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 골로새서




윤효배 목사

■ 골로새서

  1. 책 제목

헬라어 성경에서 본서는 ‘프로스 콜로싸에이스(προς κολοσσαεις)’로 불린다. 이는 ‘골로새인들에게’(to Colossians)란 뜻이다‘. 골로새서’는 이 제목에서 유래되었다.

 

 

  1. 기록자와 연대

1) 기록자/ 수신자

① 기록자

본서신은 사도 바울의 저작으로 본다. 그이유로 본서신의 내용이 이를 구체적으로 증거하며(1:1, 23; 4:18), 초대 교부들 역시 전통적으로 바울을 본서신의 저자로 보기 때문이다. (하지만 반론들도 있다. 본서신의 문체나 사상적 흐름이 다른 바울 서신들과는 차이가 나며, 본서신에 나타나는 영지주의적 색채는 2세기에 유행하던 조류로서 바울 시대와는 맞지 않다는 것이다. 그러나 문체나 사상적 흐름은 주제에 따라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으며, 영지주의 이단 사상은 이미 1세기 때부터 시작되었음을 감안한다면 이상의 반론들로 바울 저작을 부인하기는 미흡하다.)

 

② 수신자

수신자는 골로새에 있는 성도들 곧 그리스도 안에서 신실한 형제들이다. 골로새 지역의 특징과 바울과 어떠한 관계를 가졌는지에 대하여 알 필요가 있다.

 

*골로새 지역의 특징

골로새는 소아시아의 브루기아 주 남서쪽 루커스(Lycus) 계곡에 위치하였고, 이곳은 서쪽 20㎞지점의 라오디게아, 라오디게아 북쪽 인근의 히에라볼리와 함께 삼각 지역을 이루고 있는 교통, 무역의 중심 도시로서 일찍부터 이단사상과 철학들이 성행하였다. 골로새는 섬유산업이 발달하여 콜로시눔(colossinum)이라 불리는 검붉은 양모가 유명하였고, 점점 주민들에게 일자리를 제공하는 상업 중심지로 발달하면서 커졌으나 B.C. 100년경 인접한 지역에 라오디게아가 건설되어 활발하고 상업적인 강력한 경쟁자로 떠오르면서 쇠퇴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인접한 히에라볼리와 더불어 이 두 도시는 A.D. 17년(티베리우스 황제 때)과 A.D. 60년(네로 황제 때)에 있었던 지진으로 파괴됐다. (이후 재건되기는 했지만, 옛 명성을 되찾지 못했고, A.D. 400년경에 이르러서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도시가 됐다.)

골로새는 유대인들은 거의 살지 않고 이방인들이 대부분 살고 있었다.

 

*바울과 골로새 교회와의 관계

사도 바울은 골로새 지역을 직접 간 적은 없다(2:1). 그러나 그는 에베소에서 교회를 세우고 말씀을 전하는데 약 3년 정도의 시간을 보내는데, 그때 골로새에 사는 자들도 복음을 전해 들었을 것이다.(행 19:10). 직접적으로는 에바브라가 골로새지역에 말씀을 지속적으로 가르쳐 교회를 세웠고(골 1:7), 빌레몬이 일반성도로서 바울의 동역자 역할들을 감당하였고, 아킵보가 직분을 받은 교인이었으며 압비아와 오네시모 등이 있었다(몬 1-2, 골 4:9)

 

3) 기록 장소/ 연대 : 바울이 로마에 1차 투옥 당시(A.D. 60-62년 경) (4:3, 10)

본 서신은 에베소서, 빌립보서, 빌레몬서와 함께 옥중서신으로 불린다. 옥중서신은 바울이 로마 옥중에서 로마 황제의 재판을 기다리며 2년 동안 연금 생활할 당시 기록된 서신들을 일컫는다. 이렇게 본다면 본 서신은 로마에서 기록되었으며, 기록 시기는 대략 A.D. 62-63년경으로 추정된다. (한편, 바울은 로마로 이송되기 전 가이사랴에서도 2년 정도 투옥된 적이 있어 혹자는 기록 장소를 가이사랴로 보기도 한다. 그러나 골로새서 4장 후반부에는 바울이 옥중에서 여러 사람들과 수시로 접촉한 듯한 느낌을 주는데(4:7-18) 가이사랴 감옥과는 달리 바울이 로마 감옥에서는 외부 사람과 다소 자유롭게 교류할 수 있었음을 감안한다면(행 24:27; 28:16, 30) 본서신의 기록 장소는 아무래도 가이사랴보다 로마가 더 적합할 것이다.)

 

 

  1. 기록 배경

사도 바울이 본서신을 기록하게 된 직접적인 동기는 에바브라가 당시 골로새 교회를 위협하는 혼합주의적인 다양한 이단들의 가르침에 대한 소식을 전하였기 때문이다. 본서에서 에바브라가 전한 이단들의 가르침이 무엇이냐 하는 것에 대해서는 직접적으로 말하고 있지 않기 때문에 명확하게 밝히는 것은 어렵지만 본서 내용이 골로새 교회에 있었던 이단 사상에 대해 암시해 주고 있는 사실에 근거하여 다음 몇 가지로 정리해 볼 수 있다.

첫째로 유대교적인 요소로서, 이것은 절기를 지키는 것이나(레 23장) 부정한 음식으로 규정된(레 11장) 특정한 음식을 금하여 의식적 정결을 유지하는 유대주의적 관습이나(2:16) 할례에 관한 문제였다.

둘째는 이방적인 요소로서, 이것은 철학적인 특징을 지니며 ‘철학과 헛된 속임수’라는 말로 묘사되어 있다(2:8). 이러한 사상이 구체적으로 가리키는 바가 무엇인지 확실히 알기는 어렵지만 2세기에 들어서 절정을 이룬 영지주의의 초창기 모습인 원시 영지주의적 혼합주의로 생각되는 바 사도 바울은 이것들을 ‘세상의 초등 학문’이라고 규정하여 경계하도록 하였다(2:8-10).

셋째는 위장된 기독교적 요소로서, 이는 그리스도의 신성을 부인하며 그리스도의 유일하신 중보자요 구원자 되심을 부인하는 심각한 사상이었다. 그래서 바울은 본서를 통해 그리스도의 위대하심과 완전한 구세주요 주로서의 그리스도의 최고 주권과 온전하심을 강조하는 데 많은 힘을 기울였다(1:13-20, 27, 28:2-4, 8-10, 16, 17, 19; 3:1-4).

넷째는 영지주의 사상과 관련되는 것으로 보이는 천사 숭배 사상(2:18)과 금욕주의(2:21) 및 확인되지는 않으나 여러 민족이 모여서 살았던 골로새에는 여러 배타적인 사상들과 유치한 사상들이 있었을 것이다.

바울은 이와 같이 이단들의 거짓 가르침에 빠질 위험에 처해 있는 골로새 교회로 하여금 그리스도만이 유일한 절대적인 구주시오, 그 분만이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중보자이심을 확실하게 믿도록 하며 이단들의 가르침을 물리치고 견고한 신앙을 가지며 성결한 생활을 하게 하기 위하여 본서를 기록한 것이다.

 

 

  1. 골로새서의 이해

골로새서를 좀 더 쉽게 이해하고자 하면 교회는 바울의 동역자 ‘에바브로’가 개척한 교회로 바울에게 문의한 두 가지 문제에 대한 답변으로 구성되어 있다고 보면 된다. 즉, 골로새 교회가 다양한 이단들의 가르침을 수용하고 있으며, 그에 따라 그들이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온전한 삶을 살아가지 못하고 회심 전의 모습으로 돌아가고 있는 것에 문제점을 지적하며 본서를 기록한 것이다.

이에 따라 본서를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누어서 살펴보면 서신의 앞 부분인 1-2에서는 주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교리적인 부분을 다루고 있고, 뒷부분인 3-4장에서는 그것에 따른 실천적 부분을 다루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바울은 골로새에 보내는 편지를 통하여 그리스도가 탁월하시다는 것(만물 중에서 가장 먼저 나셨고, 만물의 으뜸되심)과 그리스도인의 삶은 그의 탁월하심을 나타내야 한다는 것을 보여주고, 오직 성도는 그리스도 안에 뿌리를 박고, 그 안에서 살고, 그 안에서 보호받으며, 그 안에서 온전하게 자라나기 때문에 그리스도 없는 삶을 산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임을 강조한다.

 

 

  1. 주제

1) 그리스도의 우월성을 통한 구속함을 깨달으라(1:13-29)

본서의 목적은 일차적으로 골로새의 이단을 논박하기 위함이다. 이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바울은 그리스도를 지극히 높여, 그리스도가 바로 하나님의 형상이며(1:15), 창조자이며(1:16), 만물보다 선재하신 분으로서 만물을 유지하시는 분이며(1:17), 교회의 머리시며(1:18), 맨 처음 부활하신 분이며(1:18), 신성의 모든 충만이 육체로 거하시는 분이며(1:19, 2:9) 화해하게 하시는 분(1:20-22)이라고 밝히고 있다.

그리고 그러한 분이 육체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원수가 되었던 자들을 화목하게 하게 하사 거룩하고 흠 없고 책망할 것이 없는 자로 세우고자 하셨다는 것을 잊지 않도록 권면한다(1:20-22).

 

2) 그리스도의 탁월성을 깨달아 주 안에서 행하라(2:1-23)

바울은 율법주의와 천사숭배사상과 금욕주의와 어떤 철학과 헛된 속임수에도 미혹되지 않도록 더욱 하나님의 비밀인 그리스도를 깨닫게 하려 한다. 그리스도에게는 지혜와 지식의 모든 보화가 감추어져 있는데 그를 아는 것을 통하여 그렇게 될 수 있음을 강조한다(2:1-2).

그리스도 안에는 모든 충만이 육체로 거하시고, 그는 모든 통치자와 권세의 머리이시며 우리의 죄를 사하사고, 세례와 함께 장사되고 일으키심을 받은 존재임을 밝힘으로(2:9-15). 더 이상 율법주의와 다양한 이단들로부터 미혹되지 말고 그 안에서 뿌리를 박으며 세움을 받아 교훈을 받은 대로 믿음에 굳게 서서 감사함을 넘치게 하도록 당부한다(2:6-7).

 

3)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고 벗어, 하나님의 형상의 새 사람을 입으라(3:5-17)

바울 사도는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다시 살리심을 받았기 때문에, 땅의 것이 아니라 위의 것을 찾도록 강조한다. 그러므로 땅에 있는 지체의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을 죽이고,(3:5) 노여움, 악의, 비방, 부끄러운 말을 벗어 버릴뿐만 아니라(3:8), 새 사람을 입었음을 강조하여, 자기를 창조하신 이의 형상을 따라 지식에까지 새롭게 하심을 입은 것을 행동해야 함을 말한다(3:10),

그러므로 성도의 실제의 삶에 있어서 거룩하고 사랑받는 자처럼 긍휼과 자비와 겸손과 온유와 오래 참음을 옷 입고(3:12) 서로 용납하여 피차 용서하되 사랑을 더해야 할 것이고, 평강이 너희 마음을 주장하게 해야 하며, 감사하는 자가 될 뿐만 아니라, 지혜로 피차 가르치며, 하나님을 찬양하고,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하는 삶을 살아야 할 것을 구체적으로 교훈한다.

