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개(Haggai) 08-16-2023(수) 여호와의 축제, 나의 절기


학개서 (Haggai) 성경공부


성경본문:    학개서 2:1-9


1. 학개서 서론(序論)

■  학개서의 이름
학개서는 성전건축에 관한 책입니다.
히브리어 성경은 선지자의 이름을 따라 ‘학가이’(יגח: ‘축제, 잔치, 나의 기쁜 향연’)이라고 했습니다.
70인역 성경(Septuagint)의 이름은 ‘악가이오스’(ΑΓΓΑΙΟΣ)입니다.
한글성경도 선지자의 이름을 따라 ‘학개서’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  학개서의 저자와 기록연대
학개는 선지자 스가랴와 총독 스룹바벨과 같은 시대에 활동하던 선지자입니다(1:12, 13, 2:1, 20).
학개서의 기록연대는 페르시아 왕 다리오 1세(주전 522-485)가 팔레스틴을 통치하던 시기입니다.

■  학개서의 기록목적
기록목적을 요약하면, ① 일어나 성전을 재건하라는 것을 알려 주고, ② 포로에서 돌아온 백성들의 안일함을 책망하고, ③ 새로운 용기와 격려를 주기 위한 것입니다.

■  학개서의 주제와 중심사상
학개서의 주제는 ‘성전을 재건하자!’는 것입니다.
중심사상은 ① 하나님께 대한 예배생활이 모든 삶의 우선이며, ② 그리하면 축복과 번영이 오리라는 사상입니다.


2. 학개서의 본론(本論)

학개서는 포로생활 후에 예루살렘에 귀환한 백성들을 향해 “성전을 재건하여 하나님 경외하기를 소홀하지 말자!”라고 외쳤던 메시지입니다.
그의 메시지를 간략하게 구분하면,
1:1-15까지는 ‘성전을 재건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이고(무관심에서 성전 재건으로), 2:1-9까지는 성전 재건을 하면 어떤 결과가 올 것인가라는 격려와 약속의 메시지(낙심에서 성전 재건으로), 2:10-19까지는 정결한 제물의 생활을 하게 되면 복이 임한다는 메시지(오욕에서 축복으로), 그리고 2:20-23까지는 스룹바벨에 대한 미래의 축복의 메시지입니다.

첫째, “성전을 재건하라”고 하시는 하나님의 명령(1:1-15)
    (1) 2절에서 백성은 왜 “여호와의 전을 건축할 시기가 이르지 아니하였다”라고 말합니까?
    (2) 그들이 많이 뿌리는데 어떻게 수입이 적을 수 있습니까?
    (3) 하나님은 백성에게 무엇으로 전(殿)을 건축하라고 말씀하십니까?
    (4) 하나님의 전(殿) 역사가 어떻게 되어졌습니까?

Q.T.를 위한 신앙적 질문 -- 당신은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의 귀중함을 아십니까? 하나님의 전에 나올 때 어떤 마음으로 나옵니까?

둘째, 성전 재건에 대한 격려와 약속의 메시지(2:1-9)
    (1) 스룹바벨과 여호수아(=예수아)는 그 당시에 무슨 직책의 사람들이었습니까?
    (2) 7절에 “만국의 보배”는 무엇을 가리킵니까?
    (3) 9절에 “이 전(殿)의 나중 영광이 이전 영광보다 크리라”고 말씀하셨는데, 그 의미는 무엇입니까?

Q.T.를 위한 신앙적 질문 -- 당신은 어떻게 마음에 평강을 지속적으로 가질 수 있습니까?

셋째, 정결한 제물의 생활에 대한 축복의 약속(2:10-19)
    (1) 하나님께서 백성들의 모든 일들이 부정하다고 말씀하시는 까닭은 무엇입니까?
    (2) 하나님은 백성들의 완악함을 어떻게 표현하셨습니까?
    (3) 하나님의 축복은 유다 백성들에게 어떤 모양으로 임합니까?

Q.T.를 위한 신앙적 질문 -- 당신은 삶에서 하나님의 축복의 비결을 깨달으십니까? 현재 당신을 향하신 하나님의 축복이 무엇입니까?

넷째, 스룹바벨에 대한 미래 축복의 메시지(2:20-23)
    (1) 하나님께서 하늘과 땅을 진동시키고 열국의 보좌를 엎으시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2) 하나님께서 스룹바벨에게 복 주시는 까닭은 무엇입니까?

Q.T.를 위한 신앙적 질문 -- 하나님께서 당신을 사용하셔서 하시고자 하시는 일이 무엇입니까? 당신은 어떤 방법으로 하나님께 당신을 드립니까?


3. 결론(結論)--학개서의 핵심적 교훈
학개서의 핵심적 교훈은, ① 성전 건축에 대한 나의 선입견을 수정해야 하며, ② 자신의 소유를 살피므로 영적 성전에 대한 건축도 가르칩니다.



*생활적용과 기도(祈禱)
1. 주님! 우리가 하나님을 온전함과 거룩함으로 예배하게 하옵소서!
2. 주님! 우리에게 하나님의 한없는 평강 안에 거하게 하옵소서!
3. 주님! 우리로 하나님의 나라 자녀 삼아주심을 늘 감사하게 하옵소서!


*학개서가 예언하는 그리스도
1.    성전은 그리스도의 몸
2.    만국의 보배 (2:7)



08-17-2023(목)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만국의 보배(2:7)

또한 만국을 진동시킬 것이며 만국의 보배가 이르리니 내가 영광으로 이 전에 충만케 하리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I will shake all nations, and the desired of all nations will come, and I will fill this house with glory,' says the LORD Almighty.

만국의 보배(the desired of all nations)

헤므다트 콜 학고임( חֶמְדַּת כָּל־הַגֹּויִם)

보배(2532) 헤므다(chemdâh) חֶמְדָּה 

1. 바람,  2. 기쁜 것,  3. 기쁨
발음 / 헤므다[ chemdâh ]
관련 성경 / 사모하는 자(삼상 9:20), 아끼는 자(대하 21:20), 은총을 입은 자(단 9:23), 귀한 땅(렘 3:19, 12:10), 은총을 받은 사람(단10:11,19), 보물(단11:38,43). [형] 좋은(창27:15, 단10:3), 보배로운(스8:27), 귀한(대하36:10, 렘25:34), 아름다운(사2:16, 단11:8, 나2:9), 기뻐하는(겔26:12). 보배의(호13:15, 학2:7).
구약 성경 / 16회 사용

만국(3605. 1471)

3605. 콜( kôl)  כֹּל

1. 전체,  2. 모두,  3. 온통.
발음 [ kôl ]
어원 / 3634에서 유래
구약 성경 / 5408회 사용

* 3634. 카랄(kâlal)  כָּלַל

1. 완성하다,  2. 왕관을 쓰다
발음 / [ kâlal ]
관련 성경 / 온전하게 하다(겔 27:4, 11).
구약 성경 / 2회 사용




1471. 고이(gôwy)  גּוֹי

1. 국민,  2. 이스라엘 사람들,  3.이스라엘 이외의 민족들
발음 / [ gôwy ]
어원 / 1465와 동형에서 유래한 것으로 보임[‘한 덩어리가 된다’는 뜻에서]
관련 성경 / 나라(창 10:5, 민 14:12, 시 83:4), 여러 나라(민 14:15), 민족(창 12:2, 신 4:34, 수 23:13), 고임(창 14:1), 만민(창 18:18), 백성(창 20:4, 수 3:17, 사 60:12), 국민(출 34:10), 족속(창 48:19, 출 33:13), 이방나라들(출 34:24, 레 26:33, 45), 주민(레 18:28, 합 2:8), 이방인(레 25:44, 느 5:8), 나라 사람(신 4:6), 무리(왕하 6:18), 이방 사람(왕하 17:8), 만국(대상 16:35), 만방(사 2:2), 대적(사 18:2), 조상(겔2:3), 이방 신(말 1:11).
구약 성경 / 556회 사용

* 1465. 게바( gêvâh) גֵּוָה 

1. 몸,  2. 신체, 3. 욥 20:25.
발음 [ gêvâh ]
관련 성경 / 몸(욥 20:25).
구약 성경 / 1회 사용


만국의 보배(the desired of all nations)가 무엇일까요?

보배(헴다트.  חֶמְדַּת)는 문자적으로 '열망' 또는 '사모하는 것' 혹은 '귀중한 것'을 말합니다.
보배에 대한 해석은 두 가지로 설명합니다.

첫째는 그리스도(Jeromem R. L. Aldon)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전에 임하실 때 온전한 영광으로 가득 차게 될 것임을 시사합니다.

둘째는 은과 금과 같은 귀중한 것(70인역, P. A. Verhoef,  Von Orelli, Calvin)
만국이 가져오는 재물로 지은 하나님의 성전의 영광이 이전의 솔로몬이 지었던 성전보다 훨씬 더 영광스러울 것임을 시사합니다(9절).

두 가지 견해는 나름대로의 타당성을 지니고 있을 뿐만 아니라 서로 상반된 것처럼 보이나 한 가지 흐름을 갖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성취되는 것은 그리스도의 도래로 말미암아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서 본 구절의 '보배'를 그리스도로 해석하든 재물로 해석하든 간에 그것은 기독론적인 측면에서 이해되어야 합니다(T. V. Moore).

때가 이르면 열방들은 그리스도를 고대하며 바라보게 될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성전을 짓기 위해서 재물을 가지고 오게 될 것이라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스룹바벨
스가랴 4:6-10
6. 그가 내게 일러 가로되 여호와께서 스룹바벨에게 하신 말씀이 이러하니라 만군의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이는 힘으로 되지 아니하며 능으로 되지아니하고 오직 나의 신으로 되느니라
7. 산아 네가 무엇이냐 네가 스룹바벨 앞에서 평지가 되리라 그가 머릿돌을 내어 놓을 때에 무리가 외치기를 은총, 은총이 그에게 있을찌어다 하리라 하셨고
8. 여호와의 말씀이 또 내게 임하여 가라사대
9. 스룹바벨의 손이 이 전의 지대를 놓았은즉 그 손이 또한 그것을 마치리라 하셨나니 만군의 여호와께서 나를 너희에게 보내신 줄을 네가 알리라 하셨느니라
10. 작은 일의 날이라고 멸시하는 자가 누구냐 이 일곱은 온 세상에 두루 행하는 여호와의 눈이라 다림줄스룹바벨에 있음을 보고 기뻐하리라.


베드로전서 2:4
사람에게는 버린 바가 되었으나 하나님께는 택하심을 입은 보배로운 산 돌이신 예수에게 나아와.

베드로전서 2:7
그러므로 믿는 너희에게는 보배이나 믿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건축자들의 버린 그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고.

시편 118:22
건축자의 버린 돌이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나니.



새번역 / 또 내가 모든 민족을 뒤흔들어 놓겠다. 그 때에, 모든 민족의 보화가 이리로 모일 것이다. 내가 이 성전을 보물로 가득 채우겠다. 나 만군의 주가 말한다.

현대인 / 모든 나라를 뒤흔들어 놓겠다. 온 세상의 보물이 이리로 굴러들어올 것이며 내가 이 성전을 영광으로 충만하게 할 것이다.

공동번역 / 뭇 민족도 뒤흔들리라. 그리하면 뭇 민족이 보화를 가지고 오리니, 내가 내리는 영광이 이 성전에 차고 넘치리라. 야훼의 말이다.

 
하나님의 명령을 들은 이스라엘 백성들은 성전 재건을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공사를 시작한 지 한 달이 채 못되어 공사는 또다시 중단됩니다.
그것은 이 성전의 위세가 솔로몬의 성전과 비교도 안 될 만큼 초라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또다시 학개를 통하여 비록 지금 짓고 있는 성전이 예전의 솔로몬 성전만큼은 못하지만 하나님의 영광은 더 크게 빛날 수 있음을 보여주면서 계속 재건해 나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학개가 전하고 있는 메시지의 핵심은 하나님의 은혜를 받는 방법이 어떤 외형적 조건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의지하는 진실한 믿음에 있으므로 낙심치 말고, 실망치 말고 계속 성전을 재건해 나가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사실 인간의 판단은 그 대상의 외모를 기준 삼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스룹바벨 성전의 기초석이 놓여질 때 이전 솔로몬 성전의 위용을 기억하고 있던 많은 이스라엘의 원로들은 큰 슬픔과 실망에 빠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들은 하나님의 영광이 이스라엘을 떠나버린 것이 아닌가 하고 의심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때 학개를 통하여 하나님께서 주신 '이 성전의 나중 영광이 이전 영광보다 크리라'고 하는 말씀은 계시의 점진성이라는 측면에서 볼 때 예수 그리스도를 향하고 있는 구속사의 관점에서 희망찬 메시지라고 하겠습니다.

결국 모든 것은 메시아가 이 땅에 오심으로 분명하게 드러나게 될 것입니다.
그때까지 이해할 수 없는 것은 믿음으로 묻어놓고 이해되는 것을 자랑하며 내 삶의 자리가 주님을 맞이할 수 있는 이전보다 더 거룩하고 견고한 믿음의 반석으로 다져지기를 소망하며 기도합니다. 

오 주여
오늘도 진실하게 하옵소서
늘 새롭게 하여 주옵소서







살믕의 임배로 마장차 도래할 메시아 사의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의 부정한 과거의 죄악에 대하여 말씀하시면서 그로 인하여 임하였던 재앙을 기억할 것을 명하셨습니다.
그러나 백성이 여호와의 말씀을 청종함을 인하여 다시 그들에게 복을 내려 주실 것을 약속하셨습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언약은 그리스도를 보내심으로써 내려 주실 구원의 축복을 지향하고 있습니다.


[신학주제]
계시의 점진성. 성전의 첫 유래는 모세 시대의 성막이었다. 그러다가 이것이 솔로몬 시대에 이르러서 고정적인 형태인 성전으로 바뀌었다. 그리고 신약 시대로 넘어와서는 교회 형태로 바뀌었다. 이것은 외형적인 면에서는 규모의 축소나 형태의 단순화일지는 모르지만 그 성전이 갖는 의미는 각별하다. 구약에서는 하나님이 성막이나 성전 가운데 영광으로 임하셨지만 신약으로 넘어와서는 그리스도가 친히 성전으로 임하신 것이다. 따라서 성전이 갖는 의미는 구약의 성전이나 성막보다도 그 의미 면에 있어서는 더 크다 할 수 있겠다. 따라서 구약의 성전처럼 건물이나 형태의 외형적인 면에 의미를 부여해서는 안 된다. 신약의 성전은 건물의 의미를 초월하여 장차 메시야의 완전한 구원 사역을 예고하고 있는 것이기도 하다. 즉 신약의 성전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는 심판의 날에 완전하고도 새로운 예루살렘의 형태로 임하셔서 성도들을 구원하실 것이다 여기서 예루살렘이란 성과 성전의 의미를 둘 다 지니 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성전을 통한 하나님의 계시는 성막보다는 성전에, 성전보다는 신약의 교회에 더 완전한 계시의 의미가 부여되어 있다고 볼 수 있다.  


[영적교훈]
본장을 통해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성전이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이심과, 또한 그가 성전으로 오셔서 우리들로 하여금 성전 중심의 삶을 요구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 역시 성전을 통하여 성도들을 구원시킬 것이라는 사실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신약의 성도들은 무엇보다 성전 중심의 삶을 살아가야 하는 것이다.








각자도생(各自圖生) : 제각기 살아 나갈 길을 꾀함




08-16-2023(수)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전을 건축하라(학개 1:8)

너희는 산에 올라가서 나무를 가져다가 전을 건축하라 그리하면 내가 그로 인하여 기뻐하고 또 영광을 얻으리라 나 여호와가 말하였느니라.
Go up into the mountains and bring down timber and build the house, so that I may take pleasure in it and be honored," says the LORD.

전을 건축하라(build the house)
우베누 합바이트(וּבְנוּ הַבָּיִת)

전(1004) 바이트(bayithבַּיִת

1. 집,  2. 장막, 3. 왕하23:7.
발음 / 바이트 [ bayith ]
어원 / 연계형 בֵּית, 복수 어미활용 בָּתֵּיהֶם ,בָּתֵּיכֶם ,בָּתֵּינוֹ, 1129에서 유래한 약어로 보임
관련 성경 / 집(창 7:1, 레 14:35, 삼상 1:7), 권속(창 18:19, 레 16:6, 삼하 2:3), 궁(창12:15, 삼하7:2), 처소(창 24:31, 대하 5:7), 집 안(창27:15, 시55:14),전(출 34:26, 신 23:18), 옥(창 39:20, 삿 16:21,왕하 25:27), 간수장(창 39:21), 궁중(창 45:2,왕하 21:33, 에 7:8), 가족(창 5:22, 신11:6, 시 68:6), 족속(출 2:1, 레 22;18, 수 17:17), 식구(출 12:3), 안쪽(출 28:26), 가옥(레 14:55, 신 19:1, 사 5:8), 친정(레 22:13), 종족(민 1:2, 대상7:4), 지도자(민 25:14), 지파(수 22:14), 신전(삿9:4,왕하19:37, 대상10:10), 신당(삿17:5), 궁내(왕하10:5), 성전(왕하16:18, 대상29:3), 창고(왕하20:13), 궁궐(왕하 21:18, 대상 14:1), 성막(대상 9:23), 궁전(대상 17:1), 곳간(대상 26:15,사 22:8), 반열(대상 28:13), 내전(內殿)(대하3:13), 무더기(욥 8:17), 가산(욥 20:28), 국고(사 22:15), 딸(사 10:32), 부엌(겔 46:24), 집(미 2:2).
구약 성경 / 2036회 사용

건축하라(1129) 바나(1129)  בָּנָה 

1. 짓다,  2. 왕상 6:15,  3. ~위해 집을 짓다 / 렘 24:6
발음 / 바나[ bânâh ]
관련 성경 / 쌓다(창 11:5, 신 27:5, 애 3:5), 건축하다(민 32:37, 대하 6:2, 느 2:18), 만들다(신 20:20, 겔 27:5, 창 2:22), 세우다(룻 4:11, 왕상 11:38, 렘 45:4), 증축하다(대하 27:3), 짓다(욥 27:18, 전 2:4, 렘 35:9), 건설하다(시 122:3, 사 25:2), 건축되다(겔 36:33, 잠 24:3, 슥 1:16), 번성하다(말 3:15), 얻다(창 16:2, 30:3), 복구시키다(사 44:26).
[명] 건축(왕상 6:9), 건축자(왕상 5:18, 스 3:10).
구약 성경 / 373회 사용

판벽한(5603) 사판(çâphan) סָפַן 
1. 덮다.  2. 마루를 깔다
발음 / 사판[ çâphan ]
관련 성경 / 덮다(왕상 6:9, 7:3, 7), 준비하다(신 33:21), 입히다(렘 22:14), 판벽(板璧)하다(학 1:4).
구약 성경
6회 사용

기뻐하고(7521) 라차흐[ râtsâh ]   רָצָה 

1. 기쁘게 여기다,  2. 만족하다, 3. 니팔형 : 호의를 가지다
발음 / 라차흐[ râtsâh ]
관련 성경 / 기쁘게 하다(대하 10:7), 누리다(대하 36:21), 기뻐하다(대상 28:4, 시 44:3, 잠 3:12, 학 1:8), 은혜를 베풀다(시 85:1, 77:7), 즐거워하다(시 102:14), 기쁘게 받다(전 9:7, 렘 14:10, 겔 20:40), 베풀다(시 40:13), 드리다(미 6:7), 칭찬하다 (시 49:13), 연합하다(시50:18), 기쁘게 받다(레 1:4, 19:7, 22:29), 화합하다(삼상 29:4), 사모하다(대상 29:3), 은혜를 구하다(욥 20:10).
구약 성경 / 56회 사용





전을 건축하라는 말씀은 선지자 학개의 첫 번째 설교로서 포로 귀한 후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이 성전 재건이라는 것을 강조한 것을 말합니다.

당시에 바벨론 포로생활에서부터 고향으로 돌아왔던 귀환자들에게 심각한 문제는 여호와를 사모하는 열정은 식었고 무기력하여 현실에 안주하려는 데 있었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은 선지자 학개를 통해 영적 각성 운동과 더불어 이스라엘의 삶의 중심인 성전을 재건하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이와 같은 내용으로 성전을 재건하라는 하나님의 지시를 전하는 전반부(1-11절)와 그 지시에 백성들이 순종하였음을 보여 주는 후반부로 내용을 구분할 수 있습니다(12-15절).

바벨론 포로에서 해방되어 예루살렘으로 귀환한 유다 백성들은 현실적인 어려움을 핑계로 성전 재건 사역을 미루고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신앙을 책망하시며 그들이 하나님께 불순종함으로 재앙이 임하게 되었음을 말씀하셨고, 백성은 하나님의 말씀을 청종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유다 백성의 마음을 자극하여 성전 재건 사역을 감당하도록 역사하셨습니다. 

성전은 이 땅에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는 것이었습니다.
따라서 성전 자체가 하나님은 아니었으나 성전은 하나님을 상징하는 공간적 위치로서 신앙의 확신과 삶의 방향을 제시하는 통로가 되었습니다.

오늘날은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고백하고 영접한 그리스도인이 곧 성전이라고 하셨습니다(고전 3:16-17, 6:19).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거하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뇨.
누구든지 하나님의 성전을 더럽히면 하나님이 그 사람을 멸하시리라 하나님의 성전은 거룩하니 너희도 그러하니라."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의 것이 아니라."
모든 성도들은 내가 있는 그 자리가 곧 거룩한 성전이 세워진 장소라는 것을 명심하고 내 삶의 주위를 거룩한 땅으로 회복시켜야 할 의무와 책임을 가져야 합니다.

오늘도 내가 세워야 할 성전을 바르게 세워 주위 사람들에게 삶의 최종 목표가 무엇인가를 알려주는 영적 경고등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이런 사실을 볼 때 성전도 결국 하나님이 함께하신다는 의미를 지닌 예수의 모형이요, 그림자이며 예표임을 깨닫게 됩니다.
이 성전은 그 유래가 모세가 시내 산에서 받은 성막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통하여 이스라엘 민족과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되시고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백성이 된다는 언약을 맺으셨습니다.
그리고 그 언약의 조건으로 이스라엘에게 십계명을 주시고 그것을 지키도록 명령하셨습니다.
한편 하나님께서 언약을 지키실 것임을 증거하는 표징으로 성막을 짓게 하셨습니다.
즉 성막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과 언제나 함께하시며 영원히 보호하실 것임을 보장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성막에서 모세를 만나시고 백성들에게 나타나셨습니다.
이런 점에서 성막과 성전도 단지 성막이 이동적 성격을 띠고 있는 반면 성전은 고정성을 띠고 있다는 것이 다르지만 그 이외의 의미는 같다고 하겠습니다.

본장에 나오는 성전은 이스라엘 역사상 세 번 건립되었으나 성경에서는 에스겔이 본 환상까지 합하여 네 개의 성전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즉 솔로몬 성전, 스룹바벨 성전, 에스겔 성전, 헤롯 성전 등이다.
결론적으로 이 성전은 오늘날 그리스도의 몸이요, 그리스도께서는 성전의 머리로 신약에서는 매듭짓고 있다. 따라서 이 성전에 출입하는 성도 즉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모든 성도들은 교회 즉 성전을 통하여 그리스도와 연합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것은 곧 교회 밖, 즉 예수 그리스도 외에는 구원의 길이 없음을 보여 주고 있는 것이다.  



은혜의 시대 즉 신약을 살아가고 있는 성도들은 성전 중심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성전은 우리의 구원이 되시는 그리스도의 몸이며 그의 살아 있는 임재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성전을 떠난 성도는 결코 구원을 받을 수 없습니다.
이와 같이 성도들은 성전이 그리스도의 몸이듯이 우리 또한 그리스도의 일부분으로서 살아 있는 성전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그러나 이런 성전으로서의 삶은 결코 오늘날 이야기하는 교회란 건물을 중심으로 살아가는 삶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참된 성전으로서의 삶은 교회에서 행하는 예배와 봉사에 충실하는 것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의 삶의 모습을 본받는 삶이 뒷받침되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 성전에서 장사하는 자들을 내쫓으시며 책망하셨듯이 바른 삶과 하나님을 믿는 참된 믿음이 있는 교회의 활동은 거짓된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교회 생활만이 아니라 일상의 삶 속에서도 항상 성전으로서의 의식을 갖고 정결한 삶을 살아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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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 유다, 북 이스라엘 선지자 활동


이스라엘 /  아모스(B.C. 760 / 북 여로보암2세 때)
                  호세아(B.C. 760 /북 여로보암2세 때)
                  요나(B.C.760 /북 여로보암2세 때)

유다 / 요엘(B.C.597 / 남 여호사밧 때)
          오바댜(B.C. 848~841 / 남 여호사밧 때)
          이사야(B.C.700~680 /아하스, 히스기야 때)
          예레미야(B.C. 627~587 /남 요시야, 여호아하스,여호야김,여호야긴,시드기야 때)
          다니엘(B.C. 605년의 1차 포로 / 남 여호야김,여호야긴,시드기야, 느부갓네살 때)
          에스겔(B.C.597년의 2차 포로 /남 여호야긴, 시드기야, 느부갓네살 때)
          미가(B.C. 627-586 /남 아하스, 히스기야 때)
          하박국(B.C.  / 남 여호야김 때)
          스바냐(B.C. 640~609 / 남 요시야, 여호야김 때)
          나훔(B.C. 663~612 /남 요시야 때)

포로 귀환 /  학개(B.C. 520-519)
                   스가랴(B.C. 520-475)
                   말라기(B.C. 430 / 다리오 2세 때)

니느웨 / 요나(B.C. 760 / 북 여로보암 2세 때)
              나훔(B.C. 663~612 / 남 요시야 때)

1차 포로 / 다니엘(B.C. 605년의 1차포로 / 남 여호야김,여호야긴,시드기야, 느부갓네살, 고레스 때)

2차 포로 / 에스겔(B.C. 597년의 2차포로 /남 여호야긴, 시드기야, 느부갓네살 때)

에돔 / 오바댜(B.C. 848-841 /남 여호사밧 때)

통일왕국시대

  사무엘   - 다윗에게 기름 부어 왕을 삼음 / 삼상 16:12
  나단      - 다윗의 간음을 책망함 /  삼하 12:1-12
  갓          - 다윗의 인구 조사를 책망함 / 삼하 24 11-19
  아히야   - 여로보암에게 북이스라엘을 세울 것을 예언 / 왕상 11 : 29-39
  앗도      - 솔로몬의 행적을 기록  /  대하 9:29
 




학개

구분               구약
분류            소예언서
장수                  2장
기록 관련
기록자                  학개
기록 연대(추정)              B.C. 520년경
기록 장소           예루살렘으로 추정


학개(Haggai)는 구약성경의 37번째 책으로 바벨론 포로기 이후에 기록된 예언서다.
'학개'라는 명칭은 '축제의, 절기의'라는 뜻이며, 기록자인 학개 선지자의 이름에서 따왔다.
포로 생활에서 해방되어 본토에 귀국한 유다 민족에게 예루살렘 성전 재건을 독려하는 것이 본서의 주요 내용이다.

기록자

본서의 기록자인 학개는 포로기 이후 유다에서 활동한 선지자다.
유다 민족을 독려해 스룹바벨 이후 약 15년간 중단되었던 예루살렘 성전 재건 역사를 마쳤다.
바사(페르시아) 왕 다리오 1세 제2년 6월부터(오늘날 8-9월에 해당) 9월까지 약 4개월간 받은 하나님의 말씀을 기록했다.

작성 배경

바사 왕 고레스는 바벨론(신바빌로니아)을 정복한 후,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 있던 유다 민족을 본국으로 귀환시키고 성전 건축을 명했다. 예루살렘으로 돌아온 백성들은 무너진 성전을 재건하는 일에 착수하였으나 사마리아 사람들과 이방 민족의 방해로 중단되었다.[1] 이러한 상태는 약 15년간 이어졌다.[2]
다리오 1세 2년(B.C. 520년경)에 학개 선지자는 스가랴와 함께 백성들이 하나님 성전을 건축하는 일에 마음을 모으고, 단절되었던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자고 촉구했다. 모두의 노력으로 성전은 공사를 재개한 지 4년 만에 완공되었다.[3]

학개의 내용 구성

장절     때(다리오왕 2년)        내용
1장          6월 1일     성전 건축을 격려함
2장 1-9절         7월 21일     새 성전의 영광
2장 10-23절         9월 24일     정결한 삶의 축복

선지자 학개는 유다 총독 스룹바벨과 대제사장 여호수아와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며, 백성들이 열심히 일해도 궁핍한 이유가 하나님의 성전이 황무한 것을 보고도 자신들의 집만 돌보았기 때문임을 일깨웠다.
하나님의 뜻을 전해 들은 이들은 마음이 뜨거워져서 6월 24일에 성전 건축을 다시 시작했다.
하나님께서는 백성들과 함께하시겠다고 격려하시고 새로 건축한 성전이 솔로몬 성전보다 영광스러울 것이라고 약속하셨다.
더불어 이제부터 그들에게 복을 주시겠다고 말씀하셨다.


바벨론 포로시대와 바벨론의 멸망

남 유다왕국이 망하면서 유대인들은 4차에 걸쳐서 바벨론으로 끌려갔습니다.

1차 포로 / B.C. 605년다니엘을 포함한 왕족들귀족 계급이었고,
2차 포로 / B.C. 597년여호야긴 왕을 포함한 일반 백성들과 모든 방백들과 군사1만 명 외에 많은 기술자들이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3차 포로 / B.C. 586년에 예루살렘의 성전과 성이 최후로 함락될 때 시드기야 왕을 포함한 백성들이었습니다.
4차 포로 / B.C. 581년 바벨론제국의 느부갓네살 왕의 시위대장인 느부사라단이 마지막 남은 유대인들을 사로잡아 갔습니다.

 그렇게 대부분의 유대백성들은 바벨론으로 끌려갔고 유대 본토에 남겨진 백성들은 극히 미천한 자들로 토지를 갈고 농사를 지을 수 있는 자들은 불과  2만 명 정도였습니다.

그러나 나라가 멸망한 후 각처로 도망갔던 유대인들이 다시 모여 왔으나 황무해진 그 지역의 형편은 기아와 무법천지였습니다.

반면 바벨론으로 끌려간 자들에게 바벨론 정권은 비교적 많은 자유를 허락했습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집을 짓고 사업을 할 수도 있었으며, 관리에 등용되기도 하였습니다.
비록 성전은 없었지만 종교의 자유도 허락되어서 성전을 대신한 회당을 중심으로 그들의 신앙을 유지하며 민족의 흩어짐을 막을 수 있었습니다. 

이들은 이런 환경에서 신앙과 민족의 순수성을 유지하다가 고향으로 돌아오게 되었던 것입니다.  

유대인이라고 불리는 이들은 남유대왕국의 사람들로서 유대지파와 베냐민지파의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북이스라엘왕국의 사람들은 이스라엘의 12지파 중의 나머지 10지파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앗수르(앗시라아)에게 망하고 일부는 포로로 잡혀갔으나 다시는 돌아오지 못했습니다.
앗수르는 북이스라엘 백성의 대부분을 강제로 자신들의 다른 영토로 이동시켰고, 남아 있는 자들에게는 이방 민족을 이스라엘과 혼합되게 하여 새로운 사마리아족이 나타나게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그들은 이스라엘의 잊혀진 열 지파로 사라져 갔습니다.

바벨론제국에 포로로 있던 유대인들은 바벨론이 바사(페르시아)에게 망한 후, 바사제국의  고레스왕(고레스2세)이 유대인들의 귀환을 허락함에 따라 1차 귀환을 하였습니다.
그 때가 B.C. 538-537년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지도자는 스룹바벨이었습니다.
그 후 B.C. 457년 아닥사스다왕 때에 에스라를 지도자로 2차 귀환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B.C. 444년 2차와  같은 아닥사스다왕 때에 유대인 느헤미야가 유대지방의 총독이 되어 민족을 이끌고 3차 귀환을 하였습니다.

그리고 당시 포로귀환 후 활동하던 선지자들은 학개, 스가랴, 그리고 말라기입니다.

바벨론제국이 B.C. 586년에 유대왕국을 멸망시키고 B.C. 538년에 바사에 의해 바벨론이 망하게 되는 그 사이에 인도지방에서는 불교의 석가모니가 태어나고, 중국에서는 유교의 공자가 태어났습니다.

그리고 그리스에서는 지배계급인 귀족들에 대한  평민들의 불만이 폭력으로 귀족정치를 타도하고 평민에 의한 독재정권을 세우는 일들이 나타났습니다.
그런  독재자를 참주라고 부르며 그런 정치를 참주정이라고 부릅니다.

그 참주정은 민주주의의 시효로 알려지는 그리스의 B.C. 508년의 민주정치의 도입까지 이어졌습니다.
민주주의(Demokratial)란 말은 민중(Demos)이 권력(Kratos)를 가지는 정치체제였던 것입니다.

그리고 바벨론이 망하고 바사가 근동지역을 지배하던 때인 B.C. 509년에 유럽의 이탈리아반도에서는 로마의 공화정이 시작되었습니다.


석가모니 출생 BC 564년 네팔 룸비니

공자 출생 BC 551년 노나라 취푸(曲阜)에서 떨어진 시골인 창평향(昌平鄕) 추읍(郰邑)에서 부친 숙량흘과 모친 안징재(顔徵在) 사이에 태어났다.



08-17-2023(목)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만국의 보배(2:7)

또한 만국을 진동시킬 것이며 만국의 보배가 이르리니 내가 영광으로 이 전에 충만케 하리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I will shake all nations, and the desired of all nations will come, and I will fill this house with glory,' says the LORD Almighty.

만국의 보배(the desired of all nations)
모든 민족이 사모하는

새번역 / 또 내가 모든 민족을 뒤흔들어 놓겠다. 그 때에, 모든 민족의 보화가 이리로 모일 것이다. 내가 이 성전을 보물로 가득 채우겠다. 나 만군의 주가 말한다.

현대인 / 모든 나라를 뒤흔들어 놓겠다. 온 세상의 보물이 이리로 굴러들어올 것이며 내가 이 성전을 영광으로 충만하게 할 것이다.

공동번역 / 뭇 민족도 뒤흔들리라. 그리하면 뭇 민족이 보화를 가지고 오리니, 내가 내리는 영광이 이 성전에 차고 넘치리라. 야훼의 말이다.

 
[내용개요]
하나님의 명령을 들은 이스라엘 백성들은 성전 재건을 시작하였다. 그러나 공사를 시작한 지 한 달이 채 못되어 공사는 또다시 중단되었다. 그것은 이 성전의 위세가 솔로몬의 성전과 비교도 안 될 만큼 초라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또다시 학개를 통하여 비록 지금 짓고 있는 성전만큼은 못하지만 하나님의 영광은 더 크게 빛날 수 있음을 보여주면서 계속 재건해 나가라는 메시지를 주셨다. 학개가 전하고 있는 메시지의 핵심은 하나님의 은혜를 받는 방법이 어떤 외형적 조건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의지하는 진실한 믿음에 있으므로 낙심치 말고, 실망치 말고 계속 성전을 재건해 나가라는 데 있는 것이다. 사실 인간의 판단은 그 대상의 외모를 기준 삼을 수밖에 없다. 그래서 스룹바벨 성전의 기초석이 놓여질 때 이전 솔로몬 성전의 위용을 기억하고 있던 많은 이스라엘의 원로들은 큰 슬픔과 실망 속에 빠질 수밖에 없었다. 이들은 하나님의 영광이 이스라엘을 떠나버린 것이 아닌가 하는 의심마저 갖게 되었다. 그러나 이때 학개를 통하여 하나님께서 주신 '이 성전의 나중 영광이 이전 영광보다 크리라'(9절)고 하는 이 메시지는 계시의 점진성이라는 측면에서 볼 때 예수 그리스도를 향하고 있는 구속사의 관점에서 희망찬 메시지가 아닐 수 없다. 이런 내용을 담고 있는 본장은 장차 성전에 임할 하나님의 영광을 알려 주며 성전 재건을 촉구하는 전반부(1-9절)와 이스라엘의 불순한 믿음을 지적하며 결국은 하나님이 축복을 주실 것을 전하는 후반부(10-23절)로 나눌 수 있다.  


[강  해]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의 부정한 과거의 죄악에 대하여 말씀하시면서 그로 인하여 임하였던 재앙을 기억할 것을 명하셨습니다. 그러나 백성이 여호와의 말씀을 청종함을 인하여 다시 그들에게 복을 내려 주실 것을 약속하셨습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언약은 그리스도를 보내심으로써 내려 주실 구원의 축복을 지향하고 있습니다.


[신학주제]
계시의 점진성. 성전의 첫 유래는 모세 시대의 성막이었다. 그러다가 이것이 솔로몬 시대에 이르러서 고정적인 형태인 성전으로 바뀌었다. 그리고 신약 시대로 넘어와서는 교회 형태로 바뀌었다. 이것은 외형적인 면에서는 규모의 축소나 형태의 단순화일지는 모르지만 그 성전이 갖는 의미는 각별하다. 구약에서는 하나님이 성막이나 성전 가운데 영광으로 임하셨지만 신약으로 넘어와서는 그리스도가 친히 성전으로 임하신 것이다. 따라서 성전이 갖는 의미는 구약의 성전이나 성막보다도 그 의미 면에 있어서는 더 크다 할 수 있겠다. 따라서 구약의 성전처럼 건물이나 형태의 외형적인 면에 의미를 부여해서는 안 된다. 신약의 성전은 건물의 의미를 초월하여 장차 메시야의 완전한 구원 사역을 예고하고 있는 것이기도 하다. 즉 신약의 성전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는 심판의 날에 완전하고도 새로운 예루살렘의 형태로 임하셔서 성도들을 구원하실 것이다 여기서 예루살렘이란 성과 성전의 의미를 둘 다 지니 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성전을 통한 하나님의 계시는 성막보다는 성전에, 성전보다는 신약의 교회에 더 완전한 계시의 의미가 부여되어 있다고 볼 수 있다.  


[영적교훈]
본장을 통해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성전이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이심과, 또한 그가 성전으로 오셔서 우리들로 하여금 성전 중심의 삶을 요구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 역시 성전을 통하여 성도들을 구원시킬 것이라는 사실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신약의 성도들은 무엇보다 성전 중심의 삶을 살아가야 하는 것이다.



각자도생(各自圖生) : 제각기 살아 나갈 길을 꾀함




08-16-2023(수)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전을 건축하라(학개 1:8)

너희는 산에 올라가서 나무를 가져다가 전을 건축하라 그리하면 내가 그로 인하여 기뻐하고 또 영광을 얻으리라 나 여호와가 말하였느니라.
Go up into the mountains and bring down timber and build the house, so that I may take pleasure in it and be honored," says the LORD.

전을 건축하라(build the house)
우베누 합바이트(וּבְנוּ הַבָּיִת)

전(1004) 바이트(bayithבַּיִת

1. 집,  2. 장막, 3. 왕하23:7.
발음 / 바이트 [ bayith ]
어원 / 연계형 בֵּית, 복수 어미활용 בָּתֵּיהֶם ,בָּתֵּיכֶם ,בָּתֵּינוֹ, 1129에서 유래한 약어로 보임
관련 성경 / 집(창7:1, 레14:35, 삼상1:7), 권속(창18:19,레16:6, 삼하2:3), 궁(창12:15, 삼하7:2), 처소(창24:31, 대하5:7), 집 안(창27:15, 시55:14),전(출34:26, 신23:18), 옥(창39:20, 삿16:21,왕하25:27), 간수장(창39:21), 궁중(창45:2,왕하21:33, 에7:8), 가족(창5:22, 신11:6, 시68:6), 족속(출2:1, 레22;18, 수17:17), 식구(출12:3), 안쪽(출28:26), 가옥(레14:55, 신19:1,사5:8), 친정(레22:13), 종족(민1:2, 대상7:4), 지도자(민25:14), 지파(수22:14), 신전(삿9:4,왕하19:37, 대상10:10), 신당(삿17:5), 궁내(왕하10:5), 성전(왕하16:18, 대상29:3), 창고(왕하20:13), 궁궐(왕하21:18, 대상14:1), 성막(대상9:23), 궁전(대상17:1), 곳간(대상26:15,사22:8), 반열(대상28:13), 내전(內殿)(대하3:13), 무더기(욥8:17), 가산(욥20:28), 국고(사22:15), 딸(사10:32), 부엌(겔46:24), 집(미2:2).
구약 성경 / 2036회 사용

건축하라(1129) 바나(1129)  בָּנָה 

1. 짓다
2. 왕상6:15
3. ~위해 집을 짓다 / 렘 24:6
발음 / 바나[ bânâh ]
관련 성경 / 쌓다(창 11:5, 신 27:5, 애 3:5), 건축하다(민 32:37, 대하 6:2, 느 2:18), 만들다(신 20:20, 겔 27:5, 창 2:22), 세우다(룻 4:11, 왕상 11:38, 렘 45:4), 증축하다(대하 27:3), 짓다(욥 27:18, 전 2:4, 렘 35:9), 건설하다(시 122:3, 사 25:2), 건축되다(겔 36:33, 잠 24:3, 슥 1:16), 번성하다(말 3:15), 얻다(창 16:2, 30:3), 복구시키다(사 44:26).
[명] 건축(왕상 6:9), 건축자(왕상 5:18, 스 3:10).
구약 성경 / 373회 사용


전을 건축하라는 말씀은 선지자 학개의 첫 번째 설교로서 포로 귀한 후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이 성전 재건이라는 것을 강조한 것을 말합니다.

당시에 바벨론 포로생활에서부터 고향으로 돌아왔던 귀환자들에게 심각한 문제는 여호와를 사모하는 열정은 식었고 무기력하여 현실에 안주하려는 데 있었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은 선지자 학개를 통해 영적 각성 운동과 더불어 이스라엘의 삶의 중심인 성전을 재건하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이와 같은 내용으로 성전을 재건하라는 하나님의 지시를 전하는 전반부(1-11절)와 그 지시에 백성들이 순종하였음을 보여 주는 후반부로 내용을 구분할 수 있습니다(12-15절).

바벨론 포로에서 해방되어 예루살렘으로 귀환한 유다 백성들은 현실적인 어려움을 핑계로 성전 재건 사역을 미루고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신앙을 책망하시며 그들이 하나님께 불순종함으로 재앙이 임하게 되었음을 말씀하셨고, 백성은 하나님의 말씀을 청종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유다 백성의 마음을 자극하여 성전 재건 사역을 감당하도록 역사하셨습니다. 

성전은 이 땅에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는 것이었습니다.
따라서 성전 자체가 하나님은 아니었으나 성전은 하나님을 상징하는 공간적 위치로서 신앙의 확신과 삶의 방향을 제시하는 통로가 되었습니다.

오늘날은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고백하고 영접한 그리스도인이 곧 성전이라고 하셨습니다(고전 3:16-17, 6:19).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거하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뇨.
누구든지 하나님의 성전을 더럽히면 하나님이 그 사람을 멸하시리라 하나님의 성전은 거룩하니 너희도 그러하니라."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의 것이 아니라."
모든 성도들은 내가 있는 그 자리가 곧 거룩한 성전이 세워진 장소라는 것을 명심하고 내 삶의 주위를 거룩한 땅으로 회복시켜야 할 의무와 책임을 가져야 합니다.

오늘도 내가 세워야 할 성전을 바르게 세워 주위 사람들에게 삶의 최종 목표가 무엇인가를 알려주는 영적 경고등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이런 사실을 볼 때 성전도 결국 하나님이 함께하신다는 의미를 지닌 예수의 모형이요, 그림자이며 예표임을 깨닫게 됩니다.
이 성전은 그 유래가 모세가 시내 산에서 받은 성막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통하여 이스라엘 민족과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되시고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백성이 된다는 언약을 맺으셨습니다.
그리고 그 언약의 조건으로 이스라엘에게 십계명을 주시고 그것을 지키도록 명령하셨습니다.
한편 하나님께서 언약을 지키실 것임을 증거하는 표징으로 성막을 짓게 하셨습니다.
즉 성막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과 언제나 함께하시며 영원히 보호하실 것임을 보장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성막에서 모세를 만나시고 백성들에게 나타나셨습니다.
이런 점에서 성막과 성전도 단지 성막이 이동적 성격을 띠고 있는 반면 성전은 고정성을 띠고 있다는 것이 다르지만 그 이외의 의미는 같다고 하겠습니다.

본장에 나오는 성전은 이스라엘 역사상 세 번 건립되었으나 성경에서는 에스겔이 본 환상까지 합하여 네 개의 성전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즉 솔로몬 성전, 스룹바벨 성전, 에스겔 성전, 헤롯 성전 등이다.
결론적으로 이 성전은 오늘날 그리스도의 몸이요, 그리스도께서는 성전의 머리로 신약에서는 매듭짓고 있다. 따라서 이 성전에 출입하는 성도 즉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모든 성도들은 교회 즉 성전을 통하여 그리스도와 연합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것은 곧 교회 밖, 즉 예수 그리스도 외에는 구원의 길이 없음을 보여 주고 있는 것이다.  



은혜의 시대 즉 신약을 살아가고 있는 성도들은 성전 중심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성전은 우리의 구원이 되시는 그리스도의 몸이며 그의 살아 있는 임재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성전을 떠난 성도는 결코 구원을 받을 수 없습니다.
이와 같이 성도들은 성전이 그리스도의 몸이듯이 우리 또한 그리스도의 일부분으로서 살아 있는 성전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그러나 이런 성전으로서의 삶은 결코 오늘날 이야기하는 교회란 건물을 중심으로 살아가는 삶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참된 성전으로서의 삶은 교회에서 행하는 예배와 봉사에 충실하는 것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의 삶의 모습을 본받는 삶이 뒷받침되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 성전에서 장사하는 자들을 내쫓으시며 책망하셨듯이 바른 삶과 하나님을 믿는 참된 믿음이 있는 교회의 활동은 거짓된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교회 생활만이 아니라 일상의 삶 속에서도 항상 성전으로서의 의식을 갖고 정결한 삶을 살아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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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개 개요

1. 서론

모든 성경들은 본서의 중심 인물인 ‘학개’를 표제로 삼았으며 이름의 뜻은 ‘절기’ 혹은 ‘축제’ 이다.
하나님의 일을 미루고 자신의 삶과 일에만 치중하는 자들에게 성전 재건을 통해 가치관을 재정비하라고 권면한다.

2. 저자

전통적으로도 학개의 저작으로 보며 하나님으로부터 말씀을 받아 선포했다는 내용이 여러 곳에서 언급되고 있다(1:1, 3; 2:1, 10, 20).
학개의 이름이 3인칭으로 서술되어(1:12-13; 2:12-14) 학개 저작 설을 부인하는 일부의 견해가 있다.

3. 기록시기와 시대적 배경

바벨론을 멸망시킨 고레스는 유다 백성의 귀환을 허락하는 칙령을 내려 1차로 스룹바벨의 인솔 하에 귀환하여 B.C.536년경 성전 재건에 착수하였다.
​사마리아 사람들과 주변 이방인들의 방해로 2년 만에 중단되었다가 다리오 왕 2년(B.C. 520년)에 학개 선지자를 통해 다시 재개한다.
성전은 공사를 재개한 지 4년 만인 B.C. 516년(다리오 6년)에 완공한다.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네 편의 메시지가 나오는데(1:1; 2:1,10, 20), 모두 날짜가 분명하게 언급되어 있다.

4. 기록목적

스룹바벨 이후 중단되었던 성전 재건을 독려하고, 다시금 하나님 중심적인 신앙으로 돌아오도록 격려하기 위함이다.
하나님의 백성으로 헌신과 희생하는 마음으로 성전을 건축하도록 격려하기 위함이다.
하나님께서는 삶의 우선권을 가지고 계시는 분이심을 깨닫게 하기 위함이다.

5. 구조

초 점

성전재건

하나님의 언약회복

구 분

1장

2:1-9

2:10-19

2:20-23

첫 번째 설교

두 번째 설교

세 번째 설교

네 번째 설교

주 제

성전재건 촉구

재건될 성전의 영광

순종한 사람들의 복

위로와 약속

핵 심

구 절

[학]1:8 너희는 산에 올라가서 나무를 가져다가 전을 건축하라 그리하면 내가 그로 인하여 기뻐하고 또 영광을 얻으리라 나 여호와가 말하였느니라

6. 성전의 역할

태초에 성전의 모델인 에덴동산을 창조하시고 아담을 통해 온 세상으로 확장되게 하였지만 불순종으로 성전의 기능이 파괴 되었다.
성전은 하나님께서 그분의 백성과 언약관계를 맺고 함께하시며 만나주시는 것을 상징한다.(출 25:22)
성전은 죄를 사함 받고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곳이며, 완전한 성전이신 예수그리스도를 통해 현실화 되었다.(레 26:11, 요 2:21)
성전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백성답게 올바르게 살아가야 할 방법을 가르쳐 주는 역할을 한다.

7. 성전 재건의 중요성

포로 귀환 공동체의 삶이 피폐해진 이유는 자신들의 생존과 복지 문제를 해결하는데 최우선 가치를 가지고 성전 재건을 회피하였기 때문이다.(1:2-11)
성전 재건은 죄악으로 인해 멈춰버린 것 같았던 하나님과의 언약관계가 다시 회복되었음을 의미한다.
성전 재건을 통해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회복시키시며 약속하신 언약적인 복을 주신다.

8. 중요 메시지

인간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생존과 번영에 대해 그것을 이루게 하시는 분이 하나님이심을 말하고 있다.
잘못된 예배와 부정한 삶을 지적하고 성전 재건을 통해 바른 예배를 회복하도록 호소하고 있다. (2:10-19)
성전 재건은 이스라엘의 영광이 회복되는 것이며 하나님과의 만남을 통해 평강을 누리는 것이다.

​9. 결론

성도의 책임은 축복만을 누리는게 아니라 하나님 나라에 대한 철저한 희생과 헌신이 있어야 함을 말하고 있다.
성전 재건은 단절된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을 의미하는 동시에 하나님 중심적 삶으로 복귀하는 것임을 천명한다.
성도들이 견지해야 할 삶의 최우선 순위는 하나님을 삶에 중심에 모시고, 성령을 따라 성전으로 살아가는 것임을 말한다.

 







우선순위(優先順位)

넉넉할 우, 먼저 선, 순할 순, 자리 위
어떤 것을 먼저 차지하거나 사용(使用)할 수 있는 차례(次例)나 위치(位置).



피터 드러커(P. Drucker)
훌륭한 경영자란 많은 일을 한꺼번에 처리하는 다양한 재능의 사람이 아니라 여러 가지 일을 복잡하게 만들거나 뒤죽박죽되지 않게 하고, 한 번에 하나씩 집중해서 처리하는 사람이다.

경영에서 한 번에 하나씩 집중해서 처리하기 위한 가장 중요한 방법은우선순위를 결정하는 것이라고 했다.
그는 경영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우선순위를 결정하고 일하는 것이라고 했다.

 

우선순위란 많은 일 중에 무엇을 먼저 하고 무엇을 나중에 할 것인가를 결정하는 것이다.
우선순위 문제는 경영분야 뿐 아니라 하루 일과의 성공과 실패를 좌우하고, 우리 인생의 성공과 실패를 가름하는 중요한 요소가 된다.
그리스도인의 순간적인 선택은 영원을 좌우하는 것이다.
우리 삶에 있어서 무엇을 우선순위에 두고 무엇을 뒤에 두고 사느냐에 따라 우리의 영원한 운명이 갈라진다. 

선택이 필요한 이유

그러면 인생에서 무엇을 우선순위에 둘 것인가를 선택하는 것이 왜 중요하고 필요한 것인가?
인생은 선택이다.
누구도 두 가지 모두를 동시에 할 수는 없고, 원하는 모든 것을 다 얻을 수는 없다.
그러므로 선택은 불가피한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둘 다를 가지려고 하지 말고 하나를 선택하라고 말씀하셨다.

마태복음 6:24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

사람들은 하나님과 재물 둘 다를 가지려고 하지만 그것은 불가능한 일며 어리석은 것이라는 말씀이다.
이것을 우리 인생에 적용할 수 있다.
여러 가지에 가치를 두지 말아야 한다.
하나는 가치 있게 여기고 하나는 덜 가치 있게 여겨야 한다.
더 가치 있는 것을 선택하기 위해서 덜 가치 있는 것을 포기하고 버려야 한다.
더 가치 있는 것을 위해 하나를 포기하지 못하고 다 가지려고 하면 둘 다를 잃게 된다.
년 초에 어디 놀러가고 즐기는 것도 하고, 영적인 축복도 받는 것 둘 다를 가질 수 없다.
우리는 영적인 축복을 더 가치 있게 여기기 때문에 즐기는 것을 포기하고 지금 저녁마다 집회를 가지고 있다.

우리가 모든 것을 다 가지거나 모든 일을 다 할 수 없는 이유는 시간과 능력의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더 가치 있는 것을 가지기 위해 덜 가치 있는 것을 포기하는 지혜와, 더 가치 있는 일을 행하기 위해 덜 소중한 일을 뒤로 미루고, 시간과 능력이 되면 하고, 못하면 그 일은 포기하는 지혜가 필요하다.
이런 인생이 평생을 통해 모이고 모인 것을 성공적인 인생이라고 하는 것이다.

계획성이 없고 닥치는 대로 살며, 인생을 뒤죽박죽으로 사는 사람은 결코 성공적인 인생을 살 수 없다.
닥치는 대로 살고 인생을 뒤죽박죽으로 살아온 인생을 성공적인 인생으로 바꾸어 살려면 ‘우선순위를 수정하라’

하루 일도 닥치는 대로 하지 말고 뒤죽박죽되지 않게 일의 우선순위를 정하고 중요한 일부터 하나하나에 집중하라.
한 해의 계획을 세우고, 한 달의 계획을 세우고, 한 주간의 계획과 하루의 계획을 철저하게 세우고 중요한 일부터 우선 순위에 두라.
1년 뒤에는 인생이 달라져 있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먼저 구할 것은 무엇인가?
마태복음 6:33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이 말씀은 먹고 사는 문제는 필요 없다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먼저 구할 것은 ‘하나님나라’라는 것이다.
세상 사람들은 먹고 사는 문제를 우선순위에 두고 더 가치 있게 여기고, 먼저 선택하지만 우리 그리스도인은 하나님나라를 선택해야 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은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 그분 안에서 영원한

가치를 발견하고 세상의 가치를 포기한 사람들이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하나님과 그분의 나라에 우선순위를

두고 사는 것이다

이것은 어떻게 보면 말도 안 되는 것이다. 예수님이 말도 안 되는 말씀을 하신 것이다. 그 말도 안 되는 소리를 듣고 말도 안 되는 삶을 사는 사람들이 그리스도인들이다. 그런데 이 말도 안 되는 소리를 듣고 그대로 사는 사람들 세상을 바꾸어 놓는다.

 

사실은 이 말도 안 되는 삶의 방법이 본래는 진리였고 정상적인 질서였다. 그런데 인간이 범죄 하고 타락하면서 이 질서를 무시하고 반대로 살아왔다. 그 결과 세상은 뒤죽박죽이 되고 파괴되고 만 것이다. 세상에 가치를 두고 사는 것이 진리가 되어버렸고 하나님 나라의 가치는 말도 안 되는 헛소리가 되어버렸다. 예수 그리스도는 본래의 질서를 회복시키려고 하다가 말도 안 되는 소리를 찌걸인 죄로 죽임을 당했다. 그 후 수 많은 사람들이 그분의 복음을 듣고 세상의 가치에서 하나님 나라의 가치로 바꾸어 살기 시작했다. 우리가 예수님을 따라 성경의 원리, 창조의 원리로 돌아가는 것이 우선순위를 수정하는 것이다. 우선순위를 수정하 면 뒤죽박죽이 된 우리 인생도 수정될 수 있다.

 

과거에 우리는 성공, 부, 출세, 재물을 인생의 우선순위에 두고 그것을 얻기 위해 하나님을 찾고 섬기는 우상숭배와 같은 인생을 살아왔다. 이제는 그 삶의 방법을 뒤집어 반대로 사는 것이다. 하나님께 우선순위를 두고 시간, 노력, 재물, 성공을 하나님과 그분의 나라를 위해 구하고 얻고 사용하는 삶의 우선순위를 수정하고 사는 삶이 바로 된 인생이요, 그리스도인의 삶의 방법이다.

 

그러면 우선순위를 결정하는 원칙은 무엇인가?

이와 같이 우리 삶의 방법, 방향과 목적을 완전히 뒤바꾸어놓는 것은 무엇인가? 경제학자 피터 드러커는 ‘경영에 있어서 우선순위를 정하는 중요한 원칙은 효용성, 가치성’이라고 했다. 사람들은 제마다 가치관이 다르기 때문에 우선순위도 다른 것이다. 가장 가치 있다고 여기는 것을 우선순위에 두고 사는 것이다.

삶의 가치가 삶의 우선순위를 정하는 가장 중요한 기준이다

그리스도인들로 하여금 세상 사람들과 완전히 다르게 살게

하는 그 요인은 ‘가치’이다

 

세상의 성공과 출세, 부를 가치로 여기는 사람은 명예, 돈, 권세, 출세를 얻는데 우선순위를 두고 거기에 모든 것을 쏟고 투자한다. 명예, 돈, 권세, 성공이 모든 인생을 바치는 제단인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인류의 구원과 하나님의 뜻을 순종하는 것이 그분의 가치였기 때문에 십자가를 기꺼이 지고 죽임을 당하셨다. 자신의 목숨 보다 인류구원이 우선이었던 것이다. 그 제단에 그분의 생명을 바치고 피를 쏟은 것이다.

 

그리스도인의 최고의 가치는 바로 예수의 십자가이다

십자가만이 하나님의 뜻을 이루고 구원과 영생을 얻게 한다

최고의 가치는 십자가의 복음이다

십자가의 복음만이 세상을 구원하고, 사람을 변화시키며 주의

나라를 이 땅에 이루어지게 한다

이 땅에서 가장 가치 있는 일은 십자가의 복음을 전하여 영혼을

구원하는 일이며, 굶주리는 자들에게 양식을 나눠주는 구제이다

하나님은 이런 일에 재물이 필요하다는 것을 아시고 그분의

자녀들에게 공급해주신다

그리스도인에게는 인생 전부, 모든 재물을 가장 가치 있는

일을 우이해 바치는 거룩한 제단이 있어야 한다

다른 헛된 제단에 인생을 허비하고 사는 것은 마귀에게

바치는 인생이다

기독교는 세상에 말씀을 전파하여 인생을 허비하는 사람들의

잘못된 우선순위를 바르게 수정하고 가장 가치 있는 삶을 살

도록 도와주는 종교이다

집에 불이 났다. 그 집의 안주인은 겁에 질려 홀로 뛰쳐나왔다가 갑자기 불 속으로 다시 뛰어 들어가 귀중품이 들어 있는 보석 상자를 안고 나왔다. “아, 이제 살았다. 귀고리, 목걸이, 팔찌, 모든 보석을 다 찾았다. 참으로 다행이다”고 외쳤다. 그때 사람들이 “저기 보세요. 아이들이 창가에 있어요”라고 외쳤다. 보석 상자를 들고 나온 여인은 그제 서야 정신을 차리고 “내 아이들! 내 아이들!”하고 소리치며 발을 동동 구르며 몸부림을 쳐보았지만, 불은 아이들의 생명을 삼켜버렸다. 가치관이 올바르면 큰 것을 얻게 되지만, 가치관이 올바르지 못하면 인생의 소중한 것을 다 잃고 망치게 된다.

사람들이 무시하고 사는 우선순위의 중요성

신학자 존 네이스빗은 “우선순위를 잘못선택하면 삶의 목표에서 멀어진다”고 했고,

찰스 휴멜은 “우리들이 삶에서 만나는 온갖 딜레마들은 시간과 물질의 부족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일의 우선순위를 잘못 선택함

에서 온다”고 주장했다.

혼란스러운 인생을 사는 사람들의 문제점 하나는 우선순위가 잘못되어 있기 때문이다

지금 삶이 혼란스럽고 뒤죽박죽이라면 삶의 우선순위가 잘못 되어 있을 가능성이 크다

삶의 우선순위가 바로 수정되면 뒤죽박죽이 된 인생에 혼란이 사라지고 모든 것이 제자리로 돌아가고 바로 설 것이다

그러면 우리가 오늘 결정하고 평생을 살아야 할 우선순위는 무엇인가?

첫째, 예배에 우선순위를 두고 살아야 한다

요한복음 4:23- 24
아버지께 참되게 예배하는 자들은 영과 진리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아버지께서는 자기에게 이렇게 예배하는자들을 찾으시느니라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영과 진리로 예배할지니라.

하나님은 영과 진리로 예배하는 자들을 지금 찾고 계신다.
아브라함은 가는 곳마다 먼저 단을 쌓고 예배를 드렸다. 아브라함이 결정적인 선택을 해야 할 때가 있었다.
백세에 얻은 외아들을 제물로 드리라는 명령을 받았을 때 아브라함에게 우선순위는 아들보다 예배와 순종이었다.
그랬더니 결과는 믿음의 조상이 되는 영적인 축복도 받고 후손의 축복을 받아 최고의 명문가가 되었다.

부모들이 ‘공부해서 남 주나 다 네 잘되라고 공부하라는 것이지’라고 하면서 아이들에게 주일예배보다 공부와 성적과 성공에 우선순위를 둔다. 그러나 주일 예배에 우선순위를 두고 공부하는 아이들은 예배에서 말씀에 은혜를 받고 자기 잘되려고 공부하는 것이 아니라, 공부해서 남 주려고 사명감을 가지고 열심히 공부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이런 아이들을 축복해주시는 것이다. 지금 성적이 좋거나 별로 안 좋은 것 가지고 아이들의 미래를 예단 할 수 없다

우리는 남 주려고 열심히 공부하고, 남 주려고 열심히 일한다.
이게 우선순위가 바로 되어 있는 인생을 사는 것이다.
우리가 주일 예배를 우선순위에 두고 살면 하나님도 여러분의 일을 우선순위에 두고 도와주시는 것이다.

오늘 새해 첫 주일을 맞아 우리가 결정할 것이 있다. 어떤 일보다 주일 예배를 우선으로 정하고 일 년 동안 어떤 일이 있어도 주일예배 빠지지 맙시다. 그러면 새해에는 모든 것이 달라질 것이다.

둘째, 사명에 우선순위를 두고 살아야 한다

사도행전 20:23- 24
오직 성령이 각성에서 내게 증언하여 결박과 환난이 나를 기다린다 하시나 내가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

우리가 존경하는 사람들은 자기중심으로 살지 않고 사명을 따라 살고 움직인 사람들이다. 바울은 복음을 전하다가 자신의 목숨을 잃을 수도 있는 극한 상황에서 자신의 생명보다 주께로부터 받은 사명을 더 중요하게 여기고 사명을 따라 갔다.

하나님이 어느 날 닭, 개, 돼지를 불러 “너희들은 인간 세상에 내려가 1년 동안 사람들을 위하여 봉사할일을 찾아 섬기다가 올라오라”고 하셨다. 이들이 1년 후에 돌아와서 하나님께 보고하였다. 맨 먼저 닭이 입을 열었다. “하나님, 세상에 가보니 사람들이 시간을 몰라 사는데 어려움이 있는 것을 보고 매일 새벽마다 ‘꼬끼오’하고 소리를 내 시간을 알려주었습니다.” 듣고 계시던 하나님이 너무 기뻐서 닭에게 벼슬을 하나 주셨다. 그게 닭 벼슬이라고 한다.

 

그 다음엔 개가 보고를 한다. “하나님, 제가 세상에 가보니 도적이 하도 많아 사람들이 불안해하는 것을 보고 이상하게 보이는 사람이 나타나면 ‘멍멍’하며 짖어서 집을 지켜주었습니다.” 개의 이야기를 들으신 하나님은 너무 기뻐서 개에게 다리를 하나 더 주셨다고 한다. 본래 개는 다리가 세 개뿐이었는데 다리 하나를 더 주셔서 네 개가 되었다고 한다. 그래서 가끔 보면 개들이 쉬를 할 때 한 쪽 다리를 든다고 한다. 하나님이 주신 다리라며 들어서 자랑하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돼지가 보고를 한다. “저는 세상에 가서 보니 세상에 별 할 일이 없어서 매일 먹고 자고 놀다가 왔습니다.” 돼지의 이야기를 다 들으신 하나님은 노하시면서 “여봐라, 저 돼지의 주둥이를 치라!”고 하셨다. 그래서 돼지는 다른 짐승과는 달리 주둥이가 없고 코와 입이 붙어 있어 보기가 좀 우습게 되었다는 이야기이다.

 

물리학자 아인슈타인이 조국 이스라엘 국회가 만장일치로 이스라엘 대통령으로 추대키로 결정하고 대통령이 되어줄 것을 제의 했을 때 “대통령이 되겠다는 사람은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물리학을 가르칠 사람은 그리 많지 않습니다.”라고 하면서 정중하게 거절하였다고 한다.
그는 자신의 사명을 선택한 것이다.

모든 피조물에는 사명이 있다.
성공적인 인생은 무슨 유명인사가 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사명을 발견하고 그 사명대로 충실하게 사는 인생이다.

셋째, 하나님의 것에 우선순위를 두고 살아야 한다

말라기 3장에 보면 하나님의 것에 우선을 두지 않고 주의 것을 자기 마음대로 사용한 백성들의 이야기가 나온다.
유다가 멸망한 이유 중에 하나가 십일조 문제였다고 말라기 성경은 밝히고 있다.
십일조가 무엇인가를 가르쳐 주는 중요한 교훈이 여기에 있다.

첫째 이유는 십일조는 하나님의 명령
둘째는 십일조는 하나님의 은혜 

십일조가 하나님의 은혜인 이유는 무엇인가?

첫째, 모든 것이 다 하나님이 주신 하나님의 것이기에 하나님이 다 요구하신다 해도 할 말이 없고 누구도 반대할 수 없는 것인데 하나님은 십분의 일만 드리라고 하시니 십일조는 하나님의 은혜인 것이다

십일조가 은혜인 두 번째 이유는 우리는 하나만 드렸는데  하나님은 열을 다 받으시는 것처럼 받으시기 때문이다

셋째는 우리가 하나만 드리면 하나님은 나머지 아홉을 지켜주시고 보장해주시겠다고 약속하셨으니 십일조는 무거운 짐이나 고통이 아니라 십일조에는 하나님이 우리의 재산을 지켜주는 큰 은혜의 약속이 있다

십일조는 우리를 망하지 않게 지켜주는 하나님의 전략이요 최고의 방패이다

하나님 우선으로 사는 삶의 결과는 무엇인가?

우리가 삶의 우선순위를 하나님나라에 두고 살면 우리가 먹고사는 문제는 어떻게 되는 것인가?
누가 책임져주는가?
무슨 보장이 있는 것인가?

예수님의 가르침에서 우리가 주목할 것은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라는 말씀이다.
우리가 예수님의 가르침을 따라 우선순위를 수정하고 살면 영생도 주시고 땅의 것도 다 주신다는 것이다.
그러나 닥치는 대로 살고, 인생을 뒤죽박죽으로 살면 영생도 얻지 못하고 땅의 것도 다 잃는다는 것이다.

미국에 구두를 만들어 돈을 엄청나게 번 브라운이라는 분이 있었다.
어느 날 목사님이 구두로 성공한 비결이 무엇이냐고 물었더니 “제 성공의 비결은 우선순위가 분명하였습니다.
저는 매사에 첫째는 하나님, 둘째는 가정, 그리고 셋째는 구두였습니다.
그랬더니 하나님이 모든 것을 형통하게 하여 주셨습니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지금 인생을 바꾸어 살고 싶은가?
가치관이 변하지 않고 삶의 우선순위가 바뀌지 않는 한 어떤 것도 바뀌지 않을 것이며, 아무리 기도를 하고 좋은 계획을 가지고 있어도 달라지는 것은 없을 것이다.
이제 무엇에 가치를 두고 살 것인가를 결정하고 우선순위를 바로 수정하여 그 우선순위를 따라 살면 인생이 바뀌고 운명이 달라질 것이다.






























스바냐(Zephaniah) 여호와께서 간직하셨다', '여호와께서 숨기셨다, '여호와께서 보호하셨다'




스바냐(Zephaniah) 여호와가 보호하신다, 여호와가 숨겨주신다

스바냐(Zephaniah)는 구약성경의 36번째 책이다. 선지자 스바냐가 기록했으며 요엘이나 아모스와 마찬가지로 '주의 날(여호와의 날)'을 주제로 하는 예언서다. 경건치 못한 자는 심판을 받지만 혼란하고 부패한 현실 속에서도 신실한 믿음으로 하나님의 규례를 지킨 자들은 구원받을 것이라는 메시지를 전한다.[1]

스바냐서 기록자

스바냐는 유다 왕 히스기야의 현손(고손자)으로 왕가 출신이며, 요시야가 집권하던 때 활동했던 선지자다.[2] 우상 숭배에 빠진 백성들의 마음을 하나님께로 되돌리는 일에 혼신의 힘을 기울였다.

작성 배경 및 시기

스바냐서는 요시야왕이 통치하던 초기에 기록되었다.
당시 히스기야왕이 죽은 후에 므낫세왕은 히스기야가 무너뜨린 바알 제단을 다시 지었다.
그 아들 아몬은 범죄의 정도가 더했다. 
뒤이어 요시야가 왕이 되었을 때 유다 사회는 극심한 우상숭배와 사회적 부패로 매우 혼란한 상황이었다.
유다에 만연한 우상숭배를 질책하는 내용으로 보아 본서는 요시야왕이 종교개혁을 단행하기 이전에 기록되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또한 앗수르(앗시리아)의 수도인 니느웨(니네베)에 대한 심판도 언급하고 있는 점으로 보아 니느웨 멸망(기원전 612년경) 이전의 기록으로 추정된다.

스바냐의 내용 구성



1장
유다에 대한 심판
2장
이방 나라에 대한 심판
3장
남은 자의 구원

스바냐서는 하나님을 배반하고 우상을 숭배한 유다에 대한 심판과 블레셋, 모압, 암몬, 앗수르 등 유다를 괴롭힌 이방 나라의 멸망을 예언했다.
그러나 겸손한 마음으로 하나님의 규례를 지키는 사람들은 심판의 날에 보호받을 것이며 대회로 인해 근심하는 이스라엘의 남은 자를 다시 모아 그들과 함께하시고 그들로 세상에서 칭찬과 명성을 얻게 하신다는 하나님의 약속도 함께 기록하고 있다.

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너의 가운데 계시니 그는 구원을 베푸실 전능자시라 그가 너로 인하여 기쁨을 이기지 못하여 하시며 너를 잠잠히 사랑하시며 너로 인하여 즐거이 부르며 기뻐하시리라 하리라

열왕기하 22장, 역대하 34-35장

요시야 왕

요시야는 여덟 살의 나이로 유다의 왕이 되었어요.
요시야는 주님을 사랑하는 선한 왕이었어요.
그는 자신의 백성인 이스라엘 사람들이 주님께 순종하고 더이상 우상을 숭배하지 않게 돕고 싶었어요.
요시야 왕이 성장했을 때, 그와 이스라엘 백성은 성전을 수리하고 다시 아름답게 정비하기 시작했어요.

열왕기하 22:1~2; 역대하 34:3~7

사람들이 성전 공사를 하고 있을 때, 대제사장 힐기야는 경전이 들어 있는 두루마리 율법책을 발견했어요.

열왕기하 22:3~9

왕의 종은 요시야 왕에게 율법책을 읽어주었어요.
율법책에 적힌 말씀을 들은 요시야는 그의 백성이 주님께 순종하지 않았다는 것을 알고 슬퍼했어요.
요시야는 너무 슬퍼서 자신의 옷을 찢기까지 했어요.

열왕기하 22:10~13, 19

요시야는 힐기야에게 그들이 무엇을 해야 하는지 주님께 여쭈어보라고 했어요.
힐기야와 왕의 신하들은 훌다를 찾아갔어요.
그녀는 하나님으로부터 영감을 받은 충실한 지도자이자 여선지자였어요.
훌다는 요시야가 백성들이 순종하도록 도운 일로 주님께서 요시아를 기쁘게 여기신다고 말했어요.
주님은 요시야 왕이 평화롭게 살 것이라고 약속하셨어요.

열왕기하 22:12~20

요시야 왕은 백성들이 주님께 한 약속을 지키기를 바랐어요.
요시야 왕은 주님께서 오래전에 애굽에서 이스라엘을 해방시키신 일을 백성들이 기억할 수 있도록 유월절을 지키라고 했어요.

역대하 35:1~19

예레미야(Jeremiah)

예레미야서는 구약 성경 39권 중 24번째 책으로 대선지서에 속합니다.

예레미야는 요시야 왕 때(BC 627년) 부터 유다가 망하고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가기까지(BC 586) 활동한 선지자입니다.
예레미야서는 하나님께서 예레미야를 통해 유다의 불순종과 그로 인해 닥칠 심판의 메시지를 담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예레미야를 선지자로 부르시고, 예레미야는 유다를 향한 경고와 훈계의 메시지를 전합니다.
유대인들은 예레미야를 통해 전달되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고 대신 자신들이 듣고 싶은 말을 하는 거짓 선지자들을 따르며 예레미야를 박해합니다.
결국 유다는 바벨론에 망하고 유대인들은 포로로 잡혀가거나 애굽으로 망명합니다.
또한, 하나님은 예레미야를 통해, 유대 뿐 아니라, 이웃 나라에 대한 경고도 하십니다.

다른 선지서와 비교하여, 예레미야서와 예레미야애가는 개인적인 삶과 힘겨운 몸부림을 깊고 자세하게 적고 있어, 예레미야는 "눈물의 선지자"라 불립니다.








08-15-2023(화)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불의한 자 (스바냐 3:5)

그 중에 거하신 여호와는 의로우사 불의를 행치 아니하시고 아침마다 간단 없이 자기의 공의를 나타내시거늘 불의한 자는 수치를 알지 못하는도다.
The LORD within her is righteous; he does no wrong. Morning by morning he dispenses his justice, and every new day he does not fail, yet the unrighteous know no shame.

불의한 자( the unrighteous)

불의한 자(5767) 아발(
ʽavvâl) עַוָּל 

1. 악한,  2. 사특한 자
발음 / 아발[ ʽavvâl ]
관련 성경 / [명] 불의한 자(욥 18:21, 29:17, 31:3, 습 3:5), 악인(욥 27:7)
구약 성경 / 5회 사용

스바냐 3장

3:1-7. 하나님의 경계에 따르지 않는 유다 백성의 죄를 책망하다.
3:8-13. 의인에게 하나님의 백성의 회복을 기다릴 것을 권하다.
3:14-20. 그들의 구원의 기쁨.

수치(1322) 보쉐트(bôsheth) בּשֶׁת 

1. 수치,  2. 치욕,  3. 우상
발음 / 보쉐트[ bôsheth ]
어원 / 어미활용 בָּשְׁתִּי, 954에서 유래
관련 성경 / 수치(삼상 20:30, 시 70:3, 습 3:5), (낯이) 뜨거움(대하 32:21), 부끄러움(욥 8:22), 욕(합 2:10).
구약 성경 / 30회 사용

아니하며 / 로(3808) <lôʼ>  לֹא 

1. ~하지 않았다
2. ~하지 않을 것이다
발음 / 로[ lôʼ ]
관련 성경 / 전무후무한(출 11:6), 풀리다(전 12:6).
[명]무죄(호 8:5).
[부] 틀림없이(욥 1:11), 진실로(렘 15:11)
구약 성경 / 5097회 사용

심판과 미래의 구원[습 3장]
  
하나님의 재앙과 심판이 그리고 그의 구원과 이에 대한 찬양이 함께 어우러져 소개됩니다.
선지자는 예루살렘의 패역과 탐욕에 대해 신랄하게 꾸짖으며 동시에 심판의 필연성을 강조합니다.
그와 같은 상황에서도 언약에 신실하신 하나님의 은혜를 통한 구원을 거듭 강조하여 하나님의 사랑과 공의의 양면성을 보여주셨습니다.

유다와 이방 국가들은 자신들의 죄악으로 인하여 멸망받게 될 것이지만 유다의 남은 자들은 결국 구원을 받을 것이라는 약속이 언급되었습니다.

또한 하나님께서는 남은 자들을 사랑으로 보호하시고 그들을 통해 당신의 뜻을 이루신다는 것을 약속하셨습니다.  

죄악에 대해서 진노하시고 공의를 베푸시는 하나님은 한편으로는 그의 백성들에게 구원과 긍휼을 베푸셨습니다.
선지자를 통해 보여 주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구원은 택한 백성인 이스라엘 뿐만 아니라 열방 모든 민족에게도 포함됩니다.
뿐만 아니라 극한 환경과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이스라엘의 남은 자들은 하나님께서 반드시 구원하실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따라서 하나님은 심판을 집행하시는 하나님이시며 동시에 회복시키는 하나님입니다.

악인들은 영원히 멸절되지만 그의 자녀들은 그의 은혜 가운데 회복되는 기쁨을 누릴 수 있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백성들은 회개를 통하여 다시 그의 백성으로 인정받을 수 있으며 나아가 완전한 선민의 위치까지도 올라갈 수 있습니다.
회복은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심으로 완전하게 성취되었습니다.
그리스도의 오심은 사랑의 극치요 구원의 완성임과 동시에 불완전한 세상을 완전하게 하신 것입니다.

이러한 사실은 하나님의 불변적인 사랑을 보여 주신 것이며 이 사실을 믿는 한 신약의 성도들이 하나님의 자녀로 인정을 받을 수 있으며 나아가 그의 완전한 축복의 자리까지 나아 갈 수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어려운 시대에도 굴하지 않고 믿음으로 전진하려는 거룩한 사람들이여
이 믿음 더욱 굳세라는 찬양을 들으며 오늘도 믿음으로 승리하는 하루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본장을 통해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첫째로 하나님의 구원은 이스라엘 뿐만 아니라 열방까지도 포함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택한 백성뿐만 아니라 열방까지도 구원시키길 원하신다.
즉 이스라엘을 회복시키시는 하나님의 사역을 통해 열방들이 깨닫고 구원에 동참하도록 역사하신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역사는 남은 자를 통해서 계속적으로 이루어 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하나님은 의롭고 순전하며 하나님을 신실히 찾는 자들에게 구원의 축복을 베푸신다. 결론적으로 여호와의 날엔 하나님의 백성들이 즐거움의 절정을 맛볼 수 있게 된다.  여호와의 날은 구원의 회복이 완전히 이루어지는 날이기 때문이다. 여호와의 날에는 심판과 응징이 사라지고 모든 대적들이 쫓겨나게 되며 모든 두려움은 사라지게 된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그리스도로 인한 최후의 승리의 날까지 소망을 가지고 기쁨이 충만한 가운데서 하나님의 남은 역사를 계속적으로 전개해 나가야 할 것이다. 

앗수르제국

<앗수르제국의 영토>

분열왕국시대에 강력한 나라로 등장하는 앗수르는 고대 메소포타미아의 왕국들 중의 하나로 남방 왕국인 바벨론이 바그다드와 페르시아만 사이의 평지를 차지한 반면에 앗수르는 대체로 시리아 사막과 남쪽으로 베벨로니아와 북쪽과 동쪽으로 아르메니아 및 페르시아 산과 접경을 이루었습니다.

셈의 아들 앗수르의 후손인 이들은 족장 시대 이전에 티그리스강과 유프라테스 강 유역의 바벨론 북쪽에 고대 왕국을 세우고 있었습니다. 

이스라엘 역사상 가장 유능한 왕이었던 다윗 왕 시대에 극도로 쇠약해 있었던 앗수르는 그 후 수도 니느웨를 중심으로 점차 그 세력이 강해지기 시작하였고 특히 북 왕국 이스라엘에 대해서는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였습니다.

물론 그 세력이 다소 약화되었던 여로보암 2세와 웃시야 왕 때에 이스라엘은 어느 정도의 힘을 발휘하여 자유를 찾아 국가로서의 면모를 갖추기도 하였지만 앗수르 제국의 재건을 시도한 디글랏 빌레셋 3세와 뒤를 이은 살만에셀 5세의 공격으로, 결국 북 이스라엘왕국은 멸망하여 앗수르의 속국이 되고 말았습니다.

앗수르의 세력은 B.C.8세기에 황금 시대를 이루었으나 그 후 B.C. 612년에 신 바벨론에 의한 수도 니느웨의 함락과 동시에 멸망되었습니다.

북 이스라엘왕국에 대한 성경에 나타나는 앗수르의 위협을 살펴봅시다. 

B.C. 853년에 살만에셀 3세는 앗수르 군대를 이끌고 아람 왕 벤하닷과 이스라엘왕 아합을 포함한 동맹군과 싸우러 왔습니다. 하지만 B.C.841년에 이르기까지는 이렇다 할 전과를 얻지 못하였습니다.

아합은 이스라엘을 앗수르와 정면으로 충돌시켰습니다. 이때 앗수르는 이스라엘을 하나의 속국으로 취급하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값진 조공을 바치는 예후의 사절단이 살만에셀의 흑색 방첩탑에 나타나 있는 것으로도 알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앗수르에게 조공을 바치고 앗수르는 다메섹의 위협으로부터 이스라엘을 지켜주는 관계로 이스라엘이 이웃나라 다메섹의 압제에서 어느 정도 벗어나게 해주었습니다.

 그것은 B.C. 800년경 요아스가 조공을 바치던 때에 앗수르의 출정한 기록에서 볼 수 있습니다. 그결과 이스라엘은 급성장하게 되었습니다. 여로보암 2세와 유다 왕 웃시야는 그 뒤로 앗수르의 운명이 바뀌었을 때 남부 수리아와 팔레스타인의 주도권을 쥔 군주가 되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하지만 B.C. 745년에 이르러서는 디글랏빌레셀 3세가 앗수르 제국의 지위를 회복시키기 시작하였습니다. 이스라엘 왕 므나헴은 조공을 바쳤으나 반앗수르 요인들로 인하여 그의 아들 대신에 베가가 왕으로 지명되었는데 얼마 안 가서 베가도 앗수르가 인정하는 호세아에게 왕위를 내어놓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호세아왕 때인 B.C.722년에 앗수르가 이스라엘의 수도 사마리아를 점령하고 그 백성을 사로잡아가므로 이스라엘은 멸망하고 말았습니다. 

남 유다왕국에 대한 앗수르의 위협을 살펴봅시다. 북 이스라엘의 왕 베가의 반앗수르적인 태도는 남 유다의 왕  아하스로 하여금 앗수르의 품에 들어가 보호받게 만들었습니다. 

따라서 유다왕 히스기야의 독립정책은B.C.701년에 있은 앗수르의 왕 산헤립의 무자비한 보복을 초래하였습니다. 이때로부터 므낫세는 바벨론에 강제로 끌려갔다 온 다음 앗수르에 줄곧 충성하였고 그로 인하여 오랜 기간의 통치를 누렸습니다.

그러나 요시야는 앗수르가 안심하고 있는 틈을 타서 유다를 강화하였으나B.C. 609년 앗수르의 마지막 왕을 돕기 위하여 진군하던 애굽 군대를 저지하려다가 목숨을 잃고 말았습니다.

산헤립은 앗수르의 왕 사르곤2세의 아들로서 그 부친 사르곤이 살해되므로 앗수르 왕위에 올랐습니다. 그는 바벨론의 엘람을 정복하고 B.C. 701년 서방 여러 나라를 원정하기 시작했으며, 유다왕 히스기야는 애굽에 원군을 청하여 앗수르에 도전하였습니다.

산헤립은 유다를 공격하여 46도시를 점령하고 200,150명을 포로로 데려갔습니다. 그러나 그 후 예루살렘 포위 작전때 전염병이 생겨 전쟁을 포기 하였습니다. 성경은 이 사건이 하나님의 간섭하심으로 되어진 것임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B.C. 681년 니느웨에서 산헤립은 그의 두 아들의 손에 암살 당하였습니다.


유대왕국의 멸망

<유대인들이 바벨론으로 끌려간 경로>

애굽과의 갈그미스전쟁을 승리로 끝낸 바벨론의 느부갓네살왕은 B.C. 605년에 예루살렘을 공격하였습니다. 이때 느부갓네살은 유대의 여호야김왕의 목숨은 살려 주었지만  유대인들 중 일부를 바벨론으로 끌어갔습니다.

당시 유다의 왕 여호야김은 요시아왕의 둘째 아들로서 유대왕 여호아하스를 바로느고가 애굽으로 잡아가고 그 대신으로 왕으로 추대 되었는데 그의 본명은 엘리아김이었습니다.

그는 25세에 즉위하여 국민에게 세금을 많이 부과하였고,  애굽왕 느고에게 조공을 바쳤습니다. 그후  바벨론왕 느부갓네갈이 느고를 격파한 후에는 바벨론왕에게 조공 바쳤습니다.

당시 선지자  예레미야는 이것을 신랄하게 비난하였습니다. 그리고 예레미야는 서기관 바륵을 시켜 모든 예언을 기록하게 하고 백성 앞에서 읽었으나 여호야김은 이 두루마리를 뺏어 불에 태우기도 하였습니다.

처음으로 바벨론에 끌려간 사람들 중에는 다니엘과 그의 세 친구 사드락, 메삭, 그리고 아벳느고가 있었습니다. 다니엘의 세 친구로 유명한 사드락, 메삭, 그리고 아벳느고는 모두 바벨론식의 이름입니다.

사드락의 유대식 본명은 하나냐이며, 메삭의 본명은 미사엘이며, 아벳느고는 아사랴였습니다.

여호야김이 죽자 그의 아들인 여호야긴이 왕위를 이어 받았습니다. 그런데 여호야긴은 겨우 석 달 밖에 나라를 다스리지 못했습니다.

B.C. 597년에 바벨론의 느부갓네살이 다시 예루살렘을 공격하였기 때문입니다. 물론 조약을 어기고 자신의 나라를 배반한 유다를 징벌하기 위해서입니다.

여호야긴은 자기 모친과 궁궐에 있는 모든 사람을 데리고 가서 느부갓네살에게 항복을 하였습니다. 그런데 느부갓네살은 하나님의 전과 유다 왕궁에 있는 모든 기물들을 부수어 가져갔습니다.

그리고 바벨론의 대규모 공사에 동원될 많은 기술자들도 사로잡아 갔습니다. 이는 약 115년 전 히스기야 왕 때에 선지자 이사야를 통해 하신 하나님의 말씀이 그대로 이루어진 것입니다. 그리고 느부갓네살은 시드기야로 왕을 세웠습니다.

유다의 16대 왕인 요시야의 막내아들 시드기야는 제19대 왕인 여호야긴의 숙부였습니다. 그는 여호야긴이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갔을 때 조카를 대신해 바벨론 왕에 의해 유다의 20대 왕위에 오른 인물입니다.

시드기야의 원래 이름은 ‘맛다니야’로서 바벨론 왕에 대한 충성의 표시로 이름을 바벨론식인 ‘시드기야’로 고쳤습니다. 하지만 즉위 3년 뒤에 시드기야는 모압 암몬 두로 시돈 에돔 등 유다 주변에 있는 군소 국가들의 권유를 받고, 또한 친 애굽파인 신하들의 의견을 따라 애굽과 동맹을 맺고 바벨론에 대항하는 반바벨론 음모에 가담하였습니다.

 당시는 예레미야선지자가 활동하고 있었는데, 그 선지자는 시드기야에게 하나님 앞에 회개하고 바벨론과의 동맹을 깨뜨리지 말 것을 역설하였으나 헛수고였습니다. 결국 시드기야는 바벨론 왕의 노여움을 사게 되고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은 직접 대군을 이끌고 유다를 침공하여 예루살렘을 포위하였습니다.

포위된 예루살렘은 1년6개월 동안을 힘겹게 버티다가 결국 성벽이 무너지면서 함락되었습니다. 이때 시드기야는 포위망을 뚫고 요단계곡쪽으로 몰래 도망치다가 여리고에서 붙잡혀 느부갓네살 왕 앞으로 끌려갔습니다.

거기서 시드기야는 모진 고문을 받고 두 눈이 뽑힌 채 쇠사슬에 결박되어 바벨론으로 끌려갔습니다. 그리고 그는 그곳의 감옥에 갇힌 채 여생을 보내게 되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예루살렘성은 황폐화되고 많은 백성들이 포로로 끌려가게 되었습니다.

이 때가 B.C. 586년으로서 유대왕국이 망한 때입니다. 이로써 분열왕국시대가 끝이나고 바벨론 포로시대가 시작되었습니다.  이렇게 하여 이스라엘의 통일왕국시대(B.C. 1095-975)와 분열왕국시대(B.C.933-722)로 이어지던 나라가 망하였습니다.

바벨론 포로시대

<바벨론 제국 영토>

북이스라엘왕국이 앗수르제국에게 멸망하고, 이어서 남유다왕국도 바벨론제국에게 멸망하므로서 이스라엘의 분열왕국시대도 끝이 났습니다.

그리고 바벨론에 유다왕국의 사람들이 포로로 끌려가 살던 70년을 ‘바벨론 포로시대’라고 분류합니다.  유다왕국의 사람들은 바벨론에 세 번에 걸쳐 포로로 끌려가는데, B.C. 605년에 1차 포로, B.C. 597년에 2차 포로, 그리고 B.C. 586년에 3차 포로가 끌려갔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살던 가나안지역은 바벨론제국의 총독의 통치하에 있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기간에 포로로 끌려간 곳에서 부름받은 선지자 다니엘과 에스겔이 있었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바벨론제국에 대하여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주전 612년 바벨론와 메데의  연합군의 공격 앞에서 앗수르 제국의 수도 니느웨는 의외로 힘없이 무너졌습니다. 이로써 앗수르 제국 시대는 끝이 나고 말았던 것입니다.

그리고 메소포타미아의 새로운 패권자로 등장한 것이 바벨론 제국이었습니다. 이와 함께 메소포타미아의 중심축도 북부의 니느웨에서 남부의 바벨론으로 옮겨졌습니다. 사실 바벨론이 메소포타미아 역사에서 중심 역할을 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었습니다.

당시보다 약 1100년전에 바벨론에 유명한 왕이 등장했었습는데, ‘함무라비 법전’으로 인류 역사에서 유명한 ‘함무라비’ 왕이었습니다(B.C. 18세기).

함무라비 왕을 전후한 시대의 바벨론은 메소포타미아 지역 전체를 장악했던 권력의 핵심부였다. 그러나 그 세력은 오래 가지 못했고B.C. 1600년보다 약간 후에 헷왕국(힛타이트)의 침략을 받아 멸망했습니다.

그리고 그 자리를 앗수르 제국이 차지해 오랜 기간 메소포타미아의 맹주가 되었던 것입니다. 함무라비 왕 시대로부터 약 1000년이 지난 후 바벨론의 영광의 날은 다시 찾아왔습니다.

 역사가들은 과거 함무라비 왕 시대와 1000년 뒤에 일어난 제국 시대를 구별하기 위해서, 후자를 ‘신바벨론 제국’(Neo-Babylonian Empire) 시대라고 부릅니다.

이 신바벨론 제국의 역사는 그리 길지 못했습니다. 100년도 채 넘기지 못하고 단명했습니다(B.C. 626∼539년). 그러나 이 제국은 고대 어느 제국보다도 더 큰 권세와 영화를 자랑했습니다. 나보폴랏사르(Nabopolassar)왕에 이어서 등장한 느부갓네살(네부카드네자르 2세)왕은 제국 역사의 중심인물로서 구약성경에 자주 등장하는 인물입니다.

그는 제국 역사의 절반이나 되는 40년이 넘는 기간에 메소포타미아의 절대적 제왕으로 군림했고(B.C. 605∼562년) 그의 이름 뒤에는 ‘왕’ 대신 ‘대왕’이라는 호칭이 따랐습니다. 그러나 그 바벨론 제국은  B.C. 539년 벨사살왕 때에 바사(페르시아)의 고레스왕에게 망하였습니다.

앗수르제국,  바벨론제국 등 우리가 ‘제국’이라는 표현을 사용하는데, 그 제국이라는 말은 일개 국가를 훨씬 초월하는 막강한 지배력이나 권력을 표현할 때 사용합니다. 영어로 제국을 엠파이어(empire)로 표현하는데 그 기원은 라틴어에서 유래한 것입니다.

 라틴어로 임페리움(imperium)은 권력이나 권한을 의미합니다. 그 말에서 최고사령관을 의미하는 임페라토르(imperator) 가 나왔습니다. 그리고 그 말이 황제를 의미하는 엠퍼러(emperor)가 되었고, 그 황제가 지배하는 영역을 empire(제국)이라고 부르게 된 것입니다.

 영어의 황제라는 말이 엠퍼러(emperor)라면 독일에서는 황제를 ‘카이저’로, 러시아에서는 ‘차르’로 불렀습니다. 카이저나 차르라는 말도 로마시대의 말 ‘카이사르’에서 유래한 것입니다. 로마시대에 율리어스 카이사르(시이저) 이후 카이사르는 황제를 뜻하는 호칭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의 후계자 옥타비아누스에게 원로원이 존엄자라는 존칭인 ‘아우구스투스’라는 말을 쓰면서 그 후 황제를 칭할 때 카이사르 아우구스투스(한글 성경에 ‘가이사 아구스도’로 표현됨)로 부르기도 하였습니다.



08-14-2023(월)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수치를 모르는 백성(스바냐 2:1)

수치를 모르는 백성아 모일찌어다 모일찌어다.
Gather together, gather together, O shameful nation,

수치를 모르는 백성(O shameful nation)
학고이 로 니크사프(הַגֹּוי לֹא נִכְסָף)

백성(1471) 고이(gôwy)  גּוֹי 

1. 국민,  2. 이스라엘 사람들,  3. 이스라엘 이외의 민족들
발음 / 고이 [ gôwy ]
어원 / 1465와 동형에서 유래한 것으로 보임[‘한 덩어리가 된다’는 뜻에서]
관련 성경 / 나라(창10:5, 민14:12, 시83:4), 여러 나라(민14:15), 민족(창12:2, 신4:34, 수23:13), 고임(창14:1), 만민(창18:18), 백성(창20:4, 수3:17, 사60:12), 국민(출34:10), 족속(창48:19, 출33:13), 이방나라들(출34:24, 레26:33,45), 주민(레18:28, 합2:8), 이방인(레25:44, 느5:8), 나라 사람(신4:6), 무리(왕하6:18), 이방 사람(왕하17:8), 만국(대상16:35), 만방(사2:2), 대적(사18:2), 조상(겔2:3), 이방 신(말1:11).
구약 성경 / 556회 사용


모르는(3808) 로(lôʼ)  לֹא 

1. ~하지 않았다,  2. ~하지 않을 것이다
발음 / 로 [ lôʼ ]
관련 성경 / 전무후무한(출 11:6), 풀리다(전 12:6).
[명]무죄(호 8:5).
[부] 틀림없이(욥 1:11), 진실로(렘 15:11).
구약 성경 / 5097회 사용


수치(3700) 카사프(
kâçaph)  כָּסַף 

1. 창백해지다,  2. 바라다,  3. 니팔형
발음 / 카사프[ kâçaph ]
관련 성경 / 기다리다(욥 14:15), 찢다(시 17:12), 사모하다(창 31:30, 시 84:2).
[명] 수치(습2:1).
구약 성경  / 6회 사용

개만도 못한 인간

현대 국어 ‘개새끼’의 옛말인 ‘개삿기’는 16세기 문헌에서부터 나타납니다.
‘개삿기’는 명사 ‘개’와 ‘삿기’가 결합한 합성어입니다.
한편 17세기에는 ‘가희삿기’의 예도 나타나는데, 이는 ‘개’의 옛말인 ‘가히’와 관형격 조사 ‘-의’, 명사 ‘삿기’가 결합한 것입니다.
‘가히>개’의 변화에 따라 18세기 이후에는 ‘개삿기’로만 나타납니다.
근대국어 후기에 ㅣ모음 역행동화 현상에 의해 ‘삿기>새끼’의 변화가 일어남에 따라 ‘개삿기’도 현대 국어와 같은 ‘개새끼’로 변화하였다고 합니다.

(참고: 국립국어원 홈페이지 온라인가나다)

한편 조선시대 임금들도 개새끼(狗子/狗雛/狗兒)라는 표현을 사용했으며, 이는 중국에서도 마찬가지로 욕설에 속한다고 합니다.

곰 같은 남자 : 곰 같은 여자






스바냐 1장에서는 유다에 대한 혹독한 심판의 심각성을 알리며 멸절하리라 전멸하리라고 선언했습니다.
스바냐 2장에서는 먼저 회개를 권고한 후에 유다의 이웃 나라들에 대한 심판을 선언합니다.

2:1-3. 회개의 권고.

2:4-7. 블레셋에 임하는 하나님의 형벌의 예언.

블레셋은 5부족의 수도인 가사, 가드, 아스글론, 아스돗, 에그론이라는 5도시 중심으로 운영되었습니다(수 13:3, 삼상 5:1-12).
그 도시마다 방백으로 번역된 지도자가 있어서 자치적으로 운영되었습니다.

여호수아 13:1-3

  1. 여호수아가 나이 많아 늙으매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너는 나이 많아 늙었고 얻을 땅의 남은 것은 매우 많도다
  2. 이 남은 땅은 이러하니 블레셋 사람의 온 지방과 그술 사람의 전경
  3. 애굽시홀 시내에서부터 가나안 사람에게 속한 북방 에그론 지경까지와 블레셋 사람의 다섯 방백의 땅 곧 가사 사람과 아스돗 사람과 아스글론 사람과 가드 사람과 에그론 사람과 또 방 아위 사람의 땅과



2:8-11. 모압, 암몬에 임하는 하나님의 형벌의 예언.

모압 : 근친상간에 의해 태어난 롯의 맏아들(창 19:37).
암몬 : 근친상간에 의해 태어난 롯의 둘째 아들(창 19:38).

(창 19:36, 킹흠정) 이와 같이 롯의 두 딸이 자기들의 아버지로 말미암아 아이를 배니라.
(창 19:37, 킹흠정) 맏딸은 아들을 낳아 그의 이름을 모압이라 하였는데 바로 그는 이 날까지 모압 족속의 조상이며
(창 19:38, 킹흠정) 작은딸도 아들을 낳아 그의 이름을 벤암미라 하였는데 바로 그는 이 날까지 암몬 자손의 조상이니라.

2:12-17. 구스(에디오피아), 앗수르에 임하는 하나님의 형벌의 예언.

애굽 남쪽에 있는 땅인데, 수에네(=아스완, 겔 29:10)에서 남쪽으로 수단에까지 이른다.
그리스어 번역본(칠십인 역본)에서는 '에티오피아'라고 옮겼다.
창 10장에 나오는 민족들의 계보에서 구스는 한편으로 애굽(6절의 미스라임)과 밀접히 관련되고 다른 한편으로는 - 홍해를 넘어서서 - 아라비아와도 관련된다(7절의 스바, 하윌라, 라아마, 스바, 드단. 대하 21:16; 사 43:3; 45:14도 참조).

이와는 달리 8절의 구스는 주전 2,000년경 메소보다미아로 이주해 온 코커서스 기마 민족 '카시트' 사람들(바벨론 말로 '카스')을 가리키는 듯하다.
애굽 남쪽의 나라 구스의 수도는 나파타였는데, 주전 2,000년대에 구스는 여러 차례 애굽의 지배를 받았다.
주전 8-7세기에는 구스 사람들이 일시적으로 애굽 통치권을 차지하여 그 세력으로 심지어는 앗수르 사람들에게 도전하기조차 했다(왕하19:9; 사 20장; 37:8-9).
그렇지만 애굽 사람들은 주전 6세기에 다시 제 나라의 주인이 된다.
구스는 계속 메로에를 수도로 하고 제사장 계층의 통치를 받는 독립적인 나라로 존속하다가 이 제사장 계층은 주전 3세기에 무너진다. 구스 사람들은 용병으로 애굽 군대에 들어 있었지만(대하 12:3; 14:8-14; 16:8; 렘 46:9), 또한 유다 임금을 섬기기도 했다(삼하18:21-23,31-32; 렘38:7-13; 39:15-18).
로마 시대에는 여왕들이 - 곧 태후*들이 - 간다게라는 칭호를 지니고 다스렸다(행 8:27).
옛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구스는 가장 먼 나라, 곧 세상 끝으로 통했다(에 1:1; 8:9에서는 '나일' 대신에 '구스'가 나온다).
그렇지만 거기까지도 이스라엘의 하나님의 권능이 미치고(암 9:7; 사 11:11), 또 구스 사람들도 언젠가는 이스라엘의 하나님께로 나아와서 그를 경배하게 될 것이다(사 18:7; 습 3:8-9; 시 68:31; 87:4. 행 8:26-39 참조). 관련용어 : 에티오피아

하나님께서 선민에게 분노의 날이 미치기 전에 자신들의 죄악을 뉘우치고 돌아오라고 권고하셨습니다(1-3절).
그리고 이스라엘의 멸망을 비웃고, 그들을 괴롭히며, 심지어 하나님을 무시하고 교만했던 이방 국가들을 향한 심판이 경고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심판받게 될 이방 국가는 블레셋과 모암과 암몬, 그리고 구스와 앗수르입니다. 

습관적인 신앙생활은 교회에서는 자신의 잘못된 행동에 대해 하나님께 눈물로 회개합니다.
그리고 교회 밖에서는 또다시 과거의 삶과 똑같이 행동합니다.
그러면서도 나는 교회에서 내 잘못을 뉘우치고 회개하였으므로 하나님께서 들어주셨을 것이라고 믿고 안심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매우 잘못된 신앙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사람의 외모(겉모양)을 보는 것이 아니라 중심(심령)을 보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기도의 내용을 보시고 듣는 것이 아니라 기도자의 마음에 진실이 있는가를 살피십니다.
따라서 자신의 회개에 걸맞는 행동이 없는 기도는 오히려 하나님을 기만하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한마디의 기도보다 한번의 삶 속에서 자신의 죄악을 뉘우치고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회개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이렇게 변화될 때 하나님께서 기도를 들으시고 용서하시며 참된 구원의 축복을 내려 주실 것입니다.

이와 같은 삶을 위하여 겸손하라고 권면합니다(3절)
겸손이란 영어로 험블(humble) 이라고 하며 히브리어로는 아나브(ʽânâv. עָנָו)라고 합니다.
'아나브'를 예수님께서는 산상복음에서 심령이 가난한 자라고 하셨습니다.
따라서 팔복의 내용은 한 마디로 아나브라고 하겠습니다.




 

스바냐 2:3
여호와의 규례를 지키는 세상의 모든 겸손한 자들아 너희는 여호와를 찾으며 공의와 겸손구하라 너희가 혹시 여호와의 분노의 날에 숨김을 얻으리라.

겸손한 자들아(6035) 아나브(ʽânâv)  עָנָו  

1. 억압된,  2. 유순한
발음 / 아나브[ ʽânâv ]
어원 / 6031에서 유래
관련 성경 / 온유한(민 12:3).
[명] 가난한 자(욥 24:4, 시 9:12, 사 61:1), 겸손한 자(시 10:17, 사 11:4, 습 2:3), 온유한 자(시 25:9, 69:32, 76:9), 빈곤한 자(잠 14:21),
가련한 자(사 32:7).
구약 성경 / 21회 사용

* 6031. עָנָה 스트롱번호6031
1. 어떤 것에 노력을 가하다
2. 괴롭혀지다
3. 니팔형
발음 / [ ʽânâh ]
관련 성경 / 애쓰다(전3:10), 수고하다(전1:13), 곤란하다(시119:67), 고난당하다(시119:71, 사53:4,슥10:2), 겸비하다(출10:3, 스8:21), 굴복하다(사31:4), 괴롭다(사53:7), 괴로워하다(사58:10), 욕보이다(신21:14, 삿20:5), 굴복하게 하다(삿16:5, 시90:15), 쇠약하다(시102:23), 상하다(시105:18), 고생하다(애3:33), 관계하다(겔22:10,11), 해롭다(출22:23), 노래하다(출32:18), 낮추다(신8:2,16), 학대하다(창16:6), 박대하다(창31:50), 학대받다(출1:12), 굽히다(욥37:23), 괴로움 받다(시64:12), 근심하다(시132 : 1), 벌받다(왕상8:35, 대하6:26), 복종하다(창16:9). [명] 곤란(시116:10), 고난(시119:107), 온유함(삼하22:36),
구약 성경 / 80회 사용

겸손(6038) 아나바(ʽănâvâh)  עֲנָוָה 

1. 겸손한 마음,  2. 자비
발음 [ ʽănâvâh ]
어원 / 6035에서 유래
관련 성경 / 겸손(잠 15:33, 22:4, 습 2:3), 온유함(삼하 22:36).
구약 성경 / 7회 사용


여호와의 규례를 지키는 세상의 모든 겸손한 자들아 너희는 여호와를 찾으며 공의와 겸손을 구하라

찾으며(1245) 바카쉬(bâqash)  בָּקַשׁ 

1. 찾다.  2. 피엘형  בִּקֵּשׁ
3. 추구하다
발음 [ bâqash ]
관련 성경 / 구하다(민16:10, 대상4:39, 삼상13:14), 찾다(대하15:15, 왕상2:40, 렘50:20), 요구하다(느5:18, 사5:12, 잠15:14), 수색하다(시54:3,삼상26:20), 내다(전7:29), 묻다(단1:20, 창43:9, 삿6:29), 간구하다(대하20:4, 스8:21, 단9:3), 살피다(전7:25), 알아보다(전8:17),얻다(렘2:33, 잠11:27), 물어내다(창31:39),추종하다(레19:31), 벌하다(수22:23), 꾀하다(삼상19:2), 명령하다(대상21:3), 힘쓰다(잠17:11, 슥12:9), 따르다(잠18 : 1), 앙모하다(출33:7), 원하다(왕상10:24, 대하9:23), 걸식하다(시37:25). [명] 바라는 자(시69:6), 구하는 자(시105:3, 잠29:26), 찾는 자(잠28:5, 렘2:24, 겔34:6).
구약 성경 / 225회 사용

공의(6664) 체데크(tsedeq)  צֶדֶק

1. 물리적인 의미에서 곧음,  2. 정의와 동일 레 19: 15,  3. 해방
발음 / 체데크[ tsedeq ]
어원 / 6663에서 유래
관련 성경 / 공의(레 19:15, 시 15:2, 사 11:4), 의(욥 36:3, 시 4:1, 사 26:10), 정의(시 45:7, 48:10), 공평(시 98:9, 잠 2:9, 사 16:5), 의로움(사 45:8), 불의(렘 22:13).
[형] 공평한(레 19:36, 욥 31:6, 겔 45:10), 공정한(신 25:15), 의로운(신 33:19, 잠 8:8).
구약 성경 / 119회 사용
* 6663. צָדַק 스트롱번호6663
1. 올바르다
2. 정당한 이유를 가지다.
3. 창 38:26
발음 / [ tsâdaq ]
관련 성경 / 옳다(창38:26, 욥27:5, 사43:9), 의롭다(욥9:15, 사45:25, 겔16:52), 정결하다(단8:14),의롭게 하다(잠17:15). [명] 의(사43:26, 사5:23), 의로움(렘3:11), 정의(삼하15:4), 공의(시82:3), 정직(창44:16).
구약 성경 / 41회 사용

정의(正義)와 공의(公義)

한글역본 성경들에 ‘정의’(正義)와 ‘공의’(公義)란 용어가 자주 나온다.
이 두 단어가 한 문장 안에 함께 나오는 경우도 허다하다(약 48회).
이 두 용어의 개념이 모호해서 한글역본들에서 서로 엇갈리게 번역된 경우가 많다.

아모스서 5:24

개역개정, 오직 정의 를 물 같이, 공의 를 마르지 않는 강 같이 흐르게 할지어다.

새번역, 너희는 다만 공의 가 물처럼 흐르게 하고 정의 가 마르지 않는 강처럼 흐르게 하여라.

이 구절에서 ‘정의’와 ‘공의’가 개역과 새번역에서 서로 엇갈리게 번역되어 있다.
개역은 <미쉬파트>מִשְׁפָּט 를 ‘정의’ 라고 번역했고 <처다카> צְדָקָה 를 ‘공의’ 라고 번역했지만 새번역은 그 반대로 번역했다.

창세기 18:19

개역개정, 공의 와 정의를 행하게 하려고

새번역, 옳고 바른 일을 하도록 가르치라는 뜻에서 한 것이다.

새번역은 이 두 용어들을 풀어서 의역하였다.
개역개정역에서 ‘정의’ 란 단어는 오경에서 다섯 차례 언급되며(창 18:25; 출 23:6; 신 10:18; 32:4, 41).
새번역 오경에는 ‘공의’ 란 역어를 사용하지 않지만 ‘정의’ 란 역어는 다섯 차례 사용했다(창 18:25; 출23:6; 신10:18; 32:4, 41).

이 두 단어는 우리말 성경에서 일관된 용어로 정립되어 있지 않다.
번역이 문맥에 따라 여러 가지로 다르게 나온다.
독자들은 종잡을 수가 없다.
더구나 한글 사전을 보아도 이 두 단어의 뜻을 서로 구별하기 어렵다.

‘정의’(正義)는 ‘사회나 공동체를 위한 옳고 바른 도리’
‘공의’(公義)란 ‘공평한 도리’

히브리어 원어를 찾아보자.

‘의’ 또는 ‘공의’ 라고 번역되고 있는 <처다카>는 여성명사이고 남성으로는 <체데크>이다.
이 명사는 본디 나무 막대기를 가리켰다.
길고 짧은 것을 재어볼 때 막대기를 도구로 사용하다 보니 <처다카>는 ‘자’(尺)가 되었다.

더 나아가 어떠한 사물이나 사건에 대해서 판단을 할 때 그 판단의 기준이 되는 규범을 가리키는 용어로 발전하였다.
하나님의 백성은 행동할 때 판단의 기준이 되는 척도가 곧 <처다카 / 체데크>인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살려고 애쓰는 사람은 ‘의인’ 이다.
하나님의 뜻대로 살려고 애썼던 사람 노아는 ‘의로운’ 사람이었다(창 6:9).
아브라함이 늙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아들을 주시겠다는 하나님의 말씀을 믿었더니 주께서 그를 ‘의롭다’ 고 인정하셨다(창 15:6).
그렇게 본다면 우리가 흔히 말하는 사법적인 정의(justice)는 <처다카>가 아니다.
그래서인지 서방의 많은 성경학자들은 <처다카>를 righteousness 내지는 Rechtigkeit라고 번역한다.

사법적인 정의는 <미쉬파트>의 개념에 가깝다.
<미쉬파트>는 ‘재판하다’ 란 동사 <샤파트>의 명사형이므로 법정의 소송에서 사용되는 용어라고 할 수 있다.
영어로는 대개 justice, ordinance, judgment 라고 옮긴다.
우리말 역본들에는 ‘정의’, ‘율례’, ‘법규’, 등으로 번역했다.
고대사회에서는 오늘날과 같은 성문법 제도가 없었다.
지역사회에서 오래 전수되어오던 관습법을 중심으로 재판하였다.

관습법을 표현하는 <미쉬파트>란 용어가 성경에 채용되어 하나님의 통치를 표현하였다.
시내산에서 선포된 <미쉬파트>는 하나님께서 내려주신 계약법이다.
<후크>라는 단어와 함께 쓰여 <호크 우미쉬파트>란 상투어가 구성되었는데 ‘계약법’ 을 칭하는 표제가 되었다.
<후크>는 대개 ‘규례’ 라고 번역된다.
<미쉬파트>는 하나님 나라의 백성 공동체에서 통용되는 관습법이다.

<미쉬파트>는 하나님을 믿고 말씀을 준행하며 살려고 모인 말씀공동체의 관습법
<차디크>는 모든 생활에서 주님의 말씀을 실천하며 살려고 애쓰는 사람의 아름다운 모습

<미쉬파트>는 <차디크> 없이는 실천될 수가 없다.
그러므로 <미쉬파트>와 <처다카>는 사람 사이의 윤리 도덕을 규정하는 세상의 법률을 넘어서서, 하나님을 중심으로 엮어진 인간의 공동체 내에서 이루어지는 규범에 관련된다.
하나님 나라의 ‘정의’ <미쉬파트>는 용서와 사랑이다.

"만일 악인이 돌이켜 그 악에서 떠나 정의<미쉬파트> 와 공의 <처타카> 대로 행하면 그가 그로 말미암아 살리라"(겔 33:19)

이렇게 이해할 때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예언은 정확하게 하나님나라의 도래를 선포하는 말씀이 된다.
예수 그리스도의 완전하신 ‘의’ <체데크>로 인하여 성취된 하나님의 사랑은 이미 우리 가운데 하나님의 나라로 현존하고 있다.

"보라, 장차 한 왕이 공의 <체데크> 로 통치할 것이요 방백들이 정의 <미쉬파트> 로 다스릴 것이며"(사 32:1).


공의와 정의의 차이점

는 사적 / 개인적인 덕목이다.
정의는 공적 / 사회적인 덕목이다.
공의는 공적 / 법적인 덕목이다.

1. 의(義)

의는 어원적으로 자기를 지킬 수 있는 사람이 온순하게 행동한다는 뜻입니다. 
자기를 지킨다는 말은 외부의 위협으로부터 자기의 몸을 지키는 것만 가리키는 아닙니다.  세상이 어지럽더라도 자기 마음을 지키고, 영적인 타락을 막을 수 있는 것까지 포함합니다.

그렇게 자기를 지킬 줄 아는 사람이 그런 힘/능력으로 다른 이를 해치지 않아야 합니다.  그래서 호랑이나 용처럼 공격적으로 행동하는 것이 아니라 양처럼 온순하게 행동하는 것입니다.  그게 바로 의의 어원적인 뜻입니다.

 

후대에 의는 사람이 태어나면서 하늘로부터 받은 마음의 능력이라고 정리됐습니다.  맹자님은 의를 수오지심, 즉 '내 잘못을 부끄러워할 줄 알고, 남의 잘못을 미워할 줄 아는 마음'이라고 정의하셨지요.  부끄러운 내 잘못은 고치고, 미운 남의 잘못은 내가 반복하지 않도록 경계할 줄 안다는 뜻이겠습니다. 

 

그래서 의는 대체로 개인적인 수신의 덕목으로 이해됩니다.  그래서 '의로운 사람'이 되는 것은 '어진(仁) 사람,' '예절 바른(禮) 사람,' '슬기로운(智) 사람'과 함께 군자의 도의 하나로 꼽혔습니다. 

 

그래서 의(義)로운 사람은 자기와 자연과의 관계, 자기와 세상과의 관계, 자기와 하나님과의 관계를 '옳게' 설정합니다.  그런 올바른 관계 안에서, 즉 자기 분수 안에서 몸과 마음과 넋을 지키는 것이지요.

 

그런 의의 실천은 군자지도를 이루는 수신 덕목입니다.  수신이란 기본적으로 개인적이고 사적인 영역입니다.  그러나 이런 수신의 덕목이 결국 제가와 치국과 평천하의 바탕이 됩니다.  수신과 제가는 사적인 활동이지만 치국과 평천하는 공적인 활동입니다.  그래서 의를 알고 행하는 것은 개인적이고 사적인 덕목이지만 사회적이고 공적인 덕목을 이루는 바탕이 됩니다.

 

개인적이고 사적인 덕목으로서의 의를 잉어권에서는 주로 '롸이쳐스니스(righteousness)'로 번역합니다.  의의 한국말 새김이 '옳음'인데, '롸이쳐스니스'의 어근 '롸이트(right)'도 '옳다'는 뜻입니다. 

 

우연의 일치인지는 몰라도 한국말에서도 사람의 두 손 중에서 일반적으로 더 능숙한 손을 '옳은 손 --> 오른손'이라고 부르는 데, 잉어권에서도 그런 손을 '롸이트 핸드(right hand)'라고 부릅니다.  '의'와 '롸이쳐스니스'의 긴밀한 상응 관계가 심상치 않은 수준임을 짐작할 수 있는 대목입니다.

 

2. 정의(正義)

전통적인 한자어 의미론에 따르면 정의는 그냥 의와 별반 다름이 없는 개념입니다. 
바를 정(正)자가 수식어로 사용되기는 했지만 '바르지 않은 의'라는 게 있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한편, 19세기 중엽에 일본식 한자어로 탄생한 정의개념은 서양의 '저스티스(justice)'를 번역한 말입니다.  이런 뜻으로 쓰이는 정의는 '준법 행위'를 가리킵니다.  '저스티스'가 '법'을 가리키는 라틴어 '유스(jus)'에서 나온 말이기 때문입니다.  '저스티스'로서의 정의(正義)는 전통적인 한자어 정(正)이나 의(義)개념과는 직접적인 상관이 없습니다.

 

사실상 지금 우리가 쓰는 정의라는 말은 전통적 한자 의미론에 따라 독자적으로 조합한 것이 아니라 일본식 한자어에서 유래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원래는 개인적/사적 덕목이 아니라 법적/공적 덕목이어야 합니다.

 

그런데도 지금 우리가 쓰는 정의는 그런 좁은 뜻의 '저스티스'에 머물지 않습니다.  그것은 '준법행위'라는 사법적인 의미보다는 더 포괄적이지만, 사회적이고 공적인 뜻을 가진다는 점에서 전통적인 의 개념과도 차이가 납니다.  그래서 요즘의 '정의'개념은 '의'와 '저스티스'의 중간지점에 놓인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요즘 쓰이는 '정의'라는 말은 어떤 때는 잉국말 '롸이쳐스니스'의 번역어로 쓰이기도 하고, 어떤 때는 '저스티스'의 개념으로 쓰이기도 합니다.  이렇게 다소 모호한 정의 개념은 한국말 문헌에서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성경이 바로 대표적인 문헌입니다.

 

최초의 한국어 구약 성경은 1911년에 번역이 끝나서 출판됐습니다.  그 이후 두 차례에 걸쳐서 개역이 됐지만 주로 개정된 맞춤법에 따라 표현만 바꿨을 뿐 사용된 낱말을 바꾼 적이 없습니다.  지금 가장 널리 사용되는 한글 개역판 성경은 1967년에 개정된 것인데, 거기에 사용된 개념들은 기본적으로 1911년에 출판됐던 이른바 '구역' 성경과 별반 차이가 없습니다.

 

이 개역 한글판 구약 성경에는 정의라는 말이 많이 나옵니다.  그런데 이 정의라는 말들은 때로 잉어 '저스티스'의 번역어로 쓰이기도 했지만 '롸이쳐스니스'의 번역어로도 사용됐습니다.  아래 인용한 시편과 예레미아서의 구절을 한번 보시지요.


저는 정의와 공의를 사랑하심이여 세상에 여호와의 인자하심이 충만하도다. (시편 33:5)
(He loveth righteousness and judgment: the earth is full of the goodness of the LORD.)

 

내가 다윗에게 한 의로운 가지를 일으킬 것이라. 그가 왕이 되어 ... 세상에서 공평과 정의를 행할 것이며 (예레미아서 23:5)
(I will raise unto David a righteous Branch, and a King ... shall execute judgment and justice in the earth.)

시편 33:5에 나오는 '정의'는 영어  '롸이쳐스니스'의 번역어이지만,
예레미야서 23:5에 나오는 '정의'는 영어 '저스티스'의 번역어입니다. 

영어 '롸이쳐스니스'와 '저스티스'는 상당히 다른 개념이라고 보았습니다. 
롸이쳐스니스는 도덕적 / 윤리적 / 종교적 옳음이고, 저스티스는 법적인 옳음이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롸이쳐스니스는 개인적 / 사적인 덕목인 반면에 저스티스는 사회적 / 공적인 덕목이라고 합니다. |
그런데 그렇게 서로 다른 개념을 한국말로는 똑같이 '정의'라고 했습니다. 
번역상의 실수일까요? 
결론부터 말하자면 실수가 아닙니다. 
실수가 있었다면 그건 오히려 영어 성경이 저질렀다고 보아야 합니다. 

영어 성경(킹제임스 역본)이 시편 33:5에서 '롸이쳐스니스'라고 번역한 히브리어 낱말은 "체다카"입니다. 
"옳다"는 뜻을 가진 동사 "차다크"의 명사형이지요. 
그런데 예레미야서 23:5에서 영어 성경이 '저스티스'라고 번역한 말도 똑같은 "체다카"입니다. 

그러니까 히브리말로 똑같이 "체다카"인 것을 잉어 성경이 '롸이쳐스니스'와 '저스티스'로 달리 번역했던 것이지요. 
그것을 한국말 성경에서는 다시 똑같은 말을 써서 "정의"라고 번역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사실 이 두 구절에 나오는 "정의"의 번역을 보면 킹제임스 잉어 성경보다는 개역 한글판 성경이 더 정확한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예레미야서 23:5에는 "체다카"가 두 번이나 나옵니다. 
하나는 "의로운 가지"라고 번역됐고, 다른 하나는 "정의"라고 번역됐습니다. 
여기서 다시 한번 "의(義)"와 "정의(正義)"가 결국 같은 개념이었다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그럼 어째서 한국말 성경 번역자들은 히브리어 "체다카"를 "의"와 "정의"로 따로 번역했을까요? 
그점을 미루어 짐작하려면 '체다카'가 적어도 5천년의 역사를 가진 낱말이라는 점을 알아야 합니다. 

5천년 전의 언어는 지금보다 훨씬 단순합니다. 
사회가 단순하고 사람이 단순하고 사상이 단순했으니까 언어와 그 뜻도 단순할 수밖에 없는 것이지요. 
그러므로 그때는 개인적인 의이든 사회적인 의이든 모두 "체다카"로 불러도 모자람이 없었겠습니다.

그러나 오늘날의 사회와 사람과 사상은 아주 복잡합니다. 
따라서 언어도 더욱 분화되어서 복잡해질 수 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비록 5천년 전에는 모두 "체다카"로 뭉뚱그려 말할 수 있었던 것도, 지금은 개인적 덕목과 사회적 덕목으로 나누어 불러야 할 필요가 생긴 것이지요. 

그게 바로 영국말 성경 번역자들이 같은 "체다카"를 '롸이쳐스니스'와 '저스티스'로 나누어 번역했던 까닭이겠습니다. 
그리고 똑같은 이유로 한국말 성경 번역자들이 "체다카"를 때로는 "의"로 번역하고 때로는 "정의"라고 번역했던 것이지요.

정의 개념은 원래는 의와 같은 개념이었지만, 시대와 사회의 변화 덕분에 개인적 사적인 덕목과 사회적 공적인 덕목을 구분해야 했던 사정에 따라서 분화된 말이라고 보면 좋을 것입니다. 
그래서 요즘 정의는 개인의 수신을 가리키는 뜻이 아닙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바람직한 관계와 그런 관계에서 이루어지는 바람직한 상호작용을 제시하는 개념입니다.

예컨대 부모 자식 사이에는 친(親)함이 있어야 한다는 게 오륜의 하나입니다. 
'친함'이라는 게 무슨 뜻인지는 또 다른 이야기가 되겠습니다만, 어쨌든 '친함이 있는 부모 자식 관계'가 바로 정의입니다. 
부모가 자식을 버린다거나 자식이 부모를 해치는 것은 '친하지 않음'이고 따라서 불의입니다.

민주사회에서는 유권자가 투표를 통해 대표자를 뽑기로 돼 있습니다. 
그러니 선거 때에는 투표를 하는 것이 정의입니다. 
투표를 하지 않고 먹고 놀러 가는 것은 불의입니다. 
투표를 통해서 뽑아놓으면 그의 임기 동안에는 소신껏 일할 기회를 주기로 돼 있습니다. 
그런 기회를 주지 않고 비판만 하는 것은 불의입니다.

기업이 신문이나 방송을 통해 상품을 광고할 때에는 정확한 정보를 제공해야 합니다. 
그게 정의입니다. 
과대 광고나 소비자들의 눈속임을 일으키는 광고를 하는 것은 불의입니다. 
상품을 만들어서 파는데 짧은 기간에 많은 이윤을 볼 수 있다면서 매점매석을 하는 것도 불의입니다. 
사회적 약자인 근로자들의 불리한 입장을 이용해서 사용자들이 근로자들에게 불리한 근로 조건을 강요한다면 이 역시 불의입니다.

그리스도교의 성직자는 목자이신 예수님으로부터 "내 양을 먹이라"는 명령을 받아 지키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성도  예수님 성직자의 관계는 양 목자 양치기 개(sheep dog)의 관계입니다. 
그게 옳은 관계이고, 그런 관계 속에서 상호작용이 이루어져야 합니다. 
그게 바로 정의입니다. 
만일 '양치기 개'가 '양'의 '목자' 노릇을 하려고 하면 문제가 생깁니다. 
또 '양'이 '양치기 개'를 '목자'로 여기게 되면 이것도 사단입니다. 
그게 바로 불의의 출발점입니다.

3. 공의(公義)

거의 같은 뜻으로 만들어진 정의와 공의는 한반도로 건너와서 서로 다른 길을 걸었던 것 같습니다. 
정의는 점점 전통적인 의 개념으로 옮겨가면서도 사적 개인적 덕목으로서의 의와는 구별되는 사회적 공적 덕목을 가리키는 말로 자리잡았습니다. 

공의는 본래의 번역어였던 '저스티스'와 '젓지먼트(judgment)'를 가리키는 말로 그냥 남았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공의는 다분히 '법적이고 공적인 덕목'을 가리키는 말로 굳어졌습니다. 

그러나 뜻이 이렇게 특화된 이후에도 공의는 일상어로 널리 유포되지 못했고, 단지 그리스도교 내에서만 하나님의 속성을 서술하는 말로 살아 남았습니다. 
일종의 은어지요.  "하나님은 공의로우신 분"이라는 표현으로만 주로 쓰이는 제한적인 용법의 낱말입니다.

성경에서도 '공의'는 주로 '젓지먼트'의 번역어로 쓰였습니다. 
'젓지먼트'로 옮겨진 히브리어는 "미슈파트"인데, 이는 "재판하다, 다스리다, 벌주다"는 뜻을 가진 동사 "샤파트"의 명사형입니다. 
또 재판이나 통치나 처벌은 공정해야 한다는 보았기 때문인지, 미슈파트에는 "공정하다"라는 파생적인 뜻도 갖고 있었습니다.

'미슈파트'라는 한 단어에 왜 이렇게 많은 뜻이 담겨 있었던 것일까요? 
그 점을 알려면 또다시 히브리어가 5천년 전의 원시 언어였다는 점을 되새겨 볼 필요가 있습니다. 
당시의 단순한 사회에서는 언어의 뜻이 그다지 분화될 필요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미슈파트'라는 한 단어를 가지고서도 그렇게 다양한 인접 의미를 다 가리킬 수가 있었던 것이겠지요.

킹제임스 잉어성경이 번역됐던 16세기까지만 해도 '젓지먼트'라는 한 단어를 가지고서 '미슈파트'의 뜻을 거의 다 옮길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히브리어 '미슈파트'는 거의 예외없이 잉어 '젓지먼트'로 번역됐었지요. 

그러나 20세기에 들어서는 사정이 그리 호락호락하질 못했습니다.  한국말 성경 번역자들은 '미슈파트' 혹은 '젓지먼트'를 번역하기 위해 적어도 여섯 가지의 서로 다른 낱말을 동원했습니다.  사람과 사회와 사상이 5천년이나 5백년 전에 비해 매우 복잡해 졌기 때문에 하나의 낱말로 그런 복합적인 현상을 모두 가리키기가 어려워졌기 때문이겠습니다.

 

그 여섯 가지 번역어는 공의(公義)를 비롯해서 공법(公法), 공도(公道), 공평(公平), 심판(審判) 그리고 벌(罰) 등이었습니다.  그런 번역어의 예들을 개역 한글판 구약 성경에서 하나씩만 찾아서 아래 옮겨 놓았습니다.

 

저는 정의와 공의를 사랑하심이여 (시편 33:5)
(He loveth righteousness and judgment.)

 

너희는 공법을 쓸개로 변하며 정의의 열매를 인진으로 변하며 (아모스 6:12)
(ye have turned judgment into gall, and the fruit of righteousness into hemlock.)

 

여호와의 도를 지켜 의와 공도를 행하게 하려고 (창세기 18:19)
(they shall keep the way of the LORD, to do justice and judgment.)

 

너희는 공평을 지키며 의를 행하라 (이사야 56:1)
(Keep ye judgment, and do justice.)

 

하나님이 어찌 심판을 굽게 하시겠으며 전능하신 이가 어찌 공의를 굽게 하시겠는가(욥기 8:3)
(Doth God pervert judgment? or doth the Almighty pervert justice? )

 

이제는 악인의 받을 이 네게 가득하였고 (욥기 36:17)
(But thou hast fulfilled the judgment of the wicked)

 

이중에서 심판과 벌, 그리고 공평은 오늘날 일상적으로 쓰이는 말입니다.  그러나 공법/공도/공의라는 말은 일반화되지 못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말들은 모두 합쳐져서 법을 집행하는 사법(司法)의 전과정을 가리킵니다.

 

사람들의 행위를 규제하는 법(公法)이 명시되어야 하는데, 그런 법은 사회적 도리(公道)에 기반을 두어야 합니다. 
사람의 행위를 판단하는 과정(審判)이 마련돼 있어야 하고, 그런 심판은 공평(公平)해야 합니다. 
심판을 통해 유죄가 확정되면 벌(罰)을 받게 되는 것이지요.  이런 전 과정을 가리켜 공의(公義)라고 부를 수 있습니다.

말하자면 공의는 사법의 전과정을 가리키는 말로 볼 수 있다는 말입니다. 
그것은 사회의 공적인 덕목을 실현하기 위한 과정이라는 점에서는 정의와 비슷합니다. 
그러나 명시적인 법(法)이 있어야 한다는 점, 그리고 그런 법에 비추어 사람의 행동을 판단하는 공적인 심판 과정이 뒤따라야 한다는 점에서 정의와 차이가 있습니다. 
말하자면 공의는 원래적 의미의 '저스티스,' 즉, 법을 집행하는 과정과 결과를 가리킵니다.

그리스도교에서 하나님을 '공의의 하나님'이라고 부르는 것도 이와 같은 맥락입니다. 
그리스도교의 하나님, 특히 구약 성경 시대의 하나님은 '공의의 하나님'으로 불립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사람들에게 법을 제시하고, 그 법대로 살 것을 명령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법대로 살지 않는 사람들은 심판하고, 그런 심판의 결과로 상을 내리거나 벌을 내리는 일이 가시적으로 드러났기 때문입니다.

구약의 하나님이 사람들에게 제시한 법은 율법(律法)이라고 불립니다. 
그 율법은 좁은 의미로는 '토라'라고 불리는 모세오경만 가리키지만, 넓은 의미로는 구약성경과 탈무드까지 합친 문헌을 모두 포함합니다. 
거기에는 "--를 해라"는 명령보다는 "--하지 마라"는 명령이 더 많습니다. 
오늘날의 형법(刑法)과 아주 비슷합니다. 
그런 금지 율법을 어기면 심판과 처벌의 대상이 되는 것이지요.

신약 시대에는 그런 공의적 특성이 엷어지기는 했지만 아주 사라지지는 않았습니다. 
죄인에 대한 심판이 예고되어 있다는 점, 그리고 그런 심판의 결과로 영생이나 영벌이 마련돼 있다는 점 때문입니다. 
그리스도교의 이런 특성 때문에 그 하나님은 "공의의 하나님"이라고 불려 왔다는 점을 일단 지적해 둡니다.


공의와 정의에 대해서

우리는 흔히 ‘공의’라고 부르는 말을 영어 성경 속에서 찾아보면 ‘righteousness’이며, 히브리어로는 ‘쩨다까’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한편 ‘공의’와 함께 따라오는 말은 ‘정의’에 해당하는 영어 단어로 ‘justice’이며, ‘미슈파트’라는 히브리어에 해당합니다.

 

공의란?

공의의 사전적 의미는 ‘공평하고 의로운 도의’ ‘선악의 제재를 공평하게 하는 하느님의 적극적인 품성’입니다.
따라서 성경 말씀에 비추어보면 공의는 관계적 개념으로 보는 것이 타당할 듯합니다.
이를 대체할 단어들로는 ‘긍휼’‘공평’ 등을 들 수 있으며, ‘마음을 같이 하는 것’‘동의하는 것’ 등으로도 해석할 수 있을 것입니다.
즉, 인간의 형편과 처지를 보시고 불쌍하게 여기시며, 바로잡으려고 하는 의로운 하나님의 마음이며, 일반적인 ‘정의’의 개념에 ‘긍휼’이 포함된 개념으로도 설명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 예로 “아브라함을 ’정의‘롭게 여기셨다”보다는 “아브라함을 ’공의‘롭게 여기셨다”라는 표현이 더 적절하다고 봅니다.
’공평‘이라는 의미로도 사용되는데 가난하고 약하며, 핍박받고 억압받는 사람들을 ’긍휼‘하게 여김으로서의 공평한 하나님 마음, 또는 억압하고 착취하는 폭력에 대해 참지 않으시는 ’공평‘한 마음 등으로 표현할 수 있을 것입니다.

정의란?

정의의 사전적 의미는 “진리에 맞는 올바른 도리” “개인 간의 올바른 도리. 또는 사회를 구성하고 유지하는 공정한 도리”입니다. 따라서 정의는 실제적 개념이며 마찬가지로 성경 말씀에 비추어보면 ’심판‘’법도‘’재판‘’규례‘’공평한 저울‘ 등으로 대체할 수 있을 것 입니다. ’공의‘가 관계나 그 성품(마음)을 표현하는 단어라고 한다면, 정의는 실제적인 법과 규례 그리고 집행을 의미할 것입니다. 또한 정의는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요구하는 규례, 즉, 올바른 삶의 원칙을 의미하는 단어로 사용되었다고 봅니다. “...너희가 만일 길과 행위를 참으로 바르게 하여 이웃들 사이에 ’정의‘를 행하며 이방인과 고아와 과부를 압제하지 않으며, 무제한 자의 피를 이곳에서 흘리지 아니하며...(렘 7장 :5~6절)”

아울러 위 말씀과 같이 ’약자를 억압하지 않은 것‘의 의미로 사용되기도 하여, 상거래 시 ’저울을 정당하게 사용하는 것‘을 ’정의‘로 표현할 수 있으며, 소작농에게 급여를 제날짜에 정확히 주는 것도 ’정의‘라는 단어를 사용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성경 ’잠언‘을 통해 우리가 지혜와 훈계를 알게 하고 명철의 말씀을 깨닫게 하려고 공의와 정의를 적절하게 말씀하고 있는 것도 찾아볼 수 있습니다. “...지혜롭게, ’공의‘롭게, ’정의‘롭게, 정직하게 행할 일에 대하여 훈계를 받게하며...(잠언 1:3)

이 두 말들을 적절하게 사용한 예를 몇 가지 들어보고자 합니다.

- 우리에게 있어서 구원은 하나님의 ’공의‘의 선물이고, 심판은 하나님의 ’정의‘입니다.
- 우리는 정의를 행함에 있어서 ’공의‘로운 마음으로 대해야 합니다.
- 죄는 미워하되 죄인은 미워하지 말라는 뜻은 죄는 ’정의‘롭게 심판하되, 죄인은 긍휼함, 즉, ’공의‘로 대하라는 의미일 것입니다.
끝으로  실제 생활 속에서 정의와 공의를 동시에 실천한 재판관의 명판결 예화를 소개하면서 마무리하겠습니다.

1930년 어느 상점에서 빵 한 덩이를 훔치고 절도 혐의로 기소된 노인이 재판을 받게 되었습니다.
판사가 빵을 훔친 이유를 물었습니다.
"판사님, 저는 지금 이혼한 딸과 살고 있는데 딸은 병들었고 두 손녀딸이 굶고 있습니다.
빵 가게 앞을 지나가는데 나도 모르게 그만 손이 나갔습니다. 잘못했습니다."

노인의 말을 들은 방청객들은 노인에게 동정의 시선을 보내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공정한 법의 집행을 내려야 하는 판사는 고민을 안 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리고 판사는 잠시 후에 다음과 같이 판결을 내렸습니다.
"아무리 사정이 딱하다 할지라도 남의 것을 훔치는 것은 잘못입니다. 법은 만인에게 평등하고 예외가 없습니다. 그래서 법대로 당신을 판결할 수밖에 없습니다. 당신에게 10달러의 벌금형을 선고합니다."

당시 10달러는 노인에게는 너무나도 컸습니다.
노인의 딱한 사정에 선처를 기대했던 방청객들은 실망스럽다는 목소리가 들렸습니다.
판결을 내린 판사는 자리에서 일어난 후 법정에 있는 사람들에게 모자를 내밀며 말했습니다.
"여러분, 이 노인이 빵을 훔쳐야만 할 정도로 어려운 상황임에도 아무런 도움을 주지 않고 방치한 우리 모두에게도 책임이 있는 것입니다.
여기 10달러를 제가 내겠습니다.
여러분 중에도 저와 같은 생각을 한다면 50센트를 이 모자에 넣어 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그 돈을 거두어 이 노인분에게 다 주도록 하시오."

그렇게 해서 57달러 50센트의 돈이 모였고, 노인은 돈을 받아서 10달러를 벌금으로 내고, 남은 47달러 50센트를 손에 쥐고 눈물을 흘리며 감격했습니다.

'의, 공의, 정의'의 원어와 그 개념

1. '의, 공의, 정의'의 원어(原語)


1) 히브리어 '체데크'(qd,x, tsedeq ; 남성형), '체다-카-'(hq;d;x, tsedaqah ;여성형)남성형 117회, 여성형 155회 씌어져 있다. 공평, 정직, 의, 올바름, 의로움, 공정, 번영, 균등한, 전적으로 올바른), 공정한(-함), 의로운, 의롭게 등으로 번역되어 있다.


2) 히브리어 '미슈파-트'(fP;v]mi, mishpat)이것은 '재판, 판결' 등도 의미하는 넓은 의미의 말로서, '체데크', '체다-카-'보다 윤리적인 의미가 강한데 대해, '미슈파-트'는 법적 의미가 우월하다. 


3) 그리스어 '디카이오-마'(dikaivwma, dikaioma), '디카이오-스'(dikaivwsi", dikaiosis)'디카이오-마'(dikaivwma, dikaioma)가 10회, '디카이오-시스'(dikaivwsi", dikaiosis)가 2회 씌어져 있다. 이것은 한마디로 구약에 있어서의 '의'의 개념의 연장으로 이해되는 것으로서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또는 이에 기초한 인간과 인간의 관계를 표현한(예컨대 '사랑'과 같다) 관계 개념이다. 이 말은 바울서신에 있어서, 극히 중요한 신학적 개념인데, 기타의 문서에 있어서는 비교적 나오는 수도 적고(34회), 당시의 유대교의 사상적 공유재산과 깊이 관계되어 있다. 


2. '의, 공의, 정의'의 개념(槪念)


1. 의(義)
[히] qd,x,(tsedeq), hq;d;x](tsedaqah) [그] dikaiosuvnh(dikaiosune) [라] Justisia [영] Righteousness, Justice 

죄를 하나도 짓지 않은 상태(출 15:26; 시 119:142; 마 6:33; 계 22:11). 
일반적인 '의'는 윤리적인 성질에, 윤리적인 표준에의 일치에 한정되어 있다.
그리고 그 표준은 사회 또는 집단의 규범에 의존하며 상대적이다.
하지만, 성경적인 용법에서는 그 표준은 '하나님의 의'이지, 사회의 규범은 아니다(시 85:11; 빌 3:9; 계 22:11). 
'의'(義)는 제1의적으로 '하나님의 의'이고, 하나님이 그 자신의 거룩하심에 적합하도록 인간에게 요구하는 일이며,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신앙을 통하여 주어지는 것이고, 이 행위의 결과, 즉, 이 의를 이웃 사람에의 사랑에 있어서 완성하시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생명이다. 하나님은 믿는 자를 '의로운 자'로 여기신다(롬 3:25; 행 13:38; 롬 4:3).

"주의 의는 영원한 의요 주의 법은 진리로소이다"(시 119:142).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 6:33). 


2. 공의(公義) 
[히] fP;v]mi(mishpat) [그] dikaiosuvnh(dikaiosune) [영] Justice(Right-)

공명정대하고 의로움. 하나님의 속성의 하나(신 16:20; 시 106:3; 창 18:25; 요7:24; 눅 11:42). 
'하나님의 공의'란, 그 절대 공정하심과 정의로우심을 뜻하고, 하나님은 이것을 사랑하신다(시 37:28, 99:4; 사 61:8, 62:2).
또한 이것은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것으로(미 6:8) 치리자는 공의에 따라야 하고(잠 29:4; 렘 5:1; 합 1:4; 습 3:5), 사람마다 이것을 행할 것이다(렘 7:5; 암 5:15; 미 6:8).

'공의'로 번역된 원어는 수종이나 되는데, 같은 원어가 거의 '의'로도 번역되어 있다.
공의로 역된 히브리어 중 주요한 말은 명사 [미슈파-트]로서, 이것은 [심판하다]는 동사[샤-파트 fP'v,;(shaphat)]에서 파생된 것인데, 이 미슈파-트는 인간 상호의 관계를 정하는 하나님의 공정한 심판을 의미하는 말이다.

그리스어 명사로는 '디카이오수네-'가 '공의', 또는 '의'로 번역되어 있는데, 신약에 91회 씌어져 있는 말로서, 다만 하나님의 '의'에만 씌어져 있지 않고, 경건한 행위에 대해서도 씌어져 있다(마 55:20).
 "공의를 지키는 자들과 항상 의를 행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시 106:3).
"외모로 판단하지 말고 공의의 판단으로 판단하라 하시니라"(요7:24).

3. 정의(正義)
[히] qd,x,(tsedeq), hq;d;x](tsedaqah) [그] dikaiosuvnh(dikaiosune) [영] righteousness, justice

올바른 도리(렘 33:15; 암 5:24; 시 33:5). 
이 용어는 기독교 신학의 역사를 통하여 다음과 같은 세 가지의 서로 연결된 용법으로 사용되었다. 
①.  하나님의 본성을 표현하는 말 
②. 죄에 의하여 잃어진 인간의 완전성과 의를 가리키기 위하여 
③. 인간의 사회생활에서 인간과 인간 사이에 있어야 할 정당한 관계.
"그 날 그 때에 내가 다윗에게 한 의로운 가지가 나게 하리니 그가 이 땅에 공평과 정의를 실행할 것이라"(렘 33:15).




겸손(6038) 아나바(ʽănâvâh)  עֲנָוָה 

1. 겸손한 마음,  2. 자비
발음 / 아나바[ ʽănâvâh ]
어원 / 6035에서 유래
관련 성경 /  겸손(잠 15:33, 22:4, 습 2:3), 온유함(삼하 22:36).
구약 성경 / 7회 사용

* 6035.

겸손한 자들아(6035) 아나브(ʽânâv)  עָנָו  

1. 억압된,  2. 유순한
발음 / 아나브[ ʽânâv ]
어원 / 6031에서 유래
관련 성경 / 온유한(민 12:3).
[명] 가난한 자(욥 24:4, 시 9:12, 사 61:1), 겸손한 자(시 10:17, 사 11:4, 습 2:3), 온유한 자(시 25:9, 69:32, 76:9), 빈곤한 자(잠 14:21),
가련한 자(사 32:7).
구약 성경 / 21회 사용

* 6031. עָנָה  
1. 어떤 것에 노력을 가하다
2. 괴롭혀지다
3. 니팔형
발음 / [ ʽânâh ]
관련 성경 / 애쓰다(전3:10), 수고하다(전1:13), 곤란하다(시119:67), 고난당하다(시119:71, 사53:4,슥10:2), 겸비하다(출10:3, 스8:21), 굴복하다(사31:4), 괴롭다(사53:7), 괴로워하다(사58:10), 욕보이다(신21:14, 삿20:5), 굴복하게 하다(삿16:5, 시90:15), 쇠약하다(시102:23), 상하다(시105:18), 고생하다(애3:33), 관계하다(겔22:10,11), 해롭다(출22:23), 노래하다(출32:18), 낮추다(신8:2,16), 학대하다(창16:6), 박대하다(창31:50), 학대받다(출1:12), 굽히다(욥37:23), 괴로움 받다(시64:12), 근심하다(시132 : 1), 벌받다(왕상8:35, 대하6:26), 복종하다(창16:9). [명] 곤란(시116:10), 고난(시119:107), 온유함(삼하22:36),
구약 성경 / 80회 사용



- 본 구절에서 스바냐가 권면하는 대상은 오직 '세상의 모든 겸손한 자들'뿐이다.
왜냐하면 그 외의 사람들은 도저히 여호와의 날에 살아남을 수 없기 때문이다(Von Orelli).
모든 겸손한 자들은 하나님의 은혜와 자비를 구하는 자들이며 하나님의 계명과 규례들을 지키는 자들이다.
스바냐는 여기서 '세상'이라는 표현을 사용하여 겸손한 자들이 단순히 유다 백성을 가리키는 것이 아님을 분명히 드러내고 있다.
그들은 이방인이나 유다 백성이나 그 혈통과는 상관없이 하나님을 간절히 기대하며 겸손히 공의를 행하며 하나님의 규례를 즐겨 찾는 이들이다.

너희가 혹시 여호와의 분노의 날에 숨김을 얻으리라

- 스바냐는 겸손한 자들조차도 심판이 행해지는 여호와의 날에 겨우 하나님의 은혜를 얻을 것인지 모른다고 말하고 있다.
이러한 사상은 아모스에게도 나타나는 것으로(암 5:15) 모든 것이 여호와의 주권에 달려 있음을 시사한다(Smith).





수치를 모르는 백성아 모일지어다

기독교는 단순히 내세 지향적인 종교가 아닙니다.
죽음 이후에 천국이 전부가 아닌 겁니다.
그렇다고 오늘 우리 삶의 형통함에 모든 초점이 맞추어져 있는 것도 아닙니다. 목적이 불분명하면 엉뚱한 길로 갈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어디에 서 있어야 하는지 알아야 하는 거죠. 선택과 부르심은 우리를 어디로 이끌고 가는 걸까요?

소위 기독교 신앙을 종말론적 신앙이라 부릅니다.
끝을 향해 가고 있지만, 종말은 오늘과 맞물려 있습니다. 오늘이 그래서 중요합니다. 오늘 내가 어떤 모습으로 하나님 앞에 서 있는가 볼 수 있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매일 매 순간, 그 끝에 서 있는 자신을 상상하며 살아가고 있습니까? 무엇을 했었다가 아니라 수없는 오늘에 무엇을 하고 있는가를, 단면이 아닌 전체의 우리를 하나님은 보고 계십니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기회가 한없이 주어질까요? 성경은 반복적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여호와의 날이 가까웠다.” 바로 심판의 날이 가까이 이르렀다는 경고입니다. 이 경고는 스바냐 선지자가 선포하고 있는 그 시대의 사람들을 향한 것이기도 하지만, 어느 특정한 시대를 향한 말씀이 아닌, 오고 오는 모든 시대를 향한 경고이기도 합니다. 이스라엘은 이 경고처럼 하나님의 심판을 받았지만, 이것은 궁극적인 종말의 날로써 모든 시대에 선포되는 심판의 경고인 겁니다.

이스라엘은 이러한 심판의 경고를 가볍게 여기곤 했습니다. 거기에는 그들의 잘못된 믿음도 일조를 했습니다. 하나님이 결코 자신을 버리지 않을 거라는 생각입니다. 그래서 반복적으로 경고의 시한이 닥쳐와도 변화된 행동을 취하지 않다가 하나님의 심판에 직면하곤 했던 겁니다.

인간의 좋지 않은 특징 가운데 하나가 다 끝났는데도 끝까지 버텨 보려는 행동입니다. 어리석게도 “설마 이것이 끝이겠어? 그래도 조금의 시간은 있지 않을까? 또 다른 기회가 주어지지 않을까”라고 생각하는 겁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분명하시고 명확하시고, 공의로운 분이십니다. 그러기에 스바냐 선지자는 하나님 앞에서 어떻게 하라고 합니까? 잠잠하라는 것입니다.

습 1:7 “주 여호와 앞에서 잠잠할지어다 이는 여호와의 날이 가까웠으므로 여호와께서 희생을 준비하고 그가 청할 자들을 구별하셨음이니라.”

이미 하나님은 계획하셨고 계획하신 대로 심판을 실행하실 것입니다. “여호와께서 희생을 준비하고 그가 청할 자들을 구별하셨음이니라.” 이렇게 급박한 상황에서는 다른 변명과 핑계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무엇이 가장 중요하겠습니까? 긴박한 시간에 그곳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없습니다. 오직 회개하는 것 뿐입니다. 그래야 하나님께서 멈추시지 않겠어요. 그러기에 스바냐 선지자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하여 회개를 촉구하였습니다.

그런데 회개하지 않는 이들이 있습니다. 자기 잘못을 전혀 깨닫지 못하는 자들입니다. 그들은 자기가 분명히 크게 잘못하였음에도 전혀 부끄러워하지 않습니다. 뻔뻔하고 안하무인 격입니다. 그래서인지 부끄러운지 모르고 더 큰소리칩니다. 적반하장입니다. 죄는 사람을 뻔뻔하게 만듭니다. 그러니 부끄러워하지 않습니다. 양심에 화인을 맞았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 앞에서 이런 모습을 보일 때가 많았습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은 이런 이스라엘에 다시 회개의 기회를 주셨습니다. 1절 “수치를 모르는 백성아 모일지어다 모일지어다.”

여기에서 히브리어 “니크샤프”는 부끄러워 하다는 뜻도 있지만 “사모하다, 갈망하다, 바라다”는 의미로도 사용이 됩니다. 그런 점에서 수치를 모르는 백성일 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찾지도 갈망하지도 사모하지도 않는 백성이라는 것입니다. 이런 연유로 이스라엘은 반복적으로 하나님의 구원을 구하는 대신에 사람의 구원을 의지하곤 하였던 거죠. 따라서 “수치를 모르는 백성”은 스바냐 1장 6절에서 언급한 ‘여호와를 찾지도 아니하며 구하지도 아니한 자들’(1:6)을 다시금 지적한 것입니다. 이들을 향하여 스바냐는 하나님을 찾도록 회개를 촉구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패역한 백성을 향해 당신을 사모하고 찾으며 또한 은혜를 구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렇게 찾을 수 있도록 기회를 열어주셨음에도 찾지 않으면 하나님은 이들을 어떻게 하신다고 하셨을까요? 습 1:6 “여호와를 배반하고 따르지 아니한 자들과 여호와를 찾지도 아니하며 구하지도 아니한 자들을 멸절하리라.”

