을 것이다.

한 남자를 통째로 삼킬 수 있는 큰 턱을 가지고 있는 바다생물들이 있다는 것은 확실하다.
호주 퀸즈랜드의 무루라바(Mooloolaba)에 있는 수상공원(Underwater World)에 있는 사진을 보라.
그리고 죠스 영화에서도, 고기잡이 배의 선주인 퀸트(Quint)는 상어에 의해서 통째로 삼켜지지만, 아무도 그것에 대해 이의를 제기했던 것처럼 보이지 않는다.

다른 설명?

1891년 포크랜드 섬(Falkland Islands) 근처에서 캡틴 킬람(Captain Killam)이 지휘하던 포경선인 ‘동방의 별(Star of the East)’ 호에서 작살을 던지던 제임스 바틀리(James Bartley) 라는 사람에 관한 이야기가 자주 인용되고 있다.

고래 사냥 도중에 바틀리는 바다에 빠졌고 사라졌다.
한 고래가 잡혔고 다음 날 선원들이 배를 갈랐을 때, 놀랍게도 바틀리가 그 안에서 발견되었는데, 그는 아직도 고래의 위에서 살아있었다.
그는 깨어났고, 시간이 흐른 후 회복되었다. 보고서에는 다음과 같이 쓰여져 있다.

”고래의 뱃속에서 체류된 동안, 위액에 노출된 바틀리의 피부는 놀라운 변화가 일어나 있었다.
그의 얼굴, 목, 손들은 창백하도록 흰색으로 탈색되어 있었고, 양피지 종이같은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바틀리는 굶주릴 때까지 아마도 뱃속 안쪽에서 살았을 것으로 여겨진다.
왜냐하면 그는 공포로 감각을 잃어버렸고 그곳은 공기가 부족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여지기 때문이다.” 2

이 이야기는 1892년 10월, 영자 신문인 ‘Great Yarmouth Mercury’에 처음 보도되었다.
그리고 그 이야기는 다른 글들에서 재보도 되었는데, 1924년에 출판된 프란시스 폭스(Francis Fox) 경이 지은 책 'Sixty-three Years of Engineering, Scientific and Social Work” 에도 포함되어 있었다.

성경비판자들은 이 이야기에 대해 다음과 같은 반박 주장을 하고 있다.
1906년에 캐논 윌리암스(Canon Williams)라고 불리는 영국 국교회의 목사가 이 이야기의 사실성을 확인하기 위해서 캡틴 킬람에게 편지를 썼다는 것이다.

그러나 1906년 11월 24일 캡틴의 아내로부터 답장을 받았는데, 전체 이야기가 진실이라는 이야기는 단 한 마디도 없었고, ”나는 남편이 ‘동방의 별’ 호에 있었던 해에 남편과 함께 있었는데, 남편과 함께 있는 동안 한 사람의 선원도 바다로 떨어지지 않았다.
그 선원 이야기는 바다 사람들의 허풍이다”3 라고 말했다는 것이다.

위의 상반된 보고서로부터, 누군가는 이 사건에 대해 경제적 문제로 얽혀있었던 것처럼 보인다.
명백하지 않은 것은 단지 그가 누구인가 하는 것이다!

헤리 림머(Harry Rimmer) 박사는 영국 해협에서 트롤어선으로부터 바다로 떨어졌다가 거대한 Rhincodon 고래상어에 의해서 삼켜졌던 한 선원을 직접 만난 이야기를 말하고 있다.

전체 트롤어선 선단은 상어를 잡기 위해 출항했다.
사고가 나고 48 시간이 지난 후, 그 상어가 목격되었고, 갑판에 있던 1파운드의 작살 총으로 살해되었다.
사체는 너무 무거워서 배의 갑판에 있던 윈치로 다루기에 힘들었다.
그래서 선원들은 그의 동료를 기독교 식으로 장례해주기 위해 그 상어 사체를 해안으로 끌고 왔다.
상어의 배가 열려졌을 때, 그 사람은 의식은 없었지만 살아 있었다.
그는 병원으로 급히 후송되었고, 충격으로 한 동안 고통을 당하였지만, 후에 퇴원하였다.
그의 사진과 이야기는 1 실링의 입장료를 내야하는 한 런던의 박물관(London museum)에 전시되어졌었고, ‘20세기의 요나(The Jonah of the Twentieth Century)' 로서 광고되어 졌었다.4

사흘 밤낮은 무엇인가?

고대 히브리인들은 관용적으로 하루의 한 부분도 하루로서 간주했다.5
그래서 사흘 밤낮(three days and three nights)은 38시간 정도의 짧은 기간도 될 수 있다.
이것은 예수님이 무덤에 계셨던 기간(금요일 늦은 오후에서 일요일 이른 아침까지)을 요나의 경우를 비유로 들며 밤낮 사흘이라고 말씀하셨던(마 12:40) 것을 설명하고 있다.

마가복음 8:31절에 예수님께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신 것을 주목하는 것은 흥미롭다. ”...사흘 만에 살아나야 할 것을 비로서 저희에게 가르치시되” 따라서 예수님은 두 가지의 시간 척도를 교대로(interchangeably) 사용하셨다.
성경비판자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요나가 물고기 뱃속에 있었던 시간과 비교되어진 예수님이 무덤에 계셨던 시간은 아무런 오류나 모순이 없는 것이다.6 

요나의 이야기의 많은 놀라운 부분 중의 하나는 그가 물고기의 뱃속에서 하나님께 기도하고(욘 2:1) 꽤 긴 시간을 기다려야만 했던 이유이다.
아마도 그는 기절을 했었고, 하나님이 마치 요나의 사건을 통해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을 예표하시기 위한 의도인 것처럼, 그를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게 하셨던 것이다. 

그러면 우리들이 생각하고, 믿어야만 하는 것은 무엇인가?

그 사건이 기적이었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사실, 요나의 이야기는 하나님에 의해서 일어난 6 가지 기적적인 사건들도 이루어져 있다.
그 사건들의 일부는 자연 현상까지도 하나님에 의해서 조절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여호와께서 대풍을 바다 위에 내리시매 바다 가운데 폭풍이 대작하여...” (욘 1:4)

”여호와께서 이미 큰 물고기를 예비하사 요나를 삼키게 하셨으므로...” (욘 1:17)

”여호와께서 그 물고기에게 명하시매 요나를 육지에 토하니라” (욘 2:10)

”하나님 여호와께서 박 넝쿨을 준비하사 요나 위에 가리우게 하셨으니” (욘 4:6)

”하나님이 벌레를 준비하사 이튿날 새벽에 그 박 넝쿨을 씹게 하시매 곧 시드니라”(욘 4:7)

”하나님이 뜨거운 동풍을 준비하셨고” (욘 4:8)

이러한 기적들은 성경에 기록된 노아의 대홍수 사건, 바벨에서의 언어의 혼란, 출애굽 시에 애굽 땅에 내려진 재앙들, 홍해의 갈라짐, 엘리사에 의해서 이루어진 기적적인 치유들, 예수님의 동정녀 탄생, 예수님이 행하신 기적들, 예수님의 부활 등과 같은 기적보다 더 믿을 수 없어 보이지 않는다.

기독교 신앙은 성경에 기초하고 있으며, 성경을 믿지 못한다면 무너지는 것이다.
기독교는 기적의 종교라는 것을 결코 잊어버리거나 변명해서는 안 된다.

인간적으로 말해서, 왜 하나님은 요나에게 그토록 긴 시간 동안을 물고기 뱃속에 있도록 하셨어야만 했을까?
그에 대한 정당하고 충분한 이유가 되는 대답은 니느웨 백성들에게 구원의 메시지를 전하시기 위한 하나님의 필요성에서 찾아볼 수 있다.
정말로, 요나의 이야기는 하나님이 인간들을 구원하시기 위해, 당신의 독생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시고, 갈보리 십자가에서 죽게 하시고, 사흘 만에 죽음에서 부활하셔서, 우리들이 하나님과 화해할 수 있도록 하신(벧전 1:18-19) 사건을 예표하고 있는 것이다.       

REFERENCES AND FOOTNOTES

1. Henry Morris and Martin Clark, The Bible Has the Answer, Creation-Life Publishers, El Cajon (California), 1976, p. 74.

2. Sidlow Baxter, Explore the Book, Zondervan, Grand Rapids, 1966, Vol. 4, p. 153.

3. Leslie Rumble, Questions People Ask, Cheval‍‍ier Books, Kensington (New South Wales), 1972, p. 25.

4. Harry Rimmer, The Harmony of Science and Scripture, Eerdman's, Grand Rapids (Michigan), 1952, pp. 188–189.

5. Unger's Bible Dictionary, Moody Press, Chicago, 1957, p. 1099.

6. Cf. in Matthew 27:63–64 the Pharisees tell Pilate that Jesus had said He would rise 'after three days'. They then ask Pilate for a guard for the tomb 'until the third day'. If 'after three days' was not interchangeable with 'the third day', they would have asked for a guard 'until the fourth day'—Adapted from Josh McDowell and Don Stewart, Answers to Tough Questions Skeptics Ask About the Christian Faith, Here's Life Publishers, San Bernardino (California), 1980, pp. 50­51.


요나의 이야기에 대한 세 가지 견해


'요나를 삼킨 큰 물고기'의 이야기는 성경을 믿는 신자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실제로 일어났던 역사적 사실(true history) 인가?
아니면 자유주의 신학자들이 말하는 것처럼 하나의 비유(allegory) 인가?
아니면 성경을 비판하는 자들이 말하는 것처럼 터무니없는 이야기(nonsense) 인가?


어떻게 요나가 물고기 뱃속에서 사흘동안 살아남을 수 있습니까?

성경의 내용 중에서 요나가 큰 물고기 뱃속에 들어갔다가 살아난 이야기는, 자신이 지성적이고 합리적이라고 자부하는 사람들에 의해서 가장 많이 비웃음의 대상이 되고 있는 것들 중의 하나일 것입니다.
그들은 우선 물고기가 어떻게 사람을 통째로 삼킬 수 있는가?
또 뱃속에 들어갔다 하더라도 어떻게 3일간이나 죽지 않고 살아 남을 수 있느냐? 라고 반문하면서 사실일 가능성을 전혀 믿으려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일부 자유주의적인 신앙을 가진 크리스찬들은 이와 같은 비판을 피하기 위하여, 요나의 물고기 이야기는 결코 역사적인 사실을 말한 것이 아니라 단지 이솝의 우화와 같이 교훈을 주기 위해 풍유적으로 지어낸 이야기라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성경에서는 풍유나 비유, 혹은 상징적 표현을 사용할 경우에는 항상 그렇다고 명시하거나 전체 문맥을 통해서 그 의도를 분명히 밝히고 있습니다.

요나는 가공인물이 아니라 열왕기하 14장 25절에도 기록되어 있는 실존 인물로서, 기원전 8세기 경에 북왕국 이스라엘에서 활동했던 선지자(prophet)입니다.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의 종 가드헤벨 아밋대의 아들 선지자 요나를 통하여 하신 말씀과 같이 여로보암이 이스라엘 영토를 회복하되 하맛 어귀에서부터 아라바 바다까지 하였으니.

더욱 중요한 것은 예수님께서 요나에 대한 이야기를 사실로 여기셨다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12:39-40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구하나 선지자 요나의 표적 밖에는 보일 표적이 없느니라.
요나가 밤낮 사흘 동안 큰 물고기 뱃속에 있었던 것 같이 인자도 밤낮 사흘 동안 속에 있으리라.

예수님은 마태복음 12장 41절에서 니느웨 사람들이 요나의 전도를 듣고 회개하였다고 말씀하셨고, 40절에서는 “요나가 밤낮 사흘을 큰 물고기 뱃속에 있었던 것같이 인자도 밤낮 사흘을 땅 속에 있으리라”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앞으로 자신의 죽음과 부활이 요나의 기적처럼 이루어질 것임을 예언하신 것입니다.
따라서, 요나의 물고기 이야기가 실제로 있었던 역사적 사실이라는 것을 부인하는 것은 예수님을 거짓말쟁이로 만들거나, 의도적인 것은 아니라고 할지라도, 결과적으로 그의 신성을 부인하는 것이 됩니다.

"큰 물고기"라고 번역된 히브리어와 그리스어의 원래 의미는"물에 사는 큰 동물"이라는 뜻입니다.
아마 이“큰 물고기”는 고래나 상어, 어쩌면 하나님께서 이 목적을 위해서 특별히 만드신 물고기일지도 모릅니다.

과연 큰 바다의 동물이 사람을 통째로 삼킬 수 있을까요?

향유고래, 백상어, 고래상어와 같은 동물은 사람을 통째로 삼킬 수 있습니다.
잡아 올린 향유고래의 위 속에서 길이가 16피트나 되는 상어의 뼈가 실제로 발견된 일이 있습니다.

“큰 물고기” 뱃속에서 사흘 동안 살아남을 수 있을까요?

그것도 가능합니다.
고래의 위 속에는 항상 공기가 어느 정도 있을 뿐만 아니라, 공기로 호흡하는 생물이기 때문에 머리 부분에 공기를 저장하는 큰 장소가 있습니다.
고래가 어떤 물체를 입에 넣었다가 삼키기에 너무 크면 이 공기 저장소로 보내서 가지고 있다가 나중에 내뱉는다고 합니다.
어떤 큰고래의 공기 저장소는 가로, 세로, 높이가 각각 14, 7, 7피트나 되는데, 이것은 사흘 동안 살아남기에 충분한 양의 공기입니다.

고래잡이 역사에는 고래에 사람이 통째로 삼켜진 일들이 실제로 일어났고, 그 중에서 최소한 두 사람은 구출되어 생존한 기록이 있습니다.
이와 같이, 요나의 이야기는 자연적인 현상만으로도 전혀 불가능한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성경이 나타내는 바와 같이 하나님께서 직접 개입하셔서 요나의 생명을 구하신 기적이라는 사실입니다. 여호와께서는 그의 명령에 순종하지 않는 요나를, 대풍을 바다 위에 내리셔서(욘 1:4) 바다에 던져지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큰 물고기를 예비하셔서 삼키게 하셨고(2;17), 요나가 회개하자 그 물고기에게 명하셔서 육지에 토하게 하심으로써(2:10) 요나의 생명을 건지시고, 그를 통하여 니느웨 사람들을 회개하도록 하여 구원을 얻게 하신 것입니다.

어떤 경우라 할지라도, 우리가 예수님의 부활을 굳게 믿는다면 요나의 물고기 이야기를 사실로 믿는데 어려움이 없을 것입니다. 예수님을 죽음에서 살리신 하나님께서는 얼마든지 물고기를 이용하셔서 요나를 살리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

 





7월 25일(화) 요나서 2장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스올의 뱃속(2절)

가로되 내가 받는 고난을 인하여 여호와께 불러 아뢰었삽더니 주께서 내게 대답하셨고 내가 스올의 뱃속에서 부르짖었삽더니 주께서 나의 음성을 들으셨나이다.
He said: "In my distress I called to the LORD, and he answered me. From the depths of the grave I called for help, and you listened to my cry.

스올의 뱃속
밉베텐 쉐올(מִבֶּטֶן שְׁאֹול)
the depths of the grave

* 스올(7585)
שְׁאוֹל 스트롱번호7585
1. 무덤.  2. 지옥.  3. 구덩이
발음 / 스올[ sheʼôwl ]
어원 / 7592에서 유래
관련 성경 / 스올(창 37:35, 시 6:5, 호 13:14, 시 89:48, 아 8:6, 욘 2:2).
구약 성경 / 65회 사용

내가 스올의 뱃속에서 부르짖었삽더니 주께서 나의 음성을 들으셨나이다
- '스올의 뱃속에서'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미베텐 쉐올'(*)은 '무덤의 깊은 곳에서'라고 번역할 수도 있지만, 요나가 죽었었다는 것을 지지하지는 않는다(C. L. Feinberg).
다만 요나는 자신이 죽은거나 다름없다거나, 죽은 자들과 함께 있게 되었다고 생각했을 뿐이다.

아벳느고, 사드락, 메삭은 평소보다 일곱배가 더 뜨거워진 풀무불 속에서 기도
다니엘은 굶주린 사자굴에서 기도
예수님은 십자가의 극형 가운데서 기도
스데반은 돌에 맞아 죽는 순교 현장에서 기도
사도 바울은 유라굴로 광풍이 배를 쪼개고 승선 인원 276명을 위하여 기도
사도 요한은 밧모 섬에서 유배되어 기도
사도 베드로는 깊은 감옥에 갇혀서 기도
부활하신 주님을 지켜본 사도들과 초대교회 성도들은 마가의 다락방에 모여 기도
나는 지금 어디에서 기도하고 있는가?
나는 지금 무엇을 기도하는가?

성경은 요나가 ‘물고기 뱃속에 들어갔다’고 기록합니다.
이 ‘물고기 뱃속’이란 그의 인생의 무덤이 될 수도 있고, 아니면 생명을 잉태하는 자궁이 될 수도 있었습니다.
이 두 가지 가능성을 모두 가진 자리였습니다.
2장 2절에 나타나는 ‘스올의 뱃속’이라는 말 자체가 그렇습니다.
‘스올’이란 때때로 지옥으로도 표현되지만, ‘무덤’이라는 뜻입니다.
또 ‘뱃속’은 어머니의 자궁을 뜻하지 않습니까?
다시 말하면, 이 큰 물고기의 뱃속은 두 가지의 가능성, 두 가지의 현실성을 내포하고 있는 것입니다.
거기서 죽으면 그곳은 무덤이 되지만, 그곳을 탈출하면 그곳은 생명을 낳는 자궁이 됩니다.
마치 고난 속에서 무르익어 열매가 되는 경험을 하는 자리가 바로 스올의 뱃속인 것입니다.

첫째, 말씀을 인용한 기도(2절)

가로되 내가 받는 고난을 인하여 여호와께 불러 아뢰었삽더니 주께서 내게 대답하셨고 내가 스올의 뱃속에서 부르짖었삽더니 주께서 나의 음성을 들으셨나이다.

시편 3:4
내가 나의 목소리로 여호와께 부르짖으니 그 성산에서 응답하시는도다 셀라


요나는 구약 시편을 인용하여 기도합니다.
요나의 마음에는 말씀이 있었습니다.
평소에는 그 말씀이 요나를 지배하지 않았지만 스올의 뱃속에서는 그 말씀이 되살아났습니다.
평소에 내 마음에 새겼던 말씀이 기억에서 희미해질지라도 스올의 뱃속과 같은 환경이 나에게 닥쳐올 때 내 안에 있던 그 말씀이 순식간에 솟아나 스올의 뱃속을 무덤이 아니라 생명을 품은 마치 어머니의 자궁과 같은 곳으로 바뀔 것입니다.

가장 고난을 많이 겪은 민족은 유대인들입니다.
고난을 지나면서 유대인들은 이런 고백을 합니다.

우리가 안식일을 지킨 것이 아니라 안식일이 우리를 지켜주었다!

주님의 말씀이 나를 지켜주는 은혜를 경험하는 생명의 말씀을 마음에 새겨야 하겠습니다.
풍성한 말씀, 풍성한 생명

둘째, 예루살렘 성전을 향한 기도(4절)

내가 말하기를 내가 주의 목전에서 쫓겨났을찌라도 다시 주의 성전을 바라보겠다 하였나이다.


요나 선지자는 평소에는 성전에 대한 마음이 형식에 갇혀 있었습니다.
그런데 스올의 뱃속에서 성전에 대한 새로운 믿음이 솟구치기 시작했습니다.

성전을 향한 요나의 기도는 열왕기상 8:38의 말씀을 근거한 기도입니다.
 
솔로몬이 하나님의 성전을 봉헌한 후 하나님께서 나타나셔서 "네 기도와 네가 내 앞에서 간구한 바를 내가 들었은즉 나는 네가 건축한 이 성전을 거룩하게 구별하여 내 이름을 영원히 그곳에 두며 내 눈길과 내 마음이 항상 거기에 있으리니"(왕상 9:3)

그리고 "한 사람이나 혹 주의 온 백성 이스라엘이 다 각각 자기의 마음에 재앙을 깨닫고 이 성전을 향하여 손을 펴고 무슨 기도나 무슨 간구를 하거든 주는 계신 곳 하늘에서 들으시고 사하시며."(왕상 8:38)

다니엘이 바벨론에서 창문을 열고 하루에 세 번 예루살렘 성전을 향하여 기도한 것이 바로 이 말씀에 근거한 것이다.
성전을 향하여 기도하는 것은 약속에 근거한 기도이다.
오늘날 교회는 성전이 아니다.
그러나 형식이 아니라 마음과 사랑을 담아 기도할 수 있다.

셋째, 하나님의 마음을 만지는 기도(9절)

나는 감사하는 목소리로 주께 제사를 드리며 나의 서원을 주께 갚겠나이다 구원은 여호와께로서 말미암나이다.

요나는 하나님께 불순종하여 멀어진 관계를 가회복하려고 감사제와 서원제를 드립니다.
 
"저를 살려주시면 감사를 드리며 서원을 갚겠습니다"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나를 보살펴주시는 것이 아닌 것 같습니까?
마치 하나님이 나에게만 숨어 있는 것 같습니까?
그렇다면 요나와 같이 감사와 서원의 제사와 기도로 주님 앞으로 나가야 합니다.

요나가 이렇게 기도할 때 요나를 삼킨 물고기가 요나를 니느웨로 토할 것이라고 생각이나 했을까요?
그런데 하나님은 요나가 기도하지 않은 것을 이루어 주셨습니다.

10절입니다.
여호와께서 그 물고기에게 명하시매 요나육지에 토하니라.

문제를 부르짖으라
문제를 넘을 수 있도록 회개하라
문제를 해결하는 감사와 서원의 제사를 드리라

자유대한민국의 역사는 스올의 뱃속과 같은 과정을 지나왔습니다.

한일병합조약(韓日倂合條約) 또는 한국 병합에 관한 조약(韓国併合に関する条約 간코쿠 헤이고니 간스루 조야쿠[*])
1910년 8월 22일에 조인되어 8월 29일에 발효된 대한제국과 일본제국 사이에 이루어진 합병조약

군사정전협정(Korean Armistice Agreement)
(韓半島 平和協定, Peace Treaty on Korean Peninsula, PTKP)
1950년 한국전쟁 이후 유엔의 중재하에 1953년 7월 27일 

스올의 뱃속에서 배운 교훈을 절대 잊지 않는 기도의 용사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요나는 이 스올의 뱃속에서 3일을 보냅니다. 그곳은 하나님이 주시는 마지막 기회를 만나는 장소였습니다. 그리고 그 3일은 생명과 죽음을 가늠하는 시간이었습니다. 어둠의 시간이었고, 기다림과 고통의 시간이었으며, 죽음을 맛보는 시간이기도 했습니다. 더 이상 새로운 것이 보이지 않고, 모든 가능성을 포기하고 싶은 마음이 드는 시간이었습니다. 하나님은 바로 이 시간 속에서 요나에게 기회를 주셨습니다. “네가 이 스올의 뱃속을 무덤으로 만들 것이냐? 네 인생의 종착역으로 만들 것이냐? 아니면 네 인생의 새로운 기회가 싹트고, 새롭게 도전하는 자리로 만들 것이냐?”

 두 가지 가능성 중 하나를 결정하는 것은 요나의 몫이었습니다. 전적으로 요나에게 달려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다 준비하셔도 마지막은 우리에게 맡기십니다. “네가 결단해야 한다. 네가 그곳을 이겨 나갈는지 아니면 그곳에서 주저할는지….” 하나님이 아무리 도와주셔도 마지막은 나, 우리에게 달려 있습니다.


스올의 뱃속에서 요나는 기도하기 시작합니다.


 스올의 뱃속을 무덤이 아닌 생명을 품은 어머니의 자궁으로 바꾸기 위해 요나가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이었을까요? 기도였습니다.


요나가 물고기 뱃속에서 그의 하나님 여호와께 기도하여 (요나 2:1)


 요나는 물고기 뱃속에서 하나님 여호와께 기도했습니다. 우리는 어느 때에 기도하기 시작합니까? 현실을 뛰어넘겠다는 용기가 있을 때, 현실을 박차고 일어나고 싶을 때, 현실보다 더 큰 하나님의 세계에 들어가고 싶은 기대와 희망이 있을 때 기도가 시작됩니다. 현실에 안주하겠다고 마음먹었을 때는 기도할 수 없습니다.
 또, 어떤 사람이 기도할까요? 자신을 하나님 앞에서 포기한 사람이 기도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 항복하는 것입니다. “저는 끝입니다. 제 인생은 더 이상 가능성이 없습니다. 이제 하나님을 의지합니다. 하나님, 저를 도와주세요.” 인생의 마지막을 경험해 봐야 영혼의 깊은 곳에서부터 기도가 쏟아지기 시작합니다.
 요나는 이 위기가 자신 때문에 생긴 것을 알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자신을 몰아가신 것을 압니다. 이것이 마지막 기회라는 것, 이제 한계 상황에 도달했다는 것을 절감합니다. 그래서 물고기 뱃속을 인생의 종착점으로 만드느냐, 아니면 새로운 생명의 자리로 바꾸느냐를 결정하기 위해 기도하며 자신의 모습을 하나님의 눈으로 보기 시작합니다.


주께서 나를 깊음 속 바다 가운데에 던지셨으므로 큰 물이 나를 둘렀고 주의 파도와 큰 물결이 다 내 위에 넘쳤나이다 (요나 2:3)


 자신이 죽을 수도 있다는 것을 알기에 간절한 마음으로 간구하기 시작합니다. 

 

이르되 내가 받는 고난으로 말미암아 여호와께 불러 아뢰었더니 주께서 내게 대답하셨고 내가 스올의 뱃속에서 부르짖었더니 주께서 내 음성을 들으셨나이다 (요나 2:2)


 요나는 가장 깊은 죽음의 현장에서 생명의 하나님을 발견하고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기 시작합니다. 자신의 삶 전체를 걸고 하나님을 향해 외친 것입니다.

 2절에는 매우 중요한 변화가 나타납니다. 아쉽게도 한국어 성경에는 차이가 드러나지 않지만, 영어성경에는 하나님에 대한 표현이 달라졌음이 분명하게 나타납니다. ‘주께서 내게 대답하셨고’와 ‘주께서 내 음성을 들으셨나이다’의 ‘주께서’가 3인칭에서 2인칭으로 바뀌는 것입니다. 무슨 뜻입니까? 처음에는 3인칭 하나님이셨다가 스올의 뱃속에 들어가는 아픔을 경험하면서 하나님이 2인칭으로 요나에게 다가온 것입니다.

 하나님을 3인칭에 머물게 하는 기도는 아직 성숙하지 않은 기도입니다. 내 아버지의 하나님, 내 어머니의 하나님, 내 아내의 하나님, 내 남편의 하나님이 그렇습니다. 그런데 요나는 달라졌습니다. 드디어 2인칭이신 하나님께 물으며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당신은 어떤 분입니까? 내가 어떻게 해야 합니까? 당신은 도대체 누구십니까? 나는 누구입니까? 내가 무엇을 해야 이 위기를 벗어날 수 있습니까?”

 우리의 기도는 어떻습니까? 늘 어머니의 기도, 아버지의 기도에 머물러 있지는 않습니까? 내가 하나님을 2인칭으로 부르면서, 내 영혼이 스올의 뱃속에 있는 것을 고백하며 나가야 합니다.


기도는 고난을 이기고, 하나님의 뜻을 깨닫게 합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이 무엇일까요? 예수님을 믿든 안 믿든 고난이 다가오면 누구나 다 겁쟁이가 됩니다. 때로는 고난을 이겨내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 싫습니다. 도전하고 시도하기도 전에 안 될 거라며 포기합니다. 때로는 숨어 버리고, 스스로를 ‘실패자’라고 규정해 버립니다. 신앙인도 고난이 다가오면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그러나 신앙인은 여기에 머물지 않고 다음 단계로 나아갑니다. 바로 기도입니다. 하나님을 향해서 기도합니다. 내가 여기에 왜 있는지, 내가 누구인지, 내 주위에 어떤 어려움이 있는지 돌아보기 시작합니다. 그때 하나님은 3인칭의 하나님에서 2인칭의 하나님으로 다가오십니다. 그리고 우리는 하나님이 내 옆에서 나를 지켜보셨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그 하나님의 손길을 경험하면서 드리는 기도가 진정한 기도입니다. 고난의 순간에도 하나님이 나를 보고 계셨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면, 그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의 사건으로 변하게 됩니다.

 시편 119편에서 시인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고난 당하기 전에는 내가 그릇 행하였더니 이제는 주의 말씀을 지키나이다 (시편 119:67)

고난을 당하지 않았을 때는, 잘나갈 때는 자기 자랑에 빠지고 오만불손했는데, 고난을 당하고 나니 내 인생이 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물이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기를 원하는 믿음의 사람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 5장에서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다만 이뿐 아니라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 (로마서 5:3)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는 것은, 이것이 내게 소망을 가져다주는 하나님의 역사임을 알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환난 속에서도 과감히 즐거워하겠다고 다짐하고 선언하는 것입니다.

기도로 스올의 뱃속을 새 생명의 자리로 만듭시다.

지나온 삶을 돌아보면 스올의 뱃속과도 같은 어둠의 자리가 있었음을 압니다. 또한 시시각각 내 곁에 다가오는 춥고 시린 자리가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우리로 하여금 기도하게 합니다. 열심히 공부한 고등학교 3학년 학생이 원하던 대학에 떨어지면서 스올의 뱃속을 경험하게 됩니다. 잘나가던 직장인이 직장을 잃게 되면서 스올의 뱃속을 경험하게 됩니다. 건강에는 자신 있던 사람이 건강검진 결과 암 말기라는 진단을 받으며 스올의 뱃속을 경험하게 됩니다. 사랑하던 사람이 사고로 곁을 떠나면서 스올의 뱃속을 경험하기도 합니다.

개인적인 문제뿐만이 아닙니다. 이 사회에는 크고 작은 사건들이 계속 일어나고 있습니다. 미움과 분노가 곳곳에 자리 잡고, 폭력이 난무하는 것을 보면서 우리 사회가 스올의 뱃속에 빠져 있는 것은 아닌가 하고 두려움을 느낄 때가 있습니다.

대한민국의 역사를 돌아보면, 우리는 스올의 뱃속처럼 무덤과도 같은 역사를 경험하면서 여기까지 왔습니다. 하지만 동시에 생명의 자궁과도 같은 축복의 역사도 함께 경험했습니다. 36년간의 일제의 암흑시대, 6·25 전쟁의 아픔, 70년의 세월이 흘러간 분단의 역사가 우리에게 있습니다. 그로 인해 지금도 우리 백성들이 고통을 당하고 있고, 북녘에 있는 백성들은 신음하면서 하나님의 손길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스올의 뱃속처럼 어둠과 외로움이 있고, 인간의 존엄성이 파괴되는 고통 속에서 우리는 기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 스올의 뱃속에 있는 우리를 도와주소서. 그래서 생명의 자리로 오게 해 주소서”라고 개인의 삶과 대한민국이 처해 있는 자리에서 부르짖을 수밖에 없습니다.

스올의 뱃속과도 같은 삶의 자리는 개인에게도 있고, 가족에게도 있고, 직장에도 있고, 이 사회와 대한민국, 또 저 북녘 땅에도 있습니다. 우리가 기도해야 할 때입니다. 이 스올의 뱃속을 무덤으로 만들려면 가만히 있으면 됩니다. 하지만 그것은 망하는 길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이 스올의 뱃속에서부터 토해 내게 하시어 우리가 생명의 사람으로, 부활의 존재로 일어설 수 있게 기도해야 합니다.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 요나의 하나님, 우리의 주님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우리 하나님, 나의 하나님, 바로 그분께 기도하면서 스올의 뱃속과도 같은 이 암울한 시대를 이겨나가는 하나님의 자녀들이 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요나서 2장은 선지자 요나(Jonah, 비둘기)가 물고기 뱃속에서 기도하는 사건을 소개합니다.

요나의 기도는 개인적 경험일 뿐만 아니라 예수의 죽음과 부활을 예표하는 것입니다.
요나서 2장의 내용 구분
2:1-4. 요나의 고난과 구원
2:5-10. 구원에 대한 감사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고 니느웨로 향하지 않고 다시스로 방향을 바꾸었을 때 심각한 상황에 처했습니다.
자기의 능력으로 감당할 수 없는 처지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하게 됩니다.
극한 반항으로 죽음을 선택한 요나였지만 물고기 뱃속 즉 스올의 뱃속에서 구원의 하나님을 찾았습니다.
스올의 뱃속은 가장 낮은 곳에서 돌아오는 회개의 모습이라고 하겠습니다.
 
구속사적인 의미로 볼 때 물고기 뱃속에서의 요나는 예수의 죽으심을, 요나가 물고기 뱃속에서 나와 구원을 얻은 사건은 예수의 부활을 예표하는 것입니다.

요나가 물고기 뱃속에서 삼일 동안 있었던 것도 예수께서 죽으셔서 부활하시기까지의 기간과도 일치합니다.
물고기 뱃속은 사실상 지옥이나 무덤 속같이 절박한 상황을 의미합니다.
요나는 물고기 뱃속에 있는 동안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무덤에 장사지낸 후 부활하시기까지 옥에 있는 영들에게 전도하셨습니다(벧전 3:18-19).
요나는 물고기 뱃속에서 구원받고 예수 그리스도가 죽음에서 부활했듯이 성도들도 하나님의 때에 다시 살리심을 받았다는 은혜를 알려주는 것입니다.  

성도는 하나님의 도우심이 없이는 결코 살아갈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합니다.
성도들은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였으나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았음을 알고 요나가 하나님께 감사한 것처럼 구워 받은 은총에 대하여 날마다 매 순간마다 감사와 찬송을 올려야 하겠습니다.  


* 물고기(1710)
דָּגָה 스트롱번호1710

1. 물고기. 2. 보통 집합적인 뜻을 지님
발음 / 다가[ dâgâh ]
관련 성경 / 물고기(창 1:26, 출 7:18, 겔 47:9), 생선(민 11:5), 어족(신 4:18, 사 50:2).
구약 성경 / 15회 사용

요나는 하나님의 기회를 잡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요나를 돌이키기 위해서 요나에게 여러 번의 기회를 주셨습니다.

첫 번째, “네가 내 메신저가 되어라. 니느웨에 가서 내 말을 증거하고 저들도 회개하면 하나님의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선포해라”라고 요청하셨습니다.

그러나 요나는 거절했습니다.
“나는 유대 사람입니다. 이방인들까지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말씀이 싫습니다. 하나님은 너무 자비롭고 너무 착하십니다. 하나님, 그렇게 하시면 안 됩니다.”

​두 번째, 폭풍을 만나 생명의 위협을 느낀 이방 뱃사람들이 각각 자신들의 신에게 기도할 때, 하나님은 요나에게도 기도하며 회개할 수 있는 시간을 주셨습니다.

1장 6절을 보면, 선장이 요나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 자는 자여 어찌함이냐 일어나서 네 하나님께 구하라 혹시 하나님이 우리를 생각하사 망하지 아니하게 하시리라 하니라 (요나 1:6)

선장은 요나에게 기도를 요청했지만 요나는 기도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폭풍 속에서 배가 깨지게 되는 것을 그저 지켜보고만 있었습니다. ‘될 대로 되라’는 마음이었습니다.

​세 번째, 요나는 이 재앙이 자신 때문에 온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배를 돌리는 등의 결단을 해야 했습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생명과 운명을 뱃사람들에게 맡겨 버렸습니다. 스스로 판단하고 결정하는 모습도, 용기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끝까지 요나를 포기하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은 드디어 마지막 기회를 주십니다.
요나는 폭풍우가 치는 바다에 던져지게 됩니다.
그대로 두면 요나는 끝장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요나를 향한 사랑의 끈을 놓지 않으셨습니다.

여호와께서 이미 큰 물고기를 예비하사 요나를 삼키게 하셨으므로 요나가 밤낮 삼 일을 물고기 뱃속에 있으니라 (요나 1:17)

‘여호와께서 이미 큰 물고기를 예비하사’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이 미리 준비하셨다는 뜻입니다. 요나는 자기 마음대로 도망가고 있다고 여겼지만, 하나님은 계속 요나를 추적하고 계셨습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는 요나를 막다른 골목으로 몰아가시면서 결국 요나가 다시 돌이키기를 원하셨던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요나가 당한 모든 일들의 주체와 주인이 하나님이심을 성경은 전하고 있습니다. 행위의 주체가 하나님이심을 생각하며 요나서를 읽으면, 하나님이 얼마나 요나를 움직이려고 하셨는지 쉽게 알 수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큰 바람을 바다 위에 내리시매 … (요나 1:4)
여호와께서 이미 큰 물고기를 예비하사 요나를 삼키게 하셨으므로 … (요나 1:17)
여호와께서 그 물고기에게 말씀하시매 요나를 육지에 토하니라(요나 2:10)
하나님 여호와께서 박넝쿨을 예비하사 요나를 가리게 하셨으니 … (요나 4:6)
하나님이 벌레를 예비하사 … (요나 4:7)
해가 뜰 때에 하나님이 뜨거운 동풍을 예비하셨고 … (요나 4:8)

요나를 하나님의 예언자로 사용하시기 위해서 하나님이 얼마나 정성을 기울이고 계신지를 보여 주는 내용입니다.

​하나님은 요나에게 하나님의 섭리를 보여 주고자 하셨습니다. “요나야, 내가 너희만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백성을 사랑한단다.” 하나님의 사랑과 긍휼과 자비가 얼마나 위대한지 보여 주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런데 요나는 계속 도망가기만 했습니다.

결정은 요나가 해야 합니다.

성경은 요나가 ‘물고기 뱃속에 들어갔다’고 기록합니다.
이 ‘물고기 뱃속’이란 그의 인생의 무덤이 될 수도 있고, 아니면 생명을 잉태하는 자궁이 될 수도 있었습니다.
이 두 가지 가능성을 모두 가진 자리였습니다.

2장 2절에 나타나는 ‘스올의 뱃속’이라는 말 자체가 그렇습니다.
‘스올’이란 때때로 지옥으로도 표현되지만, ‘무덤’이라는 뜻입니다.
또 ‘뱃속’은 어머니의 자궁을 뜻하지 않습니까? 다시 말하면, 이 큰 물고기의 뱃속은 두 가지의 가능성, 두 가지의 현실성을 내포하고 있는 것입니다. 거기서 죽으면 그곳은 무덤이 되지만, 그곳을 탈출하면 그곳은 생명을 낳는 자궁이 됩니다. 마치 고난 속에서 무르익어 열매가 되는 경험을 하는 자리가 바로 스올의 뱃속인 것입니다.

 요나는 이 스올의 뱃속에서 3일을 보냅니다. 그곳은 하나님이 주시는 마지막 기회를 만나는 장소였습니다. 그리고 그 3일은 생명과 죽음을 가늠하는 시간이었습니다. 어둠의 시간이었고, 기다림과 고통의 시간이었으며, 죽음을 맛보는 시간이기도 했습니다. 더 이상 새로운 것이 보이지 않고, 모든 가능성을 포기하고 싶은 마음이 드는 시간이었습니다. 하나님은 바로 이 시간 속에서 요나에게 기회를 주셨습니다. “네가 이 스올의 뱃속을 무덤으로 만들 것이냐? 네 인생의 종착역으로 만들 것이냐? 아니면 네 인생의 새로운 기회가 싹트고, 새롭게 도전하는 자리로 만들 것이냐?”

 두 가지 가능성 중 하나를 결정하는 것은 요나의 몫이었습니다. 전적으로 요나에게 달려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다 준비하셔도 마지막은 우리에게 맡기십니다. “네가 결단해야 한다. 네가 그곳을 이겨 나갈는지 아니면 그곳에서 주저할는지….” 하나님이 아무리 도와주셔도 마지막은 나, 우리에게 달려 있습니다.


스올의 뱃속에서 요나는 기도하기 시작합니다.


 스올의 뱃속을 무덤이 아닌 생명을 품은 어머니의 자궁으로 바꾸기 위해 요나가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이었을까요? 기도였습니다.


요나가 물고기 뱃속에서 그의 하나님 여호와께 기도하여 (요나 2:1)

요나는 물고기 뱃속에서 하나님 여호와께 기도했습니다. 우리는 어느 때에 기도하기 시작합니까? 현실을 뛰어넘겠다는 용기가 있을 때, 현실을 박차고 일어나고 싶을 때, 현실보다 더 큰 하나님의 세계에 들어가고 싶은 기대와 희망이 있을 때 기도가 시작됩니다. 현실에 안주하겠다고 마음먹었을 때는 기도할 수 없습니다.

 또, 어떤 사람이 기도할까요? 자신을 하나님 앞에서 포기한 사람이 기도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 항복하는 것입니다. “저는 끝입니다. 제 인생은 더 이상 가능성이 없습니다. 이제 하나님을 의지합니다. 하나님, 저를 도와주세요.” 인생의 마지막을 경험해 봐야 영혼의 깊은 곳에서부터 기도가 쏟아지기 시작합니다.
 요나는 이 위기가 자신 때문에 생긴 것을 알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자신을 몰아가신 것을 압니다. 이것이 마지막 기회라는 것, 이제 한계 상황에 도달했다는 것을 절감합니다. 그래서 물고기 뱃속을 인생의 종착점으로 만드느냐, 아니면 새로운 생명의 자리로 바꾸느냐를 결정하기 위해 기도하며 자신의 모습을 하나님의 눈으로 보기 시작합니다.


주께서 나를 깊음 속 바다 가운데에 던지셨으므로 큰 물이 나를 둘렀고 주의 파도와 큰 물결이 다 내 위에 넘쳤나이다 (요나 2:3)


 자신이 죽을 수도 있다는 것을 알기에 간절한 마음으로 간구하기 시작합니다. 

 

이르되 내가 받는 고난으로 말미암아 여호와께 불러 아뢰었더니 주께서 내게 대답하셨고 내가 스올의 뱃속에서 부르짖었더니 주께서 내 음성을 들으셨나이다 (요나 2:2)


 요나는 가장 깊은 죽음의 현장에서 생명의 하나님을 발견하고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기 시작합니다. 자신의 삶 전체를 걸고 하나님을 향해 외친 것입니다.

 2절에는 매우 중요한 변화가 나타납니다. 아쉽게도 한국어 성경에는 차이가 드러나지 않지만, 영어성경에는 하나님에 대한 표현이 달라졌음이 분명하게 나타납니다. ‘주께서 내게 대답하셨고’와 ‘주께서 내 음성을 들으셨나이다’의 ‘주께서’가 3인칭에서 2인칭으로 바뀌는 것입니다. 무슨 뜻입니까? 처음에는 3인칭 하나님이셨다가 스올의 뱃속에 들어가는 아픔을 경험하면서 하나님이 2인칭으로 요나에게 다가온 것입니다.

 하나님을 3인칭에 머물게 하는 기도는 아직 성숙하지 않은 기도입니다. 내 아버지의 하나님, 내 어머니의 하나님, 내 아내의 하나님, 내 남편의 하나님이 그렇습니다. 그런데 요나는 달라졌습니다. 드디어 2인칭이신 하나님께 물으며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당신은 어떤 분입니까? 내가 어떻게 해야 합니까? 당신은 도대체 누구십니까? 나는 누구입니까? 내가 무엇을 해야 이 위기를 벗어날 수 있습니까?”

 우리의 기도는 어떻습니까? 늘 어머니의 기도, 아버지의 기도에 머물러 있지는 않습니까? 내가 하나님을 2인칭으로 부르면서, 내 영혼이 스올의 뱃속에 있는 것을 고백하며 나가야 합니다.


기도는 고난을 이기고, 하나님의 뜻을 깨닫게 합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이 무엇일까요? 예수님을 믿든 안 믿든 고난이 다가오면 누구나 다 겁쟁이가 됩니다. 때로는 고난을 이겨내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 싫습니다. 도전하고 시도하기도 전에 안 될 거라며 포기합니다. 때로는 숨어 버리고, 스스로를 ‘실패자’라고 규정해 버립니다. 신앙인도 고난이 다가오면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그러나 신앙인은 여기에 머물지 않고 다음 단계로 나아갑니다. 바로 기도입니다. 하나님을 향해서 기도합니다. 내가 여기에 왜 있는지, 내가 누구인지, 내 주위에 어떤 어려움이 있는지 돌아보기 시작합니다. 그때 하나님은 3인칭의 하나님에서 2인칭의 하나님으로 다가오십니다. 그리고 우리는 하나님이 내 옆에서 나를 지켜보셨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그 하나님의 손길을 경험하면서 드리는 기도가 진정한 기도입니다. 고난의 순간에도 하나님이 나를 보고 계셨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면, 그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의 사건으로 변하게 됩니다.

 시편 119편에서 시인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고난 당하기 전에는 내가 그릇 행하였더니 이제는 주의 말씀을 지키나이다 (시편 119:67)


 고난을 당하지 않았을 때는, 잘나갈 때는 자기 자랑에 빠지고 오만불손했는데, 고난을 당하고 나니 내 인생이 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물이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기를 원하는 믿음의 사람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 5장에서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다만 이뿐 아니라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 (로마서 5:3)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는 것은, 이것이 내게 소망을 가져다주는 하나님의 역사임을 알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환난 속에서도 과감히 즐거워하겠다고 다짐하고 선언하는 것입니다.


기도로 스올의 뱃속을 새 생명의 자리로 만듭시다.


 지나온 삶을 돌아보면 스올의 뱃속과도 같은 어둠의 자리가 있었음을 압니다. 또한 시시각각 내 곁에 다가오는 춥고 시린 자리가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우리로 하여금 기도하게 합니다. 열심히 공부한 고등학교 3학년 학생이 원하던 대학에 떨어지면서 스올의 뱃속을 경험하게 됩니다. 잘나가던 직장인이 직장을 잃게 되면서 스올의 뱃속을 경험하게 됩니다. 건강에는 자신 있던 사람이 건강검진 결과 암 말기라는 진단을 받으며 스올의 뱃속을 경험하게 됩니다. 사랑하던 사람이 사고로 곁을 떠나면서 스올의 뱃속을 경험하기도 합니다.
 개인적인 문제뿐만이 아닙니다. 이 사회에는 크고 작은 사건들이 계속 일어나고 있습니다. 미움과 분노가 곳곳에 자리 잡고, 폭력이 난무하는 것을 보면서 우리 사회가 스올의 뱃속에 빠져 있는 것은 아닌가 하고 두려움을 느낄 때가 있습니다.

 
 대한민국의 역사를 돌아보면, 우리는 스올의 뱃속처럼 무덤과도 같은 역사를 경험하면서 여기까지 왔습니다.
하지만 동시에 생명의 자궁과도 같은 축복의 역사도 함께 경험했습니다.
36년간의 일제의 암흑시대, 6·25 전쟁의 아픔, 70년의 세월이 흘러간 분단의 역사가 우리에게 있습니다.
그로 인해 지금도 우리 백성들이 고통을 당하고 있고, 북녘에 있는 백성들은 신음하면서 하나님의 손길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스올의 뱃속처럼 어둠과 외로움이 있고, 인간의 존엄성이 파괴되는 고통 속에서 우리는 기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 스올의 뱃속에 있는 우리를 도와주소서.
그래서 생명의 자리로 오게 해 주소서”라고 개인의 삶과 대한민국이 처해 있는 자리에서 부르짖을 수밖에 없습니다.






 스올의 뱃속과도 같은 삶의 자리는 개인에게도 있고, 가족에게도 있고, 직장에도 있고, 이 사회와 대한민국, 또 저 북녘 땅에도 있습니다. 우리가 기도해야 할 때입니다. 이 스올의 뱃속을 무덤으로 만들려면 가만히 있으면 됩니다. 하지만 그것은 망하는 길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이 스올의 뱃속에서부터 토해 내게 하시어 우리가 생명의 사람으로, 부활의 존재로 일어설 수 있게 기도해야 합니다.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 요나의 하나님, 우리의 주님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우리 하나님, 나의 하나님, 바로 그분께 기도하면서 스올의 뱃속과도 같은 이 암울한 시대를 이겨나가는 하나님의 자녀들이 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스올의 뱃속 - 요나 제 2장

​일부 신학자들은 이 책이 이방 나라를 상징하는 바닷속에 빠지는 이스라엘 민족을 설명하는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사탄이 구약 성경에서 가장 싫어하는 책들은 아마도 예수님의 현신을 설명하는 창세기와 예수님의 부활을 설명하는 요나 그리고 예수님의 재림을 설명하는 다니엘서일 것입니다.

​스올의 뱃속 - 불가항력(不可抗力) / 아닐 부, 옳을 가, 겨룰 향,  힘 력

"인간(人間)의 힘만으로는 도저히 저항(抵抗)해 볼 수도 없는 힘" 이라는 뜻

2:1. 요나가 물고기 뱃속에서 그의 하나님 여호와께 기도하여

פָּלַל 스트롱번호6419

1. 심판하다,  2. 심판하다
발음 / 파랄[ pâlal ]
관련 성경 / 뜻하다(창48:11), 판결하다(삼상2:25), 유리하게 판단하다(겔16:52), 처벌하다(시106:30), 기도하다(민21:7, 신11:2, 삼상1:27),간구하다(왕상8:33, 대하6:24, 사45:14), 빌다(왕상8:35, 대하6:26, 욥42:10), 묵도하다(느2:4).
[명] 기도(삼하7:27, 왕상8:29, 대상17:25), 간구(왕상8:54, 대하33:13).
구약 성경 / 84회 사용


세 종류의 사람들

1. 신을 발견하여 섬기는 사람들 - 도리에 합당하고 행복한 사람
2. 신을 발견하지 못하고 애써 구하는 사람들 -  도리에 합당하지만 불행한 사람 
3. 신을 발견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추구하려 하지도 않는 사람들 -  도리에 어긋나기 때문에 불행한 사람

기도하며 기도의 응답을 즐기는 사람(불가항력) 不可抗力
기도를 열심히 하면서도 기도의 응답을 전혀 모르는 사람(운칠기삼) 運七技三
기도를 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생의 열정을 잃어버린 사람(자포자기) 自暴自棄


공자(孔子)
생이지지(生而知之) - 배우지 않아도 아는 사람
학이지지(學而知之) - 배워서 아는 사람
곤이지지(困而知之) - 어려움을 겪어야 아는 사람

중간의 사람들은 도리에 합당하지만 불행하다.

2:2. 이르되 내가 받는 고난으로 말미암아 여호와께 불러 아뢰었더니 주께서 내게 대답하셨고 내가 스올의 뱃속에서 부르짖었더니 주께서 내 음성을 들으셨나이다

​위 구절에서 "스올(שְׁאוֹל. H7585)" (땅 깊은 곳, 스올)”이라는 단어가 등장합니다.
영어 성경에는 이 단어를 비롯해 하데스, 게헤나, 아부소, 타타루스  다섯 개의 단어들이 단 한 개의 단어 “Hell(지옥)”이라는 단어로 번역되었습니다.
한글 성경은 그나마 구분이 되어있습니다만 이러한 것들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혼돈스럽기는 매일반입니다.

* 스올(7585) שְׁאוֹל 

1. 무덤.  2. 지옥.  3. 구덩이
발음 / 스올[ sheʼôwl ]
어원 / 7592에서 유래
관련 성경 / 스올(창 37:35, 시 6:5, 호 13:14, 시 89:48, 아 8:6, 욘 2:2).
구약 성경 / 65회 사용

위에 스올이 언급되었기에 이에 대해 간략하게 살펴보려 합니다.
그러나 여기에서는 이러한 단어들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어떠한 결론도 내리지 않겠습니다.
필자는 인간이 무엇으로 어떻게 구성되어 있는지 또 죽은 다음 인간을 구성하고 있는 요소들에 어떠한 변화가 일어나는지에 대해 그동안 견딜 수 없는 궁금증을 갖고 연구를 해왔습니다.

​우선 영어의 지옥을 의미하는 Hell은 헬란(Helan)이라는 단어에 어원을 두고 있습니다.
이는 무엇을 덮어 놓은 또는 눈에 보이지 않는 곳을 의미합니다.
영국에서는 감자를 보관하는 구덩이를 의미하기도 했습니다.
이곳은 나쁘던 좋던 모든 죽은 자들의 영혼이 가는 곳으로 설명되어 있습니다.
이 단어는 창세기 37:35에 처음 등장합니다.
그러나 이 단어가 무덤을 의미하지 않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무덤은 "카바르(קָבַר H6912. 묻다, 무덤)”를 사용하였습니다.
고대 이스라엘에서는 땅속이 아니라 지상의 동굴이나 매장소에 시체를 안장했습니다.
그러나 스올은 언제나 땅 밑 깊은 곳을 의미했습니다(시편 63:9; 시편 14:9; 44:23; 에스겔 26:20; 31:14, 16, 18; 32:18, 24).

​묻는다는 의미의 “카바르”는 스올의 의미로 사용된 적이 없습니다.
“카바르”가 명사로 쓰일 때는 복수로도 사용되었습니다.
그러나 스올은 단 한 번도 복수로 사용된 적이 없습니다.
무덤은 분명한 장소가 지정되어 있어 언제나 방문이 가능합니다.
그러나 스올은 장소가 지정되어 있지 않아 방문이 불가합니다.
무덤은 사고팔 수 있습니다.
그러나 스올은 사고팔 수 없습니다(창세기 23:4-20).

​무덤에 있는 몸은 아무것도 인식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일부 구절들에서는 스올에 있는 영혼이 인지 능력을 갖고 있는 것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이사야 14:4-7; 44:23; 에스겔 31:16; 32:21). 이 부분이 과연 모든 일반 사람들에게 해당되는지 또는 상징적인 말인지 이해가 어렵습니다.

​스올은 죽은 자들의 회중입니다(잠언 21:16).
스올은 죄인들의 영역입니다(민수기 16:33; 욥기 24:19; 시편 9:17; 31:17 등).
선인들의 영역이기도 합니다(시편 16:10; 30:3; 49:15; 86:13 등).
스올은 깊은 곳 (욥기 11:8),
어두운 곳(욥기 10:21, 22);
죽은 자들이 가는 곳으로 설명이 되었습니다(민수기 16:30, 33; 에스겔 31:15, 16, 17).

​"하데스(Aδης G86. 음부)”는 스올의 헬라어 버전이라고 생각해도 될 것 같습니다.
하데스는 크고 흰 보좌의 심판 때까지 구원받지 못한 자들의 영혼이 머무는 곳으로 기록되고 있습니다(계시록 20:11-15).
그 외에도 감옥으로(베드로전서 3:19),
문과 철장, 잠금장치가 있는 곳으로(마태복음 16:18; 계시록 1:18),
지구 밑에 있는 곳으로(마태복음 11:23; 누가복음 10:15) 표현되어 있습니다.

​"게헨나(Γέεννα G1067. 지옥불)”은 원래 예루살렘 남쪽의 힌놈 계곡을 의미했습니다.
이곳은 짐승의 사체와 쓰레기 하치장이었습니다. 이곳은 소독을 위해 늘 유황 불길이 유지되었습니다. 이곳은 죄인들을 심판하는 “영원한 불의 못”을 상징하고 있습니다.

​"타타루(Ταρταρόω. G5020. 지옥)”는 한글 성경에서 지옥으로 번역되어 있습니다. 이 단어는 성경에 베드로후서 2:4에서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등장합니다. 이곳은 하데스 또는 스올의 영역에서 가장 깊은 곳으로 창세기 6장에서 등장하는 타락한 천사들을 가둔 곳으로 설명되고 있습니다.

​"아부소스(ἄβυσσος. G12. 무저갱)”은 바닥이 없는 구덩이로 표현되고 있습니다. 이곳이 바로 계시록에서 짐승이 나오는 곳입니다 (계시록 11:7; 17:8). 이곳은 사탄이 천년 간 구속되어 있는 곳이기도 합니다 (계시록 20:1, 3). 계시록 9장에 등장하는 황충의 무리가 나오는 곳이기도 합니다. 이곳이 타타루와 같은 곳으로 생각되나 굳이 다른 단어로 표현 한 것으로 봐서는 그리 간단히 결론을 내릴 일도 아닌 것 같습니다.

필자는 이곳에서 이 단어들의 의미와 그것이 시사하는 인간의 영혼의 문제에 대해 결론을 내릴 의도가 전혀 없습니다. 이 부분을 읽으실 때 여러분도 어떠한 결론을 내리지 않도록 각별한 주의가 필요합니다. 그러나 앞서 말씀드렸듯이 빠른 시일 내에 결론을 내릴 수 있게 되기를 소망합니다.

2:3 주께서 나를 깊음 속 바다 가운데에 던지셨으므로 큰 물이 나를 둘렀고 주의 파도와 큰 물결이 다 내 위에 넘쳤나이다

2:4 내가 말하기를 내가 주의 목전에서 쫓겨났을지라도 다시 주의 성전을 바라보겠다 하였나이다

요나가 경험하고 있는 이 폭풍이 하나님의 의한 것임을 요나는 알고 있었습니다 (주의 파도와 큰 물결). 이는 자신이 겪는 모든 시련이 하나님으로부터 비롯된 것임을 아는 욥과 (욥기 1:21; 2:10) 다윗의 (사무엘하 16:5-11) 기도와 비교될 수 있습니다.

본 2장은 아래와 같이 시편의 구절들의 인용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요나는 확실히 하나님의 말씀을 잘 알고 있었다는 것이 증명됩니다.

요나 2:2 - 시편 120:1 / 내가 환난 중에 여호와께 부르짖었더니 내게 응답하셨도다.

요나 2:3 - 시편 42:7 / 주의 폭포 소리에 깊은 바다가 서로 부르며 주의 모든 파도와 물결이 나를 휩쓸었나이다

요나 2:4 - 시편 31:22 / 내가 놀라서 말하기를 주의 목전에서 끊어졌다 하였사오나 내가 주께 부르짖을 때에 주께서 나의 간구하는 소리를 들으셨나이다

요나 2:5 - 시편 69:1 / 하나님이여 나를 구원하소서 물들이 내 영혼에까지 흘러 들어왔나이다

요나 2:7 - 시편 142:3; 18:6 / 내 이 내 속에서 상할 때에도 주께서 내 을 아셨나이다 내가 가는 에 그들이 나를 잡으려고 올무를 숨겼나이다.

내가 환난 중에서 여호와께 아뢰며 나의 하나님께 부르짖었더니 그가 그의 성전에서 내 소리를 들으심이여 그의 앞에서 나의 부르짖음이 그의 귀에 들렸도다.

요나 2:8 - 시편 31:6 / 내가 허탄한 거짓을 숭상하는 자들을 미워하고 여호와를 의지하나이다

요나 2:9 - 시편 116:17, 18, 3:8 /
내가 주께 감사제를 드리고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리이다.
내가 여호와께 서원한 것을 그의 모든 백성이 보는 앞에서 내가 지키리로다.

구원은 여호와께 있사오니 주의 복을 주의 백성에게 내리소서.

2:5 물이 나를 영혼까지 둘렀사오며 깊음이 나를 에워싸고 바다 풀이 내 머리를 감쌌나이다

2:6 내가 산의 뿌리까지 내려갔사오며 땅이 그 빗장으로 나를 오래도록 막았사오나 나의 하나님 여호와여 주께서 내 생명을 구덩이에서 건지셨나이다

산의 뿌리란 해저 가장 깊은 곳을 의미합니다.
요나는 인간으로 내려갈 수 있는 가장 깊은 죽음의 골짜기까지 갔다 온 것입니다.
요나의 이 기도는 히스기아의 기도에서 인용되었습니다(이사야 38:17).

​보옵소서 내게 큰 고통을 더하신 것은 내게 평안을 주려 하심이라 주께서 내 영혼을 사랑하사 멸망의 구덩이에서 건지셨고 내 모든 를 주의 등 뒤에 던지셨나이다.

2:7 내 영혼이 내 속에서 피곤할 때에 내가 여호와를 생각하였더니 내 기도가 주께 이르렀사오며 주의 성전에 미쳤나이다

2:8 거짓되고 헛된 것을 숭상하는 모든 자는 자기에게 베푸신 은혜를 버렸사오나

2:9 나는 감사하는 목소리로 주께 제사를 드리며 나의 서원을 주께 갚겠나이다 구원은 여호와께 속하였나이다 하니라

2:10 여호와께서 그 물고기에게 말씀하시매 요나를 육지에 토하니라

하나님께서는 요나를 사용하시기 위해 배에서 분리 시키셨고 물고기를 보내 그의 신변의 안전을 제공했습니다. 그러나 요나가 하나님께 감사한 마음으로 위의 기도를 드렸을 때 하나님께서 그를 사용하기 시작하셨습니다.

하나님을 믿고 예수님을 영접한 성도들이 왜 그토록 어려운 시련을 겪어야 하는지에 대한 궁금증은 우리 성도들의 단골 메뉴입니다.
이에 대해 성경은 아래와 같이 말씀하고 계십니다.

하나님을 영광되게 하기 위해 (다니엘 3:16-18, 24-25)

내 죄에 대한 징계 또는 훈육: 히브리서 12:5; 야고보서 4:17; 로마서 14:23; 요한일서 1:9

죄에 빠지는 것을 예방: 베드로일서 4:1-2

우리의 자만을 없애기 위해: 고린도후서 12:7-10

믿음을 키우기 위해: 베드로전서 1:6-7

성장을 위해: 로마서 5:3-5

복종과 단련을 가르치기 위해: 사도행전 9:15; 빌립보서 4:11

타인을 위로할 능력을 얻기 위해: 고린도후서 1:3-4

우리 안에서 그리스도를 증명하기 위해: 고린도후서 4:7-11

천사들에게 증거하기 위해: 욥기 1:8; 에베소서 3:8-11; 베드로전서 1:12

인간은 살다 보면 누구나 어려움을 겪습니다.
자신에게 닥친 그 어려움은 어느 누가 겪는 어려움보다 훨씬 더 크게 느껴집니다.
그러나 그 어려움 뒤에는 하나님의 숨겨진 축복이 있다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그래야 어려움 가운데서 우리는 감사의 기도를 드릴 수 있습니다.

​우리가 어려움 속에서 감사의 기도를 드릴 수 있을 때 우리의 믿음은 장성한 분량으로 성장한 것입니다.
그 믿음은 절대로 헛되지 않습니다.
고난을 어려움을 예수님의 이름으로 견디면 자원입니다.
우리의 본향인 천국으로 금의환향할 수 있는 기차이기도 합니다.

이옥 선교사 그는 북한에서 인민군 하사로 근무했던 사람인데 탈북하여 우리나라에 선교단체의 도움을 받아 우리나라에 온 사람입니다. 그는 북한에서 김일성 주석 사망 이후에 국가 배급이 끊어지자 먹을 것이 없어 다 죽게 될 위경에 빠졌습니다.
너무 굶으면 헛 것이 보이고 모래도 곡식으로 착각하고 먹다가 죽는다고 합니다.
그는 강냉이라도 원없이 먹어보는 것을 소원이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중국으로 탈북하기 위해 두만강을 건넜습니다.
그러다가 물에 빠져 정신을 잃고 물에 떠내려가게 되었는데 강 하류에서 조선족에 의해 건짐을 받아 중국에 있는 우리 나라 목사님을 만나 복음을 받아 들이고 우리 나라에 온 사람입니다.

사업하면서 겪는 정신적인 고통이 더 크다는 얘기를 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어쩌면 그 말이 맞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저는 사역자가 겪는 고통이 더 클 것이라는 생각을 해 봤습니다.
오늘은 북이스라엘의 여로보암 2세 때 사역을 했던 요나 선지자에 대해 말씀 드리려 합니다(왕하 14:25).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의 종 가드헤벨 아밋대의 아들 선지자 요나를 통하여 하신 말씀과 같이 여로보암이 이스라엘 영토를 회복하되 하맛 어귀에서부터 아라바 바다까지 하였으니.


1. 요나는 사명을 거절했습니다.

하나님은 요나에게 니느웨로 가서 멸망을 선포하라고 했습니다.
'니느웨'는 고대 앗수르(앗시리아)의 수도로서 티그리스강 상류에 자리잡고 있었습니다.
이스라엘지방으로부터 동쪽으로 700km 떨어진 곳입니다. 
3:3에 보면 성읍 둘레는 걸어서 3일 이상 걸리는 큰 도시입니다.
카알 델리취에 의하면 150km 정도 된다고 합니다.
4:11에 보면 어린아이만 해서 12만 명이었으므로 총 인구는 100만을 육박하는 도시라 할 수 있습니다.
니느웨는 죄악이 관영했습니다.
우상숭배가 성행했고 포로를 다루는데 잔인했습니다.
당시에 니느웨는 역병이 2번이나 돌고 있었고(B.C. 765, 753년) 일식 현상이 일어났기 때문에(B.C. 763년) 니느웨 사람들이 멸망에 대한 암시를 느끼고 두려워했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에게 멸망을 선포하므로 회개하기를 원했습니다.
요나는 하나님의 명령을 거역하고 욥바로 내려가 다시스로 가는 배를 탔습니다(1:1-3).
 '욥바'는 이스라엘 서쪽 지중해변 항구입니다.
'다시스'는 이스라엘에서 서쪽으로 3,000km나 떨어진 스페인 지방입니다.
하나님은 요나에게 니느웨로 가라고 했으나 요나는 정 반대 편으로 향하고 있었습니다.
요나가 니느웨로 가지 않으려 했던 이유는 자신이 죽임 당할 위험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당시 앗수르는 이스라엘과 적대국 관계였습니다.
원수들이 멸망하기를 원했기 때문입니다.
요나는 하나님의 뜻을 생각하기 보다는 자기 중심적인 생각만 한 것입니다.

 2. 요나는 고통을 당했습니다.

요나는 하나님에 대한 사명을 거절하고 도망하고 있다는 양심의 가책을 잊어버리기 위해 배 밑창에 들어가 잠을 자고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간섭이 시작되었습니다.
하나님이 바람을 불게 했습니다.
다시스로 가는 배가 대풍(大風)을 만나 폭풍이 대작(大作)하므로 배가 거의 깨어지게 되었습니다.
선장과 선원들이 배를 가볍게 하려고 배의 물건들을 바다에 던졌습니다.
그리고 자기들의 신(神)을 부르며 배 밑창에 들어가 깊이 잠들어 있던 요나에게도 하나님께 구하라고 했습니다.
바다는 점점 흉용해져 갔습니다.
결국 그들은 이 재앙이 누구 때문에 온 것인지 알기 위해 제비를 뽑았는데 요나가 그 원인자로 뽑혔습니다.
그들은 요나에게 이 재앙이 무슨 연고로 온 것인지 묻자 요나는 자기가 여호와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도망한 연고인 줄 알고 그들에게 자기를 바다에 던지면 폭풍이 잔잔해 질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들은 바다가 점점 더 흉용해짐에 따라 하나님께 요나 한 생명 때문에 자기들을 멸망시키지 말아 달라고 부르짖으면서 요나를 바다에 던졌습니다.
요나가 던져지자 하나님께서 준비한 큰 물고기가 요나를 삼켰습니다.
요나는 물고기 뱃속에서 3일 동안 흑암의 고난 가운데 있게 되었습니다(1:4-17).

3. 요나는 고통 중에 부르짖었습니다.

요나는 물고기 뱃속에서 3일 동안 흑암 가운데 고통을 당했습니다.
그 고통이 얼마나 컸는지 스올 뱃속이라고 했습니다.
'스올'은 죽음, 무덤, 음부, 지옥 등으로 번역되는 단어입니다.
그런 고통 속에서 하나님께 부르짖었습니다.
자신이 처한 상황을 호소하며 죄를 회개하며 서원을 이루어 드리겠다고 했습니다. 
자신이 하나님을 떠난 것을 회개합니다.
자신이 하나님의 성전을 떠났던 것, 하나님이 베푸신 은혜를 버리고 거짓되고 헛된 것을 따랐던 것을 회개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한 서원을 이루어 드리겠다고 호소합니다.
하나님의 선지자로서 하나님이 맡긴 사명을 감당하겠다고 합니다.
하나님은 요나가 고통 중에 회개하며 부르짖는 기도를 들으시고 물고기로 하여금 요나를 육지에 토해내게 했습니다.  
하나님은 다시 그에게 니느웨로 가서 하나님께서 명한 바를 선포하게 했습니다.
요나는 3일 길을 걸어 니느웨로 갔습니다.
하룻동안 '40일이 지나면 니느웨가 무너지리라' 외치고 다녔습니다.
니느웨 사람들이 하나님을 믿기 시작했습니다.
왕으로부터 일반 백성들까지 금식을 했으며 심지어는 어린 아이와 짐승들까지 금식을 시켰습니다.
니느웨의 모든 사람이 무론대소하고 악한 길에서 떠나 금식을 하면서 굵은 베옷을 입고 전에 지은 죄를 회개를 했습니다.
그리고 전심으로 하나님께 용서와 긍휼을 구했습니다.
그들이 그렇게 한 것은 혹시 하나님께서 뜻을 돌이키사 진노를 거두시고 멸망치 않게 하시지 않겠는가 하는 생각 때문이었습니다.
그 결과 실제로 하나님께서 그들의 행위를 보고 뜻을 돌이키시고 그들에게 내리리라 하신 재앙을 내리지 않았습니다(3:1-10).   

우리는 하나님의 부름을 받았으나 우리 하나님이 시킨 일이 마음에 부담이 되어 거절했습니다.
그로 인하여 물질적, 육체적, 정신적, 영적 고통을 당했습니다.
말로 다할 수 없는 고통 가운데 있을 때 하나님께 부르짖어야 합니다.
우리의 죄를 회개하면서 서원을 지키겠다고 약속하면서 부르짖어야 합니다.

시편 50:15
"환난 날에 나를 부르라 내가 너를 건지리니 네가 나를 영화롭게 하리로다"고 했습니다.

그럴 때 고통을 주는 환경이 우릴 토해내게 할 것입니다.

스올의 뱃속   

운전을 하는 사람이라면 ‘진입금지’를 의미하는 표지판을 분명히 알 수 있을 것이다.

표지판이 눈에 들어올 리가 없었던 초보 운전이었을 때, 나는 경황없이 들어선 길에서 마주 오던 차들이 유난히 나를 노려보며 경적을 울리는 것을 의아하게 생각했다. 
얼마간 진행을 하다가 마침내 주차단속을 하던 경찰이 나를 세웠다.

‘일방통행로입니다. 
면허증을 좀 보여주시지요.’ 
나는 그제서야 내가 얼마나 위험한 행동을 했었는지 깨달을 수가 있었다. 
범칙금 고지서를 발부 받았으나 나는 오히려 미안해하고 또 감사하면서 즉시 유턴을 하여 제 길로 바로 가게 되었다.

선지자 중에서 하나님의 순리와 명령을 거역하고 나의 경우처럼 역주행 하던 선지자가 있으니 아시다시피 바로 ‘요나’이다. 
니느웨로 가라시던 명을 거스려 다시스로 향하던 요나는 경찰의 제지(대풍’ 大風’)를 받아 ‘스올(음부, 무덤)의 뱃속’으로 불리는 물 고기의 뱃속으로 빨려 들어간다. 
이 물고기를 생각하면 어릴 때 주일학교에서 한 선생님께서 보여주시던 그림 속의 장면이 떠오른다.
그 그림은 고기 뱃속을 자그마한 다락방의 이미지로 형상화 한 다음, 호롱불 아래에서 성경책을 펴 놓고 기도하는 요나의 모습이었다.
어두운 고기 뱃속에서도 성경책을 볼 수 있도록 해 준 선생님의 배려가 참 세심하다고 느껴졌다. 
그렇지만 성인이 된 내가 다 시 한 번 요나의 상황을 재현해 볼라치면 그 그림은 동화 수준에 가깝다고 여겨진다. 
아마도 고기의 뱃속 상황은 그리 호락하지는 않 았으리라 생각한다. 
위(胃)의 연동운동으로 인한 물리적인 압력, 지속적으로 내뿜는 강산성 위액, 뜨거운 내부 온도, 밀려오는 온 갖 해조류며 작은 고깃덩이까지… 그가 느꼈을 고통의 깊이란 것은 당해보지 않은 내가 상상하기에 너무 가혹하고, 어쩌면 죽음의 위기 감을 바람 앞의 등불처럼 직접 체험한 심각한 것이었을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중요한 것은 그 때 요나의 처신이다. 
그 와중에 하나님 앞에 무릎으로 기도한 요나에게 박수를 보낸다.

‘내가 받는 고난을 인하여 여호와께 불러 아뢰었삽더니 주께서 내게 대답하셨고 내가 스올의 뱃속에서 부르짖었삽더니 주께서 나의 음성을 들으셨나이다.(욘 2:2)’ 
절망적 고통 앞에서 요나는 하나님을 만난 것이었다.

하나님은 우리를 만나기 위해 아주 특별한 곳을 택하시는 경우를 종종 경험한다. 
세상 사람들이 만날 때 즐겨 찾는 화려하고 아늑한 곳이 아닌, ‘스올’과 같은 절망적인 곳, 상처와 고통의 깊이를 절감할 수 있는 어두운 곳에서 하나님은 우리를 만나 길 원하신다.

수렁에 빠졌다고 생각하는가? 
그렇다면 그 고통을 진솔하게 받아들이고, 고통 속으로 찾아오시는 하나님의 사랑의 깊이를 체험 해 보라. 
그리고 그 길에서 돌아서라. 
시인하고, 고백하고, 순종하는 참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가장 현명한 선택이 여러분 앞에 기 다리고 있다. 

기도할 수 있는 한 절대로 완전히 절망에 빠진 사람은 없다.

“하나님을 깊이 느끼고 싶은 사람이 있는가, 그는 차라리 자신의 고통의 깊이를 먼저 느껴보라.”고 역설한 유진 피터슨의 말이 오늘따라 귀에 쟁쟁하게 들린다.

스올의 뱃속에서 부르짖는 요나(요나 2:1-10)

요나는 광풍이 불어오는 바다 한가운데서 자기의 참모습을 발견하였습니다.
지금까지 그는 선지자로서 나름대로 신앙생활을 잘하고 있다고 자부하였습니다.
성경도 쉬지 않고 읽었고 남들보다 기도도 많이 한다고 생각했었습니다.
그러나 막상 환란가운데서 자신의 참 모습을 보게 되었을 때 자신이야말로 하나님의 명령을 거역하고 자기 멋대로 살았던 못된 죄인이었음을 발견하게 된 것입니다.

'아 내가 죄인이었구나, 아 내가 바로 그렇게 증오하며 비판했던 외식주의자였구나'는 것을 발견하게 된 것입니다.
이렇게 깨닫는 것이 은혜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앞에 신령과 진정으로 나아가기 위해서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을 자신의 참모습을 발견하는 것입니다.
병원에 찾아가는 환자는 한결같이 자신의 몸에 병이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사람들입니다.
영적으로도 내가 어떤 존재인지를 알아야 치료가 가능한 것입니다.

지금 요나는 거센파도와 광풍속에서 비로소 자신이 누구인가를 발견하게 된 것입니다.
여러분, 예수님의 제자 베드로가 처음 예수님을 만났을 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좇아 그물을 내렸더니 그물이 찢어질 정도로 고기가 많이 잡혔습니다.
그때 베드로가 예수님앞에 무릎을 꿇고 이렇게 고백합니다.
"시몬 베드로가 이를 보고 예수의 무릎 아래에 엎드려 이르되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니"(눅 5:8절)

그도 하나님의 기적의 현장에서 비로소 자기의 참모습을 발견하게 된 것입니다.
요나는 자기 죄때문에 배안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큰 풍랑을 만나 죽게 되었다는 것을 발견하고 정직하게 자신의 죄를 고백하고 자신이 이 모든 책임을 지겠다고 각오하였습니다.
그래서 자기를 바다에 던지라고 요청했습니다.
이 광풍의 책임이 바로 나에게 있다는 것입니다.
내탓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기가 모든 책임을 지고 죽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앞에 자기를 내려놓은 것입니다.

광풍앞에서 자기의 욕심도, 자기의 자존심도, 자기의 생명조차 내려놓고 하나님께 드리기로 작정하였습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우리 겉 사람이 강합니다.
끈질깁니다.
그래서 그냥 말로 해서는 잘 깨닫지 못할 때가 더 많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환경의 풍랑을 통해서 우리를 겉사람을 깨트리고 우리 자신의 참모습을 깨닫게 하시는 것입니다.
요나는 자신이 누구인가를 비로소 깨달았습니다.
요나는 바다에 던져졌는데 하나님께서 이미 큰 물고기를 예비해놓으셨습니다.

요나 1:17
“여호와께서 이미 큰 물고기를 예비하사 요나를 삼키게 하셨으므로 요나가 밤낮 삼 일을 물고기 뱃속에 있으니라”

하나님의 섭리입니다.
하나님이 일하고 계십니다.
여러분 어렵고 힘듭니까?
그래도 하나님께서 역사하시고 계십니다.
요나는 물고기 뱃속에 들어가서 비로소 하나님앞에 엎드려 진정으로 기도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역경이 바로 자신의 참모습을 보게 만든 것입니다.
그리고 그 역경이 비로소 하나님을 찾게 된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요나도 지금까지 기도한다고 했지만 매우 형식적이었습니다.
하나님 앞에 진지하게 마음을 터놓고 기도한 적이 언제인지 모릅니다.
깊은 기도를 드린 것이 언제인지 까마득합니다.
자신의 죄악을 회개하고 눈물로 기도했던 기억이 아득합니다.

그런데 지금 요나는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도 기도합니다.

1절, "요나가 물고기 뱃속에서 그의 하나님 여호와께 기도하여"

요나는 물고기 뱃속에서 가장 먼저 한 일은 바로 기도였습니다.
그의 얼굴이 하나님을 향하기 시작합니다.
하나님을 찾고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며 부르짖어 기도하였습니다.
이것이 영적인 회복입니다.
비록 물고기 뱃속이지만 요나의 영이 깨어난 것입니다.
비로소 그는 물고기 뱃속에서 하나님을 향한 새로운 삶이 시작했습니다.

주님께서 여러분을 사랑하십니다.
그런데 여러분은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면서 하나님으로부터 도피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리고 여러분이 마땅히 해야 할 일을, 마땅히 감당해야 할 사명을 감당하지 못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하나님은 오늘 여러분을 위해서도 물고기를 예비하고 계시다는 사실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그 물고기는 내 가정의 풍랑일 수도 있습니다.
그 물고기는 내가 당하는 육체적인 질병일 수도 있습니다.

그 물고기는 내 자식들이 당하는 어려움일 수도 있습니다.
캄캄한 물고기 뱃속에서 하나님은 나로 하여금 내가 마땅히 배워야 할 교훈을 알게 하십니다.

 

2절, "이르되 내가 받는 고난으로 말미암아 여호와께 불러 아뢰었더니 주께서 내게 대답하셨고 내가 스올의 뱃속에서 부르짖었더니 주께서 내 음성을 들으셨나이다"

요나는 "내가 받는 고난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부르짖는 기도를 드렸습니다.
이것이 은혜입니다.
이처럼 진정한 기도를 드릴 수 있다는 것은 영혼의 회복을 의미합니다.
뿐만 아닙니다.
요나의 기도를 들으신 하나님은 곧바로 응답하십니다.
하나님과 교통의 통로가 열린 것입니다.

주께서 내게 응답하셨고 주께서 내 음성을 들으셨나이다.
얼마나 놀라운 사건입니까?
요나의 죽음을 선택했더니 하나님께서 그를 살려주신 것입니다.
하나님과 대화의 통로가 열린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영이 살았다는 증거입니다.
하나님과 교통하는 요나, 여기에 하나님의 깊으신 뜻이 있습니다.
요나와 하나님이 하나가 된 것입니다.
요나에게 엄청난 고난이 왔습니다.
그 고난의 의미를 하나님께로부터 듣는 기회가 된 것입니다.

고난이 모두다 징계 때문에 오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때로는 하나님께서 징계하시기 위해 고난을 주신다는 사실을 성경은 분명히 가르칩니다.
또한 주께서 나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나를 징계하십니다.
징계에 대하여 성경에 나타나는 세 가지 원칙이 있습니다.

1. 징계는 모든 성도에게 찾아옵니다.

징계가 없으면 구원받은 그리스도인이 아닙니다.
내가 참으로 하나님의 자녀라면, 내가 그분의 사랑받는 자녀라면, 아버지 하나님께서는 나를 그대로 내버려 두시지 않고 나를 향해서 사랑의 채찍을 드십니다.
내게 하나님의 채찍이 가해질 때, 하나님의 사랑의 질책이 나를 향해서 찾아올 때 그 때가 하나님을 만날 때입니다.
하나님을 찾으면 그 때 하나님을 만나게 되는 것입니다.
깨어졌던 관계가 회복되고 영혼이 깨어난 것입니다.

2. 징계는 나자신의 한계를 발견합니다.

징계 그 자체는 참으로 고통스럽고 괴로운 것입니다.
징계를 통해서 나의 한계를 발견합니다.
하나님앞에 내가 아무것도 아닌 존재라는 사실을 발견합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없으면 나는 죄덩어리라는 사실을 발견합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없으면 나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사실을 발견합니다.
그래서 이 징계를 통해서 영적으로 성장하는 것입니다.

3. 징계의 목적은 나를 거룩하게 만듭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징계는 나의 믿음을 자극시켜서 믿음의 연단을 만들어 냅니다.
환란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는 거룩한 사람으로 만드시기 위함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징계를 통해서 무너지는 사람은 믿음이 없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징계를 통해서 하나님앞에 엎드리고 요나처럼 기도하는 사람은 징계가 은혜입니다.

징계가 내안에 있는 모든 불순물을 다 제거하고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도록 단련시키는 것입니다.
징계를 통해서 나의 참모습을 발견하고 나의 교만이 깨어지고 나를 거룩하게 하는 데 절대 필요한 과정입니다.

요나는 물고기 뱃속에서 그가 받는 고난의 의미를 묵상하기 시작했습니다.

"내가 스올의 뱃속에서 부르짖었삽더니 주께서 나의 음성을 들으셨나이다"
요나는 지금 자기에게 주어진 상황을 '스올'이라고 불렀습니다.
스올은 죽은 자들의 거처를 말합니다.
죽은 바와 다름없는 곳에서 요나는 하나님을 비로소 찾았습니다.
요나는 죽음의 골짜기에 갇힌 것입니다.
탈출할래야 할 수 없고, 불안하기 짝이 없는 밀폐된 어둠 속에서 기도하였습니다.

물고기 뱃속은 죽음의 현장이었습니다.
더러운 냄새로 숨이 막히고 어둠이 가득한 고통의 장소에서 요나는 하나님을 찾았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을 믿는 성도는 반드시 내가 어찌할 수 없는 고통의 현장에서 하나님을 찾게 되어 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의 자녀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생명이 내 안에 있기 때문에 반드시 하나님을 찾고 하나님의 이름으로 거기서 부르게 되어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 영혼이 살아있다는 증거입니다.

잃어버렸던 신앙을 찾은 것입니다.
잃어버렸던 자기를 찾은 것입니다.
잃어버렸던 기도를 찾은 것입니다.
평소에 요나는 선지자라고 하면서도 진실한 기도를 하지 못했고, 신앙은 형식뿐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만 그것을 순종하지 않았습니다.
기도해야 한다는 것을 알았지만 기도하지는 않았습니다.
전도하라는 말은 수없이 들었지만 전도하지는 않았습니다.
그것과 내 삶은 너무나 거리가 멀었습니다.

그래서 요나는 선지자이니까 겉으로는 좋은 신앙인처럼 보였지만 실제는 그렇지 못했습니다.
자기 생각대로 살았습니다.
하나님의 뜻이 분명하지만 그것은 이론이었을 뿐이었습니다.
내 생각과 같았을 때는 순종하는 것 같았지만 내 생각과 다를 때는 여지없이 내 생각대로 살았습니다.
그래도 아무런 마음의 꺼리낌이 없었습니다.
그러면 지금까지 그의 진정한 주인은 누구였습니까?
하나님이 아니었습니다.
자기 자신이었습니다.

그래서 기도가 메마르고 그의 심령이 메말라 결국 하나님의 명령에 불순종하게 되고, 사명을 저버리고 도망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더니 결국 캄캄한 환난의 밤을 만나고, 상상할 수 없는 고통 가운데서 기도할 수 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그는 부르짖기 시작했습니다.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지금도 요나처럼 물고기 뱃속에 들어가지 않고는 기도를 배울 수 없는 "요나"들이 얼마나 많은지 아십니까?
어려움을 당하지 않고는, 큰 풍랑을 당하지 않고는, 파도를 만나지 않고는 기도를 배우지 못하는 사람들이 너무도 많습니다.

요나는 물고기의 캄캄한 뱃속에서 주님을 향하여 기도하면서 이렇게 외쳤을지 모릅니다.
"내가 왜 기도하지 않았을까? 저 평안한 땅에서, 저 아름다운 땅에서, 그렇게 기도할 수 있었을 때, 그렇게 하나님을 예배할 수 있었을 때 나는 왜 기도하지 않았을까?"
그러나 요나가 이제라도 기도를 배우는 것은 다행한 일입니다.
모든 상황이 절망적일 때, 한계상황에 부딪쳐 앞에 캄캄할 때에도 하나님이 내 곁에 계셔서 내 음성을 듣고 계시다는 사실은 은혜가 아닙니까?

이때 요나는 기도하면서 잃어버렸던 하나님을 찾았습니다.

 

1. 믿음이 회복되었습니다(3-4절).

“주께서 나를 깊음 속 바다 가운데에 던지셨으므로 큰 물이 나를 둘렀고 주의 파도와 큰 물결이 다 내 위에 넘쳤나이다 [4] 내가 말하기를 내가 주의 목전에서 쫓겨났을지라도 다시 주의 성전을 바라보겠다 하였나이다”

요나는 이 모든 역경속에서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였습니다.
주께서 나를 깊음 바다 가운데에 던지셨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이 모든 역사의 주권자가 하나님이십니다.
큰 물이 나를 둘렀고 주의 파도와 큰 물결이 다 내위에 넘쳤나이다.
그렇습니다.
요나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습니다.
그저 하나님의 구원의 손길을 앙망하며 간구합니다.
요나의 기도 속에서 중요한 낱말은 "다시"라는 말입니다.
그는 지금까지 얼마동안 하나님과의 교제가 끊어져 있었다는 사실을 잘 알았습니다.
그래서 요나는 고백합니다.

"그러나 제가 다시 주의 성전을 바라보겠습니다. 주님, 다시 성경을 펼치겠습니다. 다시 엎드려 기도하겠습니다. 다시 하나님을 섬기겠습니다. 다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증거하겠습니다."

그는 다시 하나님을 바라보기 시작했습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과의 은혜를 사모하기 시작헸습니다.
하나님의 구원을 앙망합니다.
지금까지 요나는 하나님의 자리에 자기가 앉아 있었습니다.
그래서 진정한 하나님과의 교제는 단절되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이제 자기가 거기서 내려왔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인정하였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인정한다는 것은 자기가 주인이 아니라는 사실을 인정한 것입니다.
내 인생의 주인은 내가 아니라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하나님의 성전을 향하여 다시 바라보겠다는 것입니다.

이사야 40:28-31
“너는 알지 못하였느냐 듣지 못하였느냐 영원하신 하나님 여호와, 땅 끝까지 창조하신 이는 피곤하지 않으시며 곤비하지 않으시며 명철이 한이 없으시며.
피곤한 자에게는 능력을 주시며 무능한 자에게는 힘을 더하시나니.
소년이라도 피곤하며 곤비하며 장정이라도 넘어지며 쓰러지되.
오직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새 힘을 얻으리니 독수리가 날개치며 올라감 같을 것이요 달음박질하여도 곤비하지 아니하겠고 걸어가도 피곤하지 아니하리로다.”

사랑하는 여러분, 지금 하나님을 바라보고 있습니까?
하나님의 은혜를 사모합니까?
하나님의 영광을 사모합니까?
하나님의 나라를 사모합니까?
하나님과의 교제가 제대로 되고 있습니까?
하나님의 자리에 여러분이 앉아 있어 교제가 단절되고 있지는 않습니까?
이제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인정하는 성도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이처럼 하나님을 바라보는 자는 잃어버렸던 믿음을 회복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교제가 회복되는 성도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2. 기도가 회복되었습니다(7절).

“내 영혼이 내 속에서 피곤할 때에 내가 여호와를 생각하였더니 내 기도가 주께 이르렀사오며 주의 성전에 미쳤나이다”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요나는 여호와를 생각하기 시작했습니다.
우리는 편안할 때 자주 하나님을 망각합니다.
지금 우리가 앉아있는 곳이 물고기의 뱃속이라고 생각해 보십시오.
삶과 죽음이 오고가는 이 절박한 상황에 던져졌다고 생각해보십시오.

구세군의 창설자이신 월리엄 부드는 이렇게 충고했습니다.
"성도 여러분, 기도를 배우시기 바랍니다.
기도할 때는 여러분이 지금 드리는 그 기도에 생사가 달린 것처럼 생각하십시오"

지금이 기도할 때입니다.
기도를 멈추지 하십시오.
기도하실 때 지금 드리는 이 기도에 여러분의 생사가 달린 것처럼 하시기 바랍니다.
그때 우리의 기도는 얼마나 절박해지겠습니까?
우리의 기도에 필요없는 수식어는 얼마나 많이 떨어지겠습니까?

요나가 물고기의 뱃속에서 "전지전능하시고, 무소부재하시고, 높고높은 보좌 위에서‥" 라는 말로 기도를 시작했을까요? 오히려 그는 원색적인 기도를 했을 것입니다.

"하나님, 살려 주십시오. 한 번만 봐주십시오. 정신 똑똑히 차리고 다시 출발하겠습니다. 한번만 더 내게 일할 수 있는 기회를 주십시오." 그리고 그는 물고기 뱃속에서 하나님을 생각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주님을 묵상하기 시작했습니다.
이제 요나의 의식 속에서 하나님이 있었습니다.
이전에는 상상도 못할 일입니다.
그런데 이제 요나의 의식속에 하나님이 계셨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살아있는 신앙은 그 생각속에 하나님이 계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예배시간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삶의 현장에서 무엇을 하든지 그 생각속에 하나님이 계시고 하나님 중심의 생각을 갖는 성도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러면 당연히 먼저 기도하게 되어 있습니다.
기도하지 않고는 무엇도 할 수 없습니다.
이제 내 생각대로 고집하지 않습니다.
먼저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가를 생각하고 하나님 중심의 신앙을 회복하는 성도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3. 감사가 회복되었습니다(9절)

“나는 감사하는 목소리로 주께 제사를 드리며 나의 서원을 주께 갚겠나이다 구원은 여호와께 속하였나이다 하니라”.

그는 감사하는 목소리로 말하기 시작합니다.
그가 편안한 삶을 살 때 일찌기 그의 입술에는 감사의 언어가 없었습니다.
그가 마음대로 자기의 삶을 누릴 수 있었던 상황 속에서 그는 감사의 언어를 잊었습니다.
그런데 물고기의 캄캄한 뱃속에서 그는 감사의 언어를, 감사의 노래를 되찾기 시작했습니다.

말할 수 없는 인생의 역경 속에서 자기의 삶이 끝날 듯한 고통의 한밤중에 그를 구원하신 하나님의 은혜를 생각하니 살아있다는 것 자체가 다 하나님의 은혜였습니다.
그 은혜를 깨닫고 나면 그저 기도는 감사밖에 할 것이 없습니다.
무엇을 달라고 기도하는 것은 배부른 기도입니다.
그저 하나님의 은혜 앞에 감사합니다.
그는 비로소 '감사'라는 단어를 깨닫습니다.
더이상 요나는 하나님을 원망하고 불평하는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만 생각하면 그저 감사입니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범사에 감사한다는 것의 의미를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요나는 하나님앞에 감사했습니다.
그리고 한 걸음 더 나가서 서원을 갚겠다고 결심합니다.
그의 서원은 무엇이겠습니까?
구체적인 내용은 알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그에게 주신 사명, 니느웨로 가서 하나님이 명하신 회개의 메시지를 전하라는 사명을 순종하겠다는 다짐과 맹세가 포함되어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가 진정한 회개에 이르렀다면 외면했던 사명의 길로 발걸음을 돌리는 것은 필연적인 귀결일 것이기 때문입니다.
서원을 함부로 해서는 안 되지만, 그리스도인으로서 일생을 살면서 한 번도 서원을 해보지 못했다는 것도 어딘가 문제가 있지 않나 생각됩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깨달아지고 감사의 고백이 흘러나올 때 "하나님, 제가 나머지 생은 다르게 살겠습니다.
하나님을 위하여 제가 이렇게 살아 보겠습니다" 하는 결심도 없이 인생을 산다면 어떻게 구원받은 성도라 할 수가 있겠습니까?

그래서 앤드류 러코크라는 구약 신학자는 물고기 속에 들어가 있던 요나의 모습을 이와같이 설명했습니다.
"이 물고기야말로 요나의 인생을 다시 빚어 만드는 새로운 삶의 모태였다.
마치 어린아이의 생명이 어머니의 태내 어둠 속에서 빚어지며 그 속에서 인생이라는 놀라운 날을 예비하는 것처럼, 하나님은 여기 물고기의 뱃속이라는 고난의 한 심연에서 요나에게 새로운 삶을 예비하신 것이다."

그러나 그분은 고난만 예비한 것이 아니라 그것을 통해서 내가 살아야 할 인생의 빛나는 내일의 새벽까지도 예비하셨음을 깨닫고 주님을 찬양하기 바랍니다.

이제 우리는 시편기자의 고백에 공감할 수 있습니다.
"고난 당하기 전에는 내가 그릇 행하였더니 이제는 주의 말씀을 지키나이다"(시 119:67).
감사를 배우고 하나님을 향한 결단으로 새로운 삶을 계획하는 요나, 그를 위해서 하나님은 마지막에 어떻게 하십니까?

10절, "여호와께서 그 물고기에게 말씀하시매 요나를 육지에 토하니라."그 물고기가 요나를 다시 빚기 위해서 주께서 예비하신 교육의 현장이었다면, 이제 요나는 더 이상 그곳에 있을 필요가 없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깨달아 감사를 배웠고 새로운 미래를 결심했기에 그곳에서 배울 것은 다 배운 셈입니다. 이제 하나님은 물고기로 요나를 토하게 하심으로 고난을 끝내십니다. 스올의 뱃속에서도 함께 하시는 하나님, 요나와 같이 하나님의 임재를 느껴 보시기를 바랍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하나님 아버지앞에서 나의 참 모습을 발견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하나님앞에 잃어버린 것이 무엇인가를 발견하고 잃어버린 영적인 은혜를 회복하는 성도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부르짖는 기도를 드려 보았습니까?
심정을 통하는 깊은 기도를 드려 보았습니까?
지금은 부르짖어 기도할 때입니다.
지금은 잃어버린 은혜를 회복할 때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앞에 진정으로 감사하며 서원을 갚아야 할 때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나에게 베풀어 주신 그 은혜를 깊이 묵상하고 감사함으로 주 앞에 서는 성도가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7월 26일(수) 요나서 3장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여호와의 말씀대로(3절)



요나여호와의 말씀대로 일어나서 니느웨로 가니라 니느웨는 극히 큰 성읍이므로 삼일길이라.
Jonah obeyed the word of the LORD and went to Nineveh. Now Nineveh was a very important city--a visit required three days.

"여호와의 말씀대로(the word of the LORD)"
키데발 아도나이(כִּדְבַר יְהוָה)

* 말씀(1697) 다바르(dâbâr) דָּבָר

1. 말,  2. 복수로 쓰인 경우, 3. 약속
발음 / 다바르[ dâbâr ]
어원 / 1696에서 유래
관련 성경 / 언어(창 11:1, 시 19:3, 잠 29:20), 말씀(창 15:1, 민 11:24), 일(창 18:14, 출 18:18), 말(창 24:52, 출 35:1, 신 4:2), 명령(창 44:2, 삼상 15:11,13), 물건(출 22:9), 대답(잠 27:11), 사건(민 25:18, 신 19:15), 계명(신 4:13), 규례(신 15:2), 판결(신 17:11), 뜻(신 17:10), 직무(신 24:5), 까닭(수 5:4, 왕상 9:15), 의견(삿 20:7), 염려(삼상 10:2),구변(삼상 16:18), 이유(삼상 17:29), 소식(삼하 15:28), 식양(왕상 6:38), 소문(왕상 10:6),행위(왕상 10:6, 16:20), 사적(事蹟)(왕상 11:41,14:29), 행적(왕상 14:19, 대하 12:15), 지략(志略)(왕상 14:29, 16:14), 독(왕하 4:41), 불의(왕하 17:9), 양(왕하 25:30), 유언(대상 23:27), 반(대상 27:1), 글(대상 29:29), 소행(느 5:9), 생각(겔 38:10), 한 마디(렘38:14), 조서(에1:19), 일기(에2:23), 소리(욥26:14, 시22:1), 용맹(욥41:12), 병(病)(시41:8), 목적(시64:5), 영광(시79:9), 표적(시105:27), 노래(시137:3),사물의 이치(전8:1), 불행(전8:5), 예언(렘28:6), 편지(렘29:1), 영(단9:25), 말미암다(창20:11, 신4:21), 조금(렘38:5), [동] 응하다 (겔12:23), 말씀하다(말1:1), 대하다(출8:12), 대답하다(민20:8, 삼하24:13), 이르다(창41:28, 왕상18:31), 상종하다(삿18:28), 상심하다(삼하13:33), 청하다(삼하14:15), 구하다(삼하14:22), 모의하다(왕상1:7), 허락하다(대하1:9), 무엇이든지(삿19:19), 구별하다(느12:47), 자세히(삼상3:18), 어찌(삼상11:12).
구약 성경 / 1442회 사용



요나 3:1-10 여호와의 말씀대로(according to the word of God) לפי דבר אלוהים

요나서 2:10
“여호와께서 그 물고기에게 명하시매 요나를 육지에 토하니라.”

요나 1:17
“여호와께서 이미 큰 물고기를 예비하사 요나를 삼키게 하셨으므로 요나가 삼일 삼야를 물고기 배에 있으니라”

여호와 하나님이 선지자 요나에게 두 번 말씀하셨습니다.
첫번째 말씀은 "여호와의 말씀이 아밋대의 아들 요나에게 임하니라 이르시되. 너는 일어나 저 큰 성읍 니느웨로 가서 그것을 향하여 외치라 그 악독이 내 앞에 상달되었음이니라." (요나 1:1-2)

첫번째 여호와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지 않았기 때문에 스올의 뱃속에서 삼일 동안 말씀을 들을 수 있도록 몸과 마음을 다듬은 후에 다시 두번째 말씀을 주셨습니다.

"여호와의 말씀이 두 번째로 요나에게 임하니라 이르시되. 일어나 저 큰 성읍 니느웨로 가서 내가 네게 명한 바를 그들에게 선포하라 하신지라."

두번째 말씀을 듣고 요나는 니느웨 성으로 들어가 40일 후면 니느웨 성이 무너질 것이라고 외쳤습니다.
니느웨는 사일 동안 걸어다녀야 할만큼 매우 큰 성읍이었습니다.
그런데 요나는 하룻동안 니느웨 성에서 외쳤습니다.
그러자 니느웨 성에서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니느웨 사람들이 하나님을 믿고 금식을 선포하고 높고 낮은 자를 막론하고 굵은 베 옷을 입은지라.
그 일이 니느웨 왕에게 들리매 왕이 보좌에서 일어나 왕복을 벗고 굵은 베 옷을 입고 재 위에 앉으니라."(요나 3:5-6)

타락했던 니느웨 성 사람들과 심지어 왕까지 모두 굵은 베옷을 입고 회개하기 시작했습니다.
심지어 가축들까지도 금식했다고 합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그 순간 놀라운 일이 일어난 것입니다.
하나님은 다곤 신을 숭상하는 악한 이방 족속들까지도 사랑하신다는 증거를 보여주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히브리 민족은 여전히 우리만 선택받은 백성들이라고 주장합니다.

요나 한 사람이 순종할 때 놀라운 일이 일어났던 것처럼 오늘날도 순종해야 할 사람이 순종하지 않아 불행한 일은 계속하여 산불 번지듯 퍼져나갑니다.

믿음의 사람들을 불러주신 목적은 바로 이 때를 위함입니다.
우리 모두가 내 삶의 자리에서 하나님의 은혜가 헛되지 않도록 순종의 자리로 나가야 하겠습니다.
왜냐하면 성경에서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하였을 때 그 말씀은 곧 말과 행동이 일치하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믿음과 행동이 따로 떨어진 것이 아니라 믿음과 행동이 하나가 된 상태를 말합니다.

예전에 예수 믿는 사람들을 "말만 잘 하는 사람들" 이라고 비웃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예수 믿는 사람들은 말과 행실이 일치하는 진실한 사람들이라고 인정을 받는 자리로 옮겨가야 하겠습니다.

내 입의 말과 묵상과 행실이 먼저 주님을 기쁘시게 하고 주위 사람들에게 착한 행실이 되어 구원의 증거가 열매되는 일에 성공하는 믿음의 하루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말씀과 행위가 하나입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가 흔히 생각하듯이 말은 해 놓고 행동은 따라오지 않는다는 것은 하나님께 적용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에서 ‘하나님께서 말씀하셨다’는 것은 말씀대로 그대로 이루어졌다는 것을 포함하는 것입니다.
천지 창조 때의 상황에서도 이것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창세기 1:3
“하나님이 가라사대 빛이 있으라 하시매 빛이 있었고”

창세기 1:7
“하나님이 궁창을 만드사 궁창 아래의 물과 궁창 위의 물로 나뉘게 하시매 그대로 되니라”

계속해서 보면 하나님이 말씀하신 ‘그대로 되었다’고 선언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에게 있어서 말씀과 행위는 분리되지 않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이 일단 선포되면 이루어지지 않는 것은 없습니다.
말씀 그대로 되어야 합니다.
아니 성취되게 되어 있습니다.

1절에 보면 “여호와의 말씀이 두 번째 요나에게 임하니라 이르시되”라고 되어 있습니다.
물고기를 준비하신 하나님이 또한 물고기로 하여금 요나를 육지에 토하게 하셨습니다.
이 모든 것이 하나님께서 명하셨고 또한 그 말씀대로 이루어진 것입니다.
그 말씀이 이제 요나에게 다시 임하였습니다.
그렇다면 지금 이 순간 요나에게 말씀이 임하였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겠습니까?
우리가 여기서 주의해야 하는 것은 요나에게 다시 기회가 주어졌다고 보아서는 곤란합니다.
요나에게 다시 기회가 주어졌다고 보게 되면 우리의 관심은 자연스럽게 요나에게 가게 되는 것입니다.
 
성경은 요나 한 개인을 중심으로 삼고 있지 않습니다.
요나가 사명을 얼마나 잘 감당하느냐 하는 것을 설명하고자 하는 것에 본문의 기록 의도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또는 요나에게 사명을 주어서 그로 하여금 잘 감당하도록 하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요나를 훈련시키신 것도 아니라고 하는 사실입니다. 훈련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안 듣는 자가 잘 듣도록 바뀔 수 있습니까?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훈련으로 인간의 죄성을 없앨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본문은 요나 한 개인이 중심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요나라고 하는 인물이 대표하고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것은 이스라엘입니다.
요나가 가지고 있는 생각, 고정관념 그것이 바로 이스라엘의 모습이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요나를 이렇게 이끄심으로 인해서 이스라엘을 어떻게 인도하시고 이스라엘을 통해 어떻게 언약을 성취하시는가를 보여주고자 하시는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관심 가지고 계신 것은 스스로 하나님의 택한 백성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이스라엘을 죽이고 언약을 이해하고 하나님의 언약을 좇아 사는 새로운 이스라엘로 만들고자 하시는 것입니다.
요나를 물고기 뱃속에 집어넣어서 과거의 이스라엘을 죽이고 새로운 이스라엘로 창조하여 언약을 성취하고자 하시는 것입니다.
 
이제 요나는 새로운 사람으로서 하나님의 말씀을 드러내게 됩니다.
요나가 중요했기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 하나님의 의도대로 선포되고 성취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2절에 보면 “일어나 저 큰 성읍 니느웨로 가서 내가 네게 명한 바를 그들에게 선포하라 하신지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결코 중단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요나의 어떠한 방해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말씀은 본래 의도대로 드러나고 성취되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요나서에서 하나님의 처음 의도는 니느웨에 말씀이 선포되는 것이고, 니느웨에서 말씀이 드러남으로 하나님의 언약이 어떻게 성취되어 가는가 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 중심점인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말씀은 언제나 변동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언약이 변함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다시 선포되더라도 하나님의 말씀은 변하지 않습니다.
요나와 하나님이 의논하여 절충된 다른 의견이 제시되어 실행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이야기입니다.
다만 요나가 말씀에 굴복된 자로 바뀌어져 있을 뿐입니다.
말씀을 거부한 선지자가 죽고 말씀에 순종하는 새로운 선지자로 바뀌어져 있는 것입니다.
요나는 이제 말씀에 어쩔 수 없이 이끌려 가게 된 것입니다.
더 이상 거부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말씀이 요나에게 임하였기 때문이고 또한 말씀은 니느웨에 선포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요나의 방해에도 불구하고 결국에는 하나님의 말씀이 니느웨에 선포되게 됩니다.
 
3,4절의 말씀을 보면 “요나가 여호와의 말씀대로 일어나서 니느웨로 가니라 니느웨는 극히 큰 성읍이므로 삼 일 길이라 요나가 그 성에 들어가며 곧 하룻길을 행하며 외쳐 가로되 사십 일이 지나면 니느웨가 무너지리라 하였더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요나가 선포한 말씀은 40일이 지나면 니느웨가 멸망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니느웨는 큰 성읍이라 삼 일 길이 걸린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요나가 그 성에 들어가서 삼 일이 아니라 하루를 외쳤는데도 불구하고 이상한 일이 일어난 것입니다. 니느웨 백성들의 회개하는 역사가 일어난 것입니다. 그 상황을 본문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니느웨 백성이 하나님을 믿고 금식을 선포하고 무론 대소하고 굵은 베를 입은지라 그 소문이 니느웨 왕에게 들리매 왕이 보좌에서 일어나 조복을 벗고 굵은 베를 입고 재에 앉으니라 왕이 그 대신으로 더불어 조서를 내려 니느웨에 선포하여 가로되 사람이나 짐승이나 소 떼나 양 떼나 아무것도 입에 대지 말지니 곧 먹지도 말 것이요 물도 마시지 말 것이며 사람이든지 짐승이든지 다 굵은 베를 입을 것이요 힘써 여호와께 부르짖을 것이며 각기 악한 길과 손으로 행한 강포에서 떠날 것이라”(5-8절).
 
니느웨 백성들이 요나가 선포하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회개를 하게 됩니다. 삼일 동안 다니면서 선포한 것도 아니고 하루 선포하니까 온 성읍에 소문이 퍼지고 그 소식이 왕에게까지 상정되어 왕도 왕복을 벗고 베옷을 입고 재에 앉아 회개를 하게 됩니다. 그리고는 금식을 선포하면서 여호와 하나님께 부르짖습니다. 모든 악한 길에서 떠나고 강포를 행하는 일을 그치도록 합니다.
10절에 보면 “하나님이 그들의 행한 것 곧 그 악한 길에서 돌이켜 떠난 것을 감찰하시고 뜻을 돌이키사 그들에게 내리리라 말씀하신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시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것을 가지고 우리가 니느웨가 회개했기 때문에 하나님이 뜻을 돌이키셨다고 생각하면 곤란합니다. 왜냐하면 그렇게 되면 니느웨의 회개가 하나님의 심판을 돌이키는 결과를 가져온 것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생각할 것이 아니라 회개라고 하는 것 자체가 인간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인가를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우리가 회개하고 싶다고 해서 회개가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에 대해서 알지도 못하고 여호와 하나님에 대해서 들어보지도 못한 입장에서 니느웨 백성들이 마음대로 회개할 수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임하여 니느웨 백성들이 회개하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회개하게 만든 것입니다. 니느웨 백성들이 회개하는 것을 보고 하나님이 뜻을 돌이킨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이 임하였기 때문에 니느웨 백성들에게서 회개가 나오게 된 것입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니느웨에 대한 심판을 유보시키신 것이지 결코 하나님께서 심판하기로 했다가 심판을 포기하신 것이 아닙니다.
나훔서 1:1 이하에 보면 “니느웨에 대한 중한 경고 곧 엘고스 사람 나훔의 묵시의 글이라 여호와는 투기하시며 보복하시는 하나님이시니라 여호와는 보복하시며 진노하시되 자기를 거스리는 자에게 보복하시며 자기를 대적하는 자에게 진노를 품으시며 여호와는 노하기를 더디하시며 권능이 크시며 죄인을 결코 사하지 아니하시느니라”(나 1:1-3a)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나훔 선지자가 외치던 이 상황은 요나 선지자가 외쳤던 시대에서 약 100년 후의 일입니다. 결국 하나님은 니느웨을 철저히 심판하시겠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요나를 통해 니느웨에 말씀을 선포하게 하시고 심판을 유보하신 것은 결코 니느웨를 구원코자 하는 것에 목적이 있었던 것이 아니었다는 것을 나훔서를 통해서 보면 알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니느웨를 회개시키고자 하는 목적으로 요나 선지자를 보냈다고 생각하면 곤란합니다. 그것이 아니라 오히려 이스라엘에게 무엇인가를 알려주시기 위하여 니느웨를 회개시키는 역사를 하나님께서 일으키신 것입니다.
니느웨를 회개하는 것을 보도록 요나를 참여시키신 것은 요나가 하나님의 말씀을 거부하고 도망하는 것이 정당한가 하는 것을 물으시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요나는 배에서 다시스로 도망하면서도 배의 모든 사람 앞에서 자신은 히브리 민족이요 천지를 창조하신 여호와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밝혔습니다. 그것이 곧 이스라엘이 가지고 있었던 고정관념이라고 앞의 강론에서 이미 말씀드렸습니다. 요나 선지자가 활동하던 이 시대는 여로보암 2세 때로 다윗 이래로 가장 부유함을 누리고 있던 때였습니다.
 
이러한 시대에 이스라엘은 자기들이 누리는 부유함이 당연한 것이고 하나님을 잘 믿고 잘 섬기고 있기 때문에 누리는 복이라는 당위성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니느웨에 선포하라고 한 그 하나님의 말씀을 거부한 요나에게서 보여지고 있는 것입니다. 이방인에게도 그러한 긍휼이 베풀어진다는 것이 용납될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한 요나의 모습 속에서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언약에 대하여 잘못 알고 있다는 것이 확연히 드러나고 있는 것입니다.
자신들만 선민이라고 생각하고 이방인은 멸망 받아야 마땅하다고 여기는 그 고정관념 속에는 하나님의 은혜를 알지 못하는 무지가 들어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것을 이스라엘에게 알려주시기 위하여 니느웨를 회개시켜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언약에는 죄가 많거나 비록 이방인이라 할지라도 하나님의 긍휼과 은혜에 의해 구원의 여지를 마련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하나님은 “나는 은혜 줄 자에게 은혜를 주고 긍휼히 여길 자에게 긍휼을 베푸느니라”(출 33:19)는 방식대로 일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러한 언약의 방식대로 일하시는 여호와 하나님이십니다.
 
결국 니느웨에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 은혜와 긍휼이 베풀어짐에 있어서 요나 같은 자를 보내시는 것은 고통과 희생의 과정이 포함되지 않고는 안된다는 것을 보여주고자 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언약을 안다고 하고 그 말씀대로 산다고 알고 있는 이스라엘이라 할지라도 하나님의 말씀을 거부하는 쪽으로 나아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이스라엘의 죄악이고 또한 모든 인간의 죄악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거부한다는 것은 모든 죄인들의 본능입니다.
그러기에 하나님께서는 니느웨에 은혜를 베풀게 하심에 있어서 요나를 고통과 희생의 자리로 끌고 가셔서 이방인에게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되게 하시고 그 말씀에 따라 은혜와 긍휼이 어떻게 나타나는가 하는 것을 이스라엘에게 보여주고자 하시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부유함을 누리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 때문이지 자기들이 잘나서 그렇게 된 것이 아니라고 하는 것입니다.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을 거부할 자격이 이스라엘에게 없다는 것을 하나님은 니느웨를 통해 고발하고 있는 셈입니다.
 
이스라엘이 전례없는 강성함을 누리는 것은 이스라엘이기 때문에 누리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한 마디로 말하자면 하나님의 언약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언약 때문에 이스라엘이 긍휼을 누리고 있다는 것입니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이스라엘도 벌써 하나님의 심판으로 말미암아 죽어야 할 존재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니느웨에 긍휼이 베풀어지는 것에 요나라는 존재가 고통을 당하고 희생되었듯이 이스라엘에게 계속적으로 긍휼이 베풀어지는 것은 언약의 실체가 오셔서 고통과 희생을 당하셔야만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마태복음 12장에서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구하나 선지자 요나의 표적밖에는 보일 표적이 없느니라 요나가 밤낮 사흘을 큰 물고기 뱃속에 있었던 것같이 인자도 밤낮 사흘을 땅 속에 있으리라 심판 때에 니느웨 사람들이 일어나 이 세대 사람을 정죄하리니 이는 그들이 요나의 전도를 듣고 회개하였음이어니와 요나보다 더 큰 이가 여기 있으며”(마 12:39-41)라고 말씀하신 것은 요나의 고통과 희생 그것을 성취하러 오신 분이 바로 예수님 자신이라는 뜻에서 그렇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실로 하나님의 구원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언약을 온전히 이루시는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셨고, 그분이 십자가의 고난과 죽음을 당하셨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 되었습니다. 요나는 거부하고 도망할지라도 하나님은 자신의 말씀대로 반드시 이루시는 분이십니다. 오늘날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은 바로 그분의 언약 안에서 하나님의 긍휼을 누리는 것입니다. 내가 잘나서 그렇다거나 내가 잘 믿을 것 같아서 부름 받은 것이 아니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약속의 말씀대로 성취하시는 그 하나님 앞에 우리 모든 순종의 삶을 드릴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니느웨를 회개시킴으로 이스라엘을 고발하면서 하나님의 언약을 보여주고 가르쳐주신 그 하나님께서 오늘날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우리를 고발하면서 예수 그리스도를 가르쳐주시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십자가를 우습게 압니다. 십자가를 무시합니다. 나무 십자가 자체가 그렇게 한다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가 상징하는 바가 그렇다는 뜻입니다. 십자가는 우리의 죄악을 낱낱이 고발하면서 하나님의 긍휼과 은혜를 선포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나의 대속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친히 홀로 십자가에서 고통과 희생을 당하셨기 때문임을 믿는 자가 성도요 또한 교회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는 내 쪽에서 가지고 있는 어떤 구원에 대한 어떤 근거도 날마다 버릴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모태 신앙이라는 근거도, 주일 성수와 십일조를 잘하기 때문이라는 근거도, 목사나 장로, 집사, 권사이기 때문에 구원받을 것이라는 어떤 당위성도 우리에게는 없는 것입니다. 오직 주님의 십자가 은혜 때문임을 고백하고 찬양할 수밖에 없는 자를 성도라고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 이는 아무 육체라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 너희는 하나님께로부터 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고 예수는 하나님께로서 나와서 우리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속함이 되셨으니 기록된 바 자랑하는 자는 주 안에서 자랑하라 함과 같게 하려 함이니라”(고전 1:27-31)


1. [민수기 3:51]
이 속전을 여호와의 말씀대로 아론과 그 아들들에게 주었으니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하심과 같았느니라

2. [신명기 34:5]
이에 여호와의 종 모세가 여호와의 말씀대로 모압 땅에서 죽어

3. [여호수아 8:8]
너희가 성읍을 취하거든 그것을 불살라 여호와의 말씀대로 행하라 보라 내가 너희에게 명하였느니라 하고

4. [사무엘상 16:4]
사무엘이 여호와의 말씀대로 행하여 베들레헴에 이르매 성읍 장로들이 떨며 그를 영접하여 가로되 평강을 위하여 오시나이까

5. [열왕기하 1:17]
왕이 엘리야의 전한 여호와의 말씀대로 죽고 저가 아들이 없으므로 여호람이 대신하여 왕이 되니 유다 왕 여호사밧의 아들 여호람의 제 이년이었더라

6. [열왕기하 9:26]
여호와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어젯날에 나봇의 피와 그 아들들의 피를 분명히 보았노라 또 말씀하시기를 이 토지에서 네게 갚으리라 하셨으니 그런즉 여호와의 말씀대로 그 시체를 취하여 이 밭에 던질찌니라

7. [열왕기하 23:16]
요시야가 몸을 돌이켜 산에 있는 묘실들을 보고 보내어 그 묘실에서 해골을 취하여다가 단 위에 불살라 그 단을 더럽게 하니라 이 일을 하나님의 사람이 전하였더니 그 전한 여호와의 말씀대로 되었더라

8. [역대상 12:23]
싸움을 예비한 군대 장관들이 헤브론에 이르러 다윗에게로 나아와서 여호와의 말씀대로 사울의 나라를 저에게 돌리고자 하였으니 그 수효가 이러하였더라

9. [역대하 29:15]
저희가 그 형제를 모아 성결케 하고 들어가서 왕이 여호와의 말씀대로 명한것을 좇아 여호와의 전을 깨끗케 할쌔

10. [역대하 30:12]
하나님이 또한 유다 사람들을 감동시키사 저희로 왕과 방백들이 여호와의 말씀대로 전한 명령을 일심으로 준행하게 하셨더라

11. [예레미야 13:2]
내가 여호와의 말씀대로 띠를 사서 내 허리에 띠니라


요나 3:3
요나가 여호와의 말씀대로 일어나서 니느웨로 가니라 니느웨는 극히 큰 성읍이므로 삼일길이라.





노자의 세 가지 종류의 사람" (고전 2:14-3:3, 마태 13:3-23)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을 받지 아니하나니 저희에게는 미련하게 보임이요 또 깨닫지도 못하나니 이런 일은 영적으로라야 분별함이니라." (고린도전서 2:14)  

노자(老子)의 「도덕경(道德經)」 중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덕경(德經)」제 41장) :

     뛰어난 사람은 도를 들으면 부지런히 행하고(上士聞道, 勤而行之)

     평범한 사람은 도를 들으면 간수하고 있는 듯하기도 하고 잃어버린 듯하기도 하며(中士聞道, 若存若亡)

     어리석은 사람은 도를 들으면 크게 비웃으니 비웃지 않으면 도가 되기에 부족하다(下士聞道, 大笑之, 不笑不足以爲道)

     When the best student hears about the way, he practices it assiduously;        
     When the average student hears about the way, it seems to him one moment there and gone the next;      
     When the worst student hears about the way, he laughs out. If he did not laugh, it would be unworthy of being the way. 

 
사람들을 3가지로 분류합니다.
난사람, 든 사람, 된 사람입니다.

된 사람은 그 사람의 인격과 성품이 인정받을만한 사람을 가리킵니다.
난사람은 보통 평범한 사람보다 뛰어나 유명하여 이름을 널리 알린 사람을 말합니다.
든 사람은 교양을 갖춘 사람으로 풍부한 지식과 경험을 갖춘 사람을 가리킵니다.
이 세 사람가운데 인간으로서 필요한 모습은 된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사람이 유명해지는 것보다, 머리에 많은 지식을 쌓는 것보다 훨씬 중요한 것이 사람됨이라는 것입니다.

영국의 경험주의 철학자 베이컨거미와 같은 사람, 개미와 같은 사람, 그리고 꿀벌과 같은 사람으로 구분합니다. 
세상에는 거미와 같이 남을 이용해서 사는 사람이 있고, 개미와 같이 일은 열심히 하지만 자기밖에 모르는 사람이 있습니다.
하지만 꿀벌과 같이 끊임없이 날라서 자기도 살고 남도 살게 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입니다.

유대인의 관점에서는 사람을 어떻게 구분할까요?
유대인과 이방인입니다.
할례를 받은 사람 할례를 받지 못한 사람입니다.
이것은 유대인의 우월 의식과 특권의식이 강하게 내포된 구분입니다.
지금도 물론 그렇지만, 옛날에는 더욱 그것이 심했습니다.
그들은 유대인이 아니면 모두 이방인이었고, 이방인은 사람이 아닌 동물처럼 취급했습니다.
그래서 바울 시대에는 유대인들이 주님을 믿기가 매우 어려웠고, 그들의 우월의식과 고정관념이 복음을 전하는데 방해가 되었습니다. 베드로와 같은 사람도 이것을 깨는데 상당한 어려움이 있었습니다. 지금도 유대인들은 주님을 믿지 않고, 예수님을 메시야로 받아드리지 않습니다.

이렇게 사람들은 여러 관점에서 사람을 구분하고 있는데, 그렇다면 성경은 사람을 어떻게 분류할까요? 본문은 바로 그것을 알려줍니다. 오늘 우리가 이것을 유의하여 보려고 합니다. 그것을 통해 나의 모습을 조명해 보아야 합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사람의 구분은 크게 3가지로 나타납니다.

육에 속한 사람입니다.

14절에서 이것을 잘 알려줍니다.
육에 속한 사람은 한마디로 믿지 않는 사람입니다.
아직까지 거듭나지 않은 사람이요, 중생하지 못하고,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지 못한 사람입니다.
자연인을 말하고, 주님을 알지 못하다가 인생을 마치는 사람입니다.
세상에 이런 사람이 얼마나 많은 지 모릅니다.
지금 세계 76억 인구 가운데 기독교인의 숫자가 약 20억 정도 됩니다.
전체 인구의 30%가 넘습니다.
물론 여기에는 카톨릭과 다른 종파를 모두 포함한 숫자입니다.
이것을 보면 기독교가 어떤 종교보다도 차지하는 비중이 높습니다.
그러나 아직까지 3분의 2에 해당되는 사람들은 믿는 않습니다.
여기에는 다른 종교를 믿는 사람도 있고 종교가 없는 사람도 많습니다.
성경은 이런 사람을 육에 속한 사람, 믿지 않는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이들은 우리가 관심을 갖고 보아야 하고, 전도할 대상들입니다.
우리가 살면서 늘 관심을 갖고 돌아보아야 할 사람들입니다.

육에 속한 사람의 특징이 무엇일까요?

본문은 그것을 한마디로 깨닫지 못하는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사람이 살면서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이 바로 깨달음이라고 생각합니다.
인간은 깨닫는 존재입니다.
결국 인간은 깨달음을 통해 자기 성장과 발전을 이루는 것입니다.
아이가 점점 깨달아야 어른이 되는 것입니다.
어른이 되어서도 점점 깨달아야 철이 드는 것입니다.
인간 됨의 회복은 깨달음에서 절정을 이룹니다.
성경의 위대한 사람은 모두 깨달음의 사람입니다.
깨달음이 신앙과 삶에 너무도 중요함을 가르칩니다.

그런데 우리가 이처럼 중요한 깨달음은 하나님이 역사 해야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도 성령의 도움을 받지 않으면 깨닫지 못합니다.
아무리 풍성한 지식을 가진 사람도 안됩니다.
아무리 무식한 사람도 성령이 도우시면 깨닫게 됩니다.
중요한 것은 사람이 깨닫지 못하면 어리석은 행동을 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무분별하고, 맹목적이고, 인간으로서 해서는 안될 모습이 나오고, 인간임을 포기하는 행동들이 나옵니다.
이런 모습을 우리는 주변에서 관찰할 수 있고, 우리가 사는 세상에서 많이 발견합니다.


육신에 속한 사람입니다.
3장 1절과 2절에서 이것을 잘 알려주고 있습니다.
육신에 속한 사람은 육에 속한 사람과 근본적으로 다릅니다.
이 사람은 이미 주님을 믿는 사람입니다.
주님을 영접하여 주님을 모시고 사는 사람들입니다. 은혜를 아는 사람이요, 이미 거듭난 사람입니다.

육신에 속한 사람도 특징이 있습니다.
본문에서 바울은 그 특징을 어린아이와 같다고 말합니다.
주님을 영접하여 성령이 내 안에 들어오시긴 했지만 아직까지 어린아이와 같이 성숙하지 못한 것입니다.
이들은 이제 막 태어난 생명체와 같은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그보다 조금 성장해서 이제 돌을 지나고, 걸음마를 하는 단계의 사람도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그보다 조금 더 자라서 이제 말도 하고, 재롱도 피우고, 자기의사를 표현할 줄 아는 단계도 있습니다.
이 모두를 어린아이라 하고, 또한 이것이 육신에 속한 자의 특징입니다.
지금 바울이 고린도 교회에 편지를 쓰면서 초점을 맞추는 사람들이 바로 여기에 해당되는 사람들입니다.
2절에서 바울은 이들을 젖을 먹는 자라고 강조합니다.
이제 밥을 먹어야 하는데 어린아이기에 젖을 먹고 있는 자들입니다.
그만큼 아직까지 그리스도안에서 어린아이라는 것입니다.

어린아이의 특징이 무엇입니까?
물론 아이가 순수하고 깨끗하지만, 가만히 보면 어린아이의 약점이 있습니다.
크게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자기밖에 모른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깊이 생각하거나 올바르게 판단할 줄 모른다는 것입니다.
가만히 보십시오.
아이는 시도 때도 없이 웁니다.
그런데 그 우는 것을 가만히 보면 모두 자기 좀 봐달라는 것입니다.
지금 배고프다는 것이고, 불편하다는 것이고, 놀아달라는 것이고, 딴 생각하지 말고 나만 보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되지 않을 때, 여지없이 웁니다.
물론 이렇게 자기의사를 표시하는 것으로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이것은 자기밖에 모르는 행동에서 오는 모습입니다.
아이가 엄마 생각하고 우는 것 보았습니까?
지금 엄마가 몹시 피곤해서 잠을 자야 하는데 아이가 그런 엄마를 생각하고 울지 않는 것을 보았습니까?
아이가 밤에 울면 대책이 없습니다.
다 일어나야 합니다.
한 두 번은 봐주는데 자꾸 그러면 나중에는 때려주고 싶을 때가 생길 정도입니다.
이게 어린아이입니다.
갓난아이는 자기밖에 모릅니다.

아이는 사색이나 생각을 하지 않습니다.
삶의 의미나 목표를 가질 수가 없습니다.
그런 것은 커서 가능한 것입니다.
여러분 아이가 인생에 대해 고민하는 것 보았습니까?
“아! 나는 어디서 왔다가 어디로 가는가, 인생이 왜 이렇게 고달픈가, 어떻게 해야 돈을 벌어 성공할 것인가” 그런 고민을 하지 않습니다. 그러면 이상한 아이일 것입니다.
아이는 그저 아이입니다.
아이처럼 살면 됩니다.
요즘 아이들의 정신연령이 높아서 유치원에 들어가면서 자기가 결혼할 친구를 결정한다고 합니다.
그 나이에 질투도 하고 좋아하는 친구의 이야기만 나오면 어른처럼 얼굴이 빨게 집니다.
그러나 그것은 감정입니다.
생각은 아닙니다.
생각과 의미는 어른이 되어야 합니다.
어른이 되어야 인생을 생각하고, 삶의 의미를 찾고, 방향을 정하고, 고민하고, 판단하고, 결정하는 것입니다.

신앙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육신에 속한 자가 바로 이런 사람입니다.
주님을 영접하여 성령이 계시지만, 아직까지 어린아이와 같습니다.
그래서 어린아이와 같은 모습이 나타납니다.
고린도 교회에도 그런 현상이 있었습니다.
그들 사이에 분쟁과 시기가 있었습니다.
남을 배려하지 않고 자기밖에 모르는 편협한 삶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깊은 생각을 하지 않았고, 폭넓게 보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교회를 세운 이유가 무엇인지 몰랐습니다.
그런 것을 보면서 바울이 지금 편지를 쓰는 것입니다.

영에 속한 사람입니다.

15절과 16절에서 이것을 알려줍니다. 신령한 자가 바로 영에 속한 사람입니다. 영에 속한 사람은 그야말로 성숙한 사람입니다. 신앙의 사람이요, 하나님의 사람이요, 깊은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의 특징이 무엇입니까?
여기에서 세 가지를 말씀합니다.
우선, 15절을 보십시오.
“모든 것을 판단하나 자기는 아무에게도 판단을 받지 아니하느니라” 이 말이 무슨 뜻입니까?
이것을 바꾸어 말하면 깊이 생각할 줄 아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과 섭리를 잘 분별한다는 것입니다.

두 번째 특징은 16절에서 “누가 주의 마음을 알아 주를 가르치겠느냐” 라고 반문하는데, 이 말은 무슨 뜻입니까?
여기에서 ‘안다’는 것에 주목해야 합니다.
신령한 자는 뭔가를 안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깨달음을 갖는다는 것입니다.
주의 마음을, 그의 사랑을, 나를 향한 하나님의 계획을 잘 깨달아 인생을 후회 없이 살도록 노력한다는 것입니다.

세 번째 특징은 “그러나 우리가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졌느니라”고 말합니다.
영에 속한 사람은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진 자라고 말합니다.
그리스도의 마음이 어떤 마음입니까?
주님은 친히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매고 내게 배우라” 주님의 마음은 온유와 겸손입니다. 이 마음은 한마디로 남을 배려하는 마음입니다.
왜냐하면 온유와 겸손은 다른 사람과의 관계에서 분명히 밝혀지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바로 영에 속한 사람의 특징입니다.
깨달음이 있고, 남을 배려하고, 깊이 있게 사는 사람입니다.
육에 속한 사람과 육신에 속한 사람의 약점을 모두 보안한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떤 사람이 되기를 원하십니까?
우리가운데 육에 속한 사람은 없으리라 믿습니다.
그러나 육신에 속한 자라면 이제 영에 속한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것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데까지 이르리니 이는 우리가 이제부터 어린아이가 되지 아니하여 사람의 궤술과 간사한 유혹에 빠져 모든 교훈의 풍조에 밀려 요동치 않게 하려 함이라 오직 사랑안에서 참된 것을 하여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랄찌라 그는 머리니 곧 그리스도라” (엡 4:13-15)

우리 모두 영에 속한 사람, 성숙한 사람으로서 커다란 깨달음을 갖고, 이기심을 버리고, 깊은 사람으로 사시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7월 27일(목) 요나서 4장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박 넝쿨(6절)


하나님 여호와께서 박넝쿨을 예비하사 요나를 가리게 하셨으니 이는 그의 머리를 위하여 그늘이 지게 하며 그의 괴로움을 면하게 하려 하심이었더라 요나가 박넝쿨로 말미암아 크게 기뻐하였더니.
Then the LORD God provided a vine and made it grow up over Jonah to give shade for his head to ease his discomfort, and Jonah was very happy about the vine.

7021. 박넝쿨(a vine) 키카욘  קִיקָיוֹן  
1. 조롱박.  2. 박 넝쿨. 3. 요나 4:6-10.
발음 / 키카욘[ qîyqâyôwn ]
어원 / 7006에서 유래한 것으로 보임
관련 성경 / 박 넝쿨(욘 4:6-10).
구약 성경 / 5회 사용

* 7006. 토하다(카야. qâyâhקָיָה  
1. 토하다
2. 예레미야 25:27.
발음 / 카야[ qâyâh ]
관련 성경 /  토하다(렘 25:27).
구약 성경 / 9회 사용

요나서 4장은 그릇된 선민 의식을 가진 요나와 공평하게 이방인에게까지도 은혜를 베푸시는 하나님의 자비가 크게 대조되는 말씀으로 내용을 두 부분으로 소개합니다.

4:1-4. 니느웨의 회개에 불평하는 요나
4:5-11. 그릇된 요나의 생각을 바꾸려는 하나님

요나는 삼일 길의 큰 성읍 니느웨에서 단 하룻동안만 니느웨가 40일이 지나면 망할 것이라고 외쳤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니느웨 성 사람들은 요나 선지자의 외침을 듣고 그렇게 악독한 도성이 즉시 회개하는 놀라운 사건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 결과 무너져야 할 이방인의 도성인 니느웨가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를 힘입어 재앙에서 벗어났습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모습이 그대로 이루어진 것입니다.

그러나 요나의 반응은 전혀 다른 것이었습니다.
적대국인 앗수르의 발전은 이스라엘에게 위험이 된다는 생각이 요나를 억누르고 있었습니다.
큰 도성이 구원을 받는 것을 보고 오히려 불평하고 분을 내는 것은 편협한 인간의 단면을 보여 주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하나님의 넓으신 사랑의 표현을 이해하지 못하는 어리석은 모습입니다. 

기독교인들의 이기적인 모습을 요나 선지자를 통하여 깨닫게 합니다.
나는 예수를 믿고 구원을 받았기 때문에 천국에 들어갈 수 있지만 저 사람들은 아직도 예수를 믿지 않으므로 지옥에 떨어질 것이라며 은근히 무시하고 저주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기적인 요나를 깨우치려고 뜨거운 햇빛을 가려 그늘을 만들어 주는 박 넝쿨을 예비하셨습니다.
얼마 후 그 박넝쿨이 시들어서 그늘이 없어질 때 요나는 박 넝쿨 때문에 불평합니다.
이러한 요나에게 하나님은 네가 심지도 않았고 가꾸지도 않은 박 넝쿨을 아끼는 것처럼 하나님은 니느웨 백성들을 아끼고 사랑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악독한 도성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을 얼마나 사랑하시는지에 대한 단면이라고 하겠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들을 너무나 사랑하시기에 인간들의 죄악을 대속하시기 위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셨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그의 택하신 선민 이스라엘뿐만 아니라 이방인까지도 사랑하십니다. 
이 사실은 오늘날 이방인들이라 할지라도 회개하고 돌이킬 때에는 하나님께서 용서하시고 그의 자녀로 사아 주신다는 사실을 깨닫게 합니다.

사랑하는 믿음의 사람들이여,
내가 받은 하나님의 사랑과 구원의 은혜가 내 안에서만 맴도는 것이 아니라 이제는 나를 통하여 외부로 전달되고 증거되기를 위하여 결단하고 복음의 증인으로 나서야 하겠습니다.

요나는 큰 성 니느웨에 하나님의 심판이 내리지 아니하자 하나님께 화를 냅니다.

얼마나 화가 났으면 죽는 것이 사는 것보다 낫다고 고백을 하겠습니까.
이 모습을 통해서 우리는 요나가 얼마나 앗수르를 싫어했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그는 이스라엘의 원수인 앗수르가 망해야 이스라엘이 살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다시스로 도망갔던 것입니다.
어쩌면 그가 바다에 빠져 죽는 것이 니느웨에 가서 심판의 경고를 선포하는 것보다 낫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요나는 자기중심적으로 판단을 하고 있으며, 자기가 원한대로 되지 않자 분노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분노가 세상의 첫 번째 살인 사건을 만들었습니다.
가인은 아벨을 찾는 하나님께 “내가 내 아우를 지키는 자니이까”라고 말하지만, 결국은 자신의 제사를 받지 않는 하나님께 분노했던 것입니다. 

과연 우리는 무엇에 분노하고 있는지 생각해야 합니다.
많은 경우에 우리는 요나와 가인처럼 자기중심적 분노를 표출할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성도는 하나님의 분노를 이 땅에 드러내는 존재입니다.
하나님의 분노는 죄를 향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분노를 해결하기 위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우리가 받을 모든 저주를 받으시고 하나님의 공의를 만족시키셨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과 화평한 자가 된 것입니다. 

니느웨 백성들은 요나 선지자의 경고를 듣고 회개하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했던 요나는 오히려 마음이 강퍅해지는 것을 보게 됩니다. 결국 요나는 하나님의 분노를 드러내는 자가 아니라 자신의 분노를 드러내기 원했습니다. 요나는 하나님께서 은혜로우시며 자비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 하시는 분인 줄 알았지만 자기의 생각대로 그 은혜가 베풀어지길 원했던 것입니다. 자신의 생각대로 되지 않자 그는 불평하고 분노하게 됩니다. (너무나 감사한 것은 이 이야기가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요나가 불평하고 분노한 이유는 자신이 받은 은혜의 깊이를 온전히 깨닫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받은 은혜가 얼마나 큰지를 알아야 다른 사람들을 용납하고 사랑할 수 있습니다. 오늘 하루도 하나님께서 베푸신 은혜 때문에 이웃을 사랑하는 여러분들이 되시길 소원합니다.

사촌이 땅을 사면 배가 아프다는 속담이 있습니다. 


요나는 여기서 이 같은 왜곡된 인간 심성을 표출한다.
그는 국가적인 회개를 통해 심판이 연기된 니느웨 성을 탐탁치 않게 여기고 이스라엘의 대적국인 니느웨에 은혜를 허락하시는 하나님의 섭리에 불만을 토로했다.
그는 아직도 만인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과 구속 계획을 깨닫지 못하고 편협한 국가 이기주의에 빠져 있었다.
하나님은 박 넝쿨을 통해서 요나의 오해를 지적하셨다.

<요나 4장 개역한글>

1. 요나가 심히 싫어하고 노하여      

2. 여호와께 기도하여 가로되 여호와여 내가 고국에 있을 때에 이러하겠다고 말씀하지 아니하였나이까 그러므로 내가 빨리 다시스로 도망하였사오니 주께서는 은혜로우시며 자비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하시며 인애가 크시사 뜻을 돌이켜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이신 줄을 내가 알았음이니이다     

3. 여호와여 원컨대 이제 내 생명을 취하소서 사는 것보다 죽는 것이 내게 나음이니이다 

4.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너의 성냄이 어찌 합당하냐 하시니라   

5. 요나가 성에서 나가서 그 성 동편에 앉되 거기서 자기를 위하여 초막을 짓고 그 그늘 아래 앉아서 성읍이 어떻게 되는 것을 보려 하니라      

6. 하나님 여호와께서 박 넝쿨을 준비하사 요나 위에 가리우게 하셨으니 이는 그 머리를 위하여 그늘이 지게 하며 그 괴로움을 면케하려 하심이었더라 요나가 박 넝쿨을 인하여 심히 기뻐하였더니      

7. 하나님이 벌레를 준비하사 이튿날 새벽에 그 박 넝쿨을 씹게 하시매 곧 시드니라      

8. 해가 뜰 때에 하나님이 뜨거운 동풍을 준비하셨고 해는 요나의 머리에 쬐매 요나가 혼곤하여 스스로 죽기를 구하여 가로되 사는 것보다 죽는 것이 내게 나으니이다      

9. 하나님이 요나에게 이르시되 네가 이 박 넝쿨로 인하여 성냄이 어찌 합당하냐 그가 대답하되 내가 성내어 죽기까지 할찌라도 합당하니이다      

10.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네가 수고도 아니하였고 배양도 아니하였고 하룻밤에 났다가 하룻밤에 망한 이 박 넝쿨을 네가 아꼈거든      

11. 하물며 이 큰 성읍, 니느웨에는 좌우를 분변치 못하는 자가 십 이만 여명이요 육축도 많이 있나니 내가 아끼는 것이 어찌 합당치 아니하냐


<요나 4장 성경주석>

4:1 싫어하고.

 첫 번째 구절은 문자적으로 “그것은 요나에게 악, 곧 커다란 악이었다”이다. 제4장은 인간의 마음의 조급함과 하나님의 오래 참으심을 현저하게 대비하여 나타내 준다. 요나는 싫어했을 뿐 아니라, “하나님이…뜻을 돌이키”신 것에 대해 몹시 분개했다(3:10). 하나님의 은혜가 회개하는 니느웨 사람들을 용서해 주었음을 기뻐하는 대신, 그는 자기의 이기적이고 죄된 자존심 때문에 분개함을 나타냈다. 자기가 예언한 일이 일어나지 않았기 때문에 그는 자기가 거짓 선지자로 간주될 것이라고 느꼈다. 그에게는 앗수르 수도에 사는 모든 영혼들보다도 자기의 명성이 더욱 소중했다. 그는 성취되지 않은 그 예언 때문에 이방인들 가운데서 미래를 아시는 여호와의 능력이 불신을 받게 될 것이라고 추론했을지도 모른다.

4:1 노하여.

 . 니느웨 사람들을 향한 하나님의 자비는(3:10) 요나를 격분하게 했다. 하나님의 자비는 그가 불순종했을 때 그의 목숨을 살려주었건만, 하나님께서 동일한 자비를 다른 이들에게 베푸셨을 때 그는 그것을 질투했다.

4:2 기도하여.

 2장의 기도와 비교할 때 이 기도를 드릴 때의 상황은 얼마나 다르며, 이 기도를 하게 만든 그 정신은 얼마나 다른가! 그때 그는 생명을 달라고 기도했지만, 여기서는 죽음을 달라고 기도한다. 그때 그는 겸손했지만 지금은 화를 낸다.

4:3 내 생명을 취하소서.

 하나님께 드리는 요나의 간청은 모세의 그것과 얼마나 다른가! 모세는 죄를 범한 자기 백성을 살리기 위해 진정한 자기희생 정신으로 기꺼이 자기의 이름을 지워버려 달라고 호소했다(참조 출 32:31, 32). 요나는 완전히 낙담에 빠졌다.

4:4 성냄.

 요나의 성냄은 예수께서 성전에서 돈 바꾸는 사람들을 쫓아내실 때에 나타내신 것과 같은 고결한 분노(참조 요 2:13~17)가 아니라 전적으로 이기심에서 생겨난 것이었다. 그 선지자는 자기의 성급한 정신으로 인해 스스로 큰 축복을 빼앗겼다(참조 잠 14:29; 16:32).

4:5 보려 하니라.

 어떤 이들은 요나가 “너의 성냄이 어찌 합당하냐?”(4절)라는 질문을 자기가 하나님의 의도를 성급하게 오판했으며 니느웨가 아직도 멸망될 가능성이 있다는 의미로 해석했다고 제시했으나, 다른 이들은 요나가 니느웨 사람들의 회개가 진지하지 않았다고 느꼈기 때문에 결국은 하나님께서 그들을 징벌할 것으로 생각했다고 제시했다. 그러나 오히려 요나의 반응은 다만 하나님께서는 그분이 경고하셨던 것처럼 실행하셔야 한다는 요나의 완고한 태도와 주장을 반영하는 것일 것이다.

4:6 박 넝쿨.

 히브리어 키카욘(qiqayon). 알려지지 않은 식물. 아주까리, 일종의 오이 등 여러 가지가 그 정체로 제시되었다. 그 식물은 기적적으로 성장했으며, 비록 이것이 그 지역에서 잘 알려진 악갓어로 쿡카니투(kukka-ni-tu)라고 하는 미확인된 종류의 식물일 가능성이 있다 하더라도, 구태여 그 정체를 빠르게 성장하는 어떤 알려진 식물로 확인할 필요는 없다.

4:6 준비하사.

 . 히브리어 마나(manah), “지정하다.”

4:6 괴로움.

 .히브리어 라아(ra‘ah). 악, 불운, 고생, 불행 등을 의미하는 일반적인 단어. 요나의 불편함은 육체적인 것이었기보다는 그가 당하고 있다고 느낀 속상함과 모욕과 실망으로 인한 정신적이며 영적인 것이었다.

4:7 준비하사.

 참조 6절 주석.

4:7 시드니라.

 . 인생의 경험에서 얼마나 자주 기쁨과 즐거움의 새 날이 시작되는 것처럼 보일 때, 어떤 불행이나 슬픔의 벌레가 와서 희망을 절망으로 바꾸어 버리는가!

4:8 뜨거운.

 히브리어 하리쉬트(h.aris∨it). 단지 이곳에만 나오는 단어로 “태우는 듯한”이라는 의미일 것이다. 「개정표준역」은 “찌는 듯이 더운”이라는 의미를 제시한다.

4:8 준비하셨고.

 .참조 6절 주석.

4:9 내가…합당하니이다.

 선지자는 성급하고 완고하게 자기가 성내고 죽고자 결심한 것이 옳다고 항변했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마음속에 사리에 맞는 태도를 일깨우려고 애쓰고 계셨다.

4:10 네가 아꼈거든.

 히브리어에서 “네가”는 강조형이다. 화가 난, 동정심이 없는 선지자 요나는 자기가 아무런 노동이나 수고를 들이지 않은 별 가치 없고 하찮은 박 넝쿨에는 기꺼이 동정심을 나타내고 아까워했으나, 큰 도성 니느웨 사람들에게는 그와 같은 배려를 나타내고자 하지 않았다. 「70인역」은 이 절의 처음 부분을 다음과 같이 번역한다. “그리고 여호와께서는, 네가 그것을 위해 고생하지도 않고 네가 그것을 기르지도 않은 박 넝쿨에 동정심을 가졌다고 말씀하셨다.”

  요나는 하나님께서 니느웨 백성을 멸망시키지 않으시는 것에 대해 화를 냈고(1, 4절), 하나님께서 박 넝쿨을 시들도록 허락하셨을 때도 화를 냈다(9절). 얼마나 왜곡된 가치관인가! 요나는 니느웨 사람들보다도 박 넝쿨을 더 소중하게 생각했다.

4:11 분변치 못하는.

 어떤 이들은 이 표현을 아직 나이가 어려서 어느 쪽 손이 더 강하고 유용한지 분별하지 못하는 어린이들에게 적용시켰다. 만약 그런 어린이들이 전체 인구의 5분의 1을 구성한다고 가정할 경우 니느웨는 약 600,000명의 인구를 가진 도성이었을 것이다. 그런 수치는 그 고대 도성의 알려진 크기와 조화될 수 없는 너무나도 큰 숫자이다. “분변치 못하는”이라는 표현은 선과 악에 대해 불완전한 지식을 소유한 자들을 지칭하는 은유적인 내용이라고 간주하는 것이 더 좋은 것으로 보인다. 만약에 이 표현을 문자적으로 보아야 한다면 니느웨와 함께 그 주변 성읍들도 포함되었을 것이다(참조 제1장에 대한 추가적 설명).

4:11 십이만여 명이요.

 . 니느웨의 인구에 대하여는 제1장에 대한 추가적 설명을 참조하라.

4:11 아끼는 것이.

 . 히브리어 후스(h.us), “유감스럽게 여기다”, “~에 동정심을 나타내다.” 후스는 10절에서 “아꼈거든”으로 번역되었다.

요나서를 간단하게 말한다면 하나님의 은혜의 이야기라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요나에게 은혜를 베푸시고, 은혜를 가르쳐 주시는 이야기입니다.
4장은 요나에게 은혜를 가르쳐주기 위한 하나님의 노력이 특별히 더 돋보이는 장입니다.
요나는 참 어려운 과정을 통해서 하나님의 은혜를 배운 것 같습니다.
요나가 어떤 방식으로 은혜를 배우는지 “요나, 은혜를 배우다”라는 제목으로 오늘 말씀을 살펴보겠습니다.

3장에서 요나의 선포로 인해 니느웨 사람들이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이키는 놀라운 일이 벌어졌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들이 진실한 마음으로 회개하는 것을 보시고 재앙을 내리지 않으셨습니다.
마음을 바꾸셨습니다.
그들에게 은혜를 베푸셨습니다.
이것을 본 요나가 어떻게 반응했을까요?
요나는 선지자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함으로 사람들에게 회개를 촉구하는 것이 그의 사명이고, 그는 평생에 가장 놀라운 열매를 거두었습니다.
요나는 지금 그 현장에 있습니다.
정말 어메이징한 하나님의 역사를 경험하고 있는 겁니다.

만약, 여러분이 여기 오산에 나가셔서 복음을 전하는데 듣는 사람마다 꼬꾸라지면서 하나님 앞에 엎드리고 회개한다면, 그래서 오산시 전체가 다 하나님 말씀으로 뒤집어 진다면 여러분은 어떻겠습니까?

지금 요나는 그러한 일을 눈으로 보고 있는 겁니다.
요나가 어떻게 합니까?
요나가 감격합니다.
기뻐 날뛰면서 춤을 춥니다.
놀라운 은혜를 허락하신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영광을 하나님께 돌립니다.
이것이 요나서 4장의 시작입니다.

4장 1절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요나가 매우 싫어하고 성내며” 선지자가 하나님의 말씀에 반응하는 사람들을 보고 싫어하는 겁니다.
사람들이 죄에서 돌이키는 것을 보고, 사람들이 하나님을 찾는 것을 보고, 화가 나는 겁니다.
마음에 들지 않습니다. 못마땅한 겁니다. 요나는 니느웨의 회개와 하나님의 용서라는 그 감격적인 드라마를 보면서 화를 냅니다. 견딜 수가 없는 겁니다. “하나님이 어떻게 니느웨에 은혜를 베풀 수가 있어? 하나님께서 어떻게 저런 이스라엘의 원수들을 용서해주신단 말인가?” 요나는 그들이 심판받기를 바랐는데, 그렇게 되지 않아서 화가 난 겁니다. “그들을 용서하시다니!” 이게 요나를 분노하게 한 겁니다. 자기가 은혜를 받았을 때는 감사의 노래를 부르며 제사를 드린다며 난리를 쳤는데, 다른 사람이 그 은혜를 받으니까 그건 아닌 것 같다며 정의롭지 않다며 하나님 앞에서 화를 내는 겁니다.

그런데 요나만 그럴까요? 아닙니다. 우리도 그럽니다. 내가 잘못했을 때는 그냥 좀 넘어갔으면 합니다. 내가 잘못했을 때는 하나님이 그냥 은혜를 베풀어주시고 그래야 합니다. 하지만 다른 사람이 그랬을 때는 이야기가 달라집니다. 특히 내가 싫어하는 사람, 내게 상처 준 사람은 더 그렇습니다. 어떻게든 처벌당하기를 바라고 어떻게든 그 잘못이 드러나기를 원합니다.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은혜를 베풀면 화가 나는 겁니다. 요나처럼 말입니다. 여기서 문제는 누구입니까? 하나님인가요? 요나인가요? 문제는 “요나”에요. 문제는요 “나”에요. 내가 문제입니다. 요나는 어쩜 이렇게 우리와 닮았을까요? 화가 난 요나는 하나님께 자신의 분노를 쏟아 붓습니다. 2절에서 3절을 보십시오. “여호와께 기도하여 이르되 여호와여 내가 고국에 있을 때에 이러하겠다고 말씀하지 아니하였나이까 그러므로 내가 빨리 다시스로 도망하였사오니 주께서는 은혜로우시며 자비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하시며 인애가 크시사 뜻을 돌이켜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이신 줄을 내가 알았음이니이다 여호와여 원하건대 이제 내 생명을 거두어 가소서 사는 것보다 죽는 것이 내게 나음이니이다 하니“

요나는 이 기도를 통해서 여러 가지를 합니다. 먼저 자기가 했던 잘못을 정당화합니다. 하나님이 이럴 줄 알았다는 겁니다. 하나님이 니느웨를 용서하는 이 같은 대형 사고가 일어날 줄을 예상하고, 자신은 이것을 막기 위해 도망갔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은혜로운 분이시니까 그럴 수밖에 없다는 겁니다. 요나는 마치 하나님의 은혜와 자비가 잘못이라도 되듯이 하나님을 몰아붙이고 있는 겁니다. 그리고 요나는 죽는 것이 더 낫다고 말합니다. 살 의미가 없다는 겁니다. 이거는 좋게 말해 기도지, 보면 기도가 아니라 협박입니다. 요나가 얼굴이 빨개져서 씩씩거리며 하나님께 악을 쓰는 겁니다. 하나님께 얼굴을 들이밀면서 덤비는 겁니다. “하나님 그냥 나를 죽이세요!”

이거는 진짜 하늘 높은 줄을 모르고 까부는 겁니다. 이런 요나를 보시고 하나님이 어떻게 하셨습니까? “그래? 그렇게 네가 죽기를 원한다면 뜻대로 해주마!” 라고 말씀하시면서 커다란 폭풍을 보내셔서 요나를 다시 바다로 던져버리셨습니다. 제가 하나님이었다면 그랬을 겁니다. 그런데 진짜 하나님은 어떻게 하셨습니까? 4절입니다.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네가 성내는 것이 옳으냐 하시니라”

하나님은 정말 훌륭하신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철없는 아이를 설득하는 부모처럼, 슬픔과 실망과 분노의 복잡한 마음을 가지고 반항하는 십대 아이를 설득하는 것처럼, 그렇게 다정하게 요나에게 다가가십니다. 그러면서 질문하십니다. “요나야 한번 생각해보아라. 네가 화를 낼 권리가 있는 거냐? 이 일로 네가 화를 내는 것이 합당하냐?” 그런데 이 질문에 요나가 어떻게 합니까? 요나는 대답도 안하고 성 밖으로 빠져나갑니다. 완전히 막가자는 겁니다. 이건 마치 부모가 아이에게 훈계를 하는데 화가 난다고 확 나가면서 방문을 쾅 닫는 것과 같은 겁니다. 5절을 보십시오. “요나가 성읍에서 나가서 그 성읍 동쪽에 앉아 거기서 자기를 위하여 초막을 짓고 그 성읍에 무슨 일이 일어나는가를 보려고 그 그늘 아래에 앉았더라“

요나는 니느웨 성 바깥으로 나가서 자기를 위해 초막을 짓습니다. 그리고는 하나님이 말씀하신 40일 후에 어떻게 되는지 지켜보기 위해 앉아있습니다. “하나님! 저 니느웨 백성들을 벌하시든지, 나를 죽이시든지 알아서 하세요.” 요나는 하나님 앞에서 일인 시위를 하고 있는 겁니다. 하나님은 그런 요나에게 교훈을 주시기 위해 준비하십니다. 하나님은 먼저 빨리 자라는 박넝쿨을 예비하셨습니다. 그래서 요나의 머리 위에 그늘을 만들어 주셨습니다. 요나는 편안함을 느낍니다. 표정이 풀어지면서 입가에 미소가 돕니다. 기분이 좋아집니다. 갑자기 행복해졌습니다. 6절에 보면. “요나가 박넝쿨로 말미암아 크게 기뻐하였더니”라고 말씀합니다. 요나서에서 요나가 기뻐했다는 표현이 여기에 처음 나옵니다. 요나는 하나님으로부터 사명을 받았을 때도 기뻐하지 않았습니다. 니느웨 사람들이 회개하는 놀라운 역사를 봤을 때도 기뻐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요나는 지금 나무 그늘 하나에 엄청 기뻐하고 있는 겁니다.

문제는 요나입니다.
문제는요 “나”입니다.
우리도 그러지 않습니까? 교회에서 어떤 일을 맡았을 때도, 성도를 섬기는 일을 할 때도, 누군가 구원받았다는 말을 들을 때도, 별로 기뻐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마트에서 1+1 상품을 제대로 하나 건지면 엄청 기뻐하는 겁니다. 제가 최근에 크게 기뻐했던 적이 있습니다. 제가 라면을 먹으려고 하는데, 다시마가 들어있는 라면 아시죠? 포장을 뜯었는데 다시마가 3개가 들어있는 겁니다. 그런 일은 잘 없잖아요. 2개도 아니고 3개라니! 저는 사진을 찍으며 아내에게 자랑을 합니다. 이거보라고 3개나 들어있다고 그러면서 엄청 기뻐했습니다. 말씀을 전하는 책임이 주어져도 기뻐하지 않는 제가 손가락만한 다시마 때문에 기뻐하는 겁니다. 여러분 제가 그런 사람입니다. 저도 요나와 같은 겁니다.

하나님께 그렇게 화를 내던 요나가 박넝쿨이 주는 그늘로 인해 기뻐합니다. 그게 다였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런데 하나님께서 다음 날 새벽에 벌레를 예비하십니다. 그래서 요나의 초막을 덮은 박넝쿨에 보내시고, 그것을 갉아먹게 하십니다. 박넝쿨은 시들어 죽어버립니다. 그늘은 사라졌고 요나의 미소도 사라집니다. 이제 불타는 햇빛이 요나의 머리에 바로 꽂히는 겁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은 뜨거운 동풍을 예비하셨습니다. 요나서를 보면 하나님이 요나를 위해 온갖 거를 다 준비하십니다. 큰 바람을 보내서 바다에 빠뜨렸다가 큰 물고기를 준비하셔서 건지시고, 박넝쿨을 준비하셨다가 이제는 벌레와 뜨거운 동풍까지 준비하셨던 겁니다. 철없는 요나를 돌이키고 가르치기 위한 하나님의 은혜가 계속되는 겁니다.

뜨거운 동풍을 맞으며 뙤약볕 아래에 있는 요나는 정신이 혼미해졌습니다. 요즘말로 멘붕 상태에 빠진 겁니다. 그래서 요나는 또 화를 냅니다. 8절에 요나가 하는 말을 들어보십시오. “스스로 죽기를 구하여 이르되 사는 것보다 죽는 것이 내게 나으니이다” 변덕이 죽 끓듯 하는 요나의 모습을 보십시오. 물고기 뱃속에서는 하나님을 노래하며 감사하다가, 니느웨가 회개하니까 화를 내며 덤비다가, 박넝쿨 때문에 좋다고 기뻐하다가, 이제 그게 없어졌다고 또 화를 내면서 죽겠다고 소리 치고 있는 겁니다.

죽는다는 게 무슨 비장의 무기에요. 뭐가 그렇게 대단한 목숨이라고 하나님 앞에서 걸핏하면 죽겠다고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어떻게 하셨습니까? 하나님은 요나가 원하는 대로 동풍의 온도를 300도로 올려가지고 요나를 바비큐가 되게 하셨습니다. 제 아내가 하나님이었다면 그렇게 요리했을 겁니다. 그런데 진짜 하나님은 어떻게 하셨습니까? 9절을 보십시오. “하나님이 요나에게 이르시되 네가 이 박넝쿨로 말미암아 성내는 것이 어찌 옳으냐 하시니” 여러분, 이 분이 우리 하나님이십니다. 인내심이 한이 없으신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4절에서 하셨던 질문과 같은 질문을 다시 하십니다. “요나야, 이 일이 지금 네가 화를 낼 일이냐? 나의 말을 전하는 선지자인 네가 큰 성읍 니느웨의 회개를 직접 보면서도 지극히 이기적인 이유로 화를 내며 죽기를 구하는 것이 어떠냐? 그런 일이 너에게 가당한 것이냐? 네가 생각해도 좀 이상하지 않느냐?”

그런데 요나의 대답은 정말 가관입니다. 9절을 다시 보면 “그가 대답하되 내가 성내어 죽기까지 할지라도 옳으니이다” 요나가 대답합니다. “옳다 뿐이겠습니까? 저는 화가 나서 죽겠습니다.” 정말 독이 제대로 올랐습니다. 못 말리는 수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요나에게 마침내 정말 하고 싶었던 말씀을 하십니다. 10절과 11절입니다.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네가 수고도 아니하였고 재배도 아니하였고 하룻밤에 났다가 하룻밤에 말라 버린 이 박넝쿨을 아꼈거든 하물며 이 큰 성읍 니느웨에는 좌우를 분변하지 못하는 자가 십이만여 명이요 가축도 많이 있나니 내가 어찌 아끼지 아니하겠느냐 하시니라“ 이렇게 끝이 납니다. 이게 요나서의 끝입니다. 혹시 찝찝하게 끝나는 영화나 드라마를 보신 적이 있으십니까? 분명하게 해주면 좋겠는데 뭔가 쓰다가 그만둔 거처럼 요나서는 이렇게 하나님의 질문으로 끝이 납니다. 그런데 이 질문은 굉장히 중요한 메시지를 담고 있습니다.

요나는 지금까지 하나님이 말도 안 되는 일을 하셨다고 화를 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이 질문은 요나야 말로 정말 말도 안 되는 일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도록 합니다. 요나는 집착할 가치도 없고 권리도 없는 것에 마음을 쏟고 있습니다. 하루살이와 같은, 그것도 자신이 아무런 수고도 하지 않은 박넝쿨을 아끼며 그것 때문에 화를 내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그것과는 비교할 수 없는 사람들을 아끼는 것은 어떻습니까? 너무도 당연한 것 아닙니까? 하나님은 요나에게 그것을 묻고 계십니다. 하나님의 종으로서 요나는 하나님의 이 마음을 알아야 했습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뿐만 아니라 니느웨까지, 자기가 원수로 생각하는 그 사람들까지도, 하나님이 아끼시고 구원하기를 원하신다는 것을 깨달아야 했습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하나님은 요나에게 박넝쿨을 통해서 니느웨 백성들을 아끼시는 자신의 마음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마지막 질문에 대한 요나의 반응은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다. 그렇게 화를 냈던 요나가 어떻게 했을까요? 궁금하지만 알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생각해야 할 것은 요나가 어떻게 반응했을까? 라는 질문보다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에 대해서 어떻게 반응해야 하는가? 라는 질문입니다. 왜냐하면 요나서의 요나가요 “나”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우리의 합당한 반응은 무엇입니까? 내가 받은 은혜를 기억함으로 나도 은혜를 전하는 자가 되는 것입니다. 은혜를 받은 자로서, 다른 사람에 대해서 은혜로운 자가 되는 것입니다. 은혜를 받은 자로서,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은혜를 삶으로 실천하는 겁니다.

요나는 하나님이 은혜로운 분이신지 알았습니다. 그가 2절에서 고백했던 것처럼 “주께서는 은혜로우시며 자비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하시며 인애가 크시사 뜻을 돌이켜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이신 줄을 내가 알았음이니이다” 그는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알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 알고 있는 것이 자신의 삶과는 잘 안 맞았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은혜를 이스라엘 사람에게만 주어지는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이방인이고, 이스라엘의 원수인 니느웨 사람들에게 은혜를 베푸시는 데에 대해서 분노했습니다.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안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니느웨 사람들은 은혜를 받을 만한 자격이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요나는 하나님의 은혜가 그렇게 넓고, 그렇게 파격적인지 몰랐습니다. 그래서 죄인들이 회개하는 영적 축제의 현장에서 오히려 화를 냈던 겁니다. 전혀 기뻐하지 않았습니다.

우리도 그러지 않습니까? 우리는 내가 받은 하나님의 은혜가 얼마나 크고 넓은지 쉽게 잊어버립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은혜를 제한시킵니다. 이런 사람들은 은혜를 받아도 되는데 저런 사람들은 은혜를 받아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내가 생각하는 범위가 있습니다. 그래서 그 범위를 벗어난 사람들은 안 돼, 그런 사람에게 하나님이 은혜를 베푸시면 화가 납니다. 내가 생각하는 범위에서 벗어난 사람이 은혜를 받으면, 우리는 요나처럼, 그리고 탕자의 비유에 나오는 형처럼 화를 냅니다. 기뻐하지 못합니다. 나는 괜찮지만, 나는 받아도 되지만, 저런 사람들은 안 된다는 겁니다. 그것은 공평하지 않다는 겁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은혜는 너무도 파격적입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분노하기도 하고 어떤 사람들은 거기에 걸려 넘어지기도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가 얼마나 넓은지를 배워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의 마음을 넓혀야 합니다. 관대한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좀 받아줄 수 있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그렇게 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요나에게 이것을 가르쳐 주기 위해서, 바람을 일으키시고, 배, 물고기, 박넝쿨, 벌레 온갖 것을 다 동원하셨습니다. 요나를 바다에 빠뜨렸다가 건져내셨다가 다시 니느웨에 보내셨다가 훈계하셨다가 온갖 일을 다 하신 겁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얼마나 넓은 것인지, 그것이 얼마나 어메이징한 것인지 가르쳐주기 위해서 그렇게 하셨습니다. 이스라엘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에게, 니느웨 같은 죄인들에게도, 하나님은 은혜를 베푸신다는 사실을 가르치기 위해 그렇게 하신 겁니다. 하나님이 요나를 위해 그렇게 모든 것을 예비하시고 역사하셨습니다.

요나의 이야기는 지금도 계속됩니다.
저와 여러분의 삶에도 그렇게 하나님이 함께 하시고 역사하고 계신 겁니다.
하나님이 모든 것을 예비하시고 인도하고 계십니다.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러니 은혜를 받은 자로서 우리는 은혜로운 자가 되어야 합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여러분에게 니느웨는 누구입니까?
여러분 마음에 니느웨와 같은 사람이 있으십니까?
그 사람이 누구이든지, 아무리 내게 상처를 주었다 하더라도, 내 도덕적인 기준에 맞지 않는다 하더라도, 내 생활 방식과 맞지 않는다 하더라도, 우리는 그 사람을 사랑하고, 은혜를 베풀고, 용서하고, 두 번째 기회를 주고, 그 사람이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도록 기도해야 하는 겁니다.
그것이 은혜 받은 자의 마땅한 도리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먼저 우리에게 그러한 사랑을 베푸셨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하나님이 요나에게 가르쳐주길 원하셨던 그 놀라운 은혜를 우리도 배우기를 원합니다. 그 파격적인, 크고도 깊은 은혜를 경험하고 깨닫기를 원합니다. 그래서 우리도 은혜로운 자가 되어 은혜를 베풀며 은혜로 살아가기를 원합니다.

세상이 얼마나 살벌합니까? 언제, 어디에서 맹수가 뛰어 나올지 모르는 밀림 속 같습니다. 서로 잡아먹으려고 경쟁하고 밟고 올라가려고 애를 씁니다. 조금이라도 흠 잡을 것이 있으면 찍어 내리고 비난합니다. 나에게 좀 잘못한 것이 있으면 용납하지 못합니다. 그냥 막 인상을 쓰고 언성을 높이며 싸우고 그렇게 합니다. 이런 세상에서 교회는 좀 달라야하지 않겠습니까? 교회에서는 하나님의 은혜를 느낄 수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 가운데는 뭔가 관대함이 있고 너그러움이 있고, 하나님의 은혜의 따뜻함을 느낄 수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행한 대로 갚는 것이 아니라, 판단하고 정죄하는 것이 아니라, 품어 주고 안아 주고 함께 고통을 나누며 기도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나 혼자만이 아니라 다른 사람도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도록 도와야 하지 않겠습니까? 우리 예수님처럼 말입니다. 그것이 우리의 삶의 태도가 되어야 합니다. 그것이 세상을 변화시키는 교회의 힘이고 우리의 경쟁력이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세상과 교회가 다른 것입니다. 세상에서 절대 경험할 수 없는 은혜가 우리 가운데 있는 겁니다.

그러니 여러분 우리 삶에 함께하셔서 앞서 준비하시고 행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고 배우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그 은혜로 살아가는 우리가 되기를 바랍니다. 그럴 때 우리의 삶에, 우리의 교회에, 우리가 아는 수 많은 사람들에게 변화가 일어날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누군가의 삶을 도전하고, 하나님의 은혜를 전하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요나 4:1-2
  1. 요나가 심히 싫어하고 노하여
  2. 여호와께 기도하여 가로되 여호와여 내가 고국에 있을 때에 이러하겠다고 말씀하지 아니하였나이까 그러므로 내가 빨리 다시스로 도망하였사오니 주께서는 은혜로우시며 자비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하시며 인애가 크시사 뜻을 돌이켜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이신 줄을 내가 알았음이니이다.


주께서는 은혜로우시며(2587)
* 하눈(channûwn) חַנּוּן 

1. 은혜로운,  2. 자비로운,  3. 온화한
발음 / 하눈[ channûwn ]
어원 / 2603에서 유래
관련 성경 / 자비한(출 22:27), 은혜로운(출 34:6, 대하 30:9, 시 103:8).
구약 성경 / 13회 사용

용서할 자를 용서하고
긍휼을 베풀 자에게 긍휼을 베푸는 것

자비로우시며(7349)  

* 라훔(
rachûwm) רַחוּם 

1. 인정 많은.  2. 동정심이 많은. 3. 신명기 4:31
발음 / 라훔[ rachûwm ]
어원 / 7355에서 유래
관련 성경 / 자비로운(출 34:6, 시 103:8, 욘 4:2), 자비한(신4:31, 시78:38, 145:8), 긍휼히 여기는(느9:17). [부] 긍휼히(느9:31). [명] 자비(대하30:9), 진실(시86:15).
구약 성경 / 13회 사용

- 7356. 자궁(라함.  racham)  רַחַם
1. 자궁.  2. 처녀
발음 / 라함[ racham ]
어원 / 7355에서 유래
관련 성경 / 은혜(창43:14), 사랑하는 마음(창43:30),위하는 마음(왕상3:26), 긍휼(신13:17, 느9:27,28, 시51:1), 불쌍히 여김(왕상8:50, 슥1:16), 자비(대하30:9), 긍휼하심(시25:6), 은혜(느1:11), 태(창49:25, 잠30:16, 사46:3), 처녀(삿5:30).
구약 성경
6회 사용


639. 노하기를(아프.
’aph) אַף  

1. 호흡하는 곳.  2. 코. 3. 민수기 11:20.
발음 / 아프[ ’aph ]
어원 / 599에서 유래
관련 성경 / 코(창 2:7, 삼하 22:9, 시 115:6), 얼굴(창3: 19, 삼상25:41), 분노(창27:45, 신29:20, 렘12:13), 노(창30:2, 삼상11:6, 겔22:20), 분기(창49:7), 콧김(출15:8), 진노(민11:10, 스8:22, 사3:8), 머리(민22:31), 노염(시30:5), 분(욥37:11). [동] 노여워하다(합3:8), 노하다(창39:19, 출 11:8, 욥27:3), 분노하다(신9:19, 단9:16, 호 13:11), 울분을 터뜨리다(욥18:4).
구약 성경 / 134회 사용

더디하시며(750)

750. 긴, 느린(아레크. ’ârêk)  אָרֵךְ 

1. 긴,  2. 느린
발음 / 아레크[ ’ârêk ]
어원 / 748에서 유래
관련 성경 / 참는(전 7:8), 더딘(출 34:6, 민14:18, 잠14:29), 긴(겔17:3). [부] 더디(느9:17), 오래(렘15:15).
구약 성경 / 7회 사용


인애가 크시사(2617)(7227)

2617. 인자함(헤세드. chêçêd)  חֵסֵד

1. 욕구,  2. 열심, 3. 인자함
발음 / 헤세드[ chêçêd ]
어원 / 2616에서 유래
관련 성경 / 인자(창19:19, 민14:18, 시18:50), 은혜(창20:13, 삼하3:8, 렘32:18), 인애(창47:29, 신7:9, 렘2:2), 은총(창32:10, 삼하9:1, 호2:19), 성실(왕상3:6), 긍휼(느1:5, 시85:10), 아름다움(사40:6). [동] 영화롭게 하다(잠14:34), 선대하다(수2:12, 삿1:24, 룻1:8), 은혜를 베풀다(룻2:20), 인자하다(대상16:34, 대하7:3,시59:10), 자비하다(대상16:41, 대하5:13), 선하다(대하32:32, 느13:14), 긍휼히 여기다(스9:9, 시59:17), 불쌍히 여기다(욥6:14).
구약 성경 / 246회 사용

7227. 풍성한(라브. rab) רַב 

1. 풍성한,  2. 복수형 : 출 19:21, 3. 큰
발음 / 라브[ rab ]
어원 / 여성형 יַבָּה, 복수 רַבִּים, 7231에서 유래한 압축형
관련 성경 / 가득한(창6:5), 큰(창7:11, 수11:8, 삼하24:14), 많은(창13:6, 신28:38, 대하14:14), 무거운(창18:20, 전6:1), 족한(창24:25, 신3:26, 삼하24:16), 높이는(민16:3), 풍부한(창30:43), 수많은(출12:38, 겔33:24), 번성하는(출23:29, 신26:5, 대상4:27), 오랜(민9:19, 신1:6), 강대한(신9:14), 허다한(신31:17), 풍족한(삼상2:5),먼(삼상26:13), 많아지는(삼하15:12, 욥5:25),용맹스런(삼하23:20, 대상11:22), 넉넉한(왕상19:4, 잠28:27), 광대한(에1:20, 시147:5), 풍성한(시4:6), 넓은(사51:10), 범람하는(시32:6), 후한(시86:5), 심한(전8:6). [명] 여러날(창21:34, 신2:1, 에11:4), 다수(출23:2), 무리(왕상12:28, 느7:2, 시31:14), (시위)대장(왕하25:10), 장수(대하1:11), 여러(번)(시106:43), 장관(렘41:1), (시위대) 사령관(렘52:14,30), 선장(욘1:6). [부] 오래(창37:34), 많이(출19:21, 민35:8), 후히(대하21:3), 흡족히(시78:15), 온갖(잠26:10), 만족히(사53:11), 가득히(욜3:13).
구약 성경 / 413회 사용















































오바댜(Obadiah) - 여호와의 종 / 07-22-2023(토)


오바댜(Obadiah) - 여호와의 종, 여호와를 경배하는 자

저자 : 1절은 선지자 오바댜가 오바댜서의 저자라고 알려줍니다.

본서의 기록자는 남 유다 출신 선지자 오바댜이다.
오바댜는 '여호와의 종', '여호와를 경배하는 자'라는 뜻이다.
에돔의 멸망을 선포했으며 고향이나 가족에 대해 알려진 바가 없다.
성경에는 오바댜 선지자를 비롯해 아합의 궁내 대신 오바댜 등 총 13명의 오바댜가 등장한다.

저작 연대 : 오바댜서는 주전 848-840년 사이에 쓰여진 것으로 추정됩니다.

오바댜서의 기록 시기는 명확하지 않다.
기원전 586년경 바벨론이 유다를 멸망시킨 이후에 기록된 것으로 추정하는 견해가 있다.
본서의 포로 귀환 내용이 바벨론 포로 귀환을 연상케 하며, 또한 열왕기서나 역대기의 기록에서 에돔의 배반을 언급하긴 했으나 에돔이 유다를 침공했다는 내용은 없어 열왕 시대 이후의 기록이라 볼 수 있다.

기록 목적 : 구약에서 가장 짧은 책인 오바댜서는 단지 21절 밖에 없습니다.

오바댜는 하나님과 이스라엘을 대항하여 범죄한 에돔을 정죄하기 위해 하나님이 사용하신 선지자입니다.
에돔 사람들은 에서의 후손이며 이스라엘 사람들은 에서의 쌍둥이 형제 야곱의 후손입니다.
야곱과 에서 사이의 형제 싸움은 천년 동안 그들의 후손들에게 영향을 미쳤습니다.
이 분열 때문에 에돔 사람들은 이스라엘 민족이 출애굽 중에 그들의 땅을 건너는 것을 금하였습니다.
이제 주의 심판의 말씀은 에돔의 교만에 대해 선포될 것입니다.

핵심 구절 : 오바댜 1:4
“네가 독수리처럼 높이 오르며 별 사이에 깃들일지라도 내가 거기에서 너를 끌어내리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오바댜 1:12,
“네가 형제의 날 곧 그 재앙의 날에 방관할 것이 아니며 유다 자손이 패망하는 날에 기뻐할 것이 아니며 그 고난의 날에 네가 입을 크게 벌릴 것이 아니며”

오바댜 1:15,
“여호와께서 만국을 벌할 날이 가까웠나니 네가 행한 대로 너도 받을 것인즉 네가 행한 것이 네 머리로 돌아갈 것이라”

요약 : 오바댜의 메시지는 최종적이며 확실합니다.
에돔 왕국은 완전히 파괴될 것입니다. 에돔은 오만하고 이스라엘이 불행을 당할 때 기뻐했습니다. 이스라엘이 적군의 공격을 에돔 사람들에게 도움을 청하면 그들은 그 요청을 거부했을 뿐만 아니라 도리어 이스라엘을 대항하여 싸웠습니다. 이러한 교만한 죄악은 더 이상 간과될 수 없었습니다. 이 책은 마지막 때에 시온의 완성과 구원에 대한 약속으로 끝나며, 그 때에 그 땅은 하나님의 백성에게 회복되어 주께서 그들을 다스릴 것입니다.

예표: 오바댜서 21절은 그리스도와 그분의 교회를 예표합니다.
“구원자들이 시온산에 올라와서 에서의 산을 심판하리니 나라가 여호와께 속하리라”(개역한글).
이 “구원자들”(다른 역본은 “구원받은 자들")은 말씀 사역자들인 그리스도의 사도들과 특히 마지막 때의 복음 설교자들을 말합니다.
그들이 ‘구원자들’로 불리는 것은 그들이 우리의 구원을 얻어내기 때문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복음을 통해 구원을 선포하고 우리에게 그 구원을 얻는 길을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그들과 그들에 의해 선포되는 말씀은 구원의 기쁜 소식이 모든 사람들에게 전해지는 수단입니다.
그리스도만이 구원을 값 주고 사신 유일한 구세주이시며 구원의 창시자이십니다.
반면, 복음의 구원자들과 전달자들은 시대의 끝이 가까워질수록 말세의 증거로서 점점 더 많아질 것입니다.

적용 : 우리가 하나님께 온전히 충성하면 하나님은 우리를 대신하여 승리하실 것입니다.
우리는 에돔과 달리 도움을 필요로 하는 다른 사람들을 기꺼이 도울 수 있어야 합니다.
교만은 죄입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와 그분이 우리를 위해 행하신 일 외에 아무 것도 자랑할 것이 없습니다.


구약 성경의 31번째 책으로 선지자 오바댜가 기록했다.
구약 예언서 가운데 가장 짧다.
바벨론(신바빌로니아)과 연합해서 유다를 공격한 에돔은 멸망하고, 유다는 나라를 회복할 것이라는 예언이다.




에돔

오바댜가 심판을 예고한 에돔 민족은 이삭의 아들 에서의 후손으로, 야곱의 후손인 이스라엘 민족과는 형제지간이다. 사해 남단의 세일산에 정착해 큰 민족을 이루었다.[17]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해방되어 가나안으로 향할 때 에돔은 자신들의 영토를 지나지 못하게 하고,[18] 기회가 있을 때마다 이스라엘을 배신하거나 괴롭혔다.[19][20][16][21][22][23][24] 바벨론이 유다를 공격할 때는 앞장서서 침공하기까지 했다. 결국 자신들도 바벨론의 속국이 되었다. 기원전 2세기 유다에 복속되었다가 끝내 로마 제국에 의해 멸망당했다.

오바댜의 내용 구성

내용
1장 1-16 에돔의 죄와 심판
17-21 이스라엘의 회복과 복된 미래

하나님께서 자신의 능력과 지혜만 믿고 교만하게 행한 에돔에 대해 심판을 예고하셨다. 형제 나라인 유다가 어려움을 당할 때 돕기는커녕 오히려 침략자를 도와 약탈에 앞장선 죄로 인해 그 행위대로 멸망당할 것이라 말씀하셨다. 한편 유다는 이후에 다시 가나안으로 돌아올 것이며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게 될 것이라고 하셨다.

오바서는 구약에서 유일하게 단 한 장으로 구성된 말씀입니다.
성경에서 한 장으로 구성된 말씀은 신약에서는 요한이서, 요한삼서, 유다서, 빌레몬서 4권이며 구약에서는 오바댜서 1권으로 모두 5권입니다.
오바댜라는 이름은 섬기다는 아바드와 여호와라는 야가 결합된 것으로 "여호와의 종"이란 뜻입니다.
오바댜서는 에돔의 심판과 이스라엘의 회복에 관한 말씀으로 묵상의 주제는 '중심의 교만(the pride of your heart)'입니다.
중심의 교만이란 하나님을 경멸하고 자신의 힘을 믿는 에돔의 교만을 의미합니다.

오바댜 1:3
너의 마음의 교만이 너를 속였도다 바위 틈에 거주하며 높은 곳에 사는 자여 네가 마음에 이르기를 누가 능히 나를 에 끌어내리겠느냐The pride of your heart has deceived you, you who live in the clefts of the rocks and make your home on the heights, you who say to yourself, 'Who can bring me down to the ground?'

에돔 족속들이 거주한 곳은 사해 남동쪽 바위가 많은 산악 지대로 난공 불락의 요새였다.
그 주민들은 자연적인 동굴이나 인공적으로 바위를 깨어 만든 집에서 거주하였다.
이런 조건들은 외부로부터 보호해 줄 뿐 아니라 여름에는 시원하고, 겨울에는 따뜻한 안식처가 되어 주었다.
더욱이 수도인 베트라는 약 3Km에 걸쳐 펼쳐지는 좁은 암반 계곡으로 연결되어 있어서 아무리 많은 적이라도 적은 수의 군사력으로 방어할 수 있었다.
에돔 족속은 이런 좋은 조건을 가지고 있었지만, 도리어 이로 인해 교만을 불러일으켰다.

너의 중심의 교만이 너를 속였도다
- '교만'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제돈'(2087)은 '끓는다'(boil)는 의미를 가진 히브리어 '지드'(*)에서 파생된 말로 문자적으로는 끓고 있는 음식이나 물을 가리킨다.

이 단어가 사람의 심성을 나타낼 때는 자만하여 스스로 자신을 과대평가하여 마치 물이 끓어넘치는 듯한 상태에 있음을 나타낸다.
이런 상태에 있는 자들은 그 어떤 것에도 복종하려 하지 않고, 결국 자신을 속이는 결과를 초래하고야 만다.


2087. 자돈(zâdôwn) זָדוֹן 

1. 허풍,  2. 교만,  3. 거만
발음 / 자돈[ zâdôwn ]
어원 / 2102에서 유래
관련 성경 / 교만(잠언 11:2, 잠 13:10, 겔 7:10), 교만한 자(렘 50:31, 32).
                  [부] 무법하게(신 17:12), 마음대로(신 18:22).
구약 성경 / 11회 사용


2102. 주드(zûwd)  זוּד 

1. 끓이다,  2. 거만하게 굴다,  3. 니팔형 분사 נָזִיד : 요리되다
발음 / 주드[ zûwd ]
관련 성경  / 교만하다(렘 50:29), (죽을) 쑤다(창 25:29).
                   [부] 거리낌 없이(신 1:43, 17:13), 교만하게(출 18:11, 느 9:10), 마음대로(신 18:20).
구약 성경 / 10회 사용


오바댜 1:17

오직 시온 산에서 피할 자가 있으리니 그 산이 거룩할 것이요
- '시온 산'은 하나님의 통치가 강력하게 구현되고 시행되는 예루살렘을 의미한다.
또한, 하나님의 절대적인 거룩함을 표상적으로 나타낼 뿐만 아니라, 사람의 죄를 심판할 수 있는 근거나(사 31:9; 욜 3:16), 심판의 장소를 의미하기도 한다(11-14,16절; 사 10:12; 미 3:12).

한편, '피할 자'에 해당하는 히브리어는 '펠레이타'(*)로서 '구출'', '모면'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
이것으로 봐서 '그 산에 피할 자'란 심판을 모면하여 포로 생활에서 돌아와 학개와 스가랴 때에 고국의 종교를 재건한 사람을 가리킨다(학 1:12,14).








하나님은 본서를 통해 에돔 족속에 대한 심판을 예고합니다.
에돔은 이삭의 장자인 에서의 후손으로 이스라엘과는 형제지간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통적으로 이스라엘과는 적대적인 관계를 유지해 오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세일 산을 거점으로 하여 강력한 세력을 형성하여 왔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원래부터 하나님을 알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섬기지 않고 우상을 숭배했으며 자신들의 강력한 군사적, 경제적인 힘만을 의지하였던 것입니다.