 

4) 각자의 위치에서 주께 하듯하라(3:18-4:1) cf) 엡 5:22-6:9

바울은 실제적인 삶에 있어서 가정에서나 사회에 있어서나 구원받은 성도로서 마땅히 행해야 할 자세에 대해서도 교훈을 주고 있다. 이것은 에베소서의 내용과 거의 같은 내용인데, 에베소 교인들뿐만 아니라 골로새 교회와 모든 성도들이 함께 깨달아 알아야 하는 내용으로 받아야 하겠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아내들로서는 남편에게 복종하고(3:18), 남편들로서는 아내를 사랑하며 괴롭게 하지말아야 하며(3:19), 자녀들로서는 모든 일에 부모에게 순종하고((3:20), 부모들로서는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아야 한다(3:21). 사회에 있어서도 마땅한 자세를 가르치고 있는데, 종들로서는 모든 일에 육신의 상전들에게 순종하되 사람을 기쁘게 하는 자와 같이 눈 가림을 하지 말아야 하며(3:22), 상전들로서는 그들에게도 상전이 계심을 알아 의와 공평을 종들에게 베풀어야 함을 강조한다(4:1).

 

 

  1. 특징

로마서가 구원론, 에베소서가 교회론을 강조한 서신이라면, 본 서신은 기독론에 초점을 둔 교리서라 할 수 있다. (즉, 에베소서는 교회를 ‘그리스도의 교회’라고 이름 붙일 수 있다면 골로새서는 당연히 ‘교회의 그리스도’라고 이름을 붙일 수 있다.)

특히 본서신의 기독론은 만유(우주 만물)의 머리이신 그리스도라는 우주론적 차원에서의 기독론을 말한다. 사도 바울은 혼합주의적 색채가 강한 이단들이 난무하는 골로새 지역의 교회를 향해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이 유일무이한 만왕의 왕이시며 구주시라는 사실을 가르치면서 이단을 배격하여 성도다운 삶을 살도록 권면한다.

 

 

  1. 구조

1) 인사(1:1-12)

2) 그리스도의 우월성(1:13-2:23)

3) 그리스도인의 성숙한 삶(3:1-4:6)

4) 끝인사(4:7-18)



2025 빌립보서




윤효배 목사

■ 빌립보서

  1. 책 제목

헬라어 성경에서 본서는 ‘προς Φιλιππησιους(프로스 필립페시우스)’로 불린다. 이는 ‘빌립보인들에게’란 뜻이다. 한글성경 ‘빌립보서’는 이 제목에서 유래되었다.

 

 

  1. 기록자와 연대

1) 기록자/ 수신자

① 기록자

본서의 기록자는 바울이라는 사실은 본서 자체의 내증에 의해 확실시된다. 본서 1:1의 표현은 본서가 빌립보 교회에 보낸 바울의 서신임을 분명히 보여준다. 그리고 본서에 나타난 어휘와 문체, 회신 이후의 자신의 변화된 삶에 대한 바울의 간증(3:4-9) 등은 바울의 다른 서신들의 그것과 일치된다.

 

② 수신자

수신자는 빌립보에 사는 모든 성도, 감독, 집사들(1:1)이다. 이들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도시적 특성과 함께 바울과 어떻게 관계를 가졌는지에 대하여 알 필요가 있다.

 

*빌립보에 대하여

빌립보 도시는 B.C.350년 마게도냐 대왕 빌립 2세에 의하여 세워진 도시로서 원래의 이름은 ‘작은 우물’이란 뜻을 가진 ‘크레니데스’였으나 빌립에 도시를 확장, 증축하고 자신의 이름을 따라 ‘빌립보’라고 칭하였다. 그 후 이곳은 로마에 정복당해 바울 당시에는 마게도냐라는 로마 속주의 한 식민지 성읍이 되었다. 이곳은 본래 금과 은이 많이 나는 곳이었으며, 강기츠 강이 흐르는 비옥한 평지이며, 유럽과 아시아를 연결하는 교통의 요지로서 로마의 군사적 전초기지였으며 전략상 마게도냐 지방에서 제일로 꼽히는 성이었다(행 16:12).

 

*바울과 빌립보 교회의 관계

빕립보에는 소수의 유대인 거주자는 있었으나 유대인들의 회당은 없었고 단지 기도처가 강가에 있었다(행 16:13). 바울과 실라는 2차 전도여행 중에 성령에 인도하심에 따라 메게도냐 지역으로 가서 기도처를 찾다가 거기에서 여인들을 발견했고, 그중에 한 명이 자색 옷감 장사로서 루디아이며, 그녀에게 복음을 전하여 주변에도 영향을 끼쳐 감옥에도 갔으나 감옥의 간수에게 전도한 이후로 빌립보 교회가 세워지게 되었다.

 

2) 기록장소/연대

본서의 기록시기는 저작 장소와 밀접한 연관을 가진다. 바울은 자신이 옥중에 수감되어 있다고 밝히고 있다(1:7, 13, 17). 그렇다고 한다면 이 감옥은 전통적인 의견으로 볼 때 여기는 로마 감옥인 것으로 본다.

바울은 빌립보서를 통해서 시위대에 대한 언급(1:13)과 가이사 집 사람(4:22)에 대한 언급을 이어나간다. 여기서 시위대는 왕을 호위하는 고관이나 사령관을 보호하는 무리들을 말하는데, 신약성경에서 시위대라를 뜻하는 ‘프라이토리온’(πραιτώριον)은 호마 황제 근위대를 의미했다. 따라서 바울이 로마에 투옥되었을 때 기록했을 것이라는 추측이 가능하다.

또 가이사의 집사람에 대한 언급도 바울이 로마에 투옥되었다는 이야기를 지지해준다. 가이사는 ‘가이우스 율리우스 케사르'라는 로마 황제의 칭호를 말한다. 이 율리우스 이후의 모든 칭호를 말한다. 가이사의 집사람이었다는 사실은 바울이 바로 로마 통치 아래 있었다는 사실을 생각나게 한다.

마지막으로, 수감 기간의 활동이 보여주는 느슨한 제재(행 28:16, 30-31)를 봤을 때 이곳이 로마라는 사실을 더욱 극명하게 드러난다. 사도행전은 자신이 갇혀 있음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을 머물게 해주었고, 맞이 했다고 말한다. 이것은 바울이 로마에서 가택연금을 당했던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당시 로마 시민으로 황제에게 상소한 미결수는 로마에 도착하면 황제의 근위대장에게 인수인계되어 황제근위대 감옥에 감금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그러나 근위대장은 바울에게는 그렇게 하지 않고, 감옥 밖에, 가택연금의 형태로 따로 지낼 수 있도록 허락해주었다. 그럼에도 왜 바울에게 이렇게 관대하게 대해주었는지 그 이유는 알 길이 없지만, 하나님의 신비한 손길이 역사하셨다고밖에 설명할 길이 없다. 바울은 감옥 밖에 있었기 때문에 자신을 찾아오는 사람들에게 복음도 전하고, 그리스도인의 교제를 할 수 있었다.

이런 점을 볼때, 다른 옥중서신과 마찬가지로 빌립보서 또한 로마에 1차 투옥되었을 AD 62-63년에 기록되었을 것이다.

 

 

  1. 기록 동기

바울에 의하여 세워진 빌립보 교회는 그에 대하여 특별한 애정을 가진고 있었으나 바울이 로마의 감옥에 갇혔다는 소식을 듣고 헌금을 모아 에바브로디도 편에 바울에게 보내어 바울을 도왔다(2:25). 이렇게 하여 감옥에서 에바브로디도를 만난 바울은 빌립보 교인들의 사랑으로 인해 큰 기쁨을 얻었으며 또한 에바브로디도를 통해 빌립보 교회의 소식을 들었다. 그런데 그곳에 머물며 바울을 돕던 에바브로디도가 그만 병들어 중태에 빠졌고(2:26, 30), 이 일은 바울뿐 아니라 에바브로디도를 로마로 보낸 빌립보 교인들을 근심케 하였다(2:26). 그러나 다행히도 피차 근심하던 중, 에바브로디도가 회복되었다(2:27). 이에 바울은 그를 빌립보로 돌려보내면서 그간 빌립보 교인들이 자신에게 베풀어준 호의에 감사하며 자신의 투옥으로 근심하여 염려하는 저들을 안심시키고 도리어 격려하고자 본 서신을 쓰게 되었다(1:3-30, 4:10-20).

 

 

  1. 바울과 빌립보 교회의 상황

1) 바울의 상황

바울은 현재 매여 있는 상태(1:7, 13, 14 17)인데, 어떻게 보면 죽어도 상관이 없다고 말할 정도이지만(1:20-24, 4:14), 에베브로디도를 통해 빌립보 교회의 상황을 듣고 매우 안타까워하고 있다(3:17-18), 빌립보 상황을 빨리 앎으로 안위를 받고자 하였다(2:19, 28),

아울러 바울은 바울이 매여 있는 것으로 인하여 형제 중 다수가 겁 없이 복음을 전한 것뿐만 아니라 투기와 분쟁으로 복음을 전한다 할지라도 어떻게 되든지 그리스도가 전파되는 것에 대하여 기뻐할 뿐만 아니라(1:18), 빌립보 성도들이 구원의 합당한 바른 믿음과 삶을 가지고 있다고 하면 죽을지라도 기쁘다고 말하며(2:17-18, 4:1), 이러한 기쁨을 함께 나누고자 하였다(4:4).

 

2) 빌립보 교회의 상황

① 빌립보 교회는 감독들과 집사들이 있을 정도로 튼튼한 조직을 가졌으나(1:1), 구원에 완전히 다 이룬 것처럼 생각하며 구원에 대하여 점차 무감각해지고, 복음에 합당한 생활이 드러나지 않았다(1:27-29, 2:12, 3:12-14)).

② 뿐만 아니라 바울을 시기하던 자들이 있어 바울이 감옥에 갇힌 것에 대하여 오히려 잘 되었다고 생각하며 투기와 분쟁으로 복음을 전하는 자들이 있었으며(1:15, 17), 몸을 상해 하면서 행악을 일삼고(3:2, 4), 어그러지고 거스르는 세상의 영향을 받아,(2:15-16) 땅의 일만을 생각하는 자들이 나타났다

③ 아울러 유오디아와 순두게 사이의 갈들이 발생하며 교회 내부적 갈등과 분열의 조짐(2:1-4, 4:2)이 보였고,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가 아니라 육체를 신뢰하는 이들이 생겨(3:1-9) 십자가와 복음의 원수가 되는 모습을 가지고 있었다(3:18-19).

 

 

  1. 주제

1) 신앙의 성장 : 구원에 합당한 모습에까지 성장하라!

① 바울의 기도에서(1:6, 9-11)
“너희 안에서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는 확신하노라”, “9내가 기도하노라 너희 사랑을 지식과 모든 총명으로 점점 더 풍성하게 하사 10너희로 지극히 선한 것을 분별하며 또 진실하여 허물없이 그리스도의 날까지 이르고 11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의의 열매가 가득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찬송이 되기를 원하노라”

② 바울의 갇힌 상황 속에서(1:29)
“그리스도를 위하여 너희에게 은혜를 주신 것은 다만 그를 믿을 뿐 아니라 또한 그를 위하여 고난도 받게 하려 하심이라”

③ 바울의 권면에서(2:12, 3:12-14)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나 있을 때뿐 아니라 더욱 지금 나 없을 때에도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 “12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가노라 13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14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노라

 

2) 성도 간의 교제와 연합의 중요성 : 참된 교제 가운데 나아가라!