하나님은 저들을 멸절하지 않으시고 구원하시고자 이렇게 수치를 모르는 백성에게 “모일지어다. 모일지어다.” 선포하고 있습니다. 히브리어에서 같은 동사의 반복은 그 의미를 강조하기 위함입니다. 오직 모이는 길이 살길이라는 거예요. 그냥 저들끼리 모이는 자리가 아니라 하나님과의 온전한 관계를 회복하기 위한 예배로의 부르심입니다. 즉 심판의 날이 임하기 전 범죄 한 모든 백성이 다 같이 하나님 앞으로 모여 나아와 한 가지로 회개하고 오직 하나님을 사모하고 찾을 것을 요구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함께 모여 하나님을 예배하고 하나님 앞에 서는 일은 매우 중요한 행동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제사장이요 하나님의 봉사자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을 예배하고 하나님의 이름에 합당한 영광을 올려드리고 은혜의 충만함으로 세상 가운데 나아갈 수 있을 때 우리는 하나님 앞에 부끄럽지 않은 모습으로 설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이 넉넉하리라 생각하십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시급합니다. 언제 우리 주님 다시 오실지 알 수가 없습니다. 속히 임하리라는 그래서 언제라도 맞이할 준비 된 종말론적 신앙이 필요합니다. 그러기에 스바냐 선지자는 2절에서 임박한 심판 앞에서 우리가 머뭇거리지 아니하고 대비할 것을 요청하고 있습니다.

습 1:2 “명령이 시행되어 날이 겨 같이 지나가기 전, 여호와의 진노가 너희에게 내리기 전, 여호와의 분노의 날이 너희에게 이르기 전에 그리할지어다.”

항상 준비된 자만이 주 앞에 설 수 있습니다. 긴박함을 잃어버리고 느슨해지기 시작할 때 우리는 매우 중요한 포인트를 놓치고 말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것을 놓치지 않도록 여러 가지 비유들을 통해서 우리에게 말씀해주셨습니다. 그렇지 못할 때 우리는 파국을 맞게 되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는 매 순간 온전한 신앙의 자리에 서 있기를 힘써야 합니다. 사람들은 느순하게 있다가 문제가 닥친 다음에 행동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먼저 대비할 것을 요청하고 계십니다. 이렇게 그날을 대비하는 것은 수치를 모르는 이들이나 구원받은 자들 모두에게 요구되고 있어요.

습 2:3 “여호와의 규례를 지키는 세상의 모든 겸손한 자들아 너희는 여호와를 찾으며 공의와 겸손을 구하라 너희가 혹시 여호와의 분노의 날에 숨김을 얻으리라.”

“여호와의 규례를 지키는 세상의 모든 겸손한 자들아”라고 했습니다. 그냥 겸손한 이들이 아닙니다. 여호와의 규례를 지키는 겸손한 자들입니다. 예수님의 낮아지심도 세상적인 겸손함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뜻에 철저하게 순종하는 낮아짐입니다. 이렇게 우리의 낮아짐이 하나님의 뜻에 철저하게 낮아지는 겸손일 때만이 우리는 여호와 하나님을 찾을 수 있습니다. 자기의 뜻의 우선되고 세상의 것들이 우선되는데, 하나님의 말씀과는 멀리 동떨어져 있는데 어떻게 하나님을 찾을 수 있습니까? 어떻게 하나님의 구원을 의지하겠습니까?

오늘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 안에 거하는 겸손한 자라면 여호와를 사모하고 그분 앞에 거하기를 기뻐해야 합니다. 이것은 하나님을 사모하지 않는 수치를 모르는 자들과는 반대편에 서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나님 앞에 서 있음에도 하나님은 그와 같은 삶을 지속적으로 요청하십니다. 그것은 그 삶에 대한 갈망과 연속성이 우리에게 요구되기 때문입니다. “내가 예수님을 믿었으니까 이젠 죽으면 천당 가겠지”라는 단순한 생각을 내려놓고 매순간 두렵고 떨림으로 우리의 구원을 이루어가라는 말씀입니다.

무엇보다도 우리는 그날을 알지 못합니다. 마 25:13 “그런즉 깨어 있으라 너희는 그날과 그때를 알지 못하느니라.” 우리에게는 영적 긴장 필요합니다. 다 이룬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늘 언제나 하나님을 찾고, 하나님의 구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의지해야 합니다. 그와 함께 우리의 삶에 하나님의 공의와 그리스도의 겸손을 구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뜻 가운데 순종하며 사는 이들은 여호와의 공의 가운데 있고, 그리스도와 함께 하는 겸손한 자들임에도 다시 여호와를 찾고, 공의와 겸손을 구하라고 강조하는 것은 두 가지 이유가 있어서입니다. 하나는 하나님의 심판이 참으로 엄중함을 암시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하나님 앞에 겸손히 무릎 꿇고 하나님 아버지의 긍휼과 은혜를 사모하는 것이 하나님의 백성들이 끊임없이 견지하며 계속해야 할 합당한 삶의 태도이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을 찾고 공의와 겸손을 구하는 삶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을 중요한 신앙적 덕목입니다. 게다가 하나님을 찾고 공의와 겸손을 구하는 삶은 어느 순간 완전히 성취되는 것이 아닙니다. 심판의 순간까지 끊임없이 견지하고 실천해야 할 성도의 태도입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 한 후에, 그것도 후회함 없이 말입니다. 그렇게 하나님 앞에 설 수 있어야 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인간의 구원이 인간의 행위에 따라 결정되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실은 우리가 하나님 앞에 선다는 것은 언제나 부끄럽고 두려운 일입니다. 항상 이사야의 심정인 거죠.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서 죄인 된 자신의 모습을 깨닫지 못한다면 물론 이런 반응은 나오지 않겠지요.

비록 사람이 하나님의 계명에 순종하고 하나님 앞에서 공의를 행한다 할지라도, 그의 구원은 절대 주권자이신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는 것입니다. 그런 뜻에서 스바냐는 회개를 촉구하고 여호와를 찾고 공의와 겸손을 구하라고 하면서 그것이 다가 아니라고 이야기 하는 것입니다.

3b “너희가 혹시 여호와의 분노의 날에 숨김을 얻으리라.” 구원은 하나님의 절대적 주권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모습을 올려드리고 하나님의 은혜를 기다리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것이 우리에게 거저 주는 구원의 은혜를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이 은혜는 하나님의 공의가 전제된 것입니다. 공의를 이루기 위한 그리스도의 희생이 없었다면 우리는 이 은혜를 구할 수 없게 되는 거죠. 아무리 우리 행위가 완벽해도 말입니다.

딤후 1:9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사 거룩하신 소명으로 부르심은 우리의 행위대로 하심이 아니요 오직 자기의 뜻과 영원 전부터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하심이라.”

그러기에 우리는 수치를 모르는 자여서는 구원에 이를 수 없습니다. 죄로 인한 우리 자신의 부끄러움을 인지하고 우리의 부끄러움을 덮어주시는 그리스도 안에 있어야 합니다. 그럴 때 우리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을 것입니다.

벧후 2:6 “성경에 기록되었으되 보라 내가 택한 보배로운 모퉁잇돌을 시온에 두노니 그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아니하리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은 혹시 구원해주시리라는 것이 아니라 구원의 확신으로 우리를 이끌어 갈 것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수치를 당하심으로 우리의 수치를 덮어주셨습니다. 예수님의 은혜를 힘입어 우리는 더욱 깨어 자신을 돌아보아야 합니다. 하나님을 찾고, 그분의 공의와 그리스도의 겸손으로 서 있는지 말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는 이제 수치를 모르는 강퍅한 백성이 아닙니다. 자랑스러운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하나님의 제사장이요 하나님의 봉사자입니다.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새롭게 하신 우리 자신의 존재를 지켜냅시다. 이를 위해 우리의 회복을 이루어주시는 그리스도 안에 날마다 서 있는 저와 여러분이 되기를 축원합니다.




수치를 모르고 살아가는 존재가 얼마나 불쌍한 존재인지 모른다.
그렇기에 악행을 행하고도 내가 무엇을 잘못했는지조차 모른다.
목사라는 틀 안에서 나는 수치를 모르고 살아간다.
목사이니까! 하나님께서 책임져 주시겠지 생각하며 제 맘대로 살아간다.
목사이지만 기도하지 않고 목사이지만 하나님의 음성에 귀를 더욱 쫑긋 세우고 듣지 않는다.
수치를 모르는 백성들아 부르는 저 스바냐의 외침이 나를 향해 부르는 외침으로 들린다. 마치 확성기로 내 귀에 대고 부르는 듯하다. 제발 정신 차려라! 넋놓고 있지 말아라! 정신이 바짝 든다. 정신줄을 놓고 있던 것을 이제 다시 주어담는다. 수치를 모르는 백성이 아니라 여호와의 규례를 지키는 세상의 모든 겸손한 자로 세워지길 소망한다. 목사로써 깨어서 할 수 있는 일을 준비한다. 겸손함으로... 어쩌면 손가락질 당할 수 밖에 없는 일이지만 준비해 본다.


공의와 정의로 이 세상을 심판하시는 하나님! 그렇기에 나의 수치도 모르고 살아가는 어리석은 자가 되지 않도록 오늘도 저를 깨워주소서! 불의와 불공정 앞에 하나님이라는 틀로 뒤짚어쓰고 수치를 외면하고 모른척하지 않게 하소서! 오늘도 규례를 지키는 겸손한 자로 살아가게 하소서!



하 나님께서 창조하신 땅 위의 모든 것을 진멸해 버리시겠다고 한다면 분명 이유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신데 어떻게 세상을 멸절하신다는 무시무시한 말씀을 하십니까?’라고 불평할 것이 아니라 ‘세상이 멸절을 받아야 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에 마음을 두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멸절의 이유가 나 자신에게서도 발견된다면 ‘나 역시 멸망을 받아야 하는 죄인일 뿐입니다’라는 고백과 함께 하나님께 나와야 합니다. 이것이 하나님 앞에서 인간이 어떤 존재인가를 아는 바른 자세라고 할 수 있습니다.

 

 

1장에서 선지자는 유다와 예루살렘의 멸망을 선포합니다. 그들이 멸망을 받는 것은 여호와를 배반하고 따르지 아니했기 때문이고, 여호와를 찾지도 구하지도 않았기 때문입니다(1:4-6).

 

 

유다는 나름대로 하나님을 찾고 구했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제사 제도는 성실히 실천을 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하나님을 찾고 구하는 것으로 여기지 않으셨습니다. 유다가 제사 드리는 날이 되면 성전에 모였지만 하나님은 그것은 모이는 것으로 여기지 않았습니다.

 

 

1절을 보면 “수치를 모르는 백성아 모일지어다 모일지어다”라고 말합니다. 이 말의 의미는 유다가 하나님 앞에 모여 제사를 드리는 것을 시행하지 않았다는 의미가 아니라 그들이 부지런히 모였으되 하나님은 그 모임을 부인하셨다는 뜻입니다.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것은 유다가 자기의 수치를 모르는 인간으로 모였기 때문입니다. 자기 수치를 전혀 알지 못하는 인간으로써 행하는 제사는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세우신 제사 규례는 인간의 수치를 가려주시는 은혜가 담겨 있고, 그것은 흠없는 제물의 희생을 통해서 증거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자기 수치를 모르는 인간이 행하는 제사는 단지 종교 의식일 뿐 믿음과는 상관이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의 교회는 종교 의식 자체를 믿음으로 간주합니다. 유다가 제사라는 종교 의식을 하나님을 섬기는 신앙으로 여긴 것과 같습니다. 결국 종교 의식을 실천하기 위해 예배당에 모이고, 그것을 신앙으로 간주하는 현대 교회나 멸망을 받은 유다가 같은 수준에 있다면 현대 교회 역시 멸망을 피할 수 없다는 결론이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수치를 아는 백성으로 하나님께 나오는 것입니다. 자기 수치를 아는 자로 하나님께 나올 때 수치를 덮어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바라볼 것이고, 그 은혜를 기뻐하고 감사하는 자의 모임이 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그 모임을 받아주시는 것입니다.

 

 

인간이 자기 수치를 모른다는 것은 자신의 불의와 더러움을 보지 못한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이유는 자신의 속이 아니라 겉만 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표면적으로는 별 문제가 없는 사람으로 보입니다. 불의하고 더럽고 악하다고 할 만한 것이 보이지 않는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을 불의하고 더러운 존재로 표현을 하면 떨떠름한 표정을 짓기도 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속 중심을 보신다고 했습니다. 인간은 자신의 속을 위장할 수가 없습니다. 표면적인 것은 얼마든지 감추거나 위장할 수 있지만 속마음은 위장하지 못합니다. 또한 하나님 앞에서 감출 수도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의 속이 깨끗하다고 할 수 있습니까? 온갖 악하고 더러운 것으로 가득한 것이 우리의 속입니다. 만약 자신의 속이 그대로 드러난다면 떳떳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수치와 부끄러움으로 어디론가 숨어 버리고 싶은 마음일 것입니다. 그런 심정으로 하나님께 나오고 하나님을 찾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수치를 아는 사람은 자기 육신을 위해 하나님께 무언가를 구할 자격조차 없음을 압니다. 오직 수치를 덮어주시는 은혜만을 구할 뿐입니다.

 

 

2절을 보면 “명령이 시행되어 날이 겨 같이 지나가기 전, 여호와의 진노가 너희에게 내리기 전, 여호와의 분노의 날이 너희에게 이르기 전에 그리할지어다”고 말합니다. 이 말씀처럼 여호와의 분노의 날이 이르기 전에 우리가 할 일은 수치를 아는 백성으로 하나님을 찾는 것입니다. 이처럼 자기 수치를 아는 것은 생명과 연관된 참으로 중요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3절에 “여호와의 규례를 지키는 세상의 모든 겸손한 자들아 너희는 여호와를 찾으며 공의와 겸손을 구하라 너희가 혹시 여호와의 분노의 날에 숨김을 얻으리라”고 말합니다.

 

 

세상의 모든 겸손한 자들에게 여호와를 찾으면 공의와 겸손을 구하라는 것이 무슨 뜻일까요? 겸손을 구하라는 말은 겸손하지 않은 사람들에게 어울리는 말입니다. 그런데 선지자는 세상의 모든 겸손한 자들에게 공의와 겸손을 구하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세상의 모든 겸손한 자들이 실상은 겸손하지 않다는 뜻입니다. 세상이 볼 때는 겸손이지만 하나님이 보실 때는 교만일 뿐이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 앞에서 겸손은 자기 수치를 아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자기 수치를 모른다면 아무리 ‘나는 부족합니다’라는 말로 자신을 위장하고 겸손한 척해도 교만일 뿐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공의를 구하고 겸손을 구하는 사람은 자신은 의롭지 못하고 교만한 존재일 뿐임을 알기 때문입니다. 공의와 겸손은 자신에게서는 나올 수가 없고 오직 하나님께만 있음을 알기 때문에 여호와를 찾으며 공의와 겸손을 구하게 됩니다.

 

 

그런데 과연 현대 교인들이 여호와를 찾으면서 공의와 겸손을 구할까요? 현대인들이 필요로 하는 것은 육신을 즐겁게 해 주는 것입니다. 육신의 가치를 향상시킬 수 있는 것, 세상에서 높임 받을 수 있는 것을 필요로 하고 구할 뿐이지 공의와 겸손을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그러한 것은 자신의 가치를 향상시켜주는 것이 아님을 알기 때문입니다.

 

 

공의와 겸손을 구하는 것은 자기 수치를 아는 사람들에게만 있습니다. 자기 수치를 안다면 수치를 덮을 수 있는 것이 돈도 권력도 아님을 알 것입니다. 큰 집에 살고 큰 차를 탄다고 해서 수치가 가려지겠습니까? 오직 하나님의 의로만 수치가 가려지고, 자신의 교만을 알기 때문에 겸손을 구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러한 신자를 분노의 날에 숨기신다고 하십니다.

 

 

말씀이 우리에게 다가와서 드러내는 것은 수치라는 것을 아십니까? 말씀을 볼 때마다 어김없이 잊고 있었던 우리의 수치가 발각되고 드러남을 실감하십니까? 그것이 말씀의 능력이고 은혜입니다.

 

 

세상이 말하는 윤리와 도덕으로도 수치는 드러나지 않습니다. 오히려 수치가 윤리와 도덕으로 포장되어 굳게 감추어질 뿐입니다. 돈과 권력 또한 수치스러운 인간됨을 보지 못하게 합니다. 하지만 말씀은 우리가 보지 못하던 수치를 보게 하면서 하나님이 긍휼과 자비를 구하는 자로 하나님을 찾게 합니다. 이것이 은혜입니다.

 

 

여러분은 말씀을 통해서 무엇을 보려고 하십니까? 다시 말하지만 말씀은 교만한 자로 살고, 하나님을 찾지도 않고 구하지도 않으며 오로지 멸망에 해당되는 우리의 실제를 보게 합니다. 그것이 말씀의 은혜입니다.

 

 

롬 1:29-32절을 읽어 보십시오. 왜 자신을 수치스럽다고 말할 수밖에 없는지 아실 것입니다. 자기 수치를 앎으로써 예수님을 세상에 보내신 하나님의 덮어주시고 가려주신 은혜를 구하고 감사하는 신자로 하나님을 찾는 것이 참된 백성입니다.하






08-12-2023(토)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여호와의 큰 날(스바냐 1:14)

스바냐(Zephaniah) - 여호와께서 간직하셨다, 여호와께서 숨기셨다, 여호와께서 보호하셨다

스바냐의 시대 /  16대. 요시야(31년)

15대. 아몬(2년) - 16대. 요시야(31년) - 17대. 여호아하스(3개월) - 18대. 여호야 김(11년). - 19대. 여호야 긴(3개월) - 20대. 시드기야(11년)

여호와의 큰 날이 가깝도다 가깝고도 심히 빠르도다 여호와의 날의 소리로다 용사가 거기서 심히 애곡하는도다.
"The great day of the LORD is near-- near and coming quickly. Listen! The cry on the day of the LORD will be bitter, the shouting of the warrior there.

여호와의 큰 날(The great day of the LORD)
욤 아도나이 학가돌(ום־יְהוָה הַגָּדֹול)

스바냐가 활동하던 시기는 유다 왕국의 영적 암흑기였습니다.
므낫세와 아몬의 영향으로 우상 숭배의 죄악에 푹 빠졌습니다. 
요시야가 개혁을 이끌었지만 진실한 회개가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제사 형식을 정비하고 우상을 몰아냈지만 백성들의 부패한 마음을 바꿀 수 없었습니다.

​결국 하나님께서는 스바냐를 통해 심판의 메시지를 선포합니다.
유다 백성과 지도자의 죄악을 고발합니다(4-5).
여호와의 날 즉 심판 날에 대해서 예언합니다(7-13).

불의한 권력자들, 우상 숭배자들, 예루살렘에서 포악을 행한 자들, 돈을 의지한 자들은 심판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입니다.
심판의 날이 가깝고 빠르게 올 것이라고 합니다.

​여호와의 큰 날에 멸절하고자 하는 대상은 누구인가?

​ 지붕에서 하늘의 뭇 별들에게 경배하는 자들
 여호와께 맹세하면서 말감을 가리켜 맹세하는 자들
 여호와를 배반하고 따르지 아니한 자들
 여호와를 찾지도 아니하며 구하지도 아니한 자들

​우상숭배하는 자들과 여호와를 따른다고 하면서도 우상을 따르는 자들, 그리고 여호와의 말씀을 따르지 않는 자들을 멸절하신다고 하였다.

​그 중에서 '여호와께 맹세하면서 말감을 가리켜 맹세하는 자들'을 멸절하신다는 말씀이 귀에 더 쟁쟁하게 들려온다.

​참된 경배의 대상이신 만군의 여호와를 경배하지 않고 잘못된 대상인 하늘의 일월성신을 경배하는 자들을 멸절할 것이라고 말씀하신 하나님께서, 한 걸음 더 나아가 명목적으로는 여호와를 섬기지만 실제로는 이방신을 섬기는 패역한 선민들의 죄악을 질타하고 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역사적으로 볼 때 전적으로 이방신을 섬기는 데에 전념한 적은 거의 없었다. 죄악에 빠진 경우 거의 대부분 이러한 범죄를 저질렀다. 즉 가식적 · 형식적으로 여호와를 섬기거나 종교 혼합주의적 · 종교 다원주의적 유혹에 미혹되어 여호와께 범죄하였던 것이다.

​오늘날의 우리들의 모습은 어떠한가?

​오늘날 많은 사람들도 마찬가지이다. 여호와를 섬기면서도, 하나님을 믿노라고 하면서도 세상적인 것들을 쫓아다니는 삶들이 너무 너무 많다. 이러한 모습을 보고 하나님께서는 가증히 여기시는 것이다. 우리들의 일상생활 속에서 찾아보고 뉘우치고 회개하고 돌아오는 자들이 되기를 간절히 기도하자.

​예배의 형식은 엄청나게 발전하였다. 축제와 같은 예배를 드린다고 각본에 짜여진 대로 연출을 한다. 성도들에게 감동을 주는 예배의 형식은 뛰어나다. 현대 문화의 발전을 교회 예배 의식에 도입하여 엄청나게 화려하다.

​그러나 예배를 준비하는 자들의 마음 속에 어떤 것들이 존재하고 있을까? 종교 혼합주의, 다원주의 뿐만 아니라 개인의 사욕을 채우기 위한, 연출자에게 기쁨과 만족을 주기 위한 예배가 대부분임을 볼 때 안타까울 뿐이다.

​여호와께로 돌아가자. 힘써 여호와께로 돌아가자.

스바냐 선지자는 각종 우상 숭배와 죄악에 빠져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임박한 '여호와의 날'을 선포하면서 회개를 촉구합니다.

하나님의 심판의 보편성에 대해 보여 주고 있는데 심판이 온 지면에서부터 시작될 것임을 선포하고 있는 전반부(1-6절)와 예루살렘에 임할 심판의 양상을 언급하고 있는 중반부(7-13절), 그리고 임박한 여호와의 날을 기록하고 있는 후반부(14-18절)로 구성되어 있다.

특히 본장에서는 심판이 유다에 집중되어 있음과 아울러 하나님의 심판의 심각성을 강조하면서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회개하고 하나님께 돌아오도록 촉구하고 있다. 

주일이면 도처에서 많은 성도들이 교회로 발걸음을 옮기고 있습니다.
과연 이러한 행렬이 구원을 받은 증거가 될 수 있을까요?
그들은 모여서 예배하며 설교를 듣고 헌금을 바치고 때로는 직분에 따라 봉사도 합니다.
이러한 모습은 구원을 받은 외적인 모양은 될 수 있지만 내적인 증거가 될 수 없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들은 하나님이 선택을 받은 거룩한 백성이라고 증거하려고 율법에 따라 행동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와 같은 행동에 대하여 여호와의 날 즉 여호와의 두렵고 큰 날을 맞이하게 될 것이라고 선포했습니다.
형식적인 예배와 신앙생활을 버리고 하나님이 기뻐하는 신앙과 생활을 회복해야 하겠습니다.
이 길만이 여호와의 날에 인정을 받을 수 있는 비결입니다.




여호와의 날은 세상과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뜻과 목적을 이루는 날로 인류 역사의 마지막으로 벌어질 일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분의 권능으로 악을 징계하고 하나님의 언약을 이루는 여호와의 날은 종말 혹은 최후의 심판이라도 불립니다.
심판의 주인은 예수 그리스도로 믿지 않는 이들에게 그날은 가장 두려운 날이고, 믿는 이들에게는, 그들의 삶이 옳았음을 입증해 줄 것이기에, 간절히 기다리는 날입니다.



스바냐는 요시아 왕 시대에 활동하던 선지자로 포로 기간 중에도 살아 있었습니다. 스바냐는 임박한 예루살렘의 파멸에 관해 백성에게 경고하고, 다가오는 구원을 예언하였습니다. 1장은 여호와께서 온 땅과 유다 백성에게 진노하셔서 그들을 멸절시키신다는 경고의 말씀입니다. 2장에서는 이방 나라들에 대한 심판을 예고합니다. 3장에서는 예루살렘에 대한 재앙을 알리고 다가오는 구원을 선포합니다. 스바냐는 유다 민족이 이방 민족들과 함께 파멸을 당할 것이지만 때가 오면 그들이 해방의 기쁨을 누린다는 약속의 말씀으로 격려해 주었습니다.

오늘 본문은 전 우주적인 심판을 선포하는 내용입니다. ‘여호와의 날’이라는 말이 반복됩니다. 여호와의 날은 역사적으로는 바벨론을 통해 이스라엘을 심판하시는 날을 가리킵니다. 종말론적으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장차 심판장으로 재림하실 날을 가리킵니다. 여호와의 날은 불신자들에게는 심판의 날이요, 믿는 자들에게는 구원의 날입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서 여호와의 큰 날에 임할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이 어떤 자들에게 어떻게 이루어지는지 알 수 있습니다.

I. 내가 사람을 땅 위에서 멸절하리라(1-6)

완전히 진멸하리라(아소프 아세프) - אָסֹף אָסֵף


완전히(622) 아사프(
’âçaph)  אָסַף 

1. 긁어 모으다
2. 모으다.
3. 출애굽기 23:10.
발음 / 아사프[ ’âçaph ]
관련 성경 / 저축하다(창 6:21), 씻다(창30:23), 모으다 (출3:16, 렘40:12, 사33:4), 거두다(출23:10, 욥34:14), 얻다(신11:14), 오다(신22:2), 받아 들이다(수20:4), 줍다(룻2:7, 사10:14), 고쳐주다(왕하5:6), 고치다(왕하5:11), 모아들이다(렘21:4), 빼앗다(렘16:5), 거두어들이다 (신16:13), 주다(렘8:13), 소집하다(습3:8), 꾸리다(렘10:17), 멸하다(삼상15:6), 불러모으다(삼상14:52), 영접하다(시27:10, 삿19:15), 호위하다(사58:8, 52:12), 돌아가다(왕하22: 20, 삿2:10, 신32:50), 멸망하다(겔34:29), 모이다(창29:3, 레26:25, 렘4:5), 들어가다(왕하22:20, 대하34:28, 렘47:6), 모여오다(대상 11:13), 빼앗기다(렘48:33), 들어오다(민12: 14,15), 돌아오다(출9:19, 민11:30), 물러가다 (시104:22), 회집하다(사43:9), 없어지다(호 4:3), 모이게 하다(사49:5), 함께 하다(신33: 5), 모여지다(슥14:14), 모이게 되다(사24: 22). [부] 반드시(미2:12). [명] 후진(민10:25), 후군(수6:9, 13).
구약 성경 / 200회 사용

진멸하리라(5486) 수프(Ws çûwph)  סוּף 

1. 채어가다
2. 끝내다
3. 히필형 : 앗아가다
발음 / ㅎ수프[ Ws çûwph ]
관련 성경 / 무너지다(암 3:15), 폐하다(에 9:28), 망하다(사 66:17), 진멸하다(렘 8:13, 습 1:2, 3), 전멸하다(시 73:19).
구약 성경 / 7회 사용


멸절하리라(3772) 카라트(kârath)  כָּרַת 

1. 자르다
2. 사무엘상 24:5
3. 민수기 13:23
발음 / 카라트[ kârath ]
관련 성경 / 세우다(창15:18, 출24:8, 대하23:3), 베다(민13:24, 삼상24:5), 만들다(신20:20), 맺다(수9:16, 시89:3), 파괴하다(삿6:30), 찍다(왕하18:4, 렘22:7), 없이하다(왕상11:16), 맹약하다(삼상22:8), 벌목하다(대하2:8), 베이다(사44:14), 언약하다(삼상11 : 1), 조약을 맺다(수9:6), 끊어버리다(렘50:16, 왕상14:10), 깨뜨리다(출34:13), 빼다(삼상17:51), 깎다(삼하10:4), 베어내다(왕상5:6), 자르다(대상19:4), 계약하다(욥41:4), 끊다(렘11:19), 참여하다(신29:12), 끊어지다(삼상5:4, 삼하3:29, 대하6:16, 출22:15, 민9:13, 레17:14), 부서지다(사22:25), 진멸되다(나1:15), 멸하다(창9:11,레26:22), 멸망하다(창41:36), 씹히다(민11:33), 멸절되다(옵1:9), 진멸하다(미5:9, 삿4:24), 멸절하다(슥13:8, 왕하9:8), 찍히다(삿6:28), 멸절시키다(삼상28:9), 떨어지다(나3:15). [명] 언약(학2:5, 신7:2), 조약(왕상20:34), 파괴(호8:4).구약 성경  / 285회 사용

1절을 보십시오. “아몬의 아들 유다 왕 요시야의 시대에 스바냐에게 임한 여호와의 말씀이라 스바냐는 히스기야의 현손이요 아마랴의 증손이요 그다랴의 손자요 구시의 아들이었더라” 스바냐는 유다 왕 요시야 시대에 활동하던 선지자였습니다. 요시야는 8살에 왕이 되었고, 어려서부터 여호와 앞에 정직한 왕이었습니다. 20살에 종교개혁을 시작했습니다. 26살에 성전을 수리하던 중 모세의 율법책을 발견했습니다. 그는 그 성경을 읽다가 유다가 쇠락한 것이 언약의 말씀을 어겼기 때문임을 깨닫고 온 백성들과 함께 애통하며 회개하였습니다. 그리고 말씀대로 개혁을 이루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앗수루의 국내 혼란을 기회로 국토를 넓혀나갔습니다(왕하 22:1-23:20). 그러나 유다에는 선왕들의 죄악으로 인하여 하나님의 심판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었습니다. 이러한 때에 스바냐에게 여호와의 말씀이 임했습니다. 스바냐는 히스기야의 현손이요, 아마랴의 증손이요, 그다랴의 손자요 구시의 아들이었습니다. 그는 사 대 조상인 히스기아까지 언급함으로서 자신의 예언이 권위가 있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에게 임한 여호와의 말씀이 무엇입니까? 2절을 보십시오. 여호와께서 내가 땅 위에서 모든 것을 진멸하겠다고 선포하였습니다. 노아 홍수 심판 때에 세상을 진멸하신 것처럼 하나님께서 땅 위에 있는 모든 것을 철저하게 심판하시겠다는 선언이었습니다.

어느 정도로 심판하십니까? 3절을 보십시오. “내가 사람과 짐승을 진멸하고 공중의 새와 바다의 고기와 거치게 하는 것과 악인들을 아울러 진멸할 것이라 내가 사람을 땅 위에서 멸절하리라 나 여호와의 말이니라” 하나님은 지면에서 사람과 짐승을 진멸하십니다. 공중의 새, 바다의 고기, 거치게 하는 것을 진멸하십니다. ‘거치게 하는 것들’은 우상을 가리킵니다. 우상들과 악인들을 아울러 진멸하십니다. 땅 위에서 사람을 멸절하십니다. 이는 여호와의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사람의 죄악을 심판하시되 그들에게 맡기신 짐승, 공중의 새와 바다의 고기들까지 함께 심판하십니다. 그들이 섬기던 우상들을 악인들과 더불어 파멸시키십니다. 저자는 '진멸하고' ‘진멸할 것이라’ ‘멸절하리라’고 반복함으로써 하나님의 심판이 엄격하며 철저함을 강조했습니다.

특히 우상숭배자들을 진멸하십니다. 4절을 보십시오. “내가 유다와 예루살렘의 모든 주민들 위에 손을 펴서 남아 있는 바알을 그 곳에서 멸절하며 그마림이란 이름과 및 그 제사장들을 아울러 멸절하며”하나님은 심판의 손길을 유다와 예루살렘 모든 거민 위에 펴십니다. 그래서 남아 있는 바알을 그 곳에서 멸절합니다. 바알은 가나안 사람들의 농경의 신이요, 다산을 주관하는 풍요의 신이었습니다. 유목생활을 하던 이스라엘이 농경생활로 접어들면서 농사의 신 바알을 섬기게 되었습니다. 농사 월력이 모두 바알 숭배와 관련되었습니다. 점차로 백성들의 마음이 여호와에게서 떠나 바알을 따르게 되었습니다. 많은 선지자들이 하나님의 심판을 경고했습니다. 요시아 왕은 철저하게 성경 말씀에 근거하여 종교개혁을 단행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회개를 거부하고, 은밀히 바울을 숭배하는 자들이 남아 있었습니다. 그마림이란 바알을 숭배하는 가나안의 제사장들을 가리킵니다(왕하 23:5; 호 10:5).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들을 멸절하시고 바알 제사장들까지도 모조리 파멸시키십니다.

뿐만 아닙니다. 5절을 보십시오. “또 지붕에서 하늘의 뭇 별에게 경배하는 자들과 경배하며”지붕에서 하늘의 뭇 별들에게 경배하는 자들이 있었습니다. 이들은 별과 달을 숭배하는 자들입니다. 천채숭배 의식은 가나안과 바벨론에서 흔히 행해진 우상숭배였습니다. 역사적으로 이스라엘은 왕정시대가 끝날 때까지 지속적으로 별과 달을 숭배하였습니다(신 4:19; 왕하 21:3,5; 렘 8:2; 19:13; 44:8-10). 이들은 하나님이 창조하신 피조물을 하나님처럼 섬기는 죄악입니다. 이는 피조물을 창조주 하나님의 자리에 끌어올리는 신성모독의 죄입니다. 하나님은 스바냐를 통해서 이들도 예외 없이 심판하실 것을 선언하셨습니다.

또 어떤 자들을 멸절하십니까? 5b,6절을 보십시오. “여호와께 맹세하면서 말감을 가리켜 맹세하는 자들과 여호와를 배반하고 따르지 아니한 자들과 여호와를 찾지도 아니하며 구하지도 아니한 자들을 멸절하리라”말감은 암몬 족속의 신이었던 밀곰을 지칭합니다. 밀곰 숭배는 솔로몬이 후궁들을 위해서 산당을 지어준 데서 비롯되었습니다(왕상 11:5-8,33; 왕하 23:13). 유다와 예루살렘 거민들은 여호와를 섬기겠다고 맹세한 후에도 돌아서서 또 밀곰을 섬겼습니다. 이런 종교적 혼합주의는 아하스 왕과 므낫세 왕 때에 흔히 자행되었습니다(왕하 16:3). 마지막으로 하나님께서는 여호와를 배반하고 좇지 아니한 자와 여호와를 찾지도 아니하며 구하지도 아니한 자자들을 멸절하십니다. 이들은 배교자들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찾지도 않고, 구하지도 않았습니다. 하나님에 대해 관심이 없었습니다. 영적인 무관심이야말로 가장 타락한 자들입니다. 하나님은 이들을 심판하기로 결정하셨습니다.

스바냐는 하나님의 심판에 대해서 예언했습니다. 온 땅에 하나님의 심판이 임하여 노아 시대에 하나님께서 사람과 가축과 코로 숨 쉬는 모든 생물을 진멸하신 것처럼 멸절시키십니다. 노아시대에는 물고기들은 심판을 받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장차 임할 심판 때에는 바다의 물고기까지도 멸절시키십니다. 이는 우주의 종말에 있을 철저한 심판을 보여줍니다. 처음 창조된 모든 것들이 하나님의 심판의 대상이 되는 것입니다. 그때에는 처음 창조된 모든 것들이 진멸되고, 그리스도 안에서 새롭게 창조된 것들만이 살아남습니다. 또한 그날에는 유다 백성과 예루살렘이 거민이 하나님의 심판의 손길이 펼쳐집니다. 그날에는 회개를 거부하고 타락한 본성을 따라 행하던 은밀한 일들까지도 다 심판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특히 혼합주의 신앙을 가진 사람들은 하나님의 준엄한 심판을 받습니다. 그들은 하나님께 맹세를 하면서 속으로는 밀곰을 숭배하는 거짓된 자들입니다. 이들은 하나님을 기만하는 자들입니다. 겉으로는 하나님을 섬기는 것 같이 보이면서도 마음으로 하나님을 찾지도 않고 하나님께 구하지도 않습니다. 이런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준엄한 심판이 임합니다.

예수님께서도 이런 위선적인 신앙생활을 하는 자들에게 심판을 경고하셨습니다.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 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 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하지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그 때에 내가 그들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마 7:21-23) “주여, 주여”한다고 다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자라야 합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신 것은 하나님의 뜻을 행하게 하기 위함입니다. 우리 하나님은 형식적인 신앙생활을 가장 싫어하십니다. 위선과 가식적인 신앙생활을 가증히 여기십니다. 이는 하나님을 속이고 기만하는 죄악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고, 하나님의 뜻을 행하기 위해 힘쓰고, 애써야 합니다(롬 12:3). 입으로만 “주여, 주여”하고 자신의 욕망을 따라 사는 자들은 다 하나님을 기만하는 우상숭배자들입니다. 이런 자들은 하나님의 준엄하는 심판을 피할 수 없습니다.

II. 주 여호와 앞에 잠잠할지어다(7-13)

7절을 보십시오. “주 여호와 앞에서 잠잠할지어다. 이는 여호와의 날이 가까웠으므로 여호와께서 희생을 준비하고 그가 청할 자들을 구별하셨음이니라”스바냐는 온 백성들에게 주 여호와 앞에서 잠잠하라고 선언했습니다. 유다와 예루살렘 거민들이 침묵을 지켜야 하는 이유는 ‘여호와의 날’이 가까웠기 때문입니다. 여호와의 날은 불의를 심판의 날입니다. 그 심판의 날이 임박하였습니다. 여호와께서 이미 희생을 준비하셨고, 청할 자들을 구별하셨습니다. 여호와께서 준비하신 희생은 유다 백성을 가리킵니다. 그가 청할 자들은 유다를 심판하는 도구로 작정한 바벨론 군대입니다. 그들은 심판의 도구로 유다 거민들을 멸망시킬 자들입니다(사 13:1). 하나님은 이들을 구별해 놓으셨습니다.

그러면 여호와의 날에 하나님께서 어떤 자들을 벌하십니까? 8절을 보십시오. “여호와의 희생의 날에 내가 방백들과 왕자들과 이방인의 옷을 입은 자들을 벌할 것이며” 먼저 방백들과 왕자들을 심판하십니다. 방백들은 유다 거민들의 지도자들을 가리킵닌다. ‘왕자들’은 요시아의 친족들을 가리킵니다. 이들은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서 종교 개혁을 반대하고 대적했던 자들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들을 벌하시고, ‘이방인의 옷’을 입은 자들을 벌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언약의 백성들에게 경건한 옷차림을 할 것을 명하셨습니다. 항상 말씀을 기억하며 살도록 옷 술을 달도록 명하셨습니다(민 15:38; 신 22;11,12). 의복은 언약의 백성으로서의 정체성을 나타냅니다. 그런데 방백들과 왕자들이 이방인들이 입는 의복을 즐겨 입었습니다. 이는 언약의 백성으로서의 정체성을 버린 것이었습니다. 여호와의 날에는 이처럼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정체성을 잃어버리고 불신자들처럼 살아하는 자들을 벌하십니다.

또 어떤 자들을 벌하십니까? 9절을 보십시오. “그 날에 문턱을 뛰어넘어서 포악과 거짓을 자기 주인의 집에 채운 자들을 내가 벌하리라”그날에, 여호와의 날에, 여호와의 희생의 날에 여호와께서 그들의 문턱을 뛰어 넘어서 그들을 심판하십니다. 문턱을 뛰어 넘는 자들은 왕자들과 방백들의 하수인들입니다. 이들은 남의 집의 문턱을 침입하여 포악과 거짓으로 재물을 약탈하여 자기 주인의 집을 채운 자들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포악한 자들을 반드시 벌하십니다.

또 하나님의 그들을 벌하실 때의 상황이 어떠합니까? 10절을 보십시오.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그 날에 어문에서는 부르짖는 소리가, 제 이 구역에서는 울음 소리가, 작은 산들에서는 무너지는 소리가 일어나리라”어문은 다메섹 문 가까이에 있는 북쪽 성문을 가리킵니다(대하 33:14; 느 3:3; 12:39). 이는 적들이 예루살렘을 공격하는 문이었습니다. 그곳에서 부르짖는 소리가 들입니다. 제 이 구역은 어문 가까이에 있는 성읍 안쪽에 있는 문인데 그 구역에서도 울음소리가 일어납니다. 뿐만 아니라 작은 산들이 무너지는 소리가 들립니다. ‘여호와의 날’에 이방 군대의 침략으로 예루살렘 성읍이 파멸되고, 그곳 거민들은 곡하게 될 것입니다.

스바냐는 호소했습니다. 11절을 보십시오. “막데스 주민들아 너희는 슬피 울라 ”예루살렘 남쪽 저지대에 사는 막데스 주민들을 향하여 슬피 울라고 했습니다. “가나안 백성이 다 패망하고 은을 거래하는 자들이 끊어졌음이라”막데스는 상업으로 이름이 난 지역입니다. 그런데 상거래의 중심이 되었던 가나안 백성이 다 패망했습니다. 더 이상 은을 거래하는 자들도 끊어졌습니다. 하나님의 심판으로 모든 것이 황폐하게 되어 버립니다.

그때에 하나님께서 어떤 자들을 찾아내어 심판하십니까? 12절을 보십시오. 예루살렘에서 찌꺼기 같이 가라앉아서 여호와를 멸시하는 말을 하는 자들을 등불로 두루 찾아내어 벌하십니다. 찌꺼기같이 가라앉는다는 말은 쾌락에 취해있고 악을 조장하며 숨어 있는 자들을 가리킵니다. 하나님 앞에서 회개하지 않고, 세상에 숨어서 계속적으로 악을 행하는 자들입니다. 이들은 스스로 어떻게 생각합니까? “여호와께서는 복도 내리지 아니하시며 화도 내리지 아니하시리라”그들은 여호와는 살아계시지 않으며, 생화화복을 주장하지도 않으신다고 합니다.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복을 내리지도 않고, 거역하는 자에게 화도 내리지 아니하신다고 생각합니다. 이들이야말로 하나님을 만홀히 여기는 자들입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마음이 전혀 없습니다. 이들은 포도주와 독주로 만취되고 내일도 오늘 같으리라고 생각하며 사는 자들입니다(사 56:12).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이들이 숨어있는 곳을 아시고 등불을 들고 두루 찾아내어 벌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보라 내가 오늘날 생명과 복과 사망과 화를 네 앞에 두었나니 곧 내가 오늘날 너를 명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고 그 모든 길로 행하며 그 명령과 규례와 법도를 지키라 하는 것이라 그리하면 네가 생존하며 번성할 것이요 또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가 가서 얻을 땅에서 복을 주실 것임이니라. 그러나 네가 만일 마음을 돌이켜 듣지 아니하고 유혹을 받아서 다른 신들에게 절하고 그를 섬기면 내가 오늘날 선언하노니 너희가 반드시 망할 것이라”(신 30:15-18) 우리 하나님은 천지를 창조하실 뿐만 아니라 역사를 주관하시고 섭리하는 분이십니다. 순종하는 자들에게는 복을 내리고 불순종하는 이들에게는 저주를 내리시는 만왕의 왕이십니다. 이 하나님의 섭리를 부정하고, 하나님은 자신들의 삶에 전혀 관여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것은 참으로 큰 교만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을 만홀히 여기는 자들은 결코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등불을 들고 찾으시는데 누가 그 심판을 피할 수 있겠습니까?

이들에게 어떤 벌이 내려집니까? 13절을 보십시오. 그들의 재물이 노략질당하고, 그들의 집이 황무하게 됩니다. 그들은 집을 건축하지만 그 집에 살지 못합니다. 포도원을 가꿀 것이지만 포도주를 마시지 못합니다. 이는 하나님의 섭리를 부정하는 완악한 자들에 대한 심판입니다. 자신들이 받았던 축복이 하나님과 아무런 상관이 없다고 생각하던 그들이 ‘여호와의 날에’는 재물을 약탈당하고, 집이 불타고, 포도원까지도 모두 잃어버리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직접 심판에 개입하셔서 하나님의 역사와 섭리를 드러내십니다. 그날이 바로 여호와의 날입니다.

III. 여호와의 큰 날이 가깝도다14-18)

14절을 보십시오. “여호와의 큰 날이 가깝도다 가깝고도 빠르도다 여호와의 날의 소리로다 용사가 거기서 심히 슬피 우는도다” 여기에서는 여호와의 날을 ‘여호와의 큰 날’이라고 했습니다. 이는 여호와의 날에 임할 심판이 너무나 심각한 것임을 말해줍니다. 이런 하나님의 심판이 멀리 있는 것이 아닙니다. “가깝도다 가깝고도 빠르도다” 여호와의 심판이 가까이 왔습니다. 너무나 가까이 왔고, 빠르게 다가오고 있습니다. 이미 여호와의 날의 소리가 들립니다. 심판의 소리가 들입니다. 용사가 거기서 심히 슬피 울고 있습니다. 이만큼 여호와의 심판은 우리 가까이 와 있고, 긴박하게 일어날 것을 알고 항상 마음을 준비해야 합니다. 세례 요한도 심판의 긴박성을 경고했습니다. “이미 도끼가 나무뿌리에 녹였으니 좋은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어 불에 던지우리라”(마 3:10) 히브리서도 말합니다. “사람이 한번 죽는 것은 정한 것이요 그 후에 심판이 있다”(히 9:27). 주님이 재림하셔서 심판하실 것인데 그날과 그 시간을 알려 주지 않으셨습니다. 그 날과 시는 아버지의 권한에 두셨습니다. 이는 심판의 긴박성을 인식하고 하루하루 오늘이 심판의 날이라고 생각하며 살라는 말씀입니다. 항상 긴장하고 언제라도 주님을 만날 준비된 상태로 살아야 함을 깨우쳐 줍니다.

그날의 모습이 어떠합니까? 15절을 보십시오. “그날은 분노의 날이요 환난과 고통의 날이요 황폐와 패망의 날이요 캄캄하고 어두운 날이요 구름과 흑암의 날이요”그날은 하나님에게는 분노의 날입니다. 하나님께서 택한 백성들에 대한 진노가 너무 커서 멈출 수 없습니다. 동시에 백성들에게는 환난과 고통의 날입니다. 온 땅은 황폐하고 패망하는 날입니다. 캄캄하고 어두운 날이요, 구름과 흑암의 날입니다. 하나님의 현현과 임재하심이 진노로 나타나십니다(출 19:16; 20:21;신 4:11). 여호와의 날은 구원을 받을 사람에게는 은혜의 날이요, 형벌을 받을 사람들에게는 심판의 날입니다.

또 16절을 보십시오. “나팔을 불어 경고하며 견고한 성읍들을 치며 높은 망대를 치는 날이로다”그날에 그들은 나팔을 불어 경고할 것입니다. 견고한 성읍들을 치는 날이요, 높은 망대를 치는 날입니다. 견고한 성읍이 무너집니다. 높은 망대가 무너질 것입니다. 그날에 전쟁의 나탈 소리가 울려 퍼집니다. 하나님의 심판이 전쟁처럼 처절하게 임합니다.

하나님께서 사람들에게 고난을 내리십니다. 17절을 보십시오. 하나님께서 사람들에게 고난을 내려 맹인같이 행하게 하십니다. 맹인들은 고난의 날에 피할 수 없습니다. 이처럼 여호와의 큰 날에 아무도 그 재앙을 피할 수 없습니다. 그들이 하나님께 범죄하였기 때문입니다. 또 그들의 피가 쏟아져서 티끌같이 되며, 그들의 살은 분토같이 될 것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거부하고 우상 섬기기를 즐겨했습니다. 이제 하나님께서 철저하게 그들을 심판하십니다. 우리 하나님의 심판은 너무나 엄정합니다.

18절을 보십시오. “그들의 은과 금이 여호와의 분노의 날에 능히 그들을 건지지 못할 것이며 이 온 땅이 여호와의 질투의 불에 삼켜지리니 이는 여호와가 이 땅 모든 주민을 멸절하되 놀랍게 멸절할 것임이라”그들이 의지하던 은과 금이 여호와의 분노의 날에 능히 그들을 건지지 못합ㄴ다. 그들은 은과 금을 하나님처럼 섬겼습니다. 유다 지도자들과 하수인들은 자신들의 물질적 욕망을 채우기 위해 강포를 행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의지하던 은과 금도 그들을 구원해 주지 못했습니다. 그날에는 이 온 땅이 여호와의 분노의 불길에 삼켜질 것입니다. 온 땅이 여호와의 질투의 불에 삼켜집니다. 이는 여호와가 이 땅 모든 주민을 멸절하되 놀랍게 멸절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스바냐는 유다 거민들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을 이야기하다가 모든 세계 만민이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수 없음을 선포했습니다. 이 예언은 역사적으로 40여년 후에 바벨론 왕 느브갓네살에 의해 실현되었습니다. B.C. 587년 예루살렘이 완전히 멸망하였습니다.

그러나 온 땅에 임할 하나님의 진노와 질투의 불은 아직 남아 있습니다. 이 날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심판장으로 재림하시는 날입니다. 사도 요한은 그 때에 일어날 모습을 다음과 같에 기록했습니다. “볼지어다 구름을 타고 오시리라 각인의 눈이 그를 보겠고 그를 찌른 자들도 볼 터이요 땅에 있는 모든 족속이 그를 인하여 애곡하리니 그러하리라 아멘”(계 1:7). 주님께서 재림하시는 그날에 여호와의 큰 날입니다. 재림 나팔이 울려 퍼질 때 하나님을 만홀히 여기던 사람들 모두 다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에 던져집니다. “그러나 두려워하는 자들과 믿지 아니하는 자들과 흉악한 자들과 살인자들과 음행하는 자들과 점술가들과 우상 숭배자들과 거짓말하는 모든 자들은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에 던져지리니 이것이 둘째 사망이라”(계 21:8) 주님의 재림이 임박하였습니다. 모든 징조들이 급박하게 일어나고 있습니다. 여호와의 큰 날이 가깝고도 빠르게 다가오고 있습니다. 더욱 더 깨어서 오실 주님을 맞이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우상숭배는 패망의 길입니다. 여호와를 찾지도 안고 구하지도 않고, 거짓과 위선으로 살면 반드시 살면 패망합니다. 우리가 이방 풍조에 휩쓸리지 않고, 언약의 백성으로서 분명한 정체성을 가지고 합당한 삶을 살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은과 금이 우리를 구원해 줄 수 없습니다. 오직 우리 죄를 대신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만이 우리를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에서 온전히 구원해 주실 수 있습니다.

 









[서론]

밤이 깊고 어두움이 온 땅을 덮었다는 것은 새벽이 가까이 왔음을 알리는 것입니다. 빛이 임하면 어둠은 자연스럽게 자취를 감춥니다. 제 2의 도약과 도전의 시간표가 다가오고 있습니다. 악인이 심판을 받고 사라지면서 새로운 시대가 열립니다.

 

[1] 멸망과 회복의 날

멸망과 회복의 분기점이 무엇일까? 언제 멸망하고 언제 회복되는가?

1) 인류의 멸망의 날

인류의 멸망이 창세기3:1-6에서 시작됩니다. 아담의 타락은 인류의 타락이요 나의 타락입니다. 하나님 떠나 죄와 사단에 빠짐으로 하나님의 진노 아래 놓입니다. 영적 죽음, 영적 무지에 빠짐으로 우상, 점술, 미신, 종교에 빠집니다. 하나님의 형상이 깨지고 사람의 지배를 받으면서 온갖 정신병이 생겼습니다. 육 신과 삶이 병들고 가난, 우환, 고통, 상처, 중독에 빠져가고 있습니다. 결국 영원한 멸망 지옥에 빠지고 후손들이 그 길을 대물림하고 있습니다.

2) 회복의 날

창세기3장 아담의 후손이 멸망에 빠지자 바로 창세기3:15 여자의 후손 그리스도 예수님께서 사단을 멸 한 왕으로, 죄와 저주에서 해방하신 제사장으로, 하나님 만나는 길 되시는 선지자로 회복의 길을 여셨습 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자마다 영생을 얻고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기게 됩니다. 사단이 주 인 되는 날이 멸망의 날의 시작이요 그리스도가 주인 되는 날이 회복의 날입니다.


[2] 여호와의 큰 날

1) 우주적 심판 - 전 세계가 끝이 나는 우주적 심판이 있습니다. 복음이 다 증거 되면 끝이 옵니다. 말세가 되면 점점 악으로 빠지는 사람들과 반대로 믿음으로 가는 자들로 갈라지게 됩니다.

2) 심판의 원인과 대상 - 남 유다의 심판의 가장 큰 원인은 우상숭배와 혼합종교 입니다. 하나님을 배교하 고 세상에 빠진 자들이 심판을 받습니다. 세속과 향락에 쪄들어 자기 만족에 도 취해 하나님을 찾지 않는 자들 모든 것을 잃고 포로가 됩니다.

3) 하나님의 심판의 날 - “가깝고 빠르도다” 의 뜻은 즉시 행할 만큼 임박하다는 뜻입니다. 악인들의 어떤 기회도 없이 매우 신속하게 심판이 행해질 것을 말씀합니다. 하나님의 분노가 타올라서 온갖 죄악과 불의를 다 태울 것이며 혼란과 공포로 우왕좌왕 길을 못 찾고 무너질 것입니다. 이유가 무엇입니까? 하나님께 범죄 입니다.

 

[결론]

1. 세상에는 두 종류의 길만 있을 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하나님의 자녀 되어 천국으로 가는 사람들과 사단 숭배에 빠져 지옥으로 가는 사람들이 있을 뿐입니다.

2. 가문, 민족, 세계가 사는 길은 우상, 미신, 종교 생활을 버리고 하나님께로, 그리스도께로 돌아가는 것이 며 저들을 강권하여 주께로 인도하는 것입니다.

 

 





 


『여호와의 큰 날이 가깝도다 가깝고도 빠르도다 여호와의 날의 소리로라 용사가 거기서 심히 슬피 우는도다 그날은 분노의 날이요 환난과 고통의 날이요 황폐와 패망의 날이요 캄캄하고 어두운 날이요 구름과 흑암의 날이요 나팔을 불어 경고하며 견고한 성읍들을 치며 높은 망대를 치는 날이로다』 

   

첫째는 개인 종말

목사님이 지난 주일 아침에 돌아가셨어요. 아침 8시에 아마 교회를 가시다가 교통사고가 나가지고 아주 건장한 목사님인데 돌아가셨어요. 히브리서9장27절 사람이 한 번 죽는 건 정한 이치입니다. 그 후에 심판이 있습니다. 누구도 피할 수 없는 개인 종말이 있습니다.

둘째는 시대 종말

시대란 말이 뭐냐면 역사가 바뀌는 거죠. 예를 들면 지도자가 바뀐다던지 아니면 어떤 나라의 이게 바뀔 때 시대의 종말 그럽니다. 일제의 치하에서 36년 동안 있었습니다. 해방 됐지 않겠습니까. 이게 뭐냐면 변화거든요. 그리고 해방 후에 전쟁 나고 남북이 갈라지면서 약 70년 동안 지금 남과 북이 오랫동안 한 민족이 총을 겨누면서 살아왔습니다. 북한이나 남한을 보니까 극에 달했어요. 결국 우리나라가 통일시대가 올 수밖에 없습니다. 시대 종말 이건 시대가 바뀐다는 말입니다. 세상의 종말이 있습니다. 너무 이상하면 “말세다” 이러잖아요. 큰 악이 행할 때 말세라는 표현을 씁니다. 죄가 홍수처럼 밀려옵니다. 죄가 차고 올라서 하늘을 치고 올라가는, 하늘에 닿으니까 심판이 돼버리는 이게 말세. 디모데후서 3장 1절에서 5절 보면 말세의 징조가 나옵니다. 사람이 변합니다. 악하게 변해요. 무정하고, 부모를 거역하고, 인정이 없고, 무자비하고, 부모 효도, 그런 말은 옛날 말입니다. 점점 갈수록 사람들은 악을 좋아해요. 선을 싫어합니다. 그래서 악이 성행하는 시대가 와요. 악과 불법이 성행하는. 온 땅은 타락 극치가 옵니다. 그리고 사람들이 마음을 다 뺏겨요. 너무 돈을 사랑해.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없어요. 돈과 쾌락에 빠지는 시대 옵니다. 그리고 나를 너무 사랑해. 나밖에 몰라. 부모도 필요 없어, 선생도 필요 없어. 그냥 내가 돈 벌고 누리고 성공하고, 내가 귀찮으면 부모도 형제도 다 내던지는 거예요. 성경은 이처럼 개인, 시대, 세상 종말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멸망과 회복의 날

모든 것은 하나님으로 시작합니다. 이게 근본 입니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 하시니라’ 하나님을 아는 것은 모든 지혜와 지식의 근본 입니다. 하나님을 모른다? 그 사람은 근본을 모르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 합니다. 그래서 인간이라는 존재는 독립적인 존재가 아니고 하나님과 함께 입니다. 함께 하면서 하나님과 축복을 마음껏 누리면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만들었어요. 하나님께서 만물을 창조하고 축복을 인간에게 다 주었어요. 생육하고, 번성하고, 땅에 충만하고, 다스리고, 정복하고... 만물의 영장이라. 이 어마어마한 축복과 권세를 인간에게 주었습니다. 인간에게 통치권을 줬습니다. 이런 축복된 인간이 이 땅에서 고통이 많을까? 딱 하나입니다. 하나님 떠나서 그렇습니다. 근본이 무너져서 그렇습니다. 그래서 사람이 행복하다 그건 거짓말이에요. 하나님 떠난 것을 죄라고 말해요. 죄란 말이 뭐냐면 근본이 무너진 걸 말합니다. 이게 원죄 입니다. 그러면 왜 이런 비참한 사건이 벌어졌는가? 원인자가 있어요. 그게 사단입니다. 사단이라는 악한 영 때문에 인간은 속아서 하나님 떠나게 되고 죄에 빠집니다. 그 후로 사람들은 사단의 지배를 받게 됩니다. 이게 운명 그럽니다. 누구를 막론하고 운명에 묶여 있어요. 태어나면서 인간들은 죄인으로 태어납니다. 뿌리가 죄에요. 인간은 씨가 죄의 씨입니다. 어머니 태중에서부터 죄로 잉태합니다. 죄악 중에 출생하고, 죄 중에 살아가고, 죄 중에 죽습니다. 인간은 죄를 피할 수 없습니다. 이게 인간의 근본이에요. 인간은 죄와 사단에 묶여서 태어났기 때문에 축복 아닙니다. 이미 저주 아래 있습니다. 이미 뿌리가 무너져버린, 근본이 무너진 인간 입니다. 사단 숭배에 빠져 버립니다. 우상 숭배라 말합니다. 왜 우상을 하나님이 가장 미워합니까? 우상은 사단 숭배 입니다. 그리고 온갖 이 땅의 미신, 풍습, 제사, 고사, 전통 이게 다 한마디로 말하면 귀신을 섬기는 겁니다. 문제의 뿌리 입니다. 이걸 영적 문제라 그래요. 원래 하나님의 영이 함께했는데 사단이 들어왔단 말이에요. 영이 병들고 잘못 되니까, 근본이 무너지니까 아무리 애를 써도 행복 안 나옵니다. 그래서 나오는 게 정신병이 오기 시작합니다. 뭔가 혼란스럽단 말이에요. 근본이 깨지니까 내가 나를 모르겠어. 정체성도 모르겠고 왜 사는지도 모르겠고 늘 죄 속에서 죄책감만 있고. 죄의식 있지. 악령이 역사하니까 시달리지. 악몽, 가위 눌리지, 시달립니다. 우울증으로, 공황증으로, 조울증으로. 근본이 무너지니까 정신이 분열된다는 말이에요. 정신병 시대 옵니다. 이상한 짓도 합니다. 살인도 하고 자살도 하고 별짓 다 하잖아요 악령이 역사하니까. 육신도 병들어요. 대부분의 질병들이 몸이 아픈 게 아니에요. 영과 마음이 병드니까 몸으로 튀어나온 겁니다. 많은 병들의 뿌리는 여기서 와요. 육이 병들고 삶이 병들어요. 삶의 터전이 병들어 버리고. 가정이 병들어 버려요. 이 배경 때문에 부부 간에 얼마나 갈등이 많겠어요. 겉으로 포장하지만 포장이 됩니까? 화장 싹 하고 입술 칠하면 감쪽 같습니다. 그러나 본질은 안 되잖아요. 행복을 위해서 살아가고 애를 쓰지만 남는 게 뭡니까? 조금 낫겠지, 낫겠지 하지만 근본이 그대로 있으니까 오는 게 고통이란 말이에요. 인간이 뭐냐고 묻는다면 고통입니다. 저는 이걸 찾았어요. ‘아 고통이구나’ 행복을 꿈 꾼 만큼 남는 거 하나 있습니다 상처. 인간은 고통, 상처. 포장하죠. 고통과 상처가 쌓여 가니까 마음이 편하겠습니까? 상처가 쌓여서 오는 게 분노 입니다. 그래서 못 참는 거예요, 못 견디는 거예요. 원망 하고 누구 때문에. 아닙니다. 이 뿌리에서 오는 거예요. 근본을 못 찾게 되면 누구 때문에 하고 평생 원망하다가 인생을 망쳐 버려요. 온 땅은 병든 세상이에요. 정신이 병들고, 마음이 병들고, 육신도 병들고, 삶도 병들고 다 병들었어요. 사람들은 끙끙 앓아요. 어떻게 해결합니까. 몸부림치는 거예요. 너무 괴로우니까 하는 게 뭡니까? 도피처가 없잖아요. 술을 많이 찾습니다. 조금 세련된 사람은 마약을 먹어요. 도박에 빠지고, 학생들은 게임에 빠지고 어딘가에 빠져 가는 거예요. 점점점 사람들은 중독됩니다. 중독 시대 와요. 아무도 나를 치유할 수 없어. 가족도 도움이 안 돼. 어딜 가도 위로가 안 돼. 결국 학생들은 게임, 다 기계 중독이라. 왜? 위로가 안 돼. 그나마 개, 강아지는 속을 안 썩이고 상처 안 주네? 사람은 상처 줘도 개는 상처 안 주잖아요. 사람들이 외로우니까 강아지, 고양이 이런 걸 많이 키웁니다. 식물, 분재 많이 키우더라고요. 그렇게 사람들이 마음을 다른 쪽으로 쏟아 갑니다. 중독 시대가 와요. 그러면서 너무너무 괴로우니까 많은 사람들이 자살에 빠집니다. 죽으면 끝이라면 일찍 죽으면 괜찮죠 오래 살면 힘든데. 그런데 문제는 뭐냐면 내세가 있단 말이에요. 지옥 간단 말이에요. 그리고 이건 못 끊어. 우리 후대가 또 가야 돼. 끝없이 계속 가는 문제에요. 악령 사단의 지배를 받는 그 날부터, 사단이 주인 된 그 날부터 인간은 멸망 길로 들어와 있습니다. 사람들은 이렇게 살아가고 있어요. 어떻게 행복합니까? 행복한 척 하고 있죠. 다 속임수이죠. 사람들이 불쌍한 거예요. 회복의 날이 있습니다, 길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친히 와서 죄를 멸하고, 사단을 깬 분 이걸 구세주라고 불러요. 그 단어가 그리스도 입니다. 그리스도란 하나님 만나는 길 선지자, 죄를 멸한 제사장, 사단 이긴 왕 이 말이에요. 그 분의 이름이 예수님이란 말이에요. 그래서 예수를 믿는 거예요. 그리스도는 뭐냐면 직책이에요. 예수는 이름 입니다. 예수님이 질문하잖아요.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 이십니다” “예수님은 바로 내 죄를 해결하신 분입니다, 사단을 이긴 왕 입니다, 빠져 나오는 길 입니다” 예수만이 길, 다른 길은 없습니다. 아무리 별짓 다 해도 답은 그리스도에요. 이거 모르면 헛일이라니까요. “주는 그리스도시요” 신앙고백이 필요합니다. 주인을 교체해야 돼요. 우리가 사기 당했어요. 사단에게, 이 원수 마귀에게 속았단 말이에요. 그래서 이 원수 마귀를 이기신 그리스도 예수를 주인으로 모셔야 돼요. 길은 이거밖에 없어요. 영접할 때 비로소 하나님의 자녀가 돼요. 이걸 구원 그래요. 그리스도 예수가 구원하는 겁니다. 그리스도 예수가 구원자 입니다. 영접할 때 해방됩니다. 그리고 어마어마한 권세가 생깁니다. 악귀가 떠나간단 말이에요. 귀신이 굴복하기 시작합니다. 왜? 사단, 마귀, 귀신을 이긴 그리스도, 메시야가 왔기 때문에 무너진단 말이에요. 그리고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성령으로 함께합니다. 아예 하나님의 영이 나와 함께 해요. 영원히 함께 합니다. 그리고 영원한 천국으로 갑니다. 회복의 날 이 말입니다. 언제 그리스도가 주인 된 날. 그 날이 회복의 날 입니다. 악령이 주인 되는 그 날은 멸망의 날 입니다. 그래서 복음 안에 있으면 세상이 줄 수 없는 참된 자유함이 있어요. 평안이 있습니다. 왜? 죄 사함 받았잖아요, 운명에서 빠져 나왔잖아요, 악령 떠나가잖아요, 천국 가잖아요. 근본 평안이 있어요. 이 배경을 가지고 가문을 세워야 돼요. 산업도, 나라도 이 배경위에 세워야 돼요. 나라가 우상을 많이 섬기게 되면 재앙 옵니다. 가문이 우상 많이 섬기고 제사 지낸다? 재앙 와요. 왜? 악령을 끌어 들이니까. 전도가 뭐냐면 이 땅에 가장 시급한 겁니다. 내가 돈이 필요한데요? 좀 불편한 거지. 가장 시급한 게 전도, 선교. 이것은 절대 명령이요 교회의 존재 이유 입니다. 


여호와의 큰 날

여호와의 큰 날. 하나님의 심판을 말씀 합니다. 왜 하나님이 심판할까?

1. 우주적 심판

2-3절 우주적 심판이 나옵니다.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내가 땅 위에서 모든 것을 진멸하리라 내가 사람과 짐승을 진멸하고 공중의 새와 바다의 고기와 거치게 하는 것과 악인들을 아울러 진멸할 것이라 내가 사람을 땅 위에서 멸절하리라 나 여호와의 말이니라』 땅 위의 모든 것을 진멸한다 마지막 심판을 말씀합니다. 진멸, 멸절 그런 단어가 나와요. 그게 뭐냐면 모든 걸 다 끝낸다 말합니다. 노아 시대도 하나님이 심판 했어요. 노아 때와 좀 다른 점이 있습니다. 물로 심판하면 물고기는 물이 많으니까 안 죽잖아요. 그런데 마지막 때는 물고기도 다 죽어요. 그게 차이점 입니다. 마지막 심판 때는 모든 게 다 죽어요. 심판하는데 강조하는 게 하나 있어요. 사람 입니다. 왜 사람을 강조 하냐면 모든 심판의 근본 원인자가 짐승이 아니란 말이에요. 심판 근본 원인이 사람들이에요. 사람들의 타락 때문에 심판이 오는 거지 갑자기 개가 독해져서 심판 오는 거 아니란 말이에요. 사람의 죄악이 근본 심판의 원인이라 말하고 있습니다.

2. 심판의 원인과 대상

왜 그렇게 그 당시 유대인들이,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방인들이 심판 받는가? 심판의 가장 큰 직접적인 원인이 4절 『내가 유다와 예루살렘의 모든 주민들 위에 손을 펴서 남아 있는 바알을 그 곳에서 멸절하며 그마림이란 이름과 그 및 제사장들을 아울러 멸절하며』 이스라엘 민족들이 바알을 섬겼어요. 이방인의 신, ‘그마림이란 이름과’ 그마림이 뭐냐면 이방인 제사장들 입니다. 완전 이방 우상에 쪄들은 사람을 말합니다. 5절 『또 지붕에서 하늘의 뭇 별에게 경배하는 자들과 경배하며 여호와께 맹세하면서 말감을 가리켜 맹세하는 자들과』 ‘또 지붕에서 하늘의 뭇 별에게 경배하는 자들과 경배하며’ 그걸 섬기는 겁니다. 여기서 보게 되면 하나님의 심판의 가장 직접적인 원인이 뭐냐면 우상 숭배에요. 이방인의 우상들이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심지어 성전 안 까지도 우상이 들어 와버렸어요. 5절‘뭇 별에게 경배하는 자들과 경배하며 여호와께 맹세하면서 말감을 가리켜 맹세하는 자들’ 하나님도 맹세하고, 우상 앞에서도 맹세하고. 이게 뭐냐면 혼합 종교에요. 하나님도 믿고 부처도 믿고 제사 지내고 예배 드리고 완전 혼합 종교. 신앙생활은 오직 입니다. 오직 하나님 외에는 경배의 대상이 없습니다. 오직 그리스도 외에는 구원자가 없습니다. 하나님도 믿고 우상도 믿고 나중에 어떡합니까? 그게 발전하니까 결국 하나님 떠나죠. 그것이 6절『여호와를 배반하고 따르지 아니한 자들과 여호와를 찾지도 아니하며 구하지도 아니한 자들을 멸절하리라』 점점점 하나님을 멀리하고 우상에 빠지더니, 반반 믿더니 이제는 아예 하나님을 배반 해버려요. 그리고 여호와를 찾지도 않고 구하지도 않습니다. 이렇게 사람은 영적으로 하나님을 멀리하면서 서서히 서서히 교회, 예배 떠나기 시작하면 나중에는 완전히 떠나버려요. 우상 숭배 해요. 로마서1장25절 우상이 뭐냐면 거짓을 진리처럼 믿는단 말이에요. 돌, 나무, 새... 이게 다 하나님이 만든 선물 아닙니까. 다스리라 했는데 피조물을 창조주 이상으로 섬겨요. 이게 미련한 거예요. 무지죠. 어떻게 돌 밑에 절을 합니까. 돌 밑에, 나무 밑에 그건 무지한 거예요. 고사 지내는 거 어떻게 생각 합니까? 어떻게 돼지 대가리에 절을 합니까? 그건 돼지만도 못 하다는 거예요. 나를 비하시키는 겁니다. 고린도전서10장19절20절 우상과 제사는 귀신을 섬기는 겁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철저히 금한 겁니다. 7절 점점점 이방인의 풍습이 들어와요. 서서히 뒤바뀝니다. 반 하나님 믿더니, 떠나더니, 이제는 이방인의 것이 싹 들어와서 자리 잡습니다. 이렇게 변해가는 겁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심판을 말하는 겁니다. 7절 『주 여호와 앞에서 잠잠할지어다 이는 여호와의 날이 가까웠으므로 여호와께서 희생을 준비하고 그가 청할 자들을 구별하셨음이니라』 희생이 뭐냐면 심판 때에 희생 제물처럼 죽는 다는 말이에요. 청할 자들을 구별한다는 말이 뭐냐면 이방인이 들어와서 타락한 백성들을 희생 제물처럼 죽인다는 얘기입니다. 8절『여호와의 희생의 날에 내가 방백들과 왕자들과 이방인들의 옷을 입은 자들을 벌할 것이며』 방백들이 뭐냐면 지도자 입니다. 지도자들이 먼저 타락 해버렸어요. 왕자들, 왕들이 타락 합니다. ‘이방인의 옷을 입은 자들’ 이방인이 제사할 때 입는 옷, 우상 숭배 할 때 입는 옷 알록달록 하잖아요, 멋있어 보이잖아요. 그러니까 이들이 그런 옷을 가지고 들어와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걸 즐겨 입는 거예요. 우상 숭배의 옷을 입고 돌아 다녀요. 그런 식으로 서서히 문화가 잠식 됩니다. 9절 ‘그날의 문턱을 뛰어 넘어서’ 문턱을 뛰어 넘는다는 말이 뭐냐면 “문턱 밟지 마라” 들어 봤어요? “문지방 밟지 마라 복 나간다” 이방 풍습은 정성을 다해서 문지방 안 밟으려고 노력하면서 하나님은 완전 무시하는 사람들, 문지방이 집 안과 밖의 경계선 아닙니까? 집 안을 지키는 신이 있다고 문지방을 밟으면 귀신이 노한다고 해서 안 밟았거든요. 우상의 옷은 멋있다고 유행처럼 입고 다니면서 하나님은 거부하고 점점점 빗나가서 이스라엘 땅들이 완전히 우상으로, 무속으로 쪄들어 가는 그런 모습 입니다. 그래서 결국 하나님께서 이들을 벌을 하죠. 『그 때에 내가 예루살렘에서 찌꺼기 같이 가라앉아서 마음속에 스스로 이르기를 여호와께서는 복도 내리지 아니하시며 화도 내리지 아니하시니라 하는 자를 등불로 두루 찾아 벌하리니』 찌꺼기 같이 가라앉은 사람들. 포도주 통 제일 밑에 찌꺼기 달라붙어서 응고된 거 있어요. 찌꺼기가 응고된 것처럼 향락과 세상에 응고 돼서 빠져 들었단 말이에요. 자기 안일에 빠져서 하나님은 복도 안 주고 화도 안 준다. 우리가 죄를 지어도 괜찮다. 왜? 봐라 오랫동안 벌 안줬지 않느냐? 하나님을 완전히 무시하고 응고된 찌꺼기처럼 빠진 인생들 이걸 하나님이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3. 하나님의 심판

14절 보면 『여호와의 큰 날이 가깝도다 가깝고도 빠르도다 여호와의 날의 소리로라 용사가 거기서 심히 슬피 우는도다』 ‘여호와의 큰 날’ 크다는 말이 뭐냐면 총제적인 전체를 심판 합니다. ‘가깝고도 빠르다’ 이게 무슨 말이냐면 즉시 행할 만큼 임박하다는 뜻입니다. 가까운 것도 가까운 건데 또 빨라. 즉시 뭔가 행할 만큼 임박한 시간표다 말씀하고 있어요. 악인들에게는 전혀 기회를 주지 않고, 악인들에게는 전혀 경고도 하지 않고 즉시 심판한다는 뜻이거든요. 너무 악을 행하니까, 기회도 안 주고 즉시 하나님이 심판 하겠다 말씀하고 있습니다. 북한 빨리 회개해야 됩니다. 왜냐면 너무 오랫동안 어두운... 너무 오랫동안 우리 백성들 괴롭혔고 너무 악을 많이 행했어요. 우리나라가 통일 시대 옵니다. 세계복음화 하도록 하나님이 하시겠죠. 악은 결국 무너지게 돼있어요. 하나님이 손을 볼 수밖에 없는 시간표 왔단 말이에요. 15절 『그날은 분노의 날이요 환난과 고통의 날이요 황폐와 패망의 날이요 캄캄하고 어두운 날이요 구름과 흑암의 날이요』 분노라는 말이 그런 뜻이 있어요. 과잉되다 또는 범람하다. 과잉되게 넘친다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분노가 쌓이고 쌓여서 폭발한다는 뜻이에요. 17절 ‘내가 사람들에게 고난을 내려 맹인 같이 행하게 하리니’ 사람들에게 고난을 내린다 ‘내린다’ 뜻을 보니까 좁게 한단 말이에요. 하나님을 거역하는 백성들을 하나님께서 올무에 밀어 넣듯이 악을 행하는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코너에 밀어 넣어서 묶어 놓겠다 말씀하고 있어요. 그리고 맹인 같이 눈은 떴지만 이 환난과 문제 때문에 당황해서 이들이 우왕좌왕 하다가 무너지는 모습을 말하고 있어요. 이들은 결국 맹인처럼 눈 뜨고 당한다. 너무 악을 행한 사람은 하나님께서 코너에 몰아넣고 이들을 심판 하겠다. 하나님이 이 말씀 준 것은 뭔가 대한민국 땅에 새로운 시작이 아닌가 생각이 듭니다. 

그리스도를 주인 삼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들은 하나님께 예배하며 가는 사람들 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이 가는 길이죠. 이들은 이 땅에서 희생도 합니다.
복음을 위해서 그렇게 살아가죠. 왜냐면 이들의 소망은 영원한 천국에 있습니다. 사단을 주인 삼은 사람들이 있어요. 우상에 빠져가는 사람들이에요. 특징이 항상 나 중심 입니다. 그리고 오직 돈 밖에 모르는 사람들, 목적은 성공 입니다. 이것 때문에 나라고 뭐고 다 이용하는 사람이 있어요. 이게 악인들이거든요. 범죄와 악을 행하는데 조금도 부끄러움이 없습니다. 거짓을 많이 합니다. 거짓인데 안 부끄러워요. 왜 거짓은 사단의 것입니다. 사단은 거짓의 아비이기 때문에 거짓이 안 부끄러워요. 왜냐면 제 것 이니까. 내면에 많은 범죄를 일으킵니다. 그리고 나라를 위하는 척 하지만 탐욕에 묶여 있는 사람들이에요. 아마 깊은 내면 보게 되면 무한한 돈들이 왔다갔다 할 거예요. 결국 이 길은 나중에는 멸망으로 갑니다. 

우리가 살려야 돼요. 우상과 사단이 역사하기 때문에 먼저 저와 여러분이 복음을 깨달아야 돼요. 복음부터 이해해야 돼요. 예수님이 그리스도 이거 알아야 돼요. “예수님이 그리스도” 사단을 이긴 왕, 귀신을 꺾은 왕, 저주를 막은 제사장, 하나님의 성령이 역사하는 선지자. 그리스도는 모든 저주를 없애 버리고 원래 인간 회복 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를 알아 가면 회복이 돼요. 그래서 이 복음을 가진 사람들이 일어나야 돼요. 후대들이 미래 입니다. 다민족 입니다. 다민족은 선교 입니다. 탈북자 입니다. 북한 문 열리게 되면 북한이 선교지가 돼요. 같은 나라이지만 너무 오랫동안 문화가 달라서 이걸 염두에 두고 가야 됩니다. 이를 위해서 우리 자신, 우리 교회는 발판이 돼야 돼요. 우리는 배경 돼야 돼요. 무슨 배경? 복음적 배경 돼야 돼요. 나라가 안정 돼야지 국민과 산업 하는 분들이 똑같이 안정되고 또 우리 교회 성전건축도 해야 되는데 같이 맞물려 있습니다. 개인, 가정, 가문에 새롭게 뒤바뀌는, 어둠이 다 물러가는 복된 시작이 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스바냐 / 여호와의 날을 선포한 선지자

 

1. 인적 사항

    (1) 스바냐는 '여호와께서 숨겨 주신 자', '보호하신 자'라는 뜻.

    (2) 남 유다 제13대 왕 히스기야의 4대손, 아마랴의 증손, 그다랴의 손자 구시의 아들(습 1:1).

    ③ 남유다 제16대 왕 요시야 때 활동한 왕족 출신의 선지자.

    ④ 소선지서 스바냐서의 저자.

 

2. 시대적 배경

    스바냐는 B.C. 630-625년경, 남유다 제16대 왕 요시야의 통치(B.C.640-609년) 때에 주로 활동한 선지자이다. 당시 근동의 패권국인 앗수르는 신바벨론 제국(B.C.625-539년)의 등장과 함께 그 세력이 급격히 쇠퇴해져 가던 때였다. 이 때에 요시야는 대외적으로는 선왕들이 친앗수르 정책을 폈던 것과는 달리 강력한 반 앗수르 정책을 폈다. 그리고 대내적으로는 대대적인 종교개혁을 단행하여 이스라엘 민족의 자주성을 회복하는데 크게 주력하였다. 이러한 때에 스바냐는 요시야가 종교개혁을 본격적으로 개시하기에 앞서 이스라엘 백성들의 죄악에 대한 책망과 열방에 대한 여호와의 심판을 예언함으로써 그의 종교개혁에 박차를 가하였던 것이다.

 

3. 주요 생애

           

    사 역   이 전

    출생

    예루살렘 거주

    습 1:1,8-11

    사 역   이 후

    남유다 백성에 대한 여호와의 날 심판 경고와 회개 촉구

    B.C.630-625년경

    습 1;2-2:3

    열방에 대한 심판 선포

    습 2:4-15

    이스라엘의 남은 자에 대한 회복 선포

    습 3:9-20

    스바냐서 기록

    습 1:1

    죽음



4. 성  품

    (1) 왕족임에도 불구하고 왕과 정치 종교 지도자들을 위시하여 일반 백성들의 사회적 부패와 종교적 타락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을 선포한 것으로 보아 불의에 대해 단호하고 사리 판단이 분명한 자(습 1:4-13).

    (2) 여호와의 날에 대한 그의 메시지가 매우 힘있고 선명한 것을 보아 하나님의 공의에 대해 강한 확신을 소유한 매우 강직한 성품의 소유자(습 1:14-18).

    (3) 여호와의 날의 심판 예언이 흡사 죽은 자를 위해 부르는 진혼곡이나 장엄한 장송곡과도 같은 만가체(挽歌體) 운율을 갖추고 있으며, 이외에도 매우 아름다운 문장들을 많이 사용한 것 등을 볼 때 문학적 재능이 탁월한 자(습 1:12, 17; 2:4; 3:11-13).

 

5. 구속사적 지위

    (1) '여호와의 날'의 심판 예언을 통해 의인과 악인이 종말에 맞이할 운명의 대조적인 모습을 매우 선명하게 예언한 선지자.

    (2) 백성들의 죄악과 도덕적 결함과 신랄한 비판으로 요시야 왕의 종교 개혁 운동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자(습 1:2-3; 대하 34:3-8).

 

6. 평가 및 교훈

    (1) 스바냐는 모든 피조물에 대한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의 날로서 '여호와의 날' 도래를 선포하고 있다. 이 날은 궁극적으로 세상 끝날에 세계 만민에게 시행될 최후 심판의 날을 예언한 것이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는 이 최후 심판의 날에 영원한 멸망에 이를 악인의 삶을 살고 있는가 아니면 영원한 구원과 축복을 받을 의인의 삶을 살고 있는가를 두려운 마음으로 돌아볼 일이다.

    (2) 남유다 전 지역에 걸쳐 사회·경제·종교 전반적인 부패함이 퍼져 있던 때 왕족 출신의 스바냐는 안일하게 그 사태를 방관한 것이 아니라 분연히 떨치고 일어나 먼저 왕국 주변의 사람들이 부패와 종교 지도자들의 범죄 함으로 날카롭게 비판하였는데, 범국민적인 각성과 회개를 촉구하였다. 이는 부정 부패와 타락과 향락의 일변도로 치닫는 오늘의 이 사회 속에서 성도된 우리가 행해야 할 마땅한 본분이 무엇인지를 다시 한번 깨닫게 한다(습 2:1-3).

    (3) 스바냐는 패역한 이스라엘 백성에 대한 심판 예언을 준엄하게 선포하면서도 동시에 하나님께서는 한번 택한 백성을 결코 영원히 버리지 아니하시며 징계 중에도 반드시 회복시키실 것이라는 사실도 확신 중에 선포한다. 이는 실로 현재 시험으로는 고난받는 중에 있는 성도들에게 위로의 메시지를 힘써 전해야 할 것이다.

 

7. 핵심 성구

    "여호와의 규례를 지키는 세상의 모든 겸손한 자들아 너희는 여호와를 찾으며 공의와 겸손을 구하라 너희가 혹시 여호와의 분노의 날에 숨김을 얻으리라(습 2:3).

 


스바냐는 어떤 책인가?

하나님의 그루터기를 희망한 스바냐는 유다의 가장 유명한 왕 중의 한 사람인 히스기야의 증손자입니다. 그의 혈관에는 왕의 피가 흐르고 있었으나, 보다 더 중요한 일은 그의 입술에 하나님의 메시지를 담고 전하는 자였습니다.

• 스바냐서의 선지자

스바냐는 “여호와의 숨기심”, 또는 “여호와의 보호하심“이란 뜻입니다. 이는 스바냐서의 메시지의 주요 내용으로 하나님께서는 ”심판 날에 겸손한 자를 숨기시고 보호해 주신다“는 것을 말해주는 듯 합니다. 스바냐는 히스기야의 4대 후손이라고 하였는데(1:1), 그렇다면 스바냐 선지자는 요시야의 조카뻘이 됩니다. 그러므로 그는 조카로서 삼촌(요시야)에게 예언 활동을 했으며, 우상 숭배에 대하여 심하게 책망을 하는 것으로 보아 아마도 그가 활동했던 기간은 요시야가 종교 개혁(주전 627년)을 하기 이전이었던 것으로 추정됩니다. 그는 히스기야 이후에 약 60년간이나 계속되었던 영적인 암흑기를 깨트리고 요사야 왕에게 다가가서 하나님의 뜻을 전해주었습니다. ”주의 날은 심판의 날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의지하면 기쁨의 날이 될 것입니다!“ 


• 스바냐서의 배경

스바냐는 경건한 왕 요시야가 통치하는 동안에 메시지를 전하였으며 이 때는 신앙의 큰 “부흥“이 일던 시대였습니다(왕하 22-23장). 요시야는 8세에 보좌에 올랐으며 16세에 자신을 여호와께 헌신하였슶다. 20세 때에는 그 땅에 큰 개혁을 시작하였으며 우상을 헐고 거짓 제사장들과 선지자들을 심판하였습니다. 다음으로 그는 성전을 재건하여 그 민족으로 하여금 유월절을 크게 지키도록 인도하였습니다. 외관상으로 나타난 일들로 보아서는 신앙적인 관심과 정화의 시기였습니다.

그러나 스바냐는 표면보다 더 깊은 곳을 보았습니다. 그는 사람들의 마음을 보았으며, 그들의 신앙적인 열성이 진정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개혁은 얄팍한 것이었으므로, 백성은 가정에서 우상들을 제거하였으나 그들의 마음에 있는 우상들은 제거하지 않았습니다. 그 땅의 지도자들은 여전히 탐욕스럽고 불순종하였으며 예루살렘성은 온갖 사악함의 근원을 이루고 있었습니다.


• 스바냐서의 개요

스바냐서의 개관도표


1) 심판의 날에 대한 예언(1:2-3:8)
-모든 생물에 대한 심판(1:2-3)
-유다의 심판과 회개에의 권고(1:4-2:3)
-이방 열국들에 대한 심판(2:4-15)
-예루살렘의 범죄를 책망함(3:1-8)
 
2) 회복에 대한 약속(3:9-20)
-열국의 회복(3:9)
-유다의 회복(3:10-20)
 

• 스바냐서의 메시지
스바냐의 멧세지는 세 부분으로 나눌 수 있는데, 두 부분은 심판을 다루며 한 부분은 자비를 다룹니다.
 
1. 하나님은 유다를 심판하실 것이다(1:1-2:3)
그들의 죄 때문인데 특히 우상 숭배의 죄 때문입니다(4-6절). 이 선지자는 세 종류의 죄인들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즉, 여호와를 버린 사람들과 우상만을 섬기는 사람들(4-5상반절)과, 여호와와 우상을 함께 섬기는 사람들(5하반절), 또한 여호와를 공개적으로 버리고 그와 아무 관계를 맺지 않으려는 사람들(6절)입니다.

장차 임할 심판은 7-18절에 묘사되어 있습니다. 스바냐는 이 날을 “여호와의 날“이라고 부르는데 이중의 의미가 있습니다. 즉, 지역적으로는 과거에 유다와 이스라엘에 임한 하나님의 심판이며, 또한 예언적으로는 하나님께서 그의 진노를 퍼부으실 장차 임할 심판(계 6-19장 참조)입니다. 이 경우에 있어서 “여호와의 날“은 주전 606년의 바벨론의 침략과 주전 586년의 성읍과 성전의 마지막 멸망이 될 것입니다.

2장 1-3절에서 스바냐서의 선지자는 예루살렘과 유다를 향하여 백성이 여호와께 돌아와 그들의 죄를 회개할 것을 탄원합니다. “하나님의 심판의 칙령이 통과되기 전에 시간이 아직 있을 때, 여호와를 향하여 자비를 요청하라.“ 그를 만날 만한 때에 그를 찾으라! 그러나 슬프게도 이 민족은 “종교적인“ 것으로 만족하였습니다.
 

2. 하나님은 이 나라를 심판하실 것이다(2:4-3:7)
선지자는 유다 주위에 있는 여러 이방 나라들의 이름을 말하며 그들의 죄들로 인하여 하나님께서 그들을 벌하실 것임을 알립니다. 블레셋(4-7절), 애굽(12절), 앗수르와 그 수도 니느웨는 완전하게 파괴되어 그들의 땅은 황야가 될 것입니다(13-15절).
 
스바냐는 자기의 백성에게 다시금 호소함으로 그의 메시지를 끝맺고 있습다(3:1-7). 만일 하나님이 이방인들의 죄를 심판하신다면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인 유다의 죄에 대해서는 얼마나 더욱 심판하실 것인가? 그는 예루살렘이 음란하고 오염되었다고 말합니다. 요시야가 모든 우상들을 제거하였지만 하나님은 그들의 마음을 볼 수 있으시며, 그들의 마음 가운데 있는 반역을 보셨습니다. 이들은 여호와를 믿는 참된 믿음을 가지지 못하였습니다.

3. 하나님은 그의 백성을 회복시키실 것이다(3:8-20)
스바냐는 위대한 약속으로 그의 멧세지를 끝맺습니다. 어느 날 하나님은 그의 백성을 다시 모을 것이며 이방 나라들을 벌하실 것이고, 이스라엘과 유다를 자기의 땅으로 회복시키실 것입니다.

스바냐는 3장 8절은 아마겟돈 전쟁을 예언하는 것이 분명해 보입니다. 이 때는 모든 나라들이 예루살렘에 대항하여 모이게 될 마지막 때입니다(계 19:11-21).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께서 돌아오셔서 이 민족들을 심판하실 것이며 주님의 왕국을 건설하실 것입니다. 그는 흩어진 유대인들을 다시 모을 것이며, 그들의 죄에서 정결케 하실 것이고, 그의 의로운 왕국을 창설하셔서 예루살렘에 있는 다윗의 보좌에 앉으실 것입니다(슥 12-13장 참조).
 

• 스바냐서의 남은 자 신앙
스바냐는 “남은 자들“에 대하여 강조하고 있습니다(2:7/2:9/3:13) 그 당시 하나님에 대한 진실한 믿음을 가진 적은 무리의 믿음의 그루터기가 있었는데 오늘날에도 그와 같이 남은 믿음의 그루터기가 있습니다. 말세에 모든 유대인이 주님을 따르지는 않을 것이지만 남은 신앙인들은 따르게 될 것입니다.
 
심판이 지나고 하나님의 진노가 끝이 나면 그는 이 민족을 회복시키실 것이며 그들을 기뻐하실 것입니다. 하나님은 유대인들을 괴롭힌 자들을 괴롭힐 것이며(3:19) 유대인들을 그들의 땅으로 돌려 보내실 것입니다. 물론 이 일은 70년의 포로 생활이 끝난 후에 일어날 것입니다.

그래서 스바냐는 시온의 딸들을 향하여 하나님께서 그들의 형벌을 제하시고, 원수를 쫓아내시며, 하나님께서 그들 중에 계시므로 두려워하거나 낙심하지 말고 기쁜 노래를 부르라고 권면합니다.

“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너의 가운데 계시니, 그는 구원을 베푸실 전능자시라. 그가 너로 인하여 기쁨을 이기지 못하시며, 너를 잠잠히 사랑하시며 너로 인하여 즐거이 부르며 기뻐하시리라”(스바냐 3: 14-18).



스바냐 개요

 

 

 

1. 서론

 

모든 성경들은 본서의 중심인물인 ‘스바냐’를 표제로 삼았으며 이름의 뜻은 ‘여호와께서 숨기시다’ 이다.

 

하나님께서 온 세상을 심판하는 날에도 그분의 참된 백성은 안전하게 숨겨주

실 것에 대해 말씀하고 있다.

 

 

 

2. 저 자

 

전통적으로 스바냐 선지자로 보는 데는 이견이 없으며 선지자로 부름을 받고 말씀을 선포했다고 증거하고 있다(1:1).

 

​유다의 히스기야왕의 4대손(현손)으로 왕족 출신이며 왕실과 귀족사회의 타락상에 대해 자세히 언급하고 있다.

 

 

 

3. 기록시기와 시대적 배경

 

유다의 요시야 왕(B.C.640-609) 시대에 사역을 하였다.(1:1)

 

앗수르은 아슈르버니팔 왕(B.C.669-633년)이 다스리던 시대로 앗수르가

점점 쇠퇴해 가던 때였다.

 

므낫세와 아몬 왕의 우상숭배에 반하여 요시야 왕이 종교개혁을 할 당시 도와 신앙부흥 운동에 영향을 끼친 것으로 보인다.

 

대략 B.C.640-622년 어간에 기록했을 것으로 추정한다.

 



4. 기록목적

 

요엘서나 아모스서와 마찬가지로 스바냐서 역시 ‘여호와의 날’이 중심주제다.

 

​‘여호와의 날’은 불법하고 경건치 못한 자에게는 심판의 날이요, 고난 중에도 신앙을 지키는 의로운 자에게는 구원의 날임을 말한다.

 

​오직 죄를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자만이 여호와의 날에 구원에 참여하게 됨을 말하고 있다.

 

 

 

5. 구조


초 점

하나님의 심판

하나님의 구원

구 분

1:1-2:3

2:4-3:8

3:9-20

유다심판

열방 심판

남은 자들을 구원하심

주 제

여호와의 날 : 진노의 날

여호와의 날 : 구원의 날

핵 심

구 절

[습]3:17 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너의 가운데에 계시니 그는 구원을 베푸실 전능자이시라 그가 너로 말미암아 기쁨을 이기지 못하시며 너를 잠잠히 사랑하시며 너로 말미암아 즐거이 부르며 기뻐하시리라 하리라

 

 

 

6. 여호와의 날 : 심판의 날

 

어떤 선지자들보다 여호와의 날에 대하여 강렬하고 직접적인 묘사로 이루어졌다.

 

여호와의 날이 임박했음을(1:7,14), 또한 미래에 범우주적으로 이스라엘과 열방의 구원을 통해 성취됨을 선포한다.(3:16-20)

 

군사적 용어들로 묘사하며 만군의 여호와께서 적들을 물리치고 승리하는 날로 묘사한다.

 

자신의 백성을 포함한 세상 만민들이 회복되어 여호와께 참 예배를 드리게 하기 위하여 이 날을 행하신다.



7. 중요 메시지

 

스바냐는 유다 사회를 오염시킨 종교적, 사회적 불의를 질타한다.

 

여호와의 날에 범죄 한 유다는 참혹하게 심판 받을 것이며, 이방나라들도

하나님의 백성을 괴롭힌 까닭에 초토화 될 것이다.(2:14-15)

 

온전히 하나님을 찾는 가운데 마음을 겸비하고 공의와 겸손하게 살려고 

힘쓰면 ‘혹시’ 심판을 면할 수도 있다.(2:3)

 

 

 

8. 하나님의 회복의 약속

 

범죄 한 예루살렘을 심판하는 중에도 곤고하고 가난한 백성들을 남겨두시고 보호하실 것이다.(3:12)

 

남은 자들은 입술이 깨끗하고 행실이 의로운 자들이 될 것이다.(3:13)

 

때가 되면 사방에서 ‘남은 자’들을 모으셔서 구원하시고 그들로 하여금 영광을 받으실 것이며 그들을 보고 기뻐하실 것이다.(3:17)

 

 

 

9. 결 론

 

‘여호와의 날’은 심판의 날이기도 하지만 회개하여 죄사함 받은 모든 자에게는 하나님의 은혜를 통한 구원의 날이기도 하다

 

예언서는 거의 이스라엘과 유다의 죄에 대한 하나님의 슬픔, 탄식, 분노, 절망을 묘사하는 부분이 많으나 스바냐는 하나님의 ‘기쁨’을 말한다.(3:17)

 

한낱 피조물인 우리가 창조주 하나님의 기쁨이 될 수 있으며 반대로 슬프게도 할 수도 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뜻 가운데 올바르게 살아가야 한다.

 

스바냐

저자 : 스바냐 1장 1절은 스바냐서의 저자가 선지자 스바냐라고 알려줍니다. 스바냐라는 이름은 "하나님에 의해 보호를 받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저작 연대 : 스바냐서는 주전 635-625년 사이, 즉 요시야 왕이 통치하던 초기에 기록되었습니다.

기록 목적 : 스바냐의 메시지는 심판과 격려를 포함하는데 다음과 같은 세 가지 주요 교리를 알려줍니다. 1) 하나님은 모든 나라를 다스리는 주권자이시다. 2) 심판 날에는 악인이 처벌되고 의인은 신원을 받게 될 것이다. 3) 하나님은 회개하고 그분을 신뢰하는 사람들을 축복하신다.

핵심 구절 :

스바냐 1:18, “그들의 은과 금이 여호와의 분노의 날에 능히 그들을 건지지 못할 것이며 이 온 땅이 여호와의 질투의 불에 삼켜지리니 이는 여호와가 이 땅 모든 주민을 멸절하되 놀랍게 멸절할 것임이라”

스바냐 2:3, “여호와의 규례를 지키는 세상의 모든 겸손한 자들아 너희는 여호와를 찾으며 공의와 겸손을 구하라 너희가 혹시 여호와의 분노의 날에 숨김을 얻으리라”

스바냐 3:17, “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너의 가운데에 계시니 그는 구원을 베푸실 전능자이시라 그가 너로 말미암아 기쁨을 이기지 못하시며 너를 잠잠히 사랑하시며 너로 말미암아 즐거이 부르며 기뻐하시리라 하리라”

요약 :

스바냐는 온 땅과 유다와 주변 국가와 예루살렘과 모든 나라에 대한 주의 심판을 선언합니다.
그 후 모든 민족, 특히 유다 백성의 신실한 남은 자를 향해 주의 축복을 선포합니다.

스바냐는 자기가 주님의 말씀을 선포하고 있음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용기를 가지고 노골적으로 말하였습니다.
그의 책은 "주님의 말씀"으로 시작하여 "주님의 말씀"으로 마칩니다.
그는 사람들이 숭배하는 수많은 신들도, 앗수르 군대의 힘도 그들을 구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자비로우시며 긍휼이 많으십니다.
그러나 그분의 모든 경고가 무시될 때 반드시 심판이 따릅니다.
하나님의 심판의 날은 성경에 자주 언급되어 있습니다.
선지자들은 그 날을 "주의 날"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날에 이루어질 사건들로서 예루살렘의 몰락과 같은 여러 사건들을 언급했는데, 그 사건들 각각은 궁극적인 주의 날을 가리킵니다.

예표 :

3장 14-20절에서 선포된 시온에 대한 마지막 축복은 아직 거의 다 성취되지 않았습니다.
이에 우리는 그 예언들이 그리스도의 재림의 때에 성취될 메시아적 예언들이라고 결론을 내리게 됩니다.
하나님은 그분의 백성의 죄를 위해 죽임 당하시려고 오신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우리의 형벌을 제하여 버릴 수 있으셨습니다(습 3:15, 요 3:16).
그러나 이스라엘은 아직 진정한 구세주를 인정하지 않고 있습니다.
이 사건은 앞으로 발생해야 합니다(롬 11:25-27).

그들의 왕이 그들 가운데 있게 될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을 심판하시고 그것을 자신을 위해 구속하시기 위해 재림하시는 때 이스라엘의 평화와 안전에 대한 약속이 성취될 것입니다.
주께서 부활하신 후에 하늘로 올라 가셨듯이, 그분은 다시 오셔서 이 땅에 새 예루살렘을 세우실 것입니다(요한계시록 21장).
그때에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모든 약속은 성취될 것입니다.

적용 :

이름과 상황을 약간 조정만 하면, 주전 7세기경의 이 선지자가 오늘 우리의 강단에 서서 악한 자들을 향한 심판과 신실한 자들을 위한 소망의 메시지를 전할 수 있을 것입니다.
스바냐는 우리에게 하나님이 그의 백성의 도덕적이고 종교적인 죄로 인해 모독을 당하시는 것을 상기시켜줍니다.
고의로 죄를 범하면 하나님의 백성은 징계를 피하지 못할 것입니다.
징계는 고통스러울지 모르지만 그 목적은 형벌보다는 구속적일 수 있습니다.
악이 반드시 처벌되는 것은 악이 맘대로 휘저으며 승리하는 것처럼 보이는 그러한 때에 위로를 줍니다.
우리에게는 하나님께 불순종할 자유가 있지만 불순종의 결과를 피할 수 있는 자유는 없습니다.
하나님께 충실한 사람들은 상대적으로 소수이지만, 하나님은 그들을 잊지 않으십니다.
























































하박국(Habakkuk) 포옹 08/09/2023(수) -



화 있을찐저(2:6, 9, 12, 15, 19)

화 있을찐저(1945) 호이(hôwy) הוֹי

1. 화 있을진저.
2. 이사야 5:8
3. 예레미야 48:1
발음 / 호이[ hôwy ]
관련 성경 / 오호라(왕상 13:30), 슬프다(사 1:4, 렘 22:18, 48:1), 화 있을진저(사 5:8, 렘 22:13, 합 2:6), 화 있도다(렘 50:27)
구약 성경 / 51회 사용

곧 이르기를 화있을진저...무겁게 짐진 자여

- '화 있을진저'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호이'는 일반적으로 심판적인 내용을 소개하는 예언 문학에서 주로 사용되었다(사 5:8,11,18, 20-22; 렘 22:13; 23:1; 암 5:18; 6:1).
여기서도 앞으로 계속될 선포가 저주의 성격을 가진다는 사실을 충분히 뒷받침한다.
그리고 이 저주를 듣는 자들을 향해 '자기 소유 아닌 것을 모으는 자', '볼모잡은 것으로 무겁게 짐진 자'라고 표현하여 그들이 당하게 될 화는 그들이 자행했던 강탈과 노략에 근거한 것임을 시사한다.




우상(偶像) - 짝 우(偶), 모양 상, 형상 상(像)
하나님에 대(對)하여 인위적(人爲的)으로 만들어 낸 신(神)의 형상(形象ㆍ形像)이나 개념(槪念)

우상(偶像) - 짝 우(偶), 모양 상, 형상 상(像)

6459. 우상(페셀. peçel)  פֶּסֶל    

1. 새긴우상,  2. 나무로 만든 우상, 3. 주조하여 만든 우상
발음 / 페셀[ peçel ]
어원 / 6458에서 유래
관련 성경 / 우상(출 20:4, 삿 18:20, 사 42:17), 신상(삿 17:3, 시 97:7, 렘 10:14), 목상(왕하 21:7, 대하 33:7).
구약 성경 / 31회 사용

* 6458. 파살(pâçalפָּסַל   

1. 새기다
2. 출애굽기 34:1
3. 나무로 만든 우상의 경우] 하박국 2:18.
발음 / 파살[ pâçal ]
관련 성경 / 새기다(합 2:18), 깎다(출 34:1,4), 다듬다(신 10:1,3, 왕상 5:18).
구약 성경 / 6회 사용




묵시(默示) - 잠잠할 묵(默), 보일 시(示)

묵시(2372) - 직접적(直接的)으로 말이나 행동(行動)으로 드러내지 않고 은근(慇懃)히 자기(自己)의 의사(意思)를 나타내 보임 / 3회(1:1, 2:2, 3)

2372. 하자(châzâh) חָזָה 

1. 보다,   2. 하나님을 보다,  3. 민수기 24:4
발음 / 하자[ châzâh ]
관련 성경 / 보다(욥 15:17, 시 58:10, 겔 12:27), 우러러보다(욥 36:25), 바라보다(시 63:2, 미 4:11), 받다(사 2:1), 이상(異像)으로 받다(암1:1, 합 1:1), 보이다(사 30:10), 들어가다(욥 8:17), 뵙다(욥 23:9, 시 11:7), 깨닫다(욥 34:32), 보게 하다(아 6:13).
구약 성경 / 55회 사용


강포(强暴) - 강할 강, 사나울 폭  - 3절 / 간악, 패역, 겁탈, 변론, 분쟁

강포(强暴, violence) - 강하고 사납다 / 5회(1:2,  3,  9,  2:8, 17)   

2555. 하마쓰(châmâç) חָמָס

1. 포악,  2. 악업
발음 / 하마쓰[ châmâç ]
어원 / 2554에서 유래
관련 성경 / 학대(창 6:11, 사 53:9, 습 1:9). 모욕(창 16:5), 흉악(삼하 22:3), 포학(욥 16:17), 악(시 27:12), 포악한 자(시 74:20), 폭력(창49:5, 삼하 22:3), 포학한 일(삿 9:24), 불의함(대상 12:17), 폭행(욥 19:7), 해(잠 26:6),
[형] 거짓된(신 19:16), 강포한(잠 16:29), 포악한(암 6:3), 불의한(시 35:11), 심한(시 25:19).


경고(警告) - 깨우칠 경(警), 고할 고(告) / 1:1,
주의하라고 경계하여 알림

1:3. / 어찌하여 나로 간악을 보게 하시며 패역을 목도하게 하시나이까 대저 겁탈과 강포가 내 앞에 있고 변론과 분쟁이 일어났나이다.
간악 - 불의
패역 - 악
겁탈 - 약탈
변론 - 다툼
분쟁 - 시비



경고(警告, ) 마싸(massâʼ)  מַשָּׂא

מַשָּׂא 스트롱번호4853
1. 실어나름,  2. 짐, 3. 고양
발음 / 마싸[ massâʼ ]
어원 / 5375에서 유래
관련 성경 / 짐(출 23:5, 사46:2, 렘17:21), 누(삼하15: 33,19:35), 일(왕하9:25), 노래(대상15:22), 경책(대하24:27), 해(욥7:20), 잠언(잠30:1, 31:1),경고(사13:1, 나1:1, 슥9:11), 중벌(렘23:36),묵시(겔12:10). [동] 메다(민4:15, 대하35:3),싣다(왕하5:17, 8:9), 노래하다(대상15:27), 바치다(대하17:11), 탈취하다(대하20:25), 엄중하다(렘23:33,34,36).
구약 성경 / 66회 사용

* 5375. 나사(nâsâʼ)  נָשָׂא 

1. 들어올리다,  2. ‘물이 많아서 방주가 땅에서 떠올랐고’, 3. 깃발을 세우다
발음 / 나사[ nâsâʼ ]
관련 성경 / 넉넉하다(창13:6,7), 용서하다(창18:26, 출10:17), 듣다(창19:21), 데려오다(창45:19),맹세하다(출6:8), 불러들이다(출10:13), 담당하다(출18:22, 민11:17), 메다(출28:12, 왕상2:26), 원하다(출36:2), 돌아가다(레5:1),당하다(레5:17, 24:15, 시88:15), 메이다(민4:25), 지다(레16:22, 사22:6), 사하다(민14:19, 시32:5), 이끌다(민31:49), 움키다(삼상17:34), 안다(신1:31, 삼하4:4), 받다(왕상8:31, 신33:3), 들다(삼하18:28, 대상12:24, 사40:26), 실어오다(왕상10:11), 들어가다(왕하2:16), 예언하다(왕하9:25), 교만하다(왕하14:10), 가져가다(왕하23:4), 조사하다(대상27:23), 교만하다(대하25:19), 비방하다(시15:3), 두다(시24:4), 높이다(시93:3, 사52:8), 칭하다(시139:20), 받들다(시143:8), 세우다(사5:26), 짓다(사14:5), 들어올리다(겔3:14), 무성하다(겔17:23), 부르다(겔26:17), 품다(겔39:26), 맺다(욜2:22, 학2:19), 가져가다(암6:10), 제하여 버리다(말2:3), 견디다(창4:13),싣다(창44:1), 태우다(창45:27), 집계하다(민4:2), 일어나다(시89:9), 참다(렘44:22,시55:12), 빼앗다(삼하14:14, 겔38:13), 일으키다(창21:18), 계수하다(민1:2, 31:26), 떠오르다(창7:17), (소리) 내다(창21:16), 떠나다(창29:1), 눈짓하다(창39:7), 몰아넣다(출10:19), 일컫다(출20:7, 신5:11), 전파하다(출23:1), 운반하다(민1:50), 돌아보다(신28:50),(소리를) 높이다(삿21:2, 삼하13:36), 허락하다(삼상25:35), 대면하다(삼하2:22), 나오다(삼하6:3), 보내다(왕상5:9), 떠들다(왕상13:29), 이끌어가다(왕상18:12), 뜨다(왕하19:22), 긷다(대상11:18), 장가들다(대상23:22, 24:3), 노략하다(대하14:13), 운반하다(대하16:6), 베풀다(에2:9), 소리지르다(욥2:12), 따르다(욥13:8), 물다(욥13:14), 노래하다(욥21:12), 보다(욥32:21, 시82:2), 내다(욥40:20), 부르다(시16:4), 들리다(시63:4), 주다(시72:3), 기쁘게 하다(시86:3), 치다(시133:9) 건너다(사15:7), 날리다(사41:16),탈취하다(호5:14), 제거하다(호14:2), 제하다(단1:16), 솟아오르다(나1:5), 쓰다(학2:12), 받아 주다(말1:8), 긍휼히 여기다(말1:9), 실리다(창45:23), 사모하다(신24:15), 잡다(수6:18, 삿9:54), 이끌다(삼상10:3), 바치다(삼하8:6, 대상18:2), 실어오다(왕상10:22), 짐을 나르다(느4:17), 뿌리다(시126:6), 사유하다(미7:18), 치우치게 하다(말2:9), 존귀하다(왕하5:1, 대하32:23, 욥22:8), 사함을 얻다(시32:1), 사죄함을 받다(사33:24), 달하다(렘51:9), 사로잡다(단11:12), 돋우다(사40:4), 안기다(사66:12), 뛰어나다(사2:2), 자고하다(사2:12), 거룩하다(사57:15), 높다(사57:7), 제공하다(왕상9:11), 끌어가다(암4:2), 형벌받다(레22:16), 높아지다(단11:14), 높은 체하다(잠30:32), 흥왕하다(민24:7).[부] 높이(에3:1).
구약 성경 / 650회 사용


08-11-2023(금)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주께 대한 소문(하박국 3:2)

여호와여 내가 주께 대한 소문을 듣고 놀랐나이다 여호와여 주는 주의 일을 이 수년 내에 부흥케 하옵소서 이 수년 내에 나타내시옵소서 진노 중에라도 긍휼을 잊지 마옵소서.
LORD, I have heard of your fame; I stand in awe of your deeds, O LORD. Renew them in our day, in our time make them known; in wrath remember mercy.

주께 대한 소문(rumors about the Lord)
NIV. your fame
NASB. the report about You
KJV. thy speech

주께 대한 소문(8088) 쉐마( shêmaʽ) שֵׁמַע 

1. 들음,  2. 명성,  3. 음악
발음 / 쉐마[ shêmaʽ ]
관련 성경 / 소식(창 29:13, 사 23:5, 나 3:19), 풍설(출 23:1), 명성(민 14:15, 신 2:25, 왕상 10:1, 대하 9:1, 사 66:19), 소문(욥 28:22, 렘37:5, 합 3:2), 큰소리(시 150:5).
[동] 듣다(욥 42:5, 시 18: 44), 들려주다(호 7:12).
구약 성경 / 17회 사용

주께 대한 소문(the report about You)은 주의 일을 수년 내에 부흥하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남 왕국 유다 나라가 무너지기 직전에 이와 같은 소식을 듣고 전한다는 것은 매우 위험합니다.
왜냐하면 모든 백성들이 북 이스라엘 왕국은 앗수르에 의해서 이미 망했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기원전 722년).
그리고 남 왕국 유다 나라도 거센 풍랑에 의해서 심하게 흔들리고 있었다는 것을 느끼고 있었던 시대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의 일이 다시 부흥한다는 것은 무너진 나라가 다시 세워진다는 것과 같습니다.

당시 시대 상을 한 단어로 표현하면 "강포(强暴)"라고 합니다(1:2, 6, . 2:8, 17).
'강포'라는 히브리 단어는 "하마쓰(châmâç. חָמָס)" 라고 합니다. 
'하마쓰'란 "포학" 또는 "악업" 이라는 뜻으로 성경에서 사용합니다.
강포가 소개된 하박국 1장 3절의 말씀에서 강포의 내용을 이렇게 말씀합니다.
"
어찌하여 나로 간악을 보게 하시며 패역을 목도하게 하시나이까 대저 겁탈과 강포가 내 앞에 있고 변론과 분쟁이 일어났나이다."

'강포'란 "간악(불의), 패역(악), 겁탈(약탈), 변론(다툼), 분쟁(시비)"라는 내용으로 드러났습니다.

간악(奸惡) : 간사할 간, 악할 악 / 간사(奸邪)하고 악독(惡毒)함.
패역(悖逆) : 거스를 패, 거스를 역 /
겁탈(劫奪) : 도리에 어그러져 패악하고 불순함
변론(辯論) : 말씀 변, 논할 론 / 옳고 그른 것을 가려서 따짐
분쟁(分爭) : 어지러울 분, 다툴 쟁 / 말썽을 일으켜 시끄럽게 다툼



더 이상 무엇인가를 기대할 수 없는 현실에서 수년 내에 주의 일이 부흥될 것이란 소식은 절망 가운데 허덕이는 백성들을 위로하며 소망과 용기를 갖게 합니다.

과연 이러한 일이 어떻게 가능할까요?
그것은 여호와 하나님이 손을 들어주면 될 수 있습니다.

특별히 하박국서의 결론이 드러나는 3장은 2절만 기도이고, 나머지는 전부 하나님께 대한 감사와 찬미로 이어집니다.
아직은 주의 부흥이 일어나지 않았지만 하나님의 때에 반드시 실현될 것이라는 확신을 갖고 절망의 자리에서 희망의 깃발을 흔들 수 있는 믿음으로 무장해야 한다고 깨우칩니다.

이와 같은 믿음은 절망적인 현실에서도 하나님을 찬양합니다(3:17-19)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치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식물이 없으며 우리에 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찌라도. 나는 여호와를 인하여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을 인하여 기뻐하리로다.주 여호와는 나의 힘이시라 나의 발을 사슴과 같게 하사 나로 나의 높은 곳에 다니게 하시리로다 이 노래는 영장을 위하여 내 수금에 맞춘 것이니라."

사랑하는 믿음의 사람들이여
절망의 자리에서
고통의 자리에서
눈물의 골짜기에서
죽음의 문턱에서도
찬양할 수 있는 믿음으로 일어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3:1. 시기오놋에 맞춘바 선지자 하박국의 기도라.

שִׁגַּיוֹן 스트롱번호7692
1. 열광적인 시,
2. 복수 שִׁגְיוֹנוֹת : 하박국 3:1.
발음 / 식가욘[ shiggâyôwn ]
어원 / 7686에서 유래
관련 성경 / 식가욘(시 7편 표제), 시기오놋(합 3:1)
구약 성경 / 2회 사용

* 7686. שָׁגָה 
1. 방황하다,  2. 비틀거리다,  3. 잠언 5:14
발음 / 샤가[ shâgâh ]
관련 성경 /  허물되다(욥 6:24), 실수하다(사 28:7), 범죄하다(민 15:22, 겔 45:20), 잘못되다(삼상 26:21), 미련하다(잠 5:23), 유리되다(겔34:6), 떠나다(시 119:21, 118), 미혹되다(잠 20: 1), 길을 잃다(신 27:18), 유인하다(잠 28:10).
[명] 속이는 자(욥 12:16), 허물(레 4:13, 욥 19:4).
구약 성경 / 21회 사용





여러 가지 ‘정죄’에 대하여 보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심판하시겠다는 내용을 구체적으로 보았습니다.
우리 하나님이 불의와 강포에 대하여, 술 취함과 우상숭배에 대하여 분명하게 심판하시겠다는 무시무시한 말씀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런 심판들이 하박국에게는 하나님의 구원 사역으로 들리기 시작한 것입니다.
여기에 오늘 말씀의 핵심이 있습니다.
누구에게는 심판으로, 누구에게는 구원으로?
하나님께서 “의인을 살리시기 위한 방편”으로 믿어지기 시작한 것입니다.
오늘의 말씀은 이러한 구원의 약속을 받은 하박국이 하나님께 감사와 찬양을 드리는 장면입니다.
아직은 ‘축복된 상황이 아니다’라는 데 더 큰 의미가 있다는 생각을 합니다.
하나님의 심판과 구원의 약속을 받은 하박국은 맨 먼저 하나님께 감사와 찬미를 드린 것입니다.
아직도 불법과 불의는 시정되지 않았고, 여전히 약한 자들은 지배층에 의해 억압과 착취를 당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선지자는 감사와 찬미를 여호와께 돌리고 있습니다.

3장은 이렇게 시작되고 있습니다.
1. 시기오놋에 맞춘 선지자 하박국의 기도라

여기에서 시기오놋이라는 말이 무엇을 지칭하는지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학자들의 견해에 따르면 19절에 나타난 ‘수금’이라는 말과 동일시합니다.
다시 말하면, 악기를 가지고 찬양하는 구체적인 기도가 전개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실제적으로 ‘하박국의 기도’라고 되어 있지만, 2절을 제외하고는 찬미와 감사의 노래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먼저 주목해 보려고 하는 것은 말씀 전체를 통해 주시는 메시지를 ‘심판’으로 볼 것인지, ‘구원’으로 볼 것인지를 선택하라는 것입니다.
왜 어떤 이들에게는 화산폭발의 예고가 구원의 메시지가 되고, 또 어떤 이들에게는 죽음을 알리는 전주곡이 되었을까요?
하박국의 말씀, 그의 노래와 기도가 지금 우리들에게는 구원의 메시지로 들리고 있나요? 아니면, 누군가에게 죽음의 전주곡인가요?
아마도 하박국에서 가장 핵심이 되는 메시지가 오늘 본문 2절 말씀이 아닐까요?
하박국이 하나님의 구원 계획을 깨닫게 되자 그의 내면에서부터 일어났던 불같은 열망이 무엇인지를 분명하게 보여주고 있는 말씀입니다.

2. 여호와여 내가 주께 대한 소문을 듣고 놀랐나이다 여호와여 주는 주의 일을 이 수년 내에 부흥하게 하옵소서
이 수년 내에 나타내시옵소서 진노 중에라도 긍휼을 잊지 마옵소서

하박국이 주께 대한 소문을 듣고 ‘놀랐다’라고 되어 있는 부분이 아주 중요합니다.
놀람에 대한 이유는 주께 대한 ‘소문(fame)’ 때문입니다.
이 소문을 리빙 바이블(living bible)
에서는 “your report"라고 말하는데, 이것은 2장에서 계속된 하나님의 응답에 대한 내용입니다.
그 응답의 내용이란 하나님의 ‘심판’에 대한 내용입니다.

‘놀랐다’ (히브리어 야레)는 말은:
1.  두려움의 감정
2. 감정적 반응에 대한 강조 없이 악에 대한 지적인 예측
3. 존경 혹은 경외,
4. 공의로운 행위 혹은 경건
5. 공식적인 종교 예배 등의 뜻입니다.

이 말씀에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 행하시고자 하는 일에 대한 공포와 하나님이 얼마나 공의로우신 분이신가에 대한 경외가 모두 포함되어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여기에서 하박국의 전환이 시작되는데 그가 가지고 있었던 항의와 의문은 이제 경외심으로 바뀌고 있습니다.
그의 겸손한 마음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제는 아주 분명하게, “하나님이 하시고자 하는 일을 수년 내에 부흥케 하소서”라고 간구합니다.
굉장한 변화가 일어난 것입니다. 그의 기도가 성숙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계획이 그의 가슴 속에 들어오고 하나님을 신뢰하게 되니 그에게 찾아온 열망입니다.
“주의 일을 수 년 내에 부흥케 하옵소서!”
지금까지 하박국의 고민은 자신의 생각대로 되지 않는 세상, 자신이 이해하지 못하는 일이었는데, 이제는 그런 믿음이 생긴 것입니다.
주님의 일이 이루어지기를. . .
우리 신앙의 성숙은 필연적으로 ‘하나님의 뜻’으로 귀결되는 것이 아닐까요?
마태복음 6장에서 예수님이 가르쳐주신 기도의 핵심이 바로 “하늘의 뜻이 땅에서도 이루어지는 것”이듯이 말입니다.
이 기도야 말로 우리로 하여금 신앙의 정도를 벗어나지 않게 하는 핵심입니다.
우리 신앙에 사라져 버린 기쁨은 결국 우리의 뜻이 이루어지지 않음에 있었다면 평안의 회복은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기대하기 시작하면서 찾아오는 것이죠.
하박국의 신앙이 ‘하나님의 뜻’으로 바뀌자 그의 기도가 힘이 생기기 시작합니다.
그의 입에서 ‘부흥’이라는 말이 터져 나오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가 불의하다고 생각하고 무섭다고 생각했던 하나님의 심판, 하나님의 응답이 ‘수년 내에 이루어지는 것’이 부흥이라는 확신이 생긴 것이죠.
어떤 사람들은 교회가 성장하려면 희망적인 이야기를 많이 해야 한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제 희망을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들이 말로만 듣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보장해 주시는 희망에 대한 내용들입니다.
이 희망은 하박국 전체의 주제가 되는 2장 4절의 “의인은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는 말씀을 고백하는 자들에게만 나올 수 있는 희망입니다.
이제 우리들이 의인되었다고 하는 고백이 있으면 하나님의 심판이 기다려 질 수밖에 없습니다.
수년 내에 하나님 당신의 뜻을 이루어 주시옵소서!
우리는 여기에서 심판을 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나타내실 영광을 보기를 원합니다.
이제 우리들에게서 엔돌핀이 나올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의 신앙이 역동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을 만나는 시간이 기다려질 수밖에 없습니다.
아주 근본적인 신앙의 모습이 바뀌는 놀라운 순간입니다.

오늘 우리가 분명히 알고 선언해야 하는 것들이 있습니다.
“사람들이 하나님의 존재와 통치를 믿지 않는다고 해서 하나님의 존재나 통치를 제한하거나 무효화시킬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언제나 하나님의 방식대로 하십니다.”
“인생은 그분의 뜻이 이루어지게 하는 것이 목적이며, 그분의 뜻이 이루어질 것을 믿음으로 받아들일 때 그 분의 찬란한 영광의 빛 안에 거할 수 있습니다.”
나는 여러분들이 또 하나의 사람,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기대하는 사람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하박국이 부흥을 선포하는 계기가 된 것은, 하나님이 일하시는 방식과 세상이 일하는 방식이 다르다는 것을 인정하면서 부터입니다.
저는 이것을 신앙의 ‘혁신’이라고 부르고 싶습니다.
하나님을 알고 나니 비로소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 공의로우시다는 믿음이 생겼습니다.
아주 흥미로운 예화가 하나 있습니다.

원칙과 공의는 ‘내 맘대로’ 하지 않을 때 시작되는 것입니다.
가장 큰 교만은 자기 마음대로 하는 것입니다. 반대로 ‘겸손’은 내 마음대로 하지 않는 것,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순종하는 것이죠.
‘겸손’에서 우리는 하나님을 바라보는 눈이 열립니다.
하나님이 보이면 비전이 생깁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에 대한 기대가 생깁니다.
그의 겸손한 마음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부흥에 대한 기대는 지금 하박국과 그 민족이 당하고 있는 어려움, 고난, 고통, 불의한 일들이 충분히 의미가 있는 일로 받아들여지면서 시작된 것입니다.
‘부흥’의 영어 단어가 ‘revival’입니다. ‘다시 산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에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기대하면서 다시 사는 역사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세상을 살아가는 규칙을 거부하는 것이 아니라, 그 규칙을 만드시는 하나님을 기대하는 것입니다.
언젠가 제가 성경공부를 인도하다 은혜를 받았던 내용을 기록한 적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 부흥이다!

구약개관을 강의하며 ‘소유와 율법’을 공부할 때였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출애굽해서 가나안 땅을 앞두고 요단강을 건너야하는 순간이 왔습니다.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법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모맥을 거두는 시기’에 언약궤를 매고 요단강을 건너라는 것입니다.
인간의 계산으로 이해가 되지 않는 명령인데, 그 명령에 순종하기로 작정했을 때 그들을 부흥을
경험합니다. 물에 발을 담갔으나 물속에서 살아나는 경험을 하게 된 것입니다.
부흥은 아무 때나 경험하는 것이 아닙니다. 결핍에서 부흥을 경험합니다.
절실한 갈망에서 부흥을 경험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의도적으로 이스라엘 백성을 홍수로 범람하는 요단강에 발을 담그게 하셨습니다.
그래야 그들이 부흥을 경험할 수 있기 때문이죠.
내 뜻과 내 상식이 포기되지 않는 한 우리들에게서 큰 기적이 일어나지 못합니다.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기대하지 못하는 사람이 어떻게 큰 소망을 품을 수 있겠습니까?
하박국이 하나님의 뜻을 구하기 시작할 때 그에게 큰 소망이 생긴 것입니다.
유대가 고통 중에 있는데 하나님의 심판이 임하고 있는데 말입니다.
“부흥”에 대한 비전이 말입니다.
오늘 여러분들에게 큰 고통과 상식을 뛰어넘는 어려움이 있을지라도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
기를 구할 때,
“주여 수년 내에 이루시옵소서”라고 기도할 수 있을 때 놀라운 가능성이 생기는 것입니다.
그런 생각이 듭니다.
이렇게 부흥을 갈구하는 하박국의 기도가 참 가슴 벅차고 소망적이지 않았겠습니까?
언젠가 집회에 참석해서 들었던 이야기가 있습니다. 전도에 대한 갈망을 갖게 된 사람이 이야기
입니다. CBS의 “새롭게 하소서”라는 프로그램을 처음으로 만든 한 장로님의 이야기였습니다.
이분은 대학에서 동양철학을 공부하는 사람이었는데, 졸업논문이 논문을 “인간의 운명이 사주에
의해 결정된다” 라는 주제로 준비하고 있었답니다. 그래서 사람들을 만나서 사주를 봐 주면 정말
기가 막히게 들어맞더라는 것이지요. 그래서 점점 마음속에 확신이 생기기를
‘인간의 운명이란 정해져 있는 것이구나. . .’
그러던 어느 날, 한 다방에서 혼자 앉아있는 아주머니에게 자신이 논문을 쓰는 학생임을 밝히고
사주팔자를 보아주었답니다. 그랬더니, “남편이 죽어서 과부가 되어 있을 사주”가 나오더라는 것
이지요. 그래서 자신 있게 물었답니다. “남편이 없으시죠?”
그랬더니 아 아줌마가 “아니요 남편이 있는데요!”라고 대답을 하더랍니다. 그래서 가지게 된 생각이 사주가 안 맞을 수도 있구나, 그리고 계속해서 조사를 하다 보니까 사주팔자와 운명이 안 맞는 사람이 자꾸 나오더라는 것이지요.
그러던 어느 날, 갑자기 이런 의문이 들더라는 것이지요. 이 사주팔자가 안 맞는 사람들의 이유가
무엇일까 하고 조사를 하다 보니까?
그렇습니다. 모두가 예수를 믿는 사람들”이라는 것이지요.
그래서 왜 예수를 믿는 사람들은 사주팔자가 맞지를 않는가 조사하기 위해 예배를 참석하다가 2년 만에 중생의 체험을 하게 되었고, 그 예수님을 전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사람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으면 모든 운명과 억압으로부터 해방된다는 놀라운 진리를 발견하고 나서는 견딜 수 없는 burning desire가 생긴 것입니다.

역사상 가장 절망적이라고 생각하는 때에 가장 놀라운 부흥의 비전을 보았으니 말입니다.
시간이 걸리는 일이었지만 자신의 생각을 포기하고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기대할 수 있다는
것이 그에게 얼마나 큰 축복인지 말입니다.
이제 우리는 그의 마지막 신앙고백으로 넘어갈 준비가 되었습니다.


문단 분해

3:1-2. 하박국의 기도.
3:3-15. 시내, 출 애굽, 여호수아시대 등에 있어서의 과거의 하나님의 위엄을 회고하여, 신앙을 격려하다.
3:16-19. 황폐와 환난 중에 있어서의 선지자의 확신.

하박국 3장은 일종의 시로서 뛰어난 운율을 갖추고 있다.
하박국은 하나님과의 질의 응답을 통해 모든 의문이 다 풀린 상태에서 하나님을 찬양하고 있다.
이 찬양은 하나님의 품성에 대해(1-3절), 하나님의 능력에 대해(4-7절), 하나님의 목적에 대해(8-16절), 그리고 믿음의 축복에 대한 찬양(17-19절)으로 구성되어 있다.

본장에서는 특히 하나님의 나타나심이 주요 핵심부이다.
무엇보다 본서는 의인이 악인에게 핍박과 고난을 받는 부조리한 세상 속에서 살고 있는 우리들에게 참 믿음으로 사는 삶이 바로 진정한 신앙의 삶과 길임을 가르쳐 줌과 동시에 문제를 안고 있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을 믿고 기도함으로써 참된 믿음에 이르는 길을 지도하며 신앙으로 말미암는 참된 기쁨을 밝히 보여 주고자 하는 것이다.  

 본장은 악인에 대한 심판과 의인에 대한 구원의 계획을 알게 된 하박국 선지자가 하나님을 찬양하는 기도에 대해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 동안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순된 현상을 보고 회의를 가졌던 하박국이 위대한 하나님의 계획을 깨닫고 하나님을 찬양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현현 방법.
본장에서는 하박국의 찬양을 통해 이 세상에 임재하시는 하나님의 섭리 형태를 잘 보여 주고 있다.

첫째, 만물을 다스리시는 통치자로서의 임재이다.
선지자는 거룩한 자가 바란 산에서부터 오시고 그 영광이 하늘을 덮었다고 찬양하고 있다.
이러한 모습은 산과 하늘로 대표되는 모든 자연 만물에 대한 하나님의 전권적인 통치를 상징하고 있다.
그러므로 그 앞에서는 어떤 것도 그의 주권에 도전할 수 없는 것이다.

둘째로 만물에 대한 심판자로서의 하나님의 임재이다.
세상에 나타나실 하나님은 그의 노를 발하시고 악인의 집 머리를 치실 것이다.
하나님은 만물을 다스리는 분이시므로 그들의 행위에 대해서 반드시 자신의 뜻에 의해서 심판하시는 것이다.
그래서 선지자는 본장에서 세상을 심판하시기 위해 인간들 앞에 나타나실 하나님의 장엄한 모습을 생동감 있게 표현함과 동시에 인간들 로 하여금 하나님의 초월성과 영광을 특별히 강조하고자 하였다.

이처럼 하나님의 심판은 모든 만물들이 절대 피할 수 없는 필연적인 것이다.
그러므로 모든 피조물들은 자신의 행한 대로 마지막 날에 심판을 받을 것이다.

셋째로 은혜를 베푸시고 만물을 구원하시는 자비의 하나님의 임재이다.

선지자는 하나님의 임재를 표현할 때 주의 백성을 구원하시려고 기름받은 자를 구원하시려고 나오신다고 묘사하고 있다.
그것은 택한 하나님의 자녀에 대해서는 철저한 보호하심이 있을 것이라는 사실을 보여 주는 것이기도 하다.
본장에서 나타나는 하나님은 진노 중에라도 긍휼을 잊지 않으시는 하나님으로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아울러 능력이 뛰어나신 하나님으로 보여지고 있는 그것은 곧 자연을 마음대로 주장하시는 하나님의 능력 때문이다.
하박국 선지자가 모든 신들 위에 뛰어나신 하나님에 대해 우리에게 강조하고자 하는 것은 오직 하나님 한 분으로서만이 우리는 기뻐할 수 있고 신뢰할 수 있다는 사실이다.

세상에는 우리를 두렵게 하는 것이 많이 있다.
세상의 권력이나 우리에게 핍박을 가할 수 있는 물질들, 또는 육체적인 힘들이 있다.
그러나 하나님을 믿는 성도들은 결코 세상적인 이런 것들에 대해 두려움을 느낄 필요가 없다.
왜냐하면 세상이 결코 감당할 수 없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지켜 주시기 때문이다.
세상의 권력은 있다가도 사라지고 물질은 언젠가는 없어지고 육체적인 힘도 세월이 지나가면 없어지지만 하나님의 전능하신 능력은 만물이 없어지더라도 결코 쇠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삶 속에서 오직 하나님의 능력만을 의지하여 날마다 기도하고 말씀을 통해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얻도록 힘써야 할 것이다.  



여호와여 내가 주께 대한 소문을 듣고 놀랐나이다 여호와여 주는 주의 일을 이 수년  내에 부흥케 하옵소서 이 수년 내에 나타내시옵소서 진노 중에라도 긍휼을 잊지 마옵소서.

부흥케 하옵소서!

1. 부흥케 하옵소서로 번역된 말은 WhyYEj';는 의 피엘형(강조) hy:j;(하야)이다.
현대어 번역본 그대로라면 ‘부흥케 하소서!’라는 말이 아주 이상한 말이라 할 수 있다.
부흥사들이 그래서 그런지 오늘의 많은 교회들도 바르게 사용하지 못하는 것도 사실이다.
본서를 기록한 저자의 이름이 무엇인가? 
하박국?
하박국? = qWQb'j} = 포응 하다, 씨름 하다,라는 의미의 이름이다.
그래서 그런지 하박국 선지자는 의인이 왜 고난을 받아야하는지를 물었었다.
유대백성이 하나님의 선민인데 죄 좀 지었다고 애를 좀 먹였다고 불신자 이상으로 고난을 받아야 하는 이유가 궁금해서 물었다.(강한 불만으로 대들 듯이)

2:3. 이 묵시는 정한 때가 있나니 그 종말이 속히 이르겠고 결코 거짓되지 아니하리라 비록 더딜지라도 기다리라 지체되지 않고 정녕 응하리라.

종말, 종말 하면서도 언제가 종말인가가 매 시대마다 궁금하기는 마찬가지였다.

당신의 뜻을 이루소서!

“여호와여 대가 당신의 통보의 말씀을 듣고 두려웠나이다.       
여호와여 당신께서는 당신의 일을 수년 내에 일으키실 것이며  또 수년 내(中)에 당신의 그 일을 이루실 것입니다.
당신께서는 진노 중에서라도 사랑하실 것을 기억하게 하소서!”

전체적 의미는‘여호와여 여호와께서 하시고자하는 뜻을 이루소서!’하는 말씀이다.

당신의 뜻? 부흥케 하소서!?

1) 부흥케 하소서 : hy:j;(하야)
하야(hy:j;:be동사)는 기본 어근이며 살다, 살아 있다, 생명을 유지시키다, '살다, 생명을 가지다, 살아있다, 생명을 유지(보존)시키다, 소생하다'를 의미한다.

1) 여호와 : h/:hy] : YHWH의 어원 및 의미와 보다 정확한 발음은 모른다.

(1) 적절한 해석은“있다, 존재하다”를 의미하는 동사 haya(hy:h;:하야)이다.
출3:14에 하나님은 모세에게“나는 스스로 있는 자니라(hy<h.a, rv,a] hy<h.a,) 스스로 있는 자가            나를 보내셨다 하라 나를 너희에게 보내신 이는 하나님 여호와(h/:hy];:YHWH)라             하라 이는 나의 영원한 이름이요 대대로 기억할 나의 표효니라.”고 말씀하셨다.
NASB, NRSV는 “I AM WHO I AM”으로 번역했다.
정확한 번역은“I am He Exists.”이다. 이 문구는 그 의미에 있어서 초시간적이다.
'나는 이미 존재하였고, 이제도 존재하고, 앞으로도 존재할 자, 곧 영원한 존재자'의 의미.
그 이름 에흐예(h/:hy])는 칼(Qal) 미완료 1인칭 단수로 하나님께서“나는 있다”이다.
그러나 히브리 민족은 대대로 그 이름을 부를 수 없어서 kuvrio"라고 불렀다.
(2) 여호와의(YHWH : h/:hy])의 변형된 번역들
이 하나님의 이름 YHWH는 마소라 본문에서 금기 때문에 여호와로 나타난다.
2) 부흥은 하나님의 뜻을 이룸이다.
시17:15 나는 의로운 중에 주의 얼굴을 보리니 깰 때에 주의 형상으로 만족하리이다.
시16:11 주께서 생명(!yYIj')의 길로 내게 보이시리니
       주의 앞에는 기쁨이 충만하고 주의 우편에는 영원(jx'n<)한 즐거움이 있나이다.
시17:15절과 시16:11이 연결되어진다.
여기서 '생명의 길'과 죽음의 정복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에 근거한다(행2:24-29).
내세에 대한 구약성경의 가르침이 매우 순수한 공식화를 확립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러한 근거는 마법적이거나, 신화적이거나, 이론적인 것도 아니며 신비적인 것도 아니다.   이것은 은혜 그 자체만의 개념에 의하여 의인들에게서 나타나는 하나의 확신이다.
그래서 생명이신 예수께서 이 땅에 영원한 생수로 오신 것이 곧 경험적인 생명이시다.
5,부흥과 영원?
하나님께서 그의 보좌가 있는(시11:4) 하늘에 거하신다는 반복되는 구약성경의 개념(신4:36, 39, 왕상8:27, 욥22:12, 시20:6, 80:14])과 시편 기자가 그의 얼굴을 보기를 갈망하는 것(시17:15)을 보면 증명이 된다.
계22:4 그의 얼굴을 볼 터이요 그의 이름도 저희 이마에 있으리라
시온산이 영원히 있는 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시125:1).
그 대답은 어느 경우든지 비슷하나 지상의 시온산은 하늘에 있는 것의 대응이다(시123:1)
땅에서의 왕의 부귀는 단지 그에게로 향한 하나님의 영원한 자애의 시작이다(시16:11).
그의 진노는 순간적이나 그의 은혜는 lifetime 같은 기간이 아니라 life-eternal(!yYIj')이다.
그래서 믿음의 세계에는 영원이요 불신의 세계는 영멸인 것이다.
다시 말하면 본문의 현대어 번역은 이해하기가 참으로 어렵게 되어 있다.
이는 본문(하박국) 전체를 볼 때 종말론적인 사건이며 마지막 때를 아는 이라면 하박국선지가 무엇을 요구하는지를 바로 이해 할 수 있을 것이다.
성경의 마지막 책인 계시록을 본다면 더 확실하게 이해를 하게 될 것이다.

결론

1. 마귀의 소원
계 12:12
그러므로 하늘과 그 가운데 거하는 자들은 즐거워하라
       그러나 땅과 바다는 화 있을진저 이는 마귀가 자기의 때가 얼마 못 된 줄을 알므로          크게 분 내어 너희에게 내려갔음이라 하더라.

2. 성도의 소원
합3:2 여호와여 내가 주께 대한 소문을 듣고 놀랐나이다,
        여호와여 주는 주의 일을 이 수년 내에 부흥케 하옵소서,
        이 수년 내에 나타내시옵소서 진노 중에라도 긍휼을 잊지 마옵소서,

계22:20 이것들을 증거하신 이가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속히 오리라 하시거늘,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
    21 주 예수의 은혜가 모든 자들에게 있을지어다 아멘
7,h/:hy](여호와) → hy:j;(존재:있다) → !yYIj’(영원 : 당신이 그것을 이루다)


감사로 인생을 바꾼다(하박국 3:16-18)

몇 해 전 러시아 항공우주국에서 경보를 발령했습니다.
어떤 지역에 집채만 한 운석이 떨어질 것이라는 예보였습니다.
해당 지역은 즉시 혼란에 빠졌습니다.
공포와 두려움에 주민들은 대피를 가고 아예 이사를 가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한 청년의 인터뷰가 신문에 실린 후 상황이 달라졌습니다.

그 청년은 도리어 운석이 자기 집에 떨어지기를 바란다는 것이었습니다.
이유는 운석은 신비한 우주의 조각이고 그것이 자기 집에 떨어진다면 많은 사람들은 그것을 보러 자기 집을 방문 할 것이고 그러면 자신의 집이 우주와 지구를 이어주는 신비한 통로가 될 수 있지 않겠느냐는 것이었습니다.

이 인터뷰가 방송이 되자 사람들은 더 이상 운석을 두려워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도리어 청년처럼 자기 집에 떨어지기를 바라는 사람이 속속 등장했습니다.
소동은 점차 가라앉게 되었다고 합니다. 
멋진 해석이 상황을 반전한 것이지요.
이처럼 제대로 된 해석은 인생도 바꿀 수 있다. 

이름도 재미있는 하박국은 주전 6세기 초 유다에서 활동하던 선지자입니다.
당시는 신흥국가 바벨론이 느부갓네살이라는 호전적인 지도자에 의해 영토를 넓히던 시절이었습니다.
거대한 제국 앗수르도 바벨론에 점령을 당했고 이집트도 전쟁에서 대패했습니다.
이집트와 동맹을 맺었던 남왕국 유다는 호시탐탐 위협을 당하는 위태로운 시기였습니다.
이처럼 불안한 정세라면 하나님을 더욱 의지해야 하는데, 나라 안의 상황은 정치적으로는 패가 나뉘어 분쟁을 일삼았고, 사람들은 더욱 포악해지고 온갖 죄가 난무해 정의라곤 찾아볼 수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하박국서는 이런 상황을 보고 하나님께 드린 질문으로 시작합니다.
‘하나님, 이 패역한 죄악을 그저 보고만 계실 겁니까?
하나님은 즉시 대답하십니다.
‘갈대아 사람을 일으켜 심판할 것이다.’ 

갈대아 사람은 바벨론을 가리키는 말이었습니다.
그러니 유다가 바벨론에 의해 심판을 당해 망하겠다는 말씀이었습니다.
당황한 하박국은 다시 질문합니다.
‘그래도 유다 백성은 하나님의 백성이라 좀 더 의롭지 않습니까?
그런데 어떻게 하나님과 관계도 없는 불의한 바벨론이 유다를 침략하도록 하실 수 있습니까?’

하나님은 다시 명쾌하게 답하신다.
‘바벨론도 심판할 것이다.
그러나 믿음을 가진 의인은 그가 어떤 민족이든지 살 것이다.’
본문은 이 대답을 들은 하박국의 반응을 기록한 말씀입니다. 

하나님이 심판하신다는 말씀을 듣자 하박국은 두려워졌습니다. 

하박국 3:16
내가 들었으므로 내 창자가 흔들렸고 그 목소리로 말미암아 내 입술이 떨렸도다 무리가 우리를 치러 올라오는 환난 날을 내가 기다리므로 썩이는 것이 내 뼈에 들어왔으며 내 몸은 내 처소에서 떨리는도다. 

창자가 흔들리고 입술이 떨렸습니다.
뼈가 시리고 몸은 사시나무처럼 떨렸습니다.
환경은 황무지처럼 변해버릴 것입니다.

하박국 3:17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하지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먹을 것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이스라엘 사람의 주된 식물인 무화과는 시들어버릴 것입니다.
포도나무에서 열매를 얻을 수 없다면 신선한 음료수를 구할 길도, 겨울을 날 건포도도 얻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감람나무도 소출을 주지 못할 것입니다.
밭에서도 먹을 것을 구할 수 없으며 기근으로 살아갈 방법이 없습니다.
양도 소도 없으니 고기도 먹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절망적인 상황입니다. 

그런데 이어지는 하박국의 반응은 뜻밖입니다. 

하박국 3:18
나는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리로다.

뼈가 흔들릴 정도로 두렵습니다.
그런데 기쁘다니.
이것이 무슨 말일까요?
그는 하나님 때문에 기쁘다고 했습니다.
불같은 고난을 코앞에 두고 있습니다.
흉포한 바벨론 군대는 홍수처럼 유다를 휩쓸어버릴 것입니다.
기운을 차릴 열매 하나도 변변히 얻을 수 없는 참담한 환경이 닥칠 것입니다.
그런데, 이 재앙은 우연이 아니었습니다.
여호야김 왕의 정치적 무능 때문도, 갑자기 커져버린 바벨론 때문도 아니었습니다.
이 재앙은 하나님이 내리시는 심판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왜 자기 백성을 심판하십니까?
회복시키시기 위함입니다.
부모가 자녀를 벌하는 것은 더 좋은 인생이 되도록 교훈하기 위함인 것처럼, 하나님의 심판은 이스라엘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렇게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심판하신다면 하나님은 이 백성을 여전히 사랑하신다는 증거가 아니면 무엇이란 말입니까? 
이 사실을 깨닫고 나니 심판의 두려움 보다 함께하시는 하나님으로 인한 기쁨이 더 컸습니다.
심판과 고난을 다시 해석하니 기쁨을 얻게 되었습니다.
함께하시는 하나님이 너무 감사했습니다.
그래서 기쁨을 주체할 수 없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절망도 감사로 해석해내면 인생이 달라집니다.
올 해도 쉽지 않은 시간이었습니다.
팬데믹의 영향에서 우리는 아직도 자유롭지 않습니다.
경제적으로 어렵고 교회와 믿음 생활도 예전과 같지 않습니다.
지구촌 이곳저곳에서 참혹한 전쟁은 계속되고 있고 자연재해는 끊이지 않습니다.
모두가 살기 어렵다고 말합니다.
가슴이 서늘한 불안이 우리를 엄습하는 세월입니다.
그런데 한 가지를 스스로에게 물어봅시다.
나를 두렵게 했던 그 사건에 하나님이 계셨을까요?
내가 실패했을 때, 홀로 남겨졌을 때, 아무도 도와주지 않는 것 같았을 때, 내가 잃어버렸을 때, 내가 힘들어 탄식을 쏟아낼 때...하나님은? --- 내 곁에 계셨습니다.
그런데 왜 그런 일이 일어났느냐고, 왜 도와주시지 않았느냐고 묻고 싶으십니까?
다시 한 번 물어봅시다. 
내 인생에 일어나는 모든 일을 내가 아나요? - 모르는 게 더 많습니다.
이유도 해결의 방법도 우리는 잘 모릅니다. 나만 그런 일을 당했을까요? 아닙니다. 심지어 주님도 겪으셨습니다. 

십자가에 달리신 주님의 외침을 우리는 기억합니다. 

마태복음 27:46
제구시쯤에 예수께서 크게 소리질러 이르시되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시니 이는 곧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는 뜻이라

‘하나님. 왜 나를 버리십니까?’
왜 주님은 이렇게 외치셨을까요?
이것이 고단한 인생을 살아가는 우리의 질문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답을 하셨나요?
하박국의 질문에 그렇게 즉시, 분명히 답하시던 하나님이 예수님의 외침에는 침묵하십니다.
하나님은 종종 우리의 질문에도 침묵하곤 하십니다.
사실은 대답하지 않으신 것이 아니라 침묵으로 대답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질문에 하나님이 대답하지 않으셨다는 것이 하나님이 아무것도 하지 못하신다는 말입니까?
아닙니다.
하나님은 대답하지 않으셨지만 주님의 고난이 이루어야 할 구원을 완성하시고 계셨습니다. 
주님의 고난. 그 중심에 하나님이 계셨습니다.
우리가 경험했던 고난. 그 중심에도 하나님이 계셨습니다.
내가 잘 알지 못할지라도 하나님은 나를 위한 일을 이루고 계셨습니다. 우리가 경험했고 경험하는 고난은 바로 그런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고난에 대해 이렇게 해석을 하고나면 인생에 대한 태도가 달라질 수 있습니다.

Paul Brand는 세계적인 외과 의사이자 나병 전문가 입니다.
어린 시절 인도 선교사였던 부모를 따라 의사가 되어 인도에서 20년 나병환자를 치료했습니다.
미국 나병 연구소로 옮겨 30년을 나병을 연구하고 치료합니다.
나병, 한센씨병은 신경계에 침입한 박테리아로 감각을 잃어버리고 결국 신체의 부분이 절단되는 무서운 병입니다.

브랜드 박사는 어느 날 고단한 여행을 마치고 숙소에 돌아왔습니다. 그런데 발에 감각이 없었습니다. 바늘로 찔러도 아프지 않았습니다. 순간 두려움이 엄습했습니다. 수많은 나병환자를 돌보다 결국 나병에 걸린 것인가? 밤새 한 숨도 자지 못했습니다. 아침에 어떤 부분이 감각을 잃었는지를 알아보기 위해 바늘로 다시 발을 찔렀습니다. 그런데 극심한 아픔이 느껴졌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기쁠 수가 없었다. 그는 그 때의 경험으로 ‘고통이라는 선물’이라는 책을 씁니다. 고통이 선물이라는 사실을 안 것이지요. 

인생의 성숙은 대부분 예상하지 못하게 엄습한 아픔 때문에 이루어지지 않던가요?

아픔이 아니었으면 알지 못할 인생의 비밀들이 있습니다. 깨닫지 못하고 돌보지 못했을 많은 것을 우리는 아픔을 통해 알고 배웠습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내게 뭔가를 가르치시기 위해 고통을 사용하십니다. 내 괴로움이 목적이 아닙니다.  내 성숙이 목적입니다. 그렇다면 고통 속에서도 감사할 수 있습니다.

정호승 시인의 지푸라기
라는 시입니다.

나는 길가에 버려져 있는 게 아니다
먼지를 일으키며 바람 따라 떠도는 게 아니다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당신을 오직 기다릴 뿐이다
내일도 슬퍼하고 오늘도 슬퍼하는
인생은 언제 어디서나 다시 시작할 수 없다고
오늘이 인생의 마지막이라고
길바닥에 주저앉아 우는 당신이
지푸라기라도 잡고 다시 일어서길 기다릴 뿐이다
물과 바람과 맑은 햇살과
새소리가 섞인 진흙이 되어
허물어진 당신의 집을 다시 짓는
단단한 흙벽돌이 되길 바랄 뿐이다

아무 것도 아닌 것 같은 지푸라기에도 의미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내게 일어난 단 하나의 어떤 사건도 의미가 없을 수 없지 않겠습니까? 감사해서 뭘 얻느냐고요? 금과도 바꿀 수 없는 귀한 것을 얻는 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사람도, 돈도 잃어버릴 수 있습니다. 하지만 잃어버려서는 안 되는 것이 있습니다.

이것을 잃으면 아무리 돈을 많이 얻어도, 곁에 사람이 가득해도 불행하고 외로울 수밖에 없습니다.
성경은 그것을 이렇게 말합니다.

잠언 4:23
모든 지킬 만한 것 중에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 마음입니다. 그 마음을 생명의 근원이라고 했습니다.

어떻게 마음을 지킵니까?
바울은 우리를 이렇게 가르칩니다.

빌립보서 4:6-7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감사하는 자의 마음을 하나님이 지키십니다. 
‘절망을 감사로 해석해 내면 인생이 달라진다.’ 


08-10-2023(목)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거짓 스승(하박국 2:18)

새긴 우상은 그 새겨 만든 자에게 무엇이 유익하겠느냐 부어 만든 우상은 거짓 스승이라 만든 자가 이 말하지 못하는 우상을 의지하니 무엇이 유익하겠느냐.
Of what value is an idol, since a man has carved it? Or an image that teaches lies? For he who makes it trusts in his own creation; he makes idols that cannot speak.