1:1-9. 하나님은 선지자를 통해서 심판을 선언
1:10-16. 이스라엘과는 형제임에도 불구하고 다른 국가들보다 이스라엘을 더욱 핍박하고 심지어 이스라엘이 다른 나라에 의해 침략 당할 때는 그것을 기뻐하고 같이 노략질을 일삼았으므로 하나님은 이로 인해 그들을 심판하시기로 한 것입니다.
1:17-21. 에돔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은 단지 그들을 대상으로 한 것이 아니라 선민인 이스라엘의 구원을 제시하기 위한 것으로 선지자는 에돔의 심판과 함께 이스라엘의 회복을 말합니다.

오바다 선지자는 유다에 행한 에돔의 잔악한 행위로 인하여 하나님께서 에돔에게 징벌을 내리실 것임을 예언하였습니다.
유다를 대적한 에돔의 심판 예언은 곧 유다에 대한 하나님의 구원에 대한 약속이었습니다.
유다가 대적 에돔을 심판하는 도구로 사용되지 않더라도 하나님께서 에돔의 죄악을 징벌하신다는 내용은 하나님의 주권과 공의로우심을 증거하여 주며 핍박받는 의인에게 승리의 소망이 됩니다.

에돔은 근원상 믿음의 조상인 아브라함의 후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이스라엘과 달리 하나님의 심판을 피하지 못하고 결국 멸망당하고 말았다. 본장에서는 바로 에돔이 멸망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에 대해 설명해 주고 있다. 그것은 크게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는데 첫째는 하나님을 거역한 죄이다. 선지자는 에돔의 죄를 지적하면서 먼저 그들의 교만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당시 에돔은 철기 문화를 바탕으로 강력한 군사력과 경제력을 지니고 있었다. 그 결과 그들은 자신들의 힘만을 믿고 하나님을 경멸하였던 것이다. 그들은 인간의 모든 힘의 근원이 하나님께 있음을 깨닫지 못했던 것이다. 둘째는 형제인 이스라엘을 돕기는커녕 오히려 그들의 환난을 기뻐하고 같이 핍박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태도는 이웃 사랑을 강조하고 있는 하나님의 말씀에 어긋나는 것이며 공의에 벗어나는 불의한 행동이다. 따라서 그들은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수 없었던 것이다. 이와 같은 본 장의 내용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가져야 할 두 가지 측면의 삶의 기준을 보여 준다. 즉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를 형성하는 수직적 관계와 공동체 구성원간에 실현해야 할 사랑과 공존의 수평적 관계이다. 이 두 가지 관계는 상호 보완적이며 결코 포기해서는 안 될 절대적인 성도들의 삶의 기준인 것이다.


바쁜 현대 사회 속에서 살다 보면 남들에 대해 관심을 가지기 힘들다. 그래서 현대인들은 서로 무관심한 관계가 되어 버렸고 익명의 시대라는 용어가 사용되고 있다. 그러나 하나님의 자녀들은 결코 이런 이기적이고 개인적인 삶을 살아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하나님과의 관계 못지 않게 사람들끼리의 사랑과 공존을 중요하게 여기시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비록 바쁘고 힘든 생활 속에서도 자신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이 없는지를 살피고 가난한 자들에게는 도움을, 소외된 자들에게는 위로를 주는 자가 되어야 할 것이다. 





에돔에 대한 심판 예언(1-9절)
오바댜는 구약성경 39권 중에서 유일하게 1장으로 구성된 성경입니다. 신약성경에는 1장짜리가 4권, 빌레몬서, 요한이서, 요한삼서, 유다서가 있습니다.
오바댜 선지자가 어떤 인물이었는지는 확인할 수 없습니다. ‘오바댜’라는 인물이 성경에 몇 명 등장합니다. 아합왕 시대에 기근이 극심할 때에, 왕궁을 맡은 사람 중에 오바댜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하나님의 선지자 100명을 굴에 몰래 숨겨 두고, 빵과 물을 제공했습니다. 하지만 그 오바댜는 선지자가 아니었을 뿐만 아니라 시대적으로도 큰 차이가 있습니다. 요시야 왕 때 성전 수리에 동참했던 인물 중에 오바댜가 있었고, 바빌론 포로에서 돌아온 사람들 중에도 오바댜라는 인물이 있었지만, 선지자는 아니었습니다.
‘오바댜’의 뜻이 ‘여호와의 종’입니다. 또한 이 이름은 ‘에베드_예배하다, 경배하다’라는 동사에서 왔기 때문에, ‘여호와를 경배하는 사람’이라는 뜻도 있습니다. 이름에서 알 수 있는 것처럼, 그가 어떤 신분에 있었든지, 또 그가 무슨 일을 하고 있었든지 간에, 하나님의 종으로 신실하게 살았고, 하나님을 경배하는 삶을 살았던 인물이었습니다.

오바댜는 에돔에 대한 심판의 내용을 다루고 있는데, 1-9절은 에돔에게 심판이 내려질 것을 경고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이렇게 시작됩니다.
오바댜의 묵시라 주 여호와께서 에돔에 대하여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묵시(하존)’라는 말은 ‘계시’, ‘말씀’, ‘약속’이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오바댜를 통해서 에돔에게 하시는 말씀이라”라는 의미입니다. 한 국가의 대사가 대통령의 명을 받고서 다른 나라에 가서 그것을 전하면, 그 말을 대사가 자기 입으로 말할지라도, 그 말은 대사의 말이 아니라 대통령의 말입니다. 선지자들이 전하는 말씀도 동일합니다. 선지자의 말은 곧 하나님의 말씀이 됩니다. 선지자가 목이 터져라 외치면, 그것은 하나님의 마음이 터지는 것입니다. 또 선지자가 눈물로 호소하면, 그것은 곧 하나님의 눈물의 호소가 됩니다.

(1-2) 오바댜의 묵시라 주 여호와께서 에돔에 대하여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우리가 여호와께로 말미암아 소식을 들었나니 곧 사자가 나라들 가운데에 보내심을 받고 이르기를 너희는 일어날지어다 우리가 일어나서 그와 싸우자 하는 것이니라 보라 내가 너를 나라들 가운데에 매우 작게 하였으므로 네가 크게 멸시를 받느니라

하나님께서 여러 민족에게 천사를 보내셔서 말씀하시기를 “일어나서 에돔을 쳐부수러 가자”라고 말씀하십니다. 그 결과로 에돔은 아주 작게(보잘 것 없게) 될 것이고, 굉장히 경멸당하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에돔이 그렇게 되는 이유는 여호와 하나님께서 개입하였기 때문이라고 하십니다. 세상의 역사, 한 나라의 흥망성쇠는 당시의 초강대국이 좌지우지하는 것 같고, 역량이 굉장히 뛰어난 최고 통치권자가 좌지우지하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지나온 인류의 역사를 되돌아보면, 하나님의 역사와 섭리였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물론 우리 개개인의 역사도 마찬가지입니다. 당시에는 다른 사람들이 내 인생을 좌지우지하는 것 같고, 내 계획과 내 의지가 내 인생을 만들어가는 것 같이 여겨졌습니다. 하지만, 지금 돌아보면, 하나님의 역사와 섭리였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에돔이 하나님의 의로운 심판을 받을 수밖에 없었던 것, 그들의 문제를 이렇게 밝힙니다.
(3-4) 너의 마음의 교만이 너를 속였도다 바위틈에 거주하며 높은 곳에 사는 자여 네가 마음에 이르기를 누가 능히 나를 땅에 끌어내리겠느냐 하니 네가 독수리처럼 높이 오르며 별 사이에 깃들일지라도 내가 거기에서 너를 끌어내리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교만이었습니다. 에돔은 해발 1,500m 이상 되는 험준한 바위산에 요새를 건설하고 살았습니다. 서울에서 가장 높은 산이 북한산인데, 가장 높은 곳인 ‘백운대’가 해발 836m입니다. 평소 등산하지 않던 사람이 올라가려고 하면, 쉬운 높이가 결코 아닙니다. 그리고 산은 높을수록 올라가기는 더 힘듭니다. 에돔 사람들은 북한산 위에 또 북한산을 하나 더 올려놓은 정도 지점에서 살았기 때문에 지리적으로는 난공불락의 성과도 같았습니다. 그래서 에돔 사람들을 ‘독수리’에 비유합니다. 독수리는 새 중에서 가장 높은 곳, 바위틈에 둥지를 틀고 삽니다. 게다가 조류 중에서 가장 강합니다. 또한 시력도 좋아서 2,000m 상공에서 들판을 지나는 쥐를 볼 수 있을 정도입니다.
이처럼 독수리 둥지와 같은 곳에 요새를 만든 것과 같은 곳에 살았던 에돔 사람들은 그 누구도 자신들을 함락하지 못할 것이라고 굳게 믿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끌어내릴 것이라고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도둑이 남의 집 담을 넘어가 물건을 훔칠지라도 그 집 안에 있는 모든 것을 다 가져가지 않습니다. 아니 가져갈 수 없습니다. 자신이 가져가려고 했던 것만 가져가든지, 자신이 가져갈 수 있는 정도만 가져갑니다. 또 남의 포도밭에 들어가 서리를 할 때도 밭에 있는 포도를 전부 가져갈 수 없습니다. 가져갈 수 있을 정도만 갖고 갑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에돔에게 그렇게 하지 않겠다고 말씀하십니다. 남긴 것이 없도록 하시겠다고 하십니다. 심지어 깊이 감추어 둔 것까지 다 빼앗기게 될 것이라고 하십니다.

(8-9)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그 날에 내가 에돔에서 지혜 있는 자를 멸하며 에서의 산에서 지각 있는 자를 멸하지 아니하겠느냐 드만아 네 용사들이 놀랄 것이라 이로 말미암아 에서의 산에 있는 사람은 다 죽임을 당하여 멸절되리라

혹 나라가 망하게 되더라도 ‘지혜로운 사람’과 ‘지식이 있는 사람’이 있으면, 좀 더 빠른 시간에 재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에돔의 그런 사람들을 남기지 않으실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드만’은 에돔의 대표적인 도시를 뜻하거나, ‘에브라임’이 북이스라엘을 전제를 대표하듯이, 에돔 전체를 뜻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드만이 에돔을 대표하는 도시이든, 에돔 전체를 뜻하든, 군인들이 모두 멸절을 당한다는 것은 에돔이 회복 불능의 상태가 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에돔의 죄(10-14절)
10-14절은 에돔이 왜 하나님의 심판을 받을 수밖에 없었는지, 그들이 저질렀던 죄에 대해 지적하고 있습니다.

(10) 네가 네 형제 야곱에게 행한 포학으로 말미암아 부끄러움을 당하고 영원히 멸절되리라

하나님께서 에돔을 심판하시는 이유를 ‘네 형제 야곱(이스라엘)에게 행한 포학으로 말미암아’라고 하십니다.
에돔은 야곱의 쌍둥이 형, ‘에서’의 후손입니다. 에서가 들판에 있다가 집으로 돌아왔을 때 몹시 피곤하고 배가 고팠습니다. 야곱이 팥죽을 쑤고 있었는데, 그 색깔이 붉었습니다. 에서가 야곱에게 그 죽을 좀 달라고 했더니, 야곱이 죽과 ‘장자의 명분’을 바꾸자고 했습니다. 에서는 말로만 하는 것으로 생각했을 것입니다. 실제 장자의 명분이 넘어갈 것이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래서 죽과 장자의 명분을 바꾸었습니다. 하지만 성경은 에서가 장자의 명분을 가볍게 여겼기 때문에 팔았다고 증언합니다. 그래서 붉은 팥죽으로 인해서 에서의 별명이 ‘에돔’이 되었고, 그 뜻이 ‘붉다’입니다.
에돔과 이스라엘은 모두 이삭과 리브가의 피를 이어받은 형제 국가였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너는 에돔 사람을 미워하지 말라 그는 너의 형제임이니라(신 23:7)”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스라엘 자손들이 출애굽하여 가나안 땅을 향할 때에 에돔 지역을 통과만 하게 해 달라고 요청했습니다. 밭이 있는 지역이나, 포도원이 있는 지역은 결코 통과하지 않을 것이고, 우물물도 마시지 않을 것이라고 말하며, 큰 길로만 지나갈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하지만 에돔의 대답은 “NO!”였습니다. 그럼에도 지나가겠다고 하면 무력으로 응징하겠다고 했습니다. 이스라엘 자손들은 발길을 돌릴 수밖에 없었고, 그 이후 두 민족은 오랜 기간 적대적이었습니다.

(11) 네가 멀리 섰던 날 곧 이방인이 그의 재물을 빼앗아 가며 외국인이 그의 성문에 들어가서 예루살렘을 얻기 위하여 제비 뽑던 날에 너도 그들 중 한 사람 같았느니라

‘멀리 섰던 날’의 문자적인 뜻은 ‘반대편에 섰던 날’입니다. 즉 에돔은 B.C. 586년, 예루살렘이 멸망하던 날에 바빌로니아의 편에서 서서 함께 약탈을 자행했습니다. 그들은 바빌로니아 군대와 서로 지역을 나누어서 약탈했습니다.

(12) 네가 형제의 날 곧 그 재앙의 날에 방관할 것이 아니며 유다 자손이 패망하는 날에 기뻐할 것이 아니며 그 고난의 날에 네가 입을 크게 벌릴 것이 아니며

표현이 ‘현재, 부정형’으로 되어 있는데, ‘과거, 긍정형’으로 읽어야 합니다. 즉 ‘네가 형제의 날 곧 그 재앙의 날에 방관했으며, 유다 자손이 패망하는 날에 기뻐했으며, 그 고난의 날에 네가 입을 크게 벌렸으며’입니다. 과거 긍정형의 일을 현재 부정형으로 표현하는 것은 과거의 사실을 더욱더 생생하며 묘사하는 것입니다. 특히 ‘입을 크게 벌렸다’는 것은 예루살렘의 멸망을 그만큼 통쾌하게 여겼다는 것입니다. 즉 손가락질하며 “쌤통이다!”, “고소한 참기름이다” 등등을 큰 소리로 말하며 비웃었다는 것입니다.

(13-14) 내 백성이 환난을 당하는 날에 네가 그 성문에 들어가지 않을 것이며 환난을 당하는 날에 네가 그 고난을 방관하지 않을 것이며 환난을 당하는 날에 네가 그 재물에 손을 대지 않을 것이며 네거리에 서서 그 도망하는 자를 막지 않을 것이며 고난의 날에 그 남은 자를 원수에게 넘기지 않을 것이니라

이 말씀도 ‘현재, 부정형’으로 된 것을 ‘과거, 긍정형’으로 읽어야 합니다. 에돔은 예루살렘이 침략을 당할 때 들어가지 말아야 할 성문으로 들어갔고, 고난을 덜어 주지 않고 방관했으며, 손대지 말아야 할 재물에 손을 댔고, 심지어 도망가는 사람을 도와주지는 못할망정 막아 도망가지 못하게 했고, 더 나아가 원수(바빌로니아)에게 넘겨주기까지 했습니다.
에돔의 이런 만행을 하나님께서 결코 모르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유다 백성들이 우상숭배하며 불순종할 때에, 바빌로니아를 통해서 징계하셨지만, 그렇다고 다른 나라 사람들이 자기 백성을 함부로 대하는 것을 방관하지 않으셨습니다.


에돔의 멸망과 이스라엘의 회복(15-21절)
15-21절은 세상에 대한 심판과 이스라엘의 회복에 대해서 증거합니다.

(15) 여호와께서 만국을 벌할 날이 가까웠나니 네가 행한 대로 너도 받을 것인즉 네가 행한 것이 네 머리로 돌아갈 것이라

온 세상의 통치자이신 하나님께서 세상을 심판하실 때에, 에돔도 행한 대로 심판을 받게 될 것이라고 말합니다.
에돔은 B.C. 322년에 알렉산드로스 대왕에 의해 함락당하여, 수천 명의 지도자가 죽임을 당했고, 수만 명의 사람들이 노예로 팔려갔습니다. 그리고 A.D. 66-73년에 있었던 ‘제1차 유다-로마전쟁(First Jewish–Roman War)’ 또는 ‘유대독립전쟁’ 이후에는 역사의 뒤안길로 완전히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17-18) 오직 시온 산에서 피할 자가 있으리니 그 산이 거룩할 것이요 야곱 족속은 자기 기업을 누릴 것이며 야곱 족속은 불이 될 것이며 요셉 족속은 불꽃이 될 것이요 에서 족속은 지푸라기가 될 것이라 그들이 그들 위에 붙어서 그들을 불사를 것인즉 에서 족속에 남은 자가 없으리니 여호와께서 말씀하셨음이라

에돔이 보기에 바빌로니아가 예루살렘을 짓밟을 때는 유다는 끝났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도 침략자의 편에서 함께 짓밟고 약탈했습니다. 그러나 불에 타 재가 된 것은 에서 족속(에돔)이고, 반면에 야곱 족속(남유다)과 요셉 족속(북이스라엘)은 불꽃처럼 되살아나 회복될 것이라고 합니다. 왜냐하면 여호와 하나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은 이렇게 막이 내립니다.
(21) 구원 받은 자들이 시온 산에 올라와서 에서의 산을 심판하리니 나라가 여호와께 속하리라

이것이 ‘오바댜’의 결론입니다. 스스로 난공불락이라 여기며 교만했던 에서의 산(에돔)은 심판을 당하게 될 것이며, 세상의 모든 나라가 하나님께 속해 있음을 천명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에돔을 심판하시는 이유는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이스라엘에 대한 박해였습니다. 에돔의 조상인 에서와 이스라엘의 조상인 야곱은 형제였습니다. 그것도 쌍둥이였습니다. 오늘의 말씀을 우리에게 적용하면, 가까운 사람(가족, 친척, 교우 등)에게 상처를 주거나 해를 끼치면, 그것이 징계의 이유가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이 땅에서 자유인으로 살아갑니다. 그러나 우리의 삶이 다른 사람에게 해를 끼치거나 짓누르는 것인지, 반대로 대가를 지불하며 자기 십자가를 지는 것인지를 잘 살펴야 합니다. 다른 사람에게 해를 끼치고 짓누르는 삶은 당장은 이익처럼 보이지만, 그것은 자기 삶을 무너지게 만드는 첩경입니다. 그러나 대가를 지불하며, 십자가를 지는 삶은 당장은 손해를 보는 것 같지만, 그것이 다른 사람은 물론 자신을 살리는 길입니다. 오늘 하루도 나와 가까운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대가를 지불하며 자기 십자가를 지는 한 날이 되기를 축복합니다.


하나님 아버지!
에서와 야곱은 쌍둥이 형제였습니다.
하지만 에서가 하나님의 향한 삶을 살지 않게 될 때에 그 후손들은 서로 원수가 되고 말았습니다.
에서의 후손인 에돔은 1,500m나 되는 곳, 바위틈에 요새와 같이 세워졌기 때문에 난공불락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또한 그들은 예루살렘이 바빌로니아 제국에 의해 함락당할 때에 침략군의 편에서 하지 말아야 할 말과 행동을 자행했습니다.
바라옵나니 우리가 가족과 친척, 교우 등 우리와 가까운 사람들에게 더 바르게 행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지불해야 할 대가를 감당하게 하시고, 져야 할 자기 십자가를 외면하지 않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리하여 오늘 하루도 주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는 한 날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1. 에돔은 해발고도가 높은 지역에 지어졌기 때문에 스스로 난공불락이라 여겨 교만했습니다.
당신의 삶에서 가장 높게 여기고 있는 것은 무엇입니까?
오히려 그것 때문에 낭패를 당한 일은 없습니까?

2. 에돔은 같은 피를 이어받은 이스라엘에게 행한 포악으로 말미암아 심판을 받았습니다.
당신이 지금 가족이나 가까운 사람을 대하는데 바꾸어야 할 태도는 무엇입니까?

3.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징계를 받았지만, 다시 회복되는 은총을 누렸습니다.
당신이 하나님의 은총으로 회복된 것은 무엇입니까?
이제는 그것을 어떻게 사용하고 있습니까?

4. 가까운 사람들에게부터 대가를 지불하는 삶과 자기 십자가를 지는 삶을 살아가며, 또 주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기 위하여 무엇을 결단하시겠습니까?



오바댜의 묵시(默示)다. 
여호와께서 에돔에 대해 말씀하신다. 
너의 마음의 교만이 너를 속였다. 
바위 틈에 거하며 높은 곳에 산다 하여 누구도 감히 우리를 땅에 끌어내리지 못할 것이라 착각한다. 
하지만 내가 너희를 끌어내릴 것이다. 사람들은 에서가 어찌 수탐(搜探) 되었는가 놀랄 것이다.

네가 네 형제 야곱에게 행한 포악으로 말미암아 멸절(滅絶)되리라. 
너는 이방인들이 예루살렘을 공격할 때 너도 그들 중에 끼어 함께 제비를 뽑았다. 
네가 형제의 날 곧 재앙의 날에 방관해서는 안 되었다. 
너는 오히려 그들의 환난을 기뻐했고 도망하는 자를 막았고 원수에게 넘겼다.

여호와께서 만국을 벌할 날이 가까 왔다. 
네가 행한 대로 너도 받으리라. 
하지만 시온 산에는 피할 자가 있다. 
야곱 족속은 그곳에서 기업을 얻을 것이다. 
야곱 족속이 불이 되어 에서 족속이 지푸라기가 되어 불탈 것이다. 
야곱의 족속은 주변의 땅들을 얻을 것이다. 
구원받은 자들이 시온 산에 올라 에서의 산을 심판할 것이다. 
나라가 여호와께 속했다.

오바댜 1:14 / 그 남은 자(8300)

8300. 생존자,  대학살에서 살아남은 자,  민수기 21:35

사리드(sârîyd) שָׂרִיד

1. 생존자,   2.  대학살에서 살아남은 자,  3. 민수기 21:35(이에 그와 그 아들들과 그 백성을 다 쳐서 한 사람도 남기지 아니하고 그 땅을 점령하였더라.)
발음 / 사리드[ sârîyd ]
어원 / 8277에서 유래
관련 성경 / 남김(민 21:35, 신 2:34), 남기는 것(욥 20:21), 남은[을] 자[사람](민 24:19, 수 10:20, 렘 42:17), 남아 있는 바(렘 47:4), 남은 자(욥 18:19, 렘 44:14, 옵 1:14).
구약 성경 / 28회 사용




성경을 볼 때 읽어야 할지 말아야 할지 고민하게 만드는 단어가 있다.
다름 아닌 ‘셀라’이다.
셀라에 대한 궁금증은 대부분 세 가지로 정리할 수 있다.

첫째 셀라의 의미,
둘째 셀라의 기능,
셋째 셀라를 읽어야 하는가 말아야 하는가이다.

셀라는 주로 시편에 기록되어 있고 하박국에도 기록되어 있다.
시편 3편 2절에 처음 등장하는 셀라는 총 39편의 시편에서 68회 사용됐고, 하박국에서 3회(합 3:3, 9, 12) 기록되어 있다.
히브리어인 셀라는 신약성경에는 등장하지 않으며 구약성경 전체에 걸쳐 총 71회 등장한다.
문자적 의미의 셀라는 올리라는 뜻이다.
기능적으로 음악 기호라고 할 수 있다.

셀라가 음악 악상기호라는 것에는 큰 이견이 없다.
그러나 셀라가 악상에서 어떤 역할을 하는지에 대한 의견은 다양하다.
대표적으로 셀라가 ‘들어 올리다’는 뜻의 동사에서 유래했기 때문에 음을 높이라는 부호로 이해하는 것이다.
어떤 학자들은 음 자체를 높이는 것이 아니라 악기나 사람의 목소리를 크게 하라는 뜻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또 다른 견해는 지휘자가 단조로운 음악의 흐름에 변화를 주려고 붙인 부호라는 것이다.

사실 시편의 기자들이 처음부터 셀라를 넣어 시를 지은 것은 아니다.
하박국 3장과 서른아홉 편의 시편을 후대 혹은 동시대의 사람들이 곡조를 붙여 노래를 부르거나 악기로 연주하기 위해 붙인 것이다.
한글 성경은 괄호 안에 넣어 (셀라)라고 되어 있지만, 히브리어 성경에는 괄호가 없다.
한글 성경이 히브리어 원문에는 없는 괄호를 사용하고 있는 것은 셀라가 시편과 하박국의 기자가 지은 원문에는 없었지만, 필사되는 과정에서 삽입된 것으로 보고 있기 때문이다.

셀라가 처음 등장하는 시편 3편은 다윗이 그의 아들 압살롬을 피해 도망갈 때 지은 시이다.
시편 51편 또한 ‘다윗의 시, 인도자를 따라 부르는 노래, 다윗이 밧세바와 동침한 후 선지자 나단이 그에게 왔을 때’라는 부제가 붙어 있다.
다윗에게 이 사건들은 평생 다시는 기억하고 싶지 않은 사건들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다윗은 이 시편들에 곡조를 붙여 찬양대가 부르게 했다.
자신의 죄로 인해 벌어진 사건을 기억하며 다시는 똑같은 잘못을 짓지 않으려는 다윗의 의지를 엿볼 수 있다.



에돔 사람은 누구입니까?

에돔 사람들은 이삭의 맏아들이자 야곱의 쌍동이 형인 에서의 후손입니다.
리브가의 뱃속에서 에서와 야곱이 서로 싸웠습니다.
주님께서는 엄마인 리브가에게 "너의 태 안에서 두 백성이 나뉠 것이다.
한 백성이 다른 백성보다 강할 것이다.
형이 동생을 섬길 것이다"고 말씀하셨습니다(창세기25:23).
성인이 된 에서는 경솔하게도 팥죽을 먹기 위해 야곱에게 자신의 장자권을 팔아 버립니다(창세기 25:30-34).
그리고는 그 후부터 그의 동생 야곱을 증오합니다.
에서는 에돔 사람의 아버지가 되고 야곱은 이스라엘 민족의 아버지가 됩니다.
그리고 두 나라는 끝없이 싸웁니다.

성경에서 “세일”(여호수아 24:4), “보스라”(이사야63:1)와 “셀라” (열왕기하14:7)는 에돔 땅과 수도를 말합니다.
셀라는 오늘날 페트라로 더 잘 알려져 있습니다.

“에돔”이라는 이름은 “붉은”을 뜻하는 셈 족 언어로부터 나온 것입니다.
또한 사해의 남쪽을 에돔이라 부른 이유는 지형학적으로 붉은 사암이 너무나 두드러졌기 때문입니다.
장자권을 팥죽과 맞바꾼 바람에 에서는 에돔이라고 알려지게 되었고 이후 가족을 데리고 같은 이름의 구릉지대로 이사를 갑니다.
창세기 36장은 에돔 사람들의 초기 역사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에 왕이 아직 없을 때에 왕들이 차례로 에돔 땅을 다스렸습니다(창세기 36:31).
에돔 사람들의 종교는 풍요의 신을 섬긴 다른 이방 족속들과 비슷했습니다. 에서의 후손들은 결국 남쪽 땅을 점령하고 농사와 무역으로 생계를 꾸립니다.
고대 무역로 중 하나인 임금님의 땅(민수기 20:17)은 에돔을 통과했으며 이스라엘 민족이 출애굽 당시 그 통로를 이용하게 해달라고 요청했을 때 강제로 거부당했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은 에돔 족속과 가까운 친척이었으므로 에돔 사람을 미워해서는 안되었습니다(신명기23:7).
그러나 에돔 사람들은 주기적으로 이스라엘을 공격했고 그로 인해 많은 전쟁을 치러야 했습니다.
사울 왕이 에돔과 전쟁을 치를 때 다윗이 그들을 물리치고 에돔에 군사기지를 세웁니다.
에돔 영토를 통치하면서 솔로몬 때 이스라엘은 홍해에 에시온 게벨 항구를 건설하여 많은 원정을 보냈습니다.
솔로몬의 통치 이후 에돔 사람들이 반란을 일으켜 잠시 자유를 누리다가 티글라스-필레세르 3 세가 이끄는 아시리아인들에 의해 진압당했습니다.

마카베오 전쟁 동안 에돔 사람들은 유대인에게 토벌 당하여 유대교로 강제 개종하게 되었습니다.
그 모든 과정 속에서 에돔인은 유대인에 대한 오래된 미움을 계속 갖고 있었습니다.
헬라어가 공용어가 되었을 때 에돔 사람들은 이두메 사람으로 불리었습니다.
로마제국의 탄생과 함께 유대교로 개종한 한 이두메 사람이 유대 왕으로 임명되었습니다.
그 이두메 사람이 바로 아기 예수를 죽이기 위해 베들레헴에 학살을 명령한 폭군 헤롯 대왕입니다(마태복음2:16-18).

헤롯이 사망한 이후 이두메 사람들은 서서히 역사에서 사라졌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에스겔 35장에서 이미 에돔 사람들의 파멸을 예고 했습니다.
“이스라엘 족속의 기업이 황폐하므로 네가 즐거워한 것 같이 내가 너를 황폐하게 하리라 세일 산아 너와 에돔 온 땅이 황폐하리니 내가 여호와인 줄을 무리가 알리라 하셨다 하라”(에스겔 35:15).
이스라엘이 에돔보다 강하다는 것이 증명되었으니, 유대인들을 지배하려는 지속적인 에돔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리브가에게 하신 “형이 동생을 섬길 것”이라는 예언은 성취되었습니다.






성경의 에돔 땅은 사해 남쪽 지역으로 현재 이스라엘과 요르단 두 국가의 남쪽 지역에 해당한다.




북쪽의 모압과는 세렛 시내를 경계로 하고 있었으며, 남쪽의 경계는 홍해에 맞닿아 있는 에시온게벨(현재 에일랏)까지였다. 에돔의 수도는 보스라(사 34:6, 64:1; 렘 48:24)로 이곳에는 에돔의 궁궐이 있었다(암 1:12). 히브리어로 에돔의 의미는 ‘붉다’라는 뜻으로 아마도 와디 알-아르바 동쪽의 세일 산의 색깔이 붉은 데서 유래했다고 본다. 성경에 의하면 에돔 땅의 조상은 야곱의 쌍둥이 형제 에서로 그의 몸은 태어나면서부터 붉었다(창 25:25). 또한 그는 야곱이 내어 준 붉은 것을 먹어 그의 별명이 에돔이 되었다(창 25:30).

“야곱에게 이르되 내가 곤비하니 그 붉은 것을 나로 먹게 하라 한지라 그러므로 에서의 별명은 에돔이더라.” (창 25:30)

'에돔'(Edom)은 ‘붉다’라는 뜻이다. 원문에는 이 말이 두 번 반복되어 '그 붉고 붉은 것(???? ???)'으로 나온다. 에서가 팥죽의 붉은 색깔에 자극받은 식욕 때문에 지극히 흥분한 상태에 있음을 묘사한다. 본래의 붉은 피부에다 이 붉은 팥죽 사건이 결정적 계기가 되어 이후 사람들은 그를 '붉다'는 뜻을 지닌 '에돔'이라 불렀다.

장자권을 팔고 대신하여 받은 '붉은' 팥죽 한 그릇 때문에 얻게 된 에서의 별명으로(창 25:30), 에돔 족속은 바로 이 에서의 후손이다. 유다 지파는 에돔 경계에 닿는 영토를 분배받았지만 에돔 영토를 결코 침범하지는 않았다. 왜냐하면 에돔 지역은 모압, 암몬 등과 더불어 정복 대상에서 제외된 곳이었기 때문이다(신 2:4-23). 따라서 가나안 정복과 분배시기에 이스라엘과 에돔이 서로 접촉하거나 충돌한 기록은 없다. 약 2세기 후에 사울이 에돔인들과 싸운 적이 있고(삼상 21:7), 다윗 시대에 이르러서야 에돔은 이스라엘에 의해 완전히 점령당하게 된다.

한편, 장자는 짐승의 '초태생'과 추상적으로는 '장자의 상속권'을 의미한다. 구약 시대 이스라엘의 처음 출생한 자가 갖는 특권과 책임은 다음과 같다.

첫째는 외적 특권으로 아비의 뒤를 승계하여 가장이 되어 가문의 대소사를 처리할 수 있는 주도권(27:1-45; 대하 21:3)과 다른 형제에게 할당된 유산의 두 몫을 분배받을 수 있는 자격(신 21:15-17)을 가진다.

둘째는 내적 특권으로 장자는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한 가정의 대표자로서 모든 일을 수행함과 동시에, 언약 관계에서 영적 축복의 후계자가 된다. 또한 책임도 병행하는데 그것은 부친의 노후나 사후, 모친과 미혼 자매들을 부양해야 할 의무이다.

야곱이 이런 장자권의 소유를 위한 형 에서와 흥정을 하게 된 배경에는 그가 평소에 장막에 머물 때 장자권의 영적 축복을 부모로 부터 익히 들어 알고 있었던 반면, 에서는 장자권의 가치에 관해 무지하므로 가능했고, 과거 에서가 장자의 명분을 경홀히 여기는 언행을 자주 하는 것을 눈여겨 보아 왔었고, 사전에 이 문제를 놓고 농담조의 대화가 빈번하여 에서의 경계심이 해이해졌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그 행위에 있어서 굶주림에 처한 형의 처지를 이용해 장자권을 흥정한 처사는 정당시될 수 없다. 이 사실은 향후 그의 고달픈 인생의 여정이 잘 반증해 준다.

구약 당시 장자권의 상실은 본 절처럼 본인의 의사로 맹세를 통하여 직접 양도할 때, 서자가 장자일 경우 합법적인 아내가 그 후 아들을 낳아 장자의 명분을 요구할 때(창 21:10), 아비의 직권으로 다른 아들을 선택할 때(창 48:22; 대상 26:10), 중죄에 대한 징벌로 박탈당할 때(창 49:3,4; 대상 5:1)합법적으로 가능했다. 성경 기록과 유사한 풍습이 기록된 아카드어 토판인 누지서판(Nuzi Tablets)에는 형제가 상속받은 숲을 다른 형제에게 세 마리의 양을 받고 팔고 있는 상속권 거래에 관한 실례가 소개되어 있다.

그러므로 에서는 우리가 경계해야할 어리석은 자의 대명사이다. 히브리서 기자는 하나님의 은혜를 상실하고 후회하는 에서를 답습하지 말라고 간곡히 권면한다.

"음행하는 자와 혹 한 그릇 식물을 위하여 장자의 명분을 판 에서와 같이 망령된 자가 있을까 두려워하라. 너희의 아는 바와 같이 저가 그 후에 축복을 기업으로 받으려고 눈물을 흘리며 구하되 버린 바가 되어 회개할 기회를 얻지 못하였느니라." (히 12:15-16).

결국 그가 살았던 지역은 에돔이라 불렸고, 그와 그의 자손들은 세일 산 에돔 들에 거주했다(창 32:3; 36:8∼9). 창세기 36장은 세일 산에서 살았던 에돔 족속의 족보를 상당히 자세히 기록하고 있다(창 36:9∼43). 이는 아마도 에서가 이삭의 아들이요 야곱의 형제였기 때문이었을 것이며, 이러한 인척관계는 에돔 족속이 모압이나 암몬 사람들보다 이스라엘에 조금 더 우호적이도록 만들었을 것이다. 이스라엘이 이집트에서 나와 가데스에서부터 에돔 땅을 건너가고자 할 때 에돔은 이를 용납하지 않았다(민 20:14∼21). 그러나 에돔은 모압과 암몬이 그랬던 것처럼 연맹을 결성하여 이스라엘에 대항하지는 않았다. 성경에는 에돔 사람이 이스라엘의 형제이기에 그들을 미워해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신 23:7).

“너는 에돔 사람을 미워하지 말라. 그는 네 형제임이니라. 애굽 사람을 미워하지 말라. 네가 그의 땅에서 객이 되었음이니라.” (신 23:7)

민수기 20장에서 이스라엘 민족이 이집트에서 나와 광야생활을 하던 시대에 에돔은 이미 왕정을 이루고 있었다(민 20:14). 그러나 역사고고학적으로 볼 때 당시 에돔은 국가 개념의 왕정이 아닌 유목민의 부족장이었을 것이다. 학자들은 이 시대보다 100년 정도 빠른 이집트의 아마르나 문서 256번에 기록된 우루-두-무(URUU-du-mu·두무 도시라는 뜻)가 에돔 도시국가를 말한다고 주장했으나 최근 갈릴리 호수 동쪽에 있었던 우두무라 불리던 유적지라고 추정하고 있다. 오히려 이스라엘의 광야생활 시대와 동시대에 기록된 아나스타시Ⅵ 파피루스(주전 1213∼1203년에 재위한 메르넵타 왕 시대에 기록됨)는 ‘에돔으로부터 온 샤수 유목민’을 언급하고 있다. 샤수는 주전 15세기경부터 이집트의 기록에 자주 등장하는 무리들을 일컫는 말로 ‘발로 걸어 움직이는 자’라는 뜻이다.

"모세가 가데스에서 에돔 왕에게 사신을 보내며 이르되 당신의 형제 이스라엘의 말에 우리가 당한 모든 고난을 당신도 아시거니와" (민 20:14)

대부분 학자들은 샤수를 사막 유목민으로 보고 있다. 샤수는 아라비아 반도를 지나 사해 남쪽 지역을 넘어 시나이 반도까지 자유롭게 드나들었던 이들로, 당시 국가보다는 족속(부족)의 개념으로 이해해야 할 것이며 왕보다는 족장의 개념이 더 어울린다. 때로 이들은 이집트의 북서쪽 지역을 넘어 약탈을 하기도 했다. 이집트의 아멘호테프 3세 같은 경우 그의 적들의 목록에 샤수를 넣기도 했고, 세티 1세와 람세스 2세의 벽 부조에는 샤수와의 전투 현장 모습이 기록되기도 하였다. 안타깝게도 앞서 언급했던 아나스타시Ⅵ 파피루스 외에 샤수를 에돔과 연관시켜 말하고 있는 기록은 없다. 그러나 에돔 땅에서 발견된 대부분의 고고학적 흔적이 주전 9세기 이후인 것으로 보아 당시 에돔을 사막 유목민의 단계에 있었다고 보는 데는 무리가 없다고 생각한다.

세일 산지

세일 산의 원주민은 "호리 족속"이다. '호리'란 '구멍'을 의미한다. 이는 '호리족속'이 혈거인(穴居人)이었음을 암시한다. 아마 세일산 주변의 석회암 동굴을 거처로 삼았던 것 같다. 세일의 원주민이었던 이들은 아브라함 시대에 엘람 왕 ‘그돌라오멜’에 의해 1차 정복당하였고(창 14:5,6), 훗날 에서의 자손에 의해 추방당하거나 남은 자들은 에돔 족속에게 예속되어 동화되고 말았다(신 2:12,22). 한편 에서의 아내가 된 ‘오홀리바마’ 역시 이 호리 족속이었다.

세일 산은 사해와 아카바 만(gulf) 사이의 아라바 동쪽 지역에 위치해 있다.

에서는 일찍 부터 이삭을 떠나 세일에서 생활했었다(창 32:3; 33:16). 야곱과 완전히 분리하여 세일에 거주하고 됨으로써 언약의 주요 내용 가운데 하나인 가나안 땅(창 12:7)에 대한 주권은 별다른 저항을 일으키지 않고 야곱의 후손에게 주어지게 되었다.

에서가 야곱과 갈리게 된 표면적 이유는 소유의 풍부로 인한 목초지의 부족 때문이었지만, 근본적인 동기는 이삭을 통해 이미 계시되었던 하나님의 섭리 때문이었다(창 27:39,40). 즉 이미 하나님은 영원 전 부터 야곱에게는 가나안 땅(창 28:13)을, 에서에게는 세일 산지를 기업으로 주시려고 작정 하셨었다(신 2:5; 수 24:4; 32:3).

한편 가나안의 시온산이 언약의 땅을 상징한다면(시 87:1-5), 세일 산은 에돔을 대표하는 산으로서 이방인의 요새를 의미한다(겔 35:2,15).

"이스라엘 족속의 기업이 황무함을 인하여 네가 즐거워한 것 같이 내가 너로 황무케 하리라. 세일 산아 너와 에돔 온 땅이 황무하리니 무리가 나를 여호와인줄 알리라 하셨다 하라." (겔 35:15).

에서의 자손

에서의 아내는 ‘아다’, ‘바스맛’, ‘오홀리바마’ 이렇게 셋이다. 에서는 3명의 아내와 5명의 아들 및 11명의 손자가 있다. 그 중 중요한 인물은 다음과 같다.

* 데만 : 문자적인 뜻은 '오른 쪽에 있는 자'로서 이 이름은 훗날 에돔의 한 부족이자 북동 지역을 가리키는 말이 되었다(렘 49:20;겔 25:13).

* 아말렉(에서가 아다에게서 낳은 엘리바스의 첩 딤나가 낳았다) : 아내들을 제쳐두고 이례적으로 엘리바스의 첩 딤나의 이름을 기록한 이유는, 훗날 이스라엘 민족을 크게 괴롭힌 ‘아말렉 족속(출 17:8;민 14:45)’이 바로 그녀의 소생으로 부터 시작되었음을 밝힘과 동시에, 그들이 에돔 족으로부터 이탈하여 한 민족을 이루게 된 동기가 서자 출신이었기 때문임을 암시하기 위함이다.

에서의 후손 중에는 사울 왕 때에 도엑이라는 자가 있었다. 그는 사악한 자의 대명사가 되었다. 사무엘은 그에 대해 이렇게 증언한다.

“그 날에 사울의 신하 한 사람이 여호와 앞에 머물러 있었는데 그는 도엑이라 이름하는 에돔 사람이요 사울의 목자장이었더라.” (삼상 21:7)

'도엑'(Doeg)은 '불안'이란 뜻이다. 그리고 '에돔 사람'은 야곱의 쌍동이 형 에서의 후손들로서 팔레스틴 지방과 인접한 남부에 살고 있었다(창 36장). 바로 이같은 혈연적, 지역적 사정으로 인하여 역사적으로 에돔 사람들 중에는 개종(改宗)하여 이스라엘 사람이 된 경우도 적지 않았다. 그런데, 사울 왕의 목자장(牧者長)이란 요직을 맡을 정도가 된 '도엑'은 이미 개종하여 완전한 이스라엘 사람이 되어 있었을 것이 틀림없는데도 불구하고, 도엑의 과거 국적을 굳이 밝힌 까닭은, 그로 인하여 머지않아서 결코 상서롭지 못한 사건이 발생할 것이라는 암시를 주려고 의도한 때문인 듯하다(창 25:25, 30; 민 20:14-21; 삼하 8:13, 14; 왕상 11:14-22).

"사울의 목자장"- 당시 가축은 가장 중요한 재산이었다는 점에서, '도엑'이 사울 왕의 목자장이라는 요직(要職)을 맡고 있었다는 사실은 그가 사울 왕으로부터 대단한 신임을 받고 있었음을 암시한다. 한편 대부분의 고대 역본들과는 달리 70인역(LXX)은 이 말을 '사울의 노새를 관리하는 자'라고 번역하였는데, 그 근거는 희박하다. 또한 최근 들어서 몇몇 저명한 학자들은 사해 사본(Dead Sea Scrolls)의 연구 결과를 토대로 여기 '목자'를 '로임'이 아닌 '라침' , 즉 '달리는 자'로 고쳐야 한다고 주장한다. 즉 여기의 '달리는 자'는 왕의 병거보다 앞서 나가는 왕의 시위대를 가리키는데(8:11), 따라서 도엑을 '달리는 자의 우두머리'로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같은 견해는 ‘도엑’이라는 인물이 왕의 시위대 가운데 끼어 있었으며(22:17, 18), 많은 사람들과 가축을 쳐 죽일 만한 무예 및 병력을 소유하고 있었다는 사실에 의하여 뒷받침 된다고 한다. 참고할 만한 견해이다.

도엑'(Doeg)은 다윗과 아히멜렉 간에 되어진 일을 목격하고, 그 사실을 사울 왕에게 고발함으로써 무고한 제사장 85인과 놉 땅의 거민과 가축을 몰살케 만들었다(삼상 22:9-22 / 아히멜렉은 놉 땅의 제사장으로 허기진 다윗과 그의 부하들을 성막의 떡을 주었고 골리앗의 칼을 다윗에게 주었다). 이처럼 도엑은 간악하고 아부 근성이 농후한 인물로서, 후일 다윗은 그의 시편 52편을 통해 도엑의 잔인성을 질타하였다.

이스라엘의 출애굽과 가나안 진입 루트

에돔은 이스라엘이 출애굽 후 에돔 땅을 지나가도록 요청하였으나 이를 거절한다. 에돔에 속한 것은 풀 한포기도 건들지 않고 혹 피해를 입히면 배상하겠다고 모세가 간곡히 부탁하지만 그들은 거절한다(민 20.14-21).

모세와 이스라엘 백성은 출애굽 후 에돔의 세일산( 페트라 )지역을 통과하게 되었다. 이 지역의 전승에 따르면, 페트라 외곽 와디 무사(모세의 계곡)의 샘은 모세가 바위를 치자 물이 터져 나온 곳(민수기 20:10-11)이라고 한다. 모세의 형이자 최초의 대제사장 아론은 현재 아랍어로 ‘자발 하룬’이라 불리는 페트라의 ‘호르산(아론산)’에 매장되었다고 전해진다.

솔로몬은 에돔 여인을 아내로 맞아한다(왕상 11:1). 그로인해 우상숭배가 이스라엘에 만연하게 된다.

“나 주 여호와가 말하노라. 에돔이 유다 족속을 쳐서 원수를 갚았고 원수를 갚음으로 심히 범죄하였도다. 그러므로 나 주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가 내 손을 에돔 위에 펴서 사람과 짐승을 그 가운데서 끊어 데만에서부터 황무하게 하리니 드단까지 칼에 엎드러지리라.” (겔 25:12-13).

사울은 왕이 되자 우선 그의 주변에 있던 이스라엘의 적을 정복해야만 했다. 이 중에는 에돔도 포함되었고, 성경에 의하면 에돔을 비롯한 모든 적은 사울에게 정복되었다. 사울의 정복에도 불구하고 에돔은 다윗시대에도 여전히 적군이었다. 다윗은 소금 골짜기 즉 사해 골짜기에서 에돔 사람 1만8000명을 물리쳤고, 에돔에 수비대를 두어 에돔 사람이 다윗의 종이 되게 하였다(삼하 8:13∼14). 심지어 그는 요압을 시켜 6개월 동안 남아 에돔의 모든 남자를 죽이도록 하였다(왕상 11:15∼16). 덕분에 솔로몬은 평화롭게 얻은 에돔 땅의 에시온게벨에서 배들을 지어(왕상 9:26) 오빌에서 금을 가져올 수 있었고, 에돔 여인을 아내로 맞이하였다. 비록 요압의 칼에서 살아남아 이집트에서 돌아온 하닷에 의해 에돔은 솔로몬의 통치에서 잠시 벗어난 듯하나(왕상 11:14∼25), 여호사밧 때에 에돔에는 왕 대신 섭정 왕이 있었고, 에시온게벨에서 파선하고자했던 모습은 에돔이 여전히 이스라엘의 속국이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솔로몬의 구리 광산

성경은 이스라엘의 국가 형성기 즉 주전 11세기 후반부터 에돔과의 전쟁이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지만 대부분 학자들은 에돔이 주전 8∼6세기께 존재했던 나라였고 이스라엘의 속국이기보다는 독립국가였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2002년부터 시행된 캘리포니아 대학과 요르단 유물청의 ‘키르벳 엔-나하스’에서의 발굴은 새로운 이야기를 우리에게 전달해주고 있다. 키르벳 엔-나하스는 사해 남쪽에 위치한 유적지로 공중에서 찍은 사진에도 확연히 보이는 것처럼 사각형 모양의 요새화된 성이 있었음이 밝혀졌다.

특히 이곳에서 발견된 유물들은 대부분이 주전 10∼9세기께 유물로 측정되고 있으며, 주전 11세기경 이집트 인장들도 발견된 바 있다. 유적지 공중사진에서도 검은 흔적들이 목격되는데, 이는 구리를 녹일 때 생기는 물질들이 굳어서 발견되는 구리 용재(鎔滓)의 흔적들로 이곳이 구리 광산이었음을 증명해준다. 더욱더 흥미로운 것은 유적지에서 발견된 유물들이 이스라엘의 주전 10∼9세기 유물들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키르벳 엔-나하스는 솔로몬의 이스라엘 경계에 세운 요새들 선상에는 속해 있지 않은 즉 이스라엘 영토 내에 있는 유적지가 아니다.

결국 유적지를 발굴한 토머스 레비(Thomas Levy) 교수는 이 유적지는 성경에 기록된 것처럼 다윗과 솔로몬 시대에 에돔을 정복하고 세운 구리 광산을 위한 요새라고 정의했다. 또한 그는 이곳을 ‘솔로몬의 구리 광산’이라 부르고 있다. 우리는 흔히 이스라엘 네게브지역에 있는 팀나 유적지를 ‘솔로몬의 구리 광산’이라 불러왔다.

에돔의 키르벳 엔-나하스

그러나 사실 이 유적지는 이집트의 구리 광산으로 주전 1400∼1250년께 활발한 활동이 있었고, 솔로몬 시대에는 오히려 미미한 흔적이 있을 뿐이며 구리광산의 중요성에도 불구하고 요새화되어 있지 않다는 데 문제가 제기된다. 물론 성경에는 솔로몬이 구리 광산을 가지고 있었다든가 요새화했다든가 하는 구절은 없다. 그러나 학자들은 역대상 22장 3절에 예루살렘의 다윗 성을 짓기 위해 철과 놋이 준비되었던 것을 보아 다윗과 솔로몬시대에 구리 광산을 가지고 있었을 것이 분명하다고 생각하고 있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5만∼6만t의 구리 보유량을 가진 10만㎡에 달하는 팔레스타인 남부에서 가장 큰 구리광산이 발견된 키르벳 엔-나하스가 아마도 유력한 후보일 것이다.


에돔의 도시, 페트라

에돔 땅은 나무가 없고 붉은 바위로 이뤄진 산악지역이며, 농업과 목축업에 부적합한 광야 지역이기도 하다. 그렇다보니 성경시대 에돔 사람들의 경제는 사해에서 추출해 내는 소금과 바위에서 얻어낸 향신료 수출에 의존했다. 이렇듯 열악한 경제적 조건에도 불구하고 유다가 에돔 땅에 욕심을 냈던 것은 언급했던 구리광산과 이집트와 메소포타미아를 잇는 무역로(king’s way) 때문이었다. 더불어 지중해변에 적당한 항구를 가지고 있지 못했던 유다가 에돔 땅의 바닷가 ‘에시온게벨’과 ‘엘롯(대하 8:17; 왕상 9:26)’을 항구로 사용할 수 있었다는 것은 매우 매력적이었다. 앞에서 언급했던 것처럼 다윗이 차지했던 에돔 땅 덕분에 솔로몬은 에시온게벨을 통해 오빌의 금을 들여올 수 있었다. 솔로몬 시대 이후 부국강병의 시대를 누렸던 유다의 임금 여호사밧 역시 에시온게벨에서 배를 지어 오빌로 보내고자 하였다(왕상 22:48-50)

“여호사밧이 다시스의 선박을 제조하고 오빌로 금을 구하러 보내려 하였더니 그 배가 에시온게벨에서 파선하였으므로 가지 못하게 되매, 아합의 아들 아하시야가 여호사밧에게 이르되 내 종으로 당신의 종과 함께 배에 가게 하라 하나 여호사밧이 허락하지 아니하였더라.”(왕상 22:48, 49)

결국 에돔은 유다 왕 ‘여호사밧’과 이스라엘 왕 아합의 아들 ‘여호람’이 모압과 전쟁을 치를 때 그들의 동맹이 될 수밖에 없었다(왕하3장). 그러나 유다 왕 여호사밧의 아들 여호람 때에 에돔은 유다를 배반했고 섭정 왕이 아닌 자신들의 왕을 세웠다(왕하 8:20) 물론 여호람의 반격도 있었지만 에돔은 더 이상 유다의 속국이 아니었다(왕하 8:22). 후에 유다 왕 ‘아마샤’는 다시 한번 에돔을 차지하기 위해 전쟁을 일으켰다. 그는 에돔 사람 1만 명을 죽이고 에돔을 쳤다고 기록하고 있다.(왕하 14:7; 대하 25장).

“여호람 때에 에돔이 유다의 손에서 배반하여 자기 위에 왕을 세운 고로, 여호람이 모든 병거를 거느리고 사일로 갔더니 밤에 일어나 자기를 에워싼 에돔 사람과 그 병거의 장관들을 치니 이에 백성이 도망하여 각각 그들의 장막들로 돌아갔더라. 이와 같이 에돔이 유다의 수하에서 배반하였더니 오늘까지 그러하였으며 그 때에 립나도 배반하였더라.” (왕하 8:20-22)

에돔의 여신 '코스'

앞에서 언급한 전쟁 과정 속에서 유다 왕 ‘아마샤’는 큰 죄를 범하고 말았고 이 범죄는 그를 망하게 만들었다. 아마샤는 에돔에서 돌아올 때에 세일 자손의 신들을 가지고 돌아왔고, 자신의 신으로 세우고 백성들에게 경배하며 분향하도록 하였다(대하 25:14) 성경은 이 에돔의 신이 누구인지 밝히고 있지 않지만 우리는 이 신의 이름을 ‘코스(Qaws / Qos) 일 것이라고 생각한다. 앞서 모압이나 암몬 사람들에 관한 글에서도 언급한 것처럼 에돔 역시 성경 외의 다른 문헌 자료와 고고학적 자료가 거의 없다. 그러므로 에돔의 신화나 종교적 자료 역시 밝히는데 어려움이 따르고 있다. 단지 앗수르의 왕들이 에돔을 파괴하고 조공을 받는 기록에 의하면 디글랏 빌레셀(주전 745-727)과 산헤립(주전 705-681) 시대에 에돔 왕의 이름은 ’코스 신은 임금)’ 이라는 뜻의 ‘코스말락’이었고, 에살하돈(주전 680-669년) 시대에는 ‘코스는 위대함’이라는 뜻의 ‘코스가바르’가 왕이었다.

또한 에돔의 요새가 있었던 호르밧 키트밋(Horvat Qitmit) 유적지에서 발견된 인장 주인의 이름은 ‘슈브나코스’로 역시 코스 신의 이름이 등장한다. 가나안 지역에서는 사람의 이름에 자신들이 섬기는 주요 신의 이름을 넣어 짓는 습관이 있었기 때문에 이 이름들에 들어가는 ‘코스’가 어떤 신이었고, 어떤 모습을 하고 있었는가는 아직까지 밝혀진 바가 없다. 다만 에돔 땅에서 신약 시대 전후에 거주했던 나바테안 이라 불리는 사람들이 섬겼던 ‘두슈라(Dushura)’라 불리는 신이 산을 다스리는 신이었던 것으로 보아 ‘코스’도 유사한 역할의 신이었을 것으로 보고 있다.

비록 코스 신과 관련된 고고학적 자료는 없지만 에돔의 요새가 발견된 호르밧 키트밋 유적지에서는 뿔 단린 진흙으로 만든 여인의 두상이 발견되어 여신의 모습을 짐작하게 하고 있다. 이 여신상의 모습은 가나안 땅에서 발견된 어떤 신상과도 다름 모습을 하고 있다. 두상의 양쪽에 뿔이 달렸고 다시 이마 한 가운데 뿔이 하나 더 달려 있다. 두상의 정수리에 돋아 있는 기둥은 마치 전쟁용 투구를 연상케 해 전쟁의 여신의 모습일 것이라고 추측하고 있다.

이 유적지에서 보다 남쪽에 위치한 ‘엔 하체바’ 유적지에서는 작은 성소구역이 발견되었는데, 제단과 함께 모두 750여개의 점토 형상들과 향을 피우는 제대 그리고 제사용 용기들이 발견되었다. 토기의 형태를 볼 때 에돔의 것들이었으며 특별히 제대 중 세 개는 받침대가 여인의 모습을 하고 있는 것들도 있다.

호르밧 키트밋의 북쪽에 위치한 호르바 우자에도 같은 시대의 것으로 보이는 유다의 요새가 발견되었다. 유다의 속국에서 벗어난 에돔은 앗수르에 의해 파괴되었으나 오히려 영토는 확장되었고 유다를 위협할 만큼 강력해 졌다. 호르밧 우자에서는 주전 7-6세기경 기록된 37개의 히브리어 오스트라콘들과 판독하기 힘든 에돔어로 기록된 오스트라콘 하나가 발견됐다. 히브리어로 기록된 것 중 하나는 호르밧 우자보다 북쪽에 있는 아랏 요새로 보내지는 문헌으로 에돔이 쳐들어 오고 있음을 경고하는 내용이었다.

에돔의 위협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에돔 사람들은 바벨론 느부갓네살이 주전 586년 예루살렘을 파괴하는데 일조하였으며 유다 사람들을 학살했다. 선지자들은 에돔이 이 전쟁에 가담하였기에 저주가 있으리라 예언했다(시 137:7; 사 34:9; 겔 25:12-14)

“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셨느니라. 에돔이 유다 족속을 쳐서 원수를 갚았고 원수를 갚음으로 심히 범죄하였도다. 그러므로 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셨느니라. 내가 내 손을 에돔 위에 펴서 사람과 짐승을 그 가운데에서 끊어 데만에서부터 황폐하게 하리니 드단까지 칼에 엎드러지리라. 내가 내 백성 이스라엘의 손으로 내 원수를 에돔에게 갚으리니 그들이 내 진노와 분노를 따라 에돔에 행한즉 내가 원수를 갚음인 줄을 에돔이 알리라.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겔 25:12-14)

저주는 실현되었다. 바벨론의 나보니두스는 주전 553년 에돔을 멸망시켰다. 그 이후 바벨론이 페르시아에 멸망하자 에돔 땅은 아라비아 부족인 나바테아 사람들에 의해 점령됐고, 그들을 피해 달아난 에돔 사람들은 오히려 네게브 북쪽 유다의 영역 안으로 이동하였다.

에돔은 주전 553년 바빌론의 나보니두스(주전 553∼543년)에 의해 멸망했다. 그러나 주전 539년 바벨론이 페르시아에 멸망한 후 에돔은 아라비아의 부족인 나바테아 사람들에 의해 점령되었고, 이들을 피해 달아난 에돔 사람들은 오히려 네게브 북쪽 지역(진광야-현재 이스라엘 브엘세바 남쪽지역)으로 이동하게 되었다. 이곳은 한때 유다의 땅이었지만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온 유대인들이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거주했기 때문에 버려져 있던 곳이었다. 에돔 사람들은 헤브론을 수도로 삼았고 마레사와 벧술 같은 도시들을 건설하였다. 주전 332년경 알렉산더의 헬라 세력 이후 네게브 북쪽 지역에 정착한 에돔 사람들의 지역을 헬라어로 ‘이두메아’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유대인들은 이두메아 사람들을 경멸했고 그들과 혼인도 하지 않았다. 이두메아 사람들이 남긴 대표적인 유적지는 ‘마레사’가 있다.

마레사는 ‘갈렙’에게 주어진 성이었으며(수 15:44) 르호보암의 요새이기도 했다. 또한 히스기야 시대 이스라엘의 46개 도시를 파괴했다는 앗수르 왕 산헤립의 목록에 등장하기도 한다. 바벨론이 유다를 정복하면서 도시는 산산이 부서졌고 오랫동안 버려진 도시였다. 그러나 에돔 사람들이 마레사에 정착하고 이두메아의 주요 도시가 되면서 도시는 다시 번성하기 시작했다. 특별히 마레사는 주전 332년 알렉산더가 이 지역을 점령한 이후 은퇴한 그리스 군사들의 주요 거주지가 되면서 헬라문명과 이두메아, 시돈 그리고 나바테아 같은 가나안 문명이 뒤섞여 다양한 문화적 흔적을 보여주는 유적지이다.

마레사의 비들기 집

마레사의 고고학적 흔적 중에서 가장 유명한 것들은 이두메아 사람들이 살았던 동굴과 지하구조이다. 마레사의 많은 구조물들은 부드러운 바위를 깎아 만든 석회동굴들이다. 일반적인 가옥과 가축우리, 작업실(workplace) 그리고 비둘기 집(Columbarium Cave) 등 동굴을 뚫어 만든 이 구조물들은 때로는 지하에 길을 만들어 연결되어 있기도 했다. 이 구조물들 중에 가장 유명한 것은 비둘기 집이다. 85개의 비둘기 집들이 발견된 바 있는데 지하 구조물 벽에 구멍을 뚫어 마련된 곳도 있으며 길이가 30m에 달하는 터널형 비둘기 집도 있다. 후자의 경우 벽에는 3000마리 이상의 비둘기들이 서식할 수 있는 1900개 벽감(niche)이 마련되어 있다. 이 비둘기 집에서 길러진 비둘기는 식용으로 주로 사용되었으며 비둘기의 변은 연료로 사용되었다.

마레사 - 올리브 압축실

마레사에서 눈에 띄는 또 다른 지하 구조물 중에는 올리브 압축실이다. 지하로 이어진 계단을 따라 내려가면 큰 방의 한쪽 면을 깎아 만든 올리브 압축기가 보인다. 방 안에는 올리브가 담긴 주머니를 압축하기 위한 거대한 돌추들이 널려 있다. 돌추들은 벽면 반원형 아래 길게 깎여 있는 틈 사이에 걸려 있던 긴 통나무에 걸려 있었을 것이다. 방 한쪽에 마치 삼손의 연자 맷돌을 연상케 하는 맷돌들이 있다. 이 맷돌에서 먼저 올리브를 으깬 후 으깨진 올리브들을 바구니에 담아 벽면에 있는 올리브 압축기로 기름을 짜내었을 것이다.

마레사 - 시도 사람의 무덤

마레사에서는 바위를 깎아 만든 무덤이 발견되었는데 주전 3∼1세기 사이 이두메아 지역에 거주했던 시돈 사람들과 이두메아 사람들의 무덤이었다. 그중 무덤 내부 벽에 그림이 그려져 있는 무덤이 가장 유명한데 이는 시돈의 아폴로파네스 가족 무덤이었다. 무덤의 양면에는 시체를 눕힐 수 있는 벽감이 마련되어 있고 가장 안에는 침대처럼 생긴 벤치가 깎여져 있어 아마도 이 무덤을 사용했던 가족들의 가장 우두머리 조상이 안치되었을 것이다. 무덤 내부는 거대한 항아리(그리스의 암포라 형태)와 다양한 신화적 동물들의 벽화로 악령을 물리치기 위해 까마귀들과 지하수의 입구를 지킨다는 세르베루스, 사후세계를 상징하는 붉은 불새 등이 그려져 있다. 또 다른 무덤에는 플루트를 부는 남자와 하프를 켜는 여인의 모습이 그려져 있다.

주전 63년 이스라엘을 정복한 로마의 폼페이는 마레사와 에돔 지역을 유대와 분리하여 독립적으로 통치하였다. 그러나 마레사는 주전 40년 페르시아의 파르티아 사람들에 의해 파괴되었고 마레사에는 더 이상 아무도 거주하지 않았다. 주후 2세기경 로마 도시 에루테로포리스(Eleutheropolis)가 마레사 근처 언덕에 건설되었다.

헤롯의 관할 영지들

알렉산더 대왕 이후 이두메아 지역은 ‘프톨레미 왕조(Ptoelemaic Dynasty)’의 통치 아래 있었다. 그러나 주전 202∼195년 사이 있었던 시리아 전쟁에서 ‘셀루시드 왕조(Seleucid Dynasty)’ 에게 통치권이 넘어가고 말았다. 하지만 셀루시드 왕조의 이두메아 통치 역시 오래 지속되지는 못했다. 셀루시드의 통치를 저지한 사람은 마카베오서에 의하면 ‘존 히르카누스’와 유대인들이었다(마카베오 1서 5:3). 마카베오서는 외경의 하나로 구약과 신약의 유대 중간사 중 망치라는 뜻을 유대 독립군 마카비가 어떻게 셀루시드 왕조에게서 예루살렘을 탈환하고 유대 왕조인 ‘하스모니아 왕조’를 세웠는가를 다루고 있는 책이다(주전 167∼164, 마카베오 1서 4:36∼61). 이 역사적 사건을 통해 유대인들은 약 백년간(주전 164∼63년) 과거 구약 시대 이스라엘의 영토를 다시 차지할 수 있었고, 유대교를 팽창시킬 수 있었다. 결국 이스라엘 영토 내에 있었던 이들은 유대 국가에 종속되었고, 모두 유대교로 개종해야만 했다. 이두메아 사람들도 예외는 아니었다.

이두메아 사람들이 유대교인이 되었다고 해서 그들이 유대인으로서 환영받았던 것은 아니다. 이두메아 사람들 중 누구보다 유명한 사람은 ‘헤롯’이다. 헤롯은 이두메아 아버지인 ‘안티파테르’와 나바테아 출신의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는 로마의 지원을 받아 왕이 되었지만 사실 유대인들은 그를 유대인의 왕으로 인정한 적이 없다. 헤롯의 형제들과 그의 아들들 또한 이스라엘을 통치했지만 그들은 유대인이 아니었다. 그러나 유대 땅의 실질적인 통치자인 로마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로마는 이두메아를 유대 통치지역으로 함께 보았고, 이두메아 사람들은 서서히 유대화 되어갔다. 로마의 ‘디도(Titus)’ 장군이 이스라엘을 정복할 때 2만 명의 이두메아 사람들은 유대인들과 함께 싸웠다. 그들의 전쟁은 참혹한 파괴의 현장만을 남겼고 이 전쟁과 함께 이두메아 사람들은 역사에서 사라졌다. 다만 그들이 거주했던 장소를 이두메아라 부를 뿐이었다.

나바테아 사람들은 성서에는 등장하지 않는다. 그러나 에돔 사람들의 땅을 차지했던 이들로 신약시대 유대인들과 밀접한 관련이 있었을 뿐만 아니라 성지 순례객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 나바테아의 수도인 페트라는 세계적으로 유명세를 타고 있다.

나바테아 사람들은 아랍계통 사람들로 아라비아와 시리아 사이 즉 유프라테스 강부터 홍해까지 지역에 거주했다. 주전 586년 바빌론이 유다를 파괴하자 황폐한 유다 땅에 에돔 사람들이 목초를 찾아 서쪽으로 이주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시기에 남쪽 아라비아 사막에서 올라온 한 무리의 사람들이 오히려 에돔 사람들을 서쪽 유다 땅으로 몰아내고 자신들이 에돔 땅에 거주하기 시작했다. 나바테아 사람들은 주전 312년께 셀루시드 장군 ‘히에로니무스’의 나바테아와의 전쟁 기록 이후 헬라 문헌들에 종종 나타났다.

그러나 나바테아 사람들이 남긴 그들만의 문헌은 아직까지 발견된 바 없다. 단지 사해 주변을 비롯한 요르단 남쪽의 주요 거주지 내에 남겨져 있는 벽화들과 비문들이 있을 뿐이다. 비문에 따르면 나바테아 사람들은 아람어에서 발전된 언어를 사용했던 것으로 보인다.

주전 12세기부터 오랫동안 근동의 언어로 사용되었던 아람어는 주전 330년경 헬라 문명의 세력이 커지면서 점차 사용되지 않았고 오히려 헬라어가 발전했었다. 그러나 나바테아 알파벳은 아람어에서 발전한 것이었고, 주후 4세기경 이 지역에서 사용된 아랍어에도 그 흔적이 남아 있다. 그들의 동전과 비문은 주로 아람어로 기록되었다. 나바테아 사람들은 언어뿐만 아니라 문화에 있어서도 아람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심지어 후대에 아랍 사람들은 아람 사람을 ‘나바테아 사람’이라고 부르기까지 했다.

나바테아의 언어와 문화가 아람에 기초하고 있지만 에돔이 차지하고 있었던 항구 엘롯과 아카바만을 지나는 무역상들 때문에 이 지역은 보다 다양한 문화를 접할 수 있었다. 이집트에는 사해에서 나오는 역청을 판매했고, 항구를 통해 들여오는 향료들을 동쪽 지역과 거래했다. 또한 사막의 기후이기는 하지만 관개시설을 이용해 농사를 지었고 이를 통한 수입이 나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특별히 나바테아 사람들의 관개시설은 흥미로운 주제이기도 하다. 현재 나바테아 사람들의 거주지는 매우 건조하여 거의 농사를 지을 수 없는 곳으로 이 조건은 과거에도 그다지 다르지 않았다.

이 지역에 비는 우기에 겨우 1∼2번 크게 내릴 뿐 자주 내리지도 않고 물이 고이지도 않는 지역이다. 그러나 그들은 이 물을 농사에 이용하기 위해 독특한 기술을 개발해냈다. 우선 땅을 깔때기 모양으로 파 들어간 후 가운데에 과일 나무 한 그루를 심었다. 우기가 시작되기 전 나무 주변 지역의 흙을 무너뜨려 부드럽게 만들어 물이 잘 스며들게 했다. 비가 오기 시작하면 빗물은 깔때기의 경사면을 따라 흘러들어가 나무 아래 고이게 되고 이 물을 덮어 물이 고여 있도록 하였다. 고대부터 역사학자들은 이 시설을 ‘사막의 오아시스’라 불렀다. 이러한 발전된 기술을 가진 이들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나바테아 사람들은 바다에서는 악명이 높았던 것으로 보인다. 그들은 한때 해적으로 불린 적도 있다.

유대 하스모니안 왕조

유대 하스모니아 왕조가 셀루시드 왕조에 반란을 일으켰을 때 나바테아 사람들은 유대인들과 동맹 관계였다. 그러나 하스모니아 왕조의 알렉산더 야네우스는 이두메아인들에게도 그랬던 것처럼 나바테아 사람들 역시 유대교로 개종할 것을 강요했다. 결국 하스모니아 왕조와 나바테아 사이는 나빠졌고, 주전 90년 나바테아 왕 오보다스 I세는 알렉산더 야네우스와의 전쟁에서 승리하여 독립할 수 있었다. 그러나 기쁨은 잠시뿐이었다. 주전 62년 로마의 침략에 버티기는 했지만 결국 당시 무적이었던 로마의 속국이 될 수밖에 없었다. 로마와의 전쟁에서 상당히 오랫동안 버텼던 장소가 페트라이다.

주전 32년 유다 왕 헤롯은 이집트의 클레오파트라 여왕과 손을 잡고 나바테아 왕 말리쿠스 Ⅱ세를 공격했다. 헤롯의 군사와 병거는 몇 번의 접전 끝에 나바테아를 함락할 수 있었다. 주후 1세기 로마시대에 아라비아와 홍해를 잇는 무역으로 인해 나바테아는 국제 무역시장으로 호황을 누리기도 했으며 주후 4세기에는 기독교로 개종하였다.

페트라는 주전 312년경부터 나바테아의 수도로 대상무역의 중심지였다. 도시는 사해에서부터 시작돼 아카바만까지 이어지는 거대한 계곡인 와디 아라바의 동쪽 호르산 기슭에 위치해 있다. 계곡 덕분에 주변이 온통 높게 탑처럼 솟은 바위산들로 둘려져 있어 적을 막을 수 있는 자연적 요새를 갖춘 곳이다. 로마가 왜 이곳을 함락하는 데 어려움이 따랐는지 이해할 수 있다.

페트라 유적지에서는 이미 주전 16∼13세기께 사람이 살았던 흔적이 발견된 바 있다. 학자들 중에는 페트라가 에돔 땅 중 ‘셀라(왕하 14:7)’일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셀라의 뜻은 단순히 ‘바위’일 뿐 같은 장소는 아니라고 보고 있다. 페트라는 바위 계곡 틈새를 지나 안으로 들어오면 다시 바위로 둘러싸인 분지에 있었던 도시다. 이 계곡의 이름은 ‘와디 무사’ 즉, 와디 모세라 불리는데 아랍 전통에 의하면 모세가 바위에 지팡이를 꽂아 물이 나오게 한 장소가 페트라이다. 또한 이곳은 모세의 형 아론의 무덤이 있는 장소로도 알려져 있다.

페트라에서 발견된 로마식 건축 구조물, 무덤

페트라에서 발견되는 로마 극장 등 도시의 모습도 유명하지만 무엇보다 장관을 이룬 것은 무덤 군이다. 페트라의 무덤은 바위산의 절벽을 깎아 만든 것으로 무덤 입구가 화려하게 조각되어 있다. 주전 6세기께 사용된 초기 무덤은 단순한 기둥들이 있는 형태로 아취 형태의 입구가 연결되어 집의 모습을 상상케 한다. 이 무덤의 형태는 점차 화려한 양식을 더하게 되는데 이집트의 장식들과 그리스의 기둥들이 혼합되어 웅장한 입구를 장식하게 되었다. 이 무덤은 주전 2세기께 주로 사용되었다. 마지막에는 로마 신전의 모습을 연상케 하는 건축물로 발전했다.

현재 페트라의 무덤은 유네스코가 지정한 세계 문화유산으로 스티븐 스필버그의 영화 인디아나 존스 시리즈 Ⅲ편의 클라이맥스를 장식했던 성배를 찾는 장소로도 유명하다.

현재의 지명 및 국가

에서의 후손




에돔 사람을 미워하지 말라, 그는 네 형제임이니라(옵 1:1~16, 신 23:7)





내게 가시 같은 존재조차도 하나님께서 역사하십니다

너는 에돔 사람을 미워하지 말라 그는 네 형제임이니라 애굽 사람을 미워하지 말라 네가 그의 땅에서 객이 되었음이니라(신명기 23:7)

‘오바댜’서는 구약에서 가장 적은 분량의 책이며, 신약에도 인용이 거의 없는 성경책 중 하나입니다.
그럼에도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구원의 경륜이 뚜렷이 계시되어 있고, 이스라엘을 괴롭히는 대적들이 어떻게 멸망하며 하나님의 나라가 어떻게 완성될 것인지 잘 계시해 주신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선지자 오바댜에 대해 확실히 알 수 있는 것은 없습니다.
선지자의 이름을 밝힐 때는 히브리인의 관례에 따라, “…의 아들”이라고 소개하지만, 오바댜서에는 단순히 “오바댜의 묵시라”고 소개합니다.
선지자 오바댜의 이름의 뜻은 ‘여호와의 종’입니다.
오바댜라는 이름은 성경에서 흔하게 보이는 이름입니다.(대상 3:21, 7:3, 8:38, 9:16, 44, 12:9, 27:19, 대하 17:7, 34:12, 스 8:9, 느 10:5 등)

오바댜 시대도 확실하게 특정할 수 없습니다.
오바댜 1장 10~14절에 보면, 에돔의 죄를 “예루살렘이 이방인의 침략을 받을 때 에돔이 형제 야곱에게 행한 포학”이라고 지적합니다.
하지만 예루살렘이 이방인의 침략을 받은 것이 이때 뿐은 아닙니다.
르호보암 때 애굽 시삭의 침략, 여호람 때 블레셋과 아라비아인의 침입, 여호야김 여호야긴 시드기야 때 바벨론의 공격 등이 있었습니다.

오바댜서의 내용은 에돔에 대한 심판(1:1~14)과 이스라엘의 구원(1:15~21)입니다.

에돔은 야곱의 쌍둥이 형 에서의 후손입니다. 형제인 야곱의 후손, 유다의 환란 때 행한 에돔의 포학을 하나님이 심판하십니다.
그리고 ‘여호와의 날’에 에돔을 비롯한 만국은 그들의 죄에 대해 심판을 받고, 하나님의 백성들은 구원받을 것을 선포합니다.
여기서 ‘에돔’은 하나님이 택하신 이스라엘을 대적하는 모든 세력의 대표입니다.
그리고 이스라엘 혹은 유다는 아브라함의 언약의 대상자로, 신약교회의 모체입니다.

오바댜서는 교회의 승리를 보여주는 계시의 책이며, ‘시온산’은 교회, 혹은 그리스도의 나라를 상징합니다.
우리 주변에는 유다에게 에돔처럼 눈에 거슬리는 사람, 부담되는 존재가 있을 수 있습니다.
가족 중에도 힘들게 하는 사람이 있을 수 있습니다.
직장이나 일터에서도 괴롭게 하는 사람들이 있을 수 있습니다.
국가적으로도 부담스런 상대가 존재합니다.
대한민국에게 일본은 부담스러운 나라입니다.
침략의 역사를 반성하기는커녕 왜곡합니다.
대한민국의 성장과 발전을 견제하며 우리의 미래를 방해합니다.
전쟁할 수 있는 나라가 되려는 야욕을 보입니다.
첨단무기로 무장한 일본의 군사력은 이미 대한민국 국군을 능가합니다.

우리를 부담스럽게 하고 괴롭게 하는 우리 주변의 가시 같은 존재들을 어떻게 대할 지, 신명기 23장 7절 말씀을 제목으로 삼아 오바댜서의 말씀을 중심으로 살펴봅시다.

먼저, 오바댜서의 역사적인 배경을 살펴봅니다.
오바댜서를 성경의 ‘예루살렘이 침략당한 것’을 기록한 내용 중 유다의 여호람 왕이 통치할 때 유다에 반역하고 배반한 에돔이 블레셋과 아라비아 사람들과 연합하여 예루살렘을 침략함으로 예루살렘이 함락될 것을 예언한 말씀으로 보면, 오바댜서의 연대는 B.C. 849~842년경이라 할 수 있습니다.

열왕기하 8장 20~24절에 보면, 여호람 왕에 대한 기록이 나옵니다.
20절을 보면, “여호람 때에 에돔이 유다의 손에서 배반하여 자기 위에 왕을 세운 고로”라고 기록되었습니다.
계속되는 말씀을 보면, 여호람 때 유다가 에돔과 전쟁하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내용을 보면 유다 왕 여호람이 에돔에 패했습니다.

유다 왕 여호람에 대해 기록한 역대하 21장 16~17절의 말씀을 정리해 보면, 유다를 배반한 에돔이 블레셋과 아라비아 사람들과 연합하여 예루살렘을 침략하였고, 예루살렘이 함락되자 약탈한 전리품을 에돔과 연합군들이 나누어 가졌습니다.

오바댜 1장 10~14절에서 에돔 사람들이 어떻게 이스라엘을 괴롭혔는지를 기록했는데, 에돔은 동맹군들과 더불어 예루살렘을 침공해서 사람과 재산을 늑탈했으며, 유다 민족의 고통을 위로는커녕 멸시하고 조롱했습니다.

또한 주전 605년, 597년, 586년에 예루살렘이 바벨론에게 함락당해 약탈당할 때, 에돔은 바벨론을 도와서 바벨론의 침략과 약탈에 동참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예루살렘 사람들이 포로로 끌려갈 때 도망자들이 있었는데, 그 도망자들을 붙잡아 바벨론에 넘겨주기까지 했습니다.
에돔 족속과 유다 족속의 관계를 보면, 에돔 족속이 유다 족속에게 행한 일들은 해서는 안 될 일이었습니다.
에돔은 에서의 후손입니다.
유다는 야곱의 후손입니다.
에서와 야곱은 이삭의 쌍둥이 아들입니다.
비록 야곱이 형의 장자권을 빼앗은 일이 있었지만, 에서와 야곱은 얍복 강가에서 이미 화해했습니다.
이렇게 에돔과 유다가 한 핏줄, 형제관계의 족속인데도 에돔은 형제를 버리고, 침략자와 한 패가 되어 형제간에는 있어서는 안 될 일을 한 것입니다.

만일 우리가 이런 상황에 처하게 된다면 어떻게 할 것입니까?
“하나님께서 택하신 유다 민족 곁에 왜 가시와 같은 에돔 민족을 두셔서 선민이 이토록 어려움을 겪게 하십니까?”라며 하나님께 호소하지 않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에돔 족속으로 하여금 유다 족속을 괴롭히게 하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는 유다 족속이 하나님만 섬기는 민족이 되기를 바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유다가 하나님의 택하신 민족답게 살도록 하기 위해서 유다 곁에 에돔을 두셨습니다.
에돔 족속은 하나님께서 유다 족속을 선민답게 세우기 위해 준비하신 회초리였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잘못했을 때마다, 바른 길로 돌이키도록 드셨던 채찍이 에돔이었습니다.

이런 가시와 같은 에돔을 곁에 둔 상황에서 유다 족속이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자신의 모습을 전능하신 하나님 앞에 내어놓고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는 삶, 전능하신 하나님을 의지해 능력을 힘입어 사는 것 외에 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내가 결코 무시할 수 없는 사람, 내게 부담되는 사람, 보기만 해도 괴롭고 가시와 같은 사람이 있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왜 그런 사람들을 내 주변에 있게 하셨습니까?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삶을 살펴볼 때, 아직도 변화되어야 할 성품과 교만이 있기 때문입니다. 나를 아프게 하는 가시가 때로는 나를 변화시키는 요인이 되기 때문입니다. 괴롭게 하는 가시가 다른 사람을 무시하던 교만을 꺾게 합니다. 가시 때문에 잘못된 성격을 고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사실을 깨닫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가시 같은 존재가 있다는 것이 때로 내게 유익하다는 것을 알아도 받아들이는 것은 참 힘듭니다.
에돔처럼 내게 가시 같은 존재는 늘 있기 마련입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위해 허락하신 가시와 같은 존재를 받아들일 때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느낄 수 있게 됩니다.
사랑할 수 없는 사람까지 사랑으로 감싸 안을 때 하나님께서 함께 하심을 누릴 수 있게 됩니다.
하나님의 함께 하심, 하나님의 역사하심은 사람이나 세상의 방법이 아닌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의 방법대로 누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순종하면서 느끼며 누리는 것입니다.

유다 족속은 하나님께서 택하신 민족이었는데, 에돔 족속은 그렇지 못했습니다.
그런데도 여러 면에서 에돔 족속은 유다 족속보다 유력했습니다.
에돔 족속은 해상 무역에서 유리한 지역을 차지하고 있었습니다.
구리 광석 등 풍부한 천연자원의 혜택을 누리고 있었습니다.
에돔의 동쪽과 서쪽은 높고, 북쪽은 절벽으로 차단되어 있어서 외적의 침략을 방어하기에 유리했습니다.
또한 에돔 사람들은 뛰어난 지혜와 학문을 갖추고 있었습니다.
에돔 사람들은 빈틈이 없는 완벽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이런 에돔이 어떻게 되었습니까?
에돔은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수 없었습니다.
본문 6~9절 말씀은 하나님께서 에돔을 심판하겠다는 말씀입니다.
에돔은 다른 이방 나라들과 동맹을 맺어 유다 족속을 공격하는데 앞장섰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 동맹들에 의해 에돔은 배신을 당하고, 모든 것을 빼앗기고 멸망하였습니다.
멸망하지 않을 것 같은 에돔이 멸망당하는 것을 보면서 무엇을 깨닫게 됩니까?

회복되지 못할 유다 족속이 회복되는 것을 보면서 무엇을 깨닫게 됩니까?
하나님께서 간섭하시면 멸망당하지 않을 것 같은 나라도 멸망하고, 하나님께서 간섭하시면 회복되지 못할 것 같은 나라도 회복된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께서 간섭하시면 됩니다.
에돔이 아무리 완벽한 조건이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간섭하니까 망했습니다.
교만하던 에돔이 망했습니다.
가시 같은 에돔이 망했습니다.

가시 같은 존재들 때문에 마음 상할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겸손하면 되기 때문입니다.
신앙생활을 하다보면, 아니 인생을 살다보면 주위에 가시 같은 존재가 있기 마련입니다.
하지만 가시 같은 존재일지라도 미워할 필요는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가시 같은 존재를 두신 이유가 있기 때문입니다.
아직도 내 안에 변화되어야 할 기질과 교만이 남아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가시 같은 존재는 미워할 수 없는 존재입니다.
오히려 감사할 대상이 될 수도 있습니다.
시편 37장 28절에 보면, 가시 같은 존재에 대한 심판은 하나님께서 알아서 해주신다고 합니다.
괴롭히는 사람, 사랑할 수 없는 사람까지 사랑하며 기도해 주는 성도가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간섭(干涉) : 방패 간, 건널 섭
- 이래라저래라 하면서 영향(影響)을 주려고 하는 것. 참견(參見).

유기(遺棄) : 남길 유, 버릴 기
- 내버리고 돌보지 않음



하나님의 간섭을 받으라(로마서 1:28-32)


죄의 목록을 열거한 후 사도 바울은 “죄의 대가는 사망이라고 하나님이 정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거역하는 자는 남까지 죄를 짓게 만든다.”고 했다(32절).
왜 사도 바울은 죄의 목록을 열거했는가?
사람은 원래부터 죄인이고 희망이 없는 존재임을 깨닫게 하기 위해서였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앞서 열거된 21개의 죄를 거의 다 지을 것이다.
결국 그 죄들은 사람에게 복음이 얼마나 필요한 것인지를 소리 없이 웅변한다. 

그 모든 죄의 근원이 어디에서 비롯되었는가?
하나님을 멀리함으로 하나님이 간섭하지 않고 내어버려 두셨기 때문이다.
잘못된 길로 갈 때 실패하고 매를 맞고 병들면 오히려 감사해야 한다.
잘못된 길로 가도 아무 일이 없다면 오히려 심각한 문제다.
하나님이 내버려 두시는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내버려 두심으로 성공하고 형통한 것보다 하나님이 간섭하심으로 실패하고 시험 당하는 것이 오히려 복이다.

가끔 보면 너무 책임감이 없고 잘못을 계속 저질러서 친구까지 포기한 사람이 있다.
불행한 사람이다.
목사까지 포기한 사람을 블랙유머로 ‘목포댁’이라고 한다.
더 불행한 사람이다.
가끔 보면 부모마저 포기한 사람이 있다.
가장 불행한 사람이다.
그러나 사람이 포기하면 그나마 작은 희망이라도 있다.
만약 하나님까지 포기한다면 오직 절망뿐이다.
그러나 하나님 편에서는 먼저 포기하는 일은 없다.

본문에 열거된 21가지 죄는 하나님을 멀리함으로 생기는 죄들이다. 결국 가장 시급한 과제는 어떤 죄를 안 지으려는 노력보다 예배와 말씀과 기도를 통해 하나님을 가까이하려는 노력이다. 죄를 안 지으려고 노력해도 그것이 뜻대로 되지 않는다. 자신이 목표로 한 어떤 한 가지 죄는 안 지을 수 있어도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또 다른 죄를 짓기 때문이다. 한 가지 죄 구멍을 막으면 다른 죄 구멍이 터지는 것이 인간의 모습이다.

중요한 것은 모든 죄를 한꺼번에 막는 길을 찾아 그 길로 가는 것이다. 어떤 길이 죄를 한꺼번에 막는 길인가? 하나님을 마음의 중심에 두고 모든 삶에서 하나님의 간섭을 받는 길이다. 하나님이 간섭하신다는 말은 하나님은 포기가 없으시다는 말이다. 하나님이 포기하지 않으면 어떤 상황이나 어떤 사람도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친구가 포기하고 목사가 포기하고 부모가 포기해도 하나님만 포기하지 않으면 언제나 구원의 길은 있고 넘치는 희망도 있다.

하나님은 어떤 사람을 포기하지 않는가? 복음의 정표를 내미는 사람은 어떤 일이 있어도 포기하지 않는다. 복음은 하나님께서 “나는 어떤 일이 있어도 너희를 포기하지 않겠다!”는 약속으로 주신 최상의 정표다. 그 복음의 정표를 가지고 하나님의 뜻 안에서 자신의 뜻을 포기한 사람은 결코 하나님이 포기하지 않는다. 사람은 죄 공장들로서 가만히 두면 망하고 죽는 길로 갈 수밖에 없지만 복음 안에는 언제나 사는 길이 있다.




간섭(간섭)과 유기(遺棄) 그리고 사랑과 미움(로마서 1:24-32)

- 방패 간, 건널 섭
- 남길 유, 버릴 기

하나님은 만물을 창조 하셨습니다.
어떻게 창조 하셨는가 하면 말씀으로 하셨습니다.
만물이 하나님 말씀으로 창조가 되었다는 것은 말씀이 곧 피조물을 살게 하는 생명의 근원이라는 것입니다.
또한 하나님 말씀은 곧 피조물과 창조주를 연결해 주고 있는 생명줄이기도 합니다.
이러면 피조물은 하나님 말씀과 떨어지면 죽음이 됩니다.
생명줄로부터 끊어져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하나님 말씀을 떠난 사람들을 죽은 자라고 합니다.
이렇게 되면 피조물 입장에선 “최고의 축복”은 하나님 말씀과 연결이 되어 있는 것이고 “최악의 저주”는 하나님 말씀과 끊어진 것이 됩니다.
하나님 말씀과 끊어져 있다 함은 독자적(獨自的)으로 산다는 말입니다.
성경은 이렇게 독자적으로 사는 것을 죄(罪)라고 합니다.

요한복음 1장을 보면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고 합니다.
그런데 “그 말씀”이 하나님이십니다.
만물이 “그” 로부터 지은바 되었습니다.
“그” 란? 말씀이 육신이 되어 오신 예수님입니다.
그런데 “그 말씀”이신 예수님 안에 생명이 있습니다.
이 말은 곧 말씀이신 예수님만이 생명이란 뜻입니다.
그 외에 생명이 없다는 말입니다.
그럼 피조물인 만물은 “그 말씀” 이신 예수님과 연결이 되어 있을 때만 산 자가 됩니다.
이렇게 말씀이신 예수님과 연결이 된 상태를 의(義)라고 합니다.

의(義)란?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말합니다.

그래서 성경은 “의(義)를 순종”이라고 하고, “불의(不義) 곧 죄를 불순종”이라고 합니다.
순종이라 함은 하나님 말씀에 매여 있다는 뜻이며, 불순종이라 함은 말씀과 떨어져 있다는 말입니다.

사울이 아말렉을 죽이라는 하나님의 명령에 불순종을 하자 사무엘이 하나님 앞에서는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수양의 기름보다 낫다고 합니다. 또한 거역하는 것은 사술의 죄와 같고 완고한 것은 우상에게 절하는 것과 같다고 했습니다.
사울 왕은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함으로서 스스로 나는 하나님의 생명으로부터 떠나 있습니다! 라고 자증(自證)을 하고 만 것입니다.

왜? 불순종을 합니까?
자기 생각이 있기 때문입니다.
“피조물이 자기 생각을 갖는 것이 죄”입니다.
피조물이 자기 생각을 갖게 되면 하나님의 생각에 토를 달게 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생각과 피조물의 생각은 하늘과 땅만큼이나 다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은 피조물이 자기 생각을 갖는 것을 죄라고 합니다.
죄가 하나님의 말씀을 자기 생각으로 판단하고 불순종을 불러 오게 하기 때문입니다.

사울 왕이 자기 생각으로 아말렉을 다 진멸치 않고 좋은 것들을 남겨두었던 것입니다.
사울은 좋은 것으로 하나님께 제사를 지내면 하나님이 기뻐 할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마음은 가상하지만 이 가상한 마음이 문제입니다.
하나님을 아말렉을 마귀로 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사울에게 아말렉을 진멸하라고 명령을 하실 때 내가 광야 길에서 아말렉이 이스라엘을 괴롭힌 것은 추억하노니 라고 언급을 하셨던 것입니다.
저 놈들은 내 백성을 괴롭힌 저주 받은 백성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니 인정사정을 보지 말고 다 진멸하라고 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사울은 육적으로 보았습니다.
그래서 좋은 놈들은 살려두고 잔챙이들만 죽였던 것입니다.
이게 하나님을 떠난 저주 받은 자들의 안목입니다.
이걸 악(惡)에 속하였다고 합니다.
사울이 하나님 말씀을 거역하여서 죽은 것이 아니고 죽은 자이기 때문에 하나님 말씀을 거역한 것입니다.
죽었기 때문에 하나님 말씀을 듣지 않고 자기 생각으로 행한 것입니다.
이건 마치 가인이 악(惡)에 속하였기 때문에 아벨을 죽인 것과 같습니다.
가인이 아벨을 죽인 것은 곧 하나님을 죽인 것과 같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분노를 아벨에게 쏟아 부은 것입니다.
가인은 독자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자신의 제사를 거부한 하나님의 처사를 용납 할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가인은 정성껏 제사를 지냈습니다.
가인은 하나님은 당연히 자신의 정성을 보아서 받아 주실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거부하셨습니다.
하나님이 가인의 제사를 거부한 것은 가인의 제사에 정성이 부족해서가 아닙니다.
하나님이 받으시는 제물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이건 우리 신앙에 그대로 나타납니다.
사람들은 신앙을 정성에 문제로 접근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정성으로 판단치 않고 “어떤 제물이냐”로 판단하십니다.

“하나님이 지목한 제물이냐”를 보십니다.
이를 “창세전에 예비한 한 몸”이라고 합니다.
하나님께 드려진 제물은 하나님이 친히 준비하십니다.
이걸 “여호와 이레” 라고 합니다.
우린 그 제물을 들고 나아가야 합니다.
그러므로 제사보다 제물이 중요합니다.
하나님이 받으시는 제물이 무엇인지를 아는 것이 급선무입니다.
제사보다 앎이 먼저이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이 받으시는 제물만 앞세우고 나가면 그 제물을 보시고 흠향하십니다.
제물을 드린 사람을 보고 흠향하는 것이 아니고 제물입니다.

히브리서 10장을 보면 하나님께서는 제사와 예물을 기뻐하지 않으시고 한 몸을 예비하셨다고 합니다.
예수님이 아버지에게 아버지여 보시옵소서! 두루마리 책에 기록한 대로 내가 왔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이 창세전에 예비한 한 몸입니다.
예수님이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여호와 이레의 양”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자기 몸으로 영원한 제사를 드린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은 받으시는 제물이 따로 있습니다.
“그 제물의 제사”를 원하십니다.
그 제물이 가인과 아벨의 제사 속에서 양으로 나타납니다.
양은 장차 오신 희생 제물 되신 예수님을 예표하고 있습니다.
히브리서 11장에서는 이를 두고 아벨은 믿음으로 더 좋은 제물을 하나님께 드렸다고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양으로 제사를 지낸 아벨의 제사를 흠향하신 것입니다.
아벨의 제사에는 피가 있습니다.
그 피가 곧 장차 오실 예수님의 피를 예표 합니다.
그러나 가인의 제사에는 피가 없습니다.
가인의 제사에는 인간의 정성만 있었지 의인의 희생으로 죄인이 구속을 받는 대속이 없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가인의 제사를 거부하신 것입니다.
하지만 가인은 이걸 알지 못합니다.
그러니 왜? 내 정성을 무시하느냐고 화를 발한 것입니다.
가인의 생각은 자신의 제사를 거부하고 아벨의 제사를 받아준 하나님의 결정이 틀렸다는 것입니다.
이게 자기 생각입니다.
그래서 가인은 하나님에 대한 적개심을 하나님이 제사를 받은 아벨을 돌로 쳐 죽인 것입니다.
신앙에 있어서 가장 경계하여야 하는 것은 자기 생각입니다.
신앙이란? 자기 생각을 버리고 하나님의 생각에 굴복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굴복을 순종이라고 합니다.
가인이나 사울은 자기 생각 때문에 하나님 생각을 거부하는 불순종을 낳은 것입니다.

성경은 이러한 사울이나 가인의 모습을 일컬어 악(惡)에 속하였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악(惡)에 속하였기 때문에 자기 생각으로 하나님께 불순종한 것입니다.
악(惡)에 속하였기 때문에 불순종을 한 것이지 불순종을 하였기 때문에 악(惡)한 자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이 부분을 잘 이해하세요.
마귀에게 속하였기 때문에 하나님 말씀을 거역하는 것입니다.
그 속에서 “불순종의 영”이 역사를 하기 때문입니다.
가룟 유다가 예수를 판 것도 사단에게 속하였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성경은 가룟 유다의 배신을 두고 자기 길로 간 것이라고 말해주고 있습니다.
이처럼 죄는 항상 하나님 말씀에 불순종하는 모습으로 나타나게 됩니다.
죄는 항상 자신을 낳아 준 부모의 말씀을 경홀히 여기는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성경에서의 부모는 하나님과 같습니다.
이스라엘에게 부모란? 하나님의 계시 전달자입니다.
부모 말을 안 듣는다는 것은 곧 하나님 말씀을 안 듣는다는 것과 동일합니다.
그래서 율법에서 부모를 거역하는 자는 하나님을 거역한 것과 같은 동일한 중수의 죄로 물어서 돌로 쳐 죽이라고 한 것입니다.
인간론적으로도 아이들이 부모의 말을 듣지 않는 것도 다 죄 때문입니다.
자식들이 가장 만만하게 생각하는 것이 부모에요.
자기를 낳아주고 키워주고 하니까 가장 존경하고 감사하고 두려워하여야 할 분이 부모잖아요.
그런데 이 세상에 모든 자식들은 부모를 가장 우습게 여겨요.
만만하게 보고 말을 안 들어요.
이게 죄인의 어리석음입니다.
가장 어리석음이 생명을 주신 분을 업신여기는 것입니다.
이 모두가 뱀(살모사) 새끼들이라서 죄가 그들을 주장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자식들이 부모의 말을 거역하는 것은 인간이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는 것의 표상이기도 합니다.
죄가 그들을 장악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아이들이 부모의 말을 안 들을 때 우리는 우리가 곧 하나님 앞에서 아이들처럼 말을 안 듣는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내가 곧 참 부모이신 하나님 말씀을 안 듣는 자식과 같아요.
죄인은 자기를 낳아준 하나님을 죽인 패륜아에요.
하나님은 우리가 하나님께 불순종하는 것을 우리 아이들이 말을 안 듣는 것으로 대신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너희들이 꼭 너희 자식들처럼 내 말을 안 듣는 자라고 고발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은 하나님과 단절이 된 것이 얼마나 큰 저주인가를 살펴보고자 합니다.
단절(斷絶)이란? 끊어졌다는 말입니다.
그러니 하님으로부터 단절이란 하나님의 간섭에서 벗어나 있다는 뜻입니다.
창세기의 창조 사건을 보게 되면 피조물은 늘 하나님 말씀에 붙잡혀 있음을 보게 됩니다.
하나님이 말씀 하시매 그대로 되었다는 것은 곧 피조물이란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는 자들이란 뜻입니다.
순종의 끝엔 생명이 있고, 불순종의 끝엔 죽음이 있습니다.
생명(生命)이란? 어원적으로 보면 “살으라는 명령”입니다. 즉 하나님이 살으라고 명령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너 살어! 그러면 살게 되어 있어요.
왜냐하면! 하나님 말씀 자체가 생명의 능력(能力)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 속에는 생명의 기운(氣運)이 있기 때문에 하나님 말씀이 떨어지면 말씀이 의도하는 대로 살아 움직이는 모습으로 나타날 수밖에 없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이 말씀 하신대로 살아서 움직이는 것을 생명이라고 합니다.
쉬운 말로 하나님이 나무에게 꽃을 피워! 그러면 나무는 꽃을 피워내고!
바람아 불어! 그러면 바람이 불어요.
신앙적으로 말하면 너 예수 믿어! 그러면 예수가 믿어집니다.
예수님이 오셔서 이걸 그대로 보여주셨어요.
제자들이 바다를 항해하다가 풍랑을 만납니다.
배에 물이 들어와 배가 침몰할 지경에 이릅니다.
그러자 제자들이 주무시는 예수님을 깨웁니다.
잠에서 깬 예수님이 바람을 보고 꾸짖습니다.
바람아! 이제 그만 잠잠해라!
그러자 순식간에 바람이 그치고 물결이 잔잔해 집니다.
바람이 예수님 말씀에 잔잔해 진다는 것은 바람이 예수님 말씀을 알아듣는다는 뜻입니다.
바람이 예수님과 연결이 되어 있다는 말입니다.
그러니 바람이 예수님 말씀을 알아듣고 즉시로 잠잠해 진 것입니다.
예수님이 바람을 꾸짖는다는 것은 바람도 하나님의 말씀에서 나온 생명이란 말입니다.
그러니 바람이 예수님 말씀을 알아듣고 즉시로 조용해 진 것입니다.
예수님이 귀신이나 병도 말씀으로 고칩니다.
귀신도 예수님 말씀에 즉시로 나가고!
병도 예수님 말씀에 즉시로 고쳐집니다.
이는 귀신이나 병도 예수님의 다스림 아래 있다는 말입니다.
귀신이나 병도 만물 속에 있는 것들입니다.
만물 안에 속한 것이기 때문에 예수님이 말씀 하시매 그대로 순종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이 세상의 모든 우주 만물이 수천 년 동안 질서 정연하게 움직이는 것은 곧 하나님의 말씀에 매여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해가 바뀌고 계절이 돌고 돌아도 어김없이 그 자리로 찾아오는 것입니다.
또한 풀 한 포기 꽃 한 송이도 어김없이 철을 따라서 하나님이 명하신 대로 피고지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진달래” 보고 너~ “봄”에 꽃을 피워! 그러니 “진달래”는 봄이 되면 꽃을 피우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국화”에게 너~ “가을”에 꽃을 피워! 그러니 “국화”는 어김없이 가을에 꽃을 피우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동백”을 보고 야! 너는 “겨울”에 꽃을 피워! 그러니 “동백”은 그 추운 겨울에 꽃을 피우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참새에게 살라고 하니 참새가 살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야! 너 살어! 그러니 제가 살고 있는 것입니다.
이게 생명이고 창조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도 히브리서 1장 3절에서 하나님께서 만물을 말씀으로 붙잡고 계신다고 증거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창세기 1장을 보면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시고 보시기에 좋았더라고 합니다.
말씀대로 되시니 보시기에 좋은 것입니다.
무엇이 보시기에 봏은 것이냐?
하나님이 말씀하신 대로 존재하는 것입니다.

생명이 뭐냐?
하나님이 명령하신 대로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 말씀에 다스림을 받는 것을 말합니다.
그런데 죄가 하나님과의 관계를 깨트리고 말았습니다.
어떻게 깨어졌는가 하면 하나님 말씀에 불순종하게 만들었어요.
죄가 창조주 하나님을 떠나 독자적으로 살게 만들어 버렸어요.
하나님으로부터 생명을 공급 받아야지만 살 수가 있는 피조물이 하나님과 떨어지고 말았어요.
그러자 생명의 공급이 끊겨버렸습니다.
그럼 피조물은 자기 안에 있는 수한(壽限)이 다하면 죽게 됩니다.
수한(壽限)이 다 하였다는 것은 정한 기간 동안만 살다가 죽는다는 말입니다.
어떤 사람은 100년이라는 수한(壽限)을 받았고!
어떤 사람은 70년이라는 수한(壽限)을 받았고!
어떤 사람은 30년이라는 수한(壽限)을 받았고!
어떤 사람은 10년이라는 수한(壽限)을 받고 태어납니다.
그 수한(壽限)이 다하면 죽습니다.
마치 핸드폰 밧데리가 정한 시간이 되면 방전이 되는 것과 같습니다.
밧데리는 충전을 하여야 살아 있어요.
밧데리에게는 충전기가 곧 생명의 끈인 것입니다.
우리 인간도 마찬가지입니다.
창조주이신 하나님과 연결이 되어 있어야 삽니다.
하나님과 떨어지면 살았다 하나 실상은 죽은 것입니다.

성경에서는 이렇게 하나님과 끊어진 상태로 자기 수한(壽限)으로 살아가는 자들을 “산 영(靈)”이라고 합니다.
산 영(靈)은 밧데리처럼 자기 수한(壽限) 만큼만 살아요.
계속하여서 하나님으로부터 생명을 충전(充電) 받지 않으면 죽어요.
이러한 세상에 예수님이 “살려주는 영(靈)”으로 오셨습니다.
살려주는 영(靈)이란? 글자 그대로 살려주는 분입니다.
죽은 자를 살려주세요.
마치 방전된 밧데리에 전기를 공급하여서 충전으로 살려내듯이 예수님이 살려내는 것입니다.
살려내고 생명을 계속하여 공급을 해 주십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우리 안에 와 계신 것입니다.
이걸 구원이라고 합니다.
구원이란? 생명의 말씀에서 떨어진 것을 다시 생명의 말씀에 붙잡아 매어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구원을 받은 성도는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는 모습으로 살아가게 됩니다.
여기서 순종이란? 완전하게 하나님 말씀대로 산다는 말이 아니고 하나님의 뜻을 붙좇게 되는 경향성(傾向性)을 말합니다.
이는 성령이 그 안에서 “순종하는 영(靈)”으로 역사를 하기 때문입니다.

본문에서 눈여겨보아야 할 말씀은 “하나님께서 버려두셨다”는 것입니다.
버려주셨다는 것은 “간섭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니들 맘대로 살으라”는 말입니다.
생명을 공급 받아야지만 살아가는 피조물이 생명줄에서 끊어져서 홀로 독자적으로 산다는 것은 저주입니다.
저주(詛呪)가 뭐냐?
하나님이 간섭하지 않고 유기(遺棄)시켜 버린 것입니다.
왜? 하나님으로부터 유기 당함이 그렇게 큰 저주인가를 알아야 합니다.

“24절에서는” 하나님께서 저희를 “마음의 정욕대로 더러움에 내어 버려두니까” 피조물을 하나님처럼 섬기는 모습으로 나타나더라고 합니다.

인간들이 왜? 하나님을 우상숭배하고 무당을 찾고 귀신을 섬기느냐 하면 하나님이 방치 시켜 놓았기 때문입니다.
생명줄이 끊어졌기 때문에 죽을 짓을 하는 것입니다.

 “26절에서는” 하나님께서 “저희를 부끄러운 욕심에 버려두니까” 이성(理性)을 사랑하여 생명을 낳는 사랑을 하지 않고 생명도 낳지 못하는 동성(同姓)을 사랑하는 역리(逆理) 현상이 나타나더라고 합니다.

이건 단순하게 동성애를 말하는 것이 아니에요.
하나님을 떠나 생명과 상관없는 일을 한다는 뜻이 포함되어 있어요.
하나님은 생명의 하나님입니다.
산 자의 하나님이에요.
생명의 하나님과 연결이 되어 있으면 생명을 낳는 일을 합니다.
그러나 생명이신 하나님과 떨어지면 생명을 낳지 못하는 일을 하게 되어요.
하나님은 이성을 통하여서 생명을 낳게 하셨습니다.
동성(同性)이란? 같은 종이란 말입니다.
이성(理性)이란? 다른 종이란 말입니다.
중요한 말입니다.
인간은 흙에서 났습니다.
흙이 흙을 사랑하는 것은 동성(同性)을 사랑하는 것과 같습니다.
흙에게 있어 이성(理性)이란? 하늘입니다.
하늘에 것을 사랑하여야 생명이 잉태합니다.
그런데 인간이 범죄하고 난후 흙에 것을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라는 이 세상에 것을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이 모든 것은 세상으로부터 온 것입니다.
마귀가 준 것입니다.
세상엔 생명이 없습니다.
세상 것을 사랑하면 생명이 잉태 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세상을 사랑하는 것을 간음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여야 할 자가 세상을 사랑하고 있어요.
흙이 흙을 사랑하고 있어요.
이게 영적 동성애입니다.
그러므로 세상을 사랑하는 것은 생명을 낳지 못하는 동성애적인 사랑인 것입니다.
죄는 생명을 낳지 못하는 사랑을 하게 합니다.
그러므로 죄는 인간을 흙에 붙잡아 두는 일을 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땅에 일을 생각하는 자는 십자가의 원수라고 했어요.

“28절에서는” 하나님께서 저희를 “그 상실한 마음대로 내어버려두시니까” 이웃을 헤치는 살인과 미움과 강포한 모습으로 나타나더라고 합니다.

죄는 항상 생명을 죽이고 파멸케 하는 것으로 역사를 합니다.
이는 죄가 생명이신 하나님의 속성과 반(反)하는 모습으로 역사하기 때문입니다.
위에 언급한 각각의 말씀 속에서 특히 중요한 말씀은 “하나님께서”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버려두셨다”고 하는 말씀입니다.
“버려두셨다”는 말은 간섭하지 않겠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산 자의 하나님입니다.
즉 생명을 살리는 일을 하십니다.
그러나 죄는 생명을 죽이는 것으로 역사합니다.
그러니 죄인을 하나님이 간섭하지 않으면 죽이는 일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죄가 있는 곳에 죽음이 넘치는 것은 하나님께서 버려두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버려두셨다 함은 죽게 내 버려두었다는 말입니다.
그냥 그렇게 흙에서 나서 흙을 퍼 먹고 살다가 죽으라고 합니다.
그래서 인간들은 그냥 죄 아래서 태어나서 죄의 종노릇하다가 그 죄값으로 죽습니다.
이걸 신약의 유다에서는 흑암으로 돌아가는 유리하는 별이라고 했어요.
죄인은 끈 떨어진 연처럼 죄 아래서 출생하여서 죄 가운데 살다가 지옥으로 갑니다.
자기 맘대로 살다가 지옥으로 갑니다.
이 모두가 하나님은 죄에 대한 보응으로 그럼 “니 맘대로 살라”고 저주하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간섭을 포기 하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니들 맘대로 살으라는 말은 죄인 입장에선 야~ 이제부터 자유다! 라고 하지만 실상은 그건 자유가 아니라 죽음입니다.

‘허클베리 핀’과 ‘톰 소여’의 이야기를 아시지요.

간섭을 당하는 자와 간섭을 당하지 않는 자의 결말을 이야기하고자 함이니 내용이 동화와 다르더라도 의미만 참고하세요.
헤클베리 핀은 자유 합니다.
자기 맘대로 살 수 있다는 의미에서 자유 합니다.
반면에 톰 소여는 자유가 없습니다.
사사건건 간섭을 받습니다.
톰 소여는 간섭하는 사람이 있고 헤클베리 핀은 간섭하는 사람이 없습니다.
간섭 당하는 톰 소여의 눈에는 헤클베리 핀이 너무도 부럽습니다.
나도 내 맘대로 살아 봤으면 좋겠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러한 동경도 잠시입니다.
장성하고 난 후 두 사람의 운명은 극과 극으로 달라집니다.
허클베리 핀은 망나니로 살고 톰 소여는 예의범절을 갖춘 자가 됩니다.

이 이야기는 바로 신자와 불신자의 이야기로 적용해 봅니다.
신자는 하나님으로부터 사사건건 간섭 당하고 살아갑니다.
하지만 불신자는 간섭 당하지 않고 살아갑니다.
세상이라는 삶에서는 불신자들이 훨씬 편해 보입니다.
그러나 그 끝은 지옥입니다.
신자는 지독하게 간섭 당합니다.
간섭 당할 때마다 아픕니다.
그러나 그 끝은 천국입니다.
그래서 성경에서는 하나님의 사랑을 많이 입은 자일수록 하나님으로부터 지독하게 간섭을 당한 것을 보게 됩니다.
사도 바울의 간증을 들어보세요.
얼마나 간섭을 당하였으면 살 소망까지 끊어졌다고 합니다.
먹지 못하고, 자지 못하고, 욕을 먹고, 얻어맞고, 헐 벗고, 굶주렸다고 합니다.
그런데 성경은 이걸 사랑이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많이 간섭 당할수록 이 세상에서의 삶은 곤핍해지고 아픕니다.

반면에 간섭 당하지 않으면 편합니다.
하나님이 죄인을 간섭하지 않으면 어떻게 될까요?
허클베리 핀처럼 자기 맘대로 살아가겠지요.
죄인이 자기 맘대로 하면 어찌 될까요?그야 당연히 죄 짓다가 죽겠지요.

죄의 삯은 사망입니다.
이는 한 마디로 죄인은 죽을 짓만 하게 되어 있다는 말입니다.
죽은 자이니 죽을 짓만 하다가 영원한 죽음인 지옥으로 가는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이 내 버려주셨다는 것은 저주가 됩니다.
자유가 아니라 죽음입니다.
복이 아니라 저주입니다.

복(福)이란? 하나님의 간섭하심입니다.
죄인을 하나님이 마음을 간섭하지 않으면 죄인들 맘대로 살게 됩니다.
죄인 맘대로 살면 죽을 짓만 골라서 하게 됩니다.
저주란? 내가 내 마음을 억제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죄인은 본능(本能)이 이끄는 대로 말하고 행동하고 움직이게 되어 있어요.
죄인이 본능대로 살면 파멸이에요.
죄인이 자기 맘대로 살아가면 어떤 식으로서 살게 될까요?
나만 살고 남을 다 죽이게 되어요.
왜냐하면! 죄인은 자기 밖에 모르기 때문입니다.
내가 있고 남도 있어요.
내가 있고 부모형제도 있어요.
자식도 나 보다 앞설 순 없어요.
아내나 남편도 나 보다 앞 설 순 없어요.
그 누구라도 날 힘들게 하면 싫어요.

내가 신(神)이에요.
내가 곧 하나님이란 말입니다.
나는 나 이외 다른 신(神)이 없어요.
하나님도 나 보단 우선하지 못해요.
내가 있고 하나님도 있어요.
이게 죄인이에요.
죄인들은 내가 살기 위해서 남을 얼마든지 해치는 자들입니다.
그러므로 죄인이 살아가는 세상에선 뺏고 빼앗기는 전쟁이 끊이지 않고 일어나는 것입니다.
이 전쟁이 살인으로 나타나고, 도적질로 나타나고, 사기로 나타나고, 시기와 질투와 미움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십계명으로 이를 말해주셨어요.
십계명(十誡命)은 죄의 근원을 말해주고 있어요.
죄의 모습이 십계명에서 이웃을 헤치는 모습으로 나타난다고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우상숭배나, 살인이나, 도적질이나, 사기나, 간음이나 하는 것들은 모두가 자기 유익을 위하여 남을 헤치는 것들입니다.

십계명(十誡命)은 인간의 어그러진 면(面)들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죄가 십계명(十誡命)이 말하는 악함 들을 생산해 내게 하더라는 것입니다.
이처럼 죄의 근본(根本)은 자기 유익을 챙기는 식으로 나타납니다.
이게 모두가 하나님께서 간섭하지 않아서 나타나는 현상들입니다.
하나님의 생명에서 떨어진 죄인은 무슨 일을 하여도 자기를 위하여 살아가요.

자기중심으로 살게 되면 세상에 모든 것들이 자기 유익을 위한 수단이 되고 맙니다.
그럼 모든 피조물이 전부 자기 유익으로 산다고 하면 어찌 될까요?
서로가 서로를 잡아먹는 형국이 되겠지요.

인간들 세계가 바로 이런 모습입니다.
서로가 서로를 잡아먹고 살아가고 있어요.
내게 유익이 된다고 하면 남이야 죽든 말든 개의치 않습니다.
서로가 자기 유익을 위해서 남을 헤친다고 하면 결국 자기도 망하고 남도 망하게 됩니다.

이게 죄인들의 삶에 모습입니다.
이 모두가 하나님께서 버려두셨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은 하나님이 유기하면 어떻게 되는지를 말해주고 있습니다.
그럼 이제부터 하나님으로부터 유기 된 것이 어째서 그렇게 큰 저주인가를 살펴보기로 합시다.

이제부터 피조물인 인간이 하나님으로부터 유기(遺棄) 당함이 왜? 무서운지 중요한 말을 하니 깊이 생각을 하시면서 들어야 합니다.

에덴동산은 묵시 속에 있는 천국의 모형(模型)입니다.
천국을 일컬어 낙원이라고 합니다.
낙원(樂園)이란? 즐겁고 기쁜 동산이란 말입니다.
이런 상태를 “평화” 라고 합니다.
평화(平和)란? 구분이 없고 하나 된 상태를 말합니다.
한마디로 차별이 없는 상태를 말합니다.
차별이나 차등이 없으니 만족함이 되는 것입니다.
만족할 때 마음에 쉼을 얻고 안식이 되어요.
그러므로 천국을 일컬어 안식(安息)하는 세계라고 합니다. 

창세기 1장의 창조 사건을 가지고 보면 하나님이 언제 안식을 합니까?
엿새 동안 모든 것을 다 이루시고 일곱째 날에 쉬셨지요.
일곱째 날은 하나님께서 창조를 끝내시고 쉬신 날입니다.
더 이상 일할 것이 없는 상태가 안식의 상태입니다.
그러니 천국을 창조 사건으로 보면 창조를 마치고 일곱째 날 안식하는 날입니다.
안식이란? 더 할 일이 없다는 말입니다.
할 일이 남아 있으면 안식 할 수가 없어요.
안식이 되려면 미완료(未完了)가 되면 안 되어요.
완료(完了) 상태가 되어야 다 이루심의 안식이 되는 것입니다.
완료(完了)란? 변화나 자람이 필요치 않아요.
그래서 하나님은 에덴동산에 온전한 자로서의 아담과 하와를 창조하신 것입니다.
아담은 더 장성 할 것이 없는 자로 창조가 되었습니다.
온전한 자로 창조가 되었다는 말입니다.
물론 아담과 하와가 생명과를 먹고 영생으로 나아가는 일에 있어서는 미완료에요.
영생이라는 더 온전한 모습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하지만 제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아담과 하와가 어린아이가 아니라 장성한 자로 창조가 된 것을 말하고자 함입니다.
어른으로 창조가 되었기 때문에 자람이 없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결혼을 할 수 있는 정도로서의 어른이라는 입장에서 온전하다고 하는 말이니 참고하세요.
아담은 예수님의 모습이기도 하지만 천국에서의 구원 받은 성도의 모습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아담과 하와를 장성한 자로 창조를 하셨습니다.
장성하였다 함은 더 이상의 자람이 필요치 않는 생명의 완전(完全)함 또는 완성(完成)된 모습이라고 볼 수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에덴동산의 아담은 구원받은 천국백성의 모형인 것입니다.
이처럼 에덴동산은 부족함이 없는 완전한 곳입니다.
“완전(完全)의 세계이고!”
“완성(完成)의 세계이고”
“완료(完了)의 세계!” 입니다.

에덴동산은 천국의 모형이니 천국은 완전하고 완성되고 완료되어서 부족함이 없는 곳입니다.
천국에는 아담과 하와처럼 더 자람이 필요가 없는 온전한 자들이 살아가는 곳입니다.
자람이나 변화됨이 없는 곳이에요.
그래서 아담과 하와는 에덴동산에서 아이를 낳는 이야기가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그러셨지요.
어떤 사람들이 계대결혼 법으로 예수님을 시험하잖아요.
어떤 집에 형이 자식을 생산하지 못하고 죽었는데 율법에 의하면 동생이 그 형수에게 들어가 아들을 낳아 주어야 하는데 그 동생이 자식을 낳지 못하고 죽어버렸어요.
이러한 식으로 일곱 형제가 계대혼인 법에 의하여 형수와 관계를 하고 죽었습니다.
그럼 천국에 가면 이 여자는 누구의 아내가 되느냐고 아주 난감한 질문을 합니다.

이러한 질문은 이 세상 관점에서의 질문입니다.
그러자 예수님이 천국에서의 모습으로 대답을 합니다.
천국에는 시집가고 장가가는 일이 없다고 합니다.
그러니 누구의 아내라는 것이 없지요.
오로지 모든 사람은 예수님의 신부로서 존재하는 겁니다.
시집가고 장가가는 일이 없으니 아이를 낳는 일도 없는 것입니다.
천국은 아이를 낳아서 키우는 곳이 아니에요.
아이를 낳지 않는다는 것은 생명의 자람이 필요치 않다는 뜻입니다.

자람이란? 미완료(未完了)입니다.
미완료(未完了)가 되면 안식 할 수가 없어요.
미완료가 되면 완료를 위하여 나아가야 하는 일이 남아 있어요.
그럼 안식이 되지 않잖아요.
만약에 에덴동산에서 아담이 아이를 낳았다고 한다면 자라가야 하는 미완료의 상태가 되어요.
그럼 에덴동산은 안식의 세계가 될 수가 없어요.
에덴동산에서 미완료로서의 상태가 되면 안 되잖아요.
갓난아이는 성장을 전제로 하는 미완료 상태에요.
키워야 하는 일이 남아 있다는 말입니다.
그런 다 키울 때까지 안식이 될 수가 없잖아요.
그래서 에덴동산에서는 아이를 낳고 키우는 이야기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에덴동산은 모든 것이 “완전(完全)”하고, “완성(完成)”이 된 “완료(完了)”의 세계인 것입니다.
“완(完)” 자가 들어가는 것은 더 이상 변화나 자람이 필요치 않다는 말입니다.
천국은 모두가 어린 양의 신부로서 충만한 자로 살아가는 곳입니다.
그러니 천국에서의 삶은 창조 사건으로 보면 다 이루시고 안식하는 일곱째 날이 되는 것입니다.
만약에 역사 속에서도 하나님이 생명을 미숙아(未熟兒)로 낳지 않고 아담을 창조하듯이 장성한 아이로 낳으면 자람이 필요치 않겠지요.아이의 출생을 성도의 구원으로 이해하여 봅시다. 

예를 들어서 성도가 거듭나자 말자 하나님의 은혜를 다 아는 사람이라고 한다면 구원하는 즉시 천국으로 데리고 가야 할 것입니다.
더 이상 역사 속에 둘 필요가 없어요.
더 가르치고 배울 것이 없는데 무엇 때문에 역사라는 고난 속에 던져둡니까?
얼른 데리고 가야지요.
하지만 역사 속에 남겨 둔 것은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으로서의 자라감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으로서의 자람이란? 하나님의 마음을 다 헤아리는 그런 상태를 말합니다.
사도바울은 온 세계 성도들을 위하여 기도했어요.
하나님의 그 은혜와 영광을 더 많이 더 깊이 더 넓게 알아가기를 기도했어요.
그러니 성도는 이 역사라는 곳에서 천국에서 세세토록 어린 양에게 찬미하여야 하는 것을 배워가는 것입니다.
역사 속에서 하나님의 그 은혜가 너무도 커서 천국에서 세세토록 찬미 할 수밖에 없는 것을 깨달아가는 것입니다.
이 은혜를 알게 하려고 하나님이 끊임없이 간섭을 하시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어떠한 것인지를 예수님을 통해서 살펴봅니다.
예수님이 30세에 사생애를 마치고 공생애를 시작하잖아요.
사생애란? 나를 위하여 살던 때를 말하고!
공생애란? 아버지의 뜻을 위하여 자신을 버리는 때를 말합니다.
예수님이 30세 때 공생애를 시작하셨다는 것은 역사 속에 더 이상 존재할 필요가 없이 장성하였다는 뜻입니다.
이제 장성한 자로서 아버지 뜻을 온전히 이룰 수 있게 되었단 말입니다.
공생애를 시작한다는 것은 장성하였다는 뜻이에요.
이스라엘에선 30세가 되면 장성한 자로 간주해요.
그래서 회막에서 일을 할 수가 있습니다.
제사장으로서의 임무를 수행할 수가 있어요.
30세란? 완전한 자를 상징해요.
요셉이 30세 때 총리가 되어서 나라의 일을 맡아서 하게 됩니다.
또한 다윗도 30세에 왕이 되어서 이스라엘을 다스리게 됩니다.
예수님도 30세가 되어서 제사장 일을 하게 됩니다.
그럼 에덴동산에서 창조 된 아담처럼 자람이 필요치 않는 장성한 아이를 낳는다고 한다면 역사 속에서 아이를 낳아도 30살짜리를 낳아야 합니다.
미숙아(未熟兒)를 낳으면 안 되어요.
30살짜리 아이를 낳으면 부모가 키우고 자시고 할 필요가 없을 겁니다.
그냥 낳아 놓으면 스스로 알아서 살아 갈 테니까요?
그런데 이 세상에서 낳아지는 모든 생명은 장성한 것으로 태어나는 것이 없어요.
전부 미숙아(未熟兒)로 태어나요.
부모님이 보살핌이 필요한 자로 태어납니다.
미숙아(未熟兒)는 부모의 보살핌을 전제로 하고 있어요.

미숙아(未熟兒)란? “아닐 미(未)”에, “익을 숙(熟)”에, “아이 아(兒)” 자를 써요.
어원적으로 말하면 “아직 익지 않은 사람”이란 뜻입니다.
“덜 익은 인간”이란 말입니다.
“사람이지만 아직 온전하게 사람 구실을 할 수가 없는 자”란 뜻입니다.
온전한 자란? 자기 인생을 자기가 책임을 질수 있는 자란 말입니다.
미숙아(未熟兒)는 자기 인생을 자기가 책임 질수가 없어요.

과실로 말하면 땡감처럼 텁텁하단 말입니다.
홍시처럼 말랑말랑하고 달콤하려면 변화와 자람이 있어야 합니다.
미숙아(未熟兒)는 아직 홍시처럼 익어야 함이 남아 있는 미완료의 상태인 것입니다.
그러니 역사 속에서 태어나는 모든 생명은 미숙아로 태어난다는 것은 이 세상은 완전(完全)하고 완성(完成)되고 완료(完了)된 세계가 아니란 말입니다.

부모의 보호함이 필요한 곳입니다.
그래서 역사 속에서 낳아지는 모든 생명은 미완료(未完了)로서 만물을 만드신 하나님의 보살핌을 받고 완료(完了)로 나아가는 모습으로 존재하는 것입니다.
다른 말로 하나님의 생명을 공급받음으로서 존재하는 모습으로 있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생명을 공급받아야지만 살 수가 있는 세계에서 하나님의 생명줄에서 떨어져 있다는 것은 저주인 것입니다.

 

아담은 에덴동산에서 쫓겨난 후에 아이를 낳기 시작합니다.

여기서 눈여겨보아야 할 대목이 어째서 에덴동산에서는 아이를 낳지 않고 에덴동산에서 쫓겨난 후에 아이를 낳았을까요?

이는 에덴동산 바깥은 역사로서 미완료의 세계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간섭이 절대로 필요한 곳이란 말입니다.
하나님의 간섭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미완료인 세상에서 하나님으로부터 버려짐을 당하였다는 것은 곧 죽은 것이나 다름없어요.
그러니 하나님께서 죄인을 버려두셨다고 하는 말씀이 얼마나 큰 저주인지 알겠지요.
간섭하지 않고 버려두셨다는 것은 죽이겠다는 뜻입니다.
반면에 간섭하심이 얼마나 큰 축복인줄 알겠습니까? 

성경은 “완료의 세계를 묵시”라고 하고, “미완료의 세계를 역사”라고 해요.
에덴동산은 묵시(黙示)이고, 에덴동산 밖은 역사(歷史)입니다.
그러므로 “에덴동산은 완료(完了)”의 세계이고, “에덴동산 밖은 미완료(未完了)”인 세계인 것입니다.
미완료(未完了)란? 아직 다 이르지 못하였기 때문에 계속해서 완료를 향하여서 뭔가 변화하고 장성하여야 할 일이 남아 있다는 말입니다.
여기에 반드시 부모의 간섭이 필요해요.
마치 아이를 낳아서 기르는 것과 같이 아직 장성하도록 이르러야 할 것이 남아 있습니다.
그러니 역사에서는 계속하여 장성한 것으로 자라가야 하기 때문에 안식을 할 수가 없습니다.

무슨 말인지 이해가 되시지요.
자람이 있으면 안식이 될 수가 없습니다.
자람이란? 미완료(未完了)이고! 미완성(未完成)이고! 미완전(未完全)입니다.

안식(安息)이 되려면 “미(未)” 라는 것이 없어야 합니다.
여기서 “미(未)란? 아직 이르지 못하였다”는 뜻입니다.
뭔가 할 일이 남아 있다는 뜻입니다.

안식을 하려면 미(未) 라는 부족함이 없어야 합니다.
부족함이 있으면 안식 할 수가 없어요.
모든 것이 보시기에 좋았더라가 되어야 안식이 됩니다.
천국(天國)은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의 상태로서의 세상입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다 이루어진 상태가 천국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에덴동산에서는 자람이 필요치 않는 곳입니다.
그래서 에덴동산에서는 자람이 필요한 아이의 출생이 없는 것입니다.
완료의 세계이기 때문에 아담과 하와가 혼인(婚姻)을 하였어도 아이를 낳지 않은 것입니다.
요한계시록의 천국에 모습을 보아도 어린양과 혼인하는 것은 있어도 아이를 낳고 키운다는 이야기가 없는 것도 이러한 이유입니다.

 

아이를 낳고 키우고 하는 것은 역사에서 필요한 것입니다.
역사는 묵시의 반대입니다.
묵시가 완료(完了)라고 한다면, 역사는 미완료(未完了)입니다.
묵시가 쉼이라고 하면, 역사는 수고로움입니다.
“묵시는 부족함이 없는 완(完)이고!”
“역사는 아직 이르러야 하고 모자라는 미(未)”입니다.

이처럼 역사는 묵시와 다른 세계입니다.
서로가 서로를 드러내주고 있습니다.
묵시는 일곱째 날로서 안식일이지만 역사는 수고하는 여섯째 날에 속하여 있습니다.
성경에 일곱째 날 이후에 다른 날이 없는 것은 모든 것을 마치셨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역사에서 순환하는 주기(週期)를 일주일이라는 싸이클로 돌아가게 하신 것도 모두가 창조의 사건을 알려주고자 하는 것입니다.하루에서 엿새까지는 역사에 속한 날을 상징하고 일곱째 날을 안식일로 정해 놓은 것은 묵시의 세계를 알려주고자 함입니다.
일곱째 날인 안식일에 교회에 모이는 것을 잠깐 살펴보고 갑시다.
하나님께서 엿새 동안 열심히 일하고 일곱째 날을 안식일로 지키라고 하지요.
이는 엿새는 역사에 속한 날을 상징하고, 일곱째 날은 묵시에 속한 날을 상징해요.
그래서 엿새 동안은 수고하는 날로 살고 일곱째 날은 안식하는 날로 삼은 것입니다.
이건 안식일을 통해서 장차 역사를 떠나 묵시인 천국에서의 영원한 안식을 가르치기 위함이에요.
엿새는 일곱째 날을 위하여 있는 것입니다.
일곱째 날을 겨냥하고 있어요.
모든 수고가 일곱째 날 안에서 완료가 되어요.
이게 창조 사건이 주는 교훈이에요.
우리가 일곱째 날인 주일날에 교회에 모이는 것은 구원받은 성도가 세상과 다른 천국에서의 안식을 하는 모습으로서 교회에 모이는 것입니다.
이 의미를 가르치려고 엿새 동안 열심히 일을 하고 일곱째 날에는 안식하도록 하신 것입니다.
안식을 한다고 하니 각자의 집에서 쉬게 한 것이 아니고 성전에 모여서 하나님께 예배하고 성도 간에 교제케 하였어요.
안식일에는 축제를 벌였어요.
이건 천국에서의 기쁘고 즐거운 삶에 모습을 미리 맛보게 하신 것입니다.
너희가 장차 가야 할 천국이 이런 곳이다! 라는 것을 알려 주고자 일곱째 날 안식일에 성회(聖會)로 모이라고 한 것입니다.
구약에선 안식일 날 일을 해서도 안 되지만, 성회에 참석치 않고 집에서 빈둥거리고 놀아도 돌로 쳐 죽였어요.
그건 안식일을 어기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구약의 안식일에는 모두가 성전에 모여서 하나님께 예배하고 함께 떡을 떼고 나누면서 축제를 벌린 것입니다.
우리가 주일에 교회에 모이는 것은 이 의미로 모이는 것입니다.
그러니 주일은 일곱째 날을 상징하는 묵시에 속한 날입니다.
주일을 성수하라는 말은 이러한 일곱째 날의 의미 안에서 모이라는 것입니다.
이런 의미를 모르고 모인다면 그냥 엿새에 속한 날에 모임일 뿐입니다.
세상 사람들의 모임이 되어요.
그건 주일로 안식하는 것이 아니고 일요일로 쉬는 것이에요.
우리가 천국을 사모하고 그리워하듯이 주일을 기다려야 해요.
교회가 그리워져야 해요.
그래서 주일을 하루 이틀 사흘,,,,,이라는 식으로서의 날이 아니고 “주의 날”이라고 합니다.

“주의 날”이란? “주님의 날”이란 말이에요.

 

“주의 날”은 예수님이 부활 하신 날로서 묵시에 속한 날이에요.

주의 날은 월, 화, 수, 목, 금, 토, 일과 달라요.

성령 안에서 주님과 함께 하면 월요일도 주의 날이고, 화요일도 주의 날이고, 수요일도 주의 날이고, 목요일도 주의 날이고, 금요일도 주의 날이고, 토요일도 주의 날이고, 일요일도 주의 날인 것입니다.

 

그러니 구원 받은 성도는 묵시에 속한 자로서 항상 주의 날로 사는 것입니다.

주일에 교회에 모이는 것은 역사와 묵시를 구분하는 의미에서 열심히 모이면 됩니다.

세상 사람들처럼 일요일이라 생각지 말고 천국백성으로서 역사에서 묵시로 나아간다는 의미로 모이세요.

그럼 교회에서 성도들과의 모임이 곧 천국에서의 모임과 같은 의미가 되잖아요.

그러니 주일날 놀러 가지 말고 교회에 모이세요.

 

교회는 천국의 모형으로 주셨으니까 주일날 교회에 모이는 것은 천국에 모이는 것과 같아요.

그러니 열심히 교회에 모여야지요.

성경에서 열심히 모이라고 하였지 교회 가지 말라는 말을 하지 않았어요.

모이기를 폐하지 말라고 했지!

교회 안가도 된다고 하지 않았어요.

 

교회에 가면 곡식도 있고 가리지도 있어요.

흔히 복음 아는 성도도 있고 모르는 사람도 있어요.

그건 내가 구분하지 말고 내가 받은 은혜로 섬기면 되어요.

그 사람이 복음을 아느냐 모르느냐는 따지지 말고 주께 받은 은혜가 너무도 고마워서 가만있을 수가 없어서 섬기세요.

 

어떤 분들은 내가 교회인데 교회 갈 필요가 뭐 있느냐! 라고 해요.

그건 성경이 말하는 것이 아니에요.

그건 인간의 게으름을 복음으로 합리화시켜 주려고 공교하게 지은 말이에요

내가 교회인데 교회 갈 필요가 뭐 있느냐고 하는 사람들은 복음으로 자기 몸 편함으로 이용하는 것이에요.

이건 악한 것이에요.

 

설교를 듣는 것은 예배의 전부가 아니에요.

위로는 하나님과의 사귐이고 아래로는 형제간에 사귐이에요.

그래서 모임이라는 의미에서 교회(敎會)라고 하는 것입니다.

교회(敎會)란? 모임을 말합니다.

 

예배란?
말씀을 듣는 것도 있지만 성도의 교제가 있어요.
그래서 구약의 안식일이면 성전에 모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모여서 제사도 드리고 만남을 통하여서 교제하고 축제를 벌이라고 하셨어요.
이건 새 언약 안에서도 그 정신은 그대로 계승이 되어 있어요.

오순절 성령이 임하고 나자 날마다 교회로 모인 것도 다 이러한 맥을 유지하고 있는 것입니다.
새 언약은 옛 언약을 완성하는 차원에서 주어지는 것이기 때문에 율법적으로 모이는 것보다 더 잘 모여야 하는 것이어야 해요.
옛 언약에선 이레 중에 하루가 안식일이었지만 새 언약에선 날마다 안식일이에요.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라 하늘에 속한 자에요.
그러니 천국에 모형인 교회에 날마다 모여서 말씀도 듣고 교제도 하였던 것입니다.
옛 언약 안에서는 억지로 모였지만 새 언약 안에선 자발적으로 모여요.
구약은 법적으로 모였지만 신약엔 은혜로 모이는 것이에요.
그러니 모인다는 것은 구약이나 신약이나 다름이 없어요.
장차 예수 안에서 모두가 모일 것을 가르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약의 성도들의 모임을 교회라고 하는 것입니다.

복음은 우리의 육신의 소욕을 채우라고 주신 것이 아니에요.
도리어 우리의 육신의 소욕을 차압을 합니다.
그러니 주변에 교회가 버젓이 있는데도 이런 저런 핑계로 교회에 안 가는 것은 악한 것이에요.
여러분이 복음이 전해지지 않는다는 그 속에도 하나님의 백성이 있을 수 있어요.
그러니 따지지 말고 복음을 받은 우리가 가야 하는 것입니다.

교회(敎會)란? 말 자체가 모임을 전제로 하고 있는 말이에요.
왜? 모임을 전제로 하는 교회라고 하는가 하면 교회는 이 땅에 천국으로 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예수가 주와 그리스도라고 고백하는 성도는 반드시 교회라는 모임을 갖게 되어 있어요.

성령이 성도와 성도를 연결하여서 교회로 모이게 하세요.
그러므로 성경은 열심히 모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예수는 입으로 믿는 것이 아니에요.
온 몸과 맘으로 믿는 거에요.
복음을 머릿속으로 알고 마음으로 믿어지면 이제는 손과 발로 움직여서 복음으로 사세요.
복음을 “마음으로 믿어 의(義)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른다” 고 하지요.
마음으로 믿는 것은 “내적인 믿음”이라고 한다면!
입으로 시인하는 것은 “외적인 믿음”이에요. 이 둘은 하나에요.

마음으로 믿는 것을 믿음이라고 한다면 입으로 시인하는 것은 행함과 같아요.
예수님이 그러잖아요.
너희가 사람 앞에서 나를 시인하면 나도 너희를 아버지 앞에서 시인하고 너희가 사람 앞에서 나를 부인하면 나도 아버지 앞에서 너희를 부인한다고 하잖아요.

제자들이 누구 앞에서 예수를 시인합니까?
자기를 핍박하는 자들 앞에서 시인했어요.
이건 내가 믿는 예수를 드러내라는 말입니다.
마음으로 믿어지는 사람은 입으로 시인하게 되어 있어요.

빛을 말 속에 가두어 두지 말고 등경 위에 드러내 밝히란 말입니다.
나 예수 믿는다!
교회 가서 복음 모르는 분들에게 예수님은 이런 분입니다!
나는 이렇게 은혜를 받았습니다!
그러란 말입니다.
그러자면 교회에 더 열심히 가야지요.
성경을 보세요.
성령 받은 성도들이 어떻게 살았는가요?
내가 교회인데 교회 갈 필요가 뭐 있느냐?
그러면서 집에서 놀았는가요.
아니잖아요.
날마다 모여서 주를 찬미하고 했잖아요.
직장 때문에 날마다 못 모이면 모두가 모이는 주일에 교회에 가서 반가운 얼굴들을 대하고 교제하면서 주님의 은혜와 그 영광을 찬미하면 얼마나 좋아요.
그래서 오순절 성령이 임하자 날마다 성도들이 교회에 모였어요.
성령이 임하자 역사에 속한 자들이 묵시로 편입이 되었어요.
땅에 사람이 하늘에 사람으로 거듭이 난 것입니다.
성령으로 거듭난 사람은 더 이상 역사에 속한 사람이 아니에요.
이제 묵시에 속한 사람이에요.
묵시에 속하였으니 이 세상에 비록 살아도 묵시적 가치관으로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 표시로 일곱째 날에 교회로 모이는 것입니다.
교회는 묵시에 속한 곳이에요.
그래서 교회를 일컬어 만대로부터 감추인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곳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교회는 천국이란 말입니다.
그래서 일곱째 날을 주의 날로 교회로 모이는 것입니다.
주의 날은 묵시의 날이에요.
교회도 묵시의 세계에요.
성도도 묵시에 속한 자들입니다.
그러니 묵시에 속한 자들이 묵시의 날에 묵시적인 교회에 모이는 것입니다.
묵시는 완료된 세계이므로 일곱째 날이 되는 것입니다.
안식일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성령으로 거듭난 성도는 날마다가 주의 날이 되는 것입니다.
주의 날이란? 주님과 함께 하는 날이란 뜻입니다.
그럼 이 시대 주일날 교회에 모이는 것은 무슨 의미인가요?
이는 사회의 구조가 일요일에는 쉬기 때문입니다.
생각 같아선 매일 모여서 천국 생활을 맛보면 좋겠지만 먹고 살아야하니까 그럴 순 없잖아요.
직장도 다니고, 학교도 가야 하고, 돈을 벌어야 먹고 살 것이 아닙니까.
그러니 사회가 정한 6일 동안은 열심히 직장 생활 하다가 일요일은 출 애굽한 것과 같은 맘으로 역사에서 묵시로 탈출한 것과 같이 주의 날로 모이는 것입니다.
교회의 모임을 간과하지 마세요.
귀하게 여기셔야 해요.
교회가 타락했다 아니다 말하지 말고!
내 자신이 교회의 가치를 주님의 몸이라 생각하고 모이면 비록 그 교회가 타락하였다 할지라도 나는 타락한 교회로 모이는 것이 아니고 주님의 몸으로서 모이는 것이기 때문에 주 안에서 모이는 모임이 되는 것입니다.
내가 부정하다고 여기면 부정한 것이 되고 내가 정하다고 하면 정한 것이 되어요.

베드로가 고넬료를 만나기 전에 하나님께서 베드로에게 하늘에서 보자기를 내려 주잖아요.
그 속에 각양 더러운 곤충들이 들어 있어요.
하나님이 잡아먹으라고 합니다.
그러자 베드로가 율법에 금하는 것들이므로 싫다고 하니까 하나님이 내가 괜찮다고 하는데!
네가 왜? 부정하여서 못 먹겠다고 하느냐고 책망을 하십니다.
지금 하나님께서 보자기 속에 담겨진 곤충은 이방인인 고넬료를 상징해요.
고넬료는 이방인이에요.
그러니 율법에 의하면 이방인은 더러운 짐승과 같아요.
이런 짐승과 같은 사람이 자기 딴에는 열심히 하나님을 섬긴다고 섬겼어요.
고넬료는 구제도 하고 하나님 앞에 경건하게 살았어요.
하지만 고넬료는 아직 예수를 몰라요.
기껏 안다고 하여도 옛 언약 안에서 하나님을 섬기는 섬김만 있는 것입니다.
그 섬김으론 구원 못 받아요.
구원을 받으려면 예수님의 의(義)가 있어야 해요.
고넬료는 율법 식으로 하나님을 경외하고 구제하는 것은 있어도 예수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베드로를 보내는 것입니다.
고넬료에게 가서 네가 지금까지 알고 있던 그 율법에 의(義)는 다 헛 것이고 오직 예수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에만 하나님의 의(義)가 있다고 알려 주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고넬료에게 가서 복음 전하라고 하는 겁니다.

이에 베드로가 고넬료에게 가서 예수라는 복음을 전했어요.
그러자 성령이 임하고 고넬료가 세례를 받잖아요.
아! 내가 지금까지 쌓은 의(義)는 의(義)가 아니었군요!
하나님의 의(義)는 예수님 안에 있군요!
고넬료가 어린 양의 생명책에 녹명이 된 택한 백성이니까 하나님이 베드로를 보내서 옛 언약에서 새 언약 안으로 불러들인 것입니다.

지금도 교회 안에는 고넬료와 같은 사람들이 많아요.
옛 언약으로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들이 많아요.
우리도 그들 중에 있다가 빼내심을 입었잖아요.
베드로도 그들 중에 있다가 빼내심을 입었어요.
하나님은 빼내시곤 다시 그 곳으로 보냅니다.
그러니 여러분들이 베드로처럼 가야지요.
가서 그게 아니고 예수라고 복음을 전해야지요.
예수님의 십자가 안에만 하나님의 의(義)가 있다고 그 의(義)를 전해야지요.
그런데 어떻게 저 교회는 복음 없으니 나 안 가!
그럽니까?
어디서 듣고 배운 복음입니까?
어떻게 목사라는 인간이 교회 가지 말라고 합니까?
이건 복음을 빙자한 인간의 탐욕을 부추기는 아주 사악한 자에요.
그건 복음도 아니고 공교하게 만든 인본주의 사상으로 전하는 말이기 때문에 복음으로 자기 챙기기를 하는 것입니다.
죄인들의 마음을 긍정해주고 달래주는 죽은 뱀의 말이에요.
이런 사람을 따르는 자들도 유유상종이라서 자기의 행동을 합리화시켜서 달콤하게 해주기 때문에 그 말이 복음인줄 알고 아무 것도 안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이건 복음이 아니고 뱀의 말이에요.
그러니 그런 말을 듣는 사람들은 복음 복음 하면서도 그 복음으로 말장난하면서 자기 이익의 재료로 이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만약에 여러분들이 복음 안다고 하면서 게으름을 피우면서 살고자 하는 여러분들의 삶을 합리화하여 결국 자기 육신의 쾌락을 쫓아간다고 한다면 여러분이 알고 있는 그것은 복음이 아니고 뱀의 독(毒)을 마시고 있는 것입니다.

이걸 포도주에 물이 섞였다고 해요.
복음 속엔 내 가치 챙기기가 없어요.
복음 안에는 우리의 육신의 소욕을 채워주는 것이 없어요.
육신이 죄 아래 팔렸기 때문에 복음은 항상 우리 육신의 소욕이 죄라고 하면서 다가와요.
그러니 복음 알았으니 이제부터 네 맘대로 살아도 된다고 하지 않고!
성령이 네 몸은 네 것이 아니고 그리스도의 것이므로 네 맘대로 살지마!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를 위하여 살라고 하신단 말입니다.
이게 하나님의 간섭하심입니다.
이러한 간섭하심이 없다고 하면 그 사람은 오늘 본문 식으로 하나님이 버려두신 겁니다.
물론 우리는 성령이 네 맘대로 살지 말라고 하여도 우린 내 맘대로 살고자 합니다.
죄가 나를 내 몸 편한대로 끌고 가니까요.
그러니 성도는 상한 맘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내가 내 한계를 알 때 비로서 예수님의 십자가가 복음으로 다가오고 귀하게 여겨지는 것입니다.

감사가 되는 것입니다.
복음은 항상 우리 육신을 고발하면서 다가와요.
그러므로 바울은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으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건 우리더러 억지로 고난을 받으라는 말이 아니에요.
복음에 성격을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복음을 받은 성도는 반드시 그 복음이 함유하고 있는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신 모습으로서의 자기 부인의 삶이 나타나게 되어 있어요.
이걸 나는 날마다 죽는다고 합니다.
이건 우리가 원하지 않아도 우리 안에 있는 성령이 우리가 원치 않는 길로 반드시 인도하세요.
이런 삶이 안 나타난다고 하면 그 사람의 신앙은 죽은 신앙입니다.
하나님이 버려두신 사생아에요.
그가 믿는 예수는 관념이고!
그가 아는 복음은 지식이고!
그에 신앙은 추상이고!
그에 믿음은 죽은 것이고 귀신의 믿음이
교회에 가라는 말은 강요가 아니고 사실이 이렇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제가 말하는 것은 다만 복음을 안다고 하면서 교회가 복음을 전하지 않기 때문에 안 간다고 하는 그 사상이 뱀의 사상으로서 악하다는 것을 말해주고자 하는 것입니다.
가고 싶으면 가고 가기 싫으면 가지 마세요.
이건 제가 강요할 문제가 아니니까요.
저는 다만 예수님의 복음이 함유하고 있는 사실을 말하고 있는 것뿐입니다.
신앙은 누가 강요할 문제가 아니에요.
자기 안에 예수님이 있으면 그 예수님이 반드시 예수님이 사셨던 그 삶으로 인도하십니다.
예수님은 성도를 예수님의 증거자로 사용하세요.
복음 주고서 빈둥거리고 놀게 하지 않아요.
성도는 이 세상에서 지옥 생활을 경험하게 되어 있어요.
그러므로 복음은 내 생각을 긍정해 주고 우리 육신의 편안한 삶을 주지 않는단 말입니다.

베드로가 감옥에 갇혀 있으니 천사가 깨우지요.
왜? 깨웁니까?
아직도 이 성중에 내 백성이 많다고 하잖아요.
그러니 가서 전하라고 합니다.
그 성(城)이 어디인가요?
예루살렘이에요.
예루살렘은 예수를 죽인 원수들이 있는 곳이에요.
지금 베드로가 거기서 복음 전하다가 붙잡혀서 감옥에 갇혔어요.
그런데 하나님은 또 가래요.
가서 또 전하라고 합니다.
그러니 죽을 지경인 겁니다.
때리면 맞고!
욕하면 욕을 들어 먹으래요!
이게 성령을 받은 성도의 운명이에요.
성도는 예수님과 같은 운명 안에 있어요.
예수님이 죽은 세상에 복음 들고 오셨어요.
빛이 어둠에 오셨다구요.
오셔서 죽었어요.
그래서 하나님은 자기 백성에게 복음을 주시곤 어둠으로 보내는 것입니다.
복음이 없는 교회로 보내는 거에요.
죽은 곳에 생명으로 보내는 것입니다.
이게 두 증인들이에요.

하나님은 자기 백성에게 복음을 주세요.
그리곤 그 복음으로 율법이 전해지는 곳으로 보냅니다.
두 증인들에게 작은 책을 먹이고 율법 교회로 가라고 궁둥이를 확 차버립니다.
결국 복음을 받은 자들은 거기서 죽어요.
아벨의 피로부터 사가랴의 피가 뿌려진 곳이 바로 예루살렘이라는 교회에요.
복음을 받은 성도가 묻힐 무덤이 바로 교회에요.
제발 하나님의 일하심을 좀 아세요.
다시 완료와 미완료에 대하여 살펴봅시다.
에덴동산은 완료이고 에덴동산 바깥은 미완료에요.
에덴동산 바깥을 역사라고 합니다.
아담과 하와가 역사에 와서 아이를 낳지요.
미완료에서 아이를 생산하지요.
그러니 역사에서 낳아지는 아이는 전부가 다 미숙아(未熟兒)인 겁니다.
미숙아(未熟兒)로 태어나요.
역사에 속한 모든 생명은 미숙아(未熟兒)로 태어나요.
미숙아(未熟兒)란? 자람을 전제로 하고 있단 말입니다.
처음부터 장성한 사람으로 나오지 않아요.다 보살핌으로 자라서 장성한 사람으로 되어가는 것입니다.

이건 천국과 달라요.
요한계시록에서의 천국을 보면 생명수 강가에 달마다 과실이 맺힌다고 하지요.
달마다 실과가 맺힌다는 말은 완전하다는 말입니다.
다 자란 완성이란 말이에요.
왜냐하면! 천국은 완료의 세계이기 때문입니다.
이건 역사와 다르다는 의미로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럼 왜? 역사 속에서 하나님께서 유기시킨 것이 그렇게 큰 저주인지를 조금만 더 살펴보기로 합시다.
자람을 전제로 하는 미숙아에게 보호자가 없다는 것이 얼마나 큰 저주인지 알아야 합니다.

갓난아이는 미숙아(未熟兒)입니다.
미숙아(未熟兒)란? 아직 덜 익은 아이라고 했습니다.
덜 자라서 영글지 않았다는 의미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영글다” 는 말은 하나님의 창조 목적에 이르지 못함을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한 목적은 하나님을 찬송하기 위함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찬미(讚美)케 하고자 함입니다.
이건 창세전 언약을 보면 잘 나타나 있습니다.

에베소서 1:4-6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이는 그의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려는 것이라. 

하나님께서 창세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선택했다.
“우리” 라는 어떤 무리들을 선택 하셨습니다.
어떤 집단을 선택했어요.
그런데 그 집단을 누구 안에서 선택했다고 합니까? “그리스도 안에서 선택”
그리스도 안에서 선택을 입은 그 “우리” 라는 무리란?
하나님의 아들들입니다.
이 “우리” 를 “예수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하고, 이 “우리” 속에 속한 “나” 는 “그리스도의 몸에 지체”인 것입니다.

그런데 이 무리들이 이 세상에서 흠 있는 모습으로 있습니다.
여기서 흠이란? 죄와 사망을 말합니다.
한마디로 죽어 있단 말입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흠 있는 자들은 예수님의 피로서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십니다.
무슨 말인고 하니 죄로 인하여 죽은 자들을 예수님이 대신 죽어서 살려 준다는 뜻입니다.

왜? 죽은 자를 그리스도의 피로 살려 냅니까?
그 목적은 단 하나입니다.
그 은혜의 영광을 찬미(讚美)하는 것입니다.
쉬운 말로 “날 살려 주셔서 고맙습니다!” 라고 하게 한단 말입니다.
이걸 찬미(讚美)라고 합니다.
찬미(讚美)란? 아름다움을 기리는 것입니다.
이걸 그 은혜의 영광을 드러내는 것이라고 합니다.

천국에 가면 난 죽은 자였는데! 예수님 때문에 살았습니다! 라고 찬미해요.
이 찬미는 깨달음에서 비롯되어집니다.
내가 어떤 자이었는가?
어떻게 구원을 받았는지 알아야 합니다.
그래야 자발적으로 친미하게 되어집니다.

이 땅에서 이 은혜를 깨달아가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에베소서에서 기도하지요.
이 하나님의 크신 은혜를 더 많이 더 깊이 더 넓게 더 높게 더 길게 알아가기를 기도하잖아요.
예수님도 그랬어요.
많이 탕감 받은 것을 아는 자는 많이 사랑하고 적게 탕감 받은 자는 적게 사랑한다고,,,,
이건 양적(量的)인 것이 아니라 질적(質的)인 이야기에요.
이 깨달음을 알아가는 것이 신앙의 자람이에요.
우린 모두가 초등학문 아래서 태어났어요.
초등학문이란 율법을 말합니다.
우린 법 아래서 태어났고! 법 아래서 자랐고! 법 아래서 살았어요. 그래서 우린 법이 편해요.

법이란? 타율이에요. 강제에요.
지키면 상(賞)을 받고 안 지키면 벌(罰)을 받아요.
그래서 우린 하나님도 상(賞)은 받고 벌(罰)을 안 받고자 섬겼어요.
기쁨으로 감사함으로 섬기지 않았어요.
이건 우리가 어떤 존재인지를 모르기 때문입니다.
죄가 내가 누구인지 감추어 놓았기 때문입니다.

우린 원래 하나님을 찬송하도록 지음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죄가 이 사실을 감추어 버렸어요.
죄가 내가 찬양 받도록 살게 하였어요.
그러므로 우린 무슨 일을 하여도 내 가치 챙기기를 하는 것입니다.
누가 날 알아주기를 바라는 겁니다.
이처럼 자기를 알아 달라고 하는 것이 바로 자기 영광 챙기기입니다.
그러니 법을 지켜도 자기 영광을 챙기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섬겨도 자기 영광을 챙겨요.
내가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산다고 깨달아야 하는데 우린 그걸 모릅니다.
마치 어린 아이들처럼 부모님의 은혜로 살면서도 모르는 것과 같아요.
자식들이 부모님의 은혜를 모르는 것이 바로 죄의 모습입니다.
우리가 지금 하나님 앞에서 그렇게 살고 있어요.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인데도 우린 우리 힘으로 산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니 쥐뿔도 없는 것이 뭘 쬐끔하고 나면 그걸 힘을 삼고 꼴값을 떠는 것입니다.
이 꼴값을 깨뜨리기 위해서 하나님이 일을 하시는 것입니다.
우린 하나님의 은혜를 아는 일엔 미숙아(未熟兒)에요.
아직 하나님의 그 은혜의 풍성함을 깨닫지 못하고 있어요.
그러니 아직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이르지 못한 아이들인 것입니다.

우린 영적으로 미숙아(未熟兒)에요.
하나님의 더 깊은 은혜의 세계로 나아가야할 자들입니다.
미숙아(未熟兒)란? 완전(完全)과 완성(完成)과 완료(完了)로 나아가야 하는 자란 뜻입니다.
쉬운 말로 자람이 필요로 한단 말입니다.
은혜 가운데 강건한 자로 자라가야 한단 말입니다.
한번 은혜 받는 것이 끝이 아니고 그 깊이를 끊임없이 알아가고 자라가야 하는 상태입니다.

여기에 필연적으로 하나님의 간섭하심이 필요합니다. 부모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영적 미숙아(未熟兒)에겐 하나님의 도움은 반드시 필요한 것입니다.

좋은 신앙이 뭐냐?
하나님을 찬미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는 것입니다.
그럼 하나님 은혜를 알아야 하잖아요.
알아야 감사 할 것이 아닙니까?

그러므로 성령이 우리 안에서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알아가는 일에 간섭을 하시는 것입니다.
많이 간섭 당할수록 하나님의 은혜를 많이 알아갑니다.
하나님의 간섭이 많을수록 하나님의 은혜에 깊이를 더 많이 알아가게 됩니다.
그러니 고난이 많을수록 신앙이 깊어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 생각과 달라요.
그래서 사도들이 그토록 아픈 고난을 당하였던 것입니다.
바울의 고백을 보세요.
얼마나 고난이 심했으면 살 소망까지 끊어졌다고 했겠어요.
이건 자살하고 싶단 말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하신 것은 우리를 의뢰하지 않고 하나님만 의뢰하라고 하셨다고 합니다.
무슨 놈에 이런 사랑이 다 있나요?
하지만 이게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지독한 간섭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과 많이 부대낄수록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깊이 알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에스겔 47장의 성전 문지방에서 흘러내리는 물에 얼마나 잠기느냐에 따라서 살아가는 모습이 달라져요.
아주 푹 잠기면 내 힘으로 사는 것이 아니고 그 물에 힘으로 살아가게 됩니다.
물이 발목에 잠기면 내 힘으로 살아가요!
물이 무릎에 잠기면 조금 불편해도 자기 힘으로 살아가요!
허리에 잠기면 힘이 부치지만 그래도 자기 힘과 물의 힘 반반으로 살아가요!
그러나 온 몸이 푹 잠기면 그 땐 내 힘으로 살수가 없어요.
물이 이끄는 대로 흘러가게 되어요.
이건 우리의 신앙 속에서 나타납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조금 알면 조금 감사하고 조금 찬미해요.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많이 알면 알수록 많이 감사하고 많이 찬미하게 됩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은 고난을 통해서 알아간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하나님은 상대적으로 일을 하십니다.
빛을 알게 하려고 어둠을 두신 것과 같습니다.
영생을 알게 하려고 죽음을 경험케 하시는 것과 같습니다.
이는 곧 배가 많이 고플수록 음식의 귀중함과 고마움을 많이 아는 것과 같습니다.
많이 아파본 사람일수록 건강의 귀함을 아는 것과 같아요.
이처럼 천국이 귀함은 이 땅에서 지옥을 많이 경험한 사람에게 더 소중한 것입니다.

예수의 피로 구원 받았음은 자기가 죄인 중에 괴수임을 깊이 알수록 감사가 됩니다.
그럼 여기서 사람들은 천국과 지옥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살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사람들은 지옥을 고생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환경이 어렵거나 육신이 고통스러우면 지옥 같다고 합니다.
인간의 본능적으로 육신이 편한 쪽을 추구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모든 인간은 인생의 목적을 편안하고 안락한 삶을 사는데 두고 쫓아갑니다.

이러한 안락한 삶을 재물이 준다고 믿어요.
그래서 재물을 쫓아갑니다.
성경에 보면 이렇게 산 사람이 있습니다.
예수님이 말씀 하신 어리석은 부자 이야기입니다.
어떤 동네에 재물이 많은 부자가 살고 있었습니다.
이 부자는 재물을 창고에 쌓아 두고 “내 영혼아 즐거워하자” 라고 했어요.
이 사람은 재물이 영혼에 즐거움을 준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런데 어느 날 하나님이 나타나서 야~! 이 놈아!
오늘 밤 내가 너의 영혼을 거두어 가면 이 쌓아둔 재물이 뉘 것이 되겠느냐?|
이 재물이 너의 죽음을 막아 줄 수가 있겠느냐? 라고 묻습니다.

하나님이 부자에게 알려주는 말은 사람이 사는 것은 보이는 이 땅에서 안락하게 사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 앞에 설 것을 생각하고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너는 재물만 모았지 하나님은 잊고 살지 않았느냐?
그러니 너는 어리석은 자라고 합니다.
세상 적으로 보면 부자는 어리석지 않아요.
지혜로운 사람이에요.
우리가 다 꿈꾸는 그런 모범적인 삶을 산 사람입니다.
우린 이 부자처럼 살고자 합니다.
교회에서도 부자가 되라고 가르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이 땅에서 우리의 삶에 가치를 가지고 따지지 않고 하나님과의 관계로 가늠을 합니다.
너 하나님을 아느냐! 라고 묻습니다.
너 예수를 아느냐고 묻고 있습니다.
그런데 인간은 자기 힘으로 해결 할 수가 없는 일에 다다라야 신(神)을 찾게 됩니다.
자기 힘으로 해결 할 수 있는 일이라면 신(神)을 찾지 않아요.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은 돈이면 다 해결이 됩니다.
돈으로 해결 할 수 없는 일이란? 우리 힘으로 해결 할 수 없는 일입니다.
바로 진시황이 그렇게 찾고 찾았던 불로장생(不老長生)하는 것입니다. 

죽음 앞에선 인간의 화려함은 화무십일홍(花無十日紅)입니다.
인간의 그 어떤 화려함도 죽음 앞에선 모든 것을 다 잃어버리게 되어 있습니다.
돈도 잃고! 명예도 잃고! 권세도 잃어버립니다.
결국엔 공수래공수거(空手來空手去)입니다.
어리석은 부자는 일평생 잃어버릴 것들을 붙잡고 산 것입니다.
그래서 어리석다고 합니다.
그럼 어리석지 않음은 어떤 것입니까?

그건 예수님이 어리석은 부자에게 책망하신 말을 알면 알 수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부자의 어리석음을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치 못한 것”이라고 했습니다.
다른 말로 “하나님과 화목”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설 것을 생각하지 않고 산 것이 어리석음입니다.
어리석음의 반대말은 지혜로움입니다.
그럼 어리석은 부자에게 책망한 것을 내 것으로 살면 지혜로운 삶이 됩니다.
하나님께 대한 부요함입니다.
하나님과 화목된 것이 지혜로움입니다.
어떻게 하나님과 화목이 됩니까?
그건 예수님 안에서입니다.
예수를 믿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답이 나옵니다.
누가 예수를 믿느냐?
자기가 죄인이라는 사실을 아는 자입니다.
자신이 병든 자라는 것을 알아야 의원으로 오신 예수님을 찾게 됩니다.
그럼 내가 죄인이라는 것을 어떻게 알게 됩니까?
그건 내가 하나님을 미워하는 자라는 것을 아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이 어떨 때 밉습니까?
우리 뜻대로 살게 하지 않을 때 밉습니다.
하나님이 우리 뜻대로 살아지지 않도록 간섭을 하시면 우리 안에서 죄가 터져 나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간섭하시는 것입니다.
우리의 원함과 반대로 간섭할 때마다 우리 안에서 적개심이 발동을 해요.
그럼 우린 죄인으로 드러나요.
날 힘들게 하는데 감사가 나올 사람이 어디에 있나요?
본능적으로 원망이 나옵니다.
하나님께서 기어코 우리를 우리는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 자라는 것을 토설케 만들어요.
우리는 입술로는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하지만 실상은 하나님을 미워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우리 뜻대로 살도록 가만 두시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 뜻대로 두면 우린 멸망의 길로 가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자기 백성들을 간섭하시는 것입니다.
간섭당할 때마다 우리 안에서 죄가 터져 나옵니다.
하나님을 미워하는 적개심이 생깁니다.
그 적개심이 바로 예수님을 십자가에 죽인 미움입니다.내가 예수님을 죽인 자라는 것을 알아야 내가 사는 것이 하나님의 은혜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아주 역설적이지요.
내가 하나님을 많이 미워하는 인간이라는 것을 아는 것과 비례하여서 하나님께 은혜를 많이 받고 산다는 것도 알게 됩니다.
그러므로 죄가 있는 곳에 하나님의 은혜가 넘친다고 하는 것입니다.
성도의 신앙이 깊어갈수록 내가 죄인 중에 괴수라는 사실을 더욱 더 자각(自覺)하게 되어요.
이러한 자신이 죄인이라는 것에 대한 자각(自覺)이 급기야는 내 자신이 미워지는 것으로 나타납니다.
야! 난 진짜 지독한 악당이구나! 를 알게 됩니다
내가 악당임을 많이 알수록 하나님의 은혜는 더 깊이 깨달아진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사랑하는 자일수록 지독하게 간섭을 하시는 것입니다.

어떻게 간섭하는가 하면 우리 뜻대로 살아지지 않도록 간섭하세요.

이 간섭을 사랑이라고 합니다.

사람은 누구로부터 간섭 받는 것을 극도로 싫어합니다.

이는 스스로 왕처럼 살고 싶어하는 죄 때문입니다.

죄는 스스로 왕이 되어 살아가게 하는 성질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은 간섭 당함을 본능적으로 싫어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간섭 당할 때마다 우리 안에 있는 죄가 터져 나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하나님이 간섭하는 것을 복이라 합니다.

그러나 우리 인간 입장에선 하나님의 간섭을 복이라 생각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어떻게 하든지 하나님의 간섭하심으로부터 벗어나고자 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나는 너희를 가만 둘 수가 없다고 합니다.

여기서 나타나는 것이 징계입니다.

 

징계는 하나님의 또 다른 사랑입니다.

사랑 속에는 예뻐함도 있지만 미워함도 있습니다.

예쁨과 미움은 모두가 사랑입니다.

표현이 다를 뿐입니다.

사랑하기 때문에 간섭도 많은 것입니다.

 

누군가를 사랑해 보세요.

나만 그를 독점하고 싶어해요.

그러니 사랑이 자연히 당신은 나만 바라보라는 식으로서의 간섭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이처럼 사랑은 이기주의에요.

간섭한다는 것은 간섭 당하는 사람 입장에선 엄청난 고통입니다.

만약에 자신을 간섭하는 것이 사랑이라는 것을 모르면 시험에 들게 됩니다.

왜냐하면! 간섭이라는 사랑을 미움으로 받아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사랑의 깊이에 따라서 간섭도 깊어지는 것입니다.

많이 사랑하면 많이 간섭하고 적게 사랑하면 적게 간섭해요.

누군가를 많이 사랑해 보세요.

하루 종일 그 사람만 생각하잖아요.

어디에서 무얼 할까?

누구랑 있을까?

그러니 수시로 전화하고 확인하는 것입니다.

이게 사랑이에요.

 

이 간섭이 싫어지면 사랑도 깨어집니다.

다시 말합니다.

사랑과 미움은 하나입니다.

사랑의 뒷면이 미움이고, 미움의 뒷면이 사랑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스스로를 계시하시기를 “여호와는 질투하는 하나님”이라고 했어요.

질투는 사랑의 다른 면이에요.

질투가 강할수록 많이 사랑한다는 말입니다.

이스라엘을 바벨론 포로로 보내면서 하나님은 예레미야에게 알려줍니다.

내가 너희에게 내린 것은 재앙이 아니라 평안이라고 백성들에게 알려 주라고 합니다.

사랑해서 그런다고 알려 주라고 합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 그 누구도 자신들이 포로로 잡혀가서 이방에 종살이하는 것을 하나님의 사랑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어요.

미워했어요.

왜? 그런가 하면 하나님의 사랑을 읽어내는 눈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은 70년 동안 포로생활을 하면서 이 사랑을 알아가게 됩니다.

그동안 하나님으로부터 엄청난 은혜와 사랑을 받았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결국 예레미야의 말대로 자신들이 포로가 된 것이 하나님의 사랑인 것을 깨닫습니다.

 

사랑은 그 사람과 하나 되는 것입니다.

함께 아파하고 함께 우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바벨론에게 포로로 보내놓고선 잠시도 잊지 않았어요.

나중에 자기백성을 학대 하였다는 죄목으로 바벨론은 멸망시켜 버립니다.

 

간섭함이 없는 사랑은 거짓입니다.

그것은 타인으로 보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타인으로 보이면 간섭하지 않습니다.

자연히 사랑하지도 않습니다.

그냥 좋아 할 뿐입니다.

좋아하는 것은 상대의 유익을 구하지 않고 자기 유익만 챙길 뿐입니다.

 

사랑은 너와 나는 하나 라는 한 몸으로 보지만 좋아하는 것은 너는 너 나는 나 둘로 봅니다.

그러므로 사랑이 깊을수록 간섭이 심하게 나타나는 것입니다.

많이 사랑 할수록 많이 간섭합니다.

미움이 없는 사랑은 거짓입니다.

이게 사랑입니다.

 

사랑의 반대는 무관심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 하나님은 죄인을 내 버려두셨다고 합니다.

간섭하지 않겠다고 하십니다.

이건 사랑하지 않는단 말입니다.

 

죄인에게 있어 저주란? 하나님으로부터 무관심이에요.

이걸 유기라고 합니다.

무관심이야 말로 하나님이 죄인에게 주신 형벌입니다.

죄인이 하나님의 간섭에서 벗어나면 멸망입니다.

죄인의 길은 멸망의 길이에요.

 

야곱과 에서가 있습니다.

인간적으로 보면 에서의 일생이 훨씬 좋아 보입니다.

성경을 보면 에서는 하나님의 간섭을 받지 않았어요.

자기 맘대로 살았습니다.

 

그러나 야곱은 하나님이 사사건건 간섭을 하십니다.

어떻게 간섭을 하는가 하면 야곱이 원하는 것을 금지하는 식으로 간섭을 하십니다.

그러니 미칠 지경인 겁니다.

 

하고 싶은 것은 하지 못하게 하고 하기 싫은 것은 하게 하십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이 하시는 말씀이 야곱을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하였다고 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야곱을 간섭하심으로 나타났고!하나님의 미워하심이 에서를 유기시키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그럼 언약적인 관점에서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어떻게 간섭을 하시는지 살펴봅시다.

 

언약 백성은 새 언약의 길로 간섭을 하십니다.

이게 또 보통 아픈 일이 아닙니다.

우리는 율법 아래서 태어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자연적으로 율법이 편합니다.

또한 자연적으로 율법적 신앙을 선호합니다.

 

율법적 신앙은 내가 말씀을 지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율법 신앙은 좋을수록 자아가 확장됩니다.

율법 신앙이 좋을수록 내 자랑이 많아지고 내 자랑이 많아지면 내 영광으로 채워집니다.

이건 창조의 목적에 반(反)하는 악이에요.

 

하나님께서 우리를 창조한 것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입니다.

우린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도구에요.

그런데 영광을 돌려야 할 자가 영광을 차지하고 있어요.

이게 율법 신앙이에요.

 

그래서 하나님은 자기 백성들이 이런 신앙 안에 있지 못하게 간섭을 하십니다.

어떻게 간섭하는가 하면 율법 신앙을 깨트리는 방식으로 일을 하세요.

그래서 예수님을 시온에 “거치는 반석”으로 보내신 것입니다.

거치는 반석이란? 넘어뜨리기 위하여 오셨다는 말입니다.

 

율법을 지킨 것을 의(義)로 붙잡고 있는 것이 곧 하나님의 의(義)를 거부하는 것이라고 알려 주십니다.

그래서 율법으로 예수를 죽이는 식으로 간섭해 버린 것입니다.

자신들의 신앙이 옳음이 아니라 틀림으로 드러나게 하십니다.

 

유대인들은 예수를 죽일 맘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예수님을 죽일 수밖에 없도록 간섭을 해 버립니다.

그리하여 기어코 죄인의 자리로 끌어내려 버리십니다.

결국 유대인들은 예수를 죽인 대역 죄인이 되고 말았습니다.

유대인으로서는 기절초풍할 일입니다.

 

바울이 여기에 걸려들었어요.

자기 딴엔 율법에 흠이 없는 자라고 자부했어요.

추호도 자신이 하나님 앞에 죄인이라는 사실을 몰랐어요.

그래서 하나님은 바울을 스데반을 죽이는 일에 가담을 시켜서 죄인을 만들어 버립니다.

자신이 죄인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만드십니다.

 

바울이 다메섹에서 은혜를 입고 보니 자신을 죄인 중에 괴수로 만드신 것이 하나님의 사랑이라는 것을 알았어요.

그러니 넘어져도 감사하고 일어나도 감사한 것입니다.

사나 죽으나 모든 것이 감사할 일입니다.

 

일을 시작하신 이가 끝 날까지 우리를 간섭하실 것입니다.

이 간섭이 끝나는 날엔 천국에 가 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내 하는 일들이 내 뜻대로 안 될 때 원망하지 말고 하나님의 간섭하심을 깨닫고 감사하시길 바랍니다.

 

물론 잘 안 될 것입니다.
하지만 우린 그렇게 되어 가도록 인도함을 받습니다.
우린 모두가 “주여 나의 나됨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라고 고백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열심이 그 일을 반드시 이루고야 말 것이기 때문입니다.

야곱아 너는 내 것이라!
그러므로 물에도 집어넣었다가 불에도 집어넣는다고 합니다.
담금질을 하신답니다.
그러니 불같은 시험을 이상히 여기지 말라고 합니다.
그건 모두가 널 사랑해서 라고 합니다.

그토록 간섭을 당한 바울이 외칩니다.
누가 이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을 수 있으랴! 위험이냐 칼이냐! 곤고나 적신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하늘에 있는 천사라 할지라도 이 사랑을 끊을 수 없다고 합니다.
아이러니한 사랑을 뉘라서 알까요?
이 사랑을 깊이 알아 가시길 축원합니다.

 

 

 

하나님의 일곱 영이란 무엇인가요?(요한계시록 1:4, 3:1, 4:5, 5:6)



“하나님의 일곱 영”은 요한계시록 1:4, 3:1, 4:5, 5:6에서 언급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일곱 영은 구체적으로 밝혀지지 않았기 때문에, 독단적으로 단정할 수 없습니다.

요한계시록 1:4은 일곱 영이 하나님의 보좌 앞에 있다고 언급합니다.
요한계시록 3:1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일곱 영을 “가진”다고 말씀합니다.
요한계시록 4:5은 하나님의 일곱 영을 하나님의 보좌 앞에 켜진 일곱 개의 등불과 연결시킵니다.
요한계시록 5:6은 일곱 영을 어린 양의 “일곱 눈”과 동일시하고, 이들이 “온 땅에 보내심을 받[았다]”고 진술합니다.

하나님의 일곱 영에는 최소 세 가지 가능한 해석들이 있습니다.

첫째는 하나님의 일곱 영이 성령의 상징이라는 것

성경, 특히 요한계시록은 완벽성과 완전함을 언급하는 데 숫자 7을 사용합니다.
만일 “일곱 영”의 “일곱”이 그와 같은 의미라면, 이는 하나님의 일곱 영이 각기 다른 영들을 언급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성령의 완벽하심과 완전하심을 언급하는 것입니다.

둘째는 하나님의 일곱 영이 일곱의 천사들, 스랍 (seraphim)이나 그룹 (cherubim) 등을 언급하는 것

이는 요한계시록의 수많은 천사들의 묘사와도 일치합니다 (요한계시록 4:6-9; 5:6-14; 19:4-5).

셋째는 이사야 11:2을 근거하는 것

“그의 위에 여호와의 영 곧 지혜와 총명의 영이요 모략과 재능의 영이요 지식과 여호와를 경외하는 영이 강림하시리니”

다음과 같이 하나님의 일곱 영을 설명할 수 있을 것입니다.
1. 주님의 영
2. 지혜의 영
3. 총명의 영
4. 모략의 영
5. 재능의 영
6. 지식의 영
7. 주님을 경외하는 영

성경은 일곱 영들이 구체적으로 누구 혹은 무엇인지 말씀하지 않지만, 첫번째 해석, 즉 일곱 영이 성령이라는 견해가 가장 타당해 보입니다


7 일곱 영

요한은 아시아에 있는 일곱 교회에 편지하노니 이제도 계시고 전에도 계셨고 장차 오실 이와 그의 보좌 앞에 있는 일곱 영과(요한계시록 1:4)

하나님의 일곱 영

사데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라 하나님의 일곱 영과 일곱 별을 가지신 이가 이르시되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살았다 하는 이름은 가졌으나 죽은 자로다(요한계시록 3:1)

보좌 앞에 켠 등불 일곱이 있으니 이는 하나님의 일곱 영

보좌로부터 번개와 음성과 우렛소리가 나고 보좌 앞에 켠 등불 일곱이 있으니 이는 하나님의 일곱 영이라(요한계시록 4:5)

이 눈들은 온 땅에 보내심을 받은 하나님의 일곱 영

내가 또 보니 보좌와 네 생물과 장로들 사이에 한 어린 양이 서 있는데 일찍이 죽임을 당한 것 같더라 그에게 일곱 뿔과 일곱 눈이 있으니 이 눈들은 온 땅에 보내심을 받은 하나님의 일곱 영이더라(요한계시록 5:6)



하나님의 일곱 영 / 키이스 밀러

하나님의 일곱 영에 대한 말씀들

1) 계시록 1: 4

요한은 아시아에 있는 일곱 교회에 편지하노니 이제도 계시고 전에도 계셨고 장차 오실 이시며 그의 보좌 앞에 있는 일곱 영

2) 계시록 3:1

사데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라 하나님의 일곱 영과 일곱 별을 가지신 이가 이르시되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살았다 하는 이름을 가졌으나 죽은 자로다

3) 계시록 4:5

보좌로부터 번개와 음성과 우렛소리가 나고 보좌 앞에 켠 등불 일곱이 있으니 이는 하나님의 일곱 영이라

4) 계시록 5:6

내가 또 보니 보좌와 네 생물과 장로들 사이에 한 어린 양이 서 있는데 일찍이 죽임을 당한 것 같더라 그에게 일곱 뿔과 일곱 눈이 있으니 이 눈들은 온 땅에 보내심을 받은 하나님의 일곱 영이더라

하나님의 일곱 영은 일곱 가지 성품을 가진 성령을 가리킨다.

여호와의 영 (the Spirit of the Lord upon)

그리스도 예수님께 부어진 한량없는 성령의 임재 그 자체를 말한다.
마치 구름이 와서 그들을 덮으며 구름 속에서 소리가 나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 하는지라.
우리는 바로 이 성령으로 옷 입어야 한다.

모든 하나님의 일곱 영 중에서 중심의 자리에 있는.

지혜의 영 (wisdom)

불가능한 것을 가능하게 하는 하나님의 초월적 능력, 모든 사람들을 놀라게 하는 광대한 지혜, 여호와 하나님의 생각이 바로 지혜의 근원이다.

총명의 영 (understanding)

하나님의 부르심의 소망을 이루게 하는 원동력.
성경 속에 보물처럼 감취어진 영적 진리를 캐내게 하는 것이 바로 총명의 영의 사역임.

이 영이 없이는 그 누구도 하늘에서 하나님이 부으시는 비전의 삶을 창조적으로 행할 수 없다.

하나님의 지혜로 말미암은 계시의 중요성 이해 / 얻기 위해 기도한 이 : 바울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의 영광의 아버지께서 지혜와 계시의 영을 너희에게 주사

하나님을 알게 하시고 너희 마음의 눈을 밝히사 그의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이며 성도 안에서 그 기업의 영광의 풍성함이 무엇이며 그의 힘의 위력으로 역사하심을 따라 믿는 우리에게

베푸신 능력의 지극히 크심이 어떠한 것을 너희로 알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엡 1:17-19)

모략의 영 (counsel)

모략이란 모든 일의 알파와 오메가 되시는 하나님의 생각을 듣고 그 말씀에 주의를

기울이는 것에서 시작, 주님의 모략은 영원토록 이 땅 위에 서게 될 것이다.

하나님은 그 분의 계획을 따라 삶을 살아가는 사람에게 반드시 당신의 생각과 마음의 뜻을

계시할 것이다.

이 영의 인도하심을 받는 사람에게 임하는 것이 바로 다섯 번째 성령의 성품인 권능의 영이다.

권능의 영(might)

권능의 영을 받는 사람의 인생에는 하나님의 권능, 강건함의 기름부음이 나타나게 되고

이를 통하여 하나님이 계획하신 일들이 아름다운 성령의 열매를 맺는다.

하나님의 권능이란 인간의 생각으로 상상할 수 있는 작은 규모의 일들이 아니다.

인간의 생각이란 고작해야 하나님 손가락 한두 개 만으로도 충분히 이루어질 수 있는 일이다. 이사야가 하나님의 권능의 광대함을 보고 이는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사 9:6) 하나님이 친히 행하시는 일은 결코 사람의 상상으로 품을 수 없는 놀라운 것.

여호와를 아는 지식의 영 (Spirit of knowledge of the Lord)

이전의 것들은 성령에 속하거나 성령에 관한 성품이었으나 여호와를 아는 지식의 영은 여호와 하나님을 친히 아는 것.
하나님과 바로 옆에서 대화하는 것 같이 그분의 마음과 생각을 알고 속사정을 아는 것.
하나님에 대한 어떤 속성과 성품을 배우고 간접적으로 경험하는 것과는 본질적으로 다른 것.
하나님을 가까이에서 알게 되는 이 경험 때문에 성령의 나머지 모든 성품들이 가능.
하나님의 속사정까지 아는 분이 바로 성령이시다.
성령의 충만한 임재 안에 거하는 사람은 누구나 바로 하나님의 가슴 소게 있는 많은 하늘의 일들을 깨닫는 사람.

오직 하나님이 성령으로 이것을 우리에게 보이셨으니 성령은 모든 것 곧 하나님의 깊은 것이라도 통달하시느니라 사람의 사정을 사람의 속에 있는 영외에는 누가 알리요 이와 같이 하나님의 사정도 하나님의 영 외에는 아무도 알지 못하느니라 (고전 2:9)

하나님을 아는 지식의 장성함에 이르게 될 때 우리는 비로소 하나님의 영광이 지극히 크심이 얼마나 광대한 것인지를 알게 된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영 (the Spirit of the fear of the Lord)

하나님의 영광을 두려워하게 되는 것.
성도로 하여금 놀라운 영광의 하나님을 알고 온 마음으로 존경을 표하며 두려워하게 하는 것.