① 그리스도의 겸손을 본받으라(2:3-4)
“3아무 일에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 4각각 자기 일을 돌볼뿐더러 또한 각각 다른 사람들의 일을 돌보아 나의 기쁨을 충만하게 하라”

② 기쁘신 뜻 가운데 행하라(2:13-14)
“13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에게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 14모든 일을 원망과 시비가 없이 하라 15이는 너희가 흠이 없고 순전하여 어그러지고 거스르는 세대 가운데서 하나님의 흠 없는 자녀로 세상에서 그들 가운데 빛들로 나타내며

③ 갈등 가운데 있는 성도들에게 있어서(4:2-3)
“2내가 유오디아를 권하고 순두게를 권하노니 주 안에서 같은 마음을 품으라 3또 참으로 나와 멍에를 같이한 네게 구하노니 복음에 나와 함께 힘쓰던 저 여인들을 돕고 또한 글레멘드와 그 외에 나의 동역자들을 도우라 그 이름들이 생명책에 있느니라”

 

3) 기쁨과 감사의 중요성 : 주안에서 기뻐하라!

① 그리스도가 전파되는 것과 그 안에서 성장하는 것
무슨 방도로 하든지 그리스도가 전파되는 것(1:18), 빌립보 성도들의 믿음이 온전히 성장하는 것(2:17, 4;1)

② 우리의 시민권이 하늘에 있음(3:20-21)
“20그러나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 거기로부터 구원하는 자 곧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노니 21그는 만물을 자기에게 복종하게 하실 수 있는 자의 역사로 우리의 낮은 몸을 자기 영광의 몸의 형체와 같이 변하게 하시리라”

③ 성도의 필요를 채워주는 행위가 하나님께서 받으실만한 제물이 됨(4:15-18)
“15빌립보 사람들아 너희도 알거니와 복음의 시초에 내가 마게도냐를 떠날 때에 주고 받는 내 일에 참여한 교회가 너희 외에 아무도 없었느니라 16데살로니가에 있을 때에도 너희가 한 번뿐 아니라 두 번이나 나의 쓸 것을 보내었도다 17내가 선물을 구함이 아니요 오직 너희에게 유익하도록 풍성한 열매를 구함이라 18내게는 모든 것이 있고 또 풍부한지라 에바브로디도 편에 너희가 준 것을 받으므로 내가 풍족하니 이는 받으실 만한 향기로운 제물이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 것이라”

 

 

  1. 구조

① 도입(인사) : 1:1-2

② 바울의 기도 : 1:3-10

② 바울의 상황 : 1:12-26

③ 바울의 권면 : 1:27-4:9

④ 바울의 감사 : 4:10-20

⑤ 종결(끝인사) : 4:21-23



2025 에베소서





■ 에베소서

  1. 책 제목

헬라어 성경에서 본서는 ‘προς ΄ΕΦεσιος(프로스 에페시우스)’로 불린다. 이는 ‘에베소인들에게’(to Ephesians)란 뜻이다. ‘에베소서’는 이 제목에서 유래되었다.

 

 

  1. 기록자와 연대

1) 기록자/ 수신자

① 기록자

본 서신은 바울이 기록하였다고 직접 증언하고 있고(1:1; 3:1), 언어나 문체, 중심 사상 등이 바울의 다른 서신들과 일치하고 있으며, 초대 교부들(Irenaeus, Polycarp, Eusebius, Origen) 역시도 전통적으로 본 서신을 바울 기록으로 보기 때문에 대부분이 바울의 저작으로 인정한다.

 

② 수신자

바울은 에베소 교회 및 모든 믿는 그리스도인(1:1)에게 편지를 쓰고 있다고 밝히고 있는데, 물론 모든 믿는 그리스도인들에게도 이 서신을 읽도록 하는 것이지만 1차 독자는 그가 밝히고 있는 것처럼 에베소 교회라고 할 수 있겠다. 여기서 에베소는 교통의 요지이기도 하여, 소아시아 최대도시로 매우 번영했는데, 그 지방의 로마행정의 중심이었다. 이 에베소는 신전시(神殿市)로 불리웠다. 그것은 유명한 아르테미스(아데미르 역) 신전이 있는 데서, 그리고 후에는 황제예배를 목적으로 하는 2, 3의 신전까지도 포함되어서이다.

바울은 2차 전도여행할 때에 아시아 전도를 계획하였으나 성령 하나님께서 막으셔서(행 16:6), 유럽에 건너가 여러 교회를 세우고 다시 안디옥 모교회로 가는 동안 에베소에 잠깐 들렀다가 브리스길라와 아굴라를 에베소에 남겨 두었다(행 18:18-22, 26, 고전 16:19).

후에 바울은 제3차 전도여행할 때 윗 지방 갈라디아를 거쳐서 에베소에 와서(행 19:1), 회당에 들어가 석달 동안 담대히 하나님 나라에 관하여 강론하였고, 어떤 사람들은 이 도를 비방하여 그들을 떠나 두란노 서원에서 날마다 강론하여 2년 동안 말씀을 전하였다.

이렇게 바울은 이곳에 이 지방 전체에 복음을 전하는 기지로 된 교회를 세웠고 그 뒤에 디모데와 사도 요한이 이 교회에 머물며 사역을 했다. 이렇게 따라서 에베소 교회도 소아시아교회의 중심이 되고, 교회 역사상으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였다.

 

2) 기록연대

본 서신은 A.D. 62년경 로마 옥중에서 기록된 것으로 보인다. 본 서신에는 사도 바울이 옥에 갇혀 있음을 암시하는 표현들이 여럿 나타난다(3:1; 4:1; 6:20). 사도행전에 의하면 바울은 빌립보(행 16:19-34), 가이사랴(행 24:27), 로마(행 28:16, 30) 등 모두 세 차례 감옥에 투옥된 것으로 나타난다. 이 가운데 빌립보 감옥의 투옥 기간은 며칠(혹은 하루)에 지나지 않는다. 따라서 본 서신을 기록할 만한 여유는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일부 학자들이 가이사랴 감옥을 본 서신의 기록 장소로 보기도 한다. 그러나 본 서신의 필치가 매우 세련되고 신앙적 깊이와 원숙미가 넘친다는 측면에서 대분의 학자들은 이보다 훨씬 후대인 로마 감옥으로 본다. 바울은 로마 감옥에서 2년 정도 투옥되어 있었다. 이 기간에 바울은 빌립보서, 골로새서, 빌레몬서를 함께 기록했을 것으로 보며, 에베소서와 함께 옥중서신으로 불린다. 실제로 바울이 옥중에서 쓴 서신은 디모데후서도 포함되는데 이는 같은 시기에 쓴 글은 아니고, 바울 사도가 다시 붙잡혀서 순교하기 전에 목회자인 디모데에게 마지막 유언과 같이 남긴 글이며, 목회서신으로 분류된다.

 

  1. 기록 동기와 목적

본서중에는, 두기고가 다른 소식(통지)을 아시아에 전하기로 되어있다는 것(엡 6:21, 골 4:7) 이외에는, 이 편지가 기록된 특별한 이유 및 직접 목적 등에 대해 구체적으로 말하고 있지 않다. 그럼에도 바울이 행하던 사역의 모습과 편지의 내용을 통해 다음과 같이 생각해 볼 수 있다.

바울은 기원 52년부터 54년까지 약 3년 동안 그의의 전도 사역지 중에서는 가장 오래동안 머물며 복음을 전하였고 교회를 세웠다. 바울 자신은 밤낮 눈물로 각 사람을 권하기를 쉬지 않았다고 표현할 정도로 관심과 사랑이 있었다(행 20:31). 그러나 바울은 로마 감옥에 갇혀 있을 때에 에베소 교회의 여러 소식들을 듣고, 그들에게 꼭 필요한 내용들을 중심으로 모든 믿는 그리스도인들에게 다음과 같이 몇 가지 중요한 내용들을 알려 주기 원했다.

 

① 구원에 대한 바른 이해를 위해

구원을 단순히 지상의 역사에서 이루어진 사건으로 간주하여 자신의 결단이나 노력으로 얻었다는 단순한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② 교회에 대한 바른 이해를 위해

또한 교회의 참된 의미가 무엇인지 모르고, 단순히 눈에 보이는 성도들의 예배와 교제 정도로만 생각하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유대인들과 이방인들이 하나 되지 못하고 나그네나 외인 정도로 생각하고 있었다.

 

③ 그리스도인의 삶의 바른 이해를 위해

아울러 예수님을 믿는 자의 삶이 무엇인지를 잘 알지 못하여 그리스도인으로서 각각에 주어진 자리에서 어떠한 삶을 살아야 하는 지와 영적으로 어떠한 제사로 임해야 하는지를 잘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1. 주제

1) 삼위일체 하나님께서 은혜로 주신 구원에 감사해야

사도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받게 된 것이 자신의 판단이나 결단에 근거한 것이 아니라 오직 뜻의 결정대로 일하시는 하나님의 계획을 따라 예정을 입어(1:11), 그의 경륜을 따라 하나님의 택하신 자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되게 하시기 위하여(1:10) 그의 피로 말미암아 우리의 죄를 사하여 주셨고, 이 복음을 듣고 믿을 수 있도록 성령께서 인(印) 치시고 보증이 되셨음(1:13-14)을 자세히 알려준다.

또한 구원받은 자로서는 나의 어떠한 행위가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았음(2:5, 8)을 분명히 하여, 그 앞에서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려고 하신 구원의 목적을 잘 깨달아(1:4), 그의 영광을 더욱 찬송해야 함을 분명하게 밝혀주고 있다(1:14).

 

2)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온전한 교회를 이루어야

바울 사도는 그리스도의 놀라운 통치 능력으로 만물을 그 아래 복종하게 하셨는데(1:21-22), 교회가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그의 능력을 드러내어 만물을 그의 뜻으로 충만하게 하시도록 해야 함을 강조한다(1:23). 그러는데 있어서 이방인(에베소인)과 유대인이 따로 구별되는 것이 아니라 동일한 하나님의 권속이고 함께 연결하여 주 안에서 성전이 되어 가야 함을 말한다(2:19-22).

아울러 이미 주의 부르심을 받아 주와 연합하였기 때문에 성령이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고(4:1-3), 각 사람에게 주신 분량에 따라 직분과 봉사의 일을 잘 감당하며(4:7-12),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자라도록 권면한다(4:13).

 

3) 옛사람을 버리고 새사람으로 이 세상을 살아가야

바울 사도는 구원을 받은 자답게 마음을 새롭게 하여 구습을 따르는 옛 사람을 벗어 버리고 심령이 새롭게 되어 새 사람으로, 빛의 자녀답게 성령 충만한 삶을 살 것을 강조하는데(4:22-24, 5:18),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가정의 각 구성원으로서 또한 사회에서 상전과 종으로서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에 대하여 원리를 잘 설명해 주고 있다(5:22-5:9).

아울러 이 땅에서의 싸움은 영적인 것임을 잊지 말고(6:10-12)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취하여 영적 전투를 잘 감당하여 승리하는 삶을 살도록 권면한다(6:13-18).

 

 

  1. 특징

1) 삼위일체 하나님에 근거한 교회의 비밀이 담긴 서신이다.

에베소서는 그렇게 분량이 그렇게 긴 서신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교회’(에클레시아)라는 말이 9번이나 나올 정도로 ‘교회’에 대하여 강조하고 있다. 즉,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유기적이며 생동적인 조직으로 설명하면서 교회가 지닌 비밀을 잘 설명해 주고 있는 서신이다.

골로새서에서는 그리스도의 인격과 역사(일)하심의 존엄에 대하여 강조한다고 하면 에베소서 바울은 구속된 자의 총체인 그리스도의 몸, 교회의 숭고함을 말하고 있는데 즉, 삼위일체 하나님께서 택자에게 베풀어주신 은혜의 픙성함을 믿는 그리스도인들에게 보여주기 위해 하나님의 놀라운 계획을 가르쳐주고 있다.