거짓 스승(teaches lies, a teacher of falsehood, a teacher of lies)
NIV. teaches lies
NASB. a teacher of falsehood
KJV. a teacher of lies

우모레 솨케르(וּמֹורֶה שָּׁקֶר)

거짓(8267) 쉐케르(sheqer) שֶׁקֶר  

1. 예레미야 23:32.  2. 거짓말.   3. עֵד שֶׁקֶר
발음 / 쉐케르[ sheqer ]
어원 / 8266에서 유래
관련 성경 / [동] 거역하다(삼하 18:13).
[형] 거짓말하는(왕상 22:22, 대하 18:22), 당치 않은(왕하 9:12), 거짓된(시 109:2, 잠 31:30), 허무한(시 119:118, 잠 11:18, 렘 16:19), 속이는(잠 20:17, 21:6).
[부] 거짓으로(시 119:78).
[명] 악(렘 23:14, 거짓말(출 5:9, 시 63:11, 잠 13:5, 슥 13:3), 거짓(레 6:5, 시 119:67, 렘 51:17), 허사(삼상 25:21, 렘 3:23), 죄악(시 7:14), 위증자(시 27:12), 헛됨(시 33:17).
구약 성경 / 113회 사용


스승(3384) 야라(yârâh)  יָרָה 

1. 던지다.  2. 분사 יוֹרֶה : 사수.  3. 기초를 놓다
발음 / 야라[ yârâh ]
관련 성경 / 던지다(출 15:4, 욥 30:19), 뽑다(수 18:6), 쏘다(삼상 20:36, 잠 26:18), 놓다(욥 38:6), 활 쏘다(대하 35:23), 적시다(호 6:3), 가르치다(출 4:12,13, 잠 4:11), 교훈하다(왕하 12:2), 가리키다(출 15:25), 점치다(미 3:11), 윤택하다(잠 11:25), 알게 하다(잠 6:13).
[명] 선생(잠 5:13),스승(사 30:20, 합 2:18), 교훈(합 2:19, 욥 36:22), 활 쏘는 자(삼상 31:3, 대상 10:3).
구약 성경 / 81회 사용


문단 분해

2:1. 선지자의 대망.
2:2-4.  하나님의 응답으로써 주어진 계시.
2:5-19. 적의 멸망과 이를 노래하는 조롱의 시.
2:20. 하나님의 임재.

갈대아도 심판받을 것임 - 하박국 2장
 
하박국은 유다가 심판을 받아야 한다는 데 대해서는 이의가 없었으나 하필이면 왜 바벨론이냐 하는 것이 하박국의 질문이었습니다.
하박국이 제기한 질문은 2장에서 그 대답을 찾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반드시 악인을 심판하시므로 그의 의로움을 드러내실 것이라고 합니다.
그리하여 세상은 하나님의 영광을 인정하는 것이 가득하게 되고 온 천하는 그의 앞에서 잠잠해야 하며 의인은 하나님을 믿는 믿음으로 살게 될 것이라고 선포합니다.

하나님의 심판의 도구가 왜 하필이면 바벨론인가? 하는 하박국의 질문에 하나님은 바벨론 역시 죄로 인해 심판받게 되지만 그 가운데 유다도 심판당하나 의인은 믿음으로 구원을 얻게 된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제시합니다. 

범죄한 유다 백성들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을 예고한 후에(1장) 유다를 심판하기 위한 도구가 된 갈대아인들도 반드시 심판 받을 것이라고 예언합니다(2장).

특별히 2장에서는 "이신득의(以信得義)" 즉 "의인은 그 믿음으로 산다"는 신앙을 전하고 있습니다. 

의인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의

하나님께서 의인들에게 보여 주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의는 때가 되면 하나님의 영광이 온 세상에 가득하게 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악인들에 대하여 단호하신 하나님은 그러나 의인들에게는 한없는 자비와 긍휼을 베풀고 계십니다.
나아가 의인은 오직 하나님을 믿는 믿음으로 산다는 것을 보여 주고자 하셨습니다.
따라서 의인을 삼키려고 달려드는 악인들의 강포에 대해서 하나님은 결코 외면하지 않으실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악인의 세력은 의인을 압제하기에 충분합니다. 
아무리 의인들이라 할지라도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으면 악인과의 싸움에 승리할 수 없음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의인들에게 하나님의 정한 때는 반드시 존재하며 또한 그의 때는 속히 이를 것임을 강조하고자 하셨습니다.
그래서 의인들이 그의 때가 오기까지 인내하여 기다릴 것을 하나님은 바라고 원하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악인들이 득세하고 그 공포가 심하다 할지라도 그들의 득세는 오래가지 못할 것임을 알아야 한다.
비록 한시적인 것이긴 하지만 그들의 강포는 강력해서 의인들이 이길 수 없을 만큼 엄청난 시련이 올 때도 있다.
그러나 하박국 선지자가 본장을 통해 계시를 보았듯이 하나님은 그의 하늘 보좌에서 좌정하시고 세상을 다스리시며, 나아가 우상 숭배를 일삼거나 의인도 핍박하기에 열심이 있었던 저들에게 하나님은 단호한 심판을 내릴 것임을 나타내셨다.
이 사실은 의인들에겐 위로가 되며 힘이 된다. 그러므로 의인은 오로지 하나님을 믿는 믿음으로 사는 것이다.  

의인은 하나님을 믿는 믿음 안에서만 승리할 수 있다. 하나님을 떠나서는 결코 악에 대해 승리할 수 없으며 죄에 대해서 자유를 누릴 수 없다.
악인의 강포가 아무리 강력하고 드세다 할지라도 하나님은 그들 위에 군림하고 계신다.
그리고 때가 되면 그들에게 심판을 행하시며 책임을 물을 것이다.
그러나 죄에 대해서, 악인들의 핍박에 대해서 인내하고 끝까지 견딘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비하심과 긍휼하심과 사랑을 보여 주실 것이며 나아가 이 세상에 대해 영원하신 하나님의 통치권을 보여 주실 것이다. 

하박국 2:4
보라 그의 마음은 교만하며 그의 속에서 정직하지 못하니라 그러나 의인은 그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마음(5315)
נֶפֶשׁ 스트롱번호5315

1. 숨,  2. נֶפֶשׁ חַיָּה 생기,  3. 냄새
발음 / 네패쉬[ nephesh ]
어원 / 어미활용 נַפְשִׁי, 복수 נְפָשִׁים ףנְפָשׁוֹת, 겔 13:20], 5314에서 유래
관련 성경 / 생물(창1:20, 2:19, 9:16), 생명(창1:30, 출4:19, 민35:31), 사람(창12:5, 레7:25), 목숨(창12:13, 삼하1:9, 왕상20:42), 뜻(창23:8, 왕하9:15), 마음(창27:4, 출15:9, 레26:30), 혼(창35:18, 삼하11:11), 명(창46:15), 사정(출23:9), 죽은 자(레19:28), 몸(레21:1), 시체(레21:11, 민6:6, 합2:13), 주검(민5:2), 기력(민11:6), 명(名)(민31:35), 영혼(삿5:21, 욥10:1), 죽음(삿9:17), 심정(삼상1:15, 사58:10), 왕(삼상17:55), 중심(왕하4:27, 시131:2), 홀로(에4:13), 기력(욥6:11), 탐욕(시78:18, 사56:11),소원(잠11:23, 19:2), 음식을 탐하는 자(잠23:2), 식욕(전 6:7), 욕심(사 5:14), 성욕(렘 2:24), 생기(겔 37:9), 힘(암 2:14), 욕심(합 2:5)
구약 성경 / 753회 사용



교만(6075) 아팔( ʽâphal)  עָפַל 

1. 부풀어 오르다
2. 푸알형
3. 과장되다
발음 / 아팔[ ʽâphal ]
관련 성경  / 교만하다(합 2:4), 올라가다(민 14:44).
구약 성경 / 3회 사용


의인(6662) 차디크( tsaddîyq)  צַדִיק 

1. 의로운
2. 의로움을 지닌 사람.
3. 출애굽기 9:27
발음 / 차디크[ tsaddîyq ]
어원 / 6663에서 유래
관련 성경 / 의인(창 6:9, 시 1:5, 사 3:10), 의로움(창 7:1), 정의(창 18:25, 시 37:30, 합 1:4), 승리자(사 49:24).
[형] 의로운(창 20:4, 왕상 8:32, 시 116:5), 공의로운(신 4:8, 느 9:33, 슥 9:9), 옳은(잠 24:24, 사 41:26), 바른(잠 18:17).
구약 성경 / 206회 사용


믿음(530) 에무나(’ĕmûwnâh) אֱמוּנָה 

1. 확고함,  2. 안전,  3. 신뢰성
발음 / 에무나[ ’ĕmûwnâh ]
관련 성경 / 성실(시 37:3, 89:5, 렘 5:3), 진리(렘 5:1), 믿음(합 2:4), 성심(대하 31:12), 직임(대하 31:15), 진실(신 32:4, 대하 19:9, 시143:1, 렘 7:28), 신실(삼상 26:23), 직분(대상 9:22, 26).
[동] 진실하다(왕하 22:7, 시 33:4, 호 2:20), 내려오지 아니하다(출 17:12), 맡다(대상 9:31), 성실하다(시 36:5, 119:90, 사 25:1), 평안하다(사 33:6).
구약 성경 / 49회 사용


하박국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 믿음은 에무나 즉 성실과 진실과 착하고 충성입니다.

실제로 에무나(hn:Wma)의 뜻이 성실(誠實)이었기 때문에 하박국 2장 4절도 성실이라고 번역했어야 한다고 봅니다. 이 단어가 구약 성경에서 총 49회 사용되었지만 다른 어떤 곳에서도 믿음으로 번역하지 않았았고 거의 다 성실과 진실로 번역했습니다. 

 이렇게 원관념이 히브리어였고 히브리어가 다음에 헬라어로 번역되고 헬라어가 다시 라틴어로 번역되고 라틴어에서 영어나 독일어로 번역되고 그 다음에 일본어와 중국어로 번역되고 그 후에 한국말로 번역되면서 우리는 다른 모든 개념이 다 없어져 버렸고 오직 믿음으로 굳어 버린 것입니다.

"보라 그의 마음은 교만(驕慢)하며 그의 속에서 정직(正直)하지 못하니라
그러나 의인(義人)은 그 믿음(hn:Wma)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이 말씀도 잘 보시기 바랍니다.

하박국이 이러한 말씀을 듣게 된 사연도 알아야 합니다.
주전 606년 경에 바벨론의 군대가 예루살렘으로 올라와서 예루살렘에 사는 유대인들을 잡아다 족치고 죽이고 하는 모습을 보면서 하박국의 마음에 의심의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역사를 섭리하신다면 이러한 일은 일어나지 않아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눈이 정결하시기 때문에 악인들이 의인들을 잡다다 죽이고 하는 것을 차마 보시지 못하실 터인에 어찌하여 악인들의 악에 대하여 방관만 하시고 계시는지 따지고 물었습니다.

이 때 하나님의 대답은,
"보라 그 바벨론 사람들은 그 마음은 교만(驕慢)하며 그의 속에서 정직(正直)하지 못해! 그래서 그들의 종말로 속히 이르게 될 것이야 비록 더디게 느껴질지 모르지만 기다려 봐라! 정녕 이루어지게 될 것이다." 바벨론 왕이 망하게 되는 이유가 그의 마음이 교만하고 정직하지 못해서 망하는 것이라면 만약 그 당시 어떤 사람이 의인이 되려면 교만하지 않고 겸손해야 하고 또 정직하고 성실해야만 의인으로 인정받을 수 있었을 것입니다.

 아담의 자손들 중에서 죄가 아주 없어서 의인으로 인정받을 수 있는 사람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다 같이 원죄가 있다고 하지만 그 중에 교만하고 정직하지 않고 성실하지 않고 착하지 않고 충성되지 않은 사람이 있는가 하면 반대로 겸손하고 정직하고 성실하고 착하고 충성된 사람들이 있다는 것은 아무도 부인하지 못할 것입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믿음이 바로 그러한 믿음 즉 죄도 있고 허물도 있고 실수도 있고 약점도 있는 사람이지만 그 사람이 근본적으로 착하고 충성되고 정직하고 성실하고 신실하고 진실한 사람이 있다면 하나님께서는 그러한 사람의 그 성실(에무나)를 그의 의로 여기신다는 것입니다.

열왕기 상서 3장 6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솔로몬이 가로되 주(主)의 종 내 아비 다윗이 성실(誠實)과 공의(公義)와 정직(正直)한 
마음으로 주와 함께 주(主)의 앞에서 행(行)하므로 주(主)께서 저에게 큰 은혜(恩惠)를 
베푸셨고 주(主)께서 또 저를 위(爲)하여 이 큰 은혜(恩惠)를 예비(豫備)하시고 오늘날과 
같이 저의 위에 앉을 아들을 저에게 주셨나이다

하박국 선지자의 질문에 대하여 하나님의 대답은, 
"네가 염려하는 의인들(예루살렘 사람들 중에 의인)은 그 믿음(hn:Wma)으로 말미암아 살게 된단다." 이렇게 대답하신 것입니다. 이때 믿음이란 예수님을 믿는 믿음이 아니고 예루살렘에 살고 있는 의인들 중에 정말 성실하고 정직하고 진실한 사람이 있다면 그 성실하고 진실하고 정직한 믿음(에무나)로 말미암아 살게 될 것이니 네가 염려하지 않아도 내가 오히려 너 보다 더 아끼고 있단다! 하시는 말씀이었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믿음이란 말도 좀더 심도 있게 살펴서 오해가 없어야 할 것입니다.
더 엄밀하게 말하자면 믿음이란 말이 추상명사로 혹은 추상동사로 된 단어지만 본래는 형용사 즉 성실한, 진실한, 정직한 등의 용어였습니다. 따라서 행위도 중요하지만 행위 이전에 존재의 성품이 더 중요하다 할 것입니다.

 아래 그림을 잘 보시면 에무나(히브리어) 피스티스(헬라어)의 의미가 본래 함의하는 의미를 표시해 본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의 최후의 심판에서 판결문에는 행위도 행위지만 착하고 충성된 종 즉 그 사람 그 존재의 성품과 함께 충성된 행위를 두고 심판하신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믿음으로 살리라

첫째, 성실(시편 37:3, 89:5, 예레미야 5:3)

시편 37:3
여호와를 의뢰하여 선을 행하라 땅에 거하여 그의 성실로 식물을 삼을지어다.
Trust in the LORD and do good; dwell in the land and enjoy safe pasture.

시편 89:5
여호와여 주의 기사를 하늘이 찬양할 것이요 주의 성실도 거룩한 자의 회중에서 찬양하리이다.
The heavens praise your wonders, O LORD, your faithfulness too, in the assembly of the holy ones.

예레미야 5:3

여호와여 주의 눈이 성실을 돌아보지 아니하시나이까 주께서 그들을 치셨을찌라도 그들이 아픈줄을 알지 못하며 그들을 거의 멸하셨을찌라도 그들이 징계를 받지 아니하고 그 얼굴을 반석보다 굳게 하여 돌아오기를 싫어하므로.
O LORD, do not your eyes look for truth? You struck them, but they felt no pain; you crushed them, but they refused correction. They made their faces harder than stone and refused to repent.


성실(誠實)이 재능을 이긴다

반짝이는 재능도 꾸준한 성실 앞에서는 무릎을 꿇는다.
인생에 있어서 바른 방향은 중요하다.
방향이 올바르면 성실하게 가기만 하면 승리한다.
그러나 방향은 맞는데 당장 열매가 없으면 우리는 낙심하곤 한다.
성경은 “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지니 피곤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갈 6:9).
낙심의 해로움은 무엇인가?
중단하게 만든다는 것이다.
성실은 중단 없이 계속 가게 만든다.

다윗은 성실성 때문에 하나님께 크게 쓰임 받았다.

사무엘이 왕을 택할 때 첫째부터 일곱째아들은 모두 집에 있었다. 유독 막내 다윗만이 들에서 양을 지키고 있었다. 다윗은 현장을 지키는 성실한 사람이었다. 사무엘상 17장을 보면 다윗이 골리앗을 물리치는 장면이 나온다. 아버지는 전쟁터에 있는 세 아들에게 도시락을 전달하기 위해 다윗을 보낸다. 이 심부름이 있었기 때문에 다윗은 하나님을 모욕하는 골리앗을 만날 수 있었다.

그럼 왜 이새는 다윗에게 심부름을 시켰는가. 아버지 이새가 보건대 막내 다윗이 가장 성실했기 때문일 것이다. 일을 맡길 때는 성실성이 가장 중요한 판단 기준이 된다. 다윗의 성실성이 심부름을 가능하게 했다. 그 심부름이 골리앗을 물리치는 승리를 가져다주었다. 성실성은 항상 기회의 문을 열어주는 힘이 되곤 한다. 시편 78편을 보면 하나님이 다윗을 부른 이유가 그의 성실성에 있었음을 보여준다. “또 그 종 다윗을 택하시되 양의 우리에서 취하시며 젖 양을 지키는 중에서 저희를 이끄사 그 백성인 야곱 그 기업인 이스라엘을 기르게 하셨더니 이에 저가 그 마음의 성실함으로 기르고 그 손의 공교함으로 지도하였도다”(시 78:70∼72) 성실하면 기회가 온다. 성실하면 쓰임 받는다.

요셉도 성실한 사람이었다.

역시 아버지의 심부름을 하게 된다. 원래 형들은 세겜에 있었다. 그런데 세겜은 기분 나쁜 곳이다. 과거에 하몰의 일족을 몰살시켰던 장소다. 언제 보복의 칼날이 날아올지 모르는 곳이었다. 그래서 도단으로 자리를 옮겼다. 요셉이 도착했을 때 형들은 세겜에 없었다. 요셉은 성실하게 수소문해서 형들이 도단으로 간 것을 알았다. 요셉은 성실하게 물어서 형들이 있는 도단으로 가게 된다. 도단에 도착하자 형들은 ‘꿈꾸는 자가 오는도다’라고 외치며 그를 노예로 팔아버린다. 요셉에게 성실성이 없었다면 그는 형들에 의해 노예로 팔리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 성실성을 귀중히 보시고 장차 애굽의 총리로 쓰임 받을 준비를 시키신다. 하나님께 쓰임 받는 사람은 항상 성실한 사람이었다. 성실은 길을 열고 하나님의 은총을 받으며 승리로 이끈다. 재능은 부족해도 좋다. 그러나 성실성만은 놓쳐서는 안될 것이다.

로마서 12:8
혹 권위하는 자면 권위하는 일로, 구제하는 자는 성실함으로, 다스리는 자는 부지런함으로, 긍휼을 베푸는 자는 즐거움으로 할 것이니라.


세계적인 교육학자인 존 듀이 교수는 “중요한 인물이 되고 싶다는 욕망은 인간의 가장 뿌리 깊은 욕구”라고 말했습니다.

여러분은 무엇이 성공이라고 생각하십니까?

몹시 가난하지만 신앙을 지키며 말씀대로 살던 소년이 있었습니다.
성실과 신념이 성공을 가져온다고 믿으며 가난과 싸워 나갔습니다.
그 결과 30세에 점심을 배달하는 ‘모빌 런치 서비스회사’를 설립하게 되었으며 이어 세계적인 도너츠 상표를 개발하였습니다.
던킨도너츠(Dunkin’ Donuts) 창업주 윌리엄 로젠버그(William Rosenberg)입니다.
72세 생일축하 파티에서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가난과 교육 부재의 환경에서 자랐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늘 제 짐을 맡아 주셨습니다.
저는 오로지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며 살았고, 하나님께서는 저를 형통케 하셨습니다.
성공은 지식에 있지 않고 태도에 있다고 믿습니다.”

로젠버그는 어떤 환경이나 여건에서도 말씀을 지키는 적극적인 태도로 살았기에 형통함을 얻었던 것입니다.

사람들은 성공을 잡으려고 온 힘을 다하여 달려갑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성공을 잡았다고 여기는 순간 그것이 진정한 행복을 가져다주지 못하는 것임을 발견합니다. 그러나 그때는 이미 늦습니다. 벌써 인생의 대부분의 시간을 낭비하고 난 후이기 때문입니다. 흘러가 버린 시간을 되돌릴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성공학의 교과서
성공한 사람들의 일곱 가지 습관
스티븐 코비

2011년 파산 신청을 했습니다.
그리고 이듬해 병을 얻어 생을 마감했습니다.
그가 법원에 파산신청을 하자 기자들은 “당신은 성공학의 전문가인데 왜 파산하게 되었느냐?”고 질문했습니다.

기자의 질문에 코비는 “나는 내가 쓴 성공한 사람들의 습관처럼 살지 않았기 때문에 실패했다”고 답했습니다.
성공학은 정답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는 실예라고 하겠습니다.
돈 따라, 명예 따라 가지 말고 하나님의 방법대로 살아 성공적인 인생을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둘째, 진리를 따르는 것(예레미야 5:1)

너희는 예루살렘 거리로 빨리 왕래하며 그 넓은 거리에서 찾아보고 알라 너희가 만일 공의를 행하며 진리를 구하는 자를 한 사람이라도 찾으면 내가 이 성을 사하리라.

단 한 사람을 찾는다.
그 사람은 진리를 따라가는 사람이라고 합니다.

설교자의 함정: 명사 예화

설교의 예화에 비교적 자주 등장하는 세상 명사들을 몇 명만 꼽아 보자. 

설교자들은 이들을 대체로 모범적이고 훌륭한 크리스천으로 내세우고 있음이 거의 기본 전제와도 같다. 

조지 워싱턴 : 미국 연방 초대 대통령. 정직하고 경건한 '기독교인'으로 널리 알려져 왔다. 추수감사절을 최초로 국가적 행사로 선언하여 지키기도 했다. 특히 밸리 포지 전투 중 추운 날씨 속에 무릎을 꿇고 기도하다가 '환상의 계시'를 받았다는 일화로 유명하다.   

[ 실체: 그는 각국 메이슨들이 열렬히 존숭해온 대표적인 고위급 프리메이슨 명사()였다. 종교적으로는 참 크리스천이 아닌 이신교도(deist)였다. 그는 기독교와 동시에 프리메이슨리에 늘 호의적이었고 적극 참여했다. 연방의사당 정초식 때도 메이슨 앞치마 등 예복 정장을 갖춰 입고 손수 메이슨 예식을 거행했다. 수많은 관련 초상화와 그림들이 남아 있다. 

수도 워싱턴DC는 메이슨인 그를 기념하여 만든 도시로 메이슨 상징물을 조합하여 엮어 넣었고(음모론이 아니다!), 한 가운데 세워진 워싱턴 기념탑도 프리메이슨들이 신성시하는 (남근을 상징하는) 오벨리스크이다. 또한 별도의 조지 워싱턴 메이슨 기념탑도 따로 있으며, 워싱턴을 가히 건국신으로 신격화하여 전체 건국 스토리를 신화화 하다시피 한 곳이다. 오늘날도 워싱턴의 메이슨 앞치마 등 유물이 남아 있다. ] 


에이브러햄 링컨 : 그 역시 하나의 "경건한 기독교인"으로서 암살로 마치 순교나 한 듯 떠받들려 왔다. 남북전쟁 후 노예해방 선언을 한 것으로 유명하며, 매년 11월 셋째 목요일을 추수감사절로 제정해 선포하기도 했다.  하지만 평생에 거듭난 참 크리스천이었던 흔적이 전혀 없다. 어릴 적 아버지 때문에 잠시 형식적인 침례교인이었을 뿐.   

[ 실체 : 링컨은 암살로 죽기 얼마 전, 프리메이슨 가입신청을 한 기록이 현재도 남아 있다. 그 역시 일종의 이신교도였다. ]


더글러스 매카터('맥아더') : 인천 상륙 작전의 영웅인 유엔군 사령관. 특히 '매카터의 (아들을 위한) 기도'로 유명하다. 

[ 실체 : 프리메이슨 SR(스카티쉬 라잍)계 32단을 거쳐 최고위인 33단에까지 오른 사람이다. 바꿔 말하면 그의 '기도'는 성경의 하나님께 드린 올바른 기도가 아니었다. ]


존 워너메이커 : 미국 백화점 왕. 필라델피아 YMCA 총무, 연방 우정국장 등 역임. "경건한 장로교인"으로서 베터니 주일학교(BSS)를 창설하기도 했다. 

[ 실체 : 역시 고위급 프리메이슨이었다. 1898년 62세로 윌리엄 켈리의 호의로 즉석 메이슨이 됐다가 1900년 펜실베이니어 젠킨타운 프렌드슆 라지 제400호 정식 단원이 되었다. 훗날 상임 워든(메이슨 신전의 직위), 이듬해 워시풀 매스터가 됐다. 훗날 SR 33단에 오름. 그밖에도 여러 메이슨 직위를 거쳤고, 자기 재산을 들여 1만 여 권의 메이슨 관련 도서와 서신, 7,400여 점의 예술품 등을 수집/기증한 적극적인 프리메이슨이었다. 그의 워너메이커 백화점에도 메이슨적인 요소가 많이 나타나 있었다. 펜주 그랜드라지는 1993년 좐 워너메이커 메이슨 박애주의 메달(JWMHM)을 제정했다. 이 메달은 비 메이슨으로 메이슨 정신을 지지하는 인사들에게 주어진다.] 


루 월리스 : 남북전쟁 당시 북군의 장성(준장). 영화 '벤 허'의 원작인 소설 '벤 허'의 작가. 성경을 거부하여 전국 도서실을 두루 다니며 반대의 글을 쓰려다 오히려 성경을 지지하게 됐다는 일화가 있다. 

[ 실체 : 그는 역사적으로 입증된 프리메이슨이었다! 성경을 이용한 셈이다.]


좐 D. 롸커펠러(록펠러) : 석유재벌, 문화자선사업가. 현재의 데이비드 롸커펠러까지 롸커펠러 가문 대대로 롸커펠러 재단 등을 운영해 왔다. 유대계 '크리스천'으로 다양한 자선기부활동으로 알려져 있다. 어머니의 나름 십계명과 십일조 생활로 이름이 높다. 뉴욬시 맨해튼에 있는 리버사이드교회에 어머니의 이름으로 세계 최대급 카리용(종 세트)을 기증하기도 했다. 그는 또 부흥강사 무디의 말년, 무디 재단에 거액의 기부를 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 실체 : 롸커펠러 후손들은 유렆 중심의 롵촤일드 가문과 쌍벽을 이루면서, 일루미나티 등 다양한 비밀집단의 거두로 지내온, 대표적인 문제명사 집안이다. 유엔 건물의 터를 기증하는 등 세계 NWO 운동에 기여해 왔다. 롸커펠러가 주동이 되어 미국 언론을 장악해 오다 비밀집단들을 양성화해 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


할랜드 데이비드 샌더즈(영예 대령) : '켄터키 프라이드 치킨' 창업주. 자선사업가. 안식일교 가정 출신. "경건한 크리스천"으로 알려져 있으며, 죽기 전 미하나님의성회(AG)에 유산 일부를 남겼다. 

실체 : 프리메이슨(입증됨) 33단. 묘비에 메이슨리/슈라이너/SR 로고가 새겨져 있다( > )  

노먼 빈슨트 필 : 미국 개혁교단(RCA)에 속한 뉴욬시 칼리지에잍 마블즈 교회의 목회자로 기독교적(?)이고도 세속적, 뉴에이지적 매거진인 '가이드포스트'를 발행했다(현재도 발행됨). 베스트셀러인 저서 '적극적 사고 방식의 힘'으로 20세기 긍정철학의 거두가 되었다. 그의 뉴에이지적인 긍정철학은 롸벑 슐러, 조용기, 김선도, 조울 오스틴 등 수많은 지도자들에게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 실체 : 그는 프리메이슨 거물급 인사로, SR 33단에다 또 다른 비밀단체 회원인 '슈라이너'였으며, 심지어 메이슨 신전의 대표적인 그랜드 채플린이기도 했다. ]


지미 카터(본명: 제임즈 얼 카터 2세) : 미국 제 39대 대통령. 특히 평생 주일학교 교사를 해 왔고 집 지어주기 등의 '선행'으로 알려져 있다. 또 평화사절 겸 문제해결사로 자임해온 인사이다. 

[ 실체 : 진보적인 사회주의자. 비밀단체의 일종인 '3변위원회'(TC) 창설멤버의 하나로 데이비드 롸커펠러에게 초청받았다. 역시 비밀단체인 '빌더버그' 그룹의 지원을 받아왔고, 해외관계위원회(CFR)의 위원이었으며, (극비의 숲 속에서 각국 저명인사들이 모여 부엉이신에게 '걱정' 제물을 살라바치는) '보히미언클럽(BC)'의 입증된 회원이다. 동성애 적극 지지자로, 동성혼까지 옹호하면서 보수적인 남침례회(SBC)를 탈퇴했다. 이런 사람은 성경에 비춰볼 때 엉터리/거짓 크리스천이며 그의 이른 바 선행도 성경적으로는 무의미한 쇼에 불과하다. 사랑은 오직 진리와 함께 기뻐할 따름이기 때문이다! ]


'성화'를 보고 "거듭난" 친첸도르프

성도 개인의 삶에서 거듭남은 가장 중요한 사건이다. 그 순간 단순한 교인으로부터 신자로서의 삶이 새로 시작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한 교인의 성경대로 거듭남의 여부가 확실치 않다면, 그의 삶이라면 몰라도 신앙에 대하여는 더 깊이 논할 수가 없다. 별 의미가 없어서이다. 모든 신자가 마찬가지다. 이렇기에 한 사람의 신앙을 논하려면, 그의 참된 거듭남 여부를 먼저 관찰해야 바른 수순일 것이다. 

교회 역사상 명사의 한 명이었던 모라비아 교회 최고의 지도자, 친첸도르프(기타 표기 : 진젠도르프, 진젠돌프)의 거듭남은 분명하지가 않다. 과연 그는 성경대로 말씀 진리와 성령의 권능으로 거듭났을까? 마침, 친첸도르프의 거듭남인 듯이 매우 중요하게 다루어지는 한 사건이 있다. 그것은 한 중세 '성화(聖畵)'와의 조우였다. 이 사건을 함께 깊이 검토해 보도록 한다.

지난 2009년 좐 파이퍼 목사는 목회자 설교 사이트, sermonaudio.com에 올린 '하나님 자신의 피값으로'(At the Price of God's Own Blood)라는 제목의 오디오 파일1에서 친첸도르프에 관한 언질로 화두를 열면서, 친첸도르프가 여행 중 뒤셀도르프에서 이탈리아 화가 도메니코 페티(Domenico Feti,2 1589-1623)의 Ecce Homo('에케 호모')3라는 그림을 본 사건을 설명했다. 그 그림의 맨 아래에는 "나는 너를 위해 이것을 하였다. 너는 나를 위해 무엇을 해 왔느냐?"라는 라틴어 문구가 들어있었다. 파이퍼는 그 사건이 친첸도르프의 삶을 "바꿔 놓았다"면서, 그 때부터 친첸도르프는 자신을 자기 것으로 볼 수 없었고, 자신이 누구의 것인지, 자신을 얻기 위해 어떤 대가가 필요했는지, 무엇을 위해 크리스토(그리스도)님께서 친첸도르프를 값을 치르고 사셔야 했는지를 자문하면서 온전히 그 분께 헌신을 했다고 주장했다.

사실 파이퍼는 친첸도르프 예찬론자의 한 명인 문제 명사이다. 

그런가 하면, 종교미술 비평 사이트인 '이코니아'의 블로거, 메나헴 웨커는 페티의 이 그림이 비슷하거나 동일한 주제를 다룬 티티안, 틴토레토, 메믈링, 렘브란트, 뒤러, 보쉬 등의 그림보다 예술적으로 "더 낫지 못한 것 같다"고 말하면서도, 이 작품의 "종교적 유용성에 관해 왈가왈부하기 어렵다"고 말한 바 있다. 

자, 그런데 과연 성경 말씀도 아닌 페티의 미술 작품이 교인의 초자연적이고 영적인 사건인 거듭남을 일으킬 정도로 거룩하고 성령의 권능이 넘치는 것이었을까? 그것이 친첸도르프는 물론 파이퍼의 믿음인 것 같기에 하는 소리다. 만약 한 미술품이 그런 영적인 파워를 지녔다면, 그것을 그린 화가 역시 영적으로 거룩하고 탁월한 신자로서 성령의 영감을 받아 대언자나 전도자 같은 역할을 한 사람이었다고 봐야 마땅할 것이다. 그렇지 않겠는가? 페티의 이 그림이 친첸도르프를 거듭나게 해 주었다기 때문이다. 아니면 친첸도르프가 이 그림을 보고 있는 순간, 그림 속의 '이 사람'-크리스토가 마치 살아있는 듯 튀어나와서 친첸도르프의 영에 접근해 강력한 도전을 줌으로써 그로 하여금 헌신하게 만들었다고 봐야 하든지. 

과연 하나님이 한 미술 작품 그것도 중세의 '성화'를 통해 그런 역사를 하시는가? 이것은 매우 심각한 물음이다. 그림이나 영화, 음악 등의 시청각적 매체를 통하여 거듭났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꽤 많기도 하다. 

거듭나게 해 주는 대작의 힘?

친첸도르프는 이른 바 '봔더야르'(Wanderjahr)4 때, 젊은 귀족들의 '통과의례' 격이던 그랜드 투어를 한 지 약 1주 째인 1719년 5월 20일, 뒤셀도르프의 한 미술관에 들렀다가 이 그림을 처음 보았다. 그랜드 투어 중 5번째로 방문한 미술관이었다. 중세에 발달한 명 화가의 그림을 전시한 당대의 미술관이나 화랑은 귀족들의 문화 사교 중심지의 하나였다. 문지기가 깊숙이 절을 하자 친첸도르프는 고개를 끄덕였다. 당시 그는 자신의 새 가정교사 리더러 및 이복형 프레데맄과 함께였다. 벽마다 둘러 보며 딴 그림들은 여타 미술관과 별 다름없다고 느끼던 그는 문득 이 작품 앞에 멈춰서서 유다른 인상과 감흥을 느끼며 묵묵히 바라보다가, 심오한 감동과 함께 위 문구의 말이 마치 크리스토님 자신이 그의 심정에게 한 말로 들리는 듯한 "거의 신비적인" 체험을 한 것으로 추정된다. 

일부 전기작가들에 따르면, 그 날 그는 속으로 "(예수님을 위해) 뭔가를 더 해야겠다"고 결심 속에 한가로운 여행 따위로 시간을 보내선 안 되겠다고 생각했다고 한다. 프레데맄이 다가와 "나머지도 보지 않을래?"라고 물으며 "넌 여기서 15분동안 황홀경에 빠져 있어"라고 일러 주자 친첸도르프는 "그래야겠지"하고 비로소 발걸음을 옮겼다. 그래서 친첸도르프는 그 날로 크리스토님께 자신의 삶을 바치기로 서원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깊은 감동을 받은 것과 초자연적인 거듭남과는 전혀 다른 것이다. 조지 W. 부쉬가 빌리 그래엄의 교훈을 받아서, 그래엄을 통해 술을 끊게 되고 예수를 "가장 위대한 철학자"로 새롭게 보게 됐기에 결국 그래엄을 통해 "거듭났다"는 식의 '나름 체험'을 성경이 말하는 참 거듭남과 혼동해서는 안 된다.  

이 스토리에는 몇몇 버전들이 있다. 페티의 그림 자체가 '에케 호모'를 비롯해 작품마다 다양한 버전들이 있어, 당초 친첸도르프가 감상한 실제 그림이 어떤 것이었는지도 확실치 않았다. 예를 들어 피렌체의 갈레리아 데글리 우피지에는 동일한 화가의, 동일한 제목의 딴 그림이 있다. 그러나 친첸도르프가 본 작품은 현재 뮌헨의 바이예르쉐 슈타츠무제움(바바리아 주립미술관)에 있는 것(윗 사진)이라는 설이 최종적으로 유력하다.
이 작품의 맨 아래 붉은 난간 부분에, 전술한 문구가 다음과 같이 라틴어로 적혀 있기 때문이다. 


   Ego pro te haec passus sum (에고 프로 테 해크 파수스 숨)

   Tu vero quid fecisti pro me (투 베로 퀴드 풰키스티 프로 메)


이 그림을 유심히 보면, 우선 대다수의 중세 성화처럼 역시 백인에 가까운 귀족적인 면모와 차림새의 '예수'가 가시관을 썼는데도 핏방울은 모두 얼굴 정면을 비켜 가고 있다. 되도록 환한 얼굴을 보이기 위해서일 것이다. 슬프고 비참하기 짝이 없는 얼굴이기보다 온화하고 힘 없는 표정이다. 손가락은 비참한 정황에 비해 너무나 섬세한 포즈를 취하고 있다. 거의 여성적이기까지 하다. 비록 수염이 나긴 했지만, 이 인물의 전체 분위기가 남성적인 듯 하면서도 여성적이다. 


해당 시간의 정황과 과정을 묘사한 성경의 수난 내레이션과는 거리가 멀어도 한참 멀다. 성경의 예수님이 가시관을 쓰신 시각은 필라투스(빌라도) 총독의 프레토리움5에서 이미 채찍 형벌을 받고 난 뒤였다. 사형인 십자가형의 도입 격인 채찍 형은 널리 알려진 대로, 긴 가죽 조각 끝에 방울 모양의 납 덩이 등 금속 조각과 뼈/생선가시 등이 달려 있는 플라겔룸(flagellum)으로 병사가 반복해서 맹타하면 죄수의 살점이 쩍쩍 묻어나면서 등살 등이 너덜너덜해지도록 갈기갈기 찢기다시피 하는 극형이었다. 때로는 죄수의 등뼈가 드러나기까지 하면서 심한 출혈과 탈진으로 집행 도중 또는 집행 후 사망하는 경우도 있었다. 여죄수의 경우도 타격 회수만 남성보다 10회 정도 더 적었을 뿐 대동소이했다. 

그러므로 주님이 이 극형을 견뎌낸 것은 다년간 목수 일로 다져진 신체였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무거운 십자가를 지고 행진하는 동안 이내 쓰러지셨다.  


기원전 195-123년에 집필된 '렉스 포르키아'와 '렉스 셈프로니아' 등에 따르면, 로마 제국은 이런 채찍 형을 비 시민 사형수에 해당하는 형벌로 유보해 두고 있었다. 아우구스투스 황제 때의 로마 서정시인, 호라티우스6가 이 '공포의 채찍'에 관하여 언급한 바에 따르면, 최소 2명에서 6명까지의 집행자(lictor/맄토르라고 불렸다)는 죄수의 벌거벗은 몸을 키가 낮은 기둥에 엎드리게 하거나 세운 기둥에 똑 바로 묶어 둔 채, 맨 어깨부터 발바닥까지 온몸을 교대로 채찍질했다. 때로는 몸을 뒤집어 놓고 가슴을 치기도 했는데, 물론 그만큼 치명성이 가중되었다. 채찍의 타격 회수는 맄토르 자신들이 결정했다. 

그러므로 크리스토님이 채찍형을 받은 뒤의 피투성이 형상은 가히 상상을 초월한 모습이었을 것이다. 적어도 페티의 그림 속의 이런 모습은 아니었다. 그렇다고 우리는 멜 깁슨 식의 '리얼' 기법을 통한 참혹한 묘사를 구태여 필요로 하지 않는다.7 공상도 상상도 아닌 그냥 생각과 묵상만으로도 충분하기 때문이다. 

아무튼 친첸도르프는 이 비현실적인 '예수'의 모습에 "거듭날" 정도로 크게 감동 받은 모양이다. 

그런데 정작 페티의 '에케 호모'속 '예수'의 왼손 손가락들은 무슨 상징에 가까운 수상쩍은 '포즈'를 하고 있으며, 목에는 두 손목에 연결된 밧줄이 늘어져 그 끝은 난간 한 가운데 마치 교수형에 쓰이는 올가미8의 작은 모형처럼 의미심장하게 늘어져 있다. 왜 하필 올가미인가? 올가미는 흔히 비밀집단 가입의식 때의 맹약에 쓰이는, 널리 알려진 중요한 오컬트 상징물의 하나이다9. 페티는 혹시 당대의 수많은 화가/조각가/건축가 등 전문인들처럼, 메이슨리와 유사한 공인/장인들의 비밀단체에 가입 또는 개입해 있던 것일까? 아니면 오컬트 지식을 갖고 있었던 것일까? 그림 속 '예수'를 통해 비밀집단을 간접홍보하려던 것은 아닐까? 이 '크리스토'가 그림 감상자에게 묻는 은밀한 물음은 "그대 역시 맹약의 올가미를 목에 걸칠 의사는 없는가?"라는 것일까?

만약 그렇다면, 친첸도르프가 받은 감동과 그의 이 '거듭남'과 '헌신'이란 것은 어처구니 없는 것일 수 있다. 필시 당대의 다양한 오컬트와 비밀집단에 대한 선지식을 갖고 '겨자씨회'라는 문제집단을 몸소 만들다시피 한 그가 이 오컬트적(?) 그림의 '암호'를 발견하고 반가워(?), 화가와 서로 이심전심으로 통했던 것인지도 모른다. 그 깊은 속뜻을 누가 알랴.

"너도 나처럼 채찍형을..."?

이 문구의 물음에 그런 암시적 의미가 전혀 담겨있지 않고 순수하다면, 아직 십자가 형을 받기도 전인 그림 속의 '예수'가 감상자에게 질문/요구하는 것은 자신과 같은 채찍 형에 준한 벌을 자진해서 받으라는 뜻일까? 구태여 이렇게 묻는 이유는, 실제로 중세의 수많은 천주교인들이 율법적인 금욕이나 모종의 계율을 위하여 자신을 채찍질한 역사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런 '자기 채찍 형벌'은 전혀 성경적인 근거가 없음은 물론, 오히려 이교적인 근거가 있다! 

고대 로마의 루페르칼리아(Lupercalia) 축제기간인 2월 13-15일에 악령을 내쫓고 도시를 정화하여 다산과 건강을 증진하기 위해 희생 제물인 동물(februa)10의 엉덩이(hide)에서 벗겨낸 가죽끈으로 채찍을 만들어 주위 사람들을 치고 다녔다. 여성과 소녀들은 장사진을 치고 늘어서서 이 가죽채찍을 맞았는데, 불임 방지, 다산 촉진, 산통 절감을 위해서였단다. 적어도 낙태를 위해 채찍을 맞지는 않은 모양이다. 로마 때의 사가, 플루타르크는 이 축제를 이렇게 묘사했다:  

   "루페르칼리아는 많은 사람이 관련 글을 써온 대로, 고대 목자들이 즐기곤 하던 절기로, 아르카디아의 뤼케아(Lycaea)와도 모종의 연계가 있다. 이 시즌에 수많은 귀족 청년들과 시민 청소년들이 벌거벗고 시내를 두루 누비는가 하면, 스포츠와 웃음을 터뜨리며 털이 달린 가죽끈으로 만나는 사람마다 후려치곤 한다. 귀족 여성들도 일부러 그 앞에 나서서 어린이들처럼 손을 내밀어 일부로 채찍을 맞곤 한다. 임신과 출산을 쉽게 하고, 불임을 다산으로 바꾸기 위해서이다."

호라티우스도 그의 서시 'Ode III'에서 루페르칼리아를 묘사한 바 있다. 사실 '늑대 축제'라는 뜻인 루페르칼리아는 로마의 건국자로 알려진, 암늑대 '루파'의 젖을 먹고 자랐다는 고아 형제, 로물루스와 레무스의 전설과도 연계돼 있다. "지난 계절을 속죄하고 새 봄을 정화하기 위한" 이 축제는 전통적인 건국 지점인 로마 중앙 언덕, 팔란티네 위의 루페르칼 동굴 인근에서 관련 행사가 치러지곤 했다. 기원전 44년 기록만 해도 축제가 지속되다가 동굴이 회복되기 어렵게 파손되었다가 아우구스투스 때에 와서야 복원된 뒤 축제가 재개됐다. 지난 2007년 아우구스투스 궁의 유적지 지하 15m 지점에서 발굴된 동굴이 바로 이것이었다는 학설이 있다. 

축제는 루페르키(Luperci)11에 의해 진행됐는데, 이들은 반신반수의 음란한 목신(牧神), 파우누스(Faunus, 그리스의 Pan. 참조 그림 링크 >)의 사케르도테스(사제)이기도 하다. 루페르키들은 퀸크틸리아12 족 출신의 '퀸크틸리아니'13와 파비아 출신의 '파비아니' 등 두 그룹으로 나눠져 있었고, 이 그뤂 위에 감독관14이 있었다가, 기원전 44년, 율리우스 카이사르15를 기리는 제3의 그뤂인 '율리'가 추가되었고, 이 세 그뤂 위에 최초로 감독관이 된 사람이 바로 마르쿠스 안토니우스였다. 그는 축제기간중 카이사르에게 관을 헌정했는데, 카이사르가 조만간 왕이 되리라는 표징으로 해석되었다.16 루페르키는 축제 때 맨 몸에다 옷 아닌 염소가죽만 걸치고 진행했고, 황제시대엔 모두 말을 타고 있었다.  

이 축제는 루페르키 또는 유피테르(주피터)신의 사제들인 '플라멘 디알리스'가 늑대 신에게 숫염소 두 마리와 개 한 마리를 바치는 제사로 시작됐다. 그 다음으로는 두 명의 젊은 귀족 루페르키가 안내를 받아 제단에 이르면, 이마 위에다 제물의 피를 붓고, 제물의 피로 난자한 칼을 우유에 적신 털로 닦아 내고는 미소와 웃음을 웃었다. 제사가 끝나면 루페르키가 희생동물(페브루아)의 가죽으로부터 끈을 만들어 들고 제물로 바친 염소의 가죽을 걸쳐 루페르쿠스의 모습을 꾸미고는, 돌로 표시해 놓은 선을 따라 팔란티네 성의 벽을 돌며 두 떼로 나누어 군중들 특히 다산과 임신을 바라는 소녀들과 여성들을 가죽끈으로 후려치곤 했다(참조 링크: >). 

대상과 개념이 이렇다 보니, 이들 사이에는 학대성/피학대성 성욕(마조히즘/사디즘)과 주물숭배 감정이 교차했을 테고, 실로 문자 그대로 양탈을 쓴 늑대들인 셈이었다. 오늘날 검정 가죽옷을 입고 가죽 채찍을 든 파트너가 파트너를 때리고 맞으면서 서로 학대/피학대 성욕을 돋운다는 변태적이고 가히 악마적인 페티쉬즘(fetishism) 행습은 파우누스 신도 연계된 바로 이 음란한 축제에서 비롯된 것임이 거의 틀림없다.     

◀ 자신을 채찍질하는 중세 고행자들

그 후 5세기 말엽에 천주교황 겔라시우스 1세의 치하 때 이 관행은 "수치스런" 것으로 여겨져 폐지되는 듯 했으나, 어이없게도 천주교 속에 은연중 침투하여 자기금욕과 고행의 도구로 둔갑했다. 어떤 학자들은 겔라시우스가 이것을 양성화하여 '복된 정녀 마리아의 정화 축제'로 대체했다고 한다.17 

 아무튼 기독교에 없던 자기 채찍 형벌이 천주교에 생긴 것은 로마 제국에서 비롯된 이교적 연원임을 필경 알아채 수 있다는 것이다.(참고 링크: >)


흥미롭게도 이런 자학적인 자기 채찍질은 회교 등 이교에서도 흔히 발견된다.(링크: > ) 사실 우리의 생각에 선뜻 떠오르는 광경은 고대 카르멜(갈멜)산 정상에서 엘리야와 겨룬 바알과 아쉐라 사제/'예언자'들이 하늘에서 바알의 불이 내려오지를 않자, 자기네 몸을 학대하며 피를 뿌리던 진풍경이다(왕들A=열왕상 18'26~28).  

이 문구가 만약 "내가 받은 고난과 십자가형을 본받아 그대도 나름대로 십자가를 지고 받으라"는 주님의 교훈에 근거한 순수한 의미였다고 가정한다면, 프레토리움에서의 그 분이 아닌 십자가 위의 그 분이 하신 말일 때 비로소 제대로 의미가 있을 수 있다. 채찍형은 단지 수난의 일부이기 때문이다.

응보적 대가를 요구하는...?

"나는 널 위해 이것을 했노라. 너는 날 위해 무엇을 하였는가?"? -오해하지 마라! 이 라틴어 문구는 실제로 주님이 하신 말씀이 아니라, 상상의 소산일 뿐이다. 단적으로 말해서 성경엔 이런 되바라진 보상의식적인 개념이 없다. 자칫 비슷해 뵈는 개념은 있다. 주님은 우리에게 각각 자기의 십자가를 지고 따르라고 하셨음은 성경대로이다. 그런데 주님은 "내가 너를 위해 이렇게 했는데, 너는 왜 아무 것도 할 생각을 않느냐"는 식의 응분의 대가를 요구하는가? 주님은 결국 인류에게서 어떤 대가를 바라고 십자가를 지신 것인가? 과연 우리 자신의 십자가로 주님의 대속의 희생과 사랑에 대한 대가를 "치를" 수나 있겠는가? 주님이 우리에게 생명까지 거저 주신 것은 무조건적인 아가페 곧 사랑 때문이었다! 


바로 이 점에서 페티의 '에케 호모'의 문구는 문제점을 드러낸다. 주님이 채찍형과 십자가형을 받으신 것은 조건 없이 죄인을 용서하고 정하게 하시기 위함이었지, 인류 각 사람에게서 대가를 바라고 하신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독생자의 죽음을 통해 바라신 것은 사람이 한 명이라도 예수님을 믿고 구원받으라는 것이지, 죄과에 해당하는 속전을 물어 내라는 뜻이 아니었다. 단지 그 분이 무한한 사랑으로 치르신 그 고귀한 희생에 응하여 구주이신 그 분을 믿어 영생을 얻는 것-그것이 하나님이 바라시는 바이다. 또한 제자가 되려면, 각자 제 몫의 십자가를 지고 그 분의 뒤를 따름으로써 그 분의 수난에 동참하는 것이 주님이 명하신 바이다. 

"내가 대가를 치렀으니 너 또한 응분의 대가를 치러라"-이것이 십자가의 정신이 아니다. 주님은, 무엇인가 주어졌으니 무엇인가 받게 되리라는 'Do ut des(도 우트 데스)'의 원리에 의하여 우리에게서 뭔가를 기대하신 것이 아니다.  



'성화'는 계명 위배


그보다도 이런 그림을 제작하는 행위가 십계명의 제 2 계명(플러스 제1계명)을 어겼다는 더 큰 문제가 있다. 혹 우상숭배가 아니더라도 최소한 우상 제조/구매 혐의가 있다는 말이다. 

필자가 중년에 미국에서 성령의 은총을 입고서야 비로소 깨달은 사실이지만, 신/구/정교계를 막론한 예술품인 모든 '성화'나 조각상 따위는 우상숭배의 대상이기가 쉽다. 따라서 교회당 안이나 신앙단체의 건물 내부, 올바른 신자의 생활공간에 '성화'나 종교영화 장면 속 주인공 같은 '성경인물'의 사진 따위가 있어선 바람직하지 않다. 그런 미술품들이 모종의 외경이나 '숭경심'을 자아내기 십상이기 때문이다. 천주교당 주변의 모든 '성상'들도 마찬가지이다. 단, 이것을 제거할 때는 율법적인 단죄를 삼가고 어진 충고로 해야 할 것이다. 필자의 딴 글에서 비쳤듯, 예수회 사제회원이었던 관상가 헨리 나웬은 정교의 성화상을 앞에 놓고 하는 관상기도에 관한 책을 쓸 정도로 성화상 숭경에 몰입했다.( > ) 이 모두가 제 2 계명에 위배되는 행위이다. 

독자에게 권하건대, 당장 집안의 모든 '성화'들을 제거하라. 교회에서도 역시 지도자들이 그런 단행을 하는 것이 좋다. 물론 율법적으로가 아니라 부드럽게 권유조로 해 나가길 바란다. 신자가 이런 '성화'를 가까이 할 아무런 성경적인 근거가 없기 때문이다. 그림 속 또는 조각상의 인물이 실제 성경 인물일 가능성도 없거니와 실제적 근거가 있다고 하더라도 그런 상의 제작은 성경이 권하는 바가 아니다. 이 모두가 주로 눈에 보이는 것을 갖고 섬기는 천주교/정교에서 온 관행이다.    




페티의 다른 작품, '멜랑콜리'(옆 사진)에서는 등장인물이 해골을 끌어안다시피 한 채 묵상/고심을 하고 있다. 멜랑콜리라는 주제에 대해서는 다음 글을 참조하기 바란다( >  > ). 

또 다른 중세화가들과 마찬가지로 신화 속 주제를 다루었는데, 대표적인 작품은 '베르툼누스와 포모나'(Vertumnus et Pomona)이다( > ). 신화 작가 오비드의 '메타모르포시스' 제 14장에 따르면, 베르툼누스는 '계절의 신'으로 자기 마음대로 모습을 바꿀 수 있는 힘을 이용, 늙은 여인으로 위장해 아름다운 요정 포모나의 과수원에 침투하여 다양한 이야기로 유혹하다가 강간한다는 줄거리를 갖고 있다. 

본래 에트루리아에서 왔다는 베르툼누스 신 숭배 관행은 기원전 약 300년에 로마에 입수되어, 에트루리아의 볼시니18가 함락되던 해인 264년, 고대 로마 근교의 7개 언덕의 하나인 아벤티네 언덕에 그 신전이 세워져 매년 8월 13일 그를 기리는 축제가 열리기도 했다. 또한 페티의 작품 '헤로와 레안데르'(Hero et Leander) 역시 신화적 소재를 다루었다. 

그밖에도 중세 천주교도인 그로서 어쩔 수 없었겠지만, 비성경적인 성모 '무염시태'도 있고, 정체 미상의 해골을 든 채 '회개'를 하고 있다는 막달라 마리아의 그림도 있다.


필자의 견해로는, 이런 소재들을 갖고 미술 활동을 한 페티가 성령의 영감이나 권능을 지닌 거룩한 하나님의 사람이었을 리가 만무하다! 그는 당대의 수많은 카톨맄 화가들과 별 다를 바 없는 인사였다. 


참고로, 페티는 1589년쯤 로마에서 태어나 루도비코 치골리 문하에서 미술 수업을 한 뒤, 1613-1622년 만투아의 추기경이었다가 훗날 기회를 틈타 '성직'을 버리고 공작이 된 페르디난도 빈첸조 곤자가 1세의 궁정화가로 일하면서, 특히 신약성경의 비유들을 소재로 한 작품을 많이 그렸다. 1622년 9월쯤 그는 만투아의 명사들과 서로 다투던 끝에 베니치아로 옮겨 잠시 작품생활을 계속하다, 1623년에 죽었다.19 

이러한 페티의 삶 속에서 남을 거듭나게 할 만큼 "신적이고 위대한" 영감의 작품을 그렸을 여지가 발견되지 않는다. 


그밖에도 '너는 날 위해 무엇을..' 스토리엔 몇 가지 버전이 있는데, 그 한 가지는 '슈테른부르크' 또는 슈텐베르크라는 화가가 어린 짚시 소녀에 질문에 감화를 받아 그림을 그렸다는 근거 없는 일화가 그 하나이다. 




또 다른 '감동' 간증

이 그림을 갖고 각별한 '체험'을 한 사람은 또 있다. 바로 우리네 찬송가 '네 너를 위하여 몸 버려 피흘려'20의 작시자인 영국의 여성 시인/찬송작가 프랜시스 리들리 해버걸(Francis Ridley Havergal, 1836-1879) 양이다.
8살 때부터 시를 쓰기 시작했다는 해버걸은 '나의 생명 드리니', '복을 세어 보아라' 등 수많은 명찬송시를 쓰면서 독신으로 지냈다. 

해버걸은 뒤셀도르프에서 유학을 하느라고 유렆 대륙에 머물던 시절, 독일 목회자의 서재에서 머물던 1858년 1월 10일, 페티의 이 그림과 문구를 처음 대했다. 그녀는 이 작품을 보는 순간 스르르 온몸의 힘을 잃는 듯 이 그림 앞에 주저앉았단다. '구주님'의 눈길이 그녀에게 머무는 듯 했단다.21 해버걸이 문구를 읽으면서 머리 속에 흐르듯 떠오르는 찬송시를 종이에다 연필로 써 나아갔다. 바로 '나 너를 위하여 내 생명 주었단다'(I Gave My Life For Thee)였다. 그러나 시를 다시 살펴보면서 너무 초라하다는 생각에 난로불에 던져 넣느라고 했더니, 그냥 바닥에 떨어졌단다. 1859년 이 시는 소책자에 실렸다가 이듬해 '좋은 말씀'(Good Words)에 실려 출판됐으며, 1869년에는 아버지가 붙인 가락(곡명 'Baca')과 함께 처음 선을 보였다. 해버걸이 이 시를 아버지에게 보여드리면서 느낌을 말하자 아버지는 잘 간직해 두라고 일러주고는 이 시를 위한 가락(곡명 Baca/'바카')을 작곡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현재는 같은 시에다 미국 작곡가 P. P. 블리스가 붙인 곡(곡명 'Kenosis')으로 더 널리 불려진다. 그래서 이 유명한 찬송가가 태어났다.( > )

 

해버걸이 같은 그림의 선배 감상자인 셈인 친첸도르프의 일화를 알고 있었는지는 알 수가 없으나, 영국의 모라비안들을 만났을 가능성은 없지 않다. 흥미로운 점은 친첸도르프 역시 상당한 경력의 찬송가 작가였다는 것이다. 그들은 그림에 얽힌 이런 짧은 감동 문구에서 큰 영감을 얻는 모양이다. 

작가들이 쓴 이런저런 찬송시들은 성경과 같은 격의 계시적 영감을 받고 쓴 것일까? 그럴 수도 없거니와, 비성경적인 부분을 지닌 다수의 찬송시가 이 물음에 의혹을 던져 준다. 또 중세 천주교의 '성화'에 불과한 그림을 보고 이런 찬송시를 썼다면, 그것은 성령이 주시는 감동이라고 하기 어렵다.

더욱이 전술했듯, '에케 호모' 속 의문의 밧줄 '올가미'와 실상 어떤 의미인지 정확하게 알 수 없는 문구 등이 우리에게 의문을 던져 준다.



친첸도르프와 해버걸이 페티의 '에케 호모'로부터 어떤 감동을 받았든지 성령의 역사라고 보기 어렵다. "성령께서 하찮아 뵈는 재료로도 그런 역사(役事)를 할 수 있지 않느냐?"고 물을 독자가 있을지 몰라도, 천만에다. 필자가 아는 한, 성경의 성령님은 십계명에 직접 위배되는 그런 '성화'를 통해 역사하지 않는다. 성령님은 이런저런 요소를 적당히 활용하셔서 진리를 타협하시는 분이 아니라, 철저한 진리의 영이시기 때문이다. 

착각하지 말기 바란다.  


바로 그래서 '에케 호모'를 보고 "거듭났다"는 친첸도르프 및 모라비안들과 좐 파이퍼 등 여타 인사들의 주장은 비성경적이라는 결론이다. 


또 화가 페티가 어떤 의도로 썼는지 모를 문구를 갖고 큰 감동을 받아 썼다는 해버걸의 찬송시도 성령의 영감으로 왔다고 단정하기 어렵다. 그냥 명언에 의한 해버걸의 문학정서적 감동의 소산이라고 하면 모를까. 



친첸도르프는 중세 유렆의 수많은 화가들에 의하여 판 치던 이런 미술품 중심의 시각문화에 많은 영향을 받은 모양이다. 퍽 감성적 성향이었던 그는 만년인 훗날에 미술 정서에 치우친 나머지, 흔히 '성화'에 보이곤 하는 '예수' 옆구리의 창자국을 '옆구리 구멍(Seitenhölgen)'이라고 부르며, 이 '구멍'에 대한 온갖 상상을 동원하여 영적이 아니라 센슈얼하다 못해 섹슈얼하기까지 한 기묘막측한 "성적(性的) 신학"을 만들어 낸다. 같은 시대에, '나를 위해 틈새가 난 영원한 바위(만세반석), 나를 숨겨 주소서(Rock of Ages, cleft for me)'라고 읊은 영국 개혁주의 시인, 어거스터스 토플래디의 찬송시도 이와 과히 무관하지 않다.

이에 대해서는 시리즈 차회에서 논하겠다.


'모라비아'라고 하면, 흔히들 감리교 창시자인 존과 촬즈 웨즐리 형제를 연상할 것이다. 

1736년 1월 하순, 미 대륙으로 향하던 배 위에서 웨즐리는 생명을 위협하는 폭풍 속에도 흔들림 없고 두려움 없는 모라비아 형제회 교도에게서 깊은 감동을 받았다고 고백했다. 


최근 모라비아교(Moravian Church) 관련 뉴스들이 심심치 않게 뜨곤 한다. 이 교파는 웨즐리 형제에게까지 영향을 준 경건주의(Pietism)로 유명하지만, 그들의 경건주의는 성경이 말하는 진짜 경건을 추구한다기보다 그들 나름의 경건주의라고 판단된다. 까닭은 여러가지이지만, 이들은 특히 20세기였던 지난 1974년대에 이미 동성애자들을 "완전한 교인들"로 포용하고 있음을 인정했고, 2002년 북부지방대회(NPS)는 당분간의 유예기간을 두고 있다가 올해 드디어 동성애자들의 안수례를 허용키로 NPS가 표결했고, 심지어 북미주 동성애자들의 '결합예식서'를 작성, 발표했다. 다만 여타 지방회는 아직 이렇다할 입장 표명을 하지 않고 있다. 

이런 현상은 모라비아교가 에큐메니즘을 지향해온 때문일 것이다. 예부터 '경건'을 자랑해온 모라비안들치고는 참 놀라운 일이다. 결국 옛 파리새(바리새인)와 다름없는 경건이려나. 

  

가장 근래엔, 신자는 모름지기 매일 24시간 기도를 해야 한다며 '연쇄기도'를 강조하는 소위 '24/7 기도운동'을 해온 마이크 비클의 아이핲(아이합, IHOP)이 모라비아교와 연계되어 부각돼 왔다. 원래 이 기도운동의 뿌리가 친첸도르프와 그의 모라비아교 집단인 헤른후트이기 때문이다. 나중 언급할 테지만, 아이핲과 모라비아교의 연계는 이것 말고도 여럿 있다. 또 비클과 무관하지 않은 사이인 맄 조이너1 역시 모라비아교와 연계가 있다. 


모라비아교 경건주의의 선구자였던 독일의 니콜라우스 루드비히 친첸도르프(Nikolaus Ludwig von Zinzendorf, 영어: '니콜러스 루이스 진젠돌프')는 지금까지 경건주의자의 모델로 늘 떠받들어져 왔다. 모르긴 해도, 친첸도르프와 모라비아는 아마 웨즐리와 감리교에 준 영향으로 톡톡한 점수를 따 왔을 것이다. 아울러 웨즐리 형제와 친첸도르프는 모두 미국 대륙을 방문한 일로 미국인들에게도 호감을 사 왔다. 그래서 친첸도르프는 모국인 독일보다는 오히려 해외에서 더 많이 알려져 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과연 친첸도르프와 모라비아 교인들은 세계 크리스천들의 상찬을 받아 마땅할 만큼 경건하고 훌륭한 신자였을까? 수많은 설교가, 교회사가들이 경건의 모범적 사례로 들 만큼 유명한 그가 가르친 경건주의는 정말 성경적이었을까? 

정작 살펴 보면 의혹스런 구석이 한 두 가지가 아니기에, 이를 따져 보기 위해 친첸도르프와 모라비아교에 관한 시리즈를 모두 3회에 걸쳐 마련해 본다.



모라비아란?

친첸도르프 백작은 독일 귀족으로, 본래는 놀랍게도 모라비아와는 전혀 무관했다! 그 점에서 특이한 케이스라고 할 수 있다. 모라비아는 중앙 유럽에 있는 지역으로 체코(오늘날의 체코공화국)의 동부 대부분을 차지하며, 역사적으로는 보헤미아, 체코 실레지아와 함께 체코 동쪽에 있던 나라의 하나였다. 모라비아라는 이름은 이 지역 북서부에 있는 모라바(Morava, 독일어 '마르히')강에서 유래했다. 

모라비아 교의 유래


마르틴 루터의 개혁 이전에 존재했던 사상 최초의 신교 교파인 모라비아교는 처음에는 14세기 말 체코-보헤미아의 개혁가, 얀 후스(Jan Huss 영어 존 허스)의 사상을, 훗날에는 독일의 슈페너와 프랑케의 루터교 경건주의 등 두 줄기의 영향을 받게 된다. 후스는 로마 천주교에 반대하여, 라틴어가 아닌 비잔틴 초기 시대에 영향을 받은 모국어(체코) 사용, 빵과 포도주를 모두 사용하는 성찬, 사제혼인제 등으로 복귀하기를 원했고, 면죄부와 연옥설을 거부했다. 후스와 모라비아교는 보헤미아 왕실의 지지를 얻었으나, 그는 콘스탄체 공의회에서 이단 단죄를 받아 1415년 7월 6일 화형 당했다. 이로 인해 1419~1437년 '후스 전쟁'이 일어났는데, 처음엔 천주교도인 지배자와 후스 파(Husité, 영어 Hussites) 사이에, 나중엔 후스파 사람들끼리 벌어졌다. 온건주의 후스파였던 '울트라퀴스트'들은 천주교와 손잡고 다른 후스파와 맞서 싸우다, 1434년 리파니 전쟁에서 상대 후스파가 패전한 뒤, 1436년 7월 5일 바젤 조약을 맺었다. 


1457년, 후스의 제자들 일부가 독립적으로 보헤미아 형제회(Čeští bratři) 또는 형제연합(Jednota bratrská 라틴어 Unitas Fratrum)을 보헤미아의 쿤발드에 설립했다. 

[ 이것은 포데브라디의 게오르게 왕의 사유지에서 피신처를 얻었기 때문이다. 왕 자신 후스파 지도자인 휘네크 프타체크가 죽은 뒤 후스당의 주요 지도자가 된 데 이어, 1458년 보헤미아 왕위에 올라, 신구교 사이의 중도적 입장이 되어 다스렸다. 그후 친교황측 귀족들과 적대 관계가 되자, 1465년 젤레나 호라(그뤼네베르크)에서 열린 친 교황측 회의 후 이듬해 12월 23일, 천주교황에 의해 출교된다. 이를 틈탄 프레데맄 3세 황제와 헝가리의 마티아스 왕이 그를 적대해, 결국 1469년 5월 3일 모라비아 수도인 올로무츠에서 마티아스가 보헤미아 왕위에 오르게 된다. 게오르게 왕은 마티아스와의 전쟁에서 이기고도 추종자들의 뜻과는 달리 1470년 화해조약을 체결한 이듬해 죽었다. ]


16세기 중반까지 체코 왕정 지역 인구의 90%와 귀족들 대다수가 신교인들이었다. 또한 모라비아 교회가 세운 신교계 학교와 출판사 등이 번창했다. 후스파의 특징은 귀족화된 천주교와는 달리 일반 교인들을 위한 보편적 교육을 시행한 점이었다. 급기야 체코 땅에는 신교 학교가 없는 도시가 단 한 군데도 없을 정도가 되었고, 주요 도시인 질라바에는 6개나 설립됐다. 수도에 있는 프라하 대학교도 신교인들이 주도하여, 천주교는 교육에 관한 한 맥을 못추게 되었다. 


이에 다급해진 천주교는 합스부르크 귀족들의 지원을 받아 예수회 회원들이 체코 땅으로 진입하여 수도 올무츠(1566년)를 비롯한 여기저기에 천주교 교육기관을 세우게 된다. 마티아스 신성로마황제는 카톨맄 교도인 페르디난트 2세를 보헤미아 왕으로 즉위시키려 들자, 이미 2개의 신교 교회를 강폐 당한 뒤인 1618년, 보헤미아 신교 귀족들이 이에 반발하여 '보헤미아 반란'을 일으켰으나 2년 후 프라하 근교의 빌라 호라(하얀 산이란 뜻)에서 벌어진 백산전쟁(Bitva na Bílé hoře)에서 패전했다. 이 전쟁은 '30년 전쟁'으로 발전한다. 

결국 합스부르크 왕조는 독일계 천주교도들로 바뀌고 신교 귀족들은 처형/축출됐으며, 전쟁과 역병, 기타 악영향으로 인구 300여만이 80만으로 급감했다. 또 예수회의 공작에 의하여 1622년까지 신교 학교들은 모두 폐쇄된다. 예수회에 의해 모국어로 된 책들은 불태워지고 모든 신교 출판물은 '이단서적'으로 단죄됐다. 


이에 따라 형제회 사람들은 지하활동을 하다가 결국 북부 유럽 저지대 등으로 흩어졌는데, 체코 모라비아 교회 최후의 감독인 얀 아모스 코멘스키(코메니우스) 감독 등이 재기를 시도하기도 했다. 형제회 최대 그룹은 폴란드 레스노에 남아 있었는데, 그들은 코멘스키가 선조의 복음주의 신앙을 보존하기를 바랐던 '숨겨진 씨앗'이었다. 


이로부터 약 100년이 지난 1722년 6월 17일쯤, 모라비아 북부에서 지하생활을 하던 보헤미아 형제회 '숨겨진 씨앗'의 일부가 박해를 피해, 니콜라우스 루드빅 폰 친첸도르프의 소유인 베르텔스도르프 영지에 도착한다. 그들의 지도자인 순회 목수(木手, 일설엔 도공), 크리스티안 다뷔드가 친첸도르프를 만나 친교를 나눈 결과였다. 그들은 친첸도르프의 호의로 루사티아 북부(현재 독일 동부의 작센 지방, 오벌라우지츠)에 정착하도록 허락받는다. 바로 여기에 이들의 새 마을인 헤른후트(Herrnhut, '주님의 지켜 돌보심'이라는 뜻)가 세워졌다. 



친첸도르프의 생애와 경건주의

모라비아 교의 지도자이자 찬송가 작가인 니콜라우스 루드비히 친첸도르프 백작(1700~1760)은 1700년 5월 26일, 독일 드레스덴에서 태어났다. 그의 가문은 당대 유렆에서 가장 오랜 전통의, 오스트리아 북동부 귀족층으로, 개혁시대 때 루터교인이 되었다. 친첸도르프 선조들 가운데는 신성 로마 황제 막시밀리안 1세도 있다. 루드비히의 할아버지인 에라스무스 막시밀리안 폰 친첸도르프는 천주교로 개종하기를 거부하고 오스트리아의 모든 재산을 팔아 독일 프랑켄('프랑코니아')으로 이주했다. 

루드비히는 생후 6주만에 아버지를 여의어, 할머니 헨리에테 카타리나 폰 게르스도르프와 이모가 사는 그로스헤너스도르프의 성에 보내졌고, 4살 때 어머니가 재혼하는 바람에 주로 할머니의 손 아래 자랐다. 당초 루드비히의 부모는 경건주의에 심취하여, 경건주의 학자 필맆 야콥 슈페너를 루드비히의 대부로 모셨다. 

루드비히가 평생 경건주의 영향 아래 살게 된 내력의 일부가 그랬다. 그는 어릴 적부터 깊은 루터교 신앙을 지녀, 8살 때 예수님께 '사랑의 편지'를 쓰기도 했다2. 청소년기에 들어서자 그는 자연히 미래 사역자로서, 그리고 귀족(백작)으로서의 할 일도 생각해야 했다. 친첸도르프는 그가 숭모하던 마르틴 루터와 마찬가지로 강렬한 감정의 사람이었고, 자주 슬픔과 기쁨 등의 감정에 쉽사리 좌우되곤 했다. 

'겨자씨회' 결성

1715년, 당대 경건주의의 온상인 할레 아카데미에 다니던 친첸도르프는 4명의 귀족 친구들과 함께 기도와 책임성을 모토로 하는 하나의 비밀모임을 결성했는데, 이것이 훗날 공식 명칭인 '겨자씨회'(Senfkornorden 젠프코른오르덴)로 발전한다. "영적인 비밀 기사단"이라는 개념으로였다. 현재도 있는, "크리스토(그리스도)님을 위한 순정적/관계적/선교적 삶을 살려는 목적"을 지녔다는 OMS(영어 겨자씨회의 줄임말)라는 그뤂의 시조이다. 20세기 모라비아교 감독, 허버트 스포그는 OMS의 헌신 내용을 1. 크리스토님께 신실하기, 2. 모든 사람들에게 친절하기, 3. 세계에 복음 전하기로 요약한 바 있다. 겨자씨회에 관해서는 잠시 후 재론하겠다. 

그후 루드비히는 귀족으로서 걸맞은 외교관 경력을 쌓기 위해 법학을 공부하러 1716년 뷔텐베르크 대학교에 진학했다. 3년 후 그는 유렆 여행을 떠나 네덜란드, 프랑스, 독일의 다양한 지역들을 다니면서 신/구교 명사들을 만났다. 돌아오던 길에는 자신의 친척이 거주하는 뉘른베르크 근교 오버뷔르크와 카스텔을 방문했다가 카스텔에서 사촌누이 조피 테오도라를 만나 사랑에 빠졌다. 그러나 테오도라의 어머니인 과부 백작부인이 둘의 결혼을 반대하는 통에, 테오도라는 (루드비히의 친구이자) 로이스의 영주인 하인리히 29세 백작과 결혼해 버렸고, 루드비히는 당일 결혼식장에서 만난 신부의 동생, 에르트무테 도로테아와 일년 후인 1721년에 결혼하게 된다. [ 그래서 친첸도르프의 교회를 본뜬 모라비아교회가 하인리히의 영지인 에버스도르프에도 세워진다. 이 교회는 귀족과 평민의 경계를 허물고 서로를 '형제'라고 부르며 지냈다. ]  

소명? 

어릴 적부터 귀족으로서 할 수 없는 것이 별로 없었던 젊은 친첸도르프가 뜻밖에 첫 사랑을 이루지 못한 이 첫 '실망사건'은 하나님의 "특별한 소명"을 느끼게 된 동기가 된 모양이었다. 그는 과거 외교관이 되어 주길 바라던 가족의 소원에 따르려던 나머지, 칸슈타인 남작 대신 할레 고아원을 맡아 달라던 경건주의 학자, 아우구스트 헤르만 프랑케의 초청을 거절한 적이 있다. 이 부담감을 덜려고 루드비히는 그냥 농장주로서 자신의 차지인(借地人)들을 위한 삶을 보내기로 결심한다. 그는 할머니에게서 베르텔스도르프를 매입한 뒤, 요한 안드레아스 로테를 영지목사로, 요한 게오르크 하이츠를 대리인으로 불러들이고, 자신의 집부터 짓는다.  

그는 슈페너의 루터교 경건주의 이상을 보다 실천적으로 구현하기 위해 일종의 개혁에 나섰다. 그래서 로테 목사, 괴를리츠의 멜키오르 쇄퍼 목사, 어릴 적 친구인 프리드리히 폰 봐테빌레 등과 '4 형제팀'을 이뤄 크리스토님과의 개인적인 신뢰의 정감을 보존하는 종교를 일으키고자 했다. 에버스도르프(현 튀링엔)에 있는 그들의 전속 출판사는 값싼 성경과 교리문답, 찬송가와 기타 신앙서적들을 대량으로 펴냈다. 요한 아른트의 '참 기독교'의 불어판도 여기서 발행했다. 

루드비히는 당대의 건조한 루터교 정통 교리를 싫어하여 교리를 공격하는 이성주의 경향에 어느 정도 동조했지만, 양쪽의 문제점을 모두 파악하고 역사적인 크리스토와 초대교회의 관행 및 영성을 추구했다. 바로 이 국면이 그를 보헤미아 형제회로 눈길을 돌리게 했다. 

1722년, 루드비히는 천주교 예수회의 박해를 피하여 온 모라비아와 보헤미아 출신의 신자들을 맞아 그들의 피신처로서 베르텔스도르프의 한 구석을 제공하여, 헤른후트 마을을 조성하게 했다. 헤른후트가 커지고 '종교자유의 처소'로 알려지면서 '슈벵크펠더'회 등 다양한 피박해자들이 모여들었다. 그러나 복잡다단한 그뤂들이 한데 엉겨 있다보니 서로 갈등이 생기기 시작했다. 루터교 목사인 로테와 영지 관리인인 하이츠의 신앙부터가 서로 다른 데다 요한 지기스문트 크뤼거의 종말론적 가르침은 더욱 종교적 긴장을 부추겨 마을이 온통 혼란의 도가니가 되어 갔다. 

마을 설립자인 크리스티안 다뷔드를 포함한 일부는 종말론에 빠져 심지어 친첸도르프를 (계시록에 나타난) '종말의 짐승', 로테 목사를 '거짓 대언자'라고 칭하기까지 했다. 결국 친첸도르프는 드레스덴 궁중 임무를 무기한 쉬기로 하고, 저택으로 돌아와 마을의 화해/중재에 나섰다. 그는 집마다 방문하며 함께 기도하기를 요청하고, 마침내 마을 사람 전체를 불러 집중 성경공부에 들어갔다. 핵심과제는 성경이 공동체 생활을 어떻게 표현하고 있느냐는 것. 이 공부와 집중기도를 통해, 마을 사람들 다수는 사랑 안에서 함께 살아가는 것이 소명이고 자신들이 겪어온 갈등은 성경 가르침에 위배된다는 결론을 믿게 된다. 이것이 헤른후트의 '초기개혁'이었다. 

과거와 현재의 연계

헤른후트 공동체가 점점 성장할 동안, 친첸도르프는 초기 보헤미아 연합체의 교회질서 규범인 '라티오 디스키플리나'(Ratio Disciplina) 한 권을 얻은 뒤, 보헤미아 역사를 공부하면서 초기의 우니타스 프라트룸과 헤른후트의 신학 사이의 "파워풀한 공통점"을 발견하고 놀란다. 그와 헤른후트 사람들은 모라비아교회 감독 요한 아모스 코멘스키의 저술물에 깊은 공감을 느껴 과거의 많은 개념들을 도입해 답습하게 된다. 그러나 친첸도르프는 분리된 교단보다는 모든 교파를 규합한 단합의 불꽃으로 보았다. 그는 또 머리(head)의 종교보다는 심정(heart)의 종교를 추구했는데, 이것이 후기 모라비아 교회의 특징을 이룬다. 

이리하여 헤른후트의 정신적 헤게머니를 쥐게 된 친첸도르프는 마을 사람들을 수도원 영성에 근거한 중세 십자군이 아닌 '가족생활'에 근거한 크리스토의 군사들로 조직해 나아갔다. 그러나 그가 맘에 둔 '가족'은 전통적인 핵가족이 아니라 오히려 전통가족의 울타리를 깨고 연령과 혼인, 성에 바탕을 둔 공동체적인 가족 개념이었다. 또한 '반덴'(banden/소그뤂)은 나이와 결혼 여부, 성에 바탕을 둔 '코르'(성가대라는 뜻)로 조직되었다. 친첸도르프는 나름의 신학에 따라, 인생의 각 단계별로 다른 영적인 욕구와 주님과의 다른 관계가 있다고 보았다. 

이런 모델에 의하여 세워진 모라비안 공동체는 훗날 미국의 베틀레엄, 펜설베이니어, 세일럼, 놅캐럴라이나 등에도 생긴다. (미국)베틀레엄에서는 미 원주민과 귀족들이 한 장소를 나눠 쓰고, 세일럼에서는 흑인노예들이 교회의 공식 일원이 되어 교회 지도자로 선출되기도 했다. 

이런 공로를 인정받아, 친첸도르프는 1737년 5월 20일, 베를린에서 다뷔드 니취만과 다니엘 에른스트 야블론스키, 두 감독에 의하여 감독 안수를 받는다. 

친첸도르프는 흔히 여러 교파 사람들이 협력하고 서로 존중하는 것을 선호하고 옹호했다. 1742년, 그는 에프라타 수도원 등에 있는 미국 필라델피아의 독일어권 사람들이 토요안식일 준수에 존중을 표함으로써, 최초로 이틀간의 주말을 지키는 관행을 증진한 셈이 되었다. 그는 또 주일을 복음 전파에 사용했다. 

겨자씨회의 실체

'겨자씨회' 회원들은 겨자나무 그림이 새겨진 상징 브로취를 달고, '우리 중 아무도 자신을 위해 살지 않는다'*(롬 14'7)는 그리스어 문구가 새겨진 반지를 끼고 있었다.
겨자씨라는 개념은 하나님의 왕국은 겨자씨처럼 처음엔 작게 보여도 큰 나무처럼 된다는 예수님의 교훈에 근거했다(마태 13'31, 32, 마가 4'30~32, 누가 13'18,19).
아울러 주님은 겨자씨만한 믿음만 있어도 산이 바다에 던져지게 명령할 수 있다고 하셨다(마 17:20, 눅 17:6).     

친첸도르프는 그후 성인이 되어서도 계속 겨자씨 회원을 포섭해 나갔는데, 그 가운데는 예를 들면 다음과 같은 인물들도 포함돼 있었다:

   루이-앙트와느 드 노와유 대주교(천주교 파리 대교구)  

   존 포터(영국 국교회 캔터베리 대주교) 

   크리스티안 6세(덴마르크/노르웨이 국왕) 

   제임즈 에드워드 오글톮(조지아 식민지 개척자/총독, 영국 장군, 국회의원, 자선가) 

   토모치치(미 원주민 크리크 족 추장) 

   얼스킨(영국국회 스코틀런드계 의원)  

위의 사람들이 혹 친첸도르프의 고상해 뵈는 이상(理想)에 맞는지는 몰라도, 과연 크리스토님의 교훈에 걸맞은 사람들이었을까?
그러진 못했다!  

포터 대주교는 자신의 저서에서 성매매의 '유용성'을 지지/방어하기도 했고, 왕정복고적 국교회를 지향하였다.

독일 출신의 덴마르크 왕 크리스티안 6세는 수줍은 군주여서 전쟁을 피하고 평화를 추구했지만, 조용한 커튼 뒤에서 절대 전제주의에 의한 독재와 압제, 그리고 어머니에게서 물려받은  '청교도적' 경건주의를 함께 추구한, 소극적이고도 "무서운" 사람이었다.

그는 어머니의 큰 근심거리였던 일부다처를 자행한 아버지 프레데맄 4세의 유언을 무시하고, 아버지가 납치해 강제 결혼한 계모, 안나 조피 왕후를 폐위시켜 그녀의 어릴 때 집으로 보내버렸다.

또 사촌인 크리스티안 에른스트 백작을 왕의 고문 역으로 불러들여 거의 섭정을 맡기다시피 해서, 왕후 전속 조리사까지 교체하는 등 사사건건 내정간섭을 하게 만들었다.

왕은 또 농민의 타주여행권을 박탈하여 한 고장에 "말뚝 박게" 했다. 그가 죽자, 덴마르크에서 경건주의가 힘을 잃고 만다. 물론 그의 장점도 없지는 않았다. 

오글톮 장군/총독은 미국 조지아주에다 영국 식민지를 개척한 사람으로 미 대륙을 방문한 웨즐리 형제를 돕기도 한 인물이다. 박애정신 등 좋은 점도 있었지만, 그는 프리메이슨이었다! 

결국 친첸도르프의 겨자씨회는 고상한 목적과는 달리, 수단 방법 가리지 않고 '기독교' 지상왕국을 확장하는 데 급급한 주권주의/지배주의 단체가 되었고, 교파를 초월하여 영적인 '하나님의 왕국' 건립에 동참한다는 공동 목표 아래 (중세 개혁 이후) 최초의 에큐메니즘을 구현했다. 

셋째, 내려오지 않는 신앙

출애굽기 17:12
모세의 팔이 피곤하매 그들이 돌을 가져다가 모세의 아래에 놓아 그로 그 위에 앉게 하고 아론이 하나는 이편에서, 하나는 저편에서 모세의 손을 붙들어 올렸더니 그 손이 가 지도록 내려오지 아니한지라.


08-09-2023(수)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사납고 성급한 백성(하박국 1:6)

보라 내가 사납고 성급한 백성 곧 의 넓은 곳으로 다니며 자기의 소유 아닌 거할 곳들을 점령하는 갈대아 사람을 일으켰나니.
I am raising up the Babylonians, that ruthless and impetuous people, who sweep across the whole earth to seize dwelling places not their own.

문단 분해

1:1-4. 이스라엘의 불의에 대하여 하나님께 호소한 하박국의 의문.
1:5-11. 이스라엘의 징치로써 갈대아인의 내습에 관한 하나님의 응답.
1:512-17.  이상의 하나님의 응답에 관한 보다 큰 의문의 제출.


"사납고 성급한 백성(ruthless and impetuous people)" 이란 "무자비하고 성급한 백성"을 말합니다.

학고이 함마르 웨한니므하르(הַגֹּוי הַמַּר וְהַנִּמְהָר)

보라 내가 사납고 성급한 백성...갈대아 사람을 일으켰나니

- '갈대아 사람'으로 번역된 히브리어 '카세딤'은 앗수르 서판에 의하면 '칼두'(Kaldu)라고 불리기도 했다.
칼두는 유브라데 강과 티그리스 강 옆에 페르시아만과 바벨론 남단 중간에 위치한 나라였고, 도시가 거의 없었다.
그곳 거민들은 소규모의 농축업과 수렵으로 생활했으며, 앗수르에 대해 반감을 가지고 있었다(R.L.Smith).
그러다가 나보폴라살(Nabopolassar)이 B.C.625년에 니느웨를 점령하여 갈대아 왕조를 창건하였고, 그의 아들 느부갓네살에 이르러서는 바벨론인들이라고 불리게 되었다(IDB).
성경의 증거에 의하면, 갈대아인들은 아브라함의 형제인 나훌의 아들 게셋의 후손이었다(창 22:22).

사납고(4751) 마르(mar) מַר 

1. 명사 : 방울,   2. 형용사,   3. 비유 용법 :
발음 / 마르[ mar ]
어원 / 4843에서 유래
관련 성경 / 소리내어 울다(창 27:34), 쓰다(출 15:23, 민 5:24, 잠 5:4), 괴롭다(삼상 1:10, 욥 10:1), 환난 당하다(삼상 22:2), 참혹하다(삼하2:26),격분하다(삼하 17:8), 대성통곡하다(에 4:1), 고통하다(욥 21:25), 독하다(시 64:3, 전 7:26), 근심하다(잠 31:6, 겔 3:14), 크다(겔27:30), 곤고하다(암 8:10).
[명] 괴로움(삼상 15:32, 욥 7:11), 고통(사 38:15, 17, 렘 2:19).
구약 성경 / 38회 사용

* 4843.  마라르(mârar)   מָרַר  

1. 흐르다,   2. 모질다,  3. 쓰다
발음 / 마라르[ mârar ]
관련 성경 / 아프다(룻 1:13), 슬프다(삼상 30:6), 쓰다(사 24:9), 학대하다(창 49:23, 욥 27:2), 통곡하다(슥 12:10), 노엽게 하다(출 23:21), 성내다(단 8:7), 노하다(단 11:11).
[명] 괴로움(왕하 4:27), 고통(사 38:17), 곤고(애 1:4).
구약 성경 / 14회 사용



성급한(4116) 마하르(mâhar)  מָהַר  

1. 피엘형 מִהַר. .서두르다,   3. 민첩하다
발음 / 마하르[ mâhar ]
관련 성경 / 드리다(시 16:4), 민첩하다(사 32:4), 성급하다(합 1:6), 빠르다(대상 12:8, 잠 1:16), 도망하다(삼하 15:14).
[부] 얼른(왕상 20:33), 속히(창 27:20, 사 49:17), 빨리(삼상 4:14, 잠 7:23), 급히(삼상 25:34, 에 5:5), 갑자기(삼상 28:20),속속히(사 5:19).구약 성경 / 64회 사용

백성(1471) 고우이(gôwy)  גּוֹי   

1. 국민,  2. 이스라엘 사람들,  3. 이스라엘 이외의 민족들
발음 / 고우이[ gôwy ]
어원 / 1465와 동형에서 유래한 것으로 보임[‘한 덩어리가 된다’는 뜻에서]
관련 성경 / 나라(창 10:5, 민 14:12, 시 83:4), 여러 나라(민 14:15), 민족(창 12:2, 신 4:34, 수 23:13), 고임(창 14:1), 만민(창 18:18), 백성(창 20:4, 수 3:17, 사 60:12), 국민(출 34:10), 족속(창 48:19, 출 33:13), 이방나라들(출 34:24, 레 26:33, 45), 주민(레 18:28, 합 2:8), 이방인(레  25:44, 느 5:8), 나라 사람(신 4:6), 무리(왕하 6:18), 이방 사람(왕하 17:8), 만국(대상 16:35), 만방(사 2:2), 대적(사 18:2), 조상(겔2:3), 이방 신(말 1:11).
구약 성경 / 556회 사용

강포(强暴) - 강할 강, 사나울 폭  - 3절 / 간악, 패역, 겁탈, 변론, 분쟁

강포(强暴, violence) - 강하고 사납다 / 5회(1:2,  3,  9,  2:8, 17)

2555. 하마쓰(châmâç) חָמָס

1. 포악,  2. 악업
발음 / 하마쓰[ châmâç ]
어원 / 2554에서 유래
관련 성경 / 학대(창 6:11, 사 53:9, 습 1:9). 모욕(창 16:5), 흉악(삼하 22:3), 포학(욥 16:17), 악(시 27:12), 포악한 자(시 74:20), 폭력(창49:5, 삼하 22:3), 포학한 일(삿 9:24), 불의함(대상 12:17), 폭행(욥 19:7), 해(잠 26:6),
[형] 거짓된(신 19:16), 강포한(잠 16:29), 포악한(암 6:3), 불의한(시 35:11), 심한(시 25:19).
구약 성경 / 60회 사용

해이하고(6313) 푸그(pûwg)  פּוּג

1. 차가워지다,  2. 니팔형 : 마비되다
발음 / 푸그[ pûwg ]
관련 성경 / 어리둥절하다(창 45:26), 거두다(시 77:2), 해이하다(합 1:4), 피곤하다(시 38:8).
구약 성경 / 4회 사용

선지자 하박국의 세 가지 질문

1. 왜 악인은 형통하는가?
2. 왜 기도는 응답도지 않는가?
3. 왜 의로운 사람이 고난을 당하는가?



욥기의 말씀은 "왜 의로운 사람이 고난을 겪어야 하는가?" 라는 질문에 대한 대답이라고 한다면 하박국의 말씀은 "어찌하여 악인이 이 세상에서 형통함을 누립니까?" 라는 질문에 대한 대답이라고 하겠습니다.

혹시 욥과 하박국과 같은 질문을 생각해 보셨는지요?
세상의 주권은 여호와 하나님이 갖고 계시다면서도 여전히 세상에서는 부조리한 현상이 자주 반복되고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 이유에 대한 분명한 하나님의 가르침을 확인하시기 바랍니다.

선지자 하박국은 하나님의 백성인 남 유다가 타락하여 온갖 불의가 행해지고 오히려 의인이 악인에게 핍박받고 불의한 자가 공의한 자보다 물질적인 풍요를 누리는 현실에 대해 하나님께 항의를 합니다.

하박국 1장의 내용을 세 부분으로 정리해 봅니다.

1:1-4. 선지자가 생각하는 공의가 하나님과는 도저히 맞지 않는다고 합니다.

1:5-11. 이에 대해 하나님은 악을 묵과하는 것이 아니라 죄를 심판하시며 선지자의 항의 이전에 이미 패역한 이스라엘을 심판하기 위해 심판의 도구로 갈대아를 준비해 두셨다고 합니다.

1:12-17. 선지자는 계속해서 항의하기를 죄악을 심판하시지만 어떻게 더 큰 죄로 물들어 있는 이방 족속인 갈대아를 사용하시는지에 대해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고 합니다.

이러한 것은 인간을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하나님의 섭리 형태를 계시하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유다의 패역함과 악인들의 득세에 대하여 하나님께 항의할 때에 하나님께서는 바벨론 제국을 들어 유다의 죄악을 징벌하실 것임을 예언 하셨습니다. 그러자 하박국 선지자는 다시 하나님께 항의를 하였는데, 이번에는 유다보다 나을 것이 없는 바벨론을 통하여 하나님의 백성을 심판하는 것이 합당하지 않다는 내용이었습니다. 즉 악인이 의인을 삼킴이 하나님의 공의에 합당치 않다는 것입니다. 

세상을 살다 보면 선한 사람이 성공하는 것보다 악한 사람이 경제적으로 더 성공하고, 남을 속이고 타인을 짓밟는 사람이 인정을 받는 것을 자주 경험할 수 있습니다.

그때마다 과연 하나님이 살아 계시는가? 하는 의문을 갖게 됩니다.
그러면서 우리 자신도 세상 사람들과 같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고 싶은 유혹을 받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매우 어리석은 생각입니다.
왜냐하면 지금도 살아 계셔서 인간의 모든 생각과 행동을 알고 계시는 하나님께서는 능력이 없어서 악인을 심판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심판의 때를 기다리고 계시기 때문입니다(카이로스의 때 즉 하나님의 때).

그때가 되면 악인들은 심판을 견딜 수 없습니다.
그들이 세상에서 누리던 쾌락은 오히려 고통을 가중시킬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지금 믿음으로 사는 것이 힘들지라도 마지막 심판의 때를 바라보며 선하고 공의롭게 살아야 합니다.


하박국이 하나님께 받은 말씀

 하박국 1장1절은 "선지자 하박국이 묵시로 받은 경고라" 라는 말씀으로 시작합니다.
‘하박국’이란 이름의 뜻은 ‘껴안는 자, 매달리는 자’라고 합니다.
하박국이란 이름의 뜻만으로도 이 묵시의 내용이 ‘껴안고 매달리는 자가 받은 묵시’란 의미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하박국 선지자가 받은 묵시는 결코 가벼운 내용이 아니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하박국선지자가 직면한 그 시대는, 신실한 하나님의 예언자라면, 당연히 그 시대를 끌어안고 간절히 씨름해야 할 참으로 암담한 시대였습니다.

하박국 선지자는 유대의 멸망이 가까운 기원전 610년경부터 600년경 사이에 활동한 선지자입니다.
하박국1장 6절에서 "보라 내가 사납고 성급한 백성 곧 땅이 넓은 곳으로 다니며 자기의 소유가 아닌 거처들을 점령하는 갈대아 사람을 일으켰나니." 라고 말씀합니다.

갈대아 사람들은 곧 ‘바벨론을 말합니다.
하나님은 타락한 이스라엘을 징계하시기 위해 ‘갈대아 사람’ 즉 바벨론을 사용하시겠다고 말씀하셨는데, 하박국서의 내용으로 볼 때, 아직 바벨론이 예루살렘을 침공하기 전이었기에, 바벨론의 침공이 바짝 다가온 기원전 600년대 초반이 하박국 선지자가 활동한 시기라고 합니다. 

이 시기에 대해서 1장 4절에서 정확하게 말씀합니다.
"이러므로 율법이 해이하고 정의가 전혀 시행되지 못하오니 이는 악인이 의인을 에워쌌으므로 정의가 굽게 행하여짐이니이다."

율법은 해이해 질대로 해이해졌고, 정의가 그 땅에서 사라졌으며, 악인들이 의인을 에워싸 정의가 완전히 꺾여 버린 세상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율법이 해이해졌다고 말씀하는 ‘해이하고’는, ‘타푸그’ 란 말인데, 그 원형인 ‘푸그’란 말은, 하나님의 말씀, 하나님의 계명이 완전히 무시되고, 마비되었다는 뚯 입니다. 해이한 정도가 아니라, 말씀의 마비, 말씀의 무시가 그 시대의 풍조였다는 것입니다.

하박국 선지자 시대의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완전히 외면하고 무시하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인식조차 하지 못할 만큼 ‘그들의 정신과 영혼, 양심이 마비 상태가 되어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2절에서는 "여호와여 내가 부르짖어도 주께서 듣지 아니하시니 어느 때까지리이까 내가 강포로 말미암아 외쳐도 주께서 구원하지 아니하시나이다." 라고 호소합니다.

그 시대가 너무 타락하여서, 그래서 하나님의 선지자가 하나님의 심판을 간절하게 호소하였지만 하나님께서 듣지 않으셨다고 말씀하고. 3절에서는 "어찌하여 내게 죄악을 보게 하시며 패역을 눈으로 보게 하시나이까 겁탈과 강포가 내 앞에 있고 변론과 분쟁이 일어났나이다." 라고 호소 하며 그 시대의 불의와 타락의 상황을 적나라하게 증거합니다.

이 시기 유대의 왕은 여호야김이었습니다.
그는 기원전 609년부터 598년까지 통치하였는데, 여호야김왕은 예레미야선지자를 비롯하여 많은 선지자를 박해하고 핍박한 극악한 왕이었습니다.

열왕기서와 역대기서 그리고 예레미야서를 보면 여호야김 왕의 악정이 소개되고 있는데, 그는 예언의 말씀이 기록된 두루마리 말씀을 불태워버릴 만큼 패악한 왕이었습니다.

그는 애굽의 바로에게 잘 보이기 위해, 백성들에게 무자비한 방법으로 세금을 짜내었으며, 그렇게 짜낸 세금을 바로에게 바쳤습니다.

참으로 암담하고 참담한 시대상황이었습니다.
그 어디에서도 공의를 찾아보기 힘든 시대였기에, 하나님께서 그 시대에 대해 오래 침묵하고 계신 것처럼 보였고, 심지어 하나님이 없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러니 하박국선지자가 1장 2절의 앞부분과 같이 호소하는 것입니다.
"여호와여 내가 부르짖어도 주께서 듣지 아니하시니 어느 때까지리이까?" 
어느 때까지 이렇게 침묵하시고, 못 본 척 하시겠습니까? 라고 한탄하며 하나님께 탄원하고 있는 것입니다.

성경에서는 하나님은 공의로우시다고 합니다.
공의란 사람의 행위에 따라 보응 하는 것을 말하니다.

시편 28:4
"그들이 하는 일과 그들의 행위가 악한 대로 갚으시며 그들의 손이 지은 대로 그들에게 갚아 그 마땅히 받을 것으로 그들에게 갚으소서." 라고 말씀합니다.

시편 31:23
"너희 모든 성도들아 여호와를 사랑하라 여호와께서 진실한 자를 보호하시고 교만하게 행하는 자에게 엄중히 갚으시느니라."

하나님께서 진실한 자를 보호하시고, 교만하게 행하는 자에게는 엄중하게 갚으신다고 말씀합니다.

그런데 현실에서 그렇게 진행되고 있습니까?
현실에서는 전혀 그렇지 않게 보일 때가 너무나 많습니다.

시편 73:1-3
"하나님이 참으로 이스라엘 중 마음이 정결한 자에게 선을 행하시나.
나는 거의 넘어질 뻔하였고 나의 걸음이 미끄러질 뻔하였으니.
이는 내가 악인의 형통함을 보고 오만한 자를 질투하였음이로다."

새번역으로 읽어봅시다.

"하나님은, 마음이 정직한 사람과 마음이 정결한 사람에게 선을 베푸시는 분이건만, 
나는 그 확신을 잃고 넘어질 뻔했구나. 그 믿음을 버리고 미끄러질 뻔했구나.
그것은, 내가 거만한 자를 시샘하고, 악인들이 누리는 평안을 부러워했기 때문이다." 

나는 하나님이 마음이 정결한 사람에게 선을 베푸시는 분이라는 그 확신을 잃고 넘어질 뻔했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이 그런 분이시라는 믿음을 저버리고 미끄러질 뻔했다는 것입니다.

왜 입니까?
3절을 보면, "그것은, 내가 거만한 자를 시샘하고 악인들이 누리는 평안을 부러워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악인들이 심판을 받는 게 아니라, 도리어 잘 되고, 4절부터 6절까지 보면, [그들은 죽을 때에도 고통이 없고 그 힘이 강건하며 5.사람들이 당하는 고난이 그들에게는 없고 사람들이 당하는 재앙도 그들에게는 없나니 6.그러므로 교만이 그들의 목걸이요 강포가 그들의 옷이며...] 라고 말씀합니다. 이게, 이 악인들의 교만과 악인들이 강포한 세상이 오늘의 현실이란 것입니다.

시편73편은 12-13절에서도 말씀합니다.
새번역성경으로 보면, [그런데 놀랍게도, 그들은 모두가 악인인데도 신세가 언제나 편하고, 재산은 늘어만 가는구나. 13.이렇다면, 내가 깨끗한 마음으로 살아온 것과 내 손으로 죄를 짓지 않고 깨끗하게 살아온 것이 허사라는 말인가?] 어떻게 보면 오늘의 세태를 그대로 표현한 말씀입니다. 정말 세상에 이렇게 보일 때가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열심히 사는 사라들, 신실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이 이런 현실을 보면 마음이 낙망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심판의 시간이 다가옵니다.
시편73편15-18절을 새번역성경으로 읽어드리겠습니다.
"나도 그들처럼 살아야지" 하고 말했다면, 나는 주님의 자녀들을 배신하는 일을 하였을 것입니다. 16.내가 이 얽힌 문제를 풀어 보려고 깊이 생각해 보았으나, 그것은 내가 풀기에는 너무나 어려운 문제였습니다. 17.그러나 마침내 하나님의 성소에 들어가서야, 악한 자들의 종말이 어떻게 되리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18.주님께서 그들을 미끄러운 곳에 세우시며, 거기에서 넘어져서 멸망에 이르게 하십니다.] ‘나도 그들처럼 살아야지.’ 라고 말했다면 나는 주님의 자녀들을 배신했을 것이고, 내가 이 얽힌 문제를 풀어보려고 깊이 생각해 보았는데, 내가 풀기엔 어려운 문제인데, 그런데 마침내, 내가 하나님의 성소에 나아가게 되니까, 악한 자들의 종말이 어떨 것인지, 깨닫게 되더라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그들을 미끄러운 곳에 세우시고, 거기서 넘어져 멸망에 이르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시편73편은 27절, 28절에서, ‘주를 멀리하는 자는 망하리니’ ‘하나님께 가까이 함이 내게 복이라.’ 라는 말씀으로 73편을 끝맺습니다. 하나님께서 하박국선지자에게 5절부터 11절까지 말씀하십니다.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너희는 여러 나라를 보고 또 보고 놀라고 또 놀랄지어다... 6.보라 내가 사납고 성급한 백성 곧 땅이 넓은 곳으로 다니며 자기의 소유가 아닌 거처들을 점령하는 갈대아 사람을 일으켰나니...] 그리고 그들이 일어나 표범보다 빠르고 저녁 이리보다 사나운 군마를 타고 먹이를 움키려 하는 독수리와 같이 날아와, 9절을 보면, [그들은 다 강포를 행하러 오는데 앞을 향하여 나아가며 사람을 사로잡아 모으기를 모래 같이 많이 할 것이요] 라고 말씀하며, 11절은 [그들은 자기들의 힘을 자기들의 신으로 삼는 자들이라 이에 바람 같이 급히 몰아 지나치게 행하여 범죄하리라.] 라고 말씀합니다.

 

그들 바벨론이 비록 하나님의 백성, 유다의 강포한 자들을 심판하는 도구로 사용되지만, 그들 또한 자기들의 힘을 자기들의 신으로 삼고 살아가는 자들이기에, 그들 또한 곧 심판을 면치 못하게 될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것이 [세상을 이기는 믿음의 기도]입니다. 하나님의 사람은 세상을 이깁니다. 비록 지금 지는 것 같고, 비록 지금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가려고 하면 피해 보는 것 같고, 더 손해 보는 것 같아도, 결국 그 성소에서 판가름 납니다. 누가 이기는가? 하나님의 사람이 이기는 것입니다. 하박국1장의 하박국의 질문에 대한 대답이 시편73편17-18절입니다. [17.그러나 마침내 하나님의 성소에 들어가서야, 악한 자들의 종말이 어떻게 되리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18.주님께서 그들을 미끄러운 곳에 세우시며, 거기에서 넘어져서 멸망에 이르게 하십니다.]

하박국 선지자가 가졌던 의문에 대한 것과 시인 아삽이 품었던 의문은 동일한 맥락에서 이해됩니다.
그러나 그 결과는 의문이 아니라 하나님을 증거하는 증인으로 살아야 한다는 것으로 결론을 맺습니다.

아삽은 다윗 왕 때 예배 음악을 세우는 데 크게 공헌한 레위인으로(대상 6:39) 놋 제금을 치는 악장이다(대상 16:5; 15:19).

시편 73편 / 아삽의 시

1. 하나님이 참으로 이스라엘 중 마음이 정결한 자에게 선을 행하시나

2. 나는 거의 넘어질 뻔하였고 나의 걸음이 미끄러질 뻔하였으니

3. 이는 내가 악인의 1)형통함을 보고 오만한 자를 질투하였음이로다

4. 그들은 죽을 때에도 고통이 없고 그 힘이 강건하며

5. 사람들이 당하는 고난이 그들에게는 없고 사람들이 당하는 재앙도 그들에게는 없나니

6. 그러므로 교만이 그들의 목걸이요 강포가 그들의 옷이며

7. 살찜으로 그들의 눈이 솟아나며 그들의 소득은 마음의 소원보다 많으며

8. 그들은 능욕하며 악하게 말하며 높은 데서 거만하게 말하며

9. 그들의 입은 2)하늘에 두고 그들의 혀는 땅에 두루 다니도다

10. 그러므로 그의 백성이 이리로 돌아와서 잔에 가득한 물을 다 마시며

11. 말하기를 하나님이 어찌 알랴 지존자에게 지식이 있으랴 하는도다

12. 볼지어다 이들은 악인들이라도 항상 평안하고 재물은 더욱 불어나도다

13. 내가 내 마음을 깨끗하게 하며 내 손을 씻어 무죄하다 한 것이 실로 헛되도다

14. 나는 종일 재난을 당하며 아침마다 징벌을 받았도다

15. 내가 만일 스스로 이르기를 내가 그들처럼 말하리라 하였더라면 나는 주의 아들들의 세대에 대하여 악행을 행하였으리이다

16. 내가 어쩌면 이를 알까 하여 생각한즉 그것이 내게 심한 고통이 되었더니

17. 하나님의 성소에 들어갈 때에야 그들의 종말을 내가 깨달았나이다

18. 주께서 참으로 그들을 미끄러운 곳에 두시며 파멸에 던지시니

19. 그들이 어찌하여 그리 갑자기 황폐되었는가 놀랄 정도로 그들은 전멸하였나이다

20. 주여 사람이 깬 후에는 꿈을 무시함 같이 주께서 깨신 후에는 그들의 형상을 멸시하시리이다

21. 내 마음이 산란하며 내 양심이 찔렸나이다

22. 내가 이같이 우매 무지함으로 주 앞에 짐승이오나

23. 내가 항상 주와 함께 하니 주께서 내 오른손을 붙드셨나이다

24. 주의 교훈으로 나를 인도하시고 후에는 영광으로 나를 영접하시리니

25. 하늘에서는 주 외에 누가 내게 있으리요 땅에서는 주 밖에 내가 사모할 이 없나이다

26. 내 육체와 마음은 쇠약하나 하나님은 내 마음의 반석이시요 영원한 분깃이시라

27. 무릇 주를 멀리하는 자는 망하리니 음녀 같이 주를 떠난 자를 주께서 다 멸하셨나이다

28. 하나님께 가까이 함이 내게 복이라 내가 주 여호와를 나의 피난처로 삼아 주의 모든 행적을 전파하리이다


아삽 (Asaph)

아삽 (Asaph. "모으는 자", "여호와께서 자신을 위해 모으셨다")
언약궤가 예루살렘으로 옮겨져 왔을 때 헤만, 에단과 함께 찬송하는 직무를 맡았던 레위인이다(역대상 6:39;15:19).
또한 그는 언약궤가 적절한 처소에 놓이게 되었을 때 하나님께 합당한 찬양과 감사를 드리도록 임명된 사람들 가운데 하나였다(16:4-6). 그는 '아삽의 시'라는 표제가 붙은 시 50편과 73-83편을 지은 저자로 믿어진다.
대하29:30에 나오는 선견자 아삽과 동일 인물인 듯하다(참조. 느12:46).

다윗의 통치 때에 아삽의 아들들은 음악을 통해 예언을 하였으며(대상25:1`2), 후에 그 자손들은 요시야 왕 아래에서 노래하는 자들로 나타나 있다(대하35:15). 그들 가운데 많은 사람들이(참조. 스2:41;느7:44) 바벨론 포로로부터 귀환하여, 성전의 기초를 놓을 때 노래를 부르는 자로 또는 연주자로 예루살렘에 정착하였다(스3:10). 그들은 후에 여호와의 전에서 레위인들을 감독하고(느11:22), 성벽을 낙헌할 때에는 나팔을 부는 직무를 맡았다(12:35). 아삽은 게르손 자손으로 베레갸의 아들이었다(대상6:39). - 『아가페 성경사전』발췌

출생과 역사적 배경

1. 아삽은 게르손 자손이며 베레갸의 아들이다.

계보는 다음과 같다.
야곱(이스라엘) - 레위 - 게르손 - 야핫 - 시므이 - 심마 - 에단 - 아다야 - 세라 - 에드니 - 말기야 - 바아세야 - 미가엘 - 시므아 - 베레갸 - 아삽 (역대상 6:39~43)

2. 게르손은 레위의 맏아들로(출6:16), 게르손 자손은 광야 시절부터 회막의 휘장들을 운반하는 일을 맡았었다 (민4:21~28).

활동 - [참조] '헤만', '에단'

1. 아삽은 헤만, 에단과 함께 당대의 뛰어난 '노래하는 자(musician,singer)'로 평가 받고 있다. 아삽 역시, 다윗이 예루살렘으로 언약궤를 옮기는 역사적인 순간에 등장하게 된다. 레위 사람의 '어른들'은 노래하는 자로 헤만, 아삽, 에단을 다윗에게 천거했다. (대상15:16~17)

2. 아삽은 헤만, 에단과 함께 찬양대를 이끄는 역할을 담당했다. (대상 15:19; 참조. 느 12:46)

3. 언약궤를 성막으로 들인 후, 다윗은 그 앞에서 레위 사람들로 하여금 감사 찬양을 하도록 했는데 아삽은 그 때 두목으로 발탁되었다. 아삽은 제금으로 찬양대를 인도하였는데, 그 찬양대의 구성은 비파와 수금이 합쳐서 9대, 나팔 2대 규모였다. 그 찬송하는 일은 날마다 계속되었다. (대상 16:4~6,37)

그 날에 다윗이 아삽과 그 형제를 세워 위선 하나님께 감사하게 하여 이르기를 ... (대상 16:7)

4. '언약궤가 평안한 곳을 얻은 후에' 아삽은 회막 앞에서 찬송하는 일을 맡게 되었는데, 그는 가운데 위치한 헤만의 우편에서 그 직무를 수행하였다. (대상 6:31~32,39)

5. 아삽은 헤만, 에단과 함께 다윗의 수하에서 왕을 돕던 '선견자'였다. (대상25:6;대하29:30)

6.  솔로몬이 건축한 성전에 언약궤를 들여놓던 때까지도 아삽은 헤만, 에단과 함께 찬송하는 일을 맡았다. 그 때의 찬양대 규모는 제금, 비파, 수금, 나팔 등의 악기가 동원된 120명의 거대한 오케스트라였다. (대하5:12)

7).아삽은 악기뿐만 아니라 작시의 소질이 뛰어났던 것 같다. 시편에는 그의 시가 12편이 수록되어 있다(시 50, 73~83편). 아삽의 이러한 소질이 다윗의 신임을 받았던 것과 무관하지 않은 것 같고(대상16:7~36), 후대에 이르러서도 그의 '시'는 다윗의 시와 함께 여호와께 부르는 찬송으로 널리 권해졌다(대하29:30). 

그가 지은 시편에는 '마스길', '알다스헷', '영장', '현악', '여두둔의 법칙', '셀라', 소산님에돗', '깃딧' 등의 음악용어가 풍부하게 나타나있다.

히스기야 왕이 귀인들로 더불어 레위 사람을 명하여 다윗과 선견자 아삽의 시로 여호와를 찬송하게 하매 저희가 즐거움으로 찬송하고 몸을 굽혀 경배하니라 (대하29:30)

후손들과 역사적 평가

1.  아삽의 아들들 중 삭굴, 요셉, 느다냐, 아사렐라 네 사람은 헤만, 에단의 자손들과 함께 그 아비들의 수하에 속하여 왕의 명령을 좇아 '신령한 노래'를 부르는 직분을 맡았다. 그 중 요셉은 첫째로 제비뽑혀 직임을 얻었다. (대상25:1~2,6,9)

2. 성경에서는 특히 아삽의 자손들을 '노래하는 자들'로 일컫는다. (대하35:15;스2:41;3:10;느7:44)

3. 여호사밧 왕의 때에 모압과 암몬의 위협을 물리치는 데 압장섰던 레위 사람 야하시엘은 아삽의 자손이었다. 야하시엘은 무력했던 이스라엘 백성을 이끌고, 여호와를 찬송함으로 전쟁에서 승리하였다. (대하20:14~30)

4. 히스기야 왕의 성전 중건을 돕던 레위 사람들 중에는 아삽의 자손 스가랴와 맛다냐가 있다(대하29:13). 히스기야는 레위 사람들로 하여금 '다윗과 아삽의 시'로 여호와를 찬송하게 했다(대하29:30).

5. 바벨론에서 귀환했던 이스라엘 자손들의 1차 명단에는 '노래하는' 아삽 자손이 128명이라고 한다. (스2:41;느7:44)

6. 아삽의 자손 웃시는 예루살렘에 거하는 레위 사람의 감독이 되어 '노래하는 자'들에게 날마다 양식을 정하여 주는 일을 맡았다. (느11:22~23)

7. 아삽의 6대손 스가랴는 재건된 예루살렘 성의 낙성식에서 그의 형제들과 함께 에스라의 인도를 따라 다윗의 악기를 연주하였다. (느12:35~36)

※ 느헤미야 11:17과 12:8에 언급되는 아삽의 증손 맛다냐는 '기도할 때 감사하는 말씀을 인도하는 어른'이었고, 그 형제와 함께 찬송하는 일을 맡았다고 되어있다. 하지만 그 시점이 바벨론 귀환 이후(다윗 약 500년 후)인 것을 감안하면, 맛다냐의 증조부 아삽은 '노래하는' 아삽과는 다른 인물이다. (참조. 11:22)


우리 능력 되신 하나님께 높이 노래하며 야곱의 하나님께 즐거이 소리할지어다
시를 읊으며 소고를 치고 아름다운 수금에 비파를 아우를지어다 ... (시81:1~2)

헤만 (Heman; "진실한")
요엘의 아들이자 사무엘의 손자이다
.
다윗 시대에 성전에서 노래하였으며, 놋제금(Cymbals)을 연주한 그핫 계열의 한 레위인이다(대상6:33;15:19). 그는 성전 찬양대의 지도자였으며(대하35:15), 그의 무리는 기브온의 성막과 번제단을 모시는 일에 참여하였다(대상16:39-42). 그의 아들 열 네 명은 모두 그의 지도로 악기를 연주하고 노래를 부르며 성전에서 봉사하였다(25:4-6). 헤만은 또한 솔로몬 성전 봉헌식에도 참여하였다(대하5:12). 역대상 25:5에서 그는 "왕의 선견자"로도 불리고 있다(참조. 대하35:15). - 『아가페 성경사전』발췌

1. 출생과 역사적 배경

1) 그핫 자손 요엘의 아들이다. 할아버지는 그 유명한 사무엘이다. 계보는 다음과 같다.

야곱(이스라엘) - 레위 - 그핫 - 이스할 - 고라 - 에비아삽 - 앗실 - 다핫 - 스바냐 - 아사랴 - 요엘 - 엘가나 - 숩 - 도아 - 엘리엘 - 여로함 - 엘가나 - 사무엘 - 요엘 - 헤만 (대상6:33~38)

2) 그핫(고핫)은 레위의 둘째 아들로(출6:16), 그핫 자손은 광야 시절부터 회막 내의 모든 기물을 운반하는 일을 맡았었다(민4:1~20).

3) 아론과 모세는 아므람의 아들들로 그핫의 손자이다(출6:18,20). 아므람은 그핫의 장자이고(이스할은 아므람의 둘째 아들, 출6:18), 아론의 아들들이 제사장의 계보가 되었고(출29:9), 그 중에서도 아론의 장자 엘르아살의 아들들이 대제사장의 계보를 이었다(민20:26).

4) 레위의 증손 (그핫의 손자) 고라는 광야에서 모세와 아론을 거스리는 반역을 주도했었다. 고라의 무리들은 제사장 직분을 요구했던 것 같은데, 결국 이 일로 인하여 고라와 그 가족들은 산 채로 갈라진 땅이 삼키게 되었고, 원망하던 백성들에게는 염병이 임했다. (민16:1~50)
※ 고라 자손은 레위 사람들 중 찬송하는 일에 있어서 '아삽 자손' 못지 않은 신분이었다(대하20:19). 시편에서 '고라 자손의 시'라고 명시된 시는 모두 11편이다(시42, 44-49, 84, 85, 87, 88편).

5) 헤만의 조부 사무엘은 초기 이스라엘 왕국에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하였던 영적 지도자였다(삼상3:19~21). 사울과 다윗은 사무엘에게 기름 부음을 받았다(삼상10:1;16:13). 사무엘의 죽음에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도하였다(삼상25:1;28:3).

6) 헤만의 부친 요엘은 동생 아비야와 함께 브엘세바에서 사사(Judge)로 지냈지만, 그들은 사무엘과는 달리 자기 이익을 위해서 뇌물을 취하고, 판결을 굽게 하였다. 그것이 빌미가 되어서 이스라엘 장로들은 사무엘에게 왕을 세워줄 것을 요구하였던 것이다. (삼상8:1~5)

2. 활동 - [참조] 아삽, 에단

1) 역대기 저자는 헤만을 가리켜 '찬송하는 자(musician,대상6:33)', '노래하는 자(singer,대상15:19)'라고 칭했고, '찬송하는 일(the service of song/ministry with music,대상6:31,32)'을 맡았다고 한다. 지금으로 말하면 '전문 찬양사역자', 혹은 '음악목사' 정도로 부를 수 있을라나... (대상 6:31~33)

2) 다윗 당시 찬양 사역의 '3총사'라고 할 수 있는 헤만과 아삽, 에단 세 사람은 언약궤가 예루살렘으로 입성할 때 드디어 역사의 중앙에 서게 된다. 다윗은 레위 사람의 어른들에게 노래하는 자들을 세우라고 명했고, 그리하여 그 세 사람이 가장 먼저 추천되었다. (대상15:16~17)

3) 헤만을 비롯하여 아삽, 에단 세 사람은 '노래하는 자'였을 뿐만 아니라, '놋제금(the bronze cymbals)을 크게 치는 자'였다. 그 당시 제금은 악장이 사용하였던 것으로 보여지는데(대상16:5), 세 사람은 찬양대를 이끄는 지휘자나 악장의 역할을 했던 것 같다. (대상15:19;참조. 느12:46)

노래하는 자 헤만과 아삽과 에단은 놋제금을 크게 치는 자요 (대상15:19)

4) 헤만은 '노래하는 자'임과 동시에 악기를 연주하는 자였다. 찬양대를 지휘하기 위해 제금을 쳤을 뿐만 아니라,나팔 등의 여러 가지 악기 역시 연주하였던 것으로 보여진다. (대상16:42)

5) '3총사' 세 사람의 이름이 함께 거명되는 부분이 많은데, 언약궤가 입성한 후로는 오히려 헤만보다 아삽이 더 비중있게 보여지고 있다(대상16:5,7,37;25:1..). 그런데 다윗은 성막에서 찬송하는 일을 맡길 때에 헤만을 가운데에 세우고 그 좌우에 각각 에단과 아삽을 세웠다. (대상6:33,39,44)

6) 헤만은 '하나님의 말씀을 받드는 왕의 선견자(the king's seer)'였다. 선견자는 선지자의 옛말인데(삼상9:9), 이런 명칭은 헤만뿐만 아니라 아삽과 에단에게도 붙여졌다(대하29:30;35:15). 항상 왕의 곁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권하는 책임이 당시 '찬송하는 자'들에게 있었다는 것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하겠다(대하33:18).

이는 다 헤만의 아들들이니 나팔을 부는 자며 헤만은 하나님의 말씀을 받드는 왕의 선견자라 하나님이 헤만에게 열네 아들과 세 딸을 주셨더라 (대상25:5)

7) 헤만은 솔로몬이 성전을 건축할 때까지 아삽, 에단과 함께 왕의 수하에 속하여 성막 앞에서 찬송하는 직무를 맡았다. (대상6:32;25:6;대하5:12)


3. 아삽의 후손들

1) 아삽의 아들들 중 삭굴, 요셉, 느다냐, 아사렐라 네 사람은 헤만, 에단의 자손들과 함께 그 아비들의 수하에 속하여 왕의 명령을 좇아 '신령한 노래'를 부르는 직분을 맡았다. 그 중 요셉은 첫째로 제비뽑혀 직임을 얻었다. (대상25:1~2,6,9)

2) 성경에서는 특히 아삽의 자손들을 '노래하는 자들'로 일컫는다. (대하35:15;스2:41;3:10;느7:44)

3) 여호사밧 왕의 때에 모압과 암몬의 위협을 물리치는 데 압장섰던 레위 사람 야하시엘은 아삽의 자손이었다. 야하시엘은 무력했던 이스라엘 백성을 이끌고, 여호와를 찬송함으로 전쟁에서 승리하였다. (대하20:14~30)

4) 히스기야 왕의 성전 중건을 돕던 레위 사람들 중에는 아삽의 자손 스가랴와 맛다냐가 있다(대하29:13). 히스기야는 레위 사람들로 하여금 '다윗과 아삽의 시'로 여호와를 찬송하게 했다(대하29:30).

5) 바벨론에서 귀환했던 이스라엘 자손들의 1차 명단에는 '노래하는' 아삽 자손이 128명이라고 한다. (스2:41;느7:44)

6) 아삽의 자손 웃시는 예루살렘에 거하는 레위 사람의 감독이 되어 '노래하는 자'들에게 날마다 양식을 정하여 주는 일을 맡았다. (느11:22~23)

7) 아삽의 6대손 스가랴는 재건된 예루살렘 성의 낙성식에서 그의 형제들과 함께 에스라의 인도를 따라 다윗의 악기를 연주하였다. (느12:35~36)

※ 느헤미야 11:17과 12:8에 언급되는 아삽의 증손 맛다냐는 '기도할 때 감사하는 말씀을 인도하는 어른'이었고, 그 형제와 함께 찬송하는 일을 맡았다고 되어있다. 하지만 그 시점이 바벨론 귀환 이후(다윗 약 500년 후)인 것을 감안하면, 맛다냐의 증조부 아삽은 '노래하는' 아삽과는 다른 인물이다. (참조. 11:22)


우리 능력 되신 하나님께 높이 노래하며 야곱의 하나님께 즐거이 소리할지어다
시를 읊으며 소고를 치고 아름다운 수금에 비파를 아우를지어다 ... (시81:1~2)​ 

 

4. 헤만의 후손

1) 헤만은 14명의 아들과 3명의 딸들을 낳았다. 그 아들들 중 구별된 자들은 역시 헤만과 함께 성전에서 악기로 찬송하며 '신령한 노래'를 불렀다. 이들은 북기야, 맛다냐, 웃시엘, 스브엘, 여리못, 하나냐, 하나니, 엘리아다, 깃달디, 로암디에셀, 요스브가사, 말로디, 호딜, 마하시옷 14명인데, 나팔을 불었다. 그 당시 찬송하는 자 중에 제비뽑혀 직임을 얻었던 24인 중 헤만의 아들들이 14명이었다. (대상25:1,4~6,8~31)

2) 히스기야의 성전 중건을 돕던 레위 사람들 중에는 헤만의 자손 여후엘과 시므이가 있다. (대하29:14)

3) 다윗과 헤만을 비롯한 '3총사'들이 세운 찬양의 규례들은 유다가 망할 무렵까지도 성전의 찬양사역자들에게 전해 내려졌다. (대하35:15) 


곤란으로 인하여 내 눈이 쇠하였나이다 여호와여 내가 매일 주께 부르며 주를 향하여 나의 두 손을 들었나이다 (시88:9) 

5. 에단의 후손

역대상 6:19.  므라리의 아들들은 말리와 무시 그 조상에 따라 레위의 종족은 이러하니

6 : 41.  말기야는 에드니의 아들이요 에드니는 세라의 아들이요 세라는 아다야의 아들이요

6 : 44.  그들의 형제 므라리의 자손 중 그의 왼쪽에서 직무를 행하는 자는 에단이라 에단은 기시의 아들이요 기시는 압디의 아들이요 압디는 말룩의 아들이요

6 : 47. 세멜은 말리의 아들이요 말리는 무시의 아들이요 무시는 므라리의 아들이요 므라리는 레위의 아들이며


역대상 15장

16.  다윗이 레위 사람의 어른들에게 명령하여 그의 형제들을 노래하는 자들로 세우고 비파와 수금과 제금 등의 악기를 울려서 즐거운 소리를 크게 내라 하매
17.  레위 사람이 요엘의 아들 헤만과 그의 형제 중 베레야의 아들 아삽과 그의 형제 므라리 자손 중에 구사야의 아들 에단을 세우고


1)레위의 아들로(창 46:11), 마홀리와 무시를 낳았으며(출 6:19) 므라리 가족의 조상이 되었다(민 26:57). 

2) 시편 중에는 헤만이 지은 것으로 보이는 찬송시가 하나있다. 시편 88편의 저자 '고라 자손의 에스라인 헤만'이 '3총사' 헤만과 동일인이라면, 시편 89편의 저자 '에스라인 에단' 역시 '3총사' 에단일 가능성이 크다. 물론 그럴 경우에 '에스라인'이 성전의 어떤 음악사역과 관련된 사람들에 대한 명칭일지도 모르겠다. 시편 89편에는 '마스길', '영장', '마할랏르안놋', '셀라' 등의 음악용어가 사용되었다.

3) 왕정 시대 때 므라리 자손들은 찬송을 맡아서 봉사했으며(대상 6:29, 44, 47), 히스기야 왕(대하 29:12), 요시야 왕(대하 34:12) 때의 성전 청결 작업에 동참했다.​


므라리(Merari)
레위의 아들로(창 46:11), 마홀리와 무시를 낳았으며(출 6:19) 므라리 가족의 조상이 되었다(민 26:57). 

광야 생활에서의 므라리 가족은 6,200명이었으며, 수리엘이 이들의 족장이었다(민 3:34-35). 이들은 장막의 북편에 진을 쳤으며 성막의 널판, 띠, 기둥, 받침, 뜰 사면 기둥과 그 받침, 말뚝, 줄 등을 맡아서 관리하는 일을 했다(민 3:36-37). 가나안 땅에서는 제비뽑기로 스불론, 르우벤, 갓 지파로부터 각각 네 성읍을 받아 열두 개의 성읍을 차지했다(수 21:7, 34-40; 대상 6:63). 

왕정 시대 때 므라리 자손들은 찬송을 맡아서 봉사했으며(대상 6:29, 44, 47), 히스기야 왕(대하 29:12), 요시야 왕(대하 34:12) 때의 성전 청결 작업에 동참했다.


에단(Ethan)
1. 지혜로운 사람으로 알려진 예스라 사람이다(왕상 4:31). 

시편 89편은 ‘예스라인 에단의 마스길’이라고 제목을 적고 있다. 

2. 레위 사람 아다야의 아버지이며 아삽의 선조 중의 한 사람이다(대상 6:39, 42). 

3. 레위 사람 기시의 아들로(대상 6:44) 다윗 시대에 놋제금을 쳤다(대상 15:17, 19). 

4. 유다가 다말과의 사이에서 낳은 세라의 아들이며 아사랴의 아버지이다(대상 2:6, 8).


헤만(Heman)
1. 유다 지파 마홀의 아들로 지혜로웠던 사람이다(왕상 4:31).

2. 요엘의 아들로 다윗 시대에 제사장 사독을 도와 찬송과 놋제금 연주로 봉사한 사람이다(대상 6:33).


베레야(Berekiah)
다윗 시대에 회막에서 찬송하는 직무를 맡았던 사람으로 아삽의 부친이며 시므아의 조부이다(대상 15:17). 역대상 6:39에는 베레갸로 되어 있다. 여호와의 궤 앞에서 문을 지키는 자(대상 15:23)와 동일인으로 보는 학자들도 있다.


요엘(Joel)
소선지서의 두 번째 책인 요엘서를 기록한 선지자이다. 브두엘의 아들로‘여호와는 하나님이시다’라는 이름의 뜻을 가졌다(욜 1:1). 브두엘이‘하나님의 설득자’, 또는‘하나님의 성실성’을 뜻하는 것으로 보아 그의 가문이 경건한 가정이었던 것을 알 수 있다. 브두엘은 제사장이었을 것이다. 요엘은 다른 구약 선지서들과 마찬가지로 오직 회개만이 하나님의 심판을 면할 수 있는 것이라고 여겼다(욜 2:12-14). 요엘은 하나님의 이름으로 “당장 지금” 그리고 “마음을 다하여 내게로 돌아오라”(욜 2:12)고 외치면서 “그때에 여호와께서 … 그 백성을 긍휼이 여기실 것이다”(욜 2:18)라고 선언하였다. 

성경 속의 또 다른 요엘들 : 1. 사무엘의 아들로 악한 사사이다(삼상 8:2; 대상 6:33). 

2. 레위 자손으로 선지자 사무엘의 아버지인 엘가나의 선조이다(대상 6:36; 삼상 1:1). 

3. 르우벤의 자손으로 스마야의 아버지이다(대상 5:4-8). 

4. 시므온의 자손으로 그 지파의 족장이다(대상 4:35). 

5. 바산에 살던 갓 자손의 족장이다(대상 5:12). 

6. 잇사갈의 자손이며 족장이다(대상 7:3). 

7. 다윗의 용사 중 나단의 형제이다(대상 11:38). 사무엘하 23:36에는 이갈로 되어 있다. 

8. 브다야의 아들로 다윗 시대 므낫세 반 지파의 관장이다(대상 27:20). 

9. 히스기야 왕을 도와 성전을 청소한 사람으로 레위인이며 그핫 자손이다(대하 29:12).

10. 에스라 시대에 이방 여인을 아내로 취한 자이다(스 10:43). 

11. 느헤미야 시대에 베냐민 지파의 감독이다(느 11:9). 

12. 게르솜의 자손으로 족장이며 다윗 시대에 여호와의 궤를 예루살렘으로 옮기는 기념식에 형제 130명과 참석하였다(대상 15:7-11).
신명기의 언약과 요엘서 요엘은 그의 메시지의 기본적인 초점을 신명기 32장 모세의 노래(언약)에 의존하고 있다.
언약의 저주는 민족의 불순종의 결과로 생긴다.
응징 기간이 지나면 하나님은 그의 백성을 이전에 경험하지 못했던 방법으로 회복시키시고 축복하실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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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박국 개론

1. 표제

이 책의 표제는 다른 소선지서들과 같이 단순히 저자의 이름을 딴 것이다.
하박국이란 히브리어 (Chabaqquk)는 “포옹하다”라는 뜻의 동사인 카바크(chabaq)에서 왔다.
어떤 학자들은 이 이름을 향기높은 한 정원의 식물인 아카드어(Akkadian) “함바크크”(hambaququ)의 이름과 관련시키기도 한다.
하박국이라는 이름은 구약 중 다른 곳에는 나타나지 않는다.

본서의 히브리어 성경의 표제는 선지자 '하박국'의 이름을 따른 것으로 '하박쿡'이며 그 이름의 뜻은 '품다''포옹하다''꼭붙잡다'이다. 70인역(Lxx)에서는 '암바쿡'이라 하였다.

2. 저자

하박국에 대해서는 그의 책에 나타난 것 이외에 더 알 길이 없다.
하박국이 아모스처럼 어떤 다른 일에 종사하다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는지(암 7:14) 혹은 선지자 학교에서 부르심을 위하여 특별한 훈련을 받았는지는 기록되어 있지 않다.

하박국이란 이름은 '포옹하다'라는 뜻의 히브리어 어근에서 파생되었다. 제롬은 그가 하나님을 뜨겁게 사랑했기 때문에, 혹은 하나님과 어려운 문제를 가지고 씨름했기 때문에 그 이름이 '포옹하는 자'로 불리게 된 것이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저자에 대해 알려진 부분은 아무 것도 없다.

유명한 키르벳 쿰란(Khirbet Qumran) 사본 중에 하박국서를 취급한 사본이 하나 있었다.
조사해 본 결과 그것은 고대의 미드라쉬(midrash) 즉 성경 주석 책으로 판명되었는데 하박국서에서 짧은 귀절들을 인용하고 저자의 해석을 기록한 것이었다.
그 기록은 잘 보존되기는 했지만 불행히도 많은 공백들과 빠진 문장들이 있었다.
그 주석은 13줄의 기록인데 단지 하박국서 첫 두장만 포함하고 있다.
그 사본은 두개의 이사야서 사본들의 연대와 비슷한 B.C. 100년 경의 것이다.
그 하박국 주석책은 더욱 완전한 이사야 사본들과 함께 현대 히브리 문자로 기록된 같은 본문들을 수록하여 밀라 버로우(Millar Burrows)에 의해 복사판으로 출판되었다(성 마가 수도원의 사해 사본, 제1권, New Haven: American Schools of Oriental Research, 1950).

성서학에 있어서 그 하박국 주석책의 가장 중요한 점은 주석도 중요하긴 하지만 주석에 있지 않고 성경 본문에 있다.
그 당시의 어떤 종파(아마도 에세네파)에 의해 필사된 이 본문은 마소라 성경의 가장 오래된 사본들 보다 거의 천년이나 앞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것은 하박국서의 어떤 본문을 연구하는 데에도 대단히 가치있는 것이다(합 1:4; 2:1, 4, 5, 15, 16).

3. 역사적 배경

이 책은 심각한 배교의 시대, 즉 므낫세 통치 후기나 아몬의 통치 기간, 혹은 요시아 통치 초기에 기록된 듯하다.
하박국의 봉사는 선지자 나훔의 봉사에 바로 뒤따라서 있었던 것같다.
이 견해는 히브리어와 희랍어 정경에 나타난 그 책의 순서 배열을 통하여 지지를 받는다.
하박국이 자기 백성에게 돌리고 있는 일반적인 죄악들, 그가 못마땅하게 여기고 있는 죄악들이 역시 같은 시대임을 가리키고 있다. 

하박국은 백성들의 죄악 때문에 바벨론이 곧 쳐들어오는 위기가 닥칠 것이고 그 위기가 마침내 유다를 포로로 만들 것을 잘 알았다.
하박국은 이 위기를 유다에게 미리 경고했으며 하나님과 그 백성의 원수이며 우상 숭배에 빠지고 불의한 바벨론에 대하여 하늘의 심판이 임할 것을 예언했다.

본 서의 기록 시기를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본문(합1:6~11)에 나타나는 상황을 살펴봄으로써 추론할 수 있을 것이다. 본문은 갈대아인들이 유다인들을 침공할 것이라는 예언을 하고 있다. 이 침공은 주전 605년에 있었던 갈그미스 전쟁을 염두에 두고 말하고 있는 것 같다. 이 심증은 앗수르가 바벨론의 느부갓네살에게 완전히 패하게 된 전쟁을 말한다. 길대아인들은 주전 625~530년 사이에 막강한 군사력을 지니고 있었다. 따라서 본 서는 주전 625년 이전에 기록하였다고 볼 수 있다. 본 서의 저작 시기는 주전 605~508년으로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이때가 바로 여호야김이 다스리던 시기였다. 이러한 저작 시기에 대해 일부 진보적인 학자들은 주전 625년 이전에 그리고 주전 605년 이후에 기록되었다고 한다. 한편 본 서의 마지막 장인 3장이 시편의 한 부분이라고 주장하면서 본 서의 저작 시기를 주전 539년 이후로 보고 있다.


4. 주제

하박국은 유다의 죄를 한탄하고 자기 백성이 벌받아야 마땅하다는 것을 알기는 하지만 그들이 당해야 할 고통에 대해 염려한다.
그는 또한 하나님께서 징벌하시기 위해 사용하신 도구, 즉 계속적인 번영으로 축복받은 것처럼 보이는 갈대아인들의 운명에 대해서도 관심을 갖는다.
하나님께서는 회의(懷疑)에 차있는 당신의 종의 마음에 해답을 주신다.
그리고 이스라엘의 징벌은 그들의 궁극적인 행복을 위한 것이지만 바벨론으로 대표되는 악인들의 세상적 번영은 하나님의 심판으로 인하여 사라질 것임을 하박국에게 보여 주신다.
하박국 3장에 기록된 기도는 불경건한 자의 운명과 의인의 승리로 얻는 보상에 대한 생생한 묘사로 그 절정을 이룬다.

이 대조를 통해서 의인들이 믿음으로 하나님께 순복하면 생명을 얻게 되는 반면에 악인들과 마찬가지로 갈대아인들의 의기양양한 교만심이 그들을 어떻게 죽음으로 몰아가는가를 하박국에게 보여 주시려는 것이 하나님의 목적이었다.
성결과 믿음을 강조하기 때문에 하박국은 이사야와 함께 복음 선지자로 여겨지고 있다.

욥기서가 왜 하나님께서 성도들에게 고난을 허락하시는가하는 문제에 대한 해답을 준 것처럼 하박국서는 왜 하나님께서 죄인들이 번영하도록 허락하시는가하는 문제에 해답을 준다.

하박국은 하나님을 진심으로 사랑하고 의인들의 승리를 간절히 바라지만, 왜 하나님께서 유다의 범죄와 배교를 벌하시거나 간섭하지 않으시고 표면상 묵과하시는 것처럼 보이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합 1:1-4; 렘 12:1).
하나님께서는 유다의 악한 길들을 그치게 하시고 징벌하실 계획을 가지고 계시며, 그 계획을 이루시기 위하여 갈대아인들을 도구로 쓰실 것임을 하박국에게 알려 주신다(합 1:5-11; 사 10:5-16).

이 설명은 하박국의 마음에 또 하나의 문제를 야기시킨다.
하나님께서 유다를 징벌하시기 위하여 어떻게 유다보다 더 악한 나라를 사용하실 수 있으실까?
그런 계획이 어떻게 하나님의 공의와 조화될 수 있을 것인가?(합 1:12-17)

조급하기는 하지만 순수하고 진지하게 하박국은 하나님의 대답을 요청한다(합 2:1).
잠간동안 하박국의 조급한 요청을 묵과하신 후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유다에 대한 당신의 목적이 확실함을 보증하신다(합 2:2, 3).
그리고 하박국에게 겸비와 믿음이 필요함을 지적하신다(합 2:4).
하나님께서는 바벨론의 죄악들을 열거하기 시작하신다.
하나님께서는 바벨론의 패역과 사악함을 다 알고 계시며 당신께서 여전히 세상 만사를 주관하고 계심을 하박국에게 확신시켜 주신다.
따라서 하박국을 포함하여 모든 사람들은 그 앞에서 잠잠하여야 할 것이었다(합 2:20).
즉 그분이 지혜로 하시는 일에 대하여 의심하지 말 것이었다.

하나님의 지혜와 뜻에 감히 도전함으로서 예의의 한계선을 벗어났다는 것을 깨닫고 하박국은 겸손히 통회한다.
그러나 동시에 지상에서의 하나님의 계획에 대한 선택된 도구로서의 유다에 대한 그의 진실하고도 깊은 염려 때문에 그는 하나님의 공의가 자비로 말미암아 완화되기를 탄원한다(합 3:1, 2).

이 기도에 이어 하나님께서 신실한 자들의 구원과 그들의 적들을 멸망시키기 위해 일하고 계시는 것을 보여주는 하나님의 영광과 능력에 대한 계시가 뒤따른다(합 3:3-16).
그리하여 하박국서는 하나님의 계획의 지혜로우심과 종국적인 성공에 대한 하박국의 신념을 확인함으로써 끝마친다(합 3:17-19).

5. 개요

Ⅰ. 문제 : 유다와 바벨론에 대한 하나님의 오래 참으심 1:1-17
     1. 유다의 죄악에 대한 하박국의 불평 1:1-4
     2. 유다를 취급하시는 하나님의 계획 1:5-11
     3. 하나님의 계획에 대한 하박국의 항의 1:12-17

Ⅱ. 해결 : 하나님의 계획의 지혜와 성공에 대한 확신 2:1-20
     1. 하박국이 대답을 구함 2:1
     2. 하나님께서 당신의 계획의 지혜와 성공에 대해 확신을 갖도록 권하심 2:2-4, 20
     3. 하나님께서 바벨론의 국가적 죄들을 열거하심 2:5-19

Ⅲ. 하박국의 응답 3:1-19
     1. 하나님의 행동과 자비를 위한 중재 3:1, 2
     2. 심판과 구원에 관한 이상 3:3-16
     3. 하나님께 대한 하박국의 신앙 고백 3:17-19


[특징]
본서는 일종의 신앙변증서라고 할 수 있을만큼 중요한 신학사상을 담고 있는 책이다. 즉 본서는 일반성도들이 흔히 제기하는 문제를 포괄하고 있는데 이것이 믿음 안에서 해결받고 승리한다는 것이다. 본서만큼 진지하고 힘있게 증거하고 있는 책은 구약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다.

[목적]
하박국이 본 서를 기록할 당시의 상황은 상대국들끼리의 싸움으로 인해 불안한 상황이 계속되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고통당하는 유대인들이 어떠한 삶(합2:4)을 살아야 될 것인가를 일러주기 위함이다. 하박국은 지금 당하는 고난을 피하기보다는 믿음으로 극복할 것을 호소하고 있는 것이다. 불공평해 보이는 세상~악인이 잘되고 의인이 고난당하는 현실 ~에 대해 하나님께 불평을 토로하는 하박국은 결국 하나님의 공의로우심이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현재 당하는 고난을 극복하며, 이스라엘의 하나님인 여호와를 의지하는 삶을 살 때 의인은 구원을 얻을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 주고 있는 것이다. 악함을 보시고 결코 방관만 하시는 하나님이 아니시며 그들에게 심판을 내리시는 하나님이심을 말하고 있다. 그리고 역사는 하나님의 절대 주권적인 사역 안에서 이루어진다는 사실임을 깨닫고 믿음으로 정진할 것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구조]
하박국은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눠진다. 즉 하박국의 질문(1,2장)과 하박국의 찬양(3장)이다. 전자에는 시험받는 신앙, 후자에는 승리하는 신앙을 밝혀 주고 있다. 오늘날의 세상은 하박국이 살던 시대보다 훨씬 더 악한다. 때문에 우리는 본서에 드러난 하나님의 역사 운영의 원리를 깨달아 흔들리지 말고"오직 믿음'으로 살아야 한다."믿음으로 말미암아 산다'는 것은, 직접적으로는 마침내 의인은 믿음으로써 영생을 얻을 것을 가리키며, 간접적으로는 의인은 그 어떤 경우에도 믿음의 원칙대로 살아야 할 것을 의미한다 하겠다.

[내용]
하박국은 유다에 죄가 창궐하는 것을 보았을 때 하나님께서 아무 것도 하지 않으시는 것처럼 보여 이를 불평했다. 하나님께서 선지자에게 유다의 심판을 위해 바벨론을 준비하고 있는 것을 보여 주셨을 때 하박국은 더 큰 의문이 생겼다.'어떻게 거룩하신 하나님께서 역사하실 때 거룩치 못한 것을 쓰실 수 있을까?' 하나님께서는 대답하시길 침입자들은 적절한 때에 자기 자신들의 죄로 심판을 받으며 하나님께서 이 민족을 쓰신다고 이것이 유다 민족의 정당성을 입증해 주거나 핑계가 될 수 없다고 했다. 하나님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사람은 누구든지 쓰실 수 있고 또 쓰실 것이다. 그러나 모든 사람은 그래도 자기 자신의 선택에 대한 책임을 지는 것이다.하나님께서는 정직한 의문에 대해서 답하셨다. 하박국은 결코 이 때문에 책망받지 않았다. 그러나 사람이 '하나님은 이러이러한 분이시다. 스스로 정하신 후에 하나님이 바꾸실 수는 없다'하고 단정적으로 생각하는 것은 위험한 일이다. 하나님께서는 결코 하나님의 품성을 범하시지 않지만 하나님은 하나님의 방법으로 무엇이든 하십니다.

[교훈]
* 역사적인 교훈: 악한 갈대아인을 심판하시고 그 의로우심을 나타내심으로서 유다의 신실한 자를 위로하시는 하나님의 모습을 보게 된다.
* 교리적인 교훈: 악은 그 스스로 자멸을 가져온다는 사실과 반대로 의로운 자의 고통은 하나님의 훈련의 한 방법이며 의인은 믿음으로 산다는 사실을 가르쳐 준다. 특히 '의인은 그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는 말씀은 신약시대와 지금에 이르기까지 그리스도인의 삶을 변화시키는데 큰 역할을 하였다.
* 기독론적인 교훈: 본서에서 그리스도는 '거룩한 자'(1:12), 믿음에 의하여 의인을 의롭다 하시는 자(2:4), 물이 바다를 덮음같이 여호와의 영광을 인정하는 것으로 언젠가 세상을 충만케 하실 자(2:14)로 증거되어 있다.





1. 구약 역사서의 구조 및 연대별 정리

성경을 읽는 것만으로 분열왕국 시대을 이해하기는 상당히 복잡하다.
그 이유는 남유다와 북이스라엘의 여러 왕들이 열왕기서와 역대서에 분산되어 있기 때문이며, 열왕기서에서 남유다와 북이스라엘 왕이 번갈아가면서 소개되는 순서는 왕이 등극한 순서이며 완전히 역사적 순서로 기록된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또한 해당 시대에 활동한 선지자들(3개 대선지서, 9개 선지서, 별도 선지서가 없는 여러 명; 아래 참조)이 또한 남유다/북이스라엘의 어떤 왕들과 연관이 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본 글에서는 복잡하게 되어 있는 구약의 역사서 부분을 여러 측면에서 구조적으로 정리하고 있다.

 분열왕국 시대와 연관이 있는 3개 대선지서 : 이사야, 예레미야/예레미야애가 (에스겔과 다니엘은 포로시대 선지서로 분류)
 9개 소선지서 : 호욜암 옵욘미 나합습 (12개 소선지서 중 마지막 학슥말 3개는 포로귀환 시대 선지서로 분류)
 별도 선지서로 구분되지 않는 선지자 : 엘리야, 엘리사를 포함한 여러 명의 선지자들이 열왕기서에 언급되고 있음

    역사서의 성경적 구조

    선지자들 중에서도 열왕기서에는 북이스라엘에서 활동한 엘리야와 엘리사의 이야기가 많은 분량을 차지하고 있다. 이사야와 예레미야 등은 별도의 성경을 통해 그 행적이 기록되어 있으나 엘리야와 엘리사에 대해서는 열왕기서에만 언급되고 있다. 참고로, 위 표에서 12명이라고 언급된 선지자는 별도의 선지서로 언급되는 선지자들의 목록과는 다른 12명이다.

    역사서의 시대적 구분

    북이스라엘의 왕들은 열왕기서에만 언급되고 역대상에서는 언급되지 않는다(남유다 왕과 관계가 있는 일부 북이스라엘 왕들의 이야기가 나오긴 함). 역대기는 이스라엘 포로 귀환 후에 쓰였는데, 이미 멸망한 북이스라엘의 왕조에 대한 내용을 언급할 필요가 없었던 이유이다. 성경의 분열왕국 시대를 읽을 때 두 역사서를 함께 대조해보는 것이 도움이 될 수 있다. 오늘날 성경에는 소제목들이 붙어 있는데, 가령 열왕기상 14장 21절부터에는 "유다 왕 르호보암 (대하 11:5-12:15)"라는 소제목이 붙어 있다. 이 소제목을 참고하면 열왕기서와 역대서를 대조하며 읽을 수 있다.

    역사서의 주요 내용

    솔로몬의 우상숭배로 인해 하나님은 나라를 분열할 것을 말씀하셨고 그 일을 계획적으로 행하셨다. 하나님은 북이스라엘을 10지파를 여로보암에게 붙여주시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면 왕조를 견고히 세워주시겠다고 약속하셨다. 하지만 북이스라엘의 첫 왕인 여로보암은 시작부터 금송아지를 만들고 산당을 세워 백성들로 하여금 우상을 숭배하게 하였다. 우상을 숭배하고 끊임 없이 악을 행해 온 북이스라엘에서는 끊임 없는 반역으로 왕권이 계속 교체되었으며, 나라가 평안할 날이 없었다. 남유다에서 한 왕조의 12명의 왕이 다스리는 기간(르호보암 ~ 아하스) 동안 북이스라엘에서는 9왕조에서 19왕이 출현하였다. 결국 하나님은 북이스라엘을 앗수르에게 넘겨주셨으며, 북이스라엘은 역사에서 사라지게 된다. 남유다 또한 첫 왕인 르호보암부터 우상숭배를 하며 악한 길을 걸었으나 남유다에는 우상을 파하며 하나님이 말씀 앞에 바로 서고자 나라를 개혁하고자 한 8명의 선한 왕이 있었다. 남유다에서는 다윗의 후손으로만 계속 왕위가 계승될 수 있었으며(한 왕조 유지), 후에 남유다가 바벨론에 패하여 포로가 되었을 때에도 왕조는 곧바로 멸망되지 않았다. 다윗 가문 19대 왕이었던 여호와긴은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갔으나 바벨론에서 왕의 대접을 받으며 다윗의 계보를 지킬 수 있었고(보통, 당시 나라가 빼앗기면 왕의 일가 친척을 몰살당함), 이 계보에서 나중에 예수님이 태어난다. 이는 하나님께서 다윗과 맺으신 언약을 지키시기 위함이었으며, 다윗의 자손에서 메시야가 나올 것에 대한 약속을 이루기 위함이었다.

    연대표

    열왕기서는 남유다와 북이스라엘 왕이 번갈아가면서 소개되는데 이 순서는 왕이 등극한 순서이다.
    하지만 완전히 역사적 순서로 기록된 것은 아니기 때문에 아래 연대표에서 볼 수 있는 것과 같은 시각적인 시간 순서를 참고하지 않고는 성경을 보는 것만으로 이해하기 쉽지 않다.
    노란색으로 된 부분은 선자자들이 살았던 시기이다.


    아래는 위 연대표에서 여호사밧(4대)에서 아달랴(7대) 시대에 대한 내용이다(위 도표에서 좌우 화살표로 표시).


    오므리 왕조 이야기(열왕기상 16장 후반 ~ 열왕기하 11장)

    남유다의 여호사밧(4대)은 선한 왕이었으나 북이스라엘과 화평하기 위하여 북이스라엘의 매우 악한 왕 아합(왕비 이사벨)과 사돈을 맺는 일을 저질렀다.
    아합의 딸 아달랴(7대)는 여호사밧의 아들 여호람(5대)과 결혼하며 북이스라엘의 악한 행실을 남유다로 들여온다.
    아사(3대)와 여호사밧(4대) 왕은 선한 왕이었으나, 여호사밧 이후의 왕들은 우상을 숭배하고 악행을 저지르게 된다.
    한편 북이스라엘에서는 악한 왕 아합 가문을 몰아내시기 위해 하나님께서 선지자 엘리사를 통해 예후에게 기름을 부으셨고, 예후는 아합의 모든 집안을 멸절하여 스스로 북이스라엘의 왕이 되었다.
    이 과정에서 남유다의 아하시야(6대) 왕을 포함한 여호람(5대)의 다른 아들들도 모두 예후에게 죽게 된다. 
    이를 기회로 삼아 남유다의 왕권을 잡은 아달랴(7대)는 아합의 후예를 일으키고자 다윗 가문의 씨를 모조리 죽이려는 악행을 시도하였다.
    다윗의 자손 가운데서 장차 왕으로 오실 메시야가 나오는 것을 방해하기 위한 사단의 계략이 배후에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여호람(5대)의 딸이자 제사장 여호야다의 아내인 여호세바가 아기였던 조카 요아스를 숨겨주었고, 요아스는 다윗 가문의 유일한 생존자가 되었다.
    6년 후, 제사장 여호야다는 반역을 일으켜 아달랴를 몰아내며 7살인 요아스(8대)를 왕위에 앉혔다.
    제사장 여호야다가 살아있는 동안 나라가 부흥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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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훔(Nahum) 충분한 위로 / 08-05-2023(토)



    요나서와 나훔서 소개

    피터 림(Peter Lim) 박사는 요나서와 나훔서를 소개하며 하나님의 원대한 사명에 대한 메시지와 세상의 모든 민족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을 강조합니다.

