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 누가복음



11월 8일(토) 누가복음 4-6장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얼마 동안 떠나니라(4:13)

마귀가 모든 시험을 다 한 후에 얼마 동안 떠나니라.
When the devil had finished all this tempting, he left him until an opportune time.

얼마 동안 떠나니라

(13) 마귀가 모든 시험을 다 한 후에 얼마 동안 떠나니라

 

누가복음 4:13에 보면, “마귀가 모든 시험을 다한 후에 얼마동안 떠나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 말을 영어로 풀이하면 “When the devil had finished every test, he departed from him until an opportune time”이 되겠습니다. 얼마동안이라도 번역된 이 단어의 헬라어는 단순하게 “αχρι καιρού”입니다. 즉, until [opportune] time이 되는 것입니다. opportune 이란 말은 ‘기회가 좋은, 형편이 좋은, 적절한’이란 말입니다. 그러니까 마귀는 예수님에 대한 시험을 일단락하고 다시 적절한 때에 다시 오기 위해 떠났다는 의미가 됩니다. 누가가 이 말을 기록하면서 매우 주의깊에 이 단어를 쓴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럼 언제 적절한 때가 될까요? 바로 누가복음 22:3입니다. “열둘 중의 하나인 가룟인이라 부르는 유다에게 사탄이 들어가니” 많은 분들은 유다에게 대한 부정적인 이미지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사탄의 꼬임을 받아 유다가 예수님을 판 것이라고 단정합니다. 그런데 이 본문을 잘 살펴보면 누가의 의도는 그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시험했던 그 마귀가 다시 예수님을 시험하기 위해 이번에는 유다를 시험하고 있다고 합니다. 다시 말해 유다에게 먼저 들어가서 유다로 하여금 그 일을 하게 한다는 말입니다.

우선 여기서 우리가 생각을 해야 하는 것은 사탄에게 시험을 받는다는 것 자체로 인해 사탄의 시험받은 사람을 나쁘게 보아서는 안된다는 말입니다. 사탄이 들어간 유다! 물론 이 말은 단순히 시험을 당한 이란 말보다 공격적입니다. 사탄은 감히 예수님안으로 들어가지는 못했는데, 유다에게는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사탄의 시험을 받으신 주님이 아무런 문제가 없듯이 유다도 어떤 나쁜 이미지로 변모할 이유가 전혀 없는 대목입니다.

게다가 누가는 유다를 언급하여 “열둘 중의 하나”라고 적었습니다. 이 말은 열 두명의 사도중의 한 명이 바로 유다이며 그는 여전히 열둘중의 한 명이라는 의미입니다. 그가 사탄의 시험을 당했지만 열두 사도의 의심할 수 없는 명단안에 있습니다.

그리고 유대인들의 사고중에 사단은 자기 마음대로 일을 꾸미는 존재가 아닙니다. 사탄도 하나님의 수중에 있으며 하나님의 뜻과 명령없이 활동할 수 없다라는 개념입니다. 그러므로 사탄이 이 일을 하는 것은 하나님의 동기부여와 주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셔야 하는 막중의 사명의 한 일무였던 것입니다. 사탄이 유다안으로 들어갔다는 말은 오히려 유다가 하고 싶어서 한 일이 아니라 사탄으로 인해 할 수 밖에 없었던 섭리가 있었음을 알리고 유다를 변호하고자 하는 누가의 기록의도를 알아차리시기를 바랍니다.





마귀는 예수님을 시험한 후에 잠시동안 떠납니다. 적당한 기회가 오면 사탄은 다시 시험을 시작합니다.

마귀는 저희도 시험합니다. 하나의 시험을 잘 통과하면 잠시동안 평온하다가 또 다른 시험을 주어 쓰러뜨리려 합니다. 

마귀의 시험은 저희의 삶의 전반에 걸쳐서 맞닥뜨립니다. 성령으로 충만할 때에나 혹은 믿음이 바닥으로 곤두박첬을 때에나 시험은 저희에게 다가와 열매를 맺지 못하도록 합니다. 

예수님이 받으신 시험을 어떻게 이기셨음을 통하여 저희의 삶에서 끊임없이 반복되는 마귀의 시험을 물리치는 방법을 배워야 합니다.

어찌보면 마귀의 시험은 달콤하며 지름길로 인도하는 것 같습니다. 자신을 경배하면 원하는 재물과 능력을 겸하여 주겠다는 마귀의 달콤한 유혹에 넘어가기 쉽습니다. 그렇지만 저희 주님의 자녀는 그런 지름길을 택해서는 결코 않됩니다.

때로는 원치않는 인고의 시간을 지날 때도 있는 그런 굴곡있는 저희 삶의 과정을 통하여 주님의 사랑을 알아가야 하며 지나고 나면 한결 성숙한 모습으로 변화됩니다

 

시험을 받는 저희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예수님께서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셨으니 저희는 오죽하겠는가요.

순간순간 마귀는 저희를 시험합니다. 과연 내가 예수님의 자녀인지를 시험합니다.

마귀는 시험을 통해서 어떻게 하든지 예수님의 자녀가 받는 구원으로부터 멀어지게 하려고 합니다.

 

1.     시험받는 요인

정욕과 교만과 탐심이 저희가 시험받는 근본적인 요소입니다.

(창3:6) 여자가 그 나무를 본즉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인지라

(요일2:15-16) 누구든지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지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안에 있지 아니하니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부터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부터 온 것이라

(엡6:12) 저희의 씨름은 혈과 육을 상대하는 것이 아니요 통치자들과 권세들과 이 어둠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을 상대함이라

저희를 힘들게 하는 시험의 근원은 악의 근원인 마귀에게 있습니다. 마귀는 교묘하게 웅크리고 숨어서 삼킬 자를 찾습니다. 악의 영향을 받은 사람을 사용하여 저희를 힘들게 합니다.

 

2.     말씀과 기도로 이겨내야 한다

생명의 말씀이시며 성령으로 충만하신 예수님은 마귀의 시험을 성경 말씀을 인용하시며 대적하셨습니다. 

저희 또한 성령과 말씀 안에 조화를 이루어 거하도록 해야 합니다.

·         Too much Word and not enough Spirit: you puff up in the sense of pride

·         Too much Spirit and not enough Word: you blow up

·         With the Word and the Spirit together: you grow up

 

말씀의 능력:

저희에게 성령의 전신 갑주 중에 유일한 무기인 성령의 검인 말씀을 주셨습니다.

(히4:12)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활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판단하나니

하나님의 말씀의 능력이 임하게 되면 시험이 임했을 때에 능히 이겨내게 합니다.

주의 말씀의 능력을 믿습니까?

주님 말씀의 능력은 저의 영혼육에 임합니다. 주님 말씀의 능력이 저희에게 임하면 영혼 깊숙한 곳에 자리 잡고 있는 추악하고 더러운 죄성을 도려냅니다. 병으로 앓고 있다면 말씀의 능력이 환부를 도려낼 것입니다. 말씀은 저희의 영혼육의 연약함을 드러내어 환부를 도려냅니다. 

주님의 말씀인 성경을 늘 가까이하세요. 주의 말씀의 능력을 선포하세요. 왜 한 입에서 저주의 말을 하십니까? 

주님의 자녀인 저희의 입에서는 복된 주님의 말씀이 선포됨이 마땅합니다. 말씀에 무지한 자가 아니라 유식한 자가 되세요.


기도에 게을리해서는 않됩니다.

(마26:41)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기도하라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

기도를 방해하는 것이 세상에는 너무나 많이 저희 주변에 널려 있어 기도를 방해합니다. 기도하고자 하는 마음에 세상으로 유혹하는 생각이 스멀스멀 들어옵니다. 세상의 유혹을 이겨내어 성령안에서 드리는 기도는 하나님의 뜻을 구하게 되어 드려진 기도의 응답이 이루어집니다.


3.     감당할 시험

(고전10:13) 사람이 감당할 시험 밖에는 너희가 당한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하지 못할 시험당함을 허락하지 아니하시고 시험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

욥은 이해할 수 없는 고난을 겪었습니다. 하지만 욥의 믿음의 깊이를 아시는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범위내에서 욥은 시험을 받았습니다. 만일 저희에게 욥이 겪은 시험이 임하면 견디어 낼 자가 아마도 없을 것입니다.

저희의 육신은 연약하여 유혹이 있거나 어려운 일을 닥치면 전전긍긍하며 시험에 들기도 합니다. 하지만 저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은 제가 감당할 만하여 시험을 허락하십니다. 만일 저희가 통과할 수 없는 시험이면 결단코 저희에게 오지 못하도록 막으십니다.

저희의 연약함을 잘 아시는 하나님께서는 저희에게 욥이 겪은 극단적인 시험을 결단코 허락하지 않으십니다.

 

(약1:2) 내 형제들아 너희가 여러 가지 시험을 당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

시험을 만나면 아 하나님께서 나를 이만큼 인정하셔서 이런 시험을 주시는가 하며 기뻐하라고 말씀합니다.

 

예수님께서 광야에서 시험을 견디어 내셨습니다. 시험을 이기신 예수님께서 저희 안에 내주하십니다. 제가 시험을 겪을 때마다 주님은 저에게 용기를 주시며 피할 길을 내사 능히 시험에서 승리하도록 인도하십니다.

마귀의 속삭임에 넘어가면 어려운 시험의 과정을 통과해야 하며 먼 길을 돌아가야 합니다.

연약한 저희를 잘 아시는 예수님은 저희를 마귀로부터 지켜주시고 털끝 하나도 다치지 않도록 인도하시며 지켜주십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저희를 지켜주고 계십니다. 아멘.

 

4.     시험의 근원인 마귀를 대적하라

예수님을 손대지 못한 마귀

마귀는 예수님을 성전 꼭대기에 세웠지만 밀어서 떨어뜨릴 수 없었습니다. 거기까지가 마귀의 능력의 한계입니다. 마귀는 그럴듯한 의견을 내세우며 저희를 유혹하며 시험합니다. 이를 취할지는 저희 몫이며 선택입니다. 저희를 힘들게 하는 마귀를 대적해야 합니다. 저희가 결단하고 대적하면 마귀는 피해서 물러갑니다.

(약4:7) 너희는 하나님께 복종할지어다 마귀를 대적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피하리라 

(벧전5:8)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찿나니


마귀를 대적할 수 있도록 예수님의 저희에게 예수님의 이름을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저희에게 권세를 주셨습니다. 곧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의 권세를 주셨습니다.

모든 만물에 있는 존재들이 예수님의 이름 앞에 무릎을 꿇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에는 능력과 권세가 있으며, 이름의 능력과 권세를 사용할 수 있는 권한을 주님을 믿는 자녀에게 주셨습니다.

저희가 주님 안에 거하면 주님의 이름으로 간구하며 선포하는 것이 이루어 집니다. 내 앞을 가로막는 마귀의 시험도 주님의 이름의 능력 앞에서는 아무 쓸모없는 무용지물이 되어 흩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막16:17-18) 믿는 자들에게는 이런 표적이 따르리니 곧 그들이 내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새 방언을 말하며 뱀을 집어올리며 무슨 독을 마실지라도 해를 받지 아니하며 병든 사람에게 손을 얹은즉 나으리라 하시더라

마음껏 주님의 이름의 능력을 의지하며 선포하세요. 내 앞을 가로막는 마귀의 시험을 능히 이기세요. 

 

5.     돕는 은혜를 받으려면 

(히2:18) 그가 시험을 받아 고난을 당하셨은즉 시험받는 자들을 능히 도우실 수 있느니라

(히4:15) 모든 일에 저희와 똑같이 시험을 받으신 이로되 죄는 없으시니라 그러므로 저희는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받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라.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은혜를 받기를 원한다면 저희는 은혜의 보좌 앞에 나아가야 합니다.  

어떻게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하게 나아갈 수 있을까요? 성령 안에서 말씀과 기도와 예배입니다.

·        말씀을 늘 가까이 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언약과 명령이 새겨져 있습니다.

말씀을 대하기 전에 성령의 도우심을 구하세요. 성령님은 깊이 감추어진 말씀의 세계로 인도하십니다. 

·        육신적으로 드리는 기도가 아니라 영적인 기도, 내 안에 계시는 성령님과의 영적인 소통을 하는 기도를 통해서 저희의 영은 은혜의 보좌 앞에 나아갑니다. 성령님께서는 저희의 영을 주님의 보좌 앞으로 인도할 것입니다.

·        하나님의 보좌로부터 흘러내려 오는 은혜를 받아 예배를 회복하고 영성을 회복하세요. 예배를 통하여 주님의 자녀가 이 땅에서 살아가는 원동력을 얻게 됩니다.

시험을 받는 저희를 하나님 아버지께서 품어 안으시며 지켜주시며 은혜를 베푸십니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

주님께서 이 땅에 오신 하나님의 뜻을 이루시기 위하여 사역을 시작하며 마귀로부터 시험을 받으셨습니다. 마귀는 저희 역시 많은 시험을 주었으며 앞으로도 또 다른 시험을 저희에게 줄 것입니다.

주님은 저희에게 마귀를 대적하여 시험을 이기라고 가르쳐주셨습니다. 주님 안에 거하는 자에게는 주님의 이름의 능력과 권세를 주셔서 표적과 기사가 이루어지게 하섰습니다.

주님 저희를 도와주소서. 시험을 잘 통과하여 주님의 기쁨이 되게 하옵소서. 말씀과 기도와 예배를 통하여 저희를 돕는 하나님의 은혜의 보좌 앞에 나아가기를 원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11월 7일(금) 누가복음 1-3장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요셉의 아들(3:23)

예수께서 가르치심을 시작할 때에 삼십세쯤 되시니라 사람들의 아는대로는 요셉의 아들이니 요셉의 이상은 헬리요.
Now Jesus himself was about thirty years old when he began his ministry. He was the son, so it was thought, of Joseph, the son of Heli,

예수님의 족보가 소개된 마태복음 1장과 누가복음 3장은 그 시작부터가 다릅니다.
마태복음의 족보는 ㄴ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에 기록된 예수님의 족보가 서로 다른 이유는 무엇인가?

답변

예수님의 족보는 성경의 두 곳, 즉 마태복음 1장과 누가복음 3장 23-38절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마태는 예수님으로부터 아브라함까지 계보를 추적합니다. 누가는 예수님으로부터 아담까지 계보를 추적합니다. 하지만 마태와 누가가 완전히 다른 족보를 추적하고 있다고 믿을만한 이유가 있습니다. 예를 들어, 마태는 요셉의 아버지를 야곱(마 1:16)이라고 기록한 반면, 누가는 요셉의 아버지를 헬리(눅 3:23)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마태는 다윗의 아들 솔로몬(마 1:6)의 계열을 따라 추적하지만, 누가는 다윗의 아들 나단(눅 3:31)의 계열을 따라 추적하고 있습니다. 사실, 다윗과 예수님 사이에서 각 족보가 공통으로 서술하는 이름들은 스알디엘과 스룹바벨 뿐입니다(마 1:26; 눅 3:27).

어떤 사람들은 이러한 차이점을 성경의 오류라고 지적합니다. 하지만 유대인들은 꼼꼼한 기록 관리자들이었으며, 특히 계보와 관련해서는 더욱 세심하였습니다. 마태와 누가가 동일한 혈통에 대해 완전하게 서로 모순되는 족보를 세울 수 있다는 것은 상상조차 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분명히 다윗으로부터 예수님까지 이어지는 계보는 각각 완전히 다릅니다. 심지어 스알디엘과 스룹바벨에 대한 언급조차도 동명이인에 대한 언급일 수 있습니다. 마태는 스알디엘의 아버지를 여고냐라고 언급하는 반면 누가는 스알디엘의 아버지를 네리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스알디엘이라는 이름을 가진 한 남자가 자기 아들의 이름을 스룹바벨이라고 짓는 것은 그런 이름을 가진 자들 중에 유명한 사람들이 많은 것을 고려할 때 일반적인 것입니다(에스라와 느헤미야를 읽어 보십시오).

이에 대해 교회 역사가 유세비우스가 제시한 한 가지 설명은 마태가 장자 또는 생물학적 계보를 추적하는 반면 누가는 "수혼 결혼"의 경우들을 고려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만일 한 남자가 아들을 갖지 못하고 죽으면 그 남자의 형제가 그 과부와 결혼하여 죽은 사람의 이름을 이어받을 아들을 갖게 하는 것이 전통이었습니다. 유세비우스의 이론에 따르면, 멜기(눅 3:24)와 맛단(마 1:15)은 똑같은 여인(전통에 따르면 그녀의 이름은 ‘에스다’임)에게 다른 시기에 결혼했습니다. 이에 헬리(눅 3:23)와 야곱(마 1:15)은 이부 형제가 되었을 것입니다. 그 후 헬리는 아들이 없이 죽었고, 이에 그의 이부 형제 야곱이 과부가 된 헬리의 아내와 결혼하여 요셉을 낳았습니다. 따라서 요셉은 합법적으로는 ‘헬리의 아들’이지만 생물학적으로는 ‘야곱의 아들’이 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마태와 누가는 모두 요셉의 동일한 계보를 기록하고 있지만 누가는 법적인 계보를 따르고 마태는 생물학적인 계보를 따릅니다.

오늘날 보수적인 성서 학자들은 누가는 마리아의 계보를 기록하고 있고 마태는 요셉의 계보를 기록하고 있다는 다른 견해를 취하고 있습니다. 이 견해에 따르면, 마태는 다윗의 아들 솔로몬을 통해 요셉(예수님의 합법적인 아버지)의 계보를 따라가며 누가는 다윗의 아들 나단을 통해 마리아(예수님과 혈연 관계)의 계보를 따라갑니다. 요셉은 헬리의 딸 마리아와 결혼하면서 헬리의 사위가 되었지만 헬라어에는 ‘사위’에 해당하는 단어가 없기 때문에 "헬리의 아들"로 불립니다. 아무튼 마리아의 계통을 따르든지 또는 요셉의 계통을 따르든지 예수님은 다윗의 후손이기 때문에 메시야가 되실 자격이 있습니다. 모계 쪽으로 족보를 추적하는 것은 드문 일이지만 처녀 마리아를 통한 탄생은 더욱 그러합니다. 누가의 설명은 예수님은 요셉의 아들이었고 사람들도 ‘그렇게 알고 있었다’는 것입니다(눅 3:23).



1. 성경에 기록된 두 족보

예수님의 족보는 신약성경 두 곳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 마태복음 1장 1~17절: 예수님을 다윗의 왕권과 연결합니다.
  • 누가복음 3장 23~38절: 예수님을 아담과 연결하여 인류 전체의 구원자로 소개합니다.

두 족보는 다소 차이가 있으며, 이는 각각의 기록 목적과 초점에 따라 차이가 발생합니다.


2. 마태복음의 족보: 왕권과 메시아 예언의 성취

1) 족보의 시작

마태복음은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계보라” (마태복음 1:1)라는 선언으로 시작합니다. 이는 유대인 독자들을 대상으로 예수님이 메시아임을 증명하기 위한 의도를 담고 있죠.

2) 특징

  • 아브라함부터 시작: 유대 민족의 조상인 아브라함부터 예수님까지의 계보를 기록합니다.
  • 다윗을 강조: 다윗 왕조와 메시아 예언의 연결을 명확히 보여줍니다.
  • 14대씩 구분: 족보를 세 부분으로 나누어 아브라함부터 다윗, 다윗부터 바빌론 유수, 바빌론 유수부터 예수님까지로 구분합니다.

3) 신학적 메시지

마태복음의 족보는 예수님이 왕으로 오신 메시아임을 보여줍니다. 다윗 왕조의 계승자라는 점은 유대인들에게 메시아의 자격을 증명하는 핵심 요소였죠.


3. 누가복음의 족보: 인간성과 신성을 연결

1) 족보의 시작

누가복음은 예수님의 세례 후 족보를 소개하며, “예수께서 가르치심을 시작할 때쯤 삼십 세쯤 되셨더라…” (누가복음 3:23)라는 구절로 시작합니다.

2) 특징

  • 아담까지 거슬러 올라감: 예수님을 아담과 연결하며, 그분이 모든 인류의 구원자임을 강조합니다.
  • 거꾸로 진행: 마태복음과 달리 누가는 예수님부터 시작하여 아담까지 올라갑니다.
  • 다윗의 다른 아들, 나단을 기록: 누가복음은 다윗의 아들 솔로몬이 아닌 나단을 통해 계보를 이어갑니다.

3) 신학적 메시지

누가복음의 족보는 예수님이 모든 인류의 대표자로 오셨음을 보여줍니다. 유대인뿐만 아니라 이방인, 모든 민족을 위한 구세주라는 메시지를 담고 있죠.


4. 왜 두 족보가 다를까?

1) 기록 목적의 차이

  • 마태복음은 유대인들에게 예수님이 메시아임을 증명하려는 목적이 있습니다.
  • 누가복음은 이방인을 포함한 모든 인류에게 예수님이 구원자임을 강조합니다.

2) 혈통과 법적 계보

  • 마태복음은 요셉의 법적 계보를 통해 예수님이 다윗 왕조의 합법적 후손임을 보여줍니다.
  • 누가복음은 마리아의 혈통을 통해 예수님의 인간적 계보를 기록한 것으로 보입니다.

3) 다윗의 두 아들

마태복음은 다윗의 아들 솔로몬을 통해 계보를 이어가고, 누가복음은 나단을 통해 이어집니다. 이는 예수님이 다윗의 혈통을 이으면서도, 왕권과 인간성을 모두 포함하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5. 예수님의 족보가 주는 신학적 의미

1) 인간성과 신성의 조화

예수님의 족보는 그분이 완전한 인간이자 완전한 하나님임을 증명합니다.

  • 아담과 연결: 예수님은 아담의 후손으로서 우리의 연약함을 이해하십니다.
  • 다윗과 연결: 예수님은 하나님의 언약을 성취하는 메시아로 오셨습니다.

2) 하나님의 섭리

족보를 통해 하나님의 계획이 세대에 걸쳐 치밀하게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습니다.

  • 아브라함, 다윗, 바빌론 유수라는 굴곡진 역사를 통해도 하나님의 구속 계획은 변함없이 이어졌습니다.
  • 예수님의 탄생은 단순한 사건이 아니라, 하나님이 약속하신 구원의 역사의 절정입니다.

3) 모든 인류를 위한 구원

누가복음의 족보가 아담으로 연결되는 것은 예수님이 유대인뿐 아니라 이방인을 포함한 모든 인류의 구원자임을 나타냅니다.


6. 우리의 삶과 연결되는 교훈

예수님의 족보는 단순히 과거의 기록이 아니라, 우리의 신앙에 중요한 메시지를 줍니다.

  • 하나님의 계획은 완벽하다: 족보의 세대들이 때로는 죄로 얼룩져 있었지만, 하나님은 이를 통해 구속의 계획을 이루셨습니다. 우리의 삶도 마찬가지입니다.
  • 우리는 하나님의 가족이다: 예수님의 족보는 단순히 혈통이 아니라, 믿음을 통해 하나님의 가족이 될 수 있음을 상징합니다.

마무리하며

예수님의 족보는 단순한 나열이 아니라, 그분의 인간성과 신성을 완벽하게 보여주는 이야기입니다.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을 비교하며, 하나님께서 세밀하게 계획하신 구원의 역사를 발견할 수 있죠.



예수님의 계보

(1) 요셉의 족보 (마태복음 1장 1-16절, 룻기 4장 18-22절, 역대상 2장 5-15절)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계보라.
아브라함 ‣ 이삭 ‣ 야곱 ‣ 유다 (다말에게서) ‣ 베레스 ‣ 헤스론 ‣ 람 ‣ 암미나답 ‣ 나손 ‣ 살몬 (=살마 / 라합에게서) ‣ 보아스 (룻에게서) ‣ 오벳 ‣ 이새 ‣ 다윗 (우리야의 아내에게서) ‣ 솔로몬 ‣ 르호보암 (남유다 1대왕) ‣ 아비야 (2대) ‣ 아사 (3대) ‣ 여호사밧 (4대) ‣ 요람 (=여호람 / 5대) ‣ 아하시야 (6대)* ‣ 요아스 (8대)* ‣ 아마샤 (9대)* ‣ 아사랴 (=웃시야 / 10대) ‣ 요담 (11대) ‣ 아하스 (12대) ‣ 히스기야 (13대) ‣ 므낫세 (14대) ‣ 아몬 (15대) ‣ 요시야 (16대) ‣ 여고냐 (=여호와긴 / 19대 / 바벨론에 포로가 됨) ‣ 스알디엘 ‣ 스룹바벨 (포로 1차 귀환 당시의 지도자 / 성전을 건축함) ‣ (생략) ‣ 아비훗 ‣ 엘리아김 ‣ 아소르 ‣ 사독 ‣ 아킴 ‣ 엘리웃 ‣ 엘르아살 ‣ 맛단 ‣ 야곱 ‣ 요셉 (마리아에게서) ‣ 그리스도라 칭하는 예수가 나시니라.

*악행을 저지른 아하시야, 요아스, 아마샤 왕은 마태복음의 족보에서 그 이름이 빠져 있다. 아하시야와 요아스 사이의 7대왕은 북이스라엘 아합 왕의 딸 아달랴로, 남유다에 우상을 들여오고 다윗의 계보를 멸망시키려는 등 악행을 저질렀다. 이 외에 생략된 이름들이 더 있다.

(2) 마리아의 족보 (누가복음 3장)

예수는 요셉의 아들 ‣ 요셉의 위로는 헬리(요셉의 장인) ‣ 그 위는 맛닷 ‣ 그 위는 레위 ‣ 그 위는 멜기 ‣ 그 위는 얀나 ‣ (중략) ‣ 그 위는 나단 ‣ 그 위는 다윗 ‣ 그 위는 이새 ‣ 그 위는 오벳 ‣ 그 위는 보아스 ‣ (중략) ‣ 그 위는 에노스 ‣ 그 위는 셋 ‣ 그 위는 아담 ‣ 그 위는 하나님

마태복음은 요셉의 혈통, 누가복음은 마리아의 혈통(마리아 대신 남편인 요셉으로 시작하고 있음)을 이야기하고 있다. 마태는 아브라함으로부터 시작하여 예수까지 시대 순으로 기록하고 있으며, 누가는 예수부터 시작하여 아담까지 시대를 거슬러 올라가며 기록하고 있다. 아브라함부터 다윗까지의 계보는 같으며, 다윗으로부터 양쪽으로 갈라진다. 요셉의 족보는 다윗왕 ‣ 솔로몬 왕(밧세바의 넷째 아들)으로 이어지는 반면, 마리아의 족보는 다윗왕 ‣ 나단(밧세바의 셋째 아들)으로 이어진다. 예수는 다윗의 자손인데 부모 양쪽 모두 다윗의 계통이다.


예수의 계보신약성경마태오의 복음서루가의 복음서에 각각 기록되어 있다.[1] 마태오의 복음서는 아브라함에서 시작하여 순서대로 나아가고, 루가의 복음서는 예수부터 거슬러 올라가 아담까지 이어진다. 아브라함부터 다윗까지의 이름 목록은 일치하여 예수의 메시아적 칭호인 '다윗의 자손'을 확증한다. 그러나 다윗 이후로는 두 족보가 크게 다르다. 마태오의 복음서는 다윗에서 요셉까지 27세대를, 루가의 복음서는 42세대를 기록하는데 두 목록은 일치하지 않는 부분이 많다. 예수의 친할아버지, 즉 요셉의 아버지에 대해서도 마태오의 복음서는 야곱이라고 하고, 루가의 복음서는 헬리라고 한다.[2]

이처럼 예수의 계보에 대한 기록이 상이하다는 점에 대해 여러 이론이 제시되었다. 아프리카누스유세비우스[3] 시작으로 한 초대 교부들은 두 족보를 모두 진실로 받아들이며 이 차이점에 대한 다양한 설명을 제시했다.[4] 대표적인 가설은 하나(주로 마태오의 복음서)는 요셉의 족보이고 다른 하나(주로 루가의 복음서)는 마리아의 족보일 수 있으며, 또는 하나는 예수의 관습적인 법적 족보이고 다른 하나는 생물학적 혈통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해석은 또한 예수가 마리아에게서만 태어난 동정녀 탄생에 대한 복음서의 기록과도 일치하며, 요셉은 단지 법적 양아버지로 간주되었음을 보여준다. 이 때 요셉과 마리아 모두 다윗의 후손으로 여겨진다. 또한 요셉과 같이 한 사람이 두 명의 법적 아버지를 가질 수 있는 '계대결혼' 제도를 통해 이러한 차이를 설명할 수 있다. 그러나 마커스 보그존 도미니크 크로산 등의 현대 비평 학자들은 두 족보가 모두 예수의 메시아적 주장을 유대인의 기준에 맞추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라고 주장한다.[5]

마태오의 복음서에서의 계보

튀르키예 이스탄불 카리예 박물관 남쪽 돔 천장에 있는 예수와 그의 선조들을 그린 그림. 예수의 계보를 표현하는데 전통적으로 사용되어온 방식인 이새의 나무.

마태오의 복음서 1:1–17은 "아브라함의 자손이요 다윗의 자손인 예수 그리스도의 계보라. 아브라함은 이삭을 낳고, ..."로 시작하여 "야곱은 마리아의 남편 요셉을 낳으니, 마리아에게서 그리스도라 칭하는 예수가 태어나셨다. 그러므로 아브라함부터 다윗까지 모두 열네 대요, 다윗부터 바벨론으로의 유배까지 열네 대요, 바벨론 유배부터 그리스도까지 열네 대라."로 이어진다.

마태는 예수의 칭호인 '그리스도'를 복음서의 시작부터 강조하는데, 이는 히브리어 '메시아'의 그리스어 번역으로, 기름부음을 받은 자, 즉 기름부음 받은 왕의 의미를 가진다. 마태는 예수를 오랫동안 기다려온 메시아로 제시하며, 그가 다윗 왕의 후손임을 보여준다. 또한 '다윗의 자손'으로 예수를 부르며 그의 왕족 혈통을 나타내고, '아브라함의 자손'이라고 부르며 그가 이스라엘 사람임을 강조한다. 이 두 표현에서 '자손'은 '후손'을 의미하며, 야훼가 다윗과 아브라함과 맺은 약속을 상기시킨다.[6]

여러 사본들에서 마태의 서론적 제목(βίβλος γενέσεως, 비블로스 게네세오스, '출생의 책')은 여러 가지 방식으로 해석되어 왔지만, 가장 가능성이 높은 것은 이후에 나오는 족보를 위한 제목이라는 것이다. 이 표현은 같은 구절이 족보를 나타내는 용어로 사용된 70인역 성경과도 일치한다.[7]

마태오의 복음서에 따른 예수의 계보

    아브라함에서 다윗까지

  1. 아브라함
  2. 이사악
  3. 야곱
  4. 유다 & 다말
  5. 베레스
  6. 헤스론
  7. 암미나답
  8. 나흐손
  9. 살몬 & 라합
  10. 보아스 &
  11. 오벳
  12. 이새
  13. 다윗 & 밧세바

    다윗에서 바빌론 유수까지

  1. 다윗 & 밧세바
  2. 솔로몬
  3. 르하브암
  4. 아비야
  5. 아사
  6. 여호사팟
  7. 요람
  8. 우찌야
  9. 요탐
  10. 아하즈
  11. 히즈키야
  12. 므나쎄
  13. 아몬
  14. 요시야

    바빌론 유수에서 예수까지

  1. 여고냐
  2. 스알디엘
  3. 즈루빠벨
  4. 아비훗
  5. 엘야킴
  6. 아조르
  7. 차독
  8. 아킴
  9. 엘리웃
  10. 엘아자르
  11. 마탄
  12. 야곱
  13. 요셉
  14. 예수

마태오의 복음서의 족보는 루가의 복음서의 족보보다 기교적이고 명확한 구조로, 14대씩 세 범주로 나누어 구별하고 있다.

  1. 1대에서 14대까지는 유다의 형제들과 베레스의 형제를 언급하며, 네 명의 여성 조상을 포함하는 등 주석이 풍부하다.
  2. 15대에서 28대까지는 다윗의 왕조 계보를 다루지만 여러 세대를 생략하고 "바벨론 유수 시기의 여고니야와 그의 형제들"로 끝난다.
  3. 마지막 29대에서 41대까지는 13세대로 보이지만, 요셉과 즈루빠벨을 사이 조상들에 대한 고유한 전승이다. 이 시기는 그 기간에 비해 상대적으로 적은 조상이 적혀 있다.

총 42세대가 되기 위해서는 여러 이름을 생략해야 하므로, 세 부분의 14대 구성은 의도적인 것으로 보인다. 이에 대한 다양한 해석이 제시되었다. 14는 7의 두 배로, 완전함과 언약을 상징하며, 또한 다윗이라는 이름의 게마트리아와 일치한다.[8]

이 족보에 나오는 히브리어 이름의 그리스어 표기는 대부분 70인역 성경과 일치하지만, 몇 가지 독특한 부분이 있다. '아삽'이라는 형태는 아사 왕을 시편의 저자인 아삽과 동일시하는 것처럼 보인다. 마찬가지로 아몬 왕을 암모스라고 표기하는 것은 예언자 아모스를 연상시키지만, 70인역에도 이러한 형태가 나타난다. 이는 보다 친숙한 이름에 대한 동화 현상으로 해석되곤 한다. 보에스(보아스, 70인역에는 부스)와 라캅(라합, 70인역에는 라아브) 역시 독특한 형태다.[9]

생략된 왕들

아하시야, 요아스, 아마지야의 세 왕이 생략되었다. 이들은 아합의 저주받은 혈통에서 아달리야를 통해 3대, 4대에 걸쳐 이어져 내려온 악한 왕들로 여겨진다.[10] 동시에 이들을 생략함으로써 두 번째 14세대를 맞출 수 있으므로 수비학적 의도도 있는 것으로 여겨진다.[11]

또한 생략된 왕은 여고니야의 아버지인 여호야킴이다. 헬라어에서 여호야킴과 여호야긴의 두 이름은 매우 유사하며 때로는 둘 다 '요아킴'으로 불린다. 마태오가 "요시야가 바벨론 유수 시기에 여고니야와 그의 형제들을 낳았다"고 했을 때, 그는 이 둘을 혼동한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구약성경에서는 여고니야가 아니라 여호야김에게 형제가 있었다고 전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유수는 여고니야 시대에 발생했다. 따라서 이를 실수로 보는 견해도 있지만, 다른 학자들은 다윗 이후의 왕들이 정확히 14세대를 구성하도록 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생략된 것이라고 보기도 한다.[11]

마지막 집단 역시 14세대로 구성되었다. 만약 요시야의 아들로 기록된 여고니야가 본래 가리키고자 하던 대상이 여호야김이었다면, 여고니야는 유수 이후 세대로 계산될 수 있었다. 일부 저자들은 마태오의 원래 본문에 마리아의 아버지 요셉이 기록되어 있었다고 보기도 한다.[12]

여고니야(기원전 약 616년 출생)부터 예수(기원전 약 4년 출생)까지 14세대에 걸쳐 있으며, 세대 간 평균 간격은 약 44년이다. 그러나 구약성경에서는 세대 간 격차가 더 넓게 나타나기도 한다.[13] 또한 이 기간 동안 흔했던 '조부 이름을 따는 관습'의 사례가 나타나지 않는데, 마태오가 이러한 반복을 압축했을 수도 있다.[14]

루가의 복음서에서의 계보

800년경 켈트 수도사들에 의해 필사된 켈스의 서에 실린 루가의 예수 족보.

루가의 복음서에서 예수의 족보는 예수의 공생애 시작 부분에 기록되어 있다. 이 족보는 요셉부터 아담까지 역순으로 올라간다.[15] 예수의 세례 이야기를 전한 후, 루가복음 3장 23절에서 38절은 "예수께서 가르치심을 시작하실 때에 삼십 세쯤 되시니라. 사람들이 아는 대로는 요셉의 아들이니라, 헬리의 아들이요, ..." (3:23) 그리고 계속하여 "아담은 하느님의 아들이니라." (3:38)라고 끝난다.[16]

루가의 복음서에 따른 예수의 계보
  1. 하나님
  2. 아담
  3. 에노스
  4. 가이난
  5. 마할랄렐
  6. 야렛
  7. 에녹
  8. 므두셀라
  9. 레멕
  10. 노아
  11. 아르박삿
  12. 가이난
  1. 셀라
  2. 에벨
  3. 벨렉
  4. 르우
  5. 스룩
  6. 나홀
  7. 데라
  8. 아브라함
  9. 이사악
  10. 야곱
  11. 유다
  12. 베레스
  1. 헤스론
  2. 아니
  3. 아미나답
  4. 나손
  5. 살몬
  6. 보아스
  7. 오벳
  8. 이새
  9. 다윗
  10. 나단
  11. 맛다다
  12. 멘나
  13. 멜레아
  1. 엘리아김
  2. 요남
  3. 요셉
  4. 유다
  5. 시므온
  6. 레위
  7. 맛닷
  8. 요림
  9. 에리에서
  10. 예수
  11. 에르
  12. 엘마담
  13. 고삼
  1. 앗디
  2. 멜기
  3. 네리
  4. 스알디엘
  5. 즈루빠벨
  6. 레사
  7. 요아난
  8. 요다
  9. 요섹
  10. 서머인
  11. 맛다디아
  12. 마앗
  13. 낙개
  1. 에슬리
  2. 나훔
  3. 아모스
  4. 맛다디아
  5. 요셉
  6. 얀나
  7. 멜기
  8. 레위
  9. 맛닷
  10. 헬리
  11. 요셉
  12. 예수

이 족보는 구약성경에 잠깐 언급되었을 뿐인 다윗의 잘 알려지지 않은 아들 나단을 통해 다윗의 후손임을 보여준다.[17]

다윗의 조상에 대해서는 루가의 복음서와 구약성경이 완전히 일치한다. 아르박삿셀라 사이에 가이난이 포함되어 있는데, 이는 70인역(Septuagint)을 따른 것이며 대부분의 현대 성경에서 따르는 마소라 본문에는 포함되어 있지 않다.

아우구스티누스는 루가 복음서에 있는 족보의 세대 수를 77이라 하였는데, 이는 모든 죄의 용서를 상징하는 숫자로 인식된다.[18] 이 숫자는 또한 루가가 알고 있었을 가능성이 있는 『에녹서』에서 언급된 에녹 이후 70세대와도 일치한다.[19][20] 루가는 비록 마태오처럼 세대를 세지는 않았지만, 일곱 단위로 구성하는 원칙을 따랐을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레네오는 아담부터 72세대만을 계산했다.[21]

구약성경에서 아미나답의 아들로 아람이 등장하는 것은 잘 알려져 있다. 현대 학자들 사이에서 가장 신뢰받는 네슬레-알란드 비평판은 "아미나답의 아들, 아드민의 아들, 아르니의 아들"이라는 변이 형태를 받아들이며,[22] 이를 통해 아담부터 시작하는 세대 수를 76으로 계산한다.[23]

루가가 사용한 표현인 "사람들이 생각하던 대로"(ἐνομίζετο)는 예수가 실제로 요셉의 아들이라는 진술을 피하기 위한 시도로 인식된다. 이는 동 복음서에 기록된 예수의 동정녀 탄생과 일치한다. 일부 학자들은 루가가 예수의 외조부인 엘리로 계보를 전개하는 등, 가장 가까운 혈연 관계인 마리아를 통해 예수의 족보를 추적했다고 본다.[24] 이 경우 족보의 가부장적 구조를 유지하기 위해 마리아 대신 남편인 요셉을 언급했다는 견해도 있다. D. A. 카슨은 이러한 해석을 "지나치게 인위적"이라고 지적하며 독자들이 이를 유추하기 어렵다고 본다.[25] 마찬가지로 R. P. 네텔호스트는 이를 "부자연스러운 억지" 해석이라고 평가한다.[26]

이 외에도 이러한 표현이 나머지 족보와 어떻게 관련되는지에 대한 다양한 해석이 존재한다. 일부는 나머지 족보를 요셉의 실제 족보로 보고 있으며, 마태오의 복음서에 제시된 다른 족보와 비교하여 해석한다.[27]

스알디엘의 아들 즈루빠벨

마태오의 복음서와 루가의 복음서에 나오는 족보는 스알디엘의 아들 즈루빠벨에서 잠시 일치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스알디엘 위쪽과 즈루빠벨 아래쪽에서 두 복음서는 서로 다르다. 또한 이 지점에서 마태오는 구약성경의 기록과 차이를 보인다.

키루스 대제에게 예루살렘의 재건 계획도를 보여주는 즈루빠벨.

구약성경에서 즈루빠벨은 기원전 520년경 유대인들을 바빌론에서 귀환시키고 유다를 다스리며 성전을 재건한 영웅으로 묘사된다. 그는 여러 번 스알디엘의 아들이라고 불린다.[28] 즈루빠벨은 『역대기』의 족보에 한 번 등장하는데,[29] 그 후손이 여러 세대에 걸쳐 함께 기록되어 있다.[30] 그러나 복음서와 함께 볼 때 이 구절에는 여러 가지 난점이 있다. 70인역에서는 그의 아버지가 스알디엘로 되어 있지만, 마소라 본문에서는 스알디엘의 형제 브다야로 적혀있다. 해당 구절에 따르면 두 사람 모두 여고냐 왕의 아들이었다. 일부 학자들은 마소라 본문을 수용하고, 브다야가 계대결혼을 통해 스알디엘을 위해 아들을 낳았다고 가정하지만, 대부분의 학자들은 마태오 및 다른 모든 기록들과 일치하는 70인역을 원문으로 받아들인다.[31]

즈루빠벨이 매우 흔한 바빌로니아 이름임에 착안해서,[32] 루가의 복음서에서 등장하는 즈루빠벨과 스알디엘을 단순히 동명이인으로 보기도 한다. 루가의 복음서에서 스알디엘의 조상은 완전히 다르게 제시되어 있으며, 즈루빠벨의 아들에서 다시 불일치가 시작되기 때문이다. 더 나아가 알려진 연대 사이의 간격을 보완하면 루가의 스알디엘의 탄생은 유대인들이 바빌론에서 돌아온 시기의 유명한 즈루빠벨과 같은 시기가 된다. 따라서 루가의 스알디엘과 즈루빠벨은 마태오의 기록과는 다른 인물일 가능성이 높으며, 아마도 그들의 이름을 따온 것으로 보는 견해도 제기되었다.[33]

그러나 대다수의 학자들은 루가의 기록에 등장하는 이들 부자가 역대기의 인물과 동일하다고 본다. 이 경우 요셉처럼 스알디엘의 아버지로 서로 다른 두 명이 기록된 것에 대한 해답이 필요하다. 이를 위해 복잡한 계대결혼 가설이 종종 제안되었다.[33] 그러나 리처드 보컴은 루가의 기록이 실제 역사를 잘 반영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의 견해에 따르면, 『역대기』의 족보는 즈루빠벨을 선조의 계보에 끼워 넣은 후대의 첨가물로, 마태오는 단순히 왕실 계승을 따랐을 뿐이다. 실제로 보컴은 즈루빠벨의 정당성이 저주받은 솔로몬의 계보가 아닌 다윗의 아들 나단을 통해 계승되었다고 주장한다.[20]

루가의 복음서에서 즈루빠벨의 아들로 제시된 이름 레사(Rhesa)는 일반적으로 아람어로 '머리'나 '군주'를 의미하는 rēʾšāʾ로 간주된다. 일부 학자들은 이 이름이 즈루빠벨의 것인데 아들로 잘못 기록된 것으로 본다. 이 견해를 따르면 루가 복음서의 다음 세대인 요아난(Joanan)은 역대기에서 즈루빠벨의 아들 중 하나로 기록된 하나냐(Hananiah)일 수 있다고 본다. 그러나 이 경우에도 루가 복음서의 그 다음 이름들과 마태오 복음서의 다음 이름 아비웃(Abiud)은 『역대기』에서 특별히 확인할 수 없다.[20]

같이 보기

각주


 Maas, Anthony (1913). 〈Genealogy of Christ〉. 《가톨릭 백과사전》. 뉴욕: 로버트 애플턴 사.
  • 마태 1:1-16, 루가 3:23-38

  • 마태 1:16, 루가 3:23

  • Eusebius Pamphilius, Church history, Life of Constantine §VII.

  • R. T. France, The Gospel According to Matthew: An Introduction and Commentary (Eerdmans, 1985) pages 71–72.

  • Marcus J. Borg, John Dominic Crossan, The First Christmas (HarperCollins, 2009) page 95.

  • Nolland, John (2005), 《The Gospel of Matthew: a commentary on the Greek text》, Grand Rapids: W.B. Eerdmans, 65–87쪽, ISBN 978-0-8028-2389-2

  • Nolland, John (2005), 《The Gospel of Matthew: a commentary on the Greek text》, Grand Rapids: W. B. Eerdmans, 70쪽, ISBN 978-0-8028-2389-2, considers this harmonization "the most attractive."

  • Nolland, John (2005), 《The Gospel of Matthew: a commentary on the Greek text》, Grand Rapids: W.B. Eerdmans, 65–87쪽, ISBN 978-0-8028-2389-2

  • Bauckham, Richard (1995), “Tamar's Ancestry and Rahab's Marriage: Two Problems in the Matthean Genealogy”, 《Novum Testamentum》 37 (4): 313–329, doi:10.1163/1568536952663168.

  • 왕상 21:21-29, 출 20:5, 신 29:20

  • Nolland, John (1997), “Jechoniah and His Brothers” (PDF), 《Bulletin for Biblical Research》 (Biblical studies) 7: 169–78, doi:10.5325/bullbiblrese.7.1.0169, S2CID 246627732, 2012년 6월 5일에 원본 문서 (PDF)에서 보존된 문서, 2009년 5월 13일에 확인함.

  • Blair, Harold A. (1964), “Matthew 1,16 and the Matthaean Genealogy”, 《Studia Evangelica》 2: 149–54.

  • 일례로 에즈라 7:1-5에 나타난 계보와 대상 6:3-14를 참고할 수 있다.

  • Albright, William F.; Mann, C.S. (1971), 《Matthew: A New Translation with Introduction and Commentary》, The Anchor Bible 26, New York: Doubleday & Co, ISBN 978-0-385-08658-5 .

  • Maas, Anthony. "Genealogy of Christ" The Catholic Encyclopedia. Vol. 6. New York: Robert Appleton Company, 1909. 9 October 2013

  • Robertson, A.T. "Commentary on Luke 3:23". "Robertson's Word Pictures of the New Testament". Broadman Press 1932,33, Renewal 1960.

  • 대상 3:5, 즈가리야 12:12

  • 마태 18:21-22, 창 4:24

  • 에녹1서 10:11-12

  • Bauckham, Richard (2004), 《Jude and the Relatives of Jesus in the Early Church》, London: T & T Clark International, 315–373쪽, ISBN 978-0-567-08297-8

  • 이레네오, 《이단반박》, 3.22.3

  • Willker, Wieland (2009), 《A Textual Commentary on the Greek Gospels》 (PDF) 6판, 3: Luke, TVU 39쪽, 2009년 3월 27일에 원본 문서 (PDF)에서 보존된 문서, 2009년 3월 25일에 확인함. Willker details the textual evidence underlying the NA27 reading.

  • "Faced with a bewildering variety of readings, the Committee adopted what seems to be the least unsatisfactory form of text, a reading that was current in the Alexandrian church at an early period," explains Metzger, Bruce Manning (1971), 《A textual commentary on the Greek New Testament》 2판, United Bible Societies, 136쪽, ISBN 3-438-06010-8

  • Schaff, Philip (1882), 《The Gospel According to Matthew》, New York: Charles Scribner's Sons, 4–5쪽, ISBN 0-8370-9740-1

  • Carson, D. A. (2017). 《Matthew》. Zondervan Academic. ISBN 9780310531982.

  • Nettelhorst, R. P. (1998). “The Genealogy of Jesus” (PDF). 《Journal of the Evangelical Theological Society》 31 (2): 169–172. 2023년 10월 4일에 원본 문서 (PDF)에서 보존된 문서. 2024년 10월 1일에 확인함.

  • Farrar, F.W. (1892), 《The Gospel According to St. Luke》, Cambridge, 369–375쪽

  • 에즈라 3:2, 8, 5:2, 느헤미야 12:1, 학개 1:1,12, 14

  • 대상 3:17-24

  • VanderKam, James C. (2004), 《From Joshua to Caiaphas: High Priests after the Exile》, Minneapolis: Fortress Press, 104–106쪽, ISBN 978-0-8006-2617-4

  • Japhet, Sara (1993), 《I & II Chronicles: A Commentary》, Louisville: Westminster/John Knox Press, 100쪽, ISBN 978-0-664-22641-1

  • Finkelstein, Louis (1970), 《The Jews: Their History》 4판, Schocken Books, 51쪽, ISBN 0-313-21242-2


  • 누가복음

    1. 책 제목
    헬라어 성경에는 ‘카타 루칸’으로 되어 있다. 이는 ‘누가에 의한’이란 뜻으로 이 헬라어 성경을 번역한 영어 성경(A.V)에는 The Gospel According to Saint Luke(누가에 따른 복음)로 제목을 붙였다. 한글 개역 성경의 제목은 ‘누가가 전한 복음’의 의미를 갖는 ‘누가복음’이다.

    2. 기록자와 연대

    1) 기록자
    누가복음의 기록자는 다른 복음서들과 마찬가지로 복음서 자체에 적혀 있지 않다. 하지만 다음과 같은 여러 정황들로 인해서 기록자가 누가라는 것이 인정된다. 우선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이 데오빌로라는 사람에게 보내진 글이라는 동일한 형식을 취하고 있다는 공통점(눅1:3, 행 1:2), 누가복음의 끝과 사도행전의 시작이 연결이 된다는 점 등을 기초로 두 책이 동일한 기록자에 의해 적혀진 사실이 인정되며, 사도행전의 내용에 비추어 누가가 사도 바울의 전도 여행에 동참하였다는 사실(누가의 이름이 골 4:14, 딤후 4:11, 몬 1:24에 기록), 누가복음의 내용을 기초로 기록자가 예수님을 직접 만난 사람이 아니며(눅 1:2-3), 누가복음에 고급 헬라어가 사용되었다는 점, 누가의 직업이 의사였다는 사실(골 4:14), 누가가 기록자라는 2-3세기 기록들이 있다는 점, 누가복음의 기록자를 사도 바울의 동역자로 인정하여 정경에 포함시켰다는 사실들 등의 증거들이 누가가 기록자라는 것을 확인 시켜준다.
    *누가는 “빛나다”라는 뜻의 라틴어 `루카누스' 또는 `루키리우스'의 약어이며. 성경 저자 중에서 유일한 유대인이 아닌 안디옥 출신으로 추정된다.

    2) 기록연대
    이 복음서가 적힌 정확한 연대는 약간의 편차는 있지만 50년대 말에서 60년대 초가 가장 유력하다. 사도행전의 기록으로 보아서 누가복음은 사도행전 보다 먼저 적힌 것으로 추정되며, 누가복음에 서기 70년의 예루살렘과 성전의 파괴가 적혀 있지 않은 점, 사도행전의 내용을 바탕으로 할 때 60년대 중반의 네로 황제에 의한 기독교 박해, 사도 바울과 베드로의 순교보다 더 이른 시기에 적힌 것을 고려하면 50년대 말에서 60년대 초가 가장 유력하다.

    3. 대상 및 저술 목적
    누가복음은 ‘데오빌로’라는 사람에게 ‘알고 있는 바를 더 확실하게 하려고’이 글을 썼다고 구체적으로 기록되어 있다(1:4). 데오빌로에게 “존귀하신” 이라는 호칭을 사용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서 이 사람이 높은 지위에 있던 사람인 것을 짐작할 수 있는데, 그 이름의 뜻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이다(Lover of God). 누가는 서문에서 자신이 예수님에 대한 이야기를 초기부터 자세하게 조사하여 본 내용들을 적는다고 하면서, 기본적으로 예수님의 삶과 가르침에 대하여 신뢰성 있는 조사 결과들을 제시하려고 한다.
    따라서 누가복음은 일차적으로 로마에 대한 기독교의 변증이라고 볼 수 있다. 본서에서 로마 백부장의 믿음을 칭찬한 것이나, 예수께서 가이사의 것을 가이사에게 돌리라고 하는 것이나, 빌라도가 세 번 예수 그리스도에게 무죄를 발표한 것 등 전체적으로 로마에 대한 호의적인 입장을 취하고 있다.
    그러나 대상을 데오빌로 한 사람에게만 국한할 것이 아니라 확장해서 로마에 있는 많은 이방인들에게 알고 있는 바들 더 확실하게 하기 위해 기록되었다고 보는 것이 더 타당하다.

    4. 주제
    1) 흠 없는 인자(人子)이신 예수
    누가는 그리스도의 본질의 인간적인 면을 강조하여 인류의 친구로서의 그리스도, 즉, ‘인자(人子)’로서의 그리스도를 제시한다. 예수는 인성을 가지신 분으로서 여성과 어린아이, 소외 계층에 대하여 관심이 많이 있으시며 그들을 동정하시고 함께 하시기 위해 이 땅에 왔음을 강조한다.

    2) 온 세상의 구주 예수
    누가가 그려 주고 있는 그리스도는 주로 이스라엘의 메시아가 아니라, 온 세상의 구주로서 예수 그리스도이다. 누가는 어느 한 민족에 속하는 그리스도가 아니라, 여러 민족의 다양한 사람들을 위한 그리스도를 높이 부각시키고 있다. 즉, 누가는 자신이 이방인이었지만 그리스도께서 이방인을 위하여 나타내신 각종 봉사와 관심을 다른 어떤 복음서 기자들보다도 자세히 다루며 강조하고 있다.

    5. 누가복음의 특징
    1) 그리스도의 완전한 인성을 강조함 - 인간적인 면이 잘 드러나있다.
    ① 예수님의 어린 시절이 기록된 유일한 복음서(2:41-51)
    : 성장 과정(2:40, 52), 부모 밑에(2:51), 12세 때의 성전 방문(2:41-50) 기록
    ② 예수님께서 눈물을 흘리시며(19:41), 간절히 기도하심(22:44)
    ③ 인성 표현은 식사에 많이 언급(7:36-50. 10:38-42. 11:37-52. 24:41-44)
    ④ 십자가에 달려 죽으심(23:46) - 사람을 위한 대속물 - 구속이라는 말이 신약에서는 처음으로 등장(1:68. 2:38. 24:21)

    2) 여성과 어린아이 등 소외 계층에 대한 관심을 강조함 - 일반 서민들에 대한 관심이 가장 많이 표현된 복음서이다.
    ① 죄지은 여인(7:36-50), 선한 사마리아인(10:29-37), 탕자의 비유(15:11-32), 세리 삭개오(19:1-10), 십자가에 달려 회개한 강도(23:39-43) 등 소외 계층에 대한 여러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음.
    ② 마리아와 엘리사벳(1:5, 1:27: 2:41), 안나(2:36), 사렙다 과부(4:26), 시몬의 장모(4:38), 나인성 과부(7:11), 예수님을 섬긴 여인들(8:2-3), 십자가의 여자들(23:49), 부활일의 여자들(24:1) 등 여인이 많이 표현되고 있음.

    3) 예수님의 기도와 제자들의 기도를 강조함
    ① 예수님께서 기도하시는 장면을 강조함
    에수님께서는 세례자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신 후(3:21), 들에서(5:16), 산에서(6:12, 9:28, 22:39, 41) 기도하시며, 홀로(5:16, 9:18; 11:1), 오랫동안(6:12), 무릎을 꿇고(22:41, 44) 기도하셨다고 기록한다.
    아울러 예수님은 세례를 받으셨을 때 외에도 열두 제자를 부르시기 전에(6:12), 베드로에게 신앙고백을 받기 전에(9:18), 죽음을 예고하는 변화산에서(9:28), 감람산에서 수난을 앞두고(22:40-44), 십자가상에서(22:34, 46) 등 결정적인 전환점을 맞이하실 때마다 기도하셨다.
    ②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기도하도록 강조하는 내용을 강조.
    제자들이 매일 생활에 대한 염려와 이 세상에서의 즐거움을 이기게 하는 것도 기도(8:14)이고, 핍박과 고난을 이기는 것도 기도이며(8:13, 22:32, 40, 46). 기도하는 자 만이 인자가 오실 때 합격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18:1-8; 21:36), 제자들이 기도해야 하는 이유를 부활하신 예수의 요구이기 때문으로 강조하고 있다(24:52).

    4) 기타 특징
    ① 서문이 있음(1:1–4).
    이 서문에는 누가복음의 내용(1 : 우리 가운데 이루어진 사실), 기록한 방식(2 : 전하여준 그대로), 수신자(3 : 데오빌로), 작성 목적(4 : 배운 바의 확실함을 위해)을 명확하게 하고 있다. 이 서문의 또 다른 중요한 역할은 사도행전과의 관계를 밝혀주고 있다는 점이다. 첫째, 수신자가 똑같이 데오빌로이다(눅 1:4/ 행 1:1). 둘째, 사도행전에 누가복음의 속편임을 드러내는 표현들이 있다. ‘먼저 쓴 글’(행1:1)의 내용이 예수의 행하시며 가르시기를 시작하심부터(행1:1) 승천하신 날(행1:2)까지라고 정리한다. 셋째, 세계사적 시대를 명확하게 표시하고 있다. - 가이사 아구스도(Augustus) 주전 30-14년(2:1), 가이사 디베료 15년(Tiberius) 주후 14-37년(3:1)
    ② 예수님의 탄생시 목자들의 방문에 관한 기사를 싣고 있음(2:8-20).
    마태복음에서는 유대인의 왕으로서의 면모를 드러내기 위하여 예수님의 탄생시에 동방에서 박사들이 와서 왕께 드리는 예물에 대한 기사를 기록한 반면, 누가복음은 소외된 계층이라 할 수 있는 목자에게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인 예수님의 탄생 소식이 전파 되었음을 밝힌다.

    ③ 족보의 독특성(3:23-38)
    예수님의 족보가 마태복음와 누가복음에 두 번 나오는데 마태복음의 족보는 아브라함까지 올라가는데 반해, 누가복음의 족보는 아담에게까지 거슬러 올라가서, 예수님이 온 인류의 구원자로 오신 분이라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아울러 누가복음은 마태복음과 다른 계통의 족보를 가지고 있는데, 마태복음이 다윗의 아들 중 솔로몬으로 왕의 혈통을 따르고 있는 반면에, 누가복음은 다윗의 아들 나단의 혈통을 따르고 있다. 왜 그런 차이가 있는지는 정확하게 알 수 없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예수님은 요셉의 혈육이 아니라는 사실을 통해 그 족보의 의미를 이해해야 한다는 것이다.
    ④ 예루살렘과 성전을 강조함
    누가복음은 다른 복음서와 비교할 때 상대적으로 예루살렘을 강조하고 있다. ① 첫 장면이 예루살렘 성전에서 시작하며, ② 아기 예수의 예루살렘 방문, 소년 예수의 예루살렘 방문을 기록하고 있고, ③ 예수님의 목적지가 예루살렘이라는 명시적 표현들이 있고, ④ 예수님의 승천시에 제자들에게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라는 명령이 있고, ⑤ 예루살렘이라는 단어가 복음서 중 가장 많이 사용되고 있다. 아울러 누가는 사도행전에서도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복음이 퍼져나가게 될 것을 설명하고 있다.
    ⑤ 의학 용어가 많이 사용됨
    “중한 열병”(4:38), “나병 … 원하시면 깨끗하게”(5:12), “혈루증”(눅 8:43), “그(말고) 귀를 만져 낫게 하시더라”(22:51) 등
    ⑥ 찬송시가 많이 나옴
    누가복음에는 유독 찬송시가 많이 나온다. 그리고 그 찬송시들은 예수님과 요한의 출생부분에서 나오고 있다(마리아의 노래(1:46-55), 사가랴의 노래(1:68-79), 천군의 노래(2:14) 시므온의 노래(2:29-32)).

    6. 내용과 구조
    공관복음의 공통된 구조는 ① 요한의 세례, ② 갈릴리 사역, ③ 유다와 예루살렘 사역, ④ 죽으심과 부활의 구조를 갖는다. 누가복음은 공관복음의 기본구조를 좀 더 매끄럽게 다듬었고, 예수님의 출생 기록에 세례 요한의 출생 기록을 추가했다.
    공관복음은 예수님의 십자가 사역을 이루시기 위하여 예루살렘을 최종 목적지로 향하고 있음을 기준으로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특별히 누가복음에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예루살렘을 향하여 여행한다는 표현을 네 번이나 강조하여 명시하고 있다.

    1) 인자의 준비(1:1-4:13)

    2) 인자의 사역(4:14-19:48)

    3) 인자의 수난과 부활(20:1-24:53)














  • 2025 마가복음



    호모 폴리티쿠스(homo-politicus)

    ​어느 날 #공자 가 제(齊)나라로 가는 도중 #태산 근처를 지나고 있는데 어디선가 여인의 구슬픈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저 여인의 울음소리를 들은 즉 억울하고 슬픈 사연이 있는 듯한데 가서 알아보고 오너라.” 공자가 제자에게 일렀다.

    제자가 그 여인에게 물었다.
    “어찌 이렇게 들판에 혼자 앉아 서럽게 우시오?”

    그 여인이 풀어놓은 사연이 이랬다. 
    “우리 시아버지가 범에 물려 돌아가시고 제 남편도 범에 물려 죽고 오늘은 제 자식마저 범에 물려 죽고 말았습니다.”

    제자가 물었다. 
    “그렇다면 그런 참혹한 일을 겪고도 어찌 이 마을을 떠나지 않았단 말이오?”
    “이 고을에는 나쁜 수령(首領)이 없기 때문이지요.” 
    그 여인의 대답이었다.

    #나쁜_정치, #나쁜_정치가 가 #범 보다도 더 무서웠던 것이다.

    좋은 정치와 좋은 정치가, 나쁜 정치와 나쁜 정치가를 가리는 것이 투표다.


    호모 폴리티쿠스(Homo Politicus)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배트맨 비긴즈]에는 다음과 같은 대사가 나온다.
    “넌 잃을 게 없다고 말하지만, 너의 여자친구와 늙은 집사가 있지 않나.
    넌 이 세계를 몰라. 이해할 수 없는 건 두려운 법이지.”

    우리의 세계는 명확한 한계를 가진다. 철학자 비트겐슈타인이 "언어의 한계는 세계의 한계를 의미한다."라고 말했던 것처럼, 사람들은 서로 다른 지식과 경험, 다양한 가치관과 세계관을 가지며, 그에 어울리는 삶을 살아간다.

    이를 인지거리라 한다.

    인지거리란 내가 유의미하게 경험하는 인식의 거리이자, 내가 실제로 삶에서 신경 쓰는 세상의 전부다. 우리 뇌는 고성능 필터를 가지고 있어서 중요한 것과 무시해도 좋은 것으로 세상을 분류하는데, 덕분에 내 세계의 한계가 정해지게 된다.

    이때 "어디까지가 내가 사는 세상인가?"라는 질문은 곧 "어디까지 신경 써야 하는가?"라는 질문으로 치환된다. 지구 반대편에서 강한 지진이 일어나 수많은 사람들이 죽고 집을 잃었다는 뉴스를 보면 안타까움을 느끼겠지만, 그 슬픔이 오래가지 않는 것과 같다. 그보다는 손톱 옆에 갈라진 살이 더 신경 쓰이기 마련이다.

    복지나 인권, 성소수자, 사형제도, 최저임금, 부동산 문제도 마찬가지다. 누군가에겐 중요한 일이 다른 누군가에겐 무의미한 것이 될 수 있다. 우리의 현실적인 인식 범위는 자신이 경험하는 세상의 한계를 벗어나기가 힘들기 때문이다.

    이때 만약 인지하는 세상이 더 넓다면? 고려하는 범주가 멀리까지 늘어난다.

    즉, 진보주의자가 된다.

    반대로 세상의 크기가 좁으면? 고려하지 않아도 되는 범위가 늘어난다.

    즉, 보수주의자가 된다.

    따라서 정치란, 선천적으로 다른 뇌를 가지고 태어나는 보수와 진보가 환경적 요소를 바꾸기 위한 투쟁이라 정의할 수 있다. 인지거리는 후천적으로도 좁아지거나 넓어질 수 있지만, 보수주의자와 진보주의자는 어느 정도까지 타고난 ‘무의식적인 인지거리’가 다르기 때문이다. 우리는 사실 자기만의 인지거리에 걸맞은 삶을 살면서, 그에 어울리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 노력한다. 따라서 인지거리라는 개념을 이해하면 보수와 진보가 왜 다른 세계관과 신념을 가지고 특정 이데올로기에 끌리는지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보수와 진보의 인식체계는 완전히 달라지고, 세상을 다른 방향으로 바라보게 된다. 이렇듯 프레임에 따라 정보를 재해석해 받아들이는 걸 '동기화된 추론'이라고 하는데, 보수와 진보의 논의가 평행선을 달리는 원인이 된다.

    인지거리에 따라 정치 성향이 달라진다

    인지거리가 긴 진보주의자는? 사회 전체, 특히 약자를 더 배려하는 것이 당연하다. 그러니 자신과 자신의 집단만 신경 쓰는 보수가 이상하게 보인다.

    반대로 인지거리가 짧은 보수는 나와 내 주변까지만 신경 쓰는 것이 당연한데, 그 너머에 있는 인권이나 평등이라는 대의를 위해 자기 이익을 양보해야 한다는 걸 받아들이지 못한다. 그러다 보니, 그 의도를 의심하게 된다. 진보가 정의를 부르짖으며 사회 운동을 하는 모습이 권력을 차지하려는 쇼로 보이는 것이다. 그러니 동기화된 추론을 거쳐, 강남 좌파 같은 말을 만들어 낸다. 사실 본인들이 그런 식으로 밖에 생각하지 못하니(인지적 당연함 때문에), 남들도 그럴 거라고 예상하는 것이다.

    안타깝게도, 인지거리가 극단적으로 짧은 어떤 보수주의자들은 인간에 대한 연민과 측은지심에 기반한 진보의 정치행위를 이해하지 못한다. 반대로 진보주의자들은 현실적인 욕망에 충실한 보수주의자를 이기주의자라고 욕하는 오류를 범한다.

    20221030_081012png 인지거리가 달라지면 보는 세상도 달라진다

    보수주의자는 대개 인지거리 영역 밖의 요인들이 미치는 구조적 영향력이나 관계를 인식하지 못하거나 신경 쓰지 않는다. 따라서 모든 걸 개인의 탓으로 돌리는 '근본적 귀인 오류'에 빠지게 된다. 그래서 보수주의자들이 자주 하는 말이 ‘개인의 책임’이다. 하지만 자신이 책임을 지는 경우는 별로 없다. 인식의 초점이 자기 자신에 맞춰져 있으니, 잘 되면 내가 잘해서 그런 거고, 안 되면 남 탓이라는 결론을 도출해 내기 때문이다.

    인지거리가 짧으면, 그 범위 내의 대상들에 대해 더 공감하고, 더 애정을 가지게 된다. 이를 바꿔 생각해 보면, 인지거리 내의 대상에 더 집착하거나 맹신한다는 뜻이 된다. 사람이 투입할 수 있는 감정과 인지능력에는 한계가 있다. 범위가 좁아지면 인지거리 내 대상에 대한 공감과 인식의 강도는 상대적으로 더 세진다. 보수주의자들이 남의 자식에는 냉정해도 자기 자식에는 죽고 못 살거나, 경쟁 국가에는 적대적인 동시에 애국심이 넘치는 것도 좁은 인지거리 때문이다. 보수주의자의 이타심이 '우리 대 그들'의 지역주의적 성격을 띠는 이유다.







    아리스토텔레스 "인간은 정치적 동물이다"

    “인간은 정치적 동물이다.” 
    너무나도 유명한 이 말의 주인공은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입니다.  

    정치적 동물’이라는 용어부터 다시 따져보겠습니다. 
    ‘정치적 동물’은 사실 그리 좋은 번역어가 아닙니다. 
    차라리 ‘폴리스적인 동물’이라고 옮기는 게 아리스토텔레스가 쓴 그리스 본문의 뜻에 더 잘 맞습니다. 
    폴리스적인 동물? 
    아리스토텔레스의 말을 잘 알아듣기 위해서는 먼저 그가 살던 시대에 대한 배경지식이 필요합니다. 
    그는 고대 그리스의 아테네라는 도시국가에 살았습니다.
    그 당시 그리스 지역에는 크고 작은 수많은 도시국가들이 있었죠. 
    옆 동네에는 페르시아마케도니아와 같은 대제국도 있긴 했지만 그리스 사람들은 도시국가가 더 완전한 국가 형태라고 자부했습니다. 페르시아와 같은 제국은 한 명의 왕이 다수의 신민을 통치하는 반면, 
    도시국가는 평등하고 자유로운 시민이 민주적으로 국가를 운영하기 때문에 도시국가가 더 우월한 정치 형태라고 본 것이죠.

    아리스토텔레스의 생각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당시 사람들은 그리스 지역에 퍼져있던 도시국가를 ‘폴리스’라고 불렀습니다. 
    이제 ‘폴리스적인 동물’이라는 말의 의미를 짐작할 수 있겠죠? 
    인간이 본성적으로 폴리스적인 동물이라는 것은, 인간이란 정치공동체를 이루면서 살아갈 수밖에 없는 존재라는 말과 같은 것입니다. 
    그래서 『정치학』을 한국어로 번역한 천병희 님도 ‘정치적 동물’이라는 흔한 번역을 따르지 않고 인간은 ‘본성적으로 국가 공동체를 구성하는 동물’이라고 옮겼습니다.

    그렇다면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이 왜 정치 공동체를 이룰 수밖에 없는 존재라고 얘기한 것일까요? 

    두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첫 번째는 생존 때문입니다. 
    인간은 홀로 살아갈 수 없는 나약한 존재입니다. 
    인간이 안정적으로 살기 위해서는 공동체가 꼭 필요합니다.

    “맨 먼저 생겨난 것이 가정이다. (…) 
    날마다 되풀이되는 필요를 충족하기 위해 자연적으로 형성된 공동체가 이렇듯 가정인데, 그 구성원을 카른다스는 ‘식탁의 동료들’이라고 부르고, 크레테의 에피메니데스는 ‘식구’라고 부른다. 
    날마다 되풀이되는 필요 이상을 충족하기 위해 여러 가정으로 구성된 최초의 공동체가 마을이다. 
    마을이 형성되는 가장 자연스런 형태는 한 가정에서 아들들과 손자들이 분가해 나가는 것이다. 
    (…) 여러 부락으로 구성되는 완전한 공동체가 국가인데, 국가는 이미 완전한 자급자족이라는 최고 단계에 도달해 있다고 할 수 있다. 
    국가는 이전 공동체들의 최종 목표이고, 어떤 사물의 본성은 그 사물의 최종 목표이기 때문이다. 
    사람이든 말이든 집이든 각 사물이 충분히 발전했을 때의 상태를 우리는 그 사물의 본성이라고 하니 말이다. 
    그 밖에도 사물의 최종 원인과 최종 목표는 최선의 것이며, 자급자족은 최종 목표이자 최선의 것이다. (강조는 인용자)” 
    (아리스토텔레스, 천병희 옮김, 『정치학』중에서)

    아리스토텔레스는 사람들이 가정과 마을을 이루는 이유를 ‘날마나 되풀이되는 필요를 충족하기 위해’서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인간의 ‘필요’는 비로소 국가를 통해서 완전히 충족될 수 있다고 말합니다. 
    즉, 국가라고 불릴 정도의 공동체가 되면 이제 완전한 자급자족이 가능해집니다. 
    여기에는 두 가지 뜻이 담겨 있습니다. 
    우선 국가보다 작은 규모의 공동체로는 (당연하게도 개인 혼자서는) 자급자족할 수 없습니다. 
    인간이 자신의 욕구를 스스로의 힘을 충족하려면 반드시 국가 공동체를 구성해야만 합니다. 
    다음으로 국가의 목적이 자급자족에 있다는 말은, 자급자족할 수 있는 규모를 넘어선 국가, 가령 페르시아와 같은 대제국은 부자연스러운 것이라는 생각도 담고 있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그래서 크기가 크지 않은 폴리스가 국가의 본질에 더 적합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이제 인간이 정치 공동체에 소속되어야만 하는 두 번째 이유를 알아볼까요? 

    국가는 단지 (자급자족을 하기 위한) 필요의 산물만은 아닙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국가를 통해 비로소 개인이 완전한 인간이 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국가라는 정치 공동체에 소속되지 않는다면, 개인은 자급자족을 하지 못할 뿐 아니라 완전한 인간이 되지도 못합니다. 
    그래서인지 아리스토텔레스는 조금 극단적인 말을 하기도 했습니다. 
    정치 공동체에 소속되지 않은 인간은 제대로 된 인간이 아니라고까지 말합니다.

    “국가는 자연의 산물이며, 인간은 본성적으로 국가 공동체를 구성하는 동물임이 분명하다. 
    따라서 어떤 사고가 아니라 본성으로 인하여 국가가 없는 자는 인간 이하거나 인간 이상이다. 
    그런 자를 호메로스는 “친족도 없고 법률도 없고 가정도 없는 자”라고 비난한다. 
    본성이 그러한 자는 전쟁광이며, 장기판에서 혼자 앞서 나간 말처럼 독불장군이다.
    이로써 인간이 벌이나 그 밖의 군서 동물보다 더 국가 공동체를 추구하는 동물임이 분명해졌다. 
    자연은 어떤 목적 없이는 아무것도 만들지 않는다는 것이 우리의 주장이다. 
    그런데 인간은 언어(logos) 능력을 가진 유일한 동물이다. 
    (…) 언어는 무엇이 유익하고 무엇이 유해한지, 그리고 무엇이 옳고 무엇이 그른지 밝히는 데 쓰인다. 
    인간과 다른 동물들의 차이점은 인간만이 선과 악, 옳고 그름 등등을 인식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런 인식의 공유에서 가정과 국가가 생성되는 것이다.” (『정치학』중에서)

    인용문에서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이 “언어능력을 가진 유일한 동물”이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언어’로 번역된 ‘로고스logos’는 전문가들에 따르면 ‘프로네시스phronsis’를 의미합니다. 
    프로네시스는 우리말로는 ‘실천적 지혜’로 옮길 수 있습니다. 
    많은 고대 사상가가 그런 것처럼 아리스토텔레스도 인간의 본질을 이성 능력에서 찾았습니다. 
    특히 인간은 다른 사람과 소통하고 의견을 조율하고 선한 일을 실천할 수 있는 이성 능력을 갖고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실천적 지혜입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그러한 실천적 지혜야말로 (다른 동물은 갖지 못한) 인간의 고유한 능력이라고 봤습니다. 
    그런데 당연하게도 실천적 지혜는 폴리스 안에서만 발현될 수 있습니다. 
    혼자 사는 사람에게 언어와 의사소통, 그리고 윤리적 실천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즉, 인간은 폴리스 안에서만 자신의 본성을 실현할 수 있고, 자신을 완성시킬 수 있습니다. 
    그런 일이 가능하지도 않겠지만, 먹거리가 풍부한 정글에서 홀로 살아가는 사람이 있다고 생각해보죠. 
    생존하는 데 문제가 없다 하더라도 그가 완전한 인간일 수 있을까요?

    자본주의와 사회계약설은 개인의 욕망 충족이 공동체 성립의 유일한 이유인양 얘기하곤 합니다. 
    하지만 모든 것을 다 가진 부자라 할지라도 자신의 마음을 알아주는 친구가 없다면, 성공의 기쁨을 나눌 가족이 없다면, 자신을 인정하고 축하해주는 공동체가 없다면 그리 행복하지 못할 것입니다. 
    나아가 사람들과 함께 하는 삶이 아니라면 우린 우리의 이성과 윤리적 능력을 전혀 발휘할 수도 없습니다. 
    탁월한 삶은 골방에서 만들어지지 않습니다. 
    공동체가 모인 광장에서 가능한 것이죠.
     그걸 알았기 때문에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이 공동체를 떠나서는 살 수 없는 존재라고 말을 한 것입니다.

    * 프로네시스(phrŏnēsis) φρόνησις, εως, ἡ

    1. 생각하는 법.  2. 이해 
    Pronunciation [ phrŏnēsis ] 
    Etymology  /  5426에서 유래
    • 1. 생각하는 법, 눅1:17.
    • 2.  이해, 깨달음, 통찰력, 지능, 엡1:8.
    • 관련 성경 /  슬기(눅 1:17), 총명(엡 1:8).





    불의가 정의를 이길 수 없는 이유

    한때 “대한민국 최고의 직업은 국회의원이다.”는 말이 세상을 풍미했었다. 지방자치가 부활하고 선출직 단체장, 지방의원들의 자리가 생기면서 권력의 분산이 일어나기 전, 우리 민주주의가 성장하면서 특권의 상당 부분을 내려놓게 하기 전의 이야기다. 하지만 여전히 사실일 것이다. 대통령 비서실장, 장관, 국회의원 등 공직을 두루 경험했다는 정치 9단으로 불리는 한 정치인은 “보람 있는 건 대통령 비서실장, 매력은 국회의원”이라고 했다. 지역에서 유지 대접을 받는 자산가가 국회의원에 도전하다가 전 재산을 탕진하는 일, 기업인, 예술인, 교수, 판사, 의사 등 사회 지도층 인사들이 국회의원이 되겠다고 나섰다가 그나마 갖고 있던 명성을 잃고 체면까지 상하는 일도 자주 일어난다.

    그럼 왜 다들 국회의원이 되려고 할까. 좀 더 나가서 왜 다들 정치인이 되려고 할까. 여기서는 진심으로 국가와 국민을 위해 일하고 싶은 정치인은 제외하겠다. 어차피 찾기도 쉽지 않으니까. 우리의 무의식 속에는 오랜 군주정, 신분제의 잔상이 남아있는 거 같다. 대통령은 왕이고, 그 아래 입법부, 사법부, 행정부의 높은 자리에 앉아있는 이들은 벼슬아치이자 귀족이 되는 셈이다. 그리고 그런 자리에 가려면 정치인이 되어야 한다.

    군주정 당시, 사농공상(士農工商)의 시대에, 직업은 사실상 과거를 통해 진출할 수 있었던 관리 하나뿐이었다. 보수라는 걸 지급받는 것도 국가의 녹봉을 받는 관리에게만 해당되는 일이었다. 지금은 민간에 속해 있는 의사, 화가, 통역사, 요리사, 과학자 등 거의 모든 분야에서, 최고 수준에 오른 이들의 궁극적 목표는 나랏일을 하고 나랏밥을 먹는 거였다. 실제로 신분에 가로막혀 자격 자체가 주어지지 않는 이들을 제외하고는, 누구나 관리를 꿈꿨다. 양반은 누구나 유생이 되어 문과나 무과를 준비했고, 중인은 잡과를 준비했다. 나머지 농업, 공업, 상업에의 종사는 먹고살기 위한 생업이었지 직업이라 할 수 없었다. 만석꾼 집안의 머슴이나 포구 여각의 일꾼들은 노동의 대가로 새경을 받았지만 역시 생업으로 봐야 한다.

    그러나 관리가 되기는 결코 쉽지 않았다. 조선시대 문과의 경우 전국의 수험생이 수만 명인데 3년에 한 번씩 33명만 뽑았다. <경국대전>에 기록된 관직의 수는 문관 1779개, 무관 3826개로 총 5605개였다. 거기서 더 좁혀진다. 관직에는 정직(正職)과 체아직(遞兒職)이 있었는데, 정직은 정상적으로 녹봉을 받는 정규직이고 체아직은 일정 기간 근무하다가 교체되는 비정규직이다. 체 아직은 하나의 자리에 여럿이 교대로 근무하는 순환보직으로 녹봉은 근무하는 동안에만 지급됐다. 모자라는 관직을 여러 명에게 나눠 주기 위해 생긴 제도였다. 문관의 경우 체 아직 105개와 녹봉이 지급되지 않는 무록관(無祿官) 95개를 제외하면 정직은 1579개뿐이었다. 또한 중앙에 근무하는 경관직(京官職)과 지방에 근무하는 외관직(外官職)으로도 나뉘었는데, 결과적으로 문관 정규직이면서 중앙에서 근무하는 경관직 541개가 요직 중의 요직이었다. 조선의 양반들은 이 541개의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치열하게 경쟁해야 했다.

    그러므로 조선시대에 관리는 모든 백성들의 궁극적 지향점이었고, 특히 문관이 된다는 건 실로 엄청난 일이었다. 
    개인은 물론이고, 집안, 지역에 대한 모든 평가가 과거 합격자를 얼마나 배출했는지, 어떤 관리들을 배출했는지에 집중됐다. 
    성리학적 세계관 안에서 이상적 인간상인 군자(君子), 그 군자의 현신(現身)이랄 수 있는 관리가 되고자 하는 건 모든 양반의 의무인데, 자리가 한정되어 있다 보니 대안으로 운영했던 게 소과(小科)였다. 
    합격하면 생원(生員), 진사(進士)가 됐고 지역사회에서 유학자로 행세할 수 있었다. 
    체아직을 만들고 소과를 운영해야 할 만큼 누구나 갖고자 하는 자리, 그게 벼슬이었다.

    아마도 우리 사회의 “최고의 직업은 국회의원”이라는 인식의 뿌리는 거기에 있을 것이다. 
    각자 자신의 분야에서 크게 성공하여 일가를 이룬 이들도 기회만 주어진다면 정치에 발을 들이고자 한다. 
    공천을 받으려 하고 장관이 되려고 한다. 
    그건 자본주의의 총아인 돈의 문제도 아니다. 
    모든 걸 다 이룬 이들이 마지막 대미를 장식하는, 굳이 표현하자면 일종의 도박이다. 
    지금까지 쌓아온 것들을 다 무너뜨릴 위험 부담을 감내하면서까지 도전하게 만드는 강렬한 유혹이다. 
    그리고 “정치는 마약과 같다.”는 말도 있다. 
    한번 발을 들여놓으면 빼기 어렵다는 뜻이다. 
    우리 사회의 정치인에 대한 지향성은 유별나다.

    그토록 갖고 싶은 자리는 한정되어 있고 가지려는 자는 넘쳐나다 보니 경쟁은 불가피하다. 
    처음에 제외했던 국가와 국민을 위해 일하고 싶은 정치가를 다시 모셔오고, 사리사욕을 위해 권력을 쥐고 싶은 정치꾼도 불러서 전자를 정의, 후자를 불의라 해보자. 
    싸움이 일어나면 정의는 원칙을 고수한다. 
    정도를 지키면서 싸운다. 
    그러나 불의에게 원칙이나 정도 따위는 없다. 
    어떻게든 쟁취해야 할 목표만 있을 뿐이다. 
    홀로 주먹을 고수하는 진정한 건달은 칼을 쓰며 때로 몰려다니는 양아치들을 결코 이길 수 없다. 
    현실은 영화가 아니다.

    그건 조선시대 조정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성리학적 이상을 실현하기 위해 과거를 치르고 정계에 나갔으나, 오직 권력에 몰두하여 칼을 휘두르고 권모술수를 마다하지 않는 정적을 만나면 사화에 목숨을 잃고 집안이 풍비박산 나거나, 낙향하여 학문을 하고 후학을 기르거나, 그도 안 되면 음풍농월할 수밖에 없었다. 지금 우리 정치도 마찬가지다. 
    싸워야 하고, 싸워서 이겨야 하는데, 반칙을 쓰는 적을 이길 수는 없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는 자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자를 결코 이길 수 없다.

    우리는 먼저 정치에 대한 생각을 바꿔야 한다. 
    무의식 속에 자리 잡을 만큼 뿌리가 깊고 단단한, “정치는 몇 개 되지 않는 극히 희소한 권력의 자리에 내가 앉는 일이다. 
    그 권좌만 차지할 수 있으면 재물도 명예도, 다른 것들은 줄줄이 딸려온다. 
    그래서 모든 것을 가졌지만 마지막으로 꼭 한번 가져보고 싶다.”는 정치에 대한 그 불의한 인식 말이다. 
    오늘의 정치가 더 이상은 먼 옛날 백성들의 피와 땀으로 쌓아 올린 왕이나 고관대작들의 권좌가 돼서는 안 된다. 
    심지어 그때도 권력을 나라와 백성을 위해서만 사용하던 왕과 관리들이 있었고 말이다.

    정치에서 목적이 되어야 할 국가와 국민은 사라져 버리고 수단일 뿐인 권력이 그 자리를 차지하다 보니, 정치는 거래의 대상이 됐다. 
    사고팔 수 있게 된 것이다. 매관매직이다. 또한 무겁다 못해 숭고하기까지 해야 할 정치가 거래의 대상이 되다 보니 가벼워지다 못해 땅바닥에 떨어졌다. 온갖 흥정과 상술이 활개치고 시시껄렁한 농담이 난무하는 정치판이 되어버린 것이다. 권력은 더 이상 정치의 목적이어서는 안 된다. 오롯이 수단이어야만 한다. 국가와 국민을 위해 일하기 위한 수단.

    이상적 정치를 실현하고 있는 유럽의 국가들에서, 국회의원은 봉사하는 자리다. 심지어 지방의원은 무보수다. 그들은 순수하게 국가와 국민을 위해 일하겠다는 마음으로 나선다. 자신의 시간과 전문성을 내놓아야 하는 자리이고, 유일한 대가는 스스로의 성취와 보람이다. 마치 평생을 아껴서 모은 재산의 일부를 익명으로 기부하는 이들과 같은 마음이다. 그래서 그 자리는 자신의 인생 성공을 가늠하는 척도가 되거나 자랑의 대상이 되는 그런 자리가 아니다. 또한 그 일을 하기 위해 필요한 수단들은 지극히 실질적이고 소박하다. 권력이라 할 수도 없다. 매우 당연하게도 그것이 목적이 될 수도 없다.

    이제는 우리도 진짜 정치를 해야 한다. 정치가 다만 권력을 획득하기 위한 수단으로 더는 이용되지 않도록, 오직 국가와 국민을 위해 일하는 수단으로만 쓰이도록 해야 한다. 자신을 희생하여 봉사하려는 이들이 자리를 차지하고, 마음껏 일할 수 있는 그런 정치를 실현해야 한다. 불의가 정의를 이길 수도 있다. 그러나 그건 한두 번이고 결코 영원할 수 없다. 우리는 정의를 실현하기 위해 끝까지 싸울 것이기 때문이다.

    정치란 무엇인가? 왜 정치를 하는가? '정치의 본질과 이유'

    정치는 사회적 질서를 조직화하고 관리하는 활동으로 정의된다. 이는 권력의 분배, 의사결정의 과정, 규칙과 제도의 수립, 그리고 사회적 가치 및 이해관계의 형성 등을 포괄한다. 정치는 개인과 집단 간의 이해관계와 충돌을 조정하며, 사회 구조를 유지하고 변화시키는 핵심적인 활동으로 인간 사회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다.

    정치를 하는 이유는 다양한 요인으로 설명될 수 있다. 우선, 인간은 사회적 동물로서 타인과 상호작용하며 집단을 형성한다. 이러한 집단 내에서는 의견의 다양성과 이해관계의 복잡성으로 인해 의사결정이 필요하다. 정치는 이러한 의사결정의 과정을 체계화하고 효율적으로 이뤄지도록 한다.

    또한, 권력은 사회에서 불가피한 존재이며, 정치는 권력을 조절하고 분배하는 과정이다. 권력의 남용을 방지하고 권력의 효과적인 사용을 보장하기 위해 정치는 규칙, 제도, 그리고 감시와 균형의 체계를 구축한다.

    정치는 또한 가치와 이해관계의 충돌을 해결하고 사회적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수단으로 기능한다. 다양한 이해관계와 이익을 고려하며 균형을 유지하고 사회적 합의를 이끌어내는 과정을 통해 사회적 통합과 발전을 촉진한다.

    결론적으로, 정치는 사회적 상호작용과 질서를 조절하며 사회적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필수적인 활동이다. 인간 사회의 복잡성과 다양성을 고려할 때, 정치는 필연적인 존재이며, 이를 통해 우리는 더 공정하고 지속가능한 사회를 구축할 수 있다.


    우리가 정치에 관심을 가져야 하는 이유

    정치는 인간이 공동체적 삶을 살아가기 위해서는 결코 배제할 수 없는 영역이다. 아마 경제와 더불어 인간의 사회적 삶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영역이 정치일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이 정치를 낮추어보거나 정치에 종사하는 전문 정치인들을 경멸하기조차 한다. 우리 삶에서 가장 중요한 영역임에도 불구하고 왜 사람들은 정치를 경멸하면서 정치에 관심을 쏟는 태도를 비난하기까지 하는 것일까. 

    물론 자신의 본업을 팽개치고 정치적 이익을 위해 동분서주 하거나, 선거 때면 직업의 의무조차 저버린 채 선거판에 뛰어드는 사람들은 비난받아 마땅하다. “폴리페서”(polifessor)란 경멸적 용어가 나온 까닭도 거기에 있지 않은가. 과연 정치는 경멸하고 우리들의 일상적 삶에서 떼어놓아야 하는 더러운 일에 지나지 않는가. 정치에 관심을 끄고 자기 일에 충실하게 사는, 우아하고 점잖은 삶이 과연 옳은 길인가. 

    직업으로서 정치에 종사하는 이들은 그들이 지닌 정치적 이해관계를 관철시키기 위해 음습한 공간을 좋아한다. 그들은 시민들의 눈을 피해 그들끼리의 잔치를 벌린다. 앞으로는 명분을 내세우지만 뒤로는 서로의 이해관계에 일치된 행동을 한다. 그래서 그들이 이 사회에서 끊임없이 부채질 하는 것이 정치 혐오와 정치 무관심이다. 더러운 정치라고 욕하면서 돌아서게 만들고, 뒤로는 그들만의 사익을 채우고 있다. 

    전직 대통령이 최근 자신의 업무를 회고하는 책을 발간했단다. 정상적인 정신으로는 들어줄 수가 없을 지경이다. 정치권에서는 “구름 같은 회고인 허언”, “어처구니없다”, “4대강 사업을 경제위기 극복의 대안인양 포장하는 것은 헛된 주장” 등의 하나마나한 평을 하는 모양이다. 그나마 서울대 경제학부 교수 정도가 “4대강 사업과 글로벌 금융위기를 결부시키는 것은 우스꽝스럽기 짝이 없는 자기정당화”이며 “길 가던 분견이 이 말 듣고 가가대소하는 모습이 눈에 선하다”고 비판하는 정도다. 분견이 가가대소한다는 말은 결국 똥강아지도 웃을 개소리란 말을 우아하게 표현한 것이 아닌가. 

    왜 이런 개소리가 버젓이 출판되는 것일까. 이런 현상은 해방 이후 수없이 보아왔던 지극히 일상적인 행태에 지나지 않는다. 나라와 백성을 팔아먹고 자기만의 이익을 누린 반인륜적인 친일파를 숙청하지 못한 것을 시작으로, “성공한 쿠데타는 처벌할 수 없다”고 말하는 법, 술을 마시고 운전은 했지만 음주운전이 아니라는 정치인, 국방의 의무는 힘없는 백성이나 지키는 것이고 이른바 지도자라는 인간들은 모조리 병역을 면제받는 사기꾼 집단의 국가에서 무엇을 바라는가. 

    세월호에서 그렇게 수많은 사람들이 억울하게 죽어갔어도 책임 있는 자는 누구도 처벌받지 않고, 최소한 필요한 이유조차 묻지 못하게 한다. 
    IMF 구제금융 사태로 수많은 가정이 파산하고 죽어갔어도 그들은 호의호식하고 있다. 
    대선에 불법적으로 개입하고 간첩을 조작하고 정상적인 수사를 방해해도 무죄 방면되는 나라, 도대체 이런 사태를 꼽자면 끝이 없을 정도이다. 
    정치혐오와 정치 무관심이 벌어지는 것이 지극히 정상일 수밖에 없다. 
    제정신으로 정치를 바라보면 정신병에 걸릴지도 모른다. 
    분열된 사회와 불의한 정치를 보면서 무엇을 할 수 있단 말인가? 
    정치를 비웃고, 대충 자기 이익을 위해 머리 조아리는 것이 더 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현실이 아닌가.

    그러나 그렇게 살수는 없지 않은가? 
    우리가 조선시대 노비로 살지 않으려 한다면 그럴 수는 없다. 
    무엇을 해야 하는가? 
    숨은 의도와 원인을 알아야 한다. 
    책임을 묻고, 따지고 처벌해야한다. 
    여의도 정치가 아닌 생활정치, 우리들의 삶에 관계되는 올바른 정치에 참여함으로써 바꾸어야 하지 않는가? 
    정치란 전문 직업꾼이 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의 일이 모두 정치이기에 우리 모두는 정치를 해야 한다. 
    정치란 말의 어원이 바로 공동체의 일, 도시국가인 “polis”에 관계되는 일이기 때문이다. 

    정략적 정치에 종사하는 일을 혐오하고 그것이 그들만의 영역인 듯이 말하는 것은 직업꾼 정치인들이 만든 음습한 전략이다. 
    그들끼리 나눠먹기 위해 시민들의 관심을 꺼버리기 위한 공작일 뿐이다. 
    철저히 정치에 관심을 갖고, 계몽된 시민으로써 정치를 감시하고 학습하면서 고발하고 책임을 물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바보가 되고 현대판 노비가 되어 욕이나 하면서 자위하지만, 결국 자신의 삶에서 소외되고 왜곡되는 존재가 될 뿐이다. 

    헤겔의 말처럼 자신의 존재에서 소외되는 삶을 살고 싶다면 술자리에서 정치인들 욕이나 하면서 정치에 관심을 끄고 우아하게 살아가면 된다. 
    그게 아니라면 지금 관심을 가지고 배우고 익히면서, 필요한 실천과 정치참여를 외면해서는 안 될 것이다. 
    그것이 어리석은 백성에서 벗어나 계몽된 시민이 되는 길이다. 

    사대강 사업, 자원외교 비리, 국정원 정치개입, 간첩조작 사건은 물론, 세월호 참사의 원인도 철저히 밝히고 책임을 지워야 한다. 
    대선공약 파기도 끝까지 따져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이런 일은 필연적으로 끊임없이 이어진다. 
    그럴 때 삶은 철저히 소외되고 우리는 현대판 노비로 살아갈 것이다. 
    모욕 받지 않으려면 알고 따지고 물어야 한다.  





    빌라도

    이름의 뜻

    • 라틴어로 ‘창을 가진 자’란 뜻

    직위

    • 로마의 제 2대 황제 티베리우스 시대의 군인
    • 유대 주재 로마 제 5대 총독(눅 3:1)

    총독 파견 배경

    • 로마와 유대헤롯 가문이 긴밀한 유대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고, 유대는 로마의 직접적인 통치를 받지 않고 자치권을 행사했다.
    • 유대교는 로마 제국 안에서 하나의 종교로 인정을 받았다.
    • 헤롯대왕이 죽은 후, 유대는 그의 세 아들인 아켈라오, 안디바, 빌립이 분봉왕으로서 분할 통치를 하였다.
    • 유대사마리아 지역을 통치하던 아켈라오가 추방된 후, 예수님 공생애 기간 중 로마가 이 지역을 직접 통치하기 위해 파견한 총독이 빌라도였다.
    • A.D. 26~36년에 사마리아, 유대, 이두매 지역을 관할한 로마 총독(행정장관)이다.

    총독의 권한

    • 사형 집행권(요 18:31)
    • 산헤드린 공회등 지방법원이 내린 판결을 고칠 수 있는 권한
    • 대제사장 임명권
    • 종교, 사법, 군사등을 주관하는 절대적인 권력

    빌라도가 예수님을 재판한 과정

    구약 예언

    초림 성취


    바라바(Barabbâs)

    마태복음에서는 27:16에 ‘바라바라 하는 유명한 죄수가 있는데’라고 말합니다. 
    죄수(δέσμιος) - ‘갇히다’ ‘포로 되다’는 뜻이다.
    마가복음에서는 ‘민란을 꾸미고 그 민란 중에 살인하고 체포된 자’라고 말합니다. 그는 살인자입니다.
    마가복음 15:7 민란을 꾸미고 그 민란중에 살인하고 체포된 자 중에 바라바라 하는 자가 있는지라
    누가복음에서는 ‘성중에서 일어난 민란과 살인으로 말미암아 옥에 갇힌 자’라고 말합니다. 마가복음과 흡사하게 소개됩니다. 
    누가복음 23:19 이 바라바는 성중에서 일어난 민란과 살인으로 말미암아 옥에 갇힌 자러라

    마지막 요한복음의 설명을 봅시다. 요한복음에서는 ‘강도’라고 말합니다. 
    강도(λῃστής)
    요한복음 18:40 그들이 또 소리 질러 이르되 이 사람이 아니라 바라바라 하니 바라바는 강도였더라

    그런데 강도라는 레스테스라는 단어가 마태복음 21:13에서 성전청결을 하시면서 ‘강도의 소굴’이란 표현에 등장합니다.

    마태복음 21:13 
    그들에게 이르시되 기록된 바 내 집은 기도하는 집이라 일컬음을 받으리라 하였거늘 너희는 강도의 소굴을 만드는도다 하시니라. 

    이 단어가 마태복음에 몇 번에 걸쳐 등장하는데 중요한 부분에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신 그 옆에 두 강도가 같이 못박히는데 바로 그 강도들에게 사용된 단어입니다.
    마태복음 27:38 
    이 때에 예수와 함께 강도 둘이 십자가에 못 박히니 하나는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 있더라

    레스테스라는 강도라는 단어가 가장 명확하게 소개되는 곳은 누가복음 10:30입니다. 
    이곳은 우리가 잘 아는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입니다.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강도를 만납니다. 
    바로 그 강도가 레스테스라는 단업니다. 
    더 설명이 필요 없을 것 같습니다.

    누가복음 10:30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강도를 만나매 강도들이 그 옷을 벗기고 때려 거의 죽은 것을 버리고 갔더라

    그러니까 바라바가 누구나 한 마디로 그는 로마에 대항하여 일어나는 민족주의자인 동시에 다른 사람들을 약탈하는 비겁하고 악랄한 도둑이며 강도인 것입니다. 
    바라바는 아마도 유대인들에게 잘 알려진 폭력 조직의 일원이었을 것으로 추측됩니다. 
    그런 그였기에 빌라도는 유대인들에게 바라바와 예수를 선택하라고 한 것입니다. 
    빌라도의 생각에 유대인들은 당연히 예수님을 선택할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빌라도의 예상은 빗나갔고, 아무런 죄도 없는 예수님을 십자가에 달라고 소리 지르는 유대인들을 발견합니다. 
    그리고 예수님께 뒤집어 씌운 죄명은 ‘유대인의 왕’이었습니다. 
    현재 유대인에게 왕은 없습니다. 
    예전에 헤롯왕이 있었지만 퇴위되고 로마관원인 빌라도가 총독으로 다스리고 있는 곳입니다. 
    그러니까 유대의 왕은 로마 황제였습니다. 
    유대인들은 황제가 우리의 왕인데 예수라는 자가 자신이 유대인인의 왕이라고 했으니 반역자가 아니냐. 
    그를 십자가에 못 박아야 한다. 
    만약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지 않으면 당신 빌라도는 황제를 거역하는 자가 된다. 라고 협박하기에 이릅니다. 
    빌라도는 거역이라는 말에 깜짝 놀라 어쩔 수 없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내어줍니다. 
    그리고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 언덕길을 오르게 됩니다.

    바라바는 자신이 당연히 십자가에 못 박혀 죽게 될 것이라 예상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풀려난 것입니다. 
    로마 군인들이 자세히 설명을 해줄 리는 없었을 겁니다. 
    바라바가 살아날 수 있었던 또 하나의 이유는 바로 그 때가 정확히 유월절 기간이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유월절의 어린양으로서 인류의 죄를 대속하게 됩니다. 
    그런데 옛날부터 로마는 유대인들의 환심을 사기 위해 유대인의 명절 중에서 가장 큰 명절인 유월절에 죄수 한 명을 풀어주었습니다. 
    대부분 이 때 풀려나는 죄수들은 정치범들이었습니다. 
    유대민족들을 위해 혁명을 일으키고 민족을 위해 자신의 목숨을 아끼지 않았던, 즉 유대인들이 좋아하는 죄수를 풀어 주어야 환심을 살 수 있었습니다. 
    이 절묘한 시기에 바라바는 선택을 당해 어부지리(漁父之利)로 풀려나게 된 것입니다. 
    정말 우연처럼, 뜻하지 않는 다시 살아날 수 있는 기회를 얻은 것입니다.

    바라바는 풀려 난 후 무엇을 했을까요? 자신을 대신해 죽은 예수를 생각하며 고마워하며 십자기의 길을 따라갔을까요? 
    아니면 또 붙잡힐지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에 멀리 도망을 갔을까요? 
    성경은 바라바의 이후 행적에 대해 침묵하고 있습니다.

    스웨딘 출신의 작가 페르 라게르크리스트라는 사람이 쓴 <바라바>라는 책에서 바라바는 예수님을 믿으려고 노력하지만 진정한 믿음에 이르지 못한다는 이야기입니다. 
    상상으로 지어낸 것이기에 신뢰할만은 것은 아니지만 어느 정도 가능성 있는 접근입니다. 
    우리는 바라바가 이후에 어떤 선택을 했지 아무도 모른다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바로 이것입니다. 
    이제 바라바에게는 ‘선택의 기회’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는 앞으로 어떤 삶을 살아야 할지 기회가 생긴 것입니다. 
    예수를 따라 십자가의 길을 따라갈 것인지, 다시 옛사람의 모습으로 되돌아가 사람을 죽이는 강도로 살아갈 것인지를 선택해야 합니다.






    11월 5일(목) 마가복음 14-16장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무리에게 만족을 주고(15:15)

    빌라도가 무리에게 만족을 주고자 하여 바라바는 놓아 주고 예수는 채찍질하고 십자가에 못 박히게 넘겨주니라.
    Wanting to satisfy the crowd, Pilate released Barabbas to them. He had Jesus flogged, and handed him over to be crucified.

    무리에게 만족을 주려는 정치
    진리를 실현하려는 정치
     

    빌라도(Pilate)라는 이름의 뜻은 라틴어로 "창을 가진 자"라고 합니다.
    빌라도는 로마의 제2대 황제 티베리우스 시대의 군인으로 유대 주재 로마 제5대 총독이었습니다(눅 3:1).
    총독의 권한은 첫째는 사형 집행권(요 18:31)
    둘째는 산헤드린공회 등 지방법원이 내린 판결을 고칠 수 있는 권한
    대제사장 임명권 
    종교 사법 군사등을 주관하는 절대적 권력 


    무리에게 만족을 주고자 버려진 예수


    본디오 빌라도는 팔레스타인 지방을 다스리는 로마 총독이다. 그는 팔레스탄 지역을 다시리는 통치권자로서 예수를 사형 판결한 사람이다. 예수를 사형 판결할 때 죄를 발견하지 못했지만 “무리들의 만족을 채워주기 위해 채찍질하고 십자가에 못 박히게 넘겨주라고”(막15:15) 판결을 내렸다.

    빌라도는 예수님을 재판하면서 예수님에게 죄를 찾지 못했다. 죄를 발견하지 못했지만 재판을 끝냈다. 단지 "무리들에게 만족을 주고자" 죄가 없지만 예수를 채찍질하고 십자가에 못 박히게 넘겨주었다.

    예수를 십자가에 죽이는 과정에 참여한 무리들이 있다. 대제사장과 장로와 서기관들이 모여 예수를 죽이고자 모의한다. 대제사장들은 무리를 충동하여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게 하라고 소리치도록 선동했다. 그리고 백성들은 자신들이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 모른 체 큰 소리로 외쳤다. 빌라도는 무리에게 만족을 주고자 채찍질과 십자가에 못 박게 했다.

    늦은 밤과 아침 사이에 7번이나 왔다갔다하며 재판을 했다. 여기에는 정의도, 양심의 가책도, 진리의 호소도 없다.  변호도 없다. 하나님을 두려워함도 없다. 모든 것을 아랑곳하지 않고 주어진 고난인 것이다. 오직 만족을 주기 위해서 주님을 십자가에 던져 버린 것이다.

    대중들의 만족을 위해서 던져진 결정이 얼마나 무모한 가를  기록된 성경을 통해서 역사는 증명하고 있다.

     최원영목사, 본푸른교회, 본헤럴드대표,  TBMC 대표, 변화산기도원협력원장, 서울신대신학박사. 등

    ○신앙생활, 자기만족인가 진리 추구인가

    무너지는 자기만족형 신앙의 특징

    우리 삶의 흔적, 가장 가까운 이들이 안다

    오늘날의 빌라도와 무리들

    고난주간은 자신의 신앙생활을 주님의 말씀에 비추며 다시 정리하는 시간들이다. 신앙생활은 자기만족을 위해서 하는 것이 아니다. 자기만족이라는 체면에 걸리면 더 이상 양심도 인격도 신앙의 성숙도 없다. 자기만족을 채우기 위한 헌금, 찬양, 봉사, 기도생활은 유익이 없다.

    신앙생활하다가 자기만족이라는 수렁에 빠지는 분들의 특징이 있다. 자기만족이 떨어지면 헌금도, 봉사도, 기도도, 기본적인 예배생활도 다 포기한다. 자기만족은 거품이다. 거품은 언젠가는 꺼져버린다. 흔적도 없이 사라진다.

    우리는 말씀에 기초한 믿음의 흔적을 남겨야 한다. 우리가 어떻게 살고 있는지 가까운 사람들은 잘 알고 있다. 자녀들은 더 잘 안다. 부부는 내 남편이 내 아내가 어떤 수준의 신앙생활을 하는지 잘 안다. 왜냐하면 우리는 자신도 모르게 모든 흔적을 남기기 때문이다.

    자기만족을 위해서 신앙생활을 하다보면, 우리는 어느 순간 빌라도와 같은 결정을 한다. 또한 무리들과 같은 수준의 삶을 살게 된다.


    ○사도신경 속 영원히 기록된 이름

    본디오 빌라도란 이름은 사도신경에 나오는 인물이다.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아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시고” 예배 때 마다 암송하는 사도신경에 나오는 구절이다. 그가 그렇게 될 줄 상상이나 했을까? 지구가 존재하는 한, 본디오 빌라도라는 이름은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불리워질 것이다. 만약에 빌라도가 무리들에게 만족을 주고자 예수님을 십자가에 처형하라고 재판을 내리지 않았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위대한 총독으로 길이길이 기억될 것이다.

    무리들은 종교지도자들의 충동질로 인해서 예수를 채찔질하라,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외쳤다. 자신들이 지금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 전혀 의식도 없이 외쳤다. 그 피흘림의 외침을 역사의 흐름속에서 자손 대대로 받았다.


    ○한국 사회 속 이념의 외침

    신앙은 감정이 아니라 말씀이다

    교묘하게 다가오는 사단의 유혹

    한국의 이념전쟁은 양쪽 진영으로 나눠진 싸움판이다. 정의도 진리도 균형도 없다. 오직 내편이냐 네 편이냐의 싸움만이 독버섯처럼 퍼져가고 있다. 이것에 편승해서 먹고 사는 인생들이 참 많다. 좌우를 분별하는 정치인과 시민들이 많아 균형을 잡아 주는 사회가 되었으면 좋겠다. 법적인 상식을 벗어난 좌우 대립은 결국에는 국가만 망가지고 국민들의 삶만 고달퍼진다.

    신앙은 자기만족이 아니다. 자기만족은 늘 자기가 기준이다. 기분 좋을 때는 한없이 잘하는데, 기분이 상하거나 여건이 힘들어지게 되면 포기한다. 신앙은 내 기분이 아니라 십자가의 정신으로 해야 한다. 말씀에 비취어 보면서 해야 한다. 그래야 쓰러지지 않고, 견고한 신앙인으로 성장하게 된다. 말씀에 뿌리가 없고, 자기 기분이나 만족을 위해서 교회생활하면 언젠가는 무너진다.

    사단은 아주 교묘하게 나를 파고 들어와서 나를 넘어뜨린다. 사단은 나를 너무도 잘 알고 있다. 내가 무엇이 약한지를 잘 안다. 나보다 나를 더 잘 아는 것이 사단이다. 돈에 약한 사람은 돈을 치고 들어오고, 성에 약한 사람은 성적인 문제로 치고 들어오고, 입이 방정맞은 사람은 입술로 찾아오고, 명예에 약한 사람은 명예로 치고 들어와서 넘어뜨린다.

    빌라도는 사단의 앞잡이가 된 것이다. 얼마나 불쌍한 인간인가? 빌라도는 예수님을 죽인 인물로 역사의 기록 속에 영원히 남겨진 불쌍하고 가련한 인생이 되고 말았다.


    ○말씀 앞에서의 자기 점검

    신앙생활할 때 우리는 늘 말씀과 십자가앞에 자신을 비추는 습관을 가져야 한다. 자기만족인지, 자기 기분인지, 자기 생각인지를 수시로 본질을 점검하는 습관이 필요하다. 당이 높은 사람은 살기위해서 당 수치를 늘 체크한다. 마찬가지로 우리도 믿음대로 살기 위해서 늘 신앙의 동기가 병들었는지를 체크해야 한다.

    신앙생활하면서 우리가 함정에 잘 빠지는 경우가 있다. 자기 기분과 자기감정과 자기만족의 체면에 걸리면 실패한다. 어린이들은 자기가 기준이다. 그러나 청소년기를 지나고 어른이 되면 더 이상 자기가 기준이 아니다. 다른 사람들의 기분이나 생각이 무엇인지를 판단하고 행동한다.

    ○성숙한 신앙으로 나아가기

    사도요한은 신앙의 성숙도를 말하는데 어린이와 청년과 장년이 있다고 한다. 예수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까지 성장하라고 권면한다. 인격이 자라고, 성품이 자라고, 생각이 자리고, 비전이 자라고, 사명이 자라고, 믿음이 자라야 한다. 성장하면 자기만족이라는 틀에서 벗어날 수 있다. 자기 생각을 말하지 말라. 자기 기분에 집중하지 말라. 자기만족에 빠지지 말라. 오직 예수의 말씀과 정신에 마음과 생각이 가득 채워지기를 바란다. 고난주간을 보내면서 빌라도와 같은 약삭빠른 정치적 결정, 무리들과 같은 맹목적인 외침이 얼마나 큰 어리석음인가를 다시 기억하면 좋겠다. 또한 자신의 만족을 위한 신앙생활의 덧에서 벗어나는 성숙함을 기대해본다.




    유대인들의 공회는 예수님을 그들이 기대한 메시아로 믿지 않으면서도 로마 법정에 예수님을 유대인들의 왕이라는 죄목으로 기소한다. 그들은 자기모순을 범했을 뿐 아니라, 없는 죄를 뒤집어씌워 기소하는 죄도 저질렀다. 
    예수님에 대한 기소는 표면적으로 볼 때에는 자기들의 왕을 체포해 제국의 법정에 기소하는 비겁한 매국노의 모습이기도 했다. 
    예수님이 무죄이며, 예수님을 기소한 대제사장의 주요 동기는 시기심이었음을 로마 총독마저 알았다.

    ​예수님 대신 바라바를 풀어 달라고 요청한 무리는 바라바의 지지자들이었다. 
    그들이 바라바를 선택한 것은 당연한 일이지만, 그들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요구한 것은 분명 잘못이었다. 
    그들은 바라바의 석방으로 만족해야 했다. 
    그들은 대제사장의 선동을 받았더라도(11절) 무죄한 사람을 처형하라고 요구하지는 말았어야 했다. 그들에게 무장투쟁의 길을 거부한 예수님은 죽여도 되는 인물이었고, 무장투쟁을 일으킨 바라바는 반드시 살려야만 하는 인물이었던가? 그들에게는 무죄한 예수님을 죽이라고 요구한 죄책이 있다. 무리의 요구에 따라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도록 내어준 재판장에게도 책임이 있다. 그는 여론에 따른 판결은 죄수나 피고를 사면하는 데서 그치고, 피고에 대한 유죄 판결은 법과 사실에 따라 공정하게 처리해야 했다. 그러나 그는 무리의 요구에 따라 법률과 사실에 부합하지 않는 판결을 했다. 이 불의한 정치 재판에 대한 책임을 재판장 빌라도는 면할 수 없다. 우리 시대에도 예수님을 기소한 대제사장 같은 검사, 바라바의 지지자들 같은 시민, 빌라도 같은 판사가 생겨날 수 있다. 우리도 깨어 있지 않으면 누구나 그렇게 될 수 있다.​



    빌라도가 무리에게 滿足(만족)을 주고자 하여 바라바는 놓아 주고 예수는 채찍질하고 十字架(십자가)에 못 박히게 넘겨주니라.


    막10:34 그들은 릉욕하며 침 뱉으며 채찍질하고 죽일 것이니 저는 삼일 만에 살아나리라 하시니라
    사50:6 나를 때리는 자들에게 내 등을 맡기며 나의 수염을 뽑는 자들에게 나의 뺨을 맡기며 수욕과 침 뱉음을 피하려고 내 얼굴을 가리우지 아니하였느니라
    사53:5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눅23:16 그러므로 때려서 놓겠노라
    요19:1 이에 빌라도가 예수를 데려다가 채찍질하더라


    갈라디아서 1:10
    이제 내가 사람들에게 좋게 하랴 하나님께 좋게 하랴 사람들에게 기쁨을 구하랴 내가 지금까지 사람의 기쁨을 구하는 것이었더면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니라.
    Am I now trying to win the approval of men, or of God? Or am I trying to please men? If I were still trying to please men, I would not be a servant of Christ. 

    전도서 12:14
    하나님은 모든 행위와 모든 은밀한 일을 선악간에 심판하시리라.
    For God will bring every deed into judgment, including every hidden thing, whether it is good or evil.


    우리는 사람들의 시선을 많이 신경씁니다.
    그러다보니 인심을 얻기위해 또는 좋은 평판을 위해 중요한 것을 놓칠 때가 있습니다.

    빌라도는 진정으로 예수님이 죄가 없음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풀어주려고 합니다.
    심지어 마태복음에서는 빌라도의 아내까지도 빌라도에게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지 말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빌라도 또한 종교지도자들이 이 예수님을 시기하는 것을 알게됩니다.







    11월 5일(수) 마가복음 12-13장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멸망의 가증한 것(13:14)

    멸망의 가증한 것이 서지 못할 곳에 선것을 보거든 (읽는 자는 깨달을찐저) 그 때에 유대에 있는 자들은 산으로 도망할찌어다.
    When you see 'the abomination that causes desolation'standing where it does not belong--let the reader understand--then let those who are in Judea flee to the mountains. 

    그 멸망의 그 가증한 것
    토 브델뤼그마 테스 에레모세오스
     το βδελυγμα της ερημωσεως

    멸망의(2050)  ἐρήμωσις, εως, ἡ Storng number 2050

    1. 유린.  2. 황폐.  3.  파괴 
    Pronunciation [ ĕrēmōsis ]
     Etymology / 
    • 1. 유린, 황폐, 파괴, 마24:15, 막13:14, 눅21:20.
    • 관련 성경 / 파멸, 멸망(마 24:15, 막 13:14, 눅 21:20).



    가증한 것(946)  βδέλυγμα, ατος, τό

    1. 혐오하는 것.  2. 하나님의 진노를 일으키기 때문에 그 앞에 내놓을 수 없는 것
    3. 구약에 나타나는 우상과 관련된 모든 것
    Pronunciation [ bdĕlugma ]  
    Etymology  / 948에서 유래
    • 1. 혐오하는 것, 몹시 싫은 것.
      • a.  [문자적으로] 하나님의 진노를 일으키기 때문에 그 앞에 내놓을 수 없는 것, 눅16:15.
      • b. 구약에 나타나는 우상과 관련된 모든 것, 계17:4, 5, 21:27.
      • c.  τὸ β. τῆς ἐρημώσεως: 거룩한 곳을 황폐하게 하는 혐오할 만한 것, 마24:15, 막13:14.
    • 관련 성경  / 가증한 것(마 24:15, 막 13:14, 계 17:4), 미움을 받는 것(눅 16:15)

    마태복음 24:15-16
    그러므로 너희가 선지자 다니엘의 말한바 멸망의 가증한 것이 거룩한 곳에 선 것을 보거든 (읽는 자는 깨달을찐저) 
    그 때에 유대에 있는 자들은 산으로 도망할찌어다. 

    마가복음 13:14
    멸망의 가증한 것이 서지 못할 곳에 선것을 보거든 (읽는 자는 깨달을찐저) 그 때에 유대에 있는 자들은 산으로 도망할찌어다.

    요한계시록 17:4
    여자는 자주 빛과 붉은 빛 옷을 입고 과 보석과 진주로 꾸미고 손에 잔을 가졌는데 가증한 물건과 그의 음행의 더러운 것들이 가득하더라.


    滅亡(멸망)의 可憎(가증)한 것이 서지 못할 곳에 선 것을 보거든 읽는 者(자)는 깨달을진저그 때에 유대에 있는 者(자)들은 山(산)으로 逃亡(도망)할지어다.


    다니엘 9:27 
    그가 장차 많은 사람으로 더불어 한 이레 동안의 언약을 굳게 정하겠고 그가 그 이레의 절반에 제사와 예물을 금지할 것이며 또 잔포하여 미운 물건이 날개를 의지하여 설 것이며 또 이미 정한 종말까지 진노가 황폐케 하는 자에게 쏟아지리라 하였느니라.

    다니엘 11:31 
    군대는 그의 편에 서서 성소 곧 견고한 곳을 더럽히며 매일 드리는 제사를 폐하며 멸망케 하는 미운 물건을 세울 것이며.

    다니엘 12:11 
    매일 드리는 제사를 폐하며 멸망케 할 미운 물건을 세울 때부터 일천 이백 구십 일을 지낼 것이요.


    다니엘 9:23 
    곧 네가 기도를 시작할 즈음에 명령이 내렸으므로 이제 네게 고하러 왔느니라 너는 크게 은총을 입은 자라 그런즉 너는 이 일을 생각하고 그 이상을 깨달을지니라

    다니엘 9:25 
    그러므로 너는 깨달아 알지니라 예루살렘을 중건하라는 영이 날때부터 기름부음을 받은 자 곧 왕이 일어나기까지 일곱 이레와 육십이 이레가 지날 것이요 그 때 곤난한 동안에 성이 중건되어 거리와 해자가 이룰 것이며

    요한계시록 1:3 
    이 예언의 말씀을 읽는 자와 듣는 자들과 그 가운데 기록한 것을 지키는 자들이 복이 있나니 때가 가까움이라
    .







    가증한 것 이란 말은 원래 이교도의 우상 숭배와 가증스러운 일들을 가리켰다. 
    멸망의 가증한 것 이란 표현은 우상 숭배하는 자들이나 그 대상이 너무 가증하여 성전을 버리게 하고 황폐케 한다는 것을 언급한 것이다. 예수께서 사용하신 멸망의 가증한 것 이라는 말은 그 예언이 또 한 번 성취될 것을, 즉 A. D. 70년의 성전 모독과 파괴를 언급한 것이었다. 
    그의 제자들 즉 예수와 함께 있었던 사람이나 미래의 사람들이 이같은 성전 모독 사건이 일어나는 것을 볼 때 그것은 유대에 있는 사람들은 베뢰아 요단강을 건너 산으로 도망하라는 신호이다. 