 

2) 복음 전체를 잘 요약해 주고 있다.

에베소서에는 기독론, 구원론, 교회론, 종말론 등 광범한 주제를 다루고 있지만 대단히 간결하고 명쾌하게 제시되고 있다. 따라서 에베소서는 바울 신학의 요약으로 불리기도 한다. 칼빈은 에베소서를 가리켜 ‘바울 작품의 면류관’(the Crown of St. Paul’s Writings)이라고 불렀다. 에베소서는 교회 역사를 통해 가장 많은 영향을 미친 바울 서신 중 하나로 손꼽히고 있다.

 

3) 차분하고 논리적인 서신이다.

고린도전·후서가 당면한 문제에 대한 해답을, 갈라디아서가 복음과 율법 사이의 치열한 변증과 격정적인 어조로 다루고 있다면, 본 서신은 교회의 본질(교회론)과 교회와 그리스도와의 관계(기독론)를 아주 차분하면서도 조용하게 가르치는 교리서라 할 수 있다. 즉, 본서는 고요히 하늘에 계시는 그리스도와의 가장 깊은 비밀을 차분하고도 확실하게 계시한다.

 

4) 골로새서와의 유사한 서신이다.

에베소서는 골로새서와 유사한 주제들이 동일한 순서로 설명되는데, 때로는 어휘까지 동일하게 다뤄지는 경우가 많이 있다. 대표적으로 세 가지만 예를 들면, 첫째, ‘하늘과 땅에 있는 모든 것이 다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내용은 에베소서 1:10; 골로새서 1:14-20에서도 동일하게 찾아볼 수 있다. 둘째, ‘나는 너희 믿음에 대해 들었다’는 내용은 에베소서 1:15; 골로새서 1:4에 나와 있다. 마지막으로 ‘너희에 대해 하나님께 늘 감사를 드린다’는 말은 엡 1:16과 골 1:3에 동일 하게 나와 있다.

이것은 바울이 골로새서, 빌레몬서, 에베소서 모두를 비슷한 시기에 작성했고, 모두 비슷한 상황 가운데 있는 아시아 지방에 보냈기 때문으로 생각된다(엡 6:21, 골 4:7).

 

 

  1. 구조

1) 삼위일체 하나님 안에서의 구원에 대한 진술(1-3장)

(1) 도입(1:1-2)

(2) 구원에 대한 진술(1:3-3:21)

① 구원을 위한 삼위 하나님의 활동(1:3-14)

② 구원을 위한 성도의 과거와 현재(2:1-22)

③ 구원을 위한 바울의 활동(3:1-13)

④ 바울의 기도(3:14-21)

 

2) 구원 받은 성도로서의 삶에 대한 권면(4~6장)

① 삶에 대한 권면(4:1-6:9)

② 종결(6:21-24)



2025 고린도후서









12월 27일(토) 고린도후서 10-13장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12월 26일(금) 고린도후서 7-9장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12월 25일(목) 고린도후서 4-6장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보라 지금은(6:2)

가라사대 내가 은혜 베풀 때에 너를 듣고 구원의 날에 너를 도왔다 하셨으니 보라 지금은 은혜 받을만한 때요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
For he says, "In the time of my favor I heard you, and in the day of salvation I helped you." I tell you, now is the time of God's favor, now is the day of salvation.

보라 지금은(Now is the time) 

톨스토이의 세 가지 질문을 생각해 봅시다.

첫번째 질문은 모든 일들 중에서 가장 중요한 일은 무엇인가?
두번째 질문은 어떤 사람이 가장 필요한 사람인가?
세번째 질문은 각각의 일에 가장 합당한 시간은 언제인가?

가장 중요한 일은 지금 내가 하고 있는 일을 말합니다.
가장 필요한 사람은 지금 내가 만나고 있는 사람을 말합니다.
가장 중요한 시간은 지금이라고 합니다.

따라서 보라 지금은 내게 가장 중요한 때를 말합니다.
그 시간에 먼저 은혜를 받아야 합니다.
그 시간에 구원을 받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일꾼으로 부름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일꾼의 특징을 이렇게 강조합니다(6:9-10).

무명한 자 같으나 유명한 자요 
죽은 자 같으나 보라 우리가 살고 
징계를 받는 자 같으나 죽임을 당하지 아니하고.  

  •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아무 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로다.

  • 이러한 믿음을 역설적 신앙(Paradoxical faith)이라고 합니다.
    세상은 순리적 기능에 의해서 좌우됩니다.
    그러나 신앙의 세계에서는 순리적 기능을 오히려 뒤집을 수 있는 
    하나님의 능력에 의해서 좌우된다는 것을 항상 잊지말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믿음의 사람은 어떤 형편에서든지 자족하며 즐겁게 살아갈 수 있습니다.
    때로는 육신의 어려움 가운데서도 실망하지 않습니다.
    경제적인 어려움 가운데서도 좌절하지 않습니다.
    말할 수 없는 고통 가운데서도 소망을 잃지 않습니다.

    나라가 매우 위태롭습니다.
    경제적인 위기는 나라 빚을 해결할 능력이 없습니다.
    4,632조는 국민 1인당 8,963만원

    이념적인 위기는 좌우 대립으로 인하여 팽팽한 대결구도를 형성합니다.
    진보와 보수의 갈등 비율은 4점 만점에 3.52(2024년 기준)
     
    선진대열에 들어섰다고 자랑하지만 금융권에서 겨우 40위 수준에 머물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세계 100대 은행 가운데 한국계열의 은행은 하나도 포함되지 않습니다.

    오늘의 현실은 모든 성도들에게 바로 지금 하나님의 은혜와 구원을 사모해야 할 가장 중요한 때라고 비명을 지르고 있습니다.
    이러한 때에 모두 마음과 뜻을 모아 하나님의 도움을 간구합시다.





    '보라 지금은'은 성경 구절, 특히
    고린도후서 6장 2절에서 비롯된 표현으로, "보라 지금은 은혜받을 만한 때요,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라는 구절의 일부이며, 지금이 바로 하나님 은혜를 받고 구원을 받을 절호의 기회라는 의미를 강조합니다. 이는 믿음이 흔들리고 어려움이 닥쳐올 때 은혜와 복음이 가장 중요한 무기이자 도구임을 상기시키며, 현재에 집중하여 하나님을 의지하라는 메시지를 담고 있습니다. 
    주요 의미
    • 은혜의 시기: 지금이 바로 하나님의 은혜를 받을 수 있는 때라는 점을 선포합니다.
    • 구원의 날: 현재가 구원을 얻을 수 있는 중요한 시기임을 강조합니다.
    • 지금에 집중: 과거에 얽매이거나 미래를 두려워하기보다, 지금 이 순간의 믿음과 은혜에 집중해야 함을 의미합니다. 

    성경적 근거
    • 고린도후서 6:2: "내가 은혜 베풀 때에 너에게 듣고 구원의 날에 너를 도왔다 하셨으니 보라 지금은 은혜 받을 만한 때요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
    • 이사야 49:8: 이 구절의 인용 출처로 언급되기도 합니다













    12월 24일(수) 고린도후서 1-3장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그리스도의 편지(3:3)

    너희는 우리로 말미암아 나타난 그리스도의 편지니 이는 먹으로 쓴 것이 아니요 오직 살아 계신 하나님의 으로 한 것이며 또 돌비에 쓴 것이 아니요 오직 육의 심비에 한 것이라.
    You show that you are a letter from Christ, the result of our ministry, written not with ink but with the Spirit of the living God, not on tablets of stone but on tablets of human hearts.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직접 세상을 구원하는 것이 아니라 구원받은 사람을 통하여 세상을 구원하십니다.
    이와 같은 하나님의 의도에 따라 구원받은 사람들을 가리켜 "그리스도의 향기()" 또는 그리스도의 편지()"가 되라고 합니다.
    향기가 아니라 썩는 냄새가 진동합니다.
    행운의 편지가 아니라 불행을 퍼붓는 편지가 됩니다.
    이러한 현상이 도처에서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편지(You are a letter from Christ)
    그리스도인의 삶 자체가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과 성품을 세상에 보여주는 살아있는 편지와 같다는 의미라고 하겠습니다.
    따라서 그리스도인의 삶은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된 것을 보여주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이 삶으로 복음을 증거하고, 그들의 행동과 변화를 통해 사람들이 예수를 읽고 알게 되는 것을 뜻하며, 21세기 인류에게 보내는 메시지를 담은 책의 제목으로도 사용됩니다. 

    성경적 의미 (고린도후서 3:1-6)
    • 우리가 곧 편지 : 사도 바울은 고린도교회 성도들을 "우리가 너희에게 쓴 편지"이자 "그리스도의 편지"라고 말합니다.
    • 삶으로 증거하는 복음 : 그리스도인들의 삶이 곧 예수님의 가르침과 인격이 세상에 드러나는 통로이며, 불신자들이 그리스도인을 통해 예수님을 읽고 알 수 있게 됩니다.
    • 성령의 역사 : 이 편지는 인간의 힘이 아닌, 성령으로 말미암아 기록되며, 행함이 있는 믿음과 삶의 변화를 통해 나타납니다. 
    '그리스도의 편지'라는 책
    • 내용 : 한 독실한 기독교인의 기도에 대한 응답으로 예수 그리스도가 받아쓰게 했다고 전해지는 아홉 편의 편지 모음집.
    • 주제 : 그리스도의 생애와 가르침, 영적인 정화, 21세기를 살아가는 인류에게 주는 메시지 등을 담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편지(고린도후서 3:1-6)


    오늘 본문에서는 그리스도인을 가리켜 그리스도의 편지로 비유하고 있습니다. 
    여기에 보면 "너희가 우리의 편지라." 그리고 나아가서는 "그리스도의 편지"라 하여 편지라는 말을 두번 사용하고 있습니다.

    편지라는 것은 인류가 문자를 쓰기 시작하면서부터 취하게 된 가장 오랜 역사를 가진 문자 문화의 하나의 형식입니다. 
    흔히들 "그 문화 수준이란 그 사용하는 종이의 분량만큼 평가된다."는 말을 하기도 합니다. 
    이는종이를 많이 사용하는 사람이 문화인이요, 문화 국민이라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께서는 개인적으로 얼마나 많은 종이를 사용하고 계시는 것입니까? 
    만약 주로 휴지만 사용하는 터이라면 그것은 좋은 것이 아닙니다. 
    휴지 외에도 여러 가지의 용도가 있겠습니다만은 그 가운데서도 편지를 많이 받고 많이 쓰고하는 것이 문화인입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이 '편지'라는 말을 써서 그리스도인을 설명하고자 합니다. 
    아시다시피 편지란 서로의 소식이나 용건을 알리며, 그리고 마음을 글로 표현하여 전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편지는 수필이나 소설, 시와는 달리 쓰는 사람이 있음과 동시에 반드시 받는 대상이 분명하게 있습니다. 따라서 편지 속에는 보내는 사람의 인격과 구체적인 소원이며, 뜻이 숨김없이 나타나게 되어 있습니다.

    이러한 편지에는 그 대상과 목적 또는 방법에 따라 몇가지 유형으로 나눌 수가 있습니다. 그 첫째는, 한 개인이 개인에게 보내는 편지입니다.