    선교대학원의 글로벌 리더십 개발학의 부교수입니다.
    기독교 구약성경의 소예언서 섹션에 있는 책 두 권 요나와 나훔을 리더십 개발의 관점에서 소개하겠습니다.

    나훔은 칠십인역(헬라어로 번역된 히브리 성서)에서 요나서 바로 뒤에 나옵니다.
    이 순서는 꽤 적절합니다.
    특히 요나와 나훔 둘 다 자신의 사역에서 니느웨의 멸망을 발표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하지만 서로 다른 청중에게 전했습니다.

    요나는 나훔보다 한 세기 전에 니느웨에 있는 앗수르 사람들에게 이 소식을 전했습니다.
    나훔은 기원전 7 세기에 남유다 왕국에 이 소식을 전했습니다.
    그들의 압제자가 곧 멸망할 것을 전하며 그들을 위로했습니다.
    이때쯤 앗수르는 이미 유다의 이웃인 이스라엘 왕국을 지도에서 지웠습니다.
    앗수르의 정치 지도력에 대해서 하나님이 가지고 있던 문제는 청렴과 잔학함이었습니다.
    이는 나훔서 3 장 1 절에서 4 절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 시대의 초강대국으로서 앗수르 사람들은 다른 나라를 속였습니다.
    다른 나라를 소멸시키고 스스로를 더 위대하게 만들기 위해 조약과 약속을 어겼습니다.
    무고한 피를 흘리게함으로써 인간의 삶을 무시했습니다.
    이는 구약성경 전반에서 하나님이 경고하시는 심각한 범죄입니다.
    모든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 대로 창조되었기 때문입니다.
    한편 요나는 니느웨에서 이 메시지를 전했을 때 종교 지도자의 역할을 하고 있었습니다.
    우리 시대의 복음주의자들과 흡사합니다.
    그러나 그의 의도는 구원 대신 파멸에 있었습니다.
    오늘날 우리 기독교 지도자들 중 일부는 이슬람 혐오증을 조장하고, 이슬람교도들이 미국으로 오는 것을 금지하는 방법까지 제안합니다.
    그들은 요나가 저지른 실수를 반복하고 있습니다.
    세상은 변했지만 예수님은 결코 변하지 않으십니다.
    선교는 더 이상 서에서 동으로, 북에서 남으로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이제 선교는 어디에서나 시작되고, 어느 곳에서나 갑니다.
    좋든 싫든 우리가 있는 곳은 이제 선교의 장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미움이 아닌 하나님의 사랑을 --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세상과 나눌 수 있는 기회를 주셨습니다.
    선지자를 지도자라고 부르기를 꺼려합니다.
    하나님이 선지자를 종으로 부르셨다고 믿습니다.

    로버트 그린리프는 자신의 저서 "서번트 리더십"에서 섬기는 지도자는 먼저 하인이라고 말합니다.
    섬기는 지도자가 되는 것은 봉사하고자 하는 자연스러운 감정에서 시작됩니다.
    먼저 봉사하고자 하는 감정에서요.
    그린리프는 가장 효율적이지만, 가장 하기 어려운 시험은 다음과 같다고 말합니다.
    "섬김을 받은 사람들이 사람으로서 성장하는가? 섬김을 받는 동안 더 건강해지고, 더 현명해지고, 더 자유로워지는가? 더 자율적이고, 그들 자신이 섬길 가능성이 더 높아졌는가?"
    저는 이것이 예언사역에 잘 맞는다고 생각합니다.
    요나는 그렇게 했습니다.
    결과에 감사하지는 않았지만요.
    요나의 이야기는 선한 사마리아인의 이야기와 매우 흡사합니다.
    둘 다 질문으로 끝납니다.
    "하물며 이 큰 성읍 니느웨에는 좌우를 분변하지 못하는 자가 십이만여 명이요 가축도 많이 있나니 내가 어찌 아끼지  아니하겠느냐 하시니라" 주님의 말씀입니다.


    나훔의 연대를 결정하는데 있어서 매우 중요한 근거가 되는 두 사건이 있다.


    하나는 노아몬(Thebes, 애굽 제18왕조 시대의 수도)의 함락(661년)이다.
    다른 하나는 니느웨의 함락이다(612년).

    나훔의 활동 시대는 이 두 사건의 중간 시대일 것이다.
    본서 나훔 3:8-10을 보면 노아몬의 함락이 과거사로 기록이 되어있는데 노아몬은 661년에 앗수르왕 아술버니팔 (Ashurb- anipal) 에게 점령되었다.
    또 본서에는 니느웨가 함락 되던일을 목격자 처럼 묘사해 있는데 니느웨는 612년에 바벨론왕 나보폴라살(Nabopolassar)이 함락 시켰다.
    그러므 로 나훔은 661년과 612년 사이에 활동한 것으로 추정된다.
    전설에 의하면 나훔은 메소보다미아에서 살다가 거기서 죽었다고 되어있으나 본서에 의하면 그는 유대인이며 유다에서 활동한 예언자이다.


    사람 인(人)


    믿을 신(信)
    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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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세기 말 영국에서활동한 조지 프레드릭 왓츠(George Frederic Watts)의 이 그림은 2004년 미국 대통령 오바마가 보고 감동을 받아 대권에 도전할 마음을 먹었다고 해서 유명해졌다.

    오바마는 이 그림을 소개하며 미국은 "담대한 희망"을 가져야 한다고 외쳤다.
    그림을 가만히 보면 한 여인이 둥근 공 위에서 슬픈 듯이 고래를 숙인 채 하프를 연주하고 있다.
    여인은 하프에 기대어 앉아 가까스로 연주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녀의 눈은 가려져 있고, 하프는 쇠사슬에 묶여 있다.
    자세히 보면 47개의 줄 중에 마지막 한 줄만 남은 상황이다.
    이 여인이 앉아 있는 공을 화가는 무엇으로 묘사했는가?
    바로 지구다.
    지구 위에 고독하게 앉아 있는 여인, 볼수도 없고 몸을 마음대로 움직일 수도 없다.
    그러나 하프를 연주해야 한다.
    지구에서 내 사정을 알아주는 이가 아무도 없고, 더 이상 버틸 힘도 없는 상태.
    그런데 이 그림의 제목이 ‘희망!’이다.
    절망이라고 이름 붙여야 할 것 같은데 희망이라니, 그것도 아직 한 가닥의 하프 줄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

    한 가닥으로도 연주는 계속할 수 있다는 것이다.
    정말 한 가닥으로 연주가 가능한가?
    클래식 음악 중에 잘 알려진 곡으로 G선상의 아리아 라는 작품이 있다.
    왜 그 곳이 ‘G선상의 아리아’일까?
    이 작품은 바이올린의 4개의 현 중 ‘G선’이라는 하나의 줄로만 연주하는 곡이다.
    하나의 선으로만 연주해도 얼마나 아름다운지 모른다.
    이처럼 우리의 삶이 한 가닥만 남겨진 하프와 같아도 괜찮다.
    내가 붙들 것이 하나밖에 없어도 우리는 충분히 인생을 아름답게 연주할 수 있다.
    더욱이 우리에게는 마지막 한 가닥이 되어 주시는 주님이 있다.
    세상에서 유일하게 내 편이 되어 주시는 여호와 하나님이 끝까지 우리 곁에 있다는 것이 얼마나 큰 위로인지 모른다.


    희망, 조지 프레드릭 와츠

    희망 뒤에 있는 희망은 없다.

    절망 뒤에만 희망이 존재한다

    '희망 Hope', 조지 프레드릭 와츠 George Frederic Watts, 1886년, 캔버스에 유채, 142.2 x 111.8 cm, 두 번째 버전, 현재 영국 런던 테이트 브리튼 Tate Britain에서 전시 중.

    실명을 나타내는 붕대 감은 눈먼 장님, 한 줄 남고 모두 끊어진 류트, 무엇인가 소리를 들으려고 고개 숙여 귀 기울이고 있지만 그녀의 노력은 지쳐갑니다.
    희망이라 말하기에는 너무 가혹하달까?
    슬픔이나 황폐함, 절망에 가까운 블루, 우울의 색조가 지배하고 있는 미지의 별 위에 앉은 그녀, 초록과 파란색의 우울한 렌더링은 불과 5년 후 악명 높은 피카소의 청색시대를 예고하기도 합니다.
    그래도 류트에 현 한 줄은 남았지, 노래하기에는 아직도 희망은 있지, '희망을 가져요, 테이크 호프!' 엄밀함과 순수를 숭상하는 '하이 아트'의 와츠 그림 중에서 아마도 가장 서정적이고 시적이며 기억에 남을만한 작품입니다.

    희망을 가져라, Take Hope!

    '희망'. 눈가리개를 쓰고 거대한 오렌지 같은 별 위에 앉아 희망의 끈을 놓지 않는 소녀, 끈이 끊긴 한 가닥 남은 류트를 안고 절망 속에서도 아직도 희망을 잃지 않고 무엇인가 귀 기울이는 이 버전의 유화는 11년 후 영국 전역에 순회 전시에 나섰다. 1959년에는 자유의 행진에서 마틴 루서 킹 Martin Luther King 목사의 연설 주제로 등장했다. 1990년에는 젊은 청년 버락 오바마 Barack Obama는 자신이 출석하는 시카고 연합교회에서 이 그림을 만나 충격을 받았다. '희망을 가져라, Take Hope!, 오바마가 외치던 2004년 민주당 전당대회 대통령 후보 수락 연설'희망'의 열광적인 제목이 되었고, 2년 뒤 그의 베스트셀러의 선언문 메시지 제목이 되었다.
    희망을 가져라 Take Hope!,
    이 그림 한 장은 절망 속에서도 희망을 찾아 몸부림치는 민중에게 세상을 움직이는 그림이 되었다. ​​

    조지 프레더릭 왓츠의 ‘희망’

    누가 나를 위로해 주나

    저 소녀, 각박한 현실에 뒤통수를 맞았을까요, 냉정한 사랑에 상처 입었을까요? 어찌 됐건 지독한 상실감에 세상과 맞서지도 못하고 세상 밖으로 도망 나와 자기 자신 속으로 숨어들고 있습니다.

    남루하지만 소녀의 옷이 섬세하기도 하지요? 누추한 옷이지만, 어떤 화사한 옷보다도 소녀를 아름답게 드러내고 있습니다. 아마도 작가는 단애의 끝에서 통곡도 잊은 채 지칠 대로 지쳐있는 소녀의 마음과 공명하고 있는 게 분명합니다. 작가는 꿈을 잃어버린 아픈 자리에서 보지도 않고 울지도 않고 말하지도 않고 걷지도 않고 맨 발의 곡옥(曲玉) 자세로 현이 끊어진 수금에 고개를 기대고 있는 소녀의 마음을 알고 느끼고 사랑하고 있는 거지요.

    악기는 사람을 닮습니다. 현이 끊어진 수금은 바로 저 소녀의 마음일 겁니다. 기댈 것이라곤 제대로 된 소리를 내지 못하는 수금밖에 없네요, 저 소녀는! 슬픔과 고독을 수금에 실어보고 싶었으나 끊어진 수금은 제대로 된 소리를 낼 줄 모르니 또다시 억장이 무너집니다. 단장(斷腸)이라 해도 좋을 깊디깊은 절망감이 그대로 전해집니다. 그럴수록 소녀는 자기 자신 속으로 아득히 숨어들고 있습니다. 저 풍경이 도피일까요, 치유일까요?

        1886   142112

    조지 프레더릭 왓츠 ‘희망’ 1886년, 캔버스에 유채, 142×112㎝, 테이트 브리튼, 런던

    소녀의 눈을 보십시오. 흰 천으로 눈을 가리고 있습니다. 보지 않는 거지요. 그거 아십니까? 진정으로 보아야 할 것만 보는 신전의 사제들은 대부분 장님이었다는 것을. 오이디푸스의 운명의 실타래를 풀게 도와주는 타이리시아스가 장님이었던 것은 우연이 아닐 겁니다. 상처 받았다고 느낄 때는 더더욱 눈에 보이는 것에 끌려 다녀서는 안 됩니다. 그러면 아예 희망이 없으니까요. 그 때는 오히려 바깥으로 향하는 모든 시선을 차단하고 자기 숨소리를 들어야 합니다. 도피는 치유는 아니지만, 종종 도피가 치유의 시작이 되기도 합니다.

    소녀가 구(球) 위에 올라앉아 있습니다. 저 원은 지구인가요? 그럴 수도 있겠으나 그보다는 상처 입은 소녀의 마음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는 부드러운 선이라 느껴집니다. 나는, 어린 나이에 지쳐버린 소녀를 무심하게 드러내는 저 구가 동굴 같습니다. 넘어지고 미끄러지고 헛디디다 상처투성이가 된 내가 세상 밖으로 도망 나와 자신을 숨기는 자신 속의 동굴 말입니다.

    동굴의 시간을 가져보셨습니까? 그 시간은 새롭게 시작하는 시간이 아니라 접는 시간입니다. 행동하는 시간이 아니라 머무는, 혹은 미친 듯 떠도는 시간이지요. 웃고 떠드는 시간이 아니라 침묵하는 시간이고, 비판하는 시간이 아니라 참회하는 시간입니다. 그 동굴의 시간이야말로 자신을 동굴로 숨어들게 했던 두려움으로부터 걸어 나올 수 있는 힘을 비축케 하는 시간이기도 합니다.

    저 그림을 보고 있으면 심지가 굳은 내 친구가 겹쳐집니다. 끊어진 수금 대신 말 못하는 강아지를 안고 위로를 받았던 외유내강형의 친구가. 친구의 강아지 초롱이가 세상을 떠났을 때 나는 난생 처음으로 개 문상을 다녀왔습니다. 슬픔에 찬 친구의 얼굴을 보면서 뒤통수를 얻어맞은 기분이었지요. 아, 이 친구는 한 마리 개를 잃은 게 아니라 가족을 잃었구나, 초롱이와 함께 보낸 한 시절을 보내고 있구나!

    “나는 우리가 초롱이를 돌봐준다고 생각했었는데, 실은 초롱이가 우리를 지켜줬던 거야. 한참 어려울 때 집안에 들어온 강아지거든. 힘들어서 집에 들어가 그저 핸드백을 툭, 던져놓고 20분씩, 30분씩 초롱이를 안고 있었던 적이 참 많아. 그러면 초롱이는 내 아픔을 아는지 숨소리도 내지 않고 가만히 있어주는 거야. 생각해보면 그게 내겐 기도였던 거 같아. 초롱이는 울 수조차 없을 때 가장 낮은 자리에서 편안히 나를 위로해준 사랑이었어!”

    희망은 그렇게 예기치 않았던 낮고 어두운 자리에서 싹을 틔웁니다. 우리에게는 동굴의 시간이 필요합니다. 보지 않고 듣지 않고 말하지 않고 견디는 시간이. 제대로도 흐르지 못하는 눈물이 주르르 흘러내릴 때까지, 과거의 상처 때문에 두려워했던 것의 실체를 대면할 수 있는 용기가 생길 때까지.




    역사(歷史)의 교훈(敎訓)

    역사의 교훈은 무엇인가?

    역사라는 말은 단순히 “이야기”라는 뜻의 story가 아니고 history이다.
    history는 어원상 역사학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헤로도토스의 『historia』에서 유래했다.
    historia는 histor를 어원으로 하는데, histor는 나라에 중대한 일이 발생했을 때 자문을 구했던 학식이 깊은 연장자, 즉 현자를 뜻한다.
    따라서 역사 history는 “현자의 이야기”라는 뜻을 갖는다.
    이렇게 역사는 단순한 이야기도 아니고 아무나 할 수 있는 이야기가 아니라 오직 깊은 학식이 있는 연장자만이 들려 줄 수 있는 이야기이다.
    즉 역사는 단순한 사건의 나열이 아니라 그것은 현자만이 가질 수 있는 통찰이 담긴 이야기인 것이다.
    다시 말해서 역사는 사건이나 사실이 아니라 그러한 사건과 사실에 대한 해석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역사는 해석된 사실이고, 역사학은 그러한 해석을 통한 과학, 즉 주관성의 과학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이러한 역사가 우리에게 주는 의미는 무엇인가?
    즉 역사의 교훈은 무어라고 말할 수 있는가?

    첫째로 역사는 윤리를 상기시킨다.

    역사는 시험을 치기 위해서 외우는, 나의 삶과 아무 관련이 없는 그런 지식 나부랭이가 아니다.
    하나의 역사적 사건은 우리에게 여러 가지 의미지평, 즉 당시의 경제적 여건으로부터 문화, 사회, 심지어 윤리적이고 철학적인 의미까지 보여 준다.
    그리고 역사가 보여 주는 그러한 중층의 의미지평 속에서 우리는 삶과 인간성, 나아가 어떻게 살 것인가 라는 성찰을 하게 된다.
    즉 역사는 우리에게 인간의 삶에 대한 성찰, 즉 윤리를 상기시키는 것이다.

    예를 들어 보자.
    1592년 발발한 임진왜란은 이미 여러 지식인들, 특히 이율곡의 ‘십만양병설’로 예견되었던 전쟁이었다.
    일본의 동정을 파악하기 위해 보냈던 조선통신사가 일본 천황으로부터 받은 외교문서에는 “정명가도”(征明假道), 즉 명을 칠 테니 길을
    비키라는 침략의도가 드러나는 문구가 있었다.
    그럼에도 동인은 서인이 자신들의 정치적 위기를 모면하기 위해 왜를 이용한다고 생각하여 이를 당파적 정략으로 생각하였다.
    그래서 왜가 쳐들어 왔을 때 부산성을 사수하던 정발 장군은 전사하고 성을 빼앗겼고, 이튿날 동래에 진격한 왜군에 맞서 동래부사 송상현 이하 군민들이 항전했으나 순국했다.
    부산과 동래를 함락시킨 왜는 파죽지세로 서울로 북상해 들어왔고, 왜군이 침략한 지 보름만에 서울이 위험하게 되었다.
    충주에서 신립의 패전보가 전해지자 선조는 도성을 버리고 피란길에 올랐다.
    왕이 도성을 버린 게 알려지자 민심은 흉흉해져 민란이 일고, 공사노비의 문적이 있는 장례원과 형조의 건물을 불태우고 창덕궁과 창경궁의 궁궐과 관청에 들어가 약탈해갔다.
    개성에서 평양, 평양에서 임진강, 그리고 임진강의 방어선도 무너지자 선조는 의주로 향했고, 급히 명에 원병을 요청했다.
    그리고 차일피일 미루고 있던 왕세자 책봉을 광해로 하고, 광해군은 의병과 군량의 확보에 열중하도록 했다.
    이렇게 육군이 수세로 몰리고 있을 때 해군은 전라도 해안으로 진출한 왜군을 무찌르고 있었다.
    조선수군의 편제는 고려시대부터 왜구 방어위주로 잘 정비되어 각 도의 수영(水營)을 근간으로 했다.
    물론 경상 좌수영과 우수영은 싸움도 제대로 해보지 못한 채 대패했지만 전라좌수영 수군절도사 이순신은 옥포해전의 첫 승리를 필두로, 당포, 당항포, 한산도, 부산 등지에서 계속 전과를 거두었다.
    이때 전과를 거둔 이유는 거북선이라는 함선에 있다고 말해지는데, 거북선은 태종 때 기록으로 처음 전해지지만 이순신의 고안에 의해 새롭게 건조된 것으로 알려진다.
    또한 전국 각지에서 일어난 의병과 승병, 즉 곽재우, 정인홍, 고경명, 김천일, 조헌, 정문부 그리고 휴정, 유정 등이 진주싸움 등지에서 왜병에 큰 타격을 주었다.
    그리고 명의 원군의 도움을 받아 행주산성에서 권율이 왜를 물리치자 서울에서 철수했고, 이후 두 번의 진주성 싸움이 있은 후 왜는 강화회담을 제안했다.
    결국 회담이 결렬되어 정유재란이 발발했으나 왜는 북진하지 못했고, 수군에서는 이순신이 소극적이라는 죄목으로 하옥되어 원균이 그 후임을 맡았으나 수군이 전멸하자 이순신이 다시 수군통제사로 임명되어 명량대첩에서 승리하였다.
    이후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죽자 왜는 총퇴각하기 시작했는데, 이때 노량대첩에서 이순신은 최후를 맞는다.

    임진왜란의 역사에서 우리가 보게 되는 것은, 자신의 이익을 돌보느라 진실을 외면하여 전쟁을 불러온 당시 당쟁으로 얼룩진 위정자들의 파렴치, 심지어 궁궐을 버리고 피란을 가는 선조의 무책임함, 게다가 거기서 버려진 민초들의 고통과 그것이 야기한 궁궐방화사건, 뿐만 아니라 전쟁의 폐색을 염려하여 왕의 신변을 위해 왕세자 책봉을 서두른 일, 그 가운데 이순신이 수군을 통제하고 전과를 이루었으나 또한 소극적이라 하여 하옥된 일, 그는 홀로 영웅이었던 것으로 보이고 결국 노량에서 죽음을 맞는다.
    여기서 위정자들의 파렴치와 민초의 고통, 선조와 이순신에게서 보이는 인간성의 문제, 선으로 향하기 보다 악으로 빠지는 인간의 윤리성에 대한 문제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이렇게 역사는 우리에게 하나의 사건을 통해 인간과 삶 그리고 그 의미와 윤리까지 총체적으로 생각해 보게 만든다.

    다른 예로 영국의 헨리8세를 보자.

    그는 15세기 영국의 절대주의 시대의 왕이다.
    르네상스 이후 인간성에 대해 눈뜨면서 유럽은 종교로 통일되어 있던 중세를 벗어나 국가라는 개념이 싹트기 시작했다.
    이에 국가의 수반으로서 왕은 절대적인 권위를 누렸는데, “짐이 곧 국가다”라는 루이14세의 말처럼 왕의 권력은 신이 그에게 부여한 절대적 파워를 가졌다.
    이러한 시대에 헨리8세는 형의 미망인이었던 캐서린과 결혼했는데, 스페인과의 정치적 관계를 고려한 부왕에 의한 정략적 결혼이었다. 그러나 캐서린이 딸 메리 튜터밖에 두지 못했고 그러한 가운데 헨리는 그녀의 시녀였던 앤 불린을 사랑하게 된다.
    그는 양심의 가책을 이유로 20년만에 이혼을 신청하는데 가톨릭 교회가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에 헨리8세는 로마 가톨릭과 단절하고 영국 국교회, 즉 성공회를 탄생시키는데 이것이 영국에 있어서의 종교개혁이다.
    대륙에서는 루터와 칼뱅에 의해 엄청난 희생을 치르고 이룩되는 종교개혁이 영국에서는 한 사람의 왕의 개인적인 사랑의 치정으로 인해 이루어졌다는 것이 아이러니하고, 그것은 또한 당시의 절대왕의 힘이 얼마나 막강한 것이었는지를 보여 준다.
    헨리8세는 교회뿐만 아니라 대법관으로 임명하는 등의 신뢰를 보였던 토마스 모어에 대해서도 자신의 이혼에 반대했다는 이유로 관직에 해직되어 반역죄를 이유로 런던탑에 갇혔다가 단두대의 이슬로 사라지게 했다.
    그러나 그렇게 결혼한 앤 불린은 전처소생인 메리에게 쌀쌀맞게 대했고 딸 하나를 낳은 후 연속으로 두 아들을 사산하자 헨리는 그녀를 불륜과 외도의 누명을 씌워 사형에 처한다.
    세 번째 왕비도 아들을 낳았지만 산욕열로 죽고, 네 번째 부인은 독일과의 친선을 위해 들였으나 금방 이혼하고, 앤 불린의 사촌누이였던 하워즈를 들여 좋아했으나 근위대 시종과 외도한 것이 밝혀지자 참수형에 처하고 끝내 두 딸의 가정교사이자 청상과부였던 캐서린 파와 결혼한다.
    여기서 우리는 또한 절대왕이라는 시대적 조건에서 헨리의 변덕을 보며 인간성과 선악의 문제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권력의 가진 위정자들이 얼마나 파렴치할 수 있는가를 잘 드러난다.
    다음은 바스티유 감옥을 습격한 데서 시작된 프랑스 대혁명이다.
    당시 프랑스 구체제(앙시앙 레짐)는 귀족과 성직자가 대토지를 소유한 가운데 면세까지 받았지만 일반 시민과 농민은 온갖 세금에 시달려 나무껍질까지 벗겨 먹어야 할 정도로 궁핍하였다.
    90% 이상의 농민과 시민의 근로와 납세에 기생하는 이 특권층의 모순은 너무나 명백한 것이었다.
    그런데 루이16세는 미국의 독립운동과 스페인 왕위계승 전쟁을 지원하면서 재정적으로 어려워졌고, 그에 따라 성직자, 귀족, 그리고 시민의 삼부회의를 소집한다.
    이때 시민의 대표로 참석한 이들은 이른바 테니스코트 선언을 통해 영국이나 미국과 같이 시민의 권리가 인정되는 법을 통과시키고자 한다.
    왕과 귀족은 이를 인정하려 하지 않고 두려워했다.
    이에 이들을 무력으로 진압하려 했는데 그러자 분노한 시민들이 바스티유 감옥을 습격하여 국왕의 군대를 공격하여 무기를 빼앗아
    죄수를 풀어주었다.
    바스티유 습격에서 시작된 프랑스 혁명은 기득권층에 대한 불만이나 부르주아의 선동 때문에 일어났다기 보다는 루소의 “자연으로 돌아가라”라는 선언에 평등사회를 추구하여 불평등 사회에 저항하는 사회개혁 의지가 표출된 것이다.
    이러한 저항의 물결은 농촌으로 이어져 농민들이 귀족의 저택을 습격하고 전국은 혁명의 소용돌이에 빠지게 되었다.
    이때 선언된 것이 바로 ‘인권선언’인데, 바로 시민의 자유와 평등을 인정하고 귀족은 그들의 특권을 버려야 하며 국가의 권력은 왕으로부터가 아니라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는 것이다.
    이에 영주제를 폐지하고 봉건적 특권층이 폐지되었음을 선언한다.
    이러한 인권선언을 용납할 수 없었던 왕은 도피하여 왕비의 모국인 오스트리아로 가서 프랑스를 반격하고자 할 계획을 세우는데, 마침 참모였던 미라보의 죽음으로 실패하고 만다.
    왕이 다시 프랑스로 끌려오면서 국민을 버린 왕을 존경할 사람은 한 사람도 없었다.
    이에 왕의 단두대 처형을 두고 강경파와 보수파 간의 대립이 격했다.
    강경파는 점차 파리코뮌(자치 시회)를 만들면서 시민 속으로 세력을 확장해 갔고, 보수파가 투표에서 패하여 왕은 단두대에서 처형된다. 이렇게 강경해진 산악파 혹은 자코뱅파는 로베스피에르를 중심으로 공포정치를 시행한다.
    왕이 처형된 프랑스를 주변의 국가들은 호시탐탐 노렸고, 외국의 공격을 받게 되면 어렵게 얻은 자유와 평등이 사라지기 때문에 프랑스 국민은 ‘라 마르셰예즈’를 부르며 자진해서 전장에 나갔다.
    혼란한 정국속에 물품을 사재거나 외국과 손잡고 혁명세력을 타도하려는 자들은 발견 즉시 단두대에 처형되었는데, 여기에 마리 앙투아네트도 끼어 있었고 1년 동안 처형된 사람의 수가 1만에 달한다.
    이러한 공포정치는 결국 “폭군을 타도하라”는 구호 속에서 로베스피에르가 처형되는 걸로 끝난다.
    이렇게 불안한 정국을 진압하고 “혁명은 끝났다”라고 외치며 군사적 독재를 확립한 것이 나폴레옹이다.
    우리가 프랑스 혁명에서 격동하는 시대적 상황과, 그 속에 얽힌 인간의 운명과 그 비극, 그러면서도 권력이 갖는 무상함 등을 느낄 수 있다.
    이러한 역사적 비감이 비슷하게 드러나는 것이 한국사에서는 구한말의 상황이 아닌가 한다.
    대원군은 안동김씨 세도정치 하에서 숨죽이며 산 사람이다.
    그는 유방의 근위대장이었던 한신이 가랑이 밑을 지나갔다는 말처럼 안동김씨의 가랑이 밑을 지나갈 만큼 모자라는 행세를 하며 지냈다. 그가 임진왜란 후에 소실되었던 경복궁을 중건했다.
    그리고 그는 난초 잘 치기로 유명했고 그가 지냈던 곳은 운현궁으로 불리며 고종이 즉위 10년 동안 합파로 치세하며 왕 위에 군림하는 일종의 세도정치를 했다.
    그러나 그는 격동의 시대적 상황에서 외세를 인정하지 않고 쇄국을 하는 방향으로 나아갔는데 그에 반해 개화에 대한 움직임도 있었다. 이러한 움직임에 가담한 것이 명성왕후 민비였는데, 그녀는 친일과 친러를 오가면서 고종의 정치적 독립과 조선의 개화를 고종에게 간하는 첫 번째 신하나 다름없었다.
    그러나 임오군란 등으로 쇄국정책을 주도하던 대원군의 세가 복귀하는 듯했으나 민씨 일파가 청의 세력을 들여오면서 대원군의 치세는 단명에 가고 청국에 볼모로 잡혀갔으며, 일본과 청국의 조선에서의 세력만 넓혀 주는 결과가 됐다.
    그리고 갑신정변에서 청국의 내정간섭을 물리치고 일본의 힘을 얻어 근대적 개혁을 단행하고자 했던 것이 실패하고 이후 갑오경장 또한 실패로 돌아가고 나아가 청일 전쟁 이후에 일본의 세력이 내정간섭으로까지 번지면서 급기야 조선의 국운이 몰락의 견지로 가는 마당에 명성황우는 일본의 깡패집단에 의해 살해되는 비운을 맞는다.
    그러한 번민의 세월 동안 한 여인으로서 명성왕후가 쓴 편지와 그녀의 생가가 경기도 여주에 보존되고 있다.
    또한 우리는 장희빈이라는 인물과 숙종, 인현왕후 그리고 숙빈 최씨의 조선 중후반기 역사에서 조강지처를 내쳤다가 다시 들이면서 용서를 구하는 숙종에서 오류많은 인간의 모습을, 그리고 당파와 신분제 사회 속에서 모친 명성왕후에 의해 계비로 들여진 인현왕후에 대한 숙종의 편견, 또한 속절없이 후궁에서 왕비로까지 등극하며 세자를 낳은 모후를 결국 사사하는 인간의 변덕에 대해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이렇게 역사는 단순한 사건이 아니라 그 사건 속에서 여러 가지 의미지평을 보여 준다.
    그 의미지평은 결국 인간이 어떻게 살아야 하고 무엇이 올바른 것인지를 심각하게 묻는 질문의 장을 마련하다.
    그런 의미에서 역사의 의미는 윤리성까지 묻는 것이다.

    둘째로 역사는 역사성을 노정하고 그것을 통해 역사의식을 고취시킨다.

    언급했다시피, 역사는 의미지평을 제시한다.
    그 의미지평을 우리는 ‘역사성’이라고 부르는데, 이러한 역사성을 인식하는 것을 ‘역사의식’이라고 한다.
    따라서 역사를 배우는 목적은 단순한 사건을 알기 위해서가 아니라 역사의식을 갖기 위해서, 즉 그것을 고취시키기 위해서이다.
    역사의식을 고취하는 게 중요한 이유는, 역사의식은 한 국가와 민족의 정신세계를 이루는 기초이기 때문이다.
    즉 역사의식은 문화의식의 기초이고 문화의식은 곧 한 사회의 혼과 넋, 정신세계이다.
    한 개인에게 정신이 가장 중요한 부분이듯이 한 국가나 민족에게도 그 정신세계를 이루는 역사의식이 중요하다.
    이러한 정신세계가 올바르게 갖춰지지 않은 민족에게 미래가 있겠는가.
    이에 김구 선생은 “역사를 모르는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라고 했던 것이다.
    지금도 중국 자금성에 있는 건청문에 가면 ‘건청문(乾淸門)’이라고 적힌 한자 옆에 이상한 글자가 적혀 있다.
    이 글자는 만주어인데요, 이것은 청나라 만주족이 사용했던 문자로 지금은 만주족이 역사의 현장에서 사라져 사어(死語)가 되었다.
    만주족은 중국의 마지막 왕조였던 청나라를 300년가량이나 지배했는데도 그들의 역사의식, 즉 정신세계가 뚜렷하지 못해서 중국에 문화적으로 동화되는 바람에 글자만 덩그렇게 남은 채 민족은 사라지고 말았다.
    만주족뿐만 아니라 중국변방의 여러 민족들, 예컨대 10-11세기 만주벌판을 호령하던 발해를 멸망시킨 거란족도, 12-13세기 금나라를 세웠던 여진족도 모두 사라지고 없다.
    이들은 자신만의 역사의식을 갖지 못한 까닭에 그들의 정체성이 정비되지 못했기에 역사의 현장에서 사멸된 것으로 보인다.
    그에 반해 독일은 철저한 역사의식을 가지고 있다.
    그런 까닭에 독일은 자신들의 과거사에 대해 철저하게 반성하고 사과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1970년대 서독 총리 빌리 브란트가 폴란드에서 나치의 유대인 학살에 대해 무릎 꿇고 사과하는 장면은 너무나 유명하다.
    지금의 메르켈 총리 또한 아우슈비츠의 홀로코스트에 대해서 영원한 책임이 있다고 말하는 정도이다.
    독일이 1870년 통일 이후에 제2의 산업혁명이라는 성과를 이루고, 1, 2차 세계 대전 이후에 라인강의 기적을 이루었을 뿐만 아니라 현재 유럽의 금융위기 속에서도 건재할 수 있는 것은, 바로 그들의 철저한 역사의식으로 드러나는 민족적 정신력에 기반하고 있다고 생각된다.
    그리고 2006년 독일과 프랑스는 공동의 역사교과서를 만드는 데 성공하였는데요, 이는 역사적으로 라이벌로서 서로의 지역을 식민지배하는 역사를 갖고 있는 양국이 70년 동안 양국이 교류하면서 일구어낸 성과이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일본은 세계 경제 대국이지만 역사의식에 있어서는 저열하다.
    독도 망언이나 위안부 문제, 그리고 역사교과서 문제로 우리민족의 공분을 살 뿐만 아니라 중국을 비롯한 동아시아와 국제적인 비난을 받고 있다.
    그럼에도 현재의 아베 정부는 집단자위권이나 신사참배 등으로 극우적인 행보를 보이며 제국주의적인 야욕을 의심케 하고 있다.
    일본뿐만이 아니다.
    최근 안중근 기념관 건립과 관계하여 중국과 한국 간에 역사적 교류가 호혜적 물결을 타는가 생각하기도 하지만, 중국은 이미 2000년부터 동북공정이라는 명목 하에 중국변방의 역사를 조직적으로 왜곡하고 있다.
    예컨대 중국 라오닝 성에 있는 고구려 성산산성 입구에 있는 표지석에는 “고구려는 중국의 변방 소수민족”이라는 글귀를 새겨 넣었고, 중국 헤이룽 성에 있는 발해의 옛 도읍지의 발해국 안내 현판에는 “발해가 옛 당나라의 지방정권”이라고 소개하고 있다.
    또한 고구려의 시조 주몽을 관광기념품으로 만들어 판매하고, 유엔에 등재된 고구려 유물이 중국 지역에 존재한다는 이유로 중국의 역사로 소개되고 있다.
    이렇게 일본과 중국의 강국 속에서 한국의 존립을 보지하기 위해서는 보다 철저한 역사의식이 필요하고, 더욱이 이들의 퇴행적 역사의식에 대응하기 위해서도 우리의 역사의식을 강화해야 한다고 생각된다.
    그리고 이들 강국들이 역사왜국에 이토록 광분하는 것은, 곧 역사가 한 국가와 민족의 정신세계의 기저를 이루기 때문에 이를 통해 그들의 민족적 결속을 다지기 위한 것이 아닌가 한다.
    즉 역사를 통해 역사의식을 고취시킴으로써 국가와 민족의 활로를 모색하고자 하는 것, 이것이 역사가 중요한 이유라고 생각된다.

    셋째로, 역사는 사회정의의 바탕이다.

    역사는 역사적 정의 실현을 통해 사회의 정의를 실현하여 한 사회의 도덕성을 형성하는 기본이다.
    예컨대 과거사 청산과 같은 역사문제는 곧 그 사회가 도덕적으로 정의로운가를 보여 주는 바로미터이다.
    우리의 경우 친일파 척결이나 국가 유공자 처우 문제가 보여 주듯이, 한국사회는 과거의 역사의 공과가 제대로 심판되지 않은, 따라서 도덕적으로 그 정의가 실현되지 않은 사회이다.

    물론 이승만 정권 당시 반민특위(반민족 특별조사 위원회)를 구성하여 친일파를 척결하고자 하는 시도를 한 바 있다.
    그러나 이승만 자유당 정권은 초대 총리를 비롯하여 친일세력과 결탁되어 있었기 때문에 이러한 특위활동이 제대로 이루어질 수 없는 한계를 가지고 있었다.
    그로 인해 해방 이후 우리사회는 친일세력이 기득권 세력으로 자리 잡아 그들의 이세와 삼세들이 떵떵거리고 사는 세상이 되었다.
    이렇게 잘못된 과거사가 청산되지 않은 것은, 곧 역사적으로 잘못을 저지른 사람이 오히려 잘 사는 세상을 만들어 결국 사회의 도덕성을 타락시킨다.
    즉 개인이 아무리 도덕적으로 살려고 노력해도 사회가 가진 도덕성이 저열할 경우 그 개인의 삶이 타협하거나 파멸하지 않을 수 없는 도덕적 타락을 초래하는 것이다.
    지금의 한국사회가 경제적 양극화를 비롯한 경제적 정의뿐만 아니라 관피아로 불리는 관료사회의 부패와 같은 적폐(積弊)로 비정상이 정상으로 행동하는 사회가 된 것은, 바로 역사적 정의가 제대로 실현되지 않아 기본이 바로 서지 않는 사회가 되었기 때문이다.
    즉 사회정의의 기본은 역사적 정의실현에 있고, 역사적 정의는 곧 사회의 도덕성을 담보하는 바로미터인 것이다.
    따라서 아무리 세월이 흐르더라도 사회가 과거에 잘못한 것에 대해서는 철저히 응징하고, 과거에 사회를 위해 헌신한 사람에게는 반드시 보상을 한다는 역사적 정의가 바로 서야 하고, 그럴 때에만 개인은 그 사회를 신뢰하고 그의 도덕성을 발휘해서 살아갈 수 있다.
    이런 점에서 역사적 정의는 사회의 도덕성을 바로 세우는 바탕인 것이다.
    이렇게 역사는 단순한 사건이나 사실이 아니라 언제나 해석을 요구하는 사실이다.
    그 때문에 역사는 우리에게 하나의 사실을 통해 중층적 의미지평을 보여 주고, 그것을 통해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에 대한 윤리적 반성을 야기시킨다.
    그리고 역사는 역사의 의미지평인 역사성을 올바르게 인식하는 것, 즉 역사의식을 형성한다.
    역사의식은 곧 한 사회의 문화의식으로서 그 사회의 정신세계의 기저를 이룬다.
    이런 까닭에 일본과 중국의 퇴행적 역사의식은 곧 그들의 국가적 야심을 실현하고자 하는 방편으로서 자국의 정신을 결속하려 하는 데서 비롯된다고 판단된다.
    마지막으로 역사는 사회의 도덕성을 재는 기본으로서 사회정의를 실현하는 수단이다.
    역사의 잘못이 바로잡히지 않는 곳에서 개인의 도덕성을 살아남을 수 없다.
    따라서 역사는 우리에게 단순한 지식 이상의 의미로서 우리의 집단적 삶이 나아갈 방향을 제시하는 소중한 인문학적 자산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08-08-2023(화)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피 성이여(나훔 3:1)

    화 있을찐저 성이여 그 속에서는 궤휼과 강포가 가득하며 늑탈이 떠나지 아니하는도다.
    Woe to the city of blood, full of lies, full of plunder, never without victims!

    "피 성이여(the city of blood)"
    이르 다밈(עִיר דָּמִים)

    성(5893) 이르( ʽîyr)  עִיר   

    1. 이스라엘인 ‘일’,  2. 화,  3. 두려움
    발음 / 이르[ ʽîyr ]
    어원 / 5892에서 유래
    관련 성경 / 일(대상 7:12, 렘 15:8, 호 11:9).
    구약 성경 / 3회 사용

    * 5892. 이르(ʽîyr)  עִיר   

    1. 도시
    2. עִיר הַמֶּלַַח
    3. עיר נָחָ
    발음 / 이르[ ʽîyr ]
    어원 / 5782에서 유래
    관련 성경 / 성(창 4:17, 출9:29, 삼상30:3), 성읍(창19:25, 레25:33, 민13:19), 고을(창35:5, 신3:5), 도성(창36:32, 민21:26, 대상1:43), 집(삼하17:23), 성주(왕상22:26, 왕하10:5), 성중(대하23:21), 영문(느2:8), 읍(에8:17, 9:2, 합2:12),촌락(렘19:15).
    구약 성경 / 1042회 사용

    *. 5782. עוּר 

    1. 깨다,  2. 일어나다,  3. 깨우다
    발음 / 우르[ ʽûwr ]
    관련 성경 / 깨다(삿5:12, 욥14:12, 시73:20, 사51:17), 일어나다(아4:6, 슥2:13), 격동시키다(욥41:10, 단11:2, 슥9:13), 통하다(욜3:12), 깨우다(시108:2, 아8:5, 슥4 :1), 들다(삼하23:18, 대상11:11), 치다(사10:26), 소동하다(사14:9), 내다(시80:2), 일으키다(대상5:26, 잠10:12, 사45:13, 호7:4), 부르짖다(사15:5), 감동시키다(대하36:22, 스1:1), 감동받다(스1:5), 부추기다(렘51:11), 떨치다(시35:23, 단11:25), 격려하다(욜3:9), 어지럽게 하다(신32:11), 흔들다(아2:7, 8:4), 분발하다(사42:13, 64:7), 깨우치다(사50:4), 떨치다(단11:25), 흥분시키다(학1:14), 뽐내다(욥31:29), 놀라다(욥17:8).
    [명] 격동(렘50:41).
    구약 성경  / 80회 사용


    피(1818) 담(dâm)  דָּם  

    1. 피,  2. 유혈 살해,  3. 포도즙
    발음 / 담[ dâm ]
    어원 / 1826에서 유래
    관련 성경  / 피(창 4:11, 왕하 3:22, 겔 35:6), 산혈(레12:4,5,7), 살인(시26:9), 살육(겔5:17), 피투성이(겔16:6,22), 피 값(겔3:18), 죄(겔33:6), 핏빛(욜2:31), 피 흘린 자[죄](레17:4, 신21:8), 피흘리기를 즐기는 자(시59:2).
    구약 성경 / 360회 사용

    *. 1826.  다맘(dâmam) דָּמָם    

    1. 침묵하다
    2. 놀라다
    3. 출애구기 15:16.
    발음 / 다맘[ dâmam ]
    관련 성경 / 머무르다(수 10:12), 기다리다(삼상 14:9), 잠잠하다(시 4:4, 사 23:2, 애 3:28), 멸하다(렘 8:14), 침묵하다(출 15:16), 쉬게 하다(애 2:18), 적막하다(렘 25:37, 48:2), 멸절되다(렘 49:26, 50:30), 끊어지다(렘 51:6), 평온하다(시 131:2),
    [부] 가만히(렘 47:6).
    구약 성경 / 30회 사용

    나훔 3장 : 니느웨 멸망의 원인과 멸망의 필요성

    1장에서 나훔 선지자는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니느웨를 심판하시고 유다는 구원하실 것에 대해 말씀합니다.
    2장에서는 구체적으로 니느웨가 어떻게 공격과 약탈을 당할 것인가를 매우 생생하게 묘사합니다.
    3장에서도 2장과 마찬가지로 감정이 격앙되어 있는 강렬한 분위기를 느낄 수 있습니다.

    나훔 선지자 예언의 초점은 왜 하나님께서 니느웨를 심판하실 수밖에 없는 것에 대한 이유입니다.
    나훔 선지자는 한때 번창했던 교만한 도시 니느웨의 영적인 부패 상황을 잘 드러내고 있습니다. 

    3장의 내용을 세부분으로 구분합니다.
    3:1-7, 니느웨의 폭력과 속임수가 수치를 가져올 것
    3:8-11, 테베(노아몬)에 대한 니느웨의 태도가 자기 자신의 패망을 불러 올 것을 예언
    3:12-19, 니느웨의 방어 노력이 전부 무용지물이 될 것을 선포

    "피의 도성(the city of blood)" 니느웨를 히브리어로 "이르 다밈(עִיר דָּמִים)"이라고 합니다.
    '이르((ʽîyr. עִיר)'는 "도시(city), '다밈'은 "피(dâm, דָּם)"를 말합니다.

    피의 도성 니느웨는 거짓말과 강포가 가득하며 노략질을 그치지 않는 도성이었습니다.
    이러한 성에 대하여 “너는 망한다!”라는 말은 큰 슬픔의 일이나 임박한 죽음을 선포할 때 사용하는 감탄사입니다.
    니느웨는 문자 그대로 ‘피의 성’이었습니다.
    걷잡을 수 없는 욕망과 살인으로 그 성은 피에 물들어 있었던 것입니다.

    Maier라고 하는 신학자는 이 부분을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니느웨는 포로들에게 온갖 잔학 행위를 떡 먹듯이 일삼았다. 손발을 자르고, 귀와 코를 도려내고, 눈을 뽑아내고, 목을 쳐 떨구는가 하면, 나무에 매달아두거나, 성문 앞에 쌓아두었고, 심지어 산 사람에게 말뚝을 박고, 아주 천천히 최후의 한 조각까지 온 몸의 껍질을 벗겨내는 따위의 마성(魔性)을 드러내었다.”

    니느웨는 또한 궤휼, 즉 속임수와 거짓말의 도시였다고 합니다.
    예루살렘을 포위했을 때 앗수르가 써먹은 책략을 보면 이 궤휼의 특성이 아주 명백히 드러납니다(왕하 18:28-31).

    “랍사게가 드디어 일어서서 유다 말로 크게 소리 질러 불러 이르되 너희는 대왕 앗수르 왕의 말씀을 들으라. 왕의 말씀이 너희는 히스기야에게 속지 말라 그가 너희를 내 손에서 건져내지 못하리라. 또한 히스기야가 너희에게 여호와를 의뢰하라 함을 듣지 말라 그가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반드시 우리를 건지실지라 이 성읍이 앗수르 왕의 손에 함락되지 아니하게 하시리라 할지라도, 너희는 히스기야의 말을 듣지 말라 앗수르 왕의 말씀이 너희는 내게 항복하고 내게로 나아오라 그리하고 너희는 각각 그의 포도와 무화과를 먹고 또한 각각 자기의 우물의 물을 마시라. 내가 장차 와서 너희를 한 지방으로 옮기리니 그 곳은 너희 본토와 같은 지방 곧 곡식과 포도주가 있는 지방이요 떡과 포도원이 있는 지방이요 기름 나는 감람과 꿀이 있는 지방이라 너희가 살고 죽지 아니하리라 히스기야가 너희를 설득하여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우리를 건지시리라 하여도 히스기야에게 듣지 말라.”

    나훔서를 읽으면서 우리는 다시금 여호와 하나님의 공의와 거룩하심으로 회개하지 않는 죄인들에게는 결국 심판이 임하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니느웨가 요나의 경고를 받아 잠시 회개했지만, 결국 심판을 받아 멸망할 수밖에 없었던 원인은 바로 그들의 잔혹한 죄악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와 동시에 주님을 온전히 신뢰하는 자들에게는 여호와 하나님께서 우리의 산성과 피난처가 되신다는 진리를 새롭게 확인하게 됩니다.
    이로 인하여 우리에게 주님의 크신 위로가 넘치게 됩니다.
    나훔의 이 예언은 1차적으로 앗수르의 멸망과 유다의 회복으로 성취되었고, 궁극적으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실 때 세상의 심판과 성도의 구원으로 완성될 것입니다.
    주님을 대적하는 무리들이 일시적으로 권력을 휘두른다고 하여도 낙심하지 않고 잠잠히 주님을 기다려야합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참된 위로와 평안을 주십니다.



    ◈ 심판의 원인이 된 니느웨의 죄악상

    ▶ 잔혹한 피의 성 니느웨

    1. 화 있을진저 피의 성이여 그 안에는 거짓이 가득하고 포악이 가득하며 탈취가 떠나지 아니하는도다.

    니느웨 성은 망합니다. 니느웨 성은 피의 도성입니다. 거짓말과 강포가 가득하며 노략질을 그치지 않는 도성입니다. “너는 망한다!”라는 말은 큰 슬픔의 일이나 임박한 죽음을 선포할 때 사용하는 감탄사입니다. 니느웨는 문자 그대로 ‘피의 성’이었습니다. 걷잡을 수 없는 욕망과 살인으로 그 성은 피에 물들어 있었던 것입니다.

    Maier라고 하는 신학자는 이 부분을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니느웨는 포로들에게 온갖 잔학 행위를 떡 먹듯이 일삼았다. 손발을 자르고, 귀와 코를 도려내고, 눈을 뽑아내고, 목을 쳐 떨구는가 하면, 나무에 매달아두거나, 성문 앞에 쌓아두었고, 심지어 산 사람에게 말뚝을 박고, 아주 천천히 최후의 한 조각까지 온 몸의 껍질을 벗겨내는 따위의 마성(魔性)을 드러내었다.”

    니느웨는 또한 궤휼, 즉 속임수와 거짓말의 도시였다고 합니다. 예루살렘을 포위했을 때 앗수르가 써먹은 책략을 보면 이 궤휼의 특성이 아주 명백히 드러납니다.(왕하 18:28-31).

    “랍사게가 드디어 일어서서 유다 말로 크게 소리 질러 불러 이르되 너희는 대왕 앗수르 왕의 말씀을 들으라. 왕의 말씀이 너희는 히스기야에게 속지 말라 그가 너희를 내 손에서 건져내지 못하리라. 또한 히스기야가 너희에게 여호와를 의뢰하라 함을 듣지 말라 그가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반드시 우리를 건지실지라 이 성읍이 앗수르 왕의 손에 함락되지 아니하게 하시리라 할지라도, 너희는 히스기야의 말을 듣지 말라 앗수르 왕의 말씀이 너희는 내게 항복하고 내게로 나아오라 그리하고 너희는 각각 그의 포도와 무화과를 먹고 또한 각각 자기의 우물의 물을 마시라. 내가 장차 와서 너희를 한 지방으로 옮기리니 그 곳은 너희 본토와 같은 지방 곧 곡식과 포도주가 있는 지방이요 떡과 포도원이 있는 지방이요 기름 나는 감람과 꿀이 있는 지방이라 너희가 살고 죽지 아니하리라 히스기야가 너희를 설득하여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우리를 건지시리라 하여도 히스기야에게 듣지 말라.” (열왕기하 18:28~31)

    ▶ 행한 대로 당하는 니느웨

    2. 휙휙 하는 채찍 소리, 윙윙 하는 병거 바퀴 소리, 뛰는 말, 달리는 병거,

    3. 충돌하는 기병, 번쩍이는 칼, 번개 같은 창, 죽임 당한 자의 떼, 주검의 큰 무더기, 무수한 시체여 사람이 그 시체에 걸려 넘어지니

    나훔 선지자는 1절에서 니느웨의 죄를 개괄적으로 지적한 다음, 2~4절에는 이어 몇 가지 신랄하고 생생한 묘사로 이 도시에 대한 마지막 죄목을 폭로하고 있습니다. 그는 점층법을 사용하여 묘사하고 있습니다.

    ‘말채찍’에서 ‘병거 바퀴’로, 다시 ‘말’로, ‘병거’로, ‘기병’과 ‘칼’과 ‘창’으로, 그리고 살육 당한 떼와 큰 무더기 주검(무수한 시체)으로 강도가 더해가고 있습니다. 이러한 묘사는 바로 니느웨가 당한 공격을 의미하는데, 놀랍게도 이것은 다 니느웨가 자기들의 전술로 써먹던 잔인한 방법들이었습니다. 이전에는 다른 나라에 쳐들어가서 많은 시체 무더기를 쌓았던 니느웨는 이제 자기 시체들이 무더기로 쌓일 차례가 된 것입니다. 찢어지는 듯한 말채찍 소리, 요란하게 울리는 병거 바퀴 소리. 말이 달려옵니다. 병거가 굴러옵니다. 기병대가 습격하여 옵니다. 칼이 번쩍이며 불이 납니다. 창은 번개처럼 번쩍입니다. 떼죽음, 높게 쌓인 시체 더미, 셀 수도 없는 시체. 사람이 시체 더미에 걸려서 넘어집니다. 앗수르의 왕 살만에셀 3세는 적들 앞에서 사람의 머리를 잘라 피라미드처럼 쌓아 올려놓고 자랑을 했다고 합니다. 다른 왕들은 정복한 도성의 입구에 시체를 마치 장작처럼 쌓아놓았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제는 그들이 그와 같이 심판을 받습니다.

    ▶ 우상숭배와 음행의 죄

    4. 이는 마술에 능숙한 미모의 음녀가 많은 음행을 함이라. 그가 그의 음행으로 여러 나라를 미혹하고, 그의 마술로 여러 족속을 미혹하느니라.

    이렇게 심판을 받는 것은 니느웨가, 창녀가 되어서 음행을 일삼고, 마술을 써서 사람을 홀린 탓입니다. 음행으로 뭇 나라를 홀리고, 마술로 뭇 민족을 꾀었기 때문입니다.

    마술’이란 자신들의 잔인함을 미화시키는 니느웨의 외교정책을 조롱하는 표현입니다. 이런 살육이 임하게 되는 이유는 마치 음녀가 음행을 탐하는 것처럼, 니느웨가 권력을 탐해왔었기 때문입니다. 니느웨는 열국을 자기 수하로 유혹하기 위해 군사적인 지원과 권력을 팔았습니다. 음녀는 니느웨가 섬기던 여신 이스달을 말할 수도 있습니다. 매우 음란하고 야만적인 일들을 많이 한 신이라고 합니다. 열국에 대한 니느웨의 통제력 행사는 마법과 마술에 의해서 이루어졌습니다.

    열방을 정복한 후 그 민족들을 음행과 마술을 이용하여 마음대로 통치했다는 것입니다. 앗수르 사람들은 미래를 알기 위해 점을 치고, 다른 사람들의 삶에 영향을 미치기 위해서, 무수한 주문(呪文)도 많이 사용하였다고 합니다. 그들은 또한 새나 동물이나 구름의 움직임, 간밤에 꾼 꿈 등에서도 징조를 읽곤 했다고 합니다. 바벨론이 니느웨 성을 공격합니다. 여기서는 니느웨를 음녀로 묘사하면서 하나님을 떠난 것 자체가 영적인 간음으로 규정되고 있습니다. 참된 신앙을 떠난 것 자체가 바로 우상 숭배이며, 이 세상의 상대적인 것을 절대화하는 행동입니다. 사도 요한은 계시록 17:5절과 19:2절에서 이 죄악 된 세상을 ‘음녀’에 비유하고 있습니다.

    ▶ 부끄러움을 당하는 니느웨

    5. 보라 내가 네게 말하노니 만군의 여호와의 말씀에 네 치마를 걷어 올려 네 얼굴에 이르게 하고, 네 벌거벗은 것을 나라들에게 보이며, 네 부끄러운 곳을 뭇 민족에게 보일 것이요

    6. 내가 또 가증하고 더러운 것들을 네 위에 던져 능욕하여 너를 구경 거리가 되게 하리니

    이제 여호와께서 니느웨를 치십니다. 여호와 만군의 주가 선언하십니다. 여호와께서 니느웨의 치마를 그 얼굴 위로 걷어 올려서 그의 벌거벗은 것을 뭇 나라가 보게 하고, 그의 부끄러운 곳을 뭇 왕국이 보게 하십니다. 니느웨가 다른 나라들을 대적하여 저질렀던 염치없는 행위들은 이제 그 부끄러움과 수치가 백일하에 노출됨으로써 최후를 맞이하게 될 것입니다. 그들이 권력과 여신을 섬겼지만, 그에 의해서 부끄러움을 당합니다. 왜냐하면 여호와 하나님께서 니느웨의 대적이 되시기 때문입니다.(2:13) 어떤 나라든 그 나라가 아무리 부하고 강하다 하더라도 자신의 권력을 믿고 하나님의 권위를 무시하고 인간의 생명을 짓밟는다면, 하나님께서는 그 나라의 대적이 되실 것입니다.

    니느웨는 다른 나라들을 침략하여 그들에게 불명예와 수치를 가져다주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그들이 수치를 당할 차례가 된 것입니다. 더 나아가 오물을 니느웨에게 던져서 그를 부끄럽게 하고, 구경거리가 되게 하십니다. ‘더러운 것’ 즉 인간의 배설물과 ‘능욕’으로 불명예와 망신을 당하게 될 것입니다. ‘더럽다’는 말의 히브리어는 모든 혐오스러운 것들을 가리켜 사용되는 말입니다. 특히 우상을 지칭하여 쓰인 경우가 많습니다(신 29:17 렘 4:1 겔 20:7-8). 따라서 이제 니느웨의 영광은 더러운 것으로 탈바꿈하고 말 것입니다.

    ▶ 니느웨를 위로할 사람이 없음

    7. 그 때에 너를 보는 자가 다 네게서 도망하며 이르기를 니느웨가 황폐하였도다. 누가 그것을 위하여 애곡하며 내가 어디서 너를 위로할 자를 구하리요 하리라.

    그를 보는 사람마다 "니느웨가 망하였다만, 누가 그를 애도하랴?" 하면서 애도할 사람이 없음을 안타까워합니다. 사람들이 니느웨를 피하여 달아나니, 그를 위로할 자들을 아무데서도 찾을 수가 없습니다. 니느웨 성읍이 요나시대(BC. 793-753)에는 회개하여 용서함을 받았지만, 이제 100년이 지난 후(나훔; BC.640-612)에는 전혀 동정을 받지도 못한 채 완전히 멸망할 것을 수사적인 질문으로 강조합니다. 니느웨가 수치를 당하고, 마침내 황무하게 되고도 위로할 자가 전혀 없게 되는 그 날 그들의 멸망은 절정에 달하게 될 것입니다.

    니느웨가 얼마나 잔인했었던지 이제 그토록 큰 피해를 입고 있어도 누구 하나 와서 거들떠 봐주는 사람도 없는 것입니다. 마치 한때 매력을 뽐내던 기생이 이제 그 수치가 다 드러나 더 이상 누구에게도 매력을 주지 못하는 존재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세계 무역의 중심지가 되어 이웃 나라들을 유혹하며 음녀처럼 부도덕한 행위들로 타락시켰다가 결국 하나님의 심판을 받게 된 것입니다.

    ◈ 노아몬 멸망의 예를 통한 니느웨 멸망의 필요성

    ▶ 자신이 망하게 한 이집트처럼 망하는 앗수르

    8. 네가 어찌 노아몬보다 낫겠느냐, 그는 강들 사이에 있으므로 물이 둘렸으니 바다가 성루가 되었고, 바다가 방어벽이 되었으며

    9. 구스와 애굽은 그의 힘이 강하여 끝이 없었고, 붓과 루빔이 그를 돕는 자가 되었으나

    10. 그가 포로가 되어 사로잡혀 갔고, 그의 어린 아이들은 길 모퉁이 모퉁이에 메어침을 당하여 부서졌으며, 그의 존귀한 자들은 제비 뽑혀 나뉘었고, 그의 모든 권세자들은 사슬에 결박되었나니

    11. 너도 술에 취하여 숨으리라. 너도 원수들 때문에 피난처를 찾으리라.

    니느웨가 이집트의 테베(노아몬)보다 나은 것이 없습니다. 테베는 나일 강 옆에 자리 잡은 테베, 강물에 둘러 싸여 그 큰 물이 방어벽이 되고, 그 큰 물이 성벽이 된 그 성읍입니다, 이제 니느웨의 힘은 앗수르가 주전 663년에 정복했던 애굽의 도시 테베 또는 노아몬 보다도 도덕적으로 나을 것이 전혀 없는 도시이므로 마땅히 테베처럼 패망할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히브리인들이 이 도시를 노아몬이라고 부르는 이유는 ‘아몬 神의 도시’라는 의미입니다. 호머의 일리아드에 의하면 이 테베라고 하는 도시는 문이 백 개나 있었던 이집트 남쪽에서 가장 오래되고 신전들, 스핑크스 그리고 오벨리스크 등으로 화려하게 장식된 도성이었다고 합니다. 그 위치는 지금의 카이로에서 남쪽으로 약 600km 정도 떨어져 있는 곳이라고 합니다. 지금도 이 지역에 가면 유적들이 많이 남아 있다고 합니다. 이 도시는 나일 강의 동편 제방 위에 건설되었으나 그 외곽 지역은 양쪽 해안에 다 퍼져있었습니다. 테베의 한 가지 장점은 전략적인 위치였다고 합니다. 사방이 물로 둘려져 있었고 여러 가지 운하와 수로가 여기저기 많은 지역을 관통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도시 방어에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적군들은 도시 심장부에 들어가려면 수많은 운하를 건너야만 했는데, 그것이 어디 있는지 찾는 것도 쉽지 않았다고 합니다.

    에티오피아와 이집트가 얼마든지 그들의 힘이 되어 주고, 붓과 리비아가 이집트를 도와주었습니다. 테베의 또 한 가지 강점은 정치적으로 유력한 동맹국들의 지지를 받았다는 사실입니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니느웨에게는 아무런 동맹국도 없었습니다. 테베는 당시 구스(에티오피아)에서 가장 유명한 도시였습니다. 이 구스는 나일 강 상류 지역을 일컫는 지명으로 오늘날의 이집트 남부, 수단, 그리고 에티오피아 북부에 해당되는 지역입니다. 나일 강 하류 지역은 애굽에 속해 있었지만, 테베는 당시에 구스에 속해 있었습니다.

    ‘붓’과 ‘리비아’는 때로 같은 이름으로 혼용되기도 하지만 여기처럼 함께 언급될 때에는 ‘붓’이 홍해와 맞닿은 해안을 가리키고 그 남방 끝은 오늘날의 소말리아에까지 이르는 것으로 생각됩니다. 따라서 테베의 동맹국들은 동서남북 사방에 퍼져 있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니느웨의 공격을 막아낼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한 요새의 테베의 성읍의 주민도 사로잡혀 가고, 포로가 되어서 끌려갔습니다. 어린 아이들은 길거리 모퉁이, 모퉁이에서 나동그라져서 죽고, 귀족들은 제비 뽑혀서 잡혀 가고, 모든 지도자가 사슬에 묶여서 끌려갔습니다.

    여러 가지 지리적 외교적인 강점에도 불구하고 테베는 앗수르의 앗수르바니팔 왕에게 함락되고 맙니다. 테베의 백성 대부분은 포로가 되어 사로잡혀 갑니다. 테베의 어린아이들은 무자비하게 학살됩니다. 앗수르 군인들은 누구나 다 볼 수 있도록 길모퉁이마다 이 일을 자행합니다. 백성들 사이엔 극도의 공포와 고통이 하늘에 사무쳤고, 테베의 뒤를 이를 후세대의 씨가 마르게 될 형편이었습니다. 테베에 대한 이런 극악무도한 잔학 행위들이 니느웨의 죄를 더하게 됩니다. 포로로 잡혀간 테베인들 중에 일반 백성들은 그대로 포로 상태로 집단 거주하게 된 반면, 존귀한 자들은 제비 뽑혀 나뉘어졌습니다. 아마도 니느웨인들의 노예가 되었던 것 같습니다. 이것은 귀족들로서는 매우 비굴하고 수치스러운 경험이 아닐 수 없었을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전쟁 포로 중 제비 뽑히는 자들은 주로 평민이었는데, 여기서는 귀족들이 평민과 똑같은 취급을 받고 있는 것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앗수르의 ‘니느웨’도 또한 술에 취해서 갈팡질팡하고, 원수를 피하여 숨을 곳을 찾아, 허둥지둥 할 것입니다. 니느웨가 테베에게 한 일이 이제 니느웨에게 그대로 되돌아 올 것을 예언합니다. 니느웨 사람들은 공격을 받을 즈음에 ‘취한’ 사람들처럼 의식과 방향을 잃은 채 피난처를 찾아 우왕좌왕할 것입니다. 사실 니느웨 사람들은 술에 취해 있었는데(1:10), 그 바람에 그들은 방어 능력을 상실한 채 향방 없이 좌충우돌하여 큰 피해를 보았던 것입니다. 여기서 ‘숨을 곳을 찾아’라는 말씀이 나오는데 이 말은 흔적도 없이 멸망될 것을 의미합니다. 그 결과 니느웨의 유적지는 1842년 그곳이 발굴될 때까지 숨겨져 있었습니다.

    ◈ 메뚜기 비유를 통한 니느웨 멸망의 필연성

    ▶ 불에 타는 니느웨

    12. 네 모든 산성은 무화과나무의 처음 익은 열매가 흔들기만 하면 먹는 자의 입에 떨어짐과 같으리라

    13. 네 가운데 장정들은 여인 같고, 네 땅의 성문들은 네 원수 앞에 넓게 열리고 빗장들은 불에 타도다.

    니느웨의 모든 요새가 무화과처럼 떨어질 것입니다. 흔들기만 하면 먹을 이의 입에 떨어지는, 처음 익은 무화과처럼 될 것입니다. 적들이 공격을 감행해올 때, 니느웨는 자기의 모든 산성이 허약해져있는 것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봄에 맺히는 무화과나무의 처음 익은 열매는(민 13:20) 나무를 살짝 흔들기만 해도 우수수 땅에 다 떨어집니다. 조금만 손을 대어도 먹는 자의 입으로 무화과가 떨어지기 때문입니다. 니느웨의 수비도 침략자의 발 앞에 이렇게 쉽고 빠르게 무릎을 꿇게 되고 말 것입니다. 과연 이 일은 주전 612년에 문자 그대로 이루어졌습니다.

    앗수르의 군인들을 보라고 하십니다. 군인들은 모두 여자들처럼 연약합니다. 밀어닥치는 대적들 앞에서 니느웨 땅의 성문들은 모두 열리고, 빗장은 불에 타 버렸습니다. 침략자들을 보는 순간, 성 방비를 힘쓰고 있던 장정들이 일시에 용기를 잃고 ‘여자’같이 될 것이라고 선포합니다. 여인은 두려움이 많고 방어 능력이 없습니다.(사 19:16 렘 50:37 51:30) 한때 사자처럼 날뛰던 앗수르인들이 두려움에 질려 무력해지고 맙니다. 범람하는 물에 의한 성벽 유실에 힘입어 적군들은 쉽게 도시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그러자 그들은 성문과 빗장에 불을 지르고 물밀듯이 성안으로 몰려 들어갔습니다.

    ▶ 대비책이 소용없이 망하게 됨

    14. 너는 물을 길어 에워싸일 것을 대비하며 너의 산성들을 견고하게 하며 진흙에 들어가서 흙을 밟아 벽돌 가마를 수리하라.

    15. 거기서 불이 너를 삼키며, 칼이 너를 베기를 느치가 먹는 것 같이 하리라. 네가 느치 같이 스스로 많게 할지어다. 네가 메뚜기 같이 스스로 많게 할지어다.

    이제 니느웨가 에워싸일 터이니, 물이나 길어 두라고 하십니다. 옛날에 전쟁을 할 때 도시가 포위를 당하게 되면 가장 시급한 일 중의 하나는 깨끗한 식수를 충분히 공급하는 일이었습니다. 니느웨의 요새를 탄탄하게 해 두어야 할 것이라고 합니다. 수렁 속으로 들어가서 진흙을 짓이기고, 벽돌을 찍어 두라고 합니다. 니느웨가 아무리 수비책을 찾아 애를 쓴다 하더라도 여호와의 심판을 막을 도리는 결코 없을 것입니다.

    이제 파멸의 장면은 산성과 성문에서(12-13절) 성 내부로 옮겨집니다(14-17절). 조롱조의 아이러니를 사용하여 나훔은 니느웨의 군인들에게 한번 수비를 잘 해보라고 명령합니다. 적군이 도시의 성벽을 허물게 되면, 수비하는 도시는 새 벽돌과 진흙으로 이 부분들을 수리해야만 했습니다. 여기서 ‘탄탄하게 하다’로 번역된 히브리어 단어는 ‘수리하다’의 의미도 있습니다. 니느웨의 잔해를 발굴했던 고고학자들에 의하면 적군이 성벽의 일부를 무너뜨렸을 때 그 인근 지역을 방비하기 위하여 주민들이 쌓았던 2차 방벽의 흔적들도 발견해 내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결국 앗수르는 멸망할 것임을 나훔 선지자는 강조하고 있습니다. 느치가 풀을 먹어 치우듯이, 산성에서 불이 나와 니느웨를 삼킬 것입니다. 칼이 니느웨를 벨 것입니다. 느치처럼 숫자나 불어나 보라고 합니다. 메뚜기처럼 숫자를 많이 불어나 보라고 하십니다. 모든 방비의 노력들이 수포로 돌아가고 이윽고 ‘불’과 ‘칼’을 동반한 재난이 니느웨를 강타하게 됩니다. 시내로 들어온 적군은 많은 사람들을 칼로 살육합니다. 그 군대는 마치 온 사면의 농작물을 완전히 다 먹어치우는 ‘느치’와도 같을 것입니다.

    ‘느치와 메뚜기 같이 스스로 많게 하라’는 나훔의 명령은 니느웨인들에게 이미 주어진 것일 수 있습니다. 숫자를 늘려서 어떻게든 방어를 해보라는 말이지요. 그게 소용없다는 말입니다. 반면에 이 말씀을 적군들에게 주어지는 명령으로 본다면, 이것은 숫자를 늘려서 니느웨 정복을 성공리에 끝내라는 의미가 되겠습니다.

    ▶ 많은 수의 상인과 방백들이 다 도망갈 것임

    16. 네가 네 상인을 하늘의 별보다 많게 하였으나 느치가 날개를 펴서 날아감과 같고

    17. 네 방백은 메뚜기 같고 너의 장수들은 큰 메뚜기 떼가 추운 날에는 울타리에 깃들였다가 해가 뜨면 날아감과 같으니 그 있는 곳을 알 수 없도다.

    니느웨는 상인들을 하늘의 별보다 더 많게 하였습니다. 느치가 땅을 황폐하게 하고 날아가듯이 그들이 날아가고 말 것입니다. 여기서 나훔 선지자는 다시 ‘느치’이야기를 합니다. 니느웨는 수많은 ‘상고(商賈-상인)’와의 무역을 통하여 부를 엄청나게 모았으나, 이제 그 거래처 상고들은 채소밭을 죄다 갉아먹는 많은 느치 떼와 같이 될 것입니다. 비록 니느웨가 무역으로 거대한 부를 축적했으나 이제 그 거래처 상인들이 부정 이득을 통해 똑같은 방식으로 엄청난 양의 니느웨 상품들을 도로 취해가게 될 것입니다.

    이제 군대도 부(富)도 니느웨 사람들을 구해낼 수 없게 될 것입니다. 니느웨의 수비대가 메뚜기 떼처럼 많고, 그의 관리들이 느치처럼 많아도, 추울 때에는 울타리에 붙어 있다가 해가 떠오르면 날아가고 마는 메뚜기 떼처럼, 어디론가 멀리 날아가고 말 것입니다. 또 다른 성격의 ‘메뚜기’가 등장합니다. 니느웨가 공격을 당하게 되는 날, 방백들과 대장들은 너무나 두려워 야반도주를 할 것입니다. 메뚜기는 저녁에 추울 때는 울타리에 달라붙어 있지만, 아침에 해가 뜨면 곧바로 날아가 버리고 맙니다. 이와 같이 성벽(울타리)을 지키던 장수들도 공포에 질려 순식간에 온데 간데 없어지고 말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실제로 1845년이 될 때까지 니느웨가 실제로 어디에 있었는지 아무도 발굴하지 못했다고 합니다.

    ▶ 니느웨는 회복이 불가능함

    18. 앗수르 왕이여 네 목자가 자고, 네 귀족은 누워 쉬며, 네 백성은 산들에 흩어지나 그들을 모을 사람이 없도다.

    19. 네 상처는 고칠 수 없고 네 부상은 중하도다. 네 소식을 듣는 자가 다 너를 보고 손뼉을 치나니, 이는 그들이 항상 네게 행패를 당하였음이 아니더냐 하시니라.

    아시리아의 왕에게 말씀하십니다. 앗수르의 목자들이 다 죽고 그의 귀족들이 영영 잠들었습니다. 그의 백성이 이 산 저 산으로 흩어졌으나, 다시 모을 사람이 없습니다. 18~19절에는 마치 장송곡 가사와도 같은 마지막 예언이 나옵니다.

    여기 나오는 ‘왕’이 누구인가에 대해서는 두 가지 견해가 있습니다. 하나는 멸망 당시인 주전 612년에 앗수르를 통치했던 왕이라고 보는 견해가 있고, 또 하나는 니느웨가 함락된 지 3년 뒤인 주전 609년에 앗수르 제국을 다시 일으켜 보려고 노력했던 앗수르 우발릿 왕이라고 보는 견해입니다. 대개 후자 쪽이 더 타당성이 있는 것으로 여겨집니다. 앗수르우발릿 왕은 황무하게 되어버린 제국을 둘러보면서, 그의 지도자들(목자와 귀족)은 다 죽었고, 포로로 잡혀가지 않은 백성들은 다 흩어져서, 그들을 다시 모은다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수세기 동안 난공불락을 자랑해 온 이 제국이 이제 완전히 멸망한 것입니다.

    니느웨의 상처는 고칠 길이 없고, 그 부상은 치명적입니다. 그의 소식을 듣는 이들마다, 그가 망한 것을 보고 기뻐서 손뼉을 칩니다. 그의 계속되는 학대를 받지 않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기뻐하고 즐거워합니다. 불살라지고 약탈당한 도성 니느웨의 참상은 마치 ‘치명적인 것’처럼 보일 것입니다. 그 함락된 정도가 너무도 고칠 수 없고 중하여, 이제 니느웨의 재건은 영영 불가능한 일이 되었습니다. 이 사실은 고고학이 아주 잘 뒷받침해주고 있습니다. 잔인하고 포학한 니느웨 사람들에게 압제를 당한 적이 있는 모든 열국들은 이제 니느웨가 궤멸되었다는 소식에 기뻐하게 될 것입니다. 수세기 동안 계속되었던 그 악행을 늘 받을 것으로만 생각했는데, 이제 니느웨가 함락되어 그 악행도 끝이 났다고 하니, 이는 누구보다도 특히 유다에게 큰 위로가 될 것입니다. 이렇게 하여 여호와께서는 니느웨에게는 진노하시고, 주를 의뢰하는 백성들은 돌보아 주신다는 사실을 확증해 보이실 것입니다.

    오늘날 이 나훔서를 읽으면서 우리는 다시금 여호와 하나님의 공의와 거룩하심으로 회개하지 않는 죄인들에게는 결국 심판이 임하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니느웨가 요나의 경고를 받아 잠시 회개했지만, 결국 심판을 받아 멸망할 수밖에 없었던 원인은 바로 그들의 잔혹한 죄악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와 동시에 주님을 온전히 신뢰하는 자들에게는 여호와 하나님께서 우리의 산성과 피난처가 되신다는 진리를 새롭게 확인하게 됩니다. 이로 인하여 우리에게 주님의 크신 위로가 넘치게 됩니다. 나훔의 이 예언은 1차적으로 앗수르의 멸망과 유다의 회복으로 성취되었고, 궁극적으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실 때 세상의 심판과 성도의 구원으로 완성될 것입니다. 주님을 대적하는 무리들이 일시적으로 권력을 휘두른다고 하여도 낙심하지 않고 잠잠히 주님을 기다려야합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참된 위로를 주십니다.









    08-07-2023(월)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파괴하는 자(나훔 2:1)

    파괴하는 자가 너를 치러 올라왔나니 너는 산성을 지키며 을 파수하며 네 허리를 견고히 묶고 네 힘을 크게 굳게 할찌어다.
    An attacker advances against you, Nineveh . Guard the fortress, watch the road, brace yourselves, marshal all your strength!

    "파괴하는 자(an attacker)"는 당시 세계를 제패하고 최고의 권력을 자랑하던 앗수르를 무너트리기 위하여 여호와 하나님이 예비한 연합군을 말합니다.
    히브리어 "파괴하는 자(메피츠. מֵפִיץ)"는 문자적으로는 "승리의 왕"을 상징합니다.
    그러나 본문에서는 앗수르를 무너트리기 위하여 일어난 바벨론 "나보폴리살"과 메대 "카카레스"의 연합군을 말합니다(렘 51:20).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너는 나의 철퇴 곧 병기라 내가 너로 열방을 파하며 너로 국가들을 멸하며."

    연합군의 모습을 본문에서 이렇게 말씀합니다(3-4절)

    "그의 용사들의 방패는 붉고 그의 무사들의 옷도 붉으며 그 항오를 벌이는 날에 병거의 철이 번쩍이고 노송나무 창이 요동하는도다.
    그 병거는 거리에 미치게 달리며 대로에서 이리 저리 빨리 가니 그 모양이 횃불 같고 빠르기 번개 같도다."

    6. 25 전쟁 이후 1953년 7월 27일 휴전 협정 후 70년 동안 전쟁이 멈춘 상태에서 성경적인 평화를 회복할 수 있는 비결은 여호와 하나님의 방법이 나타나야 합니다.

    그 방법을 알 수 없지만 하나님이 그 일을

    "아무리 더러운 평화라도 이긴 전쟁 보다 낫다"는 거짓 슬로건을 주장하며 모든 사람들을 미혹하는 악한 세력들에 대해서 성경적 평화는 오직 여호와 하나님의 방법과 은혜로 회복될 것이라는 믿음으로 오늘도 맡은 일을 위하여 충성하는 진실한 일군으로 쓰임받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부탁하며 축복합니다.





    파괴하는 자(6327) 푸츠(pûwts)  פּוּץ  

    1. 부수다
    2. 흩어뜨리다.
    3. 에스겔 34:5. / 목자가 없으므로 그것들이 흩어지고 흩어져서 모든 들짐승의 밥이 되었도다.
    발음 / 푸츠[ pûwts ]
    관련 성경 / 흩어지다(창 11:4, 삼상 11:11, 겔 34:12), 흩다(민 10:35, 신 4:27, 겔 11:16), 흘러가다(잠 5:16), 넘치다(슥 1:17), 퍼지다(삼하18:8), 부숴뜨리다(욥 16:12, 렘 23:29), 헤치다(렘 9:16), 쫓다(욥 18:11), 뿌리다(사 28:25), 쏟다(욥 40:11), 흩어버리다(사 41:16), 파괴하다(나 2:1), 전율하다(합 3:6).
    구약 성경 / 64회 사용



    나훔 2장 : 니느웨 멸망의 참상 예언

    1장에서 나훔 선지자는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니느웨를 심판하시고, 유다는 구원하실 것에 대해 개괄적으로 말씀했습니다.
    2장에서는 좀 더 구체적으로 니느웨가 어떻게 공격과 약탈을 당할 것인가에 대해 매우 생생하게 묘사합니다.

    2:1-7, 당당한 세력으로 세계를 다스리던 니느웨가 적군의 침입으로 인하여 왕궁이 파괴되고 존귀한 자들이 수치를 당하는 비참한 상태에 놓이게 될 것을 예고
    2:8-13, 위세를 당당하게 떨치던 니느웨가 그들이 자랑하던 젊은 용사들까지도 모두 적들에 의해 살해되는 것을 예언

    선지자는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심판에 의한 것이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을 대적하고 그의 말씀을 거역하는 자는 누구도 멸망을 피할 수 없음을 니느웨를 통해 보여 주려고 합니다.

    1장에서는 조용하지만 위엄이 있는 톤에서,
    2장은 좀 더 감정적으로 생생한 묘사의 톤으로 옮겨가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유다의 편이므로 유다를 대적하는 앗수르를 멸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편이라면 우리의 대적이 아무리 무서워도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악의 세력을 심판하시는 하나님은 본질상 공의로우시므로 악과는 함께하실 수 없습니다.
    이는 이방 민족들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택함받은 백성인 이스라엘에게도 마찬가지라고 하겠습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보호 아래 있는 것은 언제나 그들이 하나님의 공의에 합당해야 한다는 전제를 갖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이 악에 빠져 있을 때는 가차없이 하나님의 심판이 행해지는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이 죄악 중에 빠져 있을 때마다 심판에 대한 메시지를 선지자를 통해 끊임없이 예고하셨습니다.
    심지어 하나님은 이스라엘 민족의 주변 국가들을 권고해서라도 이스라엘 민족의 죄를 일깨우려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악의 세력에 대해 심판하시면서도 한편으로는 긍휼을 잊지 않으셨다. 하나님은 악한 백성들을 우선적 으로 심판하시는 것이 아니라 심판을 예고하시며 회개할 기회를 제공하신다. 또한 이러한 긍휼을 베푸심은 선민 이스라엘뿐만 아니라 인근 열방들에게 동일하게 적용되었다. 그 한 예로 하나님은 요나를 통해 니느웨의 심판을 예고하셨고 니느웨의 회개로 심판은 유보되었다. 니느웨는 당시 고대 근동을 지배하던 앗수르의 수도였다. 따라서 니느웨는 온갖 죄악으로 가득 찼으며 이스라엘에게는 철저한 원수였다. 이런 점에서 선지자 요나가 니느웨에 대한 심판을 유보하시는 하나님에 대해 불평한 것은 당연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니느웨에게 회개의 기회를 주신 것이다. 그러나 니느웨는 또다시 죄악 가운데 거하게 되었으며 결국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수 없게 되어 버렸다. 따라서 본장은 악에 대해서는 반드시 분노하시는 하나님임과 동시에 회개하는 자에 대해서는 긍휼과 사랑을 잊지 않으시는 분임을 보여 주고 있다.


    [영적교훈]
    사람은 살아가면서 언제나 죄를 짓습니다.
    평생 죄에서 자유로운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이것은 성도들에게도 마찬가지라고 하겠습니다.
    따라서 죄를 짓지 않는 것만큼 중요한 것은 자신이 지은 죄에 대해 철저하게 뉘우치고 다시는 같은 죄에 빠지지 않아야 합니다.

    니느웨는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과거 심판의 위기로부터 벗어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기회마저 놓쳐 버린 니느웨는 결국 심판을 맞이하게 됩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실수를 용서하시지만 결코 뉘우치지 못하고 다시 죄악을 행하는 자는 반드시 심판하십니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평소의 삶 속에서 죄를 짓지 않으려고 노력할 뿐 아니라 지은 죄에 대해서는 철저하게 하나님 앞에 회개하며 다시는 죄에 빠지지 않도록 최선을 다해야 할 것입니다.  






    ◆ 니느웨 멸망 당시의 참상 예언

    1. 파괴하는 자가 너를 치러 올라왔나니 너는 산성을 지키며 길을 파수하며 네 허리를 견고히 묶고 네 힘을 크게 굳게 할지어다.

    BC 612년경, 앗수르의 수도 니느웨는 난공불락의 성이었습니다.
    성벽의 길이는 13km로 직사각형 모양이었고 성벽의 높이는 30m 였습니다.
    성벽 위로 6대의 마치가 나란히 달릴 수 있을 정도로 넓었고, 성 주위에 18m 깊이의 연못이 둘러쳐져 있어 누구도 침범할 수 없는 철옹성이었습니다.
    9b를 보면 “노략한 금은으로 저축한 것이 무한하고 아름다운 기구가 풍부했습니다.”
    침략군이 이런 앗수르를 치러 올라왔습니다.
    앗수르가 성을 지켜보아도, 길을 지켜보아도, 허리를 질끈 동이고 있는 힘을 다하여 막아 보아도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나훔 선지자는 이제 공격을 받아 곧 멸망할 니느웨에게 스스로 방어할 테면 해보라고 조소하는 말을 합니다.
    그러다 2절에는 유다에 대해 언급합니다.
    이렇게 나훔 선지자는 니느웨와 유다를 번갈아 언급하는 교차 표현 방식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이름은 밝히지 않고 있지만 니느웨를 치러 파괴하는 자가 올라온다는 사실은 너무나 분명하기 때문에 올라왔다는 완료 시제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올라왔다’는 동사는 군사 용어입니다.

    ​파괴하는 자는 역사적으로 볼 때 메대(메디아)의 키악사레스(Cyaxares)와 함께 니느웨를 정복한 바벨론 왕 나보폴라살(Nabopolassar)을 말한다고 합니다.

    이어서 나훔은 말합니다.
    ‘성을 지켜보려무나. 길을 지켜보려무나. 허리를 질끈 동 이고 있는 힘을 다하여 막아 보려무나.’
    이 말은 사실 매우 신랄한 조롱입니다.
    너희들이 아무리 방어를 위해 발버둥을 쳐도 결과에는 아무런 변화가 없을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그대로 이루어지기 때문에 니느웨의 자기 방어 노력은 다 수포로 돌아갈 것입니다.


    ▶ 야곱의 영광을 회복시키심

    2. 여호와께서 야곱의 영광을 회복하시되 이스라엘의 영광 같게 하시나니 이는 약탈자들이 약탈하였고 또 그들의 포도나무 가지를 없이 하였음이라.

    약탈자들이 야곱과 이스라엘을 약탈하고, 포도나무 가지를 없애 버렸지만, 주께서 야곱의 영광을 회복시키시며, 이스라엘의 영광을 회복시키실 것입니다. 공격에 대한 묘사는 야곱과 이스라엘에 관한 언급에 의해 잠시 중단됩니다. 야곱이 남왕국 유다를 가리키고 이스라엘은 북왕국을 가리킨다고 볼 수도 있겠지만, 이 두 단어는 모두 백성 전체를 지칭하고 있습니다. 니느웨의 멸망은 하나님의 백성이 그 낮아지고 겸비해진 자리에서 다시금 영광의 자리로 회복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물론 이것이 완전히 실현되는 것은 메시야가 다시 오셔서 하나님의 나라가 완성될 때 가능할 것입니다. 포도나무 가지란 하나님의 기업인 유다를 가리킵니다.

    ▶ 앗수르를 공격하는 바벨론

    3. 그의 용사들의 방패는 붉고 그의 무사들의 옷도 붉으며 그 항오를 벌이는 날에 병거의 쇠가 번쩍이고 노송나무 창이 요동하는도다.

    4. 그 병거는 미친 듯이 거리를 달리며 대로에서 이리저리 빨리 달리니 그 모양이 횃불 같고 빠르기가 번개 같도다.

    5. 그가 그의 존귀한 자들을 생각해 내니 그들이 엎드러질 듯이 달려서 급히 성에 이르러 막을 것을 준비하도다.

    6. 강들의 수문이 열리고 왕궁이 소멸되며

    7. 정한 대로 왕후가 벌거벗은 몸으로 끌려가니 그 모든 시녀들이 가슴을 치며 비둘기 같이 슬피 우는도다.

    앗수르의 적군들은 붉은 방패를 들고, 자주색 군복을 입었습니다. 병거가 대열을 지어 올 때에 그 철갑이 불꽃처럼 번쩍이고, 노송나무 창이 물결칩니다. 이제 나훔은 그 ‘파괴하는 자’들이 어떠한 장비를 가지고 공격해 오는지에 대해 설명합니다.

    메대와 바벨론의 방패들은 붉은 색이었는데, 그것은 피가 묻어 그렇게 되었을 수도 있겠고, 아니면 나무 방패에 구리를 입혔거나 붉게 염색된 가죽을 입혀서 그럴 수도 있습니다. 무사들의 붉은 (겔 23:14) 군복 옷은 상대방에게 두려움을 자아내게 해주었을 것입니다. 또한 무사들의 구브로에서 난 노송나무로 만든 창이 거친 공격 때문에 흔들렸고, 병거는 차축에 직각으로 낫을 부착시켰기 때문에 쇠가 햇빛에 반사되어 번쩍거렸다고 합니다. 병거들이 질풍처럼 거리를 휩쓸고, 광장에서 이리저리 달리니, 그 모양이 횃불 같고, 빠르기가 번개 같습니다 포위군의 달리는 병거는 격분하여 미친 듯이 달리는 것 같았습니다(렘 46:9). 그들의 움직임의 속도가 얼마나 빠른지 마치 번개와 같다고 말합니다. 칼로 정복한 앗수르는 칼로 망합니다.

    5절의 주어(그)는 앗수르 왕을 가리킵니다. 그가 정예 부대를 앞세워 성벽을 방어하고 막을 것을 예비하게 합니다. 그러나 성을 지키기에는 너무 늦었습니다. 앗수르 왕은 정예부대를 앞세웠으나, 폐르시아 군대는 거꾸러지면서도 돌격합니다. 벼락같이 성벽에 들이닥쳐 성벽 부수는 장치를 설치합니다. 마침내 강의 수문이 터지고, 왕궁이 휩쓸려서 떠내려갑니다.

    ‘수문’에 대해서는 몇 가지 해석들이 있지만 도시를 통과하여 티그리스 강으로 흘러들어 가는 고스르(Kosher) 강의 유량을 조절하기 위해 있던 수문이라는 견해가 가장 유력합니다. 기록에 의하면 산헤립 왕은 도시 외곽의 강에 물을 막아두는 둑을 설치하고 그곳을 저수지로 삼았으며 니느웨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두 개의 두꺼운 수문을 설치하여 강물의 유량을 조절했다고 합니다. 이러한 수문은 고고학적으로도 발굴되었습니다. 적군들이 니느웨를 포위하면서 수문을 다 닫아 저수지에 물이 찬 후 일제히 수문을 다시 열어 물이 넘침으로 왕궁이 소멸되었습니다. 아니면 폭우로 인해 물이 불어났을 수도 있습니다. 어쨌든 니느웨 성의 자연적 요새가 되었던 강물이 이제는 니느웨를 파멸시키는 원인이 됩니다. 세상에 믿던 모든 것들은 다 이와 같습니다. 많은 나라들의 왕궁을 소멸시켰던 앗수르의 마지막 왕 앗수르-바니팔은 이제 자기 왕궁이 파멸되는 운명을 맛보게 됩니다. 앗수르의 왕후가 벌거벗은 몸으로 끌려가고, 시녀들이 비둘기처럼 구슬피 울면서 가슴을 치는 것은 정해진 일입니다. 실제 여왕을 가리킬 수도 있고, 이스달 여신상을 가리킬 수도 있겠습니다. 또한 시녀들이 비둘기같이 슬피 울고 가슴을 치며 통곡했다고 말씀합니다. 이제 니느웨의 운명은 하나님에 의해 이미 결정되었습니다. 니느웨는 함락되고 그 사람들은 이제 포로로 끌려갈 것입니다.

    ◆ 니느웨가 멸망한 후 참상 예언

    ▶ 자기가 판 함정에 빠진 니느웨

    8. 니느웨는 예로부터 물이 모인 못 같더니 이제 모두 도망하니 서라 서라 하나 돌아보는 자가 없도다.

    9. 은을 노략하라 금을 노략하라 그 저축한 것이 무한하고 아름다운 기구가 풍부함이니라.

    10. 니느웨가 공허하였고 황폐하였도다. 주민이 낙담하여 그 무릎이 서로 부딪히며 모든 허리가 아프게 되며 모든 낯이 빛을 잃도다.

    니느웨는 생길 때로부터, 물이 가득 찬 연못처럼 주민이 가득하였으나, 이제 모두 허겁지겁 달아납니다. "멈추어라, 멈추어라!" 하고 소리를 치나, 뒤돌아보는 사람이 없습니다. 도시가 홍수에 잠기게 되자, 니느웨 사람들은 모든 소유를 뒤에 버려둔 채 도망가기에 급급했습니다. ‘연못’이라는 단어는 물이 넘쳐 물난리를 겪고 있는 지역으로서, 니느웨의 상황을 잘 묘사해 주고 있습니다. 물이 넘치자 사람들은 이제 혼비백산하여 도망합니다. 공포 가운데 달아나는 그들을 향해 서라고 하여도 아무도 돌아보는 자가 없을 것입니다. 서라고 말하는 자가 누구인지는 정확하게 알 수 없습니다. 앗수르 군대의 지휘관일수도 있겠고, 아니면 적군일수도 있겠습니다.

    적군은 은을 노략하라! 금을 노략하라! 금과 은이 얼마든지 쌓여 있다고 합니다. 온갖 진귀한 보물이 많기도 하구나! 말합니다. 이제 나훔은 승전한 침략자들에게 전리품을 수확하라고 촉구합니다. 그렇게 많은 세월동안 여러 나라를 침략하여 약탈한 엄청난 전리품이 니느웨에 있었을 것입니다. 은과 금의 보유량이 엄청났고, 기타 공물과 무역을 통해 축적한 부도 어마어마했다고 합니다. 그렇게도 많은 나라를 침략하고 약탈했던 니느웨가 이제는 오히려 약탈을 당하게 됩니다. 자기가 판 함정에 자기가 빠집니다. 그가 행한 대로 자기가 당합니다. 앗수르는 털리고 털려서 빈털터리가 되었습니다. 앗수르 사람들의 떨리는 가슴, 후들거리는 무릎, 끊어질 것같이 아픈 허리, 하얗게 질린 얼굴들이 보입니다. 이렇게 되자 니느웨 사람들은 공포에 질려 낙담하고 맙니다. 그리하여 무릎이 후들거리며 허리가 아프고 얼굴이 하얗게 질립니다.

    ▶ 수사자 같은 앗수르를 멸하심

    11. 이제 사자의 굴이 어디냐 젊은 사자가 먹을 곳이 어디냐 전에는 수사자 암사자가 그 새끼 사자와 함께 거기서 다니되 그것들을 두렵게 할 자가 없었으며

    12. 수사자가 그 새끼를 위하여 먹이를 충분히 찢고 그의 암사자들을 위하여 움켜 사냥한 것으로 그 굴을 채웠고 찢은 것으로 그 구멍을 채웠었도다.

    사자들과 같은 앗수르 사람들의 굴이 아무데도 없습니다. 사자들이 그 새끼들을 먹이던 곳이 어디에도 없습니다. 수사자와 암사자와 새끼 사자가 겁 없이 드나들던 곳이 아무데도 없습니다. 수사자가 새끼에게 먹이를 넉넉히 먹이려고, 숱하게 죽이더니, 앗수르는 수사자처럼 암컷에게도 많이 먹이려고, 먹이를 많이도 죽였습니다. 사냥하여 온 것으로 바위굴을 가득 채우고, 잡아온 먹이로 사자굴을 가득 채우더니 그 모든 것이 사라졌습니다.

    이제 나훔은 파멸된 니느웨를 바라보면서 조롱 섞인 물음을 던집니다. ‘이제 사자들의 굴이 어디에 있느냐?’ 이것은 다시 말해 니느웨는 더 이상 아무런 위협이 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전에는 사자가 자기의 암사자와 새끼 사자들을 위해 먹이를 사냥하듯이, 앗수르도 다른 나라들을 그렇게 노략했습니다. 사자는 앗수르의 상징이었습니다. 앗수르의 왕들은 사자 사냥을 나가 사자를 죽이면서 자신들의 능력에 대해 자만하고, 자신의 용맹을 사자에 비유하곤 했다고 합니다. 산헤립은 자신의 무용을 자랑하면서 ‘내가 사자처럼 포효했다’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앗수르의 부조와 장식품들에는 사자들을 많이 찾아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그 사자굴이 텅 비게 되었다고 나훔은 선포합니다. 즉 사자처럼 강력한 군사력을 가졌던 앗수르가 이제는 곧 잡힐 사자로 표현되고 있는 것입니다.

    ▶ 하나님께서 앗수르의 대적이 되심

    13. 만군의 여호와의 말씀에 내가 네 대적이 되어 네 병거들을 불살라 연기가 되게 하고, 네 젊은 사자들을 칼로 멸할 것이며, 내가 또 네 노략한 것을 땅에서 끊으리니 네 파견자의 목소리가 다시는 들리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

    여호와께서 앗수르를 치겠다고 여호와 만군의 주님이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이 앗수르의 대적이 되십니다. 앗수르 병거를 불살라서 연기와 함께 사라지게 하십니다. 앗수르의 새끼 사자들은 칼을 맞고 죽을 것입니다. 이 세상에 앗수르 먹이를 남겨 놓지 않으십니다. 앗수르가 보낸 전령의 전갈의 목소리가 다시는 들리지 않을 것입니다. 이제 니느웨를 향한 여호와 하나님의 적의가 아주 강력한 말로 표현되고 있습니다.

    내가 너를 치겠다, 즉 하나님 자신이 니느웨를 치실 것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치시면 누구도 막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겠습니까? 불이 병거들을 사를 것이고, 칼로 군사들(젊은 사자들을) 멸할 것이며, 이제 니느웨는 힘없는 다른 나라들을 괴롭히는 일이 일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이 교만한 도시는 항복을 요구하거나 공물을 수탈하기 위해, 두 번 다시는 전령을 보내는 일도 없어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바와 같이 ‘칼로 일어나는 자는 칼로 망할 것’임을 분명히 보여 주시는 사건입니다. 이 말씀은 단 한 문장이지만 깊은 역사 철학을 담고 있는 진리입니다. 역사가 이 말씀의 진리 됨을 분명히 증거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의 편이 되게 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경외하고 경건한 삶을 살아야합니다. 서로 사랑하는 삶을 살아야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알고 회개하는 삶을 살아야합니다. 요나의 전도를 듣고 회개한 역사를 교훈 삼아 회개의 삶을 살아야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앗수르의 편이 되어 은혜를 주실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오늘 말씀을 현재에 적용한다면 죄악 된 세상과 교회의 관계로 볼 수 있습니다.
    교회를 위협하고 하나님을 대적하는 무리들은 주님께서 재림하실 때 심판을 받을 것이며, 동시에 교회는 구원을 받을 뿐만 아니라, 예비 된 그 나라에 들어갈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성도들은 무엇보다 하나님 편이 되어야합니다.
    경건한 삶을 살아야합니다.
    믿음으로 의롭게 살아야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우리의 편이 되어서 우리를 도우 실 것입니다.
    우리는 이 땅에서 그 날을 대망하며 흠 없는 신부로 신랑 되신 예수님을 만날 준비를 해야 합니다.
    어려운 일을 당해도 낙심하지 않고, 전능하시고 신실하신 여호와 하나님만을 바라보고 그 분만 의지할 때, 주님께서 다시 오셔서 저 막강한 니느웨 도성도 하루아침에 쓸어버리시듯 모든 악한 세력들을 심판하시고 우리를 구원해 주실 것입니다.







    08-05-2023(토)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여호와의 길(나훔 1:3)

    여호와는 노하기를 더디하시며 권능이 크시며 죄인을 결코 사하지 아니하시느니라 여호와의 은 회리바람과 광풍에 있고 구름은 그 발의 티끌이로다.
    The LORD is slow to anger and great in power; the LORD will not leave the guilty unpunished. His way is in the whirlwind and the storm, and clouds are the dust of his feet.

    여호와의 길(the Lord's Way)

    아도나이 다르코(דַּרְכֹּו יְהוָה)

    길(1870) 데레크(derek)  דֶּרֶךְ   

    1. 여행,   2. 길,  3. ∼로향하는 길
    발음 / 데레크[ derek ]
    어원 /1869에서 유래
    관련 성경 / 길(창 3:24, 삼상 4:13, 겔 48:1), 행위(창 6:12,삼상 8:3, 왕상 8:32), 도(창 18:19, 신 13:5, 시 18:21), 도리(창 19:31, 욥 21:14), 생리(창 31:35), 도중(왕하 10:12), 도로(레 26:22, 애 1:4), 여행(민 9:10, 수 9:13), 행사(욥 26:14), 중도(시 102:23), 때문(시 107:17), 행실(잠 8:13, 13:6), 소행(잠 12:26, 호 4:9), 바른 길(잠 23:19, 사 30:11), 옳은 길(말 2:8), 자취(잠 30:19), 사정(사 40:27),행동(겔 14:22,23), 풍속(겔 20:30).
    [동] 향하다(겔 20:46, 21:2, 40:6,22,46), 위하다(암 8:14), 여행하다(수 9:11), 가다(삿 4:9), 행하다(잠 14:2, 28:6), 본받다(사 10:24).
    구약 성경 / 706회 사용

    * 1869. 다라크(dârak)  דֶּרַךְ  

    1. 밟다,  2. דָּרַכְ יֶקֶב 압력을 가하다,  3. דָּרַכְ קֶשֶׁת
    발음 / 다라크[ dârak ]
    관련 성경 / 나오다(민 24:17), 밟다(신 1:36, 수 1:3), 당기다(시 7:12, 대상 5:18), 겨누다(시 64:3), 쏘다(대상 8:40), 짓밟다(삿 20:43), 지도하다(시 25:5, 9), 행하다(시 119:35), 건너가다(사 11:15), 다니다(합 3:19).
    [명] 타작마당(렘 51:33).
    구약 성경 / 62회 사용


    경고(4853) 마싸( massâ)  מַשָּׂא 
    1. 실어나름,  2. 짐,  3. 고양
    발음 / 마싸[ massâʼ ]
    어원 / 5375에서 유래
    관련 성경 / 짐(출 23:5, 사 46:2, 렘 17:21), 누(삼하 15:33,19:35), 일(왕하 9:25), 노래(대상 15:22), 경책(대하 24:27), 해(욥 7:20), 잠언(잠30:1, 31:1), 경고(사 13:1, 나 1:1, 슥 9:11), 중벌(렘 23:36),묵시(겔 12:10).
    [동] 메다(민 4:15, 대하 35:3),싣다(왕하 5:17, 8:9), 노래하다(대상 15:27), 바치다(대하 17:11), 탈취하다(대하 20:25), 엄중하다(렘23:33, 34, 36).
    구약 성경 / 66회 사용

    * 5375. נָשָׂא    
    1. 들어올리다, 2. 물이 많아서 방주가 땅에서 떠올랐고, 3. 깃발을 세우다
    발음 / 나사[ nâsâʼ ]


    묵시(2377) 하존(châzôwn) חָזוֹן  
    1. 이상,  2. 신적인 계시, 3. 신탁
    발음 / 하존[ châzôwn ]
    어원 / 2372에서 유래
    관련 성경 /이상(異像)(삼상 3:1, 사 1:1, 단 8:2), 계시(대상 17:15), 묵시(대하 32:32, 겔 7:13), 환상(사 29:7), 예언(렘 14:14).
    구약 성경 / 35회 사용

    * 2372.  חָזָה  
    1. 보다, 2. 하나님을 보다, 3. 민수기 24:4
    발음 / 하자[ châzâh ]
    관련 성경 / 보다(욥 15:17, 시 58:10, 겔 12:27), 우러러보다(욥 36:25), 바라보다(시 63:2, 미 4:11), 받다(사 2:1), 이상(異像)으로 받다(암1:1, 합 1:1), 보이다(사 30:10), 들어가다(욥 8:17), 뵙다(욥 23:9, 시 11:7), 깨닫다(욥 34:32), 보게 하다(아 6:13).
    구약 성경 / 55회 사용

    나훔 선지자의 하나님(나훔 1:2-3)

    여호와는 투기하시며 보복하시는 하나님이시니라 여호와는 보복하시며 진노하시되 자기를 거스리는 자에게 보복하시며 자기를 대적하는 자에게 진노를 품으시며.
    여호와는 노하기를 더디하시며 권능이 크시며 죄인을 결코 사하지 아니하시느니라 여호와의 은 회리바람과 광풍에 있고 구름은 그 발의 티끌이로다.

    투기하시는 하나님
    보복하시는 하나님
    노하기를 더디 하시는 하나님








    "길"이란 영어 단어는 '웨이(way)'라고 합니다.
    '웨이'라는 단어에서 중요한 의미는 "방법"이란 뜻으로도 사용합니다.
    따라서 여호와의 길이란 '여호와의 방법' 이라고도 하겠습니다.

    북이스라엘 왕국은 앗수르에 의해서 기원전 722년에 망합니다.
    이스라엘 왕국을 무너트린 앗수르는 기원전 612년에 신흥 강국 바벨론에 의해서 망하게 됩니다.

    선지자 나훔은 이스라엘을 위협하는 앗수르는 반드시 망할 것이며, 이스라엘은 구원을 받게 될 것이라고 예언한 민족주의자적인 선지자라고 하겠습니다.
     
    "나훔"이라는 이름의 뜻은 "충분한 위로" 라고 합니다.
    앗수르라고 불리는 앗시리아는 메소포타미아 지역을 중심으로 주전 2500년경에 시작된 고대국가입니다.
    한때는 가장 강력한 힘을 가진 나라였지만, 많은 나라가 그러하듯이 시간이 지나며 약해지고 결국 바벨론에 의해 멸망 당한 후 역사 속으로 사라져버린 잊혀진 나라가 되었습니다.

    성경에 나오는 앗수르는 언제나 이스라엘을 괴롭히는 나라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하나님 앞에 잠시 회복하는 모습으로 소개된 적이 있었습니다.

    요나 선지자가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마지못해 앗수르의 수도 니느웨에 가서 그 나라의 멸망을 선포했을 때 입니다.
    요나의 메시지를 듣고 니느웨는 금식을 선포하고 회개했습니다.
     
    그런데 잠시 회복하는 듯하더니 결국에는 무너지고 말았습니다.

    나훔 선지자는 본문에서 하나님을 거역하는 것과 하나님의 백성들을 괴롭히는 죄악에 대해서 하나님은 반드시 심판하신다는 사실을 알려주며 그의 택한 백성은 반드시 구원시킨다는 것을 강조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무엇보다 하나님의 이름을 높이고 그의 뜻대로 살아야 합니다.
     
    인간은 누구나 하나님을 찬양하기 위해 창조되었기에 하나님을 찬양하는 일에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찬양하는 사람들은 선으로 악을 다스려야 합니다.
    하나님을 찬양하는 사람들은 이웃을 사랑하는 일에 본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을 찬양하는 사람들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을 수 있는 희생적인 믿음으로 거듭나야 합니다.

    자신의 안일과 이익만을 추구하는 어리석은 부자와 같은 삶이 아니라 부자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로 연명하는 거지 나사로와 같은 삶에 놓여 있을지라도 하늘의 뜻을 이 땅에 실현한다는 확고한 믿음과 결단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일에 성공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앗수르에 대해서 이사야 선지자는 이렇게 예언했습니다(이사야  19:22-25).

    "여호와께서 애굽을 치실지라도 치시고는 고치실 것이므로 그들이 여호와께로 돌아올 것이라 여호와께서 그들의 간구함을 들으시고 그들을 고쳐 주시리라.
    애굽에서 앗수르로 통하는 대로가 있어 앗수르 사람은 애굽으로 가겠고 애굽 사람은 앗수르로 갈 것이며 애굽 사람이 앗수르 사람과 함께 경배하리라.
    에 이스라엘이 애굽앗수르와 더불어 셋이 세계 중에 복이 되리니.
    이는 만군의 여호와께서 복 주시며 이르시되 내 백성 애굽이여, 내 손으로 지은 앗수르여, 나의 기업 이스라엘이여, 복이 있을지어다 하실 것임이라."

    우리에게 하나님을 거역하는 것과 하나님의 백성들을 괴롭히는 죄악에 대해서 하나님은 반드시 심판하신다는 사실을 보여 주고 있다.
    아울러 그의 택한 백성은 반드시 구원시킨다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무엇보다 하나님의 이름을 높이고 그의 뜻대로 살아야 한다.
    인간은 누구나 하나님을 찬양하기 위해 창조되었기에 하나님을 향한 안양의 삶을 사는 자만이 구원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이 세상에서 살아갈 때 자신의 이익과 안락만을 추구해서는 안 된다.
    바울의 가르침과 같이 무엇을 먹고 마시든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사는 자가 되어야 한다. 

    마지막 때에 하나님께서 이루실 일을 예언하시며 애굽과 이스라엘과 앗수르에 대해서 말씀하셨습니다.
    이스라엘이 마지막 때에 쓰임 받음도 심지어 애굽이 하나님 앞에서 나의 백성이라 불림을 받음도 애굽의 콥틱 크리스찬의 모습을 접하며 조금이나마 이해가 되었지만 앗수르는 이해하기 어려웠습니다.

    이미 역사 속에서 사라진지 오래된 나라가 무엇을 할 수 있을까…라고. 그런데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앗시리안 크리스찬을 만나게 된 것입니다. 앗시리아는 그저 구약시대에 한 시대를 풍미하고 역사 속으로 사라진 나라이기에 오랫동안 그 민족들 또한 함께 사라졌다고 여겨졌었습니다. 그런데 아니었습니다. 우리가 관심이 부족해서 모르고 있었을 뿐이지 앗시리안은 역사 가운데 계속 이 땅에 존재 해왔고 우리는 알지 못하는 상황에서도 하나님은 그들을 복음 가운데로 인도해 오신 것입니다. 현재 중동 지역과 심지어 미국 시카고 지역까지 세계에 3백만 명이 살고 있다고 하며, 더욱 놀라운 것은 그들의 대부분이 크리스찬이라는 사실입니다. 전승에 의하면 그들은 1세기 도마에 의해 복음을 받아들이게 되었다고 합니다. 우리는 그들을 잊고 기억도 하지 않았지만, 하나님은 그들을 잊지 않으시고 다시 하나님의 계획 안으로 부르셨습니다.

    수많은 나라를 핍박하고 북 이스라엘을 멸망시켜 사마리아인이라 불리게 되는 혼합인을 만든 앗시리아를 하나님은 다시 하나님의 복음 안으로 부르시고 하나님의 말씀을 이루게 하십니다. 다시 한번 하나님의 놀라운 섭리와 주권을 봅니다. 내가 알지 못해도, 내가 들어 본 적이 없어도, 하나님의 이 땅과 우리를 향한 그의 섭리와 주권은 하나님의 말씀을 반드시 이루십니다.. 그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앗수르와 나훔 선지자(B.C. 7세기)





    150년 전에 앗수르의 수도 니느웨는 요나의 전도를 받고 왕에서부터 모든 백성이 회개함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용서를 받고 구원을 받았다.

    그런데 150년 만에 앗수르는 더 이상 하나님의 긍휼을 기대할 수 없을 만큼, 즉 하나님께 중한 경고를 들어야 할 만큼 타락해 버렸다. 결국 하나님께서는 나훔 선지자를 통해 앗수르의 완전한 멸망을 예언하신다.

    “니느웨에 대한 경고 곧 엘고스 사람 나훔의 묵시의 글이라.”(나 1:1)

    나훔 선지자는 니느웨가 범람한 물로 진멸될 것이며, 하나님께서 니느웨를 흑암으로 쫓아내실 것이라고 완전한 멸망을 말씀하신다.

    “그가 범람하는 물로 그 곳을 진멸하시고, 자기 대적들을 흑암으로 쫓아내시리라.”(나 1:8)

    티그리스 강의 강물이 니느웨를 덮어 그 위에 토사가 쌓여 있었기에 니느웨는 그 흔적을 발견할 수 없었던 것이다.

    150년 전 요나 선지자를 통해 은혜와 긍휼을 베푸셨던 하나님은 이제 나훔 선지자를 통해서는 니느웨에 대한 완전한 멸망을 가차 없이 말씀하신다. 반드시 멸절하시겠다는 것이다. 반드시 멸절될 것이기 때문에 더 이상 괴롭게 할 것도 없다고까지 말씀하신다.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십니다.

    “그들이 비록 강하고 많을지라도 반드시 멸절을 당하리니 그가 없어지리라. 내가 전에는 너를 괴롭혔으나 다시는 너를 괴롭히지 아니할 것이니라.”(나 1:12)

    나훔서가 기록되기 약 100년 전(B.C. 760년 경) 니느웨는 죄악이 관영하여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마땅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요나 선지자를 통해 그들에게 회개를 촉구하시고 그들이 회개를 하자 심판을 유보하여 주셨다. 이처럼 하나님께서 멸망 받아 마땅한 니느웨에 대한 심판의 손을 거두신 것은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요 사랑의 결과였다. 그런데 회개 운동이 일어난지 약 100여년이 지난 나훔 선지자 당시의 니느웨 사람들은, 지난 날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배신하고 도리어 이전보다 더 교만하며 사악하기 그지없었다. 그들은 이웃 민족에 대하여 매우 포악했고 간교했으며, 지극히 교만했다.

    디글랏빌레셀 3세 치하의 앗시리아 제국

    즉 앗수르는 부흥기였던 ‘디글랏 빌레셀 3세(B.C. 745-727’와 그의 아들 ‘살만에셀 5세(B.C. 727-722)’ 때에 영토 확장을 위한 정복 전쟁 정책을 지속적으로 시행하였고, 이러한 정책은 국가의 성격을 호전적이고 무자비한 것으로 만들어 다른 민족에 대한 학대와 착취, 그리고 약탈을 서슴치 않게 되었다.

    성경에서 때로는 ‘불’로 알려지기도 한 ‘디글랏빌레셀 3세(B.C. 745-727)’ 가 아시리아(앗수르)의 왕 위에 오른 이후로 아시리아는 고대 근동 의 제국으로 자리를 잡았다. 종주국의 위치에서 군림했던 아시리아는 단순히 종주국들의 정치에 관여하며 조공을 받는데에 그치지 않고 그들의 사회, 종교에도 영향력을 행사한 나라였다. 이런 상황에서 약소국가인 유다와 이스라엘의 처지는 당연히 어려울 수밖에 없었다.

    열왕기하는 유다의 아하스와 이스라엘의 므나헴이 디글랏빌레셀과 어떤 관계에 놓여 있었는지를 잘 묘사하고 있다. 북 왕국의 므나헴은 디글랏빌레셀로부터 자기 정권의 정당성을 인정받기 위하여 그에게 은 1,000달란트를 주었다.

    “앗시리아의 불 왕이 그 땅을 치려고 올라오니, 므나헴은 불에게 은 천 달란트를 주었다. 이렇게 한 것은, 그의 도움을 받아서 자기 왕국의 통치권을 굳게 하려 함이었다. 므나헴은, 앗시리아 왕에게 바치려고, 이스라엘의 모든 부자에게 한 사람당 은 쉰 세겔씩을 바치게 하였다. 그러자 앗시리아 왕은 더 이상 그 땅에 머물지 않고 되돌아갔다.”(왕하 15:19-20, 새번역)

    유다 왕 아하스는 시리아의 르신과 이스라엘의 베가가 반아시리아에 반역에 가담하지 않은 그를 치기 위하여 예루살렘을 공략했을 때, 사람들을 보내 디글랏빌레셀의 도움을 받아 위기를 모면했다. 이 일이 있은 후 아시리아의 신을 숭배하는 제단이 예루살렘에 세워졌으며(왕하 16:10-16), 이들의 정치 경제적인 압박은 나훔 선지자가 활약하던 시대까지 지속되었다. 아하스 시대부터 유다는 100여 년 동안 아시리아의 종속국으로 존재했다. 아시리아는 유다 사람들에게 있어 그들을 억압하는 혹독하고 무자비한 종주국이었다. 이스라엘에게 한없이 잔인하기만 했던 아시리아는 니느웨를 중심으로 형성된 나라였다.

    니느웨(니네베)는 도시 중심을 흐르는 코서 강에 의하여 남과 북으로 나뉜 곳이었다. 북쪽 지역은 면적이 남쪽 지역의 두 배에 달했으며, 13Km의 성벽으로 둘러싸였던 니느웨의 면적은 1,800에이커(총 225만평) 정도 되었다. 당시 도시국가치고는 매우 큰 규모라 할 수 있다. 고고학자들은 니느웨가 주전 5,000년부터 도시로 존재했으며, 3,000년 이후부터 이 도시에 이스타르 여신의 신전이 있었다고 말한다.

    이스라엘이 한창 가나안에 정착하던 B.C. 1400~1200년에 이르러 살만에셀(1세)과 디글랏빌레셀(1세)이 대단한 건축 사업을 통하여 니느웨의 규모를 키웠다. 주전 700년경에 산헤립이 니느웨에 새 궁궐을 세우고 아시리아의 수도로 삼으면서 도시는 최고의 전성기를 맞이하게 되었다.(이때까지 아시리아의 수도는 앗술이었다). ‘산헤립’은 도시에 정원들을 세웠고, 약50Km에 달하는 수로 시스템을 건설하였다. 그의 후계자들인 ‘에살핫돈’과 ‘아술바니발’도 꾸준히 건축사업을 지속해 나갔다. 특히 아술바니발의 도서관은 수만 점의 흙판 문서가 보존된 상태에서 발굴되어 고고학자들과 역사가들에게 매우 중요한 자료를 제공해 주고 있다.

    히스기야가 유다를 통치하던 시대에 산헤립은 유다를 공략하여 히스기야를 예루살렘에 마치 ‘새를 새장에 가두듯이’ 가두어 둔적이 있었다. 다행히 하나님의 기적적인 개입으로 유다는 풍전등화의 위기를 모면했다(사 36-39장, 왕하 18장). 그러나 산헤립이 유다에서 철수한 다음에도 아시리아의 영향력은 유다 땅에서 지속되었다.

    므낫세(B.C. 697-643)는 바알과 아세라를 중심으로 한 아시리아의 종교를 지향했으며(왕하 21:3), 그의 아들 아몬은 암살될 때까지 2년 동안 아버지보다 더한 배교행위를 지향했다(왕하 21:23). 아몬이 왜 암살을 당했는지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아마도 유다의 외교정책에 변화를 추구하던 자들의 음모에 의하여 저격되었을 것이다(Malamat).

    아몬의 아들 요시야가 왕이 되었을 때(B.C. 641년) 아시리아는 유다의 종주국으로 이미 100여년 동안 군림해 오던 상황이었다. 아마도 이때 대부분의 유다 사람들은 옛적 다윗시대에 누렸던 정치적, 종교적 독립을 갈망했을 것이다. 이러한 갈망 속에서 아시리아의 마지막 왕 아술바니발이 B.C. 627년에 죽자, 요시야는 기다렸다는 듯이 종교개혁을 단행했다(대하 34:3).

    그는 예루살렘에서 이방 종교들의 흔적을 뿌리뽑고자 했으며, 바알제단과 아세라 상들을 자신이 보는 앞에서 부수도록 했다(대하 34:3-7). 이같은 행위는 아시리아의 신들을 거부하며 므낫세의 종교적 복합주의를 지탄하는 것을 의미했다(Bright).

    앗수르 왕조

    이런 정황에서 볼 때 B.C. 627년은 고대 근동뿐만 아니라, 이스라엘의 역사 속에서도 매우 중요한 해였다. 이 해에 '아술바니발의' 죽음은 곧 아시리아의 쇠퇴로 이어졌다. 그의 죽음은 아시리아의 내부적 갈등으로 이어졌으며, 반유목민으로 분류되는 키메리오스족, 스키타이족, 메대족 등이 압력을 가해왔다. 지금까지 아시리아의 속국으로 있었던 바벨론에서는 나보폴라살(Nabopolassar)이 왕이 되었으며, B.C. 623년에는 아시리아로부터 독립을 선언하였을 뿐만 아니라, 아예 아시리아 공략에 나섰다. 아시리아는 B.C. 614년에 앗술을 메대 사람들에게 빼앗겼으며, B.C. 612년에는 갈그미스 전투를 통하여 아시리아를 지도에서 지워버렸다.

    아시리아(앗수르)의 이스라엘 침략

    '아술바니발(아슈르버니팔)'이 죽은 B.C. 627년에 유다에서는 ‘예레미야’와 ‘스바냐’, 두 선지자가 사역을 시작했다. 선지자들은 이처럼 국제 정세가 불안한 시기에 유다가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해야 한다고 호소했다. 나훔은 예레미야나 스바냐보다 더욱더 강도 높게 아시리아의 종말을 선언함으로써 앞으로 하나님의 백성인 유다가 진정한 종교의 자유를 누리게 될 것이니 그때를 위하여 미리 준비하라는 권면을 하고 있다.

    게다가 성전을 보수하던 제사장 '힐기야'가 B.C. 621년에 율법 책을 발견한 사건은 이러한 기대와 함께 종교개혁에의 의지를 더욱더 확고하게 하였을 것이다. 율법책이 발견된 후에 이스라엘은 유월절을 지키고 점술가들을 그들의 영토에서 몰아냈다. 이러한 노력을 높이 평가한 열왕기 저자는 ‘요시야’를 전무후무한 왕으로 평가하였다.

    “요시야와 같이 마음을 다하며 뜻을 다하며 힘을 다하여 모세의 모든 율법을 따라 여호와께로 돌이킨 왕은 요시야 전에도 없었고 후에도 그와 같은 자가 없었더라.” (왕하 23:25)

    유다의 왕 요시야 통치기간(B.C. 641-609년)이 나훔 선지자의 사역 후반기와 겹친다는 점을 감안하면, 당시 아시리아의 지배하에 힘들어하던 요시야 왕이 나훔 선지자의 메시지를 통하여 큰 위로를 얻었을 것을 충분히 상상할 수 있다. 요시야는 종주국으로 섬기기를 힘들어하고 괴로워하던 아시리아가 곧 망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는 메시지를 들을 때마다 아마도 앓던 이가 빠지는 시원함을 느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아시리아의 최종적인 종말은 보지 못하고 B.C. 609년에 므깃도에서 죽었다. 아시리아가 B.C. 625년에 제국의 위상이 흔들리기 시작했지만, B.C.. 605년에야 갈그미스에서 이집트의 도움에도 불구하고 바벨론 –메대 연합군에 퍄하여 지도에서 사라졌기 때문이다.

    앗수르 제국의 민족혼합과 강제이주정책

    고대 사료에 의하면 앗수르는 적국을 완벽하게 초토화하거나 폐허로 만드는 것에 대해 대단한 자긍심을 가졌으며, 반란자들에 대해서는 살가죽을 벗기는가 하면 각을 뜨기도 했다고 한다. 또한 앗수르는 약소국과의 약속을 배반하고 속이기를 잘했다고 한다. 한마디로 앗수르는 그들의 간교함과 다른 민족의 피 위에 건설된 국가였다.

    하나님께서는 나훔 선지자를 통해 앗수르를 고칠 수 없고, 앗수르가 망햇다는 소식에 모두들 손뼉을 칠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왜냐하면 고대 근동에 앗수르로 인해 고통 받지 않은 나라가 없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앗수르 왕이여, 네 목자가 자고 네 귀족은 누워 쉬며, 네 백성은 산들에 흩어지나 그들을 모을 사람이 없도다. 네 상처는 고칠 수 없고, 네 부상은 중하도다. 네 소식을 듣는 자가 다 너를 보고 손뼉을 치나니 이는 그들이 항상 네게 행패를 당하였음이 아니더냐 하시니라.” (나 3:18-19)

    신바빌로니아 제국의 발흥

    ​앗수르 제국의 멸망(B.C. 609년)|
    앗수르는 지난 100여 년 동안 적다운 적의 대항을 받아본 적이 없었다.

    앗수르(아시리아)는 B.C. 732년에 유다 왕 아하스의 요청에 따라 시리아를 멸망시켰으며, 사마리아를 쑥대밭으로 만들었다. B.C. 722년에는 북왕국 이스라엘과 사마리아의 뿌리를 뽑아버렸다. B.C. 701년에는 유다를 침략하여 예루살렘을 제외한 모든 성을 차지한 적이 있다. B.C. 663년에는 천연의 난공불락 요새로 알려졌던 이집트의 수도 테베를 점령했다.

    그러나 B.C. 609년 신흥 강대국 바벨론에게 앗수르는 수백 년을 이어온 상 아시아의 주인 자리를 완전하게 내주어야 했다. 앗수르의 수도 니느웨는 B.C. 612년 이미 바벨론에게 함락되었고, 하란으로 수도를 옮긴 앗수르는 바벨론의 하란 공격으로 인해 B.C. 610년 하란까지 내주어야 했다.

    앗수르 제국을 계승할 야심을 품고 앗수르 패잔병들과 함께 바벨론을 대항하려 했던 애굽의 바로 느고가 B.C. 609년 하란을 재탈환하려다 실패함으로 말미암아 앗수르는 B.C. 609년 제국으로서의 깃발을 완전히 뽑아야만 했다. 그렇게 잔인하고 무섭던 앗수르의 왕들도 모두 사라지고, 앗수르의 마지막 모습은 왕궁에 불을 질러 스스로 자기 목숨을 버리는 비겁함 그 자체였다.

    나훔의 예언대로 앗수르의 멸망은 고대 근동 많은 나라들로 하여금 박수를 칠 만큼 기쁜 소식이 되었다. 왜냐하면 앗수르는 오랜 세월 제국주의를 펼치면서 매우 잔인한 방법으로 피지배 민족들을 통치했기 때문이다.

    다음은 앗수르 왕의 어느 기념비에서 새겨진 문구이다.

    『나는 귀족들의 겁데기를 벗겼고, 3000명의 포로들을 불에 태워 죽였다. 나는 한 명의 포로도 남겨 두지 않았다. 나는 그들의 손과 발을 자르고, 코와 귀를 베어 내기도 하였다. 수많은 병졸들의 눈을 도려내기도 하였으며, 처녀들을 통째로 굽기도 하였다.』

    그후 바벨론에 의해 이미 점령되어 있던 아수르의 수도 니느웨(니네베)는 나훔의 예언대로 홍수로 물이 범람해 도시 위로 6m나 토사가 쌓여 B.C. 609년부터 A.D. 1846년까지, 2,450년 이상 그 존재를 깊은 땅 속에 묻어두게 되었다.

    앗수르는 정복한 나라의 민족의 경계를 무너뜨려 혼혈족을 만들어 각 민족의 독특성을 소멸시킴으로 반란의 근원을 도려내, 그들의 제국을 영원하게 하려고 했다. 사마리아가 그 예이다.

    물론 하나님께서 북이스라엘의 죄가 너무 심해지자, 앗수르를 몽둥이로 들어 사용하신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나라와 민족과 거주의 경계는 대제국에 의해 재편성될 수 있는 그런 것이 아니다. 거주의 경계를 이미 태초부터 정하신 분은 하나님이시고, 고유한 각 민족들을 만드신 분도 하나님이시다.

    일찍이 앗수르 민족을 용서하시려는 하나님의 의도를 간파하고 앗수르 민족 경계를 넘지 않으려는 요나를 설득하셔서 앗수르의 수도 니느웨로 보내 구원의 말씀을 선포하게 함으로 니느웨의 12만 명의 생명과 가축들을 살리셨던 분이 하나님이시다.

    이후 북이스라엘의 점령한 앗수르가 남유다로 공격해올 때 이사야 선지자는 히스기야에게 하나님의 뜻을 전했다. 하나님의 뜻은 앗수르가 사마리아까지는 정복했으나, 예수살렘까지는 정복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예루살렘은 하나님께서 다윗과 맺은 언약 때문에 지켜주신다는 것이었다. 앗수르가 차지할 수 있었던 땅의 경계는 사마리아까지였음을 하나님께서는 분명하게 말씀하신 것이다.

    앗시리아의 영토 변화

    주전 700년경의 아시리아 제국

    앗수르와 신바빌로니아의 영역

    ※ 참고 문헌

    - 「 이스라엘사 」 최창모 지음, 미래출판사

    - 「역사 드라마로 읽는 성경(구약편-1, 고대근동~사사기(B.C.3300-B.C.1050)」 류모세 지음, 두란노.

    - 「역사 드라마로 읽는 성경(구약편-2, 통일왕국시대~분열왕국시대 3기(B.C.1050-753)」 류모세 지음,

    - 「역사 드라마로 읽는 성경(구약편-3, 분열왕국시대 4기~페르시아 시대(B.C.753-331)」 류모세 지음,

    - 「역사 드라마로 읽는 성경(신약편-1, 알렉산더 대왕의 등장부터 헤롯대왕의 죽음까지(B.C.331-B.C.4)」 류모세

    - 「역사 드라마로 읽는 성경(신약편-2, 헤롯대왕의 죽음부터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까지(B.C.4-A.D.30)」 류모세

    - 「 역사 드라마로 읽는 성경(신약편-3, 초대교회의 탄생에서 예루살렘 성전 파괴까지(A.D.30-A.D.70)」 류모세

    - 「 성서 그리고 역사 」 장 피에르 이즈부츠 지음, 황소자리.(내셔널지오그래픽)

    - 「 성서의 역사와 지리 」 김흔중 지음, 엘맨.

    - 「 성서지리 」 권혁승 지음, 서울신학대학교 출판부.

    - 「 바이블로드 」 장종현 지음, 백석.

    - 「 고대 이스라엘 역사 」 레스터 L. 그래비 지음, CLC.

    - 「 이스라엘의 성경적 역사 」 이안 프로반 V. 외 지음, CLC.

    - 「 이스라엘 역사 」 데이비드 F 힌슨 지음, 이후정 역, 컨콜디아사

    - 「 이스라엘의 역사와 지리 」 이병렬 지음, 요단출판사.

    - 「 이스라엘의 역사사천년 」 맥스 디몬트 지음, 김재신 옮김, 크리스찬다이제스트

    - 「 유대인의 역사 1- 성경 속의 유대인들 」 폴 존슨 지음, 김한성 옮김. 살림.

    - 「 유대인의 역사 2 - 유럽의 역사를 바꾸다 」 폴 존슨 지음, 김한성 옮김. 살림.

    - 「 유대인의 역사 3 - 홀로코스트와 시오니즘 」 폴 존슨 지음, 김한성 옮김. 살림.

    - 「 이스라엘 왕정 멸망사 」 이병렬 지음, 페트라성경원어연구원.

    - 「 이스라엘의 예언자들 」 이병렬 지음, 페트라성경원어연구원.

    - 「 고대 근동 역사 」 마르크 반드 미에룹 지음, CLC.

    - 「 고고학으로 읽는 성경 」 임미영 지음, CLC.

    - 「 성서시대 이스라엘의 역사 」 임미영 지음, 자체제작.

    - 「 성경역사, 지리학, 고고학, 아틀라스 」 앤손 F. 레이디 지음, 강성열 옮김. 이레서원










       IBC





    내 손에 있는 것(사뮈엘 타퐁 예화) - 출애굽기 4:2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네 손에 있는 것이 무엇이냐 그가 이르되 지팡이니이다' - 출4:2

    세상에는 보통 사람들이 이해 할수 없는 일들이 많이 있습니다.
    '사뮈엘 타퐁'이라는 사람은 큰 포도밭을 갖고 있던 돈 많은 양조업자였습니다.
    그런데 그는 1934년 7만 5천만 달러를 사업에 투자했다가  실패하고 자살을 하게 됩니다.
    그가 얼마나 구두쇠였는지는  그가 자살하기 위해 밧줄을 사러 갔다가 그 밧줄 값을 깍았다는 일화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죽음을 앞두고 가격을 깍은 밧줄로 그는 목을 메고 자살한 것입니다.
    그런데 더 놀라운 사실은 그가 죽은 후에 그의 금고에는 약 200만 달러(약 23억원)의 돈이 들어 있었다고 합니다.
    투자로 잃은 돈은 7만 달러밖에 되지 않았고 남은 돈은 200만 달러가 있었는데 그는 자살한 것입니다.

    인간은 일반적으로 가지고 있는 것보다 잃은 것에 더 마음을 씁니다.
    잃은 것에 대한 상실감으로 자살을 한 것입니다.
    남아 있는 것이 더 많은데도 말입니다.

    오늘 하나님은 모세를 향해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네 손에 있는 것이 무엇이냐?'

    이 질문은 하나님께서 모세를 출애굽의 일꾼으로 사용하기 위해서 부르실때 하신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오늘 모세뿐만 아니라 우리에게도 소중한 말씀입니다

    우리는 잃어 버린 것에 집중하며 살기보다 우리 손 안에 있는 것에 집중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잃어 버린 것에 마음을 두면 불행해집니다
    오히려 내 손에 무엇이 있는지 확인하며 살아야 합니다
    이것이 행복하고, 복된 인생의 비결입니다

    스스로에게 늘 질문을 던지십시요

    '내 손에 있는 것은 무엇인가?'
    내 손에 있는 것에 감사하며 살아가는 인생들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 나훔서의 개론

    ▶ 내 용 : 하나님께서 압제와 잔인함과 우상 숭배로 말미암아 니느웨(앗수르)를 심판하

    실 것이라는 예언을 담고 있으며, 니느웨 성의 멸망을 선언하는 것으로 끝남.

    ▶ 선 지 자 : 나훔, 유다 출신이라는 것 외에는 알려진 바가 없음(그의 고향도 불확실함)

    ▶ 활동시기 : 주전612년 니느웨가 함락되기 전, 유다가 앗수르의 봉신 국가로 예속되어

    있던 시기(대략 B.C 640- B.C 612)

    ▶ 강 조 점 :

    - 모든 민족들에 대한 하나님의 주권,

    - 앗수르의 잔인함을 심판하시는 여호와의 공의,

    - 스스로 영원하다고 착각하는 교만한 자들에게 임하는 하나님의 심판.

    ▶ 구 조 :

    나훔서는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

    1. 니느웨 멸망 선포(1장) :

    나훔은 여호와 하나님은 공의의 하나님이시며, 공의의 하나님의 권능은 위대하시다는 것을 선포한다. 그리고 나훔은 공의의 하나님의 치리로 니느웨는 멸망하고 유다는 하나님의 구원을 볼 것임을 예언한다.

    2. 니느웨 멸망(2-3장)

    나훔은 대적들에 의해 파괴될 니느웨 멸망의 참상을 예언한다. 그러면서 나훔은 니느웨가 이러한 하나님의 심판을 보게 되는 것은 그들의 죄악으로 인함임을 밝힌다. 아울러 그들의 죄악상 즉, 거짓과 포악과 탈취, 그리고 우상 숭배로 가득한 니느웨와 죄악을 고발하고 이러한 앗수르의 멸망은 기정사실화 되었다고 예언하면서 글을 마무리 한다.

    12소선지서 중 일곱 번째 책인 나훔서는 잔혹한 만행을 저지른 열방의 맹주인 앗수르를 향해 무서운 경고와 하나님의 심판을 선언한다. 이 책은 백여 년 전에 기록된 요나서와 대조를 이룬다. 요나서에서는 더 이른 시기에 가장 잔인한 원수들(앗수르)에게까지 관심을 보여 주신 여호와 하나님을 묘사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제 앗수르의 죄가 “가득 찼고”(창 15:16) 여호와 하나님의 잘 알려진 인내도 한계점에 도달했다. 나훔이 전하는 메시지의 핵심은 1:7-8이다. 이 구절은 유다에게 위로를 전하는 동시에 니느웨의 파멸을 선언한다.

    예언의 내용이 전반적으로 진전되고 있음을 매우 쉽게 알 수 있다. 나훔서는 신적인 전사의 승리를 찬송하는 것(12-8)으로 시작하는데, 이 찬송의 마지막 행들(7-8절) 역시 첫 번째 주요한 말씀(19-2:2)을 소개하는 구실을 한다. 이어서 니느웨의 파멸에 관한 이상(2:3-10)과 조롱(11-13절)이 등장한다. 마지막으로, 니느웨의 멸망이 절대적으로 확실함을 선언하는 말씀들과 조롱이 이어지고(3:1-17), 멸망당한 제국에 대한 풍자적 만가(18-19절)로 마무리한다.

    나훔서는 하나님의 본질적인 성품을 우리에게 상기시킨다. 그는 공의와 심판의 하나님이시며, 동시에 선하심과 구원의 하나님이시다. 이것은 최종적으로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에서 동일한 방식으로 드러난다.

    나훔의 이름은 ‘하나님의 위로’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나훔의 고향은 ‘엘고스’라고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그의 고향 ‘엘고스’가 어디인가에 대해서는 학자들 사이에서 오랜 논쟁이 있어 왔다. 초대교회 교부 제롬(히에로니무스)은 갈릴리 근처 엘세시(Elcesi)가 나훔의 고향이라고 주장했으며, 크노벨(A.W.Knobel)과 히찍(F.Hitzig) 같은 학자는 가버나움 근처에 엘코쉬(Elkosh)가 있었다고 주장한다. 심지어 초대 교회 문서에는 벧 구브린 남쪽에 엘케시가 있었다고 되어 있지만, 엘케시는 라기스를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엘고스가 어딘지는 아직도 정확히 알려지지 않는다.

    일부 학자는 나훔이 주전 660-620년 사이에 활동한 것 같다고 보고 있는데, 이 책에서 주전 663년의 테베(노아몬) 함락을 과거사로 언급하고 있으며, 주전 612년의 니느웨 함락을 미래형으로 예언하고 있다는 이유로 기록 연대를 주전 663-612년으로 좁힐 수 있다. 그러나 주전 654년 테베 재건의 역사를 언급하고 있지 않다는 점과 나훔의 사역했던 시기의 왕을 언급하고 있지 않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아마도 데베 함락과 재건 중간 즉, 므낫세 통치시기에 기록된 것 같다. 그런데 그가 유다 사람이었고(1:15, 2:2) 엘고스가 그의 고향이었던 점을 고려할 때 이 책은 주전 660-655년 경 엘고스에서 기록 되었을 것이라고 보기도 한다.

    나훔서의 시기

    ▶ 시대적 배경 :

    ① 정치적 상황 ;

    앗수르는 요나의 경고를 받아들여 온 국민이 회개했다. 그러나 디글랏빌레셀 Ⅲ, 살만에셀 Ⅴ, 사르곤 Ⅱ, 산헤립, 에살핫돈, 아슈르바니팔 등 강력한 왕들이 통치하는 100년 동안 주변 국가들을 차례로 정복하면서 점점 마음이 높아졌다. 특히 아슈르바니팔(주전 669-633) 통치 시절에는 주전 663년 애굽의 테베를 함락시킬 만큼 세력이 강해졌다. 따라서 불과 50여년 뒤에 니느웨가 망할 것이라고 아무도 예측할 수 없었다. 이미 북 이스라엘은 망해 없어졌으며, 한 때 남 유다 왕 므낫세도 아슈르바니팔의 군대의 침공을 받고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가기도 했다.(대하 33:10-19)

    ② 종교적 상황

    유다 왕 므낫세는 우상숭배와 완악함과 무죄한 자의 피 흘림 등으로 하나님 보시기에 악한 왕이었다.(왕하 21:1-16) 그는 하늘의 일월성신을 섬기기 위해 성전 뜰에 제단을 세웠으며, 무당과 점쟁이와 신접한 자를 가까이 했으나, 포로에서 돌아와 회개한 다음에는 우상숭배를 척결하고 산당을 없애며, 백성들로 여호와만 섬기도록 명령하기도 했다.

    ③ 같은 시기에 활동한 선지자 :

    스바냐, 하박국, 예레미야

    ▶ 기록 목적 :

    ① 유다의 평화는 앗수르나 애굽에 대한 외교력으로 지켜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주권적 개입으로 얻어지는 것을 가르치기 위해

    ② 니느웨 멸망을 통해 세상의 모든 신들과 우상은 헛것임을 드러내므로 하나님만 신뢰하도록 도전하기 위해.

    ▶ 니느웨 멸망에 대한 성취 :

    앗수르 왕 산헤립 때부터 니느웨가 앗수르의 수도로 지정되어 25년에 걸친 대규모 공사를 벌인 결과, 높이 30M에 마차 세대가 나란히 달릴 수 있을 정도로 넓고 길이가 120km에 이르는 성벽을 갖추었다. 거기에 200개의 망루가 설치되어 있으며, 넓이가 45m에 깊이가 18m의 삼중해자로 성벽을 둘러쌌으며, 철통같은 15개의 성문을 설치하여 적들의 포위공격에도 20년을 버틸 수 있는 난공불락의 요새 도시로 무장시켜 놓고 있었다. 그리고 티그리스 강에서 끌어들인 물을 가지고 도시 가운데 난공불락의 도시로 여겨졌기 때문에 당시 나훔의 예언은 한낱 약소국가 선지자의 푸념으로 밖에 들리지 않았을 것이다.

    니느웨 성

    그러나 그의 예언은 적중하여 주전 612년 나보폴라살이 이끄는 메대와 바벨론의 연합군에 의해 함락되고 말았다. 놀라운 것은 나훔이 예언한 대로 티그리스 강의 범람한 물을 메대와 바벨론 군대가 니느웨의 성벽을 파괴하는데 사용했다는 사실이다.(2:6) 그리고 신샤르이쉬쿤 왕(주전 629-612)이 왕궁에 불을 질러 자살하므로, 나훔의 예언처럼 니느웨 성은 마치 마른 지푸라기가 불에 타는 것과 같고, 벽돌 가마에 불이 타는 것과 같이 되어 버렸다.(1:10, 2:6, 3:15,15)

    더욱 놀라운 것은 니느웨가 사람들의 눈에 감춰질 것이라는 예언대로(3:11), 주후 1820년 일단의 학자들이 고대 니느웨 지역에서 유물을 몇 점 발견하기까지 사람들의 기억에서 철저히 사라져 심지어 니느웨의 존재조차 믿지 않으려 했을 정도였다. 주전 333년 페르시아 정벌을 위해 출정했던 알렉산더는 니느웨의 폐허에서 흔적조차 찾지 못하고 지나치기도 했던 것이다.

    (좌) 주후 1834년 발굴된 니느웨(니네베)성, 현재 복원된 니느웨 성(우)

    ▶ 참고자료

    - 니느웨(현재, 이라크 모술)

    ※ 참고 문헌

    - 「 성경과 5대 제국 」 조병호 지음, 통독원.

    - 「 성서 그리고 역사 」 장 피에르 이즈부츠 지음, 황소자리.(내셔널지오그래픽)

    - 「 성서의 역사와 지리 」 김흔중 지음, 엘맨.

    - 「 왕국시대의 예언자들 」 김인철 지음, 그리심.

    - 「 이스라엘의 예언자들 」 이병렬 지음, 페트라 성경연구원.

    - 「 이스라엘의 선지자 」 레온우드 지음, CLC.

    - 「 엑스포지멘터리 - 나훔편 」 송병헌 지음, EM. 외







    멸망을 향하여 나아가다(열왕기하 23:31-24:16)

    1. 요시야의 아들들

    유다가 멸망하기까지의 계보를 간략히 정리해 보는 일이 필요합니다.
    믿음의 선한 왕이었던 요시야가 죽은 뒤에 그 나라를 요시야의 아들이 물려받았습니다.

    열왕기하 23장후반부 부터 25장까지를 읽어보면, 요시야가 죽은 뒤에 유다가 완전히 멸망하기 까지 모두 4명의 왕이 세워졌습니다.
    첫 번째 왕이 요시야의 아들인 23세의 여호아하스가 왕위를 물려받습니다.
    그러나 33절을 보면, 애굽 왕 바로 느고가 여호아하스를 하맛 땅 립나에 가두어 버리고, 요시야의 다른 아들인 25세의 엘리야김여호야김으로 이름을 바꾸어서 왕으로 앉혔습니다.

    그런데 이 여호야김은 왕이 된 다음에 자기를 세운 애굽를 배반했습니다.

    왜냐하면 24:7절에서 설명하듯이 이때 이미 바벨론이 앗수르를 물리치고 세상을 지배하기 시작했기 때문에 애굽이 그 뒤로 다시는 자기 나라 밖으로 나오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유다도 애굽을 버리고 바벨론을 섬겼는데, 24:1절을 보면 3년 만에 다시 바벨론을 배반했습니다. 
    이 부분은 좀 더 설명이 필요합니다.

    결국 바벨론 왕이 군대를 보내서 여호야김을 폐위시켜버리고, 대신 그의 아들 여호야긴을 왕으로 세웁니다.
    이것이 열왕기하 24:1-6절까지의 이야기입니다.
    여호야긴여호야김의 아들이기 때문에 요시야의 손자입니다.

    그러나 24:17-18절을 보면, 바벨론 왕이 여호야긴의 아자비 맛디야의 이름을 시드기야로 고친 뒤에 왕으로 삼았다고 합니다.
    여호야긴의 아자비라면, 삼촌이라는 말이니까 이 사람도 요시야의 아들입니다.
    이 시드기야 시대에 유다는 멸망하게 됩니다.
    결국 요시야의 아들들 대에 유다는 역사의 저편으로 사라져 버리는 것입니다.


    16대. 요시야(31년)

    17대. 여호아하스(3개월)

    18대. 여호야김(11년)

    19대. 여호야긴(3개월)

    20대. 시드기야(11년)






    2. 여호와 하스(왕하 23:31-35절)

    여호와 하스는 요시야의 아들로 유다 17대 왕이 되었습니다. 23살의 비교적 성년이 되어 왕위에 올랐지만 그는 아버지의 길을 따르지 않았습니다. 그 결과가 고작 3개월입니다. 유다 역사상 가장 짧은 기간 통치한 왕으로 기록을 세웠습니다. 그렇게 그는 포로로 애굽에 잡혀가 거기서 죽고 말았습니다.

    그런데요? 왜 바로느고는 여호와 하스를 3개월 만에 폐위시키고 만 것일까요? 일단 요시야가 반 애굽 정책을 펼쳤기 때문에 바로느고는 보복성 벌금을 물립니다. 아마도 요시야의 반 애굽 정책 때문일 것이라고 추측하기도 합니다. 또 어떤 분은 여호와하스가 비교적 똑독한 사람이었기 때문이라고도 합니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국권을 잃은 나라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기억하십니까? 처음 왕정이 시작될 때 이스라엘 백성들이 내걸었던 슬로건 말입니다. 우리도 열방과 같이 왕이 있었으면 좋겠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그 왕정이 끝나갈 무렵에 왕은 허수아비가 되고 나라는 하나님의 징계를 받아 멸망의 길을 가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당신의 이름이 모욕을 받으면서까지 이 나라를 멸망시킬 수밖에 없도록 이들은 철저하게 부패했으며 하나님을 거역했습니다.

    이해할 수 없는 것은 아버지가 그렇게 개혁을 하고 나라가 강건해 졌음에도 아버지가 믿었던 하나님, 그 말씀을 따르지 않더라는 것입니다. 그 결과 그는 포로가 되어 애굽에 죽는 비참한 왕이 되고 말았습니다.

     

    3. 여호야 김(23:34-24:7절)

    여호와하스의 뒤를 이은 왕은 요시야 왕의 배다른 아들 엘리야김이었습니다. 이 왕은 애굽의 바로느고가 세운 일종의 섭정왕인 셈입니다. 아무런 실권이 없고 그저 애굽의 눈치를 보아야 하는 힘없는 군주가 바로 여호야김이었습니다. 이름을 개명한 것은 일종의 모욕으로 보입니다. 하나님 나라, 하나님이 왕이 되는 나라가 세상 나라들로부터 이렇게 모욕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더 많은 배상금을 요구했습니다. 애굽에 의해서 왕이 된 여호야김은 거절한 능력도 믿음도 담력도 없는 그야 말로 최악의 왕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서둘러 조공을 바치기 위해 가혹한 세금을 징수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거기서 더 나갑니다. 그는 자신이 거처할 초호화 왕국을 건설하는 무모한 악행을 저질렀습니다(렘22:13-14절).

    “불의로 그 집을 세우며 부정하게 그 다락방을 지으며 자기의 이웃을 고용하고 그의 품삯을 주지 아니하는 자에게 화 있을진저, 그가 이르기를 내가 나를 위하여 큰 집과 넓은 다락방을 지으리라 하고 자기를 위하여 창문을 만들고 그것에 백향목으로 입히고 붉은 빛으로 칠하도다.”는 이 말씀이 바로 여호야김의 악행을 고발한 내용인 것입니다.

    그는 거기서 더 나아가 예루살렘의 멸망을 예언한 선지자 우리야를 죽임으로 하나님의 진노를 샀습니다. 렘 26:20-23절입니다.

    “또 여호와의 이름으로 예언한 사람이 있었는데 곧 기럇여아림 스마야의 아들 우리야라 그가 예레미야의 모든 말과 같이 이 성과 이 땅에 경고하여 예언하매 여호야김 왕과 그의 모든 용사와 모든 고관이 그의 말을 듣고서 왕이 그를 죽이려 하매 우리야가 그 말을 듣고 두려워 애굽으로 도망하여 간지라 여호야김 왕이 사람을 애굽으로 보내되 곧 악볼의 아들 엘라단과 몇 사람을 함께 애굽으로 보냈더니 그들이 우리야를 애굽에서 연행하여 여호야김 왕에게로 그를 데려오매 왕이 칼로 그를 죽이고 그의 시체를 평민의 묘지에 던지게 하니라”

    참 부끄러움의 대명사가 되는 사람입니다. 애굽에까지 사람을 보내 연행 해다가 죽일 그 열정으로 나라를 잘 다스렸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런데 성경은 이들의 이런 선택이 하나님께서 이 나라를 멸망시키시려는 예언을 성취하는 과정이라고 말씀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분명히 이들은 자신들의 자유의지로 행동하고 있지만 이런 행동들이 결국 하나님의 말씀대로 이 나라가 부끄러움을 당하고 결국에는 열강에 의해 멸망하게 되는 것입니다. 요시야는 바로 이런 모습을 보지 않고 죽게 되는 축복을 누린 것입니다.

    여호야김이 통치했던 11년은 그렇지 않아도 기울어지는 국가의 수명을 재촉하는 어둠과 고통의 시간이었습니다.

    재위 기간 내내 애굽의 눈치를 보며 백성을 압제했던 여호야김은 통치 말년에는 바벨론의 압박까지 받게 됩니다. 주전 605년 당시 국제 정세의 판도에 중요한 사건이 발생합니다. 그것은 갈그미스 전투에서 바로느고가 신흥 강자인 바벨론 군대에 참패한 것입니다. 이때 애굽을 무너트린 장수가 바로 느브갓네살입니다.