성령의 일곱 영이 없이는 그 어떤 환경적, 자연적 제약들을 극복할 수 없다.
세상과 사단과 인간육신의 정욕이라는 방해물들을 극복하고 초자연적 권능으로 하늘의 진리를 증거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성령의 임재가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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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만

문명의 바벨탑

헨리 나우웬이 쓴 「상처입은 치유자」라는 책에 이런 이야기가 나온다.
어느 나라에 왕자 네 명이 있었다. 네 명의 왕자가 모여 이런 결정을 내렸다. “우리 형제가 전 세계에 흩어져서 최첨단 과학 기술을 배워오자.” 오랜 세월이 흘러 네 명의 왕자가 한 자리에 모였다. 첫째 왕자가 말했다.“나는 한 조각의 생물의 뼈만 있으면 근육을 붙이는 기술이 있다.”둘째 왕자도 말했다. “나는 뼈와 근육만 있으면 피부와 털을 돋아나게 하는 기술을 배워왔다.” 셋째 왕자는 “나는 뼈와 근육 그리고 털이 있으면 사지를 만들 수 있는 기술이 있다”라고 했다. 막내 왕자도 질세라 말했다.“나는 사지가 있는 것에 생명을 불어넣는 기술을 배워왔다.” 네 왕자는 숲 속에 들어가 뼈를 하나 주웠는데, 그것은 사자의 뼈였다. 네 명의 왕자는 그 뼈에 근육을 붙이고, 피부와 털을 돋아나게 하고, 사지를 만들고 마지막으로 생명을 불어넣었다. 그러자 사나운 사자가 일어나 그 네 명의 왕자를 물어뜯어 죽였다. 이 이야기는 인간들이 쌓아놓은 현대 문명의 바벨탑에 인간 스스로 깔려죽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오늘날 현대인들은 문명에 의해 얼마나 많은 상처를 입고 비참하게 죽어가는가? 인간은 하나님 앞에 하나도 자랑할 것이 없다.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물리치신다

어리석은 벌레

하루는 하늘을 찌를 듯이 커다란 나무에서 살고 있던 벌레들이 모두 모여서 회의를 열었습니다. 대장 벌레가 다른 벌레들에게 말했습니다. “이 나무가 어찌나 큰지 우리 벌레들이 이곳에 살고 있어도 아무도 알아주지 않습니다. 우리 몇 마리 정도로는 이 나무의 위용에 가려져 빛을 볼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새끼를 많이 나아서 이 나무를 먹어치우면 세상은 이 나무보다 위대한 우리 벌레들을 알아줄 것입니다.” 대장 벌레의 말을 들은 붙임성 좋은 부하가 재빨리 나서며 말했습니다. “대장님의 말씀이 지당합니다. 우리는 지혜를 다 짜내어 이 나무를 빨리 갉아먹는 방법을 찾아야 합니다. 각자 가지고 있는 실력을 최대한 발휘해서 우리의 이름을 세상에 널리 알립시다.” 이 말을 들은 대장 벌레는 흐뭇해서 말했습니다. “좋다. 이 나무를 총공격하자. 한쪽은 부지런히 자식을 낳고 나머지는 나무를 공격하여 우리 이름을 만천하에 드러내자.”대장의 말에 신이 난 벌레들은 나무를 공격하는 데 모든 힘을 기울였습니다. 그리고 나머지 벌레들은 열심히 자식들을 낳았습니다. 그것을 구경하던 이웃 벌레들은 그들의 능력을 칭찬하기 시작했습니다. 벌레들의 공격이 힘을 발휘하기 시작했습니다. 벌레들이 살고 있던 나무가 힘을 잃고 하나둘 나뭇잎이 떨어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않아 그 큰 나무가 ‘쿵’ 소리와 함께 쓰러졌습니다. 그러나 나무를 쓰러뜨린 것까지는 좋았지만 벌레들이 먹을 양식 또한 사라지게 되었습니다. 찬바람이 불고 겨울이 오자 벌레들은 모두 얼어죽고 말았습니다.

당나귀의 교만

어떤 마부가 당나귀 등에 돌부처를 싣고 길거리를 지나가는데, 많은 사람들이 돌부처를 보고 합장 배례를 하였습니다.
그런데 이 당나귀는 자기를 우러러보고 경배하는 것이라는 착각에 빠집니다.
그래서 우쭐대며 교만한 마음으로 마부가 가라는 방향으로 가지를 않습니다.
이에 화가 난 마부는 채찍으로 내려칩니다.
갑자기 내려치는 채찍에 깜짝 놀라 뛰는 바람에 당나귀의 등에 있던 돌부처가 땅에 떨어졌습니다.
그로 인해 당나귀는 다리를 다쳐 그만 쓸모없는 나귀가 되었고 결국 주인으로부터 버림을 받았습니다.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은 하나님께로부터 받지 않은 것이 없습니다.
나 자신도, 부모 처자와 물과 대지와 공기와 햇볕도 내가 만든 것이 아닙니다.
머리털 하나, 세포 하나도 내가 만들지 못합니다.
태어나는 시간도, 삶의 기간도, 죽는 시간도 내가 정하지 못합니다.
절대 자기 소유라고 주장할 만한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모두 시한부로 빌려쓰고 있는 것뿐입니다.
사실 하나님만 교만한 사람을 싫어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도 다른 사람이 교만한 것은 싫어합니다.
세상에서 교만한 사람을 좋아하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
교만은 실로 큰 죄이며, 하나님 나라의 거침돌입니다.

"사람의 마음의 교만은 멸망의 선봉이요 겸손은 존귀의 앞잡이니라"(잠언 18:12)

교만과 독선의 머리를 치켜 세운 뱀

어느 추운 겨울날 한 농부가 길을 걷고 있었다.
그는 길위에 꽁꽁 얼어붙은 뱀 한 마리를 불쌍히 여겨 집으로 가져와 화롯가에 놓아두었다.
얼마 후 생기를 되찾은 뱀이 머리를 꼿꼿하게 세우더니 농부의 아들을 향해 덤벼들었다.
농부는 홰초리를 들어 뱀을 후려쳤다.
그리고 길게 뻗은 뱀을 막대기에 감아 밖에 내던지며 중얼거렸다.
“배은망덕한 놈, 은혜를 모르면 벌을 받지. 저를 살려준 사람의 아들을 물려 하다니…”
농부의 아들이 아버지에게 말했다.
“아빠, 앞으로는 절대로 뱀을 구해주지 마세요”
죄로 죽을 수밖에 없었던 인간을 구해준 분이 있다.
그분의 이름은 예수 그리스도. 생명을 구해준 그분을 향해 인간은 가끔 교만과 독선의 머리를 치켜세운다.
불순종의 결과는 항상 사망이다.
은혜를 모르는 사람은 하늘의 노여움을 받는다.

옷걸이의 신분

세탁소에 갓 들어온 새 옷걸이한테 헌 옷걸이가 한마디하였습니다.
“너는 옷걸이라는 사실을 한시도 잊지 말길 바란다.”
“왜 옷걸이라는 것을 그렇게 강조하시는지요?”
“잠깐씩 입혀지는 옷이 자기의 신분인 양 교만해지는 옷걸이들을 그동안 많이 보았기 때문이다."
자신의 본체(本體)를 정확히 알고 살라는 뜻입니다.
자신의 진짜 능력, 자기가 선 자리를 모르거나 망각하면, 설탕물을 먹고 가짜 꿀을 내놓는 벌처럼, 초라한 인격자의 모습이 되고 맙니다.












아모스(Amos) 짐, 짐을 지는 사람 07-12-2023(수) / 07-21-2023(금)



 선지자들의 연대표



최초의 문서 예언자 아모스, 그는 어떤 인물일까요?

예언서에서 아모스서의 위치

1. 최초의 문서 예언자

구약성경에 포함되어 있는 예언서 가운데 아모스서는 독특한 위치를 차지합니다. 그건 아모스서가 ‘예언자의 이름이 곧 예언서의 이름으로 등장한 최초의 예언서’라는 점입니다. 이와 같이 아모스처럼 예언자의 이름이 곧 책의 이름이 된 예언서를 ‘문서 예언’(Writing Prophets)이라고 하고, 이들을 ‘문서 예언자’(Writing Prophets)라고 부릅니다. 우리가 사용하는 구약성경에서는 총 17권이 예언서로 분류되어 있습니다. 다만, 우리가 주의할 것은 문서 예언자들이 직접 예언서를 기록했다는 뜻은 아닙니다. 이러한 예언자들의 사역과 예언이 예언자의 이름으로 된 책으로 수집되고 보존되었다는 의미입니다(박준서, 『이스라엘아! 여호와의 날을 준비하라』, 55).

2. 양을 치며 농사를 지었던 아모스

예언자로 부름 받기 전, 아모스의 직업은 무엇이었을까요? 참고로 바벨론에서 예언사역을 했던 에스겔의 직업은 제사장이었고(겔 1:3), 예레미야도 제사장이었습니다(렘 1:1). 반면, 아모스는 자신의 직업을 이렇게 소개합니다. “아모스가 아마샤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나는 선지자가 아니며 선지자의 아들도 아니라 나는 목자요 뽕나무를 재배하는 자로서 양 떼를 따를 때에 나를 데려다가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기를 가서 내 백성 이스라엘에게 예언하라 하셨나니”(암 7:14-15). 아모스는 분명하게 자신을 ‘선지자도 아니며 선지자의 아들도 아니다’라고 소개합니다.

여기에서 짚고 넘어갈 것은 ‘선지자의 아들도 아니다’라는 정확한 의미입니다. ‘선지자의 아들’이란 말은 혈연적으로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구약의 예언서를 보면, 가끔 ‘선지자 무리’ 혹은 ‘선지자 생도’란 표현이 나오는데(삼상 10:5, 20:18-24, 왕하 2:3, 4:1, 38) 이들은 한 사람을 지도적인 예언자를 모시고 활동한 것으로 나타납니다. 선지자 무리에 속한 생도와 지도적인 예언자는 흔히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로 설명합니다. 엘리사가 엘리야에게 “내 아버지여 내 아버지여”라고 불렀던 것이 좋은 실례입니다(왕하 2:13)(박준서, 『이스라엘아! 여호와의 날을 준비하라』, 66-67). 그런 점에서 아모스가 ‘선지자의 아들’이란 말은 그가 전문적인 예언자 무리에 속한 사람이 아님을 말해줍니다.

대신, 아모스는 자신을 ‘양을 치는 목자요 뽕나무를 재배하는 농사꾼’으로 소개합니다. 주목할 것은 아모스가 자신을 ‘목자’라고 사용한 용어는 열왕기하 3장 4절에만 단 한번 나온다는 점입니다. “모압 왕 메사는 양을 치는 자라 새끼 양 십만의 털과 수양 십만의 털을 이스라엘 왕에게 바치더니.” 히브리어 ‘노케드’는 아모스가 남에게 고용된 일반 목동을 뜻하는 ‘로에’(히브리어)와는 달리, 자기의 목장을 소유하며 양을 치는 사람임을 알 수 있습니다(강성열, 『구약성경해설』, 162). 아마도 그는 본래 생활에 별로 어려움을 느낄 수 없을 정도로 넉넉한 재산을 가진 중산층의 사람이었을 것입니다.

이에 반해 ‘아마샤’는 당시 북이스라엘에 위치한 ‘벧엘’(‘하나님의 집’이라는 뜻)의 제사장이었습니다(아모스 7:10-11). 특히 벧엘은 북이스라엘의 ‘왕실성전’이 있는 곳으로 북이스라엘의 ‘중앙성전’(Central Sanctuary)의 역할을 담당했던 곳이었습니다. 그런 점에서 북이스라엘의 제사장 아마샤는 평범한 제사장이 아니라 힘과 권력이 있는 제사장이었으리라 판단됩니다.

반면, 아모스는 ‘북이스라엘 출신’이 아닌 ‘남유다’에 위치한 ‘드고아’(Tekoa) 출신의 농부였습니다. ‘드고아’는 예루살렘에서 남쪽으로 약 16km 떨어진 산악지대에 위치한 도시로, 외부와의 교류가 단절된 산간벽지가 아닙니다. 참고로, 드고아는 남유다의 르호보암(주전 922-915)이 이곳에다 각종 무기와 군비를 비축하고 군대 사령관을 주둔시켰을 뿐만 아니라(대하 11:6-12), 남유다가 멸망하기 이전까지 계속해서 중요한 군사 도시로 남아 있었던 곳이었습니다(렘 6:1).(박준서, 『이스라엘아! 여호와의 날을 준비하라』, 60.)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남유다 출신’의 아모스가 ‘북이스라엘’의 멸망을 예언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왜 하나님은 남유다 출신의 아모스를 북이스라엘로 보내셔서 예언하도록 하셨을까요? “이것은 당시 북쪽의 종교지도자들이 하나같이 영적으로 어두웠기 때문에 평신도를 들어다가 북쪽으로 보내셔서 하나님의 뜻을 전하게 하신 것입니다.”(차준희, 『예언서 바로보기』,212-213.).

당시 이스라엘은 유다와 베냐민 지파로 구성된 ‘남유다’와 이를 제외한 열지파로 이루어진 ‘북이스라엘’로 분열되어 있었습니다. 솔로몬의 아들이었던 르호보암 이후에 이스라엘은 두 나라로 분열되었습니다. 이 내용은 열왕기상 11-12장에 기록되었습니다. 아모스가 활동하던 시기에 북이스라엘은 르호보암 2세가 통치하였고, 남유다는 ‘요아스의 아들 아마샤’가 통치하고 있었습니다.

3. ‘심판 예언자’인 아모스

구약의 예언자들은 이스라엘의 왕과 지배계층, 일반 백성이 하나님의 말씀을 불순종할 때마다 무섭게 책망했고, 그것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을 단호하게 선포했습니다. 국내의 대표적인 구약학 학자 가운데 한 사람인 강성렬은 예언자에 대해 이렇게 규정합니다.

이스라엘의 예언자들은 어떠한가? 말씀의 종으로 부름 받은 그들은 하나님의 토라에 불순종하는 지배 계층과 일반 대중의 잘못된 신앙생활 및 그로부터 비롯되는 그들의 왜곡된 삶의 양식을 준엄하게 비판하고 고발한 사람들이었다. 한 마디로, 그들은 비뚤어진 세상에 대한 비판과 저항 정신으로 가득 찬 사람들이었다(강성열, 『구약성서로 읽는 지혜 예언 묵시』, 119).

예언자 아모스 역시 북이스라엘의 멸망을 매섭게 예언했습니다(암 8:2). “아모스는 처음으로 이스라엘의 종말에 대하여 선포한 예언자입니다.”(차준희, 『예언서 바로보기』, 214). 그는 하나님의 말씀의 대언자로서 이스라엘의 죄를 책망하고(accusation) 그에 상응한 하나님의 징벌을 선언했기에(announcement of judgement) 그를 흔히 전형적인 심판의 예언자라고 합니다(prophets of doom)(박준서, 『구약세계의 이해』, 123). 아모스의 예언대로 북이스라엘은 주전 722년에 앗수르에게 멸망당합니다. 아모스가 활동한지, 약 30년 만에 북이스라엘이 멸망한 것입니다. 역설적으로도 아모스는 명석한 여로보암 2세의 통치로 북이스라엘이 정치·경제·군사적으로 가장 융성할 때, 북이스라엘의 멸망을 예언한 것입니다.

사실, 아모스만이 ‘심판 예언’을 한 것은 아닙니다. 대체로 진실한 예언자들은 이스라엘 백성의 죄를 고발하고, 죄에 대한 하나님의 매서운 심판을 선포했습니다. 이들은 항상 바른 이야기만 했기에 부패한 사회와 왕궁을 향해 거침없이 쓴 소리를 했고, 담대히 멸망을 선포해야 했기에 학자들은 이들을 ‘멸망 예언자’(doom prophets)라고 부릅니다. “소위 멸망 선지자로 불리는 참 예언자들은, 대부분 살아있는 동안 이스라엘 민족의 ‘멸망’을 선포하던 이들입니다.”(기민석, 『한국성도를 위한 예언서 강의』, 54). 반대로 왕과 백성들에게 근거없는 평화를 외치며 왕의 비위만을 맞추기에 급급했던 예언자들은 ‘구원 예언자’ 혹은 ‘평화 예언자’(salvific prophets)라고도 합니다.(기민석, 『한국 성도를 위한 예언서 강의』, 43). 이런 부류에 속한 예언자로는 예레미야 시대의 하나냐(렘 28:1-4), 북이스라엘의 아합에게 속해있던 400명의 궁정 예언자들(왕상 22:1-6)입니다. 400명의 궁정 예언자들은 참 예언자였던 미가야와는 달리 ‘아합이 전쟁에서 승리할 것’이라 거짓예언을 했습니다.

특히, 아모스는 주변 국가들을 향해서도 그들의 죄악을 고발하고 심판을 선언했습니다. 아모스 1-2장은 북이스라엘 주변 국가들인 ‘다메섹’, ‘가사’, ‘두로’, ‘에돔’, ‘암몬’, ‘모압’에 대한 심판 예언을 담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왜 아모스는 북이스라엘의 심판 선언 이전에 이방 나라를 향해서도 심판 선언을 했을까요? 이는 “그들이 이웃에게 긍휼을 베풀 수 있을 때에 긍휼을 베풀지 않고 약한 이웃들을 무자비하게 죽이거나 가혹하게 탄압했기 때문”(강성열, 『구약성경해설』, 185)입니다. 에돔은 남유다가 바벨론에게 무참히 유린당할 때 돕기는 커녕 바벨론에 동조하여 그들과 같이 남유다의 재물을 노략했습니다. 심지어 바벨론을 피해 도망치는 유다 백성들을 도주하지 못하도록 막았으며, 심지어 그들을 붙잡아 바벨론에 넘기기까지 했습니다(옵 1:11-14). 이웃 나라의 아픔과 고통을 외면한 체, 살인하고 노략질한 에돔에 대해 하나님께서 멸망을 선언하셨듯, 하나님은 아모스를 통해서도 무고히 이웃국가를 침략하여 노략질한 이방 나라들에 대해 심판을 예언하도록 하셨습니다.

이 대목에서 우리가 주의할 것은 이방 나라들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 근거입니다. 그것은 이스라엘에게 주어진 율법이 아니라 보편적인 가치인 ‘휴머니즘’(Humanism)에 근거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이들에 대한 심판은 이스라엘에 대한 적대적 행위 때문이 아닙니다. 이방 나라들(다메섹, 가사, 두로, 에돔, 암몬, 모압)에게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지적은 ‘힘없는 사회적 약자들에 대한 범죄’입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율법이 없는 이방민족에게는 보편적 정의의 잣대를 사용했음을 보여줍니다.(이사야, “미가 6장 6-8절에 담긴 주전 8세기 예언자들의 예배 비판과 사회윤리”, 115-116.

이방 나라들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은 ‘하나님의 주권이 이스라엘에만 국한되지 않는다는 사실과 하나님이 세상 모든 나라들을 공평하게 판단하시는 분임을 널리 알리는 것’(강성열, 『구약성경해설』, 185)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아모스의 심판 예언은 주로 북이스라엘을 향해 집중됩니다. 아모스 2장 6절부터 9장 6절까지는 모두 북이스라엘의 멸망에 대한 예언들로 가득합니다. 


아모스(AMOS) / 짐을 진 자

기록자 : 아모스
기록 시기 : 주전 760년경
성격 : 대언
이름 : 아모스는 ‘짐을 진 자’를 뜻한다.

대언자 아모스의 직업은 농부였으며 이런 이유로 인해 그는 처음에 대언자로 인정을 받지 못했다.
그는 남 왕국 유다의 시민이었으나 북 왕국이 아시리아에 의해 멸망되기 전에 북 왕국을 향해 대언했다.

수신자 : 북 왕국 이스라엘의 통치자와 백성들
주제 : 이스라엘과 그 주변 국가들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과 이스라엘 회복의 약속
목적 : 하나님과 우리를 나누는 죄들을 제거해야 그분과의 교제가 회복됨을 보여 주는 것
내용 : 북 왕국 이스라엘에서는 여로보암 2세가 시리아를 정복하면서 백성들이 번영과 형통을 누리게 되었고 이것으로 인해 방탕함과 사치와 불법이 늘어나게 되었다.
또한 그 당시에는 200여 년 전에 만들어진 송아지 숭배와 바알 숭배가 혼합되어 이스라엘 국가의 종교가 되었다.
제사장들은 수치스런 일을 행했고 이스라엘 백성은 마치 하나님이 없는 것처럼 행동했다.
아모스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송아지 숭배의 근원인 벧엘로 가서 왕과 백성들에게 부정과 탐욕과 술 취함과 간음과 학대를 버리고 회개할 것을 촉구했다.
또한 그는 그들이 회개하지 않을 때에 포로로 잡혀가고 하나님의 심판이 임한다는 것을 강하게 선포했다.
강하게 말씀을 선포하면서도 그는 메시아 왕국과 메시아의 약속을 주면서 경건한 사람들을 위로했다.

아모스서는 9장, 146절, 4,217 영어 단어로 구성되어 있다.

핵심 장 : 9장(이스라엘의 분산과 회복),
핵심 절 : “주께서 내게 이르시되, 아모스야, 네가 무엇을 보느냐? 하시므로 내가 이르되, 다림줄이니이다, 하매 그때에 주께서 이르시되, 보라, 내가 다림줄을 내 백성 이스라엘의 한가운데 두고 다시는 그들 곁을 그대로 지나가지 아니하리라.”(7:8),
핵심 단어 : 다림줄,
핵심 구 : “두 사람이 합의하지 아니하고서야 함께 걷겠느냐?”(3:3)
아모스서의 그리스도 : 만군의 하나님(4:13),
영적 교훈 : “네 하나님 만나기를 예비하라.”(4:12)



아모스서의 시대적 배경

예언서는 서두에 예언자가 활동하던 시기를 명시적으로 밝혀둡니다.
그래서 예언서를 제대로 해석하려면, 예언자가 활동하던 시기와 장소를 숙지해야 합니다.
아모스 1장 1절에 “유다 왕 웃시야의 시대 곧 이스라엘 왕 요아스의 아들 여로보암 시대의 지진 전 이년에 드고아 목자 중 아모스가 이스라엘에 대하여 묵시 받은 말씀이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이를 쉽게 풀어서 설명하자면, 남유다를 웃시야 왕이 통치할 때 북이스라엘에서는 여로보암 2세가 다스렸다는 뜻입니다.

구약성경의 역사서와 예언서는 남유다와 북이스라엘의 왕을 동시에 병기해 놓았습니다.
“유다 왕 아사 제 삼십 팔년에 오므리의 아들 아합이 이스라엘 왕이 되니라 오므리의 아들 아합이 사마리아에서 이십 이년을 이스라엘을 다스리니라”(왕상 16:28) 남유다의 아사왕 재위 18년에 북이스라엘은 오므리의 아들, 아합이 북이스라엘을 다스렸다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여로보암 2세가 북이스라엘을 통치할 때, 시대적 상황은 어떠했을까요?

1. ‘예후 왕조’의 네 번째 왕, 여로보암 2세

아모스가 활동하던 시기는 여로보암 2세가 북이스라엘을 통치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북이스라엘의 13번째 왕으로 무려 41년간을 다스렸습니다(왕하 14장 23절, 주전 786-746).
그 이름의 뜻은 “백성이 번성하게 되기를 원한다”입니다.

여로보암 2세는 북이스라엘 19명의 왕 가운데 가장 오랜기간 북이스라엘을 통치한 왕입니다.
참고로 여로보암 2세가 북이스라엘을 통치할 때, 아모스의 뒤를 이어 호세아도 예언활동을 했습니다.
참고로 “호세아는 문서 예언자 가운데 유일하게 북 왕국 이스라엘에서 출생하고 활동한 예언자”(차준희, 『열두 예언자의 영성』, 11)입니다.

그렇다면 여로보암 2세는 어떤 인물이었을까요?
여로보암 2세는 예후 왕조(Jehu Dynasty, 주전 842-815)의 네 번째 왕이었습니다.
예후 왕조에는 예후로 시작하여 ‘여호아하스’ - ‘요아스’- ‘여로보암 2세’- ‘스가리야’가 있습니다.
흥미로운 것은 예후 왕조 이후에 북이스라엘의 멸망까지 6명의 왕인, 살룸(745, 1개월) - 므나헴(745-737) - 브가히야(738-737) - 베가(737-732) - 호세아(732-724)가 등장하지만 통치기간은 약 24년밖에 되지 않을 정도로, 북이스라엘의 정치적 상황은 대단히 불안정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로보암 2세가 북이스라엘을 통치할 때에는 예후 왕조뿐만 아니라 전체 북이스라엘의 왕 가운데 경제적·군사적으로 가장 강력했습니다.
열왕기하 14장 25절에는 여로보암의 2세의 영토 확장에 대해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여로보암이 이스라엘 지경을 회복하되 하맛 어귀에서부터 아라바 바다까지 하였으니”(왕하 14:25).
그렇다면 하맛(Hamath)은 어디쯤에 위치해 있을까요?
여기에서 ‘아라바 바다’는 사해(死海, Dead sea)를 가리킵니다.

2. 정치· 경제적 상황

이러한 북이스라엘의 융성은 ‘내부적 요인’보다 ‘외부적 요인’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그동안 북이스라엘을 항상 괴롭혔던 아람은 신흥 세력이었던 앗수르의 아닷-니라리 3세(Adad-Ninari, 주전 810-782)의 침공을 받아 그들의 수도였던 다메섹이 점령당하여 조공을 앗수르에게 바쳐야 했습니다. 이로 인해 아람(시리아)은 그 힘이 약화되어 더 이상 북이스라엘을 괴롭힐 수 없었습니다(이희학, “북왕국 멸망의 사회적 원인들과 예언자 아모스의 심판”, 『구약논단』, 22).

더하여 아닷-니라리 3세와 그의 아들 디글랏빌레셀 3세(Tiglath pileser)는 더 이상 시리아-팔레스틴을 괴롭히지 않았습니다(이안 프로반 외 2인, 『이스라엘의 성경적 역사』, 547). 참고로 디글랏빌레셀 3세는 성경에서 ‘불’(Pull, 왕하 15:9, 대상 5:2)을 말합니다. 므나헴이 북이스라엘을 통치할 때, 디글랏-빌레셀 3세가 침략하려하자 그에게 은 1000달란트를 줌으로 위기를 모면하기도 했습니다(왕하 15:17-22).

또한 여로보암 2세 치세 하에 북이스라엘은 경제적인 호황을 누렸습니다. 여로보암 2세가 북이스라엘의 영토를 넓게 확장했다는 것은 그만큼 군사력이 뒷받침되었다는 것을 의미하고, 군사력이 강력했다는 것은 경제적 상황이 매우 좋았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예나 지금이나 한 나라의 군사력의 바탕은 경제력에 기반합니다. 외세의 침략이 사그라들자, 대내외적인 경제적인 여건도 좋아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북이스라엘에서는 ‘육로와 해상을 통해 국제무역이 활발했으며, 농산물(포도주와 곡식)을 팔아 부자들이 출현했습니다’(차준희, 『열두 예언자의 영성』, 49).

열왕기하 15장 20-21절 “앗수르 왕 불(Pull, 디글랏빌레셀 3세)이 와서 그 땅을 치려하매 므나헴이 은 일천 달란트를 불에게 주어서 저로 자기를 도와주게 함으로 나라를 자기 손에 굳게 세우고자 하여 그 은을 이스라엘 모든 큰 부자에게서 토색하여 각 사람에게 은 오십 세겔씩 내게 하여 앗수르 왕에게 주었더니 이에 앗수르 왕이 돌이키고 그 땅에 머물지 아니하였더라”는 말씀에서 ‘이스라엘 모든 큰 부자’라는 구절이 등장합니다. 당시, 화폐단위로 은 한 달란트는 3,000세겔이었기에 므나헴 당시, 북이스라엘에서는 적어도 60,000여명의 부자들이 살고 있었다는 말이 됩니다. ‘큰 부자’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깁보레 하일’은 본래 전쟁의 용사를 의미했지만, 본문에서는 경제적으로 부유한 사람, 즉 많은 토지를 소유한 대지주를 가리킨다고 볼 수 있습니다(이희학, “북왕국 멸망의 사회적 원인들과 예언자 아모스의 심판”, 『구약논단』, 32.

대지주들이 많다는 것은 그에 비해 소작농도 비례하여 많아졌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아모스 3장 15절에 의하면, 이들은 ‘사치스러운 여름 별장’과 겨울 별장을 소유했고 별장 안에는 값비싼 수입품이었던 상아로 장식하기도 했습니다(암 6:4). 이런 당시 부자들의 호화로운 사치 행각은 20세기 초반에 고고학을 통해서 입증되었습니다. 1930년대, 영국과 미국 합동 발굴팀은 북이스라엘의 수도, 사마리아의 궁전을 발견했습니다. 특히, 궁전의 한 방에서 수많은 상아 장식품들이 무더기로 발견되었기에 이를 ‘상아 방’(ivory room)이라 명명하였습니다(박준서 『이스라엘아! 여호와의 날을 준비하라』, 59. 각주 3번을 보라).

당시 소위 ‘빈익빈부익부’ 현상이 주전 8세기 북이스라엘 사회 전반에 걸쳐 발생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여기에서 파생하는 문제는 단순히 ‘개인의 문제’가 아닌 ‘사회전체 문제’로 비화되기 일쑤입니다. ‘무전유죄, 유전무죄’라는 사법체계의 붕괴, 없는 자에 대한 가진 자의 갑질과 착취, 사회 안전망의 붕괴 등이 발생하기 마련입니다. 결국, 주전 8세기 북이스라엘은 정치·군사적으로 매우 안정되었고 경제적으로도 풍요로운 시기였을 것으로 보입니다. 그렇다면 신앙상태는 어떠했을까요?

3. 북이스라엘의 신앙 상태

여로보암 2세 때의 북이스라엘은 대외적인 정치적 안정과 활발한 국제무역으로 인해 경제가 호황을 누렸습니다.
하지만 이들의 신앙상태는 매우 어두웠다고 아모스는 지적합니다.
북이스라엘의 죄의 고발은 아모스 3-6장에 집중되어 있습니다.

먼저, 하나님은 아모스를 통해 북이스라엘의 죄악을 드러내십니다.
아모스서 2장 4-8절은 북이스라엘의 죄악이 무엇인지 구체적으로 적시합니다.
먼저, 하나님은 심판을 돌이키지 않을 거라 말씀하십니다.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이스라엘의 서너가지 죄로 인하여 내가 그 벌을 돌이키지 아니하리니”(암 2:6).
바로 이어, 죄의 항목을 나열합니다.
첫째, 저희가 은을 받고 의인을 팔고, 신 한 켤레를 받고 궁핍한 자를 파는 것입니다.
둘째, 가난한 자의 머리에 있는 티끌을 탐내며 겸손자의 길을 굽게 하는 것입니다.
셋째 부자가 한 젊은 여인에게 다녀서 나의 거룩한 이름을 더럽히는 것입니다.
넷째, 모든 단 옆에서 전당 잡은 옷 위에 누우며 저희 신의 전에서 벌금으로 얻은 포도주를 마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북이스라엘의 죄악을 고발하시는 내용 중에서 소위 우리가 생각하는 ‘영적인 죄’의 언급은 없습니다.
성전제사를 드리지 못했다거나, 십일조를 안했다거나, 안식을 어겼다는 지적은 없습니다.
대신, 하나님은 아모스를 통해서 “네 가지 사회 윤리적 죄를 고발”(박준서 『이스라엘아! 여호와의 날을 준비하라』, 하십니다.
특이한 것은 이러한 죄의 고발은 아모스서 8장 4-6절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궁핍한 자를 삼키며 땅의 가난한 자를 망케 하려는 자들아 이 말을 들으라 너희가 이르기를 월삭이 언제나 지나서 우리로 곡식을 팔게 하며 안식일이 언제나 지나서 우리로 밀을 내게 할꼬 에바를 작게하여 세겔을 크게 하며 거짓 저울로 속이며 은으로 가난한 자를 사며 신 한 켤레로 궁핍한 자를 사며 잿밀을 팔자 하는도다(암 8:4-6).

이 두 본문을 잘 읽어보시면, 2장 6-7절에서는 “가난한 자”, “힘없는 자”, “연약한 자”가 언급되고, 8장 4-6절에서는 “가난한 자”, “힘없는 자”(4절), “힘없는 자”, “가난한 자”(6절)가 언급됩니다. 즉, 아모스서 2장 6-7절과 8장 4-6절은 동일한 세 집단을 언급하고 있습니다(김근주, 『소예언서, 어떻게 읽을 것인가 1』, 420. 참고로, 아모스서 2장 7절의 ‘겸손한 자’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아니’는 ‘빈곤한 자’ 혹은 ‘빈궁한 자’를 말합니다박준서 『이스라엘아! 여호와의 날을 준비하라』, 88.

이 두 본문(암 2:6-7, 8:4-6)이 보여주는 당시 북이스라엘의 사회는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에게 기대하셨던 삶과는 정반대의 삶의 모습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당신의 백성들에게 원하셨던 삶의 모습은 ‘재판을 공정하게 집행함으로 공의와 정의를 세우는 것’(신 24:17; 27:19, 출 23:6-8, 잠 17:23, 사 10:2, 암 5:12)이었으며, 고아와 과부와 나그네와 객과 같은 사회적 약자들을 돌보는 공동체였습니다(출 22:22, 신 10:18; 16:16, 욥 29:12-16, 시 41:1; 146:9, 잠 14:21; 22:22, 사 1:17, 렘 22:3). 하지만 아모스가 본 북이스라엘의 모습은 권력있는 자들이 재판을 굽게 하고 있으며, 돈이 있는 자들은 힘없고, 가난한 이들을 짓밟고 그들이 가진 최소한의 물질을 착취하는 세상이었습니다(암 4:1; 5:11-12).

아모스는 이런 자들을 향하여 “정의를 쑥으로 바꾸며 공의를 땅에 던지는 자들”(암 5:7)로 규정합니다. 더욱이, 당시 종교지도들 역시 이러한 흐름에 합세하여 타락의 길을 걸었습니다. “너희가 이르기를 월삭이 언제 지나서 우리가 곡식을 팔며 안식일이 지나서 우리가 밀을 내게 할꼬 에바를 작게 하고 세겔을 크게 하여 거짓 저울로 속이며”(암 8:5). 이 말씀에 따르면 당시 종교 지도자들은 제사와 절기가 빨리 지나가기를 고대하였다고 합니다. 그 이유는 그래야만 백성들이 바친 헌물들을 시장에 내다 팔 수 있기 때문이지요”(기민석, 『한국 성도들을 위한 예언서 강의』, 99). 이런 일을 누가 했을까요? 바로 당시 종교 지도자, 즉 성전에서 제사일을 관장하는 제사장들입니다. “심지어 하나님께 바친 헌물을 그냥 팔지 않고 저울을 속여 팔아 큰 이득을 남기려고 했다니, 참 가관입니다.”(기민석, 『한국 성도들을 위한 예언서 강의』, 99)

하지만 북이스라엘의 외형적 종교적 행위는 매우 정상적으로 작동되었습니다.
아모스서 4장 4-5절은 이를 잘 보여줍니다.

너희는 벧엘에 가서 범죄하며 길갈에 가서 죄를 더하며 아침마다 너희 희생을, 삼일마다 너희 십일조를 드리며 누룩 넣은 것을 불살라 수은제로 드리며 낙헌제를 소리내어 광포하려무나 이스라엘 자손들아 이것이 너희의 기뻐하는 바니라 이는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암 4:4-5).

본문에서 등장한 벧엘과 길갈은 북이스라엘 백성이 제사를 드렸던 제의의 중심지였습니다. 바로 이곳에서 구약의 절기들과 제사인 월삭, 안식일, 십일조, 수은제, 낙헌제가 상시적으로 드려졌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북이스라엘 백성들이 “아침마다” 제사를 드리며 “삼 일마다” 십일조를 드린다는 것, 그리고 여기에서 언급된 여러 제사의 종류 등은 이들이 참으로 정성스럽게 제사했음”(김근주, 『소예언서, 어떻게 읽을 것인가 1』, 457을 보여줍니다. 이 본문에서는 북이스라엘 백성들의 신앙행위가 어떤 불법적이거나 규례를 어긴 제사에 대한 책망을 발견하기 어렵습니다.

참고로, 수은제는 ‘감사제’(레 7:13)이고, 낙헌제는 ‘자원하여 드리는 제사’(레 7:16, 민 15:3)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이러한 북이스라엘 백성들이 드리는 신앙행위를 한 마디로 이렇게 규정하십니다.
“이스라엘 자손들아 이것이 너희의 기뻐하는 바니라”(암 4:5). 아모스서 5장 21-23절에서는 북이스라엘 백성들의 일체의 신앙행위를 미워하고 멸시하며 기뻐하지 않겠다고 선포하십니다. 특별히, 아모스서 5장 1절에 ‘내가 미워하고’, ‘내가 멸시하다’라는 거절을 표시하는 심한 표현이 반복해서 나타나는 것은 매우 드문 경우로, 이는 하나님의 강한 거부감을 드러내줍니다(차준희, 『열두 예언자의 영성』, 55).

내가 너희 절기를 미워하여 멸시하며 너희 성회들을 기뻐하지 아니하나니 너희가 내게 번제나 소제를 드릴찌라도 내가 받지 아니할 것이요 너희 살진 희생의 화목제도 내가 돌아보지 아니하리라 네 노래 소리를 내 앞에서 그칠찌어다 네 비파 소리도 내가 듣지 아니하리라(암 5:21-23).

본문에서 하나님은 북이스라엘의 신앙행위 일체를 거부하신다고 말씀하십니다.

첫째는 절기와 성회의 거부입니다.
둘째는 일체의 제사에 대한 거부입니다.
셋째, 노랫소리와 비파소리를 거부하겠다는 것입니다.
사실상, 하나님은 북이스라엘에서 드려지는 일체의 신앙행위 자체를 거부하시고 어떤 제사와 헌물도 열납하지 않겠다고 선언하십니다.


아모스는 8세기 전반기 이스라엘의 여로보아 2세와 유다의 웃시야의 치세에 살았던 사람이다.

표제는 그가 대지진 직전의 비교적 짧은 기간 동안 선지자로 활동했던 것을 시사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기본적으로 아모스서는 북왕국을 배경으로 하고 있는데, 이 때는 유례없는 번영의 시대였다. 이 때에 요나가 예언한 것처럼 다윗과 솔로몬의 제국 시절의 영토를 거의 회복했으며, 거대한 부가 왕국으로 쏟아져 들어왔다. 사마리아에는 강력하면서도 흥청망청할 정도로 부유한 계층이 성장하였다. 아모스의 설교의 초점이 된 것은 이러한 부유한 자들이 부와 권력과 특권을 남용한 점이다. 그러나 부와 군사적인 성공의 시기는 이스라엘 왕국의 짧고도 찬란한 일몰의 시기였다.

아모스 자신은 유다의 베들레헴 남쪽 오 마일 지점에 있는 드고아 지방 출신 목자였다.

이 선지자의 사회적 지위 - 얼핏 보기에 아모스는 천한 신분을 가진 것처럼 보인다. 그에게 사용된 목자라는 용어는 일반적으로 사용되는 용어(rsh)가 아니라 다른 용어(nqd)가 사용되었다. 이 칭호는 대규모 목축업자였거나 가축 중개인으로 볼 수도 있다. 적어도 아모스는 단순한 농부나 소작인이 아니라 보다 부유한 사회계층의 사람으로서 그들의 죄악상을 고발했던 것이 된다.

어느 드고아? - 유일하게 알려진 곳은 유다 베들레헴 남쪽의 마을이다.

아모스와 기타 선지자들 - 7:14절은 아주 논란이 많은 부분중의 하나이다. "나는 선지자가 아니며 선지자의 아들도 아니요(I not porphet; I not son of prophet)" 라는 구절을 과거로 해석하거나 현재로 해석할 경우 많은 해석상의 차이가 나기 때문이다. 그러나 대적 아마샤는 아모스를 선지자로 생각했다는 것을 암시한다. 아마샤와 아모스 모두 그의 행동을 예언이라는 동사를 가지고 지칭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선지자와 이 책간의 관계 - 오경의 문서 비평 방법론이 지배하던 시기에는 아모스 자신의 말들을 후대의 것들로부터 분리하려는 노력들을 기울였다. 여기서 아모스는 이스라엘에 새로운 종교적 전통을 고안한 사람이 된다. 양식비평에 이르러서는 아모스서의 관심을 원래의 뼈대와 함께 원래의 설교들의 사회 문화적인 배경을 조사하고, 일단 성문화된 문헌의 편집 단계를 찾는데 시간을 들였다. 이로써 아모스는 이스라엘의 종교에 있어서 어떤 새로운 단계를 고안해낸 자가 아니라 이스라엘의 역사적 전통들에 깊이 젖어 있던 자가 된다. 이런 작업을 통해서 아모스서의 수많은 부분들이 후대의 증수된 부분으로 간주되었다.

그러나 보다 더 많은 현대의 학자들이 비평학계의 방법론들이 과연 성경의 책들, 특히 아모스서와 가은 작은 책들을 잘게 쪼개는 것을 허용해 주는 가 하는 것에 대해서 점점 더 의심을 품고 있다. 아모스서에 대한 연구의 세 번째 단계는 문학적인 구조와 수사학적인 발전 과정에 보다 많은 관심을 가지고 이 책에 접근하는데 있다. 이들은 아모스의 저자 문제와는 별도로 아모스서가 하나의 통일된 작품으로 간주하고, 편집자이든 아모스이든 본질적으로 한 사람의 작품이라고 보는 경향이 있다.

문학적인 구조

열방들에 대한 신탁(1-2장)

아모스는 일곱 나라에 대한 예언적인 심판의 말씀을 전한다.심판의 신탁들은 이스라엘을 중심으로 해서 일종의 지리적인 교차대구법을 이루고 있다. 각각의 심판들은 지혜문학에서 흔하게 나타나는 X와 X+1의 숫자 패턴을 사용하고 있다(서너가지 죄로 인하여).

그러나 이것들을 주로 이스라엘을 비난하기 위해 채택된 수사학적인 기법들이다. 그의 말을 듣는 청중들은 이웃 나라들이 저지른 잔혹한 행위들에 대한 비판들에 쉽게 고개를 끄덕이다가 결국은 사회적인 불의에 대한 비난이 자신들의 발등에 떨어지는 것을 보고 깜짝 놀라게 되었을 것이다. 주변 적국들에 대한 신탁은 이스라엘에게 갑자기 튀어 오르는 덫이 된다.

이스라엘에 대한 심판의 말씀들(3-6장)

여기서 아모스는 다양한 문학 양식들을 사용하는데, 가장 두드러진 것이 선지자적인 소송의 연설양식이다. 선지자는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니므이 고소 내용을 전달하기 위한 법정 대리인의 역할을 한다. 그리고 그 배경은 재판정이다. 이런 선지자적인 소송 외에도 아모스는 또한 심판의 연설들과 저주의 신탁들을 사용한다.

이상들에 대한 기록들(7-9장)

선지자는 자신이 받은 다섯 개의 이상들에 대한 자서전적인 기록을 제공해주고 있다. 이 중 네 개는 서로간에 비슷하고, 마지막은 뚜렷한 차이가 난다. 처음 네 개는 분명한 연결점이 있으며, 하나의 집단적인 구조를 갖추고 있다. 또한 아모스는 자신의 신탁들을 전달하기 위해 다양한 문학적인 기교들을 사용하고 있다.

신학적인 주제들

하나님의 주권과 심판

아모스는 하나님께서 북왕국의 종교적, 사회적 관행들을 거부하시고, 그들의 불순종 때문에 그들을 벌하시기로 결정하셨다는 것을 선언하고 있다. 허버드는 주권적인 통치와 심판을 네 가지 상이한 차원에서 바라본다. 첫째는 개인적,신적 차원에서이다. 심판에서 주도권은 하나님께 있다. 둘째는 창조적 차원이다. 세상 자체가 악을 심판하기 위해서 일어나는 형국이다. 셋째는 도덕적인 인과관계의 차원이다. 다른 사람들을 향해 저질러진 악은 본인에게 악으로 되돌아온다는 것이다. 넷째는 정치적인 역사의 시각에서 보자면 하나니므이 주권적인 통치는 세상의 열방들을 다 포괄한다.

우상숭배와 사회적인 불의

하나님의 심판에 대한 아모스의 메시지는 우상수애와 사회적인 불의라는 두 가지 영역에 대한 것이다. 여호와 숭배가 부패했으며, 외형적이고 허식적인 종교적인 사항들은 율법의 중요한 요소들을 상실했다. 어떤 이는 하나님을 공개적으로 무시하기도 했다. 물질적인 번영은 부유한 상류계층을 만들어 냈고, 여유 시간과 잉여 재산은 죄악에 사용되었다. 이제 공의로우신 하나님께서 자신의 언약 백성들 가운데 공의를 명하시며, 순종을 요구하신다.

언약과 남은 자

아모스는 급진적인 종교개혁가가 아니었다. 언약에 근거한 법정 소송의 대리자로서의 그의 위치는 언약의 존재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 이 책은 오경의 내용을 많이 언급하고 있으며, 언약적인 이념들을 잘 파악하고 있다. 선민, 즉 야웨와의 언약 관계 속에서 구속을 받은 나라라는 이스라엘의 지위는 이 책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거룩성 때문에 이 백성의 죄를 심판으로 대응하시는 수밖에 없으시다. 그러나 이스라엘에 대한 그의 헌신 때문에 거기에는 항상 남은 자들, 즉 하나님의 심판을 통과하고 하나님의 계속적인 백성의 핵이 되는 자들이 항상 존재한다.

여호와의 날

이스라엘에게 여호와의 날은 그 나라가 변호를 받는 날, 용사이신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적들에게 심판을 행하시는 날로 보았다. 그러나 아모스는 이 개념은 완전히 뒤집었다. 여호와의 날은 이스라엘에 대한 심판을 의미했으며, 용사이신 하나님은 이 백성의 죄를 심판하기 위해서 원수들의 군대들을 자기 백성에게로 보내실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

아모스는 선지자들을 통해서 계시도니 하나님의 말씀의 능력과 효력에 대해서 다른 선지자들과 같이 신념을 갖고 있다.

신약으로의 접근

신약은 사회 정의 및 가난한 자들의 학대에 대한 아모스서의 관심을 공유하고 있다.
아모스서는 특히 신약의 몇몇 구절들 속에서 구체적으로 인용되어 있다.
로마서 12:9에서 악을 미워하고 선을 사랑하라는 권면
스데반의 설교에서 나타나는 국가적인 우상숭배에 대한 회상 등이 그것이다.
또한 사도행전 15:16-17에 인용된 아모스 9:11-12를 들 수 있다.
예루살렘 공의회에서 야고보는 이방인들을 교회 속에 포함시키는 것이 이스라엘의 재연합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을 성취시키는 것잉라고 주장한다.
다윗의 무너진 천막을 다시 일으키며, 그 틈을 수리하는 것은 이스라엘이라는 실제적인 나라에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 열방들을 모으는 것도 또한 포함하는 것이었다.


주전 8세기의 역사적 배경(히스기야)


히스기야(주전 715-685년)

이제 주전 8세기를 배경으로 하고 있는 아모스서, 호세아서, 이사야서, 미가서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한 역사적 배경 연구는 히스기야로 마감을 합니다. 이사야와 미가는 남유다 왕이었던 웃시야, 요담, 아하스, 히스기야 시대에 활동한 예언자들입니다.

대체로, 히스기야는 구약성경을 조금 아는 분들이라면 익히 들어본 이름입니다. 그만큼 히스기야는 남유다의 성군 가운데 한명으로 인정받습니다. 역대기 기자는 29장부터 32장까지 무려 4장을 할애하여 다루고 있을 정도로 히스기야는 남유다 왕들 가운데 성군으로 평가됩니다.

먼저, 히스기야에 대한 역사적 기록은 열왕기하 18장부터 20장까지이고, 역대기는 역대기하 29장부터 32장까지 기록되어 있습니다. 열왕기 저자는 히스기야에 대하여 3장을 할애했고, 역대기 저자는 4장을 할애하고 있습니다. 먼저, 히스기야에 대한 열왕기 저자의 평가에 대해서 보겠습니다.

히스기야가 그 조상 다윗의 모든 행위와 같이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히 행하여 여러 산당을 제하며 주상을 깨뜨리며 아세라 목상을 찍으며 모세가 만들었던 놋뱀을 이스라엘 자손이 이때까지 향하여 분향하므로 그것을 부수고 느후스단이라 일컬었더라 히스기야가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를 의지하였는데 그의 전후 유다 여러 왕 중에 그러한 자가 없었으니 곧 저가 여호와께 연합하여 떠나지 아니하고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하신 계명을 지켰더라 여호와께서 저와 함께 하시매 저가 어디로 가든지 형통하였더라(왕하 18:3-7)

히스기야에 대해서는 다른 왕들과는 달리 일말의 부정적인 평가도 없습니다. 한마디로, 그는 ‘다윗의 모든 행위와 같이’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히 행하였습니다. 또한 그는 하나님과 연합하여 떠나지 않았으며,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하신 계명을 지켰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히스기야가 어디로 가든지 형통케 하셨습니다. 이렇게 열왕기 저자는 히스기야에 대해 매우 긍정적으로 평가합니다.

역대기 저자 역시 히스기야에 대해 매우 긍정적으로 평가합니다. “히스기야가 그 조상 다윗의 모든 행위와 같이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히 행하여”(대하 29:2). 이렇게 히스기야는 열왕기 저자와 역대기 저자에게 모두 후한 점수를 받습니다. 그렇다면 왜 두 저자는 히스기야에 대해 긍정적으로 평가했을까요? 그 이유에 대해 알아 봅시다. 첫째, 히스기야는 그의 부친, 아하스로 인해 16년간 방치되었던 성전을 정화하고, 성전제사를 회복합니다(대하 29:1-36). 둘째, 그 동안 지켜지지 않았던 유월절 절기를 7일간 준행합니다(대하 30:1-27). 셋째, 남유다 성읍에 세워진 모든 우상들과 우상숭배의 진원지였던 산당과 단을 파괴함으로, 우상숭배의 뿌리를 제거합니다(대하 31:1). 이러한 히스기야의 종교개혁에 대해 역대기 저자는 이렇게 평가합니다. “히스기야가 온 유다에 이같이 행하되 그 하나님 여호와 보시기에 선과 정의와 진실함으로 행하였으니 무릇 그 행하는 모든 일 곧 율법에나 계명에나 그 하나님을 구하고 일심으로 행하여 형통하였더라”(대하 31:21).

이렇게 히스기야가 남유다의 종교개혁을 시도하는 사이, 앗수르는 북이스라엘을 재차 침략합니다. 우리가 위에서 다루었듯이, 앗수르의 디글랏빌레셀 3세는 북이스라엘의 므나헴 왕 때에도(왕하 15:17-20), 베가 왕 때에도(왕하 15:27-31) 침략을 했습니다. 히스기야 재위 4년, 이때 북이스라엘은 마지막 왕, 호세아가 다스리던 때였습니다. 참고로, 이 호세아는 예언자 호세아와는 전혀 다른 인물입니다. 북이스라엘의 마지막 왕, 호세아가 앗수르의 왕, 살만에셀에게 바쳤던 조공을 중단하고 대신 이집트의 도움을 청합니다. 이는 “당시 중동에서 유일하게 앗수르를 견제할 수 있는 강대국 중 하나였던 애굽의 소(So)왕에게 사신을 보내 새로운 후원자가 되어 달라고 한 것”(한홍, 『왕들의 이야기 1』, 281)입니다. 하지만 이집트의 정치적 상황은 매우 복잡했기에 북이스라엘을 도울 처지가 되지 못했습니다. 앗수르를 배반하고 이집트의 원조를 청한 사실을 알게 된 앗수르의 왕 살만에셀은 대군을 이끌고 이스라엘의 수도, 사마리아를 3년간 포위합니다(왕하 17:1-5). 이러는 동안, 앗수르의 살만에셀이 갑자기 사망하자 그의 뒤를 이어 그의 형제인 사르곤 2세가 왕위를 이어받아 사마리아를 공격합니다. 결국, 북이스라엘은 앗수르의 사르곤 2세에게 멸망합니다. 이때가 주전 722년입니다.

3만 명에 이르는 북이스라엘의 백성들이 앗수르로 끌려갔으며, 앗수르의 도시들인 할라, 고산 하볼 하숫가, 메대 지역으로 강제 이주되었습니다. 앗수르가 취한 식민통-치방식은 ‘쌍방향 강제이주정책’(two way-deportation policy)(차준희, 『역사서 바로읽기』, 229)이었습니다. 즉, 앗수르의 백성들을 식민지 국가에 이주시키고, 식민지 백성을 자기 영토에 강제로 이주시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왜 앗수르 제국은 이렇게 쌍방향 강제이주정책을 시행했을까요? 이는 혼혈정책을 통해 신민지 국가가 앗수르에게 저항할 수 없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이러한 앗수르의 혼혈정책으로 탄생한 것이 ‘사마리아인’입니다. 사마리아인은 앗수르와 북이스라엘 사이에 태어난 혼혈인종을 말합니다.

이것이 사마리아의 비극의 시작입니다. 나중에 유대인들이 사마리아 사람들을 경멸하는 것은 바로 그들에게 이방인의 피가 섞였다는 점을 가지고 불결하게 여겼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사마리아 사람들을 ‘개’ 취급했습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시대까지 내려갑니다(차준희, 『역사서 바로읽기』, 230) .

이후로, 사마리아인들은 예수님이 오실 때까지 약 400년간 유대인들에게 사람 취급받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요한복음 4장에서 의도적으로 사마리아 여인을 만나주셨고, 그로 인해 사마리아 지역에도 복음이 심겨집니다. 더 나아가, 사도행전 8장에는 사마리아인들에게도 성령이 강림하십니다. 소위 이를 ‘사마리아인의 오순절’이라고 합니다.

한편, 약 3만여 명의 북이스라엘의 백성들은 다음과 같은 경로를 통해 앗수르 지역으로 이송되었습니다. “특히 앗수르는 피정복민의 반란을 방지하는데 총력을 기울였는데, 그 대표적인 것이 반역할 가능성이 높은 지방의 주민들을 모아서 멀리 딴 곳으로 이주시켜 버리는 강제이주정책”입니다. 앗수르가 북이스라엘 백성을 강제로 이주시킬 때, 매우 잔혹한 방법을 사용했습니다.

앗수르는 포로들을 앗수르로 끌어갈 때 말할 수없이 잔혹한 방법을 사용했다. 포로들의 발목을 줄이나 사슬로 묶어 보폭으로 걷게 했을 뿐 아니라, 가죽 끈에 묶여진 갈고리를 혀나 턱에 꽂았다. 묶인 손이나 발에 구멍을 내어 밧줄을 엮는 경우도 있었다. 포로들이 잘 따라오지 못할 때는 이 갈고리 끈을 사정없이 잡아 당겨서 포로들에게 형언키 힘든 고통을 주었다. 앗수르의 이 잔혹한 포로 다루기는 바벨론에게도 그대로 답습된다(한홍, 『왕들의 이야기 2』, 50).

앗수르로 끌려간 북이스라엘 백성들은 인종적으로 혼합되어 버렸고, 종교 역시 혼합되어 버리고 맙니다. 이렇게 북이스라엘은 당시 고대근동의 맹주였던 앗수르에게 주전 722년에 멸망합니다.

이렇게 북이스라엘을 점령한 앗수르 제국은 이제는 남유다를 식민지화 하려고 침략합니다. 이때가 히스기야 재위 14년입니다. 이 사건에 대해 열왕기 저자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히스기야 왕 십 사년에 앗수르왕 산헤립이 올라와서 유다 모든 견고한 성읍들을 쳐서 취하매”(왕하 18:13). 한편, 역대기 저자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 모든 충성된 일 후에 앗수르왕 산헤립이 유다에 들어와서 견고한 성읍들을 향하여 진을 치고 쳐서 취하고자 한지라”(대하 32:1).

히스기야는 그의 아버지 아하스와는 달리, 반-앗수르 정책을 펼쳤습니다. “저가 앗수르 왕을 배척하고 섬기지 아니하였고”(왕하 18:7). 이러한 히스기야를 앗수르의 산헤립은 그냥 넘어가지 않았습니다. 대군을 이끌고 남유다를 초토화시키려고 침략합니다.

앗수르 왕 산헤립의 대군은 노도와 같이 몰려와서 주변 여러 나라들을 복종시키고 블레셋의 성읍들도 휩쓸어 버렸다. 여로보암 때부터 요새화된 요충지 라기스도 점령하고 에그론 왕을 해방시키더니, 아프리카의 강국 애굽과 에티오피아 연합군까지 격퇴시켰다. 이 싸움에서 산헤립은 유다의 46개 성읍을 점령하고 20만이 넘는 포로들을 잡아갔다. 무시무시한 공성 장비를 가진 앗수르 대군의 침략 앞에 유다는 풍전등화와 같은 운명에 처했다(한홍, 『왕들의 이야기 2』, 309).

이때, 히스기야는 너무 두려운 나머지 앗수르의 산헤립에게 다음과 같은 편지를 보냅니다. “내가 범죄하였나이다 나를 떠나 돌아가소서 왕이 내게 지우는 것을 내가 당하리이다”(왕하 8:14). 이에 앗수르의 산헤립은 히스기야에게 엄청난 비용을 요구합니다. 즉, 은 300달란트와 금 30달란트입니다. 이에 히스기야는 여호와의 전과 왕궁 곳간에 있는 은을 다 주었고, 더하여 여호와의 전 문의 금과 자기가 모든 기둥에 입힌 금을 벗겨 모두 앗수르 왕에게 줍니다(왕하 18:13-16). 하지만 앗수르의 산헤립은 여기에 만족하지 않고, 대군을 이끌고 남유다를 완전히 지배하려고 합니다(왕하 18:17-37). 이 사건은 이사야 36-38장까지 길게 기록되었습니다.

이러한 국가적 위기 앞에, 히스기야는 이전과는 달리 하나님을 전폭적으로 의지합니다. “히스기야왕이 듣고 그 옷을 찢고 굵은 베옷을 입고 여호와의 전에 들어가서 궁내 대신 엘림야김과 서기관 셉나와 제사장 중 장로들에게 굵은 베옷을 입혀서 아모스의 아들 선지자 이사야에게 보내매”(왕하 19:1-2). 비록 이전에는 앗수르의 산헤립이 두려워서 성전에 있는 금을 다 긁어모아 바쳤지만, 이제는 여호와의 전에 들어가 기도합니다. “굵은 베를 입는다는 것은 큰 국가적 재난 앞에서 리더가 스스로 회개하며 하나님 앞에 목숨을 건 기도를 드리겠다는 의미”(한홍, 『왕들의 이야기 2』, 318)입니다. 그리고 히스기야는 당시, 궁중 예언자였던 이사야에게 사신을 보내어 ‘앗수르의 침략에 하나님의 계획’에 대해 묻자 이사야는 히스기야가 보낸 사신들에게 다음과 같은 예언을 전달해 줍니다.

이사야가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는 너희 주에게 이렇게 고하라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너희의 들은 바 앗수르 왕의 종들이 나를 능욕한 말을 인하여 두려워 말라 보라 내가 신을 그의 속에 두리니 그가 풍성을 듣고 그 고토로 돌아갈 것이며 또 내가 그를 그 고토에서 칼에 죽게 하리라 하셨느니라(사 37:6-7).

이와 같이 히스기야왕의 신복이 이사야에게 나아가니 이사야가 저희에게 이르되 너희는 너희 주에게 고하라 여호와의 말씀이 너는 앗수르 왕의 신복에게 들은바 나를 능욕하는 말을 인하여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한 영을 저희 속에 두어 저로 풍문을 듣고 그 본국으로 돌아가게 하고 또 본국에서 저로 칼에 죽게 하리라(왕하 19:5-7)

여기에서 우리가 유념할 것은 역사서와 예언서가 서로 병행할 때가 있다는 것입니다. 즉, 이사야서라는 예언서에 역사적 사건들이 종종 기록되어 있다는 말씀입니다. 다시 말하지만 이렇게 예언은 ‘무시간적·무공간적인 말씀’이 아니라, 특정한 시간과 공간에서 발생한 특정한 사건에 대한 말씀입니다.

이사야서 37장 6-7절과 열왕기하 19장 5-7절은 약간의 기록의 차이는 있지만, ‘하나님께서 앗수르의 침략으로부터 남유다를 구원하시겠다’는 예언의 말씀은 일치합니다. 실제로, 그 다음날 앗수르의 정예부대 18만 5천명의 군사들이 몰살당합니다. 산헤립 역시 이사야의 예언대로, 그의 아들들에게 살해당합니다(왕하 19:35-37). 그러면서 고대근동 지역을 호령했던 앗수르의 세력은 점점 힘을 잃어갔고, 대신 바벨론이라는 또 다른 제국이 흥기하게 됩니다.

국가적 대재난을 잘 넘겼던 히스기야에게 갑자기 죽을 병이 찾아옵니다(왕하 20:1, 사 38:1). 이때, 하나님은 이사야를 통해 히스기야에게 다음과 같은 말씀을 전하라고 하십니다. “이사야가 저에게 나아와서 이르되 여호와의 말씀이 너는 집을 정리하라 네가 죽고 살지 못하리라”(왕하 20:1). 히스기야는 이사야의 예언의 말씀을 듣고 눈물로 통회하고 하나님께 간구합니다. 그러자 하나님은 즉각적으로 이사야를 통해서 히스기야의 생명이 15년 연장될 것이라는 말씀을 주십니다(왕하 20:4-6). 이렇게 히스기야는 국가적 재난으로부터 남유다를 구원했고, 개인적인 환난으로부터도 구원을 받습니다.

하지만 히스기야는 이로 인해 마음이 높아지고 맙니다. 마치, 자기의 힘과 능으로 된 것처럼 착각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던 차에 고대근동의 신흥강국으로 부상하고 있던 바벨론왕, 발라단의 아들인 브로닥발라단이 히스기야에게 편지와 예물을 보냅니다(왕하 20:12). “고대사회에서는 병으로 회복된 군주에게 이웃 나라 왕들이 축하 사신과 선물을 보내는 것이 외교적 관례”(한홍, 『왕들의 이야기 2』, 333)입니다. 그러자 히스기야는 무슨 생각으로 그랬는지는 모르지만, 남유다의 주요한 시설을 바벨론의 사절단에게 다 공개해 버립니다.

그 때에 발라단의 아들 바벨론 왕 부로닥발라단이 히스기야가 병들었다 함을 듣고 편지와 예물을 저에게 보낸지라 히스기야가 사자의 말을 듣고 자기 보물고의 금은과 향품과 보배로운 기름과 그 군기고와 내탕고의 모든 것을 다 사자에게 보였는데 무릇 왕궁과 그 나라 안에 있는 것을 저에게 보이지 아니한 것이 없으니라 선지자 이사야가 히스기야왕에게 나아와서 이르되 이 사람들이 무슨 말을 하였으며 어디서부터 왕에게 왔나이까 히스기야가 가로되 먼 지방 바벨론에서 왔나이다 이사야가 가로되 저희가 왕궁에서 무엇을 보았나이까 히스기야가 대답하되 내 궁에 있는 것을 저희가 다 보았나니 나의 내탕고에서 하나도 보이지 아니한 것이 없나이다(왕하 20:12-15).

이사야는 이러한 히스기야의 행동에 대한 하나님 심판적 예언을 전달합니다. “여호와의 말씀이 날이 이르리니 무릇 왕궁의 모든 것과 왕의 열조가 오늘까지 쌓아 두었던 것을 바벨론으로 옮긴바 되고 하나도 남지 아니할 것이요 또 왕의 몸에서 날 아들 중에서 사로잡혀 바벨론 왕궁의 환관이 되리라 하셨나이다”(왕하 20:17-18). 하나님은 히스기야에게 두 가지의 심판적 말씀을 하십니다. 첫째, 남유다의 모든 재물이 바벨론으로 이거된다는 말씀입니다. 둘째, 왕의 몸에서 태어난 아들 가운데 바벨론의 환관이 된다는 것입니다. 즉, 이 말씀은 남유다가 바벨론의 식민지가 된다는 말씀입니다. 이사야의 예언대로, 남유다는 약 100년 후에 바벨론에게 멸망합니다.

이렇게 하여, 아모스와 호세아가 활동하던 북이스라엘의 여로보암 2세의 시대적 배경, 이사야와 아모스가 활동하던 남유다의 웃시야, 요담, 아하스, 히스기야의 역사적 배경을 살펴보았습니다. 이제는 예언서 본문 속으로 들어가서, 그들이 진정으로 추구했던 예배의 모습이 어떤 것이었는가를 탐구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아모스서는 어떤 성서인가요?

예언자 아모스가 전한 하나님의 말씀을 적은 성서라 그 예언자의 이름을 따서 ‘아모스’라 불렸어요.
아모스서는 유다 문학 사상 가장 먼저 쓰여진 예언서로 중요하지요.
비록 분량이 적어 후기 예언서에 속하는 12개의 소예언서에 속하지만, 다른 예언서에 미친 영향은 대단히 컸답니다.

아모스는 어떤 성경인가?

누가 썼나요?

예언자 아모스가 전한 하느님의 말씀이 이 성서의 주된 내용이지요.
아모스란 이름의 뜻은 ‘주님을 짊어진 사람’입니다.
그는 본래 남 유다 사람으로 “목자요 돌무화과를 가꾸는 농부”(아모 7,14)였습니다. 그렇지만 그가 가난하고 무식한 농부는 아니고 상당한 자기 재산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더구나 주변의 국제정세나 유다와 이스라엘의 국내 사정에 밝은 걸 보면, 그는 꽤 많이 배운 사람이었으리라 여겨집니다.

아모스는 본래 예언자 가문에 속하지도, 왕실 예언자도 아니었습니다. 다만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고 북 이스라엘의 사마리아와 베델에 가서 말씀을 전하는 예언자의 역할을 맡게 되었습니다. 말씀을 전한 뒤, 그는 남 유다로 추방되었다고 여겨집니다. 구약의 위경들이 전하는 전설에는 아모스가 베델의 사제 아마니야의 아들에게 살해되었다, 또는 남 유다의 왕 우찌야에게 살해되었다고 합니다.

특히 아모스는 하느님의 현존과 정의를 크게 강조하였기에 ‘정의의 예언자’란 별명을 얻기도 했지요.

언제 쓰여졌나요?

예언자 아모스가 활동한 때는 북 이스라엘의 여로보암 2세(기원전 786-746) 시절로서 대략 기원전 760년경으로 추정됩니다.
아모스의 예언활동이 그친 얼마 뒤에 그와 가까운 사람들이 아모스가 선포한 신탁들을 모우고, 또 자신이 직접 밝힌 자서전적인 내용(7,1-9; 8,1-3; 9,1-4)을 덧붙여 아모스서의 골격이 이루었을 것입니다.
그의 예언은 남 유다에서도 계속 살아 움직여서 유다에 관한 내용이 뒷부분에 덧붙여졌지요.
아마 최종적인 아모스서의 형태는 다른 예언서들처럼 유배기나 그 이후에 이루어졌다고 추정합니다.

왜 쓰여졌나요?

아모스가 예언자로 등장한 때는 북 이스라엘의 전성기가 저물어갈 무렵이었습니다. 주변 강대국들의 세력이 위축된 탓에 기를 펴고 살면서 상업으로 부를 축적한 북 이스라엘의 부유층은 가난한 동족을 괴롭히는 불의를 자행하며, 자만과 향락 속에 빠져 안일하게 살고 있었지요. 그러면서도 많은 사람들은 자신들이 하느님께 선택받았으므로 그분의 보호를 받아 아무 일도 당하지 않으리라는 믿음의 환상을 지니고, 자기식의 예배행위에만 열중하고 있었지요.

이렇게 태평스레 있는 백성들에게 아모스는 무서울 정도로 엄하고 가혹한 하느님의 심판을 선포합니다. 이 심판은 그들의 잘못에 대한 처벌을 넘어, 하느님을 잊고 사는 사람들에게 하느님은 실제로 계시며 그분은 정의를 원하신다는 것을 분명히 일깨워주는 수단이었습니다. 그리하여 자기 중심적인 생활에서 하느님 중심적인 생활로 되돌아갈 것을 강하게 일러준 것이죠.

 <새김과 나눔>

모든 일이 순탄하게 진행될 때, 우리는 별 문제가 없다고 여기며 현실에 안주하기 쉽습니다. 아모스의 예언은 불과 몇십 년이 지나지 않아 실현되었습니다. 나는 지금 어떻게 하느님의 현존을 느끼며 살아가고 있습니까?

야훼를 찾아라

(아모 1-9장)

아모스서는 9장인데, 내용에 따라 세 부분으로 나눠 볼 수 있습니다.

 나 야훼가 선고한다(아모 1,1-2,16)

하느님께서 심판을 선고하신 나라는 모두 몇 나라입니까?(2,21-24)

 하느님께서 외치시면 가르멜 산마루의 푸른 초원이 말라버릴 정도로, 말씀의 힘은 살아 있고 대단합니다. 이제 그 하느님께서 다마스커스, 불레셋 등 여러 민족의 죄상을 드러내며 그들에게 멸망을 선고합니다. 그들의 죄는 다른 민족 사람들을 마구 다루고 죽인 잘못입니다. 그 누구라도 형제를 괴롭히고 생명을 짓밝는 자는 생명의 주인이신 하느님을 욕보이는 짓입니다.

유다와 이스라엘 역시 죄없는 사람을 괴롭히고 우상을 섬겨 하느님의 거룩하신 이름을 더럽힌 잘못을 범했다고 고발되죠. 그들은 자신들의 전존재를 하느님께 맡겨야 하는 하느님의 백성임에도 불구하고, 하느님의 말씀과 규정을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아 심판을 받게 된 것이에요.

 네 하느님과 만날 채비를 하여라(아모 3,1-6,12)

아모스가 하느님을 찬미하는 두 가지 송가를 크게 읽어 보십시오(4,13; 5,9-8)

 이제 본격적으로 이스라엘의 죄를 고발하는 아모스의 외침이 터져 나옵니다. 아모스는 자신이 원하거나 자의 적인 판단에 따라 예언자가 된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말씀에 붙잡혀 순종하는 것임을 밝힙니다. 그는 이스라엘의 수도인 사마리아의 왕실과 부유한 세도가와 그들의 귀부인들이 저지르는 불의를 규탄하며 멸망을 선고합니다. 그들은 하느님과 다른 형제들을 자기 욕망 충족의 대상으로 삼아 무시하고 괴롭히며, 오직 자기 중심적으로 허영심과 자만심에 빠져 살아가고 있을 따름입니다.

그들도 성소에서 하느님께 제물을 드리고 십일조를 봉헌하며 감사예물을 끊임없이 바치지만, 아모스는 이

것 역시 살아 계신 하느님께 대한 깊은 경외심과 순종함이 없는 자기 기만적인 행위에 지나지 않는다고 지적합니다. 그렇기에 결국 하느님과 떨어져 죽음의 길을 가는 그들에게, 생명의 원천이신 하느님께 돌아와 살 길을 찾으라고 부르짖습니다.

 다시는 뿌리뽑히지 않으리라(아모 7,1-9,15)

아모스가 본 다섯 가지 환시의 내용과 뜻은 무엇입니까?(7,1-9; 8,1-3; 9,1-4)

아모스가 본 환시들은 심판의 말씀을 한층 더 생생하게보완해 줍니다.
그러나 베델의 사제 아마지야는 그를 추방하여 그 말씀을 무시하려고 하죠.
하지만 먹을 양식은 넘쳐도 참된 하느님의 말씀에 굶주리는 처지는 외적인 불행보다 더 심한 내적인 고통이요 심판입니다.

결국 아모스가 선포하는 요점은 하느님을 무슨 안전장치 쯤으로 여기고 안일하게 살아가는 이들에게, 참되고 결정적인 힘이신 하느님의 실재를 깨우쳐주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나 중심에서 하느님 중심으로 돌아가(회개하여) 하느님만을 유일한 주님으로 섬기고 그분에게서 비롯되는 형제들에 대한 책임을 다하는 삶을 살 때, 그분께서 약속하신 구원이 오리라는 선포랍니다.
누구든 하느님과 함께 있으면 살고 떨어지면 죽습니다.



아모스를 통한 하나님의 뜻은 무엇입니까?

아모스 5:14
너희는 살려면 선을 구하고 악을 구하지 말지어다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의 말과 같이 너희와 함께 하시리라.

아모스서는 저자의 이름을 따라 정했으며, '아모스'는 '짐을 지는 사람'이란 뜻으로, 이는 여호와를 거부하거나 아예 망각하고 있던, 당시의 남.북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심판을 선포하는 어려운 사역을 수행해야 했던 아모스의 소명과 잘 어울다고 할수 있습니다. 

아모스는 남유다 예루살렘 남방 약 20km지점에 위치한 드고아의 목자 출신이었습니다. 
아모스는 당시 정치. 경제, 군사적으로 최고의 번영기를 구가하였으나, 도덕적, 종교적으로는 타락이 극심했던 북이스라엘을 일차 대상으로 하고 있으며, 당시 일시적 부강과 번영에 도취되어 여호와 신앙을 떠나 인본주의적. 세속적 타락에 함몰된 선민의 사회 정의의 상실을 중심으로 한 적나라한 지적과 그에 대한 철저한 심판 및 공의의 징계 이후의 하나님의 무조건적 은혜에 의한 회복 을 약속하고 있습니다.

아모스는 먼저 다메섹(1:3~5), 가사(1:6~8), 두로(1:9~10), 에돔(1:11~12), 암몬(1:13~15), 모압(2:1~3), 유다(2:4~5)에 이어, 그 정점으로서 이스라엘(2:6~16)에 대한 심판을 예고하고 있습니다(1~2장).

그리고 이어 심판 예언의 가장 중요한 대상이 되는 이스라엘을 향해 온갖 불의와 불법을 행하고 형식적으로만 예배하는 사회 지도층은 왜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야만 하는지, 그 당위성을 설교(3~6장)하고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아모스서는 마지막으로 다섯개의 환상을 통해, 이스라엘을 멸망시키기로 작정한 하나님의 굳은 결심을 보여주고 있습니다(7~9장). 

처음 메뚜기 환상(7:1~3)과 불 환상(7:4~6)에서는 아모스의 간구로 하나님의 심판이 유예됩니다.

그리고 다림줄 환상(7:7~9)과 여름 과일 환상(8:1~3)에서는 선지자의 간구가 더이상 소용없게 됩니다.

그리고 마지막 성소 붕괴 환상(9:1~4)은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을 버리셨음을 확증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아모스서를 통한 하나님의 메시지가 무엇인지를 살펴보겠습니다.

첫째, 하나님과의 수직적 관계 파괴에 따른 사회 정의의 실종에 관한 내용

아모스서는 사회 정의가 붕괴된 선민 사회의 부패를 지적하고, 부패에 필연적으로 뒤따르는 하나님의 심판을 선언한 책으로 유명합니다. 그것은 본서에는 약자에 대한 강자의 무자비한 횡포(3:9.10; 4:1)와 수탈과 폭리(2:1; 5:11)및 상류 계층의 사치와 방종(2:8; 6:4-6) 등의 다양한 사회 악이 거듭하여 예리하게 지적되고 있을 뿐만 아니라, 그에 따른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이 불가피함이 예언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실상 본서에는 불의와 사회 정의의 실종에 대한 질타보다는 오히려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의 파괴에 대한 지적이 더 많은것을 볼수 있습니다(2:12; 3:4. 5;  5:18-27).

그리고 한걸음 더 나아가 사회 정의의 붕괴의 근본 원인을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가 파괴된 데서 찾으며,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 정립이 모든 문제의 근본적인 해결책임을 밝히고 있습니다(5:4).

그런 점에서 본서는 눈에 보이는 대상인 인간 상호간의 사랑과 정의의 회복을, 눈에 보이지 않는 여호와와의 바른 관계 회복과 긴밀하게 연결시킨 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특히 본서는 수평적 인간 관계의 파괴와 사회 정의 붕괴가 하나님과의 수직적 관계의 파괴로 말미암아 나타난 가시적 현상임을 밝힘으로써 사회 정의의 회복보다 더 우선되는 것이 여호와 신앙의 회복임을 분명히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처럼 아모스서는 하나님과의 수직적 관계 파괴에 사회 정의 붕괴가 뒤따른다는 사실을 지적하고, 수직적 차원에서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가 이루어질 때만이, 진정한 의미에서 수평적 차원의 인간 사랑과 사회 정의 구현이 가능하다는 소중한 진리를 집중적으로 설파하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둘째, 외적 번영에 초래된 영적 피폐

아모스 선지자가 활동하였던 시대는 북이스라엘과 남유다 모두 최전성기를 구가하던 때였습니다. 아모스의 예언의 무대였던 북이스라엘을 보면 대내적으로는 정치적 안정과 경제적 번영을 이루었으며, 대외적으로도 영토를 크게 확장하는등, 다윗과 솔로몬 이래 최대의 안정기에 접어들었던 시대였습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이러한 외적 번영과 반비례하여 영적으로는 매우 피폐했습니다. 여호와에 대한 순수한 신앙의 열정은 식어지고, 형식적 신앙으로 주변 나라의 우상들을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였고, 사회에는 사치와 방탕의 물결이 넘실거리며, 부패와 압제가 횡행했습니다. 사람들은 외적 번영에 심취되어 신앙과 도덕은 더 이상 그들의 관심사가 되지 못했던 것입니다.

 

이러한 사실은  외적 번영이 하나님의 축복임은 분명하나 여기에만 관심을 두게 될 때, 보다 가치 있는 영적 축복의 중요함을 간과하게 된다는 점을 알게 하기에 충분합니다. 내면적인 것보다 외면적인 것, 영적인 것보다 세속적인 것에 빠진 사회는 피폐해지고 개인은 강팍하여지는 것입니다. 따라서 성도는 외적 번영을 누리고 있을 때 이로 인하여 영적 문제에 소홀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합니다. 만약 외적 번영이 영적 피폐를 가져온다면, 외적 번영은 축복이 아니라 저주가 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축복을 저주로 만들어버린 아모스 당시 선민들의 삶을 보여주는 본서는, 외적 번영에 내재된 위험에 경각심을 가지게 하는 동시에 하나님의 축복을 더욱 큰 축복으로 키워나가는 영적 성숙함의 소중함을 깨닫게 하는 책이라 할 수 있습니다.

셋째, 사회 정의 구현에 힘쓸 책무를 지닌 지도층을 향한 말씀

모든 예언서가 종교적 타락과 더불어 사회적 범죄와 도덕의 붕괴를 지적합니다.  따라서 아모스서 역시 마찬가지이나, 다른 예언서에 비하여 사회적 범죄와 도덕의 붕괴를 더욱 많이, 그리고 더욱 강력하게 질타한다는 특징이 있습니다. 특히 아모스는 사회 지배 계층의 부패를 더욱 신랄하게 비판합니다. 예를 들어 4:1-5 에서는 사회 지도층이 약자를 압제하는 악행을 자행하며, 자기 만족적 종교 행위에 심취하여 있음을 집중적으로 지적하고 심판을 경고합니다. 그리고 6:1-14에서도 안일에 빠진 지도층 사람들이, 주제 넘고 포악하며 향락적이고 불경건하다는 사실을 질타하며, 그들에게 우선적으로 심판이 임할 것을 예언합니다. 이처럼 아모스가 지도층의 타락에 초점을 맞추는 것은 그들의 범죄가 일반 사람들의 범죄보다 더 심각 하다는 점과 더불어, 그들의 타락이 미치는 파급 효과가 더욱 크기 때문입니다. 사실 정치적으로나 경제적으로 우월한 위치에 있는 사람들은 하나님으로부터, 더 큰 책임과 의무를 부여받았다고 볼수 있습니다. 따라서 이들은 종교적으로나 도덕적으로도 더욱 성숙한 자세를 가져야 하며, 사회적으로 더 큰 기여를 해야 합니다. 그러나 이들은 우월한 위치를 이용하여 자신의 이익만을 추구하며 약자들을 수탈하는 등 범죄에 빠지는 경우가 더 많았던 것입니다.

 

그리고 사회 지도층들의 범죄는 다른 사람들을 본받게 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즉 그들의 행동은 자신들이 원하든 원하지 않든, 다른 사람들의 주목을 받으며, 다른 사람들의 행동에 영향을 미치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선민 사회의 타락에 대하여 그들의 책임은 결코 작다고 할 수 없습니다. 아모스는 바로 이러한 사실을 직시하고, 특히 사회 지도층에게 초점을 맞추어 그들의 죄악을 질타하고 심판을 선포함으로써 자신들의 위치에 대한 바른 자각을 가지도록 촉구하였던 것입니다.


넷째, 형식적이고 기복적인 종교 행위에 대한 질타

아모스서에는 다른 예언서에 비하여 사회 정의의 실종에 대한 질타와 이로 인한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에 대한 언급이 많이 나옵니다. 그러나 아모스서에는 종교적 타락과 범죄에 대한 지적 역시 적지 않습니다. 선민 사회에서 사회적 타락과 종교적 타락은 동전의 앞뒤면과 같아서 결코 분리하여 생각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두 종류의 범죄 중 더욱 근원적이며 고질적인 범죄는 종교적 범죄입니다. 왜냐하면 종교적 범죄의 뿌리에서 자라나는 가지가 사회적 타락이라고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아모스가 본서에서 주로 초점을 맞추는 종교적 범죄는 형식적인 여호와 신앙과 기복적인 종교 행위였습니다. 아모스 당시 선민들은 조상들의 관행에 따라 여호와께 희생을 드리고 십일조를 바치며, 각종 절기를 지키는 등 그들 나름대로 종교 행위를 했습니다(4:4.5).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절기를 미워하고 멸시하며 성회를 기뻐하지 아니하고, 그들이 드리는 각종 제사를 받지 않겠다고 선언하십니다(5:21.22). 이는 그들의 종교 행위가 하나님에 대한 진실한 경외심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기복적인 목적에 바탕을 둔 형식적인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사실은 그들의 삶에 바른 신앙의 열매가 없었다는 점과 더불어 그들이 하나님과 우상을 동시에 숭배하는 종교적 혼합주의에 빠졌다는 점에서 잘 드러납니다(5:26). 하나님은 이와 같이 가증한 범죄를 저지르는 자들에게 그들이 숭배하는 우상과 더불어 동반 멸망할 것을 경고하셨고(5: 26. 27), 또한 이스라엘의 종교적 타락은 벧엘 제사장 아마샤가 아모스 선지자의 예언 활동을 악의적으로 호도하고 예언하지 못하도록 하였다는 데서도 잘 드러납니다(7:10-13). 제사장으로서 참된 선지자의 사역을 방해한 아마샤에게는 그의 가문이 완전히 몰락하는 심판이 선언되었습니다(7:17). 이처럼 하나님은 하나님을 섬긴다고 하면서도 바르게 섬기지 않는 행위를 매우 가증하게 여기시며 엄격하게 심판하십니다. 그런데 본서에 나오는 것과 같은 형식적이고 기복적인 종교 행위는 과거 구약 선민 이스라엘이 행하였던 악행만으로 그치는 일이 아니라 모든 시대, 모든 신앙인이 영적으로 깨어 있지 않을 때 범하기 쉬운 죄악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리하여 아모스서는 오늘날 성도에게도 형식적이거나 기복적인 신앙이 얼마나 심각한 죄인지 깨닫게 하며 자신이 이와 같은 그릇된 신앙을 가지고 있지 않은지를 점검해 보도록 경각심을 일깨워야 할것입니다.


다섯째, 절대 공의에 업각한 하나님 심판의 공정성

본서의 주된 내용은 정치, 경제, 군사 등 외적번영에 도취되어 여호와 신앙을 저버리고 타락의 길을 가는 북이스라엘의 신앙적 범죄와 사회적 타락을 지적하고 공의로운 심판을 선언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본서에는 북이스라엘의 범죄 지적과 심판 선언만 나오는 것이 아니라, 아람, 블레셋, 베니게, 에돔, 암몬, 모압 및 남유다에 대한 범죄 지적과 심판 선언도 함께 나오고 있습니다. 이러한 사실은 하나님께서 어떤 특정 나라에 대해서만 심판하시거나 북이스라엘에 대해서만 특별한 기준을 적용시켜 심판하시는 것이 아님을 알게 하십니다. 사실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받은 모든 인간은 하나님의 축복의 대상입니다. 또한 동시에 그들이 범죄하였을 때는 예외없이 심판의 대상이 됩니다. 하나님은 이처럼 절대 공의에 입각하여 모든 인간을 차별없이 공정하게 심판하신다는 사실을 보여주시기 위하여 본서 예언의 주된 대상이 되는 북이스라엘 뿐 아니라 남유다에 대한 심판도 선언하셨고, 더 나아가 주변 6개국 등 도합 8개국에 대한 심판도 선언하신 것입니다. 이와 같은 절대 공의에 입각한 심판은 공간적 한계를 가지지 않을 뿐 아니라, 시간적 한계도 가지지 않습니다.  즉 하나님은 아모스 시대의 북이스라엘에 대한 심판자이실 뿐만 아니라, 모든 시대 온세상에 대한 심판자이시며 오늘날 우리들의 심판자도 되신다는 사실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은 과거 아모스 시대에 절대 공의에 입각하여 심판하셨듯이 지금 우리 시대에도 절대 공의에 입각하여 심판하시는 것입니다. 2700여년 전에 기록된 아모스서가 오늘날 우리에게 여전히 가치를 지니는 것도 이와 같은 불변의 진리를 생생하게 전달해 주기 때문입니다.


여섯째, 문제의 근본적 해결을 가능하게 하는 여호와 신앙의 회복

본서는 사회적이고 종교적인 범죄의 지적과 범죄한 자들에 대한 심판 선언이 많은 분량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내용 사이에 여호와를 찾으라는 권고가 발견되어지며(5:4-9), 또한 이와 더불어 악에서 돌이키라는 회개 촉구도 나옵니다(5:10-15). 이는 문제의 근본적인 해결이 여호와를 찾는 데 있음을 알게 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악에서 돌이키라는 회개의 촉구가 나아오는데, 이것은 여호와를 찾아 바른 관계를 회복하는 것에 대한 외적 증거를 보이라는 의미가 될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회개 촉구 역시 여호와를 향한 바른 신앙을 회복하라는 권면과 별개가 아닌것입니다. 사실 인간의 모든 범죄와 불행은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의 상실에서 비롯되었습니다. 따라서 모든 범죄와 불행의 근본적 치유는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 정립에서 출발되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에서 보혈을 흘리신 것도, 대속적 죽음을 통하여 어그러진 하나님과 인간들과의 관계를 바로 회복하시기 위해서였습니다. 즉 범죄한 인간 스스로 바로 잡을 수 없는 양자간의 관계를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희생시킴으로써 바로 잡을 수 있는 길을 열어주신 것입니다. 물론 아모스서를 통하여 이러한 구속의 진리를 완전히 알 수는 없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을 찾는 것만이 인간의 근본 문제가 해결할 수 있는 유일한 방편이라는 사실만은 확실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일곱째, 변경되지 않는 선민 회복의 약속

본서에는 범죄에 대한 여호와의 준엄한 책망과 범죄한 자에게 필연적으로 임할 여호와의 심판 집행에 대한 암울한 예언이 거듭 주어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본서의 마지막 단락인 9:11-15에는 비록 짧으나마, 선민의 회복 약속도 주어지고 있습니다. 즉 본서는 선민의 구원이란 밝고 고무적인 내용으로 마감되는 것입니다. 이는 하나님께서는 죄악을 결코 용납하지 않으시는 공의로운 분이실 뿐만 아니라 택한 자는 반드시 구원하시는 신실하시고 자비로우신 분이심을 알게 합니다. 특히 이 부분에서 선포되는 약속은 선민 이스라엘이 당할 심판의 상처를 완전히 회복시키는 것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과거 선민으로서 누렸던 축복들보다 더욱 큰 축복들이 주어진다는 것입니다.

 

즉 이 부분의 약속은 구약 선민 이스라엘이 여호와의 공의로운 심판으로 나라가 망하고 포로로 잡혀간 데서 벗어나, 본토에 귀환하여 풍요와 번영을 누리는 데 국한되는 것이 아닙니다. 이는 한걸음 더 나아가 여호와의 구속사가 완성되는 날, 신약 선민인 성도 모두가 새하늘과 새땅에서 누릴 종말론적 축복을 예언하는 것이기도 하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러한 내용에서 알 수 있듯이, 본서는 일차적으로 B.C.8세기의 범죄로 얼룩진 암울한 영적 상황 가운데서도 여호와께서 요구하시는 바에 따라 살아가기를 다짐하는 영적으로 각성된 구약 선민에게 주어진 소망의 말씀임이 분명합니다. 그러나 동시에 본서는 아모스 당시 이스라엘의 상황과 동일하게 하나님의 공의가 실종된 어두운 현실 속에서나마, 하나님의 말씀을 부여잡고 살아가는 오늘날 성도에게도 종말론적 소망을 갖게 하며 큰 용기를 가지고 하나님의 백성다운 의로운 삶을 살아가도록 촉구하는 말씀이기도 한것입니다.

 

그렇다면 아모스를 통한 하나님의 뜻은 무엇입니까?

주일 예배는 빠지지 않고 참석하는데 평일에는 열심히 도박장에 드나드는 사람이 있다면 하나님은 그를 어떻게 여기실까요? 십일조와 헌금은 꼬박꼬박 하면서도 여전히 탈세하는 사람이 있다면 하나님이 그것을 어떻게 보실까요?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말하면서 부모, 자식, 형제와 원수처럼 지내는 사람을 하나님은 어떻게 생각하실까요?  바로 아모스서는 그것을 이야기 하고 있는것입니다. 형식적인 종교생활만 하고 있었던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수 없었습니다.  아모스가 전한 메시지의 핵심은 바로 "내 백성 이스라엘에게 끝이 이르렀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아모스는 여호와를 사자로 보는 은유법을 사용하며, 남은 자를 구원의 상징이 아니라 파멸의 상징으로 제시하는 충격 요법을 이용했음에도 불구하고, 아모스의 선포의 원래 대상이었던 사마리아의 상류층에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못했습니다.  따라서 북왕국 이스라엘의 멸망에 대한 원인을 보여 주는 아모스서를 통해 우리는, 하나님에 대한 사랑이 반드시 이웃에 대한 사랑으로, 예배는 윤리로, 사랑은 공의로 나타나야 함을 말씀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결론

사마리아인들은 침대상에 누워 헛된 구원의 신학을 지절거리며 아모스의 선포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도와줄 것이라고 믿는 목자는 이제 그들의 죽음의 증거만을 원한다는 사실을 알리 없는 이들의 어리석음이, 바로 오늘 우리의 어리석음은 아닐까요? 
번영과 축복의 신학 위에서 성공 신드롬에 걸린 우리의 모습이, 사마리아인들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것은 단지 염세주의적 발상에서 나온 것만은 아닐것입니다. 
울부짖는 사자로서의 여호와의 은유를 통해 아모스 기자가 오늘 우리에게 보여 주려고 했던것이 바로 이것은 아니었을까요?

이제 우리 앞에 놓여 있는 선택은 분명합니다.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하나님의 법에 따라 살기 위해 하나님과의 언약 관계를 갱신하느냐, 아니면 끝이 없는 역사 자체의 심판을 받느냐하는 둘 중 하나의 선택이라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제 선택은 여러분 각자의 몫 입니다.
여러분의 선택에, 여러분의 영원한 삶이 달려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절대 간과하는 일이 없어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은 지금도 우리와의 언약 관계를 갱신하길 원하시는 사랑의 하나님이십니다. 

 


7월 12일(수) 아모스 1장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묵시 받은 말씀(1절)

유다 왕 웃시야의 시대 곧 이스라엘 왕 요아스의 아들 여로보암의 시대의 지진전 이년에 드고아 목자 중 아모스가 이스라엘에 대하여 묵시 받은 말씀이라.
The words of Amos, one of the shepherds of Tekoa--what he saw concerning Israel two years before the earthquake, when Uzziah was king of Judah and Jeroboam son of Jehoash was king of Israel.

묵시 받은 말씀(The words of Amos)

* 묵시(2372) 하자(châzâh) חָזָה

1. 보다.  2. 하나님을 보다.  3. 민수기 24:4
발음 / 하자[ châzâh ]
관련 성경 / 보다(욥15:17, 시58:10, 겔12:27), 우러러보다(욥36:25), 바라보다(시63:2, 미4:11), 받다(사2:1), 이상(異像)으로 받다(암1:1, 합1:1), 보이다(사30:10), 들어가다(욥8:17), 뵙다(욥23:9, 시11:7), 깨닫다(욥34:32), 보게 하다(아6:13).
구약 성경 / 55회 사용

* 묵시(2378) 하조투(châzôwth) חָזוֹת 

1. 이상.  2. 계시.  3. 묵시
발음 / 하조트[ châzôwth ]
어원 / 2372에서 유래
관련 성경 / 묵시(역대하 9:29).
이 외에 솔로몬의 시종 행적은 선지자 나단의 글과 실로 사람 아히야의 예언과 선견자 잇도의 묵시 책잇도느밧의 아들 여로보암에게 대하여 쓴 책에 기록되지 아니하였느냐.
구약 성경 / 1회 사용


유다 왕 웃시야의 시대 곧 이스라엘 왕 요아스의 아들 여로보암의 시대의 지진 전 이 년에

- 아모스는 호세아 선지자와 동시대의 인물로 보인다(호 1:1).
당시에는 여로보암 2세가 남방 유다까지 세력을 뻗치고 있던 시기로(왕하 14:25) 대단한 번영을 누리고 있었다.
여기서 언급된 지진이 거의 2세기가 지난 후 스가랴에 의해 다시 언급된것을 보면(슥 14:4, 5), 상당히 큰 지진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스가랴 14:4-5
그 날에 그의 발이 예루살렘 앞 곧 동편 감람산에 서실 것이요 감람산은 그 한가운데가 동서로 갈라져 매우 큰 골짜기가 되어서 산 절반은 북으로, 절반은 으로 옮기고.
그 산 골짜기는 아셀까지 미칠찌라 너희가 그의 산 골짜기로 도망하되 유다 왕 웃시야 때에 지진을 피하여 도망하던 것 같이 하리라 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임하실 것이요 모든 거룩한 자가 주와 함께하리라.

요세푸스는 웃시야 왕이 성전에 들어가 향단에 분향하려 했을 때 문둥병이 발하게 되었던 시기(대하 26:16-20)와 같다고 하였다.
그러나 이에 대한 명확한 근거는 없다.
어쩌면 이 지진은 장차 있을 심판에 대한 하나님의 경고였을지도 모른다(Feinberg).

드고아 목자 중 아모스가

- '드고아'는 예루살렘으로부터 남쪽으로 약 19km 떨어진 고지대에 위치한 마을로 넓은 들판이 있었고(대하 20:20; 렘 6:1), 목양에 좋은 곳이었다(Jerome, S.R.Driver).

한편 '목자'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노케드'(5349)는 일반적으로 사용되는 단어 '로에'(7443. 로이)와는 달리 털이 많은 양을 키우는 목자이거나(BDB), 비교적 좋은 양을 키우는 목자로 여겨진다. 이 단어가 모압 왕 메사에게 적용되기도 했는데(왕하 3:4), 그는 양을 기르고 공급하는 사람이었다(T.E.McComiskey).

7473. 목자(로이. rôʽîy) רֹעִי 

1. 목자의.  2. 목자
발음 / fhdl[ rôʽîy ]
어원 / 형 7462의 능동태 분사에서 유래
관련 성경 / 목자(사 38:12, 슥 11:17).
구약 성경 / 3회 사용

5349. 목자(노케드. nôqêd) נֹקֵד

1. 양의 일종을 지키는 목자. 2. 목자
발음 [ nôqêd ]
어원 / 5348과 동일 어원에서 유래한 분사형
관련 성경 / 목자(암 1:1), 양치는 자(왕하 3:4).
구약 성경 / 2회 사용


이스라엘에 대하여 묵시받은 말씀이라

- '...가 받은 말씀이라'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디베레이'(1697)는 어록집과 같은 형태의 책들에서 자주 사용되었고(잠 30:1; 31:1; 전 1:1; 렘 1:1), 고대 히타이트의 봉신 계약 문서에서도 자주 나타난다.
전문적인 선지자 교육을 받지 못한 아모스는 당시 부패했던 선지자들과는 달리 대중들에게 참신한 인상을 줄수 있었을 것이다.

북이스라엘은 여로보암 2세가 통치할 때 최고의 번영을 누렸습니다.
당시 주변 강대국의 약세를 이용하여 여로보암 2세는 경제적인 발전을 도모했던 것입니다.
하지만 경제적인 번영은 종교적인 타락을 야기시켰습니다.
이에 선지자 아모스를 통하여 하나님은 죄를 간과하지 않으실 것이라며 든 여호와 심판을 선포합니다.
동시에 주변 국가들의 죄에 대해서도 심판을 선포합니다.

아모스 1장은 서론에 해당하며 이스라엘과 주변에 있는 이방 나라들까지 포함하여 그들의 범죄를 고발하고 그에 대응하는 하나님의 심판에 대해 선포합니다.

특히 다메섹을 비롯한 가나안 국가들의 멸망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서술하고 아울러 회개를 제시하면서 궁극적으로 그들의 심판을 통해 이스라엘에게 종말론적인 희망을 제시합니다.

아모스는 먼저 이방 민족의 죄를 지적합니다.
그리고 유다와 이스라엘의 죄를 지적하여 이스라엘과 유다 백성이 이방 민족과 별반 다를 바 없다는 것을 깨닫게 하려는 의도라고 하겠습니다.

아모스 1장의 내용 구분
1:1-2. 심판 선언의 역사적 배경과 심판의 주체가 누구인가
1:3-5. 다메섹에 대한 심판
1:6-8. 가사에 대한 심판
1:9-12. 두로와 에돔에 대한 심판
1:13-15. 암몬 족속에 대한 심판

하나님은 교만과 우상 숭배로 얼룩진 이방 나라의 심판을 먼저 선언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에게도 회개의 기회를 외쳤습니다.
이러한 교훈은 하나님의 사랑이 얼마나 큰지를 드러내는 사례라고 하겠습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었으면 벌써 멸망할 수밖에 없는 진노의 존재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성도들은 자신의 삶 속에서 다른 사람들에게 사랑을 베푸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자신은 하나님의 은혜로 생명을 얻었으면서도 자신에게 조그만 잘못을 범한 이웃을 용서하지 못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고 자랑할 수 있을까요?

따라서 성도들은 언제나 남을 용서하고 사랑하는 자가 되어서 우리의 삶을 통하여 하나님의 사랑을 전하며 가르치는 본을 보여주는 삶을 결단해야 합니다.

오늘도 사랑의 화신이 되어 이 세상을 사랑으로 메꾸는 일에 성공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아모스는 누구인가?(아모스 1:1)

1. 유다 왕 웃시야의 시대 곧 이스라엘 왕 요아스의 아들 여로보암의 시대 지진 전 이년에 드고아 목자 중 아모스가 이스라엘에 대하여 이상으로 받은 말씀이라.

드고아에서 양 치던 목자 아모스가 이스라엘에 대해 받은 메시지다.
웃시야가 유다를 다스리고 요아스의 아들 여로보암 2세가 이스라엘의 왕이던 시기, 곧 대지진이 있기 이 년 전에, 이 메시지가 환상 가운데 그에게 임했다.

아모스서를 시작하면서 오늘은 전반적인 배경을 알아보겠습니다. 

웃시야가 유다를 다스리고 여로보암2세가 이스라엘을 다스리는 시기라고 합니다.
웃시야의 시대 B.C 792-740년, 여로보암 2세의 시대가 B.C 793-753
학자들은 아모스가 B.C 750년 즈음에 활동했다고 보고 있습니다.
이 시대의 특징은 철기시대, 우리 나라는 고조선 시대, 중국에서는 춘추전국시대가 시작되는 즈음입니다.

지진이 있기 이 년전'이라고 구체적으로 기록되어 있기는 하지만, 이 지진이 정확하게 언제 있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이 때는 남북 모두 커다란 번영을 누리고 있었습니다.
군사적, 정치적으로 위상도 높았구요.
그런데 그래서일까요.. 우상 숭배, 사치, 방종, 사법적 부패, 가난한 자들에 대한 압제 등이 만연했지요.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선지자들을 보내서 계속 회개하고 돌아오라고 경고하셨지만그들은 돌이키지 않았고 결국 B.C 722년, 먼저 북이스라엘이 앗수르라는 나라에게 멸망합니다.
아모스가 외친지 약 30년이 흐른 뒤의 일이지요.

아모스는 북이스라엘 사람이 아닙니다.
드고아라는 지명은 예루살렘 근처에 있는 마을입니다.
남유다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서 북쪽으로 올라와서 예언을 하고 있습니다.

아모스는 궁정 출신이나 제사장 가문의 사람도 아닙니다.
목자 출신이라고 이야기하고 있는데요, 겸손한 표현이기는 하지만 지식이 없는 사람이라는 의미는 아닐 것 같네요.
그가 아모스서에서 보여준 언어구사능력과 역사에 대한 통찰은그가 상당한 실력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보여주거든요.

아모스는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아서 멸망을 향해 달려가는 북이스라엘로 가서 회개를 촉구하고 있습니다.
정치적, 경제적 번영이 오히려 영적 타락을 불러 일으키고 있었으니까요.
그 번영은 상류계층에게 집중된 것이었고, 일반 국민들은 소외감과 박탈감까지 경험하고 있었습니다.
상류층은 더욱 탐욕을 부려 사치와 향락을 추구하면서 부정을 자행하고 있었구요.
북 이스라엘에 하나님의 심판이 임박했습니다.
아모스는 그 상황을 보면서 피끓는 마음으로 달려가 하나님께 돌아오라고 외칩니다.
그리고 그 외침은 오늘 우리들이 다시 들어야 하는 하나님의 외침이기도 합니다.

포효(咆哮)하는 사자(아모스 1:2)

2.  그가 이르되 여호와께서 시온에서부터 부르짖으시며 예루살렘에서부터 소리를 내시리니 목자의 초장이 마르고 갈멜 산 꼭대기가 마르리로다.

* 포효(咆哮) : 고함지를 포, 성낼 효 / 사납게 외침. 사나운 짐승의 울부짖음

하나님께서 시온에서 포효하시고예루살렘에서 고함치신다.
청천벽력같은 그 소리에 양 치는 목자의 초장이 시들고 갈멜 산 꼭대기가 벌벌 떤다.

성경연구를 할 때나 묵상을 할 때 제일 먼저 본문에 나타난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찾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능력의 하나님? 사랑의 하나님? 공의로운 하나님? 등
하나님의 모습을 찾고 나면 전체 본문의 방향이 자연스럽게 결정되지요.

아모스서는 처음부터 하나님은 부르짖고, 고함을 치시는 모습으로 등장합니다.
'포효한다'고 하는 표현이 어울릴 듯합니다.
아모스는 하나님을 '사자(lion)'로 묘사합니다.
아마, 목자 출신인 아모스의 경험이 반영된 표현이겠지요?

그런데 문제는, 사자가 지금 이스라엘의 적을 향하여 포효하는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을 향해 포효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시온에서, 예루살렘에서 (두 곳은 같은 곳을 나타냅니다. 시적 반복이지요.) 사자가 부르짖을 때, 목자의 초장이 마르고 갈멜산 꼭대기도 말라버립니다.
이스라엘 전체가 하나님의 심판에 놓일 것이라고 합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항상 선한 목자로만 생각했고, 그들의 적을 향해서만 포효하는 분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철저하게 자기 중심적인 생각으로 하나님을 바라보았던 것이지요.
그런 그들에게 아모스는 지금  "하나님은 더 이상 너희들의 목자가 아니다!
하나님은 너희 앞에서 부르짖는다.
너희가 주께로 돌아오지 않으면 하나님은 너희를 삼키실 것이다!" 

다메섹에 대한 심판 예고(아모스 1:3-5)

3.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다메섹의 서너 가지 죄로 말미암아 내가 그 벌을 돌이키지 아니하리니 이는 그들이 철 타작기로 타작하듯 길르앗을 압박하였음이라
4. 내가 하사엘의 집에 불을 보내리니 벤하닷의 궁궐들을 사르리라
5. 내가 다메섹의 빗장을 꺾으며 아웬 골짜기에서 그 주민들을 끊으며 벧에덴에서 규 잡은 자를 끊으리니 아람 백성이 사로잡혀 기르에 이르리라 여호와께서 말씀하셨느니라.

"다마스쿠스가 서너 가지 큰 죄를 저질렀으니 내가 더는 그를 참아 주지 않을 것이다.
그가 길르앗을 사정없이 때려눕혔다.
쇠망치, 나무망치로 무자비하게 두들겨팼다.
나는 하사엘의 왕궁에 불을 놓고, 벤하닷의 요새들을 태워버릴 것이다.
다마스쿠스의 성문들을 박살낼 것이며,죄의 골짜기에 사는 범죄자 왕,낙원 왕궁에서 호령하는 그 악독한 우두머리를 쫓아낼 것이다.
그 땅의 백성들은그들이 본래 살던 곳, 기르로 돌려보낼 것이다."

하나님의 포효의 내용이 구체적으로 나타납니다.
시온에서, 예루살렘에서 부르짖는다는 하나님의 외침이 당시 주변 나라들에 대한 심판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아모스가 일단 주변에 대한 심판을 먼저 선고하면서 청중들의 관심을 끌고 있습니다.




첫번째 대상은 다메섹입니다.
다메섹시리아의 수도를 말합니다.
그러므로 시리아를 대표합니다.

성경에서 시리아아람이라고 하며,  다윗 왕 때부터 이스라엘과는 숙적이었습니다.
특히 엘리야와 엘리사가 활동했을 때 여러번 싸웠지요.
요단강에서 몸을 씻어서 피부병이 나은 나아만 장군도 아람 사람입니다.

아모스는 아람이 하나님께 심판을 받는 이유를
그들이 길르앗을 가혹하게 압박했기 때문이라고 선언하고 있습니다.
(길르앗은 요단강 동쪽의 이스라엘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철타작기라는 표현은 아주 가혹하고 철저하게 침략했다는 표현이겠지요.
정확하게 어느 때 그 일이 일어난 것인지 확실하지는 않지만 열왕기하에 있는 사건을 의미할 수도 있습니다.

4절에는 하사엘과 벤하닷이 등장합니다.
둘 다 열왕기상하에 이름이 나타납니다.

벤하닷은 열왕기하 6장에서 이스라엘을 쳐들어왔다가 실패하고 돌아갔습니다.
나중에 병이 들었을 때 엘리사에게 하사엘을 사자로 보내어 자신의 병이 나을지를 물어봅니다.
그만큼 엘리사를 인정한 것입니다.
그 때 엘리사는 하사엘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눈물을 흘립니다.
놀란 하사엘이 왜 그러시느냐고 묻자 엘리사는 이렇게 대답하지요.

"네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행할 모든 악을 내가 앎이라 네가 그들의 성에 불을 지르며 장정을 칼로 죽이며 어린 아이를 메치며 아이 밴 부녀를 가르리라... 네가 아람 왕이 될 것이다"(열왕기하 8:12)

엘리사의 예언은 현실로 드러나게 됩니다.
그날 저녁 하사엘이 벤하닷을 살해합니다.
그리고 나중에 열왕기하 10장에서 이스라엘을 잔인하게 공격하지요.
그 때 길르앗을 특히 잔인하게 침략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아니면, 길르앗이 그냥 이스라엘을 의미하는 표현일수도 있구요.

아모스가 예언하고 있는 지금은 그로부터 약 100년정도 흐른 때입니다.
그렇다고 100년전 잘못을 가지고 지금 심판하겠다고 하는 것으로 보기 보다는그동안 계속 보여준 그들의 잔인함을 심판하는 것으로 보아야겠지요.

하나님의 정의는 이처럼 비인간적인 잔혹한 행위에 대해서 갚으시는 응보적 정의입니다.
특히 하나님의 백성에 대한 악행에 대해서 참지 않으시지요.
심판의 불을 보내시겠다고 경고하십니다.
하사엘의 집, 벤하닷의 궁궐, 다메섹의 빗장 이런 표현은 모두 아람을 의미합니다.
아람이 파괴되고, 아람 사람들, 특히 아람 왕이 죽을 것이라는 무시무시한 예언입니다.
이 예언은 B.C 732년, 즉 이 예언이 있은 후 약 20년이 흐른 뒤에 다메섹은 앗시리아에게 멸망합니다.

더구나 아람 백성이 사로잡혀서 기르에 이른다고 했는데요,  기르지방은 아람백성이 시작되었던 지역입니다.
즉, 아람백성을 기르로 잡아간다는 의미는 그들의 역사를 처음으로 돌려놓겠다는 하나님의 무서운 의지가 표현되고 있는 것입니다.


가사와 두로에 대한 심판경고(아모스 1:6-10)

6.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가사의 서너 가지 죄로 말미암아 내가 그 벌을 돌이키지 아니하리니 이는 그들이 모든 사로잡은 자를 끌어 에돔에 넘겼음이라
7. 내가 가사 성에 불을 보내리니 그 궁궐들을 사르리라
8. 내가 또 아스돗에서 그 주민들과 아스글론에서 규를 잡은 자를 끊고 또 손을 돌이켜 에그론을 치리니 블레셋의 남아 있는 자가 멸망하리라 주 여호와께서 말씀하셨느니라
9.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두로의 서너 가지 죄로 말미암아 내가 그 벌을 돌이키지 아니하리니 이는 그들이 그 형제의 계약을 기억하지 아니하고 모든 사로잡은 자를 에돔에 넘겼음이라
10. 내가 두로 성에 불을 보내리니 그 궁궐들을 사르리라

하나님의 메시지

"가사가 서너 가지 큰 죄를 저질렀으니, 내가 더는 그를 참아 주지 않을 것이다. 그는 주민 전부를 몰아내서는, 그들을 에돔에 팔아 버렸다. 나는 가사의 성벽을 불태워 허물고,  그의 요새들을 모조리 태워 버릴 것이다. 내가 범죄자 왕을 아스돗에서, 그 악독한 우두머리를 아스글론에서 쫓아낼 것이다. 내가 손을 들어 에그론을 칠 것이며, 블레셋 사람들을 하나도 남김없이 모두 죽일 것이다."

하나님의 포고

"두로서너 가지 큰 죄를 저질렀으니, 내가 더는 그를 참아 주지 않을 것이다. 그는 주민 전부를 에돔에 넘기고, 자기 친족들과 맺은 조약을 깨뜨려 버렸다. 나는 두로의 성벽을 불태워 허물고, 그의 요새들을 모조리 태워 버릴 것이다."

아모스는 계속해서 하나님의 심판을 예고하고 있습니다.
총 8개의 경고를 합니다. 
나라들은 달라지지만 심판의 내용은 비슷비슷합니다.

두 번째 경고는 가사성으로 대표되는 블레셋 민족들에 대한 것입니다.
블레셋에 대해서는 그래도 많이 들으셨죠?  골리앗으로 대표되는 그 민족이지요.

8절에 있는 아스돗, 아스글론, 에그론, 가드, 가사까지 합쳐서 5개의 도시국가로 이루어져 있었습니다.

사사시대부터 계속 이스라엘을 괴롭히다가 다윗 왕 시대에 거의 정복되었고, 바벨론의 느부갓네살에 의해 최종적으로 멸망했습니다. 

블레셋 민족들에게 심판이 떨어지는 이유는 그들이 '모든 사로잡은 자'를 팔아넘겼기 때문입니다. 당시에는 포로들을 노예로 삼거나 팔아버리는 것이 관행이었으므로  그 사실 자체를 지적하기 보다는 포로에 대한 비인간적인 행위들을 표현하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그 대상이 유대 사람들일 가능성도 높구요. 그들에 대한 심판은 역시 불을 보내어 궁궐을 사르고 남은 자까지 멸망시키는 것이었습니다.

세 번째 심판은 두로를 향한 것입니다.
두로는 이스라엘의 북서쪽 해변에 위치한 나라입니다.
두로와 이스라엘의 관계는 원래 매우 우호적이었습니다.
솔로몬이 성전을 지을 때 두로에서 기술자를 보내기도 했고, 아합왕의 아내였던 이세벨도 두로 출신 여인이었습니다.

그런 두로에게 심판이 떨어지는 이유는 그들 역시 '모든 사로잡은 자'를 에돔에 넘겼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형제의 계약을 기억하지 않았다'라는 항목이 하나 더 추가되어 있지요.
이 또한 이스라엘과의 조약을 의미할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들에 대한 심판은 또다시 불로 궁궐을 태우는 것입니다.

이처럼 열국에 대한 심판경고는 하나님께서 인간 역사의 배후에 계시며 다스리고 계신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즉 인류의 역사가 겉으로는 국가간의 조약이나 전쟁들에 이끌어지는 것처럼 보이지만 결국 궁극적으로는 하나님께서 역사를 이끌어가신다는 것이지요. 그냥 종교적인 부분만 이끌어가시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어떤 학자는 '인간 역사는 하나님의 통치의 드라마 속에 있다.'고 표현했지요.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정의의 법칙에 따라 세계를 움직이기를 원하신다는 것도 알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시야를 넓혀야 합니다.  하나님은 나나 내 가정, 내 교회의 복을 위해서 존재하시는 분이 아니라  전 세계를 통치하시며 이끌어가시는 분입니다.

우리들은 하나님을 너무 개인적으로 축소시키는 경향이 있습니다.
세계에 대한 관심은 오직 '열방 복음화'에만 맞추어져 있을 때가 많지요.
물론 그것이 매우 중요하기는 하지만,  우리는 이 땅에서 하나님의 정의가 바로 집행되고 있는지에 대해서도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하나님의 열국의 하나님이시며 만유의 주이십니다. 


에돔과 암몬에 대한 심판 경고(아모스 1:11-15)

11.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에돔의 서너 가지 죄로 말미암아 내가 그 벌을 돌이키지 아니하리니 이는 그가 칼로 그의 형제를 쫓아가며 긍휼을 버리며 항상 맹렬히 화를 내며 분을 끝없이 품었음이라
12. 내가 데만에 불을 보내리니 보스라의 궁궐들을 사르리라.

13.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암몬 자손의 서너 가지 죄로 말미암아 내가 그 벌을 돌이키지 아니하리니 이는 그들이 자기 지경을 넓히고자 하여 길르앗의 아이 밴 여인의 배를 갈랐음이니라
14. 내가 랍바 성에 불을 놓아 그 궁궐들을 사르되 전쟁의 날에 외침과 회오리바람의 날에 폭풍으로 할 것이며
15. 그들의 왕은 그 지도자들과 함께 사로잡혀 가리라 여호와께서 말씀하셨느니라.

하나님의 메시지

"에돔이 서너 가지 큰 죄를 저질렀으니, 내가 더는 그를 참아 주지 않을 것이다.
그는 자기 형제를 사냥감 쫓듯 쫓아서 살해한다.
무자비하고 무정하다.
분을 품고서 밤낮으로 미쳐 날뛰며, 야비하기 이를 데 없다.
나는 그의 수도 데만을 불태워 허물고, 보스라의 요새들을 태워 버릴 것이다."

하나님의 메시지.

"암몬이 서너 가지 큰 죄를 저질렀으니, 내가 더는 그를 참아 주지 않을 것이다. 땅을 더 차지하겠다고, 그는 임신한 길르앗의 여인들의 배를 갈랐다. 나는 그의 수도 랍바의 성벽을 불태워 허물고, 그의 요새들을 태워 버릴 것이다. 전쟁이 고함친다! 으르렁댄다!  회오리바람과 함께 닥치는 대로 쓸어간다! 왕이 포로로 붙잡혀 갔고,  그의 제후들도 그 뒤를 따른다"

하나님의 포고

하나님의 네 번째, 다섯 번째 심판 경고가 떨어집니다. 
세 번째 까지는 이스라엘과 혈통적 관계가 없는 시리아(아람), 블레셋, 두로였는데  이제부터는 이스라엘과 혈통적 관계가 있는 나라들이지요.

네 번째 대상은 에돔입니다.
에돔의 기원은 이삭의 아들이며 야곱의 쌍둥이 형이었던 에서입니다.
하나님께선 동생이었던 야곱을 선택하셔서 이스라엘 민족을 형성하셨고, 에서는 에돔의 조상이 되었지요.

창세기에서는 에서와 야곱이 어느 정도 화해하는 모습이 나타나지만,  이후 이스라엘과 에돔은 계속 적대적인 관계였습니다.
그리고 에돔은 매우 호전적인 민족이 되었던 것 같습니다. 
무자비하다, 항상 화를 낸다, 끝없이 분을 품는다라는 구절들이 반복됩니다.
실제로 약 170년이 지난 후 결국 예루살렘이 멸망한 후에  에돔은 유다의 영토였던 곳을 침략합니다.

다섯 번째 심판의 대상인 암몬은 아브라함의 조카였던 롯의 후손들입니다.
소돔에서 탈출한 뒤 산에 머물고 있던 롯의 두 딸이  롯에게 술을 먹이고 동침해서 아들들을 낳았고 큰 딸의 아들이 모압, 작은 딸의 아들이 암몬의 조상이 됩니다.  

그런데 암몬 또한 매우 잔인하게 이스라엘을 침략하곤 했습니다.
영토를 넓히기 위해서 아이 밴 여인의 배를 갈랐다니, 암몬 자손에 대한 묘사가 제일 잔인하지 않습니까!

이렇게 호전적인 에돔과 암몬이 하나님의 불심판을 면할 수 없다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사실 현대에도 이러한 잔인한 일들은 세계 여러 곳에서 일어나고 있습니다.

유대인 대학살이나, 르완다나 보스니아의 인종청소(이 얼마나 끔찍한 단어란 말입니까!), 일본의 난징 대학살 등등 인류의 잔인한 모습은 에돔과 모압의 연장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고, 이 또한 하나님의 심판을 면할 수 없을 것입니다.


7월 13일(목) 아모스 2장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거짓 것(4절)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유다의 서너가지 로 인하여 내가 그 벌을 돌이키지 아니하리니 이는 저희가 여호와의 율법을 멸시하며 그 율례를 지키지 아니하고 그 열조의 따라가던 거짓것에 미혹하였음이라.
This is what the LORD says: "For three sins of Judah, even for four, I will not turn back {my wrath}. Because they have rejected the law of the LORD and have not kept his decrees, because they have been led astray by false gods, the gods their ancestors followed,

"거짓 것에 미혹하였음이라(astray by false)"

* 3577. 거짓 것( 카자브.  kâzâb) כָּזָב    

1. 거짓말.  2. 속이는 행위.  3. 시편 40:5
발음 / 카자브[ kâzâb ]
어원 / 3576에서 유래
관련 성경 / 거짓말(삿 16:10, 잠 14:5, 단 11:27), 거짓(시 4:2), 거짓말하는 자(시 5:6, 잠 19:22), 거짓(시 40:4, 잠 21:28, 겔 22:28).
[형] 거짓되다(시 62:9, 겔 13:6,7), 간사하다(잠 23:3).
구약 성경 / 31회 사용

아모스 2장에서는 모압과 유다와 이스라엘의 서너가지 죄에 대하여 말씀합니다. 


어떤 성도들은 교회에 가서 예배를 드리고 헌금을 드리는 것만으로 자신의 모든 종교적 의무를 다 이행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매우 잘못된 생각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믿음을 판단하실 때 물질이나 형식적인 헌신에 관심을 갖지 않습니다.
무엇보다도 진정으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말씀대로 살고 있는가 즉 그의 중심으로 보십니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바울의 교훈과 같이 항상 자신을 돌아보고 말씀에 거하는 삶을 살고 있는지 반성하면서 두렵고 떨림으로 구원을 이루어 가야 하겠습니다.

하나님의 심판의 기준은 모든 인간에 대한 동일한 근거를 기준으로 합니다.
그 기준이란 하나님께 대한 믿음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으리라고 말씀합니다(롬 1:17).
그런데 이런 믿음은 단순히 종교적 의무의 이행으로 증거되는 것이 아닙니다.
아모스서 1장에서 이방 나라들의 심판을 예언한 선지자는 2장에서는 하나님의 백성인 이스라엘에 대한 심판을 예고합니다.
이스라엘이 역사적으로 수많은 고난을 당하면서도 소망을 잃지 않은 것은 종말에 나타날 하나님의 구원을 바라보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2장에서 선지자는 그들에게 심판을 예고합니다.
이스라엘은 자신들이 구원의 언약을 받은 아브라함의 혈통적 후손이므로 절대적인 구원의 자격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들은 아브라함 속에 존재하는 구원의 언약이 사실은 민족적인 것이 아니라 믿음에 근거한 것임을 깨닫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종교적 율법의 준수에는 관심을 가지면서 말씀에 따른 삶에는 무관심한 이스라엘을 심판하실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와 같은 사실을 통해서 성경에서 말하는 구원의 조건으로서의 믿음은 단순히 종교적인 율법의 의무 이행에 있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믿음이란 하나님이 유일한 구원자이심을 인정하고 그에게 자신의 전존재를 맡기는 것임과 동시에 자신의 전삶의 형태까지도 하나님의 요구에 따라 결정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믿음으로의 구원을 강조하면서도 사람이 자신의 행함에 따라 심판을 받을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모압에 대한 심판경고(아모스 2:1-3)

1.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모압의 서너 가지 죄로 말미암아 내가 그 벌을 돌이키지 아니하리니 이는 그가 에돔 왕의 뼈를 불살라 재를 만들었음이라
2.  내가 모압에 불을 보내리니 그리욧 궁궐들을 사르리라 모압이 요란함과 외침과 나팔 소리 중에서 죽을 것이라
3.  내가 그 중에서 재판장을 멸하며 지도자들을 그와 함께 죽이리라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니라

하나님의 메시지

"모압이 서너 가지 큰 죄를 저질렀으니, 내가 더는 그를 참아 주지 않을 것이다.
그는 에돔 왕의 시신을 불에 태워 모독했다. 나는 모압을 불태워 허물고, 그리욧의 요새들도 태워 버릴 것이다.
모압은 고함소리 중에, 전쟁나팔소리와 함께 망할 것이다.
내가 그 왕을 왕좌에서 끌어내리고, 그의 제후들도 다 죽일 것이다."

하나님의 포고

여섯 번째로 모압에 대한 심판 경고.
모압 암몬과 마찬가지로 아브라함의 조카 롯에서 시작한 민족입니다.
큰 딸이 롯과 잠자리를 같이 하고 낳은 아들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모압도 암몬처럼 전통적으로 이스라엘과 적대적인 관계를 보여 주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하나님께서 모압을 심판하시는 이유가 조금 이상합니다.
에돔 왕의 뼈를 불살라 재를 만들었다는 것이 심판의 이유라고 하겠습니다.
일단 뼈를 불살라 재를 만들었다는 것은 우리나라의 옛 형벌이었던 부관참시(무덤을 파서 시체를 다시 죽이는 상징적이고 모욕적인 형벌이지요)와 비슷한 것은 알겠는데, 그 대상이 에돔 왕이라는 게 이상하지 않습니까?

에돔은 어제 우리가 보았던대로 아모스의 심판 경고를 받은 이스라엘의 오랜 적국이자 잔인한 민족입니다.
어떻게 보면 심판 받아 마땅한 민족이라고 볼 수 있지요. 그런데 그 나라의 왕의 시체를 모독한 것이 심판의 이유라니요?
이 사실은 하나님의 심판은 민족적 배타주의를 뛰어 넘는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만의 하나님이 아니라는 것이지요.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괴롭힌다는 이유가 아니라 비인간적 야만 행위 그 자체를 심판하시는 것입니다.
심지어 어떤 민족, 혹은 어떤 사람이 심판을 받아 마땅하다고 해도 그에 대한 비인간적 대우가 용인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보여줍니다. 
범죄자의 인권도 존중해야 한다는 현대 사상과 유사하다고 할까요?
이로써 이스라엘을 제외한 나라들에 대한 심판 경고는 끝이 났습니다.
여섯 번의 심판 경고를 통해 우리가 하나님에 대해 알 수 있는 것들은 어떤 것일까요?
무엇보다도 하나님은 만유의 주이심을 알 수 있습니다.

악은 개인적인 것에 국한되지 않는다는 것도 알 수 있습니다.
지금 하나님께서 지적하는 범죄들은 국가적인 차원에서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지금도 악에 대한 우리의 시각 또한 넓어져야 합니다.
세계의 평화를 위협하는 전쟁이나 테러, 개개인의 자유를 억압하는 독재, 인간의 존엄성을 모독하는 인종차별주의, 약소국에 대한 강대국의 침략, 모든 것을 경제적 가치로만 환산하는 경제 만능주의, 사람들을 좌절하게 하는 양극화..
이런 것들 또한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악'인 것입니다.

또한 하나님의 다스림은 종교적 차원에만 국한되지 않는다는 것도 기억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다스림은 '예수 천당, 불신 지옥'으로만 모두 환원될 수는 없다는 것이지요.
깨어진 세상에 대해 함께 아파하고 분노하며 하나님 나라의 회복, 온전한 샬롬을 위해 기도하고 노력해야 합니다.

정의의 하나님은 약자의 편에 서신다는 것도 기억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이 땅에서 괴로워하며 슬퍼하고 부르짖는 사람들의 원한과 고통을 외면하지 않으실 것입니다.
따라서 그 하나님을 주님으로 섬기는 우리들은 약자들의 신음소리에 귀기울이는 것이 마땅합니다.
하나님은 고아와 과부, 그리고 나그네의 하나님이시니까요.


사랑하지 않는 자 모두 유죄(아모스 2:4-5)

4.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유다의 서너 가지 죄로 말미암아 내가 그 벌을 돌이키지 아니하리니 이는 그들이 여호와의 율법을 멸시하며 그 율례를 지키지 아니하고 그의 조상들이 따라가던 거짓 것에 미혹되었음이라
5. 내가 유다에 불을 보내리니 예루살렘의 궁궐들을 사르리라

하나님의 메시지 

"유다가 서너 가지 큰 죄를 저질렀으니, 내가 더는 그를 참아 주지 않을 것이다. 그들은 하나님의 계시를 거절했고, 내 명령 따르기를 거부했다. 그러면서도 그들은 오래된 거짓말, 그들의 조상을 막다른 골목으로 내몬 거짓말은 잘도 집어삼킨다. 나는 유다를 불태워 허물고, 예루살렘의 요새들을 다 태워 버릴 것이다."

아모스의 심판 경고는 일곱 번째에 접어들었습니다.
7이란 완전수가 아닙니까?
아마도 이 무시무시한 심판 설교를 듣고 있는 북이스라엘 백성들은 유다에 대한 심판 경고가 마지막이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유다.
북이스라엘과 같은 핏줄이면서 가깝고도 먼 나라.
성경에 보면 남유다와 북이스라엘은 전쟁도 하고 교류도 하면서 오랜 세월을 지내왔습니다.
B.C 930년 경 나누어졌고, 지금 아모스가 설교하고 있는 때가 B.C 750년쯤 되니까 남북이 나뉜 지 180년.

유다의 죄목은 무엇입니까?

다른 이방나라들과 마찬가지의 기준이 적용될까요?
오늘 아모스의 경고에는 남유다의 구체적인 행위들은 나타나지 않고 포괄적인 죄목이 나타나 있습니다.
그 죄목은 "하나님의 율법을 지키지 않고 거짓 것에 미혹되었다."입니다.
유다는 (북이스라엘도 마찬가지입니다) 언약백성 입니다.
오래 전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이집트에서 인도해 내시고, 시내 산에서 이스라엘이 영원히 지켜야 할 율법을 선포하셨습니다.
그 율법들은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약속의 땅에서 살아갈 때 지켜야 할 것들이었지요.
각종 의식법과 더불어 시민법, 도덕법들이 망라되어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율법은 그 후 이스라엘의 행위를 재는 기준이 되어 왔지요.
그런데 우리들이 알다시피 이스라엘은 계속해서 하나님의 율법을 저버리며 살았습니다.
일단 처음에 율법을 받았던 조상들조차 광야에서 계속해서 불순종했고, 가나안 땅을 정복한 후 도래했던 사사시대는 '각각 자신의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더라.'라고 정의되었으며,  그 지혜롭던 솔로몬왕도 말년에는 우상숭배에 빠지게 되었고, 남북으로 나뉜 후에도 대부분의 왕이 악한 길로 갔습니다.

신약 시대를 사는 우리들은 하나님의 언약백성이라는 면에서 영적 이스라엘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들도 마땅히 하나님을 하나님의 율법을 따르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 율법을 예수님께서 다음과 같이 요약해주셨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우리 안에도 그 율법을 따르지 않는 모습들이 만연합니다.
먼저, 하나님을 주인이 아니라 도구로 삼아서 복을 비는 대상으로 축소시킵니다.
영원한 하나님의 말씀 대신 스러져 없어지고 말 거짓 것들을 따라갑니다.
배금주의, 성공주의 이런 것들이 우리가 따라가고 있는 거짓 것들이지요.
심지어는 점을 치거나 궁합을 보거나 하는 일까지 있다고 합니다.

또한 이웃에 대한 사랑도 스러져 갑니다.
내 몸을 너무나 사랑해서 열심히 다이어트와 헬스를 하고 보양식도 먹지만 이웃을 위해서 시간과 물질을 내어주는 것에는 인색하며 내 가족은 사랑하지만 나를 조금이라도 불편하게 하는 사람들을 용납하지 못하지요. 이런 모습 모두 하나님의 율법을 따르지 않는 것입니다. '지금 사랑하지 않는 자, 모두 유죄'라는 책이 있습니다.

그나저나, 여기까지 들은 북이스라엘 사람들은 어떤 생각을 했을까요?
어쩌면 내심 회심의 미소를 짓고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당시 북이스라엘과 적대관계에 있던 나라들에 대해 심판의 경고가 떨어지고 있으니까요.
7이라는 완성의 숫자로 보아 심판 경고가 끝날 것 같으니, 하나님께서 결국 북이스라엘을 높이시겠다는 선언으로 들리지 않았을까요?


아, 이스라엘이여! (아모스 2:6-8)

6.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이스라엘의 서너 가지 죄로 말미암아 내가 그 벌을 돌이키지 아니하리니 이는 그들이 은을 받고 의인을 팔며 신 한 켤레를 받고 가난한 자를 팔며
7. 힘 없는 자의 머리를 티끌 먼지 속에 발로 밟고 연약한 자의 길을 굽게 하며 아버지와 아들이 한 젊은 여인에게 다녀서 내 거룩한 이름을 더럽히며
8. 모든 제단 옆에서 전당 잡은 옷 위에 누우며 그들의 신전에서 벌금으로 얻은 포도주를 마심이니라

하나님의 메시지

"이스라엘이 서너 가지 큰 죄를 저질렀으니, 내가 더는 그를 참아 주지 않을 것이다. 그들은 사람을 사고판다. 그들에게 사람은 그저 물건일 뿐이다. 돈벌이 수단이다. 신발 한 켤레를 갖겠다고 가난한 사람을 팔아 버린다. 그들은 자기 할머니도 팔아 치우는 자들이다. 돈 없는 자들을 바닥에 메치고, 불운한 자들을 수렁으로 떠민다. 형이고 아우고 할 것 없이 다들 '신성한 매춘부'와 동침하며, 내 거룩한 이름을 더럽힌다. 그들이 가난한 이들로부터 강탈한 물건이 이방 신의 산당에 수북이 쌓여 있다. 그들은 그곳에 둘러앉아 사기 쳐 빼앗은 포도주를 들이킨다."

열국에 대한 심판은 '서너 가지 죄'라고 시작했지만 사실 한두 가지만 선포 되었습니다.
그런데 북이스라엘에 대해서는 정말로 여러 가지 죄가 지적됩니다.
더구나 열국의 범죄들은 전쟁범죄가 많았던 것에 비해, 이스라엘의 범죄는 일상에서 자행되는 것들이었습니다.
도대체 당시 북이스라엘의 죄는 어떤 것이었길래 이렇게 아모스가 피를 토하고 있습니까?
이스라엘 사회는 먼저 돈이 우선인 사회였습니다.
그들은 의인 (여기서 의인은 아무 잘못이 없는 사람을 의미할 수도, 혹은 그냥 가난한 이들을 의미할 수도 있습니다)을 팔았고, 특히 가난한 사람을 팔았습니다.
당시에 빚을 갚지 못한 사람은 채권자의 종이 되는 일들이 있었습니다.
율법에 따르면 그들은 학대의 대상이 되어서는 안되었고, 7년 째가 되면 자유를 얻었습니다.
그런데 당시에 그들을 사고 파는 인신매매가 성행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심지어 신발 한 켤레라는 얼마 안되는 돈을 위해서도 그런 일이 일어나고 있었습니다.
또한 이스라엘 사회는 사회적 약자를 짓밟고 있었습니다.
부자들은 가난한 자들을 인격적으로 무시했으며, 그들의 정당한 권리를 짓밟았으며, 그들이 억울함을 호소하려고 하면 그 길을 굽게 하여 막았지요.
또한 이스라엘 사회는 성적으로 타락했습니다.
아버지와 아들이 함께 동침한 '젊은 여인'이 누구인지에 대해서는 의견이 갈려 있습니다.
어떤 학자들은 그녀가 성전의 창기였다고 말합니다.
가나안 종교의 영향으로 풍요를 기원하는 종교 의식의 일환으로 그런 매춘이 횡행했다는 것이지요.
어떤 학자들은 그냥 집에서 일하는 하녀라고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가정에서 일어나는 성적 학대를 묘사한 셈이 됩니다.
어떤 의견이 맞는지가 중요하겠습니까?
어쨌든 하나님의 거룩한 이름을 더럽히는 죄악이었지요.
마지막으로 이스라엘은 종교적으로 타락했습니다.
그들은 가난한 자들을 착취한 대가로 종교 행위를 벌였습니다.
원래 율법에 따르면 담보로 취했다가다도 저녁이면 돌려 주어야 하는 겉옷을 깔고 집회에서 누웠으며, 강탈한 포도주로 친교의 시간을 가졌지요.

아모스는 이렇게 구체적으로 이스라엘의 죄를 지적했습니다.
문제는, 지금 우리 사회도 이런 지적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는 것입니다.
언약 백성이었던 이스라엘과는 경우가 다르니 종교적 타락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더라도, 현재 우리 사회에서도 모든 것을 생명과 인격의 관점이 아니라 경제적 관점으로 바라보고 측정하는 일이 다반사입니다.
약한 자들의 복지와 권리를 인정하기 보다는 그들을 계속 억누르는 경우가 많습니다.
성적으로 타락해서 가정이 깨어지고 밤의 문화가 성행합니다.
문제는 이런 분위기가 점점 확산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베테랑'이나 '내부자들'과 같은 영화에서 묘사된 일부 타락한 특권층에서만 일어나는 일들이 아니라는 것이지요.
다만 정도와 범위의 차이가 있을 뿐 아니겠습니까?

열국에 비해서 훨씬 더 심하게 까발려지고 있는 그들의 상태에 대해 들으면서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해지지 않았겠습니까?
물론 이스라엘의 모든 사람들이 이렇게 타락했던 것은 아니겠지요.
하지만 전반적인 사회의 분위기가 이렇게 흘러가고 있었음을 부정할 수는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아직도 아모스의 말이 끝난 것이 아닙니다.
아직도 지적받아야 할 범죄가 남아 있으며 그에 따른 심판 경고가 남아 있습니다.

이스라엘아 기억하라! (아모스 2:9-11)

9.  내가 아모리 사람을 그들 앞에서 멸하였나니 그 키는 백향목 높이와 같고 강하기는 상수리나무 같으나 내가 그 위의 열매와 그 아래의 뿌리를 진멸하였느니라
10.  내가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이끌어 내어 사십 년 동안 광야에서 인도하고 아모리 사람의 땅을 너희가 차지하게 하였고
11. 또 너희 아들 중에서 선지자를, 너희 청년 중에서 나실인을 일으켰나니 이스라엘 자손들아 과연 그렇지 아니하냐 이는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그러나 나는, 나는 언제나 너희 편이었다. 나는 너희와 맞서던 아모리 사람들을 멸했다. 큰 백향목처럼 키가 크고, 굵은 상수리나무처럼 억센 그들을 멸했다. 내가 그들을 꼭대기에서부터 뿌리 끝까지 멸했다. 나는 너희를 이집트에서 건져내고, 너희의 사십 년 광야 길을 안전하게 인도해 주었다. 그리고 나는 너희가 아모리 사람들의 땅을 식은 죽 먹듯 차지하게 했다. 나는 너희 젊은이들 중에서 예언자들을 길러 냈고, 으뜸가는 젊은이들을 구별하여 거룩을 훈련시켰다. 그렇지 않은가, 이스라엘이여!"

다른 이방 나라들보다 오히려 더욱 무거운 죄를 지었던 이스라엘, 그들에 대한 심판 경고에는 다른 나라들에게는 없었던 독특한 부분이 들어 있습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위해 하신 일들이 기술되어 있는 것이지요.  하나님은 어떤 일을 행하셨습니까? 먼저 아모리 족속을 멸하셨습니다. 아모리 족속은 가나안 땅에 살고 있던 강한 족속이었습니다.  오늘 말씀에서도 키가 큰 백향목과 강한 상수리나무에 비유하고 있지요.
이스라엘이 정탐하러 갔다가 스스로를 메뚜기라고 비하하며 좌절하게 만들었던 그 민족들 중 하나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후에 여호수아를 통해 그들을 멸하셨습니다.
'열매부터 뿌리까지' 멸하셨지요.

다윗이 골리앗과 싸울 때 그랬듯이, 이스라엘이 칼과 창이 아니라 하나님의 이름으로 나아갔을 때 하나님께서 친히 그들을 물리치셨던 것입니다.  또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이끌어내셨습니다.

이 출애굽사건은 예언서 전반에 걸쳐서 계속 반복되는, 이스라엘의 역사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이야기입니다.
당대 최강의 제국이었던 이집트와 그 신들을 심판하신, 하나님의 강력한 능력이 가장 잘 나타난 사건이었지요.
또한 하나님께서는 사십 년 동안 광야에서 이스라엘을 인도하셨습니다.
이스라엘이 가나안 족속의 강대함에 두려움을 품고 하나님을 신뢰하지 않았다가 사십 년을 광야에서 방황했을 때,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만나와 메추라기로 먹이시고 반석에서 물을 내셨지요. 징계 가운데서도 이스라엘에게 긍휼을 베푸신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선지자와 나실인을 통해 이스라엘을 인도하셨습니다. 선지자들을 통해서 말씀을 선포해서 병든 그들을 고치셨고, 불순종하는 그들을 꾸짖으셨으며, 방황하는 그들에게 바른 길을 제시하셨으며, 나실인들을 통해서는 (나실인은 특정 기간동안 하나님께 특별한 서약을 하고는 포도주를 마시지 않고 머리를 깎지 않으며 시체를 만지지 않는 등의 거룩한 모습을 보인 사람들입니다. 삼손이 대표적이지요.)

하나님께 헌신한 자들에게 어떤 축복이 주어지는지를 보여주셨지요.
이렇게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신실하게 인도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이런 모습을 아모스가 열거하는 이유는 무엇이겠습니까? |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 각종 죄악을 저지르고 있는 이스라엘의 모습을 대비하면서 그들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 정당함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오라고 선포하는 것이지요.

영적 타락은 기억상실증에서 시작될지도 모릅니다.


이스라엘 백성도 범죄하여 망하게 되었습니다.

아모스 2:6-8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이스라엘의 서너 가지 죄로 인하여 내가 그 벌을 돌이키지 아니하리니 이는 저희가 은을 받고 의인을 팔며 신 한 켤레를 받고 궁핍한 자를 팔며 가난한 자의 머리에 있는 티끌을 탐내며 겸손한 자의 길을 굽게 하며 부자(父子)가 한 젊은 여인에게 다녀서 나의 거룩한 이름을 더럽히며 모든 단 옆에서 전당 잡은 옷 위에 누우며 저희 신의 전에서 벌금으로 얻은 포도주를 마심이니라.

12절에는 "그러나 너희가 나시르 사람으로 포도주를 마시게 하며 또 선지자에게 명하여 예언하지 말라 하였느니라"고 했습니다.

경제적으로 범죄 :

돈 때문에 의인을 팔았습니다. 적은 금액의 빚을 갚지 않는다고 그 금액을 주는 자에게 노예로 팔았습니다. 가난한 사람의 적은 것을 탐내어 빼앗았습니다. 바로 살겠다는 사람까지 꿰어 잘못 살게 했습니다. 믿는 자들도 돈이 되는 일이라면 도무지 긍휼을 베풀지 않고 욕심만 채웁니다.

도적적으로 범죄 :

아버지와 아들이 한 여인에게 드나들었습니다. 믿는 자들도 성적으로 타락합니다. 아버지가 퇴폐업소에서 여자를 불렀는데 딸이고, 어린 여학생들이 아버지 또래와 원조교제를 하고, 어린 아이들이 포르노 영상들을 보고 모든 사람을 성적 대상으로 여기는 식입니다.

종교적으로 범죄 :

성전 제단 옆에서 전당 잡은 옷 위에 눕고 벌금으로 얻은 포도주를 마셨습니다. 불의하게 얻은 것들로 성전 활동을 한다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범죄하여 얻은 것으로 교회에 헌금하여 존경받는 것과 같습니다. 도박해서 딴 돈으로 십일조 하고 훔친 돈으로 감사헌금 하는 격입니다. 또한 나시르인으로 술을 마시게 하고 선지자에게 예언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자들에게 말씀대로 전하지 못하게 한다는 것입니다. 자기의 죄를 드러내는 말씀은 전하지 못하게 하고 자신들의 구미에 맞는 말씀만 전하게 한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부와 권세를 이용하여 사역자들을 조종하고 자기 변호에 이용하려 하는 것과 같습니다. 온갖 종교의식을 자기들의 욕망을 채우는데 사용하고 하나님 말씀까지 자기들의 의도대로 요구하는 것입니다.

2:13-16
곡식 단을 가득히 실은 수레가 흙을 누름같이 내가 너희 자리에 너희를 누르리니 빨리 달음박질하는 자도 도망할 수 없으며 강한 자도 자기 힘을 낼 수 없으며 용사도 피할 수 없으며 활을 가진 자도 설 수 없으며 발이 빠른 자도 피할 수 없으며 말 타는 자도 피할 수 없고 용사 중에 굳센 자는 그 날에 벌거벗고야 도망하리라 이는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하나님께서 심판한다는 것입니다.
이 예언을 할 때는 여로보암 2세 때로서 BC790~750년 때의 일입니다.
이스라엘이 앗수르 군대에 의해 멸망한 때는 BC721년입니다.  

하나님 백성은 하나님 말씀을 지켜야 삽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사는 길은 하나님을 찾는 것뿐입니다. 5:6에 "너희는 여호와를 찾으라 그리하면 살리라"고 했습니다. 1:2에 "저가 가로되 여호와께서 시온에서부터 부르짖으시며 예루살렘에서부터 음성을 발하시리니 목자의 초장이 애통하며 갈멜 산 꼭대기가 마르리로다"고 했습니다. 하나님 말씀을 듣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뭐라고 말씀하시는지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 말씀대로 살아야 합니다.

마태복음6:33에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고 했습니다.
우선순위를 두고 살아야 합니다.

리처드 코치가 쓴 「80/20법칙」이 있습니다.
'80/20의 법칙'이란 집중하는 20%에서 80%가 산출된다는 것입니다.
중요한 20%에 집중하면 나머지 80%가 해결됩니다.
비즈니스 세계에서도 주력상품이 회사 전체를 살립니다.
오리온 제과는 '초코파이'가 동아제약에서는 '박카스에프'가 전체 매출의 80%를 넘는다고 합니다.
전략적 사고를 가져야 합니다.
우선수위를 두고 우선순위에 집중해야 합니다.
중요한 것을 하면 나머지가 다 잘될 수 있는 것입니다.
아무나 생각할 수 있는 사고는 아닙니다.
사람들은 대부분 다 중요하다고 여기고 심지어는 덜 중요한 80%에 목숨을 매는 경우가 많습니다.
여자가 결혼 전에 여러 남성을 알고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자기의 나름대로 가치 기준을 가지고 어느 한 남자를 선택하면 결혼하게 됩니다. 그러나 가치 기준을 가지지 못한 사람은 누구를 택해야 할지 결정하지 못합니다. A도 좋은 것이 있고 B도 좋은 것이 있고 C도 좋은 것이 있고 하는 식이라면 결국 결정을 미루다가 혼기를 놓칩니다. 뒤에 D와 결혼을 하는데 객관적으로 보면 그 D는 A,B,C보다 못한 사람하고 하게 됩니다. 음식점을 하려고 한다면 중요한 것이 많이 있습니다. 값, 써비스, 인테리어, 주차장 등이 있습니다. 그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음식의 맛입니다. 다 갖추어도 음식맛이 없으면 안 됩니다. 병원을 하려고 한다면 무엇보다도 병을 잘 고쳐야 합니다. 교회는 살아 있는 예배가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없이 다른 사역을 모두 하려고 한다면 아무 것도 안됩니다. 예배에 성공하면 다른 사역은 저절로 성공하게 될 것입니다. 예배는 말씀과 기도와 찬양이 주를 이룹니다. 그 기본에 충실하지 않으면 예배에 실패하고 예배에 실패하면 부흥이 안 되는데 교육, 구제, 선교가 잘 되겠습니까?

무엇이 중요한지 결정을 잘해야 합니다.
중요한 것을 선택했으면 빼앗기지 않아야 합니다.
에서는 장자권을 가지고 있었으면서도 별로 중요하게 여기지 않아서 팥죽 한 그릇에 야곱에게 팔아 버렸습니다(창 25:33, 히 12:16).
반대로 중요하지 않는 것은 포기할 수 있어야 합니다.
손해를 보는 결정을 할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 바로 살려면 손해 보는 것을 두려워 해서는 안됩니다.
아브라함은 자기 목자와 조카 롯의 목자가 싸울 때 "네가 좌 하면 나는 우하고 네가 우하면 나는 좌하리라"고 했습니다.
이삭도 아비멜렉왕이 우물을 빼앗을 때마다 싸우지 않고 양보했습니다.

누가복음10:42에 "그러나 몇 가지만 하든지 혹 한 가지만이라도 족하니라 마리아는 이 좋은 편을 택하였으니 빼앗기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을 찾으려고 해야 합니다.
주일을 지켜야 합니다.
예배를 중요하게 여겨야 합니다.
하나님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하나님 말씀대로 살아야 합니다.
그것이 영적으로 회복하는 길이고 모든 것이 잘되는 길입니다.


'경건한'(godly)과 '경건'(godliness)의 반대말은
'세속적인'(worldly)과 '속된 마음'(worldliness)입니다.
흔히 영문법에서 명사에 접미사 '-ly'가 붙으면 '~같은' 혹은 '~다운'이란 뜻의 형용사가 됩니다


지도자들을 위해서 (아모스 2:12)


12. 그러나 너희가 나실 사람으로 포도주를 마시게 하며 또 선지자에게 명령하여 예언하지 말라 하였느니라

"그런데 너희는 훈련받는 젊은이들이 탈선하게 만들고, 젊은 예언자들에게는 '예언을 그만두라!'고 말했다.

어제 영적 타락의 시작이 '기억상실증'일지도 모른다고 말씀드렸지요?
그런데 오늘 말씀에서 그 다음으로 나타나는 것은 지도자들의 타락입니다.
거룩을 지켜야 할 나실인이 포도주를 마시게 되고,  바른 말씀을 선포해야 할 선지자들이 대중에 영합하는 설교를 하게 되지요.
지금도 그런 일이 곳곳에서 일어나고 있다는 것을 부인하기 어렵습니다.
잊을만하면 터져나오는 목회자들의 이런저런 비리들도 문제려니와,  강단에서 선포되는 말씀 또한 축복, 성공, 비전, 부흥, 평강, 긍정의 힘 등만을 이야기하는 경우가 많이 있지요.
물론 그런 것들도 하나님의 말씀 안에 들어있으며 목회자들은 그것을 선포해야 하지만 문제는 역시 균형 아니겠습니까?
진정한 성공의 척도는 부나 명예가 아니라 성령의 열매에 있으며,  부를 사랑하는 것은 일만 악의 뿌리이며, 우리의 실패가 오히려 하나님의 뜻일 수 있으며, 보통 고난이 있어야 우리가 성장할 수 있으며, 죄를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이켜야 한다는 말씀이 같은 무게로 선포되어야 하지요.

지도자들의 타락 또한 이스라엘의 탓이라는 것이지요.
이 또한 지금도 곰곰이 생각해야 할 부분입니다.
물론 일부러 목회자들이 범죄하게 만드는 경우야 없겠지만, 세속적 가치에 휩쓸리지 않으며 지내려고 하거나 하나님의 말씀을 정확하게 선포하려는 목회자들에게 '좋은 게 좋은 것 아니겠습니까?'
우리 듣기에 좋은 말씀을 선포해 주세요'라고 이야기하는 것은, 또는 내가 듣기에 좋은 말씀을 선포하는 교회를 찾아 떠나는 것은 목회자들이 포도주를 마시고 예언하지 않게 되는 계기를 제공하는 것이거든요.

교회가 바로 서기 위해서는 지도자가 바로 서야 합니다.


다른 나라를 비난하기 전에(아모스 2:13-16)

13. 보라 곡식 단을 가득히 실은 수레가 흙을 누름 같이 내가 너희를 누르리니
14. 빨리 달음박질하는 자도 도망할 수 없으며 강한 자도 자기 힘을 낼 수 없으며 용사도 자기 목숨을 구할 수 없으며
15. 활을 가진 자도 설 수 없으며 발이 빠른 자도 피할 수 없으며 말 타는 자도 자기 목숨을 구할 수 없고
16.  용사 가운데 그 마음이 굳센 자도 그 날에는 벌거벗고 도망하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나는 도저히 너희를 두고 볼 수 없다. 참을 만큼 참아서 터지기 일보 직전이다. 용량을 초과하여 짐을 실은 마차처럼, 나는 지금 삐꺽거리며 신음소리를 내고 있다. 내가 행동에 들어가면, 너희는 어찌할 작정이냐? 제아무리 빨리 달아나도 너희는 내게서 도망치지 못한다. 힘센 자들의 힘도 소용없다. 전사들도 소용없다. 활 잘 쏘는 자들도 소용없다. 잘 달리는 자들도 소용없다. 전차를 모는 자들도 소용없다. 너희 가운데 최고로 용감한 전사라 해도 아무 소용없다. 그저 걸음아 나 살려라 하고, 옷도 챙겨 입지 못한 채 내뺄 것이다."

하나님의 포고
하나님을 잊어버리고,  지도자들이 타락하며,  결국 이런저런 죄악들에 빠져 있는 이스라엘에게 이제 하나님은 심판을 경고하십니다.
그런데 아모스는 경고에 첫머리에 하나님을 '곡식을 가득 실은 수레'로 비유하고 있습니다.

아모스는 원래 농사를 짓던 사람이었기에 이런 비유를 사용한 것이겠지요. 곡식을 가득 실은 수레는 어떻습니까? 삐걱거리는 소리가 나지요. 메시지는 이 소리를 하나님의 신음소리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배반하고 주의 길을 떠나 있는 자신의 백성들을 바라보며 내뱉는 탄식소리이기도 하겠지요.  또한 무거운 수레는 땅을 누릅니다.  바퀴로 부드러운 땅을 움푹 패이게 하지요.

어떤 학자들은 이 묘사가 지진을 예고하는 것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1:1에서 아모스의 이 경고가 지진이 일어나기 2년 전이라고 이야기했거든요.
어쩌면 2년 후, 이스라엘은 끔찍한 지진을 겪으면서 아모스의 이 경고를 떠올렸을지도 모르겠네요.
아무튼 하나님의 심판의 날이 닥칠 때에는 이스라엘은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 밖에 없습니다. 다름 아닌 하나님께서 그들의 대적이시기 때문이지요.

본문에서 활을 가진 자, 발이 빠른 자, 용사, 힘센 자...들이 모두 아무 소용없다고 짧게 짧게 언급하는 아모스의 말투는 매우 급박한 상황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아, 그날은 이렇게 두려운 날이 될 것입니다.  이스라엘에 대한 이런 무서운 경고를 보면서 우리들 또한 우리 자신을 돌아보아야 합니다. 열국에 대한 심판 이야기를 들으면서 내심 쾌재를 불렀을 이스라엘에게 떨어진 무서운 경고를 보십시오. 그 경고를 들으며 새파랗게 변했을 이스라엘 사람들의 얼굴을 상상해 보십시오. 우리들 또한 다른 사람들을 비난하는데 익숙합니다. 크게 보면 북한, 일본, 또는 미국을 비난합니다.

하지만 어쩌면 하나님께서는지금 우리들에게 '다른 나라들을 비난하기 전에 대한민국이 먼저 회개하라.'고 말씀하고 계실지도 모릅니다.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이렇게 경고하셨습니다.

"너희가 비판하는 그 비판으로 너희가 비판을 받을 것이요 너희가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가 헤아림을 받을 것이니라" (마태복음 7:2)

시편 119:116
주의 말씀대로 나를 붙들어 살게 하시고 소망이 부끄럽지 않게 하소서.
Sustain me according to your promise, and I will live; do not let my hopes be dashed.

* 살게하시고(소성케 하시고)  2421 하야(châyâh) חָיָה 

1. 살다.  2. 생존하다. 3. 다시 살다
발음 / 하야[ châyâh ]
관련 성경 / 보존하다(창 12:13, 민 4:19, 렘 38:20), 생존하다(민 14:38, 슥 10:9), 삶(느 9:29), 살다(에 4:11), 살게 하다(겔 37:14, 시119:17), 낫다(수 5:8, 왕하 8:8), 살리다(창 20:7, 겔 37:5), 지내다(창 5:7), 보존되다(창 19:20), 생활하다(창 27:40, 왕하 4:7), 소생하다(창45:27, 삿 15:19), 거주하다(창 47:28), 살려주다(왕상 20: 32), 살아나다(왕상 17:22), 희생하다(왕하 13:21), 살려두다(민 31:15, 삿21:14), 구원하다(겔 3:18), 유전하다(창 7:3), 부흥하게 하다(합 3:2), 전하다(창 19:32), 기르다(삼하 12:3, 사 7:21), 중수하다(대상 11:8), 일으키다(느 4:2), 소생하게 하다(시 80:18, 7:12), 보전하다(겔 18:27), 풍성하다(호 14:7), 생존하게 하다(수 14:10),구원하다(창 19:19), 보존하게 하다(창 6:20), 살려주다(사 38:16),
[명] 만세(삼상 10:24, 왕하 11:12), 생명(전 7:12),
[부] 정녕(겔 3:21, 왕상 8:10).
구약 성경 / 283회 사용

시편 119:25
내 영혼이 진토에 붙었사오니 주의 말씀대로 나를 소성케 하소서

시편 119:37
내 눈을 돌이켜 허탄한 것을 보지 말게 하시고 주의 도에 나를 소성케 하소서

시편 119:40
내가 주의 법도를 사모하였사오니 주의 의에 나를 소성케 하소서

시편 119:88
주의 인자하심을 따라 나로 소성케 하소서 그리하시면 주의 입의 증거를 내가 지키리이다

시편 119:107
나의 고난이 막심하오니 여호와여 주의 말씀대로 나를 소성케 하소서. 

시편 119:154
주는 나의 원한을 펴시고 나를 구속하사 주의 말씀대로 나를 소성케 하소서

시편 119:156

여호와여 주의 긍휼이 크오니 주의 규례를 따라 나를 소성케 하소서

시편 119:159

내가 주의 법도 사랑함을 보옵소서 여호와여 주의 인자하신 대로 나를 소성케 하소서



7월 14일(금) 아모스 3장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자기의 비밀(7절)

주 여호와께서는 자기의 비밀을 그 종 선지자들에게 보이지 아니하시고는 결코 행하심이 없으시리라.
Surely the Sovereign LORD does nothing without revealing his plan to his servants the prophets.

"자기의 비밀(revealing his plan)"
소드(סֹודֹו)

* 5475. 소드(çôwd)  סוֹד 

1. 침상.  2. 동석. 3. 예레비먀 6:11
발음 / 소드[ çôwd ]
어원 / 3245에서 유래
관련 성경 / 모의(창 49:6, 욥15:8), 꾀(시64:2), 간계(시83:3), 모임(시89:7, 렘15:17), 회중(시111 : 1),의논(시55:14, 잠15:22), 비밀(잠20:19, 암3:7), 회의(렘23:18, 22), 공회(겔13:9), 친밀함(시25:14), 교통함(잠3:32), 은밀한 일(잠25:9). [형] 가까운(욥19:19).
구약 성경 / 21회 사용

3:5 /
창애에 베풀지 아니하고야 새가 어찌 거기 치이겠으며 아무 잡힌 것이 없고야 창애가 어찌 에서 뛰겠느냐.

* 창애 - 미끼, 덫, trap

6341. 파흐(pach)  פַּח 

1. 그물. 2. 멸망
발음 / 파흐[ pach ]
어원/ 6351에서 유래
관련 성경 / 철판(민16:38), 올무(수23:13, 시119:110,사8:14), 그물(시11:6, 잠7:23, 호9:8), 덫(암3:5).
구약 성경 / 27회 사용

* 4170. 모케쉬(môwqêsh)  מֹקֵשׁ 

1. 올가미.  2. 상처의 원인.  3. 복수 ־ים
발음 / 모케쉬[ môwqêsh ]
어원 / 3369에서 유래
관련 성경  / 함정(출 10:7), 올무(출 23:33, 삼상 18:21, 사 8:14), 갈고리(욥 40:24), 그물(잠 12:13, 18:7, 30:25), 덫(암 3:5).
[동] 옭아매다(욥 34:30).
구약 성경 / 27회 사용

인간이 모든 일에 성공하지 못하는 것은 자신 앞에 일어날 일을 하나도 알 수 없기 때문입니다.
만일 사람이 모든 일을 예측할 수 있다면 실패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인간의 지혜는 한계가 있습니다.
그렇지만 성도들은 실패의 삶을 살지 않아도 됩니다.
왜냐하면 인간의 모든 일을 준비하시고 이루시는 하나님께서 그의 모든 계획을 성도들에게 미리 알려 주시기 때문입니다.

선지자는 하나님께서 자신의 모든 비밀을 선지자들에게 알려 주신다고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이 어려운 세상에서 날마다 승리하는 삶을 살기 위하여 하나님께 기도하고 그의 말씀을 묵상한다면 하나님의 비밀을 깨닫게 될 것이며 날마다 승리하는 삶을 유지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비밀은 인간을 향한 구원 계획이며 이는 하나님의 고유 권한입니다.
이 계획은 영원한 신적 계획으로서 세상을 만드시고 운행해 나가시는 모든 것이 하나님의 비밀한 예정 속에서 완벽하게 추진되고 있습니다.
또한 이런 계획들을 인간에게 나타내 보일 때에도 먼저 자기의 선지자들에게 밝히 드러내신 후에 집행하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심판을 집행하시려 할 때에도 선지자를 통해 회개를 촉구하시며 임박한 심판에 대해 예고하십니다.
따라서 역사의 주관자이시며 집행자이심과 동시에 심판자이신 하나님은 죄악을 행하는 인간들에게 진노를 행하시기에 앞서 죄인들인 인간들이 속히 자기들의 죄를 깨닫고 돌아와 하나님의 진노를 모면할 수 있도록 방편을 마련하십니다.
이런 하나님의 구원 계획의 최정점은 바로 그리스도의 성육신에서 나타내셨습다.
그리스도의 성육신은 인간이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하나님의 구원 계획을 직접 인간의 눈과 경험으로 알 수 있게 하신 은혜의 현신입니다.

이런 점에서 자신의 계획을 선지자에게 보이시겠다고 말씀하신 하나님의 은혜는 신약 시대에 온 인류에게 베푸시는 은혜로 나타났습니다.
하나님의 구원 계획에 나타난 모든 현상은 이런 점에서 처음부터 끝까지 사랑의 표현이라고 하겠습니다.
 

3:10 / 자기 궁궐에서 포학과 겁탈을 쌓는 자들이 바른 일 행할 줄을 모르느니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바른(6213) 일(5228)(עֲשֹׂות־נְכֹחָה) 이소트 니코하흐  

* 6213. 일(아사. 
ʽâsâh)  עָשָׂה 

1. 노동하다.   2. 만들다.  3. 생산하다
발음 / 아사[ ʽâsâh ]



* 5228. 바른(나코아흐. 
nâkôach) נָכֹחַ 

1. 바른.  2. 정직한
발음 / 나코아흐[ nâkôach ]
어원 / 5226과 동일 어원에서 유래
관련 성경 / 바른(삼하 15:3), 적당한(잠 24:26), 정직한(사 26:10). [명] 바른길(사 57:2).
구약 성경 / 4회 사용



말씀묵상

하루는 공자가 노나라 임금 애공에게 군주와 백성과의 관계에 대해서 말한 적이 있습니다.
공자는 군주와 백성의 관계를 ‘군주민수(君舟民水)’라고 말했습니다.
임금은 배요, 백성은 물이라는 뜻입니다.
백성은 임금을 띄우는 물이 되기도 하지만 성난 민심은 임금을 뒤집는 물이 되기도 합니다.

지금까지 역사를 보면 맞는 말입니다.
백성들이 겸손한 임금을 세워서 그를 받들어 주는 물이 되기도 하지만 임금이 백성의 뜻에 합하게 정치하지 못했을 때 민란이 일어나고 임금을 뒤집는 성난 물결이 되기도 했습니다.

역사가 우리에게 주는 교훈입니다.
세상의 군주들은 백성들을 두려워해야 합니다.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간다면 하나님의 자녀들은 하나님을 두려워해야 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알려주신 대로 말씀에 근거해서 살아야 합니다.
우리가 서 있는 삶의 현장, 공동체, 가정, 일터, 교회, 세속 사회 속에서도 하나님의 뜻이 드러나고 성취되도록 살아야 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사명이자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뜻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말씀을 보면 그렇게 살지 못한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한 하나님의 심판이 선포되고 있습니다.
특별히 지도자들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입니다.

2절 말씀입니다.
내가 땅의 모든 족속 가운데 너희만을 알았나니 그러므로 내가 너희 모든 죄악을 너희에게 보응하리라 하셨나니

하나님의 마음이 느껴지십니까?
내가 땅의 모든 족속 가운데 너희만을 알았다는 말씀을 보면 하나님의 지극한 짝사랑이 느껴지지 않으십니까?
이 말씀 그대로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택하셨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왜 이스라엘 백성들을 택하셨을까 의문이 듭니다.
그들은 강력한 제국도 아니었습니다.
잘난 것도 없었습니다.
그렇다고 의리가 깊은 것도 아니었습니다.
하나님 배반하기를 밥 먹듯이 하는 백성들이었습니다.
세상의 잘난 민족과 힘센 나라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하나님은 그 제국들을 제쳐놓고 히브리 민족을 택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을 지극히 아꼈습니다.
하나님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너희만을 알았나니’ 하나님은 그들만을 아는 사랑에 굶주린 바보 같은 분이었습니다. 

이는 오늘 우리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이 왜 나를 택하셨을까?
아무리 생각해보아도 하나님이 나를 택하실 이유가 없습니다.
나는 잘난 것도 없습니다.
생각하는 것, 계획하는 것, 행동하는 것이 사악합니다.
하나님을 향한 진실한 마음을 행동으로 옮기지도 못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속으면서도 여전히 나를 사랑한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배신당하셨습니다.
아들까지 내어주셨지만 우리는 하나님을 배반하고 살았습니다.
하나님은 여기에 실망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무서운 진노를 보여주심으로 또 다시 우리에게 기회를 주시고 돌이키게 하시는 것입니다.
오늘 하나님께서 아모스 선지자를 통해서 주시는 이 말씀은 그 당시 집권자들에게 주시는 심판의 말씀입니다.

10절을 보겠습니다.
자기 궁궐에서 포학과 겁탈을 쌓는 자들이 바른 일 행할 줄을 모르느니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자기 궁궐에 있는 자들은 정치 지도자들입니다.
정치하는 사람들이 궁궐에서 행하는 일들은 세심해야 합니다.
그들이 판단하는 것들이 백성들에게 엄청난 후폭풍을 가져다주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작정하고 백성들을 강탈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판단 한 가지가 잘못되면 백성들의 삶은 피폐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예를 들어 봅시다. 임금이 지금 궁궐이 좁은 것 같으니 크고 넒은 궁궐을 짓자고 할 때 옆에 있는 간신들이 손뼉을 치며 그렇게 하자고 말합니다.
그 말이 결정되는 순간 백성들은 피눈물이 납니다.
또 한 가지 예를 들어 봅시다.
임금이 자존심 상한다고 해서 이웃나라와 전쟁을 하자고 하면 백성들은 전쟁터에 끌려 나가야 됩니다.
한 두 사람 죽는 것이 문제가 아닙니다.
아버지를 잃은 가정에는 아이들의 울음소리가 납니다.
백성들의 시체가 온 산천을 뒤덮을 것입니다.
궁궐에서 그들이 결정하는 것에 따라서 백성들은 한숨 쉬고 고통 받을 것입니다.
이것이 그 옛날 북이스라엘에서 일어났던 일입니다. 

궁궐에서 일어나는 일들이 백성들을 괴롭게 할 때 하나님은 그들을 가만히 두고 보시지 않는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뿐만이 아닙니다. 그들의 삶을 보십시오. 15절입니다. “겨울 궁과 여름 궁을 치리니 상아 궁들이 파괴되며 큰 궁들이 무너지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겨울 궁과 여름 궁이 있었습니다. 큰 궁궐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이 궁궐을 크게 지은 만큼 백성들의 삶은 그에 비례해서 힘겨워집니다. 상아로 만든 궁궐이 있었습니다. 상아는 이스라엘에서 나지도 않는 것입니다. 상아를 수입하기 위해서 엄청난 돈을 들였습니다. 그 돈으로 궁궐을 지었습니다. 그 만큼 백성들은 수탈당했습니다. 백성들 몫으로 돌아가야 할 것이 임금 한 사람을 위한 겨울 궁과 여름 궁, 상아 궁으로 변해 버렸습니다. 그만큼 백성들은 힘겨워졌습니다. 하나님이 그들을 가만히 두시겠습니까? 하나님이 겨울 궁과 여름 궁, 상아 궁과 큰 궁들을 치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행동들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그들에게 말씀을 주셨습니다.
백성들을 정의와 공의로 다스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하나님 말씀대로 따를 생각이 없었습니다.
자신의 의지대로 큰 궁궐들을 짓고 백성들의 피를 뽑아 먹습니다.
이것이 그 당시 집권자들의 죄악이었습니다.
하나님은 그 죄악을 가만히 두지 않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집권자들의 죄악 이면에 있는 영적 지도자들입니다.
하나님은 영적지도자들도 심판하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14절을 보십시오. “내가 이스라엘의 모든 죄를 보응하는 날에 벧엘의 제단들을 벌하여 그 제단의 뿔들을 꺾어 땅에 떨어뜨리고

북이스라엘의 첫 번째 왕 여로보암 1세는 벧엘에 제단을 세웠습니다.
그 제단은 가짜였습니다.
금송아지를 세웠기 때문입니다.
그곳에 제단의 뿔도 만들어 두었습니다.
원래 제단의 뿔은 어떤 죄인이라도 잡으면 죽이지 못하도록 명시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이것도 가짜였습니다.
벧엘에 있는 제단 자체가 가짜였기 때문입니다.
오랜 세월동안 북이스라엘은 가짜를 섬기고 살았습니다.
하나님은 가짜를 섬긴 백성들과 영적 지도자들을 가만히 두지 않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오랜 기간 동안 기회와 시간을 주었지만 돌이키지 아니하였으니 이제는 심판하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정치 지도자들의 죄를 지적하지 않은 영적 지도자들이 만든 벧엘의 제단과 제단 뿔도 함께 헐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가짜를 섬긴 대가는 혹독했습니다.
하나님의 불 심판이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오늘 이 시대 영적 지도자들과 세상 지도자들의 관계를 생각해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목사와 교회의 중직으로 세워주셨습니다.
우리가 먼저 바로 서야 세상이 바로 설 것입니다.
목사는 목사로서의 사명을 제대로 감당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가감 없이 전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인 중직들과 직분 받은 자들도 사명을 잘 감당해야 합니다.
가짜를 섬기면 안 됩니다.
돈을 비롯해서 눈에 보이는 것은 모두 가짜입니다.
오늘 이 시대 수많은 영적 지도자들이 가짜를 섬기라고 충동질 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진짜이신 하나님을 섬겨야 합니다.
그 때 하나님은 우리 영혼을 보존하실 것입니다. 

오늘 이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깨달음을 붙들고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나는 어디에 서 있는가?
하나님의 말씀 위에 서 있는가?
그렇지 않으면 벧엘의 금송아지 같은 가짜 위에 서 있는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진리의 말씀이 진짜입니다.
겨울 궁과 여름 궁도 상아 궁궐도 다 가짜입니다.
하나님이 한번 불면 사라지고 없어질 가짜에 목숨 걸지 마시고 진짜이신 하나님 말씀을 붙들고 승리하는 복된 하루되시기를 바랍니다. 

1. 지도자들이 믿음의 판단을 내릴 수 있도록 기도하겠습니다.
2. 가짜에 속지 않고 진짜이신 하나님과 말씀을 의지하겠습니다.
3. 사랑의 하나님, 가짜를 섬기는 어리석은 인생이 되지 않고 진짜이신 말씀과 하나님을 의지하도록 힘과 능력을 주시옵소서.

주 여호와께서는 자기의 비밀을 그 종 선지자들에게 보이지 아니하시고는 결코 행하심이 없으시리라

- 본절이 앞절과 연관성이 있는지 여부는 단정적으로 말할 수 없다.
왜냐하면 앞 부분과 논리적인 연결이 분명하지 않기 때문이다(T.E.McComiskey).
그래서 어떤 학자는 본절의 첫머리에 나오는 히브리어 '키'(*)를 '그러나'(but)로 번역하고(Harper), 어떤 역본들은 '확실히'(surely)로 번역하였다(KJV, JB).
그렇지만 8절에 나오는 '사자'와 '두려움'의 개념이 4절의 '사자'와 6절의 '두려움'을 그대로 반영하는 것을 보면, 7절만을 따로 생각할 수도 없다.

한편 '비밀'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소드'(*)는 '은밀한 협의'(SECRET COUNSEL)란 의미를 가지고 있어서 밀접한 관계에 기초한 적극적인 의논(잠 15:22)을 의미한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이 사랑하는 사람에게 깊은 관계성을 통해 미리 알려주는 계획(plan)을 가리키기도 한다.
하나님과 이런 관계에 있으므로 선지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백성들에게 전달할 수 있다(렘 23:18, 22).
한편, 하나님의 심판에는 그에 앞서 항상 경고가 있다.
노아 시대에 홍수 심판도 그러했고(창 6:13-21), 소돔과 고모라가 멸망할 때에도 미리 경고되었다(창 18:17-21; 19:12,13).




내가 너희를 '알았다' (아모스 3:1-2)

1. 이스라엘 자손들아 여호와께서 너희에 대하여 이르시는 이 말씀을 들으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올리신 모든 족속에 대하여 이르시기를
2.  내가 땅의 모든 족속 가운데 너희만을 알았나니 그러므로 내가 너희 모든 죄악을 너희에게 보응하리라 하셨나니

이스라엘아, 귀 기울여 들어라. 하나님께서 너희를 심문하신다. 너희 모두와, 그분이 이집트에서 건져 주신 모든 족속에게 말씀하신다. 모두, 귀 기울여 들어라!

"지상의 모든 족속 중에서 내가 특별히 너희를 골라내었다.  지금 내가 너희 모든 죄에 대해 심문하는 것은 너희가 받은 이 특별한 부름 때문이다."

이제 아모스서의 본론 부분인 3장으로 들어왔네요.
서론격이었던 1-2장에서 열국에 대한 심판과 이스라엘에 대한 심판을 경고했던 아모스는 3-6장에서 이스라엘의 죄악에 대해서 더욱 자세하게 심문합니다.
그렇게 심문하기 이전에 아모스는 다시 이스라엘의 지위에 대해서 상기시킵니다.
아니, '이집트에서 올리신 모든 족속'이라고 대상을 알리는 것으로 보아 북이스라엘뿐 아니라 남유다에 대해서도 외치는 것 같습니다.
원래 남유다 사람이었던 아모스는 북이스라엘에 와서 이 예언을 선포하고 다시 유다로 돌아와서 책으로 쓰거든요.
지금 무시무시한 심판경고를 받을 정도로 타락한 이스라엘은 원래 어떤 민족이었습니까?
하나님의 은혜로 이집트의 노예 신분에서 자유민으로 해방되었던 민족입니다.
약속의 땅을 향하여 구름기둥과 불기둥으로 인도받았던 민족입니다.
하늘에서 내리는 만나와 메추라기로 배고프지 않았던 민족입니다.
끊임 없이 하나님께 불순종했지만 하나님의 은혜로 결국 가나안 땅을 정복하고 정착하게 된 민족입니다.

그것을 아모스는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땅의 모든 족속 중에서 너희만을 알았다"

이제는 많이 알려졌듯이 여기서 '알았다'는 단어는 그냥 '머리로 인식했다.'는 뜻이 아니라 '특별한 관계를 맺었다.'는 의미입니다.
남녀간의 성적인 관계를 묘사할 때도 쓰이고, 친숙하다, 인정하다, 선택하다, 사랑하다는 말로 번역되고 있지요.
하나님과 이스라엘은 원래 이런 관계였다는 것입니다.

출애굽기 19:5
"세계가 다 내게 속하였나니 너희가 내 말을 잘 듣고 내 언약을 지키면 너희는 모든 족속 중에서 내 소유가 되겠고"

모든 것이 하나님의 것이지만, 이스라엘은 특별한 소유물이라는 것이지요.  우리도 우리가 가진 많은 것들 중에서 특별히 아끼는 것이 있지 않습니까?  그런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배신하자 하나님은 더욱 분노하셨습니다.

사랑과 믿음이 컸기에 아픔과 분노가 더욱 컸던 것이지요. 로마의 황제였던 시저가 아들같이 아꼈던 심복 부르투스에게 살해당하면서 '부르투스, 너마저..'라고 신음했던 것처럼 말입니다.

오늘도 하나님의 은혜와 예정에 대해 오해해서  '오직 믿음으로 구원받는다'라는 은혜의 선언을 불순종을 정당화하는 구실로 사용하고 있는 사람들은 오늘 아모스의 이런 외침을 들어야 합니다. 우리가 사랑받기 위해서 말씀에 순종해야 하는 것은 아니지만  먼저 은혜로 사랑받았기 때문에 이제 말씀에 순종하게 되는 것이지요. 부족하지만, 연약하지만, 넘어지지만 다시 일어나 하나님 앞에 나아가 말씀 앞에 엎드려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선택과 값없는 은총은 우리에게 책임있는 반응을 요구합니다.

어찌 일어나겠느냐?(아모스 3:3-6)

3. 두 사람이 뜻이 같지 않은데 어찌 동행하겠으며
4. 사자가 움킨 것이 없는데 어찌 수풀에서 부르짖겠으며 젊은 사자가 잡은 것이 없는데 어찌 굴에서 소리를 내겠느냐
5. 덫을 땅에 놓지 않았는데 새가 어찌 거기 치이겠으며 잡힌 것이 없는데 덫이 어찌 땅에서 튀겠느냐
6. 성읍에서 나팔이 울리는데 백성이 어찌 두려워하지 아니하겠으며 여호와의 행하심이 없는데 재앙이 어찌 성읍에 임하겠느냐

두 사람이 손을 잡고 걷고 있으면, 둘이 같은 곳으로 가고 있다는 말이 아니냐?
사자가 숲 속에서 표효하고 있으면, 먹이를 움켜쥐었다는 말이 아니냐?

젊은 사자가 만족하여 으르렁거리고 있으면, 저녁거리를 잡았다는 말이 아니냐?
새가 바닥에 떨어졌으면, 돌에 맞았다는 말이 아니냐?
덫이 탁 하고 닫혔으면, 무언가 덫에 걸렸다는 말이 아니냐?
마을에 경보가 울리면, 주민들이 놀라는 것은 당연하지 않겠느냐?
재앙이 도성을 휩쓸고 있으면, 그 뒤에는 하나님이 계신 것이 아니겠느냐?

'어찌'라는 단어가 많이 보이지요?
아모스는 지금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질문을 쏟아내고 있습니다.
정말로 궁금해서 하는 질문이 아니라 '맞습니다!'라는 답을 끌어내기 위한 질문이지요.
아모스는 먼저 이스라엘 사람들, 아니 우리들까지 머리를 끄덕이며 동의할 수 있는 질문들을 5개 열거합니다.
그 질문들은 결국 다음과 같은 진술을 강조하는 것이지요.

두 사람이 동행한다는 것은 두 사람의 뜻이 맞기 때문이다!
사자가 수풀에서 부르짖는다면 뭔가를 움켜 잡은 것이다!
젊은 사자가 으르렁대고 있다면 뭔가를 잡은 것이다!
새가 덫에 치였다면 누군가 덫을 놓았기 때문이다!
덫이 튀어 올랐다면 새가 잡힌 것이다!

이 이야기를 듣는 모든 이스라엘 사람들은 '그야 당연하지'라는 마음으로 고개를 끄덕였을 것입니다.
모든 일에는 원인이 있다는, 지극히 당연한 이야기들이니까요.
그런데 아모스는 이어서 핵심진술로 들어갑니다.
성읍에서 나팔 소리가 울리면 사람들이 두려워할 것인데, 그렇게 재앙이 임한것은, 하나님이 그렇게 시키셨기 때문이다!
아..결국 아모스가 이런 수사학적 질문들을 통해 정말로 하고 싶었던 이야기는 이스라엘이 겪을 재앙은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것이라는 사실이었습니다.

그러구보니, 앞에서 아모스가 무심한 듯 열거했던 5개의 질문도 남다르게 들립니다.

두 사람의 동행은 출애굽한 이스라엘과 하나님의 동행으로 보이고,
부르짖는 사자는 하나님을 나타내는 것으로 보이고,
아, 이스라엘은 덫에 걸려 있으면서도 다가오는 심판을 알지 못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 불순종하고 있으면서도 하나님은 우리 편이라는 자기 최면에 빠져 있습니다.
하나님은 사자처럼 부르짖고 계십니다.
그리고 어쩌면,  하나님은 지금도 포효하고 계실지도 모릅니다.
'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라고 외치신 예수님의 말씀이 생각나면서 혹시 우리의 귀가 어두워지지는 않았을까 두려운 마음이 드네요. 오 주여, 우리의 귀를 열어주소서!


예언자의 역할 (아모스 3:7-8)

7. 주 여호와께서는 자기의 비밀을 그 종 선지자들에게 보이지 아니하시고는 결코 행하심이 없으시리라
8. 사자가 부르짖은즉 누가 두려워하지 아니하겠느냐 주 여호와께서 말씀하신즉 누가 예언하지 아니하겠느냐

주께서 무슨 일을 하실 때 당신의 예언자들에게 미리 그 모든 것을 말씀해 주시지 않고서는 무슨 일을 하시는 법이 없다.
사자가 포효하는데 누가 겁먹지 않을 수 있겠느냐?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데 어떤 예언자가 입을 다물고 있을 수 있겠느냐?

아마도 아모스가 이런 심판경고를 계속 토해내자,  듣고 있던 이스라엘 사람들이 항의했나 봅니다.  "너는 어떤 근거로 그런 말을 하느냐?""남유다 사람이 왜 여기까지 와서 그런 이야기를 하느냐?"라고 말이지요.  그러므로 아모스는 자신이 하고 있는 예언의 기원에 대해서 밝히고 있습니다.  그 예언의 기원은 다름 아닌 하나님이시라는 것이지요.

예언은 어떤 명석한 사람이 자신의 이야기를 전달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언은 하나님께서 맡기신 말씀을 전달하는 것이며, 예언자는 그 일을 위해 하나님께서 선택해서 세우신 사람입니다.  예언자가 되기 위해 어떤 훈련을 해야 할 필요가 없었지요. 예언자의 권위는 온전히 하나님께로부터 왔습니다.

또한 예언자는 두려운 마음으로 그 일을 행했습니다.  사실 예언자가 많이 나타나는 것은 바람직한 현상이 아닙니다. 기본적으로 왕과 제사장을 통해 하나님의 통치가 이루어지는 것 아닙니까?  사회가 어지러워지고, 기본 통로가 제 역할을 다하지 못할 때 하나님께서 예언자들을 보내신 것입니다. 예언자들의 주 임무가 심판 경고였구요. 그러므로 방자하게 그 내용을 전하는 것이 아니라 두렵고 떨린 마음으로 심판을 전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이지요.

시대에 따라 목회자에게 요구되는 덕목이 있습니다. 예전에는 열정이나 기도 이런 것들이 가장 중요했던 것 같은데  요즈음에는 경영능력이 가장 중요한 것으로 보이는 것은 그냥 저만의 생각일까요?  목표를 제시하고 동기를 부여하고 새로운 프로그램을 도입하고.. 이런 것들은 사실 경영자의 역할이 아닐까요?  물론 교회도 사람들이 모인 곳이니만큼 그런 것들이 당연히 필요하겠지만, 왠지 점점 교회가 유기체보다는 조직에 더 가까워지고 있으며, 목회자가 영적 지도자보다는 CEO에 더 가까워지고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 때가 많이 있습니다.

성경이 완결된 지금,  목회자의 가장 중요한 임무는  기록된 말씀을 잘 해석하고 전달하는 것입니다. 사실 말씀을 전할 때 두려운 마음이 들 때가 많이 있습니다. 이제 하나님께 직접 메시지를 받아서 전달하는 것이 아니니만큼  저의 생각과 저의 해석이 들어가기 때문이지요. 혹시라도 하나님의 생각과 다른 것을 전하는 것이 아닌지, 하나님의 마음을 전하지 못하고 건조한 지식만 전하는 것이 아닌지 두려울 때가 있습니다.




증인 부르세요 (아모스 3:9-12)

9. 아스돗의 궁궐들과 애굽 땅의 궁궐들에 선포하여 이르기를 너희는 사마리아 산들에 모여 그 성 중에서 얼마나 큰 요란함과 학대함이 있나 보라 하라
10. 자기 궁궐에서 포학과 겁탈을 쌓는 자들이 바른 일 행할 줄을 모르느니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11. 그러므로 주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이 땅 사면에 대적이 있어 네 힘을 쇠하게 하며 네 궁궐을 약탈하리라
12.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목자가 사자 입에서 양의 두 다리나 귀 조각을 건져냄과 같이 사마리아에서 침상 모서리에나 걸상의 방석에 앉은 이스라엘 자손도 건져냄을 입으리라

앗시리아의 요새들에게 알려라. 이집트의 요새들에게 알려라. 그들에게 전하여라. "사마리아의 산 위에 모여, 유심히 아래를 내려다보아라. 잔인과 공포가 얼마나 들끓고 있는지를! 그들은 올바른 일을 하나도 할 줄 모른다. 그럴 마음도 없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셨다.  "그들은 폭력과 어둠을 쌓아 왔다."  이는 하나님의 말씀이다. "그러므로 적이 그 나라를 포위할 것이며, 너를 무력화시키고 너의 요새를 약탈할 것이다."

하나님의 메시지다.  "사자에게서 어린양을 구하려던 목자가  겨우 두 다리와 귀 조각 정도나 건져 내듯이,  사마리아에 사는 이스라엘 사람들 중에도 소수만 건짐을 받을 것이다.  겨우 낡은 의자 몇 개,  부러진 탁자다리 정도만 남을 것이다."