    그런가 하면 개인이나 어떤 단체가 공적으로 다른 단체에게 보내는 공동의 서한이 있습니다. 또한 어떤 경우에는 수신자 외에는 절대로 뜯어 볼 수 없도록 사인이나 인장을 찍어 밀봉을 한 비밀 편지입니다. 이런 편지중 하나가 다윗 왕이 우리아의 손에 들려서 보낸 요압 장군앞으로의 편지입니다. 만약 우리아가 자기를 죽게하라는 그 편지의 내용을 읽어보았더라면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그러나 우리아는 그 내용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채 어인이 찍힌 밀봉된 편지를 받아들고 그대로 갖다바친 것입니다.

    그러기에 요즈음도 밀봉된 편지는 비싸고 개봉된 편지는 싼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리고 어떤 편지는 개인이나 어떤 단체에서 보내는 것임에도 아예 신문 같은 것을 통하여 공개적으로 보내는 공개서한이 있습니다. 이는 어쩌면 모든 사람이 읽고 모든 사람이 평가해 달라는 의미가 있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지금 우리가 본문으로 삼고 있는 고린도후서 역시 공동 서한이면서 공개 서한인 것입니다.

    그런데, 이 편지는 글로서 표현되는 것이기에 몇가지 장단점의 특징을가지고 있습니다. 먼저 단점으로서는, 첫째 얼굴과 얼굴을 볼 수 없는 가운데서 편지를 쓰기 때문에 생각이나 감정을 100퍼센트 전달하기가 어렵다는 것입니다. 이는 아무리 문장력이 좋은 사람이라하더라도 자기가 생각하는 바를 그대로 완벽하게 표현할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사람이란 생각하는 것 만큼 말하지 못하고, 말하는 것 만큼 글로 표현하지 못한다고합니다. 그리고 또 한가지 단점은, 전해진 편지는 자기 나름대로 읽기 때문에 전해진 다음에 오해가 많다는 점입니다. 그 때문에 편지로는 사무적인 이야기 외에 충고나 감정적인 이야기같은 것은 하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왜냐하면 얼굴과 얼굴을 대한 가운데 서로의 의견을 듣고 감정을 읽으면서 문제를 설명하고 이해해 나갈 수 있는 여건이 아닌 피차 일방적인상태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가 하면 편지가 갖는 장점이 있습니다. 첫째는, 계속 남아 보존될 수 있다는 점입니다. 아무리 좋은 말도 결국은 기억에서 사라지게 되지만 글로 쓰여진 편지는 계속 남아 읽혀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글로 쓰여진 편지는 깊이 생각하면서 읽을 수가 있기 때문에 그만큼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합니다. 그런 점에서 텔레비젼이나 라디오, 테이프 등 보다 종합적이고 편리한 매체들이 많이 있지만, 책은 자기 나름대로 여유를 가지고 깊이 생각하면서 읽을 수 있는 것이므로 여전히 중요한 것입니다.

    또한 편지는 반복해서 읽고 대할 수가 있습니다. 자칫 놓치고만 문장이나 이해가 어려운 부분이 있다손치더라도 거듭 읽고 생각하므로 그 뜻을와전하게 이해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편지는 모든 사람이 볼 수가 있다는 점인데 이는 곧 시간과 공간을 초월해서 남는 것을 말합니다.

    이에 오늘 우리도 사도 바울이 편지를 써주었기 때문에 이렇게 귀한 본문을 대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만약 예수님의 제자들이 글로서 기록을 남기지 않았다면 오늘의 역사가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하지만 이 글이라는 것에 하나님의 말씀을 담아서 전해 주었으므로, 오늘 이 시간까지 성경을 읽을 수가 있으며 복음에 접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글이란 참으로 중요한 것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면 이러한 글이 종이가 발달되지 않았던 그 옛날에는 어디에다 쓰여졌는가 할 때, 초기에는 주로 돌에 새겨졌으며 그 다음에는 나무에 그리고 제일 많이 사용되었던 것이 짐승의 가죽을 부드럽게 잘 손질하여 거기에 글을 쓰는 방법이었습니다. 그렇게 하여 쓰여진 것 중에는 성경책도 많이 있습니다. 그러던 것이 특별히 성경이 기록될 당시에는 파피루수(papyrus)라는 갈대의 껍질을 벗겨서 엇갈리게 붙여 평면을 만든 다음 거기에 글을 썼던 것인데, 그런 이후에 여러 가지 발달 단계를 거쳐서 오늘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이와 같은 좋은 종이에 글을 쓰며, 또한 편지를 쓸 수 있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 말하는 편지는 먹이나 잉크로 쓴 편지가 아니며, 또한 돌비나 종이에 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으로 육의 심비에 쓴 편지를 말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마음비에 쓰는 아주 신비로운 편지를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아시다시피 오늘 본문 말씀은 사도 바울이 고린도 교회에 보내는 편지입니다. 이제 편지의 내용인 1절 말씀에 보면 "우리가 다시 자천하기를시작하겠느냐? 우리가 어찌 어떤 사람처럼 천거서를 너희에게 부치거나혹 너희에게 맡기거나 할 필요가 있느냐?"며 천거서라는 말을 쓰고 있는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이 이 말을 쓰게된 것에는 그만한배경이 있습니다. 특별히 고린도 교회는 여러가지 어려운 여건 속에서 사도 바울이 세운 교회입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에게 있어서 이 고린도 교회는 사도 바울의 마음을 매우 아프게 한 교회였습니다. 어렵게 세운 교회이지만 교회내에 회개하지 못한 죄가 남아 있고 보니, 분쟁이 일게되고그 분쟁은 장점은 덮어 놓은 채 단점을 보기에 혈안이 되어 날뛰는 가운데 마침내 사도 바울을 들추며 시비를 하기에 이른 것입니다. 그리하여,사도 바울의 인격을 건드리고 소명을 건드리며, 심지어는 그의 사도권까지를 비판하면서 그가 어떻게 사도냐? 그가 예수님의 열두 제자중의 하나라도 된다는 말이냐? 부활하신 예수님도 보지 못한 그가 어떻게 사도란 말이냐? 그는 예수 믿는 사람들을 앞장서서 핍박하며 죽이려던 자가아니냐며, 사도 바울에 대한 비판의 소리가 높아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에 사도 바울은 오늘 본문에서 말하기를 내가 굳이 사도라는 천거서를 가지고 다녀야 하겠느냐는 것입니다. 물론 예루살렘 교호의 사도 베드로와 야고보가 공동 사인을 한 추천서를 가지고 올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말하기를 내가 고린도 교회를 향하여 이제 와서 새삼 추천서를 보낼 필요가 있겠느냐? 그리고 나에 대한 추천서는 곧 너희들 자신이라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바울이 있어서 고린도 교회가 세워졌고, 부흥되어 왔으며 너희들이 예수를 믿어 오늘에 이르게 된 것도 내가 전도하여된 것일진대 이제 와서 새삼스레 내가 너희 앞에 사도라는 증명서를 보여 주어야 하겠느냐? 나에 대한 추천의 글이 따로 없다. 너희 자산이 바로 나에 대한 편지요, 사도라는 증명서가 아니냐는 말입니다.

    이는 여기 한 어머니가 있다고 할 때에 내가 어머니라는 증명서를 가지고 다니지 않더라도 그 곁에 아들이 하나 있다면 그것이 바로 증명서가 되는 것과 같은 것이라 하겠습니다. 가만히 보면, 서양 사람들은 처음 만난 여자가 마음에 들게되면 우선 손가락부터 보아서 반지가 끼워져 있으면 프로포즈를 할 수가 없고, 만약 다행히 끼워져 있지 않으면 마음놓고 프로포즈를 하여 사랑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보통입니다. 그러니까 하나의 반지가 기혼자와 미혼자를 구분하는 표시가 되는 셈인데, 저는 그 보다 더 분명한 것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어린아이를 하나 낳아서 붙들고 다니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것 보다 더 분명하고 좋은 증거가 어디에 있겠습니까?

    너희가 우리의 편지라! 이 얼마나 확실한 증거의 이야기입니까? 너희가 있다는 것이 바로 내가 사도라는 것을 증거하는 것이 아니겠느냐 말입니다. 그리고 너희들은 우리의 편지인 동시에 이미 모든 사람앞에 공개된 편지라고 말합니다. 본문은 이를 두고 "뭇 사람이 알고 읽는바라."고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는 나를 통하여 예수를 믿는 사람이 어디한 두 사람이냐는 것이며, 이미 많은 사람이 복음의 소식을 받아들여서흡족해 하고 있는 터인데 어쩌자고 새삼스럽게 나를 두고 저 사람이 사도이냐? 아니냐며 쓸데없는 말들을 하고 돌아가느냐는 말입니다. 사도 바울은 바로 그 점을 오늘 본문에서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나무를 보아서 열매를 알고 열매를 보아서 뿌리를 압니다. 마찬가지로 사도 바울의 사람됨과 사도됨은 그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 그 사역을 보아서 압니다. 그리고 그의 사역은 그로 인해서 전파되는 복음, 곧 그 복음 안에서 구원받는 백성들을 통하여 알 수가 있습니다. 여기에 바울의 증명서가 있습니다. 그러기에 고린도 교회는 바울의 편지요, 바울의 마음입니다. 따라서 바울이 누구이며, 어떤 사람이라는 것은 고린도 교회스스로가 증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초등학교 1, 2학년 담임 선생님들이 말하는바에 의하면, 가정 방문을해보지 않아도 3개월 동안만 가르치면서 지켜보면 이 아이가 부유한 가정의 아이인지 아닌지, 그리고 아버지의 직업, 어머니의 성품, 어머니와 아버지의 사이가 좋고 나쁜 것, 동생 혹은 형이 있고 없고 등 그 아이가 어떤 가정의 아이라는 것을 환하게 알 수 있다고 합니다. 그것은 그 아이가바로 그 부모의 편지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너희가 우리의 편지라"는 것에서 나아가 이제는"너희는 그리스도의 편지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는 바울의 편지가 바울의 인격이나 지식, 철학 등 바울의 그 무엇을 써서 전달한 것이 아니라 그가 썼으나 그 내용은 언제나 그리스도뿐이었다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바로 여기에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바울이 썼다고 하여 바울 자신의 경험이나 좌우명, 인생관을 쓴 것은 아니란 말입니다. 바울이 쓴 것은 언제나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써서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을 전하는 것이 전부였습니다. 그리하여 그 편지를 읽는 자가 그것을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볼 수가 있고 뜻과 마음을 받아들여 예수를 믿음으로 구원에 이를 수 있도록 하는 것입니다.

    이를 위해 사도 바울은 십자가의 복음을 새겼습니다. 보다 신학적인 말씀을 드리자면 케리그마(kerygma)적 신앙을 조각했다고 하겠습니다. 이 케리그마적 신앙이란 말뜻 그대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성경에 선포된 그대로 오셨고, 성경에 선포된 그대로 죽으셨으며, 성경에 선포된 그대로, 부활하시고, 성경에 선포된 그대로 재림하실 것이라고 하는 신앙을 말합니다. 이 케리그마적 메시지가 사도 바울을 통하여 초대 교회에 전해진 메시지이며, 오늘 여기 고린도 교인들에게 보내진 편지의 내용인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의 편지입니다. 그런데 여기에 자신이 없는 사람들이 많아서 문제입니다. 우리는 성경에서 예수님을 세 번이나 모른다고 부인한 베드로를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만나주신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랬다면 이제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찬양하며, 기쁨으로 예수님의 제자가 되어야 할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어찌된 셈인지 이 베드로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뵈옵고도 물고기를 잡겠다며 갈릴리로 가버리는 것입니다.