    요세프스는 A. D. 67 - 68년에 유대 열심당들이 성전을 모독하고 성전을 점령한 사건이 있었다고 기록하였다. 
    그들은 성전을 점령하고 침략자 파니를 대제사장으로 임명하였다. 가증한 것 이 어떤 물건이 아니라 서 있지 못할 곳에 서 있는 장래의 어떤 인물이라는 것을 암시한다.

    이러한 위기가 일어날 때에 자기 집의 지붕 위에 있는 자는 무엇을 가지려고 결코 집안으로 들어가서는 안된다. 
    밭에서 일하고 있던 자들도 추운 밤 공기를 막아 주는 겉옷을 가지려고 다른 밭이나 집으로 가서는 안된다. 
    예수는 그러한 어려운 상황하에서 도망가야만 하는 아이 밴 여자와 젖먹이는 어머니들에게 동정을 나타낸다. 
    그는 그의 제자들에게 이런 일이 강물이 많이 불어 건너기 어렵게 될 우기인 겨울철에 일어나지 않도록 기도하라고 권고하셨다.

    그들이 급하게 도망해야 하는 이유는 또 다행히도 도망하는 데 방해를 받지 않을 것인데 그 이유는 창조 때부터 지금까지 이런 재난의 날들이 없었고 결코 또다시 똑같은 일들이 일어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 전례 없는 재난은 예루살렘의 멸망에도 해당되지만 거기에만 국한 된 것은 아니었다. 이것은 예루살렘 멸망을 넘어서 재림에 앞서 있을 마지막 대환란 이기도 한 것이다. 

    예수님은 예루살롐 성전이 하나님이 지켜주심으로 무너지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당시 유대인들과 또 제자들의 망상을 깨트리시며
    "돌이 돌 위에 하나도 남기우지 않고 다 무너뜨려 지리라" 고 하셨다. [23:38]

    그렇다면 그 날은 언제인가?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년대를 말씀하시지 않았지만 그의 말씀을 듣고 순종하는 자들이 구원을 받도록 다니엘의 말한 바 멸망의 가증한 것이 거룩한 곳에 선 곳을 보거든 그 때에 유대에 있는 자들은 성 안에 남아있지 말고 성밖 산으로(피난할 만한 곳으로) 도망하라고 하신다.

    예수님의 이 말씀이 그가 승천하신 후 한 세대가 조금 더 지난 주후 70년에 얼마나 정확하게 성취되었는가를 보려면 유대인 역사가 요셉푸스가 기록으로 남긴 유대 전쟁사 제 3권을 보면 자세히 나와있다. 

    유대인 역사가 요셉푸스는 본래 유대 반란군 국방장관이었다
    그는 로마제국 네로 황제 시절 유대인들이 로마 제국을 향해 반란을 일으켰을때 갈릴리 전투에서 유대군을 이끌다가 포로로 잡혀 후에는 친로마 인사가 되는데 그 사연은 이렇다. 

    당시 로마군을 이끌고 유대로 진격해온 로마군 사령관은 베스파니안 이었고 그의 아들은 티투스 였는데 욥바 전투 이후 포로가 된 요셉푸스는 베스파니안 앞으로 잡혀갔을 때  그는 신통방통하게도 베스파니안이 장차 로마 황제가 된다고 예언을 해주고 베스파니안의 아들 티투스의 호감을 받아 살아난다.
    그리고 실제로 후에 네로 황제가 피살뎐 후 베스파니안과 티투스는 대를 이어 로마 황제가 된다

    베스파니안과 티투스는 요셉푸스를 신임하기에 이르러 그늘 매우 극진히 대접하고 높여주었는데 이는 또한 그를 이용하여 유대의 반란 가담자들을 회유코자 함이었다.

    따라서 예루살렘 전쟁 이외에도 유다의 각 지방 성에서 로마군과 유대인 사이에 전쟁이 시작될 때 마다 요셉푸스는 중재자로 나서 유대인들에게 투항을 권하지만 , 8ㅑㅓ 2ㅂㅁ열심당원들(책에서는 강도 뗴들)에 의해 저항은 계속된다. 

    결국 유대의 반란군들은 계속 밀려서 예루살렘까지 들어와 성을 장악하고 최후 방어망을 치게 되는데 이 과정에서 열심당원들이 같은 동족 유대인들에게 가한 약탈과 행퍠가 너무 심하여 유대인들 중에는 스스로 로마 군에 투항하는 자들도 많이 나오게 되었다. 

    로마군은 예루살렘 성 안에서 끝까지 저항하는 반란군을 멸하기 위하여 성 주변에 토성을 쌓게 되는데 이로써 성 안에는 양식이 동이 나고 기근이 심하여 죽는 사람들이 너무 많아 악취가 진동함으로 시체들을 성밖으로 내던지는데 까지 이르게 된다. 

    로마군은 예루살렘 성문에 불을 지르는 것을 시작으로 유대 반란군들과 싸우면서 성안으로 들어가게 되는데 이 때 그들의 군단기를 앞세우고 들어가 마침내 예루살렘 성전 동문 안으로까지 들어가게 되고 거기에 이 군단기를 세우게 된다. 
    로마군대는 자신들의 군단기 자체를 신성시 했는데 그들에게는 군 단기 자체가 하나의 특별한 우상이었다.

    이들은 이 군단기 앞에 제물을 바치고 제사를 드리는 바 예루살렘 성전 안에 들어가 이렇게 하였으니 이는 곧 주전 4세기의 선지자 다니엘이 예언한 그대로 주후 169년 안티오쿠스 에피파네스의 시리아 군대가 예루살렘을 점령하고 성전에 들어가 그 거룩한 곳에 자신들의 우상을 세우고 돼지의 피로 제사를 드린 것같은 일이 다시 한 번 재현된 것이니 예수님의 경고처럼 " 가증한 것이 거룩한 곳에 선 것이 된 것이었다.

    특이한 것은 주후 70년에 발발한 유대 전쟁에서 예루살렘이 함락되고 성전이 불태워지며 무너진 것이 주전 587년 솔로몬이 건축한 예루살렘 성전이 바벨론 군대에 의해 불태워지고 무너뜨려진 날과 똑 같은 아빔월 14일 이어서 유대인들은 이 날을 금식일로 지킨다고 한다.

    로마군에 의해 예루살렘 성과 성전이 불태워지고 함락되면서 유대의 전쟁은 막을 내리게 되는데  이 때 죽은 사람들의 수효가 약 백이십만명(1,200,000)인데 하필이면 유월절기를 맞아 수많은 유대인들이 성전에 올라왔다가 로마군에 의해 포위되면서 희생자가 이렇게 많이 나왔다고 한다. 

    당시 유대인들은 하나님께서 성전을 지켜주실 것임으로 성전으로 들어가면 산다고 생각하여 성전으로 몰려들었는데 또 이렇게 된 배경에는 당시 성을 사수하는 열심당원들이 거짓 선지자들을 매수하여 그들로 하여금 거짓 예언으로 성전으로 들어오면 산다고 말하게 하였다고 하니 이들은 "산으로 도망하라"고 하신 예수님과 정 반대의 예언을 하여 수 많은 사람들을 죽음으로 몰아넣은 결과가 되고 말았다. 

    그러나 당시 초기 교회 성도들은 예수님의 이 말씀을 기억하고 자신들의 목숨을 건졌다는 기록을 볼 수 있다. 

    이제 한절 묵상의 글을 내리면서 마음에 새기는 것은 예수님께서 예언의 원근법을 사용하시어 예루살렘 멸망의 날을 하나의 모형으로 삼으셔서 장차 세상 끝날에 있게 될 일들을 예고해 주신 것인데 그 때는 적그리스도가 통치하는 시대로써[계 13장] 성도들은 더 이상 이전과 같은 일상의 삶에 미련을 두지 말고 산으로 도망가는 것으로 상징된 피난처로 피해야 할 것을 암시받게 된다.

    그렇다면 산으로 상징된 그 피난처는 어디인가?

     "여호와는...나의 요새이시요 
    나의 산성이시요 
    나를 건지시는이시요 나의 방패이시니
    내가 그에게 피하였고[시편 144:2]

    내가 산을 향하여 눈을 들리라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올꼬 
    나의 도움은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에게서로다
    이스라엘을 지키시는 이는 
    졸지도 주무시도 않으시리로다[시121:1-4]

    그 때(적그리스도의 날에)는 세상 재물이나 일상적 삶도 포기하고 예수님의 말씀처럼 특별 조치를 따라야할 때이다 

    창세기 19장에서 소돔 고모라에 남겨둔 재산과 삶이 그리워 뒤를 돌아보다가 소금 기둥이 되어버린 롯의 이야기는(눅 17:32)
    지금 이 세상에 미련을 두고 살아가는 성도들에게 경종이 된다.

    "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지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안에 있지 아니하니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부터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부터 온 것이라[요일 2:15-16]







    멸망의 가증한 것 (14절) : 
    이 구절은 다니엘서에서 가져온 것입니다. 
    다니엘은 기록합니다. 

    다니엘 11:31
    그의 군대가 성전의 요새지역을 더럽힐 것이며, 날마다 드리는 제사를 없애고, 흉측한 파괴자의 우상을 그 곳에 세울 것이다.

    신약과 구약 사이 시대에 그리스 왕 안티오쿠스 에피파네스에 의한 성전의 더럽힘이 예언되었습니다. 

    학자의 설명을 인용합니다.  

    안티오쿠스 에피파네스는 예루살렘 성전을 끔찍한 방법으로 더럽혔다. 
    실제로 안티오쿠스가 성전을 '가증하게' 더럽힌 후 많은 시간이 흐른 후에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하셨기 때문에, 그 사건은 당시에 진행 중이었습니다. 학자는 바울의 기록을 인용하면서 이 사건을 연결시킵니다.  

    여러분은 아무에게도 어떤 방식으로도 속아 넘어가지 마십시오. 그 날이 오기 전에 먼저 믿음을 배신하는 일이 생기고, 불법자 곧 멸망의 자식이 나타날 것입니다. 그는 신이라고 불리는 모든 것이나 예배의 대상이 되는 모든 것에 대항하고, 그들 위로 자기를 높이는 자인데, 하나님의 성전에 앉아서, 자기가 하나님이라고 주장할 것입니다. (새번역, 살후 2:3-4) 

    이 구절에 대한 학자들의 많은 주석이 있습니다. 
    일부 학자들은 '멸망의 가증한 것'이 예루살렘이 파괴된 AD 70년에 이루어졌다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또는 예수님이 그 이후에 영광으로 재림하신다는 주장도 있습니다. 
    그 뜻은 아직 오지 않은 미래를 의미합니다. 

    유대에 있는 자들은 산으로 도망하여라 (14절) 

    그런 사건이 일어나면 예수님은 유대인들에게 경고하십니다. 
    "옷을 가지러 집으로 돌아가지도 말라!" 명령하십니다. 
    그 사건이 이미 이루어진 것인지 아직 이루어지지 않은 것인지 우리는 알 수 없습니다. 
    예수님이 영광으로 재림하실 때 일어날 사건일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은 현대를 사는 우리에게도 경고하십니다. 

    늘 깨어서 기도하라!

    예수님은 다니엘서의 이중적인 예언의 말씀을 인용해서 말씀하셨습니다(단 9:27, 11:31, 12:11). 

    滅亡(멸망)의 可憎(가증)한 것이 서지 못할 곳에 선 것을 보거든 읽는 者(자)는 깨달을진저그 때에 유대에 있는 者(자)들은 山(산)으로 逃亡(도망)할지어다.


    다니엘 9:27 
    그가 장차 많은 사람으로 더불어 한 이레 동안의 언약을 굳게 정하겠고 그가 그 이레의 절반에 제사와 예물을 금지할 것이며 또 잔포하여 미운 물건이 날개를 의지하여 설 것이며 또 이미 정한 종말까지 진노가 황폐케 하는 자에게 쏟아지리라 하였느니라.

    다니엘 11:31 
    군대는 그의 편에 서서 성소 곧 견고한 곳을 더럽히며 매일 드리는 제사를 폐하며 멸망케 하는 미운 물건을 세울 것이며.

    다니엘 12:11 
    매일 드리는 제사를 폐하며 멸망케 할 미운 물건을 세울 때부터 일천 이백 구십 일을 지낼 것이요.



    다니엘서에 “멸망의 가증한 것”은 일차적으로 이스라엘을 파괴하는 이방의 왕들과 장군들을 의미합니다.

    다니엘의 예언대로 주전(BC) 168년경에 셀레우쿠스(Seleucus) 왕조의 안티오쿠스 4세 에피파네스(Antiochus IV Epiphanes)에 의해 예루살렘이 파괴되었던 일이 있었습니다. 
    안티우쿠스 4세에게 ‘에피파네스’라는 ‘미친 자’를 뜻하는 별명이 붙은 것은 교활하고 사악했기 때문입니다. 
    안티오쿠스 에피파네스는 안식일에 유대를 침공해서 무방비 상태였던 유대를 손쉽게 정복할 수 있었습니다.

    사악했던 에피파네스는 유대인들과 제사장을 죽였고, 유대인들이 중요시했던 매일의 제사를 폐하고, 대신 부정한 짐승이었던 돼지를 제물로 드리게 했고, 또한 성소에 제우스 신상을 제단에 세웠습니다. 
    주전 169년에는 성전을 약탈해버렸습니다. 
    안티오쿠스 4세 때 대제사장의 직분을 돈 주고 사게 했습니다
    그 악습이 신약에서도 이어져 신약성경에 ‘대제사장들’이라는 둘 이상의 복수를 쓴 것도 안티오쿠스 4세의 악영향 때문이었습니다. 
    안티우쿠스 에피파네스 마지막 때에 나타날 적그리스도의 모형이기도 합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길 “멸망의 가증한 것이 거룩한 곳에 선 것을 보거든”(15절), “유대에 있는 자들은 산으로 도망가라”(16절)고 말씀했습니다. 
    본문 17-18절에서, 물건이나 겉옷을 가지러 돌아가지 말라고 말씀했습니다. 살고 싶으면 주저 말고 곧바로 피하라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다니엘서를 인용해서 성전의 멸망을 말씀하셨던 것도 앞서 말씀드린 대로 안티오쿠스 4세 때 우상으로 성전이 더럽혀진 경험이 있었기에, 예수님의 말씀이 무슨 말뜻인지 유대인들은 잘 알고 있었습니다. 
    예루살렘 성전이 다시 이방인에게 더럽혀지고, 포위될 때가 오면 그날에 주저 말고 예루살렘을 떠나라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의 말씀대로 주후(AD) 70년경 로마의 티투스(Titus)가 예루살렘 성전을 포위했습니다. 
    이때 유대 종교지도자들은 하나님의 도성인 예루살렘은 망하지 않는다며 하나님의 보호하심이 있는 안전한 성전으로 대피하라고 말했습니다. 
    종교지도자들의 말을 따라 많은 사람이 예루살렘과 성전으로 대피했으나 그들의 기대와 달리 로마 군대는 예루살렘을 처참하게 파괴했고, 예루살렘에 모였던 유대인들을 무참히 학살했습니다. 
    유대 역사가 요세푸스가 말하길 유대인들이 무려 110만 명이나 죽었고, 10만 명 정도가 포로로 잡혀갔다고 기록했습니다.

    예루살렘에 대학살이 일어날 때 예수님의 말씀대로 예루살렘을 떠나 저 멀리 산으로 도망간 사람들은 모두 살 수가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따라 순종한 사람들은 생명을 보존하게 됩니다. 우리가 인생을 살다 보면 산으로 도망가라는 예수님의 살리는 말씀과 예루살렘에 남아야 한다는 세상의 소리를 함께 듣게 됩니다. 그때 우리는 세상의 목소리를 듣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를 살리는 인자한 예수님의 말씀을 따라야 구원받을 수 있습니다. (막 8:35, 개정) “누구든지 자기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와 복음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으면 구원하리라” 아멘. 주님과 복음을 위해 나를 죽여가며 순종할 때 나도 살고 죽어가는 영혼도 구원하게 될 줄 믿습니다.

    본문 20절에서, ‘도망하는 일’이 겨울이나 안식일이 되지 않도록 기도하라고 말씀했습니다. 그 이유는 유대 지역은 겨울이 비가 내리는 우기이기에 땅이 질퍽거리면 도망가기가 힘들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유대인들은 안식일에 1.8km 이상 걸을 수 없기에 율법을 지키려다가 모두 죽을까 봐 인자하신 예수님은 염려하시면서 안식일에 큰 화가 임하지 않게 기도할 것을 당부했습니다. 이것이 영혼을 살리고자 하는 주님의 마음입니다.

    예수님께서 다니엘서를 인용하신 것은 이중 예언을 말씀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다니엘은 마지막 큰 환난의 때에 ‘적그리스도’가 등장할 것이라고 말씀했습니다. 본문 21절에서, ‘큰 환난’이 이에 해당하는 말씀입니다. 적그리스도가 출현하여 마치 자기가 구세주 인양 세상을 거짓 평화로 통치하게 될 것입니다. 간교한 적그리스도는 세계를 저항 없이 통치하기 위해 이스라엘과 언약을 맺습니다. 7년 동안 유대인들에게 자유를 주고 제사와 예물을 드릴 수 있지만, 적그리스도는 제한된 7년의 통치 기간을 기다리지 못하고, 나머지 3년 반 동안 큰 환난으로 유대 성도들을 괴롭힐 것이라고 예언했습니다(단 9:27).

    본문 22절에서, “...택하신 자들을 위하여 그 날들을 감하시리라” 아멘. 7년간 큰 환난를 당하면 누구도 견딜 수 없기에 하나님께서는 택하신 자들을 한 영혼이라도 구원하시기 위해 큰 환난의 날을 줄여 주시겠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진노 중에라도 긍휼을 잊지 않으십니다(합 3:2).

    마지막 환난의 때 일어나는 현상이 거짓 그리스도와 거짓 선지자들이 여기저기서 일어날 것을 주님이 예언했습니다(23절). 택하신 자들도 미혹 당하는 이유가 그들도 큰 표적과 기사를 보여주기 때문에 미혹해도 믿지 말라고 말씀했습니다(24절). 거짓 그리스도는 예수님의 이름과 권위와 능력을 도용하여 자기 영광과 이익을 차지하는 자들입니다.

    마지막 우주적인 종말의 때 그리스도는 수도원 운동을 했던 경건한 에세네파처럼 광야에서 나타나지 않습니다. 좁고 밀폐된 비밀스러운 골방에 거하며 자기들만 구원받을 수 있다는 폐쇄적인 곳에서도 예수님은 나타나지 않습니다(26절). 예수님의 나타나심은 “번개가 동편에서 나서 서편까지 번쩍임 같이”(27절) 갑작스럽게 오실 것이고, 어디서나 볼 수 있는 번개처럼 모든 사람에게 재림하는 모습을 보여주실 것이라고 말씀했습니다.

    거짓 그리스도와 거짓 선지자들과 같은 세상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면 죽게 되니까 미리 말씀해주신 주님의 말씀을 굳게 믿고 흔들리지 말 것을 말씀했습니다(25절).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현재 많은 이단(異端)과 사이비(似而非)들이 자기가 그리스도라고 주장하는 시대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종말의 때가 가까웠다는 징조라고 할 수 있습니다. 본문 28절에서, 죽은 시체가 있는 곳에 독수리들이 모이는 것처럼, 생명이 없는 시체를 먹는 독수리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부활하여 살아계신 생명의 떡인 예수 그리스도를 먹고 마셔야 영생할 수 있습니다. 마지막 때 일어날 징조를 잘 분별하여 굳건하게 예수 그리스도를 잘 믿고 최후 승리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마가복음 13:14~27/ 멸망의 가증한 것이 서지 못할 곳에 선 것을 보거든

    감람산에 앉아 예루살렘 성전을 마주 바라보며 제자들에게 예루살렘 성전의 파괴를 예언하시는 예수님께서는(3절) 그 마지막 날이 찾아왔을 때 취해야 할 태도에 대해서 말씀하십니다. 이것은 서기 70년에 로마의 티투스(Titus Flavius Vespasianus) 장군에 의해 예루살렘 성이 함락당하고, 예루살렘 성전이 철저히 파괴될 것에 대한 예언이면서, 동시 마지막 심판 때가 임할 때에 대한 예언이기도 합니다.

    14절에 나오는 “멸망의 가증한 것이 서지 못할 곳에 선 것을 보거든”이라는 말씀은 마태복음 24:15에 “그러므로 너희가 선지자 다니엘이 말한 바 멸망의 가증한 것이 거룩한 곳에 선 것을 보거든”이라는 말씀인데, 다니엘은 다니엘 9:26, 27; 11:31; 12:11 등에서 예루살렘 성전에 이방 왕국이 침략하여 가증한 일을 행할 것이라고 예언했는데, 이 예언은 일차적으로 BC 168년에 수리아의 셀류코스 왕조의 아티오쿠스 에피파네스(Antiochus IV Epiphanes)에 의해 예루살렘 성전이 정복되고, 예루살렘 성전에서 불결한 짐승인 돼지를 제물로 제사를 드린 치욕이 있었던 사건으로 이뤄졌는데, 예수님은 서기 70년의 예루살렘 성전의 파괴도 이러한 다니엘의 예언을 적용하셨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그 이후에 하나님께서 세상을 심판하실 마지막 날에 대한 것에도 이 예언이 적용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 마지막 때 일어날 일들에 대해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데, 먼저 말씀하신 것은 긴박성(緊迫性)입니다. 때가 이르면 뒤도 돌아보지 말고 빨리 도망하라는 것입니다(14절~17절). 뒤에 있는 것에 미련을 두면 늦는다는 것입니다. 아이 밴 자들과 젖먹이는 자들은 어쩔 수 없이 행동이 늦을 수밖에 없는데, 그러면 화가 있을 것이라고 말씀할 정도로 긴급한 상황이 펼쳐질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세상에 미련을 두면 마지막 때에 그 미련 때문에 발목을 잡힐 수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또한 이 일이 겨울에 일어나지 않도록 기도하라고 말씀합니다(18절). 겨울은 춥기도 하고, 이스라엘의 겨울은 우기(雨期)가 포함되어 있어서 몸을 피하기에 좋은 계절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또한 엄청난 고통의 시간이 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19절).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시초부터 지금까지 이런 환난이 없었고, 후에도 없을 것이라고 말씀하실 정도이니 그 고통이 얼마나 클지에 대해 상상할 수도 없다는 말씀입니다. 인간이 견디기 힘든 혹독한 환난이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와중(渦中)에도 하나님의 은혜가 있습니다. 이러한 혹독한 환난이 계속되면 살아남을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20절을 보면 하나님께서 그 날들을 줄여주셨다고 말씀합니다. 하나님께서 구원받을 수 있는 여지(餘地)를 남겨놓으셨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잘 견디고 이기는 자들은 구원받게 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그 때에 일어날 일 중 하나는 거짓 그리스도와 거짓 선지자들이 판을 치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21절~23절). 거짓 그리스도는 자기가 그리스도라고 말하는 자들이고, 거짓 선지자들은 거짓 그리스도를 증거하거나, 거짓 메시지를 전하는 자들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거짓 그리스도와 거짓 선지자들이 무서운 것은 그들도 이적(異蹟)과 기사(奇事)를 행한다는 것입니다(22절). 거짓 그리스도이고, 거짓 선지자들이지만, 그들도 놀라운 일을 행하여 보여줄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니 속아 넘어가기가 쉽습니다. 그러니 미혹되는 자들이 많게 될 것입니다. 이적과 기사를 행한다고 진짜라고 생각하면 안 됩니다. 사탄도, 귀신들도 놀라운 능력을 행할 수 있는 존재입니다. 물론 사탄이나 귀신들은 전지(全知)하지도, 전능(全能)하지도 않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타락한 천사들이기에 인간을 뛰어넘는 지식과 능력을 갖춘 존재들입니다. 이단(異端)이나 사이비(似而非), 혹은 무속(巫俗) 등을 통해 충분히 그런 능력을 행하는 존재들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렇기에 이런 자들을 정말 조심해야 합니다(23절). 그런데 지금 이 시대에도 이러한 이단과 사이비에 미혹된 자들이 많다는 것이 참 안타깝습니다.

    24절부터 27절은 예수님께서 재림하실 때의 일을 소개합니다. 지금까지 예수님은 예루살렘 성전이 파괴되는 끔찍한 환난의 날에 대해 예언하시면서, 동시에 이 예언은 이 세상의 마지막 심판 날에 대한 예언이기도 했습니다. 이 예언들이 단순히 서기 70년에 예루살렘이 로마에 의해 함락되고, 예루살렘 성전이 철저히 파괴되는 것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님을 깨닫게 하는 것은 24절부터 27절의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심판하시는 마지막 날에 구름을 타고 재림하실 것임을 예언하십니다. 그리고 그 때에 일어날 일들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그 때가 되면 해와 달이 그 빛을 잃고, 별들이 하늘에서 떨어진다고 말씀하십니다(24절, 25절). 이 말씀은 문자 그대로 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25절에 “하늘에 있는 권능들이 흔들리리라”라는 말씀은 사탄의 세력들이 흔들려 떨어질 것이라는 말씀으로 볼 수 있는 것이기에 해와 달, 그리고 별들은 사탄과 그의 세력들로 해석할 수도 있는 부분입니다. 마지막 심판 날에는 천체(天體)의 이상한 변화도 있겠지만, 사탄과 그의 세력들이 하나님의 심판으로 인해 진멸될 것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마지막 때에는 예수님께서 큰 권능과 영광으로 재림하실 것입니다(26절). 그리고 주님께서는 천사들을 보내어 세계 곳곳에서 주님께서 택하신 자들을 사방에서 불러 모을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27절). 주님께서 택하신 자들이란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와 주님으로 믿고 따르는 그리스도인들을 일컫는 말씀입니다. 마지막 심판 때에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큰 권능과 영광으로 임하신 주님 앞에 나아가 주님을 경배하게 될 것이란 말씀입니다.

    우리는 이 마지막 때를 준비하며 믿음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들은 힘겨운 핍박을 받겠지만, 사람들에게 거부당하겠지만, 믿음으로 이겨내야 합니다. 엄청난 고통과 혹독한 환난이 찾아오겠지만, 믿음으로 견뎌야 합니다. 그러면 마지막 때에 영광으로 임하신 주님 앞에서 주님을 경배하며 만나 뵙는 축복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이단과 사이비의 미혹에 빠져들지 말고, 하나님의 말씀만을 온전히 따르며 복된 삶을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되길 소망합니다.








    가증한 것 = 미운 물건
     


    성경에 기록된 "가증한 것" "가증한 일" "미운 물건"에 관한 모든 구절을 찾았습니다. 이유는 "멸망의 가증한 것이 거룩한 곳에 선다" 하신 예수님의 경고 말씀을 더 잘 이해하기 위함입니다. 미운 물건과 가증한 것의 정체는 다음 말씀들을 전체적으로 조망할 때, 완전히 드러나게 됩니다. "가증한 것"은 육체의 정결과 관련된 말씀들로부터 시작합니다. 그리고는 도덕적인 항목들과 제사 양식에 관한 규정으로 발전하다가, 결국에는 하나님을 대적하며 말씀에서 이탈하여 우상을 숭배하는 영적 간음과 종교 부패 양태로 대확장되고 있음을 깨닫게 되실 것입니다. 따라서 독자들께서는 아무리 교회가 제사 행위에 올바르고, 금식 잘하고, 환경운동과, 성적 순결, 마약 퇴치 운동 등의 도덕적 캠페인을 주도한다 하더라도...... 그 교회가 영적인 우상 곧 "종교 통합운동, 타 종교의 구원인정, 진리는 하나"라는 등의 모토로 연합되어나가는 것을 볼 때에는 그것이 얼마나 가증한 일인지를 깨닫고 강하게 뿌리치고 나와야 할 것입니다. 레위기부터 시작된 "미운물건=가증한 것"에 대한 상고는 계시록 17장의 음녀의 정체에서 완전한 악으로 숙성되어, 밉고도 가증한 것의 결정체로 폭로되고 있습니다.

    계 17:4 "그 여자는 자주빛과 붉은빛 옷을 입고 금과 보석과 진주로 꾸미고 손에 금잔을 가졌는데 가증한 물건과 그의 음행의 더러운 것들이 가득하더라 5 그 이마에 이름이 기록되었으니 비밀이라, 큰 바벨론이라, 땅의 음녀들과 가증한 것들의 어미라 하였더라 6 또 내가 보매 이 여자가 성도들의 피와 예수의 증인들의 피에 취한지라"

    짐승을 타고, 금잔을 들고, 성도들의 피와 예수의 증인들의 피에 취하고, 또 18절에 기록되길 "내가 본 바 여자는 땅의 임금들을 다스리는 큰 성이라" 한 것으로 보아 이 여자는 막강한 물권과, 치리권을 가진 가증하고 거대한 종교단체가 분명합니다. 이 땅의 모든 거짓 선지들을 길러낸 가증한 것들의 어미입니다. 이 여자를 바로 볼 줄 아는 것! 그것이 가증한 것을 상고하는 우리의 목적입니다.


    레위기 7:15 "감사함으로 드리는 화목제 희생의 고기는 드리는 그 날에 먹을 것이요 조금이라도 이튿날 아침까지 두지 말 것이니라 16 그러나 그 희생의 예물이 서원이나 자원의 예물이면 그 희생을 드린 날에 먹을 것이요 그 남은 것은 이튿날에도 먹되 17 그 희생의 고기가 제삼일까지 남았으면 불사를지니 18 만일 그 화목제 희생의 고기를 제삼일에 조금이라도 먹으면 그 제사는 열납되지 않을 것이라 드린 자에게도 예물답게 못되고 도리어 가증한 것이 될 것이며 그것을 먹는 자는 죄를 당하리라"

    레위기 11:10 "무릇 물에서 동하는 것과 무릇 물에서 사는 것 곧 무릇 강과 바다에 있는 것으로서 지느러미와 비늘 없는 것은 너희에게 가증한 것이라 11 이들은 너희에게 가증한 것이니 너희는 그 고기를 먹지 말고 그 주검을 가증히 여기라 12 수중 생물에 지느러미와 비늘 없는 것은 너희에게 가증(可憎)하니라 13 새 중에 너희가 가증히 여길 것은 이것이라 이것들이 가증한즉 먹지 말지니 곧 독수리솔개어응과 14 매와 매 종류와11:15 까마귀 종류와 16 타조다호마스갈매기새매 종류와 17 올빼미노자부엉이와 18 따오기당아올응과 19 황새 종류대승박쥐니라 20 날개가 있고 네 발로 기어 다니는 곤충은 너희에게 가증하되 21 오직 날개가 있고 네 발로 기어다니는 모든 곤충 중에 그 발에 뛰는 다리가 있어서 땅에서 뛰는 것은 너희가 먹을지니 22 곧 그 중에 메뚜기 종류베짱이 종류귀뚜라미 종류팟종이 종류는 너희가 먹으려니와 23 오직 날개가 있고 기어다니는 곤충은 다 너희에게 가증하니라

    레위기 19:5 "너희는 화목제 희생을 여호와께 드릴 때에 열납되도록 드리고 6 그 제물은 드리는 날과 이튿날에 먹고 제삼일까지 남았거든 불사르라 7 제삼일에 조금이라도 먹으면 가증한 것이 되어 열납되지 못하고 8 그것을 먹는 자는 여호와의 성물 더럽힘을 인하여 죄를 당하리니 그가 그 백성 중에서 끊쳐지리라"

    신명기 7:25 "너는 그들의 조각한 신상들을 불사르고 그것에 입힌 은이나 금을 탐내지 말며 취하지 말라 두렵건대 네가 그것으로 인하여 올무에 들까 하노니 이는 네 하나님 여호와의 가증히 여기시는 것임이니라 26 너는 가증한 것을 네 집에 들이지 말라 너도 그와 같이 진멸당할 것이 될까 하노라 너는 그것을 극히 꺼리며 심히 미워하라 그것은 진멸당할 것임이니라"

    신명기 17:1 "무릇 흠이나 악질이 있는 우양은 네 하나님 여호와께 드리지 말지니 이는 네 하나님 여호와께 가증한 것이 됨이니라 2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주시는 어느 성중에서든지 너의 가운데 혹시 어떤 남자나 여자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목전에 악을 행하여 그 언약을 어기고 3 가서 다른 신들을 섬겨 그것에게 절하며 내가 명하지 아니한 일월성신에게 절한다 하자 4 혹이 그 일을 네게 고하므로 네가 듣거든 자세히 사실하여 볼지니 만일 그 일과 말이 확실하여 이스라엘 중에 이런 가증한 일을 행함이 있으면 5 너는 그 악을 행한 남자나 여자를 네 성문으로 끌어내고 돌로 그 남자나 여자를 쳐 죽이되 6 죽일 자를 두 사람이나 세 사람의 증거로 죽일 것이요 한 사람의 증거로는 죽이지 말 것이며 7 이런 자를 죽임에는 증인이 먼저 그에게 손을 댄 후에 뭇 백성이 손을 댈지니라 너는 이와 같이 하여 너의 중에 악을 제할지니라"

    신명기 23:17 "이스라엘 여자 중에 창기가 있지 못할 것이요 이스라엘 남자 중에 미동이 있지 못할지니 18 창기의 번 돈개 같은 자의 소득은 아무 서원하는 일로든지 네 하나님 여호와의 전에 가져오지 말라 이 둘은 다 네 하나님 여호와께 가증한 것임이니라"

    신명기 24:1 "사람이 아내를 취하여 데려온 후에 수치되는 일이 그에게 있음을 발견하고 그를 기뻐하지 아니하거든 이혼 증서를 써서 그 손에  주고 그를 자기 집에서 내어보낼 것이요 2 그 여자는 그 집에서 나가서 다른 사람의 아내가 되려니와 3 그 후부도 그를 미워하여 이혼 증서를 써서 그 손에 주고 그를 자기 집에서 내어 보내었거나 혹시 그를 아내로 취한 후부가 죽었다 하자 4 그 여자가 이미 몸을 더럽혔은즉 그를 내어 보낸 전부가 그를 다시 아내로 취하지 말지니 이 일은 여호와 앞에 가증한 것이라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기업으로 주시는 땅으로 너는 범죄케 하지 말지니라"

    신명기 29:13 "여호와께서 이왕에 네게 말씀하신 대로 또 네 열조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맹세하신 대로 오늘날 너를 세워 자기 백성을  삼으시고 자기는 친히 네 하나님이 되시려 함이니라 14 내가 이 언약과 맹세를 너희에게만 세우는 것이 아니라 15 오늘날 우리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우리와 함께 여기 선 자와 오늘날 우리와 함께 여기 있지 아니한 자에게까지니 16 (우리가 애굽 땅에 어떻게 거하였었는지 너희가 여러 나라를 어떻게 통과하여 왔었는지 너희가 알며 17 너희가 또 그들 중에 있는 가증한 것목석과 은금의 우상을 보았느니라)"

    신명기 32:15 "그러한데 여수룬이 살찌매 발로 찼도다 네가 살찌고 부대하고 윤택하매 자기를 지으신 하나님을 버리며 자기를 구원하신 반석을 경홀히 여겼도다 16 그들이 다른 신으로 그의 질투를 일으키며 가증한 것으로 그의 진노를 격발하였도다 17 그들은 하나님께 제사하지 아니하고 마귀에게 하였으니 곧 그들의 알지 못하던 신, 근래에 일어난 새 신, 너희 열조의 두려워하지 않던 것들이로다"

    열왕기하 23:24 "요시야가 또 유다 땅과 예루살렘에 보이는 신접한 자와 박수와 드라빔과 우상과 모든 가증한 것을 다 제하였으니 이는 대제사장 힐기야가 여호와의 전에서 발견한 책에 기록된 율법 말씀을 이루려 함이라 25 요시야와 같이 마음을 다하며 성품을 다하며 힘을 다하여 여호와를 향하여 모세의 모든 율법을 온전히 준행한 임금은 요시야 전에도 없었고 후에도 그와 같은 자가 없었더라"


    역대하 34:1 요시야가 위에 나아갈 때에 나이 팔 세라 예루살렘에서 삼십일 년을 치리하며 2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히 행하여 그 조상 다윗의 길로 행하여 좌우로 치우치지 아니하고 3 오히려 어렸을 때 곧 위에 있은지 팔 년에 그 조상 다윗의 하나님을 비로소 구하고 그 십이 년에 유다와 예루살렘을 비로소 정결케 하여 그 산당아세라 목상들아로새긴 우상들과 부어 만든 우상들을 제하여 버리매 4 무리가 왕의 앞에서 바알들의 단을 훼파하였으며 왕이 또 그 단 위에 높이 달린 태양상(太陽像)들을 찍고 또 아세라 목상들아로새긴 우상들부어 만든 우상들을 빻아 가루를 만들어 거기 제사하던 자들의 무덤에 뿌리고 5 제사장들의 뼈를 단 위에서 불살라 유다와 예루살렘을 정결케 하였으며 6 또 므낫세와 에브라임과 시므온과 납달리까지 사면 황폐한 성읍들에도 그렇게 행하여 7 단들을 훼파하며 아세라 목상들아로새긴 우상들을 빻아 가루를 만들며 온 이스라엘 땅에 있는 모든 태양상을 찍고 예루살렘으로 돌아왔더라....."

    역대하 34:21 "너희는 가서 나와 및 이스라엘과 유다의 남은 자를 위하여 이 발견한 책의 말씀에 대하여 여호와께 물으라 우리 열조가 여호와의 말씀을 지키지 아니하고 이 책에 기록된 모든 것을 준행치 아니하였으므로 여호와께서 우리에게 쏟으신 진노가 크도다..... 24 여호와의 말씀이 내가 이 곳과 그 거민에게 재앙을 내리되 곧 유다 왕 앞에서 읽은 책에 기록된 모든 저주대로 하리니 25 이는 이 백성이 나를 버리고 다른 신에게 분향하며 그 손의 모든 소위로 나의 노를 격발하였음이라 그러므로 나의 노를 이곳에  쏟으매 꺼지지 아니하리라 하라 하셨느니라 26 너희를 보내어 여호와께 묻게 한 유다 왕에게는 너희가 이렇게 고하라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이 네가 들은 말을 의논컨대 27 내가 이곳과 그 거민을 가리켜 말한 것을 네가 듣고 마음이 연하여 하나님 앞 곧 내 앞에서 겸비하여 옷을 찢고 통곡하였으므로 나도 네 말을 들었노라 여호와가 말하였느니라 29 왕이 보내어 유다와 예루살렘의 모든 장로를 불러 모으고 30 이에 여호와의 전에 올라가매 유다 모든 사람과 예루살렘 거민과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과 모든 백성이 무론노소하고 다 함께한지라 왕이 여호와의 전 안에서 발견한 언약책의 모든 말씀을 읽어 무리의 귀에 들리고 31 왕이 자기 처소에 서서 여호와 앞에서 언약을 세우되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여 여호와를 순종하고 그 계명과 법도와 율례를 지켜 이 책에 기록된 언약의 말씀을 이루리라 하고 32 예루살렘과 베냐민에 있는 자들로 다 이에 참가하게 하매 예루살렘 거민이 하나님 곧 그 열조의 하나님의 언약을 좇으니라 33 이와 같이 요시야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속한 모든 땅에서 가증한 것을 다 제하여 버리고 이스라엘의 모든 사람으로 그 하나님 여호와를 섬기게 하였으므로 요시야가 사는 날에 백성이 그 열조의 하나님 여호와께 복종하고 떠나지 아니하였더라"


    잠언 26:24 "감정있는 자는 입술로는 꾸미고 속에는 궤휼을 품나니 25 그 말이 좋을지라도 믿지 말 것은 그 마음에 일곱 가지 가증한 것이 있음이라 26 궤휼로 그 감정을 감출지라도 그 악이 회중 앞에 드러나리라"

    이사야 66:2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나의 손이 이 모든 것을 지어서 다 이루었느니라 무릇 마음이 가난하고 심령에 통회하며 나의 말을 인하여 떠는 자 그 사람은 내가 권고하려니와 3 소를 잡아 드리는 것은 살인함과 다름이 없고 어린 양으로 제사드리는 것은 개의 목을 꺾음과 다름이 없으며 드리는 예물은 돼지의 피와 다름이 없고 분향하는 것은 우상을 찬송함과 다름이 없이 하는 그들은 자기의 길을 택하며 그들의 마음은 가증한 것을 기뻐한즉 4 나도 유혹을 그들에게 택하여 주며 그 무서워하는 것을 그들에게 임하게 하리니 이는 내가 불러도 대답하는 자 없으며 내가 말하여도 그들이 청종하지 않고 오직 나의 목전에 악을 행하며 나의 기뻐하지 아니하는 것을 택하였음이니라 하시니라"

    예레미야 4:1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이스라엘아 네가 돌아오려거든 내게로 돌아라 네가 만일 나의 목전에서 가증한 것을 버리고 마음이 요동치 아니하며 2 진실공평정의로 여호와의 삶을 가리켜 맹세하면 열방이 나로 인하여 스스로 복을 빌며 나로 인하여 자랑하리라"

    예레미야 7:30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유다 자손이 나의 목전에 악을 행하여 내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는 집에 그들의 가증한 것을 두어 집을 더럽혔으며 31 힌놈의 아들 골짜기에 도벳 사당을 건축하고 그 자녀를 불에 살랐나니 내가 명하지 아니하였고 내 마음에 생각지도 아니한 일이니라 32 그러므로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날이 이르면 이곳을 도벳이라 하거나 힌놈의 아들의 골짜기라 칭하지 아니하고 살륙의 골짜기라 칭하리니 매장할 자리가 없도록 도벳에 장사함을 인함이니라"

    예레미야 13:27 "내가 너의 간음과 사특한 소리와 들의 작은 산 위에서 행한 네 음행의 비루하고 가증한 것을 보았노라 화 있을진저 예루살렘이여 네가 얼마나 오랜 후에야 정결하게 되겠느뇨"

    예레미야 16:18 "내가 위선 그들의 악과 죄를 배나 갚을 것은 그들이 그 미운 물건의 시체로 내 땅을 더럽히며 그들의 가증한 것으로 내 산업에 가득하게 하였음이니라"

    에스겔 11:17 "너는 또 말하기를 주 여호와의 말씀에 내가 너희를 만민 가운데 모으며 너희를 흩은 열방 가운데서 모아 내고 이스라엘 땅으로 너희에게 주리라 하셨다 하라 18 그들이 그리로 가서 그 가운데 모든 미운 물건가증한 것을 제하여 버릴지라 19 내가 그들에게 일치한 마음을 주고 그 속에 새 신을 주며 그 몸에서 굳은 마음을 제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주어서 20 내 율례를 좇으며 내 규례를 지켜 행하게 하리니 그들은 내 백성이 되고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리라 21 그러나 미운 것가증한 것을 마음으로 좇는 자는 내가 그 행위대로 그 머리에 갚으리라 나 주 여호와의 말이니라"

    에스겔 14:1 "이스라엘 장로 두어 사람이 나아와 내 앞에 앉으니 2 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임하여 가라사대 3 인자야 이 사람들이 자기 우상을 마음에 들이며 죄악의 거치는 것을 자기 앞에 두었으니 그들이 내게 묻기를 내가 조금인들 용납하랴 4 그런즉 너는 그들에게 말하여 이르라 나 주 여호와가 말하노라 이스라엘 족속 중에 무릇 그 우상을 마음에 들이며 죄악의 거치는 것을 자기 앞에 두고 선지자에게 나아오는 자에게는 나 여호와가 그 우상의 많은 대로 응답하리니 5 이는 이스라엘 족속이 다 그 우상으로 인하여 나를 배반하였으므로 내가 그들의 마음에 먹은 대로 그들을 잡으려 함이니라 6 그런즉 너는 이스라엘 족속에게 이르기를 주 여호와의 말씀에 너희는 마음을 돌이켜 우상을 떠나고 얼굴을 돌이켜 모든 가증한 것을 떠나라 7 이스라엘 족속과 이스라엘 가운데 우거하는 외인 중에 무릇 나를 떠나고 자기 우상을 마음에 들이며 죄악의 거치는 것을 자기 앞에 두고 자기를 위하여 내게 묻고자 하여 선지자에게 나아오는 자에게는 나 여호와가 친히 응답하여 8 그 사람을 대적하여 그들로 놀라움과 감계와 속담거리가 되게 하여 내 백성 가운데서 끊으리니 너희가 나를 여호와인 줄 알리라 9 만일 선지자가 유혹을 받고 말을 하면 나 여호와가 그 선지자로 유혹을 받게 하였음이어니와 내가 손을 펴서 내 백성 이스라엘 가운데서 그를 멸할 것이라 10 선지자의 죄악과 그에게 묻는 자의 죄악이 같은즉 각각 자기의 죄악을 담당하리니 11 이는 이스라엘 족속으로 다시는 미혹하여 나를 떠나지 않게 하며 다시는 모든 범죄함으로 스스로 더럽히지 않게 하여 그들로 내  백성을 삼고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려 함이니라 나 주 여호와 의 말이니라 하셨다 하라"

    에스겔 20:7 "또 그들에게 이르기를 너희는 눈을 드는 바 가증한 것을 각기 버리고 애굽의 우상들로 스스로 더럽히지 말라 나는 여호와 너희 하나님이니라 하였으나 8 그들이 내게 패역하여 내 말을 즐겨 듣지 아니하고 그 눈을 드는 바 가증한 것을 각기 버리지 아니하며 애굽의 우상들을 떠나지  아니하므로 내가 말하기를 내가 애굽 땅에서 나의 분을 그들의 위에 쏟으며 노를 그들에게 이루리라 하였었노라"

    에스겔 20:23 "또 내가 광야에서 그들에게 맹세하기를 내가 그들을 이방인 중에 흩으며 열방 중에 헤치리라 하였었나니 24 이는 그들이 나의 규례를 행치 아니하며 나의 율례를 멸시하며 내 안식일을 더럽히고 눈으로 그 열조의 우상들을 사모함이며 25 또 내가 그들에게 선치 못한 율례와 능히 살게 하지 못할 규례를 주었고 26 그들이 장자를 다 화제로 드리는 그 예물로 내가 그들을 더럽혔음은 그들로 멸망케 하여 나를 여호와인 줄 알게 하려 하였음이니라 27 그런즉 인자야 이스라엘 족속에게 고하여 이르기를 주 여호와의 말씀에 너희 열조가 또 내게 범죄하여 나를 욕되게 하였느니라 28 내가 그들에게 주기로 맹세한 땅으로 그들을 인도하여 들였더니 그들이 모든 높은 산과 모든 무성한 나무를 보고 거기서 제사를 드리고 격노케 하는 제물을 올리며 거기서 또 분향하고 전제를 부어 드린지라 29 이에 내가 그들에게 이르기를 너희가 다니는 산당이 무엇이냐 하였노라(그것을 오늘날까지 바마라 일컫느니라) 30 그러므로 너는 이스라엘 족속에게 이르기를 주 여호와의 말씀에 너희가 열조의 풍속을 따라 스스로 더럽히며 그 모든 가증한 것을 좇아 행음하느냐 31 너희가 또 너희 아들로 화제를 삼아 예물로 드려 오늘날까지 우상들로 스스로 더럽히느냐 이스라엘 족속아 너희가 내게 묻기를 내가 용납하겠느냐 나 주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가 나의 삶을 두고 맹세하노니 너희가 내게 묻기를 내가 용납지 아니하리라"

    다니엘 9:26 "육십이 이레 후에 기름 부음을 받은 자가 끊어져 없어질 것이며 장차 한 왕의 백성이 와서 그 성읍과 성소를 훼파하려니와 그의 종말은 홍수에 엄몰됨 같을 것이며 또 끝까지 전쟁이 있으리니 황폐할 것이 작정되었느니라 7 그가 장차 많은 사람으로 더불어 한 이레 동안의 언약을 굳게 정하겠고 그가 그 이레의 절반에 제사와 예물을 금지할 것이며 또 잔포하여 미운 물건(=가증한 것)이 날개를 의지하여 설 것이며 또 이미 정한 종말까지 진노가 황폐케 하는 자에게 쏟아지리라 하였느니라"

    마태복음 24:14 "이 천국 복음이 모든 민족에게 증거되기 위하여 온 세상에 전파되리니 그제야 끝이 오리라 15 그러므로 너희가 선지자 다니엘의 말한 바 멸망의 가증한 것(=미운 물건)이 거룩한 곳에 선 것을 보거든(읽는 자는 깨달을진저) 16 그 때에 유대에 있는 자들은 산으로 도망할지어다 17 지붕 위에 있는 자는 집안에 있는 물건을 가질러 내려 가지 말며 18 밭에 있는 자는 겉옷을 가질러 뒤로 돌이키지 말지어다 19 그 날에는 아이 밴 자들과 젖먹이는 자들에게 화가 있으리로다 20 너희의 도망하는 일이 겨울에나 안식일에 되지 않도록 기도하라 21 이는 그 때에 큰 환난이 있겠음이라 창세로부터 지금까지 이런 환난이 없었고 후에도 없으리라 22 그 날들을 감하지 아니할 것이면 모든 육체가 구원을 얻지 못할 것이나 그러나 택하신 자들을 위하여 그 날들을 감하시리라"

    마가복음 13:14 "멸망의 가증한 것이 서지 못할 곳에 선 것을 보거든 (읽는 자는 깨달을진저) 그 때에 유대에 있는 자들은 산으로 도망할지어다"

    요한계시록 17:1 "또 일곱 대접을 가진 일곱 천사 중 하나가 와서 내게 말하여 가로되 이리 오라 많은 물(=17:15) 위에 앉은 큰 음녀의 받을 심판을 네게 보이리라 2 땅의 임금들도 그로 더불어 음행하였고 땅에 거하는 자들도 그 음행의 포도주에 취하였다 하고 3 곧 성령으로 나를 데리고 광야로 가니라 내가 보니 여자붉은 빛 짐승을 탔는데 그 짐승의 몸에 참람된 이름들이 가득하고 일곱 머리와 열 뿔이 있으며 4 그 여자는 자주빛과 붉은빛 옷을 입고 금과 보석과 진주로 꾸미고 손에 금잔을 가졌는데 가증한 물건과 그의 음행의 더러운 것들이 가득하더라 5 그 이마에 이름이 기록되었으니 비밀이라, 큰 바벨론이라, 땅의 음녀들과 가증한 것들의 어미라 하였더라 6 또 내가 보매 이 여자가 성도들의 피와 예수의 증인들의 피에 취한지라 내가 그 여자를 보고 기이히 여기고 크게 기이히 여기니 7 천사가 가로되 왜 기이히 여기느냐 내가 여자와 그의 탄 바 일곱 머리와 열 뿔가진 짐승의 비밀을 네게 이르리라 8 네가 본 짐승은 전에 있었다가 시방 없으나 장차 무저갱으로부터 올라와 멸망으로 들어갈 자니 땅에 거하는 자들로서 창세 이후로 생명책에 녹명되지 못한 자들이 이전에 있었다가 시방 없으나 장차 나올 짐승을 보고 기이히 여기리라 9 지혜 있는 뜻이 여기 있으니 그 일곱 머리는 여자가 앉은 일곱 산(슥 4:7=큰 산)이요 10 또 일곱 왕이라 다섯(애굽,앗수르,바벨론,메데 파사,헬라)은 망하였고 하나(로마)는 있고 다른 이(소련)는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으나 이르면 반드시 잠간 동안 계속하리라 11 전에 있었다가 시방 없어진 짐승여덟째 왕이니 일곱 중에 속한 자라 저가 멸망으로 들어가리라 12 네가 보던 열 뿔은 열 왕이니 아직 나라를 얻지 못하였으나 다만 짐승으로 더불어 임금처럼 권세를 일시 동안 받으리라 13 저희(=열 뿔)가 한 뜻을 가지고 자기의 능력과 권세를 짐승에게 주더라 14 저희가 어린 양으로 더불어 싸우려니와 어린 양은 만주의 주시요 만왕의 왕이시므로 저희를 이기실 터이요 또 그와 함께 있는 자들 곧 부르심을 입고 빼내심을 얻고 진실한 자들은 이기리로다 15 또 천사가 내게 말하되 네가 본 바 음녀의 앉은 물(=17:1)은 백성과 무리와 열국과 방언들이니라 16 네가 본 바 이 열 뿔짐승음녀를 미워하여 망하게 하고 벌거벗게 하고 그 살을 먹고 불로 아주 사르리라 17 하나님이 자기 뜻대로 할 마음을 저희(=열 뿔)에게 주사 한 뜻을 이루게 하시고 저희 나라를 그 짐승에게 주게 하시되 하나님 말씀이 응하기까지 하심이니라 18 또 내가 본 바 여자땅의 임금들을 다스리는 큰 성(거대한 종교단체?)이라 하더라"


    가증한 일

    레위기 18:22 "너는 여자와 교합함 같이 남자와 교합하지 말라 이는 가증한 일이니라"

    렘 6:14~15 "그들이 내 백성의 상처를 심상히 고쳐 주며 말하기를 평강하다, 평강하다 하나 평강이 없도다 그들이 가증한 일을 행할 때에 부끄러워하였느냐 아니라 조금도 부끄러워 아니할 뿐 아니라 얼굴도 붉어지지 않았느니라 그러므로 그들이 엎드러지는 자와 함께 엎드러질 것이라 내가 그들을 벌하리니 그 때에 그들이 거꾸러지리라 여호와의 말이니라"

    렘 8:11~12 "그들이 딸 내 백성의 상처를 심상히 고쳐주며 말하기를 평강하다, 평강하다 하나 평강이 없도다 그들이 가증한 일을 행할 때에 부끄러워하였느냐 아니라 조금도 부끄러워 아니할 뿐 아니라 얼굴도 붉어지지 아니하였느니라 그러므로 그들이 엎드러질 자와 함께 엎드러질 것이라 내가 그들을 벌할 때에 그들이 거꾸러지리라 여호와의 말이니라"



    행 4:12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
     

    하신 말씀과 "여호와만이 참 신"임을 강하게 외치지 못하면서도, 예수님의 이름으로 종교단체가 누릴 수 있는 모든 영화와 권세를 누리며, 기독교에만 완전한 구원과 진리가 있음을 은근슬쩍 부정하며 인간의 평화와 공존을 추구하는 모든 종교, 정치 단체는 멸망당할 가증한 세력임을 깨달아야 하겠습니다. 말씀을 보고 현실 시사를 볼 때 세계는 하나님의 장 중에서 움직인다는 것을 분명히 깨닫게 될 것입니다. 깨닫는 자들에게 복 있을진저!



    ‘멸망의 가증한 것’이 교회 속으로 더 깊이 들어오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는 세상의 마지막 때에 대해 이렇게 말씀하셨

    “선지자 다니엘이 말한 바 멸망의 가증한 것이 거룩한 곳에 선 것을 보거든 (읽는 자는 깨달을진저) 그 때에 유대에 있는 자들은 산으로 도망할지어다”(마 24:15,16)

    예수님의 이 말씀은 다음의 다니엘서의 일부를 암시하신 말씀이다. 

    “그가 장차 많은 사람들과 더불어 한 이레 동안의 언약을 굳게 맺고 그가 그 이레의 절반에 제사와 예물을 금지할 것이며 또 포악하여 가증한 것이 날개를 의지하여 설 것이며”(단 9:27)

    “군대는 그의 편에 서서 성소 곧 견고한 곳을 더럽히며 매일 드리는 제사를 폐하며 멸망케 하는 미운 물건을 세울 것이며”(단 11:31)

    “매일 드리는 제사를 폐하며 멸망케 할 미운 물건을 세울 때부터 일천이백구십 일을 지낼 것이요”(단 12:11)

    성경학자들은 다니엘이 말한 ‘가증한 것’, ‘멸망케 할 미운 물건’은 B.C 167년 안티오쿠스가 예루살렘 성전의 제단을 파괴하고 그 자리에 제우스 신상을 세우고 돼지로 제사를 드린 사건으로 성취되었다고 본다. 또한 A.D 70년 예루살렘을 포위한 로마 군대의 독수리 문양 휘장이 예루살렘 가까운 곳에 세워지고, 나중에 예루살렘이 함락되고 성전에 그것에 세워짐으로 또 다시 성취되었다고 본다. 누가복음에는 더 구체적으로 예루살렘이 군대에 의해 포위되는 상황을 이야기하고 있다.

    “너희가 예루살렘이 군대들에게 에워싸이는 것을 보거든 그 멸망이 가까운 줄을 알라”(눅 21:20)

    예수님의 종말에 관한 이 예언을 이미 성취된 과거의 일로만 해석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이 말씀은 세상 마지막 날의 징조들을 설명하시면서 하신 말씀이기 때문이다. 이미 성취되었고, 또한 앞으로 다시 성취되어질 종말적 사건이라는 관점으로 이해되어야 할 내용인 것이다. 세상의 마지막 날이 가까워지면 어떤 일들이 일어나게 되는 것일까? 대체 다니엘 선지자가 말한 ‘가증한 것’, ‘멸망케 할 미운 물건’, 그리고 다니엘의 예언을 인용하시면서 예수님이 조금 다르게 표현하신 ‘멸망의 가증한 것’이란 무엇일까?


    마지막 시대의 특징은 교회의 배도, 활발한 이단운동

    바울 사도가 재림에 대하여 혼동과 미혹에 빠져있었던 데살로니가 교회에 보낸 편지를 보면 좀 더 자세하게 알 수 있다. 바울은 예수님의 재림이 일어나기 직전에 대대적인 배도와 그 가운데서 등장하는 인간 적그리스도가 나올 것이라고 예언하였다.

    “누가 아무렇게 하여도 너희가 미혹하지 말라 먼저 배도하는 일이 있고 저 불법의 사람 곧 멸망의 아들이 나타나기 전에는 이르지 아니하리니”(살후 2:3)

    예수님의 말씀과 다른 사도들의 글에서도 같은 내용이 나온다. 그리스도의 재림의 때가 임박하면 성경적 신앙에서 이탈하는 배도의 물결, 거짓 선생들과 이단들의 활동이 무르익을 것이라고 여러 성경들이 비슷하게 경고한다. 

    “그 때에 내가 그들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마 7:23)

    “거짓 그리스도들과 거짓 선지자들이 일어나 큰 표적과 기사를 보여 할 수만 있으면 택하신 자들도 미혹하리라”(마 24:24)

    “너희 중에도 거짓 선생들이 있으리라 저희는 멸망케 할 이단을 가만히 끌어들여 자기들을 사신 주를 부인하고 임박한 멸망을 스스로 취하는 자들이라”(벧후 2:1)

    “지금은 마지막 때라 적그리스도가 오리라는 말을 너희가 들은 것과 같이 지금도 많은 적그리스도가 일어났으니 그러므로 우리가 마지막 때인 줄 아노라”(요일 2:18)

    성경에 의하면 세상 마지막 때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배도의 물결이다. 거짓복음이 세상의 많은 교회에 관영하게 된는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세상 마지막 때를 설명하시면서 말씀하신 ‘멸망의 가증한 것’은 분명히 교회들 속에서 일어나는 배도의 물결과 깊은 연관이 있다. 예수님이 마지막 시대의 징조가 되는 것으로 설명한 '멸망의 가증한 것'은 틀림없이 표면적으로는 여전히 하나님을 섬기는 것 같으나 사실상 하나님을 대적하고 사탄을 섬기는 교회의 배도를 주도하는 어떤 인물이나 세력을 의미하는 것이다.

    다니엘이 말한 ‘가증한 것’, ‘멸망케 할 미운 물건’, 그리고 예수님이 말한 ‘멸망의 가증한 것’은 교회의 주인이신 하나님을 추방하고 사탄을 하나님으로 바꾸어 버리는 배교운동이 교회에 도입되는 것을 뜻하는 말이다. 구원을 주는 하나님의 복음을 없애고 대신 모두를 영구히 멸망하게 할 사탄의 거짓복음이 교회 속으로 들어와 정착되는 현상을 뜻하는 말이다. 사도 바울도 예수님의 재림 전에 대대적인 교회의 배도현상이 일어나고, 또한 그것의 이끄는 '멸망의 아들', 즉 적그리스도가 나타난다고 하였다. 예수님은 그러한 일이 교회에서 벌어지는 것이 보이면 믿는 자들은 더욱 지혜롭게 행동해야 한다고 하셨다. 


    천주교 중심의 일치운동이 '멸망의 가증한 것', 교황이 '멸망의 아들'??

    천주교 중심으로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는 종교일치 운동이 성경이 경고하는 마지막 시대의 배도현상, 즉 '멸망의 가증한 것', '멸망케 할 미운 물건', '가증한 것'이라고 생각된다. 그 중심에서 모든 종교들을 천주교 수하에 두고 아우르려고 시도하는 천주교의 교황이 적그리스도, 즉 바울이 경고한 '멸망의 아들'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실제로 놀라운 일이 진행되고 있다. 눈으로 보면서도 믿을 수가 없는 일이 일어났다. 참으로 놀랍고 기이한 일이 벌어졌다. 그것은 바로 천주교의 거짓 복음으로부터 성경의 복음을 수호하기 위해 일어난 종교개혁으로 탄생한 교회들이 스스로 천주교의 품으로 들어가 교회이기를 그치는 배교이다. 이미 1999년에 루터교회와 천주교가 의화교리 합의문을 작성하였고, 2006년에는 감리교회 천주교가 의화교리 합의문을 작성하였고, 그리고 2013년에는 미국의 칼빈신학교를 운영하는 교단인 CRC(Christian Reformed Church)를 비롯한 미국의 주요 4개 기독교 교단들이 천주교의 세례의 의미를 인정하고 공유한다는 ‘상호세례인정에 관한 공동협정’을 체결했다.

    천주교와 세계개혁교회연맹(WCRC)가 신앙합의 문서에 서명하고 있는 모습

    ‘의화교리 합의문’이나 ‘상호세례인정에 관한 공동협정’은 실질적으로 같은 내용이다. 천주교에서 죄인을 의롭게 만들어 주는 수단은 세례(영세)이다. 사람이 믿음을 준비하면 교회가 세례를 시행하여 원죄를 제거하고 의롭게 만드는 은총을 주입한다고 한다. 천주교의 세례사상은 기독교를 빙자한 이교사상이다. 성경은 오직 개인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이 칭의의 근거이고, 세례는 칭의를 이미 얻은 사람에게 추구 공적으로 표시하는 예식일 뿐이다.

    그러므로 천주교와 의화교리 합의문을 작성하거나, 상호간의 세례의 의미를 인정한다는 문서에 서명한다는 것은 이미 그리스도의 교회이기를 단념하는 심각한 배교이다. 그러나 이미 루터교, 감리교, 북미주개혁교회(CRC), 미국장로교회(PCUSA), 그리스도연합교회(UCC), 미국개혁교회(RCA)가 이러한 짓을 저질렀다. 이들의 궁색한 논리는 천주교도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세레를 베푼다는 것이다.

    한국의 이단 '구원파'와 '안식교'에서도 성부, 성자,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시행한다. 그러나 아무도 이들과 의화교리 합의문이나 세례협정문을 체결하자고 말하지 않는다. 그 이유는 구원파와 안식교가 비록 성부, 성자, 성령 등 같은 용어와 개념을 사용하고 있으나, 그들이 실제로 믿고 가르치는 내용이 성경에서 벗어났기 때문이다. 그런데 천주교가 가르치는 내용들 속에는 구원파나 안식교보다 더 비성경적인 것들이 많다. 그런데 왜 천주교와는 의화교리 합의문, 세례협정문을 체결하고, 구원파와 안식교는 차별하는 것일까?

    이것이 마지막 때에 일어난다고 예언된 교회의 배교이다. 하나님을 믿는 것 같으나 사실적으로 사탄을 섬기는 거짓 교회로 전락하는 것이다. 성경의 예언대로 되어가는 어쩔 수 없는 불행이 벌어지고 있다.

    천주교 측에서 운영하는 신문<카톨릭뉴스 지금여기>에 등장한 “카톨릭과 세계개혁교회연맹 의화문제 합의”(2017년 7월 10일)라는 기사를 보았다. 천주교와 ‘세계개혁교회연맹’(WCRC)이 의화교리 합의문을 작성하였다는 내용이었다. 자신의 신앙과 교회를 ‘개혁교회’(Reformed Church)라고 표현하는 교단들이 천주교와 다시 짝하는 일을 한다는 것은 정말 어이없다. 개혁교회의 선배들인 루터와 칼빈 등의 신앙을 짖밟고 다시 천주교의 거짓으로 돌아가는 행동이다.

    ‘가증한 것’, ‘멸망케 할 미운 물건’, ‘멸망의 가증한 것’이 교회 속으로 더 깊이 들어오고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은 배교와 거짓복음의 물결에 참여하는 교회들은 결코 하나님의 교회가 아니다. 참된 목회자도 아니고 성도도 아니다. 훗날 거짓된 교회들과 신자들을 하나님께서는 매우 단호하게 책망하시고 심판하실 것이다. 성경이 예언하고 경고한 이 물결에 합류하여 춤추는 자들은 영원히 죽을 자들이다. 하나님께서는 지금 참된 교회들, 목회자들, 성도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신다.

    “또 내가 들으니 하늘로서 다른 음성이 나서 가로되 내 백성아, 거기서 나와 그의 죄에 참예하지 말고 그의 받을 재앙들을 받지 말라”(계 18:4)



    예수님께서 증거하신 '멸망의 가증한 것'은 무엇인가?

    그러므로 너희가 선지자 다니엘의 말한바 멸망의 가증한 것이 거룩한 곳에 선 것을 보거든 (읽는 자는 깨달을찐저) 그 때에 유대에 있는 자들은 산으로 도망할찌어다 -마24:15~16

    본문의 말씀은 초림 때 예수님께서 재림 때의 징조(徵兆)에 대해 말씀하시면서 증거하신 말씀입니다. 곧 '멸망의 가증한 것'이 거룩한 곳에 선 것을 보거든 산으로 도망하라는 내용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산'은 요한계시록 성취 때에 등장하는 '시온산'입니다. (계14:1) 하지만, 아무때나 도망가는 것이 아니고 '멸망의 가증한 것'이 거룩한 곳에 섰을 때 도망을 가야하는 것이죠. 그렇다면 본문의 성구에서 말하는 '멸망의 가증한 것'이 무엇인지를 먼저 깨달아야만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구약의 선지자 다니엘이 '멸망의 가증한 것'에 대해 말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렇다면 '멸망의 가증한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 '다니엘서'에 기록이 되어있다는 뜻이죠. 그렇다면 다니엘서에 기록된 '멸망의 가증한 것'이 무엇인지 한번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왕이여 왕이 한 큰 신상을 보셨나이다 그 신상은 왕의 앞에 섰는데 크고 광채가 특심하며 그 모양이 심히 두려우니 그 우상의 머리는 정금이요 가슴과 팔들은 은이요 배와 넓적다리는 놋이요 그 종아리는 철이요 그 발은 얼마는 철이요 얼마는 진흙이었나이다 -단2:31~33

    위 말씀은 다니엘이 바벨론의 왕 느부갓네살이 꿈에서 본 신상(우상)에 대해서 설명하고 있는 내용입니다. 그리고 다니엘은 바벨론왕이 본 신상의 머리가 곧 '바벨론왕'이라 설명하였습니다. (단2:38) 바벨론은 구약시절 남유다(유다지파)를 멸망시킨 나라였습니다. 아담 때부터 재림 때까지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선민(이스라엘)들이 죄를 범할 때마다 이방민족을 들어서 선민들에게 그에 상응하는 벌을 내리셨습니다. (사10:5) 곧 '멸망의 가증한 것'은 범죄한 선민들을 멸망시키는 이방(異邦)을 뜻하는 것입니다. 

    바벨론왕이 꿈에서 본 신상을 좀더 분석해 보면 아래의 사진과 같은 구조를 가지고 있습니다. 

    곧 '머리(1)+가슴(1)+팔(2)+배(1)+다리(2) = (7)등분'의 구조와 '발가락(10)개'의 구조를 가지고 있죠. 요한계시록에도 이와 비슷한 존재가 출현하게 되는데 곧 '일곱(7)머리와 열(10)뿔 가진 짐승'이 출현하게 됩니다. 곧 이들의 '우상(거짓 목자)의 조직체'이자 '멸망의 가증한 것'이라는 뜻이죠. 

    내가 보니 바다에서 한 짐승이 나오는데 뿔이 열이요 머리가 일곱이라 그 뿔에는 열 면류관이 있고 그 머리들에는 참람된 이름들이 있더라 내가 본 짐승은 표범과 비슷하고 그 발은 곰의 발 같고 그 입은 사자의 입 같은데 용이 자기의 능력과 보좌와 큰 권세를 그에게 주었더라 -계13:1~2

    위 말씀에서 용(龍)은 '사단마귀'를 뜻하는 것입니다. (계20:2) 즉 사단이 '일곱 머리와 열뿔 가진 짐승'에게 자신의 능력과 권세를 준 이유는 '범죄한 하나님의 선민(選民:택한 백성)들을 멸망시키기 위함'입니다. 즉 이 '일곱 머리와 열뿔 가진 짐승'이 주 재림 때 출현하는 '멸망의 가증한 것'이라는 뜻입니다. 다시 다니엘서로 돌아가서 또 다른 예언을 하나 더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다니엘이 진술하여 가로되 내가 밤에 이상을 보았는데 하늘의 네 바람이 큰 바다로 몰려 불더니 큰 짐승 넷이 바다에서 나왔는데 그 모양이 각각 다르니 첫째는 사자와 같은데 독수리의 날개가 있더니 내가 볼 사이에 그 날개가 뽑혔고 또 땅에서 들려서 사람처럼 두 발로 서게 함을 입었으며 또 사람의 마음을 받았으며 다른 짐승 곧 둘째는 곰과 같은데 그것이 몸 한편을 들었고 그 입의 잇사이에는 세 갈빗대가 물렸는데 그에게 말하는 자가 있어 이르기를 일어나서 많은 고기를 먹으라 하였으며 그 후에 내가 또 본즉 다른 짐승 곧 표범과 같은 것이 있는데 그 등에는 새의 날개 넷이 있고 그 짐승에게 또 머리 넷이 있으며 또 권세를 받았으며 내가 밤 이상 가운데 그 다음에 본 네째 짐승은 무섭고 놀라우며 또 극히 강하며 또 큰 철 이가 있어서 먹고 부숴뜨리고 그 나머지를 발로 밟았으며 이 짐승은 전의 모든 짐승과 다르고 또 열 뿔이 있으므로 -단7:2~7

    위 말씀에서 다니엘이 이상(환상)으로 본 짐승은 첫째는 사자, 둘째는 곰, 셋째는 머리가 4개 달린 표범, 넷째는 10뿔이 있다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짐승의 머리의 수는 사자(1)+곰(1)+표범(4)+네째짐승(1) = '7머리'입니다. 또 네째 짐승에게는 10뿔이 있다하였으니 곧 '일곱머리와 열뿔가진 짐승'을 뜻하는 것입니다. 곧 다니엘과 요한이 환상을 통하여 본 짐승은 동일한 존재를 본 것이었습니다. 이 짐승을 사자,표범,곰 등의 맹수로 비유한 이유는 이들이 '양(羊)'같은 하나님의 선민들을 잡아먹거나 멸망시키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또 성경에서는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을 '짐승'으로 비유하고 있습니다.(잠30:2~3) 곧 일곱머리와 열뿔가진 짐승은 '사람'을 뜻하는 것이죠. 구체적으로 말씀을 드리면 '거짓 목자'를 뜻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재림 때를 말씀하시면서 가장 먼저 주의해야 할 것이 '사람의 미혹'이라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마24:4) 이 일곱머리와 열뿔가진 짐승(사람)이 하나님의 선민들을 미혹시켜 죄(罪)를 짓게 만들기 때문이죠.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모세의 자리에 앉았으니 -마23:2

    구약시대의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에게 '모세와 같은 선지자'를 보내주실 것을 약속하셨습니다. (신18:5) 곧 하나님께서 약속하셨던 '모세와 같은 선지자'는 예수님이셨던 것입니다. 즉 위 말씀에서 '모세의 자리'는 모세와 같은 선지자로 오신 예수님께서 앉아서 치리해야 할 자리였던 것입니다. 하지만, 그 자리를 당시 유대교의 종교지도자들(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차지하고 있었던 것이죠. 곧 이 사건이 초림 때 '멸망의 가증한 것이 거룩한 곳에 서는 일'이었던 것입니다. 곧 초림 때 출현한 '멸망의 가증한 것'은 당시 유대교의 종교지도자들이었던 것이죠. 이와 같이 주 재림 때에도 본문의 말씀과 같이 거짓 목자들(일곱머리와 열뿔가진 짐승)이 거룩한 곳에 서게 되는 사건이 예언대로 있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마24:15~16)

    짐승이 입을 벌려 하나님을 향하여 훼방하되 그의 이름과 그의 장막 곧 하늘에 거하는 자들을 훼방하더라 -계13:6

    위 말씀에서의 '짐승'은 바다에서 올라온 짐승(일곱머리 중의 우두머리:거짓목자)을 뜻하는 것입니다. 이들이 훼방하는 '하늘'은 곧 하나님의 선민들이 있는 '거룩한 곳(해와 달과 별이 있는 곳 : 하늘)'을 뜻하는 것입니다. (창37:9~11) 곧 이 사건이 바로 계시록이 이루어질 때 나타나는 '멸망의 가증한 것이 거룩한 곳에 서는 일'인 것입니다. 위 예언은 이미 이루어져 그 실체들이 출현하였고 그렇기 때문에 지금은 예수님께서 경고하신대로 '(시온)산'으로 도망을 가야할 때인 것입니다. 산으로 도망을 가기 위해서는 '성경말씀의 참 뜻'을 체계적으로 배워 깨달아야만 합니다. 이만 글을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멸망의 가증 한 것’ 이란 무엇인가? (마태 24:15; 다니엘 9:27)

    “멸망의 가증 한 것”이라는 구절은 마태복음 24:15에 나옵니다.
    “그러므로 너희가 선지자 다니엘이 말한 바
    멸망의 가증한 것이 거룩한 곳에 선 것을 보거든 (읽는 자는 깨달을진저).”
    이 구절은 다니엘서 9:27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그가 장차 많은 사람들과 더불어 한 이레 동안의 언약을 굳게 맺고
    그가 그 이레의 절반에 제사와 예물을 금지할 것이며
    또 포악하여 가증한 것이 날개를 의지하여 설 것이며
    또 이미 정한 종말까지 진노가 황폐하게 하는 자에게 쏟아지리라 하였느니라 하니라.”
    기원전 167년에 안티오쿠스 에피파네스 Antiochus Epiphanies 라는 이름의 그리스 통치자가
    예루살렘에 있는 유대인 성전의 번제단 위에 제우스 제단을 세웠습니다.
    그는 또한 예루살렘 성전의 제단에서 돼지로 희생 제사를 바쳤습니다.
    이 사건이 멸망의 가증한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예수님은 앞에서 묘사된 멸망의 가증한 것이 세워진 지 약 200년이 지난 후,
    마태복음 24:15에서 말씀하셨습니다.
    따라서 예수께서는 장래 언젠가 예루살렘에 있는 유대인의 성전에서 발생하게 될
    또 다른 멸망의 가증한 것에 대해 예언하신 것이 틀림 없습니다.

    대부분의 성경 예언 해석자들은 예수님은 적그리스도를 언급하시면서
    그가 안티오쿠스 에피파네스가 행한 것과 매우 유사한 짓을 행할 것이라고 예언하신 것으로 믿습니다.
    이 사실은 다니엘서 9:27에서 다니엘이 예언한 내용 중에 일부가
    기원전 167년에 안티오쿠스 에피파네스 시대에 함께 발생하지 않았다는 사실에 의해 확인됩니다.
    안티오쿠스는 이스라엘과 7년 조약을 맺지 않았습니다.
    마지막 때에 이스라엘과 7년 조약을 맺고
    예루살렘에 있는 유대인의 성전에서 멸망의 가증한 것과 비슷한 일을 행함으로
    그 조약을 깨뜨릴 자가 바로 적그리스도 입니다.

    장래의 멸망의 가증한 것이 무엇이든지 간에,
    그러한 일을 저지르는 자는 적그리스도로 알려진 사람이라는 점에 의심의 여지가 없습니다.
    요한계시록 13:14은 그가 어떤 형상을 만든 후
    모든 사람이 그 형상을 숭배하도록 강요할 것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살아계신 하나님의 성전을 적그리스도를 위한 숭배의 장소로 바꾸는 것은 참으로 “가증스러운 일”입니다.
    대환난 중에 살아 남은 사람들은 깨어 경성하는 가운데
    이러한 사건이 대환란의 최악의 기간인 3 년 반의 시작이라는 것과
    주 예수님의 재림이 임박했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이러므로 너희는 장차 올 이 모든 일을 능히 피하고
    인자 앞에 서도록 항상 기도하며 깨어 있으라 하시니라” (누가복음 21:36).



    멸망의 가증한 것(13:14)

    '멸망의 가증 한 것' 이란 무엇인가?

    멸망의 가증 한 것이란 구절은 마태복음 24:15, 마가복음 13:14에 나옵니다. 
    이 구절은 다니엘 9:27을 인용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너희가 선지자 다니엘이 말한 바 멸망의 가증한 것이 거룩한 곳에 선 것을 보거든 (읽는 자는 깨달을진저).” 

    "그가 장차 많은 사람들과 더불어 한 이레 동안의 언약을 굳게 맺고 그가 그 이레의 절반에 제사와 예물을 금지할 것이며 또 포악하여 가증한 것이 날개를 의지하여 설 것이며 또 이미 정한 종말까지 진노가 황폐하게 하는 자에게 쏟아지리라 하였느니라 하니라.” 

    기원전 167년에 안티오쿠스 에피파네스 Antiochus Epiphanies 라는 이름의 그리스 통치자가 예루살렘에 있는 유대인 성전의 번제단 위에 제우스 제단을 세웠습니다. 
    그는 또한 예루살렘 성전의 제단에서 돼지로 희생 제사를 바쳤습니다. 
    이 사건이 멸망의 가증한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예수님은 앞에서 묘사된 멸망의 가증한 것이 세워진 지 약 200년이 지난 후, 마태복음 24:15에서 말씀하셨습니다. 
    따라서 예수께서는 장래 언젠가 예루살렘에 있는 유대인의 성전에서 발생하게 될 또 다른 멸망의 가증한 것에 대해 예언하신 것이 틀림 없습니다. 대부분의 성경 예언 해석자들은 예수님은 적그리스도를 언급하시면서 그가 안티오쿠스 에피파네스가 행한 것과 매우 유사한 짓을 행할 것이라고 예언하신 것으로 믿습니다. 이 사실은 다니엘서 9:27에서 다니엘이 예언한 내용 중에 일부가 기원전 167년에 안티오쿠스 에피파네스 시대에 함께 발생하지 않았다는 사실에 의해 확인됩니다. 안티오쿠스는 이스라엘과 7년 조약을 맺지 않았습니다. 마지막 때에 이스라엘과 7년 조약을 맺고 예루살렘에 있는 유대인의 성전에서 멸망의 가증한 것과 비슷한 일을 행함으로 그 조약을 깨뜨릴 자가 바로 적그리스도 입니다.

    장래의 멸망의 가증한 것이 무엇이든지 간에, 그러한 일을 저지르는 자는 적그리스도로 알려진 사람이라는 점에 의심의 여지가 없습니다. 요한계시록 13:14은 그가 어떤 형상을 만든 후 모든 사람이 그 형상을 숭배하도록 강요할 것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살아계신 하나님의 성전을 적그리스도를 위한 숭배의 장소로 바꾸는 것은 참으로 "가증스러운 일"입니다. 대환난 중에 살아 남은 사람들은 깨어 경성하는 가운데 이러한 사건이 대환란의 최악의 기간인 3 년 반의 시작이라는 것과 주 예수님의 재림이 임박했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이러므로 너희는 장차 올 이 모든 일을 능히 피하고 인자 앞에 서도록 항상 기도하며 깨어 있으라 하시니라” (누가복음 21:36).

    거룩한 곳에 선 가증한 것(마태복음 24:15~28)

    그러므로 너희가 선지자 다니엘의 말한바 멸망의 가증한 것이 거룩한 곳에 선 것을 보거든(읽는자는 깨달을찐저) 그 때에 유대에 있는 자들은 산으로 도망할찌어다 지붕 위에 있는 자는 집안에 있는 물건을 가지러 내려가지 말며 밭에 있는 자는 겉옷을 가지러 뒤로 돌이키지 말찌어다 그날에는 아이 밴 자들과 젖먹이는 자들에게 화가 있으리로다 너희의 도망하는 일이 겨울에나 안식일에 되지 않도록 기도하라 이는 그 때에 큰 환난이 있겠음이라 창세로부터 지금까지 이런 환난이 없었고 후에도 없으리라 그 날들을 감하지 아니할 것이면 모든 육체가 구원을 얻지 못할 것이나 그러나 택하신 자들을 위하여 그 날들을 감하시리라 그 때에 사람이 너희에게 말하되 보라 그리스도가 여기 있다 혹 저기 있다 하여도 믿지 말라 거짓 그리스도들과 거짓 선지자들이 일어나 큰 표적과 기사를 보이어 할 수만 있으면 택하신 자들도 미혹하게 하리라 보라 내가 너희에게 미리 말하였노라 그러면 사람들이 너희에게 말하되 보라 그리스도가 광야에 있다 하여도 나가지 말고 보라 골방에 있다 하여도 믿지 말라 번개가 동편에서 나서 서편까지 번쩍임 같이 인자의 임함도 그러하리라 주검이 있는 곳에는 독수리들이 모일찌니라.

    성경을 별명으로 율법이라고 하고 예언이라고도 합니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향하신 뜻을 말해 주는 글이기도 하며 또한 하나님의 뜻을 설명해 주는 예언서이기도 합니다. "예언"이라고 해서 꼭 미래에 있을 이야기만을 기록해 주는 것은 아닙니다. 예언이란 말의 원어가 보여 주는 뜻은 "말한다" "선언한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말씀해 주실 때 그것이 곧 예언이 되는 것입니다. 과거에 대한 하나님의 뜻, 현재에 나타난 하나님의 경륜 동시에 미래로 향한 하나님의 뜻을 말해 줄 때 이를 예언이라 하고 이를 말해주는 자를 예언자(선지자)라고 하며 그 예언을 기록해 줄 때 이것을 예언서라고 하는 것입니다.

    성경은 언제나 그 시작과 근원에 대하여서 설명하기도 하며 또한 끝(終末)에 대하여 계속적으로 말해 주고 있습니다. 언제나 그 결과와 끝을 미리 말함으로서 오늘의 뜻을 설명하고 있는 것이 성경의 특징이기도 합니다. 때로는 희망적인 미래를 말하기도 합니다만 이러한 희망적인 장래를 말하기에 앞서서 대체로 어두운 미래를 먼저 말하고 있는 것을 성경 전체의 문맥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빛 이전에 어두움, 영광 이전에 수치, 생명 이전에 죽음을 말해 주고 있습니다. 어떤 때는 큰 멸망만을 예언해 주기도 합니다. 어떤 심판이든지 어떤 멸망이든지 반드시 그 환난과 멸망이 먼저 예고되었고 예언되었었습니다. 생각건대 이것이 하나님의 큰사랑이라고 봅니다. 멸망되는데 무슨 사전 지식이 필요하며 준비가 있어야 하는 것은 물론 아닙니다. 이 예언들은 곧 멸망을 피하라는 뜻이 그 속에 있는 것인 줄 압니다. 소돔과 고모라 그리고 니느웨성, 바벨론 포로 때의 유대나라 등에 언제나 미리 예언해 주셨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종말에 대한 예언입니다. 15절 말씀 멸망의 가증한 것이 거룩한 곳에 선 것을 보거든 끝이 온 줄로 알라고 하신 것은 다니엘서의 인용이었습니다.

    다니엘의 예언은 안티오커스 에피파네스가 예루살렘을 침공하고 그들의 우상인 쥬피타의 신상을 성전 안에 세워 놓고 돼지를 잡아서 제사를 드렸다고 하는 역사 안에서 응하였다고 봅니다. 문자 그대로 가증한 것이 거룩한 곳에 선 것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성경을 인용하여 예언하신 것은 로마로 인하여 유대 나라가 망할 것을 직접적으로 예언하시는 데 뜻이 있었던 것으로 생각됩니다. 로마제국 군대의 상징인 독수리 상을 성전 안에 세워 놓고 제사들인 일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예언은 이것만 생각하고 말씀하신 것은 아닌 것으로 봅니다. 역사의 종말을 말씀하시며 도시에 어느 시대에나 있을 수 있는 원리를 말씀하고 계신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면 "멸망의 가증한 것"이 무엇입니까? 가증한 것이란 원문대로의 뜻을 살피면 밉살스러운 것 또는 아주 참을 수 없이 싫은 것을 말합니다. 즉 꼭 망해야 할 자가 흥하고 마땅히 천한 대우를 받아야 할 자가 영광을 얻고 마땅히 저주를 받아야 할 자가 복을 누리고 있어서는 아니 될 자가 있어지는 것, 또는 있어서는 안될 위치에 있는 자들을 뜻합니다. 목불인견(目不忍見)이며, 차마 볼 수 없는 꼴불견을 말하는 것입니다.

    또한 "거룩한 곳"이란 직접으로는 하나님의 성전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그 뜻으로서는 하나님의 위치 즉 신적(神的)인 위치와 신적인 예배, 경배를 받는 위치를 뜻합니다. 가증한 것이 거룩한 곳에 선 것을 보거든 종말이 온줄로 알라고 말씀하였습니다. 이것이 종말의 예표이며 표징이라는 말씀입니다.

    역사 가운데에 이러한 예는 얼마든지 많습니다. 바벨론의 느브갓네살 왕도 신적인 대우를 받다가 망했습니다. 특히 "쿼바디스"란 영화나 소설을 보면 네로 황제라는 어이없는 폭군이 나옵니다. 그는 자기가 세계 제일의 시인이요, 음악가라고 자처하며 친히 시를 읊고 또 곡을 붙여서 손수 악기를 연주하면서 노래를 불렀고 굉장한 시상을 위해서 로마성을 불을 지른 변태적인 성격의 왕이며 자기가 노래를 부르는 동안 졸았다고 해서 신하를 열 일곱 명이나 죽였다는 어이없는 폭군인데 이 속물(俗物)이 자기는 신(神)이다, 죽지 아니한다고 하며 자기를 살아 있는 신으로 섬기라고 강요하였습니다. 결국 그는 망했으며 대로마제국의 망국사도 끝내는 황제 숭배의 종교의식이 강요되며 이를 거부한 수많은 기독교인들을 죽이면서 속물들이 신의 대우를 받으려고 했던 것을 역사에서 밝혀 볼 수 있습니다.

    히틀러도 일본의 천황도 하나의 속된 인간이거늘 그들이 권력을 가질 때 인간의 모든 영광을 다 누리면서도 이것이 부족하여 신의 영광을 받아 보려고 하다가 결국 패망한 것을 역력히 볼 수 있습니다. 가증한 것이 거룩한 곳에 선 것을 보면 끝이 온 것을 알아야 하겠습니다.

    우리는 다시 이 말씀을 우리의 생활과 우리 네 사회 구조와 그리고 인격 안에서 소화해야 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되지 못하고 된 줄로 알며 어리석은 자가 지혜 있는 체하고 없고도 있는 체 죄인이면서 의인인 체 이것들도 가증한 것이요 볼 수 없는 것이며 꼴불견입니다. 특히 혼란 속에서 어쩌다 돈은 벌어서 인격은 갖추지 못한 채 돈만 가진 벼락부자! 이것은 정말 목불인견입니다. 사람을 사람으로 보지 않고 돈이면 다인 줄로 알고 허세를 부리며 안하무인격으로 자기를 높혀 놓고 가정부이건 자가용 운전사이건 아직도 옛날에 종을 부리듯 하는 꼴이야 차마 볼 수 없는 가증한 것입니다.

    그러나 더욱 문제되는 것은 거룩한 곳의 문제입니다. 이 세상에 모순과 부조리는 있는 것이 사실이고 거짓도 부정도 엄연히 존재한다고 봅니다. 최선이란 이름의 거짓, 합리적인 이론을 바침하고 있는 정당화한 부정, 가치 현실화의 지지를 받고 있는 상황적인 불가피한 죄악 같은 것들이 우리 주위에서 분명히 판을 치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하나님께서 용납하시고 때로는 침묵하시고 길이 참아 주시는 것 같이 느껴집니다.

    그러나 거짓은 용납된다해도 위선(僞善)은 안되며 위성(僞聖)은 결코 용납될 수 없는 것이라고 봅니다. 물건을 도적한 자는 살았으나 아나니아와 삽비라는 죽었습니다. 죄인이 살 수도 있고, 잘 살 수도 있으며 권력을 가지고 호령하며 명예를 얻고 영광을 누리기도 하는 것을 봅니다.

    그러나 성자(聖者) 대우를 받아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신적인 대우를 받을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부정한 자가 권력을 가질 수는 있으나 거룩한 자의 위치에 오를 수는 없고 거짓된 자가 잘 살 수는 있을지 모르나 성자의 대우를 받아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속물(俗物)이 부자가 되고 권력자도 되겠지만은 거룩한 자의 위치에 오를 수는 없는 것입니다.

    김일성이란 사람이 혁명가의 대우를 받는 것까지는 좋고 불의한 자가 권력을 손에 쥐고 폭력을 내두르며 호령하는 것까지는 있을 수 있으나 이제 인간의 선을 넘어서 종교적인 대상이 되고 신적인 존경과 경배를 받고 있으니 이 또한 끝이 온 것을 말해 줍니다.

    가증한 것이 언제든지 거룩한 곳에 세워지면 곧 끝이 온다는 진리입니다. 깊이 생각해 봅시다. 우리의 사회 안에 혹이나 가증한 것이 정당한 자의 위치에 엄연히 있을 뿐더러 나아가서는 신적인 경배를 받고 있지 않으며, 스스로를 절대화하여 가증한 꼴을 노출하고 있지는 않는가? 언제나 그 징조를 밝혀 알아야 할 것입니다.

    우리의 심령은 성령이 거하시는 하나의 거룩한 곳 즉 성전입니다. 돈은 힘이 있어서 권력도 지식도 때로는 인격까지 지배하며 또 사기도 하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돈이 종교적 경배의 위치에 오르면 망하는 것입니다. 돈이건 지위이건 지식이건 인격이건 무엇이던지 신적인 위치에 오르고 섬기는 위치에 오르며 예배의 대상이 되면 망하게 되는 것입니다. 돈은 지배해야 하는 것이지 돈을 섬기고 경배하면 곧 망합니다. 그 무엇이든지, 그 누구든지 가증한 것이 거룩한 곳에 서게 되면 곧 망하게 된다는 말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살아 계신 증거입니다. 우리의 거룩한 마음 성전 안에 그 어떠한 가증한 것도 세워져서는 안 된다는 말입니다. 하나님만이 하나님의 대우를 받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만을 하나님으로 섬기고 경배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루터는 "Let God be God"하나님으로 하나님 되게 하라고 외쳤습니다. 모르드개는 이 뜻을 따르다가 죽을 뻔하지 않았습니까? 하나님만을 경배하라는 것입니다. 미국 사람들의 쓰는 돈 안에 "In God We Trust"라고 쓰여 있는 것을 봅니다. "돈은 쓰되 돈을 의지하지 아니하고 하나님만 의지합니다."라는 신앙 고백을 볼 때마다 그들 조상들의 귀한 신앙을 엿 볼 수 있습니다.

    끝의 징조를 보고 끝을 알았으면 이제는 뒤로 돌이키지 말라고 하십니다. 롯의 아내를 생각하라고 하십니다. 영원한 생명만 의지하며 믿음만을 위하여 전심전력하라 하십니다. 환난과 핍박과 유혹이 심하게 되리라고 예언하십니다. 그러나 13절에 끝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고 밝은 소망을 보여 주십니다.

    끝까지 하나님만 경배하며 믿음을 지키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고 하십니다.  

    거룩한 곳에 선 가증한 것(마태복음 24장 15~28절)

    그러므로 너희가 선지자 다니엘의 말한바 멸망의 가증한 것이 거룩한 곳에 선 것을 보거든(읽는자는 깨달을찐저) 그 때에 유대에 있는 자들은 산으로 도망할찌어다 지붕 위에 있는 자는 집안에 있는 물건을 가지러 내려가지 말며 밭에 있는 자는 겉옷을 가지러 뒤로 돌이키지 말찌어다 그날에는 아이 밴 자들과 젖먹이는 자들에게 화가 있으리로다 너희의 도망하는 일이 겨울에나 안식일에 되지 않도록 기도하라 이는 그 때에 큰 환난이 있겠음이라 창세로부터 지금까지 이런 환난이 없었고 후에도 없으리라 그 날들을 감하지 아니할 것이면 모든 육체가 구원을 얻지 못할 것이나 그러나 택하신 자들을 위하여 그 날들을 감하시리라 그 때에 사람이 너희에게 말하되 보라 그리스도가 여기 있다 혹 저기 있다 하여도 믿지 말라 거짓 그리스도들과 거짓 선지자들이 일어나 큰 표적과 기사를 보이어 할 수만 있으면 택하신 자들도 미혹하게 하리라 보라 내가 너희에게 미리 말하였노라 그러면 사람들이 너희에게 말하되 보라 그리스도가 광야에 있다 하여도 나가지 말고 보라 골방에 있다 하여도 믿지 말라 번개가 동편에서 나서 서편까지 번쩍임 같이 인자의 임함도 그러하리라 주검이 있는 곳에는 독수리들이 모일찌니라.

    성경을 별명으로 율법이라고 하고 예언이라고도 합니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향하신 뜻을 말해 주는 글이기도 하며 또한 하나님의 뜻을 설명해 주는 예언서이기도 합니다. "예언"이라고 해서 꼭 미래에 있을 이야기만을 기록해 주는 것은 아닙니다. 예언이란 말의 원어가 보여 주는 뜻은 "말한다" "선언한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말씀해 주실 때 그것이 곧 예언이 되는 것입니다. 과거에 대한 하나님의 뜻, 현재에 나타난 하나님의 경륜 동시에 미래로 향한 하나님의 뜻을 말해 줄 때 이를 예언이라 하고 이를 말해주는 자를 예언자(선지자)라고 하며 그 예언을 기록해 줄 때 이것을 예언서라고 하는 것입니다.

    성경은 언제나 그 시작과 근원에 대하여서 설명하기도 하며 또한 끝(終末)에 대하여 계속적으로 말해 주고 있습니다. 언제나 그 결과와 끝을 미리 말함으로서 오늘의 뜻을 설명하고 있는 것이 성경의 특징이기도 합니다. 때로는 희망적인 미래를 말하기도 합니다만 이러한 희망적인 장래를 말하기에 앞서서 대체로 어두운 미래를 먼저 말하고 있는 것을 성경 전체의 문맥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빛 이전에 어두움, 영광 이전에 수치, 생명 이전에 죽음을 말해 주고 있습니다. 어떤 때는 큰 멸망만을 예언해 주기도 합니다. 어떤 심판이든지 어떤 멸망이든지 반드시 그 환난과 멸망이 먼저 예고되었고 예언되었었습니다. 생각건대 이것이 하나님의 큰사랑이라고 봅니다. 멸망되는데 무슨 사전 지식이 필요하며 준비가 있어야 하는 것은 물론 아닙니다. 이 예언들은 곧 멸망을 피하라는 뜻이 그 속에 있는 것인 줄 압니다. 소돔과 고모라 그리고 니느웨성, 바벨론 포로 때의 유대나라 등에 언제나 미리 예언해 주셨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종말에 대한 예언입니다. 15절 말씀 멸망의 가증한 것이 거룩한 곳에 선 것을 보거든 끝이 온 줄로 알라고 하신 것은 다니엘서의 인용이었습니다.

    다니엘의 예언은 안티오커스 에피파네스가 예루살렘을 침공하고 그들의 우상인 쥬피타의 신상을 성전 안에 세워 놓고 돼지를 잡아서 제사를 드렸다고 하는 역사 안에서 응하였다고 봅니다. 문자 그대로 가증한 것이 거룩한 곳에 선 것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성경을 인용하여 예언하신 것은 로마로 인하여 유대 나라가 망할 것을 직접적으로 예언하시는 데 뜻이 있었던 것으로 생각됩니다. 로마제국 군대의 상징인 독수리 상을 성전 안에 세워 놓고 제사들인 일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예언은 이것만 생각하고 말씀하신 것은 아닌 것으로 봅니다. 역사의 종말을 말씀하시며 도시에 어느 시대에나 있을 수 있는 원리를 말씀하고 계신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면 "멸망의 가증한 것"이 무엇입니까? 가증한 것이란 원문대로의 뜻을 살피면 밉살스러운 것 또는 아주 참을 수 없이 싫은 것을 말합니다. 즉 꼭 망해야 할 자가 흥하고 마땅히 천한 대우를 받아야 할 자가 영광을 얻고 마땅히 저주를 받아야 할 자가 복을 누리고 있어서는 아니 될 자가 있어지는 것, 또는 있어서는 안될 위치에 있는 자들을 뜻합니다. 목불인견(目不忍見)이며, 차마 볼 수 없는 꼴불견을 말하는 것입니다.

    또한 "거룩한 곳"이란 직접으로는 하나님의 성전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그 뜻으로서는 하나님의 위치 즉 신적(神的)인 위치와 신적인 예배, 경배를 받는 위치를 뜻합니다. 가증한 것이 거룩한 곳에 선 것을 보거든 종말이 온줄로 알라고 말씀하였습니다. 이것이 종말의 예표이며 표징이라는 말씀입니다.

    역사 가운데에 이러한 예는 얼마든지 많습니다. 바벨론의 느브갓네살 왕도 신적인 대우를 받다가 망했습니다. 특히 "쿼바디스"란 영화나 소설을 보면 네로 황제라는 어이없는 폭군이 나옵니다. 그는 자기가 세계 제일의 시인이요, 음악가라고 자처하며 친히 시를 읊고 또 곡을 붙여서 손수 악기를 연주하면서 노래를 불렀고 굉장한 시상을 위해서 로마성을 불을 지른 변태적인 성격의 왕이며 자기가 노래를 부르는 동안 졸았다고 해서 신하를 열 일곱 명이나 죽였다는 어이없는 폭군인데 이 속물(俗物)이 자기는 신(神)이다, 죽지 아니한다고 하며 자기를 살아 있는 신으로 섬기라고 강요하였습니다. 결국 그는 망했으며 대로마제국의 망국사도 끝내는 황제 숭배의 종교의식이 강요되며 이를 거부한 수많은 기독교인들을 죽이면서 속물들이 신의 대우를 받으려고 했던 것을 역사에서 밝혀 볼 수 있습니다.

    히틀러도 일본의 천황도 하나의 속된 인간이거늘 그들이 권력을 가질 때 인간의 모든 영광을 다 누리면서도 이것이 부족하여 신의 영광을 받아 보려고 하다가 결국 패망한 것을 역력히 볼 수 있습니다. 가증한 것이 거룩한 곳에 선 것을 보면 끝이 온 것을 알아야 하겠습니다.

    우리는 다시 이 말씀을 우리의 생활과 우리 네 사회 구조와 그리고 인격 안에서 소화해야 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되지 못하고 된 줄로 알며 어리석은 자가 지혜 있는 체하고 없고도 있는 체 죄인이면서 의인인 체 이것들도 가증한 것이요 볼 수 없는 것이며 꼴불견입니다. 특히 혼란 속에서 어쩌다 돈은 벌어서 인격은 갖추지 못한 채 돈만 가진 벼락부자! 이것은 정말 목불인견입니다. 사람을 사람으로 보지 않고 돈이면 다인 줄로 알고 허세를 부리며 안하무인격으로 자기를 높혀 놓고 가정부이건 자가용 운전사이건 아직도 옛날에 종을 부리듯 하는 꼴이야 차마 볼 수 없는 가증한 것입니다.

    그러나 더욱 문제되는 것은 거룩한 곳의 문제입니다. 이 세상에 모순과 부조리는 있는 것이 사실이고 거짓도 부정도 엄연히 존재한다고 봅니다. 최선이란 이름의 거짓, 합리적인 이론을 바침하고 있는 정당화한 부정, 가치 현실화의 지지를 받고 있는 상황적인 불가피한 죄악 같은 것들이 우리 주위에서 분명히 판을 치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하나님께서 용납하시고 때로는 침묵하시고 길이 참아 주시는 것 같이 느껴집니다.

    그러나 거짓은 용납된다해도 위선(僞善)은 안되며 위성(僞聖)은 결코 용납될 수 없는 것이라고 봅니다. 물건을 도적한 자는 살았으나 아나니아와 삽비라는 죽었습니다. 죄인이 살 수도 있고, 잘 살 수도 있으며 권력을 가지고 호령하며 명예를 얻고 영광을 누리기도 하는 것을 봅니다.

    그러나 성자(聖者) 대우를 받아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신적인 대우를 받을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부정한 자가 권력을 가질 수는 있으나 거룩한 자의 위치에 오를 수는 없고 거짓된 자가 잘 살 수는 있을지 모르나 성자의 대우를 받아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속물(俗物)이 부자가 되고 권력자도 되겠지만은 거룩한 자의 위치에 오를 수는 없는 것입니다.

    김일성이란 사람이 혁명가의 대우를 받는 것까지는 좋고 불의한 자가 권력을 손에 쥐고 폭력을 내두르며 호령하는 것까지는 있을 수 있으나 이제 인간의 선을 넘어서 종교적인 대상이 되고 신적인 존경과 경배를 받고 있으니 이 또한 끝이 온 것을 말해 줍니다.

    가증한 것이 언제든지 거룩한 곳에 세워지면 곧 끝이 온다는 진리입니다. 깊이 생각해 봅시다. 우리의 사회 안에 혹이나 가증한 것이 정당한 자의 위치에 엄연히 있을 뿐더러 나아가서는 신적인 경배를 받고 있지 않으며, 스스로를 절대화하여 가증한 꼴을 노출하고 있지는 않는가? 언제나 그 징조를 밝혀 알아야 할 것입니다.

    우리의 심령은 성령이 거하시는 하나의 거룩한 곳 즉 성전입니다. 돈은 힘이 있어서 권력도 지식도 때로는 인격까지 지배하며 또 사기도 하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돈이 종교적 경배의 위치에 오르면 망하는 것입니다. 돈이건 지위이건 지식이건 인격이건 무엇이던지 신적인 위치에 오르고 섬기는 위치에 오르며 예배의 대상이 되면 망하게 되는 것입니다. 돈은 지배해야 하는 것이지 돈을 섬기고 경배하면 곧 망합니다. 그 무엇이든지, 그 누구든지 가증한 것이 거룩한 곳에 서게 되면 곧 망하게 된다는 말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살아 계신 증거입니다. 우리의 거룩한 마음 성전 안에 그 어떠한 가증한 것도 세워져서는 안 된다는 말입니다. 하나님만이 하나님의 대우를 받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만을 하나님으로 섬기고 경배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루터는 "Let God be God"하나님으로 하나님 되게 하라고 외쳤습니다. 모르드개는 이 뜻을 따르다가 죽을 뻔하지 않았습니까? 하나님만을 경배하라는 것입니다. 미국 사람들의 쓰는 돈 안에 "In God We Trust"라고 쓰여 있는 것을 봅니다. "돈은 쓰되 돈을 의지하지 아니하고 하나님만 의지합니다."라는 신앙 고백을 볼 때마다 그들 조상들의 귀한 신앙을 엿 볼 수 있습니다.

    끝의 징조를 보고 끝을 알았으면 이제는 뒤로 돌이키지 말라고 하십니다. 롯의 아내를 생각하라고 하십니다. 영원한 생명만 의지하며 믿음만을 위하여 전심전력하라 하십니다. 환난과 핍박과 유혹이 심하게 되리라고 예언하십니다. 그러나 13절에 끝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고 밝은 소망을 보여 주십니다.

    끝까지 하나님만 경배하며 믿음을 지키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고 하십니다.


    그리스도인들이 가장 많이 오해하는 것은 말세와 재림과 휴거이다. 이로 말미암아 생겨난 이단들의 수는 일일이 열거할 수조차 없다. 그럼에도 대부분의 성도들은 이를 모른다. 이단들이 퍼뜨리는 이단사설들을 무분별하게 받아들이고 있는 것이다.

    말세와 재림과 휴거를 오해하는 이유는 비유로 덮여있기 때문이다.

    구약과 신약은 온통 비유로 덮여있다. 예수께서도 비유로 말씀하셨다. 이에 대해 "제자들이 예수께 나아와 가로되 어찌하여 저희(유대인들)에게 비유로 말씀하시나이까?" 라고 여쭈었을 때,

    "대답하여 가라사대 천국의 비밀을 아는것이 너희에게는 허락되었으나 저희에게는 아니되었나니,,,그러므로 내가 저희에게 비유로 말하기는 저희가 보아도 보지 못하며 들어도 듣지 못하며 깨닫지 못함이니라,,,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리라 <마 13 : 10-17>

    예수께서는 멸망의 아들들이 구원받지 못하도록 비유로 말씀하셨고 성경도 재림과 말세와 휴거에 대해 비유로 기록되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이 비유를 알지못하고 문자대로 해석하여 오해한 것이다. 살펴보자.

    제자들은 "세상 끝에는 무슨 징조가 있아오리까"(마24:3) 라고 예수께 종용히 여쭈었다.

    이에 대해 예수께서 하신 말씀이 마태복음 24장, 마가복음 13장. 누가복음 21장 이다.

    사람들은 말세나 종말을 까마득히 먼 미래라고 오해한다.그러나 예수께서 오신 이후가 말세이다. 사도들은 오랫동안 구약 성경들에 예언된 그리스도께서 마침내 오신 때를 "마지막 날" "말세""종말"이라고 기록했다.

    "이 모든 날 마지막에 아들로 우리에게 말씀하셨으니,,,(히1:2) "이 말세에 너희를 위하여 나타내신 바 (벧전1:5) "말세에 내 영을 부어주리니,,(행2:17) 또한 말세를 만난 우리를 (고전10:11) "지금은 마지막 때라,(요일2:18)

    예수께서도 "노아의 때와 같이 인자의 임함도 그러하리라"고 하셨다.(마24:37) 즉 홍수로 심판 받기 전 말세에 노아가 방주를 만들었듯이 말세에 오신 예수께서도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구원의 방주를 만드셨다.

    지금 시대는 멸망하지 않으려면 속히 방주로 올라야할 마지막 때이며 종말이며 말세인 것이다. 또한 종말은 먼 훗날이 아니라 내 육신이 죽는 날이기도 하다.육신의 죽음 후에는 다시는 기회가 없고 심판이 있기 때문이다.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라"(히9:27)

    말세의 모든 징조들은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 승천 하신 후 일어날 일들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러므로 지금도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예수께서 말씀하신 말세의 징조인 (마태 24장, 마가 13장. 누가, 21장)은 참으로 해석하기가 어렵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말세의 징조들을 육적 유대인들에 나타날 말세의 징조들과 온 세상에 나타날 말세의 징조들로 구분하여 말씀하셨음을 알면 혼란스럽지 않다.

    즉, 예수께서는 율법을 신봉하는 유대인들과 세상 사람들을 구분하여 말세의 징조들을 말씀하셨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왜냐하면 육적 유대인들은 머지않아 곧 멸망할 것이기 때문이다.

    즉, 예수께서는 온 세상에 나타날 말세의 징조에 대해서는 "이 날은 온 지구상에 거하는 모든 사람에게 임하리라(눅21:35)고 하셨으나 유대인들에게 닥칠 멸망의 징조에 대해서는 " 이 세대가 지나기 전에 모든 일이 다 이루리라"(마24:34 막13:30 눅21:32) 고 하시며 분명하게 구분하여 말씀하셨다.

    먼저 "이 세대가 지나기 전에 다 이루리라"의 "이 세대" 가 누구인지부터 살펴보자.

    예수께서는 유대인들에게 나타날 멸망의 징조들에 대해 마태복음 24장 15절 에서 시작하여 34절까지 말씀하시며 "이 세대가 지나가기 전에 이 일이 다 이루리라"(마24:34)고 하셨다. "이 세대"란 누구일까?

    "이 세대"란 예수께서 "악하고 음란한 세대"라고 꾸짖으신 유대인들이다.(마12:39 마16:4) 예수께서 공생애를 시작하시며 유대인들의 병을 고치시고, 귀신을 쫓고, 오병이어의 표적을 보이실 때는 수많은 유대인들이 따랐으나 정작 복음을 자세히 전하시자 모두 예수님을 버리고 떠나버렸다.(요6:26-66)

    즉, 유대인들은 예수님의 표적만을 따랐을 뿐 복음은 배척한 것이다. 복음을 듣기 싫어한 유대인들은 나중에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소리친 자들이다.(마27:21-25, 눅23:18-21)

    이것을 미리 아신 예수께서는 모든 저주가 "이 세대에게 다 돌아가리라"고 저주하셨다.(마23:36 ) 즉, "이 세대"는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소리친 당시 유대인 세대인 것이다.

    예수께서는 이러한 유대인들에게 닥칠 멸망의 징조들은 "멸망의 가증한 것"이 거룩한 곳에 섰을 때부터 시작된다고 하셨다(마24:15 막13:14) 그때에 산으로 도망하라고 하셨다.

    멸망의 가증한 것이란 무엇일까?

    "그러므로 너희가 선지자 다니엘이 말한 바 멸망의 가증한 것이 거룩한 곳에 선 것을 보거든 (읽는 자는 깨달을찐저) 그 때에 유대에 있는 자들은 산으로 도망할찌어다" (마24:15 막13:14 )

    이 "멸망의 가증한 것"에 대해 수많은 설들과 추측들이 난무한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데살로니가후서 2장 3절에서 나오는 "멸망의 아들"을 "멸망의 가증한 것"이라고 이해하고 있다.

    그러나 "멸망의 아들"은 "멸망의 가증한 것"과는 완전히 다르다. 왜냐하면 "멸망의 아들(악한 자)의 임함은 사단의 역사를 따라 모든 능력과 표적과 거짓 기적"을 보이며 미혹한다고 기록되었기 때문이다.(살후2:9)

    즉, "멸망의 아들"(살후2:3)은 말세의 세상 사람들에게 나타날 사단의 불법의 아들이며 거짓 기적과 표적과 능력으로 미혹할 자이며 "멸망의 가증한 것"은 멸망받을 이 세대들에게 나타날 미운 물건이기에 서로 다른 것이다.

    유대인들에게 나타날 멸망의 가증한 것이 무엇인지 정확하게 알려면 유대인들의 시각으로 보아야 한다. 왜냐하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소리친 유대인들에게 하신 말씀이기 때문이다.(마24:15-34)

    유대인들이 볼 때 가장 미운 물건이며 멸망의 가증한 것은 누구일까?

    더 말할 필요 없이 예수이시다. 자신들은 하나님께 특별히 선택받은 선민이라고 자랑하는 유대인들에게 나타난 예수는 유대교를 뒤엎고 멸망시키려는 "가증하고 미운 물건"인 것이다.

    유대인들이 볼 때 감히 자신을 하나님의 아들이라며 하나님을 참칭하는가 하면, 거룩하게 지켜야할 안식일에 병을 고치며 안식일을 범하고 또 존경받는 선생들인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에게 "화있을찐저 너희 아비는 마귀"라고 저주하기도 하고, 한걸음 더 나가 유대인들이 매일 제사를 드리는 거룩한 성전이 돌 하나도 남지 않고 다 무너진다(마26:61 막14:58)고 저주하는 예수야말로 유대교를 멸망케할 가증하고 미운 물건인 것이다.

    뿐만 아니라 예수는 율법으로 구원 받으려는 유대인들을 향하여 " 네 손과 발을 찍어내고 눈을 빼어 내버리라(마18:8-9)고 꾸짖으셨다. 이러한 예수는 유대인들이 볼 때 매우 잔포(잔인하고 포악한)(단9:27) 한 미운 물건인 것이다.

    이스라엘의 대부분의 유대인들은 성전을 무너뜨리려는(마26:61 막14:58) 가증하고 미운 물건인 예수님을 죽이라고 소리치며 결국 십자가에 매달아 멸망시켜버렸다. 즉 멸망의 가증한 것은 예수이신 것이다.

    예수께서는 유대인들에게 "가증한 것이 거룩한 곳에 선 것을 보거든" (읽는 자는 깨달을찐저).(마24:15) 라고 하시며 읽는 자는 반드시 깨달으라고 강조하신다. 왜 "읽는 자"는 깨달아야 할까? 자신들이 십자가에 매단 "멸망의 가증한 것"이 그리스도이심을 깨달으면 구원받기 때문이다.

    예수께서 말씀하신 "다니엘의 말한 바"를 읽어보며 "멸망의 가증한 것"을 자세히 살펴보자.

    단 9:27 “그가 장차 많은 사람들과 더불어 한 이레 동안의 언약을 굳게 맺고 그가 그 이레의 절반에 제사와 예물을 금지할 것이며 또 잔포하여 가증한 것이 날개를 의지하여 설 것이며 또 이미 정한 종말까지 진노가 황폐하게 하는 자에게 쏟아지리라 하였느니라 하니라.”

    위 구절 중 "잔포하여 미운 물건이 날개를 의지하여 설 것이며"(단9:27)의 날개가 무엇인지 알면 "멸망의 가증한 것"이 예수그리스도이심을 알 수 있다. 살펴보자.

    성경에 나오는 날개는 인도하시고 보호하시는 성령의 능력을 나타낸다.

    "암탉의 날개"(마23:37) 독수리 날개 (출19:4) "새가 날개치며 새끼를 보호함 같이 구원하리라" (사31:5) "내가 주의 날개 아래로 피하리로다(시91:4) "바람 날개를 타고 높이 솟아 오르셨도다.(시18:10)

    이처럼 "날개"가 궁극적으로 상징하는 것은 성령이시다. 성령의 인도와 보호하심을 "날개로 나타내신 것이다. 그러므로 잔포하여 미운 물건이 날개에 의지하여 일어섰다는 것은 곧 성령의 능력으로 부활하심을 뜻한다.

    예수께서 성령 날개를 의지하여 다시 서신(단9:27) 것을 살펴보자.


    멸망의 가증한 것이며 잔포하여 미운 물건인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여버린 유대인들은 "사흘 후에 살아나리라"는 예수의 말을 기억하고 빌라도에게 건의하여 파숫군들과 함께 무덤을 인봉하고 굳게 지켰다.(마27:62-66)

    즉, 사흘동안 굳게 지킨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대인들은 예수의 시체가 없어지고 무덤이 빈 것을 보았다. 무덤이 빈 것을 본 유대인들은 이 사실을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에게 고했고, 이에 당황한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은 "제자들이 예수의 시체를 도적질하여 갔다 하라"고 말하라며 군병들에게 많은 돈을 주었다. (마28:11-15)

    자신들이 굳게 지킨 무덤이 비고 예수가 살아난 것을 본 유대인들은 이때가 예수를 그리스도로 받아들이고 회개할 수 있는 마지막 기회인 것을 알아야 했다, 즉, 죽은 지 사흘만에 살아났다는 것은 곧 예수가 곧 하나님이시며 그리스도이심을 명확하게 증거하기 때문이다.

    즉, 예수께서 부활하심으로 하나님이시며 그리스도이심을 증명하신 것은 유대인들이 볼 때에 "멸망의 가증한 것이 서지 못할 곳인 그리스도의 자리에 선 것을 본 것이다(막13:14)

    그래서 예수께서 "읽는 자는 깨달을찐저"라고 하시며 "산으로 도망할찌어다"라고 하신 것이다.(마24:15-16)

    즉, "잔포하여 가증한 것이 날개를 의지하여 설 것이며 (단9:27)" 서지 못할 곳에 섰다 라는 뜻은 유대인들이 죽인 예수가 성령의 능력으로 부활하셔서 영광을 받으신 것을 뜻하는 것이다.(눅24:26) 이어지는 구절을 살펴보자

    "이미 정한 종말까지 진노가 황폐하게 하는 자에게 쏟아지리라 하였느니라 하니라.”(단9:27)

    이미 정한 종말은 유대인들의 멸망이 정해진 것을 뜻한다. 또한 황폐하게 하는 자에게 쏟아지는 진노는 그리스도께서 전하신 구원의 복음을 황폐하게 하려고 예수님을 죽인 유대인들에게 쏟아질 환난과 멸망을 뜻한다.

    예수께서 말씀하신 "다니엘의 말한 바" 다니엘서 12장 11-13절을 살펴보자.

    "매일 드리는 제사를 폐하며 멸망케 하는 미운 물건을 세울 때부터 일천이백구십 일을 지낼 것이요.,, ,,,너는 가서 마지막을 기다리라 이는 네가 평안히 쉬다가 끝날에는 네 업을 누리리라.

    매일 드리는 제사와 예물을 금지하고 폐했다는 뜻은 무엇일까?

    이것은 예수께서 십자가 제물로 죽으심으로 짐승이나 예물로 매일 드리는 제사를 폐했다는 뜻이다.(히9:12 히10:9) 즉, 구약에는 짐승과 예물로 매일 제사를 드리며 속죄를 해야 했으나 이것은 그림자였다.짐승이나 예물로 드리던 그림자의 실체인 예수께서 오셔서 단번에 몸을 드리심으로 속죄가 완성되었기에 이제는 제사는 금지되고 폐해진 것이다.

    결론

    다니엘서는 봉해진 성경이다.(단12:9) 그러나 악한 자에게는 봉해졌으나 지혜있는 자는 깨닫는다고 하신다.

    "악한 자는 아무도 깨닫지 못하되 오직 지혜있는 자는 깨달으리라"(단12:10)

    지혜있는 자란 누구일까? 인간의 지혜가 아니라 "지혜와 총명의 신이신(사11:1) 성령님과 함께하는 자가 지혜있는 자인 것이다. 그러므로 난해한 성경이나 비유를 알고자 하거든 사람의 가르침을 좇지 말고 성령님께 기도하시기 바란다.

    끝으로 멸망의 가증한 것에 대한 수많은 온갖 설들이 난무하지만 성경은 오직 예수를 기록한 책(요5:39)임을 아시고 읽으시기를 권면드린다. 사도바울도 구원과 상관 없는 쓸데없는 지식은 오히려 구원을 혼란케하여 구원을 방해하는 배설물일 뿐이라고 말했다.(빌3:7-8)


    멸망의 가증한 것과 산으로 도망하라는 명령(마가복음 13:14)

    마가복음 13장은 종말의 징조와 재림의 때에 대한 예수님의 가르침을 담고 있는 매우 중요한 본문입니다. 그 중심에서 14절은 전환점 역할을 합니다. “멸망의 가증한 것이 서지 못할 곳에 선 것을 보거든 (읽는 자는 깨달을진저) 그때에 유대에 있는 자들은 산으로 도망할지어다.” 이 구절은 단순한 도피 명령이 아니라, 구속사 전체의 관점에서 하나님의 심판과 보호, 그리고 구원의 진행을 드러내는 상징적인 말씀이기도 합니다. 예수님은 이 명령을 통해 하나님의 백성이 종말적 심판 가운데에서 어떻게 깨어 있어야 하며, 어떤 방식으로 하나님의 나라를 향해 나아가야 하는지를 가르치십니다.