하나님께서 초대장을 보내셨습니다. 초대장을 받는 사람들은 아스돗(어떤 사본은 앗시리아라고 되어 있기도 합니다)과 애굽의 궁궐들. 초대장소는 사마리아의 산. 그리고 그들이 관객으로 모여서 관람할 것은 이것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의 요란과 학대와 포학과 겁탈. 아..

아, 이제 하나님의 심판이 임할 것입니다. 그들이 그렇게 자랑했던 궁궐들이 이제 폐허가 될 것입니다. 호화스러웠던 침실이 불타 없어질 것입니다. 아모스는 그 모습을 생생한 비유로 묘사합니다. 사자에게 물려간 어린 양을 목자가 구하려고 해봤자 다리 조각이나 귀 조각 정도나 간신히 건질 수 있듯이, 침상이나 걸상 조각 정도만 구원을 받는다고 이야기합니다. '건짐을 받는다'고 표현되었다고 해서 구원을 강조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스라엘 중에서 소수만 건짐을 받을 정도로 무서운 심판이 임할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지금 한국교회가 세상의 손가락질을 많이 받고 있습니다.  물론 진리의 편에 서 있지 않은 자들은 언제나 교회를 대적하는 것이 당연하지만, 그런 의미에서가 아니라 세상의 기준에도 미치지 못하는 부정과 부패로 인해 비난받는 일이 얼마나 많습니까?  어둡고 부패한 세상에서 빛과 소금으로 살아가며,  그들에게 대안사회를 보여주어야 할 교회가  그들 못지 않은 타락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때가 너무 많습니다. 

정신을 바짝 차려야겠습니다.  우리가 어떤 모습으로 서 있는지 돌아보아야겠습니다.  우리 주변에서는 우리를 어떻게 보고 있는지 생각해야겠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심판하실 때  그들을 증인으로 부르실 수도 있으니까요!


심판의 타겟 (아모스 3:13-15)

13. 주 여호와 만군의 하나님의 말씀이니라 너희는 듣고 야곱의 족속에게 증언하라
14. 내가 이스라엘의 모든 죄를 보응하는 날에 벧엘의 제단들을 벌하여 그 제단의 뿔들을 꺾어 땅에 떨어뜨리고
15. 겨울 궁과 여름 궁을 치리니 상아 궁들이 파괴되며 큰 궁들이 무너지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야곱 가문에 대한 고발이다. 귀 기울여 듣고 증언하여라. 이는 하나님, 곧 만군의 하나님의 말씀이다!
"주목하여라! 그날 나는 이스라엘이 자기 죄에 대해 대가를 치르게 할 것이다.
베델에 악한 제단들을 세운 것에 대해 대가를 치르게 할 것이다.
뿔 달린 제단들은 뿔이 전부 잘려 나가고 산산조각 날 것이다.
내가 겨울 궁궐을 허물고, 여름 궁궐을 - 화려한 건물들을 모조리 다 - 박살낼 것이다.

증인으로 불려나온 아스돗과 애굽이 이스라엘의 죄악을 증거하자, 이제 하나님께서는 심판을 행하십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심판을 시작하시는 곳이 어디입니까?

벧엘은 북이스라엘을 설립한 여로보암이  예루살렘을 대신하기 위해서 제단을 만든 곳입니다.
아마도 그 이후로 북이스라엘 사람들은 계속 벧엘로 와서 제사를 드렸던 것 같네요.
그 다음으로 하나님의 심판 타겟이 되는 곳은 겨울 궁궐, 여름 궁궐입니다.
그 궁궐들은 부유층들이 가지고 있던 별장을 의미합니다.
계절에 따라 피서 또는 피한을 즐겼던 곳들이겠지요.
더구나 그 궁궐들이 상아로 지어졌다는 것을 보아 매우 호화스러웠던 것 같습니다.

아.. 이스라엘의 심판의 시작이 벧엘이라는 것은 이스라엘의 타락은 성소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즉, 사회적 타락이 영적 타락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입니다.
물론 신정국가였던 이스라엘과 지금 우리 나라의 위치는 매우 다르지만, 우리 또한 두려운 마음으로 스스로를 돌아보아야 합니다.

혹시 귀에 듣기 좋은 설교들만 선포되고 있지는 않습니까?

죄악을 지적하고 심판을 경고하는 메시지는 사라지고 긍정적 사고방식과 평안과 위로만 난무하지는 않습니까?
좋은 프로그램을 찾아 철새처럼 교회를 떠돌지는 않습니까?
나를 필요로 하는 작은 교회들보다는 내게 필요한 대형교회로만 몰리지는 않습니까?
재정이 투명하게 집행되지 않고 함부로 낭비되고 있지는 않습니까?
약한 자들을 돌아보고 구제하기 보다는 자체 건물과 프로그램을 강화하는 데에만 골몰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가난한 자의 편에 서기 보다는 강자의 시각으로 상황을 해석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불의한 구조를 비판하고 대안을 모색하기 보다는 모르쇠로 일관하거나 심지어는 그 구조의 일부분이 되어 있지는 않습니까?
교회 안에서조차 경제적 능력이나 사회적 지위로 서로를 비교하고 판단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목회자들이 부와 권력과 명예를 탐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이런 영적 타락은 사회 지도층의 부패로 이어졌습니다.
이것 또한 지금 우리 나라의 현실에서도 동일합니다.
약자를 돌아보고 양극화의 해소를 위해서 구조를 개혁하려고 하기 보다는 자신들의 기득권을 지키기에 골몰하고 부와 사회적 위치를 세습하는 정치인들, 각종 부정과 불의를 통해 부를 축적하고 그들끼리의 동맹을 맺고 있는 재벌들, 비판을 잠재우고 사건의 본질을 호도하며 여론을 조작하는 언론들과 학자들, 소위 사회적 지도층의 부패 또한 북이스라엘과 크게 다르지 않지 않습니까?

이런 자들이 하나님의 심판의 다음 타겟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오래 참고 계실 때 하나님의 말씀 앞에 겸손하게 무릎을 꿇어야겠습니다.
쉬운 길이 아니라 옳은 길을 가도록 마음을 다잡아야겠습니다.
주여, 우리의 귀를 열어주시고 우리를 주의 길로 인도하소서!




7월 15일(토) 아모스 4장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만나기를 예비하라(12절)

그러므로 이스라엘아 내가 이와 같이 네게 행하리라 내가 이것을 네게 행하리니 이스라엘아 네 하나님 만나기를 예비하라.
"Therefore this is what I will do to you, Israel, and because I will do this to you, prepare to meet your God, O Israel."


이스라엘아 네 하나님 만나기를 예비하라
(
prepare to meet your God, O Israel)
히콘 리게라트 엘로이카(הִכֹּון לִקְרַאת־אֱלֹהֶיךָ)

* 3559. 예비하라(쿤. kûwn) כּוּן

1. 똑바로서다. 2. 필렐형.  כּוֹנֵן
3. 세우다
발음 / 쿤[ kûwn ]
관련 성경 / 견고하다(왕상2:46, 대상17:14, 잠29:14), 예비되다(잠19:29), 준비하다(대하35:4, 시9:7, 사51:13), 든든히 서다(삼상20:31), 굳게서다(대상16:30, 시102:28, 잠12:3), 완비하다(대하8:16), 갖추다(대하29:35) 구비되다(대하35:10), 준비되다(대하35:16), 견고히 하다(시89:21), 서다(시101:7), 보존되다(잠12:19), 이루다(잠16:3), 성취하다(잠20:18),정하다(창41:32, 시108:1), 분향하다(시141:2),성취하다(잠20:18), 버티다(삿16:26,29), 기다리다(욥12:5, 18:12), 옳다(욥42:7), 신실하다(시5:9), 정직하다(시51:10), 확정되다(시57:7), 세우다(출15:17, 시119:90, 신32:6), 당기다(시11:2), 건축하다(합2:12), 배우다(욥8:8), 짓다(욥31:15, 잠8:27), 건설하다(시24:2), 삼다(대상14:2), 저축하다(대상29:16),행하다(대하27:6), 정돈하다(대하35:20), 결심하다(대하30:19), 지도하다(렘10:23), 성취하다(렘33:2), 항오를 벌이다(나2:3), 향하다(삼상7:3), 살피다(삼상23:22), 방비하다(렘51:12), 닦다(신19:3), 베풀다(욥29:7), 주다(시65:9), 인도하다(잠16:9), 삼가다(잠21:29), 박히다(겔40:43).
[명] 참(신 13:14), 실상(삼상 23:23).
[부] 견고히(시 93:1, 잠 25:5, 왕상 2:45), 든든히(잠 4:26), 자세히(신 17:4), 과연(삼상 26:4).
구약 성경 / 217회 사용


* 7125. 만남(키리아. qîrʼâh) קִרְאָה 

1. 만남. 2. 마주침.
발음 / 키리아[ qîrʼâh ]
관련 성경 / 미치다(창 42:38), 이르다(욥4:14), 당하다(신31:29), 닥치다(렘13:22), 일어나다(렘44:23), 영접하다(창14:17, 삼하19:20, 사21:14), 마주 대하다(창15:10), 마주 오다(창24:65),만나다(창32:6, 삼상15:12, 암4:12), 맞다(창33:4, 출4:27, 삿14:5), 엎다(출14:27), 막다(민20:20, 22:34, 시35:3), 치다(민21:23, 삿7:24), 쓰지 않다(민24 : 1), 마주 나오다(신1:44,삼상9:14), 대적하다(신2:32, 수11:20), 싸우다(신29:7, 수8:14), 마주 나가다(삿15:14),환영하다(삼상18:6), 대하다(삼상17:2, 삼하10:10), 만나보다(왕하23:29), 향하다(대상19:17), 방비하다(대하35:20), 달려오다(시59:4), 일어나다(출1:10), 나타나다(출5:3),내리다(렘32:23).
[부] 우연히(삼하1:6).
구약 성경 / 23회 사용


바산은 요단강 동쪽 북단에 위치한 기름진 목초지로  그곳에서 사육되는 소들은 매우 살지고 품질이 우수한 것으로 유명했습니다.
아모스 선지자는 사마리아의 부유한 여인들을 바로 이 바산의 살진 암소에 비유합니다.
이러한 표현은 근동 지방에서는 모욕적인 것이 아니었습니다.
왜냐하면 중동에서는 기름진 몸매가 이상적인 아름다움에 속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사마리아 지도층의 부인들은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들을 희생시켜 유복한 생활을 했고, 남편들을 뒤에서 움직여 자신들의 욕망을 채워 나갔습니다.
하지만 장차 이 부유한 여인들은 밧줄에 묶여 비참하게 포로로 끌려가게 될 것이라고 합니다. 
고대 앗수르 유적지에서 발견된 한 비석에 보면  앗수르 군사들이 사로잡은 포로의 코나 아랫 입술을 뚫고  거기에 갈고리로 꿰어 끌고 가는 아주 비참한 모습이 새겨져 있다고 합니다.

북이스라엘의 죄악을 경책하며 심판을 예언하던 아모스는 갑자기 어조를 바꾸어 북이스라엘의 잘못된 종교생활에 대해 말합니다.
벧엘은 일찍이 야곱이 살기등등한 형 에서를 피해 하란으로 도망가다가 천국 사닥다리와 여호와를 꿈속에서 보고 언약을 맺은 곳입니다. 뿐만 아니라 사사 드보라와 사무엘은 이곳을 중심으로 선지자 사역을 행하는 등  벧엘은 오랫동안 이스라엘 민족의 종교적 중심지이었습니다.
그런데 왕국이 분열된 이후 북이스라엘을 창건한 여로보암은 북이스라엘 백성들이 남유다에 종교적으로 예속되는 것을 싫어하여 이곳에 자체적으로 단을 만들어 금송아지 숭배를 획책함으로써 벧엘은 북이스라엘 우상숭배의 중심지가 되었습니다.

길갈 역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종교적으로 유서 깊은 장소로 여호수아가 요단강을 건넌 후 기념물을 세우고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할례를 행했던 곳이며, 이곳은 벧엘과 함께 사무엘의 중심 사역지로서 예루살렘에 성전이 서기 전까지 종교와 정치의 중심지이었습니다.  그러나 길갈 역시 벧엘과 마찬가지로 왕국 분열 이후 북이스라엘의 우상숭배와 배교의 중심지가 되어 심각하게 타락한 도시가 되었습니다.

'희생’이란 아침마다 드리는 제사가 아니라(4절) 이스라엘 백성들이 일 년에 한 번 예루살렘 성소에 올라와서 드리는 제사를 말합니다.
그리고 여기서 말하는 십일조는 평소 드리는 십일조 외에 삼년에 한 번씩 나그네와 고아와 과부를 구제하기 위해 드리는 것을 말합니다. 따라서 이 구절은 삼년에 한번 드리는 십일조를 삼일마다 드리고,  일 년에 한번 드리는 희생을 아침마다 드린다 할지라도 형식적으로만 드리는 제사들은 오히려 그것 자체가 죄를 더하는 행위라고 꾸짖습니다.

형식이 불필요한 것이 아니라 필요하지만 형식에 치우친 제사와 예배는 결코 바람직한 제사와 예배가 아닙니다.
따라서 예배는 예배자의 삶에서 드려지는 참된 예배입니다.
그러므로 예배자는 예배하는 시간을 위하여 예배하는 자의 거룩하고 진실된 삶을 굳게 유지해야만 합니다.
오늘의 시대가 예배자는 많이 있지만 예배자의 삶을 실천하는 예배자가 너무 적어 다양한 문제에 휘말리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지금도 북녘 땅에는 예배자의 삶을 생각도 할 수 없는 얼어붙은 땅으로 닫혀 있습니다.
남녘의 땅에는 예배자의 삶을 훼방하지 않는 자유가 풍성하지만 그 자유를 은혜로 생각하지 않는 거센 거짓된 문화의 바람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이러한 환경에서도 끝까지 예배자의 삶을 사랑하고 자랑할 줄 아는 믿음으로 승리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 이루 말로 형언할 수 없는 징계를 전제하고 하는 말이기 때문에 최후의 통첩과도 같은 경고이다(T. E. McComiskey).


우리가 의지하는 것들 (아모스 4:1-3)

1. 사마리아의 산에 있는 바산의 암소들아 이 말을 들으라 너희는 힘 없는 자를 학대하며 가난한 자를 압제하며 가장에게 이르기를 술을 가져다가 우리로 마시게 하라 하는도다
2. 주 여호와께서 자기의 거룩함을 두고 맹세하시되 때가 너희에게 이를지라 사람이 갈고리로 너희를 끌어 가며 낚시로 너희의 남은 자들도 그리하리라
3. 너희가 성 무너진 데를 통하여 각기 앞으로 바로 나가서 하르몬에 던져지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사마리아 언덕에서 풀을 뜯는 너희 바산의 암소들아, 귀 기울여 들어라. 가난한 이들에게 비열하고 밑바닥 사람들에게 잔인한 여자들!
게을러빠지고 제멋대로인 너희는 남편에게 요구한다.
'시원한 술 한 잔 갖다 주세요!'
잘 들어라. 나 하나님이 나의 거룩을 두고 맹세한다!
조심하여라, 심판의 날이 다가오고 있다!
그들이 너희를 밧줄로 묶어 끌고 가면서, 뒤처지는 자들은 몽둥이로 다스릴 것이다.
그들은 너희를 한 줄로 꿰어 훼파된 성벽들 밖으로 끌고 가서, 저승으로 던져 넣을 것이다."

오늘 선포되는 아모스의 심판 경고는 특별히 귀부인들을 대상으로 하고 있습니다.
'바산의 암소'라고 표현하고 있는데요, 바산은 풍부한 목초지로 목축이 성행했던 지역의 이름입니다.
즉, 바산의 암소라는 표현은 양질의 살찐 암소라는 의미이지요.
떠오르는 이미지들이 있지 않습니까?

그녀들의 죄악은 세가지로 정리되고 있습니다.
1. 그녀들은 힘 없는 자들을 학대했고
2. 가난한 자들을 압제했으며
3. 남편들에게 술을 가져다 달라고 합니다.

아마 남편의 사회적 지위와 권력을 이용해서 부정하게 부를 축적하면서 향락을 누리고 있는 모습을 그렇게 표현한 것이겠지요.
요즈음에도 가끔씩 언론에 드러나는 '싸모님'들과 비슷한것 같습니다.

그들에게는 다시 '때'가 이를 것이라는 경고가 주어집니다.
바로 하나님의 날, 즉 심판의 날이지요.
하나님이 맹세하신다는 표현까지 쓰고 있으니, 그 날은 반드시 올 것입니다.
심판은 어떻게 이루어집니까?
그녀들은 물고기가 낚시에 걸리듯이, 송아지가 코뚜레에 코가 꿰어지듯이 묶여 끌려갈 것입니다.
처음에 그녀들을 '사마리아의 산에서 풀을 뜯는 바산의 암소'라고 불렀는데  이제는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소로 묘사하고 있는 것이지요. 머리를 풀어헤치고 더럽혀지고 찢어진 옷을 입은 채 슬피 울며 끌려갈 것입니다.
하루아침에 신세가 완전히 뒤바뀐 것입니다.
그 때, 그들이 의지하고 있던 성벽은 완전히 무너질 것입니다.
적들이 사방에서 뜷린 성벽을 통해 들어와 그녀들을 사로잡아 하르몬으로 끌고 갈 것입니다.
갑자기, 우리가 지금 의지하고 있는 성벽은 무엇일까 생각해봅니다.
하나님을 의지하기보다 나의 건강, 예금, 보험, 가문, 권력등을 의지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하나님께서 그날 밤에 영혼을 데려가실 것도 모르고 곳간에 소출을 쌓아놓으며 미래를 계획했던 누가복음의 어리석은 부자처럼 살고 있지는 않습니까?

그런 것들은 정말 한 순간에 사라져버릴 수도 있다는 것을 우리들은 수많은 간증들을 통해 듣고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건강을 잃고 사업에 실패한 후에야 하나님을 의지하기 시작했다고 이야기하고 있지요.

지금 우리에게 허락된 것들이 우리를 보호해주지는 못한다는 것을 다시 기억하고 하나님 앞에 엎드려 시편 기자처럼 고백합니다.
'오직 주님만이 나의 산성 나의 방패이십니다.'

공무를 집행하는 고위 공직자들이 죄를 지어서 검찰 포토라인에 설 때가 있습니다. 혹은 그들이 청문회 자리에 나와서 사실관계를 설명해야 될 때도 있습니다. 그때마다 그들이 공통적으로 하는 말이 있습니다. “나는 잘 몰랐습니다. 그것이 그렇게 큰 죄가 되는지 몰랐습니다. 제 가족들이 한 일입니다. 저는 전혀 모르고 있었습니다” 그들이 하는 말이 면죄부가 된다고 생각하십니까? 알고도 발뺌한다면 뻔뻔하고 사악한 일입니다. 그런데 아랫사람들이 하는 일을 몰랐다면 고위 공직자 자리에 앉아 있을 자격이 없는 무능한 사람임에 틀림없습니다. 

몰랐다고 해서 죄가 없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아모스 선지자를 통해서 북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따져 물으시는 것도 몰랐다고 하는 죄입니다. 이것은 하나님 보시기에 큰 죄가 됩니다. 오늘 우리는 입버릇처럼 말하는 몰랐다는 말이 얼마나 무서운 죄인지 살펴보겠습니다. 1절 말씀입니다. “사마리아의 산에 있는 바산의 암소들아 이 말을 들으라 너희는 힘 없는 자를 학대하며 가난한 자를 압제하며 가장에게 이르기를 술을 가져다가 우리로 마시게 하라 하는도다”

사마리아 산에 있는 바산의 암소들은 누구일까요? 그들은 고위 공직자 남편을 둔 여인들입니다. 북이스라엘에서 잘나가는 남편을 둔 여인들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이들에게 힘없고 가난한 자들을 학대하고 압제한 죄를 묻고 계십니다. 정말 이 여인들이 힘없고 가난한 자를 학대하고 압제했을까요? 그들을 세워놓고 채찍질을 했겠습니까? 발길질을 했겠습니까? 그들의 돈을 빼앗았겠습니까? 여인들은 그렇게 할 수 없는 자들이고 하지 못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여인들의 죄를 왜 힘없고 가난한 자와 연관시켜서 말씀하시는 것일까요? 4절과 5절을 보십시오. “너희는 벧엘에 가서 범죄하며 길갈에 가서 죄를 더하며 아침마다 너희 희생을, 삼일마다 너희 십일조를 드리며 누룩 넣은 것을 불살라 수은제로 드리며 낙헌제를 소리내어 선포하려무나 이스라엘 자손들아 이것이 너희가 기뻐하는 바니라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여인들은 벧엘과 길갈을 자주 순례했습니다. 당시 북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벧엘과 길갈은 성지와 같은 곳입니다. 그들은 자주 벧엘에 가서 예배드리고 길갈에 가서 하나님께 제단을 쌓았습니다. 벧엘이 어떤 곳입니까? 야곱의 영적 고향입니다. 아버지와 형을 속이고 외삼촌 집이 있는 밧단아람으로 가는 길에 야곱은 벧엘에서 하나님을 만납니다. 나중에 큰 부자가 되어서 다시 가나안 땅으로 돌아올 때도 벧엘에서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그 때부터 벧엘은 북이스라엘 백성들이 순례하고 예배드릴 영적 고향이 되었습니다. 당시 여로보암 1세부터 내려오던 금송아지 제단도 역시 벧엘에 있었습니다. 

길갈은 어떤 곳입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을 정복할 때 요단강을 건너서 처음 만났던 곳이 길갈이었습니다. 길갈에서 그들은 할례를 행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애굽의 수치를 굴러가게 했다는 뜻으로 길갈이라는 이름을 주셨습니다. 그들은 요단강을 건넌 기념으로 각 지파마다 큰 돌을 하나씩 가져다가 제단을 쌓고 하나님께 예배드렸습니다. 그곳이 바로 길갈이었습니다. 그 때부터 이스라엘 백성들은 벧엘과 길갈을 영적 고향으로 삼았고 성지순례 명소가 되었습니다. 

북이스라엘 고위 공직자들의 아내들은 몰려 다니면서 벧엘과 길갈에서 예배드렸습니다. 삼일에 한 번씩 십일조를 드렸습니다. 그리고 감사의 화목제를 드립니다. 수은제와 낙헌제라 불리는 그것은 감사의 화목제의 또 다른 이름이었습니다. 이들이 그 자리에서 어떤 감사 제목으로 예배드렸을까요? “하나님 감사합니다. 우리 남편을 이번에도 승진하게 해 주셨으니 감사합니다. 남편이 돈을 많이 벌어 오게 해주셨으니 감사합니다. 가족들이 지금까지 누리고 있는 이 혜택을 자손만대에 누리게 해 주십시오. 더 많은 물질을 벌게 해 주시고 명예가 쌓이도록 도와주시며 남편 뿐 아니라 자녀들까지도 남편의 가업을 이어 받아서 잘 먹고 잘 살도록 해 주십시오” 그들은 시마다 때마다 많은 물질을 드리며 하나님께 예배드렸을 것입니다. 

그들의 예배는 완벽했습니다. 헌금도 많이 가지고 나왔고 예배드리면서 자기들끼리 친목도 도모했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왜 죄가 될까요? 이것이 왜 가난하고 힘없는 자를 학대하고 압제하는 죄가 될까요? 하나님께서는 이런 종교 생활은 죄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왜냐하면 힘없고 가난한 자를 살피지 않고 그들이 가지고 있는 부의 잔치를 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예배는 것은 위로 하나님과 아래로 백성들 사이에서 균형을 이루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감격을 이웃과 함께 나누어야 올바른 예배가 됩니다. 이것이 참된 예배입니다. 하나님께서 항상 말씀하셨습니다. 가난하고 병든 자, 고아와 과부를 돌아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바산의 암소들이라고 불리는 사마리아의 귀족의 여인들은 그렇게 살지 못했습니다. 하나님께 드릴 제물은 있어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눌 제물은 없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들에게 죄를 물으신다면 이렇게 말했을 것입니다. “몰랐습니다. 이 나라에 그렇게 가난한 자들이 있다는 것을 저는 몰랐습니다.” 몰랐다고 하는 것만큼 큰 죄가 없습니다. 돌아봐야 됩니다. 살펴야 됩니다. 주변 이웃들이 어떤 삶을 살고 있는지 눈을 크게 뜨고 살펴야 합니다. 몰랐다고 하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큰 죄가 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 백성이라면 그들을 어떻게 도와야 할지 고민해야 됩니다. 기도하면서 방법을 찾아야 됩니다. 적극적으로 도와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종교 생활하는 여인들의 종교생활을 중독이라고 표현하십니다. 1절 하반절을 보십시오. “가장에게 이르기를 술을 가져다가 우리로 마시게 하라 하는도다”

술은 중독성이 있습니다. 이 여인들은 마치 술에 중독된 것처럼 벧엘과 길갈에 가서 사흘에 한 번씩 십일조를 드리고 수은제와 낙헌제로 감사의 화목제를 드리는 것에 중독되어 있었습니다. 이들이 하는 생활은 신앙생활이 아니었습니다. 종교 생활이고 돈 잔치였습니다. 하나님은 이들의 죄를 무섭게 책망하셨습니다. 이들을 심판하겠다고 말씀하십니다. 2절과 3절을 보십시오. “주 여호와께서 자기의 거룩함을 두고 맹세하시되 때가 너희에게 이를지라 사람이 갈고리로 너희를 끌어 가며 낚시로 너희의 남은 자들도 그리하리라 너희가 성 무너진 데를 통하여 각기 앞으로 바로 나가서 하르몬에 던져지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하나님이 심판하실 때 갈고리로 끌어가고 낚시로 낚아서 끌고 가며 하르몬에 던져버리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때 이들이 하나님께 애원할 것입니다. 몰랐습니다. 정말 그렇게 해야 되는지 몰랐습니다. 하지만 몰랐다는 것은 면죄부가 될 수 없습니다. 율법에 가난하고 병들고 연약한 자를 살피고 돌아보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이 중독처럼 종교 생활로 변질되지 않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나아와서 거룩한 옷을 입고 아름답게 예배드리는 이 모습이 하나님 보시기에 가증스러운 종교 생활로 변질되지 않기를 바랍니다. 배부른 바산의 암소가 되지 않고 이웃들을 살피고 돌아보는 부지런함과 열심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2. 실천다짐

1) 배부른 바산의 암소같은 인생을 살지 않겠습니다.

2) 이웃을 돌아보는 지혜로운 백성이 되겠습니다.

3. 한줄기도

바산의 암소와 같이 육적인 것에만 풍성하고 영적인 것에 메마른 신앙생활에 중독된 저희들에게 영적인 깨달음으로 날마다 천국생활을 즐기며 살아가게 하옵소서!
 


종교(宗敎) : religion
라틴어 - relegare / 다시(re) + 연결하다(legare)

자연종교 : 수행(修行) - 불교
계시종교 : 은혜(恩惠) - 기독교



7월 17일(월) 아모스 5장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여호와를 찾으라6절)

* 찾으라(1875) 다라쉬(dârash) דָּרַשׁ
너희는 찾으라

דָּרַשׁ 스트롱번호1875

1. 문지르다.  2. 어떤 장소를 가다.  3. 구하다
발음 / 다라쉬[ dârash ]
관련 성경 / 찾다(레 10:16, 시 77:2, 신 22:2), 묻다(신 13:14, 왕상 14:5, 겔 14:3), 조사하다(신 19:18), 구하다(대하 16:12, 미 6:8, 대상26:31), 거두다(대하 24:6), 구걸하다(시 109:10), 청하다(대상 10:13), 간구하다(대하 20:3, 렘21:2), 연구하다(스 7:10, 시 111:2, 전 1:13), 조사하다(스 10:16), 용납하다(겔 14:3), 힘쓰다(렘 29:7), 탐구하다(신 12:30), 받다(신 18:19), 요구하다(신 23:21, 겔 20:40), 알아보다(삼하 11:3), 나아가다(대하 1:5), 신원하다(대하 24:22), 감찰하다(시 10:4,13), 도모하다(에 10:3), 심문하다(시 9:12), 돌보다(시 142:4),
[부] 자세히(사 34:16), 청하건대(왕상 22:5).
구약 성경 / 164회 사용

* 살리라(2421) 하야(châyâh)  חָיָה

1. 살다.  2. 생존하다.  3. 다시 살다
발음 / 하야[ châyâh ]
관련 성경 / 보존하다(창 12:13, 민 4:19, 렘 38:20), 생존하다(민 14:38, 슥 10:9), 삶(느 9:29), 살다(에 4:11), 살게 하다(겔 37:14, 시119:17), 낫다(수 5:8, 왕하 8:8), 살리다(창 20:7, 겔 37:5), 지내다(창 5:7), 보존되다(창 19:20), 생활하다(창 27:40, 왕하 4:7), 소생하다(창45:27, 삿 15:19), 거주하다(창 47:28), 살려주다(왕상 20: 32), 살아나다(왕상 17:22), 희생하다(왕하 13:21), 살려두다(민 31:15, 삿21:14), 구원하다(겔 3:18), 유전하다(창 7:3), 부흥하게 하다(합 3:2), 전하다(창 19:32), 기르다(삼하 12:3, 사 7:21), 중수하다(대상 11:8), 일으키다(느 4:2), 소생하게 하다(시 80:18, 7:12), 보전하다(겔 18:27), 풍성하다(호 14:7), 생존하게 하다(수 14:10), 구원하다(창 19:19), 보존하게 하다(창 6:20), 살려주다(사 38:16),
[명] 만세(삼상 10:24, 왕하 11:12), 생명(전 7:12)
[부] 정녕(겔 3:21, 왕상 8:10).
구약 성경 / 283회 사용


여호와를 찾으라

1. 찾다(시편 77:2)
나의 환난 에 내가 주를 찾았으며 밤에는 내 을 들고 거두지 아니하였나니 내 영혼이 위로 받기를 거절하였도다.

2. 묻다(신명기 13:14)
너는 자세히 묻고 살펴 보아서 이런 가증한 일이 너희 가운데에 있다는 것이 확실한 사실로 드러나면.

3. 조사하다(신명기 19:18)
재판장은 자세히 조사하여 그 증인이 거짓 증거하여 그 형제를 거짓으로 모함한 것이 판명되면.

4. 구하다(미가 6:8)
사람아 주께서 선한 것이 무엇임을 네게 보이셨나니 여호와께서 네게 구하시는 것은 오직 정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하게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

너희는 여호와를 찾으라 그리하면 살리라
- 앞에서(4절)는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주체였고, 이번에는 아모스가 그와 똑같은 말을 반복하여 청중에게 던진다.
이로써 아모스의 선포가 하나님의 말씀임을 확증하게 한다.

염려컨대...없을까 하노라
- '염려컨대...없을까 하노라'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펜'(*)은 백성들로 하여금 분명한 선택을 하도록 요청한다.
그 선택은 바로 여호와를 찾아서 그로 말미암는 모든 은혜를 누리든지 아니면 심판을 당하든지 양자 택일을 하라는 요청이다(T.E.McComiskey).
한편, '내리사'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이첼라흐'(*)의 기본적인 의미는 '돌진하다'(rush)는 의미와 가까운 것으로(BDB) 전후 문맥에 따라 독특한 뉘앙스를 준다.
이 단어는 성령께서 강하게 임하시는 모습을 그리는 데 사용되기도 했고(삿 14:6,19;15:14;삼상 10:6;11:6;16:13), 반면에 악령이 강하게 임하는 모습을 묘사하기도 하였다(삼상 18:10). 여기서는 이스라엘 민족을 대항하시는 여호와의 강력한 행위를 묘사한다(J.Niehaus).

5:4 /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족속에게 이와 같이 말씀하시기를 너희는 나를 찾으라 그리하면 살리라.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족속에게 이르시기를
- '이스라엘 족속에게'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레베이트 이스라엘'(*)은 앞 구절의 '이스라엘 중에서'와 같은 용어로 본 구절은 위기에 처한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말씀으로 앞 문장과 대구를 이룬다.
이스라엘이 장차 쇠퇴하겠지만, 소수나마 남게 되리라는 사실을 복합적으로 제시하면서, 이스라엘 민족이 마땅히 추구해야 할 바를 권고하신다.

너희는 나를 찾으라 그리하면 살리라
- 히브리어 원문에는 이 구절이 단지 두 단어의 명령형으로 되어 있다.
'나를 찾으라'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디르슈니'()는 여호와께 사용될 때, '그분께로 돌아와 다시 믿음과 신뢰를 회복하라'는 의미이다(시 9:10; 24:6; 77:2; 사 65:10; 호 10:12; 습 1:6).

그리고 '살리라'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위흐유'(*)는 때때로 영적인 생명과 연관되어 있다(T.E.McComiskey).
또한 이 두 명령형 동사가 접속사 '와우'(*, 그리고, 그리하면)로 연결되어 있어서 앞의 명령은 전제로 제시되었고, 뒤의 명령은 그에 따라 주어지는 결과를 나타낸다.
이스라엘 백성이 진심으로 하나님을 찾고 화해하려고 한다면 하나님은 그들에게 생명을 부여하실 것이라는 소망의 메시지를 제시한다(Calvin).



정부가 가지고 있는 경제 정책과 방향에 따라서 나라의 경제동향은 확연히 달라집니다.
어떤 정부는 친기업적인 경제정책을 펼치고 기업을 옥죄는 규제를 풀고 기업이 자유롭게 활동하도록 길을 열어주었습니다.
기업 친화적인 정책을 펼친 이유는 기업에 모인 돈을 가계에 흘려보내 원활한 경제흐름이 일어나기를 바라는 기대 때문이었습니다.
이른바 낙수론을 펼쳤습니다.
물이 위에서 아래로 흐르는 것이 자연스러운 것처럼 돈도 위에서 아래로 흘러가야 자연스러울 것이라는 이유 때문이었습니다.
아주 좋은 경제정책입니다.

하지만 이 정책에는 한 가지 전제가 필요합니다.
기업의 투명함과 높은 윤리의식입니다.
기업을 옥죄는 규제를 풀어서 돈이 모였으나 기업이 가지고 돈을 흘려보내지 않으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기업이 이윤을 연구 개발에 재투자하지 않고 부동산 투기나 하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직원들은 열심히 일하는데 그들의 삶이 나아지지 않는 일이 반복될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는 낙수효과가 생겨나지 않습니다.

오늘 말씀에서 하나님께서는 북이스라엘의 고위 공직자들과 영적 지도자들에게 높은 윤리의식을 가지라고 말씀하십니다.
아모스 선지자가 예언하던 시절 북이스라엘은 여로보암 2세의 경제적 황금기를 누리고 있었습니다.
돈이 모였습니다.
무역이 잘 되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고위 공직자들에게 투명함과 윤리의식이 없었습니다.
그들에게 들어온 돈을 흘려보내지 않습니다. 백성들과 나누지 않았습니다. 부는 몇몇 사람들에게 집중되었습니다. 하나님은 그것을 책망하셨습니다. 5절 말씀을 보십시오. “벧엘을 찾지 말며 길갈로 들어가지 말며 브엘세바로도 나아가지 말라 길갈은 반드시 사로잡히겠고 벧엘은 비참하게 될 것임이라 하셨나니”

하나님은 벧엘과 길갈, 브엘세바를 언급하십니다. 벧엘과 길갈은 4장에서 나왔던 지명입니다. 당시 북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벧엘과 길갈, 브엘세바는 필수적으로 순례해야 할 성지였습니다. 벧엘은 야곱과 관련 있습니다. 야곱이 밧단아람으로 가던 길에 벧엘에서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밧단아람에서 돌아오는 길에도 벧엘에서 다시 하나님을 만납니다. 그 때부터 벧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영적인 고향이 되었습니다. 길갈은 이스라엘과 어떤 연관이 있습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을 정복할 때 요단강을 건너서 만났던 첫 번째 장소가 길갈이었습니다. 요단강을 건넌 기념으로 열두 돌을 세웠던 곳이 길갈이었고 할례언약을 시행하여 애굽의 수치를 굴러가게 한 곳이었습니다. 벧엘과 길갈은 북이스라엘 지경에 있는 도시였습니다. 누구든지 마음만 먹으면 찾아갈 수 있는 곳이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브엘세바입니다. 브엘세바는 가나안 지경 가장 남쪽 끝에 있는 도시였습니다. 북이스라엘 사람들은 마음을 먹어도 갈 수 없는 곳이었습니다. 브엘세바에 갈 수 있다는 것은 그들이 고위직에 있다는 증거입니다. 남유다 영토를 지나 멀리까지 갈 정도로 위세가 대단했던 것입니다. 브엘세바는 누구와 관련이 있습니까? 아브라함과 이삭과 관련이 있는 곳입니다. 아브라함이 말년에 이삭을 낳고 그곳에 정책해서 오랫동안 살았습니다. 이삭도 아버지가 떠난 후 브엘세바에서 머물렀습니다. 이삭은 브엘세바에서 블레셋 왕 아비멜렉과 언약을 맺습니다. ‘브엘세바’라는 이름의 뜻은 ‘맹세의 우물’이라는 뜻입니다. 

북이스라엘의 돈과 권력이 있는 사람들은 벧엘과 길갈을 자주 드나들었고 위세를 떨치기 위해서 남유다 브엘세바까지 순례했습니다. 그들은 그곳에 가서 십일조를 드립니다. 하나님께 예배를 드립니다. 낙헌제와 수은제를 드리면서 감사의 예배를 드렸습니다. 그런데 가난한 자들에게 베풀지 않았습니다. 이것은 하나님 보시기에 죄였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4절 말씀을 보십시오.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족속에게 이와 같이 말씀하시기를 너희는 나를 찾으라 그리하면 살리라” 6절도 보십시오. “너희는 여호와를 찾으라 그리하면 살리라 그렇지 않으면 그가 불 같이 요셉의 집에 임하여 멸하시리니 벧엘에서 그 불들을 끌 자가 없으리라”

그들은 성지는 열심히 찾아다니는데 하나님을 찾을 생각이 없었습니다. 벧엘과 길갈, 브엘세바는 찾으나 하나님은 찾을 생각이 없는 자들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하나님을 찾는다는 의미가 무엇일까요? 우리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하나님을 찾는다는 것은 기도 많이 하고 예배 열심히 드리고 헌금도 열심히 드리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아모스 본문의 맥락에서 하나님을 찾는 것은 그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아모스를 통해서 정의와 공의를 말씀하셨습니다. 7절을 보십시오. “정의를 쓴 쑥으로 바꾸며 공의를 땅에 던지는 자들아”

정의와 공의는 선지자들이 공통적으로 외치는 덕목이었습니다. 정의는 미슈파트, 공의는 체다카입니다. 미슈파트는 자기중심의 정의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중심으로 하는 정의를 말합니다. 체다카는 관계에 바탕을 둔 공의를 의미하는데 하나님께서 백성들을 지극히 사랑하셨던 것처럼 우리도 이웃들을 섬기며 사랑해야 함을 체다카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돈이 많은 사람들이었습니다. 권세도 있는 사람들입니다. 하지만 정의와 공의는 없었습니다. 정의와 공의를 가지고 있었다면 율법에서 말씀하신 것처럼 가난한 자들에게 나누고 베풀어야 했습니다. 하나님은 다시 한 번 이들에게 정의와 공의를 지킬 것을 말씀하십니다. 24절을 보십시오. “오직 정의를 물 같이, 공의를 마르지 않는 강 같이 흐르게 할지어다”

정의는 우리에게 꼭 필요한 물과 같은 것이고 공의도 역시 흘러내려 마르지 않는 강과 같이 되어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나로부터 하나님의 정의와 공의가 흘러서 이웃들에게 넘치는 강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어떻게 살고 계십니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하나님을 찾으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을 찾는 길은 정의와 공의를 실천하는 것입니다. 

요즘은 세상이 좋아졌습니다. 성지순례를 갈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자랐던 곳, 십자가 고난 받으신 곳을 오르며 예수님의 고난을 묵상합니다. 사도 바울이 선교여행 했던 곳을 답사하며 다닙니다. 배를 타고 지중해 바다를 건너 밧모 섬에도 들어가 봅니다. 종교 개혁지를 갈 수 있습니다. 돈과 시간만 있으면 얼마든지 할 수 있는 일입니다. 그런데 성지는 열심히 찾아다니는데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정의와 공의는 행하고 있는가, 이 문제를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나를 통하여 하나님의 정의와 공의가 이웃들에게 물 같이, 마르지 않는 강 같이 흘러내리기를 바랍니다. 도움의 손길, 사랑의 손길이 머물러야 하는 그곳에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사랑의 나눔이 함께 하기를 바랍니다. 그 때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것입니다.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의 언약을 기억하시면서 살아가시는 복된 날 되시기를 바랍니다.

실천다짐

1. 악한 세상에서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기 원합니다.
2. 정의와 공의를 마음에 두고 살겠습니다.
3. 기도 / 사랑의 하나님, 언제나 진실한 마음으로 정의와 공의를 실천하는 거룩한 백성이 되게 하옵소서.

아모스 5:14-15
너희는 살려면 선을 구하고 악을 구하지 말지어다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의 말과 같이 너희와 함께 하시리라.
너희는 악을 미워하고 선을 사랑하며 성문에서 정의를 세울지어다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혹시 요셉남은 자를 불쌍히 여기시리라

세우다(3322) 야차그(yâtsag)
יָצַג 스트롱번호3322

1. 히필형 הִצִּיג : 서게 하다.
2. 놓다
3. 창 43:9
발음 / 야차그[ yâtsag ]
관련 성경 / 두다(창 43:9, 삿 8:27), 세우다(창 30:38, 암 5:15), 머물다(창 33:15), 밟다(신 28:56), 보이다(창 47:2), 머물러 두다(출 10:24).구약 성경 / 16회 사용

미워하다(8130) 사네(sânêʼ)  שָׂנֵא 

1. 미완료형   יִשְׂנָא
2. 분사형 שׂוֹנֵא 증오자
3. 니팔형 : 잠14:17.
발음  사네[ sânêʼ ]
관련 성경 / 미워하다(창 26:27, 삿 11:7, 시 50:17), 가증히 여기다(신 12:31), 싫어하다( 잠5:12, 사 1:14, 암 6:8).
[명] 미움(삼하 13:15, 잠 19:7), 원수(창 24:60, 잠 25:21), 대적(출 1:10), 원한(신 4:42, 19:4,6).
구약 성경 / 113회 사용

굴리다 / 가랄(1556)(gâla) גָּלַל

1.구르다.  2. 이 단어는 다음과 같은 파생어로 사용된다. 3. 바퀴
발음 / 가랄[ gâlal ]
관련 성경  / 옮기다(창 29:3,8), 떠나가다(수 5:9), 의탁하다(시 22:8), 굴리다(수 10:18, 삼상 14:33, 렘 51:25), 맡기다(시 37:5, 잠 16:3), 떠나게 하다(시 119:22), 말리다(사 34:4), 흘리다(암 5:24), 묻다(사 9:5), 끌려들다(창 43:18), 달려들다(욥 30:14).
구약 성경 / 16회 사용



7월 18일(화) 아모스 6장 - 지도자들이 받을 심판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요셉의 환난(6절)

대접으로 포도주를 마시며 귀한 기름을 몸에 바르면서 요셉의 환난에 대하여는 근심하지 아니하는 자로다.
You drink wine by the bowlful and use the finest lotions, but you do not grieve over the ruin of Joseph.

* 환난(7667) 쉐베르(sheber) שֶׁבֶר 

1. 깨뜨림.  2. 해몽. 3. 파멸
발음 / 쉐베르[ sheber ]
어원 / 7665에서 유래
관련 성경 / ☞ [형] 부러짐(레 21:19), 틈(시 60:2), 패망(사 1:28, 애 2:11), 무너짐(사 30:13), 무너지는 소리(습 1:10), 깨뜨림(사 30:14), 상함(렘 8:21), 파괴됨(애 2:13), 상처(레 24:20), 파괴(잠 17:19), 멸망(잠18:12, 렘 4:6), 파멸(렘 50:22), 상함(사 65:14), 상처(렘 6:14, 나3:19), 환난(암 6:6).
구약 성경 / 44회 사용


 대접으로 포도주를 마시며
- '대접'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미즈레케이'(*)는 성전에서 제사를 위해 사용하는 대야를 가리키는 것으로(출 38:3; 민 4:14; 대하4:8) 제물그릇(sacrificial bowls)이라고 번역되기도 한다(NASB). 이는 그들이 매우 무분별하게 방탕한 태도로 술을 마시는 모습을 그리고 있다.

귀한 기름을 몸에 바르면서 - 귀한 기름은 향품을 섞은 기름(왕상 10:10; 겔 27:22)을 가리키는 것으로 당시 지도자들이 누리던 방탕한 풍요를 묘사한다.

요셉의 환난을 인하여는 근심치 아니하는 자로다
- '요셉의 환난'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쉐베르 요세프'라는 구문이 여기에만 등장하지만, '쉐베르'는 민족적인 파멸을 언급하는 문맥에서 자주 사용된다(사 30:12, 15; 애 2:13; 나 3:19).
아모스는 이런 표현을 사용하여 당시의 지도자들이 방탕한 생활을 누리고 근심없이 지낸다고 해도, 이스라엘을 향한 심판은 어김없이 다가온다는 사실을 주지시킨다.

이사야 30:12
이러므로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이가 이같이 말씀하시되 너희가 이 말을 업신여기고 압박과 허망을 믿어 그것을 의지하니.

애가 2:13
예루살렘이여 내가 무엇으로 네게 증거하며 무엇으로 네게 비유할까 처녀 딸 시온이여 내가 무엇으로 네게 비교하여 너를 위로할까 너의 파괴됨이 바다 같이 크니 누가 너를 고쳐 줄소냐.

나훔 3:19
네 상처는 고칠 수 없고 네 부상은 중하도다 네 소식을 듣는 자가 다 너를 보고 손뼉을 치나니 이는 그들이 항상 네게 행패를 당하였음이 아니더냐 하시니라.

아모스 6:1.
1945. 화 있을찐저 - 호이(hôwy) הוֹי 

1. 화 있을진저.  2. 사 5:8.  3. 렘 48:1.
발음 / 호이[ hôwy ]
관련 성경 / 오호라(왕상 13:30), 슬프다(사 1:4, 렘 22:18, 48:1), 화 있을진저(사 5:8, 렘 22:13, 합 2:6), 화 있도다(렘 50:27).
구약 성경 / 51회 사용

슬픔과 탄식을 나타내는 감탄사로(사 1:4, 24; 29:1) 일반적으로 심판이 선포될 때 사용된다(5:18).


아모스 5:18
화 있을찐저 여호와의 날을 사모하는 자여 너희가 어찌하여 여호와의 날을 사모하느뇨 그 날은 어두움이요 이 아니라.




아모스 6장에서는 이스라엘 지도자들의 영적 무지와 교만 그리고 이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을 강조합니다.
5장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차원에서 그들의 종교적 삶과 일상적인 삶 사이의 깊은 괴리를 꾸짖는 말씀이라면 6장은 종교 지도자들의 영적 무지와 교만에 대해 집중적으로 다루고 있습니다.
종교 지도자들이 육적으로는 많은 쾌락과 풍요를 누리고 있었으나 영적으로는 심각한 위기를 맞고 있었습니다.

6:1-7, 향락에 빠져버린 종교 지도자들의 영적 무지와 교만에 대한 경고
6:8-14, 하나님의 심판 통해 멸망당할 것을 예언

아모스 선지자는 남 유다 출신으로 북 이스라엘을 향하여 예언 활동을 했습니다.
당시 이스라엘은 경제적으로나 군사적으로나 매우 막강한 국력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에 가나안 지역의 주도적인 나라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런 물질적인 풍요는 오히려 이스라엘 백성들이 전통적인 여호와 신앙에서 멀어지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종교적 형식에 있어서는 거의 솔로몬 시대와 같이 많은 절기 제사와 각종 종교 행사들을 거행하였고 각종 제물과 십일조, 찬양  등을 하나님께 드렸지만 자신들의 삶은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역사 가운데 거하시는 하나님을 바로 인식하지 못하고 종교적 영역에서의 신으로만 제한시켜 버린 것입니다.
아모스가 이스라엘 백성들에 대해 적나라하게 심판에 대한 경고를 외친 것도 이스라엘 백성들의 이원론적인 삶 때문이었습니다.


종교적으로는 열심이 강했으나 일상적인 삶 속에서는 하나님에 대한 의식이 별로 없었습니다.
그들은 종교적 의무를 잊어버리는 것에 대해서는 매우 엄격하면서도, 일상의 삶 속에서 가난한 자들을 핍박하고 불의한 방법으로 경제적인 이익을 추구하는 것에는 아무런 거리낌이 없었습니다.
결국 이스라엘 백성들은 절기 행사나 제사에 대한 영적인 의미는 상실한 채 형식적인 태도에만 집착해 버리는 어리석음에 빠져 버렸던 것입니다.
참된 제사는 자신들이 지은 죄를 진심으로 뉘우치며 하나님과 화목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죄하심에 참여치 못하고 형식에만 치우쳐 버린 제사는 그 드리는 횟수가 아무리 많아도 하나님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성도들은 진정으로 하나님을 예배하며 찬양하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배워야 합니다.
하나님께 드리는 찬양과 예배는 결코 겉으로 드러나는 형식적인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교제이며 삶의 현장 속에서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노력하는 것입니다.
아무리 많은 예배를 드리고 많은 헌금을 드린다고 할지라도 성도의 삶이 하나님 보시기에 악하다면 그가 드리는 예배와 예물은 기뻐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자신의 삶이 하나님 앞에 바른 것인지를 언제나 돌아보며 예배를 드리기에 힘써야 합니다.
성도는 자신의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려야 합니다.
이러한 예배가 곧 신령과 진정으로 드리는 예배가 될 것입니다.
 


우당 이회영(李會榮, 1867. 4. 21 ~ 1932. 11. 17)
대한민국 초대 부통령을 지낸 이시영의 형

우당 이회영 선생은 조선시대 유명한 재상 가운데 한 사람인 백사 이항복의 10대 손이었습니다.
그분은 1910년 우리나라가 일제로 부터 국권을 침탈당하고 국권을 넘기게 된 경술국치를 당하고 난 후에 가족들을 모아 회의를 합니다. 회의의 내용은 이런 것입니다.
이때까지 우리 가문은 나라의 녹을 받으며 편안하게 잘 살았는데 이제 나라가 일제에 넘어갔으니 지금 우리가 가지고 있는 집과 전답과 이 많은 재산이 다 무슨 소용이겠는가?
회의 끝에 이회영 선생의 가문은 집과 땅과 재산을 모두 처분하기로 결정했습니다.
당시 그 가문이 가지고 있었던 재산은 실로 어마어마했습니다.
현재 서울 명동 땅 대부분이 이회영 선생 일가가 가지고 있었던 땅들이었습니다.
그것을 헐값으로 처분하고 만주로 떠납니다.
만주에 가서 학교를 세웠습니다.
신흥무관학교였습니다.
군인들을 길러서 일제에 대항하는 항일운동을 하겠다는 의도였습니다.
거기서 길러낸 군사들을 기반으로 홍범도 장군의 봉오동 전투와 김좌진 장군의 청산리 대첩의 기초를 닦았습니다.
더구나 이회영 선생님 그리스도인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조차 국가가 어려움에 처했을 때 지금까지 누린 대가를 지불하겠다고 결단하는데 하나님은 사람들은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노블레스 오블리주’가 무슨 뜻이냐고요? 사회적으로 신분이 높은 사람이 자신의 책임과 의무를 다했다는 뜻

노블레스 오블리주(프랑스어. noblesse oblige, 영어.  nobility obliges)란 프랑스어로 "귀족은 의무를 갖는다"를 의미한다.
보통 부와 권력, 명성은 사회에 대한 책임과 함께 해야 한다는 의미로 쓰인다.

우리가 알고 있는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기원

백년전쟁이 발발하자 영국과 가장 가까운 프랑스의 항구도시 칼레는 영국군의 집중 공격을 받았습니다. 프랑스의 칼레 사람들은 시민군을 조직해 맞서 싸웠지만, 전쟁이 길어지자 식량이 고갈되어, 끝내 항복하고 말았습니다. 영국왕 에드워드 3세는 파격적인 항복 조건을 내걸었습니다.

“시민들 중 6명을 뽑아 와라. 칼레 시민 전체를 대신해 처형하겠다.”

칼레의 갑부인 ‘외수타슈 생피에르’ 를 비롯한 고위 관료와 부유층 인사 6명이 자원했습니다. 이들은 목에 밧줄을 걸고 맨발에 자루 옷을 입고 영국 왕의 앞으로 나왔습니다. 사형이 집행되려는 순간, 임신 중이던 영국 왕의 아내가 처형을 만류했습니다. 이들을 죽이면 태아에게 불행한 일이 닥칠지도 모른다는 이유였습니다. 왕은 고심 끝에 이들을 풀어 주었고, 6명의 시민은 칼레의 영웅이 되었습니다.

이것이 가진 자의 의무를 상징하는 “노블레스 오블리주” 가 탄생된 배경입니다. 단 6명의 지도자가 칼레를 구한 것처럼 세상을 밝히는 등불은 아주 작은 불빛에서 시작됩니다. 희생과 나눔을 의무로 여긴다면 우리가 사는 세상은 더욱 밝아질 것입니다.

원래 노블레스는 ‘닭의 벼슬’ 을 의미하고 오블리주는 ‘달걀의 노른자’ 라는 뜻입니다. 이 두 단어를 합성해 만든 “노블레스 오블리주”는 닭의 사명이 자기의 벼슬을 자랑함에 있지 않고 알을 낳는데 있음을 말해 주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사회 지도층의 도덕적 의무를 뜻하는 말로 사회로부터 정당한 대접을 받기 위해서는 자신이 누리는 명예(노블레스)만큼 의무(오블리주)를 다 해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역사를 바로잡자 :  6명의 시민은 존재하지도 않는다

일단 여기까지가 실제로 일어난 역사 속의 이야기다.
그런데 이 칼레의 시민 이야기. 어딘가 불편하다. 전달하고자 하는 내용 자체는 좋지만 사실상 감성팔이 수준이다.

그렇다면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좋은 예라 손꼽히는 칼레의 시민 이야기는 도대체 어디서 나온 것일까?

일단 칼레의 6명의 용감한 시민의 이야기는 사실이 아니다.
칼레 항복을 기록한 문건은 영국과 플랑드르, 프랑스, 부르고뉴, 신성로마제국, 그리고 교황청의 기록까지 합하여 약 20개 정도가 존재하는데, 당시 기록에는 6명의 용감한 시민의 이야기나 영국 여왕의 간청 따위는 언급되어 있지도 않다.
그저 “1년 정도 공성전을 벌인 후 결국 필리프 6세가 먼저 철수하고, 영국이 칼레를 점령한 후, 시민들을 소거했다”라고 담담하게 서술하고 있을 뿐이다.

다만, 당시 영국의 앞잡이 노릇을 하던 플랑드르 지방의 문헌에서는 에드워드 3세가 좀 더 관대하게(칼레를 떠나는 시민들에게 노잣돈을 나눠줬다라고 나옴) 표현을 하고 있는 반면, 프랑스의 공식 기록들은 어린이들과 부녀자들을 살려달라는 간청을 에드워드 3세가 무시해서 약 500명 정도가 굶어죽었다라는 식으로 악랄한 인물로 묘사하고 있다.

그 후로, 사실 칼레 공성전이나 시민들에 대한 이야기는 거의 언급이 되지 않다가, 프랑스 혁명을 거쳐 민족주의 사상이 대세를 이루던 18세기 말부터 19세기 중엽에 이르러 다시금 등장하게 된다.

백년 전쟁에서 목숨을 잃은 이후 프랑스 본토에서도 “마녀” 혹은 “어리석은 자의 상징”으로 통하던 잔 다르크를 구국의 영웅으로 추앙하고(볼테르나 루소의 시대까지만 해도 잔 다르크는 “얼빠진 광신도”를 상징하는 역사적 인물로 통했다), 칼레의 시민들을 “외세의 침략에도 굴하지 않은 애국자”들로 둔갑시킨 건 당대의 정치인들과 그 정치인들을 빨아대던 작가들이었다.

근대에 이르러 갑부로 둔갑한 외수타슈 생피에르(Eustache de Saint Pierre)는 갑부가 아니라 당시 필리프 6세에게 칼레 방어의 명을 받은 칼레의 시장이었다. 그리고 시장이나 마을의 치안을 담당한 자가 자기 목에 밧줄을 메고 항복하는 건 에드워드 3세의 명에 의한 것이 아니라 14세기의 유럽 도시들이 적에게 항복할 때 “관대한 처분”을 요구하는 일종의 퍼포먼스, 혹은 관례 중에 하나였다는 것이 오늘날 역사학자들과 고고학자들의 관점이기도 하다.

여담으로, 칼레의 시민 동상을 제작한 오귀스트 로뎅은 이 이야기의 모순을 간파하고 그들을 영웅적으로 보이지 않게끔 조각하였다가 당시 언론에 “뭐 이리 불쌍한 표정들로 만들었음?” 하며 대차게 까이기도 한다.

이렇게 불쌍하게 표현하는 것도 재능이겠다.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어원: 닭벼슬도, 노른자도 아니다

노블레스 오블리주. 가진 자가 먼저 베풀고 먼저 행동하고 먼저 희생하고. 사회 지도층에 속한 사람들에게 주어지는 도덕적 의무. 명예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먼저 희생을 하여야 한다는 말이다. 그런데 사실 이건 칼레의 시민 이야기가 등장하기 훨씬 이전부터 사회 지도층에 속한 사람들에게 의무지워진 것이기도 하다.

멀리 가자면 호메로스의 일리야드에서 참된 왕가의 인물이라면 병사들 앞에 나서 싸워야 한다고 주장하는 트로이의 왕자가 등장하며, 나라를 다스리는 집정관을 선출할 시에는 군단 경험은 물론, 호민관이나 법무관 등의 중간 관리직도 풍부하게 경험한 사람들을 선호한 로마 공화정과 제정의 역사가 있고, 우리에게는 의병대를 조직해서 외세의 침략에 맞서 싸우거나 혹은 독립운동에 가세했던 양반들과 지식인들이 있다. 지붕이 시퍼런색으로 도색되어 있는 저택에서 수첩이나 뒤적거리시는 어떤 분과 참 대조되는 이야기이다.

그런데 Noblesse가 닭의 벼슬에서 비롯된 단어라고 하는 시점에서 이미 오류의 극치를 달리고 있다. Noblesse는 중세 프랑스어 단어인 Noblece가 근대를 거치면서 변화한 것이고, 그 어원은 라틴어에서 “고귀함”, 혹은 “집정관을 배출한 적이 있는 고귀한 혈통을 지닌 가문”을 뜻하는 Nobilis(복수: Nobiles. 고귀한 혈통을 지닌 자는 Nobilitas)에서 비롯된 것이다. 또 Oblige는 중세 영어인 obligen(혹은 중세 프랑스어 단어 obligier)에서 비롯된 것이다. 역시 그 어원은 라틴어에서 “속박”, 혹은 “의무”를 나타내는 Obligare에서 비롯되었다. 닭벼슬은 도대체 어디서 갑툭튀한 건지.

  Noblesse Oblige라는 표현 자체가 등장하게 된 건 19세기 중엽, 프랑스 사실주의를 상징하는 극작가, 오노레 드 발자크의 희곡, “골짜기의 백합(Le Lys dans la Vallée)”에서 처음 등장한다. 미안하지만 그 이전에는 이런 표현 자체가 없었다.

정당한 대접을 받기 위해서는 자신이 누리는 명예(노블레스)만큼, 의무(오블리주)를 다 해야 한다는 점에는 3,800% 정도 찬성하지만, 출처도 불분명하고 자기 감정에 앞서 배경 설명을 얼렁뚱땅 한다거나, 혹은 역사적 사실을 왜곡하면서까지 강조하는 것은 그닥 좋지 않은 것 같다. 내가 꼰대라서 이런 걸 따지는 건지도 모르겠으나 여하튼 그런 이야기.

참고 : 실제 칼레 공성전의 전말

백년 전쟁 초기에 벌어진 전투 중에 하나인 제 1차 칼레 공성전(1346)은 크레시 전투에서 괴멸에 가까운 피해를 본 필리프 6세(Philippe VI de Valois)는 노르망디 지방에서 프랑스 본토로 진군하는 에드워드 3세와 영국군을 저지해야 했으며, 이를 위해서는 영국군의 보급로를 차단할 필요가 있었다.

영국 역시 필리프 6세를 굴복시키기 위해서는 전략적 요충지인 칼레를 확보하여 프랑스군의 보급로를 완벽 차단하고 본국으로부터의 보급로를 확충할 필요가 있었다. 그에 따라 1346년 9월 4일부터 공성전이 시작된다. 칼레 공성전은 1347년 8월 3일까지 이어지는데, 일반적으로 알려진 바와는 달리 수 차례에 걸쳐 필리프 6세에 의한 파상적인 공격이 계속 이루어진다.

단, 필리프 6세는 크레 시에서 약 3만여 명의 병력을 잃은 상태였기 때문에, 영국군에 대한 공격은 주로 영국의 보급 저지를 위주로 이루어졌다. 물론 단 한 번도 성공을 하지 못하지만(반대로 영국군 역시 필리프 6세의 군대를 괴멸시키지 못한 상태에서 칼레 공성전에 임해야 했다).

당시 칼레에는 약 7,000-8,000명 정도의 시민이 있었는데, 필리프 6세에 의한 지원이 부족했기 때문에 시민들에 의한 저항이 시작되었다. 칼레는 당시 요새화되었기에 쉽사리 점령할 수 없었고, 에드워드 3세는 주변을 약탈하고 프랑스 군의 보급을 막는 작전으로 칼레를 고립시키는 전술을 택하였다. 실질적으론 공성전이 펼쳐진지 6개월 만인 1347년 2월에 이르러 칼레를 완전 포위한다.

1347년 8월 1일, 1년 남짓한 저항에 지친 칼레시민들은 에드워드 3세에게 항복의사를 타전한다. 8월 3일에 에드워드 3세와 그의 군대가 칼레에 입성하게 되고, 머지 않아 칼레 시민들은 모두 영국-플랑드르 연합군 병사들에 의하여 강제 소거 당한다. 이후 1558년 프랑스군에 의하여 탈환되기까지, 칼레는 약 200여 년간 영국의 지배를 받았다.


오늘 말씀에서 하나님은 남유다와 북이스라엘 기득권 세력들을 책망하십니다.
지금까지 너희들은 많이 누리고 살지 않았느냐?
그런데 나라가 위기에 처하고 어려움을 겪고 있는데 왜 너희들은 아무것도 하지 않느냐?

1절 말씀을 보십시오.
“화 있을진저 시온에서 교만한 자와 사마리아 산에서 마음이 든든한 자 곧 백성들의 머리인 지도자들이여 이스라엘 집이 그들을 따르는도다”

시온에서 교만한 자, 사마리아 산에서 마음이 든든한 자는 남유다와 북이스라엘의 지도자들입니다.
아모스 선지자 시절 남유다와 북이스라엘 지도자들에게는 심각한 문제가 있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누리는 부를 백성들에게 흘려보내지 않았습니다.
아모스 선지자는 북이스라엘 지도자들을 집중적으로 책망합니다.

4절을 보십시오. “상아 상에 누우며 침상에서 기지개 켜며 양 떼에서 어린 양과 우리에서 송아지를 잡아서 먹고”

상아는 북이스라엘에서 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전량 수입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수입한 상아로 상을 만들어서 누워있습니다.
상아로 침대를 만들었습니다.
밤새도록 술을 마시고 아침에 기지개를 켜며 일어납니다.
그들이 상아 상을 만들어서 술 마시고 즐기는 동안 백성들의 삶은 어떠했는지 그들은 상상조차 하지 못했습니다.
그들의 상아 상이 늘어나는 만큼 백성들은 굶주리고 고통 받아야 했습니다.
그들이 먹는 고기는 최상급 고기였습니다.
어린 양과 송아지를 먹었습니다.
하지만 백성들은 입에 풀칠조차 하기 힘들었습니다.
그 뿐만이 아닙니다.
5절을 보십시오. “비파 소리에 맞추어 노래를 지절거리며 다윗처럼 자기를 위하여 악기를 제조하며”

그들은 노래도 열심히 불렀습니다. 시를 짓고 곡을 붙여서 다윗 흉내를 냅니다. 그들은 다윗과 닮지 않았습니다. 행실과 내면은 다윗과 반대입니다. 하지만 그들은 시를 짓고 노래 부르던 다윗의 모습이 좋아보였습니다. 겉모습은 흉내 내지만 내면은 엉망입니다. 6절을 보십시오. “대접으로 포도주를 마시며 귀한 기름을 몸에 바르면서 요셉의 환난에 대하여는 근심하지 아니하는 자로다” 대접으로 포도주를 마신다는 표현은 술에 중독된 그들의 모습을 고발하는 것입니다. 술에 중독되어 있고 기름진 삶을 자랑하지만 하지만 그들은 결정적으로 요셉의 환난에 대해서는 근심하지 않고 관심이 없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백성들이 당하고 있는 고통의 문제에 대해서는 전혀 관심이 없었습니다. 북이스라엘은 여로보암 2세 시절에 부를 많이 축적했습니다. 그들의 부는 상상을 초월합니다. 무역으로 많은 돈을 벌었습니다. 하지만 그 돈이 백성들에게 흘러가지 않습니다. 기득권 세력들이 그 돈을 가지고 먹고 마시고 치장하기 바빴습니다. 백성들은 그만큼 어려운 삶을 살아야 했습니다. 

이런 자들을 하나님은 어떻게 심판하실까요? 하나님은 그들을 가만히 두지 않는다고 말씀하십니다. 7절을 보십시오. “그러므로 그들이 이제는 사로잡히는 자 중에 앞서 사로잡히리니 기지개 켜는 자의 떠드는 소리가 그치리라” 하나님은 그들이 사로잡히는 자 중에서 앞서 사로잡히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북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마지막 기회를 주시려고 호세아, 아모스, 요나 선지자를 집중적으로 보냈습니다. 하지만 북이스라엘 백성들이 돌이키지 않고 회개하지 않습니다. 그들의 부를 백성들에게 흘려보내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앗시리아를 준비하셨습니다. 북방에서 한 민족이 내려올 것인데 그들이 내려오면 사로잡힐 백성들을 먼저 준비하실 것입니다. 그들이 바로 기득권 세력들이었습니다. 

하나님의 경고를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기득권을 누리는 자들은 사로 잡히는 자 중에서 앞서 사로잡힐 것입니다. 이것은 당연한 일이며 이치에 합당한 일입니다. 기득권 세력들은 부와 권력과 명예를 앞서 누렸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가진 부와 권력과 명예를 백성들에게 나누지 않았습니다. 요셉의 환난에 대해서는 근심조차 하지 않았고 관심조차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국가가 어려움을 당할 때 앞서 사로잡힐 것입니다.

오늘 말씀은 우리에게 깊은 깨달음을 가져다줍니다. 우리는 기득권 세력이 아닙니다. 많은 돈을 가지고 사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이 땅에 있는 백성들은 대부분 시대적 고통과 아픔을 함께 하는 서민들입니다. 하지만 앞서 사로잡히겠다는 말씀을 기억해야 됩니다. 우리는 타인보다 앞서 은혜를 받은 하나님의 자녀들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먼저 구원받았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이 먼저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앞서서 은혜를 주셨습니다. 우리는 돈은 많이 가지고 있지 않으나 은혜는 먼저 받은 백성들입니다. 먼저 은혜 받은 백성으로 받은 은혜를 하나님의 백성들, 아직까지 믿지 않는 자녀들에게 그 은혜를 흘려보내야 하는 그 의무가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있습니다. 

가족들 중에 우리가 먼저 믿었다면 먼저 믿은 값을 그 대가를 지불해야 됩니다.
말씀을 전하고 선포해야 됩니다.
요셉의 환난에 대해서 근심하며 그들을 위해서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아직까지 하나님을 믿지 않는 자들을 위해서 우리는 해야 할 일이 많습니다.
그들의 고통을 부여잡고 기도해야 됩니다.
근심하며 하나님 앞에 엎드려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가 환난 날에 사로잡힐 것입니다.
14절을 보십시오.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이스라엘 족속아 내가 한 나라를 일으켜 너희를 치리니 그들이 하맛 어귀에서부터 아라바 시내까지 너희를 학대하리라 하셨느니라”

앗시리아 군대가 일어나서 북이스라엘 전역을 칠 것입니다.
먼저 된 자, 먼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깨달은 우리에게 주어진 짐이 큽니다.
우리도 나라의 어려움과 고통 앞에서 기도해야 합니다.
다음 세대들을 위해서 기도해야 됩니다.
아직까지 하나님을 모르는 백성들을 위해서 기도해야 됩니다.
기도의 의무를 게을리 하지 않는 하나님의 자녀 되시기를 바랍니다. 

1. 은혜 받은 자의 사명을 다하겠습니다.
2. 우리나라와 세계를 위해서 기도하겠습니다.
3. 은혜 받은 자들이 앞서 기도하여 하나님의 마음을 시원하게 해 드리오니 드리는 기도를 받아 주시옵소서.


7월 19일(수) 아모스 7장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다림줄(7절)

또 내게 보이신 것이 이러하니라 다림줄을 가지고 쌓은 담 곁에 주께서 에 다림줄을 잡고 서셨더니.
This is what he showed me: The Lord was standing by a wall that had been built true to plumb, with a plumb line in his hand.

* 다림줄 :  '납, 측연 추'를 뜻하는데 다림줄은 건물을 세우기 위해 사용되기도 하지만 건물을 허물기 위해 사용되기도 한다.
* 594. 아나크(’ănâk) אֲנָךְ 

1. 납.  2. 다림줄
발음 / 아나크[ ’ănâk ]
어원 / ‘좁다’라는 의미의 어원에서 유래한 것으로 보임[사용되지 않음]
관련 성경 /  다림줄(암 7:7, 8).
구약 성경 / 4회 사용

아모스가 본 환상들

아모스가 본 세 가지 환상을 중심으로 내용이 구성되어 있다.
아모스는 이제까지의 내용을 통하여 피할 수 없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죄악을 지적하고 나서 본장부터는 죄악에 대한 구체적인 심판 즉 앗수르의 침략에 대해 환상으로 묘사하고 있다.
특히 본장부터는 아모스의 예언 사역이 하나님 편에서 이스라엘을 향하였던 전장까지와는 달리 백성 편에서 하나님을 향한 사역이 주를 이루고 있으며 특히 아모스 개인 사역에 대해서 집중적으로 다루고 있다.
따라서 본장은
7:1-9. 황충과 불과 다림줄 환상을 통한 경고
7:10-17. 제사장이었던 아마샤와의 논쟁

아모스는 3장에서 6장까지 이스라엘이 심판을 받을 수밖에 없었던 그들의 죄악을 지적하였습니다.
이제 아모스는 9장까지 다섯 개의 환상을 언급하게 되는데, 본장에서는 세 개의 환상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 환상들은 심판으로 말미암은 결과들에 관해 묘사하고 있는데, 특히 앗수르의 공격을 예고하고 있습니다.
한 편 이 같은 아모스의 환상을 듣고서 하나님의 참된 계시를 방해하고자 하는 제사장 아마샤의 공격도 언급되어 있습니다.

아모스의 사역은 선지자의 사역이 하나님의 예언의 대변자임과 동시에 백성을 대신하여 하나님께 탄원을 드리는 중보자라는 점을 부각시키고 있다.
사실 구약 성경을 보면 여러 형태의 중보사역이 등장한다. 소돔과 고모라의 멸망을 놓고 조카 롯을 위해 기도하는 아브라함의 중보사역(참조, 창18:22-23), 우상 앞에서 범죄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한 모세의 중보 기도(참조, 출32:30-32), 이스라엘 백성들의 범죄를 슬퍼하며 기도하는 사무엘의 중보 사역(참조, 삼상12:23) 등에서 중보 사역들이 나타난다. 그러나 이런 모든 중보 사역의 근거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행하신 중보 사역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백성들의 죄를 대속하시기 위해 인간의 몸을 입으시고 오셨고 죽으셨다. 이런 그리스도의 대속이 있었기에 하나님 앞에서 인간의 죄 사함에 관한 중보가 가능한 것이다. 또한 그리스도는 하나님 우편에서 오늘도 자기 백성들을 위한 중보 기도를 행하고 계 신다. 이러한 그리스도의 중보 기도는 여전히 사단의 세력이 성도들을 위협하는 세상 속에서 성도들이 믿음을 지키기 위한 유일한 능력인 것이다. 오늘날 성도들에게도 이런 중보 기도의 필요성이 매우 크게 대두되고 있는데, 그것은 이 세상 백성들의 구원을 위한 성도들의 중보 사역이 무엇보다 크게 요구되고 있기 때문이다.  

아모스는 이스라엘이 영적으로 부패한 상황 속에서도 영적으로 깨어 의의 길로 돌아오도록 권고하였으며 백성들을 위해 하나님께 중보의 기도를 드렸다. 이처럼 시대 속에 깨어 있는 선지자야말로 시대를 구하는 역할을 할 수 있다. 이와 같이 이 시대 속의 선지자인 성도들도 영적으로 깨어 갈수록 타락되어 가는 세상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이끌어 가는 자가 되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 성도들은 항상 하나님과의 영꺽 관계를 바르게 유지하기 위해 최선을 다해야 한다. 날마다 기도의 삶을 살아야 하며 말씀을 묵상하고 연구하는 자가 되어야 한다. 또한 자신의 유익과 축복만을 위해 간구하는 자가 아니라 시대의 어둠 속에서 방황하는 현대인들을 위해 하나님께 간구하는 중보의 기도자가 되어야 할 것이다. 

지도자가 분명한 원칙과 지도력, 타협하지 않는 소신을 가지고 공동체를 인도하면 질서는 확실하게 잡힐 것입니다. 그러나 문제는 내부적인 불만입니다. 사람들은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융통성이 없고 고지식하고 타협할 줄 모르는 지도자 때문에 답답해서 견딜 수 없다고 말할 것입니다. 하지만 반대의 지도자에 대해서도 불만이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어떤 지도자가 원칙 없이 행동한다면 혜택을 입은 사람을 제외한 나머지 사람들이 아우성 칠 것입니다. 그러므로 훌륭한 지도자는 본질에 있어서는 타협하지 않는 분명한 소신과 지도력을 가져야 하고 비본질에 있어서는 넓은 아량과 마음을 가지고 통큰 결단을 하는 사람입니다. 그러면 크게 문제 될 것이 없습니다. 하나님 아버지는 바로 그 모습을 우리에게 보여주십니다. 

믿음 생활을 하다 보면 하나님에게 통하는 것이 있고 통하지 않는 것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본질에 있어서는 절대로 양보가 없는 분이십니다. 하지만 통하는 것도 있습니다. 끝없이 용서하시는 것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 임계점에 도달하고 나면 하나님은 반드시 심판하십니다. 오늘 본문을 통해서 우리는 하나님의 본성을 봅니다. 하나님은 북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아모스 선지자를 통해서 말씀을 주십니다. 여로보암 2세 시절 그들은 부유했지만 타락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북이스라엘 지도자들에게 심각한 죄가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하나님께서는 아모스 선지자에게 세 가지 환상을 보여주십니다. 두 가지 환상을 통해서는 죄를 묻지 않겠다고 말씀하시지만 마지막 환상은 돌이키지 않는 이들을 향한 하나님의 무서운 심판 예고입니다. 2절 말씀입니다. “메뚜기가 땅의 풀을 다 먹은지라 내가 이르되 주 여호와여 청하건대 사하소서 야곱이 미약하오니 어떻게 서리이까 하매” 메뚜기가 풀을 다 먹었다고 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땅의 풀은 곡식을 말합니다. 메뚜기 떼가 곡식을 먹어버렸습니다. 그러면 백성들은 어떻게 될까요? 그들은 죽은 목숨이나 다름없습니다. 북이스라엘이 여로보암 2세 시절 물질의 부를 누렸다 할지라도 새까맣게 하늘을 뒤덮은 메뚜기 떼가 한꺼번에 몰려와서 곡식을 다 먹어버리면 그들은 죽은 목숨이나 다름없습니다. 

이 환상을 본 아모스 선지자는 하나님께 엎드립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모두 미약합니다. 그렇게 하시면 이들이 어떻게 설 수 있겠습니까? 죽은 목숨이나 다름없지 않습니까? 하나님께 심판을 되돌려 달라고 간구합니다. 선지자의 간구에 하나님은 응답하십니다. 3절을 보십시오. “여호와께서 이에 대하여 뜻을 돌이키셨으므로 이것이 이루어지지 아니하리라 여호와께서 말씀하셨느니라” 하나님께서 뜻을 돌이키셨습니다. 메뚜기 심판을 허락하지 않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어서 두 번째 심판에 대한 환상입니다. 4절을 보십시오. “주 여호와께서 또 내게 보이신 것이 이러하니라 주 여호와께서 명령하여 불로 징벌하게 하시니 불이 큰 바다를 삼키고 육지까지 먹으려 하는지라” 하나님이 보내신 심판의 불이 바다와 육지를 삼키고 태운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진노의 불은 무서운 것입니다. 하나님의 불이 바다와 땅에 임하면 남아나는 것이 없습니다. 여로보암 2세 시절은 해상 무역이 성행했습니다. 배를 띄워서 물건을 사고 팔았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불이 먼 바다까지 오가는 배에 떨어지면 어떻게 됩니까? 북이스라엘은 심각한 경제적 타격을 입을 것입니다. 불이 육지를 삼키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요? 전쟁이 일어난다는 뜻입니다. 제 아무리 금자탑을 높이 쌓아 올린들 소용없습니다. 제 아무리 경제적 평화와 부를 누리면 무엇 하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이방 민족을 일으켜서 전쟁이 일어나게 하시면 쌓아둔 재산은 불타서 사라질 것입니다. 이 또한 무서운 재앙입니다. 선지자는 이 환상을 보고 하나님께 울며 엎드립니다. 5절을 보십시오. “이에 내가 이르되 주 여호와여 청하건대 그치소서 야곱이 미약하오니 어떻게 서리이까 하매” 선지자는 야곱이 미약하다는 말로 하나님의 긍휼을 기대합니다. 이에 하나님이 응답하십니다. 6절을 보십시오. “주 여호와께서 이에 대하여 뜻을 돌이켜 주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이것도 이루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하나님께서는 이 심판도 철회하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어서 하나님께서 선지자에게 보이신 세 번째 환상입니다. 7절을 보십시오. “또 내게 보이신 것이 이러하니라 다림줄을 가지고 쌓은 담 곁에 주께서 손에 다림줄을 잡고 서셨더니” 다림줄 환상을 보이셨습니다. 다림줄이 무엇입니까? 건축현장에서 수직을 맞추는데 필요한 도구입니다. 땅 바닥으로부터 시작해서 높다랗게 벽을 쌓아올립니다. 벽돌을 하나하나 쌓습니다. 그런데 사람이 제 아무리 좋은 눈썰미를 가지고 벽돌을 쌓아 올린다 하더라도 삐뚤삐뚤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건축자들은 다림줄을 위에서 아래로 늘어뜨립니다. 다림줄에 맞추어서 벽돌을 쌓아올려야 합니다. 그래야 반듯한 벽을 만들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다림줄을 너희에게 보내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어서 8절을 보십시오.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아모스야 네가 무엇을 보느냐 내가 대답하되 다림줄이니이다 주께서 이르시되 내가 다림줄을 내 백성 이스라엘 가운데 두고 다시는 용서하지 아니하리니”

하나님께서 다림줄을 이스라엘 백성들 가운데 두셨다고 말씀하십니다. 또한 하나님은 다시는 용서하지 않겠다고 하십니다. 메뚜기 재앙도 철회하셨고 불 재앙도 철회하시는데 다림줄은 철회하지 않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다림줄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이스라엘 백성들 가운데에 두고 말씀대로 사는지 그렇지 않는지 지켜보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해서 그들이 인생의 벽돌을 차곡차곡 쌓아 올리지 않으면 하나님은 이 재앙을 거두지 않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 인생의 기준이 되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기준으로 삼지 않습니다. 세상을 기준으로 삼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의 다림줄을 위에서 늘어뜨려 보면 인생의 벽돌이 삐죽삐죽 튀어 나와서 보기 흉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내가 말씀의 다림줄을 너희들 인생에 보내노니 튀어나온 벽돌이 있다면 다시 허물고 처음부터 다시 쌓아라. 밑바닥에서부터 다시 쌓아 올려라” 하나님은 북이스라엘 백성에게도 우리들에게도 원점부터 새롭게 시작하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우리는 원점부터 시작하기 싫어합니다. 우리 인생의 기준은 말씀이 아니라 다른 나라이며 믿지 않는 백성들의 세상 풍조입니다. 이제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다림줄로 삼고 그 말씀에 근거해서 내가 지금 제대로 살아가고 있는지 우리 인생을 돌이켜 보아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큰 화가 닥칠 것입니다. 선지자는 메뚜기 심판이나 불 심판을 예고하신 하나님께 엎드려 간구했습니다. 하지만 다림줄 심판 예고에는 하나님께 엎드리지 않습니다. 매달리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말씀의 기준에서는 타협이 없는 분이심을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의 다림줄이 오늘 우리 인생에 드리워져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개인뿐만 아니라 교회와 나라와 민족도 마찬가지입니다. 지금 우리는 코로나 19사태를 겪고 있습니다. 두렵지 않습니까? 눈에 보이지 않는 자그마한 바이러스 하나가 교회를 텅 비게 만들었습니다. 전쟁의 포화 가운데에도 교회는 가득 찼습니다. 하나님께서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은 원점에서부터 다시 시작하라는 것입니다. 다른 교회도 비교 대상이 아니고 다른 사람도 비교 대상이 아닙니다. 지금 우리는 말씀의 다림줄 앞에서 새롭게 시작해야 됩니다.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우리 인생도 다시 시작해야 됩니다. 지금까지 쌓아온 것이 아까워 그대로 두면 하나님의 임박한 심판을 피할 수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다림줄 말씀을 기억하시고 오늘도 은혜의 하루가 되시기 바랍니다. 


1. 인생을 살피시는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2. 절대 기준인 말씀을 기억하고 살겠습니다.
3. 말씀의 다림줄이 우리 인생에 있음을 기억하고 말씀을 잘 지키며 살아가도록 인도하여 주시옵소서.

다림줄을 들고 계시는 하나님

“또 내게 보이신 것이 이러하니라. 다림줄을 띄우고 쌓은 담 곁에 주께서 손에 다림줄을 잡고 서셨더니 내게 이르시되 아모스야 네가 무엇을 보느냐 내가 대답하되 다림줄이니이다 주께서 가라사대 내가 다림줄을 내 백성 이스라엘 가운데 베풀고 다시는 용서치 아니하리니”(암 7:7~8)

‘다림줄’이란 건축 기술자들이 사용하는 도구다. 쌓아 올린 구조물이 수직으로 바로 서 있는지를 점검하기 위한 것이다.

하나님께서 왜 다림줄을 들고 계시는 것일까? 아모스 시대에 북쪽 이스라엘은 여로보함2세의 부국강병책으로 부강하고 경제적 호황을 누렸지만, 사회 윤리가 무너지고 있었다. 곳곳에 사회적 약자의 신음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더욱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예배는 주변사회의 풍요를 상징하는 우상숭배로 인해 무너지고 있었다. 하나님은 드고아의 목자 아모스를 통해 이스라엘에게 하나님의 뜻을 전하라고 명하였다. 아모스는 ‘정의를 하수 같이, 공법을 물 같이’ 흐르는 사회를 위해 하나님의 시각으로 외쳤다. 하나님이 그 다림줄을 이스라엘에 베풀고 용서하지 않겠다고 하신다.

하나님은 포로생활에서 돌아온 유다 백성들의 첫 번째 총독이었던 스룹바벨의 손에 이 다림줄을 들게 하셨다(슥4:10). 이는 하나님의 뜻을 받들어 수행하는 백성의 지도자의 손에 다림줄이 있음을 기뻐하신다. 이는 지도자가 하나님의 뜻을 올바로 분별하고 수행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지도자가 하나님의 기준 감각을 잃어버린 공동체는 작건 크건 관계없이 위험에 처한다. 리더의 위기는 공동체의 위기이다.

오늘날 나의 손에는 다림줄이 들려 있는가? 하나님의 판단력을 닮고 시행하고 있는가? 이 다림줄이 올바로 서지 못하면 나의 공동체는 흔들린다. 잘못된 건물을 세우게 된다. 진리의 잣대가 흔들리면 공동체는 진리에 벗어난 집을 짓게 된다. 죽은 전통과 잘못된 관습, 상황의 잣대로 공동체를 세우면, 하나님의 다림줄에서 벗어나게 된다.

오늘 하나님께서 내 자신과 내가 섬기는 공동체, 그리고 이 땅의 교회들을 향해 다림줄을 베푸신다면 어떻게 될까? 올바로 쌓아올리지 못한 나의 모습이 전체 구조물에 심각한 영향을 준다면, 하나님은 어떻게 하시겠는가? 치유하시고 회복하시겠는가? 아니면 용서하지 않으신다는 준엄하신 심판을 내리시겠는가?

하나님의 다림줄에 나와 내가 세운 집들을 다시 재어보자.

영어로 다림줄은 plumb line입니다.
라틴어 ‘플룸붐’(납)에서 온 plumb은 다림줄 끝에 매다는 다림추(plumb bob, plummet)를 뜻하기도 합니다.
로마 시대에 납으로 수도관을 만든 것이 plumbing(수도 시설, 배관 공사), plumber(배관공) 같은 단어에 흔적으로 남아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예언자 아모스를 통해 이스라엘에 경고를 전하셨습니다.
“주님께서 나에게 다음과 같은 것을 보여주셨다. 다림줄을 드리우고 쌓은 성벽 곁에 주님께서 서 계시는데 손에 다림줄이 들려 있었다. 주님께서 나에게 ‘아모스야, 네가 무엇을 보느냐?’ 하고 물으시기에, 내가 대답하기를 ‘다림줄입니다’ 하니, 주님께서 선언하신다. ‘내가 나의 백성 이스라엘의 한가운데, 다림줄을 드리워 놓겠다. 내가 이스라엘을 다시는 용서하지 않겠다. 이삭의 산당들은 황폐해지고 이스라엘의 성소는 파괴될 것이다. 내가 칼을 들고 일어나서 여로보암의 나라를 치겠다.’”(암 7:7~9, 새번역) 그리고 그날이 오면 이스라엘을 회복시키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다림줄에 맞춰 중심을 잘 잡고 바르게 서 있는지 돌아봅니다.

다림줄



인류 역사의 끝은 사상전쟁으로 끝을 맺는다는 것을 가르친 것이 인류 종말을 가르친 다림줄의 진리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인간이 그어놓은 어떤 국경선이나 민족적 분포에 따라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특정 교파를 따라서 이루어지는 것은 더더욱 아닐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반드시 이루어지되 먼저, 하나님을 대적하는

666의 무리가 반드시 파멸당할 것이 작정되어 있습니다(사 7:15, 사 2:4, 미 4:3, 사 32:16~19). 그러므로 누구든지 붉은 짐승의 표를 받은 자는 몽땅 없애버린다는 것이 6000년 선악 싸움의 최후의 결전을 짓는 아마겟돈 전쟁이 되는 것입니다. 모든 경기와 게임이 그렇듯이, 어짜피 이 땅의 영적 전쟁도 이긴 자가 차지하리라는 것은 자명한 진리입니다. 그러나 최후의 승리는 인간 자력에 있지 않고 하나님께만 있다는 겸손한 자세에서 출발한 자들이 바로 최후의 승리자의 자리에 서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중심과 사상을 보십니다(삼상 16:7). 그리하여 하나님의 사상과 하나된 그들을 통하여 새로운 나라가 이루어질 것을 약속한 것이 사 66:18절 이하의 예언이 됩니다. 

암 7:7절에 "다림줄"이라는 말이 처음 등장하는데, 이스라엘 가운데 이 다림줄을 베풀고는 다시는 용서치 않는다고 하신 것을 볼 때 다림줄은 심판의 기준이 되는 하나님의 공법의 말씀이 분명합니다. 원래 '다림줄'이라는 것은 성전을 곧게 쌓을 때 필요한 기구로서 실에 추를 달아 늘어뜨려 중력방향의 수직을 맞추는 도구입니다. '척량줄'이라고도 합니다. 육적 세계의 건물도 보이지 않는 수직(중력)방향을 잡아주는 다림줄과 어긋날 때에는 어김없이 무너지고야 말듯이, 보이지 않는 신령한 영적 성전도 다림줄 역할을 하는 심판의 잣대(계 11:1), 척량줄(슥 2:1~), 먹줄(겔 9:3), 다림보던 추(왕하 21:13)에 맞지 않을 때에는 여지 없이 무너지고야 말 것입니다. 예수님은 육적으로도 영적으로도 '최고의 목수'이십니다. 고로 예수님이 들고 계신 다림줄은 부패한 성전을 심판하는 진리의 잣대가 되는 것입니다.

죄를 아려주는 율법시대에 누구든지 율법을 범하면 저주를 받았고(신 27:26), 영혼을 구원하는 은혜시기에도 역시 누구든지 '천국복음'을 떠나면 영적인 저주를 입고 지옥으로 가게 된 것입니다(갈 1:7~8). 종말에도 '영원한 복음'이라는 다림줄(계 14:16)이 등장하여 심팜을 이루는 것입니다. 이는 신약 성경에 한 번도 인용됨이 없으니, 종말론의 예언 안에서 찾아져야 할 것이며, 바로 종말의 영적 성전 건축 사명자인 스룹바벨에 의해서 고해져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은 스룹바벨의 손에 다림줄(슥 4:10)과, 머릿돌(슥 4:7)과, 하나님의 印(계 7:3, 학 2:23)을 맡겨 당신의 종으로 쓰실 것을 예언하셨습니다.

고로 모든 혼란한 것을 뒤집어엎는 심판기에는 '다림줄'을 외치고 나오는 '스룹바벨'의 사명자가 혼란한 종말 교회에 성경대로 재등장합니다. 이 다림줄의 사명은 영적 성전(기독교)에 부패가 있으리라는 계시록의 말씀 곧 예수님이 승천하신 후 보좌에 앉으신 성부께로 받은(계 5장) 작은 책과 함께 시작되며, 인봉된 심판의 책이 열려져 그 해석을 알게 하는 일 없이는 절대로 등장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슥 4:9~10 스룹바벨의 손으로 성전건축(144,000명 인 치는 역사)이 마쳐지는 데는 "그의 손에 다림줄이 있음을 보고 기뻐하리라" 하셨습니다.

전술한 바, 주께서는 쌓은 담을 재어보는 줄을 다림줄이라 칭하셨고(암 7:7~), 예루살렘을 척량하는 것을 척량줄이라 명하셨으며(슥 2:1~5), 성전을 척량할 때 지팡이 같은 갈대를 사용하는 모습을 묵시로 주셨습니다(계 11:1~2). 이 모든 단어는 같은 내용을 지칭하니 곧 진리의 기준이 어떤 대표자에게 위탁되어 있음을 말합니다. 이 말은 그 외에는 다 가짜라는 뜻이 아니고, 전 세계의 흩어져 있는 알곡 곧 진리의 용사들을 불러모으는 사명은 '영원한 복음'을 들고 나오는 동방 해 돋는 곳은 '다른 천사'의 사명 곧 '우리'라고 지칭된(계 7:3) 말세 선구자적인 무리들이 리드할 것을 뜻합니다. 이들은 다림추가 중력방향으로만 작용하듯이, 하나님의 말씀만을 향한 자들이며, 그 이외의 사상에는 결코 타협치 아니하는 신앙의 용사들일 것입니다. 따라서 이들의 사명은 수직이 아닌 모든 것들의 정체르 다림줄 앞에서 만천하에 공개되도록 하는 명료성과 독일무이성에 있습니다. 완전하신 하나님이 함께 해주지 아니하시고는 부족한 인간으로서는 해낼 수 없는 사명입니다(슥 4:6).

사단의 왜곡된 진리가 난립하는 이 시대, 곧 성전건축의 대역사인 기독교의 大공사판에, 다림줄을 모르고서도 공사에 동참해보겠다고 날뛰는 거짓무리들이 다시 등장할 것입니다(에스라 4:2). 그들은 세상 명예를 바라는 자들이며, 자기 뜻대로 되지 않을 때에는 사단의 권위를 빌어서 주님의 일을 기꺼이 훼방할 수 있는 자들입니다(에스라 4:4~6). 이들에게 중요한 것은 '주님의 성전재건'이 아니라 자신들의 영광이었던 것입니다. 나쁜 무화과입니다(렘 24장).

구약 성민의 모든 역사가 종말의 기독교 안에서 재연될 때에, 이스라엘 성소(종말의 기독교)에 다림줄을 베풀고(설교하고) 다시는 용서치 아니하겠다 하신 주님의 말씀은 여지 없이 실행될 것입니다. 이를 외쳐 고하는 사명이 '다림줄'을 위탁받은 스룹바벨의 사명이며, 이 사명을 깨달아 한마음 된 자들이 계시록 7:3절의 '우리'라는 단체를 이루어 계 10:11절처럼 '다시 예언'할 수 있는 것입니다.

성경에는 다림줄, 다림추와 반대되는 개념으로서 "혼란의 줄" "공허의 추"라는 단어가 나옵니다.

사 34:11 "여호와께서 혼란의 줄과 공허의 추를 에돔에 베푸실 것인즉 12 그들이 국가를 이으려 하여 귀인들을 부르되 아무도 없겠고 그 모든 방백도 없게 될 것이요..."  이들은 환란 날의 불택자들로서 에돔 사상(시기, 질투, 미움, 무신론, 황금만능, 종교협상)을 가진 자들입니다.

사 34:5 "여호와의 칼이 하늘에서 족하게 마셨은즉 보라 이것이 에돔 위에 내리며

멸망으로 정한 백성 위에 내려서 그를 심판할 것이라 34:6 여호와의 칼이 피 곧 어린 양과 염소의 피에 만족하고 기름 곧 수양의 콩팥 기름에 윤택하니 이는 여호와께서 보스라(초장=교회)에서 희생을 내시며 에돔 땅에서 큰 살륙을 행하심이라"에돔은 정치적으로는 하나님을 대적하는 7머리 10뿔 국가들이요, 종교적으로는 환란시대의 불택자들 곧 성전 밖마당 교파(협상교회)들입니다.

계 11:1~ "또 내게 지팡이 같은 갈대를 주며 말하기를 일어나서 하나님의 성전과 제단과 그 안에서 경배하는 자들을 척량하되 2

성전 밖 마당은 척량하지 말고 그냥 두라 이것을 이방인에게 주었은즉 저희가 거룩한 성을 마흔 두 달 동안 짓밟으리라"  

아모스 7:7~8  “또 내게 보이신 것이 이러하니라 다림줄을 띄우고 쌓은 담 곁에 주께서 손에 다림줄을 잡고 서셨더니 내게 이르시되 아모스야 네가 무엇을 보느냐 내가 대답하되 다림줄이니이다 주께서 가라사대 내가 다림줄을 내 백성 이스라엘 가운데 베풀고 다시는 용서치 아니하리니…”

왕하 21:13 "내가 사마리아를 잰 줄과 아합의 집을 다림보던 추로 예루살렘에 베풀고 또 사람이 그릇을 씻어 엎음같이 예루살렘을 씻어 버릴지라"

다림줄을 깨닫게 되면 성전 밖마당과 안 마당이 보입니다. 그러나 성전 밖마당에 있는 자들은 이방인(잔인한 군주=사 19:4 / 한 왕=단 8:23~, 9:26~)의 손에 붙여져 짓밟힐 때까지 결코 다림줄을 깨달을 수 없습니다.

마태 7:24 "그러므로 누구든지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는 자는

그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지혜로운 사람 같으리니 25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히되 무너지지 아니하나니 이는 주초를 반석 위에 놓은 연고요 26 나의 이 말을 듣고 행치 아니하는 자는 그 집을 모래 위에 지은 어리석은 사람 같으리니 27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히매 무너져 그 무너짐이 심하니라 28 예수께서 이 말씀을 마치시매 무리들이 그 가르치심에 놀래니 29 이는 그 가르치시는 것이 권세 있는 자와 같고 저희 서기관들과 같지 아니함일러라"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은 각각 집을 짓는 자들인데, 집을 지을 때 예수님의 말씀대로 행한 자와 사단의 꾀임을 받은 자가 섞여 있다가 다림줄 말씀(암 7:7~9)이 등장될 때(다시 예언될 때 - 계 10:11) 확연히 갈라지게 됩니다. 마치 곡식 밭에 알곡과 쭉정이가 공존하다가 타작마당에서는 확연히 갈라지는 이치와 같습니다(고로 다림줄은 사 41:15 "이가 날카로운 새 타작기계"와 같은 뜻이 됩니다). 같은 교회 내에서 똑같이 예수의 이름을 부르며 부르짖었으나, 다림줄 말씀이 외쳐질 때는 제 본 모습(영적 현주소)을 그대로 드러내게 된다는 뜻입니다.

홍수에 빠져 죽고, 핵에 타 죽는 것이 일반인들이 말하는 심판입니다. 그러나 더 무섭고도 근원적인 심판이 있습니다. 바로 다림줄 말씀이 지나갈 때 알아듣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물과 불에 해를 당하는 심판보다도 더 원천적인 심판인 것입니다. 홍수나 불은 다림줄 밖에 있는 사람을 훑고 지나가는 도구일 뿐이기 때문입니다. 말씀을 깨닫지 못하는 것이 말씀대로 모든 것이 이루어지는 그날에는 재앙이 됨을 미리 깨닫고 각성해야 할 때가 바로 지금입니다.

고전 3:12 "만일 누구든지 금이나 은이나 보석이나 나무나 풀이나 짚으로

이 터 위에 세우면 13 각각 공력이 나타날 터인데 그 날이 공력을 밝히리니 이는 불로 나타내고 그 불이 각 사람의 공력이 어떠한 것을 시험할 것임이니라 14 만일 누구든지 그 위에 세운 공력이 그대로 있으면 상을 받고 15 누구든지 공력이 불타면 해를 받으리니 그러나 자기는 구원을 얻되 불 가운데서 얻은 것 같으리라"15절 말씀에 불 가운데서 얻은 구원이란, 중생받은 자가 헛된 삶을 살다가 공력이 불탈 때 육체는 소멸되고, 영혼만 예수의 이름으로 구원을 얻는다는 뜻입니다. 노아 때 죽은 자들이 육체는 죽었으나 예수님이 옥에 내려가셔서 전파하실 때 그 영혼이 살리움 받은 이치와 꼭 같습니다(벧전 3:18~). 영혼구원은 예수 피 권세에 있으나, 환란날에 재앙을 면하고 새 시대의 백성이 되는 육체의 구원은 예수님의 피로 산 말씀 권세에 있다는 것을 잊지 맙시다. 피로 산 말씀 권세! 이것이 바로 다림줄의 권세, 머릿돌의 권세, 하나님의 인(印)의 권세입니다.

고로 다림줄이란

계시록과 계시록을 통하여서만 들어갈 수 있는 구약의 모든 예언서를 뜻합니다. 이것을 말할 줄 아는 교회가 종말의 촛대교회요, '해를 입은 한 여자'가 되는 것이니 ① 광야교회(율법), ② 피로 산 교회(은혜), ③ 촛대교회(심판과 새 시대)로 이어지는 구원노정의 순서를 알고 때를 따라 양식을 먹는 것은 이 시대에 있어서 가장 보배롭고 귀한 일이 될 것입니다(마 24:45).

그러므로 진정 예수님의 피로 산 백성이라면 때를 따라 주시는 말씀의 다림줄에 절대 순종하게 됩니다.

우리는 혼란의 줄(기독교 협상주의, 무신론, 과학만능, 황금만능)로부터 벗어나 다림줄만을 꼭 붙들어 주님이 용서 없는 심판을 행하실 때 심판을 이기고 새 시대의 거룩한 백성 또는 왕권자가 되어 주님의 창조 목적을 이루어 드리는데 이 한 몸 다 바칩시다.


다림줄이 필요하다

교회를 세우기 위해, 사람을 세우기 위해 우리에게 빌드-업이 필요하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터를 잘 닦아야 한다.
기초가 튼튼하지 않으면 모래성처럼 폭삭 무너지고 말 것이다.

예수님께서도 목수답게 튼튼한 반석이라는 기초 위에 집을 지어야 한다는 것을 잘 알고 계셨다.

반석 위에 세운 집이 무엇인가? 교회이다. 반석 위에 세운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터(말씀) 위에 세워진다. 그러나 말씀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알지 못하면 하나님을 온전히 깨달을 수 없다.

건축자가 수직으로 벽돌을 쌓는 과정은 마치 말씀을 아는 지식을 세우는 것과 같아서 기초를 무시하고 제멋대로 군데군데 벽돌을 빼먹고 쌓으면 결국은 무너지고 만다.

마찬가지로 영적인 기본기, 기초가 올바르지 않을 때에 우리 앞에 놓인 삶에서도 하나님보다 자신이 갖고 있고 보이는 것에 얽매여 넘어지기 마련이다. 그렇기 때문에 무엇보다도 말씀을 가까이 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세상은 상대적으로, 수치적으로 사람을 평가하고 기준을 제시한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렇지 않으시다.

하나님은 중심을 보시는 분이시라고 말씀하셨다.(삼상16:7) 과연 하나님께서 말씀하셨던 ‘중심’이란 무엇일까? 하나님의 ‘기준점’이란 무엇인가? 하나님의 ‘다림줄’은 무엇을 제시하였을까? 하나님의 다림줄은 그분의 말씀이었다.

성경에서의 다림줄은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 영과 육을 판단하시며 심판하실 때 기준으로 삼으시는 하나님의 의를 상징한다. 하나님은 그 다림줄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드리웠다. 바르지 않은 건물은 무너뜨리고 다시 세워야 하듯이 바르지 않은 나라는 허물고 하나님이 의도하신 당신의 나라를 다시 세우기 위함이다.

하나님의 다림줄, 말씀은 삶의 기초요 바른 길을 제시하는 절대적 규범이다. 이제 우리 스스로 다림줄을 드리워야 한다. 나의 삶이 말씀대로 살아가고 있는가? 하나님의 중심에 합당하게 살아가고 있는가?

온전하고 올바르게 빌드-업하기 위하여 다시 한 번 수평을 붙들어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않는 하나님의 은혜가 있다. 40년, 180년을 기다려주시는 하나님의 넓은 마음은 곧 은혜이다. 우리 주 하나님의 마음이 흡족하고, 중심을 인정받는 성도가 되기를 원한다.


7월 20일(목) 아모스 8장 - 여름 실과의 환상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네가 무엇을 보느냐?(2절)


예레미야 24:1-8
좋은 무화과와 나쁜 무화과의 예언

  1. 바벨론느부갓네살이 유다 왕 여호야김의 아들 여고냐와 유다 방백들과 목공들과 철공들을 예루살렘에서 바벨론으로 옮긴 후에 여호와께서 여호와의 전 앞에 놓인 무화과 두 광주리로 내게 보이셨는데
  2. 광주리에는 처음 익은듯한 극히 좋은 무화과가 있고 한 광주리에는 악하여 먹을 수 없는 극히 악한 무화과가 있더라
  3.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예레미야야 네가 무엇을 보느냐 내가 대답하되 무화과이온데 그 좋은 무화과는 극히 좋고 그 악한 것은 극히 악하여 먹을 수 없게 악하니이다
  4. 여호와의 말씀이 또 내게 임하니라 가라사대
  5.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내가 이곳에서 옮겨 갈대아인의 땅에 이르게 한 유다 포로를 이 좋은 무화과 같이 보아 좋게 할 것이라
  6. 내가 그들을 돌아보아 좋게 하여 다시 이 땅으로 인도하고 세우고 헐지 아니하며 심고 뽑지 아니하겠고
  7. 내가 여호와인줄 아는 마음을 그들에게 주어서 그들로 전심으로 내게 돌아오게 하리니 그들은 내 백성이 되겠고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리라
  8. 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내가 유다 왕 시드기야와 그 방백들과 예루살렘남은 자로서 이 땅에 남아 있는 자와 애굽 땅에 거하는 자들을 이 악하여 먹을 수 없는 악한 무화과 같이 버리되
  9. 세상 모든 나라 중에 흩어서 그들로 환난을 당하게 할 것이며 또 그들로 내가 쫓아보낼 모든 곳에서 치욕을 당하게 하며 말거리가 되게 하며 조롱과 저주를 받게 할 것이며
  10. 내가 칼과 기근과 염병을 그들 중에 보내어 그들로 내가 그들과 그 열조에게 준 땅에서 멸절하기까지 이르게 하리라 하시니라






미가 7:1
재앙이로다 나여 나는 여름 실과를 딴 후와 포도를 거둔 후 같아서 먹을 송이가 없으며 내 마음에 사모하는 처음 익은 무화과가 없도다.




가라사대 아모스야 네가 무엇을 보느냐 내가 가로되 여름 실과 한 광주리니이다 하매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내 백성 이스라엘의 끝이 이르렀은즉 내가 다시는 저를 용서치 아니하리니.
"What do you see, Amos?" he asked. "A basket of ripe fruit," I answered. Then the LORD said to me, "The time is ripe for my people Israel; I will spare them no longer.

아모스서 전체에 등장하는 다섯 가지 환상 중 네 번째 환상을 소개합니다.
7장에서는 세 가지 환상 중에서 다림줄을 통하여 북 이스라엘의 멸망을 예언했다면, 8장에서는 '여름 실과 광주리 환상'을 통한 이스라엘 종교의 멸망을 예고한 것입니다.

아모스 선지자는 하나님께서 더 이상 이스라엘과 종교적 관계를 지속시키지 않을 것이라고 합니다.
8:1-13. 여름 실과 광주리를 통한 하나님의 심판을 예고
8:4-14. 이스라엘 백성들이 율법을 어기고 자신의 삶의 이익만 추구했다는 아모스의 마지막 설교

아모스는 네번째의 환상, 곧 여름 실과의 환상을 봅니다.
이 환상은 곧 멸망하게 될 이스라엘의 운명을 예표하는 환상입니다.
왜냐하면 '여름 실과(카이츠)'란 단어와 '끝(케츠)'이란 히브리 단어의 발음이 비슷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선지자 아모스가 본 네 번째 환상은 북 이스라엘 왕국이 거의 끝나가고 있다는 것을 암시합니다.
그러므로 아모스는 또다시 이스라엘을 향해 메시지를 선포합니다.
이 메시지의 내용은 사회적인 불의와 신앙적인 타락상을 지적하면서, 이스라엘의 파국적인 멸망이 필연적임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동시에 하나님의 말씀이 없어 영적으로 기근 상태에 빠진 처참한 이스라엘의 상황을 예고하고 있습니다.

아모스서 8장을 통하여 성도들이 얻을 수 있는 교훈은 하나님의 심판의 메시지가 울려 퍼질 때 즉각적으로 회개해야 한다는 것과 더 나아가 말씀의 기갈을 당하지 않도록 하나님의 말씀을 의지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누구보다도 더 많이, 더 가까이 접할 수 있었지만 그들의 삶 속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는 데는 무관심했습니다.
그러다가 결국 하나님의 심판을 받게 된 것입니다.

오늘날의 영적 이스라엘인 성도들도 자신의 삶 속에서 끊임없이 하나님의 말씀을 자신의 행동의 표준으로 삼고 하나님과의 관계를 올바로 세우기 위해 힘쓰지 않는다면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수 없을 것입니다.

참된 하나님의 백성이란 형식적인 예배를 드리고 헌금을 하는 것으로 인정되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말씀만을 의지하는 삶을 통해 인정될 것입니다.

사랑하는 믿음의 사람들이여!
오늘도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거룩한 삶을 실현하는 일에 성공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 끝(7093) 겟츠(qêts) קֵץ

1. 극단.  2. 끝없이 אֵין קִץ.  
3. 파멸
발음 / 겟츠[ qêts ]
어원 / 7112에서 유래한 압축형
관련 성경 / 지남, 끝(창 8:6, 전 12:12), 끝남(출 12:41, 민 13:25, 대하 8:1, 겔 7:2, 단 11:27), 끝(창 6:13, 신 31:10, 왕하 19:23), 마지막(욥6:11, 애 4:18, 단 11:40), 종말(시 39:4, 합 2:3), 끝날(단 12:13).
구약 성경 / 67회 사용

* 여름실과(7019) 카이츠(qayits) קַיִץ 

1. 추수. 2. 여름
발음 / 카이츠[ qayits ]
어원 / 6972에서 유래
관련 성경 / 여름(창 8:22, 시 32:4, 렘 8:20), 여름과일(삼하 16:1, 렘 40:10, 미 7:1), 과일(삼하 16:2).
구약 성경 / 22회 사용


음펨바 효과란 같은 냉각 조건에서 높은 온도의 물이 낮은 온도의 물보다 빨리 어는 현상을 지칭한다.

음펨바 효과(Mpemba effect)는 같은 냉각 조건에서 고온의 이 저온의 보다 더 빨리 어는 현상 또는 그 효과를 말한다.[1][2] 이는 35℃ 물과 5℃ 물로 실험하였을 때 비교효과가 극대화된다.[3] 1963년 탄자니아의 에라스토 음펨바(Erasto B. Mpemba)가 처음 발견했다고 해서 붙은 명칭이다.[3]

이런 현상이 발생하는 원인이 50년간 풀리지 않다가 2013년 11월 싱가포르 연구진에 의해 물의 수소결합과 공유결합의 에너지 상관관계에 의한 현상임이 밝혀졌다.[4]


하나님의 백성의 특권.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을 받은 존재이다. 따라서 육체를 가진 인간이 육체의 건강을 위해 음식을 먹어야 하듯이 하나님의 영을 소유한 인간도 하나님이 주시는 영적 양식을 섭취해야 한다. 모세 이후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계속적으로 말씀과 선지자를 공급하셨다. 이 말씀도 곧 율법으로 가시화 되었고 인간 세상의 삶의 영적 기준이 되었다. 아울러 선지자와 제사장을 통하여 하나님의 말씀과 하나님과의 인격적 관계를 계속 유지시키셨다. 이것은 바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진 선민의 특권이었다. 그들은 죽음에 처한 인간에 대한 창조주의 구원 계획에 대해 누구보다도 정확하게 직접적으로 알 수 있는 기회를 가졌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 앞에서 우상 숭배와 아울러 끊임없이 죄를 범하여 결국 하나님과의 관계 단절까지 초래하였다. 따라서 하나님의 심판은 우선 영적 양식인 말씀을 끊어 버리는 영적 기갈부터 초래했으며 더 나아가 최종적 심판을 통한 육체의 고통과 슬픔까지도 가져오게 되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의 백성들이 가지는 특권은 절대적인 구원의 보장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구원으로의 기회를 제공하는 것이다. 따라서 제공된 구원의 기회를 스스로 저버리고 율법을 어길 때 오히려 율법은 심판의 원인으로 작용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심판의 형태는 비단 선택받은 자들만이 아니라 모든 인간에게 동일하게 임한다. 여호와의 날인 최후의 심판 날에는 인간들의 모든 공동체 영역 속에 하나님의 불같은 심판이 포괄적으로 임하게 될 것이다.  

본장을 통하여 성도들이 얻을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심판의 메시지가 울려 퍼질 때 즉각적으로 회개해야 한다는 것과 더 나아가 말씀의 기갈을 당하지 않도록 하나님의 말씀을 의지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누구보다도 더 많이, 더 가까이 접할 수 있었지만 그들의 삶 속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는 데는 무관심하였다. 그러다가 결국 하나님의 심판을 받게 된 것이다. 이와 같이 오늘날의 영적 이스라엘인 성도들도 자신의 삶 속에서 끊임없이 하나님의 말씀을 자신의 행동의 표준으로 삼고 하나님과의 관계를 올바로 세우기 위해 힘쓰지 않는다면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수 없을 것이다. 진정한 하나님의 백성이란 형식적인 예배를 드리고 헌금을 하는 것으로 인정되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말씀만을 의지하는 삶을 통해 인정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항상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백성다운 삶을 살기에 최선을 다해야 할 것이다.


하나님의 성품 가운데 우리가 가장 두려워해야 할 것이 바로 하나님의 침묵입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실 때는 아직까지 희망이 있고 기회가 있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어느 날 갑자기 말씀을 하지 않으시고 침묵하시면 심각한 상황입니다. 하나님의 심판 가운데 가장 무서운 심판, 임박한 진노의 심판이 하나님이 입을 닫는 것입니다. 이제는 너희들과 말 할 일이 없다. 지금까지 말을 많이 했는데도 불구하고 돌이키지 않고 행실이 그 모양이라면 더 이상 말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겠느냐? 하나님의 침묵은 임박한 심판을 예고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북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하여 하신 여러 말씀들이 있습니다. 호세아, 아모스를 통해서 하신 말씀들 끝에 하나님의 무서운 심판이 예고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침묵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하나님께서는 아모스 선지자에게 계속해서 환상을 보여 주십니다. 7장에서 하나님은 세 가지 환상을 보여주셨습니다. 메뚜기 환상과 바다와 육지에 불이 임하는 환상, 다림줄 환상이었습니다. 이제 네 번째 환상입니다. 1절과 2절을 보십시오. “주 여호와께서 내게 이와 같이 보이셨느니라 보라 여름 과일 한 광주리이니라 그가 말씀하시되 아모스야 네가 무엇을 보느냐 내가 이르되 여름 과일 한 광주리니이다 하매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내 백성 이스라엘의 끝이 이르렀은즉 내가 다시는 그를 용서하지 아니하리니”

다시는 용서하지 않겠다는 말씀으로 보아서 하나님이 지금까지 뜻을 여러 번 돌이킨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제는 너희를 다시는 용서하지 않겠다고 하시면서 여름 과일 한 광주리를 보여 주십니다. 때가 무르익어서 여름 과일을 사람들의 식탁에 올릴 때가 되었다는 말씀은 임박한 심판이 이르렀음을 표현하는 것입니다. 여름의 끝이 와서 과일을 따야 하는 것처럼, 과일이 사람들의 식탁에 놓일 때가 된 것처럼 이스라엘을 심판할 때가 되었다는 말씀입니다. 

아모스 선지자는 특히 북이스라엘의 지도자들의 죄에 대해서 여러 가지 말씀을 전했는데 오늘본문 다르지 않습니다. 북이스라엘의 영적 지도자와 정치 지도자들의 죄가 심각함을 전하고 있습니다. 4절을 보십시오. “가난한 자를 삼키며 땅의 힘없는 자를 망하게 하려는 자들아 이 말을 들으라” 가난한 자와 힘없는 자들을 돌보지 않는 힘 있는 자들을 심판하십니다. 그들은 구체적으로 어떤 죄를 지었습니까? 5절을 보십시오. “너희가 이르기를 월삭이 언제 지나서 우리가 곡식을 팔며 안식일이 언제 지나서 우리가 밀을 내게 할꼬 에바를 작게 하고 세겔을 크게 하여 거짓 저울로 속이며”

월삭과 안식일은 하나님께 예배드리기 위해서 일을 멈추는 날입니다. 쉬는 날입니다. 단순히 육체를 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온전한 예배를 드리기 위해서 쉬는 날입니다. 하지만 당시 권력 있는 자들은 월삭과 안식일에 쉬는 것이 불편했습니다. 문을 열기만 하면 돈이 쏟아져 들어오기 때문입니다. 이들은 정직하게 장사하지 않았습니다. 속이는 저울로 장사했습니다. 에바를 속이고 저울을 속였습니다. 세겔을 속여서 팔았습니다. 그런 식으로 돈을 모았습니다. 가난한 자, 힘없는 자들을 압제하고 착취했습니다. 이것이 당시 북이스라엘의 영적 지도자, 정치 지도자들이 행했던 일들이었습니다. 그들이 달아주는 밀도 좋은 밀이 아니었습니다. 6절을 보십시오. “은으로 힘없는 자를 사며 신 한 켤레로 가난한 자를 사며 찌꺼기 밀을 팔자 하는도다”

사람들을 인신매매로 팔아넘기는 자들, 좋지 않은 밀을 팔아서 폭리를 취하는 자들을 하나님은 여름 과일 광주리처럼 해치워 버리겠다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10절을 보십시오. “너희 절기를 애통으로, 너희 모든 노래를 애곡으로 변하게 하며 모든 사람에게 굵은 베로 허리를 동이게 하며 모든 머리를 대머리가 되게 하며 독자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애통하듯 하게 하며 결국은 곤고한 날과 같게 하리라” 눈에 띄는 것은 독자의 죽음이라는 대목입니다. 하나밖에 없는 독자가 죽으면 그 가정은 어떻게 될까요? 희망이 사라집니다. 독자는 그 가정의 희망입니다. 북이스라엘의 다음 세대가 끊어지게 할 것이라는 선언은 예사로운 심판이 아닙니다. 출애굽 당시 바로를 심판하셨던 것처럼 이제는 북이스라엘의 희망의 싹을 끊어버리겠다고 하셨습니다.  

이어서 11절을 보십시오.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보라 날이 이를지라 내가 기근을 땅에 보내리니 양식이 없어 주림이 아니며 물이 없어 갈함이 아니요 여호와의 말씀을 듣지 못한 기갈이라” 하나님의 심판이 구체화 되어 명확히 드러납니다. 양식이 없는 것도 아니고 물이 없는 것도 아닌데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못한 기갈이 곧 임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람은 육체와 영혼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흙으로 지으시고 코에 생기를 불어 넣으셔서 생령이 되게 하셨습니다. 걸어 다니는 사람은 모두 육체와 영혼으로 되어 있습니다. 육체는 하루 세 끼를 먹어야 합니다. 먹지 않으면 일을 할 수가 없습니다. 사람들은 살기 위해서 먹습니다. 입맛이 없다는 것은 몸에 병이 있다는 증거입니다. 곡기를 끊는다는 것은 생명이 다했다는 증거입니다. 그런데 육체뿐만 아니라 영혼도 먹어야 됩니다. 영혼이 살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말씀을 먹어야 됩니다. 

하나님은 여러 가지 방법으로 북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선지자들을 보냈습니다. 선지자들은 그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넣어주셨습니다. 여러 가지 징조로 말씀하셨습니다. 자연환경으로, 주변 상황으로, 때로는 백성들의 양심을 찔러가며 말씀하셨습니다. 하지만 그들이 듣지 않자 하나님은 더 이상 말하지 않겠다고 선언하셨습니다. 여름과일이 광주리에 담겨 식탁에 올라가는 것처럼 임박한 심판이 이르렀다고 선언하시고 더 이상 말씀하지 않습니다. 이것은 무시무시한 심판입니다. 

하나님께서 오늘 우리에게도 갖가지 방법으로 말씀하십니다. 강단에서 선포되는 생명수 같은 말씀으로, 성경을 읽을 때, 그리고 환경으로도 말씀하십니다. 하지만 백성들이 듣지 않고 돌이키지 않으면 하나님은 더 이상 말씀하지 않습니다. 성경 말씀을 읽어도 깨달음이 없고 설교를 들어도 졸리기만 하고 징조를 보아도 마음에 가책이 없는 날이 올 것입니다. 하나님의 심판이 임박했다는 증거입니다.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은 여러 가지 방법으로 임할 것이고 단에서부터 브엘세바까지 임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14절을 보십시오. “사마리아의 죄된 우상을 두고 맹세하여 이르기를 단아 네 신들이 살아 있음을 두고 맹세하노라 하거나 브엘세바가 위하는 것이 살아 있음을 두고 맹세하노라 하는 사람은 엎드러지고 다시 일어나지 못하리라”

북이스라엘 북단 단에서부터 남유다 남단 브엘세바까지 하나님께서는 영적 기갈을 보내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에게 이런 날이 오기 전에 하나님 앞에 엎드려 돌이키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실 때 듣고 깨닫고 돌이키는 자가 현명하고 지혜로운 백성입니다. 하나님이 때로는 크게 말씀하시고 때로는 세미한 음성으로 작게 말씀하십니다. 때마다 시마다 아버지의 말씀에 영혼을 열고 집중하시기를 바랍니다. 오늘도 하나님 말씀을 듣는 지혜로운 백성 되시기 바랍니다. 

1. 하나님의 말씀을 마음에 새기고 힘써 지키겠습니다.
2. 침묵하시는 하나님의 무서운 심판을 당하지 않도록 말씀에 귀 기울이겠습니다.
3. 말씀하시고 아버지의 뜻을 들려 주시니 그 말씀으로 힘을 얻고 승리하는 하나님의 자녀되게 하옵소서.

7144. 대머리(코르아흐. qorchâh) קָרְחָה 

1. 벗겨짐.  2. 머리의 정수리.  3. 머리의 앞부분
발음 [ qorchâh ]
어원 / 7139에서 유래
관련 성경 / 대머리(레 21:5, 겔 7:18, 미 1:16). [동] 대머리가 되다(렘 47:5, 48:37), 털을 밀다(신 14:1), 머리털을 밀다(겔 27:31)
구약 성경 / 11회 사용

7월 21일(금) 아모스 9장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범죄한 나라(8절)

보라 주 여호와 내가 범죄한 나라에 주목하여 지면에서 멸하리라 그러나 야곱의 집은 온전히 멸하지는 아니하리라 이는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Surely the eyes of the Sovereign LORD are on the sinful kingdom. I will destroy it from the face of the earth-- yet I will not totally destroy the house of Jacob," declares the LORD.

범죄한 나라(밤마믈라카 하핱타아.  בַּמַּמְלָכָה הַחַטָּאָה

2403. 범죄한(하타트. chaṭṭâʼth)  חַטָּאָת  

1. 죄.  2. 우상에 대해 적용되기도 함.  3. 속죄제
발음 [ chaṭṭâʼth ]
어원 / 2398에서 유래
관련 성경 / 죄(창 4:7, 레 4:3, 대하 6:25), 죄악(창 18: 20, 사 5:18), 속죄제(출 29:14, 민 15:27, 왕하 12:16), 속죄 제물(레 4:32, 민 8:8, 대하 29:23), 속죄 희생(레 4:25), 허물(레 5:6), 잘못(레 5:10, 11), 속죄(레 10:19, 민 8:7), 속건제(레 7:7), 번제(레 4:29), 죄악(시 32:5, 애4:6), 죄인(잠 5:22, 13:6), 벌(슥 14:19). [동] 범죄하다(느 1:6, 욥 35:3).
구약 성경 / 221회 사용

4467. 나라(맘라카. mamlâkâh) מַמְלָכָה 

1. 왕국.   2. 지배권. 3. 통치권
발음 / [ mamlâkâh ]
어원 / 4427에서 유래
관련 성경 / 나라(창 10:10, 민 32:33, 삼상 10:18, 암 6:2), 왕위(신 17:20, 대하 20:29), 만국(왕하 19:15, 스 1:2), 왕(왕하 11:1, 대하 22:10, 암 7:13), 왕국(시 46:6), 열방(사 23:11), 국왕(시 135:11), 국가(렘 18:7, 51:20).
구약 성경 / 117회 사용

아모스 9:1
내가 보니 주께서 단 곁에 서서 이르시되 기둥 머리를 쳐서 문지방이 움직이게 하며 그것으로 부숴져서 무리의 머리에 떨어지게 하라 내가 그 남은 자를 칼로 살륙하리니 그 중에서 하나도 도망하지 못하며 그 중에서 하나도 피하지 못하리라

* 319. 남은 자( 아하리트.  ’achărîyth) אַחֲרִית 

1. 마지막 부분.  2. 종말.  3. 장래
발음 / 아하리트[ ’achărîyth ]
어원/ 310에서 유래
관련 성경  /  후일(창 49:1, 민 24:14), 종말(민 23:10, 신 32:20, 사 46:10), 끝날(신 4:30, 겔 38:16), 마침내(신 8:16, 잠 23:32), 나중(욥 8:7, 잠 29:21), 자손(시 109:13), 마지막(잠 5:11, 단 8:23), 필경(잠 14:12, 19:20), 장래(잠 23:18, 24:20, 렘 29:11), 말일(사 2:2, 렘 23:20), 남은 자(겔 23:25, 암 4:2, 9:1), 자손(단 11:4). [동] 마치다 (단 8:19).
구약 성경 / 61회 사용

아모스 9:12
저희로 에돔남은 자와 내 이름으로 일컫는 만국을 기업으로 얻게 하리라 이는 이를 행하시는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 7611. 쉐에리트(sheʼêrîyth)  שְׁאֵרִית 

1. 나머지.  2. 남은 자.  3. 후손
발음 / 쉐에리트[ sheʼêrîyth ]
어원 / 7604에서 유래
관련 성경 / 남겨둔 것(렘40:11), 남은 자(렘44:7, 50:26,왕하21:14, 사15:9, 암5:15), 나머지(느7:72, 사44:17), 기타(렘39:3). [형] 남아 있는(삼하14:7, 렘8:3, 겔36:5), 남은(스9:14, 겔36:3, 습2:9).
구약 성경 / 66회 사용


'에돔의 남은 자'란 1:11,12에서 심판을 받은 자들과는 달리 그 심판에서 구원받고 보존된 자들을 가리킨다.
아마 이들은 '내 이름으로 일컫는 만국'이란 말과 비교해 볼 때,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은 자, 즉 믿음을 갖고 하나님께 돌아온 자들을 가리키는 듯하다(F. Keil).
그리고 '내 이름으로 일컫는 만국'도 역시 같은 의미로서 하나님의 품에 돌아온 자들, 곧 구원받은 무리들을 지칭하는 듯함.


'남은 자'(שאר, λειμμα, λοιπος, remnant) 사상

  성경은 하나님의 구원역사 측면에서 보면 하나님의 구원계획 실현과 사탄의 방해라는 줄거리 로 되어 있는데 그 줄거리에는 항상 ‘남은 자’가 있습니다. ‘남은 자’는 히브리어로 ‘쉐아르’(שאר)라고 하고, 헬라어로는 ‘레임마’(λειμμα) 혹은 ‘로이포스’(λοιπος)라고 하고, 영어로는 ‘렘넌트’(remnant)라고 합니다.
‘남은 것’ ‘남은 자’라는 뜻입니다.

구약시대 노아 때에도 세상 모든 사람이 타락하여 물로 심판 받아 모두 죽게 된 가운데서도 의로운 노아와 그 식구들이 살아남아 있었습니다 (창 6:6-8, 눅 17:26-27, 벧전 3:20).

롯 때에도 소돔성이 사람들이 타락하여 불로 심판받아 모두 죽게 된 가운데서도 의로운 롯과 그 식구들은 살아남아 있었습니다(창 19:29, 눅 17:28-29).

아합왕 때에도 북이스라엘이 아합왕과 이세벨의 학정으로 모든 사람이 우상을 숭배하고 많은 신앙인들이 숙청당하는 가운데서도 우상숭배에 굴복하지 않고 살아남은 엘리야와 7,000명은 살아남아 있었습니다(왕상 19:18, 롬 11:2-5).

포로기에도 이스라엘 백성과 유다 백성들이 우상숭배로 앗수르와 바벨론에 멸망한 가운데 사로잡혀간 자들 중에 하나님에 대한 유일 신앙을 가진 자들이 살아남아 있었습니다(사 6:13, 10:20, 11:10-12, 렘 23:1-4, 31:7-8, 단 1:8-9).

하나님은 음란과 우상숭배로 타락했을 때 심판을 하면서도 언제나 신앙공동체를 다시 일으키기 위해 신실한 신앙을 가진 ‘남은 자’를 남겨두셨던 것입니다.

요엘 선지자는 신약시대에도 ‘남은 자’가 있을 것을 예언했습니다.
요엘 2:32에 “누구든지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니 이는 나 여호와의 말대로 시온 산과 예루살렘에서 피할 자가 있을 것임이요 남은 자 중에 나 여호와의 부름을 받을 자가 있을 것임이니라”고 했습니다(욜 2:28-32, 행 2:1-21).

사도 바울은 신약시대에도 남은 자가 있다고 했습니다.
로마서 11:5에 “그런즉 이와 같이 지금도 은혜로 택하심을 따라 남은 자가 있느니라”고 했습니다(롬 9:27, 29).
사도 요한은 종말에도 남은 자가 있다고 했습니다.
요한계시록 12:17에 “용이 여자에게 분노하여 돌아가서 그 여자의 남은 자손 곧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며 예수의 증거를 가진 자들과 더불어 싸우려고 바다 모래 위에 서 있더라”고 했습니다(계 6:6).

구약시대에 모두가 우상숭배에 빠지고 앗수르와 바벨론에 멸망하여 사로잡혀 간 가운데서도 하나님에 대한 신앙을 포기하지 않은 자들이 남아 있었고 그들이 돌아와 이스라엘의 신앙을 회복시키고 부흥시켰습니다.

신약시대에 모두가 영적으로 침체되어 로마의 박해 가운데 있을 때 하나님에 대한 신앙을 가진 예수님의 제자들이 남아 있었고 그들이 성령의 충만하여 초대교회를 세우고 확장시켰습니다.

그처럼 종말에도 사탄의 온갖 핍박과 유혹에도 신앙을 지키는 자들이 살아남아 하나님 나라를 이룰 것이라는 것입니다.

사탄이 그것을 알기 때문에 참 생명력을 가진 ‘여자의 남은 후손들’ 곧 ‘남은 자’와 더불어 마지막 일전을 벌이기 위해 바다 모래 위에 선 것입니다. ‘바다 모래 위’는 용이 여자의 남은 자손과 싸우는 장소라기보다는 용이 여자의 남은 자손과 싸우기 위해 여자의 남은 자손을 공격하게 할 짐승을 부르는 장소라 할 수 있습니다. 13장에 보면 두 짐승이 나옵니다. 1-10절에는 바다에서 일곱 머리와 열 뿔이 달린 짐승이 나오고 11-18절에는 땅에서 두 뿔을 가진 짐승이 올라옵니다. 용이 그 두 짐승을 이용하여 여자의 남은 자손들을 적극적으로 공격합니다. ‘용’은 사탄을 상징하고, ‘바다에서 나온 열 뿔 달린 짐승’은 적그리스도를 상징하고, ‘땅에서 올라온 두 뿔 가진 짐승은 거짓그리스도와 거짓선지자를 상징합니다. 적그리스도는 기독교를 박멸하려는 정치지도자들을 의미하고 거짓그리스도와 거짓선지자는 기독교를 타락시키는 종교지도자들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은 마지막 때에 모든 사람들이 타락한 가운데서도 하나님 나라를 세울 자들을 남겨 놓습니다. 사탄은 그들이 구원역사에 생명력을 가진 자들이라는 사실을 알기 때문에 마지막으로 그들을 굴복시키기 위해 적그리스도와 거짓선지자들을 앞세워 공격을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이른바 ’남은 자‘들은 결코 그들에게 굴복하거나 미혹당하지 않고 신앙을 지킵니다.

   남은 자들은 증거를 가지고 계명을 지키는 자들입니다. 요한계시록12:17에 “~그 여자의 남은 자손 곧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며 예수의 증거를 가진 자들과~”라고 했습니다. ‘여자의 남은 자손’ 곧 이른바 ‘남은 자손’은 어떤 성격을 가진 자들이냐면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며 예수의 증거를 가진 자들’입니다. ‘예수의 증거를 가진 자들이며 하나님의 계명을 가진 자들’인 것입니다. ‘예수의 증거를 가진 자’라는 말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 구원자로서 자기 백성들을 구원하기 위해 십자가에 죽으셨다가 다시 살아나셔서 승천하신 분인 것을 믿는 믿음을 굳게 지키는 자들을 말합니다. 예수님이 구주인 것을 믿는 믿음을 가지고 양보하지 않는 자들을 말하며 예수님이 구주인 것을 증언하기를 두려워하거나 포기하지 않는 자들을 말합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예수님이 주되심을 부인하지 않는 자들입니다. ‘하나님의 계명을 지킨 자’라는 말은 하나님의 계명을 철저히 지키는 자를 말합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하나님의 계명을 양보하지 않고 지키는 자들입니다. 이들은 사탄이 이용하는 적그리스도의 박해와 거짓 선지자들의 유혹 속에서도 예수님을 부인하지 않고 하나님 계명을 지키는 자들입니다.

  ​

  종말에 그런 자들이 하나님께 쓰임받게 됩니다. 요한계시록11:3에 “내가 나의 두 증인에게 권세를 주리니 그들이 굵은 베옷을 입고 천이백육십 일을 예언하리라”고 했습니다 (11:5-6). 그리고 하나님 나라에서 주님과 함께 왕 노릇하며 영광을 누립니다. 요한계시록20:4에 “또 내가 보좌들을 보니 거기에 앉은 자들이 있어 심판하는 권세를 받았더라 또 내가 보니 예수를 증언함과 하나님의 말씀 때문에 목 베임을 당한 자들의 영혼들과 또 짐승과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지 아니하고 그들의 이마와 손에 그의 표를 받지 아니한 자들이 살아서 그리스도와 더불어 천 년 동안 왕 노릇 하니”고 했습니다 (14:12).

   지금 신약 복음시대에도 남은 자가 있습니다. 로마서11:5에 “그런즉 이와 같이 지금도 은혜로 택하심을 따라 남은 자가 있느니라”고 했습니다. 그 남은 자는 교회 회복과 부흥을 위해 준비된 자들입니다. 그 목적 때문에 하나님이 환난 가운데서도 보호하고 원하시는 때에 영적 권세를 주어 사역을 감당하게 합니다. 그들의 특징은 예수님의 증거를 가지고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는 자입니다. 어떤 상황과 형편과 처지에서도 예수 믿는 믿음을 양보하지 않으며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는 것을 양보하지 않는 자입니다. 우리가 모두 힘든 가운데 있지만 남은 자답게 살아야 합니다. 그 신실한 신앙을 나타내는 것이 우리가 하나님께 쓰임 받을 목적 하에 있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고 하나님이 그 목적 때문에 우리를 어떤 상황에서도 지키신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특별한 보호 속에 있는 남은 자들<쉐아르- שְׁאָר‎>

“남은 자 곧 야곱의 남은 자가 능하신 하나님께로 돌아올것이라”(사 10:21)
“저에게 하신 대답이 무엇이뇨 내가 나를 위하여 바알에게 무릎을 꿇지 아니한 사람 칠천을 남겨 두었다 하셨으니”(롬 11:4)
“남은 자는 예루살렘에서부터 나올 것이요 피하는 자는 시온산에서부터 나오리니 여호와의 열심이 이 일을 이루리라 하셨나이다”(왕하19:31)

“남은 자”를 히브리어로 <쉐아르- שְׁאָר‎>라고 합니다.
영어로 <렘넌트- Remnant> 라고 합니다.
“남다, 남겨지다”의 <샤아르>에서 파생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 땅의 죄악을 심판하실 때, 보호 받는 자를 의미합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 믿음이 있는 자를 뜻합니다. 소돔과 고모라를 불로 심판하실 때, 롯과 두 딸이 남은 자가 되었습니다. 노아의 시대 때, 홍수로 심판 하실 때, 노아와 그의 아들들이 남은 자가 되었습니다. 애굽에서 열 가지 재앙으로 심판하실 때, 고센 땅에 머물며 하나님을 경외했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남은 자가 되었습니다. 엘리야 시대 때, 바알과 아세라 신상에 절하지 않고 하나님을 경외했던 칠천명이 남은 자가 되었습니다.

“남은 자”는 하나님의 약속을 신뢰하는 영혼들입니다. 오직 하나님만을 바라 보는 사람들입니다. 세상과 구별 되는 삶을 사는 자들입니다. 하나님을 끝까지 믿는 영혼이 남은 자입니다. 그 어떤 일이 있더라도 오직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신뢰하는 영혼들입니다. 그 “남은 자”는 하나님을 깊이 만나게 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으로 충만하게 될 것입니다. 온 마음으로 하나님을 따르는 영혼들입니다.

<남은 자>는 하나님의 특별한 섭리 속에서 보호를 받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의 강력한 손이 함께 하는 영혼들입니다. <남은 자>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을 고백하는 사람들입니다.



'남은 자' 사상에 대하여

[라이프성경사전]

하나님께서 죄인을 벌하실 때 심판받지 않고 살아남은 소수의 사람을 가리킨다.
이런 자들은 고난과 역경 중에서도 죄악 된 세상과 짝하지 않고 끝까지 하나님의 언약을 믿고 역경을 견디며 믿음의 승리를 이룬 자들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이런 소수의 의로운 자들을 남겨 두시는 이유는, 일차적으로 이들의 구원에 목적이 있지만 한 걸음 더 나아가 이들 의로운 자들을 통해 당신의 구속 역사를 계속해서 이루어 가시려는 데 그 궁극적 목적이 있다.

이스라엘 역사 가운데 대표적 실례를 살펴보면,

1. 대홍수 가운데서 살아남은 노아의 가족(창 6:5-8).
2. 바로의 남아 대학살에서 살아남은 모세(출 2장).
3. 출애굽 1세대로서 광야에서 살아남은 여호수아와 갈렙(민 14:29-30).
4. 아합의 여호와 신앙 말살 정책 때 바알에게 무릎을 꿇지 않은 7천 명의 성도(왕상 19:18).
5. 남유다가 바벨론에 멸망당할 때 하나님께서 남겨 두신 자(사 10:20; 미 2:12-13) 등이다.

사도 바울은 환난과 역경 중에도 끝까지 믿음을 지키며 구원을 대망하는 자를 가리켜 ‘남은 자’로 정의했다(로마서 9:27).

이사야가 이스라엘에 관하여 외치되 이스라엘 자손들의 수가 비록 바다의 모래 같을지라도 남은 자만 구원을 받으리니.

그러나 이 모든 것은 사람의 능력이 아닌 오직 하나님의 구원하시는 은혜로써만 가능하다.

[교회용어사전]

고통과 재난 가운데서 살아남은 자(레 26:36; 민 24:19). 특히, 하나님께서 죄인을 벌하실 때에 멸망치 않고 살아남은 소수의 사람을 가리킨다(사 10:20; 렘 31:7).

이사야 10:20-21 / 남은 자야곱남은 자가 능하신 하나님께로 돌아올 것이라.  
에 이스라엘의 남은 자야곱 족속의 피난한 자들이 다시는 자기를 친 자를 의지하지 아니하고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이 여호와를 진실하게 의지하리니.





이런 자들은 고난 중에도 죄악과 짝하지 않고 끝까지 하나님을 의지해 믿음의 승리를 이룬 자들이다.

하나님께서 이런 자를 남겨 두신 일차적인 목적은 이들의 구원에 있지만, 궁극적으로 이들을 통해 구속 역사를 이루어 가시려는 데 그 목적이 있다.

창 6:5-8; 출 2장; 민 14:29-30; 왕상 19:18; 사 10:20-22; 미 2:12-13).
참고로, 사도바울은 환난 중에도 끝까지 믿음을 지키며 구원을 대망하는 자를 '남은 자'로 정의했다.(로마서 9:27)

[두산백과사전]

남은 자 사상 요약 : 하나님이 죄인을 벌하는데, 그 중에서도 소수자를 남겨 구원과 축복의 담당자로 함을 자각하고 있는 자.
헤브라이어로는 아하리스, 예세르, 펠레타(피한 자) 등이다.
하나님이 자유로운 은혜로서 심판을 면케 하고 심판에 제한을 가하는 일을 보여주고 있다.

첫째, 정치적, 군사적 재난으로부터 살아남은 자들을 일컫는다.

《여호수아서》 13장 12절에 “곧 르바의 남은 족속으로서 아스다롯과 에드레이에 도읍하였던 바산 왕

옥의 온 나라라 모세가 이 땅의 사람들을 쳐서 쫓아내었어도”로 나타나 있는데, 여기서 남은 족속을 이야기한다.

둘째, 하나님의 심판에서 살아남아 하나님의 새로운 백성의 싹이 되는 이스라엘의 영적인 것을 나타낸다.

즉 하나님께서 남은 자를 허락한 것이다.
《이사야》 1장 9절에 “만군의 여호와께서 우리를 위하여 조금 남겨두지 아니하셨더면 우리가 소돔 같고 고모라 같았으리로다”고 하여 하나님이 남은 자를 허락하였음을 나타낸다.

남은 자가 하나님께 돌아오게 된다는 것을 구약성서 《이사야》 10장에 “그날에 이스라엘의 남은 자와 야곱 족속의 피난한 자들이 다시는 자기를 친 자를 의뢰치 아니하고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자 여호와를 진실히 의뢰하리니 남은 자 곧 야곱의 남은 자가 능하신 하나님께로 돌아올 것이라”고 하여 남은 자가 하나님께 돌아오리라고 하였다.

그리고 하나님이 남은 자를 모으고, 남은 자는 회개하게 된다.
《예레미야》 31장 9절에 “울며 올 것이며 그들이 나의 인도함을 입고 간구할 때에 내가 그들로 넘어지지 아니하고 하숫가의 바른 길로 향하게 하리라 나는 이스라엘의 아비요 에브라임은 나의 장자니라”고 하였다. 하나님이 남은 자를 긍휼히 여기고 남은 자는 여호와를 의탁하여 보호받게 된다.

남은 자는 순결한 자들이 되고 평화와 번영을 누리게 된다.

남은 자가 받는 축복은 “그들은 내 백성이 되겠고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될 것이며 내가 그들에게 한 마음과 한 도를 주어 자기들과 자기 후손의 복을 위하여 항상 나를 경외하게 하고(예레미야 32:38~39)”로 나타나 있다. 스바냐에 따르면 남은 자는 겸비하여 주를 찾는 자이고 남은 자를 창조하는 것은 하나님의 역사이다. 신약성서의 이 개념은 바울로의 구원론에 중요한 역할을 한다.

[Holynet]

‘남은 자’는 히브리어로 ‘쉐어리트’(tyrav)입니다.
‘남다’, ‘뒤에 남겨지다’라는 뜻의 ‘솨아르’(rav)에서 파생된 ‘쉐어리트’는 ‘잔류자’의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솨아르’는 벌목 후에 남아 있는 나무나 그 나무의 그루터기(사 6:13; 10:19) 등을 가리킬 때 사용됩니다.
성경에서는 하나님의 주권적인 간섭에 의해 심판을 받고 남은 자, 혹은 남은 민족, 남은 땅을 비유할 때 주로 사용되었습니다(사 15:9; 렘 47:4,5; 겔 25:16).

‘쉐어리트’는 하나님 심판의 엄중함을 표현하며, 심판 속에서도 생명을 살리시는 하나님의 자비하심을 나타내는 두 가지 성격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즉, 이러한 ‘남은 자’ 사상은 ‘오직 남은 자’만이 돌아올 수 있다는 경고의 의미와 하나님께서는 자신이 택한 백성을 절대로 멸하시지 않는다는 소망의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결국 ‘남은 자’란 하나님께서 죄인을 벌 하실 때에 그 중에서 몇명을 남겨 구원과 축복을 베푸시는 데, 그것을 아는 자를 말하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보여지는 ‘남은 자’에는 광야 생활에서 살아 남아 약속의 땅에 들어간 자들, 앗수르의 강제 이송에서 탈출한 북이스라엘 왕국의 백성들(대하 30:6; 34:9), 바벨론 포로에서 풀려나 유다로 되돌아 온 자들(학 1:12; 슥  8:6  참조; 느 1:2-3), 이방 여러 나라들로부터 다시 이스라엘로 되돌아 오게 된 자들(사 11:11; 미 2:12) 등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은혜로 심판을 면케 하시거나, 심판을 하시는 일을 보여주고 계십니다. 이렇게 남은 자를 만드시는 것은 하나님의 일하심 속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성도들은 심판 중에서도 회복을 약속하시며, 그 약속을 반드시 이루시는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아모스서 9장은 다섯 번째 문설주 환상과 이스라엘의 회복에 대한 말씀입니다.
아모스 선지자는 말씀의 기근과 함께 이스라엘에 대한 최종적 심판이 임할 것임과 동시에 한편으로는 다윗의 무너진 천막이 회복될 것이라고 밝히면서 끝을 맺습니다.
이것은 이스라엘이 멸망당해도 하나님의 주권적인 역사는 계속될 것임을 보여 주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이스라엘의 심판의 흐름 속에서도 '남은 자'를 통한 하나님의 구원의 확신이 조금도 흔들리지 않는다는 것을 깨우칩니다.
9:1-6. 성전 파괴에 대한 환상과 하나님에 대한 찬양
9:7-10. 이스라엘에 대한 최종적 심판에 대한 예언
9:11-15. 다윗의 무너진 천막의 회복을 통하여 하나님의 약속을 제시 

아모스는 다섯번째의 환상인 부서지는 문설주를 보았습니다.
이는 이스라엘의 완전한 멸망을 선포하는 환상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멸망 속에서도 하나님은 남은 자들에게 구원의 길을 베풀어주시리라 약속하셨습니다.
그리고 메시야 왕국이 도래하는 그날에 무너진 이스라엘의 장막을 회복시켜 주신다고 약속해 주셨습니다.
이는 곧 메시야를 통한 하나님 나라의 완성을 예고하는 것입니다.


대부분의 선지자가 그러했듯이 아모스 선지자도 줄곧 심판을 예언하면서도 하나님께서는 남은 자를 통하여 다시 회복하실 것을 여러 선지자들을 통하여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곧 하나님의 구원 역사가 이스라엘의 남은 자를 통하여 계속해서 이루어질 것을 의미합니다.
또한 이와 같은 사상은 결국 다윗의 왕권을 이어받은 메시야를 통하여 하나님의 구원 역사가 완전히 이루어질 것임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와 같은 의미에서 볼 때 남은 자는 하나님의 구원 계획에서 그루터기로 존재합니다.
그런데 이 남은 자는 단순히 이스라엘의 민족적 의미에서 살아 남은 자를 가리키는 것만이 아닙니다.
오히려 남은 자들이란 이스라엘의 타락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신앙을 끝까지 지킨 자들입니다.
또한 이들조차도 그들 스스로의 힘으로 남은 자가 아니라 심판의 와중에서 하나님의 은혜로 남겨진 자들입니다.
이스라엘의 남은 자 사상은 이스라엘 백성에 대한 하나님의 주권적인 능력과 더불어 풍성한 하나님의 은혜에 대해 깨닫게 합니다.
죄악으로 인해 하나님의 백성들은 고통을 겪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모든 나라와 백성 위에 뛰어나며 이 땅 위에 주의 백성과 함께 임재하심으로써 주의 백성들을 끝까지 인도하십니다.
세상이 주는 환난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자신의 믿음을 지키는 자는 최후의 승리를 보장받을 수 있습니다.

죄악이 관영하여 가고 온갖 죄의 유혹이 밀려오는 세상에서 성도들이 자신의 신앙을 지킨다는 것은 매우 힘든 일입니다.
더욱이 당장 눈앞에 보이는 세상적인 풍요에서도 성도들은 오히려 손해를 보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서 많은 성도들이 때때로 자신의 믿음을 포기하고 싶은 생각을 가진다. 그러나 그럴 때일수록 성도들은 자신의 믿음을 더욱 굳건히 하여야 한다. 이스라엘의 멸망 가운데서도 신앙의 순결을 지닌 자들을 남기시고 그들을 통하여 이스라엘의 회복을 이루신 하나님께서 오늘날 죄악의 세상에서도 하나님의 자녀로서 순결을 지킨 성도들에게 마지막 심판을 통해 승리의 기쁨과 영원한 구원의 면류관을 주시기 때문이다. 바로 현재의 고난은 장차 올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는 것이다. 

하나님이 무소부재(omnipresent)하시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요?

접두사 omni- 는 “모든”을 의미하는 라틴어에서 온 말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무소부재하시다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어디에나 존재하신다는 말입니다.
많은 종교에서 신은 무소부재하다고 간주하지만, 유대교와 기독교에서는 이러한 관점이 하나님의 초월성과 내재성으로 세분화됩니다. 하나님은 창조물의 모든 결마다 스며있지는(범신론) 않으시지만, 어디에서 항상 계십니다.

비록 어디에서든지 같은 시간 같은 방법으로 사람들에게 나타나시지는 않지만, 모든 창조물을 통하여 하나님께서는 지속적으로 존재하십니다.
때때로 어떤 상황에서는 하나님께서 적극적으로 당신을 나타내실 수도 있지만, 다른 지역 다른 환경에서는 당신의 존재하심을 드러내지 않으실 때도 있습니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분명한 방법으로 한 사람에게 나타나실 수도 있고(시편 46:1; 이사야 57:15) 상황에 따라 어떤 주어진 시간에 모든 창조물들에게 나타나실 수도 있다고 알려줍니다(시편 33:13-14).

하나님께서는 시공의 모든 영역에 무소부재의 방식으로 존재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시간과 공간 속에 존재하시지만, 그렇다고 어떤 시간이나 공간에만 지협적으로 제한을 받으시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어디에나 또 매순간의 현재마다 계십니다.
어떤 분자와 원자 입자도 하나님께서 온전히 존재하시기에 너무 작다 할 수 없으며, 어떤 은하계도 하나님께서 제한하시기에는 너무 광대하다 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만일 창조물을 제거하려고 한다면, 하나님께서는 모든 가능성들까지도 알고 계시므로 그 일이 실제로 일어나든 그렇지 않든 간에 여전히 알고 계실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연히 사물의 모든 자연적 질서 안에, 모든 방법, 모든 시간과 장소 안에 존재하십니다(이사야 40:12; 나훔 1:3).
하나님께서는 인간 사건의 안내자로서 역사 속의 모든 사건마다 다양한 방식으로 적극적으로 존재하십니다(시편 48:7, 2; 역대하 20:37; 다니엘 5:5-6).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이름을 부르는 자들, 다른 이들을 위해 탄원하는 자들, 하나님을 사모하는 자들, 간청하는 자들, 죄 사함을 받기 위해 진정으로 기도하는 자들에게는 특별히 세심한 방법으로 존재하십니다(시편 46:1).
더할 나위 없이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아들 된 자,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존재하시며(골로새서 2:19), 지상을 덮고 있으며 지옥 문이 이기지 못할 온 교회들 안에 신비롭게 존재하십니다.

인간 정신의 한계로 인해 하나님의 전지하심이 역설적인 질문들에 시달리듯이, 하나님의 무소부재하심도 그렇습니다.
이러한 역설 중 한 가지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즉 지옥에도 하나님이 계신가 하는 것입니다.
지옥은 악인이 가는 곳으로, 악인들이 자신들의 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무한하고 끝없는 분노 아래 고통 받는 장소입니다.
많은 이들이 지옥은 하나님과 분리된 장소라고 주장합니다(마태복음 25:41).
만약 그렇다면 하나님이 당신과 분리된 곳에 존재할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그러나 요한계시록 14:10이 어린양 앞에서 고난 받는 악인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처럼, 지옥에 있는 악인은 하나님의 영원한 분노를 견뎌야 합니다.
악인을 따로 떼어 놓은 곳에 하나님께서 계시다니 좀 놀랍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만물을 당신의 존재로 채우시며(골로새서 1:17) 당신의 능력의 말씀으로 만물을 붙드시기 때문에(히브리서 1:3), 위의 역설은 하나님께서 존재하시되 반드시 축복해야 할 곳에만 존재하시지는 않는다는 사실로 설명될 수 있습니다.

때때로 하나님께서 죄로 인해 당신의 자녀들과 떨어져 계신 것처럼(이사야 52:9), 악인을 멀리 하시고(잠언 15:29) 마지막 때에는 어둠에 매여 있는 불신자들에게 영원한 형벌이 가해지는 곳으로 가라고 명령하시지만, 하나님은 여전히 그 가운데에 계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지금 지옥에 있는 영혼들이 어떻게 고통 당하는지 아십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영혼들이 자신들이 처한 영원한 상태로 인해 괴로워하고, 구원을 바라며 울부짖고, 눈물 흘리고 슬퍼하는 것을 아십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그들의 죄, 즉 죄가 없었다면 그들이 누렸을지도 모를 모든 축복으로부터 깊은 단절을 만든 그 죄를 끊임 없이 상기시켜 주시는 자로서 언제나 그곳에 존재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그곳에 항상 존재하시지만, 진노 외에 어떤 속성도 보여주시지 않습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는 또한 천국에도 존재하시며, 우리가 여기서는 감히 이해할 수 조차 없는 모든 축복들을 보여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여러 가지 모양의 축복, 여러 가지 모양의 사랑, 여러 가지 모양의 친절, 그야말로 진노 외에 그 모든 것을 보이시며 천국에 계실 것입니다.
하나님의 무소부재하심은 우리가 죄를 지었을 때 하나님으로부터 숨을 수 없다는 사실을 상기시켜 주기도 하지만(시편 139:11-12), 우리가 움직이지 않고도 그 자리에서 회개하고 믿으면 하나님께 돌아갈 수 있다는 의미도 됩니다(이사야 57:16).


무소부재하신 하나님 (시 139:7-18)

여러분이 믿는 하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뜬금없는 질문 같지만 굉장히 중요한 이야기입니다.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아느냐 모르느냐, 안다면 얼마나 많이 아느냐에 따라 신앙의 컬러와 수준이 달라집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아는 만큼, 그리고 믿는 만큼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 인간인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을 알 수 있습니까? 
시조 아담의 타락 이후 모든 인간은 죄로 말미암아 무지해져서 하나님을 볼 수도 없고, 알 수도 없습니다. 
그런데 다행히 하나님을 알 수 있는 방법이 딱 하나 있습니다. 
‘계시’(啓示 Revelation)를 통해서입니다. 
계시는 하나님이 비밀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계시를 의미하는 ‘revelation’은 ‘보여주다’ ‘드러내다’를 의미하는 ‘reveal’에서 유래했습니다. 
그러니까 우리 인간은 하나님이 보여주시는 만큼만 알 수 있는 겁니다. 

이런 계시를 기록해 놓은 게 성경입니다. 
우리는 성경을 통해서 하나님을 알고, 그만큼 신앙생활을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기독교를 ‘계시종교’라 부르는 겁니다. 
반대로 다른 종교들은 ‘자연종교’입니다. 
자연종교는 인간의 이성을 통해 신을 찾습니다. 
인간이 이성을 갖고 있지만 영적으로 무지한데 어찌 하나님을 알 수 있겠습니까? 

물론 성경 계시를 통해서 하나님을 완전히 알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부분적으로 알 뿐이죠. 
하지만 성경 계시를 통해 최대한 하나님을 알아가는 게 중요합니다. 
하나님을 안다는 것은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속성(屬性 Attribute)을 아는 겁니다. 
하나님의 속성은 크게 두 가지로 분류됩니다. 
공유적 속성(共有的 屬性 Communicable Attribute)과 비공유적 속성(非共有的 屬性 Incommunicable Attribute)입니다. 

공유적 속성이란 하나님의 속성 중에서 인간과 공유되는, 다시 말하면 인간에게도 부분적으로 나눠주신 속성입니다. 
예를 들면, 지혜, 선, 사랑, 거룩, 의 등입니다. 
하나님만큼은 아니지만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되었기 때문에 하나님을 닮은 이런 속성들을 조금씩 갖고 있는 것입니다.

비공유적 속성은 인간에게는 없고, 오직 하나님에게만 있는 속성을 말합니다. 
인간이 공유할 수 없는 속성이죠. 
비공유적 속성은 자존성, 불변성, 무한성 등입니다. 
무한성의 속성에 해당되는 게 여럿 있죠. 영원성이나 전지전능(全知全能 Omniscience and Omnipotence)도 무한성입니다. 
그런데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이 언제 어디에나 계십니다. 
이런 속성을 가리켜 ‘편재’(遍在 Omnipresence/Ubiquity) 혹은 ‘무소부재’(無所不在)라고 부릅니다. 

전지전능한데다 무소부재하신 하나님! 얼마나 놀라운 분이십니까? 
그런 분이 바로 우리의 아버지 하나님이십니다. 
이런 하나님을 믿고 산다는 게 얼마나 복되고 아름다운지 모릅니다. 
본문 시편 139편은 다윗이 지은 시편인데, 전지전능하실 뿐 아니라 무소부재하신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저와 여러분도 이런 하나님을 만나시고 체험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험한 세상 살지만, 무소부재하신 하나님을 통해 승리하는 복된 인생 되시기 바랍니다! 

무한하신 하나님 : 전지전능, 무소부재

본문을 보면, 다윗은 먼저 자신이 체험한 하나님의 속성을 노래합니다. 
이미 말씀드린 대로 무한하신 하나님, 전지전능하신 하나님, 무소부재하신 하나님입니다. 
시편 139:2~4 
“2 주께서 내가 앉고 일어섬을 아시고 멀리서도 나의 생각을 밝히 아시오며 3 나의 모든 길과 내가 눕는 것을 살펴보셨으므로 나의 모든 행위를 익히 아시오니 4 여호와여 내 혀의 말을 알지 못하시는 것이 하나도 없으시니이다” 

하나님은 우리 인간의 언행심사, 일거수일투족을 전부 알고 계십니다. 
내 생각조차, 심지어 입을 뻥끗도 하지 않았는데 말 할 것을 미리 아십니다. 전지하신 하나님이시죠. 

13절~14절을 보면 또 하나님을 어떤 분으로 노래합니까? 
창조주 하나님! 
“13 주께서 내 내장을 지으시며 나의 모태에서 나를 만드셨나이다 14 내가 주께 감사하옴은 나를 지으심이 심히 기묘하심이라 주께서 하시는 일이 기이함을 내 영혼이 잘 아나이다” 

하나님이 인간의 오장육부를 만드셨는데 인체가 얼마나 신비롭습니까? 
의학의 발달로 인공 심장, 인공 혈액, 시험관 아기, 복제 인간, ... 별의 별 이야기가 나오고 있지만, 하나님 앞에서는 흉내 내는 수준에 불과하죠. 오직 창조주 하나님만이 전능하십니다. 

그런데 이렇게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이 언제 어디에나 존재하신다는 사실입니다. 
편재! 무소부재! 
다윗은 하나님의 무소부재하심을 7절~8절에서 노래합니다. 
“7 내가 주의 영을 떠나 어디로 가며 주의 앞에서 어디로 피하리이까 8 내가 하늘에 올라갈지라도 거기 계시며 스올에 내 자리를 펼지라도 거기 계시니이다” 인간은 본질상 죄인입니다. 그래서 거룩하신 하나님을 피하려는 본능이 있습니다. 

창세가 3장을 보면, 아담이 타락한 후 하나님을 피해 숨어버리지 않습니까? 그러나 아무리 피하려고 해도 피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십자가 피로 속죄의 은혜를 받고 하나님과 친밀한 관계를 맺는 게 최선입니다. 그럴 때 비로소 하나님의 부드러운 손길과 따스한 시선을 느낄 수 있습니다. 그 사랑의 힘으로 우리가 승리하며 살아가게 됩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하나님의 손길과 시선이 부담스럽습니까? 피하고 싶습니까? 아니면 반갑고 좋습니까? 당연히 반갑고 좋아야 합니다. 그게 그리스도인의 마땅한 모습입니다. 부디 언제 어디서나 우리와 함께 하시는 무소부재하신 하나님과 동행하며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무소부재하신 하나님의 역사 : 인도, 보호, 감찰

무소부재하신 하나님은 우리와 함께 하면서 여러 가지로 역사들을 행하십니다. 본문에 나타난 3가지를 소개해 드리죠. 

1. 인도 :

무소부재하신 하나님은 우리의 인생길을 인도해 주십니다. 9절~10절(상). “9 내가 새벽 날개를 치며 바다 끝에 가서 거주할지라도 10 거기서도 주의 손이 나를 인도하시며 ... ” 

비유법인데, 새벽에 동녘에 해가 떠오를 때 햇살이 얼마나 강렬합니까? 그 빛이 빠른 속도로 가는 것처럼, 아무리 빨라 바다 끝으로 가버린다 해도 하나님은 이미 그곳에 계시며 그의 손으로 나를 인도하십니다. 우리가 아무리 도망가도, 아무리 멀어진 것 같아도 하나님의 손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12절. “주에게서는 흑암이 숨기지 못하며 밤이 낮과 같이 비추이나니 주에게는 흑암과 빛이 같음이니이다” 무슨 말인가요? 하나님에게는 어둠이나 빛이나 마찬가지라는 겁니다. 왜냐하면 하나님 자신이 빛이기 때문에 어둠 속에서도 우리를 다 찾아내십니다. 

군대에서 사용하는 장비 중 야간 투시경이 있습니다. 야간 사격이나 수색할 때 사용하는 것으로 어둠 속에서도 신기하게 사물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야간 투시경보다 더 확실하게 우리 인생을 인도해 주십니다. 앞이 캄캄해도 복된 길로 인도해 주십니다. 

물론 그렇다고 항상 우리의 인생길이 탄탄대로인 것은 아닙니다. 때로는 힘들고 어려운 길을 걸어가야 할 때도 있습니다. 왜요? 두 가지 이유 때문입니다. 하나는 우리의 죄악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자유의지를 주셨는데, 그만큼 우리를 존중해 주시는데, 우리가 범죄하면 길을 막으십니다. 때로는 매를 드십니다. 두번째 이유는 우리를 정금처럼 귀한 사람으로 연단하시기 위함입니다. 욥23:10 “그러나 내가 가는 길을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순금 같이 되어 나오리라”

탈북자 피아니스트 김철웅 교수(한세대)의 간증입니다. 그는 북한에서 당 간부 자제로 8세에 뽑혀 평양 음대에서 피아니스트로 훈련 받았습니다. 대학 졸업 후에는 러시아 유학까지 갔습니다. 유학 시절 한 카페에서 음악을 들은 게 인생의 전환점이 됐습니다. 재즈 피아노곡인 리차드 클레이더만의 「가을의 속삭임」이었는데, 청춘의 마음을 흔들어놓았습니다. 유학을 마친 후 북한에 돌아갔는데, 음악에 많은 제한을 받기 시작합니다. 

평양국립교향악단에서 「가을의 속삭임」을 연주한 게 문제가 되어 시말서를 쓰고 금지 조치를 당했습니다. 실제로 북한 당국은 20세기 이후 음악은 불순하다며 19세기 이전 음악만 연주하도록 제한하고 있다고 합니다. 고민 끝에 중국으로 탈북을 결행합니다. 탈북 후 여러 가지로 어려웠지만 무엇보다 피아노를 칠 수 없는 게 큰 고통이었습니다. 그런데 북한에 있을 때 극동방송을 몇 번 들은 기억이 있는데, 교회에 가면 피아노를 칠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교회를 찾아갔고 한국인 선교사를 만납니다. 선교사 도움으로 한국행을 시도했으나 공항에서 체포되어 공안에 끌려가 취조를 당하고 북한으로 압송됩니다. 도중에 탈출하고, 또 잡히고 ... 이렇게 여러 번 반복하다가 마침내 북한으로 압송됐습니다. 그런데 취조 도중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가 나타납니다. 수사관이 묻습니다. 너 아무개 아냐? 평양 음대 출신 맞지? 아버지가 아무개지? 그래서 이젠 모든 신원이 밝혀졌으니 죽었구나 싶었습니다. 수사관이 자기가 최근에 전근 왔다며, 아버지의 후배인데 과거에 은혜를 많이 입었다며 풀어 줍니다. 이렇게 해서 결국 한국으로 오개 됐습니다. 그 후 서울대 음대 대학원에서 공부하고 한세대 교수가 된 겁니다. 

여러분, 얼마나 놀랍습니까? 물론 이 간증은 특별한 사람의 아주 특별한 케이스입니다. 

그렇다고 남의 일로 생각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은 여러분 각자를 특별한 사람으로 대우하십니다. 여러분의 특별한 상황에 맞게 인도해 주실 줄로 믿습니다. 무소부재하신 하나님은 항상 우리를 보고 계십니다. 인생길을 한 걸음 한 걸음 인도해 주십니다. 앞이 캄캄할 때는 기도하세요! 하나님께서 인도해 주실 줄로 믿습니다. 

2. 보호 :

무소부재하신 하나님은 우리를 보호해 주십니다. 시139:5절. “주께서 나의 앞뒤를 둘러싸시고 내게 안수하셨나이다” 나를 호위하듯이 보호해 주십니다. 강한 손으로 붙잡아주십니다. 10절(하). “ ... 주의 오른손이 나를 붙드시리이다(your right hand will hold me fast)” 오른손은 전능자 하나님의 능력을 상징합니다. 그 능력으로 붙잡아주십니다.

여러분, 중력(重力 Gravity)의 법칙을 아시죠. 지구가 그 표면의 물체를 잡아당기는 힘입니다. 지구본을 놓고 생각해 보세요! 둥근 지구 위에 옆으로 비스듬히, 거꾸로 서 있어도 떨어지지 않고 안전하게 서고 걷고 할 수 있는 것은 바로 중력 때문입니다. 한국은 북위 37도쯤 되니까 비스듬히 서 있는 격입니다. 그래도 전혀 문제가 없습니다. 게다가 지구는 자전과 공전을 합니다. 그 속도가 엄청납니다. 자전 속도는 위치마다 다른데, 적도가 가장 빠른 1,674km/h입니다. 

한국은 1,337km/h입니다. KTX 시속의 5배쯤 됩니다. 얼마나 빠릅니까! 공전 속도는 107,532km/h입니다. 이렇게 쌩쌩 달리는데도 미동도 없다니! 하나님이 우주만물을 창조하시고 그 가운데 정해 놓으신 중력의 법칙을 통해 우리를 붙잡아 주시는 겁니다. 우리 인생 가운데도 마찬가지입니다. 영적인 중력으로 우리를 꽉 붙잡아 주십니다. 

또 18절 보십시오! “ ... 내가 깰 때에도 여전히 주와 함께 있나이다” 자나 깨나 보살펴주십니다. 잘 때 보호해 주시지 않으면 큰일이죠. 다윗은 다른 시편 23:4에서 뭐라고 노래합니까?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목자가 양을 돌보듯이 보호해 주심으로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통과하는 것처럼 위험한 상황에서도 안전할 수 있다는 겁니다. 

우리 인생은 마치 전쟁터와 같습니다. 얼마나 경쟁이 심하고, 사건과 사고가 많습니까? 얼마나 위험한 일들이 많습니까? 그런 와중에 그나마 안전하게 살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보호 때문입니다. 

월남전 참전 용사의 간증입니다. 1970년 맹호부대 통신병으로 참전했는데, 전투를 하던 중 네 군데 총탄을 맞고 신실했습니다. 군의관이 관통으로 판단하고 급히 상의를 벗겼습니다. 상의의 상태로 보면 분명히 관통한 흔적이 역력합니다. 그런데 옷을 벗겨 보니 심장 부위에 아무런 상처의 흔적도 없습니다. 이상해서 자세히 살펴보니까, 총탄이 상의 주머니에 있던 포켓성경을 관통하다가 포켓 성경과 그 뒤에 있던 파월장병수첩 사이에서 멈추어 있습니다. 이게 화제가 되어서 국내외에 크게 보도됐습니다. 그 주인공은 수년전(기독교 잡지에 간증이 실린 때) KBS 제주방송총국 이영진 부장입니다. 포켓성경은 파병 직전 군 동료이며 교회 친구였던 이흥부 이병이 선물로 준 것이라고 합니다. 

정말 신기합니다. 하나님은 이처럼 우리 인생 가운데 신기하고 놀라운 역사로 우리를 보호해 주십니다. 부디 저와 여러분도 어떤 어려운 상황에 처해도 무소부재하신 하나님이 붙잡아주심 보호하심을 확신하시고, 늘 기도로 승리하시기 바랍니다. 

3. 감찰 :

무소부재하신 하나님은 우리를 감찰하십니다. 시139:1절 “여호와여 주께서 나를 살펴 보셨으므로(you have searched me) 나를 아시나이다” 살핀다는 말이 바로 ‘감찰’입니다. 하나님의 눈은 불꽃같은 눈입니다.(계1:14 참조)

하나님은 우리 언행심사를 훤히 들여다보고 계십니다. 그런데 왜 인간이 하나님을 싫어하고 기피할까요? 죄인이기 때문에 양심이 찔려 그렇습니다. 하나님을 등지고, 사실은 하나님이 뻔히 보고 계신데 죄악을 행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고도 아무 일도 없으면 하나님이 모르시는 줄 알고 회개치도 않고 습관적인 죄악으로 고질화됩니다. 그러면 나중에 한꺼번에 얻어맞는 겁니다. 이런 이치를 알고 미리미리 십자가 앞에 엎드려 회개하고 흠 없는 모습으로 바로 서야 합니다. 그럴 때 담대한 용기가 생깁니다. 인간이 죄를 품고 있으면 부지불식간에 쫓깁니다. 그러니까 인생이 잘 풀릴 수가 없죠. 기도도 담대하게 할 수 없습니다. 

어느 수박 장수가 봉고 트럭에 수박을 싣고 이면도로와 골목길을 다니며 장사하고 있었습니다. 한번은 좁은 도로에 신호등이 있는데, 사람도 많지 않고 경찰차도 없으니까 위반하고 지나갔습니다. 그런데 잠시 후 뒤에 경찰차가 나타났습니다. 혹시 봤나 걱정됐지만 시치미를 떼고 갔습니다. 뒤를 보니까 계속 따라옵니다. 그래서 골목길로 들어갑니다. 그래도 따라옵니다. 겁이 났습니다. 경찰차가 바짝 따라오더니 서라고 손짓합니다. 큰일이다 싶었습니다. 그런데 경찰관이 차에서 내리더니 소리칩니다. “아저씨! 왜 도망치는 것처럼 달려요? 수박 한 통 사기 되게 어렵네!” 

죄를 짓고는 못 사는 겁니다. 의식하든지 의식하지 않든지 처리하지 못한 죄가 있으면 영혼을 짓누릅니다. 그런 가운데 무슨 기도를 하며 무슨 일이 잘 풀리겠습니까? 안 되는 겁니다. 십자가 앞에 죄를 고백하고 깨끗함을 받아야 합니다. 절대 죄악을 숨기거나 방치해서는 해결이 안 됩니다. 

하나님 앞에서 아무 것도 숨길 수 없습니다. 
예레미야 23:24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사람이 내게 보이지 아니하려고 누가 자신을 은밀한 곳에 숨길 수 있겠느냐 여호와가 말하노라 나는 천지에 충만하지 아니하냐" 

심지어 시편 130:3~4은 뭐라고 합니까? 
“3 여호와여 주께서 죄악을 지켜보실진대(If you, O LORD, kept a record of sins) 주여 누가 서리이까 4 그러나 사유하심이 주께 있음은 주를 경외하게 하심이니이다” 

하나님이 감찰하시되 아예 죄악의 기록을 갖고 계시다는 겁니다. 
참고 기다려주실 뿐, 결국은 회개하지 않으면 터져 버립니다. 
하나님은 자비로우셔서 오래 참아주시지만, 공의로우신 분이라 영원히 참지는 않으십니다. 

다윗을 생각해 보십시오. 
그 역시 완전한 사람이이 아니었습니다. 
많은 죄악을 저질렀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때그때 죄 문제를 해결했습니다. 
하나님 앞에 속죄의 은혜로 담대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평생 성화의 노력을 기울었습니다. 
결국 ‘성군 다윗’이란 칭호를 얻었습니다. 
시편 139:19절,23절~24절을 보십시오. 
“19 하나님이여 주께서 반드시 악인을 죽이시리이다 피 흘리기를 즐기는 자들아 나를 떠날지어다 ... 23 하나님이여 나를 살피사(Search me) 내 마음을 아시며 나를 시험하사 내 뜻을 아옵소서 내게 무슨 악한 행위가 있나 보시고 나를 영원한 길로 인도하소서” 다윗은 하나님 앞에 거리낌이 없었습니다. 
결백했습니다. 
그러니까 감찰하시는 하나님께 악한 자들을 심판해 달라고 요구할 수 있었던 겁니다. 

여러분, 우리는 항상 하나님 앞에서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언제 어디서나 나를 보고 계심을 의식해야 합니다. 
그렇다고 지나치게 긴장하고 경직되라는 말은 아닙니다. 
그런데 우리는 때때로 하나님을 새까맣게 잊어버리고 삽니다. 

“그러는 너는? 그리고 한국교회 교인들은 어떻고?” 정말 그렇습니다! 
우리가 감시 카메라만큼도 하나님을 의식하지 않고 살 때가 많습니다. 
요즘 한국교회 일각에서 벌어진 추문들을 생각해 보십시오! 만약 관련자들이 감시 카메라 앞에서 살았다면 과연 그런 지저분한 짓들을 해겠습니까? 
너나 할 것 없이 회개해야 합니다. 

우리는 매일 감찰하시는 하나님을 의식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 날마다 바르게 살고, 혹 잘못되면 얼른 회개하며 살아야 합니다. 
그렇게 하면 주님을 닮은 성결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그럴 때 담대한 모습으로 하나님 앞에 승리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 무소부재하신 하나님을 정말 믿습니까? 
그러면 그분을 늘 의식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하나님 경외’의 신앙이 있으면 세상의 그 어느 것도 두렵지 않습니다. 
당당해집니다. 
아무쪼록 언제 어디서나 우리와 함께 해 주시는 무소부재의 하나님을 의지함으로 꼭 승리하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 바랍니다.


한 유대인 어머니가 아들을 데리고 랍비에게 갔습니다. 랍비는 그 아이를 보고 “하나님은 어디에 계시니? 어디에 계신지 대답하면 이 은전 하나를 주마”라고 했습니다. 그러자 아이는 “선생님, 한 가지만 질문해도 되겠습니까? 만약 제 질문에 답하신다면 제가 선생님께 은전 두 개를 드리겠습니다.” 아이의 당돌한 말에 랍비는 무슨 질문인지 물었습니다. 그러자 아이는 “선생님, 하나님께서 계시지 않는 곳을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랍비는 아이의 질문에 대답할 수 없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이 세상에 우리 하나님께서 계시지 않는 곳은 없습니다.


오늘 본문은 무소부재하신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삶이 지혜로운 삶이며 행복의 요인이라는 내용이 담겨있는 다윗의 시입니다. 특히 이 시는 모든 시 가운데 걸작에 속하는 시로 ‘시편 중 왕관’이라고 불리어질 뿐만 아니라 신앙적 감정의 깊이와 사상의 탁월성, 표현의 아름다움이 돋보입니다.


저는 오늘 본문을 통해 첫째, 왜 인간은 하나님으로부터 도망치려하고 있는가 둘째, 인간이 하나님의 손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그리고 셋째, 감찰하시는 하나님의 목적은 무엇인가에 대해서 말씀드림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1. 왜 사람들은 하나님으로부터 도망가려고 하는가?


  


본문 7절에 다윗은 “내가 주의 영을 떠나 어디로 가며 주의 앞에서 어디로 피하리이까”라고 하며 이 세상 그 어디에도 하나님을 피할 곳이 없음을 말했습니다. 그러나 이 세상의 모든 사람들은 하나님의 눈에서 벗어나고자 발버둥을 치며 삽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고 축복이신데 사람들은 왜 하나님을 떠나 살려고 하고 간섭받지 않으려고 하는 것일까요?


  


1) 인간은 죄인이기에 하나님의 거룩한 빛에 나타나기를 싫어하기 때문입니다.


사람의 첫 조상인 아담과 하와가 지음을 받아 에덴동산에서 살아갈 때에는 천진난만한 시대였기에 그들은 벗었으나 부끄럼을 알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금지하신 선악과를 따먹음으로 말미암아 그들에게 죄가 들어오게 되었고 그 죄로 말미암아 아담과 하와는 부끄러움을 알게 되어 무화과 잎을 엮어 그들의 몸을 가렸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 아담과 만나시기 위해 저녁 무렵 에덴동산에 임하셔서 아담을 부르셨을 때 그들은 하나님을 피해 숨었습니다.


하나님을 환영하고 함께 이야기 나누던 그들이 왜 하나님께서 부르실 때 달려 나오질 못하고 숨었습니까? 그들이 죄인이 되었기에 하나님의 영광에 나타날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바로 이와 같은 죄성이 우리 인간에게 계속해서 스며들어 본성이 되고, 그 본성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부터 피하여 도망치고자 하는 마음이 생기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사야 선지자가 부름을 받았을 때 “웃시야 왕이 죽던 해에 내가 본즉 주께서 높이 들린 보좌에 앉으셨는데 그의 옷자락은 성전에 가득하였고 스랍들이 모시고 섰는데 각기 여섯 날개가 있어 그 둘로는 자기의 얼굴을 가리었고 그 둘로는 자기의 발을 가리었고 그 둘로는 날며 서로 불러 이르되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만군의 여호와여 그의 영광이 온 땅에 충만하도다 하더라 이같이 화답하는 자의 소리로 말미암아 문지방의 터가 요동하며 성전에 연기가 충만한지라 그 때에 내가 말하되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 나는 입술이 부정한 백성 중에 거주하면서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을 뵈었음이로다”(사6:1-5)라고 하며 환상가운데 하나님의 거룩한 보좌를 보았다고 고백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을 만남으로 죄인인 자신을 깨닫게 된 이사야 선지자는 하나님의 제단 숯불을 그 입에 가져다 대어 그 죄를 사함 받았으며 참으로 많은 세월 가운데에 선지자 노릇을 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베드로는 밤이 새도록 바다에 그물을 던져 고기를 잡고자 했지만 아무것도 얻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께서 그에게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리라고 하시자 그물이 찢어지도록 고기를 잡을 수 있었습니다. 그 때 베드로는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눅5:8)라고 고백했습니다. 그는 아무 상관없는 고기 잡는 일과 죄를 통해 자신의 앞에 계신 거룩한 분이 바로 하나님의 아들이심과 자신이 죄인임을 깨닫게 되었던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을 만나 스스로가 한없이 추하고 더러운 죄인임을 깨닫게 되었을 때, 그 죄를 사함 받고자 주님 앞에 나아가는 사람은 구원을 받게 되지만 죄를 감추고 숨기려고 하는 사람은 계속 어둠에 머물게 되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3장 19-21절에 “그 정죄는 이것이니 곧 빛이 세상에 왔으되 사람들이 자기 행위가 악하므로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한 것이니라 악을 행하는 자마다 빛을 미워하여 빛으로 오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 행위가 드러날까 함이요 진리를 따르는 자는 빛으로 오나니 이는 그 행위가 하나님 안에서 행한 것임을 나타내려 함이라 하시니라”라고 하였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죄성으로 인해 하나님께로부터 도망치려고 합니다. 그러나 정작 그 어느 곳에도 하나님께로부터 도망칠 수 있는 곳은 없음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2) 인간의 자유의지로 인해 자아 너무 강해졌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실 때 스스로 생각하고 판단하여 행동할 수 있도록 자유의지라는 것을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로봇이나 기계처럼 입력한 대로만 하는 것이 아닌 자유의지를 주신 것은 인간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깨닫고 하나님의 능력 아래 하나님을 찬양하고 영광 돌리며 그 섭리 가운데 살아가도록 하기 위해서인데, 인간은 도리어 하나님을 피해서 도망치고 죄를 지으며 그것을 감추기까지 합니다. 즉, 자유의지를 통해 하나님을 거역하고 반역하는 일에 사용하고 자신의 뜻대로 행동함으로 하나님을 기쁘게 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진정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받아 하나님의 백성이 되려고 한다면 우리 주님께서 마태복음 16장 24절에 말씀하신 대로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는 말씀을 기억하여 하나님 뜻에 따라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스스로를 부인하고 내가 하나님의 뜻에 따라 살아갈 때 우리가 진정한 안정과 평화를 누리며 살 수 있는 것입니다.


탕자의 비유에서 탕자는 아버지를 떠났을 때 참된 자유를 얻은 듯 했지만 그 자유로 인해 오히려 노예가 되었고, 빈곤하게 되었으며, 자유롭다고 생각했던 마음은 땅에 떨어져 부끄러운 마음이 되었습니다. 그는 자아가 깨지는 아픔을 겪게 되었지만 그의 아버지 품으로 돌아옴으로 참된 자유와 평안, 그리고 안정을 누릴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처럼 사람들은 자유 의지에 대해 잘못 생각하고 있기 때문에 하나님을 자꾸 떠나려고 합니다. 우리 하나님께서 자유 의지를 주신 것은 그것을 통해 하나님을 찬양하고 영광 받으시기 위함이지 우리 맘대로 사용하라는 것이 아님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3) 내 생각이 하나님의 생각보다 낫다고 하는 교만 때문입니다.


내 생각이 하나님의 생각보다 옳은 것이며, 나은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려 하지 않습니다. 이것이 얼마나 큰 교만입니까? 우리들의 생각이 하나님의 생각보다 더 옳고 나은 것입니까? 하나님의 생각보다 우리의 생각이 더 지혜롭습니까?


이사야서 55장 8-9절에 보면 “이는 내 생각이 너희의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의 길과 다름이니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이는 하늘이 땅보다 높음 같이 내 길은 너희의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의 생각보다 높음이니라”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지혜와 능력을 이 세상 그 어느 누가 따라갈 수 있습니까? 우리는 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이것을 깨닫고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풍성함이여, 그의 판단은 헤아리지 못할 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롬11:33)라고 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앞에 우리의 생각이 옳다고 하는 교만은 하나님의 징계를 받게 되어 결국 멸망을 가져오게 되는 것입니다.


요나 선지자는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여 만민에게 복음을 전해야하는 사명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니느웨로 가서 그 성을 회개케 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피해 달아나 다시스로 향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풍랑을 일으켜 그를 고래 뱃속에서 회개하도록 하셨고 결국 삼일 만에 고래 뱃속에서 나오게 되어 하나님의 뜻에 따라 니느웨 사람들을 회개시킴으로 그 성을 구한 위대한 선지자가 되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아직도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서 우리의 생각과 뜻대로 하려는 일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우리가 예수 믿는 것은 예수님의 생각을 내 생각에다가 맞추려고 하는 것이 아닌 내 생각을 예수님의 생각에 맞추어 변화시키는 것으로 그런 사람은 은혜 받은 사람이요, 하나님 안에서 발견된 사람입니다.


  


2. 인간은 하나님의 손에서 벗어날 수 있는가?


  


1) 한마디로 ‘없다.’가 답입니다.


하나님은 무소부재하시며 이 세상에 편만하시기 때문에 하나님으로부터 숨을 곳은 없습니다. 시편 94편 9절에 보면 “귀를 지으신 이가 듣지 아니하시랴 눈을 만드신 이가 보지 아니하시랴”라고 하였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의 눈을 지으시고, 귀를 지으신 이가 듣지 아니하시고 보지 아니하실 리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눈을 피해서 숨을 곳이 없는 것입니다.