    저는 그 부문이 매우 언짢게 느껴지고는 하는데 성경은 거기에 대한 언급을 하지 않고 있습니다.

    하지만, 제가 이 문제를 두고 생각해 본 바에 의하면 아마도 베드로의 마음이 이러했을 것만 같습니다. 즉 "예수님 제가 보이지 않거든 물고기 잡으러 갈릴리로 간 줄 아십시오. 그리고 찾지 마십시오. 저 같은 것을 제자 삼았다가는 예수님 망신만 당하십니다. 어떻게 제가 다시 예수님의제자가 될 수 있겠습니까? 저는 믿을 인간이 못됩니다. 그러므로 사양하겠습니다."하고서는 갈릴리로 갔던 것이 아닌가 하고 느껴집니다.

    이와 같이 오늘도 보면 예수님의 제자가 되고 그리스도의 편지가 된 신분을 사양하는 사람이 많이 있습니다. 그리하여 교회에 나올 때에도 손바닥만한 성경책 한 권 핸드백 속에 집어넣고 달랑 달랑 나오다가 누군가가 "어디가니?"하고 묻기라도 하면 "놀러 간다"하고 마니 이런 것이 다 자신이 없어서 그러는 것이란 말입니다. 그런데 그 중에는 상당히 겸손한사람이 있어서 "저런 것이 다 예수를 믿어"라고 할까봐서 그렇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생각이 우선은 겸손한 것처럼 보일지 모르지만 그것은 결코 아름다운 마음이 아닙니다.

    여러분! 우리는 그리스도인이 된 것을 언제 어디서나 자랑할 수 있어야 합니다. 요즈음 보면, 십자가가 달린 목걸이도 하고 배지들도 많이 다는데 문제는 그 목걸이 그 배지에 부끄럽지 않도록 살라는 말입니다. 교인들이 자동차 뒤에 '잌스투스' 라는 물고기 마크를 달고 다니는 것도 그렇습니다. 어떤 이들은 사서 주면서 달라고 하여도 그것 달고는 아무데나 차를 댈 수 없지 않느냐며 싫어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언제나 그것을 붙이고 다닐 수 있을 만큼 자신이 있는 인생을 살 수 있어야 참된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우리는 그리스도의 편지입니다. 따라서 어디를 가나 편지인 우리를 통하여 그리스도가 나타나고, 그리스도가 보이며, 그리스도가 전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누구든지 위대한 그리스도인을 만난 다음에야 그리스도인이 된다."라는 마리 있는 것입니다. 누구이든 한 번은 예수 잘 믿는 사람을 만나야 "세상에 저런 사람도 다 있군", "나도 예수 믿어 저 사람처럼 되었으면 좋겠다."라는 생각을 하면서 예수를 믿게 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우리는 그리스도의 편지인 나를 통해서 그리스도를 보고, 그리스도에게로 인도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은 이 편지가 육의 심비에 쓰여진 것이라고 했습니다.

    이는 영적인 마음의 비석에다 썼다는 말입니다. 다시 말하면, 영혼 깊이에 새겼다는 말이 되겠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먹으로 쓴 것이 아니라, 영으로 썼다고 말합니다. 여러분! 말씀은 영으로 받고 신령하게 받아야 합니다. 그렇게 할 때, 우리 영혼에 하나님의 말씀이 새겨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설교를 듣거나 성경 공부를 할 때에도 이 사실을 깊이 생각하면서 처음부터 끝까지 영으로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어떤 이들은 설교를 들으면서도 저것은 어느 책에 있는 내용인가? 혹은 무슨 신학인가 하며 잡다한 생각을 많이 합니다만 그런 생각을 하는 동안은 마음에 새겨지는 것이 있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영으로 받는 사람은 하나님께서 성령으로 감화하사 목사님의 입을 통하여 지금 내게 말씀하신다고 생각하며 한 마디 한 마디를 아멘으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그러는 동안에 말씀이 내 마음의 비석에 깊이 깊이 새겨져 어느 사이에 나의 믿음이 성장하고 심령이 변화되어 나의 생각, 나의 언어, 나의 행동, 나의 가치관 등 내 인격의 모든 것들이 아름답게 변화되어 가는 것입니다. 그러노라면 마침내 믿지 않는 사람들이 우리를 보면서도 그리스도의 말씀을 읽게 되고, 그리고 그리스도의 마음을 알게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말씀을 성령의 역사로 받아들이게 될 때 마음에 새겨지게 되는 것이며 그 새겨진 바는 반드시 열매로 나타나게 될 것입니다. 마치 옥토에 떨어진 겨자씨가 언젠가는 반드시 싹을 내고, 그리고 자라서 열매를 맺으며 새들이 깃들이게 되는 것처럼 말입니다.

    이제 우리는 모든 사람이 읽어야 할 그리스도의 편지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똑똑하게 쓰여진 편지, 순수하게 쓰여진 복음의 편지가 되어서 살아가야 합니다. 그리고 좀더 나아가서 생각할 것은 우리 개개인도 사도바울처럼 누구의 마음엔가 그리스도의 편지를 쓰는 필자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그 누구에게든 전도를 하고 성경을 가르치면서 그 마음속에 그리스도의 편지를 써야한다는 말입ㅡ니다. 그렇게 하여 쓰여진 편지가 또 다른 편지를 쓰게 되고 읽혀질 수 있도록 계속 그렇게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하박국 2:2 말씀에 보면 "너는 이 묵시를 기록하여 판에 명백히 새기되 달려가면서도 읽을 수 있게 하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씀이 뜻하는바가 무엇이겠습니까? 그러니까 이는 큰 글자로 분명하게 써서 달려가면서도 읽을 수 있도록 하라는 말씀입니다. 우리의 얼굴, 우리의 마음 깊은 곳에 하나님의 말씀이 분명하게 새겨져서 언제, 어디서, 누구를 만나든 우리의 얼굴을 대하는 사람들이 우리에게서 그리스도를 보고 만나는 것과 같은 마음을 가질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그리하여, 저들이 우리를 만나 하나님의 말씀을 들음으로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구원을 얻게되는 생명의 역사를 일으킬 수 있도록 우리 모두 살아 있는 그리스도의 편지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직접 세상을 구원하는 것이 아니라 구원받은 사람을 통하여 세상을 구원하십니다.
    그러므로 구원받은 사람들을 가리켜 그리스도의 향기 또는 그리스도의 편지가 되라고 합니다.
    향기가 아니라 썩는 냄새가 진동합니다.
    행운의 편지가 아니라 불행을 퍼붓는 편지가 됩니다.
    이러한 현상이 도처에서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편지(便紙)

    오늘의 말씀을 보면 바울은 우리를 가리켜 “그리스도의 편지”라고 말씀합니다. 편지에는 편지를 쓴 사람의 혼과 가슴의 열정이 담겨 있습니다. “너희는 그리스도의 편지라”는 말에는 우리가 세상에 예수님을 홍보하는 정도를 넘어 예수님의 깊은 마음과 열정과 아름다움을 보이고 전해야 한다는 강한 의미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고린도후서 3:1절에서 사도바울은 자신은 다른 사람들처럼 추천서가 필요하지 않는데, 그 이유는 변화된 고린도교인들이 바로 사도들의 사역을 증명해 주는 추천서이며 사도들의 마음에 새겨진 편지이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초대교회 시대에는 거짓선지자나 사이비 이단들을 구별하기 위해 권위 있는 사도들의 추천서가 통용되던 시대였습니다.


     

     

    2절에는 “너희는 우리의 편지라”고 쓰고, 3절에는 “너희는 그리스도의 편지라”고 쓰고 있습니다. 사도들은 예수님으로부터 보냄을 받은 사람들이고 사도들의 편지가 성경이 되었기 때문에, 사도들의 편지는 곧 예수님의 편지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도들이 전했던 분은 오로지 예수님밖에 없었고 그들의 메시지는 곧 예수님의 메시지였습니다. 교회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워졌다고 말씀합니다(엡 2:20). 따라서 지상의 모든 교회는 그리스도의 편지입니다.

     

    저와 여러분은 살아있는 그리스도의 편지입니다. 아직도 우리나라의85%의 믿지 않는 사람들에 의해 읽혀지고 보여 져야 하는 예수님의 편지입니다. 그들은 우리의 삶의 모습을 보고 그리스도를 알게 되고 읽게 됩니다. 그러면 저와 여러분은 어떻게 이 역할을 감당할 수 있습니까?

     

    그리스도의 편지가 되기 위하여

    Key Point. 1

    변화된 삶

    오늘 본문에서 바울은 고린도교인들의 변화된 삶은 뭇사람들이 보고 읽을 수 있는 살아서 움직이는 편지라고 언급합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말에 있지 않고 오직 능력에 있습니다. 그 능력은 변화된 삶으로 증명되는 것입니다. 고린도교인들 중에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과 우리 하나님의 성령 안에서 씻음과 거룩함과 의롭다 하심을 받고 엄청난 삶의 변화를 체험한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고린도전서 6:9-11절은 “불의한 자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줄을 알지 못하느냐 미혹을 받지 말라 음행하는 자나 우상숭배하는 자나 간음하는 자나 탐색하는 자나 남색하는 자나 도적이나 탐욕을 부리는 자나 술 취하는 자나 모욕하는 자나 속여 빼앗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하리라 너희 중에 이와 같은 자들이 있더니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과 우리 하나님의 성령 안에서 씻음과 거룩함과 의롭다 하심을 받았느니라”고 말씀합니다.

     

    130여 년 전 구한 말 우리나라에 복음이 처음으로 들어왔을 때, 선교사님들의 편지에 의하면, 우리나라는 음행과 도박과 술로 인한 방탕함이 진한 구름처럼 덮여 있었다고 적고 있습니다. 선교사님들은 복음이 펼쳐지고 사회가 변화되고 가정이 회복되기 위해서는 먼저 술을 철저하게 억제해야겠다고 생각하고, 교회에 오기 위해서 술을 먼저 끊어야 한다는 지침을 만들었다고 합니다. 이것은 한국교회에서만 볼 수 있는 문화이지만, 남편들의 술과 도박과 음행을 끊게 하기 위하여 여성들이 아기를 업고 새벽기도회에 와서 눈물로 기도했던 것이 변화의 원동력이 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오늘날 한국교회가 능력을 잃었다면 그것은 더 이상 변화가 일어나지 않기 때문일 것입니다. 이 말씀이 우리 모두에게 거룩한 부담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리스도의 편지가 되기 위하여

    Key Point. 2

    말씀으로 늘 새로워지는 마음

    고린도후서 3:3절은 “너희는 우리로 말미암아 나타난 그리스도의 편지니 이는 먹으로 쓴 것이 아니요 오직 살아계신 하나님의 영으로 쓴 것이며 또 돌판에 쓴 것이 아니요 오직 육의 마음판에 쓴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바울은 그리스도의 편지는 성령에 의하여 우리의 마음판에 새겨진 하나님의 말씀임을 강조합니다.

     

    예레미야 31:31-33절은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보라 날이 이르리니 내가 이스라엘 집과 유다 집에 새 언약을 맺으리라 이 언약은 내가 그들의 조상들의 손을 잡고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던 날에 맺은 것과 같지 아니할 것은 내가 그들의 남편이 되었어도 그들이 내 언약을 깨뜨렸음이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그러나 그 날 후에 내가 이스라엘 집과 맺을 언약은 이러하니 곧 내가 나의 법을 그들의 속에 두며 그들의 마음에 기록하여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 백성이 될 것이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고 말씀합니다.