    멸망의 가증한 것: 역사와 상징이 겹쳐진 계시

    ‘멸망의 가증한 것’이라는 표현은 다니엘서 9장, 11장, 12장에서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종말적 상징입니다. 다니엘은 장차 거룩한 곳, 곧 성소가 모독당하고, 하나님의 예배가 더럽혀질 사건이 일어날 것을 예언했습니다. 실제로 기원전 167년경, 셀류시드 왕조의 안티오쿠스 에피파네스 4세는 예루살렘 성전에 제우스 신의 제단을 세우고 돼지를 제물로 바치는 가증한 행위를 했습니다. 이는 유대인들의 종교적 충격이었고, 훗날 마카비 혁명을 일으킨 도화선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 과거의 사건을 상기시키면서도, 그것이 장차 다시 일어날 사건을 예표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 시대 이후 약 40년 뒤인 AD 70년, 로마 장군 티투스에 의해 예루살렘 성전이 완전히 파괴됩니다. 로마 군대가 성소에 들어서고, 성전 예배가 중단된 이 사건은 유대인들에게 있어 또 다른 ‘멸망의 가증한 것’의 현실적 성취였습니다.

    그렇기에 이 구절은 역사적으로는 성전 파괴의 예언이며, 신학적으로는 하나님의 임재의 상징이었던 성전이 더 이상 그 기능을 다하지 못하게 되는 시대 전환의 표지입니다. 구속사적으로 볼 때, 이는 옛 언약의 상징이었던 성전이 무너지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새 언약, 곧 참된 성전이 세워지는 과정입니다. 성전의 종말은 단지 건물의 붕괴가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의 정체성이 새롭게 정의되는 계기입니다.

    예수님은 이 전환의 시점을 ‘읽는 자는 깨달을진저’라고 강조하십니다. 이는 단순히 문자적 사건을 넘어, 하나님의 뜻과 시대의 흐름을 영적으로 분별할 것을 요구하시는 말씀입니다. 교부 이레니우스는 이 구절을 두고 “역사는 반복되나, 그 의미는 점점 더 명확하게 하나님의 구원을 향해 집중된다”고 해석했습니다.

    산으로 도망하라: 도피인가, 믿음의 결단인가

    예수님은 이어서 “그때에 유대에 있는 자들은 산으로 도망할지어다”고 명령하십니다. 이 명령은 매우 구체적이며, 그 당시 예루살렘 성전 중심 신앙 체계 안에 있던 자들에게 실질적인 생존의 지침이 되었습니다. 실제로 초대 교회는 AD 70년 성전 파괴 전후로 ‘펠라’라는 요단강 동쪽 산악 지역으로 피신한 것으로 전해집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이 말씀을 문자 그대로 순종했고, 그로 인해 로마군의 참혹한 학살에서 벗어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 명령은 단순한 물리적 피신을 넘는 영적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산으로 도망하라’는 말은 시편과 예언서들에서 자주 등장하는 이미지로, 하나님께 피신하는 행위를 상징합니다. 시편 11편 1절은 “내가 여호와께 피하였거늘 너희가 내 영혼더러 산으로 도망하라 함은 어찜인가”라고 노래합니다. 즉, 산은 단순히 높은 지형이 아니라, 하나님의 보호와 인도하심을 상징하는 장소입니다.

    예수님의 명령은 하나님의 심판이 임할 때, 백성은 자기 고정된 자리에서 떠나 하나님의 처소, 하나님의 방법,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따르는 쪽으로 결단해야 한다는 영적 명령입니다. 이 말은 종말의 시간뿐 아니라 오늘 우리 삶의 위기 앞에서도 유효합니다. 물질적 기반, 종교적 형식, 세속적 안정감이 무너질 때, 하나님께로 ‘도망가는’ 결단을 할 수 있는가가 신자의 진짜 신앙을 드러내는 기준입니다.

    개혁자 칼빈은 이 본문을 주석하며, “산으로 도망하라 하신 예수님의 말씀은 단지 무서운 미래를 피하라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 안으로 자신을 피신시키라는 영적 호소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위기에서 도망치는 자가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을 붙들고 피난처 되신 하나님께로 향하는 자들입니다.

    시대적 환란과 그리스도의 통치

    마가복음 13장은 점점 더 환란의 강도를 묘사하며, 하나님의 구원과 심판의 날이 가까이 왔음을 강조합니다. 14절의 전환 이후로 본문은 전 세계적 혼란과 박해, 배교의 증가를 언급합니다. 이는 단지 예루살렘이라는 지역적 한계를 넘어서, 모든 민족에게 복음이 전파되는 가운데 진행될 보편적 구속사의 완성을 암시합니다.

    ‘멸망의 가증한 것’은 단지 과거 역사나 먼 미래의 종말적 징조로만 이해되어서는 안 됩니다. 그것은 지금 이 시대에도 하나님 자리에 다른 것을 세우는 모든 시도들 속에서 반복됩니다. 우상, 권력, 인간 중심의 종교, 이념—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자리를 차지할 때, 그것은 다시금 ‘멸망의 가증한 것’이 됩니다. 그럴 때 하나님은 다시금 말씀하십니다. "도망하라, 그리고 나에게로 오라."

    하느님 관련 서적

    그러므로 ‘산으로 도망하라’는 명령은 오늘날에도 깊은 영적 적용이 가능합니다. 우리는 어떤 신뢰의 기반 위에 서 있는가? 무엇이 무너지면 우리는 무너지는가? 우리 시대의 성전은 무엇이며, 그것이 무너질 때 나는 어디로 향할 것인가? 이 질문들 앞에서 우리는 예수님의 음성을 다시 들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심판이 임할 때, 남는 자는 피신한 자, 곧 하나님께로 향한 자입니다.

    성경은 반복해서 말합니다.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성전이 무너져도, 세상이 흔들려도, 그 이름을 붙들고 산으로 도망가는 자는 하나님의 날개 아래 보호받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산 위에서 우리는 다시금 참된 예배를 회복하게 될 것입니다.

    전체 결론

    마가복음 13:14은 단순한 도피 명령이 아니라, 구속사의 전환점에서 하나님의 백성에게 요구되는 영적 결단을 상징합니다. ‘멸망의 가증한 것’은 거룩을 모독하는 세속의 표지이며, ‘산으로 도망하라’는 명령은 하나님께 피하는 믿음의 삶을 요구하는 부르심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심판의 시대에 세상으로부터 도망치는 자가 아니라, 하나님께로 달려가는 자입니다.




    예수님은 마태복음 24장의 예언을 단순하게 해석하지 않도록 여러 가지 해석의 장치를 해두었습니다. 예수님은 "원근법"(foreshortening)을 사용하여 앞으로 올 다중적인 예언의 성취를 "멸망의 가증한 것"이라는 한 그림으로 표시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니엘의 구절로 역사속의 종말을 관통하는 통시성(diachrony)으로 예언의 해석방법을 가르쳐준 것입니다. 

    예수님은 앞으로 멸망이 얼마 남지 아니한 성전에 임할 무서운 미래를 그리면서, 동시에 예수님이 재림하실 때에 임할 세상의 파국에 대하여 설명하십니다. 더구나 예수님의 성전의 파괴로 시작되는 일련의 사건을 구약의 다니엘서를 인용하셔서 "멸망의 가증한 것이 거룩한 곳에 선 것을 보면"(단 9:27, 11:31, 12:11)이라는 말로 종말의 증거를 삼습니다.  

    예수님의 종말예언은 그러므로 중층 구조를 가지고 있습니다. "멸망의 가증한 것"은 이미 과거에 안티오커스 4세 에피파네스의 등장으로 성취된 일에 대한 언급입니다. 다니엘의 예언적 구절은 기원전 167년 안티오커스 4세라는 셀류시드의 왕이 제우스 신상과 자신의 신상을 성전 안에 세우고 돼지와 여타 부정한 짐승으로 희생 제사를 드림으로 성취되었습니다.  

    둘째로 예수님은 가까운 미래의 성전 파괴를 "돌 하나 위에 돌 하나도 남지 않고" 파괴되는 성전으로 말씀하십니다. 이는 서기 70년의 예루살렘의 붕괴를 통하여 이루어졌고, 요세푸스는 안티오커스 시대의 역사기록과 거의 동일한 필치로 예루살렘성의 붕괴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예언을 기억하고 있던 제자 공동체는 유대-로마 전쟁이 시작되던 해인 서기 66년에 벨라(Pella)로 이주하여 목숨을 부지하였습니다. 

    셋째로 이 말씀은 예수님의 재림 직전에 있을 세계적인 무서운 전쟁을 예언하고 있습니다. 20세기를 살던 인류는 1, 2차 세계대전이라는 무섭고 끔찍한 전쟁을 경험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재림 직전에 전례가 없는 무서운 전쟁이 일어날 것을 경고하고 있습니다. 종말에 있을 전무후무한 예루살렘의 재앙과 전쟁이 남아있습니다. 

    지금 우리가 사는 시대는 예언과 묵시가 풀려 이해를 할 수 있는 해석의 단초들이 드러나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이제 깨달아야 합니다(마 24:15). 악으로부터 피하여야 합니다(마 24:16). 그리고 삼가서 미혹에 들지 말아야 합니다(마 24:23, 26). 고개를 들어야 할 때가 왔습니다.





    11월 4일(화) 마가복음 10-11장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하나님을 믿으라(11:22)

    예수께서 대답하여 저희에게 이르시되 하나님을 믿으라. 
    "Have faith in God," Jesus answered.

    피스틴 데우(πιστιν θεου)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하나님 편에 서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하나님 편에 서게 될 때 비로서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이 달라지게 될 것입니다.

    짐 월리스(Jim Wallis. 1948. 6. 4 ~ )의 <하나님 편에 서라>는 책이 있습니다.
    기독교인들이  세상 속에서 추구해야 할 공동선에 관한 책입니다.
    영어 제목도  “On His Side”이니 우리 제목과 같습니다.

    하나님의 희로애락에 동참하는 기도, 
    하나님을 기쁘고 즐겁게 하는 신앙,
    하나님 나라를 이 세상에서 경험하고 이루는 시도,
    이 모든 것의 기본은 하나님 편에 서는 것입니다.
    월리스의 한국어 번역 책 표지에

    아브라함 링컨 대통령의 말이 나옵니다:

    “하나님이 우리 편인지 아닌지 나는 관심이 없다.
    나의 가장 큰 관심은
    내가 하나님 편에 서는 것이다.”



    하나님 편에 서라(출 14:10-20)

     

    할렐루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사랑합니다.

     

    차를 운전할 때, 길이 막힐 때가 있습니다. 옆 차선의 차는 잘 빠져나갔는데, 내 차선의 차들은 그대로 멈추어 서 있을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잘 살피고 있다가 옆 차선의 공간이 많이 벌어졌을 때, 얼른 그 차선으로 들어갑니다. 그런데 내 차가 그 차선으로 들어간 순간, 잘 빠져나가던 차들이 순식간에 멈추어 버리고, 원래 내가 있던 차선의 차들이 생생 달릴 때, “그대로 있을걸” 하는 후회를 할 때가 종종 있습니다. 줄을 잘 서야 합니다. 끈기있게 서 있어야 합니다. 당장은 보이지 않아도 기다리고 있으면, 끝이 보입니다. 옆 차선을 자꾸 신경 쓰다보면, 피곤합니다. 내 차선을 지켜야 합니다. 내가 가야 할 길을 똑바로 가야 합니다. 자꾸 옆에 눈길을 주어서는 안됩니다.

     

    열왕기상 18장을 보면, 엘리야 선지자와 바알과 아세라 선지자 850명과의 갈멜산 대결이 나옵니다.

    대결이 시작되기 전에, 엘리야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가까이 나아가 말하였습니다.

    “너희가 어느 때까지 둘 사이에서 머뭇머뭇 하려느냐 여호와가 만일 하나님이면 그를 따르고 바알이 만일 하나님이면 그를 따를지니라”(왕상 18:21)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이 말 한마디도 대답하지 아니하고, 선뜻 하나님 편에 서지 않았습니다.

    바알과 아세라 선지자들이 열심히 기도했지만 하늘에서는 불이 임하지 않았습니다. 저녁 소제 드릴 때에, 엘리야 선지자가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여 주께서 이스라엘 중에서 하나님이신 것과 내가 주의 종인 것과 내가 주의 말씀대로 이 모든 일을 행하는 것을 오늘 알게 하옵소서 여호와여 내게 응답하옵소서 내게 응답하옵소서 이 백성에게 주 여호와는 하나님이신 것과 주는 그들의 마음을 되돌이키심을 알게 하옵소서”(왕상 18:36-37)

    엘리야가 하나님께 기도하자, 여호와의 불이 내려서 번제물과 나무와 돌과 흙을 태우고 또 도랑의 물을 핥았습니다. 그때 비로소, 백성들이 고백합니다.

    “여호와 그는 하나님이시로다 여호와 그는 하나님이시로다”(왕상 18:31)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 편에 서야 할지, 바알과 아세라 편에 서야 할지 결단하지 못하고, 머뭇머뭇 거렸습니다. 선뜻 하나님 편에 서지 못했습니다. 하나님만이 진짜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만이 살아 계십니다. 역사하시는 하나님, 살아계시는 하나님, 불로 응답하시는 하나님, 날마다 우리 곁에 찾아 오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이제는 더 이상 머뭇머뭇 필요가 없습니다. 감출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님 믿는 것을 숨길 필요가 없습니다. 교회 다니는 것을 감출 필요가 없습니다. 당당하게 드러내야 합니다. 숨기면 숨길수록 우리의 신앙은 병들고 맙니다. 당당하게 드러낼 때, 여러 가지 어려움을 쉽게 극복할 수 있습니다. 기도하는 모습을 감추지 맙시다. 당당하게 드러내 놓고 기도합시다.

    사람 편에 설까, 하나님 편에 설까? 물질 편에 설까? 권력 편에 설까?

    당당하게 하나님 편에 설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오직 믿음으로, 하나님을 붙들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남북 전쟁 당시 링컨의 북군이 곤경에 처해 있을 때였습니다. 하루는 링컨의 안타까움을 보고 있던 그의 보좌관들이 다가와 링컨을 위로합니다.

    “대통령이여.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우리가 하나님께 우리 북군의 편이 되어 달라고 기도하겠습니다.”

    그러나 이 말을 들은 링컨은 오히려 “절대 그리하지 마십시오.”라고 그들의 기도를 말렸습니다. 그리고는 “만약에 그대들이 하나님께 기도하려거든 하나님께서 북군의 편에 서기를 기도하지 말고 우리 북군이 하나님 편에 설 수 있도록 기도하십시오.”라고 했습니다.

    링컨은 이런 말을 남겼습니다.

    “하나님이 우리 편인지 아닌지 나는 관심이 없다. 나의 가장 큰 관심은 내가 하나님의 편에 서는 것이다”

    하나님은 언제나 우리 편이십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우리가 하나님 편에 서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성경을 읽어보면, 되풀이 해서 “나는 너희의 하나님이라. 너희의 하나님이 되기 위하여, 내가 너희를 애굽에서 이끌어내었다.”라고 강조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내 편이십니다.

    “여호와는 내 편이시라 내가 두려워하지 아니하리니 사람이 내게 어찌할까”(시118:6)

    환난을 당하고 계십니까? 고통 가운데 계십니까? 염려와 걱정 가운데 아파하십니까? 마음 아픈 일이 있습니까? 육체적인 연약함이 있습니까? 우리가 어떤 상황 속에 있든지 하나님은 언제나 내 편이십니다. 변함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우리를 떠나지 않습니다. 우리를 버리지 않습니다. 우리의 어떤 조건을 보고, 우리 편이 되신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있는 모습 그대로 사랑하십니다. 우리를 보시고 기뻐하십니다. 우리를 잠잠히 사랑하십니다. 하나님은 멀리 있지 않습니다. 언제나 가까이에 계십니다. 우리 곁에 계십니다.

    하나님은 나의 도움이십니다. 나의 반석이십니다. 하나님은 나의 힘이십니다. 하나님은 나의 환난 날의 피난처이십니다. 하나님 편에 서서, 세상을 이길 수 있기를 바랍니다.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요 16:33)

     

    하나님 편에 서서, 우리를 넘어뜨리려고 하는 세상을 맞설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비록 연약하지만 승리할 수 있습니다. 이길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 편이시기에, 우리는 넉넉히 세상을 이길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모든 망설임을 던져버리고 확고히 하나님 편에 서야 합니다. 때로는 세상 염려에 쉽게 하나님 편에 설 수 없습니다. 승진 때문에, 하나님 편에 서는 것을 망설입니다. 세상 유익을 위하여 교회 다니는 것을 숨겨야 합니다. 그러나 이제부터라도 숨기며 안됩니다. 드러내야 합니다.

    마태복음 10:32-33절 말씀입니다.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시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그를 시인할 것이요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부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그를 부인하리라”

    하나님을 부인해서는 안됩니다. 그러나 우리는 너무나 쉽게 하나님을 부인합니다. 굳건한 믿음으로 하나님 편에 서야 하는데, 하나님을 멀리 합니다. 하나님을 부인합니다. 하나님을 가까이 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멀리 하지 맙시다. 하나님을 가까이 합시다. 하나님을 부인하지 맙시다. 하나님을 인정합시다.

     

    어느 날, 빌립보 가이사랴 지방에서,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질문을 하셨습니다.

    “사람들이 인자를 누구라 하느냐”

    “더러는 세례 요한, 더러는 엘리야, 어떤 이는 예레미야나 선지자 중의 하나라 하나이다”(마 16:14)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다시 질문을 하셨습니다.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그때,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였습니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마 16:16)

    예수님은 너무 기쁘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천국 열쇠를 주셨습니다.

    “내가 천국 열쇠를 네게 주리니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마 16:19)

     

    베드로는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고백했습니다. 참으로 멋진 고백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잡히시던 밤에 베드로는 예수님을 부인하였습니다.

    예수님이 심문받고 있을 때, 베드로는 사람들과 함께 바깥 뜰에 있었습니다. 그때 한 여종이 베드로에게 “너도 갈릴리 사람 예수와 함께 있었도다”고 하자, 베드로가 모든 사람 앞에서 예수님을 부인하였습니다.

    “나는 네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지 못하겠노라”

    조금 후, 다른 여종이 베드로를 보고 거기 있는 사람들에게 말했습니다.

    “이 사람은 나사렛 예수와 함께 있었도다”

    베드로가 맹세하고 또 부인하였습니다.

    “나는 그 사람을 알지 못하노라”

    조금 후에 곁에 섰던 사람들이 나아와 베드로에게 말했습니다.

    “너도 진실로 그 도당이라 네 말소리가 너를 표명한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저주하며 맹세하였습니다.

    “나는 그 사람을 알지 못하노라”

     

    예수님 앞에서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라고 고백했던 베드로가 예수님이 위험에 처하자, 부인하고 말았습니다.

    하나님 편에 선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 편에 서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분만이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기 때문입니다. 다른 이름을 주시지 않았습니다.

    “오직 예수” 그분 편에 서야 합니다. 그래야 구원을 얻을 수 있습니다. 구원의 길을 걸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 편에 서야 진리 가운데 머물 수 있습니다. 예수님 편에 서야 참된 생명을 얻을 수 있습니다.

     

    사도 요한은 예수님에 대하여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참 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추는 빛이 있었다.”(요 1:9)

    그러나 세상 사람들은 예수님을 알지 못하였습니다. 영접하지 않았습니다. 그를 박했습니다. 그를 죽였습니다. 그러나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습니다.

    예수님을 마음 속에 모시고 살아야 합니다. 우리 마음 속에 주님이 계셔야 합니다. 주님 중심으로 살아야 합니다. 주님 편에 서야 합니다.

    중간 회색지대에서 망설이는 자는 가장 어리석은 자입니다. 망설이지 맙시다. 주님을 드러냅시다. 주님을 증거합시다. 지금 결단해야 합니다. 오늘 결단하지 않으면 내일 영원한 후회를 하게 될 줄 모릅니다. 후회하기 전에 하나님 편에 서야 합니다. 나의 주님이 누구인지를 단호하게 선포하여야 합니다. 세상의 짝퉁 보화를 버리고 하늘의 진짜 보화를 선택하여야 합니다. 뜻을 정한 다니엘처럼, 대담하게 뜻을 정하여 세상 가운데 우뚝 서야 합니다.

     

    모세가 여호수아에게 남긴 유언의 말씀입니다.

    “네 평생에 너를 능히 대적할 자가 없으리니 내가 모세와 함께 있었던 것 같이 너와 함께 있을 것임이니라 내가 너를 떠나지 아니하며 버리지 아니하리니 강하고 담대하라 너는 내가 그들의 조상에게 맹세하여 그들에게 주리라 한 땅을 이 백성에게 차지하게 하리라 오직 강하고 극히 담대하여 나의 종 모세가 네게 명령한 그 율법을 다 지켜 행하고 우로나 좌로나 치우치지 말라 그리하면 어디로 가든지 형통하리니 이 율법책을 네 입에서 떠나지 말게 하며 주야로 그것을 묵상하여 그 안에 기록된 대로 다 지켜 행하라 그리하면 네 길이 평탄하게 될 것이며 네가 형통하리라 내가 네게 명령한 것이 아니냐 강하고 담대하라 두려워하지 말며 놀라지 말라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너와 함께 하느니라 하시니라”(수 1:5-9)

     

    여호수아가 이스라엘 백성들을 모아 놓고 마지막으로 남긴 말입니다.

    “그러므로 이제는 여호와를 경외하며 온전함과 진실함으로 그를 섬기라 너희의 조상들이 강 저쪽과 애굽에서 섬기던 신들을 치워 버리고 여호와만 섬기라 만일 여호와를 섬기는 것이 너희에게 좋지 않게 보이거든 너희 조상들이 강 저쪽에서 섬기던 신들이든지 또는 너희가 거주하는 땅에 있는 아모리 족속의 신들이든지 너희가 섬길 자를 오늘 택하라 오직 나와 내 집은 여호와를 섬기겠노라”(수 24:14-15)

    여호수아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오직 하나님만을 섬기라. 하나님 편에 서라”고 결단을 촉구합니다.

     

    여러분! 하나님 편에 서야 합니다. 세상 살아가는 것이 아무리 힘들고 어렵다고 해고, 신앙을 지키는 것이 너무 힘들다 해도, 신앙을 버리면 안됩니다. 신앙을 지켜야 합니다. 신앙의 힘으로 승리해야 합니다. 하나님 편에 서야 합니다. 세상의 힘 앞에 무릎을 꿇어서는 안됩니다. 살기 위하여 신앙을 버리면 안됩니다. 살기 위하여 신앙을 지켜야합니다. 믿음을 지킬 때, 세상을 넉넉히 이길 수 있습니다. 예수 버리면 세상을 이길 수 있을 것 같지만, 결국에는 세상 앞에 무릎을 꿇고 맙니다. 당장 눈앞에 이익을 바라보지 마시고, 일의 결국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보이는 것만 보아서는 안됩니다. 보이지 않는 것을 보아야 합니다. 보이지 않는 것을 볼 때, 이길 수 있습니다. 육적인 것만 바라보고서는 승산이 없습니다. 영적인 것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세상은 육적인 싸움인 것처럼 보이지만, 결국에는 영적인 싸움입니다. 보이지 않는 것을 볼 수 있을 때, 승리의 노래를 부를 수 있습니다. 영적인 것을 볼 수 있을 때, 승리를 쟁취할 수 있습니다.

    “나와 내 집은 오직 여호와만을 섬기겠노라”

    참으로 아름다운 믿음의 고백입니다. 당당하게 고백할 수 있어야 합니다. 모든 사람들 앞에서 신앙의 고백이 있어야 합니다. 숨겨서는 안됩니다. 드러내야 합니다. 믿음의 깃발을 들어야 합니다. 당당해야 합니다. 세상 앞에서 믿음으로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만을 섬기려면, 하나님을 드러내야 합니다.

     

    다윗이 솔로몬에게 남긴 유언의 말씀입니다.

    “내가 이제 세상 모든 사람이 가는 길로 가게 되었노니 너는 힘써 대장부가 되고 네 하나님 여호와의 명령을 지켜 그 길로 행하여 그 법률과 계명과 율례와 증거를 모세의 율법에 기록된 대로 지키라 그리하면 네가 무엇을 하든지 어디로 가든지 형통할지라”(왕상 2:2-3)

     

    하나님 편에 설 때, 믿음의 대장부가 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 편에 서서, 하나님의 말씀을 지켜 행할 때, 우리의 나아가는 길이 평탄의 길이요, 형통의 길이 되는 것입니다.

     

    늘 자기 자신에게 물어보아야 합니다.

    “나는 하나님 편에 서 있는가?”

    신앙인이라면 누구나 깊이 생각해야 할 질문은 “나는 하나님 편에 선 사람인가?”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내 편에 계신가?”에 관심이 많습니다. 피곤하고 힘든 인생에서 하나님의 도우심을 늘 필요로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떼를 쓰기도 하고, 과연 하나님은 우리와 함께 계신가에 의문을 표하기도 합니다. 의심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은 언제나 우리 편이십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내 편이십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많은 싸움을 합니다. 싸움을 시작할 때, 우리는 “내 편”과 “네 편”을 형성합니다. 이 사람은 분명히 내 편이라고 생각했는데, 중간에 보면, 상대방 편에 가 있습니다. 믿을 수가 없습니다. 믿을 수 없는 세상입니다. 그 사람은 반드시 내가 힘이 들고 어려울 때, 나의 입장을 이해해 주고, 나를 대변해 주고, 나를 도와줄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바로 그 순간, 나를 더욱 더 힘들게 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 사람에게 배신당했다고 말합니다. 철저하게 속았다고 말합니다. 세상에 믿을 사람 아무도 없다고 말합니다. 그런 경험을 하게 되면, 비참함을 느낍니다. 삶의 목표가 와르르 무너지는 것을 경험하게 됩니다. 앞이 캄캄합니다.

    우리 주님은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요 14:1)

    마음에 근심하지 맙시다. 세상 모든 사람들이 나를 버린다고 해도 하나님은 결코 나를 버리지 않습니다. 내가푸른 풀밭과 쉴만한 물가에 있을 때에도 함께 하시지만, 죽음의 골짜기, 사망의 골짜기, 어둠의 골짜기, 절망의 골짜기에 있을지라도 하나님은 나와 함께 하십니다.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시 23:4)

    하나님은 언제나 나와 함께 하십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내 편이십니다. 모든 사람들이 나를 등진다 해도 하나님은 내 곁에 머물러 계십니다. 나에게 더 가까이 다가오십니다. 나의 눈물을 닦아 주십니다. 나의 얼굴을 도닥도닥거려 주십니다. 나를 위로하여 주십니다. 나에게 힘을 주십니다. 하나님은 나의 든든한 후원자이십니다. 나의 좋은 배경이십니다. 하나님이 내 편일 때, 외롭지 않습니다. 슬프지 않습니다. 설령 넘어졌다 할지라도, 주님의 손을 붙들고 다시 일어설 수 있습니다. 주님이 내 편이실 때, 엉켜 있는 실타래처럼 꼬여 있는 삶의 문제들을 쉽게 풀 수 있습니다.

    세상은 변합니다. 사람들도 변합니다. 인심도 변합니다. 어제는 친구였는데, 오늘은 적이 됩니다. 믿을 사람이 없습니다. 그러나 결코 변하지 않는 분이 계십니다. 그분은 바로 나의 하나님이십니다. 영원토록 내 편이 되어 주십니다.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믿으면서도, 교회를 열심히 다니면서도, 믿음이 흔들립니다. 하나님을 의심합니다. 말씀을 의심합니다. 왜 의심합니까? 왜 불평합니까? 왜 좌절합니까? 아직도 하나님이 내 편이라는 확신이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내 편이라는 확신을 가지십시오. 하나님은 언제나 내 편이십니다. 하나님이 내 편이라는 확신을 가지고 있다면, 때로 삶에 어려움이 찾아오고, 고통이 찾아오고, 아픔이 찾아오고, 질병이 찾아오고, 누가 나를 대적하고, 정죄하고, 송사해도 하나님께 감사하며, 찬송하면서 살아갈 수 있습니다. 노래하면서 살아갈 수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하나님 편에 서야 할 이유가 무엇일까요?

     

    첫째,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여 주시기 때문입니다.

     

    13-14절 말씀입니다.

    “모세가 백성에게 이르되 너희는 두려워하지 말고 가만히 서서 여호와께서 오늘 너희를 위하여 행하시는 구원을 보라 너희가 오늘 본 애굽 사람을 영원히 다시 보지 아니하리라 여호와께서 너희를 위하여 싸우시리니 너희는 가만히 있을지니라” 아멘.

    우리의 살고 죽는 것은 하나님에게 달려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구원자이십니다. 하나님에게 우리의 생명이 달려 있습니다. 하나님의 손에 우리의 삶이 달려 있습니다. 하나님 편에 서서, 가만히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바라보면 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구하여 주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필요한 것을 공급하여 주십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지켜 주십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건져 주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질병을 치료하여 주십니다. 오직 믿음으로 주님을 바라볼 수 있어야 합니다. 오직 믿음으로 주님 편에 서 있어야 합니다. 가만히 서서, 주님의 행하심을 바라보는 것, 그것이 믿음입니다. 하나님 보다 앞서지 않아야 합니다. 성령님보다 앞서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지켜 행하여야 합니다. 가만히 있으라고 할 때, 가만히 있는 것, 그것이 믿음입니다. 물론 가라 하면 가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할 때,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을 책임져 주십니다.

     

    둘째, 하나님께서 우리를 인도하시기 때문입니다.

     

    15-16절 말씀입니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는 어찌하여 내게 부르짖느냐 이스라엘 자손에게 명령하여 앞으로 나아가게 하고 지팡이를 들고 손을 바다 위로 내밀어 그것이 갈라지게 하라 이스라엘 자손이 바다 가운데서 마른 땅으로 행하리라” 아멘.

     

    우리의 삶은 뒤로 물러가서는 안됩니다. 날마다 앞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향하여 힘차게 달려가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삶이 전진하기를 원하십니다. 성장하기를 원하십니다. 승리하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순종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셋째, 하나님께서 우리 앞에 있는 장애물들을 제거하여 주시기 때문입니다.

     

    17-20절 말씀입니다.

    “내가 애굽 사람들의 마음을 완악하게 할 것인즉 그들이 그 뒤를 따라 들어갈 것이라 내가 바로와 그의 모든 군대와 그의 병거와 마병으로 말미암아 영광을 얻으리니 내가 바로와 그의 병거와 마병으로 말미암아 영광을 얻을 때에야 애굽 사람들이 나를 여호와인 줄 알리라 하시더니 이스라엘 진 앞에 가던 하나님의 사자가 그들의 뒤로 옮겨 가매 구름 기둥도 앞에서 그 뒤로 옮겨 애굽 진과 이스라엘 진 사이에 이르러 서니 저쪽에는 구름과 흑암이 있고 이쪽에는 밤이 밝으므로 밤새도록 저쪽이 이쪽에 가까이 못하였더라” 아멘.

     

    우리의 나아가는 길에 장애물이 있습니다. 앞에서 막고 있는 장애물도 있고, 우리의 발걸음을 붙잡는 장애물도 있습니다. 우리의 힘으로 도저히 감당하기 어려운 문제들이 있습니다. 하나님 편에 서 있을 때, 하나님께서 친히 그런 모든 장애물을 제거하여 주십니다. 장애물을 제거하고 나아갈 수 있는 믿음을 우리에게 주십니다. 지혜를 주십니다. 힘을 주십니다. 담대함을 주십니다. 막아 주십니다. 제거하여 주십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어떤 형편에 있습니까? 어떤 문제가 있습니까?

    문제를 바라보지 마십시오. 문제를 바라보면, 절망할 수밖에 없습니다. 환경을 바라보면, 실망할 수밖에 없습니다. 사람을 바라보면, 모든 것을 포기할 수밖에 없습니다.

    눈을 들어 주님을 바라보십시오. 주님은 우리들이 눈을 들어 주님을 바라볼 수 있기를 원하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얼굴을 구할 때, 하나님은 우리의 모든 형편을 아시고, 오직 주님만 바라볼 수 있도록 이끌어 주십니다.

     

    여러분! 세상 사람들을 내 편으로 만들려고 하지 마십시오. 환경을 내게 유리하게 하려고 하지 마십시오.

    오직 주님 편에 서 있으십시오. 그러면 모든 것을 주님께서 책임져 주십니다.

     

    주님 편에 서 있으므로 늘 승리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하나님 편에 서라 (창 49:5-7, 신 33:8-11)

    잡초
    7–9 minutes

      오늘 저는 레위 지파에 대해 이야기를 하려고 합니다. 말씀을 시작하기 앞서 레위 지파는 복을 받은 지파입니까? 아니면 저주를 받은 지파입니까? 사실 레위 지파는 복을 받은 지파가 아니었습니다. 레위 지파는 큰 저주를 받은 지파였습니다. 창세기 49:5절 말씀에 보면 “그들의 칼은 잔해 하는 기계”라고 했습니다. 레아의 아들이었던 시므온과 레위를 가리켜 성경은 “잔해 하는 기계” 즉, 살인 기계라고 했습니다. 아버지가 너는 사람을 죽이는 잔인한 기계라는 말이 어떻게 축복의 말이 될 수 있겠습니까? 6절에는 “그들은 분노대로 사람을 죽이고 혈기대로 소의 발목 힘줄을 끊었다”고 했습니다. 그들의 성격이 얼마나 포학했는지 7절에는 “그 노염이 혹독하니 저주를 받을 것이요 분기가 맹렬하니 저주를 받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그 저주 받은 결과로 그들은 야곱 중에서 나누어지고 이스라엘 중에서 흩어진다고 했습니다.

      레위 지파하면 우리는 복 받은 지파,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는 지파, 하나님을 찬양하는 찬양대 지파, 성막을 관리하며 하나님과 늘 함께 하는 지파로서 참 복을 받은 지파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사실은 그렇지가 않습니다. 레위 지파는 창세기에서 철저하게 버림받은 지파요, 저주 받은 지파요, 세상에서는 정처 없이 떠돌아다니는 흩어진 지파요 분깃이 없는 하나님으로부터 저주 받은 지파였습니다.

      그들이 저주받은 이유는 거짓 맹세를 하고, 하나님의 언약의 말씀을 이용하여 살인의 죄를 범했기 때문입니다. 야곱은 그 12 아들과 함께 가나안 땅에 들어와 세겜이라는 곳에 머물게 되었습니다. 시므온과 레위의 형제 중에 디나라는 여동생이 있었습니다. 그녀가 세겜 땅의 어느 여인을 보기위해 집을 나서게 되었습니다. 그 때, 그 지방의 추장 하몰이라는 사람에게 세겜이라는 아들이 있었습니다. 세겜이 디나를 보고 한 눈에 반했습니다. 세겜은 자신의 권력과 힘을 사용해서 디나를 강간하고 욕을 보이고 말았습니다. 딸이 강간당했다는 소문을 들은 아버지와 그 형제들의 마음이 어떠했겠습니까?

      물이 끊듯이 그 마음에 분노가 부글부글 끌어 올랐습니다. 기회만 오면 복수하려고 마음을 먹었습니다. 특히 디나와 같은 어머니를 둔 르우벤, 시므온, 레위, 유다, 갓, 아셀, 잇사갈, 스불론 등 8명의 형제들은 더욱 마음에 복수심이 타올랐을 것입니다. 그들은 복수할 기회를 찾고 있었지만, 세겜 족속은 야곱 족속에 비해 힘도 강했고, 그 땅의 토박이들이었기 때문에 마음대로 복수할 수도 없었습니다.

    이렇게 "기회만 오면 반드시 복수하리라!"고 마음먹은 그들에게 마침내 복수의 기회가 찾아왔습니다. 어느 날 세겜의 아버지 하몰이 야곱을 방문한 것입니다. 그가 방문한 목적은 아들 세겜도 디나를 너무 너무 사랑하고 있고, 이왕 일이 이렇게 되었으니 당사자들을 결혼시켜서 부족과 부족이 서로 연합하여 잘 지내자는 것이었습니다. 그러자, 디나의 형제들이 이렇게 대답하였습니다. “추장의 뜻을 알겠으나 그 제안을 받아들이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여호와 하나님을 믿는 부족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족속이 되려면 반드시 모든 남자는 할례를 받아야 한다고 명령하셨고, 할례 받지 않은 사람들과는 결혼하지 말라고 명령하셨기 때문입니다. 이 결혼을 위해 당신 부족의 모든 남자들이 할례를 받을 수 있겠습니까? 만일 그렇게만 한다면 이 청혼을 고려해 보겠습니다. 그렇지 않다면 우리는 동생을 데리고 이곳을 떠나겠습니다.”

    당사자인 세겜과 그 아버지 하몰은 이 제안을 듣고 그 제안을 좋게 여겨 받아들였고, 세겜 부족의 모든 남자들에게 할례를 행하라고 명령을 내렸습니다. 추장이었던 하몰도 할례를 받고, 새 신랑될 세겜도 결혼의 날을 꿈꾸며 할례를 받고 혼례 날을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심각한 문제가 삼일 만에 발생했습니다. 세겜 부족인 할례를 받고 움직일 수 없는 큰 고통을 이용해서 시므온과 레위가 칼을 들고 세겜 성으로 들어가 닥치는 대로 할례의 고통으로 움직이지 못하는 남자라는 남자는 모두 잔인하게 죽인 것입니다. 새 신랑 될 세겜도 죽이고, 추장인 하몰도 죽이고, 그 성을 완전히 초토화시킨 것입니다.

      세겜 성은 시체로 가득하게 됐고, 부녀자들과 여자 아이들은 고성을 지르며 도망치고 난리가 난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세겜 성에 있었던 양떼와 소떼와 나귀를 자신의 재산으로 갈취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성안에 있는 재물로 시작해서 모든 집 안의 재물과 들에 있는 재물까지 모두 갈취했습니다. 그들의 자녀와 아내와 부녀자들을 노예로 만들어 버렸습니다. 이루 말할 수 없는 악한 일을 행한 것입니다.

      오죽했으면 아버지가 자식에게 말하기를 “시므온과 레위는 형제로서 그들의 칼은 잔해하는 기계”라고 했겠습니까? 그들은 분노로 사람을 죽인 사람들이었고, 그들은 분노와 혈기로 남의 재물을 갈취하며 소의 발목 힘줄을 끊어 버린 잔인한 인간들이었습니다. 결국, 시므온과 레위의 거짓된 행위와 그들의 악한 분노로 하나님은 그들을 저주하셨습니다. 분과 혈기를 내는 사람은 하나님의 복을 결코 받지 못합니다. 가인도 마음의 분노로 인해 멸망의 길을 갔습니다. 잠언 27:3절에는 “돌은 무겁고 모래도 가볍지 아니하거니와 미련한 자의 분노는 이 둘보다 무거우니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오늘날 레위 지파하면 우리는 저주 받은 지파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복을 받아 제사장이 된 지파요 하나님의 이름으로 사람들에게 복을 선언하는 복된 지파가 되었다고 말합니다. 함께 읽은 신명기 33:10~11절에는 레위지파가 하나님께 받은 복에 대해 “주의 법도를 야곱에게, 주의 율법을 이스라엘에게 가르치며 주 앞에 분향하고 온전한 번제를 주의 단 위에 드리리로다. 여호와여 그 재산을 풍족케 하시고 그 손의 일을 받으소서 그를 대적하여 일어나는 자와 미워하는 자의 허리를 꺾으사 다시 일어나지 못하게 하옵소서”라고 했습니다. 그들이 얼마나 복을 받았는지 하나님께 대표로 제사를 드리는 복을 받았습니다. 그들은 물질의 복을 받아 인생이 절대고 가난하지 않은 재산이 풍족한 복을 받았습니다. 그들은 또한 그들을 대적하거나 그들을 미워하는 사람의 허리를 하나님께서 꺾어 주시겠다는 약속을 받은 참으로 놀라운 복을 는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어떻게 이렇게 저주 받은 레위 지파가 복의 근원이 되는 지파가 되었을까요? 나는 오늘 여기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저주에서 벗어나 복을 받는 사람들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들이 이렇게 복을 받고 인생이 역전되고 저주가 축복으로 바뀌게 된 사건이 출애굽기 32장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출애굽기 32장의 내용을 보면 모세를 중심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시내산 기슭에 도착하게 되었습니다. 모세는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시내산에 올라가 하나님과 40일 동안 만남을 가지게 됩니다. 그곳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은혜를 받으며 성령 충만하게 됩니다. 이렇게 모세가 금식하며 성령에충만하며 하나님과 교제하는 동안에 산 아래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심각한 문제가 발생하였습니다. 모세가 산에서 속히 내려오지 않자 이들은 “우리를 인도할 신을 우리를 위하여 만들어라 모세는 죽었는지 살았는지 우리가 알지 못함이다”라고 말하면서 연약한 아론을 위협하여 결국, 그들의 아내들과 자신들이 귀에 끼고 있었던 금고리를 빼어서는 금 송아지를 만들게 되었습니다.  모세가 내려와 보니 백성들이 우상 앞에서 술 마시고, 춤추고 가진 추태를 벌이면서 우상을 경배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얼마나 기가막힌 일입니까?

      모세는 너무나도 진노하여 십계명의 돌 판을 던져 깨어 버리고 금송아지를 불살라 그것을 빻아서 가루로 만들어 백성들에게 물에 타서 마시게 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신들의 잘못을 회개 하기는 커녕 오히려 자신들이 만든 금송아지를 부순 모세를 원망하고 시비를 걸면서 방자하게 행동하며 그 원수 마귀 편에 서서 하나님을 조롱하는 것입니다. 이에 모세가 분노하여 진문에 서서 12지파를 모두 모으고 이렇게 말합니다. “누구든지 여호와의 편에 있는 자는 내게로 나오라”(출32:26)

      이 때 11 지파가 잠잠했지만 오직 한 지파만이 그 마음이 하나가 되어 하나님 편에 서기 위해 모세 앞에 나왔습니다. 그 한 지파가 어떤 지파겠습니까? 바로 레위지파입니다. 모세는 레위 지파에게 “너희는 각각 허리에 칼을 차고 진 이문에서 저 문까지 왕래하며 각 사람이 그 형제를 각 사람이 그 친구를 각 사람이 그 이웃을 도륙하라”(출 32:27)고 명령을 내리자 레위 지파는 모세의 명령에 순종하여 칼로 하나님을 거역한 자신의 민족을 그 자리에서 3천명이나 죽이는 아주 끔찍한 사건이 발생하게 되었습니다. 이 사건이 발생하자 백성들은 자신들이 하나님 앞에서 큰 죄를 범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죄를 회개하게 되었습니다.

      이 사건이 있은 후에 모세는 레위인들에게 이렇게 말합니다.“각 사람이 그 아들과 형제를 쳤으니 오늘날 여호와께 헌신하게 되었느니라 그가 오늘날 너희에게 복을 내리시리라”(출 32:29)고 축복하였습니다. 사실  레위지파가 행한 행동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거짓 우상을 만들고 거짓 위상을 경배한 것은 분명히 하나님 앞에 큰 죄였지만, 이스라엘 백성은 자신들의 형제요 가족이었기 때문에  칼을 들고 자신들의 이웃과 형제와 친척을 죽인다는 것은 도무지 인간의 인정으로는 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레위인들은 이런 인간의 정을 다 버리고, 오직 하나님의 일을 행하기로 결정한 것입니다. 오직 사람의 얼굴을 보고 사람의 편에 설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 편에 서서 일하기로 결심했기 때문입니다.

    오죽하면 신명기 33:9절에는 “그는 그 부모에게 대하여 이르기를 내가 그들을 보지 못하였다 하며 그 형제들을 인정치 아니하며 그 자녀를 알지 아니한 것은 주의 말씀을 준행하고 주의 언약을 지킴을 인함이로다”라고 했겠습니까? 이 말씀이 무슨 말입니까? 레위 인들은 오직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하나님 편에 서기 때문에 때로는 형제를 형제로 보지 못하고, 자녀를 자녀로 받아들이지 않고, 심지어 부모를 보지 않는 일도 생기게 된다는 것입니다. 레위인들의 사명은 오직 하나님만을 바라보는 사명 자들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들은 부모나, 형제나, 친척이나 심지어 자녀보다 하나님을 우선 순에 둔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야곱 시대에 그들은 저주 받은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하나님 편에 서기로 결심하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기로 결심하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행동하자 그들에게 임했던 저주가 바뀌어 축복의 역사가 일어난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편에 서면 반드시 저주가 변하여 축복이 됩니다.

      모세가 태어나기 전 애굽에는 십브라와 부아라는 산파가 있었습니다. 그들은 애굽 왕 바로의 명령을 받아 히브리 사람에게서 아이가 태어날 때 남자면 죽이고 여자면 살리라는 명령을 받은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히브리 산파인 십브라와 부아는 사람보다 하나님을 더 경외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바로 왕의 명령을 따리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 순종했습니다. 그랬더니 그들의 집을 하나님께서 왕성하게 하셨고, 그들의 가문은 크게 날마다 번성하게 되었습니다.

    바벨론에서 포로 생활을 했던 다니엘도 우상 숭배를 강요받았던 사람입니다. 다니엘의 세 친구는 죽으면 죽으리라는 각오로 우상 숭배를 거부했습니다. 다니엘은 바벨론에서 섬기는 마르둑이라는 신외에 다른 신에게 기도하면 죽임을 당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지만, 그는 기도를 쉬지 않았습니다. 다니엘서 6:10절에는 “다니엘이 이 조서에 어인이 찍힌 것을 알고도 자기 집에 돌아가서는 그 방의 예루살렘으로 향하여 열린 창에서 전에 행하던 대로 하루 세 번씩 무릎을 꿇고 기도하며 그 하나님께 감사하였더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들이 이렇게 한 이유는 오직 하나입니다. 인간 편에 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편에 서기로 결심했기 때문입니다.

      레위 인들은 오직 하나님 편에 섰기 때문에 저주를 축복으로 바꾼 복된 지파가 되었습니다. 그들이 얼마나 큰 저를 받은 사람들입니까? 그러나, 하나님 편에 서자 그들에게 하나님은 엄청난 복을 허락해 주셨습니다.

      그들이 하나님께 받은 복을 보면 그 첫째가 하나님의 제사장이 되어 오직 하나님 앞에 나올 수 있는 특별한 권한을 그들에게 주셨습니다. 제사장으로 백성을 가르치고, 제사장으로 사람들을 축복하고, 제사장으로 그들에게 하나님을 대신하여 말씀을 선포할 수 있는 특권을 주신 것입니다. 나도 여러분들이 하나님 편에 서서 저주가 축복으로 바뀌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둘째로 레위인들이 받은 축복은 물질의 축복을 받았습니다. 신명기 33:11절에는 “그 재산을 풍족케 하시고...”라고 했습니다. 사실 그들은 땅이 없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11지파는 자신들을 축복하고, 자신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며 성전에서 봉사하는 레위인들의 생계와 하나님의 성전을 유지하고, 보수하게 하도록 하기위해 십일조를 할 의무가 있었습니다. 결국, 레위 지파는 분깃은 가지고 있지 않았지만 11개 지파로부터 받은 물질의 공궤로 가장 큰 부유함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우리가 사람을 두려워하거나, 사람의 얼굴을 보고 사람 편에 서는 것은 결코 복을 받지 못합니다. 우리는 오직 하나님 편에 서야 복을 받습니다. 레위 지파는 저주를 받은 지파였지만 하나님 편에 서자 그들에게 임한 저주가 큰 축복으로 변하고, 물질의 복이 그들에게 임하게 된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레위 지파가 받은 복을 보면 그를 대적하는 사람들은 모두 망하게 되는 복을 주셨습니다. 이는 참으로 놀라운 복입니다. 그를 축복하는 자는 축복을 받고, 그를 저주하는 사람은 저주를 받아 망하는 것입니다. 신명기 33:11절 후반절에 보면 “그를 대적하여 일어나는 자와 미워하는 자의 허리를 꺾으사 다시 일어나지 못하게 하옵소서”라고 했습니다.

      다윗은 사울을 죽일 수 있었지만 결코 사울의 몸에 손을 대지 않았습니다. 사울을 죽인 사람을 다윗은 하나님의 기름 부음 받은 사람에게 손을 댔다고 오히려 그를 죽이도록 명령했습니다.

      히브리서 13:17절에는 “너희를 인도하는 자들에게 순종하고 복종하라 저희는 너희 영혼을 위하여 경성하기를 자기가 회계할 자인 것같이 하느니라 저희로 하여금 즐거움으로 이것을 하게 하고 근심으로 하게 말라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유익이 없느니라”고 분명히 말씀하고 있습니다. 레위인들을 대적하지 마십시오. 오직 그들을 위해 기도하십시오. 그것이 여러분들에게 복을 쌓은 길입니다.

      분명한 사실은 레위 지파는 저주 받은 지파였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어느 날 갑자기 놀라운 복을 받은 지파가 되었습니다. 그들이 받은 복은 영혼이 잘 되는 복이었고, 물질이 풍부한 복이었으며, 그 대적의 누구도 그들을 이길 수 없는 큰 복을 받았습니다. 이들이 이러한 복을 받은 원인은 오직 하나입니다. 그것은 바로 아무도 하나님 편에 서지 않았을 때에 사람의 얼굴이나 사람의 정을 생각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 편에 서서 하나님의 일을 했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무슨 일이 있어도 하나님 편에 서십시오. 오직 하나님께서 여러분들을 축복하시고, 인도하시고 영혼의 복과 물질의 복과 형통의 복 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하나님이란 영어 단어는 'GOD' 이라고 합니다.
    GOD이란 단어를 거꾸로 읽으면 DOG가 됩니다.
    하나님을 바르게 믿으면 하나님은 하나님으로 역사하십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믿지 못하면 애완견이 아니라 거리에 버려진 개처럼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을 하나님답게 믿는 비결은 무엇일까요?

    "보는 것이 믿는 것이다"라는 서양 속담이 있는가 하면 기독교 신앙은 "믿으면 보인다"고 가르칩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을 믿으려면 하나님을 먼저 보는 것이 우선일까요?
    아니면 믿은 후에 보는 것이 바람직한 방법일까요?

    어느 젊은이가 유명한 랍비를 찾아와서 이런 부탁을 합니다.
    선생님 하나님을 보여주면 믿겠습니다.
    하나님을 보여주십시오.
    그러자 랍비는 젊은이들 데리고 밖으로 나가서 하늘에 떠 있는 태양을 바라보라고 합니다.
    그러자 젊은이는 선생님 어떻게 빛나는 해를 바라볼 수 있습니까?
    그때 랍비는 젊은이 자네는 하나님이 만드신 태양도 제대로 바라보지 못하면서 어떻게 하나님을 보여달라고 하는가?
    이렇게 깨우쳤다고 합니다.

    정말 하나님을 보려고 하면 먼저 성경을 읽어야 합니다.

    이사야 55:8-9

  • 여호와의 말씀에 내 생각은 너희 생각과 다르며 내 은 너희 과 달라서
  • 하늘이 보다 높음 같이 내 은 너희 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 생각보다 높으니라.
  • For my thoughts are not your thoughts, neither are your ways my ways," declares the LORD.
  • "As the heavens are higher than the earth, so are my ways higher than your ways and my thoughts than your thoughts.

  • 로마서 8:7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치 아니할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



    하나님을 직접 본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믿는 사들도 있습니다.
    왜 그 사람들은 눈으로 볼 수 없는 하나님을 믿을 수 있을까요?
    하나님을 믿을 수 있는 가장 중요한 단서를 성경(Bible) 입니다.
    성경을 읽고 묵상할 때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믿으려고 한다면 먼저 믿음을 얻기 위해서 성경을 읽어야 합니다.



    βλέπω 991 [blĕpō]
    • 1.  보다.
    • 2. 쳐다보다, 들여다보다 [εἰς+대격과 함께], 눅9:62, 요13:22, 행1:11, 3:4. [대격과 함께] 마5:28, 계5:3,4.
    • 3. 관찰하다, 조심하다, 경계하다, 막13: 9, 빌3:2, 요이1:8. [주] [μή, μή- ποτε, μήπως와 부정과거 가정법이 뒤따라와 서] 돌보다, 바라보다, 마24:4, 막13: 5, 눅21:8, 행13:40, 고전8:9, 10:12, 갈5:15, 히12:25. [미래간접 화법] 골2:8. [ἀπό ...
    ὁράω 3708 [hŏraō]
    • 1. 보다, 찾아내다, 주목하다, 관찰하다.
    • 2. [완곡어법] ㉠ ὁρ. τό πρό- σωπόν τινος, 얼굴을 보다, 행20:25, 골2:1, 계22:4. ㉡ ορ. τὴν δ όξαν τοῦ θεοῦ : 하나님의 영광을 보다, 요11:40.
    • 3.

      바라보다, 주목하다[정신적으로], 롬15:21.

    Strong's Code Dictionary of Greek by O.N.O

    εἴδω 1492 [ĕidō]
    • 1. [문자적으로] 보다, 인식하다.
    • 2.[τι- νά, τὶ와 함께] ㉠ 별을 보다, 마2:2. ㉡ 아이를 보다, 마2:11. ㉢ 하나님의 성령을 보다, 마3:16. ㉣ 빛을 보다, 마4:16.
    •  3. [ἀκούειν과 함께] 눅7:22, 고전2:9, 빌1:27,30, 4:9, 약5:11, [πιστεύειν과 대조해서] 요20:29. ㉠ 누군가를 쳐다보다, 막8:33, 요21: 21. ㉡ 무엇인가를 비판적으로 보다, 눅14:18. ㉢ [환상을] 행10:17, 11:5, 16:10, 계4:1.


    θεάομαι 2300 [thĕaŏmai]
    • 1. 보다.
    • 2. 찾아보다, 방문하다, 마22:11.
    • 3. [육안으로 보는 것].


    θεωρέω 2334 [thĕōrĕō]
    • 1. 구경하다, 보다, 관찰하다, 인지하다, 마27:55, 막15:40, 눅14:29, 23:35, 요6:40, 계11:11,12, 바라보다, 마28:1, 주목하다, 막3:11, 5:38.
    • 2. [마음이나 영으로 깨닫는 것]
    • 3. 깨닫다, 감지하다, 관찰하다, 발견하다, 요4:19, 12:19, 행4:13, 28:6, 히7:4등.



    보다 - 블레포 데오레오 호라오, 에이도, 옵타노마이

    βλέπω 스트롱번호 991

    1. 보다.  2. 들보.  3. 큰 건물들

    발음 [ blĕpō ]

    관련 성경 / 

    보다(마5:28, 눅6:41, 요1:29), 보게 되다 (마12:22), 뵙다(마18:10), 주의하다(마24:4, 막8:15, 눅21:18), 삼가다(막4:24, 눅8:18), 보이다(막8:23), 조심하다(막13:9, 고전8:9), 돌아보다(눅9:62), (눈이)밝아지다(요9:7).

    θεωρέω 스트롱번호 2334

    1. 구경하다.  2. 깨닫다.  3. 요 14:17,19

    발음 [ thĕōrĕō ]

    관련 성경 /
    바라보다(마 27:55, 막 15:40), 보다(막 3:11, 눅 10:18), 구경하다(눅 23:35, 계 11:12), 생각하다(히 7:4).

    ὁράω 스트롱번호 3708

    1. 보다.  2. 마 28:7.  3. 눅1:22

    발음 [ hŏraō ]
    관련 성경 /
    보이다(마 8:4), 알리다(마 9:30), 주의하다(마 16:6), 보다(눅 1:22, 요 1:18, 고전 9:1).

    εἴδω 스트롱번호 1492

    1. 보다.  2. ㉠ 별을 보다. 3. 눅 7:22

    발음 [ ĕidō ]

    관련 성경

    보다(마 2:2, 막 1:10, 요 1:39), 알다(마 2:16, 막 10:42, 요 9:25), 뵙다(마 28:17), 보이다(막 12:15), 당하다(행 2:31, 13:36), 시인하다(딛 1:16), 알리다(눅 2:15), 의논하다(행 15:6).

    ὀπτάνομαι 스트롱번호 3700

    1. 나타나다.  2. 보여지다. 3. 행 1:3.

    발음 [ ŏptanŏmai ]

    관련 성경 /

    보다(마 5:8, 눅 13:28, 행 2:17), 보이다(마 17:3, 행 7:30, 고전 15:5), 나타나다(막 9:4, 눅 1:11, 행 9: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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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요한복음 20:5
    구푸려 세마포 놓인 것을 보았으나(블레포. 991) 들어가지는 아니하였더니.

    요한은 무덤‘보다’라는 헬라 단어는 ‘블레포’라고 합니다.
    그 단어는 단순히 어떤 형상이 망막에 들어옴을 가리키는 것을 말합니다.

    요한복음 20:6
    시몬 베드로도 따라 와서 무덤에 들어가 보니(데오레오. 2234) 세마포가 놓였고.

    베드로가 무덤 속으로 따라 들어가서 세마포를 보았다고 합니다.
    이때 사용된 헬라 단어는 ‘데오레오(2234)’입니다.
    데오레오는 ‘뚫어지게 쳐다보다, 갸우뚱 거리며 쳐다보다’라는 말입니다.
    그냥 멍하니 쳐다본 것이 아니라 ‘왜 주님의 수의가 저렇게 가지런히 제 자리에 놓여 있는 것일까?
    누군가 수의를 풀고 시체를 가져 간 것이라면 그 긴박한 상황에 수의와 수건을 저렇게 가지런히 원래 있던 자리에 개켜서 올려놓고 가지는 않았을 텐데’하는 생각을 하며 보았다는 뜻입니다.
    바로 그렇게 보는 것을 ‘데오레오’라고 한다.

    요한복음 20:8
    그 때에야 무덤에 먼저 왔던 그 다른 제자도 들어가 보고(호라오. 3708) 믿더라.

    그런데 8절에 보면 또 다른 ‘보다’가 나옵니다.
    요한이 다시 무덤에 들어가서 수의를 보고는 ‘믿었다’고 하지요? 거기에서 쓰인 단어가 ‘호라오’이다.
    그 말은 ‘이해심을 가지고 보아 그 의미를 알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정확하게 그 단어 ‘호라오’가 쓰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을 보고 하나님을 보는 사람은 예수님의 말씀과 그의 사역을 정확하게 이해한 사람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게 예수님을 보는 것입니다.

    우리 인간은 원래 하나님만 바라보도록 지어진 하나님 의존형 소경입니다.
    그런데 인간들이 선악과를 따먹고 돈이나 명예, 인기, 자랑 같은 이 세상의 힘들을 바라보기 시작하면서부터 아버지 집으로 가는 길을 잃어버린 것입니다.
    그 때 다시 아버지 집을 제대로 찾아갈 수 있는 유일한 길은 하나님 이외의 다른 세상을 바라보던 눈을 감아버리는 것입니다.
    그래야 아버지 집을 찾아갈 수 있습니다.

    이렇게 인간의 육신의 눈은 진짜 봐야 할 것을 보지 못하고 진짜 봐서는 안 되는 것들을 보고 있는 아주 어리석고 무력한 눈에 불과합니다.

    ‘블레포’로서의 보는 것의 한계가 가장 잘 나타난 곳이 변화산 사건입니다.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 세 사람이 변화산에 올라가 찬란한 하늘의 몸으로 변하신 예수님과 모세와 엘리야를 직접 두 눈으로 보았습니다. ‘블레포’입니다.
    그런데 그들이 예수님의 십자가 앞에서 모두 도망을 쳤습니다.
    그들은 육신의 눈으로 하늘의 몸들을 보았고 하나님의 음성까지 직접 들었음에도 이 세상의 권세 앞에서 모두 줄행랑을 쳤습니다.
    도대체 그들이 무엇을 본 것입니까?
    뭘 보긴 봤는데 그게 그들의 신앙에 전혀 영향을 미치지 못합니다.
    그건 본 것이 아닙니다.
    성경이 말하는 ‘봄’은 영적인 깨달음을 전제한 ‘봄’인 것입니다.
    따라서 성경이 이야기하는 ‘봄’은 ‘믿음’이라는 단어와 혼용하여 바꿔 쓸 수 있는 단어인 것입니다.

    그렇게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봄’은 육신의 눈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믿음의 눈으로 보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오늘날 예수를 믿는다고 하는 이들이 저마다 육신의 눈으로 뭔가를 보고 싶어 하고 육신의 귀로 뭔가를 듣고 싶어 합니다.
    신비한 체험을 하고 싶어 합니다.
    믿음은 보는 것으로 생기는 것이 아니고 보는 것으로 성숙되어지지도 않습니다.
    홍해가 갈라져 그 40마일이나 되는 바다를 마른 땅처럼 건넜던 이스라엘을 생각해 보세요.
    밤낮으로 구름기둥과 불기둥이 그들을 인도했고 하늘에서 먹 거리가 비 오듯 쏟아졌습니다.
    이 백 만이 넘는 사람들이 마실 물이 땅도 아닌 반석에서 쏟아져 나왔습니다.
    대구의 인구만큼 되는 사람들이 일시에 해갈이 될 물이 쏟아져 나왔단 말입니다.
    그러한 엄청난 광경을 모두 눈으로 본 사람들이 결국 믿음이 없어 하나님을 배신하고 광야에서 죽었다는 것을 잊지 마세요.
    그런데 뭔가를 보여주면 내 신앙이 더 돈독해 질 거라고요?
    천만의 말씀입니다.
    ‘내 삶 속에서 기적을 한 번 보여주세요, 그러면 믿을게요.’ 그건 모두 헛소리입니다.

    요한복음 4:48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는 표적과 기사를 보지(호라오. 3708) 못하면 도무지 믿지 아니하리라

    그리고는 그에게 말씀하시기를 ‘가라, 네 아들이 살았다’고 하십니다.
    그 아비가 그 말씀을 믿자 어떤 일이 보였습니까?
    진짜로 아이가 살아난 것을 보게 되었습니다.
    바로 그것이 믿음의 원리입니다.
    믿음이 앞서야 합니다.
    그 다음에 보는 것이 오는 것입니다.
    믿으면 보는 것이 신앙의 원리입니다.
    그런데 먼저 보고 믿겠다고 하는 것은 예수님에게 ‘패역한 세대’라는 욕을 먹은 바리새인들과 똑같은 믿음인 것입니다.

    요한복음 11:40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 말이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호라오. 3708) 하지 아니하였느냐 하신대

    먼저 자기 오빠를 고쳐 달라고, 무언가를 보여 달라고 요구하는 마르다에게 예수께서 하신 말씀입니다.
    ‘너는 보고 믿으려 하는데 믿으면 보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예수님을 보는 것은 예수님을 믿는 것이고 예수님을 믿는 것은 하나님을 보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보다 (to look on) : 호라오

    보다 (to look on) : 호라오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아버지 품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셨느니라" (요1:18)

    '보다'라고 번역된  헬라어 '호라오'는 깨달아 안다는 의미에서 '눈으로 보다, 마음으로 보다, 인지하다, 알다, 경험하다, 주의하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헬라어에는 '보다'라는 뜻으로 사용되는 여러 단어가 있습니다.

    옵타노마이(ὀπτάνομαι 스트롱번호 3700)

    그냥 응시하다,  보여지다'

    에이도

    단지 기계적이고 수동적이거나 우연한 응시를 표현하는 '겉을 보고 깨닫다,  지식을 갖다, 확신하다,  발견하다, 보다, 알다'
    '우상'이라는 '에이돌론'에서 유래되었으며,  이와 같이 눈에 보이는 형태, 외모를 보고  확신해 버리면 우상이 되어 버린다.

    데아오마이

    또한 좀 더 진지하게 본다는 의미에서 '가까이서 보다, 지각하다, 주목하다, 보고 배우다, 방문하다'

    블레포

    크게 뜬 눈으로, 현저한 어느 것을 향한 것처럼 자발적인 관찰이라는 의미에서 

    '경험으로 알다, 마음의 눈으로 보다, 이해하다, 생각하다'

    '보다'라는 뜻을 가진 단어들을 정리하면,
    단지 응시하는(옵타노마이) 단계에서
    그대로 보고 판단해 버리는(에이도) 단계로 
    그리고 좀 더 자세히 보아(데아오마이) 
    경험과 마음으로 아는(블레포) 단계를 통하여
    비로소 깨달아 알게 되는(호라오) 것이다.

    성경은 원래부터 항상 하나님을 본(호라오) 사람이 없다고 하였다(요1:18).
    그러면서 마음이 청결한 자만이 하나님을 볼(호라오) 수 있다고 말씀하셨다(마 5:8)

    청결하고 흠 없는(카타로스) 자는 그리스도 예수밖에 없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말씀해 주시는 그 말씀으로만 청결하고 흠없게 될 수 있다(요 15:3)

    선악의 주체가 된  '나'의 말을 죽이고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섬김을 받는 자가 비로소 하나님을 '호라오'할 수 있는 것이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와서  '보라'(호라오)고 말씀하실 때  제자들은  눈에 보이는 것만 보았다(에이도)(1:39).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보려고(에이도) 한다.

    그러나 하나님은  말씀으로 모든 것을 창조하셨다.

    만물 가운데 하나님의 말씀이 숨어 있다는 뜻이다.

    보이는(옵타노마이) 만물을 통하여 말씀을 보는(호라오)자가 하늘 백성인 성도이며, 바로 그가 예수를 통해서 그리스도를 보는(호라오)자이며,  그리스도를 믿는 자이며 그리고 그리스도로 사는 자이고(갈 2:20),  영원한 그리스도의 생명을 가진 자로서  영생을 보는(호라오)자인 것이다(요 3: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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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보는 것’(인식)과 ‘지식’과 관련된 신약의 헬라어 단어 정리

    하나님의 말씀은 신구약 성경으로 되어 있으며, 구약은 히브리어로, 신약은 헬라어로 기록되었습니다.

    두 언어에 담긴 특징을 알면 성경을 보다 깊이 인식할 수 있는데, 성경은 모두 하나님의 호흡으로 기록된 것이며(딤후 3:16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given by inspiration of God/ θεόπνευστος 데오프뉴토스 ; 하나님의 숨, 호흡), 또한 예수(그리스도와 교회)에 관한 기록이다.

    요한복음 5:39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상고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거하는 것이로다.

    구약은 모세가 시내산에서 하나님께서 직접 기록한 증거의 두 판을 받은 것으로 상징되듯이, 하나님께서 직접 내려준 말씀이다.
    히브리어는 자음으로만 주어졌고 또한 권위를 나타내는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쓴다.
    후대에 읽기를 위해 모음을 붙이고 띄어쓰기와 장 절을 나누었다.

    반면 신약의 헬라어는 아버지의 뜻을 이루시기 위해 인생으로 오시고 과정을 거치신 예수께서 십자가를 통해서 그 아버지의 뜻을 다 이루신 것을 하늘에 계시는 아버지께 올려드리는 글이다.
    그래서 히브리어와 달리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기록한다.
    그래서 주께서 십자가에서 하신 일곱 말씀의 마지막이 ‘(아버지의 뜻이) 다 이루어졌다’인 것이다.

    주의 다 이루심은 인자로서 자신 안에 우리와 온 우주와 그 모든 변화를 담고 있기 때문에 이를 기록한 헬라어 역시 그 어떤 언어보다 가장 정교하고, 예수의 그 이루심을 다 담기에 가장 적합한 언어였기 때문에 선택된 것이다.

    여기서는 그 가운데 ‘보는 것(인지)과 지식에 관련되는 단어’에 대해서 알아보고자 한다.
    이유는 단어 해석에 있어 인지와 지식을 혼동해 사용하는 경우가 흔히 있으며, 또 같은 부류에 속더라도 단어에 따라 그 영적 의미가 많은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욥기 42:4-6
    4. 주여 내게 알게 하옵소서
    5.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삽더니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
    6. 그러므로 내가 스스로 한하고 티끌과 재 가운데서 회개하나이다.

    ​Ⅰ. 보는 것(인식)과 관련되어 사용되는 헬라어

    ➀ ὀπτάνομαι(3700) 옵타노마이

    ◾ 보다, 나타나다 등, 이 단어는 어떤 대상이 시각적으로 나타나거나, 인식되는 것을 나타내며, 시각적으로 평가되는 상황이나 대상을 설명하는 데 사용된다.

    -행 1:3 해 받으신 후에 또한 저희에게 확실한 많은 증거로 친히 사심을 나타내사 사십 일 동안 저희에게 보이시며(being seen) 하나님 나라의 일을 말씀하시니라

    ➁ θεάομαι(2300) 데아오마이

    ◾ 데아오마이는 눈여겨보고 주의를 기울이며 관찰하는 것을 나타낸다.

    누가복음 7:24
    요한의 보낸 자가 떠난 후에 예수께서 무리에게 요한에 대하여 말씀하시되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광야에 나갔더냐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냐

    ➂ βλέπω(991) 브레포

    ◾ 눈으로 보다, 식별하다, 살피다, 관찰하다.
         관심을 가지고 보다 자세히 살피는 것을 의미한다.

    마태복음 7:3
    어찌하여 형제의 눈속에 있는 티는 보고 네 눈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➃ ὁράω(3708) 호라오

    ◾ 눈으로 보아서 깨달아 알다(to see with the eyes i.e. become acquainted with by experience), 보이는 것 뒤에 있는 의미를 분별하다(gives prominence to the discerning mind)

    ◾ ‘호라오’는 눈으로 보고, 그 보이는 것 뒤에 있는 것을 경험적으로 아는 것을 의미한다. 인식에 속하지만 지식과 밀접한 관련이 있으며, 경험에 의한 것이기 때문에 타인과 공유가 되지 않는다.

    요한복음 1:18
    “본래 하나님을 사람이 없으되 아버지 품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셨느니라 No man hath seen God at any time; the only begotten Son, which is in the bosom of the Father, he hath declared him.

    ◾ 성경은 본래부터 하나님을 본(호라오) 사람이 없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마음이 청결한 자만이 하나님을 볼 수 있다고 말한다(마 5:8). 청결하고 흠 없는(카다로스 καθαρός) 사람은 그리스도 예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분의 말씀으로만 깨끗해질 수 있다(요 15:3).

    우리는 보이는(옵타노마이) 만물을 통하여 말씀을 보는(호라오) 자가 되어야 한다.


    하나님을 볼 것이다

    “마음이 깨끗한 자는 복이 있다. 그들이 하나님을 볼 것이다.”(마5:8)

    헬라어에서 본다는 의미를 가진 대표적인 단어가 두 가지 있습니다. 하나는 “호라오”이고 또 하나는 “블레포”입니다. 두 단어는 쓰임새가 약간 다릅니다. 블레포는 육적인 눈으로 본다는 의미로 쓰이고, 호라오는 물리적으로 보는 이외에도 이해, 인식, 통찰, 그리고 영적인식이나 지적시각을 나타내는 은유로 사용됩니다. 우리는 은유적인 방식으로 하나님을 볼 수 있습니다. 은유(메타포)가 무엇입니까? 행동, 개념, 물체 등이 지닌 특성을 그것과는 다르거나 상관없는 말로 대체하여, 간접적이며 암시적으로 나타내는 일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을 본다는 것을 물리적으로 본다고 이해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실제로 하나님을 볼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만물 뒤에 숨어 계십니다. 아름다운 석양을 바라보면서 경이로움을 느낍니다. 자연을 보는데 하나님의 현존을 느낍니다. “와! 원더풀!”하고 외칩니다. 하나님의 흔적을 본 것입니다. 말씀을 듣는데 “아하! 그게 하나님을 보는 것이군요!! 나는 하나님을 본다는 것이 환상을 보거나 그런 것인 줄 알았는데.” 아하! 하고, 영적인 지식이 확장됩니다. 새로운 통찰을 얻었습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을 본 것입니다. 하늘 나는 새를 보면서 예전과 다르게 하나님이 그 새를 키우고 계신다는 믿음이 직관적으로 들어옵니다. 영적인식, 지적시각의 변화입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을 본 것입니다.


    하나님을 본다는 것을 다른 말로 표현해 볼까요? 만물을 볼 때 하나님처럼 보는 것입니다. 이것을 영성용어로 관상(contemplation)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삶 가운데 이런 경험들이 많았을 것입니다. 그것을 무엇이라고 말로 표현할 줄을 몰랐을 뿐입니다. 길거리를 가다가 장애인을 보는데 갑자기 눈물이 납니다. 유행가를 들으면서도 갑자기 눈물이 납니다. 드라마를 보면서 갑자기 눈물이 납니다. 슬픈 드라마도 아닙니다. 그냥 대화를 들으면서 눈물이 납니다. 찬양을 부르는데 다른 사람들은 다 냉랭한데 나는 눈물이 납니다. 그리고 귀한 어떤 가치가 생각이 납니다. 마음에 변화가 생깁니다. 믿음 소망 사랑이 생겨납니다. 이것은 분명히 성령의 역사인데 무엇이라고 표현할 말이 없었습니다. 이제는 여러분이 말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으로부터 어떤 통찰, 이해, 인식을 선물로 받은 것입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의 흔적을 본 것입니다. 이것을 무어라고 표현한다고요? 여러분은 하나님을 본 것입니다.

    마음이 깨끗한 사람들에게 무수히 일어날 수 있는 하나님 만남입니다. 하나님을 본 것입니다. 예수님처럼 만물을 본 것입니다.


    예수님은 간음하다 붙잡혀 온 여인에게서 죄를 본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향한 사랑을 보았습니다. 십자가 강도에게서 영원에 대한 갈망을 보았습니다. 하늘 나는 새와 들의 백합화에게서 하나님의 현존을 보았습니다. 비참하고 가난에 찌든 사람들에게서 하나님의 형상을 보았습니다.

    어느 오후에 자연걷기를 하였습니다. 마음이 고요했습니다. 하늘을 보았습니다. 푸른 하늘이었습니다. 구름들이 몰려서 떠내려갑니다. 푸른 하늘과 흘러가는 구름을 보면서 우주의 영원성과 광활함을 느꼈습니다. ‘저 푸른 하늘은 옛적부터 그대로일 것이다. 창조 시부터 지금까지 그대로일 것이다. 변함이 없다. 창세후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다.’ 그 무구한 세월이 흘러도 변함이 없다는 것을 생각하니 공의로 우신 하나님의 흔적이 느껴졌습니다. 하나님의 흔적이 있는 유구한 시간의 흐름 가운데, 나라는 존재는 작은 점 하나 같은 존재였습니다. 보잘것없는 존재였습니다. 잠깐 있다가 사라지는 미미한 존재였습니다. 그러나 미세한 점하나 같은 존재이지만 나는 이 세상에 존재하다 홀연히 사라지는 그런 존재가 아니라는 것을 느꼈습니다. 아버지의 심장에 나의 존재의 표시로 나의 작은 하트를 각인하고 사라지는 존재였습니다. 나는 미미한 존재이지만 이 순간 하나님의 광대하심이 느껴집니다. 하나님의 사랑의 무한하심이 느껴집니다. 나라는 존재는 하나님의 마음에 하트의 점을 새기고 사라지는 작지만, 아버지께 영원히 기억되는 작지 않은 존재라는 것을 느꼈습니다. 가슴이 벅차왔습니다. 두려움이 없어집니다. 나는 자연을 통해 하나님의 흔적을 보았습니다.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다. 그가 하나님을 볼 것이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요 3:16).
    For God so loved the world that he gave his one and only Son, that whoever believes in him shall not perish but have eternal life. (John 3:16 NIV)



    기독교 영성 전통에서는 하나님을 직접 보는 기쁨을 삶의 궁극적인 목적이자 제자도의 온전한 실현이라고 본다. 
    이것을 지복직관(beatific vision. 지복의 비전)이라고 한다. 
    지복직관의 개념을 동방교회 전통에서는 신성화(deification)로 보는 반면, 서방전통 특히 개신교회는 창조주와 피조물 사이의 차이를 없애는 것으로 여겨 지복직관이라는 용어 사용을 피하는 경향이 있다. 

    한스 부어스마(Hans Boersma, 1961-현재)의 『지복직관』은 이것을 잘 소개해 주는 책이다.

    부어스마는 독특한 이력을 가진 신학자이다. 
    그는 개혁파 목회자의 자녀로 자랐으며, 개혁파 목회자로 활동하다가 지금은 북미 성공회 사제로 활동하고 있다. 
    그는 캐나다 레스브리지 대학교에서 역사학(B.A.)을 공부했고, 캐나다 개혁신학대학원(M.Div.)과 네덜란드 위트레흐트 대학교(Th.M./Ph.D.)에서 수학했다. 
    그는 캐나다 랭글리에 있는 트리니트웨스턴 대학교(1999-2005)에서 가르쳤고, 리젠트 칼리지에서 제임스 페커(James Packer) 신학 교수(2005-2019)로 활동했다. 
    지금은 성공회 전통인 미국 내쇼다하우스(Nashotah House)의 성 베네딕트 그리스도의 종 수덕신학 석좌교수로 재직 중이다. 

    이력에서 보는 것처럼, 부어스마는 다양한 기독교 전통에 서 있는 에큐메니컬한 신학자이다. 
    하지만 대표적인 저작을 읽어보면, 그는 다양성 속의 일치만을 주장하는 학자가 아니라 기독교 전통과 교부 신학의 풍부함을 추구하는 가톨릭의 새로운 신학(nouvelle théologie)에 영향을 많이 받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지복직관』도 마찬가지다. 
    그는 이 책에서 다양한 기독교 사상가들의 지복직관을 살피며, 독특한 “성례전적 존재론”(sacramental ontology)으로 확장시키고 있다. 

    부어스마는 지복직관을 성서적 기반과 기독교 역사를 통해 무엇을 의미하고, 무엇을 의미하지 않는 가를 공정하게 살펴야 한다고 말한다.
     
    직관(vision. 直觀. 곧을 직. 볼 관. 바로 눈에 보임), 
    즉 바라봄은 인간의 경험에서 유래하는 은유적인 단어이다. 
    이것은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를 모두 다 담을 수 없지만 그분과의 관계를 표현 할 수 있는 은유이다. 
    직관이란 일종에 하나님에 대한 간접적인 접근이다. 
    이것은 “하나님께 도달하지만 결국 인간의 기호를 통해 간접적으로 도달하는 성례전적인 접근”이기도 하다.(부어스마, 29쪽) 
    동시에 성례전적 존재론은 실재가 물질 세계를 통해 영적인 실재를 드러낸다는 의미에서 목적인을 가지고 있다고 본다. 
    하지만 “근대성은 어떤 사물의 목적이 그것의 본성과 함께 주어진다는 창조적 목적인 개념을 거부했다.”(부어스마, 61쪽) 
    그리고 이것은 지복직관의 개념 상실로 이어졌다. 
    이런 상황에서 부어스마는 “하나님에 초점을 맞추는 신학적이고 기독론적인 지복직관의 교리를 회복하고 재표현해야 한다”고 말한다.(부어스마, 92쪽) 

    이를 위해 부어스마는 다시 한번 기독교 전통에 집중할 필요를 말하며 다음과 같이 책을 구성한다. 
    책은 서론과 제13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2~4장은 제1부로 ‘초기 기독교 사상에서의 지복직관’을 다루고, 
    5~8장은 제2부로 ‘중세 사상에서의 지복직관’을 논의한다. 
    9~12장인 제3부는 자신의 사상적 토대인 ‘개혁파 사상에서의 지복직관’을 다루는 데, 칼뱅으로 시작하여 청교도와 네덜란드 개혁주의에서 지복직관의 의미를 찾는다. 
    부어스마는 근대 초기의 청교도와 네덜란드 개혁주의 사이의 차이를 자세하고 날카롭게 대비시키지만, 다른 개신교 전통에서의 지복직관 개념을 논의하지 않는 다는 건 아쉬운 대목이다. 
    마지막 13장은 책의 4부로 결론인데, “지복직관”의 교리적 평가를 교육의 입장에서 다룬다. 
    하나님 섭리를 신적 교육과 연결시켜 그리스도와 연합이라는 훈련 과정으로 설명한다. 
    “하나님은 자신의 성령을 통해 우리 안에 내주하고 그로 인해 우리를 그리스도와 연합시키는데, 시간이 흐르면서 증진되는 직관을 낳는다”(부어스마, 631쪽). 
    직관을 낳는 형성과정으로 교육은 독일어 Bildung에 일맥상통한다. 
    Bildung은 교육, 교양으로 번역되지만 엄밀히 말해 도야이다(슈바이처, 36-42쪽). 

    하나님을 바라보는 교육은 네 개의 요소를 지니고 있다(부어스마, 632-638쪽). 

    첫째, 그것은 하나님의 지속적인 섭리적 돌봄에 근거를 둔다. 
    둘째, 하나님을 보기 위해서는 견습이 필요하다. 
    견습은 하나님의 생명에 참여하는 것이며, 그것은 이미 하나님에 대한 직관이라고 할 수 있다. 
    셋째, 견습의 단계는 다양하지만 그리스도에 집중하는 것은 동일하다. 
    넷째, 하나님의 교육에는 변화시키는 힘이 있다. 
    지복직관이란 창조주-피조물 구분을 제거하지 않지만, 신적 영광과 덕에 참여를 의미한다. 
    그런 의미에서 신적인 하나님의 본성을 공유하는 것이다.  

    참고도서 / 
     
    슈바이처, 프리드리히.  『기독교교양: 사람은 어떻게 빚어지는가?』. 손성현 옮김. 서울: IVP, 2023. 
    Vanhoozer, Kevin J.. Mere Christian Hermeneutics: Transfiguring What It Means to Read the Bible Theologically. Grand Rapids: Zondervan, 2024.


    잠언 8:17 
    나를 사랑하는 자들이 나의 사랑을 입으며, 나를 간절히 찾는 자가 나를 만날 것이니라. 

    “하나님”을 만나는 방법을 알고 있습니까?  
    “하나님”을 환상이나 꿈속에서 만나 봤다고 하는 신앙인들은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만나 봤다고 증거 하는 내용들은 대개 성경과 맞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이 “하나님”을 만나 볼 수 있는 방법을 이미 성경을 통해서 자세하게 기록해 놓으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만났다고 하는 말을 그대로 믿지 말고, 그들이 증거 하는 내용이 성경과 맞는지를 확인해 보고 진위를 판단해야 할 것입니다.

    기독교인들이 “하나님”을 만나 보지 못하는 것은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유일한 길이 되는 “성경”을 잘 모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을 만나 보신 일이 없는 기독교인들에게 “하나님”을 만나 보는 방법을 성경을 통해서 자세하게 알려드리겠습니다. 
    성경의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을 만나는 방법이야 말로 가장 확실한 방법이기 때문입니다. 
    “예수께서는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다고 하셨습니다”(요14:6) 
    그런데 예수님이신 길도 말씀이요, 진리도 말씀이요, 생명도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말씀”(성경)으로 말미암지 않고는 “하나님”을 결코 만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진정으로 “하나님”을 만나보고 싶으신 독자님들은 “생명의 말씀”

    오늘날 기독교인들이 성경공부를 하면서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하는데 말씀이라 해서 다 같은 말씀이 아닙니다. 
    “씨”가 있는 말씀이 있고 “씨”가 없는 말씀이 있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씨”로 난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을 알아듣고, 못 알아듣는다면 하나님의 “씨”로 난 자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요한복음 8:47

     예수님께서는 유대인들과 같은 아브라함의 혈통(씨)이셨으나 “내 아버지와 너희 아비가 다르다”

    오늘날 목회자는 “씨”가 없기 때문에 아비는 될 수가 없습니다.  

    요한복음 1:12~13  

    벧전 1:23

    우리가 육적인 “씨”를 받고 부모의 자녀로 태어난 것처럼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려면 하나님의 씨(말씀)를 받고 거듭나야 자녀가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거듭난 자라야 하나님 나라를 보고 들어 갈 수 있다 하셨습니다(요3:3~5) 그러므로 우리가 거듭나게 되면 하나님 나라를 보고 들어 갈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마태, 마가, 누가, 사도바울이 예수님의 탄생을 보지 못했어도 성경을 정확히 기록할 수 있었던 것은 성경을 통달했기 때문에 마치 예수님의 탄생을 옆에서 본 사람같이 기록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성경에는 분명하게 예수님(하나님)을 만나는 방법과 천국을 보고 들어 갈 수 있는 방법이 자세히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마치 보물섬에 감춰놓은 보물지도와 같은 것이어서 보물지도의 암호(비유비사)를 해독해야만 보물(천국)을 찾을 수 있는 이치와 같은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성경을 기록하실 때 하나님이 계신 천국을 각종

    “비유비사”로 기록해 놓으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께서 감춰 놓으신 천국의 보물을 찾아내기 위해서는 “비유비사”를 해독할 수 있는 방법을 알아야만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까지 수많은 신학자들이

    “비유비사”를 해독하려고 힘써 왔지만 부분적인 해독은 할 수 있었으나 결코 완전한 해독을 할 수 없었습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 사람의 지혜나 능력으로는 결코 해독할 수 없도록 “일곱 인”으로 완전히 봉해 놓았기 때문입니다(계5:1)

     

    그러나 예수님은 성경의 비유비사를 해독해 주실 때가 와서 천국을 보고 들어가서 얼굴과 얼굴을 맞대며 만날 때가 올 것이라고 우리에게 약속을 하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 믿는 자들의 소망인 것입니다. 이 성경의 비유비사가 해독이 되면 하나님께서 이루시려고 계획하시고 경영하시는 하나님의 천국이 반드시 이 땅에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이사야 14:24 “만군의 여호와께서 맹세하여 이르시되 내가 생각한 것이 반드시 되며 내가 경영한 것을 반드시 이루리라” 우리가 “비유비사”로 되어 있는 성경을 완전히 해독해서 하나님이 계시는 천국을 보고 들어 갈 수 있는 믿음을 갖는 것이 바로 거듭난 믿음인 것입니다. 이것은 성경이 바로 묵시요 예언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봉함해 놓으신 묵시와 예언이 마지막 때가 이르면 실제상황으로 성취가 된다는 것입니다.

     

    하박국 2:2~3 “여호와께서 내게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는 이 묵시를 기록하여 판에 명백히 새기되 달려가면서도 읽을 수 있게 하라, 이 묵시는 정한 때가 있나니 그 종말이 속히 이르겠고 결코 거짓되지 아니하리라 비록 더딜 찌라도 기다리라 지체되지 않고 정녕 응하리라”  묵시(예언)는 정한 때가 있다 하시고 종말이 이르면 지체되지 않고 정녕 응한다고 하십니다. 다시 말하면 묵시 곧 예언이 성취되면 그 예언의 내용과 같은 실상이 나타나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구약의 예언이 성취되어 실상으로 오셨던 것처럼 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나타난 실상을 알아보고 믿으려면 비유비사를 해독하여 묵시의 내용을 완전히 깨달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달려가면서도 읽을 수 있도록 우리의 마음 판에 새겨야 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명령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이 예언을 마지막 종말이 이르면 완전히 깨닫게 해 주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다니엘 12:4 다니엘아 마지막 때까지 이 말을 간수하고 이 글을 봉함하라,  예레미야 23:20 “나 여호와의 노는 내 마음의 뜻하는 바를 행하여 이루기까지는 쉬지 아니하나니 너희가 말일에 그것을 완전히 깨달으리라” 

    따라서 마지막 종말의 때에 모든 것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마지막이나 종말이란 뜻은 천지개벽으로 세상종말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처음에 기독교에 입문해서 씨가 없는 목자의 비 진리로 잘못 지어진 내 육체의 성전을 헐면(죽고) 내게는 종말이라는 것입니다. 내가 죽으니 끝이요 종말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죽는가?  그것은 “씨”가 있는 목자를 만나 진리의 말씀으로 죽는 것입니다(침례) 내가 그리스도와(말씀) 함께 죽으면 그리스도와 함께 부활하는 것입니다(갈2:20) 그러므로 이렇게 죽고 부활하면 “재림의 영”이 임함으로 모든 것을 깨닫고 통달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진리의 성령이 우리에게 오셔서 묵시(예언)를 해독해서 우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고 계시는 때이기 때문입니다. 이때에 진리의 성령으로부터 “비유비사”가 해독되어진 진리를 듣는 자들이 거듭나는 자들이요 “재림예수”로 탄생하는 자들이요 하나님 나라를 보고 들어가서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자들이 되는 것입니다. 이 비유비사는 하나님께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보내시는 진리의 성령께서 해독하여 성경의 모든 것을 가르치고 생각나게 알게 해 주신다고 합니다.  요한복음 14:26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시리라

     

    요한 1서 2:27 너희는 주께 받은 바 기름 부음이 너희 안에 거하나니 아무도 너희를 가르칠 필요가 없고 오직 그의 기름 부음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가르치며 또 참되고 거짓이 없으니 너희를 가르치신 그대로 주 안에 거하라,  이렇게 재림의 영이 임하면 성경을 통달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계시록 5:1절의 안팎으로 일곱 인으로 봉해진 말씀이 해독되어 열어서 보여주신다는 뜻입니다. 감춰져 있던 천국을 보여주시고 그곳에 들어가게 하시고 하나님을 만나 볼 수 있도록 해주신다는 말씀입니다. 진정으로 하나님을 만나보고 싶으신 신앙인은 생명의 말씀을 하나님의 약속대로 반듯이 혈통의 씨로 태어나신 지금 우리 옆에 계신 현제인간예수님의 말씀을 영접하고 계시의 말씀을 깨달아서 천국을 보고 들어가서 하나님을 참으로 만나보는 복 받는 성도가 되시기 바랍니다. 혹시 독자 분들께서는 필자를 신천지 인으로 오해하시는 분이 계신데 저는 미국 씨애틀에 살며 기독교를 탈퇴한 사람입니다.

    (원문 출처:새사람 블로그) s,  2.014  NO 271 


    하나님을 보는 법!!을 3가지로 정리해 볼께요.

    첫째. 하나님은 볼 수 없습니다.

    제대로 하나님을 알진 못했지만 어려서 교회를 다녔던 적이 있습니다. 그러나 약간 머리가 크면서, 하나님을 볼 수 있으면 믿겠다. 좋겠다.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저 말고도 이런 생각 한 분 많을거에요. 그런데 목회자분들께 질문해도 명확한 답을 듣지 못했습니다. 그 분들이 설명을 못 한것인지, 제가 이해를 못 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저는 작년에서야 이 답을 찾았습니다.

    오직 그에게만 죽지 아니함이 있고 가까이 가지 못할 빛에 거하시고 어떤 사람도 보지 못하였고, 또 볼 수 없는 이시니

     그에게 존귀와 영원한 권능을 돌릴지어다 아멘

    -디모데전서 6장 16절-

    성경에 적혀있더라고요. 죽지 않는 존재, 그리고 빛에 거하시는데 볼 수 없는 존재라고 적혀있습니다. 네 우리가 눈으로 볼 수 있는 존재가 아닙니다. 다만, 성경이 그 분의 생각이시니 성경을 봄으로써 하나님을 본다? 만날수는 있습니다. (맨 처음 제목은 그냥 시선을 끌려고 '하나님을 보는법'이라고 적었어요.) 성경을 직접 읽어보시면서 '아, 이건 정말 사람의 생각이 아니구나. 신의 생각이구나'를 여러분도 경험하시길 기대합니다. 

    둘째, 자연을 봄으로써 하나님의 존재를 직감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만이 구원의 길이다!! 하면, 예수님 오시기 전 사람들은 다 지옥가는가? 세종대왕, 이순신같은 분도 지옥 가는가?? 단골 주제죠. 이것도 역시 전에는 답을 찾지 못했어요. 그래서 각자가 열심히 살아있는한 공부해야 되요.

    자연을 봄으로써 창조주를 느낄수 있도록 그렇게 하나님이 창조하셨습니다.

    이는 하나님을 알 만한 것이 그들 속에 보임이라 하나님꼐서 이를 그들에게 보이셨느니라.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가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려졌나니 그러므로 그들이 핑계하지 못할지니라 로마서 1장 19~20절

    그래서 자연을 볼 때 우리가 아름다움을 느끼고, 때가 맞으면 '이게 저절로 생겼을까? 어떤 전능한 존재가 만든 것 아닐까?' 이렇게 되어있답니다. 이것을 통해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지 않은 곳에서도, 예수님에 대해 듣지 못한 분들에게도, 원주민들도 포함이고 자연을 바라보며 하나님을 찾을수 있도록 기회를 주신것이죠. 물론 아직(?), 자연을 봐도 별 느낌, 생각이 없는 분들도 있을 수 있습니다. 중요하지 않은 것으로 너무 정신 없이 지내거나 불평 불만으로 가득찬 경우면 그렇게 되지 싶습니다.

    셋째, 역사를 공부함으로 하나님이 계신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 부분이 참 놀라운데요. (아니 위에 1,2번도 다 놀랍습니다..) 공부를 해 보면 알 수 있다는 거에요. 저도 더 공부해서 더 많이 정리해야는데 일단 대략이라도 얼렁 전해드리고 싶어서 적어보고 있습니다. 로마사와, 유대인의 역사를 공부해 보시면 알 수 있습니다.

    로마시대에 왜 기독교 탄압이 생겼고, 나중에 황제가 기독교를 인정하는 지 과정을 살펴보면 정말 신기하거든요. 예수님이라는 분이 태어나지 않았다면, 죽음에서 다시 살아나는 일이 생기지 않았다면, 그의 제자들이 무슨 생각으로 순교할 수 있었을까요? 그래서 기독교가 전파될 수 있었을까요?

    그리고 유대인 말인데요. 저도 학교때 공부를 잘 안해서 몰랐는데 은근 유대인, 유태인의 단어를 여러번 들었단 말이죠. 유대인이랑 유태인이 다른건지 같은건지도 모르고 그냥 그런게 있나보다 했었습니다. 교과서에 나오는 유대인이 성경에 나오는 그 유대인이랑 같은건지도 이번에 알았습니다. 성경에 그 모세가 구출한 민족, 홍해를 가르고 나오는 민족 그 민족입니다 하나님이 택하신 민족이지요. 그런데 놀랍게도, 구약에 '나중에 예수님이 태어나서 너희를 구원할거다' 적혀있는데도 실제 예수님이 태어나시니 이들은 믿지 않습니다. 그리고 오히려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죽여버립니다...그런데 그렇게 예수님이 죽으심으로, 다시 부활하심으로 그 부활을 본 제자들이 놀라고, 정말 믿게 되면서 순교하며 기독교가 퍼져나가죠. 아직도 유대인들은 예수님이 구원자인걸 믿지 않아요. 그리고 그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죽였기 때문에 유럽에서 추방당하고 나라를 잃고 떠돌다가 20세기에 들어서야 다시 나라(이스라엘)을 찾죠. 그렇게 나라 없이 떠돌던 민족 유대인, 그러나 또 세계 부의 40%를 장악하고 미국 대통령 거의 전부를 뽑는데 큰 영향을 준 민족 유대인. 그런데 현재 기독교를 가장 탄압하는 공산주의를 만든 마르크스가 유대인입니다. 좀 단순히 말하면 인구수는 2천만으로 정말 적은데 세계 경제와 역사를 흔드는 민족이지요. 하나님이 택했던 민족이신데, 오히려 그들은 하나님에 반대하는 일들을 하는 거죠. 그렇게 함으로써 오히려 이방인이였던 우리들이 하나님을 찾게 하고, 또 우리를 '유대인을 다시 하나님께 돌아오게 만드려는 도구'로 사용하시는 그런 놀라운 하나님의 방식...

    역사를 공부함으로써도 하나님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그냥 말로만 살아계신 하나님...하는게 아니라 아 진짜 이 세상을 운행하고 계시구나. 그 분이 이끌고 가시는구나. 우리가 하는 것이 아니구나. 전 그래서 ‘살아계신 하나님’ 이 말이 어색합니다. 그냥 계속 역사하시는 하나님. 영원하신 하나님이 더 맞는 듯 해요. 사람들이 연구한 바로는 약 46억년 전에 지구가 만들어 지고 약 400만년전 인류가 생겼다 하죠. 지구가 만들어 지기 전에, 태양계와 우주가 만들어지기도 전부터 스스로 계신 자. ‘I am Who I am’ 이 The GOD. 하나님이시니까요. 사람의 언어로 적힌 성경을 읽으며 아주 조금 알아갈 뿐 우리의 머리로 어찌 다 이해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죠.

    13.너희가 온 마음으로 나를 구하면 나를 찾을 것이요 나를 만나리라

    예레미야 29:13 

    성경을 읽으세요 성경을 읽으세요 놀라운 일이 생깁니다 성경을 읽으세요


    성도의 궁극적인 소망은 하나님을 아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는 하나님을 알고자 하는 욕망이 있습니다. 사실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것, 그것은 곧 생명이 없는 것이기도 합니다. 요한복음 17:3에 보면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을 아는 것이 곧 생명입니다. 하나님을 모르면 죽습니다. 호세아 선지자는 “내 백성이 지식이 없으므로 망하는 도다.”(호 4:6)라고 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을 아는 자에게만 참 생명이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아는데 힘써야 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하면 하나님을 알 수 있습니까? 그냥 “하나님!”하고 외치면 하나님을 알 수 있습니까? 아니면 우리가 하나님을 깊이 연구하면 알 수 있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자신을 드러내시는 방법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자신을 알려주셔야만 알 수 있습니다. 이걸 계시(啓示, revelation)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을 아는 방법에는 어떤 것이 있을까? 다시 말해, 하나님은 어떻게 자신을 계시하실까요?

    오늘의 시편은 바로 그것을 가장 잘 보여주는 성경 본문 중에 하나입니다.

    본론

    시편 19편이 말하는바

    시편 19편은 우리가 하나님을 아는 방법을 크게 두 가지로 말씀합니다. 하나는 자연을 통해서 하나님을 아는 것입니다. 또 하나는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을 아는 것입니다. 이 사실을 각각 1-6절, 7-10절에서 말씀합니다. 

    자연계시

    하나님을 아는 방법은 ‘자연’에 나타나 있습니다. 1절에 “하늘이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고, 궁창이 그의 손으로 하신 일을 나타내는도다”라고 말씀합니다. ‘하늘’과 ‘궁창’은 하나님께서 태초에 지으신 자연입니다. ‘영광’과 ‘그의 손으로 하신 일’은 각각 하나님의 속성과 사역입니다. 그렇다면 1절이 말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자연이 하나님의 속성과 하나님의 사역을 나타낸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알아야 할 하나님에 대해서는 크게 두 가지로 나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속성, 그리고 하나님의 사역입니다. 이 두 가지를 자연이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전능하시고, 영원하시고, 무한하신 분이라는 사실을 자연이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온 세상을 창조하셨고 다스리고 계시다는 사실을 자연이 말합니다. 높고 높은 하늘을 바라보면서, 하늘에 떠있는 저 태양을 바라보면서, 높고 높은 산과 깊고 깊은 바다와 울창한 숲과 아름다운 새들의 노래 소리를 들으면서 하나님께서 천지만물을 창조하셨음을 깨닫습니다. 지난달에 살펴 본 시편 8편 3절은 “주의 손가락으로 만드신 주의 하늘과 주께서 베풀어 두신 달과 별들을 내가 보오니”라고 하면서 그것들이 다 주님의 영광을 드러내고 있음을 노래합니다. 

    2절을 봅시다. “날은 날에게 말하고 밤은 밤에게 지식을 전하니”라고 말씀합니다. 여기에서의 날은 낮이라는 말이죠. 그래서 낮과 밤은 합쳐서 ‘하루’입니다. 여기서는 “날은 날에게 밤은 밤에게”라고 말하면서 아주 아름답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날은 날에게 말한다”에서 ‘말하다’는 말은 ‘쏟다, 끓어오르다’라는 뜻으로 “마치 샘에서 물이 터져 나오며 분출하는 듯하다”는 의미입니다. 따라서 자연이 증거 하는 하나님은 단순하게 전해지는 것이 아니라 샘에서 솟아난 물이 지속적으로, 쉬임없이 쏟아져 나온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이렇게 자연이 하나님에 대해서 말해 줍니다. 자연 그 자체가 갖고 있는 본성의 빛들(lights of nature)이 우리에게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증거 합니다. 하나님의 하신 일을 드러냅니다. 우리는 이런 것을 가리켜 ‘자연계시’(Natural Revelation)라고 말합니다.

    핑계할 수 없는 계시

    자연이 하나님을 나타낸다는 것은 중요한 의미를 갖습니다. 특별히 그 누구도 하나님이 계시지 않다고 핑계할 수 없게 만든다는 점에서 중요합니다. 로마서 1장 19-20절을 봅시다. “(19)이는 하나님을 알만한 것이 저희 속에 보임이라 하나님께서 이를 저희에게 보이셨느니라. (20)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게 되나니, 그러므로 저희가 핑계치 못할찌니라.”라고 말합니다. 한 군데 더 보겠습니다. 로마서 10장 18절 “그러나 내가 말하노니 그들이 듣지 아니하였느냐 그렇지 아니하니 그 소리가 온 땅에 퍼졌고 그 말씀이 땅 끝까지 이르렀도다. 하였느니라.”라고 합니다. 이 말씀은 개역개정성경의 난외주에 표시하고 있는 것처럼 시편 19편 4절을 인용하고 있습니다. 나아가 오늘 본문인 시편 19편 3절에도 “언어도 없고 말씀도 없으며 들리는 소리도 없으나”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자연세계가 언어도 없고 소리도 없지만 그 소리가 분명히 땅 끝까지 모든 사람이 알 수 있도록 보여준다는 것입니다. 아무도 하나님을 몰랐었다고 핑계할 수 없는 것입니다.

    하늘이 하나님을 선포하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을 몰랐다고 핑계할 수 없습니다. 온 세상은 하나님의 영광을 찬양하는 소리로 가득 차 있습니다. 비록 우리 귀에 들리지 않지만 이 소리는 온 땅에 통합니다. 자연에는 하나님을 알만한 것이 있어서 하나님을 모른다고 할 수 없습니다. 

    자연을 통해 하나님을 바라보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자연 속에 하나님의 신비가 나타나 있습니다. 하나님의 영광과 하나님이 그의 손으로 하신 일이 나타나 있습니다. 우리는 자연 속에서 하나님을 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현대인들은 하나님을 보여주는 자연을 쳐다볼 여유조차 없습니다. 밤하늘에서 별을 본 지가 오래입니다. 

    하지만 성도들은 자연을 즐길 줄 알 필요가 있겠습니다. 특별히 산을 한 번씩 가보는 것이 좋습니다. 인간의 유한함을 보면서 자연의 무한함 속에서 하나님의 무한함을 발견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어떤 자매가 산에 가서 쓴 짧은 시 한편을 읽어드리겠습니다. “산이라는 무거운 존재가 있어 사람은 좌절하고 절망하는 한편 희망을 품고 미래를 본다. 눈에 보이는 산을 통하여도, 인생에 있어 산이라는 어려움을 통하여도 동일하다. 결국 산도 우리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이다. 하나님을 알게 하는 매개체다.”이러한 감상을 느낄 수 있는 곳이 바로 자연입니다. 

    말씀계시

    두 번째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계시는 ‘말씀’입니다. 이것이 바로 7절부터 10절까지 나와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하나님의 말씀’을 6가지 서로 다른 언어로 표현합니다. 

    7절 : 여호와의 율법, 여호와의 증거

    8절 : 여호와의 교훈, 여호와의 계명

    9절 : 여호와를 경외하는 도, 여호와의 법(규례; 개역한글)

    이 모든 표현이 사실은 다 하나님의 말씀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말씀의 효력

    이런 하나님의 말씀은 어떤 점에서 우리가 하나님을 아는 방법이 될 수 있을까? 무엇보다도 하나님이 친히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이라는 점에서 그러합니다. 그리고 이 말씀이 갖고 있는 능력 때문에 그렇습니다. 7-9절에는 이 하나님의 말씀들이 하는 기능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말씀의 효과는 영혼을 소성시키며, 우둔한 자를 지혜롭게 하며(7절), 마음을 기쁘게 하고, 눈을 밝게 하며(8절), 영원까지 이르고, 의롭게 하는 효과(9절)가 있습니다.

    말씀

    특성

    효과

    7절

    율법, 증거

    완전, 확실

    영혼을 소성시키며, 우둔한 자를 지혜롭게 하며

    8절

    교훈, 계명

    정직, 순결

    마음을 기쁘게 하고, 눈을 밝게 하며

    9절

    여호와를 경외하는 도

    여호와의 법

    정결, 진실

    영원까지 이르고, 의롭게 한다.

    우리에게 생명을 줍니다. 지혜를 줍니다.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을 경배해야 하는지를 가르쳐 줍니다. 우리의 마음을 기쁘게 해 줍니다. 우리의 눈을 밝게 해 준다. 이 말은 우리의 지각을 열어준다는 것입니다. 죄로 인하여 어두워진 눈을 밝게 해 주는 것입니다. 

    특히 9절에서 말씀을 가리켜 ‘여호와를 경외하는 도’라고 표현한 것은 우리가 말씀을 통해 여호와를 경외하게 된다는 뜻입니다.

    말씀의 특성

    이러한 하나님의 말씀의 특성은 완전, 확실(7절), 정직, 순결(8절), 정결, 진실(9절)합니다.

    자연계시의 한계

    여기에서 의문이 생깁니다. 앞서 분명히 말하기를 자연을 통해서 하나님을 알 수 있다고 했는데, 그렇다면 굳이 우리가 뭣 하러 성경을 읽을까? 나아가 뭣 하러 전도를 해야 하나? 그렇지 않습니까? 자연 만물이 하나님을 찬양하고 있다고 말하고, 자연 만물을 바라볼 때에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셨음을 확인할 수 있다고 하였는데, 왜 아직도 수많은 사람들은 그것을 인정하지 않습니까? 왜 자연만물을 뻔히 보고도, 아니 그것들을 세밀하게 연구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은 진화를 창조보다 더 신뢰합니까? 그리고 성경은 왜 있어서 우리를 어렵게 만드는가? 이에 대해서 많은 사람들이 고민했습니다. 그리고 성경을 통해서 답을 찾으려고 했습니다.

    정답은 자연계시에는 한계가 있다는 것입니다. 인간의 타락으로 인하여 자연계시를 이해함에 있어서 한계가 생겼습니다. 분명히 자연만물들은 하나님을 찬송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하신 일을 선포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회심하지 않은 자들, 하나님을 모르는 자들은 그것을 알 수가 없습니다. 보이지가 않습니다. 들리지가 않습니다. 그들의 죄가 그것을 가리우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제는 오직 믿음으로만(히 11:3) 하나님의 피조물들이 선포하는 창조주의 영광이 들립니다. 자연을 통한 계시는 마치 희미한 유리로 하나님을 보는 것과 같아서 하나님에 대해 인식하고 느낄 수 있기는 하지만 선명하게 하나님의 은혜를 알 수는 없습니다. 더 분명한 것이 필요합니다. 바로 성경입니다. 

    특별계시로서의 성경

    그래서 자연계시는 흔히 일반계시라고 하고, 말씀계시를 가리켜 ‘특별계시’(Special Revelation) 라고 합니다. 자연계시가 귀중하지만, 그것은 특별계시인 말씀과 비교할 수 없습니다.

    10절 말씀을 봅시다. “금 곧 많은 순금보다 더 사모할 것이며 꿀과 송이 꿀보다 더 달도다.”라고 말합니다. 시편 기자는 앞서 1-6절까지에서 자연계시의 아름다움에 대해서 노래했습니다. 그런데 7-9절에서 특별계시의 아름다움에 대해서 노래하면서 특별계시가 더 탁월하다고 말합니다. 많은 순금보다 더 사모할 것이며, 꿀과 송이 꿀보다 더 달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의 가치는 다른 것과 비교할 수 없는 것입니다. 절대적 가치입니다. 본문에서 말하는 금이라고 하는 것은 절대적 가치이죠. 경제학 용어 중에 ‘금본위제’라는 것이 있습니다. 지금은 달러가 화폐의 기준입니다. 그래서 각 국가 간의 돈의 가치가 다른데 그것을 평가하는 기준이 달러입니다. 하지만 불과 수 십 년 전만 해도 ‘금본위제’라고 해서 금이 모든 화폐의 기준이 되었습니다. 금이라고 하는 것은 전 세계의 절대적인 가치입니다. 그런데 그 절대적 가치와 비교할 수 없는 더 위대한 가치가 바로 하나님의 말씀인 것입니다. 

    시편 19편 저자의 관점에서

    오늘의 시편을 지은 다윗의 관점에서 생각해 봅시다. 그는 우리가 잘 알다시피 목동이었습니다. 낮에도 밤에도 양을 치는 자였습니다. 넓고 광활한 이스라엘의 평원에서 양을 치면서 하늘을 보기도 하고 땅을 보기도 합니다. 자연의 아름다움과 변화를 봅니다. 그러면서 그는 하나님을 노래합니다. 다윗에게 있어서 하늘과 땅의 표정들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영광을 선포하는 것임을 볼 수 있는 한 방법이었습니다.

    그런데 그것보다도 더 위대한 것은 그에게 주신 율법입니다. 교훈입니다. 계명입니다. 말씀입니다. 그는 말씀이야말로 하나님을 아는 최고의 방법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무엇보다도 말씀을 묵상하는 자의 삶을 살았습니다. 그리고 그는 시편 119편에서 말씀의 위대함과 탁월함을 매우 길게 노래했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은 우리에게 하나님의 뜻을 알 수 있는 2가지 방법을 주셨습니다. 하나는 자연계시입니다. 또 하나는 특별계시로서의 성경입니다. 이 2가지 중에 성경이 더욱 중요합니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1장 1절

    이 사실은 우리 고신교회가 고백하는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의 가장 첫 장 첫 절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제1장 성경에 관하여 

    Of the Holy Scripture

         1. 비록 본성의 빛과 창조와 섭리의 사역들이 하나님의 선하심과 지혜와 능력을 사람이 핑계하지 못할 정도로 분명하게 나타낸다고 하더라도,1) 구원에 이르게 할 정도로 필수적인 지식 곧 하나님과 그분의 뜻에 대한 지식을 전달하기에는 충분하지 않다.2) 그러므로 주님은 여러 시대에 그리고 다양한 방식으로 자신을 계시하시는 것과 자신의 뜻을 자신의 교회에 선포하기를 기뻐하셨다.3) 그 이후에 육신의 부패, 사탄과 세상의 사악함에 맞서 진리를 보다 잘 보전하고 전파하기 위하여 그리고 교회를 더욱 굳게 세우고 안위하기 위하여, 주님은 그것을 전부 기록하게 하셨다.4) 그렇기 때문에 성경은 반드시 필요하게 되었다.5) 그리하여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들에게 자신의 뜻을 계시하셨던 이전의 방식들은 이제 중단되었다.6)

    1) 롬 1:20; 시 19:1-3; 롬 1:32; 2:1; 14-15   2) 고전 1:21; 2:13-14   3) 히 1:1   4) 롬 15:4; 잠 22:19-21; 사 8:20; 마 4:4,7,10; 눅 1:3-4   5) 딤후 3:15; 벧후 1:19   6) 히 1:2

    계시에 대한 인간의 반응

    이제 우리가 할 일은 이 2가지 방식을 잘 활용하는 것입니다. 자연을 보아야 합니다. 성경을 읽어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뜻을 분별할 줄 알아야 합니다. 

    11절 “주의 종이 이것으로 경고를 받고 이것을 지킴으로 상이 크니이다”라고 말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를 향한 경고라는 사실을 알고 이것을 지키기 위해 힘써야 합니다. 12-13절 “(12)자기 허물을 능히 깨달을 자 누구리요 나를 숨은 허물에서 벗어나게 하소서 (13)또 주의 종에게 고의로 죄를 짓지 말게 하사 그 죄가 나를 주장하지 못하게 하소서 그리하면 내가 정직하여 큰 죄과에서 벗어나겠나이다”라고 말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우리의 죄를 깨달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 죄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율법을 통해 우리의 눈이 밝아지고 영혼이 소성케 되면서 자기의 허물을 생각하게 됩니다. 자신의 본 모습을 보게 된다는 것입니다. 자신의 실체를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말씀을 가까이 하는 사람은, 죄에 대해서 지적하고 알려주면 자기를 돌아볼 줄 알고 더 이상 죄에 빠져 살지 않기를 간구하며 살아갑니다. 여호와의 율법을 항상 가까이 하며 충고를 받고 권고를 받고 살아가는 사람은 하나님께서 싫어하시는 일이나 죄에 빠져 사는 삶을 살지 않으려는 마음이 강렬하여 징계 가운데 들어가지 않습니다. 평소에 삶의 정서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죄와 연약에 대해 권고를 받고 지적을 받고 말씀 앞에서 자기를 낮추고 겸손히 듣고자 하는 마음 자세와 생활감정이 있어야 한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말씀에 자신을 진정으로 비추는 사람은, 허물과 고범죄(고의로 범하는 죄)에서 벗어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자신의 인생 전체에서 죄가 주장하고 죄 가운데서 살아가지 않게 해 주시길 간구합니다. 13절에서처럼, “깨닫게 해 주시고 벗어나게 해 주소서”하는 간절한 심정을 갖게 됩니다.

    짐이 아닌 하나님의 사랑

    우리는 종종 성경을 짐처럼 생각합니다. 도무지 감당하기 힘든 무거운 짐이라고 생각합니다. 철저히 율법 중심으로 성경을 이해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성경은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편지입니다.

    특히 오늘 본문은 하나님의 말씀을 무거운 짐으로 말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의 자유를 제한하거나 불편하게 하는 것으로 간주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며 사는 신앙생활이 생활의 굴레인 것으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시인은 하나님의 율법은 꿀보다 달다고 말합니다. 

    말씀과 학문

    이번 달은 “종교개혁과 학문”을 주제로 살피는 달입니다. 그래서 특별히 말씀과 학문의 관계에서 이 본문이 말씀하는 바를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의 원천은 성경입니다. 우리는 성경을 통해서 하나님을 알아가야 합니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의 유일한 기준은 “오직 성경”입니다. 이것이 곧 종교개혁의 모토이기도 했습니다. 고려신학대학원의 초대교장 박윤선 목사님은 “계시 의존적 사색”이라는 표현을 자주 사용하기도 하셨습니다.

    성경이 우리의 기준이 되어야 한다는 것은 꼭 하나님을 아는 것에 대해서만 아닙니다. 우리의 모든 지식에 있어서 항상 성경이 기준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휘튼 대학의 아더 홈스(Arthur F. Holmes) 교수라는 분은 “모든 진리는 하나님의 진리다(All Truth is God’s Truth)”라고 했습니다. 이 말은 이 세상의 모든 지식이 결국은 하나님의 진리에 기초함을 말합니다. 

    신자는 이 사실을 기억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학문함에 있어서 뿐만 아니라 어떤 사실을 알아감에 있어서 그러해야 합니다. 특히 오늘날 정보의 홍수 시대를 살면서 어떤 정보나 지식을 받아들일 때에 그것이 과연 하나님의 말씀이 말하는 바에 기초하여 볼 때에 바람직한 것인지를 분별하는 지혜가 우리에게 필요합니다. 

    결론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은 우리에게 2개의 책을 주셨습니다. 자연계시와 특별계시라는 2개의 책을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만드신 자연만물을 통해서 계시하시고, 말씀으로 또한 계시하십니다. 이 계시를 통해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진정으로 바라시는 것은 하나님을 알고 섬기게 하기 위함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자연이라는 책과 성경이라는 책을 주셨음을 감사해야 합니다. 언어가 없고 들리는 소리도 없으나 분명히 말씀하시는 자연계시를 통한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십시오. 그리고 지금도 당신이 세우신 설교자를 통해서 분명하고도 또렷하게 들려주시는 말씀을 들으십시오. 그리하여 하나님을 참답게 섬기는 우리가 됩시다.

    구원받은 자의 눈으로 온 세상을 바라보십시오. 하나님의 창조가 얼마나 아름다운 지요? 하나님의 오묘하신 섭리가 얼마나 신비로운 지요? 춥디추운 겨울에 옷 하나 걸치지 않은 나무들이 생존해 있는 것을 보십시오. 밟아도 밟아도 생명을 유지하는 풀들을 보십시오. 넓고 넓은 강이 흐르고 흘러서 바다가 되는 그 신비를 보십시오. 오직 구원받은 자에게만 주어지는 특권입니다. 

    그러나 무엇보다 더 중요한 것은 성경을 사랑해야 하는 것입니다. 오직 성경만이 하나님에 관한 참된 지식을 알려줍니다. 이 성경을 한 해 동안 열심히 묵상하는 우리가 됩시다.


    지구 두 바퀴 반의 여행

     

    1873년에 소개된 쥘 베른의 장편소설, ‘80일간의 세계 일주’. 
    소설의 주인공인 영국 신사 필리어스 포그는 80일 만에 세계 일주가 가능한지를 두고 2만 파운드를 건 내기를 한다. 
    내기에서 이기기 위해 그는 하인 파스파르투를 데리고 런던에서 인도를 거쳐 일본, 미국을 통과하여 다시 런던으로 돌아오는 80일간의 긴 여행길에 오른다.

    그런데 놀랍게도 소설 속 세계 일주보다 무려 2배 이상 긴 여정이 우리의 몸 안에서 펼쳐지고 있다. 
    그 흥미진진한 이야기의 주인공은 바로 혈액이다.

    혈액은 뼈 안에 있는 골수에서 만들어진다. 
    혈액의 성분은 물이 주성분인 혈장과 세포인 혈구들로 이루어져 있다. 
    우리 몸속을 여행하는 모든 혈액의 총 무게는 체중의 약 7~8퍼센트에 해당한다. 
    예를 들어, 몸무게가 60킬로그램인 성인 남성의 경우 약 5리터 정도가 혈액이다. 
    그 5리터의 혈액은 혈관을 따라 쉼 없이 돌며 여러 기관 사이에 산소와 이산화탄소, 영양분과 노폐물 등의 물질을 운반한다.

    혈액의 구성 성분

    그런데 피는 왜 붉은색일까? 
    피가 붉은색을 띠는 이유는 혈구 중 가장 많은 수를 차지하는 적혈구 때문이다. 
    우리 몸속에서 25조 개라는 어마어마한 수를 자랑하는 적혈구는 가운데가 움푹 파인 원반 모양의 구조로 되어 있고 지름이 7.5마이크로미터가량으로 아주 작다. 
    이 조그마한 적혈구는 폐에서 산소를 받아서 세포에 운반하고 이산화탄소를 받아 폐로 실어 나르는 아주 중요한 역할을 맡고 있다. 
    적혈구는 헤모글로빈이라는 단백질을 가지고 있는데, 이 헤모글로빈 안에는 산소를 붙잡는 끈끈이 역할을 하는 철이 들어 있다. 
    녹슨 철이 붉게 보이는 것처럼 헤모글로빈의 철도 산소와 결합하면 붉은색을 띠게 된다. 
    더 놀라운 점은 이 작은 적혈구가 개당 약 300만 개의 헤모글로빈을 포함한다는 것이다. 
    적혈구 한 개가 약 1200만 개의 산소 분자를 실어 나를 수 있다.