    그는 신바벨론의 창시자인 나보폴라살의 아들로 무적으로 일컬어지던 앗수르를 물리치고 이어서 애굽의 바로느고까지 꺾어 버려 명실상부한 중동의 최강자로 등극하게 됩니다. 이 갈그미스 전투를 시작으로 바벨론은 애굽 때문에 이루지 못했던 서진 정책을 마음껏 밀어붙이게 됩니다. 이때 유다도 점령 당하게 됩니다. 멸망의 서곡이었던 것입니다. 이때 포로로 잡혀간 사람들이 바로 다니엘과 세 친구들을 위시한 일련의 영재들입니다.

    느브갓네살은 뛰어난 장군이자 대단한 리더로서 관제를 정비하고 궁전과 저수지, 대운하등을 건설하여 위대한 바벨론 제국의 기틀을 놓았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정복국에서 인재들을 데려다가 최고의 시설에서 훈련 받게 하고 국가의 요직에 등용했습니다. 다니엘이 그 나라의 셋째 치리자가 될 수 있었던 것은 이런 느브갓네살의 열린 정책 때문이었습니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여호야김은 죽은 듯이 3년을 바벨론이 시키는 대로 다 하면서 지내게 됩니다. 기막힌 일입니다. 한 나라의 왕이 애굽에 이어 바벨론의 속주가 되는 기막힌 경험을 하니 말입니다. 그러다가 3년 후에 돌연 태도를 바꿔 바벨론을 배반합니다. 이것이 왕하24:1절입니다.

    왜 여호야김은 이렇게 무모한 결정을 한 것입니까? 성경은 이 결정이 여호와께서 그의 종 선지자들을 통하여 하신 말씀과 같이 갈대아의 부대와 아람의 부대와 모압의 부대와 암몬 자손의 부대를 여호야김에게로 보내 유다를 쳐 멸하려 하심이라는 것입니다. 이 일이 유다에 임한 것은 여호와의 말씀대로 그들을 자기 앞에서 물리치고자 하심이니 이는 므낫세의 지은 모든 죄 때문이며 또 그가 무죄한 자의 피를 흘려 그의 피가 예루살렘에 가득하게 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 죄를 사하시기를 즐겨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성경적인 관점에서 여호야김의 선택은 예언을 이루는 결과를 초래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호야김이 이런 결정을 한데는 이유가 있습니다.

    주전 602년 경에 느브갓네살이 유다를 전진기지로 애굽을 공격한 일이 있었습니다. 그때 애굽은 결사 항전을 해서 간신히 느브갓네살의 공격을 물리친 것입니다. 이것을 지켜본 여호야김은 기회는 이때다 하고 애굽과 손을 잡은 것입니다. 그런데 사실 애굽은 거의 죽을 힘을 다해서 버틴 것에 불과했습니다. 그때 예레미야 선지자가 바벨론을 거역하지 말 것을 간곡히 권합니다. 그러나 여호야김은 친애굽파의 말을 듣고 결정을 내린 것입니다.

    이때 느브갓네살이 이끄는 바벨론 군대는 결사 항전하는 애굽 군대를 죽자고 물리쳐야 할 이유가 없기 때문에 작전상 후퇴한 것에 불과했습니다. 따라서 유다를 징계하지 못할 정도로 군사력이 약해지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여호야김의 이런 정책에 바벨론은 득달같이 몰려오게 된 것입니다. 갈대아 사람 본대와 유다 변방이 아람, 모압, 암몬 족속의 연합군들까지 몰려와 유다의 숨통을 끊으려고 했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 시대에 이사야, 미가, 나훔, 하박국, 예레미야 등의 수많은 선지자들을 보내서 유다의 멸망을 경고했습니다. 그러나 왕들은 이 경고를 하나같이 무시했습니다. 여호야김은 예레미야를 토굴에 가두기까지 했습니다.

    그들의 그런 선택...

    그들의 그런 끊임없는 불신앙과 악행이 멸망을 향하여 점점 더 다가가게 만든 것입니다.

    이 침공으로 유다는 철저하게 유린 당합니다. 여호야김은 느브갓네살의 포로가 되어 쇠사슬에 묶여 끌려갑니다. 이때 예루살렘 성전에 있는 모든 기구들을 털어 바벨론으로 가져갑니다. 뒷날 벨사살이 바로 이 성전 기구들을 가지고 술판을 벌이다가 하나님의 심판 선고를 받고 멸망의 길을 가게 되는 것입니다. 안타까운 일입니다.

     

    4. 여호야긴(왕하8-17절; 대하36:9-10절)

    유다의 19대 왕은 여호야 긴입니다. 여고냐 라는 이름을 가진 여호야긴은 왕이 되어 석달 열흘을 통치했습니다. 그런데 그 짧은 기간에 아버지 여호야김의 뒤를 따라 멸망의 길을 재촉한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그는 재위 100일만에 바벨론의 2차 침공이라는 재앙을 만났습니다.

    그런데요? 바벨론은 이미 정복한 나라를 왜 다시 정복한 것입니까? 여기에는 앞서 여호야김의 잘못된 선택이 있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여호야김이 포로로 끌려간 해가 주전 602년이라면 바벨론의 2차 침공시기가 주전 597년이라고 할 때 5년의 차이가 발생합니다. 왜냐하면 여호야긴은 100밖에 다스리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2차 침공과 정권이 교체되는 시기가 같아야 하는데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를 한 홍목사는 이렇게 설명합니다.

    여호야긴이 왕위에 오른 시기는 아버지인 여호야김이 포로로 끌려간 직후가 아니라 그로부터 5년 후라는 것입니다. 그럴 때 5년의 공백은 누가 다스렸느냐는 문제가 생깁니다. 이 문제를 한 홍목사는 여호야김이 바벨론에게 충성을 맹세하고 바로 풀려났다고 봅니다. 그렇게 충성을 맹세했다가 5년 후에 다시 배반한 것이라는 말입니다. 그러자 격분한 바벨론 군대가 2차 침공을 감행하게 되고 그 결과는 훨씬 잔인한 것이었습니다. 따라서 아버지의 잘못된 결정 때문에 여호야긴은 100일을 통치하고 무려 37년이라는 긴 세월을 포로로 잡혀 있어야 했습니다.

    참 아이러니한 것은 그가 이렇게 포로로 잡혀 있었던 것이 저주만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가 포로로 잡혀 있음으로 유다 왕조의 맥이 끊어지지 않는 기막힌 축복이 되기 때문입니다. 물론 멸망한 나라의 왕족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마는 그의 37년 포로 생활은 왕족의 대통을 잇는 기회이기도 했다는 점에서 다행스러운 면이 있다는 것입니다.

    아무튼 여호야김의 잘못된 판단으로 2차 침공을 당한 유다는 철저하게 유린을 당하고 훨씬 많은 사람이 2차 포로로 잡혀가게 됩니다. 이때 잡혀간 사람들이 바로 모르드개, 에스더, 에스겔 같은 사람들입니다. 이때 포로의 규모가 1만 명이 되었기 때문에 국가의 중요한 인물들은 거의 포로로 잡혀가게 됩니다. 이들은 모두 국가에 중추적인 역할을 하던 학자, 군인, 기술자들이었기 때문에 유다는 아예 재기할 힘을 일어 버릴 정도였습니다.

    우리가 물어야 할 질문

    자, 우리는 세 왕이 국제 정세 속에서 계속 잘못된 결정을 하는 장면을 차례로 살폈습니다. 결과는 이미 말씀에 기록된 대로 멸망을 향해서 치닥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여호와하스나 여호야김, 여호야긴은 모두가 자신이 최선을 다한 결정이었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그들은 나름대로 국제 정세를 읽었습니다. 나름대로 고민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하지 않은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들의 계획에는 하나님이 없었습니다. 하나님이 왕이신 나라의 왕이 하나님을 배제하고 계획을 짜고 하나님 없이 국정을 운영했습니다. 더 나아가 적극적으로 우상을 숭배했습니다.

    우리가 역사를 통해서 배워야 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저는 이것이 열방을 쫓아간 인생들의 결론이라고 믿습니다.

    열왕기는 결국 열방을 쫓겠다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결정이 그들 스스로를 심판의 구덩이에 던지게 했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그러나 그것보다 더 안타까운 것은 하나님이 계속해서 선지자를 보내셔서 말씀하시고 또 말씀하셨어도 듣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점점 더 극단적인 우상숭배에 빠져들었다는 것입니다. 여기에 타락한 인간의 문제가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을 때 우리의 성품이나 삶이 저절로 주님을 닮은 모습으로 변화될 것이라는 환상을 가져서는 안 될 것입니다. 절대로 그렇게 될 수 없습니다. 오히려 역사가 증명하는 것은 그대로두면 이렇게 세상을 쫓다가 멸망의 길을 가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옳게 인식하셔야 합니다. 따라서 우리는 매일 주님 앞에 서야 합니다. 매일 주님 말씀에 순종하고 우리가 가고 있는 길이 주님이 기뻐하시는 길이 될 수 있도록 마음을 써야 합니다. 그것만이 우리를 곁길로 가지 않도록 지켜줄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사야 41:21-29
    나 여호와가 말하노니”(21)

    “이사야”라는 이름의 뜻은 “여호와는 구원 이시다”
    구약의 선지서 17권이 있다.
    이사야서를 제외한 16권 가운데 “구원” 이라는 단어 딱 7번 쓰인다.
    그런데 이사야 서에만 “구원” 이라는 단어는 26번 나온다.
    .
    구원에 대한 말씀, 그 이름만큼, 구원에 대한 말씀을 많이 허락하고 있다.
    이게 은혜이다.
    .
    이사야는 약 주전 739-681 에 대략 50년동안 예루살렘에서 사역을 했다.
    이 당시는 북동쪽에 앗수르, 남서쪽 애굽제국  그 사이에 끼어있는 형국이었다.
    양쪽에 메소포타미아, 나일강의 강대국 사이에서 어느쪽에도 기울수 없고, 한쪾이 강력해지면 반대편을 의지해서 나라를 지켜야하는 시기였다.
    .
    이사야는 그런 가운데 두려움이 없이 구원에 대하여 선포했다.

    주전 586년에 바벨론이 예루살렘 함락.
    그리고 바벨론으로 3차레 포로로 끌려간다.(주전 605, 597, 586)
    .
    이사야, 예레미야 포로에서 “해방, 귀환할것이다.”
    이사야는 이때에 앞으로 150년후 일어날 일들에 대하여 예언이 나온다.
    .
    이샤야 44장까지 가서보면 바라, 고래스 라는 인물이 등장한다.
    동방사람, 메사 _바사, 페르시아 제국, 바사에서 매데까지 다스리게 된다.
    쓰임 받는다.
    “누가 동방에서 사람을 일깨워?” “공의로 불러서” (41:2)
    하나님의 주권아래서 역사가 진행이 된다.
    .
    바벨론을 무너 트린다.
    그리고 말씀 하신다.
    공의를 통해서 우리를 보호 하시는것이다.
    세상의 공의와 다르다.
    공의롭게 일하시겠다는거다.
    심판과 회복 두가지 측면을 다 가지고 계시다.
    .
    단순히 이스라엘의 나라와 민족의 회복이 아니다.
    나의 종이다.
    하나님의 말씀앞에 순종하는자.
    하나님의 뜻에 순복하는자들은 두려워말라. 이다.
    .
    선택된 자들에게 임하는 은혜이다.
    .
    당시 사람들은 고래스를 가볍게 여겼었다.
    바벨론을 무너질것이라는 것을 꿈에도 몰랐다.
    .
    “이 일을 누가 행하였느냐
    누가 이루었느냐 누가 처음부터 만대를 불러내었느냐
    나 여호와라 처음에도 나요 나중 있을 자에게도 내가 곧 그니라.(41:4)
    .
    공의를 이루기 위해서 일을 시작하면 누구도 막을수없다.
    그렇지만 나의 종들은 두령워하지말라.
    이게 어제 본문이다.
    .
    “우상들은 소송하라.
    우상의 허무함을 알아라! 뜻이다.
    보이라, 진술하라, 그 결말을 알아보리라,
    장차 당할 일을 우리에게 진술하라.
    또 이전 일이 어떠했는지 알게하라.”(21-24)
    .
    우상은 존재자체가 없다.
    이전도 모르고, 미래도 모른다.
    우상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것을 바라보는게 허망한것이다.
    .
    우상에 빠져있는 자들은
    예언의 능력도 없고,
    하나님의 일을 말하지 못한다.
    아는것도 없고, 들어본것도 없는것이다.





    아도나이 다르코(יְהֹוָה דַּרְכֹּו )

    길(1870) 데레크(derek) דֶּרֶךְ 

    1. 여행,  2. 길, 3. ∼로향하는 길
    발음 / 데레크[ derek ]
    어원 / 1869에서 유래
    관련 성경  / 길(창3:24, 삼상4:13, 겔48:1), 행위(창6: 12,삼상8:3, 왕상8:32), 도(창18:19, 신13:5, 시18:21), 도리(창19:31, 욥21:14), 생리(창31:35), 도중(왕하10:12), 도로(레26:22, 애1:4), 여행(민9:10, 수9:13), 행사(욥26:14), 중도(시102:23),때문(시107:17), 행실(잠8:13, 13:6), 소행(잠12:26, 호4:9), 바른 길(잠23:19, 사30:11), 옳은 길(말2:8), 자취(잠30:19), 사정(사40:27),행동(겔14:22,23), 풍속(겔20:30). [동] 향하다(겔20:46, 21:2, 40:6,22,46), 위하다(암8:14), 여행하다(수9:11), 가다(삿4:9), 행하다(잠14:2, 28:6), 본받다(사10:24).
    구약 성경 / 706회 사용


    하나님께서는 북이스라엘을 멸망시킨 앗수르의 수도 니느웨에 징벌 심판을 내리실 것임을 예언하셨습니다.
    그들은 북이스라엘을 멸망시킨 것에 만족하지 않고 유다를 괴롭혔습니다.
    비록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의 언약을 어겨 심판을 받았지만, 하나님의 백성에게 포학을 행하는 이방 나라가 하나님의 심판을 받음은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죄악으로 가득 찬 니느웨에 멸망을 선포하면서 심판주이신 하나님의 권능과 선민 유다 민족에 베푸시는 하나님의 은혜에 대하여 기록하고 있다.
    특히 본장에서는 자연계에 나타난 하나님의 능력을 보여 주면서, 죄악을 행하는 니느웨에 대한 하나님의 공의의 속성을 강렬하게 부각시키고 있다.
    그러면서 한편으로는 유다에 평화의 소식이 전하여진다는 메시지로 본장을 마무리 짓고 있다.
    이러한 내용을 가진 본장은 자연계와 이방 백성에게 보여 주시는 하나님의 공의의 속성을 보여주는 전반부(1-8절)와 니느웨에는 심판을 행하시지만 반면에 유다에는 구원을 베푸실 것임을 보여 주는 후반부(9-15절)로 나눌 수 있다. 

    나훔 1:1-8
    나훔 1:9-15


    [신학주제]
    모든 피조물의 주관자이신 하나님.
    인간 세계에 존재하는 모든 신학과 사상의 주제는 존재하는 피조 세계가 어디서 왔는가 하는 것이다.
    이는 곧 인간의 존재 근원에 대한 질문이며, 인간의 삶의 목적을 규정하는 결정적인 요소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인류의 시작으로부터 제기된 질문은, 인간으로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피조 세계가 어떤 알 수 없는 절대자로부터 지배되고 있다는 선험적 이해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래서 인류는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고대로부터 수많은 철학자들이 나름대로 사상을 주장하였지만 시대가 지나가면 언제나 사람들의 관념에서 벗어나 버렸다.
    그런데 이 가장 근원적인 문제에 대해 가장 명확하고 정확한 해답을 제공하는 것이 바로 성경이다.
    성경은 처음부터 모든 피조 세계가 하나님에 의해 창조되었다고 선언하고 있다.
    이방 족속에 대한 심판을 선언하고 있는 본장이 처음부 터 하나님을 피조물의 주관자라고 선포하고 있는 것도 그런 이유에서이다.
    즉 하나님은 피조물의 창조주이시므로 그들을 심판하실 자격이 있으시고 그들에게 찬양을 요구하실 수 있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이 모든 것을 만드신 것은 모든 피조물로 하여금 찬양과 영광을 받으시려 함이었다.
    그러나 인간은 이 하나님의 창조 솜씨를 찬양하기를 거부했다.
    그래서 무엇보다 선지자는 하나님의 창조의 주권과 그 솜씨를 노래하며 인간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찬양하라고 선포했다.
    하나님은 창조의 주체자이신 만큼 만드신 그 모든 것들을 심판하실 권한도 있으시다.
    선지자들을 통해 하나님께서 계속 깨우치고자 하신 것이 바로 심판의 메시지이다.
    또한 심판의 메시지를 듣고 자신의 죄를 회개하는 자는 구원을 받게 된다.
    본장에 언급된 이방 족속들이 심판을 받게 된 것도 하나님을 찬양해야할 피조물의 사명을 잊어버렸기 때문이다.
    따라서 하나님이 인간들에게 요구하시는 것은 무엇보다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고 그의 창조 솜씨를 찬양하고 높이는 것이다.  


    [영적교훈]
    본장은 우리에게 하나님을 거역하는 것과 하나님의 백성들을 괴롭히는 죄악에 대해서 하나님은 반드시 심판하신다는 사실을 보여 주고 있다.
    아울러 그의 택한 백성은 반드시 구원시킨다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무엇보다 하나님의 이름을 높이고 그의 뜻대로 살아야 한다.
    인간은 누구나 하나님을 찬양하기 위해 창조되었기에 하나님을 향한 안양의 삶을 사는 자만이 구원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이 세상에서 살아갈 때 자신의 이익과 안락만을 추구해서는 안 된다.
    바울의 가르침과 같이 무엇을 먹고 마시든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사는 자가 되어야 한다.  





    주님의 길을 예비하라(이사야 40:2-5)

    가. 절망 중에도 희망의 길을 열어야 한다.

    2절, “외치는 자의 소리여 이르되 너희는 광야에서 여호와의 길을 예비하라 사막에서 우리 하나님의 대로를 평탄하게 하라.”

    * 본문은 바벨론 포로생활에서 절망에 빠져 있는 이스라엘 백성을 위로하기 위하여 주신 말씀이다. 당시 이스라엘은 오랜 포로생활에 지친 나머지 절망의 늪에 빠져 허덕이고 있었다. 그러나 하나님은 선지자를 통하여 선포하시기를 절망 중에서도 낙심하지 말고 희망의 길을 열라고 하셨다.

    * 본문에서 ‘사막’(아라바)은 ‘해가 지다’ 또는 ‘방황하다’를 뜻하는 ‘아라브’에서 유래하였다. 즉 사막은 희망을 잃고 방황하고 있는 상태를 암시한다. 이것은 당시에 이스라엘 백성의 상황이 얼마나 힘들었는지를 보여준다. 그래도 하나님은 절망하지 말고 희망의 길을 열라고 하신다.

    * 현재 우리들도 어려운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 ‘삼포시대’ 또는 ‘오포시대’라는 비관적인 견해가 널리 퍼져있다. ‘헬(hell)조선’이라는 괴이한 용어가 등장하고, 이곳을 떠나고 싶다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다. 그러나 포기하면 안 된다. 저녁이 되고 아침이 오는 하나님의 역사를 믿어야 한다.

    나. 여호와 하나님이 우리의 희망이시다.

    3절, “광야에서 여호와의 길을 예비하라 사막에서 우리 하나님의 대로를 평탄하게 하라.”

    * 본문에서 선지자는 여호와의 길을 예비하고 하나님의 대로를 평탄하게 하라고 외친다. 여호와 하나님이 우리의 희망이시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임재를 회복하는 곳에 희망이 있다. 사람들이 우리의 목자이신 하나님의 인도를 온전히 따를 때에 희망이 있다.

    * 본문에서 ‘광야’(미드바르)는 ‘말하다’ 또는 ‘인도하다’와 ‘따르다’를 뜻하는 ‘다바르’에서 유래하였다. 광야는 양이 목자를 전적으로 의지하고 따를 수밖에 없는 곳이다. 광야에서는 하나님이 목자가 되어 인도하시고 백성들은 양같이 그의 말씀을 온전히 따를 때에 안전하고 평화롭다.

    * 여호와 하나님이 우리의 희망이 되시는 근거는 ‘하나님의 약속은 이루어진다’에 있다. ‘꿈이 이루어진다’가 아니라 ‘약속은 이루어진다’가 신앙적인 표현이다. 성경은 하나님의 약속은 반드시 이루어진다고 선포하고 있다. 아브라함에게 주셨던 약속은 오랜 시간이 지났지만 확실하게 성취되었다. 메시야에 대한 예언의 말씀들도 확실하게 성취되었다. 몰트만의 희망의 신학을 참조하라.

    다. 주님이 오실 길을 잘 예비하여야 한다.

    4절, “골짜기마다 돋우어지며 산마다, 언덕마다 낮아지며 고르지 아니한 곳이 평탄하게 되며 험한 곳이 평지가 될 것이요.”

    * 본문 3절에 이어 4절에서도 주님의 오실 길을 예비하라고 하면서 구체적인 내용을 제시한다. 여호와의 길을 ‘예비하라’(파나, 피엘형)는 ‘제거하라’ 또는 ‘깨끗하게 하라’는 뜻이다. 거룩하신 하나님을 맞으려면 속사람을 깨끗하게 청소를 해야 한다. 이를 위해 요한은 회개의 세례를 베풀었다.

    * 여호와의 대로를 ‘평탄하게 하라’(야사르, 피엘형)는 ‘똑바르게 하라’는 뜻이다. 성도가 주님을 영접하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의를 이루어야 한다는 말씀이다. 절망의 땅에서 비열한 야합, 술수, 음모 등이 판치는 것과는 대조적인 말씀이다.

    * 여기서 ‘골짜기마다 돋우어지며’는 낮은 자들이 높여지는 것을 뜻한다. 또한 ‘산마다, 언덕마다 낮아지며’는 힘 있는 자들이 몸을 낮추는 것을 뜻한다. 그리고 ‘고르지 아니한 곳이 평탄하게 되며’는 뒤에 처진 자들이 이끌어지는 것을 뜻한다. 즉 공평을 이루는 것이 주의 길을 예비하는 것이다.

    라. 주의 길을 예비한 사람은 그의 영광을 본다.

    5절, “여호와의 영광이 나타나고 모든 육체가 그것을 함께 보리라...”

    * 여기서 하나님의 영광은 그의 임재를 상징한다. 사람은 하나님의 임재를 볼 수 없으나 그의 영광을 보고 그의 임재를 확인할 수 있다. 하나님이 성소에 임하실 때에 그의 영광이 가득하였다. “구름이 회막에 덮이고 여호와의 영광이 성막에 가득하매” 모세가 회막에 들어갈 수 없었다(출40:34).

    * 에스겔서에 보면 이스라엘을 벌하실 때에 하나님의 영광이 성소를 떠나는 장면이 나온다(겔10장 참조). 그러다가 이스라엘의 회복을 약속하시며 하나님의 영광이 돌아온다. “이스라엘 하나님의 영광이 동쪽에서부터 오는데 하나님의 음성이 많은 물소리 같고 땅은 그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빛나니 그 모양이 내가 본 환상 곧 전에 성읍을 멸하러 올 때의 환상과 같고...”(겔43:2-3a)

    * 여호와의 ‘영광’(카도쉬)은 ‘풍부’라는 뜻도 갖고 있다. 하나님의 영광이 임하고 그가 임재하시면 백성들은 구원을 받고 부요케 하시는 은총을 입는다. 하나님이 오심은 가난한 자들에게 기쁜 소식이며, 고통 중에 있는 사람들에게 희망이다. 주의 길을 예비한 사람들이 이 영광을 본다.


    여호와의 길을 준비하라

    이사야 40장 3절은 우리 교회가 매우 좋아하는 본문입니다. 그리고 이사야서 안에서 이 본문이 차지하고 있는 분위기 역시 뭔가 희망적이고 소망의 느낌을 줍니다.
    오늘 본문에서 선포되는 말씀은 마태복음 3장 3절에서 세례요한에게서 다시 인용되어 사용되기도 했습니다.
    3 그는 선지자 이사야를 통하여 말씀하신 자라 일렀으되 광야에 외치는 자의 소리가 있어 이르되 너희는 주의 길을 준비하라 그가 오실 길을 곧게 하라 하였느니라 [1] (마 3:3.)
    오늘 본문의 말씀은 마치 시의 노래처럼 평행적인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본문을 보면 광야와 사막이 평행되는 의미를 가지고있습니다..
    그렇다면 여호와의 길과 우리 하나님의 대로는 같은 의미를 가질 것입니다.
    우리가 “대로”라는 의미를 생각할 때 그 의미는 앞의 법칙에 의해서 “길”이라는 의미를 가진 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 길은 그 앞의 “주” 또는 “여호와”라는 말로 수식되어서 “주의 길”, “여호와의 길”로 표현되고 있습니다. 따라서 대로는 길인데.. 이 이사야서에서 표현하는 대로는 여호와의 길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길이라는 것으로 번역된 “메씰라” 라는 단어는 영어 성경에서 “하이웨이”…. 고속도로로 번역이 되어 있습니다. 다시말하면 이 메씰라 라는 길은 길인데 다듬어진 길입니다. 평탄하게 다듬고 곧게 닦은 길은 고대에 대규모 군사 원정을 떠나는 이들이 다녔던 길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신속하고 편안하게 길을 떠나기 위해 그 길은 곧게 뻗어야 했고, 다듬어 지고 평탄해야 했습니다…
    그런데 오늘 이사야 말씀에서 하나님께서 이 이사야를 통해서 말씀하시는 것이 “너희가 광야에서 여호와의 길을 예비하라는 것입니다. “ 다시말하면 너희가 고속도로를 닦아라 입니다.
    이게 무슨 말입니까?
    이사야는 유다가 앗수르에 위협을 당하는 시기에 사역을 했습니다. 이사야서는 유다의 심판 뿐만이 아니라 열방에 대한 심판을 예언합니다. 이스라엘 주변의 강대국이었던 애굽, 에둠, 블레셋, 앗수르.. 바벨론까지 모든 나라들이 하나님의 심판 가운데 있으며 그들이 심판에 의한 재앙을 맞게 될 것을 예언합니다.
    재앙이라고 하면 포로 또는 국가의 멸망이 될 것입니다.
    여기에는 예루살렘… 유다도 포함 됩니다.
    그런데 그러한 심판이 끝이 아니라 오늘 40장 이후부터는 이스라엘이 심판으로 포로가 되지만 곧 그들이 구원과 회복을 얻게 될 것을 또한 예언합니다. 포로에서 해방된다는 것입니다.
    이사야는 비록 포로기 전에 활동했지만 유다의 포로를 내다 보았고 더 나아가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사로잡은 바벨론을 심판하시고 이스라엘을 다시 회복 할 것이라는 소망과 구원을 앞서 보고 있습니다.
    그러한 구원의 소망을 노래하는 가운데 오늘 본문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다시말하면 오늘 본문은 앞서 심판에 대한 내용의 반전이자 새로운 구원을 노래하는 시작으로 나타납니다.
    따라서 오늘 광야에서 길을 예비하라… 사막에서 대로를 평탄케 하라는 말씀은 이 길을 따라서 포로된 이스라엘이 돌아올 것을 예언하는 본문입니다.
    일부 학자들은 이스라엘이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오는 것을 제2의 출애굽으로 말합니다.
    이집트의 포로에서 벗어난 첫 번째 구원 사건이 첫번째 출애굽 이었다면 베발론 포로에서 예루살렘으로 돌아온 사건을 제2의 출애굽으로 보는 것입니다.
    마치 첫번째 출애굽에서 이스라엘이 광야의 길을 따라 가나안으로 들어갔듯이… 오늘 두번째 출애굽에서도 이스라엘은 광야의 길을 따라 예루살렘으로 돌아오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그때와 다른 것은 이스라엘에게 길을 준비하라고 했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이스라엘이 바벨론에서 예루살렘으로 돌아오기 위해서는 상당한 장애물이 있었습니다. 그 중에 하나가 이 사막입니다. 실제로 상인들과 군대가 이동을 하기 위해서는 이 사막을 바로 통과하지 못하고 유프라테스 강 상류 지역으로 올라간 다음에 다시 남쪽으로 내려와야 했습니다.
    아브라함의 이동경로를 보면 아시겠지만 아브라함도 우르에서 가나안땅으로 올 때 터키 남단에 위치한 하란을 거쳐서 멀리 돌아온 이유가 바로 이 사막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사막에 이 광야를 가로 질러서 메실라 … 대로 라고 번역된 고속도로가 생긴다면 이제는 전혀 우회할 필요가 없이 가장 가깝고 신속한 직선 도로가 생기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 길을 통해서 심판의 하나님으로 이스라엘에게는 구원의 하나님으로 오신다는 것입니다… 너희가 마음의 할례를 받고 준비되어 회개하면 하나님의 구원이 이 왕의 대로를 통해서 지체없이 오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스라엘은 이 하나님의 구원의 길… 하나님의 대로를 통해서 하나님의 성전 예루살렘으로 돌아오게 될 것임을 이야기 합니다.

    아까 이야기 했지만 이 포로귀환은 제2의 출애굽이라고 했습니다. 오늘 본문은 여러가지면에서 이스라엘의 첫번째 출애굽과 비교될 수 있습니다.
    먼저 오늘 본문의 하나님의 대로와 출애굽당시 이스라엘이 지나가고자 했던 왕의 대로입니다.
    민수기 20:17-18절입니다.
    17 청하건대 우리에게 당신의 땅을 지나가게 하소서 우리가 밭으로나 포도원으로 지나가지 아니하고 우물물도 마시지 아니하고 왕의 큰길로만 지나가고 당신의 지경에서 나가기까지 왼쪽으로나 오른쪽으로나 치우치지 아니하리이다 한다고 하라 하였더니
    18 에돔 왕이 대답하되 너는 우리 가운데로 지나가지 못하리라 내가 칼을 들고 나아가 너를 대적할까 하노라 [1]
    민수기 21:21-23절도 읽겠습니다,.
    21 ◎이스라엘이 아모리 왕 시혼에게 사신을 보내어 이르되
    22 우리에게 당신의 땅을 지나가게 하소서 우리가 밭에든지 포도원에든지 들어가지 아니하며 우물물도 마시지 아니하고 당신의 지경에서 다 나가기까지 왕의 큰길로만 지나가리이다 하나
    23 시혼이 이스라엘이 자기 영토로 지나감을 용납하지 아니하고
    이스라엘이 출애굽가운데 왕의 대로를 지나가고자 했습니다. 그러나 민수기 말씀처럼 이방 나라는 이스라엘이 왕의 대로를 지나가는 것을 거절합니다. 굴욕적인 거절입니다. 결국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 왕의 대로를 이용하지 못하고 우회하여 모압 지역에 도착을 합니다…
    하지만 이사야를 통해서 말씀하시는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이 하나님의 대로를 통해서 곧바로 구원받게 될 것임을 보여줍니다… 심지어 이 길을 지날때는 이민족의 방해도 없을 뿐더러 심지어 사자나 들짐승의 위협도 없을 것입니다.. 이 길을 걸어가는 자들은 보호를 받으며 신속하게 하나님의 나라로 돌아오게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길을 통해 돌아오는 자들은 누구입니까? 첫번째 출애굽에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약속의 땅으로 들어왔다면 이 두번째 출애굽에서 누가 하나님의 구원을 경험합니까? 여기서는 이스라엘이 아니라 남은자입니다.
    이사야 11장 11절입니다.
    11 ◎그 날에 주께서 다시 그의 손을 펴사 그의 남은 백성을 앗수르와 애굽과 바드로스와 구스와 엘람과 시날과 하맛과 바다 섬들에서 돌아오게 하실 것이라 [1]
    [1] 대한성서공회, 성경전서: 개역개정, 전자책. (서울시 서초구 남부순환로 2569: 대한성서공회, 1998), 사 11:11.
    16절도 읽겠습니다.
    16 그의 남아 있는 백성 곧 앗수르에서 남은 자들을 위하여 큰 길이 있게 하시되 이스라엘이 애굽 땅에서 나오던 날과 같게 하시리라 [1]
    [1] 대한성서공회, 성경전서: 개역개정, 전자책. (서울시 서초구 남부순환로 2569: 대한성서공회, 1998), 사 11:16.
    비록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다의 모래같이 많겠지만… 하나님의 구원을 경험하는 자들은 오직 남은자들입니다. 이것은 단지 이스라엘이라고 해서 구원받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수많은 이스라엘 백성들 중에서 오로지 여호와의 신앙을 순수하게 간직하고 있는… 포로기 가운데 그 바벨론의 찬란한 문화 가운데서도 흔들리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구원을 바라보며 거룩함으로 살아가는 자들… 그들에게 구원이 임한다는 것입니다.
    출애굽기 12장 38절에서 보면 이스라엘이 출애굽 할때는 수많은 잡족들이 함께 섞여 있으며 많은 가축들이 함께 출애굽의 경로에 섞여 있었습니다.
    그러나 오늘 말씀의 여호와의 길 대로는 어떤 길입니까? 이사야 35장 8절을 읽게씁니다.
    8 거기에 대로가 있어 그 길을 거룩한 길이라 일컫는 바 되리니 깨끗하지 못한 자는 지나가지 못하겠고 오직 구속함을 입은 자들을 위하여 있게 될 것이라[1]
    [1] 대한성서공회, 성경전서: 개역개정, 전자책. (서울시 서초구 남부순환로 2569: 대한성서공회, 1998), 사 35:8.
    대로는 거룩한 길이라 말합니다. 부정한 자는 지나가지 못하며 오직 구속함을 받은 자들이 갈 수 있습니다… 구원은 이 구속함을 입은 자들에게 임합니다. 이 구속함은 거룩한 자들이고…. 온갖 우상숭배와 물질 주의가 팽배한 곳에서 하나님의 말씀과 신앙을 붙들며 살아갔던 자들..... 남은자!!들 이 가는 길이 바로 이 대로의 길이라는 것입니다.
    그들이 이 사막의 한가운데 뻗은 이 대로의 길을 걸어갈 때…. 하나님의 영광을 보게 됩니다…
    사막은… 광야는 배고픔과 결핍의 장소입니다.. 목마름의 장소입니다… 그런데 출애굽기에서 하나님이 이 광야 한가운데 시내산에 임재하셔서 하나님의 영광을 보여 주셨습니다… 또한 이사야에서도 이 광야에서 여호와의 영광 곧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볼것이다!! (35:2)라고 선언합니다.
    이 하나님의 영광은 바로 준비된 대로의 길을 통해서 오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영광이 바로 남은자들이 준비하고 닦은 그 거룩한 길을 통해서 임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이 길을 준비하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때 너희가 구원을 보며 하나님의 아름다움… 하나님의 영광을 볼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오늘도 우리의 삶은 광야와 같고 우리의 환경은 온갖 우상숭배가 가득한 바벨론과 같지만… 하나님은 그러한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너희가 남은자인가!!! 너희가 하나님의 오실 길을 준비하는 자인가!! 하는 것을 보신다고 합니다…. 그것이 지금 우리에게 선포되어지는 이사야 선지자의 메시지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아니라… 남은자이다…. 알곡과 쭉정이가 같이 자라지만 … 알곡은 모아 곳간에 들이고 쭉정이는 불에 던지우게 될 것이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이라고 불리지만…. 그 명칭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우리가 남은자로 하나님의 길을 준비하는 자인가!! 하는 것이 우리에게 중요하다고 말씀하십니다.. 오늘 우리는 대로 교회에 맞는 남은자로서의 삶을 살고 계십니까?? 우리가 우리의 삶을 그리스도인에 맞게… 대로라는 교회 이름에 맞는 그러한 삶을 통해… 하나님의 길을 예비하며… 이 땅가운데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고 나타낼 수 있는 교회가 되길 소망합니다.

    요일

    오늘 읽을 말씀

    묵상 주제

    211

    7

    30

    주일

    설교 묵상 및 봉사와 섬김

    212

    7

    31

    월 

    미가 3장

    여호와의 신(8절)

    213

    8

    1

    미가 4장

    여호와의 산(2절)

    214

    8

    2

    미가 5장

    근본(2절)

    215

    8

    3

    미가 6장

    영혼의 죄(7절)

    216

    8

    4

    미가 7장

    주와 같은 신(18절)

    217

    8

    5

    미가 8장

    여호와의 길(3절)








































































    미가(Micah) 07-28-2023(금)


    여호와께서 네게 구하시는 것(미가 6:8)  

    미가 6:8
    사람아 주께서 선한 것이 무엇임을 네게 보이셨나니 여호와께서 네게 구하시는 것이 오직 공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히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

    공의(4941) 미쉬파트(mishpâṭ) מִשְׁפָּט

    공의(4941) 미쉬파트(mishpâṭ)  מִשְׁפָּט  

    1. 판단.  2. 레위기 19:15  3. 욥기 9:32
    발음 / 미쉬파트[ mishpâṭ ]
    어원 / 8199에서 유래
    관련 성경 / 정의(창18:19), 법(렘30:11), 공의(신16:18,시25:9), 율례(왕상9:4), 양식(출26:30, 왕상6:38), 판결(출28:15, 민27:11, 삼상8:3), 규례(레5:10, 민15:16, 삼상30:25), 법도(레18:4, 신4:1), 재판(레19:35, 신1:17), 법(레24:22, 왕하17:26,27), 사연(민27:5), 판결법(민27:21), 몫(신18:3), 권리(신21:17), 송사(신24:17, 왕상3:11), 방식(수6:15), 관습(삼상2:13), 계명(왕상2:3), 직무(왕상4:28), 일(왕상8:45,59), 모양(왕하1:7), 풍속(왕하17:33,34,40), 반열(대상6:32), 판단(대상16:12), 사정(욥13:18, 사40:27), 응답(욥19:7), 정당함(욥27:2), 판단력(시72:1), 뜻(습3:8), 작정(잠29: 26), 권리(사10:2, 렘32:7), 재판석(사28:6), 보응(사49:4), 심문(사53:8), 형벌(렘49:12, 습3:15), 화(렘51:9), 죄(겔7:23), 죄악(겔7: 27), 의로움(렘12:1). [동] 합당하다(신19:6), 공의롭다(신32:4), 재판받다(수20:6, 삿4:5), 심문하다(왕하25:6), 재판하다(욥14:3), 옳다(욥34:4), 정직하다(욥34:6), 공판하다(시35:23), 심판하다(시119:84, 사3:14), 정직하다(잠12:5), 작정하다(잠16:33), 적당하다(사28:26), 바르게 하다(사32:7), 송사하다(사54:17).
    구약 성경 / 424회 사용

    * 8199. 솨파트(shâphat) שָׁפַט  

    1. 심판하다,  2. 분사형  שׁוֹפֵט: 재판장,  3. 저주하다
    발음 / 솨파트[ shâphat ]
    관련 성경 / 판단하다(창 16:5, 출 18:16, 시98:9), 재판하다(출18:26, 왕상3:9, 잠31:9), 판결하다(민35:24, 신1:16, 왕상3:28), 다스리다(삼상8:20, 왕하23:22), 심판하다(왕상8:32, 겔7:3,시10:18, 사11:4), 신원하다(잠31:9, 애3:59),징벌하다(대하20:12, 22:8), 다스리다(왕하23:22, 대하26:21), 변론하다(사43:26), 다투다(잠29:9). [명] 재판장(신1:16, 수8:33, 욥12:17), 사사(삿16:31, 삼상4:18, 대상17:10),방백(삼상6:16), 법관(창19:9), 재판관(삼하15:4, 대하19:6, 욥9:24, 시141:6), 심판자(욥23:7), 재판자(미5 : 1), 재판(시37:33), 심판(시9:19, 사66:16).
    구약 성경 / 142회 사용

    인자(2617) 헤세드( chêçêd) חֵסֵד

    인자(2617) 헤세드( chêçêd) חֵסֵד

    1. 욕구,  2. 열심,  3. 인자함
    발음 / 헤세드[ chêçêd ]
    어원 / 2616에서 유래
    관련 성경 / 인자(창 19:19, 민 14:18, 시 18:50), 은혜(창 20:13, 삼하 3:8, 렘 32:18), 인애(창 47:29, 신 7:9, 렘 2:2), 은총(창 32:10, 삼하9:1, 호 2:19), 성실(왕상 3:6), 긍휼(느 1:5, 시 85:10), 아름다움(사 40:6).
    [동] 영화롭게 하다(잠 14:34), 선대하다(수 2:12, 삿 1:24, 룻 1:8), 은혜를 베풀다(룻 2:20), 인자하다(대상 16:34, 대하 7:3,시 59:10), 자비하다(대상 16:41, 대하 5:13), 선하다(대하 32:32, 느 13:14), 긍휼히 여기다(스 9:9, 시 59:17), 불쌍히 여기다(욥 6:14).
    구약 성경 / 246회 사용

    * 2616. 하사드(châçad)  חָסַד 

    1. 사랑하다,  2. 겨루다,  3. 피엘형 : 비난하다
    발음 / 하사드[ châçad ]
    관련 성경 / 꾸짖다(잠 25:10), 자비하다(삼하 22:26, 시 18:25).
    구약 성경 / 3회 사용

    겸손(6800) 차나(tsânaʽ)  צָנַע

    겸손(6800) 차나(tsânaʽ)  צָנַע 

    1. 겸손하게 행하다,  2. 미가 6:8.
    발음 / 차나[ tsânaʽ ]
    관련 성경 / [부] 겸손하게(미 6:8).
                      [명] 겸손한 자(잠 11:2) 교만이 오면 욕도 오거니와 겸손한 자에게는 지혜가 있느니라
    구약 성경 / 2회 사용


    본절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요구하시는 항목을 세 가지로 언급하고 있다.

    1. 오직 공의를 행하며

    - '공의'는 의로운 삶을 말할 뿐만 아니라 사회적으로 모든 사람에 대해 공평하게 대하는 것을 의미한다.

    2. 인자를 사랑하며

    - 이것은 인간을 사랑하는 것이다. '사랑하며'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헤세드'는 하나님의 속성이면서 동시에 언약의 기본적인 원리이다. 그래서 선지자들은 타인에게 '헤세드'를 보이지 못할 경우 하나님과의 언약을 어긴 것으로 이해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언약은 하나님의 '헤세드'를 얻게하는 매개체가 되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에게 자신의 속성인 '헤세드'를 보여주고 그로 인해 언약을 맺었던 것처럼, 자기 백성들도 타인에게 '헤세드'를 보여 하나님과의 언약을 신실하게 지킬 것을 요구하신다(McComiskey).

    3. 겸손히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

    - 다음으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요구하시는 것은 겸손하게 하나님과 더불어 교제하며 행하는 것이다(Delitzsch). 하나님께서 가장 원하시는 것은 이상의 세 가지이다. 그렇다고 해서 선지자 미가가 율법에 기록된 희생제사를 무시하는 것은 아니다. 미가가 강조하는 것은 앞서 언급된 세 가지 마음 자세와 행위를 동반하지 않은 희생 제사는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본절에서 요구된 마음의 자세와 행위들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죄사함을 얻는 조건들이 아니다. 분명히 죄사함은 희생제사를 통해서 가능하다. 그러나 본절의 윤리적 행위들은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언약 백성으로서, 곧 죄사함을 받은 백성으로서 삶 가운데 마땅히 드러나야 할 삶의 규범들이다. 이것이 없는 희생제사는 아무런 용서도 구할 수 없는 자기 만족의 행위에 불과한 것이다.





       IBC









    08-04-2023(금)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주와 같은 신(미가 7:18)

    종교(宗敎) - 마루 종, 가르칠 교
    religion -

    주와 같은 신이 어디있으리이까 주께서는 죄악을 사유하시며 그 기업남은 자의 허물을 넘기시며 인애를 기뻐하심으로 노를 항상 품지 아니하시나이다.
    Who is a God like you, who pardons sin and forgives the transgression of the remnant of his inheritance? You do not stay angry forever but delight to show mercy.

    주와 같은 신(God like LORD)(Who is a God like)

    엘 카모카(אֵל כָּמֹוךָ) 

    이처럼, ~같이 / 키모우(kemôw) כְּמוֹ 

    1.  이처럼,  2. ~같이,  3. 이사야 41:25. / 내가 한 사람을 일으켜 북방에서 오게 하며 내 이름을 부르는 자를 돋는 곳에서 오게 하였나니 그가 이르러 방백들을 회삼물 같이, 토기장이의 진흙을 밟음 같이 밟을 것이니.
    발음 / 키모우[ kemôw ]
    구약 성경 / 140회 사용

    주와 같은 신이 어디 있으리이까
    - 본 구절은 이스라엘이 출애굽하고 홍해를 건넌 후에 미리암이 노래한 것이다(출 15:11; 시 86:8).
    이는 하나님께서 유일하시며 전능하신 신이실 뿐만 아니라 사랑이 풍성하신 인애의 하나님이심을 시사한다(Smith, McComiskey, Lange).

    주께서는 죄악을 사유하시며 그 기업의 남은 자의 허물을 넘기시며 인애를 기뻐하심으로 노를 항상 품지 아니하시나이다
    - 본 구절은 하나님의 성품과 속성을 나타낸다.

    '사유하시며'는 없애버린다는 의미
    '넘기시며'는 간과하신다는 뜻이다.

    사유하시며(5375) 나사(nâsâʼ) נָשָׂא 

    1. 들어올리다,  2. ‘물이 많아서 방주가 땅에서 떠올랐고’, 3. 깃발을 세우다
    발음 / 나사(nâsâʼ)
    관련 성경 / 넉넉하다(창 13:6,7), 용서하다(창 18:26, 출 10:17), 듣다(창 19:21), 데려오다(창45:19),맹세하다(출6:8), 불러들이다(출10:13), 담당하다(출18:22, 민11:17), 메다(출28:12, 왕상2:26), 원하다(출36:2), 돌아가다(레5:1),당하다(레5:17, 24:15, 시88:15), 메이다(민4:25), 지다(레16:22, 사22:6), 사하다(민14:19, 시32:5), 이끌다(민31:49), 움키다(삼상17:34), 안다(신1:31, 삼하4:4), 받다(왕상8:31, 신33:3), 들다(삼하18:28, 대상12:24, 사40:26), 실어오다(왕상10:11), 들어가다(왕하2:16), 예언하다(왕하9:25), 교만하다(왕하14:10), 가져가다(왕하23:4), 조사하다(대상27:23), 교만하다(대하25:19), 비방하다(시15:3), 두다(시24:4), 높이다(시93:3, 사52:8), 칭하다(시139:20), 받들다(시143:8), 세우다(사5:26), 짓다(사14:5), 들어올리다(겔3:14), 무성하다(겔17:23), 부르다(겔26:17), 품다(겔39:26), 맺다(욜2:22, 학2:19), 가져가다(암6:10), 제하여 버리다(말2:3), 견디다(창4:13),싣다(창44:1), 태우다(창45:27), 집계하다(민4:2), 일어나다(시89:9), 참다(렘44:22,시55:12), 빼앗다(삼하14:14, 겔38:13), 일으키다(창21:18), 계수하다(민1:2, 31:26), 떠오르다(창7:17), (소리) 내다(창21:16), 떠나다(창29:1), 눈짓하다(창39:7), 몰아넣다(출10:19), 일컫다(출20:7, 신5:11), 전파하다(출23:1), 운반하다(민1:50), 돌아보다(신28:50),(소리를) 높이다(삿21:2, 삼하13:36), 허락하다(삼상25:35), 대면하다(삼하2:22), 나오다(삼하6:3), 보내다(왕상5:9), 떠들다(왕상13:29), 이끌어가다(왕상18:12), 뜨다(왕하19:22), 긷다(대상11:18), 장가들다(대상23:22, 24:3), 노략하다(대하14:13), 운반하다(대하16:6), 베풀다(에2:9), 소리지르다(욥2:12), 따르다(욥13:8), 물다(욥13:14), 노래하다(욥21:12), 보다(욥32:21, 시82:2), 내다(욥40:20), 부르다(시16:4), 들리다(시63:4), 주다(시72:3), 기쁘게 하다(시86:3), 치다(시133:9) 건너다(사15:7), 날리다(사41:16),탈취하다(호5:14), 제거하다(호14:2), 제하다(단1:16), 솟아오르다(나1:5), 쓰다(학2:12), 받아 주다(말1:8), 긍휼히 여기다(말1:9), 실리다(창45:23), 사모하다(신24:15), 잡다(수6:18, 삿9:54), 이끌다(삼상10:3), 바치다(삼하8:6, 대상18:2), 실어오다(왕상10:22), 짐을 나르다(느4:17), 뿌리다(시126:6), 사유하다(미7:18), 치우치게 하다(말2:9), 존귀하다(왕하5:1, 대하32:23, 욥22:8), 사함을 얻다(시32:1), 사죄함을 받다(사33:24), 달하다(렘51:9), 사로잡다(단11:12), 돋우다(사40:4), 안기다(사66:12), 뛰어나다(사2:2), 자고하다(사2:12), 거룩하다(사57:15), 높다(사57:7), 제공하다(왕상9:11), 끌어가다(암4:2), 형벌받다(레22:16), 높아지다(단11:14), 높은 체하다(잠30:32), 흥왕하다(민24:7).
    [부] 높이(에 3:1)
    구약 성경 / 650회 사용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남은 자들에게 남아 있는 모든 죄악을 완전히 제거하시며 동시에 기억지 아니하신다.

    넘기시며(5674) 아바르(ʽâbar) עָבַר

    1. 건너다
    2. 창세기 31:21 / 그가 그 모든 소유를 이끌고 강을 건너 길르앗산을 향하여 도망한지
    3. 여호수아 3:11 / 보라 온 의 주의 언약궤가 너희 앞서 요단으로 들어가나니.
    발음 / 아바[ ʽâbar ]
    관련 성경 / 지나다(창 15:17, 수 15:3. 삼상 14:23), 오다(창18:5), 건너다(창 32:10, 삿 3:28), 나아가다(창 33:3, 삿 19:12), 다니다(출 12:12, 왕상 18:6), 두루 다니다(출 12:23, 수 3:2), 생기다(민 5:14), 건너가다(민 32:21, 수 4:13), 범하다(신 26:13, 사 24:5), 통과하다(민 20:21, 신 29:16, 왕하 6:26), 행진하다(신 2:8), 어기다(수 7:11, 삿 2:20), 이르다(수 15:4, 삿 9:26), 건너오다(삼하 19:40), 따르다(삼하 20:13), 왕래하다(욥 15:19), 가다(삼상 26:13, 왕상 22:24), 넘치다(시 38:4, 104:9), 떠나다(아 3:4, 렘 11:15), 휩쓸다(시 42:7), 잠기다(시 124:4), 물러가다(아 5:6,사31:9), 헤매다(사 8:21), 악하다(렘 5:28), 잡히다(렘 23:9), 넘다(렘 48:32), 통행하다(사 33:21, 겔 39:15), 나아오다(단11:10), 메우다(호 10:11), 없어지다(렘 8:13, 나 1:12), 받다(나 3:19), 참여하다(신 29:12), 나오다(삼하 15:24), 멸망하다(욥 33:18), 내려가다(욥33:28), 용서하다(잠 19:11), 범람하다(사 54:9), 상달하다(애 3:44), 들어가다(수 4:5), 순행하다(겔 9:4 ,5), 순찰하다(창 41:46), 맡기다(신24:5), 대다(민6:5), 앞서다(삼상9:27, 삼하18:23), 보내다(삼상26:22), 마치다(삼하11:27), 두루행하다(삼하20:14), 배반하다(왕하18:12), 출정하다(대하21:9), 변개하다(에1:19), 폐하다(에9:27), 마르다(욥6:15), 당하다(욥13:13),망하다(욥36:12), 넘어가다(욥14:5), 범죄하다(시17:3), 동행하다(시42:4), 면하다(시141:10), 거스르다(잠8:29), 수리하다(사40:29),제거함을 당하다(욥34:20), 돌아오다(사45:14), 순복하다(렘2:20), 진멸하다(렘8:13), 주다(겔48:14), 통용하다(창23:16, 왕하12:4), 들다(출30:13), 거역하다(대하24:20), 불려가다(사29:5, 렘13:24), 옮기다(창 47:21, 삼하 3:10), 새끼를 배다(욥21:10), 돌리다(출13:12, 민27:8), 밀다(민8:7), 가지다(수4:3), 인도하다(수7:7), 사하다(삼하12:13), 끌어내다(삼하12:31), 거두다(에8:2), 잃다(렘46:17),깎다(겔5:1), 사르다(겔23:37), 제거하여 버리다(욥7:21, 슥3:4), 반포하다(대하30:5),제거하다(에8:3), 돌이키다(시119:37), 공포하다(출36:6, 스10:7), 소리를 내다(레25:9),쫓아내다(왕상15:12), 벗다(욘3:6), 범죄하게 하다(삼상2:24), 분내다(시78:62), 노하다(시78:21, 89:38), 진노하다(신3:26), 방자하다(잠14:16), 간섭하다(잠26:17).
    [부] 빨리(삼하 17:16).
    [명] 행인(잠 9:15), 즙(아 5:5,13), 행인(사 33:8).
    구약 성경 / 547회 사용

    그분은 노를 항상 품지 않으실 뿐만 아니라 은혜와 사랑을 베풀어 주시기를 즐겨하신다.

    노(639) 아프( ’aph)  אַף  

    1. 호흡하는 곳
    2. 코
    3. 민수기 11:20.
    발음 / 아프[ ’aph ]
    어원/ 599에서 유래
    관련 성경 / 코(창2:7, 삼하22:9, 시115:6), 얼굴(창3: 19, 삼상25:41), 분노(창27:45, 신29:20, 렘12:13), 노(창30:2, 삼상11:6, 겔22:20), 분기(창49:7), 콧김(출15:8), 진노(민11:10, 스8:22, 사3:8), 머리(민22:31), 노염(시30:5), 분(욥37:11). [동] 노여워하다(합3:8), 노하다(창39:19, 출 11:8, 욥27:3), 분노하다(신9:19, 단9:16, 호 13:11), 울분을 터뜨리다(욥18:4).
    구약 성경 / 134회 사용

    * 599. 아나프(’ânaph) אָנַף  

    1. 성내다
    2. 이 말은 더 고상하고 시적인 언어로만 사용됨.
    3. 힛파엘형 : 화가 나다
    발음 / 아나프[ ’ânaph ]
    관련 성경 / 진노하다(왕상 8:46, 시 2:12, 신 1:37), 분노하다(시 60: 1), 노하다(왕하 17:18, 사 12:1, 시  79:5).
    구약 성경 / 14회 사용

    인애(2617) 헤세드(chêçêd) חֵסֵד 

    1. 욕구,  2. 열심, 3. 인자함
    발음 / 헤세드[ chêçêd ]
    어원 / 2616에서 유래
    관련 성경 / 인자(창 19:19, 민 14:18, 시 18:50), 은혜(창 20:13, 삼하 3:8, 렘 32:18), 인애(창 47:29, 신 7:9, 렘 2:2), 은총(창 32:10, 삼하9:1, 호2:19), 성실(왕상3:6), 긍휼(느1:5, 시85:10), 아름다움(사40:6).
    [동] 영화롭게 하다(잠 14:34), 선대하다(수 2:12, 삿 1:24, 룻 1:8), 은혜를 베풀다(룻 2:20), 인자하다(대상16:34, 대하7:3,시59:10), 자비하다(대상16:41, 대하5:13), 선하다(대하32:32, 느13:14), 긍휼히 여기다(스 9:9, 시 59:17), 불쌍히 여기다(욥 6:14).
    구약 성경 / 246회 사용


    미가 선지자는 육적인 이스라엘이 죄악 때문에 포로로 끌려가지만 인애를 기뻐하시는 하나님께서 영적인 이스라엘을 다시 세워주시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의 죄악을 사하시고 거룩하게 하시는 은혜를 베풀어 그들로 하여금 영생을 누리는 백성이 되게 하신다는 예언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죄 용서하시기를 기뻐하시는 하나님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언약한 백성에게 인애를 베푸시는 하나님입니다. 
    하나님과 같은 신은 이 세상 어디에도 없습니다. 
    하나님을 평생 경배하고 더 사랑하며 살아가시기를 바랍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내가 하나님의 택한 백성인지 아닌지를 아는 것 아닙니까? 
    이것을 아는 방법이 있는데, 세 가지가 있는 사람은 하나님의 택한 백성입니다. 

    세 가지는 바로 믿음, 소망, 사랑입니다. 

    첫째, 그리스도께서 내 죄를 갚으신 나의 구주라는 것을 믿는 사람입니다. 
    둘째, 나는 천국에서 영생을 누리고 생명의 부활을 해서 영원히 살 것이라는 소망을 가진 사람입니다. 
    셋째, 마음으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가 있는 사람은 의심할 여지도 없이 하나님의 택한 백성이고 하나님의 인애의 대상이 되는 것입니다. 
    믿음이 있으십니까? 
    소망이 있으십니까? 
    사랑이 있으십니까?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로 살아가는 하나님의 남은 자가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미가서는 12개 소선지서 가운데 6번째 책입니다. 

    선지서들은 대부분 동일한 형태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옛 언약에 실패해서 포로가 되는 형벌을 받지만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회복하신다는 내용입니다. 
    육적인 이스라엘은 시내산에서 맺은 언약을 어겨서 하나님께 징벌받고 바벨론의 포로가 되지만 하나님께서 영적인 이스라엘을 다시 세워주신다는 것입니다. 
    대부분의 20세기 세대주의 종말론자들은 육적인 이스라엘이 다시 일어난다고 해석했습니다. 

    예를 들면 모리아산에 다시 여호와의 성전이 세워질 것이라 예언한 것입니다. 
    하지만 지금 모리아산에 성전을 짓는다고 해서 누가 그것을 성전이라고 부르겠습니까? 
    결국 예언서의 내용은 육적인 이스라엘이 망해도 하나님께서 영적인 이스라엘을 다시 회복시키시고 일으키신다는 것입니다.

    미가서의 마지막 3절도 새 언약의 핵심을 증거합니다.

    “주와 같은 신이 어디 있으리이까 주께서는 죄악을 사유하시며 그 기업의 남은 자의 허물을 넘기시며 인애를 기뻐하심으로 노를 항상 품지 아니하시나이다” (미가 7:18). 

    새 언약은 하나님께서 우리의 죄를 용서해주신다는 것입니다.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그러나 그 날 후에 내가 이스라엘 집에 세울 언약은 이러하니 곧 내가 나의 법을 그들의 속에 두며 그 마음에 기록하여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 백성이 될 것이라 그들이 다시는 각기 이웃과 형제를 가리켜 이르기를 너는 여호와를 알라 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작은 자로부터 큰 자까지 다 나를 앎이니라 내가 그들의 죄악을 사하고 다시는 그 죄를 기억지 아니하리라 여호와의 말이니라” (예레미야 31:33-34).

    미가서 7장과 예레미야서 31장의 새 언약에 관한 내용이 같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회복시키시고 원수들을 모두 부끄럽게 하시며 새로운 출애굽의 기적을 보이시겠다는 것입니다. 
    이런 하나님을 향해서 미가 선지자는 놀라움을 금치 못합니다. 
    “주와 같은 신이 어디 있으리이까” 이것은 또한 미가 선지자 이름의 뜻과 같습니다.  

    성경은 성령의 영감으로 기록된 책입니다. 
    단순히 사람이 연구해서 쓴 책이 아닙니다. 
    어떤 사람은 방서의 은혜를 받았다고 하면서 기도를 하면 손이 저절로 움직여 글자가 써진다고 합니다. 하지만 이것은 말도 안 되는 이야기입니다. 
    구약성경을 기록한 선지자들도 그런 방법으로는 하지 않았습니다. 
    성령께서 영감을 주실 때 성경 기록자들의 언어와 인격과 감정 모두를 사용하여 기록하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바울이 쓴 책과 베드로가 쓴 책의 어휘와 표현이 조금씩 다른 것입니다. 

    Ⅰ. 하나님의 비교 불가능성(Incomparableness) 

    미가 7장 18절에는 미가 선지자의 감성이 드러나 있습니다. 
    도대체 이 세상에 여호와 하나님과 같은 신이 어디 있느냐는 것입니다. 지금 미가 선지자가 감탄하고 있는 하나님의 속성은 하나님의 ‘비교 불가능성’을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다른 신들을 비교하는 것 자체가 가능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오늘날은 기독교와 다른 종교를 비교하는 ‘비교 종교학’이라는 학문이 있습니다. 물론 다른 종교를 연구하여 이해하고 선교전략을 세운다는 의미로 연구하는 것은 문제가 없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과 다른 신들을 평면적인 차원에서 비교하는 것은 생각부터 잘못된 것입니다. 하나님은 다른 신들과는 비교될 수 없는 자체적인 속성을 갖고 계십니다. 

      미가 선지자뿐만 아니라 모세도 하나님의 비교 불가능성을 여러 곳에서 증거했습니다. “여호와여 신 중에 주와 같은 자 누구니이까 주와 같이 거룩함에 영광스러우며 찬송할만한 위엄이 있으며 기이한 일을 행하는 자 누구니이까” (출 15:11). 

    하나님께서 홍해를 가르셨는데 200만 명이 하룻밤 사이에 다 지나갔습니다. 만약 10명씩 일렬로 지나갔다면 지금까지 건너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몇천 명, 몇만 명씩 지나갈 수 있을 만큼 홍해를 가르셔서 200만 명이 하룻밤 사이에 다 건널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것을 애굽 군대가 보고 따라 들어가는데 하나님께서 다시 홍해를 합치셔서 모두 물에 빠져 죽게 되었습니다. 이것을 본 모세가 도대체 여호와와 같은 신이 어디 있느냐는 고백을 하는 것입니다. 또 모세는 죽기 직전 신명기 33장 26절에 이스라엘 자손들을 축복하면서도 이렇게 말했습니다. 

    “여수룬이여 하나님 같은 자 없도다 그가 너를 도우시려고 하늘을 타시고 궁창에서 위엄을 나타내시는도다” (신 33:26). 

    여수룬은 내 의로운 백성이라는 의미인데 이스라엘의 애칭입니다. 그러니까 이스라엘에게 하나님 같은 분은 없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다른 귀신, 잡신과 비교하시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들은 비교 대상도 안 됩니다. 비교도 비슷해야 하지 비교할 수준도 안 되는데 무슨 비교를 합니까? 

      미가 선지자가 예언하던 시대는 요담, 아하스, 히스기야 왕 때입니다. 요담과 아하스는 16년 통치했고, 히스기야는 29년을 통치했습니다. 그런데 요담, 히스기야 때는 아니더라도 아하스 시대 16년은 계속해서 예언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아하스는 유다 왕 중에서 가장 악한 왕입니다. 성전 문을 닫아버리고 여호와 하나님을 섬기는 그릇들을 다 창고에 집어넣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제물을 드리는 제단이 있던 곳에 다메섹 귀신을 숭배하는 제단을 갖다놓고 제사를 드린 것입니다. 그리고 바알을 숭배하고 힌놈 골짜기에 자기 자식들을 불에 태우면서까지 귀신들을 숭배했습니다. 그러자 미가 선지자가 “이스라엘 백성들아! 어리석은 실수를 하지 마라. 하나님을 그런 잡신, 귀신들과 비교하지도 마라. 하나님과 바알이 상대가 되느냐? 하나님과 다메섹 귀신을 비교하는 것 자체가 기분 나쁘다. 그런 잡신들과 비교하지 말고 너희는 하나님을 경배하라. 여호와 하나님만이 우리의 하나님이시다.” 이런 메시지를 증거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비교 불가능성에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특징은 하나님께서 죄를 용서하시는 분이라는 것입니다. 긍휼을 기뻐하시고 인애(Mercy)를 기뻐하시는 하나님이라는 것입니다. 이 세상의 종교는 둘 중 하나입니다. 사탄이 만들었거나 인간의 부패한 영혼이 만든 것입니다. 그런데 사탄에게도 없고 인간의 부패한 영혼에게도 없는 것이 바로 긍휼인 것입니다. 세상의 종교는 다 겁을 줍니다. 두려움을 줘서 벌 받지 않으려면 자신을 섬기라고 합니다. 

    제가 어렸을 때 집에 못도 함부로 박지 못했습니다. 집에 못을 박으면 삼신할머니가 노하셔서 눈에 핏발이 서게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눈에 핏발 서는 것은 밤에 잠 안 자고 공부해서 그런 것이지 못 박는 것과는 아무 상관없는 것입니다. 이처럼 나를 섬기지 않으면 집에 불행이 생길 것이라고 겁을 줘서 경배를 받으려고 하는 것이 바로 세상 종교의 특징입니다. 전도해보면 사람들이 두려워합니다. 내가 예수님을 믿으면 그동안 섬겼던 귀신이 우리 집을 괴롭히면 어떻게 하냐는 것 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귀신들이 괴롭히려 해도 하나님께서 막으시면 괴롭힐 수 없습니다. 상대도 안 되고 비교도 안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이 지옥 가는 것을 기뻐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성경에 예수님을 믿지 않으면 지옥 간다고 말한 것은 현실을 알려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아무리 큰 죄로 말미암아 멸망하고 지옥 갈 사람도 예수님을 믿으면 용서함을 받고 영생을 얻어 천국에 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믿으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세상종교와 다릅니다. 겁을 줘서 예수님을 믿지 않으면 지옥 가니까 믿으라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주 여호와의 말씀에 나의 삶을 두고 맹세하노니 나는 악인의 죽는 것을 기뻐하지 아니하고 악인이 그 길에서 돌이켜 떠나서 사는 것을 기뻐하노라” (겔 33:11). 에스겔 18장 32절도 동일한 내용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죄 용서하기를 기뻐하십니다. 

    Ⅱ. 하나님의 인애의 대상 

    그런데 하나님께서 온 세상 모든 사람의 죄를 다 용서하시느냐? 하나님의 인애의 대상은 온 세상 모든 사람이 아닙니다. “주와 같은 신이 어디 있으리이까 주께서는 죄악을 사유하시며 그 기업의 남은 자의 허물을 넘기시며 인애를 기뻐하심으로 노를 항상 품지 아니하시나이다” (미 7:18). 

    누구의 허물을 넘기신다고 했습니까? 그 기업에 남은 자의 허물을 넘기신다고 했습니다. 이것은 신약의 용어로 보면 성부 하나님의 택하신 자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무나 용서하시는 것이 아니라 당신의 계획을 가지고 용서하십니다. 계획된 사람들에게 인애를 베푸시는 것입니다. 

    “모세에게 이르시되 내가 긍휼히 여길 자를 긍휼히 여기고 불쌍히 여길 자를 불쌍히 여기리라 하셨으니” (롬 9:15).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을 다 긍휼히 여기신다면 이런 말씀을 왜 기록하셨겠습니까? 하나님께서 긍휼히 여기는 사람이 있고 긍휼을 베풀지 않는 사람도 있으니까 이런 말씀이 기록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이것을 굉장히 기분 나빠합니다. 왜 차별을 두냐고 하나님께 따집니다. 이것은 주제 파악이 아직 되지 않아서 그렇습니다. 어떤 사람은 긍휼히 여기시고 어떤 사람을 긍휼히 여기지 않는 것은 하나님의 주권입니다. 

    “토기장이가 진흙 한 덩이로 하나는 귀히 쓸 그릇을, 하나는 천히 쓸 그릇을 만드는 권이 없느냐” (롬 9:21). 

    토기장이도 진흙 한 덩이로 하나는 귀히 쓸 그릇을 하나는 천히 쓸 그릇을 만드는데 하나님께서 그럴 권한이 없느냐는 것입니다. 하나님보다 더 똑똑한 인간은 없습니다. 우리가 아무리 똑똑해도 피조물입니다. “또 이사야가 이스라엘에 관하여 외치되 이스라엘 뭇 자손의 수가 비록 바다의 모래 같을지라도 남은 자만 구원을 얻으리니” (롬 9:27). 수가 바다의 모래 같아도 남은 자만 구원을 얻으리라는 것이 이사야 선지자의 예언이고 사도 바울이 로마서에서 다시 한 번 확증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인애와 긍휼은 아무한테나 베푸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택한 자에게 베푸시는 은혜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택한 자에게 인애와 긍휼을 베푸시는 것은 세상을 창조하기 전에 이미 계획해놓으신 것입니다. 이것을 가리켜서 하나님의 ‘구속 언약’(Covenant of Redemption)이라고 합니다. “주께서 옛적에 우리 열조에게 맹세하신 대로 야곱에게 성실을 베푸시며 아브라함에게 인애를 더하시리이다” (미 7:20). 

    여기서 ‘옛적’이라는 단어는 미가서 5장 2절에도 나옵니다. “베들레헴 에브라다야 너는 유다 족속 중에 작을지라도 이스라엘을 다스릴 자가 네게서 내게로 나올 것이라 그의 근본은 상고에 태초에니라” (미 5:2). ‘태초’라는 말은 영원이라는 의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영원 전에 택한 자들을 구원하시고 그들의 죄를 용서하기로 맹세하신 것입니다. 영원 전에 인간을 창조하기도 전에 벌써 인간의 타락을 다 보신 것입니다. 그리고 부패한 인류 가운데 구원할 자를 미리 예정하신 것입니다. 

      어떤 분은 예정이라는 단어만 나오면 성질을 냅니다. 하나님께서 예정하신 것이 무엇을 그렇게 잘못한 건지 알 수가 없습니다. 구속 언약은 영원 전 삼위일체 하나님 사이에 맺어진 언약입니다. 성부 하나님은 타락한 인류 가운데 구원할 자를 택하시고 성자 예수님에게 택한 자를 주십니다. 그리고 성자 예수님은 육신을 입고 세상에 내려와 피를 흘려 택한 사람들의 죗값을 갚아주셨습니다. 

    마지막으로 성령님은 택한 자들의 영혼에 역사해서 거듭나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구속 언약을 택한 백성에게 점진적으로 보여주셨습니다. 그래서 아담이 타락했을 때도 앞으로 여자의 후손이 와서 택한 자를 구원할 것이라고 말씀하셨고 아브라함에게도 네 씨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받을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다윗에게도 네 씨가 영영히 다윗의 보좌에 앉아서 내 백성의 목자가 되리라고 하셨습니다. 이러한 구속 언약을 창세 전에 계획하시고 점진적으로 택한 백성에게 보여주시고 맹세하셨던 것입니다. 

    “양의 큰 목자이신 우리 주 예수를 영원한 언약의 피로 죽은 자 가운데서 이끌어 내신 평강의 하나님이” (히 13:20). 

    예수 그리스도께서 피 흘려 죽으신 것도 영원한 언약 때문이고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신 이유도 영원한 언약 때문입니다. 침례교의 위대한 스펄전 목사님이 ‘영원한 언약의 피’라는 제목으로 히브리서 13장 20절을 설교했는데 참으로 놀라운 진리를 말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영원한 언약에 따라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시고 피를 흘리셨으며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시키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영원한 언약에 따라 택한 자에게 죄 사함과 인애와 긍휼을 베푸시겠다고 맹세하시고 구원하시는 것이기 때문에 구원받은 사람에게는 구원받을 이유나 조건이나 업적이나 공로가 아무것도 없습니다. 우리는 그저 은혜로 구원받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독생자 예수의 피 값을 치렀지만 우리는 순 공짜로 받았으니 얼마나 감사합니까? 감사하기 때문에 하나님께 헌금도 하는 것입니다. 헌금을 내서 천국에 가려면 일조 원을 내도 못 갑니다. 우리에게 지옥 가서 영원한 형벌을 받을 자격은 있습니다. 하지만 천국 갈 자격이나 권리는 없는 것입니다. 오직 예수님을 믿어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는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결국 영원 전 하나님께서 언약을 맺으시고 택하신 영혼들이 예수님을 믿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 언약의 자비가 있기 때문에 아무리 큰 죄인이라도 구원의 소망이 있는 것입니다. 제가 전도하면서 보니까 99% 믿는데 1% 안 믿는 사람들은 죽을 때까지 안 믿습니다. 그런데 그 가운데 정말 안 믿을 것 같은 사람도 하나님께서 구원의 은혜를 베푸시면 믿는 것입니다. 도끼로 사람을 죽인 사람을 아십니까? 고재봉, 김대두. 이런 사람들이 감옥에 들어가서 성경을 읽다가 예수님을 믿고 완전히 변해서 감옥에 있는 사람들 다 전도하다가 결국 사형 당했다고 합니다. 우리는 이렇게 가망 없을 것 같은 사람들에게도 구원의 소망이 있다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구원은 하나님의 언약에 따라서 베푸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전도도 하고 선교도 하는 것입니다. 

    Ⅲ.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인애의 내용 

    하나님께서 택한 자에게 인애를 베풀어 주시는데 그 내용은 두 가지입니다. 

      첫째, 죄를 용서하시고 의롭다함을 주시는 칭의의 은혜(Justifying Grace)입니다. 하나님의 택한 자는 예수님을 믿고 죄를 용서받습니다. “주와 같은 신이 어디 있으리이까 주께서는 죄악을 사유하시며 그 기업의 남은 자의 허물을 넘기시며 인애를 기뻐하심으로 노를 항상 품지 아니하시나이다” (미 7:18). 

    죄악을 사하신다는 동사의 히브리어는 ‘라사’인데 이것은 죄 짐을 들어 올리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들어 올려서 어깨에 메고 씨름선수가 하듯이 확 넘겨버리는 것입니다. 이것이 사하신다는 히브리어 동사의 의미입니다. 저는 참 죄가 많습니다. 여러분은 죄가 없으신 표정으로 앉아계시는데 저는 죄 짐이 엄청나게 커서 아무리 들려고 해도 미동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오시더니 내 죄 짐을 잡아서 어깨에 메시고 그것을 등 뒤로 던져버려 어디로 날아갔는지 날아가 버린 것입니다. 이것이 죄악을 사하신다는 것의 의미입니다. 그리고 허물을 넘기신다는 동사는 히브리어로 ‘오베르’인데 출애굽기 12장 23절에서도 사용되었습니다. 어린양의 피가 문설주에 발라져 있으면 넘어간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택하신 자들의 죄 짐을 그리스도에게 담당시키셔서 죄를 용서하시고 그 죄를 잊어버리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을 믿는 여러분의 죄를 기억하지 못하십니다. 우리는 가끔 옛날에 지은 죄 때문에 악몽을 꾸기도 합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모두 잊어버리시기 때문에 그런 악몽을 주시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악몽은 무엇이냐? 사단이 죄를 복사해서 그것을 가지고 자꾸 송사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런 사단에게 미가 7장 18절을 붙들고 ‘나사렛 예수의 이름으로 명하노라. 내 죄의 복사본을 가지고 와서 괴롭히는 사단아 물러갈지어다!’ 이렇게 명하면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죄를 기억하지 않으십니다. 

      인간의 가장 큰 문제가 뭘까요? 배고픈 것이 문제입니까? 배고파도 굶어 죽지만 않으면 크게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그럼 가난이 문제입니까? 만약 그렇다면 가난한 나라 사람들은 모두 불행합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오히려 가난한 사람들이 더 행복합니다. 이번에 우리 성도들이 캄보디아에 다녀왔는데 그 사람들이 우리보다 더 행복해한다는 것입니다. 

    인간의 가장 큰 문제는 그런 것이 아니라 죄인인 것이 가장 큰 문제입니다. 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죄의 종이 되어 살아갑니다. 천로역정의 저자 존 번연은 이런 말을 했습니다. “죄는 마귀를 아버지로 만들고 비참을 친구로 만들고 사망을 대가로 만들고 지옥을 영원한 운명으로 만든다.” 죄는 그대로 두어서는 안 되고 용서를 받아야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죄 용서하기를 기뻐하시는 분이시고 누구든지 예수님을 믿는 자를 죄에서 해방하시고 지옥에서 건져주시는 분이십니다. 이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둘째,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죄의 영향력을 벗어나 점진적으로 거룩한 사람이 되게 하시는 성화의 은혜(Sanctifying Grace)를 주시는 것입니다. “인애를 기뻐하심으로 노를 항상 품지 아니하시나이다 다시 우리를 긍휼히 여기셔서 우리의 죄악을 발로 밟으시고 우리의 모든 죄를 깊은 바다에 던지시리이다” (미 7:18-19). 

    예수님을 믿고 성도가 되어 의롭다 함을 받으면 천국에 가게 됩니다. 지옥에 가기는 다 틀린 것입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우리가 갑자기 성인(聖人)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자꾸 죄에 빠집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의롭다함을 입은 성도들을 거룩하게 해주시는데 그것이 하나님의 세 가지 행동으로 묘사되어 있습니다. 

    첫째,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죄를 지으면 진노하시지만 우리가 회개하면 진노를 풀어버리십니다. 그러니까 성도가 죄를 지으면 진노하시다가도 회개하면 진노를 푸시는 과정이 성화인 것입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아주 강력한 원수처럼 쫓아오는 죄들이 있습니다. 한국 사람들이 가장 많이 빠지는 죄로 음란, 도박, 술, 담배와 같은 것들은 예수님을 믿어도 쉽게 끊지 못하고 따라옵니다. 

    하지만 이러한 죄들을 하나님께 맡기면 발로 밟아주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쫓아오는 대군들은 깊은 바다에 빠뜨려버리십니다. “다시 우리를 긍휼히 여기셔서 우리의 죄악을 발로 밟으시고 우리의 모든 죄를 깊은 바다에 던지시리이다” (미 7:19). 이것이 바로 우리를 거룩하게 하시는 성화의 은혜인 것입니다.

    칭의와 성화의 은혜는 오직 여호와 하나님만이 그 기업에 남은 자들에게 베푸시는 자비와 긍휼입니다. 
    하나님은 자비와 긍휼을 베푸시기를 기뻐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이렇게 좋으신 하나님과 비교할 수 있는 신은 세상에 없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비교 불가능성’입니다. 

    미가 선지자는 육적인 이스라엘이 죄악 때문에 포로로 끌려가지만 인애를 기뻐하시는 하나님께서 영적인 이스라엘을 다시 세워주시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의 죄악을 사하시고 거룩하게 하시는 은혜를 베풀어 그들로 하여금 영생을 누리는 백성이 되게 하신다는 예언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죄 용서하시기를 기뻐하시는 하나님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언약한 백성에게 인애를 베푸시는 하나님입니다. 
    하나님과 같은 신은 이 세상 어디에도 없습니다. 
    하나님을 평생 경배하고 더 사랑하며 살아가시기를 바랍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내가 하나님의 택한 백성인지 아닌지를 아는 것 아닙니까? 
    이것을 아는 방법이 있는데, 세 가지가 있는 사람은 하나님의 택한 백성입니다. 

    세 가지는 바로 믿음, 소망, 사랑입니다. 

    첫째, 그리스도께서 내 죄를 갚으신 나의 구주라는 것을 믿는 사람입니다. 
    둘째, 나는 천국에서 영생을 누리고 생명의 부활을 해서 영원히 살 것이라는 소망을 가진 사람입니다. 
    셋째, 마음으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가 있는 사람은 의심할 여지도 없이 하나님의 택한 백성이고 하나님의 인애의 대상이 되는 것입니다. 
    믿음이 있으십니까? 
    소망이 있으십니까? 
    사랑이 있으십니까?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로 살아가는 하나님의 남은 자가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옴팔로스(Omphalos)

    옴팔로스는 그리스어로 "배꼽(ομφαλός)" 이란 뜻이다.


    그리스신화에 따르면 제우스가 세상의 중심을 알고 싶어, 두 마리 독수리를 세상에 날려보냈는데 서로 다른 방향으로 날아가서 세상을 돌아 그 중심에서 만나게 하였다.
    이 마주친 장소가 바로 파르나소스 산 기슭에 자리한 도시 '델포이'였다.
    이곳이 세계의 중심인 것을 안 제우스는 옴팔로스라 부르며 돌을 놓아 표시했다.
    그리고 이곳을 신탁을 받는 장소로 보았다.

    여기서 델포이라는 말은 대지의 자궁을 뜻하고, 옴팔로스는 세상의 배꼽, 세상의 중심을 상징한다.

    지금도 남아있는 옴팔로스(돌)는 고대 그리스의 종교적인 석조물로 아주 반구형의 모습을 하고 있다.
    오늘날 남아있는 기록들에 따르면 지중해 지역에서는 신탁소가 있는 장소들에는 의례 이 옴팔로스 돌이 있어서 성스럽게 여겨졌다고 한다.
    그중에서 가장 유명한 옴팔로스는 아폴론의 신탁이 있었던 델포이에 있던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가나안 사람들의 신인 바알(Baal)과 관련된 "광휘의 돌(stone of splendor)"로부터 옴팔로스가 나왔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광휘의 돌과 옴팔로스의 가장 큰 공통점은 바로 신과의 대화를 가능케 해주는 능력에 있다.

    옴팔로스 증후군

    옴팔로스 증후군은 자신이 사는 곳이 지구의 배꼽이라고 믿는 일종의 자기과신 증세를 말한다.
    이 증후군의 용어는 사회, 경제, 역사, 정치, 종교에 걸쳐 많은 분야에서 사용되고 있다.
    '지중해(地中海)'라는 말 역시 지구 중심에 있는 바다라는 뜻으로 여기에도 옴팔로스 증후군이 엿보인다.
    지중해라는 말이 오래 전부터 '마레 노스트룸(우리의 바다)'라고 불리던 것을 로마 제국이 번영하던 그 시기 솔리누스에 의해 그렇게 불리게 되었다고 한다.

    같은 맥락으로 콜럼버스의 신대륙 발견도 옴팔로스 증후군의 사례다.
    다분히 콜럼버스의 입장에서 그가 발견한 대륙은 이전에도 존재하던 대륙이지 전혀 새로운 신대륙은 아니다.
    정복자의 시각, 강자의 역사에 의해 서구 중심적 세계관이 반영된 것이다.

    "옴팔로스" 라는 단편 소설은 "테드 창"의 작품.
    단편집 "숨"에 처음 수록되었다. 

    창조설이 진실인 세계에서, 교회 고고학자인 주인공 도로시아의 시점으로 서술되는 이야기.
    이 지구는 창조의 과학적 증거를 찾을 수 있는 세상이다.
    나무의 나이테를 세는 방법으로 추적하면 8912년 전이 가장 오래된 나이테며, 이는 8912년 전에 지구가 창조되었으며 그 때의 나무는 이미 자란 상태로 창조되었기에 최초의 나무들은 바깥쪽에는 나이테가 없고 안쪽에만 나이테가 있다.
    비슷하게 성장판이 없는 조개나 뼈 등이 발견되며, 배꼽이 없는 최초의 인간들의 미라도 발견된다.
    이렇듯 창조의 증거가 발견되기에 기독교의 존재감이 막강한 것으로 보이며, 과학과 종교가 심하게 반목하지도 않는다.
    오히려 과학적 방법론으로 창조의 증거를 찾을 수 있으니 교회가 딱히 반과학적인 스탠스를 취할 필요가 없는 것이 그 이유로 보이며, 이렇기에 전세계에서 많은 태초의 인간들이 발견되자 아담과 이브만이 신이 직접 창조하셨다는 성경의 이야기는 비유적으로 받아들여야 한다며 한 발짝 물러서는 모습도 보여준다.

    실제로 주인공도 교회 고고학자며, 과거에 대해 연구하는 것을 신의 영광을 드높이기 위함으로 인식했다.
    다만 세속적 과학자가 언급되는 것으로 보아 모든 과학자가 종교의 영향 아래에 놓여 있는 것은 아닌 것 같다.

    도로시아가 자기 사촌 로즈마리가 최근에 태초 유물을 샀다며 사슴의 다리뼈를 보여주는데, 로즈마리의 남편 알프레드는 진짜 유물이라면 그렇게 쌌을 리 없다며 부정한다.
    도로시아는 사슴 뼈에 성장판이 닫혀서 생긴 흔적이 없음을 확인하여, 이 뼈는 성체 상태로 만들어졌기에 태초 유물이 맞다고 인증한다. 도로시아가 유물을 어디서 샀냐고 묻는데, 로즈마리는 박물관 기프트샵에서 샀으며, 다양한 종류의 유물을 싸게 팔고 있었으며 전복 유물이 있어서 신기했다고 말한다. 그런데 태초 전복 유물은 발견된 적이 단 한 번이며, 알타 캘리포니아 대학의 산타 로자 섬 발굴인데, 대학에서 유물을 땡처리할 리가 없으니 수상하게 여긴 도로시아가 조사에 나선다.

    기프트샵 주인은 기부를 받았을 뿐이라며 기부자의 신상 정보를 알려준다. 마틴 오스본이라는 사람이었는데, 직접 만난 적은 없고 집주소도 모르며, 우체통 주소만 안다고 밝혔다. 도로시아는 기프트샵 주인의 이름으로 해당 우체국으로 전자 메일그램을 보내 네가 기부한 유물이 장물이라는 의심 때문에 반송하겠다는 메시지를 전송하고, 우체통에서 소포를 가져가는 사람을 잡기로 한다. 이 작전은 성공했는데, 마틴 오스본은 가명이었고 유물을 보낸 사람은 윌헬미나 맥컬로라는 소녀로, 오클랜드 소재 알타 캘리포니아 대학교 자연철학[1] 박물관장인 네이선 맥컬로 박사의 딸이었다. 관장의 딸이었기에 의심을 사지 않고 박물관 유물들을 빼돌릴 수 있었던 것. 왜 이런 일을 했냐는 추궁에 윌헬미나는 자신은 잘못한 것이 없다며, 사람들의 믿음을 더 확고하고 신을 가까이 느낄 수 있게 한 것이라고 항변한다. 곧 사람들의 믿음을 흔들리게 하는 논문이 발표될 것이고, 그렇기에 이런 유물들이 더 많은 사람들에게 전해져 믿음이 흔들리지 않게 해야 한다면서. 무슨 논문이냐고 도로시아가 묻자, 윌헬미나는 자신의 아버지에게 리뷰 요청이 온 천문학 논문이 있는데, 아버지의 믿음이 흔들리고 있다고 하고, 자세히 알고 싶으면 아버지랑 얘기하라면서 집주소를 알려준다.

    다음 날 도로시아는 맥컬로네에 찾아가서 이야기를 나누고, 네이선이 윌헬미나에게 화내는 모습을 본다. 딸이 말한 당신의 믿음이 흔들리는 이유가 뭐냐고 도로시아가 묻지만, 네이선은 이건 가족의 개인적인 일이기에 당신 알 바가 아니라고 쏘아붙인다. 그러자 도로시아는 입장 바꿔 생각하면 이런 일이 발생했는데 당신 같으면 그런 설명으로 만족하고 박물관에 보고 안 할 수 있겠냐고 반박하고, 네이선은 크게 불편해하지만 여기까지 왔는데 어차피 발표될 논문을 보여주라는 아내의 설득에 논문 내용을 공유한다. <자연 철학>이라는 학술지의 논문을 리뷰해달라는 요청을 받았는데, 논문의 제목은 "태양과 에테르의 상대적 운동에 관하여 (On the Relative Motion of the Sun and the Luminiferous Aether)"이다. 마이컬슨-몰리 실험의 결과 에테르의 존재가 확인되지 않아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이 에테르의 존재를 부정하고 빛의 속도가 모든 관성기준계에서 동일하다는 특수 상대성 이론을 발표한 현실 세계와 달리, 이 소설 속의 세계에서는 에테르의 존재가 실험적으로 관찰되고 그 속도도 관측할 수 있다. 관측 결과 태양계에는 일정한 에테르 바람이 불고 있는데, 대부분의 물리학자들은 딱히 중요하다고 생각하지 않는 결과지만 아서 로슨이라는 천문학자는 태양계에 에테르 바람이 부는 게 아니라 태양계 자체가 정지해 있는 에테르에 대해서 움직인다고 해석한다. 도로시아는 사막에 바람이 불면 바람이 움직이고 사막이 가만히 있는 거지, 공기는 가만히 있는데 사막이 움직인다는 해석이 말이 되냐고 바로 반박하지만, 네이선은 일단 끝까지 들어보라고 한다. 로슨의 가설에 따르면 에테르에 대해 정지해 있는 항성이 있을 것이며, 그 항성은 절대 공간의 기준인 에테르에 대해 정지해 있으므로 절대 정지의 상태에 있다는 것이다.

    비슷한 항성들은 있었지만 완벽히 에테르를 기준으로 정지 상태인 항성은 없었는데, 그러다가 로슨은 에리다누스 별자리의 58 에리다니라는 항성의 속도가 조금 이상하다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초속 몇천 마일 정도의 속도로 지구에게 다가왔다가 멀어졌다가를 반복하는 이상한 항성이었던 것이다. 다른 관측소와 정확히 대조해본 결과, 이 항성은 24시간을 주기로 속도가 변하고 있고, 로슨은 24시간을 58 에리다니가 원형 궤도를 돌고 있다고 추측한다. 도로시아는 그러면 더 무거운 천체를 중심으로 공전하고 있는 것 아니냐고 하자, 네이선은 그렇게 운동하는 천체는 중력에 의한 공전일 리 없다고 답한다. 여태까지 우리의 천체 역학에 대한 모든 지식을 부정한다면서. 로슨의 가설은 58 에리다니가 우리가 관측하기 너무 작은 천체, 즉 지구 크기의 행성을 24시간 주기로 공전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58 에리다니가 이렇게 공전하는 이유는 행성에게 24시간의 밤-낮 주기를 만들기 위함이라는 것이다. 즉 58 에리다니는 천동설적인 태양계를 이루며, 58 에리다니가 공전하고 있는 이 행성은 에테르에 대해서 정지 상태이며 이 행성에서, 그리고 오직 이 행성에서만 빛의 속도가 모든 방향에서 동일하다는 것이 로슨의 가설이다. 이 행성에 생명이 있는지 알 방법은 없지만 로슨은 생명이 있다고 추측하며, 이 행성의 생명이 신이 이 우주를 창조한 이유라고 주장한다. 태양이 24시간 주기로 행성을 공전하는 기적이 존재하는 행성, 절대적 정지 상태에 있는 이 행성이야말로 신이 관심을 가지고 직접 창조한 특별한 행성이 아니겠냐는 것.

    로슨은 추가로 지구의 인간이 존재하는 가설로 세 가지를 꼽는데,
    1. 진짜를 만들기 위한 연습 창조였다.
    2. 의도치 않은 부작용으로 58 에리다니의 행성을 창조할 때 창조되었다.
    3. 사실 우리가 진짜고 58 에리다니의 행성은 연습이거나 부작용이었다.
    세 번째 가설은 가능성이 낮다고 주장한다.
    기적이 일어나는 곳이 주의 관심이 있는 곳이라면 항성이 행성을 공전하는 기적이 일어나는 행성이 신이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곳이 아니겠냐는 것. 즉 지구는 어찌 됐든 의도치 않는 창조물로서, 신은 존재하지만 우리에게는 딱히 관심이 없다는 핵폭탄급 결론이 도출되는 논문이었던 것이다.

    물론 로슨도 스스로 인정했다시피 추측이 많은 논문이지만, 설득력 있는 이론이며 많은 것을 설명할 수 있다고 네이선은 말한다. 대표적인 언어학의 난제로 전 세계의 언어가 몇 천년의 시간 만에 이토록 달라졌냐는 것이 있었다. 태초의 인간들이 하나의 언어를 말하고 있었다면, 전세계의 언어에서 어느 정도 공통점을 찾을 수 있어야 하는데 그렇다기엔 관련 없는 언어들이 존재하기에, 태초의 인간들이 쓰던 언어가 여럿이라는 결론에 이른다. 대체 왜 신이 태초에 인간들에게 여러 언어를 쓰게 만들었는지가 난제였으나, 애초에 우리가 신의 관심 밖이었다면 난제가 해결된다. 신은 태초의 인간들에게 언어를 구사할 수 있는 능력은 줬지만 언어를 내려주진 않았고, 세계 각지의 태초 인간들은 독립적으로 언어를 개발했기에, 세계의 언어가 이토록 다른 것이다.

    이어서 네이선은 자신은 이 논문을 리젝하고 싶었지만 리젝할 명분이 없으며, 과학자로서의 양심이 이 논문을 게재 승인토록 했다고 한다. 그러면서 하느님의 계획에 우리가 아예 없었다면 어찌 되는 거냐면서 거의 울음을 터뜨리고, 도로시아가 위로하려 하자 당신은 아무것도 모른다며 소리친다. 네이선의 부인은 우리에게 윌헬미나보다 10년 정도 오빠였던 마틴이라는 아들이 있었으며, 인플루엔자로 세상을 떠났다고 한다. 네이선이 이 큰 아픔을 버틸 수 있었던 건 이것도 신의 계획 안에 있었다는 믿음 때문이었는데, 애초에 지구라는 행성부터 신의 관심 밖이라는 생각에 이르자 버틸 수가 없었던 것. 자신의 태양 연구에서 신의 지문을 찾아내는 것과 같은 성취를 느꼈는데 모든 항성에서 이런 파동이 발견될 것이라면서, 과학은 목적을 잃었다고 한탄한다.

    도로시아는 다시 직장으로 돌아왔으나, 스스로도 발굴 작업의 의미에 대해 흔들림이 생겨 일을 쉬게 된다. 태초 시절의 창을 발굴해 그 이후의 기술 발전 수준을 파악해, 하느님이 인간 지식에 대해 어떤 의도를 가졌는지 유추하는 작업이었으나, 신이 우리에 대한 의도 자체가 없을 수도 있다는 생각에 이르자 집중이 안 되었던 것.

    시간이 지난 후, 생각이 정리된 도로시아는 자신의 다짐을 기도로 올린다. 도로시아는 자신이 평생 연구를 하며 느낀 성취감을 하느님의 뜻과 자신을 창조했던 의지에 부응했기에 그런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만약에 자신이 하느님의 의도 밖어였다면 자신이 느낀 성취감은 오로지 나를 위해서 느낀 것이라 한다. 자신은 하느님께서 내려다보시던 그렇지 않던 다시 발굴 작업에 참여하고, 우주가 창조된 것이 인간 때문이 아니더라도 우주가 작동하는 방식에 대한 연구를 계속할 것이라며. 이 여정이 자신의 목적이며, 하느님이 이 목적을 내게 내려줬기 때문이 아니라, 내가 스스로 선택한 것이기에. 아멘.

    해석과 편집

    신앙과 과학에 대한 다양한 화두를 던지는 소설.
    현실의 과학사는 종교가 인간이 신의 선택을 받은 특별한 지위를 주창하고, 과학이 신이나 기적, 지구/인간의 특별함을 찾지 못하며 우리가 우연의 산물이라는 주장을 펼쳐 온 대립의 역사가 있다. 교회의 천동설/과학의 지동설이 그러했고, 교회의 창조설/과학의 진화론이 그러했다. 다만 이 소설에서는 신이 존재한다는 과학적 증거 (적어도 지구가 8천 년 이내로 창조되었다는 증거)가 존재하는데, 우리에게 관심이 없다는 증거도 존재해, 어찌 보면 더 절망적이라고 할 수도 있다. 현실의 과학은 신의 존재를 증명하지도 않지만 반증하지도 않기에 많은 사람들이 믿음을 가지고 살아갈 수 있지만, 이 소설에서는 과학이 신의 존재를 증명하는데 신은 우리 행성에 관심이 없고 신의 관심을 받는 기적이 존재하는 특별한 행성은 우주 저 멀리에 따로 있다. 이랬을 때의 신앙은 어때야 하며, 삶의 의미는 어떻게 찾아야 하냐는 것이 주제다. 마지막 기도에서의 결론은, 삶의 의미는 신이 있더라도 신에게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만들어 나가는 것이라는 깨달음이다.




    폴 브랜드라는 크리스천 의사와 필립 얀시가 함께 저술한 우리 시대의 기독교 명저 가운데 하나로 손꼽힐만한 책이 있습니다.
    오묘한 육체’(Fearfully and Wonderfully Made-The Mystery of the Body and Soul)

    이 책에서 폴 브랜드는 이렇게 말합니다.
    “세상에는 우리가 놀랄 것이 많이 있지만, 먼저 우리는 우리의 탄생에 대하여 놀래야만 한다.
    인간의 탄생 이것은 기적 중에 기적이요, 신비 중에 신비가 아닐 수가 없다.
    생각해 보라. 정자와 난자의 만남으로 단 하나의 수정난 세포에서 10조개에 이르는 세포가 생성되고 드디어 거기에서 한 생명이 탄생한다.
    바로 한 아기가 탄생하는 것이다.
    이 신비를 어떻게 말할 수가 있을까?”


    솔트 라인’(salt line)은 흐르는 강물과 바닷물이 만나는 지점을 이르는 말이다.
    이 솔트라인은 수시로 변한다.
    가뭄으로 물이 줄어들면 솔트라인은 강 위쪽에 형성이 되고 비가 와서 강물이 많아지면 솔트라인은 바다쪽으로 깊이 들어온다.
    뉴욕에 허드슨 강에도 솔트라인이 있다.
    날이 가물어서 강물이 약해지면 바닷물이 역류해서 허드슨 강쪽으로 올라온다.
    그러면 식수를 공급하는 수원지가 위협을 받게 된다.
    그러다가 비가 적당히 내려서 어느 정도 강물이 많아지면 민물이 바닷물을 밀어내어 수원지를 안전하게 보호하게 된다.
    지금도 허드슨강의 ‘쏠트 라인’은 끊임없이 당기고 있습니다.


    깨달음만이 꿈과 희망이다.

    인간은 행복을 위해
    수많은 물질을 개발하였지만
    인간성을 상실한 인간들은 행복하지 않다.

    종교는 인간의 영적인 성장을 위해 필요하지만 전 세계 5만 여 종의 종교는
    오히려 인간성을 상실하는데 동조하였고 인류의 영적 성장을 이루지 못했다.

    『25시』라는 작품은 제2차 세계 대전을 배경으로 1949년에 루마니아의 신부인 '게오르규'가 쓴 소설입니다.
    『25시』의 의미는 인간성을 상실한 인류를 구원할 황금 타임을 1시간이나 지난 시간을 말합니다.

    설상가상으로 74년이 지난 지금 전 세계는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전쟁을 통해 제3차 전쟁 일보 직전에 있습니다.
    인간성을 상실한 인간들은 전쟁을 통해 수많은 인간들이 참혹하게 죽어가도 죄 의식이 없고 사회에 대한 책임감이 사라지고 무능한 인간들이 되어가고 있습니다. 

    더욱 우려되는 것은 2015년부터 2023년까지 8년 동안 베이비 박스에 맡겨진 아동은 1,418명이고, 출생 신고가 되지 않은 아이는 2,236명이라고 합니다. 

    출생 미신고 아이 중 20명을 표본 조사하는 과정에 발견된 사건이 ‘수원 아기 시신 냉장고 보관 사건’이라는 것이 충격적입니다. 

    많은 인류 학자들은 전쟁과 괴질과 자연 생태계 파괴, 인간성 상실로 인해 21세기 인류는 꿈과 희망은 사라지고 결국은 공멸할 것이라고 경고한 지 오래되었다.

    인간성을 상실한 인류는 인간다움이 점점 사라지고 많은 사람들은 불면증, 우울증, 공포증 등 뇌 신경 질환으로 고통을 받으며 서서히 죽어가고 있다.

    이대로 계속 간다면 멀지 않은 시기에 인류는 공멸이다.
    『25시』가 아니라 『26시』가 되었다.

    대안은 무엇인가?

    기존의 종교와 정치적인 시스템으로는 현재 인류의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예수, 석가, 공자가 다시 부활한다고 해도 인류의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 오히려 예수, 석가, 공자가 다시 부활한다면 인류는 더 혼란에 빠질 것임이 불을 보듯 명약관화하다. 

    그럼에도 많은 사람들은 2천 년 전에 지구를 다녀 간 성인들을 기다리며 애원하고 있다. 참으로 아이러니하다. 인간성을 상실하고 연약한 인간이 되었기 때문이다.

    중요한 것은  지금 지구에 살아가는 당신이 당신 삶의 유일한 전문가이며 책임자라는 인식의 대전환이 일어나서 깨어나야 한다는 것이다.  

    나와 당신, 우리 모두는 각자의 삶을 스스로 변화 시킬 때 모든 인류는 변화될 것이다.
    그 변화의 시작은 모든 사람들의 뇌 속에 이미 내려와 있지만 잠들어 있는 신성(神性)을 흔들어 깨우는 것이다. 
    신성이 회복될 때 신이 나고 신명이 나는 사람이 되고, 사람 사는 세상이 된다. 뇌 속의 신기(神氣)가 발동될 때 우리 모두는 무엇이든 할 수 있고 무엇이든 될 수 있다.

    게오르규 신부는 대한민국은 21세기 인류의 모든 문제를 해결할 ‘열쇠의 나라’라고 했다. 홍익인간 이화세계가 이루어지지 않으면 인류는 공멸할 것이라 했다.

    인지학(人智學)의 창시자이며 녹색운동의 창시자인 독일계 오스트라인 ‘루돌프 슈타이너(Rudolf Steiner)’는 21세기 인류문명의 대전환기에 인간의 새로운 삶의 양식을 결정할 원형(Archetype)을 제시하는 성배(聖杯)의 민족은 ‘한국’이라고 했다.

    21세기 표류하고 있는 인류에게 신인류, 새로운 하늘과 새로운 땅을 꽃 피울 수 있는 나침반을 한민족의 창세신화가 기록된 부도지(符都誌)에 기록된 마고복본(麻姑復本)에서 찾을 수 있다.

    그리고 한민족의 첫 번째 경전인 천부경(天符經)의 본심본태양앙명 인중천지일(本心本太陽昻明 人中天地一)과 두 번째 경전인 삼일신고(三一神誥)의 강재이뇌 신(降在爾腦 神) 사상에서 찾을 수 있다.

    거듭 얘기하지만, 21세기 신인류, 새로운 하늘과 새로운 땅을 꽃 피우는 변화의 시작은 모든 사람들의 뇌 속에서 부터 이루어진다. 

    뇌 속의 신성을 깨우는 사람은 신인류의 문명인이 될 것이고, 신성을 깨우지 못한 사람은 원시인이 될 것이다. 신성을 회복한 사람의 삶은 예술이 될 것이고 신성을 회복하지 못한 사람의 삶은 고통이 될 것이다.

    본심본태양앙명 인중천지일(本心本太陽昻明 人中天地一)
    사람의 마음이 태양처럼 밝아지면 그 사람은 새로운 하늘과 새로운 땅의 주인이 된다.

    강재이뇌 신(降在爾腦 神)

    참 하나님은 뇌 속에 이미 내려와 있다.

    굼벵이 속에 매미가 있고, 누에 속에 나비가 있듯이
    뇌 속에 내려와 있는 신성을 회복한 사람은 신인(神人)이 된다.

    누에가 고치를 뚫고 나오는 것이 힘들다고 고치를 가위로 잘라주면 나방은 날개에 힘이 없어서 날지 못한다. 깨달음도 마찬가지다.
    자식을 키우는 것이나 뇌 속의 신성을 회복하는 것이나 모두가 같은 이치다. 수행을 통해 내가 나를 찢고 스스로 나오는 것이 깨달음이고 진정한 구원이다. 스스로를 구원하라. 스스로를 구원하지 못한 사람이 세상을 구원하겠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인류 문명의 대전환기에 모든 것이 혼란 속에 있다.
    지금은 난법(亂法) 시대이고, 무법천지(無法天地)의 시대다.

    뇌 속에서 신성을 회복하는 깨달음만이 꿈과 희망이다.
    신인류, 새로운 하늘과 새로운 땅의 황금 천년의 정신 문명을 향해가는 새로운 시대, 그 변화의 주인공이 되기를 바란다.



    완전한 지혜


    지혜(2451) 호크마(chokmâh) חָכְמָה

    1. 숙련,  2. 지혜,  3. 다양한 학식
    발음 / 호크마[ chokmâh ]
    어원 / 2449에서 유래
    관련 성경 / 지혜(출 28:3, 삼하 20:22), 슬기(출 35:26), 유능한 기술자(대상 28:21).
    구약 성경 / 153회 사용

    * 2449. 하캄(châkam)  חָכַם

    1. 현명해지다,  2. 피엘형 : 지혜롭게 만들다,  3. 푸알형 : 지혜로워진
    발음 / 하캄[ châkam ]
    관련 성경 / 지혜 있다(신 32:29, 슥 9:2), 지혜롭다(잠 9:12, 23:15, 욥 32:9), 지혜를 얻다(잠 6:6, 21:11, 27:11), 지혜롭게 하다(욥 35:11), 능숙하다(시 58:5), 지혜가 있다(전 2:15, 19, 시 105:22), 지혜자가 되다(전 7:16, 23).
    구약 성경 / 27회 사용




    잠언 2:7
    그는 정직한 자를 위하여 완전한 지혜를 예비하시며 행실이 온전한 자에게 방패가 되시나니.

    잠언 3:21
    내 아들아 완전한 지혜와 근신을 지키고 이것들로 네 눈 앞에서 떠나지 않게 하라.

    미가 6:9
    여호와께서 성읍을 향하여 외쳐 부르시나니 완전한 지혜는 주의 이름을 경외함이니라 너희는 매를 순히 받고 그것을 정하신 자를 순종할찌니라.





    08-03-2023(목)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영혼의 죄(미가 6:7)

    여호와께서 천천의 수양이나 만만의 강수 같은 기름을 기뻐하실까 내 허물을 위하여 내 맏아들을, 내 영혼의 를 인하여 내 몸의 열매를 드릴까
    Will the LORD be pleased with thousands of rams, with ten thousand rivers of oil? Shall I offer my firstborn for my transgression, the fruit of my body for the sin of my soul?

    "영혼의 죄(the sin of soul)"는 구체적으로 내 영혼의 죄(the sin of my soul)"라고 하겠습니다.
    하타트 나프쉬(חַטַּאת נַפְשִׁי)  

    * 영혼(5315) 네패쉬( nephesh)  נֶפֶשׁ 

    1. 숨,  2. נֶפֶשׁ חַיָּה 생기,   3. 냄새
    발음 / 네패쉬[ nephesh ]
    어원 / 어미활용 נַפְשִׁי, 복수 נְפָשִׁים ףנְפָשׁוֹת, 겔13:20], 5314에서 유래
    관련 성경 / 생물(창 1:20, 2:19, 9:16), 생명(창1:30, 출4:19, 민35:31), 사람(창12:5, 레7:25), 목숨(창12:13, 삼하1:9, 왕상20:42), 뜻(창23:8, 왕하9:15), 마음(창27:4, 출15:9, 레26:30), 혼(창35:18, 삼하11:11), 명(창46:15), 사정(출23:9), 죽은 자(레19:28), 몸(레21:1), 시체(레21:11, 민6:6, 합2:13), 주검(민5:2), 기력(민11:6), 명(名)(민31:35), 영혼(삿5:21, 욥10:1), 죽음(삿9:17), 심정(삼상1:15, 사58:10), 왕(삼상17:55), 중심(왕하4:27, 시131:2), 홀로(에4:13), 기력(욥6:11), 탐욕(시78:18, 사56:11),소원(잠11:23, 19:2), 음식을 탐하는 자(잠23:2), 식욕(전6:7), 욕심(사5:14), 성욕(렘2:24), 생기(겔37:9), 힘(암2:14), 욕심(합2:5).
    구약 성경 / 753회 사용

    죄(2403) 하타트(chaṭṭâʼth)  חַטָּאָת   

    1. 죄,  2. 우상에 대해 적용되기도 함,  3. 속죄제
    발음 / 하타트[ chaṭṭâʼth ]
    어원 / 2398에서 유래
    관련 성경 / 죄(창 4:7, 레 4:3, 대하 6:25), 죄악(창 18: 20, 사 5:18), 속죄제(출29:14, 민15:27, 왕하12:16), 속죄 제물(레4:32, 민8:8, 대하29:23), 속죄 희생(레4:25), 허물(레5:6), 잘못(레5:10,11), 속죄(레10:19, 민8:7), 속건제(레7:7), 번제(레4:29), 죄악(시32:5, 애4:6), 죄인(잠5:22,13:6), 벌(슥14:19). [동] 범죄하다(느1:6, 욥35:3).
    구약 성경 / 221회 사용

    * 2398. 하타(châṭâʼ) חָטָא 

    1. 벗어나다,  2. 사사기 20:16,  3. 비틀거리다
    발음 / 하타[ châṭâʼ ]
    관련 성경 / 범하다(창 20:9, 출 32:31, 렘 33:8), 죄를 짓다(창 39:9, 삼상 19:4, 욥 8:4), 범죄하다(창 40:1, 삼하7:6, 애 5:16), 죄짓다(창43:9, 삿 11:27), 잘못하다(레 5:5,15), 죄를 범하다(삼하 12:13, 24:10, 왕상 18:9), 잃다(잠 8:36), 해하다(잠 20:2), 보충하다(창 31:39), 깨끗하다(출 29:36, 레 8:15), 정결하다(레 14:52, 겔 43:22), 제사 드리다(레 6:26), 깨끗이 하다(민 31:19), 달아나다(욥 41:25).
    [명] 죄(출 5:16, 레 5:7,16, 민 12:11, 신 9:18, 호 8:11), 죄인(잠 11:31, 13:22, 전 2:26).
    구약 성경 / 238회 사용








    이스라엘 백성들에 대한 죄를 꾸짖기 위하여 본문에서 특별한 두 개의 단어를 살펴봅니다.

    첫째는 말씀- 다바르와 아마르(6:1)

    너희는 여호와의 말씀을 들을찌어다 내게 이르시기를 너는 일어나서 산 앞에서 쟁변하여 작은 산으로 네 목소리를 듣게 하라.

    하나님의 말씀이란 주된 단어는 "다바르(דָּבַר)" 라고 합니다.
    다바르의 말씀은 순종이 따라옵니다.

    그러나 본문에서는 "아마르(אָמַר)" 라는 단어를 사용합니다.
    아마르는 권고하다는 뜻으로 순종하지 못하므로 깨우치기 위한 것입니다.


    둘째는 변론 - 쟁변과 변론(6:2)

    너희 산들과 의 견고한 지대들아 너희는 여호와의 쟁변을 들으라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과 쟁변하시며 이스라엘과 변론하실 것이라.

    쟁변이란 단어는 "리이브(רִיב)" 라고 합니다.
    그러나 변론이란 단어는 "야카흐(יָכַח)"라는 단어를 사용합니다.

    쟁변이란 주로 변론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반면에 변론이란 잘잘못을 구분하여 조목조목 따지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을 떠나 우상을 숭배하는 반드시 망할 것이라고 경고하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속적으로 우상을 숭배하기 때문에 더 이상 설명하고 깨우치는 방법을 선택하지 않고 그들의 죄악을 드러내어 가르칩니다.

    사랑의 하나님은 깨우치고 가르쳐서 제 자리로 돌아오기를 기다립니다.
    그러나 공의롭기 때문에 하나님의 때에 돌아오지 않으면 징계하신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말씀하다(1696) 다바르( dâbar)  דָּבַר 

    1. 정돈하다,  2. 안내하다,  3. 뒤따르다
    발음 / 다바르[ dâbar ]
    관련 성경 / 말씀하다(대상17:17, 시51:4, 사1:2), 명령하다(삿1:20), 이르다(창16:13, 신5:31, 겔37:21), 안위하다(에10:3), 명하다(욘3:2), 말하다(욥33:2, 미7:3), 진술하다(창24:33). 허락하다(창28:15, 출12:25), 고하다(신20:2, 겔2:7), 기도하다(민21:7), 선포하다(신1:1, 렘35:17,36:31), 강론하다(신6:7, 11:19), 언약하다(신23:23), 확언하다(신26:18), 대답하다(왕상2:30, 창34:13), 전하다(왕하1:17, 20:19), 고발하다(에7:9), 아뢰다(삼하22:1), 베풀다(렘1:16), 선언하다(렘11:17, 22:1, 25:13), 비방하다(민12:8), 여쭙다(삼하14:15), 구하다(왕하4:13, 삿8:8), 이야기하다(출33:11, 욥41:3),공포하다(레23:44), 담화하다(삼상9:25), 쟁론하다(왕상3:22), 위로하다(대하30:22), 질문하다(렘12:1), 권하다(대하33:18), 복종하게 하다(시18:47, 47:3). [명] 말(민27:7, 삼하13:36, 사65:24), 말씀(민36:5, 수24:27, 욥11:5), 명령(창44:2).
    구약 성경 / 1137회 사용


    말씀하다(559) 아마르( ’âmar)  אָמַר


    1. 말하다,  2. 소명하다,  3. 권고하다
    발음 / 아마르[ ’âmar ]
    관련 성경 / 이르다(창12:12, 삼하18:12, 미3:1), 지시하다(창22:3, 26:2), 청하다(창24:43, 느8:1), 대답하다(창26:9, 대하10:10, 삼상17:58), 말씀하다(창31:29, 왕상2:4, 대상17:7), 묻다(창46 :33, 삼하9:4, 암6:10), 명을 받다(출6:26), 명하다(민15:38, 수11:9, 대하29:24), 전하다(삼하18:18), 아뢰다(신26:5, 대상21:8), 간구하다(신3:23, 대하6:37), 인정하다(신26:17,18), 부르다(왕상1:34,39, 대하23:11), 내리다(에 9:25), 선포하다(시40:10), 생각하다(수 22:24, 삼상27:1), 증거하다(왕상21: 10), 언약하다(대하7:18), 전파하다(에1:17), 권하다 (에3:4), 구하다(에6:4, 5:14), 속담을 말하다 (겔16:44), 외치다(대하23:13), 말을 전하다 (출18:6), 여쭈다(출32:31, 삿10:15), 울다(욥 39:25), 간청하다(왕하2:17), 결심하다(대하2:1), 논하다(민23:23), 맹세하다(렘16:14), 허락하다(에9:14), 칭하다(사4:3). [명] 대답 (창24:44), 말(창41:54, 삿12:4, 삼상20: 7, 시 42:3), 명(창43:17, 시106:34).
    구약 성경 / 5298회 사용.

    쟁변하다(7378) 리이브(rîyb)  רִיב  

    1. 다투다,  2. 주먹질하며 싸우는 경우,  3. 말로 싸우는 경우
    발음 / 리이브[ rîyb ]
    관련 성경 / 다투다(창26:22, 시35:1, 사45:9), 논쟁하다(욥33:13), 시비하다(삿21:22, 호2:2), 변론하다(욥9:3, 미6 : 1), 징벌하다(암7:4), 변호하다(사1:17), 대답하다(창31:36), 싸우다(출21:18), 복병시키다(삼상15:5), 꾸짖다(느5:7, 13:11), 억울함을 풀다(삼상24:15, 잠22:23), 책망하다(느13:25), 견책하다(사27:8), 대적하다(삼상2:10, 사49:25). [명] 원통(시74:22, 애3:58), 변호(시119:154), 원한(잠23:11), 다툼(렘2:29), 송사(렘51:36).
    구약 성경 / 68회 사용.

    변론하다(3198) 야카흐(yâkach) יָכַח 

    1. 앞에 나서다,  2. 히필형  הוֹכִיחַ
    3. 다투다
    발음 / 야카흐[ yâkach ]
    관련 성경 / 변론하다(욥23:7, 사1:18, 미6:2), 해결되다(창20:16), 책망하다(창21:25, 욥13:10, 잠9:8), 정하다(창24:14,44), 징계하다(삼하7:14,잠3:12), 꾸짖다(왕하19:4, 대상16:21, 시105:14), 견책하다(잠19:25, 시6:1), 판결하다(사2:4, 미4:3), 판단하다(사11:4, 창31:37), 견책받다(잠15:12), 경계하다(합1:12), 징계받다(욥5:17), 아뢰다(욥13:15, 16:21), 증언하다(욥19:5), 징벌하다(시94:10), 꺾다(욥32:12),경책하다(잠28:23). [명] 책망(욥6:25, 잠25:12), 판결자(욥9:33), 꾸짖는 자(겔3:26).
    구약 성경 / 59회 사용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불러 세우고 그들에게 반역의 길을 걷지 말 것을 요구하십니다.
    그런데 그들은 불의와 부정으로 옷 입고 있어서 더 이상 하나님의 말씀에 반응하지 않고 우상을 따라 살아가는 패역한 자들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형식뿐인 제사를 원하지 않으시며 그를 믿고 따르는 마음을 원하십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그가 베풀어주신 은혜를 기억하며 그의 율례를 지키기에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는 우리를 구원하신 분이며 우리는 그의 백성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애타게 찾으시는 음성을 들을 줄 아는 감각을 갖고 그와 동행하는 성도들이 되어야 합니다.

    인간들이 짓는 죄에 대해서 보다 심도 있게 꾸짖고 있는데 첫째 자연계를 증인으로 하여 이스라엘 백성들의 죄악을 꾸짖습니다.
    즉 '작은 산', '땅의 견고한 지대'라는 용어들을 쓰면서 그들이 이스라엘 민족이 저지른 죄에 대해서 다 보았을 뿐만 아니라 또한 들었다고 합니다.

    이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죄가 이미 온 땅에 만연되었음을 의미합니다.
    또한 그들이 아무리 변명을 해도 자신의 죄에 대해 부정할 수 없음을 의미한다.
    죄란 어떤 경우에도 드러나기 때문이다.
    특히 이스라엘을 지키시는 이는 졸지도, 주무시지도 않는다는 증언처럼 인간의 모든 행위를 살피시는 하나님 앞에서는 결코 죄를 감출 수가 없는 것이다.

    둘째 하나님은 과거의 역사적인 사건들을 상기시키며 백성들의 죄악을 꾸짖고 계신다.
    여기에는 두 가지의 의미가 있다.
    첫째는 과거에 그들에게 베푼 하나님의 은혜를 상기시키시면서 죄로부터의 회개를 촉구하고 있는 것 이다.
    둘째는 과거에 그들의 조상이 죄를 지음으로 말미암아 얼마나 큰 고통을 겪었는지를 상기시키시면서 결코 범죄하지 말도록 충고하는 것이다.
    즉 하나님께서는 자연 만물과 과거의 잊을 수 없는 사건을 통하여 하나님께 대한 온전한 섬김과 경외를 바라고 계시는 것이다.
    이것은 결코 인간에 대한 협박이 아니라 죄에서 돌이켜 구원으로 돌아오기를 바라는 사랑의 표현이다. 
     

    미가 6:4
    내가 너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어 종노릇 하는 집에서 속량하였고 모세아론미리암을 보내어 네 앞에 행하게 하였었느니라.

    내가 너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어 종 노릇하는 집에서 속량하였고 -
    '인도하여 내어'(헤어레티카)는 '괴롭게 하였느냐'(헤레티카)와 동음이어의 형태를 이루고 있다.
    하나님은 이러한 언어적 유희(word play)를 통해서 역설적인 증언을 하신다.
    곧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괴롭히신 적이 없으며 도리어 애굽에서 종살이하던 이스라엘을 속량하여 구원의 은총을 베푸셨음을 강조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출애굽시키신 사건은 하나님의 구원과 사랑을 증거하는 선지자들에게 매우 중요한 근거였으며 역사 신학이 되었다(McComiskey).

    인도하여(5927) 알라( ʽâlâh)  עָלָה 

    1. 올라가다,  2. 이사야 14:14, 3. 출애굽기 24:13
    발음 / 알라[ ʽâlâh ]
    관련 성경 / 동트다(창 19:15, 삼상 9:26), 치솟다(창 19:28, 삿 20:38), 새다(창32:26), 피다(창40:10), 오르다(창49:4, 신5:5), 올라가다(창49:9, 수2:8, 암9:2), 가다(출1:10, 수18:11, 호8:9), 올라오다(출8:3, 삿12:3, 아8:5), 나오다(출13:18, 아4:2), 뽑다(레16:9), 메다(민19:2, 삼상6:7), 나아가다(신25:7, 삿4:5), 닿다(수8:20, 욥20:6), 이르다(수15:6, 삿21:5), 대다(삿16:18), 일어나다(삿20:40, 호13:15), 들리다(왕하19:28, 사37:29), 들어오다(삼상14:21), 기록하다(대상27:24), 중수되다(느4:7), 나타내다(시78:31), 퍼지다(잠24:31), 들다(잠26:9,슥14:13), 뛰어나다(잠31:29), 기어오르다(렘4:29), 덮다(사8:7), 생각하다(렘7:31), 두다(렘32:35), 치료받다(렘8:22), 뜻하다(렘19:5), 넘치다(렘51:42), 올리다(왕상10:29, 에1:14), 솟아오르다(사34:3, 암8:8), 상달하다(출2:23, 욘1:2), 돌다(수6:15), 드리다(왕상18:29, 왕하3:20), 미치다(대하36:16), 달다(시62:9), 움돋다(암7:1), 솟아나다(민21:17), 타다(창31:10, 렘46:4), 달리다(렘46:9),치다(렘49:31), 올려 보내다(창44:33), 마르다(출16:14), 떠오르다(출19:18, 사34:10), 행하다(출33:5), 입다(레19:19, 겔44:17), 지나가다(민20:19), 높아지다(신28:43), 사무치다(삼상5:12), 물러가다(삼하23:9), 맹렬하다(왕상22:35, 대하18:34), 승천하다(왕하2:11), 떠나가다(왕하12:18, 렘34:21), 진척되다(대하24:13), 일으키다(전10:4), 날리다(사5:24), 자라나다(사53:2), 떠나다(렘21:2, 겔11:24), 날아오다(렘49:22), 들이다(겔14:7), 자라다(겔47:12), 강성하다(단8:8), 뛰다(암3:5), 가리다(욘4:6), 통하다(대상26:16), 품다(겔20:32), 지존하다(시47:9), 초월하다(시97:9), 머물러 있다(민9:22), 데리고 오다(스1:11), 인도하다(창50:24, 출17:3), 가지다(출13:19), 켜다(출27:20, 민8:3), 이끌어내다(민16:13, 수24:32), 나오게 하다(민20:5), 주다(삼상2:19), 메어올리다(대상15:12),데리다(대하8:11), 가지고 오다(스1:11), 기도하다(욥42:8), 끌어내다(시30:3, 겔29:4),인도하여내다(출32:4, 삿6:8, 렘16:15), 인도하여 올리다(민21:5, 왕상12:28, 암3:1), 무릅쓰다(애2:10, 겔27:30), 입히다(겔37:6), 거느리다(겔23:46), 굽이치다(겔26:3), 옮기다(삼상 7:1, 렘 27:22), 옮겨가다(삼상 6:21), 가져오다(삼상19:15), 불러올리다(삼상28:8),몰아오다(렘51:27), 새기다(대하3:5), 쌓다(대하32:5), 고치다(렘30:17), 키우다(겔19:3), 건지다(욘2:6), 새김질하다(레11:3,5, 신14:7),채우다(삼하1:24), 제사하다(렘48:35), 충돌하다(나3:3), 기록되다(대하20:34), 끌려가다(나2:7), 서다(렘51:3).
    구약 성경 / 890회 사용

    올라가다
    - 1. 애굽에서 가나안 땅으로(낮은 곳에서 높은 곳으로)
    - 2. 종에서 자유자로
    - 3. 세상에서 천국으로




    속량하셨고(6299) 파다(pâdâh) פָּדָה 

    1. 몸값을 치루고 석방하다,  2. 대속하다,  3. 자유롭게 하다.
    발음 / 파다[ pâdâh ]
    어원 / ‘자르다’는 뜻의 사용하지 않는 어원에서 유래
    관련 성경 / 무르다(레 27:27, 민 18:16, 신 9:26), 속량하다(신 21:8, 사 35:10, 미 6:4), 건지다(삼하 4:9,욥 33:28), 구속하다(삼하 7:23, 대상 17:21, 시 34:22), 구원하다(삼상 14:45, 왕상 1:29), 대속하다(출 13:13, 34:20, 민 18:15), 취하다(민18:16), 구속되다(사 51:11), 속량하게 하다(출 21:8).
    [명] 구속(사 1:27), 속량(레 19:20),구원(삼상 14:45).
    구약 성경 / 63회 사용

    속량하다
    - 1. 몸 값을 지불하다


    육체의 죄는 죽음이지만(로마서 6:23), 영혼의 죄는 영벌이라고 하겠습니다(마태복음 25:46).

    육체의 죄는 자범죄(고범죄)라고 합니다(시편19:13)
    또 주의 종으로 고범죄를 짓지 말게 하사 그 죄가 나를 주장치 못하게 하소서 그리하시면 내가 정직하여 큰 죄과에서 벗어나겠나이다.


    이사야 53:10
    여호와께서 그로 상함을 받게 하시기를 원하사 질고를 당케 하셨은즉 그 영혼을 속건제물로 드리기에 이르면 그가 그 씨를 보게 되며 그 날은 길 것이요 또 그의 손으로 여호와의 뜻을 성취하리로다.
    Yet it was the LORD's will to crush him and cause him to suffer, and though the LORD makes his life a guilt offering, he will see his offspring and prolong his days, and the will of the LORD will prosper in his hand.


    미가 6:8
    사람아 주께서 선한 것이 무엇임을 네게 보이셨나니 여호와께서 네게 구하시는 것이 오직 공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히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요구하시는 항목을 세 가지로 언급하고 있다.

    1. 오직 공의를 행하며
    - '공의'는 의로운 삶을 말할 뿐만 아니라 사회적으로 모든 사람에 대해 공평하게 대하는 것을 의미한다.

    2. 인자를 사랑하며
    - 이것은 인간을 사랑하는 것이다.
    '사랑하며'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헤세드'는 하나님의 속성이면서 동시에 언약의 기본적인 원리이다.
    그래서 선지자들은 타인에게 '헤세드'를 보이지 못할 경우 하나님과의 언약을 어긴 것으로 이해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언약은 하나님의 '헤세드'를 얻게하는 매개체가 되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에게 자신의 속성인 '헤세드'를 보여주고 그로 인해 언약을 맺었던 것처럼, 자기 백성들도 타인에게 '헤세드'를 보여 하나님과의 언약을 신실하게 지킬 것을 요구하신다(McComiskey).

    3. 겸손히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
    -  겸손하게 하나님과 더불어 교제하며 행하는 것이다(Delitzsch).
    하나님께서 가장 원하시는 것은 이상의 세 가지이다.
    그렇다고 해서 선지자 미가가 율법에 기록된 희생제사를 무시하는 것은 아니다.
    미가가 강조하는 것은 앞서 언급된 세 가지 마음 자세와 행위를 동반하지 않은 희생 제사는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본절에서 요구된 마음의 자세와 행위들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죄사함을 얻는 조건들이 아니다.
    분명히 죄사함은 희생제사를 통해서 가능하다.
    그러나 본절의 윤리적 행위들은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언약 백성으로서, 곧 죄사함을 받은 백성으로서 삶 가운데 마땅히 드러나야 할 삶의 규범들이다.
    이것이 없는 희생제사는 아무런 용서도 구할 수 없는 자기 만족의 행위에 불과한 것이다.







    08-02-2023(수)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근본(미가 5:2)

    베들레헴 에브라다야 너는 유다 족속 중에 작을찌라도 이스라엘을 다스릴 자가 네게서 내게로 나올 것이라 그의 근본은 상고에, 태초에니라.
    But you, Bethlehem Ephrathah, though you are small among the clans of Judah, out of you will come for me one who will be ruler over Israel, whose origins are from of old, from ancient times.

    근본(根本)이란 한자의 훈은 "뿌리 근" "근본 본"으로 첫째는사물(事物)의 생겨나는 근원(根源), 둘째는어떤 것의 본질(本質)로 되거나 어떤 것이 이루어지는 바탕, 셋째는 시초적(始初的)인 것이나 주가 되거나 기본(基本)이 되는 것, 넷째는 초목(草木)의 뿌리라고 사전에서 정의합니다.

    미가서 5장에서의 근본이란 "메시아의 기원"을 말합니다.

    4163. 근본(모차아흐.  môwtsâʼâh) מוֹצָאָה   

    1. 태생
    2. 복수 מוֹצָאוֹת 하수도
    발음 / 모차아흐[ môwtsâʼâh ]
    관련 성경 / 변소(왕하 10:27), 근본(미 5:2)
    구약 성경 / 2회 사용

    뜻풀이부

    • 1. 태생, 가문, 혈통, 출신, 미5:2
    • 2. 복수 מוֹצָאוֹת 하수도, 지하배수로, 변소, 왕하 10:27.

    본절은 1절에서 이스라엘의 왕이 침략자로부터 수치를 당하는 것과 대조를 이루어 더 이상 패배도 수치도 당하지 않게 하며 이스라엘을 온전하게 다스릴 자이신 참된 왕 메시야의 탄생을 예고한다.
    그리고 마태복음 2:6과 연관되어 인용되고 있다.
    또 유대 땅 베들레헴아 너는 유대 고을 중에 가장 작지 아니하도다 네게서 한 다스리는 자가 나와서 내 백성 이스라엘의 목자가 되리라 하였음이니이다.

    베들레헴 에브라다야
    - '에브라다'는 '떡집'을 뜻하는 '베들레헴'의 옛 이름으로 '열매를 많이 맺음'이란 의미를 지니고 있다.
    특별히 미가가 '베들레헴'의 옛 이름 '에브라다'를 첨가한 것은 본절의 베들레헴이 스불론의 베들레헴과 다른 지명이며(수 19:15) 다윗의 집을 가리키는 것임을 시사하기 위함인 듯하다. 미가는 베들레헴의 옛 이름을 통해서 본절의 내용이 다윗의 집에서 나온 메시야 왕과 연관됨을 암시하고 있다.

    너는 유다 족속 중에 작을지라도...나올 것이라
    - '작을지라도'(차이르)는 크기가 작은 것을 의미하기보다는 천하고 보잘것없는 상태를 나타낸다(시 68:27). 메시야가 천한 곳에서 태어난다는 사실은 메시야이신 예수께서 비천한 자들을 높이신다는 것을 암시한다(눅 1:52). 한편 '이스라엘을 다스릴 자가 네게서 내게로'의 화자(話者)는 여호와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다스릴 자, 곧 메시야가 천한 베들레헴에서 자신에게로 나온다고 말씀하심으로 자신과 메시야의 밀접한 관계를 시사하신다(McComiskey).

    그의 근본은 상고에, 태초에니라
    - '그의 근본'(모차오타이오)은 문자적으로 '그의 나옴'을 뜻하는 것으로 메시야의 기원을 의미한다.
    한편 '상고'(케뎀)와 '태초'(예메 올람)는 영원성뿐만 아니라 이스라엘의 초기 역사만큼이나 오래됨을 의미하는 용어이다


    근본(根本)이란 한자의 훈은 "뿌리 근" "근본 본"으로 첫째는사물(事物)의 생겨나는 근원(根源), 둘째는어떤 것의 본질(本質)로 되거나 어떤 것이 이루어지는 바탕, 셋째는 시초적(始初的)인 것이나 주가 되거나 기본(基本)이 되는 것, 넷째는 초목(草木)의 뿌리라고 사전에서 정의합니다.

    미가서 5장에서의 근본이란 "메시아의 기원"을 말합니다.


    그의 근본은 상고에, 태초에니라

    ‘베들레헴 에브라다야 너는 유다 족속 중에 작을지라도 이스라엘을 다스릴 자가 네게서 내게로 나올 것이라 그의 근본은 상고에, 태초에니라’ 하셨다. 이 말씀에서 우리에게 주시는 구원도리는 다음과 같이 셋이다.

    1. 이스라엘을 다스릴 자


    מָשַׁל 스트롱번호4910

    1.

    통치하다

    2.

    창3:16

    3.

    잠28:15.

    발음 [ mâshal ]
    관련 성경
    ☞통치하다(시103:19), 다스리다(삿9:2, 잠17:2, 단11:3), 주장하다(시19:13), 팔다(출21:8), 거느리다(대하23:20), 주관하다(잠22:7),맡다(창24:2). [명] 통치자(창45:8, 사16:1),총리(창45:26), 다스리는 자(삼하23:3, 잠16:32), 권세(단11:5,43), 권세 잡은 자(겔19:14), 주재(대상29:12, 시22:28), 주권자(전10:4), 관원(잠23:1, 28:15, 렘51:46), 주권(욥25:2).
    구약 성경
    81회 사용


    2. 그의 근본은 상고에

    קֶדֶם 스트롱번호6924

    1.

    앞면

    2.

    동쪽

    3.

    고대

    발음 [ qedem ]
    어원
    6923에서 유래
    관련 성경
    ☞동방(창2:8, 25:6, 민2:3, 수18:20, 삿6:3, 겔25:4), 동쪽(창3:24, 출27:13, 민3:38, 23:7, 수19:12, 욘4:5), 동(왕상17:3, 겔8:16), 옛적(느12:46, 시68:33, 미7:20), 건너편(민34:15),옛날(시44:1, 77:5, 애1:7), 옛(시55:19), 예로부터(시74:12, 사45:21), 태초(잠8:22, 사37:26), 이전(렘46:26), 만세전(합1:12), 영원(신33:27), 예전(렘30:20).
    구약 성경
    87회 사용


    3. (그의 근본은) 태초에니라’

    그리스도의 근본은 상고에 태초라는 말씀이다.

    ‘상고’는 무엇이며 ‘태초’는 무엇인가?
    상고(케뎀)는 “창세 전의 태초”
    태초(예메 올람)는 “창세의 태초”

    1. 이스라엘을 다스릴 자

    그리스도(마태복음 2:1-11)

    헤롯 왕 때에 예수께서 유대 베들레헴에서 나시매 동방으로부터 박사들이 예루살렘에 이르러 말하되
    *유대인의 왕으로 나신 이가 어디 계시뇨 우리가 동방에서 그의 별을 보고 그에게 경배하러 왔노라 하니
    *헤롯 왕과 온 예루살렘이 듣고 소동한지라
    *왕이 모든 대제사장과 백성의 서기관들을 모아 그리스도가 어디서 나겠느뇨 물으니
    *가로되 유대 베들레헴이오니 이는 선지자로 이렇게 기록된 바
    *또 유대 땅 베들레헴아 너는 유대 고을 중에 가장 작지 아니하도다 네게서 한 다스리는 자가 나와서 내 백성 이스라엘의 목자가 되리라 하였음이니이다
    *이에 헤롯이 가만히 박사들을 불러 별이 나타난 때를 자세히 묻고
    *베들레헴으로 보내며 이르되 가서 아기에 대하여 자세히 알아보고 찾거든 내게 고하여 나도 가서 그에게 경배하게 하라
    *박사들이 왕의 말을 듣고 갈새 동방에서 보던 그 별이 문득 앞서 인도하여 가다가 아기 있는 곳 위에 머물러 섰는지라
    *저희가 별을 보고 가장 크게 기뻐하고 기뻐하더라
    *집에 들어가 아기와 그 모친 마리아의 함께 있는 것을 보고 엎드려 아기께 경배하고 보배합을 열어 황금과 유향과 몰약을 예물로 드리니라

    ‘왕이 모든 대제사장과 백성의 서기관들을 모아 그리스도가 어디서 나겠느뇨 물으니
    *가로되 유대 베들레헴이오니 이는 선지자로 이렇게 기록된 바
    *또 유대 땅 베들레헴아 너는 유대 고을 중에 가장 작지 아니하도다 네게서 한 다스리는 자가 나와서 내 백성 이스라엘의 목자가 되리라 하였음이니이다’하였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을 다스릴 자는 선지자로 기록된바 그리스도를 말씀한다.

    그러면 ‘그리스도’가 무엇인가?

    하나님의 본체(빌립보서 2:5-8)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하셨다. 이것이 그리스도이시다.

    만물이 그에게 창조되되(골로새서 1:14-17)

    그 아들 안에서 우리가 구속 곧 죄 사함을 얻었도다 *그는 보이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의 형상이요 모든 창조물보다 먼저 나신 자니 *만물이 그에게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보좌들이나 주관들이나 정사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 *또한 그가 만물보다 먼저 계시고 만물이 그 안에 함께 섰느니라

    ‘그는 보이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의 형상이요 모든 창조물보다 먼저 나신 자니 *만물이 그에게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보좌들이나 주관들이나 정사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 하셨다. 이것이 그리스도이시다.

    2. 그의 근본은 상고에

    1.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요1:1-3)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하셨다. 즉 태초에 이스라엘을 다스릴 자 곧 그리스도가 계셨다는 말씀이다.

    ‘요1:1에서 태초’는 창세 전의 태초 곧 상고이다. 그렇기에 이스라엘을 다스릴 자 곧 그리스도의 근본은 상고이다.

    태초에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신 것이 창세 전의 태초 곧 상고라는 것을 확인시키는 말씀이 다음의 요17:5과 골1:14-17의 말씀이다.

    2. 아버지여 창세 전에 내가 아버지와 함께 가졌던 영화

    (요17:5) 아버지여 창세 전에 내가 아버지와 함께 가졌던 영화로써 지금도 아버지와 함께 나를 영화롭게 하옵소서

    ‘아버지여 창세 전에 내가 아버지와 함께 가졌던 영화로써’하셨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을 다스릴 자 곧 그리스도의 근본은 창세 전 곧 상고이다.

    3. 모든 창조물보다 먼저 나신 자

    (골1:14-17) 그 아들 안에서 우리가 구속 곧 죄 사함을 얻었도다 *그는 보이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의 형상이요 모든 창조물보다 먼저 나신 자니 *만물이 그에게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보좌들이나 주관들이나 정사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 *또한 그가 만물보다 먼저 계시고 만물이 그 안에 함께 섰느니라

    ‘그는 보이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의 형상이요 모든 창조물보다 먼저 나신 자니’ 하셨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을 다스릴 자 곧 그리스도의 근본은 창세 전 곧 상고이다.

    4.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

    (요일1:1-2)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에 관하여는 우리가 들은 바요 눈으로 본 바요 주목하고 우리 손으로 만진 바라 *이 생명이 나타내신 바 된지라 이 영원한 생명을 우리가 보았고 증거하여 너희에게 전하노니 이는 아버지와 함께 계시다가 우리에게 나타내신 바 된 자니라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이라 하셨다.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은 요17:5에서 ‘아버지여 창세 전에 내가 아버지와 함께 가졌던 영화로써(요17:5)’하셨으니 곧 이스라엘을 다스릴 자 곧 그리스도의 근본은 창세 전의 태초 곧 상고이다.

    3. (그의 근본은) 태초에니라

    1.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요1:1-3)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하셨다. 즉 이스라엘을 다스릴 자 곧 그리스도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게셨고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다는 말씀이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을 다스릴 자 곧 그리스도의 근본은 창세의 태초이다.

    2. 만물이 그에게 창조되되

    (골1:14-17) 그 아들 안에서 우리가 구속 곧 죄 사함을 얻었도다 *그는 보이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의 형상이요 모든 창조물보다 먼저 나신 자니 *만물이 그에게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보좌들이나 주관들이나 정사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 *또한 그가 만물보다 먼저 계시고 만물이 그 안에 함께 섰느니라

    ‘만물이 그에게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보좌들이나 주관들이나 정사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 하셨다. 그러므로 만물이 이스라엘을 다스릴 자 곧 그리스도에게 창조되었기에 이스라엘을 다스릴 자 곧 그리스도의 근본은 창세의 태초이다.

    3.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

    (창1:1)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하셨다.

    (요1:2-3)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그(이스라엘을 다스릴 자 곧 그리스도)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하셨다.

    (골1:16-17) 만물이 그에게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보좌들이나 주관들이나 정사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 *또한 그가 만물보다 먼저 계시고 만물이 그 안에 함께 섰느니라

    ‘만물이 그(이스라엘을 다스릴 자 곧 그리스도)에게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보좌들이나 주관들이나 정사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 *또한 그가 만물보다 먼저 계시고’ 하셨다.

    그러므로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창1:1)하실 때에 이스라엘을 다스릴 자 곧 그리스도가 함께 계셨고(요1:2-3), 만물이 이스라엘을 다스릴 자 곧 그리스도에게 창조(골1:16-17)되었다. 그렇기에 이스라엘을 다스릴 자 곧 그리스도의 근본은 창세의 태초이다.

    (문답)

    문1: ‘이스라엘을 다스릴 자’는 무엇인가?

    답: 그리스도(마2:1-11)이시며,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빌2:5-8)이시며, 만물이 그에게 창조(골1:14-17)되었다.

    문2: ‘그의 근본은 상고에’는 무엇인가?

    답: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요1:1-3)이며, 아버지여 창세 전에 내가 아버지와 함께 가졌던 영화(요17:5)이며, 모든 창조물보다 먼저 나신 자(골1:14-17)이며,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요일1:1-2)이다.

    그러므로 ‘그의 근본은 상고에’는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기 전에 곧 “창세 전의 태초”를 말씀한다.

    문3: ‘(그의 근본은) 태초에니라’는 무엇인가?

    답: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요1:1-3)이며, 만물이 그에게 창조되되(골1:14-17)이며,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창1:1)이다.

    그러므로 ‘(그의 근본은) 태초에니라’는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는 곧 “창세의 태초”를 말씀한다.





    본장에서 보여 주고 있는 하나님의 나라의 회복은 장차 오실 시온의 완전한 회복에 의해서만 가능하다는 사실을 보여 주고 있다.
    따라서 메시야의 오심은 곧 하나님의 나라의 임재요, 사단 왕국의 멸망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현재 속에 거하고 있는 하나님의 나라는 여전히 악과의 투쟁 속에 있다.
    그 이유는 현재 속에서는 여전히 사단의 왕국이 존재하고 있기 때문이다.
    성경에서 증거하기를 사단은 공중 권세 잡은 자로 소개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하나님 나라의 완전한 회복은 메시야의 재림을 통해서만이 가능하다 예언된 메시야의 초림은 사단의 왕국을 일차적으로 정복하심이요, 그의 완전한 궤멸은 장차 있을 종말의 심판을 통해서 완성될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신약의 메시야를 통하여 지상에 실현된 하나님의 나라는 최종적인 승리를 보장하고 있지만 지상에서는 끊임없이 악의 세력과 영적 전쟁을 펼쳐 나가야 한다.
    이는 지상의 메시야 왕국에 속한 성도들도 세상 속에서는 악한 세력과의 영적 전쟁에 임해야 함을 의미한다.
    이런 점에서 하나님 나라는 성도들에게 두 가지의 사상을 전달하고 있다.

    첫째는 완전한 소망이다.
    즉 성도들은 이미 그리스도에 의해 하나님 나라에 속한 자이므로 결코 악의 세력에 의해 멸망당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둘째는 그러면서도 성도들은 지상에서 악과의 전쟁을 통해 하나님 나라의 세력을 확장시켜야 할 의무를 지니고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성도들의 사명은 또한 두 가지 형태로 나타난다.
    하나는 그리스도의 복음을 세상에 널리 전함으로써 사람들로 하여금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안에 거하게 하는 것이며, 또 하나는 사단의 세력이 창조 세계에 만연시켜 놓은 불의하고 비도덕적인 현상들을 타파함으로써 세계를 공의와 사랑의 세계로 만드는 것이다.
    이것이 구원에 있어서 아직도 이루어지지 않은 긴장과 이미 얻은 구원 사이에서 살아가는 성도들의 삶을 관장하는 신앙의 원리인 것이다.  

    성도들 중에 어떤 사람들은 예수를 믿음으로 이미 구원을 얻었기 때문에 오직 하나님이 주시는 구원의 감격만을 누리면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이들은 이 세상에서의 삶에는 관심이 없고 오직 하나님께서 세상을 심판하시는 날 성도들에게 주실 구원의 기쁨과 영원한 생명의 축복만을 고대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잘못된 태도입니다.
    왜냐하면 성도들은 이미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을 보장받았지만 이 땅에서 여전히 삶을 살아가고 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가 이 땅에서 하나님의 일을 위하여 살아가기를 원하신다.
    성도들은 우리의 삶이 끝나는 순간까지 결코 긴장을 놓지 말고 복음의 전파를 위해 힘써야 할 것이다.  

     








    심리학 용어중에 '워비곤 호수 효과'라는게 있다.

    1970년대 미국의 작가 게리슨 케일러는 라디오쇼 '프레리 홈 컴패니언(A Prairie Home Companion)'을 진행했다. 
    그것은 '워비곤 호수'라는 가상의 마을을 무대로 한 프로그램이었다.
    이 마을은 '여자는 모두 강인하고, 남자는 모두 잘 생겼으며, 아이들은 모두 평균 이상인' 허구의 세계다.
    그런 세계를 가상하고 허구로 만든 마을인데 현실의 사람들도 이런 착각에 빠져 산다.
    "우리애가 노력을 않해서 그렇지, 머리는 좋아요~"
    "착한 우리애가 나쁜 친구를 만나 이렇게 된거죠."
    "저는 제대로 갔는데 저 사람이 운전을 험하게 한 겁니다."
    자신의 능력과 재능을 과대평가하거나 약점에는 그럴듯한 해석을 붙여 실제보다 나아 보이게 만들기 일쑤이다.
    이처럼 자신이 평균보다 더 낫다고 착각하는 경향을 심리학에서는 ‘워비곤 호수 효과’라고 한다.
    즉, 워비곤 호수 효과(Lake Wobegon Effect)란 자신이 평균보다 더 낫다고 믿는 일반적인 오류를 말한다.


    워비곤 호수 효과(Lake Wobegon Effect)

    워비곤 호수 효과(Lake Wobegon Effect)는 자신이 평균보다 더 낫다고 믿는 일반적인 오류를 말한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이 다른 사람에 비해 더 창조적이고 매력적이며 성실하고 공정하다고 믿는다. 
    사람들이 자기 집단에서 평균 이상이라면 누군가 평균이나 평균 이하가 있어야 한다. 
    모든 사람들이 평균이상이라고 생각하면 통계적으로 불가능한 일이다. 
    그래서 이러한 믿음은 논리적 오류이며 비현실적이다.
    이 말은 게리슨 케일러가 지은 이야기로 가상의 마을 '워비곤 호수'에는 모두 평균 이상의 아이들이 산다는 것에서 착안하여 'Lake Wobegon Effect'라고 했다.

    풍자 작가인 개리슨 케일러(Garrison Keillor)는 그의 라디오 쇼인 'Prairie Home Companion'의 배경으로 워비곤 호수 마을을 설정했다. 자신의 쇼를 청취하면 워비곤 호수 마을처럼 ‘여자들은 힘이 세고, 남자들은 잘생겼으며 아이들은 평균 이상의 능력’을 가지고 있다고 유혹했다. 청취자들은 인간이기에 워비곤 호수 효과로 자신의 프로그램에 빠져들 수밖에 없다는 것을  케일러는 확실히 알고 있었다.  그 이후 웨스트버지니아 주에 살던 소아과 의사이자 교육학자인 John Cannell 박사는 워비곤 호수 효과로 알려진 연구 결과를 발표했다. 보고서에서 그는 미국의 50개 주가 발표한 각 주의 학생들의 시험성적 평균 하나 하나 모두가 미국 전체의 평균보다 높은 것은 통계적으로 불가능한 것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그러나 모든 주 정부가 하나같이 자기네 주 학생들의 평균 성적이 전국 평균보다 높게 나왔다고 주장했다. 그가 처음 의심을 하게 된 계기는 그가 살고 있는 버지니아 주가 발표한 CTBS(Comprehensive Test of Basic Skills)시험 결과 때문이었다. 웨스트버지니아 주는 대학을 나오지 않은 성인 비율이 전국에서 가장 높은 주로서 미국 대학 입학시험(ACT: the American College Testing)의 성적도 하위권이었고 1인당 소득 수준도 두 번째 낮은 주였다. 그런데 웨스트버지니아 주가 발표한 바에 따르면 전 학년의 시험 성적 평균이 전국 평균보다 높았다는 것이다.

    사회학자 데이비드 마이어스가 쓴 ‘사회심리학’도 워비곤 호수 효과의 가설을 입증하는 연구 사례들을 소개한다.
    기업 임원들 중 90%가 자신의 성과를 평균 이상이라고 자평하는 것이 좋은 예다.

    해리 베키스의 저서 ‘보이지 않는 것을 팔아라’에서도 80%의 직장인이 스스로를 평균 이상이라고 여긴다.
    부모들이 흔히 ‘우리 아이도 혹시 수재가 아닐까’하고 착각하는 것도 워비곤 호수 효과에 속한다.
    국부론의 저자 아담 스미스는 “사람들은 대개 자신이 이익을 볼 가능성은 과대평가하고, 손해를 볼 가능성은 과소평가한다”고 설명했다. 자신의 능력과 행운을 지나치게 부풀리는 경향이 있다는 거다.
    그가 200년 전에 갈파한 인간 본성은 오늘날에도 별로 달라진 게 없다.
    특히 잘못된 판단을 내릴 때 자기 자신을 더욱 과신한다. 실패 가능성은 가급적 낮춰 보고 성공 가능성은 가급적 높여 보니 결과는 기대에 못 미치기 마련이라는 얘기다.


    산(2022) 하르(har) הַר   

    1. 복수 הָהָר
    2. 시내산 출애굽기 3:1
    3. 시온산
    발음 / 하르[ har ]
    관련 성경 / 산(창 7:20, 출 19:2, 시 2:6), 산지(민 13:29, 신 1:7, 수 15:48), 산골(삼상 23:14), 산악(시 98:8), 산중(대하 27:4).
    구약 성경 / 547회 사용



         MA MAQuigley Quigley      FC BmbA Bm    -- D 1GA 2D7 A    G -   G A   Bm  Em       rght Scripture Song Intergrity Hosarnal Music Adm CapyCare Lised Permission


    08-01-2023(화)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여호와의 산(미가 4:2)

    곧 많은 이방이 가며 이르기를 오라 우리가 여호와의 산에 올라가서 야곱의 하나님의 전에 이르자 그가 그 도로 우리에게 가르치실 것이라 우리가 그 로 행하리라 하리니 이는 율법이 시온에서부터 나올 것이요 여호와의 말씀이 예루살렘에서부터 나올 것임이라.
    Many nations will come and say, "Come, let us go up to the mountain of the LORD, to the house of the God of Jacob. He will teach us his ways, so that we may walk in his paths." The law will go out from Zion, the word of the LORD from Jerusalem.

    여호와의 산(the mountain of the LORD)은 시온(Zion)을 말합니다.
    여호와의 산(할 아도나이. הַר־יְהוָה)은 여호와의 전이 있는 곳 즉 하나님의 임재가 나타는 곳입니다.

    여호와의 산에서 "여호와"는 "야훼" 하나님을 말합니다.
    야곱의 "하나님의 전"에서 "하나님"은 "엘로힘" 하나님을 말합니다.
    선지자 미가는 하나님의 이름을 '야훼'와 '엘로힘'을 함께 사용합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두 가지로 함께 사용하는 것은 하나님의 두 가지 속성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첫째는 야훼 하나님은 역사 속에 이미 들어와 계신 하나님을 말합니다.

    둘째는 엘로힘 하나님은 창조주로서 인간의 생각을 초월하는 하나님으로 구원을 위하여 인간을 돕기 위하여 이 세상에 오신 하나님을 말합니다.

    또한 선지자 미가는 "말일에 이르러는" 이라고 하며 이스라엘의 회복을 알리는 종말론적 신앙을 소개합니다.
    "시온"이란 "예루살렘"을 의미하지만 궁극적으로는 "메시야"를 나타내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원래 시온은 예루살렘 북쪽에 있는 언덕의 이름으로 그 곳에는 예루살렘 성전이 있었습니다.
    따라서 시온은 이스라엘과 함께 거하시는 하나님의 임재를 나타냅니다.