요사이 과학의 발달로 여러 가지 편리한 도구들이 많이 나오고 있습니다. 그 중 적외선을 이용한 망원경은 밤중에도 움직이는 모든 것을 또렷하게 볼 수 있게 해 주어 아주 유용합니다. 이처럼 인간은 적외선을 발견한 시점부터 그 빛을 사용하였지만 하나님께서는 이미 아주 오래전에 이 빛을 만들어 놓으셨습니다. 그런데 만드신 하나님께서 보질 못하시겠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적외선이 없어도 불꽃같은 눈으로 모든 것을 보고 계십니다.


  


2)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생각, 행동, 말까지도 모두 알고 계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어느 날 예레미야 선지자에게 “내가 너를 모태에 짓기 전에 너를 알았고 네가 배에서 나오기 전에 너를 성별하였고 너를 여러 나라의 선지자로 세웠노라 하시기로”(렘1:5)라고 하셨습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앉고 서는 것도, 생각도, 행위도, 말도 모두 알고 계시며, 심지어 우리가 어머니 뱃속에서 태어나기 전과 같이 우리가 세상에 나오기 전의 모든 일까지도 알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본문 18절에는 “내가 세려고 할지라도 그 수가 모래보다 많도소이다 내가 깰 때에도 여전히 주와 함께 있나이다”라고 하며 우리는 주의 편만한 속에 들어있음을 말하고 있고, 에베소서 1장 3-6절에는 “찬송하리로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을 우리에게 주시되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이는 그가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는 것이라”라고 하며 이것을 알고 피하려고 하지 말고 그 뜻을 깨달아 하나님을 찬양하고 영광 돌리는 삶을 살도록 하기 위해 우리를 지으셨음을 말씀했습니다.


지난 21일 미 육군 브래들리 매닝 일병은 미국의 국방 비밀을 폭로한 죄로 군사 재판에서 35년형을 받았습니다. 뿐만 아니라 미국에서는 국가 기밀문서를 전 세계에 공개한 죄로 CIA에 근무하던 에드워드 스노든을 잡으려 했지만 다른 나라로 망명하여 도망치는 일이 있었습니다. 이처럼 세상에서도 비밀은 숨길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모든 것을 아심에도 비밀을 절대 폭로하지 않으십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계시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삼국 유사에 기록된 이야기 중 신라 48대 경륜왕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경륜왕은 왕의 자리에 오른 후에 이상하게도 귀가 조금씩 자라나더니 시간이 지나자 당나귀 귀처럼 커졌습니다. 그래서 새 관을 만들기 위해 사람을 불렀습니다. 관을 만들기 위해 왕을 찾아온 그 사람은 왕의 귀를 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그는 그것을 다른 사람들에게 말하고 싶었지만 말을 하면 왕에게 죽임을 당할 것이 분명하기에 말하지 못하고 답답함에 속앓이를 하다가 죽게 되었습니다. 그가 죽기 전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하는 답답함을 풀기 위해 대나무 숲에서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라고 소리친 뒤 죽었는데, 이상하게도 그가 죽은 뒤 그 대나무 밭에 바람이 불 때면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라는 음성이 들리는 것이었습니다. 너무나 창피한 왕은 그 밭에 대나무를 모두 베어버리고 산수화를 심었지만 그 소리는 여전히 멈추질 않았다고 합니다.


간혹 하나님께서 자신의 약점이나 비밀을 모두 알고 계신다는 말에 기분 나쁠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죄까지도 알고 계심에도 회개하면 용서해주시며 우리를 새로운 사람으로 만들어 주십니다.


프란시스 톰슨은 유복한 가정에서 자랐습니다. 그의 아버지는 의사이셨으며 신앙이 깊은 분으로 아들이 목사가 되었으면 하는 생각에 톰슨을 신학교를 보냈지만 그는 학업을 포기했습니다. 그러나 교육 의지가 높았던 톰슨의 아버지는 그와 마찬가지로 의술로 하나님 나라의 일에 보탬이 되게 하고자 그를 다시 의과대학에 보내었지만 톰슨은 또 학업을 그만두고 집을 나왔습니다. 집을 나온 톰슨은 먹고 쓸 것이 없어 신문을 팔아 겨우 먹고 살게 되었고, 노숙자나 거지처럼 얻어먹기도 하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는 마약까지 하게 되어 거의 폐인이 되었습니다. 톰슨은 그런 상황에도 순간순간 떠오르는 것을 시로 적었는데, 우연히 그의 시를 읽고 감동을 받게 된 출판사 사장인 월프래드 메이빌이 그를 병원에 데려가기도 하고 돌보아주며 결국 그를 문학가로 만들었습니다.


그가 쓴 시집 중 아주 유명한 ‘천국의 추적’이라는 시집은 사냥꾼이 사냥감을 잡기 위해 포기하지 않는 것처럼 사냥감인 우리는 사냥꾼인 하나님을 피해 도망가지만 끝까지 하나님께서 우리를 추적하고 잡아 변화시킴으로 새사람을 만든다는 내용으로 사냥감인 자신이 잡히지 않기 위해 끝까지 도망쳤지만 결국 하나님께서는 그를 붙잡아 새 사람이 되게 하셨음을 고백했습니다. 그가 간증하기를 “내가 변화되고, 이 시를 쓰게 된 것은 내가 잘나서가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가 끊임없이 나에게 임하셨기에 내가 이처럼 변화 되어 새사람이 된 것입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여인이 어찌 그 젖 먹는 자식을 잊겠으며 자기 태에서 난 아들을 긍휼히 여기지 않겠느냐 그들은 혹시 잊을지라도 나는 너를 잊지 아니할 것이라 내가 너를 내 손바닥에 새겼고 너의 성벽이 항상 내 앞에 있나니”(사49:15-16)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자식을 잊을 부모가 어디 있으며, 모른다고 할 부모가 어디 있습니까? 주님께서는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시면 손바닥에 우리 이름을 새기시고 늘 보신다고 하셨습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버리지 않으시고 끝까지 돌보아 주시기에 하나님의 손에서 떠날 자 그 눈에서 숨을 자가 없는 것입니다.


  


3.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감찰하시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는 더 좋은 곳, 더 아름다운 곳으로 인도해 주시기 위해 우리를 감찰하십니다. 우리는 이것을 늘 기억해야 합니다. 예레미야 23장 23-24절에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나는 가까운 데에 있는 하나님이요 먼 데에 있는 하나님은 아니냐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사람이 내게 보이지 아니하려고 누가 자신을 은밀한 곳에 숨길 수 있겠느냐 여호와가 말하노라 나는 천지에 충만하지 아니하냐”라고 했으며, 시편 33장 15절에 “그는 그들 모두의 마음을 지으시며 그들이 하는 일을 굽어살피시는 이로다”라고 하였습니다.


아마도 죄성에 가득 찬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감찰하시고 살피신다니 더욱 도망가려고 하는지 모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살피고 지켜보시는 이유는 부모가 자식을 돌보는 것과 같습니다. 부모님은 자식이 먹는 것, 자는 것, 생활하는 것을 늘 관심을 가지고 지켜보며 잘못된 길로 가면 교훈하고 충고하고 권면하여 옳은 길로 가게 합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도 우리의 모든 것을 살피시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받는 자녀로서 이 땅에서 승리하고 성공하게 하기 위해서 그러시는 것입니다.


  


1) 우리로 하여금 의의 길, 생명의 길을 걷게 하기 위함입니다.


우리가 마귀의 유혹에 빠져서 죄의 길에 빠지고 멸망의 길에 들어선다고 한다면 우리의 부모되신 하나님이 어찌 마음이 아프지 않으시겠습니까? 그러므로 우리를 감찰하고 계시다가 잘못된 길로 들어서려하면 권고하고 채찍질해서 하나님의 생명의 길로 다시 되돌아오도록 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다윗은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그가 나를 푸른 초장에 누이시며 쉴만한 물 가으로 인도하시는도다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도다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베푸시고 기름으로 내 머리에 바르셨으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시23:1-4)라고 하였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선한 목자가 되십니다. 우리가 잘못된 길로 가고 있을 때 선한 목자이신 하나님께서 양인 우리를 불러 돌아오게 하시며, 만약 오지 않으면 때려서라도 돌아오게 하십니다. 즉, 택함 받은 백성인 우리들이 잘못된 길로 가게 되면 하나님께서는 그 곁길에 서서 의의 길 생명의 길로 가게 몰아주시기 위해 늘 감찰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는 “너희 중에 어떤 사람이 양 백 마리가 있는데 그 중의 하나를 잃으면 아흔아홉 마리를 들에 두고 그 잃은 것을 찾아내기까지 찾아다니지 아니하겠느냐 또 찾아낸즉 즐거워 어깨에 메고 집에 와서 그 벗과 이웃을 불러 모으고 말하되 나와 함께 즐기자 나의 잃은 양을 찾아내었노라 하리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와 같이 죄인 한 사람이 회개하면 하늘에서는 회개할 것 없는 의인 아흔아홉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는 것보다 더하리라”(눅15:4-7)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2) 모든 고난과 슬픔 가운데 우리를 건지시기 위해 늘 살펴주신다고 하셨습니다.


만약 400년 동안 애굽에서 종살이 하던 이스라엘 백성의 고난과 슬픔을 하나님께서 모른다고 하셨다면 그들은 이 땅에서 멸망당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들의 부르짖음을 보시고 들으셔서 모세를 통해 그들을 구원하셨습니다. 오늘날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만약 하나님께서 우리의 어려움과 슬픔, 환난 당함을 모른다고 하신다면 우리는 멸망당하게 될 것입니다.


예루살렘에 아람 왕 벤하닷이 쳐들어와 하나님을 모욕하였을 때 히스기야 왕은 그들을 징벌해 달라고 하나님 앞에 기도했습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그의 기도에 응답하사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 그들이 일곱 길로 도망갈 것을 말씀하셨고, 결국 그들은 패하여 죽임을 당했습니다. 이 외에도 성경에 보면 환난과 어려움을 당한 그 많은 사람들이 부르짖어 기도함으로 응답을 받지 않았습니까? 광야에서 물이 없어 목말라 죽게 된 하갈은 하나님 앞에 부르짖어 샘을 얻었고(창21:14-19), 아들이 없는 슬픔을 하나님 앞에 애통하며 부르짖은 한나는 아들을 얻게 되었으며(삼상1:10-11), 가난한 자는 부르짖어 양식을 얻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고통과 어려움을 보시고 응답해 주신 것입니다. 또한, 주님께서는 열 명의 문둥병자를 모두 치료해 주셨습니다. 그러나 감사하기 위해 주님을 찾아온 사람은 단 한 사람뿐이었습니다.


마태복음 11장 5절에 “맹인이 보며 못 걷는 사람이 걸으며 나병환자가 깨끗함을 받으며 못 듣는 자가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 하라”고 했으며, 누가복음 4장 18-19절에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 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롭게 하고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였더라”라고 했습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고 이처럼 곤고한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 앞에 부르짖을 때 그들을 구원해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보지 못하시고 우리가 생각하는 것을 알지 못하시는 것 같아도 모든 것을 알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 앞에 올바른 생각을 해야 하며 자꾸 우리의 생각을 고쳐서 하나님의 생각에 접근하도록 해야 합니다.


2000년 4월 7일 고성에서 시작된 산불이 동해안 지역을 8일간이나 태우고 진화된 일이 있었습니다. 그 당시 군부대와 전 도민이 동원되어 불을 끄려고 했지만 바람이 너무 강했기 때문에 피해는 점점 더 커져갔고, 불을 진압하던 군장병 몇몇이 불길에 휩싸이게 되었습니다. 그 때 뉴스를 보던 우리 교회 집사님께서 갑자기 급하게 교회로 뛰어왔습니다. 바로 그 불길 속에 군 복무 중이던 집사님의 둘째 아들이 있다는 소식을 들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집사님은 불길가운데서 아들을 구해달라고 땅을 치고 대성통곡 하며 기도했습니다. 얼마나 오랫동안 기도를 했는지 날이 새고 새벽녘이 되었는데 그 때 하늘에서 비가 내려 불이 꺼지는 환상을 보게 되었고 곧 큰 아들이 달려와 비가 내려 불이 진압되어 아들이 살게 되었다고 말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들을 구원해 주신 것입니다. 그 소식에 기뻐하며 정신 차리고 보니 얼마나 땅을 치며 기도했는지 집사님의 손바닥이 터져 손이며 바닥이며 피투성이가 되어있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주님은 무소부재하시고 편만하시기에 우리가 기도하면 어디서든지 역사하셔서 우리를 고통가운데서 건지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부정적인 생각을 버리고 하나님의 무소부재하심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여 하나님의 보호하심과 인도하심, 선하심과 축복하심을 받아 누려야지 잘못한 것만 생각하고 도망치려고만 하면 안 될 것입니다.


  


3) 공의의 심판을 하시기 위해서입니다.


의인이 악인이 되고 악인이 의인이 되는 이 세상은 공의롭지 못합니다. 만약 이 세상을 그대로 놔둔다면 악인의 세계가 될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심판의 하나님이십니다. 그래서 올바르게 평가하심으로 바른 사람과 악한 사람을 구분하심으로 바른 사람에게 상을 주시고 그를 하늘나라에 가게 하십니다.


요한복음 5장 29절에는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라고 하였기에 시편139편 23-24절에 “하나님이여 나를 살피사 내 마음을 아시며 나를 시험하사 내 뜻을 아옵소서 내게 무슨 악한 행위가 있나 보시고 나를 영원한 길로 인도하소서”라고 하며 저자는 자신의 악한 생각을 사로잡아서 선한 생각을 하게 해 달라고 한 것입니다.


만약 가인이 아벨을 돌로 쳐 죽인 것을 하나님께서 모른 척하셨다면 가인은 아마도 같은 일을 계속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가 아벨을 돌로 쳐 죽인 것을 아시고 네 아우의 피가 나에게 소리친다고 말씀하셨으며, 요한계시록 6장 10-11절에 “큰 소리로 불러 이르되 거룩하고 참되신 대주재여 땅에 거하는 자들을 심판하여 우리 피를 갚아 주지 아니하시기를 어느 때까지 하시려 하나이까 하니 각각 그들에게 흰 두루마기를 주시며 이르시되 아직 잠시 동안 쉬되 그들의 동무 종들과 형제들도 자기처럼 죽임을 당하여 그 수가 차기까지 하라 하시더라”라고 하셨습니다.


  


4) 우리 전지전능하신 하나님, 무소부재하신 하나님을 예배하게 하기 위하여 우리를 감찰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감찰하시는 것은 심판하시기 위함이 아닌 의의 길 생명의 길로 가게 하기 위함입니다. 또한, 그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상 주시기 위함이며, 우리로 하여금 살아계신 하나님이 계심을 알게 하여 매일 예배드림으로 하나님께서 더욱 굽어 살피기 위해서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온 마음과 정성을 다하여서 하나님을 잘 섬겨 나아가야 합니다. 그럴 때 우리를 통해서 주님께서 영광 받으시고 수많은 영혼들이 주님 앞에 돌아와 회개함으로 구원을 받게 되는 역사가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두렵고 떨림으로 섬기되 그 하나님은 그 백성을 사랑하셔서 은혜 베푸시고 생명의 길로 인도하심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믿는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궁극적인 희망이십니다.  
그분이 궁극적 희망이 되시는 이유는 죽음의 권세를 이겼기 때문입니다. 인간사에서 가장 두렵고 절망적이며 무서운 것은 죽음입니다. 죽음 앞에서 사람들은 모두 무릎을 꿇습니다. 하지만 예수 그리스도는 죽음의 권세를 넉넉히 이겨내셨습니다. 그러므로 그분은 희망이십니다. 예수님께서 죽음의 권세를 이긴 이후로 예수의 십자가 그늘에 거하는 하나님의 자녀들은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도 죽음을 이기는 자들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죽음을 이기는 능력을 가진 자는 작은 일에 일희일비하지 않습니다. 세상에서 실패하거나 넘어져도 불안해하거나 두려움에 떨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최후 승리는 우리의 것이 분명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말씀은 항상 희망으로 끝납니다. 하나님께서 북이스라엘 백성들을 책망하실 때 그 대상은 주로 지도자들이었습니다. 영적 지도자, 정치 지도자들 때문에 이 땅에 소망이 끊어졌다고 책망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보면 북이스라엘에는 더 이상 희망이 없는 것 같아 보입니다. 하지만 오늘 읽은 아모스 9장 말씀에는 궁극적인 소망이 되시는 그 한 분을 계시하십니다. 궁극적인 소망은 북이스라엘에서 태어날 왕이 아닙니다. 남유다의 왕도 아닙니다. 그 분은 왕 중의 왕이며 궁극적이고 멸하지 않고 쇠하지 않는 영원한 왕이신 예수 그리스도 이십니다. 그 분은 모든 인류의 소망이 되시고 오늘 우리에게도 온전한 소망, 유일한 소망이 되십니다. 1절을 보겠습니다. “내가 보니 주께서 제단 곁에 서서 이르시되 기둥 머리를 쳐서 문지방이 움직이게 하며 그것으로 부서져서 무리의 머리에 떨어지게 하라 내가 그 남은 자를 칼로 죽이리니 그 중에서 한 사람도 도망하지 못하며 그 중에서 한 사람도 피하지 못하리라”

주께서 제단 곁에 서서 말씀하십니다. 제단이 무너져서 모든 사람이 다 죽을 것이다. 혹시 살아남는 사람이 있다 할지라도 내가 끝까지 따라가서 멸할 것이다. 심판을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 말씀하시는 제단이 어디입니까? 이 제단은 여로보암 1세가 벧엘과 단에 세운 금송아지 제단입니다. 여로보암 1세부터 아모스 선지자가 예언하던 시대까지는 약 200년의 시차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200년 동안 많은 선지자들을 통해서 말씀하셨습니다. “벧엘과 단에 금송아지 제단을 제거하라. 그리고 하나님 앞에 돌아오라” 하나님은 계속해서 말씀하셨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돌이키지 않았습니다. 금송아지 앞에 무릎을 꿇고 음란한 제사를 드려도 망하지 않았기 때문에 하나님이 용납하는 줄 알았습니다. 그들이 섬기는 금송아지가 하나님인줄 착각하고 살았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우상숭배를 용납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오래 참고 기다렸던 것입니다. 이제 기다림의 임계점에 도달했습니다. 하나님이 그 제단을 완전히 무너지게 하겠다 말씀하셨습니다. 벧엘과 단에서 금송아지를 섬기던 이스라엘 백성들은 제단이 무너져 내림과 동시에 함께 망할 것입니다. 혹시 살아남는 사람들이 있다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끝까지 따라가서 죽이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들이 섬기던 우상과 함께 죽을 것입니다. 

이 말씀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이 무엇입니까?
우리 마음 속 깊이 숨겨진 우상을 찾아내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 아닌 다른 것을 최고의 가치로 두고 살아가는 것은 하나님이 허락하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항상 말씀하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돌이키지 않는다면 우상 때문에 망할 것입니다.
돈 때문에, 권력 때문에, 사람 때문에 망할 것입니다.
돈으로 쌓은 탑이 무너지고 권력이 무너져 내려 우리가 그 아래 함께 깔려 죽을 것입니다.
재난이 임하기 전에 하나님 앞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그것이 지혜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모스 선지자를 통해서 완전한 심판을 말씀하셨지만 희망도 함께 말씀하십니다.

8절을 보십시오.
“보라 주 여호와의 눈이 범죄한 나라를 주목하노니 내가 그것을 지면에서 멸하리라 그러나 야곱의 집은 온전히 멸하지는 아니하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범죄한 자를 주목하시고 멸할 것이지만 야곱의 집은 완전히 멸하지는 않을 것이며 남은 자를 둘 것이고 희망을 선물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도 희망이 있다는 말씀입니다.
모든 선지자들은 마지막에 희망을 노래합니다.
이것이 성경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입니다.
그들에게 주신 하나님의 희망이 무엇입니까?

11절을 보시겠습니다.
“그 날에 내가 다윗의 무너진 장막을 일으키고 그것들의 틈을 막으며 그 허물어진 것을 일으켜서 옛적과 같이 세우고”

다윗의 무너진 장막이라는 대목에서 우리의 눈이 번쩍 뜨입니다. 다윗의 무너진 장막은 과연 누구이며 어디를 말하는 것입니까? 다윗 왕조를 말하는 것일까요? 북이스라엘은 유다 백성들과 다른 길을 살아왔습니다. 이스라엘은 솔로몬 사후에 르호보암과 여로보암으로 갈라졌습니다. 북이스라엘 백성들은 여로보암을 따라 북이스라엘로 분열되어 지금까지 살아왔습니다. 다윗의 장막이라면 남유다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북이스라엘의 왕들도 아니고 남유다의 왕들 중 한 사람도 아닙니다. 다윗의 장막은 장차 오실 예수 그리스도 이십니다. 그리스도께서 오시면 회복될 것이니 북이스라엘의 영적 지도자나 정치지도자들에게 희망을 두지 말라고 하십니다. 사람에게는 희망을 찾을 수 없을 것이다. 하나님께서 760여년 이후에 그리스도를 보낼 것이니 그 분이 다윗의 장막을 일으키고 무너진 장막을 일으켜 세우고 벌어진 틈을 메울 것이며 궁극적 소망이 되실 것입니다. 

그 분이 오시면 일어날 일을 말씀합니다.
12절을 보십시오.
“그들이 에돔의 남은 자와 내 이름으로 일컫는 만국을 기업으로 얻게 하리라 이 일을 행하시는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예수 그리스도가 오시면 에돔에 남은 자들을 일으키고 만국백성을 당신의 백성으로 삼는다 말씀하셨습니다.
에돔이 어떤 자들입니까?
에서의 후손입니다.
에서는 집을 나가 갈라진 민족이 되었습니다.
예수께서 오시면 갈라진 민족이 하나가 됩니다.
북이스라엘과 남유다가 갈라진 것, 야곱과 에서가 갈라진 분열 상태로 두지 않을 것입니다.
예수님이 오시면 막힌 담을 허시고 둘이 하나가 되게 하실 것입니다.
만국들이 예수의 이름 앞에 무릎을 꿇고 십자가 아래 함께 모여 찬양할 것입니다.
이 얼마나 아름다운 희망의 노래입니까? 

오늘 우리에게도 예수님 한 분이 궁극적 희망입니다.
세상에는 희망이 없습니다.
대통령이 바뀌면 세상이 바뀔 것 같고 지역 국회의원이 바뀌면 지역이 바뀔 것 같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가정에 돈이 많아지면 행복해 질 것 같지만 그것도 허상입니다.
세상에 악은 여전히 관영하고 불평등은 존재합니다.
우리는 세상에서 희망을 찾을 수 없습니다.
예수님이 오시고 십자가 아래에서야 우리는 희망을 노래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아래에서 죽음의 권세도 부활로 회복될 것입니다.
예수님 아래에 있으면 우리는 흩어지지 않고 나눠지지 않습니다.

15절을 보십시오. “내가 그들을 그들의 땅에 심으리니 그들이 내가 준 땅에서 다시 뽑히지 아니하리라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북이스라엘 백성들은 기원전 721년에 앗시리아에 의해서 뽑혀 나갑니다.
남유다 백성들은 기원전 586년 바벨론에 의해서 뽑혀나갑니다.
하지만 예수님이 오셔서 다윗의 장막에 거하게 되면 영원히 뽑히지 않을 것입니다.
예수의 십자가 아래에 우리가 거하기 때문입니다.
아모스의 마지막 교훈을 마음에 새기기 바랍니다.
궁극적 소망은 이 땅의 나라가 아니라 하나님이라는 사실, 하나님께서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의 유일한 희망이 되신다는 사실, 이 세상에 악이 관영하여도 예수의 권세 앞에 무릎을 꿇고 그 아래 거하면 우리는 영원히 다시 뽑히지 않는 하나님의 백성이 될 것입니다.

1.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를 소망합니다.
2. 궁극적 희망은 그리스도이심을 고백합니다.
3. 사랑의 하나님, 소망 없는 이 땅에 그리스도를 보내 주시고 새로운 희망을 가지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언제나 영원히 주님 따르는 백성이 되게 하옵소서.

아모스 9:2-4
2. 저희가 파고 음부로 들어갈찌라도 내 이 거기서 취하여 낼 것이요 하늘로 올라갈찌라도 내가 거기서 취하여 내리울 것이며
3. 갈멜산 꼭대기에 숨을찌라도 내가 거기서 찾아낼 것이요 내 눈을 피하여 바다 밑에 숨을찌라도 내가 거기서 을 명하여 물게 할 것이요
4. 그 원수 앞에 사로잡혀 갈찌라도 내가 거기서 칼을 명하여 살륙하게 할 것이라 내가 저희에게 주목하여 화를 내리고 복을 내리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시편 139:7-10
7.
내가 주의 신을 떠나 어디로 가며 주의 앞에서 어디로 피하리이까
8. 내가 하늘에 올라갈찌라도 거기 계시며 음부에 내 자리를 펼찌라도 거기 계시니이다
9. 내가 새벽 날개를 치며 바다 끝에 가서 거할찌라도
10. 곧 거기서도 주의 이 나를 인도하시며 주의 오른손이 나를 붙드시리이다


남은 자(이사야 10:20, 22)(미가 5:3. 7-8)

7605. 쉐아르(
sheʼâr) שְׁאָר 

1. 나머지
2. 여분
3. 이사야 10:20
발음 / 쉐아르[ sheʼâr ]
어원 / 7604에서 유래
관련 성경 / 나머지(대상 11:8, 느 10:28, 사 10:19), 충만(말 2:15), 기타(스 4:3), 남은 자(사 10:20, 14:22). [형] 다른(스 3:8, 에 9:12).
구약 성경 / 26회 사용

야곱의 남은 자가 능하신 하나님께로 돌아올 것이라
- 이 일은 스알야숩(7:3)의 이름속에 포함된 예언의 성취를 의미할 것이다.
그리고 '능하신 하나님'(엘 깁보르)은 임마누엘이라 하는 아이에게 적용된 이름 중 하나이다(9:6).

네 백성이 바다의 모래 같을지라도...돌아오리니
- '네 씨로 바닷가의 모래와 같게 하겠다'(창 22:17)고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셨다.
그 약속은 성취되어 이스라엘 자손이 '바닷가의 많은 모래같이'(삼하 17:11) 되었으나, 저들의 범죄로 인하여 남은 자는 소수에 국한될 것이다.
사도 바울은 이 말씀을 '이스라엘에게서 난 그들이 다 이스라엘이 아니며 오직 약속의 자녀라야 씨로 여기심을 받는다'(롬 9:6-8,27)는 사상과 연결시켜 인용한다.


아모스 9:1 /  남은 자(319. 아하리탐)

- 이는 흔히 하나님의 구속사적 경륜에서 말해지는 바, 여기서는 하나님의 은혜로 환난을 피하고 보존되어진 자들(사 10:20, 22; 미 5:3,7,8)을 가리킨다기보다는 아직 환난을 받지 않은 자(곧 받게 될 자)를 의미한다고 보는 것이 좋다(4:2).

319. 남은 자(아하리트.  ’achărîyth)  אַחֲרִית 

1. 마지막 부분. 2. 종말. 3. 장래
발음 / 아하리트[ ’achărîyth ]
어원 / 310에서 유래
관련 성경 /  후일(창 49:1, 민 24:14), 종말(민 23:10, 신 32:20, 사 46:10), 끝날(신 4:30, 겔 38:16), 마침내(신 8:16, 잠 23:32), 나중(욥 8:7, 잠 29:21), 자손(시 109:13), 마지막(잠 5:11, 단 8:23), 필경(잠 14:12, 19:20), 장래(잠 23:18, 24:20, 렘 29:11), 말일(사 2:2, 렘 23:20), 남은 자(겔 23:25, 암 4:2, 9:1), 자손(단 11:4). [동] 마치다 (단 8:19).
구약 성경 / 61회 사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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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모스(Amos) : 무거운 짐을 진 자(짐을 지는 사람)

1. 주전 8세기의 남 유다 출신으로 이스라엘에서 활동한 예언자.

2. 베들레헴 남쪽 10Km지점 돌 많은 드고아의 목자 겸 뽕나무를 재배했었다(아모스 7:14-15)

아모스
아마샤에게 대답하여 가로되 나는 선지자가 아니며 선지자의 아들도 아니요 나는 목자요 뽕나무를 배양하는 자로서.
양떼를 따를 때에 여호와께서 나를 데려다가 내게 이르시기를 가서 내 백성 이스라엘에게 예언하라 하셨나니.

3. 그는 고향 유대를 떠나 북왕국 이스라엘의 벧엘에서 당시의 왕 여로보암 2세의 정치와 종교적 타락을 공박했었다(호세아 7:7-9)

저희가 다 화덕 같이 뜨거워져서 그 재판장들을 삼키며 그 왕들을 다 엎드러지게 하며 저희 중에는 내게 부르짖는 자가 하나도 없도다.에브라임이 열방에 혼잡되니 저는 곧 뒤집지 않은 전병이로다.
저는 이방인에게 그 힘이 삼키웠으나 알지 못하고 백발이 얼룩얼룩할찌라도 깨닫지 못하는도다.

4. 별명 / 정의의 선지자

5. 주제 성구 / 아모스 5:24

오직 공법을 물 같이, 정의를 하수 같이 흘릴찌로다.


정의(正義)


1. 사회나 공동체를 위한 옳고 바른 도리.
2. 정의의 사도(使徒)
3. 사회 전체의 평화와 행복을 위해 법과 질서를 바로 세우고, 구성원의 기회나 권리를 공평하게 보장하는 일.
4. 바른 의의

정의(체다카, tsedâqâh) צְדָקָה            

1. 올바름,  2. 정의,  3. 의로움

공의(公義)


1. 공정한 도의(道義).
2. 세력 있는 자라고 두호하지 말고 공의로 사람을 재판할지며.
3. 가톨릭 / 선악의 제재(制裁)를 공평하게 하는 하느님의 적극 품성(積極稟性)의 하나.

공의(미쉬파트, mishpâṭ) מִשְׁפָּט               

1.  판결,  2. 율례, 3. 공의





χρηστός (크레스토스)

사도행전 11:26

만나매 안디옥에 데리고 와서 둘이 교회에 일년간 모여 있어 큰 무리를 가르쳤고 제자들이 안디옥에서 비로소 그리스도인이라 일컬음을 받게 되었더라.

사도행전 11:26에는 시리아 안디옥에서 처음으로 믿음의 사람들을 그리스도인(크리스티아노스, Χριστιανός)이라고 호칭하게 되었다고 말한다.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는 사람을 그리스도인이라고 부르게 된 것인데, 로마제국에 복음이 전파되면서 그리스도인(Christianum)의 존재가 유대교인과 구별되었다.

기원후 2세기 초반 하드리아누스 황제의 비서로 활동했던 로마 역사가 Suetonius는 De vita Caesarum(황제들의 생애)에서, 글라우디오 황제 시대(주후 41-54년) 주후 49년에 유대인들을 로마에서 추방하는 칙령을 반포했음을 말하면서 그 이유를 잠깐 서술하였다.

“글라우디오는 그리스도(Chrestus)의 선동을 받은 유대인들이 끊임없이 난동을 일으켜 그들을 로마에서 추방했다” – 유대인들의 추방사건이 그리스도라는 인물 때문이라는 것이다. 역사가 수에토니우스는 로마의 유대인 공동체 안에서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는 기독교인들과의 갈등이 분쟁과 불화로 이어지고 있음을 암시한다. 로마인들에게 눈에 가시처럼 여겨졌던 유대인들의 존재가 기독교인들 사이의 불화로 문제를 일으키자, 글라우디오 황제는 반유대적 시민들의 호소에 편승하여 유대인들을 로마에서 추방한 것으로 보인다. 바울의 고린도 사역을 도왔던 부부 아길라와 브리스길라는 이때 로마로부터 추방당하여 건너온 로마 교인이었다(행 18:2). 수에토니우스는 세속 역사가였지만, 기독교인이 믿는 그리스도의 존재를 잘 알고 있었고, 그리스도라는 호칭을 라틴어로 ‘크레스투스’(Chrestus)라 불렀다. 이 명칭은 헬라어 Χριστός(크리스토스)의 라틴어 음역이었다. 그런데 라틴어로 제대로 음역한다면 Christus(크리스투스)라고 해야 하고, 실제로 라틴어 성경번역은 그렇게 하고 있다. 하지만 2세기 초의 역사가 수에토니우스는 그리스도(Χριστός)를 Christus가 아닌 Chrestus 라고 비슷한 발음을 가진 다른 단어로 음역하였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    

그리스도(Χριστός)라는 말은 헬라어 χρίω (크리오)에서 왔다.
이 동사는 ‘기름 붓다’(anoint), 혹은 ‘기름 바르다’(smear)의 뜻을 가지고 있다.
그레코 로만 세계의 사람들은 헤브라이즘의 메시아(그리스도),
즉 anointed one (기름부음 받은, 기름칠한 자)의 뜻을 전혀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그래서 Christus의 철자보다는 비슷한 철자이지만, 뜻이 통하고 발음이 비슷한 Chrestus로 음역했을 것이다.
이 음역은 헬라어 χρηστός(크레스토스)를 즉시 연상시킨다.
이 단어는 대체적으로 탁월한(excellent), 유용한(useful), 도움이 되는(helpful), 좋은(good), 친절한(kind), 온화한(mild) 등의 뜻을 가지며, 고전 헬라어뿐만 아니라, 셉투아진트, 신약성경에서 고루 사용되었다.

구약 헬라어 성경(LXX)에서 χρηστός (크레스토스)는 여러 히브리어 동사에서 번역한 단어이지만, 대체적으로 ‘좋은, 선한’이라는 טוֹב(토브)를 번역할 때 이 단어를 사용하였다(렘 24:2; 단 2:32). 

χρηστός (크레스토스)는 하나님과 사람에게 사용되는 단어로서 주로 관계적인 측면에서, 그리고 어떤 목적에 유용하고 도움이 되는 것을 의미하는 단어이다.

본질적 선함(essential goodness)보다는, 사람과의 관계에서(relational), 혹은 목적에 도움이 되는(serviceable) 선함을 나타내는 단어이다. 그런 점에서 도덕적 선함(moral goodness)을 말한다.

신약성경에서 헬라어 χρηστός(크레스토스)가 7번 사용되었고,
명사 χρηστότης (크레스토테스)는 10번 사용되었고,
동사 χρηστεύομαι(크레스튜오마이)는 단 한 번 사용되었다(고전 13:4).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라는 담화에서 예수는 “묵은 것이 좋다”(χρηστεύομαι)라는 격언을 소개한다(눅 5:39).
예수의 가르침과 다른 엉뚱한 격언이 첨부되었기에, 고대 사본에는 이 구절이 없지만 묵은 포도주가 미각과 후각에 더 좋은 것이기에 포도주를 마시는 목적에 맞는다는 의미로서 χρηστός (크레스토스)를 사용하였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에게 육체의 부활을 믿지 않고 다른 주장을 하는 가르침에 속지 말라고 권면하면서, “나쁜 동무가 좋은 습성을 망친다”(새번역성경, 고전 15:33) 고 고전 희극작가 Menander의 구절을 인용한다.

여기서 ‘좋은 습성'(에토스 크레스토스, ἦθος χρηστός)은 도덕적 선함을 뜻하는 말인데, 부활을 믿지  않는 거짓 교인들이 부활을 기다리며 사는 그리스도인들의 도덕적 선한 삶을 무용지물로 만들 것을 경계하는 바울의 염려를 담고 있다.       

χρηστός(크레스토스)는 그리스도인의 존재를 세상에 보여주는 핵심단어이다.
선하고 착하게 사는 모습, 관용과 인자, 친절을 베푸는 모습, 겸손과 온유를 보여주는 그리스도인들의 모습을 한마디로 표현하는 것이 χρηστός(크레스토스)이다.
제자 누가는 세상에서 하나님의 자녀로 사는 모습을 인자한(χρηστός) 하나님의 모습을 닮은 삶으로 표현한다:

“오직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고 선대하며 아무 것도 바라지 말고 꾸어 주라, 그리하면 너희 상이 클 것이요 또 지극히 높으신 이의 아들이 되리니, 그는 은혜를 모르는 자와 악한 자에게도 인자하시니라”(눅 6:35). 

어떤 인간이라도 인자하게 대하시는 하나님의 모습처럼, 기독교인은 모든 사람에게 χρηστός(크레스토스)해야 한다.
그것이 세상을 살아가는 하나님의 자녀의 모습이다.
그리스도인들은 “주님이 인자하시다"( χρηστὸς ὁ κύριος) 라는 진리(벧전 2:3)를 맛보았기에, 이제 세상에서 사는 모습은 그 진리를 실천하는 삶으로 이해한다.

“서로 친절하게 하며(χρηστοί), 불쌍히 여기며, 서로 용서하기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심과 같이 하라”(엡 4:32)


1세기 말과 2세기 초의 로마의 역사가나 관리들, 시민들은 그리스도인들의 친절함과 부드러움, 온유함, 사랑하는 모습에 깊은 감명을 받았다.

비록 종교적 오해와 선입관이 있었지만, 기독교인들의 친절함(크레스토테스 χρηστότης)을 보고, 기독교인들이 믿는 그리스도(Christus)를 라틴어로 크레스투스(Chrestus)라고 불렀다. 예수는 친절한 분(Chrestus)이다.

χρηστός (크레스토스)는 도덕적 선함을 말하고, 인간관계에서 선하고 친절한 삶을 사는 것이고, 세상을 향한 섬김의 목적에 유용한 덕목이다. 이 덕목을 실천하는 사는 사람들이 Χριστιανός(크리스티아노스)이다.


6월 19일(토) 드고아 목자 아모스


드고아(Tekoa, 나팔소리)는 유다 광야에 있으며 예루살렘에서 남으로 약 15km  베들레헴의 남으로 약 10km의 위치에 있는 해발 1,000m 에 가까운 고지이다.
예언자 아모스의 출신지였으며 예루살렘 방어의 언덕이었던 이곳에는 오늘날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다.
계곡의 낮은 지대에는 소규모의 경작지가 있고, 또한 한때의 무성했던 산재한 식물의 부식토가 있다.
이곳에서 감람열매와 시카모어열매(암 7:14)라고 불리는 과일이 재배되었다.


아모스 1:1,
유다 왕 웃시야의 시대 곧 이스라엘 왕 요아스의 아들 여로보암의 시대의 지진전 이년에 드고아 목자 중 아모스가 이스라엘에 대하여 묵시 받은 말씀이라.

호세아 1:1b
...요아스의 아들 여로보암이 이스라엘 왕이 된 시대에 브에리의 아들 호세아에게 임한 여호와의 말씀이라.

유다 왕 웃시야(10대) /
이스라엘 왕 여로보암 2세(13대) /

아모스와 호세아는 동 시대에 예언 활동을 하였다.
다만 호세아는 북 이스라엘 출신으로 이스라엘을 향하여 말씀을 선포하였으나
아모스는 남 유다 출신으로 북 이스라엘에서 말씀을 선포하였다.

남과 북으로 나누어졌으나 말씀을 갖고 왕래하며 전할 수 있었다는 것은 한국과 북한을 생각하면 정말 행복한 분열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한국과 북한의 분열은 비극적인 현실입니다.

목자(牧者) shepherds                                  

1. 로이(rôʽîy) רֹעִי
   (시편 23:1) 여호와는 나의 목자(여호와 로이) 

2. 노케드(nôqêd) נֹקֵד (아모스 1:1)
   (털이 많은 양, 비교적 좋은 양)


서너 가지 죄(1:3, 6, 9, 11, 13, 2:1, 4, 6)

1. 수적인 격언
numerical proverb

2. 완전 수 3 + 1=4(아주 많은 죄)
Luther, Calvin, Keil, Drive

3. 3+4=7(죄로 가득한 상태) 
W. R. Harper


다메섹의 죄(3절) - 아람(수리아)의 수도
철타작기로 길르앗을 압박

가사의 죄(6절)
사로 잡은 자를 에돔에 붙였다(인신매매)


두로의 죄(9절)
형제의 계약을 무시하고
사로 잡은 자를 에돔에 붙였다(인신매매)

에돔의 죄(11절)
칼로 형제를 추격하며 긍휼을 버리고 항상 분을 품다 


암몬의 죄(13절)
자기 지경을 넓히려 아이 밴 여인의 배를 갈랐다
(비인도적인 만행)


아모스(Amos. ʽÂmôwç) עָמוֹס                         짐, 무거운 짐을 진자, 무거운 짐을 운반하는 자                            

    묵시 / 하조트(châzôwth) חָזוֹת

평범한 가문의 아모스가 여호와 하나님으로부터
이스라엘에 대한 책망을 선포하는 무거운 짐을 짊어진
것처럼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은 어두운 세상에
소금과 빛으로 살아야 할 무거운 짐을 맡았다.

바닷물의 염분 농도(약 3%)

로마 정부 기독교를 국교 / 9%의 기독교인들

어느 임금의 세 딸 / 금, 보석, 소금


오늘의 기도

세상의 소금
세상의 빛으로 살아가자

희생, 헌신, 자기 포기, 자기 비하


6월 21일(월)

아모스(무거운 짐을 짊어진 사람)

1. 남 유다 출신(웃시야 왕)

2. 북 이스라엘을 향한 활동(여로보암 2세)

3. 목자(노케드, 보케르)

4.  서너가지 죄(수적인 격언)
X + 1 =  점차 증가하는 죄악

잠언 6:6 / 여호와의 미워하시는 것 곧 그 마음에 싫어하시는 것이 육 칠 가지니 

5. 이웃 나라들의 죄를 심판
율법을 받은 백성들의 죄악이 더 심각
세상 모든 나라가 하나님의 주권 아래

호세아 2:4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유다의 서너가지 죄로 인하여 내가 그 벌을 돌이키지 아니하리니
이는 저희가 여호와의 율법을 멸시하며 그 율례를 지키지 아니하고 그 열조의 따라가던 거짓것에 미혹하였음이라.

  • 거짓것 / (현대인, 공동, 새번역) 거짓 신
    (NIV) false gods
    카자브(kâzab) כָּזַב 헛것, 거짓말쟁이, 거짓말

유다의 죄(4절)

1. 여호와의 율법을 멸시

2.  율례를 지키지 않는 것

3. 거짓 것에 미혹된 것(우상 숭배)
* 난외의 주 1 참조(우상)

아모스 2:6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이스라엘의 서너가지 죄로 인하여 내가 그 벌을 돌이키지 아니하리니
이는 저희가 은을 받고 의인을 팔며 신 한 켤레를 받고 궁핍한 자를 팔며.

이스라엘의 죄(6-8절)


1. 은을 받고 의인을 팔며(부당한 재판)

2. 신 한 켤레를 받고 궁핍한 자를 팔며(불의한 뇌물)

3. 가난한 자의 머리에 있는 티끌을 탐내며(물질적 탐욕)

4. 겸손한 자의 길을 굽게 하며(부정과 부패)

5. 부자가 한 젊은 여인에게 다녀서 나의 거룩한 이름을 더럽히며(음란)

6. 모든 단 옆에서 전당 잡은 옷 위에 누우며(무정함)

7. 저희 신의 전에서 벌금으로 얻은 포도주를 마심이니라(신성모독)

정의(체다카, tsedâqâh) צְדָקָה            

1. 올바름,  2. 정의,  3. 의로움
                                                           

공의(미쉬파트, mishpâṭ) מִשְׁפָּט               

 1.  판결,  2. 율례, 3. 공의


역대하 19:6(여호사밧 왕)
너희의 재판 하는 것이 사람을 위함이 아니요 여호와를 위함이니…. 



아모스 5:24
오직 공법(מִשְׁפָּט)을 물 같이,정의(צְדָקָה)를 하수 같이 흘릴찌로다.

7절. 공법을 인진으로 변하며 정의를 땅에 던지는 자들아.

12절b. 너희는 의인을 학대하며뇌물을 받고 성문에서 궁핍한 자를 억울하게 하는 자로다.

공의란?
판결의 의를 말하는 것으로 공평한 재판이 실현되는 것을 말한다.

정의란?
사회적 의를 말하는 것으로 세상의 질서가 모두에게 바르게 적용되는 것을 말한다.

12절b. 너희는 의인을 학대하며
뇌물을 받고 성문에서 궁핍한 자를 억울하게 하는 자로다. 

오늘의 기도

믿음의 반석위에 교회를 세우자

 임직자들을 세울 때
(믿음? 사회적 지위와 신분?)

갈라디아서 1:10
이제 내가 사람들에게 좋게 하랴 하나님께 좋게 하랴 사람들에게 기쁨을 구하랴
내가 지금까지 사람의 기쁨을 구하는 것이었더면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니라.


신일교회는 창립76주년을 맞아 ‘신일교회 7무(無) 임직식’이라는 특별한 임직예식을 가졌다.
1. 임직자 직분에 따른 임직헌금 無
2. 축하를 위한 축의금 꽃다발 無
3. 임직증서를 수여하고 화려한 임직패 無
4. 가슴에 다는 꽃과 흰 장갑 無
5. 임직을 위한 의상(양복, 한복) 구매 착용 無
6. 임직자들이 돈을 모아 교회에 드리는 기념품 無
7. 교역자에게 선물 및 사례비 無 등

7무(無) 예식을 진행하며 코로나19 시대에 솔선하여 검소한 예식을 실천했다.



6월 22일(화) 자기의 비밀(아모스 3:7)


아모스 3:7
주 여호와께서는 자기의 비밀을 그 종 선지자들에게 보이지 아니하시고는 결코 행하심이 없으시리라.

아모스 3. 4장과 5. 6장은 구약에서 공통적인 표현법으로서, 시의 효과를 위해 둘 혹은 그 이상의 행이 다른 낱말이 갖는 사상과 관련되어 표현되는 것을 병행구 또는 병행법이라고 한다.

예를 들면,

1. 동의적 병행법
가장 일반적인 것은 시편 1:1과 같이 시의 행이 그와 동등하거나 유사한 의미를 나타내는 것.
복 있는 사람은 악인의 꾀를 따르지 아니하며

2. 반의적 병행법
어떤 경우에는 잠언 3:5과 같이 두 행이 반대의 의미를 나타낸다.
너는 마음을 다하여 여호와를 의뢰하고 네 명철을 의지하지 말라

3. 종합적 병행법
어떤 경우에는 잠언 3:20과 같이 둘째 행이 첫째 행의 의미에다 무엇을 더하는 것이다.
그 지식으로 해양이 갈라지게 하셨으며 공중에서 이슬이 내리게 하셨느니라.  

아모스 3:1
이스라엘 자손들아
여호와께서
너희를 쳐서 이르시는 이 말씀을 들으라.

아모스 5:1
이스라엘 족속아
내가 너희에게 대하여 애가로 지은
이 말을 들으라.


아모스 3:2
내가 땅의 모든 족속 중에 너희만 알았나니 그러므로 내가 너희 모든 죄악을 너희에게 보응하리라.

* 너희만(레크, rêyq. רֵיק)

(공동번역) 너희만을 골라내었건만
(새번역) 오직 너희만을 선택하였으나

이스라엘과 하나님의 특별한 관계
- 친밀한 관계

1. 하나님의 특별한 소유(출 19:5, 말 3:17)

2. 제사장 나라(출 19:6)

3. 여호와의 백성(삿 5:11, 삼하 14:13)

4. 거룩한 백성(신 7:6, 14:2, 21)

아모스 3:10

자기 궁궐에서 포학과 겁탈을 쌓는 자들이 바른 일을 행할 줄을 모르느니라 이는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베드로전서 2:9

오직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데서 불러 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자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오늘의 기도

믿음의 본분을 바르게 감당하자!

어두운 죄악 가운데서 불러 내어 구원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아름다운 은혜를 전하는 사명


6월 23일(수) 예비하라(아모스 4:12)


아모스 4:12

그러므로 이스라엘아 내가 이와같이 네게 행하리니 이스라엘아 네 하나님 만나기를 예비하라.

아모스 4:1

사마리아 산에 거하는 바산 암소들아 이 말을 들으라 너희는 가난한 자를 학대하며 핍한 자를 압제하며
가장에게 이르기를 술을 가져다가 우리로 마시게 하라 하는도다.

* 바산의 암소들(부유한 여인들)

아모스 4:4

너희는 벧엘에 가서 범죄하며 길갈에 가서 죄를 더하며
아침마다 너희 희생을, 삼일마다 너희 십일조를 드리며.

* 벧엘(하나님과 이스라엘이 만난 곳)
* 길갈(단을 쌓은 곳, 12지파의 기념비, 국가의 시작 선포)
* 아침마다 너희 희생을(상번제)

벧엘은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만남이 시작된 곳

길갈은 가나안 땅의 역사가 시작된 곳입니다.
아브라함과 야곱이 하나님의 약속을 받고 제단을 쌓은 곳
여호수아가 요단강을 건너 12지파의 기념비를 세운 곳
사무엘이 사울을 왕으로 세운 후 이스라엘 백성들과 함께 새로운 국가의 시작을 선포한 곳

그러므로 이스라엘이 ‘벧엘에서 범죄하고 길갈에서 죄를 더했다’(4절)는 말씀의 뜻은,
이스라엘이 하나님과 맺은 관계를 어그러뜨리는 죄를 지었다는 뜻으로 풀이될 수 있겠습니다.

아모스 4:5

누룩 넣은 것을 불살라 수은제로 드리며 낙헌제를 소리내어 광포하려무나 이스라엘 자손들아
이것이 너희의 기뻐하는 바니라 이는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 수은제(thank offering) 토다(tôwdâh) תּוֹדָה
  은혜에 보답하는 제사(감사)
* 낙헌제(freewill offering) 네다바(nedâbâh)   נְדָבָה

  자원하는 제사 (아낌없이 주는 마음)

이스라엘에 대한 경고(6-11절)
내가……
너희가 내게 돌아오지 아니하였느니라
(6b, 8b, 9b, 10b, 11b)


7가지 재앙
1. 기근(6),
2. 가뭄(7-8), 
3. 곡물재해(9a), 
4. 황충(9b),
5. 전염병(10a), 
6. 칼(전쟁)(10b), 
7. 지진(11) 

아모스 4:12

그러므로 이스라엘아 내가 이와같이 네게 행하리니 이스라엘아 네 하나님 만나기를 예비하라.

잠언 31:30-31

고운 것도 거짓되고 아름다운 것도 헛되나 오직 여호와를 경외하는 여자는 칭찬을 받을 것이라.
그 손의 열매가 그에게로 돌아갈 것이요 그 행한 일을 인하여 성문에서 칭찬을 받으리라. 

로마서 12:1-2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예배니라.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오늘의 기도

예수님이 기뻐하는 예배와 삶을 회복하자!

내가 만족하는 예배와 예물
영적인 예민함

찰스 엠 셀돈(Charles M  Sheldon. 1857-1946)
In his Step(예수님이라면 어떻게 하셨을까?)

https://m.blog.naver.com/PostView.naver?isHttpsRedirect=true&blogId=dyskekq&logNo=220799757881


하나님께서 재난을 내리시는 목적을 세 가지로 분명하게 증거 한다.

첫째, ‘자기 뜻을 사람에게 보이며’ 고난에는 뜻이 있고 재앙에는 메시지가 있다.

빨리 지나가고 회복되기만을 바랄 게 아니라 그 속에 담긴 뜻과 메시지를 깨달아 변화와 성숙의 기회로 삼아야 한다.

둘째, ‘땅의 높은 데를 밟는 도다’

인간의 오만을 꺾으신다.
재난은 오만불손한 이들을 겸손하게 만든다.
인생은 풀과 같고 그 영광은 들의 꽃과 같다.
한줌의 재로 돌아갈 존재다.
재난을 통해 일상의 소중함을 깊이 자각한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라는 사실을 깨닫게 하신다.

셋째, ‘그 이름이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니라’

왕 노릇하던 헛된 우상들을 무너뜨리신다.
우상숭배는 하나님이 아닌 것들을 하나님처럼 섬기는 것이다.

우상은 이단 신천지의 교주만이 아니다. 물질과 건강, 명예와 권세가 얼마나 부질없는가를 철저하게 깨닫게 하신다.
오직 하나님만 하나님 되심을 나타내신다.

코로나19의 재난이 언제까지 계속될지 모르지만 부디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을 성찰하고, 오만을 버리고, 헛된 우상을 내려놓고 하나님을 삶의 주관자로 인정하는 기회가 되길 바랄 뿐이다.

6월 24일(목) 여호와를 찾으라(아모스 5:6)

아모스 5:6

너희는 여호와를 찾으라 그리하면 살리라
염려컨대 저가 불 같이 요셉의 집에 내리사 멸하시리니 벧엘에서 그 불들을 끌 자가 없을까 하노라.

돌아오라!
슈브(shûwb) שׁוּב                                                                                                    

5:2, 처녀 이스라엘  
5:4, 벧엘, 길갈, 브엘세바                                     

찾으라!
다라쉬(dârash)  דָּרַשׁ                                                                

* 인간의 어리석음 : 매를 맞아야 깨닫는 존재

아모스 5:4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족속에게 이르시기를 너희는 나를 찾으라 그리하면 살리라.

아모스 5:7-8

공법(공의)을 인진으로 변하며 정의를 땅에 던지는 자들아.
묘성(북두칠성)과 삼성(오리온좌)을 만드시며 사망의 그늘로 아침이 되게 하시며 백주로 어두운 밤이 되게 하시며
바닷물을 불러 지면에 쏟으시는 자를 찾으라  그 이름이 여호와시니라.


아모스 5:14-15

너희는 살기 위하여 선을 구하고 악을 구하지 말찌어다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의 말과 같이 너희와 함께하시리라.
너희는 악을 미워하고 선을 사랑하며 성문에서 공의를 세울찌어다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혹시 요셉의 남은 자를 긍휼히 여기시리라.    

오늘의 기도

시대적 본분과 사명을 깨닫자!

길을 보여주는 삶
(세상이 교회를 필요로 하는가?)



6월 25일(금) 공법을 쓸개로(아모스 6:12)


아모스 6:12-13a

말들이 어찌 바위 위에서 달리겠으며 소가 어찌 거기 밭 갈겠느냐 그런데 너희는 공법을 쓸개로 변하며 정의의 열매를 인진으로 변하며. 허무한 것을 기뻐하며.

말이 바위 위를 달릴 수 없고 소가 바위를 개간할 수 없듯이(공동번역 / 바다를 개간 할 수 있느냐?)
사람이 해서는 알 될 정의와 공의를 무너뜨렸습니다.

금기로 간주되는 일, 도저히 해서는 안 될 일을 이스라엘이 했다는 것입니다.
정의를 물같이 공의를 마르지 않는 강같이 흐르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섭리이자 순리입니다.
하지만 정의와 공의를 쓸개와 쓴 쑥으로 바꾸었다는 것은 쓸개와 쓴 쑥으로 사람들을 핍박하고 죽음에 이르게 하는 악행을 저질렀다는 의미입니다.
‘쓸개’와 ‘쓴 쑥’으로 번역한 단어는 성경 다른 구절에서는 ‘독’과 ‘독약’으로 번역되었습니다.

허무한 것을 기뻐하고 자신의 힘으로 뿔들을 취하였다는 것은 이스라엘의 군사적 경제적 힘을 자랑하는 교만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허무한 것(로다바르, 지명으로 뜻은 없는 것, nothing)
언어의 묘미를 살려 없는 것을 기뻐하는 어리석음을 지적합니다.
이스라엘의 지도자들이 가치도 없고, 존재하지도 않으며, 허무한 것을 추구하는 모습을 빗대어 말한 것이다.

뿔(카르나임)이란 것도 힘을 상징하는 것으로 지명으로 여로보암 2세가 전쟁에서 승리한 후 얻은 땅으로 이런 것들도 모두 헛되다는 것을 의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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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복을 자신의 힘으로 이루었다고 말하는 교만을 책망하는 말씀입니다.

아모스 6:14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이스라엘 족속아 내가 한 나라를 일으켜 너희를 치리니 그들이 하맛 어귀에서부터 아라바 시내까지 너희를 학대하리라 하셨느니라.

하나님께서 결론적으로 말씀하십니다.
‘한 나라를 일으켜 치겠다’

하맛 어귀는 이스라엘 국경 최북단이며
아라바 시내는 이스라엘 국경 최남단을 가리킵니다.

이스라엘 전체가 외세에 의해 짓밟힐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역사적으로 보면 한 나라는 앗수르를 의미합니다.
북 이스라엘은 주전 722년 앗수르에 의해 멸망을 당합니다.

이스라엘은 번영의 시기에 교만해졌습니다.
누리고 있는 모든 것들이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임을 자각하지 못했습니다.
왕이 능력이 있고 지도자들이 지략이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지도자들의 타락이 백성들의 타락으로 이어졌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마음이 굳어지고 교만해졌습니다.
주리고 목마르고 나그네 되고 헐벗고 병들고 갇힌 자들은 안중에 없었고 오히려 그들을 신 발 한 짝에 팔아넘길 정도로 부의 축적에 혈안이 되었고, 축적된 부로 사치와 향락의 일상을 살았습니다.

예수님의 비유로 보면, 양과 염소의 무리 중에 염소 무리가 되고 말았습니다.
그 결과는 어떻게 되었습니까?

여로보암 2세 시대 이스라엘 사람들이나 예수님 시대 이스라엘 사람들이 사회적 약자들을 주님이라고 여겼다면 과연 태도가 달랐겠습니까?

오늘날 우리는 사회적 약자를 대하는 것이 주님께 대하는 것임을 성경 말씀을 통해 배웠습니다.
그렇다면 사회적 약자에게 어떻게 대하며 살아야 하겠습니까?
오늘 하루 사회적 약자를 주님을 대접하듯 살아가는 것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을 주님을 대하듯이 살아보시지 않겠습니까?

아모스의 경고의 화살은 아무래도 지도자들, 상류층을 주로 향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남 유다의 수도인 시온산, 북 이스라엘의 수도인 사마리아산에 거주하면서 으스대고 있었습니다.
그런 그들에게 아모스는 갈레, 하맛, 가드를 상기시켜주지요.
그곳들은 이전에는 이스라엘보다 훨씬 더 크고 화려했었지만 아모스 당시에는 쇠락해져 있었습니다.
이스라엘도 곧 그렇게 될 것이라는 경고입니다.
특히 지도자들은 더욱 심판받을 것인데, 그들의 죄목은 교만과 안일이었습니다.

이어지는 아모스의 고발은 참 생생합니다.

상아 침대에 누워 기지개를 켜고, 양과 송아지를 잡아서 파티를 열고, 자기가 마치 다윗인 것처럼 악기를 만들어서 노래부르고, 술에 빠져 있으면서 열심히 외모를 꾸미고 있었습니다.

그림이 그려지지 않습니까?

그들은 흉한 날은 멀다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요셉의 환난, 즉 망해가는 나라에 대해서는 근심하지 않고 있었습니다.
물론 힘들어 부르짖는 서민들의 소리에도 귀기울이지 않았구요.

자신들이 쌓아놓은 자기들만의 성 안에서 흥청망청 지낼 뿐이었습니다.
이런 지도자들의 사치와 부패는 어디서나 일어나는 일입니다.

로마 제국 말기의 귀족들이 그랬고,
유럽 봉건 시대의 왕과 영주들이 그랬고,
일제 치하 우리나라의 친일파들이 그랬고,
제정 러시아의 귀족들과 성직자들이 그랬고,
미군정 아래에서 지주들이 그랬지요.
미국에서 2008년 금융위기로 600만 명이 집을 잃었을 때도 은행의 임원들은 수십억원의 연봉잔치를 누렸고,
북한에서는 수백 만의 인민들은 굶어죽어가고 있는데 당 간부들은 호화스러운 생활을 누리고 있습니다.
현재 한국의 주사파들이 모든 분야를 장악하고 부를 축적히는 일에 열중하는 것
그들은 나라의 운명이나 다른 사람의 아픔 같은 것에는 신경쓰지 않습니다.
오직 나의 이득에만 관심이 있지요.
지금 우리나라는 어떻습니까?
그렇지 않다고 자신할 수 있을까요?

아모스는 그런 지도자들에게 그날이 오면 그들이 맨 앞에서 끌려갈 것이라고 선포합니다.
1절에서 그들을 가리켜 '백성들의 머리'라고 했는데 7절에서는 사로잡혀갈 때도 머리가 될 것이라고 빈정대고 있지요.
그리고 그들의 기지개 켜는 소리와 흥얼대던 노래소리도 그칠 것이라고 합니다.
지도자들을 향해 손가락질을 하기는 쉽습니다.
하지만 그 손가락을 우리 스스로에게도 돌려야겠지요.



6월 26일(토) 다림줄(아모스 7:7)

7:1. 주 여호와께서 내게 보이신 것(7:1, 4. 8:1)  

아모스 7:7
또 내게 보이신 것이 이러하니라 다림줄을 띄우고 쌓은 담 곁에 주께서 손에 다림줄을 잡고 서셨더니.

- 보이신 것(라아. רָאָה)

 선지자, 선견자, 예언자

1. 듣는 것(경청)
2. 보는 것(환상)
3. 전하는 것(신탁)             
    * 하나님의 마음
    (세상을 하나님의 눈으로 바라보는 것)

아모스 7:7
또 내게 보이신 것이 이러하니라 다림줄을 띄우고 쌓은 담 곁에 주께서 손에 다림줄을 잡고 서셨더니.

* 다림줄(아나크, ’ănâk. אֲנָךְ ) / 주석(칼)
다림줄은 위에서부터 줄을 내려야 한다.
기준은 위에서 시작                   

* 쌓은 담(견고한 성, 사마리아 성, 이스라엘 백성 전체)

아모스 7:2, 5

주 여호와여 청컨대 사하소서 야곱이 미약하오니 어떻게 서리이까 

아모스 7:3, 6

주 여호와께서 이에 대하여 뜻을 돌이켜 가라사대 이것이 이루지 아니하리라. 


아모스 7:8

내게 이르시되 아모스야 네가 무엇을 보느냐 내가 대답하되 다림줄이니이다
주께서 가라사대 내가 다림줄을 내 백성 이스라엘 가운데 베풀고 다시는 용서치 아니하리니.

  • 용서를 구할 수 없는 시간(시대)


교회는 건물이 아니라 사람이다.

교회를 세우는 것은
사람을 진리의 말씀으로 양육하는 것이다.
내가 교회가 되어야 한다.
  가정이 교회가 되어야 한다.
가정이 사회로 발전해야 한다.
사회가 국가로 발전해야 한다.


벧엘의 제사장 아마샤와 남 유다 출신의 선지자 아모스

아모스 7:10

때에 벧엘의 제사장 아마샤가 이스라엘 왕 여로보암에게 기별하여 가로되 이스라엘 족속 중에 아모스가 왕을 모반하나니
그 모든 말을 이 땅이 견딜 수 없나이다.

아모스 7:11

아모스가 말하기를 여로보암은 칼에 죽겠고 이스라엘은 정녕 사로잡혀  땅에서 떠나겠다 하나이다.

  • BC 722년 앗수르에 의한 멸망

오늘의 기도

말씀을 분별하는 믿음을 주소서!

가정 제단의 거룩함을 회복하라.

세상의 소금과 빛으로 일어나라.

진리 편에 가담하라. 

6월 28일(월) 기근과 기갈(아모스 8:11)


기근(飢饉· 饑饉)

1. 흉년이 들어 식량이 모자라는 것. 순화어는 `굶주림'.
"기근이 들어 백성들이 초근목피로 연명하다"
2. 필요한 물자가 몹시 부족한

기갈(飢渴)

1.배고픔과 목마름.

"기갈이 심하다"

* 기갈이 감식(甘食)
- 굶주리고 목마르면 무엇이나 맛있다는 말.

* 기갈든 놈은 돌담조차도 부순다
- 사람이 몹시 굶주리면 상식으로는 도저히 생각할 수 없는 일까지도 저지른다.

* 기갈이 들다
- 몹시 굶주려서 간절히 음식을 탐내다. 순화어는 `(굶)주리다'.

아모스가 본 환상

1. 황충(7:1-3)
2. 불(7:4-6)
3. 다림줄(7:7-9)
4. 여름과일 한 광주리(8:1-3)
5. 단 곁에 서신 주님(9:1-4)

아모스 8:11

주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보라 날이 이를찌라 내가 기근을 땅에 보내리니 양식이 없어 주림이 아니며
물이 없어 갈함이 아니요 여호와의 말씀을 듣지 못한 기갈이라.

기근과 기갈이란 먹을 양식과 마실 물이 없기 때문이 아니라 "여호와의 말씀"이 없기 때문입니다.
"여호와의 말씀이 없다!"는 것을 "예수님이 없다" 라고 생각해 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는 말씀이 육신이 되어 이 세상에 오셨기 때문입니다.

요한복음 1:14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대형교회는 있습니다.
대형 예수님이 있을까요?
예수님은 은혜와 진리로 드러나야 합니다.
얼마전 정기 검진을 받기 위하여 담당 의사를 만났습니다.
은혜가 무엇이냐?고 질문을 하므로 "은혜는 주는 것입니다!" 라고 말했습니다.
"왜 은혜가 주는 것인가?"
성경에도 " 주 예수의 친히 말씀하신바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 하심을 기억하여야 할찌니라"(사도행전 20:35)

그동안 신앙교육은 다른 사람이 받지 못한 것을 받는 것이 은혜라고 배웠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가르침은 은혜는 주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대형교회는 주는 은혜가 다른 교회보다 더 크고 더 많아야 합니다.
그런데 소유한 것은 많지만 주는 것은 지극히 일부분입니다.

부흥과 성장을 자랑하는 교회가 있습니다.
부흥하고 성장하는 예수님이 있을까요?
부흥과 성장하는 교회는 은혜와 진리가 무르익어야 합니다.

아모스 8:12-13

사람이 이 바다에서 저 바다까지, 북에서 동까지 비틀거리며 여호와의 말씀을 구하려고 달려 왕래하되 얻지 못하리니
그 날에 아름다운 처녀와 젊은 남자가 다 갈하여 피곤하리라.    

교회마다 시집 가야 할 아가씨들은 넘쳐나는데 장가갈 청년들이 없다고 합니다.
아름다운 처녀와 젊은 남자가 갈하여 피곤하다는 것은 물론 짝을 찾지 못한 것은 아닙니다.

아모스 8:14

무릇 사마리아의 죄된 우상을 가리켜 맹세하여 이르기를 단아 네 신의 생존을 가리켜 맹세하노라 하거나
브엘세바의 위하는 것의 생존을 가리켜 맹세하노라 하는 사람은 엎드러지고 다시 일어나지 못하리라.

우상은 탐심입니다.
탐심은 곧 탐욕을 말합니다.

골로새서 3:5
그러므로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 곧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이니 탐심은 우상 숭배니라.

아모스 8:1-2

주 여호와께서 또 내게 여름 실과(카이츠) 한 광주리를 보이시며.
가라사대 아모스야 네가 무엇을 보느냐 내가 가로되 여름 실과 한 광주리니이다 하매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내 백성 이스라엘의 끝(케츠)이 이르렀은즉 내가 다시는 저를 용서치 아니하리니.

첫째, 언어의 이중적 의미로 표현

예레미야에게 "네가 무엇을 보느냐?"
"내가 살구나무 가지를 보나이다"
"내가 내 말을 지켜 그대로 이루려 함이니라."

살구나무(샤켓. Shaqed)
지킨다(쇼켓. Shoqed)

둘째, 무르익은 과일은 곧 썩을 수밖에 없다.

북 이스라엘의 멸망은 우상숭배 때문이라고 하겠습니다.
벧엘과 단에 금송아지를 만들고 예루살렘에 가지 말고 이곳에서 여호와께 단을 쌓으라고 하였다.

예레미야 1:11

네가 무엇을 보느냐?
살구나무(샤켓. Shaqed) 가지를 보나이다.
내가 내 말을 지켜(쇼켓. Shoqed)
그대로 이루려 함이니라.

8247. 살구나무(샤켓. shâqêd) 솨케드  שָׁקֵד 

1. 살구나무
2. 살구나무 열매
발음 [ shâqêd ]
어원 / 8245에서 유래
관련 성경 / 감복숭아(창43:11), 살구 열매(민17:8), 살구나무(전12:5, 렘1:11).
구약 성경 / 4회 사용

* 8245. 지키다(솨카드. shâqad ) שָׁקַד 

1. 밤을 새우다.  2. 경계하다. 3. 주목하다
발음 [ shâqad ]
관련 성경 / 새우다(시102:7), 깨어있다(시127:1, 렘31:28, 44:27), 기다리다(잠8:34), 지키다(스8:29), 엿보다(사29:20, 렘5:6), 보다(렘1:21).
구약 성경 / 18회 사용





아모스 8:4

궁핍한 자를 삼키며 땅의 가난한 자를 망케 하려는 자들아 이 말을 들으라.

* 여호와의 말씀(예수) / 은혜, 진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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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나(Jonas) : 비둘기


1. 스불론 땅 갓헤벨 사람 아밋대의 아들.
2. 12소선지자 중 한 사람으로 요나서의 주인공
3. 주전 825년 여로보암 2세 때 하나님이 요나에게 앗수르 도성 니느웨로 가서 그 죄악을 책하고 장차 멸망할 것을 예언하라 하였다.
4. 니느웨 사람과 감정이 좋지 않아 다시스로 도망가다 폭풍을 만나 죄인 하나를 제비뽑아 물속에 던지는 그 제비에 뽑혀 바다에 던져졌다.
5. 여호와가 큰 물고기를 예비하여 요나를 삼키게 하여 고기 배속 에서 3주야를 지내게 되었다(요나 2장)
6. 요나가 그 가윤데서 자복하고 기도할 때에 고기는 요나를 육지에 토하여냈다(요나 3장)
7. 요나가 니느웨로 가서 3일간 선포하자 그 성 주민들이 회개하였다(요나 3장)
8. 요나가 성밖에 나가서 어느 박넝쿨을 죽여 말라 버리는지라 요나가 심히 안타까와 할때 여호와의 말씀이"네가 하루 났다가 시들어지는 박넝쿨도 그롱게 아끼거둔 내가 이 큰성 니느웨의 12만명을 아끼지 않겠느냐"고 일깨워 주셨다(요나 4장)

9. 예수님이 죽었다가 사흘만에 살아나실 것을 요나를 들어 말씀하셨다(마태복음 12:39)
10. 헬라인과 로마인은 이 사실을 모두 확증하였다.



호세아(Hosea) : 여호와는 구원이시다

1. 잇사갈 지파 사람으로 12소선지중의 한 사람
2. 웃시아 왕 때부터 히스기야 왕 때(B.C 785-725)까지 예언하였으니 선지자 중 가장 오래 예언하였다.
3. 호세아서에서는 이스라엘 백성이 우상 숭배한 죄를 깊이 책망하고 구세주 오실 것을 신망하였다고 신약에 3차 인용하였다(마태복음 9:13, 로마서 9:25, 베드로전서 3:10-12)




아모스(Amos) / 무거운 짐을 진 자(짐을 지는 사람)

주전 8세기의 이스라엘의 예언자.
그는 베들레헴 남쪽 10Km지점 돌 많은 드고아의 목자 겸 뽕나무를 재배했었다(호세아 1:7, 14).
그는 고향 유대를 떠나 북왕국 이스라엘의 벧엘에서 당시의 왕 여로보암 2세의 정치와 종교적 타락을 공박했었다(호세아 7:7-9).


주전 8세기 북 이스라엘을 향한 예언 활동 : 아모스, 요나, 호세아

아모스(Amos) : 무거운 짐을 진 자(짐을 지는 사람)

1. 주전 8세기의 이스라엘의 예언자.
2. 베들레헴 남쪽 10Km지점 돌 많은 드고아의 목자 겸 뽕나무를 재배했었다(호세아 1:7, 14)
3. 그는 고향 유대를 떠나 북왕국 이스라엘의 벧엘에서 당시의 왕 여로보암 2세의 정치와 종교적 타락을 공박했었다(호세아 7:7-9)

요나(Jonas) : 비둘기

1. 스불론 땅 갓헤벨 사람 아밋대의 아들.
2. 12소선지자 중 한 사람으로 요나서의 주인공
3. 주전 825년 여로보암 2세 때 하나님이 요나에게 앗수르 도성 니느웨로 가서 그 죄악을 책하고 장차 멸망할 것을 예언하라 하였다.
4. 니느웨 사람과 감정이 좋지 않아 다시스로 도망가다 폭풍을 만나 죄인 하나를 제비뽑아 물속에 던지는 그 제비에 뽑혀 바다에 던져졌다.
5. 여호와가 큰 물고기를 예비하여 요나를 삼키게 하여 고기 배속 에서 3주야를 지내게 되었다(요나 2장)
6. 요나가 그 가윤데서 자복하고 기도할 때에 고기는 요나를 육지에 토하여냈다(요나 3장)
7. 요나가 니느웨로 가서 3일간 선포하자 그 성 주민들이 회개하였다(요나 3장)
8. 요나가 성밖에 나가서 어느 박넝쿨을 죽여 말라 버리는지라 요나가 심히 안타까와 할때 여호와의 말씀이"네가 하루 났다가 시들어지는 박넝쿨도 그롱게 아끼거둔 내가 이 큰성 니느웨의 12만명을 아끼지 않겠느냐"고 일깨워 주셨다(요나 4장)

9. 예수님이 죽었다가 사흘만에 살아나실 것을 요나를 들어 말씀하셨다(마태복음 12:39)
10. 헬라인과 로마인은 이 사실을 모두 확증하였다.





호세아(Hosea) : 여호와는 구원이시다.

(1) 잇사갈 지파 사람으로 12소선지중의 한 사람이다. (2) 웃시아 왕때부터 히스기야 왕 때(B.C 785-725)까지 예언하였으니 선 지 중 가장 오래 예언하였다. (3) 그의 저서 호세아서에서는 이스라엘 백성이 우상 숭배한 죄를 깊이 책 망하고 구세주 오실 것을 신망하였다고 신약에 3차 인용하였다 (마 9:13,롬9:25, 벧전 3:10-12).


아모스의 소명(1-2절)
오늘부터 아모스를 함께 나누겠습니다.
‘아모스’의 이름의 뜻은 ‘짐을 지는 사람’입니다.
아모스 선지자는 끊임없이 죄를 짓는 이스라엘에게 하나님의 징계가 있을 것을 선언하라는 말씀의 짐을 진 사람이었습니다.

(1) 유다 왕 웃시야의 시대 곧 이스라엘 왕 요아스의 아들 여로보암의 시대 지진 전 이년에 드고아 목자 중 아모스가 이스라엘에 대하여 이상으로 받은 말씀이라

아모스 선지자는 자신이 활동했던 때가 언제였는지를 밝히고 있습니다.
소선지서가 12권이 있는데, 그 중에서 그 선지자가 활동했던 시기를 밝히지 않는 것이 6권(요엘, 오바댜, 요나, 나훔, 하박국, 말라기)이 있고, 밝히는 것이 6권 있습니다. 밝히는 것 중에서 학개와 스가랴는 북이스라엘과 남유다가 모두 무너지고 난 후에 기록되었기 때문에 이스라엘의 왕이 아닌 페르시아의 왕 다리오의 이름을 밝힙니다. 그리고 미가와 스바냐는 남유다의 선지자였기 때문에 남유다의 왕들을 언급했습니다. 그런데 호세아와 아모스에는 남유다의 왕과 북이스라엘의 왕의 이름이 함께 기록되어 있습니다. 호세아 선지자는 북이스라엘에서 활동했음에도 불구하고, 남유다와 북이스라엘 왕들의 이름이 모두 언급을 하고 있고, 아모스는 남유다 출신임에도 북이스라엘에서 선지자 활동을 하였기 때문에 남유다와 북이스라엘의 왕의 이름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우리 성경에는 1절에서 ‘말씀이라’가 맨 뒤에 나오지만, 히브리어성경에는 맨 앞에 나옵니다. 다른 선지서와 마찬가지로, 이 말씀도 아모스 선지자가 자기 하고 싶은 말을 전한 것이 아니라, 환상으로 받은 말씀을 전하는 것이라는 것을 강조합니다.

아모스 선지자가 하나님의 말씀을 받을 때, 남유다를 다스렸던 왕은, 10대 임금 ‘웃시야(791-739)’였습니다. 그는 무려 52년 동안이나 통치했습니다. 북이스라엘과 남유다를 통틀어, 므낫세(55년 통치)를 이어 두 번째로 긴 기간 통치했습니다. 그는 블레셋의 중요 도시 중에 하나인 아스돗을 점령했고, 에돔의 ‘구르바알’도 차지했습니다. 구르바알을 에돔의 수도 ‘페트라’로 보는 학자들도 적지 않습니다.
또 아모스 선지자가 하나님의 말씀을 받을 때, 북이스라엘을 다스렸던 왕은, 13대 임금 ‘여로보암2세(793-753)’였습니다. 그는 41년을 통치했는데, 북이스라엘과 남유다를 통틀어서는 므낫세와 웃시야에 이어서 세 번째이었고, 북이스라엘에서는 가장 긴 기간 통했습니다. 그는 신흥 제국 아시리아가 쇠약해진 틈을 타서 북쪽으로는 하맛 어귀까지, 남쪽으로는 염해(사해)까지 확장하였습니다. 다윗과 솔로몬 이후로 가장 넓은 영토를 차지했습니다. 즉 아모스 선지자가 활동했던 때는 남유다와 북이스라엘이 전성기를 구가하고 있을 때였습니다. 남과 북이 함께 강성해 있을 때는 이 때가 거의 유일합니다.
하지만 이런 때에 사회는 무너질 대로 무너져 있었습니다. 돈으로 사람을 고통스럽게 하고, 올바르지 못한 세금제도로 가난한 사람을 더욱 착취했고, 부유한 사람들은 사치와 방탕한 생활을 일삼았습니다. 그래서 아모스의 핵심구절이 5:24절인데, “오직 정의를 물 같이, 공의를 마르지 않는 강 같이 흐르게 할지어다”라고 합니다. 그 땅에는 정의(하나님의 바르게 행하심을 받아들여, 공평하고 공정한 원칙)도 없었고, 공의(하나님의 의로우신 성품을 본받아, 가난하고 연약한 사람들, 아무 데도 기댈 데가 없는 사람들을 돕는 긍휼)도 없는 불의와 우상숭배만이 팽배했던 것입니다.

1절을 다시 읽겠습니다.
(1) 유다 왕 웃시야의 시대 곧 이스라엘 왕 요아스의 아들 여로보암의 시대 지진 전 이년에 드고아 목자 중 아모스가 이스라엘에 대하여 이상으로 받은 말씀이라

아모스 선지자는 자신의 출신지와 직업에 대해서도 밝히고 있습니다.
그는 자신이 ‘드고아’ 출신이라고 합니다. ‘드고아’는 예루살렘에서 남쪽으로 약 20km 정도 떨어진 곳에 위치한 작은 마을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받은 말씀은 남유다가 아니라 북이스라엘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또한 아모스는 자신의 직업이 ‘목자’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히브리말로 목자들을 뜻하는 보편적인 말은 ‘로에’입니다. 그런데 아모스는 ‘노케드’라는 단어를 사용합니다. 이 단어는 성경에서 2번 밖에 사용되지 않았습니다. 또 한 번은 ‘모압왕 메사’를 지칭하면서 사용되었습니다. 그래서 아모스가 가난한 목자일 것으로 생각하는 학자도 있지만, 굉장히 부유한 사람이었을 것으로 보는 학자들도 적지 않습니다. 즉, 목자라기보다 목축업자에 가깝습니다. 또한 7장에서 아모스는 자신이 ‘뽕나무를 재배하는 사람’이라고 밝히고 있습니다.
아모스는 제사장 집안의 아들도 아니었고, 선지자 학교(신학교) 출신도 아니었습니다. 그는 농삿일을 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 그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일터, 우리의 삶의 자리는 언제나 하나님의 부르심의 터전이 됩니다. 삶의 자리를 떠난 부르심은 없습니다.

(2) 그가 이르되 여호와께서 시온에서부터 부르짖으시며 예루살렘에서부터 소리를 내시리니 목자의 초장이 마르고 갈멜산 꼭대기가 마르리로다

하나님께서 부르짖으시고, 하나님께서 소리를 내신다고 선언합니다. ‘부르짖다’는 성경에서 주로 사자가 포효할 때에, 특히 먹잇감을 공격하거나, 싸울 상대 앞에서 으르렁거릴 때 사용하는 단어입니다. 또한 ‘소리를 내다’는 ‘천둥번개가 치다’는 의미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부르짖으시고, 소리를 내신다는 것은 감당하기 어려운 심판이 임박했음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그 때에 ‘목자의 초장에서 갈멜산 꼭대기까지’ 마른다고 하는데, 그 의미는 우리말 ‘한라에서 백두까지’와 비슷합니다. 하나님의 징계가 남유다와 북이스라엘 모두에게 심각하게 임하게 될 것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가나안 땅 주변 나라에 대한 심판 예언(3-15절)
3-2:16까지는 남유다와 북이스라엘 그리고 주변 6개국 등 8개의 나라에 대한 심판과 징계의 예언입니다. 그 중에서 3-15절은 5개 나라에 대한 심판의 예언입니다.
8개 나라를 심판하는 내용은 일정한 형식이 있습니다.
①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라며 심판의 주체가 누구신지를 밝힙니다.
② “서너 가지 죄로 말미암아......”라며 심판의 이유를 분명하게 밝힙니다.
③ “불을 보내리니... 사르리라”라며 심판의 형태를 밝힙니다. ‘불’은 심판을 상징합니다.
④ “여호와께서 말씀하셨느니라”라며 심판을 선언하신 분이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그것이 반드시 이루어지게 될 것임을 선언합니다. 이 네 가지 형식을 기본으로 하여 심판을 선언하십니다.

(3-5)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다메섹의 서너 가지 죄로 말미암아 내가 그 벌을 돌이키지 아니하리니 이는 그들이 철 타작기로 타작하듯 길르앗을 압박하였음이라 내가 하사엘의 집에 불을 보내리니 벤하닷의 궁궐들을 사르리라 내가 다메섹의 빗장을 꺾으며 아웬 골짜기에서 그 주민들을 끊으며 벧에덴에서 규 잡은 자를 끊으리니 아람 백성이 사로잡혀 기르에 이르리라 여호와께서 말씀하셨느니라

다메섹은 이스라엘의 북쪽에 위치한 아람(시리아)의 수도입니다. 고대의 상업도시였고, 교통의 중심지였습니다. 다른 지역도 마찬가지인데, 하나님께서는 다메섹의 ‘서너 가지 죄로 말미암아 그 벌을 돌이키지 아니하신다’라고 말씀하십니다. 혹 이렇게 생각하실지 모르겠습니다. “아니, 하나님은 서너 가지 죄만 지어도 한 도시나 한 나라를 망하게 하시는 분이신가?” 그러나 ‘서너 가지’는 ‘3이나 4’를 가리키는 단어가 아니라 ‘아주 많음’을 뜻하는 관용적인 표현입니다. 그리고 3과 4를 더하면 7인데, 7은 완전수를 뜻하기도 합니다.
하나님께서 다메섹을 심판하는 이유는 그들이 철 타작기로 타작하듯이 길르앗을 짓밟았기 때문이라고 하십니다. 특히 여호아하스왕 때에 아람(시리아)이 보병 일만 명과 마병과 병거(탱크)를 몰고 와 침략하여 이스라엘 군대를 타작마당의 티끌같이 만들어 버렸습니다. 그것에 대해서 심판을 하시겠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6-8)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가사의 서너 가지 죄로 말미암아 내가 그 벌을 돌이키지 아니하리니 이는 그들이 모든 사로잡은 자를 끌어 에돔에 넘겼음이라 내가 가사 성에 불을 보내리니 그 궁궐들을 사르리라 내가 또 아스돗에서 그 주민들과 아스글론에서 규를 잡은 자를 끊고 또 손을 돌이켜 에그론을 치리니 블레셋의 남아 있는 자가 멸망하리라 주 여호와께서 말씀하셨느니라

이스라엘의 서쪽, 지중해와 접한 곳에 위치한 블레셋은 도시들이 연합하며 만든 국가인데, 그 중에 대표적인 도시인, 가사, 아스돗, 아스글론, 에그론에 대한 심판 선언입니다.
가사는 블레셋에서 가장 교통이 발달한 도시였습니다. 그들은 편리한 교통을 이용하여 이스라엘에서 잡은 사람들을 인신매매하였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가사를 심판하시는 이유는 단지 인신매매를 했기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전쟁포로를 노예로 파는 일은 고대에 드문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포로로 잡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스라엘과 적대적인 관계에 있던 에돔에 고의로 팔아넘겼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가사에 불을 보내어서 궁궐을 사르겠다고 하십니다. 그 의미는 패전하여서 궁궐이 불에 타게 될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즉 전쟁포로를 무자비하게 잡아 넘겼으니, 전쟁으로 심판하시겠다는 의미입니다.

(9-10)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두로의 서너 가지 죄로 말미암아 내가 그 벌을 돌이키지 아니하리니 이는 그들이 그 형제의 계약을 기억하지 아니하고 모든 사로잡은 자를 에돔에 넘겼음이라 내가 두로 성에 불을 보내리니 그 궁궐들을 사르리라

두로는 이스라엘 북쪽, 지중해와 접한 곳에 위치한 국가였습니다. 그래서 두로는 발달한 해상무역으로 많은 부를 쌓았습니다. 그래서 교만했습니다. 교만한 두로왕은 자신을 하나님이라 참칭하기도 하고, 자신의 지혜가 가장 뛰어나다고 착각하기도 했습니다. 두로와 이스라엘은 서로 혈맹관계, 형제의 계약을 맺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래서 두로왕 히람이 솔로몬에게 “내 형제여”라고 호칭하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두로와 인접한 도시 시돈 출신의 여인 이세벨은 아합왕과 결혼도 했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가난하여 두로로 이주한 이스라엘 사람들을 노예로 팔아버리는 일을 자행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 일에 대해서 하나님께서는 묵과하지 않겠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11-12)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에돔의 서너 가지 죄로 말미암아 내가 그 벌을 돌이키지 아니하리니 이는 그가 칼로 그의 형제를 쫓아가며 긍휼을 버리며 항상 맹렬히 화를 내며 분을 끝없이 품었음이라 내가 데만에 불을 보내리니 보스라의 궁궐들을 사르리라

에돔은 야곱의 쌍둥이 형, 에서의 후손들이 만든 나라입니다.
사실 에돔은 이스라엘과의 전쟁에서 더 많이 당했습니다. 사울왕에 에돔에서 승리를 한 적이 있었고, 다윗왕도 소금골짜기(염곡)에서 에돔 사람 18,000명을 물리친 적도 있었습니다. 후에 유다가 바빌로니아제국에 의해 무너질 때에 에돔 사람들은 바빌로니아의 편에서 유다 백성들을 약탈하고, 온갖 만행을 저질렀습니다. 그래서 에돔에 대한 심판은 미래의 시점에 이루어질 것에 대해 증거하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13-15)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암몬 자손의 서너 가지 죄로 말미암아 내가 그 벌을 돌이키지 아니하리니 이는 그들이 자기 지경을 넓히고자 하여 길르앗의 아이 밴 여인의 배를 갈랐음이니라 내가 랍바 성에 불을 놓아 그 궁궐들을 사르되 전쟁의 날에 외침과 회오리바람의 날에 폭풍으로 할 것이며 그들의 왕은 그 지도자들과 함께 사로잡혀 가리라 여호와께서 말씀하셨느니라

암몬에 대한 심판입니다. 암몬은 아브라함의 조카 롯이 그의 둘째 딸과의 관계에서 태어난 아들(벤암미)의 후손이 세운 나라입니다. 암몬 사람들은 길르앗의 임신한 여인의 배를 갈랐다고 합니다. 이런 만행은 있을 수도 없는 일이어야 하고, 상상으로도 없어야 하는 일입니다. 그런데 그런 만행을 저지른 이유가 자기 지경을 넓히기 위해서 였습니다. 자신의 욕망을 성취하기 위해서 그런 악독한 일을 저질렀던 것입니다. 그런 만행을 저지른 암몬을 심판하신다고 하십니다.

지금까지 살핀 다섯 나라, 아람(다메섹), 블레셋(가사, 아스돗, 아스글론, 에그론), 베니게(두로), 에돔, 암몬이 심판을 받는 이유의 공통점은 하나님을 믿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박해하였기 때문입니다. 물론 그들은 하나님을 믿지 않기 때문에 범죄하고, 하나님의 백성에게 만행을 저질렀지만 하나님은 그것을 모르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박해를 받는 상황을 결코 모르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들을 심판하실 정도로 우리를 사랑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분이 우리의 창조주시고, 아버지이시기 때문입니다.

1절을 다시 읽겠습니다.
(1) 유다 왕 웃시야의 시대 곧 이스라엘 왕 요아스의 아들 여로보암의 시대 지진 전 이년에 드고아 목자 중 아모스가 이스라엘에 대하여 이상으로 받은 말씀이라

아모스 선지자가 이 말씀을 받은 것이 ‘지진 2년 전’이라고 밝히고 있습니다.
당시 북이스라엘과 남유다는 번영의 시기였습니다. 국력이 이전보다 훨씬 강했던 때였습니다. 그런 때에 이런 심판을 예언하는 것은 당돌하고 미친 짓처럼 보였을 것입니다. 아모스 선지자는 조롱을 받았을 것입니다. 그러니 신앙은 보이지 않는 것을 보는 눈을 갖는 것입니다.
이런 아모스 선지자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지진이 있었다는 것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오늘도 우리에게 다양한 방법으로 말씀하십니다. 그것을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지는 우리의 선택이고 결단입니다. 물론 그 결과도 고스란히 우리에게 남습니다.

우리는 과거 어느 때보다도 잘 살고 있습니다. 이런 때에 자신의 기도자리, 겟세마네를 갖는 것은 미래를 가장 잘 준비하는 것이고, 주님 안에서 가장 잘 지어져 가는 것입니다. 오늘 하루도 세속적 가치관이 난무하는 삶의 현장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그 말씀에 무릎을 꿇는 한 날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아모스 장별 요약 및 강해


1. 아모스 개요


아모스는 1:1에서 시기를 분명히 고지하고 있어서 큰 어려움은 없다.
시대적 배경은 유다 왕 웃시야와 북이스라엘 왕 여로보암(2세) 때 선지자로 활동했다.

2. 아모스 장별 요약

아모스 1장 요약

드고아의 목자 아모스가 이상으로 받은 말씀이다.
여호와께서 다메섹을 벌하리라.
에돔과 두로와 암몬을 벌하리라.
그들이 이스라엘이 망할 때 이스라엘을 괴롭혔기 때문이다.

아모스 2장 요약

여호와께서 모압을 벌할 것이다.
유다를 벌할 것이다.
그들의 여호와의 율법을 지키지 않았다.
이스라엘을 벌할 것이다.
그들의 여호와의 이름을 더럽혔다.
내가 아모리 사람을 멸하고 애굽에서 이끌어 내었다.
하지만 너희는 나실인으로 포주를 마시게 하고 선지자의 명령을 따르지 않았다.

아모스 3장 요약

여호와께서 말씀하심으로 예언한다. 
사마리아는 포학과 겁탈이 쌓였다. 
내가 이스라엘의 죄를 보응할 때 벧엘의 단들을 벌하고 제단의 뿔들을 꺾어 땅에 버릴 것이다.

아모스 4장 요약

바산의 암소들아 너희는 힘없는 자들을 학대한다. 너희를 갈고리로 끌며, 낚시로 너희 남은 자들을 끌고 가리라. 너희는 벧엘에 가서 범죄하고 길갈에서 죄를 더한다. 너희에게 재앙이 임하나 나 여호와께 돌아오지 않았다. 그러므로 너희 이스라엘아 하나님 만나기를 준비하라. 여호와는 산들을 짓고 바람을 창조하며 자기 뜻을 사람에게 보이며 아침을 어둡게 하며 땅의 높은 데를 밟는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다.

아모스 5장 요약

처녀 이스라엘이 엎드러 졌다. 너희는 나를 찾으라 그리하면 살리라 그렇지 않으면 불 같이 임하리라. 너희 허물이 많고 죄악이 무겁다. 너희는 살려면 선을 구하고 악을 구하지 말라. 여호와의 날을 사모하여는 자여 그날은 어둠이다. 내가 너희 절기들을 미워하고 멸시한다. 너희 제사를 받지 않을 것이다. 오직 정의를 물 같이 공의를 마르지 않은 강 같이 흐르게 할지어다.(24절) 내가 너희를 다메섹 밖으로 사로잡혀 가게 하라라.

아모스 6장 요약

교만하고 방탕한 사마리아 사람들을 멸하리라.
그들은 상아 상에 눕고 비파 소리에 맞추어 노래를 지절 거리며 다윗처럼 자기를 위하여 악기를 제조한다.
환난에 대하여 근심하지 않는다. 
야곱의 영광을 싫어하며 궁궐들을 미워한다. 
말은 달리지 못하고 소는 밭갈지 못한다.
만군의 여호와께서 말씀하길 한 나라를 일으켜 이스라엘을 치리라.

아모스 7장 요약

풀이 움돋기 시작할 때 메뚜기를 땅의 풀을 먹을 것이다. 
간구하자 여호와께서 뜻을 돌이키신다. 
이번에 불로 징벌하지만 다시 돌이키신다. 
다림질로 측량하여 다시는 이스라엘을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 
내가 여로보암의 집을 치리라. 
벧엘의 제사장 아마샤가 여로보암에게 아모스가 왕을 배반했다고 고소한다.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의 심판을 예언하신다.

아모스 8장 요약

여름 과일 광주리를 보라. 
심판의 때가 가까이 왔다. 
가난한 자를 삼키고 땅의 힘없는 자들을 망하게 하는 자들을 여호와께서 심판하실 것이다. 
보라 날이 이를지라 내가 기근을 땅에 보내리니 양식이 없어 주림이 아니요 물이 없어 갈함이 아니요 여호와의 말씀을 듣지 못할 기갈이라.(11절)

아모스 9장 요약

이스라엘이 한 명도 남김없이 파괴될 것이다. 
모든 자가 칼에 죽을 것이다. 
주 만군의 여호와가 땅을 만져 녹게 하고 땅이 강의 넘침같이 솟아오를 것이다. 
이방 민족들을 불러오리라. 
화가 미치지 않는다고 말하는 죄인들은 칼에 죽으리라. 
그날에 내가 다윗의 무너진 장막을 일으키고 그것들의 틈을 막으며 그 허물어진 것을 일으켜서 옛적과 같이 세울 것이다. 
에돔의 남은 자와 내 이름으로 일컫는 만국을 기업으로 삼을 것이다. 내가 들을 다시 땅에 심으리라.

 































































2024년 역사의 순서대로 성경을 읽어가는 훈련 암모스 - 호세아 - 요나 - 왕하 15-18:12. 이사야 1-35,


2024년 성경 읽기 계획
역사순으로 성경을 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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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수일 목사
성경은 귀로 보는 책이다

성경을 입으로 보는 책이라고 여기는 이유는 암송과 구두 전승의 전통 때문이기도 하지만, 낭송의 효과도 그 이유로 꼽힌다.
기독교에도 성경을 봉독하는 전통이 지금까지 공동체 안에 남아 있는데, 개인적으로 성경을 읽을 때도 꼭 낭송해 보기를 권면하고 싶다. 또한, 성경을 많이 읽는 것 못지않게 바르게 읽는 것도 중요하다.
따라서 2천 년 동안 인류가 축적해 온 성경에 대한 역사적, 신학적 탐구의 결과를 존중하며 성경을 읽어야 할 것이다.
신학이 있어야 성서를 바르게 이해하고, 신앙도 건강하게 성숙할 수 있다.

조병호 목사
성경 한 권이면 충분하다

성경통독의 궁극적인 지향점은 성경이 말하고 있는 ‘하나님의 마음’을 깨달아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신 그 뜻을 발견하는 것이다.
따라서 성경은 ‘하나의 이야기’로 읽어야 한다.
다윗이 단연 하나님께 합당한 자라 여김 받은 것은 어려서부터 모세오경을 통해 마음을 훈련함으로써 여호와의 율법을 사모하였기 때문이었다.
하나님의 말씀을 진정으로 깨달으며 읽는 성경통독법으로서 역사 순으로 읽을 것을 권하며, 매일 성경을 읽고, 듣고, 묵상하는 건강한 그리스도인 되기를 꿈꾼다.

김홍양 목사
맥체인성경, 통독의 신비를 열다

성경읽기의 중요성은 모든 성도가 인식하고 있는 바다.
그럼에도 일반 성경에는 성도들의 이해도와 가독성을 저해하는 부분들이 있어 성경읽기의 지속적인 실천을 저해하고 있다.
맥체인성경통독은 맥체인의 성경읽기표를 토대로 워드 링크와 미닝 링크 등의 기능을 삽입하여 성경 전체가 구속사로 연결되어 있음을 발견하며 성경본문에 충실한 통독으로 이끌어 준다.
따라서 맥체인성경으로 성경읽기에 도전함으로써 바르게 성경을 읽는 즐거움과 함께 통독을 통해 다져진 경건한 습관이 삶을 변화시키는 것을 체험할 수 있다.

이원희 목사
왜, 연대기로 읽어야 하는가

이단 사상이 난무하는 시대일수록 믿음을 지킬 말씀의 지혜가 필요하다.
우리는 성경을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자이심을 확신하고, 더욱 성숙한 신앙으로 자랄 수 있다.
그러나 성경이 기록된 시기와 장소와 그에 따른 문화적인 차이는 오늘의 우리가 이해하고 깨닫는 데 많은 어려움을 주고 있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 처음 성경을 읽을 때는 특히 연대기로 읽는 것이 필요하다.
그렇게 어느 정도 성경의 흐름을 이해한 후에는 좀 더 쉽게 번역된 성경을 읽고, 마지막으로 기존의 성경 순서대로 읽는 것이 바람직하다.

전태식 목사
성경으로 성경을 해석하다

오늘날은 다양한 채널을 통해 언제 어디서든지 말씀을 듣고 배울 수 있다.
그런 만큼 성도들은 잘못된 교리, 진리와 이단 사설의 혼재 속에 위험하게 놓여 있다.
따라서 성도들이 바른 신앙의 홀로서기로 도달하기 위해서는 ‘설교 듣기’를 뛰어넘어 ‘성경읽기’가 절실히 필요한 시대다.
즉, 스스로 성경을 읽어 믿음을 지키고 세워가야 한다.
성경을 해석하는 가장 바른 방법은 성경으로 성경을 해석하는 것이다.
이러한 원리 하에 편찬된 「관주해설 아바드성경」은 바르게 말씀을 해석하며 읽는 즐거움으로 성도들을 인도할 것이다.

강인구 장로
필사, 쓰기를 넘어 ‘이해 쓰기’로

필사는 노동이요, 훈련이다.
필사하는 과정을 통해 성경의 단어와 구절들을 마음과 생각에 새기는 필사는, 성도를 경건한 생활로 이끄는 제일의 도구라 할 것이다.
또한 공동체와 함께 성경을 읽고 쓰는 것을 통해 말씀의 은혜를 공동체 전체로 흘러가게 하며, 교제의 깊이를 더욱더 깊어지게 할 수 있다.
더욱이 성경을 필사할 때 그 뜻과 의미를 알고 쓰는 ‘이해 쓰기’를 한다면 성도의 성장에 비교할 수 없는 유익이 있다.
이제 한국교회는 필사를 통해 성도들을 건강하게 바로 세우는 본질에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역사순 연대순성경읽기


구약 성경을 연대기 순으로 읽는 순서를 정리하였습니다.

창세기 - 출애굽기 - 레위기 - 민수기 - 신명기 - 여호수아 - 사사기 - 룻기 - 사무엘상.하 → 열왕기상 까지는 그대로 읽으면 됩니다.

열왕기 하서 13장 까지 읽으신 후에

요나서 를 읽습니다. 요나가 그 때에 니느웨를 위하여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그 다음 다시

열왕기하 14장 까지 읽으시고

→아모스, 호세아→요엘(북왕국 여로보암 2세 때의 선지자들 )

열왕기하 15장~16장 까지

오바댜→미가→ 이사야→ 나훔 를 읽어야 합니다.(나훔서 오바다서 역시 연대가 불분명합니다).

열왕기하서 17장~ 23장 까지 읽으시고,

→하박국 → 스바냐 → 예레미야 →를 읽으시기 바랍니다.

다시

열왕기 하서 24장~ 25장 까지 읽으신 후 ​

→예레미야애가→ 다니엘→ 에스겔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간 다니엘과 에스겔의 이야기 ) ​

에스라서 를 읽어야 합니다.

이제는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오는 이야기 가 됩니다.

에스라 1~4장학개→ 스가랴

에스라 5,6장에스더→역대상→역대하 를 읽으시면 이해가 될 것입니다.

에스라 7~10장 →느혜미야→말라기

★ 시가서 5권(지혜서) →

욥기, 시편, 잠언, 전도서, 아가서

대체로 연대기 순 으로 읽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나서야 비로소 신약 성경을 읽고 이해 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하루에 3~5장 정도로 읽으면 된다.

창세기 11장 바벨탑 사건 후

셈100세때 홍수가 나고

500세를 더 살며 자녀를 낳고 600세에 사망한다

노아의 홍수bc2556과 우리나라의

47대 단군 BC2096년(치화시대)

창10:26~30

알이랑 알이랑 알 알이요 알이랑 고개를 넘어 간다”라고 부르는 노랫말의 의미는

“하느님과 함께, 하느님과 함께, 하느님과 함께, 하느님이요, 하느님과 함께 고개를 넘어 간다”라는 것.

“아리랑은 우리 겨레의 직계조상인 셈의 현손(玄孫) 욕단 족속(창 10:21~30)이 대홍수 후 동방으로 천동(遷動)할 때 파미르고원에서 천산산맥으로, 천산산맥에서 알타이산맥을 넘어오면서 불렀던 찬송가였다.

홍수 후 산을 넘어 가장 먼저 동방으로 천동한 족속은 ‘욕단’이었으며, 창세기 10장 21절과 25절에 의하면 욕단은 선택받은 종족인 에벨의 후손이었다”라고 주장한다.

  1. 오빌 하윌라요밥을 낳았으니 이들은 다 욕단의 아들이며

성경속지도 성경지명

정상적으로는 앞에 거론된 이름이 장자의 이름이지만,

이 규칙에는 예외도 있다.

아브람은 맨 앞에 거론되긴 했지만 장남은 아니었수도 있다.

차라리 하란이 데라의 장남이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는 것이다.

https://m.blog.naver.com/danny522/222575535222

창세기 25:1 아브라함이 후처를 맞이하였으니 그의 이름은 그두라라

창세기 25:4 미디안의 아들은 에바에벨하녹아비다엘다아이니 다 그두라의 자손이었더라

역대상 1:32 아브라함의 소실 그두라가 낳은 자손은 시므란과 욕산과 므단과 미디안과 이스박과 수아요 욕산의 자손은 스바와 드단이요

남 유다(요담.731). 아하스.히스기야 715-687)

앗수르에 북이스라엘 멸망 마지막왕 호세아 732-722

요시야왕의 정책(애굽과 전쟁에서 전사 BC.609년경)과 비극적 결과

①요시야왕은 애굽이 승리를 한다면 그 결과는 유다에 어떤 영향이 미칠지 알고 있었다

②그래서 그는 애굽이 앗수르 대신 유다의 감독이 되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③그래서 군대을 보내 애굽군대의 진군을 막으려 했다

④전투는 므깃도 골짜기에서 벌어졌으나 결국 유다군대가 패하고 말았다

⑤요시야 왕은 그 전투에서 전사했고 애굽 군대는 하란을 향해 진군을 계속하였다 (대하35:20-24)

⑥요시야 왕이 공격이 그 전투의 결과 어떤 영향력을 행사했는지에 대해서는 잘알수 없으나 아마도 그가 애굽

⑦군대의 지원이 필요한 앗수르에게 도움을 제공할 적시를 놓치게한 것도 사실인 것같다

⑧그래서 앗수르는 영토을 재탈환할 시도에 실패를 했고 역사상 대세가 끝나게 되었다

신 바벨론 제국의 등장 BC.626년경

1).바벨론의 승리와 전쟁 당시 과정

①BC.626년경 10월에 칼돈의 왕자 나보폴라사(느부갓네살의 부친)가 바벨론 외곽에서 앗수르 군대을 패배시켜 바벨론의 왕위권을 주장하게 되었다 그가 세운 왕국은 신 바벨론제국으로 알려졌다 그는 그의 제국을 견고하게 했고 BC.616년경에는 그의 영토를 확장하기 위한 진격을 시작했다

BC.612년경에 바벨론과 메데 군인들도 구성된 연합군대가 앗수르의 니느웨이성를 함락시켰다

③BC. BC.609년경에는 대전쟁을 벌여서 퇴각하는 앗수르 군대을 하란에서 패배케 하였다

④한때 위대했던 앗수르 제국에 포위되어 있던 잔존자들이 유프라테스강을 건너 갈그머스 을 흔들거리게 한 적도 있었다

. 뒤 바뀌는 제국과 중동의 판도의 변화 BC.609년경

바벨론의 부흥과 앗수르의 멸망은 그 지역 전체의 힘의 재분배을 가져오게 되었다

②수세기 동안 고대 중동 지역을 지배해 왔던 앗수르 제국은 결국 바벨론의 의해 붕괴 되었다

③이 앗수르의 멸망은 좀더 큰 다른 세력 바벨론의 부흥을 야기시키므로 다수의 약소국들의 멸망을 초래했다

④요시야가 통치하고 있던 앗수르 지배의 멍에로부터 잠시나마 국가 독립의 기쁨을 맛보게 되었다

그러나 이독립은 BC.609년경의 사건들로 그 막을 내리게 되었다

⑤그때 갈그미스성을 경계로 하여 서로 맞서 있던 세력은 애굽과 바벨론이었다

.바벨론 제국과 애굽제국의 대립

1.앗수르 멸망후 (BC.609년경후) 중동지역의 바뀐 판도와 혼란

1).애굽제국과 바벨론제국 패권의 전쟁으로 혼란을 거듭하는 유다말기 왕들

①.유다17대왕 여호아하스(요시야 둘째 아들).3개월. 애굽왕이 폐위 시킴

②.유다18대왕 여호야 김 (요시야 첫째 아들),11년치리. 애굽왕이 등극시킴

③.유다19대왕 여호야 긴 (여호야김 아들). 3개월치리. 바벨론왕 페위시킴.

④.유다20대왕 시드기야 (요시야 셋째 아들). 11년치리. 바벨론왕 등극시킴 BC.586년 경멸망

2.유다왕들의 처해진 비극적 상황

1).유다 17대왕 여호아하스 609년경

①유다의 패배후에 애굽이 팔레스타인을 차지하게 되었고

유다는 애굽과 전쟁시 전사한 요시아왕의 후임으로 그의 아들 여호아하스를 왕으로 추대하게 되었다

②유다 백성들을 요시야 왕이 죽자 우상숭배 고리을 끊치 못하고 다시 전례대로 돌아갔다

요시야왕의 둘째 아들인 여호아하스는 백성의 의해 등극했지만

④요시야 왕이후 유다왕국은 외세에 의한 요시야왕가의 불운한 상황이 닥쳐왔다

애굽이 전쟁에 대한 부친의 책임을 물어 여호아하스를 폐위 시키고

⑤바로느고는 유다의 국고를 약탈해 갔으며 요시야의 다른 아들인 여호야김을 본분왕으로 임명하는 유다섭정시대로 들어갔다 (왕하23:34-35)

⑥여호아하스가 통치한 지 꼭 3개월 만에 바로느고에 의해서 폐위을 당해 애굽으로 끌려가게 되었다(왕하23:31-32)

2).BC.609년경--BC.601년경 사이에 바벨론과 애굽의 시대적 정세 변화

①BC.605년경에 중도 지역에는 힘의 균형에 있어서 또다른 주요한 변화가 일어났다

4년동안 애굽과 바벨론은 갈그미스에서 서로 우위을 차지하지도 못하면서 대적상태에 있었다

②그후 느부갓네살 왕자가 갈그미스에서 바벨론 군대를 이끌고 방어선을 부수고 도망가는 애굽의 군대을 애굽의 국경 가까이 추적하여 결정적인 승리을 하게 되었다

③BC.605년경에는 또다른 두 사건이 유다의 역사에 영향을 미쳤는데 그 첫째는 여호야김왕이 갈그미스 전투가 있은후 동맹을 파기 하고 바벨론과 제휴하게 되었고 느부갓네살의 한 본분왕으로 그를 섬기는데 동의을 한점이다 (왕하24:1)

④둘째는 BC.605년경 8월15일에 바벨론의 왕 나볼라사가 사망한 것으로 인하여 느부갓네살이 그의 진격을 중단하고 바벨론으로 돌아와 왕위를 차지하게 되었다는 점이다

⑤BC.605년경 느부갓네살 왕은 분봉왕들을 임명한후 계속적인 충성을 확고히 하기위해서 인질 정책을 취하였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의 획득한 영토에 대해서 통치를 견고하게 할 수있었다

팔레스타인에서 이와같은 정책의 첫일환으로 그는 다니엘등 왕족과 권력층 사람들 을 포로로 데려갔던 것이다

(단1:1-6)

⑥유다는 BC.601년경 속국으로 남아있게 되었다 ,그당시 느부갓네살 왕은 애굽을 상대로 다시한번 팔레스타인에 진격을 감행했으나 목적을 달성하지 못했다

⑦오히려 바벨론 군대는 패배을 당하고 퇴각할 수밖에 없었다

그의 군대 다시 온전한 공격을 할 수있기까지 는 거의 3년이라는 시간이 걸렸다

2).유다 18대왕 여호야김 변덕스런 정책 (11년치리.16대요시야왕 첫째 아들) BC.609년경-BC.598년경

①애굽의 유다 통치 (애굽왕 의한 등극)

BC.609년경애굽 바로느고의 의해 요시야의 전쟁책임을 물어 여호아하스을 폐위 시키고

여호야김을 등극함으로 애굽의 본분왕이 되었다

②바벨론의 제휴 (애굽 동맹 파기)

BC.605년경 애굽과 바벨론 국경에 대치한 갈그미스 전투에서 바벨론이 승리하여 계속적인 공격을 하려 하였으나 나폴라사 왕의 사망으로 등극하기위하여 느부갓네살을 전투을 중단하고 바벨론으로 철수한다

③여호야김은 정치적인 변덕장이로 BC.605년경 바벨론이 바벨론이 애굽와의 전투에서 승리하자 애굽과

동맹을 파기하고 바벨론과 제휴을 맺었다

④애굽과의 제휴 (바벨론 동맹 파기)

BC.601년경 바벨론 느부갓네살은 애굽을 다시 공격하였으나 패배함으로 다시 돌아가게 된다

이런 상황에 바벨론이 불리한 틈을 타서 여호야김은 또다시 동맹관계을 바꿔 애굽을 택하고 도왔는데 이것이 멸망에 치명적인 실수 였다

(왕하34:2)

⑤바벨론의 유다 통치 (바벨론과의 전투 여호야김의 사망)

BC.598년경 12월에 바벨론의 느부갓네살 군대는 유다을 공격 하게 되었는데 그의 주요한 목적은 다른 속국들에 게 예루살렘으로 하여금 바벨론에 대항하는 반란의 무서운결과가 어떤것인가를 알게 하기위한 본보기 였었다

여호야김은 이때에 사망했으며 그의 아들 여호야긴이 그뒤을 왕위를 계승하게 되었다

3).유다 19대왕 여호야긴 정책 (3개월통치 .18대 여호야 김의 아들) BC.598년경

①부친 여호야김이 바벨론과의 전투에서 죽고 바벨론과 대치상황속에 등극한 아들 여호야긴

②그는 바벨론에 대항하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라 생각하여 BC.597년에 3월항복하고 말았다

③유다19대왕 여호야긴은 3개월통치하였으며 항복하므로 바벨론왕이 여호야긴을 하야 시킨후 바벨론으로 볼모로 유배당했다

4).유다 20대 왕 시드기야 (11년치리. 16대 요시야왕 셋째 아들 )BC.597년경-BC.586년경

①바벨론왕은 여호야긴 삼촌 시드기야(요시야 왕 셋째아들)가 유대의 왕으로 등극시키후

페위된 여호야긴과 만명의 지도자들. 기술자들 그리고 예루살렘의 병사들을 바벨론으로 볼모로 데려갔다 왕24:12-16.

②바벨론왕 느부갓네살은 유다의 새로운왕으로 시드기야로 대치하게 했으며 도시을 노략질하며 주요 인사들을 제거시켰던것이다

③여호야긴 항복한후 폐위당한 여호야긴왕과 함께 예언자 에스겔도 바벨론으로 유배될 시점이 이당시일 인 것으로 추정한다

④에스겔은 유배후 5년후 BC.592년경 그는 포로 생활속에 바벨론에서 그의 예언 사역을 시작했다

에스겔의 바벨론에서 예언사역은 유다멸망 시점으로 6년전이다

5). 바벨론 느부갓네살왕 통치속에 들어간 유다왕국 BC.598년경

①유다 20대왕 시드기야의 영적 타락

그의 11년동안의 통치는 영적인 타락과 정치적 불안정에 의해서 끝나고 말았다

②유다의 새로운 왕 시드기야는 허약하고 마음의 동요가 심했기 때문에 결국 유다는 파멸하고 말았다

③ 그는과거의 실패을 교훈삼기보다 그것을 되풀이 한것처럼 보인다

여호야김시대 4번걸쳐 제국들과 관계에서 변덕스러운 정책을 따라 헸다

6).바벨론을 배반하고 애굽으로 향하는 시드기야.

결과는 유다 멸망이였다 BC.598년경-BC.586년경

①BC.588년경에 애굽의 다른 바로의 등극과 함께

유다는 다시 한번 바벨론에 대한 반란의 유혹을 받았다 (대하24:20-25:1, 렘52장3-4)

②그 당시 시대에서 유대을 비롯한 속국들의 바벨론에 대한 반란과 멸망

바벨론을 싫어하는 주변국들 (속국들의 연합 유다,두로.모압,시돈. 암몬)은 바벨론의 통치하에 남아있기를 거부했다

③그러자 느부갓네살의 반응은 즉각적으로 나타났다 결과 함께 멸망이였다

즉 바벨론 군대가 예루살렘성을 둘러쌌고 장기간의 포위가 시작된것이다 그러나 BC.586년경 7월-8월

에 그성은 패배을 당해 파괴되고말았다

(에스겔 예언 25장-29장)

당시 바벨론의 느부갓네살 영토는

오늘날

현재 지도에서 이라크를 중심으로 하여 쿠웨이트, 시리아, 레바논, 요르단, 이스라엘의 국토 전체와 앗수르, 터키, 이집트 국토 일부를 포함하고 있다.(오늘날 이라크 지역)​

이 지역은 아브라함이 가나안으로 이주하기 전까지 족장들이 살아갔던 무대다. 바벨탑이 세워졌던 지역도 이곳이고, 유다 왕국이 멸망한 후 바벨론 포로생활을 했던 지역도 바로 이곳이다. 아브라함의 고향 ‘갈대아 우르’를 현재 지도에서 보면 ‘갈대아’는 오늘날 전 세계의 이목이 집중되는 이라크의남부지역에 해당하며 ‘우르’는 이라크 안나리시아 근처에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요나 선지자가 회개를 외쳤던 앗수르의 수도 ‘니느웨’는 현재 이라크의 ‘모술’해당하며 이라크에서도 가장 위험한 곳 중 하나가 되었다.

네이버 검색 카피

고대역사,..를 살펴보며

바벨론(현재 이라크 지역)

이란은

엘람 왕국, 바사(페르시아)제국과 메데 제국.

바벨론 제국,(느부갓네살 왕)-오늘날 이라크 이며,

오늘날 현재 이란의

메데 제국(고레스대왕)

바사(페르샤 제국)다리오왕,

그리스의

알렉산더 대 왕이 통치한 헬라제국, 그리고 로마 제국이 차례로 등장했다 사라지는 급변기

www.christiantoday.co.krnews

크리스천투데이(오피니언/칼럼

외경을 어떻게 봐야 하나요?

정경과 외경

정경(正經, Cannon)은 현재 기독교공동체(정확히는 개신교 공동체)와 신자들이 소지하여 따르는 하나님의 말씀인

구약 39권과 신약 27권의 책을 말합니다.

구약 외경은 그 명칭이 '숨겨진' '비밀의' 책이라는 뜻이듯이 주로 당시 사람들의 신앙과 소망을 상징적으로 표현한 묵시 문학이 대부분입니다.

일부는 또 구약과 신약의 중간시대에 관한 기록들도 있어서 유대 역사 문화 관습을 알아볼 수 있는 소중한 자료가 됩니다.

신약의 외경은

당시의 비정통 혹은 이단 교파가 자기들 교리에 맞게 각색하여 정경 대신에 사용한 것들입니다.

이 또한 초대 교회 당시에 관해 참고할 만한 정보를 많이 제공하긴 하지만,

여전히 그 진리성과 역사성에 허구가 많으므로 하나님 말씀으로 삼을 수는 없습니다.

반면에 정경은

신구약 공히 각 신앙공동체(구약은 히브리 공동체, 신약은 초대교회)에서 하나님의 계시와 계명으로 받아들여서 그대로 따랐던 책들입니다.

그 책들을 선정하기 위해 상당기간 공동체 내에서 검증 비교 토의를 거쳤으며 최종적으로 공식적인 절차를 통해 확정했습니다.

(구약은 AD 90년 얌니야 종교회의, 신약은 AD 397년 카르타고 종교회의)

정경을 선정할 때에

신구약은 각기 그 특성상 고유의 구체적 기준들이 있었습니다.

공통적으로는 말씀드린 대로 하나님의 진리임을 누구나 확신할 수 있어서 공동체에서 이미 받아들여진 책들이었습니다.

그 무엇보다도 예수그리스도 대속구원이라는 일관된 주제를 모순 상충 없이 계시했고 하나님이 인간과 만물을 통치하는 진리와도 일치했기 때문입니다.

외경과 초대교부

이런 정경화 작업은 하나님의 성령이 처음부터 끝까지 모든 사람들의 마음을 주관하고 역사했기에 가능했습니다.

성경 저작에

성령이 영감(inspired) 했을 뿐 아니라 그 원작이 필사 보존 전달 번역 되는 모든 과정에도 하나님이 역사하셨습니다.

정경화에 하나님이 역사했다는 사실이 성경의 무오성 또한 보증하는 것입니다.

초대교부들이 외경을 어떻게 받아들였을까 궁금해 하셨습니다.

먼저 아셔야 할 것은 교부들은 정경화 과정 중에도 지금 정경으로 받아들여진 책들 중 일부에 문제를 제기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외경은

당연히 더더욱 문제 삼았을 것이라는 것이 합리적 결론입니다.

한마디로 결론을 내리자면

초대교부들이 외경을 인정한 것은 아니며,

그 내용을 익히 알고 참조는 했으며,

인용한 구절도 그 내용을 인정한 것이 아니라

단지 설명하려는 주제를 더 쉽게 이해시키고 강조하려는 목적이었습니다.

크리스천투데이(오피니언/칼럼

외경을 어떻게 봐야 하나요?

라이프성경사전

야살의 책

[ -冊 , book of Jashar ]

‘바른(의로운) 자의 책’이란 뜻. 여호수아와 다윗, 그리고 솔로몬이 역사를 기록할 때 인용했던 일종의 출전(出典)에 해당하는 책을 말한다(수 10:13, 삼하 1:18 그리고 70인역의 왕상 8:53에 나타나 있음).

이 책은 주로 시문(詩文)을 수집·편집한 것으로 여겨지며 고대 이스라엘에서는 잘 알려진 히브리 문학이었다.

그 내용은 주로 이스라엘 위인(영웅)들과 그 업적을 찬양한 것 같다. 학자들은 이 책이 삿 5장에 언급된 ‘드보라노래’의 후속편으로 보기도 하며, 율법서를 포함했을 것으로도 추정한다.

대략 B.C. 8세기경 편집되었다가 바벨론 포로 기간 중에 사라진 것으로 본다.

[네이버 지식백과] 야살의 책

성경구절에 야살의 책이 무엇인가? 궁금해서 찾아보니,..

야살의 책은 고대 역사서 시 문 수집 히브리 문학이라고 볼 수 있다고 한다.

야살의 책이 성경에 기록되었지만, 원본이 사라지고 난 후, 이 사본이 진짜인지 가짜인지 알 수가 없다는 것이다.

삼하1:18 명령하여 그것을 유다 족속에게 가르치라 하였으니 곧 활 노래라 야살의 책에 기록되었으되

여호수아10:13 태양이 머물고 달이 멈추기를 백성이 그 대적에게 원수를 갚기까지 하였느니라 야살의 책에 태양이 중천에 머물러서 거의 종일토록 속히 내려가지 아니하였다고 기록되지 아니하였느냐

야살의 책 외에도,..

대상29:29 선견자 사무엘의 글, 나단의 글과 선견자 갓의 기록. 예후의 책등이 성경에 등장한다)

성경에서 언급하는 야살의 책을 연구 결론적으로는 참고 문헌이며, 이 책의 내용은 신빙성은 없고,..

성경만이 정경으로 권위로 믿어야 되고 신뢰해야 하며,..

성경은 짧은데,.. 이 야살의 책은 성경 연대기로 계산한 날짜와 절기가 신기할 정도로 정확하게 기록되어 있고, 스토리 장르가 있기에 “아 그랬구나”로 이해 또는 공감되는 부분이 성경과 스토리가 충돌하지 않는 점이 많기에 성경의 상상력 함향 정도의 비하인드 스토리 책 정도로만 생각하고 읽고 보아야 한다고 한다.

성경에 없는 방대한 분량의 정보를 담고,..

성경과 그럴듯하게 문학 장르가 맞게 펼쳐 있다고,..

절대 성경에 준하는 귄위를 주면 안 된다고 한다.

다만 말씀에 대하여 연구할 수 있는 참고 자료로서 사용 한다고 생각하면서,..

말씀 속에 감추어져 있는 하나님의 놀라운 가르침에 대한 깨달음을 얻게 된다면,.. 유익 할 것이라고만 생각된다고 한다.

박영민 목사

야살의 책 비하인드 스토리

제 27정 –15세 에서가 니므롯과 그의 능력자 둘을 살해한다.

싸움으로 인해 지쳐서 집으로 돌아오고, 그의 장자권을 판다.

에서의 후손이 골리앗 이며 헤롯왕가는 BC 43 사망한 안디바 2세Antipatris에 의해 시작. 이는 본래 에서의 후손인 에돔 족속으로 이두메 지방 사람이었다.

이스라엘(야곱)의 후손이 다윗 왕과 예수님 이다.

제 28장 –아브람이 39년간 샘의 집에서 머물며 여호와의 도를 배운 것처럼,..

야곱도 샘의 집에 보내진다. 그 곳에서 그는 23년 간 머물며 여호와의 도를 배운다. 그러나 에서는 가지 않으려 한다

에서는 가나안 여인과 결혼한다.

제 29장 – 야곱이 속임수로 그의 형제의 축복을 얻는다.

야곱은 에서의 분노를 두려워하며 에벨의 집으로 도망간다. 그곳에서 그는 십사 년을 보낸다. (창10:21~25절 노아, 샘, 에벨, 벨렉, 욕단이며,.. 중요한 인물)

에서는 다시 그 땅의 여인과 결혼한다. 야곱은 그의 아버지 집에 돌아오지만, 여전히 에서의 위협을 받는다.

어머니로부터 하란에 있는 그녀의 오누이 라반에게로 가라고 권고를 받는다.

야곱이 하란에 가면서, 가나안의 딸들 중 누구와도 결혼하지 말라는 하늘 아버지의 명령을 받는다. 야곱은 여행 중에 에서의 아들에 의해 가로 막히며 그가 소유한 모든 것을 강탈당한다.

위 내용 처럼 야살의 비하인드 스토리책은 성경 읽는데 참고용이지 믿으면 안된다. 사실 일 수도 있고 사실이 아닌, 틀릴 수 도 있는 것이다.

문학 소설처럼 신빙성도 있고 재미가 있다.

https://blog.naver.com/herb555222/222454834694

- (야살의 책)

[성경이야기(외경)]야살의책 8장 듣기-아브람이 태어나던 날 밤하늘의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8.니므롯과 지혜자들 -

아브라함의 징조

https://m.blog.naver.com/elrodream/222617045640

데라는 바벨탑 사건때의 인물로 니므롯의 군대장관으로 최고의 신임받는 자 였다.

니므롯215ㅡ175아브람= 40

니므롯과 아브람은40년차이

니므롯40세에 아브람 출생하고

이때 데라는70이다

니므롯왕 의

데라 군장관은 30살이 많다는 이야기다.

데라70살에 니므롯은 40이엇던것 니므롯은 30년 이나 나이 많은 데라를 군장관으로 둔것이다

데라는 바벨탑 사건때의 인물로 니므롯의 군대장관으로 최고의 신임받는 자 였다.

(데라, 그돌라오멜 . 이들은 시날땅 바벨의 니므롯왕의 군장관들이다)그돌라오멜은 바벨사건후 "엘람땅에 " 가서 성읍을 지어 왕이 된다..

그 시대 니므롯 바벨탑 사건때 우상 형상을 12개나 나무와 돌로 조각해 모두 집 방에 들여놓고 절하였던 데라였다.그때 그 지역 모두가 그러했다

어린 아브람은 니므롯왕과 12우상을 섬기는 아버지 데라를 피하여

멀리 노아와 셈 집에 39년을 더 숨어지내게 되고 그 나이 10+39=49세 로 그가50세에 아비 데라 집에 간다.거기서 그 아버지 데라가가 섬기는 12우상 있는 방으로 가서 도끼로 파괴하는 사건이벌어지고 아브람은 니므롯에게 끌려가 3일 밤 낮 불땐 용광로속에 들어가는 죽음의 고난을 겪는다.

하란과 아브람 둘을 용광로 풀무 불 속에 넣었는데 하란은 재가 되었고 아브람은 3일 동안 불 속에서 살아서 걸어 다닌다. 다니엘 처럼,..

아브람이 아비 데라에게 우상버리고 하나님 섬기고 니므롯 앞을 피하여 다른 지역에 가서 살자고하여..아브람 52세에 갈데아 카스딤 우르를 떠나게된다

이때 니므롯이 은.금.선물을 많이 주고 왕의 수석중 2명 오니와 엘리에셀을 준다 이때 많은 자가 300명이 아브람과 데라편에 서게되고 따르며 함께 간다

풀무불 사건때 아브람 50세다 .2년 후 니므롯이 꿈을 꾸고 자신의 나라가 망하게 될것이 두려워 아브람을 죽이려한다

이때 사건으로 아브람 52세 ..데라 122세에 그곳을 탈출하여 출 우르하여

가나안으로 가게되며 그 길중 하란에 머물다가 3년째 55세때 하나님이 아브람에게 나타나 가나안으로 떠나라 하여 아버지 데라와 조카를 하란에 남겨둔채 아브람이 식솔과 니므롯이준 오니.엘리에셀과 바벨에서 아브람 편에 섰던 300 군종들과 하란의 백성남자72명을 다 데리고 가나안에 떠났다가 거주후 15년후70세에 다시 하란으로 가고 5년후 아브람75세에 나시 나타나신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 아버지 데라.형 나홀 을 하란에 두고 롯과함께 온가족이 가나안으로 말씀을 쫓아 간다

롯의 아버지는 아브라함의 막내 동생 하란입니다.

하란은 형들이 결혼도 하기 전에 롯을 낳았습니다. 그리고는 얼마 지나지 않아 죽었고, 죽은 하란의 아들 롯은 자연스럽게 큰 아버지 아브라함의 의무가 되었습니다.

하란의 아버지 데라는 죽은 하란을 묻어두고 그의 아들인 손자 롯, 그리고 두 아들네 식구들을 데리고 먼 길을 떠나 하란에 정착을 하게 되었습니다. 죽은 아들의 이름도 하란, 정착하여 살게 된 땅의 이름도 하란입니다.

"(창 11:26-28)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데라는 70세에 아브람과 나홀과 하란을 낳았더라!“

데라의 족보는 이러하니라 데라는 아브람과 나홀과 하란을 낳고 하란은 롯을

낳았으며

하란은 그 아비 데라보다 먼저 고향 갈대아인의 우르에서 죽었더라

데라는 왠지 그곳을 떠나기 싫었습니다.

원래의 목적지는 가나안이었지만 데라는 그곳에 그냥 눌러 앉게 됩니다. 하는수 없이 아브라함네 식구들만이 조카 롯을 데리고 가나안으로 이주를 했습니다.

성경속지도 성경지명

정상적으로는 앞에 거론된 이름이 장자의 이름이지만,

이 규칙에는 예외도 있다.

아브람은 맨 앞에 거론되긴 했지만 장남은 아니었수도 있다.

차라리 하란이 데라의 장남이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는 것이다.

https://m.blog.naver.com/danny522/222575535222

아브람 이야기 속 하란의 죽음

데라70에 아브람을 낳았고

데라38세에 하란과 나홀을 낳는다

아브라함의 형들

나홀과 하란과는 32년차이가...나홀 하란32살때 아브람은 태어난다

아브람 출생년도bc1266

아브라함의 이동경로

성경속지도 성경속 지명

데라205사망한 해에

아들 아브람은 아비 데라와 70년 차이이므로 205-70=135

아브람135세때 아버지 데라 205세로 사망한다

창세기 25:1 아브라함이 후처를 맞이하였으니 그의 이름은 그두라라

창세기 25:4 미디안의 아들은 에바에벨하녹아비다엘다아이니 다 그두라의 자손이었더라

아브람출생 10살까지 엄마와 동굴거주 나와

노아 셈 집에서39년 살고

#49세에 데라집에 귀가하고

#50세 풀무불 속에서3일 살아서 나오고

#52세 출우르 출발

#55세 (하란에3년머물고

#55세 하란출발해 가나안에 첫3년을머문다

#58세에 가나안3년거할때 (노아가 950년 살고 죽는해이다)노아 셈 후예들의 거주지가 어딜까?

항상 그리로 피신하니...궁금하다

#아브람60세 소돔 고모라 가 엘람땅 그돌라오멜왕의 속국이였는데 (소돔.고모라땅이 엘람땅의 식민지였다) 12년 조공 바치다가 13년째 배신때리고 그때가 아브람 60세때

엘람은? 니므롯 바벨탑 사건때 언어로 흩으실때 니므롯의 군장군중하나엿는데 배신하고 엘람이 다른지역에가서 성읍을 세운자이다

엘람?셈의 아들이다

노아 ㅡ셈 ㅡ아르박삭.엘람.앗수르.룻.아람

니므롯은 함의아들이다

노아 ㅡ함 ㅡ 구스.니므롯.미스라임.붓.가나안

노아 ㅡ 셈 .함 .야벳

#아브람 65세 가나안10년거주할때 니므롯과 엘람의 그돌라오멜과 전쟁해서 니므롯은도망가고 아들 마르돈이죽는다

#70세 가나안 거주15년째 아브나이70세였고

아브람은 아비 데라와 엄마집 하란으로 다시가서 5년을 지낸다

#75세 여호와하나님이 나타나서 축복하며 약속하며 일어나 가나안에 가라 하여 롯과 가족 많은 그들이 이룬 영혼들을 데리고 가나안 마므레 평지에 장막세운다

역대상 1:32 아브라함의 소실 그두라가 낳은 자손은 시므란과 욕산과 므단과 미디안과 이스박과 수아요 욕산의 자손은 스바와 드단이요

데라는70에 아브람을 낳는데 그해 셈의 나이 390살때이다

셈은 아브람출생후 210년 더 살았다는이야기다 600-390=210

데라는 중동지역 가나안 ,이집트 지역의 흉년 감뭄 7년째 bc1876-5=bc1871년에 사망한다. 데라가 205세를 살았다

(창10장~11장

아브라함135세때는

이삭은35세 였고(135-35=100 아브람100세 이삭이 출생하였으니)

이삭은 40에 리브가와 결혼하고60에 야곱과 에서를 낳는다

아브라함175세에 사망하니

데라가 사망한지 40년후가된다175-135=40

아브라함 사망한때175세 그 해에

이삭의 나이는 75세이고

야곱과 에서의 나이는 15세이다

아브라함이 죽는175세때 사냥꾼 에서가 15세때에

사냥꾼 니므롯을 사냥을 나갔다가 죽였다는 설,.. 에서의 조상 증조부 데라가 왕으로 섬겼던과 할아버지 아브라함 죽이려 했던 니므롯의 이야기를 들었던 에서가 니므롯을,.. 상상해 본다.

니므롯40세에 아브람 출생하고

이때 데라는70이다

니므롯왕 의

데라 군장관은 30살이 많다는 이야기다.

니므롯215ㅡ175아브람= 40

니므롯과 아브람은40년차이

성경지도 성경지명

노아자손 셈도 600세 살앗으니

홍수가 셈100세때 나고 이후에 아르박삭낳은후 500년 더 살았으므로 계산하면 데라 70세때 가

셈이390살이던 해에 데라의 아들 아브람이 태어난다

이후 셈은 600-390=210년 더 살았다는 이야기.

아브람이 175사망

아브람태어나던해 셈은 390세였으므로 210-175=35

390+175=565

600-565=35

셈이 아브람보다 35세 더살앗네

아브람음 130에 애굽에 내려가 17년 더 살고 사망.

아브람175세 때에 이삭은75세 야곱 에서는 15세 셈은 565세였네...

이삭은180세 사망

야곱은 147세 사망

이삭 야곱은60년나이차이

이삭은 아브람 사망후 105년을 더살고

이삭과 야곱은 60년 차이 나므로 야곱이 애굽갈때 130세때라면 130+60=190 이니 -10하면 180세

야곱120세때 이삭은 180세로 사망하고

그때라면 7년 풍년후 가뭄 7년중 가뭄2년째 이면 총 9년 전

풍년 시작년 전년도에 이삭은 풍년도 못보고 하늘로간것.이삭은 흉년 7년을 경험 안하고 하늘로간것

이삭은 요셉이 총리되기1년전이나.총리된해에 사망한다

야곱과 요셉은 90년차이

야곱이 삼촌 라반집에 간지14년째해 요셉이 출생햇으니76세에 에서를 피하여 도피한것.

출11:1~

홍수 후 다음 해 셈은100세에 이르박삭을 낳는다

셈100+아르박삭35+셀라30+에벨34+벨렉30+르우32+스룩30+나홀29+데라70=390

셈390세때 데라70세이다

데라70에 아브람 낳는다

출애굽 bc1446+ 애굽 종 생활 430년=bc1876

"bc1876은 야곱과 요셉이 상봉한 해"

년도 계산은 요셉 ""상봉의 해와""

출애굽후480년된해 솔로몬 성전짓는해를 기준하면 계산 다 맞게된다

※야살의책이란?

'의로운 자의 책'을 뜻한다

아담 에녹 노아시대 아브라함 후손..걸쳐 출애굽과 전쟁의 승리사 등을 노래한 것을 B.C.8세기 경에 편집한거란다


* https://digitalcollections.drew.edu/UniversityArchives/ThesesAndDissertations/THEO/DMin/2016/Yun/openaccess/KYun.pdf



역사의 순서대로 성경을 읽어가는 훈련 아모스
- 호세아 - 요나 - 왕하 15-18:12. 이사야 1-35, 왕하 19, 사 37, 왕하 20, 사 38-39, 사 40-66, 미 1-7, 왕하 21-23, 습 1-3, 합 1-3, 나 1-3, 욜 1-3, 왕하 24, 렘 1-3, 렘 4-38,

아모스(Amos) : 무거운 짐을 진 자(짐을 지는 사람)

1. 주전 8세기의 남 유다 출신으로 이스라엘에서 활동한 예언자.

2. 베들레헴 남쪽 10Km지점 돌 많은 드고아의 목자 겸 뽕나무를 재배했었다(아모스 7:14-15)

아모스
아마샤에게 대답하여 가로되 나는 선지자가 아니며 선지자의 아들도 아니요 나는 목자요 뽕나무를 배양하는 자로서.
양떼를 따를 때에 여호와께서 나를 데려다가 내게 이르시기를 가서 내 백성 이스라엘에게 예언하라 하셨나니.

3. 그는 고향 유대를 떠나 북왕국 이스라엘의 벧엘에서 당시의 왕 여로보암 2세의 정치와 종교적 타락을 공박했었다(호세아 7:7-9)

저희가 다 화덕 같이 뜨거워져서 그 재판장들을 삼키며 그 왕들을 다 엎드러지게 하며 저희 중에는 내게 부르짖는 자가 하나도 없도다.에브라임이 열방에 혼잡되니 저는 곧 뒤집지 않은 전병이로다.
저는 이방인에게 그 힘이 삼키웠으나 알지 못하고 백발이 얼룩얼룩할찌라도 깨닫지 못하는도다.

4. 별명 / 정의의 선지자

5. 주제 성구 / 아모스 5:24

오직 공법을 물 같이, 정의를 하수 같이 흘릴찌로다.


정의(正義)


1. 사회나 공동체를 위한 옳고 바른 도리.
2. 정의의 사도(使徒)
3. 사회 전체의 평화와 행복을 위해 법과 질서를 바로 세우고, 구성원의 기회나 권리를 공평하게 보장하는 일.
4. 바른 의의

정의(체다카, tsedâqâh) צְדָקָה            

1. 올바름,  2. 정의,  3. 의로움

공의(公義)


1. 공정한 도의(道義).
2. 세력 있는 자라고 두호하지 말고 공의로 사람을 재판할지며.
3. 가톨릭 / 선악의 제재(制裁)를 공평하게 하는 하느님의 적극 품성(積極稟性)의 하나.

공의(미쉬파트, mishpâṭ) מִשְׁפָּט               

1.  판결,  2. 율례, 3. 공의







그리스도인

사도행전 11:26
만나매 안디옥에 데리고 와서 둘이 교회에 일년간 모여 있어 큰 무리를 가르쳤고 제자들이 안디옥에서 비로소 그리스도인이라 일컬음을 받게 되었더라.

사도행전 26:28
아그립바가 바울더러 이르되 네가 적은 말로 나를 권하여 그리스도인이 되게 하려 하는도다.

베드로전서 4:16 
만일 그리스도인으로 고난을 받은즉 부끄러워 말고 도리어 그 이름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χρηστός (크레스토스)

사도행전 11:26

만나매 안디옥에 데리고 와서 둘이 교회에 일년간 모여 있어 큰 무리를 가르쳤고 제자들이 안디옥에서 비로소 그리스도인이라 일컬음을 받게 되었더라.

사도행전 11:26에는 시리아 안디옥에서 처음으로 믿음의 사람들을 그리스도인(크리스티아노스, Χριστιανός)이라고 호칭하게 되었다고 말한다.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는 사람을 그리스도인이라고 부르게 된 것인데, 로마제국에 복음이 전파되면서 그리스도인(Christianum)의 존재가 유대교인과 구별되었다.

기원후 2세기 초반 하드리아누스 황제의 비서로 활동했던 로마 역사가 Suetonius는 De vita Caesarum(황제들의 생애)에서, 글라우디오 황제 시대(주후 41-54년) 주후 49년에 유대인들을 로마에서 추방하는 칙령을 반포했음을 말하면서 그 이유를 잠깐 서술하였다.

“글라우디오는 그리스도(Chrestus)의 선동을 받은 유대인들이 끊임없이 난동을 일으켜 그들을 로마에서 추방했다” – 유대인들의 추방사건이 그리스도라는 인물 때문이라는 것이다. 역사가 수에토니우스는 로마의 유대인 공동체 안에서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는 기독교인들과의 갈등이 분쟁과 불화로 이어지고 있음을 암시한다. 로마인들에게 눈에 가시처럼 여겨졌던 유대인들의 존재가 기독교인들 사이의 불화로 문제를 일으키자, 글라우디오 황제는 반유대적 시민들의 호소에 편승하여 유대인들을 로마에서 추방한 것으로 보인다. 바울의 고린도 사역을 도왔던 부부 아길라와 브리스길라는 이때 로마로부터 추방당하여 건너온 로마 교인이었다(행 18:2). 수에토니우스는 세속 역사가였지만, 기독교인이 믿는 그리스도의 존재를 잘 알고 있었고, 그리스도라는 호칭을 라틴어로 ‘크레스투스’(Chrestus)라 불렀다. 이 명칭은 헬라어 Χριστός(크리스토스)의 라틴어 음역이었다. 그런데 라틴어로 제대로 음역한다면 Christus(크리스투스)라고 해야 하고, 실제로 라틴어 성경번역은 그렇게 하고 있다. 하지만 2세기 초의 역사가 수에토니우스는 그리스도(Χριστός)를 Christus가 아닌 Chrestus 라고 비슷한 발음을 가진 다른 단어로 음역하였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    

그리스도(Χριστός)라는 말은 헬라어 χρίω (크리오)에서 왔다.
이 동사는 ‘기름 붓다’(anoint), 혹은 ‘기름 바르다’(smear)의 뜻을 가지고 있다.
그레코 로만 세계의 사람들은 헤브라이즘의 메시아(그리스도),
즉 anointed one (기름부음 받은, 기름칠한 자)의 뜻을 전혀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그래서 Christus의 철자보다는 비슷한 철자이지만, 뜻이 통하고 발음이 비슷한 Chrestus로 음역했을 것이다.
이 음역은 헬라어 χρηστός(크레스토스)를 즉시 연상시킨다.
이 단어는 대체적으로 탁월한(excellent), 유용한(useful), 도움이 되는(helpful), 좋은(good), 친절한(kind), 온화한(mild) 등의 뜻을 가지며, 고전 헬라어뿐만 아니라, 셉투아진트, 신약성경에서 고루 사용되었다.

구약 헬라어 성경(LXX)에서 χρηστός (크레스토스)는 여러 히브리어 동사에서 번역한 단어이지만, 대체적으로 ‘좋은, 선한’이라는 טוֹב(토브)를 번역할 때 이 단어를 사용하였다(렘 24:2; 단 2:32). 

χρηστός (크레스토스)는 하나님과 사람에게 사용되는 단어로서 주로 관계적인 측면에서, 그리고 어떤 목적에 유용하고 도움이 되는 것을 의미하는 단어이다.

본질적 선함(essential goodness)보다는, 사람과의 관계에서(relational), 혹은 목적에 도움이 되는(serviceable) 선함을 나타내는 단어이다. 그런 점에서 도덕적 선함(moral goodness)을 말한다.

신약성경에서 헬라어 χρηστός(크레스토스)가 7번 사용되었고,
명사 χρηστότης (크레스토테스)는 10번 사용되었고,
동사 χρηστεύομαι(크레스튜오마이)는 단 한 번 사용되었다(고전 13:4).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라는 담화에서 예수는 “묵은 것이 좋다”(χρηστεύομαι)라는 격언을 소개한다(눅 5:39).
예수의 가르침과 다른 엉뚱한 격언이 첨부되었기에, 고대 사본에는 이 구절이 없지만 묵은 포도주가 미각과 후각에 더 좋은 것이기에 포도주를 마시는 목적에 맞는다는 의미로서 χρηστός (크레스토스)를 사용하였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에게 육체의 부활을 믿지 않고 다른 주장을 하는 가르침에 속지 말라고 권면하면서, “나쁜 동무가 좋은 습성을 망친다”(새번역성경, 고전 15:33) 고 고전 희극작가 Menander의 구절을 인용한다.

여기서 ‘좋은 습성'(에토스 크레스토스, ἦθος χρηστός)은 도덕적 선함을 뜻하는 말인데, 부활을 믿지  않는 거짓 교인들이 부활을 기다리며 사는 그리스도인들의 도덕적 선한 삶을 무용지물로 만들 것을 경계하는 바울의 염려를 담고 있다.       

χρηστός(크레스토스)는 그리스도인의 존재를 세상에 보여주는 핵심단어이다.
선하고 착하게 사는 모습, 관용과 인자, 친절을 베푸는 모습, 겸손과 온유를 보여주는 그리스도인들의 모습을 한마디로 표현하는 것이 χρηστός(크레스토스)이다.
제자 누가는 세상에서 하나님의 자녀로 사는 모습을 인자한(χρηστός) 하나님의 모습을 닮은 삶으로 표현한다:

“오직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고 선대하며 아무 것도 바라지 말고 꾸어 주라, 그리하면 너희 상이 클 것이요 또 지극히 높으신 이의 아들이 되리니, 그는 은혜를 모르는 자와 악한 자에게도 인자하시니라”(눅 6:35). 

어떤 인간이라도 인자하게 대하시는 하나님의 모습처럼, 기독교인은 모든 사람에게 χρηστός(크레스토스)해야 한다.
그것이 세상을 살아가는 하나님의 자녀의 모습이다.
그리스도인들은 “주님이 인자하시다"( χρηστὸς ὁ κύριος) 라는 진리(벧전 2:3)를 맛보았기에, 이제 세상에서 사는 모습은 그 진리를 실천하는 삶으로 이해한다.

“서로 친절하게 하며(χρηστοί), 불쌍히 여기며, 서로 용서하기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심과 같이 하라”(엡 4:32)


1세기 말과 2세기 초의 로마의 역사가나 관리들, 시민들은 그리스도인들의 친절함과 부드러움, 온유함, 사랑하는 모습에 깊은 감명을 받았다.

비록 종교적 오해와 선입관이 있었지만, 기독교인들의 친절함(크레스토테스 χρηστότης)을 보고, 기독교인들이 믿는 그리스도(Christus)를 라틴어로 크레스투스(Chrestus)라고 불렀다. 예수는 친절한 분(Chrestus)이다.

χρηστός (크레스토스)는 도덕적 선함을 말하고, 인간관계에서 선하고 친절한 삶을 사는 것이고, 세상을 향한 섬김의 목적에 유용한 덕목이다. 이 덕목을 실천하는 사는 사람들이 Χριστιανός(크리스티아노스)이다.


6월 19일(토) 드고아 목자 아모스


드고아(Tekoa, 나팔소리)는 유다 광야에 있으며 예루살렘에서 남으로 약 15km  베들레헴의 남으로 약 10km의 위치에 있는 해발 1,000m 에 가까운 고지이다.
예언자 아모스의 출신지였으며 예루살렘 방어의 언덕이었던 이곳에는 오늘날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다.
계곡의 낮은 지대에는 소규모의 경작지가 있고, 또한 한때의 무성했던 산재한 식물의 부식토가 있다.
이곳에서 감람열매와 시카모어열매(암 7:14)라고 불리는 과일이 재배되었다.


아모스 1:1,
유다 왕 웃시야의 시대 곧 이스라엘 왕 요아스의 아들 여로보암의 시대의 지진전 이년에 드고아 목자 중 아모스가 이스라엘에 대하여 묵시 받은 말씀이라.

호세아 1:1b
...요아스의 아들 여로보암이 이스라엘 왕이 된 시대에 브에리의 아들 호세아에게 임한 여호와의 말씀이라.

유다 왕 웃시야(10대) /
이스라엘 왕 여로보암 2세(13대) /

아모스와 호세아는 동 시대에 예언 활동을 하였다.
다만 호세아는 북 이스라엘 출신으로 이스라엘을 향하여 말씀을 선포하였으나
아모스는 남 유다 출신으로 북 이스라엘에서 말씀을 선포하였다.

남과 북으로 나누어졌으나 말씀을 갖고 왕래하며 전할 수 있었다는 것은 한국과 북한을 생각하면 정말 행복한 분열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한국과 북한의 분열은 비극적인 현실입니다.

목자(牧者) shepherds                                  

1. 로이(rôʽîy) רֹעִי
   (시편 23:1) 여호와는 나의 목자(여호와 로이) 

2. 노케드(nôqêd) נֹקֵד (아모스 1:1)
   (털이 많은 양, 비교적 좋은 양)


서너 가지 죄(1:3, 6, 9, 11, 13, 2:1, 4, 6)

1. 수적인 격언
numerical proverb

2. 완전 수 3 + 1=4(아주 많은 죄)
Luther, Calvin, Keil, Drive

3. 3+4=7(죄로 가득한 상태) 
W. R. Harper


다메섹의 죄(3절) - 아람(수리아)의 수도
철타작기로 길르앗을 압박

가사의 죄(6절)
사로 잡은 자를 에돔에 붙였다(인신매매)


두로의 죄(9절)
형제의 계약을 무시하고
사로 잡은 자를 에돔에 붙였다(인신매매)

에돔의 죄(11절)
칼로 형제를 추격하며 긍휼을 버리고 항상 분을 품다 


암몬의 죄(13절)
자기 지경을 넓히려 아이 밴 여인의 배를 갈랐다
(비인도적인 만행)


아모스(Amos. ʽÂmôwç) עָמוֹס                         짐, 무거운 짐을 진자, 무거운 짐을 운반하는 자                            

    묵시 / 하조트(châzôwth) חָזוֹת

평범한 가문의 아모스가 여호와 하나님으로부터
이스라엘에 대한 책망을 선포하는 무거운 짐을 짊어진
것처럼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은 어두운 세상에
소금과 빛으로 살아야 할 무거운 짐을 맡았다.

바닷물의 염분 농도(약 3%)

로마 정부 기독교를 국교 / 9%의 기독교인들

어느 임금의 세 딸 / 금, 보석, 소금


오늘의 기도

세상의 소금
세상의 빛으로 살아가자

희생, 헌신, 자기 포기, 자기 비하


6월 21일(월)

아모스(무거운 짐을 짊어진 사람)

1. 남 유다 출신(웃시야 왕)

2. 북 이스라엘을 향한 활동(여로보암 2세)

3. 목자(노케드, 보케르)

4.  서너가지 죄(수적인 격언)
X + 1 =  점차 증가하는 죄악

잠언 6:6 / 여호와의 미워하시는 것 곧 그 마음에 싫어하시는 것이 육 칠 가지니 

5. 이웃 나라들의 죄를 심판
율법을 받은 백성들의 죄악이 더 심각
세상 모든 나라가 하나님의 주권 아래

호세아 2:4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유다의 서너가지 죄로 인하여 내가 그 벌을 돌이키지 아니하리니
이는 저희가 여호와의 율법을 멸시하며 그 율례를 지키지 아니하고 그 열조의 따라가던 거짓것에 미혹하였음이라.

  • 거짓것 / (현대인, 공동, 새번역) 거짓 신
    (NIV) false gods
    카자브(kâzab) כָּזַב 헛것, 거짓말쟁이, 거짓말

유다의 죄(4절)

1. 여호와의 율법을 멸시

2.  율례를 지키지 않는 것

3. 거짓 것에 미혹된 것(우상 숭배)
* 난외의 주 1 참조(우상)

아모스 2:6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이스라엘의 서너가지 죄로 인하여 내가 그 벌을 돌이키지 아니하리니
이는 저희가 은을 받고 의인을 팔며 신 한 켤레를 받고 궁핍한 자를 팔며.

이스라엘의 죄(6-8절)


1. 은을 받고 의인을 팔며(부당한 재판)

2. 신 한 켤레를 받고 궁핍한 자를 팔며(불의한 뇌물)

3. 가난한 자의 머리에 있는 티끌을 탐내며(물질적 탐욕)

4. 겸손한 자의 길을 굽게 하며(부정과 부패)

5. 부자가 한 젊은 여인에게 다녀서 나의 거룩한 이름을 더럽히며(음란)

6. 모든 단 옆에서 전당 잡은 옷 위에 누우며(무정함)

7. 저희 신의 전에서 벌금으로 얻은 포도주를 마심이니라(신성모독)

정의(체다카, tsedâqâh) צְדָקָה            

1. 올바름,  2. 정의,  3. 의로움
                                                           

공의(미쉬파트, mishpâṭ) מִשְׁפָּט               

 1.  판결,  2. 율례, 3. 공의


역대하 19:6(여호사밧 왕)
너희의 재판 하는 것이 사람을 위함이 아니요 여호와를 위함이니…. 



아모스 5:24
오직 공법(מִשְׁפָּט)을 물 같이,정의(צְדָקָה)를 하수 같이 흘릴찌로다.

7절. 공법을 인진으로 변하며 정의를 땅에 던지는 자들아.

12절b. 너희는 의인을 학대하며뇌물을 받고 성문에서 궁핍한 자를 억울하게 하는 자로다.

공의란?
판결의 의를 말하는 것으로 공평한 재판이 실현되는 것을 말한다.

정의란?
사회적 의를 말하는 것으로 세상의 질서가 모두에게 바르게 적용되는 것을 말한다.

12절b. 너희는 의인을 학대하며
뇌물을 받고 성문에서 궁핍한 자를 억울하게 하는 자로다. 

오늘의 기도

믿음의 반석위에 교회를 세우자

 임직자들을 세울 때
(믿음? 사회적 지위와 신분?)

갈라디아서 1:10
이제 내가 사람들에게 좋게 하랴 하나님께 좋게 하랴 사람들에게 기쁨을 구하랴
내가 지금까지 사람의 기쁨을 구하는 것이었더면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니라.


신일교회는 창립76주년을 맞아 ‘신일교회 7무(無) 임직식’이라는 특별한 임직예식을 가졌다.
1. 임직자 직분에 따른 임직헌금 無
2. 축하를 위한 축의금 꽃다발 無
3. 임직증서를 수여하고 화려한 임직패 無
4. 가슴에 다는 꽃과 흰 장갑 無
5. 임직을 위한 의상(양복, 한복) 구매 착용 無
6. 임직자들이 돈을 모아 교회에 드리는 기념품 無
7. 교역자에게 선물 및 사례비 無 등

7무(無) 예식을 진행하며 코로나19 시대에 솔선하여 검소한 예식을 실천했다.



6월 22일(화) 자기의 비밀(아모스 3:7)


아모스 3:7
주 여호와께서는 자기의 비밀을 그 종 선지자들에게 보이지 아니하시고는 결코 행하심이 없으시리라.

아모스 3. 4장과 5. 6장은 구약에서 공통적인 표현법으로서, 시의 효과를 위해 둘 혹은 그 이상의 행이 다른 낱말이 갖는 사상과 관련되어 표현되는 것을 병행구 또는 병행법이라고 한다.

예를 들면,

1. 동의적 병행법
가장 일반적인 것은 시편 1:1과 같이 시의 행이 그와 동등하거나 유사한 의미를 나타내는 것.
복 있는 사람은 악인의 꾀를 따르지 아니하며

2. 반의적 병행법
어떤 경우에는 잠언 3:5과 같이 두 행이 반대의 의미를 나타낸다.
너는 마음을 다하여 여호와를 의뢰하고 네 명철을 의지하지 말라

3. 종합적 병행법
어떤 경우에는 잠언 3:20과 같이 둘째 행이 첫째 행의 의미에다 무엇을 더하는 것이다.
그 지식으로 해양이 갈라지게 하셨으며 공중에서 이슬이 내리게 하셨느니라.  

아모스 3:1
이스라엘 자손들아
여호와께서
너희를 쳐서 이르시는 이 말씀을 들으라.

아모스 5:1
이스라엘 족속아
내가 너희에게 대하여 애가로 지은
이 말을 들으라.


아모스 3:2
내가 땅의 모든 족속 중에 너희만 알았나니 그러므로 내가 너희 모든 죄악을 너희에게 보응하리라.

* 너희만(레크, rêyq. רֵיק)

(공동번역) 너희만을 골라내었건만
(새번역) 오직 너희만을 선택하였으나

이스라엘과 하나님의 특별한 관계
- 친밀한 관계

1. 하나님의 특별한 소유(출 19:5, 말 3:17)

2. 제사장 나라(출 19:6)

3. 여호와의 백성(삿 5:11, 삼하 14:13)

4. 거룩한 백성(신 7:6, 14:2, 21)

아모스 3:10

자기 궁궐에서 포학과 겁탈을 쌓는 자들이 바른 일을 행할 줄을 모르느니라 이는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베드로전서 2:9

오직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데서 불러 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자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오늘의 기도

믿음의 본분을 바르게 감당하자!

어두운 죄악 가운데서 불러 내어 구원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아름다운 은혜를 전하는 사명


6월 23일(수) 예비하라(아모스 4:12)


아모스 4:12

그러므로 이스라엘아 내가 이와같이 네게 행하리니 이스라엘아 네 하나님 만나기를 예비하라.

아모스 4:1

사마리아 산에 거하는 바산 암소들아 이 말을 들으라 너희는 가난한 자를 학대하며 핍한 자를 압제하며
가장에게 이르기를 술을 가져다가 우리로 마시게 하라 하는도다.

* 바산의 암소들(부유한 여인들)

아모스 4:4

너희는 벧엘에 가서 범죄하며 길갈에 가서 죄를 더하며
아침마다 너희 희생을, 삼일마다 너희 십일조를 드리며.

* 벧엘(하나님과 이스라엘이 만난 곳)
* 길갈(단을 쌓은 곳, 12지파의 기념비, 국가의 시작 선포)
* 아침마다 너희 희생을(상번제)

벧엘은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만남이 시작된 곳

길갈은 가나안 땅의 역사가 시작된 곳입니다.
아브라함과 야곱이 하나님의 약속을 받고 제단을 쌓은 곳
여호수아가 요단강을 건너 12지파의 기념비를 세운 곳
사무엘이 사울을 왕으로 세운 후 이스라엘 백성들과 함께 새로운 국가의 시작을 선포한 곳

그러므로 이스라엘이 ‘벧엘에서 범죄하고 길갈에서 죄를 더했다’(4절)는 말씀의 뜻은,
이스라엘이 하나님과 맺은 관계를 어그러뜨리는 죄를 지었다는 뜻으로 풀이될 수 있겠습니다.

아모스 4:5

누룩 넣은 것을 불살라 수은제로 드리며 낙헌제를 소리내어 광포하려무나 이스라엘 자손들아
이것이 너희의 기뻐하는 바니라 이는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 수은제(thank offering) 토다(tôwdâh) תּוֹדָה
  은혜에 보답하는 제사(감사)
* 낙헌제(freewill offering) 네다바(nedâbâh)   נְדָבָה

  자원하는 제사 (아낌없이 주는 마음)

이스라엘에 대한 경고(6-11절)
내가……
너희가 내게 돌아오지 아니하였느니라
(6b, 8b, 9b, 10b, 11b)


7가지 재앙
1. 기근(6),
2. 가뭄(7-8), 
3. 곡물재해(9a), 
4. 황충(9b),
5. 전염병(10a), 
6. 칼(전쟁)(10b), 
7. 지진(11) 

아모스 4:12

그러므로 이스라엘아 내가 이와같이 네게 행하리니 이스라엘아 네 하나님 만나기를 예비하라.

잠언 31:30-31

고운 것도 거짓되고 아름다운 것도 헛되나 오직 여호와를 경외하는 여자는 칭찬을 받을 것이라.
그 손의 열매가 그에게로 돌아갈 것이요 그 행한 일을 인하여 성문에서 칭찬을 받으리라. 

로마서 12:1-2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예배니라.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오늘의 기도

예수님이 기뻐하는 예배와 삶을 회복하자!

내가 만족하는 예배와 예물
영적인 예민함

찰스 엠 셀돈(Charles M  Sheldon. 1857-1946)
In his Step(예수님이라면 어떻게 하셨을까?)

https://m.blog.naver.com/PostView.naver?isHttpsRedirect=true&blogId=dyskekq&logNo=220799757881


하나님께서 재난을 내리시는 목적을 세 가지로 분명하게 증거 한다.

첫째, ‘자기 뜻을 사람에게 보이며’ 고난에는 뜻이 있고 재앙에는 메시지가 있다.

빨리 지나가고 회복되기만을 바랄 게 아니라 그 속에 담긴 뜻과 메시지를 깨달아 변화와 성숙의 기회로 삼아야 한다.

둘째, ‘땅의 높은 데를 밟는 도다’

인간의 오만을 꺾으신다.
재난은 오만불손한 이들을 겸손하게 만든다.
인생은 풀과 같고 그 영광은 들의 꽃과 같다.
한줌의 재로 돌아갈 존재다.
재난을 통해 일상의 소중함을 깊이 자각한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라는 사실을 깨닫게 하신다.

셋째, ‘그 이름이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니라’

왕 노릇하던 헛된 우상들을 무너뜨리신다.
우상숭배는 하나님이 아닌 것들을 하나님처럼 섬기는 것이다.

우상은 이단 신천지의 교주만이 아니다. 물질과 건강, 명예와 권세가 얼마나 부질없는가를 철저하게 깨닫게 하신다.
오직 하나님만 하나님 되심을 나타내신다.

코로나19의 재난이 언제까지 계속될지 모르지만 부디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을 성찰하고, 오만을 버리고, 헛된 우상을 내려놓고 하나님을 삶의 주관자로 인정하는 기회가 되길 바랄 뿐이다.

6월 24일(목) 여호와를 찾으라(아모스 5:6)

아모스 5:6

너희는 여호와를 찾으라 그리하면 살리라
염려컨대 저가 불 같이 요셉의 집에 내리사 멸하시리니 벧엘에서 그 불들을 끌 자가 없을까 하노라.

돌아오라!
슈브(shûwb) שׁוּב                                                                                                    

5:2, 처녀 이스라엘  
5:4, 벧엘, 길갈, 브엘세바                                     

찾으라!
다라쉬(dârash)  דָּרַשׁ                                                                

* 인간의 어리석음 : 매를 맞아야 깨닫는 존재

아모스 5:4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족속에게 이르시기를 너희는 나를 찾으라 그리하면 살리라.

아모스 5:7-8

공법(공의)을 인진으로 변하며 정의를 땅에 던지는 자들아.
묘성(북두칠성)과 삼성(오리온좌)을 만드시며 사망의 그늘로 아침이 되게 하시며 백주로 어두운 밤이 되게 하시며
바닷물을 불러 지면에 쏟으시는 자를 찾으라  그 이름이 여호와시니라.


아모스 5:14-15

너희는 살기 위하여 선을 구하고 악을 구하지 말찌어다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의 말과 같이 너희와 함께하시리라.
너희는 악을 미워하고 선을 사랑하며 성문에서 공의를 세울찌어다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혹시 요셉의 남은 자를 긍휼히 여기시리라.    

오늘의 기도

시대적 본분과 사명을 깨닫자!

길을 보여주는 삶
(세상이 교회를 필요로 하는가?)



6월 25일(금) 공법을 쓸개로(아모스 6:12)


아모스 6:12-13a

말들이 어찌 바위 위에서 달리겠으며 소가 어찌 거기 밭 갈겠느냐 그런데 너희는 공법을 쓸개로 변하며 정의의 열매를 인진으로 변하며. 허무한 것을 기뻐하며.

말이 바위 위를 달릴 수 없고 소가 바위를 개간할 수 없듯이(공동번역 / 바다를 개간 할 수 있느냐?)
사람이 해서는 알 될 정의와 공의를 무너뜨렸습니다.

금기로 간주되는 일, 도저히 해서는 안 될 일을 이스라엘이 했다는 것입니다.
정의를 물같이 공의를 마르지 않는 강같이 흐르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섭리이자 순리입니다.
하지만 정의와 공의를 쓸개와 쓴 쑥으로 바꾸었다는 것은 쓸개와 쓴 쑥으로 사람들을 핍박하고 죽음에 이르게 하는 악행을 저질렀다는 의미입니다.
‘쓸개’와 ‘쓴 쑥’으로 번역한 단어는 성경 다른 구절에서는 ‘독’과 ‘독약’으로 번역되었습니다.

허무한 것을 기뻐하고 자신의 힘으로 뿔들을 취하였다는 것은 이스라엘의 군사적 경제적 힘을 자랑하는 교만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허무한 것(로다바르, 지명으로 뜻은 없는 것, nothing)
언어의 묘미를 살려 없는 것을 기뻐하는 어리석음을 지적합니다.
이스라엘의 지도자들이 가치도 없고, 존재하지도 않으며, 허무한 것을 추구하는 모습을 빗대어 말한 것이다.

뿔(카르나임)이란 것도 힘을 상징하는 것으로 지명으로 여로보암 2세가 전쟁에서 승리한 후 얻은 땅으로 이런 것들도 모두 헛되다는 것을 의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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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복을 자신의 힘으로 이루었다고 말하는 교만을 책망하는 말씀입니다.

아모스 6:14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이스라엘 족속아 내가 한 나라를 일으켜 너희를 치리니 그들이 하맛 어귀에서부터 아라바 시내까지 너희를 학대하리라 하셨느니라.

하나님께서 결론적으로 말씀하십니다.
‘한 나라를 일으켜 치겠다’

하맛 어귀는 이스라엘 국경 최북단이며
아라바 시내는 이스라엘 국경 최남단을 가리킵니다.

이스라엘 전체가 외세에 의해 짓밟힐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역사적으로 보면 한 나라는 앗수르를 의미합니다.
북 이스라엘은 주전 722년 앗수르에 의해 멸망을 당합니다.

이스라엘은 번영의 시기에 교만해졌습니다.
누리고 있는 모든 것들이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임을 자각하지 못했습니다.
왕이 능력이 있고 지도자들이 지략이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지도자들의 타락이 백성들의 타락으로 이어졌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마음이 굳어지고 교만해졌습니다.
주리고 목마르고 나그네 되고 헐벗고 병들고 갇힌 자들은 안중에 없었고 오히려 그들을 신 발 한 짝에 팔아넘길 정도로 부의 축적에 혈안이 되었고, 축적된 부로 사치와 향락의 일상을 살았습니다.

예수님의 비유로 보면, 양과 염소의 무리 중에 염소 무리가 되고 말았습니다.
그 결과는 어떻게 되었습니까?

여로보암 2세 시대 이스라엘 사람들이나 예수님 시대 이스라엘 사람들이 사회적 약자들을 주님이라고 여겼다면 과연 태도가 달랐겠습니까?

오늘날 우리는 사회적 약자를 대하는 것이 주님께 대하는 것임을 성경 말씀을 통해 배웠습니다.
그렇다면 사회적 약자에게 어떻게 대하며 살아야 하겠습니까?
오늘 하루 사회적 약자를 주님을 대접하듯 살아가는 것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을 주님을 대하듯이 살아보시지 않겠습니까?

아모스의 경고의 화살은 아무래도 지도자들, 상류층을 주로 향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남 유다의 수도인 시온산, 북 이스라엘의 수도인 사마리아산에 거주하면서 으스대고 있었습니다.
그런 그들에게 아모스는 갈레, 하맛, 가드를 상기시켜주지요.
그곳들은 이전에는 이스라엘보다 훨씬 더 크고 화려했었지만 아모스 당시에는 쇠락해져 있었습니다.
이스라엘도 곧 그렇게 될 것이라는 경고입니다.
특히 지도자들은 더욱 심판받을 것인데, 그들의 죄목은 교만과 안일이었습니다.

이어지는 아모스의 고발은 참 생생합니다.

상아 침대에 누워 기지개를 켜고, 양과 송아지를 잡아서 파티를 열고, 자기가 마치 다윗인 것처럼 악기를 만들어서 노래부르고, 술에 빠져 있으면서 열심히 외모를 꾸미고 있었습니다.

그림이 그려지지 않습니까?

그들은 흉한 날은 멀다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요셉의 환난, 즉 망해가는 나라에 대해서는 근심하지 않고 있었습니다.
물론 힘들어 부르짖는 서민들의 소리에도 귀기울이지 않았구요.

자신들이 쌓아놓은 자기들만의 성 안에서 흥청망청 지낼 뿐이었습니다.
이런 지도자들의 사치와 부패는 어디서나 일어나는 일입니다.

로마 제국 말기의 귀족들이 그랬고,
유럽 봉건 시대의 왕과 영주들이 그랬고,
일제 치하 우리나라의 친일파들이 그랬고,
제정 러시아의 귀족들과 성직자들이 그랬고,
미군정 아래에서 지주들이 그랬지요.
미국에서 2008년 금융위기로 600만 명이 집을 잃었을 때도 은행의 임원들은 수십억원의 연봉잔치를 누렸고,
북한에서는 수백 만의 인민들은 굶어죽어가고 있는데 당 간부들은 호화스러운 생활을 누리고 있습니다.
현재 한국의 주사파들이 모든 분야를 장악하고 부를 축적히는 일에 열중하는 것
그들은 나라의 운명이나 다른 사람의 아픔 같은 것에는 신경쓰지 않습니다.
오직 나의 이득에만 관심이 있지요.
지금 우리나라는 어떻습니까?
그렇지 않다고 자신할 수 있을까요?

아모스는 그런 지도자들에게 그날이 오면 그들이 맨 앞에서 끌려갈 것이라고 선포합니다.
1절에서 그들을 가리켜 '백성들의 머리'라고 했는데 7절에서는 사로잡혀갈 때도 머리가 될 것이라고 빈정대고 있지요.
그리고 그들의 기지개 켜는 소리와 흥얼대던 노래소리도 그칠 것이라고 합니다.
지도자들을 향해 손가락질을 하기는 쉽습니다.
하지만 그 손가락을 우리 스스로에게도 돌려야겠지요.



6월 26일(토) 다림줄(아모스 7:7)

7:1. 주 여호와께서 내게 보이신 것(7:1, 4. 8:1)  

아모스 7:7
또 내게 보이신 것이 이러하니라 다림줄을 띄우고 쌓은 담 곁에 주께서 손에 다림줄을 잡고 서셨더니.

- 보이신 것(라아. רָאָה)

 선지자, 선견자, 예언자

1. 듣는 것(경청)
2. 보는 것(환상)
3. 전하는 것(신탁)             
    * 하나님의 마음
    (세상을 하나님의 눈으로 바라보는 것)

아모스 7:7
또 내게 보이신 것이 이러하니라 다림줄을 띄우고 쌓은 담 곁에 주께서 손에 다림줄을 잡고 서셨더니.

* 다림줄(아나크, ’ănâk. אֲנָךְ ) / 주석(칼)
다림줄은 위에서부터 줄을 내려야 한다.
기준은 위에서 시작                   

* 쌓은 담(견고한 성, 사마리아 성, 이스라엘 백성 전체)

아모스 7:2, 5

주 여호와여 청컨대 사하소서 야곱이 미약하오니 어떻게 서리이까 

아모스 7:3, 6

주 여호와께서 이에 대하여 뜻을 돌이켜 가라사대 이것이 이루지 아니하리라. 


아모스 7:8

내게 이르시되 아모스야 네가 무엇을 보느냐 내가 대답하되 다림줄이니이다
주께서 가라사대 내가 다림줄을 내 백성 이스라엘 가운데 베풀고 다시는 용서치 아니하리니.

  • 용서를 구할 수 없는 시간(시대)


교회는 건물이 아니라 사람이다.

교회를 세우는 것은
사람을 진리의 말씀으로 양육하는 것이다.
내가 교회가 되어야 한다.
  가정이 교회가 되어야 한다.
가정이 사회로 발전해야 한다.
사회가 국가로 발전해야 한다.


벧엘의 제사장 아마샤와 남 유다 출신의 선지자 아모스

아모스 7:10

때에 벧엘의 제사장 아마샤가 이스라엘 왕 여로보암에게 기별하여 가로되 이스라엘 족속 중에 아모스가 왕을 모반하나니
그 모든 말을 이 땅이 견딜 수 없나이다.

아모스 7:11

아모스가 말하기를 여로보암은 칼에 죽겠고 이스라엘은 정녕 사로잡혀  땅에서 떠나겠다 하나이다.

  • BC 722년 앗수르에 의한 멸망

오늘의 기도

말씀을 분별하는 믿음을 주소서!

가정 제단의 거룩함을 회복하라.

세상의 소금과 빛으로 일어나라.

진리 편에 가담하라. 

6월 28일(월) 기근과 기갈(아모스 8:11)


기근(飢饉· 饑饉)

1. 흉년이 들어 식량이 모자라는 것. 순화어는 `굶주림'.
"기근이 들어 백성들이 초근목피로 연명하다"
2. 필요한 물자가 몹시 부족한

기갈(飢渴)

1.배고픔과 목마름.

"기갈이 심하다"

* 기갈이 감식(甘食)
- 굶주리고 목마르면 무엇이나 맛있다는 말.

* 기갈든 놈은 돌담조차도 부순다
- 사람이 몹시 굶주리면 상식으로는 도저히 생각할 수 없는 일까지도 저지른다.

* 기갈이 들다
- 몹시 굶주려서 간절히 음식을 탐내다. 순화어는 `(굶)주리다'.

아모스가 본 환상

1. 황충(7:1-3)
2. 불(7:4-6)
3. 다림줄(7:7-9)
4. 여름과일 한 광주리(8:1-3)
5. 단 곁에 서신 주님(9:1-4)

아모스 8:11

주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보라 날이 이를찌라 내가 기근을 땅에 보내리니 양식이 없어 주림이 아니며
물이 없어 갈함이 아니요 여호와의 말씀을 듣지 못한 기갈이라.

기근과 기갈이란 먹을 양식과 마실 물이 없기 때문이 아니라 "여호와의 말씀"이 없기 때문입니다.
"여호와의 말씀이 없다!"는 것을 "예수님이 없다" 라고 생각해 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는 말씀이 육신이 되어 이 세상에 오셨기 때문입니다.

요한복음 1:14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대형교회는 있습니다.
대형 예수님이 있을까요?
예수님은 은혜와 진리로 드러나야 합니다.
얼마전 정기 검진을 받기 위하여 담당 의사를 만났습니다.
은혜가 무엇이냐?고 질문을 하므로 "은혜는 주는 것입니다!" 라고 말했습니다.
"왜 은혜가 주는 것인가?"
성경에도 " 주 예수의 친히 말씀하신바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 하심을 기억하여야 할찌니라"(사도행전 20:35)

그동안 신앙교육은 다른 사람이 받지 못한 것을 받는 것이 은혜라고 배웠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가르침은 은혜는 주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대형교회는 주는 은혜가 다른 교회보다 더 크고 더 많아야 합니다.
그런데 소유한 것은 많지만 주는 것은 지극히 일부분입니다.

부흥과 성장을 자랑하는 교회가 있습니다.
부흥하고 성장하는 예수님이 있을까요?
부흥과 성장하는 교회는 은혜와 진리가 무르익어야 합니다.

아모스 8:12-13

사람이 이 바다에서 저 바다까지, 북에서 동까지 비틀거리며 여호와의 말씀을 구하려고 달려 왕래하되 얻지 못하리니
그 날에 아름다운 처녀와 젊은 남자가 다 갈하여 피곤하리라.    

교회마다 시집 가야 할 아가씨들은 넘쳐나는데 장가갈 청년들이 없다고 합니다.
아름다운 처녀와 젊은 남자가 갈하여 피곤하다는 것은 물론 짝을 찾지 못한 것은 아닙니다.

아모스 8:14

무릇 사마리아의 죄된 우상을 가리켜 맹세하여 이르기를 단아 네 신의 생존을 가리켜 맹세하노라 하거나
브엘세바의 위하는 것의 생존을 가리켜 맹세하노라 하는 사람은 엎드러지고 다시 일어나지 못하리라.

우상은 탐심입니다.
탐심은 곧 탐욕을 말합니다.

골로새서 3:5
그러므로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 곧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이니 탐심은 우상 숭배니라.

아모스 8:1-2

주 여호와께서 또 내게 여름 실과(카이츠) 한 광주리를 보이시며.
가라사대 아모스야 네가 무엇을 보느냐 내가 가로되 여름 실과 한 광주리니이다 하매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내 백성 이스라엘의 끝(케츠)이 이르렀은즉 내가 다시는 저를 용서치 아니하리니.

첫째, 언어의 이중적 의미로 표현

예레미야에게 "네가 무엇을 보느냐?"
"내가 살구나무 가지를 보나이다"
"내가 내 말을 지켜 그대로 이루려 함이니라."

살구나무(샤켓. Shaqed)
지킨다(쇼켓. Shoqed)

둘째, 무르익은 과일은 곧 썩을 수밖에 없다.

북 이스라엘의 멸망은 우상숭배 때문이라고 하겠습니다.
벧엘과 단에 금송아지를 만들고 예루살렘에 가지 말고 이곳에서 여호와께 단을 쌓으라고 하였다.

예레미야

네가 무엇을 보느냐?
살구나무(샤켓. Shaqed) 가지를 보나이다.
내가 내 말을 지켜(쇼켓. Shoqed)
그대로 이루려 함이니라.

아모스 8:4

궁핍한 자를 삼키며 땅의 가난한 자를 망케 하려는 자들아 이 말을 들으라.

* 여호와의 말씀(예수) / 은혜, 진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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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나(Jonas) : 비둘기


1. 스불론 땅 갓헤벨 사람 아밋대의 아들.
2. 12소선지자 중 한 사람으로 요나서의 주인공
3. 주전 825년 여로보암 2세 때 하나님이 요나에게 앗수르 도성 니느웨로 가서 그 죄악을 책하고 장차 멸망할 것을 예언하라 하였다.
4. 니느웨 사람과 감정이 좋지 않아 다시스로 도망가다 폭풍을 만나 죄인 하나를 제비뽑아 물속에 던지는 그 제비에 뽑혀 바다에 던져졌다.
5. 여호와가 큰 물고기를 예비하여 요나를 삼키게 하여 고기 배속 에서 3주야를 지내게 되었다(요나 2장)
6. 요나가 그 가윤데서 자복하고 기도할 때에 고기는 요나를 육지에 토하여냈다(요나 3장)
7. 요나가 니느웨로 가서 3일간 선포하자 그 성 주민들이 회개하였다(요나 3장)
8. 요나가 성밖에 나가서 어느 박넝쿨을 죽여 말라 버리는지라 요나가 심히 안타까와 할때 여호와의 말씀이"네가 하루 났다가 시들어지는 박넝쿨도 그롱게 아끼거둔 내가 이 큰성 니느웨의 12만명을 아끼지 않겠느냐"고 일깨워 주셨다(요나 4장)

9. 예수님이 죽었다가 사흘만에 살아나실 것을 요나를 들어 말씀하셨다(마태복음 12:39)
10. 헬라인과 로마인은 이 사실을 모두 확증하였다.



호세아(Hosea) : 여호와는 구원이시다

1. 잇사갈 지파 사람으로 12소선지중의 한 사람
2. 웃시아 왕 때부터 히스기야 왕 때(B.C 785-725)까지 예언하였으니 선지자 중 가장 오래 예언하였다.
3. 호세아서에서는 이스라엘 백성이 우상 숭배한 죄를 깊이 책망하고 구세주 오실 것을 신망하였다고 신약에 3차 인용하였다(마태복음 9:13, 로마서 9:25, 베드로전서 3:10-12)




아모스(Amos) / 무거운 짐을 진 자(짐을 지는 사람)

주전 8세기의 이스라엘의 예언자.
그는 베들레헴 남쪽 10Km지점 돌 많은 드고아의 목자 겸 뽕나무를 재배했었다(호세아 1:7, 14).
그는 고향 유대를 떠나 북왕국 이스라엘의 벧엘에서 당시의 왕 여로보암 2세의 정치와 종교적 타락을 공박했었다(호세아 7:7-9).


주전 8세기 북 이스라엘을 향한 예언 활동 : 아모스, 요나, 호세아

아모스(Amos) : 무거운 짐을 진 자(짐을 지는 사람)

1. 주전 8세기의 이스라엘의 예언자.
2. 베들레헴 남쪽 10Km지점 돌 많은 드고아의 목자 겸 뽕나무를 재배했었다(호세아 1:7, 14)
3. 그는 고향 유대를 떠나 북왕국 이스라엘의 벧엘에서 당시의 왕 여로보암 2세의 정치와 종교적 타락을 공박했었다(호세아 7:7-9)

요나(Jonas) : 비둘기

1. 스불론 땅 갓헤벨 사람 아밋대의 아들.
2. 12소선지자 중 한 사람으로 요나서의 주인공
3. 주전 825년 여로보암 2세 때 하나님이 요나에게 앗수르 도성 니느웨로 가서 그 죄악을 책하고 장차 멸망할 것을 예언하라 하였다.
4. 니느웨 사람과 감정이 좋지 않아 다시스로 도망가다 폭풍을 만나 죄인 하나를 제비뽑아 물속에 던지는 그 제비에 뽑혀 바다에 던져졌다.
5. 여호와가 큰 물고기를 예비하여 요나를 삼키게 하여 고기 배속 에서 3주야를 지내게 되었다(요나 2장)
6. 요나가 그 가윤데서 자복하고 기도할 때에 고기는 요나를 육지에 토하여냈다(요나 3장)
7. 요나가 니느웨로 가서 3일간 선포하자 그 성 주민들이 회개하였다(요나 3장)
8. 요나가 성밖에 나가서 어느 박넝쿨을 죽여 말라 버리는지라 요나가 심히 안타까와 할때 여호와의 말씀이"네가 하루 났다가 시들어지는 박넝쿨도 그롱게 아끼거둔 내가 이 큰성 니느웨의 12만명을 아끼지 않겠느냐"고 일깨워 주셨다(요나 4장)

9. 예수님이 죽었다가 사흘만에 살아나실 것을 요나를 들어 말씀하셨다(마태복음 12:39)
10. 헬라인과 로마인은 이 사실을 모두 확증하였다.





호세아(Hosea) : 여호와는 구원이시다.

(1) 잇사갈 지파 사람으로 12소선지중의 한 사람이다. (2) 웃시아 왕때부터 히스기야 왕 때(B.C 785-725)까지 예언하였으니 선 지 중 가장 오래 예언하였다. (3) 그의 저서 호세아서에서는 이스라엘 백성이 우상 숭배한 죄를 깊이 책 망하고 구세주 오실 것을 신망하였다고 신약에 3차 인용하였다 (마 9:13,롬9:25, 벧전 3:10-12).


아모스의 소명(1-2절)
오늘부터 아모스를 함께 나누겠습니다.
‘아모스’의 이름의 뜻은 ‘짐을 지는 사람’입니다. 아모스 선지자는 끊임없이 죄를 짓는 이스라엘에게 하나님의 징계가 있을 것을 선언하라는 말씀의 짐을 진 사람이었습니다.

(1) 유다 왕 웃시야의 시대 곧 이스라엘 왕 요아스의 아들 여로보암의 시대 지진 전 이년에 드고아 목자 중 아모스가 이스라엘에 대하여 이상으로 받은 말씀이라

아모스 선지자는 자신이 활동했던 때가 언제였는지를 밝히고 있습니다.
소선지서가 12권이 있는데, 그 중에서 그 선지자가 활동했던 시기를 밝히지 않는 것이 6권(요엘, 오바댜, 요나, 나훔, 하박국, 말라기)이 있고, 밝히는 것이 6권 있습니다. 밝히는 것 중에서 학개와 스가랴는 북이스라엘과 남유다가 모두 무너지고 난 후에 기록되었기 때문에 이스라엘의 왕이 아닌 페르시아의 왕 다리오의 이름을 밝힙니다. 그리고 미가와 스바냐는 남유다의 선지자였기 때문에 남유다의 왕들을 언급했습니다. 그런데 호세아와 아모스에는 남유다의 왕과 북이스라엘의 왕의 이름이 함께 기록되어 있습니다. 호세아 선지자는 북이스라엘에서 활동했음에도 불구하고, 남유다와 북이스라엘 왕들의 이름이 모두 언급을 하고 있고, 아모스는 남유다 출신임에도 북이스라엘에서 선지자 활동을 하였기 때문에 남유다와 북이스라엘의 왕의 이름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우리 성경에는 1절에서 ‘말씀이라’가 맨 뒤에 나오지만, 히브리어성경에는 맨 앞에 나옵니다. 다른 선지서와 마찬가지로, 이 말씀도 아모스 선지자가 자기 하고 싶은 말을 전한 것이 아니라, 환상으로 받은 말씀을 전하는 것이라는 것을 강조합니다.