    혈액 속에는 적혈구 외의 다른 여행자들도 존재한다. 그중 무색투명한 백혈구는 외부의 침략자들로부터 인체를 지켜낸다. 세균이나 이물질이 우리 몸속으로 들어오면 백혈구는 여기에 대항하는 항체를 생성해서 침입자를 무력화시킨다. 또 체내로 들어온 이물질을 직접 공격하여 삼켜버리기도 한다.

    혈구 중 가장 작고 형태가 일정하지 않은 혈소판은 혈액응고에 관여한다. 혈관이 손상되어 피부나 점막에 출혈이 생기면 혈액이 계속해서 흘러나오게 되므로 출혈을 멈춰야 한다. 이때 혈소판은 혈액을 응고시켜 손상된 부위를 막아 혈액이 몸 밖으로 나오는 것을 방지한다. 이러한 혈액응고의 과정은 혈소판이 자신의 몸을 던져 터지며 시작된다.

    우리가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고 하루를 보내는 사이에도 약 2천억 개의 적혈구, 1천억 개의 백혈구, 2천억 개의 혈소판이 새로 생성되어 묵묵히 자신의 임무를 수행하고 있다. 심장을 떠난 적혈구는 불과 23초 만에 세포에 산소를 전달하고 다시 심장으로 돌아온다. 생성된 적혈구는 약 120일을 사는데 매일 적혈구의 125분의 1 정도가 새것으로 바뀐다. 백혈구는 종류에 따라 다르지만 보통 5~50개의 세균을 없애고 사멸하며 단 몇 시간도 살지 못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혈소판은 길어야 10일을 산다. 우리 몸속 혈액의 15퍼센트는 여유분이며, 새로 생성되는 혈구들에 의해 빈자리가 금방 채워지기 때문에 헌혈을 해도 아무 문제 없이 건강을 유지할 수 있다.

    혈액은 어떠한 힘으로 온몸을 돌아다닐 수 있는 것일까? 심장의 주기적인 펌프 작용이 혈액 순환의 원동력이다.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혈액을 순환시키는 괴력은 심장의 특수한 근육으로부터 나온다. 달리기를 하면 심장이 쿵쾅거리는 것을 느낄 수 있다. 그러나 팔을 굽혔다가 펼 때처럼 마음대로 심장을 멈추게 할 수는 없다. 자율신경의 지배를 받는 심장에는 동방결절 1 이라는 특수한 근육이 있어서 스스로 주기적인 전기 자극을 만들기 때문이다. 동방결절의 전기 자극으로 심장박동이 시작되고 조절되기 때문에 이 근육을 ‘페이스메이커’라고 부른다.

    1. 동방결절(sinoatrial node, 洞房結節) : 

    심장의 한 부분으로, 전기자극을 생성하여 포유동물의 심장이 수축되게 하며 심장 박동의 리듬을 결정한다.

    심장은 보통 자기 주먹보다 약간 크다. 1분에 약 72회, 하루에 약 10만 회를 뛰며 사람이 80세가 되면 심장은 약 29억 번을 한 번도 쉬지 않고 뛴 것이다. 팔이나 다리 근육이 심장만큼 움직이려면 시작도 제대로 못하고 금방 지칠 것이다. 그러나 심장은 수십억 회 박동에도 지치지 않는다. 좌심실이 한 번 박동할 때 약 70밀리리터의 혈액을 동맥을 통해 온몸으로 내보낸다. 심장은 한 시간에 약 300리터, 하루에 약 7000리터 정도의 엄청난 양의 혈액을 펌프질하는 셈이다.

    혈액은 막중한 임무를 띤 채 심장의 도움으로 혈관이라는 길을 여행한다. 동맥과 정맥은 우리나라 중심 지역을 관통하는 고속도로와 같아서 굵고 지나는 혈액량도 많다. 그리고 손끝, 발끝까지 이어진 아주 가는 모세혈관이 우리 몸속 구석구석까지 넓게 퍼져 있다. 그러나 혈액의 여행이 순탄하지만은 않다. 심장에서 나가는 길인 동맥에서는 심장에서 발생하는 엄청난 압력을 견뎌야 하고, 모세혈관은 너무 얇아 적혈구 하나가 온몸을 찌그러뜨려 겨우 지나갈 수 있을 정도다. 심장으로 돌아오는 정맥에서는 판막 2 의 도움으로 겨우 심장으로 돌아온다.

    2. 판막 : 혈액의 역류를 막기 위해 심장과 정맥에 존재하는 막.

    심장에서 뿜어져 나와 동맥을 지나온 혈액은 모세혈관을 따라 여행하며 자신의 목적지인 몸 곳곳의 세포에 산소와 영양분을 공급하고 이산화탄소와 노폐물을 받아서 다시 심장으로 돌아온다. 산소를 세포에 주고 온 혈액은 산소를 받기 위해 다시 폐로 향한다. 폐에 도착한 혈액은 세포에서 받아 온 이산화탄소를 폐에 건네주고 산소를 받아 출발지인 심장으로 돌아온다. 혈액은 이 일주 코스를 지금도 쉼 없이 돌고 있다.

    작디작은 혈구들이 혈액을 타고 이동하는 혈관은 모세혈관까지 총 10만 킬로미터로 한 줄로 이으면 지구 두 바퀴 반을 돌 수 있는 거리다. 신장이 겨우 2미터도 되지 않는 사람의 몸속에 서울-부산 간 고속도로의 250배에 달하는 10만 킬로미터의 길이 빼곡히 자리하고 있다는 것을 우리는 상상조차 하기 어렵다. 심장이 1분에 5리터 정도의 혈액을 내보내므로 혈액이 심장에서 나와 다시 심장으로 돌아오는 데 채 1분이 걸리지 않는다.

    혈액의 이 기나긴 여행은 어느 누구를 위한 것이 아니라 오직 ‘나’만을 위한 여행이다. 특히 뇌의 경우는 다량의 산소와 포도당이 필요하지만 저장기능이 없으므로 혈액을 통한 물질공급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15초만 혈액순환이 멈춰도 의식을 잃고, 4분이 지나면 뇌세포가 복원이 불가능할 정도로 크게 손상된다. 몇 초만 혈액순환이 멈춰도 우리는 보지도, 듣지도 못하고, 아무것도 할 수 없게 된다. 혈액의 머나먼 여정은 그만큼 인체에 매우 중요하다.

    우리는 삶 속에서 아주 특별한 기적을 원한다. 그러나 일상이 없이는 특별함도 전혀 의미가 없다. 우리가 아무런 문제 없이 1분을 보내고 있다는 것이 진정한 기적이 아닐까. 지금도 일어나고 있는 일상의 기적, 혈액의 지구 두 바퀴 반 여행.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에 관한 성경구절 21가지

    1. 잠언 3:5~6

    “너는 마음을 다하여 여호와를 신뢰하고 네 명철을 의지하지 말라 너는 범사에 그를 인정하라 그리하면 네 길을 지도하시리라”

    2. 히브리서 13:8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니라”

    3. 시편 112:7

    “그는 흉한 소문을 두려워하지 아니함이여 여호와를 의뢰하고 그의 마음을 굳게 정하였도다”

    4. 여호수아 1:9

    “내가 네게 명령한 것이 아니냐 강하고 담대하라 두려워하지 말며 놀라지 말라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너와 함께 하느니라 하시니라”

    5. 시편 37:5

    “네 길을 여호와께 맡기라 그를 의지하면 그가 이루시고”

    6. 이사야 41:10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라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참으로 너를 도와 주리라 참으로 나의 의로운 오른손으로 너를 붙들리라”

    7. 시편 33:4

    “여호와의 말씀은 정직하며 그가 행하시는 일은 다 진실하시도다”

    8. 요한복음 10:14

    “나는 선한 목자라 나는 내 양을 알고 양도 나를 아는 것이”

    9. 로마서 8:28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10. 마태복음 6:26

    “공중의 새를 보라 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창고에 모아들이지도 아니하되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기르시나니 너희는 이것들보다 귀하지 아니하냐”

    11. 시편 62:8

    “백성들아 시시로 그를 의지하고 그의 앞에 마음을 토하라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시로다”

    12. 요한복음 14:1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13. 요한복음 5:14

    “그 후에 예수께서 성전에서 그 사람을 만나 이르시되 보라 네가 나았으니 더 심한 것이 생기지 않게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 하시니”

    14. 시편 20:7

    “어떤 사람은 병거, 어떤 사람은 말을 의지하나 우리는 여호와 우리 하나님의 이름을 자랑하리로다”

    15. 이사야 26:3~4

    “주께서 심지가 견고한 자를 평강하고 평강하도록 지키시리니 이는 그가 주를 신뢰함이니이다 너희는 여호와를 영원히 신뢰하라 주 여호와는 영원한 반석이심이로다”

    16. 시편 56:3

    “내가 두려워하는 날에는 내가 주를 의지하리이다”

    17. 시편 32:10

    “악인에게는 많은 슬픔이 있으나 여호와를 신뢰하는 자에게는 인자하심이 두르리로다”

    18. 시편 118:8

    “여호와께 피하는 것이 사람을 신뢰하는 것보다 나으며”

    19. 요한일서 5:11

    “또 증거는 이것이니 하나님이 우리에게 영생을 주신 것과 이 생명이 그의 아들 안에 있는 그것이니라”

    20. 예레미야 17:7

    “그러나 무릇 여호와를 의지하며 여호와를 의뢰하는 그 사람은 복을 받을 것이라”

    21. 디모데후서 4:18

    “주께서 나를 모든 악한 일에서 건져내시고 또 그의 천국에 들어가도록 구원하시리니 그에게 영광이 세세무궁토록 있을지어다 아멘”





    하나님을 믿으라(11:22)

    예수는 그의 제자들에게 하나님을 믿으라고 가르치셨다. 하나님을 신뢰하는 믿음은 그의 전능하신 능력과 무한히 선하심을 의심 없이 신뢰하는 것이다. 엄숙한 선언에 뒤이어 예수님은 “누구든지 이 산더러 들리어 바다 속으로 던지우라고 하면 그렇게 될 것이라”고 과장법을 사용하여 말씀하셨다. 한 가지 조건은 부정적으로는 의심없이 그리고 긍정적으로는 믿음으로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인데 그러한 기도는 이루어지게 될 것이다. 이와 같은 신앙은 이스라엘의 부족한 신앙과 대조되었다. 그러므로 기도는 사람으로는 할 수 없는 것을 하나님의 능력으로 하게 하는 두드림이 되기 때문에 예수는 그의 제자들에게 무엇이든지 기도로 구한 것은 이미 받은 줄로 믿으라고 훈계하셨다.

      요한복음 14:1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번역비교] [유사말씀]
     

      마가복음 11:22
    예수께서 대답하여 저희에게 이르시되 하나님을 믿으라 [번역비교] [유사말씀]
     

      마가복음 1:15
    가라사대 때가 찼고 하나님 나라가 가까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하시더라 [번역비교] [유사말씀]
     

      갈라디아서 3:6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이것을 그에게 의로 정하셨다 함과 같으니라 [번역비교] [유사말씀]
     

      로마서 4:3
    성경이 무엇을 말하느뇨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이것이 저에게 의로 여기신바 되었느니라 [번역비교] [유사말씀]
     

      야고보서 2:23
    이에 경에 이른바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니 이것을 의로 여기셨다는 말씀이 응하였고 그는 하나님의 벗이라 칭함을 받았나니 [번역비교] [유사말씀]
     

      사도행전 24:14

    하나님을 믿으라(마가복음 11:11-25)

    한 드라마에서 주인공이 이렇게 말합니다. 
    “이 녀석은 어릴 적부터 단 한 번도 나를 배신한 적이 없었어!” 
    여기서 주인공이 말한 “이 녀석”은 바로 돈입니다. 
    그는 돈을 믿었으며, 돈은 늘 그의 믿음을 실망시키지 않았습니다. 
    그는 사람을 믿지 않고, 대신 돈을 믿었습니다. 
    그래서 돈 때문에 원수를 만들기도 하고, 때로는 돈 때문에 원수와 손을 잡기도 했습니다. 
    돈이 그의 믿음이었습니다.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돈에 대한 믿음”이야말로 이 세상을 사는 사람들이 모두 암묵적으로 공유하고 있는 가장 보편적인 가치관일 것입니다. 
    돈이 아주 많다면 여러 “불가능한 일들”이 가능하게 됩니다. 
    또 돈이 아주 많다면 “원하는 것들”을 쉽게 손에 넣을 수 있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보자면, 돈이 갖고 있는 권세는 거의 “신적인 권세 (divine power)”라고 할 수 있습니다. 
    왜 사람들이 돈을 하나님처럼 숭배하는지를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오늘 말씀에서 예수님은 우리 믿음의 대상이 돈이 아니라 바로 하나님이심을 가르치십니다. 

    22-24절에 쓰인 예수님의 말씀을 읽어보겠습니다. 
    “하나님을 믿으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이 산더러 들리어 바다에 던지우라 하며 그 말하는 것이 이룰 줄 믿고 마음에 의심치 아니하면 그대로 되리라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그대로 되리라.” 

    이 말씀에서 예수님은 “그대로 되리라”를 반복하십니다. 
    하나는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리고 또 하나는 “원하는 것”입니다. 
    어떻게 불가능한 일이 말한 그대로 이루어지며, 어떻게 원하는 것을 구하고 기도한 그대로 받게 됩니까? 
    이는 하나님을 믿을 때 그렇게 됩니다. 
    이 점에서 우리의 하나님께 대한 신앙은 세상 사람들의 돈에 대한 신앙과 비슷합니다. 
    물론 하나님의 전능하심과 신실하심은 돈의 그것과 비교할 수 없이 크고 높은 것입니다. 
    마태복음 13장에 기록된 천국 비유들에서 예수님은 천국을 가리켜 “밭에 감추인 보화”와 같고, “극히 값진 진주”와 같다고 하십니다. 
    그래서 그것을 발견한 사람은 자기의 모든 소유를 다 팔아서 그 밭을, 그리고 그 진주를 삽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께 대한 믿음”입니다. 
    이 보배는 감추인 보배이며, 극히 값진 보배이며, 영원히 변치 않는 보배이며, 우리를 절대로 실망시키지 않는 보배입니다. 
    이 진리를 아시는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간절히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을 믿으라!”
     
    오늘 본문 말씀에는 여러 내용들이 함께 얽혀져 있습니다.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예수님께서는 성전에 가셔서 이곳을 깨끗케 하셨습니다. 
    또 예루살렘을 오가는 길에 서 있는 무화과 나무를 저주하시자 이 나무가 뿌리 채 말라버렸습니다. 
    그리고 이를 보고 놀란 베드로와 다른 제자들에게 하나님께 대한 믿음을 가르치셨습니다. 
    마지막으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용서하라”고 가르치십니다. 
    이 사건들과 가르침들은 서로 관련이 없어 보이지만 깊이 생각해 보면 “큰 그림”을 구성하는 부분들임을 알 수 있습니다. 

    예루살렘에는 성전(Temple)이 있었습니다. 
    성전(Temple)은 기본적으로 하나님과 사람이 만나는 장소입니다. 
    오늘 말씀에서 예수님은 이사야서 말씀을 인용하여 “성전의 의미”를 이렇게 정의하십니다. 
    “내 집은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라 칭함을 받으리라!” 
    성전은 하나님께서 거하시는 집이며, 동시에 세상 만민이 이 하나님께 나아와 기도하는 곳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통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여러 가지 “제사에 관한 규례들”을 주셨습니다. 
    이 제사는 죄인 된 사람들이 거룩하신 하나님을 만나고 교제하기 위해서 필요한 절차들이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성전을 가리켜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는 곳”이라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라고 하십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성전에 가셨을 때 그곳에는 “매매하는 자들과 돈 바꾸는 자들”로 가득했습니다. 
    이들은 희생 제물로 사용할 동물들을 팔거나 성전세로 낼 돈을 환전해 주는 거짓 성직자들 곧 장사꾼들이었습니다. 
    아마도 사람들은 이렇게 희생 제물을 드리거나 성전세를 냄으로써 자신들의 죄가 속해졌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이 점에서 “성전”은 매우 훌륭한 비즈니스였습니다. 사람들에게 성전은 “하나님을 만나는 곳”이 아니라, 돈을 내고 죄를 세탁하는 곳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은 자신들이 세상에서 가장 “거룩한 성전”을 갖고 있다고 믿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성전은 죄를 속하는데 있어서 특별한 효능을 갖고 있다고 믿었습니다. 그래서 유대인의 최대 명절인 유월절이 되면 세계 각지에서 사람들이 예루살렘에 있는 성전을 방문하고 이곳에서 희생 제물을 바쳤습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때가 유월절을 며칠 앞둔 때라서 아마도 성전은 제사를 드리려는 수많은 방문객들을 맞아 “대목”을 누리고 있었을 것입니다.

    당시 예루살렘에 있던 성전을 “헤롯 성전”이라고 합니다. 
    이는 헤롯 대왕이 이전에 있던 옛 성전을 헐고 그 자리에 새로 지은 건물이기 때문입니다. 
    그 이전에 예루살렘에는 솔로몬 왕이 기원전 957년에 세운 최초의 성전인 솔로몬 성전이 있었습니다. 
    솔로몬 성전은 기원전 586년에 바벨론 제국의 침략으로 인해 완전히 파괴되었습니다. 
    그리고 후에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 갔다가 돌아와 유다 총독이 된 스룹바벨의 지도 하에 성전이 재건축되었습니다. 
    기원전 516년에 완공된 이 2차 성전스룹바벨 성전이라고 하는데, 이 성전은 솔로몬 성전에 비해 작고 초라했다고 합니다. 
    학개 2:3절에 따르면, 이 성전이 완성되었을 때 여호와 하나님께서 스룹바벨과 대제사장 여호수아 그리고 유다 백성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 중에 남아 있는 자 곧 이 전(Temple)의 이전 영광 (솔로몬 성전)을 본 자가 누구냐 이제 이것이 너희에게 어떻게 보이느냐 이것이 너희 눈에 보잘것 없지 아니하냐?” 하나님께서 이 새 성전을 가리켜 “너희 눈에 보잘 것 없지 아니하냐?”고 하십니다. 아마도 스룹바벨이 재건한 성전은 솔로몬 성전에 비해 작고 초라하고 볼품이 없었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다음과 같이 위로하시고, 격려하시고, 약속하십니다. 학개 2:4-9절 말씀입니다. 조금 길지만 제가 천천히 읽어보겠습니다. “그러나 나 여호와가 이르노라 스룹바벨아 스스로 굳세게 할지어다 여호사닥의 아들 대제사장 여호수아야 스스로 굳세게 할지어다 나 여호와의 말이니라 이 땅 모든 백성아 스스로 굳세게 하여 일할지어다 내가 너희와 함께 하노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너희가 애굽에서 나올 때에 내가 너희와 언약한 말과 나의 신이 오히려 너희 중에 머물러 있나니 너희는 두려워하지 말지어다 나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노라 조금 있으면 내가 하늘과 땅과 바다와 육지를 진동시킬 것이요 또한 만국을 진동시킬 것이며 만국의 보배가 이르리니 내가 영광으로 이 전에 충만케 하리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은도 내 것이요 금도 내 것이니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이 전의 나중 영광이 이전 영광보다 크리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내가 이곳에 평강을 주리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약속하신 것은 “더 크고 화려한 성전”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약속하신 것은 하나님께서 함께 하실 것, 하나님의 말씀과 신(Spirit)이 그들 중에 머무실 것, 하나님의 영광으로 이 성전을 채우실 것, 그리고 이 성전에 평강을 주실 것 등입니다. 하나님께서 이 일을 이루시는 것은 “만국의 보배 (The Desire of All Nations)”를 이 땅에 보내시고 또 그를 통해 온 세상을 진동시킴으로써입니다. 그리고 이 “만국의 보배”가 바로 예수님입니다. 이 하나님의 약속은 성전의 의미를 다시금 기억하게 합니다. 성전은 하나님께서 거하시는 곳입니다. 그리고 만국 백성이 그 앞에 나아와 하나님께 기도하고, 그 영광을 찬양하고 누리는 곳입니다. 하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은 “또 다시” 하나님을 외면했습니다. 헤롯은 이 “보잘것 없는 스룹바벨 성전”을 헐고 그 자리에 대리석과 금으로 치장한 크고 화려한 새 건물을 지었습니다. 요한복음 2:19-20절에 보면 예수님께서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 하시자, 유대인들이 반문하기를 “이 성전은 46년 동안에 지었거늘 네가 삼 일 동안에 일으키겠느뇨?” 합니다. 이 말에 따르면, 헤롯 대왕이 시작한 성전 건축은46년 동안이나 계속되고 있었으며, 예수님께서 활동하실 당시에도 여전히 “공사 중”이었습니다. 얼마나 대규모 프로젝트인지를 짐작할 수 있습니다. 마가복음 13:1절에서, 예수님의 제자들은 성전을 바라보며 놀라움을 금치 못합니다. “선생님 보소서 이 돌들이 어떠하며 이 건물들이 어떠하니이까?”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네가 이 큰 건물들을 보느냐?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고 다 무너뜨려지리라!”  

    헤롯 대왕은 대리석과 황금으로 장식한 크고 화려한 성전을 지었습니다. 그리고 수많은 사람들이 몰려와 희생 제물을 드리고 헌금을 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이 성전과 그 안에서 이루어지는 많은 “상거래들”을 보시면서 탄식하셨습니다. “내 집은 만민의 기도하는 집이라 칭함을 받으리라고 하지 아니하였느냐? 너희는 강도의 굴혈을 만들었도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을 오가시는 길에 만난 무화과 나무를 저주하신 것은 이 성전에 대한 예수님의 분노를 비유로 표현하신 것입니다. 13절에 보면 예수님께서 멀리서 이 무화과 나무를 보셨을 때 그것은  “잎사귀 있는 무화과 나무”였습니다. 아마도 푸른 잎사귀가 무성했던 것 같습니다. 시장하셨던 예수님께서는 혹시 나무에 무엇인가 먹을 수 있는 것이 있을까 해서 가까이 가셨습니다. 그런데 나무에는 잎사귀 외에는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성경 저자는 이에 대해 “이는 무화과의 때가 아님이라”고 설명합니다. 곧 아직 먹을만한 열매가 열릴 철이 아니기 때문에 아무것도 없었다고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께서는 이 나무의 “열매 없음”을 인하여 그것을 저주하셨습니다. “이제부터 영원토록 사람이 네게서 열매를 따먹지 못하리라.” 그리고 과연 예수님의 말씀대로 이 무화과 나무는 이튿날 아침에 뿌리까지 마른 채로 발견되었습니다. 왜 예수님께서는 아직 철이 아닌 때에 무화과 나무의 열매 없음을 인해서 이 나무를 저주했을까요? 이는 그것의 “무성한 잎사귀”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것으로 사람들의 눈을 속였기 때문입니다. 예루살렘의 성전이 바로 그랬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바벨론의 이방 땅에서 포로 생활을 하다가 돌아와 가장 먼저 성전을 재건한 이스라엘 백성들의 “보잘것 없는 성전”을 축복하셨습니다. 그리고 이 전을 하나님의 영광으로 가득 채우실 것을 약속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들과 함께 하시며,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께서 그들 가운데 머무실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이 하나님의 약속이 이루어지는 것이 바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 “성전”을 통해 거둘 열매였습니다. 하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은 “열매” 대신 “잎사귀”를 택했습니다. 그들은 “보잘것 없는 성전”에서 가난한 마음으로 하나님의 때를 기다려야 했습니다. 하나님을 그리워하고 그 영광을 사모하며, 그 하신 약속을 믿고 기다려야 했습니다. 하지만 이들은 이렇게 하는 대신, 그 보잘것 없는 성전을 허물고 그 자리에 대리석과 황금으로 치장한 크고 화려한 성전을 세웠습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사람들의 죄”를 이용하여 제사용 동물들을 팔고 “금과 은”을 모으는 장사를 했습니다. 이 성전은 모든 것들을 다 갖추고 있었습니다. 오직 “하나님”이 없었습니다. 하나님께 기도하기 위해 먼 나라에서 예루살렘을 찾아온 사람들도 “첫 눈”에는 이 화려한 성전에 마음을 빼앗기고 감탄을 하지만, 결코 이곳 성전에서 하나님을 만날 수는 없었습니다. 다만 제사장들의 안내에 따라 비싼 값을 치르고 희생 제물을 드린 후 거짓 제사장들이 주는 “가짜 면죄부”를 받고 헛헛한 심정으로 돌아갈 뿐이었습니다. 예루살렘의 성전과 이스라엘 사람들의 신앙은 참으로 예수님께서 저주하신 “잎사귀만 무성한 무화과 나무”와 같았습니다. 그곳에는 “하나님”께서 계시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그곳에는 사람이 먹을만한 열매가 하나도 열리지 않았으며, 또 열릴 수도 없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하나님을 믿으라”고 하십니다. 위에 인용한 바 여호와 하나님께서 학개 선지자를 통해서 하신 말씀들 중에는 이런 말씀도 있습니다. “은도 내 것이요 금도 내 것이니라!” 그렇습니다. 세상이 자랑하는 가장 귀한 보배라도 다 하나님께 속한 것이며, 하나님의 소유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가진 자는 “모든 것을 가진 자”입니다. 우리 믿는 자들이 처음부터 끝까지 지켜야 할 것은 단 한 가지입니다. 그것은 “하나님께 대한 믿음”입니다. 모든 좋은 것이 다 하나님 안에 있으며, 모든 좋은 것이 다 하나님께로부터 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제사”에 대해서 가르치신 적이 한 번도 없습니다. 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돈”에 대해서 가르치신 적이 한 번도 없습니다. 이는 예수님께서 자신의 몸을 “값 없이 은혜로” 우리 죄인들을 위한 대속의 제물로 드리셨으며, 친히 그 몸으로 “모든 사람들을 위한 완전하고 영원한 제사”를 드리셨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오직 이 제사를 통해 하나님은 우리의 영원한 아버지가 되셨으며, 우리는 하나님의 영원한 자녀가 되었습니다. 이 새로운 성전의 “터(Foundation)”는 그리스도 예수님이십니다. 그리고 이 성전에 항상 성령님께서 거하시며, 이 성령께서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로 영접해 주시고,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임을 증거하시며 (로마서 8:16), 또 우리를 위해 친히 기도해 주십니다 (로마서 8:26-27). 우리는 예수님께서 지으신 이 새로운 “아버지의 집”에서 아무런 제약이나 장애물이 없이 자유롭고 담대하게 하나님을 만나고, 교제하며, 기도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기업을 이을 “상속자”가 된 것입니다. 이것을 누리기 위해서 우리가 해결해야 할 “죄”나 혹은 우리가 지불해야 할 “값”이 없습니다. 전혀 없습니다. 오직 한 가지가 필요합니다. 그것은 “하나님께 대한 믿음”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 어떤 믿음인지를 구체적으로 말씀하십니다. 23-24절을 다시 한번 읽겠습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이 산더러 들리어 바다에 던지우라 하며 그 말하는 것이 이룰 줄 믿고 마음에 의심치 아니하면 그대로 되리라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그대로 되리라.”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이 “믿음의 능력”은 참으로 놀랍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심지어 우리 눈으로 보기에 전혀 불가능한 일이라도 그것을 입으로 말하고 말하는 것이 이룰 줄 믿고 마음에 의심치 아니하면 그대로 되리라고 하십니다. 또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 그리하면 그대로 되리라고 하십니다. 이 말씀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우선 우리가 믿어야 하는 것은 “하나님의 능력과 사랑”에는 끝이 없다는 사실입니다. 우리의 믿음은 무엇보다도 이 하나님의 한 없는 능력과 사랑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는 것입니다. 둘째로, 우리의 믿음은 살아계신 하나님께 마음의 소원으로, 말로, 그리고 기도로 표현되어야 합니다. 믿음이 “돈”이라면, 기도는 그 “돈을 꺼내어 사용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는 이 믿음의 거래가 매일 매우 활발하게 일어나야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한 가지 조건을 덧붙이십니다. 
    25절 말씀입니다. 
    “서서 기도할 때에 아무에게나 혐의가 있거든 용서하라 그리하여야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도 너희 허물을 사하여 주리리라.”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을 믿고 기도할 때 먼저 형제의 죄를 용서하라고 하십니다. 
    누가복음 15장에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바 유명한 “돌아온 탕자의 비유”가 있습니다. 
    이 비유에 나오는 큰 아들은 아버지의 돈을 창기와 함께 허비하고 거지가 되어 돌아온 동생을 용서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는 “돈”을 사랑했으며, 그 귀한 돈을 허비한 동생의 “죄”를 용서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이런 큰 아들의 가치관은 그와 아버지와의 관계에서도 그대로 나타납니다. 
    그는 아버지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가 여러 해 아버지를 섬겨 명을 어김이 없거늘 내게는 염소 새끼라도 주어 나와 내 벗으로 즐기게 하신 일이 없었습니다. 
    정말 서운합니다. 
    (누가복음 15:29). 큰 아들이 아버지 앞에서 자신을 바라보는 눈은, 그가 동생을 바라보는 눈과 똑 같습니다. 
    그에게 아버지는 작은 실수도 용납하지 않는 엄격한 사람이며, 염소 새끼도 주지 않는 구두쇠 영감이었습니다. 
    여전히 그는 “죄”와 “돈”에 매여 있었습니다. 
    그래서 아버지의 큰 아들이지만 노예처럼 비참하고 가난하게 살았습니다. 
    이런 큰 아들에게 아버지는 놀라운 말씀을 하십니다. 
    “얘 너는 항상 나와 함께 있으니 내 것이 다 네 것이니라!” 
    아버지의 눈으로 보기에는 큰 아들과 자신 사이에 아무런 “벽”이 없었습니다. 
    둘은 항상 함께 있었으며 모든 좋은 것을 함께 나누었습니다. 
    그런데 큰 아들의 눈으로 보기에는 자신과 아버지 사이에 “넘을 수 없는 높은 벽”이 가로막고 있었습니다. 
    왜 이런 벽이 생긴 것일까요? 
    이는 그에게 “아버지께 대한 믿음”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대신 돈을 사랑하고, 죄를 용서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성전의 제사장들은 성전 장사를 통해 스스로 부자가 되었으며, 또 소소한 규례들을 지킴으로 스스로 의인이 되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 없이” 부를 쌓고 의를 세웠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이들을 부러운 눈으로 바라보았습니다. 
    하지만 이들의 부와 의는 “무성한 잎사귀”에 불과합니다. 
    주님께서는 제자들에게 “하나님을 믿으라”고 하십니다. 
    제자들은 “가난한 죄인”입니다. 
    하지만 그들에게는 예수님께서 그 몸으로 세우시고 성령께서 항상 거하시는 성전이 있습니다. 
    이 성전 안에서 하나님께서 그들의 아버지가 되십니다. 
    이 하나님께서 그들의 모든 소원을 들으시고 항상 가장 좋은 것으로 이들의 기도에 응답하십니다. 
    이 하나님을 믿음으로 사실 그들은 “부족함이 전혀 없는 거룩한 하나님의 자녀들”인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으라!” 
    이 말씀의 영광스러움을 짧은 설교에 담기가 참으로 어렵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각자의 마음 속에 성령으로 놀라운 환상을 보여주시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11월 3일(월) 마가복음 7-9장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화목의 원리(9:50)

    소금은 좋은 것이로되 만일 소금이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이를 짜게 하리요 너희 속에 소금을 두고 서로 화목하라 하시니라.
    Salt is good, but if it loses its saltiness, how can you make it salty again? Have salt in yourselves, and be at peace with each other.

    화목(和睦) : 화할 화, 화목할 목
    서로 뜻이 맞고 정다움.

    화목이란 단어가 사용된 한글개역성경의 구절 수는 : 104개 구절 

    화목(1514) 에이레뉴오(
    ĕirēnĕuōεἰρηνεύω

    1.  ~와 평화롭게 살다.  2. 평화를 유지하다.  3. 막 9:50  
    Pronunciation [ ĕirēnĕuō ]  
    Etymology  /  1515에서 유래, 미래 εἰρηνεύσω, 제1부정과거부정사 εἰρηνεῦσαι
    • 1.  ~와 평화롭게 살다, 평화를 유지하다, 막 9:50, 롬 12:18, 고후 13:11, 살전 5:13.
    • 관련 성경  /  화목하다(막 9:50, 롬 12:18, 살전 5:13), 평안하다(고후 13:11).

    마가복음 9:50 
    소금은 좋은 것이로되 만일 소금이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이를 짜게 하리요 너희 속에 소금을 두고 서로 화목하라 하시니라.

    고린도후서 5:20 
    이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사신이 되어 하나님이 우리로 너희를 권면하시는 것 같이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간구하노니 너희는 하나님과 화목하라.

    데살로니가전서 5:13 
    저의 역사로 말미암아 사랑 안에서 가장 귀히 여기며 너희끼리 화목하라.

     

                                                          

    99. [에베소서 2:16]
    또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 원수 된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

    100. [골로새서 1:20]
    그의 십자가의 피로 화평을 이루사 만물 곧 땅에 있는 것들이나 하늘에 있는 것들을 그로 말미암아 자기와 화목케 되기를 기뻐하심이라


    101. [골로새서 1:22]
    이제는 그의 육체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화목케 하사 너희를 거룩하고 흠 없고 책망할 것이 없는 자로 그 앞에 세우고자 하셨으니. 


    103. [요한1서 2:2]
    저는 우리 죄를 위한 화목 제물이니 우리만 위할뿐 아니요 온 세상의 죄를 위하심이라. 


    104. [요한1서 4:10]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니라.






    소금은 좋은 것이로되
    - 이 마지막 절은 39-49절까지의 내용을 함축시켜, 격언구 형식으로 마무리 짓고 있다. 
    즉 이제까지의 가르침에 대한 의도와 내용을 한 마디로 요약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소금은 사람에게 참 좋은 것이고 사람의 삶에 있어서 참맛을 내기 위해 반드시 소금을 쳐야 한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소금이 의미하는 바는 무엇일까 하는 문제가 남는다. 
    소금은33-42절까지의 내용을 생각해 볼때 어린아이와 같은 작고 미미한 사람을 섬기는 일이라고 볼 수 있다. 
    그리고 이와 같은 섬김을 위한 자기 회생,겸손, 사랑, 남을 자신보다 낫게 여김, 절제와 경건등으로 나타나는 삶의 행위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50절이 갖는 전체적 의미는 49절에서처럼 심판의 때에 불로 소금 치듯 당하지 않으려면 평소의 삶속에서 희생과 겸손 사랑의 소금을 치라는 것이다.

    ​소금은 좋은 것이로되 만일 소금이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이를 짜게 하리요 너희 속에 소금을 두고 서로 화목하라 하시니라.

    ​소금을 두고 화목하라고 합니다. 
    이것이 도대체 어떤 뜻일까요?
    먼저 화목이 뭔지에 대해서 알아보겠습니다.

    ​에베소서 2:16 
    또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 원수 된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 하나님과 우리를 화목하게 만들고,유대인과 이방인인 우리를 화목하게 만들고 북이스라엘과 남유다를 화목하게 만드는것, 십자가이신 예수님을 뜻합니다.

    ​화목하게 하신 분은 바로 예수님 입니다.

    ​요한일서 4:10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니라.

    예수님이 화목제물이 되는 것입니다.
    5대 제사법이 있는데 그 중에서 가장 큰 제사가 화목제입니다.

    ​이제 소금이 무엇인지 찾아보겠습니다.

    ​민수기 18:19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께 거제로 드리는 모든 성물은 내가 영영한 응식으로 너와 네 자손에게 주노니 이는 여호와 앞에 너와 네 후손에게 변하지 않는 소금 언약이니라.

    ​모든 제물에 항상 소금을 치라고 말씀을 하시는데 소금이 바로 변하지 않는 소금 언약을 가르키기 때문입니다.
    소금을 놔둔다고 하는 것은 소금이 맛을 잃지 않듯이 영원히 변하지 않는 소금 언약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언약 = 예수님 

    영원히 변하지 않는 소금 언약은 바로 구약과 신약을 의미합니다.
    이것을 두고 화목제물로 예수님께서 돌아가셨기 때문에 소금을 두고 화목하라고 말씀을 하시는 것입니다.
    언약을 깨트린 우리가 지옥을 가야하는데 예수님께서 대신해서 몸이 갈라지십니다. 
    소금을 두고 화목하라는 것은 바로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잠언 17:1 
    마른 떡 한 조각만 있고도 화목하는 것이 육선이 집에 가득하고 다투는 것보다 나으니라. 

    요즘에 돈 때문에 이혼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 구절 그대로 마른 떡 한 조각만 있는데도 화목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물론 사랑이 있으면 가능하지만 쉽지 않은 일입니다. 
    잠언서의 이 내용은 문자 그대로를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요한복음 6:35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

    바로 예수님께서 생명의 떡이라고 하셨습니다.  
    마른 떡 한조각만 있고도 화목하다는 것은 예수님을 두고 이야기를 하는 것입니다.
    떡은 떡인데 그렇다면 마른 떡이 무엇인지 알아야 합니다.

    ​사무엘상 21:6
    제사장이 그 거룩한 떡을 주었으니 거기는 진설병 곧 여호와 앞에서 물려 낸 떡밖에 없음이라 이 떡은 더운 떡을 드리는 날에 물려낸 것이더라. 

    뜨거운 떡이 왔을때에 마른 떡은 옮겨지는 것, 

    레위기 24:5-8
    너는 고운 가루를 취하여 떡 열 둘을 굽되 매 덩이를 에바 십분 이로 하여 여호와 앞 순결한 상 위에 두 줄로 한 줄에 여섯씩 진설하고 너는 또 정결한 유향을 그 매 줄 위에 두어 기념물로 여호와께 화제를 삼을 것이며. 항상 매 안식일에 이 떡을 여호와 앞에 진설할지니 이는 이스라엘 자손을 위한 것이요 영원한 언약이니라.

    ​이 떡은 7일마다 진열을 합니다. 
    금방한 떡을 두면 7일 동안 떡이 말라 비틀어지고 다시 새로운 떡을 거기다가 올리는 것입니다. 
    마른 떡을 두고도 화목하다는 구절은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님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마가복음 9:50 
    소금은 좋은 것이로되 만일 소금이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이를 짜게 하리요 너희 속에 소금을 두고 서로 화목하라 하시니라

    ​이 구절은 소금을 두고 화목하라는 것과 마른 떡을 두고 화목하다는 구절과 같은 개념입니다.



    11월 1일(토) 마가복음 4-6장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예수를 배척한지라(6:3)

    이 사람이 마리아의 아들 목수가 아니냐 야고보요셉유다시몬형제가 아니냐 그 누이들이 우리와 함께 여기 있지 아니하냐 하고 예수를 배척한지라.
    Isn't this the carpenter? Isn't this Mary's son and the brother of James, Joseph, Judas and Simon? Aren't his sisters here with us?" And they took offense at him.

    배척(排斥) : 밀칠 배, 물리칠 척 / took offense, reject

    따돌리거나 거부(拒否)하여 밀어 내침.

    유의어 / 排擯(배빈) 斥擯(척빈) 擯斥(빈척)


  • 천국 가족

    천국 가족(하늘 가족, Heavenly Family)은 아버지 하나님(God the Father, Heavenly Father), 어머니 하나님(God the Mother, Heavenly Mother), 그리고 하나님의 자녀들로 이루어지는 영원한 가족이다. 
    전능하신 창조주 하나님은 피조물인 인간에게 믿음의 대상이자 구원받을 성도들의 아버지, 어머니시다. 그림자인 지상 가족으로 천국 가족을 이해할 수 있다. 천국 가족은 유월절로 혈연관계를 맺는다. 유월절로 하나님의 혈통을 이어받은 자들은 하나님의 자녀요, 천국의 후사로서 영생하는 축복을 누린다.

    사랑의 결정체, 가족

    가족은 사랑의 결정체다. 사랑으로 백년가약을 맺은 부부가 자녀를 낳아 사랑으로 기르는 곳이 가정이다. 부부애(夫婦愛), 부성애(父性愛), 모성애(母性愛), 형제애(兄弟愛), 효성(孝誠) 등 가족 간의 사랑은 행복한 삶의 주요 덕목이다.[1] 특히 자녀를 향한 부모의 사랑은 무조건적으로서, 동물들에게도 흔히 나타난다. 가시고기황제펭귄은 부성애가 강하다. 보름 동안 아무것도 먹지 않고 알들에 신선한 산소를 공급하며 침입자들과 사투를 벌이는 가시고기는, 알들이 부화하면 기력이 소진해 죽는다. 죽은 아비는 부화한 새끼들의 먹이가 된다. 황제펭귄은 약 두 달간 꼼짝없이 알을 품는다. 먹이활동을 중단하고 영하 60도에 이르는 혹독한 추위와 포식자들로부터 알을 지켜낸다. 모성애는 조류와 포유류에서 보편적으로 관찰되는 현상이다.
    미물은 물론 이성을 가진 사람도 자녀의 위험 앞에서는 본능이 앞선다. 태아를 위해 항암 치료를 거부하고 세상을 떠난 어머니,[2] 추락하는 케이블카에서 아들을 품에 안아 살린 아버지,[3] 달려오는 트럭 앞에서 자녀를 밀어내고 희생된 어머니[4] 등 자녀를 위해 헌신하고 자신의 생명까지 포기하는 아버지 혹은 어머니 이야기는 언론을 통해 종종 보도된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가정은 생명의 보금자리이자, 사랑이 근간인 조직이다.

    인간의 가장 위대한 미덕, 가장 뛰어난 미덕이 만들어지고 발전하고 유지되는 곳이 가족과 가정이라는 데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 윈스턴 처칠(Winston S. Churchill)

    천국 가족과 지상 가족의 관계

    가족은 하나님이 만드신 사랑의 제도로서, 하나님은 가족이 서로 사랑하고 화목하기를 바라신다.[5][6] 이처럼 사랑으로 맺어지는 지상 가족은, 천국 가족과 함께 그림자와 실물의 관계다. 하나님이 시내산에서 모세에게 성소를 건설하라 명하실 때, 하늘 성소를 보이며 그것을 본떠서 만들라고 하셨다.[7] 사도 바울은 그 일을 언급하며 이 땅의 것은 하늘에 있는 것의 모형과 그림자라고 말했다.

    저희가 섬기는 것은 하늘에 있는 것의 모형그림자라 모세가 장막을 지으려 할 때에 지시하심을 얻음과 같으니 가라사대 삼가 모든 것을 산에서 네게 보이던 본을 좇아 지으라 하셨느니라

    - 히브리서 8:5

    모형과 그림자는 실체(實體)를 이해하도록 돕는 역할을 한다. 지구본 모형으로 지구를 한눈에 보듯 이해할 수 있고, 손그림자로 손 모양을 짐작할 수 있다. 하나님이 하늘의 것과 같은 모형을 땅에 짓게 하신 데에는 모형을 통해 하늘의 이치를 알게 하시려는 뜻이 내포되어 있다. 하나님은 모세에게 짓게 하신 성소만 아니라, 천국을 알 만한 창조물을 이 땅에 많이 두셨다.[8][9] 그중 하나가 가족 제도다. 사회를 이루는 최소 단위인 가족은 하나님이 최초의 사람인 아담하와를 창조해 부부로 맺어주시면서 시작되었다.[10][11] 아담과 하와는 "생육하고 번성하라" 하신 하나님 말씀대로 자녀들을 낳아 전형적인 가족의 형태를 이루었다. 하나님이 사람으로 이루게 하신 지상 가족을 통해 실체인 천국 가족을 이해할 수 있다.

    천국 가족의 구성원

    천국 가족의 구성원은 그림자인 지상 가족에 그대로 나타난다. 가족은 일반적으로 아버지, 어머니, 자녀로 이루어진다.[12] 지상 가족의 실체인 천국 가족도 마찬가지다.

    아버지

    아버지는 사전적 의미로 '자기를 낳아 준 남자를 이르거나 부르는 말, 자녀를 둔 남자를 자식에 대한 관계로 이르거나 부르는 말'[13]이다. 신약성경은 하나님을 부르는 호칭으로 알려준다.

    우리 육체의 아버지가 우리를 징계하여도 공경하였거든 하물며 모든 영의 아버지께 더욱 복종하여 살려 하지 않겠느냐

    - 히브리서 12:9

    이 땅에 태어난 사람은 누구에게나 아버지가 있다. 성경은 육체의 아버지에 대한 공경심을 말하면서 영의 아버지도 공경해야 한다고 교훈한다. 이는 육체의 아버지만 아니라 영의 아버지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아우른다. 영의 아버지는 사람에게 생기(영혼)를 불어넣으신 하나님이다.[14] 자신의 육체를 낳아 준 남자를 아버지라 부르는 것처럼, 영혼을 존재케 하신 하나님을 '아버지'라 불러 마땅하다. 예수님도 제자들에게 하나님이 아버지라는 사실을 깨우치셨다.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 마태복음 6:9

    예수님이 가르치신 주기도문은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로 시작한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는 하나님을 의미한다.[15] 이전까지 이스라엘 백성과 하나님은 '왕과 백성' 혹은 '주인과 종'으로서 주종(主從)관계의 개념이 절대적이었다.[16][17] 그러한 하나님을, 예수님께서 오셔서 '아버지'라 알려주셨다. 하나님이 아버지라는 예수님의 가르침은 천국에도 가족이 있음을 시사한다. '아버지'는 가정에서 사용하는 호칭이기 때문이다. 이 땅에 가족 제도가 있듯 천국에도 가족이 있고, 지상 가족에 아버지가 있듯 천국 가족에도 아버지 하나님(God the Father, Heavenly Father)이 계신다.

    자녀(형제자매)

    아버지라는 신분은 자녀가 있다는 사실을 전제로 한다. 자녀가 없는 남자는 아버지라 불릴 수 없다. 하나님 역시 자녀가 있기에 아버지라 불리는 것이다.

    내가 너희를 영접하여 너희에게 아버지가 되고 너희는 내게 자녀가 되리라 전능하신 주의 말씀이니라

    - 고린도후서 6:17-18

    하나님이 구원받을 성도들의 아버지가 되시고, 구원받을 성도들은 하나님의 아들딸이 된다. 아울러 천국 가족의 일원으로서 성도들끼리는 서로 형제자매가 된다. 지상 가족의 구성원으로 아버지와 자녀가 있는 것처럼, 천국 가족에도 아버지 하나님 그리고 하나님의 자녀들이 있다.

    어머니

    어머니는 가정의 구심점(求心點)이다. 어머니 없이는 자녀가 태어날 수 없고, 자녀가 없으면 아버지도 될 수 없다. 지상 가족에 어머니가 있음은 실체인 천국 가족에도 어머니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나타낸다.

    '위'는 하늘, 즉 천국을 가리키고 '우리'는 구원받을 성도들을 가리킨다. 구원받을 성도들은 천국 가족의 일원이자 아버지 하나님과 어머니 하나님(God the Mother, Heavenly Mother)의 자녀들이다. 생명 탄생의 결정적인 역할을 어머니가 하듯, 하늘 자녀들에게 주어질 영원한 생명도 하늘 어머니에게서 나온다. 따라서 영의 아버지만 아니라 영의 어머니를 믿어야만 구원받을 성도들을 지칭하는 '우리' 안에 포함된다.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하시는 장면을 통해서도 어머니 하나님이 계심을 알 수 있다.

    하나님이 가라사대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로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육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 창세기 1:26-27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하실 때,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자'고 하셨다. 그 결과로 남자와 여자가 창조되었다. 이는 남성 형상의 아버지 하나님과 여성 형상의 어머니 하나님이 존재하심을 나타낸다. 지상 가족에 아버지와 어머니가 있어 부모의 형상대로 아들과 딸이 태어나듯, 하나님의 아들딸들에게도 아버지와 함께 어머니가 계신다.

    유월절로 맺는 혈연관계

     
    유월절로 천국 가족이 된 하나님의 자녀들은 하나님 아버지 어머니로부터 영원한 생명을 얻는다

    가족은 혈연으로 맺어지는 관계다. 사람이 살아가면서 타인과 맺는 여러 관계 중 가족은 혈연을 매개로 한다는 점에서 다른 인간관계와 구별된다. "피는 물보다 진하다"는 말은 '혈육의 정은 남보다 강하다'는 뜻으로, 언어권마다 관용적으로 사용하는 표현이다. 그림자인 지상 가족의 자녀가 부모의 피를 이어받듯 천국 가족의 자녀도 하나님의 피를 이어받는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인자의 살을 먹지 아니하고 인자의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 속에 생명이 없느니라 내 을 먹고 내 를 마시는 자는 영생을 가졌고

    - 요한복음 6:53-54

    그리스도의 살을 먹고 피를 마시는 것은 하나님의 혈통(血統)을 물려받는다는 뜻이다. 영생하시는 하나님의 혈통을 물려받음으로 성도들 역시 하나님의 아들딸이 되어 영생하게 된다. 예수님은 당신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시는 방법으로, 새 언약 유월절을 지키라 명하셨다.

    제자들이 예수의 시키신 대로 하여 유월절을 예비하였더라 ... 예수께서 을 가지사 축복하시고 떼어 제자들을 주시며 가라사대 받아 먹으라 이것이 내 몸이니라 하시고 또 잔[포도주]을 가지사 사례하시고 저희에게 주시며 가라사대 너희가 다 이것을 마시라 이것은 죄 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

    - 마태복음 26:19, 26-28

    제자들과 함께 유월절을 지키는 자리에서 예수님은 떡을 주시며 '내 몸'이라 하시고 포도주를 주시며 '내 피'라 하셨다. 새 언약 유월절 안에는 오직 자녀의 구원을 위해 십자가에서 살이 찢기시고 피를 흘리는 고통까지 감내하신 하나님의 희생과 사랑이 담겨 있는 것이다. 진실된 믿음으로 그러한 사랑을 마음에 새기며 유월절 예식에 참예하는 자는 하나님의 혈통을 물려받은 자녀로서 천국 가족의 일원이 되고 영생하는 축복을 받는다. 하나님을 단지 입으로 아버지라고 부른다고 해서 자녀의 자격이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새 언약 유월절을 지켜 행함으로 하나님과 혈연관계로 맺어진다. 유월절은 하늘의 혈통을 이어받은 하나님의 자녀임을 확증하는 진리다.[18]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19] 하신 예수님의 당부처럼 유월절을 통해 하나님의 사랑을 깨달은 자녀는 그 사랑을 본받아 서로를 한 몸같이 사랑하게 된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유월절 떡으로 그리스도의 몸에 참예할 뿐만 아니라 모든 성도가 한 떡에 참예함으로 한 몸이 된다고 말했다.[20] 유월절을 지켜 하나님 안에서 한 가족을 이루어 서로를 자기 몸을 사랑하는 것같이 사랑하게 된다. 천국 가족은 그림자인 지상 가족이 그러하듯이 사랑의 공동체인 것이다.

    하나님의 후사가 얻을 영광

    성경은 하나님의 자녀를 가리켜 만왕의 왕이신 하나님의 유업을 물려받을 후사라고 말한다. 또한 하나님의 후사로서 가져야 할 마음 자세도 일러준다.

    성령이 친히 우리 영으로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거하시나니 자녀이면 또한 후사 곧 하나님의 후사요 그리스도와 함께한 후사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될 것이니라 생각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도다

    - 로마서 8:16-18

    하나님의 후사는 천국에서 세세토록 왕 노릇 한다.[21] 하나님이 자녀들을 위해 예비하신 천국은 사람의 눈으로 보지 못하고 귀로도 듣지 못하고 마음으로 생각지도 못하는 곳이다.[22] 그러나 영광에는 고난이 뒤따른다. "왕관을 쓰려는 자, 그 무게를 견디라"는 말처럼 어느 시대, 어느 나라든 왕실의 자녀는 엄격한 교육을 받는다.[23] 교육 과정은 다소 고통스러우나 학식과 덕망을 두루 갖춘 왕이 되기 위해서는 불가피한 과정이다. 하나님의 후사 역시 생명의 면류관을 얻기 위해 땅에서는 환난과 고난을 받는다.[24] 그 고난은 천국에서 누릴 영광에 비하면 미미하다. 하나님의 자녀는 하늘에 속한 자들로 천사와 같이 신령한 몸을 갖는다.[25] 이 세상에서는 육체를 따라 부모도 되고, 자녀도 되지만 성도들이 이 세상을 떠나 하나님 앞에 서면 각자 동등한 자녀의 입장이다. 천국의 후사들은 하늘 아버지와 하늘 어머니 안에서 서로 형제간의 우애를 가지며,[26] 우주 천체 안에 있는 각 별세계를 시찰하게 된다.[27]



    고향에서 인정받지 못한 예수님, 그 이유는 무엇일까?

    예수님은 공생애 동안 많은 기적을 행하고 가르침을 전했지만, 정작 자신의 고향인 나사렛에서는 배척을 받았습니다. 
    왜 고향 사람들은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않았을까요? 성경에 기록된 내용을 바탕으로 그 이유를 살펴보고, 오늘날 우리에게 주는 교훈을 생각해 보겠습니다.

    1. 예수님이 나사렛에서 배척받은 사건

    예수님이 나사렛에서 배척받은 사건은 신약성경 마태복음 13:53-58누가복음 4:16-30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은 공생애를 시작한 후 갈릴리 여러 지역에서 가르치고 기적을 행하셨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분을 따랐고, 예수님의 가르침과 능력에 감탄했습니다. 그러나 고향 나사렛에서는 상황이 달랐습니다.

    나사렛 회당에서의 사건 (누가복음 4:16-22)

    • 예수님은 안식일에 나사렛 회당에서 이사야서 61장을 읽으시고, "이 성경 말씀이 오늘 너희에게 이루어졌다"고 선언하셨습니다.
    • 회당에 있던 사람들은 처음에는 놀라워하며 "이 사람이 요셉의 아들이 아니냐?"라고 말했습니다.
    •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그들은 점점 의심하고 반발하기 시작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과 사람들의 반응 (누가복음 4:23-27)

    • 예수님은 나사렛 사람들이 기적을 요구할 것을 아셨고, "선지자는 고향에서 환영받지 못한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 또한, 구약의 예언자들이 이방인들에게 은혜를 베풀었던 사례(엘리야와 사르밧 과부, 엘리사와 나아만 장군)를 언급하셨습니다.
    • 이 말을 들은 나사렛 사람들은 분노하여 예수님을 마을 밖으로 쫓아내려 했습니다. 

    2. 예수님이 고향에서 배척받은 이유

    예수님이 고향 나사렛에서 배척받은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1) ‘익숙함’이 만든 편견

    • 나사렛 사람들은 예수님을 어릴 때부터 알고 있었습니다.
    • 그들은 예수님이 목수 요셉의 아들이며 평범한 가정에서 자랐다는 사실을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 "이 사람이 우리가 알던 그 예수인데, 어떻게 하나님의 메시아일 수 있는가?"라는 의심이 들었습니다.

     2) 기적을 기대했지만, 실망함

    • 예수님이 가버나움 등 다른 지역에서는 많은 기적을 행하셨지만, 나사렛에서는 그러지 않으셨습니다.
    • 나사렛 사람들은 예수님이 자신들의 기대를 충족시키지 않는다고 생각하고 배척했습니다.

     3) 교만과 시기심

    • 예수님이 이방인들에게 은혜를 베푸신 구약의 사건을 언급하자 나사렛 사람들은 분노했습니다.
    • 그들은 자신들이 하나님의 선택받은 민족인데, 예수님이 이방인들을 언급한 것에 불쾌감을 느꼈습니다.
    • 또한, 같은 마을 출신인 예수님이 자신들보다 높은 위치에서 가르친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기 어려웠습니다.

     4) 선지자는 고향에서 환영받지 못한다

    • 예수님은 "선지자는 자기 고향과 자기 집에서 존경을 받지 못한다"(마태복음 13:57)라고 말씀하셨습니다.
    • 이는 예수님뿐만 아니라, 역사적으로 많은 선지자들이 고향에서 인정받지 못했던 패턴을 보여줍니다.

    3. 오늘날 우리에게 주는 교훈

    예수님의 나사렛 배척 사건은 오늘날 우리에게도 중요한 메시지를 줍니다.

     1) 편견을 버리고 진리를 받아들여야 한다

    • 우리는 익숙함 때문에 진리를 거부하는 실수를 저지를 수 있습니다.
    • 하나님의 일하심은 우리가 예상하지 못한 방식으로 나타날 수 있습니다.

     2) 믿음이 있어야 기적을 경험할 수 있다

    • 마태복음 13:58에 따르면, "그들이 믿지 않음으로 말미암아 거기서 많은 능력을 행하지 아니하시니라"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 믿음이 없으면 하나님의 역사를 경험할 수 없습니다.

     3) 모든 사람이 복음을 받아들이는 것은 아니다

    • 예수님도 배척받으셨기에, 우리도 진리를 전할 때 거부당할 수 있습니다.
    • 하지만 이에 낙심하지 않고, 꾸준히 하나님의 뜻을 따라가야 합니다.

    결론

    예수님이 고향 나사렛에서 배척받은 이유는 사람들의 편견, 기적에 대한 기대, 교만과 시기심 때문이었습니다. 
    오늘날 우리도 비슷한 상황에 처할 수 있으며, 진리를 받아들이는 열린 마음과 믿음이 중요합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통해 우리 자신의 신앙을 돌아보고, 하나님의 뜻을 온전히 따르는 삶을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배척받으신 예수님(마태복음 13:53-58)

    예수님은 하나님의 본체요 인류를 구원하러 오신 메시야이므로 만인으로부터 존경을 받아야 하지만 일부 사람들로부터만 인정을 받으셨고 대다수의 사람들로부터 왕따와 배척을 받으셨습니다.
    왜 존귀하신 예수님께서 배척을 당하여야 하셨습니까?

    본문에 보면 예수님께서 고향에서 배척을 받으신 내용이 소개되어 있으므로 오늘 아침에는 배척받으신 예수님에 대하여 말씀을 드리면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1. 메시야로 인정을 받지 못하시는 예수님

    예수님은 하늘의 지혜로 고향의 회당에서 하늘나라 진리를 전파하셨는데, 가르치심에 모두가 놀라서 이 사람의 지혜와 이런 능력이 어디서 났느뇨? 라고 감탄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이들은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가리켜서 이는 그 목수의 아들이 아니냐 그 모친은 마리아, 그 형제들은 야고보, 요셉, 시몬, 유다라 하지 않느냐 그 누이들은 다 우리와 함께 있지 아니하냐 그런즉 이 사람의 이 모든 것이 어디서 났느뇨? 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 하늘나라 진리를 전하신 회당은 ‘쉬나고게’라고 하는데 유대인들이 모여서 예배를 드리고 율법을 배우는 장소입니다.
    고향사람들은 예수님의 인간적인 모습만을 보고 사람이상으로는 생각을 하지 않고 가르침의 능력에 감탄할 뿐이었습니다. 
    누구 하나도 예수님 편에 서서 예수님을 옹호하거나 하나님의 아들 되심을 증언하는 자가 없었습니다.
    예수님의 고향사람들은 예수님을 목수인 요셉의 아들이라고 알고 있었지만 예수님은 요셉의 아들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육신의 모습으로 오시기 위해서 요셉과 약혼을 하고 육체관계를 아직 갖지 않았던 마리아의 몸에서 성령으로 잉태되어 그 가문을 사용하셨을 뿐입니다.
    예수님은 분명히 우리를 죄와 죽음과 사망과 지옥에서 구원하시는 메시야이시면서도 메시야로 인정을 받지 못하셨습니다.

       우리들도 세상을 살다보면 우리의 원래 신분으로 인정을 받지 못하고 오해를 받는 경우들이 종종 있습니다. 아무리 말을 해도 믿어주지 않고 오해를 하는 경우들이 있습니다. 오해를 받을 때에 속이 많이 상하겠지만 속이 상할 때마다 예수님께서도 오해를 받으신 것을 생각하시면서 잘 참고 견디시기 바랍니다.

    2. 고향에서 배척을 받으시는 예수님

    예수님은 고향에서 인정을 받지 못할 뿐만 아니라 배척을 당하였습니다.
    배척하였다는 말은 적대시하다, 용납지 않다, 감정을 매우 상하게 하다, 라는 의미입니다.
    고향의 사람들은 예수님을 인정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그것도 부족해서 배척까지 하였습니다.
    배척을 받으신 예수님은 “선지자가 자기 고향과 자기 집 외에서는 존경을 받지 않음이 없느니라”고 말씀을 하셨습니다.
    이 격언은 유대나 그리스와 로마의 문학작품에서 볼 수 있습니다.

    눅4:29절에 보면, 예수님께서 안식일 날 회당에서 이사야서를 강해를 하셨는데 강해를 듣고 있던 무리들이 분이 가득하여 일어나 예수님을 동네 밖으로 쫓아내어 산 낭떠러지까지 끌고 가서 밀쳐 내리치고자 하였는데 예수님께서 알아차리시고 그 자리를 떠나셨습니다.
    하나님의 본체시오 우리의 구원자이신 예수님께서 왜 이렇게 배척을 받으셔야 합니까? 그 이유는 우리 때문입니다.

    사53:4-6에 보면,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서 하나님에게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라고 말씀하였습니다.

    고후8:9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요하신 자로서 가난하게 되심은 우리들을 부요케 하려 하심이라고 하였습니다.

    갈3:13에 보면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저주를 받으신 것은 우리를 저주에서 속량을 하시기 위함이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 흠도 티도 없으신 하나님의 본체시오 메시야이시지만 고난을 당하시고 채찍에 맞으시고 찔림을 당하시고 버림을 당하시고 가난하게 사시고 저주를 받으시고 배척을 받으신 것은 예수님 자신이아 또 다른 자를 위해서가 아니라 바로 저와 여러분 때문입니다.

    우리 주님은 우리를 위해서 그렇게 많은 고통과 버림과 배척을 당하시면서 단 한번도 짜증이나 불평이나 원망을 하시지 않으셨습니다. 내가 고통을 당하고 버림을 당하고 배척을 당하고 망신을 당할 지라도 그것이 하나님 아버지께서 택하신 백성을 위해서라면 어떤 것이라도 달게 받겠다는 자세로 잘 참고 견디어 내셨습니다.

    우리는 어떠한가요?
    우리들도 신앙생활을 하다 보면, 불신 세계로부터 오해를 받고 배척을 받고 왕따를 당할 수도 있고 손해를 볼 수도 있고, 배신을 당하고 이용을 당 할 수도 있지만 우리 주님을 생각하면서 잘 견뎌야 할 줄로 믿습니다.
    하나님께 영광이 된다면 우리 주님이 기뻐하시는 일이라면 하나님께서 세우시고 우리 주님이 머리되시는 교회의 부흥을 위해서라면 무엇인들 못 참겠느냐는 각오와 결단으로, 내게 주어진 십자가를 잘 지고 달려가야 할 줄로 믿습니다.

    3. 고향에서 능력을 행치 않으신 예수 그리스도

    본문 58절에 보면, 예수님께서는 저희의 믿지 않음을 인하여 거기서 많은 능력을 행치 아니하시니라 고 말씀을 하셨습니다.
      고향 사람들은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믿지 않았고, 예수님께서 행하시는 능력을 하나님께서 주신 권능으로 행하시는 것을 믿지 않았고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나라의 도래를 말씀하셨을 때 그 말씀을 믿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믿지 않는 장소에서나 믿지 않는 자를 위하여 기적을 행하지 않으십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기적을 행하실 때 믿음을 보시고 행하셨고, 귀신을 쫓아내실 때에나 병을 고치실 때 믿음을 보시고 치료를 하여 주셨습니다.

    마8:13에 보면, 하인의 중풍병 문제를 가지고 예수님을 찾아오신 백부장에게 가라 네 믿은 대로 될찌어다, 마9:2에 보면, 침상에 누운 중풍병자를 데리고 온 자들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병자에게 소자야 안심하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마9:22에 보면, 12년 동안 혈루병으로 고통을 앓던 여인에게 딸아 안심하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막9:23에 보면, 예수님께서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느니라 고 말씀을 하셨습니다.

    우리들이 같은 하나님, 같은 예수님을 믿으면서, 우리가 복을 받고 못 받는 것, 기적을 체험하고 체험을 하지 못하는 것, 병을 고침 받고, 또 받지 못하는 것은 다 믿음의 여부에 달려 있습니다.

    우리가 복을 받고, 받지 못하는 것, 기적을 체험하고 체험하지 못하는 것, 응답을 받고 받지 못하는 것, 질병을 고침 받고 또 받지 못하는 것은 여러분의 삶의 현장이 믿음의 장소냐 아니면 불신의 장소냐에 달려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의 삶의 현장이 믿음의 장소가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왜 예수님은 본인 고향에서는 배척 받았나요?

    오늘 우리가 주목해야 할 말씀은 왜 예수님께서 고향에서 높임을 받지 못할 것이라고 말씀하셨을까요?  
    그리고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하신 깊은 뜻은 무엇일까요?

    ​1. 고향 사람들이 예수님을 너무나 잘았기 때문

     예수님의 고향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코흘리개 어린이 적부터 모든 것을 보았습니다.  아버지가 누군지, 어머니가 어떤지, 형제 자매들이 무엇을 하는지 세세하게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신선감이 없고 존경심을 갖기 어렵습니다.  그것도 가난한 목수의 아들로서 아버지 일을 거들어 주던 사람이 어느 날 갑자기 메시아요, 하나님의 아들이라니 황당했을 것입니다.  막 3: 21에 보면 심지어 예수님의 친척들도 예수님을 정신 이상자 취급을 했습니다.  또한 막 3: 31-35과 요 7: 5에 보면 예수님의 친가족들조차도 예수님을 믿지 않고 예수님을 집에 돌아오도록 채근하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이렇게 가족 친지들까지도 예수님을 믿지 않았으니 보통 동네 사람들이 예수님을 높이 보지 않았던 일은 극히 당연할 것입니다.  화란의 유명한 화가 빈센트 반 고흐(Vincent Van Gogh, 1853-90)는 생전에 모두 800 여점의 그림을 그렸지만 단 1개만 팔 수 있었습니다.  그는 나이 37세에 세상을 떠났는데 고흐의 그림을 모은 전시회는 그가 세상을 떠난 후에 겨우 있었다고 합니다.  고흐는 자기 고국인 네덜란드에서 철저히 외면당하고 배척 당했던 것입니다.  '개천에서 용난다'는 한국 속담이 있듯이 자기 고향 땅에 별 볼일 없는 가문의 사람이 갑자기 출세라도 하는 날에는 사람들이 옛날 일만 생각하며 존경하는 마음을 별로 가지지 않습니다.  그것이 세상 인심인데 예외 없이 예수님께도 적용되었던 것입니다.

    나다나엘이 빌립의 전도를 받고 예수님의 출신 지역을 들먹거린 이야기는 유명합니다.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요 1: 46)  그렇게 보잘 것 없고 형편없는 동네, 아직까지 아무도 위대한 사람, 유명한 사람이 나오지 못한 동네에서 무슨 대단한 것이 나올 수 있다는 말인가?  참으로 위험한 편견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면 '개천에서 용'이 나올 수 있습니다. 

     고전 1: 27-9에서 뭐라고 말씀하십니까?  하나님은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시며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십니다.  뿐만 아니라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셔서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십니다.  그렇게 해서 아무 육체라도 하나님 앞에 자랑하지 못하도록 만드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출신 지역을 가지고, 가문을 가지고, 외모를 가지고 사람을 판단하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갈릴리 시골 마을 작고 별 볼일 없는 동네 나사렛에서 인류를 구원한 그리스도께서 나오셨습니다.  인류의 역사를 BC와 AD로 나누신 메시아 예수께서 나오셨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더 이상 '나사렛 동네의 초라한 목수'가 아닙니다

    동네 사람들이 예수님을 환대하지 않은 이유는 여전히 예수님의 초라한 과거만 보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지금 여기에서의 예수님의 영광과 권능을 보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목수의 아들'이 고향에서 존경받지 못한다는 말씀을 하지 않으십니다.  주님은 지금 여기에서 하나님의 사명을 받아서 엄청난 권능을 가진 분이시기 때문에 '목수의 아들'이라는 표현 대신에 '선지자'라는 용어를 쓰고 계십니다.  이사야나 에레미야나 에스겔, 엘리야, 엘리사와 같은 위대한 선지자 반열에 당신을 두고 계시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사람을 판단함에 있어서 과거를 보지말고 현재의 모습을 보아야 합니다.  지난번에 국무총리 지명자 장상씨의 청문회를 보면서, 사람의 과거를 자꾸 캐내면 아무도 온전한 사람이 없다는 사실을 새삼 발견했습니다.  장상씨에게 날카로운 질문을 던졌던 국회의원들 역시 과거에 저지른 비리를 파헤치면 그보다 많으면 많았지 적지 않을 것입니다.  "털어서 먼지 안 나는 사람 없다"는 한국 속담처럼 아무도 하나님 앞에서 자기를 자랑할 수 없습니다.  내 자신이 온전하지 못한 것처럼 내 이웃 역시 온전하지 못하다는 사실을 너그럽게 인정하고 이웃을 관대한 마음으로 바라 봐야 할 것입니다.  자기 자신에게는 엄격하고 이웃에게는 한없이 관대한 사람이 되어야만 할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여전히 예수님을 나사렛 촌동네의 목수로서 보았지만 이제 예수님은 더 이상 과거의 사람이 아닙니다.  선지자요, 메시아요, 인류를 구원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오늘 여러분의 모습도 더 이상 과거의 죄 많고 초라했던 모습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로서 당당한 모습을 세상에 보이십시오!

    누구든지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사람이 예수님의 형제 자매요 동향 사람들 

     막 3: 31-35에 보면 예수님께서 열심히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실 때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와 육신의 동생들과 누이들이 찾아 왔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예수님의 가족들이 예수님 찾아왔다는 소식을 전합니다.  이 때 예수님은 단호하게 말씀하십니다.  "누가 내 모친이며 동생들이냐?  누구든지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자는 내 형제요 자매요 모친이라"고 대답하십니다. 

    여러분, 오늘 누가 우리의 진정한 가족입니까?  누가 우리의 고향 사람들입니까?  단지 피가 섞였다고 해서, 이른바 삼연(三緣), 즉 혈연(血緣), 지연(地緣), 학연(學緣)을 함께 나눈다고 해서 친근감을 느낍니까?  어리석습니다.  부질없는 짓입니다.  예수님의 피로 나눈 형제 자매가 육신의 피붙이보다 훨씬 귀하다는 사실을 믿으십시오. 

     나사렛에서 살았던 예수님의 가족 친지들, 동네 사람들이 예수님을 배척했지만 사마리아 사람들은 예수님을 영접했습니다.  누가 진짜 예수님을 사랑했습니까?  누가 예수님의 진정한 가족이요, 친척이요, 동향 사람들입니까?  하나님의 뜻을 행하며 예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입니다.  오늘 우리 그리스도인들부터 세상의 모든 연줄을 끊어버리고 예수님 안에서 진정으로 한 형제 자매로서 연합되어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 당시 천대 받던 직업


    τελώνης (텔로네스, 세리)에 대하여


    신약성경 공관복음서에서 예수님 사역의 청중이거나 혹은 비유나 이야기의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특별한 직업이 있다. 그것은 세리(τελώνης, 텔로네스)라는 사람들이다. 헬라어 τελώνης(텔로네스)를 영어성경은 tax collector라고 번역하고, 한글성경은 ‘세리’라고 번역한다. 이 세리는 단순히 세금을 징수하는 관료이거나 공무원이 아니다. 당시 유대 땅에서 세리라고 불렸던 사람은 나라가 임명한 공무원이 아니었고 민간인이었다. τελώνης(텔로네스)라는 헬라어는 τέλος(텔로스, toll)와 ὠνέομαι(오네오마이, I  buy)의 합성어로서 '세금을 징수하는 권리를 정부로부터  내가 샀다'는 뜻을 가지고 있다. 이 명칭은 고대 그리스 도시국가들에서 시작된 명칭이고, 도시국가들은 재정수입을 위하여 세금제도를 통해 세금을 징수하였는데,  정부의 관료들을 동원하여 직접적인 징수를 한 것이 아니라, 민간 세금업자들을 동원하여 세금징수를 하였다. 이런 세금징수 방법을 tax farming이라고 지칭하였다. 도시 혹은 나라의 일정구역에 세금징수를 담당할 업자들을 모집하고 그들 중에 한 사업자(tax-farmer)를 선정하여, 세금목표액만 도시에 바치고, 나머지 것은 그들의 소득으로 챙기도록 권리를 주었다. 이런 세금징수 방법은 알렉산더 대왕의 후계자들 중 한 명인 이집트의 프톨레미 왕조에서 발전되었고, 후에는 로마 공화정과 제국 시대에도 받아들여졌다. 로마는 tax farming을 속주인 유대 땅에서 시행하였고, 예수님 시대에 로마를 위하여 세금을 징수하는 권리를 가지고 일한 사람들이 바로 τελώνης(텔로네스)이었다. 이들은 민간 사업자로서 세금사업의 권리를 가진 사람이거나(tax farmer), 이 사업자의 고용인으로서 세금을 거두는 사람(tax collector)이었다. τελώνης(텔로네스)가 세금을 거두는 집이나 사무실을 τελώνιον(텔로니온, 세관)이라고 불렀다(눅 5:27).

     τελώνης(텔로네스)에 대한 사람들의 시선은 어떤 사회에서도 결코 곱지 않았다. 이들은 할당된 세금액을 정부에 내면서도 자신들의 이득을 취하기 위해, 더 많은 세금을 부과하였기에 세액에 대한 불만, 세금을 내어야 하는 대상에 대한 시비가 끊이지 않았다. 그래서 거의 모든 고대 사회에서(헬라, 로마, 팔레스타인 등)에서, τελώνης(텔로네스)에 대한 사람들의 시선은 부정적이고 비호감이었다. 예수님 시대에 유대교 랍비들은 이런 세리들을 강도나 도적 같은 부류의 사람으로 부정한(unclean) 사람의 목록에 넣었다. 왜냐하면 남의 돈을 강제하여 가져가는 사람들이라고 간주하여 율법으로도 부정한 사람처럼 대하였다. 누가복음 3:13에서 세례요한은 세례 받으려 나아오는 세리들을 향하여 “부과된 것 외에는 거두지 말라”고 말한다. 진정한 회개에 합당한 열매로서 정해진 세금을 넘어 탐욕을 채우는 세금을 거두지 말라고 한 것이다.

    당시의 세금업자들은 나라가 정한 세금을 거두어 납세하지 못하면 세금업자들이 부족한 세금을 채워야 했고, 그러지 못하면 그들이 내세운 재정보증인들(guarantor)이 내어야 하는 것이 tax farming 제도였다. 그래서 τελώνης(텔로네스)는 손해를 보지 않기 위해서 악착같이 세금을 징수하였고, 세금을 내지 못하는 사람들을 시의 관료들에게 보고하였고, 자신들이 손해를 보지 않고 최대의 이익을 남기기 위해서 사람들의 원성과 미움 받을 일들을 하게 된 것이었다. 누가복음 19장에서 여리고의 세리장(ἀρχι-τελώνης 아르키텔로네스) 삭개오는 주님 앞에 세리로서 행한 일에 대하여 회개하며 회개의 열매로 주님 앞에 고백한다: “주여! 보시옵소서,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사오며, 만일 누구의 것을 속여 빼앗은 일이 있으면, 네 갑절이나 갚겠나이다”(눅 19:8). 삭개오는 단순한 tax collector가 아니라, 세금업자(tax farmer)로서 세금업을 통해서 많은 돈을 벌었던 사람일 것이다. 당시 로마는 유대 땅에 직접세를 무겁게 부과했고, 물품이나 계약, 거래, 통관에 대한 간접세를 부과하였는데, 유대인들은 로마에 대한 인두세(poll tax)를 외세의 지배로 간주하였고, 간접세는 불의와 부정직의 상징처럼 보았다. 세금에 대한 유대인의 분노와 불만이 주후 6년 갈릴리 유다의 조세저항운동으로 폭발한 것임을 역사가 증거하고 있다. 이 세금을 거두는 세리에 대하여  당연히 부정적이었을 뿐만 아니라, 이들의 회개도 온전한 회개가 불가능하다고 보았다. 왜냐하면 남의 돈을 착복한 것을 율법이 정한 대로 되갚아야 하는데, 불특정 다수의 돈을 착복하였기에 그것을 빠짐없이 되갚는 것이 불가능한 것으로 보았기 때문이었다.

       공관복음서 저자들은 예수가 ‘세리와 죄인의 친구’로서 그들과 함께 먹고 마신 역사적 예수의 전승을 강조한다(마 11:19; 막 2:15; 눅 7:34). 누가복음은 세리를 다른 복음서보다 더 우호적으로 묘사하면서, 세리들은 요한의 물세례를 받았지만, 바리새인과 율법교사들은 이 세례를 거부했음을 말한다(눅 7:29). 또 누가의 특수자료인 누가복음 15장에서 예수님의 특별한 비유적 가르침의 청중은 “모든 세리와 죄인들”(15:1)과 “바리새인과 서기관들”(15:2)이다. 이후에 나오는 비유들, 특별히 불의한 청지기의 비유(16:1-9), 거지 나사로와 부자의 비유(16:19-31)는 가난한 이웃을 향한 재물의 나눔을 강조한다. 바리새인들이 이 비유를 듣고 비웃을 때, 누가는 바리새인은 “돈을 좋아하는 자”(16:14)라고 판단한다. 누가복음은 죄인으로 여겨졌던 세리의 나눔과 회개를 부각시키면서(19장의 세리장 삭개오), 스스로 의인으로 여기는 바리새인의 탐욕과 죄성을 대조한다. 그리고 세리 마태(레위)가 예수님의 열두 제자 중 하나가 되는 부르심을 받았음을 공관복음서가 소개하면서 세리의 회개뿐만 아니라 부르심을 기뻐하며,  세리의 잔치에 어울리시는 주님이심을 분명히 드러낸다(마 9:9; 막 2:14; 눅 5:27). 

    마태복음은 유대 사회에서 유대인들이 세리를 이방인 취급하는 부정적인 시각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다:

    “너희가 너희를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면 무슨 상이 있으리요, 세리도 이같이 아니하느냐”(마 5:46)

    “만일 그들의 말도 듣지 않거든 교회에 말하고, 교회의 말도 듣지 않거든 이방인과 세리와 같이 여기라”(마 18:17)

    세리를 이방인처럼 여기는 이런 유대 사회의 분위기 속에서, 역사적 예수의 모습은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식사하며(마 9:11; 11:19), 순종하는 둘째 아들인 세리가 불순종하는 첫째 아들 바리새인보다 먼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간다고 세리를 우호적으로 대한다(마 21:31). 이런 예수의 모습은 누가복음에서 더욱 강화되어 자기 의를 자랑하는 바리새인의 기도보다 참회하는 죄인으로 기도하는 세리의 기도를 하나님이 인정하심을 부각시킨다. 돈에 대한 탐욕과 불의의 존재로서 세리를 죄인으로 여기는 유대교 지도자들을 향하여, 예수는 오히려 돈을 사랑하는 위선적인 바리새인, 성전 뜰에서 가축을 매매하게 하고 성전세를 쉽게 거두기 위해 환전상의 탁자를 허락하며 시장터로 만든 탐욕적인 성전 제사장들을 더욱 악하게 여긴다.

     세리의 존재와 회개를 부각시키는 예수의 전승에서 우리는 진정으로 이 사회에서 지탄받고 비판 받아야 할 존재가 누구인지를 다시 한번 생각하게 된다.


    예수님 당시 목자들의 사회적 위치

    🔹 1. 가난하고 천대받는 직업

    • 목자는 일반적으로 가난한 농민 계층이었어요.

    • 교육을 받지 못했고, 종교적·사회적 행사에 참여하기 어려운 위치에 있었죠.

    • 노동이 고되고 외로운 일이었기 때문에 사회적으로 존경받지 못했습니다.


    🔹 2. 부정하게 여겨졌던 직업

    • 바리새인들과 율법학자들은 목자들을 율법을 제대로 지키지 못하는 자들로 여겼습니다.

    • 안식일이나 정결법을 지키기 어려운 환경에서 일했기 때문에, 의식적으로 “부정한 자들”로 낙인 찍혔습니다.

    • 일부 기록에 따르면, 당시 사회에서는 목자들의 증언조차 법정에서 무시되었다고 해요.

    🔹 3. 그러나 하나님은 그들을 선택하심

    • 놀라운 점은, 하나님께서 이런 낮은 자들을 복음의 증인으로 삼으셨다는 것입니다.

    • 예를 들어:

    예수님 탄생 소식이 가장 먼저 전해진 사람들이 누구였나요?

    바로 들에서 양을 치던 목자들이었습니다. (누가복음 2:8–20)

    👉 이것은 하나님이 세상의 기준이 아닌, 겸손하고 낮은 자를 귀하게 여기신다는 상징입니다.











    대한민국 상위 1% 이상 : 금수저

    자산 30억 이상, 부모가 사업가 혹은 의사,교수등과 비견되는 전문직, 건물주, 성공한 연예인 등

    대한민국 상위 1%, 흙갤러들이 가장 부러워하는 존재

    금수저들끼리는 1%내에서도 금수저와 재벌가의 차이가 어마어마하게 크다고 얘기하며

    금수저 이상의 플레티넘 수저 다이아 수저 비브라늄 수저 핵수저 등등 이야기 하지만

    적어도 대한민국에선 금수저와 재벌가의 차이보다 흙수저와 금수저의 차이가 더 큼.


    자녀에게 해주는 것은

    우수한 교육, 우수한 환경, 해외여행, 대학 졸업시까지 등록금+공부에 부족함 없는 용돈, 학원, 취준

    자녀는 진짜 지적장애급 아니면 서울 괜찮은 대학 이상 졸업하고 대기업 가는경우가 많음

    여기서 끝나면 금수저가 아니지 마지막으로 결혼할때 서울에 평타치는 곳(7~10억, 목동급)에 집까지 하나 선물해줌

    부모의 경우는 사업가나 전문직이므로 정년 후에도 계속해서 돈을 벌기때문에

    자기 손자 손녀에게 용돈도 두둑하게 주는 경우가 많다.


    신앙의 명문가

    중국 근대사를 움직인 송애령, 송경령, 송미령의 삶을 그린 ‘송가황조’라는 영화가 있다. 
    세 자매의 아버지는 송가희로 목사다. 
    명문가로 키워낸 송가희의 교육방법은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배우고 싶어 한다. 
    송가희는 어려서 미국으로 들어가 공부를 하였는데, 거기서 기독교인이 되어 목사 안수를 받고 중국으로 귀국하게 된다. 중국으로 돌아온 송가희는 한편으로는 사업을 해 돈을 벌고, 다른 한편으로는 인쇄소를 차려 성경을 출판하여 복음을 전했다. 
    그 때 친구면서 사위가 될 손문을 만나게 되는데, 손문 역시 기독교인이었다.

    송가희는 결혼을 해 세 딸을 낳게 되는데, 세 딸을 서양 선교사들이 운영하는 미션스쿨에 보내 공부를 시킨다. 
    그러다 세 딸 모두 미국에 보내 공부를 시키는데 그것은 큰 세상을 보고 많은 것을 배우고 와서 훌륭한 일꾼이 되었으면 하는 그의 비전을 실천하기 위함이었다. 

    세 딸은 아버지의 뜻대로 믿음 안에서 잘 자라서 큰 딸 송애령은 중국 최고의 부자인 공상희와 결혼을 했고, 
    둘째 딸 송경령은 중국 혁명의 아버지라는 손문과 결혼을 했으며, 
    막내딸인 송미령은 후에 중국 국민당 총재가 된 장개석과 결혼했다. 

    한 집안에서 2명의 퍼스트레이디를 배출한 것이다. 돈과 나라, 권력이 세 자매와 연결되면서 세 자매는 중국을 이끌어가는 실질적인 인물이 되었다. 그런데 세 자매의 성공적 삶 뒤에는 아버지 송가희 목사로부터 배운 신앙이 있었다. 막내딸인 송미령을 보면 잘 알 수 있다. 송미령이 살았던 ‘메이링 궁’을 가보면 2층 거실 중앙 벽에 예수님의 초상화가 걸려 있고, 그 아래 성경책이 놓여 있다. 남편인 장개석과 송미령은 그 거실에서 늘 기도를 했다고 한다. 송미령이 결혼을 할 때 장개석은 기독교인이 아니었는데, 결혼조건으로 예수님을 믿는 것이었다. 그래서 장개석은 기독교인이 되었다. 신앙의 명문가는 그냥 되는 것이 아니다. 철저한 신앙교육과 커다란 비전이 어우러질 때 이루어진다.

    우리나라에도 신앙의 명문가가 있다. 
    김승규 전 국정원장의 가문이다. 5대 째 믿음을 이어오고 있는 김승규 전 국정원장의 가족들은 연말이나 새해 초가 되면 온 가족이 모여 하나님께 감사의 예배를 드리는데, 특히 연말에는 한 해 동안 신·구약 성경을 통독한 가족에게 선물을 주고 특별 찬양과 연주의 시간을 갖는다. 
    온 가족들이 매일 새벽기도로 하루를 시작하고, 가정에서 가족예배를 드리는 것은 오랜 신앙의 전통이다. 
    하나님에 대한 신앙이 가족들의 영혼을 키우는 젖줄이 되어 8남매 모두 훌륭하게 자라났다. 
    장남 김홍규 장로(전 순천매산고 교장), 차남 김병규 장로(명보 회장), 3남 김성규 장로(유성T&G 회장), 4남 김명규 장로(전 국회의원), 5남 김승규 장로(전 국정원 원장)는 모두 다 사회의 훌륭한 일꾼들이 되어 많은 사람들의 귀감이 되고 있다.

    신앙의 명문가는 하루아침에 이루어지지 않는다. 
    수대에 걸쳐 신앙의 계승이 이루어지고 거룩한 비전을 품고 하나님의 사람답게 구별된 삶을 살아가려고 노력할 때 신앙의 명문가가 되는 것이다. 
    신앙의 명문가야 말로 하나님께서 축복하신 증거요, 하나님이 함께 하신 증거라고 할 수 있다.


    믿음의 명문가문


    몇 년 전 <미국 명문가, 위대한 유산의 비밀>이라는 내용을 방송한 적이 있었습니다.
    미국 매사추세츠의 작은 도시 노드댐프턴에 오래된 교회 앞에 250년 전 이곳에서 목회를 했던 목사님의 이름이 적혀 있습니다. 그 이름은 조나단 에드워즈입니다.
    조나단 에드워즈 목사님은 순수한 복음을 강조하며 대각성 운동과 여성해방을 주장했고, 도덕과 박애라는 미국사회 특유의 가치를 만들어 냈던, 초기 미국 교회사에서 가장 위대한 인물입니다.
    조나단 에드워즈의 가문이 어떻게 위대한 명문가가 되었을까요?
    미국의 개척사에 보면 18세기 초 두 명의 젊은이가 청운의 꿈을 안고, 배를 타고 신대륙인 미국에 내렸습니다.
    그 두 사람은 마르크 슐츠와 에드워즈 조나단입니다.

    두 사람은 똑같이 새로운 땅에서 새로운 미래를 개척하기 위해서 이곳에 왔습니다.
    그런데 마르크 슐츠는 ‘내가 이곳에서 큰 돈을 벌어 부자가 되어서 내 자손에게는 가난이라는 것을 모르고 살도록 돈을 벌어야 하겠다' 생각하고 뉴욕에 술집을 차려서 열심히 일했습니다.
    결국 그의 소원대로 엄청난 돈을 벌어서 당대에 큰 부자가 되었습니다.
    그런 반면에 조나단 에드워즈는
    ‘내가 여기까지 온 것은 신앙의 자유를 찾아서 왔으니 바른 신앙생활을 통하여 이 신앙의 자유의 나라인 이곳에서 바른 신앙생활을 해야 되겠다' 생각했고 신학교에 들어가서 목사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세월이 흘렀습니다.
    150년이 지나 5대 자손들이 태어난 후에 뉴욕시 교육위원회에서는 컴퓨터로 이 두 사람의 자손들을 추적해 어떻게 되었는지 조사해 보았습니다.
    그랬더니 놀라운 결과가 나왔습니다.
    돈을 벌어서 많은 재산을 남겨 자손들을 잘 살게 해주어야겠다고 생각한 마르크 슐츠의 자손은 5대를 내려가면서 1,062명의 자손을 두었습니다.
    그런데 그 자손들은 어떻게 되었을까요?
    교도소에서 5년 이상 형을 살은 자손이 96명, 창녀가 된 자손이 65명, 정신이상, 알코올 중독자만 58명, 자신의 이름도 쓸 줄 모르는 문맹자가 460명이었습니다.
    반면 조나단 에드워즈는 유명한 프린스턴 대학을 당대에 설립하고 5대를 내려가면서

    1,394명의 자손을 두었습니다.
    자손들 중에 부통령 1명, 주지사 3명, 예일 대학교 총장을 비롯한 대학총장 13명, 교수, 교사 86명, 인구 6백만 이상의 대도시 시장 3명, 장.차관 82명, 변호사 149명, 판.검사 48명, 의사 68명, 교수 65명, 세계적인 사업가 75명, 뛰어난 발명가 25명, 군인이 76명, 문학가가 75명, 장로 집사가 286명, 그리고 목사도 116명이 탄생했습니다.
    방송 기자는 위대한 명문 가문이 된 그 이유를 찾기 위해 현 노드댐프턴 교회의 목사를 인터뷰했는데, 목사님은 그 이유로 ‘신앙의 유산’을 꼽았습니다.
    에드워즈 목사는 11명의 자녀를 두었는데, 성경을 제대로 읽히기 위해서 10대 초반에 히브리어와 헬라어

    그리고 라틴어를 완벽하게 구사하도록 가르쳤다고 합니다.
    이 가문에서 예일대학교 총장도 나오고 교수도 나오고 수십명이 예일대를 졸업했습니다.

    예일대학 내에서도 조나단 연구센터를 세워서 가문의 비밀을 연구했습니다.
    예일대학에서 내 놓은 결과도 에드워즈 목사의 가문이 위대한 명문가가 된 것은 ‘신앙에 기초한 사랑’이었습니다. 믿음으로 인한 가족의 사랑이 위대한 가문을 만들어 냈다는 것입니다.

    [창세기 26:4~5]

    네 자손을 하늘의 별과 같이 번성하게 하며 이 모든 땅을 네 자손에게 주리니 네 자손으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받으리라 이는 아브라함이 내 말을 순종하고 내 명령과 내 계명과 내 율례와 내 법도를 지켰음이라 하시니라

    여러분은 자녀에게 무엇을 물려주길 원하십니까? 큰 집, 고급 자동차, 재산, 기업을 물려주기 위해 열심히 돈을 벌고 계시진 않습니까?

    [갈라디아서 4:7]

    그러므로 네가 이 후로는 종이 아니요 아들이니 아들이면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유업을 받을 자니라

    우리의 아버지 하나님께서는 전 우주만물을 담고 있는 하늘의 유업을 주시려는데, 우리는 이 좁은 땅에서 세상의 지위와 재산을 얻으려고 믿음마져 내팽개치고 아둥바둥하고 있다면, 얼마나 어리석은 인생이겠습니까?
    하나님의 유업은 세상적 상속과는 차원이 다릅니다.

    언제가는 썩어버리고 끝내는 물거품처럼 사라질 유업이 아닙니다.
    이 하늘의 유업은 썩지도 않고 더럽지도 않고 쇠하지도 않는 영원한 유업이요. 우리가 받은 하나님의 은혜, 십자가에서 보여주신 주님의 사랑, 우리에게 주어진 영원한 생명, 그리고 약속된 저 천국까지 모두가 하늘의 유업입니다.
    우리가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않는 하늘의 유업을 상속받았다면, 우리 자녀에게도 하늘의 유업을 상속해야 합니다. 우리가 자녀들에게 신앙의 유산을 물려주는 것은, 집이나 재산이나 권력을 상속하는 것과는 근본적으로 다릅니다.
    신앙의 유산을 물려주는 것은 곧 하늘의 유업을 상속하는 것이요 천국의 보화를 상속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앙의 유산은 가장 위대한 유산입니다.
    자녀들에게 신앙의 유산을 상속하기 위해서 여러분은 어떤 노력을 하고 계십니까?
    혹시 교회 주일학교에 모든 책임을 떠넘기고 있지는 않으신가요?

    [창세기 26:25]

    이삭이 그 곳에 제단을 쌓고,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며 거기 장막을 쳤더니

    이삭의 종들이 거기서도 우물을 팠더라

    이삭이 제단을 쌓고 장막을 치고 우물을 팠듯이 아버지의 제사장 자리가 회복되고

    아버지의 믿음이 자녀들에게 계승되기 위해서는 ‘가정예배’가 회복되어야 합니다.

    [잠언 22:6]

    마땅히 행할 길을 아이에게 가르치라 그리하면 늙어도 그것을 떠나지 아니하리라

    우리모두 사랑하는 자녀들이 내 자녀이기 이전에 하나님의 자녀라는 의식을 잊지 말고

    세상적인 교육에 앞서 신앙교육을 최우선으로 삼으며 어려서부터 주님을 경외하며 진리의 말씀 안에서

    인격과 삶의 영성이 예수님을 닮아가도록, 다음 세대를 이끌어갈 우리 아이들이 하나님 나라에 보석처럼

    쓰임 받는 믿음의 일꾼들이 되도록 가정예배를 회복하길 기도합니다.

    ♣전능하신 하나님 아버지!!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을 감히 아버지라고 부를수 있는 특권을 주시고 또한 하늘의 유업을 이을 상속자가 되게 하시니 감사드립니다.
    이 땅을 살아가는 자녀들이 악하고 음란한 문화에 빠지지않도록 신앙으로 교육하게하시고 하나님의 무한하신 사랑과 신실하신 은혜가 담겨진 믿음의 유산을 상속할 수 있도록 인도하여 주옵소서.
    하나님이 주신 자녀들이 믿음의 일꾼이 되도록 매일 3분씩 가정예배 드리기를 결단하고 아버지가 제사장의 역할을 잘 감당하여 하나님 앞에 참으로 위대한 믿음의 명문 가문이 되도록 축복하여 주옵소서.
    하늘의 유업을 상속하시려고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아멘


    믿음의 명문가문 세우기.

    믿음의 명문가문을 말할 때, ‘아브라함-이삭-야곱의 하나님’이라는 표현을 떠올리게 됩니다. 할아버지대로부터 손자와 손녀에 이르기까지 3대를 계승하는 신앙, 3대가 조화를 이루는 신앙의 모습은 너무나 아릅답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교회도 3대가 아름답게 조화를 이루는 모습을 생각하면 참 복되다 생각됩니다. 어르신들은 힘이 없으시고 연로하시다고 위축될 필요가 없습니다. 어느 누구나, 소년시절을 지나 청장년에 이르고, 반드시 노년층에 이를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어떻게 하면, 그런 교회 공동체를 만들어 갈 수 있겠습니까? 분명한 것은, 그런 교회는 그러한 믿음의 계승이 잘 이루어지는 가정들이 먼저 세워져야 합니다. 교회는 또한, 부지런히 3세대를 말씀과 기도로 잘 양육하여서 믿음의 가정들이 잘 세워지도록 목회적 노력을 기울일 책임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가정에서 가장 어려운 부분이 교육문제이듯이 쉽지만은 않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부모자신이 먼저 말씀에 순종하는 신앙사상의 분명한 전환을 결단해야 합니다. 교회에 대한 분명한 자세를 가져야 합니다. 말세의 가장 우선된 현상이 ‘사람들은 자기를 사랑하고’에서 시작합니다. 지독한 이기적 개인주의의 생각으로는 결코 자녀손들과 함께하는 믿음의 가문을 세울 수 없습니다. 예전에는 학교, 스승, 부모에 의존하여 정보를 습득하고 삶의 지혜를 배웠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어쩌면 부모보다 훨씬 더 빠르게 정보의 유해 유무에 관계없이 더 많이 노출되어 살아가는 것이 자녀세대입니다. 의존적이 될 이유가 없어진 것입니다. 스스로 알아서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인터넷 구글님(?)이 제공하는 지식이 부모들의 지식에 비할 바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부모자신이 오직 자식사랑에만 목을 맨다면, 아쉬울 것이 없는 자식들은 교만하거나 부모앞에서 우상노릇을 할 것입니다. 많지도 않은 하나 둘 되는 자녀들에게 쏟아붓는 부모의 사랑은 가엾기가 한이 없습니다. 그러나 그 넘치는 사랑은 자식을 오히려 교만하게 하거나 부모를 마음대로 조종할 수 있는 우상의 자리에 이르게 하기가 쉽니다. 부모의 사랑을 자신의 방종의 조건으로 생각합니다. 내가 무슨 짓을 하고 살아도, 내 부모는 나를 사랑하기에 나를 어쩌지 못한다는 그 오만한 생각이 자식들을 폐인으로 몰아가는 것입니다.

    지나친 자식사랑의 자리에서 한걸음 물러서시기 바랍니다. 가장 먼저 100세에 낳은 자식이어도 하나님의 말씀이라면 포기하고 내려놓으며 모리아산으로 올라갈 수 있는 부모임을 스스로 증명해 보이시기 바랍니다. 우리 부모는 나를 사랑하지만, 하나님을 더 사랑하고, 하나님의 말씀에 아까울 것이 없는 분이시고, 오직 하나님앞에 생명을 걸고 순종의 삶을 산다는 것을 증명해야 합니다. 그것이 자녀로 하여금, 부모를 통해 하나님 경외하는 법을 배우고 하나님의 눈앞에서(코람데오) 그의 말씀을 두려워하며 살게 할 것입니다. 비록 부모가 세상을 떠난다 하더라도 하나님께 온전히 붙들린 존재가 되는 길입니다.

    눈에 보이는 내 교회를 생명바쳐 사랑하십시오. 교회를 우습게 아는 것은, 곧 하나님을 만홀히 여기는 일입니다. 자녀가 부모의 하나님 사랑을 가장 선명하고 분명하게 깨달을 수 있는 체험장이 주의 몸된 교회입니다. 역사가 100년이 넘는 미국교회를 매입해서 예배처소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교회 역사가 오래되다 보니, 가끔씩 부모의 장례를 치른 날 어릴 적 부모와 함께 출입하던 본 교회를 그리움에 찾는 자녀들이 있습니다. 천국에 계신 어머니가 그리운데, 그 어머니와 함께 천국을 노래했던 그 자리로 다시 회귀하는 애틋한 마음입니다. 어머니가 이 교회에서 구원의 길, 영생의 길을 준비하였음을 알게 될 때, 그 자녀들도 결코 신앙의 세계를 떠나지 않을 것입니다. 부모와 자녀가 함께 천국을 향해 가는 가장 선명하고 분명한 길은 바로 부모가 이 교회를 지독하게 사랑하는 존재가 되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예배를 사랑하십시오. ‘나의 사랑하는 책 비록 해어졌으나~.’ 어머니와 함께 부르며 듣던 그 찬송과 말씀의 향취는 어디에서 배어나옵니까? 예배가운데 성령의 임재가운데 드러나는 것입니다. 남녀노소, 지식유무를 불문하고 예배의 자리에는 차별없이 부어주시는 하늘의 은혜가 머무는 장소가 됩니다. 3대가 함께 예배하며 한 말씀을 듣고 새기며 은혜를 경험하는 가정, 반드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을 각기 만나는 새로운 믿음의 명문가문의 탄생을 목도하며 누리게 괼 것입니다.






    대한민국 상위 5% 이상 : 은수저

    자산 10억 이상, 부모가 중소 사업가 혹은 대기업 차장 부장급, 개천에서 용나서 돈 모은 전문직, 소형 건물주 등

    대한민국 상위 5%, 흙수저가 보기엔 금수저랑 별 차이가 없는 계급

    금수저와 자녀가 자라는 환경은 큰 차이는 없음

    다만 금수저는 강남 8학군에서 공부하고 은수저는 우수한 학군인 목동, 수성구 등에서 공부하는 차이


    자녀에게 해주는 것은

    우수한 교육, 우수한 환경, 해외여행, 대학 졸업시까지 등록금+공부에 부족함이 없는 용돈, 학원, 취준

    자녀는 진짜 지적장애급 아니면 서울 괜찮은 대학 이상 졸업하고 대기업 가는경우가 많음

    근데 은수저급 자녀들중에 의외로 부모 재력에 비해 공부실력이 형편없어서 인생 대충사는 애들도 꽤 있음

    그래도 뭐 부모 사업 물려받고 빽으로 괜찮은 곳 들어갈 정도는 되니 부럽다...

    금수저와 은수저의 차이는 결혼하면서 부터임

    금수저는 결혼할때 부모에게 서울에 평타치는 집을 선물로 받지만

    은수저는 값이 좀 싼 일산, 김포와 같은 3~5억대 신도시의 집을 받는 경우가 많음.

    부모의 경우 금수저만큼 혹은 그렇지 않더라도 노후 대비할 돈은 충분하기에

    자식에게 장애가 되지않고 자기 손자 손녀한테 용돈 두둑히 줌


    대한민국 상위 10% 이상 : 동수저

    자산 5억 이상, 부모가 조그만 사업을 하고있거나 중소기업 임원급, 개천에서 용나서 돈 모은 대기업,중견기업 차장 부장급 등

    의외로 대한민국에 순 자산이 5억 이상 있는 경우가 별로 없다.

    사실 흙갤러들 입장에선 부모가 이정도 자산만 있어도 부러워할거다

    보통 이정도 재산만 있어도 금수저 드립치는게 흙갤러들

    흙수저가 자기인생을 갈아서 노력하면 도달할 수 있는 최대의 계급이다.

    (천부적인 재능 발현되어서 은수저, 금수저되는 예외적인 경우 제외)


    자녀에게 해주는 것은 금수저 은수저보단 모자라는 편

    무난한 교육, 무난한 환경, 가끔 해외여행, 대학 졸업시까지 등록금+취준비용은 대주나 용돈은 많지 않고 학원 혹은 과외도 알짜배기로 1~2개만 다님

    자녀 결혼시 집은 못해줘도 억단위의 돈을 보태주는 경우가 많다.

    근데 자녀가 인생 대충 사는 애들이 많은 부류가 딱 동수저부터임

    동수저부터는 공부를 안하면 자식대에서 돈 날리는 경우도 많다.


    보통 어떤 사람이 연예인이 되거나 성공을 하거나 할때 최소의 마지노선 환경이 동수저 (상위 10%)임

    일례로 성공한 사람들 부모 재산 보면 최~~소한 동수저 이상인 경우가 95%다.


    대한민국 상위 50% 이상 : 쇠수저

    자산 1억 이상, 부모가 그냥 밥벌어먹고 사는 일을 하여 돈을 모아 신도시급에 집 하나 갖고있는 경우임

    부모가 정년 퇴직하면 위태로울수도 있는 경우이지만 자식에게 손을 벌리지 않는 경우가 많음

    그냥 부모 자신이 늙어도 계속 일을 하려고 하지.

    확실히 쇠수저부턴 여유롭지 않긴하다.


    자녀에게 해주는 것은 동수저랑 비교하면 확연히 차이난다.

    굶지는 않을 환경, 평범한 교육, 가~끔 해외여행, 대학 등록금은 입학금 혹은 한두학기 정도는 지원 해주거나 졸업시까지 지원해주거나 아애 지원을 안해주거나 여러 케이스가 있고, 용돈도 많지않고 학원은 필요한 경우 1개정도 다님.

    자녀가 본격적으로 결혼을 포기하는 계급. 왜냐면 요즘 신도시급 집값도 3~4억인데

    부모가 집값을 대주지 않는 이상 마련하기 아주 어렵거든


    보통 자조섞인 목소리로 쇠수저를 물고 태어난 애들이 자기들도 흙수저라고 하기도 함.

    근데 엄연히 말하면 쇠수저와 흙수저는 차이가 크다. 아래에 설명함


    대한민국 상위 50% 미만 : 흙수저

    자산 1억 미만 (보통 빚을 빼면 5천만도 없는 경우가 많다), 부모가 일용직 혹은 알바와 다를바 없는 비전문적인 일, 부모가 집이 없거나 집 대출이 많이남음

    부모가 자녀가 어릴적부터 본인 일에 정착하지 못하고 직종 바꿔가며 이리저리 왔다갔다해서 전문성이 없음.

    집에 돈때문에 월세가 밀리는 경우 많고 이사를 년마다 다니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학교도 자주 전학을 감.


    자녀에게 해주는 것은 거의 없음

    굶는 환경, 뒤떨어지는 교육, 해외여행 혹은 제주도 여행 불가능, 놀이공원과 같은 유원지에 갈 일 1도 없음, 당연히 학원은 언감생심이고 대학 등록금은 무조건 학자금 대출 받아서 가야함. 그나마 요즘은 국가장학금이라는게 있어서 흙수저에겐 반값 등록금이 실현되었지만 나 20살 지잡대 다닐땐 부모가 등록금 대주고 그런거도 일절 없어서 대학 가려면 등록금을 전부 대출 받았어야함. (내가 그래서 20살 지잡대 1개월 다니고 바로 자퇴함) 추후 20중반에 서울 4년제 공대 다니면서도 내가 내돈으로 등록금 마련해서 학교 다녔음. 그나마 국가장학금+교내장학금+성적장학금 덕에 학교 다녔지 안그랬으면 졸업도 못했을듯.


    중고딩때 용돈은 아주 최소로 받음 (한달 용돈 2만원 남짓), 학원또한 언감생심이라 사실 인강밖에 답이 없음.

    노량진 공시생들 불쌍하게 방송에 나오지만 적어도 공시생은 최소 쇠수저, 동수저급은 되는 경우가 많기때문에 난 아애 공시쪽으론 쳐다보지도 않음. 결과적으로 공대 졸업해서 취업했으니 괜찮게 풀리긴 했지만...


    자녀가 결혼을 포기해야만 하는 계급임 흙수저가 결혼하면 그것은 리얼 재앙이다.

    난 알바, 물류창고, 공장노가다, 숙식노가다 하면서 그런 결혼한 흙수저 30~40대를 너무 많이 봤는데

    다들 인생 존나 우울하게 살더라. 흙수저 남 + 흙수저 녀가 합치면 진짜 노답인 케이스를 많이 봤음.


    흙수저는 빨리 돈벌든 늦게 돈벌든 문제가 많음

    내 친구도 흙수저인데 비교적 이른나이에 군대+전문대 졸업하고 20초중반에 취업했지만 지금까지 모은돈 없음

    왜냐면 부모가 진 빚을 계속 값아나가느라 돈을 모을수가 없음.

    부모가 자녀에게 장애물이 되기 시작하는게 흙수저임


    금수저 은수저 동수저 쇠수저 대부분 부모가 자식의 돈에 간섭하고 뜯어가지 않는데 반해서

    흙수저는 그런것을 뜯어가는거에 당연시하고 미안한 감정이 없음.

    그게 흙수저와 비 흙수저의 차이인듯.

    난 그래서 지금 결혼도 포기하고 혼자 살 준비를 하나하나 하려한다...




    구약에서 예언된 메시야는 요셉과 마리아 가정의 아들로 오셨습니다.
    물론 생물학적인 관계에 의해서 태어난 아들이 아니라 성령으로 잉태된 것이었습니다.
    그렇지만 표면적으로는 목수 요셉의 아들입니다.
    그러므로 메시야를 기다리는 유대인들은 그들이 대망하며 기다리는 메시야가 목수의 아들로 이 세상에 등장하는 것을 기대하지 않았습니다.
    메시야로 오실 그 사람은 고귀한  신분 즉 왕, 제사장, 선지자와 같은 혈통에서 태어나야 한다고 기대했기 때문에 예수님을 배척했습니다.

    노골적인 배척인가 아니면 은근한 배척인가?



    익숙함 속의 거절, 은혜를 가로막는 마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우리가 함께 묵상할 본문은 마태복음 13장 53절부터 58절까지입니다. 이 본문은 예수님께서 천국 비유들을 마치시고 고향 나사렛으로 돌아가신 후, 그곳에서 어떤 반응을 받으셨는지를 보여주는 장면입니다. 구속사의 정점이신 예수 그리스도, 천국의 말씀을 전하시고 수많은 기적을 행하신 그분조차도, 가장 가까운 이들로부터 인정받지 못하셨다는 이 장면은 오늘 우리에게 매우 중요한 교훈을 줍니다.

    은혜는 어디에서 거절당합니까? 은혜는 낯선 이들보다, 오히려 가장 익숙한 관계 속에서 더 자주 거절당합니다. 오늘 본문은 바로 그런 현실을 보여줍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하나님 나라의 진리가 어떻게 우리의 편견과 익숙함 속에서 가려지는지를 살펴보고, 은혜를 향한 우리의 마음을 다시 점검해 보길 원합니다.

    천국 말씀을 마치시고(마 13:53)

    본문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예수께서 이 모든 비유를 마치신 후에 그 곳을 떠나서"(마 13:53). 여기서 '이 모든 비유'는 마태복음 13장에서 주신 천국에 대한 연속된 비유들을 가리킵니다. 씨 뿌리는 자, 가라지, 겨자씨, 누룩, 감추인 보화, 진주, 그물, 서기관에 대한 비유까지 — 이 모두는 천국의 실체를 다양한 방식으로 조명하며, 듣는 자의 마음과 태도를 점검하게 만드는 말씀들이었습니다.

    그 모든 말씀을 마친 예수님은 고향으로 향하십니다. '그 곳을 떠나서'라는 표현은 단지 공간적 이동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이는 공적인 사역에서 개인적인 관계로, 넓은 무리에서 좁은 공동체로 시선이 옮겨지는 전환을 상징합니다. 말씀을 선포하신 예수님께서, 이제 가장 가까운 이들 앞에 서십니다. 그러나 그 앞에 놓인 것은 경탄이 아닌 의심이었습니다.

    고향에서 가르치시니(마 13:54)

    "고향에 오사 그들의 회당에서 가르치시니 그들이 놀라이르되 이 사람의 이 지혜와 이런 능력이 어디서 났느냐 하고"(마 13:54). 예수님은 나사렛 회당에서 말씀을 가르치셨습니다. 이는 단지 예배의 장소가 아니라, 유대인의 삶과 전통이 집약된 곳입니다. 그곳에서 예수님은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셨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은 놀랐습니다.

    그러나 그 놀람은 경외가 아니라 의혹이었습니다. 그들의 마음은 이미 가득 차 있었습니다. '이 사람이 누구냐?' 하는 물음은, '우리가 다 아는 사람 아니냐?'라는 편견에서 시작된 것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지혜와 능력을 인정하기보다는, 그 출처를 의심했습니다. 이것은 오늘날 우리가 복음을 대할 때 흔히 겪는 태도와 비슷합니다. 익숙함은 놀라움을 삼켜버리고, 전능하신 하나님의 현존조차도 일상의 피로감 속에 희미해질 수 있습니다.

    우리는 그의 가족을 알고 있지 않은가(마 13:55-56)

    "이는 그 목수의 아들이 아니냐 그 어머니는 말리아라 하지 않느냐 그의 형제들은 야고보, 요셉, 시몬, 유다라 하지 않느냐 그의 누이들은 다 우리와 함께 있지 아니하냐 그런즉 이 사람의 이 모든 것이 어디서 났느냐 하고"(마 13:55-56). 이 구절은 예수님의 인간적 배경을 낱낱이 언급합니다. 가족들의 이름, 직업, 출신 배경까지 그들은 모두 알고 있다고 말합니다.

    이러한 말은 단지 정보의 나열이 아닙니다. 그것은 곧 예수님의 정체성과 권위를 축소하려는 시도입니다. '그 목수의 아들', '우리와 같은 집안의 사람', 이 표현들 속에는 하나님의 아들을 인간의 틀 속에 가두려는 마음이 담겨 있습니다.

    그러나 복음은 언제나 우리의 틀을 깨는 방식으로 다가옵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우리의 이해를 초월하고, 때로는 너무 익숙해서 오히려 보지 못하는 형태로 우리 곁에 옵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주시는 선물을 때로 너무 평범하다는 이유로 지나쳐버립니다.

    그들이 예수를 배척한지라(마 13:57-58)

    결국 그들의 반응은 분명해집니다. "그들이 예수를 배척한지라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시되 선지자가 자기 고향과 자기 집 외에서는 존경을 받지 않음이 없느니라 하시고 그들의 믿지 않음을 인하여 거기서 많은 능력을 행하지 아니하시니라"(마 13:57-58).

    '배척했다'는 말은 헬라어로 '스칸달리조(skanalizō)'로, 걸려 넘어지게 하다, 걸림돌이 되게 하다의 의미입니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있어 걸림돌이 되셨습니다. 그분의 거룩함, 그분의 능력이 그들의 기준과 기대에 부합하지 않았기 때문에, 오히려 장애물이 되었던 것입니다.

    헬라어 스칸달리조 (σκανδαλίζω, skandalizō)는 신약 성경에서 자주 등장하는 단어로, 그 의미는 단순히 ‘실족시키다’ 또는 ‘걸려 넘어지게 하다’를 넘어, ‘믿음의 길에서 떠나게 만들다’, ‘영적 장애물을 일으키다’, ‘죄에 빠지게 유도하다’는 깊은 의미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이 단어의 어근인 스칸달론 (σκάνδαλον)은 원래 동물의 덫에 있는 ‘올가미’나 ‘걸림돌’을 뜻하며, 누군가가 걸려 넘어지게 만드는 장치를 가리킵니다. 이 말이 신약 성경에서 사용될 때는 단순한 외적인 장애물 이상의 개념으로, 하나님의 뜻을 방해하고, 진리로부터 마음을 돌리게 만드는 내적 작용까지 포함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마태복음 18:6에서 “누구든지 나를 믿는 이 작은 자 중 하나를 실족하게 하면…”이라고 하시며, 스칸달리조를 하나님 나라를 방해하는 가장 심각한 죄로 지적하십니다. 또한 마가복음 4:17에서는 환난이나 박해로 인해 ‘실족하는 자들’이 언급되며, 이는 믿음이 뿌리내리지 못한 상태에서 생기는 영적 위기를 의미합니다.

    마태복음 13:57에서도 사람들은 예수님의 신성을 인정하지 못하고 “그를 배척했다”고 나오는데, 이 '배척하다' 역시 스칸달리조입니다. 즉, 예수님의 본질이 그들의 기대와 맞지 않았고, 오히려 그것이 그들에게는 걸림돌이 되어 믿음의 문을 닫아버린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스칸달리조는 외적인 장애물이 아니라, 복음을 받아들이지 못하게 하는 내면의 반응, 곧 불신, 교만, 편견에서 비롯된 반응이며, 이는 오늘날 우리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되는 영적 경고입니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그들의 '믿지 않음'이 예수님의 능력을 제약했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의 능력은 무한하지만, 그것이 우리 삶에 임하기 위해서는 믿음의 통로가 필요합니다. 믿음 없는 공동체는 하나님의 기적을 제한합니다. 믿음 없는 가정은 은혜의 통로를 막습니다. 하나님은 억지로 임재하지 않으십니다. 믿음이 있는 자리를 찾으시고, 거기서 일하십니다.

    마무리 묵상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본문은 우리에게 매우 개인적인 질문을 던집니다. 나는 예수님을 얼마나 '익숙한 존재'로 여기고 있는가? 주님의 말씀이 반복될수록, 그 감동은 줄어들고 있지는 않은가? 내 마음속의 익숙함, 편견, 자기 기준이 오히려 하나님의 은혜를 가로막는 걸림돌이 되고 있지는 않은가?

    예수님은 오늘도 우리 가운데 말씀하시고 계십니다. 그분은 나사렛 사람처럼 평범한 모습으로 우리 일상 속에 찾아오십니다. 그러나 그 속에 담긴 은혜는 결코 평범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그 은혜를 믿음으로 맞이할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합니다.

    고향에서 거절당하신 예수님의 모습은, 오늘 우리 삶 속에서도 반복됩니다. 그러나 우리가 믿음의 눈을 들어 그분을 바라볼 때, 그 은혜는 다시 살아 움직이기 시작할 것입니다. 익숙함을 내려놓고, 다시 첫사랑의 마음으로 예수님을 맞이하는 우리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아멘.


    고향에서 배척받은 예수님(마태복음 13:53-58)

    마지막 부분은 비유를 마치시고 고향으로 돌아갔지만 거절 당하신 이야기를 담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하나님의 나라로 본다면 다시 감추어진 것이나 다름 없습니다. 버림 받은 예수님은 곧 버림 받은 하나님의 나라와 같은 맥락이라할 수 있습니다. 이제 본문 안으로 들어가 봅시다.

    고향에서 배척받은 예수님, 하나님의 나라가 거절당할 때 일어나는 일들

    마태복음 13장 53절부터 58절은 예수님께서 천국 비유들을 마치신 후, 고향 나사렛으로 돌아가신 장면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곳에서 예수님은 권능 있는 말씀과 놀라운 기적을 행하셨지만, 사람들은 오히려 예수님을 배척하고 의심하였습니다. 이 본문은 하나님의 나라가 우리 현실 가운데 어떻게 받아들여지며, 또 어떻게 거절당하는지를 보여주는 구속사적 교훈이 담긴 장면입니다. 우리는 이 말씀을 통해 하나님의 계시 앞에서 인간이 얼마나 완악해질 수 있는지를 깊이 있게 묵상하게 됩니다.

    1. 고향에서 배척받으신 예수님: 익숙함이 가져온 불신앙의 비극 (마 13:53–56)

    “예수께서 이 비유들을 마치신 후에 거기를 떠나 고향으로 가사 그들의 회당에서 가르치시니 그들이 놀라 이르되 이 사람의 이 지혜와 이런 능력이 어디서 났느냐”(13:53–54)

    예수님은 천국 비유들을 마친 후, 고향 나사렛으로 돌아가십니다. 고향은 예수님께서 어린 시절을 보낸 곳으로, 사람들은 그분의 가족과 배경을 잘 알고 있던 이웃들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처음에는 놀랐지만, 곧 그 놀라움이 불신으로 바뀌었습니다. "이 사람은 목수의 아들이 아니냐? 그의 어머니는 마리아, 형제들은 야고보와 요셉과 시몬과 유다 아닌가? 그의 누이들도 다 우리와 함께 있지 아니하냐?"(13:55–56)

    그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통해 드러난 신적 지혜와 능력을 보고도, 그것을 받아들이지 못했습니다. 그 이유는 예수님의 출신과 익숙함 때문이었습니다. 익숙함은 때로 신앙을 무디게 만듭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메시아일 수 없다고 생각했고, 그 결과로 하나님의 나라의 임재를 받아들이지 못했습니다.