    그러므로 시온의 회복이란 이방 나라로 인하여 핍박을 받는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임재를 뜻하며, 하나님의 임재는 곧 구원을 의미합니다.

    이와 같은 관점에서 시온은 인간의 범죄로 말미암아 파괴된 세상을 회복할 메시야의 도래를 말합니다.
    신약에 나타난 메시야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은 회복을 의미하며 불완전한 세계에 대한 완전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가 오심은 말씀의 회복이며 하나님의 통치권의 완성을 의미합니다.
    시온이 갖는 궁극적 의미는 예수 그리스도를 의미하면서 동시에 신약의 교회를 의미하기도 합니다.

    신약의 시온 즉 교회는 하나님의 축복의 상징이지만 이것은 종말에 이루어질 완전한 하나님 나라를 향한 지상적 표본일 뿐이며, 궁극적으로는 그리스도의 재림을 통하여 완전한 시온의 완성을 이루어 나가실 것이다.  

    사랑하는 믿음의 형제들이여
    하나님의 임재가 이 땅위에 풍성하게 거할 수 있도록 오늘도 주님과 동행하는 일에 성공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많은 이방이 가며 이르기를...이는 율법이 시온에서부터 나올 것이요 여호와의 말씀이 예루살렘에서부터 나올 것임이라

    - '시온'은 여호와의 전이 소재한 여호와의 산이다.
    그러므로 산 자체에 강조점이 있다기보다 여호와께서 임재하신다는 사실에 초점이 있다.
    이런 관점에서 시온은 곧 여호와의 임재와 현존을 뜻한다.
    열국들이 시온에 매료되어 몰려드는 것은 시온 자체에 매료시킬 만한 요소나 자격이 있어서가 아니다.
    그것은 여호와께서 시온에 임재하실 뿐만 아니라 그곳에서 여호와의 말씀이 나오기 때문이다.

    '말일에' 열국들은 시온에서 흘러나오는 여호와의 말씀을 간절히 사모하게 되며 그 말씀을 받기 위해서 시온에 현존하시는 여호와 앞에 몰려들게 된다.
    열국은 그 때에 여호와의 앞에 몰려들게 된다.
    열국은 그때에 여호와의 말씀으로 인해서 완전히 변화될 것이다.
    그들은 오직 여호와의 말씀을 따라 살게 될 것이며 죄와 사망의 길을 걷는 것이 아니라 여호와의 도를 따른 여호와의 길을 걷게 될 것이다(Delitzsch).

    샬롬이 의미하는 평화

    평화라는 말에는 두가지가 있다. 팍스(pax)와 샬롬(shalom)이 그것이다.
    팍스는 로마인들이 추구하는 평화였는데 물질적인 만족감이나 법, 힘으로 세상을 평정하는 것을 의미했다. 로마는 이런 평화를 실현하기 위해 온 힘을 다해 넓은 땅을 정복했고 지배했다. 로마는 하루도 피를 흘리지 않는 날이 없었고 결국 그 힘과 물질에 의해 망하고 말았다.
    이에 반해 샬롬이 의미하는 평화는 로마 식민백성인 히브리 민족의 것으로 내적이며 정신적인 것이다.히브리인들은 건강한 자나 성공한 자는 물론 병든 자나 실패한 자들과도 ‘샬롬’이라는 인사를 기꺼이 주고받았다.
    오늘날 믿는 자들이 구해야 할 평화는 팍스가 아니라 샬롬이다. 스피노자는 “평화란 싸움이 없는 것이 아니다. 영혼에서 솟는 기쁨을 말하는 것”이라고 했다. 새해에는 샬롬의 평화가 우리 삶속에 넘치기를 기원한다.

    마음의 평화(平和)
    - 평평할 평(平) = 두 개의 심장이 나란히 있는 것, 화할 화(和) = 입 구(口) + 벼 화(禾)
    평(平) = 한 일(一) + 열 십(十) + 점 주(
    )

    일본의 ‘하루야마 시게오’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 사람은 글을 쓰는 작가인데, 건강에 대한 관심이 많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30년 동안 책을 쓰면서 건강의 6가지 조건을 제시했습니다.
    사람이 건강하려면 이 여섯 가지를 지키라는 것입니다.
    첫째는 피곤하지 않게 하라!
    둘째는 적절한 잠을 자라!
    셋째는 식욕을 절제하라!
    넷째는 화를 내지 말라!
    다섯째는 두뇌를 계속적으로 사용하라!
    여섯째는 적당한 운동을 하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30년이 지난 후에 이 사람은 “뇌내혁명((腦內革命)“이라는 책을 쓰면서 정말 인간에게서 필요한 것 여섯 가지에 한 가지를 더 첨가했는데,
    그것은 ‘마음의 평안’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이 마음의 평화가 건강에서 차지하는 비중을 55%로 보았습니다.
    다른 모든 것보다 가장 중요한 것은 “마음의 평화”라는 말입니다.



    뇌내 腦內 혁명
    하루야마 시게오

    머리말

    프롤로그

    제1장 의학으로 증명하는 플러스 발상의 효과

    제2장 근육이 붙으면 병에 걸리지 않는다

    제3장 항상 뇌를 젊게 보존하는 식생활

    제4장 뇌가 젊으면 125살까지 살 수 있다

    머리말

      현재 우리 의사들이 의료 활동을 통해서 실제로 고칠 수 있는 병은 전체의 약 20%에 지나지 않으며, 나머지  80%는 의료비만 물쓰듯 낭비하고 있는 실정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이러한 상황이 계속된다면 의료비는  머지않아 200조원을 상회하게  될 것이며,  2010년에는 700조원에 달할  것이라 예상된다. 그 중 80%가 잘못 쓰인다면  이 얼마나 무의미한 낭비란 말인가.

    의료 행위란 도대체 무엇인가? 나는 어려서부터 동양의학과 접해왔으며 성장해서는 서양의학을 공부했다. 몇 년 전만 하더라도 동양의학과 서양의학은  전혀 다른 분야이며 서로 상반되는 존재로 인식되어 왔으나, 뇌 생리학이나 분자생리학의 발달에  힘입어 이제 현대의학의 과학적인 방식으로 동양의학을 설명할 수 있게 되었다.

    동양의학에서 널리 사용하고 있는 침술이 뇌에서 마약 모르핀과 비슷한 형태의 호르몬을 분비하게 만드는 의술의  하나라는 사실이 현대 과학에 의해 밝혀진 것이 좋은 사례이다 (뇌에서 분비하는 이 호르몬이야말로 이 책의 주제라 할 수 있는데, 나는 이 호르몬을 ‘뇌내 모르핀’이라 명명하겠다). 뿐만 아니라 분자 생리학 분야에서는 기공이나 명상과 같은 동양고유의 건강법이 호르몬 분비를 원활하게 만들기 위한 효과적인 방법이라는  사실을 증명하여 현대의학의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

    이처럼 동양의학과 서양의학이 결합하여 의술의 새로운 지평을 열자, 지금까지 병을 치료하는 데  초점을 맞추던 의사들 역시 환자들이 병에  걸리기 전, 즉 ‘미병’의 단계에서 병을 미연에 방지하여 건강과 장수를 유지하게 하는데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정말  바람직한 변화라고 할 수  있다.

    나 또한 병원을 경영하고 있는데, 내가 설정한 궁극의  목표 역시 ‘병을 미리 예방하는 의술 행위’이다. 병을 미연에 방지하면 의료비도 상당히 줄어들  것이며, 병원에서 산더미처럼 약을 받아오는 일도 사라질 것이다. 동양의학에 ‘의사는 자신을 찾아온 환자에게 두 손 모아 사죄하라’는 말이 있다. 건강한 사람을 병들게 방치한 것 자체가 의사의 책임이라 여겼기 때문이다. 이런 정신에 비추어 볼 때, 의사가 거만한 자세로 환자를 진단하는 태도는  현재의 의료가 뭔가 크게 잘못되어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서양의학이 발달함에 따라 새로운 약이나 치료법이  잇따라 개발되고 있으나, 그로 인해 파생되는 부작용 역시 커다란 문제로  떠오르고 있다. 본래 인간은 자신의 체내에 모든 질환에 대한 방어기능을 갖추고  있으며, 이 기능을 충분히 활용하면 암이나  심장병 또는 뇌혈관 장해  등의 질병은 상당히 감소시킬  수 있다.

    하지만 실제로 많은 사람이 이 기능을 충분히  활용하지 못하고 있다. 그 원인은 대체로 평소의 라이프 스타일이나 식생활이 잘못되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바른 식생활을 하면서 호르몬이나 면역체를 효과적으로 조절한다면 우리 인간은 의약품 등의 인공적 물질에 의존하지 않아도 얼마든지  건강을 유지할 수 있다.

    인간의 건강에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하는 물질은  뇌에서 분비하는 호르몬이다. 이 호르몬을 잘 활용하면 우리는  건강하게 살 수 있다. 나는 바로  이것을 이 책에서 설명하고자 한다. 동양의학에  뿌리를 두고 서양의학의 과학적인 방식에 근거하여 인간의 건강과 장수, 행복한 삶, 나아가 인류의 존재 목적까지 새로운 시각에서 규명하고자 한다. 다시 말해 의료를 사상 혁명으로 유도해 가려는 목적을 갖는 것이다.

    고령화 추세가 날로 심화되어 가고 스트레스가 곳곳에 널려 있는 현대 사회에서 인류가 건강하고 바람직하게 삶을 살아가는 데 이 책이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길 바란다.덧붙여  이 책을 쓰는 데 도움을 주신  많은 분들에게 감사의 뜻을 전한다. 특히 나의 삶의 태도나 인생관 교정에 큰 도움을 준 후나이 종합 연구소의 후나이 회장을 비롯하여 출판사 임직원 일동에게도 감사의 뜻을 전하고 싶다.

    저자 씀.

    프롤로그

    동양의학과 서양의학의 접점에서 치료한다

    병에 걸리지 않는 것이 진정한 의학

    내가 의사가 된 동기는 일조의 아쉬움 때문이었다. 나는 대대로 동양의학을 가업으로 하는 가정에서 태어나, 네 살 때부터 할아버지에게 침구, 지압술을 배웠다.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나에게 특별한 관심을 기울인 결과인지 모르겠지만, 어쨌든 가문의 비법을 전수받아 여덟 살 때 침술사 자격을 획득하게 되었다. 그 후 나는 할아버지가 환자를  치료할 때 보조 역할을 수행하게 되었는데,  그 경험은 나로 하여금 동양의학이 인간의 병을 치료하는 데 아주 효과적이라는 사실을 절감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나이를 먹으면서 서양의학을 많이 접하게 되었고, 서양의학이 아주 논리적이고 이해하기 쉽다는 사실도 깨닫게 되었다. 서양의학은 기본적으로 ‘병리학’이므로 병의 원인과 치료 방법은 물론 치료 과정까지 일목요연하게 설명할 수 있다. 게다가 X-레이를 찍거나 기타 검사 방식을 통해 데이터를 뽑아서 정확한 수치로 설명할 수 있기 때문에 동양의학과 달리 대단한 설득력을 갖는다.

    반면에 동양의학은 허와 실, 음과 양이라는 말로 설명하는 탓에 왠지 모르게 고리타분하고  진부한 느낌을 준다.  게다가 뭔가 철학적인  냄새까지 풍겨 일반인은 더욱  이해하기 힘들다. 하지만 내  경험에 비추어 볼 때  성인 병이나 피로성 어깨결림,  요통 등은 동양의학이 단연 우세한 효능을 발휘했다. 그러나 이런 사실을 과학적으로 설명할 수 없었다. 나로선 정말 아쉽고  안타까운 일이었다. 동양의학이 가지고 있는 우수한 효능을  과학적으로 명확하게 설명하는 방법은 없을까? 이 문제가 나에게 늘 무거운 과제처럼 남아  있었다. 그래서 결국 동경대 의학과의 문을 두드리게 되었고, 그 후 서양의학이라는 과학적인 표현 방식으로 동양의학을 설명해내는  방법에 관해 오랫동안 모색하게  되었다.

    서양의학을 공부하면 할수록  나는 동양의학의 효능에 관해  한층 더 자신감을 가지게 되었다. 그래서 의학부를  졸업하자마자 병원을 만들어서 내가  생각하는 의술을 실천에 옮기고자 했다.  그러나 너무  조급하게 서두르면 안  되니까 단념하라는 선배들의 강력한 반대에  부딪쳐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개업의로서의 경험이나 병원 경영의 노하우가  전혀 없었다는 것이 커다란 장애 요인이었다.  좀더 경험을 쌓아 훌륭한 의사로 인정받은 후에 해도 늦지 않다는 선배의 충고에 따라 나는 몇몇 병원에서 소화기 계통의  외과의로 수업을 쌓은 후에 드디어 내 병원을 개업하게 되었다. 그때가 8년전으로 ‘전원도시 후생병원’이 바로 그 병원이다. 현재 이 병원은  입원실 260개실에 내과, 외과, 소아과를 갖춘 종합병원이다.

    동양의학에 ‘미병’이라는 말이 있다. 이것은 병이 나기 일보직전의 상태를 말하는데, 이러한 상태에 있는 사람을 ‘병에 걸리지 않게 하는 것’이 동양의학의 목표이며 동시에 우리 병원의  목표이기도 하다. 그러나 오늘날의 병원은 병에  걸리지 않으면 진료조차 해주지 않는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병은 미연의 방지하는 것인데도 거의 모든 병원이 이 사실을 철저히  무시하고 있는 것이다.

    결혼을 앞둔 28세의 남성이 우리  병원에 입원한 적이 있다. 103킬로그램의 비만  체질인 이 남성은 약혼녀에게  ‘너무 뚱뚱해서 싫다’라는 말을  듣고 그저 단순히 다이어트를 목적으로 입원하게 되었다. 환자도 아닌 사람이  입원하는 것은 사치라고 생각할지 모르겠다. 하지만 ‘병에 걸리지 않게 하는  것’을 궁극의 목표로 세운 나는 그 요청을 흔쾌히 받아들였다. 그는 입원 후, 40일에 걸친 치료를 통해 약 15킬로그램을 빼고 80킬로그램  정도의 체중으로 퇴원할 수 있었다.

    살이  빠졌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본인은 물론 약혼자도 크게 기뻐했다.  물론 체중이 줄어들었다는 건 아주 만족할  일이다. 그러나 본인에게 얘기하지  않았지만, 그는 젊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비만 상태가  지나쳐 대단히 위험한 발병 상태에 놓여  있었다. 간 기능이 나쁘고 콜레스테롤  수치가 높았다. 중성 지방도 과대한  상태였다. 간염,만성췌장염,고 콜레스테롤혈중,고 지혈증 등 그럴싸한 병명을 얼마든지 붙일 수 있을 정도였다.

    그런데 이처럼  위험한 상태가 다이어트 입원 중에 모두  정상으로 회복된 것이다. 본인은 자신이  그렇게 위험한 상태에 있었다는 사실도, 완전히 치료받아 정상으로 돌아왔다는 사실도 모르는 채 단지 살이 빠졌다는 결과만 만족스러워하며 퇴원했다. 이것은 내가 이상으로 삼는 의료의 한 단면이다. ‘미병’ 상태에 있는 사람을 병에 걸리지  않는 정상인 상태로 되돌려 퇴원시키는 것이 내가 의사로서 느끼는 가장 큰 보람이기 때문이다.

    뇌에서 모르핀을 분비시키자

      도대체 우리 병원에서 이 남자를 어떻게 치료했길래 이러한 결과를 얻었는지 몹시 궁금하게 여길  사람이 많을 것이다. 결론적으로 말한다면 나는  이 사람에게 ‘식사’와 ‘운동’ 그리고 ‘명상’이라는 세 가지 치료 방식을 제시했다. 식사는 고단백·저칼로리에 초점을 맞추고, 운동은 근육을 붙이고  지방을 없애는 데 주력했으며, 명상은  플러스 발상을 생활화하는 데  중점을 두었다. 플러스 발상이란 모든 것을 긍정적·발전적으로  생각하는 것을 말하는데, 처음부터  본격적인 명상에 들어가는 것은 무리이므로 우선 명상실 에 차분히 앉아서 플러스 발상을 하도록 만들면서 뇌파를 측정한 것이다. 여기서  덧붙여 동양의학의 지압법을 응용한 메디컬 마사지를  적절히 사용했다.

    나는 위와 같은 방법만으로도  성인병 발병 위기에 있는 사람을 건강한 상태로 되돌릴 수 있다고 확신한다. 불면과 환청, 우울증으로 정신병에 걸리기 일보직전에 있던 58세의 한 여성도 거의 같은 치료법으로 건강을 되찾을  수 있었다. 간 기능 장해가 있던 46세의  여성은 비만체질이 아닌데도 고혈압과  지방간 증세를 보이고 있었다. 근육질이 없고  지방만 많은 야윈 체형이었으나,  이 여성 역시 4주간의 통원 치료를  통해 지방간과 총 콜레스테롤 수치를 정상  상태로 되돌릴 수 있었다. 당뇨병과 고혈압  증상으로 입원한 63세 남성은  의식까지 몽롱한 상태였다. 처음에는 하는 수  없이 인슐린을 사용했으나, 곧 약으로  바꾸었으며 이제 둘 다 사용하지 않아도  괜찮을 정도로 회복했다. 이 환자 역시 앞에서 말한 똑같은 방법으로 치료했다.

    위에 열거한 여러 가지 치료 사례에는 공통적인  비밀 하나가 있다. 이 책의 주제이기도 한 ‘뇌내 모르핀’이 바로  그것이다. 인간의 뇌는 모르핀과 비슷한 물질을 분비하는데, 이것은 사람의 기분을  좋게 만들 뿐만 아니라  노화를 방지하고 자연 치유력을 높여 주는 아주  뛰어난 약리 효과를 갖고 있다. 나는 이것을 ‘뇌내 모르핀’이라 부르고 있는데, 이 호르몬을 계속 분비시키면 그  효과가 뇌뿐만 아니라 몸 전체에 확산되어 신체의 여러 기관을 건강하게 만든다. 즉 우리 인간은 그 어떤 약보다 우수한 제약 공장을 몸 속에 지니고 있으며, 나는 바로 이 제약 공장을 철저하게 이용하려 한 것이다.

    뇌내 모르핀의 존재는 이전부터 알려져 왔으나, 진통 효과 이외의  별다른 효과가 없다고 생각되어 오랫동안 그다지 관심을 끌지 못했다. 그러나 최근에 와서 이에 관한 연구를 활발히 진행하여  굉장한 효력이 감추어져 있다는 사실을 밝히게 되었다. 인간은 화를 내거나  강한 스트레스를 받으면 뇌에서 노르아드레날린(noradrenalin/강력한 혈압 상승제 역할을 하는 신경전달 물질)이라는 물질이 분비된다. 이 물질은 호르몬의 일종으로 대단히 극렬한 독성을 갖고 있다. 자연계에 있는 독으로는  뱀 다음으로 그 독성이 강하다고 한다. 물론 뇌에서 분비하는 호르몬은 극히 소량에 지나지 않지만, 항상 화를 내거나 스트레스를 자주  받으면 이 호르몬의 독성  때문에 노화가 촉진되어 오래 살수 없다.

    우리 병원을 찾아온 환자는 물론, 인간이 질병에 걸리는 원인 가운데 하나가 바로 뇌에서 분비하는 노르아드레날린 이라고 말할 수 있을 만큼 이 물질은 우리  인간의 건강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고 있다. 

    한편, 뇌는 β-엔돌핀(β-endorphin)이라는 호르몬도 분비한다. 이  호르몬은 뇌에서 분비하는 호르몬 가운데 가장 긍정적인 효력을 발휘하는 물질인데, 현대 과학이 밝힌 바에 의하면 노르아드레날린과 β-엔돌핀은 아주 기묘한 상관관계를 가지고 있다 한다. 다른 사람에게 어떤 말을 듣고 ‘기분이 나쁘다’고 생각하면 뇌는 독성이 있는 노르아드레날린을 분비한다. 하지만 ‘기분이 좋다’고 생각하면 β-엔돌핀을 분비한다.

    뇌에서 노르아드레날린을 분비하는 것이 좋은지 아니면 β-엔돌핀을 분비하는 것이 좋은지는 새삼 거론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아무리 불쾌한 일을 겪더라도 사태를 긍정적이고 발전적으로 받아들인다면 뇌는 신체에 이로운 호르몬을 분비한다. 그러나 반대로  아무리 행복한 환경에 있는 사람이라 하더라도  화를 내거나 누군가를 증오하는 불쾌한 감정을 가지면 몸에 해로운 물질을 분비한다. 따라서 모든 것을 플러스 발상으로 받아들여 늘 긍정적으로 살아가는 사람이라면 항상 젊음과 건강을 유지하면서 질병 없이 편안하게 일생을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담배도 ‘건강에  나쁜데……’ 라는 부정적인 생각으로  피우면 좋지 않지만,담배를 즐기는 사람이 작업을 마치고 휴식을 취하며 ‘아 – 좋다’라는 기분으로 피우면 뇌내 모르핀이 분비된다. 인간은 대개 맛있는 음식을 먹거나 성관계를 할 때 쾌감을 느낀다. 어떤  일이든 마음가짐 하나에 따라 몸이 좋아지기도  하고 나빠지기도 한다는 사실이 의학적으로 증명된 것이다.

    뇌내 모르핀은 성인병도 막아준다

      뇌내 모르핀은 뛰어난 효능을 많이 가지고 있다. 특히, 앞에서 언급한 β-엔돌핀은 면역력을 높여 효과가 뛰어나다. 세균에  의해 감염된 질병이나 바이러스에 의한 질병은 아무리 마음가짐으로 노력한다 해도 소용없으리라 생각할지 모르나, 뇌내 모르핀은 면역 세포를 강하게 만들기 때문에 심지어 에이즈와 같은 병에도 강한 저항력을 발휘하게 할 수 있다. 실제로 에이즈라는 병은 감염자와 접촉해도 어떤 사람은  감염되고 어떤 사람은 감염되지 않는다. 또한  감염 초기에 의사를 찾아가서 호들갑을 떨어도  흐지부지한 치료를 받아 결국 죽음에 이르는 사람이 있는 반면,  각오를 단단히 굳히고 명상이나 기공에 열중하여  오랜 세월이 지나도록  발병되지 않고 감염 초기 상태를 유지 하는 경우도  있다. 후자는 뇌내 모르핀에 의한 면역력 향상의 결과라고 할  수 있다. 에이즈라는 병은 누구나 걸리는 병이라고 할 수 없으나, 혈관이나  심장 계열의 질환은 성인병이기 때문에 거의 모든 사람이 질병에 걸릴 위험을  안고 있다. 하지만 뇌에서 분비하는 뇌내 모르핀은 이 같은 성인병에도 경이적인 플러스  효과를 발휘해 준다.

    불행하게도 우리는 스트레스가  곳곳에 널려 있는 사회에 살고 있다.  강한 스트레스를 받게 되면  뇌는 앞에서 말한  아드레날린(adrenalin/ 척추동물의 부신 피질에서 분비되는 호르몬. 교감신경 흥분제.혈관 수축제.혈압 상승제 따위로 작용) 계열의 독성 호르몬을 분비한다. 이 호르몬은 적정량이  분비되면 신체에 긴장과 활기를 주어 긍정적으로 작용하지만  과잉 분비되면 혈관을 수축시킨다.  혈관이 수축되면 혈압이 오르고 혈액 흐름에 장해가 일어난다.  뇌에 있는 굵은 혈관이 막히면 뇌경색(cerebralinfarct/뇌의 동맥이나 정맥의 폐색으로 인해  허혈성 괴사가 일어나는 현상)을, 가는 혈관이 막히면 기억 상실 및 치매  현상을 일으키게 된다. 하지만 뇌내 모르핀은 수축된  혈관을 원상태로 되돌리고 혈액의 흐름을 순조롭게 도와주는 작용을  한다. 성인병 발병은 대부분  혈관이 막히는 데서 시작하는데, 뇌내 모르핀은 혈액  순환을 원활하게 하는 작용을  하므로 결국 성인병을 예방 혹은 치유하는 효능을 발휘하는 것이다.

    또한 최근  화제가 되고 있는 악성 산소 중에 활성 산소라는 것이 있다. 활성 산소  가운데는 우리가 호흡한 산소가 그렇게 바뀌는 경우도 있고, 자연계에 그대로 산재해 있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이것은 체내에 들어가서 노화 물질을 만들거나 유전자를 해치기 때문에 건강을 해치기 때문에 건강을 해치는  최대의 적이라 할 수 있다. 또한  활성 산소는 달리기를 하는 등 인체가 에너지를 사용할 때  반드시 분비되어 나오기 때문에, 인체에는  산소독(활성   산소)을  중화시키는  기능이  갖추어져   있다.  SOD  효소(supe-roxide dismutase/ 유해 산소 중화 과정에 관여하는 효소)가 바로 활성 산소 중화에 관여하는 물질이며 이것은 인체 내에서  합성된다. 따라서 활성 산소가 발생한다 해도 그것을  중화시킬 만한 SOD가 만들어지면 전혀  문제될 것이 없다. 그러나 뇌 운동이  저하되면 SOD를 생성하는 능력도 저하된다 따라서  해로운 활성 산소가 점차 확산되어 노화와 성인병을 일으키는 원인으로 작용하게 되는 것이다.

    또한 노르아드레날린과 같은 아드레날린  계열의 호르몬의 분비는 활성 산소의 발생을 촉진시키므로  가급적이면 이런 물질이 분비되지 않게 노력하는 것이  뇌를 젊게 유지하는 관건이  된다. 뇌세포가 젊으면 활성  산소의 해악 역시 줄일 수 있다는 사실이 최근 연구에  의해 밝혀졌다. 그런데 뇌세포의 젊음을 유지시키는 물질이 바로 뇌내 모르핀이므로 늘 이 뇌내 모르핀을 분비할 수 생활 방식, 즉 플러스 발상을 한다면 우리  인간은 노화와 질병이라는 인류 최대의 적을 물리칠 수 있게 될 것이다. 

    덧붙여 기억력을 향상시키거나 인간 관계를 원만하게 유지하는 것 그리고 미래에  대한 비전이나 인내력 및 창조적 사고 역시 뇌내 모르핀과 깊은  연관이 있다고 할 수 있다. 자신의  인생을 긍정적인 방향으로 이끌어 갈 것인가 부정적인  방향으로 이끌어 갈 것인가는 그 사람이 분비하는 뇌내 모르핀의 양에 의해 결정된다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따라서 나는 자신의 체험에 근거하여 뇌내  모르핀이 가지고 있는 여러 기지 효능과 뇌내 모르핀을 효율적으로 분비시키는 방법 등을 이  책에서 정리하고자 한다.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모르핀은 일종의 마약으로 독성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뇌내 모르핀은 독성이 없다. 반면에 효력은 마약 모르핀의 5-6배나 된다. 개중에는 법을 어기고 폐인이 될 위험을 무릅쓰면서까지 마약 모르핀에 손을 대는 사람이 있는데, 그 이유는 기분이 더할 나위 없이 좋아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조물주는 그런 위험을 감수하지 않아도 충분한 쾌락을  즐길 수 있도록 우리 인간에게 뇌내 모르핀이라는 선물을 주셨다. 조물주는  이 선물을 통해 우리 인간에게 ‘인생을 유쾌하게 살아라. 유쾌하게  살면 병에 걸리지 않으며,  젊고 건강하게 오래 살 수 있다.’는 메시지를 던져 준 것이다. 한마디로  말해서 조물주가 내려 주신 최대의 선물이라 할  수 있다. 그럼 이제부터  조물주가 내려 주신 최대의  선물에 관해 구체적으로 설명해 보겠다.

    제1장 의학으로 증명하는 플러스 발상의 효과

    마이너스 발상은 왜 병이 되는가

      최근 플러스 발상법이나 긍정적  발상 등의 개념이 많이 논의되고 있다.  ‘매사를 긍정적으로 사고하고 수용하면 스트레스가  쌓이지 않는다’. ‘무엇이든 적극적으로 받아들이면  결과도 좋다’는 정도의  의미로 사회 일반에서 이해되고 있는 것 같다. 이 같은 분위기는 의학계에도 널리 퍼지고 있다. 육체와 마음은 늘 대화를 나누고 있으며, ‘마음으로 생각하는 것’은  추상적인 관념 상태에서 그치지 않고 반드시 구체적인  물질로 변화되어 ‘육체에 작용한다’는  사실도 밝혀냈다. 남에게 어떤  말을 듣고 ‘기분이 나쁘다’고  생각하면 체내에서는 노화를 촉진하고 암을 유발시키는 물질이 생성된다. 반대로  ‘고맙다’고 생각하면 젊음을 유지하고 몸을 건강하게  만드는 물질이  만들어진다.

    인간의  체내에서 이러한  메커니즘(mechanism)이 작용한다는 사실은 의학적으로 이미 충분히 밝혀졌다. 따라서 무엇이든 플러스 발상을  하는 습관을 가진 사람은  면역성이 강하여 좀처럼 병에 걸리지 않는다. 그러나  늘 마이너스 발상만 하는 사람은 한심스러울  정도로 쉽게 병에 걸리고  만다. 똑같은 라이프 스타일임에도 불구하고 생기  있고 건강한 사람이 있는가 하면,  늘 기운이 없고 병약한  사람이 있다.

    이같이 차이는 모두 다 그렇다고 할  수는 없지만 대부분 ‘마음가짐’에서  시작된다. 그렇다면 마음가짐에 따라  다르게 생성되는 체내 물질이란  것은 도대체 무엇인가? 호르몬으로 알려진 물질이 바로 그것인데 이 가운데에서 마음가짐에 따라 좌우되는 주요 호르몬으로는 아드레날린과  노르아드레날린 그리고 β-엔돌핀  등을 들 수  있다.

    인간이 화를  내거나 긴장하면  뇌에서는 노르아드레날린을 분비한다.  공포감을 느끼면 아드레날린을 분비한다.  호르몬이란 세포 사이에서 정보를  전달하는 물질이다. 다시 말해 이것은  뇌에서 내린 지령을 세포에 전달하는 물질이다. 분노라는 정보가 전달되면  육체는 경계 상태에 들어가 매우 활동적인  상태가 된다.

    이렇게만 작용한다면 살아가는 데 별 지장이 없을  터이다. 그러나 어떤 이유 때문인지 모르겠지만 불행하게도  이 물질은 대단한 독성을 갖고 있다.  따라서 화를 자주 내거나 스트레스를  많이 받으면 그로 인해 발생되는 노르아드레날린의 독성으로 인해 병에  걸리거나 노화가 촉진되어 그만큼 빨리 죽게  된다. 반대로 늘 미소를 띤 얼굴로  사물을 바라보며 긍정적인 쪽으로 생각한다면 뇌 안에서는 뇌세포를 활성화시키고 육체를  이롭게 만드는 유익한 호르몬이  분비된다. 이들 호르몬은 인체를 젊게 만들 뿐 아니라 암세포를 파괴하고 인간의 마음을 즐겁게 한다. 따라서  인생을 즐겁고 건강하게  그리고 암이나 성인병에도  걸리지 않고 장수하기를 바란다면 뇌에서 좋은  호르몬을 많이 분비하는 삶의 내용을 꾸려나가야 할 것이다. 

    사람에게 유익한 이 호르몬이 바로 내가  말하는 ‘뇌내 모르핀’인데, 이런 명칭을  붙인 이유는 물질의 구조식이 마약 모르핀과  매우 흡사하기 때문이다. 인간에게 쾌감을 주는 호르몬은 약 20종 정도가 알려져 있는데, 그 작용이나 강약의  차이는 있으나 약리 작용은  거의 같다. 우리 인간은  나쁜 것을 생각하고 실제로 그것을 행동에  옮기는 경우가 많다. 가령 ‘다른 사람을 곤경에 빠뜨려서라도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는 사람’이 있다고  하자. 그래서 많은 돈을 벌었다고 하자. 또는 지위나  명예를 얻었다고 하자. 그러한 소망을 실현하면 그 사람은 큰 행복감을  느낄 것이다. 행복을 느끼고 기쁨을 맛보면  뇌에서는 몸에 이로운 호르몬이 분비된다.  그러나 무슨 이유인지 그러한 기쁨은 오래  가지 않는다. 반드시  어디선가 이상하게 꼬이게 된다.  이웃이나 사회에 해를 끼치거나 남에게 원망을 사는 행동을 하면 무슨 까닭인지 잘  알 수 없으나, 뇌는 그 사람을 서서히 멸망의  방향으로 유도해 간다. 나는 이것을 조물주가  바람직하게 살아가는 사람은 남고 그것에  역행하는 사람은 소멸되는 메커니즘을 만들어 유전자라는 형태로 인간의 몸 안에 심어놓았기 때문이라  해석하고 싶다. 사실 뇌 속에는 선조의 선행이나 악행에 관한 기억까지  모두 입력되어 대대손손 누적된다. 따라서  그런 현상이  발생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결과일는지도  모르겠다.         

    일벌레가 일찍 죽는 이유는?

      인류는 살기 좋은 세상을 만들기 위해  갖가지 종교나 철학사상을 만들어왔다. 그리고 자연계를 포함한 지구상의 모든 생명체와 ‘공생’하자는 사고를 가진 사람도 점차 늘어나고 있다. 미래 사회를 생각할  때 이것은 매우 발전적이고 바람직한 경향이 아닐 수 없다. 나는 의사로서 새로운  사회를 위해 뭔가 도움이 될 만한 일을 하기 위해  늘 노력하고 있다. 이 같은 노력은 나  자신을 위한 것이기도 하다. 이웃이나 사회를  위해 노력하지 않으면 뇌는 그 인간을  멸망으로 유도해 가기 때문이다.

    내가 존경하는  EM (electorn microscope/ 전자 현미경) 발견자인 후나이 사치오 씨는 ‘우주 전체에 창조주의 의지가 작용하고 있다’ 고 말하고 있는데, 나는 그 의지가 유전자라는 형태로 우리 몸 안에 새겨져 있다고 생각한다. 창조주의 의지에 합당한 사람은  살아남고 합당하지 않은 자는 소멸하는 메커니즘이 인간의 몸 안에 장치되어 있는 것이다. 

    실제로 우리 인간이 의욕적으로 일을 할 때는 뇌가 매우 활성화되어 도파민(dopamine  / norpinephcine합성의 중간 단계로 중추 신경에서 신경전달  물질의 기능을 한다)이라는 호르몬이 분비된다. 도파민이라는 물질은 인간에게 의욕을  불러일으키는 호르몬이지만, 분비가 과다할 경우는 에너지가 필요 이상으로 소비되어 그만큼  일찍 죽게 된다. 죽지 않는다 하더라도 정신분열증이나 간질병 같은 증상을  일으킬 가능성이 많다. 반면에 이 호르몬이 적게 분비되면 파킨슨병(parkinsonism /운동기능  감소증.전진.근육 경직을 특징으로 하는 질환)이나 치매 현상을 일으킬 가능성이  그만큼 높아지지만 과다한 분비 역시 문제가 되는 것이다. 

    옛날부터 천재로 일컬어 오던 사람이 일찍 사망하거나 뇌 질환  계통의 병에 많이 걸렸던  이유도 도파민 과잉 분비와 깊은 관계가 있다고 할 수 있다. 열심히  일하는 직장인이나 실적을 쭉쭉 올리는 사업가 가운데에서도 도파민  분비 과잉 현상을 보이는 사람이 많다.  사업에 성공하려면 경쟁에서 이겨야  하고  경쟁에서 이기려면 투쟁심에 불타야  한다. 그러나 그렇게 악착스럽게 일해서 성공한다 해도 뇌내 모르핀을 잘 활용하지 못해 일찍 죽는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정치계나  경제계에서 대단한 성공을 거둔 유능한 인물임에도 불구하고 일찍 죽는  사람 역시 뇌 분비 호르몬을 제대로 활용하지 못했기  때문이라 할 수 있다. 투쟁 호르몬의 과잉 분비가  명을 재촉한 것이다. 그러나 남보다 뛰어난 능력을 키워 큰일을 하려면 거기에  상응하는 에너지가 필요하다. 에너지가 부족하면  큰일을 할 수 없다. 그러나 에너지 출력을 너무 높이면 질병이나 단명이 찾아온다. 이것은 극히 이율배반적이다.

    하지만 이 책을 통해 차차  밝히겠지만, 이것을 극복할 수  있는 굉장한 비법이 있다. 뇌내 모르핀을 제대로 활용하는  것이 바로 그 비법이다. 도파민을 많이  분비하면 에너지가 소멸되어 녹초가 된다.  하지만 이럴 때 뇌내 모르핀을 분비시키면, 적은 양의 도파민으로 10-20배나 되는 양의  도파민이 분비된 것과 똑같은 효과를 얻을 수 있다. 뇌내 모르핀은 지렛대의 원리와  비슷한 에너지 증폭 효과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아무리  강한 의욕을 가지고 있다 해도 도파민을  과다 분비하면 부작용이 생긴다. 도파민이나 노르아드레날린은  활성 산소를 대량으로 방출시키는 특징이 있다. 반면에 뇌내 모르핀은 몸에  해로운 활성 산소를 방출하지 않기 때문에 소량의 도파민에 뇌내 모르핀을 결합시키면 별다른 부작용 없이 그 효과를 증폭시켜 사용할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메커니즘을 최대한  이용하는 것이 이상적인 뇌 활용법이라  할 수 있다

    옛 부터  이름있는 고승들은 높은 식견으로 세상을 관망하고 사람을 감화시키는 힘을 갖고 있었으며 통계적으로 볼 때 질병 없이 장수했다. 득도한 고승들이 대부분 질병 없이  장수한 까닭은 무엇일까? 그것은 이들이 질병에  강한 면역성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인데, 이들의  생활 방식이나 사고방식을 가만히 살펴보면  결국 뇌내 모르핀을 유용하게 활용한 결과라 할 수 있다. 이런 사람은 악성 에이즈에  감염되더라도 보통 사람처럼 쉽게 발병하지 않을 것이다. 면역력이 높고 자연 치유력이 강하기 때문이다.

    암세포를 불러오는 스트레스, 모든 악의 근원

      업무로 긴장하면 아무래도 스트레스가 쌓이기 마련이다.  이것 또한 병의 원인이 된다. 암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쥐를 이용한 유명한 실험이  있는데, 그 데이터를 보면 스트레스의 강약에 따라 암 발병율이 크게 달라진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발암 물질로 인한  암의 발병률이 10%라면, 발암 물질에 스트레스가  가해지면 발암률은 50%까지 높아진다.

    득도한  사람들은 일반인이 스트레스를 받는 일에 동요하지 않고, 오히려 뇌내 모르핀을 분비시킬 수 있다. 뇌내 모르핀은 스트레스를 완화시키는 작용을 하며 발암율을 극단적으로  감소시킨다. 암에 잘 걸리지 않는다는 것은  다른 질병에도 강해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또한  성인병은 신진대사 장해가 그 원인이라 할 수 있는데 이것은 간단히 말해서 혈액이 원활하게 흐르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뇌내  모르핀에는 혈액의 흐름을 원활하게 만드는 효능도 있다.

    혈액  흐름이 방해 받는 이유는 크게 두 가지가 있다. 그 중 하나가 스트레스다.  스트레스를 받아 노르아드레날린이 분비되면  혈관이 수축되어 혈액의 흐름을 막는다.  이러한 변화  자체도 마이너스이지만, 이로 인해 활성 산소가 대량으로  발생되어 유전자를 손상시키거나 과산화지질을 생성시켜 성인병 발병률을 더욱 높이게 된다. 혈액 순환  장해의 또 다른 원인은 콜레스테롤이나 중성 지방 등에 의한 혈관 막힘이다.  그러나 넓은 의미에서 보면 혈관이 막히는 물리적 이유 역시 결국에는 스트레스에서  기인하는 경우가 많으므로, 성인병 계통의 거의 모든 질환은 스트레스 때문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이런 점에서 볼 때 옛날 고승들의 깨달음의 높은 경지는 병을 물리치는 데 큰 힘이 되었음을 쉽게 알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많든 적든 때때로 긴장을 강요당하는 경우가 생기며, 그로 인해 강한 스트레스를  받게 되면 누구나 노르아드레날린 계의 호르몬을 분비한다.  적절한 양을 분비하면 나름대로 우리 몸에  자극을 주어 긍정적인 효능을 발휘하지만, 그 한도를 넘게 되면 몸에 해를 끼치게 된다. 혈압이 상승하는 것도 그  가운데 하나의 증상이라 할 수 있다.  사람이 죽음에 임박한 급박한 상황에는 심장 속에 노르아드레날린을 주입시켜 측정할 수 없을 정도로 낮았던 혈압을 급격히 상승시킨다. 긴급 상태에  한하여 독으로 그 위기를 모면하는 사례라  할 수 있다. 그러나  평상시에는 높은 혈압이 몸에  좋을 까닭이 없다. 혈압이 오르면 피의 흐름이 나빠진다. 뇌세포를 건강하게 유지하려면 혈액 순환을 원활하게 하여 산소와  영양분을 각 세포에 효과적으로  공급해야 하는데,혈압이 높다는 것은 혈관이 수축되거나 막혀서 피의 흐름이 정체된다는 것을 의미하므로 그만큼 건강을  해치게 된다.

    그리고 산소가 공급되지 않으면  혈액 성분 가운데 하나인  혈소판이 파괴되고, 혈소판이 깨지면  혈병이라는 부스럼딱지 같은 것이 생기게 되는데, 바로 이 부스럼딱지가  혈관을 막아 상황을 더욱 악화시킨다. 혈관 수축은 뇌의 건강을 해치는 적신호이기도 하다. 뇌혈관을 수축시키는 가장  커다란 원인 가운데  하나가 노르아드레날린 호르몬인데,  이 호르몬은 마음가짐이나 감정 상태에  따라 분비량이 결정된다. 이것만으로도  플러스 발상이 얼마나 중요한지 다시  한 번 절감할 수 있을 것이다. 

    회사에서 상사에게 꾸중을 들어 화가 난다.  사업에 실패하여 좌절감에 빠진다. 부인과 다투어 혈압이 오른다. 아이의 성적표를 보니  어이가 없다. 이런 상황들은 강한 스트레스를 동반하게 되는데, 이 모든 상황을 전부  마이너스 발상법으로만 받아들인다면 노르아드레날린은 그만큼 과다하게 분비될 것이다. 하루 중  우리가 깨어 있는 시간은 15-16시간인데 이 깨어있는 동안에  계속 노르아드레날린을 분비하면 어떻게 되겠는가. 혈압은 점점 높아지고  혈관도 막히게 될 것이다. 더구나 이것은 뇌만이 아니라 인체 각 기관에 영향을 미쳐 노화를 촉진하고 성인병을 일으키는 원인이 되기도 한다. 이러한 경우 어떻게 하는 것이 좋을까? 다른 방법이 없다. 뇌를 유용하게 활용하는 수밖에 없다. 

    무슨 일이든 한 번 경험한 기억은  전부 뇌에 축적되므로 같은 상황이나 경험을 당하게 되면 뇌는 과거의 기억을 끌어내 과거와 동일한 대응을 하게 된다. ‘사장님이 부르십니다’라는 말을 들었을 경우, 전에 야단 맞은 일이 있는  회사원은 ‘또 야단 맞는구나’라고 생각하게 된다. ‘칭찬 받으리라’는 생각은  좀처럼 떠오르지 않는다. 실제로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하더라도 머리 속에서는 우선 나쁜 상상이 일어나 가슴이 두근거리게 되고 그와 동시에 뇌에서 노르아드레날린을 분비하게 된다. 이럴  때는 되도록 정반대로 발상하도록 애써야 한다. 우선 ‘이번에는 칭찬 받을 거야’라고 생각해 보라. 그러면 쾌감을 촉발하는  호르몬이 분비되어 불쾌한 생각을  중화시키기 때문에 수축된 혈관이 원래 상태로  돌아가 피의 흐름을 원활하게 만든다. 실제로  사장실에 불려가 꾸중을 듣게  된다 하더라도 사장이 자신을  위해 꾸중하는 것이니 고마운 일이라고 생각하며 플러스  발상으로 전환시킨다. 아무짝에도 쓸모  없는 인간이라면 무시당하는 일은 있어도 꾸중 듣는 일은  없을 터이니 말이다.

    어쨌든 인간은 어떻게 생각하느냐에 따라 뇌내  모르핀이 분비될 수도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는 사실을 염두에 두기 바란다. 위에서 언급한  간단한 사례에서도 알 수 있듯이 과거의 지각이나  기억에 따라 주어진 자극에  대한 반응이 달라지기 때문이다. 가령 길거리에서 개와  마주쳤을 경우, 개를 키우거나 개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개에게 말이라도  건네려 할 것이다. 이런 경우에는 뇌내  모르핀이 우위를 차지하게 된다. 그러나  반대로 과거에 개에게 물린 경험이 있는  사람이라면 극도의 경계심이 일어나면서 교감신경이  최고도로 활성화되고, 하수체는 면역체에 영향을 주게 되어  스트레스 호르몬을 방출하게 된다. 그러면 심장  박동이 빨라지고 동공이 흐릿해지며 좀더 많은 공기를  들이마시기 위해 기관지가 확대된다.

    또한 혈액이 근육으로 흐르고  공격과 도피 상황에 대비하여 아드레날린 계 호르몬이 혈관  속에 다량 투입된다. 이렇듯  개와 마주친 상황은 같아도  개에 대한 과거의 기억이나 경험에 따라 그  반응이 전혀 다르게 나타나고 신경 전달 물질의 분비도 현격한 차이를  보인다. 그러나 과거의 나쁜 기억에만 집착하지 않고, 개는 온순해서 결코 사람을 물거나 공격하지 않는다는 생각을 몇 번이고 주입시키려 노력한다면 부정적인 결과를 막을 수 있을  것이다. 현재 일어나고 있는 사실 그 자체보다  그것을 어떻게 받아들이느냐가 더욱 중요한 법이다.  이 사회에서 일어나는 여러  가지 현상이나 자극도 물론 중요하지만, 그것을  플러스 발상으로 받아들이기  위해 의식적으로 노력하는  것은 더욱 중요하다.  그러면 몸과 마음의 반응을 바람직한 방향으로 이끌어 갈 수 있기 때문이다.

    활성 산소의 독을 어떻게 막을 것인가

      인간은 누구나 건강하게  오래 살기를 바라는 마음이 있다. 그와  동시에 갖가지 욕망을 품고  그것을 충족시키기 위해 노력한다. 그러나 건강과  장수에 대한소망과 욕망의 만족은 대부분 이율배반적인 경우가  많다. 술을 좋아하는 사람이 기분 좋게 적당량의 알코올을 섭취한다면 뇌에서  모르핀을 분비하겠지만, 늘 적당량만 마실  수 없는 법이다. 과음이  건강을 해친다는 것은 말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담배도 마찬가지다. 최근 세계적으로 금연 운동이 확산되고 있어 다행스러운 일이나, 담배를  즐기는 사람이 일에 몰두하다가 모처럼 찾아온  휴식 시간에 즐거운 마음으로 담배를 피운다면 뇌에서는 β-엔돌핀을 분비한다.  이 β-엔돌핀은 기분을 좋게 하는  데 그치지 않고, 인체 각 기관의  노화를 막고 암세포를 파괴시키는 작용을  한다. 이런 경우에는 담배가 인체에 해롭다고만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아무리 담배를 좋아하고 흡연으로 인해  즐거움을 느낀다 하더라도  하루에 몇 십 개피를  피워도 된다는 말은 아니다.  젊은 나이에 흡연을 시작한 사람의 사망률은 비흡연자의 약 2배에 달한다.

    성행위도 마찬가지다. 섹스의 쾌감이 뇌 활동을 좋게 한다는 이야기를 가끔 접하게 되는데, 단순한  속설에 불과하다고 외면할 수만은 없다. 기분이 좋아진다는 것은 뇌내 모르핀이  분비된다는 것을 의미하므로 젊음이나 건강에 플러스로 작용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부작용이 일어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운동량으로 따져  보면 섹스는 상당히 격렬한 운동에 속한다. 그런데 격렬한 운동은  활성 산소를 대량으로 발생시킨다. 활성 산소는  건강에 매우 해로운 물질이다.  따라서 나이가 지긋한  사람은 과도한 섹스를  삼가는 것이 좋다.

    활성 산소라는 물질은 우리가 호흡할 때  들이마신 산소가 분자 상태로 변해 활성화된 것으로서  모든 질병이나 노화를 유발하는  인류 최대의 적이라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이러한 활성 산소는 언제 가장 많이  생겨나는 것일까? 우선 피의 흐름이 나빠질 때 활성 산소가 다량으로  만들어 진다. 좀더 정확하게 말하면, 일단 혈액의 흐름이 나빠졌다가 다시 정상으로  돌아올 때 활성 산소가 분비되는 것이다.  바로 이때 활성 산소에  의해 혈관의 내피가 상하거나  조직 또는 유전자가 다치게 된다.  따라서 인간의 몸은 언제나 적정 수준의  혈류량을 유지해야 한다.  내피가 상하면 염증을 일으키며  유전자가 상하면 암을 유발시킨다.

    또한 활성 산소가  지방과 만나면 몸을 노화시키는 결과를 초래하기도  한다. 두 번째로 노르아드레날린이나 아드레날린을 분비할 때에도 활성 산소가 다량 발생된다. 따라서 마이너스  발상을 피해 이런 호르몬이 가급적 적게  분비되도록 하는 것이 뇌를 젊게 유지하는 지름길이다. 뇌세포를  젊게 유지할 때 활성 산소의 해를 최소로 줄일 수 있다는 사실이 최근  연구로 밝혀졌다. 따라서 항상 긍정적이고 발전적으로  사물을 받아들이고 지나치거나 무리한  생각을 피한다면 활성 산소의 해는 거의 막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활성 산소가  인체에 도움이 되는 경우도 있다. 몸 안에 침투한 병균을 퇴치하는  무기로 활용될 때도 있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볼 때,  활성 산소는 인간이 갖고 있는 면역 시스템의 일부로 작용하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이것이 너무 많아지면 곤란하다. 그래서 이럴 때는 인체  내부에서 SOD라는 해독 효소를  만들어 산소독을 중화시킨다.  따라서 인체의 자연 정화 기능에 이상이 없으면 활성 산소 때문에 해를 입는 경우는 별로 없다. 그리고 성장기에 해당 필요가 없다. 그러나 중년기 이후에는 SOD가 활발하게 생성되므로  크게 걱정할 필요가 없다.  그러나 중년기 이후에는  SOD를 생성하는 능력이 쇠퇴하기 때문에 활성 산소의 해가 점차 확대되어 노화나 성인병으로 발전할 가능성이 그만큼 높아진다. 이것은  나이가 들수록 플러스 발상이 한층 더 중요한 비중을 차지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술이나 담배에 죄의식을 갖지 말자

      시원하게 트인 고속도로를 달리다  보면 폭주족이 아니더라도 누구나 한 번쯤 스피드를 내고 싶은  충동을 느낄 것이다. 앞차도 보이지 않고  뒤따라오는 차도 없다. ‘안심하고 마음껏 달려볼까’하고 엑셀레이터를  밟으면 어디선가 갑자기 순찰차가 뒤쫓아온다. 아마 이런 경험을 겪어본 사람이 적지 않을 것이다. 규정 속도를 위반하면 안 된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왜  스피드를 내게 되는가. 그것은 마음껏 엑셀러이터를 밟아 속도를 올리면 기분이  좋아지고, 기분이 좋아지면 뇌에서 β-엔돌핀이 분비되기 때문이다.

    이것은 한 예에 불과하지만, 뇌를 잘 활용하려면 우선 ‘인간은 쾌감을  추구하며 살아가는 존재’라는 사실을 확실히 머리 속에 넣어둘 필요가 있다. 담배가  몸에 해롭다는 사실은 누구나 다 알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애연가는 도저히 담배를 끊을 수  없다. 흡연을 통해 커다란 쾌감을 얻기 때문이다. 또한 술을 좋아하는 사람은  직접 술을 마시지 않더라도 저녁 무렵 술집의  네온사인만 보아도 뇌내 모르핀이 분비된다. 이런  습관이 붙으면 쉽게 술을 끊을  수 없다. 술을 끊는다는 것은 쾌락을  포기한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나는  간장 계통의 전문의로도 활동하고 있기 때문에  소위 알코올 중독자라는  사람과 많이 접촉해  왔다. 그들에게 알코올이  해롭다는 사실에 대해 입이 닳도록 떠들어 봤지만 별다른 효과가 없었다. ‘그렇게 계속 마시면 당신은 곧 죽는다’고 말해도 ‘내가 좋아하는  술이니 마시다 죽어도 여한이 없다’고 하니 별 도리가 없다. 아무리 맛있는 음식이라도  과식하면 비만 체질이 되고 그러면 성인병에 걸릴  확률은 그만큼 높아진다. 그런데도 맛있는 음식만  찾아 다니며 배가 터지도록 먹어대는 미식가가 허다하다.  몸에 해롭다는 것을 알면서도 쉽게 끊지 못하는 이유 역시 대부분 뇌내  모르핀과 관련되어 있기 때문이다.

    진화된 인간에게서도  동물과 같은 본능적  행동 양상이 많이  나타난다. 그렇다면 우리 인간의 본능이라  할 수 있는 기본적인 욕구는 무엇인가.  심리학자 A.H.마즈로 박사는 인간의 기본적인 욕구를 ‘5 F’라는 말로 설명하고 있다. ‘5 F’란 F로 시작하는 다섯 가지 단어를  의미한다. 퍼킹(fucking/성욕), 피딩(feeding/식욕),  플로킹(flocking/집단의식 욕구),  파이팅(fighting/공격.정복 욕구),  프리잉(fleeing/도피욕구) 등 다섯 가지가 본능적인 행동의  형태로 나타난다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본능적인 행동이란  ‘의지력으로 억제하지 못하는 원시적  충동’이라 정의하는데, 최근 연구 발표에 의하면  이것도 결국 뇌내 모르핀을  분비시켜 기분을 좋게 만드는 행위들이라는 것이다. 식사는 성행위 등을 통해  쾌감을 얻는다는 사실은 누구나 인정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동물 사회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집단을 형성하는 행위 역시 인간에게 쾌감을 준다. 그리고  파이팅은 상대방을 공격하고 정복하여 자신에게 복종하게 만들려는  욕구인데, 이것이 쾌감으로 이어진다는  사실은 인류사가 투쟁의 역사였다는  사실만 상기해도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그처럼 싫증을 느끼지 않고 전쟁을  되풀이해 온 것은 승리라는 결과를 포함해 근원적으로 그것이 쾌감을  동반하고 있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도피.도주의 욕구를 들 수 있다. ‘도망치는 것이 어째서  쾌감을 일으키는가’ 의아하게 생각할지 모르겠으나,도피나 도주는 반드시  인간에게 즐거움을 주어 뇌내  모르핀을 분비한다는 사실이 이미 실험으로  밝혀졌다.

    이상이 마즈로 박사가 말하는 ‘5 F’  이론인데 인간의 원뇌(원시적 뇌)는 이 같은 본능적 욕구를 부정하지 않는다. 담배를 좋아하는 사람은 담배를 피우고 술을 좋아하는 사람은  술을 마시면 된다. 물론 정도에 지나치면 건강에  해롭지만 좋아하는 것을 무리하게 끊을 필요도  없다. 단 적당량을 유지하는 동시에 한가지 덧붙여 당부하고 싶은 것은 술이나 담배에 죄의식을 갖지 말라는  것이다. 죄의식을 느끼지 않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기 때문이다. 담배와  술에 포함된 독의 영향도  해롭지만, 죄의식으로 인해 발생되는 활성 산소는 인체에  더욱 해롭기 때문이다. 반면에 애연가가 작업을  마친 후나 식사 후에 즐거운 마음으로 담배  한 대를 피운다면 뇌내 모르핀을 분비하는 좋은 계기가 될 것이다. 술도 적절하게 마신다면 ‘백약의 왕’이 될 수 있다. 그러나 담배나 술을 접할 때마다 꺼림직해 하거나 죄의식을 갖는다면 플러스 효과는 사라지고 마이너스 결과만 나타나게 된다. 즐거운  마음으로 적당히 담배를 피우고 술을 마시면 뇌내  모르핀을 분비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아,  또 피웠군. 폐암에 걸릴지도 모르는데’ 혹은  ‘또 술을 마셨어. 이러다가 알코올 중독이 되면’ 이라고 걱정하면 실제로  인간의 뇌는 병에 걸리게  만드는 호르몬을 분비하게 된다. 연애를 할 대도 마찬가지다. ‘실연 당하지 않을까’하고 늘 걱정하는 마음으로 만나면 실제로 실연을  당하게 되는 경우가 많다. 이런 결과를  초래하는 이유는 걱정할 때마다 실연 당하는 쪽으로 작용하는  호르몬이 분비되기 때문이다. 어떤 일이든 불안이나 걱정 혹은 죄의식을 느끼며 행동하는 것은 바람직한 뇌 활동법이라 할 수 없다. 그것은 불행과 죽음을 부르는 전주곡이기 때문이다.

    마즈로 박사의 5단계설과 뇌의 활동

      마즈로 박사가 말하는  ‘5 F’ 이론은 어느  누구도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이 다섯 가지 욕구가 없으면 우리  인간은 살아갈 수 없기 때문이다. 뇌는 ‘5 F’  이론에 관계되는 모든 활동에 중대한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여기서 뇌 구조에 관해 간단히 설명하기로 하자. 인간의 뇌는  3중 구조로 되어 있다. 첫 번째는 ‘5 F’를 관장하는 뇌이다. 이 뇌는  모든 동물이 소유하고 있는데, 우리는 이 뇌를 원뇌라고 한다. 뇌간-연수, 시상하부 그리고 시상이 바로 여기에 해당한다. 다음으로 원뇌를 감싸는 듯한 형태의 뇌가 있다. 이것은 개나 고양이 정도 이상의 지능  동물이 가지고 있으며, 동물뇌(대뇌변연계)라고  한다. 세 번째는 제일 바깥쪽에 있는 대뇌신피질 이다. 인간이 자신을  만물의 영장이라 자부할 수 있는 이유도 바로  이 대뇌신피질이 발달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뇌  전체의 활용 측면에서 볼 때,  대뇌신피질의 활동만을 중요하게 여기는 것은 매우  위험한 발상이다. 아무리 대뇌신피질을 잘 활용한다 해도  그것만으로는 모든 일을 해결할 수 없으며 인생의 즐거움  역시 제대로 맛볼 수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뇌의 활동을 논할 때  우리는 자칫하면 인간 특유의 대뇌신피질에만 관심을  갖기 쉽다.

    그러나 ‘생각하는 갈대’라고 불리는  인간의 고상한 사고는 뇌 전체 활동 중에서 고작 5% 정도에 지나지 않는다. 나머지 95%는 ‘무엇을 먹을 것인가’, ‘어떻게 하면 저 사람과 사귈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살아남을 수 있을까’와 같은 본능적 욕구를 충적시키기 위한 사고를  하며, 바로 이것이 인간 본래의 모습인 것이다.

    파충류는 원뇌만으로 살아가는 동물이다. 먹이를 보면  덤벼들고 암컷을 보면 생식 활동을 한다. 거의 조건 반사적인 행위가  지배하는 세계인데 우리 인간 역시 이와 똑같은 뇌를 가지고 있다. 이에 비해  개나 고양이는 좀더 발달된 대뇌변연계라는 동물뇌를 갖고 있다. 그래서 주인을  알아보고 자기집을 찾아오며 이름을 부으면 알아듣는  정도의 반응을 보일 수  있다. 인간이 인간다울 수  있는 것은 분명히 대뇌신피질 덕분이다.  하지만 뇌의 활동이나 욕구라는  측면에서 생각할 때 파충류나 개와 고양이의 뇌도 염두해주지 않을  수 없다. 그렇지 않으면 본질을 이해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인간은 도대체 어떤 욕구를  갖고 있는 동물일까. 쾌감을 추구하면서  살아가는 한 인간은 다른 동물과 별반  차이가 없는 존재인가. 파충류 차원의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해 발버둥친다는 사실을 부끄럽게 여겨야 한단 말인가. 마즈로 박사는  ‘욕구 단계설’이란 설득력 있는 이론을 통해 인간의 욕구에  대해 살펴보기로 하겠다.

    마즈로 박사는 인간의  욕구를 크게 다섯 가지로  구분한다. (1)생리 욕구 (2)안전  욕구 (3)소속감과 사랑에 대한 욕구 (4)인정(승인)을 받으려는 욕구 (5)자기 실현의 욕구 . 이 다섯 가지 욕구는 계단을 오르듯 낮은 차원의 욕구에서 점차 높은 차원의 욕구를 향해 단계적으로 상승한다. 가장 낮은 단계는  ‘생리 욕구’ 이다. 성욕.식욕.수면욕 등이 바로 이것인데, 생존하는데 절실하게 필요한 가장 본능적인 욕구이기도 하다. 인간은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 이 욕구를  절대적으로 충족시켜야 하는데,  의학계에서는 이 생리 욕구가 나오는  곳을 파충류뇌라 추측하고 있다.

    기본적인 생리  욕구가 충족되면 그 다음에는 ‘안전 욕구’가 나타난다.  배가 고플 때는 부끄러움을 느끼거나 남의 말에 귀 기울일 틈도 없이 먹을 것만  찾게 된다. 먹을 것을 위해 수단과 방법을 기리지 않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충족되고 나면 그때  비로소 자신의 안전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첫 번째와 두 번째 욕구가 충족되면 그 다음으로 ‘소속감과 사랑에 대한 욕구’가  나타난다. 이것은 어떤 형태로든 사회의 한 구성원으로 존재하고자 하는 욕구이다. 사회 귀속 욕구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대상을 필요로 하는  사랑의 행위도 여기에 속한다. 공복도 채우고  안전도 보장받고 사회의 일원이 되어  집단에 소속되었다고 해서 만족할  인간은 아마 없을 것이다.

    마즈로 박사는  세 가지가 충족된 다음에 네 번째로  ‘인정을 받으려는 욕구’가 등장한다고 설명하고 있다. 자존심을 지키고  동시에 다른 사람에게 인정받고 싶어하는 욕구가 여기에 해당한다. 자기가 남보다 뛰어나다는 우월감, 자신의 능력에 대한 확신, 뛰어난 업무  실적, 높은 자립도 바로 이런 요소를 통해 자존심을 만족시키고 동시에  그런 자신을 타인에게 인정받고 싶어하는 것이다.   인간은 다른 사람에게 인정받았다는 증거로 표창을  받거나 지위,명성을 높이거나 좋은 평판을 받고  싶어하는데, 이런 것들이 바로 네 번째 욕구의  구체적인 내용으로 표출된다. 인간은  단지 사회적 집단의 일원이 되는 것만으로는  만족하지 못한다. 사회의 일원으로서 타인에게 자신의 능력을 인정받기를 바라는 것이다. 이 정도의 욕구만 채워진다  해도 상당한 수준의 인간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인간은 여기에서도  만족하지 못한다. 다섯 번째  욕구인 ‘자기 실현의  욕구’가 있기 때문이다. 네 번째 욕구를 달성한 사람은 그  다음으로 최고의 존재가 되고 싶다는 소망(마즈로 박사)을 가지게  되는데, 이것이 바로 ‘자기 실현의 욕구’라는 것이다. 자기 실현의 욕구는 신의 영역과 일맥상통하는 점이 있다고 말할 수 있다.

    공자가 말하는 ‘나이  칠십이면 마음이 가는 대로 따르고  한계에 도전하지 않는다’라는 세계가 바로 이것을 말한다. 자신과 타인 사이에 경계를 두지 않고 마음이 가는 대로 살다  보니 세상과 이웃을 위해 바람직한 행동이  되었다는 뜻이다.

    이런 이상향의 세계는 없을까. 마즈로 박사는  ‘자기 실현의 욕구’를 포함한 위의 다섯 가지 욕구가 인간이 갖고  있는 기본적인 욕구라 말하고 있다. 이것을 ‘욕구 단계설’이라 명명한 이유는 첫 번째 욕구를 충족시킨 다음 두 번째 욕구로, 다시 세 번째 욕구로 나아가듯 반드시 앞 단계의 욕구가 어느 정도 충족된 다음에 비로소 그 다음 욕구로 발전되어 가기 때문이라  한다. 현재 여러분은 어느 단계의 욕구를 추구하고 있는지  생각해 보는 것도 재미있을 것이다.

    여기서  설명한 마즈로의 이론은 20여년  전부터 널리 알려진 욕구 이론인데, 여기에서  이것을 인용한 이유는 최근에 밝혀진 뇌의  활동과 이 욕구 이론이 상당히 일치하고 있기 때문이다. 마즈로 박사가 이 이론을 생각할 당시는  아직 뇌의 활동에 관한 상세한 정보가 밝혀지지  않았다. 그러나 현재까지 밝혀진  연구를 볼 때, 이 이론은 뇌생리학 측면에서 인간의 기본 욕구를 이해하는데 많은 도움을 주고 있다.

    욕구 수준이 높을수록 쾌감도 크다

      현대 사회에서 다섯 번째 단계의  욕구까지 도달할 수 있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세 번째 단계의 욕구인 ‘소속감과  사랑에 대한 욕구’까지 도달하는 사람은 많지만 대부분 여기에서  멈추거나 아니면 네 번째 욕구인  ‘인정을 받으려는 욕구’에서 멈추는 사람이 많다. 그러나 뇌의 활동 특히 뇌내 모르핀은 인간에게 다섯 번째 욕구,  즉 ‘자기 실현의 욕구’까지  달성하기 위해 도전하라고 촉구한다.

    이 부분은 이 책을 읽고 나서 자신의 뇌를 유용하게 활용하려고 시도할 여러분에게 하나의 중요한 포인트로 작용할 것이다. 자기  실현의 욕구라고 하면 왠지 깨달음의 경지와 같은  생각이 들어 ‘너무 어려운 일이다’ 혹은  ‘나는 그렇게 대단한 존재가 안 돼도  상관없다’라며 겁부터 집어먹는 사람이 있을지 모르겠다. 하지만 그럴 필요는 없다. 뇌내 모르핀은 자기  실현을 목표로 살아가는 것이 인간 최고의 기쁨이며 동시에 항상 마르지  않는 행복을 느끼며 살아갈 수 있는 열쇠임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있다.

    지금까지 많은 사람들은 여러  욕구가 병렬적으로 놓여 있으며 서로 상치되는 관계에 있다고  오해해 왔다. 그러나 욕구는 나름대로 단계가 있는 법이다. 어떤 인간이든 식욕과 성욕을 가지고 있다. 또한 권력욕과 명예욕도 있다. 남을 위해 봉사하거나  자신을 바르게 성장시켜야 한다는 숭고한 차원의 욕구도  있다. 그러나 인간욕구의 상당 부분은 숭고한  차원의 욕구가 아닌 저 차원적  욕구라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낮은 수준에서 만족하기보다 한 차원 높은 수준의 욕구로 자신을 끌어올리는 것은 극히 바람직한 일이나, 낮은 차원의  욕구를 추구할 때 만족도나  쾌감의 정도가 훨씬 높다. 그렇기 때문에 자칫 방심하면 우리 인간은 끝도 없이 낮은 차원으로 곤두박질치게 된다는 것이 지금까지 알려진 욕구 단계 이동에  대한 일반적인 견해였다. 그러나 최근의 뇌내 모르핀에 관한 연구를 통해 이러한 일반적 견해가 잘못된 것이었다는 사실이 밝혀지고 있다. 

    인간은 병렬적으로 나열된 욕구 가운데서 몇  개씩을 선택하는 것이 아니다. 마즈로가 말한 대로 욕구는  낮은 차원에서 높은 쪽으로 단계적으로 이동하는 것이며, 욕구의 수준이 높아질수록  뇌내 모르핀이 많이 분비되며 그만큼 쾌감도 커지는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단계를 거쳐 높은 수준의 욕구에 도달하면 인간은 좀처럼 병에 걸리지 않고 행복한 마음으로 오래 살 수 있게 된다. 마르고 훌륭하게 살아가는 사람, 타인에게 도움을 부는 사람은 항상 젊고 건강하게 질병 없이 오래  살 수 있다는 사실이 뇌내 모르핀 연구를 통해 증명된  것이다.

    이것을  물질로  설명하면 다음과  같다.  인체는 호메오스타시스(homeostasis/ 항상성, 생체 항상 상태)라는 메커니즘을 가지고 있다. 항상성이라고 하는 조정  시스템이 바로 이것인데, 추우면 피부의 숨구멍이  수축하여 체열의 발산을 막고 더우면 숨구멍을  열어 땀을 흘려 체온의 상승을 막아주는 등의 작용을 하는 것을 말한다. 호메오스타시스라는 메커니즘은  인간 신체 곳곳에 분포되어 있으며 이것으로  인해 인간은 환경에 적응하게 된다.

    그런데  호르몬 역시 이같은 메커니즘의 적용을  받는다. 노르아드레날린이나 아드레날린이 나오면 반드시 그것을 억제하는 세로토닌   (serotoni/ 호르몬이자 신경전달 물질)이라는 호르몬이 나오는 것이다. 우리는 이런 현상을  네가티브 피드백(negative feedback/ 한쪽 많아지면 그것을 억제하는 현상)이라 부르고 있다. 전기 난로에 자동 온도 조절장치가 있어 과열을 방지하는 것과 비슷한 장치가 인간의 육체 곳곳에 자리잡고 있는 것이다.  뇌내 모르핀에도 역시 이러한  억제 물질0이 작용한다.

    그런데 한가지 이상한 예외  현상이 있다. 인간의 뇌 가운데에서 가장  진화된 전두연합야가 자극을 받아 뇌내모르핀이  분비될 경우에 한해서는 이 네거티브 피드백이 작용하지 않는 것이다.  이것은 뇌내 모르핀은 아무런 장애 없이  얼마든지 분비될 수 있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억제 물질이 반드시 분비된다는  네거티브 피드백의 원리가 어째서 이  경우에는 작용되지 않는가? 유감스럽게도 그 이유는 아직 밝혀지지 않았다. 아니,  ‘아직 발견하지 못했을 뿐이다’ 라는 게 더 정확한 표현인 것 같다.

    어쨌던 나는 인간이 가장 진보된  뇌를 사용하여 어떤 일을 할 때 β-엔돌핀이 아무런 제한 없이 분비되어 점점 기분이  좋아지는 현상은 ‘그런 세계를 지향하라’는 조물주의  메시지라 해석하고 싶다. 성욕이나 식욕에서는 그런 현상이 일어나지 않는다. 식욕이 충족되지 않으면  배고픔을 채우려는 욕구가 강하게 나타나지만 일단 배가 부르면 만사가  귀찮고 음식을 쳐다보기도 싫어진다.

    성욕 역시 강한 욕구 가운데 하나지만 충족되면  그것으로 끝이다. 또한 이런 욕구는 너무 집착하면  반드시 부작용이 따르는 공통점이 있다. 과식은  비만과 성인병을 유발시키고 과도한 섹스는 활성 산소를 발생하는 요인이 되어 생명을 단축시킨다. 생명을 유지하는  데 필요한 기본적 욕구는 강한 만족을  누릴 수 있는 반면 너무 집착하면 반드시 마이너스로 작용한다.  네거티브 피드백은 바로 그런 결과를 막기 위한 장치  가운데 하나라 볼 수 있다. 그러한  인간이 사회와 이웃을 위해 살아가며 상위뇌를  활용하면 아무런 제지도 없고 부작용도 없다. 아니, 뇌내 모르핀이 더 많이  분비되어 기분을 최고로 만들어 준다.

    나는  이 같은 생리 현상 속에서  이상적인 사회를 만들려는 창조주의 강한 의지를  느낀다. 마즈로 박사는 고차원적인 자기 실현의 욕구를 달성한 사람들이 느끼는 최고의 정신적 상태를 ‘지고경험’이란 말로 표현하고 있다.  이것은 뇌에서 β-엔돌핀을 끊임 없이 분비하는 상태라  할 수 있다. 따라서 뇌를 잘  활용하면 누구나 ‘지고경험’의 세계를 느낄 수 있는 것이다.

    약이 되는 것과 독이 되는 것

      외부의 자극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든 부정적으로 받아들이든 이것은 단순한 추상적 사고에 지나지 않으므로 별다른 차이가  없다고 생각하기 쉽다. 사람들은 흔히 ‘단지 생각만 그렇게 했을 뿐인데…..’라고 말하는데, 이것은 인간은 아무 한계 없이 얼마든지 자유자재로 사고할  수 있다는 잘못된 견해에서 비롯된 착각이다. 하지만 뇌가 활동하고 판단하는 사고의  결과물은 모두 물질화되어 화학반응을 일으킨다. 생각하는 데도  에너지가 필요하다. 그러나 우리는 보통 이 같은 사실을 망각한 채 살아가고 있다. 하지만 가까운  예로 공부라는 행위는 뇌에서 상당한 양의 에너지를 소비하는 것이다. ‘싫다.’ 혹은 ‘좋다’ 고 생각하는 데도  기본적인 양의  에너지가 필요하다. 죄가  에너지를 사용할 때는 POMC라는  단백질 분해 현상이 반드시 일어난다. 그리고 긍정적으로  사고할 때와 부정적으로 사고할 때의 단백질  분해 방법은 서로 다르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스트레스를 받더라도 긍정적으로 생각해서 ‘이것은 하나의 시련이다,좋은 경험이다’라고 받아들이면 단백질이  부신피질 호르몬과 β-엔돌핀으로 분해된다. 부신피질 호르몬은  육체적인 스트레스를  완화시키는 역할을  담당하고,β-엔돌핀은 정신적 스트레스를 해소하는  작용을 한다.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면  정신적 스트레스를 해소시켜  주는 β-엔돌핀과 신체적  스트레스를 해소시키는 부신피질이 분비 되지만, 부정적으로  사고하는 경우에는 신기하게도 β-엔돌핀이나  부신피질이 전혀 다른  물질로 변한다. 노르아드레날린과 아드레날린이 바로 그것인데, 이 물질 자체도 독상  물질이지만, 이 물질로 인해 더욱 강한  독성 물질인 활성 산소가 발생한다.

    이제  여러분도 외부의 어떤 자극에 대해 마이너스  발상을 하는 것이 얼마나 건강에 해가 되는지  충분히 이해했으리라 믿는다. 스트레스라는 자국을 받아들이는 방식에 따라  뇌의 생성 물질이 상이하게 달라진다는 사실을 꼭 명심해 두기 바란다. 플러스 발상을 하여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면 인체에 좋은 약으로 작용하는  물질이 체내에  생성되지만, 마이너스 발상을 하여  부정적으로 받아들이면 약  대신 독으로 작용하는  물질이 생성된다. 인간의  사고는 습관의 지배를 받는 경향이  있다. 플러스 발상을 하는 사람은 매사를  긍정적으로 받아들이고 마이너스 발상을 하는 사람은 매사를  부정적으로 받아들이기 쉽다. 그러므로 동일한 상황이 벌어진다  하더라도 그것을 받아들이는 방식은 본인의 컨트롤 능력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

    가령 지갑에 있는 돈을 세어보고 ‘이것밖에 남지 않았다’라고도 ‘아직 이 만큼이나 남았다’라고도 생각할 수 있는 것이다. 어떤 쪽으로 생각하든 지갑에 들어  있는 돈의 액수, 즉 현실 상황  그 자체는 조금도 변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인간은  자칫하면 마이너스 발상을 하기 쉽다. 긍정적으로 사고하려고  의식적으로 노력하지 않는 한  통계적으로 70∼80%는 마이너스 발상을 하게  된다고 한다. 이것은 ‘안정을 바라는 본능적인 사고 태도(마즈로)’에서 기인한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뇌내 모르핀의  효과를 알고 난 지금부터는  매사를 플러스 발상으로  수용하려고 노력해야 한다.  그것이 곧 당신의 건강과 진정한 행복을 보장해 주는 최고의 지름길이기 때문이다.

    호르몬은 뇌 안의 정보 전달자

      뇌는 호르몬 덩어리라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뇌는  신경 덩어리로 더 많이 알려져 있다.  신경 세포로 가득 찬 뇌는 전기 회로처럼  얽히고 설켜 있으며, 세포와 세포를 연결하는 전선 같은 돌기가  뻗쳐 있어 거기에 미약한 전류를 흘려서 뇌의  명령을 전달한다고 이해하는 사람이 많을 것이다.  그러나 뇌는 신경 세포가 가득한  전기 회로와 전선 같은 돌기만으로 활동하는  것이 아니다.

    호르몬이 없으면  뇌는 아무런 활동도 할  수 없다. 신경 세포가  전기 배선처럼 얽혀 있다는 것만으로는  신경 세포가 어떤 표적  세포에 명령을 전달하기 위한 필요충분 조건이 될 수 없다. 신경 세포와  신경세포 사이에는 틈새가 잇기 때문이다. 그 틈새를 연결하여  정보를 전달하는 것은 호르몬의 역할이다.

    예를 들어 A라는 지역에서 B라는 지역으로 전보를 쳤다고 하자. 물론 그 내용은 C라는 전보국으로 송신되지만 최종적으로  수신자가 그 전보를 받을  수 잇는 것은 우편 배달부가 전보를 전달해  주기 때문이다. 호르몬이 바로 이 전보  전달자 역할을 하는 것이다. 호르몬이란 뇌 안에 있는 정보 전달자이다. 뇌가 몸 전체에 명령을 보낼 수 있는 것  역시 뇌의 각 부분이 적절한 호르몬을  분비하기 때문이다. 그러면 인체 각 기관에서도  동일한 호르몬이 분비되고 거기에서 정보를 전달받은 세포가 그 명령에 따라 행동하게 된다. 호르몬은  이처럼 정보 전달자 역할을 하고 잇다. 다시  말해 인간이 생각하거나 행동하거나 느끼는 모든  행위는 호르몬 없이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현재 호르몬은 백 수십 종으로  알려져 있으나 아직 알려지지 않은 호르몬도 상당히 많다. 그것을 모두  알게 되면 뇌의 메커니즘도 보다 확실하게 이해하게 될  것이다. 뇌내 모르핀 역시 호르몬의 일종이다. 호르몬은 아미노산으로 만들어진다. 뇌내 모르핀을 구성하는  요소 가운데 가장 중요한 성분은 티로신이라는  아미노산이다. 아미노산은 단백질을 합성하는  기본 요소로서 그 종류는 전부 20종이  있다. 이중 8종은 체내에서 합성되지 않기 때문에 필수 아미노산이라 부른다는 사실은 이미 학창시절에 배운 기억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여기서  다시 복습해 보는 것도 의미가 있을 것  같다. 필수 아미노산 8종은 이소류신, 류신,  발린, 리신, 페닐알라닌, 트레오닌등이다. 티로신은 체내 합성이 가능한 아미노산으로 나머지 12종 안에 들어 있다. 뇌내 모르핀은 현재까지 20종 정도가 알려져 있다. 이중에서 구조식이 가장 간단한 뇌내 모르핀은 엔케팔린(강력한 모르핀과 비슷한  효과를 갖고 있으며 신경전달  역할을 하는 물질)으로, 티로신을  비롯한 5종의 아미노산으로 이루어져 있다. 티로신은 중요한  신경전달 물질 가운데 하나인 도파민과 노르아드레날린 그리고 아드레날린의 기본 골격을 이루는 물질이며 실제로 이러한 물질은 티로신이 중심이 되어 합성된다.  그리고 각성제로 쓰이는 메탄페타민(이른바 히로뽕)과 안페타민도 티로신 구조를 가지고 있다.

    좀더 전문적으로 설명하면, 뇌내 모르핀  가운데에서 가장 강력한 쾌감을 주는  β-엔돌핀은 티로신을 포함한 아미노산 31종으로 구성된다. 또한  뇌내 모르핀에 해당하는 호르몬은 반드시  티로신을 포함하고 잇다.  그리고 티로신이라는 아미노산  분자가 두 개 모이면 마약 모르핀이 된다. 이 정도  설명이면 뇌내 모르핀과 마약 모르핀이 얼마나 유사한 화학 방정식을 가지고 있는지 충분히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티로신이라는 아미노산은 원래 마약 성질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단독으로 존재하면 곧 산화해버리므로 분자량이 약간 큰 펩티드라는  형태를 취하고 있다.

    β-엔돌핀의 분자를 자세히 살펴보면 뇌내 모르핀에 관한 여러 가지 재미있는 사실을 알 수 있을 것이다.  β-엔돌핀은 아미노산 31종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아미노산 5종 정도가 각각  다른 단위를 형성하여 서로 상이한 역할을  수행한다. 제일 먼저 발견한 한 단위는  앞에서 말한 뇌내 모르핀과 동일한 구조로  모르핀(엔케팔린) 역할을 하는 부분이고, 그 다음은  α-헤릭스 구조를 띄고 있어 인체의 면역력을 높여  주는 부분이다. 그 다음  단위는 β-엔돌핀을 안정시켜 활력을  잃지 않도록 작용하고 있으며 그 나머지 부분은 아직  잘 밝혀지지 않았으나, 뇌내 모르핀을 활동시키는 리셉터(receptor/수용기관.생물체 내에서  자극을 수용하는 기관·세포 등)로 작용하는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하지만 미국 체스터 대학의 신경 생리학 교수  테이비드 펠톤의 ‘뇌와 면역계에  관한 연구 논문’에 의하면 이 뇌내 모르핀은 뇌의  리셉터로만 작용하는 것이 아니라고 한다. 체내  곳곳에 리셉터가 존재하며 사람의 면역체  가운데에서 특히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는 백혈구의 일종인 내추럴 킬러(NKcell,natural killer cell / 임파구 중의 하나로써 특정한 암세포나 바이러스에 전염된  정상 세포를 죽이는 역할을 하는 세포)  세포의 표면에도 리셉터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밝혀냈는데, 바로 여기에도  뇌내 모르핀이 작용한다는 것이다.  데이비드 펠톤 교수는 뇌 안에서  β-엔돌핀을 분비하면 내추럴 킬러  세포의 활동이 좋아져서 면역력이  높아진다는 사실을 밝힘으로써 β-엔돌핀의 분비가 우리를 질병으로부터 지켜 주는 효능이 있다는 사실을 증명했다. 또한 최근  의학 잡지에 실린 논문에서 리셉터는 우리가  상상하는 이상으로 많은 세포에  존재하고 있다고 주장하는 논문이 많다. 특히  정소세포에 많다고 주장하는 내용의 보고서를  많이 볼 수 있다.

    우리는 이 같은  최근 연구 결과를 통해, 뇌내 모르핀은 단순히 사고의 영역에  영향을 미치는 것으로 끝나지 않고 신체 각 기관의  반응에 밀접하게 관계한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뇌내 모르핀은 몸과 마음을  이어주는 화학물질이라 해도 과언이 아닌 것이다.  이처럼 뇌내 모르핀은 여러 가지 역할을 담당하고 잇는데,  과거에 대한 기억 등의 정보도 호르몬 형태로  존재하고 있다. β-엔돌핀 역시  단순히 쾌감을 주는 데  그치는 게 아니라 면역력 향상이나 기억력의 강화, 인내력 향상 등에 관여하고 있다. 인간의 사고방식을 ‘단지 생각만  그렇게 했을 뿐인데……’라며 간과할 수 없는 이유는 여기에서 설명한 β-엔돌핀 역할 하나만 보더라도 쉽게 납득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게다가 뇌 내 모르핀에는 뛰어난  진통 효과가 있다는 사실이 밝혀졌고, 이것에 근거하여 한의학  침술의 효능도 증명할 수 있게 되었다. 중국에서는 예로부터 수술을 할 때 마취약 대신  침술을 사용했다. 그러나 침술이 어떻게 진통  효과를 내는지는 최근까지  과학적으로 입증되지 않았다.  그러나 뇌내 모르핀이 발견됨으로써 비로소 동양의학의  침술이 가지고 있는 치료 효과를 물리적으로 해명할 수 있게 되었다.

    좋은 호르몬을 방출할 것인가, 나쁜 호르몬을 방출할 것인가

      앞에서 설명한 대로  뇌내 모르핀은 면역력을 높이는 구조식을 갖고  있다. 그런데 말초 호르몬계는 뇌가 컨트롤하고 있기 때문에 뇌에서 면역력을 높이는 호르몬이 나오면 몸  전체의 면역력이  높아지게 된다. 오늘날에는  대부분의 질병이 스트레스와 관련되어 있다는 사실을 상식처럼  받아들이고 있다. 병이라 불리는 질환  가운데 약  70∼80%는 스트레스가 그  원인이며, 특히 성인병은  거의 100%가 스트레스 때문이라 해도 지나친 표현은  아닐 것이다. 몸과 마음은 별개의 존재가 아니며 마음가짐 여하에 따라 체내의 POMC라는 단백질 분해 현상이 상이하게 달라지며 이에 따라  화학 반응도 달라지는 것이다. 가령 ‘나는 쓸모 없는 인간이다’라고 생각하면 몸은  점점 나쁜 상태로 변화하고 ‘위험한 사태가 벌어질 거야’라고 생각하면 정말 그런 결과를 맞게 될 가능성이 그 만큼 높아진다.

    ‘병은 마음에서  생겨난다’는 옛사람의 격언은 뇌내  모르핀의 물리적 작용을 한 마디로 설명하는 좋은  예라 할 수 있다. 정신적 스트레스가  면역력을 저하시키는 정도를 나타낸 것의 예로, 졸업  시험을 보는 동안과 시험을 마친 후를 살펴보면 앞서 말한  내추럴 킬러 세포, 즉 NK세포의 활성이  현저하게 다르게 나타나는 것을 알 수  있다. 시험 중에는 면역력이 현격히 떨어진다. 이런 면역력 저하 현상은  시험에만 한정되는 것이 아니다. 사회 생활이나  연애 등 스트레스를 받게 되는  인생의 모든 상황에 똑같이 적용되는 것이다.  육체적인 스트레스가 면역 세포에  미치는 영향은, 학생에게 전력 질주를 시킨 결과 70분  동안 달린 후에는 달리기 전에 비해 NK세포의 활성이  크게 저하되었다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이것은 달리기를 좋아하는  사람이 아니라 싫어하는 사람을 억지로  달리게 했을 때 나타나는 현상이다.  이런 예로 우리는 정신적으로든  육체적으로든 스트레스가 얼마나 면역력을 저하시키는가를 잘 알 수  있을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생각  여하에 따라서 스트레스를 받을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구도 있다는 사실이다.  졸업시험을 준비하거나 전력 질주를 하는 그 자체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런 상황을 본인이 어떻게 받아들이는가가 가장 중요한 관건이 된다. 졸업시험을 앞두고 ‘합격 못하면 어떻게 하나’하고 걱정하는 것과 ‘이젠 취직도 결정되었으니 시험을 잘못 치르더라도 졸업이야 시켜주겠지’하고 생각하는  것은 결과가 현저히 다르게 나타난다. 이점에 주의해  주기  바란다. 

    NK세포에는  암세포를  죽이는  효능도  있다.  퍼포린(perforin/세포막 안에  구멍을 형성하여 세포를 융해시키게  만드는 단백질)이라는 물질을 분비하여  암세포에 구멍을 뚫는데, 그 구멍으로 수분과  염분이 들어가면 암세포가 몇 분 안에 죽는다. 이런 과정을  거쳐 NK세포 한 개가 몇 개의 암세포를 파괴시킬  구 있다. 일정한 시간에 암세포를 얼마나  파괴시킬 수 있는가에 따라 활성도를 측정하는데, 인체가 가지고  있는 이처럼 강력한 기능은 우리의 마음가짐 여하에 따라 더욱 높일 수도  있고 약화시킬 수도 있는 것이다.

     세상을 살아가는 한  우리는 스트레스를 피할 수 없다. 학생은  아무리 지긋지긋하게 싫더라도 시험을 치르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시험 때마다 ‘싫다, 싫어’하고 과민 반응을  보이며 불안과 걱정에 휩싸이게  되면 면역력은 계속 떨어지게 된다. 반면에 똑같은  상황에 있는 사람이더라도 ‘뭐  어떻게든 되겠지’라고 느긋하게 생각하면 면역력이  심하게 떨어지는 것은 막을 수 있다.  사고방식의 차이는 이처럼 인생살이에  상상 이상으로 커다란 영향력을 미친다. 불안  초조 증세가 있는 사람은 항상 불안과 초조의 스트레스를  느낀다. 그런 사람은 늘 노르아드레날린이나 아드레날린의 세계로  빠져들게 된다. 그러나 낙천적인  사람은 똑같은 상황에서도 β-엔돌핀의 세계에 있을  수 있다. 긴 안목으로 볼 때, 이러한 플러스 발상과 마이너스 발상의 차이는 건강과  인생의 성공, 실패에 이르기까지 우리 삶의 다양한 부분에 깊게 관여하게 되는  것이다.

    미국 사회를 풍미하고 있는 ‘소망실현 성공법칙’의 기본  원리는 ‘좋은 생각을 하면 좋은 일이 생기고, 나쁜 생각을 하면 나쁜  일이 생긴다’는 내용이다. 이것을 과학적으로 정확하게 표현한다면 ‘좋은 생각을  하면 뇌에서 좋은 호르몬이 분비되고  나쁜 생각을 하면 뇌에서 나쁜 호르몬이 분비된다’는 내용이 될 것이다.

    소망실현 이론에서는 잠재의식 발휘하는 것이 중요하며 그 잠재의식은 인간의 상념으로 구체화되어 인생을 결정짓는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 과학적 근거를 명확히 밝히지 못 했었다. 왜냐하면 이제까지는  마음이란 것을 불질로  해명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때문에 잠재의식 또는  잠재능력이 발휘되는 메커니즘에 대한  설명은 추상적일 수밖에 없었다. ‘마음 속으로  좋은 생각을 하면 어째서 실제로  좋은 결과가 나오는가?’라는 의문에 대한  과학적 설명은 무리였던 것이다. 그러나 이제  그것이 가능해졌다. 좋은 생각을 하면  뇌에서 좋은 호르몬을 갖게 할 뿐  아니라 잠재뇌를 활용시켜 자신도  상상하지 못했던 능력을  발휘하게 만든다. 게다가  견디기 힘든 상황에 닥치더라도 좌절하지 않고 극복해  나갈 수 있는 강한 인내력도 길러 준다. 이렇게 된다면  자신이 바라는 소망을 실현시킬 수 있는  확률은 비약적으로 높아질 것이 분명하다.

    인간의 마음을 과학으로 해명한다

      인간은 뛰어난 자연 치유력을 가지고 있으며, 그  중심을 이루는 것이 면역 기능이라는 사실은 이미 오래 전부터 잘 알려져  있다. 그러나 지금까지 우리는 마음과 면역 기능은 전혀 아무 상관도 없는  존재라고 생각해 왔다. 그러나 실제로 인간의 육체와 마음은 하나의 개체라고 표현해도 좋을 정도로 서로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 따라서 ‘매사를 좋은 방향으로 생각하는 그 자체가 효력이 극히 뛰어난 약’이라고 이해하면 된다. 인간은 누구나 자신의 인체 내부에 그 어떤 제약 회사에도 뒤지지 않는 훌륭한 제약공장 시스템을  갖추고 있기 때문이다. 플러스 발상을 하면 체내에  있는 제약 공장은 순식간에 몸에 이로운  약을 만들어낸다.

    그리고 그 약은  인체를 괴롭히는 모든 질병을 물리친다. 그러나  자칫 잘못해서 마이너스 발상을 하게 되면 체내의  제약 공장은 곧바로 몸에 해로운 약을 만들어낸다. 이  점을 확실히 명심하여 매사를  플러스 발상으로 받아들이길 바란다.

    인간은 누구나 나름대로  과학적인 근거가 없는 소박한  신앙 같은 것을 가지고 있다. 한 예로 ‘먹고 싶은 음식을 먹으면  영양 상태에 관해 걱정할 필요가 없다’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다. 물론 이 생각은  일정 정도 타당성을 가진다. 몸이 건강할 때는 먹고 싶은 음식만 먹어도 큰  문제가 생기지 않는다. 그러나 인간의 육체는 우리가 생각하는  만큼 선량한 존재가 아니다. 한 발짝만 잘못  디디면 자신의 목을 조이는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 그 증거가 바로 호르몬이다.

    시종 초조해하고 화만  내는 사람에게 호르몬은  아무런 경고도 하지  않는다. 호르몬은 바보스러울 정도로 충실한  하인이 되어 노르아드레날린이나 아드레날린을 묵묵히 분비할 뿐이다. 그로 인해 주인이 암에  걸리든 말든 ‘알 바 아니다’라는 것이 신체 메커니즘의 특징이다. 단, 여기서 유의해야 할 것은 노르아드레날린이나 아드레날린이 결코  해로운 역할만 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인체 기관에서 발생하는 물질은 반드시 그 나름의 긍정적인  목적과 필연성을 갖는다. 노르아드레날린이나 아드레날린은 도파민의 친척으로 인간에게 의욕과 활력을 일으켜 주는 원천으로 작용하기도 한다. 그러나 인체 안에서  어떻게 이런 강한 독을 분비할 수 있을까  의아스러울 정도로 독성이 강하다. 따라서 항상  불안·초조의 세계에 틀어박혀서 살아가는 사람은 뱀의  독에 필적할 만큼 강한 이 독으로 인해 인생을 원만하게  보낼 수  없을 뿐  아니라 오래  살수도 없다.

    뇌내  모르핀은 1983년에 처음 발견되어 그 해에  영국의 과학 잡지 <네이쳐>를 통해 최초로 소개되었다. 그리 오래된 일이  아니다. 이 발견으로 인해 인간의 마음이라는 추상적인 존재를 과학의 눈이라는 구체적인  틀로 바라볼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은 정말 커다란 진보가 아닐  수 없다. 사람 가운데에는 근성이 있는  사람과 없는 사람이 있다. 그 차이는  과연 무엇 때문일까. 지금까지는 대부분 정신력의 차이로 여기고 질타하거나 격려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앞으로는 뇌내 모르핀을 이끌어내는 보다 합리적인 방법을 연구하는 것이 바람직할 것이다.

    체내 지방량이 수명을 결정한다

      뇌내 모르핀을 많이 분비하고  독성 호르몬을 분비하지 않으면 뇌세포를 항상 건강하게 유지할 수 있는가? 그러나 문제는 그렇게  간단하지 않다. 좀더 알아둬야 할  것이 있다. 뇌의 무게는  대개 1.4킬로그램 정도다.  체중이 60킬로그램인 사람이라면 전체 체중의 2.3% 정도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그러나 그 작은  생김새에 비해 혈액과 산소를  몇 배 혹은 몇 십 배 많이  사용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혈액과 산소의 원활한 공급은 뇌의 활동에 그만큼 커다란 역할을 담당하게 된다.

    뇌세포가  활달하게 움직여서 인체 각 기관으로 하여금  최상의 컨디션을 유지하도록 명령하려면 뇌내 모르핀을 많이 분비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산소와 혈액을 항상 충분하게 공급하는 것도 중요하다.  산소와 혈액 가운데 어느 하나만 부족해도 그  영향이 곧바로 나타난다. 따라서 혈관이 막히는  현상을 특히 조심해야 한다.

    혈관이  막혀 혈액 흐름을 방해하게 되는 이유 가운데에서 가장 커다란 원인은 노르아드레날린이  분비되어 혈관을 수축시키고 혈소판을 파괴시켜 부스럼을  만들어 내는 것이다. 하지만  지방 역시 또 다른  커다란 원인으로 작용한다. 지방은 인간이 먹는  음식 중에서 가장 맛이 좋은 영양분이다. 따라서 입맛을 충족시켜  뇌내 모르핀을 많이 분비시킨다는  점에서는 지방이 플러스로 작용할 수 있지만 지방은 혈관을  막는 원인이 되기 때문에 이로움보다는 해로움이 더 많다고 할  수 있다. 건강을 위해서는 지방 섭취량을  줄이는 식사법이 최상이다.

    하지만  담배와 마찬가지로 지방  역시 해롭다는 사실은  알면서도 쉽게 줄이지 못한다. 게다가 무리하게 지방 섭취를  중단하게 되면 정신적 스트레스가 되어 그만큼 독성 호르몬을 많이 분비할 위험이  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는 것이 좋을까. 아직까지 많이  알려진 방법은 아니지만, 우선 근육을 튼튼하게 유지하는 게 가장  좋다. 근육이 지방과 어떤 관계가 있는지  의아해할는지 모르겠으나, 지방은 근육 안에서만 연소되는 특성을 가지고 있다. 따라서 같은 양의 지방을 섭취하는 경우  근육이 튼튼한 사람은 그만큼  빨리 지방을 연소시키지 못해 결국 과잉 지방질이  몸 안에 축적되는 것이다.

    예를 들어  체중이 60킬로그램인 사람이 매일 2000칼로리씩  식사를 했다고 하자. 이 사람이 일찍 죽느냐  오래 사느냐 하는 것은 체내에 얼마나 많은 지방질이  누적되느냐에 따라 좌우 된다. 오래 사는 사람은  당연히 지방량은 근육의 상태에 따라 달라진다.  근육이 튼튼한 사람은 지방을 연소시키기는 능력 역시 그만큼 뛰어나기 때문에 지방이 누적되는 양을 줄일 수 있다. 따라서 근육이 튼튼하면  지방으로 인한 해를 막을 수 있다는 결론을 내릴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근육을 튼튼하게 만들려면  상당히 격렬한 운동을 해야 한다. 그러나  격렬한 운동을 하면 활성 산소가  많이 발생되는 부작용이 뒤따른다. 따라서 근육  상태가 좋은 사람은 부드러운 운동을 계속해서  몸을 그대로 유지하는 방법으로 지방을 산화시키는 것이 좋다.  근육을 유지하는 운동으로는 맨손 체조와 같이  너무 격렬하지 않은 가벼운  운동이 적합하다. 반면에 몸에 지방이 많아도  근육량이 극단적으로 부족해서  겉으로 볼 때는 전혀  뚱뚱하지 않은 사람이 있다.  이런 사람은 자신이 뚱뚱하지 않다고  안심해버리기 쉽다. 그러나 혈관의  막힘은 겉보기와는 상관 없으며, 이런 사람일수록  혈관이 언제 막힐지 몰라 더욱 위험하다. 따라서 근육량이 극단적으로 부족한 사람은 그만큼 강도가 강한 운동을 해서 근육을 일정 정도 키워야 한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성인병에 걸릴 위험도 높아지고 오래 살 수도 없다.

    뇌내 모르핀에 유익한 식사

      뇌세포를 활성화시키는데 근육  다음으로 영향을 미치는 것은  식생활이다. 나는 머리말에서  ‘마음으로 생각하는 것은 추상적인  관념 상태에서 그치지 않고, 반드시 구체적인 물질로 변화되어 육체에 작용한다’고 말했다. 그런데 물질은 그 구성 재료가 반드시 필요하다.  이 재료를 섭취하는 과정이 바로 식사다. 경제적으로 여유로운 현대  사회는 먹을 것이 없어서  걱정하던 과거와는 상황이 크게 다르다. 오히려 너무 많이  먹어서 걱정일 정도이다. 그렇다고 해서 단순히 식사량을 줄인다고 문제가 해결되는 것도 아니다.  칼로리 섭취량을 적절하게 조절해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특히  중요한 것은 고단백질 식사를  많이 해야 뇌내 모르핀을 많이 분비할 수 있다는 사실이다.  그 이유는 뇌내 모르핀을 구성하는 재료가 단백질이기  때문이다.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단백질은  20종의 아미노산으로 이루어져 있다.  식사를 통해 섭취한 단백질은 몸 안에  들어가 일단 아미노산으로 분해된 다음 인체의 구성 재료와  효소로 재합성된다. 20종 중에서 필수 아미노산 8종은  체내에서 만들지 못하기 때문에 외부에서  섭취해야 한다.

    이것은 한 번에 많이  먹어둘 수 없을 뿐 아니라, 뇌내  모르핀을 많이 분비하면 그만큼 빨리 소비된다. 그러므로 식사를 통해  매일매일 양질의 단백질을 섭취하는 식사법이 뇌세포를 활성화시키기 위한 필수  불가결한 요소로 작용한다. 인체가 분비하는  호르몬은 현재 백 수십 여종에  달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런데 호르몬은 아미노산이 수십 개 연결된 단백질의 일종이므로  식사를 통해 질적, 양적으로 충분한 단백질을 섭취 못하면 플러스 발상을 아무리 많이 하더라도 뇌내 모르핀을 제대로 분비할  수 없는 결과를 초래한 것이다.

    그리고  뇌내 모르핀이라 불리는  호르몬 물질은 앞에서  언급했듯이 전부 20종이  알려져 있는데,어느 것이나 티로신이라는 아미노산이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따라서 티로신이 없으면  뇌내 모르핀 계통의 호르몬을  만들 수 없는 것이다.  티로신은 필수 아미노산이 아니기 때문에 몸에서 얼마든지 만들 수  있다. 하지만 이것 역시 재료가 필요하다. 따라서 고단백질 식사를 일상화하여  항상 재료를 충분히 보충할 필요가 있다. 고단백질  식사가 중요한 이유를 이제 어느 정도  납득하리라 믿는다. 뇌내 모르핀에 유익한 식사법은 제3장에서  좀더 자세히 다룰 예정이니 참고하기 바란다.

    포인트 식사.운동.명상 세가지

      뇌내 모르핀에 관해 알아두어야 할 중요한 사항이  또 하나 있다. 그것은 뇌파와의 관계이다. 뇌내  모르핀이 분비될 때는 반드시 뇌에서 α파인  뇌파가 동시에 방출된다는 사실이다. 뇌파가  β파 상태가 되면 β-엔돌핀은 사라진다. 그런데 외부의 자극을 받아들이는 방식에  따라 뇌파 역시 α파나 β파로 다르게 방출된다. β파도 우리가  살아가는데 필수 불가결한 요소이지만  β파만 방출한다면 인간은 오래 살 수 없으며 즐거운 시간을  보낼 수도 없다. 반면에 α파를 방출하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무슨 일이고 긍정적인  자세로 감사하며 플러스 발상을 하도록  노력한다면 얼마든지 α파 상태를 만들 수  있다. α파와 뇌내 모르핀은 닭과 계란같이 어느 쪽이 먼저인지 구분할 수 없을 만큼 서로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다. 그런데 α파 방출에 가장 좋은 방법은 명상이다. 따라서 명상에 임하는  훈련을 많이 하면 α파를  그만큼 쉽게 방출할 수  있을 것이다.

    α파를 방출한다는 것은 β-엔돌핀 같은 쾌감 물질을 분비한다는 것을 의미하며 그것이 자유자재로  가능해지면 인생의 빛깔  역시 그만큼 멋지게  바뀔 것이다. 우리 인간은  일반적으로 어떤 일을  시작할 때 무의식적으로  긴장한다. 그래서 실력을 제대로 발휘 못하게 되는 이른바  ‘노력 역전의 법칙’이 작용되는 것이다. 이렇게 되는 원인은 아드레날린 계통의 신경전달  호르몬 때문이다. 이때 플러스 발상을 하여 의식적으로  뇌내 모르핀을 분비시키면 그와  동시에 뇌에서 α파를 방출하여 대뇌의 전두연합야가  활성화된다. 그러한 상태에서는 의식  세계와 잠재의식 세계가 하나로  통합되어 성공을 향한 긍정적인  발상을 프로그램 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상태에서는 잠재의식을  의식적으로 통제할 수 있으며 여러  가지 능력을 활성화시킬 수도 있다.

    잠재의식을  자극해서 좋은 아이디어를 떠올릴 수도 있고 정신 상태를 예민하게  만들 수도 있다, 그러면 그만큼 뛰어난 창조성을  발휘할 수 있을 것이다. 프롤로그에서  식사.운동.명상 세 가지가 아주 중요하다고  말한 의미를 이제 어느 정도 이해하리라  믿는다. 뇌내 모르핀에 유익한 ‘식사’, 근육을 붙이는 ‘운동’,α파를 방출하는 ‘명상’  이 세 가지는 정말 중요한 포인트라 할 수 있다.

    ‘병은 마음에서’ 라는 옛말은 의학적으로도 타당하다

      뇌내 모르핀의 효능이 밝혀짐에 따라 인간의 마음을 조절할 수 있다는 사실이 증명되었다. 인간의 마음은 뇌 안의 뇌관과  대뇌변연계 그리고 대뇌신피질로 구성된다고 말할 수 있는데,  마음을 관장하는 이 뇌에는 에이 텐(A10)이라는 신경이 들어 있다. 에이 텐 신경은 쾌감신경이라고도 하는데, 이 신경이 어떤 자극을 받으면 우리 인간에게  쾌감을 전달한다. 그런데 여기에서 흥미로운 것은  이 신경이 성욕과 식욕, 체온 조절과 같은 극히 원시적인 생리 욕구에서 운동과 학습, 기억은 물론 지고한 인간  정신을 관장하는 전두연합야까지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인간은  맛있는 음식을 먹거나  성행위를 하면서 굉장한  쾌감을 느끼며 스포츠나 학습을 통해서도  커다란 쾌감을 맛볼 수 있다. 그리고  이웃이나 사회에 도움이 되는 행위를  통해서도 차원 높은 정신적 기쁨을 맛볼  수 있다. 인간의 사고나 행위에서 발생하는 이 같은 쾌감은 모두 에이텐 신경에서 비롯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에이 텐 신경은  약 17-8년 전에 발견된 신경으로, 이것은 β-엔돌핀 등의 뇌내  모르핀의 존재를 밝히는데 중요한 단서가 되었다.  뿐만 아니라 에이 텐  신경에 대한 계속된 연구는 또 다른  굉장한 사실을 발견하는 계기로 작용했다. 그것은 우리 인간의 뇌가 에이 텐 신경을 조절할 수 있다는 사실이다.

    개나 고양이는 물론 파충류도 에이 텐 신경을  가지고 있으며, 그로 인해 그만한 쾌감을 느낄 수 있다. 그러나 이런 동물에게는  에이 텐 신경을 조절하는 상위뇌가 없다.  그러나 인간은 대뇌신피질을 갖고  있기 때문에 에이 텐 신경을 통해 쾌감을 얻을 수 있을 뿐 아니라 사고방식 여하에 따라 에이 텐 신경을 자유롭게 조절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  에이 텐 신경을 자유롭게  조절하는 열쇠가 되는 것이 바로  뇌내 모르핀의 하나인 β-엔돌핀이다. 대뇌신피질을  제거해 버리면 인간은 개나 고양이와 별반 다를 게  없어진다. 또한 개나 고양이의 상위뇌인 대뇌변연계까지 제거한다면 인간의 뇌는 파충류나 다를 바 없는 수준으로 떨어진다. 인간이  식생활이나 성행위에 동물과는  다른 의미나 가치를  부여할 수 있는 것도 대뇌신피질  덕분인 것이다. 또한 더욱 차원이 높은  사랑의 감정이나 자기 실현 같은 것으로 욕구 수준을 높여갈 수 있는 것도 대뇌신피질이 있기 대문에 가능하다.

    그런데 인간이 자신의 행위를  이처럼 지고한 수준으로 승화시키려고 하는 원인은  그것이 그만큼 커다란 쾌감을 수반하기 때문이다.  아무리 고매한 이상을 갖고 있다 해도 그것이 일정한 쾌감을 수반하지 않는 한 아마 어느 누구도 그렇게 살아가려고 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인간은 바람직한 행위를 하면  이로운 호르몬이 분비되는 조직을 체내에 갖추고  있다. 그래서 연인이나 아이를 위한 행동  혹은 아내나 조직을 위한 행위라면 아무리 괴롭고 힘들다 해도 그것을  통해 쾌감을 얻을 수 있는 것이다.  그러면 뇌파는 α파 상태가 되고 그만큼 많은 β-엔돌핀을 분비하게 된다. 또한  β-엔돌핀은 기억력을 향상시키거나  인간 관계를 원만하게  유지하는 것 그리고  의욕이나 인내력, 창조력을 발휘하는 분야에도 관계하고 있다. 그래서  인간은 자신의 사고방식 여하에 따라 정신 활동을 유익한  방향으로 이끌어갈 수도 있고 나쁜 방향으로 이끌어 갈 수도  있다.

    매사를 긍정적으로 생각하며 플러스 발상을  하도록 노력하면 β-엔돌핀이 분비되어  기분이 좋아진다. 그러나 화를 내거나  부정적으로 생각하여 남을 미워하거나 원망하는 마음을 가지면  β-엔돌핀은 분비되지 않는다. 이런 현상이  일어나는 이유에 대한  메커니즘은 아직 밝혀지지  않았다. 그러나 확실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은 ‘병은 마음에서 생겨난다’는 옛사람들의 정의가 의학적으로도 극히 타당하다는 사실이다. ‘행복하다’ 거나 ‘기쁘다’ 혹은 ‘운이 좋다’고 긍정적으로 생각하면 β-엔돌핀의  세계로 들어갈 수 있다. 하지만  동일한 상황에서도 ‘싫다’ 거나 ‘밉다’ 혹은  ‘복수하겠다’ 고 생각하면 불쾌감과 질병, 돌발사고, 적대감, 실패, 실의  좌절감과 같은 자기 파멸의 골짜기로 빠지게 된다. 뇌내 모르핀의 세계는 아직도 밝혀지지 않은 신비에 싸여  있다. 내가 알고 있는 내용은 아마 전체의 10%에도 미치지 못할 것이다. 그러니 여기서 단 하나 단언할 수 있는 것은 뇌내  모르핀의 정체 규명과 활용법  개발이 21세기를 향한 의료계의 최대 목표일 수밖에 없다는 사실이다.

    제2장 근육이 붙으면 병에 걸리지 않는다

    지방을 섭취해도 성인병에 걸리지 않는다

      지방은 성인병의 커다란 원인 중의 하나다.  여기에 스트레스가 겹쳐지면 거의 대부분 질병의  영향권 안에 들어가게 된다.  그런데 현대 사회는 이  두 가지가 쉽게 누적될 위험이 많기 때문에 성인병이 증가할 가능성은 그만큼 높아질 수밖에 없다. 이 세상에서  과식이 원인이 되어 죽음을 맞게 되는  대상은 인간과 가축 그리고 동물원의 동물밖에 없다. 가축이나  동물원의 동물도 인간이 관리한다는 점을 볼 때, 결국 그 책임은 인간에게 있는 것이다. 그러나 아무리 반성을 거듭해도 인간은  맛있는 음식을 먹고  싶어하는 본능적 욕구를  억제하기 힘들다. ‘알고 있지만……’이라고 말하면서도 나쁜 식생활 습관을 바로 잡지 못하는 것이다.

    그런데 맛있는 음식은  예외 없이 지방을 포함하고 있다. 좀 과장해서 말한다면 과식으로 인한 죽음은 결국 지방질 누적(지방독)때문이라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지방독은 어떻게 해야 막을 수 있는가? 일반적으로 우리는 지방질 섭취를 피하는 것이  가장 바람직한 방법이라  생각하고 있다. 그러나  그것이 가능하다면 문제는 없겠지만 불가능하기 때문에 문제가 발생하는  것이다. 나는 지방질 음식을 멀리하지 못하는  심정을 이해한다. 왜냐하면 맛있는 음식은 기분을  좋게 만들기 때문이다. 기분이 좋아지면 뇌내 모르핀이  분비되어 그만큼 플러스 효과가 되는 반면, 먹고 싶은  음식을 못 먹으면 스트레스가 쌓여 그  자체로 노화나 성인병의 원인이 된다. 어느  쪽이나 문제를 가지고 있는 셈이다.

    따라서 지방독의 해를 막는 가장 좋은 방법은  운동을 통해 적당한 근육을 유지시켜 나가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근육과 산소만  있으면 지방은 완전 연소되어  탄산가스와 물로 변하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말해서 일정한 근육  상태만 유지한다면 지방독에 침해 당할 위험은 사라지게  되는 것이다.

    반면에 중년이 되면 금방  뚱뚱해지고 쉽게 성인병에  걸리는 원인도 근육량이  감소하기 때문이다. 근육은  몸의 형태를 잡아주고 몸이 움직이도록  도와주는 역할 외에 또  다른 중요한 기능을 담당한다. 혈액 순환을 원활하게 돕는 기능이 바로 그것이다. 혈액은 펌프 역할을 하는 심장 박동에 의해  전신으로 흘러가서 각 세포에  영양소와 에너지를 공급한 다음, 세포의 노폐물을 담은  정맥혈이 되어 다시 심장으로 돌아온다. 이 정맥혈이 다시 심장으로 돌아오는 바로 그때 전신 근육의  힘이 필요한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근육을 제2의  심장이라 부르기도 한다. 즉 인체 내부의  혈액 순환은 심장과 전신  근육 때문에 가능하다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근육이  줄어들면 혈액 순환이 원만하게 이루어질 수  없다. 이것이 성인병의 도화선이 되는 것이다.

    근육의 유지 상태는 자신의  복부를 보면 쉽게 확인할 수 있다.  배가 많이 튀어나왔다는 것은  근육이 줄어들고 지방질은  그 이상 누적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배가 많이 나온 사람은 그만큼 혈액 순환이  나쁘다 할 수 있다. 배를 복강이라고 하는데 이것은  빈 공간에 내장을 담고 있다는 뜻이다.  이처럼 배에는 빈 공간이 많아 지방이 쌓일 가능성이 가장  크다. 물론 지방은 피하에도 쌓이지만 복강에 특히 많이  쌓인다. 그래서 배를 보면 지방이 쌓인  정도를 한눈에 파악할 수 있는 것이다. 또한 배가 튀어나왔다는  것은 이미 뇌세포가 상당히 죽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배의 상태 하나로 노화의  진행 속도나 성인병에 걸릴 위험 정도를 어느 정도 판단할 수 있는 것이다.

    격한 운동은 25세로 마감 짓자

      그렇다면 배가 나온 사람은 어떻게 해야 하는가.  물론 배가 나왔다는 건 근육이 빠졌다는 것을 의미하므로 근육을 붙이기 위해 운동을 하면 에너지가 발생하고 그러면 독성 활성 산소가 동시에 발생되므로 이것을 완전히 중화시키지 않으면 안 된다. 25세를 넘지 않은 젊은 시절에는 인체 내부에서 SOD를 충분히  생성하여 활성 산소의  독을 중화시키기 때문에 걱정할 필요가 없다. 

    그러나 뇌의 발육이 멈출 무렵이 되면 어떤 이유 때문인지 SOD의 발생도 멈추어 버린다.  그러므로 근육을 단련시키고자 하는 사람은 뇌가 한참 성장하는 젊은 시절에 운동을 하는 것이 좋다.  젊을 때는 격렬한 운동을 해도 SOD를 생성하여 활성  산소를 곧바로 중화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가장 이상적인 근육 단련법은 이 시기에 근육을 충분히 발달시키고, 그 이후는  그것을 유지하도록 노력하는 방법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뇌가 발육을 멈추었다 해도 근육을 단련하면 된다. 어쨌든 25세 이후에는 가급적 과격한  운동을 피하고 지방을 산화시킬 수 있을 정도의 부드러운  운동을 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부드러운 운동은  뇌내 모르핀을 분비시켜 활성 산소의 독성을 중화시키는 부수적인  효과도 가지고 있다.

    그러나 호르몬을 제대로 분비하여 독성을 중화시키는 일은  그리 간단하지 않다. 왜냐하면 뇌는 의외로 나약한  기관이기 때문이다. 뇌는 몸 전체에 비해  아주 작은 기관에 불과하지만 에너지  소비량은 상당한 양에 달한다.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산소 소비량만 하더라도  전체의 20%를 육박하고 있다. 따라서 항상  산소의 원활한 공급이 필요하며 잠시라도 중단되면 그 영향을  가장 먼저 받는다. 뇌는 산소 공급이 중단될 경우,  단 3분도 견뎌내지 못한다. 그렇기 때문에 다른 장기는 살아 있더라도 뇌사 상태에  빠지는 사태가 발생한다. 또한 한번  죽은 뇌는 두 번 다시 정상으로  돌아오지 않는다.

    뇌는 이렇게 나약하기 때문에  뇌혈관 곳의 혈액 흐름이 나빠진다는 것은 다른 부분의 혈액 흐름이 나빠진다는 것과 근본적으로 다른 의미를 갖는다. 제 1장에서  뇌내 모르핀을 분비해야 한다는 이야기를 귀찮을 정도로 강조한 이유는 그 자체의  중요성 때문이기도 하지만, 노르아드레날린이나 아드레날린을 분비하면 뇌혈관이  수축되어 뇌 속의 혈액 흐름이 저하될 염려가 있기  때문이다.

    내가 알고 있는  한, 혈관을 수축시키는 가장 커다란 주범은 노르아드레날린과 아드레날린이다. 이것을  많이 분비하면 혈관이 수축되고 급기야는 막혀버릴 수도 있다. 그 메커니즘은 다음과 같다.

    우선 혈관이 수축되면 혈액이 원활하게  흐르지 못한다. 혈액 흐름이 나빠지면 산소  공급량이 줄어든다. 산소가 부족하면  혈액 성분 가운데 하나인  혈소판(platelet/혈액 응고에 관여하는 혈구 중의 하나)등이 쉽게  파괴되고, 파괴된 혈소판은 혈병(thrombus/혈액 성분들에 의해  형성된 집합체)으로 변해 혈관  수축을 가속화시킨다. 또한 혈관에 지방이 침투되더라도 혈액의  흐름만 원활하면 지방은 좀처럼 끼지 않는다. 그러므로 혈관을 막는  가장 큰 원인은 호르몬에 의한 혈관  수축이라 할 수 있다. 뇌의 굵은 혈관이  막히는 것을 뇌경색이라 하는데, 뇌경색 전단계에는 반드시 가는 혈관이 막히는 현상이  일어나며 막힌 부근에 있는 세포는 점차 죽어간다. 이것이 이른바 치매의 시작이다. 30대 후반이 되면 이런 형태로 하루에 약 20만개 정도의 뇌세포가 죽어간다고 한다. 하루에 20만개는 대단히 많은 양이다.

    그러나 뇌를 젊게 유지할 수만 있다면 뇌세포가 죽는 양을 대폭 감소시킬 수 있다. 인간은 본래 생체학상  120년을 살 수 있도록 설계되어 있다. 그러므로 타고난 기능을 손상하지 않는  한 수명에 관해 그리 걱정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따라서 이런 문제를 극복하기 위한 최대의 과제는  근육을 단련시키는 데 있다. 그런데 앞에서 말했듯이,  운동으로 근육을 단련하려면 다량의  에너지가 필요하며 에너지를 사용하면 활성  산소의 발생도 동반된다. 따라서 활성 산소로  인한 피해를 최소화시키면서 근육을 단련하는 방법을 연구해야  하는 과제가 남는다. 그 과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먼저 활성 산소가 발생되는 과정에 관해 상세히 알아둘 필요가  있다.

    여기서 한가지 집고  넘어가야 할 사실은 혈액이  재관류할 때 활성 산소가 가장  많이 발생한다는 것이다. 재관류란 일단 혈액의  흐름이 멈추었다가 다시 정상적으로 흐르는 것을 말한다. 모세  혈관의 굵기는 혈구 한 개가 겨우 통과할  수 있을 정도다.  그런데 노르아드레날린이 분비되어  갑자기 모세 혈관이 수축되었다고 하자. 그러면 혈액의 흐름이 순간적으로 멈추게 된다. 그러나 심장이 펌프 역할을 하여  계속 일정한 압력으로 혈액을 내보내기 때문에 혈액은 곧바로 다시 흐르기  시작한다. 바로 이때 활성산소가 발생하는 것이다. 이때 발생한 활성  산소는 우선 세포를 공격하여 유전자에 상처를  입힌다. 그러면 상처 입은 부분에서  암이 발생하는 경우도 있으며, 설사 유전자가  상처를 입지 않았다 하더라도  혈관 내피에 상처가 생겨  염증이 생길 수 있다. 

    어떤 경우든 혈액이 봄날 시냇물처럼  원활하게 흐르지 않으면 만병의 근원이 된다.  화를 잘 내는 사람이 빨리 죽고 온화한  성격의 소유자가 오래 사는 이유는 이처럼 사고방식에 의해 다르게 생성된 물질로 인하여 혈관 수축의 정도가 달라지기 때문이다.

    운동 후, 곧바로 쉬지 않는 것이 요령

      앞에서 설명한 대로 혈액을 항상 원활하게 흐르게 하려면 단단한 근육을 유지해야 하며 그러기  위해서는 적절한 운동이 필요하다. 이때 활성  산소의 해악을 최소로 줄이는 요령  가운데 하나는 갑자기 운동을  멈추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해를 돕는 사례로 적절할지 모르나 남녀간의  성행위를 한 예로 삼아 설명해 보겠다. 이미 알고 있는 바와 같이 성행위는 상당히 격렬한 운동이다. 따라서 활성 산소가 대량으로 발생한다.  사람에 따라 다소 차이는 있겠지만, 섹스 행위는 기분을 좋게 하여 뇌내 모르핀의 분비를  촉진시킨다. 그래서 점점 더 격렬한 행위로 나아갈 가능성이 많다. 물론 이 과정에서  분비된 뇌내 모르핀은 몸에 이롭게 작용한다. 몇몇 고지식한 사람은 부정하겠지만, 예로부터 섹스가 미용과 건강에 좋다는 설이  있다. 뇌내 모르핀이 많이 분비된다는 사실  하나만 보더라도 이것을 단순한 속설로 외면할 수는 없다. 욕구를  충족시켜 뇌를 기분 좋은 상태로 만들면 누구나 신체적 정신적으로 긍정적인 결과를  얻을 수 있다.

    다만 문제는 격렬한 운동을  어떻게 수습하느냐는 것이다. 격렬한 운동을 하면  혈액의 흐름이 빨라진다. 그런데  그 운동을 갑자기 멈추면 이제까지 순조롭게  흐르던 혈액에 갑자기 산소 결핍 현상이 일어난다. 이런 현상을 산소부채(O2 debate)라 부르는 데,  이것은 운동할 때 평소  여분으로 비축해 두었던 산소의  양까지 모두 소비해 갑작스럽게 산소가  부족하게 되는 것을 말한다. 전력으로  100미터 달리기를 하고  나면 숨이 차서 헉헉거리게  된다. 그것은 달리는 동안  몸에서 빌려 쓴 산소를 원상태로  되돌리기 위해 서둘러 산소를 보급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때 혈관 속에서는  재관류와 동일한 현상이 일어난다. 활성 산소가  대량으로 발생되는 것이다. 따라서 격렬한 운동을 한 다음  갑자기 동작을 멈추는 것은 건강에 매우 해롭다.

    따라서  섹스가 끝났다고 등을 돌려 곧바로 코를  골며 자는 습관 역시 건강에  좋지 않다. 침대에서 일어나 방안을 걸어 다니거나  샤워를 해서 갑자기 동작을 멈추는 것을 피해야 한다. 다시 한 번 강조하건대, 섹스가 끝나자마자 동작을 멈추는 행위는 건강에 매우 좋지  않은 결과를 낳는다. 가장 이상적인 것은 행위가  끝난 다음 두 사람이 함께  기공을 하는 것이지만 보통 사람은 좀처럼 실천하기 어려우리라 생각된다. 그렇다면 간단히  목욕을 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서로 몸을 씻어주면서 대화를 나누는 것도 가벼운 운동이 될 수 있다.

    야구 선수 가운데 투수는 경기를 마친 다음날 어깨를 움직일 수 없을 정도로 심한 고통을 느낀다고  호소하는 경우가 많다. 이것은 투구 방법이  잘못된 탓이기도 하지만 경기를 마친 후에 가벼운 피칭을 하여 급격하게 흐르던 혈액의 흐름을 서서히 늦추지 않았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시합 후에 몸을  가볍게 움직여 주면 심한 피로감이나 고통은 상당히 줄어들  것이다. 섹스를 한 다음날 심한 피로감에 시달리는 사람도 마찬가지다. 행위가 끝난  뒤에 그대로 자버리기 때문에 피로가 그대로  쌓이는 것이다.

    어떤 운동이든 이튿날 가장  피로감을 느끼는 곳은 전날 사용했던 근육 부분이다. 그러나 실제로  피로가 쌓인 곳은 사용한 근육만이 아니다. 비록  우리가 자각을 못하지만, 뇌  역시 상당히 지쳐 있는 상태다. 운동을 한  다음, 특히 격렬한 운동을  한 다음에는 어떠한 경우에도 갑자기 동작을 멈추어 휴식 상태에 들어가지 않는 것이 활성 산소의 해를 줄이면서 근육을 단련하는 요령이다. 이 점을 조심한다면 운동은  인체 각 기관과 뇌를 젊게 하는데 많은 도움이 될 것이다.

    격렬한 운동은 백해무익

      격렬한 운동에 관한 얘기가 나온  김에 지옥 훈련의 폐단에 관해 언급하고 넘어가는 게 좋겠다.  지옥 훈련이란 하나의 수행과정이라  볼 수 있다. 소위 극기 훈련이란 것도  여기에 속한다. 하지만 여기에  대해서는 찬반 양론이 분분하다.

    지옥 훈련에는 대부분 종교적인 신심이나 자기 단련을  위한 수행 등이 많다. 폭포수를 맞거나 한겨울의 혹한 추위에 얇은 옷만 입고 산 속을 뛰어 다니는 등의 훈련도 지옥 훈련의 좋은 예다. 또한 운동량이  극히 격렬한 운동 선수들의 지옥 훈련이 있는가 하면 운동량은 그리  많지 않지만 심리적으로 매우 힘든 극기 훈련도 있다. 이 같은 훈련을 모두 한데 묶어 지옥 훈련이라 할 때, 과연 이런 훈련이 인간에게 좋은가  나쁜가 하는 문제를 한 번  검토하고 넘어가지 않을 수 없다. 이 문제에 대해 언급하기 전에 우선 내  어린 시절에 겪었던 지옥 훈련의 경험을 몇 자 적어 보겠다.

    나는 어릴 때  보통 사람들이 좀처럼 체험하기 힘든 맹훈련을 받았다. 프롤로그에서  잠시 언급했듯이, 우리 집안은 대대로 동양의학을 가업으로 이어왔기 때문에 가업을  이어받을 사람은 특수한 과정을 통과해야 했다. 일종의 왕위 전수 수업과 같은 힘든 과정이었는데, 나는 고작해야 대여섯 상에 불과한 어린  나이부터 이런 고된 수행을 억지로 받아야 했다.  감나무에 하루 종일 묶여 있거니 밤중에 산  속에 앉아서 아무 이유도 모른 채 밤새껏 별을 바라보아야 했다. 폭포수를 맞는 일은 아무렇지 않을  정도로 온갖 힘든 수행을 강요당했다. 이러다가  죽는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머리 속에서 수  없이 떠오를 정도였다. 이렇게 고달픈  수행을 받다 보면 너무 힘들고 괴로운 나머지  죽고 싶은 지경까지 이르게  된다. 처음에는 노르아드레날린과 아드레날린은  물론 활성 산소도 많이 분비되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위험을 무릅쓰면서도 왜 많은 사람들이 혹독한  수행을 하는 것일까? 그것은  극한 상황에서도 뇌내 모르핀을 분비할 수 있는 훈련을 쌓기 위한 것이다. 

    극한 상황을 계속 체험하다 보면 은연중  기쁨으로 바뀌어  가는 것을  느끼게 된다.  그래서 그  체험을DNA(deoxy ribonucleic acid/디옥시 리보 핵산)와  RNA(ribonucleic acid/ 리보 핵산)에 주입시키면 다음부터는 쓰라린 체험을 하더라도 뇌내 모르핀을 분비할 수 있게 되고 고통 속에서도 기쁨을 맛볼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 단식이라는 수행 과정을 하나의 예로  들어보자. 이것은 식욕이라는  본능을 억제하는 상당히  힘든 수행법 가운데 하나이다. 나는 5-6세부터 단식을 했으며, 국민학교에 입학한 다음에는 1주일 동안  단식을 하는 경우도 많았다.  이때는 물만 마시고 식사는  일체 하지 않는다. 몹시 배가 고프고  의식이 몽롱해 지지만, 정신은 아주 깨끗하고 맑아진다. 그래서  할아버지가 귓전에 대고  속삭이는 소리가 그대로  마음에 전해지고 서서히 행복감에 빠져들게 된다. 일반인들은 그다지  실행하지 않는 이런 수행을 한 덕분에 나는 나름대로 집념과 인내력을 키울  수 있었다.

    그러나 다른 사람에게 이런 수행을 권하고 싶은 생각은 없다.  옛날에는 뇌내 모르핀의 존재를 전혀 알지 못했다. 극한  상황만 극복하면 그 너머에 이상야릇한 행복감과  쾌감의 세계가 있다는 정도만 어렴풋이 느꼈을 뿐이다. 그러므로  한 번 극한 상황을 극복하고 나면 다음에는 같은  상황에 처하더라도 자포자기하지 않고 오히려 적극적으로 거기에 대처하려는  근성이 생겨난다고 믿었다. 오랜 세월 동안  많은 사람들이 이러한 사실을 깨닫게 되었고, 심신을  단련하는 방법으로 수행을 실행하게 된 것이다.

    여기에서  중요한 포인트는 자신이 처한 쓰라린 상황을  플러스로 전환시키는 데 있다.  그러나 이것을 마이너스로 받아들이면  오히려 노르아드레날린과 아드레날린이 나오고 동시에 활성 산소가 분비되어 매우 위험한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 나 역시 처음에는 마이너스로 받아들였다. 그러나 다행이 선조 대대로 이런 수행을 통해 쌓아온  긍정적 요소들의 흔적이 유전자 속에 들어 있어 비교적 빨리 극복할  수 있었다. 만일 그렇지 못했다면 마이너스  결과만 초래했을 가능성도 높았을 것이다. 가끔 세간에 화재가  되고 있는 극기 훈련이라는 것도 그 취지와 효과를 완전히 무시할 수는 없지만, 나는 그다지 찬성하지 않는다.

    그러나 지나치게 과보호를 받고 자라는 요즘 아이들에게 합숙 과정을 통해 평소와 다른 검소한  식사나 불편한 생활을 체험하게  만드는 것이 긍정적인 결과를 낳을 수도  있다는 것에는 동의한다. 의학적으로  볼 대 뇌가 발육  단계에 있는 동안은 틀림없이 좋은 효과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뇌는 대부분  열 살 정도까지 성장하므로 이 같은 훈련을 하려면 열 살 이전에  하는 게 좋다. 한 사람의 성장 과정을 볼 때 세 살,다섯 살,일곱 살,열  살은 하나의 성장 전환점이 될 수 있다.

    얘기가 다소 옆길로 빠졌으나 어쨌든  극단적인 수행방식은 나름대로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뇌내  모르핀의 메커니즘이 밝혀진 현재로서는 구태여 위험이 따르는 격렬한 운동이나 수행을  할 필요가 없다. 뇌내 모르핀에 관한 지식을 익혀서  잘 응용하는 것으로 충분하기 때문이다. 긍정적인 사고, 감사하는 마음, 타인에 대한 사랑, 플러스 발상 등을 행동으로 옳기면 좋은 결과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운동 선수를 모방한 힘든  운동이나 지옥 훈련은 그다지 권장할 만한 방법이 아니다. 훈련 자체의 좋고 나쁨을 떠나, 혜택 받은 풍요로운 환경에서 성장한 사람이나 수행 능력이 부족한 사람에게 갑자기 혹독한 수행을 강요하는 것은 오히려 부정적인 결과를 초래할 확률이 크기 때문이다.

    30대 이후에는 가벼운 맨손 체조가 이상적

      젊었을 때는 과격한  운동을 해도 상관없지만, 대개 25세 이후의  과격한 운동은 득보다 해가 많다. 이  점을 명심해 두기 바란다. 그렇다면 30세 이후에는 어떤 방법으로 근육을 단련하는 것이 좋은가. 가장  좋은 방법은 체조 계통의 유연한 운동이다. 체조는 평상시 잘 쓰지 않는 근육을 움직여주는데 그 의미가 있다.

    근육에는 근긴장성섬유 (tonofiboil/ 근긴장에  관여하는 근육섬유)가 있는데, 이것은 뇌의 시상하부(hypothalamus)와 이어져 있다. 그래서 이  근육이 자극을 받으면 뇌내  모르핀이 분비되어 기분이  좋아진다. 운동선수가 운동을  히는 도중에 행복감은 느낄 수 있는  것도 바로 이 근육은 사용하기 때문이다.  이 근육을 펴주면 다른 효과도 얻을 수 있다. 뼈 속에 많은 혈액이 흘러 들어가게 되는 것이다.

    근육을 펴준다고 해서 어떻게  뼈 속에 피가 흘러 들어가게 되는지 이상하게 생각하는 사람이 많겠지만, 그것은 다음과 같은 원리로 설명할 수 있다. 가령 대나무 통 한 개가 있고  겉에 구멍 몇 개가 뚫려 있다고 하자. 그  대나무 통을 물에 젖은 수건으로 싸고  바깥쪽을 비닐로 감는다. 그리고 나서 두 손으로  꽉 눌렀다고 하자. 그러면 물은 당연히  구멍을 통해 통속으로 들어가게 될 것이다. 근긴장성섬유를 펴주면  위의 대나무 실험과 똑같은  효과를 얻을 수 있다.  뼈 속에 많은 피가 흘러 들어 가면 뼈의 노화를  방지하는데 큰 효과가 있을 뿐 아니라 골다공증을 치료하거나 예방하는데도  아주 뛰어난 효과를 얻을 수 있다. 

    맨손 체조란 관절을 움직이지 않고 최대한으로 근육의 긴장을  높여가는 운동을 말한다. 맨손 체조는 본격적인 운동 전 단계에  하는 워밍업이므로 이것이 끝나면 근육을 단련하는 본격적인 운동에 들어간다. 근육을 강화하려면  일정한 힘을 사용해야 하기 때문에 파워트레이닝이  필요하다. 중요한 것은  어느 정도의 힘을  가하는 것이 가장 바람직한 가의 문제이다.  사람에 따라서 다소 차이가 있겠지만, 힘을 전혀 사용하지 않는다면 별다른  효과를 기대할 수 없다. 반면에 힘을  너무 과중하게 사용하게 활성 산소의 해를 입을 수 있다. 따라서 연령.성별 등에 근거한 다음과 같은 공식을 참조하여 자신에게  적절한 운동량을 산출해서 기준으로 삼는 것이 좋다.

    남성의  최고 심박수=209-0.69×연령  여성의 최고 심박수=205-0.75×연령

    위에 제시한 공식에 근거하여 개개인의 심박수를 산출하여 그 심박수의 60-75%를 유지하도록 운동을  하는 것이 이상적이다. 만약 지나치게 힘을  사용하면 근육은 붙지만 활성  산소의 독으로 피해를 입게 된다는 사실을  명심하기 바란다. 근육을 붙이는 목적은 어디까지나 피의 흐름을 좋게 하고 몸에 해로운 지방질을 산화시키기 위함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이 목적에서 벗어나  과도하게 운동을 하면 오히려 해가 될 가능성이 높다.

    우뇌를 사용하는 인문계 사람들이 오래 산다

      운동 선수는 겉보기에  상당히 건강하고 강인해 보인다. 그리고 잘  단련된 근육은 아름답기조차 하다. 하드 트레이닝을 통해 육체를 단련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격렬한 훈련은 반드시 활성 산소를 동반한다는 사실을 지적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스포츠 의학을 공부한 사람은 잘 알겠지만, 스포츠맨들은 겉보기에는 건강해 보이지만 실제로는 건강하다고 말할 수 없다.  오히려 그렇지 않다고 하는 편이 더 적절할 것이다.

    그 증거로 일반인들은  힘든 일을 하면서도 정년 60세까지 별 탈없이 근무하는 사람이 대부분이지만 스포츠를 직업으로 하는 사람 가운데에서는 60세까지  현역으로 활동하는 경우를 거의  찾아볼 수 없다.   프로 야구만 하더라도 30세가 넘으면 베테랑이며 40대 현역은  손가락으로 꼽을 정도다. 마라톤 같은 운동은  20대가 황금기이며 40대에게는 극히 무리한 운동이다.  뿐만 아니라 스포츠맨은 일반인에  비해 신체에 자주 이상이 생기고 수명도  짧다. 이들은 스포츠를 통해  돈과 명예를 얻는 대가로  자신의 육체를 기꺼이 혹사하기로 단단히 각오하고 있기 때문에 그럭저럭 어려운 상황을 극복해 나가는 것에 불과하다. 그러므로 보통  사람이 이들을 흉내 내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라  할 수밖에 없다.

    최근에는 아마추어 마라톤이 유행이라 일반인도 많이 참가하고 있다. 마라톤이 너무 좋아  몸을 해쳐도 괜찮다고 생각한다면 모르겠지만, 만일  건강을 위해서 마라톤을 한다면  당장 그만 두는 게 좋다. 아마추어  마라톤은 백해무익한 일이다. 여성마라톤 선수의 경우, 그것으로 청춘을 불사르며 자신의 길을 닦아나간다는 의미에서는 나름대로 선택의 여지가 있을지  모르나, 그것을 통해 일반적인 의미에서 말하는  여자의 행복을 얻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선수 대부분이 생리불순으로 고통을 받고  있으며 생리를 한다고 해도 무배란일 가능성이 많기 때문이다. 정자나 난자는 활성 산소의  공격을 쉽게 받기 때문에 과격한 운동을 하는 선수는 아이를 낳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낳더라도 기형아를 낳는 마이너스 결과를 초래할 확률이 높다.

    지나친  운동이 몸에 좋지 않다는 사실은 운동과 수명의  관계를 나타낸  자료에서도 명확하게 나타난다.  이것은 운동과 수명의  관계를 나타낸 그림인데 장수라는  측면에서 확실히 스포츠계 사람들이  불리하다는 사실이 잘 드러난다. 몸을 단련해서 튼튼한 근육을 갖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스포츠맨 출신이 일찍 죽는 이유는 활성 산소로 인한 피해를 그만큼 많이 받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또한  인문계와 이공계를 비교한다면, 인문계가  상대적으로 더 오래 사는 현상을 볼 수 있다. 이것은 인문계가 우뇌를 많이 사용하는 반면 이공계는 논리. 계산 등으로 좌뇌를  많이 사용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우뇌를 많이  사용하는 인문계가 더 오래  사는 이유는 뇌내 모르핀이 우뇌에서 먼저  분비되기 때문이다.

    이것은 뇌내 모르핀이 너무나 중요하다는 사실을 다시 한 번 확인할 수 잇는 사례라 할 수  있다. 그러므로 건강하게 장수하기를 바란다면 지속적인  운동을 통해 근육을 단련시키는 노력이 필요하다. 그러나  지나친 운동은 오히려 역효과를 낸다는 사실을 명심하기 바란다.

    근육을 키우는 운동과 지방을 없애는 운동

      요즘은 남녀를 불문하고 살을  배야겠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굉장히 많은 것 같다. 성인병의 원인  중의 하나가 비만이라는 사실을 감안할 때  정말 바람직한 경향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한가지 걱정스러운  것은 운동으로 지방을 줄일 수 있다고 믿는 소박한  신앙이 널리 퍼져 있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실제로 격렬한 운동을 해도 지방은 거의 빠지지 않는다. 지방은  오히려 부드러운 운동을 할 때 많이 빠진다.

    근육  운동에는 크게 두 가지  방법이 있다. 하나는 근육을 붙이는 운동이고 다른 하나는  지방을 없애는 운동이다. 이 둘은 전혀  별개의 운동이라 할 수 있다. 근육을  붙이는 운동은 파워 트레이닝이다. 무거운 역기를 들어올리는 등의 운동이  바로 여기에 속한다. 이에  비해 가벼운 워킹(wal-king/걷기)을 장시간 하는 것은  지방을 없애는 운동에 속한다. 어째서 격렬한  운동으로는 지방을 연소시킬 수 없는가.  그 이유는 간단하다. 지방을 연소시키려면 많은 양의 산소가 필요한데 격렬한 운동은 대량의 산소를 소모하므로 정작 지방 연소에 필요한 산소가 부족하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100m 전력 질주와 같은 격렬한 운동으로는 지방을 전혀  소모시킬 수 없다. 그러므로 살 빼기가 목적이라면  격한 운동은 되도록 삼가는 것이 좋다. 그런 운동은  아무 효과도 없을뿐더러 도리어 활성 산소의 공격을 받는 계기로 작용할 뿐이다.  고른 호흡을 하면서 부드러운 운동을 장시간 계속하면 산소가 충분히 공급되어  지방을 점차 연소시킨다.

    지방을 없애는 운동으로 가장 좋은  것은 워킹이다. 매일 한 시간 정도  워킹을 하면 많은 효과를 얻을 수 있다. 부드러운 운동은  뇌내 모르핀을 분비하여 운동 자체를 편안하고 즐거운 행위가 되게 한다. 식사를 마치고  휴식을 취한 다음 산책을 하면 다소  과식을 했더라도 지방을 충분히  연소시킬 수 있다. 걷는  양은 하루에 총 1만 3천보  정도가 적당하다. 그러나 일상생활에서 기본적으로 걷는  양이 있으므로 운동 삼아서 걷는 양은 약 8천보에서  1만보 정도가 적당하다. 각자 이것을 염두에 두고 자신이  하루에 걷는 양을 계산해 보는 것도  좋을 것이다.

    참고로 설명한다면 총  1만 3천보라고 하는 운동량은  미국의 한 병원에서 환자에게 걷기 운동을 시키며 질병을 치료한 결과에서  나온 수치이다. 1만보를 걸을 때는 병이 재발되었으나 1만 3천의 운동량에서 는 건강을 향상시킬 수 있었기 때문에 하루에 걷는 양이  이 정도면 적당하지 않을까 추정하는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부드러운 운동은 웬만큼 부지런하지  않는 한 현실적으로 좀처럼 실행하기 힘들다는 데에 있다. 건강에 좋다는 사실을 잘  알면서도 실천에 옮기기가 어려운 것이다. 따라서  필요하다면 함께 걸을  사람을 만들어 매일  주기적으로 산책하는 것도 좋은 방법일  것이다. 자신에게 좋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좀처럼  실천에 옮기지 못하는 것이 세상살이다. 그러나 누군가가  지켜보고 있다거나 격려해 준다면 혹은 함께  산책을 한다면 그 자체가 유쾌하기  때문에 열심히 하게 될 것이다.

    운동은 기본적으로 활성 산소를 대량으로  발생시키기 때문에 통계적으로 보면 격렬한 운동을  많이 한 사람은 일찍 사망한다. 그렇지만  지방독을 해소하려면 근육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며,  근육을 키우려면 운동을 해야 한다. 따라서 근육이 부족한 사람은 우선 맨손 체조로 가볍게 근육을 풀어 준 다음 파워 트레이닝을 하는 방법이 좋다. 그런 다음 다시 부드러운  운동을 한 시간 정도 해서 지방을 연소시키도록 한다.  이렇게 하면 필요 없는 지방을 연소되고  혈액 순환이 좋아져 성인병에 걸릴 위험을 줄일 수 있다.

    비만도 사라지고 콜레스테롤도 낮아진다

      또 한가지 성인병 예방에 큰 효과가 있는  것이 명상이다. 명상은 기공과 함께 동양의학의 중요한 요소  가운데 하나로 꼽히는데, 이것은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대단히 효력을  발휘한다. 그래서 나는  질병의 종류에 관계없이  모든 환자에게 가벼운 운동과 명상을 권하고 싶다. 여기에  식이요법과 메디컬 마사지를 적당히 덧붙여서 실시하면 어떤 고질적인  성인병이라 하더라도 기적처럼 치료할 수 있다.

    이런 요법을  통해 개선된 사례 몇  가지를 아래에 소개하겠다. 명상에 의한 효과는 뇌파 측정기를 이용해서  α파가 방출되는 양을 측정하는 방법으로 확인했다.

    사례 1)  58세의 한 부인은 진단 결과 고혈압과  우울증으로 판단됐다. 비만 정도는 플러스 25로  상당히 높은 편이었다. 또한 총콜레스테롤  수치도 275로서 이것 역시 정상을  훨씬 웃도는 수치였다.(정상치 120-220). 증상은 불면과  강박관념으로, 이렇다 할 원인도 없는데 늘 쫓기고  있는 듯한 불안과 초조감에 시달려 좀처럼 잠을 이루지 못한다고 하소연했다. 나는  이 환자에게 식이 요법과 운동요법 그리고 명상  세 가지에 메디컬 마사지를 덧붙여서 실시하였다. 

    그 결과는 다음과 같다. 비만도는  3.5까지 내려갔는데, 이것은 정상치 범주에 속한다(정상치는 ±10). 총콜레스테롤 수치도 215까지 내려갔다. 정상치가 120-220이라  할 때, 이것 역시 정상으로 회복되었다고  할 수 있다. 이 환자를 치료할 때는 명상이 특히 효과적이었다.  이 부인은 꽃을 너무  좋아한 나머지, 꽃을 보면 안색이 딴 사람처럼 변할 정도였다. 그래서 꽃이 가득  찍힌 이미지 비디오를 보여 주어 꽃에 관한 이미지를  뇌리에 심어놓은 다음 명상실에서 명상을 하게  했다. 이런 훈련을 몇 번 되풀이 하다 보니, 어느덧 꽃에  대한 이미지를 쉽게 뇌리에 떠올려 α파를 그만큼 많이  방출하게 되었다. α파를 방출하는 정도는 그림과  같은 방법으로 측정한다. 우선 α파가 50% 이상 방출될 때를 1점으로 하고 이것을 점수로 환산한다.  다음에는 전체 면적에 α파가  차지한 비율을 계산하는데, 이것은 클리어 레이트(clear rate)라 한다. 그리고 양쪽 점수를 합쳐서 전체 점수(토털)를 뽑아낸다. 만점은 100점인데, 이 환자는 처음에 11밖에 되지 않았으나 치료 후에 60점까지 늘어났다. 11점이란 상당히 위험한 질병권 내에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은 건강의 기본이  되는 뇌내 모르핀이 거의  분비되지 않는 상태이기도 하다. 이렇다 할  원인이 없는데도 ‘자기는 이 세상에서 가장  불행한 인간’ 이라고 생각하며 언제나 우울한  상태에 빠져들게 된다. 다시 말해 플러스  발상이 불가능한 것이다. 낮에는 꾸벅꾸벅  졸고 밤에는 잠을 이루지 못하며, 망상이 일어나고 환청이 들리기도 하기  때문에 그대로 방치하면 정신병으로 발전될 가능성도 높다.

    우울증에 걸린 사람은 거의 하루 종일 자는 경우가 많다. 의욕을 불러일으키는 도파민 호르몬이 고갈되어 거의 분비되지  않는 상태이기 때문이다. 이것을 파킨슨 병이라고 부른다. 파킨슨 병의 반대는  도파민이 과다 분비되는 경우인데 이것을 ‘분열증’ 이라  부른다. 약물을 먹으면 순간적으로  반짝하는 정도의 치료 효과를 볼 수 있지만  근본적인 치료는 거의 불가능하다. 그런데 이  환자는  명상과 식이요법 그리고 운동을 통해 매우 좋은  상태를 회복했다. 이런 질병은 비록 그  증상이 신체적으로 나타나지만, 본질적으로  볼 때 마음의 병이라  할 수 있다. 정신 신체 장애(psychosomatic disease)라  하는 게 바로 이것인데, 지금은 이 같은 심신증 역시 뇌가 분비하는 물질로 판단할  수 있게 되었다. 뇌내 모르핀에 대한 억제 물질이  과도하게 분비될 때 이런 질병에 걸리게  되는 것이다. 나는 기본적으로 이 환자가 뇌내 모르핀을 많이  분비할 수 있도록 치료했다. 정신 신체 장애는 뇌내 모르핀을 많이  분비하여 몸 전체에 영향을 미치게 만들면 거의 대부분 호전 된다.  뇌 속을 혁명할 수만 있다면 어떤  사람이라도 좋은 결과를 얻을 수 있다.

    그러나 오늘날 의사들은  이런 이야기에 그다지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다. 명상에 빠지면 머릿속을 깨끗이 비울 수 있다. 역으로 말하면 머릿속을 깨끗이  비운 상태를 명상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웬만큼  훈련하지 않으면 이런 상태에 접근하기  어렵다. 머릿속을 비우려고 하면 오히려 잡념만  생겨 더욱 복잡해지기  때문이다. 따라서 앞에서 말한  사례에서 잘 나타나듯이, 자기가 좋아하는 사물에 대한 이미지를 명상 전 단계에 미리 뇌리에 심어놓은 과정이 필요하다. 명상을 할  때 즐거운 이미지를 떠올리면 뇌내 모르핀이  나와서 기분이 좋아질 뿐 아니라, 잡념 역시  비교적 쉽게 없앨 수 있기 때문이다. 잡념이 생길 여지를 없애면 진정한  명상의 영역에 도달할 가능성이 높아지고, 설사  그런 단계에 접근하지 못한다 하더라도  최소한 뇌내 모르핀의 작용으로 심신이 호전되어 자연 치유력이 높아질 것이다.

     사례 2) 46세의 중년 여성이다. 이 사람은 나이에 비해  간 기능이 엉망이었다. 뚱뚱한 몸이 아닌데도  고지혈증과 이로 인한 지방간 증상이 있었던  것이다. 야윈 몸매에 비해 근육은 적고 지방이 아주  많았다. 단명하기 쉬운 유형으로 암에 걸릴 확률이 아주 높은  체질이었다. 나는 이 사람 역시 앞의  환자와 같은 방법으로 치료했다. 그  결과 273에 달하던 총콜레스테롤 수치가 통원  치료 4주만에 207까지 내려갔다. 간기능  상태를 나타내는 효소량인 GOT.GPT(간기능을  나타내는 효소,둘 다 0∼40까지를 정상으로 보고 있음)가 77과  88이었으나, 이것은 32와 34까지 떨어졌으며 간기능  장해를 나타내는 효소로 대개 30까지를 정상으로 봄)는 325에서 123으로 내려갔다.

    이 여자는 개를 너무 좋아해서 개 얘기만 나오면 굉장히 행복스러워했다. 병원에 올  때도 늘 개를 데리고 올 정도였다. 이 환자의 경우는 개 얘기를  하면 뇌내 모르핀을 분비할 수 있었다.  그래서 나는 이 환자로 하여금 아침에 개를  데리고 산책을 다니게 한 후, 여러  가지 대화를 나누었다. 그런 다음에 명상실로  들어가서 명상하도록 권했다. 이 환자를 개를 데리고 산책하는 그  자체로 상당한 치료 효과를 얻을 수  있었다.

    사례 3) 63세의 한 남성은  당뇨병과 고혈압으로 고생하고  있었다. 공복시의  혈당량이 273이나 되어 결국 입원 치료를 받게 되었다. 입원할  당시만 하더라도 의식이 몽롱할 정도로 상태가 아주  나빴기 때문에 처음에는 인슐린 주사를 놓았다.  그후 내복약으로 바꾸고 인슐린 주사는 중단했다. 혈당치가  273에서 126까지 떨어진 다음부터는 운동과 명상을  병행시켰다.