아모스 선지자가 하나님의 말씀을 받을 때, 남유다를 다스렸던 왕은, 10대 임금 ‘웃시야(791-739)’였습니다. 그는 무려 52년 동안이나 통치했습니다. 북이스라엘과 남유다를 통틀어, 므낫세(55년 통치)를 이어 두 번째로 긴 기간 통치했습니다. 그는 블레셋의 중요 도시 중에 하나인 아스돗을 점령했고, 에돔의 ‘구르바알’도 차지했습니다. 구르바알을 에돔의 수도 ‘페트라’로 보는 학자들도 적지 않습니다.
또 아모스 선지자가 하나님의 말씀을 받을 때, 북이스라엘을 다스렸던 왕은, 13대 임금 ‘여로보암2세(793-753)’였습니다. 그는 41년을 통치했는데, 북이스라엘과 남유다를 통틀어서는 므낫세와 웃시야에 이어서 세 번째이었고, 북이스라엘에서는 가장 긴 기간 통했습니다. 그는 신흥 제국 아시리아가 쇠약해진 틈을 타서 북쪽으로는 하맛 어귀까지, 남쪽으로는 염해(사해)까지 확장하였습니다. 다윗과 솔로몬 이후로 가장 넓은 영토를 차지했습니다. 즉 아모스 선지자가 활동했던 때는 남유다와 북이스라엘이 전성기를 구가하고 있을 때였습니다. 남과 북이 함께 강성해 있을 때는 이 때가 거의 유일합니다.
하지만 이런 때에 사회는 무너질 대로 무너져 있었습니다. 돈으로 사람을 고통스럽게 하고, 올바르지 못한 세금제도로 가난한 사람을 더욱 착취했고, 부유한 사람들은 사치와 방탕한 생활을 일삼았습니다. 그래서 아모스의 핵심구절이 5:24절인데, “오직 정의를 물 같이, 공의를 마르지 않는 강 같이 흐르게 할지어다”라고 합니다. 그 땅에는 정의(하나님의 바르게 행하심을 받아들여, 공평하고 공정한 원칙)도 없었고, 공의(하나님의 의로우신 성품을 본받아, 가난하고 연약한 사람들, 아무 데도 기댈 데가 없는 사람들을 돕는 긍휼)도 없는 불의와 우상숭배만이 팽배했던 것입니다.

1절을 다시 읽겠습니다.
(1) 유다 왕 웃시야의 시대 곧 이스라엘 왕 요아스의 아들 여로보암의 시대 지진 전 이년에 드고아 목자 중 아모스가 이스라엘에 대하여 이상으로 받은 말씀이라

아모스 선지자는 자신의 출신지와 직업에 대해서도 밝히고 있습니다.
그는 자신이 ‘드고아’ 출신이라고 합니다. ‘드고아’는 예루살렘에서 남쪽으로 약 20km 정도 떨어진 곳에 위치한 작은 마을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받은 말씀은 남유다가 아니라 북이스라엘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또한 아모스는 자신의 직업이 ‘목자’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히브리말로 목자들을 뜻하는 보편적인 말은 ‘로에’입니다. 그런데 아모스는 ‘노케드’라는 단어를 사용합니다. 이 단어는 성경에서 2번 밖에 사용되지 않았습니다. 또 한 번은 ‘모압왕 메사’를 지칭하면서 사용되었습니다. 그래서 아모스가 가난한 목자일 것으로 생각하는 학자도 있지만, 굉장히 부유한 사람이었을 것으로 보는 학자들도 적지 않습니다. 즉, 목자라기보다 목축업자에 가깝습니다. 또한 7장에서 아모스는 자신이 ‘뽕나무를 재배하는 사람’이라고 밝히고 있습니다.
아모스는 제사장 집안의 아들도 아니었고, 선지자 학교(신학교) 출신도 아니었습니다. 그는 농삿일을 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 그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일터, 우리의 삶의 자리는 언제나 하나님의 부르심의 터전이 됩니다. 삶의 자리를 떠난 부르심은 없습니다.

(2) 그가 이르되 여호와께서 시온에서부터 부르짖으시며 예루살렘에서부터 소리를 내시리니 목자의 초장이 마르고 갈멜산 꼭대기가 마르리로다

하나님께서 부르짖으시고, 하나님께서 소리를 내신다고 선언합니다. ‘부르짖다’는 성경에서 주로 사자가 포효할 때에, 특히 먹잇감을 공격하거나, 싸울 상대 앞에서 으르렁거릴 때 사용하는 단어입니다. 또한 ‘소리를 내다’는 ‘천둥번개가 치다’는 의미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부르짖으시고, 소리를 내신다는 것은 감당하기 어려운 심판이 임박했음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그 때에 ‘목자의 초장에서 갈멜산 꼭대기까지’ 마른다고 하는데, 그 의미는 우리말 ‘한라에서 백두까지’와 비슷합니다. 하나님의 징계가 남유다와 북이스라엘 모두에게 심각하게 임하게 될 것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가나안 땅 주변 나라에 대한 심판 예언(3-15절)
3-2:16까지는 남유다와 북이스라엘 그리고 주변 6개국 등 8개의 나라에 대한 심판과 징계의 예언입니다. 그 중에서 3-15절은 5개 나라에 대한 심판의 예언입니다.
8개 나라를 심판하는 내용은 일정한 형식이 있습니다.
①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라며 심판의 주체가 누구신지를 밝힙니다.
② “서너 가지 죄로 말미암아......”라며 심판의 이유를 분명하게 밝힙니다.
③ “불을 보내리니... 사르리라”라며 심판의 형태를 밝힙니다. ‘불’은 심판을 상징합니다.
④ “여호와께서 말씀하셨느니라”라며 심판을 선언하신 분이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그것이 반드시 이루어지게 될 것임을 선언합니다. 이 네 가지 형식을 기본으로 하여 심판을 선언하십니다.

(3-5)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다메섹의 서너 가지 죄로 말미암아 내가 그 벌을 돌이키지 아니하리니 이는 그들이 철 타작기로 타작하듯 길르앗을 압박하였음이라 내가 하사엘의 집에 불을 보내리니 벤하닷의 궁궐들을 사르리라 내가 다메섹의 빗장을 꺾으며 아웬 골짜기에서 그 주민들을 끊으며 벧에덴에서 규 잡은 자를 끊으리니 아람 백성이 사로잡혀 기르에 이르리라 여호와께서 말씀하셨느니라

다메섹은 이스라엘의 북쪽에 위치한 아람(시리아)의 수도입니다. 고대의 상업도시였고, 교통의 중심지였습니다. 다른 지역도 마찬가지인데, 하나님께서는 다메섹의 ‘서너 가지 죄로 말미암아 그 벌을 돌이키지 아니하신다’라고 말씀하십니다. 혹 이렇게 생각하실지 모르겠습니다. “아니, 하나님은 서너 가지 죄만 지어도 한 도시나 한 나라를 망하게 하시는 분이신가?” 그러나 ‘서너 가지’는 ‘3이나 4’를 가리키는 단어가 아니라 ‘아주 많음’을 뜻하는 관용적인 표현입니다. 그리고 3과 4를 더하면 7인데, 7은 완전수를 뜻하기도 합니다.
하나님께서 다메섹을 심판하는 이유는 그들이 철 타작기로 타작하듯이 길르앗을 짓밟았기 때문이라고 하십니다. 특히 여호아하스왕 때에 아람(시리아)이 보병 일만 명과 마병과 병거(탱크)를 몰고 와 침략하여 이스라엘 군대를 타작마당의 티끌같이 만들어 버렸습니다. 그것에 대해서 심판을 하시겠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6-8)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가사의 서너 가지 죄로 말미암아 내가 그 벌을 돌이키지 아니하리니 이는 그들이 모든 사로잡은 자를 끌어 에돔에 넘겼음이라 내가 가사 성에 불을 보내리니 그 궁궐들을 사르리라 내가 또 아스돗에서 그 주민들과 아스글론에서 규를 잡은 자를 끊고 또 손을 돌이켜 에그론을 치리니 블레셋의 남아 있는 자가 멸망하리라 주 여호와께서 말씀하셨느니라

이스라엘의 서쪽, 지중해와 접한 곳에 위치한 블레셋은 도시들이 연합하며 만든 국가인데, 그 중에 대표적인 도시인, 가사, 아스돗, 아스글론, 에그론에 대한 심판 선언입니다.
가사는 블레셋에서 가장 교통이 발달한 도시였습니다. 그들은 편리한 교통을 이용하여 이스라엘에서 잡은 사람들을 인신매매하였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가사를 심판하시는 이유는 단지 인신매매를 했기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전쟁포로를 노예로 파는 일은 고대에 드문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포로로 잡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스라엘과 적대적인 관계에 있던 에돔에 고의로 팔아넘겼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가사에 불을 보내어서 궁궐을 사르겠다고 하십니다. 그 의미는 패전하여서 궁궐이 불에 타게 될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즉 전쟁포로를 무자비하게 잡아 넘겼으니, 전쟁으로 심판하시겠다는 의미입니다.

(9-10)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두로의 서너 가지 죄로 말미암아 내가 그 벌을 돌이키지 아니하리니 이는 그들이 그 형제의 계약을 기억하지 아니하고 모든 사로잡은 자를 에돔에 넘겼음이라 내가 두로 성에 불을 보내리니 그 궁궐들을 사르리라

두로는 이스라엘 북쪽, 지중해와 접한 곳에 위치한 국가였습니다. 그래서 두로는 발달한 해상무역으로 많은 부를 쌓았습니다. 그래서 교만했습니다. 교만한 두로왕은 자신을 하나님이라 참칭하기도 하고, 자신의 지혜가 가장 뛰어나다고 착각하기도 했습니다. 두로와 이스라엘은 서로 혈맹관계, 형제의 계약을 맺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래서 두로왕 히람이 솔로몬에게 “내 형제여”라고 호칭하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두로와 인접한 도시 시돈 출신의 여인 이세벨은 아합왕과 결혼도 했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가난하여 두로로 이주한 이스라엘 사람들을 노예로 팔아버리는 일을 자행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 일에 대해서 하나님께서는 묵과하지 않겠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11-12)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에돔의 서너 가지 죄로 말미암아 내가 그 벌을 돌이키지 아니하리니 이는 그가 칼로 그의 형제를 쫓아가며 긍휼을 버리며 항상 맹렬히 화를 내며 분을 끝없이 품었음이라 내가 데만에 불을 보내리니 보스라의 궁궐들을 사르리라

에돔은 야곱의 쌍둥이 형, 에서의 후손들이 만든 나라입니다.
사실 에돔은 이스라엘과의 전쟁에서 더 많이 당했습니다. 사울왕에 에돔에서 승리를 한 적이 있었고, 다윗왕도 소금골짜기(염곡)에서 에돔 사람 18,000명을 물리친 적도 있었습니다. 후에 유다가 바빌로니아제국에 의해 무너질 때에 에돔 사람들은 바빌로니아의 편에서 유다 백성들을 약탈하고, 온갖 만행을 저질렀습니다. 그래서 에돔에 대한 심판은 미래의 시점에 이루어질 것에 대해 증거하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13-15)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암몬 자손의 서너 가지 죄로 말미암아 내가 그 벌을 돌이키지 아니하리니 이는 그들이 자기 지경을 넓히고자 하여 길르앗의 아이 밴 여인의 배를 갈랐음이니라 내가 랍바 성에 불을 놓아 그 궁궐들을 사르되 전쟁의 날에 외침과 회오리바람의 날에 폭풍으로 할 것이며 그들의 왕은 그 지도자들과 함께 사로잡혀 가리라 여호와께서 말씀하셨느니라

암몬에 대한 심판입니다. 암몬은 아브라함의 조카 롯이 그의 둘째 딸과의 관계에서 태어난 아들(벤암미)의 후손이 세운 나라입니다. 암몬 사람들은 길르앗의 임신한 여인의 배를 갈랐다고 합니다. 이런 만행은 있을 수도 없는 일이어야 하고, 상상으로도 없어야 하는 일입니다. 그런데 그런 만행을 저지른 이유가 자기 지경을 넓히기 위해서 였습니다. 자신의 욕망을 성취하기 위해서 그런 악독한 일을 저질렀던 것입니다. 그런 만행을 저지른 암몬을 심판하신다고 하십니다.

지금까지 살핀 다섯 나라, 아람(다메섹), 블레셋(가사, 아스돗, 아스글론, 에그론), 베니게(두로), 에돔, 암몬이 심판을 받는 이유의 공통점은 하나님을 믿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박해하였기 때문입니다. 물론 그들은 하나님을 믿지 않기 때문에 범죄하고, 하나님의 백성에게 만행을 저질렀지만 하나님은 그것을 모르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박해를 받는 상황을 결코 모르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들을 심판하실 정도로 우리를 사랑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분이 우리의 창조주시고, 아버지이시기 때문입니다.

1절을 다시 읽겠습니다.
(1) 유다 왕 웃시야의 시대 곧 이스라엘 왕 요아스의 아들 여로보암의 시대 지진 전 이년에 드고아 목자 중 아모스가 이스라엘에 대하여 이상으로 받은 말씀이라

아모스 선지자가 이 말씀을 받은 것이 ‘지진 2년 전’이라고 밝히고 있습니다.
당시 북이스라엘과 남유다는 번영의 시기였습니다. 국력이 이전보다 훨씬 강했던 때였습니다. 그런 때에 이런 심판을 예언하는 것은 당돌하고 미친 짓처럼 보였을 것입니다. 아모스 선지자는 조롱을 받았을 것입니다. 그러니 신앙은 보이지 않는 것을 보는 눈을 갖는 것입니다.
이런 아모스 선지자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지진이 있었다는 것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오늘도 우리에게 다양한 방법으로 말씀하십니다. 그것을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지는 우리의 선택이고 결단입니다. 물론 그 결과도 고스란히 우리에게 남습니다.

우리는 과거 어느 때보다도 잘 살고 있습니다. 이런 때에 자신의 기도자리, 겟세마네를 갖는 것은 미래를 가장 잘 준비하는 것이고, 주님 안에서 가장 잘 지어져 가는 것입니다. 오늘 하루도 세속적 가치관이 난무하는 삶의 현장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그 말씀에 무릎을 꿇는 한 날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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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구약성경 맥찾기 1.
- 성경 전반부 맥잡기 /
창조시대, 족장시대, 출애굽광야시대, 가나안시대, 사사시대, 통일왕국시대

성경을 읽다보면 누가 옆에서 신구약성경 맥찾기만 도와준다면 성경을 술술 읽어내려갈 수 있을텐데 하는 생각, 다들 해보셨으리라 생각합니다. 그래서 오늘은 성경 66권의 전체 흐름을 알고 성경을 읽으실 수 있도록 맥을 잡아드리고자 합니다. 그 중 오늘은 먼저 66권의 신구약성경 맥찾기가 가능하게 해주는 그 굵직굵직한 줄기에 대해서 이해하기 쉽게 포스팅을 해보겠습니다.  

신구약성경은 크게 전반부와 후반부로 나뉘어집니다. 먼저 암기하고 가면 좋은 두문자 먼저 알려드릴게요. 이 두문자는 각 시대의 앞글자를 딴 두문자이니 나중에는 두문자만 기억해두셔도 성경 66권의 전체적인 흐름이 잡히실거에요!

  • 전반부 : 창족출가 사통 (창조시대, 족장시대, 출애굽광야시대, 가나안시대, 사사시대, 통일왕국시대)
  • 후반부 : 분포귀중 복교 ()

신구약성경맥찾기 전반부 한방에 정리!

1. 창조시대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고 인간을 에덴동산에 살게하셨는데, 인간이 뱀의 꼬임에 넘어가 에덴동산에서 추방됩니다. 죄의 속성상 인간은 작은 죄를 짓게 되면 점점 더 큰 죄를 짓게 되는데요, 죄가 걷잡을 수 없이 퍼져나가 하나님이 세상을 홍수로 심판하게 됩니다. 홍수 이후에도 살아남은 유일한 의인이었던 노아의 후손들은 또 다시 하늘에 닿을 듯한 높고 거대한 바벨탑을 세워 하나님보다 더 높아지고자 저항합니다. 이것이 인간의 창조시대의 큰 줄기입니다. 

2. 족장시대

 하나님께서는 인간과 세상을 다시는 물로 심판하시지 않겠노라고 하시며 아들이신 예수님을 세상에 보내셔서 인간과 세상을 구원하실 계획을 세우십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즉시 오시는 것이 아닌 카이로스, 즉 하나님의 때가 차야지만이 예수님이 구원자로 오시게 되는 것이고, 이 족장시대부터 예수님이 오시는 복음시대까지 예수님의 오심을 준비하시는 기간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바벨탑이 세워진 갈대아우르에 사는 아브라함에게 가나안땅과 후손을 주겠다고 약속하셨고, 아브라함은 이에 순종하여 약속의 땅 가나안으로 향했습니다. 이후 아브라함과 그 아브라함의 약속을 이어받은 후손들, 즉 이삭, 야곱을 족장들이라고 불렀던 것이죠. 하나님은 이렇게 약속의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강조하고 싶을 때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이라고 기록하며 이 세 족장을 묶어서 표현하곤 하였습니다. 

3. 출애굽광야 시대

 야곱은 열두명의 아들을 낳았고, 그 야곱의 열두아들은 가뭄을 피하고자 이집트로 내려가 잠시 살고자 하였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남에 따라 그 야곱의 열 두 아들들이 번성하여 야곱의 자손들의 숫자가 많아지자 불안감을 느낀 이집트 정부가 야곱의 자손들을 핍박하고 노예로 강제 종살이를 시키게 됩니다. 

 그러나 선하신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땅과 후손을 주신다고 하셨던 약속을 기억하시고 이집트의 압제로부터 이스라엘 백성들을 구원할 한 사람, 모세를 리더로 세우시게 되죠. 모세는 하나님의 능력으로 이스라엘 자손들을 이끌고 홍해를 가르며 이집트를 탈출하게 됩니다. 탈출과정에서 홍해가 갈라진 사건은 인류에게 엄청난 기적으로 현재까지도 인간의 구원의 모형론이 되는 사건입니다. 

 그런데 약속의 자손들이 곧장 약속의 땅, 가나안으로 간 것은 아니었습니다. 일단 그들의 수가 지난 몇 백년간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기 때문에 부족이 아니라 하나의 민족, 즉 국가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약속의 땅 가나안으로 가기 전에 광야에서 제사장나라가 되기 위한 체계를 잡고 훈련과정을 거칩니다. 우선 제사장나라로 살기 위한 법적 체계로써 '율법', 하나님을 제사하기 위한 처소인 '성막'을 지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만 의지하고 순종하는 법을 '광야'에서 훈련을 통해 배웁니다. 

4. 가나안시대

 그러나 이집트에서 출애굽했던 출애굽 1세대는 아쉽게도 광야의 훈련을 제대로 통과하지 못하여 가나안땅에 들어가지 못했고, 오히려 광야에서 태어났던 출애굽 2세대가 잘 준비되어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는 과정에서 토착원주민들과 정복전쟁은 필연적이었고, 출애굽 2세대들은 하나님께 의지하고 순종해서 초기 정복전쟁에서 승리를 거두게 됩니다. 

5. 사사시대

 그러나 시간이 흘러 출애굽 2세대들이 죽자 이스라엘은 가나안 원주민들과 싸워 정복할 생각은 하지 않고 오히려 가나안 사람들 속으로 들어가서 어울려 동화되어 살았습니다. 그러다보니 제사장나라가 되어야 했던 이스라엘의 상태는 점점 악화되어 급기야 가나안원주민들과 이스라엘 사람들을 구분조차 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정신 차릴 수 있도록 주변에 있는 이민족들을 통해서 징계하셨습니다. 동시에 사사를 세우셔서 이스라엘 백성을 이민족의 손에서부터 구원해내셨습니다. 하나님은 자신을 믿고 의지하면서 순종하는 교제 안에서 약속을 이루시는 분이라는 것을 보여주고 싶으셨기 때문이죠. 그러나 이스라엘은 이를 깨닫지 못하고 점점 상태가 악화되어 결국 유럽에서부터 배타고 넘어온 블레셋에게 가나안 땅 전체를 빼앗기고 블레셋의 종이 되어 버립니다. 이 때 등장했던 사사가 그 유명한 삼손입니다.

6. 통일왕국시대

 모세는 이집트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탈출시켰던 것처럼 다윗은 블레셋으로부터 이스라엘 백성들을 구원해내고 가나안 땅 전체를 통일시키는 데에까지 성공합니다. 이로써 족장시대때 아브라함에게 하셨던 약속이 다윗의 통일왕국시대에 가서 성취되게 된 것이죠. 그리고 다윗의 아들 솔로몬은 성전까지 건축하게 됩니다. 이스라엘이 가장 번성하였던 시대가 바로 이 통일왕국시대입니다. 

 자, 이로써 신구약성경 맥찾기 시리즈 중 전반부 맥잡기는 창조시대, 족장시대, 출애굽광야시대, 가나안시대, 사사시대, 통일왕국시대를 간단히 정리해보았는데요, 성경의 전반부가 머릿속에 잘 그려지시나요? 잘 그려지시지 않는다면 이 포스팅을 5번만 읽어보시면 뇌 속에 성경 전체의 흐름이 평생 지워지지 않으실거에요! 아무쪼록 제 정리가 성경통독 하시는 데에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셨으면 좋겠습니다.





신구약성경 맥찾기 2
- 성경 후반부 맥잡기 / 
분열왕국시대, 포로시대, 귀환시대, 중간시대, 복음시대, 교회시대


신구약성경 맥찾기 그 두 번째 포스팅입니다. 지난 포스팅에서는 성경 전반부 맥잡기를 했고, 이번에는 성경 후반부 맥잡기를 위해서 분열 왕국시대, 포로시대, 귀환 시대, 중간시대, 복음 시대, 교회시대에 대해서 아주 간단명료하게 정리해보겠습니다. 성경 맥잡기는 저의 포스팅 2개로 확실히 머릿속에 정리될 수 있게끔 도와드리겠으니 생각나실 때마다 자주 읽으셔서 정리해주시면 됩니다.







지난 신구약성경맺찾기(1) - 성경 전반부 맥잡기 포스팅에서 안내드렸던 두문자 다시 말씀드립니다. 이 두문자는 성경 전체 흐름을 매우 명료하게 나타내 주기 때문에 암기해두시면 성경을 마주 대할 때마다 큰 도움 되시리라 생각합니다. 시간 나실 때마다 이 두문자는 자주 외워주셔서 머릿속에 넣어두세요!

  • 전반부 : 창족출가 사통 (창조시대, 족장시대, 출애굽 광야 시대, 가나안 시대, 사사시대, 통일왕국시대)
  • 후반부 : 분포귀중 복교 (분열 왕국시대, 포로시대, 귀환 시대, 중간시대, 복음 시대, 교회시대)

신구약성경 맥찾기 후반부 한방에 정리!

1. 분열왕국시대

 이스라엘 통일왕국시대는 다윗과 솔로몬 때까지만 잠시 번영하였다가 그 화려한 시대는 금방 끝이 납니다. 북쪽 지파와 남쪽 지파 사이에 수면 밑에 잠자는 갈등이 있어 왔는데 그 분쟁의 씨앗은 솔로몬 사후에 표면적으로 드러나기 시작하더니 실제로 이스라엘이 남과 북으로 분열합니다. 그래서 북쪽 지역을 북이스라엘, 남쪽 지역을 남유다라고 지칭하면서 단일민족이지만 두 개의 왕조가 들어서게 되는 아주 특이한 구조를 갖게 됩니다. 나라의 구조가 특이하다 보니 북이스라엘과 남유다는 서로 간에는 경쟁하는 구도이면서 동시에 필요에 의해서는 동맹을 맺기도 하고,  또다시 금세 갈등을 빚기를 반복하는데요, 문제는 분열된 나아는 외세의 침략에는 약해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분열 왕국시대의 메소포타미아 지역에서 강력한 신흥제국들이 나타나면서 이스라엘의 고난의 서막이 다시 열리게 됩니다. 

2. 포로시대 (바벨론 1차 포로 605년, 바벨론 2차 포로 597년, 바벨론 3차 포로 586년)

 722년, 북이스라엘은 안타깝게도 야만적인 통치로 악명이 높았던 앗시리아에 의해서 멸망당합니다. 야만적인 앗시리아는 그보다 더 잔인한 바빌로니아에 의해 멸망당했습니다. 바빌로니아는 앗시리아를 멸망시키고 가나안까지 진출해서 586년에는 남유다까지 멸망시키고야 맙니다. 살아남은 남유다 사람들은 바빌로니아로 끌려가 노예 집단촌으로 가서 거주하게 되고 이때를 포로시대라고 지칭합니다. 남유다 사람들은 바벨론으로 3차에 걸쳐 포로로 잡혀가는데요, 그 자세한 연도는 바벨론 1차 포로 605년, 바벨론 2차 포로 597년, 바벨론 3차 포로 586년입니다. 

3. 귀환 시대 (바벨론 1차 포로 귀환 536년, 바벨론 2차 포로 귀환 458년, 바벨론 3차 포로 귀환 444년)

 물론 하나님께서도 이스라엘의 포로생활을 방관하시지만은 않으셨습니다. 모세를 세워 애굽에서 이스라엘을 탈출시키셨고, 다윗을 세워 블레셋을 물리치고 통일왕국을 일으키셨던 것과 같이 페르시아의 고레스를 일으키셔서 바빌로니아를 멸망시키셨고 고레스로 하여금 칙령을 반포하게 하셔서 남유대 백성들을 다시 가나안 땅으로 돌아가게 길을 열어 주셨습니다. 남유다인들이 세 번에 걸쳐 포로로 끌려갔던 것처럼 세 번에 걸쳐 귀환합니다. 그 자세한 연도는 바벨론 1차 포로 귀환 536년, 바벨론 2차 포로 귀환 458년, 바벨론 3차 포로 귀환 444년입니다.  

비가 온 뒤 땅이 굳는다는 말처럼 3차에 걸쳐 가나안 땅으로 귀환한 이스라엘은 가장 먼저 성전을 세웠고 이제 다시는 우상을 숭배하지 않기로 약속하고 율법을 지키며 살겠다고 다짐합니다. 

4. 중간시대

 그러나 상황은 눈에 띄게 좋아지지도, 눈에 띄게 나빠지지도 않는 국면으로 들어갑니다. 페르시아의 지배가 200년 이상 이어졌고, 페르시아가 멸망한 이후에도 이스라엘은 해방되지 못했습니다. 페르시아가 멸망한 이후에는 헬라가 이스라엘을 통치했고, 헬라가 멸망한 이후에는 로마가 이스라엘을 통치 헸습니다. 

 로마의 통치를 받으면서도 이스라엘 사람들은 4가지 부류로 나뉘게 됩니다. 로마의 통치를 받으면서도 성전에서 하나님께 제사만 드릴 수 있다면 더 바랄 것이 없다는 종교 귀족 '사두개파', 로마도 몰아내고 성전도 다시 세우자고 주장하는 폭력혁명 '열심당',  로마도 몰아내야 되지만 무엇보다 율법을 잘 지켜야만 한다는 '바리새파', 로마도, 성전도, 율법도 다 오염되었다고 보고 자신들만의 규칙을 가지고 동굴에서 공동체 생활을 했던 신비주의 '에센파', 크게 4 부류로 나뉘어서 서로 경쟁하며 세월이 지나가게 됩니다.

5. 복음 시대

  그러나 하나님은 족장시대에 아브라함의 후손을 통해서 세상을 구원하겠노라고 약속했던 것을 잊지 않으시고 성취하시기 위해 신실하게 일하고 계셨습니다. 헬라시대에 온 세상에 확산되었던 헬라어로 구약성경을 번역한 70인역이라는 번역성경을 편찬하셔서 온 세상에 뿌리셨습니다. 이 70인경을 읽은 많은 이방인들이 유대인들과 함께 하나님의 약속, 즉 아브라함의 후손을 통해 세상을 구원하시겠다는 약속을 기다리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다윗가문에서 예수님을 태어나게 하셨고 예수님을 통해 많은 제자들을 세우셨습니다. 강력히 저항하던 유대인들은 결국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하고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지만 하나님은 십자가로부터 예수님을 부활시키심으로써 온 세상의 구주로 예수님을 세상에 보내셨다는 것을 명확히 보여주셨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목격한 제자들에게 오순절에 성령을 보내주셔서 예수님을 통해서 전파되던 하나님의 복음이 이제는 제자들을 통해서 온 세상에 전파되기 시작합니다. 

6. 교회시대

 제자들이 전파했던 복음의 내용은 아주 간단합니다. 구약시대 내내 온 세상을 구원하시기 위해 구원자를 보내실 것이라고 약속하신 그 약속의 메시야가 바로 예수님이라는 것이고, 이 예수님을 믿고 성령을 받으면 누구나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될 수 있다는 것이죠. 이미 70인경을 읽은 많은 이방인들이 이미 메시아를 기다리고 있었기에 예수의 복음이 삽시간에 로마제국 전체에 퍼질 수 있었던 것입니다. 또한 성령께서 이방인 선교에 특화된 바울사도를 세워서 온 세계에 보내셨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10년 간 아시아와 유럽을 통해 복음을 전파했고 체포되어 로마에 압송된 이후에는 로마에서도 복음을 전파하였습니다. 사도바울뿐만 아니라 많은 전도자들이 목숨을 걸고 복음을 전파하여 이로 인해 로마제국 곳곳에 교회가 세워지게 됩니다. 

 자 이로써 드디어 신구약성경 맥찾기 그 두 번째 포스팅, 성경 후반부 맥잡기 (분열 왕국시대, 포로시대, 귀환 시대, 중간시대, 복음 시대, 교회시대)까지 정리했습니다. 부디 저희 포스팅이 신구약성경 맥찾기에 도움이 되셨기를 바랍니다. 




구약성경 순서대로 읽자!
- 역사와 사건에 따른 구약성경 39권 순서

성경 66권을 열 두 시대의 흐름으로 나누어 바라보는 안목이 생기셨다면, 구약 39권을 율법서, 신명기역사서, 역대기역사서, 예언서, 선지서 총 5개의 섹터로 구분하여 열 두 시대에 적절히 배치하고 이해하면서 성경흐름을 이해할 수 있는 안목을 가지실 수 있도록 그 방법을 알려드립니다.   

구약 39권은 총 5개의 섹터로 나뉩니다.
기억하기 쉽게 두문자는 "'율신역'에서 '예지'를 만났다

법서 : 창세기, 출애굽기,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
명기 역사서 : 여호수아, 사사기, 사무엘상, 사무엘하, 열왕기상, 열왕기하
대기 역사서 : 역대상, 역대하, 에스라, 느헤미야, 에스더
언서
  분열왕국시대 : 북이스라엘 - 요나, 아모스, 호세아 / 남유다 - 이사야, 미가, 나훔, 스바냐, 하박국
  포로시대 : 예레미아, 예레미아애가, 다니엘, 에스겔, 오바댜, 요엘
 귀환시대 : 학개, 스가랴, 말라기
혜서 : 잠언, 전도사, 아가, 욥기, 시편

1. 율법서

창세기, 출애굽기,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

 율법서는 창세기, 출애굽기,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 다섯권으로 되어있고 이 율법서들은 구약성경 39권에 온통 연결되어 있습니다. 율법서는 처음부터 끝까지 율법을 지키면 땅에 머무르고, 율법을 지키지 않으면 땅에 머무르지 못한다는 '율법과 땅의 상관관계'에 대해 이야기 합니다. 

 '창세기'에서는 에덴 동산에서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이 먹지 말라고 금기하신 열매인 선악과를 먹음으로서 에덴동산에서 추방당하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우리는 창세기를 통해 율법과 땅의 상관관계를 알고 나머지 율법서들을 읽어나간다면 창세기에 제시된 간단한 룰, 즉 율법에 순종하면 땅에 머무르고 율법에 불순종하면 땅에서 추방된다는 법칙이 인류에게 어떻게 확장되는지 금방 알 수 있습니다.

 '출애굽기'에서 이스라엘 백성이 시내산에서 하나님과 언약을 맺는 내용이 나오고, '레위기'에서 율법을 받는 내용이 나옵니다. '신명기'에서는 시내산 언약을 받을 때 받았던 그 율법을 이스라엘 백성들이 약속의 땅 가나안에 들어가서 잘 지킨다면 하나님께서 그 약속의 땅에서 계속 거주할 수 있게 하실 것이고, 만일 불순종을 할 경우에는 그 약속의 땅 가나안에서 추방할 것이라는 경고의 내용이 담겨져 있습니다.

2. 신명기역사서 - 율법서를 바탕으로 '추방되는' 내용의 역사서

여호수아, 사사기, 사무엘상, 사무엘하, 열왕기상, 열왕기하

 안타깝게도 이스라엘 백성들은 율법을 잘 지키지 않았습니다. 율법에 순종하지 않은 이스라엘의 역사는 전에 성경 맥잡기 포스팅에서 정리한 바와 같이 창조시대, 족장시대, 출애굽광야시대, 가나안시대, 사사시대, 통일왕국시대, 분열왕국시대를 거쳐 결국 포로시대까지 흘러오게 되고 결국 신명기의 경고대로 약속의 땅에서 추방되고 말았습니다.

 신명기에 제시된 율법을 지키면 땅에 머무르고 율법을 지키지 않으면 땅에서 추방된다는 경고의 메세지가 이스라엘의 역사 가운에 어떻게 이루어졌는지를 정리한 책들을 '신명기역사서'라고 부릅니다. 여호수아서, 사사기, 사무엘상, 사무엘하, 열왕기상, 열왕기하에는 이스라엘이 율법에 순종하지 않아 추방되는 역사들이 반성적인 어투로 잘 정리되어 있고 우리는 이 여섯권의 책을 신명기 역사서 라고 부릅니다. 

3. 역대기역사서 - 율법서를 바탕으로 '귀환하는' 내용의 역사서

역대상, 역대하, 에스라, 느헤미야, 에스더

 이스라엘이 율법에 순종하지 못하여 결국 포로시대까지 흘러가 비참한 꼴을 면치 못하게 되었지만 약속의 하나님은 신실하셔서 이스라엘 역사를 귀환시대로 이끌어오시면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다시 약속의 땅 가나안으로 돌아오게 만드시고야 맙니다. 

  70년 이상 외국에서 노예살이를 하다가 돌아온 공동체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단 두가지 뿐이었습니다. 여전히 하나님의 약속은 유효하다는 사실과 철저히 회개하고 다시 하나님께 돌아가면 된다는 사실이죠. 약속을 신뢰하고 회개하고 돌아가는 것을 중심으로 정리된 포로기 시대의 역사서들을 '역대기역사서'라고 지칭하고, 역대기역사서에는 역대상, 역대하. 에스라, 느헤미야, 에스더 다섯권이 있습니다. 

4. 예언서

- 분열왕국시대 : 요나, 아모스, 호세아 / 이사야, 미가, 나훔, 스바냐, 하박국

- 포로시대 : 예레미아, 예레미아애가, 다니엘, 에스겔, 오바댜, 요엘

- 귀환시대 : 학개, 스가랴, 말라기

 예언서는 분열왕국시대, 포로시대, 귀환시대에 걸쳐져 기록되었습니다. , '포로시대'에는 구원의 소망과 회복의 예언이 주로 선포되었습니다. '귀환시대'에는 

 '분열왕국시대'신명기의 경고에 따라 율법을 어기면 이 땅에서 쫓겨난다는 '심판'의 예언을 주로 선포되었습니다. 분열왕국시대는 솔로몬이 죽은 이후 이스라엘이 실제로 남과 북으로 나위어서 북쪽은 북이스라엘, 남쪽은 남유다가 되어 각각의 왕조가 세워지는 시대였기 때문에 북이스라엘에서는 요나, 아모스, 호세아 선지자가 활동하였고, 남유다에서는 이사야, 미가, 나훔, 스바냐, 하박국이 활동하였습니다. 

 '포로시대'부터 '귀환시대'에 걸쳐 활동했던 선지자들은 예레미아, 다니엘, 에스겔, 오바댜, 요엘입니다. 포로시대는 북이스라엘이 이미 멸망하고 없어진 이후이기 때문에 포로시대에 활동했던 선지자들은 모두 다 남유다와 관련있는 선지자들뿐입니다. 남유다 멸망하면서 포로로 잡혀갔다가 다시 귀환하기까지 활동했던 선지자들이기 때문에 경고의 말씀을 전하기도 하지만 아주 구체적인 구원과 회복에 관한 메세지도 전합니다. 

 70년 동안 바벨론에서 노예생활을 하다가 돌아오게 되는 '귀환시대'에는 이스라엘에게 오직 두 가지, 하나님의 약속을 믿는 것과 철저한 회개만이 필요했고 오직 하나님만을 섬기는 자의 정체성을 지키기 위해 성전을 재건하라는 예언이 선포됩니다. 귀환시대에 활동했던 선지자들은 학개, 스가랴, 말라기가 있습니다. 정체성을 잃지 않기 위해서 학개와 스가랴는 "성전을 지어라"라고 선포하였고, 말라기는 "진정으로 회개하라, 하나님의 치료를 소망하라"고 외쳤던 선지자입니다. 

5. 지혜서

- 통일왕국시대 : 잠언, 전도서, 아가서

- 분열왕국시대, 포로시대 : 욥기

- 귀환시대 : 시편

 잠언, 전도서, 아가서의 저자는 솔로몬이죠? 그래서 잠언, 전도서, 아가서는 통일왕국시대에 기록된 지혜서로 분류합니다. 그리고 의인의 고난에 대해 다루고 있는 욥기서는 족장시대를 배경으로 하고 있지만, 실질적으로는 분열왕국시대와 포로시대라는 매우 역경의 세월을 살았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읽혀면서 정경으로 채택됩니다. 시편은 귀환시대에 성가대찬양집으로 사용되었습니다. 

자, 오늘은 이스라엘 역사와 사건에 따라 구약성경 39권을 순서대로 나열해보았는데요, 마지막으로 두문자 암기하시면서 인사하고 싶습니다, 이스라엘 역사를 12개의 시대로 나눈 두문자 "창족출가사통 분포귀중복교", 구약을 5가지 섹터로 나눈 두문자 "'율신역'에서 '예지'를 만났다" 꼭 기억해주시면서 구약성경 이스라엘 역사 순서대로 읽어보시는 귀한 날 되시기 바라겠습니다.






신약성경 순서대로 읽자!
- 역사와 사건에 따른 신약성경 27권 순서

성경 66권 중 구약 39권은 2000년에 걸쳐 기록되었고, 신약 27권은 100년에 걸쳐 기록되었습니다.
신약성경을 순서대로 읽으려면 신약성경분류가 중요한데요, 오늘은 신약성경 쓰여진 순서대로 읽기에 도전해보실 수 있도록 도와드리고자 합니다. 


사건       관련성경
탄공십        마막누가요한
바울여        행/ 갈데고로마/ 약
불순파        옥중목회 / 벧히
밧모요한        유요123/ 계

1. 탄 공 십 - 마 막 누가 요한

탄생, 공생애, 십자가사건을 다루고 있는 책들은 마태복음, 마가복음, 누가복음, 요한복음이라는 뜻이거든요.
신약성경의 시작은 예수님의 '탄생'으로 시작합니다.
그런데요 여러분, 신약성경에는 예수님의 12세부터 30세까지의 기록이 일절 나오지 않는다는 사실 알고 계셨나요?
이 사복음서에는 예수님의 탄생과 유년시절만 기록하다가 세월을 훌쩍 넘겨 예수님이 서른살이 되어서야 메시야로서 공적인 사역을 감당하시기 위해서 다시 짠 하고 나타나셔서 '공생애' 사역을 시작하시는 모습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메시야 사역의 절정은 예수님이 우리의 죄를 대신 사하시기 위해 십자가에 죽으시고 다시 부활하셔서 우리에게 성령을 보내주시는 '십자가 사역'이라고 합니다.

2. 바울 여 - 행 / 갈 데 고 로마 / 약

사복음서인 마태복음, 마가복음, 누가복음, 요한복음에서는 예수님과 왕성히 활동했던 열 두 제자들이 다른 신약성경에서는 잘 보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기껏 해봐야 베드로가 사도행전에 나오는 정도 외에는 특별히 열 두 제자들이 다른 신약 성경에는 출연하지 않는다고 봐도 무방할 정도이죠. 아이러니하게도 열 두 제자들을 핍박했던 사람, 바리새인 출신의 바울이 나타납니다.
그가 얼마나 중요한 사람인지 부활하신 예수님이 그를 스카웃 하시기 위해 직접 나타나시기도 하고요,

 '사도행전'에서는 바울의 회심사건이 얼마나 중요한지 바울의 회심사건을 3번이나 다루고 있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하나님은 바울을 특별히 이방사도로 세우셔서 유대땅 뿐만이 아니라 온 세계에 퍼져있는 이방인들에게까지 복음을 전파하고자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회심한 바울은 그 길로 곧장 바울의 전도여행을 떠납니다.
1차 전도여행으로 아시아, 2차 전도여행으로 유럽,  3차 전도여행으로 다시 아시아로 복음을 전하면서 로마제국 전지역에 복음을 전하고 교회를 세웠습니다.
그리고 극심한 가뭄 가운데 고통받던 예루살렘 교회 성도들을 돕기 위한 연보, 바로 헌금을 이방 성도들로부터 거두기도 하였습니다.
이를 전달하는 것을 전도여행의 마지막 과업으로 삼았습니다.
바울은 이방 성도들이 십시일반 모은 연보를 예루살렘 교회에 전달하고자 예루살렘으로 돌아갔다가 잡히게 됩니다.
그러나 바울은 로마 시민권자였기 때문에 유대인들이 함부로 하지 못하고 로마황제 법정에서 재판을 받기 위해 예루살렘에서 로마로 압송당합니다.
이러한 바울의 전도여행을 상세히 기록한 책이 바로 사도행전인 것이고, 바울의 전도여행 과정에서 신생 이방교회들에게 일어났던 여러가지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 바울이 직접 쓴 편지형식의 글이 '갈라디아서', '데살로니가전서', '데살로니가후서', '고린도전서', '고린도후서', '로마서'였던 것이죠.

'야고보서'는 바울이 기록한 책은 아니지만 바울의 전도여행 기간에 야고보 공동체에 일어났던 '차별'문제에 대해서 다루고 있는 성경이라서 시기적으로 동시대에 쓰여진 성경은 함께 묶어서 외워두시면 좋습니다. 

3. 불 순 파 - 옥중 목회 벧 히

로마에 압송되었다가 잠시 바울이 풀려난 기간동안 어마어마하게 큰 '불'이 나서 로마 14구역 중 10구역이나 집어삼키는 대형 화재사고가 발생합니다.
문제는 로마 황제였던 네로가 민심이 흉흉해지자 정치적 희생양을 찾고자 당시 약자이고 소수였던 기독교인들에게 화재의 책임을 전가했다는 것이었는데요, 이때부터 기독교인들은 억울하게 방화범이라는 누명을 쓴 채 로마제국으로부터 핍박을 받기 시작했습니다. 바울은 다시 수감되어 '순교'하게 되었고 같은 시기에 베드로도 순교하게 됩니다.
그런데 박해는 기독교인들에게만 찾아온 것이 아니었습니다.
바울과 베드로가 순교한지 2년이 지나자 유대인들이 로마제국에 폭동을 일으켜 유대-로마전쟁이 벌어지게 되나 계란으로 바위치는 격으로 예루살렘은 로마에 의해 함락되고 '성전까지도 파괴'되고야 말았습니다.

'옥중서신'이라 불리우는 '에베소서', '빌립보서', '골로새서', '빌레몬서'이고 이 옥중서신들을 통해 바울은 죽기 전에 성도들이 잘못된 가르침에 흔들릴까봐 무엇이 진짜 복음인지 다시 복음을 들려주기 위해서 기록했습니다.

또한 '목회서신'이라 불리는 '디모데전서', '디모데후서', '디도서'를 통해서 바울은 자신을 대신해 교회를 지도할 후배 목회자들을 교훈하는 서신을 기록했습니다.

위에서 베드로도 바울과 비슷한 시기에 순교했다고 말씀드렸죠?
그래서 같은 시기에 기록된 '베드로전서', '베드로후서', 그리고 '히브리서'도 모두 배교하지 말고 믿음으로 시험을 잘 이기라고 권면하는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4. 밧모 요한 - 유 요 1 2 3 계

시간이 흘러흘러 이제 제자들도 다 죽고 사도 요한만 남았습니다.
사도요한은 에베소교회를 목회하면서 당시 초대교회에 큰 영향을 준 영지주의 이단과 싸우면서 '요한1서', '요한2서', '요한3서'를 기록합니다.
사도요한은 네로 황제만큼 악질이었던 도미티아누스 황제의 대박해를 받으며 박해와 순교의 길을 따라가게 됩니다.
요한은 유배지인 밧모섬에서 "지금 보이는 로마는 바벨론처럼 순식간에 멸망할 것이고 하나님의 나라만 영원할 것이다.
예수께서 반드시 다시 오실 것이다."라는 환상을 보게 됩니다.
그 환상을 기록한 책이 '요한계시록'이고 이로써 신약성경 순서의 마지막을 장식하게 됩니다.

구약성경순서에 이어 이번에는 27권의 신약성경읽기를 수월하게 만들어 드리기 위해서 주후 1세기의 역사 흐름과 사건에 따라 신약성경주제암기법으로 신약성경순서를 나열해보았는데요, 이와 같은 신약성경분류가 명확히 되어있는 상태에서 신약성경읽기를 진행하신다면 신약성경저자기록연대는 물론이거니와 27권의 신약성경요약이 머릿속에 잘 그려지시리라 생각합니다.

 








호세아(Hosea) 여호와는 구원이시다 / 북왕국 이스라엘 여로보암 2세 때 예언 활동 시작 - 멸망할 때까지




호세아(HOSEA) / 여호와는 구원이시다 

기록자 : 호세아
기록 시기 : 주전 720년경
성격 : 대언
기간 : 약 60년
수신자 : 북 왕국 이스라엘 백성
이름 : 호세아는 ‘여호와는 구원이시다’

북 왕국 이스라엘의 대언자로서 마치 남 왕국 유다를 향해 책망의 메시지를 선포한 예레미야 대언자와 비슷한 사역을 수행했다.

주제 : 이스라엘의 배교와 회복
목적 : 이스라엘에 관한 하나님의 불변하는 권고를 가르쳐 주는 것
내용 : 호세아서에는 사악한 정부(情夫)를 따르기 위해 신실한 남편에게서 등을 돌린 아내를 통해 주 하나님을 버린 이스라엘의 불신앙이 잘 묘사되어 있다.
실제로 이러한 비유적 표현은 호세아 자신의 체험에서 나왔다.
호세아는 자기가 하나님의 손에 의해 인간적인 면에서 비극적인 결혼을 하게 됨을 알게 되었다.
고귀한 소망을 지닌 호세아는 고멜과 결혼하고 그녀의 음란한 품성을 알게 되며 그래서 곧이어 별거하게 되었다.
그러나 호세아의 사랑은 지속되었고 결국 그는 그녀와 다시 결합하였는데 이것은 하나님께서 음란한 이스라엘을 대하시는 것과 유사하다.
주께 신실할 것을 맹세한 이후에도 이스라엘은 하나님께서 바빌론 포로 생활을 통해 일시적으로 그들을 버릴 때까지 바알 신과 가나안의 다른 신들을 섬겼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메시아의 약속과 함께 마지막 때에 영적인 씨가 행복을 누릴 것을 보여 주셨다.

호세아서는 14장, 197절, 5,175 영어 단어로 구성되어 있다.

핵심 장 : 3장(하나님의 불변하는 사랑)
핵심 절 : “오 이스라엘아, 네가 네 자신을 파멸시켰거니와 네 도움이 내게 있느니라. 내가 네 왕이 되리라. 네 모든 도시에서 너를 구원할 다른 자가 어디 있느냐?”(13:9-10)
핵심 단어 : 돌아오라(15회)
핵심 구 : “마지막 날들”(3:5)
호세아서의 그리스도 : 다윗(3:5)
영적 교훈 : “하나님께로 돌아가라.”


호세아 선지자의 시대

13대. 여로보암2세
     
    (백성의 수가 많아진다, 백성을 더하게 하소서)

북이스라엘 왕 요아스의 아들로서 10여 년간 아버지와 함께 통치하다가 그를 계승하여 제13대 왕이자 예후 왕조의 네 번째 왕 이 되었다 (BC796-753)(왕하 13:13, 14:16, 23).

13:13. 요아스가 그의 조상들과 함께 자매 이스라엘 왕들과 함께 사마리아에 장사되고 여로보암이 그 자리에 앉으니라.

14:16. 요아스가 그의 조상들과 함께 자매 이스라엘 왕들과 사마리아에 함께 장사되고 그의 아들 여로보암이 대신하여 왕이 되니라

14:23.  유다의 왕 요아스의 아들 아마샤 제십오년에 이스라엘의 왕 요아스의 아들 여로보암이 사마리아에서 왕이 되어 사십일 년간 다스렸으며.



특히 그는 군사 정치 경제 문화 등 다방면에서 북IS 최고의 황금기를 가져온 왕이다(왕하14:23-29).
아버지 요아스때부터 북IS은 수리아와의 싸움에서 이겨 잃었던 북방의 영토를 회복하기 시작했고, 또 유다를 눌러 남방으로의 영토 확장에 발판을 마련하였다. 
그리고 국제적으로는 주변국 앗수르와 아람이 위축되어 있는 상태였다.
이런 배경하에서 왕위에 오른 여로보암은 아밋대의 아들 선지자 요나의 예언대로 ‘하맛에서 아라바 바다까지 솔로몬 때의 영토와 흡사한 넓이의 광대한 땅을 지배 하게 되었다(신 3:17.  왕하 14:25-28)

하지만 이러한 물질적 번영 뒤에는 빈부 간의 갈등과 그로 인한 사회적 모순이라는 그림자가 생겨났고, 더욱이 중근동 지역에 성행하던 각종 우상과 타락한 문화가 극격히 유입됨으로써 북IS의 영적 부패를 심화시켰다. 
이에 대해 당시 활동 했던 선지자 아모스는 사회 전반의 부패와 극심한 빈부의 차이(암 2:6-7),
헛된 종교적 행위(암 5:21-24; 7:10-17),
허물어져 버릴 거짓된 평안(암 6:1-8)을 지적하며 하나님의 심판을 예언했고(암 7:7-13),
선지자 호세아도 같은 맥락에서 여로 보암 때의 죄악을 비유적으로 고발하고 있다(호 1-3장).
그가 죽자 그 뒤를 이어 아들 스가랴가 왕위를 계승하게 된다(왕하 14:29)

여로보암이 그의 조상 이스라엘 왕들과 함께 자고 그의 아들 스가랴가 대신하여 왕이 되니라.






북왕국 이스라엘 백성들의 신앙적 특징 네 가지


1. 로다아트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없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1847,  430) 다아트(daʽath) דַּעַת 엘로힘(’ĕlôhîym) אֱלֹהִים

지식(1847) 다아트(daʽath)  דַּעַת 

1. 지식.  2. 지성
발음 / 다아트[ daʽath ]
어원 / 3045에서 유래
관련 성경 / 지식(렘 22:16, 시 19:2, 전 1:16), 지혜(욥 34:35), 재능(왕상 7:14).
구약 성경 / 91회 사용

2. 로헤세드
인애가 없다.

인애(2617) 헤세드(chêçêd) חֵסֵד

1. 욕구.  2. 열심.  3. 인자함
발음 / 헤세드[ chêçêd ]
어원 / 2616에서 유래
관련 성경 / 인자(창19:19, 민14:18, 시18:50), 은혜(창20:13, 삼하3:8, 렘32:18), 인애(창47:29, 신7:9, 렘2:2), 은총(창32:10, 삼하9:1, 호2:19), 성실(왕상3:6), 긍휼(느1:5, 시85:10), 아름다움(사40:6). [동] 영화롭게 하다(잠14:34), 선대하다(수2:12, 삿1:24, 룻1:8), 은혜를 베풀다(룻2:20), 인자하다(대상16:34, 대하7:3,시59:10), 자비하다(대상16:41, 대하5:13), 선하다(대하32:32, 느13:14), 긍휼히 여기다(스9:9, 시59:17), 불쌍히 여기다(욥6:14).
구약 성경 / 246회 사용


3. 가온
교만하다

1347. 교만(가온. gâʼôwn) גָּאוֹן


1. 장대함.  2. 장식.  3. 교만
발음 / 가온[ gâʼôwn ]
어원 / 1342에서 유래
관련 성경 / 위엄(출 15:7, 욥 37:4, 미 5:4), 교만(레 26:19, 잠 16:18, 겔 7:20), 영화(시 47:4, 사 14:11), 거만(잠 8:13), 오만(사 13:11), 영광(사 13:19, 암 6:8, 나 2:2), 아름다움(사 60:15), 자고(렘 48:29)
구약 성경 / 49회 사용

6038. 겸손(아나바. ʽănâvâh) עֲנָוָה

1. 겸손한 마음.  2. 자비
발음 / 아나바[ ʽănâvâh ]
어원 / 6035에서 유래
관련 성경 / 겸손(잠 15:33, 22:4, 습 2:3), 온유함(삼하 22:36)
구약 성경 / 7회 사용


4. 첼다이
세속화 되다

2469. 세속적인(첼다이. Chelday)  חֶלְדַּי

1. 세속적인
2. 역대상 27:15. 열두째 열두째 지휘관은 옷니엘 자손에 속한 느도바 사람 헬대니 그 반에 이만 사천 명이었더라
3. 스가랴 6:10. 사로잡힌 자 중 바벨론에서부터 돌아온 헬대와 도비야와 여다야스바냐의 아들 요시아의 집에 들었나니 너는 이 날에 그 집에 들어가서 그들에게서 취하되.
발음 / 첼다이[ Chelday ]
어원  / 2466에서 유래
관련 성경  / 헬대(대상 27:15, 슥 6:10).
구약 성경 / 2회 사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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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라엘 왕들의 연대 및 특징

통일 왕국 시대-1대왕 사울(BC1050~1010년경)

2대왕 다윗(BC1010~970년경)

3대왕 솔론몬(BC970~930년경)

남유다왕

통치연대

참조구절


북IS왕

      통치연대

참조구절

1,르호보암

930-913

왕상12-14장,대하10-12장

1,여로보암

930-910

    왕상11:26-14:20

2,아비야(아비얌)

903-910

왕상15:1-8;,대하13장

2,나답

910-909

    왕상15:25-28

3,아사

910-869

왕상15:9-24:,대하14-16장

3,바아사

909-886

    왕상15:27-16:7,대하6:1-12

4,여호사밧

872-847

왕상22:41-50: 대하17-20장

4,엘라

886-885

    왕상16:6-10

5,여호람(요람)

853-841

왕하8:16-24: 대하21장

5,시므리

885

    왕상16:8-20

6,아하시야

841

왕하8:25-29: 대하22:1-9

6,오므리

885-874

    왕상16:15-28,왕하3:4

7,아달랴

841-835

왕하8:18:,25-28: 11장

7,아합

874-853

    왕상16:28-22:40,대하18장

8,요아스(여호아스)

835-796

왕하11-12장,대하22-24장

8,아하시야

853-852

    왕상22:40,51-53

9,아마샤

796-767

왕하14장,대하26장

9,요람(여호람)

852-841

    왕하3:1-3,9:14-25

10,아사랴(웃시야)

791-739

왕하15:1-7: 대하26장

10,예후

841-814

    왕하9-10장, 대하22:7-12

11,요담

750-731

왕하15:32-33

11,여호아하스

814-798

    왕하13:1-9

12,아하스

735-716

왕하16장,대하28장

12,여호아스(요아스)

798-782


13,히스기야

728-687

와하18-20장,대하29-32장

13. 여로보암2세

793-753


14,므낫세

697-642

왕하21장 대하33장

14. 스가랴

753-752

  왕하14:29: 15:8-12

15,아몬

642-640

왕하21:19-23,대하33:21-25

15. 살룸

752

  왕하15:16-22

16,요시야

640-609

왕하22-23장 대하34-35장

16. 므나헴

752-742

  왕하15:16-22

17,요호아하스(살룸)

609

왕하23:31-33,대하36:5-6

17. 브가히야

742-740

  왕하15:23-26

18,여호야김(엘리야김)

609-598

왕하23:34-24:5,대하36;5-6

18. 베가

740-732

  왕하15:27-31

19,여호야긴(여고니야)

598

왕하24:6-16,대하36:8-10

19. 호세아

732-722

  왕하17:1-41

20,시드기야(맛다니야)

597-586

왕하24:17-25:7,대하36:11-12




북이스라엘왕

1. 여로보암
(백성의 수가 많아진다, 백성을 더하게 하소서)

이스라엘 분열을 주도한 자로 북IS의 초대 왕(930-910), 에브라임 사람 느밧과 스루아 사이에서 태어났으며(왕상11:26), 아비야와 나답을 낳았다(왕상14:1: 15:25). 솔로몬 휘하에서 신임받은 유능한 신복(공사 감독관)이었다(왕상11:28).

선지자 아히야로부터 10지파의 왕이 될 것이라는 예언을 듣게 되고(왕상11:29-40), 이에 솔로몬이 그를 죽이려고 했으 므로 그는 급히 애굽으로 망명하였다(왕상11:29-40). 솔로몬이 죽은 후 르호보암 왕 때 이스라엘 12지파 중 유다와

베냐민 지파를 제외한 10지파를 규합하여 북IS(세겜을 수도로함)에 또 다른 왕국을 세워 왕이 됨으로써 왕국의 분열이 시작되었다(왕상12:1-20) 특히 그는 백성들이 남왕국에 위치한 예루살렘 성전으로 마음이 쏠리는 것을 막고자 단과 벧엘 에 금송아지 우상을 만들어 두고 그곳을 예배 중심으로 삼았다(왕상12:25-33), 그리고 정한 절기를 변경하여 율법을

왜곡시켰고(7월15일의 장막절을 8월 15일에 지키게 함). 레위인이 아닌자로 제사장을 삼아 제사를 드리게 했고(왕상 12:31) 산당을 만들었다, 이같은 죄로 인해 그는 익명의 하나님의 사람과 선지자 아히야로부터 급격히 몰락할 것이라는 예언을 듣게 된다(왕상13-14장).

하지만 그는 악행을 거듭하다가(왕상13:33-34) 유다왕 아비야와의 전투에서 패한 후 하나님의 징계로 최후를 맞게 된다 (대하13:20) 한편, 여로보암의 죄악은 북왕국이 멸망할 때까지 반복되었고 북IS의 통치자들은 한결같이 ‘여로보암의 길로 행한 자’로 묘사되고 있다(왕상15:26, 34: 16:19, 31: 22:52 왕하3:3 10:29, 13:2, 11: 14:24 15:9, 18, 24, 28).

그리고 여로보암의 우상 숭배는 결국 앗수르에 의한 이스라엘의 패망의 큰 원인이 된다(왕하17:16, 18)

2. 나답
(하나님은 관대하시다)

북IS 왕 여로보암 1세의 아들, 북IS의 제2대왕(910-909), 블레셋의 군사 도시 깁브돈을 포위 공격하던 중 반란을 일으킨 잇사갈 지파 바아사에 의해 살해되어 그의 온 집안은 망하고 그의 왕조는 2대 만에 막을 내린다(왕상15:27). 그의 통치 기간은 1년 수개월에 불과한데 그는 부왕과 마찬가지로 우상을 숭배하는 등 하나님 앞에서 악을 행하였다(왕상15:26)

3. 바아사
(바알은 태양이다 바알이 듣고 있다)

잇사갈 지파 아히야의 아들(왕상15:27). 북IS 초대왕 여로보암의 아들 나답 왕의 부하 장군, 나답이 블레셋의 깁브돈을 포위 공략할 때 진중에서 반란을 일으켜 나답을 살해하고 왕위를 찬탈하여 수도 디르사에서 24년간 통치햇다, 남유다

2대왕 아사의 경건한 신앙에 고무된 북IS 백성이 남쪽으로 이주하자(대하15:9)남쪽 경계 라마에 성곽을 건축하여 백성의 남하를 저지하는(대하16:1-6) 한편 아사 왕과 끊임없이 전쟁을 벌였으나 번번이 실패했고, 아람의 원조를 받은 아사 왕 에게 라마 성마저 함락당했다, 지속적으로 우상을 숭배하였으며 사후에 아들 엘라가 왕위를 계승했다,(왕상16:2-12)

4. 엘라
(상수리나무, 테레빈나무)

북IS의 제4대왕 (886-885)이자 바아사 왕조의 두 번째 왕(왕상16:6)으로 부하 장군 시므리의 반역으로 살해되었다

(왕상16:9-10). 이외에도 같은 이름으로 에돔 족장(창36:41), 북IS의 마지막 왕 호세아의 부친(왕하15:30; 17:1; 18:1), 갈렙의 아들(대상4:15), 베냐민 지파의 한 사람(대상9:8)등이 있다.

5. 시므리
(영양)

엘라왕 휘하의 장군이었으나, 왕을 암살하고 북IS의 제5대왕(855년경)이 된 인물, 재반격을 시도한 오므리 장군에 의해 퇴위될때까지 7일 간 통치했다(왕상16:8-20), 오므리는 그의 뒤를 이어 북IS 제6대왕이 되었다.

6. 오므리
(여호와를 숭배하는자, 여호와의 종, 여호와의 예배자)

바아사의 아들인 엘라 왕의 군대장관으로서 북IS의 제6대왕이자 오므리 왕조의 창시자가 된 인물(885-874). 유다 왕

아사 27년에 엘라를 살해한 시므리의 반란 때 진중의 백성들(일종의 군부)에 의해 이스라엘 왕으로 추대되었다

(왕상16:15-16),오므리에 맞섰던 시므리는 7일만에 자살로 끝을 맺는다(왕상16:18), 그리고 가낫의 아들 디브니가 북IS 주민 절반 가량의 지지로 왕이 되어 오므리를 대항했으나 4년후 마침내 패배함으로써 명실공히 오므리 왕가의 기틀을

확고히 하였다(왕상16:23), 그는 세멜에게서 금 두 달란트로 사마리아를 사들여 사마리아 성을 건축하고 곳을 수도로 정하고 북IS의 수도로 삼았다(왕상16:24-27), 이후 사마리아는 북IS이 멸망할 때(BC722)까지 수도로서 역할을 한다

이처럼 오므리는 유능하기는 했지만 여호와 보기에 사악한 통치자였다(왕상16:25-28)

오므리는 두로와 맺은 동맹을 확고히 하기 위해 자신의 아들 아합과 베니게의 공주 이세벨을 결혼시켰다, 이러한 결혼 동맹은 일찍이 다윗과 솔로몬이 베니게에 대해 취해온 전통적인 정책이었다. 이 동맹으로 북IS에는 이방의 악한 풍습과 바알 우상 등이 급속히 유입되어 더욱 타락하게 되었고, 그것은 결국 오므리 왕조의 멸망을 초래했다. 이에 더하여 오므 리는 그 악명 높은 ‘오므리의 율례’(미6:16)를 남겼다, 오므리의 율례란 다름 아닌 여호와를 철저히 외면하고 우상을

숭배하게 한 것이었다,

7 .아합
(아버지의 형제)

북IS의 제7대왕(874-853)이자 오므리 왕가의 두 번째왕, 아합은 통치 기간중 이스라엘의 왕들 가운데 가장 강력한 통치 력을 발휘했고 모압에게서 많은 조공을 받는등(왕하3:4)군사적으로나 경제적으로 태평 시대를 누렸다, 하지만 그는 시돈 의 왕이요 바알 제사장인 엣바알의 딸 이세벨을 아내로 맞아 이스라엘 역사상 가장 지독한 바알 숭배를 만연시켰고

(왕상16:28-31), 그 결과로 이스라엘에 기근과 가뭄이 찾아들게 했다(왕상16:32-33). 또한 그는 아내 이세벨과 함께

하나님의 사람들을 핍박했으며 오바댜가 숨긴 100명의 선지자를 제외한 여호와의 선지자들을 살해했다(왕상18:4; 19:14), 물론 여호와는 갈멜 산상에서 엘리야를 통해 바알 우상의 허상을 드러내시고 오직 당신만이 유일한 하나님이심 을 나타내 보이셨다(왕상18장). 한편 아합은 탐욕의 노예로서 이세벨의 계략에 따라 나봇을 살해하고 그의 포도원을

탈취하는 악을 행함으로써 결국 처참한 종말을 예고받게 된다(왕상21:1-26), 아합은 그 예언을 듣고 잠시 겸비함으로써 재앙이 지연되기도 했지만 근본적인 변화는 아니었다(왕상21:27-29), 그는 말년에 수리아(아람)왕 벤하닷과의 전쟁을

세 번이나 치렀는데 1,2차는 승리했지만(왕상21:1-42),마지막 전투에서 선지자 미가야의 경고를 무시한 채 전쟁에 나갔 다가 한 병사가 무심코 긴 화살에 치명상을 입고 결국 사망하여 사마리아에서 장사된다(왕상22:5-37), 그리고 미가야의 예언대로 개들이 그 피를 핥았고(왕상22:38)또 그의 아들 요람 때에는 미가야의 예언이 좀더 명확회 성취된다

(왕하9:24-26)

8. 아하시야
(여호와께서 붙잡으셨다)

아합과 이세벨의 아들로서 북IS의 제8대왕(853-852),아하시야는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했으며 여로보암의 송아지

우상과 그의 모친 이세벨이 주도하는 바알을 섬겼다(왕상22:52-53), 재위 초기에 매년 엄청난 양의 조공(새끼양 10만과 숫양 10만의 털)을 바쳐 오던 모압이 반역했지만(왕하1:1; 3:4-5), 그가 사마리아 왕궁 다락 난간에서 떨어져 심하게

다쳐 병이 들어 그 반란을 진압하지 못했다, 한편 중병이 든 그는 에그론의 신 바알세붑에게 사자를 보내어 자신이 나을 것인지 물어보려 했지만 하나님께서는 선지자 엘리야를 보내어 그의 죽음을 선고하셨다(왕하1:3-6), 그 선고대로

아하시야는 죽었고 왕위는 그의 형제 여호람이 계승하였다(왕하1:17; 8:16)

9. 요람
(여호람: 여호와는 높으시다, 여호와는 존귀하시다, 여호와는 일으키신다)

북IS의 제9대왕(852-841), 아합과 이세벨의 둘째 아들로서 자식이 없어 죽은 그의 형 아하시야를 계승해 12년 간 통치했다(왕하1:17;3:1), 그는 아합이 만든 바알 우상을 제거했지만 여로보암이 만든 금송아지는 숭배했고 악을 행했다, 그는 지금껏 이스라엘을 섬겨왔던 모압이 반란하자 유다(여호사밧왕), 에돔과 연합하여 모압을 정벌하러 가던 중 엘리사로부터 이적적인 방법으로 물을 얻고 또 승리하리라는 예언을 들은 후 완승을 거두게 된다(왕하3:13-27), 아람 왕은 장군 나아만의 나병을 치료하고자 여호람에게 사자를 보냈고(왕하5장), 얼마후 아람 왕은 엘리사의 기도로 하나님께서 아람 군대의 눈을 멀게 하심으로써 그 일은 수포로 돌아가게 된다(왕하6:8-23), 벤하닷이 아람 왕이 된 후 재차 이스라엘을 침공하여 사마리아를 큰 기근에 빠뜨렸지만 이때도 하나님의 이적적인 도움으로 아람 군을 물리쳤다(왕하6:24-7:20), 하지만 또 다른 아람 왕(벤하닷을 죽이고 스스로 왕이 된 하사엘)이 이스라엘과 유다 연합군을 공격하여 길르앗 라못에서 여호람에게 부상을 입혔다, 여호람은 귀국하여 요양 중에 있다가 그의 장군 예후의 반란으로 나봇의 포도밭에서 비참한 최후를 맞게 되었다(왕하8:28-9:26), 그후 북IS에 예후 왕조가 시작되었다.

10. 예후
(그는 여호와시다)

북IS의 제10대왕 (841-814년)으로 님시의 손자이자 여호사밧의 아들(왕하9-10장; 대하22:7-12). 100년 이상 지속된

예후 왕조를 시작한 인물, 그는 원래 오므리 왕조인 아합 왕의 군대장관이었으고(왕하9:25), 아합의 아들 요람 왕을 섬기 던 자였다(왕하9:14), 선지자 엘리사에 의해 기름 부음을 받고(왕하9:1-6).또 엘리사로부터 아합의 온 집안을 멸망시키라 는 명령을 받은 후(왕하9:7-10),왕위에 올라(왕하9:12-13),요람왕을 죽이고(왕하9:22-24),계속해서 유다 왕 아하시야

(왕하9:27-28),와 이세벨(왕하9:30-33),그리고 아합의 왕자 70명과 아합 집에 속한 자들을 멸절시킴으로써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했다(왕하10:1-8,11,17),그에 더하여 바알 숭배자들을 죽이고 그 산당을 변소로 만들었다(왕하10:18-27), 이 일로 인해 하나님은 예후의 후손이 4대에 걸쳐 이스라엘을 통치할 것을 약속하셨다(왕하10:30),하지만 예후 자신은 진심 으로 여호와를 섬기지 않았고 오히려 금송아지 우상을 숭배했다(왕하10:29-31). 그 결과 예후는 하사엘의 침략을 받아 요단 동편 땅을 빼앗겼다(왕하10:32-33), 28년간의 긴 통치를 마감하고 죽어 사마리아에 장사되었다(왕하10:35-36)

11. 여호아하스
(여호와께서 붙드셨다(붙잡으셨다))

북IS의 제11대왕(814-798년). 예후의 아들로서 왕위를 계승한 후(왕하10:35)재위 17년 간 아세라 우상을 제거하지

않고 여로보암의 악행을 그대로 답습하였다(왕하13:1-2,6), 아람 왕 하사엘과 그 아들 벤하닷 3세의 침공을 받았을 때 하나님께 호소하여 하나님이 보내신 한 구원자로 인해 위기를 면하기는 했으나 국력은 크게 손실을 입었다(왕하13:3-5, 22,25), 그는 죽어 사마리아 성에 장사되고 그 아들 요아스가 왕위를 이었다(왕하13:9)

12. 여호아스
(요아스: 여호와께서 주셨다, 여호와는 강하시다, 여호와는 도와 주신다)

여호아하스의 아들로 북IS의 12대 왕이자 예후 왕조의 세 번째 통치자(BC798-782년).16년 간을 통치하면서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하였다(왕하13:10-11). 엘리사의 후원자요 엘리사의 병든 것을 슬퍼하였다(왕하13:14-19). 유다 왕

아마샤를 물리쳤으며(왕하 대하25:21-23). 아람와 벤하닷을 무찌르고 이스라엘 성읍들을 회복하였다(왕하13:24-25).

죽어 사마리아에 장사되고 그 아들 여로보암 2세가 그를 계승했다(왕하13:10-25; 14:8-17)

13. 여로보암2세 (백성의 수가 많아진다, 백성을 더하게 하소서)

북IS 왕 요아스의 아들로서 10여 년간 아버지와 함께 통치하다가 그를 계승하여 제13대 왕이자 예후 왕조의 네 번째왕 (BC796-753)이 되었다(왕하13:13 14:16, 23).
특히 그는 군사 정치 경제 문화 등 다방면에서 북IS 최고의 황금기를 가져온 왕이다(왕하14:23-29).
아버지 요아스때부터 북IS은 수리아와의 싸움에서 이겨 잃었던 북방의 영토를 회복하기 시작했고, 또 유다를 눌러 남방으로의 영토 확장에 발판을 마련하였다. 
그리고 국제적으로는 주변국 앗수르와 아람이 위축되어 있는 상태였다.
이런 배경하에서 왕위에 오른 여로보암은 아밋대의 아들 선지자 요나의 예언대로 ‘하맛에서 아라바 바다까지 솔로몬 때의 영토와 흡사한 넓이의 광대한 땅을 지배 하게 되었다(신 3:17.  왕하 14:25-28)

하지만 이러한 물질적 번영 뒤에는 빈부 간의 갈등과 그로 인한 사회적 모순이라는 그림자가 생겨났고, 더욱이 중근동 지역에 성행하던 각종 우상과 타락한 문화가 극격히 유입됨으로써 북IS의 영적 부패를 심화시켰다. 
이에 대해 당시 활동 했던 선지자 아모스는 사회 전반의 부패와 극심한 빈부의 차이(암 2:6-7),
헛된 종교적 행위(암 5:21-24; 7:10-17),
허물어져 버릴 거짓된 평안(암 6:1-8)을 지적하며 하나님의 심판을 예언했고(암 7:7-13),
선지자 호세아도 같은 맥락에서 여로 보암 때의 죄악을 비유적으로 고발하고 있다(호 1-3장).
그가 죽자 그 뒤를 이어 아들 스가랴가 왕위를 계승하게 된다(왕하 14:29)

여로보암이 그의 조상 이스라엘 왕들과 함께 자고 그의 아들 스가랴가 대신하여 왕이 되니라.


14. 스가랴 (여호와께서 기억하셨다)

여로보암2세를 이어 북IS의 왕이 된 인물. 예후 왕조의 4대째(마지막)왕으로 남유다왕 웃시야 38년에 사마리아에서 즉위 하여 6개월 정도 통치했으며 살룸의 모반으로 암살당했다(왕하14:29; 15:8-11)

15. 살룸 (보응)

북IS 여로보암2세의 아들인 스가랴 왕을 죽이고 사마리아에서 왕위에 올랐으나 즉위1개월 만에 가디의 아들 므나헴에게 죽임을 당하였다(왕하15:10-15). 부친은 야베스

16. 므나헴 (위로하다)

갓 지파 가디의 아들로 북IS 16대왕(752-742), 여로보암 2세 이후 6개월 만에 스가랴 왕을 살해한 살룸을 제거하고

권좌에 올랐다, 정권 찬탈에 저항하는 딥사 주민들을 학살하였고 장기 집권을 위해 앗수르왕 디글랏 빌레셀 3세에게 은 1000달란트를 조공으로 바치기도 하였다(왕하15:13-22), 10년 통치 후 아들 브가히야가 왕위를 계승했다,

17. 브가히야 (여호와께서(눈을)여셨다)

므나헴의 아들이며 북IS의 17대왕(742-740),북IS을 건국한 여로보암의 정책을 본받아 우상 숭배 죄를 범하였다

(왕하15:24), 그는 부왕과 마찬가지로 친 앗수르 정책을 펼쳤는데 2년 통치 말기에 군대장관 베가의 반란으로 사마리아 왕궁 호위소에서 50명의 자객들에게 암살당했다(왕하15:25)

18. 베가 (뜨다 열다)

군대장관 출신으로 친 앗수르파인 브가히야 왕을 살해하고 왕위를 찬탈한 북IS 제18대왕(740-732)르말랴의 아들(왕하15:37). 아람 왕 르신과 동맹을 맺고 반 앗수르 정책을 펼치는 한편 남유다의 아하스 왕도 이 동맹에 끌어들이려 했으나 친 앗수르 정책을 펴는 아하스의 반대에 부딪치자 아람과 더불어 남유다를 침공하고 예루살렘까지 압박하였다(왕하16:5; 대하28:5), 이에 다급해진 아하스 왕은 앗수르의 디글랏 빌레셀에게 원병을 요청하고 앗수르는 아람의 수도 다메섹까지 진격하여 아람 왕 르신을 살해한다(왕하16:9), 또한 북IS 역시 앗수르의 침공을 받아 길르앗, 갈릴리, 납달리 지역의 많은 이스라엘 사람들이 앗수르에 포로로 잡혀가는 위기를 맞게 된다(왕하15:29), 이 전쟁의 여파로 베가는 앗수르의 지배를 받게 되었고, 친 앗수르파인 호세아(북IS의 마지막 왕)에 의해 살해당해(왕하15:30) 통치를 마감하게 된다.

한편 그가 ‘사마리아에서 이십년간 다르시며’라는 성경 기록(왕하15:27)은 그의 군대장관 시절부터 통치기간을 합산한 것으로 실제 그의 치세는 8년 정도일 것이라는 견해가 지배적이다.

19. 호세아(여호와께서 구원하시옵소서)

엘라의 아들, 북IS 왕국의 마지막 왕. 베가를 살해하고 왕이 되었다(왕하15:30). 그가 왕이 된 배후에는 앗수르 왕 디글 랏 빌레셀3세의 적극적인 지원이 있었다, 그 대가로 호세아는 앗수르에 많은 조공을 바쳤다(왕하17:3), 하지만 BC727년 디글랏 빌레셀 3세가 죽자 호세아는 앗수르와의 친선 관계를 단절하고 대신 애굽 왕 소(So)에게 의지하였다(왕하17:4), 이에 왕위를 계승한 앗수르 왕 살만에셀5세는 북IS을 침공하여 호세아를 옥에 가두고 과중한 세금을 부과하였다(왕하 17:4), 그리고 3년간 사마리아를 포위한 채 공략하였다, 그러나 살만에셀 5세는 사마리아를 함락시키지 못한 채 죽음을 맞고 계승자 사르곤 2세는 결국 호세아 9년에 사마리아를 함락시킨다(BC722). 그리고 수많은 이스라엘 사람들을 할라, 하볼 하수, 메대 등 메소보다미아 여러 지방으로 잡아가고 대신 여러 이민족들을 사마리아에 강제로 이주시킨다

(왕하17:6: 18:9-12: 호10:3,7). 기록에 의하면 이때 포로로 끌려간 자는 무려 27,290명인데 이는 북IS 인구의 20분의 1에 해당되었다고 한다


남 유다 왕

1.르호보암 (백성의 수가 많다),

솔로몬과 암몬 여자 나아마 사이에 태어난 분열 왕국 남유다의 초대왕(왕상14:21,31).부왕 솔로몬의 뒤를 이어 왕이

되었으나 지나친 조세 부담과 부역에 반발한 10지파가 여로보암을 주축으로 반란을 일으키고 북이스라엘을 건국하자

유다, 베냐민 두 지파만 거느리고 남유다의 왕이 되었다(왕상12:1-15)

이에 18만의 군사를 일으켜 북IS을 치려 하였으나 스마야 선지자의 만류로 북벌 계획을 중단하였다(왕상12:22-24).

그후 3년간 성실히 하나님을 섬겼으나 얼마 되지 않아 우상 숭배에 빠져들게 되고 하나님의 진노로 5년째 되던 해 애굽 왕 시삭의 공격 앞에 왕궁까지 약탈당하는 위기를 겪는다(왕상14:25-28),그후 북IS과도 잦은 분쟁을 치른다

(대하12:2-4,15).그는 41세에 즉위하여 17년을 통치하였고 18명의 아내와 60명의 첩을 통해 28명의 아들과 60명의

딸을 낳았는데 그중 아들 아비얌에게 왕위를 승계해 주었다(왕상14:31) 그는 ‘지혜가 없고 미련하여 백성을 반역으로

몰아넣은 자’로 평가받고 있다.

2. 아비야(아비얌)

왕국 분열의 빌미를 제공한 르호보암과 압살롬의 딸 마아가 사이에서 태어난 유다의 제2대왕, ‘아비얌’과 동일인

(왕상14:31),북IS 여로보암의 죄악을 지적했고 또 북IS의 열 지파를 회복하기 위해 여로보암과 교전하여 성읍들을 빼앗았다, 그리하여 그가 살아있는 동안은 여로보암이 다시 강성하지 못하게 했다 그는 아내 14명에게서 아들 22명과 딸 16명 을 두었다 그가 죽어 다윗 성에 장사되고 경건한 왕 아사가 그 뒤를 이었다(왕상15:8: 대하14:1)

3.아사 (치료하는 사람, 의사, 주는자)

아비야와 마아가 사이에서 태어난(왕상15:8-10: 대하14:1)남왕국 유다 제3대왕.유다의 경건한 왕들(아사,여호사밧,

요아스,아마샤,웃시야,요담,히스기야,요시야 등)중 첫 번째 왕이었다(대하14-16장)

그는 통치 초기 약 10년간 전쟁 없이 태평한 시기를 보냈고(대하14:1,6),평화시에 전쟁에 대비했으며 전쟁이 다가왔을 때는 하나님께 부르짖으며 의지했다. 그는 가증한 신상과 제단을 없애며 우상 숭배를 배척했고 하나님의 뜻에 귀기울였 으며(대하15:1-8),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히 행하고 부패와 타락을 멀리하면서(왕상15:11-12) 신앙 부흥 운동에 힘을

쏟았다(대하15:8-16).하지만 아사는 북IS의 바아사를 치기 위해 아람 왕 벤하닷과 동맹을 맺었는데, 그로 인해 선견자 하나니의 꾸중을 들었다(왕상15:16-19: 대하16:1-9), 이에 분노한 아사는 하나니를 옥에 가두고 백성을 학대하였다

(대하16:10).이같은 악행에 대해 하나님은 아사가 왕이 된지 39년에 병으로 그를 치셨다, 이때도 아사는 하나님께 구하 지 않고 의원에게 도움을 청했다(대하16:12),그 결과 아사는 재위 41년 만에 죽어 다윗성에 장사된다(대하16:13-14)

4. 여호사밧(여호와께서 심판하신다)

남왕국 유다의 제4대왕,아사 왕과 아수바 사이에서 태어났고, 35세에 왕위에 올라 25년간 통치했다, 불의한 왕 아합이나 아하시야와의 연합 같은 실수도 있었으나 전체적으로 볼 때 여호와가 보시기에 정직히 행하며 그분을 경외함으로써

(왕하22:4: 대하19:9)히스기야, 요아스와 함께 유다의 3대선왕으로 인정되고 있다

여호사밧은 왕위에 오르자 우상과 산당을 파괴하고 백성에게 율법을 가르치며 오직 하나님만을 의지하게 하고, 사회

정의를 구현하는 등의 노력을 기울였다(대하17:6-9: 18:4-6, 19:2-11: 20:3-32), 이로 인해 하나님이 복을 주셔서

나라가 견고해졌다.

이같은 강성함을 지속시키기 위해 그는 아들 여호람을 북IS왕 아합의 딸인 아달랴와 정략 결혼시키는 잘못을 범하였다

물론 이런 결속으로 솔로몬 사후 계속되었던 남북 간의 전쟁이 종식되기는 했지만(왕상22:44), 양국은 이를 기반으로

아람의 길르앗 라봇을 공격했다가 아합은 전사하고 여호사밧은 겨우 목숨만 구하는 치명타를 입었다(대하18:2-34), 그후 모압과 암몬의 동맹군이 유다를 침입하여 위기에 처했을 때 여호사밧은 여호와께 간구하여 승리를 얻는다(대하21:1-30), 한편 승리한 후 여호사밧은 북왕국의 아하시야와 더불어 배를 만들어 오빌의 금을 들여오려고 했지만 선지자 엘리에셀의 책망대로 배가 파선하여 실패하고 만다. 그는 죽기 전에 장자인 여호람에게 왕위를 물려주었고 아들들에게는 견고한

성읍과 보물들을 선물로 주었다, 사망후 다윗성에 장사되었다(대하21:1-3)

5. 여호람(요람) (여호와는 높으시다, 여호와는 존귀하시다, 여호와는 일으키신다, 요람은 축약형이다)

유다의 제5대왕, 부친 여호사밧과 함께 4-5년간 유다를 다스리다가 BC847년 부친 사망 후 단독으로 통치하게 된다

(왕하8:16 대하21:1). 그의 아내는 가증스런 바알 숭배자인 북IS의 아합과 이세벨의 딸 아달랴였다, 여호람은 단독 통치 가 시작되자 아내의 사주를 받아 우상을 적극 섬기고 그 형제와 신하들을 살해하는 등 악행을 일삼았다(왕하8:16-19: 대하21:1-6,11) 이같은 일로 하나님은 그에게 고통스런 생애를 주셨는데, 에돔과 립나의 반역(왕하8:20-22: 대하 21:8-10)과 블레셋과 북IS의 침공으로 나라가 초토화되고 그 아내와 자식들은 포로로 끌려갔다(대하21:16-17: 22:1). 그 역시 하나님의 징벌로 불치의 병을 얻어 2년간 고생하다가 죽음을 맞았다(대하21:18-19), 죽어서도 역대 왕들의 무덤 에 들지 못하는 수모를 겪어야 했다(대하21:18-20)

6. 아하시야 (여호와께서 붙잡으셨다)

여호람과 아달랴(아합의 딸)에게서 난 막내 아들(왕하8:25-26). 42세때 예루살렘 주민들에 의해 유다 제6대왕으로 옹립 되나(대하 22:1-2) 단 1년간 왕위에 머물렀을 뿐이다(대하22:2) 이유는 아합의 아들 요람과 동맹하여 아람 왕 하사엘과 맞서 싸웠고 요람의 부상으로 그를 문안하러 갔다가 요람을 제거하려는 예후의 손에 살해되었기 때문이다(왕하9:16-27), 재위 기간중 그는 모친 아달랴의 꾐으로 아합 집안과 같이 악을 행했다(왕하8:27: 대하22:3-4) 여호아하스와 동일인

(대하21:17: 25:23)

7. 아달랴 (여호와는 위대하시다)

아합과 이세벨의 딸로서 남왕국 유다를 통치한 유일한 여인(대하22-23장), 아달랴는 사마리아에서 성장했고 바알을 섬겼 다(왕하8:18, 25-28), 유다왕 여호람과 결혼해 아하시야를 낳았으나 아들이 죽자 겨우 피신한 손자 요아스를 제외한

왕의 일가족을 몰살시킨 후 자신이 왕위에 올라 6년간 통치했다(왕하11:1-3), 그후 즉위7년째 제사장 여호야다에 의해 살해된다(왕하11:4-16).성경에서는 ‘악한 여인’이라 일컫고 있다(대하24:7)

8. 요아스(여호아스) (여호와께서 주셨다. 여호와는 강하시다, 여호와는 도와주신다)

아하시야 왕의 아들로 1살 때 아하시야의 모친인 아달랴의 대학살로 집안이 참화를 겪었다 이때 고모인 여호세바와 고모 부인 대제사장 여호야다 부부의 도움으로 간신히 화를 면하고 6년간 성전에서 몰래 양육되다가(왕하11:1-3:,

대하22:11-12),7세때 아달랴의 악정에 반기를 든 대제사장 여호야다에게 기름 부음을 받고 유다의 제8대 왕에 즉위하여 (왕하11:12) 40년간을 통치했다, 재위 초기에는 여호야다의 신앙적 조언에 귀 기울여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히 행하였고 (왕하11:17-12:2), 또 여호와의 전을 수리하기도 했다(왕하12:4-16). 하지만 여호야다가 죽자 여호와의 전을 버리고

아세라 목상과 우상을 섬겼으며 나라 전체에 우상 숭배를 조장하였다(대하24:17-18), 이에 하나님은 선지자들을 보내 어 불신앙을 경계했으나 듣지 않았다(대하24:19),그 뒤를 이어 여호야다의 아들 스가랴를 보내어 요아스의 배교를 꾸짖 고 하나님의 심판을 경고하게 했으나 요아스는 오히려 그를 여호와의 전 뜰 안에서 살해하였다(대하24:10-22: 마23:35), 말년에 그는 수리아(아람)하사엘의 침공을 받고 성전 창고의 물건들까지 바쳐야 할 정도로 힘겹게 조공을 충당하였다 (왕하12:17-18), 또 하사엘과의 전투에서 부상을 입기도 했다(대하24:25),

그리고 끝내 오랜 악정 끝에 그는 자기 부하들에 의해 침상에서 살해되었다(왕하12:20: 대하24:25)

9. 아마샤 (여호와는 강하시다 여호와의 능력)

유다의 제9대왕이자 요아스의 아들로 에돔을 정복하였으며, 29년간 왕위에 있었다, 25세에 즉위한 그는 율법 정신에

따라 (신24:16),부왕(요아스)의 암살자를 처형하면서도 그 아들은 살려주었다(왕하14:5-6), 에돔 정복 후 교만해진

아마샤는 북IS을 침공했다가 벧세메스 전투에서 패배하여 생포되고(왕하14:8-14: 대하25:19) 나라는 북IS에 예속된다. 그 역시 내란에 의해 살해되었다(왕하14:18-20) 성경은 그가 대체로 여호와 앞에서 정직히 행했지만 산당을 제하지

않는 등 온전한 마음으로 행치 않았다고 평가한다(왕하14:3-4: 대하25:2),

10. 아사랴(웃시야) (여호와께서 도우셨다)

유다의 10대왕으로(791-739) 16세에 왕위에 등극(남북 왕국의 왕들 중 가장 오랜기간) 52년 간을 통치했다(왕하15:1 대하26:1). ‘웃시야’(여호와는 나의 힘)로도 불린다(왕하15:13: 대하26:1)

부친 아마샤와 모친 여골리야 사이에서 태어나(대하15:1-1). 재위 초기 엘롯을 건축하여 유다에 돌리고(대하26:2). 부왕 의 대적인 에돔(동쪽), 블레셋(서쪽), 아리비아(남쪽), 및 마온 사람들과의 전쟁에서 승리했다(왕하14:22: 대하26:1-7). 그는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히 행하였으며 예루살렘 성에 망대를 세워 견고히 하였고, 농경을 발전시켰으며, 군대를 위해 무기를 예비하는 등 종교, 정치, 경제적으로 탁월한 업적들을 남겼다(대하26:4-15). 하지만 나라가 부강해지고 평안해지 자 교만해져 제사장만이 행할 수 있는 분향을 하려다가 여호아의 징계를 받아 나병에 걸렸다, 그로 인해 웃시야는 여생 을 별궁에서 홀로 지내다가 죽은 후에도 조상들의 묘실에 묻히지 못했다(대하26:16-23). 한편 나병 발병 후 죽기까지 그의 아들 요담이 섭정했고(대하26:21), 웃시야의 모든 행적을 선지자 이사야가 기록하였다(대하26:22), 그리고 웃시야가 죽던 해에 이사야는 높이 들린 보좌에 앉으신 여호와의 영광을 목격하였다(사6:1)

11. 요담(여호와는 정직 완전 하시다)

부친 웃시야의 나병 발병으로(대하26:16-21) 일찍이 대리로 통치하다가(왕하15:5) 유다의 제11대 왕으로 즉위하여 평생 동안 여호와 신앙으로 통치했다, 그의 모친은 사독의 딸 여루사였다(대하27:1). 그는 이사야가 선지자로 소명을 받고

사역을 시작한 즈음에 통치를 시작했다(사6:1), 또 호세아와 미가 선지자와도 도이대 인물이다(호1:1,미1:1),따라서 자연 히 하나님의 사람들로부터 선한 영향을 받았을 것이다(왕하15:32-38: 대하27장). 그는 재임 기간중 부왕의 행위대로

정직히 행하였으나 산당을 제거하지는 않았다(왕하15:34-35)

12. 아하스
(그(여호와)가 붙잡고 있다)

유다12대왕으로(735-716),20세에 왕위를 물려받아 4년간 부친(요담)과 섭정했으며(왕하16:2), 16년간 단독 통치했다

(대하28:1) 그는 재위 기간 중에 여호와의 말씀을 무시하고 하나님보다 외세를 더 의존했으며, 배교와 가증한 우상 숭배 등으로 유다의 부패를 촉진시켰다, 특히 그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앞에서 쫓아내신 이방인들의 가증한 풍습을 좇아

자기 아들을 산 채로 불살라 우상(몰록)에게 제물로 바치는가 하면(왕하16:3-4: 대하28:2-4). 우상을 제조하고(사2:8)

우상의 제단을 만들어 제사 드렸으며(왕하16:11-14), 다메섹(아람)의 신들에게 도움을 구했다(28:22-23). 그리고 성전 기구를 파괴하고 성전 문을 닫았으며 유다의 각 성읍마다 산당을 세우고 푸른 나무 아래서 분향하였다(대하28:22-25)

한편 다메섹 왕 르신과 북IS왕 베가가 동맹을 맺고 유다를 침략해 왔을 때 하나님께서는 선지자 이사야를 통해 말씀을 전하였으나(사7:1-14)아하스는 이사야의 권면을 거절했고, 결국 끔찍한 전쟁의 참화(하루 동안에 12만 명이 학살당하고, 20만명이상이 포로로 끌려감)를 겪게 된다(왕하16:6: 대하28:5). 이에 더하여 유다는 동쪽의 에돔과 남서쪽의 블레셋의 침략을 받게 되었고(대하28:17-18). 그럼에도 아하스는 여호와를 의지하기보다 앗수르 왕 디글랏 빌레셀3세에게 지원을 요청하여 더 큰 재난을 재촉하게 된다(사7:1-3: 대하28:16-20). 이러한 악정과 불신앙의 결과, 아하스는 죽은 뒤에도

왕들의 모실에 묻히지 못하는 수모를 당하게 된다(대하28:15,27) 아하스의 통치기간중 활동했던 선지자로 이사야

(사1:11), 호세아(호1:1),미가(미1:1)등이 있다,

13. 히스기야
(여호와는 강하시다)

유다의 13대 왕(728-687)으로, 북IS의 패망과 앗수르의 남하 정책에 맞서야 하는 위기 정국을 신앙으로 헤쳐 나간 3대 현군(여호사밧, 요시야 등)중한 사람이다(왕하18-20장: 대하29-32장; 사36-39장). 초기 13년 동안 부친 아하스와 함께 통치하다가 부친의 무능력으로 실권을 장악한 뒤 부친이 폐쇄하고 더럽혔던 성전을 깨끗이 정화하고 성전 문을 다시

열고 여호와 예배를 회복시켰다. 이사야, 미가 선지자와 함께 백성의 영적 각성 운동을 벌이는 등 구약 시대 가장 신실한 통치자 가운데 하나로 인정되고 있다. 히스기야 재위 6년에 북IS은 곤경에 처해 있었다, 앗수르 왕 살만에셀 5세가 드디 어 사마리아를 포위 공격하였고, 사르곤 2세는 북IS을 멸망시킨 뒤 주민들을 메소보다미아 일대로 추방시켰다, 그후

앗수르 왕 산헤립은 남유다를 침공하여 히스기야는 통치자로서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온갖 수모를 감내해야 했지만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앗수르 군사는 하룻밤에 185000명의 전사자를 남기고 퇴각하였다(왕하18-19장). 그후 히스기야는 등창으로 추정되는 병에 걸려 거의 죽게 되었으나 하나님은 그의 간절한 기도에 응답하사 생명을 15년 동안 연장시켜

주셨다(왕하20:1-11). 이때 그의 아들 므낫세가 태어난 것으로 추정되는데 그는 히스기야 사후 부왕의 왕권을 이어받았 다(왕하20:20-21), 히스기야가 회복되자 바벨론 왕 므로닥 발라단은 히스기야를 축하하기 이하여 사절단 보냈다,

그러나 실제로는 히스기야를 설득하여 앗수르 세력에 대항할 비밀 동맹을 맺으려는 의도였다, 주의가 산만한 히스기야는 바벨론 사절에게 그의 모든 보고를 보여 주었는데, 이는 장차 바벨론에 의한 유다 왕국의 멸망을 암시하는 행위로 여겨 져 히스기야는 큰 책망을 받았다(왕하20:12-19), 하지만 히스기야는 평생 바른 신앙과 믿음으로 하나님을 가까이하며

나라를 바르게 통치한 성군으로 평가된다.

14. 므낫세
(잊게 해주다)

히스기야 왕과 헵시바의 아들로 유다 14대 왕위에 오른 자(697-642년경). 부왕과의 공동 섭정 기간(대략10년)을 포함하 여 55년간 통치한 최장수왕(왕하21:1). 철저한 개혁자였던 부왕과는 달리 바알과 아세라를 숭배하고, 성전 뜰에 일월성신 제단까지 두는 등 철저한 우상 숭배자였다(왕하21:1-6). 또 많은 신실한 자들과 선지자를 핍박하였는데, 전승에는 이사야 선지자를 톱으로 켜서 죽인 것으로 전해진다(왕하21:16: 히11:37), 이런 악행의 결과 앗수르의 침공을 받아 바벨론 지역 으로 끌려가기까지 했다(대하33:11-13). 그러나 포로에서 풀려난 후에는 회심하고 우상 철폐에 앞장섰으며 여호와 예배 를 부활시켰다(대하33:12-19)

15. 아몬
(신뢰할 수 있는 사람, 충실한 자)

므낫세 왕의 아들이자 요시야 왕의 아버지로 유다의15대왕(642-640 왕하21:18-19). 그는 22세에 등극하여 부친 므낫세 의 정책을 답습함으로써 우상을 숭배하고 악을 행하였다(왕하21:20-22: 대하33:22), 2년간 통치한 후 신복들에 의해

살해된다(왕하21:23-24)

16. 요시야
(야훼께서 고쳐주신다, 야훼께서 주소서 야훼께서 지지하신다)

유다 제16대왕으로 예루살렘이 멸망하기(BC586) 전에 유다 왕국의 마지막 종교적 부흥기를 주도하고 국가의 독립성을 유지했던 경건한 왕(대하34:1), 아몬 왕과 보스갓 아다야의 딸인 여디다 사이에서 태어났는데(왕하22:1)그가 태어나기

전에 이미 그 사역과 이름이 예언되었다(왕상13:1-2) 그는 8세에 즉위하여 31년간을 통치하면서 경건했던 여호사밧 과 히스기야 왕의 전통을 이어 여호와 신앙을 회복하기에 힘썼다, 그는 재위 8년 되던 해(16세)에 다윗의 하나님을 찾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행동하기를 원했고, 재위 12년 되던 해(20세)에 우상을 파괴하고 가증한 이교적 예배를 금하였다

(대하34:3). 그리고 재위 18년 되던해(26세)에 성전을 수리, 복구하면서 성전에서 율법책을 발견하였다, 대제사장 힐기야 에 의해 발견된 율법의 말씀을 들은 (요시야를 크게 감동시킨 말씀은 신28-30장)요시야는 옷을 찢고 통곡하면서 겸손히 여호와의 뜻을 물었다(왕하22:11-13), 이에 여선지자 훌다는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철저히 낮춘 요시야는 예언된 재앙을 만나지 않고 평안히 조상들과 함께 잠들 것이 약속되었다는 사실을 알려준다(왕하22:15-20), 요시야는 율법책의 내용을 깨달은 후 정결 작업에 더욱 박차를 가해 율법 중심의 제2의 종교개혁과 영적 대각성을 추진하게 된다.

이때 그는 백성들에게 율법을 읽어 그 언약을 온전히 좇게 하였고, 각종 산당과 우상들(바알,아세라,일월성신,몰록,드라빔 등)그와 관련 된 부정한 것을 모조리 파괴하고 빻아서 가루를 만들거나 불살랐고 신접한 자나 박수 등 모든 우상숭배자 들을 처형시켰다(왕하22:3-23:25). 이 개혁의 칼바람은 유다 지경을 넘어 당시 앗수르 치하에 있던 북이스라엘 지경까지 영향을 미쳤다(왕하17:28; 23:15-20), 이렇게 정결 작업을 진행한 뒤, 요시야는 유월절 절기를 성대하게 지킴으로써

종교개혁을 완수하게 된다(왕하23:22-23), 요시야에 의해 정착된 경건한 분위기는 예레미야의 사역 초기에 여러 모양으 로 영향을 미쳤음에 틀림없다, 한편, 성경은 요시야의 종교개혁이후 몇 년 동안의 행적에 대해서 침묵하고 있다 이 침묵 기간 동안 국제적으로는 바벨론이 신흥제국으로 부상하고 있었고 구세력인 앗수르는 점차 힘을 잃어가게 된다, BC609년 에 요시야는 앗수르를 도와 애굽의 바로 느고의 계획을 방해하려고 했다. 그는 느고의 평화 제안까지 거부하며 전쟁에 임했다가 므깃도 전투에서 치명상을 입고 39세의 나이로 사망하게 된다(왕하23:29: 대하35:20-24), 그의 죽음은 결국 유다 왕국의 몰락을 앞당기는 계기가 되었으며, 선지자 예레미야는 백성과 함께 요시야의 죽음을 애도하였고

(대하35:25-27), 요시야의 행적을 자신의 예언서에 남기게 된다(렘22:11-18), 요시야는 예루살렘 조상의 묘실에 안치되 고 그 아들 여호아하스가 뒤를 이었다(왕하23:30)

17. 여호아하스(살룸)

남유다의 17대왕(609년) 요시야를 이어 23세에 왕위에 올랐으나 3개월만에 폐위되어 가장 단명한 왕이 된다

(왕하23:30-31),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하다가(왕하23:32) 부친 요시야 왕을 전사시킨 애굽의 바로느고에게 포로로

잡혀가 그곳에서 죽고, 왕위는 그의 형에게 주어진다(왕하23:33-34), 예레미야와 에스겔도 이같은 비극적인 운명을 예언 한 바 있다(렘22:10-12: 겔19:2-4),에스겔은 그를 ‘젊은사자’라 불렀다(겔19:3), 일명 살룸(대상3:15)

18. 여호야김(엘리야김) (여호와께서 일으키시다)

경건한 왕 요시야의 둘째 아들이며 유다의 제18대왕(609-598년 대상3:15),유다를 침공한 애굽의 바로느고에 의해 3개 월 천하에 그친 아우 여호아하스(요시야의 넷째아들)의 뒤를 이어 25세에 왕위에 올랐다(왕하23:36),본명이 ‘엘리야김’이 었으나 그를 세운 애굽 왕 바로느고에 의해 ‘여호야김’으로 개명되었다(왕하23:24), 그는 조공을 요구하는 애굽에 공물을 바치기 위해 백성에게 중한 세금을 매겼고 그 일부를 착복했으며9렘22:13-190, 심판을 외치는 선지자 우리야를 살해했 고(렘26:21-23),예언의 말씀을 경시하여 바룩이 기록한 예레미야의 두루마리를 불태우는 등(렘36:9-24)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하였다(대하36:5,8) 한편 여호야김 제4년(605년경),갈그미스 전투에서 애굽이 바벨론에 대패한 이후, 유다는

바벨론의 지배 아래 있던 중, 선지자의 권유에도 불구하고 3년 후 반란을 일으켰다(왕하24:1 렘27:8-11),이에 바벨론의 느부갓네살이 유다를 침공하여 예루살렘을 함락하게 된다, 그후 여호야김은 느부갓네살에 의해 쇠사슬에 결박된 채 바벨 론으로 잡혀갔다(대하36:6), 그의 최후에 대해서는 알려져 있지 않으나 예레미야의 예언에서 보듯(렘22:13-23: 36:30-31),끔찍한 죽음을 맞았을 것으로 추정된다(왕하23:34-37: 24:1-6: 대하36:4-8),

19. 여호야긴(여고니야)
(여호와께서 성취 완성하신다)

여호야김의 아들로 유다 제19대왕(598년 왕하24:6-8), 18세에 왕위에 올라(대하36:9에서는 8세에 등극한 것으로 소개 됨) 불과 3개월만 통치했다(대하36:9), 그는 자기 부친을 본받아 악을 해하다가(왕하24:9)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의 공격을 받고 패하여 모친(느후스다)과 아내들과 신하들과 함께 포로로 잡혀갔다(왕하24:10-16), 예레미야는 이런 처참한 결망을 예언한 바 있다(렘22:24-30: 24:1-10), 여호야긴은 포로 생활 37년 만에 바벨론의 에월므로닥 왕이 즉위한 때에 석방되 어 명예를 회복하고 높임을 받게 된다(왕하25:27-30: 렘52:31-34), 일명 ‘고니야’(렘22:24: 37:1), ‘여고니야’(렘27:20: 28:4: 29:2), ‘여고냐’(대상3:16-17: 에2:6: 렘24:1 마1:11-12)

20. 시드기야(맛다니야) (여호와는 의롭다)

유다 왕국의 마지막 왕(597-586), 요시야 왕의 셋째 아들로 여호아하스의 친동생이며 여호야김의 이복동생(대상3:15),

어머니는 립나 예레미야(렘,선지자와 다름)의 딸인 하무달이다(왕하24:18), 시드기야는 조카이자 선왕인 여호야긴(여호야 김의 아들)이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간 후 느부갓네살 왕에 의해 21세의 나이에 유다 왕으로 세워졌다, 본래 이름은 ‘맛다 니야’인데, 바벨론식 이름인 ‘시드기야’로 개명했다(겔17:11-14),즉위 3년에 친 애굽파가 득세하자 선지자 예레미야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주변 군소 국가들과 함께 반바벨론 동맹을 결성하였다(렘27:3: 52:3),즉위 9년에는 바로 호브라가

애굽 왕이 되어 원군을 약속하자 하벨론에 반역을 꾀하였다(렘44:30), 그러자 즉시 바벨론의 침공이 재개되었고 애굽의 도움으로 잠시 위기를 모면하였다, 그러나 애굽이 퇴각하자 시드기야 9년 10월 10일 바벨론은 다시 예루살렘을 포위

공격하기 시작했다, 결국 시드기야 11년 4월 9일, 햇수로 만 3년 만에 예루살렘 도성은 함락되었고, 예루살렘 성내에서 는 기근과 아사로 수많은 사상자들이 속출했다(렘37:21: 애2:4),이런 상황에서 시드기야 왕은 포위망을 뚫고 아라바 광야 쪽으로 도주하였으나 결국 여리고 평지에서 바벨론 군사들에게 체포되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왕하25:4-6), 그리하여 바 벨론 야전 사령부가 있는 립나로 끌려간 시드기야는 두 아들은 죽임당하는 것을 목도해야 했고, 자신도 두 눈이 뽑힌 채 사슬에 묶여 바벨론으로 잡혀가 옥에서 여생을 마치게 되었다(왕하25:7: 렘52:11)






7월 11일(화) 호세아 14장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여호와께로 돌아오라(1절)


이스라엘아 네 하나님 여호와께로 돌아 오라 네가 불의함을 인하여 엎드러졌느니라.
Return, O Israel, to the LORD your God, For you have stumbled because of your iniquity.

여호와께로 돌아오라(Return to the Lord)
슈바 아도 아도나이(שׁוּבָה  עַד יְהוָה)

호세아 14장은 이스라엘의 회복을 위한 약속의 말씀입니다.
지금까지 강조된 심판주로서의 하나님보다 사랑의 하나님을 중점적으로 계시합니다.
마치 2:14-23을 연상케 하며 자비로우신 하나님을 보여주십니다.
선지자는 마지막 장에서 하나님의 계획이 심판이 아니라 구원임을 밝히며, 이스라엘의 궁극적 회복을 약속합니다.

여호와께로 돌아오라
- '...께로'에 해당하는 '아드'(5704)는 단순히 방향을 뜻하는 '엘'(413)과는 다른 말로서 어떤 귀착점, 목적지를 지적하는 뜻입니다.
따라서 '여호와께로 돌아오라'는 외침은 이스라엘로 하여금 하나님의 품안으로 온전히 돌아오게 하는 회개의 선포라고 하겠습니다.

* 엘(413)   אֵל

1. 어떤 것을 지향하다. 2. ~으로.  3. 이사야 38:2.
발음 / 엘 [ ’el ]
관련 성경 / ~에게, ~향하여, ~안으로, ~으로, 대하여(창30:40, 삼상3:12, 렘22:11), 때문에(삼상4:21), [부] 서로(렘36:16).
구약 성경 / 5464회 사용

* 아드(5704) עַד 

1. 열왕기하 9:18.  2. ~하는 동안.  3. ~까지.㉠ 창7:23
발음 / 아드[ ʽad ]
구약 성경 / 35회 사용


14:2 / 너는 말씀을 가지고 여호와께로 돌아 와서 아뢰기를 모든 불의를 제하시고 선한바를 받으소서 우리가 입술로 수송아지를 대신하여 주께 드리리이다

회개의 방법

가지고(3947)  라카흐(lâqach) לָקַח

1. 취하다.  2. 잡다. 3. 데리고 가다
발음 / 라카흐[ lâqach
관련 성경 / 취하다(창 2:22), 따먹다(창 3:22), 데려가다(창 5:24), 택하다(창 24:4, 민 3:12), 빼앗다(창 27:36, 신 3:4, 삼하 8:1), 불러오다(창 27:45, 렘 43:10), 넣다(창 31:34), 받다(창 33:10, 민 3:50), 데리다(창 34:17, 출 14:6), 빼어내다(출 6:7, 삿 3:21), 바르다(출 12:7, 레14:42), 이끌어 내다(출 14:11, 수 24:3), 대다(출 22:11), 가지다(출 29:5, 레 4:5, 수 4:20), 삼다(출 34:16, 신 21:11), 찍다(레 4:25, 민19:4), 돌리다(민 3:41), 모으다(민 11:16), 밀다(민 6:18), 가져오다(민 13:20, 삼하 1:10), 잡다(신 19:12, 삼하 12:4), 데려오다(민 23:11, 삿 11:5), 얻다(신22:15, 삿21:22), 거느리다(삿4:6, 대하16: 6), 장가들다(왕상7:8, 대하11:20), 탈취하다(삼상30:16, 렘20:5), 옮기다(왕하18:32, 삼하18:17), 빼앗기다(왕하13:25, 잠22:27), 양육하다(에2:7), 사로잡다(창14:12, 시68:18), 본받다(잠22:25), 거두다(시51:11, 사51:22), 청종하다(렘7:28), 옮겨가다(렘28:3), 찾아내다(암9:3), 가져가다(렘52:18), 찾다(창38: 20),잡아가지다(렘52:25), 인도하다(왕상20:33, 신4:34), 강권하다(왕하5:16), 접대하다(겔16:61), 이끌다(창19:15, 신30:4), 안다(호11:3, 왕상17:23), 축복하다(창48:9), 줍다(출5:11), 몰아가다(출12:32), 끌어오다(창20:31, 민19:2), 끌다(삼상6:7), 태우다(출4:20, 왕하9:17), 들다(출34:4, 왕하4:29), 끌어들이다(창34:2), 주다(창24:22, 호13:11), 이르다(창48:1), 따다(창40:11), 동원하다(출14:7), 쓰다(출28:5), 숨기다(수2:4), 짓다(민16 : 1), 노략하다(삿14:19), 부르다(삼상17:31), 머무르다(삼상18:2), 사다(왕상10:28, 대하1:16), 차지하다(삼하19:30), 적시다(왕하8:15), 거절하다(왕하5:16), 당하다(왕하11:2, 시75:2), 두다(왕하13:25), 잡히다(왕하20:18, 욥3:6), 싣다(왕하23:30), 내다(대하22:11), 세우다(대하23 : 1), 들리다(욥4:12), 끌리다(욥15:12), 영접하다(시49:15, 73:24), 따르다(시49:17), 치다(시50:9), 탐하다(잠6:25), 사로잡히다(사39:7), 보복하다(사47:3), 불려가다(사57:13), 갚다(렘20:10), 넘기다(렘37:17), 입히다(겔16:18), 간음하다(겔16:32), 꾸미다(겔18:8), 의지하다(미1:11), 던지다(슥11:13), 구원하다(잠24:11), 놀리다(렘23:31),잡혀가다(사52:5), 섞이다(출9:24).
구약 성경 /966회 사용



돌아와서(7725) 슈브(shûwb)  שׁוּב 

1. 방향을 돌리다.  2. 회복하다. 3. 돌이키다
발음 / 슈브[ shûwb ]
관련 성경 / 돌아가다(창 18:33, 룻 1:8, 대하 25:10), 오다(레14:39), 돌아오다(레22:13, 사52:8), 배반하다(민14:43), 돌이키다(신23:13, 호6:11), 떠나다(신23:14, 렘2:35), 돌다(수19:12), 함께 가다(삿11:8), 보고하다(삼상23:23), 물러가다(삼하11:15), 다시 이르다(왕하4:38), 그치다(삼상2:26, 느9:35), 남아 있다(사6:13),쉬다(사9:12), 변하다(사29:17), 뉘우치다(렘8:6), 회복하다(나2:2), 베풀다(슥8:15), 마르다(창8:7), 보내다(창27:45, 왕하1:13), 내보내다(신24:4), 불러올리다(삼상28:11), 돌아보다(렘5:3), 부르다(창26:18), 풀리다(창27:44), 주다(창30:31), 회복되다(출14:27,삿15:19), 돌려보내다(삼상29:4), 차리다(삼상30:12), 거두다(대하34:9), 중건되다(단9:25), 또 오다(단11:10), 쌓다(말1:4), 왕래하다(겔35:7, 슥7:14), 지나가다(미2:28), 유혹하다(사47:10), 소생시키다(시23:3), 회복시키다(시60:1), 벗어나다(겔38:8), 찾아오다(창14:16), 옮기다(창29:3, 잠24:18), 복직하다(창41:13), 가져오다(창44:8), 가리다(출34:35), 피하다(레26:26), 돌려주다(민5:7), 대답하다(민22:8), 명심하다(신4:39), 돌리다(신22:2), 가져가다(신28:60), 끌어가다(신28:68), 응하다(삿9:57), 드리다(삼상6:17), 갚아주다(삼하16:12), 데려오다(삿19:3, 왕상13:20), 데리고 오다(왕상13:23), 가져가다(왕상14:28, 대하12:11), 보답하다(대하32:25), 보응하다(잠24:12), 쫓겨나다(렘16:15),인도하다(렘24:6), 거래하다(겔27:15), 드리우다(슥13:7), 모셔오다(삼하19:43), 복종하다(느9:29), 회답하다(에4:13,15), 옮겨오다(렘28:6), 돌려주다(왕상8:6), 구원하다(시35:17), 심판하다(겔21:30), 빼앗기다(창14:16), 도망하다(삼하24:13), 거절하다(왕상2:16,20), 자문하다(왕상12:9), 물리치다(왕하18:24), 꽂다(대상21:27), 복명하다(대하34:16), 들여놓다(느13:9), 막다(사43:13, 렘2:24), 도로 넣다(창42:28), 행하지 아니하다(사58:13), 회복시키다(애1:19), 꾸어주다(겔18:8), 데리고 가다(겔47:1), 소성시키다(시19:7). [명] 왕래(겔1:14). [부] 도리어(잠26:27).
구약 성경 / 1059회 사용


아뢰기를(559)  아마르(
’âmar) אָמַר

1. 말하다. 2. 소명하다. 3. 권고하다
발음 / 아마르[ ’âmar ]
관련 성경 / 이르다(창 12:12, 삼하 18:12, 미3:1), 지시하다(창22:3, 26:2), 청하다(창24:43, 느8:1), 대답하다(창26:9, 대하10:10, 삼상17:58), 말씀하다(창31:29, 왕상2:4, 대상17:7), 묻다(창46 :33, 삼하9:4, 암6:10), 명을 받다(출6:26), 명하다(민15:38, 수11:9, 대하29:24), 전하다(삼하18:18), 아뢰다(신26:5, 대상21:8), 간구하다(신3:23, 대하6:37), 인정하다(신26:17,18), 부르다(왕상1:34,39, 대하23:11), 내리다(에 9:25), 선포하다(시40:10), 생각하다(수 22:24, 삼상27:1), 증거하다(왕상21: 10), 언약하다(대하7:18), 전파하다(에1:17), 권하다 (에3:4), 구하다(에6:4, 5:14), 속담을 말하다 (겔16:44), 외치다(대하23:13), 말을 전하다 (출18:6), 여쭈다(출32:31, 삿10:15), 울다(욥 39:25), 간청하다(왕하2:17), 결심하다(대하2:1), 논하다(민23:23), 맹세하다(렘16:14), 허락하다(에9:14), 칭하다(사4:3). [명] 대답 (창24:44), 말(창41:54, 삿12:4, 삼상20: 7, 시 42:3), 명(창43:17, 시106:34).
구약 성경 / 5298회 사용

너는...아뢰기를
- 회개의 방법을 가르쳐주는 말씀이다.
즉 이스라엘로 하여금 입술의 고백과 간구로써 회개하며 하나님 앞에 자신들의 용서를 빌도록 권고하는 부분이다.
한편 본 구절의 '가지고'(3947. 케후), '돌아와서'(7725. 쉬부), '아뢰기를'(559. 이므루)등은 모두 2인칭 복수 단수 명령형이다.
이는 본 구절의 회개의 권고가 호세아 선지자에 의해 이스라엘에게 강하게 촉구되어지는 것임을 엿보게한다.
또한 '여호와께로'의 '...께로'란 히브리어로 '엘'(413)인데, 1절과는 달리 하나님께 방향을 돌리도록 촉구하는 뜻을 담고 있다.

선한바를 받으소서
- '선한 바'란 히브리어로 '토브'(*)인데 '아름다운'(창 45:18;신 6:18,19;왕상 1:42), '좋은'(창 18:7;수 9:25;시 85:12)등의 뜻을 갖는다.
히브리인들에게 있어서 이 말은 가치있고 유익하다는 뜻을 함축한다.
여기에 대해 카일(Keil)은 '이스라엘로 하여금 드려지도록 권고되어지는 입술의 제사'라고 말한다.
실제로 문맥의 흐름으로 볼 때 '선한 바'란 후반절에서 언급되어지는 입술로 제사드리는 것을 암시한다.

* 2896. 선한바(토브. tôwb) טוֹב

1. 좋은.  2. 비옥한. 3. 정직한
발음 / 토브[ tôwb ]
어원 / 2895에서 유래
관련 성경 / 좋은(창 1:4, 삼상 2:24, 겔 34:14), 아리따운(창24:16, 26:7), 선한(창26:29, 출18:17), 나은(창29:19, 출14:12, 삿8:2), 충실한(창41:5), 좋게 여기는(창49:15, 삼하24:22), 잘 생긴(출2:2, 삼상9:2), 아름다운(출3:8, 신6:10, 민14:7), 선량한(신6:18), 기뻐하는(신23:16),즐거운(삿16:25), 귀한(룻4:15), 옳은(삼상9:10, 왕상18:24), 칭찬하는(삼상19:4), 선대하는(삼상24:18, 시145:9), 총명한(삼상25:3),어진(왕하10:3), 보배로운(왕하20:13, 스8:27), 존귀한(대상29:28), 즐거워하는(대하7:10), 후대하는(대하10:7), 감사하는(대하30:22, 시136:1), 지극히 선한(스3:11), 흥왕하게 하는(느2:10), 충성된(에7:9), 즐겨하는(에8:5), 선히 여기는(에9:13), 복된(욥7:7),형통한(욥21:13, 시106:5), 잘되는(시112:5), 복을 얻는(시119:122), 정직한(시125:4), 유익한(전5:11), 진기한(욜3:5), 풍부한(슥1:17).[명] 아름다움(창6:2), 선(창44:4, 삼하16:12),은혜(출18:9, 시68:10), 복(민10: 29, 신6:24,왕상10:7), 좋음(민13:19), 행복(신10:13), 형통(신23:6, 스9:12), 은혜(삿8:35, 대하6:41),은총(삼상2:26, 시86:17, 잠22:1), 순금(창2:12, 대하3:5), 선행(느6:19), 주흥(에1:10), 이익(에10:3), 은택(시65:11), 유익(시119:71), 복록(잠12:14, 13:2), 진실(사38:3), 희락(슥8:19). [부] 임의로(삿19:24), 평안히(삼상24:19), 즐거이(에7:9), 뜻대로(에8:8).
구약 성경 / 495회 사용


14:3 / 우리가 앗수르의 구원을 의지하지 아니하며 말을 타지 아니하며 다시는 우리의 손으로 지은 것을 향하여 너희는 우리 신이라 하지 아니하오리니 이는 고아가 주께로 말미암아 긍휼을 얻음이니이다 할찌니라

* 7355. 긍휼을(라함. râcham) רָחַם

1. 사랑하다
2. 피엘형
3. 푸알형 ׃רֻחַם 자비를 얻다
발음 / 라함[ râcham ]
관련 성경 / 사랑하다(시 18:1), 긍휼히 여기다(신 13:17,왕하 13:23, 사 49:10), 자비하다(시116:5), 불쌍히 여기다(왕상8:50, 시103:13, 사27:11).[명] 자비(렘6:23, 애3:32), 긍휼(겔39:25, 합3:2), 로루하마(호1:8), 루하마(호2:1).
구약 성경 / 47회 사용




이스라엘의 회복 약속(호세아 14장)


14장의 내용을 크게 두 부분으로 구성된다.

전반부 / 회개를 촉구(1-3절)
후반부 / 번영과 축복을 예고(4-9절)
죄악을 치유한 후에 누릴 수 있는 은혜

그러나 이스라엘은 선지자 호세아의 외침을 듣지 않고 거부하므로 멸망의 길로 달려갔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회개하고 돌아을 것을 명하시면서 그들이 돌아오면 하나님께서 축복을 내려 주실 것을 약속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이슬이 되어 주시겠다고 하셨는데, 이는 그들로 축복의 열매를 맺게 하실 것을 의미합니다. 


사랑의 선지자 호세아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의 하나님에 대하여 선포합니다.
왜냐하면 징계받고 심판을 받아 죽어 마땅한 백성들이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결국 그들에게 은혜를 입게 하셨기 때문입니다.
이와 같은 은혜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비롯한 족장들에게 약속하신 언약에 근거한 것이었습니다.
이러한 은총을 구속사적인 의미로 해석해 볼 때 구속함을 입은 성도들 모두에게 해당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을 통하여 택하신 자녀 모두를 회복시키실 것입니다.
이것은 성도들의 소망의 근거이기도 합니다.
성도들은 하나님이 베푸시는 자비와 은혜 안에서만이 참 평안을 누릴 수 있습니다.
우리는 죄와 죄의 오염을 제거시킬 수 있는 분도 오직 하나님 한 분이라는 사실을 깨달아야 합니다.
성도가 참 평안을 누릴 수 있는 길은 하나님의 은혜를 계속적으로 받는 상태에서만이 가능하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형통(亨通)하다 

형통(형통)에는 두 종류의 형통이 있습니다.

첫째, 환경적인 형통(세속적인 형통)

사전의 정의처럼 ‘하는 일마다 잘 되고 번성하는 것’을 말합니다.
코로나19에도 가게가 잘 되고 매상이 많아집니다.
자녀가 명문대학에 올 장학금을 받으며 입학을 합니다.
졸업 후에 이름있는 회사에 들어가 승승장구합니다.
결혼을 하고 예쁜 손주도 태어납니다.
이러한 것을 우리는 형통이라고 합니다.

둘째, 성경적인 형통(영적 형통)

요셉은 형들의 시기로 애굽의 노예로 팔려갔으며, 보디발 장군의 집에서 성실히 일하여 인정을 받고 가정 총무가 되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여주인의 유혹을 뿌리침으로 증오와 모함으로 감옥의 죄수가 되었습니다.
불행이요 비극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그가 형통하였다라고 말합니다.

“간수장은 그의 손에 맡긴 것을 무엇이든지 살펴보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심이라 여호와께서 그를 범사에 형통하게 하셨더라” (창세기39:23)

성경에서 말하는 형통이란?
단순히 하는 일마다 잘 되고 번성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와 함께 하시느냐 하시지 않느냐를 형통과 불행의 기준으로 삼습니다. 아무리 세상적으로 성공하였어도 하나님이 함께 하시지 않으면 진정한 형통이 아닙니다.
요셉처럼 어려움에 처하였어도 하나님이 함께 하실 때 진정한 형통이라는 것입니다.

요셉에게 쓰인 “형통”은 히브리어로 “찰라흐(צלח)” 라고 합니다.
“찰라흐”는 “돌진하다. 뚫고 나아가다”라는 뜻입니다.
우리가 세상에 살면서 때로 어려움을 만납니다.
실패하고 넘어집니다.
사업의 문을 닫기도 하며 직장을 그만두기도 합니다.
세상의 관점에서 보면 고난과 어려움이요 실패요 좌절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함께 하사 그 모든 어려움과 난관을 돌진하여 뚫고 나아갈 때 형통이라고 합니다.
쇠사슬에 묶여 애굽으로 끌려갈 때에도, 보디발 장군의 집에서 노예로 지낼 때에도, 억울하게 감옥에 갇힌 절망과 좌절의 상황에도 이겨나갈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께서 함께 하사 찰라흐의 힘이 주어졌기 때문입니다.
마침내 그는 애굽의 총리가 되었습니다.

성경은 “여호와께서 그를 범사에 형통하게 하셨더라”고 증거합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은 형통의 삶을 살고 있나요?
때론 건강을 잃을 수도 있습니다.
매달 렌트비와 갚아야 하는 융자금에 어려움을 겪습니다.
사업장의 어려움과 심지어 일자리를 잃고 새로운 일자를 찾아야 함에 잠 못 이룰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때에도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면 우리는 형통한 자입니다.
모든 어려움과 난관을 뚫고 나아갈 수 있도록 하나님이 함께 하사 “찰라흐의 형통”을 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코로나19의 기나긴 터널로 인해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나요?
찰라흐의 하나님이 함께 하사 그 모든 것을 이기고 기쁨의 춤을 출 날이 오게 될 것입니다.

<모래위의 두 발자국>
어느 날 밤 난 꿈을 꾸었습니다.
주님과 함께 해변을 걷는 꿈이었습니다.
모래 위에 두 발자국이 남겨졌습니다.
하나는 주님의 것이고 다른 하나는 저의 것이었습니다.
인생의 황혼이 되어 걸어 걸었던 뒤를 돌아보았습니다.
가장 힘들고 고통스러울 때 발자국이 하나만 있었습니다.
섭섭한 마음으로 주님께 물었습니다.
“항상 함께 하시겠다고 약속하셨는데 가장 어렵고 힘들 때 주님은 어디로 가셨나요?”
주님이 미소를 지으며 말씀하셨습니다.
“사랑하는 자녀야, 나는 너를 홀로 두고 떠난 적이 없단다.
시련과 고통의 순간에 보인 그 발자국은 너를 업고 간 내 발자국이란다.”

어느 날 난 다시 꿈을 꾸었습니다.
그 때에도 모래 위에 찍힌 발자국을 보았습니다.
어렵고 힘들었던 시간, 여전히 하나 밖에 없는 발자국이었습니다.
“주님, 정말 저 때문에 많이 힘드셨군요.”
주님께서 “그래 그때는 정말 힘들고 어려웠지. 엄청난 폭풍우가 몰아쳤었지!”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그 후에 지그재그로 엉망이 된 두 사람의 발자국이 보였습니다.
“이건 무슨 발자국이죠?” 주님이 기쁨 가득한 얼굴로 대답하셨습니다.
“ 모든 어려움이 지난 후 우리가 함께 즐거워 춤을 추었었지.”

어렵고 힘들 때 전능의 하나님, 사랑의 예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찰라흐”의 형통, 능히 뚫고 이겨나가도록 도와 주사 마침내 모든 어려움과 난관을 극복한 후 우리는 주님과 함께 기쁨의 춤을 출 날을 맞이할 것입니다.
그 날을 소망하며, 어떤 어려움과 힘든 일에도 믿음으로 나가길 바랍니다.

형통하다(亨通) - 찰라흐, 샬라흐

6743.찰라흐(tsâlach) צָלַח

צָלַח 스트롱번호 6743
1. 돌진하다.  2. 침범하다. 3. 잘되어가다
발음 / 찰라흐[ tsâlach ]
관련 성경 / 임하다(삿 14:19, 15:14, 삼상 10:6), 건너다(삼하 19:17), 건너가다(삼하 19:18), 형통하다(대하 20:20, 렘 12:1, 겔 17:15, 대하20:20), 감동되다(삿 14:6, 삼상 11:6, 16:13), 힘있다(삼상 18:10), 성취하다(사 53:10), 쓸데없다(렘 13:10), 번성하다(겔 17:9,10), 평탄하다(창 24:21, 40), 행하다(단 11:36), 윤택하다(렘 5:28), 승리하다(렘 32:5), [명] 소용(겔 15:4).
구약 성경 / 65회 사용

뜻풀이부

  • 1. 원형 돌진하다, 통하여 가다, 삼하19:18(17)
  • 2. 원형 침범하다, [עַל을 수반하여] 여호와의 영이 사람에게 내리다는 의미로 사용되어, 삿14:19, 15:14, 삼상10:10, 11:6,[אֶל을 수반하여] 삼상16:13, 18:10, 하나님 자신이 인간에게 스스로 나타나심에 사용되어, 암5:6.
  • 3. 원형 잘되어가다, 번영하다, 성공하다, 시45:5(4), 사53:10, 렘22:30, 식물이 번성하다, 겔17:9,10, [לְ을 수반하여]~에 적당한, 알맞는, 렘13:7,10.
    • a. 원형 히필형
    • b.원형 번영하다, 성공하게 하다. ㉠ [~의 일에] 창24:21,56, 39:3,23. ㉡ [인칭대명사의 목적격을 수반하여]대하26:5, [לְ를 수반하여] 느 1:11, 2:20
    • c.원형 잘 성취하다, 끝내다, 신 28:29, 삿 18:5, 왕상 22:12, 대하 7:11, 시 37:7, 잠 28:13, 렘 2:37, 단 8:12.

7971. 샬라흐(shâlach) שָׁלַח

שָׁלַח 스트롱번호 7971

1. 창세기 38:17.  2. 창세기 43:8. 3. 창세기 37:13
발음 / 샬라흐[ shâlach ]
관련 성경 / 보내다(창 27:45, 삼하 11:6, 느 2:5), 펴다(출 9:15, 왕상 13:4, 시 144:7), 대다(출 24:11, 에 9:10), 들다(삼상 26:9, 겔 2:4), 전하다(왕하 17:13, 느 6:19, 슥 7:12), 주다(창 38:17, 욜 2:19), 달리다(에 8:7), 청하다(욥 1:4), 베풀다(시 111:9, 옵 1:7), 훼방하다(사37:17), 편지하다(렘 29:28), 떠나다(신 9:23), 돌이키다(삼상 22:17), 앉다(에2:21), 알리다(에3:6), 암살하다(에6:2), 죽이다(에9:2), 가다(왕하18:17, 느 8:10), 불러오다(렘 9:17), 넘치다(욜 3:13),내밀다(창 8:9, 삿 6:21), 어긋맞기다(창 48:14), 듣다(수 11:1), 던지다(삼상 17:49, 전11:1), 조상(弔喪)하다(삼하 10:2), 통보하다(왕상 21:14), 답장하다(대하 2:11), 부르다(스 8:16), 잡다(느 13:21), 날리다(시 18:14), 내리다(출 9:14, 겔 14:21), 보다(렘 43:10), 펴지다(겔 2:9), 놓다(출 22:5, 레 14:53), 돌아오다(삿 20:48, 암 4:10), 갚다(삼상24:19), 내보내다(신 24:4), 이르다(레 16:22), 벗다(출 30:11), 풀다(욥 39:5), 떠내다(사 50:1), 내쫓다(렘 3:8), 옮기다(렘 24:5, 40:1), 흐르다(겔 31:4), 내놓다(창 8:10), 나가다(창 18:16), 버리다(신 22:29), 쏘다(삼상 20:20), 들리다(느 8:12), 쫓아내다(레 18:24, 사 27:8), 풀어주다(사 58:6), 쫓아내보내다(렘  15:1), 끌러주다(사 58:6), 떠나가다(창 26:27), 이혼하다(말 2:16), 대접하다(민 22:40), 던져버리다(왕상 9:7), 미치다(시 80:11), 버려두다(시 81:12), 꾀하다(잠 6:14), 일으키다(잠 16:28), 붙다(사 10:16), 뻗치다(렘 17:8), 달아내리다(렘 38:6), 자라다(겔 44:20), 이간하다(잠 6:19), 뿌리다(사32:20), 제하다(렘 28:16), 따르다(삿 5:15), 버려두다(잠 29:15), 흩어지다(사 16:2), 보냄을 받다(단 10:11), 손가락질(사 58:9).
구약 성경 / 846회 사용

뜻풀이부

  • 1.원형 [절대형] 창38:17.
    • a. 원형 [사람을 대격으로 수반하여] 창43:8, 45:5, 사6:8, 겔17:7.
    • b. 원형 [אֶל을 수반하여] 창37:13, 출3:10,7:16.
    • c. 원형 [부정사에 לְ를 수반하여] 민14:36,사61:1.
    • d.원형 [사람에 אֶל을 수반하여] 에9:20,30, 렘29:25.
    • e. 원형 [사람에 לְ를 수반하여] 창45:23
  • 2. 원형 [특별한 의미로]
    • a. 원형 메시지를 보내다, 창38:25, 왕상20:5, 왕하5:8, 잠 26:6.
    • b. 원형 ㉠ [하나님께서 재앙을] 수24:12.㉡ [구원의 손길을] 시20:3(2).㉢ [신탁, 하나님의 말씀, 계시를] 시107:20, 사9:7(8).
  • 3. 원형 떠나게 하다, 물리치다, 처리하다, 왕상13:4, 시50:19, 아5:4.
  • 4. 원형 보내다, 뻗다.
    • a. 원형 [도움의 손을] 사58:9.
    • b. 원형 [채찍을] 삼상14:27, 시110:2.
    • c.원형 [주]수동태분사 שָׁלוּחַ: 창49:21.
    • d. 원형 니팔형: 보내지다.
    • e. 원형 [주]부정사 절대형 נִשְׁלוֹח 에3:13.
    • f. 원형 피엘형 שִׁלַּח
    • g. 원형 [대리자로] 보내다, 대리로 임명하다,사43:14. ㉠ [사람을 대격으로 수반하여] 창19:13, 28:6, 사10:6. ㉡ [עַל을 수반하여] 대하32:31. ㉢ [בְּ를 수반하여] 신7:20, 32:24, 왕하17:25, 시78:45. ㉣ [אֶל을 수반하여] 겔14:19. ㉤ [עַל을 수반하여] 겔5:17
    • h. 원형 물러가게 하다, 떠나게 하다, 창32:27,출8:28(32), 레14:7. ㉠ [갇힌 자를] 석방하다, 왕상20:42,슥9:11. ㉡ [딸을] 시집보내다, 삿12:9.
    • i. 원형 [강한 의미로] 던지다. ㉠ [활을] 쏘다, 삼상20:20. ㉡ [불 재앙을] 암1:4.
    • j. 원형 [힘차게] 던지다, 욥30:11, 전11:1.
    • k. 원형 내쫓다, 창3:23, 왕상9:7, 사50:1.
    • l. 원형 [특별한 의미로] 이혼하다[아내를 내쫓다], 신21:14, 22:19,29, 렘3:8.
    • m. 원형 푸알형
    • n. 원형 보내지다, 대리로 임명되다, 삿5:15,잠17:11
    • o. 원형 해고되다, 내어보내지다, 창44:3, 사50:1.
    • p. 원형 버려지다, 사27:10, 잠29:15.
    • q. 원형 쫓겨나다, 흩어지다, 사16:2.
    • r. 원형 히필형: [전염병이나 재난을] 보내다, [בְּ를 수반하여] 레26:22, 암8:11.






7월 10일(월) 호세아 13장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구원할 자(10절)



전에 네가 이르기를 내게 왕과 방백들을 주소서 하였느니라 네 모든 성읍에서 너를 구원할 자 네 왕이 이제 어디 있으며 네 재판장들이 어디 있느냐.
Where is your king, that he may save you? Where are your rulers in all your towns, of whom you said, 'Give me a king and princes'?

"구원할 자(your rulers. )"
웨야쉬오카( וְיֹושִׁיעֲךָ)

3467. 구원하다(야솨. yâsha) יָשַׁע

1. 넓다
2. 히필형 הוֹשִׁיעַ. 미완료형 יוֹשִׁיעַ
3. 해방하다
발음 / 야솨[ yâshaʽ ]
관련 성경 / 구원하다(민10:9, 삼하22:42, 렘17:14), 구원을 얻다(렘8:20, 삼하22:4, 렘4:14), 구하다(렘30:7), 돕다(삼하10:19, 대상19:12), 보복하다(삼상25:26,31), 건져내다(삿2:16), 이기게 하다(대상18:6), 보호하다(시36:6), 도와주다(신28:31). [명] 구원(사45:17, 신32:29, 습3:17), 구원자(삿3:9, 왕하13:5, 시106:21).
구약 성경 / 205회 사용

1. 동사 - 넓다, 광대하다, 넉넉하다, 풍부하다, 풍족하다.
  • a. 동사 히필형 הוֹשִׁיעַ. 미완료형 יוֹשִׁיעַ
  • b. 동사 해방하다, 석방하다, 보존하다, 보호하다, 유지하다, 삿2:16,18, 3:31, 6: 14,15,31,36, 시7:2(1), 34:7(6), 44:8(7)
  • c. 동사 돕다, 구제하다, 구원하다, 출2:17, 수10:6, 삼하10:19, 시3:8, 6:5(4), 31:17(16), 72:4, 86:16, 116:6, 사45:20, 겔34:22.
  • d. 동사 승리하게 하다, 이기게 하다, 신20:4, 수22:22, 삼하8:6,14.
  • e. 동사 니팔형
    f. 동사 자유롭게 되다, 해방되다, 보호되다, 민10:9, 시33:16
  • g. 동사 도움을 받다, 구원받다, 안전하게 되다,정복하다, 시80:4(3),8(7), 신33:29,사30:16, 45:17.
  • h. 동사 [주]분사 נוֹשָׁע: 정복자, 슥9:9, 시33:16.
호세아서의 내용은 크게 두 부분으로 구분합니다.

첫째는 전반부(1-3장)
선지자 호세아의 개인적인 가정사(家庭事)에 대한 이야기로 음란한 여자를 아내로 맞이하라는 명령입니다.
이러한 명령은 곧 북 이스라엘 왕국이 하나님을 떠나 우상을 숭배한는 타락한 신앙에 대한 경고라고 하겠습니다.

둘째는 후반부(4-14장)
북이스라엘 백성의 심각한 타락을 구체적으로 지적하며 회개를 촉구하고 있습니다.

1-8절은 북이스라엘의 대표적인 지파인 에브라임이 앞장서서 우상숭배를 한 것에 대한 경고와 그런 일들이 조상 대대로부터 있었음을 경고합니다.

(1) 에브라임이 말을 하면 사람들이 떨었도다 그가 이스라엘 중에서 자기를 높이더니 바알로 말미암아 범죄하므로 망하였거늘

에브라임은 본래 요셉의 두 아들 중에서 둘째입니다.
솔로몬왕이 죽은 이후에 이스라엘은 남유다와 북이스라엘로 갈라졌습니다.
그 때 북이스라엘의 초대왕이 여로보암이었는데, 그가 에브라임 지파였습니다.
그래서 ‘에브라임’은 성경에서 ‘북이스라엘 전체’를 가리키는 말로 주로 사용되곤 합니다.
마치 ‘시온’은 본래 예루살렘 근처의 작은 산(언덕)의 이름이지만 주로 ‘예루살렘’을 가리키는 것으로 사용되는 것과 동일한 이치입니다.
그래서 북이스라엘을 대표하는 ‘에브라임 지파’가 하나님을 섬기는 의로운 길을 가는 본을 보이지 못하고, 바알을 섬기는 불의한 길을 가는 본을 보이니까 온 이스라엘도 그렇게 가게 되었다고 말합니다.
‘바알’의 뜻은 ‘주인’인데, 이스라엘의 주인은 하나님이심에도 불구하고, 바알을 주인으로 섬김으로 말미암아 망하는 길로 갔다고 고발하고 있습니다.

(2) 이제도 그들은 더욱 범죄하여 그 은으로 자기를 위하여 우상을 부어 만들되 자기의 정교함을 따라 우상을 만들었으며 그것은 다 은장색이 만든 것이거늘 그들은 그것에 대하여 말하기를 제사를 드리는 자는 송아지와 입을 맞출 것이라 하도다

북이스라엘 백성들은 바알을 섬기는 것에 만족하지 못하고, 또 다른 우상들을 만들었습니다. 사도바울이 에베소에서 전도할 때에 만났던 사람 중에 ‘데메드리오’가 있었습니다. 그는 아데미(아르테미스) 여신의 신전을 조각하여 판매하는 종교사업가였습니다. 그처럼 고대에 우상 세공업자들은 상당히 전문직이었고, 우상 조각하는 일은 고소득의 원천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만군의 여호와’이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전쟁의 신, 싸움에서 승리하게 하시는 분으로 여겼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이 가나안을 정복할 때는 ‘만군의 여호와’가 필요했지만, 완전히 정착한 후에는 ‘풍요의 신’이 필요했습니다. 그래서 바알을 섬겼습니다.
그리고 그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고 생각하여, 자기들이 생각하는 풍요의 신을 또 만들었는데, 그것이 ‘송아지 우상’이었습니다. 이스라엘 자손들이 출애굽하여 광야에 있을 때, 모세가 십계명을 받기 위해서 시내산에 올라가고, 그들은 아론과 더불어 출애굽 때 가져온 금으로 우상을 만들었습니다. 자기 아내와 자녀들의 귀에 있던 금고리를 모아 만든 것이 송아지 우상이었습니다. 그리고는 “이스라엘아! 이 신이 너희를 애굽에서 이끌어 낸 너희의 신이다.”라고 외치며 선언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형상을 송아지의 모습으로 만든 것입니다.
애굽의 대표적인 신 중의 하나가 ‘아피스(Apis)’인데, 그것이 풍요의 신이며, 그 모습이 ‘황소’였습니다. 나일강이 범람하여 만드는 삼각지(델타)는 세상에서 가장 비옥한 땅 중에 하나입니다. 아브라함의 조카 롯이 소돔 땅을 바라보니, 거기가 ‘애굽 땅 같았다’라고 했습니다. 그것은 굉장히 비옥한 땅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호세아 선지자 당시까지 사람들은 송아지 신상에 입을 맞추며 존경을 표하며, 충성을 다짐하는 어리석은 일을 그치지 않고 있었던 것이었습니다.

(3) 이러므로 그들은 아침 구름 같으며 쉬 사라지는 이슬 같으며 타작 마당에서 광풍에 날리는 쭉정이 같으며 굴뚝에서 나가는 연기 같으리라

우상숭배하는 사람들의 말로가 ‘구름’과 같고, ‘이슬’과 같으며, ‘쭉정이’와 ‘연기’와 같다고 합니다. 이 네 가지는 모두 일시적이라 금방 사라지는 것들이어서 덧없음과 허무함을 뜻합니다. 또한 이것들은 모두 눈에 보이는 것들이어서 실상과 같이 느껴집니다. 그러나 그렇게 오래 지나지 않아서 허상이었다는 것들을 깨닫게 됩니다.
우리의 삶과 신앙생활에도 동일합니다. 내가 실상이라고 생각했던 것들, 틀림이 없고 분명하다고 생각했던 것들이 얼마 지나지 않아서 허상으로 밝혀지고, 모호하고 흐릿하게 바뀌는 것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우리가 보았던 사람들의 모습이 그러할 때가 있고, 가진 것이 그러할 때가 있고, 앉은 자리도 그러할 때가 있고, 사람들과의 관계도 그러할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호세아 선지자는 아주 분명한 ‘실상’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4) 그러나 애굽 땅에 있을 때부터 나는 네 하나님 여호와라 나 밖에 네가 다른 신을 알지 말 것이라 나 외에는 구원자가 없느니라

히브리어성경으로 이 구절의 첫 단어이자, 강조되는 단어는 ‘나는’입니다.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에서 꺼낸 것도 여호와 하나님이시며, 그들과 언약을 맺어 자기 백성으로 삼으신 분도 여호와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즉 세상에 있는 나, 여호와 하나님 이외의 모든 신은 다 ‘허상’이고, 오직 나, 여호와 하나님만 ‘실상’이다는 의미입니다.

(5-6) 내가 광야 마른 땅에서 너를 알았거늘 그들이 먹여 준 대로 배가 불렀고 배가 부르니 그들의 마음이 교만하여 이로 말미암아 나를 잊었느니라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자손들을 출애굽하게 하시고, 그 다음에는 ‘이제 너희들 알아서 살아라’라고 말씀하지 아니하고, 아무것도 없는 광야, 아무데도 기댈 데가 없는 마른 땅에서 그들을 아셨다(남편과 아내가 서로 아는 인격적인 교제)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자손들이 광야를 다 지나고 나니까 딴소리를 했습니다. 마치 부모가 자녀들을 온 정성을 다해서 젖 먹이고, 기저귀 갈아주고, 밥 먹이고, 교육을 받게 하여 다 키워 놓으니까 하는 말이 “해 준 게 뭐 있어요?”, 이웃에 사는 용돈 한 번 준 사람보고, “그 분이 나를 키웠어요, 그 분이 훨씬 더 좋아요.”라고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이스라엘 자손들이 광야를 지날 때,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만나를 내려 주시고, 반석에서 물이 나게 해 주시며, 구름기둥과 불기둥으로 인도하셨습니다. 그리고 가나안을 차지할 때도, 그 전에 전쟁을 해 보지도 않은 노예 출신의 오합지졸 군대가 연전연승을 거두게 해 주셨습니다. 그렇게 하나님께서 역사하신 것입니다. 그렇게 가나안 땅에 정착하게 되니까, 그들은 하나님을 바알로, 자신들이 만든 우상으로 바꾸어 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7-8) 그러므로 내가 그들에게 사자 같고 길 가에서 기다리는 표범 같으니라 내가 새끼 잃은 곰 같이 그들을 만나 그의 염통 꺼풀을 찢고 거기서 암사자 같이 그들을 삼키리라 들짐승이 그들을 찢으리라


하나님께서는 우상숭배하는 자기 백성들을 향하여, 당신이 맹수와 같이 바뀌어 심판하시겠다고 하십니다. 사자는 백수의 제왕이라고 불립니다. 잡히면 빠져나가기가 정말 어렵습니다. 또 표범은 모든 고양잇과 동물 중에서 사냥 능력이 가장 뛰어납니다. 그리고 곰도 굉장히 강한 맹수입니다. 사자나 호랑이도 곰과 일대일로 싸우면 이길 수 없습니다. 그런데 새끼를 빼앗긴 암콤은 더 말할 필요가 없습니다. 더 나아가 들짐승들도 사납기는 마찬가지입니다. 하이에나나 들개들은 떼로 다니기 때문에 사자보다 강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들에게 노하기를 더디 하시며 인애를 베푸시는 분이신데, 이런 맹수와 같이 되신다고 하는 것은, 자기 백성들이 우상숭배와 불순종하는 것을 보니 속이 너무도 상하신다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이런 맹수와 같은 사람들을 보내어서 징계하심을 통해서 다시 세우시겠다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의 징계(9-16절)
9-16절은 하나님을 버리고, 세속적 가치관을 따랐던 삶이 얼마나 허망한지와 그에 따른 하나님의 징계가 있을 것에 대해서 증거합니다.

(9-11) 이스라엘아 네가 패망하였나니 이는 너를 도와 주는 나를 대적함이니라 전에 네가 이르기를 내게 왕과 지도자들을 주소서 하였느니라 네 모든 성읍에서 너를 구원할 자 곧 네 왕이 이제 어디 있으며 네 재판장들이 어디 있느냐 내가 분노하므로 네게 왕을 주고 진노하므로 폐하였노라

이스라엘은 패망하였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싸워야 할 대상과 싸운 것이 아니라, 자신을 보호해 주는 하나님을 향해 칼을 겨누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은 아직 망하지 않았음에도 패망하였다고 선언합니다. 아군과 적군을 구분하지 못하면, 싸우지 않아도 진 것과 마찬가지이고, 서 있어도 무너진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또 이스라엘 백성들이 왕과 지도자들을 구할 때에 하나님께서 분노하심으로 왕을 주고, 진노하심으로 폐하였다고 말씀하심에서, 자연스럽게 사울왕이 떠오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에게 오래전에 장차 때가 되면 왕을 주실 것이라고 약속하셨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그 때까지 기다리지 못하고, 주변 나라들과 같이 왕의 제도를 구했습니다. 그렇게 세워진 사울왕은 언제나 하나님의 길에 순종하려고 하지 않고, 자기가 만든 길만을 고집했습니다.
사울이 왕으로 뽑혔을 때, 이스라엘 온 백성은 환호성을 지르며 “임금님 만세!”를 외쳤습니다. 그 모습을 개인으로 축소하면, 기도를 응답받았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니었습니다. 시편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여호와께서는 그들이 요구한 것을 그들에게 주셨을지라도 그들의 영혼은 쇠약하게 하셨도다(시 106:15)”
우리가 올려드린 기도가 응답을 받느냐 아니냐도 우리의 관심사이지만, 더 관심을 기울이고 중요하게 여겨야 하는 것은 우리의 기도와 삶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이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12) 에브라임의 불의가 봉함되었고 그 죄가 저장되었나니

무슨 의미인지 빨리 다가오지 않는데, 새번역성경은 이렇게 표현합니다. “에브라임의 허물을 적은 문서를 모두 모았고, 죄상을 적은 기록을 모두 보관하고 있다.” 북이스라엘이 죄 위에 죄를 또 짓는, 계속해서 죄를 쌓아가고 있다는 의미입니다.

(13) 해산하는 여인의 어려움이 그에게 임하리라 그는 지혜 없는 자식이로다 해산할 때가 되어도 그가 나오지 못하느니라

여인이 결혼하여 임신하고, 출산하는 것은 큰 복입니다. 그런데 임신한 태아가 해산할 때가 되었음에도 나오려고 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사람의 임신기간은 40주, 280일 정도입니다. 그렇다고 모든 태가 280일째 되는 날에 세상으로 나오는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임부(妊婦)들은 40주가 가까워지면 초긴장을 하게 됩니다. 또 이미 출산의 경험이 있다면, 그 때의 고통을 알기 때문에 더 긴장하고, 두려워하게 됩니다. 그런데 만약 분만(출산)예정일이 2주가 지났음에도, 태아가 나오려고 하지 않으면 그 때는 태아는 물론 산모에게도 치명적인 위험에 처하게 됩니다. 출산의 고통도 크지만, 그것보다도 나오지 않는 태아의 상태는 더 고통스럽고, 치명적인 위험에 처하게 됩니다. 북이스라엘의 멸망을 그와 같은 모습으로 비유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의 본문은 이렇게 막이 내립니다.
(15-16) 그가 비록 형제 중에서 결실하나 동풍이 오리니 곧 광야에서 일어나는 여호와의 바람이라 그의 근원이 마르며 그의 샘이 마르고 그 쌓아 둔 바 모든 보배의 그릇이 약탈되리로다 사마리아가 그들의 하나님을 배반하였으므로 형벌을 당하여 칼에 엎드러질 것이요 그 어린 아이는 부서뜨려지며 아이 밴 여인은 배가 갈라지리라

‘동풍’이 ‘광야에서 불어오는 하나님의 바람’이라고 합니다. 그 바람이 모든 것을 말려 버린다고 하는데, 그것은 아라비아 사막에서 불어오는 고온건조한 사막열풍입니다. 그것이 물을 말려버리는 것처럼, 아시리아의 군대가 북이스라엘의 수도 사마리아를 무너뜨리게 될 때에 어린아이들과 임신한 여인들도 죽임을 당하게 될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가장 보호받아야 할 사람들이 그러하다면 남자들은 더 말할 필요가 없습니다.

호세아 선지자가 이렇게 낱낱이 북이스라엘의 죄를 고발하는 것은, 하나님께 등을 돌리고 사는 자신의 실상을 직시하고, 나라가 망하는 고통을 당하기 전에 돌이키라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께서 그들을 하나님의 백성으로 한 번 정해 주신 것으로 모든 것이 끝났다고 생각했습니다. 즉 그들은 하나님께로 돌아와 하나님 나라의 잔치 속에 머무는 두 번째 부르심을 외면하고 살았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자손들을 택하신 것은 숫자가 많기 때문이 아니라 적어서였습니다. 그럼에도 그들이 자신들을 불러 구원하여 주신 분이 하나님 외에는 없다는 사실을 망각하자, 그들은 하나님과 상관 없는 삶을 살았던 것입니다.
우리도 동일합니다. 우리가 적어서, 그리고 거리와 골목, 길과 울타리 가에 있었기 때문에 하나님 나라의 잔치로 초대를 받았고, 그런 우리를 불러주신 분이 하나님 외에는 없습니다. 오늘 하루도 그 사실을 되새김으로 하나님 나라의 잔치 속에 사는 한 날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전에 네가 이르기를 내게 왕과 방백들을 주소서 하였느니라 네 모든 성읍에서 너를 구원할 자 네 왕이 이제 어디 있으며 네 재판장들이 어디 있느냐.

"구원할 자(your rulers)"
웨야쉬오카( וְיֹושִׁיעֲךָ)

3467. 구원하다(야솨. yâsha) יָשַׁע


북 왕국 이스라엘은 여로보암 2세 때 가장 강한 나라가 되었을 때 교만에 빠졌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은혜를 망각하고 이방 신에게 절하는 우상 숭배의 죄에 붙잡혔습니다.
이스라엘의 주권자이시며 구원자이신 하나님을 배반한 것입니다.
호세아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이와 같은 행위가 모두 헛된 것이며 그들에게 심판이 있을 것이라고 경고합니다.

이스라엘이 바알과 금송아지를 섬김으로 하나님의 진노를 불러일으켰고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의 배역에 대해 징벌을 내리실 것을 선포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의 죄를 징벌하실 것이라는 예언과 함께 그들을 다시 구원하실 것을 예언하심으로써 이스라엘을 끝까지 사랑하실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들이 범죄하고 타락했을지라도 언제든지 회개하고 돌아서면 용서해 주시고 긍휼과 사랑으로 감싸주시려고 합니다.
인간은 변할 수 있지만 하나님께서는 변함이 없으십니다.
이런 점에서 인간은 더욱 하나님의 구속하심과 자비에 대해 감사해야 합니다. 
 









7월 8일(토) 호세아 12장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기념 칭호(5절)


저는 만군(萬軍)의 하나님 여호와시라 여호와는 그의 기념(記念) 칭호(稱號)니라.
NIV / the LORD God Almighty, the LORD is his name of renown.
KJV / Even the LORD God of hosts; the LORD is his memorial.
NASB / Even the LORD, the God of hosts, The LORD is His name.


출애굽기 3:15
하나님이 또 모세에게성도들이 세상을 살아나가는 데는 여러 가지 어려움을 맞이하게 된다. 그런데 그럴 때마다 위기를 이겨 나가기 위해서는 때로 세상의 권력자나 돈을 가진 자에게 의지할 때가 많다. 물론 이런 방법은 당장 눈에 보이는 효과를 가져다 준다. 또한 성도들이 세상을 살아갈 때 이런 방법을 사용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런 경우에도 성도들이 기억해야 할 것은 이 모든 상황을 근본적으로 가능케 한 것은 하나님이심을 깨닫는 것이다 왜냐하면 세상의 힘으로 하여금 성도를 도와주게 하신 것도 하나님의 섭리에 의한 것이기 때문이다. 본장에서 하나님을 만군의 여호와로 표현한 것은 이것을 잘 보여 주고 있다. 세상의 모든 것은 오직 하나님의 다스림 아래 존재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인간이 아무리 계획해도 하나님께서 허락하지 않으시면 할 수 없는 것이다. 성도들은 자신에게 일어나는 모든 상황 속에서 인간의 힘이 아니라 하나님의 도우심을 발견하고 그에게 감사하는 자세로 살아가야 할 것이다.   이르시되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같이 이르기를 나를 너희에게 보내신 이는 너희 조상의 하나님 곧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 여호와라 하라 이는 나의 영원한 이름이요 대대로 기억할 나의 표호니라.

야훼 지크로(יְהוָה זִכְרֹו)

칭호(2143)
제케르(zeker) זֶכֶר  

1.기억.  2. 명성.  3. 찬양
발음 / 제케르[ zeker ]
어원 / 2142에서 유래
관련 성경 / 칭호(출 3:15), 기억(신 32:26, 사 26:14), 기념(욥 18:17, 시 97:12, 사 26:8), 이름(전 9:5), 자취(시 34:16), 명칭(시 102:12), 향기(호 14:7). [동] 기념하다(출 17:14, 에 9:28, 시 6:5), 기억하다(시 6:5, 9:6)
구약 성경 / 23회 사용

뜻풀이부

  • 1. 명사, 남성  기억, 회상, 신25:19, 32:26, 시9:7(6), 34:17(16), 109:15
  • 2. 명사, 남성  명성, 명망, 이름, 출3:15, 호12:6(5).
  • 3. 명사, 남성  찬양, 칭찬, 시6:6(5), 102:13(12).


* 기억하다(2142) 자카르(zâkar)  זָכַר 

1. 기억하다.  2. 잊지 않다. 3. 명심하다
발음 [ zâkar ]
관련 성경 / 기억하다(창9:15, 시9:12, 겔21:23), 생각하다(창40:14, 겔23:19, 렘31:20), 기념하다(시136:23, 출13:3, 삼하18:18), 마음에 두다(사17:10), 선포하다(렘20:9), 부르다(사12:4),생각나게 하다(왕상17:18), 칭송하다(대상16:4), 전하다(렘4:16), 자랑하다(시20:7), 진하다(아1:4), 분향하다(사66:3). [명] 소문(사19:17), 사관(삼하8:16, 왕상4:3, 대상18:15), 서기관(대하34:8).
구약 성경 / 222회 사용
    기념 칭호(記念 稱號. )

    호세아서 12장은 선지자 호세아의 일곱번째 설교의 연속된 내용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회개를 촉구하는 말씀으로 두 가지 내용으로 구분합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인간적인 외교 관계를 수립한 것과 아울러 이스라엘의 범죄에 대한 구체적인 언급(1-6절)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격노케 한 대가에 대한 예고(7-14절)

    이스라엘은 위기에 처했을 때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앗수르와 애굽을 의지했습니다.
    호세아는 이스라엘 민족에게 하나님께로 회개하고 돌아오라고 호소합니다.
    선지자가 보는 관점에서 이스라엘 민족이 나라를 의지하는 것은 이스라엘을 지키시는 여호와 하나님을 불신하는 것임과 동시에 나아가 우상을 숭배하겠다는 배교적인 행위였습니다.
    따라서 그는 임박한 하나님의 심판에 대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외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물질의 풍요 가운데서 세속의 가치에 익숙한 백성들에게 하늘의 가치를 선택하라고 외치는 것은 메아리가 되어 다시 돌아올 뿐입니다.
    기념 칭호(기념 칭호. 야훼 지크로. יְהוָה זִכְרֹו)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에서 인도하기 위하여 선택한 지도자 모세에게 계시하셨던 바로 그 이름입니다(출 3:15).

    하나님이 또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같이 이르기를 나를 너희에게 보내신 이는 너희 조상의 하나님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 여호와라 하라 이는 나의 영원한 이름이요 대대로 기억할 나의 표호니라.

    세속의 물결이 흉흉하게 파도치는 세상에서 오늘도 오직 예수 이름만 의지하고 영생의 항구를 향하여 힘차게 항해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이사야 26:8
    여호와여 주의 심판하시는 길에서 우리가 주를 기다렸사오며 주의 이름 곧 주의 기념 이름을 우리 영혼이 사모하나이다.

    * 주의 기념 이름(2143) 제케르

    출애굽기 3:15
    하나님이 또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같이 이르기를 나를 너희에게 보내신 이는 너희 조상의 하나님아브라함하나님, 이삭하나님, 야곱하나님 여호와라 하라 이는 나의 영원한 이름이요 대대로 기억할 나의 표호니라.

    * 표호(2143) 제케르(zeker)  זֶכֶר

    1. 기억.   2. 명성.  3. 찬양
    발음 [ zeker ]
    어원 / 2142에서 유래
    관련 성경 / 칭호(출3:15), 기억(신32:26, 사26:14), 기념(욥18:17, 시97:12, 사26:8), 이름(전9:5), 자취(시34:16), 명칭(시102:12), 향기(호14:7). [동] 기념하다(출17:14, 에9:28, 시6:5), 기억하다(시6:5, 9:6).
    구약 성경 / 23회 사용

    뜻풀이부

    • 1. 명사, 남성 기억, 회상, 신25:19, 32:26, 시9:7(6), 34:17(16), 109:15
    • 2.명사, 남성 명성, 명망, 이름, 출3:15, 호12:6(5).
    • 3.명사, 남성 찬양, 칭찬, 시6:6(5), 102:13(12).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가리켜 ‘내 백성"이라고 하셨습니다. ’내 아들‘이라고 하셨습니다. 아들이 불순종할 때 징계를 하면서도 긍휼히 여겨 다시 일으키시는 사랑의 아버지의 모습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고통의 땅, 애굽에서 성공적으로 탈출하기 이전 애굽에 있을 때부터 ‘나는 네 하나님’이라고 하십시다. 이미 하나님은 그들의 하나님이십니다.

    그런데 그렇게 이스라엘을 사랑하시는 하나님께서 크게 노하시는 내용이 소개되어 있습니다. 7절을 보겠습니다. ‘그는 상인이라 손에 거짓 저울을 가지고 속이기를 좋아하는 도다.’ 에브라임이, 하나님의 백성이 상업적 이익을 추구하는 존재가 된 것을 보고 분노하셨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오해하지 말아야 할 부분이 있습니다. '나도 지금 장사를 하고 있는데, 우리 회사가 무역회사인데 그렇다면 하나님이 기뻐하지 않으실까?' 그렇지 않습니다. 물론 상인은 장사를 하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원문에는 ‘가나안 사람’이라고 되어있습니다. 당시 가나안 사람이라고 하면 페니키아인들을 가리키는데 성경에 나오는 베니게 즉 두로와 시돈입니다. 그들은 지중해를 오가며 무역으로 막대한 부를 쌓았습니다. 그래서 가나안과 상인은 같은 의미로 종종 사용되었습니다. 또한 가나안사람들의 본거지인 두로와 시돈은 이스라엘을 미혹한 대표적인 우상인 바알종교의 발상지입니다. 호세아 선지자의 마음속에는 “저들은 상인이라”는 말속에 ‘저들은 가나안과 같은 자들이라’는 뜻이 들어있었을 것입니다.

    솔로몬이 죽은 후 이스라엘 왕국은 유다와 이스라엘 둘로 나누어집니다. 남쪽 유다에는 유다와 베냐민, 2지파가 연합하여 왕국을 이루었고, 북쪽의 이스라엘에는 10지파가 합하여 나라를 만듭니다. 그리고 이 이스라엘의 10지파 중에서 가장 크고 영향력이 있는 지파가 바로 에브라임 지파입니다. 그래서 성경을 보면 이스라엘을 부를 때! 어떤 때는 이스라엘! 어떤 때는 에브라임이라고 부릅니다. 하나님의 자녀인 에브라임 즉 이스라엘이 가나안 사람의 그 부요함과 쾌락에 점점 빠져듭니다. 하나님의 자리를 물질이 차지합니다. 하나님의 백성 에브라임이 가나안화 되어서 바알과 아세라 앞에 제물을 주고, 엎드려 제사를 드리면서 많은 소득의 기회를 얻었고, 그 불의한 소득을 가지고 살아가면서도 하나님 앞에 불의함이 없다며 자만하는 모습을 주님은 보고 계신 것입니다.

    에브라임은 큰 착각에 빠져있었습니다. “에브라임이 말하기를 나는 실로 부자라 내가 재물을 얻었는데 내가 수고한 모든 것 중에서 죄라 할 만한 불의를 내게서 찾아 낼 자 없으리라”(8절) 돈을 많이 벌었습니다. 재물도 많이 얻었습니다. 자신의 삶에 대한 평가를 스스로 내리면서 부끄러움도 죄가 될 만한 일도 없다고 합리화하고 있는 모습입니다. 어느새 가나안화 되어서 물질을 자신의 신으로 알고 섬기는 에브라임에게는 당연한 생각입니다.

    우리가 구약에 기록된 이스라엘 백성의 모습을 보면서 혀를 찹니다. 하나님의 특별한 사랑을 받은 선민들이 어떻게 약속의 땅에 들어가자 하나님을 버리고 바알을 숭배할 수 있을까? 아닙니다. 이스라엘은 한 번도 하나님을 버리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과 바알을 같은 수준에 놓고 숭배했던 것입니다. 여호와는 전쟁의 신이니까 전쟁이 나면 부릅니다. 바알은 풍요의 신이기 때문에 농사를 지을 때는 바알을 찾습니다. 이스라엘백성들은 자신들이 하나님을 버렸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신들의 전공을 찾아 준 것뿐이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진노하십니다.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에게 원하시는 삶이 어떤 것입니까? 우리의 삶 속에 하나님이 하나님 되시는 것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삶입니다. 하나님으로 하여금 우리의 삶에 주인이 되게 하라는 말입니다. 호세아 선지자는 에브라임을 향해 이렇게 말합니다. “너의 하나님께로 돌아와라”,“너의 하나님을 바랄지니라. 호세아는 하나님께 돌아와 인애와 공의의 하나님을 바람으로 바뀌어진 사람으로 이스라엘 이름의 주인공인 야곱을 예로 듭니다. 야곱은 오직 자기욕심을 따라 목적을 세우고 자신의 꾀와 술수로써 그것을 성취하려 했던 사람이었습니다. 오죽하면 "태에서 그 형의 발뒤꿈치를 잡고" 나왔을까요? 축복을 자기 것으로 만들기 위한 욕심과 그 욕심 성취를 위하여 자신의 경쟁상대를 물고 늘어지는 본성은 아예 출생 때부터 타고났던 것이었습니다. 형 에서를 속입니다. 아버지 이삭을 속입니다. 자신의 욕망을 채우기 위해서 수단과 방법을 다 동원했습니다. 야곱에게 있어서 성공은 그가 섬기는 우상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거짓된 계책을 의지하여 교만하게 살아가는 이스라엘을 장막에 거하도록 하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12:9). 이것은 죄를 범한 그들을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인 가나안에서 쫓아내 이스라엘이 가데스바네아에서 범죄하고 40년간 광야에서 유리하던 그때와 같이 만드시겠다고 하는 심판의 선언입니다. 그러나 외견적으로는 징벌의 선언처럼 들리는 이 말씀 속에는 죄를 범한 자기 백성들과 만나서 그들과 다시 새롭게 친밀한 관계를 회복하시겠다고 하는 하나님의 의도가 있음을 깨달아야 합니다. “보라 내가 그를 타일러 거친 들로 데리고 가서 말로 위로하고”(2장14절). 즉 하나님께서는 남편이신 하나님을 버리고 음란하게 바알을 숭배한 이스라엘을 벌하실 것이지만, 그들을 광야(거친 들)로 데리고 가서 말로써 타이르고 위로하여 이전의 첫 사랑의 관계를 회복시키시겠다고 하셨습니다. 때때로 성도들이 세상에 취하여 살다가 어느 날엔가 광야와 같은 시련이 찾아올 때, 그것은 사실상 징벌이라기보다 우리를 단독적으로 만나 설득하시고자 하는 하나님의 사랑의 초청임을 깨달아야 할 것입니다.

    물질을 주인으로 삼는 삶 아니 하나님과 물질을 모두 주인으로 섬기겠다는 가나안의 삶을 포기하십시오. 에브라임은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님의 백성답게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고민이요, 우리의 숙제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을 통해서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은 모든 성도들에게 주시는 말씀과 동일하게 이 시대에 물질을 따라가는 가나안인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 에브라임으로써 진정으로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섬기는 삶, 하나님을 바라는 삶을 살아가는 그런 거룩한 백성으로서 살아가기를 주님은 기대하고 있습니다. 이 주님의 기대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는 성도의 삶이되기를 바랍니다.

    자비하신 하나님, 에브라임같이 야곱같이 하나님과 세상을 겸하여 섬길 수 있다고 생각했던 가나안적인 삶이 나의 삶이었습니다. 하나님을 바라보는 일에 장애물을 가지고 살았던 것이 우리의 삶이었음을 고백합니다. 그리고 회개합니다. 하나님 아버지, 이제 주님을 나의 구주, 나의 하나님으로 바라볼 수 있도록 인도해 주시옵소서.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우리에게 다가오셔서 우리를 만나주시는 하나님을 바라보며 살아가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호세아 선지자는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인간적인 수단과 방법을 통하여 자신들을 지켜 나가려고 하는 것에 대하여 미련하고 어리석음을 비난하였습니다.

    야곱처럼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와 하나님을 신실하게 섬길 것을 촉구하였습니다.
    호세아 선지자는 5, 6절에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나님께 받았던 복을 기억하라고 요구했습니다.
    특히 야곱의 생애와 출애굽 당시에 보호와 인도함을 받았던 것을 기억할 것을 요구했습니다.
    이스라엘이 과거 수많은 범죄에도 불구하고 속히 회개함으로 복 받았음을 기억하여 죄를 회개하고 해결 받을 것을 촉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또한 호세아는 이스라엘이 외교에서 거짓과 교만을 나타냈으므로 하나님께서 격노하셨고 그에 상당한 보응을 받게 되리라는 경고를 하였습니다.

    12장에 대한 분석과 이해를 돕는다면,
    먼저 1-2절에서 에브라임과 유다의 행위를 책망하고 있는데, 헛된 것을 사랑하고 추구하다가 결국 자신들을 파멸시켰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가 원하는 방법대로 우리의 일을 도모하는 것이 오히려 하나님의 명예를 모독하고 하나님을 부정하는 것임을 깨달아야 합니다.

    3-6절에서 오직 하님께로 돌아오라고 선포하고 있는데,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받았던 복을 기억하라고 요구했습니다.

    특히 야곱의 생애와 출애굽 당시의 일을 기억할 것을 요구하며, 호세아는, 이스라엘이 과거 수많은 범죄에도 불구하고 속히 회개함으로 복 받았음을 기억하여 죄를 회개하고 해결 받을 것을 촉구하고 있습니다.

    7-10절에서 에브라임의 불의를 책망하면서 패역한 이스라엘은 상고와 같이 손에 거짓 저울을 가지고 사취하기를 좋아하는 장사 방법을 선택했습니다.

    ‘상고’란 가나안 족속을 가리키며, 이들은 베니게 지역에 거주하였고, 주업은 상업이었으며 남을 속이고 강탈을 일삼았습니다.

    패역한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시선을 의식하지 못했기 때문에 이러한 일을 자행했지만, 우리는 결코 하나님을 속일 수 없음을 깨닫고 정직과 공의로 이행해야 할 것입니다.

    11-14절에서 거짓 된 제사와 우상숭배를 강하게 꾸짖고 있습니다.

    이제 본문을 적용할 수 있는 구절의 핵심(PS) 의미를 돕는다면, 우선 1절에서 거짓을 좇는 자의 삶은 허망하게 되고 필경 파멸에 이르게 될 뿐입니다.

    2절에서 지혜로운 자는 악인의 결국을 반면교사로 삼아 교훈을 받습니다.
    2, 3절에서 인생의 근본적인 문제 해결은 진지하게 하나님과 씨름할 때 얻을 수 있습니다.
    4절에서 하나님을 참으로 만나려면 그 손으로 붙잡은 모든 우상을 포기해야 합니다.
    5절에서 하나님은 진실로 당신을 찾는 자들을 만나주시며 복을 베풀어 주십니다.
    6절에서 하나님께로 되돌아왔다면 이제는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지 점검해야 합니다.

    결론적으로 죄악으로 하나님께 징계 받은 이스라엘의 역사를 통해 회개하여 회복되는 사실을 모든 성도에게 교훈이 되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하는 자들은 결국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수치를 당할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하나님의 계시하신 말씀을 모든 삶의 기준으로 삼고 오직 그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 구원받은 자의 의무요, 본분임을 기억하여야 합니다.
    그리스도께서 마지막 날 계시하신 말씀을 근거로 하여 상벌을 내리실 것이며, 하나님의 백성의 표징이 하나님의 말씀을 지킴으로써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것임을 교훈하고 있습니다. 

    ❥ 인간의 지혜는 한계가 있고 하나님의 지혜는 무한하다.(호세아12: 2, 3절)
    본 구절의 핵심(PS) 의미를 돕는다면;

    인생의 근본적인 문제 해결은 한계가 있으나 진지하게 하나님과 씨름할 때 얻을 수 있습니다.

    2-3절을 살펴보면 “여호와께서 유다와 논쟁하시고 야곱을 그 행실대로 벌하시며 그의 행위대로 그에게 보응하시리라 야곱은 모태에서 그의 형의 발뒤꿈치를 잡았고 또 힘으로는 하나님과 겨루되.”라고 하였습니다.

    호세아는 이스라엘의 조상인 야곱의 역사적 경험을 회상하고 있습니다.
    이는 하나님의 심판의 위기에 직면한 북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 위기에서 벗어나 소망을 가질 수 있는 비결이 무엇인지 가르치기 위함이었습니다.
    우리가 아는 것처럼 이스라엘의 조상 야곱은 그 이름이 의미하는 것처럼 온갖 계책과 지혜로 거짓의 달인이라 할 수 있는 인물입니다.
    그는 자기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라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인물이었습니다.
    그는 어미의 뱃속에서 나올 때 형의 발꿈치를 잡고 나왔는데, 이는 그가 천성적으로 욕망이 강한 인물이었다는 사실을 나타내줍니다.
    성경을 보면 그는 형님 에서의 배고픔을 이용하여 팥죽 한 그릇에 장자권을 팔게 하였고, 눈이 어두워 사물을 분간하지 못하는 그 아비 이삭을 속여 장자의 축복을 받아내기도 하였습니다.
    그리고 에서를 피하여 밧단아람의 외삼촌 집으로 피신하였던 때에는 간교한 술책으로 외삼촌의 양들을 자기의 것으로 만들었습니다.
    이처럼 야곱은 자기의 욕망으로 거짓과 술책이 끊이지 않는 삶을 살았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그의 삶은 이로 인해 형과 원수가 되었고, 외삼촌과도 원수가 되어 그를 피해 야간도주해야 하였던 것입니다.
    그는 외적으로는 성공을 거둔 덧 하였지만, 무엇 하나 내세울 것 없는 피곤하고 고단한 삶을 살다가 생을 마쳐야 했던 것입니다.
    누가 이러한 그의 인생을 성공이라 말할 수 있겠습니까? 누가 그의 인생을 참으로 복되다 하겠습니까?
    이러한 그의 실상이 현저히 드러난 곳이 바로 얍복 강가입니다. 야곱은 형 에서를 만나기 직전에 있었습니다.
    당시 에서는 사백이나 되는 장정들을 거느리고 그를 향해 오고 있었고 그를 피할 수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잘못하면 인간적 계책으로 얻게 된 모든 것을 잃을 뿐만 아니라 가족과 그 자신의 생명까지도 잃을 수 있는 절대 절명의 위기 상황이었습니다.
    그는 가나안 땅이 건너보이는 얍복 강에 이르러 하나님을 붙잡고 울며 씨름하고 있었습니다.
    하나님께 기도하며 은총을 간구한 것입니다.
    얼마나 열심히 하나님과 씨름하였던지 그의 환도 뼈가 위골될 지경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비록 환도 뼈가 위골되는 고난 속에서도 하나님을 결코 놓지 않았고 하나님의 축복을 얻고야 말았습니다.
    이를 통해 그는 간교한 야곱에서 하나님의 사람 이스라엘로 거듭나게 되었고, 에서와 극적인 화해를 이룰 수 있었습니다.
    이렇듯 우리의 인생이 거짓과 위선과 계략과 모사로 흥망이 결정되며, 복과 화가 결정 되는 것처럼 보이지만 인생의 참된 복과 흥함은 오히려 인간의 모든 거짓된 계책을 버리고 하나님을 붙잡고 도움을 의뢰할 때 주어지는 것임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이사야 30:2-3
    “그들이 바로의 세력 안에서 스스로 강하려 하며 애굽의 그늘에 피하려 하여 애굽으로 내려갔으되 나의 입에 묻지 아니 하였도다 그러므로 바로의 세력이 너희의 수치가 되며 애굽의 그늘에 피함이 너희의 수욕이 될 것이라.”라고 하였습니다.

     

    - 거짓과 술수와 계략과 인간의 지혜는 일시적으로 성공하는 것처럼 보이고 당장 승리를 안겨 주는 것처럼 보이지만, 궁극적으로는 반드시 실패하게 될 것이며 반면 하나님의 도움을 구하며 그 뜻 안에서 씨름하면 궁극적으로는 참된 승리와 성공을 향해 나아가게 될 것입니다.

     

    - 그렇다면 오늘 이 아침에 성령님께서 묻는 것은 “ 지금 내가 하나님의 은혜 안에 있음을 확신하고 있는지? 야곱처럼 성공지향을 위해 수단과 방법을 앞세운 적은 없었는지? 인간의 근본적인 문제 해결은 어디에 있다고 믿는지? 하나님께 기도함으로 긍휼히 여김을 받을 때에 얻는 결과는 무엇이라고 생각하는지? 오늘 성령님께서 나에게 무엇을 생각하고 어떻게 행하기를 원하시는지? 묻고 있으니 스스로 자문자답 해 봅시다.

     

    - 인생의 근본적인 모든 문제 해결은 한계가 있으나 진지하게 하나님과 씨름할 때 얻을 수 있는 하나님의 지혜와 은총의 복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의 지혜는 한계가 있지만, 하나님의 지혜는 무한하여 은혜와 평강의 복을 누립니다.

     

    - 인본주의 계책과 지혜란 간교한 것이 대부분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간교함을 미워하십니다. 그러므로 인본주의 계책을 쓰는 자는 언젠가 무너지게 되어 있습니다.

     

    - 자기가 쓴 계책이 자기 무덤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붙잡으면 절대 실패하지 않습니다.

     

    - 그러므로 우리는 모든 인본주의적 수단과 방법의 계책과 지혜를 다 버립시다. 대신 하나님께 겸손히 나아가 하나님을 붙잡고 진지하게 그분께 기도하고 힘을 다해 씨름 해 봅시다. 그래서 하나님의 지혜와 은총을 구합시다. 하나님께서 성도들을 위하여 놀라운 지혜를 베푸사 인간의 모든 문제 해결과 형통의 자리에 굳건히 서게 하실 것을 확신하는 저와 주님의 사랑하는 형제와 자매가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여호와는 하나님의 이름인가?




    여호와의 증인은 하나님의 고유의 이름을 "여호와"라고 주장합니다. 여호와의 증인이 사용하는 "성경을 사용하여 추리함"이라는 책을 보면 "여호와"를 이렇게 정의합니다.
    정의: "여호와는 유일하신 참 하느님의 고유한 이름이다. 이 이름은 그분이 친히 정하신 이름이다."

    "여호와께서는 창조주이시므로, 합당하게도 우주의 최고 통치자이시다." "여호와는 '그분은 되게 하신다.'라는 뜻을 지닌 히브리어 "테트라그라마톤"(Tetragrammaton; 히브리어에서 하나님을 나타내는 자음 "YHWH"를 의미한다.) 즉 יהוה에서 번역되었다. 이 히브리어 네 글자는 많은 언어에서 "JHVH" 또는 "YHWH"에 해당하는 글자로 표시된다. 여호와의 증인은 로마서 10장 13절(신세계역)을 인용하면서, "누구든지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는 사람은 구원을 받을 것이다" 즉 "누구든지 구원을 받으려면 반드시 여호와의 이름을 불러야 한다."고 말합니다. 이 뜻을 다시 설명한다면 누구든지 하나님의 이름인 "여호와"를 부르지 않으면 구원이 없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 여호와의 증인은 주장하기를 이 세상에 수많은 종교가 있지만 그중에서 여호와의 증인만이 하나님의 유일한 조직인 이유는 오직 여호와의 증인만이 하나님의 참 이름인 "여호와"를 부르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워치타워 온라인 라이브러리에 "그리스도의 참 제자가 되려면" 이라는 글에 이런 간증이 있습니다.

    "우리는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이름을 지닌 것을 자랑스럽게 여깁니까? 다른 사람이 이 거룩한 이름을 알도록 돕고 있습니까? 프랑스 파리의 한 여자는 여호와의 증인만이 하느님의 이름을 알고 있다는 말을 듣고는, 그 뒤에 증인을 만났을 때 자기 성서에서 그 이름을 보여 달라고 했습니다. 시편 83편18절을 읽자 그 효과는 대단했습니다. 그 여자는 성서 연구를 시작했고, 지금은 여호와의 증인의 자매가 되어 다른 나라에서 충실히 섬기고 있습니다. 오스트레일리아에 사는 가톨릭 신자인 한 부인은 난생처음으로 성서에서 하느님의 이름을 보고는 기뻐서 울고 말았습니다. 그는 지금까지 여러 해 동안 신실한 여호와의 증인 전도자로 봉사하고 있습니다. 최근에 자메이카의 증인들이 한 여자에게 본인의 성서에 하느님의 이름이 들어 있다는 것을 보여 주자 그 여자도 기쁨의 눈물을 흘렸습니다. 그러니 하느님의 이름을 지닌 것을 자랑스럽게 여기고, 이 소중한 이름을 모두에게 알리십시오."

       그런데 문제는 이것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이 "여호와(JEHOVAH)"인가?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은 "여호와"가 아닙니다.

    먼저 워치타워의 글을 보도록 합시다. 1980년 2월 1일 워치타워의 글에 "여호와"가 하나님의 고유한 이름이 아니라는 것을 인정하였습니다. 워치타워의 글에 분명히 하나님의 고유한 이름이 무엇인지는 잃어 버렸다고 합니다. 하나님의 이름이 분명하지 않다고 그들 스스로 말합니다. 아래의 영어는 원문이고 한어는 번역한 것입니다.
    "... down though the centuries, the correct pronunciation of the divine name in Hebrew has been lost. Hence, it is uncertain what vowels should be used to fill in the name" (WT Feb. 1, 1980). "

    ... 수세기를 지나면서 올바르게 발음하는 히브리어의 신의 이름을 잃어 버렸습니다. 그러므로 그 이름에 어떤 모음을 써야하는지는 분명치가 않습니다." 이에 대해 워치타워 온라인 라이브러리는 이렇게 적고 있습니다.

    "하느님의 이름의 영어 표기는, 대부분의 히브리어 학자들이 'Yahweh'(야훼)를 선호하기는 하지만,('Jehovah' 한국어로는 '여호와'로 가장 잘 알려져 있다.) 하느님의 이름의 히브리어 자음은 알려져 있지만 문제는 '이들 자음에 어떤 모음을 결합시켜야 하는가?'이다."