    이 장면은 단순히 나사렛 사람들의 완고함을 비판하는 데 그치지 않습니다. 구속사적으로 볼 때, 이 장면은 구약 시대 선지자들이 백성에게 외면당했던 모습의 반복이며, 예수 그리스도께서 세상에 오셨지만 세상이 그를 영접하지 않은 ‘거절당한 메시야’의 서사를 보여주는 중요한 사건입니다. 요한복음 1장 11절은 이를 이렇게 요약합니다.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하지 아니하였으나.”

    2. 구약 선지자들의 배척과 예수님의 거절: 계시를 거부하는 인간의 본성

    예수님의 나사렛 배척 사건은 성경 전체에서 반복되어온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인간의 반응과 밀접히 연결되어 있습니다. 구약에서는 하나님의 선지자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전할 때마다 백성들에게 거절당했습니다.

    • 모세는 출애굽 여정 내내 끊임없는 원망과 배척을 받았으며(민 14:2–4),
    • 사무엘은 백성들이 눈에 보이는 왕을 요구하며 그를 외면했고(삼상 8:7),
    • 엘리야는 아합과 이세벨에게 쫓겨 생명을 위협당했습니다(왕상 19:10),
    • 예레미야는 눈물의 선지자라 불릴 만큼 끊임없는 조롱과 매질을 당했고(렘 20:1–2),
    • 에스겔은 듣지 아니할 백성에게 말씀을 전해야 했습니다(겔 2:5–7).

    이러한 배척은 단지 선지자 개인의 고난이 아니라, 하나님의 계시에 대한 집단적 거부로 이해해야 합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뜻을 전했지만, 백성들은 눈앞의 현실과 고정된 기대를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이것이 반복적인 거절의 구조이며, 예수님의 사역에서도 동일하게 나타납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오신 ‘계시의 완성’이자, 구약 선지자들의 메시지를 성취하신 분이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그분을 거부했습니다.

    이로써 우리는 ‘예수님의 배척’이 우연하거나 단회적인 사건이 아니라, 인류가 일관되게 하나님의 말씀을 거부해왔던 구속사적 현실 속에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3. 하나님의 나라가 거절당할 때: 믿음 없음의 영적 결과 (마 13:57–58)

    “그들이 예수를 배척한지라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시되 선지자가 자기 고향과 자기 집 외에서는 존경을 받지 않음이 없느니라 하시고 그들이 믿지 않음으로 말미암아 거기서 많은 능력을 행하지 아니하시니라”(13:57–58)

    ‘배척하다’는 헬라어 원어는 ‘스칸달리조’로, 이는 ‘걸림돌이 되다’, ‘믿음의 방해물이 되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존재 자체가 그들에게 믿음의 걸림돌이 되었던 것입니다. 그들은 눈앞에 있는 하나님의 나라의 임재를 스스로 거부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선지자는 고향에서 환영받지 못한다’는 말씀으로 답하시며, 자신이 겪는 고난이 이미 예언된 것이었음을 드러내십니다.

    예수님은 고향에서 ‘많은 능력을 행하지 않으셨다’고 합니다. 이는 예수님의 능력이 믿음에 의존되어 있다는 뜻이 아니라, 믿지 않는 이들에게 은혜를 강권적으로 강요하지 않으시는 하나님의 섭리적인 방식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강제로 임하지 않습니다. 오직 믿음으로 반응하는 자들에게, 그 은혜가 역사합니다.

    이 본문은 믿음 없음을 가볍게 여기지 않도록 경고합니다. 하나님은 그분의 아들을 세상에 보내셨고, 그 아들을 통해 천국이 임했지만, 많은 사람은 그 나라를 보지 못합니다. 그 이유는 단순히 무지가 아니라, 의도적인 거절입니다. 이 거절은 종말론적으로도 심각한 결과를 가져옵니다. 믿음 없이는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믿음은 단지 복을 받기 위한 조건이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에 참여하는 자의 존재 방식입니다.

    4. 종말론적 의미와 구속사적 통찰: 배척받은 메시야와 남은 자의 신앙

    이 본문은 종말론적 긴장 속에서 읽혀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고향에서 거절당하셨다는 사실은 하나님의 나라가 이 세상에서 어떻게 받아들여지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지표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권능으로 오지만, 그 권능은 믿음을 통해서만 드러납니다. 이는 마지막 날에도 동일합니다. 하나님의 심판 날에도, 믿음으로 반응한 자들만이 그 나라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또한 이 본문은 구속사적 흐름에서, 예수님의 사역이 실패가 아니라 하나님의 계획 속에 있는 정해진 수순임을 보여줍니다. 선지자들은 늘 거절당했고, 하나님의 말씀은 언제나 환영받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그 가운데서도 하나님은 남은 자를 통해 구속사를 이루어 가셨습니다. 예수님을 배척한 사람들 가운데서도, 결국 복음을 받아들인 자들이 있었습니다. 믿음 없는 고향 사람들 가운데서도, 복음을 품은 자들은 구속사의 자리에 있게 됩니다.

    우리는 이 말씀을 통해, 지금 우리 안에도 예수님을 익숙하게 여겨 무감각해진 신앙의 태도가 있는지를 살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늘 우리 곁에 있지만, 그것이 우리에게 능력으로 임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말씀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의 믿음 없음 때문입니다. 익숙함 속에서 거절당한 예수님의 모습은 오늘 우리 안에서도 반복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오늘도 믿음을 요구하시며, 자신의 아들을 받아들이는 자에게 하나님의 나라를 맡기십니다.

    결론

    마태복음 13장 53-58절은 예수님께서 고향 나사렛에서 배척당하신 장면을 통해, 하나님의 나라가 사람들의 마음에 어떻게 받아들여지며 동시에 어떻게 거절당하는지를 보여줍니다. 익숙함은 믿음의 걸림돌이 되었고, 결국 예수님은 거기서 많은 능력을 행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러나 이 거절은 구약 시대 선지자들이 겪었던 고난의 반복이며, 동시에 예수님의 구속사적 사명이 인간의 거절 속에서도 계속 진행됨을 보여줍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믿음을 통해서만 임하고, 그 믿음은 종말론적 구원의 열쇠입니다. 우리는 오늘도 말씀 앞에 서서, 그 말씀이 우리 안에서 능력으로 역사하는가를 점검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아들을 배척했던 나사렛의 실패가, 우리에게는 은혜를 향한 각성으로 다가오길 소망합니다.








    10월 31일(금) 마가복음 1-3장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한 가운데 일어서라(3:3)

    예수께서 손 마른 사람에게 이르시되 한 가운데 일어서라.
    Jesus said to the man with the shriveled hand, "Stand up in front of everyone.

    3:5
    저희 마음의 완악함을 근심하사 노하심으로 저희를 둘러 보시고 그 사람에게 이르시되 네 손을 내밀라 하시니 그가 내밀매 그 손이 회복되었더라.
    He looked around at them in anger and, deeply distressed at their stubborn hearts, said to the man, "Stretch out your hand." He stretched it out, and his hand was completely restored.

    사람은 누구나 장점(長點. pros)과 단점(短點. cons)을 갖고 있습니다.
    장점은 당당하게 드러낼 수 있지만 단점은 웬만하면 드러내지 않고 감추려고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방식은 일반적인 사람들의 성향과 전혀 다르게 단점을 드러내게 하셨습니다.

    손 마른 사람에 대해서 누가복음에서는 오른 손이라고 명확하게 밝히고 있습니다.
    유대 전통에 의하면 손 마른 사람의 직업을 목수 또는 석수라고 합니다.
    만일 목수이든 석수이든 오른 손은 매우 중요한 기능을 합니다.
    그런데 오른 손이 제 기능을 할 수 없다면 생계에 심각한 타격(打擊)을 갖게 됩니다.
    그 사람의 단점을 미리 아시고 그의 아픔을 치유하시려는 목적에 의해서 단점을 드러내게 하셨습니다.
    이러한 것이 예수님의 방식이었습니다.

    예를 들면 나사로의 무덤 앞에서 돌문을 옮기라고 하셨습니다.
    12년 동안 혈루증을 잃던 여인에게 누가 내 옷에 손을 대였느냐? 하시며 그 여인을 군중들 가운데서 드러내셨습니다.
    38년동안 중풍병자에게 누워 있던 그 자리를 들고 가라고 하셨습니다.
    오른 손 마른 사람에게 그 손을 내미랄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으로부터 치유를 받으려면 솔직해야 합니다.
    가장 약하고 부끄럽고 드러내기 싫은 것을 노출시켜야 합니다.
    그래야 주님의 치유하시는 손길을 느낄 수 있습니다.
    회개한다는 것이 곧 나의 단점과 약점 그리고 부끄러운 모든 것을 드러내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한가운데 일어서라(마가복음 3:1~6)

    어떠한 일이든 근본 목적에서 벗어나면 그 의미를 상실하고 맙니다.

    처음에 가졌던 목적이 다른 것으로 바뀌게 되면, 설사 외형적으로는 여전히 같은 것으로 남아있을지언정, 그 내용과 의미는 완전히 달라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무슨 일이든지 처음에 가졌던 그 목적으로 일관해야 합니다.

    가령 우리가 선한 목적을 가지고 무슨 일을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중간쯤에서 마음이 변하여 그 일로 돈을 벌고자 합니다. 하나님을 위하는 마음으로 시작하여 끝내는 나를 위하는 마음으로 돌아가버린 것입니다.

    일은 엄연히 같습니다마는 이제는 선행도 아니요 하나님을 위하는 일도 아니라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어떠한 일이건 목적이 분명해야 되고, 그 목적이 변질되어서는 안됩니다. 어느 경우고 그렇습니다. 주려고 마음먹었으면 주기만 해야 합니다. 어느 순간에라도 받고자 하는 마음이 들면 안됩니다. 사랑하기로 했으면 끝까지 사랑할 것입니다. 이제와서 사랑받는 데에 신경을 써서는 안된다는 말입니다. 어떠한 일이든, 어떠한 선행이든 애초의 목적에서 떠나서는 안됩니다. 시작과 끝이 같아야만 그 일의 참의미가 살아나는 것입니다. 또한 목적이 아무리 좋아도 방법이 잘못되어서는 안됩니다. 제아무리 선한 목적이라도 방법이 잘못되었으면 결과 역시 잘못되게 마련입니다.

    더욱이 형식주의에 빠져서는 안됩니다. 숫자는 맞게 채워서 형식적으로는 됐습니다만 내용적으로는 이루어진 것이 없습니다. 안될 일입니다.

    특별히 하나님의 일이 그렇습니다. 우리는 무엇이건 하는 체만 했습니다. 실상은 한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책망하신 말씀 가운데도 '하와 운향과 채소 같은 것은 십일조로 바치면서 중요한 것은 바치지 않는다'라는 것이 있습니다. 숫자만 맞춘 것입니다. 양을 십일조로 드린다면, 예를 들어 열 마리가 있을 경우 그 중 가장 좋은 놈을 골라서 깨끗한가, 흠은 없는가 확인한 다음에 바쳐야 진정한 십일조가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숫자는 맞습니다. 열에 하나를 바쳤으니 십일조가 됩니다마는 그 중 가장 나쁜 놈, 병든 놈을 바친 것입니다. 바치기는 했습니다마는 진정 바친 것이 아닙니다. 이것이 바로 형식주의입니다. 형식주의만큼 괴로운 것도 없습니다. 가정에서도 남편을 위하여 수고하든, 자식을 위하여 수고하든, 아내를 위하여 수고하든 마음은 없고 형식만 남았습니다. 참으로 피곤한 일입니다. 본인은 물론 상대방까지 그렇습니다. 아무 의미도 없는 일입니다.

    유대사람들의 종교 의식, 특별히 안식일을 지키는 것이 그러했습니다. 목적이 변하고, 방법이 잘못되고, 형식주의에 빠졌습니다. 이 세 가지가 합쳐져서 엉뚱한 방향으로 치닫고 말았습니다. 이제는 안식일도 아닙니다. 아무 의미도 없어지고 만 것입니다. 여기에서 예수님의 행적을 생각해보십시다. 예수님께서 병 고치시는 것, 복음을 전하시는 것이 얼마나 아름다운 일입니까? 오늘이라도 어떤 사람이 이처럼 귀한 일을 하고 다닌다면 참으로 좋겠습니다마는 이상하게도 선한 일에는 비방이 따릅니다. 비방을 받지 않는 일이 없습니다. 비방 받지 않고 선한 일을 하리라고는 아예 생각하지 마십시다. 예수님께서도 비방을 받으셨는데 하물며 우리 같은 사람이야 말해 무엇하겠습니까? 비방 받을 것이 당연합니다. 선한 일을 좀 하는 것 같더니 이런저런 좋지 않은 말들이 나오자 얼른 그만두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안 하면 그만이지' 합니다. 언제 내가 선한 일이 무엇인지 알기나 했습니까? 예수님께서는 평생 선한 일을 하시고 십자가에 죽으셨습니다. 우리는 그 예수님을 믿고 있는 것입니다.

    선한 일 하고 좋은 말 들으려는 생각은 아예 마십시다. 좋은 말 듣고자 한다면 처음부터 시작하지 말아야 합니다. 선한 일에 반드시 비방이 따르게 마련입니다. 지금이라도 구제를 한다, 봉사를 한다 해보십시오.

    당장에 이런 말들이 나올 것입니다. 살림도 제대로 못하면서 나다닌다는 둥, 돈도 없는 사람이 돈 쓰고 다닌다는 둥, 좋은 일 좀 해서 국회의원에라도 출마할 모양이라는 둥, 별아 별소리가 다 나옵니다. 더구나 경건한 체한다. 잘 믿는 체한다는 소리까지 듣게 됩니다. 여러분, 비방이 따르지 않는 일이 없습니다. 심지어 권세의 예수님께서도 비방을 받으셨습니다. 복음을 전하시고, 병을 고쳐주심에도 비방을 받으셔야 했습니다.

    비방 받아야 할 이유라도 있었습니까? 그런데도 비방을 받으셨음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또한 선한 일이라고 하여 만사가 합리적이지는 않습니다. 언제나 반드시 무리가 따릅니다. '소가 없으면 외양간이 깨끗하다'라는 말이 있지 않습니까? 소를 먹이려면 외양간이 있어야 하고 외양간이 있으면 냄새가 나는 것이 당연한 일입니다. 무슨 일에든 좋은 일이 있는가 하면 다른 한편으로 어려운 일이 따른다는 말입니다. 이 어려움을 무릅쓰고 나아가야 합니다. 밀고 나아가야 합니다마는 하나같이 피하려고만 합니다. 이쪽도 좋고 저쪽도 좋게만 하려고 해보십시오. 아마 모르긴 해도 다 되기가 어려울 것입니다. 남녀 관계에서 그렇다면 시집 장가 갈 사람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두 여자가 나를 좋아하는데 결혼하려면 부득불한 사람을 버려야 합니다. 더구나 내가 두 사람 모두를 좋아할 수도 있는 문제입니다. 이 사람은 인물이 잘났고, 저 사람은 학벌이 좋고-장․단점이 다 다르다는 말입니다. 어느 쪽 하나는 포기해야 합니다. 결혼식이라면 다들 좋아합니다 마는 생각만큼 좋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 일로 적어도 몇 사람이 울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짝사랑하던 사람이 숨어서 울고 있을 수도 있습니다. 모두에게 좋게 할 수는 없습니다. 부득불 큰 것을 놓고 그쪽으로 밀고 나가는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병 고치시는 일, 이 얼마나 귀한 일입니까? 그런데 그날이 바로 안식일이었습니다. 안식일에 병을 고치셔서 시비가 된 것입니다.

    누가복음 13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십팔 년 동안 귀신들려 있는 여자를 고치시자 회당장이 안식일에 병 고침을 분 내어 하는 말이 나옵니다. "일할 날이 엿새가 있으니 그 동안에 와서 고침을 받을 것이요 안식일에는 말 것이니라(14절)."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계속하여 안식일에도 병을 고치십니다. 어떤 사람은 예수님께서 이 문제와의 충돌만이라도 피하셨더라면 적어도 십자가에 돌아가시지는 않았을 거라고 말합니다. 아무튼 예수님께서는 안식일 문제로는 한 발짝도 양보하시지 않으셨습니다. 그렇다고 이스라엘사람들이 아예 병 고치는 일을 하지 말라고 한 것도 아닙니다. 당장 고치지 않으면 죽게 될 사람조차 그냥 두라고 하지는 않았습니다. 인도주의적인 차원에서 그것은 죄로 치부하지 않을 것입니다. 다만 당장 고치지 않아도 죽지 않을 사람, 곧 오늘의 본문에 등장한 손 마른 사람쯤이야 한 달 뒤에 고친들 그 사이에 죽기야 하겠습니까? 어차피 오래 앓아온 환자인데 몇 달 더 불편하게 지낸다고 대수겠습니까? 하필이면 안식일에 고쳐서 말썽을 일으킬 것이 무엇입니까?

    이렇게 보면 예수님은 참 답답한 분이십니다. 구태여 충동할 필요가 있었던 것입니까? 요즘도 좋은 일을 하려면 꼭 그렇습니다. '굳이 힘들이면서 왜 하느냐'고 말들이 많습니다. 사실 안 하면 그만입니다. 저도 목사된 입장에서 뭣 좀 하려고 하면 꼭 난관에 부닥칩니다. 좋게 좋게 하려고만 하면 잘 안됩니다. 그렇다고 안 하면 영영 아무 일도 못하는 것입니다. 우리 교회 예배당을 증축할 때에도 참 문제가 많았습니다. '왜 자꾸만 증축하려고 하느냐'하고 많은 사람들이 제동을 걸고는 했습니다.

    그러나 보십시오. 지금도 예배당이 차고 넘쳐서 걱정입니다 마는 그나마 증축하지 않았더라면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까짓 것 안 하면 그만이지'하고 포기하면 저로서는 편합니다마는 밀고 나가려니까 문제가 됩니다. 사실 교인이 많으면 힘들기만 합니다. 소가 없으면 외양간도 깨끗하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세상이 다 그러합니다. 예수님께 한번 물어보십시다.

    왜 안식일에까지 병을 고치시면서 말썽을 일으키셨습니까? 가만히 쉬면서 안식일을 지키셨더라면 아무 일도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양보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병고치신 예는 한두 번이 아닙니다.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 것만 일곱 번입니다. 마가복음 1장에서는 귀신들린 사람과 베드로의 장모를, 3장에서는 손 마른 사람을 고쳐주십니다. 그리고 요한복음 5장에서는 베데스다 연못가에서 38년이나 누워 있던 환자를 고쳐주십니다. 며칠 후에 고쳐주셔도 될 일을 하필이면 안식일에 고쳐주셔서 말썽이 됩니다. 9장에서는 날 때부터 소경 된 사람을 고쳐주십니다. 누가복음 13장에서는 18년 동안 귀신들린 여자를, 14장에서는 고창병 들린 사람을 고쳐주십니다. 이 일곱 가지의 경우가 모두 며칠 더 있다가 고쳐 주어도 괜찮을 병들입니다. 그런데 왜 안식일에 고치셔야만 했습니까? 여기서 우리는 그 깊은 뜻을 깨달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환자를 보셨습니다. 환자가 눈에 보이는데 다음날에 고쳐야 합니까? 안식일이라고 내일로 미루지 않으셨습니다. 안식일에 보셨으면 안식일에, 월요일에 보셨으면 월요일에 고치셔야 한 것입니다.

    오늘 선한 일 하려고 마음먹었으면 그 즉시로 해야 합니다. 내일 하자하고는 돌아서면 못하게 됩니다. 끝내 천추의 한으로 남고 맙니다.

    저는 목사로서 늘 마음에 괴로운 것이 있습니다. 병들어서 자리에 눕게 된 교인들이 한번 와달라고 청하는 일이 종종 있습니다. 그때마다 일이 있어 수첩에 기록해놓고 차일피일 미루다보면 그만 돌아가셨다는 기별이 옵니다. 장례식에 참석을 합니다만 이미 세상을 떠난 사람이 되었습니다. 얼마나 마음이 아픈지 모릅니다. 자리에 누웠다는 소식을 듣는대로 가보았더라면 얼마나 좋았겠습니까마는 그렇게 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참으로 죄송한 일입니다. 선한 일은 직감적이고 즉행적이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이렇게까지 말씀하셨습니다. "십팔 년 동안 사단에게 매인바 된 이 아브라함의 딸을 안식일에 이 매임에서 푸는 것이 합당치 아니하냐(눅 13 : 16)"-한시바삐 풀어주는 것이 마땅하다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안식일의 문제로 부딪힌 것은 이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그 뜨거운 마음은 시간을 지체할 수가 없었습니다. 안식 일이어서 안 된다는 관습 따위는 안중에도 없었습니다. 시비가 없도록 해야겠다는 타협적인 마음을 용납하시지 않은 것입니다. 환자를 매임에서 풀어주어야 한다는 생각이 먼저였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예수님의 깊은 마음, 그 뜨거운 사랑을 읽어야 할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의 율법에는 구전으로 전해져 내려오는 것이 많았습니다.

    십계명에는 안식일에 관한 조항이 간단하게 나옵니다. 
    "안식일을 기억하며 거룩히 지키라(출 20:8)." 
    이어 한두 가지의 금기 사항이 기록되어 있을 뿐입니다. 
    성경에는 이 정도였습니다마는 예수님 당시의 바리새인들이 가르치던 교재에는 무려 39가지의 금기 사항이 있습니다. 
    안식일에는 하지 말라는 것이 39가지입니다. 어떤 것들이 있는지 한번 보십시다.

    씨뿌리지 말라, 밭갈지 말라, 추수하지 말라, 단을 묶지 말라, 타작하지 말라, 곡식을 까불지 말라, 곡식을 씻지 말라, 곡식을 바수지 말라, 곡식을 가리지 말라, 반죽하지 말라, 떡을 굽지 말라, 양털을 깎지 말라, 빨래하지 말라, 타격하지 말라, 염색하지 말라, 실 잣지 말라, 실을 뒤틀지 말라, 두 끈을 묶지 말라, 두 실을 맞추어 짜지 말라, 짜여진 실을 풀지 말라, 매듭짓지 말라, 매듭 풀지 말라(곧 옷고름을 풀지도 매지도 말라), 두 조각의 베를 깁지 말라(곧 바느질하지 말라), 깁기 위하여 베 조각을 찢지 말라, 노루를 잡지 말라, 죽이지 말라, 동물의 껍질을 벗기지 말라, 껍질을 소금에 담그지 말라, 가죽 만드는 일을 하지 말라, 머리털을 밀어내지 말라, 머리털을 깎지 말라, 두 글자를 쓰지 말라, 두 글자를 쓰려고 다른 글자를 지우지 말라, 건축물 짓지 말라, 부수지 말라, 망치질하지 말라, 불을 끄지 말라, 불을 켜지 말라(꺼져 있으면 켜지 말고 켜져 있으면 끄지 말라), 이사하지 말라-이상이 안식일에 금한 39가지의 조항입니다.

    이제 보십시다. 이 규례 대로 한다면 죄인 아닐 사람이 없습니다. 이렇게 해서 문제가 되었다는 이야기입니다. 사람들이 이것저것 많은 조항을 덧붙여 놓은 것입니다. 오늘의 본문에 보면 이 사람들은 어떠한 근거로든 간에 예수님을 송사 할 생각만 합니다. 선한 일 하시는 예수님을 왜 송사 하려고 합니까? 왜 죽이려고 하는 것입니까? 가장 큰 이유가 질투였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것이 질투입니다. 제일로 치사한 죄입니다.

    사람의 마음속에 고민이 있는 것도 이 질투 때문입니다.

    어느 책에서 보니 승부욕이 강한 사람에게는 운동하는 것이 하등 도움이 안 된다고 합니다. 운동을 하면서도 남보다 잘하려는 생각만 합니다.

    이겨야 직성이 풀립니다. 그런 사람은 운동할 필요가 없습니다. 잘못하면 죽기 십상입니다. 운동도 적당히 하며 건강에 도움이 되도록 해야 합니다. 지면 어떻고 이기면 어떻습니까? 남한테 이기려고 바락바락 애쓰다가 그만 과로로 죽고 심장마비로 죽습니다. 제가 골프 치러 가서 보니 충분히 그럴 만도 하겠습니다. 이 사람도 잘 치고 저 사람도 잘 치는데 나만 변변치 못합니다. 주위 사람들이 다 비웃는 것만 같습니다. 그래서 잘 치려고 정신통일 하다가 그만 머리가 터져서 죽습니다. 시기와 질투 때문입니다. 마음속에 들어 있는 그것이 참으로 무서운 것입니다. 가만히 보면 부부간에 질투 때문에 문제가 많습니다. 내가 잘났느니 네가 못났느니 하면서 팽팽하게 맞서서 뒤로 물러날 줄을 모릅니다. 시기와 질투-에덴동산에서부터 내려오는 것입니다. 족보가 있는 것입니다. 이것을 마음속에서 빼어버리지 않으면 안됩니다.

    또 하나, 예수님으로 인하여 저들의 위치가 무너지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높아지면 높아질수록 저들이 상대적으로 낮아지는 데에 문제가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이 능력을 행하시는 한 저들은 무능한 자가 되었습니다. 이것이 견디기 힘드는 것입니다. 남이 칭찬 받는 동안 나는 형편없는 사람이 되는 것 같지 않습니까? 참으로 어려운 일입니다.

    더욱이 중요한 것은 예수님으로 하여 저들의 죄인된 모습이 그대로 노출된다는 것입니다. 가야바가 그렇고 바리새인들이 그러했습니다. 예수님이 나타나시기 전에는 저들이 거룩하고 존경받는 종교인이었습니다 마는 예수님이 등장하시면서 저들은 죄인이 되고 말았습니다. 형식주의자요 위선자요 돈만 아는, 형편없는 인간으로 드러났다는 말입니다. 이 얼마나 추해졌습니까? 당연히 예수님을 죽일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요한복음 11장에 보면 대제사장 가야바가 무서운 말을 합니다. "한 사람이 백성을 위하여 죽어서 온 민족이 망하지 않게 되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한 줄을 생각지 아니하는도다(50절)"-의인이건 죄인이건 한 사람이 죽어서 온 민족이 평안할 수 있다면 죽여야 한다는 말입니다. 말은 이렇게 했습니다마는 사실 속에는 딴마음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있으면 저가 죽어야 합니다. 그러니 예수님을 죽이고 내가 살아야겠다고 한 것입니다. 형식적으로야 온 민족을 위하는 일입니다.

    예수님을 중심으로 사람들이 모이다보면 혁명이 일어날 것이고, 로마를 반대하는 혁명이 일어나는 날에는 민족적으로 시끄러울 것이니 불순세력을 미리미리 제거해야 한다고 민족적 차원에서 거창하게 말합니다. 또한 덧붙여 하는 말이 더 재미있습니다. "너희가 아무 것도 알지 못하는도다(49절)." 아주 아는 체합니다 마는 정말 바보스런 사람이 가야바입니다.

    의인 하나가 죄 없이 죽으면 그 땅이 망한다는 생각을 왜 하지 못합니까? 오늘의 본문에 보면 예수님을 죽이기 위해 여러 모로 의논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거기에 걸려든 것이 바로 안식일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시비가 될 것을 다 아시면서도 안식일에 계속하여 병을 고치십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그 뜨거운 정열과 사랑하심을 알아야 하겠습니다. 2절의 '송사하려'라는 말은 원문에서 '엿보다'의 뜻입니다. '파레테룬'-못된 의도를 가지고 올무에 걸려들기만을 예의(銳意) 관찰했다는 이야기입니다. 여러분, 다른 사람이 잘못하는 일에 대해서는 대충 보아 넘어갑시다. 걸고 넘어가겠다는 듯이 눈에 쌍심지를 돋우고 볼 것이 아닙니다.

    저들은 예수를 핍박하고 송사하기 위하여 행동이나 말씀 하나, 하나를 자세히 관찰했습니다. 나쁜 마음으로 들여다본 것입니다. 범죄 하도록 조건을 만들어놓고는 편견이라는 거울을 통해 보고 있습니다. 동정과 이해는 없습니다. 오로지 예수님이 올무에 걸려들기만을 바라는 악의뿐입니다.

    그러던 차에 안식일에 회당에 가니 한 손 마른 사람이 있습니다. 저들은 옳다구나 싶었을 것입니다. '저 사람을 보고는 가만히 있지 않을 것이다. 오늘은 잘 걸려들었다'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예상대로 예수님은 그 사람을 고쳐주십니다. 그들은 이 일을 기화로 삼습니다. 대단히 중요한 문제입니다. 누가복음에서는 오른손이 말랐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고대 로마의 교부 제롬은 이 사람이 본디 석수장이였다고 말합니다. 오른손을 사용하여 먹고살던 사람인데 그 손이 말라버렸다는 것입니다. 병신이 되어 생계가 어렵게 된 이 사람을 예수님이 불쌍히 여기어 고쳐주신 것이라고 전설로 전해지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안식일의 문제로 여러 번 충돌하십니다. 
    그때, 그때 대답하신 말씀을 크게 다섯 가지로 요약해볼 수 있습니다. 
    여기에는 아주 중대한 의미가 있습니다.

    첫째, 안식일에 예수님의 제자들이 밀밭 사이로 지나가다 이삭을 잘라 손으로 비벼 먹은 것 

    이를 바리새인들이 문제삼습니다.

    안식일에 타작했다는 것입니다. 
    그러자 예수님이 말씀하십니다. 

    "다윗이 자기와 및 함께한 자들이 시장할 때에 한 일을 읽지 못하느냐. 그가 하나님의 전에 들어가서 다만 제사장 외에는 먹지 못하는 진설병을 집어먹고 함께 한 자들에게도 주지 아니하였느냐(마 12 : 3~4)." 
    악의로 한 일이 아닙니다. 
    먹어서는 안될 것이지만 먹지 않으면 굶어죽을 지경입니다. 
    그 지경이기에 제사장들이나 먹을 수 있는 진설병을 먹을 수밖에 없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법 가운데 예외가 있음을 말씀해주시고 계십니다. 
    형식적으로 지킬 것이 아니라 동기적으로 지켜야 한다는 것을 가르치는 말씀입니다

    둘째, 안식일에도 제사장들은 일을 합니다. 

    교회에서 교인들에게는 안식일을 가족과 함께 편히 쉬라고 합니다마는 목사들은 하루종일 일을 해야 합니다. 
    이렇듯 제사장들은 하나님 앞에 제사를 드리고, 난 지 8일 된 아이들에게 할례도 베풀어야 합니다. 
    제사장들은 안식일에도 일을 한다, 곧 예외가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셋째, 나는 인애를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않는다. 

    "나는 인애(仁愛)를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며, 번제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을 원하노라(호세아 6:6)."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자비로운 마음이지 제사 같은 형식적인 율법을 지키는 행위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넷째, 사람이 안식일을 위해 있느냐 안식일이 사람을 위해 있느냐

    예수님께서 대답하신 말씀 가운데 가장 결정적인 이유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안식일을 지키라고 하신 것도 우리를 사랑하셔서 주신 법입니다. 
    억지로 율법을 지켜서는 안됩니다. 
    기쁜 마음으로, 감사하는 마음으로 지켜야 합니다. 
    살인하지 말라 - 누구를 위해 지켜야 합니까? 
    간음하지 말라, 도둑질하지 말라 - 누구를 위해 지켜야 할 법입니까? 
    감사하는 마음으로 지켜야 합니다. 
    이 모든 법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은혜이기 때문입니다. 
    안식일이 사람을 위해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셔서 주신 법입니다. 
    벌받을까봐 지키고 저주받을까봐 억지로 지키는 것은 하나님을 폭군으로 만드는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왜 하나님을 나쁘게 만들어야 합니까? 
    우리는 하나님의 법을 감사함으로 지켜야 할 것입니다. 
    주일날 교회에 나오는 일도 그렇습니다. 
    주일을 주시고, 교회를 주시고, 하나님 앞에 예배드릴 수 있는 은혜를 베푸신 것에 감사해야 합니다. 
    이 얼마나 좋습니까? '주일날이니 갈 데도 못 가고 할 일도 못하는구나'라고 생각한다면 잘못입니다. 
    안 하자니 욕들을 것 같고 하자니 마음에 걸리고…… 그래서 늘상 늦게 오거나 하곤 합니다. 망설이니 그럴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다섯째, 인자는 안식일의 주인  

    예수님은 안식일의 주인이십니다. 
    아버지이신 하나님께서 안식일에 일을 하시니 당신도 하신다는 것입니다. 
    이 문제가 결정적인 이유가 되었습니다. 
    인자는 안식일의 주인이라 하시는 말씀에는 여러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안식일은 천국의 예표입니다.

    안식일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사랑의 법의 결정체입니다. 
    은혜의 근본입니다. 
    하나님 앞에 예배하며 말씀을 듣고 강의하는 시간입니다.

    그러므로 안식일의 주인은 말씀의 주인이신 예수님이십니다. 
    온 예배가 예수님의 이름으로 드려지지 않습니까? 
    우리는 주인인 예수님을 찬양하고 그의 이름으로 기도하고 그에게 영광을 돌려야 합니다. 
    그런데 인자는 안식일의 주인이라고 하실 때에 충돌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당신을 죽이려고 하는 저들의 의도를 아시면 서도 물러서지 않으셨습니다. 
    이 자세를 우리가 배워야 합니다. 
    '이 손 마른 사람을 고치기만 해봐라. 안식일을 범한 것이니 당장 끌어다가 돌로 쳐죽여야 한다'하고 잔뜩 벼르고 있는 저들의 속을 빤히 들여다보시고도 병을 고쳐 주시는 예수님이십니다. 
    '오늘은 안식일이니 내일 보자'하지 않으셨습니다. 
    우리 같으면 굳이 충돌할 필요가 없지 않겠느냐 하고 뒤로 물러서기가 쉽겠습니다마는 예수님은 절대 양보하지 않으셨습니다. 한치의 양보도 없습니다. "한가운데 일어서라." 안식일에 많은 사람들 앞에서 손 마른 자를 세워놓고 저들에게 공개적으로 질문하십니다.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과 악을 행하는 것, 생명을 구하는 것과 죽이는 것, 어느 것이 옳으냐?" 스스로 판단하라고 하십니다. 참으로 담대하신 분입니다. 그때 저들은 잠잠했다고 합니다. 당연히 할말이 없었을 것입니다. 이렇게 저들의 입을 막아놓고 저들 마음의 완악함을 근심하시면서 말씀하십니다.

    "네 손을 내밀라" 하시자 그 사람, 손을 쑥 내밉니다. 
    마른손이 회복됩니다. 
    그러나 저들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지 않고 더욱 완악해졌습니다. 
    근심하사 노하심으로 저희를 둘러보시고 이미 완악해진 줄 아셨습니다. 
    앞으로 어떠한 핍박과 고난이 다가오리라는 것을 아셨습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한 사람을 구원하는 것입니다. 
    오늘 이 시간에 구원해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마음이 이렇습니다. 
    이 뜨겁고 간절한 마음, 이 엄청난 용기를 마음에 새깁시다. 
    우리에게는 타협이 너무 많습니다. 
    남의 눈치를 많이 봅니다. 
    지나치게 인본주의적이요 불신앙적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데에 한치의 양보도 없으십니다. 
    이 일로 당장 돌에 맞아죽을지언정 양보하지 않으십니다. 
    당장 이 일부터 해야 하는 것이 예수님의 마음입니다. 
    그래서 핍박을 받으셔야 했습니다. 
    결국 십자가에 돌아가셔야 했습니다마는 그것이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여러분은 선한 일을 하면서 얼마나 용기 있게 나아가 보았습니까? 
    진정 하나님만을 바라보았습니까? 
    나를 필요로 하시는 하나님, 그분만을 생각하여야 합니다. 
    뒤로 재고 앞으로 재고 할 것이 아닙니다. 
    그러면 아무 일도 할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의 말씀대로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막 14:38)"입니다. 
    해놓은 일없이 그러구러 세월만 가버린 것입니다. 

    "한가운데 일어서라……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과 악을 행하는 것, 생명을 구하는 것과 죽이는 것, 어느 것이 옳으냐…… 네 손을 내밀라" 
    예수님의 이 귀한 말씀과 용기를 깊이 깨달아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의 안식일 사역에  이의를 제기

    인자는 안식일의 주인 

    안식일에 병자를 고치신 예수님의 이야기입니다. 
    사람들이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병자를 고치시는가 엿보는 가운데 예수님은 회당에 들어가셔서 손 마른 사람을 한 가운데 일어서라 하시면서 사람들에게 묻습니다.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과 악을 행하는 것, 생명을 구하는 것과 죽이는 것, 어느 것이 옳으냐?"고 물으시면서예수님의 안식일 사역에  이의를 제기하고자 하는 사람들을 잠재우셨습니다. 
    즉, 예수님의 사역의 원칙은 하나님 앞에서 옳고 그름에 따른 선과 악의 기준이 분명하였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 옳다 하시는 기준, 생명을 살리는 것과 선을 행하는 것을 사역의 기준하였습니다. 
    이를 통해 우리에게도 하나님의 원칙에 따라 하나님의 일을 감당해야 하는 교훈을 말씀하고 계십니다.

    이 땅에 그리스도의 몸으로 세우신 교회들, 그리스도께 속한 그리스도인들 또한 예수님이 물으신 “하나님 앞에서 어느 것이 옳으냐?”를 늘 기억하며 따라야 합니다. 
    하지만 교회들 마저도 사람들 위주에 따라 일하는 모습을 곧잘 보게 됩니다. 
    “하나님 앞에서 어느 것이 옳으냐?" 보다는 "교회의 형편과 처지와 교인의 입장에서 어느 것이 옳으냐?"를 따지며 열심을 내는 교회들과 주의 종들이 참 많다는 것입니다. 
    또한 이러한 자신들의 모습을 하나님 앞에서의 옳은 신앙의 모습으로 착각하는데 문제의 심각성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인본주의 중심의 신앙생활로 변질된 교회가 결국에는 오늘 날 이 땅의 영적인 혼돈을 키워 세상을 어둡게 하는 원인을 제공했다는 점에서는 아무도 부인 할 수 없게된 현실을 우리는 잘 압니다.

    혼돈의 시대  

    지금처럼 기준이 혼돈한 때가 없었습니다. 
    동방예의지국이라고 자부했던 조국, 대한민국에서도 동성애를 합법화 하자는 차별금지법이 발의가 되었습니다. 
    차별금지법이 합법화가 되면 성경에서 말씀하시는 동성애가 죄가 아니라 의가 됩니다. 
    성경 말씀대로 동성애를 죄라고 설교하면 그 목사는 차별금지법을 어긴 것으로 되어 처벌을 받게 됩니다. 
    참으로 이 땅은 하나님의 법과 질서에 대적하여 거꾸로 미쳐 돌아가고 있습니다. 

    이러한 때일수록 깨어 있어야 합니다. 
    믿음으로 산다는 것은 2000년전 예수님께서 사역하신 기준인 “하나님 앞에서 어느 것이 옳으냐?”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어느 것이 옳으냐?”를 가지고 고민하며 씨름하며 결단하고 선택하며 나아가는 것이 믿음의 길입니다.  
    오늘도 ‘어느 것이 옳으냐?’고 내게 물으시며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이 원하시는 길로 이끄시는 성령의 도우심으로 하나님 앞에서 옳다 하시는 길, 의의 길을 따라 끝까지 믿음으로 승리하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함께 기도합니다.

    네 손을 내밀라 하시니 내밀매 그 손이 회복되었더라(마가복음 3:1~6)

    예수께서 제자들이 밀 이삭을 잘라 먹은 일로 인해 바리새인들과 논쟁을 하시고 난 후 또 다른 안식일에 다시 복음을 전하시기 위해 회당에 들어가시는 거기에 한 손이 마비되어 있는 사람이 있었고,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안식일에 예수께서 율법을 어기고 병자를 고쳐주는 일을 행하면 고소하려고 지켜보고 있는데, 예수님은 오히려 손이 마비된 사람을 일으켜 세우시고 모든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일어서라고 명령하시고, 예수를 고소하려는 자들을 향해 안식일에 선을 행하여 생명을 구하는 일과 악을 행하여 사람을 죽이는 것 중에 어느 것이 옳으냐고 물으시자 그들이 대답하지 못하고 침묵하였고, 예수께서 그들의 마음이 돌같이 굳어져 죄에 대해 무감각해진것에 대해 슬퍼 탄식하시고 또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의분을 가지고 분노하시면서 그들을 둘러 보신 뒤 손이 마비된 자에게 손을 내밀라고 하시자 그의 손에 생명력이 더하여져 정상적인 손으로 회복이 되었고, 이를 본 민족주의자들인 바리새인들은 평상시 성향이 정반대여서 원수와 같이 여기던 친로마 성향의 헤롯 지지파들과 손을 잡고 예수를 죽이려고 서로 음모를 꾸몄음을 보며, 우리는 선을 행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선을 행하는 다른 사람을 비난하고 방해하는 자가 되지않도록 조심해야 하고 또 다른 사람들을 비난하고 정죄하기 보다 칭찬하고 격려하며 용서하는 자세를 지니고 또 주일을 성수하려고 노력할 뿐만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진실되게 만남으로써 주가 주시는 참된 만족과 기쁨을 누리는 자들이 되어야 하며 지금 이 시간에 죽어져 가는 생명을 살리시기 위해 안타까워하시고 회복하시고 온전케 하시는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를 알고 사람을 죽이려 악한 일을 행하는 모든 악한 세력들과 싸워 이기며 연약한 자들을 향한 예수님의 사랑으로 힘써 복음을 전하고 사랑을 베푸는 자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한쪽 손 마른 자를 고치신 예수님(마가복음 3:1-6)

    본문에는 ‘한쪽 손 마른 자’가 나옵니다. 마가복음 2:23-28절에 보면 예수님의 제자들이 시장하여 밀 이삭을 잘라 먹었습니다. 그때 안식일 논쟁이 일어 났습니다. 또 다른 어느 안식일에 예수님께서 회당에 들어가셨습니다. 그런데 그 곳에 ‘한쪽 손 마른 사람’이 있었습니다. 누가복음 6:6절에는 그가 “오른손 마른 사람” 이라고 구체적으로 밝힙니다. 사람은 손으로 많은 일을 합니다. 손으로 글도 쓰고 위대한 예술 작품도 만들고 문자도 전송합니다. 그런데 한쪽 손 마른 사람은 더군다나 오른쪽 손이 돌돌 말렸으니, 얼마나 ‘불편’ 했을까요? 예수님은 한쪽 손이 말라 콤플렉스가 있고 불편한 사람을 돕고자 하십니다. 그런데 지금 어떤 상황 가운데서 예수님은 한쪽 손 마른 자를 고쳐 주시고자 하시는 것일까요? 이를 통하여 예수님이 말씀 하고자 하는 하나님의 계시가 무엇입니까?

    예수님이 들어가신 회당장 안에 어떤 사람들이 함께 있었습니까? 2절에 “ 예수를 고발하려 하는 사람들” 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6절에 ‘바리새인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안식일에 예수님이 그 사람을 ‘고치시는가’ 주시했습니다. 만약 예수님이 한쪽 손마른 사람을 고치시면 아무 일도 하지 말라는 ‘안식일 법을 어긴 죄’로 고발하고자 함이요, 고치시지 않으면 ‘사랑의 구주가’ 아니다 힐난하고자 함이었습니다. 그러면 그들이 법조문을 내세워 송사할 구실을 만들고 꼬투리 잡으려는 목적이 무엇입니까? 6절에 ‘예수를 죽이고자’ 의논 하였습니다. 바래새인들은 겉은 종교지도자였습니다. 그러나 내면은 한쪽 손마른 자에 대한 사랑이 메마른자요, 약자를 이용해 예수님 고발해서 죽이려는 미끼로 쓰려한 위선자였습니다.

    그러니 지금 예수님이 들어가신 회당은 말씀을 나누는 은혜로운 분위기가 아니었습니다. 살벌했습니다. 이런 형편 속에서 예수님은 고발하려는 사람들에게 무엇을 묻습니까?

    1. 핵심 가치를 물으시는 예수님

    3절에 “한 가운데 일어서라” 누가복음 6:8절에는 “예수께서 그들의 생각을 아시고 손 마른 사람에게 이르시되 일어나 한 가운데 서라 하시니. 그가 일어나 서거늘” 이라고 나옵니다. 예수님은 바리새인들이 자신을 잡아 죽일 꼬투리를 잡고자 하는 것을 다 아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모든 사람들이 다 주시하는 상황에서도 한쪽 손 마른 자에게 “ 한 가운데 일어서라 ” 명하셨습니다.

    사람들은 긴장하며 주시했습니다. 바리새인들이 예수님께 무엇을 물었습니까? 마태복음 12:10절에 “ 안식일에 병 고치는 것이 옳으니이까?” ‘안식일 법’을 걸고 넘어졌습니다. 예수님 지금 불법을 행하는 거죠? 라고 추궁한 것입니다. 법조문을 걸고 넘어져 ‘고발 하려는 사람’ 들에게 예수님은 어떤 질문을 되물으십니까? 4절에 “그들에게 이르시되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과 악을 행하는 것, 생명을 구하는 것과 죽이는 것, 어느 것이 옳으냐? 마태복음 12:11절에 추가된 질문입니다. “너희 중에 어느 사람이 양 한 마리가 있어 안식일에 구덩이에 빠졌으면 끌어 내지 않겠느냐?” 예수님은 왜 안식일 법을 어기느냐는 사람들에게 ‘법조문이냐 생명이냐?’ 핵심가치를 물으셨습니다.

    안식일 날 자기 양이 구덩이에 빠지면 사람들은 어떻게 할까요? 당연히 그 양을 구해 낼 것입니다. 법조문 보다 생명이 더 소중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의 질문은 ‘법의 정신’을 잃고, 법조문에 얽매인 바리새인들의 잘못된 율법적 관점을 핵심가치로 깨트리신 것입니다. 동시에 ‘참 안식일은 어떤 날인가?’ 가르치신 것입니다. 마태복음 12:12절은 말씀하십니다. “사람이 양보다 얼마나 더 귀하냐. 그러므로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이 옳으니라” 한갖 미물 짐승도 안식일에 구덩이에 빠졌으면 ‘건져 내 살려 주는 것’이 옳습니다. 그러므로 천하보다 귀한 사람은 더 말할 것 없습니다. 짐승도 구덩이에서 건져내어 살리는 것이 동물 복지요 자비라면, 영혼의 소유자 사람은 더욱 그렇게 해야 마땅합니다.

    하나님께서 안식일을 주신 참 뜻이 무엇입니까? 누가복음 13:16절에 “그러면 열여덟해 동안 사탄에게 매인바 된 이 아브라함의 딸을 안식일에 이 매임에서 푸는 것이 합당하지 아니하냐”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18년 동안 귀신에 들려 앓으며 꼬부라져 펴지 못하는 한 여자를 고쳐 주셨습니다. 그때 회당장이 안식일에 예수님이 병을 고쳤다고 비난 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들에게 ‘외식하는 자들아’ 책망하셨습니다. “ 너희가 각각 안식일에 자기의 소나 나귀를 외양간에서 풀어 내어 이끌고 가서 물을 먹이지 아니하느냐?” 예수님께서 이 땅에 육신을 입고 오신 목적은 아브라함의 자손들을 사단의 매임에서 풀어서 하나님의 영원한 안식, 곧 하나님 나라의 영원한 안식에 들어가게 하시는데 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 안식일을 주신 것은 사탄에게 매여 있던 ‘아브라함의 자손을 풀어 주는데 있다’ 는 것을 드러내신 것입니다.

    예수님을 보내신 하나님 아버지의 뜻이 바로 이 일에 있었고, 예수님 자신 또한 아버지의 뜻에 온전히 순종하여 그 일을 이루어 나가셨습니다. 그래서 참 안식 속에 들어온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 아버지와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공경하게 하십니다(요 5:23). 마가복음 2:27절에 “또 이르시되 안식일은 사람을 위하여 있는 것이요,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있는 것이 아니니” 예수님은 ‘참 안식일은 사람을 위하여 있는 날임을 알려 주신것입니다.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핵심 가치는 안식일이 아니라 사람입니다. 따라서 안식일을 지키려 하는 일이 사람을 올무에 가두는 일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안식일이라 해도 배고픈 자에게 먹을 것을 주고, 구덩이에 빠진 짐승은 건져내는 것이 바로 안식일의 바른 정신입니다.

    이때 바리새인들 반응이 어떠합니까? 4b절 ”그들이 잠잠하거늘” 왜 그들이 잠잠했을까요? 어느 것이 옳은지 몰라서 대답 못 했을까요? 아닙니다. 그들이 잠잠한 까닭은 안식일 준수와 관련한 잘못을 인정하고 시인해야 했기 때문입니다. 또 그동안 그들이 가르쳐왔던 안식일 규정을 근본적으로 뜯어 고쳐야 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하자니 자부심이 무너지고 자존심이 상했습니다. 진리는 밝히 드러났는데 받아들일 수 없어 잠잠한 것입니다. 이로서 그들은 ‘진리의 사람이 아니다’ 함을 스스로 드러낸 것입니다. 그들은 낡은 전통과 규례 고수를 진리보다 앞세웠습니다. 이것이 바로 ‘낡은 가죽 부대’의 모습입니다.

    예수님께서 왜 탄식 하셨습니까? 5a절에 “그들의 마음이 완악함을 탄식하사 노하심으로 그들을 둘러 보시고…” 완악함 때문이었습니다. 무지가 진리를 깨닫지 못하는 것이라면, 완악함은 깨달은 하나님 진리의 핵심가치 조차 인정하지 않는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은 이전 삶을 고집하며 곁가지만 붙잡고 늘어지는 완악함 때문에 진리의 핵심가치를 상실하고 말았습니다. 안식일을 제정하신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진리의 핵심가치는 안식일이 아니라 사람이며, 안식일의 핵심가치는 법조문이 아니라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과 생명을 구하는 것입니다. 우리 신앙 생활도 곁가지가 아니라 핵심가치를 붙들고 실천하며 살기를 바랍니다.

    2. 불편한 문제를 가진 자를 받아 주신 예수님

    지금 회당장 분위기는 살벌합니다. 그러면 ‘오늘만 날인가?’ 하고 손마른 자를 무시하고 외면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사람들이 주시하는 회당장안에서 손마른 사람을 외면하거나 무시하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한 가운데 일어서라’ 말씀하셨습니다. 사람마다 불편한 문제들을 다 가지고 있죠?

    겉은 멀쩡해도 속으로 들어가 보면 남모르는 자기만이 알고 있는 불편함의 문제를 다 가지고 있죠?

    어떤 이는 외모 콤플렉스로, 혹은 사랑 콤플렉스를 가지고 있는 이도 있습니다. 한나는 남편 사랑은 더 받았으니 자식을 낳지 목하는 콤플렉스로 한맺힌 문제를 안고 있었던 것이 성경 사무엘서에 나옵니다. 어떤 이는 내성적인 성격 때문에 사람들 사이에 어울리지 못하는 성격 콤플렉스도 있습니다. 어떤이는 충격적인 사건을 겪고 공항장애를 겪는 이도 있습니다. 혹은 가정 환경 배경 때문에 컴플레스를 겪는 이도 있습니다.

    이때 바리새인들은 한쪽 손 마른 사람의 콤플렉스는 아예 거들떠 보지도 않고 무시했습니다. 한쪽 손마른 사람처럼 장애를 안고 불편하게 살아 가는 자를 볼때 우리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바리새인 처럼 무시는 하지 않더라도 혹 외면하지는 않았는지요?

    그러나 우리주 예수님은 한쪽 손 마른 자를 외면하지 않으셧습니다. 관심을 갖고 그를 회당 가운데 세우셨습니다. 예수님은 그를 영접해 주시고 받아 주셧습니다. 이 예수님은 헤세드 인자와 긍휼이 풍성하신 구세주 이십니다.

    3. 한 손 마른 자를 살려주시는 예수님

    예수님은 안식일 법을 어긴다 주장하는 바리새인들의 비판에 조금도 개의치 않으셨습니다. 
    대신 예수님은 한편 손 마른 자에게 어떤 말씀을 주십니까? 
    5b절에 “네 손을 내밀라” 명 하셨습니다. 
    '내밀라'는 뜻은 “오그라든 네 손을 펴라” 는 말씀입니다. 
    콤플렉스로 돌돌 말린 ‘심령을 활짝 펴 믿음으로 내 밀라’ 는 말씀입니다. 
    그가 “내밀자” 곧 “그 손이 회복되었습니다.” 그가 예수님 말씀에 순종하니 이전처럼 성하여 진 것입니다. 고발하려는 자들의 주시 속에서 예수님은 당당히 한 병든 영혼을 치유 하셨습니다.

    사 59:1~3에 "여호와의 손이 짧아 구원하지 못하심도 아니요 귀가 둔하여 듣지 못하심도 아니라 오직 너의 죄악이 너희와 하나님 사이를 갈라 놓았고 너희 죄가 그의 얼굴을 가리어서 너희에게서 듣지 않으시게 함이니라 이는 손이 피에 너희 손가락이 죄악에 더러워졌으며" 예레미야 애가 3:40~41절에는 "우리가 스스로 우리의 행위들을 조사하고 여호와께로 돌아가자 우리의 마음과 손을 아울러 하늘에 계신 하나님께 들자" 말씀하십니다. 여기 ‘손을 들자’는 말은 손이 한 일을 회개 하자는 말입니다. 아담과 하와는 손을 들어 선악과를 따먹었죠? 불순종의 손이었습니다. 따라서 아담의 후손인 우리도 손이 지금까지 하나님 앞에서 잘못한 것을 회개해야 마땅합니다. 약 4:8절에 "하나님을 가까이 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가까이 하시리라 죄인들아 손을 깨끗이 하라" 하셨습니다. 이 ‘병든 손’,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하지 않는 ‘오그라진 손’을 주께 내밀고 치료함을 받아야 합니다. 믿음으로 우리 오그라든 손을 주께 내밀어 치료를 받으면 주님의 은혜와 마음의 평안과 기쁨이 회복 됩니다. 첫 사랑을 회복 하게 됩니다. 주의 의로운 병기로 회복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안식일에 선을 행하고 생명을 구하셨습니다. 이 예수님은 긍휼과 인자가 풍성하신 구주이십니다. 안식일이라도 안식일의 주인이신 예수님이 하시는 일을 제한할 수 없습니다. 마태복음 12:12b절에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이 옳으니라” 안식일에 예수님이 한쪽 손 마른 자를 방관하지 않고 고쳐 주시는 것이 선입니다. 예수님은 사람을 죄와 질병으로 부터 구원하사 참 안식 주셨습니다. 사람을 지배하고 있는 죄와 죽음, 사단의 세력에서 건져 ‘참 안식을 누리게 하는 것’이 안식일의 본질입니다.

    캐나다에 Maud Lewis 라는 실존 인물이 있었습니다. 
    그녀의 애칭은 Maudie 입니다. 
    1903-1970 년까지 산 그녀는 어릴때는 기형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자라며 관절염을 심하게 앓아 뒤뚱뒤뚱 걷고 행동이 불편하며 오른 손이 돌돌 말렸습니다. 
    오빠는 그런 그녀를 무시하고 아버지가 남겨준 얼마 안되는 유산마져 처분해 가로채 갔습니다. 
    그녀는 친척에 의해 양육됩니다. 
    1928년 24세때 그녀는 딸을 낳았는데, 식구들은 아이도 기형이라 속이고 다른 집에 입양을 보냈습니다. 
    숙모에 얹혀 살던 그녀는 ‘가정부 구함’ 이란 광고를 보고 생선 행상 Everett Lewis 집에 갔다가 그녀 나이 34세때, Everett Lewis 와 결혼 합니다. 
    그들은 Marshalltown 에 잠자는 다락 방이 있는 에버렛의 방 1개 집으로 이사했습니다. 
    남편은 거칠고 기형인 마우디를 무시하며 폭력을 행사했습니다. 
    그러나 그녀가 그림 그리는 것은 허용합니다. 
    Maud Lewis 는 페인트로 집 벽과 창에 그림을 그리기 시작해서 엽서 그림을 그려 팔기 시작했습니다. 
    그녀 작품은 색깔이 화려하고 따뜻하며 밝고 섬세한게 특징입니다. 
    그녀는 이런 말을 많이 했습니다. 
    ‘내인생 전부가 액자속에 있어요’ 입소문이 나서 미 대통령까지 그녀 그림을 구매할 정도록 ‘Naive 화가’로 명성을 얻습니다. 
    T.V나 신문에 소개 되고 유명세를 타자 친척이 찾아와 입양간 딸은 실제 장애우가 아니고 양 아빠 와 행복하게 산다는 고백을 듣습니다. 멀리서 자기 딸이 행복하게 사는 모습을 지켜본 뒤 되돌아와 ‘자기는 많이 사랑받은 사람’이란 말을 남기고 숨을 거둡니다. 
    이 감동적인 실화 스토리는 장애인인 에이슬링 월시 감독에 의해 샐리 호킨스와 에단 호크 주연으로 영화화 되어 원제가 Maudi, My Love 였는데, 35회 벤쿠버 국제 영화제 관객상을 수상하고, 2017년 전주 국제 영화제 상영작으로 우리나라에서는 “내사랑” 이란 제목으로 상영된바 있습니다. 

    우리는 장애우를 볼때 불행할 것이란 편견을 갖고 무시하기 쉽죠? 그러나 이 영화의 실존인물 Maud Lewis 는 근육통과 관절염으로 손이 심히 기형이었지만, 하나님이 주신 은사를 살려 그림 그리는 일로이 스스로를 행복하게 만들고 수없이 붓을 들어 자기 마음에 있는 따뜻한 그림을 그려 다른 사람들 마음까지 따뜻하게 만들어 주었던 것입니다. 장애우에 대한 바리새인의 시각을 에수님 시각으로 고쳐야 합니다. 장애우도 똑같이 ‘하나님 형상’의 소유자입니다. 똑같이 영혼의 소유자입니다. 똑같이 하나님께 사랑받을 자이고 우리들에게 사랑 받기 위해 태어난 존재들입니다. 천하보다 귀한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조금 어느 한구석이 불편할 뿐입니다. 장애우도 하나님을 만나 오그라든 손을 펼때 얼마든지 사람들에게 기쁨과 행복을 나누어 줄수 있는 축복의 샘터입니다.

    더나가 고침 받은 우리는 이제 ‘오그라든 손’을 펴서 ‘선한 일’과 ‘주의 일’에 힘쓰는 사람이 되것입니다.

    이를 본 바리새인들의 반응이 어떠합니까? 6절에 “바리새인들이 나가서 곧 헤롯당과 함께 어떻게 하여 예수를 죽일꼬 의논하니라” 평소 헤롯당과 바리새인들은 상극 관계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죽이는데는 함께 손을 잡았습니다. 옛 형식을 고집하는 완악함 때문에 마귀의 앞잡이가 된 것입니다. 딤후 3:5절은 말씀하십니다.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는 자니. 이같은 자들에게서 네가 돌아서라”

    예수님은 자기를 함정에 빠트려 죽이려하는 살벌한 분위기 속에서도 ‘한쪽 손마른 사람을’ 고쳐 주셨습니다. 자기 생명을 걸고 한쪽 손마른 콤플렉스와 불편한게 많은 장애우를 고쳐 주신 예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요한복음 15:13절에 “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보다 더 큰 사랑이 없나니”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핵심 가치를 붙들고 메시야의 목숨을 걸고 한쪽 손마른 사람을 치유해 주셧습니다. 예수님은 진정 사랑과 긍휼 헤세드가 풍성하신 주세주이십니다. 오늘날 삼가 경계할 것은 경계해야 하지만, 법 조문에 얽매이기보다 예수님이 가르치시는 성경의 핵심 가치인 ‘선을 행하며’ ‘생명을 살리는 일’에 힘쓰는 자 되길 바랍니다. 그래서 주님이 주시는 참된 안식을 누리는 ‘복된 자’들이 되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일어서라(에게이로. ĕgĕirōἐγείρω

    1. 깨우다.  2. 마 8:25. 3. 일으키다  
    Pronunciation [ ĕgĕirō ]

    • I.  [능동]
      • 1.  [타동사] 깨우다, 일으키다.
        • a.  [문자적으로: 자던 사람을 깨우는 경우] 마8:25, 행12:7.
        • b.  [상징적으로] 일으키다, 일어나게 하다. ㉠ [앉은 사람을] 행3:7. ㉡ [누운 사람을] 막1:31, 9:27. ㉢ [엎드린 사람을] 행10:26. ㉣ [구덩이에 빠진 것을] 마12:11. ㉤ [앓는 사람을] 낫게 한다, 약5:15. ㉥ [죽은 사람을] 일으키다, 다시 살리다, 마10:8, 요5:21, 행26:8. [주] [예수께서 살리신 일에 대해서] 행5:30, 10:40, 13:37, 고전6:14, 15:15,16,17, 고후4:14, ἐ. τινὰ ἐκ νεκ- ρῶν, 요12:1,9,17, 행3:15, 4:10, 13:30, 롬4:24, 갈1:1, 엡1:20, 골2:12, 살전1:10, 히11:19, 벧전1:21.
        • c. 세우다, 일으키다, 다시 세우다. ㉠ [성전을] 요2:19,20. ㉡ [구원의 뿔을] 눅1:69.
        • d.  [상징적으로] 일으키다, 생기게 하다, 나타내게 하다, 원인이 되게 하다, 눅3:8, 행13:22, 빌1:17.
      • 2. [자동사: 명령형으로만 사용되어] ἔγειρε, 일어나라! 오라!, 마9:5,6, 막2:9,11, 3:3, 5:41, 10:49, 눅5:23, 24, 6:8, 8:54, 요5:8, 엡5:14, 계11:1.
    • II. [수동태 자동사]
      • 1.  깨다, 잠깨다, 마1:24, 25:7, 막4:27, [비유적] 롬13:11.
      • 2.  일어나다, 마2:14,20,21, 8:26, 눅 11:8.
        • a.  [앉았던 사람이] 마9:19, 눅13:25, 요11:29.
        • b.  [앓는 사람이] 마8:15, 9:7.
        • c.  [죽었다가 살아난 사람이] 마9:25, 눅7:14.
        • d.  [식탁에서] 요13:4.
        • e. [넘어졌다가] 행9:8.
      • 3. 다시 살아나다 [그리스도가 죽은 자 가운데서] 막6:14, 눅9:7, 요2:22, 21:14, 롬6:4,9, 8:34, 고전15:12, 20, 딤후2:8, ἀπο τῶν νεκρ ῶν, 마14:2, 27:64, 28:7, [독립적으로] 마11:5, 16:21, 막6:16, 12:26 등.
      • 4.  [무력적으로] 일어나다 ἐ. ἐπί τινα: ~을 대항하여 일어나다, 마24:7, 막13:8, 눅21:10.
      • 5.  나타나다.
        • a.  [예언자가] 마11:11, 눅7:16, 요7:52.
        • b.  [거짓 예언자가] 마24:11,24, 막13:22.
      • 6.  [명령]
        • a.  ἐγείρου: 일어나라, 막2:9, 눅8:54.
        • b.  ἐγείρεσθε, ἄγωμεν: 일어나라, 가자!, 마26:46, 막14:42, 요14:31.
    Grammar Explanation

    미래 ἐγερῶ , 제1부정과거 ἤγειρα, 현재수동 ἐγείρομαι, 현재명령2인칭단수 ἐγείρου, 복수 ἐγείρεσθε, 완료수동 ἐγήγερμαι, 제1부정과거수동 ἠ- γέρθην, 미래수동 ἐγερθήσομαι.

    • 문법설명  / 미래 ἐγερῶ , 제1부정과거 ἤγειρα, 현재수동 ἐγείρομαι, 현재명령2인칭단수 ἐγείρου, 복수 ἐγείρεσθε, 완료수동 ἐγήγερμαι, 제1부정과거수동 ἠ- γέρθην, 미래수동 ἐγερθήσομαι.
      관련 성경 /  일어나다(마2:14, 막5:41, 행12:7), 일어나게 하다(마3:9), 깨우다(마8:25), 살리다(마10:8, 요12:1, 행10:40), 살아나다(마11:5, 막6:14, 요2:22), 내다(마2:11), 일어서다(막3:3), 깨다(막4:27, 눅8:24, 롬13:11), 세우다 (행13:22, 23), 살다(고전15:20,43).





    1614. 내밀다(ĕktĕinō)  ἐκτείνω

    1. 뻗치다.  2. 퍼뜨리다.  3. 마 26:51.
    Pronunciation [ ĕktĕinō ]   
    Etymology  /  미래 ἐκτενῶ , 제1부정과거 ἐξέτει- να, 1537과 τείνω에서 유래
    • I. 뻗치다
      • 1.  [문자적으로] 뻗치다, 퍼뜨리다, 마12:13, 막3:5, 눅6:10, 행27:30.
        • a.  [무엇인가를 잡기 위하여] 마26:51.

        • b.  [누군가를 붙들기 위하여] 마14:31.
        • c.  [누군가를 고치기 위하여] 마8:3, 막1:41, 눅5:13.
        • d.  [목적을 표시하는 εἰς와 함께] 행4:30.
        • e.  [적대적 의도로] 눅22:53.
        • f.  [누군가를 지적하기 위하여] 마12:49.
        • g.  [말하는 자의 자세로서] 행26:1.
        • h.  [십자가에 달린 자에 대하여] 요21:18.
      • 2. [비유적으로] 길게 늘이다, 길게 말하다.
    • 관련 성경 /  내밀다(마 8:3, 막 1:41, 행 4:30), 펴다(마 26: 51), 대다(눅22:53), 벌리다(요21:18), 내려 놓다(행27:30), 들다(행26:1).

    마태복음 26:51
    예수와 함께 있던 자 중에 하나가 손을 펴 검을 빼어 대제사장의 종을 쳐 그 귀를 떨어뜨리니.
    With that, one of Jesus' companions reached for his sword, drew it out and struck the servant of the high priest, cutting off his ear.  

    회복되었더라(600) ἀποκαθίστημι

    1. 소생하다.  2. 낫게 하다.  3. 마 12:13  
    Pronunciation  [ apŏkathistēmi ] 
    Etymology  /  미래 ἀποκαταστήσω, 제2부정과거 ἀπεκατέστην, 미래수동태 ἀποκα- τασταθήσομαι, 제1부정과거수동태 ἀ- πεκατεςτάθην, 575와 2525에서 유래
    •  1. 소생하다, 회복하다, 복구하다, 마17:11, 막9:12, 행1:6.
      •  a. [의학적으로 용어로] 낫게 하다, 치료하다, 막8:25.
      •  b. [수동으로] 마12:13, 막3:5, 눅6:10.
    •  2. 돌려주다, 도로 주다, 히13:19.
    • 관련 성경  /  회복하다(마 12:13, 17:11, 막 9:12, 눅 6:10, 행 1:6), 돌아가다(히 13:19), 낫다(막 8:25).


    한편 손마른 사람. 처지

    1. 육신

    (마 9:35, 개역) 예수께서 모든 성과 촌에 두루 다니사 저희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며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시니라
    (Mt 9:35, NKJV) Then Jesus went about all the cities and villages, teaching in their synagogues, preaching the gospel of the kingdom, and healing every sickness and every disease among the people.
     
    2. 영적으로 병든 바리새인들

    (마 23:21-25, 개역) [21] 또 성전으로 맹세하는 자는 성전과 그 안에 계신 이로 맹세함이요 [22] 또 하늘로 맹세하는 자는 하나님의 보좌와 그 위에 앉으신 이로 맹세함이니라 [23]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가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를 드리되 율법의 더 중한 바 의와 인과 신은 버렸도다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지니라 [24] 소경된 인도자여 하루살이는 걸러내고 약대는 삼키는도다 [25]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잔과 대접의 겉은 깨끗이 하되 그 안에는 탐욕과 방탕으로 가득하게 하는도다
    (마 23:21-25, NKJV) [21] "He who swears by the temple, swears by it and by Him who dwells in it. [22] "And he who swears by heaven, swears by the throne of God and by Him who sits on it. [23] "Woe to you, scribes and Pharisees, hypocrites! For you pay tithe of mint and anise and cummin, and have neglected the weightier matters of the law: justice and mercy and faith. These you ought to have done, without leaving the others undone. [24] "Blind guides, who strain out a gnat and swallow a camel! [25] "Woe to you, scribes and Pharisees, hypocrites! For you cleanse the outside of the cup and dish, but inside they are full of extortion and self-indulgence.
     
    3. 절망적임 포기

    (마 13:10-16, 개역) [10] 제자들이 예수께 나아와 가로되 어찌하여 저희에게 비유로 말씀하시나이까 [11] 대답하여 가라사대 천국의 비밀을 아는 것이 너희에게는 허락되었으나 저희에게는 아니 되었나니 [12] 무릇 있는 자는 받아 넉넉하게 되되 무릇 없는 자는 그 있는 것도 빼앗기리라 [13] 그러므로 내가 저희에게 비유로 말하기는 저희가 보아도 보지 못하며 들어도 듣지 못하며 깨닫지 못함이니라 [14] 이사야의 예언이 저희에게 이루었으니 일렀으되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리라 [15] 이 백성들의 마음이 완악하여져서 그 귀는 듣기에 둔하고 눈은 감았으니 이는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달아 돌이켜 내게 고침을 받을까 두려워 함이라 하였느니라 [16] 그러나 너희 눈은 봄으로 너희 귀는 들음으로 복이 있도다
    (마 13:10-16, NKJV) [10] And the disciples came and said to Him, "Why do You speak to them in parables?" [11] He answered and said to them, "Because it has been given to you to know the mysteries of the kingdom of heaven, but to them it has not been given. [12] "For whoever has, to him more will be given, and he will have abundance; but whoever does not have, even what he has will be taken away from him. [13] "Therefore I speak to them in parables, because seeing they do not see, and hearing they do not hear, nor do they understand. [14] "And in them the prophecy of Isaiah is fulfilled, which says: 'Hearing you will hear and shall not understand, And seeing you will see and not perceive; [15] For the hearts of this people have grown dull. Their ears are hard of hearing, And their eyes they have closed, Lest they should see with their eyes and hear with their ears, Lest they should understand with their hearts and turn, So that I should heal them.' [16] "But blessed are your eyes for they see, and your ears for they hear;
     
    4. 눈먼자들

    (요 9:39-41, 개역) [39]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심판하러 이 세상에 왔으니 보지 못하는 자들은 보게 하고 보는 자들은 소경 되게 하려 함이라 하시니 [40] 바리새인 중에 예수와 함께 있던 자들이 이 말씀을 듣고 가로되 우리도 소경인가 [41]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가 소경 되었더면 죄가 없으려니와 본다고 하니 너희 죄가 그저 있느니라
    (요 9:39-41, NKJV) [39] And Jesus said, "For judgment I have come into this world, that those who do not see may see, and that those who see may be made blind." [40] Then some of the Pharisees who were with Him heard these words, and said to Him, "Are we blind also?" [41] Jesus said to them, "If you were blind, you would have no sin; but now you say, 'We see.' Therefore your sin remains.
     
    5. 무능
    (갈 2:16, 개역)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줄 아는 고로 우리도 그리스도 예수를 믿나니 이는 우리가 율법의 행위에서 아니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함이라 율법의 행위로서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느니라
    (Gl 2:16, NKJV) "knowing that a man is not justified by the works of the law but by faith in Jesus Christ, even we have believed in Christ Jesus, that we might be justified by faith in Christ and not by the works of the law; for by the works of the law no flesh shall be justified.
     
    6. 가운데 일어나라. 주님 앞에 서라

    (마 25:31-35, 개역) [31] 인자가 자기 영광으로 모든 천사와 함께 올 때에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으리니 [32] 모든 민족을 그 앞에 모으고 각각 분별하기를 목자가 양과 염소를 분별하는 것 같이 하여 [33] 양은 그 오른편에 염소는 왼편에 두리라 [34] 그 때에 임금이 그 오른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내 아버지께 복받을 자들이여 나아와 창세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예비된 나라를 상속하라 [35]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였고
    (마 25:31-35, NKJV) [31] "When the Son of Man comes in His glory, and all the holy angels with Him, then He will sit on the throne of His glory. [32] "All the nations will be gathered before Him, and He will separate them one from another, as a shepherd divides his sheep from the goats. [33] "And He will set the sheep on His right hand, but the goats on the left. [34] "Then the King will say to those on His right hand, 'Come, you blessed of My Father, inherit the kingdom prepared for you from the foundation of the world: [35] 'for I was hungry and you gave Me food; I was thirsty and you gave Me drink; I was a stranger and you took Me in;
     
    7. 주님께 모든 것을 보여드리자

    (히 4:12, 개역)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하나니
    (Heb 4:12, NKJV) For the word of God is living and powerful, and sharper than any two-edged sword, piercing even to the division of soul and spirit, and of joints and marrow, and is a discerner of the thoughts and intents of the heart.
     
    (요일 3:20, 개역) 우리 마음이 혹 우리를 책망할 일이 있거든 하물며 우리 마음보다 크시고 모든 것을 아시는 하나님일까 보냐
    (1Jn 3:20, NKJV) For if our heart condemns us, God is greater than our heart, and knows all things.
     
    (행 15:8-9, 개역) [8] 또 마음을 아시는 하나님이 우리에게와 같이 저희에게도 성령을 주어 증거하시고 [9] 믿음으로 저희 마음을 깨끗이 하사 저희나 우리나 분간치 아니하셨느니라
    (행 15:8-9, NKJV) [8] "So God, who knows the heart, acknowledged them by giving them the Holy Spirit, just as He did to us, [9] "and made no distinction between us and them, purifying their hearts by faith.
     
    8. 모든 것을 아시는 주님

    (시 139:1-7, 개역) [1] [다윗의 시, 영장으로 한 노래] 여호와여 주께서 나를 감찰하시고 아셨나이다 [2] 주께서 나의 앉고 일어섬을 아시며 멀리서도 나의 생각을 통촉하시오며 [3] 나의 길과 눕는 것을 감찰하시며 나의 모든 행위를 익히 아시오니 [4] 여호와여 내 혀의 말을 알지 못하시는 것이 하나도 없으시니이다 [5] 주께서 나의 전후를 두르시며 내게 안수하셨나이다 [6] 이 지식이 내게 너무 기이하니 높아서 내가 능히 미치지 못하나이다 [7] 내가 주의 신을 떠나 어디로 가며 주의 앞에서 어디로 피하리이까
    (시 139:1-7, NKJV) [1] For the Chief Musician. A Psalm of David. O LORD, You have searched me and known me. [2] You know my sitting down and my rising up; You understand my thought afar off. [3] You comprehend my path and my lying down, And are acquainted with all my ways. [4] For there is not a word on my tongue, But behold, O LORD, You know it altogether. [5] You have hedged me behind and before, And laid Your hand upon me. [6] Such knowledge is too wonderful for me; It is high, I cannot attain it. [7] Where can I go from Your Spirit? Or where can I flee from Your presence?
     
    9.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

    (눅 10:30-34, 개역) [30]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강도를 만나매 강도들이 그 옷을 벗기고 때려 거반 죽은 것을 버리고 갔더라 [31] 마침 한 제사장이 그 길로 내려가다가 그를 보고 피하여 지나가고 [32] 또 이와 같이 한 레위인도 그곳에 이르러 그를 보고 피하여 지나가되 [33] 어떤 사마리아인은 여행하는 중 거기 이르러 그를 보고 불쌍히 여겨 [34] 가까이 가서 기름과 포도주를 그 상처에 붓고 싸매고 자기 짐승에 태워 주막으로 데리고 가서 돌보아 주고
    (눅 10:30-34, NKJV) [30] Then Jesus answered and said: "A certain man went down from Jerusalem to Jericho, and fell among thieves, who stripped him of his clothing, wounded him, and departed, leaving him half dead. [31] "Now by chance a certain priest came down that road. And when he saw him, he passed by on the other side. [32] "Likewise a Levite, when he arrived at the place, came and looked, and passed by on the other side. [33] "But a certain Samaritan, as he journeyed, came where he was. And when he saw him, he had compassion. [34] "So he went to him and bandaged his wounds, pouring on oil and wine; and he set him on his own animal, brought him to an inn, and took care of him.
     
    10. 율법의 무능.

    (롬 7:21-25, 개역) [21] 그러므로 내가 한 법을 깨달았노니 곧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이로다 [22] 내 속 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23]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 아래로 나를 사로잡아 오는 것을 보는도다 [24]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25]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그런즉 내 자신이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노라
    (롬 7:21-25, NKJV) [21] I find then a law, that evil is present with me, the one who wills to do good. [22] For I delight in the law of God according to the inward man. [23] But I see another law in my members, warring against the law of my mind, and bringing me into captivity to the law of sin which is in my members. [24] O wretched man that I am! Who will deliver me from this body of death? [25] I thank God--through Jesus Christ our Lord! So then, with the mind I myself serve the law of God, but with the flesh the law of s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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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가복음 소개

    왜 마가복음을 공부하는가?

    마가복음은 예수 그리스도의 성역, 죽음, 부활을 속도감 있게 서술하며, 대체로 구주의 권능 있는 행적에 초점을 맞춘다. 그런 행적 중 으뜸은 속죄이며, 마가는 오랫동안 약속되어 왔던 메시야로서의 예수님의 핵심 사명인 속죄를 강조했다. 여러분은 구주께서 속죄라는 사명을 어떻게 성취하셨는지를 다룬 마가의 기록과 간증을 공부하면서 복음으로 더 깊이 개종하게 되고 구주를 따를 용기를 얻을 수 있다.

    누가 마가복음을 썼는가?

    이 복음서의 저자는 마가(또한 요한 마가라고도 불림)이다. 마가는 예수 그리스도의 최초 제자들에 속해 있지 않았으나, 나중에 개종하여 사도 베드로의 조력자가 되었으며, 베드로에게서 배운 것을 바탕으로 자신의 복음서를 기록했을 것이다.(경전 안내서, “마가” 참조)

    마가와 그의 모친 마리아는 예루살렘에서 살았으며, 그들의 집은 일부 초기 기독교인들이 모이는 장소였다.(사도행전 12:12 참조) 마가는 첫 선교 여행을 떠나는 바나바와 사울(바울)을 돕기 위해 예루살렘을 떠났다.(사도행전 12:25; 13:4~6, 42~48 참조) 이후에 바울은 마가가 로마에서 자신과 함께 있었다고 기록했으며(골로새서 4:10; 빌레몬서 1:24 참조), 마가를 성역 “일에 유익[한]”(디모데후서 4:11) 동반자로 칭찬했다. 베드로는 그를 “내 아들 마가”(베드로전서 5:13)로 언급함으로써 두 사람 사이의 친밀한 관계를 시사했다.

    마가복음은 언제, 어디에서 쓰였는가?

    마가복음이 정확히 언제 쓰였는지는 알 수 없다. 마가는 주후 64년과 주후 70년 사이에 로마에서 이 복음서를 썼을 가능성이 있으며, 그때는 아마도 사도 베드로가 주후 64년경에 순교당하고 얼마 되지 않은 때였을 것이다.

    마가복음은 누구를 위해, 왜 쓰였는가?

    마가복음에는 아람어 인용문의 번역본, 라틴어 표현, 유대인의 관습에 대한 설명 등이 자세히 실려 있는 점으로 보아, 주로 로마인과 그 외 이방 국가 출신의 사람들, 그리고 대부분 로마와 로마제국 전체에 걸쳐서 기독교로 개종한 사람들로 구성된 독자를 대상으로 기록한 것으로 보인다. 로마제국 전체에 걸쳐 여러 지역에서 교회의 다수 회원들이 신앙의 시련을 극심하게 겪던 시기에 마가가 베드로와 함께 로마에 있었을 것이라고 믿는 이들이 많다.

    마가복음 중 삼분의 일은 구주께서 생애의 마지막 주 동안 전하신 가르침과 그 기간의 사건들을 다룬다. 마가는 수난을 겪으신 하나님의 아들이 결국에는 악과 죄, 죽음을 이기셨음을 증거했다. 구주를 따르는 사람들은 두려워할 필요가 없음을 이 증거는 의미했다. 따라서 그들은 박해나 시련, 또는 죽음에 처했을 때에도 구주를 따랐다. 그들은 주님께서 자신들을 도와주실 것이며 그분이 하신 약속은 결국 성취될 것임을 알았기에, 자신 있게 견뎌 낼 수 있었다.

    마가복음에는 어떤 뚜렷한 특징이 있는가?

    마가복음은 갑작스럽고도 극적으로 전개되며, 사건들의 진행 속도를 빠르게 이어간다. 마가는 , 즉시라는 단어를 자주 사용하여 빠른 속도와 행동을 느낄 수 있게 했다.

    마가복음의 내용 중 90퍼센트 이상이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에도 나오는 것이지만, 마가의 기록에는 종종 더 자세한 내용이 포함되어 있어서, 구주께서 보이신 연민과 그분의 주변 사람들이 보인 반응을 더 깊이 느낄 수가 있다.(마가복음 9장 14~27절마태복음 17장 14~18절과 비교해 본다.) 예를 들어, 마가는 구주께서 성역 초기에 갈릴리와 그 밖의 지역에서 널리 열렬한 환대를 받으셨다고 언급했다.(마가복음 1:32~33, 45; 2:2; 3:7~9; 4:1 참조) 마가는 또한 조심스럽게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의 부정적인 반응도 기록했는데, 그들의 반대는 회의적인 생각에서부터(마가복음 2:6~7 참조) 예수님을 파멸시키려는 음모에 이르기까지(마가복음 3:6 참조) 급속도로 커져 갔다.

    마가복음에서 다룬 중요한 주제 중에는 예수님이 누구이며, 누가 그분의 신분을 이해했는지에 대한 질문뿐만 아니라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라야]”(마가복음 8:34) 하는 제자의 본분도 포함된다. 또한 스스로 자라나는 씨의 비유(마가복음 4:26~27 참조), 데가볼리 지방에서 귀 먹은 사람을 고치신 일(마가복음 7:31~37 참조), 그리고 벳새다에서 맹인을 고치신 일(마가복음 8:22~26 참조)은 마가복음에만 기록되어 있다.

    개요

    마가복음 1~4장. 예수께서 침례 요한에게서 침례를 받으시고 나서, 복음을 전하며, 제자들을 부르고, 기적을 행하는 일을 시작하시다. 그분이 자신에 대한 반대가 늘어나자 비유로 가르치시다.

    마가복음 5~7장. 구주께서 계속해서 많은 기적을 행하시며 사람들에 대한 연민을 보이시다. 침례 요한이 죽임을 당한 후, 예수께서 5천 명 이상을 먹이시고 물 위를 걸으시다. 그분이 거짓 전통에 반하는 가르침을 주시다.

    마가복음 8~10장. 예수 그리스도께서 계속해서 기적을 행하시다. 베드로가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간증하다. 구주께서 자신이 고통과 죽음 및 부활을 겪게 된다고 세 차례 예언하시지만, 제자들은 그분이 의미하는 바를 아직 완전히 이해하지 못하다. 그분이 제자들에게 요구되는 겸손과 봉사에 관해 가르치시다.

    마가복음 11~16장. 구주께서 생애의 마지막 주에 예루살렘으로 입성하시고, 제자들을 가르치시며, 겟세마네에서 고통을 겪으시고, 십자가에 달리시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시다.




    마가복음서의 핵심 내용과 주요 메시지

    1. 영어 제목
    Mark  → 베드로의 증언을 바탕으로 마가가 기록한 행동 중심의 복음서

    2. 헬라어 원어 및 발음 

    원어: Κατά Μάρκον
    발음: Kata Markon (카타 마르콘)
    → 뜻: “마가에 따른 복음서”

    3. 복음 중심 한 문장 요약
     
    마가복음은 예수 그리스도를 고난받는 하나님의 종으로 증거하며,
    신속하고 강력한 행위들을 통해 하나님의 나라가 임했음을 보여주는 복음서이다.

    4. 복음적 메시지 요약

    “즉시”, “곧바로”라는 표현이 반복되며 속도감 있게 전개되는 복음서
    예수님의 능력 있는 사역: 병 고침, 귀신 쫓음, 기적들이 중심
    예수님은 섬김받으러 온 왕이 아니라 섬기기 위해 오신 종 (막 10:45)
    사람들은 계속해서 예수님의 정체를 오해하지만,
    십자가에서 비로소 진정한 메시아의 정체가 드러남
    예수님의 고난과 죽음은 하나님의 뜻에 따른 구속의 절정

    대표 구절(마가복음 10:45)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마가복음은 어떤 책인가?
     
    마가복음은 신약성경 네 복음서 중 두 번째 책으로, 예수님의 공생애와 복음의 시작, 그리고 십자가와 부활의 과정을 담고 있습니다.
    저자는 마가 요한(John Mark) 으로, 바나바의 조카이자 베드로의 영적 아들 같은 제자였습니다. 베드로가 직접 경험한 예수님의 사역과 복음을 마가가 기록하여 전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기록 시기는 A.D. 60~70년경, 로마에서 박해받는 성도들을 위로하고 복음의 능력을 전하기 위해 쓰였습니다.
     
    📌 마가복음의 특징
     
    가장 짧고 빠른 전개
    — '곧(immediately)'이라는 단어가 자주 등장하며, 예수님의 사역을 빠르고 힘 있게 전달합니다.
     
    행동 중심 복음서
    — 긴 설교보다는 예수님의 기적과 사역, 행동을 중심으로 기록하여, 복음의 실제적 능력을 보여줍니다.
     
    박해받는 성도들을 위한 복음
    — 초대교회 성도들이 로마의 박해 속에서도 믿음을 지키며 복음에 목숨 걸 수 있도록 격려하는 메시지가 담겨 있습니다.
     
    📌 핵심 메시지
     
    📖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시작이라" (막 1:1)
    마가는 복음서의 서두에서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 이라 선포하며 복음의 정체성을 분명히 합니다.
     
    ✔️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자, 우리를 위해 십자가 지신 구원자
    ✔️ 복음은 듣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삶을 변화시키는 능력
    ✔️ 믿는 자에게 표적이 따르고, 고난 속에서도 끝까지 복음을 붙들라는 권면
     
    * 대상 독자: 주로 로마에 거주하는 이방인 기독교인들을 대상으로 기록되었습니다.
    이는 마가복음이 유대인의 관습이나 지명 등을 설명하는 부분이 많고, 아람어를 번역하여 기록한 흔적(예: "달리다굼",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이 나타나는 것에서 유추할 수 있습니다. 박해받는 로마 그리스도인들에게 용기와 소망을 주기 위함이었습니다.
     
    * 기록 목적:
    *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신가? 라는 질문에 답하고,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며 메시아임을 증거하기 위함.
    * 고난 받는 그리스도인의 정체성 확립: 박해 속에서 흔들리는 신앙을 가진 독자들에게 예수님 역시 고난과 죽음을 통해 사역을 완성하셨음을 보여주어, 그들이 겪는 고난이 헛되지 않음을 강조하고 인내하도록 격려하기 위함.
    * 제자도의 본질 강조: 예수님을 따르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고난을 감수하는 제자도의 중요성을 가르치기 위함.
    * 긴박하고 역동적인 예수님의 사역 전달: 짧고 간결한 문장, '즉시'와 같은 부사의 빈번한 사용으로 예수님의 활동적인 사역을 생생하게 전달하려 했습니다.
     
    2. 마가복음의 핵심 메시지
    마가복음의 핵심 메시지는 크게 다음 세 가지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1. 예수 그리스도는 '고난 받는 하나님의 아들'이시다. (The Suffering Son of God)
    * 메시아 비밀: 마가복음은 예수님이 자신이 메시아임을 명시적으로 드러내는 것을 자주 금지하시는 '메시아 비밀' 모티프를 사용합니다. 이는 예수님의 메시아직이 당시 유대인들이 기대했던 정치적/군사적 메시아가 아니라, 고난받고 죽임당할 종으로서의 메시아임을 강조하기 위함입니다. 진정한 메시아 되심은 십자가 죽음과 부활을 통해서야 온전히 드러납니다.
    * 고난 예고와 십자가의 길: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세 번에 걸쳐 자신이 고난받고 죽임을 당한 후 사흘 만에 부활할 것을 분명히 예고하십니다. 이는 예수님의 사역의 정점이 십자가 죽음임을 보여주며, 이것이 곧 하나님의 뜻임을 나타냅니다.
    * 십자가와 부활: 마가복음의 정점은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입니다. 로마 백부장이 예수님의 죽음을 보고 "진실로 이 사람은 하나님의 아들이었도다" (마가복음 15:39)라고 고백하는 장면은, 마가복음 전체의 주제를 압축적으로 보여줍니다. 예수님은 약해 보이고 무능해 보이는 십자가 죽음을 통해 오히려 하나님의 권능과 사랑을 가장 강력하게 드러내셨습니다.
     
    2. 진정한 제자도는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르는 것'이다. (Costly Discipleship)
    * 제자들의 이해 부족: 마가복음은 제자들의 어리석음과 예수님에 대한 오해를 매우 솔직하게 기록합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고난 예고를 이해하지 못하고, 누가 더 높은 자리에 앉을 것인지 다투며, 예수님이 잡히실 때 모두 도망갑니다. 이는 독자들에게 제자들이라도 예수님의 길을 이해하고 따르기 어려웠음을 보여줌으로써, 그들 또한 쉽지 않은 길을 걷고 있음을 위로하고 격려합니다.
    * 자기 부인과 십자가: 예수님은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마가복음 8:34)고 말씀하십니다. 이는 단순히 고난을 참는 것을 넘어, 예수님처럼 자신을 온전히 내어주고 희생하는 삶이 진정한 제자도임을 강조합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길은 세상적인 성공이나 영광이 아니라, 고난과 희생의 길임을 명확히 합니다.
    * 섬김의 중요성: 예수님은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마가복음 10:45)고 말씀하시며, 리더십과 섬김의 진정한 의미를 제시합니다.
     
    3. 하나님의 나라는 '예수님의 사역을 통해 이미 시작되었으며, 궁극적으로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 완성될 것이다.'
    * 하나님 나라의 도래: 예수님은 자신의 사역이 곧 하나님 나라의 도래임을 선포하셨습니다. 귀신을 쫓아내고 병든 자를 고치는 것은 사탄의 권세가 꺾이고 하나님의 통치가 시작되었음을 보여주는 표적입니다.
    * 역동적인 사역: 마가복음은 예수님의 활동적인 사역을 강조하며, 하나님의 나라가 단순한 미래적 소망이 아니라 예수님의 현재 사역 속에서 역동적으로 실현되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 종말론적 승리: 비록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셨지만, 부활을 통해 죽음의 권세를 이기시고 하나님의 나라가 궁극적으로 승리할 것임을 확증하셨습니다. 이는 박해받는 그리스도인들에게 궁극적인 소망과 확신을 줍니다.
    요약하자면, 마가복음은 예수님을 '고난받는 하나님의 아들'로 제시하며, 그분을 따르는 제자들 또한 세상적 성공이 아닌 '자기 십자가를 지고 섬기는 삶'을 통해 하나님의 나라를 경험하게 될 것임을 선포하는 복음서입니다. 박해받는 이들에게 예수님의 고난이 곧 영광으로 이어지는 길임을 보여주며 인내와 소망을 불어넣습니다.
     
    📌 복음서 전체 흐름 요약
     
    구분 내용
     
    복음의 시작 : 세례 요한의 사역과 예수님의 공생애 시작 (1장)
    갈릴리 사역 : 병 고치심, 귀신 쫓으심, 제자 부르심 (1~9장)
    예루살렘 입성 : 성전 정화, 종교 지도자들과의 갈등 (11~13장)
    고난과 십자가 : 체포, 재판, 십자가 처형 (14~15장)
    부활과 명령 : 부활, 제자들에게 복음 전파 명령 (16장)
     
    📌 적용 포인트
     
    ✅ 복음은 단순한 종교 이야기가 아니라, 우리 삶의 능력
    ✅ 고난 속에서도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말고, 끝까지 주님을 따라가야 함
    ✅ 믿는 자에겐 반드시 능력이 따름을 믿고 담대히 살아갈 것
     
    개역개정 마가복음 16장

    15. 또 이르시되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
    16. 믿고 세례를 받는 사람은 구원을 얻을 것이요 믿지 않는 사람은 정죄를 받으리라
    17. 믿는 자들에게는 이런 표적이 따르리니 곧 그들이 내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새 방언을 말하며
    18. 뱀을 집어올리며 무슨 독을 마실지라도 해를 받지 아니하며 병든 사람에게 손을 얹은즉 나으리라 하시더라
     
    📖 마무리
     
    마가복음은 짧지만 가장 강력하고 실천적인 복음서입니다.
    우리도 이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고, 어떤 상황에서도 주님을 따르며 복음을 전하는 삶을 살아야겠습니다.





    마가복음을 통해서 볼 때 마가는,

    히브리어와 아람어와 유대풍습을 잘 알고 있는 것으로 보아 유대인으로 봅니다.

    그런데 한편으로 그리스어로 마가복음을 쓸 만큼 그리스어에도 능통하고, 히브리어나 아람어가 나올 때마다 그리스어로 번역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그리스어에 능통한 유대계 기독교인으로 봅니다.

    마가복음의 대상자는?

    로마제국 비유대계 크리스천입니다.

    그래서 족보도 없고 구약 이야기가 적습니다.

    반면 이방인인 수로보니게 여인(7:24-30)과 로마군 백부장(15:39)을 등장시킵니다.

    2. 마가는 12제자가 아닌데 어떻게 복음서를 썼는가?

    사도행전에 보면, 마가 요한은 <바나바의 조카>로 바울의 1차 선교여행에 동행했던 사람이었습니다.

    바나바와 같이 구브로섬(키프로스) 출신이므로 그리스어에도 능통해서 주로 통역자 역할을 하였습니다.

    전승에 의하면. 원래 마가는 <70인 전도대의 한 사람>이었다고 합니다.

    최후만찬 후 겟세마네 동산에 따라갔다가 <예수님이 체포될 때 포대기를 버리고서 알몸으로 도망간 청년>(막14:51)이 뜬금없이 마가복음에서만 나오는데, 이 사람이 마가라 추정됩니다.

    "그런데 어떤 젊은이가 맨몸에 홑이불을 두르고 예수를 따라가고 있었다.

    그들이 그를 잡으려고 하니,

    그는 홑이불을 버리고 맨몸으로 달아났다." (막14:51-52)

    마가의 집은 <마가의 다락방>으로 유명합니다. 이곳은 최후의 만찬과 성령강림사건이 이루어진 곳으로서, 마가는 예루살렘 성안에 집을 가진 사람, 그것도 120명을 수용할 다락방을 가진 상당한 규모의 집을 갖고 있었기에 부유하게 자랐다고 여겨집니다.

    부잣집 아들로 (주로 무역업에 종사했을 것) 자라나 바나바와 바울과 함께 1차 선교여행에 따라갔다가 눈앞에 놓인 험난한 타르수스 산맥을 보고 중도 포기하고 돌아섰습니다. 이런 이유로 바울과는 관계가 좋지 않았으나 나중에 화해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런데 마가는 바울보다는 베드로의 제자였으며, 문체나 어투 등이 베드로와 유사한 것으로 보아 마가복음을 ‘베드로 복음’이라 불리기도 합니다.

    마가는 베드로의 통역자로 로마까지 수행했고, 이 과정에서 베드로에게 전해 들은 예수님 이야기를 충실히 기록한 것입니다.

    3. 마가복음의 특징은?

    마가복음이 쓰여진 당시 상황은?

    1. 마가복음은 정치적인 복음입니다.

    그러나 당시 유대인들이 생각한 ‘정치적 메시아니즘’과는 다릅니다.

    그 당시 강경 전쟁론과 낙관주의 사상이 팽배했습니다.

    열심당원들은 화해나 타협 없이 강경하게 전쟁론을 펼쳤고, 이땅에 로마로부터 독립 왕국을 세울 수 있다는 낙관론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은 이에 반대해 유다독립전쟁에 참여하지 않고 예수님의 말씀대로 예루살렘에서 탈출하였습니다. (막15:14-19, "읽는 사람은 깨달아라. 그 때에는 유대에 있는 사람들은 산으로 도망하여라.)

    결국 그리스도인들은 유다 전쟁 이후 유대교와 결별하게 됩니다.

    이런 상황에서 마가복음은 하나님 나라는 전쟁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나라가 아니다, 예수님이 가르치시고 보여주신 진정한 하나님 나라가 무엇인지에 대해서 기록한 것입니다.

    2. 마가복음은 예수의 삶을 강조하는 복음입니다.

    마가복음 이전에 쓰여진 바울의 복음은 십자가 죽음과 부활을 강조한 반면,

    마가복음은 인간 예수의 삶을 강조합니다.

    예수의 삶을 본 받아라! 우리와 같은 인간 예수의 모습을 부각시킵니다.

    그런데 그 분이 하나님의 아들이시다! 로마 황제가 신의 아들이 아니라는 대단한 도전의 메시지입니다.


    3. 마가복음은 인간이면서 하나님의 아들되심을 강조합니다.

    인간 예수의 하나님 아들 되심을 초점으로 구성을 살펴보면,

    신의 아들의 출현 (1장 1-13절)

    신의 아들의 교훈과 민중들을 향한 사역 (1장14-13장 37절)

    신의 아들의 인격과 하나님에 대한 순종 (14장 1-15장 47절)

    신의 아들의 승리 부활과 영광 (16장1-20절) 으로 전개됩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시니 오히려 족보나 유년시절이 없이 전개됩니다.

    곧바로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시다’를 말하면서 세례로부터 시작하여 공생애를 중심에 둡니다.

    4. 마가복음은 예수의 '인간적인 측면'을 강조합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가족과 친척들로부터 미쳤다는 소리를 들으시고, 죽음을 앞두고 번민하시는 모습, 십자가상에서 하나님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습니까’ 부르짖는 장면 등 인간적인 모습을 가감 없이 묘사합니다.

    그 이유는 박해 받는 순교자 공동체를 염두에 두고 기록하였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마가는 '우리와 같이 수난 받는 인간 예수가 곧 하나님의 아들이었다!'를 선언하고 있는 것입니다.

    마가복음의 예수는 ‘인간 예수, 하나님의 아들, 수난당하는 예수’ 입니다!

    4. 마가복음의 핵심 사상은?

    하나님의 나라

    사실 "하나님의 나라'는 마가복음 뿐만 아니라 4복음서의 핵심 사상입니다.

    그러나 마가복음은 예수의 삶 자체하나님 나라 운동임을 강조합니다.

    우리는 하나님 나라를

    지상 나라와 반대되는 천국, 천당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렇게 이분법적으로 생각하게 된 이유는,

    마태복음에 등장하는 ‘하늘나라’라는 용어를 오해한 결과입니다.

    ‘하늘나라’라는 말은 마태복음에만 (32번) 등장하는 용어입니다.

    ‘하나님’이란 이름을 부르는 것을 신성모독으로 여겨 하나님 이름을 부르지 않는 유대교 관습(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말라는 십계명 제1계명)에 따라 마태는 ‘하나님’ 대신 ‘하늘’이라고 표현한 것입니다. 유대인들을 염두에 두고 기록한 책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를 잘못 생각해서, 지상 나라와 반대되는 세상, 현세가 아닌 사후세계로 오해하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에서 ‘나라’는 영토가 아니라 ‘통치’를 뜻합니다.

    즉 하나님 나라란 하나님의 통치입니다!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그 어디나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그 당시 백성들은 새로운 나라, 메시아의 나라를 꿈꾸었습니다.

    세금과 빚 때문에 땅을 잃고 일용직 노동자(품꾼 비유)나 거지나 도둑이 되는 현실이었습니다. 그래서 잦은 농민 항쟁들이 일어났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목 빠지게 바라던 메시아 왕국을 이룩하고자 그들은 유다 독립 전쟁을 일으킵니다.

    예수님의 하나님 나라는?

    그런데 예수님의 하나님 나라는 달랐습니다.

    차원이 달랐고, 방법론이 달랐습니다.

    기존의 가치관에 대한 전복이지만,

    지금의 지배구조를 뒤엎고 또 다른 지배계급을 만든 것이 아니라

    지배가 없는 세상을 만드는 것이었습니다.

    칼과 힘에 의한 방법론이 아니라

    섬김과 나눔, 십자가, 누군가를 살리기 위한 죽음, 목숨을 건 사랑을 통한 비폭력 평화의 물결이었습니다!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뜻을 다하고, 네 힘을 다하여,

    너의 하나님이신 주님을

    사랑하여라!

    네 이웃을 네 몸 같이 사랑하여라!

    (막12:30~31)





























































































    2025 마태복음







    예수님의 열두 제자 능력분석
    - 만약 한 회사가 유능한 신입사원을 뽑기 위해 예수님의 열두 제자를 대상으로 인물분석을 했다고 가정하자. 
    회사가 이들의 학력 경력 적성을 종합해 컴퓨터에 분석을 의뢰했다면 아마 이런 결과가 나왔을 지도 모른다.
    야고보, 요한 : 매우 이기적인 사람
    도마 : 매사에 의심이 많고 부정적인 성격의 소유자
    베드로 : 성격이 급해서 실수할 가능성이 높다 
    안드레 : 너무 내성적이어서 매사에 추진력이 떨어진다  
    야고보 : 혁명가적인 기질이 있어 위험한 사람 
    마태 : 세리 출신으로 자신의 이익만을 추구하는 이기적인 사람
    가룟 유다 : 적격자로서 그는 학식과 경험을 겸비한 인물이며 실업가의 감각과 사교성을 지니고 있다.

    좇아다닌다고 제자가 되는 것은 아니다

    어느날 저명한 두 교수가 심오한 사상과 삶의 의미에 대해 논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한 교수가 다른 교수에게 물었다.
    “헨리라는 학생이 그러는데 자기가 자네의 제자라더군. 그 말이 사실인가?”
    이에 대한 동료 교수의 대답은 이랬다.
    “글쎄, 그 학생이 내가 하는 모든 강의를 좇아다니며 듣고 있긴 하지. 그러나 나의 제자가 아닐세.”
    멋모르고 좇아다니는 사람은 많아도 참된 제자가 없는 것처럼 슬픈 일이 있을까?

    코카콜라와 제자

    브라질의 후안 까를로스 오르티즈 목사님이 자신의 제자 사역에 대해서 말한 부분이다.
    내가 부에노스 아이레스의 교회에 부임했을 때 교인 수는 184명이었다. 
    교역자들은 그때부터 정신없이 일해야 했다. 
    2년 동안 극성스러운 조직과 전도 덕분에 교인 수는 600명을 헤아리게 되었다. 
    그러니까 3배나 교세를 확장시킨 셈이다. 
    그러나 그 이면에 나는 무엇인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느꼈다. 
    마침내 나는 모든 것에서 손을 떼기로 결정했다. 
    나는 한적한 곳으로 가서 기도와 묵상에 전념했다. 
    성령께서 나를 깨뜨리기 시작했다. 
    “너는 코카콜라 회사가 코카콜라를 파는 것과 똑같은 방식으로, 리더스 다이제스트 사가 잡지를 파는 것과 똑같은 방법으로 복음을 전하고 있다. 
    너는 학교에서 배운 모든 술수를 쓰고 있다. 
    도대체 네가 하는 일들 가운데 나의 손길을 찾아보겠느냐?” 라고 그분이 말씀하셨다. 

    “너는 자라나고 있질 않다. 
    네 생각에 네가 교인 수를 200명에서 600명으로 늘렸다고 해서 자라고 있다고 생각하는 모양인데, 그것은 자라는 것이 아니라 살쪄 가는 것이다.” 

    우리는 제자 수를 늘려 가는 것이 제자 사역의 핵심이라고 생각한다. 
    그러기에 많은 사람들이 여러 가지 행사를 중심으로 제자 수를 늘려 가려고 한다. 
    그러나 진정한 제자는 성령으로 태어나는 것이요, 하나님의 손길로 탄생하는 것이다. 
    우리는 제자를 양육함에 있어서 주님의 손길과 뜻을 찾아야 할 것이다.

    믿음의 중간지대는 없다

    예수님의 제자는 중간지대에 살지 않는다. 우리는 맨 가장자리에서 전적으로 하나님을 의지해서 살아간다(마이클 슬로터)

    당신은 주일 성수만을 목표로 한 신앙인입니까?
    아니면 삶 전체를 성수하고자 하는 제자입니까?
    세상과 하나님 사이, 중간지대에 자리를 잡은 채 머뭇거리고 있다면 이것은 제자의 삶이 아닙니다. 세상이 말하는 안전지대에 거하기보다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진리 안에 거하십시오
    믿는 자에게 중간지대란 존재하지 않습니다. 당장은 당신의 선택을 두고 많은 이들이 어리석다 할지라도 전적으로 하나님을 의지하는 삶이 가장 현명한 삶의 방식임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새벽종소리

    3. 제자의 길과 십자가

    고난이야말로 진정한 제자의 길의 상징입니다. 제자는 그의 스승보다 높지 않습니다. 그리스도를 따르는 것은 우리가 반드시 받아야 하는 고통을 의미합니다. 루터가 진정한 교회의 표적들 중에 고난을 넣었던 이유가 바로 이 때문입니다. 그리고 아우구스부르크의 신앙고백을 준비하며 작성한 비망록 중의 하나에도 교회를‘복음을 위하여 박해받고 순교당하는 사람들’의 공동체로 정의했습니다. 만일 우리가 우리의 십자가를 짊어지기를 거부한다면 우리는 그리스도와의 교제를 박탈 당하고 그리스도를 따르지 못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를 섬기는 가운데 우리의 생명을 포기하고 우리의 십자가를 지고 간다면 우리는 그리스도와 십자가의 교제 가운데 우리의 생명을 다시 찾게 될 것입니다. 제자의 길의 반대는 그리스도와 그리스도의 십자가, 그리고 십자가가 가져오는 모든 모욕들을 부끄러워하는 것입니다.
    제자의 길은 고난 당하시는 그리스도에 대한 충성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에게 고난을 받으라는 요구는 기쁨이며 그리스도의 은혜의 증거입니다. 초대 기독교 순교자들의 행동은 그리스도께서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임재의 확신을 주심으로써 어떻게 그들이 죽음의 고통을 당하는 때를 아름답게 하셨는지를 보여주는 완전한 증거입니다. 그들이 그리스도를 위해 무자비한 고문을 받을 때 그리스도와 함께하는 완전한 기쁨과 축복의 참여자가 되었습니다. 십자가를 지는 것은 고난에서 승리하는 유일한 길입니다. 이 승리의 길은 그리스도에게도 분명하였기 때문에 그리스도를 따르는 모든 사람들에게도 분명합니다.
    /생명의 삶 중에서

    기독교 역사를 변화시킨 사람은 실격자로 판정난 제자들이었습니다. 
    세상적 판단으로 가장 유능한 가룟 유다는 오히려 배신자로 낙인 찍혔습니다.


    신자와 제자

    값싼 은혜를 생각하는 사람, 곧 쉽게 예수를 믿으려는 사람이 많을수록 교회 는 그 의미를 상실한다. 
    그리고 제자가 되어 십자가를 지는 사람이 많을수록 교회는 하나님께 많은 영광을 돌린다. 값싼 은혜를 생각하는 사람은 하나님을, 쉽게 용서하고 쉽게 천당에 보내주는 할인 매장의 주인쯤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나를 따라오려거든 네 소유를 포기하라"라는 비싼 대가를 요구하셨다.
    신자는 열매가 빈약하고, 제자는 풍성한 열매를 맺는다.
    신자는 자기 혼자의 영혼을 겨우 건지나, 제자는 그리스도를 영화롭게 한다. 
    신자는 그리스도의 사람이라 불리기는 쑥스러우나, 제자는 큰소리로 "그는 그리스도 인이다"라고 불릴 수 있다. 
    신자는 싼 값을 지불하며 살고, 제자는 비싼 값을 치르며 산다. 
    신자는 빈 어깨로 천국에 가려 하고, 제자는 남의 십자가까지 지고 천국으로 향한다. 
    신자는 혼자 기뻐하고 혼자 만족한다. 
    그러나 제자는 눈 물과 기쁨을 이웃과 함께 나눈다. 
    예수님께서는 '나를 존경하라' '나를 예배하 라' '나에게 영광을 돌리라'라는 말 대신 '나를 따르라'라고 하셨다. 
    따른다는 것은 예수님의 행동을 따라 실천하는 것이다. 
    예수님처럼 나도 희생하고 예수 님처럼 나도 사랑하고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셨으니 나도 나의 십자가를 지 고 예수님을 따르는 것이 믿음이요, 예수 사랑이다.




    제자(弟子) 아우 제, 아들 자 


    μαθητής, οῆ, ὁ

    1. 제자.  2. 생도.  3. 귀의자
    Pronunciation [ mathētēs ]  
    Etymology  /  3129에서 유래
    • 1.  제자, 배우는 자, 생도.
      • a.   [일반적으로] 생도, 견습자, 마10:24, 25, 눅6:40.
      • b.   제자, 귀의자, 마9:14, 10:1, 11:1, 22:16, 막2:18, 5:31, 눅5:33, 6:17, 8:9, 19:37, 요1:35, 6:66, 9:28.
    • 관련 성경 /  제자(마9:10, 막8:27, 요6:3), 형제(행1:15).



    10월 30일(목) 마태복음 27-28장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제자를 삼아(28:19)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찌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 
    Therefore go and make disciples of all nations, baptizing them in the name of the Father and of the Son and of the Holy Spirit,
    and teaching them to obey everything I have commanded you. And surely I am with you always, to the very end of the age."

    예수님을 어떻게 따라야 하는가?​

    1. 최우선으로 그분을 따라야 한다. 주님의 부르심에 응답하는 것이 삶의 가장 중요한 결단이어야 한다.

    2. 개인적으로 따라야 한다. 배우자, 친구, 그룹차원의 결단이 아니다. 내가 따라야 한다.

    3. 회개하는 마음으로 따라야 한다. 세상의 죄악에 등을 돌려야 한다

    4. 믿음으로 따라야 한다. 의심하지 말고 모든 면에서 그분을 신뢰해야 한다.

    5. 온 마음으로 따라야 한다. 한 사람은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한다. 삶 전체를 그분께 복종시켜야 한다.

    스티븐 로슨 교수는 이렇게 말합니다.

    "그리스도를 온전히 따를 때만이 삶의 궁극적인 만족을 누린다."

    동시에 그는 이렇게 질문합니다.

    "자 여러분 준비가 되었습니까?"

    사랑하는 여러분 준비가 되셨습니까?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나를 따르라!! 저는 예수님을 따라가고 있는 여러분에게 한가지 방법을 더 드리고 싶었습니다. ^^ [아침에 따라야 한다!! 할렐루야!!]^^ 말씀으로 승리합시다^^

    1번 - 마태복음 6:33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2번 - 누가복음 13:24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들어가기를 구하여도 못하는 자가 많으리라

    3번 - 마태복음 16:24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4번 - 야고보서 1:6 오직 믿음으로 구하고 조금도 의심하지 말라 의심하는 자는 마치 바람에 밀려 요동하는 바다 물결 같으니

    5번 - 마태복음 6:24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




    스승과 제자의 인연은 특별하다고 합니다

    스승은 제자를 찾고 제자 또한 스승을 찾습니다. 
    훌륭한 스승과 제자가 인연이 되어 공부할 수 있다면 그것은 가장 복되고 큰 공덕을 이루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들도 이 광대한 부처님 법을 의지하여 공부할 수 있다면 자신을 이끄는 묘한 도리를 알게 될 것입니다. 
    마음 공부는 조급한 마음은 금물입니다. 
    오직 묵묵한 코끼리의 걸음으로 지금, 순간순간을 깨어있는 정신으로 인내하며 자기 자리에서 묵묵히 최선을 다하면 그 자리에서 꽃이 피고 열매 맺어 향기가 두루 할 것입니다.
  • 1. 스승으로부터 가르침을 받거나 받은 사람. 
    2. 예수(Jesus)의 가르침을 받아 그의 뒤를 따르는 사람.



  • 제자(弟子) 아우 제, 아들 자 

  • 1. 스승으로부터 가르침을 받거나 받은 사람. 
    2. 예수(Jesus)의 가르침을 받아 그의 뒤를 따르는 사람.

  • μαθητής, οῆ, ὁ

    1. 제자.  2. 생도.  3. 귀의자
    Pronunciation [ mathētēs ]  
    Etymology  /  3129에서 유래
    • 1.  제자, 배우는 자, 생도.
      • a.   [일반적으로] 생도, 견습자, 마10:24, 25, 눅6:40.
      • b.   제자, 귀의자, 마9:14, 10:1, 11:1, 22:16, 막2:18, 5:31, 눅5:33, 6:17, 8:9, 19:37, 요1:35, 6:66, 9:28.
    • 관련 성경 /  제자(마9:10, 막8:27, 요6:3), 형제(행1:15).



    10월 30일(목) 마태복음 27-28장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제자를 삼아(28:19)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찌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 
    Therefore go and make disciples of all nations, baptizing them in the name of the Father and of the Son and of the Holy Spirit,
    and teaching them to obey everything I have commanded you. And surely I am with you always, to the very end of the age."



    너희는 가서 
    - 여기 `가서'(*, 포류덴테스)는 제 1과거 분사형으로서 끝없이 지속적으로 나아가야 할 것을 시사한다. 
    물론 이 분사는 `너희는 제자를 삼아'라는 본동사의 보조 역할 밖에는 하지 않으나 제자를 만드는 사역이 `모든 족속'에 확장되길 요구하는 문맥에서 `가다'라는 분사가 매우 의미 심장한 명령적 의미를 지닌다고 할 수 있다. 
    사실 한 분사가 명령형에 의존하는 부수적인 분사로서의 기능을 가질 때는 보통 그 분사는 독립성이 짙은 명령적 의미를 갖는다(2:8,13; 9:13; 11:4; 17:27; C. Rogers, The Great Commission, pp.258-67). 
    결국 '가서'란 선교에 있어서 적극적이고 능동적이며 지속적이어야 함을 강조하는 말씀이라 본다. 
    진정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진 분이 위임한 권세와 당부한 명령을 가지고 언제 어디서나 복음 전하는 길을 `가는' 선교사들이 바로 성도들인 것이다.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 일찍이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방인의 길'과 `사마리아인의 고을'로 가지 말고 이스라엘 집의 잃은양에게 가라고 하셨고(10:5,6) 예수 자신은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에게로만 보냄을 받았다고 말씀했던 것(15:24)과는 대조적으로 이제는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으라고 한다. 이는 이제 더이상 유대인과 이방인의 차별(差別)이 존재하지 않음을 뜻한다. 한편 `모든 족속'에 대해 이스라엘을 제외한 모든 이방족속들을 지칭한다는 견해가 있다(Hare, Walker). 즉 이스라엘은 이제 영광된 지위를 상실했기 때문에 복음 전파 대상에서 제외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스라엘을 포함한 모든 민족을 가리킨다는 견해가 있다(Trilling, Hubbard,John p.Maier). 사실 마태가 '족속'(*, 에드네)이라는 말을 관사없이 사용할 경우 대부분 `민족들', `백성들'을 뜻했으며(24:9,14; 25:32) 그리고 그 표현은 `(구분없이) 모든 백성들' 혹은 `(구분없이) 모든 나라들'을 의미했다. 따라서 이방인만이 본 지상 명령의 관심대상이라고 보는 것은 불필요한 제한을 설정하는 것이 된다. 한편 `제자를 삼아(*, 마데튜사테)란 말은 `제자를 만들라'는 강한 명령으로서 가르치고 훈련시키라는 의미이다. 사실 한 자연인을 그리스도의 제자로 만든다는 것은 그를 선생과 제자에의 관계에로 인도함을 뜻한다. 제자란 그리스도의 권세있는 교훈의 멍에를 메야 하며(11:29), 그리스도가 말한 것이기 때문에 그가 말한 바를 진리로 받아들이고, 그리스도가 요구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 요구의 정당성을 인정하고 순복하는 것을 모두 포함한 말이다(Broadus). 진정 제자들은 예수의 가르침을 듣고 이해하고 순종하는 자들이다(12:46-50). 한편 이와 더불어 제자는 선포와 응답을 모두 필요로 하는 존재이기 때문에 `제자를 삼아'라는 말 속에는 회개의 신앙을 이끌어내는 복음의 선포가 은연 중에 내포되었다고도 볼 수 있다. 이 제자직에 대한 응답은 세례를 받고 가르침을 받는 일이다. 이러한 사실은 본절과 다음 절에 이어지는 지상명령에서 주어진 바 `가라', `세례를 주라',`가르쳐 지키게 하라'는 단어가 모두 `제자 삼으라'는 본 동사의 보조 역할을 하는 분사형을 취하고 있다는 사실에서 더욱 확연(確然)해진다.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 예수께서 `세례를 주라'고 말씀하시기는 이곳이 처음이다. 그런데 우리는 여기서 세례가 처음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베풀어지다가(행 2:38; 8:16; 10:48; 롬 6:3; 고전 1:13,15; 6:11; 10:2)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이 점차 아버지, 아들, 성령의 이름으로 확대 되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이에 관해 리겐바하(E. Riggenbach)는 말하기를 디다케(Didach, 12사도 교훈집) 당대에, 예수의 이름으로주는 세례와 삼위(三位)의 이름으로 주는 세례는 공존했다 한다. 
    그러나 분명히 밝혀둘 것은 예수께서 세례를 받으실 때 성삼위의 조화로운 협력이 있었다는 사실과(3:16, 17) 초대 교회에서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다 하더라도(행 8:16; 10:48) 그것이 창조자이시요 섭리자이신 성부 하나님과 죄를 고백케 하시며 위로하시는 성령의 권위와 실체를 이미 전제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실로 삼위 일체라는 신앙이 후대의 교회가 확실한 토대를 세우고 또 초대교부 터툴리안(Tertullian)에 의해 그 용어가 공식 사용되었다 하더라도 그것은 분명 예수의 가르침과 삶에 의해 증거되고 또 사도들에(고전 12:4-6; 고후 13:13; 요일 3:23,24) 의해 계승 발전되었다는 사실은 간과되어서는 안 된다. 
    어떻든 제자들이 되는 자들은 삼위(Trinty)하나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아야 한다. 여기서 `이름'(*, 오노마)이란 하나님의 품성과 속성 및 그분의 전인격을 암시하며 또 그분의 권위와 권능이라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특별히 `오노마'가 복수가 아닌 단수로 사용된것은 삼위 하나님의 완전한 하나되심을 강조해 준다고 보겠다. 
    그리고 `이름으로'에서 `...으로'(*, 에이스)에 관해 몇몇 신약 성경 기자들과는 달리, 마태는 분명히 헬레니스틱 그리스어(Hellenistic Greek)에서 흔히 나타내는 '에이스(엄격히는 `안으로'란 뜻)와 '엔' (*, 엄격히는 `안에'라는 뜻) 간의 혼동을 피하고 있다. 만일 그렇다면 전치사 `안으로'는 어떤 관계 안으로 들어오는 행위 혹은 주님의 권세 아래로 들어오는 행위를 강하게 시사해 준다(Allen, Albrigth and Mann). 한편 `세례를 주고'에 해당하는 헬라어 `밥티조'(*)는 `잠근다'(왕하 5:14; 시 68:23), `씻는다'(막7:4; 눅 11:38; 딛 3:5)는 뜻으로 사용되고 있어 이를 `세례' 또는 `침례'로도 각각 번역할 수 있다. 이에 대해서는 3:6, 11, 13-17의 주석을 참조하라. 사실 중요한 것은 `세례'냐 `침례'냐 하는 것이 아니라 세례란 죄사함을 받고(막16:16) 메시야의 계약 공동체의 일원이 되며, 메시야의 주권에 굴복하겠다는 서약의 표(Sign)라는 사실이다(Beasley-Murray, Baptism pp.90-92).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 마태복음에서 예수의 공생애는 `가르침', `전파하심' 그리고 `병 고침'으로 요약될 수 있다(4:23; 9:35). 그런데 예수께서 일찍이 제자들을 파송하면서 `병을 고치고', `전파할 것을' 명하셨지만(10:7-9)지금처럼 `가르치는 것'에 대한 직접적 명령은 하시지 않았다. 그 이유는 예수께서 살아있는 유일한 선생으로서(23:8) 가르치는 권세가 그분에게만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제는 승천하실 때가 되었으므로 당신의 뜻을 받들어 천국 일꾼으로 계속 매진(邁進)해야 할 제자들에게 `가르칠' 책임과 권위를 부여해 주고 계신 것이다. 제자들은 이제 세상에 나아가 생전에 스승이 가르쳐 주신 계명들과 교훈(*, 디다케)을 가르칠 수 있는 권리와 동시에 의무를 갖게 된 것이다. 한편 `가르쳐'(*, 디다스콘테스)는 현재 분사형으로서 지속적인 가르침을 강조한 말이다. 즉 예수의 가르침은 오고오는 세대들에게 전달되고 보존되어야 할 것이었다(딤후2:2). 실로 처음 예수의 가르침에 접했던 제자들(`눈의 목격자들 - eyewitnesses')이 예수께서 가르치신 것들을 주의깊게 전달하여 줄 때 다음은 `귀의 목격자들'(earwitnesses)을 낳게 된다(O'Brien pp.264ff.).이러한 역동적이고 생명력 넘치는 전달 과정을 통해 하나님의 나라는 더욱 든든히 서 갈 것이다. 한편 제자들이 가르치는 바는 단지 추상적이고 이론적인 교리로 끝나서는 아니되었다. 그것은 반드시 `지키고' 순종해야 할 그리고 전의지적 결단과 실행이 동반되어야 할 살아있는 가르침이어야 했다.