     

    원래 하나님께서 주셨던 옛 언약은 인간들의 마음 밖에 있는 돌판에 새겨졌기 때문에 백성들이 아무리 노력한다고 해도 다 지킬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새 언약은 하나님의 법을 우리의 속에 두며 우리의 마음에 기록하였기 때문에 마음으로부터 우러나와서 지키기를 사모하게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의 하나님이 되시고 우리는 그분의 백성이 됩니다. 이 새 언약은 우리의 중보자이신 예수님의 십자가의 피 흘리심을 통하여 이루어집니다. “이것은 죄 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마 26:28).

     

    새 언약이 우리의 마음판에 새겨졌기 때문에 우리는 말씀을 마음으로 받아야 합니다. 말씀을 접하는 순간 마음으로부터 변화가 우러나와야 합니다(inside out change). 연애편지를 읽듯이 말씀을 가슴으로 읽고 암송하고 묵상해야 합니다. 시편 119:9절은 “청년이 무엇으로 그의 행실을 깨끗하게 하리이까 주의 말씀만 지킬 따름이니이다”라고 말씀하고, 시편 119:11절은 “내가 주께 범죄하지 아니하려 하여 주의 말씀을 내 마음에 두었나이다”라고 말씀하고, 에베소서 5:26절은 교회가 말씀으로 깨끗해지고 거룩해진다고 말씀합니다.

     

    그리스도의 편지가 되기 위하여

    Key Point. 3

    성령을 따르는 삶

    우리가 살아있는 그리스도의 편지가 되기 위하여 성령의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성령의 사람이 되지 아니하면 언제나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에 끌려 살게 됩니다.

     

    고린도후서 3:3절은 “너희는 우리로 말미암아 나타난 그리스도의 편지니 이는 먹으로 쓴 것이 아니요 오직 살아계신 하나님의 영으로 쓴 것이며 또 돌판에 쓴 것이 아니요 오직 육의 마음판에 쓴 것이라”고 말씀하고, 6절은 “그가 또한 우리를 새 언약의 일꾼 되기에 만족하게 하셨으니 율법조문으로 하지 아니하고 오직 영으로 함이니 율법조문은 죽이는 것이요 영은 살리는 것이니라”고 말씀합니다.

     

    돌판에 쓴 율법조문은 우리가 그 기준을 다 지킬 수 없기 때문에 우리를 죽이는 역할을 하는데 반해 하나님의 영으로 우리의 마음판에 새겨진 새 언약은 우리를 살리는 역할, 생명을 주는 역할을 합니다. 육신을 따르지 않고 그 영을 따라 행하는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가 이루어지게 하셨습니다.

     

    성령을 따르는 삶을 4개의 키워드로 설명하면, 생각-순종-고난-기도로 설명할 수 있겠습니다.

    <생각>

    로마서 8:5-6 “육신을 따르는 자는 육신의 일을, 영을 따르는 자는 영의 일을 생각하나니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 - 영의 생각을 합니다.

    <순종>

    로마서 8:14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사람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 - 그의 영의 인도함을 받고 순종합니다.

    <고난>

    로마서 8:16-17 “성령이 친히 우리의 영과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언하시나니 자녀이면 또한 상속자 곧 하나님의 상속자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상속자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할 것이니라” - 고난도 함께 받습니다.

    <기도>

    로마서 8:26-27 “이와같이 성령도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는 마땅히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마음을 살피시는 이가 성령의 생각을 아시나니 이는 성령이 하나님의 뜻대로 성도를 위하여 간구하심이니라” - 성령님의 도우심을 받아 하나님의 뜻대로 기도합니다. 








     

    하나님께서 왜 우리들 각자를 이 세상에 보내셨다고 믿으십니까? 또 우리들이 이 세상에 사는 동안 어떤 사명을 감당하라고 우리들의 생명을 매일 매일 연장 시켜주고 계신다고 믿으십니까? 아니 우리가 이 세상에 사는 동안 어떤 삶을 살아야 우리들 스스로 만족스럽고 떳떳하며, 행복을 느낄 수 있을까요?

    오늘 본문에서는 우리들이 가져야할 우리들의 삶의 가치관을 심어주며 일평생 행복하게 사는 길을 안내해주고 있습니다. 우리들은 이미 하나님께서 그의 아들과 딸이 되도록 특혜를 주신 바 있으나 오늘은 하나님의 딸과 아들들에게 그들이 맡은 일들을 하게 함으로 그로 인해 일평생 행복하도록 행복의 길을 안내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우리들에게 ‘그리스도의 편지’ 또 ‘새 언약의 일꾼’임을 분명히 밝혀주면서 우리들로 그리스도의 편지와 새 언약의 일꾼의 삶을 살므로 행복한 인생을 살도록 귀한 교훈을 주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는 하나님께서 맡겨주신 그리스도의 편지와 새 언약의 일꾼의 역할을 감당하시므로 일평생 행복하시게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오늘 주신 본문을 두 부분으로 나누어 본문의 뜻을 이해하고 본문이 주는 교훈을 찾으며 이 교훈을 우리들의 일상 생활에 어떻게 적용할 수 있겠는지 찾아보도록 하겠습니다. [1]그리스도의 편지(1-5) [2]새 언약의 일꾼(6)입니다.

    [1]먼저 1절부터 5절까지의 그리스도의 편지에 대해 함께 생각해보겠습니다. 사도 바울은 비록 일부이기는 하지만 거짓 선지자들의 충동에 휘말린 고린도 교인들 중에 사도 바울이 신임장이나 추천서를 가지고 있지 않은 가짜 사도이며, 자기 자랑을 일삼고 거짓 복음을 전하는 자라고 험한 비난을 받아왔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이 고린도 교회에 디도 편에 보냈던 눈물의 편지를 통해 이젠 전세가 역전되어 사도 바울에게 거짓 사도라고 뒤집어 씌운 자들이 거짓 선지자들이고 그들이 전한 복음이 거짓 복음으로 판명되어 고린도 교회가 거짓 선지자들과 이들에게 놀아난 무리들을 징계하기에 이르렀던 것입니다. 이 사실을 아는 사도 바울이 고린도 교회가 진리로 재무장하도록 하기 위해 이 글을 쓰고 있는 것입니다. 고린도 교회가 거짓 선지자들에게 현혹되었던 문제가 바로 사도 바울의 사도권이었습니다. 즉 거짓 선지자들인 자기들은 추천서 즉 자격증을 서류상으로 가지고 있는데 사도 바울은 사도로서의 어떤 추천서를 서류상으로 가지고 있지 않으므로 사도 바울은 거짓 사도요 자칭 사도라는 것이었으며, 구원을 받기 위해서는 마땅히 율법을 다 지켜야 하는데 사도 바울은 복음을 믿음으로 구원받는다고 하니 그가 가르친 진리도 가짜라는 것입니다.

    고린도 교회에 어떤 선지자들이 와서 그럴듯한 자격증을 내 놓고 그렇게 교인들을 설득시키면 상당수의 교인들이 이에 현혹되지 않겠습니까? 그런 이유로 몇몇 성도들이 거짓에 유혹되어 사도 바울을 향해 거세게 비난을 하고 도전하는 큰 범죄를 저지른 것입니다. 이런 여건이 되므로 사도 바울은 추천서를 갖고 있다는 그들이 오히려 거짓 선지자들이고 자신이 진짜 사도라고 강조하다보니 그 반대파들이 볼 때에는 자기 자랑이나 내 놓고 자신만이 옳고 남들은 옳지 않다는 인상을 심어주게 되어 더욱 비난을 받기에 이르렀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는 거짓에 유혹을 당했던 무리들도 누가 진짜이고 누가 가짜인지 어느 정도는 분별할 수 있게 되었으므로 사도 바울로는 자신을 가지고 추천서가 없는 자신과 추천서가 있는 거짓 선지자들을 구별하여 진리를 호소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1절에서 왜? 자기가 자신을 소개해야하는 그런 절차가 필요하겠느냐고 반문하면서 말문을 열게 됩니다. 추천서와 이력서는 언제 필요한 것입니까? 처음 입사할 때에 필요한 것입니다. 이미 일을 하고 퇴직했는데 그 때에 추천서를 가져오라고 한다면 정신이 나간 사람이라는 판단을 받게 될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 도시에 주후 54년경에 가서 1년 6개월 동안 어려움을 무릅쓰고 우상과 부패의 대명사 고린도 도시에 복음을 전하고 구원받는 성도가 태어나게 하므로 고린도 도시에 교회가 세워지는 기적을 이룩했었는데 지금 고린도 후서를 쓰고 있는 시기는 주후 60년경인 것입니다. 전도한지 5-6년이 지난 그 때에 편지하기를 내가 왜? 이제 와서 무슨 추천서나 자격증을 고린도 교회에 내놓아야 하겠느냐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면서 추천서가 없는 사도 바울 자신과 추천서를 가지고 자랑한 거짓 선지자들과의 차별화를 분명히 밝혀주고 있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자신이 문서로 추천서를 갖고 있지 않은 것은 자기를 사도로 세우신 이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시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어떤 사람이나 어떤 단체가 자기를 사도로 세웠다고 한다면 어떤 문서가 있을 수 있겠지만 예수님께서 자기를 사도로 직접 부르셨기 때문에 주님께서 발행하시지 않은 사도증을 어디에서 얻어 가지고 올 수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만일 사도 바울이 문서로 된 사도증을 가지고 다닌다면 그가 진짜 가짜 사도임을 증명하는 사도증이 되지 않겠습니까? 또 무슨 추천서를 가지고 오라고 하는데 이미 1년 6개월간 고린도 교회에서 개척전도를 하면서 모든 어려움을 겪고 참으면서 자신이 고린도 교인들 하나하나를 심히 사랑하며 사귄 나머지 고린도 교인들의 한분 한분이 지워지지 않을 사도 바울의 마음에 다 새겨져 있다는 것입니다. 고린도 교회 교인들을 향한 사도 바울의 마음에서 울어나는 사랑 바로 그것이 사도 바울의 추천서라는 것입니다.

    또 이미 수년간 사도 바울의 신앙 지도를 받아 영원히 죽을 수밖에 없는 고린도 사람들이 사도 바울이 전한 복음을 받아드려 이미 구원받는 자리에 들어섰고 삶이 변화되어 변화된 삶을 세상 사람들에게도 완연히 보여주고 있으므로 죽을 영혼이 구원받고 또 삶이 변화되게 한 그 사실이 지을 수 없고 살아있는 추천서인데 또 다른 무슨 추천서가 있어야 하겠느냐는 말입니다. 사실이지 않습니까? 이미 고린도 교인들은 그리스도의 정신을 외부 사람들에게 전달하는 그리스도의 편지가 다 되었으므로 그렇게 되도록 사역을 한 사람이 사도 바울이므로 사도 바울이 그것 말고 어떤 다른 추천서가 전연 불필요함을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사도 바울은 거짓 선지자들이 자랑거리로 휴대하고 다니는 추천서와 사도 바울이 가지고 있는 추천서를 비교하면서 자신의 추천서가 진짜임을 증명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거짓 선지자들이 써온 추천서는 종이에 먹으로 쓴 것이나 자신이 가지고 다니는 추천서는 사람들의 마음 바탕에 영으로 썼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거짓 선지자들이 구약의 율법을 지켜야 행위로 구원받는 다고 가르치면서 사도 바울이 복음을 믿음으로 구원받는다고 가르친 것은 틀린 진리라고 가르친 것에 빗대어, 거짓 선지자들은 돌 비에 쓴 것이지만 자기가 가진 추천서는 영으로 육의 심비에 즉 사람들의 마음에 썼다고 설득시키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돌 비와 하나님의 영’은 모세가 받은 십계명 돌 판을 비유한 것으로 거짓 선지자들이 강조하고 있는 율법과 사도 바울이 강조하고 있는 복음을 대조하기 위해 표현된 것입니다. 즉 추천서나 면허증을 가지고 있다고 하면서 사람들을 구원에 이르게 하기는커녕 멸망의 자식들이 되게 하는 거짓 교사들을 분명히 밝혀주어 고린도 교인들이 다시는 거짓 선지자에게 빠져들어 가지 않도록 판단력을 키워주고 있는 것입니다.