    그렇다면, 히브리 성경에 하나님의 이름을 나타내는 자음 네 글자(יהוה)는 알고 있는데 모음을 알고 있는가? 지금은 정확한 모음을 찾았는가? 답은 워치타워가 인정하듯 모음을 찾지 못했습니다. 그러므로 여호와 증인도 그 모음이 무엇인지 모릅니다. 여호와의 증인이 인정하는 것은 하나님의 이름을 나타내는 100% 정확한 모음을 찾지는 못했지만 여호와는 확실히 아니고 거의 대부분의 히브리 학자들은 "Yahweh(야훼)"를 선호한다고 말합니다. (왜 확실히 여호와가 아닌지는 뒤에 설명합니다.)

     야웨가 더 올바른 하나님의 이름입니다.

    다시 워치타워의 글을 보도록 합니다. 1969년도 인터리니어 헬라어 성경 서론 23페이지에는 여호와의 이름에 대하여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아래의 영어는 원문이고 한어는 번역한 것입니다.
    "While inclining to view the pronunciation 'Yahweh' as the more correct way, we have retained the form 'Jehovah' because of people's familiarity with it since the 14th century" (1969 edition, p. 23).

    하나님의 이름은 『야웨 Yahweh』가 더 올바른 발음이지만 여호와의 증인은 '여호와'를 계속 사용하기로 하였습니다. 그 이유는 사람들이 14세기부터 '여호와'라는 이름에 친숙해 있기 때문입니다."

    여호와의 증인이 이글에서 무엇을 인정하고 있습니까? 본래 "여호와"는 하나님의 이름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현존하는 거의 모든 히브리 성경학자들은 여호와가 아니라 "야웨"가 하나님의 이름일 것이라고 말합니다. 본래 하나님의 이름은 "야웨"가 더 맞지만 더 맞는 "야웨"를 쓰지 않는 이유는 14세기부터 사람들이 "여호와"란 이름을 썼기 때문에 여호와의 증인도 "여호와"란 이름을 지금까지 쓰고 있다는 것입니다. "여호와"보다는 "야웨"가 더 정확한 이름인 줄을 여호와의 증인은 알면서도 사람들에게 여호와란 이름이 더 친숙하기 때문에 "여호와"라는 이름을 쓴다는 것입니다. 다시 설명하자면, "여호와"는 성경적인 이름이 아님을 알고 또한 "야웨"가 더욱 성경에 가까운 이름인줄 알면서도 14세기부터 "여호와"란 이름을 사용해왔기 때문에 의도적으로 여호와의 증인도 "여호와"란 이름을 지금까지도 사용하고 있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말은 여호와의 증인은 성경적인 진리(TRUTH)보다는 사람의 전통을 선택하였다고 스스로 인정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지금까지 주장해온 여호와의 증인의 정신(SPIRIT)이 아닙니다. 여호와의 증인 조직은 사람의 전통보다 하나님의 진리를 선택하는 조직이 아니었나요? 그런데 그들은 자신들이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하나님의 이름을 진리가 아닌 전통을 따름으로 자신들이 정직한 단체가 아님을 스스로 입증하고 있습니다.

    워치타워는 구약에 하나님의 이름인 여호와가 6,973번 나오고 신약에는 237번 나온다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이들은 야웨가 더 올바른 하나님의 이름인 것을 알면서도 구약에 6,973번의 옳지 않은 이름인 "여호와"를 쓴 것이고 신약에는 237번 "여호와"를 쓴 것입니다. 여호와의 증인들은 하나님의 더 올바른 이름이 "야웨"인 것을 분명히 알면서도 왜 의도적으로 "여호와"가 오직 하나님의 이름이라고 많은 사람들을 속일까요? 성경에도 있지 않는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지 않으면 구원을 받을 수 없다고 가르치는 이유는 어디에 있을까요?

    한번 대답해 보세요. 하나님의 이름조차 거짓을 일삼고 있는 조직이 과연 하나님의 진실한 조직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여호와"라는 단어의 시작은 기원 1270년 입니다.

    "여호와" 이름의 시작을 워치타워의 기록에서 찾아보도록 합시다. 워치타워는 "여호와" 라는 이름의 첫 시작이 1270년에 한 가톨릭 신부라고 말합니다. 아래는 요약된 내용입니다. "여호와라는 이름이 처음 기록된 것은 13세기 스페인 신부인 레이문더스 마르티니의 책 「포헤오 피테이」입니다. 그런데 히브리 학자들은 대체로 "야웨"가 올바른 발음이라고 말합니다."
    "The first recorded use of this form [Jehovah] dates from the 13thcentury C. E. Raymundus Martini, a Spanishmonk of the Dominican Order, use ditin his book Pugeo Fidei of the year 1270. Hebrew scholars generally favor "Yahweh" as the most likely pronunciation" (Aid to Bible Understanding, 1971, 884-85).

    워치타워의 기록에 따르면 "여호와"라는 발음의 시작이 1270년이므로 그전에는 "여호와" 라는 단어가 존재하지 않았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므로 구약의 어느 누구도 "여호와"라는 이름을 몰랐습니다.
    아브라함도 말하지 않았습니다. 다윗도 말하지 않았습니다. 다니엘도 말하지 않았습니다. 신약의 어느 누구도 "여호와"라는 이름을 말하지 않았습니다. 베드로도 말하지 않았습니다. 성경을 13권 쓴 바울도 말하지 않았습니다. 심지어는 예수님도 말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여호와"라는 이름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여호와라는 이름은 1270년 이후부터 사용되기 시작한 이름입니다. 여호와라는 이름은 스페인 가톨릭 신부인 레이문더스 마르티니란 사람이 만든 이름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1270년 이전에는 아무도 몰랐던 "여호와"란 이름을 지금 하나님의 이름이라고 불러야 할까요?

     학자들의 견해를 보겠습니다.

    그럼 학자들은 하나님의 이름이라고 말하는 "여호와"에 대하여 어떤 의견을 가지고 있는지 요약하겠습니다.

    * 유니버살 유대인 백과사전
    "'여호와'는 히브리 하나님의 이름 네 자를 그릇 인도하는 것이다."
    THE UNIVERSAL JEWISH ENCYCLOPEDIA says "JEHOVAH is an erroneous pronunciation of the Tetragrammaton a four lettered name of God, made up of the Hebrew letters Yod He Vav He. The word "JEHOVAH" therefore is a misreading for which there is no warrant and which makes no sense in Hebrew" The Hebrew letters point to a Yod Y the more correct pronunciation is Yahweh or some form deriving from the same consonants. For example Yah is used in its shorter form in Ex.15장 2 and 17장 15, Isa.12장 2 and Ps.118장 14 .

    * 아메리카나 백과사전
    "'여호와'는 이스라엘의 하나님의 이름을 잘못 말한 것이다."
    JEHOVAH -"is an erroneous form of the name of the God of Israel." (ENCYCLOPEDIA AMERICANA)

     * 브리태니카 백과 사전
    "'여호와'란 발음은 자음 'YHWH'과 모음 'ADHONAY'가 합쳐져서 나온 말이므로 오류다."
    JEHOVAH -"the pronunciation "Jehovah" is an error resulting among Christians from combining the consonants YHWH with the vowels of ADHONAY." (ENCYCLOPEDIA BRITANNICA)

     * 스카프-헤조그 백과 사전
    "'여호와'는 이스라엘의 언약의 하나님의 이름이 아니다."
    JEHOVAH -"is an erroneous form of the divine name of the covenant God of Israel." (THE NEW SCHAFF-HERZOG ENCYCLOPEDIA)

     * 유대인 백과사전
    "여호와"는 히브리 하나님의 이름을 잘못 발음한 것이다.
    문법적으로 여호와 이름은 불가능하다.
    JEHOVAH -"is a mispronunciation of the Hebrew YHWH the name of God. This pronunciation is grammatically impossible. The form "Jehovah" is a philological impossibility." (THE JEWISH ENCYCLOPEDIA p. 160)

    "여호와"란 이름은 사람이 만든 이름입니다.

    여호와라는 이름은 성경에서 나온 이름이 아닙니다. 본래 "여호와(JEHOVAH)"라는 이름은 성경에는 나오지 않습니다. "여호와(JEHOVAH)"는 사람이 만든 단어입니다. "여호와(JEHOVAH)"의 단어가 생긴 일반적인 설명은 이러합니다. 히브리 성경은 하나님의 이름을 『יהוה YHWH』로 표기합니다. 유대 서기관들은 하나님의 이름 "YHWH"을 망령되게 부르는 것을 두려워하였습니다. 그래서 부르지 않았습니다. 점차 발음하는 것을 잊어버리게 되었습니다. 후에 "Adonai" 라는 단어에서 모음을 뽑아 하나님의 이름인 네 자의 자음 "YHWH"과 합하여 "JEHOVAH" 란 단어를 만들었습니다. 그러므로 "여호와"는 사람이 만든 이름입니다.
    다시 한 번 워치타워의 글을 보도록 합시다.

    "Aid to Bible Understanding"이란 워치타워의 글에도 보면 "여호와(JEHOVAH)" 라는 단어가 어떻게 생겼는지를 설명합니다. 그 내용을 요약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뜻하는 히브리어 자음 네 글자『יהוה』와 주를 뜻하는 히브리 단어 'Adho.nay and 'Elo.him'(아도나이, 엘로힘)의 모음을 합성하여 만든 글자가 'Yeho.wah' and 'Yehowih'(여호와)입니다."

    By combining the vowel signs of 'Adho.nay and 'Elo.him' with the four consonants of the Tetragrammaton the pronunciations Yeho.wah' and Yehowih' were formed. (Aid to Bible Understanding, Watchtower Bible and Tract Society, 1971, pp. 884-885)

    그러므로 "여호와"란 이름은 워치타워에서도 주장하듯이 사람이 만든 하나님의 이름입니다.

      

    성경에서 하나님의 이름과 연관된 세 가지를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1. 예수님은 한 번도 하나님을 부를 때 "여호와"라 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이 가르쳐준 기도를 보도록 합시다.

     마태복음 6장 9절(신세계역)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해지게 하십시오."
    예수님이 제자에게 기도를 가르치실 때 "하늘에 계신 여호와 하나님 ..." 하고 말씀하시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사복음서 어느 곳에서도 "여호와"란 이름을 사용하지 않으셨습니다. "여호와"란 이름을 부르는 것이 그렇게 중요하다면 왜 예수님은 하나님의 이름 "여호와"를 한 번도 사용하지 않으셨을까요?

     2. 예수님을 믿는 자들은 하나님을 부를 때 "아바 아버지"라고 부릅니다.

     로마서 8장 14-15절(신세계역)
    "하느님의 영의 인도를 받는 사람들은 모두 하느님의 아들입니다. 15 여러분은 다시 두려움을 갖게 하는 종살이의 영이 아니라 아들로 입양되게 하는 영을 받았습니다. 그 영으로 우리는 '아바, 아버지!'라고 외칩니다."

     3. 구원은 반드시 "여호와"라는 이름을 불러야 받는 것이 아닙니다.

     사도행전 16장 31절(신세계역)
    "그들이 대답했다. 주 예수를 믿으십시오. 그러면 당신과 당신의 집안이 구원을 받을 것입니다."

    어떻게 구원을 받는다고요? 사도 바울은 이렇게 간수에게 말하지 않았습니다, "주 여호와를 믿으십시오. 그러면 ... 구원을 받을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여호와의 이름을 불러야만 구원을 받는다고 이야기하지 않았습니다. 다시 한 번 읽어 봅니다, "주 예수를 믿으십시오. 그러면 당신과 당신의 집안이 구원을 받을 것입니다."

    Romans 10장 13 is referring to Jesus. 
    WT 5. 1. 1978, p. 12 
    Romans 10장 13 is referring to Jehovah. 
    WT 2. 1. 1980, p. 16 

    신세계역 번역에는 "누구든지 여호와의 이름을 ..."이라고 번역을 하였습니다. 하지만 사실상 신약에는 한 번도 히브리 이름인 "여호와(JEHOVAH)"를 사용한 적이 없습니다. 
    지금까지 5000천개 이상의 헬라어 사본에서 한 번도 "여호와"란 단어가 쓰인 적이 없습니다. 이것은 여호와의 증인도 인정하는 바입니다. 

    그렇다면 왜 신세계역에는 신약에 "여호와"라는 단어가 나오는가? 그것은 여호와의 증인이 신약에 "여호와"라는 단어를 237번 삽입하였기 때문입니다. 로마서 10장 13절에도 원어에는 없는 "여호와"라는 이름을 그들 맘대로 삽입하였습니다.

    로마서 10장 13절을 이해하려면 10장 9절부터 전체의 문맥을 보아야 합니다. 
      
    로마서 10장 9절(개역)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얻으리니" 9절은 누구에 대한 말씀입니까? 분명히 예수님이 대한 말씀입니다. 
      
    로마서 10장 10절(개역)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 10절에서는 누구를 의미할까요? 
    9절에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에 이어서 10절에 [예수를]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 문맥상 9절에도 예수님을 시인하는 것이고 10절에도 계속해서 예수님을 시인하는 것입니다. 
      
    로마서 10장 11절(개역) 
    "성경에 이르되 누구든지 저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아니하리라 하니" 11절의 말씀은 이사야 28장 16절을 인용한 것입니다. 
      
    이사야 28장 16절(개역)
    "그러므로 주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보라 내가 한 돌을 시온에 두어 기초를 삼았노니 곧 시험한 돌이요 귀하고 견고한 기초 돌이라 그것을 믿는 자는 급절하게 되지 아니하리로다" 
    여기서 말씀은 시온의 기초 돌은 예수님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자는 급절하게 되지 아니하리로다"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이 분명합니다. 
    또한 로마서 9장 33절에도 사도바울이 이 말씀을 인용하였습니다. 

    로마서 9장 33절(개역)
    "기록된바 보라 내가 부딪히는 돌과 거치는 반석을 시온에 두노니 저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치 아니하리라 함과 같으니라" 
    여기서도 역시 "부딪히는 돌"은 예수님을 뜻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누구든지 저를 믿는 자"에서 "저"는 누구를 뜻하는 것일까요? 당연히 예수님을 뜻하는 것입니다. 
      
    로마서 10장 12절(개역)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차별이 없음이라 한 주께서 모든 사람의 주가 되사 저를 부르는 모든 사람에게 부요하시도다." 
    여기서 "주"는 누구일까요? 바울은 9절에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12절에는 "... 한 주께서..." 라고 말씀합니다. "예수", "주" 12절에도 "한 주"는 예수님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저를 부르는 모든 사람에서 ..."에서 "저"도 예수님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에베소서에는 바울이 모든 사람과 하나 되라고 말씀합니다. 여기서도 주가 나옵니다.
      
    에베소서 4장 4-6절(개역)
    "몸이 하나이요 성령이 하나이니 이와 같이 너희가 부르심의 한 소망 안에서 부르심을 입었느니라 주도 하나이요 믿음도 하나이요 세례도 하나이요 하나님도 하니이시니 곧 만유의 아버지시라"
      
    로마서 10장 13절(개역)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9절도 예수님에 대하여, 10절도 예수님 대하여, 11절도 예수님에 대하여, 12절도 예수님에 대하여입니다. 14절에 "믿지 아니하는 이를"이라고 했는데 여기서도 예수님을 의미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상의 내용을 정리하면 9절, 10절, 11절, 12절, 그리고 14절 모두 예수님에 대한 말씀입니다. 그렇다면, 13절은 누구에 대한 말씀일까요?

    당연히 예수님의 이름을 부르는 자가 구원을 얻는다는 말씀이지요. 9절에서 12절까지 예수님에 대한 이야기를 하다가 갑자기 13절에 가서는 "여호와"에 대하여 말씀하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은 성경으로 해석해야 합니다. 
      
    여기에서 사도행전 9장 14-21절(개역) 말씀을 봅시다. 
    사도행전에서도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예수님의 이름을 부르는 자를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도행전 9장 14-21절(개역) 
    "14 여기서도 주의 이름을 부르는 모든 자를 결박할 권세를 대제사장들에게 받았나이다 하거늘 5 주께서 가라사대 가라 이 사람은 내 이름을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 앞에 전하기 위하여 택한 나의 그릇이라 16 그가 내 이름을 위하여 해를 얼마나 받아야 할 것을 내가 그에게 보이리라 하시니 17 아나니아가 떠나 그 집에 들어가서 그에게 안수하여 가로되 형제 사울아 주 곧 네가 오는 길에서 나타나시던 예수께서 나를 보내어 너로 다시 보게 하시고 성령으로 충만하게 하신다 하니 18 즉시 사울의 눈에서 비늘 같은 것이 벗어져 다시 보게 된지라 일어나 세례를 받고 19 음식을 먹으매 강건하여지니라 사울이 다메섹에 있는 제자들과 함께 며칠 있을새 20 즉시로 각 회당에서 예수의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전파하니 21 듣는 사람이 다 놀라 말하되 이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이 이름 부르는 사람을 잔해하던 자가 아니냐 여기 온 것도 저희를 결박하여 대제사장들에게 끌어가고자 함이 아니냐 하더라"
    여기서 누가가 말씀한 "주의 이름을 부르는 모든 자... "는 여호와의 이름이 아닙니다. 14절, 15절, 16절, 17절 .... 모두 다 "주의 이름"은 곧 "예수님의 이름"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장 2절을 보겠습니다. 
      
    고전 1장 2절(개역) 
    "고린도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 곧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거룩하여지고 성도라 부르심을 입은 자들과 또 각처에서 우리의 주 곧 저희와 우리의 주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모든 자들에게"
      
      
    동일하게 로마서 10장 13절 말씀에서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에서 "주"도 예수님을 의미하고 있는 것입니다. 
    로마서 10장 13절은 요엘서 2장 32절을 인용한 것입니다. 바울은 여기서 요엘의 『יהוה』과 로마서의 주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동일하게 본 것입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예수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라고 읽어야 하는 것입니다. 
      
      
    왜 워치타워는 하나님의 이름을 여호와로 주장할까요?
      
    워치타워도 1870년부터 1978년까지 108년 동안 그렇게 해석을 하였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1980년도에 "여호와"로 바꾸었습니다. 바꾼 의도가 무엇일까요? 지난 1969년부터 현재까지의 "여호와 이름"에 대한 워치타워의 주장을 요약하여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1969년 인터리니어 헬라어 성경
    "'야웨(Yahweh)'가 더 올바른 발음이지만 우리는 '여호와'를 계속 사용하기로 하였습니다. 그 이유는 사람들이 14세기부터 친숙해 있기 때문입니다."
      
    1971년 Aid to Bible Understanding
    "여호와라는 이름이 처음 기록된 것은 13세기 스페인 신부인 레이문더스 마르티니의 책 "포헤오 피테이"입니다. 히브리 학자들은 대체로 "야웨"가 올바른 발음이라고 말합니다." 
      
    1971년 Aid to Bible Understanding
    "하나님의 이름을 뜻하는 히브리어 자음 네 글자와 주를 뜻하는 히브리 단어 'Adho.nay and 'Elo.him'(아도나이와 엘로힘)의 모음을 합성하여 만든 글자가Yeho.wah' and Yehowih'(여호와)입니다."

    1980년 워치타워
    "... 수세기를 지나면서 올바르게 발음하는 히브리어의 신의 이름을 잃어 버렸습니다." 
      
    1985년 추리
    여호와 정의: 유일하신 참 하느님의 고유한 이름. 그분이 친히 정하신 이름이다.
      
    2010년 통찰
    대부분의 히브리어 학자들이 "Yahweh"(야훼)를 선호하기는 하지만, ...
      
    2010년 파수대
    "우리는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이름을 지닌 것을 자랑스럽게 여깁니까? 다른 사람이 이 거룩한 이름 [여호와]를 알도록 돕고 있습니까?"


    결론
    여호와의 증인이 스스로 주장을 하듯이 "여호와"라는 이름은 성경에 나오는 하나님의 이름이 아닙니다. 이것은 사람이 만든 이름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인 히브리어 자음 네 자 『יהוה』와 "주"로 번역되는 히브리어 "adonai" 모음의 합성어입니다. 그리고 레이문더스 마르티니가 만든 이 이름은 1270년 이후로 쓰였습니다. 여호와라는 이름은 예수님도 모르는 이름입니다. 
    사람이 만든 이름을 우리가 하나님의 이름이라고 주장해야 옳은 것일까요? 그게 정직한 생각일까요? 차라리 여호와의 증인도 성경에 더 가깝다고 자신 스스로가 인정한 "야웨"를 쓰는 것이 더 정직하고 옳지 않을까요? 여호와의 증인 조직이 진정 하나님의 유일한 조직이라면 왜 진리보다 사람의 전통을 택하였나요? 더 나아가, "여호와"가 고유한 하나님의 이름이라고 온 세계에 다니며 거짓 증거하는 일을 중단해야 진정한 여호와의 증인의 정신이 아닐까요? 
    다시 위치타워 온라인 라이브러리 글들을 봅니다.

    "우리는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이름을 지닌 것을 자랑스럽게 여깁니까? 다른 사람이 이 거룩한 이름 [여호와]를 알도록 돕고 있습니까?" 

    ​지난번에는 워치타워가 예언한 모든 예언이 틀린 것을 보면서 워치타워가 하나님의 조직이 아닌 것이 드러났습니다. 이번에는 워치타워가 "여호와"란 이름조차도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것이 워치타워 스스로의 글에서 드러났습니다. 거룩한 하나님의 이름조차도 거짓말을 일삼는 조직이 과연 진실로 하나님의 조직일까요? 예수님도 몰랐던 "여호와"가 하나님의 이름입니까? 온 세계에 다니며 하나님의 이름이 무엇인지를 물어 보는 게 정직한 행동입니까? 선생님은 어떻게 판단하십니까? 







    히브리어 성경에서 하나님의 이름은 י (요드), ה (헤이), ו (바브), ה (헤이)라는 네 개의 히브리어 알파벳으로 기록합니다 (Tetragrammaton). 히브리어 성경 뿐 아니라, 고대 이스라엘 주변의 나라에서도 이스라엘 민족의 하나님을 יהוה 라고 소개합니다 (참조. 메사 석비).
    영어로는 YHWH 라고 쓰지요.
    그런데 영어 철자법에서도 알 수 있듯이 이 네개의 글자에는 모음이 없습니다.
    굳이 우리 식으로 빗대어 표현하자면, “대한민국”이라는 이름을 “ㄷㅎㅁㄴㄱㄱ”이라고 써놓은 것과 마찬가지인 셈이지요.
    그러나 이것이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큰 문제가 되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의 히브리어는 원래부터 모음이 없었습니다.
    모음은 관습처럼 부모의 세대에서 자녀의 세대로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는 것이었거든요.

    모음이 없는 히브리어 표기 전통은 곧 매우 난처한 경우를 맞이합니다.
    이스라엘 공동체에서 거룩한 하나님의 이름은 너무나 거룩하기 때문에 함부로 입에 올리는 것이 금지 되어 있습니다.
    시내 산에서 모세에게 하나님의 이름을 스스로 드러내신 이후에 한번도 불러보지 못한 하나님의 이름 יהוה (요드-헤이-바브-헤이) 는 모세 이후 몇 백년 뒤에 결국 아무도 어떻게 읽는지 모르는 이름이 되어버렸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지금도 유대인들은 성경에서 이 거룩한 하나님의 이름이 나오면 “그 이름” ( השם 하쉠), 또는 “주님” ( אדני 아도나이)이라고 부릅니다. 대부분의 영어 성경에서는 יהוה를 “the Lord” 라고 번역하는데, 이것 역시 하나님의 이름을 정확하게 알지 못하기 때문에 유대교의 전통을 따라서 “주님”이라고 번역한 것이지요.

    예수님의 이름을 알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이름인 ‘여호와(יהוה)’라는 이름을 먼저 알아야 합니다.
    히브리어의 여호와는 원래 상형문자로부터 시작된 문자입니다.

    히브리어의 ‘요드, 헤, 와우, 헤’ 그래서 ‘Yahweh(야훼, 여호와)’라고 발음합니다.

    히브리어 알파벳은 총 22개로 이루어져 있는데, 각 철자 마다 의미가 있습니다.

    여호와의 첫 번째 글자인 ‘요드(Yod)’는 ‘손(hand)’이란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상형문자로부터 시작되었기 때문에 글자의 모양 자체가 손 모양하고 비슷합니다.

    여호와의 두 번째, 네 번째 글자는 ‘헤(Heh)’는 ‘창문 또는 보다(Window, behold, look)’란 뜻을 갖고 있습니다.
    우리가 창문을 통해 밖을 볼 수 있는 것과 같은 의미입니다.

    세 번째 글자는 ‘와우(Vow)’는 ‘못(nail)’이란 뜻을 갖고 있습니다.
    철자가 못 모양처럼 생겼습니다.

    그래서 이 글자들을 종합하면, “그 손을 보아라, 그 못을 보아라(Behold the hand behold the nail)”이란 뜻이 되는 것입니다. 생각나는 분 없습니까? 우릴 위해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예수님을 의미하는 겁니다. 여호와라는 이름 안에 이미 우리를 위한 구원의 길을 제시하고 계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원래 이름은 구약에서 등장하는데, 모세의 후계자였던 ‘여호수아’라는 이름의 축약형이 ‘예수아(Yehhsuah)’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 이름이 신약시대에 헬라어로 ‘이에수스(Iesous)’라고 했고, 라틴어를 거쳐 오늘날 널리 알려진 영어의 ‘지저스(Jesus)’가 된 것입니다.

    예수님의 이름인 ‘여호수아’는 ‘구원’이란 뜻의 ‘호세아’라는 이름 앞에 하나님의 이름인 ‘여호와’를 뜻하는 ‘여’가 붙어서 ‘여호수아’ 축약형으로 ‘예수아’ 그래서 ‘여호와는 구원이시다’라는 뜻인 것입니다.

    예수님의 이름인 ‘예수아’는 ‘야훼는 구원이시다’라는 뜻을 갖고 있고, 그 야훼라는 이름 안에는 ‘그 손을 보라, 그 못을 보라’ 즉 우리의 구원은 오직 예수님의 십자가에 달려 있다는 것을 말씀해 주시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 믿으라는 것입니다.

    "야훼"가 의미하는 10가지

    하나님의 이름은 여호와로 번역됩니다.
    그러나 히브리어로는 "야훼"로 발음되며, 이는 "I am"에 해당하는 단어로 되어 있습니다.

    여호와 혹은 야훼라는 하나님의 이름은 "I am"에 해당하는 단어로 형성된 이름이며 이는 하나님이 다른 모든 존재하는 것들과는 다른 절대적으로 존재하는 분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야훼 ("I am") 라는 이름은 하나님에 대해 적어도 10가지를 말하고 있습니다.

    1. 하나님은 결코 시작이 없습니다.
    모든 아이들은 묻습니다.
    "누가 하나님을 만들었나요?" 모든 지혜로운 부모들은 이렇게 대답합니다. "그 누구도 하나님을 만들지 않았어. 하나님은 그저 존재하시지. 그리고 언제나 존재하셨단다. 시작이 없는 분이지."

    2. 하나님은 끝이 없습니다.
    만약 그분이 존재의 시작이 없다면 그 존재에서 벗어나시는 일도 없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being(존재하는 것)이십니다.

    3. 하나님은 절대적인 실재이십니다.
    하나님을 앞서는 다른 실재는 없습니다. 하나님 바깥에 다른 영원한 실재는 없습니다. 하나님이 뜻하시거나 만드시지 않는 한 오직 하나님만이 존재합니다. 영원히 존재했던 실재는 오직 하나님밖에 없습니다. 영원 전에는 공간도, 우주도, 공허도 없었습니다. 오직 하나님만 계셨습니다.

    4. 하나님은 전적으로 독립적이십니다.
    하나님은 그 존재에 있어서 누구에게도 의존하지 않으십니다. 또한 누구의 도움이나 누구의 조언에도 의존하지 않으십니다.

    5. 하나님이 아닌 모든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께 의존합니다.
    전 우주는 철저하게 하나님께 의존합니다. 그것은 하나님에 의해서 존재하게 되었고, 그 존재를 유지함에 있어서도 매 순간 하나님의 결정에 의존합니다.

    6. 모든 우주는 하나님과 비교하면 아무 것도 아닙니다.
    의존적인 실재와 절대적이고 독립적인 실재의 차이는 그림자와 실물의 차이와도 같습니다. 혹은 메아리와 천둥소리간의 차이와도 같습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그리고 은하계 내에서 놀라워하는 모든 것은 하나님께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닙니다.

    7. 하나님은 변치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어제도, 오늘도, 그리고 영원히 동일하십니다. 하나님은 개선되거나 보완되실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무언가로 becoming 하는 존재가 아닙니다. 하나님은 becoming 하는 존재가 아니라 be 하는 존재입니다. 하나님은 영원히 절대적으로 동일하게 존재하십니다. (He is who he is)

    8. 하나님은 진선미의 절대적 기준입니다.
    하나님은 무엇이 올바른 것인지 찾아볼 법전이 필요 없습니다. 사실들을 확실히 기록해두기 위한 연감이 필요치 않습니다. 무엇이 탁월하고 아름다운 것인지 결정하기 위한 지침이 필요 없습니다. 하나님 자신이 무엇이 옳고, 무엇이 참되고, 무엇이 아름다운지에 대한 기준이십니다.

    9. 하나님은 그가 기뻐하시는 것은 무엇이든지 행하시며, 이는 언제나 옳고 언제나 아름답고 언제나 진리에 부합합니다.
    하나님 밖에 있는 모든 존재는 하나님이 창조하고 설계하셨고 다스리고 계십니다. 따라서 하나님은 자신의 뜻에서 비롯된 것이 아닌 다른 어떠한 것에도 구속되거나 제한되지 않으시며 완전히 자유로우십니다.

    10. 하나님은 우주에서 가장 중요하고 가장 소중한 실재이자 인격이십니다.
    하나님은 전 우주의 그 어떤 존재보다 더 우리의 흥미와 주목과 찬양과 즐거움을 얻으시기에 합당하십니다.



















    7월 7일(금) 호세아 11장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위에 계신 자(7절)

    내 백성이 결심하고 내게서 물러가나니 비록 저희를 불러 위에 계신 자에게로 돌아오라 할찌라도 일어나는 자가 하나도 없도다.
    My people are determined to turn from me. Even if they call to the Most High, he will by no means exalt them.

    "위에 계신 자(The Most Hugh. the One on high)"
    위에 계신 자는 역사의 주인이 되신 "여호와 하나님"입니다.

    위에 계신 자 -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
    열왕기하 19:15
    그 앞에서 기도하여 가로되 그룹들 위에 계신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여 주는 천하 만국에 홀로 하나님이시라 주께서 천지를 조성하셨나이다.

    위에 계신 자  -
    욥기 31:2
    그리하면 위에 계신 하나님의 내리시는 분깃이 무엇이겠으며 높은 곳에서 전능자의 주시는 산업이 무엇이겠느냐.

    욥기 31:28
    이 역시 재판장에게 벌 받을 죄악이니 내가 그리하였으면 위에 계신 하나님을 배반한 것이니라.

    골로새서 3:2
    위엣 것을 생각하고 땅엣 것을 생각지 말라.


    3:1. 위엣 것을 찾으라

    위엣 것을 찾으라
    -
    본절은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심을 받은 골로새 교인들의 삶의 방향을 제시한다.
    그들의 생명은 자신들의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것이기 때문에 그들의 관심사는 그리스도의 관심사로 바뀌어야 했다.
    ‘위엣 것’ 에 대해서 바울은 이미 ‘하늘’ 이라는 용어로 표현한 바 있다(1:5,16,20, O ' Brien).
    따라서 ‘위엣 것’은 ‘하늘 나라와 새 시대의 일’을 의미한다.
    이것은 윤리적인 면을 내포할 뿐만 아니라(12-14절) 하나님께 속한 본질적이며 초월적인 것을 포함한다(O' Brien).
    이것은 이미 골로새 교인들이 맛보고 참여하고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이미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장사되었으며 살리심을 받았기 때문이다.
    한편 ‘찾으라’에 해당하는 헬라어 ‘제테이테’(*)는 현재 명령법으로서 본절의 요구에 충족되기 위하여 지속적인 노력이 필요함을 시사한다(Hendrikaen, O' Brien).

    거기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느니라
    - 본절은 ‘위엣 것’을 찾는 이유이다.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우편에 앉아 계신다’는 것은 초대 교회의 신앙고백(Primitive Confeaaion)을 반영하는 것으로(Bruse),사도들의 설교에 있어서 본질적이고 필수적인 요소였다(행 2:33-35 ; 5:31 ; 7:55,56 ; 롬8:34; 엡1:20 ; 히1:3,13 ; 8:1 ; 10:12; 12;2 ; 벧전 3:22 ; 계 3:21).
    이것은 예수께서 직접 인용하신 시 110:1의 기독론적 해석이다(막 12:35-37 ; 14:61-62).
    사도들은 본절을 문자적인 의미가 아니라 비유적인 의미로 인식하였다.
    그러므로 본절은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우편에서 다스리신다’(엡 4:10 ; 빌2:9-11)는 의미로서, 하늘 영역에서의 그리스도의 중심성과 그의 신적인 지고의 권위를 나타낸다(O' Brien, Bruce, Carson, Vaughan).

    위엣 것을 생각하고 땅엣 것을 생각지 말라
    - 바울은 본절에서 ‘위엣 것’과 ‘아랫 것’을 대조하는 바 이 대조는 윤리적인 요소를 내포한다.
    ‘위엣 것’에 해당하는 윤리적인 요소는 긍휼, 자비, 겸손, 온유, 오래참음, 용납, 용서, 사랑들이며(12-14절).
    ‘땅에 것’에 해당하는 윤리적인 요소는 음란, 부정, 사욕, 악한 정욕, 탐심등이다(5-7절).

    한편 ‘생각하고’의 헬라어 ‘프로네이테’(φρονειτε)는 ‘판단하다’ , ‘주의를 기울이다’라는 의미이다(프로네오. φρονέω).
    이것은 단순히 지적 요소분만 아니라 의지적인 요소를 내포한다.(O' Brien).

    생각하라 / 프로네오(5426)  φρονέω 

    1. 생각하다.   2. ~에 몹시 마음을 두다.  3. 생각을 가지다
    발음 [ phrŏnĕō ]
    어원  / 미완료 ἐφρόνουν, 미래 φρονήσω, 제1 부정과거 ἐφρόνησα, 5424에서 유래
    관련 성경  / 생각하다(롬 8:5, 빌 1:7, 골 3:2), 여기다(롬 14:6), 뜻이 같게 하다(롬 15:5), (서로에게) 마음을 기울이다(롬 12:16, 빌 2:2, 5), [명] 사상(행 28:22).
    신약 성경 / 26회 사용


    이스라엘 역사상 출애굽 사건은 하나님의 구원 행동의 가시적 행위라고 하겠습니다.
    하나님은 단순히 노예에 불과하던 이스라엘을 압제의 굴레에서 벗어나게 하시고 가나안 땅에서 자유와 기쁨을 약속하셨습니다
    그러나 육체적, 정신적 노예 상태에서 벗어난 이스라엘은 우상 숭배에 빠져 버리는 죄를 범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을 향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은 변함이 없으셨고 그들로 하여금 회개하고 하나님의 사랑의 품으로 돌아올 것을 요구하셨습니다.

    호세아 11장은 이와 같은 배경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께 불순종한 현상을 정죄합니다(1-7절)
    범죄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다시 은혜를 베푸십니다(8-12절)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아들과 같이 사랑하셔서 애굽에서 구원하여 주셨지만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사랑을 배반하고 우상 앞에서 절하며 음란하듯 섬긴 것에 대하여 증언합니다.
     
    하나님의 이스라엘에 대한 구원과 인도는 아버지가 아들을 돌봄 같았지만 이스라엘은 아버지의 사랑을 버리고 타락한 아들과 같이 하나님께로부터 멀리 떠나갔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의 백성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셨다.
    비록 이스라엘 백성들이 우상을 섬기며 하나님의 주권을 부인하였어도 하나님은 한번 베풀기로 한 당신의 사랑을 변치 않고 베푸셨다. 이것은 바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족장 즉 아브라함이나 이삭, 야곱 등과 맺은 언약에 기초한 것이기 때문이었다.
    인간의 구원에 관한 하나님과 인간의 언약은 처음부터 하나님의 주도하에 맺어진 것이었다.
    그런 구원의 언약에서 인간의 역할은 하나님의 은혜를 바라보는 것뿐이었다.
    따라서 아담 이후로 아브라함에게까지 이어진 구원의 언약은 처음부터 하나님의 신실하심에 기초하여 변할 수 없는 것이었다.
    공의의 하나님께서 범죄한 이스라엘에게 그대로 심판을 행하신다면 이스라엘 백성들은 벌써 산산조각이 나고 말았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긍휼을 베푸셔서 용서를 베푸셨다.
    하나님께서는 선민을 택하셔서 사랑하겠다고 약속한 언약을 끝까지 이행하신 것이다.
    그래서 비록 하나님과 언약을 맺은 인간이 언약을 이행치 않고 파기했지만 하나님께서는 그 언약을 보존하기 위한 또 다른 계획을 세워 놓으셨다.
    자신의 독생자이신 예수를 통해 인간의 불순종을 대신하시고 언약의 조건을 완성하신 것이다.
    성경에서 말한 대로 모든 존재하는 인간 중에 의인이 아무도 없어도, 구원을 얻을 수 있는 것은 바로 이런 하나님의 사랑의 불변하심에 의한 것이다.
    이런 점에서 그리스도 안에서 택함받은 백성들이 구원의 완전한 소망을 가질 수 있는 것이다.  

    이 세상을 살아가는 어떤 인간이라도 자신의 삶에 대하여 언제든지 당당할 수는 없다.
    사람은 언제나 죄악 속에서 살아가기 때문이다.
    이는 성도들도 마찬가지이다.
    그래서 성도들 중에는 언제나 죄악을 행하는 자신의 삶 때문에 구원에 대한 확신을 가지지 못하는 사람이 있다.
    그러나 이것은 잘못된 태도이며 스스로의 삶을 고통스럽게 만드는 것이다.
    성도들은 비록 자신의 죄악된 삶에도 불구하고 결코 절망적일 수는 없다.
    왜냐하면 성도들의 구원에 관한 한 하나님의 언약은 불변하기 때문이다.
    처음부터 인간의 구원은 사람의 힘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다.
    따라서 인간의 힘으로는 구원에 전혀 보탬이 될 수 없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죄악된 세상을 살아갈 때 결코 낙심해서는 안 된다.
    오히려 자신의 부족함을 발견할 때는 절망감이 아니라 자신의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자인을 사랑하시고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고 감사하는 자세로 살아가야 할 것이다. 

    하늘의 시선과 땅의 시선
    거룩의 가치와 세속의 가치




    애굽의 고센 땅에 정착한 야곱 일가는 어느덧 200만명이라는 엄청난 수로 불어나 있었습니다. 애굽의 바로 왕은 큰 위협을 느끼고 히브리 가정에 남자아이가 태어나면 무조건 나일강에 던져 죽일 것을 명령합니다. 이런 엄혹한 시절에 모세가 태어납니다. 그런데 그의 부모 아므람과 요게벳은 바로의 명령을 어기고 석 달 동안 아이를 숨겨서 키워냅니다. 만에 하나 모세를 숨긴 것이 발각이라도 되면 이미 안전이 보장된 모세의 형 아론과 누이 미리암까지도 위험한 상황이었습니다.

    아므람과 요게벳이 벼랑 끝에서도 모세를 쉽게 포기할 수 없었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요. 거기에는 부정과 모정을 넘어서는 또 다른 중요한 이유가 있었습니다. “그 여자가 임신하여 아들을 낳으니 그가 잘 생긴 것을 보고 석 달 동안 그를 숨겼으나”(출 2:2) 한국어 성경으로만 이해하면 모세의 외모가 너무 출중해서 죽일 수 없었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나라 말 ‘잘 생긴’으로 번역된 히브리어 단어는 ‘토브’입니다. 이 단어는 창세기에도 사용됐습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시고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 했는데 ‘좋았더라’는 단어가 ‘토브’입니다.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좋았던 것은 단순히 인간의 외모가 아니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대로 창조됐습니다. 하나님은 우리 안에 있는 당신의 형상을 보시고 ‘토브’, ‘아름답고 좋았더라’ 말씀하신 것입니다. 아므람과 요게벳이 토브의 시선으로 모세를 바라봤듯이 하나님은 우리가 서로를 하나님의 시선, 토브의 시선으로 바라보기를 원하십니다.

    우리는 지금 죄로 왜곡돼 하나님 나라의 법칙과 기준이 깨어지고 세속의 기준, 잘못된 기준으로 세팅된 세상 속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 땅에서는 많이 가진 자가 대우받고 많이 배우고 높은 위치에 있는 사람이 인정받습니다. 그러나 토브의 시선을 가진 공동체는 한 사람의 존재 자체를 인정하고 존귀하게 여깁니다.

    이런 아름다운 일이 안디옥교회에서 일어났습니다. 사도행전 13장에 안디옥교회를 이끌어 가고 있던 영적인 리더 다섯 명의 이름이 기록돼 있습니다. 먼저 바나바는 안디옥교회를 개척한 목회자이자 레위 지파의 후손이었습니다. 다음은 니게르라 하는 시므온입니다. ‘니게르’에서 파생된 단어가 ‘니그루’인데 ‘흑인’이라는 뜻입니다. 로마 제국에서 흑인들은 대부분 노예였습니다. 다음은 구레네 사람 루기오입니다. 학자들은 구레네 출신인 루기오 역시도 흑인이었을 것으로 추정합니다. 다음은 분봉 왕 헤롯의 젖동생 마나엔입니다. 마나엔은 당시 최고의 권력을 가진 로마 왕가의 사람이었습니다. 마지막은 바울입니다. 그는 철저한 유교적 배경 속에서 자란 최고의 엘리트였습니다.

    한 사람, 한 사람 면면을 살펴보면 도저히 하나가 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이들이 함께 안디옥교회의 영적 리더로 하나가 되어 섬길 수 있었던 이유는 이들 안에 토브의 시선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한 시대 영적 리더로 쓰임 받았던 모세가 존재할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의 시선을 가진 아므람과 요게벳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안디옥교회가 예수님의 마지막 대 명령인 땅끝까지 이르러 증인 되는 사명을 감당할 수 있었던 것은 서로를 토브의 시선으로 바라볼 수 있는 하나님의 마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우리 모두 하나님의 시선으로 서로를 바라보고 세상을 바라봄으로 사분오열 깨어지고 갈라진 이 땅을 하나로 묶어내는 일에 쓰임 받기를 소망합니다.

    하나님의 시선 vs. 인간의 시선

    시선(視線) : 볼 시(視), 줄 선(線) -

    • 1. 눈이 가는 방향(方向)
      2. 눈동자의 중심점(中心點)과 외계(外界)의 주시점(注視點)과를 잇는 직선(直線)
      3. 주의(注意)나 관심(關心).




    왜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바로의 궁궐에서 자라게 했을까요?
    왜 이스라엘이 벌벌떠는 적장 골리앗을 대면한 다윗은 두려움이 없었을까요?

    사무엘이 타락한 제사장의 아이들과 어울려 못된 짓을 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불속에서도 살아 돌아온 다니엘의 믿음의 근원은 무엇일까요?

    하나님이 쓰시는 사람은 어떻게 구분을 하게 될까요?

    하나님은 시대에 따라 쓰실 사람을 미리 준비하십니다.
    모세를 바로의 공주가 건져서 키운 사건은 우연이 아닙니다.
    바로, 하나님의 주권적인 계획이 있었습니다.
    바로의 공주는 그 아이가 당시 천민계층인 이스라엘의 아이라는 것을 알았지만 사랑하는 마음을 가지게 되었으며 유모를 찾게 되었고 모세의 실제 엄마가 유모로 궁궐을 드나들게 됩니다.
    모유를 먹이머 아마도 철저한 유아교육을 시켰을 겁니다.

    ​지금도 하나님은 다음세대에 쓰실 사람을 준비하고 계십니다.
    그게 나일지 나의 자녀일지 아무도 모릅니다.
    하나님만 아십니다.
    하나님께 쓰임받기 위해 우리는 준비를 해야 합니다.
    성경에 의하면, 다윗을 준비하신 하나님, 사무엘을 준비하신 하나님, 다니엘을 준비하신 하나님을 발견 하게 됩니다.

    ​우리는 성경을 통해 하나님의 시선과 인간의 시선이 많이 다르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꼬맹이 였던 양치기 소년 다윗이 적장 골리앗과 당당히 싸워서 이길수 있는 담대함을 주신 하나님을 봅니다.
    어머니의 간절한 기도로 성전에 바쳐친 사무엘이 제사장의 타락한 아들들 틈에서도 올바르게 자라는 모습을 봅니다.
    사자앞에서도 당당하게 하나님을 의지했던 다니엘, 불가마 속에서도 당당했던 다니엘을 통해 하나님의 손길을 느낍니다.

    ​위의 상황을 인간의 시선으로 보면 연약한 양치기/ 타락한 아이들과 뛰노는 아이/ 포로로 잡혀간 소년의 모습 입니다.

    ​지금 악조건에 놓여 있습니까?

    그런데, 악조건 속에서도 하나님께서 쓰실 사람을 훈련 하신다는 사실을 명심 하시길 바랍니다.

    하나님이 보시는 기준은 우리와 다릅니다.

    하나님의 시선은 우리의 시선과 다릅니다.

    ​세상은 꼬맹이 다윗을 보지만, 하나님은 다윗의 용맹함과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을 봅니다.

    세상은 성전에서 악동들과 같이 뛰노는 꼬마 사무엘을 보지만, 하나님은 사무엘의 중심을 보십니다.

    세상은 볼품없는 나라에서 포로로 끌려온 소년 다니엘을 보지만, 하나님은 하나님만 의지하며 담대한 소년의 마음을 읽습니다.

    ​고난과 어려움이 왔습니까?
    결코 흔들리지 마시길 바랍니다.
    흔들리지 않고 변함없는 사람을 주님이 쓰십니다.
    철은 녹슬지만 금은 변함이 없기에 가치가 있습니다.
    변함이 없이 주님만을 의지하시길 바랍니다.
    흔들리지 않아야 합니다.
    환난이 오면 오히려 즐거워 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쓰시기 위해 환난을 예비해 놓으셨을지 모릅니다.
    오직 주님만 바라 보시기 바랍니다.



    5920. 알( ʽal. עַל)
    위에 계신자(알. ʽal)  עַל 

    1. 높음.  2. 높이.  3. 위
    발음 / 알[ ʽal ]
    어원 / 5927에서 유래
    관련 성경 / 위(창 49:25, 시 50:4, 호 11:7), 높이(삼하 23:1). [형] 높은(호 7:16).
    구약 성경 / 6회 사용




    결심하고...물러가나니

    - '결심하고'(테루임)는 기본어 '타라'(*)의 복수 수동태 분사형이다.
    '타라'의 의미는 '매달리다', '집착하다', '치우치다'이다.
    그리고 '내게서 물러가나니'(*, 리므슈바티)란 1인칭 접미사가 붙은 명사(기본 명사, * , 메슈바, 배교)에 전치사가 결합된 단어로서 '나에게서 물러가는 것(나를 떠나가는 것)에'이다.
    따라서 본절은 하나님을 떠나는 일에 매달려 집착해 있음을 암시하는 내용이다.








    7월 6일(목) 호세아 10장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무성한 포도나무(1절)

    이스라엘은 열매 맺는 무성한 포도나무라 그 열매가 많을수록 제단을 많게 하며 그 땅이 아름다울수록 주상을 아름답게 하도다.
    Israel was a spreading vine; he brought forth fruit for himself. As his fruit increased, he built more altars; as his land prospered, he adorned his sacred stones.

    "무성한 포도나무(a spreading vine)"
    이스라엘은 약속의 땅에서 열매를 잘 맺는 포도나무처럼 성장해야 합니다.
    그런데 열매를 맺지만 그 열매를 하나님의 은혜라고 감사하지 않고 도리어 이방 신 바알에게 감사합니다.
    이와 같은 마음을 두 마음이라고 꾸짖습니다(2절)
    성경은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다고 말씀합니다(마태 6:24).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

    예레미야 4:3
    나 여호와가 유다와 예루살렘 사람에게 이같이 이르노라 너희 묵은 땅을 갈고 가시덤불 속에 파종하지 말라.

    * 갈고(5214) 니르( nîyr) נִיר 

    1. 땅을 갈아 엎다.  2. מָנוֹר
    발음 / 니르[ nîyr ]
    어원 / 5216과 동일 어원에서 유래한 듯
    관련 성경 / 갈다(렘 4:3), 기경(起耕)하다(호 10:12)
    구약 성경 / 2회 사용

    * 묵은 땅(5215) 니르(
    nîyr)  נִיר

    1. 개간된 땅.  2. 새로 일군밭. 3. 잠언 13:23
    발음 / 니르[ nîyr ]
    어원 / 5214에서 유래
    관련 성경 / 경작지, 밭을 경작함(잠언13:23), 묵은 땅(예레미야 4:3).
    구약 성경 / 3회 사용


    유다와 예루살렘 사람
    - 본절의 유다가 1절의 '이스라엘'의 일부를 뜻하는 것인지에 대해서는 견해가 달라진다.
    어떤 주석가들은 1절의 '이스라엘'이 현재 포로로 잡혀가 있는 북이스라엘을 가리킨다고 본다(Streane, Welch).
    그러나 문맥상 본절과 4절은 1,2절의 연장선상에 있다고 생각되며, 따라서 본절의 '유다'에는 북이스라엘이 앗수르의 변방 주(州)로 편입된 이후 남하한 백성까지 포함되고 있다고 볼 수 있겠다.

    묵은 땅을 갈고
    - 여기서 '묵은 땅'(니르. 5215)은 오랫동안 경작을 하지 않아 잡초가 무성한 땅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경작된 바가 없는 '새 토양'을 뜻한다.
    결국 분문은 개혁 기간 동안의 형식적, 피상적 회개가 아닌 근복적 회개를 요청하는 내용으로서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란(마 9:17; 막2:22) 예수의 비유와 일맥 상통한다.

    가시덤불 속에 파종하지 말라
    - 예레미야는 여기서 '유다'라는 토지가 과거, 특히 므낫세 통치 이후에 악행이라는 가시덤불로 만연되어 있으며, 유다의 유일한 희망은 오직 새 토지를 경작하는 것뿐임을 지적한다. 즉 우상 숭배로 말미암아 야기된 온갖종류의 폐단들, 곧 가시덤불을 회개와 순종이라고 하는 쟁기로 갈아서 온전히 제거해버리도록 요청하고 있는 것이다(C.L. Feinberg).



    호세아 10:12
    너희가 자기를 위하여 의를 심고 긍휼을 거두라 지금이 곧 여호와를 찾을 때니 너희 묵은 땅을 기경하라 마침내 여호와께서 임하사 의를 비처럼 너희에게 내리시리라.

    * 기경하라(5214)

    * 갈고(5214) 니르( nîyr) נִיר 

    1. 땅을 갈아 엎다.  2. מָנוֹר
    발음 / 니르[ nîyr ]
    어원 / 5216과 동일 어원에서 유래한 듯
    관련 성경 / 갈다(렘 4:3), 기경(起耕)하다(호 10:12)
    구약 성경 / 2회 사용


    호세아는 두 마음을 속히 버리지 않으면 심판을 면할 수 없다고 분명하게 선포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은 계속하여 자기들의 죄악을 버리지 않고 점점 더 타락의 길을 선택하고 말았습니다. 
    결국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말씀에 정면으로 대치되는 행위까지도 주저하지 않고 행했습니다. 
    마침내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의도와는 전혀 타른 길로 나갔고 드디어 헤어날 수 없는 징계의 늪에 빠지고 말았습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을 받아 오직 마음을 하나로 하여 하나님만을 섬겨야 합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배반하여 우상과 하나님을 함께 섬기는 두 마음을 품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행위는 자신들의 욕심을 채우기 위한 수단으로 하나님을 섬긴 결과였습니다.
    이로 인하여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에 대해 심판을 선포하셨습니다.
    하나님만을 섬기라는 언약을 수행하지 않았으므로 이스라엘은 징벌의 심판을 받아 앗수르에 의해서 완전히 무너지고 말았습니다.

    하나님은 오늘날도 분명한 메시지로 그의 백성들에게 말씀합니다.
    오직 여호와만을 섬겨야 하느니라.
    만일 너희들이 여호와 하나님을 버리면 나도 너희를 버릴 것이라고 경고하십니다.

    복의 길로 갈 것인가?
    저주의 길로 갈 것인가?
    어느 길을 선택하느냐에 따라 미래가 결정될 것입니다.
    무엇을 선택하시렵니까?
    불편할지라도 미래가 보장되는 무성한 열매를 맺는 포도나무가 되어 우리들이 누려보지 못했던 풍성한 은혜를 다음 세대에게 물려줄 수 있는 그 길을 선택하는 지혜로운 주의 백성으로 오래도록 기억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두 마음의 죄.
    하나님께서 가장 싫어하시는 것은 바로 인간의 우상 숭배였다.
    하나님은 자신이 질투하는 하나님이기에 자기 자신 외에 다른 신을 섬기는 것을 결코 용납지 않으신다고 분명히 밝히셨다.
    왜냐하면 다른 신을 하나님과 동시에 섬긴다는 것은 하나님과 우상을 동등한 위치에 둔다는 것이며, 이는 우주의 유일한 섭리자이신 하나님을 부정하는 것과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이 가나안에 입성할 때 기존의 모든 족속과 그 곳의 문화를 모두 진멸하라고 명령하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은 역사상 한번도 가나안의 우상 숭배 관습을 철저히 타파한 적이 없었고, 이런 이유 때문에 계속해서 하나님의 심판을 받았던 것이다.

    역대상 12:33
    스불론 중에서 모든 군기를 가지고 항오를 정제히 하고 두 마음을 품지 아니하고 능히 진에 나아가서 싸움을 잘하는 자가 오만명이요.

    시편 12:2
    저희가 이웃에게 각기 거짓을 말함이여 아첨하는 입술과 두 마음으로 말하는도다.

    시편 119:113
    내가 두 마음 품는 자를 미워하고 주의 법을 사랑하나이다.

    호세아 10:2
    저희가 두 마음을 품었으니 이제 죄를 받을 것이라 하나님이 그 제단을 쳐서 깨치시며 그 주상을 헐으시리라.

    야고보서 1:8
    두 마음을 품어 모든 일에 정함이 없는 자로다.

    야고보서 4:8
    하나님을 가까이 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가까이 하시리라 죄인들아 손을 깨끗이 하라 두 마음을 품은 자들아 마음을 성결케 하라.






    게펜 보케크(גֶּפֶן בֹּוקֵק)

    열매 맺는 무성한 포도나무

    - '열매 맺는'(페리 예솨에 로)에 대해 혹자는 '예솨에'(*)가 '열매 맺다'의 뜻이라고 보아(Gesenius, J.Given), 본 구절을 '그가 자기를 위해 열매를 맺는다'로 본다.
    그러나 또 다른 사람은 '예솨에'의 기본어 '솨와'(*)가 '두다', '쌓아놓다'의 의미가 있는 바 본 구절을 '그가 자기를 위하여 열매를 쌓아 놓을것이라'는 의미라고 본다.
    영역본 중 KJV, NIV등은 전자와 유사하게 '그가 자기를 위하여 열매를 맺다'로 해석한다. 한편 '무성한'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보케크'(*)에 대해서는 사람마다 의견이 다르다. (1)'텅빈'으로 보는 견해(A.Ezra). 영역본 중 KJV가 이와 일치한다. (2)본 구절의 기본어가 '약탈하다'의 의미도 있는 바 '도둑맞은'의 뜻(J.Calvin)으로 주장하는 견해. (3)한글 개역 성경과 유사하게 '넓게 퍼진'(Gesenius), '무성하게 자란'(De Wette)으로 보는 견해 등이 있다. 이중 (1)은 문맥상 맞지 않는 것 같고 (2)는 어느 정도 일리는 있으나 자연스럽지는 않다. 따라서 전체적인 흐름을 고려할 때 (3)이 가장 타당한 듯하다. 본 구절은 과거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 풍성했던 이스라엘을 묘사한 내용이다. 그들은 초기 하나님의 축복으로 가나안 땅에 들어와 풍요로운 은혜 가운데 정착했었다(시 80:8-11;렘 2:21;겔 19:10,11).

    제단을...아름답게 하도다

    - 이스라엘이 열매 등으로 풍족하게 되면 될수록 더욱 우상 숭배를 자행하며 사신(邪神)을 아름답게 장식한 사실을 지적한다(2:8).
    이런 현상은 유다 왕국의 말기에도 동일하게 나타났다(겔 16:15-29).

    무성한(1238) 바카크(bâqaq)  בָּקַק

    1. 쏟아 붓다.  2. 땅을 비우다. 3. 주민들을 약탈하다
    발음 / 바카크[ bâqaq ]
    관련 성경 / 무너뜨리다(렘 19:7), 약탈하다(나 2:2), 공허하게 되다(사 24:3), 쇠약하다(사 19:3). [명] 약탈자(나 2:2).
    구약 성경 / 9회 사용


    포도나무(1612) 게펜(gephen)  גֶּפֶן 
    1. 덩굴. 2. 포도나무
    발음 / 게펜[ gephen ]
    어원 / 혼성. 어미활용 גַּפְנִי, 복수 גְּפָנִים, ‘구부리다’는 뜻의 사용하지 않는 어원에서 유래
    관련 성경 / 포도나무(창 40:9, 시 78:47, 학 2:19), 나무(창 40:10), 포도(신 8:8, 왕하 18:31, 사 36:16), 들포도덩굴(왕하 4:39), 포도송이(아 7:12).
    구약 성경 / 55회 사용



    호세아 10장 / 이스라엘의 죄악과 보응
      
    하나님께서는 우상 숭배 등의 죄로 인해 영적 파탄에 이른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그들이 의지한 우상 숭배가 아무 소용없다고 경책하셨다(1-8절).
    또한 하나님은 그들에게 징계를 내리실 것이라는 사실을 예고하며 회개할 것을 재차 촉구하셨다.
    이스라엘의 범죄의 원인은 그들이 두 마음을 가졌기 때문이었다.
    즉 바알과 하나님을 동시에 섬겼던 것이다.
    성경은 두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길 수 없음을 분명히 말씀합니다(마 6:24; 눅 6:13).
    호세아는 두 마음을 속히 버리지 않는다면 심판을 면할 수 없음을 분명히 언급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은 계속하여 자기들의 죄악을 버리지 아니하고 점점 더 타락의 길로만 나아갔다.
    결국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말씀에 정면으로 대치되는 행위까지도 서슴지 않았다.
    마침내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의도와는 전혀 타른 길로 나아갔으며, 드디어는 헤어날 수 없는 깊은 징계의 늪에 빠지고 말았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을 받아 오직 마음을 하나로 하여 하나님을 섬겨야 했는데, 그들은 오히려 하나님을 배반하여 우상과 하나님을 함께 섬기는 두 마음을 품게 되었습니다.
    이는 자신들의 욕심을 채우기 위한 수단으로 하나님을 섬긴 결과였습니다.
    이로 인해 하나님께서는 그들에 대해 심판을 선포하셨습니다.
    하나님만을 섬기라는 언약을 수행하지 않았으므로 이스라엘은 징벌 심판을 당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두 마음의 죄.
    하나님께서 가장 싫어하시는 것은 바로 인간의 우상 숭배였다.
    하나님은 자신이 질투하는 하나님이기에 자기 자신 외에 다른 신을 섬기는 것을 결코 용납지 않으신다고 분명히 밝히셨다.
    왜냐하면 다른 신을 하나님과 동시에 섬긴다는 것은 하나님과 우상을 동등한 위치에 둔다는 것이며, 이는 우주의 유일한 섭리자이신 하나님을 부정하는 것과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이 가나안에 입성할 때 기존의 모든 족속과 그 곳의 문화를 모두 진멸하라고 명령하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은 역사상 한번도 가나안의 우상 숭배 관습을 철저히 타파한 적이 없었고, 이런 이유 때문에 계속해서 하나님의 심판을 받았던 것이다.

    본장에서 호세아 선지자가 선포하는 심판의 예고도 역시 하나님 외에 바알이라는 우상을 섬긴 그들의 죄악 때문이다.
    하나님 외에 다른 신을 섬긴다는 것은 바로 두 마음을 품은 것을 말하며 이 두 마음은 결국 타락이요 죄인 것이다.
    하나님은 오직 하나님 한 분만을 섬기기를 원하신다.
    이런 본장의 내용은 신약 시대의 영적 이스라엘인 성도들이게도 마찬가지이다.
    성경은 하나님 외의 모든 것을 부정한다.
    그래서 바울은 사람이 동시에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듯이 하나님과 돈을 섬길 수 없다고 교훈한 것이다(딤전 6:17).
    이런 점에서 기독교는 근본적으로 비타협적인 종교이다.
    그래서 유대교도 역사상 최초의 유일신 사상으로 등장한 것이다.
    그러므로 본장은 삶에 있어서 포괄적이되 신앙적으로 배타적인 기독교 신앙 의 본질을 단적으로 증거하고 있다.  

    갈수록 물질 위주의 사상이 삶을 지배하는 이 시대 속에서 오직 하나 님만을 섬기며 살아간다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그래서 많은 성도들이 세상에서 돈을 벌기 위해 때때로 자신의 신앙적 신념을 포기하는 경우가 있다.
    그러나 인간의 모든 행복과 성공이 하나님께 달려 있다는 것을 생각할 때 이것은 매우 어리석은 행동이다.
    물질을 우선으로 하는 삶은 순간의 유익은 있으나 결코 하나님의 최종 적인 심판을 피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비록 지금 어렵다고 해도 마지막의 상급을 바라보며 오직 하나님만을 사랑하고 섬기기에 최선을 다해야 할 것이다. 




    심판의 경고(1-8절)

    호세아 선지자는 계속해서 북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그들의 삶이 총체적으로 부패했다고 경고하고 있습니다.
    1-8절이 바로 그 사실에 대해서 증언하고 있습니다.

    (1) 이스라엘은 열매 맺는 무성한 포도나무라 그 열매가 많을수록 제단을 많게 하며 그 땅이 번영할수록 주상을 아름답게 하도다

    북이스라엘에서 가장 오랜 기간 통치하였던 왕은 여로보암2세였습니다. 또 그가 통치할 때에 북이스라엘은 최전성기를 구가하였습니다. 군사적으로 막강하여 다윗과 솔로몬 때 만큼이나 국경이 길어졌고, 경제적으로도 풍요로웠습니다. 여로보암2세 통치 후반에 호세아 선지자는 부르심을 받아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습니다.
    1절의 말씀 그대로 ‘이스라엘은 열매 맺는 무성한 포도나무’와 같았습니다. 그러나 북이스라엘 백성들은 그 풍성함의 이유를 우상들에게 돌렸습니다. 그래서 우상을 섬기는 제단들이 점점 더 많아지고, ‘주상_한 곳에 서 있는 우상’을 꾸미는 일이 경쟁적으로 이루어졌습니다.

    (2) 그들이 두 마음을 품었으니 이제 벌을 받을 것이라 하나님이 그 제단을 쳐서 깨뜨리시며 그 주상을 허시리라

    ‘두 마음을 품다’는 ‘마음이 나뉘어지다’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을 나타내는 표현 중에 성경에 자주 등장하는 것이 ‘만군의 여호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자손들을 출애굽을 행하게 하셨을 뿐만 아니라, 그들로 하여금 가나안 땅에 들어가 그 땅을 차지하게 하기 위해서 많은 전쟁을 치르게 하셨습니다.

    저희가 두 마음을 품었으니
    1. 이스라엘이 하나님으로부터 분리되어 있음(J. Calvin)
    2. 이스라엘이 하나님에게서 떠나 하나님과 우상 사이에서 머뭇거리는 상태(J. Wolfendale)
    3. 이스라엘인들의 마음이 거짓되고 기만적이라는 사실을 나타냄(F. Keil,  B. Chrisholm)

    이스라엘의 마음이 하나님에게서 벗어나 그릇되었음을 의미하는 것은 확실하다.

    하나님이...헐으시리라

    - 이는 이미 모세 오경에 경고된 바 있다(레 26:30).
    본 구절의 '쳐서'(아라프)란 '구부리다', '목을 꺾다'라는 뜻을 내포하는 데(출 13:13; 34:20),
    우상 제단을 깨뜨리시는 하나님의 강한 의지를 암시한다.


    두 마음(할랔 립밤. חָלַק לִבָּם) Their heart is deceitful. Their heart is devided



    그래서 하나님은 그들에게 언제나 군대의 하나님, 승리하게 하시는 하나님이었습니다. 그런데 가나안 땅에 정착하고 나서는 ‘전쟁의 하나님’이 아니라 ‘풍요의 신’이 필요하다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택한 것이 ‘바알’을 비롯한 우상들이었습니다. 그래서 전쟁을 치를 때는 ‘여호와 하나님’을 섬겼고, 농사를 짓고, 목축을 할 때는 ‘바알 하나님’을 섬겼습니다. 그 사실을 잘 지적한 것이, 엘리야 선지자가 갈멜산에서 여호와와 바알 중에서 누가 하나님이신지를 선택하라는 외침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상의 제단을 파괴하시고, 주상_돌기둥을 부수신다고 하십니다. 즉 북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잘못 선택했다는 것입니다.
    (5-6) 사마리아 주민이 벧아웬의 송아지로 말미암아 두려워할 것이라 그 백성이 슬퍼하며 그것을 기뻐하던 제사장들도 슬퍼하리니 이는 그의 영광이 떠나감이며 그 송아지는 앗수르로 옮겨다가 예물로 야렙 왕에게 드리리니 에브라임은 수치를 받을 것이요 이스라엘은 자기들의 계책을 부끄러워할 것이며

    ‘벧아웬’은 ‘벧엘’을 뜻하는 지명입니다. 북이스라엘의 최남단에 위치한 곳인데, 그곳은 아브라함이 갈대아 우르에서 와서 처음 처음 단을 쌓았던 곳이었고, 야곱이 돌베개로 단을 쌓고 예배를 드렸던 곳이었습니다. 북이스라엘의 초대 왕인 여로보암1세가 백성들이 성전이 있는 예루살렘으로 가지 못하도록 막기 위해서 거기에다 금송아지를 세우는 등 우상숭배를 하게 되어, ‘벧엘_하나님의 집’이 아니라 ‘벧아웬_사악의 집, 허무의 집’이라고 경멸적으로 표현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집을 사악의 집, 허무의 집으로 만들어 버린 것을 가만히 두지 않을 것이라고 합니다.
    ‘야렙 왕’의 문자적인 의미는 ‘싸움의 왕’입니다. 그는 ‘아시리아제국의 왕’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우상숭배는 곧 나라를 허무는 출발이자 마침이 되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북이스라엘이 어떻게 될 것인지에 대해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7-8) 사마리아 왕은 물 위에 있는 거품 같이 멸망할 것이며 이스라엘의 죄 곧 아웬의 산당은 파괴되어 가시와 찔레가 그 제단 위에 날 것이니 그 때에 그들이 산더러 우리를 가리라 할 것이요 작은 산더러 우리 위에 무너지라 하리라

    물의 표면에 맺히는 거품이 얼마 지나지 않아서 어떻게 변하는지를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그 거품이 무지갯빛을 띠고 아무리 영롱하게 보일지라도 한순간에 흔적도 없이 사라집니다. 또 거품의 크기가 크면 클수록 더 빨리 터집니다.
    또한 ‘거품’은 ‘나뭇토막’이라고 번역할 수도 있습니다. 강물이나 시냇물 위에 떠 있는 나뭇토막이나 나뭇가지는 조금 있다가 다시 보면, 떠내려가고 나서 흔적도 없이 사라집니다. 그렇게 멸망하게 될 것이라 말씀하십니다. 한 나라의 왕이라 할지라도 말입니다.
    뿐만 아니라 그토록 잘 꾸미려고 했고, 정성을 다했던 벧엘에 세운 산당에는 잡초만 무성하게 될 것이라고 하십니다.
    우리나라 사람이 만든 최초의 대중가요가 ‘황성옛터’입니다. 한때 찬란했던 고려의 왕궁, 만월대를 바라보고 지은 노래입니다. 2절 가사 앞부분이 이러합니다.
    “성은 허물어져 빈터인데 방초만 푸르러 세상이 허무한 것을 말하여 주노라”
    하나님의 집이 우상숭배의 도시가 되어 버린, 벧엘이 이와 같이 될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스라엘의 징계(9-15절)
    9-15절은 북이스라엘의 죄를 기브아까지 소급하여 추궁하고, 결국 징계를 당할 것에 대해서 증거합니다.
    (9-10) 이스라엘아 네가 기브아 시대로부터 범죄하더니 지금까지 죄를 짓는구나 그러니 범죄한 자손들에 대한 전쟁이 어찌 기브아에서 일어나지 않겠느냐 내가 원하는 때에 그들을 징계하리니 그들이 두 가지 죄에 걸릴 때에 만민이 모여서 그들을 치리라

    북이스라엘은 기브아 시대 때부터 당시까지, 300년 이상을 지속적으로 죄를 짓는다고 말씀하십니다.
    ‘기브아 시대’는 사사기 19-21장에 있었던 사건을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그 때에 일어난 일은 입에 담기도 어려운 참극입니다. 한 레위인의 첩이 베냐민 지파에 속한 기브아에서 성폭행과 살해를 당하자, 그 시체를 12조각을 내어서 이스라엘 각 지파로 보내어서 기브아 사람들이 저지른 만행을 온 나라에 알렸습니다. 그래서 전 이스라엘은 베냐민 지파를 상대로 전쟁을 벌였고, 베냐민 지파는 그 일로 인해, 전멸할 지경에 까지 이르게 되었습니다. 이스라엘에서 그 일은 생각도 하기 싫은 치욕적인 사건이었습니다. 그런데 호세아 선지자는 지금의 시대가 그 옛날 사사시대처럼 잔혹하고 추악함이 있다고 고발하고 있습니다.
    북이스라엘이 이방인들에게 물리침을 당하는 ‘두 가지 죄’는 ‘여호와 하나님을 버린 것’과 ‘반역 정부를 세운 것’입니다. 이것은 모두 우상숭배와 연결이 됩니다. 여호와 하나님을 버렸기 때문에, ‘하나님 대용품_우상’을 섬기게 되었고, 다윗의 계보가 아닌 다른 정부를 세웠기 때문에, 성전을 대신하기 위해 벧엘에 송아지 우상을 세웠던 것입니다.
    인간은 예나 지금이나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섬기지 않으면, 하나님의 대용품을 찾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무엇이든지 간에, 자신을 무너뜨리는 원인이 됩니다.
    (11) 에브라임은 마치 길들인 암소 같아서 곡식 밟기를 좋아하나 내가 그의 아름다운 목에 멍에를 메우고 에브라임 위에 사람을 태우리니 유다가 밭을 갈고 야곱이 흙덩이를 깨뜨리리라

    ‘에브라임’은 ‘북이스라엘’을 뜻합니다.
    북이스라엘은 길들인 암소 같아서 곡식 밟기를 좋아한다고 합니다. 트랙터와 같은 농기구가 없던 당시에 소가 해야 할 일이 여러 가지가 있었습니다. 밭을 가는 일도 해야 했고, 곡식을 등에 지고 옮기기도 해야 했으며, 곡식을 빻기 위해 연자맷돌도 돌려야 했습니다. 그 중에서 소의 가장 쉬운 일은 곡식을 밟는 것이었습니다. 소가 곡식을 떨 때에는 입에 망을 씌우지 않는 것이 율법의 관례이었기 때문에 곡식을 떠는 소는 곡식을 마음껏 먹을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본문은 북이스라엘이 복과 형통, 풍요는 좋아하지만, 율법이 요구하는 책임과 의무는 행하려고 하지 않는 것을 꼬집고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에브라임이 사람도 태우고 수레도 끌어야 하고, 밭도 갈게 하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이제는 아무리 많은 일을 해도 먹지 못하게 되리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징계로 이방에게 압제를 당하며, 곤고한 날을 보내게 것이라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명령하십니다.
    (12) 너희가 자기를 위하여 공의를 심고 인애를 거두라 너희 묵은 땅을 기경하라 지금이 곧 여호와를 찾을 때니 마침내 여호와께서 오사 공의를 비처럼 너희에게 내리시리라

    하나님께서는 에브라임 사람들에게 곡식의 씨를 심고, 열매를 거두는 것보다도 더 중요한 공의를 심고 인애를 거두라고 명령하십니다. ‘공의를 심는 것’은 하나님을 향하여서는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섬기는 것’입니다. 마음이 나누어져서 하나님과 우상을 겸하여 섬기려고 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만을 유일하신 분으로 섬기는 것입니다. 또한 사람을 향하여서는 긍휼한 마음, 깊은 공감을 가지고 삶을 나누는 것이 공의를 행하는 것입니다. 그 때에 경험하게 되는 것은 하나님의 ‘인애’입니다. 인애는 하나님의 실패하지 않는 사랑이고, 떨어지지 않고 지속되는 사랑입니다.
    공의를 심고, 인애를 거두기 위해서 반드시 해야 하는 것이 묵은 땅을 뒤집어엎는 것입니다. 묵은 땅은 오랫동안 경작하지 않아서 길처럼 딱딱해진 땅입니다. 당시의 사람들의 심령이 욕망만을 추구하느라 율법과 말씀의 쟁기로 한 번도 뒤집어 보지 않은 것입니다.
    그 마음의 땅을 뒤집으면 공의의 비를 경험하게 될 것이라고 합니다. 땅을 아무리 뒤집어서 거기에 곡식을 심어도, 물이 없으면 결실할 수 없습니다. 뒤집음과 공의의 비가 합해져서 의의 열매를 결실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촉구함에도 불구하고 북이스라엘이 어떠하였는지 이렇게 증거합니다.
    (13) 너희는 악을 밭 갈아 죄를 거두고 거짓 열매를 먹었나니 이는 네가 네 길과 네 용사의 많음을 의뢰하였음이라

    ‘묵은 땅을 기경하라’는 하나님의 말씀에 북이스라엘 백성이 ‘갈고’, ‘거두고’, ‘먹은’ 것은 전부 하나님께서 가증히 여기시는 것들이었습니다. 그들이 밭 갈아 심은 것은 ‘악’이었고, 거둔 것은 ‘죄’였으며, 먹은 것은 ‘거짓 열매’였습니다. 게다가 그들이 의뢰했던 것은 ‘하나님’이 아니라 ‘많은 용사_군사력’이었습니다. 여로보암2세의 군대로 나라를 충분히 지킬 수 있으리라 생각했던 것이었습니다.

    북이스라엘이 장차 어떻게 될 것인지를 이렇게 증거합니다.
    (14-15) 그러므로 너희 백성 중에 요란함이 일어나며 네 산성들이 다 무너지되 살만이 전쟁의 날에 벧아벨을 무너뜨린 것 같이 될 것이라 그 때에 어머니와 자식이 함께 부서졌도다 너희의 큰 악으로 말미암아 벧엘이 이같이 너희에게 행하리니 이스라엘 왕이 새벽에 정녕 망하리로다

    북이스라엘은 국방력이 강하고, 산성을 높이 쌓으면 나라가 지켜지리라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높이 산성을 쌓아도 무너지게 될 것이라고 합니다. 또 벧엘에 송아지로 우상을 만든 것도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하게 부서지게 될 것이라고 합니다. 뿐만 아니라 전쟁이 시작되는 새벽에 이스라엘의 왕이 잡혀 죽게 될 것이라고 합니다. 고대에 왕의 죽음은 곧 전쟁의 패배를 의미하고, 전쟁의 패배는 곧 국가의 멸망과 동의어였습니다. 북이스라엘은 여로보암2세가 죽은 후, 30년 동안 6명의 왕이 죽이고, 죽임을 당하는 혼란을 겪다가 아시리아제국에 의해서 완전히 무너지고 말았습니다.

    북이스라엘이 완전히 무너지게 된 제1 원인은 우상숭배입니다.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섬기지 아니하고, 자신들에게 풍요를 가져다준다고 믿은 바알을 비롯한 가나안의 토착신들을 섬긴 것입니다. 이것은 남유다가 바빌론의 포로가 된 이유도 동일합니다.
    예나 지금이나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의 백성답게 살지 못하고, 그 삶이 무너지는 가장 큰 원인은 우상숭배입니다. 고대에는 우상숭배가 돌과 나무와 같은 눈에 보이는 형상이었지만, 지금은 눈에 보이지 않는 세속적인 가치관과 병든 이기심(욕망)입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자신의 인생에 대해서 자신을 창조하신 하나님보다 자신이 더 잘 안다고 생각하곤 합니다. 그래서 자신의 인생의 주인을 자신으로 삼고, 하나님은 조력자로 여기는 것입니다. 마치 하나님을 알라딘의 마술램프에 나오는 ‘지니’ 정도로 생각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래서 자기의 길을 자신이 정하고, 하나님께 도와달라고만 합니다.
    마치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잔치를 여시고 초대를 하는 데도, 자신은 밭을 샀기 때문에 나가보아야 한다고 말하고, 소를 샀기 때문에 시험을 해 봐야 한다고 말하며, 결혼했기 때문에 내 생활에 더 치중해야 되겠다고 말합니다. 이런 삶의 태도는 자신이 어떤 상태에 있을 때 부르심을 받았는지를 망각했기 때문입니다. 자신들과 민족이 거리와 골목에 있을 때, 길과 울타리 가에 있을 때 불러주심을 받았다는 것을 잊어버렸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세월이 지나고 보면 깨닫게 됩니다. 내 생각보다 하나님의 생각에 순종하는 것이 훨씬 나은 것이며, 내 길을 고집하는 것보다 하나님의 길에 순종하는 것이 최상의 삶을 사는 것이라는 것을 말입니다. 그래서 매일매일을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섬기는 것보다 더 지혜로운 삶은 없으며, 그것보다 인생을 더 가치있게 사는 것이 없습니다. 또한 그렇게 사는 것이 주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는 것입니다.
    오늘도 우리의 이기심의 묵은 땅, 욕망의 묵은 땅, 세속적 가치관의 묵은 땅을 기경하여 공의를 심음으로, 하나님의 인애를 거두며, 하나님의 은혜의 비를 경험하는 복된 날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에브라임 사람들이 열매 맺는 무성한 포도나무에 집중하다가 그렇게 열매를 맺게 해 주시는 하나님을 잊어버리고 말았습니다. 우리도 하나님께서 주신 것에 집중하다가 하나님을 잊어버리나, 잃어버리는 경우가 없게 하여 주시옵소서.
    또한 우리 삶의 ‘벧엘_하나님의 집’을 ‘벧아웬_사악의 집, 허무의 집’으로 전락시키는 일도 없게 하여 주시기를 원합니다.
    오늘도 우리가 우리 삶에 있는 묵은 땅들을 갈아엎게 하심으로 하나님의 인애를 거두며, 하나님의 하나님 되시는 공의로운 비를 경험하는 복된 날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1007. 벧 아웬(Bêyth ʼÂven) בֵּית אָוֶן 

    1. 허영의 집 : 벧엘 성 동쪽에 있는 베냐민 지파의 마을 ‘벧아웬’.  2. 여호수아 7:2.  3. 사무엘상 13:5
    발음 / 벧 아웬[ Bêyth ʼÂven ]
    어원 / 1004와 205에서 유래
    관련 성경 / 벧아웬(수 7:2, 삼상 13:5).
    구약 성경 / 7회 사용

    1008. 벧엘(Bêyth-ʼÊl)  בֵּית־אֵל

    1. 하나님의 집 : 팔레스타인의 한 장소 ‘벧엘’.  2. 여호수아 16:1
    발음 / 벧엘[ Bêyth-ʼÊl ]
    어원 / 1004와 410에서 유래
    관련 성경 / 벧엘(수 16:1, 2, 삼상 13:2).
    구약 성경 / 70회 사용




    호세아 10장 12b 너희 묵은 땅을 기경하라

     

    여러분들은 신앙생활에 기쁨이 있으십니까? 행복이 있으십니까? 행복이 있다면 무엇 때문에 행복하십니까? 진정한 행복은 어디에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지금까지 이렇게 행복했던 순간이 언제라고 생각하십니까? 저는 이런 행복한 순간이 하나님이 임재를 느낄 때라고 생각됩니다. 살아계신 하나님께서 자신의 모습을 계시해 주실 때 마음에 넘치는 기쁨이 있습니다. 저에게는 이런 때가 몇 번 있습니다. 특별히 제가 처음 창조주 하나님을 영접했을 때 하늘의 기쁨이 임했습니다. 그 기쁨으로 제가 대학 일 학년에서 삼 학년까지를 버텼습니다. 대학 삼학년 때 부활의 주님을 만났습니다. 부활의 주님을 만나는 날 감격에 잠을 이룰 수 없었습니다. 그 힘으로 대학 졸업 때까지 살았습니다. 대학을 졸업하고 나서 십자가의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저는 감격하여 한참 울었습니다. 그 후에 순종을 배우고 기도를 배우면서 우리의 생활 속에서 구체적으로 일하시는 하나님을 다시 만났습니다. 그것들은 너무 많아서 다 기록할 수 없습니다. 물질을 통해서 나타나 주신 하나님, 학생들의 성적을 통해서 만나주신 하나님, 그리고 양들의 변화를 통해서 만나 주신 하나님, 질병의 치료를 통해서 만나주신 하나님이 계십니다. 특히 제가 삼 년간 언어와 논술을 가르친 학생들 네 명중에 세 명이 서울의대에 가고 한명이 서울대 전기과에 간 사건을 잊을 수 없습니다. 또 한 번은 본고사반 22명 중에 한 명도 빠지지 않고 서울대 법대와 의대를 포함하여 연고대에 합격했습니다. 회개했을 때 학생회 새 역사를 이루어주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알았을 때도 하나님이 크게 임재하여 주셨습니다. 그때 성경 66권 강해서를 쓰기 시작하게 하셨습니다. 성경 강해를 완성하면서 예수님을 통하여 하나님 나라를 보게 되었습니다. 그때는 하나님이 내주하여 나의 마음 속에 영원히 계신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우리에게 가장 큰 기쁨은 임재뿐 아니라 하나님의 내주하심입니다. 하나님이 내주하실 때 우리는 기쁨이 있고 행복이 있습니다. 우리는 어떻게 하나님의 임재와 내주를 알 수 있을까요?

     

    (축복을 받을수록 우상을 섬기는 이스라엘)

     

    1절을 보십시오. “이스라엘은 열매 맺는 무성한 포도나무라 그 열매가 많을수록 제단을 많게 하며 그 땅이 번영할수록 주상을 아름답게 하도다”

     

    이스라엘은 가지마다 주렁주렁 탐스러운 열매가 가득한 포도나무처럼 번영을 누리고 있습니다! 그들은 그 재산을 제단과 기념비와 신상을 세우는 데에 쏟아 붓고 있습니다. 그 땅에 풍년이 들면 들수록 더욱더 많은 제물을 우상의 제단에 바치기에 바쁜 자들입니다.

    이스라엘이 사막 땅에 살 때는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사랑이 뜨거웠습니다. 하나님은 그때가 즐거웠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때는 행복했습니다. 사막을 지나다 포도나무 송이를 발견했을 때 감격하듯이 하나님을 만나는 감격이 있었습니다. 무화과나무에 첫열매를 보았을 때처럼 그들은 하나님을 보고 만족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사막을 지나자마자 하나님을 버렸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떠나서 우상 바알브올을 섬겼습니다. 이스라엘은 지금 탐스러운 열매가 주렁주렁 맺힌 것처럼 번영을 누리고 있습니다. 그들은 부자가 되자 우상의 제단을 더 많이 만들고 그 돈을 우상 신상에게 쏟아부었습니다. 그들은 풍년이 들면 들수록 우상의 제단에 제물을 바쳤습니다. 하나님은 이들에게 포도주가 떨어지게 하시고 곡식이 떨어지게 하십니다. 흉년으로 이들을 심판하십니다.

    얼마 전에 어떤 부부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들 부부는 가난할 때는 정말 된장찌개라도 보글보글 끓여놓고 이마를 맞대고 행복하게 살았습니다. 남편은 집에 일찍 돌아오고 항상 아내에게 미안한 마음을 가졌습니다. 아내는 남편이 돈을 많이 벌어오지 못해도 정말 행복했습니다. 아내도 남편과 함께 열심히 일했습니다. 그래서 그 집은 부자가 되었습니다. 부자가 되자 남편의 태도가 달라졌습니다. 남편은 집에 늦게 들어왔습니다. 집에서 밥 먹는 날이 한 달에 며칠 안 되었습니다. 사업을 핑계로 여러 여자들을 만났습니다. 아내에게 대하는 말투도 달라졌습니다. 겸손하게 존댓말을 쓰던 사람이 교만하게 반말을 했습니다. 간혹 폭력도 행사했고 목소리도 높아졌습니다. 아내는 이제 기도제목이 달라졌습니다. 남편의 사업이 망하기를 기도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계용묵의 백치 아다다를 아십니까? 아다다는 항상 말을 하면 아다다... 하기 때문에 별명이 아다다입니다. 지금으로 말하면 뇌성마비로 인한 정박아입니다. 누구한 테 시집갈 수도 없습니다. 어떤 가난한 남자가 아다다를 데리고 갔습니다. 아다다는 시집갈 때 혼수감도 가지고 가고 돈도 많이 가지고 갔습니다. 아다다로 인하여 그 시댁에는 활기가 돌았습니다. 시아버지와 남편은 아다다를 신주단지 모시듯이 잘 대해주었습니다. 그 가지고 온 돈을 밑천으로 해서 열심히 일을 했습니다. 그 집이 부자가 되었습니다. 남편은 부자가 되자 아다다가가 싫어졌습니다. 바람을 피우고 아다다를 구박하기 시작했습니다. 아다다는 구타를 이기지 못하고 친정으로 도망을 왔습니다.

    이스라엘이 이들 남편과 같이 되었습니다. 그들이 광야에서 배가 고프고 목마를 때는 하나님을 열심히 섬겼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광야를 떠나자 그들은 하나님을 떠났습니다. 잘 먹고 잘 살게 되자 하나님을 떠났습니다. 하나님이 그들을 물질적으로 축복해주셨지만 그들은 하나님을 떠나버렸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이스라엘을 보며 차라리 사막에서 가난할 때가 얼마나 좋고 행복했었느냐고 탄식하십니다.

     

    (축복의 때에 하나님을 떠난 우리나라 백성들)

     

    이들의 상황이 바로 우리나라의 상황입니다. 우리가 오륙십 년대에 얼마나 가난했습니까? 얼마나 헐벗고 배가 고팠습니까? 그러나 그때 우리는 하나님을 뜨겁게 사랑했습니다. 교회에는 사람이 모였고 선교단체마다 사람이 들끓었습니다. 새벽기도, 금요 철야기도, 금식기도, 성경백독 사관학교, 성경 암송대회등 수없이 많이 있었습니다. 우리나라는 하나님의 은혜로 경제적으로도 많은 축복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이제 90년대부터 교회는 점점 줄어들기 시작하고 있습니다. 점점 편하게 예수님을 믿으려고 합니다. 십자가를 싫어합니다. 하나님이 축복해주시자 그 돈을 가지고 성매매하고 나이트클럽을 갑니다. 돈을 가지고 놀러다니는데 바쁩니다. 하나님이 주신 돈으로 로또복권을 사는 데 열을 냅니다. 하나님이 얼마나 탄식하시겠습니까?

    이들의 상황이 바로 우리의 모습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기 전 우리는 얼마나 고통했습니까? 예수님을 믿지 않았다면 정신 병원에 있을 사람도 있고 자살해서 살지 못할 사람도 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믿는 순간 목숨까지도 주님을 위해서 희생할 것 같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영접하고 나서 살만하니까 이제 일주일에 한번 예배드리고 말씀공부도 부담스러워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크신 은혜를 받고 하나님과 사명을 떠나는 사람도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런 자들을 어떻게 하실까요?

     

    (두 마음을 품은 자들을 벌하시는 하나님)

     

    2절을 보십시오. "그들이 두 마음을 품었으니 이제 벌을 받을 것이라 하나님이 그 제단을 쳐서 깨뜨리시며 그 주상을 허시리라“

     

    그들은 두 마음을 품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섬기면서도 바알을 섬겼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물질을 바알에게 바쳤습니다. 그들은 교회에 다니면서도 마음은 세상에 가 있었습니다. 그들은 말로는 거룩하신 하나님을 부르면서 행동은 음란 사이트들어 가는데 열을 내었습니다. 그들은 진실이 없었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에게 주셨던 축복을 가져가십니다. 그들의 호화로운 우상제단을 무너뜨리고 신상을 쓰러뜨립니다. 그들의 물질적인 축복을 다 가져가십니다. 이는 무서운 일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이런 우상 숭배의 죄악을 회개해야 합니다. 첫사랑을 회복해야 합니다. 이렇게 회개하면 하나님이 성령을 비처럼 주실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의 심판이 임합니다. 요즘 시대는 하나님을 대신하여 돈을 섬깁니다. 음란과 쾌락과 자기를 섬깁니다. 대학촌은 동거촌으로 전락했습니다. 자기의 만족과 쾌락을 섬깁니다. 이렇게 자기를 왕으로 섬기는 자들은 공주병 왕자병에 걸린 자들입니다. 이런 우상 숭배를 회개해야 하나님께서 임재하실 것입니다.

     

    (여호와를 두려워하지 않는 이스라엘)

     

    “3. 그들이 이제 이르기를 우리가 여호와를 두려워하지 아니하므로 우리에게 왕이 없거니와 왕이 우리를 위하여 무엇을 하리요 하리로다 4그들이 헛된 말을 내며 거짓 맹세로 언약을 세우니 그 재판이 밭이랑에 돋는 독초 같으리로다”

     

    호세아서에 하나님은 사자 같은 하나님이십니다. 무서우신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을 두려워할 줄 모르고 담대히 죄를 지었습니다. 그들은 주님 두려운 줄 모르고 살다가, 나라를 잃었습니다. 임금도 못 모시게 되었습니다. 이제 임금이 있은들 나라를 잃었으니 임금은 아무데도 사용할 수 없습니다. 그들은 나라 잃은 것을 탄식할 것입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말을 함으로 죄를 짓습니다. 그들은 하나님께 빈 약속이나 일삼습니다. 거짓 맹세나 합니다. 쓸모없는 언약이나 맺습니다. 그들은 진실성, 신실성을 상실하였습니다. 그들에게 밭이랑에 돋아난 독초처럼 불의가 퍼져 나갑니다.

     

    (우상숭배로 수치를 당하는 이스라엘)

     

    5,6절을 보십시오. “사마리아 주민이 벧아웬의 송아지로 말미암아 두려워할 것이라 그 백성이 슬퍼하며 그것을 기뻐하던 제사장들도 슬퍼하리니 이는 그의 영광이 떠나감이며 그 송아지는 앗수르로 옮겨다가 예물로 야렙 왕에게 드리리니 에브라임은 수치를 받을 것이요 이스라엘은 자기들의 계책을 부끄러워할 것이며”

     

    사마리아 주민은 벳아웬의 금송아지를 잃고 두려워합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으면 세상이 두렵습니다. 벳아웬은 하나님의 집이라는 뜻을 가진 벧엘이었습니다. 여로보암 이세가 단과 벧엘에 단과 금송아지 우상을 만든 후에 벧아웬 곧 우상의 집이라는 뜻으로 바뀌었습니다. 벧엘은 야곱이 하나님을 만난 곳입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곳입니다. 그러나 그곳이 우상이 함께 하는 곳이 되었습니다. 여로보암 이세가 그곳에 송아지 우상을 만들었습니다. 벧아웬은 허무한 곳의 뜻이 더하여졌습니다. 벧아웬은 그 송아지 우상을 잃고 슬퍼할 것입니다. 송아지 우상을 즐겨서 섬긴 이교의 제사장들은, 우상의 영화가 자기들에게서 떠난 것 때문에 탄식할 것입니다. 사람들이 금송아지 우상을 앗시리아에 가지고 가서 앗수르 대왕에게 선물로 바칠 것입니다. 그러나 에브라임이 앗수르에게 대가로 받아 오는 것은 수치뿐일 것입니다. 그들은 굴욕적이 외교를 맺습니다. 끝내 이스라엘은 우상을 섬긴 일로 수치를 당하고야 말 것입니다.

     

    (빨리 죽기를 바라는 이스라엘)

     

    “7사마리아 왕은 물 위에 있는 거품 같이 멸망할 것이며 8. 이스라엘의 죄 곧 아웬의 산당은 파괴되어 가시와 찔레가 그 제단 위에 날 것이니 그 때에 그들이 산더러 우리를 가리라 할 것이요 작은 산더러 우리 위에 무너지라 하리라”

     

    사마리아는 멸망하게 되었습니다. 왕은 물 위로 떠내려가는 나무토막과 같습니다. 이제 이스라엘의 죄악인 벧아웬 산당들은 무너지고, 가시덤불과 엉겅퀴가 자라 올라서 그 제단들을 뒤덮을 것입니다. 그 때에 백성들은 산들을 보고 "우리를 숨겨 다오!" 또 언덕들을 보고 "우리를 덮어 다오!" 하고 호소할 것입니다. 그들은 죽는 것이 사는 것보다 편하여서 빨리 죽기를 바랍니다.

     

    (기브아 사람들과 같이 죄를 지은 이스라엘 사람들).

     

    9. ○이스라엘아 네가 기브아 시대로부터 범죄하더니 지금까지 죄를 짓는구나 그러니 범죄한 자손들에 대한 전쟁이 어찌 기브아에서 일어나지 않겠느냐 10. 내가 원하는 때에 그들을 징계하리니 그들이 두 가지 죄에 걸릴 때에 만민이 모여서 그들을 치리라"

     

    이스라엘은 기브아에 살던 때부터 죄를 짓기 시작해서 이제까지 죄를 짓고 있습니다. 레위지파가 첩을 얻었습니다. 기브온 사람들은 레위인을 동성애 하고자 하였습니다. 그것이 되지 않자 그 첩을 집단 강간하여 죽였습니다. 레위인은 이스라엘 사람들을 격동하게 하여 전쟁을 일으켰습니다. 그들은 거기에서부터 하나님에게 반항하였습니다. 하나님은 베냐민과 이스라엘이 전쟁이 나게 하여 이스라엘 전체를 벌하셨습니다. 베냐민은 600명만 남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어찌하여 전쟁이 기브아에서 죄짓는 자에게 미치지 않겠느냐고 책망하십니다. 이스라엘 전체가 기브아 사람들과 같은 죄를 지었습니다. 하나님이 원하는 그 때에 이 백성을 쳐서 벌하십니다. 이방 나라들도 하나님과 함께 이스라엘 백성을 칠 것입니다. 그들은 두 가지 죄를 지었습니다. 주 하나님을 떠나고 우상을 섬긴 죄입니다.

     

    (에브라임의 목에 멍에를 메우시는 하나님)

     

    "11. 에브라임은 마치 길들인 암소 같아서 곡식 밟기를 좋아하나 내가 그의 아름다운 목에 멍에를 메우고 에브라임 위에 사람을 태우리니 유다가 밭을 갈고 야곱이 흙덩이를 깨뜨리리라"

     

    한때 에브라임은 길이 잘 든 암소와 같아서, 곡식을 밟아서 잘도 떨었습니다. 길들인 암소는 제대로 훈련받고 교육 받은 백성을 말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는 훈련을 받았습니다. 풍성한 수확을 거두어 들였습니다. 그러나 이제 하나님은 그 아름다운 목에 멍에를 씌워 에브라임은 수레를 끌게 하고, 유다는 밭을 갈게 하십니다. 야곱은 써레질을 하게 하십니다. 그들을 이방인의 종이 되게 하십니다. 하나님이 이들에게 멍에를 메게 하고 수레를 끌게 하는 이유를 말씀하십니다.

     

    (공의를 심고 사랑을 거두어야함)

     

    "12a ○너희가 자기를 위하여 공의를 심고 인애를 거두라 너희 묵은 땅을 기경하라 지금이 곧 여호와를 찾을 때니 마침내 여호와께서 오사 공의를 비처럼 너희에게 내리시리라"

     

    하나님은 그들이 정의를 뿌리고 사랑의 열매를 거두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고 하십니다. 지금은 이스라엘이 주를 찾을 때라고 하십니다. 지금이 회개할 때라고 하십니다. 묵은 땅을 갈아엎으라고 하십니다.

     

    (우리가 묵은 땅을 기경해야하는 이유)

     

    "12b 너희 묵은 땅을 기경하라"

     

    오늘 말씀에서 하나님은 묵은 땅을 기경하라고 하십니다. 묵은 땅을 기경하라는 말씀은 쟁기든지 경운기로 갈아 엎으라는 말씀입니다. 여러분 묵은 땅을 보셨습니까? 묵은 땅은 오랫동안 사용하지 않고 묵혀둔 땅을 의미합니다. 이렇게 묵혀 두면 온갖 잡초가 생겨납니다. 잡초뿐 아닙니다. 그곳에는 나무도 자랍니다. 가시나무 같은 것이 뿌리를 내립니다. 이곳 저곳에서 돌맹이도 굴러와 있습니다. 이런 밭은 갈아 엎는 것이 어렵습니다. 부르도자로 밀고 삽으로 모든 나무나 돌맹이를 가려내야 합니다. 오래 된 밭일수록 기경하기는 더욱 어렵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임재를 체험하려면 갈아엎어야 합니다. 여기서 묵은 땅은 오랫동안 회개를 하지 않은 사람들입니다. 이들의 마음에는 갖은 죄악이 뿌리를 내리고 있습니다. 온갖 욕심의 돌맹이들이 굴러와 있습니다. 이를 회개하기는 어려운 일입니다. 지신의 힘으로 힘이 듭니다. 성령의 도자로 밀어야 합니다. 말씀의 삽으로 가려내야 합니다. 현재 이스라엘의 상태가 그런 상태였습니다. 이스라엘은 묵은 밭과 같았습니다. 묵은 밭은 사사기부터 시작된 죄악을 회개하라는 말입니다. 묵은 밭일수록 돌도 많고 가시나무도 많습니다. 갈아엎기가 어렵습니다. 그래도 갈아엎어야합니다. 그들은 회개해야합니다. 회개하고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해야합니다. 음란을 회개하고 물질 숭배를 회개해야합니다. 강대국을 의지하는 죄를 회개해야 합니다.

    회개만이 살 길입니다. 그들이 회개하면 주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정의를 비처럼 내려 주십니다. 하나님이 은혜의 단비를 내려주십니다. 하나님이 마음껏 복을 주십니다. 하나님께서 회개한 자에게 임재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임재하사 비처럼 의를 내려 주신다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은 성령을 단비처럼 내려 주십니다. 아침 빛과 같이 그들을 비추십니다. 치료의 빛 생명의 빛을 비추십니다. 우리의 생활 곳곳에 임재하사 자신을 계시하십니다. 기쁨의 단비를 내려 주십니다. 행복의 단비를 내려 주십니다. 그들의 내면에 영원히 내주하여 주십니다. 그러면 생명이 자랄 것입니다. 꽃이 피고 열매가 맺힐 것입니다. 나무가 자라서 잎이 무성할 것입니다. 나무는 가지를 뻗고 많은 새들이 깃들일 것입니다. 강에는 큼직한 고기들이 뛰놀 것입니다. 행복의 동산, 축복의 동산이 건설될 것입니다.

    하나님은 호세아 선지자를 통해서 이스라엘의 밭에 갈아엎어야 할 죄악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들이 이 죄악의 나무는 뽑아내도 되고 내버려 두어도 되는 것이 아닙니다. 이들이 이를 뽑아 내지 않으면 하나님은 이 밭은 불태워 버립니다. 다시 밭으로 사용할 수 없도록 밭을 황무케 하십니다. 그러므로 반드시 그들은 회개하고 죄악의 나무를 뽑아내야 합니다. 그러면 그들이 뽑아내야 할 죄의 나무는 무엇입니까? 이들이 뽑아내지 않으면 하나님의 어떤 심판이 임합니까? 혹시 우리 가운데 이런 죄악의 요소는 없습니까?

     

    (죄악을 뿌리고 거짓을 거둔 이스라엘)

     

    "13. 너희는 악을 밭 갈아 죄를 거두고 거짓 열매를 먹었나니 이는 네가 네 길과 네 용사의 많음을 의뢰하였음이라"

     

    하나님은 공의를 심고 사랑을 거두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회개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밭을 갈아서 죄악의 씨를 뿌리고, 반역을 거두어서 거짓의 열매를 먹었습니다. 이스라엘은 병거와 많은 수의 군인을 믿고 마음을 놓은 탓으로 죄를 지었습니다. 그들은 자신의 군대를 의지하고 거짓된 강대국을 의지하였습니다. 그들은 이런 죄를 애통하며 회개해야 합니다.

     

    (죄를 뿌리는 이스라엘은 반드시 망함)

     

    "14. 그러므로 너희 백성 중에 요란함이 일어나며 네 산성들이 다 무너지되 살만이 전쟁의 날에 벧아벨을 무너뜨린 것 같이 될 것이라 그 때에 어머니와 자식이 함께 부서졌도다 15. 너희의 큰 악으로 말미암아 벧엘이 이같이 너희에게 행하리니 이스라엘 왕이 새벽에 정녕 망하리로다"

     

    그들이 묵은 땅을 기경하지 않을 때에 이스라엘 백성을 공격하는 전쟁의 함성이 들려 올 것입니다. 벳아벨이 살만에게 공격을 받고 파괴된 날과 같이, 이스라엘의 요새들이 모조리 파괴될 것입니다. 그 날에 자식들이 박살 난 바로 그 바위 위에서 어머니들마저 박살 날 것입니다. 하나님은 벧엘에게 그와 같은 심판을 하십니다. 이스라엘이 지은 심히 무서운 죄악 때문에 그렇게 벌하십니다. 이스라엘 왕은 전쟁이 시작되는 새벽녘에 틀림없이 잡혀 죽을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이런 심판을 피하는 길은 묵은 죄를 회개하는 길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회개함으로 하나님의 임재를 체험하고 영원히 내주하시는 하나님과 함께 살아가기를 기도합니다. 아멘!

    호세아 10장 강해 묵은 땅을 기경하라

    호세아 10장 1-호세아 10장 15

    요절 호세아 10장 12b 너희 묵은 땅을 기경하라






    7월 5일(수) 호세아 9장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하나님의 파수군(8절)

    에브라임은 내 하나님의 파숫군이어늘 선지자는 그 모든 행위에 새 잡는 자의 그물 같고 또 그 하나님의 전에서 원한을 품었도다.
    The prophet, along with my God, is the watchman over Ephraim, yet snares await him on all his paths, and hostility in the house of his God.

    파수군(6822) 차파(tsâphâh) צָפָה

    1. 빛나다.  2. 바라보다. 3. 조사하다
    발음 / 차파[ tsâphâh ]
    관련 성경 / 살피다(창 31:49, 시 66:7), 감찰하다(잠 15:3), 파수하다(삼하 13:34, 나 2:1), 엿보다(시 37:32), 보살피다(잠 31:27), 기다리다(삼상 4:13, 욥 15:22), 바라다(시 5:3, 애 4:17), 바라보다(애 4:17, 미 7:7, 합 2:1), 지키다(렘 48:19).
    [명] 파수꾼(삼하 18:25, 사 21:5, 겔 3:17), 망대(아 7:4).
    구약 성경 / 36회 사용


    하나님은 자기 자신의 백성 즉 이스라엘 백성들이 언약 안에서 하나님의 사랑과 공의를 드러내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번영의 축복과 안정을 누리는 은혜를 베풀어 주셨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와 같은 은혜를 따르지 않고 오히려 하나님을 배반했습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기대와는 달리 오히려 이방인들의 속된 문화와 종교에 영향을 받아 하나님 없는 삶을 즐겼습니다.
    그 결과 하나님도 이스라엘 백성들을 버리셨고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에 저주를 내리셨으며 이스라엘 백성들은 약속의 쫓겨나는  시련을 겪게 되었습니다.

    호세아 9장은 이와 같은 사실을 증거합니다.
    이스라엘은 앗수르의 포로가 될 것이다(1-9절)
    포로가 되기 전 가나안 땅에서 받을 저주에 대하여 예언합니다(10-17절) .

    인간은 누구나 행복하고 축복을 얻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이와 같은 은혜를 누리며 살아가는 사람은 참 드물다고 하겠습니다.
    왜냐하면 참된 행복은 타락한 인간 스스로의 힘으로 얻을 수 없눈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성도들은 행복을 얻을 수 있는 은혜를 받은 사람들입니다.
    인간에게 행복을 주시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성도들이라고 해서 모두 축복을 얻을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의 택함을 받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축복의 땅에서 추방된 것같이 성도들도 하나님의 징계를 받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축복을 받는 것은 성도라는 신분으로 되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대로 순종하는 삶에 의해서 되어지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세상에서는 제멋대로의 삶을 즐기고 교회에서 복을 달라고 기도하는 것은 잘못된 태도입니다.
    복을 구하는 기도처럼 믿음으로 살아가는 삶이 온전히 일치될 때 진정한 축복을 얻을 수 있습니다.
    무더위가 계속되는 여름철에 더욱 강건하여 지옥의 열기보다 부드러운 더위를 지혜롭게 다스리며 진리의 말씀따라 순종하는 하나님의 파수군으로 세워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기브아(Gibah) /  뜻 : 작은산, 언덕

    베들레헴 남동쪽 약 12km 지점, 엘 자바(Jaba, Jeba)로 추측.

    기브아 : 기브아는 히브리어로 구릉을 의미한다.
    예루살렘으로부터 벧엘로가는 도로변에 위치하고 있는 이 기브아는 이스라엘 초대왕인 사울의 고향이다(삼상 10:26).

    1. 유대 남쪽 도시로서 옛적에 성소가 있던 곳이므로 하나님의 기브아라 함 (삿 19:6).
    종교적 암흑기요영적 혼란기였던 사사 시대의 윤리적인 타락상을 보여줍니다.
    이것은 레위인 첩 사건에서 잘 나타납니다.
    에브라임 산지에 살던 한 레위인이 첩을 두었습니다.
    그런데그 첩이 다른 남자와 간음하고 도망을 갔습니다.
    그러자 레위인은 도망간 첩이 있는 장인의 집에 가 그녀를 데리고 돌아오게 되었습니다.

    돌아오는 길에 기브아의 한 노인의 집에 들려 하룻밤을 쉬어 가게 되었는데 그곳의 불량배들이 몰려와 레위인과 동성애를 요구하였습니다.
    막무가내인 그들에게 레위인은 결국 자기 첩을 내어 주지 않으면 안되었습니다.
    밤새도록 고통을 당한 레위인의 첩은 처참하게 죽고 말았습니다.
    그러자 레위인은 죽은 자기 첩의 시체를 열두 덩이로 나누고 그것을 이스라엘 각지에 보냈습니다.
    그는 기브아 사람들의 악행을 천하에 알리고자 했습니다.
    우리는 이 사건에서 사사 시대의 타락상을 여실히 살펴볼 수 있습니다.

    레위인이 첩을 둔 일, 그 첩의 간음행위, 만연한 동성애, 불량배들의 만행, 경악할 만한 사체 절단 행위 등등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지 못한 자들의 삶의 모습들을 발견하게 됩니다.하나님을 떠난 자들의 삶은 결국 처참한 악행과 심각한 부도덕 가운데 처할 수 밖에 없다는 사실입니다(롬 1:24-32)

    2. 유대 산중에 있는 한 성읍(수 15:57).


    기브아의 시대와 같이 심히 패괴한지라

    - 이는 사사 시대에 기브아에 사는 비류(非類)들이 한 레위인의 첩을 강간한 사건을 빌미로 이스라엘인과 베냐민 지파가 싸워 베냐민 사람들이 크게 희생당한 역사적 사실을 말합니다(삿 19:10-20:48).

    이스라엘 백성이 극도로 패괴하게 된 것을 가리킨다. 한편 '패괴한 지라'(쉬흐트)의 기본어 '솨하트'는 (도덕적으로) '부패하다', '타락하다'의 뜻을 함축한다(창 6:12; 신 4:16; 31:29; 잠 6:32; 겔 23:11).

    7843. 패괴하다(솨하트. shâchath) שָׁחַת 

    1. 피엘형 שִׁחֵת
    2. 파멸하다. 3. 무너지다
    발음 / 소하트[ shâchath ]
    관련 성경 / 부패하다(창6:12, 삿2:19), 썩다(렘13:7),터지다(렘18:4), 설정하다(창38:9), 상하게 하다(출21:26), 멸망시키다(민32:15), 멸하다(창9:11, 호11:9), 헛된 데로 돌아가다(잠23:8), 죽이다(사14:20), 헐다(렘12:10, 애2:5), 깨뜨리다(렘48:18, 말2:8), 더럽히다(겔28:17), 패망하다(호13:9), 버리다(암1:11), 없이하다(나2:2), 죽다(창6:17), 헐어버리다(대하34:11), 범죄하다(대하26:16), 손상하다(레19:27), 엎드러뜨리다(삿20:21), 치다(대하35:21), 해되다(사11:9), 해하다(사65:25), 박멸하다(렘11:19), 깨어지다(단8:25), 진멸하다(삿20:42), 파괴하다(사54:16), 사납다(렘2:30), 반역하다(렘6:28), 더러워지다(잠25:26), [명] 해(출8:24), 흠(신32:5), 노략꾼(삼상13:17), 사악(대하27:2), 멸망(렘51:25).[형] 더러운(겔20:44).
    구약 성경 / 140회 사용




    추수의 계절에 경고(1-3절)

    2절에 타작마당과 술틀이 언급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추수의 계절에 추수로 인해 흥겨워하고 있는 백성들을 향해 경고를 하고 있습니다. “이방 사람처럼 기뻐 뛰놀지 말라”고 하며 그 이유를 “음행하여 네 하나님을 떠나고 각 타작 마당에서 음행의 값을 좋아하였다”고 합니다. 단순히 추수에 대한 즐거움이 아니었습니다.
    이들은 바알이라는 우상에게 풍요를 기원하는 제사를 지내며 영적 음행과 온갖 문란한 육체적 음행을 저지르며 즐거웠습니다.

    바알 신앙은 모든 농산물의 수확을 여호와 하나님이 주신 것이 아니라 바알에 의한 것이라고 믿고 추수 때에 풍성한 수확물에 대해서 바알신에게 경배하는 행위를 두려움없이 행하고 있었다.

    하나님은 이러한 행위를 묵과할 수 없었습니다.
    반드시 대가가 따를 것을 선언하셨는데, 2-3절입니다.
    “타작 마당이나 술틀이 그들을 기르지 못할 것이며 새 포도주도 떨어질 것이요 그들은 여호와의 땅에 거주하지 못하며 에브라임은 애굽으로 다시 가고 앗수르에서 더러운 것을 먹을 것이니라.”
    먹거리가 나오지 않게 하겠다는 것입니다.
    기근이나 가뭄을 통해 수확하지 못하게 하겠다는 말씀입니다. 바알을 숭배하는 일이 얼마나 허망한 일인지 알게 하겠다는 말과 다름이 없습니다. 그뿐 아닙니다. 비참한 삶을 예고하고 있는데, 앗수르로 끌려가 포로라는 비참함을 맞이하게 될 것이라 합니다. 설사 앗수르를 피해 애굽으로 도망한다 하더라도 그곳에서도 역시 비참함을 벗어날 수 없을 것이라 경고합니다.

    비참함에 대한 경고(4-6절)
    그 비참함에 대한 구체적인 내용을 이렇게 적고 있습니다.
    (4-6) 그들은 여호와께 포도주를 부어 드리지 못하며 여호와께서 기뻐하시는 바도 되지 못할 것이라 그들의 제물은 애곡하는 자의 떡과 같아서 그것을 먹는 자는 더러워지나니 그들의 떡은 자기의 먹기에만 소용될 뿐이라 여호와의 집에 드릴 것이 아님이니라 너희는 명절날과 여호와의 절기의 날에 무엇을 하겠느냐 보라 그들이 멸망을 피하여 갈지라도 애굽은 그들을 모으고 놉은 그들을 장사하리니 그들의 은은 귀한 것이나 찔레가 덮을 것이요 그들의 장막 안에는 가시덩굴이 퍼지리라.

    이스라엘 백성이 앗수르의 포로나 애굽으로 도망해 하나님께 제물을 드릴 수 없게 되는데 그 이유를 ‘애곡하는 자의 떡과 같아서 그것을 먹는 자는 더러워지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이를 새번역 성경에서는 이렇게 적고 있습니다. ‘그들이 먹는 것은 초상집에서 먹는 음식과 같아서, 그것을 먹는 사람들마다 부정을 타게 될 것이다.’ 부정한 음식이기 때문에 하나님께 드릴 수 없다는 말입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께 나아가지 못하는 관계의 단절이 있게 된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그들의 예배를 받지 않을 것이고, 그들은 더 이상 하나님과 어떠한 관계도 맺을 수 없게 될 것을 경고하고 있습니다.

    이보다 더 무섭고 비참한 경고는 없습니다. 모든 인생은 하나님으로만 온전히 채워질 수 있도록 지어졌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과 교제 속에 살아갈 때에만 온전한 인생의 의미를 채워 갈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떠나서는 살아도 죽은 것과 다름이 없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를 맺지 못하며 사는 것보다 더 큰 비극은 없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이것을 알려주고 싶어 하셨던 것입니다.

    파수꾼으로서의 사명 망각(7-9절)
    또 한 번 이스라엘의 죄가 무엇인지 구체적으로 그려져 있습니다.

    (7-9, 새번역) 이스라엘은 알아라. 너희가 보복을 받을 날이 이르렀고, 죄지은 만큼 벌받을 날이 가까이 왔다. 너희는 말하기를 "이 예언자는 어리석은 자요, 영감을 받은 이 자는 미친 자다" 하였다. 너희의 죄가 많은 만큼, 나를 미워하는 너희의 원한 또한 많다. 하나님은 나를 예언자로 임명하셔서 에브라임을 지키는 파수꾼이 되게 하셨다. 그러나 너희는 예언자가 가는 길목마다 덫을 놓았다. 하나님이 계신 집에서마저, 너희는 예언자에게 원한을 품었다. 기브아 사건이 터진 그 때 못지않게, 이 백성이 더러운 일을 계속한다. 주님께서 이 백성의 죄악을 기억하시고, 그릇된 행실을 다 벌하실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은 그들의 죄 때문에 영적 눈이 가려져 있어서 무엇이 올바르고 무엇이 그른지 분별을 할 수 없었습니다. 하나님은 선지자들을 파수꾼으로 보내셨습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은 선지자들을 높은 파수대에 세워 시시각각 다가오는 위험을 성읍 내부의 사람들에게 알리고 그 위험을 대비할 수 있게 하는 파수꾼의 역할을 맡기셨습니다. 하지만 영적 눈이 흐려져 이를 알지 못한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의 심판에 대해 경고하는 선지자의 메시지가 불편하고 듣기 싫어 원한을 품고 비방한 것도 모자라 참 선지자들을 미친 사람 취급해 버렸습니다. 한편 파수꾼으로 해야 할 역할을 감당해야 할 선지자들 역시 그 소명을 저버리고 백성을 걸려 넘어지게 함으로 타락을 가속시키기도 했습니다.

    이런 이스라엘의 부패가 기브아 사건 때의 부패와 다르지 않았다고 합니다. 이 사건은 사사기 19-21장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에브라임 산지 구석에 한 레위 사람이 살고 있었는데, 그에게는 첩이 있었습니다. 어느 날 그 첩이 집을 나가 친정으로 갔고, 레위 사람은 그 여인을 데리러 갔습니다. 그 여인과 함께 돌아오는 길에 레위 사람은 베냐민 지파에 속한 기브아라는 곳에서 하루를 묵었는데, 이때 기브아의 불량배들이 그 집으로 몰려와 집 주인에게 레위 사람을 내 놓으라고 했습니다. 이 일로 레위사람은 자신의 첩을 대신 내어주었고, 결국 첩은 윤간을 당하여 죽고 말았습니다. 이 일 후 레위 사람은 그녀의 시체를 열두 토막 내어 이스라엘 온 지역으로 보냈고, 결국 전 이스라엘은 베냐민 지파를 상대로 전쟁을 벌였고, 베냐민 지파는 거의 전멸할 지경에까지 이르게 되었던 사건이 있었습니다. 이 사건은 ‘이스라엘에 왕이 없으므로 사람이 각기 자기의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더라’는 사사기의 어두운 영적 상태를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참된 왕인 하나님을 자신의 왕으로 인정하지 않고 스스로 왕의 자리에 앉아 자신의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함으로 극도의 음란함과 잔인함을 저질렀던 이 기브아 사건 때의 타락상이 바로 호세아 시대의 이스라엘과 다르지 않더라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오늘 우리를 당신의 파수꾼으로 부르셨습니다. 내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마음을 말과 삶으로 그대로 전하고 선포하는 자로 살아야 한다는 말입니다. 영적으로 깨어있어 늘 주님의 말씀에 민감하게 반응하며 살아야 한다는 말입니다.

    은혜를 모르는 이스라엘(10-17절)
    10절 상반절에 보면 원래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께 어떠한 존재였는지를 잘 설명하고 있습니다. “옛적에 내가 이스라엘을 만나기를 광야에서 포도를 만남 같이 하였으며 너희 조상들을 보기를 무화과나무에서 처음 맺힌 첫 열매를 봄 같이 하였거늘”

    광야에는 포도가 없습니다. 그런데 전혀 기대하지 못하던 포도를 만난다면 그 기분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감격스러울 것입니다. 또 처음 익은 무화과나무 열매는 매우 맛이 있었는데, 이스라엘이 하나님께 이러한 존재였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진정 기쁨이 되는 존재. 이스라엘이 이러했습니다. 그런데 그런 존재인 이스라엘이 바알브올에 가서 부끄러운 우상에게 몸을 드림으로 저희가 사랑하는 우상 같이 가증하여졌다고 합니다. 이 구절을 새번역성경으로 보면 이렇습니다. “그러나 바알브올에 이르자, 그들은 거기에서 그 부끄러운 우상에게 몸을 바치고, 우상을 좋아하다가 우상처럼 추악해지고 말았다.”

    모압평지에 위치한 바알브올이라는 곳에서 벌어진 사건을 말하는 듯 보입니다. 40년의 광야 생활을 마치고 이제 곧 가나안 입성을 앞둔 상황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모압평지에서 전열을 가다듬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때 벌어지지 말아야 할 사건이 벌어지고 말았습니다. 발람의 꾀에 넘어간 이스라엘 백성은 모압 여인들과 음행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단순한 음행 정도가 아니라 이 여인들의 종교까지 끌어안으며 그들의 신인 바알에 절하기까지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진노는 엄청났습니다. 염병을 내리셨는데, 이만 사천 명이 이 일로 죽었습니다.

    이때처럼 하나님은 바알을 선택한 이스라엘에게 극적이 처방이 필요하다고 판단하셨습니다. 먼저 ‘에브라임의 영광이 새 같이 날아갈 것이다’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버리시고 떠나실 것을 상징적으로 표현한 말입니다. 게다가 이스라엘을 대표하는 에브라임이 잉태하지 못할 것이고, 설령 자식을 낳아서 기른다고 하여도 그 아이들을 살려 두지 않을 것이라 하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더 이상 소망을 생각할 수 없는 더 이상 미래를 상상할 수 없는 철저한 멸망을 예고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계속해서 이스라엘의 죄에 대해 설명합니다.
    (15) 그들의 모든 악이 길갈에 있으므로 내가 거기에서 그들을 미워하였노라 그들의 행위가 악하므로 내 집에서 그들을 쫓아내고 다시는 사랑하지 아니하리라 그들의 지도자들은 다 반역한 자니라.

    길갈은 이스라엘에게 깊은 의미를 지니는 곳이었습니다. 가나안에 들어가기 전 할례 의식을 행하던 곳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사람으로 성결하고 구별될 것을 다짐한 곳이었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이곳이 우상숭배지가 되어버렸습니다. 하나님을 기억하고 은혜를 기억해야 할 의미 있는 그곳이 온갖 악이 행해지는 장소가 되어버렸습니다. 우리의 일상을 돌아보면,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고 떠올릴 수밖에 없는 장소가 있습니다. 은혜로 보내어진 자리임을 고백할 수밖에 없으며, 은혜의 눈물이 스며있는 곳이 있습니다. 가정이 그런 곳일 수 있고, 회사가 그런 곳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어느덧 그곳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떠올리기보다, 하나님의 세밀한 손길을 떠올리기보다, 내 이기심이 자라가는 곳이 되어 있지는 않습니까? 감사함보다 미움, 불평, 증오로 채워가고 있지는 않습니까?

    그렇다면 17절 말씀처럼 하나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주님의 말씀에 비춰 우리 자신을 매일 점검해 가야 합니다. 그때 우리는 우리를 하나님 나라의 잔치로 불러 주신 주님만을 목적 삼고 살아갈 수 있습니다. 또한 우리를 하나님 나라의 잔치 속으로 초대해 주신 것처럼 거리와 골목에 있는 사람들, 길과 울타리 가에 있는 사람들을 이 잔치로 인도하는 징검다리로 사용될 수 있습니다.


    주님! 죄악에 빠진 이스라엘의 어리석음을 보며 우리 자신을 돌아봅니다.
    또한 이스라엘을 향한 주님의 심정을 읽으며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마음은 어떨까 생각해 봅니다.
    주님! 이스라엘을 향해 말씀하시는 주님의 음성을 오늘 나를 향해 말씀하시는 주님의 음성으로 듣게 해 주시옵소서.
    마땅히 벗어야 할 우상을 벗게 하시고, 마땅히 져야 할 주님의 파수꾼의 사명을 지며 살게 해 주시옵소서.
    그리하여 우리가 서 있는 그 자리가 어떠한 곳이든 하나님께서 세워주신 곳임을 믿고, 그곳에서 사명도 새기고, 은혜도 새기고, 감사도 새기며 늘 살게 해 주시옵소서.














    7월 4일(화) 호세아 8장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나팔을 네 입에 댈지어다(1절)


    나팔을 네 입에 댈찌어다 대적이 독수리처럼 여호와의 집에 덮치리니 이는 무리가 내 언약을 어기며 내 율법을 범함이로다
    Put the trumpet to your lips! An eagle is over the house of the LORD because the people have broken my covenant and rebelled against my law.

    나팔을 네 입에 댈지어다(Put the trumpet to your lips!)(엘 히크카 쉬파르(אֶל־חִךְּךָ שֹׁפָר)
    선지자 호세아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타락한 여러 증거를 제시하면서 북왕국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배반하였다고 외칩니다.
    특히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믿는 신앙과 더불어 세상을 따라가는 적당주의와 기회주의의 노예가 되었습니다.
    이러한 모습은 이스라엘이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모든 축복을 상실할 지경에 이르렀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와같은 신앙에 대해 철저한 심판을 경고하셨습니다.
    따라서 호세아 8장의 내용은 이스라엘이 언약과 율법을 위반하였다(1-3절)
    금이나 은으로 새긴 우상에게 절하는 죄를 범했다(4-7절)
    이스라엘이 살길을 찾고자 외세의 도움을 구한 것은 더 큰 멸망의 길로 빠져드는 것이다(8-10절)
    율법을 어긴 것에 대한 구체적인 내용(11-14절)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의 법을 어기고 우상을 숭배하고 자신들의 힘을 의지함으로 하나님께 징벌을 받아 이방의 포로가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의 창조주요 구원주로서 그들의 죄악을 심판하신 것입니다. 

    율법이란 하나님이 이스라엘과 맺은 언약입니다.
    따라서 이 율법은 인간들에게 하나님의 사역의 성격과 하나님의 뜻을 알려 줄 뿐만 아니라 삶의 기준을 제시합니다.
    그러므로 이 율법은 인간이 최고의 행복에 도달하는 데 필요한 모든 지식 곧 하나님의 섭리와 사랑, 그분과 교제하는 방법, 윤리 및 규범과 규칙 등을 알려주는 것입니다.
    따라서 율법은 개인과 가정 그리고 교회와 나라의 운명을 결정지을 만큼 아주 중요한 것이었습니다.
    율법은 인간이 순종하고 따르면 믿음이 자라고 복이 임하는 지름길이 됩니다.
    반면에 불순종하면 저주와 화를 받게 될 것입니다.
    삶의 기준이 되는 율법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완성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가르침을 통해 율법의 숨겨진 의미까지 완전히 가르쳐 주셨으며, 동시에 자신을 십자가의 희생 제물이 되심으로 타락한 인간에게 내릴 율법의 정당한 심판 요구를 대신 지불하므로 율법을 완성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삶의 기준이 되는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 즉 성경을 삶의 유일한 기준으로 삼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의 가르침을 삶 속에 실천함으로써 율법의 요구를 충족시킬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인간은 율법의 심판에서 벗어나게 되었으며 그리스도 안에서 자유자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율법의 의무로부터 해방되었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성도들은 우리를 구원하신 그리스도의 은혜에 감사하며 그의 뜻을 본받아 율법에 순종하는 믿음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믿음의 삶은 세상(땅)의 소금과 세상(코스모스)의 빛이 되는 것을 말합니다.
     


    성경에 ‘나팔’이 등장한다?


    학자들은 40년 동안 광야에서 유목 생활을 하던 이스라엘 백성의 숫자를 무려 200만 명으로 추산한다.
    그 옛날 이 많은 사람들은 어떻게 일사불란하게 움직였을까?
    민수기를 보면 비밀이 풀린다.
    바로 ‘나팔’이다.
    광범위하게 흩어져 있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나팔 소리’는 최고의 신호 체계였다.
     

    두 종류의 ‘나팔’은 각각 언제 불지?

    구약성경에는 두 종류의 나팔이 등장한다.
    하나는 금속 재질로 만들어진 것으로 길이가 대략 45~50cm 되는 은 나팔 ‘하초체라’(חֲצֹצְרָה)

    חֲצֹצְרָה  2689

    1. 나팔
    2. 민수기 10:2이하
    발음 / 하초체라(chătsôtserâh)
    어원 / 2690에서 유래한 중복형
    관련 성경  / 나팔(민 10:8, 대하 20:28, 느 12:35, 호 5:8), 나팔수(왕하 11:14), 나팔부는 자(대하 29:28).
    구약 성경 / 5회 사용

    다른 하나는 21~90cm의 다양한 크기의 양 뿔로 만든 양각 나팔 ‘쇼파르’(שׁוֹפָר)

    שׁוֹפָר 7782

    1. 나팔. 2. שׁוֹפָר
    발음 / 쇼파르[ shôwphâr ]
    어원 / 복수 שׁוֹפָיוֹת 8231에서 유래
    관련 성경 / 나팔(출 19:16, 삿 3:27, 슥 9:14), 뿔나팔(레 25:9, 왕상 1:34, 39).
    구약 성경 / 72회 사용

    ‘은 나팔’(하초체라)은 주로 이동에 따른 신호를 주거나 전쟁에 나갈 때 불었다.
    양각 나팔보다 상대적으로 높은 소리를 내기 때문에 소리의 빠른 전달이 가능했을 것이다.

    ‘양각 나팔’(쇼파르) 역시 신호용으로 사용되기도 했지만 다양한 크기의 뿔 나팔은 크기나 모양에 따라 소리의 높낮이를 조절할 수 있었다.
    그래서 주로 제사를 드리거나 절기 때 연주용으로 사용됐다.
    하지만 두 나팔의 용도를 엄격하게 구별할 수 있었던 것은 아니다.

    신약의 헬라어는 이 두 종류의 나팔을 한 단어, ‘살핀크스’(σάλπιγξ)로 번역했다.

    σάλπιγξ, ιγγος, ἡ 4536

    1. 나팔.  2. 나팔 자체. 3. 나팔이 내는 소리나 신호
    발음 / [ salpingx ]
    어원 / 4535에서 유래한 듯함
    관련 성경 / 나팔(마 24:31, 살전 4:16, 계 9:14)
    신약 성경 /11회 사용

    그러나 시대와 상황, 재질과 소리를 고려했을 때, 은 나팔은 주로 전쟁과 절기 때에 소집과 해산 및 이동을 알리는 신호용으로 사용됐고, 양각 나팔은 제사와 연주용으로 사용됐을 가능성이 크다.

    ‘나팔 소리’,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다

    어릴 때부터 교회를 다닌 사람이라면, 하나님의 명령대로 성 주위를 일주일 동안 돌아 성을 차지하게 됐다는 ‘여리고 전투 이야기’를 잘 알고 있을 것이다.
    이 이야기를 자주 들어본 사람들은 이스라엘 벽성이 6일 동안은 아무 소리를 내지 않다가 7일째에 신호(나팔 소리)에 맞춰 큰 소리를 내며 성을 무너뜨린 사건으로 기억할 것이다.
    하지만 성경을 자세히 읽어 보면 나팔 소리는 마지막 날뿐 아니라 매일 이스라엘 백성 중에 울리고 있었다(수 6:13~14).
    여기서 흥미로운 것은 이 전쟁에 사용된 나팔이 ‘은 나팔’이 아니라 ‘양각 나팔’(수 6:4)이라는 것이다.

    앞서 살펴본 대로라면 전쟁 신호용인 ‘은 나팔’이 사용돼야 하는데, 가나안 첫 전투에는 ‘양각 나팔’이 사용된 것이다.
    이는 어떤 이유일까?

    이는 이스라엘 백성이 여리고 행진을 ‘전쟁’이 아니라 ‘예배’로 생각했기 때문이다.
    가나안 땅은 전쟁이 아니라 약속으로 얻는 땅임을 알고, 하나님께 예배함으로 얻을 수 있다.
    일촉즉발의 전쟁터에서 드리는 예배의 행렬, 멋지지 않은가!

    하나님의 ‘나팔 소리’가 내 삶에 울려 퍼지다

    혹자는 인생을 전쟁에 비유한다.
    이는 삶이 그만큼 치열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세속의 물결에 맞서야 하는 삶의 자리에서 하나님의 자녀가 불어야 하는 나팔은 무엇일까?
    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한 ‘은 나팔’일까? 아니면 그 치열한 현장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임재를 바라며 예배하는 ‘양각 나팔’일까?
    답을 하기에 앞서 진정한 승리가 무엇인지 깨닫고, 우리가 매일 직면하는 전쟁의 정체와 그 승패가 무엇에 달렸는지를 생각해야 한다.
    아무리 치열한 상황일지라도 역사를 주관하시는 하나님의 임재를 바라며 예배할 수 있다면 그것이야말로 진정한 ‘승리’가 아닐까? 오늘도 주님과 동행하며 내 삶이 예배의 연주가 되는 ‘양각 나팔’을 불어 보자.


    요한계시록 8:2, 일곱 나팔을 받더라

    내가 보매 하나님 앞에 일곱 천사가 서 있어 일곱 나팔을 받았더라.

    그렇다면 천사가 일곱 나팔을 받았다는 것의 의미하는 무엇일까요?

    성경에서 나팔 소리는 하나님의 임재를 통한 구원과 심판을 나타냅니다.

    나팔 소리는 전쟁의 때를 알리는 신호입니다.

    사울이 블레셋과 싸울 때 나팔을 본 것은 가장 대표적인 예입니다.
    사울의 아들 요나단이 게바에 있는 블레셋 군대를 쳤을 때 사울은 나팔을 불어 온 이스라엘에 전쟁을 선포했습니다.
    (삼상 13:3) 성전을 봉헌할 때도 나팔을 불었습니다.
    다윗이 언약궤를 다윗성으로 옮긴 후에 성전을 봉헌할 때 제사장들은 나팔을 불면서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을 찬양했습니다.
    그 성전에 하나님의 구름이 가득 찼습니다. (대상 5:12-13)
    그리고 대관식에도 나팔을 불어 축하했습니다. 다윗의 아들 아도니아가 스스로 왕이 되고자 음모를 꾸몄을 때, 다윗은 제사장 사독과 선지자 나단, 그리고 브나야 장군을 불러 아도니아 대신에 솔로몬에게 기름을 붓고 나팔을 불어 이스라엘 왕으로 삼으라고 명령을 했습니다. (왕상 1:34) 그리고 나팔 소리는 예배의 때와 관련 있습니다. 보통 번제를 드리기 전이나 절기에 나팔을 불기도 했습니다. (민 10:10; 레 23:24) 이처럼, 구약 성경에서 나팔 소리는 주로  하나님의 임재를 알리는 신호였습니다.   

    신약 성경에서 나팔은 주로 종말론적 심판 (Eschatological judgment)을 의미합니다. (Osborne, Revelation, 347)

    마태복음에서 예수님은 마지막 때에 일어날 일에 대한 설교에서, “그때 인자의 징조가 하늘에서 보이겠고 그때 땅의 모든 족속이 통곡하며 그들이 인자가 구름을 타고 능력과 큰 영광으로 오는 것을 보리라 그가 큰 나팔소리와 함께 천사들을 보내리니 그들이 그의 택하신 자들을 하늘 이 끝에서 저 끝까지 사방에서 모으리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마 24:31)

    사도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회에 보내는 편지에서, “주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 소리로 친히 하늘로부터 강림하시리니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고”라고 마지막 때 현상을 전합니다. (데살로니가전서 4:16)

    그리고 계시록에서 나팔은 종말론적 약속 (계 1:10; 4:1)과 심판을 나타냅니다.
    특히, 인  심판 뒤에 있을 나팔소리는 심판 자체를 의미합니다. (8:6-9:21 & 11:15-19)
    결국, 나팔 소리는 하나님의 임재로 인한 구원과 심판을 나타내는데, 본문에서 일곱 천사가 일곱 나팔을 받았다는 것은 앞으로 닥칠 심판에 대한 예고입니다.

    어떤 소리에 귀 기울이십니까?
    어떤 소리가 잘 들립니까?
    혹은 어떤 소리를 듣고 싶어 합니까?
    우리 주변에는 많은 소리가 있지만, 우리는 주님의 나팔 소리를 들어야 합니다.
    우리는 주님의 임재를 통한 구원과 심판을 알리는 주님의 나팔 소리를 들어야 합니다.
    그 나팔 소리는 믿는 자에게는 구원의 소리이지만, 믿지 않는 이들에게는 심판의 소리가 됩니다.
    주님께서 언제 오실지 아무도 모르기 때문에 바로 지금 그 나팔 소리에 귀를 기울이어야 합니다.
    그리고 주님의 때를 알리는 나팔수가 되어야 합니다


    등과 기름은 무엇인가?

    1장 미련한 처녀 다섯

    미련한 처녀 다섯은 등을 들고 신랑을 맞으러 나간 열 처녀 중에 다섯이다. 그러면 왜 미련한 자인가? 그것은 ‘미련한 자들은 등을 가지되 기름을 가지지 아니하고’하셨다.

    그러면 ‘등’을 가진 것은 무엇이며, 그리고 ‘기름’을 가지지 아니한 것은 무엇인가?

    1. 등

    (엡1:7)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피로 말미암아 구속 곧 죄 사함을 받았으니

    우리의 허물과 죄로 죽었던 우리가(엡2:1) 하나님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엡1:3-6) 예수 그리스도의 피(대속)으로 말미암아 죄 사함(구속)을 받았다. 이것이 열 처녀가 등을 든 것이다.

    다음은 열 처녀가 든 등 곧 예수 그리스도의 피(대속)로 말미암아 죄 사함(구속)을 받은 것을 자세히 설명한 것이다.

    ●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죄 사함

    (엡1:7)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피로 말미암아 구속 곧 죄 사함을 받았으니

    1. 사죄의 구속

    1) 대형벌의 대속

    (롬5:6-7)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 기약대로 그리스도께서 경건치 않은 자를 위하여 죽으셨도다 *의인을 위하여 죽는 자가 쉽지 않고 선인을 위하여 용감히 죽는 자가 혹 있거니와

    (골1:22) 이제는 그의 육체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화목케 하사 너희를 거룩하고 흠 없고 책망할 것이 없는 자로 그 앞에 세우고자 하셨으니

    우리가 아직 하나님의 영이 함께 거하시지 않는 육신의 연약한 자로 있을 때에(롬5:6-7) 예수 그리스도의 피 곧 예수님의 육체가 죽으시는 대형벌(代刑罰: 골1:22)의 대속을 하셨다.

    2) 사죄의 구속

    (요20:19-22) 이 날 곧 안식 후 첫날 저녁 때에 제자들이 유대인들을 두려워하여 모인 곳에 문들을 닫았더니 예수께서 오사 가운데 서서 가라사대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이 말씀을 하시고 손과 옆구리를 보이시니 제자들이 주를 보고 기뻐하더라 *예수께서 또 가라사대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 *이 말씀을 하시고 저희를 향하사 숨을 내쉬며 가라사대 성령을 받으라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시고 사흘 만에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셔서 주님을 믿는 제자들에게 오사 숨을 내쉬며 가라사대 성령을 받으라 하셨다. 즉 육신의 연약한 자를 하나님의 영(롬8:9)이 거하시는 생령의 사람으로 구속하셨다. 이것이 우리가 받은 사죄의 구속이다.

    2. 칭의의 구속

    1) 대복종의 대속

    (롬5:8-9)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그러면 이제 우리가 그 피를 인하여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더욱 그로 말미암아 진노하심에서 구원을 얻을 것이니

    (빌2:8)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우리가 아직 하나님께 순종치 아니하는 죄인 된 자로 있을 때에(롬5:8-9) 예수 그리스도의 피 곧 예수님께서 죽기까지 복종하시는 대복종(代服從: 빌2:8)의 대속을 하셨다.

    2) 칭의의 구속

    (롬5:18) 그런즉 한 범죄로 많은 사람이 정죄에 이른 것같이 의의 한 행동으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아 생명에 이르렀느니라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기까지 복종하시는 의의 한 행동으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았다. 즉 하나님께 순종치 아니하는 자를 하나님께 순종하는 자로 구속하셨다. 이것이 우리가 받은 칭의의 구속이다.

    3. 화친의 구속

    1) 대화평의 대속

    (롬5:10-11) 곧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목되었은즉 화목된 자로서는 더욱 그의 살으심을 인하여 구원을 얻을 것이니라 *이뿐 아니라 이제 우리로 화목을 얻게 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 안에서 또한 즐거워하느니라

    (골1:19-20) 아버지께서는 모든 충만으로 예수 안에 거하게 하시고 *그의 십자가의 피로 화평을 이루사 만물 곧 땅에 있는 것들이나 하늘에 있는 것들을 그로 말미암아 자기와 화목케 되기를 기뻐하심이라

    우리가 아직 육신의 생각으로 하나님과 원수 된 자로 있을 때에(롬5:10-11) 예수 그리스도의 피 곧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모든 충만으로 예수님 안에 거하시는 대화평(代和平:골1:19-20)의 대속을 하셨다.

    2) 화목의 구속

    (엡2:15-16) 원수 된 것 곧 의문에 속한 계명의 율법을 자기 육체로 폐하셨으니 이는 이 둘로 자기의 안에서 한 새 사람을 지어 화평하게 하시고 *또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 원수 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

    예수님께서 자기 안에서 한 새 사람을 지어 하나님과 화평하시고, 또 십자가에서 아버지 하나님의 모든 충만으로 예수님 안에 거하시는 화목으로 말미암아 원수 된 것을 소멸하셨다. 즉 육신의 생각으로 하나님과 원수 된 자를 영의 생각(롬8:6)으로 하나님과 화평하고 또 하나님과 화목 하는 자가 되게 구속하셨다. 이것이 우리가 받은 화친의 구속이다.

    참고로, 우리가 영의 생각(롬8:6)으로 ‘하나님과 화평 하는 것’은 예수 믿는 자에게 보혜사 성령(요14:16, 요14:26, 요15:26)이 임하셔서 함께 거하시는 것을 말씀한다. 그리고 우리가 영의 생각으로 ‘하나님과 화목 하는 것’은 예수 믿는 자에게 주의 성령(눅4:18)이 임하셔서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을 말씀한다.

    2. 기름

    (엡1:13) 그 안에서 너희도 진리의 말씀 곧 너희의 구원의 복음을 듣고 그 안에서 또한 믿어 약속의 성령으로 인치심을 받았으니

    예수 그리스도의 피(대속)으로 말미암아 죄 사함(구속)을 받은 우리가 그 안에서 또한 믿어 약속의 성령으로 인치심을 받았다. 이것이 기름을 든 것이다.

    그면 약속의 성령으로 인치심을 받은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에게 보혜사 성령이 임하셔서 함께 거하시고(요14:16-17),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요14:26),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 하시는(요15:26) 것이며,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에게 주의 성령이 임하셔서 기름을 부으시고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눈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케 하시는(눅4:18) 것이다. 이것이 미련한 처녀 다섯이 기름을 가지지 못한 것이며, 이것이 슬기 있는 처녀 다섯이 그릇에 기름을 담아 등과 함께 가져간 것이다. ‘기름’에 대한 자세한 설명은 아래의 “2장 슬기 있는 처녀 다섯, 2. 기름”에서 참고하시기 바란다.

    2장 슬기 있는 처녀 다섯

    슬기 있는 처녀 다섯은 등을 들고 신랑을 맞으러 나간 열 처녀 중에 다섯이다. 그러면 왜 슬기 있는 자인가? 그것은 “슬기 있는 자들은 그릇에 기름을 담아 등과 함께 가져갔더니”하셨다.

    그러면 등을 가진 것은 무엇이며, 그리고 그릇에 기름을 담아 등과 함께 가져간 것은 무엇인가?

    1. 등

    (엡1:7)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피로 말미암아 구속 곧 죄 사함을 받았으니

    우리의 허물과 죄로 죽었던 우리가(엡2:1) 하나님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엡1:3-6) 예수 그리스도의 피(대속)로 말미암아 죄 사함(구속)을 받았다. 이것이 열 처녀가 든 등이다. ‘등’에 대한 자세한 설명은 위의 “1장 미련한 처녀 다섯 1. 등”에서 언급하였기에 생략한다.

    2. 기름

    (엡1:13) 그 안에서 너희도 진리의 말씀 곧 너희의 구원의 복음을 듣고 그 안에서 또한 믿어 약속의 성령으로 인치심을 받았으니

    예수 그리스도의 피(대속)으로 말미암아 죄 사함(구속)을 받은 그 안에서 또한 믿어 약속의 성령으로 인치심을 받았다.

    그러면 약속의 성령으로 인치심을 받은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에게 보혜사 성령이 임하셔서 함께 거하시고(요14:16-17),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요14:26),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 하시는(요15:26) 것이며,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에게 주의 성령이 임하셔서 기름을 부으시고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눈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케 하시는(눅4:18) 것이다. 이것이 미련한 처녀 다섯이 기름을 가지지 못한 것이며, 이것이 슬기 있는 처녀 다섯이 그릇에 기름을 담아 등과 함께 가져간 것이다.

    다음은 슬기 있는 처녀 다섯이 그릇에 기름을 담아 등과 함께 가져간 것이니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에게 보혜사 성령이 임하심과 주의 성령이 임하심이다.

    ● 보혜사 성령

    1. 영원토록 함께 계시는 보혜사 성령

    (요14:16)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시리니

    예수 그리스도의 사죄의 구속을 힘입어 죄 짓지 아니하는 자에게 보혜사 성령이 임하셔서 영원토록 함께 거하신다.

    2. 모든 것을 가르치시는 보혜사 성령

    (요14:26)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시리라

    예수 그리스도의 칭의의 구속을 힘입어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자에게 보혜사 성령이 임하셔서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주께서 말씀하신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신다.

    3.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 하시는 보혜사 성령

    (요15:26) 내가 아버지께로서 너희에게 보낼 보혜사 곧 아버지께로서 나오시는 진리의 성령이 오실 때에 그가 나를 증거하실 것이요

    예수 그리스도의 화친의 구속을 힘입어 하나님과 동행하는 자에게 보혜사 성령이 임하셔서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 하신다.

    ● 주의 성령

    (눅4:18)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눈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케 하고

    예수 믿는 자에게 주의 성령이 임하셔서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기름을 부으시고(제사장 직책과 선지자 직책과 왕 직책을 세우시고)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눈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케 하셨다.

    1.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육신의 연약한 자(롬5:6, 롬6:19)를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는(롬8:9) 생기 있는 자가 되게 하는 것을 말씀한다.

    2. 눈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하나님께 순종치 아니하는 죄인 된 자(롬5:8, 롬11:30)를 하나님께 순종하는(롬1:5) 의인이 되게 하는 것을 말씀한다.

    3. 눌린 자를 자유케

    육신의 생각으로 하나님과 원수 된 자(롬5:10, 롬8:7)를 영의 생각(롬8:6)으로 하나님과 화목 하는 자가 되게 하는 것을 말씀한다.

    (결론)

    열 처녀가 등을 든 것은 꼭 같다. 즉 예수 그리스도의 피 곧 대속으로 말미암아 죄 사함(구속)을 받은 것은 꼭 같다.(이에 대한 도리를 부산서부교회 백영희목사님께서는 모든 믿는 자가 차별이 없이 받은(롬3:22) 것이므로 ‘기본구원’이라 표현하셨다) 그러므로 열 처녀는 전부 택자이다.

    그러나 미련한 처녀 다섯은 ‘등을 가지되 기름을 가지지 아니하고’, 슬기 있는 처녀 다섯은 “그릇에 기름을 담아 등과 함께 가져갔더니”이다.

    미련한 처녀 다섯은 예수 그리스도의 피(대속)으로 말미암아 죄 사함(구속)을 받았다. 그러나 죄 사함의 구속을 받은 그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을 힘입어 사는 믿음으로 살지 아니하여 약속의 성령으로 인치심을 받지 못하였다. 즉 보혜사 성령이 임하심을 받지 못하였고, 주의 성령의 임하심을 받지 못하였다.

    슬기 있는 처녀 다섯은 예수 그리스도의 피(대속)으로 말미암아 죄 사함(구속)을 받았다. 그리고 죄 사함의 구속을 받은 그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을 힘입어 사는 믿ㅇ음으로 살아서 약속의 성령으로 인치심을 받았다. 즉 보혜사 성령이 임하심을 받았고, 주의 성령의 임하심을 받았다.

    그런즉 미련한 처녀 다섯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가지지 아니하였고, 슬기 있는 처녀 다섯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가졌다.(이에 대한 도리를 부산서부교회 백영희목사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터 위에 금과 은과 보석으로 세우는(고전3:10-15) 것이므로 ‘건설구원’이라 표현하셨다, 건설구원은 곧 성화구원(그리스도의 형상을 이루는: 갈4:19)이다.

    그러면 예수 그리스도의 피 (대속)으로 말미암아 죄 사함(구속)을 받은 그 안에서 그 구속을 힘입어 사는 믿음이 무엇인가?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사죄의 구속과 칭의의 구속과 화목의 구속을 힘입어 사는 믿음이다.

    ● 우리의 믿음

    (엡1:13) 그 안에서 너희도 진리의 말씀 곧 너희의 구원의 복음을 듣고 그 안에서 또한 믿어 약속의 성령으로 인치심을 받았으니

    1. 사죄의 구속을 믿는 믿음

    예수 그리스도의 사죄의 구속을 힘입어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는 자로 사는 것이다. 즉 죄 짓지 아니하는 자로 사는 것이 사죄의 구속을 힘입어 사는 믿음이다.

    2. 칭의의 구속을 믿는 믿음

    예수 그리스도의 칭의의 구속을 힘입어 하나님께 순종하는 자로 사는 것이다. 즉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것이 칭의의 구속을 힘입어 사는 믿음이다.

    3 화친의 구속을 믿는 믿음

    예수 그리스도의 화친의 구속을 힘입어 하나님과 화목 하는 자로 사는 것이다. 즉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이 화친의 구속을 힘입어 사는 믿음이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피(대속)으로 말미암아 죄 사함(구속)을 받은 우리들이 해야 할 것은 믿음이다. 그래서 성경은 ‘보배로운 믿음(벧후1:1)’이라 하셨다.

    기다리던 신랑을 맞으러 나간 열 처녀의 등불과 기름의 참된 의미


    Matthew 25:1 Then shall the kingdom of heaven be likened unto ten virgins, which took their lamps, and went forth to meet the bridegroom. 2 And five of them were wise, and five were foolish. 3 They that were foolish took their lamps, and took no oil with them: 4 But the wise took oil in their vessels with their lamps.

    성경을 읽다 보면 눈을 가리고 있던 천이 벗겨지는 듯한 느낌이 들 때가 있는데, 그중 한번이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는 구절의 참된 의미를 깨달았을 때라면 다른 한 번은 열 처녀의 비유에서였습니다(완전수 10에 대한 자세한 의미는 여길 누르시기 바랍니다). 여태까지 열 처녀의 비유를 ‘우리 크리스천들은 어리석은 다섯 처녀처럼 되어서는 안 된다. 기름이 떨어지지 않도록 주의해야 하고, 은혜에서 떨어져 나가지 않도록 주의해야 하며, 늘 성령 충만 해야 한다’는 식의 설교를 들었었습니다. 그러다 몇 년 전에는 ‘이 열 처녀를 크리스천에 비유하는 건 잘못된 해석이다. 크리스천은 성령을 받은 사람들이기에 어리석은 5 처녀처럼 기름이 떨어질 수가 없다. 그렇기에 이 열 처녀의 비유는 천년왕국 때 주님께로 돌아올 이스라엘에 대한 비유다’란 설교를 들었었습니다.

    양쪽 해석에 대해 별다른 생각 없이 지내던 어느 날, 여느 때처럼 성경을 통독하다가 깜짝 놀라게 됐습니다. 마태복음 25장 3절과 4절을 직역하면, ‘어리석은 자들은 자기들의 등불은 가져갔으되 기름은 가져가지 않았더라, 그러나 현명한 자는 등불과 함께 자신들의 그릇에 기름을 가져갔더라’. 3절의 ‘took no oil’이란 표현이 눈에 들어오자 비늘이 벗겨지는 느낌이었습니다. 여태까지 있던 기름이 떨어진 줄로만 생각하고 또 그렇게 듣고 넘어갔었던 구절이었는데 5 처녀는 처음부터 기름이 없었음을 발견하자 잠시 멍했습니다(숫자 5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여길 누르시기 바랍니다).

    물론 이렇게 눈에서 비늘이 떨어져 나가는 것 같은 느낌은 하루아침에 일어나는 일은 아닙니다. 그동안 성경을 여러 번 주의 깊게 살피며 정독했었고 또 그 과정에서 깨달았었던 다른 것들이 합쳐지며 화학작용처럼 일어난 것이긴 했습니다. 성경을 주의 깊게 읽는 가운데 이미 ‘vessel’ 즉 그릇이 성경에선 사람의 몸을 뜻하기도 한다는 걸 알고 있었습니다. 삼상 21장에 보면 다윗이 사울에게서 도망칠 때 제사장 아히멜렉을 만나 먹을 것을 구합니다. 그러자, 아히멜렉은 먹을 것이라고는 여호와께 올렸다 내린 거룩한 빵 5덩이 밖에 없는데 같이 있는 자들이 여자를 가까이하지만 않았다면 주겠다고 합니다. 그때 “다윗이 제사장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우리가 참으로 삼 일 동안이나 여자를 가까이 하지 아니하였나이다 내가 떠난 길이 보통 여행이라도 소년들의 그릇이 성결하겠거든 하물며 오늘 그들의 그릇이 성결하지 아니하겠나이까…(삼상 21:5)”라고 합니다. 여기서 소년들의 몸을 그릇으로 표현했음을 볼 수 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신약에서도 하나님은 바울에 대해 “…이 사람은 내 이름을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전하기 위하여 택한 나의 그릇이라“고 하십니다. 바울 또한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이는 심히 큰 능력은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고후 4:7)’고 하며 디모데에게 “큰 집에는 금 그릇과 은 그릇뿐 아니라 나무 그릇과 질그릇도 있어 귀하게 쓰는 것도 있고 천하게 쓰는 것도 있나니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런 것에서 자기를 깨끗하게 하면 귀히 쓰는 그릇이 되어 거룩하고 주인의 쓰심에 합당하며 모든 선한 일에 준비함이 되리라(딤후 2:20-21)”고 말합니다.

    또한 저는 성경에 나오는 어떤 단어의 의미를 알고 싶을 땐 성경에서 그 단어가 들어간 모든 구절을 뽑아 읽어보는데-부끄럽게도 백 구절 넘어가는 것들은 그 유익을 알면서도 뽑아놓기만 했지 읽지 못한 것들이 대부분입니다-그렇게 모든 구절을 읽다 보면 성경에서 말씀하시는 단어의 의미가 들리기 시작합니다. 그렇게 ‘등불’의 바른 의미를 알고자 예전에 킹제임스 영어 성경에서 ‘lamp’가 들어간 44구절을 모두 찾아 읽었었습니다. 그런데 이 ‘lamp’라는 단어는 놀랍게도 44구절 안에 총 50번 등장합니다. 50은 온전한 은혜와 속량 및 자유를 뜻하며 율법이 아닌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성령의 법을 뜻하는 숫자입니다(50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여길 누르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이 모든 과정에서 내린 결론은 ‘등불’은 하나님의 말씀 및 언약을 뜻하는데 특히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성령의 법을 뜻한다는 거였습니다. 몇 구절을 예로 든다면 등불은 창 15:17에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언약을 맺으실 때 반으로 찢긴 헌물의 사체들 사이로 등불과 화로가 지나가는 장면에서 처음 나옵니다. 그리고 시 119:105절에 ‘주님의 말씀은 내 발의 등불’이라는 다윗의 고백이 나오며 잠언 6:23절엔 “대저 명령은 등불이요 법은 빛이요 훈계의 책망은 곧 생명의 길이라”고 합니다. 여기서 명령으로 번역된 단어가 영어로는 ‘commandment’ 즉, 계명입니다.

    이런 과정을 거친 후에 어느 날 열 처녀의 비유를 읽다가 어리석은 5 처녀는 등불은 가져갔으되 기름은  없었고 현명한 5 처녀는 등불과 함께 자기들의 그릇(몸)에 기름을 가져갔더라는 비유가, 하나님의 말씀 즉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성령의 법(등불)이 올 것이라는 언약은 알았지만, 그 언약을 성취하러 오신 예수님은 정작 거부해서 성령(기름)은 없게 될 유대인들과 예수님을 믿어 성취하신 성령의 법(말씀) 안에 기름인 성령을 받게 될 교회를 비유하셨음을 깨달았습니다. 등불 자체엔 당연히 기름이 있어 불이 탈 수밖에 없습니다. 왜냐면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의 저자는 성령님이시기에 등불 자체에 기름이 있지만, 말씀 즉 성령의 법(등불)만 갖고 있지 그 말씀을 마음 가운데 믿어 주님을 영접함으로 성령의 전(기름을 담은 그릇)이 되지 못한다면(고전 3:16), 그가 가진 성경이나 언약이 구원을 가져오진 않습니다. 이 비유를 현 지역 교회에 적용한다면 그리스도의 피로 씻김 받고 말씀을 마음에 받아 성령으로 거듭난 그리스도인들과 그냥 성경책만 들고 다니는 church goer(그냥 교회만 왔다 갔다 하는 사람들)에 비유할 수 있을 거 같습니다.

    더구나 3절에 어리석은 처녀들은 모든 묘사에서 복수로 쓰이는데 4절에 지혜로운 처녀들은 5명임에도 불구하고 ‘the wise’란 단수로 표현하다가 ‘그들의 그릇들에’, ‘그들의 등불들’에서는 복수로 쓰입니다. 교회는 여러 지체로 되어 있으면서도 한 몸이요 한 영인 탓입니다. 그렇기에 이 비유에서 나오는 현명한 5 처녀는 어리석은 처녀들에게 기름을 나눠줄 수 없다고 9절에서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내 그릇에 담겨 있는 기름을 (몸에 임재하시는 성령) 나눠줄 방법이 없기에 너희 것을 사라고 권면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은 “오호라 너희 모든 목마른 자들아 물로 나아오라 돈 없는 자도 오라 너희는 와서 사 먹되 돈 없이, 값 없이 와서 포도주와 젖을 사라(사 55:1)“고 말씀하시고 계시록의 라오디게아 교회에게도 내게로 와서 사라고 권면하십니다. “네가 말하기를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 하나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 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는도다 내가 너를 권하노니 내게서 불로 연단한 금을 사서 부요하게 하고 흰 옷을 사서 입어 벌거벗은 수치를 보이지 않게 하고 안약을 사서 눈에 발라 보게 하라(계 3:17-18).” 그들은 이어지는 계 3:20절에 보이듯이 그냥 교회만 다니지 말고 예수님을 마음 가운데 주님으로 영접해야 하는 사람들입니다.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더불어 먹고 그는 나와 더불어 먹으리라“(계 3:20) 

    그렇게 황망히 자리를 떠났던 어리석은 5 처녀들은 11절에 다시 돌아와 지혜로운 자가 신랑과 함께 marriage(결혼)에-성경엔 wedding 즉 결혼식에 대한 비유도 나오지만, marriage 즉 결혼식을 포함한 결혼한 상태를 뜻하는 비유도 나옵니다-들어가게 되어 닫힌 문을 열어달라고 주님께 호소합니다. 하지만 그냥 문을 열어달라고만 하지 어디에도 기름을 사 왔더란 기록은 없습니다. 예수님의 초림과 재림(공중 재림) 사이에 있는 은혜의 때가 지난 후에는 이미 늦었기 때문입니다.








    눈 가리고 아웅
    遮住你的 眼睛
    차주이적 안청
    가릴 차, 살 주, 넉 이, 고녁 적. 눈안, 눈동자 정

    7월 3일(월) 호세아 7장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어리석은 비둘기(11절)

    어리석은 비둘기 /  케요나 포타(כְּיֹונָה פֹותָה)  /  a silly dove


    어리석은(6601) 파타(pâthâh) פָּתָה

    1. 열다.  2. 열리다. 3. 니팔형 : 유혹 당하다
    발음 / 파타[ pâthâh ]
    관련 성경 / 미혹하다(신 11:16), 유혹되다(욥 31:27, 9),어리석다(욥 5:2, 호 7:11), 한담하다(잠 20:19),속이다(잠 24:28, 삼하 3:25), 조롱하다(렘 20:7), 유혹을 받다(겔 14:9, 렘 20:10), 꾀다(출 22:16, 삿 14:15, 잠 16:29), 아첨하다(시 78:36), 타이르다(호 2:14), 권유하다(렘20:7).
    구약 성경 / 28회 사용


    비둘기(3123) 요나(yôwnâh) יוֹנָה 

    1.비둘기.  2. 집비둘기.  3. 창세기 8:8이하
    발음 / 요나[ yôwnâh ]
    어원 / 복수 יוֹנִים, 3196과 같은 어원에서 유래한 것으로 보임
    관련 성경 / 비둘기(창 8:8, 시 55:6, 나 2:7), 집비둘기(레 1:14, 12:6, 민 6:10), 비둘기 똥(왕하 6:25)
    구약 성경 / 32회 사용




    본장을 통해 호세아는 이스라엘 말기의 안팎으로 나타나는 혼란스러운 현상에 대해 지적하고 있다.
    이스라엘 민족은 하나님께 불순종함으로 범죄와 혼란에 빠지게 되었고, 그럴수록 그들은 인위적으로 해결책을 갈구하였다.
    따라서 본 장에서 호세아는 전반부(1-7절)를 통해 왕위 쟁탈과 노략으로 도적질이 들끓고 있는 국내의 상황을, 후반부(8-16절)에서는 나라의 어려움을 외세로 극복하려는 어리석음에 대해 역설하고 있다.
    특히 본장이 보여 주고자 하는 것은 정치와 종교의 상호 관계가 유기적이라는 것과 또한 이 모든 정치와 종교의 주관자가 하나님이라는 사실이다.
    따라서 신정일치가 정치와 경제, 사회, 문화 등 모든 영역에 미쳐야 함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 민족은 이방 신, 예를 들면 바알 신 같은 것에 빠져 버리고 우상 숭배하는 우를 범하고 말았다.
    더욱이 호세아 선지자가 활동기인 여로보암 2세의 아들 스가랴(B.C.753) 이후 30여 년 동안 네 번의 혁명과 6번의 왕위 바뀜이 있었는데 이 시기에는 나라 안의 혼란이 극도로 치달았다.
    본장은 이러한 역사적 배경을 바탕으로 쓰여진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의 교만함으로 인한 어리석음이 그들을 죄악 가운데 빠뜨렸고 그로 인해 심판을 받아 이방 나라에 멸망받게 되었음을 말씀하셨습니다.
    특히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의지하지 아니하고 이방 나라를 의지함으로써 스스로 멸망의 길을 자초했습니다. 


    역사의 주관자이신 하나님.
    하나님은 인간 역사 속에 내재해 계신다.
    하나님은 왕들을 세우기도 하시고 폐하기도 하신다.
    그러나 인간들은 이 사실을 신뢰하지 않는다.
    오히려 하나님을 불신하며 인위적인 방법으로 문제들을 해결하려 한다.
    이것은 문제들을 더 어렵게 만들어 버리는 것이요, 나아가서는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인정하지 않는 큰 죄를 짓게 되는 것이다.
    태초 이래로 인류 역사는 하나님의 손에 의해 운행되었다.
    하나님은 나라를 일으키기도 하셨고 나라를 멸하기도 하셨다.
    백성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할 때는 하나님은 그 백성과 나라를 번성케 하셨고 은혜를 베푸셨으나,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치 않고 불신할 때에는 재앙을 내리기도 하셨고 이웃 나라를 통한 전쟁의 어려움도 겪게 하셨다.
    이와 같이 하나님의 주권은 종교사에만 해당하는 것이 아니라 일반 세속사에도 적용된다.
    따라서 일반 세속사도 하나님의 뜻에 따르는 자가 최종적인 축복을 받을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전체 우주의 역사를 주관하시는 그 하나님은 지금도 역사하고 계신다.
    따라서 모든 백성은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고 그의 앞에 꿇어 복종하며 이 땅 백성들을 향하신 하나님의 뜻에 순복하며 살아가야 할 것이다.  


    인간은 나약한 존재에 불과하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은 절대자를 찾고 그에게 나아가 자신의 삶을 의지하려고 한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은 본장의 이스라엘 백성들과 같이 헛된 우상에게로 나아가 복을 빌고 있다.
    그러나 우상은 인간이 만든 것이며 결코 인간을 위하여 아무 것도 해줄 수 없다.
    오직 인간은 창조주 하나님이 아니면 삶이 무의미한 것뿐이다.
    그러므로 인간 역사를 지배하시는 하나님 앞에 우리는 바른 신앙 고백과 찬양을 돌려야 할 것이며, 사람을 의지하거나 다른 우상 앞에 절하는 어리석음을 버려야 할 것이다. 


    7월 1일(토) 호세아 6장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여호와를 알자(3절)

    그러므로 우리가 여호와를 알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 그의 나오심은 새벽 빛 같이 일정하니 와 같이, 을 적시는 늦은 와 같이 우리에게 임하시리라 하리라.
    Let us acknowledge the LORD; let us press on to acknowledge him. As surely as the sun rises, he will appear; he will come to us like the winter rains, like the spring rains that water the earth.

    "여호와를 알자( acknowledge the LORD)"

    라다아트( לָדַעַת) 엩(אֶת) 아도나이(יְהוָה)

    6:1 / 오라 우리가 여호와께로 돌아가자 여호와께서 우리를 찢으셨으나 도로 낫게 하실 것이요 우리를 치셨으나 싸매어 주실 것임이라.

    * 돌아가자(7725) 슈브(shûwb)  שׁוּב 

    1. 방향을 돌리다.  2. 회복하다.  3. 돌이키다
    발음 / 슈브[ shûwb ]
    관련 성경 / 돌아가다(창 18:33, 룻 1:8, 대하 25:10), 오다(레 14:39), 돌아오다(레 22:13, 사 52:8), 배반하다(민 14:43), 돌이키다(신 23:13, 호6:11), 떠나다(신23:14, 렘2:35), 돌다(수19:12), 함께 가다(삿11:8), 보고하다(삼상23:23), 물러가다(삼하11:15), 다시 이르다(왕하4:38), 그치다(삼상2:26, 느9:35), 남아 있다(사6:13),쉬다(사9:12), 변하다(사29:17), 뉘우치다(렘8:6), 회복하다(나2:2), 베풀다(슥8:15), 마르다(창8:7), 보내다(창27:45, 왕하1:13), 내보내다(신24:4), 불러올리다(삼상28:11), 돌아보다(렘5:3), 부르다(창26:18), 풀리다(창27:44), 주다(창30:31), 회복되다(출14:27,삿15:19), 돌려보내다(삼상29:4), 차리다(삼상30:12), 거두다(대하34:9), 중건되다(단9:25), 또 오다(단11:10), 쌓다(말1:4), 왕래하다(겔35:7, 슥7:14), 지나가다(미2:28), 유혹하다(사47:10), 소생시키다(시23:3), 회복시키다(시60:1), 벗어나다(겔38:8), 찾아오다(창14:16), 옮기다(창29:3, 잠24:18), 복직하다(창41:13), 가져오다(창44:8), 가리다(출34:35), 피하다(레26:26), 돌려주다(민5:7), 대답하다(민22:8), 명심하다(신4:39), 돌리다(신22:2), 가져가다(신28:60), 끌어가다(신28:68), 응하다(삿9:57), 드리다(삼상6:17), 갚아주다(삼하16:12), 데려오다(삿19:3, 왕상13:20), 데리고 오다(왕상13:23), 가져가다(왕상14:28, 대하12:11), 보답하다(대하32:25), 보응하다(잠24:12), 쫓겨나다(렘16:15),인도하다(렘24:6), 거래하다(겔27:15), 드리우다(슥13:7), 모셔오다(삼하19:43), 복종하다(느9:29), 회답하다(에4:13,15), 옮겨오다(렘28:6), 돌려주다(왕상8:6), 구원하다(시35:17), 심판하다(겔21:30), 빼앗기다(창14:16), 도망하다(삼하24:13), 거절하다(왕상2:16,20), 자문하다(왕상12:9), 물리치다(왕하18:24), 꽂다(대상21:27), 복명하다(대하34:16), 들여놓다(느13:9), 막다(사43:13, 렘2:24), 도로 넣다(창42:28), 행하지 아니하다(사58:13), 회복시키다(애1:19), 꾸어주다(겔18:8), 데리고 가다(겔47:1), 소성시키다(시19:7). [명] 왕래(겔1:14). [부] 도리어(잠26:27).
    구약 성경 / 1059회 사용

    뜻풀이부

    • 1. 원형 방향을 돌리다, 돌아서다, 창8:12, 18:33, 겔35:7
    • 2. 원형 [무생물에 대하여] 돌아서다, 회복하다, 새롭게 되다, 공허하게 되다, [화가] 돌아서다, 누그러지다, 삼상7:14,왕상13:6, 사29:17, 45:23.
    • 3. 원형 돌이키다, 회복하다, 새롭게 하다, 민10:36, 시54:7, 85:5(4), 잠12:14.
      • a. 원형 필렐형 שׁוֹבֵב: 돌이키다, 회복하다, 돌리다, 사47:10, 렘50:19, 사58:12.
      • b. 원형 풀랄형 שׁוֹבַב, 분사 מְשׁוֹבֶבֶת: 돌이킨, [즉]구조된, 구원된, 겔38:8.
      • c. 원형 히필형 הֵשִׁיב, 미완료형 ׃יָשִׁיב 돌이키게 하다, 회복하다, 새롭게 하다, 철회하다, 헛되게 하다, 여러 번 가져오다, ~로 돌리다, ~를 향해 돌아가다, 왕상8:47, 시72:10, 사1:25, 단9:25, 11:18, 암1:3.
      • d. 원형 호팔형 ׃הוּשַׁב
      • e. 원형 뒤돌아 서게 되다, 출10:8
      • f. 원형 회복되다, 창42:28, 43:12, 민5:8.

    6:2 / 여호와께서 이틀 후에 우리를 살리시며 제 삼일에 우리를 일으키시리니 우리가 그 앞에서 살리라.

    이틀 후에...제 삼 일에 우리를 일으키시리니

    - 이는 이스라엘의 회복이 빠르고 확실하게 성취될 것임을 표현한다(Keil, Cheyne, Lange, Chrisholm).
    왜냐하면 이 숫자들은 매우 짧거나 적은 것을 나타내는 동시에 가장 중요하거나 확실한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왕상 17:12; 왕하 9:32;잠 30:15; 사 17:6; 암 4:8).

    그런데 유대인 학자들은 이를 연대기적으로 해석하여 '이틀'을 애굽과 바벨론 포로기로 '삼일'을 로마의 속박과 관련시키거나(Kimchi), 또는 솔로몬 성전, 스룹바벨 성전, 메시야에 의해 세워질 성전의 '세 때'를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하였다(Rashi).

    이와는 달리 많은 교부들과 주석 학자들은 이 구절을 그리스도의 부활 사건에 적용시킨다.
    즉 이스라엘의 정치적 회복은 3일만에 살아나신 그리스도의 부활을 예표하는 것이라고 한다(Theodoret, Given, Calvin, Butler).
    결국 본 구절은 이스라엘의 정치적 회복뿐만 아니라 영적이고 도덕적인 회복을 엿볼 수 있게 해준다.
    즉 회개하고 돌아오는 이스라엘을 여호와께서 다시 소생시킬 뿐만 아니라, 메시야를 통하여 영원한 생명으로 다시 살릴 것임을 약속하는 것이다(사 26:19; 겔 37:1-14).

    우리가 그 앞에서 살리라

    - 직역하면 '그의 얼굴 앞에서'이다.
    이는 여호와를 기꺼이 받아들이고 그의 주권을 인정하며 그의 섭리와 보호 아래서 살게 되리라는 의미이다(창 17:18;렘 30:20).





    6:6 / 나는 인애를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며 번제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을 원하노라.


    * 2617. 인애(헤세드)

    * 2077. 제사(제바흐. zebach) זֶבַח

    1. 살륙.  2. 희생.  3. 출애굽기 10:25
    발음 / 제바흐[ zebach ]
    어원 / 2076에서 유래
    관련 성경 / 제사(창 31:54, 출 12:27, 민 15:5), 희생(창 46:1, 레 3:1, 신 12:11), 제물(레 19:6, 신 18:3), 제육(祭肉)(잠 17:1), 잔치(겔39:17,19), 제사를 드림(삼상 10:8)
    구약 성경 / 162회 사용


    * 5930. 번제(올라. ʽôlâh) עֹלָה

    1. 제단 위에 드려진 것.  2. 상승
    발음 / 올라[ ʽôlâh ]
    관련 성경 / 번제(창 8:20, 레 10:19), 번제물(출 10:25, 레 3:5, 민 6:11), [동] 올라가다(겔 40:26), 번제하다(창 22:7, 8)
    구약 성경 / 9회 사용





     
    하나님은 완전한 영으로 존재합니다.
    사람은 온전하지 못한 영과 육체로 존재하기 때문에 사람이 하나님을 안다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만일 사람이 하나님을 알 수 없다면 신앙은 비현실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사람이 하나님을 알 수 있는 단계를 소개합니다.

    첫째는 정한 마음과 정직한 영(시편 51:10)

    하나님이여 내 속에 정한 마음을 창조하시고 내 안에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하소서.
    Create in me a pure heart, O God, and renew a steadfast spirit within me.

    둘째는 성경을 받으라(요한복음 10:35)

    성경은 폐하지 못하나니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사람들을 신이라 하셨거든.

    * 신 - 데우스(2316)

    * 받은(1096) 기노마이(ginŏmai)  γίνομαι  

    1. ~이 되다.  2. 탄생되다.  3. 마태복음 21:19( 가에서 한 무화과나무를 보시고 그리로 가사 잎사귀 밖에 아무 것도 얻지 못하시고 나무에게 이르시되 이제부터 영원토록 네게 열매가 맺지 못하리라 하시니 무화과나무가 곧 마른지라.)
    발음 / 기노마이[ ginŏmai
    관련 성경 / 되다(마 1:22, 막4:19, 눅1:2), 되게 하다(마4:3, 막1:17, 고후5:21), 이루다(마5:18, 6:10, 눅1:38), 내다(마6:16), 일어나다(마8:24, 막4:17), 베풀다(마11:20), 행하다(마11:21,23), 나타나다(행8:13), 맺다(마21:19), 나다(마25:6, 막9:7, 눅3:22), 생기다(마23:15, 요5:14), 계시다(마26:6, 막4:10), 임하다(마27: 45, 막15:33), 이르다(막1:4, 눅10:32), 당하다(막5:16, 딤후3:11), 드러나다(막6:14), 오다(막6:21, 요1:17), 차다(눅2:6, 9:51), 만들다(행19:26), 가다(행27:33), 거하다(고전2: 3), 있다(마18:12).
    신약 성경 / 670회 사용




    요한복음 5:39 /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줄 생각하고 성경을 상고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거하는 것이로다.

    요한복음 7:38 /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리라.

    디모데후서 3:16-17 /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힘써 여호와를 알자
    - 여호와를 '아는 것'(다아트)은 우상 숭배와 배교로부터 돌아서려는 강한 열성을 내포한다(4:1, 6).
    이것은 계명을 순종하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진실된 마음으로부터 비롯되는 것이다.

    지식(1847) 다아트(daʽath)  דַּעַת 

    1. 지식.  2. 지성
    발음 / 다아트[ daʽath ]
    어원 / 3045에서 유래
    관련 성경 / 지식(렘 22:16, 시 19:2, 전 1:16), 지혜(욥 34:35), 재능(왕상 7:14).
    구약 성경 / 91회 사용


    '힘써'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라다프'는 '추적하다', '뒤따르다'란 뜻으로 여호와를 알고 섬기는 일에 온 마음과 성품을 다하여 열심히 좇아가는 것을 의미한다(신 30:2, 3).

    힘써(7291) 라다프(râdaph)  רָדַף

    1. 추적하다.  2. 박해하다.  3. 패주시키다
    발음 / 라다프[ râdaph ]
    관련 성경 / 추격하다(창35:5, 삿7:25, 8:12), 따르다(출14:4, 삼하18:16, 시23:6), 쫓다(레26:8, 신16:20, 삼상26:18), 따라가다(수2:7, 잠15:9, 호12 : 1), 치다(삼하20:10, 욥19:28), 핍박하다(시69:26, 욥19:22, 애1:3), 학대당하다(렘29:18), 쫓아가다(삼상30:8, 대하13:19, 암1:11),쫓아오다(수7:5, 느9:11), 따라오다(수20:9),쫓기다(삿9:40, 삼하24:13), 수색하다(삼상26:20), 임하다(호6:3), 뒤쫓다(애3:66), 구하다(사1:23), 박해하다(욥19:22, 렘15:15, 20:11), 지나가다(전3:15), 쫓아내다(나1:8)
    구약 성경 / 144회 사용

    그의 나오심은 새벽 빛같이 일정하니
    - '나오심'의 히브리어 '야차'는 해가 떠오르는 것을 나타낸다(창 19:23; 시 19:5).
    본 구절은 여호와의 임재가 새벽처럼 틀림없이 나타난다는 사실을 표현한다(사 58:8; 60:2).

    비와 같이
    - 여기서 '비'(게쉠)는 퍼붓거나 흡족하게 내리는 비로서(스 10:9, 13) 10월 초부터 2월 말 사이에 오는 겨울비를 가리킨다.

    땅을 적시는 늦은 비와 같이
    - '늦은 비'(말코쉬)는 추수하기 전 3-4월 중에 내리는 봄비로서 곡물의 수확에 가장 중요한 비이다.
    한편, '땅을 적시는'에 해당하는 '요레'는 원래 '이른 비'(former rain, KJV)를 뜻하나, 여기서는 하필 미완료형(또는 칼 분사형)으로 사용되어 '마른 땅을 적시는'이란 의미를 갖는다.
    이와같이 만물을 소성케 하는 겨울비와 봄비처럼 여호와께서는 자기를 힘써 아는 백성들에게 풍요로운 은총과 축복을 내리신다(레 26:4;신 11:14).


    하나님께로 돌아와 관계를 회복할 것과 그들이 지은 구체적인 죄에 대해 논의합니다.
    호세아는 하나님께로 돌아오면 은혜를 받을 수 있습니다(1-3절).
    이스라엘과 유다가 언약을 어긴 죄에 대한 구체적인 죄의 항목을 지적합니다(4-11절).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의 징벌을 받고 자신들의 죄를 깨달아 회개하고 돌아올 것을 예언하면서 그들의 외식적인 신앙을 책망하셨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사랑을 버리고 제사만 지냄으로써 하나님을 만홀히 여기는 죄를 범하였던 것입니다.
    특히 제사장들의 행악은 모든 사회를 타락하게 만들었습니다.

    상처받은 이스라엘을 치료하시고 회복시키시는 하나님은 무엇보다 이스라엘이 회개하기를 원하셨습니다.
    이스라엘의 궁극적 회복은 반드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이루실 것임을 예표합니다.
    그것은 곧 그리스도의 부활 사건입니다.
    선지자 호세아가 그리스도의 부활을 통해 우리에게 암시하고자 하는 것은 그리스도가 부활로 택한 백성을 회복시키듯이 성도들도 회개와 구원을 통해 하나님의 자녀로 다시 회복될 것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평안과 안식을 누리기 위해서는 하나님과 깊은 교제를 통해서만 가능합니다.
    그러므로 인간은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관계를 회복하는 것에 우선적으로 주력해야 합니다.
    또한 철저하게 자기 자신이 죄인이라는 사실과 이 죄 문제를 해결할 분은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 한 분뿐이라는 사실을 인식하고 그분 안에서 평안을 누리며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여호와를 아는 지식(호세아 6:6)

    나는 인애(헤세드)를 원하고 제사(자바흐)를 원치 아니하며 번제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을 원하노라.”

    헤세드


    자바흐(2077)
    זֶבַח 스트롱번호2077
    1.

    살륙

    2.

    희생

    3.

    출10:25

    발음 [ zebach ]
    어원
    2076에서 유래
    관련 성경
    ☞제사(창31:54, 출12:27, 민15:5), 희생(창46:1, 레3:1, 신12:11), 제물(레19:6, 신18:3), 제육(祭肉)(잠17:1), 잔치(겔39:17,19), 제사를 드림(삼상10:8).
    구약 성경
    162회 사용







    호세아는 인생과 나라의 문제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이 하나님을 아는 것에 있다고 합니다.
    하나님을 아는 것은 하나님의 언약을 맺는 것이고 그 언약을 기억하여 지키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저희는 아담처럼 언약을 어기고 거기서 내게 패역을 행하였느니라”(호 6:7).
    하나님이 원하는 것은 종교적 행위, 제사(자바흐)와 번제(올레)가 아니라 인애(헤세드)와 하나님을 아는 것(다아트 엘로힘)이라고 말하며 아담의 언약을 말하고 있다.

    선악과를 따먹었던 불순종의 조상을 언급하면서 죄를 짓는 아담의 후예임을 보여주고 있다.
    하나님의 언약을 지키며 죄를 짓지 않는 길은 무엇인가?
    그 길은 여호와를 아는 것, 여호와의 지식을 갖는 것임을 말하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가 여호와를 알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 그의 나오심은 새벽빛 같이 일정하니 비와 같이, 땅을 적시는 늦은 비와 같이 우리에게 임하시리라 하리라”(호 6:3).

    호세아서 후반부는 이 여호와의 지식을 강조하며 여호와 하나님 신앙을 부각하고 있다.

    호세아 4-14장은 크게 호4-11장과 호12-14장으로 나뉜다.
    전반부에서도 여호와의 지식과 언약, 회개와 인애와 공의를 강조한다(4:6; 5:15; 6:3; 7:10; 8:1; 9:15; 10:4; 11:3; 12:6).
    “내가 저를 위하여 내 율법을 만 가지로 기록하였으나 저희가 관계 없는 것으로 여기도다”(호 8:12).

    하나님은 자신을 알려서 말씀을 순종하게 하려하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 말씀, 율법을 멀리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호세아서 4장은 제사장들의 불순종과 우상제의(11-19)를 말하며 그 땅에 하나님의 지식이 없음을 말한다(4:2). “이스라엘 자손들아 여호와의 말씀을 들으라 여호와께서 이 땅 주민과 논쟁하시나니 이 땅에는 진실도 없고 인애도 없고 하나님을 아는 지식도 없고 오직 저주와 속임과 살인과 도둑질과 간음뿐이요 포악하여 피가 피를 뒤이음이라”(호4:1-2).

    원시 부족에 가보면 하나님을 아는 법을 가지지 못하여 범죄가 범죄로 여겨지지 않고 자연적으로 죄와 저주가 뒤대이며 연속되는 모습을 볼 수 있게 된다. 북이스라엘도 이러한 죄악 세상을 보여주고 있다. 이는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없기 때문이었다. 백성들의 지도자들도 하나님 지식이 없는 그러한 모습이다(5:1-7). 하나님께 돌아갈 가능성이 없었다. “저희가 양떼와 소떼를 끌고 여호와를 찾으러 갈찌라도 만나지 못할 것은 이미 저희에게서 떠나셨음이라”(호5:6).

    호세아5-7장에는 시로-에브라임 전쟁의 상황에서 일어난다. 호 6:1-3절은 회개의 노래로 이삼일이면 살아나리라 하신다. 과연 이스라엘이 죄악 속에서 과연 회개하여 살아날 수 있을까? 교정할 수 없는 이스라엘(6:4)의 상황이며, 하나님은 희생제사 대신에 하나님의 지식을 요구하며(6:6), 에브라임이 자신을 다른 백성들과 혼합하고 있는 것을 지적한다(7:8). 군주와 제사의 거역(8:4이하)과, 어리석은 예언자(9:7)를 말하며. 역사적 첫 회고를 한다(바알브올, 호9:10). “옛적에 내가 이스라엘 만나기를 광야에서 포도를 만남같이 하였으며 너희 열조 보기를 무화과나무에서 처음 맺힌 첫 열매를 봄 같이 하였거늘 저희가 바알브올에 가서 부끄러운 우상에게 몸을 드림으로 저희의 사랑하는 우상같이 가증하여졌도다”(호9:10).

    호세아서 11장은 이스라엘이 반란한 아들과 같다. “이스라엘이 어렸을 때 나는 그를 사랑하였다.” 하나님의 거룩한 사랑: “나는 하나님이요 사람이 아니다.” “나는 네 가운데 거하는 거룩한 자니 진노함으로 네게 임하지 아니하리라”(호11:9). 이처럼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없어서 하나님을 떠나고 우상숭배하며 다른 민족과 종교적으로 혼합하며 인간적인 판단으로 시리아와 동맹을 맺어 전쟁을 하는 모습 등을 본다.