    이 사람은 전에 항공 회사에서  근무했던 경험이 있어 비행기를 무척 좋아했다. 비행기 얘기가  나오면 옛날 일을 회상하며 즐거워하곤 했다. 그래서  나는 이 사람에게 새가 되어 하늘을  날아다니는 상상을 해보라고 권했다. 눈을  감고 자유롭게 하늘을 날아다니는  이미지를 떠올리도록 만든 것이다. 이  사람은 비행기를 탄 경험이 많았기 때문에  후지산이 보인다거나 날씨가  맑아서 기분이 좋다는 등의  이미지를 쉽게 형성할 수  있었다. 그와 동시에 상당히 긍정적인 결과를 얻을 수 있었다.  몇 번 명상실을 들락거리는 사이에 약도 주사도 필요 없게 되었다. 혈당치는  인슐린 주사를 중단한 상태에서도 110이하를 유지하게 되었다.

    사례4) 역시 당뇨병이 있는 43세의 남성이다.  그의 당뇨는 유전상일 뿐 아니라 통풍(gout/acid/gout 정도를 나타내 주는 수치가  됨)은 9.7로 높은 편이었다. 건강을 위해  조깅을 계속했는데, 사고로 무릎을 다치면서 운동을 못하게 된  것이 증상 악화의 원인인 것 같았다.  나는 이 환자에게도 처음에는 인슐린을 투여했다. 그리고 식이요법과 운동, 명상을 통해 α파를 많이 발산하도록 만들었다. 입원  당시에는 스트레스가 많이 누적되어 있었고, 어두운 것이 싫은 나머지 밤에  잠을 잘 때도 불을 켜놓을 정도였다.  그러나 치료를 시작한 다음부터는 생활  스타일이 개선되었고 건강 상태도 많이  향상되었다. 200이상이던 혈당치도 치료한 결과 투약하지 않은 상태에서 150이하를 유지하게 되었고, 요산치도 8.0이하로 떨어졌다.  명상에는 특별한 유형이 없다. 우리 병원명상실에서는 의자에 기대거나 옆으로 눕는 등 자유로운 자세를 취하게 하고 머리에 헬멧를 씌워 뇌파 상태를 측정하고  있다. 명상 도중에 α파가 50%이상 방출되면 찌륵찌륵 하는  벌레 신호음이 울린다. 그러면 환자는 자신의  뇌파가 지금 어떤 상태에 있는지 바로 이해할 수 있고 어떤 기분이 되면 좋은 뇌파가 나오는지 자기 나름대로 판단할 수 있게 된다.

    동양의학은 기분을 좋게 만드는 의학

      우리 병원에서는 명상과 운동 그리고 식이요법 세 가지가 주된 치료 내용인데 또 하나 독자적으로 메디컬 마사지를 실시하고  있다. 이것은 동양의학의 지압과 서양의학의 마사지가 가지고 있는 각각의 장점을 혼합한 것으로 그 개요는 다음과 같다.  지금까지 살펴 본 바와  같이 성인병 원인의 대부분은  혈관의 노화와 혈관 막힘이라 할 수 있다. 단적으로 말해서  혈관이 약화되어 경색 증세가 일어나면 심장병과 뇌졸중, 협심증,  암, 통풍, 고지혈증 등 갖가지 장해가 생기게 되는 것이다. 혈액만 원만하게  흐른다면 성인병은 쉽게 생기지 않는다. 근육을 강화시키고 지망을 없애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나 명상을 해서 뇌파를 조정하는 이유도 궁극적으로는 피의 흐름을 원활하게 만들기  위한 조치의 일환이다.

    동양의학은 전통적으로 피가  잘 흐르도록 돕는데 초점을 맞추고 있다.  지압 요법이나 기공이라 불리우는 건강법이 바로 그것이다. 심호흡과  체조를 통해 체내의 기와 피의 흐름을 좋게  만드는 기공은 성인병 예방에 특히 효과적이다.  기공은 단순한 호흡법이나 체조방식이  아니다. 개중에는 심리요법의 하나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는데,  그건 너무 단순한 규정이다.  기공은 전신 이완법이라는 내향적인 방법을 통해 심신을 단련하는 방법이며 자기 조절을 통해서 자연 본래의 상태를 회복하는 동양 특유의 운동이다. 그래서 기공은 오래  한 사람은 인간 본연의 상태, 즉 천인합일(사람과  하늘이 일체화되는 것)의 상태를 회복할 수  있다. 이것은 인체 내부의 잠재능력을  끌어내고 생명력의 근원을 강화시키는데 지대한 역할을 담당한다.

    이 같은 효과가 나타나는 이유를  의학적으로 해석하면 결국 기공이 뇌내 모르핀을  그만큼 많이 분비시키는 역할을 하기 때문이라  판단된다. 위암은 심한 스트레스나  알코올로 찌든 위에 염증이  생기거나 어떤 발암 물질이 침투하여 화학반응을 일으킬 때 발병한다. 혹은  활성 산소가 발생되어 유전자에 상처를 입히는 경우에도  발병할 수 있다. 그런데 염증이란 것은  피가 원활하게 흐르지 못해서 생기는 것이기 때문에 혈액 흐름이 원활한 사람이라면 암에 걸릴 확률 역시 그만큼 낮아질 것이다. 메디컬  마사지는 동양의학의 지압요법에 서양의학의 마사지 요법과 검사 방법을 도입하여 혈액의 흐름 상태나 울혈의 위치를 정확하게 파악하여 치료하는  방법이다.

    인간에게는 좌우 대칭으로  31대의 척수 신경이 있으며 이  신경은 전신의 말초신경으로 퍼져 나간다. 인체  어딘가에 이상이 있으면 아무리 구석진 곳이라  하더라도 그것은 척수 신경을 통해 뇌로 연결된다. 동양의학에서 볼 때, 인체는 365개소의 경혈(신체의 표면에  침이나 뜸으로 자극을 가하는 자리)을  가지고 있으며 각각의 경혈은 경로라는 신경  대동맥을 통해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이 경혈을 자극하면 특정기관의 혈액 흐름이 원활해진다.  또한  경혈은   뇌의  상행망양부활계(ascen-ding  reticuloactivating system)라는 신경계를 경유해서 뇌 속의  에이텐 신경과 연결되므로 경혈을 자극하면 뇌내 모르핀 분비를 촉진할 수 있다. 

    특별한 병이 없는데도 마사지를 받는 사람이 있는데, 이것은 건강을 지키는 좋은 방법이다. 마사지를 하면 뇌내 모르핀이 나와서 혈액 순환을 좋게  만들기 때문에 인체의 좋지 않은 기관이 자연스럽게 치유된다. 병에 걸리기 직전, 즉 미병의 단계에서 다시 건강한 상태로 되돌린다는 동양의학의  기본적인 사고방식도 바로  여기에 그 기초를  두고 있다.

    동양의학에서는 오래 전부터 특정한  경혈에 침을 놓아서 진통 효과를 발휘시켰다. 침을 놓아서  마취 효과를 강화시킨 후에  외과 수술을 하기도 했다. 그런데 특정한 경혈을 자극하면 진통 효과가 창출되는 이유는 오랫동안 의문에 싸여 있었다. 하지만 최근의  의학적인 성과에 의해 그것이 바로 뇌내  모르핀 덕분이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게다가 뇌내 모르핀은 에이 텐 신경계를  자극하게 되는데 이 신경계는 인간의 창조력과 의식, 의욕,  기억, 감정 등을 지배하고 있기 때문에 이러한 기능을 높여 주는 효과도  동반한다.

    단적으로 말하자면 동양의학은 기분을 좋게 만드는  의학이다. 기분이 좋아지면 스트레스가  해소되고 기억력이 향상된다. 또한 면역력이 높아지고 창조력이 생기며  긴장이 완화되고 염증도 고칠 수 있다. 이처럼 모든 것이 상호 연관되어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하는 것이 동양의학의  기본  개념이다.  메디컬  마사지를   할  때는  우선  MRI(magnetic resonance imagination/자기 공명 영상)  등의 첨단 의료기기를 사용하여 혈관이 막힌 상태를  검사하거나 내시경으로 위  내부 조직을 검사한다.  여기에서 나온 각종 데이터를 수집·분석하여  적절한 처방을 내리게 된다.  기본적으로 동양의학과 서양의학을 결합할 때 비로소 가능한 치료법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치료는 발의 경혈을 자극하는  것으로 시작하여 장딴지와 넙적  다리 그리고 등의 경혈로, 하부에서 점차 중추로  상승하여 마지막으로 복에서 끝낸다. 이 마사지는 한 번 하는데 약 두 시간이 걸린다. 얼굴의 경혈을 마사지하는 경우도 있다. 얼굴은 경혈 덩어리이기 때문에 이곳만  제대로 마사지해도 호르몬 분비를 상당히 좋아지게 만들 수 있다. 어깨가 뻐근할 때 그  부분을 만져 보면 딱딱하게 굳어 있을 뿐 아니라  우드득거리는 소리도 난다. 동양의학에서는  이것을 ‘나쁜 기가 뭉쳐 있다’라고 말하지만, 서양의학의 입장에서 설명하면  유산이 뭉쳐 있기 때문이다.

    동양의학에서 말하는 나쁜 기의 정체가 바로 한곳에 똘똘 뭉쳐 빠져나가지 못하는 유산 등의 여러  가지 불완전 연소 물질인 셈이다. 이렇게  되는 원인은 혈관이 수축된 결과 더러운 피가  제대로 빠져나가지 못하는 동시에 신선한 피가 들어오지 못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산소가 부족하게 되고 불완전 연소  현상이 발생하는 것이다. 불완전  연소는 산성 물질을 발생케 하고 혈관  수축을 가속화시킨다. 이 같은 악순환이 일정 정도 진행되면 성인병이 나타나기 시작한다. 그러나 메디컬 마사지는 이러한 악순환을 막아  미연에 성인병을 방지할 수 있게 해 준다.

    병에 걸리기 전에 치료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동양의학은 뇌내  모르핀을 끌어내는 의학이며  그 지표로 삼는  것이 뇌파다. 뇌파가 α파 상태가 되면 뇌내 모르핀이 분비된다.  그러나 뇌파를 쉽게 α파 상태로 만들  수 있는 환경에 사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대부분이 스트레스를 많이 받는 조건에서 살아가기 때문이다. 이런  경우에는 뇌파를 α파로 바꿔주는 기계를 사용하여 스트레스를  푸는 방법을 채택할 수 있다. 뇌파를  α파 상태로 만들어 주면 뇌내  모르핀을 분비시켜 스트레스를 풀 수 있다. 

    스트레스를 푸는 가장 바람직한 방법은 기공이나  명상이지만 좀처럼 그럴 기회나 시간을 만들지 못하는 사람이라면 해소하는 편이 건강에 훨씬  유익할 것이다. 현대인은 끊임없이 스트레스를 받으며 살아가고 있다. 각자  나름대로 해소법을 찾아내며 살아가고 있겠지만, 개중에는 자각이  불가능한 스트레스도 있다. 특히 오랜 시일에 걸쳐 먼지처럼 조금씩 쌓여 가는 스트레스는 그만큼 포착하기 힘들 것이다. 특별히 아픈데도 없고 건강 진단을 받아도 별  이상이 없다. 그러니까 나는 건강하다. 하지만 이런 생각이나  믿음은 잘못된 것이다. 건강은 의료 검사에서 나온 수치만으로는 판단할 수 없기 때문이다. 

    세계 보건기구, 즉 WHO(World Health Oranization)는 건강에 대해 다음과  같은 유명한 정의를 내렸다. ‘건강이란 단순히 질병에 걸리지  않거나 병약하지 않은 상태를 뜻하는 것뿐만  아니라 신체적.정신적.사회적으로도 안전한 상태를  의미한다’ 이것은 건강에 대한 매우 바람직한 해석이라 생각한다. 

    내가 진찰한 사람 가운데에는  사회적으로  상당히 성공한 사람도 많다. 이런  사람은 사회적으로 더 이상 바랄 것이  없을 정도로 대부분 충족된  생활을 하고 있다. 이런  사람을 진찰해 보면 매사에  의욕이 넘치고 정신적으로나 신체적으로 별다른  부정적인 징후가 나타나기 않는다.  겉으로 드러나는 현상만으로 볼 때, 이런 사람은 병원에 찾아올 필요가 없다. 이런 사람들이 병원에 찾아오는  이유는 대개 건강 진단을 받기 위해서인데,  현재의 의료계 수준이라면 건강에 이상이 없다는  판정을 내려 되돌려 보내는 경우가 대부분일 것이다.

    그러나 그처럼  건강해 보이는 사람이라도 잠시 대화를 나누다  보면 곧 질병으로 발전하고 말 요소들이 불쑥불쑥 튀어나온다.  그들 중에는 굉장한 투쟁형의 인간이나 공격적인  인간 혹은 염세주의적인 사람이 많다. 아직은  아무 병에도 걸리지 않은 상태이지만 그대로 두면 가까운 장래에 성인병에 걸릴 가능성이 높다. 나는 이런 사람을 대하면 뇌내  모르핀에 대한 얘기를 해주고 사고방식을 전환하도록 넌즈시  권유한다. 공연한 말참견이라 생각하겠지만, 특별히 아픈 데가 없더라도 곧 병에 걸릴 위험에 놓여 있거나 단명으로 끝날 요인을 갖고 있는 사람이 적지 않다.

    지금까지 그런 판단은 거의 적중했다. 메디컬 마사지를 하면서 몸을 만져  보기만 해도 질병에 걸릴 징후들이 곳곳에  나타난다. 일반적으로 병원은 병에 걸린 사람이 찾아오는 곳이므로 의사라는 직업에 종사하고 있는 한 나는  많은 환자를 상대할 수밖에  없다. 그런데 환자를 마주할  때마다 뭔가 잘못되었다는 생각을  씻어 버릴 수가 없다.  할아버지는 내게 ‘환자가 찾아오면 두 손 모아 사죄하라’ 는 사상을 늘 강조했었다. 동양의학에서 의사는 기본적으로 환자를 만들지 않기 위해 존재한다. 미병의 단계에서 예방.치료하여 질병을 미연에 방지하는 존재인 셈이다. 

    앞에서 잠깐 언급했듯이, 본인은 전혀 병을 자각하지 못하고 단지  살을 빼기 위해 입원했는데  결과적으로 완전히 건강한 몸으로 퇴원하게 된 청년과 같은 사례가  앞으로 펼쳐 나가야 할 의술의 방향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이것은 동양의학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다. 이제부터는 동서양의 울타리를 허물어 인류  전체가 병에 걸리지 않도록  하는 방향으로 의술을 지향해 나가야 한다. 이를  위해 위의 청년이 치료받은 의료 데이터를  아래에 적어보겠다. 그러면 서양의학과 동양의학이 만난 의료 행태가  어떤 것인지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전형적인 치료  사례이므로 자세히 소개하기로 한다.

    이 청년은 신장이 173센티미터, 입원  당시에 체중은 103킬로그램이며 연령은 28세였다. 결혼을 앞둔 그는 약혼자가 살을 빼라고 해서 입원하게  되었다. 이 청년은 자신은 상당히 건강하지만 살이 많이 찐 것이 문제라는  정도로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진찰한 결과 곧 질병에  걸리게 될 징후가 여러 가지 나타났다.  그래서 우리 병원은 칼로리 제한과  근육 트레이닝을 중심으로 청년을 치료했다. 영양사가 짜 준 식단에 의해 식이요법에 충실하고, 아침 저녁 매일 두 차례씩 워킹 머신과  카이오 바이크(운동 부하용 자전거)를 가지고  운동을 실시했다. 여기에 명상을 덧붙여서  약40일간에 걸친 치료를 했다. 그 결과는 입원과 퇴원 당시의 두 데이터를 비교하면 잘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는 입원할 때 이미 질병에 걸릴 가능성이 높은 위험한 상태였다. 그대로  두면 성인병에 걸릴 게 불 보듯 뻔했다. 30대나 40대가  되면 매우 심각한 성인병에 시달릴 상황이었다. 곧 결혼하여 아이도  생길 터인데, 그  아이가 초등학교에 들어갈  무렵에 아버지가 병에 걸려 장기  입원하게 된다면 젊은 부인의 걱정은 이만 저만이  아닐 것이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그렇게  될 가능성은 매우 높았다. 그러나 이것은  나 혼자만의 걱정이고  본인은 전혀  눈치조차 채지 못했다.  그런 사람이 하루에  1600∼1800칼로리의 식이 요법과 근육 트레이닝으로 체중을 15킬로 그램이나 줄였으며 다른 수치도 거의  정상치로 되돌렸다. 그러나 청년은 자기가 병에  걸릴 위험에 놓여 있었다는 사실도, 그것이 나았다는 사실도 모른  채 살이 빠졌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아주 만족스러워하며  퇴원했다. 사실 체중 15킬로그램을  줄인 정도의 다이어트는 아주 만족할  만큼 대단한 일은 아니다. 체중 감량  20킬로그램 정도는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다른 수치와  균형을 이루기 위해 체중을 급격하게 줄이지 않았을 뿐이다. 보통 사람이라면 뚱뚱하다는  이유 하나로는 입원하지 않을 것이다. 이 청년 역시 결혼을 앞둔  상황에서 약혼녀가 원한다는 특수한 계기로 인해 입원했다.  그러나 시간적인 여유만 있다면 입원하지 않아도  충분한 효과를 얻을 수 있다.

     중요한 것은 지금 자신이 어떠한 상태에  있느냐는 것은 검사하는 수밖에 다른 방법이 없다. 건강 상태만  체크하면 지금 같은 생활 방식을 계속할 경우  몇 년 후에는 어떠어떠한 병이  생길 것이라고 가르쳐 줄  수 있다. 또한 병에 거리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생활 지도도 해줄  수 있다. 지도 사항을 잘 지켜 실천에 옮긴다면 대부분의 질병은 미연에 예방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도 병에 걸린다면  그때 병원에 가는 것이다. 나는 현재처럼 질병에 걸린 다음에야 치료하는  형태의 의술은 지양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지금부터라도 몸을 단련시켜서 젊음과  아름다움을 유지하도록 도와주는 여러 가지 시설과 의료 시설을 하나로 통합한  의료 시스템을 만들어 가도록 노력해야 할 것이다.

    α파를 일으키는 명상법

      지금까지 소개한 치료법을 모면 명상이 대단히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것이다. 사실 명상이야말로  동양의학의 중심 사상이며 이것만 가능하다면 뇌내 모르핀이나 α파는 물론 근육이나 혈관에 관한 문제도 모두 해결할 수 있다. 아니 명상은 여기에서 설명한  그 이상으로 대단한 효력을 가지고 있다. 그렇다면  명상이란 도대체 무엇인가. 지금까지  한 설명으로 어느 정도는 이해했으리라 생각한다. 그러나  세간에는 선이나 요가 등에서  수행하는 명상법을 명상의 전부로  생각하고 있는 사람이 많다. 그러나 동양의학에서  말하는 명상이란 그렇게 틀에 박힌 것이  아니며 또한 머리를 깨끗이 비우는 등의 어려운 행위를 요구하지도  않는다. 기분이 좋다고  느끼는 그 자체도  하나의 명상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할아버지 할머니가 손자의 귀여운 모습을  생각하거나 젊은  남녀가 사랑하는 연인을   생각하는 그 자체도 명상이다. 옛일을  생각하며 추억에 젖거나,  아름다운 경치를 바라보거나,  건전한 취미에  몰두하거나, 아름다운 음악이나 그림을 감상하는  행위는 물론 시냇물 소리나 산새의 지저귐  소리, 낙수가 떨어지는 수리, 바람이 부는 소리를 가만히 듣는 일도 명상의 하나이다. 사람에 따라서는  공항이나 항구의 소음도 기분을  좋게 하는 요소가 될  수 있다.

    α파를 발산하도록 자극하는 대상이라면  모두 명상의 재료가 될 수 있다. ‘푸리에의 α파 법칙’ 이라는 것이  있는데, 그림에서 보는 바와 같이 물결 모양의 중심선이 ‘f 분의  1’선상에 있으면 마음이 안정되어 명상에 도움이  된다. 이 법칙은 1920년경에 전기  공학 분야에서 많이 논의된 ‘f분의 1  소음’이라는 진동관의 열 잡음에 관계된 소음의 한 형태에서 시작되었다.  열 잡음은 일정한 경향성을 띠고 있기 때문에 규칙적인 진동이  생긴다는 것이다. ‘f분의 1 진동’은 그 잡음 연구의 원리에서 힌트를  얻어 창안한 이론으로, 최근에는 우주 창조의  원리도 이 이론으로 해명할 수 있다는 주장까지 발표되고 있다. ‘f분의 1 진동’이 원자나 분자의 운동은 물론 생명의 탄생에 이르는 모든  것에 관련되어 있다는 것이다.

    음악을 예로 들어 ‘f분의 1  진동’이론에 대해 간단히 설명해 보겠다. 음의 주의 주파수를 Y축으로 하고  음의 강도를 X축으로 할 때, 음의  강도와 주파수가 반비례하여 경사각 45도를  나타내는 직선이 있는데, 템포나 리듬의 중심이  이 직선 위에 자리하는 음악은  정서적으로 사람을 안정시킨다는 것이다.  우주가 만들어진 이래 자연계에 존재하는 모든  소리는 ‘f분의 1 진동’ 의 형태를 띠고 있으며, 이것은 오감을 통해 인간의 정서를 안정시킨다는 사실이 실험을 통해 증명 되었다. 그러나 개인차가 있어서  누구나 똑같은 반응을 보이는 것은 아니다. 그래서 우리 병원에서는 α파를  이끌어내는 방법을 400가지 정도 개발해  놓았다. 누구에게나 생각만 해도 기분이 좋아지는 어떤 대상이  있을 것이다. 명상은 바로 그런 대상을 머리에  떠올리는 행위라 해도 무방하다.

    반면에 어려운  말이나 학설은 전부 이해한다고 해도 뇌에 무리를 주어 β파를 발산하기 때문에 바람직하지 못하다. 명상의 목적은 뇌파를 α파로 만드는 데 있다. α파가 많아지면 뇌내 모르핀이 나온다. 차츰  익숙해지면 명상하는 도중에 그 대상을 다른  대상으로 바꿀 수도 있다. 따라서 명상을 하다 보면 매우  커다란 행복감을 맛볼 수 있게 된다. 그러면 인체를 위협하던 징후는 서서히 꼬리를 감추게 될 것이다.

    인간의 육체는 매우 교묘하게 만들어져 있을 뿐 아니라,  살아가는 데 필요한 모든 요소를 갖추고 있다. 악이 필요할 때는 내부의 제약  공장을 가동해서 필요한 만큼 공급해 준다.  그러므로 인체 내부의  능력을 올바르게 사용한다면  이상이 생기거나 병에 걸릴 위험은 거의 사라진다. 동양의학은 본래  인간이 갖고 있는 능력을 철저하게 활성화시키는 것을,  만일 스스로 그런 능력을 활성화시킬 수  없다면 지압이나 명상 그리고 호흡법이란 기술을 통해서 그 능력을 이끌어내는 것을 기본으로 한다.

    반면에  서양의학은 인간의 육체를 상세히 관찰하여 여러  가지 징후를 밝혀내고 만일  좋지 않은 징후가 있다면  약을 투여해서 고치거나 절단하는 방법을 택하는 것을 기본으로  한다. 약의 발상도 마찬가지이다. 약은 당장은 인간을 괴롭히는 증상에 대해서 효과가 있지만 그렇지 않은 부분에는 불필요한 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몸 전체로 볼 때  결과적으로 마이너스가 되는 경우가 많다.

    혈당치를 내리는 인슐린이  좋은 사례이다. 당뇨병이란 인슐린이  부족해서 생기는 병이다. 따라서  외부에서 주사를 통해 인슐린을 인체 내부에  주입하면 일단 급한 고비는  넘길 수 있다. 하지만  인슐린 부족 현상이 생기는  이유는 췌장이 이 호르몬을 제대로 만들어내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체외에서 이 호르몬을 주사기로 투입하면 췌장의  인슐린 생성 기능은 그만큼 더 후퇴하게  된다. 결국에는 장기 자체가 퇴화해 버리는 위험도 있다.  이것은 당장의 고비를 넘기기 위한 조치가 인체 전체에는 커다란 마이너스로 작용하게 되는 서양 의술의 한계를 잘 나타낸다.

    그래서  나는 당뇨병 환자를 만나면 단단히 각오하고  인슐린 주사를 중단하라고 권유한다. 물론 적절한 시기를 설정해서 행동에 옮겨야 하겠지만, 앞에서 소개한  사례에서 잘 나타나듯이,  당뇨병은 인슐린 주사  없이도 충분히 완치할 수 있다.  대부분은 절절한 운동과 식사 그리고 명상을  성실히 수행하는 정도로 가능하다.  이 같은 방식은 당뇨병은 물론  소화성 궤양이나 고혈압, 지방간, 암 등을 예방하고 치료하는 데에도 상당한 효과를 올리고 있다.

    하루 최저 5000보, 우뇌를 활동시키며 걷는다

       인간의 육체는 대개 25세를  전후로 발육을 멈추고 점차 노화의 단계로 들어선다. 노화의 진행을  그대로 방치하면 뇌 세포는 하루에 10만개  꼴로 죽어가고 근육도 쇠퇴하기 시작한다.  하지만 사회생활에 시달리다 보면  정신적으로나 시간적으로 인체를 단련할 여유가 점차 줄어든다.  그렇다면 일상 생활을 하면서도 뇌세포를 지키고 근육을  튼튼하게 유지하는 방법은 없을까. 

    다행스럽게도 누구나 할 수 있는 아주 간단한 방법 하나가  있다. 하루에 최소한 5000보를 걷는 것이다. 걷는 운동은 뇌내  모르핀을 분비하는데 아주 효과적이다. 원래는 1만 3천보를 기준량으로 잡고  있지만 최소한 5000보를 걸어야 한다. 이것을  꾸준히 실천하면 위에서 말한 목적은 거의 실현할 수  있다. 일상 생활을 통해서 기본적으로 걷는 양이 있긴 하지만  현대인의 생활 패턴으로 볼 때 아무래도 그 양은 턱없이 부족하다. 그러므로 부족한 양을 의식적으로 보충하는 노력이 필요하다. 걷는 양이 부족하다고  느낀 날은 퇴근한 다음에라도  산책을 해서 부족한 양만큼 보충해야 한다. 비가  와도 우산을 쓰고 걸어야  한다. 심한 폭풍우가 불지 않는 한 매일 5000보 이상  걷는 운동을 지속해야 한다. 산책 코스를  여러 개 만들어 놓고, 그때그때 기분에  따라 선택하는 것도 싫증나지 않게 걷는  운동을 지속할 수 있는 좋은 방법일 것이다. 

    걷는 동안에는 명상을 하는 석이 좋다. 편하게 눕거나 좌선으로  이완시켜야 명상이 가능한  것은 아니다. 산책을  하면서 명상을 하면 오히려 3∼4배 이상 효과적이다. 그렇다면 걸으면서  어떤 생각을 할 수 있을까. 나는 꿈이나 희망 그리고 장래 계획에 관해서 생각한다. 앞으로 병원을 어떻게 경영해 갈  것인가, 이상적인 병원을 만들려면 어떤 일부터  시작하는 것이 좋은가 등의 생각을  떠올려 본다. 일단 이런 생각을 시작하면  기분이 좋아지기 때문에 쉽게 멈출 수 없다. 심지어 비가  내리고 있다는 사실조차 까맣게 잊어버릴 때가 있다. 

    이런 상태에 빠져든다는 것은 우뇌가 그만큼  바쁘게 활동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α파는  우뇌에서 나오므로 우뇌를 활동시키려면  좌뇌를 진정시킬 필요가 있다.  그런데 좌뇌를 진정시키는데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  바로 걷는 운동이다. 좌뇌가 잠잠해지면  우뇌에서 지혜가 솟아오른다. 가만히 앉아서 하는 명상이 좋다고 하는  사람도 있으나, 가만히 있으면 좋은 지혜가  떠오르지 않는다. 오히려 많은 잡념이  생긴다. 그러므로 산책을 하면서 자기가 좋아하는 대상에 관해 생각하는  습관을 일상화하는 것이 몸에도 좋고 머리에도  좋다. 창조적인 생각이나  기발한 아이디어는 몸을  움직이면서 명상할 때  불쑥 튀어나온다.

    철학자 칸트는 매일 빼놓지 않고 산책을 했다고  한다. 어쩌면 칸트의 위대한 철학 사상은 산책을  통한 명상의 결과물인지도 무른다. 인간에게는 의식할  수 있는 세계와  의식할 수 없는 세계가  존재한다. 의식 세계와 무의식  세계가 바로 그것이다. 그런데 의식할  수 있는 세계에서 도출한 사고의 내용은  깊이가 얕을 수밖에 없다. 책상  앞에 앉아서 이론적으로 생각하려고 애쓰지 말고  몸을 천천히 주기적으로 움직여 좌뇌를 진정시키면서 모든 기억이 담겨 있는 무의식의 메시지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그러다 보면 자신이  경험한 일체의 기억은  물론 DNA에 새겨진  선조의 지혜까지 뒤섞여  있는 무의식의 세계에 들어가게  되며 거기에서 굉장한 착상을 떠올릴 수 있을 것이다.  이런 경지에 들어설 때 뇌파는 α파 상태가 되며,  뇌내 모르핀이 충분히 분비된다는 사실을 현대  의학은 증명해 보이고 있다.

    성인병에 걸리는 원인은 대부분 지방 때문이다. 누적된 지방에 강한 스트레스가 더해지면 병에  걸릴 위험이 높아진다. 근육만 적당히 유지할  수 있으면 지방독의 해를 막을 수 있다.  노르아드레날린과 아드레날린은 혈관을 수축시키는 주요 물질이다.  이것을 많이 분비하면 혈관이 수축될 뿐만  아니라 급기야 막힐 위험도 있다. 항상  혈액을 원활하게 흐르게 하려면 근육이 튼튼해야 한다.

    근육은 제2의 심장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섹스가 끝난 후에  곧바로 잠들면 그대로 피로가 누적되어  몸에 해롭다. 어느 운동이든 격렬한 운동을  한 다음에는 사용한 근육을 서서히  풀어주는 것이 피로를 막는 가장 좋은  요령이다. 근육은 물론 폐나 뇌 역시  갑자기 활동을 멈추는 것을 피해야 한다.  그러면 활성 산소의 피해를 줄일 수  있다. 30대 이후에는 맨손 체조와 같은  가벼운 운동을 통해 근육을 유지하는 것이 가장 좋다. 맨손 체조는  평소에 사용하지 않는 근육을 움직여 주는  아주 좋은 운동이다.

    근육에는  근긴장성섬유가 있는데, 이것은 뇌의 시상하부와 이어져 있다.  그러므로 이 근육이 자극을 받으면 뇌내  모르핀이 분비되어 기분이 좋아진다. 운동 선수가 운동을 하는  도중에 행복감을 느낄 수 있는 이유도 바로 이 근육을 사용하기 때문이다.  하루에 1만 3천보를 걸으면 근육을 유지하고 지방을 연소시킬 수 있다. 아마 이보다 좋은 건강법은 없을 것이다.

    이때 명상을  하면 효과가 더욱  커진다. 동양의학은 전통적으로  혈액의 흐름을 원활하게 하는데 초점을 맞추고 있다. 지압  요법이나 기공이라 불리는 건강법이 바로 그것이다.  심호흡과 체조를 통해 체내의 기와 혈액의  흐름을 원활하게 만드는 기공은 성인병 예방에 특히 효과적이다.  동양의학은 뇌내 모르핀을 끌어내는 의학이며  그 지표로 삼는 것은  뇌파이다. 뇌파가 α파 상태가  되면 뇌내 모르핀이 분비된다.

    그러나 뇌파를 쉽게 α파로 바꿀  수 있는 환경에서 사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대부분이 스트레스를 많이 받는 조건에서  살아가기 때문이다. 이럴 경우에는  뇌파를 α파로 바꿔 주는 기계를 사용하여  스트레스를 푸는 방법을 채택할  수 있다. 일상생활에 쫓기는 속에서도 뇌세포를  지키고 근육을 유지하기 위한 아주 좋은 방법이 있다. 누구나  할 수 있는 가장 간단한 방법은 하루에 최소한  5000보를 걷는 것이다. 걷는 운동은 뇌내  모르핀을 분비하는데 아주 효과적이다.

    제3장 항상 뇌를 젊게 보존하는 식생활

    뇌내 모르핀을 만드는 단백질

      동물이 이리저리  배회하는 이유는 무엇  때문일까. 그 이유는  대부분 먹이를 구하기 위한 것이거나  자손을 번식하기 위한 것이다. 그런데 암컷과  수컷이 만나 생식을 하는 시기는 대체적으로 정해져 있으나,  먹이를 찾는 작업은 따로 정해진 시기가 있을 수  없다. 다시 말해서 동물은 일생을 먹고  사는 문제로 움직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옛날에는 인간 역시 동물과  마찬가지로 음식물을 확보하기 위해 바쁘게  움직여야 했으며, 이는 모든 투쟁의 원인이 되었다.

    그러나 현재는 먹을  것이 남아돌 지경이어서 그런  문제로 고민하는 사람은 없다. 확실히 우리는 행복한 시대에  살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 잊어서는 안 될 것이 있다. 본래  인간의 육체는 굶주림 상태를 전제로 하여 구성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불시에 영양 보급이 끊어질지도 모른다는  상황에 대비하여 식욕 기능이나 지방 비축 기능이  가동되는 것이다. 그러나 이에 비해 음식물이  과잉 공급되는 상황에 대한 대응책은 의외로 미흡하다. 식료품이  남아도는 현대 사회에서는 자기 스스로  식생활을 컨트롤하지 못하면  건강을 해치게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현대인의 식생활에서 우선  주의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은 칼로리  과잉이다. 다행히 이 점에 대해서는 많은 사람이 주의를  기울이고 있다. 따라서 구태여 강조할 필요는 없겠으나, 다만 꼭  한가지 중요한 사항이 있다. 앞에서도 강조했지만 그것은 양질의 단백질을 충분히 섭취해야 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단백질은 뇌내 모르핀을 구성하는 곳이 뇌내 모르핀을 충분히 분비하기 위한 기본 조건이 되는 것이다. 그러나 아미노산은  뇌 안에 극소량밖에 축적할 수 없으며  곧 소모되는 특성이 있다. 따라서 한꺼번에 많은 양의  단백질을 섭취해서 아미노산을 비축한다는 것은 전혀 불가능하다. 뇌가 건강하고  활기차게 활동하도록 만들려면 양질의 단백질을 매일 공급해 주어야 한다. 이때  저칼로리 식사를 해야 한다는 사실을 항상 염두에 두고 있어야 함은 말할  필요도 없다.

    그렇다면 구체적으로 어떤 식사가 바람직한가. 좋은 식생활의 모델로 승려들이 먹는   정진요리를 들 수 있다. 전통적인 정진요리는 뇌의  젊음을 유지하는데 가장 좋은 식사 형태이다. 특히 콩을 가공한 두부나 밀병 그리고 삶은 나물 등은 양질의 식물성 단백질이 풍부하여 옛날 스님들이 치매를 예방하고 장수하는데  최고의 역할을 했다. 그러나 요즘처럼 식료품이 풍부한 시대에  옛날 승려와 같은 정진요리 식사법을 실천하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미식을  하지 말라는 얘기는 아니다. 먹는 것 역시 인생의 큰 즐거움 가운데 하나이므로 이런 즐거움을 빼앗아 버리면 스트레스가 쌓일 수 있다. 맛 없는  음식만 먹거나 먹고 싶은 양을 마음껏  먹는다면 편식이나 과식으로 인한 해를 피할  수 없을 것이다. 음식을 먹을 때는  뇌내 모르핀이 분비된다 하더라도 편식이나 과식은 활성 산소가 발생하는 원인이 되기 때문에 결과적으로는 신체에 해를 입히게 되는 것이다.

    고단백·저칼로리 식생활이 이상적 

      우리가 음식에서 섭취하는 영양소  가운데에서 단백질은 그다지 맛이 좋은 편이 아니다. 단백질 그 자체가 맛이 없기 때문이다. 가장 맛있는 영양소는 지방이고 그 다음이 탄수화물이다. 단백질 식품이 맛있는  이유는 그 음식에 지방이 섞여 있기 때문이다.  단백질이 많이 들어 있다는 스테이크나 장어가  맛있는 이유도 지방질 때문이다.  따라서 단백질을 섭취하기 위해 이런 음식을  많이 먹으면 몸이 뚱뚱해지기 쉽다. 지방은 에너지원을 비축하는 데 가장 효율적이다. 인간의 몸은 지방이 체내에  들어오면 곧 저축 체재로 돌입한다. 이것은  너무나 당연한 현상일 수밖에 없다.  지방이 아닌 다른 물질로 에너지를 축적하려면  체중 60킬로그램인 사람은 315킬로그램의 거인이 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지방이라는 편리한 영양소로 에너지가  축적되기 때문에 지금 현재의  체구로 생활 가능한 것이며, 며칠 동안 굶어도 생명을  유지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어떤 경우든 넘치는 것보다는 모자라는 것이 낫다. 지방 역시  필요 이상으로 축적되면 혈관을 막는 원인으로  작용한다. 식생활에서 한가지  주의할 일은 고칼로리  식사를 하면 단백질이나 탄수화물 등  남아도는 모든 영양소가 지방질로  변한다는 사실이다.

    에너지로 축적되는 영양소가 모두 지방질로 바뀐다.  탄수화물이나 단백질 등 남아도는 영양소가 전부 지방으로 바뀐다는 것을 전제로 하면 지방 섭취만을 줄이는 방식으로 비만을 막는다는 것은 별다른 의미가  없다고 할 수 있다. 3대 영양소는 각각 다른 역할을 한다. 하지만 이들은  근본적으로 서로 밀접한 연관을 맺고 있다.

    어느 경우나  과식은 지방을 축적시키는 원인이 된다. 단백질은 체내에 들어가면 일단 아미노산으로 분해되어 각용도에 따라  재합성 되는데, 이때 아미노산이 100개 이상 합성된 분자를 단백질이라  부른다. 바로 이것이 에너지로 전환되는 것이다.  반면에 100개  이하인 경우에는  단백질이라 하지 않고  펩티드(peptide)라고 부른다. 뇌내 모르핀은 바로 이  펩티드 형태이기 때문에 에너지로 바뀌지 않고 호르몬으로  기능하게 된다. 그런데 뇌내  모르핀에는 티로신이라는 아미노산이 반드시 포함되어 있으며, 티로신 단체(홑원소 물질)만으로도 뇌내 모르핀과 거의 같은 작용을  할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은 금방  산화해 버리는 특성이 있어  유감스럽게도 티로신 단체만으로는  별다른 역할을 하지  못한다. 뇌를 건강하게 유지하기 위해서는 단백질이 절대적으로 필요하지만 사용하고 남은 단백질은 모두 지방으로 변해서 혈관을  막게 되고 이것은 성인병의 원인이 될 수도 있다.  따라서 항상 저지방·저칼로리 식사를  하도록 유념해야 한다.

    그러나 이런 식사법이 중요하다는 사실에  대해 그다지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는 사람이 의외로 많다. 하지만 식료품이 풍족한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현대인으로서는 영양에 관한 지식을 어느 정도  갖추어 현명하게 대처하지 않으면 결국 칼로리 과잉이 되기  쉽다. 다행히 최근에는 일반인도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영양학 책이 많으므로 이런 책을 참고하여 식생활  패턴을 조절하면 많은 도움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어쨌든  다시 강조하지만, 고단백·저칼로리 식단을 생활화해야 하며 될 수 있는 한  지방의 섭취를 줄여가야 한다.

    그러나 앞에서  설명한 바와 같이 지방은 근육 내부에서 산화되므로 운동을 통해 지방을 연소시킬 수 있다면 적당량의 지방을  섭취하는 것은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 다만 한가지  조심해야 할 것은 혈당치가 높은 사람은 여기에 해당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혈당치가 높으면 지방을 근육 속에 집어넣을  수 없기 때문이다. 지방을 근육 안에  넣을 수 있는 혈당치는 일반적으로 100밀리  이하이며 아무리 높더라도 150밀리 이하가 되어야 한다. 혈당이 이 정도 수치라면 지방을  근육 내부의 대사경로로 보내 산화시킬 수 있다. 그것은  마치 쌍 갈래 길에 선 것과 같아서  오른쪽으로 가면 지방이 산화되고, 왼쪽으로 가면  에너지로 비축되는 것이다. 지방은 당연히 파란 신호등이 켜진 길을 선택하게 된다. 바로 이때  신호등 역할을 하는 것이 혈당으로 150밀리 이하면 지방을  연소하는 방향으로 보낼 수 있는 반면,  그 이상이면 섭취한 지방은  모두 비축 창고 쪽으로  가게 된다.

    이러한 누적  현상을 막으려면 식후에 조금씩 몸을  움직이는 게 좋다. 식후 30분 후에 산책이라도  해서 가볍게 몸을 풀면 혈당치가 현저히 낮아지므로 지방을 연소하는 방향으로 보낼 수 있을 것이다. 가장  빨리 뚱뚱해지는 지름길은  식후에 달콤한 디저트를  먹고 곧바로 잠자리에 드는 일이다. 식사로 혈당치가 높아진  상태에서 다시 디저트로 혈당치를 높이고, 에너지를 소모하지 않은 채 곧바로  잠자리에 드는 습관은 아주 좋지 않은 결과를 초래할 뿐이다.  초원의 사자는 배가 부르면 벌렁 드러눕는다. 그것이 너무나 편안해 보여 우리도 무의식적으로 눕게  된다. 그러나 사자나 기타 동물들이 식후에 바로 눕는 행위는 우리 인간과 정반대의 의미에서 정당성을 갖는다. 언제 먹느냐 먹히느냐를 예측할 수 없는  동물의 세계에서는 가능한 한 지방을 많이 축적해 둘  필요가 있는 것이다. 반면에 상황이 전혀  다른 우리 인간이 그것을 흉내 낸다는 것은  오히려 수명을 단축하는 지름길이 될 뿐이다. 

    뇌 건강에 바람직한 식생활은  고단백·저칼로리 식사라는 것은 이미  충분히 설명했다. 하지만 눈앞에 먹을 것이 쌓여 있고 본능적으로 미식을 추구하는 인간에게 매일매일 수도승 같은 식사를 하라고 강요할 수는  없다. 미식 자체는 그다지 해롭지 않다. 단, 미식으로 인한 해를  막으려면 식후 30분이 지난 다음 가볍게 몸을 움직여 주어야 한다. 20분 정도 운동하면 충분하다. 가장 좋은 운동은 적당한 산책이나 파워  트레이닝이다. 여기서 식후  30분이란 시간을 설정한  것은 나름대로 이유가 있다.  식사를 마친 직후에는 아직  위 속에 음식이 들어  있으므로 바로 움직이면 오히려  소화기에 부담을 주기  때문이다. 그러나 30분쯤  지나면 먹은 음식이 소장으로 옮겨지므로 운동을 해도 무방하다.

      미식을 해도 살찌지 않고 근육을 붙일 수 있다. 미식을 하면서도  비만을 피하고 근육을 붙일  수 있는 방법이 또  하나 있다. 잠들기 전에 즐거운 생각을 하여  편안한 수면 상태에 들어가는 방법이 바로 그 것이다. 즐거운 생각을  한다는 것은 일종의 명상을 의미하므로 뇌파가  α파 상태가 되고 몸이  이완된다. 이런 상태에서 수면에 들어가면 체내에서  성장 호르몬이 분비된다. ‘잘 자는 아기가 잘 자란다’는 말이 있는데, 수면시에는 성장기에 있는 아이뿐 아니라  성인의 인체 내부에서도 성장 호르몬이 분비된다.  물론 성인의 경우는 성장 호르몬이 많이  분비된다 해도 키가 크거나 하는 효과를 기대할 수는 없다. 그러나 분비된 성장 호르몬은  근육을 튼튼하게 만들어 지방을 연소시키는 효과를 발휘한다. 물론  성장 호르몬은 깨어 있을 때도 분비되지만, 이는 극히 소량에 불과하고 대부분은 수면 중에  분비된다. 또한 명상 중에도 많이 분비된다.

    일반적으로 식사  후에 명상을 하면 혈액 순환이 좋아지고  근육 안의 피의 양도 증가하며 성장  호르몬이 분비되는 효과가 덧붙여지기 때문에 운동을 하지 않고도 근육을 붙일 수 있다. 물론 운동이라는 능동적인 수단도 좋으나, 명상이나 수면으로 α파 상태를 유도해도 똑같은 효과를  얻을 수 있는 것이다. α파의 또 다른  흥미로운 효능은 혈당치를 억제하는 힘이 잇다는  것이다. 혈당을 낮추는  호르몬으로는  인슐린이 있고  혈당을  높이는  호르몬으로는 글루카곤(glucagon)이 있다.  그런데 글루카곤이 분비되기 전에는  반드시 다른 호르몬이 먼저 분비된다. 노르아드레날린과  아드레날린이 바로 그것이다. 따라서 몹시 흥분하거나 화를 내면  노르아드레날린이 분비되고, 그것은 다시  췌장으로 하여금 글루카곤을 분비하도록 유도해서  혈당치를 높인다. 그러므로 자주  화를 내거나 흥분하는 일이 되풀이  되면 점점 비대해진다.

    위의 메커니즘에서 알  수 있듯이 식후에는 되도록 뇌내 모르핀이 분비되는 상황을  조성하는 것이 유익하다. 그러면 혈당치가 내려가고 지방이 잘  연소될 뿐 아니라 성장 호르몬이 분비되어 근육을 강화시킬 수도 있다.  명상은 동양의학에서 가장 중요한 분야인데, 이를 습관화하면 뇌내 모르핀의  분비는 물론이고 그 저장 창고도 커지게  된다. 따라서 여기에 검소한 음식과 가벼운  운동만 덧붙인다면 매우 효율적으로 건강을 유지할 수 있다.

    고령화 사회가 시작되자 노인의  건강법에 대한 여러 가지 방법론이 소개되고 있다. 그러나 노인들에게 ‘운동을  자주해서 몸을 단련하라’고 권장하는 방법은 조금 문제가 있다. 앞에서 말했듯이 운동은  전혀 안 해도 해롭지만 지나치게 하면 더 해롭기 때문이다. 과격한 운동은 25세 정도로 마감 짓고, 그 이후에는 근육을 유지하는 정도의 가벼운 운동으로  만족해야 한다. 지방을 연소시키기 위해서는 부드러운 운동도 효과적이지만 무엇보다 효율적인 것은 뇌내 모르핀을 잘 분비시키는 것이다. 명상이나 기공을 통해  뇌내 모르핀을 원활하게 분비한다면 얼마든지 건강한 근육을 유지할 수 있다.

    기억력을 향상시키는 뇌내 모르핀

      뇌 안에는  기억력을 향상시키는 해마라는  부분이 있는데, 뇌내  모르핀은 이 부분을 활성화시켜 건망증이  생기지 않도록 하는 효능도 가지고 있다.  좀더 구체적으로 설명한다면 에이 텐 신경 즉 쾌감신경은 해마를 지배하고 있으며 뇌내 모르핀을 활성화시키는 신경  덩어리의 근본 역시 에이 텐 신경이다.  뇌내 모르핀이 분비되지  않으면 머리가 나빠진다고  하는 얘기가 있다.  이것은 학습이나 기억력에 관계하는 해마 역시 뇌내 모르핀을 관장하는 에이 텐 신경의 지배하에 있다는 사실과 무관하지 않다. 에이 텐  신경은 최종적으로 대뇌신피질의 전두연합야와 이어지는데 기억에  관한 한 해마가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시각의 예를 들어 보자. 우리는  일상 생활에서 굉장히 많은 사물을 본다. 그러나 거의 대부분은 바로 기억에서 사라진다. 전철이나  길거리에서 수없이 많은 사람을 접하지만 얼굴은커녕 마주친 기억조차 깨끗이 사라져  버리는 것이다. 그러나 뇌는 한 번 본  내용을 최소한 무의식의 형태로라도 전부 기억하고  있다. 바로 그 기억을 담고 있는 저장 창고가 해마이다. 나중에  어떤 필요에 의해 저장 창고에서 기억을 끄집어 낼  수 있는 것은 뇌내 모르핀 덕분이다.  앞에서 설명한 바와 같이 뇌내  모르핀은 증폭 효과(앰플리파이어)를  발휘하기 때문에 해마에  담겨 있는 희미한 기억을  마치 라디오의 볼륨을 올리듯 증폭시켜 주는  것이다. 그래서 필요에 의해 그때그때 기억을 끄집어낼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기억력이 좋은가 나쁜가는 머리의 좋고 나쁨이라기 보다는 뇌내 모르핀을 얼마나 분비할 수 있느냐에 따라 결정된다고 할 수 있다. 다시  말해 뇌내 모르핀이 원활하게 분비되지 않으면  기억력이 둔화되는 것이다.  물론 뇌혈관이 막히거나  뇌를 다치는 등의 물리적  타격으로 인하여 기억력이  떨어지기도 하지만, 뇌내  모르핀 역시 기억력과 상당히 밀접한  관계를 갖고 있다.

    뇌내 모르핀이 기억력과  얼마나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는지 한 예를  들어 살펴보기로 한다.  조로증으로 고생하는 58세의 남성이 찾아왔다.  이 남성은 아직 그럴 나이가 아닌데도  건망증이 매우 심했다. 1분전에 자기가 한 말을 기억하지 못할 정도였다.  알츠하이머(흔히 노망이라고 일컫는 병으로  뇌기질 이상으로 생김. 정확한 원인이나 치료는  아직 밝혀지지 않았음)와 비슷한 치매 증상을  보이고 있었던 것이다. 건강을 진단해 보니 비만 상태는 플러스 21, 콜레스테롤 수치는 263이나 되었다.

    이 환자 역시 우리 병원의 고정 메뉴인 식사와  운동, 명상 치료를 받기 시작했다. 이 환자는 대단한 낚시광이었다는 사실이 명상을 하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 낚시 얘기만 나오면 대단한 흥미를 보였기 때문에 우리는 낚시를 이메이징 훈련 대상으로 이용했다. 우선 낚시에 관한 비디오를 본 다음  자신이 겪은 낚시 에피소드를 자랑하게 만들었다. 그런데 몇 번을 되풀이해서 같은  이야기를 하는 것을 보면 낚시에 관한 한 기억력이  정확히 되살아나는 게 분명했다. 그런 다음 명상을  하도록 유도했다. 이런 치료를 지속한  결과, 전에는 산책을 나갔다가 집을 찾아오지 못해 부인이 집 전화 번호를 항상  주머니에 넣어 줄 정도로 심했던 건망증이 이제는 30분 정도  산책하는 것은 아무 문제  없이 다녀올 수 있을  정도로 향상되었다.

    그리고 사소한  일에 흥분하여 자주  가족들과 말다툼하던 습관도  고쳤다. 비록 완쾌시켰다고 볼  수 없지만, 다른  방법이었다면 이 정도의  치료도 불가능했을 것이라 생각한다. 이전에는  간호원이 쌀쌀맞다거나 아내가 오지  않았는데도 아내가 가져온 세탁물이라며 남의 세탁물을 가져가는  등 상당히 문제가 많았으나, 낚시를 이용한 명상 요법으로 어느 정도 기억력을  되찾게 된 것이다. 뇌파를 측정한 결과 아주 낮았던 α파의 비율도  상당히 높아졌으며, 총콜레스테롤 수치는 263에서 정상 수준인  207로 떨어졌다. 그리고 비만 상태도 플러스  21에서 마이너스 3까지 내려갔다. 일체의 부작용 없이  이만큼 향상되었다는 것은 정말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런데 이것은 바로 뇌내 모르핀 덕분이다. 인간의 뇌는 발육이 멈추는 단계부터 쇠퇴기로  들어간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150∼180억개나 되는 뇌세포가  하루 10만개씩 죽어가는 것이다.  물론 여기에는 개인차가 있다. 노르아드레날린이나 아드레날린이 많이  분비되면 활성 산소를 빈번하게 발생시켜 뇌세포의 노화를 가속화시킨다. 그러나 뇌내  모르핀은 기억이나 학습과 연관된 뇌를 – 특히 해마를 – 항상 자극시키므로 뇌내 모르핀을 많이 분비하면 항상 건강한 뇌를 유지할 수 있는 것이다.

    활성 산소의 독을 중화시키는 물질

      인간이 일생 동안  들이마시는 산소량은 2천 1백만 리터라고 한다.  이것이 체내에서 소비할 수 있는 산소의 양이다. 그런데  체내에서 어떤 물질을 생성할 때 산소 가운데 일부가 활성 산소로 변화된다. 칼로리가  높은 식사를 하는 것 역시 인체에 많은 일을 시키는 것이기 때문에 그만큼  많은 활성 산소가 발생한다. 활성 산소는 적게 발생할수록  좋다. 활성 산소 자체가 몸에 해로운  역할을 할 뿐 아니라 인체에  절대적으로 필요한 산소의  양을 빼앗아 가기  때문이다. 따라서 가급적 스트레스를 피하고 산소  소비량도 최소한으로 줄여서 활성 산소가 발생할 요인을 줄여  나가는 것이 바람직하다. 물론 식사량도 적절하게  조절해야 한다.

    인간이  먹는 음식 역시 산소와  마찬가지로 일생 동안 체내에서  소비할 수 있는 양이 일정하게 정해져 있다고 할 수 있다.  이 세상에 태어난 이후 죽을 때까지 먹을 수 있는  양이 저축의 형태로 정해져 있는 것이다.  우리가 매일 음식을 먹는 것은 저축한 양을 조금씩 찾아 쓰는  형식이라고 볼 수 있다. 따라서 저축 액수가 1억원일 경우 1년에 백만 원씩 꺼내  쓴다면 100년을 쓸 수 있는 반면, 2백만원씩 쓴다면 50년만에 바닥이 나고 말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과식을 하는 것은 ‘가늘고 길게’ 사는 대신 ‘굵고 짧게’ 사는 쪽을 선택하는 것과 같다. 음식물은 에너지를 얻기  위해서 절대적으로 필요하지만 많이 먹는 것은  몸에 해롭다.

    가급적 적은 양을  효율적으로 먹고 동시에 이미  발생한 활성 산소를 중화시켜 활성 산소의 해를 최소한으로 줄여가야 한다.  가능하면 뇌내 모르핀을 분비시키는 방식으로 활성  산소를 줄여나가는 게 좋으나  활성 산소를 중화시키는 다른 물질도 많으니 참고하기  바란다. 그림에서 볼 수 있듯이 활성  산소를 중화시키는 데  가장 좋은 물질은 수소다.  수소를 무공해 에너지라 부르는  이유도 바로 이 때문이다. 산소는 820밀리볼트의 플러스 전위를  갖고 있는데 비해 수소는 마이너스 420볼트의 전위를  갖는다. 가급적이면 마이너스 전위를 갖는  물질이 우리 몸에 이롭다. 갓 태어난 아기는 대개  0에서 100밀리볼트 이내의 전위 상태를 유지하는데 나이가 들면서 차차 플러스 쪽으로  바뀐다. 따라서 외부에서 받아들이는 물질이 마이너스에  가까우면 그만큼 건강에 도움이 되는 것이다. 

    자료를 통해서 우리는 수돗물이 플러스 상태가 가장 높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는데, 이것은 수돗물이  약보다 나쁘다는 것을 의미한다.  표백분(염소)이 투입되어 있기 때문이다. 염소를 투입하는  이유는 세균을 죽여 물의 안전성을 높이기  위한 조치의 일환인데 이 같은 발상이야말로 현대인을 온갖 질병의 구렁텅이에 빠뜨리는 최대의 함정이라 할 수 있다. 세균을 죽이기  위해 염소를 투입한다는 발상은 벌레에게 살충제를 뿌리고 세균성  질병에 항생물질을 투여하는 것과 똑같은 대증요법(원인 치료는 하지 않고 그때그때 증상에 맞는 치료를 하는 것)적 발상이다.

    당장은 효과를 볼지 모르나 이런  방법은 하나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또 다른 고질적인 문제를 발생시키는  원인으로 작용한다. 항생 물질에  의지한다는 것은 영원히 쫓고  쫓기는 게임을 계속하는  결과이며 오히려 사태는  점점 악화된다.

    염소를 넣은 수돗물은  인체 내부에서 새로운 화학  반응을 일으켜 발암 물질을 발생시킬 위험성도 있다. 더욱  심각한 것은 염소를 쏟아 부은 수영장이다. 보건소가 이것을 의무 사항으로 규정하고 있다는  사실이 참으로 한심스러울 뿐이다.

    수영이 건강에 좋은 것은 사실이지만 지금처럼 염소를 많이 투입한 물에서 수영을 하면 오히려 건강을 해치는 결과를 낳을  가능성이 높다. 앞에서 운동 선수가 일반인에 비해 수명이 짧다고 했는데, 수영 선수는  다른 운동에 비해 현역 활동 기간이 비교적 짧아 그 해를 조금은 피하고  있을 뿐이다. 최근에는 어린이를 상대로 한 수영 교실이 유행이며 중년이나 노인들 가운데에도 건강을 위해 수영을 하는 사람이 많아졌다. 그러나 수영장 측이 지금처럼  많은 염소를 물에 쏟아 붓는다면 수영을 통해 얻는 플러스 효과와 염소로 인한 마이너스 작용을 비교하면 수영을 안 하는 것이  오히려 이득이 될 정도다.

    물이 더러워지기  때문에 염소를 넣어야 한다는 것이 보건 당국의 주장이지만, 노송 나무 에센스(essence)나 자외선 살균법으로도 얼마든지 물을 깨끗이 할 수  있다. 최근 질병에 걸리는 아이들이 부쩍 늘어나고 있는데, 이것은 살충제·농약·항생  물질 등의 약품류와 수영장의 염소·수돗물 같은 것이  복잡하게 뒤엉켜서 아이들의 건강을 해치고 있기 때문이다.

    수돗물을 그대로 마시는  것은 매우 위험하다. 물은 몸의 3분의 2이상을 차지하고 있어서 매일  보급하지 않으면 안 된다. 하지만 질이  나쁜 물은 노화를 촉진시키고 성인병의 원인이 되므로 될 수 있는 한 정수된 물을 마셔야 한다. 시판 중인 미네랄 워터(mineral  water)는 수돗물보다 안전하지만, 가격이 너무 비싸기 때문에 매번 사서 마신다는 것이  부담스러울 수 있다. 반면에 수돗물은 한 번 끊이는 정도로  상당히 안전해지므로 좀 귀찮더라도 건강을 위해서 꼭 끓여먹는 것이 좋다.

    최고의 자연 식품인 된장

      뇌세포 활성화에 특히 도움이 되는 식품으로  된장을 들 수 있다. 자료를 보면 된장은  마이너스 전위 200선 가까이  있는데, 이것은 된장이  최고의 자연 식품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스님들이 콩을 가공한  식품을 많이 먹는다는 사실은 콩과 관련된  식품이 그만큼 뛰어나다는 것을  증명하는 한 사례라 할  수 있다.

    게다가 콩은 양질의 식물성 단백질일 뿐 아니라 값도 저렴해서 상당히 경제적이다. 청국장이나 된장국  등 콩을 이용해서 만든 음식은 아미노산  밸런스가 극히 뛰어나 뇌내 모르핀을  만드는 재료로 가장 적합하다. 이런 음식은  쌀밥과 같이 먹으면 특히 좋은데 쌀에 부족한 아미노산은 콩에  들어 있으며, 콩에 부족한 아미노산은 쌀에 들어 있어서 서로 결점을 보완해 최고의 아미노산 밸런스를 유지하기 때문이다. 

    된장보다는 조금 떨어지지만   동물의 간이나 신장 등의 장기류 식품도 권장할 만하다. 닭이나 돼지, 소등의 내장은 재료에 따라 차이는 있으나 대체로 활성 산소의 해를  퇴치하는 좋은 소재로 작용한다. 녹차의 전위는 0이며, 이보다 약간 우수한 식품이 클로렐라(chrorella)이다. 일반 식물은 햇빛을 받으면 대량의  활성 산소를 발생시키지만 클로렐라는 햇빛을 받아도 활성 산소를  발생시키지 않는 이점을 가지고 있다.

    최근에  과다한 일광욕은 건강에 해롭다는  발표가 많이 나오고  있다. 그만큼 자외선은  생명체에 위험한 존재다. 그러나  식물은 자외선 에너지를  이용하여 광합성 작용을  하므로 태양 광선을 받지 않을 수  없다. 식물은 태양 광선에 시들지 않는  방어 기구를 갖추고 있다. 그 비밀이  바로 엽록소이며 엽록소 덩어리가 바로 클로렐라인 것이다.

    나는 오래 전부터  클로렐라를 복용하고 있는데 그 효과가 뛰어나다.  50대 중반인데도 흰머리가 없고 나이에 비해 너무 젊다며  깜짝 놀라는 사람이 많다. 녹차 역시 클로렐라와 더불어 항산화식품으로 권장할 수  있다. 그리고 녹황색 야채도 엽록소와 항산화 비타민(비타민  C, A, E)을 얻을  수 있으므로 신선한 것을  잘 조리해 먹으면 좋다.  건강 식품 가운데에서는 로얄제리 같은 것을  추천할 만하다. 참고로 설명한다면, 도표에 있는 황송죽은 한방 약의 일종이다.

    α파를 발생시켜 기억력을 좋게 하는 식품

      프랑스에서는 한 식품을  대상으로 한 흥미 있는 실험 결과를  발표했다. 북대서양 심해 1500∼2000미터  지점에서 서식하는 ‘모르바 가디데아’라는 생선의 내장에서 추출한 영양  보조 식품이 바로 실험 대상이었는데, 이것을  먹으면 스트레스가 줄고 뇌파가 α파로 바뀐다는 것이다. 모르바(심해어)가 바로 그것이다.  뇌파가 α파가 된다는 것은 뇌내 모르핀이 그만큼 잘  분비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먹는 것만으로 플러스  발상이나 명상을 한 것과 동일한 효과를 얻을 수 있다는 것은 바쁜 현대인에게 더없이 고마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여기에 ‘프랑스 국립  뇌 노화 방지 연구소’가 행한 임상 실험의 개요를 간단히 소개하기로  한다. 실험 대상은 35세에서 75세에 달하는  남녀 백 명이었고, 실험 목적은 기억력 저하를 호소하는  사람들에게 모르비라고 하는 심해어 캡슐(이하 모르바  캡슐이라 한다)을 투여할 경우에 일어나는  변화를 조사하는 것이다. 별도로 플라시보 그룹(placebo, 비교  대상으로 삼기 위해 가짜 약을 먹인 그룹)을 만들어 60일간 매일 모르바 캡슐을 투약하고, 투약 전·15일째·60일째 세 차례에 걸쳐  기억력 테스트를 했다.

    위 연구소는 그  결과를 다음과 같이 보고했다. ‘실험 결과  우리는 모르바 캡슐이 심리적 안정과 집중력을 증진시켜 장단기간에 걸쳐 기억력을  개선시킨다는 결론을 내릴 수 있었다.’ 우리 병원에서도 모르바 캡슐을 사용해 보았다. 위염·간염·췌염  환자를 재상으로 석 달 동안 매일 모르바 캡슐을 복용시킨 다음 뇌파의  변화를 관찰했다. 그 결과 30일이 지난 다음부터  α파가 상승하는 경향을 보이기 시작하더니 60일,  90일 기간이 지나면서 더욱  좋아졌다. 이것은 모르바 캡슐이라는 영양 보조  식품이 뇌의 에이 텐 신경(쾌감신경)을 자극시켜 기분을  전환시키는 효과를 발휘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프랑스에서 실시한  연구에서는 기억력 향상이 확인되었고, 우리 병원에서 실시한 연구에서는 릴랙스(relaxation)효과를 확인한 셈이다. 아인슈타인 박사가 연구에 몰두하고 있을  때 뇌파를 측정한 결과, 계산이 잘  되고 있을 때에는 뇌파가 α파 상태고 계산이 잘못된 순간  바로 β파로 바뀌었다고 한다. 일반적으로 뇌의 계산  기능은 좌뇌로 알려져 있는데, α파가 방출된다고  하는 것은 우뇌가 주체가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뛰어난 주산 실력의 소유자가  암산을 할 때도 뇌파는 α파  상태를 유지한다. 우리는 여기서 인간이 고도의  사고 능력을 발휘하고 있을 때는 좌뇌가 아닌 우뇌가 사용된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우뇌는 선천뇌라고도 한다. 그래서 우뇌를 잘라내면 본능적인 행동을 할 수 없다. 갓 태어난 아기가 엄마  젖을 빨 수 있는 이유는  선천뇌에 그 본능이 입력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와 비슷한 예는  얼마든지 있다. 간혹 전생에서 겪은 일을 기억하는 사람이 있는데, 이것 역시 선천뇌에 담겨 있는  기억이 의식 표면에 나타난 현상의 하나라 할 수 있다. 그러나 평상시에는 그런 기억을 끌어낼 수 없다. 그 기억은 DNA와 RNA에 새겨져  있어 쉽게 의식할 수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내면의 자아는 모두 의식하고 있다. 그래서 이것이  본능이나 생리적인 욕구라는 형태로 나타나게 된다. 그러나  여기에서 말하는 본능적·생리적 욕구에는  원초적 욕구뿐 아니라 보다  높은 차원의 정보도 입력되어 있다. 그러나  이것을 이끌어낸다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명상이나 기도를 열심히 하면 나름대로 접근 가능하다. 아인슈타인이나  뉴턴도 순간적인 번득임을 통해  위대한 법칙을 발견했다. 그러나 아무리  천재적인 재능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 해도  뇌에 입력되지 않은  것이나 기억에 없는 정보는  발휘할 수 없다. 반면에  이것은 우리 같은 보통 사람에게도 놀라운 능력이 잠재되어 있을 가능성이 있다는 걸 의미한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그 정보를  의식적으로 감지할 수 있는가  없는가 하는 것이 문제다.

    그 열쇠가  지금까지는 기도나 명상 또는 편안한 수면이었다. 그러나 모르바 캡슐처럼 기억력을  개선시키고 집중력을 증강시킬 뿐 아니라 α파까지 분비시키는 식품이 발견된다면, 그런 식품을  섭취하여 무의식의 세계로 접근해 가는 시대가 올는지 모른다. 현재는  ‘β-엔돌핀 연구회’라는 곳에서는 모르바 캡슐에 관해 구체적으로 연구한다고 한다.

    바둑의  명인들이 대국할 때도 뇌파가 α파 상태를 유지한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다시 말해 천재란 뇌파를  α파 상태로 바꾸어 뇌내  모르핀을 그만큼 쉽게 끌어내는  요령을 체득한 사람이라고 볼 수 있는 것이다. 이  말은 우리 같은 평범한 사람도 뇌내  모르핀을 많이 분비하는 생활을 일상화한다면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뛰어난 능력을 발휘할 수 있게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뇌내 모르핀은 질병에 대한 저항력을 강화시킬  뿐 아니라 우리 자신을  천재의 영역으로 끌어올려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도록 도와준다. 이렇게 살아가는 사람이 늘어난다면 세상은  그만큼 평화롭고 안전하고 풍요롭게 변할 것이다.

    스트레스가 장기간 누적되면 어떤 현상이 나타나는가

      통풍이란 병이 있다.  요산이 체내에 일정 정도 고이면 바늘처럼  뾰족한 결정체로 변해 신경을 건드리게 되는 몹시 통증이  심한 병이다. 요산이 고인 정도가 이 병을 나타내는 지표가 된다. 요산은 세포가  새로 만들어질 때 생기는 일종의 가스로 오줌이나  담즙의 형태로 배설되는  게 보통이다. 그런데  이것이 갑자기 많이 발생하거나 배설이 원활하지 못해 체내에 고이면 바람이 불기만 해도 심한 통증을 일으키는 통풍이라는 병으로 발전하는 것이다. 

    요산은 신장 장해나 요로결석(vrinary stone) 등의 원인이 되기도 한다.  요산이 고이는 원인은 지나친 운동이나 강한  스트레스 그리고 음식 때문일  수 있는데, 생선의 내장  및 육류나 조개류에 포함된 퓨린(purine)이라는 물질이 그 주범으로 밝혀졌다.  통풍은 미식을 삼가는 것이 좋다. 또한 요산은 활성  산소를 아주 많이 발생시킨다는 사실이 최근 연구에 의해 밝혀졌다. 과잉 누적된  요산은 단순히 인체 내부에 고이는 것으로 끝나지 않고,  다량의 활성 산소를 발생시켜 세포에 상처를  입히고 염증을 유발시키는  원인으로 작용하는 것이다.  이런 현상이 신장  기관에 발생하면 오줌이 잘 나오지 않게 되며  급기야 만성 신장 장해로 발전하여 생명을 위협할 위험도 있다.

    병에  걸리면 약을 먹는다. 머리가 아프면 두통약  신세를 진다. 약이 우리에게 도움이  된다고 철썩 같이 믿기 때문이다. 그러나 의사  입장에서 이런 말을  한다는 게 좀 거북하지만,  약은 대부분 우리 몸에  독으로 작용한다고 볼 수 있다. 예를 들어 진통제를 먹었다고 하자. 그러면 진통제는 혈액안에 들어가서 세균을 물리치는  호중구라는 백혈구를 활성화시킨다. 그러면  백혈구는 퇴치할 세균이 없는  상태에서도 활성 산소를 발생시킨다. 또 위  속에는 헤리코박터(helico bactor pylori)라는 세균이 있는데, 백혈구가 이 세균에 닿으면 활성 산소가 발생한다. 그러면 이 활성 산소는 과산화수소로  변해서 뇌 안에 있는 염분과 뒤섞여 차아염소산이라는 물질을  발생시킨다. 차아염소산이란 앞에서 인체에 해롭다고 설명한 염소  가루를 말한다. 만일 체내에 염소 가루가  생겨나 요소와 섞이면 맹독성  발암물질로 변한다.

    이와  비슷한 과정을 거쳐  체내에 생성되는 발암  물질은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다.  담배를   피우면  벤즈파이렌(benzopyrene)이란 발암 물질이 나온다. 이 물질은 담배뿐 아니라 훈제 식품에도 포함되어 있다. 그리고 햄의 발색제로 사용되는  아초산염은 위 속으로 들어와서 단백질 분해 물질과 만나 니트로소아민(nitrosoamine)이라는  발암물질을 만든다.

    한마디로 말해서 현대를 사는 우리  인간은 발암성 물질을 끝없이 자기 입에 집어넣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강조하고 싶은  것은 이 모든 물질이  활성 산소를 발생하는 원인으로 작용한다는  사실이다. 활성 산소를 분비시키는  물질은 너무나 많다. 저절로 발생하는 경우를 포함시켜 모두  다 조사한다면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을 것이다. 

    그러나 활성 산소를 가장 많이 발생시키는  원인은 뭐니뭐니해도 스트레스라는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 식품이나  약품 등도 원인으로 작용하지만 가장 큰 원인은 역시 스트레스인  것이다. 게다가 노르아드레날린과 아드레날린까지 분비시킨다는 것을 감안한다면 결국 이 스트레스는 현대인을 질병의 구렁텅이로 몰아넣은  원흉이라 할 수  있다. 이것은 암도  발생시키고 뇌혈관도 막히게 하는 등  모든 질병의 근원으로 작용하여  인간으로 하여금 본래 타고난 120년의 수명을 고작 80년에서 마감 지을 수밖에  없게 만든다. 활성 산소는 인류의 가장 커다란 적이다. 그러나 그 원인을  거슬러 올라가 보면 결국에는 스트레스가 자리잡고 있다. 이  모든 상황을 종합할 때 우리 인간의  건강에 가장 해로운 것은 스트레스라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스트레스란 무엇인가? 그것은 심리적·생리적으로 일그러진  상태, 간단하게 말해서 정신적으로  ‘싫다’고 받아들이는 것이다. 외부의 자극을  부정적으로 받아들이는 것, 불안이나  걱정, 욕구 불만이나 증오,  질투나 부러움, 열등감 등의  모든 마이너스 발상이  여기에 속하는데, 바로 이럴 때  달려드는 스트레스가 우리 인간을 병약하게 만든다. 

    그런데 이것을 피하게 하는  것이 뇌내 모르핀이다. 뇌내 모르핀이 나오면  스트레스는 마이너스로 작용하지 않는다. 스트레스에는  마이너스로 작용하는 스트레스와 플러스로 작용하는  스트레스가 있는데, 이것은  수용하는 자세에 따라  결정된다고 볼 수 있다. 찬  생선을 보고 ‘발암 물질이 있을 텐데  괜찮을까’라고 걱정하면서 먹으면 마이너스 스트레스가 된다. 간이 나빠지지  않을까 걱정하면서 술을 마시면 정말로 간에 좋지 않은 결과를 초래하게 된다.  담배를 피울 때도 폐암에 걸리면 어쩌나 하는 등의  자책감을 느꼈다고 하자. 그것이 원인이 되어  폐암으로 발전하는지 어떤지는 모르겠으나, 그로 인해 아드레날린이  분비되는 것 하나는 확실하다. 아드레날린이 분비되면 그로 인해 활성 산소가 발생하고, 그 결과 우리 인체가 어떤  해를 입게 되는지 설명하지  않아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담배를  피우더라도 ‘아, 이제  일이 끝났구나. 담배 맛 정말  좋군!’이라고 생각한다면 뇌내 모르핀인 β-엔돌핀이  분비되어 인체에 그만큼 이로운 작용을 할 것이다. 인간의 사고방식은  습관의 지배를 받는 경향이 있다. 따라서 마이너스 발상을 하는 사람은 끊임없이  마이너스 사고를 하고 플러스 발상을 하는 사람을 계속 플러스 사고를 하게 된다.

    플러스  사고와 마이너스 사고가 일정 기간 누적되면 현격한 차이가 나타나게 된다. 예를 들어  뇌의 성장 완성기인 25세 전후까지 육체적으로 동일한 조건을  갖고 있던 두 사람이 ‘플러스 발상’의 인간형과 ‘마이너스 발상’의 인간형으로 나뉘어 생활하다  20년 후에 만났다고 하자. 외관상 나타나는 연령이나 건강 상태 그리고 노화의 정도 등을 볼 때 전자와 후자는 상당한 차이를  나타낼 것이다. 이것은 뇌내 모르핀을 정복한  사람은 인생을 정복할 수 있다는 논리를 증명하는 좋은 증거가 된다.

    산화는 두렵다, 오래된 음식은 피하자

      산소 때문에 일어나는 여러 가지 부작용을 보면 산소가 서로 다른 두 가지 얼굴을 지니고 있다는 사실을  쉽게 알 수 있다. 우선 산소는  우리 인간에게 없어서는 안 될 필수  불가결한 물질이다. 인간을 포함한 모든 동물은  몸 밖에서 영양분을 섭취하고 그것을 산소로 연소시켜 에너지를  얻는다. 만약 산소가 없다면 인간은 물론 지구상의 거의 모든 생물이 멸종하고  말 것이다. 산소는 이렇게 모든 생물에게 에너지  원천으로 작용한다.

    이런 의미에서 볼 때  산소는 우리에게 매우 유익한 반면 앞에서 설명한 활성 산소로 변화되어 질병을 일으키고 노화를 촉진시키며 끝내는 생명까지 앗아가기도 한다. 공기  중에서 산소가 일으키는 다음의 작용을 보면 산소가 얼마나 나쁜 역할을 하는지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① 쇠에  녹이 슨다.

    ② 고무가 탄력을  잃는다.

    ③ 버터나 식용유가 변한다.

    ④ 껍질을  벗겨 놓은 사과가  변색한다.

    그렇다면 인간에게  절대적으로 필요한 산소가 독으로 작용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이것을  이해하려면 우선 지구에서 제일 먼저 생명체의 형태로 생겨났던 미생물에 관해  살펴볼 필요가 있다. 이 지구상에 최초로 생겨난 미생물은 처음에는 산소 없이도  살 수 있었다. 오히려 산소가 있으면 곤란한 생명 시스템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태양 광선을 이용해 에너지를  만드는 마름이 번식하기 시작했고, 이 수초는  노폐물로 산소를 토해내기 시작했다.  인간이 산소를 들이마시고 탄산가스를  토해내는 것과 정반대 현상이다.

    이렇게  마름이 산소를 점점 토해내자 산소가 없이도  잘 자라던 미생물은 산소독의 해를 입어 모두 멸종하게  된 것으로 추정된다. 그 후에 산소를 이용하는 미생물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산소가 있는  곳에서 살 수 있는 미생물을 호기성 미생물이라 하는데, 산소로 구성된  대기권이 지구를 에워싸게 되면서 이 같은 호기성  미생물이 지천에 퍼지게 되었다. 한편 산소가  있으면 살지 못하는 미생물을 혐기성 미생물이라 하는데, 이런  미생물은 거의 사라지고 공기가 닿지 않는 깊은 땅  속이나 바다 속 혹은 인간의 내장 속에서 근근이 생명을 유지하게 되었다.

    우리 인간의 체내에는 산소를  꺼리는 혐기성 미생물의 흔적이 아직도 남아 있다.  세포 핵이 바로 그것이다.  세포 핵 주변에는 에너지 발전소 역할을 하는 미토콘드리아(mitochondria)라는 부분이 있는데,  이 미토콘드리아의 활력이 떨어지면 세포의  핵과 산소가 닿게 된다. 그것을 현미경으로  관찰해 보면 핵은 산소와 부딪치는 순간  바로 죽어버린다. 이 현상에서 잘 알 수 있듯이, 산소는 인간이 사랑하는 에너지를  만드는 데는 절대적으로 필요한 존재지만 동시에 독으로 작용하는 부정적인 존재이기도 하다. 

    산소를 캡슐로 싸서 에너지를 만들 때만 조금씩 사용하고 그 외는 공기가 없는 환경에서 살 수 있다면 인간의 생명이 몇 백 년으로 연장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산소는 생물에게 독약이나 다를 바 없는  물질로 작용하는 것이다. 식품을 공기 중에  두면 점점 상하게 되는 것이 그  증거 가운데 하나다. 고기나 생선은 산소에  닿으면 10초 단위로 상태가 나빠진다. 이것이 산화라는 현상이다.

    산화한 음식을 먹는다는 것은 체내에 산화물을 집어넣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은  녹을 체내에 집어넣는 것과 같으며, 따라서 그 인체 역시 그만큼 산화가 촉진된다. 이 같은 산화를 억제하는 물질을 항산화 물질이라  하는데 비타민C,비타민A 그리고 비타민E 등이  이 같은 작용을 한다. 야채나 허브(herb)  등의 식품은 자체 내에서 스스로 산화를 막는 항산화 물질을 만들고 있으므로 이런 식품을 섭취하면 항산화력을 키울 수 있다.

    참고로 식품을 섭취할 때 가장 이상적인 방법 몇 가지를 소개하겠다. 주스를 마실 경우에는 신선한 야채나 과일을 즉석에서 갈아  미시는 것이 가장 좋다. 캔에 넣어 아무리  잘 저장한다 해도 시간이 지나면  일정 부분의 산화를 피할 수 없기 때문이다.  초밥도 미리 썰어 놓은  생선은 이미 상당 정도  산화가 진행된 상태이므로 즉석에서 잘라 만든 초밥은 그 신선도 면에서 현격한 차이를 나타낸다. 흔히 식이요법을 할 때 무엇을 먹느냐, 얼마나 먹느냐에 가장 관심을 기울이기 쉬우나 실은 그 재료가 얼마나 신선한가 하는 점에 제일 먼저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건강을 위해서는 오래  된 식품은 먹지 않는 것이 좋다. 신선도라는 관점에서 볼 때, 식품 가운데서 특히 주의할 식품은 기름을 사용한 가공 식품이다. 기름을 사용한 가공식품은 대개 식물성 기름을  사용하는데, 식물성 기름은 불포화지방산이 많기 때문에 분자 구조가 불안정한 상태로 체내에 들어가서 역시 분자 구조가 불안정한  활성 산소와 섞이기 쉽다. 이 양자가  결합되면 과산화지질아라는 녹 성분으로 변화되어 노화와 성인병의 원인으로 작용한다.

    일을 열심히 하던 사람이 정년 퇴직 후에 성인병에 걸리는 이유

      식사가 건강이나 젊음을 유지하는  열쇠가 된다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자기 나름대로 올바른  식생활을 위해 노력하는  사람이 늘어나고 있다.  아무리 고령화  사회가 되어 전보다 오래 살 수 있다고  해도 건강하지 않으면 즐거운 노후를 보낼 수 없기 때문이다. 한편 암·심장병·뇌혈관 장해라는 이른바  3대 성인병은 변함없는 위세로 사람들의 인생을  괴롭고 음울하게 만들고  있다. 여기에 최근에는  뇌의 노화나 치매 현상까지 걱정해야  하는 사람이 많이 늘어나고 있다.

    게다가  심각하게 걱정할 나이가 아닌데도  건강이 나빠져 고생하는 사람 역시 늘어나고  있다. 한창 일할 나이에 성인병으로 도중하차하는 사례나 개미처럼 열심히 일하던 회사원이 정년 퇴직을 고비로  갑자기 쇠약해지는 예도 흔히 보게 된다.  WHO에서 재미있는 실험을 한 적이 있다. 일을 왕성하게 할  수 있는 건강한 사람에게 일을 시키지 않고 시간과 돈을 충분히 제공한 것이다.  따라서 실험 대상으로 선정된 사람들을 아무 일도 하지 않고 마음껏 놀아야 했다.  하지만 그 결과는 얼마 안 가서 성인병 형태로 나타났다. 

    일을 하는 것은 건강에  좋다. 이것이 WHO의 실험을 통해 밝혀진 사실이다. 일을 좋아하고 기기에서  보람을 느끼는 사람한테는 열심히 일하는 과정 자체가 뇌내 모르핀을 분비하는  계기가 된다. 일을 좋아하는 사람이 일할 기회를 빼앗기면 중성 지방이 증가하거나 혈당치가 높아져서 쉽게 질병 위험 권에 들어간다. 의학적으로 볼 때, 정년 후에 치매 현상이 나타나거나 질병에 걸리는 현상은  충분히 설명 가능한 것이다.

    여기서 가장  걱정스러운 것은 정도에 차이는 있지만, 현대 사회는 WHO의 실험에서  부여한 상황을 정년이 지난 사람에게 자동적으로 떠안길 수밖에 없다는  사실이다. 60세라는 연령은 현역으로 일할 수  있는 충분히 건강한 나이다. 그런데도 강제로  일을 빼앗아버리는 것이다. 돈만 있다면  먹는 것은 걱정할 필요가  없는 것이 요즘 세상이다. 굶어 죽는 상황을 체험하기가 오히려 힘든 시대라 할  수 있다. 돈도 연금이라는 형태로 일정액을 지급받고 있다. WHO의 실험과 너무나  비슷한 상황에 처하는 사람이 양산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 같은 환경에 처하면 어떤  인간이든 성인병에 쉽게 걸린다는 WHO의  실험 결과가 지금 우리  사회에서 광범위하게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건강과 장수는  병행한다. 유일한 예외는 의료 기술이 발달하여 식물인간의 수명을 늘리는 것뿐이다. 이것을 제외하면  건강과 장수는 거의 대부분 병행한다. 하지만 현재의 상황이 개선되지 않는 한  한창 일할 나이인 60세 고참 대부분은 아주 쉽게  질병의 구렁텅이로 빠지는 결과를 면치 못할  것이다. 통계적으로 평균수명이 늘어난다고 해도  그것은 억지로 생명을 부지하는 사람의 수를 늘리는 외에  다른 의미가 없다. 누구나 동의하겠지만 이 같은  사태는 바람직하지 못하다. 정부는 국가 시책이나 법률 문제를  떠나 국민 개개인이 바라는 바를 충족시켜 주는  차원의 행정을 펼쳐야 할 것이다.

    마즈로의  욕구 단계설에서 설명한 바와 같이 인간에게는 갖가지 욕구가 있다.  그리고 그 욕구는 각기 단계가 있어 저 차원적인  욕구가 충족되었을 때 비로소  다음 단계의 욕구로 발전한다. 따라서 개개인이  욕구를 느끼는 단계는 각자 다를 수밖에  없으므로 그것을 한데 모아 관리한다는  것은 사실 무리가 따른다. 하지만 현대인이  가지고 있는 보편적인 욕구를  파악하면 총체적인 관리가  가능할 수 있다.  그렇다면 현대인 일반은 과연 어떤 욕구를 가지고 있을까. 건강  분야로 압축하면 다음과 같이 집약할 수  있을 것이다.

    ①젊음과 아름다움을  유지하고 싶다.

    ②치매를 예방하고 싶다.

    ③오래 살고 싶다.

    ④기억력을 유지하고 싶다.

    ⑤노화 속도를 늦추고 싶다.

    ⑥퇴직 없이 오랫동안 일하고 싶다.

    ⑦피로를 풀고 싶다.

    ⑧암을 비롯한 기타 질병에서 해방되고 싶다. 

    ⑨살을 빼고 싶다.

    ⑩스트레스를 피하고  싶다.

    ⑪여유를 즐기고 싶다.

    ⑫정력을  유지하고 싶다.

    대충 이런  내용이 아닐까? 그래서 이런 욕구를 전부 충족시킬 수 있는  사람은 즐겁고 활력이 넘치는 인생을 살아갈 것이며, 이런 사람이 늘어난다면 사회 전체에 활력이 생길 것이다.

    뇌를 활성화시키는 식생활의 세 가지 포인트

      병이란 ‘생물체의 몸에 생리적으로 이상이 생기는 현상’이라는 것이 종래의 견해였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스트레스에 관한  연구를 통해 병이 인간의 마음과 깊이 관련되어  있다는 사실이 최근에  잇달아 밝혀졌다. 인간의  마음은 개인의 문제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사회 및 시대와 상호 영향을 주고  받는다. 사회 환경이 그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의 마음 상태에 큰 영향을 미치고 한 인간의 마음은 그 사회에 많은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의사가 한 인간을 진찰할 때, 육체를 살펴보고 혈액이나  심전도를 검사하는 등의 의료  행위 그 자체만 중시하면 그 사람의  질병을 속속들이 파악할 수  없다. 그 사람이 신봉하는  사회 이념과 사회나 가정에서의 위치도 자세히  파악하여 질병이 생기게 된 원인을 다각도로 규명하여야 한다.  물론 의료 행위 그  자체만 충실히 하면 현재의  건강 상태는 파악할 수  있겠으나, 앞으로 전개될  가능성에 대해서는 단선적인  예측밖에 할 수 없는 것이다. ‘사회’와 ‘몸’과 ‘마음’  이 세 가지가 조화를 이루지 못한다면 진정한 건강이라 말할 수 없다. ‘병은 마음에서’라는 옛말에 나오는 ‘마음’은 사회가 만들어내는 것이며 그 시대의 환경에 따라 영향력을 발휘하는 양태가 다르다 할 수 있다.

    병의 유무를 진단하고 치료하는 것으로  의료 행위가 끝나는 시대는 지났다. 앞으로는 병을  미연에 방지하는 것, 즉  예방에 대한 것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병을 미연에 예방하기  위해서는 영양 보충, 적당한 운동 그리고 스트레스의 해소가  불가결한 요소가 된다.  명상으로 이완 상태를  만들어서 스트레스를 완화시키고 적당한 운동을 통해 근육을 붙이고  기존의 근육을 유지시켜야 한다.

    그리고 다음 세  가지 사항을 착실하게 지키는 식생활이 필요하다. 

    ①양질의 단백질을 섭취한다.

    ②혈관 막힘을 예방한다. 

    ③활성 산소를 중화시킨다.

    식생활로 뇌의 건강을 유지하려면 위에 열거한 세 가지  사항에 유의해야 한다.

    우선 항목 ①의 중요성을 다시 한 번 설명해 보겠다. 

    뇌내 모르핀은 누차 말했듯이 단백질로 구성된다. 그런데 이 단백질은 아미노산이  사슬처럼 엮여 만들어지는 물질이므로 아미노산이 필요하다.  반면에 아미노산은 식사를 통해서  섭취한 단백질이 분해되어 생겨난다. 아미노산은  20종이 있으며 그 중 8가지는 체내  합성이 불가능한 필수 아미노산이므로 음식물에서 섭취해야 한다.  나머지 12종은 체내 합성이 가능하다.

    하지만  여기서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양질의 단백질을  매일 충분히 섭취해야  한다는 사실이다. 그렇지 않으면  쉽게 지칠 뿐 아니라  뇌가 금방 망가져서 노망하거나  빨리 죽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뇌가  지치거나 망가지는 데는 개인차가 있다. 뇌세포를 활성화시켜 주면  망가지는 세포 수는 현저하게 감소한다. 여기서 뇌세포 활성화에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이 바로 뇌내 모르핀이므로 뇌에  충분한 영양을 공급하도록  유의해야 한다.

    현재  뇌내 모르핀은 20종 정도가 알려져 있는데, 그 중에서 티로신이라는  아미노산이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사실은  이미 앞에서 충분히 설명했다. 티로신은 아미노산  한 개로 이루어진 극히 단순한 물질이지만 마약 모르핀과 아주 흡사하며 그 작용도 거의 같다. 마약 모르핀은  중독성을 비롯한 여러 가지 부작용이 따르지만  이것은 그런 위험이  전혀 없다는 차이가 있다.  바로 이 티로신이 뇌내  모르핀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그러나 단백질은 지방처럼 한꺼번에 많이  먹어둘 수 없는 영양소이므로 필수 아미노산을 많이 포함한 음식을 매일 충분히 먹어야 한다. 구체적으로 육류와 생선류  그리고 콩류가 좋은데, 이 식품들은 단백질의 보고라 할 수 있다. 반면에  티로신 그 자체는 필수 아미노산이 아니지만, 뇌내 모르핀은 티로신만으로 구성되는 것이 아니므로 각종 아미노산을 골고루 섭취해야 하는 것이다.

    두 번째로 식생활에서 항목 ②를  충족시킬 방법에 대해 정리해 보자.

    혈관을 막히지 않게 하는 데는 제 2의 심장이라 불리는 근육이 열쇠를 쥐고 있다는 사실을 이미 제 2장에서 언급하였다.  그러나 대부분의 물질은 식사를 통해서 체내에 들어오므로 식생활 역시 혈액 순환을 원활하게 하는 데 중요하다고 할 수 있다. 혈관이 막히는  원인으로 우선 지방을 들 수 있다. 지방은 음식 맛의 원인으로 작용하므로 인간은  지방이 많은 음식을 즐겨 먹을 수밖에  없다. 반면에 지방질이 적은  음식은 혈관에 좋지만 맛이  없어서 식사하는 즐거움을 잃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지방을  섭취하는 방법이 중요하다.

    지방 자체를 피하는 식사법보다는 전체적으로 저칼로리를 지향하는 식사법을 통해 음식 맛도 느끼고 체내로 들어온 지방  자체도 소모시키는 방식이 가장 무리가 없는  것이다. 저칼로리 식사법은 예로부터 수도를 쌓는  사람이 지켜야 할 철칙 가운데 하나로 알려질 정도로 중요하다.  반면에 과식은 젊음과 건강을 해치는 최대의  적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렇다면 왜  과식은 몸에 해로운 것인가. 남아도는 영양소가 모두 지방으로 변해 혈관에 누적되기 때문이다. 지방은  우선 혈관에 고인 다음 간장과 피하의 순서로  고이게 된다. 이처럼 누적되는 지방의 특성  때문에 우리는 몸을 움직여서라도 소모시켜야  한다. 지방을 산화시키려면 가벼운  운동을 하는 것이 좋다는 사실 역시 이미 앞에서 충분히  설명했다.

    세 번째로 식생활에서 항목 ③을 충족시킬  방식에 대해 정리토록 하겠다.

    활성 산소를  중화시키는 대책으로 바람직한 것은 항산화 물질이 많이 들어  있는 음식을 섭취하는 것이다. 항산화물질이란 산화를 억제시켜 주는  물질로 비타민 C, A, E 등이 알려져  있다. 그 밖에도 최근에 녹차나 참깨,  녹황색 채소나 각종 식물, 어패류 등에서도 새로운 항산화물질이 발견되고 있다.  또 하나는 체내에서 활성 산소 중화제  SOD를 충분히 합성하는 방법이다. 그런데 SOD는 효소 즉 단백질이므로  여기서도 단백질을  충분하게 섭취하는  것이 중요한  관건으로 작용한다.  또 하나는  미네랄(mineral/광물질. 생리  기능에 필요한 광물 화합물이나  광물 원소)이다. 음식을 통해서 철이나  아연 그리고 셀레늄(selenium)  같은 미네랄을 충분히  섭취하면 체내에 SOD 합성 능력을  증가시키는 데 효과적이다.

    다음으로 몸을 녹슬게  하는 성질을 가진 기름, 특히  식물성 기름을 가급적 피하는 것이 좋다. 식물성 기름에는 불포화성 지방산이 많은데, 이것이 체내에  들어가면 활성 산소와 결부되어 과산화지질이라는 일종의  녹을 만들게 된다. 이 녹이 단백질과  합쳐져서 노인성 검버섯의 노화 색소를 만든다. 물론  불포화지방 가운데에는 인체에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도  있으나, 평소 식생활을 통해서 충분히 섭취하고  있기 때문에 지방을 포함한 식품은 물론 드레싱이나 마요네즈 같은 형태로 기름을 과다 섭취하는 식생활은  적극적으로 피하는 것이  좋다.

    활성 산소는  체내에서 에너지를 발생할 때 반드시  발생한다. 이것은 피할 방법이 없다. 그뿐  아니다. 활성 산소는 자연계에서도 발생한다.  저기압이 되면 공기 중에서 다량의 활성  산소가 발생하여 지병으로 시달리는 사람의 증상을 악화시키는  정도의 영향을 미친다. 원래 공기 중에는 0.2%의 활성  상소가 있다. 즉 활성 산소는 천재와 같은 것이어서 라이프 스타일에 따라 다소 차이가 있을지 모르나,  살아 있는 한 그 해를 피할 수 없는 것이다. 따라서  그 독을 중화시키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며, 그러기 위해서는 음식의 재료와 먹는 양에 더욱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고칼로리 식사를 하면 단백질이나 탄수화물 등 남아도는 모든 영양소가 지방으로 변한다. 뇌를 위해서는  고단백질 식품이 절대적으로 필요하지만, 이에 따른 지방의 섭취가 문제가 된다. 지방은 혈관  막힘의 큰 원인이 되므로 그것을 막으려면 저칼로리 식품을 섭취하지 않으면 안 된다. 

    쾌적한 수면을 취하면 체내에서 성장호르몬이 분비된다. 성장 호르몬은 잠자고  있는 사이에도 근육을 강화시키는 작용을 한다. 식후에 흥분하게 되면  노르아드레날린이 나오고 이것은 글루카곤이라는 호르몬의  분비를 촉진시켜  혈당치를 높인다. 기억력에  관여하는 뇌 속의 해마는 에이 텐 신경(쾌감신경)의 지배를 받는다. 뇌내 모르핀을 이끌어 내는 신경 덩어리의 근본도 에이 텐 신경이다.  산소는 플러스 전위를 가지며 수소는 마이너스 전위를 갖고 있다. 마이너스 전위를 갖고 있는 물질이 몸에 좋다.

    수영 자체는 건강에  좋으나 염소 분말을 투입한  수영장에서 수영을 하는 것은 오히려 건강을 해치는  행위가 된다. 식수로 수돗물을 그대로 마시는  것은 좋지 않다. 될 수 있는 한  정수된 물을 마시도록 해야 한다.

    된장은 뇌세포 활성화에 도움이 되는  최고의 자연 식품이라 할  만큼 건강에 도움을 준다.  콩을 사용한 식품은 아미노산 밸런스가 뛰어나 뇌내 모르핀의  재료로써 가장 적합하다. 특히 쌀밥과 콩을 곁들이면  쌀에 부족한 아미노산은 콩이 함유하고 있고,  콩에 부족한 아미노산은 쌀이 함유하고 있어 결점을 상호 보완하여 최고의 아미노산 밸런스를 이룬다. 갓 태어난  아기가 엄마 젖을 빨 수 있는 것은 이미  뇌 안에 그러한 노하우가 입력되어 있기 때문이다. 기억은 DNA, RNA에 새겨져 있으며 평소에는 의식하지 못하지만  자아는 늘 자각하고 있다. 이것은 본능이나  생리적 욕구라는 형태로 나타난다.

    독성인 활성 산소가 많이  발생되는 가장 큰 원인은 스트레스다. 스트레스란 신체에  가해진 심리적, 생리적 일그러짐을 말한다.   매사에 마이너스로  받아들이면 스트레스가 발생한다.  불안이나 근심, 욕구불만이나 증오, 질투나 부러움, 열등감  등의 마이너스 발상은 모두 스트레스의 원천이 된다. 뇌내 모르핀이  분비되면 스트레스가 마이너스로 작용하는 것을 피할  수 있다. 일을 즐기는 사람에게서 그것을 빼앗으면, 중성지방이 증가하여 혈당치가 높아지고 곧 질병 위험 영역으로 들어서게 된다.  샐러리맨이 정년 퇴직 후 치매나 성인 병에 걸리게 되는  원인은 좋아하는 일로부터 소외 당한 결과에서 비롯되는 경우가 많다. 

    뇌내 모르핀을 잘 분비시킬  수 있는 식생활의 포인트는  다음 세 가지이다.

    ①양질의 단백질(아미노산)을 섭취한다.

    ②혈관 막힘을 예방한다.

    ③활성 산소를 중화시킨다.

    제4장 뇌가 젊으면 125살까지 살 수 있다

     지금까지 간과되어 온 뇌의 건강

      최근 평균 수명이  80세에 가까워지면서 사람들은 오래  살 수 있게 되었다며 기뻐하고 있다. 그러나 본래  인간의 수명은 이보다 훨씬 긴 120∼125년이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이 생물체로 유지할 수 있는 자신의 수명을 다하지 못하고 죽는다. 가끔 개나 고양이의 수명은 어느 정도이며  말의 수명은 몇 년인가 궁금할 때가 있다. 여기서  말하는 ‘수명’이란 한계 수명을 말한다. 인간의 한계 수명은 대충 계산해 보더라도 100년이  넘는다. 동양의학에서는 ‘160세설’이라는 말도 있으며, 신선도 같은  책에는 장수에 관한 이야기가 많이 나오지만  근거가 없으니 뭐라고 말할  수 없다.

    일본만 하더라도 백 살 이상의  노인이 5천여명이나 있다. 그러나 이것을 초장수로 볼 수는 없다. 이런 분들이야말로 인간 본래의 수명을 살고 있는 셈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125살이라는 한계 수명은 어디에 근거하는 것일까. 이것은 뇌의 발육 기간을 근거로 산출한 수치이다. 인간의 뇌는 대개 25살까지 성장한다. 그런데 일반적으로 한계  수명은 뇌 성장 기간의 5배이므로 25×5=125년이라는  기간이 산출 되는 것이다.  척추 동물 모두가 이  등식의 적용을 받는다. 우리 집안에는 109살, 107살,  105살로 100살 이상 장수한 선조가 세분이 계시나, 아직 110살  대로 들어간 사람은 없다. 나는 금년에 56살인데 어떻게든 그  선을 돌파해 보고 싶은  욕심을 가지고 있다. 현재의  학문 수준으로 볼 때 이것은  충분히 실현 가능한 욕심이라 생각한다.

    그렇다면  어째서 인간은 한계 수명보다 일찍  죽는가. 평균 수명을 나타내는 통계 수치는  사고와 유아의 사망도 포함한 것이므로  실제보다 낮은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100살 이상 장수하는 사람이 늘어났다고 해도 아직  그리 많은 숫자가 아니다. 분명 어딘가에 수명을 단축시키는  원인이 있는 것이다. 그 원인은 대부분  라이프 스타일에서 비롯된다. 그 가운데서도 가장 중요한 것이 바로 식생활이다. 과식이나 편식, 화학 물질의 영향 등이 특히 수명을 단축시키는 요인으로 작용한다. 또 철야를 하거나 밤낮을 거꾸로 사는 생활도 바이오 리듬(biorhythm/육체·감정·지성 등을 통해  일정한 주기로 나타나는 생명  활동 리듬)를 깨뜨려 몸에  무리를 준다. 세 번째는 부족한 운동량이 몸을 녹슬게 하는 것이다.

    그러나 뭐니 뭐니 해도 가장 문제가 되는 것은 역시 뇌라고 할  수 있다. 뇌가 튼튼하고 근육만 어느 정도 붙어 있다면 100살 이상 사는 것은  간단한 일이다. 뇌를 돌보지 않는 상태에서는 아무리 몸을 단련하고 식사에 신경을 써도  아무 소용이 없다. 그러나 문제는 뇌를 단련하는 방법을  아는 사람이 별로 없다는 데 있다.  흔히 머리를 쓰라고 말하지만, 지금까지 누누이 설명했듯이 무턱대고 쓴다면 아무 효과도 없다.

    건강과 장수를 위해 머리를 쓰라는 것은 플러스 발상을 습관화하라는 것을 의미한다. 플러스 발상을 하면  뇌내 모르핀이 분비된다. 뇌내 모르핀이 분비되면 뇌세포가 활성화된다. 그래서  라이프 스타일을 긍정적으로 수용하면  언제나 젊음을 유지할 수 있고 성인병도 예방할 수  있다. 장수를 불가능하게 만드는 최대의 적은 성인병이다.

    현대처럼 의료 기술이 발달한  시대에서도 성인병은 좀처럼 고치지 못한다.  어쩌면 이것은 당연한 현상일는지  모른다. 성인병은 만성 질환의 일종이기 때문에 아무리  퇴치시키려고 노력해도 큰 효과를 기대할 수  없다. 왜냐하면 성인병은 그  원인의 80∼90%가 누적된 스트레스, 즉 마음의  병에서 비롯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양의학은 병이  난 국소만 치료하고 가장 중요한 마음의 치료는  소홀하게 다루어 왔다. 그러나 이런 현상은  어떤 면에서 너무나 당연한 결과일는지 모른다. 왜냐하면 서양의학은  병이 난 국소는 얼마든지 진단할 수 있지만, 마음을 판단할 방법은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제는 그것이 가능하다. 뇌생리학의 발달로 마음의 변화를  상당 부분까지 물질적으로 해명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그 결과 뇌내  모르핀을 잘 분비하는 생활을 해야 한다는 사실이 확실하게 밝혀졌다. 한 인간이 살아가는  방식에 따라 뇌 안의 물리적 환경도 변화된다. 이런 변화를 관찰하면 그 사람이  건강한 몸으로 지낼 수 있는 지, 가까운  장래에 어떤 병에 걸리게  될 것인지를 손바닥 들여다보듯  훤히 알 수 있게 된다. 

    그러나 현대의학은 이런 사실을 알고 있으면서도  실천에 옮기지 않는다. 아직도 질병 부위에 초점을 맞춘 치료만 고집하고 있다. 위에 염증이 생기면 염증을 가라앉히는  약을 준다. 하지만 그 약이 염증을  가라앉히는 동시에 다른 부작용을  일으킬 수 있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무관심하다.  염증을 고치는 것이 급선무라는 사고방식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암이 발생하면 환부를 잘라내거나 방사선으로 태워버린다. 하지만 발병 원인을  파악해서 그 원인을 제거하지 않는 한 암이 재발할  건 너무나 뻔한 사실이다. 이런 관행이  잘못된 의료 행위라는 것을 알면서도 고치지 못하는 이유는 현재의 의료 제도가 이미 병이 난 환자만 상대하는 시스템이기 때문이다.

    건강한 사람은 병원에 찾아오지 않는다. 찾아오는 것은 병에  걸린 사람뿐이다. 반대로 건강 관리를 위한  시설에서도 환자를 받아주지 않는다. 쇠약해 보이는 사람도 없다. 건강한 젊은 이들만 모여서 육체를 단련하고 있을 뿐이다. 인간이 나이가 들어  쇠약해지는 것은 그 누구도 막을 수 없다. 하지만  고령화 사회로 전환해 가는 이 시점에서  정말로 필요한 것은 나이 든  사람들이 병에 걸리지 않고 건강하게  여생을 보낼 수 있게 하려는 발상의 전환과 이들을  수용할 수 있는 적절한 시설이다. 병을  치료하는 시설도 중요하지만 병에 걸리지  않은 사람이 휴식을 취할 시설도 필요하다.  이런 시설에서 병에 걸리지 않고 살 수 있도록 생활 지도를 한다면 노인을 괴롭히는 건강상의 문제는 자연히 해결될  것이며 많은 사람이 인간의 한계 수명인 125살까지 살 수 있으리라 나는 믿어 의심치 않는다.

    인간이 병에 걸리는 것이야말로 이상한 일이다

      사람은 병에 걸리기  위해서 태어난 것이 아니다. 그러나 오늘날  대부분의 사람들은 병으로 죽어가고  있다. 나이가 들어 병에 걸리지 않으면  이상하게 여길 정도로 병은 우리에게  가까운 존재가 되어 버렸다. 의술과 의료  기관은 환자를 구제하기 위하여 존재한다. 그런데 의술이 발달하고  의료 기관이 이렇게 많아졌는데도 환자는 줄지 않고 오히려 점차 늘어나는  실정이니 정말 어이가 없다. 인간은 본래 병에 걸리지 않는 건강체로 한계 수명까지 살 수 있는 구조를 갖추고 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오늘날 갖가지 질병이 늘어나는 이유는 무엇일까. 난치병이 점점 증가하는 이유는  과연 무엇일까.

    그 원인은 크게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다. 그 하나는  병에 걸리는 게 너무나 당연한 현상이라는  사고가 만연하다는 것이다. 나이가 들면 당연히  병이 생기는 것이라 생각하고 있다. 이것은 서양의학의 발달이 가져다 준 웃지 못할  결과라고 할 수 있다. 옛날에는 ‘404병’이라고 해서 병의 수를  나타내는 말까지 있었다. 그런데 이제는 의사도  기억하지 못할 정도로 병의  종류가 많아졌다. 이것은  국소·장기별 의학이 가져다  준 크나큰 폐해이다. 장기별 의학은 병의 가짓수만큼 치료법도 많아진다. 게다가 그 치료법은 국소의 병을  치료하는 데만 전념하기 때문에 그  병은 낫지만 또 다른 병을 유발시키는 경우가 적지 않게 발생한다. 상황이  이렇게까지 심각하게 변한 이유는 의사도 일반인도 병에 걸리는 것이 이상할 게 전혀 없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심리학 분야에서  최근에 밝힌 중요한 사실은 ‘인간은 자신이 사고하는 방향으로  변화하는 존재’하는 것이다. 이런  논리에서 볼 때,  많은 사람이 병에 걸리는 현상을 너무나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기 때문에 병이나 환자의 수가 점점 증가한다고 말할 수 있다. 동양의학은 병에  걸리지 않게 하는 것을 중요하게 여기고 있다는 사실은 앞에서 충분히  설명했다. 동양의학이 이렇게 사고하게 된 배경에는 ‘인간은  본래 건강하게 살 수 있는 존재’라는  건강관이 깔려 있다.

    나는 동양의학의 이 같은  사고방식을 철저하게 지지한다. 동료들  가운데에 의학은 참으로 멋진 것이라고 늘 얘기하는 사람이  있다. 그 이유는 병으로 고통 받는 사람을 고쳐 주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물론 그것은 의미 있는 일이다. 하지만 그 동료는 병이 난  이유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것은 의사가  개입할 문제가 아니며, 의사는 병을 고쳐 주기만 하면 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바로 이것이 서양의학의 배경에  깔려 있는 사고방식이다.

    사회적 상황도 이런  사고를 부추기는 커다란  원인으로 작용한다. 병에  걸리지 않는 방법을  지도해서 미연에 병을 예방할 수 있게 되면  병원에 찾아오는 사람이 줄어들 것이고 그러면 의사가 먹고 살기 어렵게  될 것이다. 동시에 거대한 자본을 투자한  의료 재단 역시 경영상 커다란 문제에  봉착하게 될 가능성이 많다.

    여기에서 더욱  위험한 것은 그 치료 방법이다.  병원끼리 혹은 의사끼리 치료 성과를 다툰다고  하면 이상하겠지만, 어쨌든 국소의  병만 신속하게 치료하고 끝내려 하기 때문에  몸 전체 상태는 신경을 쓸 겨를이 없는 것이다. 이러한  의료 형태 때문에 암세포는 없앴지만, 환자는 죽게 되는 어처구니없는 일이 생기기도 한다. 병을 고친다고 해서 환자가 건강을 되찾는다고 할 수  없다. 이런 모든 현상은 결국 ‘병에 걸리는 것이 이상하다’는 인식이 없기 때문에  발생하는 문제라 할 수 있다. 이러한 사고방식을 개선하지 않는 한, 질병의 종류와 환자의  숫자 그리고 의료비는 결코 줄어들지 않을 것이다.

    생물계 전체를  볼 때, 인간만큼 병치레를 많이 하는 동물은 없다. 동물은 의사가 없어도  종족을 보존하며 번영을 누리고 있다. 그렇다고 해서 자연계의 동물들이 질병에  대해 전혀 아무런 대책 없이 살아가는  것은 아니다. 그들은 자신의 뇌 안에 새겨져  있는 본능에 따라 유익한 것은 받아들이고 해로운 것은 배제하면서 살아가고 있다. 몸에 갖추고  있는 자연 치유력과 체내의 제약 공장을 풀가동시키는  것만으로 충분히 건강을 지키며  살아갈 수 있는 것이다. 기본적으로 동물과 같은 이런  생활 방식, 즉 인간의 육체가 갖추고 있는 생명력을 최대한 살려나가는  것이 동양의학의 기본적인 사고방식이다. 

    그런데 그것은 언제부터인가 낡은 사고로 받아들여지게 되었다.  왜냐하면 그 원리를 합리적으로 설명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경혈에 침을  놓으면 통증을 느끼지 않는 이유는 무엇인가. 경혈을 자극하는  방법으로 어떻게 병을 낫게 하는가. 이 같은 의문점을 과학적으로 설명할 수 없었기 때문에 동양의학은 과학의 토대 위에 쌓아 올린 서양의학의 방법론에  늘 우위를 빼앗길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이제는 그것을 설명할 수  있게 되었다. 음양이나 사기라는 것은 전위이며  활성 산소이고 호르몬이었다. 동양의학의 원리를 이렇게 물질적으로 설명할 수 있게 되자, 성인병 계통의 질병을 고치는 데는 서양의학보다 동양의학이 큰 효과를 발휘하고 있다는 사실을 입증할 수 있게 되었다.

    병이  늘어나는 두 번째 이유는 지난 200∼300년 동안 인간이 저질러  온 형태와 관련이 있다. 특히 지난  100년 동안의 영향이 크다. 상징적으로 말한다면 벌레나 세균이  자라지 못하는 환경에서는 인간도 살 수 없는  법이다. 인류는 농약을 사용해서 곤충이나 작은  동물은 물론 세균까지 모조리 죽여가면서 겉보기에만 훌륭하고 먹음직스러운 야채나 과일을 재배하는 데 열중했다. 하지만  이것은 분명히 잘못된 것이다.

    여기에서 파생된 부작용의 한  예로 요즘 유행하고 있는  아토피(atopic, allergie/선천적으로 과민한 사람에게 나타나는 과민성 피부염)를 들  수 있다. 아토피는 항상균과 공존할 수 없을 때  나타나는 증상이다. 사람의 피부에는  이로운 균과 해로운 균  등 여러 가지 균이 있으며, 이 균은  서로 상호 작용을 하며 피부를 보호한다. 그런데 그 균형이 깨졌을 때 아토피 증상이 일어 나는  것이다.

    인간의 내장 안에서는 백 종 이상의 균이 서식하면서  인간과 공존하고 있다. 공존하다 보면 서로  해가 되기도 하지만 이익을 제공하기도 한다. 다시 말해서  서로 도움을 주고 받는 관계를 형성하는 것이다. 그런데  국소 치료를 하는 약물이나 화학 물질이  섞인 식품·음료수 등이 이 같은  공존을 깨뜨려서 문제를 일으키게 되는 것이다.  우리는 동물이나 곤충 혹은 미생물이 살 수 없는 토양에서 자라난 음식을 먹지 말아야 한다. 곤충과 세균 그리고 동물과 먹을 것을  다투는 환경이 오히려 인간의 건강에 유익하다. 다행히 최근에는  그런 환경을 되찾으려고 노력하는  사람이 늘어나고 있으며, 그 방법론을 연구하는  사람도 많아지고 있다.

    몇 번씩 강조하지만 본래 인간은 건강하게 120년  이상 살아갈 수 있는 신체적 구조를  갖고 있다. 간장이라는 장기는 80%까지 잘라내도 생명에 지장이 없다. 그만큼 뛰어난 수용 능력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그렇게 건강체로 태어난  인간이 한계 수명인 125년을 살지 못하는 가장 커다란  원인 가운데 하나는 잘못된 건강관이다. 인간은  필요한 모든 것을 체내에 갖추고 있으며 늘 건강하게 살 수 있는 존재라는 사실을 가슴속에 담아두기 바란다.

    장수하는 사람의 공통점은 ‘끙끙 앓지 않는 것’

      그러나 지나치게  자유롭게 제멋대로 살아가는 생활  방식은 바람직하지 못하다. 오래  살려면 세 가지 포인트에  유의해야 한다는 사실을 앞에서  설명한 바 있다. 그 세 가지 포인트에  관해 좀더 자세히 살펴보기로 하자.

    첫 번째로 식사를 들 수 있다.  동양의학에는 ‘의식동원’이란 말이 있다. 여기에서 ‘의’는  치료를 뜻하는 것이  아니다. 의학적 측면에서 받아들이면  ‘질병을 치료하는 식품이 있다’는 뜻이 되겠지만, 실제로는 ‘먹는 것이  곧 치료’라는 말이다. 이 말은 잘못된 식사법은 건강을 해치지만 올바른 식사법은 병을 치유하고 건강을 유지시킨다는 뜻이다. 여기서 올바른 식사법이란 고단백·저칼로리 식사를 의미한다.

    식생활이 건강의 열쇠라는 사실은  누구나 알고 있지만, 무엇을 얼마나 어떻게  먹어야 하는지에 관해서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잘 모르고 있다. 일반적으로 볼  때 사찰의 정진요리가 좋은  참고가 된다고 앞에서  설명했다. 확실히 그것은  좋은 식사법 가운데 하나지만 사람은  개개인에 따라 각자 그 신체적 조건이  다르다. 요산치가 높은 사람이 있는가  하면 당뇨기가 있는 사람도 있다. 혹은  간장이 약한 사람도 있다. 따라서 건강한 사람은 물론이고 질병에  걸릴 위험권에 들어 있는 사람 역시 자신의 신체적 특성에 맞는 식생활을  해야 한다. 개개인에 맞는 식생활 지도가 필요한 것이다.  그러나 현재 올바른 식생활을 지도하는 기관은  거의 없다. 일단 질병에 걸리면  여러모로 보살펴 주지만, 질병에 걸릴 위험이 있더라도 아직 증상이 겉으로 나타나지 않는 사람에게는 식사법에 대한 적절한 지도를 해주는 기관이 없다.

    나는 직업상 백 살까지 장수하는 사람과 만날 기회가 많다. 그런데 이런  분들은 몇 가지 공통된  특징을 가지고 있다. 첫째는  음식을 가리지 않고 무엇이나 잘 먹는 다는 것, 둘째는 식사량을 정량의 80%정도로 억제한다는 것, 셋째는 동물성 음식에  치우치지 않고 야채를 많이 먹는다는 것, 마지막으로 몸을 많이 움직여 주는 것 등이다.

    하지만  여기에서 조심해야 할 사항은 동물성 지방은 물론  식물성 지방도 지나치게  섭취하면 좋지 않다는  사실이다. 식물성 기름에는 불포화 지방산이 많아  체내에서 활성 산소와 합성되어 몸을 산화시키고 세포막을 상하게  하는 특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식물성  기름은 특별히 섭취해야 할 이유가  없으므로 최대한 멀리하는 것이 좋다. 한식과  양식을 비교하면 한식이 훨씬  건강에 도움이 된다. 그것은 내가 동양인이기  때문에 그렇게 말하는 것이  아니다. 서양식이 성인병을  예방하는 데 그다지  바람직하지 않기 때문이다. 염분을 줄이고 양질의 단백질을 섭취하는  것에 유의한다면 한식은 최고의 장수식이라 할 수  있다.

    장수의 두 번째 조건은 혈관이  막히는 현상을 예방하는 일이다. 성인병은  대부분 혈관 이상에서 시작된다. 당뇨병이나  통풍, 고혈압이나 동맥 경화도  결국은 혈관 막힘으로 인해 생기는 병이다.  그런데 혈관이 막히는 현상을 피하는 방법은 두 가지가  있다. 그 중 하나는 근육을 쇠퇴시키지 않는 것이다.  근육은 심장과 마찬가지로 피의 흐름을 원활하게  만드는 작용을 한다. 그러므로 근육이  약해지면 피의 흐름이 그만큼 나빠진다. 이것이 혈관 막힘 현상과 관계가 있다는 사실은 이미 앞에서  설명했다.

    또 다른 하나는 혈관을 막는 원인으로 작용하는 지방의 섭취를  줄여야 한다는 것이다. 콜레스테롤이나 중성지방은 혈관에  쌓이는 특성을 가지고 있다. 이것이 연소되면  큰 문제는 없으나, 지방은 근육 속에서만 연소되는 특성이 있다. 그러므로 지방을 연소시키기 위해서라도  근육을 단련시킬 필요가  있다. 나이가 들면  아무래도 운동량이 줄어든다. 그러나 이것을 나쁘다고만 볼 수는 없다. 나이 많은 사람이 과격한 운동을 하면 활성  산소의 해를 입을 가능성이 많아지기 때문이다.  따라서 나이가 들수록 운동량이 감소하는 현상은 자연의 섭리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인간 역시 동물이기  때문에 운동을 중단하면 안 된다.  움직이지 못하면 동물은 죽는다.

    움직이지 않는 것은 건강에 결정적인 마이너스로  작용한다. 나이가 들어도 평소대로 자연스럽게 활동하면  젊었을 때 붙은 근육이  줄어드는 일은 별로 없으며 근육을 유지하는 한  혈액 역시 원활하게 흐를 것이다. 성인병이  늘어나는 원인중의 또 다른 하나는 경제가 발전함에 따라 교통 수단이 늘어나고 그로 인해 많이 움직일 필요가 없게 되었다는 것이다.

    장수의  세 번째 포인트는 뇌를 활성화시키는 것이다. 인간의 모든 활동은 뇌의 명령을 받는다. 면역체의 기능 역시 뇌의 통제를  받는다. 따라서 뇌를  쇠퇴시킨다는 것은 건강을  악화시킨다는 것과 직결된다. 그러나  현대인 가운데 뇌를  활성화시키는 방법을 제대로  알고 있는 사람은 별로 없다. ‘머리를 쓰라’고 말하는  사람은 많지만 실제로 어떻게 사용하면 좋은지에 대해서는  별로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다. 건강과 장수에  도움이 되는 뇌 활용 법은  플러스 발상이다.

    세계 어디를 가도 오래  사는 사람들은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끙끙  앓지 않는다’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이것은 플러스 발상이 생활화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뇌내 모르핀을 그만큼 많이 분비할  수 있는 것이다. 매사를 긍정적으로 생각해서 뇌내  모르핀을 많이 분비시킨다면 누구나 건강하게 오래 살  수 있을 것이다. 뇌내 모르핀을 분비하는  기준은 바로 α파인데, 뇌파를  α파 상태로 만들려면  항상 편안하고 즐거운  상태로 유지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너무  바빠서 좀처럼 그런 것에 신경을 쓸  수 없는 사람들에게도 한 가지 좋은 방법이 있다. 잠자는  시간을 이용하는 방법이 바로 그것이다. 아무리 바쁜 사람이라도 하루에  한 번은 잠을 잘 수밖에 없다. 바로 이때를 활용해야 한다. 아무리 혹독한 상황에 처했다 해도  잠자리에 들 때는 미래의 꿈이나 희망  혹은 인생의 계획 등을  떠올리도록 하는 것이 좋다.  과거의 즐거운 추억을 되새기는 것도 좋다. 편안한 기분으로  잠들면 뇌세포가 활성화되고 근육에도 좋은 자극을 주어  운동한 것과 똑같은 효과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심한 스트레스가 쌓여 그것이 뇌리에서  떠나지 않더라도 어떻게 해서든 그것을 플러스 발상으로 바꾸려고 노력해야 한다. 처음에는  힘겨울지 모르나 점차 익숙해질 것이다. 이것이 건강과  장수를 누릴 수 있느냐 없느냐의 문제로  직결된다는 사실을 항상 명심하기 바란다.

    그저 오래 산다고 좋은 것은 아니다. 건강하고 맑은 정신으로 사는 것이  중요하다. 올바른 식사와 근육 유지 그리고  플러스 발상에 유념한다면 이것은 얼마든지  가능하다. 고령화 사회로 들어서면서  사회적 문제가 조금씩 파생되고 있다. 사회적으로 약자가 된  노인을 젊은 노동력이 받쳐 주어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고령화 사회는 힘든  사회’라고 말하는 사람이 많다. 그러나 반드시 그렇다고 볼 수는 없다. 사회 제일선에서 물러났을 뿐, 노인은 그렇게 나약한 존재가  아니기 때문이다. 이들은 인생 경험이 풍부한  선배로 사회를 발전시키는 데 꼭 필요한 존재다. 체력이 필요한 일은 젊은 이들이 담당하고, 고령자들은 경험이 필요한 일을 담당하면 될 것이다.  물론 이런 역할 분담이 가능 하려면 노인도 건강한 육체와 맑은 정신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이렇게 볼 때 노인은 자신은 물론 사회를 위해서라도 오랫동안 건강하게 살아야 할 의무가 있는 것이다.

    의사는 삼기 중에서 약과 메스만 사용하고 있다

      세상에는 질병으로 고통 받는  사람도 있지만, 지나치게 건강해서  인생을 헛되이 낭비하는  사람도 적지 않다. 이런  사람들은 대개 돈 버는 일에  혈안이 되어 있거나 사회적으로 높은  지위와 명예를 탐내는 경우가 많다. 물론  이것 자체는 크게 비난할 일이 아닐지 모른다. 그러나 이런  사람도 산 속에서 조난을 당하게 되면 지금까지 필사적으로 손에 넣은 것들이 아무 소용도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돈이나 명예가 목숨보다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겠으나, 그것이 통용되는 사회는 상상외로  좁다. 거액의 수표를 끊는다 해도 조난을  당한 상황에서는 아무 소용이 없다. 그리고 다른 사람의 10배, 100배의 돈을 벌었다 해서 10배, 100배를 먹은 것은 아니다. 역시 10배, 100배를 더 사는 것도 아니다.

    반면에 성공한 사람일수록  고독하게 살기 쉽다.  마음을 터놓고 얘기할  사람이 주위에 없기 때문이다. 직장인도  회사 일에만 열중하면 당시는 만족할지  모르나 정년이 가까워지면서 ‘내가 이렇게 살아도 괜찮은 걸까’하는  회의를 품게 된다. 이런 회의가 생기는 이유는  기존의 생활 방식에서 진정한 만족을 느끼지  못한 탓이다. 일에 열중하는 생활 방식이 꼭 허무하다는 것은  아니다. 다만 이제 사고의 전환이 필요하다는 뜻이다. 왜냐하면 세상이 그만큼 많이 변했기 때문이다.

    마즈로의 욕구 단계설로 설명한다면, 전쟁 후 우리는  제 1단계의 욕구를 충족시키는 단계에서 시작하여 안전과 소속의 욕구도 충족시켰고,  현재는 인정받고 싶어하는 욕구에서 자기 실현의 욕구로 전환하고 있는 단계라 할 수 있다. ‘내가 잘 되고 회사가 잘 된다면야……’라는  생각은 더 이상 현대인을 만족시키지  못하게 된 것이다. 다른 사람과의 경쟁에서 이겨 돈과 명예를 획득했다고 가정하자. 과거에는 그런 성공을 향해 모두가 박수 갈채를 보냈다.  그러나 이제 이런 아메리칸 드림은 더 이상 박수를 받을 수 없다. 남을  짓밟고 자기 이익만 추구하는 방식은 더 이상 통용될 수 없는 사회가 되었다. 왜냐하면  공생의 규칙이 확립되지 않는 한 인류는 멸망을 향해 치달을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환경 파괴 등의 행위는 자신 스스로 목을 조이는 행위와 똑같은  것이다.

    그러나 인간은 건강할 때나 성공을 거두고  있을 당시에는 좀처럼  그것을 깨닫지 못한다.  기분이 최고조일 때도 남의 말이 귀에 들어오지 않는다. 또  이와 반대로 구사일생을 했거나 실의의 밑바닥에 빠져 있을 때 혹은 큰 병을 얻어 죽음에 대한 체험을 할 때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그런  역경을 딛고 다시 일어서면 기존의 사고는  백팔십도 달라지게 된다. 그런 의미에서 본다면  질병이 꼭 나쁜 것이라고 할 수는 없다. 순풍에 돛을 단 듯  살다가 생사의 고비를 헤매게 하는 질병과  맞닥뜨리는 순간, 정신이 번쩍 뜨이고 이제까지 굳어 있던 사고에  균열이 생긴다. 그 시점이 언제인가가 문제다. 죽음의 병상에서  뉘우친다면 이미 늦은 것이다. 가능하면 더 빨리 깨우치는 게 좋다. 

    건강이 지나치게 좋아서 인생을 헛되이 보내는  사람은 불을 환하게 밝히고 계란을 줄줄이 낳는 양계장의 닭과 같다. 그 닭은 머지않아 알을 못 낳게 되고 결국 닭고기로 팔리는 신세가  된다. 사회적으로 성공한 사람 중에 어이없이 일찍 죽어버리는  사람이 많은데 이것 역시  그런 사례 가운데 하나라 할 수 있다. 내 인생이니 어떻게 살아가든 내 마음이라고 생각할지 모르나, 지금까지 아무리 자기  멋대로 살아온 사람이라 하더라도  역시 누구나 사는 날까지 건강하게 살고자 하는 욕심은 갖고 있을 것이다.  그리고 세상을 위해 혹은 이웃을 위해 뭔가 보람된 일을 하고 싶다고 생각할  때도 가끔 있을 것이다. 그럴 때 나는 그 사람에게 뇌내 모르핀 이야기를 해준다.  건강한 사람이나 현재 자기 생활에 별 문제가 없는 사람은  처음에는 좀처럼 수긍하지 않지만 어떤 계기가 생기면 갑자기 순수하게 받아들일  때가 있다. 바로 이럴 때 나는  의사가 된 것을 고맙게 생각한다. 왜냐하면  그 사람이 병에 걸릴 확률을 현저하게  줄이는 방법이 되기  때문이다.

    오늘날, 의사는 삼기  중에서 주로 약과  메스에만 의존한다. 그러나 실제로는 대화를 통해서도 치료가 가능하다.  대화를 통한 치료는 환자의 몸 속에 있는 본연의 치유력을 이끌어내서 병을 치유하는 방법으로 아무 부작용이 없으므로 의사로서 자부심을 가질 만한  치료법이다. 전통 무예에서는 흡기와 호기에 관한 얘기를 많이 한다. 숨을 들이마셨다가  바로 내뱉는 것은 좋지 않으니, 숨을 들이마시는 것과  내뱉는 동작을 잠시 멈추라는 것이다. 그러면 혈관이 확장하여 대사 작용이 좋아진다. 내뱉을 때는  가슴 안의 혈관이 확장되지만 그 밖의 부분은 수축된다.  따라서 숨을 멈추었을 때  밸런스가 가장 좋다. 바로 이때 나쁜 기가 빠져나간다. 무도를 하는 사람은 바로 이 호흡법을 활용하고 있다.

    기공 역시 동양의학의  중요한 부분 가운데 하나다. 그런데 태극권을  기공으로 생각하는 사람이 많다. 물론 태극권을 기공의 하나라고 말할 수 있다. 하지만 태극권만 기공은 아니다.  넓은 개념에서 태극권이나 기타 무술을 비롯  명상도 기공에 포함된다. 즉, 아무것에도  구속되지 않은 편안한 상태에서 인생에 대해 생각하는 것이 바로 기공인 셈이다. 그러므로 자기가  움직이고 싶은 대로 몸을 움직이는 것도 기공이며  즐거운 생각을 하면서 길을  걸어가는 것이나 세상을 위해 어떤 일을 할까 상상하는 것도 기공이다. 또한  사랑하는 아내와 함께 편안한 마음으로 산책하는  것도 기공이다. 자연계의  에너지 리듬에 맞게  뇌내 호르몬의 밸런스를 조정하는 것은 모두 기공이라 할 수 있는 것이다.

    어떤 상황에서도 플러스 발상을 하는 법

      뇌내 모르핀을  분비하는 최고의 조건은  플러스 발상을 하는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 플러스 발상을  한다는 것은 말처럼 그렇게 간단하기 않다.  왜냐하면 인생을 살아가다 보면  성공보다 실패를, 즐거운 일보다는 괴로운 일을  많이 접하기 때문이다. 즐거운  일이 있을 때 플러스  발상을 하는 것은 간단하다. 그러나 실패했을 때나 혹독한 환경에 처했을 때 어떻게  플러스 발상을 하는가. 바로 이것이 뇌내 혁명의  가장 중요한 관건이다.

    플러스 발상의 진수는  좀처럼 플러스로 생각할  수 없는 상황을 플러스  발상으로 전환시키는 데 있다.  설령 육친과 사별하더라도 하늘을 원망하지 않고  자신에게 일어난 모든 일을 최선의 상황으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평범한 인간은 좀처럼  그런 경지에 이르기 힘들겠지만, 마이너스 상황을 플러스 발상으로 이끌어 가야 한다는 것이 가장 중요한 테마이므로 이 점에 대해서  잠시 숙고하고 넘어갈 필요가 있다.

    예를  들어 너무나 사랑하는 사람이 죽었을  때 우리는 어떻게 생각하는가. 만약 죄가  있어서 죽어야 한다면 차라리 자기가  죽는 편이 낫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을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는 상대방이나 본인에게 아무런 잘못이 없는  경우가 허다하다. 갓 태어난 아기가 갑자기 죽었다고  가정하자. 부모의 슬픔이란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일 것이다. 이 아이는 왜 태어났을까. 잠시 동안 부모에게 기쁨을 주었다가 그것을 송두리째 빼앗아 비탄의 나락으로 빠뜨리기  위해서 태어났는가. 그렇다면 너무나 가혹하다. 하나님도 부처님도 없느냐며 하늘을  향해 저주를 퍼붓는 부모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저주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이와 비슷한 사례가 성경의 욥기에 나와 있다. 재물과  가족, 명예와 출세 등 사회적으로 무엇 하나 부족함이 없고, 또 독실한 신앙심 역시 따를 자가 없었다고 하는 욥. 그는 갖가지 재앙이 닥쳤을 때 한때는 하늘을 저주하지만 이윽고 자신에게는 그럴 자격이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피조물인 인간은  창조주의 의도를 알 수  없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의학적으로  보더라도 인간의 인체 구조에는 해명할 수  없는 부분이 너무 많다. 간 하나만 보더라도 전체의 20%도 사용하지 않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80%를 제거해도 생명에 지장이  없는 것이다. 뇌세포 역시 전체 180억개 가운데에서 극소수만 사용하고 있다. 또한 일반  세포는 헤이프릭의 한계라고 하는 수명을 가지고 있는데 어째서  암세포는 영양만 공급되면 영원히 살 수 있는가. 이것도 불가사의  가운데 하나다. 이런 의문에  대해 아직 명확한 해답이 없다.

    그런데 최근에 와서 한가지 사실은 명확하게 밝혀졌다. 뇌는 우리 인간이 건강하고 행복하게 인생을 즐기며 살아 가기를 원하는  게 바로 그것이다. 물론 우리 인간은 자유 의지를  가지고 있으므로 다른 선택을 할 수도  있다. 인생을 행복하게 살고 싶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그런 방향으로 살아갈 수  있으며, 인생을 불행하게 살고 싶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그런 방향으로 살게 될 가능성이 많다는 것을 의미한다. 바로 이것이  뇌내 모르핀의 발견을 통해 밝혀진 사실이다.

    다만 전제 조건은 창조주의 의지에 합당하게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창조주의 의지에 역행하는 행위를 하면 아무리 행복하게 살고 싶어도 점차 파멸을 향해 나아가게 되는 것이다. 노르아드레날린이나  아드레날린의 세계가 바로 그것이다. 뇌의 명령은 창조주의 명령과  일맥상통한다. 의학적인 견지에서 보면  창조주가 바라는 세상은 결국 자기  실현을 향한 세계로 귀착하게 된다. 그렇다면  자기 실현이란 무엇인가. 마즈로 박사의 해석을 빌리면 그것은  진, 선, 미, 약동, 개성, 완전, 필연, 완성, 정의, 질서, 단순, 풍부, 즐거움, 자기 충실 등의 개념이다.  말하자면 누가 보더라도 올바르고  훌륭한 생활 태도, 남에게 비난 받지 않고  즐겁고 충실하게 살아가는 생활 태도를 몸에  갖추는 것이 자기 실현이며 인간으로 태어난 목적이라 할 수 있다. 훌륭한 행동을 할 때  최고의 행복과 기쁨을 느끼게 되는 이유 바로 이것 때문인 것 같다. 지나치게  거창한 해석이라 뭔가 속아넘어가는 듯한 느낌을 받는  사람이 있을지 모르겠다. 그러나 실제로 뇌내  모르핀에 관련된 에이 텐 신경의  활동 유형을 살펴보면 역시  이것이 인생의 진실이라는 사실을 다시 한 번 확인 할 수 있다.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에이 텐 신경은 원뇌에 있으며 파충류나 개나  고양이도 갖고 있는 신경이다. 이 신경은  쾌감신경이라 불리는데, 이 신경 세포가  자극을 받으면 기분이 좋아진다. 섹스나 식욕의 만족감을 쾌감이라 부르는 이유도 모두 이 신경  세포가 자극을 받기 때문이다. 이것은 뇌내  모르핀의 근원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이 신경은  불가사의한 요소를 가지고 있다. 일반  신경은 자극을 받는 방향이 플러스로 나가든  마이너스로 나가든 일정 정도에 도달하면 브레이크가 걸린다.  아무리 성욕이 강하더라도 일단 충족되면 그것을 억제하는 호르몬이 나와서 욕구를  멈추게 된다. 이것을 네거티브 피드백이라고 한다는  것은 앞에서 말한 바 있다. 식욕의  경우에는 글루카곤이라는 호르몬과  인슐린이 그러한 관계에  있다. 뇌내 모르핀의  경우에도 억제 물질이 작용한다.  그러나 에이 텐  신경이 인간 특유의  전두연합야와 연결되어 작용할 때는 브레이크 기능을 하는 물질이 생기지  않는다.

    그 이유는 무엇 때문인가. 인간이 진선미에  관계되는 행위를 하거나 정의로운 행동을 할  때는 그것을 방해하는 물질이 분비되지  않는다. 뇌내 모르핀이 계속 분비되어 나온다. 그런데 뇌내 모르핀은 마약 모르핀에  비해서 그 효력이 훨씬 크기 때문에 인간은 자기 실현을 하고 있을  때 가장 커다란 쾌감을 느끼게 되는  것이다. 나는 바로 이 같은 물리적  현상에서 창조주의 의도나  목적 같은 것을  느낀다.

    일반적으로 예술가가 오래 사는  이유는 이들이 진선미에 관계된 일을 하기  때문이다. 뇌내 모르핀이 끊임없이  분비되어 창작 의욕을 고조시키며  나아가 창작의 기쁨으로 이어지게 된다. 나이팅게일이나 슈바이처가 90세까지 장수를  누릴 수 있었던 원인 역시 그들이 세상과 이웃을 위해 살았기  때문이다. 평범한 사람의 눈에는 괴로운 일 투성이로 보이지만, 그들은 우리 생각과  달리 고도의 쾌감을 느끼며 살았을 가능성이 크다.  위인이나 현인들의 발자취를 보고  ‘고생이 많았겠다’고 하는 것은 속인들의 얕은 생각에 불과하다. 그들  자신은 실제로 굉장히 풍부한 마음의 재산을 누렸던  것이다.

    20세기도 다 저물어가는 이 시점에  뇌내 모르핀의 커다란 효능이 밝혀졌다는 것은 세상이 크게 변화할 수밖에 없다는 필연성과 동시에 눈에 보이지  않는 어떤 의지가 현존한다는 사실을 실감하게  만든다. 너무나 훌륭한 대상을 보면 이제까지  우리는 외경심을 품을 뿐 자신이 직접 도전하려는 용기는 좀처럼 낼  수 없었다. 왜냐하면 그 길은 너무  힘들고 고되게 보일 뿐 조금도 즐거운  일이 아니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제  상황은 달라졌다. 인간은 전두연합야와  에이 텐 신경을 연관시켜 활동시킬 때  최고의 기쁨을 맛볼 수 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그것이 바로 마즈로 박사가 말한 ‘자기 실현’의 경지인 것이다. 자기  실현을 할 수 있는 사람은 ‘지고체험’의 경지에 도달할 수 있다고 판단한 마즈로 박사의 통찰력에 놀라지 않을 수 없다.

    병에 걸리지 않게 만드는 것이 목적

      나는 병원 사업 이외에 건강 의료원, 헬스  클럽, 메디컬 에스테, 건강 호텔 사업 등에도 관심을 기울이고 있어 확대 주의자란  말도 듣고 있으나, 이것은 모두 오해에서 비롯된 것이다.  내가 목표로 하는 것은 ‘병에 걸리지  않게 하는 것’뿐이다. 건강 의료원은 병원과 별 차이 없으나, 이곳을 찾는 사람은 환자가 아니라 모두 건강한 사람들이다. 그러나 그들은 혹시  고질적인 질병이 발견되지나 않을까 두려워하며 찾아온다. 그런 사람들에게 쓸데없이  심리적인 부담을 주지 않고 편안하게 왔다가 ‘오기 잘했다’고  생각하며 집으로 돌아갈 수 있게 하려고 약간 정성을 기울인 것이 소위 ‘건강 의료원’이다. 

    우선 내부 장식을 완전히 우리 식으로 꾸미고 안내하는 사람도 간호사 복장 대신  전통 의상을 입게 만들었다. 그리고 전통 음악을 틀어주고 검사 후에는 즉석 요리도 서비스 하고 맥주도 마실 수 있게 했다. 너무 파격적이라서  처음에는 여러 가지 물의를 일으켰다. 그러나 가격이 예상외로 저렴했기 때문에 이곳을 찾아오는  사람들은 모두 놀라워했다. 일반 종합 병원에서 실시하는 검사 가운데에는 검사 대상으로 하여금 불안감을 느끼게 만드는 것이 많다. 특히 위 내시경은 그 자체가 스트레스로 작용한다. 건강 진단을 하는  단계에서 병의 원인이 될  수 있는 스트레스를 주게  되는 것이다.

    이것은 병을 예방하기  위한 장소에서 병의 씨앗을 뿌리는 행위와  같다. 이러한 스트레스로 인하여 건강한 사람은 좀처럼 종합  병원을 찾아가지 않는다. 하지만 질병을 미연에 방지하려면  건강할 때 진단을 받아야 한다. 따라서  종합 병원에 찾아오는 부담감을 덜어 주려는 노력의 일환으로 편안한 호텔 같은 공간을 연출해 보았던 것이다.

    경영상의 적자는 각오하고  시작했는데 뜻밖에도 초만원 사태를 이루게 되었다. 지금은 헬스 클럽과 메디컬 에스테 시설도 갖추게 되었고, 앞으로 건강 호텔도 만들 계획이다. 나는 이런 것을 통틀어서 ‘토탈 헬스 엔지니어링’이라 부르고 있다. 환자만 찾아오는 병원에서는 동양의학이 가지고 있는 장점을 충분히 살릴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  건강 의료원에서는 그 사람의 아킬레스건을 찾아내서 어디가 어떻게 될 것인지를 충분히 살핀다. 또한 ‘이 상태가 계속되면 곧 뇌가 상하게 됩니다’,  ‘심장이 나빠집니다’, ‘암이 됩니다’라고 말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그것을  피할 수 있는 방법을 처방해 준다.  처방 내용은 올바른 식사와 운동, 명상 그리고  메디컬 마사지이다. 일반 종합 병원에서는 여러 가지 수치만 제시하는데 전문가가 아닌 일반인은 그  수치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앞으로 무엇을 어떻게 해야  좋을 지 모른다.

    병에 걸리지 않게  하는 방법이 있는데도 그렇게 하지 않는 이유는  경영상 돈벌이가 안 되기 때문이며 현재의 의료보험 제도가 잘못 되어  있기 때문이다. ‘건강을 회복시키면 그만큼의 보험료를 지불한다’는 시스템으로 전환하면 의사도  올바른 의료 행위를 하게 될 것이다. 현재의 의료 형태는 본래의 보습을 많이 역행하고  있다. 자신의 건강을 위해 의사에게 굽실거려야 하는  현상도 뭔가 크게 잘못된 것이다. 의사가  으스댄다는 것 자체가 우스운 일이다. 동양의학에서는  환자에게 머리 숙여 사과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는데,  오늘날 그것이 뒤죽박죽 되어버린  것이다. 최근에 인폼드 컨센트(informed consent/환자의 동의·승낙)라는 말이 많이 사용되는데, 나는  이 말을 들을 때마다 격세지감을 느낀다. 의사로 일해온 지 30년, 그 동안 내가 추구해온 일이 바로  그런 것이었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나를 이상하게  생각하는 사람도 없지 않았다. 그러나 이제 겨우  내 의도를 이해하는 것 같다. 다행히 나는 어려서 동양의학을 접할 수  있어 남보다 빨리 그런 치료 방식을  실천할 수 있었다.

    동양의학이 전반적으로 재평가되고 있는 오늘날의 상황으로  볼 때, 나는 앞으로 의료 행위가 좀 더  나은 방향으로 변화될 것이라 믿는다. 하지만  다른 무엇보다 한시라도 빨리 고쳐야 할 것은 건강을 위해 뭔가를 희생시켜야 한다는 사고방식이다. 약물 요법이 하나의 전형이라 할 수 있다. 어린이가 천식 발작을 일으키거나 알레르기 반응을  보이는 것은 약물에서 비롯되는 경우가 많다.  앞에서도 소개했지만 우리 병원에서는 인슐린  주사를 맞던 당뇨병 환자가 찾아오면 인슐린과 내복약을 최대한  빨리 중단시킨다. 식사 요법과 운동과 명상  그리고 메디컬 마사지로 대신한다. 가장 이상적인 상황은 병이 나서  의사 신세를 지는 일 자체를 없애는 것이다. 자기 스스로 할 수 있는  방법을 의사에게 배워 일상 생활 속에서 실행하면 성인병은  대부분 예방할 수 있다. 왜냐하면 성인병에  걸리는 원인은 대개 그  사람의 문란한 일상 생활에 기인하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건강했던 사람이라도 좋지 않은 생활 습관이 붙게 되면 차츰 질병의 골짜기로 빠져들게 된다. 만일 의사가 그  진행 과정을 알게 되면 그 단계에서  적절한 처방을 내릴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이런 단계에서  처방을 받는 사람은 거의 없다. 의사와 아주 친한 사람만  그 단계에서 처방을 받을 수 있을 뿐이다. 하지만 나는 병을 예방하는  차원의 전문의가 되기 위해 노력해 왔다.  동양의학은 건강을 증진시켜 질병을 미연에 방지하고  환자의 자연 치유력을 끌어내는 데 그 목적을 두고 있다. 일반 의사 역시 그런 사고를  갖는 것이 사회 전반을 위해 바람직한 일이다. 의료 행위가 병만 치료하던 시대는 이제 종말을 고하고 있다. 이제부터는 ‘병에  걸리지 않는 방법’에 관해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  의사나 환자도 그런 생각에 의견을 일치할 수 있다면 그 자체로 상당한 의료비를 절약할 수 있을 것이다.

    우뇌를 많이 사용하면 α파 상태를 만들 수 있다

      뇌파가 α파일 때  뇌내 모르핀이 나온다. α파와 뇌내 모르핀이  하나의 짝을 이루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뇌파가 α파를 유지하는  상태는 깨어 있는 것도 자고 있는 것도 아닌  그 중간 정도의 상태다. 잠에서 깨어나  일상적인 행동을 하고 있을 때는 잔뜩  긴장하게 되므로 뇌파는 β파 상태가 된다.  반면에 깊이 잠들어 있을 때는 θ파, δ파  상태가 된다. 하지만 깨어 있는 상태에서도 잠을 자는 것처럼 뇌의 활동을  떨어뜨리면 매우 좋은 효과를 얻을 수  있다. 그러면 잠재 뇌를 활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DNA에는 본능 이외에 선조의 경험이나 지혜는 물론  정보까지 입력되어 있다고  설명했는데, 바로 그것이  우뇌에 저장되어 있다. 편안한 상태로 긴장을  이완시키면 잠재 뇌가 활동하고, 그러면 우뇌 역시 활발해져 α파를  방출시키는 것이다. 그런데  역으로 뇌파가 α파  상태가 되어 β-엔돌핀이 분비되면 내부에서 잠자고 있던 재능이 활동하여 우뇌에 저장된 기억이나 정보를 자유자재로 이끌어 낼 수 있게  된다. β파 상태에서는 상상도 못한 능력을 발휘하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α파의 최대 장점이라 할 수 있다.

    뇌파를 α파로  바꾸는 요령은 좌뇌를  진정시키는 것이다. 우뇌와  좌뇌를 비교해 보면 평상시에는 좌뇌가  우위에 있다. 말이나 계산 논리를 관장하는  좌뇌는 말하자면 이성의 뇌이며,  사람이 잠에서 깨어나 활동하고 있을 때는  거의 좌뇌를 사용하게 된다. 좌뇌는 태어난  이후에 받은 모든 자극을 저장한다. 그러나 반복해서 동일한 자극을 받게 되면 그 자극이  우뇌로 입력되어 간다. 우뇌에 입력된 이것은 유전자에 새겨져 영구 보존된다. 천부적으로  그림을 잘 그린다거나 리듬 감각이 예민하다는 등의 천재적인 재능은 과거에 선조의 선천 뇌에 새겨져 있던 능력이 그 사람의 단계에서  발휘된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누구의 선천 뇌에나 훌륭한 재능은 감추어져  있다. 소위 잠재 능력이 바로 이것이라  할 수 있다. 그 능력을 끌어낼 수 있다면 누구나 천재가 될 수 있는 것이다.

    교육의 목적은 인간이 훌륭한  재능을 발휘하도록 돕는 것이어야 한다. 그러나  인간이 가지고 있는 무한한 재능을 계발하기는커녕  그 싹을 잘라 내 버리는 현재의 획일적인 교육은 많은 문제점을  안고 있다. 학교는 죽었다. 인간으로 하여금 자유롭고 활달한 분위기에서 자신의 독특한  개성을 계발하게 만드는 학교가 없기 때문이다. 획일적인 규격에 따라 평균 점수가 나오고  그 점수만 좋으면 괸다는 식이므로, 어느 특정 분야에 뛰어난 재능이 있더라도  다른 부분이 떨어지면 좋은 평가를 받을 수 없다. 그런 교육은 전근대적인  기업에 도움이 되는 인간만 길러왔을 뿐이다. 그것은 좌뇌만 사용하는  효율적인 기계 부품을 만들어낸 것과 같다. 전쟁 후에 비로소  발전의 틀을 다지기 시작한 우리  현실을 볼 때 그것은 당연한 결과였는지 모른다. 그러나 우리 앞에 펼쳐진 세계는  그런 교육을 더 이상 용납하지 않을 것이다. 의학적으로  볼 때도 우뇌를 많이 사용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좌뇌는 의식적으로 에너지를 발생시켜야 하지만 우뇌는 에너지를 많이 사용하지 않고 효율적으로 도파민을  작용시킬 수 있다. 사람이 개성을 가지고  자신의 최고 능력을 발휘할 수 있다면 이 세상은 더욱  살기 좋은 사회로 변할 것이다. 그렇게 하려면 뇌내 모르핀을  분비할 수 있는 교육, 뇌파를 α파  상태로 만들 수 있는 교육,  우뇌를 많이 사용하는 교육이  필요하다. 그렇다면 개인적으로 그런 상태를 만들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최근에는  뇌파계가 있어서 그것을 사용하면 자신의 뇌파 상태를  측정할 수 있게 되었다. 이 기계를  이용해서 자신의 뇌파가 어떤 때 α파  상태가 되는지 파악한 다음, 그런 상태를  최대한 오래 지속하도록 훈련하는 방법이 좋다.

    또 하나는 신념을 갖는 일이다. 인간은 누구나 자기 나름대로 신이나 절대적인 존재 혹은 동경의  세계를 가지고 있다. 우리는 그것을 신념이라  부른다. 신념이 있으면 사소한  일에는 흔들리지 않는다. 그러면 플러스 발상  역시 그만큼 쉬워진다.  이런 상태는 신앙심이  독실한 사람에게서 흔히 볼  수 있다. 종교에 깊이  빠지면 남이 보기에 이상하지만  본인을 무한한 행복을 느낀다.  어떤 종교든 나름대로 신자를  획득할 수 있는 이유는  믿음 그 자체로 뇌내 모르핀을  분비시킬 수 있다는 이점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상태가 되려면  신앙심도 좋지만 신념이나 사명감을  갖는 것도 한 방법이다. 신념을 갖고 있으면 뇌를 컨트롤하기 쉬워진다.

    현재의 교육제도가 바람직하지 않다고 하는 이유는 바로  이 같은 신념을 길러 주지 못하는 구조이기 때문이다. 최근 교내  폭력과 동료 학대 문제가  사회적으로 큰 물의를 일으키고 있다. 이것은 신념이 없는 사회가 만들어낸 전형적인 피해의  한 사례라고 할 수 있다. 사람들은 피해자에게 지나친 동정을  보이는 반면 가해자를 규탄하는 데 열중하고 있으나,  내가 보기에는 가해자 역시  피해자인 것이다. 교통사고의 가해자가 나중에 피해자  이상의 피해를 입게 되는 경우를  종종 볼 수 있다.  교내 폭력도 이와 같다. 친구를  학대하거나 구타하는 아이들의 뇌 발육 과정을  보면 정신구조가 마즈로의  첫 번째 욕구 단계에  머물러 있는 경우가 많다.  왜냐하면 아직 안전에 대한 욕구가 없기 때문이다. 특히 마음의  안정에 대한 욕구는 거의 무방비 상태라고  할 수 있다. 누가  보아도 잘못된 행위를 되풀이하고  있다는 것이 바로 그 증거다.  친구를 협박해서 돈을 빼앗다가 발각되면 빠져나갈  구멍이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런 행위를  태연하게 되풀이한다는 것은  일종의 자살 행위라고 볼 수  있다. 이들은 저급한 단계의 욕구를 만족시키기  위해서 자신을 망치는 행위도  서슴지 않는다. 그  욕구 자체가 어린이  당사자에게는 살아가는 보람으로 작용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자신의 존재  가치를 확인하는 보람을 누리기 위해 무척이나  애쓴다. 그것을 추구하지만 충족시킬 수 없기  때문에 자포자기한 나머지 자기 학대를 향해 내닫기도 한다.  그러면 그럴수록 이 세상을 살아간다는 게 더욱 막막하게  느껴진다. 그래서 극도로 초조해진다. 그러나 뇌가 좀더 발육하면 자기가  저지른 행위가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 깨닫게  된다. 그러면 자연히 안전에 대한 욕구가 생겨 자신에게 마이너스가 되는 행위에 제동을 걸게 된다.