    [2]두 번째로는 6절의 새 언약의 일꾼에 대해 함께 생각해보도록 하겠습니다. 다음 주에 새 언약과 옛 언약의 비교가 자세히 나오지만 옛 언약 즉 구약인 율법을 지켜 나가는 인간의 행위로는 사람이 구원을 얻을 수 없고 오직 새 언약 즉 복음을 믿음으로 구원을 받을 수 있음을 전제하고 하나님께서 사도 바울과 그 동역자들에게 새 언약의 일꾼이 되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다른 말로는 고린도 교회를 혼란케 한 거짓 교사들은 사람을 결과적으로 멸망케 한 율법을 소개한 율법의 일꾼들이었음을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반대파 무리들이 사도 바울은 자기 자랑을 일삼는다고 비난했는데 사도 바울은 자기가 잘나서 새 언약의 일꾼이 된 것이 아니라 자기들에 나타난 모든 것은 하나님으로부터 된 것이며, 모든 확신과 행복은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임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 세대에도 자기 소개서가 거창한 추천서가 있는 교회 지도자들이 있는데 그들이 영혼의 구원보다는 자기 교파나 조직을 키워 사람의 명예를 높이며 사람수에 따라 자연히 늘어나는 재정으로 자기 만족을 위해 활용하는 일꾼들이 얼마든지 가능한 이 때에 추천서가 있는 거짓 일꾼들 중 복음에 어긋난 교훈으로 가르치는 자는 하나님이 보내신 일꾼이 아니라는 판단력을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이기도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들은 오늘 주신 본문 말씀을 통해 어떤 교훈을 받았으며 이 교훈을 우리들의 일상 생활에 어떻게 적용할 수 있겠습니까?

    첫째는 우리 모두가 그리스도의 편지가 되어야 하겠다는 교훈입니다. 
     
    성경에는 그리스도의 말씀과 교훈이 많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믿지 않는 자들이나 성경을 읽어보지 못한 자들은 그리스도의 말씀이 무엇인지를 모를 것이므로 성도들의 삶을 통해서 그리스도께서 교훈하시고 가르친 모든 것을 실천하므로 이를 본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가르침과 교훈을 깨닫게 하여야 한다는 뜻입니다. 
    즉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가르치는 것으로 끝나지 않고 배운 것을 일상 생활에서 적용하므로 내 속에서 그리스도께서 일하신 것을 보여줄 수 있어야 하겠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삶을 2쳔년이 지난 지금에는 직접 볼 수 없으나 우리 들의 삶을 통해 그리스도의 삶을 대략 보여줄 수 있는 작은 그리스도들이 다 되라는 것입니다. 
    작은 그리스도가 되는 길은 무엇을 하든지 그리스도라면 이 일을 어떻게 처리하였을까를 생각하며 기도로 얻은 응답대로 행동하라는 것입니다. 내 자신은 다른 길을 원하지만 그리스도라면 내가 가고자 하는 길이 아닌 다른 길을 택했을 것으로 믿어지면 바로 그 길을 가야 하는 것입니다. 작은 그리스도가 되는 삶은 고되고 손해보는 길일 수 있습니다. 때로는 바보라는 소리를 들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가 가라는 길을 간 사람은 그 마음이 행복하며 만족한 삶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바로 이런 자들의 삶에 복을 부어주시며 주님 오실 때에 눈물과 모든 고통을 다 갚아 주실 것입니다.

    두 번째로는 새 언약의 일꾼들이 다 되라는 교훈입니다. 하나님이 한 분이시오 그리스도가 한 분이시며 성경이 하나임에도 불구하고 사도 바울 시대에 있었던 다른 복음을 전하는 일꾼들이 지금에는 더욱 폭이 넓어져 있습니다. 많은 교파와 많은 지도자가 있는 이 시대에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에게 새 언약의 일꾼이 되라고 하십니다. 사람들에게 구원의 멧세지를 전하는 성실한 종들이 되라고 하십니다. 이 말은 어떤 종들은 구원과 상돤없이 자기 몸만 실찌게 하는 종들이 있다는 것을 전제한 말입니다. 우리들에게는 많은 선택이 있습니다. 새 언약의 종이란 어떤 교파가 만든 교리나 어떤 학자가 만든 신학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만 따르는 길입니다. 내가 지금까지 어떤 길을 걸어왔던지간에 보다 성서적인 길이 있다면 그 길을 가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이 어떻게 말을 하더라도 주님이 성경에 가라하신 길이 아니라면 그 길을 가는 것은 보장이 없는 길입니다. 자기 만족을 위해 자기 욕심을 위해 성서적인 길을 알면서도 자기가 원하는 길을 택했다면 그것은 그리스도가 원하시는 길은 아닙니다. 우리들을 현혹하는 교파도 교회도 많습니다. 그 중에 어떤 교회가 보다 성서적이며 그리스도 중심인지를 분간하여 보다 성서적이며 보다 그리스도 중심적인 신앙 생활하는 길을 택해야 하는 것입니다.

    판단 기준이 사람이 많이 모인 곳이 제일 안전하겠지? 하는 말도 들어 보았습니다. 많이 몰린 통일교나, 여호와의 중인이 올바른 교회라는 결론을 내릴 수가 없습니다. 수가 많은 교파가 장로교이니 그 교파가 가장 안전하다는 결론을 내리는 것도 결론을 내리는 기준이 옳지 않습니다. 오직 기준은 어느 길이, 어느 교회가 보다 성서적이며 그리스도 중심적이냐여야 합니다.

    모든 성도님들이 모두 새 언약의 일꾼들이 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4) 거짓 선생들의 비방에 대한 변호와 주장(10-12장)

    바울은 자신의 외적 모습(약하고 말도 시원하지 않음)에 대한 지적하는 것에(10:10-11) 대해 외모만 보는 어리석음에 대하여 책망하고, 자기를 칭찬하는 자와 짝하며 비교할 수 없으며, 자랑하는 자는 주 안에서 자랑해야 하고(10:12, 17), 자신이 비록 말에는 부족하나 지식에는 그렇지 않을 뿐만 아니라(11:16). 바울은 교회를 위한 사랑과 염려, 자신의 약한 것을 자랑한다(11:23-30). 아울러 바울은 자신이 지극히 큰 환상과 계시를 보았음에도 자만하지 않게 하시려고, 사탄의 사자를 주셔서 교만하지 않고, 자신의 약함을 고백하며 주님을 의지할 수 있도록 하셨음을 말하면서 자신의 능력은 약한 데서 온전하여 진다는 것을 강조한다(12:7-10). 그리고 수많은 핍박과 고난을 견디며 표적과 기사와 능력을 행한 것이 진정한 사도라는 것을 증거한다고 강하게 주장한다(12:11-13).

     

    5) 고린도 교회 방문계획을 말함(12-13장)

    바울은 세 번째 고린도 교회에 가기를 준비하고 있는데 그것은 단순히 재물 때문이 아니라 오직 고린도 교회 성도들 때문인 것임을 강조하면서(12:14-21), 이번에는 약속이 변경되지 않도록 확실하게 갈 수 있도록 두세 증인의 입으로 확정할 뿐만 아니라(13:1), 이번에 가게 되면 전에 죄 지은 자들을 용서하지 아니할 것이며(13:2), 너희가 믿음 안에 있는가 확증하며, 너희가 악이 아니라 선을 행하고, 온전하게 되기를 간절히 바란다는 것을 밝힌다(13:5-10).

     

     

    1. 특징

    1) 솔직하고 자서전적 서신

    고린도전서가 교회 내의 문제에 대하여 필요한 내용들을 순차적으로 대답함에 비해, 고린도후서는 바울 스스로가 포착한 문제들에 대해 공격적 어조로 변호하며 사실을 밝히고 있다. 그러한 가운데 바울의 심정 깊이에서 우러나오는 고백, 극과 극의 감정, 즉 자랑과 약함, 감사와 노여움, 엄격과 부드러움이 교차적으로 나타나 인간 바울의 풍부한 감정을 잘 보여준다. 그러나 여기에는 변덕스런 고린도 교인들을 향한 바울의 위대한 목자의 사랑이 잘 나타나 있다.

    2) 복잡한 구조 속에 드러나는 복음의 진수

    고린도후서는 고린도전서에 비해 구조가 복잡하다. 여러 학자들은 고린도전서에서 후서로 들어설 때는 마치 정연한 공원길에서 길도 없는 숲을 헤치며 들어가는 느낌이라고 말한다. (어떤 이들은 신약 성경 가운데 고린도후서만큼이나 번역자들과 해석자들을 난관에 빠지게 하는 것도 없다고 할만큼 복잡하고 난해하다.) 그러나 이 편지에서 자기의 사적인 이야기나 자신의 사도권을 두서 없이 변호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자신은 새 언약의 일꾼임을 밝히면서 돌판에 새겨진 외적인 율법이 아니라 마음에 새겨진 하나님의 법에 따라 성령님의 인도하심에 따라 행해야 하고, 외적인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하여 관심을 가져 새 언약인 복음의 가르침에 더욱 집중해야 함을 강조한다.

     

    3) 다양한 비유를 통한 성도의 정체성에 대한 강조

    본서에는 고린도전서의 부활장(15장)과 같은 독특한 신학사상을 강조한 내용은 두드러지지 않지만 다양한 비유들을 통하여 자신과 성도의 정체성에 대하여 표현해주고 있다. 예를 들어 그리스도의 향기(2:14-17), 그리스도의 편지(3:3), 보배를 담은 질그릇(4:7), 새로운 피조물(5:17-19), 그리스도의 사신(5:20), 하나님의 성전(6:14-18) 등의 표현 등 성도가 어떠한 모습이어야 하는지에 대하여 이해를 잘 할 수 있도록 설명한다.

     

    1. 구조

    1) 인사말(1:1-11)

     

    2) 사도권에 대한 소극적 해명(1:12-7:16)

    ① 해명을 시작하는 말(1:12-14)

    ② 고린도 방문 계획의 변경에 대한 해명(1:15-2:13)

    ③ 사도직의 확실성과 그에 대한 바른 자세의 해명(2:14-5:10)

    ④ 화목케 하는 자로서의 사도의 직무(5:11-7:16)

     

    3) 예루살렘 교회를 위한 구제 연보(8:1-9:15)

    ① 마게도냐 교회의 구제 연보의 모범(8:1-5)

    ② 구제 연보의 권면(8:6-15)

    ③ 구제 연보를 위한 위원 파견(8:16-9:5)

     

    4) 사도권에 대한 적극적 주장(10:1-13:10)

    ① 사도권에 근거한 권징의 의지(10:1-11)

    ② 사도권을 입증하는 구체적 증거들(10:12-12:10)

    ③ 사도권 주장에 대한 최종 변론(12:11-13)

    ④ 세 번째 고린도 방문 계획 예고와 결론(12:14-13:10)

     

    5) 끝인사(13:11-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