    볼지어다(*, 이두) 
    - 마태가 자주 사용하던 간투사로서, 예수께서 지상 대명령을 마치시면서 그에 곁들여 당신의 위대한 약속을 주시고자 제자들의 주의를 환기시키고 계신 것이다. 따라서 이 `볼지어다'는 본문에서 `확실히' 정도의 뜻이 될 것이다.

    세상 끝 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 본서는 예수의 탄생이 선지자의 예언을 성취하는 것이며 그 이름은 `임마누엘'이라는 말로 시작되었다(1:23). `임마누엘' 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말씀은 이제 본서의 마지막에 강조적으로 다시 언급되고 있다. 이 약속은 성도들에 대한 넘치는 위로와 힘이 아닐 수 없다.비록 그분은 잠시후 승천하실 것이지만 무소부재하신 그분은 여전히 당신의 사람들의 형제요 친구요 구원자요 상담자요 안내자로서 모든 공간 모든 시간을 초월하여 `함께' 계실 것이다. 진정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지니신 그분이 `함께' 하신다는 것은 모든 지식과 권능과 사랑를 가지고 언제라도 돕고 위로해 주실 것이라는 초월한 약속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단 매일매일의 삶 속에서 그분의 계명을 지킴으로써 그분의 임재(臨在)를 체험하고 그분의 주권을 인정하는 자에게만 그분의 약속은 실현이 될것이다. 한편 여기서 `세상 끝날까지'(*, 헤오스 테스 쉰테레이아스 투 아이오노스)란 복음이 땅끝까지 전파되어 주께서 재림하시는, 세상 역사의 종말을 가리킨다(24:3). 그리고 `항상'(*, 파시스 타스헤메라스)이란 신약에서 여기에만 나오는데 직역하면 `모든 날의 전체'가 된다. 이는 우리의 먼 장래만이 아니라 우리가 현재 살고 있는각각의 날들 모두를 가리킨다. 실로 주님의 임재는 이 `세상 끝날까지'(13:39, 40, 49; 히 9:26) 지속될 것이다. 즉 하나님 나라가 완성될 그때인 역사의 종말 때까지 게속될 것이다. 여기에는 심판에 대한 묵시적 경고가 내포되어있다. 주와 더불어 살아가는 성도 내지는 신앙 공동체는 그 궁극 지향점이 종말이므로 감히 더불어 계신 주님을 떠나 제멋대로 행동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한편 주님의 지상 명령과 그것의 성취 사이의 기간은 추정하기가 어렵다. 어쨌든 그 기간은 교회가 지속적으로 선교해야하는 활동 기간이며, 또 교회가 주의 재림(parousia)을 예비해야 하는 준비 기간인 동시에 교회가 주의 잔치를 현재적으로 누려야 하는 희락(喜樂)의 기간이기도 하다. 이상으로 본서는 지속적인 선교와 가르침에 대한 기대와 명령으로 끝이 난다. 앞에서 보아왔듯이 본서에 기술된 다섯개의 강화들은 예수의 가르침이라는 동일한 내용과 함께 끝을 맺고 있다(3:1-26:5). 반면 예수의 수난과 부활 기사는 그의 제자들에게 동일한 사역을 수행하도록 위임함으로 끝이났다. 즉 십자가와 빈 무덤, 그리고 부활하신 주의 영광스런 승리의 현현과 승귀에 비추어서 그 사역을 수행하라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본서는 주의 명령이 완성되는 `세상 끝날까지'는 종결되지 않는 미완(未完)의 책인 것이다.




    제자화를 위한 소요 시간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부르시고 3년 동안 함께 생활하며 제자들을 양육했습니다.
    3년을 시간으로 환산해 봅시다.
    하루 24시간, 
    1주 7일은 168시간이란 시간을 
    1개월은 4주 672시간
    1년은 12개월 8,064시간
    3년은 24,192시간

    신앙생활을 시간으로 환산하면 주일 예배 1시간, 새벽 기도회 6시간, 수요성서탐구 1시간 
    주 8시간
    3년 24,192시간을 주 8시간으로 나누면 3,024주
    3,024주를 52주로 나누면 58년 




    선교 명령(마태복음 28:19-20)            

    예수 안에서 죄 사함을 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된 성도가 예수의 부활을 증거하는 것이 복음 전파이다. 
    복음을 전파하는 일은 성도의 사명이다. 
    교회는 복음 전파를 위하여 존재하는 공동체이다. 
    성도는 땅끝 선교의 사명을 감당하도록 부르심을 받은 주님의 자녀들이다. 
    예수께서는 승천하시기 전에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행1:8)라고 약속하셨다.

    “하나님은 인간에게 복을 주시며 생육, 번성, 충만, 정복, 다스리라”는 문화 명령을 하셨다. 창세기 1장 28절의 내용이다. 그리고 오늘 읽은 본문에서 ‘선교 위임 명령’을 하셨다. 오늘 함께 예배하는 선교사들은 젊은 지난 날 선교 현장을 향한 부르심에 응답한 이들이다. 오늘 읽은 본문에는 네 가지의 명령이 담겨 있다. 

    가라
    제자를 삼으라
    세례를 주라
    가르쳐 지키게 하라

    신앙생활이란 누구나 다 이와 같은 선교 명령을 준행하는 삶이어야 한다. 
    우리는 각기 사회적인 신분이 다르고 직업이 다르고 경험이 다르고 사회적인 역량이 다르고 경제력이 다르고 능력도 다르고 건강 상태도 서로 다 다르다. 
    그러나 분명한 한 가지 사실은 서로 다른 삶의 여건 가운데서도 믿음의 사람은 선교 명령을 준행해야만 한다. 
    노아가 방주 건설 명령을 준행한 것처럼 말이다. 

    ‘가라’는 명령이 무엇인가. 
    4천년 전에 하나님은 아브람을 만나셨다. 
    그리고 저에게 “내가 지시하는 땅으로 가라”라고 명령하셨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으로부터 언약의 말씀을 듣고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아갔다. 이것이 언약의 조상이 되는 첫 출발이었다. 야곱은 도망 간 땅에서 12지파의 조상의 기틀을 닦았다. 요셉은 노예로 팔려 간 땅 애굽에서 동행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덧입고 애굽의 총리대신으로 80년을 섬겼다. 모세는 살인 후 피신해서 도망갔던 땅, 미디안 생활 40년 후에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다. 다윗은 아버지 이새의 심부름으로 전쟁터를 찾아갔다. 세 형들을 만나려고 블레셋과의 전쟁터인 가드 골짜기를 찾아갔다가 운명이 바뀌었다. 거기서 만난 블레셋의 거인 장수 골리앗을 물맷돌 한 개로 때려 눕혔다. 그런 인연으로 다윗은 십수년 후에 통일 왕국 이스라엘을 40년간 통치하는 언약 민족의 왕으로 쓰임 받았다. 바사의 수산성에 있던 느헤미야는 멀고 먼 길을 예루살렘에 찾아 갔다. 52일만이 예루살렘의 무너진 성곽을 중건하고 총독으로 섬겼다. 

    신앙생활은 ‘가라’는 명령에 순종하는 생활이다. 하나님은 사명의 사람으로 하여금 갈 곳을 향하여 나아가게 하신다. 때로는 가야만 하도록 환경과 여건을 몰아가시기도 한다. 요셉처럼 팔려 간 곳에서라도 하나님의 뜻을 이룩하게 하신다. 다니엘이나 세 친구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처럼 끌려 간 포로의 땅에서라도 하나님의 하시려는 일을 행하게 하신다. 오늘날 우리는 우리 가정, 우리 직장, 우리 사업장, 우리 일터, 우리가 살아가는 삶의 자리가 주님이 가라 하신 그 곳이 되어야만 한다. 가라 하신 그 곳에서 삶의 우여곡절(迂餘曲折)을 겪는다. 삶의 희로애락(喜怒哀樂)을 경험한다. 삶의 흥망성쇠(興亡盛衰) 앞에 서게 된다. 

    이처럼 사명을 갖고 복음을 들고 열방을 향하여 나아가는 길은 환난과 핍박과 고난의 길이며 외로운 길이며 순교의 길이다. 지난 2천년 동안 복음 전파를 위하여 열방에 나아갔던 수많은 신앙 선배들이 그런 길을 걸어갔다. 

    우리는 1866년 제너럴 셔먼호 방화 사건을 안다. 
    그해 7월 25일, 평양 대동강을 거슬러 올라온 미국 무장 상선이 평양부에 접근해서 포를 쏘고 조선인을 학살하며 일어난 사건이다. 그 당시의 유럽 여러나라들과 미국은 강제로 아시아 국가를 식민지화 하려는데 혈안이 되어 있었다. 미국 상선은 개항과 상호 통상 무역을 요구하였다. 평양 감사 박규수 휘하의 조선 군대는 그해 9월 5일에 배에 급습하여 불을 지르고 선원을 살해하였다. 그 배의 통역관은 로버트 토마스(Robert Jermain Thomas: 1840~1866)였다. 1840년 영국 웨일즈의 라야다 회중 교회 목사의 아들로 태어났다. 런던대학교 뉴 칼리지를 졸업한 그는 23살에 목사 안수를 받았다. 런던선교회의 파송을 받아 중국 선교사로 부름 받았다. 입국 4개월 만에 그의 아내가 유산과 과다 출혈로 숨지고 말았다. 선교지에 다녀 온 그는 아내의 시체가 다 부패한 일주일 후에야 현장을 목격하였다. 토마스는 슬픔과 충격을 가슴에 묻고 중국 산동성의 청나라 해상 세관에서 통역으로 일하게 되었다. 

    그때, 조선의 천주교 신자들이 박해와 핍박으로 중국으로 도망쳐 오는 것을 보고 조선에 대해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마침 미국의 상선이 조선으로 가는데 통역관이 필요하다는 말을 듣고 1866년 미국 상선인 제너럴셔먼호를 타고 황해도 연안 창린도에 두 달 쯤 머물렀다. 그 곳 주민들에게서 한국말을 열심히 배웠다. 저들에게 200여권의 한문 성경도 나누어 주었다. 나중에 평양 대동강 물줄기를 따라서 조선 땅의 육지에 접근하고 있었다. 그러나 당시 쇄국정책을 펴오던 조선은 미국의 상선이 조선에 들어오는 것을 허용하지 않았다. 조선의 병사들과의 사이에서 싸움이 벌어지게 되었다. 결국 제너럴셔먼호는 조선의 군대의 공격을 받고 불에 타게 되었다. 토마스 선교사는 대동강 변에 끌려 나와 조선의 군대 박춘권의 칼에 목 베임을 당하고 말았다. 그는 죽어 가면서도 박춘권과 그 곁의 12살된 최치량에게 성경을 건넸다. 로버트 토마스 선교사는 순교 직전 까지 이 땅에 이미 1,000여권의 성경을 이 사람 저 사람에게 나누어 주었다. 토마스를 목 베어 죽인 박춘권은 후에 성경 말씀을 읽고 변화되었다. 세례도 받았다. 나중에 그는 안주교회 영수가 되었다. 성경책을 받아 든 12살 소년 최치량은 그 성경을 박영식에게 건넸다. 박영식은 자신이 경영하는 여관 방에 성경을 낱장으로 찢어 도배지로 사용했다. 박춘권의 조차 이영태는 그 방에 도배된 성경을 읽고 변화 받았다. 평양 숭실학교를 졸업했다. 레이놀즈 선교사의 곁에서 사역하며 나중에 성경 번역 위원으로 활동했다.  

    어린 최치량은 성인으로 자라났다. 사업에 성공한 그는 돈을 모아 박영식의 여관을 사들였다. 그 여관에 사무엘 마펫 선교사가 우연히 묵게 되었다. 사방의 벽면이 성경으로 도배가 된 것을 보고 놀란 사무엘 마펫 선교사는 그 여관 방을 월세를 내고 머물렀다. 그 방에서 예배를 시작했다. 3개월 후에 7명이 세례를 받았다. 교인이 늘어나자 최치량은 널다리 골에 사는 홍종대의 집을 사서 예배당으로 사용했다. 그렇게 시작해서 널다리골 교회가 탄생되었다. 그 교회는 후에 1907년 평양 대부흥 운동의 발화점이 된 평양 장대현교회로 자리매김하였다. 하나님은 토마스 선교사의 순교를 헛되지 않게 하셨다. 그가 죽어 가며 대동강 변에 던져 놓은 몇 권의 성경책이 열매를 맺게 하셨다. 

    ​예수의 열 두 제자들은 사도 요한 외에는 맛디아를 비롯한 11사도가 모두 순교하였다. 바울 사도도 목 베임을 당하는 순교자의 길을 갔다. 히브리서 에 보면 “또 어떤 이들은 조롱과 채찍질 뿐 아니라 결박과 옥에 갇히는 시련도 받았으며 돌로 치는 것과 톱으로 켜는 것과 시험과 칼로 죽임을 당하고 양과 염소의 가죽을 입고 유리하여 궁핍과 환난과 학대를 받았으니 이런 사람은 세상이 감당하지 못하느니라 그들이 광야와 산과 동굴과 토굴에 유리하였느니라”(히11:36-38)라고 하였다. 

    오늘날도 선교 현지 곳곳의 도전과 위협은 여전하다. 생명에 위협을 받기고 하고 심각한 질병으로 고생하기도 한다. 
    사랑하는 가족을 앞서 보내기도 한다. 

    어느 며느리가 시어머니 생일에 문자를 보냈다. 
    “어머니 오래 오래 사세요.” 
    그런데 그만 서둘러 문자를 쓰다가 문자를 잘 못 보내고 말았다.
    “어머니 오래 오래 사시네요”

    우리 선교사들은 선교지에서 건강하게 오래 오래 살면서 선교 현장의 풍성한 열매를 넘치도록 맺을 수 있기를 기도한다.

    주님의 선교 명령 또 하나는,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으라”라는 명령이다. 
    모든 족속이 누구인가. 예수께서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자나 모든 열방 민족이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기를 원하신다. 이는 언어, 피부색, 풍습, 문화, 경제 수준의 차이가 없다. 
    주님은 천하 만민이 모두가 다 복음을 아는 예수의 제자가 되길 원하신다.

    또 하나의 명령은,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라”라는 말씀이다. 예수께서는 물세례와 불 세례와 성령 세례를 명하셨다. “요한은 물로 세례를 베풀었으나 너희는 몇 날이 못되어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행1:5)라고 말씀하셨다. 

    1906년 스크랜턴 선교사와 데이밍 선교사가 강화도 고향 마을에 찾아왔다. 
    마을 사람 몇 몇에게 복음을 전했다. 
    세례 교인이 탄생했다. 
    고조부 49살, 증조부 26살 때의 일이다. 
    고조할머니와 증조 할머니도 그 때 세례를 받았다. 
    선교지마다 이런 일이 넘쳐 나기를 축원한다.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라는 명령이다. 
    복음은 가르치는 것으로 끝나서는 안 된다. 
    배운 것을 생활 속에 실천하도록 가르쳐야 한다. 
    전도자가 그런 모범이 되는 삶, 영향력이 있는 삶을 살아가야 한다. 

    교회의 앞날과 선교사들의 선교 사역의 현장에 성령의 충만함과 주님의 풍성한 은혜의 기름 부으심을 위하여 간절히 기도하자. 
    우리 모두에게 주님의 축복이 임하시길 바란다. 




    10월 29일(수) 마태복음 25-26장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복 받을 자들이여(25:34)

    그 때에 임금이 그 오른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내 아버지께 복 받을 자들이여 나아와 창세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예비된 나라를 상속하라.
    Then the King will say to those on his right, 'Come, you who are blessed by my Father; take your inheritance, the kingdom prepared for you since the creation of the world.

    멀찍이(3113) 마크로덴(makrŏthĕn) μακρόθεν   

    1. 멀리서부터.  2. 먼 곳으로부터.  3. 멀리
    Pronunciation [ makrŏthĕn ]   
    Etymology  / 3117에서 유래  
    • 1. 멀리서부터, 먼 곳으로부터, 멀리, 멀리 떨어져서, 마27:55, 막8:3, 15:40, 눅16:23, 18:13, 22:54, 계18:10.
    • 관련 성경 /  멀찍이(마26:58, 막14:54, 눅22:54), 멀리 [멀리서](마27:55, 막11:13, 계18:10).

    μακρός, ά, όν Storng number 3117

    1. 긴.  2. 먼
    Pronunciation [ makrŏs ] 
    Etymology  / 3372에서 유래
    • 1.  [시간이나 장소 범위] 긴, 막12:40, 눅 20:47.
    • 2.  [거리가] 먼, 눅15:13, 19:12.
    • 관련 성경 /  긴(막12:40, 눅20:47), 먼(눅15:13, 19:12).

    μῆκος, ους, τό Storng number 3372

    1. 3173과 유사하게 보임 : 길이.  2. 엡 3:18.  3. 계 21:16.
    Pronunciation [ mēkŏs ]
    • 1. 3173과 유사하게 보임: 길이, 엡3:18, 계21:16.

    • 관련 성경 / 길이(엡3:18, 계21:16).

    약자들을 돕는 하나님의 손이 되는 삶(마태복음 25:34-36)

    양과 염소의 비유에서 양의 길을 걸은 사람들은 그들이 한 행동에 합당한 보상을 받습니다. 
    그들은 창조때부터 선한 삶을 산 자들을 위하여 준비된 나라를 상급으로 상속 받습니다.
    이들이 한 생애동안 한 일은 사회적 약자들과 고난 당하는 자들의 편에 서서 살아온 것입니다. 
    먹을 것이 부족한 이들에게는 먹을 것을 나누어 주었습니다. 
    노숙자들을 위해 자기의 것을 내어 주었습니다. 
    병든 자들과 억울한 일을 당한 자들을 위로해 주었습니다. 
    하나님의 은총이 필요한 곳에 하나님을 대신하는 손이 되어준 사람들입니다.

    오늘도 불공평한 세상에서 고난을 당하는 사회적 약자들이 많습니다. 
    하나님은 이들이 인간답게 살기를 원하십니다. 
    우리들이 가진 것을 나누는 선한 삶, 양의 길을 걷는 이들을 통하여 말입니다. 
    세상을 공평하게 만드는 하나님의 손이 되는 삶을 살아가기를 소망합니다. 


    복받을 자는 누구인가?(예레미야 17:5-11)

    여호와께서 예레미야에게 계시를 통하여 백성들에게 말씀하시기를 하나님을 떠난 자는 저주를 받고, 의지하며 사는 자가 복을 받는다고 말씀하고 있다.

    1.저주를 받을 사람들은 어떤 사람인가?
     
    ①나를 버리고 떠나간 자(5)
    ②인간의 도움으로 나를 대신한 자(5)
    ③잠시 있다가 사라지는 인간의 도움을 의지하는 자(5) 

    그들이 받을 형벌 

    ①사람이 살 수 없는 외롭고 거친 땅, 돌덩이만 쌓여있는 광야에 살게 된다(6)
    ②모래바람만 휘몰아치는 황야에서 볼품없이 가시덩굴만 내뻗치는 한 그루 관목과 같은 신세가 된다(6)
    ③그들은 언제까지나 좋은 일을 보지 못하고 행운을 얻지 못할 것이다(6)

    2.복 받을 사람은 어떤 사람인가? 

    ①나 여호와만을 의지하는 자(7)
    ②그들에게는 틀림없이 좋은 때가 온다(7)
    ③그들에게는 분명히 복받을 때가 온다(7) 

    그들이 받을 복:물 댄 동산에서 자라는 과일나무와 같다(8) 

    ①아무리 가물어도 수로를 향하여 뿌리를 내뻗을 수 있다(8)
    ②길고 지루한 가뭄도 무섭지 않다(8)
    ③여름철의 뙤약볕도 두렵지 않다(8)
    ④그 나무의 잎사귀는 언제나 푸르고 싱싱하다(8)
    ⑤오랫동안 비가 내리지 않아도, 그에게는 전혀 고통스러울 것이 없다(8)
    ⑥여전히 열매를 맺으며 무성할 것이다(8)

    3.인간의 본성을 잘 아시는 하나님 

    (1)인간의 본성(마음)
    ①인간보다 더 간사하고 그 깊이를 알 수 없는 것이 없다(9)
    ②거짓과 재앙으로 가득차 있다(9) 

    (2)인간의 마음을 꿰뚫어 보시는 하나님
    ①나는 인간의 속마음을 들여다 볼 수 있다(10)
    ②아무리 깊은 소원을 품더라도 나는 이미 그것을 알고 있다(10)
    ③사람이 행동한 것에 따라 그대로 갚아준다(10)

    결론
    ①하나님을 떠난 자는 저주를 받을 수밖에 없고, 하나님을 의지하며 살면 틀림없이 좋은 때를 얻고 분명히 복을 받는다.
    ②하나님은 인간의 속마음을 꿰뚫어 보실 수 있는 분이므로, 하나님 마음에 드는 삶을 살아야, 좋은 복으로 갚아주신다.







    모노폴리 실험은 부의 편중이 개인의 태도와 사회적 행동에 미치는 영향을 탐구하기 위해 설계된 실험입니다. 
    참가자들은 각기 다른 자원과 유리한 조건을 가지고 모노폴리 게임을 시작합니다. 
    자원이 풍부한 참가자들은 더 빠르게 부를 축적할 수 있었고, 반대로 불리한 조건의 참가자들은 도태되는 과정을 겪었습니다.

    이 실험은 단순한 게임 이상의 결과를 보여줍니다. 
    사회적 계층과 부의 편중이 인간 행동과 사회 구조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를 명확히 드러냅니다.

    모노폴리 실험이 보여주는 부의 편중 효과

    1. 금수저의 심리적 변화

    부유한 조건에서 시작한 참가자들은 점차 자신의 성공을 환경이 아닌 개인의 노력 덕분으로 간주했습니다. 
    이는 부유한 사람들이 사회적 불평등의 구조를 과소평가하고, 자신의 지위를 정당화하려는 태도를 강화시켰습니다.

    2. 가난한 참가자의 무력감

    불리한 조건에서 시작한 참가자들은 점차 좌절감과 무력감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이들은 초기 조건이 얼마나 불공평했는지 인지하고 있었지만, 이를 극복할 방법을 찾지 못하며 점차 소극적으로 변했습니다.

    3. 사회적 거리감 증가

    부유한 참가자와 가난한 참가자 간의 상호작용은 점차 줄어들었습니다. 
    부유한 참가자들은 가난한 참가자를 공감하거나 돕기보다는, 자신의 성공에 집중하며 사회적 거리를 형성했습니다. 

    부의 편중이 사회 구조에 미치는 부정적 영향

    1. 사회적 신뢰 감소

    부의 편중은 사회적 신뢰를 약화시킵니다. 부유한 계층은 자신과 다른 계층과의 상호작용을 줄이며, 빈곤층은 부유층이 사회적 공정을 저해한다고 느끼게 됩니다. 이는 사회적 갈등과 불안을 증폭시킵니다.

    2. 기회 불평등

    금수저의 특권은 교육, 네트워크, 자본 등 다양한 자원을 통해 대물림됩니다. 이는 사회적 이동성을 제한하고, 공정한 경쟁의 기회를 박탈합니다.

    3. 경제적 비효율성

    부의 편중은 자원이 비효율적으로 분배되도록 만듭니다. 극소수의 부유층이 자원을 독점할 때, 경제 전반의 성장 잠재력이 억제됩니다. 

    실제 사례: 부의 편중의 사회적 결과

    사례 1: “교육에서의 기회 불평등”

    한 지역에서는 부유층 자녀들이 더 나은 학습 환경과 과외 기회를 누릴 수 있었던 반면, 저소득층 학생들은 기본적인 교육 자원조차 부족했습니다. 이는 학생들 간의 성취도 격차를 심화시켰습니다.

    사례 2: “부유층의 사회적 거리감”

    부유층이 거주하는 지역은 빈곤층과 철저히 분리되어 있습니다. 이는 부유층이 사회적 책임을 덜 느끼게 하고, 빈곤층의 목소리가 정책에 반영되지 않게 만듭니다. 

    부의 편중을 완화하기 위한 실질적 방안

    1. 공정한 세제 정책 도입

    부유층에게 적절한 세금을 부과하고, 이 자금을 활용해 사회적 안전망을 강화해야 합니다. 예를 들어, 교육과 의료 접근성을 높이는 데 투자할 수 있습니다.

    2. 포용적 경제 성장 전략

    모든 계층이 경제 성장의 혜택을 누릴 수 있도록 포용적 정책을 설계해야 합니다. 이를 통해 빈곤층에게 새로운 기회를 제공할 수 있습니다.

    3. 사회적 책임 강조

    부유층은 자신의 성공이 단순히 개인의 노력 때문이 아님을 인식하고, 사회적 책임을 다하는 문화를 형성해야 합니다. 예를 들어, 기업이 지역 사회에 환원하거나, 교육 장학금을 제공하는 것이 이에 해당합니다. 

    개인과 조직이 할 수 있는 실천 방법

    1. 공감 교육

    사회적 계층 간의 격차를 좁히기 위해 공감 능력을 키우는 교육이 필요합니다. 이는 사람들 간의 이해와 신뢰를 증진시키는 데 기여할 수 있습니다.

    2. 공동체 중심 활동 참여

    지역 사회에서 봉사 활동에 참여하거나, 다양한 계층과 교류할 수 있는 기회를 늘려야 합니다. 이는 사회적 거리감을 줄이는 데 효과적입니다.

    3. 부의 재분배 촉진

    부유층은 자발적으로 부의 일부를 사회에 환원하는 노력을 해야 합니다. 이는 자선 활동이나 비영리 단체를 지원하는 방식으로 이뤄질 수 있습니다. 

    모노폴리 실험이 주는 교훈

    모노폴리 실험은 부의 편중이 개인과 사회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강력하게 보여줍니다. 
    금수저의 특권은 사회적 불평등을 심화시키고, 사회 전체의 신뢰와 연대를 약화시킬 수 있습니다. 
    이를 완화하기 위해서는 공정한 제도와 책임 있는 행동이 필수적입니다. 
    부유층과 빈곤층이 함께 더 나은 사회를 만들어갈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1. 공감 능력이 뛰어나다

    이런 사람은 타인의 감정을 잘 느끼고, 놓치지 않습니다.

    “지금 이 사람 배고프겠구나.”

    “이 말 하면 기분 좋아질 것 같아.”

    이처럼 상대방의 기분과 필요를 빠르게 캐치하죠.

    공감력이 높다 보니

    내가 줄 수 있는 게 있다면 나누고 싶다는 마음도 자연스럽게 따라옵니다.

    이건 단순한 친절을 넘어서, 타인의 감정을 진심으로 이해하려는 태도에서 비롯됩니다.

     

    공감능력


    2. 어릴 때부터 나눔을 배웠다

    심리학에서는 행동 패턴의 많은 부분이 유년기에 형성된다고 합니다.

    특히 가족 문화나 교육, 성장 환경이 나눔 성향에 큰 영향을 주죠.

    예를 들어,

    • 가족끼리 음식을 나누는 문화가 익숙했던 사람

    • 부모님이 주변을 챙기는 모습을 자주 본 사람

    • 남을 도울 때 칭찬받았던 경험이 많은 사람

    이들은 '나눈다'는 행동이 자연스러운 삶의 일부가 되어 있습니다.

    억지로 베푸는 게 아니라, 습관처럼 체화된 행동인 거죠.

     

    공감능력


    3. 타인의 기쁨이 나의 만족이다

    ‘기브 앤 테이크’보다

    기브 앤 스마일 에 가까운 사람들입니다.

    무언가를 나눠줬을 때, 상대가 웃는 모습을 보는 게 너무 기쁘다는 분들 많죠?

    이런 사람들은 “고맙다”는 말 한마디에도 큰 보람을 느끼며,

    그 감정을 내면의 보상으로 받아들이는 성향이 있습니다.

    이건 ‘착한 사람 콤플렉스’라기보단,

    진짜로 타인의 기쁨에 공명할 줄 아는 정서적 능력입니다.

     

    공감능력


    4. 관계 유지 능력이 뛰어나다

    ‘나눔’은 관계의 윤활유 역할을 합니다.

    작은 선물, 사소한 배려, 따뜻한 말 한마디—

    이 모든 건 상대를 기억하고 있다는 표현이죠.

    이런 행동은

    나 너 생각하고 있어

    우린 연결돼 있어

    라는 메시지를 전달합니다.

    그래서 나눔에 익숙한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관계를 유지하고, 신뢰를 쌓는 데 능숙합니다.

    누구와도 금방 가까워지고, 갈등 상황도 유연하게 넘기는 경우가 많죠.

      

    공감능력


    5. 결핍보다 ‘풍요 마인드’를 갖고 있다

    무언가를 나누기 위해선

    내가 가진 것부터 괜찮다는 인식이 필요합니다.

    즉, 자신 안에 심리적 여유와 안정감이 있다는 뜻이죠.

    반대로 결핍감이 강한 사람은

    “나도 부족한데 뭘 줘?”라는 생각에 사로잡힐 수 있습니다.

    하지만 풍요 마인드를 가진 사람은

    작은 것 하나라도 나누면 더 많아진다고 느끼죠.




    10월 28일(화) 마태복음 23-24장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그제야 끝이 오리라(24:14)

    이 천국 복음이 모든 민족에게 증거되기 위하여 온 세상에 전파되리니 그제야 끝이 오리라.
    And this gospel of the kingdom will be preached in the whole world as a testimony to all nations, and then the end will come.

    말세(末世)와 말일(末日) 


    말세란 무엇인가?

    말세는 성경에서 마지막 시대를 의미하며, 하나님의 구속 역사의 마지막 때를 가리킨다. 
    일반적으로 예수님의 초림 이후부터 재림까지의 기간을 포함하며, 최종적인 심판과 하나님의 나라가 완성되는 시기를 포함한다. 
    성경은 말세에 대해 경고하면서도, 성도들이 가져야 할 믿음과 소망을 강조한다. 
    그럼 성경이 말하는 말세의 특징과 신앙인의 태도에 대해 살펴보자.

    성경에서의 말세

    성경에서는 말세를 두 가지 의미로 사용한다.

    첫째, 예수님의 초림 이후부터 재림까지의 시대이다. 

    히브리서 1장 2절에서는 "이 모든 날 마지막에 아들을 통하여 우리에게 말씀하셨으니"라고 기록되어 있으며, 
    사도행전 2장 17절에서는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 말세에 내가 내 영을 모든 육체에 부어 주리니"라고 말한다. 
    즉, 우리는 이미 말세 속에 살고 있다.

    둘째, 마지막 심판이 이루어지는 최종적인 종말의 시기이다. 

    디모데후서 3장 1절에서는 "너는 이것을 알라 말세에 고통하는 때가 이르러"라고 기록되어 있으며, 
    마태복음 24장 3절에서는 "주의 임하심과 세상 끝에는 어떤 징조가 있사오리이까?"라고 묻고 있다. 
    이처럼 성경은 마지막 때에 심판과 하나님의 나라가 완성될 것이라고 가르친다. 

    말세의 특징

    성경에서는 말세의 주요 특징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첫째, 도덕적, 영적 타락이 심해진다. 

    디모데후서 3장 1~5절에서는 "말세에 고통하는 때가 이르리니 사람들이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며, 자긍하며, 교만하며... 감사하지 아니하며, 거룩하지 아니하며..."라고 경고한다. 사람들은 하나님보다 자신과 세상을 더 사랑하며, 죄악이 만연한 시대가 될 것이다.

    둘째, 거짓 교사와 미혹이 증가한다. 

    마태복음 24장 24절에서는 "거짓 그리스도들과 거짓 선지자들이 일어나 큰 표적과 기적을 보여 할 수만 있으면 택하신 자들도 미혹하리라"고 말한다. 말세에는 거짓 선지자들이 등장하여 많은 사람들을 미혹할 것이다.

    셋째, 재난과 전쟁이 잦아진다. 

    마태복음 24장 6~7절에서는 "난리와 난리의 소문을 듣겠으나... 민족이 민족을, 나라가 나라를 대적하여 일어나겠고 곳곳에 기근과 지진이 있으리니"라고 기록되어 있다. 말세에는 전쟁, 기근, 지진과 같은 재난이 증가할 것이다.

    넷째, 복음이 세계적으로 전파된다. 

    마태복음 24장 14절에서는 "이 천국 복음이 모든 민족에게 증언되기 위하여 온 세상에 전파되리니 그제야 끝이 오리라"고 말한다. 말세에는 복음이 온 세상에 전파될 것이다. 

    말세를 살아가는 성도의 자세

    말세를 살아가는 성도들에게 중요한 것은 두려움이 아니라 준비와 믿음의 삶이다. 
    성경은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할지 명확하게 가르친다.

    첫째, 깨어 기도해야 한다. 
    누가복음 21장 36절에서는 "이러므로 너희는 장차 올 이 모든 일을 능히 피하고 인자 앞에 서도록 항상 기도하며 깨어 있으라"고 기록되어 있다.

    둘째, 말씀에 굳게 서야 한다. 
    요한계시록 3장 10절에서는 "네가 나의 인내의 말씀을 지켰은즉 내가 또한 너를 지켜 시험의 때를 면하게 하리니"라고 말씀한다.

    셋째, 복음을 전파해야 한다. 
    마태복음 28장 19~20절에서는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라고 명령한다.

    넷째, 세속에 물들지 말아야 한다. 
    로마서 12장 2절에서는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라고 말씀한다. 

    말세와 재림의 소망

    말세는 단순히 두려운 시간이 아니라, 예수님의 재림과 영광스러운 하나님의 나라가 완성되는 소망의 때이다. 
    요한계시록 22장 12절에서는 "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라고 말씀하고 있으며, 데살로니가전서 4장 16~17절에서는 "주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 소리로 친히 하늘로부터 강림하시리니..."라고 기록되어 있다. 
    성도들은 그날에 영광스럽게 부활하여 주님과 함께할 것이다. 

    결론

    말세는 죄악과 심판의 때이지만, 동시에 복음이 전파되고 하나님의 구원이 완성되는 시간이다. 
    성도들은 두려움이 아니라, 소망 가운데 깨어 기도하며 복음을 전해야 한다. 예수님의 재림을 기다리며 믿음으로 승리하는 삶을 살아가야 한다.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 (요한계시록 22:20)


    말세(末世, end-time)는 세계 대부분의 종교 및 신화에 등장하는 종말론이다.

    기독교에서 "마지막 날"은 구원자이자 메시아로서의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이 우선되는 환난 시대를 언급하기도 한다.
    이슬람에서는 부활의 날(Yawm al-Qiyāmah), 심판의 날(Yawm ad-Din)이 세상의 마지막 이전에 선행된다. 
    유다교에서 "마지막 날"이라는 용어는 타나크민수기 24장 4절에서 메시아 시대에 대한 언급과 메시아가 도래할 것이라는 유다인들의 믿음을 상징한다.[1] 
    이후 요엘이나 스바니야 등도 '야훼의 날, 또는 주님의 날(가톨릭) 등을 통해 이스라엘 백성에게 심판의 날이 찾아올 것을 경고하였다. 
    다른 다양한 종교도 환생과 구속에 관한 종말론적인 믿음을 가지고 있다.
       
    마태복음 10:15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심판 날에 소돔과 고모라 땅이 그 성보다 견디기 쉬우리라 말세에는 넘치는 성욕으로 말미암아 동성애를 한다고 한다. 동성애는 안된다.

    그러므로 다니엘 예언자를 통하여 말씀하신 대로, 황폐를 부르는 혐오스러운 것이 거룩한 곳에 서 있는 것을 보거든 
    ─ 읽는 이는 알아들으라. ─ 
    그때에 유다에 있는 이들은 산으로 달아나라. 옥상에 있는 이는 물건을 꺼내러 집 안으로 내려가지 말고, 들에 있는 이는 겉옷을 가지러 가려고 뒤로 돌아서지 마라. 불행하여라, 그 무렵에 임신한 여자들과 젖먹이가 딸린 여자들! 너희가 달아나는 일이 겨울이나 안식일에 일어나지 않도록 기도하여라. 그때에 큰 환난이 닥칠 터인데, 그러한 환난은 세상 시초부터 지금까지 없었고 앞으로도 결코 없을 것이다. 그 날수를 줄여 주지 않으시면 어떠한 사람도 살아남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선택된 이들을 위하여 그 날수를 줄여 주실 것이다.

    — 마태오 복음서(마태복음) 24장 15-22절

    있어서는 안 될 곳에 황폐를 부르는 혐오스러운 것이 서 있는 것을 보거든 ─ 읽는 이는 알아들으라. ─ 그때에 유다에 있는 이들은 산으로 달아나라. 옥상에 있는 이는 내려가지도 말고 무엇을 꺼내러 집 안으로 들어가지도 마라. 들에 있는 이는 겉옷을 가지러 뒤로 돌아서지 마라. 불행하여라, 그 무렵에 임신한 여자들과 젖먹이가 딸린 여자들! 그 일이 겨울에 일어나지 않도록 기도하여라. 그 무렵에 환난이 닥칠 터인데, 그러한 환난은 하느님께서 이룩하신 창조 이래 지금까지 없었고 앞으로도 없을 것이다. 주님께서 그 날수를 줄여 주지 않으셨으면, 어떠한 사람도 살아 남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몸소 선택하신 이들을 위하여 그 날수를 줄여 주셨다.

    — 마르코 복음서(마가복음) 13장 14-20절

    예루살렘이 적군에게 포위된 것을 보거든, 그곳이 황폐해질 때가 가까이 왔음을 알아라. 그때에 유다에 있는 이들은 산으로 달아나고, 예루살렘에 있는 이들은 거기에서 빠져나가라. 시골에 있는 이들은 예루살렘으로 들어가지 마라. 그때가 바로 성경에 기록된 모든 말씀이 이루어지는 징벌의 날이기 때문이다. 불행하여라, 그 무렵에 임신한 여자들과 젖먹이가 딸린 여자들! 이 땅에 큰 재난이, 이 백성에게 진노가 닥칠 것이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칼날에 쓰러지고 포로가 되어 모든 민족들에게 끌려갈 것이다. 그리고 예루살렘은 다른 민족들의 시대가 다 찰 때까지 그들에게 짓밟힐 것이다.

    그리고 해와 달과 별들에는 표징들이 나타나고, 땅에서는 바다와 거센 파도 소리에 자지러진 민족들이 공포에 휩싸일 것이다. 사람들은 세상에 닥쳐오는 것들에 대한 두려운 예감으로 까무러칠 것이다. 하늘의 세력들이 흔들릴 것이기 때문이다. 그때에 ‘사람의 아들이’ 권능과 큰 영광을 떨치며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사람들이 볼 것이다. 이러한 일들이 일어나기 시작하거든 허리를 펴고 머리를 들어라. 너희의 속량이 가까웠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는 이어서 그들에게 비유 하나를 말씀하셨다.) 무화과나무와 다른 모든 나무를 보아라. 잎이 돋자마자, 너희는 그것을 보고 여름이 이미 가까이 온 줄을 저절로 알게 된다. 이와 같이 너희도 이러한 일들이 일어나는 것을 보거든,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온 줄 알아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이 세대가 지나기 전에 모든 일이 일어날 것이다. 하늘과 땅은 사라질지라도 내 말은 결코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누가복음 20:21-23


    “마지막 날” 즉 “말세”에는 어떤 일들이 일어납니까?

    성경의 대답

    성경은 “세상 제도의 종결” 즉 “세상 끝”에 어떤 일들이 일어나고 사람들이 어떤 태도를 나타낼지 알려 줍니다. 

    (마태복음 24:3; 개역한글판) 성경은 그 기간을 가리켜 “마지막 날”, “마지막 때” 혹은 “말세”라고 부릅니다.—디모데 후서 3:1; 다니엘 8:19; 쉬운말성경.

    성경에는 “마지막 날”에 관한 어떤 예언들이 있습니까?

    성경은 마지막 날의 “표징”이 될 여러 가지 일들을 예언했습니다. 
    따라서 그 일들이 동시에 일어나면 그 때가 마지막 날이라는 것을 알아볼 수 있습니다. (누가복음 21:7
    그 예언들 중 몇 가지를 살펴보겠습니다.

    대규모 전쟁. 
    예수께서는 이렇게 예언하셨습니다. 
    “민족과 민족이 맞서 일어나고 왕국과 왕국이 맞서 일어날 것입니다.” (마태복음 24:7
    그와 비슷하게, 요한 계시록 6:4에는 전쟁을 상징하는 비유적인 말 탄 자가 “땅에서 평화를 없앨” 것이라는 예언이 나옵니다.

    기근.
     
    예수께서는 이렇게 예언하셨습니다. 
    “식량 부족[이] 있을 것입니다.” (마태복음 24:7
    요한 계시록에서도 또 다른 비유적인 말 탄 자에 대해 묘사하면서 대규모 기근이 일어날 것이라고 예언했습니다.—요한 계시록 6:5, 6.

    큰 지진. 
    예수께서는 “곳곳에 … 지진이 있을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마태복음 24:7; 누가복음 21:11
    세계 여러 지역에서 큰 지진들이 일어나 전례 없는 규모로 많은 사람이 죽고 고통을 당할 것이 예언되었습니다.

    질병.  
    예수께서는 역병 즉 심각한 “전염병”이 있을 것이라고 예언하셨습니다.—누가복음 21:11, 공동번역.

    범죄. 
    물론 범죄는 항상 있었지만, 예수께서는 마지막 날에 “불법이 증가”할 것이라고 예언하셨습니다.—마태복음 24:12.

    땅을 파멸시키는 일. 
    요한 계시록 11:18
    에서는 사람들이 “땅을 파멸시킬” 것이라고 예언했습니다. 
    오늘날 사람들은 다양한 방법으로 그렇게 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땅을 폭력과 부패로 가득 채우고 있으며 자연 환경을 파괴하고 있습니다.

    태도의 변화. 
    디모데 후서 3:1-4에서는 사람들이 전반적으로 “감사하지 않고, 충성스럽지 않고, … 합의하려 하지 않고, 중상하고, 자제하지 않고, 사납고, 선을 사랑하지 않고, 배반하고, 자기 고집대로 하고, 교만으로 우쭐댈” 것이라고 예언했습니다. 
    성경은 사람들의 이러한 태도가 너무나 심각해져서 마지막 날이 “대처하기 어려운 위급한 때”가 될 것이라고 말합니다.

    무너지는 가정. 
    디모데 후서 3:2, 3에서는 많은 사람이 가족에게 “비정하고” 자녀가 “부모에게 불순종”할 것이라고 예언했습니다.

    하느님에 대한 사랑이 약해지는 일. 
    예수께서는 이렇게 예언하셨습니다. “많은 사람의 사랑이 식을 것입니다.” (마태복음 24:12
    예수의 말씀은 전반적으로 하느님에 대한 사람들의 사랑이 식을 것이라는 의미였습니다. 
    그와 비슷하게 디모데 후서 3:4에서도 그러한 사람들이 “하느님을 사랑하기보다는 쾌락을 사랑”할 것이라고 말합니다.

    종교의 위선. 
    디모데 후서 3:5에서는 사람들이 겉으로는 하느님을 섬기는 척하지만 실제로는 그분의 표준에 따라 살지 않을 것이라고 예언했습니다.

    성경 예언에 대한 이해의 증가. 
    성경 다니엘서에서는 “마지막 때”에 많은 사람이 성경 진리에 대해 더 많은 지식을 얻고 성경 예언을 더 정확히 이해하게 될 것이라고 예언했습니다.—다니엘 12:4, 각주.

    세계적인 전파 활동. 
    예수께서는 이렇게 예언하셨습니다. “이 왕국의 좋은 소식이 … 사람이 거주하는 온 땅에 전파될 것입니다.”—마태복음 24:14.

    무관심과 불신. 
    예수께서는 대다수의 사람들이 끝이 가까워지고 있다는 압도적인 증거를 무시할 것이라고 예언하셨습니다. (마태복음 24:37-39) 그에 더해, 베드로 후서 3:3, 4에서는 일부 사람들이 그러한 증거를 비웃고 완전히 배척할 것이라고 예언했습니다.

    모든 예언의 성취. 
    예수께서는 마지막 날에 이러한 예언들이 단지 몇 가지나 대부분이 아니라 모두 동시에 성취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마태복음 24:33.


    지금이 “마지막 날”입니까?

     그렇습니다. 세상 상태를 검토해 보고 성경 예언에 근거해 연대를 계산해 보면, 1차 세계 대전이 일어난 해인 1914년에 마지막 날이 시작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세상 상태를 보면 지금이 마지막 날이라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는지 아래의 동영상을 시청해 보십시오.

    행복한 삶을 영원히 누리십시오!—당신을 위한 성경 공부 과정—동영상

    한국어

    1914년 이후로 크게 달라진 세상

     1914년에 하느님의 왕국은 하늘에서 통치하기 시작했습니다. 그 왕국이 처음으로 한 일 중 하나는 사탄 마귀와 악귀들을 하늘에서 내쫓고 그들의 활동 영역을 지구 근처로 제한한 것이었습니다. (요한 계시록 12:7-12) 현재 사탄은 인류에게 많은 영향을 미치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너무나도 악한 태도를 나타내고 악한 행동을 하는 것을 보면 그 점을 알 수 있습니다. 그 때문에 마지막 날은 “대처하기 어려운 위급한 때”가 되었습니다.—디모데 후서 3:1.

     많은 사람은 이처럼 힘든 시대를 살아가면서 고통을 받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인간 사회가 분열되고 있는 것에 대해 염려합니다. 일부 사람들은 인류가 멸망되지는 않을까 두려워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세상 상태 때문에 비슷한 어려움을 겪으면서도 미래에 대한 희망을 가진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머지않아 하느님의 왕국이 행동을 취하여 세상의 문제들을 없앨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다니엘 2:44; 요한 계시록 21:3, 4) 그들은 하느님께서 그러한 약속을 이루실 때를 참을성 있게 기다리고 있으며, 다음과 같은 예수의 말씀에서 위로를 얻습니다. “끝까지 인내하는 사람은 구원을 받을 것입니다.”—마태복음 24:13; 미가 7:7.


    마지막 때 (말세)의 의미

    성경에서는 “마지막, 말세”라는 단어가 종종 등장합니다. 그러나 혹간은 이것을 지금으로만 적용하여, 지금이 곧 종말의 때이고 곧 예수가 재림하신다고 말합니다. 이러한 주장을 하는 사람들은 지금 이러한 징조가 모두 이루어졌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성경이 말하는 종말적인 징조는 자의적인 해석으로 단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1) 요엘서와 사도행전

    욜 2:28 그 후에내가 내 신을 만민에게 부어 주리니 너희 자녀들이 장래 일을 말할 것이며 너희 늙은이는 꿈을 꾸며 너희 젊은이는 이상을 볼 것이며

    욜 2:29 그 때에내가 또 내 신으로 남종과 여종에게 부어 줄 것이며

    욜 2:30 내가 이적을 하늘과 땅에 베풀리니 곧 피와 불과 연기 기둥이라

    욜 2:31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이 이르기 전에해가 어두워지고 달이 핏빛 같이 변하려니와

    욜 2:32 누구든지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니 이는 나 여호와의 말대로 시온산과 예루살렘에서 피할 자가 있을 것임이요 남은 자 중에 나 여호와의 부름을 받을 자가 있을 것임이니라

    요엘의 본문을 보면 “그 후에”(욜2:28)과 “그 때에”(욜2:29)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사도행전2:17에서는 베드로가 요엘서를 인용하면서 “말세에”라는 단어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행 2:16 이는 곧 선지자 요엘을 통하여 말씀하신 것이니 일렀으되

    행 2:17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 말세에내가 내 영을 모든 육체에 부어 주리니 너희의 자녀들은 예언할 것이요 너희의 젊은이들은 환상을 보고 너희의 늙은이들은 꿈을 꾸리라

    행 2:18 그 때에내가 내 영을 내 남종과 여종들에게 부어 주리니 그들이 예언할 것이요

    행 2:19 또 내가 위로 하늘에서는 기사를 아래로 땅에서는 징조를 베풀리니 곧 피와 불과 연기로다

    행 2:20 주의 크고 영화로운 날이 이르기 전에해가 변하여 어두워지고 달이 변하여 피가 되리라

    행 2:21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 하였느니라

    이 “말세에”(에스카토스)라는 헬라어 단어는 반드시 종말에만 사용되는 단어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베드로가 인용한 요엘서는 사도행전 2장 오순절에 성취되었기 때문입니다

    물론 이 단어는 재림예수님이 오시는 종말적인 날도 뜻할 수 있지만, 초림 예수님이 사역하였던 당시에도 사용되었습니다.

    2) 초림 예수님의 사역도 마지막, 말세라고 기록되어 있다.

    히 1:2 이 모든 날 마지막(에스카토스)에아들로 우리에게 말씀하셨으니 이 아들을 만유의 후사로 세우시고 또 저로 말미암아 모든 세계를 지으셨느니라

    벧전 1:20 그는 창세 전부터 미리 알리신 바 된 자나 이 말세(에스카토스)에너희를 위하여 나타내신 바 되었으니

    성경의 기자들, 특히 신약의 기자들은 초림 예수님의 사역 시간을 마지막, 종말의 시간이라고 표현한 적이 많이 있었습니다. 다시 말하자면, 유대인들이 말하는 “에스카토스”라는 단어는 예수의 초림부터 재림까지를 말하는 긴 시간을 뜻합니다.  물론 우리도 지금 시간을 “말세”라고 말할 수 있다는 것을 생각하시면 이해가 갈 것입니다. 즉 이 단어는 예수의 재림과 종말의 시간만을 국한하여 뜻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초대교회는 이 마지막 때의 기간이 매우 짧은 것으로 생각한 적도 있었기 때문에 예수의 재림을 간절히 소망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의 재림의 시간은 아무도 모른다는 것이 성경적인 정답이기 때문에 그 말세의 기간도 얼마든지 연장되어질 수 있습니다

    3) 구약에서도 말일에는 종말의 시간만을 말하지 않는다.

    구약에서도 “말일에”라는 단어는 종말만을 뜻하지는 않으며, 어느 특정한 시한적인 때나 메시야의 시간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단 10:14 이제 내가 말일에네 백성의 당할 일을 네게 깨닫게 하러 왔노라 대저 이 이상은 오래 후의 일이니라

    사 2:2 말일에여호와의 전의 산이 모든 산 꼭대기에 굳게 설 것이요 모든 작은 산 위에 뛰어나리니 만방이 그리로 모여 들 것이라

    이사야서 2장의 구절을 미가서에서도 인용합니다.(겔 17:22) 이 구절은 메시야 시대의 도래를 뜻하는 것이 분명합니다.

    미 4:1 말일에 이르러는여호와의 전의 산이 산들의 꼭대기에 굳게 서며 작은 산들 위에 뛰어나고 민족들이 그리로 몰려갈 것이라

    말라기에서는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이 이르기 전에”라는 기록이 있으며 엘리야를 보낸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엘리야가 세례요한이라고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말 4:5 보라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이 이르기 전에내가 선지자 엘리야를 너희에게 보내리니

    마 17:10 제자들이 물어 이르되 그러면 어찌하여 서기관들이 엘리야가 먼저 와야 하리라 하나이까

    마 17:11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엘리야가 과연 먼저 와서 모든 일을 회복하리라

    마 17:12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엘리야가 이미 왔으되 사람들이 알지 못하고 임의로 대우하였도다 인자도 이와 같이 그들에게 고난을 받으리라 하시니

    마 17:13 그제서야 제자들이 예수께서 말씀하신 것이 세례 요한인 줄을 깨달으니라

    (참고, 막 9:11-13)

    4) 사도요한이 요한일서를 쓸 당시에도 마지막 때라고 말합니다

    요일 2:18 아이들아 이것이 마지막 때라적그리스도가 이르겠다 함을 너희가 들은 것과 같이 지금도 많은 적그리스도가 일어났으니 이러므로 우리가 마지막 때인 줄 아노라

    참고하시기 위하여 주석과 사전을 올려 드립니다.
                        

    호크마 주석

    말세에 – 욜 2:28의 맛소라 본문(MT.; 욜 3:1)이는 ‘이후“로, 70인역(LXX; 욜 3:1)에는 ‘이(일)후‘로 표기되었으나 베드로는 “말세‘라는 표현으로 대체시켰다. 유대인들의 말세란 엄밀히 말해서 메시야가 오시는 때를 가리킨다(사 2:2; 미 4:1). 베드로가 이 말을 오순절날에 임한 성령 강림과 관련하여 사용한 것을 볼 때 이 말은 그리스도의 초림에서 재림까지를 지칭하는 종말 개념으로 이해된다. 이러한 종말 개념은 신약 시대에 와서 생겨난 것으로 하나님 나라의 개념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라이프성경

    구약에서는 세상종말적 의미보다는 ‘먼 미래’나 ‘훗날’을 가리키는 경우가 훨씬 더 많다(신 31:29). 그러나 신약에서 ‘말세’는 종말적인 의미가 매우 강한데, 신학적으로는 ‘예수 그리스도부활 승천 이후 재림하기까지의 모든 기간’, 그리고 그와 함께 ‘종말에 발생할 모든 징조와 재앙, 미래적 사건’ 등을 통칭해서 일컫는 경우가 많다(행 2:17; 히 1:2; 벧전 1:20). 특히 종말의 우주적 징조에 대해서는 소계시록이라 불리는 마 24장에, 그리고 종말의 타락상에 대해서는 딤후 3장에 잘 나타나고 있다.
    아무튼 이렇게 본다면 신약 시대는 넓은 의미에서 ‘말세’라 할 수 있고, 특히 주께서 오실 날이 더욱 가까운 오늘날을 소위 ‘말세지말’(末世之末)이라 할 수 있다. 유사한 표현들로 ‘마지막 날’(호 3:5), ‘끝날’(미 4:1), ‘말일’(사 2:2), ‘주의 날’(살전 5:2), ‘심판날’(요일 4:17) 등이 있다.









    10월 27일(월) 마태복음 21-22장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믿고 구하는 것(21:22)

    너희가 기도할 때에 무엇이든지 믿고 구하는 것은 다 받으리라 하시니라.
    If you believe, you will receive whatever you ask for in prayer.

    믿고 구하는 것은 다 받으리라는 예수님의 말씀에서 세 개의 단어를 살펴보겠습니다.

    첫째는 믿음이란 무엇일까요?

    믿음이란 하나님에 대한 참된 신뢰를 말합니다.
    믿음이란 하나님의 뜻을 분별할 줄 아는 것입니다.
    믿음이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둘째는 구하는 것이란 무엇일까요?

    구하는 것을 기도라고 합니다.
    기도는 나의 모든 형편과 사정을 하나님에게 일라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배가 고픈 사람이 배가 고프다고 하면 될텐데 전능하시고 거룩하신 아버지 하나님이시여 내가 지금 배가 고파서 죽게 되었사오니 당장 내게 먹을 것을 주시옵소서 이렇게 알리는 것과 아버지 배가 고파요 이렇게 알리는 것과의 차이가 무엇일까요?
    자기의 감정을 실어서 알리는 것과 자기의 감정을 억누를 수 있는 차이라고 하겠습니다.
    따라서 구한다는 것은 구한 것의 결과를 나의 만족으로 채우는 것이 아니라 구하는 것을 듣는 아버지의 뜻을 따르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셋째는 받는다는 것은 무엇일까요?

    받는다는 것은 내가 요구하는 것만을 얻는 것이 아니라 무엇을 주시든지 그것을 있는 그대로 수용하는 것입니다.
    구하는 사람과 주시는 하나님은 근본적인 존재 양식이 다르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구하는 사람이 생존하려면 그 조건이 까다롭습니다.
    그러나 주시는 하나님은 어떤 조건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영원한 생명이시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받는다는 것은 모든 것을 헤아리시는 영원한 생명께서 나의 모든 형편과 사정을 아시기 때문에 나의 필요와 조건에 의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기준에 맞도록 주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선지자 이사야는 이렇게 가르쳤습니다.

    이사야 55:8-9
    여호와의 말씀에 내 생각은 너희 생각과 다르며 내
    하늘이 보다 높음 같이 내 은 너희 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 생각보다 높으니라.

    나의 생각과 전혀 다른 것을 주시려고 계획하시는 하나님께 전적으로 의지하고 순종하면서 아직도 온전하게 구하지 못하는 어리석음을 살필 줄 아는 믿음의 기도자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마태복음 19:20
    그 청년이 가로되 이 모든 것을 내가 지키었사오니 아직도 무엇이 부족하니이까?




    προσευχή, ῆς, ἡ Storng number 4335

    1. 기도.  2. 기도처.  
    Pronunciation [ prŏsĕuchē ] 

    Etymology  /  4336에서 유래
    •  1. 기도, 마17:21, 막9:29, 눅22:45, 행3:1.
    •  2. 기도처, 기도소, 교회당, 행16:13,16.
    • 관련 성경 / 기도(막9:29, 행3:1, 딤전2:1), 기도하는 곳, 기도실(행16:13), 구하는 것(마21:22), 기도하기(행2:42).
    προσεύχομαι Storng number 4336

    1. 기도하다.  2. 막 1:35. 3. 눅 1:10
    Pronunciation [ prŏsĕuchŏmai ]

    Etymology / 디포넌트. 미완료 προσηυχόμην, 미래 προσεύξομαι, 제1부정과거 προ- σηυξάμην, 4314와 2172에서 유래
    •  1. 기도하다, 막1:35, 눅1:10, 행1:24.
    • 관련 성경 / 기도하다(마5:44, 눅1:10, 행1:24), 간구하다(롬8:26).




    받으리라는 헬라 단어는 람바노(lambanō)라고 합니다.



    λαμβάνω Storng number 2983

    1. 취하다.   2. 손에 들다.  3. 가져가다
    Pronunciation [ lambanō ]
    관련 성경 /  얻다(행 3:5), 담당하다(마 8:17), 받다(마 10:8, 막 12:40, 행 2:33), 지다(마 10:38), 영접하다(마 10:41, 요 5:43, 13:20), 
    가지다(마14:19, 막14:23, 요21:13), 취하다(마15:26, 막12: 21, 요19:23), 가져가다(마16:5), 가져오다(마16:7), 줍다(마16:9,10), 잡다(마21:35,39), 걸리다(마22:15), 들다(마25:1), 담다(마25: 4), 거두다(마27:6), 빼앗다(마27:30, 고후11:20), 데리다(막9:36), 입다(요13:12), 모시다(요19:27), 받게 하다(행8:19), 먹다(행 9:19), 이어받다(행 24:27), 있다(행25:16), 받아 가지다(행26:10), 얻게 하다(행26:18), 타다(롬7:8), 감당하다(고전10:13), 세우다(고전 14:5), 받게 하려하다(갈3:14), 기다리다 (약 5:7), 제하다(계 6:4).


    믿음의 기도란 무엇일까?
    야고보서 5:15
    믿음의 기도는 병든 자를 구원하리니 주께서 저를 일으키시리라 혹시 죄를 범하였을찌라도 사하심을 얻으리라.

    야고보서의 말씀에서 '믿음의 기도'는 두 가지를 나타낼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첫째는 믿음의 기도는 병든 자를 회복시키는 기도라고 합니다.
    둘째는 믿음의 기도는 죄를 사함받는 기도라고 합니다. 

    많은 성도들 중에 육체의 질병으로 고통 받으며 힘들어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들은 분명히 육체의 질병에서 회복되기를 기도합니다.
    만일 육체의 질병을 아직고 회복하지 못하고 있다면 그들이 하는 기도는 믿음의 기도가 아닐까요?

    야고보서에서 병든 자는 물론 육체적인 질병에 시달리는 것을 말합니다.
    그렇다면 병든 자를 구원하지 못하는 기도는 믿음의 기도가 아닐까요?

    믿음의 기도는 예수님처럼 기도하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앞에 놓고 밤을 새워 기도하셨습니다.
    처음에는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라고 기도하셨습니다.
    십자가의 고통은 육신적으로 감당하기가 너무 힘들다는 것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힘든 것을 싫어합니다.
    이런 갈등을 갖고 다시 기도하실 때에는 기도가 완전히 바뀌었습니다.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예수님의 기도에서 믿음의 기도를 생각합니다.

    첫째는 나의 생각을 포기하는 기도

    사람에게는 내가 감당하기 힘들고 어려운 것이 있습니다.
    누구나 그 어려운 것을 싫어합니다.
    그러므로 누구나 이 세상에서 건강하고 좋은 것만을 누리려고 합니다.
    문제는 이런 생각조차 버려야 합니다.

    이사야 55:8-9
    여호와의 말씀에 내 생각은 너희 생각과 다르며 내
    하늘이 보다 높음 같이 내 은 너희 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 생각보다 높으니라.

    둘째는 하나님의 생각을 찾는 기도

    사람이 싫어하는 것은 좁은 문, 좁은 길과 같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기뻐하는 것은 좁은 문, 좁은 길입니다.
    따라서 믿음의 기도는 육신의 몸을 갖고 살아야 하는 나는 그 길을 가고 싶지 않지만 주님께서 기뻐하시는 길이라면 기꺼이 갈 수 있는 믿음을 주옵소서 라고 기도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내가 원하는 것을 성취하는 기도는 마치 육체의 욕망을 채우려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나 거룩한 사람의 기도는 육체의 만족을 위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원하는 것을 ㅇ이 원인




    기도할 때에 다 받으리라 
    - 예수는 무화과나무가 곧 마른 사건을 통해서 종말이 임박해 왔다고 하는 사실을 경고하는 한편 믿고 구하는 기도의 능력에 대해서도 교훈하고 있다. 어떤 학자는(A. W. Argyle) 21절과 본문이 무화과 저주 사건과 성전 정화 작업을 연결시켜 주는 것으로 이해한다. 즉 성전이 기도하는 집일 경우 그들이 준비한 모든 희생 제물은 하나님께서 다 받고 기도를 이루어 주시지만 실제로 유대인들은 믿음이 없기 때문에 성전은 기도하는 집이 되지 못하고 있다. 따라서 열매없는 무화과나무나 믿음없이 형식적으로 행해지는 모든 희생제사도 하나님으로부터 마땅히 저주를 받는다는 것이며, 반대로 믿음으로 행하는 모든 일들은 그것이 비록 희생제사의 형식을 갖추지는 못할 경우라고 하더라도 하나님께서 열납(悅納)하시어 그분과 우리와의 화해의 길이 열린다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유의해야 할 것은 이 '믿음'이란 결코 우리 스스로가 실제로 믿지 않는 것을 억지로 믿으라고 강요하는 것으로 축소되어서는 안된다는 사실이다. 대신에 그것은 하나님께 대한 참된 신뢰, 하나님의 뜻의 분별 및 그 뜻에의 순종과 관계된다(19:20).

    AI Overview

    '믿고 구하는 것'은 특정 대상(신)을 전적으로 신뢰하며 자신의 뜻을 아뢰는 행위를 뜻합니다. 
    기독교적인 맥락에서는 하나님께 무언가를 기도하고 구하는 것이 해당하며, 이는 '받을 줄로 믿고 구하면 그대로 이루어질 것'이라는 믿음에 기반합니다. 
    이는 단순히 원하는 것을 얻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 대한 확고한 신뢰와 그분의 뜻에 대한 순종을 동반하는 신앙생활의 근본적인 자세를 의미합니다. 

    믿고 구하는 것의 의미

    신뢰 
    : 의심 없이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하는 태도입니다.  

    성경적 근거

    요한복음 16:23-24

    "너희가 무엇이든지 아버지께 구하는 것을 내 이름으로 주시리라 ... 구하라 그리하면 받으리니 너희 기쁨이 충만하리라"고 말씀합니다. 

    '믿고 구하는 것'의 함정 

    원하는 대로 얻는 행위로 변질 
    : '원하는 것을 말하고 요구하라(Name it Claim it)'는 운동은 성경적 기독교와는 다르다는 비판이 있습니다. 
    이는 신앙을 단순히 원하는 것을 얻는 수단으로 여기게 만들 수 있습니다. 


  • 기도 : 원하는 바를 하나님께 아뢰는 행위입니다. 

  • 확신 : 기도하는 모든 것을 이미 받은 것처럼 믿는 확신입니다. 

  • 순종 : 하나님 말씀에 대한 순종이 동반되어야 하는 행동입니다. 

  • 행함 : 믿음은 실제적인 행동으로 나타나야 살아있는 믿음이 됩니다.

    마가복음 11:24
  •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그대로 이루어지리라"고 가르칩니다.  


  • 믿고 구하는 것은 다 받으리라(마태복음 21:18-22)

  • 예수님의 행적이 나옵니다. 
    고난 주간 월요일 아침 일찍 성으로 올라가시는 길에 시장하셨습니다. 
    길가에 있던 무화과 나무에서 열매를 구하지 못하고 잎사귀만 무성한 것을 보았습니다. 
    예수님이 무화과 나무를 향해 “이제부터 영원토록 네가 열매를 맺지 못하리라”(19절) 말씀하자마자 무화과나무가 즉시 말랐습니다.

    무화과 나무 저주 사건을 통해서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가르쳐주고자 하는 의도는 무엇인가? 
    모든 행동에는 원인과 결과가 있습니다. 
    예수님의 삶 자체는 농담으로 한 것도 없고 보여주기식 쇼를 한 것도 없고, 모든 것이 하나님의 뜻안에서 진행되었다. 
    무화과 사건을 통해서 가르쳐주고자 하는 예수님의 의도는 무엇인가? 
    마가복음을 보면, 계절로 보면 아직 “무화과나무 열매를 맺을 때”가 아니라고 했다. 
    예수님은 열매를 기대할 수 없는 시기에 무화과 나무를 보고 열매를 찾았고, 열매를 얻지 못하고 저주한 것이다. 자연의 이치에 맞지 않는 행동을 하셨다. 왜 그랬을까?

    제자들에게 기도의 능력을 가르쳐 주기 위해서이다. 
    제자들이 예수님께 물었다. 
    어찌하여 무화과나무가 즉시 말랐습니까? 
    예수님이 대답하시기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만일 너희가 믿음이 있고 의심하지 아니하면 이 무화과나무에게 된 이런 일만 할 뿐 아니라 이 산더러 들려 바다에 던져지라 하여도 될것이요. 
    너희가 기도할 때에 무엇이든지 믿고 구하는 것은 다 받으리라”(21.22절).

    신앙생활에서 중요한 단어가 있다면 믿음의 언어이다. 
    믿음의 언어는 산을 들어 바다로 옮길 수 있다는 것이다. 
    과장된 언어이다. 
    그러나 주님은 믿음의 조건에서 언어가 찾이 하는 영역이 매우 클 뿐 아니라 전부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믿음의 언어를 사용하면 놀라운 일을 경험한다. 
    “기도할 때에 무엇이든지 믿고 구하는 것은 다 받으리라.” 
    강력하게 제자들에게 권면하고 있다.

    믿음과 기도는 신앙생활에서 늘 붙어 다니는 한 몸이다. 
    믿음으로 기도할 때, 주님은 일하신다. 
    그러나 불신앙의 언어는 현실을 개척할만한 에너지를 얻지 못한다. 
    불신앙의 믿음으로 인생을 창조적으로 열어간 분들은 찾아보기 힘들다. 불신앙은 자신과 가족과 공동체를 파괴하는 언어이다. 예수님은 고난주간 아침 첫 시간에 언어와 기도에 관해서 가르쳐주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신앙생활을 승리하는 비결이기 때문에 친히 가르쳐주고 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구하라고 가르친 메시지가 참으로 많다.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무엇이든지 아버지께 구하는 것을 내 이름으로 주시리라. 지금까지는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무 것도 구하지 아니하였으나 구하라 그리하면 받으리니 너희 기쁨이 충만하리라”(요16:23,24).

    믿고 구하는 것은 신앙생활의 기본 중에 기본이다. 이것은 제자들에게 뿐만 아니라, 모든 신앙인들에게 주신 하늘의 축복의 문이다. 구하지 않고는 주시지 않는다. 믿고 구하는 것은 일차적으로 우리들의 몫이다. 시편기자는 말했다. “네 입을 크게 열라 내가 채우리라” 얼마나 활기차고 생동감 있는 표현인가?

    나의 왕이신 예수님이 그리스도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며. 이 분이 곧 하나님과 동등하신 분이며 곧 본체라는 사실을 믿는 것이다. 만왕의 왕되신 주님께 구하는 것은 당연한 자녀들의 권리이다.

    믿고 기도하는 것은 불필요한 시간의 낭비가 아니라 거룩한 시간 낭비인 것이다. 그러기에 행복하다. 거룩한 시간 낭비를 즐기는 제자들이 되어야 한다. 여기서 삶의 질서가 세워지고, 삶의 고난을 뚫고 나갈 영적 에너지를 얻기 때문이다.

    믿음으로 기도하면, 우리의 언어에 큰 기쁨이 넘친다. 한 샘에서 쓴물과 단물이 동시에 나오지 않는 것처럼, 기도의 시간이 깊어지면, 하나님이 주신 창조적인 입으로 저주와 찬송을 내지 않는다. 오직 찬송과 축복의 언어를 쏟아 낸다. 얼마나 아름다운 모습인가? 
    원수를 오히려 저주하지 않고 축복한다. 오히려 나에게 상처를 준 사람들을 위해 기도한다. 그것이 가능한 일인가? 그러나 믿음안에서는 가능한 일이다. 나에게 손해를 끼친 사람들을 향해서 직접 내가 재판관이 되어 배로 값아 주어야 속이 시원한데, 믿음의 기도가 깊어지면 모든 원한들이 눈 녹듯이 녹아지게 된다. 내 안에 상처에 새살이 스스로 돋아난다. 저주의 죄악에 갇혀있지 않고, 그 지옥 같은 곳에서 나오게 된다. 그것이 축복이다.

    염려란 두 마음을 품는 것이다. 두 마음으로 고난의 계절을 이길 수 없다. 
    우리가 해야할 가장 소중한 선택은 지킬 것이 그래도 있을 때, 믿음의 기도로 다시 시작하는 것이다. 
    무엇이든지 구하라고 하셨다. 
    구하는 것은 우리들의 몫이다. 
    구하지 않으면 깊은 갈등과 염려의 감옥에 갇히게 된다. 
    구하라 그리하면 구할 것이고, 찾으라 그리하면 찾을 것이고, 두드리라 그러면 열릴 것이다.


    “17세기 영국에서는 찰스2세가 왕이 되면서 국교회를 제외한 모든 종교 활동이 금지되었습니다. 
    하지만 이 사람은 낮에는 냄비를 수선하고 밤에는 설교를 하며 복음을 전하다가 결국 1660년에 허가 없이 설교를 했다는 죄목으로 체포되어 12년 동안 감옥에 갇히게 되었습니다. 
    그 기간 앞을 보지 못하는 그의 아내는 거지처럼 구걸을 하다고 죽게 되었고, 그의 세 자녀는 스스로 생존할 수밖에 없는 고아가 되었습니다. 
    비참하고 고통스러운 상황이었지만, 포기하지 않고 하나님만을 바라보며 간구하였습니다. 
    "하나님! 너무 고통스럽습니다. 
    하나님을 위해서 할 일이 아직 남아 있습니까? 
    만약 제가 해야 할 일을 알 수 있다면, 결코 절망하지 않겠습니다."

    이 때 하나님은 마음속에 감동을 주셨습니다. 
    "너는 글을 써라, 내가 너에게 글을 쓰는 달란트를 주었노라." 
    엎드려서 간절히 기도하던 그에게 환상이 보였고, 그 환상을 책으로 기록하였습니다.

    그 사람은 존 번연이고, 그 책은 역사상 성경다음으로 많이 인쇄된 "천로역정" 이었습니다.

    "모든 것이 무너지고, 나의 힘으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그 때에, 포기하지 않고 기도하면 하나님이 일하실 것이다”


    믿음으로 기도한다는 것
    AI Overview

    믿음으로 기도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뜻을 따르고, 응답을 확신하며, 기적을 기대하며 기도하는 것입니다. 
    이는 하나님의 능력에 대한 굳은 신뢰를 바탕으로, 자신의 뜻이 아닌 하나님의 뜻을 구하고, 의심 없이 기도하는 자세를 의미합니다. 
    또한,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합력하여 선을 이루실 것을 믿는 것이며, 성령 안에서 기도하는 것도 포함됩니다.  

    믿음으로 기도하는 자세

    하나님의 뜻을 구함
     : 

    개인적인 욕심이 아닌, 하나님 나라와 의를 위한 기도를 드립니다. 

  • 하나님의 역사를 기대함 

  • 기도를 통해 하나님께서 역사하실 것을 기대하고, 놀라운 선물을 받을 것을 믿습니다. 

  • 의심하지 않음 
    :

  • 응답에 대해 의심하지 않고, 받은 줄로 믿고 기도합니다. 
    두 마음을 품지 않는 것이 중요합니다. 

  • 하나님의 전능함을 신뢰함 
    :

    하나님께서 우리의 과거, 현재, 미래를 아시고 모든 일을 합력하여 선을 이루실 것을 믿습니다. 

  • 성령 안에서 기도함 :

  • 성령의 인도하심에 따라 깨어 구하며, 다른 성도들을 위해서도 기도합니다. 


  • 인터넷 한글개역  성경 검색란에 '대속물'이란 단어를 입력하면 3구절이 소개됩니다(마 20:28, 막 10:45, 욥 33:24).

    마태복음 20:28
    인자가 온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마가복음 10:45
    인자의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욥기 33:24
    하나님이 그 사람을 긍휼히 여기사 이르시기를 그를 건져서 구덩이에 내려가지 않게 하라 내가 대속물을 얻었다 하시리라.

    대속물(코페르. kôpher) כֹּפֶר

    1. 마을.  2. 역청.  3. 고벨화
    Pronunciation [ kôpher ] 
    Etymology /  3722에서 유래
    Old Testament / 13회 사용 
    관련 성경 / 속죄금(출21:30), 속전(출30:12, 민35:31,32), 마을(삼상6:18), 대속물(욥33:24), 보상(잠6:35), 고벨화(아1:14), 뇌물(암5:12). [동]칠하다(창6:14), 갚다(삼상12:3).

    내가 대속물을 얻었다 
    하나님께서 심판을 돌이키시는 근거가 언급된다. 
    영원한 사망의 '구덩이'(22절)에서 구원을 가능케 하시는 것은 사람 자신의 능력이 아니라, 대속물을 보시고 돌이키시는 하나님의 '긍휼하심'에 있는 것이다.
     
    '대속물'(코페르)에 대해서는 '덮다', '화해하다', '대속하다'라는 뜻의 동사 '카파르'(kâphar)에서 파생되었으며, 
    '구속하다'를 뜻하는 '파다'(pâdâh), 개역성경은 '건져서'로 번역함. 시 49:7 참조)와 연관된 속량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이 대속의 개념은 희생 제물의 피를 뿌리는 제사 의식과 관련이 깊다(레 1:4; 4:4; 16:21). 
    일반적으로 이 단어는 범죄에 의한 처형이 있기 전에 그 몸값을 지불하여 자유의 몸이 되게 하는 수단을 가리킨다. 
    이런 점에서 '그를 놓아주라'(개역 성경은 '건지라'로 번역함)는 하나님의 명령이 '대속물'과 연관되어 있는 것은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의 의미를 이해하는 빛이 된다.

    카파르(kâphar)  כָּפַר Storng number 3722

    1. 덮다.  2. 전면에 퍼지다.  3. 머리로 덮히다  
    Pronunciation [ kâphar ]
    Old Testament / 101회 사용
  • 관련 성경 / 칠하다(창6:14), 속죄하다(출30:10, 신32:49, 겔45:17), 알다(사47:11), 용서하다(겔16:63), 마치다(단9:24), 속량하다(신21:8), 풀다(창32:20), 속죄하게 하다(레17:11), 사하다(대하30:18, 시78:38), 폐하다(사28:18).[명] 속죄제(느10:33, 겔43:26), 속죄물(출29:33).

    파다(pâdâh) פָּדָה Storng number 6299
  • 1. 몸값을 치루고 석방하다.  2. 대속하다.  3. 자유롭게 하다.
    Pronunciation [ pâdâh ]
     Etymology /  ‘자르다’는 뜻의 사용하지 않는 어원에서 유래  
    Old Testament / 63회 사용
  • 관련 성경 / 무르다(레27:27, 민18:16, 신9:26), 속량하다(신21:8, 사35:10, 미6:4), 건지다(삼하4:9,욥33:28), 구속하다(삼하7:23, 대상17:21, 시34:22), 구원하다(삼상14:45, 왕상1:29), 대속하다(출13:13, 34:20, 민18:15), 취하다(민18:16), 구속되다(사51:11), 속량하게 하다(출21:8). [명] 구속(사1:27), 속량(레19:20),구원(삼상14:45).

    파다(pâdaʽ)  פָּדַע Storng number 6308

    1. 해방시키다.  2. 건지다.  3. 욥 33:24.
    Pronunciation [ pâdaʽ ] 
    Old Testament /  1회 사용  

    관련 성경 /  
    건지다(욥 33:24).


  • 2025년 10월 21일 
    우리 아기가 또 태어났어요 라는 프로그램을 보게 되었습니다.
    경북 청송군에 거주하는 배지윤, 유덕선부부 사이에서 넷째 아이가 태어 났다고 축하하는 내용이었습니다.
    남편은 14년 전에 정관수술을 받았고 2차례 검사 결과 무정자증이라는 판명을 받았다고 합니다.
    부인은 임신이란 산부인과 의사의 진찰을 받았는데 임신이란 사실을 어떻게 남편에게 설명해야 할지 매우 난처했다고 합니다.
    아기가 태어난 후에 유전자 검사를 하였는데 99.997% 라고 합니다.
    의료진들은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사례라고 합니다.

    과학적으로 의학적으로 도저히 납득할 수 없는 사례가 일어난 것처럼 예수님께서 대속물이 되셨다는 것은 신앙이 아니면 믿을 수 없는 영역이라고 하겠습니다.

    구약의 율법은 죄를 지은 사람이 죄를 용서받기 위하여 짐승을 바쳐 속죄의 제사를 드려야만 했습니다.
    그런데 메시야 즉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심으로 모든 인류의 죄값을 대신 지불하심으로 누구든지 그를 믿으면 용서를 받습니다.

    도저히 일어날 수 없는 사례가 일어난 것처럼  예수께서 죄 값을 지불하심으로 모든 인류가 용서를 받았습니다.
    그러나 믿지 않는 사람에게는 이런 은혜가 적용되지 않을 것입니다.

    미국의 7대 대통령 앤드류 잭슨(Andrew Jackson. 1767-1845)죠지 윌슨이라는 사람이 우편물을 훔치는 사람을 발견하고 권총으로 쏴 죽이고 체포되어 사형언도를 받았다.
    그러나 우편물을 훔치는 강도를 쏘았기 때문에 정상이 참작되어 대통령은 그에게 '무죄 석방의 특별 사면장'을 내렸다.
    그런데 죠지 윌슨은 그에게 내려진 무죄 석방의 특별 사면장을 받기를 거부하였다. 
    이 문제는 대법원까지 상정되어 수석 판사 요한 마샬(John Marshal)이 유명한 판결을 내렸다.

    사면장은 하나의 종이 쪽지 이나 그 가치는 받아드리는 사람에 의해서 죄를 용서 받을 수 있다.
    만약 그것을 거절한다면 용서받을 수 없다.
    그러므로 죠지 윌슨은 처형을 당해야 한다.

    용서를 받았지만 용서를 거부하므로 사형을 당한 사례라고 합니다. 




    10월 25일(토) 마태복음 19-20장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대속물(20:28)

    인자가 온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just as the Son of Man did not come to be served, but to serve, and to give his life as a ransom for many.

    대속물 3083 루트론 lütrŏn  λύτρον, ου, τό  Storng number 3083


    1. 속전.  2. 석방금.  3. 마 20: 28
    Pronunciation    [ lütrŏn ]

    Etymology  /  3089에서 유래 
    관련 성경 / 대속물(마 20:28, 막 10:45).

    예수는 일생을 봉사받기 보다는 봉사하시면서 사셨다. 
    남을 섬기는 삶의 가장 감동적인 실례는, 최후의 만찬에서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신 장면이며 봉사의 극치는 그 분의 죽으심에서 보여 졌다.

    대속물 이란 무엇입니까?

    히브리어 - ( 카알 ) 되찾다, 사서 놓아주다
    히브리어 - (코페르) 속죄, 덮다
    그리스어 - (리트론) 풀어주다,되사는 것

    성서학자 앨버트 반스 박사는 포로를 구속(풀어주기)위해 지불하는 값을 대속물 이라고 하였습니다. 
    전쟁에서 적에게 포로로 잡혔을 때 몸값으로 지불되는 값이 대속물입니다.
    몸값(대속물)으로 포로가 자유롭게 풀려나는 것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어떤 사람을 형벌이나 고통이나 죄 상태에서 풀어주는 값을 대속물이라고 합니다

    디모데전서 2:6에는 안티리트론(상응하는 대속물)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파크허스트의「신약 희영 사전」은 “그것은 적절하게도 포로를 적으로부터  구속(석방)하는 즉 교환하는 값을 뜻한다. 
    강조하는 것은 공의의 저울에 균형을  이루기 위해 지불되는 대속의 값이 상응(같아야)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완전한 아담과 상응하는 완전한 몸을 갖고 태어나셨고, 아담이 하느님께 불순종하여 상실한 죽음으로부터 인류를 완전히 구출시킬수 있는 대속물을 지불할 분은 예수 한분 뿐입니다.

    사도행전 4:12 에서는 예수 외에 다른 구원의 마련이 없다고 하였습니다
    “그분(에수)외에는 다른 누구에게도 구원이 없습니다,,,하늘 아래 없습니다“

    마태복음 20:28 

    개역한글판)의 예수께서 지상에 오신 목적중 하나를 이렇게 말씀 하셨습니다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하셨습니다

    또한 요한복음 3:16에서는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히브리서 10:10 절에 기록은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단번에 드리심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거룩함을 얻었노라.

    이와같이 여러 성경의 표현들을 보면 예수의 죽음은 죽어가는 인류를 대속하여 영원한 생명을 찾을 수 있는 하느님의 과분하신 친절의 마련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대속에 대한 확신과 믿음으로  하늘 왕국통치 신세계에서 있을 부활과 영원한 생명의 기회를 갖게되기 바랍니다. 

    대속이란 무엇인가?

    대속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죄인들을 위해 대속물로 죽으신 것을 말합니다. 
    성경은 모든 사람들이 죄인이라고 가르칩니다(롬 3:9-18, 23). 
    죄의 대가는 죽음입니다. 
    로마서 6장 23절은 “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이니라”고 말합니다.

    이 구절은 몇 가지 가르침을 줍니다. 그리스도가 없다면, 우리는 죽을 것이고 우리의 죄에 대한 대가로 지옥에서 영원을 보낼 것입니다. 성경에서 사망은 ‘분리’를 뜻합니다. 모든 사람은 죽을 것이지만, 어떤 사람은 주님과 함께 영원히 천국에서 살 것이고, 다른 사람들은 영원히 지옥에서 살게 될 것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사망은 지옥에서의 삶을 가리킵니다. 그러나 이 구절이 가르치는 두 번째 내용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영생이 가능하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이 그분의 대속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처형되셨을 때 그분께서는 우리를 대신하여 죽으셨습니다. 우리는 죄악된 삶을 사는 자들이기 때문에 마땅히 십자가위에 놓여졌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대신하여 형벌을 받으셨습니다. 그분께서는 친히 우리를 대신하여 우리가 마땅히 받아야 할 형벌을 받으셨습니다.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이를 우리를 대신하여 죄로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그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 (고후 5:21).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이는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는 나음을 얻었나니” (벧전 2:24). 우리는 여기서 다시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죄값을 치르시기 위해 우리가 지은 죄를 담당하신 것을 보게 됩니다. 몇 구절 뒤에서 우리는 “그리스도께서도 단번에 죄를 위하여 죽으사 의인으로서 불의한 자를 대신하셨으니 이는 우리를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려 하심이라 육체로는 죽임을 당하시고 영으로는 살리심을 받으셨으니”(벧전 3:18)라는 내용을 접합니다. 이 구절은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대속물이 된 사실 뿐만 아니라 사람의 죄악에 합당한 형벌을 치르기 위해 속죄물이 되신 사실도 가르칩니다.

    대속에 관해 말하는 또 다른 구절은 이사야 53장 5절입니다. 이 구절은 우리의 죄를 위해 십자가에서 죽기 위해 오시는 그리스도를 말합니다. 이 예언은 매우 상세하며, 십자가의 처형은 예언된 그대로 이루어졌습니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 대속을 주목하십시오. 여기서도 또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대가를 치르신 것을 보게 됩니다.

    우리는 영원토록 지옥에서 형벌을 받으며 그곳에 있어야만 우리 자신의 죄값을 치를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값을 치르기 위해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분께서 우리를 위해 이 일을 하셨기 때문에, 우리는 지금 죄 사함을 받을 수 있는 기회 뿐만 아니라 주님과 영원히 함께 할 기회도 가지게 되었습니다. 이를 위해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행하셨던 일을 믿어야 합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들을 구원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우리를 대신할 대속물이 필요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은 대속적인 속죄입니다. 

    대속물 (代贖物)

    ἀντίλυτρον, ου, τό 487 [antilütrŏn]

    • 대속물, 딤전2:6.

    • 때, 쓰레기, 고전4:13, 대속물, 희생.

    • 교환 할 물건, 대속물, 마16:26, 막8:37.

    “과연 사단의 계획대로 예수님은 범죄한 신령들을 구원하시려고 당신 스스로 땅으로 내려와 육체를 쓰시고 범죄한 신령들의 죄 값으로 친히 그 몸을 속죄 제물로 주셨던 것이다. 

    ‘죄의 삯은 사망’ 이라 하였으니, 범죄한 신령들을 구원하려면 죄를 범하지 않는 완전한 의인으로서 불의한 자를 대신하여 죽으면 구원할 수 있다. 

    옛날 법에 죄인 한 사람을 놓아주면 대신 그 사람이 죽게 마련이다(왕상 20:42).”


    대속물 (代贖物) 


    1. 단어상의 의미

    대속물로 번역된 헬라어 ‘뤼트론’ 은 노예나 포로를 해방할 때 지불하는 몸값(속전)을 가리키는 단어입니다.

    2. 역사 속에서 배우는 대속의 이치(왕상 20:1~43)

    북(北)이스라엘의 아합왕 당시에 아람 왕 벤하닷의 군대와 전쟁이 있었습니다. 
    아람 왕은 그와 동맹한 32명의 왕들과 함께 군대를 이끌고 올라와 사마리아(이스라엘의 수도)를 포위하고 항복을 요구하였으나 아합왕과 이스라엘은 결전을 각오하고 전쟁에 임하였습니다. 
    그때 하나님의 선지자가 왕 앞에 나아가, 하나님께서 아람 군대를 이스라엘 손에 붙이셨다는(아람 군대를 이스라엘이 이기게 하시겠다는) 사실을 알려주었고 이스라엘은 이 전투에서 큰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패주한 아람 왕은 자위하기를 ‘이스라엘의 신은 산의 신이므로 저희가 우리보다 강하였거니와 우리가 만일 평지에서 저희와 싸우면 정녕 저희보다 강할지라’ 하며 전력을 보강하여 다음 해에 다시금 전쟁을 일으켰습니다.

    한편, 이스라엘도 이듬해에 아람 군대가 반드시 공격해 올 것이라는 선지자의 충고를 받아들여 열심히 군비를 확충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막상 적과 대치했을 때, “이스라엘은 염소 새끼의 두 적은 떼와 같고 아람 사람은 그 땅에 가득 하였더라”(왕상 20:27)는 표현처럼 군사력에서 현격한 열세를 보이고 있었습니다.

    이스라엘 왕 앞에 나선, 하나님의 선지자는 다시금 하나님의 뜻을 전하였습니다. 
    ‘여호와는 산의 신이요 골짜기의 신은 아니다’라고 하는 저들을 이스라엘의 손에 붙이겠노라고.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는 이스라엘의 군대는 대승을 거두었고, 아람 왕은 이스라엘 왕 아합에게 살려주기를 간청하는 수밖에 없었습니다. 
    아합은 자신을 높이는 아람 왕의 말에 기분이 우쭐해져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붙이신 아람 왕과 그의 군대를 놓아주게 됩니다.

    얼마 후,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한 선지자는 전쟁에서 다친 병사로 변장하고 수건으로 눈을 가린 채 아합 왕에게 나아갔습니다.

    “종이 전장 가운데 나갔더니 한 사람이 돌이켜 어떤 사람을 끌고 내게로 와서 말하기를 이 사람을 지키라. 만일 저를 잃어버리면 네 생명으로 저의 생명을 대신하거나 그렇지 아니하면 네가 은 한 달란트를 내어야 하리라 하였거늘 종이 이리저리 일 볼 동안에 저가 없어졌나이다”

    이 말을 듣고 있던 아합왕은 그 내용이 자신을 가리켜 말한 것임을 알지 못한 채 용감하게 말했습니다.

    “네가 스스로 결정하였으니 그대로 당하여야 하리라”

    죽어야 할 아람 왕을 놓아준 이스라엘의 아합에게는 다음과 같은 하나님의 말씀이 전달되었습니다.

    “내가 멸하기로 작정한 사람을 네 손으로 놓았은즉 네 목숨은 저의 목숨을 대신하고 네 백성은 저의 백성을 대신하리라”

    이와 같이 대속이란 죽을 죄를 지은 사람을 살리기 위해서 죄를 짓지 아니한 다른 사람이 대신 죽는 것을 의미합니다.

    3. 대속제물이 되신 그리스도

    구약시대 이스라엘 백성들이 죄를 지었을 때, 짐승을 잡아 피를 제단에 뿌림으로 죄를 대속받았던 역사는 신약시대 그리스도께서 모든 대속제물의 실체가 되시어, 자신을 내어주시고 피를 흘리심으로 인류의 죄를 대속하실 것에 대한 모형이었습니다.

    이제 그 피를 믿고 그의 가르침대로 행하는 모든 심령들은 그리스도의 대속으로 정죄(定罪)에 이르지 않고 온전한 구원에 이르게 될 것입니다.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마 20:28, 막 10:45

    죽을 수밖에 없는 죄를 지은 인류를 살리기 위해 당신의 목숨까지 아끼지 않으신 예수님의 숭고한 사랑은 이제 하늘 자녀들의 가슴속에 새겨져 영원히 잊혀지지 않을 것입니다.


    구속 (救贖), 대속 (代贖), 속죄 (贖罪), 속량 (贖良), Redemption, Atonement, Ransom의 의미는?

    영미에서는 신학용어가 매우 잘 정리되어 있어 신학을 이해하기가 수월합니다. 하지만 한국의 경우 복잡하고 어려운 한자식 조어들과 영어 단어들이 혼재되어 있어 신학 개념의 이해를 방해하는데 주된 역할을 합니다.

    구속(救贖), 대속 (代贖), 속죄 (贖罪), 속량 (贖良), Redemption, Atonement, Ransom이라는 단어는 신학용어로 너무나도 자주 등장하는 용어입니다. 하지만 이 용어들의 정확한 의미를 모두 파악하고 계시나요?

    오늘은 간단하지만 매우 중요한 이 단어의 사전적 의미를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결론부터 말씀드리자면, 위의 단어는 사용에 있어 약간의 차이가 존재하지만, 모두 유사한 뜻을 지닌 단어입니다.

    구속(救贖) ≒ 대속 (代贖) ≒ 속죄 (贖罪) ≒ 속량 (贖良)

    ≒ Redemption ≒ Atonement ≒ Ransom (속전, 속죄)

    본문에서는 단어의 뜻을 알아보기 위하여 다음 인터넷 사전을 이용하였습니다. http://alldic.daum.net/

    구속(救贖, Redemption)

    성경에서 구속(救贖, Redemption)이라는 단어는 참으로 많이 쓰입니다. 하지만 일상생활에서 구속이라 하면 도망가지 못하게 가두어 두는 것을 뜻합니다.

    - 구속 (잡을 拘 묶을 속 束)1.[법률] 형사 소송법에서, 법원 또는 판사가 피고인이나 피의자를 강제로 일정한 장소에 잡아 가두는 일

    그럼 성경에서 사용되는 구속(救贖, Redemption)은 무슨 뜻일까요? 사전적 의미를 살펴보겠습니다.

    - 구속 [구원할 救 속죄할 贖] 예수가 십자가에 못박혀 인류의 죄를 대속(代贖)함으로써 인류를 구원함

    즉, 구속이란 예수께서 대신 우리의 죄를 속하시고 구원하심을 뜻합니다. 사전에는 인류라고 되어 있으나, 정통신학에서는 창세 전 하나님께서 이미 택한 백성들의 죄를 속하여 구원하셨다는 것이 정설입니다.

    대속 [代贖, Atonement]속죄 [贖罪, Atonement]

    구속과 동일한 뜻으로 쓰이는 단어로는 '대속'과 '속죄'가 있습니다. 이 두 한자식 조어에는 '구원 (救援)'을 의미하는 한자는 없습니다.

    대속은 예수께서 우리를 대신하여 (죄를) 속하셨다는 의미이고, 속죄는 예수께서 우리의 죄를 (우리를 대신하여) 속하셨다는 의미입니다. 결과적으로 예수께서 우리를 대신하여 죄를 속하여 주신 은혜를 입은 자들은 구원에 이를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하기에, 위의 구속(Redemption)과 동의어로 쓰이고 있습니다.

    사전의 뜻을 한번 살펴보도록 합시다.

    - 대속 [대신 代 속죄할 贖] 1.남의 죄를 대신하여 받음

    2.[기독교] 예수가 십자가에 못박혀 죽음으로써 그 흘린 피로 만민의 죄를 대신 씻어 구원한 일

    영단어 1. atonement 2. redemption 으로 번역된다.

    - 속죄 [속죄할 贖 허물 罪] 1.금품이나 노력으로 지난날의 죄나 과오를 씻음

    2.[기독교] 예수가 인류의 죄를 대신하여 십자가에 못박혀 죽음으로써 대속(代贖)한 행위

    영단어 1. redemption 2. atonement 으로 번역된다.

    속(贖, paying ransom)

    구속, 대속, 속죄에 공통적으로 쓰이는 속(贖)은 죄나 빚진 것을 씻기 위하여 물건을 바치는 행위 혹은 바치는 물건 그 자체를 뜻합니다.

    - 속(贖) 1.죄를 씻기 위하여 재물이나 노력 등을 바침

    2.빚진 것 대신에 다른 물건이나 노력을 제공함 3.또는 그 재물이나 노력

    - 속(贖)하다 1. (사람이 재물이나 노력 등을) 죄를 씻기 위하여 대신 바치다.

    2. (사람이 물건이나 노력 등을) 빚진 것 대신에 제공하다.

    '속량'도 '구속', '대속', '속죄'와 유사한 의미로 쓰이고 있습니다. 이 단어는 몸값을 받아 종을 놓아주어 양민이 되게 한 것을 뜻하는 말로서, 노예제도가 있었던 한국 역사에서 씌였던 단어를 예수님의 구속 사역에 적용한 것으로 생각됩니다. 유의어로는 '속신'이 있습니다.

    속량 [贖良]

    - 속량 [속죄할 贖 좋을 良] 1.[역사] 몸값을 받고 종을 놓아주어 양민이 되게 함. 유의어 속신(贖身)

    2. [기독교] 예수가 인류의 죄를 대신하여 십자가에 못박혀 죽음으로써 대속(代贖)한 행위. 유의어 속죄(贖罪)

    '속전'이라는 단어도 눈에 띄는데, 죄를 속하기 위해 쓰이는 돈으로서, '대속물' 혹은 '속량물'과 같은 뜻이다.

    속전 [贖錢]

    - 속전 [속죄할 贖 돈 錢] 죄를 면하려고 바치는 돈

    ​위와 같은 의미를 가진 영어단어는 Redemption, Atonement 그리고 Ransom이 있습니다. 
    각 단어의 뜻을 살펴 보도록 하겠습니다. 
    세 단어 모두 '죄의 갚음' 혹은 '죄 갚음에 대한 배상'을 뜻하고 있습니다.

    Redemption (구속)
    redemption은 redeem의 명사형입니다.
    redeem은 '채무를 갚다', '저당잡힌 것을 도로 찾다','남을 몸값을 지불하고 구해내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것의 명사형인 redemption은 '몸값을 주고 빼내기','범죄에 대한 대가',저당물의 상환'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redemption 명사

    1. [불가산] 다시 사들이기, 되찾기; (약속의) 이행.
    2. [불가산] 구조, 구출, 몸값을 주고 빼내기.
    3. [불가산] (범죄에 대한) 대가, 대상; (저당물 등의) 변제, 상환; (화폐의) 태환.
    4. [불가산] [신학]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에 따른) 죄의 갚음, 속죄, 구원.
    5. 벌충하는 것, 장점

    redemption과 관련된 성경 구절을 살펴 보겠습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 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개역한글) Being justified freely by his grace through the redemption that is in Christ Jesus: (KJV) 롬 3:24

    ​눅 21:28 이런 일이 되기를 시작하거든 일어나 머리를 들라; 너희 구속이 가까왔느니라 하시더라 
    (개역한글) And when these things begin to come to pass, then look up, and lift up your heads; for your redemption draweth nigh. (KJV)

    Atonement (속죄)
    Atonement는 atone의 명사형입니다.

    ​atone은 '죄의 보상을 하다'의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누군가의 지은 죄에 대한 보상을 죄로 인해 피해를 입은 누군가에게 하는 것입니다.

    ​예수의 구속에 있어, 우리에게 유전된 원조를 비롯한 모든 죄를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피흘림으로 보상을 하는 것입니다. 
    누군가에게 보상을 할까요? 
    역사적으로 신학적으로 극렬하게 토론했던 이슈였습니다. 바로 성부 아버지께 드리는 것입니다.

    atonement 명사 (격식)

    1. [불가산] [죄·잘못 등의] 보상, 죄 갚음, 배상 [for ‥]

    in atonement for one's misdeeds 비행의 죄 갚음으로.

    2. [신학] 속죄; (the Atonement) 예수의 속죄.

    매일 수송아지 하나로 속죄하기 위하여 속죄제를 드리며 또 단을 위하여 속죄하여 깨끗케 하고 그것에 기름을 부어 거룩하게 하라 (개역한글) And thou shalt offer every day a bullock for a sin offering for atonement: and thou shalt cleanse the altar, when thou hast made an atonement for it, and thou shalt anoint it, to sanctify it. (KJV) 출29:36

    Ransom (속전)

    ranmsom은 '속전' 혹은 '죄를 속하기 위한 배상금'입니다.

    예수의 구속에 있어서는, 우리의 원죄를 포함한 모든 죄를 속하기 위해 그가 십자가에서 흘린 피입니다. 그 피의 은혜는 바로 믿음으로 거저 받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 외에도 '속죄'의 의미도 가지고 있습니다.

    ransom 명사

    1. 몸값, 속전, 속량금(액), 배상금(액) 
    demand[exact] a ransom from a person 몸값을 남에게 요구하다.

    2. [불가산] (포로·노예·유괴된 사람·노획품 등을) 금품을 주고 풀려나오게 하기[되찾기].

    3. [불가산] 죄의 갚음; (특히) 면죄금 지불; (예수의) 속죄.

    타동사

    1. [포로 등을] (보상금을 지불하여) 풀려나오게 하다, 구해내다.

    2. [남을] 몸값을 받고 석방하다; [물품을] 배상금을 받고 돌려주다; …으로부터 몸값을 받다, …에게 배상금을 요구하다.

    3. …의 죄를 갚다; [예수가] 속죄를 하다; (일반적으로) …을 보상하다, 죄 갚음을 하다.

    그가 모든 사람을 위하여 자기를 속전으로 주셨으니 기약이 이르면 증거할 것이라 (개역한글) Who gave himself a ransom for all, to be testified in due time. (KJV) 딤전 2:6

    아주 단순화 해서 살펴보면, 아래의 단어가 모두 비슷한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고로, 다음과 같은 도식이 가능합니다.

    구속(救贖) ≒ 대속 (代贖) ≒ 속죄 (贖罪) ≒ 속량 (贖良)

    ≒ Redemption ≒ Atonement ≒ Ransom (속전, 속죄)

    하지만, 'ransom'은 '속전', '대속물', 혹은 '속량물'이라는 뜻으로 주로 쓰입니다.

    구속(救贖, Redemption) 원어의 뜻은 '찍어내다, 몸 값'으로 대가를 지불하고 구해내는 일을 말한다.

    성경에서 이말이 최초로 씌어져 있는 것은 야곱이 요셉을 축복하는 말에 있어서이다(창 48:16).

    ​댓가(代價)를 지불하여 구해 내는 일(출 6:6, 15:13, 호 13:14, 엡 1:7). 
    단지 구해냄을 의미하는경우도 있다(출 6:6, 삼하 4:9, 왕상 1:29, 시 74:2). 
    구약에서는 주로 여호와께서 애굽왕 바로아래서 노예생활을 강요 받고 있던 이스라엘을 구출해 내신 일에 대하여(신 7:8, 9:26, 13:5, 21:8, 24:18, 시 111:9), 
    또는 바벨론 포로에서의 구해내심에 대해서 (렘 31:11) 씌어져 있다.

    ​처음에는 이 단어가 상업적 용어로 제한되었으나, 신약성경에 사용됨으로써 구속의 개념과 이 구속에 상당하는 대가, 즉 몸값이라는 개념을 아울러 포함하게 되었다(롬 3:24, 고전 6:20, 갈 3:13). 
    그래서 구속한다는 것은 죄의 종노릇으로부터 구원해 내어 새로운 자유로 해방시켜 준다는 의미를 내포한다. 
    이 새로운 자유는 항상 그리스도 안에 거하는 것이라고 성경에 제시되어 있다. 
    즉 인간이 죄로부터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새 생명에로 구원을 받은 것이다(롬 6:4). 
    이 단어의 근본 개념은 이중적이다. 
    즉, '~로부터의 구속'과 '~에로의 구속'이다.

    ​다시 말해 율법, 율법의 형벌, 죄, 사탄 및 모든 악으로부터의 구속과 죄로부터 새로운 자유 및 하나님과의 새로운 관계 그리고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새 생명에로의 구속인 것이다. 
    구속은 속전(贖錢 ; 몸값)의 요구에 대한 그리스도의 보상을 기초로 한다. 
    그리스도께서는 율법이 요구하는 바를 충족시키기 위하여 스스로 우리의 죄의 속성을 입고 우리의 죄악을 담당하셨다. 
    자발적으로 자기의 뜻을 이렇게 행함으로써 죄의 속박으로부터 우리를 구원해 내기 위하여 자신을 속전으로 내어 주신 것이다(벧전 3:18).

    대속(Ransom) 노예나 죄인을 자유케 하기 위해서 대신 지불하여 구원함을 말한다. 이 때 지불된 것을 대속물이라 한다(민 18:15).

    ​구약에서는 삶의 죄의대상(代償 대신갚음)으로 하나님께 바치는 것을 의미한다(출 30:12, 민 35:31).
    소가 사람을 받아 죽이면 소 임자는 당연히 죽임을 당해야 했지만 정해진 속전(ransom money)을 냄으로써 죽임을 면하는 규례가 있었다(출 21:30). 
    그리고 실화(失火)로 인해 이웃에게 손해를 주었을 경우, 상법과 장물에 대한 배상법, 위탁받은 가축의 손상에 대한 배상법 등이 나온다(출 22:6-13). 
    이러한 배상법들은 대속의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구약에서 노예를 자유케 하기 위해 지불하는 값 역시 대속의 의미를 지니고 있다(레 19:20). 
    더 나아가 이사야는 여호와의 속량함을 얻는 자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사 35:10).

    ​신약에서는예수께서 만민의 죄를 대신하여 지신 것을 주로 뜻하고 있다(마 20:28).

    헬라어 명사 '루트론'은 포로나 노예를 해방시키기 위한 '몸의 대금(값)'을 말하는데(막 10:45),예수께서는 죄의 노예로 되어 있는 인간을 해방시켜 하나님의 것으로 하기 위해, 그 자신의생명을 '속전'(代贖物, 代償)으로 바치셨다(마 20:28, 막 10:45, 요 1:29). 인간은 하나님은, 그 죄의 심판을 행하시는 분이시다. 
    예수의 대속(댓가)은 이 하나님 자신의 의를 만족시키기 위해 지불되었다(롬 3:28, 고전 6:20).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치르신 죽음은 우리의 죄에 대한 범칙금을 지불하는 사건이었다(갈 1:4).


    사도행전 2:40
    또 여러 말로 확증하며 권하여 가로되 너희가 이 패역한 세대에서 구원을 받으라.

    사람의 도리가 뭐냐 하면 하나님이 알려줬죠.

    전도서 12:13
    일의 결국을 다 들었으니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 명령을 지킬지어다 이것이 사람의 본분이니라.

    예레미야 2:19 
    네 악이 너를 징계하겠고 네 패역이 너를 책할 것이라 그런즉 네 하나님 여호와를 버림과 네 속에 나를 경외함이 없는 것이 악이요 고통인 줄 알라 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경외라는 말은 히브리 말로는 '야레(Yare)'라고 돼 있습니다. 
    '야레'라는 말은 공경하다, 존중하다, 이런 의미고. '경외하다'라는 말은, 하나님은 하나님과 부모님에게 사용했습니다. (레 19:3) '부모를 경외하고'라는 말씀도 있죠. 이런 뜻입니다. 자녀는 부모님이 베풀어주신 은혜를 알고 감사하고, 또 부모님은 자신보다 높으심을 알고 부모님 말씀에 절대적으로 순종하려는 태도. 그것이 부모를 공경하고 사랑하는 모습입니다. 다시. 부모님을 내가 공경하고 사랑한다는 것은 부모를 만만하게 본다는 게 아닙니다. 무엇이냐면 베풀어주신 은혜를 기억하고 감사하고 그리고 부모님은 나보다 높기 때문에 말씀에 절대 순종하는 것이 그것이 부모를 존중하고 공경하고 사랑하는 태도인 거예요. 하나님께 대한 경외가 뭐겠어요? 하나님이 나에게 베풀어주신 은혜를 알고 감사하고 그리고 하나님이 나보다 얼마나 높으심을 알고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말씀에 절대적으로 순종하는 것. 그것이 바로 하나님을 공경하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모습인 거예요.

    이런 일이 있었습니다. 패륜 범죄라는 거. 왜, 자식이 부모를 죽이는 것 이걸 패륜아라고 그러잖아요. 스물한 살짜리 한 청년이 있었는데, 이 청년이 부모님을 죽였는데요. 어떻게 죽였냐면 아버지를 서른네 군데를 칼로 찍었어요. 엄마를 스물여덟 군데를 칼로 찔러가지고. 자기를 낳고 길러준 부모님을 그렇게 난도질해 가지고 불 질러 버렸습니다. 이유가 뭐냐. 이놈이 고등학교 때부터 사고를 치는 거예요. 말을 안 들으니까, 부모님이 돈이 좀 있었습니다, 미국 유학을 보낸 거예요. 그래도 대학 보내고 사람 만들려고. 근데 미국 가서 뭐 하느냐? 만날 술 마시고. 음주 가무, 여자하고 놀고. 엉망인 거예요. 컴백. 들어와. 한국에 불렀는데 뭐라 하냐면 저는 또 나가서 놀겠다는 거야. 얼마나 답답해요. 이놈아, 정신 좀 차리라고. 야단을 치니까. "아, 돈 달라고. 아, 그 재산 많은데 돈 좀 주라고. 내가 좀 하겠다는데." 돈을 줄 리가 없잖아요, 아버지가요. 어떻게 했냐. 밤에 가가지고 죽여 버린 거예요. 자, 우리는 그걸 패륜, 패역이라 부릅니다. 뭐가 느껴져요? 이놈이 왜 죽였을까, 부모님을? 이거죠. 뭐냐면 부모님 은혜를 잊어버린 거예요. 그리고 너무너무 교만해졌죠. 자기가 지금 이 자리에 있는 것이 누구 덕분인 줄 모르는 거예요. 부모님이 피 흘리고 낳고. 부모께서 정성껏 키워 가지고 입히고 재우고 교육시켜서 자기를 지금 만들어 줬는데도 불구하고. 자기가 덩치가 커지고 힘이 세지니까 눈에 뵈는 게 없잖아요. 교만해지니까 어떤 일이 벌어지냐면, 부모를 딱 보니까 노인으로 보이잖아요. 만만한 거예요. 우습게 보이는 거예요. 그리고 자기 욕망을 채워야 되는데 부모가 안 도와주잖아요. 돈을 안 주잖아요. 어떻게 보입니까? '아, 빨리 없애야 될 노인이구먼.' 죽어야 될 노인으로 보이는 거예요. 부모로 안 보이고. 결국은 제거해 버린 거예요. 즉, 부모로 안 보이는 거예요.

    따라서 사람이 하나님을 향한 패역이 무엇이냐면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보지 않는 걸 말하는 거예요. 하나님을 깔보는 거예요. 하나님을 무시하는 거예요. 하나님을 막 보는 거예요. 하나님을 그림자 취급하는 거예요. 하나님 은혜가 뭔지도 모르고 하나님이 얼마나 높은지도 모르고 하나님을 막 대하는 거예요. 사람들이 왜 구원을 못 받겠어요? 패역하기 때문이에요. 하나님을 무시하기 때문이에요. 패역은 언제나 삼종 세트가 따라와요. 무엇이냐면 무지함과 교만함과 자기중심이 따라온다고. 인간은 하나님이 자기에게 베풀어준 은혜를 모르고 하나님이 얼마나 높은지를 모르는 그 무지와 교만이 더해지는 거예요. 자기가 마치 스스로 존재하고 자신의 힘으로 현재 자신의 위치에 있고 앞으로도 자기 위치가 영원히 지속될 거라는 교만. 거기에다가 자기중심이 딱 들러붙는 거예요. 즉, 내 욕망을 위해서 산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자기를 위해서는 별짓도 다 할 수 있는 거예요. 자기를 위해서는 수많은 사람을 괴롭힐 수도 있고 음란한 짓도 할 수 있고 다른 사람 피해줄 수도 있고. 내 욕망을 위해서는 뭐든지 다 할 수 있다. 심지어 자기 뜻대로 안되면 귀신의 힘이라도 빌려서라도 복을 받고 싶어서 우상숭배도 선택하는 거예요. 완전히 하나님을 뭉개버린 거예요.

    이런 패역한 태도가 어디서 시작됐냐, 그 말이에요. 그 시작은 바로 마귀였습니다. 원래 마귀는 천사였죠. 루시퍼였잖아요. 왜 마귀가 됐습니까? 하나님께 패역하다 그리된 거예요. 하나님을 무시하고 깔보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이 없었던 거예요. 마귀는 하나님의 존재를 부인한 게 아닙니다. 다만 하나님을 무시하고 깔봤잖아요. 자신이 너무 아름다우니까, 능력이 많으니까 교만해져 가지고 자신이 누군지, 자기가 지금 어떤 위치에 있는지 주제 파악이 안 되잖아요. 사람은 교만해지게 되면 하나님을 잊어버립니다. 하나님이 누군지를 몰라요. 자기 앞에 계신 하나님이 누굽니까? 자기를 지은 분이에요. 천지만물을 창조하고 다스리는 분이고, 그분은 단 한 번의 말씀으로 자신을 지옥의 맨 밑창에 집어넣을 수 있는 분이에요. 근데 교만해지니까 제정신이 아니잖아요. 과감하게 하나님과의 독립을 딱 선언하는 거예요. 그러고는 외쳐댔죠. 감히 (사 14:14) '지극히 높은 자와 비기리라' (사 14:13) '뭇 별 위에 나의 보좌를 높이리라' 내가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과 비기리라 외치는 순간 그의 운명은 지옥 맨 밑에, 음부 맨 밑으로 딱 결정 난 거예요. 지옥 가서도 가장 큰 형벌 받는 게 마귀잖아요. 느부갓네살 왕이 교만했잖아요. 이 모든 이뤄온 게 내가 한 거라고. 외치는 순간 하나님이 그대로 느부갓네살 왕을 짐승으로 만들어버렸잖아요. 이 마귀가 사람들을 속여 옵니다. 하나님 우습게 보라고. 아담이 속았잖아요. "너, 하나님 말씀 무시해도 돼. 무시해. 그래도 지금처럼 행복할 거야." 그리고 선악과 따 먹었잖아요. 결과는 비참했잖아요. 노아 시대 사람들도 마귀에게 속았잖아요. "배에 안 타도, 방주에 안 타도 괜찮아. 안전할 거야. 하나님 무시해. 깔봐." 망했잖아요. 롯의 사위들도 마찬가지죠. 피하라 그러는데 하나님 말씀을 무시하라고. 농담이라고. 그들의 죽음은 진담으로 바뀌었습니다. 마귀에게 딱 속잖아요. 그때부터 어떤 일이 벌어지냐면, 드디어 하나님 무시하고 깔보기 시작하죠, 그때부터는 완전 타락의 길을 걷는 거예요. 온갖 죄를 다 짓는 거예요. 아모스 시대에 별의별 죄를 다 지었잖아요. 완전히. 돈이라면 의인도 팔아먹고 아버지와 아들이 한 여자와 관계하고. 성적으로 완전히 엉망진창 다 됐잖아요.

    우리 시대가 어때요? 아모스 시대와 똑같다니까요. 완전히 도덕이 타락했잖아요. 우리 시대, 얼마나 패역해요. "하나님이 어딨냐고. 성경이 무슨 하나님 말씀이냐고. 지어낸 거지. 무시해버려. 깔봐. 내 인생은 내 거야. 네 인생의 주인은 너야. 너 하고 싶은 대로 해. 죽으면 끝이야. 살아봐야 얼마나 산다고. 마음껏 즐기고 살아." 그래서 이런 걸 하잖아요. 우리 시대에 중요한 게 욜로(YOLO)족이라면서요. 욜로. 욜로 하다가 골로 갑니다. 여기에 이렇게 돼 있죠? You Only Live Once. 단 한 번 사는 거다. 그러니 즐겨라. 그 말이에요. 그러니까 이런 일이 벌어지죠. 내 인생은 나의 것이라고. 동성 결혼, 혼전 동거, 동성애. 하면 안 된다고. 뭐라고 말합니까? 누가 하지 말라 그랬냐고. 내 몸 내 거고 내 인생 내 건데. 하나님이 어딨냐고. 내가 하나님인데. 그게 바로 패역인 거예요. 근데 놀라운 게 있어요. 노아 시대에 이런 일이 벌어졌죠. 하나님을 안 믿는 사람은 하나님 무시하는 거 이해가 되잖아요. 물론 나쁜 거지만 그래도 이해는 되지 않습니까? 안 믿으니까. 근데 노아 시대 때, 여러분, 잘 아시죠? 셋의 후손들,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람들도 패역했습니다. 하나님을 무시했잖아요. 어떻게 했습니까? 자기들 좋은 대로. (창 6:2)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을 보고', '아내를 삼는지라' 이스라엘 사람들이 하나님을 얼마나 깔보고 무시했냐면 이런 일을 벌였잖아요. 하나님 앞에 제사를 지내는데 와가지고 (말 1:8) '눈먼', '저는 것, 병든 것'으로 드렸잖아요. 하나님이 너무 답답해 가지고 뭐라 하셨냐면 네가 이 드린 희생을 (말 1:8) '너희 총독에게 드려보라 그가 너를 기뻐하겠느냐' 하나님을 사람인 총독보다 못하게 생각했잖아요. 옛날에 중국 황제를 만나러 갈 때는 자금성에 황제가 있었잖아요. 어떤 사람이 황제를 만나러 가게 되면 이런 일이 벌어졌답니다. 일곱 개 관문을 통과해야 되는데 한 개 관문을 통과할 때마다 무릎을 꿇고 세 번 절해야 돼요. 세 번 무릎 꿇고 또 절하고, 세 번 무릎 꿇고 또 세 번 절하고. 스물한 번 해야 황제를 만납니다. 근데 어떤 일이 벌어지느냐 하면, 하나님을 너무너무 가볍게 생각하는 거예요.