    최근에 교내  폭력이 증가하는 또 다른 배경으로 획일적인  교육 시스템을 들 수 있다. 학생들은 자신이 바라든 바라지  않든 아침부터 밤까지 공부를 강요당한다. 정말로  공부가 좋아서 하는 사람은  극소수에 불과하다. 그런 아이들은 공부를 하면 할수록 뇌내 모르핀을 분비할 수 있어 더욱 열심히 공부에 임할 수 있다. 부모들은 툭하면 ” 를 봐라, 얼마나 열심히 공부하는지……’라고 말한다. 그러나 공부가 싫은 아이를  강제로 시키면 그 결과는 불 보듯  뻔하다. 공부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아 노르아드레날린과 아드레날린의 세계에 빠져들고 말 것이기 때문이다. 어린이는 친구들과 놀면서 몸을 단련시키고, 인간 사회를 살아가는 데 필요한  규범을 배워 성인으로 살아갈  준비를 하게 된다. 운동  경기를 통해 다른 아이와 경쟁하면서  ‘나보다 뛰어난 아이가 있다’ 든가  ‘노력하면 그 나름의 성과를 얻을 수 있다’는 것을 체험하며 성장한다. 그런데 현대 교육은 절대적 가치 평가의 잣대만을 중요시하기 때문에 상대보다 좋은 점수를 얻기만 하면 최선이다. 이런 경쟁 구조에서는 상대를 밀어내는  것이나 적대시하는 것밖에 배우지 못한다. 다시 말해  ‘나만 잘 되면 된다’는 이기적인 사고방식을  갖게 되는 것이다. 대체로 공부를 잘하면  좋은 대학에 사고 그러면 일류 기업에  취직할 수 있다. 그런 것밖에 생각하지  않는다는 자체가 발상의 빈약함을 뜻한다. 자신이 추구하는 인간의 유형과 인생에  대해 자유롭게 생각하는 즐거움을 완전히 빼앗기고 말았다. 이런 시대를  살아가는 아이들이 너무 불쌍할 뿐이다.

    어느 학급이든 학업 성적이 뛰어난 학생이 한두 명은 있기  마련이다. 그러나 동시에 성적이 형편없는 아이도 한두 명은 있을 수밖에 없다. 또  힘이 센 아이가 있는가 하면 친구를 잘 사귀는 아이도  있다. 갖가지 개성이 하나의 학급 속에  뒤섞여 있는 것이다. 그런데 학업  성적이 좋은 학생 이외에는 모두 쓸모 없는  인간으로 규정하는 것이 현재의 교육 현실이다. 이런 학교에서는  학업 성적 이외의 재능을 가진 학생은 무척이나 견디기 어려울 것이다. 자신의  개성을 정상적으로 발휘할 공간이 없어진 학생은  급기야 쇠막대로 부모를 때리거나  살인 강도 행위도 서슴지 않게 된다.

    이런  일이 일어나는 것은 모두  다 우리 어른들의 책임이다. 수준을 한 단계 높여서 우리 인간은 무엇  때문에 태어났고 어떻게 사는 것이 올바른 삶인가를 가르쳐야 하는데, 그런 것을 가르칠 사람이 없다. 일반인은 물론 교사 자신도 그런 생각을 하지 않기 때문이다. 우선  이런 문제점을 차분히 생각할 필요가 있다. 물론 반도체나 자동차를  잘 만들어서 수출하면 많은 돈을 벌 수 있다. 이것은 이 사회를  유지하기 위해 상당히 필요한 역할이다. 하지만  이런 부분에만 혈안이 된 나머지, 가장 중요한 인간 교육은 뿌리 채 뽑혀나가고 말았다.

    뇌내 혁명은 삶의 즐거움을 발견하는 것

      노골적으로 말하면, 인간은 원래 쾌감 법칙에 충실하게 살아가는 동물이다. 뇌내 모르핀을 분비하자는 이유도 이 법칙에  충실하기 위해서이다. 하지만 저 차원적 욕구만 채우기 위해 노력한다면  우리 인간은 파충류나 개나 고양이와 별 차이가 없는 존재로 전락한다. 다행스러운 것은  뇌내 모르핀이 뇌의 전두연합야와 연관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전두연합야네는 인간의 예지가  들어 있어 이것이 에이 텐 이라는 쾌락 신경과 연결되면 인간은 쾌락을 즐기면서 높은 차원으로 발전할 수 있다.

    예를 들어  한 아이가 진흙땅에 넘어졌다고 하자. 이때 자신의 옷을 더럽히면서도 도와주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모르는 체  지나치는 사람도 있다. 그렇다면 아이를 도와준 사람의 심리는 도대체  어떤 것일까. 옷을 더럽히면서까지 아이를 도와주는 행위는  어디로 보나 훌륭하다. 그러나 이것도 뇌가  그런 행위를 명령했기  때문이며 그 결과 그 사람은 그만한 쾌감을 느끼게  된다. 반면에 그냥 지나친 사람은 뇌가 그냥 지나치도록 명령했기  때문에 모른 척 한 것이다.

    명령하지 않았는데도 의무감이나  책임감 때문에 아이를 도와준다면 노르아드레날린이 분비된다. 결국 원하지 않는 행위를  함으로써 정신적으로 커다란 손해를 입게 되는 것이다. 뇌내 모르핀을 잘 분비하는 훈련을 쌓았기 때문에 이런 사람은 어느 상황에서나 쉽게 쾌감을 느낄 수 있다. 부럽다면 부러운 일이겠지만 자진해서 배우고 싶은 생각은 없다. 유명한 마술사를  만난 것 같은 놀라움은 있겠지만, 결코 정신적으로 높은 경지에 도달했다고 볼 수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들이 분비하는 뇌내 모르핀  역시 그다지 높은 레벨이라 할 수  없다. 아무리 뇌내 모르핀이 많이 나오더라도 신의 선물을 받지  못할 때가 있는 것이다.

    인간은 누구나 각자 독특한 사명을 갖고 태어났다. 그것이  무엇인지 자각할 수 있을 때 신은 그 인간에게 뇌내 모르핀을 분비하게 해주고,  지칠 줄 모르는 활력과 성실함으로 발전적인 사고를 펼쳐나가게 하는 것이라  생각한다. 그런데 자신에게 주어진 사명을 파악하려면 DNA에 의존 할 수 밖에 없다. 그러기 위해서는 뇌파를 α파 상태로 만들어 잠재의식의 속삭임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뇌내혁명이란 바로 그런 것이며, 그것은  삶의 즐거움을 발견하는 과정이기도 하다. 자신의 사명이 무엇인지 깨닫게 되면 그 사람은 무한한 기쁨 속에서 인생을 살아가게 될 것이다.





    평안은 주님의 선물입니다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것과 같지 아니하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요한복음 14:27)

    유대인 랍비 조수아 리브만의 책 '마음의 평화'에 나오는 이야기 입니다.
    어느 젊은이가 현명한 노인을 찾아갔습니다.
    노인이 젊은이에게 물어습니다.
    "그대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가?" 젊은이가 대답합니다.
    첫째는 건강이고,
    둘째는 재물이며,
    셋째는 미모이고,
    넷째는 재능이며,
    다섯째는 권력이고,
    여섯째는 명예입니다.
    듣고 있던 노인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자네는 그 모든 것을 얻고 싶겠지만 마음의 평안이 없이는 아무것도 누릴 수 없다네."
    평안은 평강이라는 말과 함께 쓰이는데, 걱정이나 탈이 없다는 뜻으로 주로 개인의 내적 상태를 일컫습니다.

    히브리어로는 '살롬',
    헬라어에서는 '에이레네'를 광범위하게 사용하고 있습니다.
    평안은 삶의 가장 본질적인 복이며, 그리스도인의 성품입니다.
    인류 역사 이래로 모든 사람이 한결같이 원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안녕, 평안일 것입니다.
    평안은 내면의 감정이나 외부의 상황에 휘둘리지 않는 성품입니다.
    살다 보면 미래에 대한 염려, 과거에 대한 후회, 그리고 현재의 불안이 우리의 마음을 흔들어 놓을 때가 있습니다.
    평안은 모든 동요를 포함하여 평정심을 잃지 않는 성품입니다.
    급변하는 상황에 휘둘리고 평정심을  잃게 됩니다.
    그래서 믿음이 없으면 평안도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삶의 주인으로 모신 사람마다 마음에 평안을 얻게 됩니다.
    주께서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27)."하셨습니다.
    이 평안은 세상이 알수도 없고 줄 수도 없는 평안입니다.
    속죄받은 믿음의 사람에게 하늘의 평화가 깃들게 됩니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얻은 평안에 머물고 또한 나누기 위해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그리스도의 평화가 여러분의 마음을 지배하게 하십시오.
    이 평화를 누리도록 여러분은 부르심을 받아 한 몸이 되었습니다.
    또 여러분은 감사하는 사람이 되십시오(골 3 :15)."



     




    이 세상에 없는 필수품 다섯 가지
    시인 강월도(1936-202)



    이 세상에는 도망쳐 숨을 곳이 아무 데도 없데요.
    이 세상에는 돌이킬 수 있는 일은 아무 것도 없데요.
    이 세상에는 편히 쉴 곳이 마땅치 않데요.
    이 세상에는 사랑할 만한 사람이 아무도 없데요.
    이 세상에는 사는가 죽는가, 선택의 여지가 없데요.



    독일 제친 K-장갑차…한화에어로, 호주서 2조원 '잭팟

    • 한화에어로, 호주서 잭팟 2조원 규모 장갑차 수출

      獨 제치고 '레드백' 129대 계약
      자주포 이어 K방산 위상 재확인
        K-  2
      한화에어로스페이스가 5년간 공들여온 보병전투장갑차의 호주 수출에 성공했다.
      총 129대로 약 2조원 규모다.
      특히 독일 방산기업인 라인메탈과의 경쟁에서 승리하면서 한국 방산의 높아진 위상을 재확인했다는 평가가 나온다.

      호주 언론사인 디 오스트레일리언은 26일 “패트릭 콘로이 호주 방위산업부 장관이 이날 한화에어로스페이스에 전화를 걸어 한화의 보병전투장갑차 ‘레드백’ 129대를 공급받는 계약을 체결하겠다는 뜻을 전달했다”고 보도했다.

      디 오스트레일리언은 이번 계약이 24억호주달러(약 2조 676억원) 규모라고 전했다.
      독일 라인메탈의 입찰가가 더 낮았지만, 성능 면에서 한화의 레드백이 라인메탈의 ‘링스’ 장갑차보다 높은 평가를 받았다고 설명했다.

      호주는 2019년 9월 ‘랜드(LAND) 400 3단계 사업’을 발표하며 장갑차 보급 계획을 확정했다.
      한화의 레드백은 라인메탈의 링스와 함께 최종 공급 후보에 올랐다.
      초기에는 라인메탈이 호주 브리즈번에서 다른 장갑차인 ‘복서’를 생산하고 있어 한발 앞섰다는 평가가 많았다.
      호주는 최근 독일 정부와 브리즈번에서 생산되는 복서 100대를 독일로 역수출하는 계약을 맺기도 했다.
      10억달러(약 1조3000억원) 규모로 호주 무기 수출 사상 최대였다.
      독일은 호주가 생산한 무기를 북대서양조약기구(NATO)에 납품할 수 있도록 돕기도 했다.

      호주 정부는 양사가 치열하게 경쟁하는 가운데 최종 결정을 계속 미뤘고, 그 사이 정권이 교체되며 계약 규모는 당초 450대에서 129대로 줄었다.
      지난해에는 호주에 장갑차가 왜 필요한지에 대한 무용론이 제기되기도 했다.

      그러나 호주 정부는 결국 한화에어로스페이스를 장갑차 공급 업체로 선정했다.
      레드백은 K-21 보병전투차량을 기반으로 호주 지형에 맞춰 제작한 보병전투장갑차다.

      한화에어로스페이스는 2021년 12월 호주와 K-9 자주포 수출 계약을 맺었으며 호주 절롱시 아발론 공항 내에 최첨단 장갑차 생산시설(H-ACE)도 짓고 있다.
      한화에어로스페이스는 호주의 차세대 장갑차 사업에 뛰어들어 5년간 수출을 위해 적극 노력했다.

      이에 대해 한화에어로스페이스 관계자는 “관련 수주에 입찰해 결과를 기다리고 있지만 아직 공식적으로 통보받은 것은 없다”고 말했다.

      김재후 기자 hu@hankyung.com

    한수원, 폴란드에 원전 수출 사실상 확정… 최대 20조원 규모


    입력 2022-11-01 03:00업데이트 2022-11-01 0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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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폴란드 민간사와 협력의향서 체결

    정부와 한국수력원자력이 최대 약 20조 원 규모의 원자력발전소 폴란드 수출을 사실상 확정했다.
    아직 법적 구속력이 없는 협력의향서(LOI) 단계이지만 폴란드 정부가 본계약 전까지 경쟁 입찰을 부치지 않기로 한 데 따른 것이다.
    유럽으로의 첫 원전 수출로, 아랍에미리트(UAE) 바라카 원전 이후 13년 만에 한국형 원전(APR1400)을 수출하게 됐다.

    31일 산업통상자원부와 한수원은 서울 중구 더플라자호텔에서 폴란드 국유재산부, 폴란드 전력공사(PGE), 민간 에너지기업 제파크와 원전 개발계획 수립 및 지원을 위한 LOI와 양해각서(MOU)를 각각 체결했다.
    이번 사업은 폴란드 퐁트누프의 기존 화력발전소 부지에 최대 4기의 원전을 짓는 것으로, 앞서 미국 웨스팅하우스가 수주한 폴란드 정부 발주 원전 사업(6기)과는 별개다. 민간 주도 사업으로 폴란드 정부의 ‘에너지정책 2040’에 포함된 원전 건설 프로젝트를 보완하는 성격이다.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나토) 회원국으로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후 대미 관계가 한층 중요해진 폴란드 정부가 미국 웨스팅하우스를 정부 발주 원전 사업자로 선정하면서 한국에도 사업 기회를 주기 위해 별도의 민간 주도 사업을 만들었다는 게 정부 설명이다.

    2020년 8월 미국과 폴란드가 정부 간 협정(IGA)을 체결한 후 한국 프랑스가 폴란드 정부 발주 원전 사업에 뛰어들었지만 결국 웨스팅하우스로 사업권이 넘어갔다.

    박일준 산업부 2차관은 “폴란드 정부가 당초 계획한 6기에 더해 추가로 민간 주도의 원전을 건설하기로 했다”며 “폴란드 정부가 민간 추진 사업은 한국과 하기로 결정한 것으로, 별도의 입찰 과정 없이 곧바로 사업을 진행한다”고 말했다.

    박 차관은 “미국과 폴란드 정부 간 협정이 체결된 후 한국과 프랑스가 수주 경쟁에 나섰지만 (이미) 절반 이상 미국에 넘어간 것”이라며 “(정부 발주 원전 사업을 따내지 못한 것을) 고배를 마셨다고 생각하지 않는다”고 덧붙였다.

    이번 사업은 원전 건설 예산, 공정 등의 기본 계획이 수립되지 않아 건설용량이나 사업비는 확정되지 않았다.
    정부는 1.4GW(기가와트) 원전 2∼4기로 추정하고 있는데, UAE 바라카 원전 4기 건설비용이 1기당 약 5조 원이었음을 감안하면 최대 20조 원 이상의 수주가 예상된다.

    박 차관은 “UAE 원전 수주는 13년 전이고 지금과 달라진 부분이 있어 구체적인 금액을 산정하기는 어렵다”고 말했다.
    한수원의 폴란드 원전 사업은 이르면 2026년 착공에 들어갈 예정이다.

    이번 원전 수주는 국내 원전업체들에 일감을 공급해 고사 상태에 빠진 원전 생태계를 복원하는 데 도움을 줄 것으로 기대된다.
    정부의 2030년 원전 10기 수출 목표에 주춧돌을 놓았다는 평가도 나온다.
    이창양 산업부 장관은 “한국과 폴란드 양국은 최근 글로벌 공급망이 불안정한 상황에서 원전 협력을 토대로 방산, 배터리, 수소·전기차 등 다양한 분야로 협력을 확장할 예정”이라고 말했다.


    세종=김형민 기자 kalssam35@donga.com



    07-31-2023(월)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여호와의 신(미가 3:8)


    오직 나는 여호와의 신으로 말미암아 권능공의와 재능으로 채움을 얻고 야곱의 허물과 이스라엘의 를 그들에게 보이리라.
    But as for me, I am filled with power, with the Spirit of the LORD, and with justice and might, to declare to Jacob his transgression, to Israel his sin.

    여호와의 신(the Spirit of the LORD)
    루아흐 아도나이(רוּחַ יְהוָה)

    사람에게는 다섯 가지의 기가 있어야 합니다. 
    첫째는 눈에는 총기(聰氣)
    둘째는 얼굴에는 화기(火氣)
    셋째는 마음에는 열기(熱氣)
    넷째는 몸에는 향기(香氣)
    다섯째는 끈기(忍耐) 
    선지자 미가는 인간이 갖추어야 할 다섯 가지 기(氣)에 하나를 더 추구하여 신기(神氣)를 가져야 한다고 합니다.
    이 다섯 가지의 기를 오기(五氣)라고 합니다.
    신기(神氣)를 갖는 사람을 "성령인(聖靈人)" 이라고 합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회의 문제를 설명하면서 교인들을 세 종류로 구분합니다.
    첫째는 육(肉)에 속한 사람
    육에 속한 사람을 자연인(自然人)이라고 합니다.

    둘째는 육신(肉身)에 속한 사람
    육신에 속한 사람은 어린 아이와 같이 받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이라고 합니다.

    셋째는 영(靈)에 속한 사람
    영에 속한 사람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할 수 있는 사람을 말합니다.

    북 왕국 이스라엘과 남 왕국 유다가 망(亡)한 까닭은 제사장을 비롯하여 사회 지도층의 사람들이 그들의 본분(本分)을 망각하고 탐욕(貪慾)에 붙잡혔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철학자 플라톤은 그의 유명한 저서 이상 국가에서 사람들은 누구나 덕(悳)을 갖춰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덕이란 곧 본분과 같습니다.

    농사군은 농사군의 덕
    상인은 상인의 덕
    군인은 군인의 덕
    왕은 왕의 덕
    목사는 목사의 덕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인의 덕

    세상이 망할 징조는 모두가 덕을 버리고 욕망과 탐욕에 붙잡혀 이기적인 삶을 즐기기 때문입니다.
    믿음의 사람들이여
    모두가 자기의 덕을 버리고 탐욕에 시달릴 때 우리는 온전한 믿음으로 내가 맡은 본분 즉 덕을 철저하게 지킴으로 세상의 소금과 빛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여호와의 신 즉 주의 영이 내게 임할 때 나는(자아) 깨어지고 부수어져서 새로운 존재로 일어날 수 있습니다.

    아주 노련하고 존경받는 수도사 한 사람이 젊은 수도사의 교육을 막 시작했습니다.
    아직은 좀 건방지고 교만한 구석이 있는 젊은 수도사에게 교훈을 주기 위해서 그는 흙을 만지면서 이런 대화를 나눕니다.

    아주 견고하고 딱딱한 흙을 만지면서 젊은 수도사에게, “여보게, 여기 물 좀 붓지”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젊은 수도사는 물을 부었습니다.
    그런데 물이 흙으로 스며드는 것이 아니라 딱딱한 흙이라서 그냥 옆으로 흘러내리고 맙니다.
    노련한 수도사는 “이 딱딱한 흙은 물을 받지 못하네”라고 말하면서 옆에 있는 망치를 집어들더니 그 딱딱한 흙덩이를 부수기 시작했습니다.
    그런 후에 젊은 수도사에게 다시 물을 부어 보라고 합니다.
    젊은 수도사가 부서져서 부드러워진 그 흙 속에 물을 붓자 그 물이 흙을 응고시키기 시작했습니다.
    그 다음에 이 수도사는 웃으면서 말합니다.
    “여기다가 말이야. 씨를 뿌리면 틀림없이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을 것이 아니겠나? 우리는 이것을 수도하는 사람들은 깨어짐의 영성의 법칙이라고 말하지.”


    미가 3:4. 부르짖다(2199) 자아크

    זָעַק 스트롱번호2199
    1. 소리 지르다
    2. 니팔형 : 소집하다
    3. 히필형
    발음 / 자아크[ zâʽaq ]
    관련 성경 / 부르짖다(삿 6:7, 겔 21:12, 욥 35:9), 울다(삼하 13:19, 렘 48:31), 부르다(삿 12:2, 호 7:14, 욘 1:5), 슬피 울다(사 14:31), 애곡하다(렘 25:34), 외치다(삼상 28:12, 합 1:2), 소리 지르다(왕상 22:32, 대하 18:21), 통곡하다(에 4:1, 겔 27:30), 모이다(수 8:16, 삿 18:22, 삼상 14:20), 모으다(삿 18:23, 욥 35:9), 선포하다(욘 3:7)
    구약 성경 / 71회 사용

    출애굽기 2:23 /  개역개정
    여러 해 후에 애굽 왕은 죽었고 이스라엘 자손은 고된 노동으로 말미암아 탄식하며 부르짖으니(2199) 그 고된 노동으로 말미암아 부르짖는(7775) 소리가 하나님께 상달된지라 

    * 7775. 부르짖는 소리(솨바) שַׁוְעָה 
    1. 고함소리
    2. 도움을 청하는 외침
    3. 시편 18:7
    발음 / 소바[ shavʽâh ]
    관련 성경 / 부르짖는 소리(출 2:23), 부르짖음(시 18:6, 렘 8:19. 삼상 5:12, 시 145:19, 애 3:56).
    구약 성경 / 11회 사용




    미국의 정신분석학자 스캇 팩은 악에 대해 말하기를
    “악이란 자신의 병든 자아를 방어하고 보존하려는 목적으로 다른 사람들을 파괴하는 데 정치적 힘을 사용하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그는 모든 악의 근원을 ‘거짓’으로 보았고, 모든 악의 증상도 ‘거짓’이라고 주장했는데, 이는 오늘 우리가 읽은 예수님의 말씀과도 대단히 일치한다(요 8:44).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예수님의 말씀을 믿지 못하고, 이해하지 못할 뿐 아니라, 실천한 마음이 전혀 없던 유대인들에게 예수님께서는 마귀의 자식이라고 말씀하셨다(요 8:44).
    자신들은 아브라함의 자손이요 하나님의 자녀라고 생각을 하고 있었던 유대인들은 예수님이 자신들을 거짓의 아비인 마귀에게서 나왔다고 하였을 때 대단히 큰 충격을 받았다.
    그리고 아니라고 강변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결국 돌을 들어 예수님을 쳐 죽이려고 하였으니 그들은 예수님이 말씀하신 거짓의 아비 마귀의 자식들로 자기 스스로도 속은 거짓의 사람들이었다.

    스스로를 속이는 일은 개인에게만 일어나는 것이 아니다.
    회사나 국가, 심지어 교회조차도 스스로를 속이는 경우가 허다하다. 

    스캇팩은 거짓의 사람의 특징을 열 가지 언급했다.

    첫째, 거짓의 사람은 자신의 죄를 인정하지 않는다.
    둘째, 거짓의 사람은 남에게 죄를 덮어씌우고 책임을 전가한다.
    셋째, 거짓의 사람은 자기도취에 빠져 살아간다.
    넷째, 거짓의 사람은 변장의 전문가다.
    다섯째, 거짓의 사람은 자기 성찰이 없다.
    여섯째, 거짓의 사람은 자기 양심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다.
    일곱째, 거짓의 사람은 교만하다.
    여덟 번째, 거짓의 사람은 심각한 정신 질환을 가지고 있다.
    아홉 번째, 거짓의 사람은 사람들의 인정을 집요하게 요구한다.
    열 번째, 거짓의 사람은 자기 망상 속에서 살아간다.

    내 속에도 이런 특징들이 고스란히 남아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거짓된 나를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내 죄를 용서해 주신 예수님을 생각하면 그 사랑에 감격하지 않을 수가 없다.
    그러므로 악하고 우리를 괴롭히는 거짓의 사람들에 대하여 어떠한 경우에도 죄 때문에 그 사람을 멸시하거나 없애버리려고 해서는 안되겠다.
    왜냐하면 우리 주님께서 그를 위해서도 십자가에서 죽으셨기 때문이다.
    거짓의 사람이라 할지라도 존귀한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사람이라는 사실을 잊지 말자.

    마음의 상처가 많은 사람들이 거짓의 사람이 될 확률은 대단히 높다.
    왜냐하면 마귀는 마음의 상처가 있는 사람을 속여 서로 서로 상처를 주게 하고, 그 상처를 이용하여 거짓의 사람들을 만들어 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내 속에 들어 있는 죄악을 깊이 들여다보고 자신의 죄악을 있는 그대로 가지고 주님께로 나아가라. 성령님께서 여러분의 죄를 용서해 주실 것이다.
    사람을 속이고 자신을 속이는 거짓의 삶을 살지 말고, 죄 용서함을 받고 타인의 죄를 용서할 줄 아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살아가자.

     

    6588. 허물(페솨)
    '거역하다, 범죄하다, 반역하다'는 뜻으로 계약 위반의 행위를 듯하며 여기서는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한 행위를 말한다.

    허물(6588) 폐솨(pesha)
    פֶּשַׁע 
    1. 반역
    2. 잘못
    3. 죄에 대한 대가에 사용되어
    발음 / 폐솨[ peshaʽ ]
    관련 성경 / 허물(창 31:36, 왕상 8:50, 잠 10:12), 악(출 34:7, 겔 33:12), 범함(레 16:16), 죄악(민 14:18, 욥 35:6, 사 24:20), 죄(욥 34:37, 시 19:13, 잠 28:2), 죄과(잠 17:19, 사 59:20), 범죄(잠 29:6, 22), 패역(사 57:4)
    구약 성경 / 93회 사용

    2403. 죄(하타트. chaṭṭâʼth) חַטָּאָת 
    1. 죄
    2. 우상에 대해 적용되기도 함
    3. 속죄제
    발음 / 하타트[ chaṭṭâʼth ]
    어원 / 2398에서 유래
    관련 성경 / 죄(창 4:7, 레 4:3, 대하 6:25), 죄악(창 18: 20,사 5:18), 속죄제(출 29:14, 민 15:27, 왕하 12:16), 속죄 제물(레 4:32, 민 8:8, 대하 29:23), 속죄 희생(레 4:25), 허물(레 5:6), 잘못(레 5:10,11), 속죄(레 10:19, 민 8:7), 속건제(레 7:7), 번제(레 4:29), 죄악(시 32:5, 애 4:6), 죄인(잠 5:22,13:6), 벌(슥 14:19). [동] 범죄하다(느 1:6, 욥 35:3).
    구약 성경 / 221회 사용

    *2398. 하타(châṭâʼ) חָטָא 
    1. 벗어나다
    2. 사사기 20:16.
    3. 비틀거리다
    발음 / 하타[ châṭâʼ ]
    관련 성경 / 범하다(창 20:9, 출 32:31, 렘 33:8), 죄를 짓다(창 39:9, 삼상 19:4, 욥 8:4), 범죄하다(창 40:1, 삼하 7:6, 애 5:16), 죄짓다(창43:9, 삿 11:27), 잘못하다(레 5:5,15), 죄를 범하다(삼하12:13,24:10, 왕상18:9), 잃다(잠8:36), 해하다(잠20:2), 보충하다(창 31:39), 깨끗하다(출 29:36, 레 8:15), 정결하다(레 14:52, 겔 43:22), 제사 드리다(레 6:26), 깨끗이 하다(민 31:19), 달아나다(욥 41:25). [명] 죄(출 5:16, 레5:7,16, 민 12:11, 신 9:18, 호 8:11), 죄인(잠 11:31, 13:22, 전 2:26).
    구약 성경 / 238회 사용




    오직 나는...권능과 공의와 재능으로 채움을 얻고

    - 본 구절은 미가가 자신에 대해 변호한 내용이다. '오직 나는'(웨우람 아노키)은 '그러나'라는 반의 접속사와 '나'라는 인칭 대명사가 합쳐진 강조 용법의 표현이다. 미가는 '웨우람 아노키'라는 표현을 사용해서 자신의 사역과 선포가 거짓 선지자의 선포와는 전혀 다른 하나님의 계시임을 강하게 묘사하고 있다. 한편 미가는 거짓 선지자들과는 달리 여호와의신, 곧 성령의 감동함으로 인해서 '권능'과 '공의'와 '재능'을 소유하였다. '권능'(코흐)은 사역을 감당하는 잠재력을 뜻한다(Von Orelli), '공의'(미쉬파트)는 넓은 의미로 사용되는 단어이다. 법적인 차원에서는 '율법'이나 '규례'를 의미하였으며(출 24:3; 레 5:10), 문화적인 측면에서는 '방법'이나 '관습'으로 이해되었다(창 40:13; 왕상 18:28). 선지자들에게 있어서 이 '미쉬파트'는 율법에 계시된 하나님의 뜻의 성취를 의미하였다. 이것은 윤리적인 성격을 내포하고 있어서 예레미야는 '미쉬파트'를 가난한 자를 돌보는 것으로 생각하였다(렘 5:28; 7:5). 그리고 '재능'(게브라)은 '힘'을 의미하는 단어로 사람들의 위협이나 협박을 두려워하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전하며 사람들의 죄악을 고발하는 용기를 뜻한다. 거짓 선지자는 자기 생각과 허망한 환상을 보고 점을 치며 미래를 예측하였으나, 참된 선지자인 미가는 하나님의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서 주신 권능과 공의와 재능을 가지고 하나님의 계시를 선포하였다.

    야곱의 허물과 이스라엘의 죄를 그들에게 보이리라

    - 거짓 선지자들은 평안을 선포하여 백성들의 욕구를 만족시키기도 하고, 전쟁을 선포하여 백성들에게 공포심을 조장하여 자신의 부(富)와 번영 그리고 안락한 생활을 추구하였다. 그들이 선포한 것은 사람의 만족을 전제로 한 인간의 생각에 불과했다. 그러나 미가의 사역은 거짓 선지자의 사역과는 전적으로 달랐다. 미가는 하나님의 능력을 힘입어 하나님의 뜻을 계시하였다. 하나님의 계시는 이스라엘 전체가 범죄하였다는 것이다. 이스라엘은 우상을 숭배했을 뿐만 아니라 언약 속에 내재된 공의를 저버리고 가난한 자들을 압제하는 죄악을 범하였다. 거짓 선지자는 이들의 죄를 개인적인 안락을 위해서 옹호하였으나 미가는 하나님의 권능과 공의와 재능으로 이스라엘의 죄를 고발하였다.


    캐나다軍 10월 K잠수함 실사…韓 '80조 수주전' 올라탔다

    최대 80조 원 안팎의 잠수함 도입 사업을 추진하고 있는 캐나다 해군이 한국을 방문해 국산 잠수함에 직접 승선하고 조선소를 둘러보기로 했다.
    5월 방한해 조선소 현장을 찾은 데 이어 다시 국내 잠수함 현황과 건조 시설을 다시 둘러보는 것이다.
    캐나다 당국이 아직 구체적인 도입 계획을 발표하지 않았지만 한국 잠수함에 대한 관심이 점점 높아지며 사업 추진 속도도 빨라지고 있다는 평가다.
    이번 사업은 사실상 한국일본의 수주전이 될 것으로 관측되는 가운데 양국 정부의 수주를 위한 물밑 작업 역시 치열해질 것으로 전망된다.

    14일 업계에 따르면 캐나다 해군 당국자들은 10월께 잠수함 도입 사업을 위한 사전 실사 성격으로 방한할 예정이다.

    캐나다 군 당국은 국내 최신 잠수함인 도산안창호급 잠수함에 승선해 성능을 점검한다.
    HD현대중공업(329180)한화오션(042660) 등 울산·거제 소재 조선소를 방문해 잠수함 제조 현장을 둘러볼 것으로 알려졌다.

    캐나다 군 당국은 5월에도 한국과 일본 조선소를 방문한 바 있다.
    당시 해군 잠수함 사령부 등을 찾아 관계자들을 만나 국산 잠수함 현황에 대한 소개를 받았다.
    이 관계자들은 방한 전 일본을 찾아 미쓰비시, 가와사키중공업과 해상자위대에 들러 잠수함 운용 현황도 살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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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캐나다 해군 잠수함 도입 사업은 아직 공식 발표되지 않았지만 캐나다순찰잠수함프로젝트(CPSP)라는 이름으로 총 12척의 잠수함을 발주할 계획으로 알려졌다.
    잠수함 획득 비용은 1척에 2조 원 안팎으로 추정되고 수명 주기 비용, 교육 훈련까지 더해 총 600억 달러(79조 6200억 원) 수준으로 알려졌다.
    캐나다 군 당국은 디젤 추진 재래식 잠수함에 관심이 있다.

    방산 업계의 한 관계자는 “많은 국가들이 캐나다 잠수함 사업에 관심을 보이지만 사실상 한국의 도산안창호급 잠수함일본의 다이게이급 잠수함이 유력할 것”으로 말했다.

    도산안창호급 잠수함을 개량한 DSME 3000 잠수함은 캐나다 당국의 큰 관심을 받고 있다.
    이 잠수함은 리튬 배터리를 탑재해 잠항 시간을 늘리고 수직발사관도 있어 잠수함발사탄도미사일(SLBM)도 운용 가능하다.
    특히 선내에 많은 기능이 자동화돼 있어 잠수함 승조원이 부족한 캐나다 해군에 적합하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일본의 다이게이급 잠수함은 DSME 3000보다 더 크고 잠항 능력도 우수하지만 상대적으로 자동화 기술이 덜 적용돼 승조원이 더 필요하다.
    일본은 아직 잠수함을 수출해본 적이 없다.
    캐나다 수출에 있어 승조원 교육과 잠수함 운용 훈련 등을 지원해야 하는데 잠수함 수출 경험이 있는 한국이 다소 유리한 위치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이 장기화되면서 지정학적 갈등이 심화하자 캐나다 군도 군비 증강에 나서고 있다.
    캐나다 해군은 호위함 12척, 잠수함 4척 등을 운용하고 있다.
    긴장 상태에 있는 유럽 및 아시아 지역과 가깝지만 현재 해군력을 미군에 절대적으로 의존하고 있다.

    정부 역시 캐나다 잠수함 사업에서 우위를 점하기 위해 물밑 작업에 속도를 내고 있다.
    6월 이종섭 국방부 장관도 9일 방한한 웨인 에어 캐나다 국방참모총장을 만나 양국 국방 협력 발전 방안을 논의했다.

    업계에서는 잠수함 수출 성사를 위해 정부 당국과 HD현대중공업· 한화오션 등이 한 팀을 이뤄 수출 총력전에 나서야 한다는 주장도 나온다.

    문근식 경기대 정치전문대학원 교수는 “함정 수출이 기술력만 갖고 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외교력과 조선소 간 기술 교류 등 한뜻을 모아 수출에 나서야 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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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지도자의 자질과 외교 능력에 따라 미래가 투명하게 드러날 수 있다.

    - 이러한 한국의 방위 산업이 시작된 계기는 1979년 6월  미국 대통령 카터가 방문한 후 박정희 대통령과 회담 후 미군을 철수하겠다고 제안. 그 이유는 당신과 같은 독재자가 다스리는 나라에 미군을 계속하여 주둔하는 것은 옳지 않다. 
    이때 박정희 대통령은 카터에게 북한에는 김일성이 계속하여 독재자로 군림하고 있기 때문에 미군을 주둔시켜야 한다고 반박.
    이때 박정희 대통령이 결단하기를 방위산업체를 육성하려고 대전 과학단지에 한국 방위 산업을 위한 연구소를 설립하고 연구를 시작하였다.
    처음에는 총, 수류탄과 같은 것을 개발하였으나 지금은 세계적인 방위 산업체로 육성되었다. 
    지도자 한 사람에 의해서 국가의 미래가 분명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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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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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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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혼의 죄(7절)

    216

    8

    4

    미가 7장

    주와 같은 신(18절)

    217

    8

    5

    미가 8장

    여호와의 길(3절)



























































































































































































    인간 욕망의 끝은 어디일까?

    선지자 세상을 바르게 보고 아는 자.
    바르게의 기준은 하나님.        
    욕망은 절제 될 때 유용하지만 절제되지 않으면 위험하다.
    욕심이 죄가 되고 죄가 죽음으로 몰고 간다.
    거짓 선지자는 권력과 타협하여 진리를 거짓으로 만든다.
    그러나 참 선지자는 권력에 대하여 쓴소리를 한다.
    구약의 선지자들의 특징은 그 시대의 권력자들에게 미움의 대상이 되었다.







    오늘날 많은 성도들에게 있어서 교회와 일반 사회 속에서의 삶이 전혀 다른 것을 볼 수 있다.

    교회 안에서는 열심이고 많은 헌금과 봉사에 관심을 쏟으면서도 자신이 속한 직장이나 가정에서는 부정을 일삼고 이기적으로 행동하는 경우가 있다.
    이것은 매우 잘못된 것이다.
    성도들에게 교회와 세상은 결코 다른 곳이 아니다.
    그 곳은 모두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져야 할 곳이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언제 어디서나 하나님의 자녀답게 살아가야 한다.
    특히 우리가 참으로 하나님을 사랑한다면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야 할 것이며 하나님의 모습을 따라 공의롭게 살아갈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와 같이 성도들은 비록 자신에게 물질적인 손해가 있다 하더라도 불의를 물리치고 바르게 행동함으로 세상 속에서 하나님의 선하심과 공의로우심을 드러내는 자가 되어야 할 것이다. 


    미가서 2장 말씀은  세상의 권세잡은 자들, 정치권력과 종교 권력에 대해서 책망하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을 통해서 우리가 크건 작건 간에 가지고 있는 힘과 권력이 하나님을 믿는 신앙인격에 의해서 적절하게 통제되고 관리되어야 한다는 걸 깨닫고 배우는 시간되시기를 바랍니다. 1절 말씀을 보시겠습니다. 


    "그들이 침상에서 죄를 꾀하며 악을 꾸미고 날이 밝으면 그 손에 힘이 있으므로 그것을 행하는 자는 화 있을진저"


    여기서 그들은 누구겠습니까? 유대의 권력자들을 말하고 있습니다. 정치인들, 종교인들입니다. 이른바 힘이 있고 권세가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이 지금 어떤 일을 꾸미고 있습니까? 침상에서 죄를 꾀하고 악을 꾸미고 있습니다. 잠자리에 누워서 여러가지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날이 밝으면 아침에 일어나서 이런 일을 해야지. 그런데 그들이 꿈꾸고 꾸미는 모든 것들은 하나님 보시기에 악한 것이었습니다.

     백성들을 긍휼히 여기는 생각이 전혀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종교적으로도 정치적으로도 백성들을 괴롭히고 백성들의 고혈을 빨아먹는 참으로 악한 존재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이 본문에서 주의해서 봐야 할 것은 그들 손에 힘이 있다는 말씀입니다. 이것이 불행입니다. 그들에게도 불행이고 백성들에게도 불행한 일이었습니다. 

    만약에 그들 손에 힘이 없었다면 이것은 한낱 몽상에 불과했을 것입니다. 

    자신들이 꿈꾸고 계획하는 것을 이룰 힘이 없었기 때문에 실행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문제는 이들에게는 권력이 있었습니다. 많이 배웠습니다. 많이 가지고 있었습니다. 힘이 있었기 때문에 잠자리에서 악을 꾀하고 죄를 꾸몄던 것을 실행해 버렸습니다. 그 다음 날 아침이 되면 그 때문에 백성들은 신음하고 고통스러워야 했습니다.  도대체 그들은 어떤 죄를 범하고 살았을까요? 2절을 보십시오. 


    "밭들을 탐하여 빼앗고 집들을 탐하여 차지하니 그들이 남자와 그의 집과 사람과 그의 산업을 강탈하도다"


    밭과 집을 빼앗고 강탈하고 심지어는 사람까지 빼앗았습니다. 사람이라면 할 수 없는 일을 무지막지하게 행했습니다.

     어찌 이런 사람들이 미가 선지자가 예언했던 시대만 있었겠습니까? 오늘도 역시 이런 사람들이 여전히 존재하고 있습니다.

    국민들의 세금만 강탈하려는 정치인들이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선거철만 되면 나타납니다. 그리고 머리를 땅에 조아립니다. 엎드려서 일어나지 않을 기세로 끝까지 허리를 굽히고 인사합니다. 하지만 선거가 끝나고 나면 여전히 권력으로 자기 뱃속을 채웁니다. 

    우크라이나에서 일어난 전쟁도 결국은 힘을 가진 독재자 때문입니다. 힘을 가진 강대국들 때문에 참혹한 전쟁이 일어난 것입니다.

    차라리 그들에게 힘이 없었더라면 권력이 없었더라면 그들이 많이 배우지 못했더라면 이러한 참상이 벌어지지 않았을 것입니다.


    노블레스 오블리주 라는 말이 있습니다. 힘을 가지고 있다면 그에 응당한 책임의식이 있어야 합니다. 지식을 가졌다면 더 많은 사람을 섬길 의무가 있습니다. 


     미가 선지자도 예언했고 이사야도 예언했습니다. 북이스라엘에서 예언했던 호세아, 아모스도 목청을 높였습니다. 모든 선지자들의 공통적인 외침입니다.

     하지만 이들은 그들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습니다. 오히려 선지자들을 조롱합니다. 하나님을 비웃습니다. 6절과 7절을 보십시오. 


    "그들이 말하기를 너희는 예언하지 말라 이것은 예언할 것이 아니거늘 욕하는 말을 그치지 아니한다 하는도다 너희 야곱의 족속아 어찌 이르기를 여호와의 영이 성급하시다 하겠느냐 그의 행위가 이러하시다 하겠느냐 나의 말이 정직하게 행하는 자에게 유익하지 아니하냐"


    미가 선지자에게 말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선지자들의 입을 봉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조롱했습니다. 여호와의 영이 성급하시다 말했습니다. 어찌 이럴 수 있습니까? 정치인들은 그렇다 하더라도 신앙을 가지고 있다는 종교지도자들이 어찌 이럴 수 있습니까? 자신들의 힘이 하나님을 능가한다고 착각했습니다. 교만하기 짝이 없고 어리석기 이를데 없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자신이 가지고 있는 권력이 영원할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하나님은 이들을 가만히 두지 않을 것입니다. 경고하시고 책망하시고 여러번 기다리시고 사랑으로 품으시고 때로는 내버려 두시다가 때가 되면 그들을 심판하실 것입니다. 그 심판은 무서운 심판이고 처절한 심판이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심판하시면서 남유다의 예루살렘 성과 예루살렘 성전을 불태웠습니다. 

    너희들이 살고 있는 성전은 이제 더이상 존재 가치가 없다. 내가 너희들이 살고 있는 성전을 붙태워 버리겠다.

    하나님의 무지막지한 무서운 심판이었습니다. 그전에 하나님은 끝까지 기다리고 책망하시고 또 기다리셨지만 돌아오지 않는 그들을 향하여 하나님은 성전을 불태워버렸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남아 있는 양들입니다. 양들이 무슨 죄가 있습니까? 

    그들은 권력도 없고 힘도 없습니다. 배우지 못했습니다. 성경을 읽을 수도 없습니다.  종교 지도자들이 그렇게 쓰여있다고 하니 그렇게 믿고 따라갈 수밖에 없습니다. 

    백성들은 아무런 죄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양들에 대해서 특별한 마음을 가지고 계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희들을 인도하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12절과 13절을 보십시오. 




    "야곱아 내가 반드시 너희 무리를 다 모으며 내가 반드시 이스라엘의 남은 자를 모으고 그들을 한 처소에 두기를 보스라의 양 떼 같이 하며 초장의 양 떼 같이 하리니 사람들이 크게 떠들 것이며 길을 여는 자가 그들 앞에 올라가고 그들은 길을 열어 성문에 이르러서는 그리로 나갈 것이며 그들의 왕이 앞서 가며 여호와께서는 선두로 가시리라"


    걱정하지 않아도 됩니다.  두 번이나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너희를 모을 것이다. 앞서 가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길을 열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호와께서 선두에 가실 것이라고 약속하셨습니다. 

    오늘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정치인들이 타락하고 교회를 맡은 종교지도자들이 타락한다는 소식이 계속 들릴지라도 우리 하나님이 목자되시기에 반드시 회복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낙심하지 말고 소망 가운데 믿음을 지키며 살면 하나님이 우리의 걸음을 인도하실 것입니다.  . 미가 선지자가 말씀하신 이 예언은 궁극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을 예언하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의 오심으로 이제 모든 성도들이 예수님의 이름으로 자유롭게 하나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종교지도자 때문에 하나님을 만날 수 없다는 것은 핑계를 대서는 안됩니다. 

    성도 한 사람 한 사람이 하나님께로 나아가면 교회는 소망이 있습니다. 

    이 땅은 회복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타락한 지도자들을 심판하실 것입니다. 그 때 우리 각 자도 심판당하지 않도록 깨어 있어야 합니다. 우리 자신의 신앙적 몰락을 다른 이들에게 핑계댈 수는 없습니다. 


    오늘 우리는 하나님이 나의 목자가 되심을 기억하십니다. 사람이 우리의 궁극적인 목자가 될 수 없습니다. 권력과 부를 가진 사람이 우리의 구원자가 될 수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께만 소망을 두고 살아가시는 믿음의 삶을 사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1. 세상 힘을 가진 자들이 힘으로 맘대로 할 수 있다는 착각을 버리게 하소서.

    2. 세상 권세와 부를 가진 사람을 두려워하기보다는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는 지혜를 주옵소서.


    미가 선지자는 하나님을 버리고 우상을 섬기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심판이 임할 것을 예언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재앙을 내리시고 그들이 기업을 받지 못할 것이라 했습니다.
    자, 이와 같은 선지자의 경고를 들으면 어떻게 반응해야 하겠습니까?
    자신이 지은 죄를 인정하고, 하나님께 죄사함을 받기 위해서 겸손하게 반응하는 것이 순리일 것입니다.
    그러나 타락한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재앙을 받아 수치를 당하게 되는 이런 일이 자기들에게는 결코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 호언장담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오히려 미가 선지자를 향해서 “이와 같은 예언은 하지 말아라!”고 신신당부했습니다.
    6절 말씀을 봅시다. “(미 2:6) 그들이 말하기를 너희는 예언하지 말라 이것은 예언할 것이 아니어늘 욕하는 말을 그치지 아니한다 하는도다” 하나님을 버리고 우상을 섬기는 것을 본인들도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선지자의 입을 통해 하나님께서 벌하실 것이란 경고를 받아들이지도 않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완고한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고집스러운 이스라엘 백성들이 미가 선지자의 경고를 어떻게 거부하는지, 7절을 보겠습니다. “(미 2:7) 너희 야곱의 족속아 어찌 이르기를 여호와의 신이 편급하시다 하겠느냐 그의 행위가 이러하시다 하겠느냐 나의 말이 행위 정직한 자에게 유익되지 아니하냐” 미가 선지자가 이스라엘에 화가 임할 것이라 하자,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께서 어찌 그리 성급하시단 말이냐? 하나님께서 어찌 그리 인내심이 짧으시단 말인가?”하고 오히려 선지자를 책망하고,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이 했습니다. 하나님의 꾸지람을 가볍게 여기고 도리어 하나님을 조롱하는 듯한 말로 선지자 미가를 꾸짓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모습이 얼마나 어리석습니까? 7절 후반절에 미가 선지자의 말을 보십시오. “나의 말이 행위 정직한 자에게 유익되지 아니하냐?” 이 말은 “여러분, 제 말대로 여러분이 정직하게 행하면 그것이 여러분의 영혼에 유익하지 않겠습니까?” 하나님의 경고를 무시하는 백성을 향한 미가의 애통함과 탄식하는 소리입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섬기지 않고, 도리어 우상을 택함으로 하나님의 원수가 되어버렸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구체적으로 또 어떤 죄를 지었는지 봅시다. 8절입니다. “(미 2:8) 근래에 내 백성이 대적 같이 일어나서 전쟁을 피하여 평안히 지나가는 자들의 의복 중 겉옷을 벗기며” 전쟁터에서 고향으로 도망치고 있는 동족 피난민들을 길거리에서 몰래 공격해서 그들의 옷을 빼앗아 버렸습니다. 빈궁한 처지에 있는 사람들에게 강도 행위를 한 것입니다. 하나님을 대적하여 악행을 저지른 것입니다.
    게다가 전쟁으로 인해 남편을 잃은 과부들을 얕잡아 보고 그들을 괴롭히고 그들의 집을 빼앗아 버리고 그들을 집 밖으로 내쫓아버렸습니다. 또한 전쟁으로 고아가 된 어린 아이들을 우상을 숭배하는 나라의 노예로 팔아버렸습니다. 그것이 9절 말씀입니다. “(미 2:9) 내 백성의 부녀들을 너희가 그 즐거운 집에서 쫓아내고 그 어린 자녀에게서 나의 영광을 영영히 빼앗는도다” 과부와 고아를 돌보는 것이 하나님 백성의 당연한 의무이건만,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제 과부와 고아를 괴롭히고 그들을 착취하여 이익을 누리려고 했습니다. 이처럼 미가 선지자는 이스라엘 사회의 죄악상을 고발했습니다.
    이에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이 살고 있는 가나안 땅을 더 이상 안식과 평강이 머무는 땅이 아니라 심판으로 멸망할 땅으로 선포하십니다. 10절입니다. “(미 2:10) 이것이 너희의 쉴 곳이 아니니 일어나 떠날지어다 이는 그것이 이미 더러워졌음이라 그런즉 반드시 멸하리니 그 멸망이 크리라” 본래 가나안 땅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주신 축복의 땅이요 안식처입니다만, 이제 이들이 하나님을 무시하고 죄악을 행함으로 그 땅은 멸망 당하는 땅이 되어버렸습니다.
    이스라엘이 얼마나 타락했는가 하면, 미가 선지자처럼 바른 말을 하고, 죄를 고발하고 회개를 종용하는 자의 경고는 멀리했습니다. 대신에 거짓 메시지로 평화를 노래하며 ‘포도주’와 ‘독주’와 같이 세상의 복락과 감각적인 즐거움을 누릴 것이라고 말하며 그들의 귀를 즐겁게 해주는 사람은 참 선지자라고 여기며 그들을 따랐습니다. 11절입니다. “(미 2:11) 사람이 만일 허망히 행하며 거짓말로 이르기를 내가 포도주와 독주에 대하여 네게 예언하리라 할 것 같으면 그 사람이 이 백성의 선지자가 되리로다” 자신들의 죄를 지적하는 자들을 향해서는 귀를 듣고, 허망한 말, 즉 하나님께서 주시지 않은 거짓 평안을 선포하며 자신들의 귀를 즐겁게 해주는 자들만을 선지자로 삼은 것입니다. 이와 같이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수 없을 정도로 죄악을 일삼으며 살았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이 악한 무리 가운데서도 회개하고 하나님께 돌아온 사람들은 있었습니다. 그들이 바로 ‘남은 자’들입니다. 하나님께서 이 사람들은 죄를 용서해 주시고, 목자가 양 떼를 모음 같이 다시 하나님의 보호하심 아래로 모아주십니다. 12절입니다. “(미 2:12) 야곱아 내가 정녕히 너희 무리를 다 모으며 내가 정녕히 이스라엘의 남은 자를 모으고 그들을 한 처소에 두기를 보스라 양떼 같게 하며 초장의 양떼 같게 하리니 그들의 인수가 많으므로 소리가 크게 들릴 것이며” 보스라는 매우 비옥하고 푸른 풀밭이 있어 유목하기에 좋기로 소문난 에돔 족속의 도시입니다. 하나님께서 죄를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와 주님을 의지하고 살아가는 주님의 백성을 보스라의 양 떼처럼 돌보시겠다는 말씀입니다. 진실로 하나님께서는 그의 백성이 과거에 하나님을 배반하고 죄를 지었어도, 회개하고 돌아오면 그들의 모든 죄들을 용서하시고 다시 축복하신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친히 남은 자들을 대적들의 손에서 구원하십니다. 13절입니다. “(미 2:13) 길을 여는 자가 그들의 앞서 올라가고 그들은 달려서 성문에 이르러서는 그리로 좇아 나갈 것이며 그들의 왕이 앞서 행하며 여호와께서 선두로 행하시리라” 여기서 ‘길을 여는 자’는 하나님을 뜻합니다. 심판으로 인해 대적이 길을 막고 백성들을 괴롭히지만, 하나님께서 남은 자들을 구원하기 위해서 친히 성문을 여시고 앞서 선두로 행하시어 남은 자들, 즉 회개한 백성들을 죄의 노예에서 해방시키시고 하나님 나라 백성으로 다시 살아가게 하십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들도 혹시 우리 귀에 듣기 좋은 말씀만 골라서 듣고 있지는 않습니까? 하나님께서 우리의 잘못을 책망하시고 바른 길로 돌아오기를 원하시지는 않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가려서 들으려는 잘못된 습관은 버리고, 모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마태복음 7:21-22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 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치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

    요한계시록 7:14
    내가 가로되 내 주여 당신이 알리이다 하니 그가 나더러 이르되 이는 큰 환난에서 나오는 자들인데 어린양의 피에 그 옷을 씻어 희게 하였느니라.




    해석의 차이

    수도원에서 수도승 네 명이 명상하고 있었다. 
    그 때 갑자기 바람이 불면서 수도원의 깃발이 펄럭였다.
    이것을 본 가장 어린 수도승이 말했다.
    "깃발이 나부낍니다."
    조금 더 경험있는 수도승이 말했다.
    "그건 바람이 나부끼는 것이야." 
    수련경험이 훨씬 많은 셋째 수도승이 말했다.
    "네 마음이 나부끼는 것이니라." 
    가장 나이가 많은 넷째 수도승이 말했다.
    "입만 나불거리기는."


    라기스(Lachish)

    라기스는 예루살렘의 서남쪽 셰펠라에 있는 성읍이다.
    이스라엘 땅을 서쪽부터 동쪽의 요단강으로 이어지는 지역으로 나누면 지중해(Mediterranean), 해안 평야(Coastal Plain), 셰펠라(Shephelah), 중앙 산지(Central Mountains), 광야(Wilderness), 열곡(Rift Valley), 요단강(Jordan River) 그리고 요단강 동편(Transjordan)이다.

    셰펠라는 ‘저지대’라는 뜻이지만 중앙 산지에 비해서 낮다는 것이지 해안 평야처럼 완전한 평지를 가리키지 않는다.

    해안 평야에는 유명하고도 매우 중요한 해안 도로(Via Maris)가 있다.
    이는 남쪽의 애굽과 북쪽의 메소포타미아를 연결하는 도로로서 경제적으로나 군사적으로 매우 중요해서 역사 내내 강대국의 표적이 되었다.
    이스라엘 내 해안 도로의 맨 아래, 즉 최남단에 있는 중요한 성읍은 블레셋 족속 성읍 가사(Gaza)였다.
    라기스는 이 해안 도로에 있는 가사의 동쪽에 자리 잡고 있다.
    지중해 근처에 있는 가사에서 동쪽으로 연결된 동서 도로 상의 성읍들을 나열하면 가사-라기스-헤브론인데, 이 헤브론은 예루살렘으로 연결되는 족장들의 도로, 즉 남북 도로 상에 자리 잡고 있다.
    이런 면에서 라기스는 예루살렘 다음으로 중요한 성읍이며 내륙으로 들어가는 주요 도로를 지키는 방어 진지였다.

    그래서 라기스는 항상 고대 제국들의 정복 대상이었다.
    라기스는 성경은 물론 고대 문서에 자주 등장했다.

    성경 이외에 라기스가 제일 먼저 언급되는 고대 문서는 기원전 1400년경의 아마르나 서신(Amarna Letters)이다.
    아마르나 서신은 382개의 토판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군사들 간의 통신을 담고 있어서 바벨론, 앗수르, 미타니, 히타이트, 시리아, 가나안 등과 애굽의 관계를 보여준다.
    기원전 14세기 중반 애굽 왕 아케나텐(Akhenaten)이 애굽을 통치할 때 하비루(Habiru)를 언급하는데, 하비루는 낱말과 지역적 유사성 때문에 히브리인들(즉 출애굽한 이스라엘)을 가리키는 것으로 해석된다.

    물론 반대하는 학자들도 있지만 말이다.
    아마르나 서신에서 라기스는 하비루에게 음식과 기름을 공급하여 도와주었다고 비난당했다.

    출애굽한 여호수아는 기브온 족속을 공격하는 연합군, 즉 예루살렘 왕 아도니세덱, 헤브론 왕 호함, 야르뭇 왕 비람, 라기스 왕 야비아, 에글론 왕 드빌을 물리쳤다(수 10장; 12:11). 후에 여호수아는 라기스를 유다 지파에게 할당했다(수 15:39). 이상하게도 다윗이나 솔로몬 시대에는 라기스에 대한 언급이 없다. 여호수아 시대 이후 곧바로 솔로몬의 아들 남유다 초대 왕 르호보암 시대로 넘어간다. 르호보암은 유다 땅과 베냐민 땅에 있는 성읍들을 요새화했는데, 그중 하나가 바로 라기스였다(대하 11:5-10). 르호보암은 아마도 이 요새화된 성읍들에 음식과 기름과 포도주 그리고 방패와 창과 같은 무기들을 갖추었을 것이다(대하 11:11-12). 이후 유다 왕 아마샤는 예루살렘에서 반역이 일어나자 라기스로 피했다가 그곳에서 살해당했다(왕하 14:19-20; 대하 25:26-28).

    유다 왕 히스기야 때, 즉 기원전 701년 앗수르의 산헤립은 유다로 남하해서 유다의 48개 성읍을 파괴했는데, 거기에는 라기스도 포함되어 있었다(왕하 18:13; 대하 32:9). 산헤립과 앗수르 군대는 예루살렘을 포위하고 히스기야를 위협했다. 히스기야가 하나님께 기도했을 때 하나님은 히스기야의 기도를 들으시고, 이사야를 통해서 구원을 약속하셨으며, 그 밤에 천사를 보내어 앗수르 군사를 치셨다(왕하 19장; 대하 32:21-23; 이사야 36장). 이로써 예루살렘은 앗수르의 공격에서 구원을 얻었다.

    이 역사적 사실은 앗수르의 니느웨에 있는 왕궁 벽에 부조로 새겨져 있다. 그 내용을 번역하면 다음과 같다.

    유다의 히스기야는 내 멍에에 굴복하지 않았다. 나는 성벽을 갖춘 요새, 그의 강한 성읍 46개와 그 주변의 작은 수많은 마을들을 잘 다져진 경사로와 성벽으로 끌고 온 공성퇴로 정복했다. 나는 남녀노소 200,150명을 몰아내고, 셀 수 없이 많은 말들, 노새들, 나귀들, 낙타들, 크고 작은 소들을 끌고 왔으며, 전리품으로 여겼다. 나는 예루살렘, 그의 왕궁을 마치 새장의 새처럼 가두었다. 나는 토루로 그를 둘러싸고 성문을 떠나고 있었던 사람들을 폭행했다. 나는 그의 나라에서 그의 마을들을 약탈하고 취했으며, 그것들을 아스돗의 왕 미틴티, 에그론 왕 파디, 가사 왕 실리벨에게 주었다. 그래서 나는 그의 나라를 축소시켰지만, 여전히 그의 지배자로서 이전 조공보다 후에 내가 부과했던 나에 대한 조공과 선물들을 늘였으며 매년 전달되었다. 공포심을 조장하는 내 주권의 영광은 히스기야 그를 압도했으며, 그가 강화하기 위해서 예루살렘, 그의 왕궁으로 끌어들였던 그의 비정규군과 정예군은 그를 저버렸고, 후에 나의 위풍당당한 도시 니느웨에 있는 나에게 금 30달란트, 은 800달란트, 보석들, 안티몬, 커다란 붉은 보석들, 상아로 세공한 침상들, 상아로 세공한 의자들, 코끼리 가죽, 흑단목, 회양목, 온갖 보물들, 그의 딸들, 첩들, 남녀 음악가들을 보냈다. 그는 조공을 바치고 노예로서 존경을 표하기 위해서 사신을 보냈다.

    바벨론의 느부갓네살 왕이 라기스를 정복할 당시 상황을 기록하고 있는 아마르나 서신 중 일부는 라기스 군 지휘관 요아쉬(Yoash)와 외부에 떨어져 있는 수비대의 지휘관 호쉬아(Hoshiah)가 서로 연락하는 내용을 담고 있는데, 이는 바벨론과의 전쟁이 거의 끝나갈 무렵 남왕국 유다가 어떻게 황폐화되어 가고 있는지를 보여준다. 그 서신에 따르면 외부 수비대에 있는 파수꾼은 라기스의 봉화를 계속해서 지켜보고 있지만, 바벨론이 마지막으로 정복한 아세가(이 블로그 “아세가” 참고)의 봉화는 더 이상 보지 못했다(렘 34:7). 봉화를 보지 못했다는 것은 이미 그 성읍이 바벨론에게 함락되었다는 뜻이었다. 그 이후 라기스는 거의 주목을 받지 못했다.

    * 성경 구절

    여호수아 10:3, 5, 23, 31, 32, 33, 34, 35; 12:11; 15:39; 열왕기하 14:19; 18:14, 17; 19:8; 역대하 11:9; 25:27; 32:9; 느헤미야 11:30; 이사야 36:2; 37:8; 예레미야 34:7; 미가 1:13

     

    라기스(Lachish)는 이 지도 왼쪽 하단부에 있는 브엘세바(Beersheba) 위에 있다. 

    라기스에서 왼쪽(서남쪽)에 있는 점선을 따라가면 지중해 해변을 따라 나 있는 점선과 만나는 지점이 나오는데,  비록 이름이 지도에 나타나지 않지만 그곳이 가사(Gaza)이다. 

    그래서 가사에서 라기스, 라기스에서 헤브론(Hebron)으로 가면 남북으로 이어지는 도로를 만나게 되는데, 

    그 남북 도로는 예루살렘(Jerusalem)으로 연결된다.


    미가서 1장에 나오는 지명들

    본문에서는  미가의 '언어유희'가 나타난다.

    10. 가드에 알리지 말며 도무지 울지 말지어다.  내가 베들레아브라에서 티끌에 굴렀도다

    1, '*가드'에서 '*나가드(고하다)' 하지 말고

    가드라는 지명은 히브리어 *나가드 라는 단어와 음이 비슷하다.
    나가드는 고하다란 뜻이니 가드에서 고하지 마라


    2. '*베들레아브라(베이트 레 아프라 ; 티끌의 집)' 에서 '*아프라(티끌)' 에 굴지 마라

    먼지 속에서 뒹군다는 것은 슬픔과 애통의 표현이다.

    11. 사빌 주민아 너는 벗은 몸에 수치를 무릅쓰고 나갈지어다 
        사아난 주민은 나오지 못하고 
        벧에셀이 애곡하여 너희에게 의지할 곳이 없게 하리라

    3. 수치스럽고 벌거벗은 *사빌(아름답다 라는 뜻) 거민아/ 예) '불꺼진 이태원' 이런 느낌

    이 도시의 사람들은 침략자들에 의해서 벌거 벗기고 수치를 당할 것이며 포로가 될 것이다. 

    4. *사아난 주민은 나오지 못하고

    떨고 있는 주민은 두려움 속에서 싸우러 나오지 못한다. 

    사아난은 (전쟁에) '나가는 자'란 뜻이다. 이 용감한 성읍도 적이 접근할 때 싸우러 나가지 못할 것이다. 

    5. *벧에셀(*베이트 하 에젤 ; 지도자의 집)이 애곡하여 너희에게 의지할 곳이 없게 하리라

    지도자의 집, 의지할 곳이 없게 된다. 

    벧에셀을 (빼앗음의 집)은 그 마을이 빼앗김, 즉 멸망으로 당함으로 인한 애곡을 표현한다. 

    돕는 자 혹은 피난처를 암시한다는 해석도 있다.

    12. 마롯 주민이 근심 중에 복을 바라니 이는 재앙이 여호와께로 말미암아 예루살렘 성문에 임함이니라

    6. *마롯(쓰라림, 가혹함) 주민이 근심 중에 복을 바라니 이는 재앙이 여호와께로 말미암아 예루살렘 성문에 임함이니라

    마롯은 쓰라림, 가혹함 이라는 개념을 전달한다. 따라서 쓰라린 마을은 복을 버린다. 

    이 성읍은 행복을 찾지만 여호와로부터 재앙만이 내려와서 예루살렘 성문까지 이르게 될 것이다. 

    13. 라기스 주민아 너는 준마에 병거를 메울지어다 라기스는 딸 시온의 죄의 근본이니 이는 이스라엘의 허물이 네게서 보였음이니라

    7. 라기스 주민아 너는 준마(히, '라레케시' , 직역하면 '준마에게')에 병거를 메울지어다. 

    라기스는 딸 시온의 죄에 근본이니 이는 이스라엘의 허물이 네게서 보였음이니라

    준마 (레케시)는 라기스와 발음이 비슷하다.
    라기스는 남서 유다 지방의 중심 도시였다.
    이 성읍은 요새였다. 
    미가는 전쟁을 치를 날이 다가왔기 때문에 라기스의 말들을 병거에 매야 한다고 말한다. 
    우리나라의 경우라면 '제주도에서 말을 준비하라. ' 정도 되겠다.

    14 이러므로 너는 가드모레셋에 작별하는 예물을 줄지어다 
         악십의 집들이 이스라엘 왕들을 속이리라

    8.  이러므로 너는 가드모레셋에 작별하는 예물을 줄지어다 

    가드 모레셋은 미가의 고향이다. 모레셋이 히브리 단어인 "결혼 지참금"" 소유물" 혹은 "선물"과 발음이 비슷하기 때문이다. 이 단어는 아마도 듣는 사람들로 하여금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남편의 집으로 향한 신부에게 주는 이별의 선물을 생각나게 해 줄 것이다. 미가는 그의 고향 사람들이 포로가 될 것이라고 말한다. 

    9. 악십의 집들이 이스라엘 왕들을 속이리라

    악십이란 이름은 '거짓말'을 의미하는 히브리어 단어와 매우 유사하다. 지금 악십 성읍은 이스라엘 왕들을 속였다.


    15 마레사 주민아 내가 장차 너를 소유할 자로 네게 이르게 하리니 이스라엘의 영광이 아둘람까지 이를 것이라

    10. 마레사("소유자"란 뜻 소유하는 자가 다른 사람의 소유가 될 것이다) 주민아 내가 장차 너를 소유할 자로 네게 이르게 하리니 이스라엘의 영광이 아둘람까지 이를 것이라.


    미가(Micah)의 이름의 뜻은 여호와와 같은 자가 누구냐?

    미가는 ‘모레셋’ 사람이며 유다 왕 요담과 아하스, 그리고 히스기야 때 활동한 예언자입니다(미 1:1).
    모레셋은 예루살렘 남서쪽으로 약 35km 정도 떨어진 성읍으로 알려져 있습니다(미 1:14).

    유다 왕
    11대. 요담(요람) - 12대. 아하스 - 13대. 히스기야

    https1bpblogspotcom-je3oQQ1l3TYYJR0Ov_MViIAAAAAAAAYvgwJ49JemgVScdvlHVksbmOJBU2j-95VdJQCLcBGAsYHQs51225EB25AA25A825EB25A0258825EC2585258B2B25EB25AF25B825EA25B025802B25EA25B325A025ED259625A5jpg


    미가서 서론

    미가(Micah)의 이름의 뜻은 “여호와와 같은 자가 누구냐?”입니다.
    미가는 ‘모레셋’ 사람이며 유다 왕 요담과 아하스, 그리고 히스기야 때 활동한 예언자입니다(미 1:1).
    모레셋은 예루살렘 남서쪽으로 약 35km 정도 떨어진 성읍으로 알려져 있습니다(미 1:14).



    미가서는 사마리아와 예루살렘을 향한 예언처럼 보이지만, 유다를 향한 예언으로 보입니다.
    그 이유는 서두에 유다 왕들의 이름만 언급되고 있기 때문입니다(미 1:1).
    다른 선지자와 달리 그의 아버지 이름이 언급되고 있지 않은 점으로 보아 미가는 비천한 가문 출신으로 보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구사한 언어와 수사법은 탁월합니다.

    미가서 1:14절에 보면, 모레셋의 이름이 ‘가드모레셋’으로 나옵니다.
    모레셋은 블레셋의 도시 가드 근방에 있어서 얼마 동안 블레셋의 영토였다고 추측합니다.
    모레셋은 예루살렘 남서쪽 35km 지점에 있는 마을로서, 농촌입니다.
    미가는 농촌 출신 선지자입니다.

    여호야김 왕 때 제사장들과 거짓 선지자들이 예레미야를 죽이려고 모의했을 때 몇몇 장로들이 예레미야의 심판에 대한 예언을 정당화하기 위해 미가의 사역을 언급했습니다(렘 26:18, 19).

    유다의 왕 히스기야 시대에 모레셋 사람 미가가 유다의 모든 백성에게 예언하여 이르되 만군의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셨느니라 시온은 밭 같이 경작지가 될 것이며 예루살렘은 돌 무더기가 되며 이 성전의 산은 산당의 숲과 같이 되리라 하였으나.
    유다의 왕 히스기야와 모든 유다가 그를 죽였느냐 히스기야가 여호와를 두려워하여 여호와께 간구하매 여호와께서 그들에게 선언한 재앙에 대하여 뜻을 돌이키지 아니하셨느냐 우리가 이같이 하면 우리의 생명을 스스로 심히 해롭게 하는 것이니라.

    이로 인해 예레미야는 죽음을 피할 수 있었습니다(렘 26:24).

    사반의 아들 아히감예레미야를 도와 주어 그를 백성의 에 내어 주지 아니하여 죽이지 못하게 하니라.

    미가가 활동했던 BC 8세기 무렵에는 남북 이스라엘을 둘러싼 주변 정세가 급변하고 있던 때였습니다.
    이사야 선지자와 같이 사마리아와 북이스라엘의 멸망을 예언했던 미가는 BC 732년 아람의 멸망 BC 722년 북이스라엘의 멸망을 직접 목격했습니다.

    디글랏빌레셀 3세(BC 745-727), 살만에셀 5세(BC 727-722), 사르곤 2세(BC 722-705), 산헤립(BC 705-681) 등과 같은 앗수르의 통치자들 아래 앗수르가 다시 불같이 일어나는 것도 목격했습니다.
    이 앗수르는 바벨론에 의해 쇠퇴하기까지 한 세기가 넘게 고대 근동을 지배했습니다.
    미가가 활동했을 때 강대국은 앗수르 제국이었습니다.

    산헤립의 침공으로 히스기야 왕은 결정적인 위기를 맞았지만, 이사야와 미가를 통해 회개하고 예루살렘을 지켜낼 수 있었습니다(왕하 18장).
    하지만 히스기야가 죽은 뒤 유다의 왕들은 하나님께 등을 돌렸고, 이로 말미암아 유다는 미가의 예언대로 BC 586년에 멸망했습니다.
    그러나 미가는 남 유다가 다시 회복될 것을 예언했습니다(미 7:15).

    이사야는 주로 왕실과 도시에서 활동했던 궁정 선지자였고(사 7:3-12; 36-39장), 미가시골이나 촌락을 중심으로 활동했던 시골 선지자였습니다(미 1:2).
    하지만 선지자 미가와 이사야의 메시지에 공통적인 부분(심판, 소망, 메시아 왕국)이 있습니다.

    미가 선지자는 특별히 가난하고 소외당한 사람들에게 관심이 많았습니다.
    미가는 빈곤한 자의 돈을 착취하는 행위, 부패한 상도덕(商道德), 껍질만 남은 신앙 등을 지적하면서, 특히 약자의 편에 서서 강자의 부패와 불의를 강하게 책망했습니다.
    시골 모레셋 출신이었던 미가는 수도에 사는 귀족들의 부패와 탐욕으로부터 민중을 보호하고자 했습니다.

    미가는 유다와 이스라엘 지도층의 이런 죄들 때문에 하나님의 심판이 곧 사마리아와 예루살렘을 덮칠 것이라고 예언했습니다.
    미가와 이사야는 유다와 이스라엘 지도자들의 죄로 인하여 북이스라엘은 앗수르의 공격을 받고 멸망하고, 유다도 바벨론의 공격을 받고 망하고, 수많은 백성이 바벨론 포로로 끌려가게 될 것을 예언했습니다.

    삶은 죄로 가득 찼으면서 겉으로는 그럴듯한 종교의식 행위를 계속하며 자기들이 의롭다고 자부했던 당시의 유대인들에게 미가는 하나님이 진정으로 원하시는 것(신앙인의 모습)이 어떤 것인지 애절하게 선포합니다.

    그 말씀이 우리가 잘 아는 미가서 6:8입니다.

    “사람아 주께서 선한 것이 무엇임을 네게 보이셨나니 여호와께서 네게 구하시는 것은 오직 정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히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미가서 6:8)


    죄악으로 가득 찬 삶과 종교적 위선으로 인하여 곧 망할 수밖에 없는 사랑하는 조국과 민족을 바라보는 미가의 심정은 어떠했을까요? 미가의 심장은 슬픔으로 터질 것만 같았습니다. 그런 절절한 안타까움이 미가서 곳곳에 담겨 있습니다.

    하지만 미가는 동시에 예루살렘이 세계 모든 나라의 주목을 받게 되는 영광스러운 미래를 봅니다. 그리고 작은 베들레헴 마을에 위대한 다윗의 자손인 메시아가 태어나서 영원히 하나님의 백성들을 다스릴 것이라는 황홀한 비전을 선포합니다(미 5:2).

    베들레헴 에브라다야 너는 유다 족속 중에 작을지라도 이스라엘을 다스릴 자가 네게서 내게로 나올 것이라 그의 근본은 상고에, 영원에 있느니라”(미가 5:2)


    부패한 왕들 때문에 나라가 멸망합니다. 자기 욕심에 눈이 멀어 불법으로 교회를 아들에게 세습한 목사 때문에 한국교회가 욕을 먹습니다. 그러나 완전한 정의와 사랑의 왕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심으로 말미암아 세상은 다시 살아나고 교회가 다시 일어서게 될 것입니다. 나라나 교회나 가정이나 겸손히 하나님과 동행하는 사람 때문에 살아납니다.

    미가서의 특징

    1. 탁월한 수사법과 그림같이 생생한 언어들이 많이 사용되었습니다.

    미가 1:10-16절은 앗수르의 왕 산헤립의 군대가 예루살렘으로 진군할 때 취할 경로에 대한 예언적인 서술입니다. 여기에서 미가는 재미있는 언어유희 (word-play)들을 사용하여 장차 각 도성의 이름과 그 도성이 장차 처할 운명을 연결시켜 주고 있습니다.

    2. 하나님을 섬기는 참된 길은 오직 ‘공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히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임을 강조합니다(미 6:6-8).

    이는 공교롭게도 같은 시기에 활동했던 아모스(공의,  righteousness), 호세아(인자,  steadfast love), 이사야(겸손히 행함,  humility and faith)의 메시지 주제를 종합하여 말하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3. 구속 받은 자의 윤리적인 교훈이 강조되고 있습니다.

    가진 자들의 탐심’과 ‘없는 자들에 대한 착취를 질책하는(미 2:1-5, 8-9) 한편 통치자들의 불의와 탈취를 질타하고(3:1-4, 9), 선지자들(3:5-7)과 제사장들(3:11,12)과 같은 지도자들의 부정과 욕심을 신랄히 비판합니다.

    이스라엘과 유대의 정치적 상황

    1. 북이스라엘

    북이스라엘은 여로보암 2세가 죽은 후 불안정한 정치 상황과 전쟁으로 인해 혼란한 시기를 겪었습니다.
    북이스라엘은 아람(시리아)과 연합하여 반 앗수르 정책을 펴고, 반 앗수르 연합에 동참하지 않았던 남 유다를 공격했습니다.

    앗수르 왕 디글랏 빌레셋 3세의 공격으로 이스라엘의 성읍들을 빼앗기고 사람들이 포로로 잡혀갔습니다(왕하 15:29).
    결국, 앗수르 왕 사르곤 2세에 의해 북이스라엘은 멸망했습니다(BC 722).

    2. 남 유다

    아람 왕 르신과 연합한 북이스라엘 왕 베가의 공격으로 유다는 엘랏을 빼앗겼습니다(왕하 16:6).
    유다 왕 아하스는 앗수르 왕 디글랏 빌레셀 3세에게 성전과 왕궁 보물을 예물로 보내 도움을 요청하고, 전쟁에서 벗어났습니다(왕하 16:7-9).
    히스기야 왕 때에, 앗수르 왕 산헤립의 공격으로 유다의 46개 성읍이 함락되었습니다(왕하 18:13-37).

     이스라엘과 유대의 종교적 상황(미가서 본문 중심으로)

     

    1:7

    우상 숭배 - 그 새긴 우상들은 다 부서지고 그 음행의 값은 다 불살라지며 내가 그 목상들을 다 깨뜨리리니 그가 기생의 값으로 모았은즉 그것이 기생의 값으로 돌아가리라

     

    2:6,7

    하나님에 대한 오해 - 그들이 말하기를 너희는 예언하지 말라 이것은 예언할 것이 아니거늘 욕하는 말을 그치지 아니한다 하는도다 너희 야곱의 족속아 어찌 이르기를 여호와의 영이 성급하시다 하겠느냐 그의 행위가 이러하시다 하겠느냐 나의 말이 정직하게 행하는 자에게 유익하지 아니하냐

     

    2:11

    거짓 선지자 - 사람이 만일 허망하게 행하며 거짓말로 이르기를 내가 포도주와 독주에 대하여 네게 예언하리라 할 것 같으면 그 사람이 이 백성의 선지자가 되리로다

     

     3:5,6

    뇌물을 받는 거짓 선지자 - 내 백성을 유혹하는 선지자들은 이에 물 것이 있으면 평강을 외치나 그 입에 무엇을 채워 주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전쟁을 준비하는도다 이런 선지자에 대하여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그러므로 너희가 밤을 만나리니 이상을 보지 못할 것이요 어둠을 만나리니 점 치지 못하리라 하셨나니 이 선지자 위에는 해가 져서 낮이 캄캄할 것이라

    3:7

    술객들 - 선견자가 부끄러워하며 술객이 수치를 당하여 다 입술을 가릴 것은 하나님이 응답하지 아니하심이거니와

     

    3:11

    뇌물을 받는 제사장과 선지자 - 그들의 우두머리들은 뇌물을 위하여 재판하며 그들의 제사장은 삯을 위하여 교훈하며 그들의 선지자는 돈을 위하여 점을 치면서도 여호와를 의뢰하여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우리 중에 계시지 아니하냐 재앙이 우리에게 임하지 아니하리라 하는도다

    5:12

    복술과 점쟁이 - 내가 또 복술을 네 손에서 끊으리니 네게 다시는 점쟁이가 없게 될 것이며

     

    5:13,14

    우상과 주상, 아세라 목상 - 내가 네가 새긴 우상과 주상을 너희 가운데에서 멸절하리니 네가 네 손으로 만든 것을 다시는 섬기지 아니하리라 내가 또 네 아세라 목상을 너희 가운데에서 빼버리고 네 성읍들을 멸할 것이며

     

    6:16

    오므리의 율례와 아합 집의 모든 행위를 따름(바알과 아세라 숭배)

    너희가 오므리의 율례와 아합 집의 모든 예법을 지키고 그들의 전통을 따르니 내가 너희를 황폐하게 하며 그의 주민을 사람의 조소거리로 만들리라 너희가 내 백성의 수욕을 담당하리라

     

    앗수르 시대의 선지자들과 그 시대 상황

    요나, 아모스, 호세아, 미가, 이사야

    선지서 중에서 이사야가 가장 먼저 나오지만, 이사야가 가장 먼저 기록된 건 아닙니다.
    17권의 선지서 중에서 가장 먼저 기록된 책은 ‘요엘서’입니다.
    하지만 기록된 시기를 기준으로 배열하지 않고 장수가 많은 것부터 앞에 두는 바람에 이사야(66장)가 첫 번째, 예레미야(52장)가 두 번째, 에스겔(48장)이 세 번째로 나오는 겁니다. 

    아모스가 사역하던 시기는 북이스라엘의 여로보암 2세와 남 유다의 웃시야가 통치하던 시기였습니다.
    이때가 북이스라엘과 남 유다의 전성기였습니다.
    그게 가능했던 이유는 앗수르의 아닷니라리 3세가 BC 805년 이스라엘의 원수 아람을 정복하고, BC 745년 디글랏 빌레셀 3세가 즉위하기까지 북이스라엘과 남 유다를 괴롭히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때는 앗수르가 강대국이 아니었습니다. 

    그때, 북이스라엘은 경제적 전성기를 누렸습니다. 다윗과 솔로몬 이후 가장 잘나가던 시기였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을 버리고, 백성들을 억압하고 착취하던 시대였습니다. 하나님을 버릴 뿐만 아니라, 공의가 무너진 시대였습니다. 이런 상황 속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한 예언자가 아모스입니다.

    아닷니라리 3세와 달리 앗수르의 디글랏 빌레셀 3세는 공격적인 왕이었습니다. 그가 왕위에 오르면서 국제정세가 완전히 변했습니다. 앗수르가 강대국의 면모를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호세아, 미가, 이사야 모두 앗수르가 강대국이었을 때 사역했습니다. 이 세 선지자는 앗수르가 다섯 번씩이나 아람과 이스라엘(유다 포함)을 침략할 것을 예언했습니다.


    1. 앗수르의 첫 번째 침략

    앗수르 왕 디글랏 빌레셀 3세(BC 743-738)에 의해 진행되었습니다.
    관련 내용은 열왕기하 15:19-20절에 나옵니다.
    이때 북이스라엘 므나헴 왕은 앗수르에게 은 1천 달란트를 조공으로 바치고 목숨을 건지고, 위기를 넘깁니다.

    2. 앗수르의 두 번째 침략

    아람 왕 르신과 북이스라엘 왕 베가가 반 앗수르 동맹을 맺고 남 유다의 아하스를 이 동맹에 끌어들이려고 했습니다(사 7:1-2).
    이사야는 아하스에게 여호와께서 아람과 이스라엘 동맹군의 공격이 성공하지 못하게 할 것이라고 하면서 징조를 구하라고 했습니다.

    하지만 아하스가 거절합니다.
    겉으로 볼 때는 아하스가 믿음이 좋아서 징조를 구하지않는 것처럼 보이지만 속내는 뻔합니다.
    하나님을 신뢰하지 않고 앗수르를 의지하겠다는 거지요.
    이때, 하나님께서 이사야를 통해 임마누엘에 관한 징조를 주십니다(사 7장).

    디글랏 빌레셀 3세는 아람과 북이스라엘과 싸워서 다메섹에 큰 타격을 입힙니다.
    북이스라엘의 갈릴리 지역 주민들을 포로로 끌고 갑니다(왕하 15:29).
    이때, 친 앗수르 정책을 펼친 남 유다 아하스 왕에게 독립을 보장받지만, 그때부터 아하스와 남 유다는 앗수르의 꼭두각시로 전락하고 맙니다.

    3. 앗수르의 세 번째 침략

    BC 725-722년에 살만에셀 5세에 의해 사마리아가 함락되었습니다(BC 722). 살만에셀 5세가 3년 동안 사마리아를 에워싸고 공격해서 사마리아가 함락되었습니다(왕하 18:9,10). 아모스, 호세아, 미가, 이사야 모두 사마리아의 멸망을 예언했습니다.


    4. 앗수르의 네 번째 침략

    아스돗 사람들이 반란을 일으켜서 사르곤 2세가 아스돗을 쳐서 취했습니다. 이사야는 유다가 이 반역에 동참하는 것을 반대하였습니다. 이때 이사야는 앗수르가 애굽과 구스(에티오피아를) 황폐케 하리라는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주기 위해서 3년간 벗은 몸과 벗은 발로 다녔습니다(사 20장). 그의 행동이 바로 애굽과 구스에 대한 징조와 예표였습니다.


    5. 앗수르의 다섯 번째 침략

    산헤립이 BC 701년 남 유다 왕 히스기야를 공격한 사건입니다(사 36-37장, 왕하 18:13-19:37, 미 4:6-13). 하나님을 의지함으로 앗수르가 패배한 전쟁입니다. 믿음으로 위기를 극복한 히스기야는 큰 신앙적인 승리를 맛보았습니다. 이사야 36,37장에 나오는 히스기야의 믿음과 승리 이야기는 이사야 7,8장에 나오는 아하스 이야기와 비교됩니다.


    미가가 활동한 시기 – 유다 왕 아하스 시대

     

    미가서의 정치/종교/사회 상황

    아하스 시대

    정치/종교/사회 상황

    사회적

    불의

    약자를 돌보지 않음(2:8-9)

    평안히 가는 자의 의복을 빼앗음

    부녀자들의 집을 빼앗음

    정의와 공의가 없는 사회

    (2:1-2; 7:2-4)

    침상에서 죄를 꾀하고 그걸 행함

    밭과 집을 빼앗음/산업을 빼앗음

    악을 부지런히 행함

    경건한 자와 정직한 자가 끊어짐

    약자를 돌보지 않음(사 1:17)

    학대받는 자를 도와주지 않음

    고아를 위해 신원하지 않음

    과부 위해 변호하지 않음

     정의와 공의가 없는 사회

    (사 1:21,26)

    신실함, 정의, 

    공의가 사라지고

    살인자들뿐인 성읍

    지도자들의 불의(3:2-3, 5, 9-11)

    백성들을 무자비하게 착취

    선지자들의 거짓된 예언

    뇌물을 위해 재판

    제사장들은 삯을 위해 교훈

    선지자는 돈을 위해 점을 침

    지도자들의 불의(1:23)

     

    고관들이 뇌물을

    사랑하고 예물을 구함

    고아 위해 신원하지 않음

    과부의 송사를 수리하지 않음

     

    종교적

    타락

    우상숭배(1:7; 5:12-14)

    우상을 섬김

    우상 숭배를 통한

    부의 축적

    복술을 행함

     

    종교지도자들의 타락

    (3:2-3, 9-11)

    선지자들의 거짓된 예언

    재판을 굽게 함

    제사장들은 삯을 위하여 교훈

    선지자는 돈을 위하여 점을 침

    우상 숭배

    (왕하 16, 대하 28)

    바알의 우상들을 만듦

    힌놈의 아들 골짜기에서 분향

    자녀들을 불사름

    산당과 작은 산 위와

    모든 푸른 나무 아래서

    제사를 드리며 분향함

    이방신을 섬김

    여호와의 전 문들을 닫음

    종교지도자들의 타락

    (왕하 16:11-16)

    북이스라엘

    멸망 예언

    이스라엘 멸망 예언(1:2-7)

    앗수르의 북이스라엘 점령

    (왕하 17:5-6)

    산헤립의 침공

    산헤립의 침공 경로 예언

    (1:8-15)

    산헤립의 침공 기록

    (왕하 18:13)


    미가 선지자가 지적하는 당시의 정치적, 종교적, 사회적 상황(죄들)은 유다 왕 아하스 시대의 죄들과 상당 부분 일치하기 때문에 미가서에 나오는 대부분의 예언이 아하스 시대에 선포된 것으로 추정합니다. 

    하지만 예레미야 26:18절에 미가가 유다 왕 히스기야 시대에 예언했다고 나오기 때문에, 원 청중을 넓게 잡아서 아하스가 단독 통치하던 BC 731년부터 히스기야 왕 14, 앗수르 산헤립이 남 유다를 공격한 BC 701년 사이에 남 유다 백성들로 볼 수 있습니다.


    @ 핵심 구절(Key Verse)

    “사람아 주께서 선한 것이 무엇임을 네게 보이셨나니 여호와께서 네게 구하시는 것은 오직 정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히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6:8)


    @ 중심 내용(main idea)

    1)형식적인 제사(종교행위)가 아니라 정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히 하나님과 함께 행해야 한다.

    2)하나님의 언약 백성으로서 정의와 인자와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아라. 

     

    기록한 주된 이유(목적)

    1)하나님의 백성이 죄에서 돌이켜 정의와 사랑으로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게 하려고

    2)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 특히 지도자들의 부패를 지적하기 위해

    3)죄악 때문에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이 멸망할 것을 말하기 위해

    4)하나님의 나라가 망하고 하나님의 백성이 이방 나라의 포로가 될 것을 말하기 위해

    5)이방에 포로로 끌려가지만, 하나님께서 회복시키심을 말하기 위해 

     

    강조하는 하나님의 성품

    1)공의의 하나님(죄는 반드시 심판)

    2)노하기를 더디 하시는 하나님(사랑)

    3)죄를 용서하시는 하나님(은혜와 긍휼)


    미가서 한눈에 보기

    이스라엘의 죄와 심판

    (1-3장)

    메시야 왕국

    (4-5장)

    하나님의 회복

    여호와의 심판과

    구원의 소망

    (6-7장)

    사마리아와

     예루살렘

     심판(1장)

    이스라엘

     심판이유

    (2장)

    지도자들의

     죄와 심판

    (3장)

    여호와께서 다스리시는 나라

    (4장)

    메시아를 통한 이스라엘의 

    회복(5장)

    이스라엘의 죄와 여호와의 심판

    (6:1-7:6)

    남은 자에 대한 회복약속

    (7:7-20)


    미가서 두 눈에 보기

    이 사람아, 잘 살아야 하네! (6:8)

    이스라엘의

    죄와 심판

    (1-3장)

    사마리아와 예루살렘 심판(1장)

    이스라엘의 심판 이유(2장)

    지도자들의 죄와 심판(3장)

    메시야 왕국(4-5장)

    메시아를 통한 

    이스라엘 회복

    여호와께서 다스리시는 나라(4장)

    메시아를 통한 이스라엘의 회복(5장)

    여호와의 심판과

    구원의 소망(6-7장)

    IS의 죄와 여호와의 심판(6:1-7:6)

    남은 자에 대한 회복 약속(7:7-20)

     







    07-28-2023(금)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죄의 근본(미가 1:13)


    라기스 거민아 너는 준마에 병거를 메울찌어다 라기스는 딸 시온의 근본이니 이는 이스라엘의 허물이 네게서 보였음이니라.
    You who live in Lachish, harness the team to the chariot. You were the beginning of sin to the Daughter of Zion, for the transgressions of Israel were found in you.

    "죄의 근본(the beginning of sin)"

    라기스(Lachish)는 북 이스라엘 왕국을 무너지게 하는 원인이 된  "죄의 근본(the beginning of sin)" 즉 "죄의 출발지" 라고 합니다.
    라기스에서 어떤 죄를 일으켰는가에 대해서 여러 의견을 제시합니다.

    첫째는 라기스는 병거로 무장한 성읍

    라기스 주민들은 그들이 소유한 철병거로 인하여 전쟁에 능하다고 자랑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도와주지 않는 전쟁은 도저히 이길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둘째는 우상들이 유입된 것

    라기스에서부터 우상이 유입되어 이스라엘 전역으로 퍼졌다고 합니다(5-9절)
    라기스 주민들은 말과 강력한 병거를 갖추고 있었기 때문에 하나님을 의지하기 보다는 그들이 갖고 있는 힘을 더 의지하므로 하나님을 떠날 수밖에 없었습니다.

    성도들에게 하나님은 중요한 존재가 아니라 유일한 존재가 되어야 합니다.
    성도들의 삶 속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은 하나님의 뜻과 힘을 의지해서 헤쳐 나가야 한다는 뜻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성도들은 자신의 판단에 따라 쉬운 일은 자신의 힘과 지혜로 만들어 나가고 좀 어렵다고 판단되는 일만 하나님께 맡기려고 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분명 잘못된 태도라고 하겠습니다.
    왜냐하면 세상의 어떤 일이라도 하나님의 도우심이 없이 이루어지는 것은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보다 다른 것을 더 의지하고 찾는 것은 곧 죄의 근본이 됩니다.
    그러므로 무엇보다도 먼저 하나님을 찾는 신앙의 우선순위를 바르게 결정하고 선택해야 할 것입니다.

     

    󰃨 라기스 거민아 너는 준마에 병거를 메울지어다 - '라기스'(라키쉬)는 '준마'(라레케쉬)와 운율을 이룬다. 라기스는 병거로 무장한 성읍이며, 그곳 거민들은 전쟁에 능한 자들이었다. 그들은 앗수르의 침략소식을 듣고 전쟁을 치를 준비를 갖추어야 한다. 그러나 그 결과는 파멸이다. 그들은 준비를 타고 도망을 치게 될 것이다.

    󰃨 라기스는...네게서 보였음이니라 - 본 구절은 라기스가 멸망당하는 이유를 나타낸다. 딸 시온, 곧 이스라엘이 범한 죄의 근원이 라기스에서 왔기 때문이다. 혹자는 그 죄악이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말과 병거를 의지한 것을 가리킨다고 주장하나 라기스를 통해서 우상들이 이스라엘에 유입된 것으로 보는 것이 더 타당하다(5-9절, Lange,Smith).



    유다 출신의 선지자 미가(Micah)는 남 유다 예루살렘과 북 이스라엘 사마리아를 중심으로 하나님의 심판과 회복에 대해 예언합니다.
    미가 선지자의 주된 메시지는 이스라엘 두 왕국 전체에 만연해 있던 부패와 타락의 근본 원인이 하나님을 떠나 우상 숭배를 행했기 때문이라고 강조합니다.
    이러한 메시지를 부각시키기 위해 백성들의 죄악으로 인해 하나님의 심판이 진행될 것을 예언하는 것(1-7절)
    심판에 대한 선지자 자신의 반응을 보여 주는 것(8-9절)
    백성들을 향한 경고를 예언하는 것(10-16절)

    하나님의 백성인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법도에서 벗어나서 죄악의 길에 빠져 있을 때 하나님은 그들을 돌이키시려는 일을 하십니다.
    하나님은 그의 백성들에게 심판과 멸망을 선포하시며 죄악을 지적하십니다.
    이것은 확정된 멸망의 선언 이 아니라 돌아오기를 바라시는 하나님의 사랑의 또 다른 표현입니다.
    선지자들을 통해서 간절히 바라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보여 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악을 용납하실 수 없기에 그의 백성들이 악에서 떠나 자기에게로 돌아오기를 바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가장 미워하시는 죄는 '우상 숭배'입니다.
    그래서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율법을 주실 때에도 제일 먼저 강조한 것이 바로 '내 앞에서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는 것이었습니다.

    우상 숭배는 만물의 유일한 창조주이며 주관자이신 하나님을 부정하는 행위와 같습니다.
    특히 당시 각종 우상 숭배가 성행하고 있던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는 이스라엘에게 우상 숭배에 관한 경고는 가장 절실하고 중요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가나안의 모든 거민들을 완전히 멸하라고 명령하신 것도 이스라엘이 가나안의 종교적 문화에 물드는 것을 염려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은 오히려 가나안의 전통적인 우상 숭배에 빠져 버렸고 그 결과 하나님의 징계를 언제나 받았습니다.
    특히 번성하던 통일 이스라엘이 급격히 몰락하기 시작한 것도 솔로몬으로부터 시작된 각종 우상 숭배로 인한 것이었습니다.
    본장에서 뿐만 아니라 모든 소선지서에 나타난 선지자들의 메시지를 통하여 끊임없이 선포된 것도 바로 우상 숭배를 폐하고 하나님께로 돌아오라는 것이었다.
    본문에 소개되고 있는 사마리아의 죄악도 바로 우상 숭배였고 예루살렘도 마찬가지였다.
    이 사실은 하나님을 떠난 것이 바로 우상 숭배라는 사실을 보여 준다.
    특히 우상 숭배는 신약에 넘어와서는 '두 마음을 품은 것'으로도 설명하고 있는데, 인간도 두 마음을 싫어하듯이 하나님은 더욱 그러하신 것이다.  


    성도들에게 있어 하나님은 중요한 존재가 아니라 유일한 존재가 되어야 합니다.
    성도들의 삶 속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은 하나님의 뜻과 힘에 의지해서 헤쳐 나가야 한다는 뜻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성도들은 자신의 판단에 따라 쉬운 일은 자신의 힘과 지혜로 만들어 나가고 좀 어렵다고 판단되는 일만 하나님께 맡기려고 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분명 잘못된 태도라고 하겠습니다.
    왜냐하면 세상의 어떤 일이라도 하나님의 도우심이 없이 이루어지는 것은 없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우상을 숭배하다가 멸망하였듯이 오늘날 세상의 물질이나 권력에 자신의 인생을 의지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세상의 어떤 것에도 결코 눈을 돌리지 말고 오직 하나님 앞에 자신의 모든 것을 맡기고 하나님만을 의지하는 삶을 살아야 할 것입니다.  


    미가라는 이름의 뜻은 “여호와와 같은 이가 누군가?” 라고 합니다.
    미가 선지자는 유다왕 ‘요담, 아하스, 히스기야’ 시대에 활동하였는데, 이 시기는 이스라엘이 남과 북으로 나눠진 후 약 200년쯤 지난 격동의 시기였습니다.
    번성하던 북이스라엘은 앗수르의 침공으로 결국 망하게 되었고, 자신들에게는 절대 문제가 없다던 남유다도, 주변 강대국들의 소용돌이에 휩싸이고 말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런 시기에 미가를 선택하셔서, 사마리아와 예루살렘에게 회개를 선포하게 하셨으며, 그와 동시대에 활동하던 선지자로는 ‘이사야, 아모스, 호세아’가 있었습니다.










     




    이사야부터 말라기까지 현재 기록이 전해지는 16명의 선지자들은 BC 800년경부터 400년까지 4세기 동안 활동했다.
    그들 대부분은 봉사 기간을 최소한 대략적으로라도 확정지을 수 있도록 연대 자료를 남겼다.
    그러나 두 사람(요엘과 오바댜)의 경우 사역 시기에 관한 결정적인 증거가 없어서 이 문제에 대한 견해는 학자마다 매우 다르다.

    유다와 이스라엘 왕들, 특별히 후기 왕들의 시대를 비교적 매우 정확하게 추정할 수 있기 때문에, 이 16명의 선지자들이 봉사했던 시기에 다스렸던 여러 왕들의 통치 기간이 본 주석에서 채용한 잠정적인 연대기에 따라 이 도표에 편입됐다(참조 제3권, 107; 제4권, 54, 76, 99, 100, 322). 이 시기에 다스렸던 앗수르, 바벨론, 페르시아 왕들의 비교적 잘 정립된 연대도 다른 난에 기록되어 있다. 그 왕들 대부분은 성경의 예언서나 역사서에 언급되어 있다. 또 한 난에는 이 기간에 있었던 특별한 사건들의 목록이 나와 있는데, 일부는 이스라엘과 유다 주변국들에서 일어난 국외 사건에 관한 것이고 일부는 국내 사건에 관한 것이다. 이 도표에는 성경에 언급되어 있으며 예언적 기별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사건들만 나와 있다.

     다음의 간략한 요약에는 여러 선지자들이 도표에서 각각 해당 연대에 표시된 것에 관한 증거가 포함되어 있다.

     이사야

    이사야는 성경 기자들의 위대한 선구자였다.
    이 사실은 여러 신약 기자가 인정하는 바, 그들은 이사야서를 90회 이상 인용했다.
    이사야는 남방 왕국의 선지자로, 국가적으로 중차대한 시기에 살았다.
    그는 두 번의 결정적인 시기에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1) 아하스 치세 때 아람과 이스라엘이 전쟁을 벌였던 시기(사 7~11장),

     (2) 히스기야 치세 때 산헤립이 이스라엘을 포위했던 시기(36, 37장).

     하나님에 대한 자신의 신뢰를 통해 히스기야와 백성을 독려한 그는 예루살렘을 구원하는 도구로 사용되었다.

     그의 초기 봉사는 웃시야 왕 통치 말기와 일치하는 것 같지만(참조 이사야 서론), 공식적인 선지자로서의 부르심은 웃시야 왕의 마지막 해인 BC 740/739년에 있었다(6:1). 이어지는 세 왕 요담, 아하스, 히스기야 치세 아래서 신실하게 봉사했던(1:1) 그는 히스기야의 악한 아들 므낫세에게 극도로 미움을 받았던 것 같다. 므낫세는 BC 686년경 그의 아버지의 사망 직후 단독 통치자로 보좌에 등극했을 때 지체하지 않고 그 신실한 선견자를 제거하였다(선지자와 왕, 382). 유대 전승에 의하면 이사야는 톱으로 켬을 당하여 죽었다고 한다. 히브리서 11장 37절이 이 사건을 가리키는 것일 수 있다.

     그러므로 웃시야부터 므낫세까지 이사야의 전 봉사 기간은 반세기 넘게 지속됐음에 틀림없다(선지자와 왕 310, 382,).

     예레미야

    예레미야의 일대기는 다른 선지자에 비해 더 잘 알려져 있다.
    그는 아나돗이 고향이었던 제사장의 가문에 속했다. 예레미야는 출생 전부터 하나님에게 택함 받아 직무를 맡았고(렘 1:5) 어린 나이에 선지자로 부르심을 받았다(1:6, 7). 선지자가 자신을 가리켜 말한 “청년” 혹은 “아이”(1:6)라는 뜻의 히브리어 나아르(na‘ar)는 예레미야가 정확히 몇 살에 부름을 받았는지 드러내 주지는 않지만, 이 단어가 들어있는 구절의 문맥이 적어도 20세 미만의 매우 젊은 나이였다는 해석을 지지하는 듯이 보인다. 이 부르심은 BC 627/626년 요시야 왕 제13년(1:2; 25:3)에 있었다. 그 당시 요시야는 불과 21세밖에 되지 않은 젊은 왕이었다.

     예레미야는 조국이 위기를 겪던 시기에 살면서 동포에게 책망의 기별과 앞으로 닥쳐올 파멸에 대한 엄중한 예언을 많이 선포하라는 부르심을 받았다. 여호야김 치세 때는 담대한 기별로 인해 거의 목숨을 잃을 뻔했기에 숨어 지내기도 했다(36:26). 유다의 마지막 왕 시드기야의 치세 때는 바벨론인들에게 항복하라고 권고했다는 이유로 배반자로 여겨져 투옥됐다(37:11~16). BC 586년 예루살렘 멸망 후 느부갓네살은 예레미야가 유다에 남게 된 동포와 지내도 좋다고 허락했다(40:1~6). 유다의 새 총독 그다랴의 피살 후 미스바의 유대인들은 느부갓네살의 보복을 두려워하여 예레미야와 그의 서기 바룩을 데리고 애굽으로 도망갔다(43:6).

     애굽에서 예레미야는 유대인들이 그곳에서 행하던 우상숭배를 강하게 질타했다(43, 44장). 그는 나일강 지역에서 사망했을 것이다. 유대인의 전설 가운데는 그가 동포에게 돌에 맞아 죽었다는 주장이 있다. 역사적인 후기(後記)인 52장을 예레미야가 기록했다면 그는 바벨론 왕 에윌-므로닥(Evil-Merodach)이 여호야긴을 감옥에서 방면했던(참조 52:31) BC 561년까지 살았음에 틀림없다. 이럴 경우 그는 80대였을 것이다. 52장이 예레미야의 서기나 그의 제자 중 한 사람이 영감받아 기록한 후기로서 첨가된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그가 약 20년 앞선 BC 580년경에 죽었다고 믿는다. 도표에는 두 의견을 다 반영하여 실재했을지 모를 BC 560년 이전 20년의 봉사 기간을 점선으로 표시했다.

     에스겔

     선지자 겸 제사장인 에스겔은 여호야긴 왕이 바벨론으로 압송됐던 BC 597년에 느부갓네살 왕이 포로로 잡아갔던 유다인 10,000명 중의 한 사람이었다. 여호야긴이 포로 된 지 제5년인 BC 593/592에 에스겔은 바벨론 남부 닙푸르(Nippur)라는 유명한 도성 인근의 한 운하였던 “그발강”가에서 첫 번째 계시를 보았다(겔 1:1~3). 포로 된 지 제5년을 그가 “제삼십년”이라고 언급한 것은 수수께끼이다. 선지자가 자신의 나이를 그렇게 지칭했거나 아니면 그 해가 요시야 왕이 개혁을 일으킨 지 제30년이라고 말한 것이라고 여겨진다.

     에스겔의 여러 기별은 정확한 연대를 매길 수 있으며 연대가 매겨진 예언 기별 중 마지막은 에스겔이 사로잡힌 지 제27년(29:17)인 BC 571/570년에 받은 것이다. 그렇다면 에스겔은 BC 593/592년부터 BC 571/570년까지 적어도 22년의 봉사를 한 셈이 된다. 그러나 연대가 매겨지지 않은 일부 예언이 그 이후에도 주어졌을 가능성이 있다. 그러므로 BC 571/570년을 굳이 그의 봉사의 마지막 해로 구분지어 생각해서는 안 된다.

     다니엘

     다니엘은 느부갓네살의 즉위년인 BC 605년에 바벨론으로 끌려갔다(참조 단 1:1 주석). 하지만 젊은 다니엘이 선지자의 소명에 관한 최초의 증거를 보여 준 사건은 느부갓네살 제2년 곧 그가 포로 된 지 제3년이 되어서야 일어났다(1:5, 17; 2:1, 19). 따라서 BC 603년을 다니엘이 선지자로 봉사하기 시작한 해로 볼 수 있다.

     한동안 그는 느부갓네살 정부의 고위직에 있었고(2:48) 그 위대한 왕에게 신임받는 모사가 됐다. 느부갓네살의 후계자들의 치세 때는 다니엘의 조력이 요청되지 않았던 것 같다. 그러나 바벨론이 멸망하던 밤, 벽에 기록된 신비스런 글자의 해석자로서 다시 한 번 역할을 담당한다(5장). 이 사건 직후 그는 새롭게 형성된 페르시아 제국에서 또다시 명예롭고 책임이 막중한 고위관직에 오르게 되었다(6장).

     

    7~12장에 기록된 모든 계시는 다니엘이 말년에 받은 것인데, 첫 번째 계시(7장)는 벨사살 원년(BC 552년 혹은 그 후)에, 마지막 계시(10~12장)는 고레스 제3년인 BC 536/535년에 주어졌다. 그가 책을 마무리짓고 봉함하라는 명령을 받았을 때가 이 시기였을 것이며, 이때 다니엘은 거의 90세였을 것이다(12:4, 13). 이런 이유로 다니엘의 광범위한 선지자 봉사 기간은 대략 BC 603년에서 535년까지로 산정할 수 있다.

     호세아

     선지자 호세아는 북방 이스라엘의 시민이었는데, 당시는 그가 “우리 왕”(호 1:1; 7:5)이라고 부른 여로보암 II세가 통치하던 때였다. 호세아의 예언 일부와 아모스의 예언을 비교해 보면 호세아가 동시대의 아모스보다 젊었다는 점이 드러난다(참조 호 4:3암 8:8; 호 4:15암 5:5; 호 8:14암 2:5). 유다 왕 웃시야와 이스라엘 왕 여로보암 시대(호 1:1)에 봉사를 시작한 호세아는 유다 왕 히스기야 때까지 계속 활동했다(1:1). 그러나 그의 모든 기별은 북방 왕국에게 보낸 것이었다.

     호세아서에는 BC 723/722년에 일어난 사마리아의 함락에 관해 아무런 언급이 없는 것으로 보아 선지자의 마지막 기별은 사마리아의 멸망 전에 주어졌다고 결론지을 수 있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그의 봉사는 약 BC 755년(혹은 그전)부터 BC 725년경까지로 산정할 수 있다.

     요엘

     선지자 요엘에 관해서는 브두엘의 아들(욜 1:1)이라는 사실 외에는 알려진 바가 아무것도 없다. 그의 저작은 능란한 말솜씨와 균형 잡힌 구문과 생동감 있고 인상적인 시(詩)라는 특징을 지닌다. 하지만 이 책에는 선지자가 살았던 시기에 대한 명확한 언급이 없다. 선지자가 매우 생생하게 묘사하며 다가올 심판날의 두려움과 비교하는 파괴적인 황충 재앙의 시대를 산정하는 일은 불가능하다. 요엘이 봉사했던 시기에 관해 학자들마다 견해를 달리한다. 이전 세대의 학자들은 그를 BC 9세기 사람으로 보는 반면, 현재 대부분의 주석가들은 그의 시기를 요시야 왕 시대나 바벨론 유수 이후로 정하는 경향이 있다. 다음의 세 가지 견해를 지지하는 결정적인 증거가 없기 때문에 모두를 여기에 제시한다.

     1. 9세기 견해

     대제국 앗수르와 바벨론은 이 선지자의 시계(視界) 안에 등장하지 않는다. 이로 보건대 그는 앗수르가 팔레스타인 정세에 어떤 역할을 하기 이전 시대에 일했던 것 같다. 이방 민족들이 유다에게 자행한 적대 행위들(3:4 이하)은 열왕기하 8장 20~22절역대하 21장 8~10절에 기록된 사건들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이며, 반면 왕하 12:17, 18대하 24:23, 24에 기록된 하사엘의 침공을 지적하는 내용은 아무것도 없기 때문에 요엘이 이 두 사건 사이에 해당하는 시기에 기별을 전했다는 결론이 내려졌다. 더욱이 그는 대제사장 여호야다가 어린 왕 요아스를 위해 섭정하던 시절(왕하 11:17~12:2)에 봉사했다고 여겨지는데, 이 사실은 요엘서 어느 곳에도 왕에 대한 언급이 없는 이유를 설명해 줄 것이다. 한편 그 당시에는 성전봉사가 잘 이뤄지고 있었다.

     2. 7세기 견해

     이 견해는 요엘의 봉사가 요시야 초기, 곧 앗수르 세력이 거의 끝나고 바벨론이 아직 약한 왕국이었던 시기에 들어맞는 것 같다는 주장이다. 그래서 이 두 왕국에 관한 언급을 이 선지자가 전혀 안 했던 것이다. 요시야는 어린 나이에 보좌에 올랐기 때문에 섭정을 받지 않을 수 없었는데, 이는 요엘이 왕에 대해 전혀 언급하지 않은 점에 대한 설명이 된다. 더욱이 두로와 시돈 백성이 유다 역사의 마지막 수십 년이 돼서야 적대국으로 등장하는 반면, 요엘이 그들을 유다의 원수로 언급한 사실은 이 선지자의 봉사가 늦은 연대에 있었음을 가리키는 것 같다. 여기에 헬라에 관한 언급(욜 3:6)을 덧 붙일 수 있는데, 헬라는 BC 7세기 이전에는 근동 역사에서 활약한 적이 없었다. 이런 이유로 인해 정확하다는 결정적인 증거는 없을지라도 본 주석에서는 7세기를 요엘서의 연대로 채택했다.

     3. 바벨론 유수 후 견해

     유다 왕이나 앗수르 혹은 바벨론에 관한 언급이 없으나, 두로와 시돈의 적개심과 헬라에 관해서 언급한 사실을 일부 주석가들은 요엘서가 포로 후 시대에 기록되었다는 증거로 받아들였다. 그러나 페르시아에 대한 언급, 즉 그렇게 늦은 연대에 기록됐다면 나오리라고 기대할 수 있는 요소도 이 책에는 나오지 않는다. 이 사실로 인해 이런 늦은 연대를 지지하는 논거는 약해진다.

     아모스

     아모스는 독자들에게 자신을 “목자” 그리고 “뽕나무를 배양하는 자”(암 1:1; 7:14)로 제시한다. 책 서두에서 그는 유다 왕 웃시야와 이스라엘 왕 여로보암 II세의 치세 때 봉사했다고 밝힌다. 두 왕만 언급된 점으로 보아 아모스는 두 왕이 각자의 나라에서 단독 통치자로 있던 시대에 예언했던 것 같다. 웃시야는 유다에서 BC 767년부터 750년까지, 여로보암은 이스라엘에서 BC 782년부터 753년까지 단독으로 통치한 왕이었다. 첫 번째 기별이 “지진 전 이년”(1:1)에 임했다는 언급이 있는데도 더 정확한 연대 추정이 불가능한 이유는 지진의 연대가 알려져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지진은 매우 강력했음에 틀림없는데, 이는 스가랴 14장 5절을 보면 그 지진에 대한 기억이 250년 후에도 사람들의 마음에 여전히 생생하게 남아있었기 때문이다.

     아모스 선지자는 유다의 국민이었으나 이스라엘 왕국에도 기별을 전했다. 그의 기별 중 일부는 여러 이방 민족들에 대한 경고였다. 그는 북방 이스라엘의 성소가 있는 벧엘에 가서 이스라엘에 닥칠 운명과 경고와 견책의 예언들을 전했다.

     오바댜

     21절로만 구성된 짧은 책 오바댜는 연대가 나와 있지 않으며 연대적 배경도 불확실하다. 에돔에 대한 경고인 오바댜의 예언은 예루살렘을 약탈하고 많은 유대인을 포로로 잡아간 사건이 최근에 일어났다는 점을 전제로 한다. 오바댜가 BC 9세기 여호람 왕 시대에 예루살렘이 정복당한 사실(왕하 8:20~22; 대하 21:8~10, 16, 17)을 언급한 것이라고 믿는 이들도 있지만, BC 586년 느부갓네살이 예루살렘을 멸망시킨 일을 말하고 있다고 믿는 이들도 있다. 그가 사용한 단어 일부가 예레미야(옵 1:1, 3, 4절; 참조 렘 49:14, 16)와 요엘(옵 1:15, 17절; 참조 욜 1:15; 2:1, 32)에도 나온다는 점이 늦은 연대인지 이른 연대인지 밝히는 증거로 사용되기 힘들다. 본 주석에서는 이른 연대에 대한 편견은 없지만 늦은 연대를 채택하고 있다.

    요나

    선지자 요나는 가드헤벨 출신의 갈릴리 사람이었다.
    그의 책에는 니느웨로 가라는 사명을 부여받은 시기를 입증할 수 있는 직접적인 자료는 아무것도 없다.
    그러나 열왕기하 14장 25절에는 요나가 여로보암 II세가 성취할 이스라엘의 영토 확장에 관한 예언을 선포했다고 나와 있다.
    이 예언은 여로보암이 즉위하기 전(약 BC 793년)이나 그의 통치 초기에 선포했음에 틀림없다.
    그러므로 요나는 여기서 논의하는 선지자들 중 가장 초기의 사람이었을 것이다.

    요나의 봉사 시기를 BC 790년경으로 이른 연대로 잡는 것은 앗수르의 역사와 잘 부합한다.
    니느웨에 대한 요나의 사명과 그 결과가 부합되는 것으로 보이는 유일한 기간은 아닷-니라리 III세(Adad-nirari III, BC 810~782) 치세이다.
    그의 통치 중 짧은 시기 동안 앗수르는 다신교 신앙에서 단일신 나부(Nabu) 숭배 신앙으로 돌아섰다(참조 제3권, 82).

    미가

    미가는 유다 남서부 텔 엣-주데이데(Tell ej-Judeideh)로 보이는 가드모레셋(미 1:1, 14) 출신의 선지자였다.
    미가를 아합 시대(BC 9세기)에 이스라엘의 선지자였던 이믈라의 아들 미가야와 혼돈해서는 안 된다.
    초기 주석가들은 이 두 사람을 동일 인물로 보려고 했는데, 이는 그들이 유사한 표현을 사용했기 때문이다(미 1:2; 참조 왕상 22:28).
    그러나 미가가 제시한 연대적 자료는 이렇게 보는 것과 부합하지 않으며, 두 사람 사이에 한 세기 이상의 시차가 있음을 보여 준다.

    미가는 자기의 봉사가 요담, 아하스, 히스기야(미 1:1) 시대에 해당한다고 언급한다.
    요담의 단독 통치가 그의 아버지 웃시야가 죽던 BC 740/739년 후에 시작됐기 때문에, 미가의 선지자 봉사의 시작 연대도 웃시야의 사후로 봐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그는 이사야보다 조금 어린 동시대 사람인데, 그의 예언은 어휘와 용어 면에서 이사야와 매우 흡사하게 나타난다(미 4:1; 참조 사 2:2~4).

    예레미야(렘 26:18)도 미가서(미 3:12)를 인용하며 미가가 히스기야 시대에 봉사했음을 증언한다.
    이 모든 사실에 비춰볼 때 미가는 약 BC 740년부터 700년경까지 예언했다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나훔

    나훔은 엘고스 사람이라 불린다(나 1:1). 엘고스라는 지명은 알려져 있지 않지만 주석가들은 이곳이 갈릴리 북부에 있는 엘케시(Elkesi), 모술(Mosul) 인근의 알쿠쉬(Alkush), 유다의 엘류쎄로폴리스(Eleutheropolis) 인근 마을임을 밝히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그가 남방 왕국에서 살고 일했으며, 그의 주요 예언이 전반적으로는 앗수르를 그리고 구체적으로는 니느웨를 다루고 있음은 분명하다. 어떤 연대적 자료도 나오지 않지만 선지자는 노(No)의 멸망을 과거사로 말하고 있다(3:8). 헬라식 명칭인 테베(Thebes)로 더 잘 알려진 상(上)애굽의 이 수도는 BC 663년 아슈르바니팔(Ashurbanipal)에게 멸망당했는데, 이 해는 나훔이 예언했다고 볼 수 있는 시기의 상한선이 된다. 반면 니느웨의 멸망은 장래 사건으로 기술되어 있다(3:7). 앗수르의 수도 니느웨는 BC 612년 메대와 바벨론 연합군의 수중에 들어가 멸망당했고, 따라서 이 해는 나훔이 예언한 시기의 하한선이 될 수 있다. 테베에 임한 파멸에 관한 선지자의 생생한 묘사는 그 사건이 백성의 기억에 아직도 생생하게 남아있다는 인상을 주는 반면, 앗수르는 세력이 기울고는 있었지만 아직 파국에 가깝지는 않았다. 그래서 테베의 멸망과 니느웨의 멸망 연대의 중간쯤 되는 BC 640년이 나훔의 예언적 봉사에 합당한 추측 연대일 것 같다.

     하박국

     하박국에 관해서는 이름 외에는 알려진 바가 아무것도 없다. 하박국 3장이 “영장”에게 바치기 위해 “내 수금에 맞춘 것”(합 3:19)이라는 기록을 보면 그가 성전에서 노래하는 자였을 가능성이 있다. 어떤 연대적 자료도 하박국서에 나오지 않지만 하박국의 예언 시기를 비교적 정확히 추정할 수 있는 언급들이 일부 있다. 성전이 아직 존재하는 것으로 보아(2:20) 하박국서는 BC 586년 느부갓네살이 예루살렘을 멸망시키기 전에 기록됐음이 드러난다. 더군다나 갈대아 사람들이 일어나 서방을 침략할 것이라는 예언은 전혀 믿을 수 없는 것으로 보였다(1:5~7). 이 상황은, BC 626/625년에 통치를 시작하여 메대와 함께 앗수르를 멸망시킨 장본인인 나보폴랏사르(Nabopolassar) 치하의 갈대아 제국이 일어나기 전 시기에 가장 잘 맞는다. 갈대아 사람들이 주요 세력이 되기 전인 BC 630년경이 하박국의 예언 활동 시기로 매우 적절한 것 같다.

     스바냐

     선지자 스바냐는 유다 왕 히스기야(Hezekiah)로 보이는 히즈키야(Hizkiah, 두 이름이 히브리어로는 같음)라는 중요 인물에 이르기 까지 자기 계보를 소급한다. 그는 BC 640년에서 609년까지 다스렸던 요시야 왕(습 1:1)의 치세 때 봉사했다고 진술한다. BC 612년에 일어난 니느웨의 멸망이 미래의 사건으로 언급된 점은 스바냐의 사역이 이 연대보다 앞서 진행됐음을 나타낸다. 더욱이 유다의 죄악이 당대에 엄청났다고 반복하여 언급한 것(참조 1:4~6, 8, 9, 12; 3:1~3, 7)은 BC 622/621년에 시작된 요시야의 개혁 이전 시대를 가리킨다. 이러한 관찰을 통해 스바냐는 아마도 BC 630년경 요시야의 통치 초기 곧 하박국과 동시대에 살았던 인물로 볼 수 있을 것 같다.

     학개

     한동안 중단됐던 성전 재건(스 4:24; 5:1)은 학개의 담대한 봉사를 통해 다리오 I세 때 재개되었다. 학개서에는 연설 네 개가 들어 있는데, 각각에는 다리오의 정확한 통치 연월일이 나와 있다. 학개서의 이어지는 순서를 통해, 기록된 그의 봉사 기간은 BC 520년 8월 29일에 시작하여(학 1:1) 마지막 두 편의 연설(2:10, 20)을 했던 BC 520년 12월 18일까지 전부 3개월 반에 지나지 않음을 알게 된다. 학개의 사역처럼 이렇게 명확하게 연대를 매길 수 있는 다른 선지자는 없다.

     스가랴

     스가랴는 제사장 가문에 속했던 것 같다(슥 1:1; 참조 느 12:12, 16). 소명은 BC 520년 10/11월 어느 날 그에게 이르러 왔는데, 같은 해에 학개도 처음 등장한다(슥 1:1). 여러 예언이 두세 달 후에 연이어 임했다(1:7~6:15). 그런 뒤 그의 활동은 거의 2년 동안 잠잠했다가, BC 518년 12월 6일(7:1) 7장8장에 기록된 또 다른 거룩한 기별을 받았다. 9~14장에 나오는 나머지 기별과 예언에는 연대가 나와 있지 않기 때문에 스가랴의 활동기간을 확정할 수 없다. 따라서 그가 BC 520년에 사역을 시작하여 BC 518년까지 계속했음은 알려져 있는 반면, 선지자 봉사의 끝은 정하지 않은 상태로 유보해야만 한다. 일부 학자들은 그의 봉사의 마지막을, 잠정적으로 BC 510년이라고 정한다. 9~14장 부분이 훨씬 후에 주어졌을 수 있기 때문에 그가 좀 더 오래 일했을 가능성도 있다.


     

    말라기

     말라기라는 말이 “나의 사자”라는 뜻이기 때문에 말라기가 저자의 이름인지 아니면 단순히 익명의 저자에 대한 호칭인지는 알려져 있지 않다. 만약 후자가 사실이라면 그의 책은 구약의 선지서 가운데 유일한 익명의 작품이 된다. 그러나 말라기를 왜 고유명사로 보지 말아야 하는지에 대한 타당한 근거는 없다.

     말라기서는 선지서들의 배열에서 마지막 책일 뿐 아니라 그리스도교 이전 시대에 저술된 마지막 예언서이기도 하다. 그 책의 기별은 유다 왕국 시대가 끝나고 총독이 나라를 치리하던 시대(말 1:8)에 기록되었음을 보여 주는데, 그것은 그때가 페르시야 시대임을 가리킨다. 성전은 분명히 재건됐고 말라기가 활동하던 시기에는 제사가 정규적으로 드려졌다(1:7~10). 말라기가 꾸짖었던 여러 악습은 느헤미야가 두 번째 총독 임기를 맞이하여 예루살렘으로 돌아왔을 때 발견했던 것들과 거의 동일하다(말 3:8, 9; 참조 느 13:10~12; 말 2:11~16; 참조 느 13:23~27).

     불행하게도 느헤미야의 두 번째 총독 임기의 연대를 추정할 수 없기에 말라기의 연대를 정하는 데도 어려움이 있다. 느헤미야의 첫 번째 총독 임기는 BC 444년부터 432년까지 이어졌다가, 이후에 페르시아로 소환됐다. 거기서 그는 얼마간인지 알 수 없는 여러 해를 보낸 뒤 유대로 돌아왔을 때 느헤미야 13장에 기록된 악습들을 보게 된다. 이런 악습들은 총독의 단호한 조치로 시정되었다. 이를 통해 말라기의 사역은 느헤미야의 첫 번째 총독 임기에 뒤이어 있었지만 느헤미야가 페르시아의 수도에서 예루살렘으로 돌아온 시기 이전에 있었다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따라서 이 책은 BC 425년경에 기록된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저자 : 미가서의 저자는 선지자 미가(미 1:1)

    저작 연대 : 주전 735-700년 사이에 쓰여졌습니다.

    기록 목적 : 미가서의 메시지는 심판과 소망이 복잡하게 섞여 있습니다.
    한편으로는 사회악, 부패한 지도층, 그리고 우상 숭배으로 인한 이스라엘 심판을 예언합니다.
    이 심판은 사마리아와 예루살렘이 멸망할 때 절정을 이룰 것으로 예상되었습니다.
    한편으로, 이 책은 이스라엘 국가의 회복뿐만 아니라 이스라엘과 예루살렘의 변화와 영광을 선포합니다.
    소망과 멸망의 메시지는 반드시 모순되는 것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회복과 변화는 심판 후에야 발생하기 때문입니다.

    핵심 구절 : 미가 1:2, “백성들아 너희는 다 들을지어다 땅과 거기에 있는 모든 것들아 자세히 들을지어다 주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대하여 증언하시되 곧 주께서 성전에서 그리하실 것이니라”

    미가 5:2, “베들레헴 에브라다야 너는 유다 족속 중에 작을지라도 이스라엘을 다스릴 자가 네게서 내게로 나올 것이라 그의 근본은 상고에, 영원에 있느니라”

    미가 6:8, “사람아 주께서 선한 것이 무엇임을 네게 보이셨나니 여호와께서 네게 구하시는 것은 오직 정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하게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

    미가 7:18-19, “주와 같은 신이 어디 있으리이까 주께서는 죄악과 그 기업에 남은 자의 허물을 사유하시며 인애를 기뻐하시므로 진노를 오래 품지 아니하시나이다 19 다시 우리를 불쌍히 여기셔서 우리의 죄악을 발로 밟으시고 우리의 모든 죄를 깊은 바다에 던지시리이다”






    미가는 "여호와 같으신 이가 누구입니까?"라는 뜻의 미가야후(מִיכָיָ֫הוּ)를 줄인 것으로 받아들여진다.

    미가는 주로 남왕국 유다에서 활동한 예언자로 이사야와 같은 시대의 사람이었다.
    주로 이스라엘 왕국의 수도 사마리아의 멸망에 대해 예언했고 유다와 이스라엘의 부자들을 몹시 꾸짖고 가난한 자들과 어울리며 지냈다. 미가 1:1은 예언자 미가가 예언 활동을 펼치던 때를 남 유다의 요담 왕(주전742-735). 아하스 왕, 히스기야 왕이 통치하던 시대로 소개한다.
    미가가 활동할 당시에는 신 앗수르 제국의 힘이 상승하면서 주변 국가들을 정복하려는 시도가 시작되었다.
    앗수르 제국의 왕들은 다른 주변 국가의 왕들과 달리 정복한 백성들로부터 받은 조공을 가지고 직업 군인들을 지원했기 때문에 서방의 군인들에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강한 군사적 힘을 지니고 있었다.

    미가는 구약 소예언서 중 한 권이다.
    미가는 이사야 선지자가 활동하던 유다 왕국의 요담 아하스, 히스기야(기원전 739년~686년) 치세의 선지자이다.
    모레셋 사람 미가(מִיכָה הַמֹּרַשְׁתִּי / Mīḵā hamMōraštī)으로 기록돼있다.
    아합 왕에게 책망을 한후 미가는 아합 왕의 아들 요람에 의해 절벽에서 죽임을 당했다


    미가의 내용을 요약하자면 다음과 같은데, 구약의 예언서에 대한 기독교적 해석은 일반적으로 역사적인 해석과 영적인 해석을 적절히 혼합하여 해석하는 것을 기본으로 한다.

    1장 : 이스라엘의 악행의 원인인 사마리아에 대한 심판이 있을 것이고, 예루살렘은 유다의 산당의 원인인데 예루살렘 근처의 성들이 정복당할 것이다.

    2장 1-11절 : 거짓 선지자들의 말이나 들으며 악한 일들을 꾸미는 자들에게는 심판이 있을 것이다.

    2장 12-13절 : 하느님이 이스라엘의 남은 사람들을 모을 것이고, 하느님이 그들을 선두에서 이끄는 왕이 되실 것이다.
    -기독교적 해석: 왕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구원 받은 성도들을 천국으로 이끄실 것이다.

    3장 : 타락한 이스라엘 족속의 통치자들과 선지자들로 인하여 예루살렘은 심판을 받을 것이다.

    4장 1-5절 : 마지막 날에 많은 민족들이 하느님의 성전이 있는 산으로 몰려올 것이고, 그 이후로는 하느님이 다스리시는 전쟁이 없는 세상이 오게 된다.
    -기독교적 해석: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 때에 많은 민족들에게서 구원받는 자들이 나올 것이며, 그들은 영원히 평화로운 천국에 가게 된다.

    4장 6-13절 : 마지막 날에 하느님이 다리 저는 사람들, 추방된 사람들, 환난을 당하던 사람들을 모으실 것이고, 그들을 시온 산에서 영원히 다스리실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제 바벨론으로 가게 될 것이고, 하느님은 그들을 그곳에서 원수들로부터 구원하실 것이다. 많은 민족들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대적하고 있으나 하느님이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그들을 짓밟게 할 것이다.
    -기독교적 해석: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 때에 세상에서 고통 당하던 성도들은 구원받아 천국에 가게 될 것이다. 성도들은 세상에서 고통당하나 결국 구원받을 것이고, 재림의 때에 세상은 심판을 받을 것이다.

    4장 14절-5장(5장) : 베들레헴으로부터 이스라엘을 다스릴 자가 나올 것이고 그의 근본은 상고에, 영원에 있는데, 그는 앗시리아를 무찌를 것이다. 남은 이스라엘 백성들은 여러 민족들 가운데에 있을 것이고, 원수들을 향하여 강력한 힘을 발휘할 것이다. 그 날에 앗시리아는 멸망할 것이고, 우상들은 사라질 것이며, 하느님께 복종하지 않는 민족들은 심판을 받을 것이다.

    -기독교적 해석 : 예수 그리스도께서 마귀들을 무찌르기 위하여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실 것이고, 각 나라에 있는 구원 받은 성도들은 마귀들을 향하여 강력한 힘을 발휘할 것이다. 재림의 날에는 모든 마귀들과 죄인들이 심판을 받을 것이다.

    6장 : 이스라엘을 이방 민족으로부터 구하신 하느님의 은혜에도 불구하고 싯딤에서 길갈에 이르기까지 악을 행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느님의 공의로운 심판이 있었던 것처럼, 악을 행하는 자들에게는 심판이 있을 것이고, 하느님이 사람들에게 원하시는 것은 제사가 아니라 정의를 행하고 사람들을 사랑하며 겸손히 하느님과 동행하는 것이다.

    7장 1-17절 : 미가 선지자는 죄로 심각하게 타락한 이스라엘의 상황 속에서도 하느님이 결국 자신을 빛으로 이끄실 것이라는 소망을 가지며, 원수는 세력이 커지다가 결국 죄로 인해 심판을 받을 것이라고 예언한다.

    -기독교적 해석 : 성도들은 세상에서 핍박을 당하더라도 결국 구원을 받아 천국에 들어가게 될 것이고, 세상은 마귀의 지배 아래에서 점점 악해지다가 죄로 인해 심판을 받게 될 것이다.

    7장 18-20절 : 죄악을 용서하시고 긍휼을 베푸시는 하느님에 대한 찬양








    죄의 근본(레쉬트 핱타트. רֵאשִׁית חַטָּאת)

    7225
    רֵאשִׁית 스트롱번호7225
    1. 처음
    2. 이전의 상태
    3. 처음 것
    발음 / 레쉬트(rêʼshîyth)
    어원  / 7218과 동형에서 유래
    관련 성경 / 태초(창1:1), 시작(창49:3, 욥8:7, 전7:8), 처음(출23:19, 느10:38, 겔48:14), 첫(레23:10, 겔20:40), 으뜸(민24:20, 욥40:19, 렘49:35),장자(신21:17), 맏물(신26:2,10), 가장(삼상2:29, 15:21), 근본(시111:10, 잠1:7, 미1:13), 제일(잠4:7).
    구약 성경 / 51회 사용



    2403
    חַטָּאָת 스트롱번호2403
    1. 죄
    2. 우상에 대해 적용되기도 함
    3. 속죄제
    발음 / 하타트[ chaṭṭâʼth ]
    어원 / 2398에서 유래
    관련 성경 / 죄(창 4:7, 레4:3, 대하6:25), 죄악(창18: 20,사5:18), 속죄제(출29:14, 민15:27, 왕하12:16), 속죄 제물(레4:32, 민8:8, 대하29:23), 속죄 희생(레4:25), 허물(레5:6), 잘못(레5:10,11), 속죄(레10:19, 민8:7), 속건제(레7:7), 번제(레4:29), 죄악(시32:5, 애4:6), 죄인(잠5:22,13:6), 벌(슥14:19). [동] 범죄하다(느1:6, 욥35:3).
    구약 성경 / 221회 사용


    라기스 거민아 너는 준마에 병거를 메울지어다
    - '라기스'(라키쉬)는 '준마'(라레케쉬)와 운율을 이룬다. 라기스는 병거로 무장한 성읍이며, 그곳 거민들은 전쟁에 능한 자들이었다. 그들은 앗수르의 침략소식을 듣고 전쟁을 치를 준비를 갖추어야 한다. 그러나 그 결과는 파멸이다. 그들은 준비를 타고 도망을 치게 될 것이다.

    라기스는...네게서 보였음이니라
    - 본 구절은 라기스가 멸망당하는 이유를 나타낸다. 딸 시온, 곧 이스라엘이 범한 죄의 근원이 라기스에서 왔기 때문이다. 혹자는 그 죄악이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말과 병거를 의지한 것을 가리킨다고 주장하나 라기스를 통해서 우상들이 이스라엘에 유입된 것으로 보는 것이 더 타당하다(5-9절, Lange,Smith).



    미가서 1장은 사마리아와 유다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을 말씀합니다.
    유다 출신의 선지자 미가가 이스라엘의 남북 왕조의 수도인 예루살렘과 사마리아를 중심으로 하나님의 심판과 회복에 대해 예언합니다.
    미가 선지자의 주된 메시지는 이스라엘 두 왕국 전체에 만연해 있던 부패와 타락의 근본 원인이 하나님을 떠나 우상 숭배를 행했기 때문이라고 강조합니다.
    이러한 메시지를 부각시키기 위해 백성들의 죄악으로 인해 하나님의 심판이 진행될 것을 예언하는 것(1-7절)
    심판에 대한 선지자 자신의 반응을 보여 주는 것(8-9절)
    백성들을 향한 경고를 예언하는 것(10-16절)

    하나님의 백성인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법도에서 벗어나서 죄악의 길에 빠져 있을 때 하나님은 그들을 돌이키시려는 일을 하십니다.
    하나님은 그의 백성들에게 심판과 멸망을 선포하시며 죄악을 지적하십니다.
    이것은 확정된 멸망의 선언 이 아니라 돌아오기를 바라시는 하나님의 사랑의 또 다른 표현입니다.
    선지자들을 통해서 간절히 바라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보여 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악을 용납하실 수 없기에 그의 백성들이 악에서 떠나 자기에게로 돌아오기를 바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가장 미워하시는 죄는 '우상 숭배'입니다.
    그래서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율법을 주실 때에도 제일 먼저 강조한 것이 바로 '내 앞에서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는 것이었습니다.

    우상 숭배는 만물의 유일한 창조주이며 주관자이신 하나님을 부정하는 행위와 같습니다.
    특히 당시 각종 우상 숭배가 성행하고 있던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는 이스라엘에게 우상 숭배에 관한 경고는 가장 절실하고 중요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가나안의 모든 거민들을 완전히 멸하라고 명령하신 것도 이스라엘이 가나안의 종교적 문화에 물드는 것을 염려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은 오히려 가나안의 전통적인 우상 숭배에 빠져 버렸고 그 결과 하나님의 징계를 언제나 받았습니다.
    특히 번성하던 통일 이스라엘이 급격히 몰락하기 시작한 것도 솔로몬으로부터 시작된 각종 우상 숭배로 인한 것이었습니다.
    본장에서 뿐만 아니라 모든 소선지서에 나타난 선지자들의 메시지를 통하여 끊임없이 선포된 것도 바로 우상 숭배를 폐하고 하나님께로 돌아오라는 것이었다.
    본문에 소개되고 있는 사마리아의 죄악도 바로 우상 숭배였고 예루살렘도 마찬가지였다.
    이 사실은 하나님을 떠난 것이 바로 우상 숭배라는 사실을 보여 준다.
    특히 우상 숭배는 신약에 넘어와서는 '두 마음을 품은 것'으로도 설명하고 있는데, 인간도 두 마음을 싫어하듯이 하나님은 더욱 그러하신 것이다.  


    성도들에게 있어 하나님은 중요한 존재가 아니라 유일한 존재가 되어야 합니다.
    성도들의 삶 속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은 하나님의 뜻과 힘에 의지해서 헤쳐 나가야 한다는 뜻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성도들은 자신의 판단에 따라 쉬운 일은 자신의 힘과 지혜로 만들어 나가고 좀 어렵다고 판단되는 일만 하나님께 맡기려고 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분명 잘못된 태도라고 하겠습니다.
    왜냐하면 세상의 어떤 일이라도 하나님의 도우심이 없이 이루어지는 것은 없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우상을 숭배하다가 멸망하였듯이 오늘날 세상의 물질이나 권력에 자신의 인생을 의지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세상의 어떤 것에도 결코 눈을 돌리지 말고 오직 하나님 앞에 자신의 모든 것을 맡기고 하나님만을 의지하는 삶을 살아야 할 것입니다.  


    미가라는 이름의 뜻은 “여호와와 같은 이가 누군가?” 라고 합니다.
    미가 선지자는 유다왕 ‘요담, 아하스, 히스기야’ 시대에 활동하였는데, 이 시기는 이스라엘이 남과 북으로 나눠진 후 약 200년쯤 지난 격동의 시기였습니다.
    번성하던 북이스라엘은 앗수르의 침공으로 결국 망하게 되었고, 자신들에게는 절대 문제가 없다던 남유다도, 주변 강대국들의 소용돌이에 휩싸이고 말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런 시기에 미가를 선택하셔서, 사마리아와 예루살렘에게 회개를 선포하게 하셨으며, 그와 동시대에 활동하던 선지자로는 ‘이사야, 아모스, 호세아’가 있었습니다.



    (1) 유다의 왕들 요담과 아하스와 히스기야 시대에 모레셋 사람 미가에게 임한 여호와의 말씀 곧 사마리아와 예루살렘에 관한 묵시라

    하나님의 임재(1-3절)
    1절을 보면, “모레셋 사람 미가에게 임한 여호와의 말씀”이라고 합니다. 미가는 모레셋 출신의 선지자라고 하는데, 이 모레셋은 예루살렘에서 서남쪽 34km에 위치한 작은 농업마을입니다. 이곳에 부패하고 타락한 예루살렘의 부자들이 와서, 부당한 방법으로 소산물을 착취하거나 땅을 빼앗기도 하였습니다. 그래서 예루살렘 사람들의 입장에서는 모레셋은 힘도 없고 보잘 것 없는 마을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마을에서 선지자가 와서 말씀을 전하는데, 그 말씀을 제대로 귀담아 들었겠습니까? 우리도 외적으로, 편견과 고정관념이 있습니다. 전에 사역하던 교회에서 머리를 노랗게 물들고, 피어싱을 한 청년이 있었습니다. 그 청년에게 어느 성도님이 “청년! 어떻게 인생을 사려고 그래. 그렇게 해서 직장이나 제대로 다니겠어. 대체 학교는 다니긴 하는 거야?”라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그 청년이 “저 서울대 경제학과 다니는데요.” 라고 말하자, 순간 정적이 흐르며, “아~ 어쩐지, 창의성이 있게 보이더라”고 말하며, 그 분은 황급히 자리를 피하셨습니다. 이건 단적인 예지만, 우리는 평소 외적으로 모든 것을 판단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과연 저 사람이 가능할까? 과연 저 상황에서 가능할까?”라고 편견을 갖습니다. 사람은 한계가 있지만 하나님이 임재하시면 가능합니다. 보잘 것 없는 모레셋 출신의 미가에게 여호와의 말씀이 임했을 때, 심판과 회개에 대해 선포하며, 결국 훗날 5:2에서 소망의 예수님이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실 것이라는 희망을 선포하게 됩니다. “베들레헴 에브라다야 너는 유다 족속 중에 작을지라도 이스라엘을 다스릴 자가 네게서 내게로 나올 것이라 그의 근본은 상고에, 영원에 있느니라”

    하나님은 상황과 환경을 초월하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께서 작정하시면 약함으로 심고 강함으로 일어나게 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래서 마19:26에서도 “예수께서 그들을 보시며 이르시되 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나 하나님으로서는 다 하실 수 있느니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말씀, 그 임재가 임하면, 주로 땔감으로 사용하는 조각목(아카시아 나무)이 십계명을 담는 법궤로 사용되게 됩니다. 하나님의 임재가 임하면, 극렬한 죽음의 상징이어서, 쳐다보기도 싫었던 십자가를, 부활과 소망의 상징으로 변화되게 합니다. 하나님의 임재가 임하면, 걱정과 두려움도 사라집니다. 삼상16:13에서 사무엘이 다윗에게 기름을 부을 때, 다윗이 여호와의 영에게 크게 감동되었다고 합니다. 이때 “크게 감동되다”라는 원어적 의미는 마치 ‘큰 태풍이 휘몰아쳐 와서 모든 것을 갈아엎는 것’을 말합니다. 성령께서 다윗에서 임하셨을 때, 혹여나 그가 갖고 있는 두려움과 근심을 몰아쳐주시고, 갈아 엎어주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담대함을 갖게 하셔서, 결국 골리앗과 맞서 싸울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임재는 오늘 우리들에게도 임하십니다. 나약하고 힘든 상황일수도 있지만, 그 하나님의 영이 임하면, 우리의 약함을 강하게 하시고, 우리가 가진 두려움과 걱정을 평안으로 만드실 것입니다. 그리고 그 주님의 영이 소망의 길로 인도하실 것입니다.

    (4-7) 그 아래에서 산들이 녹고 골짜기들이 갈라지기를 불 앞의 밀초 같고 비탈로 쏟아지는 물 같을 것이니 이는 다 야곱의 허물로 말미암음이요 이스라엘 족속의 죄로 말미암음이라 야곱의 허물이 무엇이냐 사마리아가 아니냐 유다의 산당이 무엇이냐 예루살렘이 아니냐 이러므로 내가 사마리아를 들의 무더기 같게 하고 포도 심을 동산 같게 하며 또 그 돌들을 골짜기에 쏟아 내리고 그 기초를 드러내며 그 새긴 우상들은 다 부서지고 그 음행의 값은 다 불살라지며 내가 그 목상들을 다 깨뜨리리니 그가 기생의 값으로 모았은즉 그것이 기생의 값으로 돌아가리라

    말씀을 품는 자(4-7절)
    미가에게 여호와의 말씀이 임하신 이유가 무엇이었을까요? 바로 이스라엘의 범죄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의 심판은 산들을 녹이고 골짜기들을 갈라지게 할 정도의 큰 형벌이었습니다. ‘우상 숭배, 음행, 이웃에 행악을 저지르며 공의와 정의를 어지럽히는 죄악’을 저질렀습니다. 5절에 “이는 다 야곱의 허물과 이스라엘 족속의 죄 때문”이라고 합니다. 집에 쓰레기가 있으면, 그 쓰레기를 치워야 합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은 허물과 죄들이 난잡하게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들을 방관하고, 치우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허물과 죄를 더 많이 만들어 냈습니다. 그 이유는 5절과 7절에 설명되었듯이, 이들은 하나님을 버리고, 우상숭배를 자행했습니다. 우상숭배의 본질은 결국 교만입니다. 교만은 삼상15:23에 “왕이 여호와의 말씀을 버렸으므로”라고 말합니다. ‘말씀을 버린 것,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필요가 없는 것’이 바로 <교만>입니다. 미가를 비롯한 선지자들이 줄기차게 이스라엘의 죄에 대해 외치는 것이 무엇입니까? 예레미야도 이스라엘 백성들이 ‘생수의 강’이신 하나님을 버렸다고 합니다.(렘2:13) 심판이 오는 상황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먼저 구해야 할 것은, 다름 아닌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이 아닌, 거짓 선지자들의 허탄한 가르침에만 귀를 기울여 패망을 자초했습니다.
    싱크홀 현상이 있습니다. 이는 도심이든 자연이든 땅이 갑자기 붕괴되는 것입니다. 갑자기 땅이 무너져 그 위에 있는 사람과 건물 등이 주저앉아 심각한 사고를 유발합니다. 그런데 이 싱크홀의 원인은 무엇입니까? 다름 아닌, 그 지반에 있어야 할 지하수가 사라졌기 때문입니다. 그 물이 사라지니, 그 주변의 지탱하던 토양들이 소실되면서, 결국 가라앉는 현상이라고 합니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삶에서도 영적인 싱크홀을 조심해야 합니다. 내가 신앙인의 모습으로 살고 있다고는 하지만, 우리 마음에, 우리를 지탱하는 하나님의 말씀이 사라진다면, 우리의 영적인 부분도 붕괴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미가를 선택하셔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말씀을 대언하게 하셨듯이, 우리에게도 여호와의 말씀이 임한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헛되이 살지 말고 주님이 우리에게 주신 사명들을 생각하며 책임감 있게 살아가야 합니다.

    (8-15) 이러므로 내가 애통하며 애곡하고 벌거벗은 몸으로 행하며 들개 같이 애곡하고 타조 같이 애통하리니 이는 그 상처는 고칠 수 없고 그것이 유다까지도 이르고 내 백성의 성문 곧 예루살렘에도 미쳤음이니라 가드에 알리지 말며 도무지 울지 말지어다 내가 베들레아브라에서 티끌에 굴렀도다 사빌 주민아 너는 벗은 몸에 수치를 무릅쓰고 나갈지어다 사아난 주민은 나오지 못하고 벧에셀이 애곡하여 너희에게 의지할 곳이 없게 하리라 마롯 주민이 근심 중에 복을 바라니 이는 재앙이 여호와께로 말미암아 예루살렘 성문에 임함이니라 라기스 주민아 너는 준마에 병거를 메울지어다 라기스는 딸 시온의 죄의 근본이니 이는 이스라엘의 허물이 네게서 보였음이니라 이러므로 너는 가드모레셋에 작별하는 예물을 줄지어다 악십의 집들이 이스라엘 왕들을 속이리라 마레사 주민아 내가 장차 너를 소유할 자로 네게 이르게 하리니 이스라엘의 영광이 아둘람까지 이를 것이라

    앗수르보다 이스라엘을(8-16절)
    8~9절에 미가는 ‘들개같이 애곡하고 타조같이 애통하겠다’고 합니다. 사마리아와 예루살렘 앞에 놓인 운명을 바라보고 처량하게 애통해하는 모습을 상징적으로 표현했습니다. 미가가 그렇게 애통했던 이유는 하나님의 심판을 초래하는 사마리아의 죄가 더 이상 치유될 가능성조차 없으며, 사마리아의 문제가 예루살렘까지 전염될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히스기야 제14년에 앗수르의 산헤립 왕은 대군을 이끌고 남유다를 침공하여 순식간에 무려 46개의 성읍을 함락하고 마지막 남은 예루살렘마저 함락시키기 위해 포위하였습니다. 10~15절에 나온 성읍들이 바로 이때 앗수르에 함락된 성읍들입니다. 이 성읍들은 원래 이스라엘 백성들이 약속의 기업으로 받은 곳입니다. 거기서 기쁨과 자유를 누리며 살아가게 하셨지만, 12절에 ‘재앙이 여호와께로 말미암아 예루살렘 성문에 임함이니라’고 말씀하듯이, 원래의 아름다운 의미와 반대되는 부정적인 의미를 통하여, 삶의 자리가 재앙으로 가득한 저주로 변하게 될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본문에서는 침공한 앗수르에 대해서는 다루지 않습니다. 이는 앗수르가 문제라고 생각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당시 처절한 형벌과 황폐함의 결과는 바로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하나님에서 떠난 이스라엘 백성이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일반적으로 문제가 생길 때, 그 문제를 없애달라는 기도를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방법은 다릅니다. 하나님은 그 문제를 없애거나 기도의 내용을 먼저 들어주시는 것이 아니라, ‘문제가 없어질 수 있는 환경, 기도의 내용(본질)이 응답 될 수 있는 환경’을 먼저 만드십니다. 사사기 6장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미디안과 아말렉과 동방 사람들’로 인해 고통을 받았습니다. 이때 이들은 대적 미디안 등을 물리치는 강한 용사를 달라고 부르짖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응답하신 것은 강한 기드온과 같은 사사가 아니라, 이름 없는 선지자를 보내셨습니다. 참으로 황당한 상황입니다. 기도응답이 잘 못되었을까요? 아닙니다. 하나님은 그들이 미디안의 압제에서 벗어나기 위해, 그 바탕(환경)을 먼저 만드신 것입니다. 왜 우리에게 이런 어려움이 생겼는지, 근본적인 것을 깨닫게 하신 것입니다. 결국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버린 잘못을 깨닫게 하시고, 돌이킨 후에 보내주신 것은, 그들의 기도 응답인 기드온입니다. 천지창조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은 내용을 먼저 만드신 것이 아닙니다. 첫째 날부터 넷째 날까지 ‘빛, 하늘, 산, 바다, 식물, 해, 달, 별’을 먼저 만드셨습니다. 생명이 살아갈 환경을 먼저 만드신 것입니다. 그리고 5-6일째, 거기서 살아갈 ‘새, 물고기, 동물, 사람’을 만드셨습니다. 기도의 내용보다 그 기도가 들어주는 바탕(환경)을 먼저 만드시는 것이 하나님의 법칙입니다. 그래서 우리도 기도를 할 때, 그 내용에 대해서만 기도하기 보다는, 그 기도가 이루어질 수 있는, 바탕(환경)이 먼저 조성될 수 있도록 간구해야 합니다. 그것이 우선순위며, 그럴 때 주님은 역사하십니다. 그래서 오늘 하루도 내게 임하신 하나님의 임재에 감사하며, 그 말씀을 품고 주님의 죽으심이 헛되지 않게 살아가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