    호세아는 하나님께 돌아와서 다시 언약을 갱신하고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충만해지기를 바라고 있다. “저는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시라 여호와는 그의 기념 칭호니라. 그런즉 너의 하나님께로 돌아와서 인애와 공의를 지키며 항상 너의 하나님을 바라볼지니라”(호12:5-6). 하나님을 아는가, 모르는가? 이는 그 지식으로 말미암아 인생과 국가와 민족에게는 절대적 운명의 판가름이 나게 되는 것이다.

    호세아12-14장은 이스라엘이 지식이 없어서 사기치는 조상 야곱과 같이 되며(호12), 그로 인해 이스라엘에 파멸이 오게 되었다(13장). 그 후 회개를 촉구하고(14:2-4절), 그래서 하나님의 치유 행동이 있게 된다. “내가 저희의 패역을 고치고 즐거이 저희를 사랑하리니 나의 진노가 저에게서 떠났음이니라”(호14:4). 끝으로 설명적인 지혜결론으로 맺는다. “주의 길은 의롭다.” 여호와의 도는 정직하니 의인이라야 그 도에 행하리라 그러나 죄인은 그 도에 거쳐 넘어지리라“(호14:9).

    “내가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의 사랑 안에 거하는 것같이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거하리라”(요한15:10).



    시편 51:10
    하나님이여 내 속에 정한 마음을 창조하시고 내 안에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하소서.

    정한 마음(레브 타홀 / 3820.  2889)

    3820.
    לֵב 스트롱번호3820
    발음 [ lêb ]
    관련 성경
    ☞마음(창6:5, 삼상4:13, 시61:2), 심중(신29:19, 에7:5), 숨(출8:15), 콧김(출15:8), 가슴(출28:29), 감동(출35:34), 간담(수14:8), 결심,생각(삿5:15, 시33:11), 진심(삿16:17), 기력(삿19:5), 관념(삼상4:20), 인심(삼하15:13),심장(삼하18:14, 시38:10), 염통(왕하9: 24, 시45:5), 한마음(대상12:38, 시83:5), 성심(대상29:9), 전심(대하17:6, 시119:10, 겔44:5), 뜻(대하24:4), 충심(시34:18), 총명(욥12:24), 지혜(욥36:5, 잠10:8, 전1:17), 지식(잠10:21), 의사(잠18:2), 생각(잠24:32), 명철(전7:7), 지각(렘5:21), 굳센 자(암2:16). [동] 말하다(창42:28), 간곡하다(창50:21), 낙심하다(민32:7),염려하다(삼상9:20), 개의하다(삼상25:25),낙담하다(삼상17:32, 겔21:15), 근심하다(삼하7:27, 애3:33), 상심하다(삼하13:33), 깨닫다(왕상8:47), 감동시키다(대하30:12), 위로하다(대하30:22), 주의하다(욥1:8, 전7:2), 담대하다(시27:14), 살피다(시48:13), 무지하다(잠6:32), 간교하다(잠7:10), 착심하다(잠23:12), 진술하다(사41:22), 기억하다(사46:8), 낙심하다(렘4:9). [부] 다정하게(삿19:3), 뜻대로(삼하7:21, 대상17:19), 담대히(렘30:21).
    구약 성경
    599회 사용



    2889.
    טָהוֹר 스트롱번호2889
    1.

    순수한.

    2.

    깨끗한

    3.

    혼합되지 않은

    발음 [ ṭâhôwr ]
    어원
    2891에서 유래
    관련 성경
    ☞정결한(창7:2, 8:20, 출37:29, 합1:13), 부정하여지지 아니한(레11:36), 깨끗한(레7:19, 대하13:11, 사66:20), 정한(레10:10, 민19:19, 겔22:26), 순결한(레24:4,6, 시12:6), 성결한(대하30:17), 맑은(겔36:25). [명] 순금(출25:11, 대하3:4, 대상28:17), 정결(민9:13).
    구약 성경
    95회 사용

    내 속에 정한 마음을 창조하시고

    - 여기서 '정한 마음'은 범죄의 욕구를 물리칠 정도의 능력이 있는, 성령에 의해서 변화된 심령을 가리킨다.
    한편 '창조하시고'(바라)는 하나님께서 무(無)에서 유(有)를 산출해 내는 경우에 사용된 동사이다(창 1:1).
    다윗은 바로 이 같은 동사를 과감히 사용함으로써,
    1. 하나님께서 원하시는(6절) 삶을 사는데 있어서 자신의 타락한 옛성품은 전혀 무의미함을 강력히 시사하며
    2. 아울러 그러한 삶은 하나님의 이적적인 은혜로써만 가능함을 나타낸다(kIDNER).

    내 안에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하소서

    - 여기서 '정직한 영'(루아흐 나콘)에 대해서는
    1. 다윗이 이미 하나님으로부터 받았던 '성령'이라는 견해(Cavin)
    2. 다윗이 이미 갖고 있었던 하나님께 대한 '믿음'이라는 견해(박윤선)
    3. 다윗이 지금까지의 변덕스러운 마음 대신에 하나님으로부터 앞으로 새로 받게 될 '변함없는 마음'이라는 견해(Kraus)
    4. 하나님의 은총을 따라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행동을 하게끔 하는 심령(마음)을 뜻한다는 견해(A. A. Anderson)등 그 해석이 다양하다.

    그러나 첫째, 본절은 그 의미를 강조하기 위해 두 대구(對句)로서 표현되었으며
    둘째, 완전한 인격자이신 성령은 갱신의 대상이 될 수 없으며
    셋째, 본 문구의 '새롭게 하소서'(하다쉬)는 이미 존재하는 것을 온전케 하는 행위를 가리킨다(삼상 11:14;대하 24:4;사 61:4)는 점 등에서 볼 때, 위의 네 견해 중 (4)의 것이 가장 타당하다.

    즉, 여기서 다윗은 성령에 의해서 감동받은 자신의 '영'이지만, 더욱 새롭게 갱신될 필요가 있음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됨으로써, 다윗은 하나님안에서 두려움이 없고 담대하며(57:7; 112:7) 또한 굳건해질(78:37) 수 있는 것이다(C. B. Moll).





    정직한 영(루아흐 쿤 / 7307.  3559)

    7307.
    רוּחַ 스트롱번호7307
    1.

    2.

    입 기운

    3.

    호흡

    발음 [ rûwach ]
    어원
    7306에서 유래
    관련 성경
    ☞영(창1:2, 삼상10:10, 사11:2), 기운(창6:17,7:15), 바람(창8:1, 삼하22:11, 시11:6), 마음(창26:35, 수2:11, 전1:17), 콧김(출15:8, 시18:15, 애4:20), 의심(민5:14,30), 생명(민16:22),노여움(삿8:3, 잠29:11), 정신(삿15:19, 왕상10:5, 대하9:4), 성령이 하시는 역사(왕하2:9,15), 큰 바람(욥1:19), (콧)김(욥4:9), (입)기운(시33:6), 호흡(시104:29, 전3:19), 영혼(욥7:11, 시143:7, 사26:9), 광풍(시148:8, 사32:2), 숨(욥9:18, 19:17), 혼(전3:21), (입)김(욥15:30), 심령(시77:3, 잠16:2), 폭풍(시55:8, 사27:8), 성품(잠17:27), 생기(렘10:14, 겔37:9), 분(전10:4), 사면(렘52:23), 사방(겔5:10, 17:21, 단11:4), 바람이 불 때(창3:8), 헐떡거림(렘2:24). [부] 허망하게(미2:11). [동]헐떡이다(렘14:6).
    구약 성경
    378회 사용



    3559.
    כּוּן 스트롱번호3559
    1.

    똑바로서다

    2.

    필렐형 כּוֹנֵן

    3.

    세우다

    발음 [ kûwn ]
    관련 성경
    ☞견고하다(왕상2:46, 대상17:14, 잠29:14), 예비되다(잠19:29), 준비하다(대하35:4, 시9:7, 사51:13), 든든히 서다(삼상20:31), 굳게서다(대상16:30, 시102:28, 잠12:3), 완비하다(대하8:16), 갖추다(대하29:35) 구비되다(대하35:10), 준비되다(대하35:16), 견고히 하다(시89:21), 서다(시101:7), 보존되다(잠12:19), 이루다(잠16:3), 성취하다(잠20:18),정하다(창41:32, 시108:1), 분향하다(시141:2),성취하다(잠20:18), 버티다(삿16:26,29), 기다리다(욥12:5, 18:12), 옳다(욥42:7), 신실하다(시5:9), 정직하다(시51:10), 확정되다(시57:7), 세우다(출15:17, 시119:90, 신32:6), 당기다(시11:2), 건축하다(합2:12), 배우다(욥8:8), 짓다(욥31:15, 잠8:27), 건설하다(시24:2), 삼다(대상14:2), 저축하다(대상29:16),행하다(대하27:6), 정돈하다(대하35:20), 결심하다(대하30:19), 지도하다(렘10:23), 성취하다(렘33:2), 항오를 벌이다(나2:3), 향하다(삼상7:3), 살피다(삼상23:22), 방비하다(렘51:12), 닦다(신19:3), 베풀다(욥29:7), 주다(시65:9), 인도하다(잠16:9), 삼가다(잠21:29), 박히다(겔40:43). [명] 참(신13:14),실상(삼상23:23). [부] 견고히(시93:1, 잠25:5, 왕상2:45), 든든히(잠4:26), 자세히(신17:4), 과연(삼상26:4).
    구약 성경
    217회 사용





    6월 30일(금) 호세아 5장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들으라 깨달으라 기울이라(1절)

    제사장들아 이를 들으라 이스라엘 족속들아 깨달으라 왕족들아 귀를 기울이라 너희에게 심판이 있나니 너희가 미스바에서 올무가 되며 다볼 위에서 친 그물이 됨이라.
    "Hear this, you priests! Pay attention, you Israelites! Listen, O royal house! This judgment is against you: You have been a snare at Mizpah, a net spread out on Tabor.

    들으라(솨마) 깨달으라(카솨브) 기울이라(아잔)
    호세아 선지자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전달할 때 점층적인 방법으로 그 수위를 높여갑니다.
    첫째는 들으라(솨마. שָׁמַע)
    둘째는 깨달으라(카솨브. קָשַׁב)
    셋째는 기울이라(아잔.  אָזַן)

    들음(로마서 10:17)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

    깨달음(로마서 3:20)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

    기울이라(사도행전 2:14)
    베드로가 열 한 사도와 같이 서서 소리를 높여 가로되 유대인들과 예루살렘에 사는 모든 사람들아 이 일을 너희로 알게 할 것이니 내 말에 귀를 기울이라

    호세아 5:1
    제사장들아 이를 들으라 이스라엘 족속들아 깨달으라 왕족들아 귀를 기울이라 너희에게 심판이 있나니 너희가 미스바에서 올무가 되며 다볼 위에서 친 그물이 됨이라.



    8085. 들으라(Hear) 솨마(shâmaʽ)  שָׁמַע 

    1. 듣다.  2. 창세기 3:10.  3. 창세기 37:17
    발음 / 솨마[ shâmaʽ
    관련 성경 / 듣다(창 3:10, 신 5:23, 슥 8:9), 준행하다(창 22:18, 렘 35:10), 순종하다(창 26:5, 신 30:2, 사 1:19), 들어가다(삼하 19:3), 청종하다(신 4:30, 수 1:17), 받다(잠 13:8), 들어보다(렘 18:13, 19), 들리다(왕상1:45, 시26:7, 렘51:46), 예언하다(렘23:25, 29:8), 비방하다(애3:61), 분간하다(삼하 14:17), 차지하다(왕상 21:16), 복종하다(렘 42:13), 따르다(창 27:8), 알다(신 28:49), 용납하다(느 13:27), 깨닫다(렘5:15), 드리다(미 7:7), 부르다(삼상 3:10), 반포되다(에 2:8), 소집하다(삼상 15:4), 불러모으다(삼상 23:8), 알리다(사 45:21), 소리지르다(겔27:30), 소리를 내다(대하 5:13), 공포하다(렘 4:5, 50:2), 전파하다(렘 31:7), 모이다(암 3:9),소리내다(암 4:5), 찬송하다(대상 16:42, 느 12:42), 이르다(사 42:9), 증인(삿 11:10, 잠 21:28), 소문(느 6:6).
    구약 성경 / 1159회 사용



    7181. 깨달으라(Pay attention) 카솨브(qâshab)  קָשַׁב 

    1. 집중하다.  2. 히필형 : 경청하다
    발음 / 카솨브[ qâshab ]
    관련 성경 / 기울어지다(사 32:3), 듣다(대하 33:10, 사 48:18, 말 3:16), 순종하다(느 9:34), 주의하다(시 66:19, 잠 4:1, 렘 18:18), 귀 기울이다(슥 1:4, 사 42:23, 51:4), 알아듣다(렘 23:18), 기울이다(잠 2:2, 아 8:13), 들어보다(욥 13:6), 응답하다(시 55:2), 유의하다(시 61:1), 돌아보다(렘 18:19, 잠 1:24).
    구약 성경 / 46회 사용


    238. 기울이라(Listen) 아잔(’âzan)  אָזַן 

    1. 날카롭다.  2. 명확하다.  3. 히필형 : הֶאֱזִין
    발음 / 아잔[ ’âzan ]
    관련 성경 /  깊이 생각하다(전 12:9), 순종하다(출 15: 26), 귀기울이다(신 1:45, 시 86:6, 렘 13:15), 듣다(대하 24:19, 느 9:30, 시 135:17), 깨닫다(사 64:4).
    구약 성경 / 2회 사용



    제사장들아
    - 하나님의 율법과 계명들을 마땅히 가르치고 준수하도록 훈계해야 하는 책임을 저버린 제사장들을 먼저 경고한다.

    이스라엘 족속들아
    - 원문에는 '이스라엘 집'(이스라엘 베이트)으로 되어 있다.
    이는 북왕국 이스라엘의 10지파 백성들을 가리키는 말이다.

    왕족들아
    - 원문에는 '왕의 집'(하멜레크 베이트)으로 되어 있다.
    이는 왕의 가족들 외에 그 가문에 속한 자들과 왕의 주변에서 혜택을 받고 있는 자들을 가리킨다.

    들으라...깨달으라...기울이라
    - 여기에 사용된 세 동사(솨마,  카솨브,  아잔)는 점층적인 방법으로 연설의 절정을 이루고 있다.
    그것은 하나님의 임박한 심판에 대한 경고의 말씀을 주의깊고 세심하게 들으라는 것이다(사 28:14 ,23; 렘 13:15).

    너희에게 심판이 있나니
    - 이는 하나님의 공의가 세워지기 위해 반드시 심판이 있을 것임을 선고하는 말씀이다.
    특히 이 말씀은 왕족과 제사장들을 향한 것인데, 아마 앗수르의 침략을 받은 므나헴 왕가와 관련된 것 같다(왕하 15:19).
    또한 곧이어 있을 북왕국의 멸망을 예고하고 있다.

    미스바에서...다볼 위에서
    - '미스바'는 베냐민 지파의 영토에 있는 것이라기보다는(삼상 7:5) 요단 동편 길르앗 미스바를 가리킨다(삿 10:17; 11:29).
    이곳은 야곱과 라반이 언약을 세웠던 곳이다(창 31:48, 49).
    그리고 '다볼'은 요단 서편에 있는 다볼산을 가리킨다.
    이 두 곳이 우상 숭배의 중심지 였는지는 명확하지 않다.
    아마 숲이 우거져 새와 짐승들을 잡기에 적합한 장소였기 때문에 상징적으로 사용된 것 같다(Keil, Given).
    본절은 이스라엘의 통치자들이 새를 잡는 것처럼 백성들에게 올무와 그물을 놓고 있음을 책망하고 있다.
    그것은 미스바와 다볼 산 위에서 거짓 우상을 섬기라고 부추겼던 사실을 의미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백성들을 악한 길로 인도하였다는 것을 가리키고 있음은 명백하다.
    그들은 백성들의 지도자가 되기는 커녕 도리어 도덕적 부패와 우상 숭배에 빠져 멸망의 길에서 허덕이며 백성들을 미혹했던 것이다.



    호세아 선지자의 첫번째 설교는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없다"는 것입니다(4:1-5:4).
    하나님을 아는 지식은 제사장들과 선지자들을 통하여 가르침을 받아야 하는데 율법과 계명을 가르칠만한 제사장들과 선지자들이 없었다는 것이 이스라엘의 비극이라고 하겠습니다.

    그 결과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없으므로 부패하고 교만해진 이스라엘 백성에 대해서 말씀합니다.
    그들은 이스라엘 나라가 부강해지고 자신들이 누리고 있는 축복이 자기들 스스로의 노력에 의해 얻어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할 때 부패와 죄악, 즉 우상 숭배와 교만된 행위가 나을 수밖에 없습니다.
    따라서 이들은 환난을 당할 때 하나님께 의존하지 아니하고 인위적인 방법으로 해결하려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자들에게 당연한 심판을 내릴 수밖에 없습니다.
    전반부에서는 철저하게 부패된 이스라엘의 죄악상에 대해 고발합니다(1-7절)
    그리고 후반부에서는 자신들이 당하는 고통의 해결책이 인위적으로는 될 수 없음과 아울러 하나님의 심판이 도래할 것 등에 대해 예고합니다(8-15절)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과 유다의 지도자들과 백성이 행한 악행들을 열거하시면서 그것들로 인해 심판을 내리실 것을 예언하셨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심판은 영원한 징벌을 목적으로 한 것이 아니고, 이스라엘로 자신들의 죄악을 깨닫고 회개하고 돌아오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의 징계였습니다.  

    인간이 하나님에 대해서 안다는 것은 쉬운 일은 아닙니다.
    그렇지만 하나님께서는 인간으로 하여금 하나님을 아는 길을 열어놓으셨습니다.
    그 길을 하나님의 특별 계시와 언약이라고 합니다.
    따라서 날마다 하나님을 찬양하고 그의 계명을 따르며 사랑하려고 할 때마다 새로운 길을 보여주시고 열어주실 것입니다.
    그런데 어리석은 인간들은 하나님 알기를 거절하므로 부패와 타락의 길로 빠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더욱 안타까운 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하나님의 성품과 지식에 관하여 가르치고 증거하는 선지자마저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다만 거짓 선지자들만 왕성하게 활동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무엇보다 인간은 하나님의 언약 아래 있어야 하며 하나님과 맺은 언약을 준수할 책임과 의무를 가져야 합니다.
    더욱이 지켜야 할 언약과 계명이 무엇인지 알기 위해선 하나님의 특별 계시인 성경을 가까이 해야 하고 더 나아가 선지자들의 외침에 귀를 기울여야만 합니다.

    하나님을 안다는 것은 단순히 지식을 얻는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획득된 지식에 따라 삶의 형태로 고백되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성도들의 삶은 지식과 행함이 하나가 되어야 온전한 하나님 지식을 얻을 수 있으며 진리의 하나님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인간은 무엇보다 하나님의 지식을 알기에 힘써야 합니다.
    왜냐하면 인간을 창조하신 분은 하나님이시므로 인간의 살아가야 할 모든 지표가 하나님께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지식이 없는 자는 오직 멸망으로 향할 뿐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매일의 삶 속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고 익히고 순종하는 일에 힘을 다하여야 합니다.
    세상의 지식이나 방법으로 자신의 삶을 성공시키려는 노력의 결과는 어리석은 것이 될 것입니다.
    따라서 성도들은 하나님의 뜻을 가장 정확하게 보여 주는 성경 말씀을 언제나 읽고 연구하고 묵상하면서 참된 성공의 길을 찾아가야 합니다.

     





    6월 29일(목) 호세아 4장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음란한 마음(12절)

    내 백성이 나무를 향하여 묻고 그 막대기는 저희에게 고하나니 이는 저희가 음란한 마음에 미혹되어 그 하나님의 수하를 음란하듯 떠났음이니라.
    of my people. They consult a wooden idol and are answered by a stick of wood. A spirit of prostitution leads them astray; they are unfaithful to their God.

    KJV.  My people ask counsel at their stocks, and their staff declareth unto them: for the spirit of whoredoms hath caused them to err, and they have gone a whoring from under their God.

    음란한 마음(the spirit of whoredoms. a spirit of prostitution. a spirit of harlotry)
                       (음란의 정신, 매춘의 정신, 매춘의 영)
    현대인 / 음란한 정신
    새번역 / 마음이 음심에 홀려서
    공동번역 / 음탕한 바람에

    호세아서 3장까지는 호세아 개인의 불운한 결혼 생활을 통해 북왕조의 죄악을 경고하고 심판을 선언하는 내용이었습니다.
    그러나 4장부터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타락을 호세아의 설교를 통해서 직접적으로 깨우치고 있습니다.
    따라서 호세아는 먼저 이스라엘의 종교 지도자와 평민들 모두가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 없다고 합니다(1-10절).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 없음으로 나타나는 현상과 결과를 소개합니다(11-19 절).
    특히 호세아는 본장 전체를 통하여 책망의 말씀과 경고를 일관성 있게 함으로써 이스라엘 백성들의 죄가 얼마나 심각한지를 일깨워 주고 있습니다.
    아울러 이스라엘 사회 전체가 종교적, 도덕적으로 심히 부패하였음을 경고하면서 회개를 촉구합니다.

    하나님께서는 호세아 선지자를 통하여 이스라엘의 가증한 죄악상을 밝히시며 그로 인해 그들에게 심판이 임하게 될 것임을 예언하셨습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버리고 탐욕과 우상 숭배로 인해 하나님의 진노의 심판을 자초함으로써 약속의 땅에서 쫓겨나 앗수르 땅으로 옮겨가야 했습니다. 

    "음란한 마음"이란 "음란한 영(루아흐 제누님. רוּחַ זְנוּנִים)"이란 뜻입니다.

    2183. 음란한(zânûwn)  זָנוּן 

    1. 매춘,  2. 우상숭배, 3. 이방인과의 음행
    발음 / 자눈[ zânûwn ]
    어원 / 2181에서 유래
    관련 성경 / 음란(호 2:2), 음행(왕하 9:22, 나 3:4), 간음(겔 23:11). [동] 음행하다(겔 23:29), 음란하다(호 1:2, 2:4, 4:12), 간음하다(겔23:11).
    구약 성경 / 12회 사용

    7307. 마음(rûwach) רוּחַ 

    1. 영,   2. 입 기운, 3. 호흡
    발음 / [ rûwach ]
    어원 / 7306에서 유래
    관련 성경 / 영(창 1:2, 삼상 10:10, 사 11:2), 기운(창 6:17, 7:15), 바람(창 8:1, 삼하 22:11, 시 11:6), 마음(창 26:35, 수 2:11, 전 1:17), 콧김(출 15:8, 시 18:15, 애 4:20), 의심(민 5:14, 30), 생명(민 16:22),노여움(삿 8:3, 잠 29:11), 정신(삿 15:19, 왕상 10:5, 대하 9:4), 성령이 하시는 역사(왕하 2:9,15), 큰 바람(욥 1:19), (콧)김(욥 4:9), (입)기운(시 33:6), 호흡(시 104:29, 전 3:19), 영혼(욥 7:11, 시 143:7, 사 26:9), 광풍(시148:8, 사 32:2), 숨(욥 9:18, 19:17), 혼(전 3:21), (입)김(욥 15:30), 심령(시 77:3, 잠 16:2), 폭풍(시 55:8, 사 27:8), 성품(잠17:27), 생기(렘10:14, 겔 37:9), 분(전 10:4), 사면(렘 52:23), 사방(겔 5:10, 17:21, 단 11:4), 바람이 불 때(창 3:8), 헐떡거림(렘 2:24). [부] 허망하게(미 2:11). [동]헐떡이다(렘 14:6).
    구약 성경 / 378회 사용


    진실(571) 에메트(’emeth) אֶמֶת

    인애(2617) 헤세드(chêçêd) חֵסֵד

    하나님을 아는 지식(1847,  430) 다아트(daʽath) דַּעַת 엘로힘(’ĕlôhîym)

    3무(無) 5유(有)
    진실, 인애, 하나님을 아는 지식(1절)
    저주, 사위, 살인, 투절,  간음(2절)

    1. 이스라엘 자손들아 여호와의 말씀을 들으라 여호와께서 이 땅 거민과 쟁변하시나니 이 땅에는 진실도 없고 인애도 없고 하나님을 아는 지식도 없고
      Hear the word of the LORD, you Israelites, because the LORD has a charge to bring against you who live in the land: "There is no faithfulness, no love, no acknowledgment of God in the land.
    2. 오직 저주와 사위와 살인과 투절과 간음 뿐이요 강포하여 를 뒤대임이라.
      There is only cursing, lying and murder, stealing and adultery; they break all bounds, and bloodshed follows bloodshed.

    진실(571) 에메트(’emeth) אֶמֶת

    진실(571) 에메트(’emeth) אֶמֶת

    1. 확고함.  2. 여호수아 2:12. 3. 성실성
    발음 / 에메트[ ’emeth ]
    어원 / 539에서 유래
    관련 성경 / 바름(창 24:48), 진실함(출 18:21, 렘 42:5), 확실함(신 17:4, 잠 11:18), 참됨(신 22:20, 단 10:1), 충성됨(대하 32:1), 진정함(느9: 3), 성실함(시 54:5), 충실함(사 16:5), 견고함(사  39:8), 옳음(사 43:9). [부] 분명히(렘 32:41), 참으로(삿 9:15), 진실히(삼상 12:24, 왕상2:4, 겔 18:8), 성실히(시 132:11, 잠 29:14). [명] 성실(창 24:27, 왕상 3:6, 시 71:22), 진실(왕하 20:3, 시 111:7), 진리(창 32:10), 시 57:3, 단 10:21), 성실함(창 47:29), 참(신 13:14, 대하 15:3, 렘 10:10), 진실함(수 24:14).
    구약 성경 / 127회 사용

    인애(2617) 헤세드(chêçêd) חֵסֵד

    인애(2617) 헤세드(chêçêd)

    1. 욕구.  2. 열심.  3. 인자함
    발음 / 헤세드[ chêçêd ]
    어원 / 2616에서 유래
    관련 성경 / 인자(창19:19, 민14:18, 시18:50), 은혜(창20:13, 삼하3:8, 렘32:18), 인애(창47:29, 신7:9, 렘2:2), 은총(창32:10, 삼하9:1, 호2:19), 성실(왕상3:6), 긍휼(느1:5, 시85:10), 아름다움(사40:6). [동] 영화롭게 하다(잠14:34), 선대하다(수2:12, 삿1:24, 룻1:8), 은혜를 베풀다(룻2:20), 인자하다(대상16:34, 대하7:3,시59:10), 자비하다(대상16:41, 대하5:13), 선하다(대하32:32, 느13:14), 긍휼히 여기다(스9:9, 시59:17), 불쌍히 여기다(욥6:14).
    구약 성경 / 246회 사용

    하나님을 아는 지식(1847,  430) 다아트(daʽath) דַּעַת 엘로힘(’ĕlôhîym) אֱלֹהִים

    하나님을 아는 지식(1847,  430) 다아트(daʽath) דַּעַת 엘로힘(’ĕlôhîym)

    지식(1847) 다아트(daʽath)  דַּעַת 

    1. 지식.  2. 지성
    발음 / 다아트[ daʽath ]
    어원 / 3045에서 유래
    관련 성경 / 지식(렘 22:16, 시 19:2, 전 1:16), 지혜(욥 34:35), 재능(왕상 7:14).
    구약 성경 / 91회 사용

    하나님(430) 엘로힘(’ĕlôhîym) אֱלֹהִים 

    1. 신들.  2. 신과 같은 모습.  3. 유일하고 참된 하나님
    발음 / 엘로힘[ ’ĕlôhîym ]
    관련 성경 / 하나님(창 1:1, 시 109:1, 욘 4:6), 엘엘로헤 이스라엘(창 33:20), 신상(창 35:2, 출 20:23, 신 7:25), 신(출 7:1, 신 4:34, 삼상17:43), 재판 장(출 21:6), 여호와(레 21:7), 여신(왕상 11:5).
    구약 성경 / 2603회 사용

    저주(422) 알라(’âlâh)  אָלָה 
    사위(3584) 카하쉬(kâchash) כָּחַשׁ
    살인(7523)  라차흐(
    rôtsach) רָצַח
    투절(1589) 가나브([gânab)  גָּנַב    
    간음(5003) 나아프(nâʼaph)   נָאַף


    (현대인의 성경) 2절 / 오직 저주와 거짓말과 살인과 도둑질과 간음뿐이며 폭력과 살인이 그칠 날이 없다.


     



    저주(422) 알라(’âlâh)  אָלָה 

    1. 맹세하다.  2. 저주하다.  3. 울부짖다
    발음 / 알라[ ’âlâh ]
    관련 성경 / 저주하다(삿 17:2), 맹세시키다(왕상 8:31, 대하 6:22). [명] 저주(호 4:2), 맹세(호 10:4).
    구약 성경 / 6회 사용


    사위(3584) 카하쉬(kâchash) כָּחַשׁ

    1. 거짓말을 하다.  2. 쇠하다.  3. 피엘형 כִּחֵשׁ
    발음 / 카하쉬[ kâchash ]
    관련 성경 / 부인하다(창 18:15, 레 6:2,3), 굴복하다(삼하 22:45), 속이다(수 7:11), 모르다(욥 8:18, 잠 30:9), 인정하지 아니하다(렘 5:12), 속이다(슥 13:4, 레 19:11), 떨어지다(호 9:2). [명] 속임(왕상 13:18, 호 4:2), 거짓말(사 59:13).
    구약 성경 / 22회 사용


    살인(7523)  라차흐(rôtsach) רָצַח 

    1. 산산조각으로 부수다.  2. 죽이다. 3. 니팔형 : 살해되다
    발음 / 라차흐[ rôtsach ]
    관련 성경 / 죽이다(민 35:16,27, 왕상21:19), 살인하다(민35:11, 렘7:9, 호6:9, 신4:42, 수20:3), 찢기다(잠22:13), 죽임을 당하다(삿20:4), 살해하다(시94:6). [명] 살인(호4:2), 살인자(민35:6, 신29:3, 수21:38, 민35:18,21).
    구약 성경 / 16회 사용


    투절(1589) 가나브([gânab)  גָּנַב    

    1. 훔치다.  2. 속이다. 3. 피엘형
    발음 / 가나브[ gânab ]
    관련 성경 / 도둑질하다(창31:30, 잠6:30, 렘23:30, 수7:11, 왕하11:2, 삼하15:6), 가만히 가져오다(삼하21:12), 날려가다(욥21:18), 앗아가다(욥27:20), 도둑을 맞다(출22:7,12), 가만히떠나다(창31:20), 가만히 도망하다(창31:27), 유인하다(신24:7), 도둑맞다(창31:39), 끌려오다(창40:15), 가만히 이르다(욥4:12),[명] 도둑질(호 4:2)
    구약 성경 / 40회 사용
    • 1.원형 훔치다, 몰래 가져가다, 창31:19,30,39,삼하19:42(41), 신24:7, 욥21:18
    • 2.원형 속이다, 창31:27.
    • 3.원형 피엘형

    간음(5003) 나아프(nâʼaph)  נָאַף 

    1. 간음하다
    2. 비유적으로 이스라엘이 참 하나님으로부터 돌이켜서 우상을 섬기는데 적용되었다. 렘3:8
    3. 대격이 뒤이어 나타남. 렘3:9
    발음 / 나아프[ nâʼaph ]
    관련 성경 / 간음하다(레20:10, 잠6:32, 시50:18, 렘7:9,출20:14, 겔16:32), [명] 간음(호4:2), 간부(레20:10), 음부(레20:10, 겔23:45, 호3:1), 음녀(잠30:20, 사57:3).
    구약 성경 / 31회 사용



    4:1-14:9은 모두 9개의 설교로 이루어져 있다.
    1.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없음(4:1-5:4)
    2. 인간의 교만을 지적함(5:5-6:3)
    3. 인애가 없으므로 망함(6:4-7:7)
    4. 세속과 혼합된 죄를 책망함(7:8-8:14)
    5. 부패의 죄로 징벌을 받음(9:1-17)
    6. 이스라엘의 두 가지 큰 죄(10:1-15)
    7. 인간적인 계책을 책망함(11:1-16)
    8. 우상 숭배의 죄악을 다시 책망함(13:1-16)
      * 12:1-14 / 이스라엘에 대한 회개 촉구
    9. 회복에 대한 약속(14:1-9)

    이상에서 하나님은 죄악된 생활을 청산하고, 하나님의 무궁한 은혜속에 거하도록 촉구하신다.

    여호와께서...쟁변하시나니
    - '이 땅 거민'은 북이스라엘 백성을 가리킨다.
    하나님께서는 그들과 쟁변하신다. '쟁변'(리브)은 다투는 것을 말하는데(2:2 참조), 여기서는 하나님과의 계약을 파괴한 책임을 물어 이스라엘을 고소한다는 의미이다(12:2; 미 6:2).

    이 땅에는...하나님을 아는 지식도 없고
    - 계약을 위반한 이스라엘의 죄악은 진실과 인애와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없다는 것이다.

    진실(에메트)
    하나님의 속성으로서 말과 행동의 신실함을 나타낸다.
    이는 곧 하나님과 맺은 언약의 내용에 충실하지 않은 이스라엘의 범죄를 지적하기 위해 사용되었다.

    인애(헤세드)는 언약에 기초한 사랑으로서 하나님의 인간을 향한 은총과 긍휼을 의미한다(2:19 참조).

    지식(다아트) 하나님을 아는 지식의 '다아트는 직접적이고 구체적인 경험에서 얻게되는 체험적 지식을 말한다.
    이것은 하나님과의 교제를 통해서 이루어진다.
    따라서 '다아트'가 없다는 것은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배반하고 거짓신들을 섬기고 있음을 지적한 것이다.
    즉, 그들은 하나님을 영화롭게도 하지 않고 감사치도 않았다(롬 1:21).
    게다가 사랑과 진실을 도외시하였다.
    이처럼 하나님을 섬기지 않고 우상 숭배로 타락한 이스라엘에게 주어지는 것은 심판과 멸망에 대한 선포였다.

    오직 저주와...간음 뿐이요
    - 이스라엘의 부도덕한 죄악들이 열거되고 있는데, 저자는 명사형이 아닌 부정사 절대형(infinitives absolute)으로 표현함으로써 타락과 죄악의 현실을 생생하고 적나라하게 나타내고 있다(Keil, Lange).

    저주의 '알라'는 원래 '맹세하다'란 단순한 뜻이 있으나, 여기서는 남을 저주하는 것과 관련된 거짓 맹세를 의미한다(마 5:34 참조).

    사위의 '카하쉬'는 '거짓말하다', '속이다'란 뜻으로 십계명 중 제9계명을 어기는 것이다.

    투절(가나브)은 훔치는 것으로 절도 행위를 가리키며, 제8계명을 범하는 것이다.
    살인(제6계명)과 간음(제 7계명) 역시 이스라엘에게서 빼놓을 수 없는 죄악으로 간주되고 있다.

    간음(나아프)은 제7계명을 위반하는 것이다.

    강포하여...뒤대임이라
    - '강포하다'의 '파라츠'는 '찢다', '깨뜨리다'등의 뜻으로 강도와 살인의 목적이 있는 폭력 행위를 의미한다. '피'(*, 다밈)는 피흘리는 행위와 관련되며, '뒤대임'(*, 나가)은 원래 '만지다', '도달하다', '치다'등의 뜻으로 여기서는 피흘리는 행위에 또 다른 피흘림이 뒤따른다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즉, 폭력은 폭력을 낳고 피는 피를 부른다는 뜻이다. 이는 폭력으로 가득 찬 이스라엘 사회의 비극적인 상황을 반영해준다.





    영어 성경에서는 다양하게 표현합니다.
    the spirit of whoredoms(음란한 정신), a spirit of prostitution(매춘의 정신), a spirit of harlotry(매춘의 영).
    왜 음란한 마음 즉 음란한 영의 지배를 받고 있었을까요?
    백성들이 나무를 향하여 묻고 있었다고 합니다.
    나무를 향하여 묻는다는 것은 우상 숭배의 구체적 행위 즉 나무로 새긴 우상에게 신적 계시를 묻는 것을 말합니다(렘 10:3, 합 2:19).

    막대기는 마치 드라빔과 같은 점을 치는 도구와 같은 것으로 나무 막대기가 넘어지는 방향으로 결정할 때 사용하는 것과 같은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하나님을 떠난 인간의 특징은 하나님에 대하여 아는 지식이 부족합니다.
    인간이 타락하여 범죄하는 가장 큰 이유는 무엇보다도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 부족하기 때문이라고 하겠습니다.
    호세아 4장에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범죄한 가장 큰 죄목은 십계명을 어긴 것이었다고 합니다.
    그것은 곧 하나님을 바르게 섬기지 못한 것과, 바른 인간 관계를 갖지 못한 것으로 설명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택한 백성인 이스라엘이 세상의 모든 다른 사람보다 더 악한 행위를 저지른 것은 하나님의 심판을 자초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눈여겨 볼 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무지뿐만이 아니라 제사장들조차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럴 수밖에 없었던 것이 당시 이스라엘 왕국의 지도자였던 여로보암 2세는 레위인이 아닌 사람을 제사장으로 임명했습니다.
    그 결과 하나님에 대해 신실하고 성경을 잘 알고 있었던 많은 제사장과 레위인들이 북이스라엘을 떠나 버렸습니다.
    그러므로 레위인이 아닌 제사장들은 성경을 제대로 가르치지도 못했을 뿐더러 바른 제사도 집행하지 못하였고 그 결과 백성은 더 큰 범죄에 빠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결국 하나님에 깨한 지식의 결여는 일차적으로 백성들 자신에게 있었고 또한 제 사장들도 이 책임을 면할 길이 없습니다.  


    인간은 무엇보다 하나님을 알기에 힘써야 합니다.
    또한 하나님에 대해서 바르게 알려면 성경 또한 깊이 알아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무지는 곧 죄악으로 치달을 수 있는 동기가 되기 때문에 인간은 무엇보다 하나님께서 베푸신 은혜와 사랑을 깨닫고 그 사랑에 대한 보답으로 말씀 앞에서 바로 서는 훈련을 꾸준히 지속해야만 합니다.





    내 백성이 나무를 향하여 묻고
    - 백성들의 어리석은 우상 숭배 행위가 구체적으로묘사되고 있다. 그들은 나무로 새긴 우상에게 신적계시를 묻는다(렘 10:3;합 2:19).특히 이것은 드라빔과 관련된 것으로 보인다(3:4).

    그 막대기는 저희에게 고하나니
    - '막대기'(마켈)는 여기서 우상의 형상을 나무 꼭대기에 새겨서 만든 것이거나, 아니면 막대기가 넘어지는 방향에 따라서 예언이 응답되는 것으로 믿는 점술적인 도구의 하나로 여겨진다(J.Given, W.Harper).

    이는...떠났음이니라
    - 나무 우상에게 신탁을 구하고 점복술을 통하여 소원을 얻으려는 이스라엘의 우매함과 가증스러움에 대해 호세아는 그들이 음란한 마음에 미혹되었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5:4). 이스라엘은 우상 숭배의 감각적인 행음에 빠져서 더이상 하나님 섬기기를 거부하고 언약에서 떠남으로써 멸망의 길을 자초한다. 그런데,그렇게 만드는 배후의 세력은 '음란한 영'(*, 루아흐 제누님) 곧 악한 귀신의 능력이다. 결국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의 계명에 복종하기보다는 음란과 우상 숭배를 자극하는 사탄의 권세에 굴복하고 말았음을 알 수 있다.




    호세아서 3장까지는 호세아 개인의 불운한 결혼 생활을 통해 북왕조의 죄악을 경고하고 심판을 선언하는 내용이었습니다.
    그러나 4장부터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타락을 호세아의 설교를 통해서 직접적으로 깨우치고 있습니다.
    따라서 호세아는 먼저 이스라엘의 종교 지도자와 평민들 모두가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 없다고 합니다(1-10절).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 없음으로 나타나는 현상과 결과를 소개합니다(11-19 절).
    특히 호세아는 본장 전체를 통하여 책망의 말씀과 경고를 일관성 있게 함으로써 이스라엘 백성들의 죄가 얼마나 심각한지를 일깨워 주고 있습니다.
    아울러 이스라엘 사회 전체가 종교적, 도덕적으로 심히 부패하였음을 경고하면서 회개를 촉구합니다.

    하나님께서는 호세아 선지자를 통하여 이스라엘의 가증한 죄악상을 밝히시며 그로 인해 그들에게 심판이 임하게 될 것임을 예언하셨습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버리고 탐욕과 우상 숭배로 인해 하나님의 진노의 심판을 자초함으로써 약속의 땅에서 뽑힘을 당하여야 했습니다. 


    하나님을 떠난 인간의 특징은 하나님에 대하여 아는 지식이 부족합니다.
    인간이 타락하여 범죄하는 가장 큰 이유는 무엇보다도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 부족하기 때문이라고 하겠습니다.
    호세아 4장에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범죄한 가장 큰 죄목은 십계명을 어긴 것이었다고 합니다.
    그것은 곧 하나님을 바르게 섬기지 못한 것과, 바른 인간 관계를 갖지 못한 것으로 설명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택한 백성인 이스라엘이 세상의 모든 다른 사람보다 더 악한 행위를 저지른 것은 하나님의 심판을 자초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눈여겨 볼 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무지뿐만이 아니라 제사장들조차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럴 수밖에 없었던 것이 당시 이스라엘 왕국의 지도자였던 여로보암 2세는 레위인이 아닌 사람을 제사장으로 임명했습니다.
    그 결과 하나님에 대해 신실하고 성경을 잘 알고 있었던 많은 제사장과 레위인들이 북이스라엘을 떠나 버렸습니다.
    그러므로 레위인이 아닌 제사장들은 성경을 제대로 가르치지도 못했을 뿐더러 바른 제사도 집행하지 못하였고 그 결과 백성은 더 큰 범죄에 빠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결국 하나님에 깨한 지식의 결여는 일차적으로 백성들 자신에게 있었고 또한 제 사장들도 이 책임을 면할 길이 없습니다.  


    인간은 무엇보다 하나님을 알기에 힘써야 합니다.
    또한 하나님에 대해서 바르게 알려면 성경 또한 깊이 알아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무지는 곧 죄악으로 치달을 수 있는 동기가 되기 때문에 인간은 무엇보다 하나님께서 베푸신 은혜와 사랑을 깨닫고 그 사랑에 대한 보답으로 말씀 앞에서 바로 서는 훈련을 꾸준히 지속해야만 합니다.









    6월 28일(수) 호세아 3장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음부 된 그 여인(1절)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이스라엘 자손이 다른 신을 섬기고 건포도 떡을 즐길찌라도 여호와가 저희를 사랑하나니 너는 또 가서 타인에게 연애를 받아 음부 된 그 여인을 사랑하라 하시기로.
    The LORD said to me, "Go, show your love to your wife again, though she is loved by another and is an adulteress. Love her as the LORD loves the Israelites, though they turn to other gods and love the sacred raisin cakes."

    음부된 그 여인(the woman who became a whore)(the woman who became an adulteress)

    그 여인(802) 이솨(’ishshâh)  אִשָה 

    1. 여자,  2. 여성
    발음 / 이솨 [ ’ishshâh ]
    관련 성경 / 여자(창 2:22, 출21:28, 느8:2), 아내(창2:24, 20:7, 스2:61), 여인(창12:14, 출21:22, 욥14:1), 첩(창16:3, 삿19:1), 부인(창24:36), 시집(민 36:8), 기생(수2:1, 6:22), 과부(삼하14:5), 계집(잠2:16), 어머니(왕하8:5, 사45:10).
    구약 성경 / 782회 사용



    음부 된(5003) 나아프(nâʼaph)  נָאַף 

    1. 간음하다
    2. 비유적으로 이스라엘이 참 하나님으로부터 돌이켜서 우상을 섬기는데 적용되었다. 예레미야 3:8
    3. 대격이 뒤이어 나타남. 예레미야 3:9
    발음 / 나아프 [ nâʼaph ]
    관련 성경 / 간음하다(레 20:10, 잠 6:32, 시 50:18, 렘 7:9, 출 20:14, 겔 16:32), [명] 간음(호 4:2), 간부(레 20:10), 음부(레 20:10, 겔 23:45, 호 3:1), 음녀(잠 30:20, 사 57:3).
    구약 성경 / 31회 사용



    ♦ 6월 28일(수)

    ♦ 오늘 읽어야 할 말씀 : 호세아 3:1∼5
    ♦ 묵상을 위한 주제 : 음부 된 그 여인(1절)
    ♦ 성구 :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이스라엘 자손이 다른 신을 섬기고 건포도 떡을 즐길찌라도 여호와가 저희를 사랑하나니 너는 또 가서 타인에게 연애를 받아 음부 된 그 여인을 사랑하라.

    "음부(淫婦)"란 훈(訓)은 "음란할 음(淫)"과 "아내 부(婦)"라고 하여 "음란한 부인"을 말합니다.
    선지자 호세아는 북왕국 이스라엘 여로보암 2세가 다스리던 시대에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 이스라엘 왕국이 앗수르에 의하여 망할 때까지 활동했던 예언자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 역사에 개입하셔서 인간들로 하여금 멸망과 파멸의 늪에서 벗어나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의 역사는 죄악으로 얼룩져 갔습니다.
    호세아 선지자는 하나님과 이스라엘 나라의 관계를 부부관계로 말씀하여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남편이었고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신부가 되었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부부관계가 부인의 부정한 행동으로 인하여 관계가 끊어지게 되었다는 것을 고멜이란 음부 된 그 여인으로 등장시켜 분명하게 설명하셨습니다.
    그러나 고멜은 분명한 호세아의 부인이었으므로 데려오라고 명령합니다.
    선지자는 하나님의 명령을 이성적으로 합리적으로 받아드리는 것이 아니라 순종하는 마음으로 받아드려야 하므로 고멜을 데려오는 것을 두려워하거나 주저하지 않습니다.
    이것이 곧 하나님께서 죄인을 사랑하시는 모습을 보여주신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죄로 인하여 타락의 길로 치닫고 있는 동안 하나님께서는 인간 역사의 배후에서 자기 백성들의 구원과 하나님 나라의 건설이라는 원대한 계획을 차질 없이 펼쳐 나가셨습니다.

    하나님께서 호세아에게 음탕한 고멜을 용서하고 다시 데려오라고 명령하신 것은 이런 용서와 구원의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고멜과 같이 이스라엘 백성들이 멸망의 길로 치닫고 있을 때 그들을 구하시기 위해 속전을 지불하시고 자기의 품으로 안아주셨습니다. 

    이것은 공의로우신 본질과 더불어 모든 죄인들을 사랑하시는 사랑의 품성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에서 자기 아들을 보내셔서 인간의 죄를 대속시킴으로 구원을 완성하셨습니다.
    죄로 인해 죽을 수밖에 없는 인간의 구원은 오직 하나님의 사랑에 의해서만 이루어지고 있음을 분명하게 증거하고 있습니다.

    죄인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이 얼마나 지극한 지를 깨달아야 합니다.
    음란하고 타락한 고멜까지도 부르신 하나님은 자기 백성 이스라엘을 부르셨으며 오늘날도 우리들을 부르고 있습니다.
    따라서 속전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지불하시고 우리를 사신 하나님의 사랑 감사와 찬양과 영광을 올려드리는 일에 성공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주와 동행 365 / 179일
    욥기 11-13장
    사도행전 9:1-21 


    ♪ 찬양 / 예수 따라 가며


    예수 내 구주!
    예수 내 생명!
    예수 내 권세! 

    3:1.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이스라엘 자손이 다른 신을 섬기고 건포도 떡을 즐길찌라도 여호와가 저희를 사랑하나니 너는 또 가서 타인에게 연애를 받아 음부 된 그 여인을 사랑하라 하시기로.

    160. 사랑(아하브. ’ahăbâh) אַהֲבָה 

    1. 순수한 사랑,  2. 이성간의 사랑,  3. 사랑스런 여자에게서 느끼는 사랑
    발음 / 아하브[ ’ahăbâh ]
    관련 성경 /  사랑함(삼상 18:3, 왕상 10:9, 시 109:4), 사랑(삼하 1:26, 시 109:5, 아 2:4, 삼하 13:15), 사랑하는 자(아 3:5, 8:4)
    구약 성경 / 40회 사용




    다른 신을 섬기고

    - '섬기고'에 해당하는 '파나'(6437)는 얼굴을 돌이켜서 다른 신을 바라보는 것을 뜻한다.
    이는 이스라엘의 영적인 배교와 우상 숭배를 잘 보여준다.

    6437. 섬기고(파나, pânâh) פָּנָה

    1. 돌다. 2. 창세기 18:22. 3. 향하게 하다
    발음 / 파나[ pânâh ]
    관련 성경 / 권고하다(레 16:9, 왕하 13:23), 돌아가다(신 16:7, 수 22:4, 렘 50:16), 돌이키다(신 31:18, 왕하 2:24, 겔 10:11), 돌아보다(왕상 8:28, 대하 6:19, 렘 47:3), 떠나다(신 29:18, 왕상 17:3), 지나가다(시 90:9), 보다(대하 26:20, 욥 6:28, 전 2:11), 쳐다보다(사 8:21), 가다(사 53:6), 올라가다(렘 6:4), 들다(창 25:63), 거스르다(출 14:27), 들어오다(신 23:11), 엎드러지다(삿 19:26), 향하다(창 18:22, 겔 17:6), 돌리다(신 1:7), 들어가다(신 1:40, 2:1), 돌이키다(사 45:22), 살피다(출 2:12), 바라보다(출 16:10, 민 16:42), 만들다(레 19:4), 추종하다(레 19:31, 20:6), 정탐하다(신 1:24), 돌아서다(수 7:12), 보이다(수 8:20), 나오다(삼상 13:17), 행하다(왕상 2:3), 이르다(수 15:2), 돌아오다(렘 46:5, 겔 44:1), 섬기다(호 3 :1), 예비하다(사 40:3),준비하다(시 80:9), 쫓아내다(습 3:15), 수축하다(사 57:14), 매다(삿 15:4). [부] 도리어(학1:9). [명] 새벽(시46:5), 모퉁이(대하25:23).
    구약 성경 / 135회 사용



    건포도 떡을 즐길지라도

    - '건포도 떡'(아쉬솨 아나빔. 6025, 809)(אֱלֹהִים אֲחֵרִים)은 그 맛과 관련하여 육체적이고 감각적인 우상 숭배의 모습을 상징한다(Keil, Given, Lange).
    특히 이것은 앗수르의 풍요의 여신인 아스다롯 신전에 바쳐진 희생의 떡과 연관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렘 7:18; 44:17-19).

    6025. 포도(에나브. ʽênâb) עֵנָב 

    1. 포도송이,  2. 창세기 40:10
    발음 / 에나브[ ʽênâb ]
    어원 / 복수עֲנָבִים, 연계형 עִנְּבֵי, ‘열매맺다’는 뜻의 사용하지 않는 어원에서 유래
    관련 성경 / 포도송이(창 40:10), 포도(창 40:11, 신 23:24, 암 9:13), 열매(레 25:5).
    구약 성경 / 19회 사용

    809. 떡(이쉬솨. ’ăshîyshâh) אֲשִׁישָׁה

    1. 건포도 ‘빵’,  2. 단과자,  3. 사무엘하 6:19
    발음 / 이쉬솨 [ ’ăshîyshâh ]
    관련 성경 / 건포도 떡(삼하 6:19), 건포도 과자(호 3:1), 건포도로 만든 과자(대상 16:3), 건포도(아  2:5)
    구약 성경 / 5회 사용



    여호와가 저희를 사랑하나니

    - 직역하면 '이스라엘 자손들을 사랑하는 여호와처럼'이다. 이는 호세아가 음부된 여인을 사랑해야 하는 근본적인 이유가 되고 있다.

    너는 또 가서...사랑하라

    - '여인'으로 번역된 '이솨'(*)에 정관사(*, 하)가 없다는 이유로 본절의 '여인'이 1장에서의 고멜이 아니라는 주장이 종종 제기되기도 한다. 그러나 '이솨'는 여기서 어떤 다른 여인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음부된 여인과의 별거 상태를 나타내고 있을 뿐이다(Pusey).
    즉, 고멜은 호세아를 떠나 다른 남자와 간음죄를 범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레아'(*)가 '타인'의 의미뿐만 아니라(렘 3:1) '남편'이라는 뜻도 있기 때문에(렘 3:20) 본 구절은 다음과 같이 두 가지로 해석될 수 있다.

    1. 고멜이 타인(또는 친구)을 사랑하며 음란한 생활을 했다(RSV,NEB).
    2. 고멜이 남편의 사랑을 받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음부가 되었다(JB, Keil).
    이 두 가지 해석 모두 여인의 간음을 전제하고 있다.

    이것은 음부된 여인처럼 여호와를 배반하고 우상 숭배에 빠져 있는 이스라엘 백성의 타락한 모습을 묘사한다.
    하지만 하나님은 호세아에게 음부 고멜을 다시 사랑하라는 명령을 통하여 이스라엘을 긍휼히 여기시는 자신의 사랑을 표현하고 있다(14:4).

    3:2. 내가 은 열 다섯개와 보리호멜 반으로 나를 위하여 저를 사고.

    내가...저를 사고

    - '사다'의 '카라'는 '거래에 의해서 얻다'라는 뜻이다.
    이것은 여인을 찾아오기 위하여 간부(姦夫)에게 지불한 대가는 아니다. 또한 여인의 부모에게 주어야 하는 지참금도 아닐 것이다.
    호세아와 고멜의 법적인 이혼이 있었는지는 알 수 없기 때문에 여기서는 단지 추측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아마 '카라'는 여인의 현재 상태를 표현하기 위하여 사용된 것으로 보인다.
    즉, 호세아는 여인에게 일정한 몸값을 결혼 선물의 형식으로 주었을 것이다(Lange, Wood).
    이는 그녀의 음란함에도 불구하고 그녀를 다시 데려오기 위하여 그녀에게 주었던 생활 보장의 비용이었던 것 같다.
    한편, 그 비용은 은 십오 세겔과 보리 한 호멜 반이었다.
    한 호멜은 십 에바로서 은 십 세겔과 비슷하다(겔 45:11).
    여기서 '반'으로 번역된 '레테크'(*)의 의미가 불분명하지만 전통적인 해석을 그대로 따른다면 보리 한 호멜 반은 은 십오 세겔이다.
    따라서 여인에게 주어진 값은 은 삼십 세겔인데, 이것은 이스라엘 사회에서 보통 노예의 몸값이었다(출 21:32, 레 27:4).
    결국 호세아가 지불했던 비용은 여인의 낮아진 신분과 노예적인 생활 상태를 암시하고 있다.
    이는 창녀와 같은 이스라엘의 타락한 모습을 반영하는 것이다.

    3:3. 저에게 이르기를 너는 많은 날 동안 나와 함께 지내고 행음하지 말며 다른 남자를 좇지 말라 나도 네게 그리하리라 하였노라.

    많은 날 동안(야밈라빔)

    - 이는 정확하게 한정된 시기를 의미하지 않는다.
    그 '많은 날'의 끝은 여인의 행동에 달려있다.
    즉, 그 기간은 여인이 절제하고 훈련받음으로써 새롭게 변화되는 날들을 가리킨다.

    나와 함께 지내고...좇지 말라

    - 여인의 음란한 생활은 끝나게 되었다.
    이제 여인은 남편에게 다시 돌아와서 순결한 삶을 살도록 요청받는다.
    그러나 여인은 다른 남자뿐만 아니라 남편과의 성적인 교제가 금지된다.
    '함께 지내고'의 '야솨브 리'는 '거주'가 아니라 조용히 혼자 앉아 있는 것을 의미한다(LXX).
    또한 '남자를 좇지 말라'(로 하야 레이쉬)는 성적인 부부 관계를 갖지 말라는 뜻이다.
    여인은 고독과 절제의 시간들을 통하여 새롭게 인격이 변화될 때까지 훈련을 받아야 했던 것이다.

    나도 네게 그리하리라

    - 직역하면 '그리고 또 나는 너에게로'이다. 이 구절은 해석상 어려움이 있기 때문에 다양하게 이해되었다. (1)'나도 너와 함께 지낼 것이다'(NIV). 이것은 부부간의 전적인 헌신을 내포한다. (2)'나도 네게 오지 아니하리라'(Kimchi). 이는 부부 관계를 맺지 않겠다는 의미이다(NEB, Keil). (3)'내가 네게 친절하게 대하리라'(Ewald). (4)'나도 역시 네 편이 되리라'(Calvin). 즉, 너의 남편이 되어 신실할 것을 맹세한다는 뜻이다. 이상에서 (2), (4)의 견해가 적합한 것 같다. 하나님은 이와같이 이스라엘에게 회개의 기회를 주시고 새 언약하에서 새롭게 변화될 때까지 인내하실 것이다. 이러한 사상은 하나님의 오래 참으심과 긍휼 가운데 이스라엘이 회복될 것을 암시하고 있다.





    3:4. 이스라엘 자손들이 많은 날 동안 왕도 없고 군도 없고 제사도 없고 주상도 없고 에봇도 없고 드라빔도 없이 지내다가.

    이스라엘 자손들이 많은 날 동안

    - 고멜의 절제 기간은 이스라엘의 포로 기간을 상징하며, 이스라엘 백성들이 회개해야 하는 암울한 시기임을 암시한다.

    왕도 없고 군(君)도 없고

    - 이는 이스라엘의 자주적 통치권과 행정이 부재(不在)할 것임을 시사한다.
    '군'(사르)은 '방백'과 같이 이스라엘의 정치 지도자들을 뜻한다(7:3, 13:10).

    제사도 없고 주상도 없고

    - '제사'(제바흐)는 여호와께 드리는 희생 의식으로서 이스라엘의 종교 행위를 상징한다.
    '주상'(마체바)은 원래 하나의 '기둥'(pillar, RSV)을 뜻하였는데(창 28:18, 수 24:26), 후에는 제단 곁에 세우는 종교적 숭배물로 인식되거나 이교적인 우상과 관련되었다(출 34:13, 신 7:5).
    특히 바알 숭배의 일환으로 주상을 세우기도 하였다(10:1,왕하 3:2, 미 5:13).
    따라서 본 구절은 전통적인 제사 의식이든지 우상과 관련된 혼합주의적인 종교 행위이든지 간에 종교 자체의 폐지를 언급하고 있는 것이다.

    에봇도 없고 드라빔도 없이 지내다가

    - '에봇'(에포드)은 본래 이스라엘의 대제사장이 입는 겉옷으로서 하나님의 신탁을 구하는 우림과 둠밈에 관계되었다(출 28:30).
    이것은 후에 신적 계시를 받기 위한 우상 숭배와 연관되어 종교적 숭배물로 우상화되기도 하였다(삿 8:27, 17:5, 삼상 21:9).
    '드라빔'(테라핌)은 가정의 수호신으로서(창 31:19, 삼상 19:13-16) 미래를 예언하는 신으로 숭배된 우상이었다.
    특히 이것은 점치는 도구로서 개인적인 우상 숭배와 밀접한 연관이 있었다(삿 18:14-20, 겔 21:21).
    따라서 에봇과 드라빔이 없어진다는 것은 여호와 숭배와 관련된 혼합주의적 우상 숭배가 종말을 고하게 된다는 뜻이다.
    이처럼 이스라엘은 정치적, 종교적인 암흑기를 맞게 될 것이다.
    그러나 이 기간은 이스라엘에게 있어서 참회의 기회이며, 인내와 시련을 통한 훈련의 시기임에 틀림없다.


    3:5. 그 후에 저희가 돌아와서 그 하나님 여호와와 그 왕 다윗을 구하고 말일에는 경외하므로 여호와께로 와 그 은총으로 나아가리라.

    말일에는(아하리크 하야밈) יְהוָה אֱלֹהֵיהֶם

    - '말일'(last days)은 단순히 미래를 뜻하지 않고 이스라엘의 회복의 때를 가리키는 종말을 의미한다(신 4:30;사 2:2;렘 23:20;미 4:1 참조) 그때는 곧 구속이 완성될 메시야의 날이며(Butler, Lange), 하나님 나라가 종결되는 메시야 강림의 날이다(Keil).

    경외함으로...나아가리라

    - '경외함'(파하드)은 단순한 공포가 아니라 하나님을 존경하고 섬기게하는 두려움으로서 신적 거룩함 앞에서 겸손히 떠는 것을 뜻한다. '은총'으로 번역된 '토브'는 '선하심'(goodness)을 의미한다.
    하나님의 선하심은 땅의 소산인 곡식과 새 포도주와 기름이 아름답고 풍성하게 넘치도록 채우신다(신 6:11, 사 1:19, 렘 31:12, 슥 9:17). 이것은 곧 이스라엘의 죄를 용서해주는 은혜의 표현이며, 그들을 자비와 긍휼로 용납하시는 축복의 결과이다.
    이와같이 하나님의 선하심은 이스라엘의 회복을 가져오게 하는 요인이 된다.
    한편, 이러한 이스라엘의 회복은 메시야 시대로 확대, 적용될 수 있다.
    곧 교회와 성도들에게 내려주시는 성령의 은사와 축복들 속에서 하나님의 선하심과 긍휼이 잘 나타날 것이다.


    6월 27일(화) 호세아 2장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음란한 자식들(4절)

    내가 그 자녀를 긍휼히 여기지 아니하리니 이는 저희가 음란한 자식들임이니라.
    And I will not have mercy upon her children; for they be the children of whoredoms.

    NIV / the children of adultery
    KJV / the children of whoredoms
    NASB / children of harlotry


    ♦ 6월 27일(화)

    ♦ 오늘 읽어야 할 말씀 : 호세아 2:1∼23
    ♦ 묵상을 위한 주제 : 음란한 자식들(4절)
    ♦ 성구 : 내가 그 자녀(子女)를 긍휼(矜恤)히 여기지 아니하리니 이는 저희가 음란(淫亂)한 자식(子息)들임이니라.

    호세아 선지자는 북 이스라엘 왕국 여로보암 2세 때부터 북 이스라엘 왕국이 앗수르에 의해서 망하던 시대에 예언 활동을 했던 선지자이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그의 조국을 사랑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조국이 망해가는 것을 지켜보는 선지자의 마음을 그 누가 이해할 수 있었을까요?

    오늘날도 나만 잘 먹고 잘 살고 행복하면 그만이라는 극단의 이기적인 생각과 번영의 신앙이 굳게 자리를 잡은 세상에서 세상 걱정을 한다는 것은 주제 넘은 생각이거나 사치스런 행동이라고 할 것입니다.

    그러나 자비의 하나님은 하나님의 사랑을 선지자 호세아를 통하여 음란한 여자를 아내로 맞이하여 부정한 자식들을 낳게 하면서까지 이스라엘을 사랑하셨습니다.

    만일 부정한 여자가 자식을 낳았다면 유전자 검사를 통하여 내 자식인지 아닌지 확인한 후에 내 자식이 아니라는 것이 판명되면 이 여자가 부정한 짓을 하여 낳은 자식이라고 세상에 알린 후에 나는 이런 여자와 더 이상 혼인 관계를 유지할 수 없다면 당장 이혼 청구 소송 및 위자료를 청구할 것입니다.

    그렇지만 사랑의 하나님은 호세아 선지자를 통하여 부정한 여자가 곧 오늘의 교회와 성도들이라고 책망합니다.
    당장 하나님의 징계를 받아야 할 교회와 성도들이지만 하나님은 또 다시 사랑을 베풀며 여호와 하나님을 알아야 한다고 깨우칩니다.
    그리고 이렇게 선포합니다.

    "이스라엘아, 내가 너를 영원히 내 아내로 삼아 너에게 신의와 사랑과 자비를 베풀고
    진실함으로 너를 맞을 것이니 네가 나를 여호와로 인정할 것이다.
    내가 나를 위하여 그를 이 에 심고 '사랑받지 못하는 자'라고 부르던 자에게 네가 사랑을 베풀고 내 백성이 아니라고 하던 자에게 '너는 내 백성이다.' 하고 말할 것이며 그들이 '주는 나의 하나님이십니다.' 하고 말할 것이다."
    (현대인의 성경 호세아 2:19-20. 23)

    호세아를 함께 읽어가는 믿음의 동지들이여
    하나님의 자비가 두 팔을 벌리고 우리들을 맞이하려고 할 때 당장 그 자리에서 일어나 주님께로 돌아와야 합니다.
    더 이상 머뭇거리지 말고 주님 앞으로 나오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지난 날 음란한 여자처럼 음란한 자식들을 낳았던 더러운 과거를 모두 버리고 이제부터는 거룩하신 주님과 더불어 진리의 말씀에 따라 순종하는 소금과 빛의 자녀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 찬양 / 나 어느 곳에 있든지

    예수 내 구주!
    예수 내 생명!
    예수 내 권세! 

    호세아 2:4

    내가 그 자녀를 긍휼히 여기지 아니하리니
    이는 저희가 음란한 자식들임이니라. 아멘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음란한 자식들
    베네 제누님(בְנֵי זְנוּנִים)    
    the children of adultery

    저희가 음란한 자식들임이니라 -

    이는 이스라엘 백성이 음란한 어미를 두고 있기 때문만은 아니다(1:2).
    오히려 그들 자신도 어미와 같이 음란한 행위와 우상 숭배에 빠져들었다.
    이스라엘 개개인은 전체로서의 나라와 다를 바가 전혀 없었다.
    백성들은 우상 숭배와 탐욕으로 더러워졌고, 이스라엘 나라는 주위에 있는 이방 나라들의 정치적인 힘과 부를 의존함으로써 여호와를 떠났다.
    결국 백성들은 더 이상 긍휼을 얻지 못하고 고아처럼 버려지게 될 것이다.

    음란한 자식에서 벗어나는 길

    첫째, 어미와 쟁론하라(2절)

    어미는 이스라엘을 의미한다.
    어미는 육체적인 욕망과 생각을 말한다.

    쟁론하다(리브) 7378  רִיב 

    1. 다투다. 2. 주먹질하며 싸우는 경우. 3. 말로 싸우는 경우
    발음 / 리브 [ rîyb ]
    관련 성경 / 다투다(창26:22, 시35:1, 사45:9), 논쟁하다(욥33:13), 시비하다(삿21:22, 호2:2), 변론하다(욥9:3, 미6 : 1), 징벌하다(암7:4), 변호하다(사1:17), 대답하다(창31:36), 싸우다(출21:18), 복병시키다(삼상15:5), 꾸짖다(느5:7, 13:11), 억울함을 풀다(삼상24:15, 잠22:23), 책망하다(느13:25), 견책하다(사27:8), 대적하다(삼상2:10, 사49:25). [명] 원통(시74:22, 애3:58), 변호(시119:154), 원한(잠23:11), 다툼(렘2:29), 송사(렘51:36).
    구약 성경 / 68회 사용

    3808. 로(לֹא)

    1. ~하지 않았다,  2. ~하지 않을 것이다
    발음 / 로[ lôʼ ]
    관련 성경 / 전무후무한(출 11:6), 풀리다(전 12:6). [명]무죄(호 8:5). [부] 틀림없이(욥 1:11), 진실로(렘 15:11).
    구약 성경 / 5097회 사용


    517. 어미(엠, ’êm ) אֵם 

    1. 할머니,  2. 다른 사람들에게 은혜를 베푸는 여자,  3. 친척 관계를 나타낼 때도 쓰임
    발음 / 엠[ ’êm ]
    관련 성경 /  어머니(창 3:20, 신 21:18, 왕하 4:20, 11:1, 대하 12:13)
    구약 성경 / 220회 사용

    둘째, 얼굴에서 음란을 제하라(2절)

    그 얼굴에서...제하게 하라

    - 이스라엘의 음행은 하나님을 반역하고 거짓 신을 섬긴 우상 숭배와 그에 따른 온갖 불의와 탐욕을 의미한다(4:11-14; 6:7-10; 7:1-10; 8:3-14; 10:1-10; 13:1-3).
    그들이 심판을 면하기 위해서는 이러한 죄악들을 그 얼굴과 유방 사이에서 완전히 제거해야 했다.
    여기서 '얼굴'과 '유방'은 창녀의 호색과 방종을 드러냄과 동시에 음행에 대한 담대함과 부끄러움이 없는 상태를 묘사하는 것이다(Lange, Keil).

    6440. 얼굴(파님. pânîym) פָּנִים 

     1. 얼굴,  2. 대면 ㉠ פָּנִים אֶל פָּנִים
    발음 / 파님[ pânîym ]
    어원 / 6437에서 유래
    관련 성경 / 얼굴(로부터 피하다)(창 16:8), 대항(창16:12),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리다)(창17:3, 민16:4), (소돔) 쪽(으로 향하다) (창18:16),소원(창19:21), 앞(창23:12), 섬김(창24:40),말미암음(창27:46, 출8:24, 레26:10), (기근)까닭(창47:13), 인도(출32:1, 민23:28), 얼굴(레17:10), (세력 있는) 자(레19:15), 거느림(신3:28), 낯(창3:8, 출2:15), 위(창6:1), 얼굴(창9:23, 출10:28, 민12:15), 나그네(창23:4),후일(창30:33), 맞은편(출14:9, 신32:49), 목전(출17:6, 수10:12), 진설병(출39:36), 들(레14:7, 민19:16), 선봉(신3:18), 용모(신28:50),본래(수11:10), 손(삿2:14), 전례(룻4:7), 선견자(삼상9:19), 건너편(삼하10:16), 아귀(삼하17:19), 부하(삼하18: 9), 내소(왕상6:20), 옛적(대상4:40), 몸(대하35:22), 가죽(욥41:13),앞잡이(잠16:18), 생명(잠16:15), 시작(잠17:14), 형편(잠27:23), 안색(사3:9), 까닭(사10:27), 얼굴가리개(사25:7), 사람(사36:9), 이전(사41:26), 얼굴빛(렘30:6), 내시(렘52:25), 대적(애1:5), 모양(겔1:28), 징조(겔4:3), 빈들(겔39:5), 현관(겔40:22,26), 출입구(겔  42:11),어귀(겔42:12).
    구약 성경 / 2038회 사용


    7699. 유방(솨드. shad)  שַׁד 

    1. 애가 4:3. 2. 쌍수 ׃ שָׁדַיִם 가슴
    발음 / 솨드[ shad ]
    관련 성경 / 젖 먹임(창 46:25), 유방(아 7:7, 호 2:2), 젖(시 22:9, 아 8:1, 사 60:16, 66:11, 애 4:3, 욜 2:16), 품(욥 24:9, 아 1:13, 사 28:9),  가슴(사 32:12).
    구약 성경 / 21회 사용

    음란(2183) 자눈 זָנוּן
    1. 매춘,  2. 우상숭배,  3. 이방인과의 음행
    발음 / 자눈[ zânûwn ]
    어원 / 2181에서 유래
    관련 성경 / 음란(호2:2), 음행(왕하9:22, 나3:4), 간음(겔23:11). [동] 음행하다(겔23:29), 음란하다(호1:2, 2:4, 4:12), 간음하다(겔23:11).
    구약 성경 / 12회 사용

    음행을 제하라(5005) 나아푸페하(naʼăphûwph) נַאֲפוּף 
    1. 음란한 자들,  2. 교만한 자들
    발음 / 나아푸페하[ naʼăphûwph ]
    어원 / 5003에서 유래
    관련 성경 / 음행(호 2:2).
    구약 성경 / 4회 사용





    6월 26일(월) 호세아 1장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음란한 아내(2절)

    음란한(2183) 자눈(zânûwn) זָנוּן 

    1. 매춘.  2. 우상숭배.  3. 이방인과의 음행
    발음 / 자눈[ zânûwn ]
    어원 / 2181에서 유래
    관련 성경 / 음란(호 2:2), 음행(왕하 9:22, 나 3:4), 간음(겔 23:11).
    [동] 음행하다(겔 23:29), 음란하다(호 1:2, 2:4, 4:12), 간음하다(겔 23:11).
    구약 성경 / 12회 사용

    뜻풀이부

    • 1. 남성 매춘, 음행, 창 38:24, 호 1:2,  2:6(4), 4:12, 5:4
    • 2. 남성 [비유법]
      • a. 명사, 남성 우상숭배, 왕하 9:22.
      • b. 명사, 남성 이방인과의 음행, 나 3:4.

    ♦ 6월 26일(월)

    ♦ 오늘 읽어야 할 말씀 : 호세아 1:1∼11
    ♦ 묵상을 위한 주제 : 음란한 아내(2절)
    ♦ 성구 : 여호와께서 비로소 호세아로 말씀하시니라 여호와께서 호세아에게 이르시되 너는 가서 음란(淫亂)한  아내를 취(取)하여 음란(淫亂)한 자식(子息)들을 낳으라 이 나라가 여호와를 떠나 크게 행음(行淫)함이니라.  

    오늘부터 구약의 마지막 책들 “소선지서(minor prophets)”를 읽게 될 것입니다.
    ‘소선지서’는 12권의 책들이며, 그 내용이 “대선지서(major prophets)”보다 분량이 작기 때문에 소선지서라고 합니다.
    결코 선지자의 활동과 그 인품이 크고 작기 때문에 구분하는 것이 아닙니다. 

    “호세아(Hosea)”라는 이름의 뜻은 “여호와는 구원이시다(Jehovah is salvation)”라고 하며 별명은 “사랑의 선지자”라고 합니다.
    “호세아서”를 읽어가면서 하나님의 사랑을 새롭게 느껴야 하겠습니다.

    “아모스(Amos)”는 “정의의 선지자” 라고 합니다.
    ‘아모스’와 ‘호세아’의 활동을 비교하면 “아모스”는 하나님이 행하신 것을 강조합니다.
    “호세아”는 하나님이 느끼신 것을 강조합니다.

    호세아는 북이스라엘 출신으로 북 이스라엘의 멸망에 대하여 말씀을 전했습니다.
    호세아 1장은 여호와 하나님은 선지자 호세아에게 “음란한 여자를 아내로 맞이하라”는 매우 충격적인 말씀을 전합니다.

    만일 하나님이 나에게 이런 명령을 하신다면 나는 호세아처럼 순종할 수 있을까요?
    “음란하다”는 단어는 복수형으로 한 번의 실수가 아니라 계속적으로 타락한 삶을 말합니다.

    방탕한 삶을 즐기는 여자를 아내로 맞이하라고 하셨을 때 그 여자 “고멜(Gomer)”을 아내로 맞이하여 첫 아들 “이스르엘(Jezreel)”과  딸 “로루하마(Lpruhamah)” 그리고 둘째 아들 “로암미(Loammi)”를 낳는 선지자의 모습에서 그 크신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는 은혜가 내 삶에서 분명하게 새겨져야 하겠습니다.

    “호세아”는 모든 죄인들을 사랑하는 하나님입니다.
    “고멜”은 계속적으로 죄악 된 삶을 즐기는 우리들을 말합니다.
    “고멜”이 낳은 “이스르엘”과 “로루하마”와 “로암미”는 이스라엘 백성을 상징합니다.

    선지자 호세아를 선택하여 하나님의 사랑이 실제적으로 어떻게 나타나고 있었는지 증거하는 말씀에서 내가 받은 하나님의 사랑을 새롭게 깨닫는 은혜를 누릴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 찬양 / 내 구주 예수를 더욱 사랑

    https://www.youtube.com/watch?v=rco1vI3Gr4c

    예수 내 구주!
    예수 내 생명!
    예수 내 권세! 

    비로소 호세아로

    '비로소'(데힐라트)는 여호와의 말씀의 시작, 곧 음란한 아내를 취하라는 계시가 호세아를 통해 처음으로 내려졌음을 의미한다.
    '호세아로'는 '호세아를 통하여'(through, NIV, RSV), 또는 '호세아에 의하여'(by, KJV)란 뜻으로 하나님의 계시가 호세아와의 인격적 관계 속에서 주어졌음을 시사한다.

    음란한 아내를 취하여

    '취하다'의 히브리어 '라카흐'는 축첩을 뜻하지 않고 결혼하라는 의미이다(창 4:19; 6:2; 19:14; 출 34:16).
    '음란한'의 히브리어 '제누님'은 음탕한 기질이 있는 여자, 또는 매춘부를 가리킨다.
    그런데, 이 같은 명령이 하나님의 도덕적 특성과 신적 거룩함에 맞지 않기 때문에 다음과 같은 다양한 해석과 논쟁을 불러 일으켰다.

    1. 가설적인 결혼이라는 견해 :
    호세아의 결혼이 하나님과 타락한 이스라엘과의 관계를 나타내기 위한 하나의 비유 또는 환상이라는 주장이다(Augustine, Jerome, Kimchi, E.J.Young).

    2. 영적인 불신앙으로 보는 견해 :
    여인의 음란을 이스라엘의 타락을 표현하기 위한 영적 음란으로 이해하려는 주장이다(Umbreit).
    하나님의 명령이 선지자의 내적이고 영적 본능 속에서 행하여진 것으로 이해하는 것도 이에 해당한다(Keil).

    3. 문자적으로 해석하는 견해 :
    선지자가 역사 속에서 실제로 경험한 결혼이라는 주장이다(Kurtz, Lange, Harper, Chrisholm, Given, Butler).
    즉 하나님은 선지자에게 실재의 경험을 통하여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관계를 상징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 견해가 가장 받아들일 만하다.
    그러나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여전히 하나님의 신적 속성에 관한 것이다.
    그래서 문자적 해석을 지지하는 학자들의 견해도 두 가지로 나뉜다.
    (1) 여인이 호세아와 결혼하기 전에는 순결하였으나, 결혼 후에 음란하게 되었다는 주장
    (2) 원래부터 음탕한 창녀였다는 주장 등이다.
    그러나 (1)의 견해는 신적 거룩함을 옹호하기 위한 변증임에도 불구하고 성경적 뒷받침이 불충분하며, 특히 3:1-3과 연관해 볼 때 수용하기 어렵다.
    (2)의 견해는 하나님의 명령이 결코 그의 신적 속성을 더럽게 하지 않으며, 오히려 그 명령을 어기는 것이 죄가 된다는 입장을 취한다.

    즉 음란한 여인과의 결혼은 실제적인 음란죄를 범하라는 것이 아니라, 여인의 죄악된 관습을 치료하여 선지자 자신의 수준으로 높이기 위한 결합이라는 것이다(Lange).
    이는 하나님의 거룩한 목적을 완성하기 위한 하나의 고상한 명령이자 선지자의 의무이지, 결코 도덕적 특성과 관련된 죄에 결부되지 않는다는 것이다(M.Henry).
    이러한 해석을 받아들일 때 음란한 여인과의 결혼을 명령한 하나님의 속성이 결코 불의 하다거나, 또는 그 명령대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한 호세아 선지자에게 죄가 있다고 생각하지 않아도 된다.

    음란한 자식들을 낳으라

    원문에는 '낳으라'는 말이 없고 '취하라'(라카흐)는 동사가 나온다.
    그래서 혹자는 고멜이 결혼시에 이미 자녀들을 데리고 왔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그러나 전체의 문맥을 고려해 볼 때, 음란한 자식들은 4-9절의 세 자녀를 가리키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
    이 음란한 자식들은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관계를 보다 선명하게 드러내기 위하여 하나님의 계획에 따라 이름지어진다(4, 6, 9절).

    이 나라가...행음함이니라

    '나라'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에레츠'는 이스라엘 땅의 백성을 가리키며(4:1), '떠나다'의 히브리어 '메아하레'는 여호와의 신실함에서 끊어진 관계를 나타낸다.
    이처럼 그 백성이 여호와를 떠난 것은 '크게 행음하였기'(자노케즈네) 때문이다.
    이것은 이스라엘 백성의 죄악이 계속해서 행해지고 있음을 강조하고 있다.
    여기서 '이 나라'는 크게 행음하고 있는 음란한 아내로 상징되고 있는데, 하나님과의 언약을 저버리고 우상 숭배와 방탕한 생활 가운데 빠져있는 이스라엘 백성의 불신실함을 드러내는 것이다.




    * 브에리(Beeri) / 샘에 속해 있는

    1. 에서의 아내인 헷 사람 유딧의 아버지(창 26:34)
    2. 호세아 선지자의 아버지(호 1:1)
        성경에서 다시는 찾아볼 수 없는 이름으로 "아주 평범한 인물" 이라고 하겠다.

    * 호세아(Hosea) / 여호와는 구원이시다(구원자)

    레위기 21:13-15
    - 레위기 21장은 "제사장이 지켜야 할 규례"에 관한 말씀입니다.

    13. 그는 처녀를 취하여 아내를 삼을찌니
    14. 과부
    나 이혼 된 여인이나 더러운 여인이나 기생을 취하지 말고 자기 백성중 처녀를 취하여 아내를 삼아
    15. 그 자손으로 백성 중에서 더럽히지 말찌니 나는 그를 거룩하게 하는 여호와임이니

    브에리 - 호세아 + 고멜(Gomer, 마지막, 끝. The End)
                              1. 이스르엘(Jezreel) / 하나님이 뿌려주심
                              2. 로루하마(Loruhamah) / 자비를 받지 못한 자
                              3. 로암미(Loammi) / 내 백성이 아니다

    * 브에리(Beeri) / 샘에 속해 있는

    * 디블라임(Diblaim)
    / 두가지 무화과 과자. 무화과 떡. 
    - 호세아의 장인(호 1:3)
    - 하나님에게 바치는 떡은 "무교병"이다. 무화과 떡이란 유교병이 들어간 떡으로 이방 신에게 바치는 제물로서 "디블라임의 딸"이란 이방 신전에 속한 딸이다.

    성경에서 "음행(淫行), 행음(行淫)"이란?

    1. 고린도전서 6:18

    음행을 피하라 사람이 범하는 죄마다 몸 밖에 있거니와 음행하는 자는 자기 몸에게 죄를 범하느니라.

    2. 예레미야 13:27
    내가 너의 간음과 사특한 소리와 들의 작은 산 위에서 행한 네 음행의 비루하고 가증한 것을 보았노라 화 있을찐저 예루살렘이여 네가 얼마나 오랜 후에야 정결하게 되겠느뇨.

    3. 호세아 9:1
    이스라엘아 너는 이방 사람처럼 기뻐 뛰놀지 말라 네가 행음하여 네 하나님을 떠나고 각 타작 마당에서 음행의 값을 좋아 하였느니라.

    4. 호세아 2:2
    너희 어미와 쟁론하고 쟁론하라 저는 내 아내가 아니요 나는 저의 남편이 아니라 저로 그 얼굴에서 음란을 제하게 하고 그 유방 사이에서 음행을 제하게 하라.

    5. 호세아 4:11
    음행과 묵은 포도주와 새 포도주가 마음을 빼앗느니라.



    * 이스르엘(Jezreel) /  하나님이 뿌려주심  
    1. 유다 자손인데 이것은 지명으로 해석하는 자도 있다(대상 4:3)
    2. 호세아가 자기 장자에게 지어준 상징적 이름(호 1:4)
    3.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주신 상징적인 이름(호 2:22)

    * 로루하마(Loruhamah) / 자비를 받지 못한 자
    1. 호세아가 부정한 아내의 몸에서 태어난 딸에게 지어준 상징적인 이름(호 1:6. 8)

    * 로암미(Loammi) / 내 백성이 아니다  
    1. 고멜이 낳은 호세아의 둘째 아들에게 상징적으로 준 이름(호 1:9, 2:23).


    빌립보서 1장 9-10절

    “너희 사랑이 지식과 모든 통찰력으로 더욱 더 풍성하게 되어, 선한 것을 분별하며, 또한 그리스도의 날까지 정결하고 흠이 없기를 나는 기도하노라.”

    “내가 기도하노라, 너희 사랑을 지식과 모든 총명으로 점점 더 풍성하게 하사, 너희로 지극히 선한 것을 분별하며 또 진실하여 허물없이 그리스도의 날까지 이르고.” (개역개정)

    1. 9절의 한글 번역은 주어(‘너희 사랑을’)를 목적어로 번역하면서, 그 목적어를 취하는 주동사(‘풍성하게 하사’)의 주어가 하나님인 것처럼 보이게 만듦으로써, 의미를 모호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헬라어 문장에서 주어는 ‘너희 사랑’이고, 동사는 ‘풍성하다’(περισσευω; abound, 자동사)이다.

    아이스데시스(αισθησιs; perception, insight)는 '총명'보다는 '통찰력'이 더 적절한 번역이다(NIV, NRSV).

    말론 카이 말론(μαλλον και μαλλον; more and more; NIV, NRSV, ESV)는 시간적 의미의 ‘점점 더’가 아니라, 양적 의미의 ‘더욱 더’가 더 적절한 번역이다.

    2. 10절의 한글번역은 다시 주어가 바뀌어 마치 ‘너희가 진실하여 허물없이 그리스도의 날까지 이르도록’ 바울이 기도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헬라어 원문에 따르면, ‘그리스도의 날까지 이르는 것’이 주목적이 아니라, 그 날까지 ‘정결하고(ειλικρινηs; pure, sincere) 흠이 없기를(αποσκοποs; blameless)’ 사도 바울은 기도하고 있는 것이다.

    ▶ 한글번역을 따르면, 하나님께서 주어가 됨으로써 성도의 사랑을 포함하여 성도의 모든 행위와 행실이 수동적인 의미를 갖게 되는데, 반면에 원문에 따르면, 성도의 사랑을 포함하여 성도의 모든 행위와 행실이 능동적인 의미를 갖게 된다.

    이러한 사도 바울의 기도는 2장 12절 말씀과 연결되어 나타난다.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나 없을 때뿐 아니라 더욱 지금 나 없을 때에도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

    ▶ 우리의 구원은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주, 나의 하나님으로 고백할 때 결정되지만, 그 완성은 주님의 재림 때 성취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 날까지 우리는 날마다 계속하여 우리의 구원을 이루는 노력을 경주해야 하는 것이다.

    바울신학에서 우리는 이러한 양면성을 직설법(indicative)과 명령법(imperative)이라는 용어로 정의한다. 예수를 믿을 때 우리는 구원을 받게 되지만(indicative), 그러나 거기서 끝나지 않고 주께서 재림하실 때까지 우리의 구원을 위한 노력은 계속되어야 하는 것이다(명령법; imperative).

    구원에 있어서 하나님의 주권을 강조하는 것은 좋지만 그것을 너무 강조한 나머지 우리의 신앙이 수동적이 되면, 하나님의 뜻이 하늘에서처럼 땅에서도 이뤄지도록 기도하라는 주님의 기도가 간과될 수 있는 여지가 남는다.

    ▶ 오늘도 구원을 향해 달려가는 여정에서, “여러분의 사랑이 지식과 모든 통찰력으로 더욱 더 풍성하게 되어, 선한 것을 분별하며, 또한 그리스도의 날까지 정결하고 흠이 없게 해 달라”는 사도 바울의 기도를 이 아침 여러분께 드립니다.


    # 왕조 임금 통치 기간 성경 구약 참고
    1 여로보암 왕조 여로보암 1세 22년 기원전 931년경-909년경 열왕기상 12:20
    2 나답 2년 기원전 909년경-908년경 열왕기상 15:25
    3 바아사 왕조 바아사 24년 기원전 908년경-885년경 열왕기상 15:33
    4 엘라 2년 기원전 885년경-884년경 열왕기상 16:8
    5 지므리 왕조 지므리 7일 기원전 884년경-884년경 열왕기상 16:15
    6 오므리 왕조 오므리 12년 기원전 884년경-873년경 열왕기상 16:21
    7 아합 22년 기원전 873년경-852년경 열왕기상 16:29
    8 아하지야 2년 기원전 852년경-851년경 열왕기상 22:51
    9 요람 12년 기원전 851년경-842년경 열왕기하 1:17
    10 예후 왕조 예후 28년 기원전 842년경-815년경 열왕기하 9:6
    11 여호아하즈 17년 기원전 819년경-804년경 열왕기하 13:1
    12 여호아스 16년 기원전 805년경-790년경 열왕기하 13:10
    13 여로보암 2세 41년 기원전 790년경-750년경 열왕기하 14:23
    14 즈가리야 6달 기원전 750년경-749년경 열왕기하 15:8
    15 살룸 왕조 살룸 1달 기원전 749년경-749년경 열왕기하 15:13
    16 므나헴 왕조 므나헴 10년 기원전 749년경-738년경 열왕기하 15:17
    17 브가히야 2년 기원전 738년경-736년경 열왕기하 15:23
    18 베가 왕조 베가 20년 기원전 736년경-732년경 열왕기하 15:27
    19 호세아 왕조 호세아 9년 기원전 732년경-722년경 열왕기하 1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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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왕국이 분열하게 된 이유

    ​솔로몬 왕이 통치하던 시기의 이스라엘 왕정은 세상적으로 볼 때 가장 완벽한 체제를 갖춘 왕국이었습니다.
    이스라엘 역사상 가장 드넓은 영토와 강력한 군대 조직과 능률적인 행정 조직, 그리고 농업과 목축업을 뛰어 넘은 무역을 통한 부의 축적 등… 역대 어느 왕조와 비교해도 차원이 다른 강성대국(제국)을 이루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겉으로 보이는 화려함 뒤에는 인간이 통치하는 왕정국가가 가지는 한계와 그늘이 존재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솔로몬 왕조 40년의 세월 동안 그늘 밑에 가려져 있었을 뿐, 결국 솔로몬 왕이 죽은 후 억눌렸던 문제들이 터져나오면서 왕국 분열의 뇌관으로 작용하였습니다.

    따라서 왕국의 분열은 어느 날 갑자기 생겨난 사건이 아닙니다.
    이미 오랫동안 축적되어온 분열의 이유들이 폭발할 수 있는 환경이 갖추어 지게 되자 일시에 터지게 된 것입니다.
    다음의 목록들은 솔로몬 왕국이 분열될 수 밖에 없는 원인들을 정리한 것입니다.

    1. 지파 갈등

    솔로몬 왕국은 에브라임 지파로 대변하는 북쪽 지파와 유다 지파 간의 오랜 세월 동안 뿌리 깊은 갈등을 극복하지 못한 채, 이 갈등을 더욱 가중시키는 일련의 정책으로 인해 결국 지파 갈등이 왕국 분열을 초래하게 하였습니다.

    1대 왕 사울 왕의 경우 에브라임 지파도 아니고 유다 지파도 아닌 베냐민 지파에서 왕이 선출되었기 때문에 특별히 이 두 지파 간의 갈등 요인이 발생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다윗 왕 시대부터는 유다 지파에서 왕이 나왔기 때문에 에브라임 지파와의 갈등은 언제나 분출 될 수 있는 가능성이 존재 했었습니다. 그러나 다윗 왕은 인정 받는 지도력과 정치력을 발휘해 이런 문제들이 부각되지 않도록 하였고, 다윗 왕조 시대에는 특별한 지파 갈등이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그렇지만 솔로몬 왕조는 12개의 지방 행정 조직을 구성하면서, 지파 차별에 근간한 국가 경제 정책을 펼치게 되었습니다. 즉 다른 지파들은 1년에 한 번, 한 달씩 돌아가며 국가 재정의 모든 것을 담당해야 했고, 더불어 군역도 감당해야 했는데, 오직 유다 지파에게만은 어떠한 짐도 지우지 않는 특혜를 베풀었습니다.

    당연히 이 부분에 대한 다른 지파들의 불만은 상당했을 것입니다. 더구나 솔로몬 통치 후기로 갈수록 세금과 부역은 가중되었고, 북쪽 지파들이 겪는 부담은 점점 인내하기 어려운 수준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그렇지만 솔로몬 왕의 강력한 전제 정치하에서 말 못할 고민으로 가지고 있어야 만 했습니다.

    그러다가 마침내 솔로몬이 죽고 그의 아들 르호보암이 즉위하게 되었을 때, 르호보암이 북쪽 지파의 인준을 받으려 에브라임 지파의 근거지인 세겜으로 찾아가서 북쪽 지파의 장로들과의 만남을 가지게 되었을 때, 그들이 르호보암에게 요구한 것은 한 마디로 그 부담을 줄여달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리하면 르호보암을 왕으로 인정해 주겠다는 것이었습니다.

    [왕상12:1] 르호보암이 세겜으로 갔으니 이는 온 이스라엘이 그를 왕으로 삼고자 하여 세겜에 이르렀음이더라

    [왕상12:2] 느밧의 아들 여로보암이 전에 솔로몬 왕의 얼굴을 피하여 애굽으로 도망하여 있었더니 이제 그 소문을 듣고 여전히 애굽에 있는 중에

    [왕상12:3] 무리가 사람을 보내 그를 불렀더라 여로보암과 이스라엘의 온 회중이 와서 르호보암에게 말하여 이르되

    [왕상12:4] 왕의 아버지가 우리의 멍에를 무겁게 하였으나 왕은 이제 왕의 아버지가 우리에게 시킨 고역과 메운 무거운 멍에를 가볍게 하소서 그리하시면 우리가 왕을 섬기겠나이다

    그러나 르호보암은 그들의 주장을 수락해 주라는 장로들의 의견을 철저히 무시합니다. 자기와 함께 자란 젊은 관리들의 자문을 받아들여, 오히려 솔로몬 때보다 더 무거운 짐을 지게 하는 강경책을 결정합니다.

    [왕상12:10] 함께 자라난 소년들이 왕께 아뢰어 이르되 이 백성들이 왕께 아뢰기를 왕의 부친이 우리의 멍에를 무겁게 하였으나 왕은 우리를 위하여 가볍게 하라 하였은즉 왕은 대답하기를 내 새끼 손가락이 내 아버지의 허리보다 굵으니

    [왕상12:11] 내 아버지께서 너희에게 무거운 멍에를 메게 하였으나 이제 나는 너희의 멍에를 더욱 무겁게 할지라 내 아버지는 채찍으로 너희를 징계하였으나 나는 전갈 채찍으로 너희를 징계하리라 하소서

    이러한 결정을 들은 북쪽 지파들은 당연히 반발하였고, 그 동안 잠재되어온 불만이 한 순간에 폭발하게 되었습니다. 북쪽 지파들은 르호보암 왕이 보낸 역꾼 감독인 아도람을 돌로 쳐죽이는 민중반란으로 일으키며 그들은 더 이상 다윗 왕조와 함께 할 수 없다는 뜻을 드러냅니다. 그리고 마침 이집트의 망명생활을 끝내고 돌아온 여로보암을 그들의 왕으로 세우게 됩니다.

    [왕상12:16] 온 이스라엘이 자기들의 말을 왕이 듣지 아니함을 보고 왕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우리가 다윗과 무슨 관계가 있느냐 이새의 아들에게서 받을 유산이 없도다 이스라엘아 너희의 장막으로 돌아가라 다윗이여 이제 너는 네 집이나 돌아보라 하고 이스라엘이 그 장막으로 돌아가니라

    [왕상12:17] 그러나 유다 성읍들에 사는 이스라엘 자손에게는 르호보암이 그들의 왕이 되었더라

    [왕상12:18] 르호보암 왕이 역꾼의 감독 아도람을 보냈더니 온 이스라엘이 그를 돌로 쳐죽인지라 르호보암 왕이 급히 수레에 올라 예루살렘으로 도망하였더라

    [왕상12:19] 이에 이스라엘이 다윗의 집을 배반하여 오늘까지 이르렀더라

    [왕상12:20] 온 이스라엘이 여로보암이 돌아왔다 함을 듣고 사람을 보내 그를 공회로 청하여 온 이스라엘의 왕으로 삼았으니 유다 지파 외에는 다윗의 집을 따르는 자가 없으니라

    이에 르호보암은 유다와 베냐민에서 뽑은 18만 군대로 북쪽 지파의 반란을 진압하려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선지자 스마야를 보내어 이 일이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생긴 일임을 전하게 하셨고, 이로 말미암아 전쟁은 피하게 됩니다. 그러나 이후 왕국의 분열은 기정 사실화 되어 이 때부터 제2차 분열 왕국 시대가 도래하게 됩니다.

    [왕상12:21] 르호보암이 예루살렘에 이르러 유다 온 족속과 베냐민 지파를 모으니 택한 용사가 십팔만 명이라 이스라엘 족속과 싸워 나라를 회복하여 솔로몬의 아들 르호보암에게 돌리려 하더니

    [왕상12:22] 하나님의 말씀이 하나님의 사람 스마야에게 임하여 이르시되

    [왕상12:23] 솔로몬의 아들 유다 왕 르호보암과 유다와 베냐민 온 족속과 또 그 남은 백성에게 말하여 이르기를

    [왕상12:24] 여호와의 말씀이 너희는 올라가지 말라 너희 형제 이스라엘 자손과 싸우지 말고 각기 집으로 돌아가라 이 일이 나로 말미암아 난 것이라 하셨다 하라 하신지라 그들이 여호와의 말씀을 듣고 그 말씀을 따라 돌아갔더라

    2. 우상 숭배와 하나님의 징계

    지파 간의 갈등이 왕국 분열의 표면적인 이유라고 한다면, 보다 깊은 분열의 원인은 영적 타락으로 인한 하나님의 징계입니다. 곧 솔로몬 왕국의 우상 숭배가 하나님의 징계를 불러 일으키게 한 것입니다.

    열왕기상 11장에 보면 솔로몬 왕은 무려 1,000명의 아내를 거느립니다. 소위 결혼 동맹을 위한 정략 결혼의 결과입니다. 당연히 솔로몬의 아내들 중에는 수 많은 이방 여인들이 있었고, 문제는 이들이 솔로몬과 결혼하여 이스라엘 땅으로 들어왔을 때 그들이 섬기던 이방신들도 함께 들어오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더구나 솔로몬이 나이가 많아져서 분별력을 잃어갈 때는 그 여인들은 솔로몬으로 하여금 우상 숭배에 깊이 빠지게 한 것입니다. ​

    [왕상11:1] 솔로몬 왕이 바로의 딸 외에 이방의 많은 여인을 사랑하였으니 곧 모압과 암몬과 에돔과 시돈과 헷 여인이라

    [왕상11:2] 여호와께서 일찍이 이 여러 백성에 대하여 이스라엘 자손에게 말씀하시기를 너희는 그들과 서로 통혼하지 말며 그들도 너희와 서로 통혼하게 하지 말라 그들이 반드시 너희의 마음을 돌려 그들의 신들을 따르게 하리라 하셨으나 솔로몬이 그들을 사랑하였더라

    [왕상11:3] 왕은 후궁이 칠백 명이요 첩이 삼백 명이라 그의 여인들이 왕의 마음을 돌아서게 하였더라

    [왕상11:4] 솔로몬의 나이가 많을 때에 그의 여인들이 그의 마음을 돌려 다른 신들을 따르게 하였으므로 왕의 마음이 그의 아버지 다윗의 마음과 같지 아니하여 그의 하나님 여호와 앞에 온전하지 못하였으니

    [왕상11:5] 이는 시돈 사람의 여신 아스다롯을 따르고 암몬 사람의 가증한 밀곰을 따름이라

    [왕상11:6] 솔로몬이 여호와의 눈앞에서 악을 행하여 그의 아버지 다윗이 여호와를 온전히 따름 같이 따르지 아니하고

    [왕상11:7] 모압의 가증한 그모스를 위하여 예루살렘 앞 산에 산당을 지었고 또 암몬 자손의 가증한 몰록을 위하여 그와 같이 하였으며

    [왕상11:8] 그가 또 그의 이방 여인들을 위하여 다 그와 같이 한지라 그들이 자기의 신들에게 분향하며 제사하였더라

    그래서 하나님은 2번씩이나 솔로몬에게 나타나 경고를 하셨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솔로몬은 우상 숭배의 길에서 돌이키지 아니하였고, 이에 하나님께서는 솔로몬 왕국을 둘로 나누는 결심을 하게 됩니다. 그래서 유다와 베냐민 지파를 제외한 북쪽 지파 모두를 솔로몬의 신하인 여로보암에게 주기로 작정하셨습니다.

    [왕상11:9] 솔로몬이 마음을 돌려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를 떠나므로 여호와께서 그에게 진노하시니라 여호와께서 일찍이 두 번이나 그에게 나타나시고

    [왕상11:10] 이 일에 대하여 명령하사 다른 신을 따르지 말라 하셨으나 그가 여호와의 명령을 지키지 않았으므로

    [왕상11:11] 여호와께서 솔로몬에게 말씀하시되 네게 이러한 일이 있었고 또 네가 내 언약과 내가 네게 명령한 법도를 지키지 아니하였으니 내가 반드시 이 나라를 네게서 빼앗아 네 신하에게 주리라

    [왕상11:12] 그러나 네 아버지 다윗을 위하여 네 세대에는 이 일을 행하지 아니하고 네 아들의 손에서 빼앗으려니와

    [왕상11:13] 오직 내가 이 나라를 다 빼앗지 아니하고 내 종 다윗과 내가 택한 예루살렘을 위하여 한 지파를 네 아들에게 주리라 하셨더라

    3. 하나님 말씀에 대한 불순종과 도덕 타락과 급격한 세속화, 그리고 이에 대한 민심의 이반

    하나님께서는 이미 신명기 17:16~17을 통해서 왕이 해서는 안 될 금기 사항들을 보여 주었는데, 솔로몬 왕은 정작 이 모든 금기 조항들만을 골라서 행하는 부덕을 행합니다.

    [신17:14]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주시는 땅에 이르러 그 땅을 차지하고 거주할 때에 만일 우리도 우리 주위의 모든 민족들 같이 우리 위에 왕을 세워야겠다는 생각이 나거든

    [신17:15] 반드시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택하신 자를 네 위에 왕으로 세울 것이며 네 위에 왕을 세우려면 네 형제 중에서 한 사람을 할 것이요 네 형제 아닌 타국인을 네 위에 세우지 말 것이며

    [신17:16] 그는 병마를 많이 두지 말 것이요 병마를 많이 얻으려고 그 백성을 애굽으로 돌아가게 하지 말 것이니 이는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이르시기를 너희가 이 후에는 그 길로 다시 돌아가지 말 것이라 하셨음이며

    [신17:17] 그에게 아내를 많이 두어 그의 마음이 미혹되게 하지 말 것이며 자기를 위하여 은금을 많이 쌓지 말 것이니라

    지난 시간에 솔로몬 왕국의 번영을 소개하면서 솔로몬에게는 1,200승의 병거와 12,000명의 마병, 그리고 4,000필의 말을 관리하는 마구간이 있었다고 소개했습니다. 이것은 아버지 다윗 왕 때에는 없었던 군사력 증강의 결과입니다. 그렇지만 이것은 하나님이 사전에 그렇게 하지 말라고 경고한 것입니다.

    또한 아내를 많이 두지 말라고 경고했음에도 불구하고, 1,000명의 아내를 거느림으로 결과적으로는 그들에 의해 우상 숭배의 미혹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은금을 많이 쌓아두지 말라고 했지만, 당시에 솔로몬 왕과 필적할 왕이 없었을 정도로 솔로몬의 부는 거대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이 같은 일을 경계한 것은 결국 이 일이 영적 타락은 물론이거니와, 도덕적 타락을 가져와 왕국이 급속하게 세속화의 길로 나아가기 때문입니다. 당연히 하나님과는 멀어지고 인간 통치의 시대가 되고 말 것입니다.

    이러한 모습들을 모든 백성들은 보고 있었습니다. 특히 북쪽 지파에 속한 백성들은 솔로몬의 전제 정치의 권력 앞에 할 말을 하지 못하였지만, 솔로몬이 사후 그들의 불만들은 왕국을 분열하게 하는 원인이 되었습니다.

    4. 중앙권력의 증대로 인한 견제세력의 약화, 그리고 국가 권력의 균형 상실

    여기에 한 가지를 더 추가한다면 솔로몬 왕조가 들어서면서 왕권은 더욱 더 강화되었고, 중앙정부로의 권력이 집권화되면서 지파의 독립성이 약화되었습니다. 그 뿐만 아니라 시간이 갈수록 성전은 점차로 왕실 예배당이 되어갔고, 대제사장은 왕이 임명한 사람으로서 내각의 종교부 장관 수준으로 그 의미가 퇴색되었습니다. 사무엘 시대와 비교해보면 격세지감을 느낄 정도로 종교는 어느덧 정치 권력의 부속물이 되어 버렸습니다.

    따라서 이와 같이 상황은 솔로몬 왕이 여호와 신앙을 잃어버리게 될 때 그의 잘못된 독주를 막아줄 제동 장치의 부재 상황을 만들었고, 결국 계속해서 누적 되어진 부패와 불신앙은 결국 솔로몬 왕국의 운명을 북쪽 지파에게도 버림받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에게서도 버림을 받을 수 밖에 없는 결과에 이르게 한 것입니다.

    ​솔로몬 통치 후기의 반란

    솔로몬 왕국의 분열은 이미 솔로몬 생전에 시작되었고, 그것이 전조가 되어 솔로몬 사후 급격히 왕국이 분열되었습니다.

    솔로몬 왕의 통치 후기에 이르자 3명의 대적자가 나타나게 됩니다. 그런데 이 모든 대적자들은 하나같이 하나님께서 허락한 사람들입니다. 다시 말해 왕국의 분열은 사람이 한 일이 아니라 하나님의 섭리 안에서 발생한 하나님의 뜻과 계획인 것입니다.

    [왕상11:14] 여호와께서 에돔 사람 하닷을 일으켜 솔로몬의 대적이 되게 하시니 그는 왕의 자손으로서 에돔에 거하였더라

    [왕상11:23] 하나님이 또 엘리아다의 아들 르손을 일으켜 솔로몬의 대적자가 되게 하시니 그는 그의 주인 소바 왕 하닷에셀에게서 도망한 자라

    [왕상12:20] 온 이스라엘이 여로보암이 돌아왔다 함을 듣고 사람을 보내 그를 공회로 청하여 온 이스라엘의 왕으로 삼았으니 유다 지파 외에는 다윗의 집을 따르는 자가 없으니라

    [왕상12:21] 르호보암이 예루살렘에 이르러 유다 온 족속과 베냐민 지파를 모으니 택한 용사가 십팔만 명이라 이스라엘 족속과 싸워 나라를 회복하여 솔로몬의 아들 르호보암에게 돌리려 하더니

    [왕상12:22] 하나님의 말씀이 하나님의 사람 스마야에게 임하여 이르시되

    [왕상12:23] 솔로몬의 아들 유다 왕 르호보암과 유다와 베냐민 온 족속과 또 그 남은 백성에게 말하여 이르기를

    [왕상12:24] 여호와의 말씀이 너희는 올라가지 말라 너희 형제 이스라엘 자손과 싸우지 말고 각기 집으로 돌아가라 이 일이 나로 말미암아 난 것이라 하셨다 하라 하신지라 그들이 여호와의 말씀을 듣고 그 말씀을 따라 돌아갔더라​

    사사기 역사에서 보듯이 이스라엘 민족이 하나님을 떠나 우상 숭배를 하면, 하나님이 대적을 보내어 그들을 징계하셨듯이, 솔로몬 왕국도 분열에 앞서 대적을 보냄으로써 그들을 돌이키는 기회를 주고자 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솔로몬은 이러한 하나님의 뜻에 겸손한 반응이 아닌 강팍한 모습을 보여주게 됩니다. 그리고 결국 그 결과 솔로몬 왕국은 통치 말기부터 이미 왕국의 변경부터 무너지기 시작했고, 그의 아들 르호보암이 즉위하자 한번 더 마지막 기회를 주었것만, 그 역시 더 강팍하게 반응함으로써 왕국은 급속히 분열의 절차를 경험하게 됩니다.

    1. 여로보암

    솔로몬의 첫 번째 대적자는 훗날 북이스라엘의 왕이 될 여로보암입니다. 여로보암은 일찍이 솔로몬의 눈에 띄어 요셉 지파의 노역 감독관으로 일하게 된 솔로몬 왕국의 인재 중의 하나였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실로 출신의 선지자인 아히야가 나타나 여로보암이 가던 길을 막으며 새 옷을 열두 조각으로 찢어 그 중 열 조각을 취하도록 합니다. 그런데 이것은 솔로몬이 죽은 후 여로보암이 통치하게 될 열 지파를 상징한 것입니다.

    [왕상11:26] 솔로몬의 신하 느밧의 아들 여로보암이 또한 손을 들어 왕을 대적하였으니 그는 에브라임 족속인 스레다 사람이요 그의 어머니의 이름은 스루아이니 과부더라

    [왕상11:27] 그가 손을 들어 왕을 대적하는 까닭은 이러하니라. 솔로몬이 밀로를 건축하고 그의 아버지 다윗의 성읍이 무너진 것을 수축하였는데

    [왕상11:28] 이 사람 여로보암은 큰 용사라 솔로몬이 이 청년의 부지런함을 보고 세워 요셉 족속의 일을 감독하게 하였더니

    [왕상11:29] 그 즈음에 여로보암이 예루살렘에서 나갈 때에 실로 사람 선지자 아히야가 길에서 그를 만나니 아히야가 새 의복을 입었고 그 두 사람만 들에 있었더라

    [왕상11:30] 아히야가 자기가 입은 새 옷을 잡아 열두 조각으로 찢고

    [왕상11:31] 여로보암에게 이르되 너는 열 조각을 가지라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이 내가 이 나라를 솔로몬의 손에서 찢어 빼앗아 열 지파를 네게 주고

    [왕상11:32] 오직 내 종 다윗을 위하고 이스라엘 모든 지파 중에서 택한 성읍 예루살렘을 위하여 한 지파를 솔로몬에게 주리니

    [왕상11:33] 이는 그들이 나를 버리고 시돈 사람의 여신 아스다롯과 모압의 신 그모스와 암몬 자손의 신 밀곰을 경배하며 그의 아버지 다윗이 행함 같지 아니하여 내 길로 행하지 아니하며 나 보기에 정직한 일과 내 법도와 내 율례를 행하지 아니함이니라​

    그렇지만 이 일이 발각되면서 여로보암은 이집트에서 망명생활을 해야만 했습니다. 왜냐하면 사울이 다윗을 죽이려 한 것 같이 솔로몬도 여로보암을 죽이려 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솔로몬은 아버지 다윗의 길을 따르기 보다는 사울의 길을 따르게 됩니다. 결국 여로보암은 다윗이 그런 것처럼 이집트에서의 망명 생활을 마치고 오자 북쪽 지파의 왕이 됩니다.

    이와 같이 역사는 반복과 반전입니다. 다윗과 사울의 여정이 여로보암과 솔로몬과 무척 닮아 보입니다. 안타까운 것은 성공자 다윗의 아들인 솔로몬이 실패자 사울의 전철을 밟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로보암의 반역은 이미 솔로몬 자신에게 하나님이 경고하신 바가 성취된 것이었습니다.

    [왕상11:9] 솔로몬이 마음을 돌려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를 떠나므로 여호와께서 그에게 진노하시니라 여호와께서 일찍이 두 번이나 그에게 나타나시고

    [왕상11:10] 이 일에 대하여 명령하사 다른 신을 따르지 말라 하셨으나 그가 여호와의 명령을 지키지 않았으므로

    [왕상11:11] 여호와께서 솔로몬에게 말씀하시되 네게 이러한 일이 있었고 또 네가 내 언약과 내가 네게 명령한 법도를 지키지 아니하였으니 내가 반드시 이 나라를 네게서 빼앗아 네 신하에게 주리라

    [왕상11:12] 그러나 네 아버지 다윗을 위하여 네 세대에는 이 일을 행하지 아니하고 네 아들의 손에서 빼앗으려니와

    [왕상11:13] 오직 내가 이 나라를 다 빼앗지 아니하고 내 종 다윗과 내가 택한 예루살렘을 위하여 한 지파를 네 아들에게 주리라 하셨더라

    그리고 이 일은 마치 그 옛날 사울 왕이 사무엘을 통해 하나님께로 받은 경고와 예언의 성취와 동일한 일이 다윗의 후손에게도 발생하게 된 것입니다.

    [삼상13:13] 사무엘이 사울에게 이르되 왕이 망령되이 행하였도다 왕이 왕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왕에게 내리신 명령을 지키지 아니하였도다 그리하였더라면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위에 왕의 나라를 영원히 세우셨을 것이거늘

    [삼상13:14] 지금은 왕의 나라가 길지 못할 것이라 여호와께서 왕에게 명령하신 바를 왕이 지키지 아니하였으므로 여호와께서 그의 마음에 맞는 사람을 구하여 여호와께서 그를 그의 백성의 지도자로 삼으셨느니라 하고

    이 때 이집트의 파라오는 이집트 제22왕조를 창건한 쇼셍크 1세(B.C. 946~913년)로서 성경에서는 그를 '시삭'으로 소개합니다. 후일 그는 르호보암 시대에 또 다시 등장하게 되는데, 남유다와 북이스라엘을 침공하여 막대한 피해를 입히게 합니다.

    [왕상11:40] 이러므로 솔로몬이 여로보암을 죽이려 하매 여로보암이 일어나 애굽으로 도망하여 애굽 왕 시삭에게 이르러 솔로몬이 죽기까지 애굽에 있으니라

    [왕상14:25] 르호보암 왕 제오년에 애굽의 왕 시삭이 올라와서 예루살렘을 치고

    [왕상14:26]여호와의 성전의 보물과 왕궁의 보물을 모두 빼앗고 또 솔로몬이 만든 금 방패를 다 빼앗은지라

    시삭의 침공에 대한 더 자세한 기록이 역대하 12장에 소개되어 있습니다. 시삭의 침공으로 이집트 군대는 이스라엘 전역을 황페하게 하였고, 네게브 지역을 석권하였으며 이 지역에 있는 솔로몬의 요새들을 접수하였습니다.

    그런데 시삭의 침공 역시 솔로몬의 대적이 발현한 것과 맥을 같이합니다. 르호보암이 율법을 버리고, 온 이스라엘이 왕을 본받아 그들이 하나님께 범죄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시삭을 강성케하여 이스라엘을 치는 막대기로 사용한 것입니다.

    [대하12:1] 르호보암의 나라가 견고하고 세력이 강해지매 그가 여호와의 율법을 버리니 온 이스라엘이 본받은지라

    [대하12:2] 그들이 여호와께 범죄하였으므로 르호보암 왕 제오년에 애굽 왕 시삭이 예루살렘을 치러 올라오니

    [대하12:3] 그에게 병거가 천이백 대요 마병이 육만 명이며 애굽에서 그와 함께 온 백성 곧 리비아와 숙과 구스 사람이 헤아릴 수 없이 많더라

    [대하12:4] 시삭이 유다의 견고한 성읍들을 빼앗고 예루살렘에 이르니

    [대하12:5] 그 때에 유다 방백들이 시삭의 일로 예루살렘에 모였는지라 선지자 스마야가 르호보암과 방백들에게 나아와 이르되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너희가 나를 버렸으므로 나도 너희를 버려 시삭의 손에 넘겼노라 하셨다 한지라

    [대하12:6] 이에 이스라엘 방백들과 왕이 스스로 겸비하여 이르되 여호와는 의로우시다 하매

    [대하12:7] 여호와께서 그들이 스스로 겸비함을 보신지라 여호와의 말씀이 스마야에게 임하여 이르시되 그들이 스스로 겸비하였으니 내가 멸하지 아니하고 저희를 조금 구원하여 나의 노를 시삭의 손을 통하여 예루살렘에 쏟지 아니하리라

    [대하12:8] 그러나 그들이 시삭의 종이 되어 나를 섬기는 것과 세상 나라들을 섬기는 것이 어떠한지 알게 되리라 하셨더라

    [대하12:9] 애굽 왕 시삭이 올라와서 예루살렘을 치고 여호와의 전 보물과 왕궁의 보물을 모두 빼앗고 솔로몬이 만든 금 방패도 빼앗은지라

    이와 같이 인간의 역사는 하나님의 섭리 안에서 모든 것이 발생합니다. 한 민족의 운명과 개인의 운명도 모두가 하나님의 섭리 안에서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이것을 역사 안에서 보게 되는 것입니다.

    2. 에돔의 하닷

    두 번째 대적자는 에돔의 하닷입니다. 하닷은 다윗 왕 시대에 요압이 에돔을 정복하고 큰 살육을 자행했을 때에 에돔 왕가 중에 유일하게 생존한 왕손이었습니다. 하닷 역시 여로보암과 마찬가지로 이집트로 망명하여 때를 기다렸고, 다윗이 죽고 요압도 죽게 되자 에돔으로 다시 돌아와 당시 솔로몬 제국의 영향권에 있었던 에돔 지역의 우두머리가 되었습니다.

    [왕상11:14] 여호와께서 에돔 사람 하닷을 일으켜 솔로몬의 대적이 되게 하시니 그는 왕의 자손으로서 에돔에 거하였더라

    열왕기상의 기록에 의하면, 그는 이집트의 파라오의 신임을 받아 파라오의 왕비의 동생, 곧 파라오의 처제와 결혼하여 파라오의 동서가 되었습니다.

    [왕상11:19] 하닷이 바로의 눈 앞에 크게 은총을 얻었으므로 바로가 자기의 처제 곧 왕비 다브네스의 아우를 그의 아내로 삼으매

    [왕상11:20] 다브네스의 아우가 그로 말미암아 아들 그누밧을 낳았더니 다브네스가 그 아이를 바로의 궁중에서 젖을 떼게 하매 그누밧이 바로의 궁에서 바로의 아들 가운데 있었더라

    따라서 그가 가진 권세와 영화가 만만치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닷은 다윗과 요압이 죽자 파라오에게 에돔으로 돌아가야 할 것을 강권합니다.

    [왕상11:21] 하닷이 애굽에 있어서 다윗이 그의 조상들과 함께 잔 것과 군대 지휘관 요압이 죽은 것을 듣고 바로에게 아뢰되 나를 보내어 내 고국으로 가게 하옵소서

    [왕상11:22] 바로가 그에게 이르되 네가 나와 함께 있어 무슨 부족함이 있기에 네 고국으로 가기를 구하느냐 대답하되 없나이다 그러나 아무쪼록 나를 보내옵소서 하였더라

    그 이유가 열왕기 기록에 소개됩니다.

    [왕상11:15] 전에 다윗이 에돔에 있을 때에 군대 지휘관 요압이 가서 죽임을 당한 자들을 장사하고 에돔의 남자를 다 쳐서 죽였는데

    [왕상11:16] 요압은 에돔의 남자를 다 없애기까지 이스라엘 무리와 함께 여섯 달 동안 그 곳에 머물렀더라

    [왕상11:17] 그 때에 하닷은 작은 아이라 그의 아버지 신하 중 에돔 사람 몇몇과 함께 도망하여 애굽으로 가려 하여

    [왕상11:18] 미디안을 떠나 바란에 이르고 거기서 사람을 데리고 애굽으로 가서 애굽 왕 바로에게 나아가매 바로가 그에게 집과 먹을 양식을 주며 또 토지를 주었더라

    이와 같이 하닷은 오래 전 요압이 에돔 백성에게 행했던 잔악한 행위를 기억하며, 그들 민족이 당했던 수치와 아픔을 되 갚을 것을 다짐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마침내 기회가 오자 그는 이집트의 영화를 뒤로하고 에돔으로 돌아와 솔로몬 왕국의 대적자가 됩니다.

    그래서 이 하닷으로 인해 솔로몬 제국의 남쪽이 타격을 받게 됩니다. 당장 에돔에 속한 무역항 에시온 게벨로부터 이어지는 왕의 대로의 통제권이 불안하게 되었고, 이전과는 달리 활발한 무역을 할 수 없게 됩니다. 그러나 솔로몬이 생존한 날까지는 에돔의 완전한 독립은 이루어지지 않고 여전히 이스라엘의 속국으로 존재합니다.

    2. 다메섹의 르손

    세 번째 대적자는 다메섹의 르손입니다. 하닷으로 인해 남쪽 지역의 지배력이 약화되었다고 한다면, 이번에는 르손으로 인해 솔로몬 제국의 북쪽 지역의 지배력이 줄어들게 됩니다.

    르손은 이전에 다윗이 물리친 소바 왕 하닷에셀을 섬기는 신하 중의 하나였습니다. 그렇지만 하닷에셀이 다윗 왕과의 전투에서 패전하고 세력이 약해지자 그 틈을 이용해 다메섹에서 왕이 되었습니다.

    [왕상11:23] 하나님이 또 엘리아다의 아들 르손을 일으켜 솔로몬의 대적자가 되게 하시니​ 그는 그의 주인 소바 왕 하닷에셀에게서 도망한 자라

    [왕상11:24] 다윗이 소바 사람을 죽일 때에 르손이 사람들을 자기에게 모으고 그 무리의 괴수가 되어 다메섹으로 가서 살다가 거기서 왕이 되었더라

    [왕상11:25] 솔로몬의 일평생에 하닷이 끼친 환난 외에 르손이 수리아 왕이 되어 이스라엘을 대적하고 미워하였더라

    이전에 다메섹은 그다지 강력한 세력의 중심지가 아니었습니다. 그렇지만 르손의 등장과 함께 다메섹은 이후 아람 도시국가 연합의 중추적인 역할을 감당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는 점차 세력을 확대하여 솔로몬에게 심각한 위협이 되었고, 이후 분열왕국 시대에는 상황이 역전되어 이스라엘이 다메섹 왕에게 조공을 바치는 지경에까지 이르게 됩니다.

    [왕상15:18] 아사가 여호와의 성전 곳간과 왕궁 곳간에 남은 은금을 모두 가져다가 그 신하의 손에 넘겨 다메섹에 거주하고 있는 아람의 왕 헤시온의 손자 다브림몬의 아들 벤하닷에게 보내며 이르되

    [왕상15:19] 나와 당신 사이에 약조가 있고 내 아버지와 당신의 아버지 사이에도 있었느니라 내가 당신에게 은금 예물을 보냈으니 와서 이스라엘의 왕 바아사와 세운 약조를 깨뜨려서 그가 나를 떠나게 하라 하매

    [왕상15:20] 벤하닷이 아사 왕의 말을 듣고 그의 군대 지휘관들을 보내 이스라엘 성읍들을 치되 이욘과 단과 아벨벧마아가와 긴네렛 온 땅과 납달리 온 땅을 쳤더니



    1. 솔로몬 왕국의 번영과 실패

    솔로몬 왕국의 분열은 우리에게 적지 않은 교훈을 가져다 줍니다. 인간적인 면에서 볼 때 솔로몬 왕국은 이스라엘 역사상 가장 큰 번영을 누린 국가였습니다. 당연히 왕국의 백성들은 왕국의 번영에 대한 기대감이 컸을 것입니다. 그러나 솔로몬 왕이 죽자마자 왕국은 급격히 쇠락의 길을 걷게 됩니다.

    솔로몬 왕국은 솔로몬 왕 자신의 능력과 노력만으로 세워진 나라가 아니었습니다. 1차적으로는 아버지 다윗 왕의 신실한 믿음과 정복 전쟁에 의한 열매였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다윗 왕과의 약속을 통해 다윗 왕국의 후계자인 솔로몬 왕국을 번영시켜 주었습니다. 솔로몬 왕은 그 같은 번영 위에 지혜로운 관리자로서 적어도 통치의 절반까지는 하나님 뜻 앞에 순종하는 왕으로 서 있을 수 있었습니다. 그러기에 솔로몬이 하나님 앞에 바로 서 있기만 해도 왕국의 번영은 유지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솔로몬은 번영이 가져다 주는 즐거움에 취했고, 세상에 속한 화려함을 쫓았으며, 그같은 번영을 허락하시는 하나님 앞에서 예배자로 서 있지 못하고 우상숭배자로 전락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결국 그는 결국 하나님도 잃고, 왕국도 잃는 실패의 주인공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솔로몬 왕의 인생 말기에 쓰여진 전도서는 그의 이러한 실패의 고백을 담게 되었던 것입니다.

    [전1:1] 다윗의 아들 예루살렘 왕 전도자의 말씀이라

    [전1:2] 전도자가 이르되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그러나 하나님은 솔로몬 왕의 실패에도 불구하고 그 아버지 다윗 왕의 신실함과 그와의 약속을 기억하셨습니다. 그래서 비록 왕국은 분열되어도 다윗의 후손을 통한 하나님의 계획은 중단하지 않으셨습니다. 결론적으로 남유다 왕국은 북이스라엘 왕국과는 달리, 비록 고비가 있을지언정 여호와 신앙만큼은 근근이 이어나갈 수 있었고, 왕국의 왕권 또한 다윗의 직통 후손으로 이어질 수 있었습니다.

    [삼하7:8] 그러므로 이제 내 종 다윗에게 이와 같이 말하라 만군의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기를 내가 너를 목장 곧 양을 따르는 데에서 데려다가 내 백성 이스라엘의 주권자로 삼고

    [삼하7:9] 네가 가는 모든 곳에서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 모든 원수를 네 앞에서 멸하였은즉 땅에서 위대한 자들의 이름 같이 네 이름을 위대하게 만들어 주리라

    [삼하7:15] 내가 네 앞에서 물러나게 한 사울에게서 내 은총을 빼앗은 것처럼 그에게서 빼앗지는 아니하리라

    [삼하7:16] 네 집과 네 나라가 내 앞에서 영원히 보전되고 네 왕위가 영원히 견고하리라 하셨다 하라

    [왕상15:4] 그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다윗을 위하여 예루살렘에서 그에게 등불을 주시되 그의 아들을 세워 뒤를 잇게 하사 예루살렘을 견고하게 하셨으니

    [왕하8:19] 여호와께서 그의 종 다윗을 위하여 유다 멸하기를 즐겨하지 아니하셨으니 이는 그와 그의 자손에게 항상 등불을 주겠다고 말씀 하셨음이더라.




    2. 분열되는 왕국(B.C. 930~586년, 344년 간의 기록)

    분열왕국 시대의 이야기는 성경의 열왕기상 12~22장, 열왕기하 1~25장, 그리고 역대하 10~32장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분열왕국 시대의 역사는 매우 복잡한 양상을 띠고 있습니다. 주된 요인은 동 시대에 두 개의 왕국이 존재하고, 그리고 당시에 활동한 선지자의 활동 영역이 남북 왕조에 겹쳐있으며, 두 왕국을 둘러싼 열방들의 환경도 공유되었기 때문입니다. 이와 같이 분열왕국 시대의 역사는 여러 요인에 의해 얽히고 설켜 있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분열왕국 시대의 역사를 이해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닌 것입니다.

    따라서 분열왕국 시대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는 그러한 요인들에 대한 일종의 정리가 필요합니다. 그래서 두 가지 중요한 축으로 분열왕국 시대를 구분해야 합니다.

    첫째는 각각의 왕조의 역사이고, 둘째는 그 당시 하나님이 보내어 활동하게 한 선지자의 역사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교통정리 위에 한 가지를 더 추가한다면 이 두 왕국을 둘러싼 고대 근동의 주변 강대국들의 힘의 흐름을 이해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러한 요인들이 어떻게 서로 영향을 주고 받고 있는가를 파악하는 것이 분열왕국 시대를 이해하기 위한 필수적인 요소들입니다.

    북왕국 이스라엘의 상황

    ① 북왕국 이스라엘은 다윗과 솔로몬 왕국으로부터 시작했지만, 혈통적 뿌리는 달랐습니다. 지난 강의솔로몬 왕국의 분열 원인에서도 설명한 바와 같이, 12개의 지파 공동체로 이루어진 이스라엘 왕국은 오랜 기간 동안 내재된 지파 갈등이 존재했었습니다. 사울 왕과 다윗 왕 시대에는 한 동안 잠잠했었지만, 솔로몬 왕이 집권한 이후에는 유다 지파만을 우대하는 일종의 차별 정책으로 인해 또다시 지파 갈등의 불이 다시 타오르게 되었습니다. 그러다가 르호보암 시대에 이르러서 그것이 폭발하여 결국 왕국이 분열되는 결과를 초래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갈등의 중심에는 언제나 유다지파와 에브라임지파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에브라임 지파를 중심으로 북쪽의 지파들이 연합하였고, 남쪽은 유다와 베냐민 지파가 뜻을 같이 했습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한 가지 의문점은 베냐민 지파는 역사적으로는 북쪽 지파이고, 혈통적으로도 라헬의 자식이라는 공통점에서 보면 요셉 지파인 에브라임 지파와 가까운 것이 당연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베냐민 지파는 에브라임 지파를 따르지 않고 유다 지파를 따라 남쪽 지파에 속하였습니다.

    두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첫 번째 이유는 베냐민 지파의 의중보다는 유다 지파의 의중이 강하게 작용했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베냐민 지파의 땅은 유다 지파와 북쪽 지파의 경계에 위치하여 일종의 완충지 역할을 했습니다.

    그래서 북쪽 지파와 유다 지파의 갈등이 있더라도 그 중간에 베냐민 지파가 있었기에 유다로서는 북쪽 지파와의 극적인 충돌은 피할 수가 있었고, 예루살렘을 보호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유다 지파는 어떻게 하든 베냐민 지파에 대한 영향력 만큼은 결코 놓지 않으려 했습니다. 그래서 베냐민 지파는 유다 지파 안에 머무르게 되었습니다.

    두 번째 이유는 하나님의 섭리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솔로몬의 실패에도 불구하고, 다윗을 생각해서 유다 지파에게 한 지파를 남겨주시겠다고 약속하십니다. 여기에서 ‘한 지파’는 직접적으로는 ‘유다 지파’를 가리킵니다. 그렇지만 결과적으로는 ‘베냐민 지파’도 포함됩니다.

    [왕상11:11] 여호와께서 솔로몬에게 말씀하시되 네게 이러한 일이 있었고 또 네가 내 언약과 내가 네게 명령한 법도를 지키지 아니하였으니 내가 반드시 이 나라를 네게서 빼앗아 네 신하에게 주리라

    [왕상11:12] 그러나 네 아버지 다윗을 위하여 네 세대에는 이 일을 행하지 아니하고 네 아들의 손에서 빼앗으려니와

    [왕상11:13] 오직 내가 이 나라를 다 빼앗지 아니하고 내 종 다윗과 내가 택한 예루살렘을 위하여 한 지파를 네 아들에게 주리라 하셨더라

    ② 북 이스라엘 왕국은 남 유다 왕국에 비해 지리적인 이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남북으로는 남쪽의 벧엘에서부터 북쪽의 단에 이르기까지, 그리고 동서로는 요단 동편의 길르앗과 모압을 포함한 트랜스요르단 지역까지 남 유다 왕국보다는 더 광대한 영토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많은 나라들과 국경을 접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주변국들과의 통상에 유리한 두 개의 국제도로인 해변 길과 왕의 대로가 영토를 통과하였습니다. 그래서 고립된 구조가 아닌 다양한 민족들과 소통할 수 있는 개방된 영토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특히 솔로몬 시대의 번영을 가져다 준 경제 파트너인 부유한 페니키아 왕국과의 무역을 통해 북 왕국은 남 왕국보다는 더 부유하고, 더 강대한 국력을 가질 수가 있었습니다.

    ③ 그렇지만 이러한 이점들은 다른 측면에서 해악을 가져다 주기도 했습니다. 특히 페니키아 왕국과의 결혼 동맹을 통해 이방의 물질 문명과 사회적 풍습뿐만 아니라, 영적인 면에서는 심각한 결과를 초래하게 하였는데, 페니키아의 바알 종교가 뿌리내리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우상숭배를 받아 들이고, 여호와 신앙을 잃어버리게 하는 악영향을 끼치게 합니다.

    북 이스라엘의 번영 시대를 연 오므리 왕조의 첫째 왕 오므리는 페니키아와의 동맹을 위해 아들 아합을 시돈의 공주 이세벨과 결혼시키는 결혼 동맹을 맺게 합니다.

    그런데 오므리 왕이 간과한 것이 있었습니다. 이세벨의 아버지 시돈 왕 엣바알(바알과 함께하는 자)은 평범한 왕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이름마저도 ‘바알과 함께하는 자’라는 뜻의 ‘엘바알’로 개명하면서까지 바알을 열렬히 숭배하는 바알 숭배자였습니다. 그래서 그는 한 나라의 왕 임과 동시에 바알신을 섬기는 제사장이기도 했습니다. 따라서 이세벨은 북 이스라엘에 시집을 오게 된 것은 바알 종교를 전파하러 온 선교사로서 파송 받아 온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사람의 딸이 북 이스라엘 왕국의 왕비가 됩니다. 그리고 처음부터 여호와 신앙보다는 세속적인 왕가였던 오므리 왕조는 급격하게 바알 종교의 영향을 받게 됩니다. 결국은 이세벨이 왕비가 되자 북 이스라엘은 바알과 아세라 종교가 여호와 신앙을 대체하여 국교가 되었습니다.

    [왕상16:30] 오므리의 아들 아합이 그의 이전의 모든 사람보다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더욱 행하여

    [왕상16:31] 느밧의 아들 여로보암의 죄를 따라 행하는 것을 오히려 가볍게 여기며 시돈 사람의 왕 엣바알의 딸 이세벨을 아내로 삼고 가서 바알을 섬겨 예배하고

    [왕상16:32] 사마리아에 건축한 바알의 신전 안에 바알을 위하여 제단을 쌓으며

    [왕상16:33] 또 아세라 상을 만들었으니 그는 그 이전의 이스라엘의 모든 왕보다 심히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를 노하시게 하였더라

    여호와의 단은 허물어 졌고, 제사장들은 죽임을 당하였으며, 그 자리를 바알과 아세라 신전이 대신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 일은 남 유다에도 동일하게 반복됩니다. 아합과 이세벨 사이에 출생한 딸인 아달랴 역시 남북 왕조의 결혼 동맹으로 인해 유다 왕국으로 시집을 가게 됩니다. 그리고 유다 왕국 또한 이로 인해 바알 종교를 받아들이게 됩니다.

    [왕하8:16] 이스라엘의 왕 아합의 아들 요람 제오년에 여호사밧이 유다의 왕이었을 때에 유다의 왕 여호사밧의 아들 여호람이 왕이 되니라

    [왕하8:17] 여호람이 왕이 될 때에 나이가 삼십이 세라 예루살렘에서 팔 년 동안 통치하니라

    [왕하8:18] 그가 이스라엘 왕들의 길을 가서 아합의 집과 같이 하였으니 이는 아합의 딸(아달랴)이 그의 아내가 되었음이라 그가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하였으나

    [왕하8:25] 이스라엘의 왕 아합의 아들 요람 제십이년에 유다 왕 여호람의 아들 아하시야가 왕이 되니

    [왕하8:26] 아하시야가 왕이 될 때에 나이가 이십이 세라 예루살렘에서 일 년을 통치하니라 그의 어머니의 이름은 아달랴라 이스라엘 왕 오므리의 손녀이더라

    [왕하8:27] 아하시야가 아합의 집 길로 행하여 아합의 집과 같이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하였으니 그는 아합의 집의 사위가 되었음이러라

    그래서 이 불행한 시기에 두 나라의 왕실에는 이교 숭배와 음모, 그리고 살인이라는 먹구름이 덮이게 되었습니다. 그렇지만 이러한 상황가운데 하나님은 선지자를 보내어 북이스라엘의 패역을 고발하게 합니다.

    아이러니하게도 영적으로는 가장 암흑기 시기였던 이 때에 가장 탁월한 활동을 한 두 선지자가 출현합니다. 바로 엘리야와 엘리사입니다. 특히 엘리야는 구약을 대표하는 선지자로서의 명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엘리야를 통해 북 이스라엘 아합 왕가의 영적 타락을 경고하였고, 새로운 시대를 여는 새 인물들을 세우십니다.

    [왕상19:15]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너는 네 길을 돌이켜 광야를 통하여 다메섹에 가서 이르거든 하사엘에게 기름을 부어 아람의 왕이 되게 하고

    [왕상19:16] 너는 또 님시의 아들 예후에게 기름을 부어 이스라엘의 왕이 되게 하고 또 아벨므홀라 사밧의 아들 엘리사에게 기름을 부어 너를 대신하여 선지자가 되게 하라

    [왕상19:17]하사엘의 칼을 피하는 자를 예후가 죽일 것이요 예후의 칼을 피하는 자를 엘리사가 죽이리라

    ④ 북 왕국 이스라엘에는 왕국이 존속한 218년(B.C. 930~722년)동안 총 19명의 왕들이 존재했습니다. 이 보다 더 긴 344년(B.C. 930~586년)동안 존속한 남 왕국 유다는 총 20명의 왕들이 단지 다윗 가문 한 곳에서만 배출 되었던 것에 비해, 북 이스라엘의 왕들은 모두 9개의 다른 가문에서 나왔고, 이중 단지 2개의 가문만이 두 세대를 넘어 존재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평균 재위 년도도 11년에 불과합니다. 이 중에 7명의 왕들이 암살당했고[ 나답(B.C. 909~908년), 엘라(B.C. 886~885년), 아합(B.C. 874~853년), 요람(B.C. 852~841년), 스가랴(B.C. 753년), 살룸(B.C. 752년), 브가히야(B.C. 742~740년), 베가(B.C.740~732년)], 시므리 왕은 겨우 7일만에 왕권을 다시 빼앗기고 자살로 생을 마감하였습니다. 그 만큼 북 이스라엘의 정치는 안정적이지 못했습니다.

    따라서 이와 같은 정치적 불안과 지리적 취약성은 후일 앗시리아(앗수르) 제국이 침략하였을 때(B.C. 722년) 너무 쉽게 나라가 무너지는 멸망의 주된 요인이 되었습니다.

    남 왕국 유다

    한편 남 왕국 유다는 북 이스라엘과는 달리 그래도 비교적 정치적 안정 위에 오랜 기간 동안 왕국을 유지할 수 있었습니다. 다음의 몇 가지 이유가 그것을 가능케 했습니다.

    ① 다윗의 가문에 대한 하나님의 특별한 보살핌입니다. 하나님은 신실하십니다. 그러기에 그 약속은 변함이 없으십니다. 하나님은 다윗과의 약속을 지키셨습니다. 그래서 남 왕국 유다는 북 이스라엘과는 달리 344년 동안 오직 다윗의 후손들만이 왕위에 오르게 되었습니다.(7년 동안 아합과 이세벨의 딸, 아달랴의 일시적인 통치기간이 있습니다)

    또한 북 이스라엘 왕국에는 단 한 명의 신실한 왕이 없었던 것과는 달리, 남 왕국 유다에는 여러 명의 신실한 왕들을 배출했습니다. 성경은 그런 왕들을 가리켜 ‘다윗의 길을 따르는 것’으로 표현합니다. 이와 반대 개념이 ‘여로보암의 길을 따르는 것’입니다. 그래서 유다 왕국의 왕들 중에는 히스기야, 요시야와 같은 전적으로 하나님 앞에 바로 선 왕도 있었고, 비록 온전치는 않았지만 그래도 적어도 여로보암의 길보다는 다윗의 길을 쫓아가려고 노력했던 아사, 웃시야, 요담과 같은 왕도 있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다윗 가문의 왕조를 이어갈 수 있게 하셨던 것입니다.

    ② 유다 왕국의 지리적 이유입니다. 유다의 지형은 이스라엘에 비해 주변 강대국과 훨씬 더 격리되어 있습니다. 남북으로는 대체적으로 베냐민 땅에서부터 가데스바네아까지 국경을 유지하였습니다. 동서로는 블레셋과 사해로 인해 국경이 형성되었습니다. 북 이스라엘과는 달리 국제도로인 해안 길과 왕의 대로와도 단절되어 있습니다. 국토의 대부분은 중보 산악지대에 속해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자연적인 장애물이 많은 유다로서는, 이러한 지리적 상황이 단점이 되어 경제적으로는 북 이스라엘에 달리 무역을 통한 상업적 관계를 제한시켰습니다.

    그러나 반대로 영적인 면에서는 이것이 오히려 장점이 되었습니다. 비록 경제적 이득은 얻지 못했을지라도, 이방 나라로부터의 우상 숭배가 들어오는 것도 제한되게 되었고, 물질 문명과 세속문명의 폐해도 상대적으로 적었습니다. 더구나 예루살렘에 성전이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남 유다는 종교적으로 안정되어 이것이 결국 정치적인 안정을 이루게 하였습니다.

    이 같은 이유로 남 유다 왕국은 북 이스라엘 왕국보다 136년 동안 더 오래 동안 왕국을 존속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분열왕국 시대의 분류

    분열왕국 시대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남북왕조의 열왕들의 이름을 기억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나라도 그리하듯이 왕국의 역사는 왕들의 역사와 동일하기 때문입니다. 왕들의 치적이 역사 기록의 중심이 되기 때문입니다. 한 가지 더 중요한 것은 이 시대의 역사 흐름의 주도권은 일반 백성이 아닌 왕들에게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왕들이 하나님 앞에 신실하면 백성들로 그리하였고, 왕들이 하나님을 배역하면 일반 백성들 또한 그리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왕들이 하나님 앞에 서 있는 것을 통해 왕국의 흥망성쇠를 결정하셨습니다. 따라서 성경의 역사 또한 열왕기 시대의 왕들의 행적을 통해 역사를 이해할 수 있습니다. 왕들의 역사가 왕국의 역사와 거의 일치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일은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렇지만 다행이 이 부분을 잘 정리해준 자료(류모세 선교사의 『역사 드라마로 읽는 성경』 제2편 분열왕국 시대)가 있어서 그것을 참고하여 이 시기를 5개의 시대로 분류함으로써 복잡한 열왕기 역사를 이해하는 데 도움을 주고자 합니다.​

    (1) 남북경쟁시대(B.C.930~874)

    이 시대의 상황을 한 마디로 설명해 주는 성경의 표현이 있습니다.

    [왕상14:30] 르호보암(유다)과 여로보암(이스라엘) 사이에 항상 전쟁이 있으니라

    [왕상15:6] 르호보암(유다)과 여로보암(이스라엘) 사이에 사는 날 동안 전쟁이 있었더니

    [왕상15:7] 아비얌(유다)과 여로보암(이스라엘) 사이에도 전쟁이 있으니라~~

    [왕상15:16] 아사(유다)와 이스라엘의 왕 바아사(이스라엘) 사이에 일생 동안 전쟁이 있으니라

    [왕상15:32] 아사(유다)와 이스라엘의 바아사 왕(이스라엘) 사이에 일생 동안 전쟁이 있으니라

    그래서 이 시기의 두 왕국은 팔레스틴 지역의 패권을 차지하기 위한 크고 작은 국지전들이 발생했습니다. 대표적인 것이 유다의 아비야 왕과 이스라엘의 여로보암 왕, 유다의 아사 왕과 이스라엘의 바아사 간에 전쟁입니다. 그래서 이로 인해 베냐민 땅을 중심으로 남북 왕조의 국경선이 오르락 내리락하는 일이 발생합니다.

    [대하13:19] 아비야가 여로보암을 쫓아가서 그의 성읍들을 빼앗았으니 곧 벧엘과 그 동네들과 여사나와 그 동네들과 에브론과 그 동네들이라

    (2) 남북화해시대

    분열 왕국의 시작과 함께 남북 간에 벌어진 전쟁 가운데 유다의 아사 왕에 의해 외세인 아람의 다메섹이 개입되게 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자충수가 되어 이로 인해 오랫동안 이스라엘은 외세에 의한 괴롭힘을 당하게 됩니다. 왜냐하면 분열 왕국의 대립이 깊어지고 길어질수록 체력이 바닥나듯이 두 왕국 모두 국력이 소진되면서 통일왕국 시대에 비교하여 현저히 국력이 약화되었고, 반대로 이스라엘이 약해진 만큼 아람 다메섹과 같은 주변국들의 힘은 강성해졌기 때문입니다.

    그러자 사태의 심각성을 깨달은 남북 왕조는 비로서 소모적인 전쟁을 중지하고 이제는 힘을 합쳐 공동의 적인 아람을 대항하기 위한 동맹을 체결합니다. 그래서 북 이스라엘 아합 왕의 딸인 아달랴와 남 유다 여호사밧의 아들인 여호람이 결혼하는 결혼 동맹이 맺어지게 됩니다. 이로써 여호사밧은 아람과의 전쟁에 아합을 도와 참전하였고, 모압과의 전쟁에서는 아합의 아들 여호람과 함께 참전하게 됩니다. 그래서 남북경쟁시대와는 달리 이 때의 상황을 설명하는 표현은 ‘화평입니다.

    [왕상22:44] 여호사밧이 이스라엘의 왕과 더불어 화평하니라

    [왕상22:1] 아람과 이스라엘 사이에 전쟁이 없이 삼 년을 지냈더라

    [왕상22:2] 셋째 해에 유다의 여호사밧 왕이 이스라엘의 왕에게 내려가매

    [왕상22:3] 이스라엘의 왕이 그의 신하들에게 이르되 길르앗 라못은 본래 우리의 것인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우리가 어찌 아람의 왕의 손에서 도로 찾지 아니하고 잠잠히 있으리요 하고

    [왕상22:4] 여호사밧에게 이르되 당신은 나와 함께 길르앗 라못으로 가서 싸우시겠느냐 여호사밧이 이스라엘 왕에게 이르되 나는 당신과 같고 내 백성은 당신의 백성과 같고 내 말들도 당신의 말들과 같으니이다

    [왕하3:5] 아합이 죽은 후에 모압 왕이 이스라엘 왕을 배반한지라

    [왕하3:6] 그 때에 여호람 왕이 사마리아에서 나가 온 이스라엘을 둘러보고

    [왕하3:7] 또 가서 유다의 왕 여호사밧에게 사신을 보내 이르되 모압 왕이 나를 배반하였으니 당신은 나와 함께 가서 모압을 치시겠느냐 하니 그가 이르되 내가 올라가리이다 나는 당신과 같고 내 백성은 당신의 백성과 같고 내 말들도 당신의 말들과 같으니이다 하는지라

    (3) 남북단절시대(B.C.841~731)

    남북 간에 형성되었던 화해 무드는 남북 왕조에서 각각 독자적으로 일어난 쿠테타로 인해 이전의 경쟁 수준을 넘어서 피차 상종도 하지 않는 남북단절 시대를 겪게 됩니다.

    사건의 발단은 북이스라엘에서 먼저 시작됩니다. 이 시기에 북이스라엘에서는 아합 왕조에 대한 피의 숙청을 감행한 예후의 쿠데타가 일어납니다. 그런데 남유다에서도 아합의 딸인 아달랴가 다윗 가계의 왕자들을 죽이고 남유다 최초의 쿠테타가 일어납니다. 이런 상황 예후와 아달랴는 결코 상종할 수 없는 철천지원수가 됩니다. 아달랴 입장에서는 예후가 자신의 가족 모두를 몰살한 불구대천의 원수가 되기 때문입니다.

    (4) 아시리아 정복시대(B.C.731~722)

    남북간의 경쟁, 화해, 단절 시대를 거치는 동안 주변국들은 국력이 약해진 이스라엘의 공백을 메우며 점차 강대국으로 발돋움하게 됩니다. 그 첫 번째가 아람 왕국이었고, 그 뒤를 이어 앗시리아 제국이 본격적으로 세력을 확장하게 됩니다.

    그러나 앗시리아는 이전의 소국들과는 달리 제국주의 노선을 천명하며 질풍노도와 같이 수 많은 왕국들을 몰락시킵니다. 이 시대가 앗시리아 정복시대입니다. 그 결과 북이스라엘은 B.C.722년 결국 멸망하게 됩니다.

    5) 유다 왕국시대(B.C. 97~583)

    북이스라엘이라는 완충지대가 사라진 상황에서 홀로 남은 유다는 초강대국인 앗시리아와 국경을 마주하게 됩니다. 그러나 이 시대에 앗시리아는 제국의 절정기를 지나 급속히 쇠락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 바통을 바벨론이 잇게 됩니다. 또한 이 시대에 이집트도 오랜 침체기를 거두고 고대 근동 지역의 세력 판도에 합류하게 됩니다. 당연히 팔레스틴 지역의 영유권을 주장하며 정복 전쟁의 대열에 합류하게 됩니다. 결국 남 유다는 앗시리아가 쇠퇴하는 틈을 이용해 다시 독립을 이루는 듯하다가 이집트에 예속된 후 최종적으로는 바벨론에 의해 멸망(B.C.586) 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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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유다,북이스라엘 선지자 활동

     포로귀환

     학개, 스가랴, 말라기   학개(B.C.520-519), 스가랴(B.C.520-475), 말라기(B.C. 430/다리오2세때)

     니느웨 예언

     요나(B.C.760/북 여로보암2세때), 나훔(B.C.663~612/남 요시야때)

     바벨론 포로

    1차포로 다니엘(B.C.605년의 1차포로/남 여호야김,여호야긴,시드기야, 느부갓네살, 고레스때),

    2차포로 에스겔(B.C.597년의 2차포로/남 여호야긴, 시드기야, 느부갓네살때)

     에돔 예언

     오바댜(B.C.848-841/남 여호사밧때)

    통일왕국시대

    사무엘
    나 단

    아히야
    앗 도

    다윗에게 기름 부어 왕을 삼음
    다윗의 간음을 책망함
    다윗의 인구 조사를 책망함
    여로보암에게 북이스라엘을 세울 것을 예언
    솔로몬의 행적을 기록

    삼상 16 : 12
    삼하 12 : 1-12
    삼하 24 : 11-19
    왕상 11 : 29-39
    대하 9:29

    분열

    왕국

    시대

    유 다

    잇 도

    스 마 야

    이 사 랴

    하 나 니

    예 후

    아하시엘

    엘리에셀

    엘 리 야

    스 가 랴

    요 엘

    이 사 야

    미 가

    나 훔

    하 박 국

    야 두 둔

    홀 다

    스 바 냐

    예레미야

    835-796

    740-680

    740-695

    640-630

    608-597

    640-630

    627-586

    솔로몬의 행적을 기록

    르호보암에게 여로보암과 전쟁하지 않도록 권장

    아사에게 하나님과의 언약 이행을 권유

    아람과 외교하는 아사를 책망

    아합과 동맹한 여호사밧을 책망

    모압,압몬 연합군과의 전쟁의 승리를 예언

    여호사벳에게 아하시야와의 교제를 책망

    여호람(유다)에게 창자가 빠지는 죽음을 예언

    요아스 왕과 신하들의 우상 숭배를 책망

    성령의 강림을 예언

    메시야의 탄생과 사역을 예언

    베를레헴에서의 메시야 탄생

    앗수르의 멸망을 예언

    바벨론의 멸망을 예언

    요시야 왕을 도와 유월절을 지킴

    유다의 멸망 예언

    여호와의 날을 예언

    시드기야에게 유다의 명망을 예언

    대하 9:29

    대하 11:1-4

    대하 15:1-7

    대하 16:7-9

    대하 19:1-3

    대하 20:14-17

    대하 20:14-17

    대하 21:11-15

    대하 24:20

    욜 2:28

    사 49-53장

    미 5: 2

    나 2: 8-13

    합 2: 4-17

    대하 35:15

    왕하 22:15-20

    습 1:14-16

    렘 34:2-5

    이 스 라 엘

    아히야

    무 명

    예 후

    엘리야

    미가야

    엘리사

    호세아

    아모스

    요 나

    오 뎃

    764-724

    760-785

    793-753

    여로보암의 집의 멸망을 예언

    요시야의 탄생을 예언

    바아사의 우상 숭배와 악행을 책망

    아합가의 멸망을 예언

    아합의 죽음을 예언

    아합가의 멸망을 예언

    하나님을 버리고 이방에 의존하는 이스라엘을 책망

    이스라엘에 대한 심판과 회복을 예언

    이스라엘의 부흥을 예언

    베가에서 유다인 포로를 석방토록 권유

    왕상 14: 6-16

    왕상 13: 3

    왕상 16: 7

    왕상 21:20-26

    왕상 22:19-28

    왕하 9: 6-10

    호 7: 8-16

    암 9: 1-15

    대하 14:25

    왕하 28: 9-13

    포로

    시대

    에 스겔
    오 바댜
    에레미
    다 니엘

    593-570
    627-586
    605-536

    유다의 멸망과 회복을 예언
    에돔의 멸망을 예언
    유다의 예루살렘의 회복과 바벨론의 멸망을 예언
    네 왕국(바벨론,바사,헬라,로마)과 70이레에 관한 예언

    겔 12 : 8 - 16
    옵 1 : 18
    렘 50 : 1 - 5
    단 7 : 1 - 12 : 13

    귀환시대

    학 개
    스가 랴
    말라 기

    520-519
    520-475
    435-425

    메시야 임재의 예언
    메시야의 임재와 하나님 나라의 실현
    메시야의 임재

    학 2 : 6 - 9
    슥 12 : 1 - 14 : 21
    말 3 : 1 - 4 : 6

    <선지자들의 출신별 분류>

    출신

    예언국

    목자

    평민

    왕족,귀족

    제사장,레위

    미상(未詳)

    유다


    미가

    이사야

    다니엘

    예레미야,에스겔,

    ⓬하박국, ⓯스가랴,

    요엘,

    ⓮학개

    이스라엘

    아모스



    ⓰말라기

    호세아

    이방



    ⓭스바냐


    오바댜,요나,⓫나훔

    (ⅰ) 유다지방(大이사야. 大예레미야. 大에스겔. 大다니엘. 요엘. 스가랴. 미가. 하박국. 학개)

    (ⅱ) 이스라엘지방(엘리야. 엘리사, 호세아. 아모스. 말라기)

    (ⅲ) 앗수르지방(요나. 나훔. 스바냐)

    (ⅳ) 에돔지방(오바댜)

    예언서

    (Nebhim)

    대선지서

    (5)

    이사야

    아모스의 아들로 아마샤 왕의 형제이며 요아스 왕의 손자. 유다왕 10대웃시야가 죽던 해(B.C.739)+11대요담(B.C.751~736)+12대아하스(B.C.742~725)+13대 히스기야(B.C.725~697)+14대므낫세(B.C.697~642)의 통치기간 중인 B.C.680년에 순교하기까지 약60년간 예언활동.

    예레미야

    B.C.650년경 유다 아나돗의 제사장 가문, 20세에 선지자 소명, 활동시기는 유다왕 요시야 왕 때(B.C.627)부터 예루살렘 멸망 때(B.C.586년 7,8월)까지, 즉 요시야(18년간)+여호아하스(3개월)+여호야긴(3개월)+여호야김(11년간)+시드기야(11년간)= 40년 6개월 동안 활동,

    예레미야애가


    에스겔

    사독계열의 제사장 부시의 아들, 바벨론왕 느부갓네살의 2차 침입 때, 3개월간 통치하던 여호야긴(B.C.597. 3개월 통치)이 포로로 잡혀간지 5년 후인 B.C.593년에 소명을 받고, 22년 뒤인 B.C.570년까지 예언활동, 주제:여호와삼마(‘여호와께서 거기 계시다’)

    다니엘

    바벨론에 1차 포로로 잡혀간(B.C.605) 다니엘(벨드사살)은, 티그리스 강 기슭에서 마지막 환상을 본 고레스 3년(B.C.536)까지가 역사적 배경이다. 다니엘은 느부갓네살-에윌므로닥-네르갈사레셀-라바시말둑-나보니두스-고레스 때까지 활동했다.

    소선지서

    (12)

    호세아

    북이스라엘 출신 브에리의 아들. 물질적 풍요하나 영적 빈곤의 시대인 여로보암 2세가 통치하던 때(B.C.793~782~753)를 배경으로 함. 사마리아가 함락(B.C.722)되고 포로로 잡혀감.

    요엘

    브두엘의 아들. 유다왕 요아스의 재위기간 중인 B.C.830년경 기록. 메뚜기 재앙(팟종이. 늣, 황충)

    아모스

    드고아 목자. 유다출신으로 벧엘로 이주하여 이스라엘에 대해 예언. 호세아와 동시대 선지지. 평화와 번영의 시기였던 유다왕 웃시야(B.C.783~742)와 이스라엘왕 여로보암2세(B.C.786~746)의 통치기간 중에 활동.

    오바댜

    에돔(에서 자손의 땅)의 멸망 예언. 오바댜의 예언과 유사한 성경은 아모스서(1,2장), 이사야서(13~23장), 예레미야서(46~51장), 에스겔서(25~32장) 이다.

    요나

    북이스라엘 가드헤벨 출신. 아밋대의 아들. B.C.765년과 B.C.763년에 역병 발생함.

    니느웨(당시의 왕은 아슈르단 3세로 요나 당시 앗수르의 수도는 ‘갈가’였고, 니느웨는 B.C.700년경 수도로 됨)에 대한 예언. 엘리야가 살려준 사렙다 과부의 아들(왕상17:17~24). 엘리사가 예후를 이스라엘 왕으로 기름 붓기 위해 보냈던 소년(왕하9:1~6).

    미가

    모레셋(블레셋 가드 근처)출신. 이사야와 동시대 활동. 앗시리아(빌레셋3세. 살만에셀3세. 사르곤2세. 산헤립 등)가 고대 근동지역을 정복하려는 야망에 불타있던 시기. 요담(B.C.739~735)와 아하스(B.C.735~725) 히스기야(B.C.725~697)의 통치시대에 말씀을 받음. 미가는 이사야가 예루살렘에서 설교할 때 그곳에 종종 체류하며 설교했다(렘26:16~19). B.C.700년경에 메시야의 베들레헴(고대이름:에브라다)탄생을 예고.

    ⓫나훔

    엘고스 출신. 앗시리아의 앗술바니팔(B.C.669~626)이 치리했던 때부터 니느웨 함락(B.C.612년)까지의 일을 기록. 북왕국 이스라엘이 함락된 지 약1세기가 지난 때로서 예레미야. 하박국, 스바냐의 활동기간과 동일(렘3:6;습1:1). 주제: 니느웨 성의 멸망을 예언.

    ⓬하박국

    갈대아인이 강성해져, 나보폴라살 왕 때 앗수르를 함락 후 대바벨론 제국을 세움. 니느웨를 멸망시키고(B.C.612년), 1차로 이스라엘을 침입한 때(B.C.605년)에 기록함. 주제: ‘의인은 그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⓭스바냐

    유다와 예루살렘에서 예언. 상류사회(왕족과 방백들)의 죄악상을 지적. 스바냐의 조상이 4대까지 기록된 것은 히스기야 왕과 같은 인물이 조상가운데 있기 때문. 유다왕 요시야(B.C.640~609)가 종교개혁을 하기 몇 해 전(B.C.627~626년경)에 기록. 앗수르의 에살핫돈과 앗술바니팔(B.C.668~626)의 치세 때 절정에 이르지만 사후에 국력이 쇠퇴하여 신흥세력인 바벨론의 공격(B.C.626)을 받아, 결국 메대와 바벨론의 연합군에 니느웨가 함락되고 앗수르가 멸망함(B.C.612년). 스바냐는 앗수르가 메대의 공격으로 스키티아족이 서부 아시아를 침공(B.C.625)할 것과 앗수르의 멸망을 예언함. 유다와 열방들에 임한 하나님 심판을 경고.

    ⓮학개

    포로기간 중 바벨론에서 태어남. 바사왕 고레스(B.C.539~529)가 스룹바벨 인솔 하에 귀환 때(B.C.536) 예루살렘으로 옴. 스가랴보다 약2개월 먼저 사역 시작함. 6월부터 9월까지 4개월간 짧은 사역함. 스룹바벨, 여호수아, 스가랴와 함께 성전 재건에 힘씀.

    ⓯스가랴

    제사장가문. 학개와 동시대 활동. 바벨론의 고레스왕 치하에서 1차 귀환 때(B.C.537) 귀국함. 스가랴의 예언 선포는 1차 귀환 이후 18년이 지난 해로서, 다리오 왕 2년 8월(B.C.520)부터 다리오 왕 4년 9월(B.C.518)까지 만2년에 걸쳐 예언활동.

    70년간 포로생활(느부갓네살 왕에 의해 포로로 잡혀간 때(B.C.605년) 부터 고레스 왕이 조서를 내린 때(B.C.538년) 까지를 말한다.

    ⓰말라기

    바벨론 포로생활에서 귀환한 자들이 성전 재건 후 시간이 흐르자 하나님을 향한 처음 열심을 잃고 타락함을 지적. 하나님과 이스라엘은 부자(父子)관계로 설명.

    ▶북이스라엘 멸망(B.C922~B.C.722년): B.C.722년 19대 호세아 왕(B.C.732~722) 때 앗수르왕 사르곤2세(주전722~705년)에게 멸망했다.

    아홉 王朝 19왕:

    1대(①여로보암 왕조-②둘째 아들 나답)/ 2대(왕위 찬탈한 ③바아사 왕조-④아들 엘라)/ 3대(⑤엘라의 신복으로 병거의 절반을 통솔한 장군 시므리 왕조)/ 4대(⑥오므리 왕조-⑦아합-⑧아하시야-⑨여호람)/ 5대(⑩예후 왕조-⑪여호아하스-⑫요아스-⑬여로보암2세-⑭스가랴)/ 6대(⑮살룸 왕조)/ 7대(⑯므나헴 왕조-⑰브가히야)/ 8대(⑱베가 왕조)/ 9대(⑲호세아 왕조)

    남유다 멸망(B.C.~B.C.): B.C.586년 20대 시드기야 왕(B.C.597~B.C.586)때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B.C. 605-562년)에게 멸망했다.​

    ①르호보암-②아비야-③아사-④여호사밧-⑤여호람,요람-⑥아하시야-⑦아달랴 여왕-⑧요아스-⑨아마샤-⑩아사랴,웃시야-⑪요담-⑫아하스-⑬히스기야-⑭므낫세-⑮아몬-⑯요시야-⑰여호아하스-⑱여호야김-⑲여호야긴-⑳시드기야

    ​ 신 바벨론 제국 2대 왕인 느부갓네살 2세(B.C. 605-562년경). ‘느보(Nebo) 신(神)이 국경을 지켜주셨다’는 뜻.

    그는 바벨론의 창설자이며 부왕(父王)인 나보폴라살이 당대 최강대국인 앗수르를 공격할 때 왕자로서 니느웨를 함락시키고 앗수르 제국을 멸망시켰다. 3년 뒤 앗수르의 세력이 약화된 틈을 노려 중근동의 패권을 차지하려던 애굽의 바로 느고(Pharaoh-Neco)가 앗수르 지역까지 진출했을 때 갈그미스(Carchemish)에서 애굽을 맞아 격퇴시킴으로써(B.C. 605년) 바벨론을 명실상부한 중근동 최고의 강대국 자리에 올려놓은 인물이다.

    이스라엘(북부 10지파)

    아모스(B.C.760/북 여로보암2세때), 호세아(B.C.760/북 여로보암2세때), 요나(B.C.760/북 여로보암2세때)

     유다(남부 2지파)

     요엘(B.C.597/남 여호사밧때), 오바댜(B.C.848~841/남 여호사밧때), 이사야(B.C.700~680/아하스,히스기야때), 예레미야(B.C.627~587/남 요시야, 여호아하스,여호야김,여호야긴,시드기야때), 다니엘(B.C.605년의 1차포로/남 여호야김,여호야긴,시드기야, 느부갓네살때), 에스겔(B.C.597년의 2차포로/남 여호야긴, 시드기야, 느부갓네살때), 미가(B.C.627-586/남 아하스,히스기야때), 하박국(B.C. /남 여호야김때), 스바냐(B.C.640~609/남 요시야,여호야김때), 나훔(B.C.663~612/남 요시야때)




    북왕국 이스라엘이 앗수르에 멸망당할 무렵 활동했던 선지자는 요엘, 요나, 아모스, 호세아, 이사야, 미가
    남왕국 유다가 바벨론에 멸망당할 무렵이나 바벨론 포로기에 활동했던 선지자들은 예레미야, 오바댜, 나훔, 하박국, 스바냐, 에스겔, 다니엘
    바벨론의 포로였던 유다가 본토로 귀국할 때에 활동했던 선지자들은 학개, 스가랴, 말라기

    ♦  호세아 1장 문단 분해

    1:1, 서언.
    1:2, 음행한 여인을 취하라는 하나님의 명령.
    1:3-5, 호세아의 결혼 및 장남 이스르엘의 출생과 그 이름에 있어서 보여진 이스라엘 장래의 운명.
    1:6, 차남 로루하마의 출생과 그 이름의 유래.
    1:7, 하나님의 긍휼과 유다의 구원.
    1:8-9, 삼남 로암미의 탄생과 그 이름의 유래.
    1:10, 이스라엘 장래의 회복.
    1:11, 이스라엘과 유다의 축복.

    ♦  내용개요

    여로보암 2세 때 북이스라엘 왕국은 최고의 번영을 이루고 있었다.
    그러나 이런 물질적 풍요 속에 백성들에게는 영적 타락이 스며들었으며 급기야는 하나님으로부터 준엄한 경고를 듣게 되었다.
    본장은 이런 배경하에 호세아 선지자의 비극적인 결혼이라는 극단적인 방법을 통하여 그들에게 최후의 경고를 주고 있는 내용이다.
    특히 본장에서 말하고자 하는 것은 하나님을 떠난 자들의 풍요로움의 결국 이 파멸과 심판밖에 없다는 것을 보여 주는 것이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의 배도를 경고하는 상징적 메시지로서 그들의 비극을 폭로하시려고 한다. 따라서 호세아에게 음란한 고멜과 결혼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호세아가 순종하는 부분(1-9절),
    하지만 하나님께서 백성을 징계하시는 목적은 영원히 멸망시키기 위함이 아니라 그들로 하여금 성숙한 인격을 가지게 하여 하나님 자신과 바른 관계를 형성하도록 하려는 데 있다는 것을 보여 주는 소망의 부분(10-11절)으로 구성되어 있다.


    ♦  강해

    브에리의 아들 호세아에게 여호와의 말씀이 임했는데 그 내용은 음란한 아내를 취하여 아내를 삼아 자녀를 낳으라는 것이었습니다.
    호세아가 여호와의 말씀에 순종하여 고멜을 아내로 삼아 자녀들을 잉태하였는데, 하나님께서 그들의 이름을 지어 주시면서 이스라엘에 대해 심판을 예언하셨습니다.
    호세아의 가정을 통하여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의 뜻을 계시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다시 회복시키시어 구원을 베푸실 것을 약속하셨습니다.  

    ♦  신학 주제

    미래의 회복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 대다수 선지자들이 외친 메시지의 주된 내용은 하나님의 심판과 구원 사역에 관한 것이었다.
    본장에서 하나님은 호세아를 통하여 심판에 관한 암시를 자녀들의 이름을 통하여 주고 있다.
    그러나 여기서만 끝나는 것이 아니라 회복의 약속들도 함께 보여 주고 있는데, 이것은 하나님께서 언약을 지키시는 하나님이심을 보여 주고 있는 것이기로 하다.
    특히 본문에서는 아브라함과의 언약이 미래에 궁극적으로 성취될 것과 하나님의 신정 정치의 회복, 남북 왕조의 통일, 나아가 메시야의 도래 등에 대해 예언하고 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하신 약속은 그의 후손을 바닷가의 모래같이 많게 해주시겠다는 것이었다.
    이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소망을 주는 약속이며 위로가 될 수 있었다.
    따라서 본장에서 이스라엘 패망이 예언되고 있는 것은 하나님의 약속이 말소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언약이 잠시 지연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그리고 이 약속이 지연되는 원인과 책임은 하나님께 있는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들 자신에게 있음을 성경은 상기시키고 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약속을 이루기 위해서는 먼저 백성들 자신들이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와야 할 것이다.
    이 회복의 예언은 하나님의 축복의 상징이며, 세상의 고난과 핍박 속에서 믿음을 지키기 위해 노력하는 성도들의 삶에 용기를 북돋우어 주는 말씀이 되기도 한다.  

    ♦  영적교훈

    역사상 인간들은 스스로의 행복을 얻기 위해서 모든 노력을 다 기울였다.
    그러나 지금까지도 인간 사회는 오히려 멸망의 위기 앞에 놓이게 되었다.
    이는 인간의 힘으로는 도무지 행복을 달성할 수 없음을 보여 준다.
    그러므로 인간이 참된 행복과 인류의 구원을 얻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언약의 하나님이며 축복의 근원인 하나님께 굴복하여야 한다.
    물고기가 물을 떠나서 살 수 없듯이 인간도 창조주이신 하나님제 의지할 때만 생명을 유지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구원은 결코 아무에게나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본장에서 호세아가 강조하고 있듯이 자신의 죄인 됨과 무능함을 하나님께 고백하는 자만이 구원을 얻을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자신의 삶 속에서 인간의 물질이나 세상 권세를 의지하지 말고 항상 하나님만을 의지해야 하며 또한 끊임없는 회개를 통해 하나님과의 관계를 바로 유지하기 위해 힘써야 할 것이다. 




    * 브에리(Beeri) / 샘에 속해 있는

    1. 에서의 아내인 헷 사람 유딧의 아버지(창 26:34)
    2. 호세아 선지자의 아버지(호 1:1)
        성경에서 다시는 찾아볼 수 없는 이름으로 "아주 평범한 인물" 이라고 하겠다.

    * 호세아(Hosea) / 여호와는 구원이시다(구원자)

    레위기 21:13-15
    - 레위기 21장은 "제사장이 지켜야 할 규례"에 관한 말씀입니다.

    13. 그는 처녀를 취하여 아내를 삼을찌니
    14. 과부
    나 이혼 된 여인이나 더러운 여인이나 기생을 취하지 말고 자기 백성중 처녀를 취하여 아내를 삼아
    15. 그 자손으로 백성 중에서 더럽히지 말찌니 나는 그를 거룩하게 하는 여호와임이니

    브에리(Beeri, 샘에 속해 있는)  - 호세아(Hosea, 여호와는 구원)  + 고멜(Gomer, 마지막, 끝. The End)
                              1. 이스르엘(Jezreel) / 하나님이 뿌려주심
                              2. 로루하마(Loruhamah) / 자비를 받지 못한 자
                              3. 로암미(Loammi) / 내 백성이 아니다

    * 브에리(Beeri) / 샘에 속해 있는

    * 디블라임
    (Diblaim) / 두가지 무화과 과자. 무화과 떡. 
    - 호세아의 장인(호 1:3)
    - 하나님에게 바치는 떡은 "무교병"이다. 무화과 떡이란 유교병이 들어간 떡으로 이방 신에게 바치는 제물로서 "디블라임의 딸"이란 이방 신전에 속한 딸이다.

    성경에서 "음행(淫行), 행음(行淫)"이란?

    1. 고린도전서 6:18

    음행을 피하라 사람이 범하는 죄마다 몸 밖에 있거니와 음행하는 자는 자기 몸에게 죄를 범하느니라.

    2. 예레미야 13:27
    내가 너의 간음과 사특한 소리와 들의 작은 산 위에서 행한 네 음행의 비루하고 가증한 것을 보았노라 화 있을찐저 예루살렘이여 네가 얼마나 오랜 후에야 정결하게 되겠느뇨.

    3. 호세아 9:1
    이스라엘아 너는 이방 사람처럼 기뻐 뛰놀지 말라 네가 행음하여 네 하나님을 떠나고 각 타작 마당에서 음행의 값을 좋아 하였느니라.

    4. 호세아 2:2
    너희 어미와 쟁론하고 쟁론하라 저는 내 아내가 아니요 나는 저의 남편이 아니라 저로 그 얼굴에서 음란을 제하게 하고 그 유방 사이에서 음행을 제하게 하라.

    5. 호세아 4:11
    음행과 묵은 포도주와 새 포도주가 마음을 빼앗느니라.



    * 이스르엘(Jezreel) /  하나님이 뿌려주심  
    1. 유다 자손인데 이것은 지명으로 해석하는 자도 있다(대상 4:3)
    2. 호세아가 자기 장자에게 지어준 상징적 이름(호 1:4)
    3.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주신 상징적인 이름(호 2:22)

    * 로루하마(Loruhamah) / 자비를 받지 못한 자
    1. 호세아가 부정한 아내의 몸에서 태어난 딸에게 지어준 상징적인 이름(호 1:6. 8)

    * 로암미(Loammi) / 내 백성이 아니다  
    1. 고멜이 낳은 호세아의 둘째 아들에게 상징적으로 준 이름(호 1:9, 2:23).




































































































































































    호세아서 개론 및 장별 요약

    1. 호세아서 개요

    호세아서는 구약 소진서 중에서 가장 서두에 배치된 선지서입니다. 대선지서와 소선지서의 차이는 분량의 차이일 뿐 특별한 의미가 있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분량의 차이는 중요의 차이와도 연관이 있기 때문에 소선지서에 들어가는 것이 합당해 보입니다. 호세아의 내용은 호세아 선지자가 음란한 여인과 결혼하여 일어나는 가정의 내용을 비유로 작동하여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사이를 설명합니다. 주 대상은 북이스라엘입니다. 


    2. 역사적 배경


    1:1에서 유다왕 히스기야가 왕으로 있을 때 북이스라엘에 속한 호세아는 선지라도 부름을 받습니다.(이후 남유다는 유다로, 북이스라엘은 이스라엘로 표기) 당시 이스라엘의 왕은 여로보암입니다.(1절) 여기에 등장하는 여로보암은 솔로몬 이후 등장하는 여로보암이 아닙니다. 당시의 여로보암을 존경해 자신을 여로보암으로 이름한 여로보암 2세(Ⅱ)입니다. 호세아의 활동 시기는 시기적으로 기원전 790-710년 정도입니다. 


    당시 팔레스타인 주변으로 권력의 공백기가 일어납니다. 애굽과 시리아, 앗수르 등은 여러가지 상황 속에서 팔레스타인을 공격하지 못하게 됩니다. 이러한 권력의 공백기를 틈타 여로보암은 주변 소국들을 정복해 나갑니다. 기원전 8세기경 이스라엘은 광대한 영토를 회복했을 뿐 아니라 정치적으로 망각한 힘을 갖게 되고, 경제적으로 때 아닌 부강을 누리게 됩니다.


    이러한 배경은 결국 깊은 영적 퇴보와 타락을 가져왔고, 세상을 탐하는 욕망의 삶을 살아갑니다. 호세의 아내 고멜은 당시의 이스라엘의 정신을 보여주는 전형적인 모습이라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평화는 오래가지 못합니다. 잠잠하던 앗수르가 드디어 일어나면서 힘을 갖게 됩니다. 많은 선지자들이 회개할 것을 촉구했지만 그들은 돌아오지 않습니다. 결국 기원전 722년 앗수르에 의해 이스라엘은 멸망당하게 됩니다.


    호세아서를 읽을 때는 이런 부유함 속에 깃든 멸망의 징조들을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이스라엘을 사랑하는 하나님께서 끊임없이 회개하도록 촉구했지만 결국 그들은 멸망의 길을 가게 됩니다. 호세아 선지자의 가족 이름들은 이러한 하나님의 의지와 계획을 상징적으로 잘 드러냅니다. 호세아는 구원이란 뜻을 가진 이름이며 구원자이신 하나님을 뜻합니다. 부인 고멜은 남편이 아닌 다른 남자에게 쾌락을 찾는 음란한 이스라엘을 상징합니다. 장자 이스르엘은 '하나님께서 흩으셨다'는 뜻으로 멸망당할 이스라엘을 의미합니다. 둘째이자 장녀인 로루하마의 뜻은 '하나님의 긍휼이 없다'는 뜻입니다. 하지만 후에 부정어인 '로'을 제하고 루하마'로 고쳐 '긍휼을 베푼다'는 뜻이 됩니다. 셋째인 '로암미'는 '내 아들이 아니다'라는 뜻입니다.


    본서의 글의 정경학적 연구를 통한 주해를 기본적으로 하여 작성된 것입니다. 블로그에 올려진 글에는 각주나 따른 설명이 거의 첨부되지 않았습니다. 각주나 참고도서들은 후에 출간된 책에서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호세아 연구에 필요한 도서는 [호세아서 연구와 관련된 도서들]이란 글에서 확인하시기 바랍니다.

     

    3. 호세아 장별 요약

     

    호세아 1장

    웃시야와 요담과 아하스와 히스기야 유다의 왕으로 있을 때 호세아가 선지라로 부름 받는다. 호세아는 음란한 여인 고멜과 결혼한다. 첫 번째 아들 이름을 '하나님이 흩으신다'는 뜻인 이스르엘이라 한다. 둘 째는 긍휼히 여김을 얻지 못한다는 뜻의 '로루하마'라 부른다. 셋째는 나의 백성이 아니라는 로암미로 부른다. 그러나 하나님은 내 백성이 아니라 한 곳에서 하나님의 아들들이란 이름을 듣게 될 것이다.

     

    호세아 2장

    너희는 형제에게(암미-내백성)이라하고, 자매에게 루하마(그휼히여김을 받은자)라 하라. 음란을 제하라. 그렇자면 벌거벗겨 지리라. 너희가 바알에게 쓴 곡식, 새포도주, 은, 금 모든 내가 준 것이다. 이 모든 것들을 내가 빼앗을 것이다. 하지만 내가 그들을 거친 들로 데리고 가서 위로하리라. 내가 긍휼히 여김을 받지 못하던 자를 긍휼히 여기고, 내 백성이 아니었던 자들을 내 백성이라 하리라. 

    호세아 3장

    이스라엘은 음녀지만 내가 그들을 사랑한다. 너도 가서 타인의 사랑을 받아 음녀가 된 여자를 사랑하라. 내가 은 열다섯 개와 보리 한 호멜반으로 그를 샀다. 그들이 많은 날 동안 왕도 없고 지도자도 없고 주상도 에봇도 없고 드라빔도 없이 지내다 내게 올 것이다.

     

    호세아 4장

    여호와께서 이땅 주민과 논쟁하신다. 이 땅에는 진실도 없고 인애도 없고, 하나님을 아는 지식도 없다. 이 땅에 피가 가득하다. 내 백성이 지식이 없으므로 망하다. 너희가 나를 버렸으니 나도 너희를 버리고 너희 자녀들을 잊으리라. 음행과 묵은 포도주가 너희 마음을 빼앗는다. 깨닫지 못하는 백성은 망한다. 

     

    호세아 5장

    제사장들아 이스라엘에 깨달아라. 그들은 여호와께 정조를 지키지 아니하고 사생아를 낳았다. 너희는 망하고 황폐할 것이다. 아무도 건져낼 자가 없으리라. 그들이 그 죄를 뇌우치고 내 얼굴을 구하기까지 내가 내 곳을 돌아가리라.

     

    호세아 6장

    오라 우리가 여호와께로 돌아가자 여호와께서 찢으셨으나 도로 낫게 하실 것이요 우리를 치셨으나 싸매어 주실 것임이라. 나는 인애를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면 번제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을 원하노라. 너들은 아담처럼 언약을 하고, 너희들의 손에는 피가 가득하다.

     

    호세아 7장

    내가 이스라엘을 치료하려 할 때 그들의 죄와 악이 드러난다. 그들의 행위가 그들을 에워싸고 얼굴에 있다. 거짓말을 하고 간음한다. 뒤집히지 않은 전병처럼 혼합되었다. 교만이 그들의 얼굴에 가득하다. 여호와께 돌아가지 않고 애굽으로 내려가고 앗수르로 놀아간다. 

     

    호세아 8장

    원수가 독수치럼 여호와의 집을 덮치리라. 그들은 내 언약을 어기고 내 율법을 범했다. 그들은 선을 버렸다. 그들은 내가 세우지 않은 왕과 지도자를 세웠다. 그들이 은과 금으로 만든 우상도 파괴되리라. 그들은 바람을 심고 광풍을 거둔다. 내가 그를 위하여 내 율법을 만가지로 기록했으나 그들은 이상한 것으로 여겼다.

     

    호세아 9장

    이스라엘아 너희는 이방처럼 기뻐 뛰놀지 말라. 타작 마당의 술틀도 새 포도주도 떨어질 것이다. 형벌의 날이 이르렀다. 기브아의 시대처럼 심히 부패했다. 옛적에 내가 이스라엘은 광야에서 만난 포도처럼, 무화과나무의 첫 열매처럼 기뻐했다. 하지만 그들은 바알브올에게 가서 자신의 몸을 드린다. 그들이 듣지 않음으로 그들을 버리리라. 그들이 여러 나라 가운데 떠도는 자가 되리라.

     

    호세아 10장

    너희는 포도나무처럼 열매가 많은 수록 우상 제단을 많게 한다. 번성할 수록 주상을 아름답게 한다. 그들은 여호와를 두려워하지 않는다. 거짓을 말하고 거짓 증언을 한다. 이스라엘의 아웬의 산당은 파괴되어 가시와 찔레가 날 것이다. 너희가 자기를 위하여 공이를 심고 인애를 거두라 너희 묵은 땅을 기경하라 지금이 곧 여호와를 찾을 때니 마침내 여호와께서 오사 공의를 비처럼 너희에게 내리시리라

     

    호세아 11장

    이스라엘이 어렸을 때 내가 사랑하여 내 아들을 애굽에서 불렀다. 하지만 그들은 부를수록 멀리갔고, 우상 앞에서 분향한다. 내가 사랑의 줄로 이끌었고, 그들 앞에 먹을 두었다. 하지만 그들은 내게로 오기를 싫어한다. 내가 어찌 너희를 잊겠으며 놓겠느냐. 내 마음이 내 속에서 나의 긍휼이 온전히 불붙듯 하도다.

     

    호세아 12장

    에브라임은 바람을 먹고 동풍을 따라간다. 거짓과 포악을 더한다. 앗수르와 계약하고 애굽에게 아부한다. 여호와께서 그 행위대로 보응하실 것이다. 야곱은 형의 뒷굼치를 잡고 하나님과 힘을 겨루었다. 하나님은 벧엘에서 야곱을 만나샀다. 너희는 여호와께 돌라와서 인애와 정의를 지켜라. 

     

    호세아 13장

    이스라엘은 바알로 말미암아 망한다.  그들은 은으로 자기를 위하여 우상을 만든다. 이들은 아침 구름같고, 이슬같다. 나 밖에 다른 신이 없다. 내가 광야 마른 땅에서 너를 만났다. 이스라엘아 너희가 나를 대적함으로 패망한다. 에브라임의 불의가 봉함되었고 그 죄가 저장되었다. 해산 여인처럼 망하리라. 너희가 쌓아둔 모든 보화가 약탈 당하리라.

     

    호세아 14장

    이스라엘아 여호와께 돌아오라 너는 말씀을 가지고 돌아오라  앗수를 의존하지 말고 손으로 만든 것을 신이라 하지 말고 고아가 주로 말미암아 긍휼을 얻는 것처럼 하라. 내가 그들의 반역을 고치고 그들을 사랑하리라. 그들은 백화화처럼 피고, 레바논 백향목처럼 뿌리가 박힌다. 가지는 퍼지고, 그의 아름다움은 감람나무와 같다. 에브라임의 말이 내가 우상과 무슨 상관이 있으리요 할 것이다.

    "누가 지혜가 있어 이런 일을 깨달으며 누가 총명이 있어 이런 일을 알겠느냐 여호와의 도는 정직하니 의인은 그 길로 다니거니와 그러나 죄인은 그 길에 걸려 넘어지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