    우리 시대, 아모스 시대입니다. 노아 홍수 전의 시대입니다. 그것처럼 요즘 구원받은 청년들 중에도 노아 시대의 셋의 후손 같은 사람이 꽤 보이고 많아지고 있는 겁니다. 하나님의 존재도 인정하고 구원받은 것도 인정하는데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이 없어요. 자기 좋은 대로, 내 생각대로, 내 감정대로 신앙생활하는 거예요. 교회도 오고 싶으면 오고 오기 싫으면 안 오고. 봉사도 하고 싶으면 하고 헌금도 하기 싫으면 안 하고. 사람 볼 때는 열심히 하고 혼자 있을 때는 엉망이고. 가정에서는 엉망입니다. 부모도 공경 안 하고 가족 사랑도 안 하는데 밖에서는 열심 있는 척하고. 심지어 한 걸음 나가서 하나님을 우습게 보죠. 깔봅니다. 무시합니다. 하나님 신경도 안 쓰고 죄 지어 버립니다. 거짓말도 하고 욕도 하고 음란한 말도 하고 음란한 것도 봅니다. 죄를 버리고 순종하라, 이런 말씀을 들어도 한쪽 귀로 듣고 한쪽 귀로 흘려버려요. 심지어 헌금하라, 십일조 하라, 해외 선교 헌금하라 해도 신경 안 씁니다. 무시하는 거예요. 하나님을 깔보는 거예요. 한 손으로 죄를 붙잡고 있으면서 한 손으로 기도하고 있습니다. 얼마나 하나님을 무시하는 거예요. (욥 1:8) '순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게 아닙니다. 몰래몰래 죄를 짓고, 그리고 교회 가서는 안 지은 척하고. 우리 시대가 바로 라오디게아 시대죠. 요한계시록 3장의 라오디게아 시대. (계 3:16) '더웁지도 아니하고 차지도 아니'하고 '미지근'한 시대. 하나님이 '토하여 내치리라' 했던 그 시대죠. 그 라오디게아 때 예수님의 모습이 이 모습입니다.

    요한계시록 3장 14절

    [아멘이시요 충성되고 참된 증인이시요 하나님의 창조의 근본이신 이가 가라사대]

    마지막 시대 때 예수님은 아멘(Amen)으로 나타났습니다. 왜요? 우리 시대에 아멘이 제일 부족하기 때문에 이렇게 나타나신 거예요. 아멘이 뭡니까? 예스(Yes), 그 말입니다. 우리 시대에 제일 안 되는 게 뭐냐 하면 예스, 순종인 겁니다. 우리 시대에 이게 안 되는 겁니다. 예스, 아멘. 아멘. 예수님은 하나님께 언제나 아멘이었죠. 예수님은 자신의 본분을 언제나 지켰습니다. 하나님이 얼마나 높으심을 알고 하나님을 깊이 사랑하고 하나님을 경외했습니다. 예수 인생에 불순종이 없지 않습니까? 우리 시대에 제일 필요한 게 뭐냐? 경외심이에요. 그래야 죄 많은 세상에서 악을 떠날 수가 있는 거예요. 우리 시대를 보게 되면, 이런 일이 벌어집니다.

    잠언 16장 6절

    [인자와 진리로 인하여 죄악이 속하게 되고]

    같이 읽겠습니다,

    [여호와를 경외함으로 인하여 악에서 떠나게 되느니라]

    우리 시대에 희한한 신앙이 유행하는 겁니다. 뭐냐 하면 하나님을 옆집 아저씨처럼, 동네 친구처럼 생각하는 희한한 신앙이 있는 거예요. 그게 마치 영성이 뛰어난 것처럼. 착각입니다. 성경의 하나님은 그런 분이 아닙니다. 성경의 하나님은 우리가 깊이 사랑하는 동시에 두렵고 떨림으로 섬겨야 되는 겁니다. 구약에서 신약까지 하나님을 사랑했던 위대한 신앙 위인들을 보십시오. 보면 그들은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고, 또 그 사랑을 사람들에게 전파했습니다. 자기들의 죄를 완전히 용서해 주시고 영원한 속죄해 주신 하나님의 사랑을 깨달았지만 그들의 삶 속에는 하나님을 무시하거나 깔보는 태도는 전혀 없었습니다. 오히려 하나님께 감사함과 함께 두려움과 떨림으로 경외심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도 이렇게 말했잖아요. (빌 2:12-13)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교회 안에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에 두렵고 떨림으로. 하나님을 믿는 신앙은, 기독교는 하나님을 절대로 만만하게 보는 신앙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크고, 하나님을 하나님답게 두렵고 떨림으로 섬기는 신앙인 거예요. 욥이 왜 경건합니까? 욥은 얼마나 하나님 앞에 자기가 바르게 하려고 그랬어요. 욥은 철저했잖아요. 욥은 (욥 31:1) '내가 내 눈과 언약을 세웠나니 어찌 처녀에게 주목하랴' 왜? 자기가 처녀에 주목하게 되면 범죄 할 수 있으니까 눈도 조심했습니다. 내가 언제 이웃의 옆집 여인에게 마음이 유혹돼서 쳐다본다거나 자기가 죄를 지을까 봐 그렇게 두려워했다고. 왜요? 하나님을 멸시하는 사람은 죄를 막 짓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을 정말 두려워하는 사람은 하나님 말씀 어기는 거를 정말 크게 생각하고 죄짓는 걸 제일 두려워하는 거예요. (욥 31:2-3) '그리하면 위에 계신 하나님의 내리시는 분깃이 무엇이겠으며', '재앙이 아니겠느냐' 욥은 하나님께 축복을 받고 싶었습니다. 욥이 말했잖아요. 내 일생에 제일 중요하게 생각하는 게 뭐냐 하면 순종이라고. (욥 23:12) '일정한 음식보다 그 입의 말씀을 귀히 여겼구나' 음식을 꾸준히 먹어야만 건강한 것처럼 자기 삶에 제일 중요한 것을 순종, 그걸 보배로 여겼습니다.

    한번 돌아보는 거예요. 내가 그동안 하나님을 어떻게 섬겨왔는지. 물어보겠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경건한 두려움이 있었습니까? 두렵고 떨림으로 하나님을 섬겼습니까? 하나님 은혜에 깊이 감사했고 하나님이 얼마나 더 높으심을 알고 하나님을 두렵고 떨림으로 하나님 말씀 한마디 한마디의 말씀을 크게 생각하고 지키려고, 그것이 내가 하나님에 대한 공경하는 태도고 하나님에 대한 사랑이라고 굳게 믿고 그렇게 살았습니까? 사람들이 나를 보고 정말 저 형제는, 저 친구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이야 그랬다면 분명히 아모스 4장 13절의 나를 도와주신 하나님을 만났을 겁니다. 근데 혹시 그간 나의 삶이 하나님께 대한 그 어떤 두려움도 없고 하나님을 우습게보고 만만하게 보고 깔보는 삶을 서슴없이 살았지 않습니까? 하나님을 무시하고 능욕하고 심지어 하나님을 없는 것처럼 생각하고 그렇게 살면서도 그게 마치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생각하고 살았지 않습니까? 그런 동안에 자신의 삶은 경건한 삶과 한참 멀어졌고 자기 영혼은 피폐해졌고 자기 마음은, 생활은 죄의 노예로 속박이 된 겁니다. 그리고 자기의 삶은 고통스러웠을 거예요. (렘 2:19) '나를 경외함이 없는 것이 악이요 고통인 줄 알라' 그 고통은 쓰디쓴 고통이었을 겁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하고 난 다음에 물이 없어서 처음으로 마셨던 물이 마라였습니다. 너무 써가지고 마시지 못했습니다. 그때 쓰는 단어가 바로 고통, 그 단어입니다. 막상 그렇게 살아보니까 삶은 지옥 같은 삶이었을 겁니다. 바로 징계의 하나님을 만났을 거예요. 이런 마음이 들었을 거예요. 그렇게 사는 분은 '이렇게 사는 건 사는 게 아니야. 이건 정말 너무 고통스러워. 지옥 같은 삶이야. 하나님께 돌아오지 않고는 나는 못 견딜 것 같아, 이젠.' 죄가 처음에는 달았지만 (잠 5:4) '나중은 쑥같이 쓰고 두 날 가진 칼같이 날카로우며' 하나님은 나한테 왜 이렇게 하십니까? 잘 들으십시오. 나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그런 거예요. 나의 패역을, 그렇게 하나님을 만만히 보고 멋대로 죄짓고 사는 것을 고쳐주고 싶은 거예요. 이거 아십니까? 하나님은 나의 죄에 대해서 분노하시고 혐오하세요. 근데 문제는 나예요. 사람이에요. 나는 하나님처럼 죄를 혐오하지 않아요. 오히려 죄를 너무 좋아하고 친밀히 느끼는 거예요. 도대체 어떻게 해야 돼요? 그래서 하나님이 선택하신 방법이 징계였던 거예요. 하나님은 징계를 통해서 죄가 주는 비참함을 경험하게 함으로 죄의 실체를 알게 해 주신 거예요.

    잠언 5장 3-4절

    [대저 음녀의 입술은 꿀을 떨어뜨리며 그 입은 기름보다 미끄러우나 나중은 쑥같이 쓰고 두 날 가진 칼같이 날카로우며]

    '아, 이렇게 살아가는 것이 진짜 아니구나.' 그걸 나도 알 때야 드디어 버릴 수 있는 거예요.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가 패역한 삶에서 돌아오길 원하시는 거예요. 이거 아시죠? 하나님은 나를 미워하는 게 아니요. 하나님은 내 죄를, 내 패역한 모습을 미워하는 거예요. 내 영혼에 대한 진노가 아니에요. 내 죄에 대해서는 끓어오르는 분노가 있는 거예요. 하나님이 이렇게 보시는 겁니다. 우리들을 바라볼 때 '이 죄가 감히 내 사랑하는 아이를 이렇게 망가뜨리냐? 저렇게 비참하게 만드냐? 저렇게 지옥 같은 삶을 경험하게 하냐?' 하나님이 일어나신 거예요. '내가 이 죄를 고쳐주마. 내가 네 패역을 고쳐주마.' 십자가에서 나의 죄를 영원히 도말하셨던 그 주님께서 다시 일어서셔가지고 내 생활 중에 들어오신 거예요. 그래서 '내가 고쳐주리라. 고치고 즐거이 사랑하리라.' 바로 내 삶 속에서 죄를 몰아내주시는 거예요. 참으로 징계를 받은 사람은 깨닫는 게 있습니다. '죄는 진짜 아프고 나쁘고 고통이구나. 하나님이 죄를 그렇게 미워하신 이유를 내가 알겠다. 나도 죄를 미워하노라, 이제. 나도 패역한 삶을 가장 미워하노라. 감히 사람의 본분을 떠나는 삶, 마귀를 따르는 삶, 마귀를 쫓았던 삶. 하나님을 막 대하고 하나님을 무시하고. 나는 그렇게 살았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그런 나를 영원히 버리는 게 아니라 그런 내 죄를 몰아내주시려고. 하나님은 나를 끝까지 사랑하셨고, 다만 내 죄를 몰아내주시려고, 내게 거룩한 성품을 넣어주시려고, 죄에 대한 바른 정의를 갖게 해주시려고 징계하신 거였구나.' 여러분, 이제는 하나님께로 돌아가서 하나님을 경외해야 됩니다. 하나님께 돌아가면 하나님은 예전보다 훨씬 더 사랑해 주십니다. 다윗이 범죄하고 하나님께 돌아갔을 때 하나님은 그를 예전처럼 안 대해준 게 아닙니다. 오히려 예전보다 훨씬 더 사랑해 주셨습니다. 그를 안아주시고, 그에게 주옥같은 시편을 기록하게 해주시고, 왕위를 회복시켜 주시고, 그에게 주를 위해 살 수 있는 성전을 지을 준비를 해주셨어요. 나중에 예수님이 다윗의 자손으로 오셨어요. 우리가 하나님을 바르게 알게 되면 이렇게 알게 되는 겁니다. 하나님은 사람이 아니에요.

    호세아 11장 9절

    [이는 내가 사람이 아니요 하나님임이라]

    하나님은 내가 죄지을 때 나를 멸망시키는 분이 아닙니다. 이 죄를 고쳐주는 분입니다. 깨닫게 되는 겁니다.

    아가 7장 10절

    [나는 나의 사랑하는 자에게 속하였구나 그가 나를 사모하는구나]

    하나님이 나를 진짜 사모하셔서 지옥에서도 건져주셨고, 죄도 형벌도 없애주셨고. 진짜 나를 사모하셔서 내 패역한 삶, 죄짓는 삶을 몰아내주시는 거구나.




    10월 24일(금) 마태복음 17-18장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패역한 세대(17:17)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믿음이 없고 패역한 세대여 내가 얼마나 너희와 함께 있으며 얼마나 너희를 참으리요 그를 이리로 데려오라.
    O unbelieving and perverse generation, Jesus replied, how long shall I stay with you? How long shall I put up with you? Bring the boy here to me.

    전염병이 창궐할 때 어떤 사람은 전염병에 걸리지 않고 건강하게 생활합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그 전염병에 의해서 죽어갑니다.
    그 차이가 무엇일까요?
    강한 면역력을 가진 건강한 사람과 면역력이 약한 사람의 차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렇다면 영적으로 강한 사람과 영적으로 약한 사람은 분명한 차이가 드러나게 될 것입니다.
    본문의 내용은 이러한 예를 분명하게 증거합니다.

    悖逆, 영어: rebellion, perversity, waywardness, guilt, deceit, deviousness(KJV, NASB, NIV)
    하나님하나님말씀에 불순종하므로 하나님을 거역함(요 1:1, 민 5:6, 신 31:27, 렘 5:11~13, 23, 겔 20:21).

    주요 성경 사례

    3.

    패역하고 회개하지 않은 자들의 결과

    4.

    반대 표현

    순종: 그대로 순순히 따르는 행위를 의미한다.

    5.

    관련 단어



    패역(悖逆) : 거스를 패, 거스를 역
    도리에 어긋난 것

    사람의 도리가 무엇입니까?
    전도서 12:13
    일의 결국을 다 들었으니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 명령을 지킬찌어다 이것이 사람의 본분이니라.

    사람의 도리는 하나님을 경외하고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 살아가는 것입니다.

    도리(道理) : 길 도, 다스릴 리
    마땅히 행해야 할 일

    예레미야 2:19
    네 악이 너를 징계하겠고 네 패역이 너를 책할 것이라 그런즉 네 하나님 여호와를 버림과 네 속에 나를 경외함이 없는 것이 악이요 고통인줄 알라 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경외'라는 말이 있잖아요. 이 반대가 패역입니다. 
    경외가 뭐냐 하면 이런 뜻입니다. 
    경외라는 말은 히브리 말로는 '야레(Yare)'라고 합니다.
    '야레'라는 말은 공경하다, 존중하다, 이런 의미고. '경외하다'라는 말은, 하나님은 하나님과 부모님에게 사용했습니다. 
    레위기 19:3
    '부모를 경외하고'라는 말씀도 있죠. 

    이런 뜻입니다. 자녀는 부모님이 베풀어주신 은혜를 알고 감사하고, 또 부모님은 자신보다 높으심을 알고 부모님 말씀에 절대적으로 순종하려는 태도. 그것이 부모를 공경하고 사랑하는 모습입니다. 다시. 부모님을 내가 공경하고 사랑한다는 것은 부모를 만만하게 본다는 게 아닙니다. 무엇이냐면 베풀어주신 은혜를 기억하고 감사하고 그리고 부모님은 나보다 높기 때문에 말씀에 절대 순종하는 것이 그것이 부모를 존중하고 공경하고 사랑하는 태도인 거예요. 하나님께 대한 경외가 뭐겠어요? 하나님이 나에게 베풀어주신 은혜를 알고 감사하고 그리고 하나님이 나보다 얼마나 높으심을 알고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말씀에 절대적으로 순종하는 것. 그것이 바로 하나님을 공경하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모습인 거예요.

    이 시대의 패역함을 보라

    “행악하기를 기뻐하며 악인의 패역을 즐거워하리니
    그 길은 구부러지고 그 행위는 패역하니라(잠2:14-15)








     
    의 반대어는 패역입니다.
      


    패역한(1294) 디아스트래포(diastrĕphōδιαστρέφω

    1. 굽게 하다.  2. 잘못 인도하다  
    Pronunciation [ diastrĕphō ]  
    Etymology  /  제1부정과거 διέστρεψα, 완료수동분사 διεστραμμένος, 1223과 4762에서 유래

    • 1.  굽게 하다, 왜곡하다, 그르치다, [비유적으로] 마17:17, 눅9:41, 행13:10, 20:30, 빌2:15.
    • 2.  잘못 인도하다, 그릇되게 인도하다, 돌아서다, 눅23:2, 행13:8.
    • 관련 성경 /  패역하다(마17:17, 눅9:41), 미혹하다(눅23:2), 굽게 하다(행13:10), 어그러지다(행20:30), 거스르다(빌2:15).


    패역한 이라 헬라 단어는 디아스트래포(diastrĕphōδιαστρέφω 라고 합니다. 
    영어 성경에서는 perverse라고 번역했습니다(NIV. KJV).
    perverse란 ‘외고집의, 불법의, 사악한’ 이란 뜻으로 하나님의 뜻과 다른 행위를 말하며 주로 부정적인 의미로 성경에서 사용되었습니다.
    패역한(마 17:17, 눅 9:41), 미혹하고(눅 23:2), 못하게(행 13:8), 굽게 하기를 (행 13:10), 이그러지(행 20:30), 거스리는(빌 2:15).

    예수님께서 왜 패역한 세대라고 꾸짖었는지  그 사건의 배경을 살펴보겠습니다. 

    예수님과 세 제자인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가 산에 올라가 있는 사이에, 귀신들린 외아들을 가진 어떤 사람이 산 아래에 있는 제자들에게 귀신을 쫓아 달라고 데리고 왔었습니다. 
    그런데 제자들은 귀신을 쫓아낼 수 없었습니다. 

    이런 사건이 있은 후에 예수님은 산에서 내려오셨을 때  그 사람은 예수님에게 당신의 제자들이 귀신을 쫓아내지 못했다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믿음이 없고 패역한 세대여”라고 책망하시며, 그 귀신을 쫓아내셨습니다. 
    제자들은 왜 자신들이 귀신을 내쫓지 못하였는가를 예수께 물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셨던 말씀을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에서 살펴보겠습니다. 

    마태복음에서는 믿음이 없는연고라고 하셨습니다(마 17:19-20)

    “이 때에 제자들이 종용히 예수께 나아와 가로되 우리는 어찌하여 쫓아내지 못하였나이까. 가라사대 너희 믿음이 적은 연고니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만일 믿음이 한 겨자씨만큼만 있으면 이 산을 명하여 여기서 저기로 옮기라 하여도 옮길 것이요 또 너희가 못할 것이 없으리라”

    마가복음에서는 기도가 없었기 때문이라고 하셨습니다(막 9:28-29) 

    “집에 들어가시매 제자들이 종용히 묻자오되 우리는 어찌하여 능히 그 귀신을 쫓아 내지 못하였나이까, 이르시되 기도 외에 다른 것으로는 이런 유가 나갈 수 없느니라 하시니라”  

    마태복음에서는 은 ‘믿음이 적은 연고’라고 하셨습니다.
    마가복음에서는 ‘기도 외의 다른 방법으로는 귀신을 쫓지 못한다고 하셨습니다.
    따라서 마태와 마가복음을 종합하면 귀신을 쫓아내지 못한 이유는 두 가지 부족 때문이라고 하겠습니다.
    첫째는 믿음의 부족
    둘째는 기도의 부족

    패역한 세대(perverse generation)란 믿음의 없는 사악한 시대를 말합니다.
    왜 믿음이 없고 패역한 세대라고 꾸짖으셨을까요?



    '패역한 세대'는 믿음이 없고, 이치에 맞지 않으며,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는 세대를 뜻합니다. 
    이는 하나님께 등을 돌리고 순리를 거스르는 행위를 말하며, 특히 예수님 당시의 유대 사회가 메시아를 믿지 않고 핍박한 상황을 묘사하는 데 사용된 표현입니다. 

    '패역한 세대'의 특징을 소개합니다. 

    첫째는 불신 세대(不信 世代) 
    하나님을 믿지 않거나, 믿음이 부족한 상태를 의미합니다.

    둘째는 불순종(不順從)
    하나님의 말씀이나 가르침을 따르지 않고 거스르는 것을 말합니다.

    셋째는 순리(順理)를 거스림
    사람으로서 마땅히 따라야 할 도리나 순리를 벗어난 상태를 뜻합니다.

    넷째는 왜곡(歪曲)된 세대
    하나님의 뜻에서 벗어나 왜곡된 생각을 가지고 살아가는 세대라는 의미도 포함됩니다.

    패역한 세대를 바라보신 예수님께서는 탄식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믿음이 없고 패역한 세대여라고 말씀하신 것은, 귀신 들린 아이를 고치지 못한 제자들과 예수님의 능력을 보고도 믿지 않는 무리들을 보며 탄식하신 사건에서 외치셨던 말씀이었습니다.

    더구나 예수님 시대의 유대인들이 메시아인 예수님을 기다리면서도, 그가 오셨을 때 믿지 않고 오히려 핍박했던 상황을 묘사합니다.이러한 유대 백성들의 행위를 일컬어 '메시아 거부 사태'라고 합니다.

    심지어 예수님의 제자들마저 기도하지 않고 믿음이 부족하여 예수님의 가르침을 잊고 낙심하는 모습을 보였기 때문에 제자들의 어리석음을 꾸짖었던 말씀이었습니다.


    悖 : 거스를 패, 우쩍 일어날 발
    1.거스르다  2.어그러지다  3.어지럽다

    逆 : 거스릴 역

    1.거스르다,거역하다  2.거절하다  3.어기다,어긋나다

    패역 - 悖逆 (파생어:패역하다)
    사람으로서 마땅히 하여야 할 도리에 어긋나고 순리를 거슬러 불순함. (비슷한말 행역)

     잠언 10:31 
    (새번역) 의인의 입에서는 지혜가 나오지만, 거짓말하는 혀는 잘릴 것이다.
    (NIV) The mouth of the righteous brings forth wisdom, but a perverse tongue will be cut out.


    새번역에서는 '거짓말하는'으로, NIV에서는 'a perverse'로 번역되었습니다. 
    영어사전에서의 perverses는?

    per·verse
    미국식 [pər|vɜ:rs]
    (사고방식·태도가)비뚫어진[삐딱한]


    '패역'에 대해 알아보았습니다.
    패역의 의미를 알아보니, 더욱 패역한 자가 되지 않도록 노력해야겠다는 생각이 드는 단어입니다.



    믿음이 없고 패역한 세대여

    “대답하여 가라사대 믿음이 없는 세대여 내가 얼마나 너희와 함께 있으며 얼마나 너희를 참으리요 그를 내게로 데려오라 하시매”(막9:19)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믿음이 없고 패역한 세대여 내가 얼마나 너희와 함께 있으며 너희를 참으리요 네 아들을 이리로 데리고 오라 하시니”(눅9:41)


    예수님은 왜 이 말씀을 하셨는지에 대해서 그 사건의 배경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예수님과 그의 세 제자인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가 산에 올라가 있는 사이에, 귀신들린 외아들을 가진 어떤 사람이 산 아래에 있는 제자들에게 귀신을 쫓아 달라고 데리고 왔다. 그런데 제자들은 능히 귀신을 쫓아낼 수 없었던 것이다.

    이런 사건이 있은 후에 예수님은 산에서 내려오셨는데, 그 사람은 예수님을 보자 그에게 나아가 제자들이 귀신을 쫓아내지 못한 것을 알리자,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믿음이 없고 패역한 세대여”라고 책망하시며, 그 귀신을 쫓아내셨다. 나중에 제자들은 왜 자신들이 귀신을 쫓지 못하였는가를 예수께 묻게 되는데, 예수님의 답변은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에서 두 가지의 답변을 나타내고 있다.

    “이 때에 제자들이 종용히 예수께 나아와 가로되 우리는 어찌하여 쫓아내지 못하였나이까. 가라사대 너희 믿음이 적은 연고니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만일 믿음이 한 겨자씨만큼만 있으면 이 산을 명하여 여기서 저기로 옮기라 하여도 옮길 것이요 또 너희가 못할 것이 없으리라”(마17:19-20)

    “집에 들어가시매 제자들이 종용히 묻자오되 우리는 어찌하여 능히 그 귀신을 쫓아 내지 못하였나이까, 이르시되 기도 외에 다른 것으로는 이런 유가 나갈 수 없느니라 하시니라”(막9:28-29)


    즉 마태복음은 ‘믿음이 적은 연고’라고 말하고 있고, 마가복음에서는 ‘기도 외의 다른 방법으로는 귀신을 쫓지 못 한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을 함께 적용하여 살펴보면, 제자들은 믿음이 부족하였고, 기도를 하지 않았던 것으로 이해된다.

    ‘믿음이 없고 패역한 세대’를 성경원문으로 보면 ‘불신앙과 왜곡된 세대’ 혹은 ‘믿음이 부족하고 정도를 벗어난 세대’라는 뜻이 되어 진다. 헬라어 ‘아피스토스’는 ‘믿지 않는, 불신앙의’이란 뜻이고, ‘디아스트렙호’는 ‘왜곡하다, 잘못 해석하다. 그르치다. 벗어나다’는 뜻이다. 표준새번역과 현대인의 성경 등은 ‘믿음이 없고 비뚤어진 세대여’라고 번역하고 있다.

    [공동번역] 예수께서는 "아, 이 세대가 왜 이다지도 믿으려 하지 않고 비뚤어졌을까? 내가 언제까지나 너희와 함께 살며 이 성화를 받아야 한단 말이냐? 그 아이를 나에게 데려오너라." 하시고는

    [표준새번역]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아! 믿음이 없고 비뚤어진 세대여, 내가 언제까지 너희와 같이 있어야 하겠느냐? 내가 언제까지 너희에게 참아야 하겠느냐? 아이를 이리로 내게 데려오너라."

    [현대인의성경] 그러자 예수님은 "믿음이 없고 비뚤어진 세대여, 내가 언제까지 너희와 함께 있어야 하겠느냐? 너희를 보고 내가 언제까지 참아야 하겠느냐? 아이를 이리 데려오너라" 하고 말씀하셨다.

    패역한 이라 단어를 NIV 그리고 KJV 영어 성경에서 ‘perverse’라고 번역합니다.
    perverse란 ‘외고집의, 불법의, 사악한’ 이란 뜻입니다. 
    패역한 이란 헬라단어는 주로 하나님의 뜻과 다른 행위를 말하며 주로 부정적인 의미로 성경에서 사용되었습니다.
    패역한(마 17:17, 눅 9:41), 미혹하고(눅 23:2), 못하게(행 13:8), 굽게 하기를 (행 13:10), 이그러지(행 20:30), 거스리는(빌 2:15).

    예수님의 말씀대로 보자면, 분명히 제자들은 믿음이 부족하였고, 기도가 없었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그것은 어느 정도 이해가 가는데, 그러나 예수님은 왜 ‘패역한 세대’라고 말씀하신 것일까? 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해당되는 경우를 ‘이 세대’라고 확대하여 말씀하셨으며, ‘패역하다’고 하셨을까? 과연 귀신을 쫓지 못한다고 패역한 세대가 될 수 있을까? 그런 뜻은 분명히 아니라고 보아야 하며 그 이상의 의미가 담겨져 있다고 보아야 한다.

    아마 이 사건에서 드러난 제자들의 무능력은 제자들에게만 국한 된 것이 아니라, 그 세대의 사람들이 지닌 영적 상황을 충분히 대변해주었기 때문일 것이다.

    헬라어 ‘게네아’는 ‘세대’(generation)를 의미한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향해서 “믿음이 없으며 패역한 세대”라고 나무라셨는데, 그것은 비단 제자들만 아니라 귀신들린 자를 고치는 것에 대한 본질적이며 중요한 부분을 보지 못하는 세대의 영적인 왜곡을 지적하신 것이다.

    이미 예수님의 제자들은 예수님께 귀신을 쫓고 병을 고치는 권세를 부여받아 많은 기적과 이사를 체험하였을 것이다. 예수님이 산에 오르시고 안 계셨음에도 불구하고, 제자들에게 귀신들린 자를 데려왔다는 자체는, 이전 체험으로 볼 때에 제자들도 능히 능력을 행할 수 있다고 믿었다는 뜻이 된다. 제자들은 자신들이 예수님의 제자라는 사실에 대해서 어떤 직분적인 위치와 능력을 자만했던 것은 아니었을까? 이 사건은 예수님이 지적하셨듯이 제자들의 믿음이 부족하였으며, 또한 그들이 정도(正道)를 벗어나 있었다고 보아야 한다.

    마태복음 7장에는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권능을 행하는 자들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는데, 그것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예수님은 그들에게도 동일하게 불법을 행하는 자들이라고 질책을 하셨기 때문이다.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 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치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그 때에 내가 저희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 (마 7:21-23)

    예수님이 병을 고치고, 귀신을 쫓으며, 권능을 행하실 때에는 예수 자신의 능력을 과시한 것이 아니라, 언제나 하나님의 위엄과 영광을 드러내는 사역을 통하여 불신앙인을 신앙인으로 전도함이 그 목적이셨던 것이다. 실제로 귀신을 쫓는 것은 예수님의 사역의 중요한 본질과 목적이 아니었다. 예수님이 이 땅에서 병을 고치고 귀신을 쫓는 사역을 하신 중요한 이유는, 그의 백성들에게 ‘믿음과 정도’를 되찾도록 하게 하려는 것이었다.

    예수님이 “내가 얼마나 너희와 함께 있으며 너희에게 참으리요”(41절)라고 말씀하셨을 때, 그는 자신과 가장 가까이 지내던 제자들마저도 그러한 사역의 본질적인 목적을 깨닫지 못한 것을 매우 안타까워하신 것이라고 보여진다. 예수님은 귀신을 쫓고 병을 고치는 일에 대해서 하나님의 위엄과 영광을 드러내는 일을 하였는데 반하여, 제자들은 그러한 사역을 자신의 능력을 알고 기도조차 없었으며 믿음도 없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일은 제자들에게 국한된 문제뿐 아니라 그 세대의 문제이기도 하였다. 아울러 오늘날 우리 세대의 문제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예수님이 계시는 것과 안계시는 것의 차이점은 무엇일까?

    제자들이 정도를 벗어난 데에는 본질을 보지 못하는 잘못된 관점이 놓여있었다. 그들은 놀라운 체험 후에 예수님이 주신 권세를 하나님 나라의 일과 별개로 여기는 잘못을 범했다. 그들은 놀라운 체험 후에 내심 자신들의 위엄과 능력을 드러내려고 '자신들의 기적 행함'에 열중하여 믿음과 기도를 잊었던 것이다.

    제자들이 예수님과 함께 사역을 함으로서 능력을 행할 수 있었던 것을 잊고, 그 권세가 자기 자신의 능력인 것처럼 착각을 하여 기도조차 하지 않았으며, 마치 자신들이 권능을 갖고 있는 것과 같이 스스로를 나타내 보려는 교만을 가지는 순간, 그것은 곧 패역이며 정도를 벗어나 버린 것이 되었던 것이다. 이 사건 이후에 얼마 안 되어 제자들은 “누가 크냐”는 논쟁을 하게 되는데, 이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며 이 사건과 연관된 문제라는 것을(막9:34, 눅9:46) 암시하여 준다.

    제자들은 예수님이 함께 있을 때에는 기적과 표적을 행함을 통하여 하나님나라를 전파하며 복음을 전하는 올바른 사명에 참여했지만, 예수님이 계시지 않을 때에는 믿음의 정도를 벗어나면서 잘못된 확신과 교만을 쌓아 갔던 것이다. 하나님의 역사를 잘못 착각하여 사람의 능력과 기적으로 간주하는 것은 곧 믿음이 없고 패역한 세대의 표징이다. 예수가 머리가 되지 않으며, 예수가 몸이 되지 않는 그런 교회나 단체가 오늘날 이 세대에도 엄연히 존재한다.

    성경본문의 제자들의 모습은 오늘날 세대의 영적 상황을 대변하고 있다.

    제자들이 귀신을 쫓고 병을 고치는 기적을 행하게 되었을 때에 그들은 기도를 외면하게 된 것으로 보인다. 예수님이 잠시 안계시자 그들은 그러한 능력이 자신들에게 있는 것으로 착각하게 되었던 것이다. 결론적으로 믿음도 부족하게 되고, 기도도 하지 않는 왜곡되고 변질된 방법을 사용하였다. 그것은 제자들만의 모습이 아니었으며 이스라엘민족의 모습이었으며, 오늘날 한국교계의 지도자들의 모습일 수도 있다고 본다.

    특히 목회자들이 지도자적인 위치에 있을 때에 하나님의 말씀과 영광을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자칫 자기 자신의 이익을 위하거나, 혹은 다른 고의적인 목적으로 자신의 능력과 명예, 혹은 부를 취하려는 행위를 하는 것을 뜻할 수도 있을 것이다.

    자기 자신을 앞에 내세우고, 예수님이 함께 하지 않는 자체가 곧 불신앙이고 불법이다.

    또 어떤 측면에서는 볼 때에, 종교적 경건을 빙자하여 개인의 이익을 추구하는 곳도 패역한 곳이며, 기적이나 표적을 보임으로서 교인들을 숫적으로만 부흥시키고자 하는 곳, 혹은 자기 자신의 이익을 위하여 이단을 이단이 아니라고 옹호하는 자들도 해당될 것이다. 이단규정은 한국교회와 성도들을 보호하기 위하여 하는 것인데, 그들은 눈앞에 있는 자신의 이익 때문에 한국교회와 성도들을 실족하게 하는 일을 하기 때문이다.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어느 세대이건 하나님의 뜻에서 벗어난 세대는 패역한 세대이다. 예수님은 오늘도 믿음이 없고 패역한 세대를 행하여 질책을 하시고 계신다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롬 12:2)

    믿음이 없고 패역한 세대(누가복음 9:37-45)

    영국의 비평가이자 사회사상가 "러스킨" -- 
    "지구상의 산들은 천연의 대 자원이다. 참된 종교는 거의 이 산 속에서 이루워졌다" 말했습니다.

    기독교도 산과 많은 관계를 가지고 있습니다.
    ① 하나님께서 최초의 사람인 아담과 하와를 창조하시고 그들의 보금자리로 마련해 주신 곳이 에덴 동산이었습니다.
    ② 그 후 극도로 타락한 세상을 물로 심판 하셨을 때 제 2의 인류의 시조로 남기신 노아와 그의 가족이 첫발을 디딘 곳은 아라랏 산이었습니다.
    ③ 믿음의 시조인 아브라함이 그의 외아들 이삭을 제물로 바친 곳은 모리아 산이었습니다.
    ④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 땅에서 구원해 내시려고 하나님께서 모세를 부르신 곳은 호렙 산이었습니다.
    ⑤ 엘리야 선지자가 바알과 아세라 선지자들과 대결을 벌려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낸 곳은  갈멜 산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산을 가까이 하셨습니다. 자주 산에서 기도하셨습니다. 산에서 가르치셨고. 산에서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변화하시기도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마지막 밤에 기도하셨던 곳은 겟세마네 동산이었고.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신 곳은 갈보리 동산이었고. 부활하신 후 하늘로 승천하신 곳은 감람 산이었습니다.

    ◈ 예수님께서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를 데리고 높은 산에 올라가셨습니다.
    마태와 마가 복음에는 그 목적이 기록되어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누가는 아주 중요한 정보를 제공합니다. 이 산에 오른 목적과 변화될 때 예수님이 무엇을 하셨는지에 대한 기록입니다.
    예수님은 기도하러 올라가셨습니다. 그리고 기도하실 때 이 세상에서 볼 수 없는 영광된
    모습으로 변화되었습니다.

    누가는 예수님의 변화의 기적을 기도와 연결시키고 있습니다.
    산 위에서의 변화가 예수님의 기도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기도할 때 예수님은 하늘로부터 나의 택한 아들이라는 음성을 들었습니다.
    이것은 예수님을 위한 것이 아니라 제자들을 위해 주시는 음성이었습니다.
    예수님은 변화산 기도를 통해 십자가 고난의 길을 담대하게 갈 수 있는 힘을 얻었습니다.
    예수님은 산에서 내려오시자 마자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기로 굳게 결심을 하십니다.
    눅 9:51『예수께서 승천하실 기약이 차가매 예루살렘을 향하여 올라가기로 굳게 결심하시고』
    예수님의 기도는 메시야로서 사명의 길을 더 확고부동하게 걸어가게 하는 원동력이 되었다.

    예수님께서 사명을 감당하시기 위해 기도하셨고 기도를 통해서 힘과 능력을 얻으셨다.
    성도 여러분 우리의 힘과 능력으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습니다. 기도가 방법입니다.
    기도가 힘입니다. 하나님의 힘과 담대한 믿음의 능력을 얻기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열심히 부르짖어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신비한 경험을 하고 난 제자들은 그 산이 너무나 좋았습니다. 복잡한 일상생활로 돌아가기 싫었습니다. 평범한 현실로 돌아가기 싫었습니다.
    죄 많고 삭막한 세상 속으로 다시는 내려가고 싶지 않았습니다. 영원히 그 산에 머물러
    있으면서 영광의 광채 속에 살아가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그들의 소원은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위대한 경험을 마음에 간직한 채 예수님을 따라 산을 내려와야만 했습니다.
    그 다음의 내용이 오늘 본문의 말씀입니다.

    ◈ 예수님이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변화되셨던 다음 날, 예수님의 일행이 산에서 내려오셨을 때, 산 아래에서는 많은 무리가 예수님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산 아래의 세계는 영광스러웠던 모습과는 너무나 대조적인 상황이 펼쳐지고 있었습니다.
    그 곳에는 하나님 대신 귀신의 세력이 역사하고 있었습니다.
    영광의 광채 대신 절망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워져 있었습니다.

    예수님을 맞이하던 무리 중에 한사람이 소리를 지르면서 말했습니다.
    "선생님 청컨대 내 아들을 돌아보아 주옵소서. 이는 내 외아들이니이다. 귀신이 저를 잡아
    졸지에 부르짖게 하고 경련을 일으켜 거품을 흘리게 하며 심히 상하게 하고야 겨우 떠나가나이다 당신의 제자들에게 내어 쫓아주기를 구하였으나 저희가 능히 못하더이다".

    산 아래 사람들의 모습은 참담합니다.
    귀신에게 정복당해 무섭게 날뛰는 아이, 도와달라고 부르짖는 그의 아버지.
    그리고 아무런 도움도 줄 수 없었던 무능력한 예수님의 제자들.
    무감각한 눈으로 쳐다만 보고 있는 마을 사람들.
    이 모든 모습들이 예수님의 마음을 아프게 했습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믿음이 없고 패역한 세대여 내가 얼마나 너희와 함께 있으며 너희를 참으리요"
    그리고는 그 아이를 데려오라고 하여 더러운 귀신을 꾸짖어 쫓아내시고 아이를 낫게 하시고는 그 아버지에게 돌려 주셨습니다.

    ◈ 산 아래 사람들의 모습 - 허무, 정욕, 파괴적
    아이는 귀신들려 있었습니다. 그것은 단순한 육체적 질병이나 정신적 질병이 아니었습니다. 그 아이의 아버지가 고백한대로 더러운 귀신이 그 아이의 영혼과 육체를 완전히 장악한 채
    그에게 고통을 가해왔습니다.
    동일한 사건을 기록하고 있는 막 9장에 보면 이 아이는 귀신들린 이 후
    귀머거리가 되고 벙어리가 되어 듣지도 못하고 말하지도 못했습니다. 그리고 귀신이
    고통을 가해오면 어디서든지 거꾸러져서 이를 갈며 거품을 흘리며 파리하여 졌습니다.
    뿐만 아니라 어떤 때는 불 속으로 뛰어들기도 하고 또 어떤 때는 물 속을 뛰어들기도
    했습니다.
    귀신은 그 아이에게 들어온 날부터 아이의 육체는 물론 영혼과 인격과 이상까지도 철저하게 파괴했습니다. 그 아이는 이젠 완전히 귀신의 노예가 되었습니다.
    이 아이는 자기의 의지는 전혀 없는 노리개가 되고 말았습니다.

    오늘 날 사단은 우리의 자녀들을 정욕과 폭력과 방탕과 허무의 노예로 만들어 영혼을 파괴시키고 있습니다. 컴퓨터, 영화, 게임, 인터넷등 여러 매체를 통해서 무섭게 침투하고 있다.
    아이들에게 예배는 시시하고 고리타분한 것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경외의 대상이 되지 못합니다. 하나님이 소중히 여김을 받지 못하고 놀림의 대상이 되고 있습니다.
    제가 나중에 목회를 하게 될 대상들이 이런 모습이어서 너무나 가슴이 아픕니다.
    우리의 자녀에 대해서 안심할 수 없습니다. 내가 내 자녀를 책임질 수도 없습니다.
    우리의 자녀들을 위해서 많이 기도해 주시기 바랍니다.

    ▶ 귀신은 아이에게만 역사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에게도 역사합니다.
    귀신들린 아이의 아버지는 아들 때문에 절망에 사로잡히게 되었습니다.
    가정의 꿈과 행복은 다 깨졌습니다. 의술을 의지했지만 소용없었습니다.
    종교의 힘을 빌려 보려했지만 그들도 무기력했습니다. 거기다가 동네 사람들의 눈빛이 예전같지 않았습니다.
    귀신의 세력은 아이에게는 인생의 허무함을, 이웃과 사회에는 실망을, 종교에는 회의를 안겨주었습니다.
    이러한 모습은 바로 오늘을 살고 있는 우리들의 모습과 비슷합니다.
    돈도 벌고 자가용도 굴리고 좋은 집에서 각종 문화혜택을 누리면서 편안하게 살면서도
    삶의 허무와 권태로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허무를 채우기 위해 여행도 해보고 술도 마셔보고 오락실도 출입해 보지만 별다른 만족을
    느끼지 못하고 있습니다. 옛날 사람들보다도 더욱 쓸쓸하고 불안하고 힘겹게 세상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 산아래 사람들의 문제- 무기력, 무자비, 무관심
    산아래 사람들의 모습은 전혀 손을 쓸 수 없는 심각한 상태였습니다.
    아이는 귀신들려 날뛰고, 아이의 아버지는 절망에 사로잡혀 극도로 지친 상태였고,
    예수님의 제자들은 어찌할 바를 몰라 당황하고 있었고. 다른 사람들은 쓸데없이 우왕좌왕하고 있었습니다.

    ▶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었지만 어느 누구도 이 아이에게 도움을 줄 수 없었습니다.
    능력과 권세를 가지고 사역을 행하던 제자들도 무기력했습니다.
    이스라엘의 공무원인 서기관들이 달려왔지만 속수무책이었습니다.
    오히려 이 사람들은 이 일을 기회로 예수님을 공격할 준비를 갖추고 예수님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아버지는 더 절망합니다. 고통받는 외아들을 위해서 해줄 것이 아무 것도 없는
    무능함이 원망스럽기도 했을 것입니다.
    인간이 이렇게 무능력하단 말인가! 도대체 이 애비가 저 아이에게 해 줄 수 있는 일이라는 것이 무엇이란 말인가!
    나 뿐만 아니라 세상사람 모두가 다 이렇게 무능력하단 말인가! 어느 누구도 우리 아이를 구원해 줄 수 없단 말인가!" 아이의 아버지는 이렇게 인간의 무력함을 한탄하였을 것입니다.

    ▶ 인간은 모두 무력한 존재입니다. 인간이 가지고 있는 힘이란 너무나 보잘 것 없습니다.
    아무리 의학이 발달해도 계속 불치의 병이 늘어가고 있음을 부정하지 못합니다.
    지식이 아무리 발달해도 지식은 모르는 것을 더 많이 만들어 냅니다.
    옛날에는 책 몇 권 읽으면 안다고 말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안다는 말을 할 수
    없습니다. 아무리 뛰어난 이론도 금방 옛날 것이 됩니다.
    갈수록 더 무능해질 수 밖에 없습니다.

    ▶ 제자들이 성의를 가지고 이 아이를 고치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무관심했습니다.
    그냥 구경거리가 되었습니다. 누구도 거들지 않았습니다. 나중에는 비판하기까지 합니다.
    얼마나 무자비하고 냉정한 모습입니까?
    지금은 그 때보다 더 냉혹한 시대입니다. 사람들은 자기의 일외에는 전혀 관심이 없습니다.
    그 때와 마찬가지로 지금도 무자비하고 무관심한 시대입니다.

    ◈ 산아래 사람들의 기쁨 - 예수 그리스도
    아주 복잡한 문제들이 예수님께서 내려오심으로 깨끗하게 해결되었습니다.
    예수께서 나타나시자 군중들의 혼란과 갈등이 진정되었습니다. 제자들의 당황됨은 사라졌습니다. 서기관의 비판도 쑥 들어가버렸습니다.
    무엇보다도 아이에게 들어갔던 사악한 귀신은 소리를 지르며 도망갔고 아이는 오랜 세월만에 정상을 되찾았습니다.
    정상이 된 아이를 품안에 끌어안은 아버지의 감격은 이루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었을 것이며. 온 가정에는 기쁨이 넘쳤을 것입니다 .
    이 가정 뿐 아니라 산 아래 사람들에게 즐거움과 기쁨이 넘쳤습니다.

    예수님은 우리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문제의 해결자가 되십니다.
    예수님은 마귀를 장난을 제거하시며 귀신을 쫓으실 수 있는 분이십니다.
    예수님은 아이의 영혼을 되찾아주신 구세주이십니다.
    예수님은 가정에 행복을 가져다 주시는 분이십니다.

    복음서의 기록을 살펴보면 예수님께서 가는 곳에는 언제 어디서나 감격이 넘쳤습니다. 기쁨이 넘쳤습니다.
    문제가 있는 곳에 가셨지만 속시원한 해결이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해결하시지 못하시거나 피한 문제가 없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
    "건강한 자에게는 의원이 쓸데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데있나니 내가 의인을 부르러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왔노라"(눅5:31.32).
    예수님은 병든 인생들을 위해서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문제있는 사람들을 위해서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절망에 처해있는 인생을 위해서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영원히 죽을 인생을 위해서 오셨습니다.
    그러므로 오직 예수님만이 인류의 희망이시고 생명이 되십니다.

    세계적인 부흥사인 무디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너 자신을 믿어 보라. 반드시 실망할 때가 올 것이다. 친구를 믿어 보라.
    어느 날 죽거나 이별할 때가 있을 것이다. 명예나 돈을 믿어 보라.
    어느 날 사라질 때가 올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보라. 후회없는 삶을 살것이요,
    영원한 생명을 얻을 것이다".
    참으로 그렇습니다. 오직 예수님만이 영원토록 믿을 만한 분입니다.
    죽도록 믿어서 결코 후회함이 없는 분입니다.

    이 예수님을 여러분의 마음과 가정에 모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이 예수님을 열심히 전하시기 바랍니다.
    전도는 내가 만난 예수님을 소개하는 것입니다.
    내가 다니는 교회와 목사님을 소개하는 것입니다.
    전도대회 기간동안 이 일에 부지런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능력과 힘을 의지하며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기도가 능력입니다.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영혼 구원의 일에 동참하시고 하나님이 주시는 기쁨을 함께 누리시기 바랍니다.


    믿음이 없고 패역한 세대(누가복음 9:37-42)

    변화산에서 일행이 내려왔을 때, 사람들이 예수님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귀신 들린 아이 하나가 입에 거품을 물고 경련을 일으키고 있었는데, 다른 제자들이 그를 고치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었습니다. 아들의 아버지는 예수님께 달려가 소리치며 자신의 외아들을 고쳐주시기를 간구하였습니다. 예수님은 그를 데려오게 하시어 낫게 해 주셨습니다.

    ​이 사건에서 예수님이 제자들과 무리에게 하신 말씀에 대해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믿음이 없고 패역한 세대’라는 표현에서 ‘패역’에 해당하는 헬라어 단어는 ‘디아스트래포’의 수동완료형입니다. 정도를 벗어난(perverted), 혹은 사악하고 그릇된(wicked)의 의미를 지닙니다. 여기서 한 가지 눈여겨볼 점은 이 단어가 ‘수동완료형’으로 쓰였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원래는 그렇지 않았는데, 사악함에 노출되어 변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앞선 ‘믿음이 없다’는 표현에서는 능동형을 사용하셨는데 ‘패역한 세대’는 이와는 달리 수동태로 표현하신 이유는 무엇일까요?

    ​우리 인간은 원래는 그렇지 않았는데 현재는 사악하고 패역한 상태로 변해 버렸다는 것을 말씀해 주신 것입니다. 우리가 원하든 원치 않던 사탄의 하수인 노릇을 하는 존재가 되어 버린 것입니다. 주께서 우리에게 복음을 주신 것은 이 패역함에서 벗어나 건강하고 온전한 모습을 회복하기 위함입니다.

    ​아이를 고치지 못하는 것과 패역한 것은 관련이 없어 보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패역함으로 인해, 사탄이 우리 안에, 우리의 가족들 안에, 우리의 친구들 안에서 역사할 수 있도록 내버려 둔 것을 책망하시는 것입니다.

    ​아들이 어두운 세력에 사로잡혀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날뛸 때, 아비 된 자로 그 심정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지경이었습니다. 미친 듯이 반항하다가도, 또 갑자기 며칠씩 자리에 누워 꼼짝도 하지 않고 학교도 가지 않고 무기력해 있을 때는 도무지 무엇 때문에 이런 상황이 발생했는지 나 자신을 자책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오직 믿음으로 아들의 건강함과 가정의 회복을 위해 기도하고 말씀을 묵상하기 시작했을 때, 아들은 조금씩 변해가기 시작했습니다. 점점 아들 안에 일어나고 있는 일들이, 말이나 가르침의 문제가 아니라 믿음의 문제인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이제 아들은 더 이상 귀신 들린 것과 같은 모습은 보이지 않습니다. 정상적으로 생각하고, 판단하고, 이야기하는 아들을 보며, 과거 1년 전 자기의 모습을 기억이나 하고 있을지 궁금하기만 합니다.

    ​부모의 영적 나태함이 자녀 스스로도 원치 않는 귀신에 붙잡히게 했다는 깊은 깨닫고 회개하게 됩니다. 영적 온전함으로 아비가 바로 섰을 때, 그리고 주의 부르심을 입은 종으로 다시금 간절함으로 서고자 했을 때, 주는 은혜와 축복으로 아들을 묶임에서 놓임 받게 하셨습니다.

    아침부터 스스로 해야 할 일을 감당하고, 시키지 않아도 공부하고, 약속한 일들을 힘써 지키고자 하는 아들을 바라보며, 언제 이 아이가 소리 질렀고, 반항했고, 또 어떨 때는 죽은 자와 같이 드러누워 있었는지 기억조차 나지 않았습니다.

    아들의 문제를 통해, 지난 2년여 시간을 주 앞에 엎드려 기도하고 간구할 수 있도록 은혜 주신 것에 감사합니다. 자녀로 인해 죽고 싶을 만큼 힘든 시간이었는데, 어느새 축복의 시간이며 영광이 시간이 되었음을 돌아보게 됩니다. 주의 은혜에 감사와 찬양을 드립니다.

    하나둘씩 자기 자리를 찾아가는 아들과 가족들을 바라보며, 돌아보시는 주의 은혜를 인해 감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부족한 자가 끝까지 깨어 믿음을 가지고 패역지 아니한 심정으로 주와 복음을 따라갈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주여, 감사합니다. 부족한 자의 믿음을 지키소서. 아멘.









    10월 23일(목) 마태복음 15-16장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시대의 표적(16:3)

    아침에 하늘이 붉고 흐리면 오늘은 날이 궂겠다 하나니 너희가 천기는 분별할줄 알면서 시대의 표적은 분별할 수 없느냐. 

    and in the morning, 'Today it will be stormy, for the sky is red and overcast.' You know how to interpret the appearance of the sky, but you cannot interpret the signs of the times.

    아침에 하늘이 붉고 흐리면 오늘은 날이 궂겠다 하나니 너희가 天氣(천기)는 分別(분별)할 줄 알면서 時代(시대)의 標蹟(표적)은 分別(분별)할 수 없느냐.


    누가복음 12:56 
    외식하는 자여 너희가 천지의 기상은 분변할 줄을 알면서 어찌 이 시대는 분변치 못하느냐. 


    마태복음 12:28 
    그러나 내가 하나님의 성령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 내는 것이면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임하였느니라.

    누가복음 19:44 
    또 너와 및 그 가운데 있는 네 자식들을 땅에 메어치며 돌 하나도 돌위에 남기지 아니하리니 이는 권고 받는 날을 네가 알지 못함을 인함이니라 하시니라.
     

    표적(標的) :  표할 표, 우듬지 표(標), 과녁 적(的)


    σημεῖον, ου, τό Storng number 4592

    1. 표징.  2. 표.  3. 기적  
    Pronunciation  [ sēmĕiŏn ]
    관련 성경  / 표적(마 12:38, 행 2:22, 살후 2:9), 징조(마 24:3, 눅 21:7, 행 2:19), 군호(마 26:48), 이적 (막 13:22, 눅 23:8), 표(롬 4:11,  고후 12:12).

    마태복음 16:1-4                                             

    오늘 본문에 소개된 표적(세메이온)이라는 단어가 영어 성경에는 sign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사실, 이 sign이라는 단어는 표적보다는 징조라고 해석하는 것이 더 정확합니다. 
    배가 가라앉기 전에 쥐들이 빠져나가는 것, 지진이 일어나기 전에 뱀이나 개구리들이 집단 이동을 하는 것 등이 바로 ‘징조’입니다.

    sign이라는 단어에는 ‘도로 표지판’이라는 뜻도 있는데, 운전하는 사람이 도로에 설치된 표지판을 통해 내가 지금 어디에 있고, 어디를 향해 가고 있는지 알 수 있듯이, 시대마다 하나님이 보여주시는 ‘시대의 표적’(the signs of the times)들을 통해 우리가 하나님의 구속의 역사 가운데 어느 시점에 와 있는지 알 수 있습니다. 

    성경을 보면 하나님이 구속사의 전환기 때마다 사람들로 하여금 이것을 알 수 있는 시대의 표적, 혹은 시대의 징조들을 보여 주신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노아의 시대 때는 노아가 지은 방주가 홍수의 심판이 다가온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그 시대의 표적이었습니다. 
    롯의 가정이 소돔성을 떠난 사건이 바로 소돔성에 심판이 시작된다는 징조였습니다. 
    멍에를 매고 애가를 부르던 예레미야가 바로 예루살렘의 멸망이 다가왔음을 보여주는 시대의 표적이었습니다. 
    예수님 당시에는 예수님이 행하신 이적과 말씀들이 그 분이 바로 성경에서 예언하신 메시야임을 보여주는 시대의 표적이었습니다.

    요한복음에서는 공생애 기간 동안 예수님이 행하신 이적들 가운데 특별히 7가지 사건을 골라서 ‘표적(sign)’이라고 소개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베푸신 기적은 단순한 이적이 아니라, 예수님이 바로 하나님이 보내신 메시야요, 성자 하나님이심을 보여주는 ‘표적’이라는 겁니다. 앉은뱅이를 일으키시고, 죽은 자를 살리셨다는 사실에만 관심을 갖지 말고, 이 사건들을 통해 우리가 깨달아야 할 정말로 중요한 교훈이 무엇인가를 알아야 합니다.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바리새인, 사두개인들이 책망을 받은 것도, 예수님이 행하신 시대의 표적들을 보면서도 저들이 깨달음을 얻지 못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예수님이 메시야이심을 알 수 있는 충분한 표적들을 보았으면서도 또 다른 표적을 보여 달라는 저들을 향해 예수님은 다음과 같은 말씀으로 책망하십니다(2,3).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가 저녁에 하늘이 붉으면 날이 좋겠다 하고 아침에 하늘이 붉고 흐리면 오늘은 날이 궂겠다 하나니 너희가 천기는 분별할줄 알면서 시대의 표적은 분별할 수 없느냐”(마태복음 16:2,3)

    너희가 하늘에 나타난 징조들을 보면서 천기 즉 그 날의 날씨는 곧잘 분별해내는데, 왜 예수님이 보여주신 ‘시대의 표적들’을 분별하지 못하느냐고 책망하고 계십니다. 
    예수님이 메시야 되심을 보여주는 표적이 없었던 것이 아니라, 그 많은 표적을 보고도 이것을 분별해내지 못하는 영적 무지함, 혹은 알고도 인정하지 않으려는 영적 완악함이 문제라는 겁니다.

    그러면서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구하나 요나의 표적밖에는 보여줄 표적이 없다”(4)하십니다. 
    요나가 물고기 뱃속에 갇혔다가 사흘만이 기적적으로 살아나온 것처럼,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 예수님이 메시야되심을 마지막으로 보여주시겠다는 말씀입니다. 
    달리 말해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과 부활의 사건을 보여 주어도 믿지 못한다면, 그 어떤 표적을 보여주어도 믿음을 가질 수 없다는 말씀입니다.

    예수님 당시에는 예수님이 행하신 일들과 전하신 말씀들이 바로 그 분이 하나님이 보내신 메시야임을 보여주는 ‘시대의 표적’이었습니다. 
    이 시대를 사는 성도들에게도 하나님이 보여주시는 ‘시대의 표적들’이 있습니다. 
    종말에 관한 성경의 예언들이 실현되고 있는 모습들이 곧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가 바로 성경에서 예언하고 있는 종말의 세대임을 보여주는 ‘시대의 표적들’인 것입니다. 
    이 시대를 종말의 세대라고 결론지을 수밖에 없는 일곱 가지 시대의 표적들을 소개하고자 합니다.

    1. 이스라엘

    종말에 대한 예언의 중심에 이스라엘이 있습니다. 마태복음 24장 32,33절을 보면 “무화과나무의 비유를 배우라 그 가지가 연하여지고 잎사귀를 내면 여름이 가까운 줄을 아나니 이와 같이 너희도 이 모든 일을 보거든 인자가 가까이 곧 문 앞에 이른 줄 알라”하셨습니다. 이스라엘의 회복이 종말의 역사가 시작되는 출발점이라는 뜻입니다.

    A.D. 70년 로마에 의해 멸망한 이스라엘이 1948년 5월 14일 나라를 재건하게 됩니다. 말일에 이스라엘이 고토로 돌아와 나라를 재건할 것이라는 성경의 예언(겔 37장)이 성취된 것입니다. 겨우내 죽었던 것 같던 무화과나무에 가지가 연하여지고 잎사귀가 돋는 기적이 나타난 것입니다. 이러한 시대의 표적을 통해 그 날이 가까움을 알 수 있다는 겁니다.

     

    2. 자연의 재앙(災殃)

    감람산 강화(마24,25, 막13, 눅21)에서 예수님은 종말의 때가 되면 처처에 지진과 기근과 온역이 있을 것이고, 일월성신에는 징조가 있겠고 땅에서는 민족들이 바다와 파도의 우는 소리를 인하여 혼란한 중에 곤고할 것(눅21:25)이라 하셨습니다. 지금까지 경험하지 못했던 큰 자연의 재앙이 있을 것을 경고하고 있습니다. 새삼 일례를 들지 않아도 현재 우리가 경험하고 있는 일들입니다.

    3. 배도(背道)

    감람산 강화에서 예수님은 마지막 때가 되면 교회 안에서 많은 거짓 선지자와 거짓 그리스도가 일어날 것이라 했고, 데살로니가후서 2장 3절에서 사도 바울은 종말의 때에 교회가 배도의 길을 갈 것이라고 경고하셨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종말의 때가 되면 교회가 큰 부흥을 경험하게 될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는데, 성경은 그렇게 말씀하고 있지 않습니다. 오히려 교회가 큰 미혹과 배도를 경험하게 될 것이라고 경고하고 있습니다.

    ‘배도’란 진리에서 떠난다는 뜻이 있습니다. 오늘날 많은 교회들이 뉴에이지 사상, 기복사상과 같은 세상 철학에 미혹되어 참된 진리인 말씀에서 떠나고 있습니다. 배도의 시대를 살고 있는 것입니다.

    4. 도덕적 타락(墮落)

    누가복음 17장에서는 종말의 때를 ‘노아의 때와 롯의 때’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노아의 때, 롯의 때는 도덕적, 성적 타락이 극에 이른 때입니다. 특히 롯의 때의 배경이 되고 있는 소돔성은 동성애가 만연한 도성이었습니다. 오늘날 세계 곳곳에서 동성연애가 자연스런 현상으로 받아들여지고 있습니다. 동성결혼을 합법화하고 있는 곳이 늘어나고 있고, 동성연애자들에게 안수를 주는 교단들도 생겨나고 있습니다. 우리가 지금 노아의 때와 롯의 때와 같은 시대를 살고 있는 것입니다.

     

    5. 과학 기술의 발달(發達)

    다니엘서 12장 4절에서는 종말의 때가 되면 “사람이 빨리 왕래하며 지식이 더하리라”고 묘사하고 있습니다. 종말의 시대는 교통기술이 발달하고 정보지식 산업이 발달한 시대가 될 것임을 예견하는 말씀인 것입니다. 요한계시록 13에서는 종말의 때가 되면 사람들을 감시하고 화폐의 기능을 대신할 수 있는 ‘짐승의 표’가 등장할 것이라 했습니다. 이미 신분증과 의료보험증, 그리고 신용카드를 대체할 수 있는 베리칩(RFID)이 완성되어 우리의 손과 이마에 이식될 순간만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6. 전쟁(戰爭)

    “난리와 난리의 소문을 듣겠으며, 민족이 민족을 나라가 나라를 대적하여 일어나리라.”(마 24:6,7)하셨습니다. 시리아의 사태가 내전으로 치닫고 있는 가운데, 조만간 이스라엘과 이란 사이에 전쟁이 일어나면 3차 대전이 될 수 있다는 전망이 나오고 있습니다. 아시아 지역에서도 미국과 중국이 군사적으로 대치하는 일들이 많아지고 있습니다. 곳곳에서 난리와 난리의 소문들이 들려오는 심란한 시대를 살고 있는 것입니다.

    7. 세계정부의 등장(登場)

    다니엘서 2장에 등장하는 철과 진흙이 섞인 발로 묘사되는 나라, 다니엘서 7장에서 묘사하고 있는 열 뿔을 가진 네 번째 짐승, 또 요한계시록 17장에서 말씀하고 있는 ‘큰 성 바벨론’은 모두 주님이 재림하여 주의 나라(천년왕국)를 이 땅에 세우시기 전에 등장할 마지막 제국, 적그리스도의 나라를 설명하는 말씀들입니다.

    오래전부터 루시퍼를 추종하는 일루미나티들이 이 땅에 저들이 지배하는 세상, New World Order(세계정부)를 만들기 위해 애써왔는데, 이제 그것을 완성할 시점이 얼마 안남았다고 판단하고 있습니다. 저들이 추구하는 New World Order(세계정부)가 바로 적그리스도가 다스리는 세상입니다. 이 땅에 적그리스도의 나라가 세워짐으로 7년 대환난으로 묘사되는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이 시작될 것입니다.

    바리새인 서기관들은 예수님이 보여주신 ‘시대의 표적들’을 보고도 예수님이 메시야라는 사실을 깨닫지 못했습니다. 
    깨닫지 못하고 예수님을 대적하다가 결국 십자가에 못 박는 끔찍한 죄를 짓고 말았습니다. 
    아무리 하나님이 시대의 표적을 보여주셔도 우리가 그것을 깨닫지 못하면 결국 우리도 무지 가운데 죄를 짓고 멸망의 길을 갈 수 밖에 없습니다.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고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면 소용없습니다. 
    “너희 눈은 봄으로, 너희 귀는 들음으로 복이 있다”(마 13:16)하신 예수님의 말씀에 유념해야 합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가 종말의 세대임을 보여주는 ‘시대의 표적들’을 분별하고 믿음으로 깨어있는 성도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시대의 표적을 분별하자

    여러분, 지금이 어느 시대입니까? 
    역사적으로 보면 21세기이며 코로나 시대입니다. 
    그리고 정치적으로는 진리와 정의를 무너뜨리고 민주주의와 자유경제시장과 한미동맹을 무너뜨리고 종교의 자유를 무너뜨리려고 하는 혼란의 시대라고 할 수 있습니다. 
    대표적인 것이 국회의원들 중에서 포괄적 차별금지법을 제정하려는 시도에서 볼 수 있습니다.
    우리가 사는 시대를 바로 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바른 판단력을 가지고 시대적인 사명을 감당할 수 있습니다. 

    1.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이 예수님을 시험하여 하늘로부터 오는 표적 보이기를 청하였습니다.

    예수님을 시험할 목적으로 예수님을 찾았으며, 하늘로부터 오는 표적 보이기를 청하였습니다. 
    이들이 예수님을 찾은 목적과 동기부터가 잘못 되었고, 또한 하늘로부터 오는 표적을 구하는 요청도 잘못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찾는 목적과 동기가 중요합니다. 
    목적과 동기가 잘못되면 구원자이신 예수님을 만날 수가 없습니다. 
    인간이 하나님을 찾는 가장 중요한 목적은 하나님의 도움을 받기 위해서입니다. 
    특별히 죄에서 구원받기 위해서 구원자이신 예수님을 찾아야 합니다. 
    그리고 유한한 피조물로서 창조자이신 전능하신 하나님의 은총과 능력을 구하기 위해서 하나님을 찾아야 합니다. 
    그것을 가능하게 해 주는 것이 예배를 드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배를 통해서 사람과 하나님이 만나게 되고, 하나님께서는 자신을 찾는 자들을 만나 주십니다.

      그런데 바리새인과 사도개인은 예수님을 시험할 목적으로 찾았습니다. 성경은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을 시험하는 자는 오직 사탄 마귀뿐입니다. 만약 어떤 사람이 하나님을 시험한다면 그 사람은 마귀에게 속한 사람입니다. 물론 예외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시험해 보라고 하신 것을 시험해 보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기 때문에 잘못된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은 믿음이 없는 사람들에게 십일조를 드려서 하나님이 복을 쌓을 곳이 없도록 부어 주시는지 그렇지 않는지를 시험해 보라고 했고, 하나님께서 기뻐하는 것이 무엇인지 시험해 보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 외에는 하나님을 시험해서는 안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우리의 시험의 대상도 아닐 뿐더러 우리에게는 하나님을 시험할만한 능력이 없기 때문입니다. 선생님이 학생들에게 시험을 치게 하지 학생들이 선생님에게 시험을 치게 하지 않는 것처럼 창조주 하나님이 피조물인 인간을 시험하시지 피조물인 우리가 창조주 하나님을 시험할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은 시험의 대상이 아니라 경배의 대상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자신을 시험하는 사탄에게 마4:10/...사탄아 물러가라 기록되었으되 주 너의 하나님께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기라.../고 했습니다. 여러분, 예수님을 찾으시는 목적은 오직 그분을 섬기고 예배하기 위해서 임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예수님을 만날 수가 있습니다.

    2. 예수님은 그들의 잘못된 동기와 요구에 이렇게 대답하셨습니다.

      2-3절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가 저녁에 하늘이 붉으면 날이 좋겠다 하고 3 아침에 하늘이 붉고 흐리면 오늘은 날이 궂겠다 하나니 너희가 날씨는 분별할 줄 알면서 시대의 표적은 분별할 수 없느냐/라고 했습니다.

      그 당시의 성인 유대인들은 날씨를 분별할 수 있었습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저녁에 하늘이 붉으면 그 다음 날의 날씨는 매우 화창하고 맑고 좋습니다. 그러나 아침에 일어났는데 하늘이 붉고 흐리면 그 날은 비가 온다는 징조입니다. 이런 현상은 오랜 경험을 통해서 알 수 있는 것으로, 구름을 통해서 날씨를 분별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지구촌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을 배려하셔서 보여 주시는 징조입니다. 그래서 날씨를 보고 농사를 짓고, 날씨를 보고 배를 띄우고, 날씨를 보고 장사를 하고, 날씨를 보고 차를 운전하고 비행기를 띄우라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이렇게 날씨는 분별할 줄 알면서도 시대의 표적은 분별하지 못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날의 날씨가 어떨 지에 대한 징조로 하늘의 구름을 보여 주시는 것처럼 시대마다 그 시대를 분별할 수 있는 표적과 징조도 주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님의 자녀로서 매일의 날씨를 분별할 수 있어야 합니다. 날씨를 보고 하루를 살아가야 합니다. 비가 오는 날씨인데도 일기예보를 보지 않고 그냥 갔다가 비를 맞는 일은 없어야 하는 것처럼 우리는 시대를 분별하는 능력을 갖추어야 합니다.

      역사가들은 인류의 역사를 고대, 중세, 근대, 현대라는 시대로 구분합니다. 그리고 100년을 단위로 한 세기라는 이름을 붙입니다. 지금은 21세기입니다. 그리고 종말의 시대입니다.

      그렇다면 시대를 분별하는 기준은 무엇입니까? 예수 그리스도가 시대를 분별하는 기준입니다. 그래서 역사가들은 예수님을 기준해서 B.C.와 A.D.로 구분합니다. 다른 어떤 것도 역사를 분별하는 기준이 될 수가 없습니다. 불교인들은 불기를 사용합니다. 잘못된 계산방법입니다. 첫 단추를 잘못 끼우면 모든 단추가 잘못 끼워지는 것처럼 불교인들은 불기를 사용함으로 시작부터 혼란에 빠졌습니다.

      모든 역사가들은 예수님을 역사의 중심에 두고 B.C.와 A.D.로 구분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2000년 전에 이미 세상에 오셔서 인류를 구원하시려는 모든 계획을 완성하시고 하늘로 올라가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승천하실 때 이 세상에 다시 오신다고 약속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다시 오시는 것을 재림이라고 하고, 그 때를 종말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므로 대부분의 신학자들과 미래학자들과 예언자들과 과학자들은 우주와 지구와 인류의 종말을 이야기합니다. 언제 종말이 올 것인가를 예측하고 지구의 종말을 피하기 위해서 화성에다 새로운 인류의 정착지를 만들려고 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비성경적이고 탈성경적인 행위로서 헛수고에 불과합니다.

      역사의 중심에 계신 예수님은 이미 시대를 분별할 수 있는 기준을 제시해 놓았습니다. 그것은 무화과나무에 관한 비유입니다. 마24:32-33/무화과나무의 비유를 배우라 그 가지가 연하여지고 잎사귀를 내면 여름이 가까운 줄을 아나니 33 이와 같이 너희도 이 모든 일을 보거든 인자가 가까이 곧 문 앞에 이른 줄 알라/고 했습니다. 시대를 분별하는 기준은 예수님이십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오심을 기준으로 역사를 재편성하였습니다. 동시에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시대의 표적은 무화과나무입니다. 무화과나무는 곧 이스라엘 나라와 그 민족을 상징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열매 없는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신 것은 하나님께 아름답고 풍성한 열매를 드려야 할 이스라엘 백성들이 아무런 열매도 맺지 못했기 때문에 상징적으로 열매 없는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신 것입니다. 열매 없는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셨을 때 뿌리부터 완전히 말라 버린 것처럼 이스라엘 나라와 민족은 저주를 받아서 완전히 말라 버렸습니다. 그래서 A.D. 70년에 로마에 의해서 멸망된 이스라엘 나라는 약 2000년 동안 나라를 잃어버리고 전 세계에 흩어져서 멸시와 학살과 죽임을 당했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을 대상으로 새로운 비유를 주셨는데 그것은 무화과나무의 비유입니다. 그래서 무화과나무의 비유를 배우라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그 가지가 연하여지고 잎사귀를 내면 여름이 가까운 줄로 아나니 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처럼 드디어 1945년에 우리 나라가 해방되던 바로 그 해에 이스라엘 나라도 해방이 되어서 자신의 나라로 돌아왔습니다. 다시 이스라엘이라는 나라가 세워졌습니다. 지구에서 사라져 버린 이스라엘 나라가 다시 세워졌습니다.

      그리고 이스라엘 나라는 주님의 비유에서처럼 가지가 연하여지고 잎사귀를 내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이라는 나라는 국제사회에서 자신의 역할을 담당하고 자신의 목소리를 내고 있습니다. 특히 가지가 연하여지고 잎사귀를 낸다는 것은 노아방주 사건에서 노아가 120일 동안 하늘에서 비가 내리고 땅에서 물이 솟아오르는 홍수심판을 지내고 나서 서서히 물이 감하면서 1년 후에 드디어 물이 가라 앉아서 배가 땅에 닿았고 그 결과 방주의 문을 열고 까마귀와 비둘기를 내어 놓는 일을 했습니다. 그런데 비둘기를 내려 놓았을 때 두 번째 날에 감람 잎사귀를 가지고 돌아왔습니다. 그것은 물이 완전히 빠지고 나무들이 새 싹을 틔우고 있다는 신호입니다. 이제는 방주에서 나와도 된다는 신호였습니다.

      마찬가지로 무화과나무에서 잎사귀가 난다는 것은 이스라엘이라는 나라가 회복되고 있다는 신호입니다. 그리고 드디어 이스라엘 예루살렘에 다시 하나님의 성전이 세워지게 될 것입니다. 그러면 주님의 재림은 완성될 것입니다. 그러나 아직도 예루살렘 성전은 이슬람사람들에게 빼앗긴 상태입니다. 빼앗긴 예루살렘 성전 터가 다시 회복되면 드디어 주님의 재림은 완성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시대의 표적을 분별할 수 있어야 합니다. 지금 우리가 사는 시대는 어느 시대입니까? 많은 신학자들과 정치가들이 빨리 코로나이후 시대가 왔으면 좋겠다고 말합니다. 또한 코로나이후 시대를 점치기도 합니다. 코로나 이후시대라는 말이 나올 만큼 코로나로 인하여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종교 등이 많은 영향을 받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지금은 코로나 시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코로나 재앙을 통해서 영적으로 잠을 자고 있는 사람들에게 시대를 분별하게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에게 날씨는 분별할 줄 알면서 시대의 표적은 분별하지 못하느냐? 라고 책망하셨듯이 오늘 우리도 시대의 표적을 분별하지 못한다면 책망을 받게 될 것이고 많은 혼란에 빠지게 될 것입니다.

    3. 예수님은 시대의 표적을 구하는 그들에게 요나의 표적 밖에 보여줄 표적이 없다고 했습니다.

      4절에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구하나 요나의 표적 밖에는 보여 줄 표적이 없느니라 하시고 그들을 떠나 가시니라/고 했습니다. 어느 시대이든지 악하고 음란하지 않은 세대는 없었습니다. 아담의 타락이후 줄 곳 세상은 악하고 음란했습니다. 지금도 그렇습니다. 오히려 시간이 갈수록 더 심각해졌습니다.

      그런 시대에 주님은 요나의 표적 밖에 보여 줄 표적이 없다고 했습니다. 요나의 표적이란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3일만에 부활하시는 것을 두고 하신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시대의 표적 중에서 가장 중요한 표적은 예수님의 부활입니다.

      지금 이 시대는 어떤 시대입니까? 코로나 시대이면서 동시에 악하고 음란한 세대입니다.

      그런데 코로나 시대이면서 악하고 음란한 세대인 지금 이 시대에 요나의 표적을 주신 부활하신 예수님은 우리와 함께 하시면서 우리에게 시대를 분별할 수 있는 지혜를 주십니다. 그래서 우리가 주님과 동행하는 삶을 산다면 모든 믿음의 선조들이 주님과 동행함으로 그 시대를 분별하고, 그 시대를 향한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 하나님의 뜻대로 살다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것처럼 우리도 이 시대의 표적이신 부활의 예수님을 모시고 시대를 분별하면서 살아야 합니다.

      우리는 지금 이 시대를 읽을 수가 있어야 합니다. 주님은 분명히 성경말씀을 통해서 시대를 분별할 수 있는 지혜를 주셨고, 거기에 대한 해답을 주셨습니다. 왜 코로나 때문에 사람들이 왕래하는 것이나 해외여행이나 공식적인 모임들이 다 취소가 되고 예배가 중단되는 이런 일을 행하셨습니까? 교회에서 예배를 드리지 못하게 한다고 사람들은 종교탄압이라고 불만을 터뜨리지만 사실은 정치가들과 국가를 탓하기 전에 자신들부터 성찰해야 합니다.

      그리고 지금 이 시대를 분별해야 합니다. 코로나 이후에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

      지금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하나님의 뜻은 과연 무엇일까? 코로나를 통해서 문을 닫아 버린 기관들이 많습니다. 지금은 많은 기관들이 다시 문을 열고 있지만 일시적으로 모든 문들이 닫혔습니다. 교회도, 식당도, 학원도, 시장도, 마트도, 요양원도, 병원도, 해외여행사도 문을 닫아 버렸습니다. 왜 하나님은 코로나 바이러스를 통해서 문들을 닫게 만들었을까요? 물을 닫아 버린 이유는 너무 바쁘게 돌아다닌다는 것입니다. 사람들과 성도들이 다시 오실 주님을 기다리면서 천국혼인잔치에 참석할 신부단장을 해야 하는데 거기에는 관심이 없고 세상에 취하고, 여행 다니는 것에 취하고, 세상쾌락에 취하고, 돈 버는 일에 취해서 다시 오실 심판주 예수님을 바라보지 못하기 때문에 바쁜 일상을 멈추고 조용히 자신을 성찰하라는 뜻입니다. 다시 오실 예수님을 맞을 준비를 하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코로나 사태를 통해서 이 세상은 천국도 낙원도 아니라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지상낙원이라고 생각했던 장소들과 유명 피서지들이 문을 닫아 버렸습니다. 지상낙원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세계적인 휴양지들이 파괴되고 있고 물에 잠기고 있고 무너지고 있습니다. 지상낙원을 꿈꾸지 말고 참된 천국을 바라보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영원한 복지국가인 천국을 바라보고 사모하라는 것입니다.

      중국을 비롯한 일본과 우리 나라에 집중 호우로 인해서 유래없는 홍수 피해를 입고 있습니다. 레바논에 폭발이 일어나서 도시의 절반이 삶의 터전을 잃어버리고 4000명이상 부상을 입었습니다. 곳곳에서 이런 종말의 징조가 일어나고 있습니다. 우리는 시대의 표적을 분별할 수 있어야 합니다.

    4. 우리는 어느 시대를 살든지 항상 세 가지에 염두를 두어야 합니다.

      1) 첫 번째 항상 주님 다시 오심을 기다리고 사모해야 합니다. 

      슬기로운 다섯 처녀와 같이 다시 오실 주님을 맞이할 준비를 게을리 해서는 안됩니다. 주님 재림을 맞이해야 합니다. 다시 오실 주님을 맞이할 만반의 준비가 되어 있습니까? 정말 주님을 사모하고 기다리고 있습니까? 세상에 취해서 주님이 오시는지도 모르고 있지 않습니까? 마25:1-13/그 때에 천국은 마치 등을 들고 신랑을 맞으러 나간 열 처녀와 같다 하리니 2 그 중에 다섯은 미련하고 다섯은 슬기 있는 자라 3 미련한 자들은 등을 가지되 기름을 가지지 아니하고 4 슬기 있는 자들은 그릇에 기름을 담아 등과 함께 가져갔더니 5 신랑이 더디 오므로 다 졸며 잘새 6 밤중에 소리가 나되 보라 신랑이로다 맞으러 나오라 하매 7 이에 그 처녀들이 다 일어나 등을 준비할 새 8 미련한 자들이 슬기 있는 자들에게 이르되 우리 등불이 꺼져가니 너희 기름을 좀 나눠 달라 하거늘 9 슬기 있는 자들이 대답하여 이르되 우리와 너희가 쓰기에 다 부족할까 하노니 차라리 파는 자들에게 가서 너희 쓸 것을 사라 하니 10 그들이 사러 간 사이에 신랑이 오므로 준비하였던 자들은 함께 혼인 잔치에 들어가고 문은 닫힌지라 11 그 후에 남은 처녀들이 와서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에게 열어 주소서 12 대답하여 이르되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가 너희를 알지 못하노라 하였느니라 13 그런즉 깨어 있으라 너희는 그 날과 그 때를 알지 못하느니라/고 했습니다.

      등만 있고 여분의 기름이 없는 사람들은 주님이 다시 오실 때가 되면 넘어지게 되어 있고 버림받아 주님의 혼인잔치에 들어가지 못했다는 것을 기억하며 날마다 기도할 수 있어야 합니다. 기도하지 않고 전도하지 않는 사람들은 등만 있지 여분의 기름이 없는 사람입니다. 빨리 자신의 죄를 회개하고 날마다 기도하며 날마다 전도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1시간 동안도 기도하지 못하느냐? 라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있어 기도하라고 했습니다. 1시간 기도는 자신이 위기가 찾아왔을 때 시험에 들지 않게 해 주는 것입니다. 2시간이상 기도를 해야 다른 사람을 도와줄 수 있습니다. 이것은 저의 개인적인 체험입니다.

      2) 두 번째는 자신에게 맡겨 주신 사명에 충실해야 합니다.

      다섯 달란트 받은 종과 두 달란트를 받은 종처럼 주인이 맡겨주신 달란트를 남기를 일에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마25:14-30/또 어떤 사람이 타국에 갈 때 그 종들을 불러 자기 소유를 맡김과 같으니 15 각각 그 재능대로 한 사람에게는 금 다섯 달란트를, 한 사람에게는 두 달란트를, 한 사람에게는 한 달란트를 주고 떠났더니 16 다섯 달란트 받은 자는 바로 가서 그것으로 장사하여 또 다섯 달란트를 남기고 17 두 달란트를 받은 자도 그같이 하여 또 두 달란트를 남겼으되 18 한 달란트 받은 자는 가서 땅을 파고 그 주인의 돈을 감추어 두었더니 19 오랜 후에 그 종들의 주인이 돌아와 그들과 결산할새 20 다섯 달란트 받았던 자는 다섯 달란트를 더 가지고 와서 이르되 주인이여 내게 다섯 달란트를 주셨는데 보소서 내가 또 다섯 달란트를 남겼나이다 21 그 주인이 이르되 잘 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적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을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할지어다 하고 22 두 달란트 받았던 자도 와서 이르되 주인이여 내게 두 달란트를 주셨는데 보소서 내가 또 두 달란트를 남겼나이다 23 그 주인이 이르되 잘 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적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을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할지어다 하고 24 한 달란트 받았던 자는 와서 이르되 주여 당신은 굳은 사람이라 심지 않은 데서 거두고 헤치지 않은 데서 모으는 줄을 내가 알았으므로 25 두려워하여 나가서 당신의 달란트를 땅에 감추어 두었었나이다 보소서 당신의 것을 가지셨나이다 26 그 주인이 대답하여 이르되 악하고 게으른 종아 나는 심지 않은 데서 거두고 헤치지 않은 데서 모으는 줄로 네가 알았느냐 27 그러면 네가 마땅히 내 돈을 취리하는 자들에게나 맡겼다가 내가 돌아와서 내 원금과 이자를 받게 하였을 것이니라 28 그에게서 그 한 달란트를 빼앗아 열 달란트 가진 자에게 주라 29 무릇 있는 자는 받아 풍족하게 되고 없는 자는 그 있는 것까지 빼앗기리라 30 이 무익한 종을 바깥 어두운 데로 내쫓으라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갈리라 하니라/고 했습니다. 받은 달란트와 사명에 충실하라는 것입니다. 배나 남기는 충성스럽고 부지런한 삶을 살아야 됩니다. 사명이 없다는 것은 부끄러운 일입니다. 모두가 사명자가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달란트라는 사명을 받고 거기에 최선을 다함으로 배를 남기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대충살아서는 배를 남길 수가 없습니다. 죽도록 충성해야 합니다.

      3) 세 번째는 크고 위대한 일만 추구하다가 내 주위에 있는 작은 자들을 돌보는 일에 소홀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우리 주위에는 소외된 자들이 많이 있습니다. 울고 있는 자들이 있고, 굶주리는 자들이 있고, 고통 속에 빠진 자들이 있습니다. 그들을 돌아보아야 합니다.

      그래서 마25장에 보시면 마25:31-46/인자가 자기 영광으로 모든 천사와 함께 올 때에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으리니 32 모든 민족을 그 앞에 모으고 각각 구분하기를 목자가 양과 염소를 구분하는 것 같이 하여 33 양은 그 오른편에 염소는 왼편에 두리라 34 그 때에 임금이 그 오른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내 아버지께 복 받을 자들이여 나아와 창세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예비된 나라를 상속받으라 35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였고 36 헐벗었을 때에 옷을 입혔고 병들었을 때에 돌보았고 옥에 갇혔을 때에 와서 보았느니라 37 이에 의인들이 대답하여 이르되 주여 우리가 어느 때에 주께서 주리신 것을 보고 음식을 대접하였으며 목마르신 것을 보고 마시게 하였나이까 38 어느 때에 나그네 되신 것을 보고 영접하였으며 헐벗으신 것을 보고 옷 입혔나이까 39 어느 때에 병드신 것이나 옥에 갇히신 것을 보고 가서 뵈었나이까 하리니 40 임금이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하시고 41 또 왼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저주를 받은 자들아 나를 떠나 마귀와 그 사자들을 위하여 예비된 영영한 불에 들어가라 42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지 아니하였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지 아니하였고 43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지 아니하였고 헐벗었을 때에 옷 입히지 아니하였고 병들었을 때와 옥에 갇혔을 때에 돌보지 아니하였느니라 하시니 44 그들도 대답하여 이르되 주여 우리가 어느 때에 주께서 주리신 것이나 목마르신 것이나 나그네 되신 것이나 헐벗으신 것이나 병드신 것이나 옥에 갇히신 것을 보고 공양하지 아니하더이까 45 이에 임금이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하지 아니한 것이 곧 내게 하지 아니한 것이니라 하시리니 46 그들은 영벌에, 의인들은 영생에 들어가리라 하시니라/고 했습니다. 각자가 악하고 음란한 세대에서 자신의 믿음을 잘 지키고 자신을 세속에 물들지 않도록 거룩함을 지켜야 하지만 주변에 있는 가난한 자, 헐벗은 자, 약한 자, 병든 자, 옥에 갇힌 자를 돌아보아야 합니다. 아무리 가난한 사람이라도 자기 보다 더 가난한 사람이 있어서 그들을 도와줄 수가 있습니다. 그러니까 나는 도움만 받아야 돼 라는 생각은 바꾸어야 합니다. 나도 누군가를 도와주어야 한다는 생각으로 살아가면 내가 도와주어야 할 가난한 자가 있을 것입니다. 그들을 찾아내어 도와주어야 합니다. 이렇게 하는 것이 시대를 분별하면서 살아가는 믿음의 승리자이며 이기는 자의 삶입니다. 여러분 모두가 이렇게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우리가 마지막 때에 있다는 50가지 징조들
    50 SIGNS WE ARE IN THE END TIMES:

    1) Increasing instability of nature. (Matthew 24:7 & Luke 21:11)

    자연의 불안정성 증가. (마 24:7 & 누가 21:11)

    2) Increasing lawlessness and violence. (Matthew 24:12)

    무법과 폭력의 증가. (마 24:12)

    3) Increasing immorality. (Matthew 24:37)

    부도덕함의 증가. (마 24:37)

    4) Increasing materialism. (2 Timothy 3:2)

    물질주의의 증가. (딤.후 3:2)

    5) Increasing Hedonism. (2 Timothy 3:4)

    쾌락주의의증가. (딤.후 3:4)

    6) Increasing influence of Humanism. (2 Timothy 3:2)

    인본주의의 영향력 증가. (딤.후3:2)

    7) Depraved entertainment. (2 Timothy 3:4)

    오락문화의 타락. (딤.후 3:4)

    8)Calling evil good and good evil. (2 Timothy 3:3 & Isaiah 5:20)

    악을 선으로 선을 악이라 부름. (딤.후 3:3 & 이사야 5:20)

    9) Increasing use of drugs. (2 Timothy 3:3)

    마약류 사용의 증가. (딤.후3:3)

    10) Increasing blasphemy. (2 Timothy 3:2)

    신성모독의 증가 (딤.후 3:2)

    11) Increasing paganism. (2 Timothy 3:1-4)

    이교도의(우상) 증가 (딤.후 3:1-4)

    12) Increasing despair. (2 Timothy 3:1)

    절망의 증가 (딤.후3:1)

    13) Signs in the heavens. (Luke 21:11,25)

    하늘의징조. (누가 21:11,25)

    14) Increasing knowledge. (Daniel 12:4)

    지식의 증가 (다니엘 12:4)

    15) Increasing travel. (Daniel 12:4)

    이도믜 증가 (다니엘 12:4)

    16) The explosion of cults. (Matthew 24:11)

    사이비 종교집단의 폭발적증가 (마 24:11)

    17) The proliferation of false christs. (Matthew 24:5)

    거짓 그리스도의 급증 (마 24:5)

    18) Increasing apostasy in the Church. (2 Timothy 4:3-5)

    교회에서 배교 증가 (딤.후 4:3-5)

    19) Increasing attacks on Jesus. (Romans 1:18-19)

    예수님에 대한 공격의 증가 (롬 1:18-19)

    20) Increasing attacks on the Bible. (Romans 1:18-19)

    성경에 대한 공격의 증가 (롬 1:18-19)

    21) Increasing persecution of Christians. (Matthew 24:9)

    그리스도인에 대한 박해 증가 (마 24:9)

    22) Increasing occultism. (1 Timothy 4:1)

    신비주의의 증가 (딤.전 4:1)

    23) Wars and rumors of wars. (Matthew 24:6)

    전쟁과 전쟁의 소문 (마 24:6)

    24) Weapons of mass destruction. (Luke 21:26)

    대량살상무기. (누가21:26)

    25) Increasing famine. (Luke 21:11)

    기근의 증가. (누가 21:11)​

    26) Increasing pestilence. (Luke 21:11)

    역병의 증가. (누가21:11)

    27) Computer technology. (Revelation 13:7)

    컴퓨터 기술. (계 13:7)

    28) Television. (Revelation 11:8-9)

    텔레비전. (계 11:8-9)

    29) Satellite technology. (Revelation 11:8-9)

    위성 기술. (계 11:8-9)

    30) Virtual reality. (Revelation 13:14-15)

    가상현실. (계기 13:14-15)

    31) Unification of Europe. (Daniel 2 & 7)

    유럽 연합 (다니엘 2, 7)

    32) Far Eastern military powers. (Revelation 9:16 & 16:12)

    극동의 군사력. (계시 9:16 & 16:12)

    33) Government toward world government. (Daniel 7:23-26)

    세계 정부를 향한 정부. (다니엘 7:23-26)

    34) Regathering of the Jews. (Isaiah 11:10-12)

    유대인들의 회복. (이사야 11:10-12)

    35) Re-establishment of Israel. (Isaiah 66:7-8)

    이스라엘의 재건. (이사야 66:7-8)

    36) Reclamation of the land of Israel. (Ezekiel 36:34-35)

    이스라엘 땅의 개간. (에스겔 36:34-35)

    37) Revival of Biblical Hebrew. (Zephaniah 3:9; Jeremiah 31:23)

    성겨적 히브리어의 회복. (스바냐 3:9; 예레미야 31:23)

    38) Re-occupation of Jerusalem. (Luke 21:24)

    예루살렘의 재점령. (누가 21:24)

    39) Resurgence of the Israeli military. (Zechariah 12:6)

    이스라엘군의 부활. (스가랴 12:6)

    40) Re-focusing of world politics on Israel. (Zechariah 12:3)

    이스라엘에 대한 세계 정치적 문제들에 관한 재집중. (스가랴 12:3)

    41) Russian threat to Israel. (Ezekiel 38 and 39)

    러시아의 이스라엘을 향한 위협 (에스겔 38, 39)

    42) Arab threat to Israel. (Ezekiel 35 and 36)

    이스라엘에 대한 아랍의 위협. (에제키엘 35, 36)

    43) Denial of the Second Coming. (2 Peter 3:3-4)

    예수님의 재림 부정. ( 베.후 3:3-4)

    44) Denial of creation by God. (Romans 1:18-22)

    하나님에 의한 창조의 부인. (롬 1:18-22)

    45) Outpouring of the Holy Spirit. (Joel 2:28-29)

    폭발적성령의 역사 (요엘2:28-29)

    46) Translation of the Bible into many languages (Matthew 24:14)

    여러 언어로 성경 번역 (마태 24:14)

    47) Preaching of the Gospel worldwide. (Matthew 24:14)

    전 세계 복음 전도. (마태 24:14)

    48) The revival of Messianic Judaism. (Romans 9:27)

    메시아닉 유대교의 부활. (롬 9:27)

    49) The revival of Davidic praise worship. (Amos 9:11)

    다윗 찬양 예배의 부활 (아모스9:11)

    50) The understanding of Bible prophecy. (Daniel 12:8-9)

    성경 예언에 대한 이해

    the 50 examples above should be sufficient to show that we are living in the season of the Lord's return. The Bible clearly teaches that God never pours out His wrath without warning for He is a just and loving God who does not wish that any should perish (2 Peter 3:9). That's why He has provided so many signs to alert us to the fact that we are living on the threshold of the Tribulation.

    By David Reagan lamb and lion²

    위의 50가지 예들은 우리가 주님이 다시오시는 계절에 살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에 충분할 것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은 아느것도 멸망하기를 바라시지 않으시는 정의롭고 다정하신 하나님이시기에 경고 없이 분노를 쏟아내는 일이 결코 없다고 분명히 가르치고 있습니다(베드로 3:9). 
    그래서 그분은 우리가 대환란의 문턱에서 살고 있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경고하기 위해 그렇게 많은 징조들을 제공하는 이유입니다.






    마지막 때임을 알 수 있는 징조
    성경대로 믿는사람들 <1997년 10월호>

    우리는 지금이 마지막 때임을 알 수 있는 많은 징조를 우리 주위에서 발견할 수 있다. 
    그리스도인이라면 시대적 징조를 분별할 줄 알아야 한다. 
    예수님께서도 지상에 계실 때『너희 위선자들아, 너희가 하늘과 땅의 현상은 분별할 줄 알면서 어찌하여 이 때는 분별하지 못하느냐?』(눅 12:56)라고 말씀하셨다.

    오늘날은 세계 역사상 전에 없던 시대이며, 하나님의 말씀이 눈에 띄도록 빠르게 성취되고 있음을 목도하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이것으로 우리는 세상이 마지막 에 도달했음을 알 수 있다. 마지막 때가 되었다는 것은 그리스도인의 휴거가 가까이 다가왔다는 것이며 또한 7년 대환란과,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이 가까워졌다는 것이다.

    첫 번째 징조 - 이스라엘의 성전 재건

    이 성전은 환란성전 이라고도 하며 제3의 성전이라 불리기도 한다. 
    이스라엘의 성전 재건은 성경의 예언의 성취에 있어서 너무나 중요하다. 
    이 이스라엘의 성전이 재건되면 적그리스도가 본격적으로 등장하게 된다(살후 2:1-12). 
    현재 성전이 지어질 장소에는 회교도들의 신전이 세워져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 이스라엘 사람들은 성전에 쓰여질 모든 기구들을 만들어 놓고 제사장들을 교육도 시키고 있다. 
    1967년 5월 21일 워싱턴 포스트지에 다음과 같은 광고가 실린 적도 있다. 
    [“전세계 유대교도들에게 고함” 이스라엘에 하나님의 성전건축 계획이 시작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인도와 보호로 성전은 완성될 것입니다. 
    특수한 기술, 행정상의 재능, 모든 종류의 기술을 가진 분이 필요합니다. 
    여러분이 보내 주시는 모든 기부금은 익명으로 처리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제 곧 땅으로 내려오실 것입니다.]

    유대인들이 성전 재건에 힘을 기울이는 것은 적그리스도가 그곳에 앉아 자기를 가리켜 하나님이라 일컬을 시간이 성큼 다가왔음을 알려 주는 나팔 소리이다.

    두 번째 징조 - 표

    『그가 모든 자, 즉 작은 자나 큰 자, 부자나 가난한 자, 자유자나 종이나 그들의 오른손이나 이마에 표를 받게 하고, 그 표나 그 짐승의 이름이나 그의 이름의 숫자를 지닌 사람을 제외하고는, 아무도 사거나 팔 수 없게 하더라. 지혜가 여기에 있으니, 지각이 있는 자는 그 짐승의 숫자를 헤아려 보라. 그것은 한 사람의 숫자이니, 그의 숫자는 육백육십육이니라』(계 13:16-18). 

    마지막 때가 되면 사람의 몸에 표를 받게 한다는 이 말씀이 성취되어 가고 있다는 징조가 이미 나타나고 있다. 중앙일보 97, 6, 6일자 신문에 이런 제목하에 글이 실렸다. [“가장 확실한 신분증은 몸” - 생체측정학을 이용한 이같은 신분확인은 전자식 카드 등 기존의 방법보다 분실 또는 도난당하거나 놓고 다닐 우려가 없다는게 큰 장점이다. 그리고 현금도 도난당하지 않으며 또한 쉽게 위조하기도 어렵다.]
    이외에도 영국의 산업 신문인 <스마트 카드 뉴스지>는 2002년까지는 세계 모든 시민이 가난하든 부하든간에 카드를 하나씩 소지하게 될 것이라고 전망했으며, 경향신문 97,8,5 일거수 일투족이 감시받는 사회란 제하에 국가별 정보망이 하나로 연결된 이른바 하나의 세계도 멀지 않았다고 예측했다.
    이런 기사를 보아도 이제 성경의 예언의 성취가 얼마나 가깝게 다가왔는가를 알 수 있다. 휴거 이후 대환란이 시작되면 적그리스도는 가난한 자든 부자이든 사람들에게 표를 받게 할 것이다.(종이화폐->전자화폐->몸)

    세 번째 징조 - 자연의 징조

    『큰 지진이 여러 곳에서 있을 것이며, 기근과, 역병과, 무서운 광경과, 큰 표적들이 하늘로부터 있으리라』(눅 21:11). 얼마 전 동네에 오존 주의보가 내려서 집 밖에 못 나간적이 있다. 필자의 동네에 올해만 4번의 오존주의보가 발생했다. 집 밖에 나가 잠깐 서 있는데 머리가 아파서 집으로 다시 들어왔다. 몆 년 전만해도 상상하지 못하는 일이 우리 주위에 벌어지고 있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중앙일보 95,6,3신문>에는 한반도 도 자외선에 노출되어 있기 때문에 피부암을 유발할 수 있다고 보도했고, <미국 ABC 세계뉴스(95,4,6)>에서는 지금의 지구는 거대한 온실이라고 보도했다. <동아일보 97,8,4신문>과 <조선일보 97,8,18신문>에도 “자연 재앙이 몰려온다.” 기사에서 적도 부근 해수면 온도의 급격상승으로 주변 지역에 이상기후가 발생하여 미국 콜로라도 텍사스에 5시간동안 200mm폭우가 내려 홍수가 발생했다고 보도했다. 이외에도 칠레 산티아고에서는 스모그현상이 심화되어 차량의 75%가 운행중단 되었고, 아르헨티나는 한겨울에 온도가 섭시 36도까지 상승했으며, 독일의 오데르강에는 200년만의 대홍수가 발생했다.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에는 불볕더위와 가뭄으로 산불이 75건이나 발생했고, 북한은 가뭄으로 저수지 620개가 고갈했으며, 중국 서한에는 50년만의 폭염으로 200명이 사망하는 등 각종 자연 재앙이 전세계적으로 일어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월드워치연구소는 <생명의 징후들, 1997>을 통해서 96년 한 해 동안 세계의 환경은 부분적인 개선에도 불구하고, 전체적으로 대기중 이산화탄소가 “사상 최악”이라고 발표하였다(동아일보 97,5,26).
    계시록 16장 21절『또 무게가 각기 한 달란트나 되는 큰 우박이 하늘로부터 사람들 위에 떨어졌는데, 사람들은 그 우박의 재앙 때문에 하나님을 모독하니 이는 그 재앙이 심히 크기 때문이라』. 이 우박의 재앙은 무게가 8파운드 나가는 돌들과 함께 떨어진다. 어떤 회의론자나 자유주의 신학자도 이 구절을 있는 그대로 믿지 않으려고 할 것이다. 그러나 얼마전 중국 남부 광동 일부 지역에 실제로 농구공만한 우박과 함께 호우와 폭풍이 몰아쳐 적어도 37명 사망하고 17명이 실종됐으며 4백 53명의 부상자가 났다고 <조선일보, 97.3.22> 국제면에 보도되었다.

    네 번째 징조 - 배교

    『아무도 어떤 모양으로든지 너희를 미혹하지 못하게 하라. 이는 먼저 배교하는 일이 이르지 않고서는 그날이 오지 아니함이라. 그리고 나서 죄의 사람 곧 멸망의 아들이 나타나리라』(살후 2:3). 

    오늘날 소위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하는 사람들이 성경의 진리를 저버리고 부인하는 일들이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다. <미드나잇 콜 30호>에 이런 기사가 실렸다.

     [독일에 있는 액션 교회에서 동물은 우리의 형제 “인간과 짐승이 드리는 예배, 모두 환영”이란 제목으로 교회 게시판에 광고하였고, 예배에 카톨릭과 개신교 사람들 200명이나 넘게 모였으며, 그들은 쥐를 포함하여 애완동물들을 데리고 와서 동물들을 위한 이 예배에 참여하였다. 
    개신교 목사들은 2마리의 고양이에게 안수 기도를 하기도 했다. 
    설교는 마이클 브랭크 목사였다. 그곳에서 180명이나 넘는 신학생들은 동물에게 죄를 지었는 것을 자백한다는 성명서에 서명 했다.] 이 얼마나 하나님의 진리를 모독하는 행위인가? 어떻게 인간과 동물이 함께 예배를 드릴수 있다는 말인가! 하나님의 말씀은 분명이 사람의 영과 짐승의 영은 다르다고 말씀 하고 있다(전 3:21). 동물을 예배 의식에 끌어들이려는 이러한 시도는 마귀적인 것이다. 데살로니가후서 2:11-12에『이로 인하여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미혹의 역사를 보내시어 거짓 것을 믿게 하심은 진리를 믿지 않고 불의를 좋아하는 모든 자로 심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 또 하나님께서는 이런 자들에 대해서 로마서 1:23절에『썩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의 형상과 새들과 네 발 달린 짐승들과 기어다니는 것들의 형상으로 바꾸었도다』라고 말씀하신다. 

    <중앙일보 97,5,13일자>에 한신대 앞에 부처님 오신날을 경축한다는 현수막이 내걸린 것이 보도된 적이 있다. 그리스도인에게 이 신문 기사 내용은 너무나 충격적인 것이었다. 어떻게 하나님과 우상이 함께 할 수 있는가(고후 6:14-16)? <문화일보 94,2, 5>에는 수유리에 있는 한 장로교회와 카톨릭 교회가 같이 예배도 드리는 사건이 실려지기도 했다. 어떻게 장로교회 신앙과 카톨릭의 신앙이 일치 될 수 있겠는가? 또한 예수님 외에도 구원이 있다고 말했다가 쫒겨난 신학교 교수도 있다. 이런 현상들을 모두 지금 이 시대가 마지막 때임을 알 수 있는 또다른 징조이다.

    다섯 번째 징조 - 사랑이 식어감

    디모데후서 3:1-4
    『또 이것을 알라. 마지막 날들에 아주 어려운 때가 오리라. 사람들이 자기를 사랑하고 돈을 사랑하며, 자긍하고 교만하며, 하나님을 모독하고 부모에게 불순종하며, 감사하지 아니하고 거룩하지 아니하며무정하고, 화해하지 아니하며, 모함하고 절제하지 못하며, 사납고, 선한 것을 좋아하지 아니하며 배반하고 분별이 없으며, 자만하고 쾌락을 사랑하는 것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보다 더하며』

    <한국일보 92. 11. 30일자>에는 지하절 역내 흡연시비로 10대가 경찰을 폭행하여 숨지게 했다 
    <동아일보 97. 5. 22일자>에는 부부 효부상을 받은 부부가 싸움 끝에 부인이 숨졌다는 내용이 실렸다. 
    이외에도 18년 간 매맞은 아내가 남편이 잠든사이 흉기로 살해했다든가, 수업중에는 졸고 밤에는 술집에 나가는 여고생들이 심지어 한 반에 10명이 넘는다든가, 후배들 폭력에 시달려 중학교 3년생이 투신자살 했다는 등의 신문기사 등을 볼 때 참으로 마지막 때에 와 있다는 생각이 든다. 또한 산부인과에서는 수많은 아기들이 낙태당하고 있으며 기혼 여성 80%가 낙태를 경험했다고 복음 신문에 보도된 적도 있다. 예수님께서는 마지막 때가 되면 사랑이 식어진다고 말씀하셨다(마 24:12).

    여섯 번째 징조 - 교통의 발달과 지식의 대폭발

    다니엘 12:4
    『그러나, 오 너 다니엘아, 마지막 때까지 그 말씀을 닫고 그 책을 봉하라. 그 때에는 많은 사람이 이리저리 달릴 것이요, 지식이 증가하리라.” 하더라.』

    다니엘 선지자는 마지막 때가 되면 유래 없는 교통의 발달과 지식의 대폭발이 있을 것을 예언하였다. 
    1960년 말기에 나온 영국과 프랑스의 합작품인 콩코드 비행기는 런던에서 뉴욕까지 3시간도 채 안 걸리도록 만들었다. 
    우리나라만 해도 서울에서 제주도까지 며칠 걸릴 것을 비행기로 1시간 내에 200명이 넘는 사람을 수송하고 있다. 
    노아 허칭스 박사는 <지식과 커뮤니케이션의 증가>라는 그의 책에서 오늘날 사용되는 모든 의약품의 75%는 우리 세대에 발견되었으며, 이전에 살았던 모든 과학자들의 90%가 오늘날에도 살아있다고 증언한다. 
    최근 들어 사람을 달로 보내고 우주선을 태양계내의 다른 행성으로 보내는 우주탐사계획이 급속히 진전되어 왔다. 
    인간의 지식은 매 2년 6개월마다 두배로 확장되었고, 이같은 교육의 급증에 따라 인간의 지성이 극도로 고양되었다. 
    라디오, 텔레비젼, 그리고 몇 초 안에 세계 각처로 뉴스를 방송할수 있는 시설을 갖춘 각종 대중 통신매체들이 계속적으로 발명되고 발전되었다. 
    컴퓨터가 발명되어 전세계가 현금지불이 없이 하루종일 움직이고 구매 및 구입할 수 있는 경제체제가 가능해졌다. 
    앞에서 말한 모든 과학의 진보는 극히 최근인 20세기 초까지도 실현되지 못했던 일이었다. 

    <동아일보 97. 5. 29일자>에는 손바닥만한 휴대용 수신기로 전 세계 45억 인구가 청취가능하다란 내용을 실었다. 
    얼마 전만 해도 전화 버튼을 눌러서 걸었는데 요즘은 말로 걸고 말로 받는 그런 시대가 되었다. 
    그리고 미항공우주국(NASV)에서는 화성에 탐사 위성을 보내어 화성에 대한 연구도 하고 있다. 
    우리는 분명히 지식의 폭발과 교통의 발달을 경험하고 있다. 
    인류 지식의 증가와 유래 없는 교통의 발달은 때가 가까이 다가왔다는 것을 알려 준다.

    일곱 번째 징조 - 노사간의 갈등

    야고보서 5:1-5
    『이제 오라, 너희 부자들이여, 너희에게 닥칠 재난으로 인하여 울고 통곡하라. 너희의 재물은 썩었고, 너희의 의복은 좀먹었으며 너희의 금과 은은 녹이 슬었으니, 이것들의 녹이 너희에게 증거가 되어 불같이 너희 살을 먹으리라. 너희가 마지막 날들을 위한 재물을 쌓았도다. 보라, 너희 밭에서 추수한 일꾼들에게 속임수로 주지 않은 품삯이 소리지르며, 추수꾼들의 울부짖음이 만군의 주의 귀에 들렸느니라. 너희는 땅에서 방탕하고 사치스럽게 살았도다. 너희가 살륙의 날처럼 너희 마음을 살지게 하였도다.』

    오늘날에 들어와서 노사간의 갈등이 매우 심각해졌다는 것을 우리는 사회 전반의 모습을 통해 알 수 있다. 
    현재 경제상황은 심히 어럽고 특히 노사간의 대림은 날로 그 갈등이 심화되고 있는 실정이다. 
    이렇게 된 주된 이유는 과거보다 살기 어려워서가 아니라 인권이 급격히 신장되었기 때문인 것이다. 
    시민의 권리는 라오디케아 교회의 특징이기도 하다. 

    이처럼 우리가 성경을 믿든 안믿든 간에 이 세상은 마지막 때를 향하여 달려가고 있다는 징조는 너무나 많이 있다. 
    그리스도인은 마지막 때를 향하여 달려갈수록 정신차리고 깨어 있어 주님의 오심을 예비하는 신실한 종이 되어야 한다. 
    그리고 믿지 않는 자들에게 복음을 전하여 한 사람이라도 구원받게 해야 한다.

    고린도전서 15:51-54
    『보라, 내가 너희에게 한 가지 신비를 말하노니, 우리가 다 잠잘 것이 아니요 오히려 우리가 모두 변화될 것이니 마지막 나팔에 눈깜짝하는 순간에 그러하리라. 나팔 소리가 나면 죽은 자들이 썩지 아니하는 몸으로 일으켜지며, 우리도 변화되리라. 그리하여 이 썩을 몸이 반드시 썩지 아니할 몸을 입고, 이 죽을 몸이 반드시 죽지 아니할 몸을 입으리라. 이 썩을 몸이 썩지 아니함을 입고, 또 이 죽을 몸이 죽지 아니함을 입게 되면 “사망이 승리 속에 삼킨 바 되었느니라.”




    시대의 표적을 분별하라(마태복음 16:1-4)


    1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이 와서 예수를 시험하여 하늘로부터 오는 표적 보이기를 청하니
    2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가 저녁에 하늘이 붉으면 날이 좋겠다 하고
    3 아침에 하늘이 붉고 흐리면 오늘은 날이 궂겠다 하나니 너희가 날씨는 분별할 줄 알면서 시대의 표적은 분별할 수 없느냐
    4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구하나 요나의 표적밖에는 보여 줄 표적이 없느니라 하시고 그들을 떠나가시니라

    믿음은 하나님이 주시는 가장 큰 선물입니다. 하나님이 살아 계신 것이 믿어지고 또 예수님이
    나의 구원자가 되신다는 사실이 믿어지는 것은 나의 능력 지식이 아닌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러나 믿지 않는 사람의 마음과 눈은 사단이 구원받지 못하도록 영적으로 가리고 있기 때문에 눈을 뜨고도 보지 못하고 귀로 들으면서도 깨닫지 못합니다. 지금도 우리는 하나님이 이 시대를 통해서 일하시는 것을 믿음으로 보고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믿음이 없는 사람은 보고도 알 수 없습니다. 우리는 오직 믿음으로만 하나님이 함께하시는 그 역사를 따라가는 신앙을 할 수 있습니다.

    오늘 말씀으로 종교인들에게 나타난 문제를 통해 우리 신앙에도 나타날 수 있는 허점이 무엇이고, 아직 해결되지 않은 내 신앙의 문제가 무엇인지 알 수 있는 기회가 되시기 바랍니다.

    1. 예수님께 나온 종교인

    1) 나온 동기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은 그 당시 하나님을 가장 잘 섬기는 대표적인 그룹의 사람들이었습니
    다. 그들은 교리적으로 서로 반대이기 때문에 사사건건 다투는 원수지간입니다. 그런데도 예수님을 죽이려는 일에 하나가 되어 있습니다. 왜냐하면 둘 다 예수님과 원수가 되는 영, 악한 영을 가졌기 때문에 악한 일에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그들은 예수님께 표적을 보여 달라고 했습니다. 그동안 예수님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표시로 많은 표적을 나타내셨습니다.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도 그동안 예수님이 하시는 많은 표적을 이미 보았습니다. 그런데도 이번에는 하늘로부터 오는 표적을 보여 달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믿지 않으려는 동기, 예수님을 고소하려는 동기를 다 아셨습니다. 이렇게 믿지 않으려고 하는 사람에게는 어떤 것을 보여줘도 믿지 않습니다. 믿지 않으려는 사람의 마음에 믿지 않으려는 악한 마음이 있기 때문에 그 악한 마음이 믿지 못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은 믿지 않으려는 그 마음이 회개될 때만 믿을 수 있습니다. “형제들아 너희는 삼가 혹 너희 중에 누가 믿지 아니하는 악한 마음을 품고 살아 계신 하나님에게서 떨어질까 조심할 것이요”(히 3:12). 마음에 믿지 않으려는 악심을 품는다는 것은 살아 계신 하나님에게서 떨어져 구원에서 제외되는 것으로 엄청난 도박입니다. 그것은 믿지 못하게 하려는 악한 사단이 주는 마음을 품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 마음에 악한 것만 없어도, 마음이 겸손하고 순수하면 우리는 자연 만물을 보고도 하나님의 살아 계심을 믿을 수 있습니다. 예배드릴 때 우리는 믿으려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한 번의 예배를 통해서, 그 말씀을 통해서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구원받는 데 아무 문제가 없습니다. 예배드리는 자세가 자신의 운명을 좌우합니다. 마음을 겸손히 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자 하고 사모하고 믿고자 할 때 모든 것이 다 믿어집니다. 믿을수 없는 것도 믿어지는 것입니다.

    2) 종교인들의 문제

    2,3절에 예수님은 그들에게 너희가 날씨는 잘분별하면서 ‘시대의 표적’은 분별할 수 없느냐고
    말씀하셨습니다. ‘시대’는 ‘카이로스’로 “결정적인 하나님의 때”라는 뜻입니다. 영적으로 ‘그때’는하나님께서 자기 아들을 메시아를 보내셔서 많은 사람들이 믿도록 표적을 보이는 때를 말합니다. 예수님은 너희들이 그런 시대의 표적은 왜 모르느냐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들이 세상일에는 이치가 밝지만 영적인 일에 무지한 것입니다. 이런 사람은 하나님의 때를 따라 살지 못하고 자기 때를 따라 인생을 낭비하는 삶을 살게 됩니다. 세상적인 사람일수록 영적인 일에 분별력이 약합니다. 가장 앞서가는 사람은 하나님의 때를 따라사는 사람입니다. 왜냐하면 그 역사와 시대는 하나님이 만드시고 하나님이 주관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보다 앞서갈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세상 지식과 유행에 앞서가는 것은 하나2016년 7월 24일 주일말씀 시대의 표적을 분별하라 마태복음 16장 1-4절님의 때를 따라 앞서가는 것이 아니라 사단의 때를 따라 앞서가는 것입니다. 우리가 세상 유행에 민감하고 그것을 따라가는 데 마음을 드리면서 하나님의 일에 마음이 없다면, 지금 이 카이로스적인 표적을 이해할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성령을 따라 산다면 그때그때 하나님이 하시는 자기 시대를 분별할 수 있습니다. 왜냐
    하면 이 시대에 일어나는 일, 앞으로 마지막 때까지 일어나는 일은 하나님이 임의로 행하시는 것이아니라 이미 성경에 예언적으로 다 기록한 그 말씀을 따라 행하시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성경을 통해서 이 시대가 어떤 시대인지, 과거 현재 미래에 하나님이 어떤 일을 행하실지 시대의 표적을 분별할 수 있습니다.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 그가 스스로 말하지 않고 오직 들은 것을 말하며 장래 일을 너희에게 알리시리라”(요 16:13). 하나님의 때를 따라 시대의 표적을 분별하는 신앙을 하시기 바랍니다.

    2. 예수님의 대답

    악하고 음란한 세대
    예수님은 그들이 요청한 표적을 보여주시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문제를 말씀하시고 아예 그들을 떠나셨습니다. 
    예수님은 자기를 시험하기 위해 표적을 구하는 그들의 마음을 ‘악하고 음란한 세대’라고 표현하셨습니다. 악하다는 것은 그동안 충분히 믿을 만한 말씀과 충분히 알 만한 표적을 많이 보여주셨는데도 그것을 끝까지 믿지 않으려는 그 마음이 악하다는 것입니다. 또 간음하는 음란한 세대라는 것은 하나님보다 세상을 더 사랑하고 하나님보다 자기 영광을 더 사랑하는 것을 뜻합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실체를 너무 잘 알고 계십니다.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이 이유 없이 믿을 수 없는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믿기 원하고, 신앙이 자라기 원하고, 변화되기 원한다면 그럴 만한 마음과 자세를 해야 합니다. “간음한 여인들아 세상과 벗된 것이 하나님과 원수 됨을 알지 못하느냐 그런즉 누구든지 세상과 벗이 되고자 하는 자는 스스로 하나님과 원수 되는 것이니라”(약 4:4). 하나님은 신실하고 미쁘신 분입니다. 하나님을 가까이하고 하나님께 좋은 것으로 심는 자는 하나님도 그를 가까 이해주시고, 하나님도 그에게 좋은 것으로 열매 맺게 해주시는 좋으신 하나님이신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요나의 표적
    예수님은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구하지만 ‘요나의 표적’밖에 보여줄 표적이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요나의 표적은 예수님이 우리의 죄 때문에 십자가에 달려 무덤 속에 사흘 동안 계시다가 다시 살아나신 십자가와 부활 사건을 상징하는표적입니다. 고래 힘줄처럼 질기고, 정말 변화되지않고, 완악한 사람에게는 더 이상 어떤 말씀과 표적도 필요 없습니다. 이런 사람에게는 오직 한 가지 십자가와 부활의 표적 외에 다른 방법이 없다는 말씀입니다. 믿지 않으려는 완고한 자기 죄를 깊이 회개함으로 예수님과 함께 자기 옛사람이 십자가에 죽으면 하나님이 성령으로 죽은 그 사람을 다시 살려내어서 새로운 인간으로 거듭나게 하십니다. 이것이 십자가의 사건입니다. 변화되지 않는 모든 사람의 문제는 교만하고 완고하고 불신하는 자기 죄를 깨닫지 못하는 것입니다. 십자가가 아니면 아무도 자기 죄를 깨달을 수 없습니다. 그것은 성령으로만 됩니다. 성령을 받으면 성령이 자기 죄를 깨닫게 해줍니다. 성령이 회개의 영을 주셔야 회개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 신앙의 모든 문제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만나면 끝납니다. 자기 죄를 깊이 깨닫고 통회 자복하면 그 인생이 달라질 것입니다.

    지금은 영적으로 깨어 카이로스적인 표적을 따라가야 합니다. 
    이 시대에 하나님이 무슨 일을 하시고, 지금 성령께서 교회에 어떤 일을 하시는지, 그리고 하나님이 나에게 두신 뜻과 계획이 무엇인지, 하나님이 내가 무엇을 하기 원하시는지 알아야 하나님의 때를 따라 살 수 있습니다. 
    도적이 빼앗아간 것을 되찾을 때는 빼앗긴 것만 되찾는 것이아니라 잃어버린 것에 7배로 되찾아올 것입니다. 

    시대의 표적 / 적그리스도의 출현(데살로니가후서 2:1-12)

     적그리스도정치와 경제와 종교를 하나로 묶을 것이다.
    오늘은 급박하게 돌아가는 경제 상황을 보면서 “시대의 표적 : 적그리스도의 출현”

    구원이라는 영적인 문제를 빼면 먹고사는 것이 사람에게 가장 중요한 문제이다.
    이것은 한 마디로 경제 문제이다. 
    좋은 정치는 경제생활의 윤택을 가져온다.
    전쟁이나 비상 상황이 아닌 한 좋은 경제를 약속하는 사람이 대통령, 국회의원이 될 것이다.
    그래서 빈 공약을 남발한다. 내용은 모두 무상으로 해 준다는 것이다.
    국가가 다 해준다는 것, 참으로 듣기에 좋은 말 같지만 국가는 그런 것을 해결하는 기관이 아니다.
    모두가 각각 자유롭게 장사해서 이득을 취해 경제 활동을 해야 한다.
    자유로운 시장 경제 황동이 보장되는 자본주의가 성경적이지만 여기에는 늘 병폐가 있다.
    돈을 가진 자들이 갖지 못한 자들을 배려해야 잘 굴러간다. 그런데 이것이 늘 문제이다.
    그래서 성경은 율법에서도 항상 가난한 자들을 배려하라고 말한다.

    신명기 15:7-11

    이런 배려가 이루어지지 않으면 문제가 발생한다. 그것이 양극화 현상이다.
    양극화는 이미 성경에 예고되어 있다.

    야고보서 5:1-6


    양극화: 대륙과 대륙, 국가와 국가, 도시와 도시, 도시와 시골, 교육, 재정, 휴가 등
    양극화로 인해 획일화 되는 것은 더 큰 문제이다.
    그것이 바로 공산주의요, 더 좋은 말로는 사회주의이다.
    부자들에게 이런 것을 부추기는 것이 바로 인본주의 진화론이다. 약육강식, 적자생존
    아이들이 이런 교육을 받으므로 남에 대한 배려가 없다.
    그래서 반발 작용으로 민중은 사회주의/공산주의 획일화 꿈에 빠지게 된다.
    앞으로 온 세상에서는 자본주의 양극화의 부자 계층과 사회주의 민중 계층의 갈등이 곳곳에서 생긴다.
    왜 이런 문제가 발생할까?
    사람들이 남과 자기를 비교하기 때문이다. 첫 아담의 후손들은 언제나 욕심에 이끌려 산다.
    딤전6:3-10
    우리 자녀들이 자기의 모든 분야에서 열심히 노력해서 성공하기를 원한다.
    그리고 남을 배려하는 아이들이 되기를 원한다. ★★★
    하나님은 공산주의 하나님이 아니다. 자유주의 시장 경제의 하나님이다. 그런데 배려가 있어야 한다.
    적그리스도의 등장
    앞으로 이 세상에는 적대 관계가 심화될 것이다. 사람들이 먹고사는 문제로 폭동을 일으키고 가난한
    자들의 불만이 극도로 표출되는 시대가 바로 적그리스도의 시대이다.
    경제적인 어려움으로 인한 사회 갈등, 영적 피폐 현상
    이때에 이 모든 문제를 일시에 해결해 주겠다고 나서는 자가 등장할 것이다. 적그리스도
    국가와 국가의 갈등: 정치적 수완
    경제적 갈등: 경제적 수완
    “은혜와 진리가 충만한” 사랑침례교회, 032-664-1611, www.cbck.org
    영적 피폐: 종교적 수완
    창3:15 여자의 씨, 뱀의 씨 사이의 갈등
    구약 시대에 여러 사람이 적그리스도의 예표로 등장해서 하나님의 백성을 핍박하였다.
    적그리스도(Antichrist): 그리스도를 반대하는 자
    살후2:3-10, 네 가지 이름, 죄의 사람, 멸망의 아들(3), 불법의 신비(7), 저 사악한 자(8)
    죄의 사람: 중세에서는 교항을 가리켰다. 저 사악한 자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성품의 신비(딤전3:16), 적그리스도는 그 반대인 불법의 신비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셨으므로 적그리스도는 사탄의 분신인 멸망의 아들이어야 한다.
    적그리스도를 의미하는 ‘불법의 신비’의 특징은 다니엘에게 계시되었다(단7:7-8).
    앞으로 일어나야 할 왕, 큰일들을 말하는 입, 놀라운 지혜와 대단한 웅변력을 소유한 사람
    그는 대담하고 오만하며 교활한 박해자로서 때와 법을 변경시키려 할 것이고
    지극히 높으신 분의 백성들 즉 다니엘의 백성인 유대인들을 3년 반 동안 다스린다.
    그 후에 그는 그 권세를 빼앗길 것이다(단7:23-26).
    그는 마지막 때에 무서운 용모를 하고 난해한 문장들을 깨닫는 왕으로 일어나지만 자신의 권세로
    인한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사탄이 그 안에 내주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는 엄청난 파괴력을 갖고 크게 번성하며 강한 자들과 거룩한 백성 즉 유대인들을 멸하고 자신의
    정책을 통하여 자기 손에서 교활한 술책을 일으킬 것이다. 그리고 자기 마음속에서 자신을 높이고(살후
    2:3-4) 위장된 평화로 많은 것을 파괴하며(8:25) 또 통치자 중에 통치자이신 그리스도를 대항하여
    설 것이나 사람의 손에 의하지 않고 멸망할 것이다(단8:23-25).
    한 마디로 불법의 신비 즉 적그리스도는 사탄의 초능력 인간일 것이다.
    그는 거듭나지 않은 사람들을 미혹할 수 있는 놀라운 재능과 매혹적인 힘과 여러 방면에 능한 업적들,
    초자연적인 지혜, 놀라운 통치력과 행정능력을 가질 것이다. 또한 그는 완벽한 아첨꾼, 뛰어난 외교가,
    최상의 전략가로서 사람들 가운데 가장 두드러지게 될 것이다.
    그는 위대한 인도주의자, 사람들의 친구, 유대인들의 특별한 친구로 가장하여 자신을 대언자들이
    예언한 황금시대로 인도하러 온 사람이라고 말하며 유대인들을 설득할 것이고 유대인들은 그를 자신들
    의 메시아로 받아들일 것이다.
    그는 강력한 기만술과 변치 않는 성공으로 사람들을 도취시킬 것이며 그리스도의 부활을 흉내 내어
    살해당했다가 죽은 자들로부터 다시 일어날 것이다(계13:3).
    그때에도 그는 이러한 권세들 중 어느 것도 잃지 않을 것이다. 그는 7년 환난기 동안 통치할 것이지만
    종말에는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지구에 다시 오셔서 그의 연합 군대들을 쳐부수실 것이고 거짓
    대언자와 함께 그를 산채로 불 호수에 내던지실 것이다(계19:19-20).
    적그리스도가 나타나는 때
    사람들이 양극화의 갈등 속에서 평화를 구하는 때
    종교의 피폐함 속에서 영적인 쾌락을 구하는 때(살후2:4)
    그의 표적들과 기적들(2:9-10)
    이때에는 깨닫는 자가 많지 않다(2:11-12). ★★★
    결론
    요즘 일어나고 있는 일련의 정치, 경제, 종교 상황들을 보면서 깨달아야 한다.
    양극화, 무상복지 포퓰리즘, 종교일치운동, 미국의 쇠퇴, 이스라엘 압박, 중동과 중국, 러시아의 부상
    유럽의 갈등
    시대의 표적들을 유심히 보면서 하늘보고 살아가야 한다.
    아이들과 함께 내 주변을 살피자.
    배려하는 그리스도인(교회)
    세상에서 바른 것을 추구해야 한다: 자유주의 시장 경제, 무상 복지 포퓰리즘에 빠지면 안 된다.
    내일 적그리스도가 나타나도 오늘 우리가 할 것은 해야 한다.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만 있으면 안전하다. ★★★




    시대의 표적을 분별하라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이 와서 예수를 시험하여 하늘로부터 오는 표적 보이기를 청하니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가 저녁에 하늘이 붉으면 날이 좋겠다 하고 아침에 하늘이 붉고 흐리면 오늘은 날이 궂겠다 하나니 너희가 날씨는 분별할 줄 알면서 시대의 표적은 분별할 수 없느냐

    I. 들어가는 말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은 “하늘로부터 오는 표적”(또 세메이온 엑 뚜 우라누; to shmeion e*k tou ou*ranou)을 구했습니다. 이에 예수께서는 그들이 천기는 분별하면서 “시대의 표적”(또 세메이온 똔 까이론; to shmeion twn kairwn)을 보지 못하느냐고 꾸짖으셨습니다. “하늘로부터 오는 표적”이나 “시대의 표적”은 동일한 말이라고 볼 수 있을 것입니다.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은 천기는 분별하면서 “하늘로부터 오는 표적,” 즉 “시대의 표적”이 바로 자기들 눈앞에 서 있는 것을 분별하지 못한 것입니다. 그 시대의 “하늘로부터 오는 표적”은 바로 예수님이셨으며, 예수님은 하나님께서 세상의 구원자, 그리스도로 보내신 구원의 시대의 표적이셨습니다.

        각 시대에는 그 시대를 대표하는 표적이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오늘날 우리에게도 “시대의 표적”을 분별하지 못하느냐?라고 물의시며 “분별하라!”고 명령하고 계십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분별해야 할 시대의 표적은 무엇일까요?

    II. 자유와 평등에 대한 과거와 현재의 두 흐름

        10월 27일에 광화문 광장에 한국 교회의 100여만 명의 교인들이 함께 모였습니다. 왜, 모였을까요? 포괄적 차별금지법 제정을 반대하고 막기 위해서입니다. 차별금지법이 무엇인가요? 그것은 간단하게 말하자면, “모든 인간은 무엇이든 할 수 있고, 무엇이든 될 수 있는 자유가 있으며, 그 자유를 마음껏 누릴 수 있게 되는 것이 인간의 발전이며 진보다. 남성이 여성이 될 수 있는 자유가 있고, 여성이 남성이 될 수 있는 자유가 있고, 남성과 남성이 여성과 여성이 사랑을 나눌 수 있는 자유가 있고, 모든 인간은 평등하니 모든 사람이 그런 자유를 똑같이 동등하게 누리도록 교육하고 살게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 광장에 모인 그리스도인들은 그런 자유와 평등을 반대하고 나선 것입니다. 왜 그들은 그런 자유와 평등을 반대하는 것일까요? 그들은 “성경이 사람이 남자와 여자로 구별하여 창조되었고, 한 남자와 한 여자가 사랑하고 자녀들을 낳는 한 가정을 이루어야 한다고, 남자와 남자가 그리고 여자와 여자가 서로 사랑하는 것을 금하고 있기 때문이다”라고 대답합니다. 성경은 자유와 평등을 반대할까요? 성경은 자유와 차별 없는 평등을 말합니다.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요한복음 8:32) “그러므로 아들이 너희를 자유롭게 하면 너희가 참으로 자유로우리라.”(요한복음 8:36) “거기에는 헬라인이나 유대인이나 할례파나 무할례파나 야만인이나 스구디아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 차별이 있을 수 없나니 오직 그리스도는 만유시요 만유 안에 계시니라.”(골로새서 3:11) 광화문에 모인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에 기초하여 남성과 여성으로 구별하여 창조된 질서 안에서,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개인의 자유와 평등을 추구하는 것입니다. 그들은 모든 사람들이 자유와 평등을 누릴 수 있는 이유는 모든 사람 개개인이 하나님의 형상을 닮게 창조된, 침범당할 수 없는 존엄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라고 대답합니다.

        그렇다면, 차별금지법 제정을 찬성하는 사람들은 기독교인도 아니고, 성경도 보지 않는 사람들일까요? 한국의 모든 교인들이 다 광화문에 모이지는 않았습니다. 한국 기독교 교인들 중에는 차별금지법 제정을 찬성하는 사람들이 있는 것입니다. 그들이 읽는 성경은 광화문에 모인 그리스도인들이 보는 성경과 다를까요? 시각적으로 보자면, 아닙니다! 반대자들이나 찬성자들이나 똑같은 한국성서공회에서 펴낸 성경을 육체적 눈으로 봅니다. 그러나 학적으로 보자면, 그렇습니다! 반대자들과 찬성자들은 같은 성경을 서로 다른 마음의 눈으로 봅니다. 찬성자들은 반대자들이 그 근거로 제시하는 성경이 사람을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존재, 남성과 여성으로 구별되어 창조된 존재라는 것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왜, 그럴까요? 찬성자들은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다고 주장하고, 남성과 여성으로 창조되었다고 주장하는 창세기는 모세가 그 시대에 쓴 것이 아니고 서로 다른 자료들과 고대의 편집자들에 의해 다윗 시대 이후에 써지거나 구전된 것들에 의한 것이기 때문에, 그런 주장은 각종 자료들과 구전들을 자기 생각 안에서 짜깁기 했던 어떤 고대의 특정 편집자의 신학에 불과하다고 생각합니다. 찬성자들은 실제로 하나님이 사람을 자기 형상대로 창조한 것도 아니고, 남성과 여성으로 구별하여 창조한 것도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들은 각 개인의 존엄성을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된 것에서 찾지 않습니다.

        차별금지법 찬성자들이 추구하는 인간의 자유와 평등은 어디에 그 근거를 두는 것일까요? 더 멀리 갈 수 있겠지만, 500여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 봅시다. 당시 유럽은 두 가지 중요한 흐름이 일어났습니다. 종교개혁과 인문주의가 그것입니다. 두 흐름 다 크리스텐덤(Christendom)이라는 전체주의적 중세 기독교 세계에서 탈피하여 개개인의 자유와 평등을 추구했습니다. 루터를 통해 대표적으로 표출된 흐름은 성경에 기반을 둔 개개인의 신앙의 자유와 모든 신자들의 평등한 제사장 됨을 주장했습니다. 반면에 인문주의는 인간중심의 헬라문명의 재조명을 통한 개인의 자유와 평등을 주장했습니다.

        성경에 기반을 둔 개인의 신앙의 자유와 평등을 추구했던 그리스도인들은 자유를 찾아 북유럽으로, 아메리카 신대륙으로 이주했습니다. 그리고 그곳에 성경적 신앙의 자유와 평등이 꽃피고 열매 맺는 천년왕국을 건설하려 했습니다.

        반면에 헬라문명을 기반으로 한 개인의 자유와 평등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프랑스 혁명을 일으켰습니다. 그들은 신을 포함한 과거의 모든 권위를 무너트리고 그 최고 존재의 자리인 왕좌에 계몽주의적 이성을 앉혔습니다. 칸트의 이성관으로 대표되는 계몽주의적 이성은 밖에 있는 본질을 알 수 없고, 인간의 몸의 감각기관들을 통해 감지되는 것들만을 인식할 수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인간의 순수이성이란 초월적이고 신적인 것을 인식할 수 없게 되었고, 신은 인간의 실천 이성이 도덕적 필요를 위해 요청한 것에 불과한 존재가 되었습니다. 그들은 그런 이성의 한계 내에 있는 성경, 그런 이성의 한계 내에 있는 종교를 추구했습니다.

        칸트적 순수이성으로 성경을 보자는 것이 소위 문서비평, 편집비평, 양식비평, 신문학비평 등을 포함하는 역사비평, 고등비평입니다. 계몽주의적 이성의 한계 내에서 성경을 보면 신의 인간 역사로의 개입은 알 수 없는 불가지의 것, 불가능한 것이 됩니다. 창조, 예언, 신유, 이적들은 실제로 일어난 적이 없는 신화가 됩니다. 그들에게 성경에 남는 것은 인간이 투사된 신입니다. 신은 인간의 투사에 불과한, 인간이 가공하여 만들어낸 허상에 불과합니다. 그래서 그들에게 인간화된 신이, 인간이 만든 신이 인간을 창조했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 황당한 것입니다.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되었다는 것은 인간이 인간의 기원을 신화적으로 표현한 것에 불과하게 됩니다. 인간이 남성과 여성으로 구별되어 창조되었다는 것도, 사실이 아니라 인간이 만든 J자료 E자료 등 서로 다른 여러 문서들이나 구전들의 짜깁기 또는 편집의 결과이며, 인간 자신 안의 분열을 신화적으로 표현한 것에 불과하게 됩니다. 그들에게 인간의 자유와 평등은 신의 지배나 간섭을 받지 않는, 신에 의해 창조되지 않은 자연적 존재로서 개인의 자유와 평등입니다. 이런 자유와 평등은 사회주의, 공산주의의 기반이 되었습니다.

        성경에 기반을 둔 개인의 신앙의 자유와 평등을 찾아 배를 타고 대서양을 건넜던 사람들이 세운 미국, 그 미국의 대표적 항구 뉴욕항, 그 입구에 자유의 여신상이 서 있습니다. 프랑스가 미국의 독립을 기념하며 미국에 기증하며 세워준 것입니다. 성경은 하나님 이외에 다른 신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하물며 아세라를 연상시키는 여신은 더더욱 그렇습니다. 자유의 여신상은 미국의 상반되는 두 얼굴을 상징합니다.

        한 얼굴은 미국을 성경에 기초하여 자유롭게 평등하게 하나님을 섬기는 천년왕국으로 만들기 위해 하나님 앞에서 겸비하고 각성하여 1차 대각성운동을 일으켰습니다.

        다른 얼굴은 신을 제거한, 하나님을 제거한 인간 자신만의 자유와 평등을 추구했습니다. 이 흐름은 프랑스 혁명을 통해 표출된 계몽주의적 이성을 왕좌에 앉힌 개인의 자유와 평등을 최고의 가치로 여겼습니다. 그리고 19세기 말엽에 유럽에서 성경에 대한 고등비평을 받아들였습니다. 성경은 인간끼리 서로를 사랑하라는 메시지만 남은 도덕적 교훈서가 되었습니다. 19세기 말엽과 20세기 초엽에 미국에서는 하나님을 쫓아낸 인간 자신의 자유와 평등이 판치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일에 최선을 다하여 부를 창출해내어 자본주의를 정착시켰으나, 그 중심에서 하나님이 제거되었고, 그 자리에 인간의 한없는 욕심이 들어앉았습니다. 창조론을 비웃는 진화론이 미국을 점령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사회주의, 공산주의가 미국에 상륙했습니다.

        미국을 하나님을 자유롭고 평등하게 예배할 수 있는 천년왕국으로 만들고자 노력했던 사람들은 절망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의 눈과 마음에 미국과 세계는 하나님이 개입하여 정리하기 전에는 돌이킬 수 없이 망가진 종말적 상황에 빠졌습니다. 그들은 왕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심판자로 재림하셔서 이 참담한 상황을 바꾸어 주시기를 기도했습니다. 그들의 기도는 제2차 대각성운동을 일으켰습니다. 그 각성운동, 성결운동 가운데서 오순절운동이 일어났습니다. 그런 각성운동은 전 세계에 영향을 주어 선교운동을 일으켰습니다. 미국과 전 세계에 교회들이 급격하게 설립되었습니다. 그 시기에 한국에도 그리스도가 본격적으로 전해졌습니다. 그리고 한국 교회는 큰 부흥을 경험했습니다.

        그런데 인간 중심의 자유와 평등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사라졌을까요? 유럽에서 외형상으로 공산주의 체제는 무너진 것 같지만, 오히려 포스트모더니즘, 페미니즘, 젠더, 동성애, 기본소득, 공유, 공공 사회보장 등등의 문화적 맠스주의, 첨단 기술을 바탕으로 한 디지털 레닌주의 등으로 변환되어 유럽과 그곳의 신학교들과 교회들을 점령했습니다. 2차 대각성운동은 그들을 잠시 억누르는 것 같았지만, 그들은 더 커져 미국을 삼켰습니다. 공교육 기관들에서는 창조론이 배격되고 진화론만 자리 잡게 되었습니다.

        한국에도 이 두 흐름이 존재해 왔습니다. 2000년대 이전에는 성경에 기반을 둔 자유와 평등이 대세였지만, 이제 하나님을 배제하고 진화론에 기반을 둔 인간만의 자유와 평등이 활개를 치고 있습니다. 포괄적 차별금지법 제정 시도와 그리스도인들의 10월 27일 광화문 집회는 두 흐름의 격돌입니다. 현재 미국의 대선도 바로 이 두 흐름이 맞붙는 전장이 되고 있습니다. 유럽은 이미 포괄적 차별금지법이 제정되며 싸움이 끝났습니다. 성경에 기반을 둔 자유와 평등이 패배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미래는 어떻게 전개될까요?

    III. 미래 시대의 표적

        세계는 인공지능(AI), 로봇으로 대표되는 4차 산업혁명시대로 접어들었습니다. 로봇은 인간화되고, 인간은 로봇화되고 있습니다. 로봇은 점차 그러나 빠르게 인간을 닮아가고 있습니다. 인간의 몸에는 착용하는 로봇을 비롯하여 인공심장 등 인공장기, 인공 뼈들이 심어지고 있어, 인간의 몸은 로봇화되고 있습니다. 그러다 어느 시점, 특이점에 도달하면, 무엇이 로봇이고, 무엇이 인간인지 구별할 수 없게 될 것이라고 예상합니다.

        이때 남성과 여성의 구별은 불필요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로봇들이 인간 대신 노동을 하게 되면, 사람은 거의 불필요하게 됩니다. 그래서 인구 감축이 필요하답니다. 트렌스젠더, 동성애가 일반화되어 여성과 여성이 남성과 남성이 결혼하면 인구증가를 막게 된답니다. 세계는 평등하게 남성도 여성도, 국가도 사라진, 모든 차별이 사라진 하나가 될 거라는 것입니다.

        소수의 엘리트들을 제외한 대부분의 인간은 사유재산을 잃고 기본소득만 받고 사는, 일거수일투족이 CCTV, 각종 디지털 기기에 의해 감시당하고 통제되는 가축으로 전락할 것입니다. 모든 차별이 사라진 평등한, 그러나 획일화되고 자유가 없는 세상이 도래하는 것입니다. 성경은 문학서적, 신화책이 되어 평범한 고서가 되어 버리고, 기독교는 세계의 단일종교로 흡수될 것입니다. 하나님을 배제한 인간만의 자유와 평등 추구는 더욱더 고도화되어 결국, 자유가 상실된 평등만이 남게 될 것입니다.

        인간 중심의 자유와 평등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이것을 인류의 진화, 진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들에게 하나님 중심의 자유와 평등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극우, 인류의 진보를 이해하지 못하는 어리석은 자들, 인류의 진화를 가로막고 있는 장애물이 되고 있습니다. 따라서 이 시대의 표적은 인공지능과 로봇, 인간 중심의 자유와 평등일 것입니다.

    IV. 대응책

        이런 시대에 그리스도인들은 어떻게 해야 할까요? 첫째는 성경을 있는 그대로 읽으며, 하나님의 지혜와 성결과 능력을 구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신학교에서 고등비평, 역사비평, 문서비평, 편집비평, 양식비평, 신문학비평을 쫓아내야 합니다. 둘째는 이런 시대를 일시라도 저지하고, 나아가 그 방향을 바꿀 수 있는 강력한 부흥을 갈구해야 합니다.

        이 두 가지는 이미 가깝게는 100년 전에 2차 대각성운동에 참여했던 성도들과 찰스 파함과, 윌리엄 시무어, 윌리엄 더함 등 초기 오순절지도자들과 그들과 함께 했던 그리스도인들이 했던 일이기도 합니다. 그들은 고등비평에 물들지 않은 중생, 성화, 성령침례, 신유, 재림을 포함하는 Full Gospel을 성경에서 회복시켰습니다. 그리고 동양인들은 Full Gospel을 고등비평에 의해 물들지 않은 “순복음”으로 번역했습니다. 이 두 가지를 해내어 인공지능과 로봇으로 대표되는 4차산업혁명이 인간 중심의 자유와 평등을 구현하려 하는 방향을 틀어 하나님이 원하시는 방향으로 진행되도록, 성경에 기반을 두는 개인의 자유와 평등이 실현되는 방향으로 진행되게 해야 합니다.

    V. 나가는 말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에게 “시대의 표적을 분별하라”고 명령하십니다. 시대는 반성경적이고 적그리스도적인 시대가 되었습니다. 세계의 대부분은 인공지능, 로봇, 동성애, 트렌스젠더, 공유, 나눔으로 표현되는 하나님을 배제한 인간 만의 자유와 평등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어렵지 않은 시대가 없었지만, 우리에게 펼쳐질 미래 시대만큼 어려운 시대는 없을 것입니다. 그야말로 순교적 신앙을 갖지 않으면, 견뎌낼 수 없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성경을 참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으며, 인간 개개인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존귀한 존재라는 것을 믿는, 그리스도 안에서 자유롭고 평등한 그리스도인들은 이런 시대의 표적을 분별하며 개개인이 대각성하고(Great Awakening), 세계의 대부흥을 기도해야 합니다.




    시대의 표적 마16:1-4 

    1. 1절/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이 와서 예수를 시험하여 하늘로부터 오는 표적 보이기를 청하니

    바리새인<평신도, 개혁을 요구하는 경건주의, 회당중심>과 사두개인<제사장직, 귀족주의, 성전중심, 로마와 협력>들은 교리적으로나 정치적 입장에 있어서 서로 대립하고 있던 자들임(cf. 행23:6-8). 이 두 집단이 함께 예수를 시험하고자 하늘로부터 오는 표적 보이기를 청함.

    이전에 서기관과 바리새인 중 몇 사람이 예수에게 표적을 구했던 적이 있음(마12:38). 이때 주님께서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구하나 선지자 요나의 표적 밖에는 보일 표적이 없다”고 하시며(39절), “요나가 3일 동안 큰 물고기 뱃속에 있었던 것같이 인자도 3일 동안 땅 속에 있을 것이다(40절). 심판의 날에 요나의 전도에 온 민족이 회개했던 니느웨 사람들이 일어나 이 세대 사람을 정죄할 것이며, 솔로몬의 지혜를 직접 보고자 예루살렘을 방문했던 스바 여왕이 그날 이 세대 사람을 정죄할 것이다”라고 하심(41-42절). 이같이 예수의 외침에 귀를 닫고 있는 당시 유대인들의 상태는 구약 시대 이스라엘 보다 더 비참한 상태에 놓여 있었음(43-45절). 오늘날 기독교의 상태 역시 예수님 당시 유대인들보다 더 처참한 상태라 할 수 있음.

    당시 유대교 신앙을 주도하고 있던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에게 유대교를 부정하고 정죄하고 있는 예수는 그들의 공공의 적이었음. 예수를 따르는 무리들이 점차 늘어가자 이들이 예수의 흠을 찾는 일에 손을 잡은 것임. 그들은 예수가 하늘로부터 오는 표적(로마 식민지로부터 유다를 해방시키는 일, 모세가 행한 출애굽, 만나 표적 같은 일, 요6:31)을 행할 수 없는 자라는 것을 확신하고 있음. 이러한 표적(하늘로부터 오는 표적, @만이 행할 수 있는 표적)을 구할 때 마다 이런 저런 핑계를 대며 그 상황을 모면하기만 하고 있는 예수를 보며 다시 한번 하늘로부터 오는 표적을 요구한 것임. 이를 통해 예수가 병을 고치는 일로 사람들을 미혹하여 자기를 따르게 하고 있는 사기꾼임을 사람들에게 보여주고자 한 것임(cf. 행5:35-37).

    2. 2-4절/ 16:2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가 저녁에 하늘이 붉으면 날이 좋겠다 하고 16:3 아침에 하늘이 붉고 흐리면 오늘은 날이 궂겠다 하나니 너희가 날씨는 분별할 줄 알면서 시대의 표적은 분별할 수 없느냐 16:4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구하나 요나의 표적 밖에는 보여 줄 표적이 없느니라 하시고 그들을 떠나 가시니라

    하늘의 표적을 요구하는 그들에게 “너희가 저녁에 하늘이 붉으면 날이 좋겠다 하고 아침에 하늘이 붉고 흐리면 오늘은 날이 궂겠다 하는 등 날씨는 분별할 줄 알면서 어찌하여 시대의 표적은 분별할 수 없느냐”라고 하심. 그리고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구하나 요나의 표적 밖에는 보여줄 표적이 없다” 라는 말씀을 하시고 그들을 떠나 가심.

    날씨는 분별할 줄 알면서 어찌하여 시대의 표적은 분별하지 못하느냐? 라고 하심. 이 세상에 속한 자들은 이 세상의 표적을 분별하며 살아감(예, 전쟁 징후, 경제 지표, 기후 상황). 그러나 하늘에 속한 신자는 시대의 표적을 분별하며 살아야 함.

    주님은 지금까지 많은 표적을 보여주셨음. 이런 표적을 보이심은 예수가 @의 아들 그리스도임을 믿고 그 이름을 힘 입어 생명을 얻게 하기 위해서였음(요20:30-31). 성경을 바로 알았더라면 예수가 보인 이 표적들을 보고 예수가 약속된 그리스도라는 것을 헤아릴 수 있었음. 성경은 메시아 시대의 표적을 말해 놓고 있음. 아침에 하늘이 붉고 흐리면 그날 날이 궂겠구나 라고 날씨를 분별하듯, 지금 예수가 행하는 표적을 보면 그것이 구약에 약속된 메시아 시대의 징조라는 것을 알 수 있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이를 보지 못하고 있음. @의 영이 떠난 인간은 @의 일에 1도 관심 없음(고전2:14).

    성경이 말하고 있는 메시아 시대 표적 중 대표적인 것이 사35장임. “35:5 그 때에 맹인의 눈이 밝을 것이며 못 듣는 사람의 귀가 열릴 것이며 35:6 그 때에 저는 자는 사슴 같이 뛸 것이며 말 못하는 자의 혀는 노래하리니 이는 광야에서 물이 솟겠고 사막에서 시내가 흐를 것임이라”(사35:5-6). 이 구약의 예언이 지금 그들 눈 앞에 그대로 실현되고 있음.

    예수에 의해 맹인의 눈이 밝게 되고, 못 듣는 사람의 귀가 열리고, 저는 자가 사슴 같이 뛰는 일이 벌어지고, 말 못하는 자의 혀가 열려 @을 찬송하는 일이 벌어지고 있음(cf. 행3:1-8). 물 없는 광야에서 물이 솟고 사막에서 시내가 흐를 것이라는 것은 400년간 닫혀 있던 @의 계시가 세례 요한의 등장으로 쏟아지기 시작한 것을 말함. 성경이 말하고 있는 메시아 시대의 모든 징조가 그들의 눈 앞에 벌어지고 있음. 예수님이 말씀하신 시대의 표적이란 예수가 그리스도임을 알아 볼 수 있는 표적을 말함. 이런 명백한 시대의 표적에도 불구하고 유대인들은 예수를 그리스도로 보지 못하고 예수에게 다른 표적을 구하고 있음. 이들을 향해 악하고 음란한 세대라 표현하심. ‘악하고 음란한 세대’란 세상을 사랑하는 @의 언약 백성을 말함(약4:4).

    이 세상에 마음이 빼앗긴 자에게 시대의 표적은 보이지 않음(예, 삼손, 삿16:20). 우리의 싸움은 세상 것에 마음이 빼앗기지 않도록 내 마음을 지키는 싸움임(요일2:15-16). 이스라엘은 @의 선하심을 맛본 민족임. 그들은 @의 언약 안에서 세상에 속한 자들과 달리 @의 약속을 의지하며 살아야 하는 거룩한 민족이었음. 그런데 그들은 다른 민족들과 같이 세상을 사랑하는 길로 나아갔음. 이러한 이스라엘과 @은 치열한 싸움을 하시며 그들을 언약 안으로 이끄셨음. 그러나 그들은 세상 사랑하기를 포기하지 않았음. 이러한 이스라엘을 @께서 음녀(창녀)로 칭하시고 호되게 징계하심(호1:2, 9-10절). 바벨론 포로 되게 하시면서까지 그들을 책망하시며 다시 약속의 땅으로 이끄심. 그러나 이런 모든 @의 일은 허사였음. 이것이 인간의 실상임. 육신이 된 인간은 @의 교훈을 받지 않음. @의 일에 1도 관심 없음. 이방인이나 이스라엘이나 하나도 다르지 않음.

    이러한 이스라엘에 예수가 등장하심. 산상수훈을 통해 그들의 신앙관이 어떻게 잘못되었는지 가르치시고 이제 자신의 말을 듣고 행하라고 하심(마7:24). 이스라엘의 실패는 @의 말씀 듣는 법을 배우지 못했다는데 있음. 이들이 @의 말씀 듣는 법을 배웠다면 예수가 행한 표적들을 통해 예수가 그리스도임을 알아 차렸을 것임. 이것이 시대의 표적임. 그러나 그들은 여전히 시대의 표적을 분별하지 못함. 이같이 육신에 속한 인간은 영의 일을 분별 못함. 인간은 육에 속한 설교에 반응함. 주님의 말씀은 영임(요6:63). 영이란 @의 뜻을 말함. 이는 @의 영 안에서만 분별됨. 율법을 따랐던 유대인들은 영의 말씀을 알아 듣지 못했음. 주님의 가르침은 인간의 의에 대한 정죄였음. 천국은 인간의 의가 아닌 다른 의 즉 @의 의로 가는 나라임을 선포하셨음(롬1:17, 롬3:21-22). 그러나 바리새인의 눈엔 인간의 의만 보일 뿐임. 성경이 말하는 어린 아이란 이같이 의의 말씀을 경험하지 못한 자들을 말함(히5:12-13).

    어린 아이는 자신만 생각하고(자기 행위), 자신이 남보다 낫다고 생각함. 신앙행위, 열심을 내세우는 자들이 인간의 눈에는 어른으로 보이지만 @께는 어린아이임. 바리새인이었던 바울 역시 어린아이였음(빌3:6, 롬2:17-20). 눈에 비늘(자기 의)이 벗겨지자 자기 의를 내세웠던 자신이 얼마나 유치한 어린 아이였는지 보게 됨. 회개의 열매가 맺힌 것임(히5:14 지각을 사용함으로 연단을 받아 선악을 분별하는 자가 됨). 이들이 시대의 표적을 분별하는 자임. 육의 관점에서 영의 관점으로 전환!

    예수님 당시 유대인들이나 오늘날 기독교인들이나 세상에 속한 표적을 구할 뿐임. 인간은 육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함. 예수님은 이러한 세대에 요나의 표적 말고는 보일 표적이 없다고 하심. 요나의 표적이란 물고기 뱃속에서 요나가 경험한 사건을 말함. 자기 의로 충만한 요나를 물고기 뱃속에서 죽음을 맛보게 하심(욘2:2 스올의 뱃속). 사망의 자리에 놓인 요나. 그가 그토록 자랑했던 자기 의는 @앞에서 아무 효력도 없었음. 그를 살린 것은 @의 긍휼이었음. 이스라엘은 @의 긍휼로 사는 자들이었음. 예수께서 행하신 모든 표적은 @의 긍휼을 보이는 표적들이었음. 이것이 예수님이 말씀하신 시대의 표적임.

    성경은 육이 아닌 영임. 예수님의 말씀 역시 영임. 영으로 성경을 보아야 함. 육으로 성경을 보면 성경의 문자에 갇히게 됨. @의 관심사는 우리를 죄로부터 구원하시는 일임. 우리가 @과 원수된 자로 존재하는 것은 죄 때문임. 죄 아래서 태어난 인간은 @이 없는 세상이 천국임. 이것이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상의 실상임. 예수님은 이러한 세상에서 우리를 불러내어 @의 나라를 보게 하심. @의 영을 보내 눈의 비늘을 벗기시고 죄 아래 놓여 @과 원수된 삶을 살아가는 내 자신의 영적 모습을 보게 하심. 사람들은 이 세상을 바라보며 살 수 밖에 없음. 그러나 @의 영이 임한 우리는 죄 안에 갇힌 나와 죄에서 구원하시는 예수가 보임. 시대의 표적을 분별하는 성한 눈이 주어진 자들임. 마6:22-23절을 읽고 마치겠음.



    시대의 표적 (마태복음 16:1~4)

    흔히 우리가 살아가면서 주고받는 말 가운데 ‘지구촌’이라는 말을 하고, 듣게 됩니다. ‘촌’이라고 하는 말 자체는 참으로 순박하고, 아름답고, 격이 없이 가까이 함께 사는 마을을 뜻합니다. 흔히 도시 사람들은 ‘향촌’이란 말로 산촌의 자기 고향을 생각하기도 합니다. 별로 문명과는 관계가 없이 오순도순 살아가는 시골의 풍경과 삶을 생각나게 하는 말입니다.
    이러한 개념의 ‘촌’에다가 ‘지구촌’ 혹은 ‘지구촌 마을’이라는 말을 쓰고 보면 어딘가 격에 어울리지 않는 감마저 일어납니다. 그럼에도 거침없이 진보하고 있는 인간의 지식은 마침내 산업사회를 만들고, 문명사회를 만들어 내면서부터 ‘지구촌’이라고 하는 말을 곁들여 사용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이 말은 멀고도 먼 나라들을 이웃처럼 가깝게 만들어 서로 오고가면서 상부상조하는 이 시대의 새로운 국제관계를 나타내는 낭만적 표현 중에 하나라고 생각합니다. 세계가 1일 권내에 접어들고, 온갖 통신망과 매스컴들의 역할을 통해 언제 어디서나 크고도 넓고, 멀고도 긴 지구안의 사람들의 소식과 모습과 삶의 양태들을 안방에 앉아서 듣고 보는 시대이고 보면, 세계를 가리켜 ‘지구촌’이라고 하는 향수 섞인 말을 할만 한 것 같습니다.

    Ⅰ. 우리는 지금 국제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국제’(International)란 나라와 나라 사이의 관계를 나타내는 말입니다. ‘국제간’이란 나라와 나라가 서로 교제하는 사이를 뜻합니다. 이것은 오늘 세계 인류의 공존을 특징짓는 역사의 한 표현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사실상 국제 역사시대를 호흡하고 있는 자들이 되고 말았습니다.
    ‘국제시대’란 사실상 고대 산물은 아닙니다. 우리가 보는 고대 역사는 사실상 국제관계, 국제성을 띠었다고 보기보다는 하나의 패권통일제국시대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고대 애굽, 앗수르, 바벨론, 페르시아, 헬라, 로마 등은 이웃나라를 생각한다거나 공존, 공유를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저들의 역사의식에는 오직 하나의 패권제국만이 존재했을 따름입니다.
    그러므로 고대 나라들에는 국제정신, 국제이름, 국제동맹 같은 역사의식이 없었습니다. 세계시민이라고 자처한 소크라테스의 시대에도 사실상 통합적 시민주의에 불과했습니다. 오직 자기 제국의 세계적 지배만을 꿈꾸었던 시대였습니다.
    국제, 혹은 국제정신, 더 나아가 국제주의 같은 국제성을 띠게 된 것은 사실상 근대적 산물이라고 해야 합니다. 그것은 사실상 기독교적 산물이라고 해도 과언은 아닙니다. 세계가 로마로 통한다고 하던 시대에, 기독교는 벌써 확고한 세계종교가 되었습니다. 기독교는 그 본질적 성격이 어떤 특수한 민족의 종교가 아니고 세계종교였습니다. 예수님은 만민을 구원하러 오신 온 세상의 구주였습니다.
    모든 시대, 모든 장소에서 각이한 언어와 풍습과 문화와 역사를 가진 자라도,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하는 자는 모두가 한 형제라고 하는 십자가 사랑의 진리에 연합되었기 때문입니다.
    특별히 중세기에 종교와 정치권을 장악하고 하나의 패권제국이 계속되던 암흑시대에서 일어난 종교개혁과 또 문예부흥으로 말미암아 사람들은 하늘을 향하여 마음을 열고, 세계를 향하여 눈을 열게 되었습니다. 그러면서부터 이른바 국제정신이 맹렬하게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그 결과 단일국가주의가 무너져버리고 여러 유의 국제관계가 일어나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국제정신, 국제관계는 사실상 기독교적 정신의 산물이요, 종교개혁과 문예부흥의 산물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기독교는 국가주의자도 아니고 국제주의자도 아닙니다.

    Ⅱ. 우리는 여러 국제연합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국제연합’이란 문구가 지적하는 것은 국가들 사이의 상호관계를 뜻합니다. 그 대표적 기구가 UN(United Nation), 이른바 ‘국제연합’이란 기구입니다. 제2차 세계대전의 비극을 경험한 후 세계평화, 안전유지, 국제우호, 관계촉진, 경제적, 사회적, 문화적, 인도적 문제에 대한 국제협력을 달성하기 위한 국제평화기구로, 1945년 10월 24일에 창립되었습니다. 현재 188개국이 가맹하고 있습니다. UN산하의 중요기관으로서 총회, 안전보장이사회, 경제사회이사회, 신탁통치이사회, 국제사법재판소 등이 있습니다. 그 외 국제연맹, UN군, 국제경찰, 국제공무원을 위시하여 종교, 정치, 경제, 사회, 과학, 문화, 교육, 교통통신, 군사 등등에 관계된 국제기구는 수백에 이르고 있습니다.
    따라서 이 무수한 기관들의 공존, 공영과 호혜평등을 위하여 여러 유들에 속한 ‘국제법’이 생겼습니다. 유명한 학자 무어(John Besset Moore)는 말하기를 ‘국제법은 본래 유럽의 모든 그리스도교 국가들의 소산이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지금 세계는 점점 여러 유의 동맹협력체제로 움직이고 있습니다. 이것은 제2차 세계대전의 종식 그리고 공산주의의 몰락(?)과 함께 대두된 이른바 데탕트 시대의 특성이기도 합니다.

    Ⅲ. 기독교적 국가들은 여러 유의 국제 악을 제지할 하나님의 검을 받았습니다.

    성경은 인류의 죄와 그 부패로 말미암아 세계가 더욱 악하여진다고 예언하고 있습니다. 그 중에 대표적인 악은 질서를 파괴하는 일이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인간 생존에 가정이라고 하는 고유한 조직과 법칙(질서)을 주었습니다. 그것은 부모공경과 자녀사랑입니다. 하나님은 부모에게 가정의 축복질서를 위하여 부권을 주셨습니다.
    또한 하나님은 일반은총 세계에도 악(무질서)을 제지하기 위하여 정부(국가)라고 하는 기관에 검(통치권)을 행사하게 하였습니다. 이런 경우 정부의 여러 관원들은 하나님의 사자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사자인 관원들은 악을 제지하고 선을 조장하는 일에 검을 행사해야 된다고 하였습니다. 각 사람(백성)들은 그 권세에 복종해야 된다고 하였습니다(롬 13:1~4).
    성경을 따르는 벨직 신앙고백서(Brlgic Confession) 제36항에는 이 점에 대하여 말하고 있습니다. ‘정부는 사람들의 방종이 제지되고, 모든 일이 저희 가운데서 선한 질서와 예의가 있게 하기 위하여 하나님이 제정하신바 되었고, 또 하나님께서 목적하신 바대로 악한 자는 벌하고, 선한 자는 보호하도록 통치자에게 검을 맡겼다.’라고 하였습니다.
    이 악한 자들이 경찰력만으로 제지될 경우도 있고, 육해공군을 동원해야 할 경우도 있습니다. 중대한 내용은 국가는 악을 제지하기 위하여 소규모든지 대규모든지 물리적 힘을 동원할 수 있다는 원리입니다. 무력에 의하여 악을 제지하는 것은 정부의 특별한 의무인데, 검은 정부의 상징입니다.
    이러한 원리는 국제간에도 있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UN이 생기고, UN군이 생기고, UN경찰이 생겼습니다. 여러 유에 속하는 국제법이 생겼습니다. 이른바 지구촌 시대와 국제사회는 그 이름에 합당하지 못한 여러 악, 곧 무질서와 패괴로 가득 차 있습니다. 여러 유의 새로운 악들이 개인과 가정과 나라와 국제사회에 만연되어 있습니다.
    이런 경우 한 나라의 경우에는 하나님의 사자가 정부이고, 그것이 국제문제인 경우에는 그 사자가 UN이거나 아니면 그 정신에 준하는 여러 UN의 기구들이 될 것입니다. 가정의 질서(법)나 정부의 질서나 국제간의 질서는 곧 공생, 공존, 공영의 법칙이 되는 것입니다. 가정에서는 아버지가, 나라에서는 정부가, 국제간에는 여러 국제기구가 하나님의 검을 받은 사자노릇을 해야 합니다. 바로 여기에 기독교적 정신에 바탕을 둔 세계 우방국가들은 세계의 양심으로, 세계의 정의수호자로, 세계의 평화의 사자로서 하나님의 공의로운 검을 부여받았습니다. 그 큰 이유는 기독교는 국제정신의 요람이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국민들은 8월만 되면 8·15해방의 감격을 기억합니다. 6월만 되면 6·25동족상잔의 비극을 기억하게 됩니다. 이제 우리는 국제적으로 9월만 되면 작년(2001년) 9월 11일에 일어났던 저 미국의 국제무역회관의 비극적 참사를 기억하게 됩니다. 아마 21세기 초에 세계가 만난 최악의 비극일 것입니다.
    이슬람 국가를 배경으로 하는 신흥 국제테러리스트들에 의하여 생긴 큰 재앙이었습니다. 이 비극은 미국의 비극일 뿐만 아니고 오늘 자유우방 국가들이 만난 비극입니다. 우리는 이 비극 후 1년 동안의 세계의 표정들을 직시하고 있습니다. 처음에는 미국을 위시한 자유우방 국가들이 새로운 신흥 악인 테러리스트들을 응징하는데 힘을 모았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국제적 악인 테러리스트들의 응징에 대한 자유우방 국가들의 태도가 지극히 미온적인 상태임을 보고 있습니다. 실로 유감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공의의 검을 받은 자유우방 국가들은 UN정신을 따라 동맹해야 합니다.
    지금 미국이 이라크의 후세인 정권을 몰아내고자 하는 일을 미국 자체의 어떤 국제정치나 경제나 사회적인 입장에서만 볼 수가 없는 것입니다. 확실히 이라크를 위시한 중동의 여러 나라들은 테러리스트들의 활동을 조장하고 있습니다. 저들은 가공할만한 생화학무기를 만들고 있습니다. 전 세계에 움직이는 폭탄이라 할 수 있는 테러동맹분자들이 그것을 알라신을 위한 순교의 영광이라고 자부하고 있습니다. 저들을 길러내는 전문학교가 있습니다.
    이 일에 미국의 부시 정부는 강한 입장을 보이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세계 우방국들이 ‘까마귀 활본 듯’이 미온적이고 비협력적인 것은 하나님의 공의로운 검을 받은 기독교적 자유우방 국가들이 취할 행동이 못됩니다.
    우리는 개인적 원수가 없습니다. 성경에는 개인적 원수나 보복을 금하고 있습니다(롬 12: 9~21). 반면 성경에는 공적 원수에 대하여는 여러 유의 제재와 심지어 전쟁까지도 불사하는 ‘검’을 사용해야 된다고 가르칩니다(롬 13:1~4). 전쟁은 언제나 최후수단이어야 합니다. ① 정의의 보존과 불법적 반역을 진압하기 위하여 ② 박해를 당한 나라와 민족을 도와주기 위하여 ③ 불의한 침략자들을 응징하기 위하여 전쟁까지도 불사해야 될 경우들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우리 한국은 UN 창설 이후 제일 처음으로 이러한 자유우방 국가들의 도움을 받아 6·25남침의 야욕을 제지하는 자유우방들에게 빚을 진 나라입니다.
    우리 앞에 나타난 테러리스트들은 이른바 반미주의 이상 가는 세계평화의 질서를 파괴하는 정의와 평화의 공적(公敵)들입니다. 더 큰 문제는 이러한 개인의 악이나 가정의 악이나 한 나라 정부나 국제적 악들의 배후에는 역사를 멸망으로 이끌어가고자 하는 개구리 같은 세 더러운 귀신의 영(계 16:13~18)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더 중대한 것은 이러한 사탄의 책략에 세계의 지도자들이 영적으로 암매하여 그 앞에서 꼭두각시 노릇을 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계 16:14, 계 17:12~13).
    우리는 예수님의 말씀을 확실히 기억해야 합니다. 악하고 음란한 이 세대가 시대의 표적(tav shmei'a; the signs of the time)을 분별하지 못하고 있다고 하였습니다. 당시에 예루살렘은 곧 파괴될 것이고, 유대 국가는 붕괴될 암흑의 장래를 분별하지 못하고 있다고 하였습니다.
    깨어있는 교회들은 우리 앞에 하나님이 보여주고 있는 역사의 벽보를 읽을 줄 알아야 하고, 또 해석해 줄줄 알아야 합니다. 여러 가지 자연계의 징조, 거짓 종교들의 징조, 세계가 겉잡을 수 없이 유물론, 무신론, 살신론, 심지어 반기독주의, 반 교회주의로 흘러가고 있다는 이 종말의 징조를 바로 깨달아야 합니다. 오늘 우리에게 중동에서 일어나고 있는 여러 가지 사태들은 결코 정치나 경제나 과학이나 군사문제 이상으로 종교적 차원에서 직시하는 지혜가 있기를 축원합니다. 자유우방 국가들은 세계적인 악을 제지하는데, 하나님의 검을 받은 하나님의 사자들이 되어야 합니다.


    표적 중의 표적(마태복음 16:1-4)

    1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이 와서 예수를 시험하여 하늘로부터 오는 표적 보이기를 청하니 
    2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가 저녁에 하늘이 붉으면 날이 좋겠다 하고 
    3 아침에 하늘이 붉고 흐리면 오늘은 날이 궂겠다 하나니 너희가 날씨는 분별할 줄 알면서 시대의 표적은 분별할 수 없느냐 
    4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구하나 요나의 표적 밖에는 보여 줄 표적이 없느니라 하시고 그들을 떠나 가시니라 

     

    1절에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이 와서 예수를 시험하여 하늘로서 오는 표적 보이기를 청하니”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에 보면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이 예수님을 시험하여, 하늘로서 오는 표적 보이기를 청하였다고 했습니다. 바리새인에 해당하는 ‘파리사이오스’는 ‘구분하다’ ‘나누다’는 뜻이 있는 히브리어 ‘파라쉬’에서 유래하여 ‘분리된 자들’이란 뜻을 지닙니다. 

    그리고 사두개인에 해당하는 ‘삿두카이오스’는 다윗과 솔로몬 시대 대제사장을 지낸 ‘의로움’이란 이름 뜻을 가진 ‘사독’에서 유래하여, 당시 성전을 중심으로 한 종교 지도자 계층을 형성하였던 대제사장과 예루살렘의 유력자들이 속한 귀족 계급이었습니다. 바리새인은 극단적인 보수파로서, 율법은 물론 조상들의 유전과 천사와 부활과 영혼불멸과 내세를 믿고, 메시아를 기다리는 자들이었습니다. 반면에 사두개인은 진보적인 현실주의자들로서, 내세와 천사와 부활을 다 부정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이렇게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은 교리적으로, 그리고 정치적으로 적대적인 관계에 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대적하여 시험하는 악한 일에 있어서는 함께 서로 연합하였습니다. 이처럼 악한 자들은 선을 대적함에 있어서 항상 한 편이 됩니다. 비록 그들이 자기들끼리는 서로 구별이 있고 나뉘어질지라도, 선 앞에서는 언제나 함께 공동보조를 취하는 것입니다. 

    오늘날 인터넷을 보면, 기독교에 대해서 얼마나 많은 악평들이 판을 치는지 모릅니다. 
    그야말로 불신자들이 일심동체가 되어 온갖 말로 기독교를 공격하고 비방하는 일을 서슴지 않습니다. 
    그런데 거기에 비해 우리 기독교인들은 어떠합니까? 
    그리스도인들이 한 마음으로 기독교를 변호하고 변증을 하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세상 사람들과 함께 교회를 비난하고 비방하기를 주저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못난 어머니도 어머니이고 못난 아버지도 아버지인 것만은 틀림없듯이, 오늘날 비록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에게 많은 허물이 있을지라도, 하나님을 아버지로 교회를 어머니처럼 섬겨야 할 그리스도인들이, 세상 사람들과 함께 교회를 비방하는 일을 함부로 해서는 절대로 안 되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교회를 아끼고 성도를 존중히 여기는 자가 진정한 그리스도인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이 함께 와서 예수님께 하늘로서 오는 표적 보이기를 요청한 것은, 실로 어처구니없는 일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공생애를 시작하신 것이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라, 이미 일 년 이상 지난 후의 일이었으며, 그 기간 동안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메시아 되심을 분명하게 나타내는 표적들을 수없이 보여 주셨기 때문입니다. 

    마태복음 16장 이전에 행하셨던 이적들만 잠시 살펴보아도, 나병 환자를 깨끗하게 해주시고, 백부장 하인의 병을 말씀 한 마디로 고쳐 주셨고, 바람과 파도를 꾸짖어 잔잔하게 하셨으며, 각종 귀신들린 자들에게서 귀신을 쫓아주셨고, 중풍 병자를 고쳐주셨으며, 맹인의 눈을 뜨게 하셨고, 열 두 해를 혈루증으로 앓던 여인을 고쳐주셨으며, 회당장 야이로의 죽은 딸을 살려주셨고, 말 못하는 사람의 입을 열어주셨으며, 오병이어로 오천 명을 먹이신 기적을 행하셨고, 물 위를 걸어가시기도 하였습니다. 

    여러분, 과연 이만 하면 예수님께서 하늘로부터 오신 표적이, 메시아로서의 자격이 충분하지 않습니까? 
    무엇을 더 바란다는 것입니까? 
    그런데도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은 예수님께 나와서 하늘로부터 온 또 다른 표적을 요청하였다고 했습니다.

    이처럼 표적은 믿지 못하는 자들에게 결코 믿음을 갖게 하지 못합니다. 
    오히려 믿음이 표적을 표적으로 보게 하는 것입니다. 
    즉 믿음이 없는 자들은 아무리 분명하고 확실한 표적을 보아도, 그것을 표적으로 여기지 못하고 의심하지만, 믿음이 있는 자들은 다른 사람들이 표적으로조차 여기지 않는 사실 속에서도 하나님의 섭리와 뜻을 깨닫고, 그것으로 인해 더욱 큰 확신을 가지게 된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거지 나사로의 비유에서 “모세와 선지자들에게 듣지 아니하면 비록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는 자가 있을지라도 권함을 받지 아니하리라”고 말씀하셨으며, 또 히브리서 기자는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라고 하였던 것입니다.

    표적이 믿음을 갖게 하는 것이 아니라, 믿음이 표적을 보게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표적을 보지 못하기 때문에 믿지 못한다는 말은 성립될 수 없습니다. 
    그것은 한낱 변명에 지나지 않습니다. 
    오히려 믿음이 없기 때문에 오늘날도 시대의 표적을 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 여러분! 우리는 표적만을 구하는 신앙을 가져서는 안 됩니다. 
    그것은 우리의 믿음 없음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우리는 믿음의 눈으로 시대의 표적을 볼 줄 알아야 합니다. 
    그럴 때 우리의 신앙은 더욱 견고하고 온전하게 될 줄로 믿습니다. 

    또한 표적을 구하는 것과, 하나님을 시험하는 것에는 차이가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이 예수님께 표적 보이기를 청한 것은, 반드시 잘못된 일이라고만 볼 수는 없습니다. 
    표적을 구하는 것은 확고한 믿음이 없음을 나타내는 것이지만, 그렇다고 해도 그것이 꼭 나쁜 것이라고만 할 수 없는 이유는, 성경에 등장하는 많은 신앙의 사람들이 하나님께 표적을 구하였기 때문입니다. 

    기드온을 보십시오. 
    그는 하나님께서 보내신 천사에게 ‘주 되시는 표징’을 보여 달라고 요구했으며, 또 미디안 연합군과 싸우기 위하여 출전하려 할 때에는 하나님께 자신을 통하여 이스라엘을 구원하실 것을 나타내는 표적으로 양털에만 이슬이 내리고 온 땅이 마를 것과, 이와 반대로 온 땅에 이슬이 내리고 양털에는 내리지 않도록 해주실 것을 구하였습니다. 

    히스기야는 하나님께서 자신의 기도를 들으셔서 질병을 고쳐 주시고 또 십 오년 동안 생명을 연장해 주시겠다는 징표로 아하스의 일영표에 나아갔던 해 그림자를 뒤로 십도 물러가게 해주시라고 요청하였습니다. 

    도마는 예수님의 부활하심을 믿기 위한 표적으로 못 자국 난 주님의 손과 창에 찔린 옆구리를 만져 보게 해주시라고 요구하였습니다. 

    이러한 사실이 보여 주듯이, 표적을 구하는 행위가 반드시 잘못된 것은 아닌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의 행위가 크게 잘못되었다고 말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그들의 행위가 자신들의 믿음을 견고하게 하기 위해 예수님께 표적을 구한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시험’하는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표적을 구하는 것과, 하나님을 시험하는 것은 겉으로 보기에 잘 구별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 두 가지 행위는 분명히 엄격한 차이가 있습니다. 
    그 차이는 바로 동기와 목적의 차이입니다. 

    즉 하나님께서도 인정하시고 허락하시는 표적을 구하는 행위는, 그 동기가 확고한 믿음을 갖고자 하는 것이며, 그 목적이 하나님을 보다 잘 섬기는 데 있지만, 하나님께서 미워하시고 결코 허락하지 않으시는 ‘하나님을 시험하는 행위’는, 그 동기가 자신의 불신앙을 정당화하기 위한 것이며, 그 목적이 하나님의 존재와 능력을 부정하는 데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자신의 믿음을 확고히 하고, 하나님의 약속에 대해 확신을 갖기 위해 표적을 구할지언정, 그 의심을 정당화하기 위하여 하나님께 표적을 보여 달라는 사악하고 어리석은 자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오직 하나님을 향한 순전한 믿음과 사랑의 동기로 최선을 다해 주님을 섬기는 가운데, 날마다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하며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늘로부터 오는 표적을 보여 달라는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에게 “너희가 저녁에 하늘이 붉으면 날이 좋겠다 하고, 아침에 하늘이 붉고 흐리면 오늘은 날이 궂겠다 하나니, 너희가 날씨는 분별할 줄 알면서 시대의 표적은 분별할 줄 모르느냐?”고 책망을 하셨습니다. 

    마가복음에 보면 하늘로부터 오는 표적을 보여 달라는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을 향하여, 예수님께서 마음속으로 깊이 탄식하셨다고 하였습니다. 

    즉 예수님께서는 마음을 열어 주님을 받아들이지 않고, 모함거리만 찾는 그들에 대하여 통분하신 것입니다. 
    다른 번역 성경에는 주님께서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을 향하여 외식하는 자들이라고 하시며, 당시 표적을 구했던 그들을 몹시 질책한 것이 더욱 선명하게 드러납니다.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은 주님께 하늘로부터 오는 표적을 구하고, 그 표적을 보기만 하면 믿을 것처럼 위장을 하였지만, 이는 외식에 불과하였고 그들은 처음부터 예수님을 모함하기 위하여 나왔기 때문에, 주님께서는 저들의 위선을 꿰뚫어 보시고 ‘배우’ ‘연기자’란 의미의 ‘외식하는 자들’이란 말로 날카롭게 질책하셨던 것입니다. 

    이처럼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이 예수님께 하늘로부터 오는 표적을 구한 것은, 그들이 예수님의 메시아 되심을 확인하기 위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다만 자신들에게 경쟁과 위협이 되고 있는 예수님을 음해하는 데 필요한 단서를 확보하기 위해, 하늘로서 오는 표적을 구했던 것입니다. 
    이에 그들의 의도를 간파하신 예수께서는, 그들의 악한 의도와 시대의 표적으로 오신 자신을 알아보지 못하는 그들에게 “너희가 저녁에 하늘이 붉으면 날이 좋겠다 하고, 아침에 하늘이 붉고 흐리면 오늘은 날이 궂겠다 하나니, 너희가 날씨는 분별할 줄 알면서 시대의 표적은 분별할 줄 모르느냐?” 라고 책망을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시대의 표적’을 분별하는 것이, 날씨를 분별하는 것보다 쉽다는 말씀이 아닙니다. 
    어떻게 시대의 표적을 분별하는 것이, 하늘을 보고 일기를 예측하는 것보다 쉬울 수가 있겠습니까? 
    그럴 수 없습니다. 
    따라서 이 말씀은 시대의 표적을 분별하는 것이 날씨를 분별하는 것보다 쉽다는 말씀이 아니라, 시대의 표적을 분별하는 일이 훨씬 중요하다는 말씀입니다. 
    즉 일상사에 영향을 줄 수 있는 하찮은 이치들은 분별할 줄 알면서, 어째서 인간의 역사 전체를 좌우할 수 있는 시대의 표적은 분별할 줄 모르느냐는 말씀인 것입니다.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이 반드시 분별할 줄 알아야 했던 것은, 하찮은 날씨 정도가 아니었습니다. 
    날씨를 분별하지 못 한다고 해서 그들이 당할 수 있는 일이란 고작 비를 맞는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시대의 표적을 분별하지 못한 것은, 하나님 뜻에 무관한 삶을 살거나 혹은 하나님의 뜻에 역행하는 삶을 살다가, 마침내 준엄한 하나님의 심판과 형벌을 받게 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것은 오늘날 우리에게 있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즉 오늘날 우리들 역시 일상사와 관련된 하찮은 이치나 표적은 분별할 알면서, 그 시대를 향한 하나님의 뜻을 나타내는 시대의 표적을 분별할 줄 모른다면, 결국 하나님의 준엄한 심판과 형벌을 면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대부분의 사람들은 ‘일기 예보’ ‘주가 동향’ ‘정치 상황’ 같은 일상사와 관련된 하찮은 징조와 표적을 분별하기에만 급급할 뿐, 우리 시대를 향한 하나님의 뜻을 나타내는 시대의 표적을 알기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따라서 그들은 언제나 하나님의 뜻과는 무관한, 아니 하나님의 뜻에 역행하는 삶을 살아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도 혹 이와 같은 많은 사람들에 속해 있지는 않습니까? 
    우리들의 관심이 오직 이 땅에서 먹고 사는 것과 관련된 표적을 분별하는 것에 집중되어져 있는 것은 아닙니까? 
    만약 그렇다면 우리는 속히 우리의 관심을 이 시대를 향한 하나님의 뜻을 나타내는 시대의 표적으로 돌려야만 합니다. 
    그래서 시대의 표적을 분별할 줄 알아야 합니다. 
    특별히 이 시대는 세상의 마지막이 가까운 때입니다. 
    마지막 때의 징조가 곳곳에서 나타나고 있습니다. 
    우리가 이러한 시대의 표적을 분별할 줄 모른다면, 우리 또한 다수의 사람들과 함께 멸망을 피하지 못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늘로부터 오는 표적 보이기를 청하는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에게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구하나 요나의 표적 밖에는 보여 줄 표적이 없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요나의 표적’이란 요나가 물고기 뱃속에 삼 일간 들어갔다 나와서 이방 땅 니느웨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 했던 것을 가리키는 것으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다가 무덤에 장사된 지 삼일 만에 부활하시므로, 마침내는 이방인들에게까지 복음이 증거되게 될 것을 가리키는 말씀입니다. 
    즉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십자가와 부활이 하늘로부터 오는 가장 큰 표적이 될 것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메시아 되심을 나타내는 가장 분명한 표적은 바로 십자가와 부활입니다. 
    역사는 너무나도 분명하게 예수 그리스도께서 성경이 말씀하고 있는 바로 그 메시아이심을 보여줍니다.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 그리고 그 이후 이방인들에게 복음이 전해지는 가운데 진행되어져 온 인류역사를 자세히 살펴본다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인간의 참 구원자 되시며, 또한 인간의 역사는 바로 그리스도께서 인간을 구속하시는 과정, 곧 인류 구속의 역사라는 사실을 부인할 수 없을 것입니다. 

    영어를 쓰는 사람들은 역사를 History 즉 ‘그분의 이야기’라고 표현하고 있으며, 오늘날 우리들도 역사의 연호를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B. C(Before Christ)와 A. D(Anno Domini) 구분하는 것입니다. 
    물론 그 단어나 연도 표기법을 쓰는 사람들이 다 그 뜻을 알고 쓰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역사 속에서 모든 사람들이 그와 같은 단어와 연도 표기법을 쓰도록 섭리하심으로써, 예수께서 모든 인류의 구원자요 또한 역사의 주인이신 메시아라는 사실을 분명하게 나타내셨던 것입니다.

    이처럼 역사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구세주 곧 ‘메시아’이심을 분명하게 보여줍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이와 같은 명백한 표적을 외면한 채, 마치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처럼 예수 그리스도께서 인간의 구원자 되심을 증명할 수 있는 하늘로부터의 표적을 보이라고 요구하고 있습니다. 
    이 얼마나 어리석은 일입니까? 
    만약 그들이 역사가 보여 주는 명백한 표적을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메시아 되심을 믿지 못한다면, 예수께서 그들에게 그 어떠한 표적을 보여 주신다고 해도 그들은 예수님을 메시아로 믿을 수 없을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는 역사를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메시아 되심을 분명히 확신할 수 있어야 합니다. 
    역사에 나타난 명백한 표적을 보고도 다른 표적을 구한다면, 그것처럼 우매한 일도 없을 것입니다. 
    정녕 우리는 역사를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메시아 되심을 확신함으로 믿음을 견고히 세워 나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은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로 또는 메시아로 행하신 그 많은 표적을 보고도, 또 다른 하늘로부터 오는 표적을 보여 달라고 요청을 하였습니다. 
    저들은 표적을 보고 예수님을 메시아로 믿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 반대로 예수님이 메시아가 아님을 입증하고 모함하기 위해서 표적을 구했습니다. 
    성도들은 여러분의 믿음을 더욱 확고하고 견고하기 위해서 표적을 구하고, 그러한 성도들에게 하나님께서 기도에 응답해 주심으로 말미암아, 확신에 가득 찬 체험신앙의 소유자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주님께서는 표적을 요구하는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에게 “너희가 저녁에 하늘이 붉으면 날이 좋겠다 하고, 아침에 하늘이 붉고 흐리면 오늘은 날이 궂겠다 하나니, 너희가 날씨는 분별할 줄 알면서 시대의 표적은 분별할 줄 모르느냐?”고 책망하셨습니다. 
    오늘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이 시대의 표적을 분별할 줄 알아야 합니다. 

    자연계에 나타난 징조로서 구제역과 조류독감, 그리고 갈수록 빈발하는 지진과 기근과 전쟁, 많은 사람이 빨리 왕래하고 지식이 더하리라는 다니엘서의 예언처럼 빨라진 교통과 정보의 홍수 시대, 사회적 징조로서 성도덕의 타락, 종교계의 징조로서 거짓 선지자들의 출현과 종교계의 타락 등 이 시대의 표적을 보면서, 참으로 이 시대는 예수님의 재림이 가까워진 말세지말인 것을 깨닫고, 깨어 근신하며, 주님 맞을 준비를 잘 하고 살 수 있기를 바랍니다.

    주님께서는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구하나 요나의 표적밖에는 보여 줄 표적이 없느니라.”고 하셨습니다. 
    표적 중의 표적은 ‘요나의 표적’ 곧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으심과 부활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은 표적 중의 표적인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을 확신함으로 말미암아, 영원한 생명과 하늘나라의 상속자가 되는 복을 다 받게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마지막 시대의 징조(徵兆)(데모데후서 3:1-5)
    The Symbol of Last Days

    디모데후서 3:1-5

    1. 너는 이것을 알라 말세에 고통 하는 때가 이르러.
    2. 사람들이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며 자랑하며 교만하며 비방하며 부모를 거역하며 감사하지 아니하며 거룩하지 아니하며.
    3. 무정하며 원통함을 풀지 아니하며 모함하며 절제하지 못하며 사나우며 선한 것을 좋아하지 아니하며.
    4. 배신하며 조급하며 자만하며 쾌락을 사랑하기를 하나님 사랑하는 것보다 더하며.
    5.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니 이 같은 자들에게서 네가 돌아서라.


    (목회서신)

    디모데전서디모데후서 그리고 디도서를 “목회서신(The Pastoral Ketters)”이라고 합니다.
    디모데에베소교회의 감독이었고,
    디도그레데교회의 감독이었습니다.

    디모데전서의 주제는 예수는 선생(거짓 교리, 거짓 교사에 대한 것)
    디모데후서의 주제는 예수는 바른 교훈(고난을 받을 때 모두 떠나갔고 오직 누가만 함께 하였다)
    디모데후서는 바울 서신의 마지막 서신이었다.
    디도서의 주제는 예수는 신앙의 본(성도는 세상의 본이 되어야 한다)

    디모데후서는 사도 바울이 그의 마지막 전도여행 중 갑자기 체포되어 로마의 감옥에 있으면서 디모데에게 보낸 편지입니다.
    이때는 네로 황제가 로마의 왕으로 있었고 기독교에 대한 탄압은 점점 더 거세지고 있었습니다.
    결국 바울은 복음을 전하다가 감옥에 갇혀 복음을 전한다는 이유로 재판을 받고 A.D. 68년경에 로마에서  약 5킬로미터 정도 떨어진 “오스티안 가도”에서 참수 당하였습니다.

    디모데후서 4장 16절을 읽어보면 바울이 디모데후서를 보내게 된 배경을 잘 이해 할 수 있습니다.

    내가 처음 변명할 때에 나와 함께한 자가 하나도 없고 다 나를 버렸으나 저희에게 허물을 돌리지 않기를 원하노라.

    내가 처음 재판관 앞에 끌려갔을 때, 나를 도와 준 사람은 한 명도 없었습니다.
    모두 나를 버리고 떠났지만 그들이 비난 받지 않기를 원합니다.
    즉, 복음이 핍박 받는 상황에서 다들 바울을 버리고 도망쳤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 혼자 쓸쓸히 재판관 앞에서 자신을 변론해야 했다는 말씀입니다.
    하지만 바울은 도망친 그들이 그 일 때문에 하나님께 벌 받게 되지 않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이로 보건대 디모데후서는 A.D. 67 또는 68년에 기록된 것으로 추정됩니다.

    바울은 로마 감옥에서 홀로 있었습니다.

    1장 16절을 보면 바울을 찾아 방문한 사람은 멀리 에베소에서 로마 감옥까지 찾아온 “오네시보로” 밖에 없었습니다.
    바울은 “오네시보로” 때문에 대단히 기뻐하며 그 가정에 하나님의 자비가 임하기를 축복하고 있습니다.
    오네시보로”는 바울이 에베소에 있을 때에도 많은 도움과 위로를 주었던 사람입니다.


    (도입 이야기) 펜데믹(Pandemic)

    세계보건기구(WHO)에서는 유행병을 여섯 단계로 구분합니다.

    1단계
    동물에게만 전염되는 단계
    2단계
    동물에서 사람에게로 전염되는 단계 
    3단계 사람들 사이에서 전염이 증가되는 단계
    4단계
    사람들 사이에서 전염이 급속히 확산되면서 세계적 유행병이 발생할 초기 상태
    5단계
    감염이 널리 확산되어 최소 2개국에서 병이 유행하는 상태
    6단계는 국가와 국가에서 다른 대륙의 국가로 감염이 발생한 상태

    팬데믹(Pandemics)이란 6단계 상태를 말합니다.

    팬데믹은 그리스어로, ‘팬(Pan)’은 ‘모두(All)’를 의미하고, ‘데믹(Demic)’은 ‘사람(Man)’을 의미합니다.
    "모든 사람이 전염된다"는 뜻입니다.
    팬데믹이 세계를 거대한 우한 코로나 바이러스라는 거대한 수용소(Camp)를 만들었습니다.
     
    이러한 상태가 6개월 이상 계속되므로 어떤 사람은 "마지막 때의 징조"라고 강조합니다.

    성경에서 강조하는 "마지막 시대의 징조(The Symbol of Last Fays)"를 함께 살펴보려고 합니다.

    먼저 "말세(末世)"와 "말일(末日)"에 대한 정확한 이해가 필요합니다.

    말세(末世)를 "마지막 시대(The Last Days)" 라고 합니다.
    말세라는 기간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을 때부터 지금까지 계속되는 기간을 말합니다.

    말일(末日)은 "마지막 날(The Last Day)" 이라고 합니다.
    말일은 최후 심판의 날이며 주님께서 다시 오시는 재림의 날을 말합니다.

    디모데후서 4장 8절
    에서는 말일을 "그 날" 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니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니라.

    우한 코로나 바이러스가 6개월 이상 계속되므로 이 세상이 팬데믹(Pandemic)이란 거대한 수용소가 되었습니다.

    세계적인 전염병이 지속되기 때문에 일부 어떤 사람들은 마지막 때라고 외칩니다.
    성경에서 교훈하는 마지막 시대의 징조를 살펴보겠습니다.

    하인리히 법칙(Heinrich's law) 1: 29: 300의 법칙이라고도 합니다.
     
    어떤 대형 사고가 발생하기 전에는 그와 관련된 수십 차례의 아주 작은 사고와 수백 번의 징후들이 반드시 나타난다는 법칙을 말합니다.

    성경에서도 마지막 시대의 징조가 다양하게 소개됩니다.
    이러한 징조가 나타난 후에 반드시 마지막 그 날이 올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항상 지혜로운 처녀들과 같이 등과 기름을 준비하여 마지막 시대를 대비하는 신앙으로 무장해야 합니다.

    마지막 시대의 징조
    마태복음 24장(세상 끝 날의 징조는 사람의 미혹을 받지 않도록 주의하라)

    디모데후서 3장(마지막에는 고통하는 때가 올 것이다)

    베드로후서 3장(말세에 기롱하는 자들 즉 정욕대로 행하는 자들의 득세) 

    1. 자연적 징조
    - 난리, 전쟁, 자연재해(지진, 기근, 전염병)

    2. 도덕적 징조
    - 불법, 사랑의 타락

    3. 영적 징조
    - 거짓 그리스도의 등장


    마지막 시대의 신앙을 준비합시다

    1. 세상을 이기는 믿음(요한일서 5:1-5)

    요한일서 5:4
    대저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세상을 이기느니라 세상을 이긴 이김은 이것이니 우리의 믿음이니라.

    영적 싸움의 대상은 공중 권세를 잡은 자(에베소서 2:2)
    공중 권세를 잡은 자의 방법은 세상 풍속을 좇게 한다.

    (예화) 2014년 미국 휴스턴 시장은 동성애자가 부임하여 동성애를 반대하는 설교자들에게 설교 원고를 제출하는 법안을 제정 발표하였을 때 더 많은 교회에서 설교 원고들을 보냄으로 너무 많은 양을 보냈기 때문에 결국에는 취소하도록 하였다.

    대마초 합법화, 동성에 찬성, 낙태의 합법화와 더불어 공산주의가 교회를 탄압할 것이다.
    이미 공산주의를 창시한 칼 마르크스는 죽었고 공산국가들은 몰락했으나 공산주의를 추종하는 세력들은 교묘한 방법으로 세상을 흔들고 있다.

    역사가 토인비는 말하기를 "공산주의가 활개를 치는 이유는 교회와 성도들이 기독교식으로 생활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라고 하였다. 공산주의는 기독교 사회의 이단이라고하였다.

    칼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이미 영국의 자본주의 맛을 경험했기 때문에 자신들은 여전히 자본주의 삶을 즐기며 살았다.

    2.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믿음(히브리서 11:5-6)

    히브리서 11:6
    믿음이 없이는 기쁘시게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찌니라 .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믿음이란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것이다.

    (예화) 찰스 린드버그가 뉴욕에서 프랑스 파리로 대성양 횡단에 성공했을 때 당시 유명 담배회사에서 광고 사진을 찍기 위하여 린드버그에게 제안하기를 사진 한 장 당 5만불을 제시하며 담배를 손가락 사이에 끼고 있든지 아니면 입에 물고 있는 사진을 찍자고 제안하였다. 이때 린드버그는 "나는 세례를 받은 교인입니다. 담배를 피울 수 없습니다" 라고 정중하게 거절하였다고 한다. 이런 기사가 신문에 보도된 후에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신문 기사를 읽은 사람들이 돈을 모아 린드버그에게 전달했는데 무려 10만불이었다고 합니다.

    3. 육체의 욕망을 다스리자(로마서 8:12-13)

    로마서 8:13
    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


    육신을 따르는 자는 육신의 일을 영을 따르는 자는 영의 일을 생각하나니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

    왜 하나님은 아담과 하와에게 옷을 지어 입히지 않으셨나?
    옷을 이빟면 주머니를 달라고 요구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예화) 어느 다리의 표지판에 10톤 이상 화물차는 통행금지 라는 푯말이 세워졌다.
    트럭 운전사가 적재함에 실은 물건의 무게가 10톤이기 때문에 걱정없이 다리 위를 건너가는데 그만 다리가 무너지고 말았다.
    원인은 화물차 위에 앉아있던 새 한마리 때문이라고 합니다.
    새의 무게가 비록 작다고 하지만 정확하게 10톤 보다는 더 나가므로 다리가 무너진 것이라면 욕망의 가장 작은 무게가 신앙의 삶을 파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예화) 어느 샘물은 마시면 젊어진다고 합니다.
    마을의 가난한 부부가 함께 그 샘에 가저 물을 마시고 젊은 사람이 되어 돌아왔다는 소문을 들은 마을의 부자 영감은 그 샘에 가서 물을 너무 많이 마셨기 때문에 갓난 아이가 되었다고 합니다.

    중국 정부에서 최근 발표한 소식은 11월이 되면 지금보다 더 강한 바이러스가 나타나게 될 것이라며 주의해야 한다고 합니다.
    시간이 지날수록 더 심각한 전염병이 닥쳐올 것이라고 할 때 교회는 신앙의 자세를 회복해야 합니다.
    신앙의 자세와 목표를 회복하기 위하여 종교 개혁 시대의 5대 신앙 목표에 따라 신앙생활을 회복해야 하겠습니다.

    첫째, 솔라 스크립투라(Sola Scriptura, 오직 성경)
    둘째, 솔라 그라티아(Sola Gratia, 오직 은혜)
    셋째, 솔루스 크리스투스(Solus Christus, 오직 그리스도)
    넷째, 솔라 피데(Sola Fide, 오직 믿음)
    다섯, 솔리 데오 글로리아(Soli Deo Gloria, 오직 하나님께 영광)


    마지막 때 징조들에 관한 성경 예언의 실현 증거

    예수님과 사도들은 마지막 때에 대해 매우 구체적으로 언급하셨습니다. 그들은 세상 종말이 다가오면 여러 가지 징조들이 나타날 것이라고 예고하셨는데, 전쟁과 기근, 지진, 사회적 혼란, 배교, 잘못된 교리의 확산 등이 대표적입니다.(마태복음 24:3-14)

    먼저 전쟁에 대한 예언을 보겠습니다.  

    "난리와 난리 소문을 듣겠으나 너희는 삼가 두려워하지 말라 이런 일이 있어야 하되 끝은 아직 아니니라 민족이 민족을, 나라가 나라를 대적하여 일어나겠고 처처에 기근과 지진이 있으리니"(마 24:6-7)

    20세기에 들어 두 차례의 세계대전이 일어났고, 각종 분쟁과 테러, 내전 등으로 전 세계가 혼란에 빠졌습니다. 전쟁 희생자만 1억 명이 넘는다고 합니다.[1] 21세기인 지금도 전쟁의 위험은 높아만 가고 있죠. 특히 최근 우크라이나 전쟁의 발발은 성경의 예언을 실감케 합니다.

    기근 문제도 심각합니다. 유엔은 2021년 기준 약 8억 1100만 명, 즉 세계 인구의 10%가 기아에 직면했다고 발표했습니다.[2] 기후변화와 코로나19 팬데믹, 국제 곡물가 상승 등이 주된 원인으로 지목되고 있죠.[3] 앞으로 상황은 더 나빠질 전망입니다.

    지진 역시 빈번하게 발생하고 있습니다. 통계에 따르면 규모 6.0 이상의 강진 발생 빈도가 20세기 들어 크게 증가했다고 합니다.[4] 2010년 아이티 지진(사망자 31만 명)을 비롯해 최근에도 대형 지진이 잇따르고 있죠.[5] 앞으로 지진은 더 많아지고 강도도 세질 것이라는 게 전문가들의 예측입니다.

    또한 성경은 마지막 때에 사회적 혼란과 도덕적 타락이 극에 달할 것이라고 경고합니다.

    "말세에 고통하는 때가 이르러 사람들은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며 자긍하며 교만하며 훼방하며 부모를 거역하며 감사하지 아니하며 거룩하지 아니하며 무정하며 원통함을 풀지 아니하며 모함하며 절제하지 못하며 사나우며 선한 것을 좋아 아니하며 배반하며 조급하며 자고하며 쾌락을 사랑하기를 하나님 사랑하는 것보다 더하며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는 자니 이같은 자들에게서 네가 돌아서라"(디모데후서 3:1-5)

    오늘날 세상은 성경이 말한 것처럼 극도로 이기적이고 물질 중심적입니다. 개인주의가 만연하고 가정이 파괴되고 있습니다. 범죄율은 날로 늘어가고, 성적 타락 또한 심각한 수준입니다. 이혼과 동거, 동성애, 성매매, 포르노 등 성 관련 문제가 난무하고 있죠.[6] 

    뿐만 아니라 약물 중독, 자살, 우울증 등 정신적 문제도 증가 추세에 있습니다.[7] 이는 도덕적, 영적 황폐함을 반영하는 것이라 하겠습니다. 바울 사도가 예언한 말세의 모습이 바로 오늘날의 현실인 셈이죠.

    성경은 또한 마지막 때에 배교와 이단이 만연할 것이라고 경고합니다.

    "너는 이것을 알라 말세에 고통하는 때가 이르러 사람들은 ... 진리에 귀를 기울이지 아니하며 허탄한 이야기를 따르느니라"(딤후 4:3-4)   
    "거짓 선지자가 많이 일어나 많은 사람을 미혹하겠으며 불법이 성하므로 많은 사람의 사랑이 식어지리라"(마 24:11-12)

    오늘날 기독교계는 자유주의 신학과 상대주의, 다원주의 사상에 물들어가고 있습니다.[8] 교회가 세속화되어 복음의 능력을 상실해 가고 있는 것이죠. 뿐만 아니라 각종 이단 사설들이 교회를 혼란케 하고 있습니다. 이는 말세에 대한 성경의 예언이 그대로 이뤄지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이 외에도 환경오염, 자연재해, 전염병, 경제 위기 등 각종 재앙이 끊이지 않고 있습니다. 유엔 보고서에 따르면 지난 20년간 자연재해로 인한 피해액이 3조 달러에 이른다고 합니다.[9] 기후변화로 극심한 가뭄과 홍수, 폭염이 반복되고 있죠.[10] 신종 전염병의 출현 또한 성경의 예언과 일치합니다.(눅 21:11) 

    이처럼 마지막 때에 대한 성경의 예언은 오늘날 놀라운 정확도로 성취되고 있습니다. 곳곳에서 나타나는 종말의 징조들은 성경 말씀이 결코 허구가 아닌 진리임을 입증하고 있는 것이죠.

    그렇다면 우리는 왜 이런 종말의 징조에 주목해야 할까요? 그것은 성경이 마지막 때의 심판과 구원에 대해서도 분명히 예고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와 같이 너희가 이런 일이 일어나는 것을 보거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운 줄을 알라"(눅 21:31)
    "볼찌어다 주의 크고 두려운 날이 이르기 전에 내가 선지자 엘리야를 너희에게 보내리니 그가 아비의 마음을 자녀에게, 자녀의 마음을 그들의 아비에게로 돌이키게 하리라 돌이키지 아니하면 두렵건대 내가 와서 저주로 그 땅을 칠까 하노라"(말라기 4:5-6)

    성경은 말세에 하나님의 심판이 있을 것이며,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실 것을 예고합니다. 그러나 동시에 구원의 길도 제시하고 있습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회개하는 자마다 구원받아 영생에 이를 수 있다는 복음이 바로 그것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요 3:16)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요 11:25-26)

    성경은 명백히 예수 그리스도가 인류의 유일한 구원자이심을 밝히고 있습니다. 십자가에서 우리의 죄를 대속하신 예수님만이 우리를 심판에서 건지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제 마지막 때에 대한 성경의 예언이 성취되는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분명합니다. 말씀을 깨닫고 회개하며 구원자 예수 그리스도께 나아가는 것입니다. 

    간곡히 호소합니다. 더 이상 복음을 외면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의 죄를 회개하고 지금 이 자리에서 예수님을 영접하십시오. 그분만이 여러분의 구원이요 생명이 되실 것입니다. 

    이 시대의 징조들이 말해주듯 주님의 재림이 멀지 않았습니다. 그날이 이르기 전에 구원의 결단을 내리시길 간절히 바랍니다.

    이상으로 마지막 때에 대한 성경 예언의 성취 증거들을 살펴보았습니다. 우리가 살펴본 증거들은 성경이 결코 사람의 허구가 아니라 살아계신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임을 보여줍니다. 

    뿐만 아니라 그 말씀은 우리에게 구원의 길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그 길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열려 있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이 시간 주저하지 말고 예수님께 나아오시길 권합니다. 그분이 주시는 구원의 은혜를 받아 누리시길 바랍니다. 종말의 때가 가까웠기에 지체할 시간이 없습니다.



    10월 22일(수) 마태복음 13-14장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천국의 비밀(13:11)

    대답하여 가라사대 천국의 비밀을 아는 것이 너희에게는 허락되었으나 저희에게는 아니되었나니. 
    He replied, "The knowledge of the secrets of the kingdom of heaven has been given to you, but not to them.

    비밀

    천국

    요한복음 1:14 / 개역개정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거하시매(4637) 스캐노오(skēnŏō)  σκηνόω

    1. 살다.  2. 거주하다.  3. 계 13:6
    Pronunciation [ skēnŏō ]
    Etymology
    미래 σκηνώσω, 제1부정과거 ἐσκή- νωσα, 4636에서 유래
    • 1. 살다, 거주하다, 계13:6, 21:3, 요1:14.
    • 관련 성경 / 거하다(요1:14, 계13:6, 21:3), 장막을 치다(계7:15).




    󰃨 말씀이 육신이 되어 - 본문은 9절에 서술한 성육신 사건을 다시 언급하는 내용이다. 여기서 '육신'(*, 사르크스)은 육체적 존재를 의미한다(갈 4:13). 따라서 '그리스도가 인간으로 오신 것처럼 보였으나 육체로 오시지 않았으며 그의 수난도 하나의 가상(假像)이었다'고 주장했던 영지주의의 가현설(Docetism)을 본문은 '육신'이라는 한 단어로 여지없이 붕괴시킨다. 한편 '사르크스'는 일반적으로 '몸'을 의미하는 '소마'(*)와는 다른 뉘앙스로 쓰였다. 즉 '사르크스'는 주로 부패하고 도덕적으로 연약한 육신을 의미한다. 바울도 이 용어를 하늘이나 영의 영역과 반대되는 개념으로 쓰고 있다(롬 1:3,4). 즉 하나님의 지혜와 육체의 지혜, 하나님의 권능과 육체의 무기는 서로 반대되며 서로 대적한다(고전 1:24-31;고후 10:4). 그리고 하나님의 약속과 '육체'는 결코 부합 될 수 없다(롬 9:8). 그러나 이 용어가 그리스도에 대해 쓰일 경우에는 부패하고 도덕적으로 연약한 '육체'를 의미하지 않으며(고후 5:21), 단지 인간적인 한계성과 연약성을 지닌 존재임을 나타낸다(히 4:15). 이는 그리스도의 완벽한 성육신을 나타낸다. 이에 대한 구체적인 예증으로서 본서는 그리스도의 인성을 잘 보여준다. (1) 피곤(4:6) (2) 갈증(4:7) (3) 하나님께 의존(5:19) (4) 슬퍼 눈물을 흘리심(11:35) (5) 분노하심(11:38) (6) 갈등(12:27) (7) 수난과 죽으심(18, 19장) 등.

    󰃨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 '우리 가운데'(*, 엔 헤민)라는 표현은 10절의 '그가 세상에'라는 말과 내용상 일치한다. 즉 그리스도의 성육신은 이 세상에서 이루어졌으며, 우리 인간들 속에서 발생한 역사적인 사건이다. 그러므로 요한은 '천막을 치다'란 뜻의 동사 '스케노오'(*)의 부정과거 능동태인 '에스케노센'(*)을 사용함으로써 그리스도의 성육신의 역사성을 실증한다. 따라서 본절은 마1:18-2:23과 죽 2:1-20의 성육신 기사를 함축적으로 요약한 말씀이다. 한편 '에스케노센'이란 표현에 대한 해석은 여러 가지가 있다. 이러한 해석은 시내산에서의 하나님의 현현(顯現) 장면과 본문의 전후 내용을 비교해 볼 때 상당한 설득력을 제공해 준다.(1) 성육신하신 예수께서 '임시적으로' 이 땅에 계셨음을 가리킴. (2) '하나님의 임재'를 상기시킴. 유대인들이 광야에서 방랑할 때 하나님이 거주하시는 곳으로 정해진 곳이 바로 '장막'이었으며, 특히 요한이 곧이어 '영광'에 관해서 언급한 사실도 이 해석을 뒷받침한다. 왜냐하면 영광과 장막은 서로 밀접한 관계가 있기 때문이다(출 40:34이하). (3) 모세에게 주어졌던 계시가 예수에 의해 확연히 밝혀졌음을 보여줌.

    󰃨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 '보니'에 해당하는 헬랑어는 '놀라운 광경을 보다'라는 뜻의 '데아오마이'(*)의 부정 과거 중간태로서 '놀라운 상태에서 실제로 목격했다'라는 의미를 포함한다. 이는 아마도 저자 요한이 예수님의 변모*Transfiguration, 마 17:2-8;막 9:2-8;눅 9:28-36)에 대한 회상을 기초로 하여 사용한 용어인 것 같다. 그때 예수는 거룩한 광채와 함께 나타나 보이셨으며, 하나님의 사랑스런 아들이심을 나타내셨다. 이는 시편 기자의 '주의 영광를 저희 자선에게 나타내소서'(시 90:16)라는 간구를 연상테 한다. 더 나아가 그리스도의 성육신과 공생애와 부활은 그 자체로서 어둠 속에서 빛이 환하게 비치듯이 놀랍고도 영광스러운 사건으로서 우리 성도들의 영광을 위하여 예정된 것이었다(고전 2:7;벧전 5:4).

    󰃨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 - 저자 요한은 그리스도의 영광의 근원이 인성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신성에 있음을 재천명한다. 즉 1절에서 그리스도의 영원성, 인격성, 신성을 나타냈듯이 본문에서도 '...같이', '...만큼'이란 뜻을 지닌 부사 '호스'(*)를 사용함으로써, 그리스도의 영광이 영원하신 성부 하나님의 영광과 대당함을 보여주고 있다. 특히 '독생자'(공동번역, '외아들')라고 번역된 '모노게누스'(*)는 '모노스'(*, '유일한')와 '게노스'(*, '종류', '혈족')의 합성어로서 누가 복음과 히브리서에서 '외아들'(눅 7:12;9:38;히 11:17) 또는 '외동딸'(눅 8:42)을 지칭한다. 그러나 요한에게 있어서 이 용어는 오직 그리스도를 가리키고 있으며(3:16, 18;요일 4:9), 누가복음과 히브리서에서 보다 더 심오한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 즉 그리스도는 (1) 하나님의 자녀(12절 주석 참조)중 하나가 아니며, 오히려 하나님과 하나님의 자녀들 사이에서 중보자적 사역을 담당하시는 유일하신 분(3:17;갈3:26)이며, (2) 하나님과 친밀한 인격적인 관계를 지니신 대등하신 분(1절 주석 참조;3:18;5:18;10:30;17:5, 24)이며, (3) 이 세상에 하나님을 완벽하게 계시하신 유일하신 분(14:9;빌 2:6, 7)이라는 의미를 나타낸다. 한편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을 부인하는 일부 학자들은 1:1-3절의 내용을 무시하고, '하나님께로서 나신 자'라는 요일5:18의 내용을 증거로 하여 '그리스도란 하나님에 의해 창조된 존재'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하나님께로서 나신 자'라는 표현은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됨을 나타내기위해서 사용한 것일 뿐이다(요일 5:18 주석 참조)

    󰃨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 '은혜와 진리'(*,카리스 카이 알레데이아)란 구약성경에서 하나님의 성품을 나타내는 용어로 쓰였다(삼하2:6). 사도 요한은 앞 문장에서 하나님의 영광과 그리스도의 영광이 대등하고 등질적(等質的)임을 묘사한 후에 곧 이어서 하나님의 성품인 은혜와 진리가 바로 말씀이신 그리스도의 성품과 일치함을 보여준다. 이는 성육신하신 그리스도가 그의 지상사역을 통해서 하나님의 본성을 드러내셨음을 시사한다(10:30). 특히 기독교적 측면에서 '은혜'라는 말은 하나님이 인류 구속을 위해 독생자를 보내주신 그 일방적인 행위와 밀접하게 연관되는 것이다. 한편 '가득차서 넘치는'이란 뜻의 헬라어 서술적 형용사 '플레레스'(*)는 은혜와 진리의 역동성을 보여준다. 다시 말해서 그리스도께 속한 은혜와 진리는 고정된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로부터 차고 넘치게 흘러 나와 성도들에게 임하여 역사(役事)한다는 것이다.




    천국의 비밀 
    - '비밀'(뮈스테리온)은 원래 '닫다', '가두다'는 의미의 '전수(傳授)받은 자'란 뜻인 '뮈스테스' 가 파생되었고, 
    이 '뮈스테이'에서 바로 '뮈스테리온'이 파생되었다. 
    그런데 혹자는(Robertson) 이 용어를 단순히 동방의 신비 종교의 입문, 교리 교육 등에 관계된 용어로만 단정짓지만 오히려 이것은 어느 정도의 종말론적인 비밀을 지닌 셈족어의 '라즈'라는 말과 연관짓는 것이 좋다(R. E. Brown). 
    이 말은 다니엘서에서 언급된 바 있는데(단 2:18, 19, 27, 28, 30), 거기서는 하나님께서 선포하신 것이 미래에 일어나게 될 징조임을 시사하고 있다. 
    더욱이 헬라어 '뮈스테리온'은 히브리어 '소드'(비밀)를 반영하는데, 이 '소드'는 사해사본에서 확실히 발견할 수 있듯이, 천상의 회의에서 유래된 말이다(Brown). 
    결국 '뮈스테리온'은 하나님의 계획 또는 뜻으로서, 때로 은밀한 말로 전달되기도 하며, 선택받은 자만이 알 수 있는 것이며, 항상 종말론적 사건에 관계되어 있다. 
    한편 '천국의'라는 말이 비밀의 내용을 가리키는 말이라면 '비밀'이라는 말은 천국에 관한 내용이 문자 그대로 '닫아 둔 것'(*)이 되었음을 말한 것이다. 
    따라서 천국에 대한 일은 인간 스스로는 결코 알거나 할 수 없는 것으로서 오직 그것을 닫아 둔 것을 열기 전에는 알 수 없는 영역의 진리임을 전제하는 표현이다. 
    본문에 있어서 천국비밀의 내용은 '하나님 나라가 올 것'이라고 하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하나님이 그의 나라를 이 땅에 실현시킬 것이라고 하는 사실은 결코 비밀이 아닌 공공연한 믿음이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예수께서 말씀하시는 바의 천국의 비밀이란 유대인들은 상상조차 못한 천국이 역사 안에 이미 시작되고 있다고 하는 사실, 즉 '하나님 나라가 왔다'고 하는 놀라운 소식을 의미한다(Ladd).

    너희에게는 ... 저희에게는 
    - '너희'는 12제자와 함께 주님에게로 모여든 소수의 무리, 즉 영적 의미로는 남은 자(remnant)들로서, 하나님의 은혜의 영역 안에 있는 자들이다. 
    그러나 '저희'는 외인들(*, 토이스 여소)로서 은혜 밖에 있는 자들이다. 
    그렇다면 저희에 속하는 자들은 당장 이렇게 반박할 수도 있다. 
    어차피 우리는 비유를 깨닫는 자의 놀라운 은혜를 허락받지 못한 자들이므로 비유를 못 알아 듣는 것은 우리 책임이 아니라고 말이다. 
    그러나 그들이 은혜 밖에 있음은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은혜주시기를 싫어함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요 3:16; 딤전 2:4; 벧후 3:9), 오히려 그들이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을 거역했기 때문이다. 
    이 문제를 깊이 고찰할 때 우리는 신학의 한 핵심인 하나님의 작정과 인간의 자유의지라는 심각한 문제에 직면하게 된다(엡 1:3-13강해 참조). 
    그리고 '저희'에 해당하는 사람들은 대략 다음 두 부류로 나눌 수 있다. 
    1. 주어진 은혜의 말씀에 대해 적대적인 태도를 취하는 유대교권주의자들, 
    2. 병고침, 오병이어의 기적만을 기대하고 모여든 군중들로, 결국 그들은 도래하는 하나님 나라 잔치에 참예치 못하고 바깥 어두운 데로 내어쫓김을 당할 것이다(25:30). 
    그러므로 성도는 예수 밖에 있는 '저희'의 자리가 아니라 예수 안에 있는 '너희'의 자리에 있기를 힘써야 할 것이다.




    '천국의 비밀'은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만 가르쳐주신 천국에 대한 진리를 뜻하며, 일반 사람들에게는 감춰져 있었습니다. 이 비밀은 하나님을 믿고 따르는 사람들에게는 진리이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들에게는 오해와 비방의 대상이 되기도 합니다.  

    • 예수님의 가르침:
      예수님께서는 천국이 무엇인지 직접적으로 알려주셨으며, 이는 많은 선지자들과 의인들이 간절히 알기를 원했던 것이었습니다. 


  • 비유로 설명:
    예수님께서는 비유를 통해 천국의 비밀을 설명하셨습니다. 이는 듣고 깨닫는 사람들에게는 천국 백성으로서 하나님께 소망을 두고 살아가게 하는 이유가 됩니다. 

  • 천국에 대한 이해:
    천국은 하나님을 경외하고 의식하며 살아가는 곳으로, 형제를 사랑하지 않는 자는 하나님께 속하지 않은 자라는 가르침을 포함합니다. 

  • 천국에 대한 믿음:
    비록 천국은 다양한 비유로 표현되지만(곳간, 아버지 집, 안식처, 낙원 등), 그 근본은 하나님께 소망을 두고 사는 삶을 의미합니다. 

  • 침노하는 자:
    예수님께서는 '세례요한의 때부터 지금까지 천국은 침노를 당하나니 침노하는 자는 빼앗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 '침노'는 정당하지 않은 방법으로 천국을 빼앗으려는 것을 의미합니다. 


  • 천국의 비밀 / 마 13:10-17

    기독교를 일컬어 계시의 종교라고 합니다. 계시란 베일에 가려져 있던 것을 베일을 열어 보여준다는 뜻입니다. 따라서 계시는 드러난 비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신 목적은 천국의 비밀을 알려주시기 위함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공생애를 시작하시면서 외치신 첫 말씀은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는 것이었습니다. 천국이 가깝다는 것은 곧 이 세상의 종말이 가깝다는 말과 같습니다. 이 세상이 종말을 고하고 새로운 하나님의 나라가 임한다는 뜻입니다. 죄와 마귀와 폭력이 지배하던 세상이 종말을 고하고 그리스도께서 의와 화평과 사랑으로 다스리시는 새로운 시대가 열리는 것을 말합니다. 이 시간 저는 ‘천국의 비밀’이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증거함으로 은혜를 나누려고 합니다.

    첫 번째로, 천국의 비밀을 이해하려면 천국의 본질에 대하여 알아야 합니다.

    대체로 사람들은 천국은 성도들이 죽어서 가는 낙원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 말이 틀렸다고 할 수는 없지만 그렇다고 정답이라고 볼 수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천국은 몇 가지 차원으로 나누어 설명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선, 천국의 영적인 차원을 살펴봅시다. 한번은 바리새인들이 와서 “하나님의 나라가 어느 때에 임하나이까?”라고 물었습니다. 이에 예수님께서 대답하시기를 “하나님의 나라는 볼 수 있게 임하는 것이 아니요 또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도 못하리니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눅 17:20-21)고 하셨습니다.

    여기서 예수님께서는 천국 곧 하나님 나라의 영적인 성격을 말씀해 주셨습니다.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나라가 마치 우렁찬 선포와 달리는 말들과 행군하는 군대와 더불어 환호 속에 도래할 줄로 알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나라가 떠들썩한 분위기에서 모든 사람이 볼 수 있도록 임하는 것이 아니라, 영적 차원에 속한 나라로서 믿는 자들의 내면에 임한다고 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은 예수님을 자기들의 왕으로 영접한 사람들입니다. 메시야의 왕권을 인정하고 그의 다스림을 받는 사람들은 다 천국의 시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마음에 천국을 이룩한 성도들은 이같이 찬송합니다.

    ♪“내 영혼이 은총 입어 중한 죄 짐 벗고 보니
      슬픔 많은 이 세상도 천국으로 화 하도다
      할렐루야 찬양하세 내 모든 죄 사함 받고
      주 예수와 동행하니 그 어디나 하늘나라“

    이번에는 천국의 현재성에 관해서 살펴봅시다. 한번은 사람들이 귀신들려 눈멀고 벙어리 된 자를 데리고 온 것을 예수님께서 고쳐 주시니 그 벙어리가 말하며 보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이를 본 사람들이 놀라서 말하기를 “이는 다윗의 자손이 아니냐?”고 했습니다. ‘다윗의 자손’이란 메시야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때 바리새인들이 듣고 말하기를 “이가 귀신의 왕 바알세불을 힘입지 않고는 귀신을 쫓아내지 못하느니라”고 했습니다.

    이에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25)… 스스로 분쟁하는 나라마다 황폐하여질 것이요 스스로 분쟁하는 동네나 집마다 서지 못하리라 26)사단이 만일 사단을 쫓아내면 스스로 분쟁하는 것이니 그리하고야 저의 나라가 어떻게 서겠느냐 27)또 내가 바알세불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내면 너희 아들들은 누구를 힘입어 쫓아내느냐 그러므로 저희가 너희 재판관이 되리라 28)그러나 내가 하나님의 성령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내는 것이면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임하였느니라 29)사람이 먼저 강한 자를 결박하지 않고야 어떻게 그 강한 자의 집에 들어가 그 세간을 늑탈하겠느냐 결박한 후에야 그 집을 늑탈하리라”(마 12:)고 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성령의 능력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내신 것은 이미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 임하였다는 명백한 증거입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지금도 천국은 성령의 능력을 힘입어 사방으로 뻗어나가고 있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그를 믿는 우리에게 예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는 권세를 주셨습니다. 우리가 이 권세를 활용할 때 마귀의 나라는 점점 위축되고 천국은 끊임없이 확장되어 나가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우리는 천국의 내면성과 현재성에 관해서 살펴보았습니다. 이번에는 천국의 미래성에 관해서 살펴봅시다. 이는 천국의 궁극적인 실체를 의미합니다. 이에 대하여 베드로후서 3장 10절로 13절에는 이같이 말씀합니다. “10)그러나 주의 날이 도적 같이 오리니 그 날에는 하늘이 큰 소리로 떠나가고 체질이 뜨거운 불에 풀어지고 땅과 그 중에 있는 모든 일이 드러나리로다 11)이 모든 것이 이렇게 풀어지리니 너희가 어떠한 사람이 되어야 마땅하뇨 거룩한 행실과 경건함으로 12)하나님의 날이 임하기를 바라보고 간절히 사모하라 그 날에 하늘이 불에 타서 풀어지고 체질이 뜨거운 불에 녹아지려니와 13)우리는 그의 약속대로 의의 거하는바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도다”

    현재의 하늘과 땅이 불타 없어지고 구원 받은 성도들은 도래하는 새 하늘과 새 땅에 들어갈 것입니다. 요한계시록 21장에 보니 “1)또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보니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이 없어졌고 바다도 다시 있지 않더라 2)또 내가 보매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이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니 그 예비한 것이 신부가 남편을 위하여 단장한 것 같더라”고 했습니다. 여기 언급한 새 예루살렘이 바로 영원한 천국입니다.

    요한계시록 21장과 22장에 보면, 새 예루살렘의 영광스러움을 말씀해 줍니다. 그러나 천국 곧 하나님의 나라의 가장 중요하고 기본적인 성격은 하나님의 임재입니다. 성도들의 마음에 천국이 임하는 것은 성령의 내주하심에 근거한 것입니다.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고 하신 고린도전서 6장 19절 말씀이 이 사실을 의미합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여러분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하셨다면 여러분은 심령 천국을 누릴 자격자가 되었음을 아시기 바랍니다. 새 예루살렘 성이 천국인 근거는 그곳에 하나님께서 임재해 계시기 때문입니다. 이에 대하여 요한계시록 21장에는 “3)내가 들으니 보좌에서 큰 음성이 나서 가로되 보라 하나님의 장막이 사람들과 함께 있으매 하나님이 저희와 함께 거하시리니 저희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은 친히 저희와 함께 계셔서”라고 했습니다.

    만약에 하나님께서 함께 계시지 않으시면 아무리 아름답고 찬란한 곳이라도 천국이 될 수 없습니다. 이 진리를 아는 성도는 “주의 궁정에서 한 날이 다른 곳에서 천 날보다 나은즉 악인의 장막에 거함보다 내 하나님 문지기로 있는 것이 좋사오니”(시 84:10)라고 한 성구를 이해하며, 이 땅에 사는 동안에도 천국의 삶을 누리는 것입니다.

    두 번째로, 천국의 비밀을 아는 것이 허락된 사람에 관해서 살펴봅시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말씀하시기를 “천국의 비밀을 아는 것이 너희에게는 허락되었으나 저희에게는 아니 되었나니”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에 보면, 두 종류의 사람이 나옵니다. 첫째는 천국의 비밀을 아는 것이 허락된 사람이고, 둘째는 허락되지 않은 사람입니다. 전자는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사람이고, 후자는 하나님의 은혜를 받지 못한 사람입니다. 천국의 비밀을 아는 것이 허락된 사람들은 천국 복음을 들을 때 기쁜 마음으로 받아들입니다. 그러나 허락되지 아니한 사람들은 천국 복음을 전해 주면 귀를 막고 들으려하지 않습니다.

    전자는 복음을 전해주면 일단 무슨 내용인지 들어나 보자고 합니다. 그러나 후자는 예수님에 대한 그릇된 선입견에 사로잡혀서 듣기도 전에 거부합니다.

    천국의 비밀은 사람의 지혜로 알 수 없습니다. 아무리 공부를 많이 한 사람이라도 자기의 지혜와 능력으로 천국의 비밀을 알 수 없습니다. 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동정녀 탄생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동정녀 탄생은 우리의 경험에 맞지 않으며 과학적인 이치에도 맞지 않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동정녀 탄생을 말씀하니 우리의 이성으로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경외하는 성도들은 이치에 맞지 않는 일이 그리 쉽게 믿어지다니 이상하지 않습니까? 우리가 불신 이웃들에 비해서 이해력이 탁월하기 때문일까요? 아니면 우리가 그들보다 정직하고 의롭기 때문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가 저들보다 조금도 나을 것이 없습니다. 우리나 그들이나 동일하게 타락한 본성을 갖고 있습니다. 답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천국의 비밀을 알도록 허락하신데서 찾을 수 있습니다. 다시 말씀하면, 우리가 천국 복음을 믿게 된 것은 순전히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이에 대하여 에베소서 2장 8절로 9절에는 이같이 말씀합니다. “8)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9)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치 못하게 함이니라”

    우리가 가진 믿음은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선물은 대가를 지불하지 아니하고 그저 호의로 받는 것입니다. 또한 우리는 아무에게나 선물을 주지 아니하고 좋아하는 사람에게 선물을 줍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믿음으로 말미암은 구원을 선물로 주신 것은 우리를 좋게 여기셨기 때문입니다. 좋아한다는 감정은 지극히 주관적인 것입니다. 이는 하나님께서도 마찬가지십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천국의 비밀을 알도록 허락하신 것은 순전히 하나님의 주권적인 결정입니다.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선택을 받을만한 아무런 아름다움이나 의로움이 없는데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일방적으로 우리를 선택하셨습니다. 이에 대하여 디도서 3장 3절로 7절에는 이같이 말씀합니다. “3)우리도 전에는 어리석은 자요 순종치 아니한 자요 속은 자요 각색 정욕과 행락에 종노릇한 자요 악독과 투기로 지낸 자요 가증스러운 자요 피차 미워한 자이었으나 4)우리 구주 하나님의 자비와 사람 사랑하심을 나타내실 때에 5)우리를 구원하시되 우리의 행한바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지 아니하고 오직 그의 긍휼하심을 좇아 중생의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으로 하셨나니 6)성령을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풍성히 부어 주사 7)우리로 저의 은혜를 힘입어 의롭다 하심을 얻어 영생의 소망을 따라 후사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

    사랑하는 성도님들, 이 말씀과 같이 우리가 천국에 들어갈 자격자가 된 것은 순전히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임을 아시기 바랍니다. 사람이 이 세상에 태어나서 받는 축복 가운데서 가장 큰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 받는 것입니다. 만약에 구원을 받지 못한다면 차라리 이 세상에 태어나지 않은 편이 나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태어나지 않았으면 천국에 들어가지도 못하지만 영원한 형벌도 받지 않을 것이니까요.

    그러면 우리가 천국에 들어가든 못 들어가든 그 책임이 우리 인간에게는 없는 것일까요? 만약에 구원이 전적으로 하나님의 선택에 의한 것이라고 하면, 논리적으로 볼 때 구원 받든 못 받든 그 책임이 하나님께만 있고 사람들에게는 없다고 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렇게 말씀하지 않습니다. 성경은 사람이 구원 받지 못한 데 대한 책임을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다 구원 받지 못한 그 사람에게 지웁니다.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아니한 책임은 그 당사자가 지게 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의 선택과 우리의 믿음 사이에 있는 모순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의 논리에는 모순처럼 보일지라도 하나님께서 모순된 일을 하실 리가 만무합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선택을 말씀하면서 동시에 우리 편의 믿음을 강조합니다. 이에 대하여 요한복음 3장 16절로 18절에는 이같이 말씀합니다. “16)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17)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저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 18)저를 믿는 자는 심판을 받지 아니하는 것이요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아니하므로 벌써 심판을 받은 것이니라”

    하나님께서는 인간들에게 복음을 듣고 자발적으로 호응할 것을 요청하십니다. 의심을 버리고 복음을 믿어 구원을 받으라고 하십니다. 또 먼저 믿은 우리에게 열심히 복음을 전파하라고 명하십니다. 제가 읽어드리는 로마서 10장 9절로 15절 말씀을 경청해 보십시오.

    “9)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얻으리니 10)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 11)성경에 이르되 누구든지 저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아니하리라 하니 12)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차별이 없음이라 한 주께서 모든 사람의 주가 되사 저를 부르는 모든 사람에게 부요하시도다 13)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14)그런즉 저희가 믿지 아니하는 이를 어찌 부르리요 듣지도 못한 이를 어찌 믿으리요 전파하는 자가 없이 어찌 들으리요 15)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으면 어찌 전파하리요 기록된바 아름답도다 좋은 소식을 전하는 자들의 발이여 함과 같으니라”

    그뿐 아니라, 디모데전서 2장 4절에는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데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고 하였고, 베드로후서 3장 8절로 9절에는 “8)사랑하는 자들아 주께는 하루가 천년 같고 천년이 하루 같은 이 한 가지를 잊지 말라 9)주의 약속은 어떤이의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 같이 더딘 것이 아니라 오직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치 않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고 하였습니다.

    그렇습니다. 사랑의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람이 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구원 받기를 원하십니다. 그렇다고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는 것은 아닙니다. 구원 받는 사람이 있는가하면, 구원 받지 못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믿지 않는 것은 하나님의 택하심을 받지 못했기 때문이 아니라 그 사람이 고의적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거부하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말씀하면, 그렇다면 하나님의 예정은 어디로 갔습니까 라고 질문하고플 것입니다.

    이 질문에 대한 답은 예정은 하나님의 고유하신 권한이므로 우리가 관여할 바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솔직히 말해서 우리는 하나님의 예정 섭리에 대하여 소상하게 알 재간이 없습니다. 또 누가 선택 받았고 누가 선택 받지 못했는가를 알 수도 없습니다. 예정에 관해서 우리는 완전히 이해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유한한 머리를 가지고  억지로 이 교리를 풀려고 할 것이 아니라, 사도와 같이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부요함이여, 그의 판단은 측량치 못할 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롬 11:33)라고 고백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 보다는 우리 편에서 행할 바가 무엇인지 알고 실천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한 가지 우리가 아는 것은, 하나님께서는 햇빛을 선인과 악인에게 고루 비추어 주시듯이, 복음을 들을 때 성령의 감화를 모든 사람에게 베풀어 주신다는 사실입니다. 누구나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 죄를 지적받으면 가책을 받습니다. 이 때 죄를 회개하고 순순히 복음을 받아들이는 사람이 있는가하면, 곧바로 마음을 완고하게 만들어서 하나님의 말씀을 거부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저희가 보아도 보지 못하며 들어도 듣지 못하며 깨닫지 못한다 하신 말씀은 죄인들의 영적인 무능을 지적한 말씀임과 동시에 인간들의 완악함을 드러내신 말씀입니다. 영적 무능과 완악함은 손등과 손바닥의 관계와 같습니다. 하나님께서 구원의 잔치를 배설하시고 인생들을 향하여 값없이 와서 즐기라고 하시건만 이 초청을 거절하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그들이 구원에 참여하지 못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입니다. 그들에게 하나님의 초청은 무의미한 소리에 불과합니다. 그 대신 세상의 허탄한 일에는 지대한 관심을 가지고 자발적으로 달려갑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순종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은 우리에게도 절실하게 요구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은혜로운 신앙생활을 하려면 우리 편에서 행할 바가 무엇인지를 분별해서 실천해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믿으면서도 때로 그 말씀을 의심할 때가 있습니다. 그렇게 마음속에 의심이 머리를 쳐들 때 우리는 단호하게 그 의심을 물리치고 우리 자신을 하나님께 복종시켜야 합니다.

    신앙생활에 게으름을 피우고 싶은 유혹이 마음에서 일어날 때 그 생각을 물리치고 의지를 발동해서 열심을 내야 합니다. 저절로 하나님을 잘 섬기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잘 섬기기 위해서 애쓰고 힘써야 합니다. 때로는 경제적인 손해도 감수하고 사람들의 비난도 각오해야 합니다.

    이에 대하여 히브리서 3장 12절 이하에는 “12)형제들아 너희가 삼가 혹 너희 중에 누가 믿지 아니하는 악심을 품고 살아 계신 하나님에게서 떨어질까 염려할 것이요 13)오직 오늘이라 일컫는 동안에 매일 피차 권면하여 너희 중에 누구든지 죄의 유혹으로 강퍅케 됨을 면하라 14)우리가 시작할 때에 확실한 것을 끝까지 견고히 잡으면 그리스도와 함께 참예한 자가 되리라 15)성경에 일렀으되 오늘날 너희가 그의 음성을 듣거든 노하심을 격동할 때와 같이 너희 마음을 강퍅케 하지 말라…”고 말씀했습니다. 악심을 버리고, 피차 권면하고, 강퍅케 됨을 면하는 일은 다 우리 스스로 해야 할 몫입니다.

    하나님께서 성경을 기록하셔서 우리에게 주신 것은 앞서간 선배들의 성공과 실패를 거울로 삼게 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이제 우리는 선배들의 발자취를 살펴보고 잘한 점은 적극적으로 본받고 잘못한 점은 미리 알고 피함으로 동일한 실패를 반복하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세 번째로, 우리는 천국의 비밀을 알게 된 행복을 감사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천국의 비밀을 아는 것이 너희에게는 허락되었으나 저희에게는 아니되었다"고 하셨습니다. 또한 ”너희 눈은 봄으로, 너희 귀는 들음으로 복이 있도다“고 하셨습니다. 주님의 이 말씀은 오늘 우리에게도 해당되는 말씀입니다. 이 세상에 60억이 넘는 사람들이 살고 있는 가운데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하여 천국 시민의 자격을 가진 사람은 그리 많지 않습니다. 기독교인의 수는 신구교와 정교회를 다 합쳐서 20억 정도에 불과합니다. 나머지 3분지 2는 복음을 거부하는 사람들입니다. 성도님들에게는 천국의 비밀을 아는 것이 허락되었지만 저들에게는 허락되지 않았습니다.

    또 성도님들은 마음의 눈을 떠서 하나님의 구원하시는 역사를 보고, 마음의 귀로써 구원의 소식을 들을 수 있지만, 저들은 마음의 눈이 소경 되고 마음의 귀가 먹어서 보고 듣지 못합니다.

    모세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스라엘이여 너는 행복자로다 여호와의 구원을 너 같이 얻은 백성이 누구뇨”(신 33:29)라고 말했습니다. 이 말씀과 같이 이스라엘 자손은 말로 다할 수 없으리만치 놀랍고 위대한 하나님의 구원을 체험한 민족입니다. 출애굽은 그야말로 매일 같이 불가사의한 기적의 연속이었습니다. 40년 광야생활 역시 기적의 나날이었습니다. 그런데 정작 이스라엘 자손은 행복한 줄을 몰랐습니다. 그들은 매일 같이 먹을 것이 만나밖에 없다고 불평했습니다. 자신이 행복자인 사실을 알지 못한 이스라엘 자손이 하나님의 명령에 불순종하다가 징벌을 당한 것은 너무나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이는 오늘날 그리스도인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천국의 비밀을 알도록 허락 받은 사실을 행복하게 여겨야 합니다. “보라 아버지께서 어떠한 사랑을 우리에게 주사 하나님의 자녀라 일컬음을 얻게 하셨는고”(요1 3:1) 구원 받은 것을 생각할 때마다 이와 같은 감탄이 터져 나와야 합니다.

    그뿐 아니라,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시기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많은 선지자와 의인이 너희 보는 것들을 보고자 하여도 보지 못하였고 너희 듣는 것들을 듣고자 하여도 듣지 못하였느니라”고 하셨습니다. 구약시대의 많은 선지자들과 의인들이 보고자 한 것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메시야의 오심입니다. 요셉과 마리아가 아기 예수를 안고 결례를 행하려고 성전에 들어갔을 적에 시므온이라는 경건한 노인이 성령의 감동을 받아 아기 예수가 메시야이심을 알아보았습니다.

    시므온은 아기 예수를 품에 안고 하나님을 찬송하기를 “29)주재여 이제는 말씀하신대로 종을 평안히 놓아 주시는도다 30)내 눈이 주의 구원을 보았사오니 31 이는 만민 앞에 예비하신 것이요 32)이방을 비추는 빛이요 주의 백성 이스라엘의 영광이니이다”(눅 2:)고 했습니다. 그는 메시야를 자기 눈으로 보게 되자 이제는 죽어도 여한이 없다고 말했습니다.

    또한 선진들이 보고자 한 것은 메시야께서 완성하신 구원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메시야를 눈으로 보지 못했고 구원의 완성도 보지 못했습니다. 그러면 구약시대의 많은 선지자들과 의인들이 듣고자 한 것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메시야께서 전하신 천국 복음을 가리킵니다. 그런데 구약의 선지자들과 의인들이 그토록 보고 듣기를 원했던 것들을 신약의 성도들은 보고 듣게 되었으니 얼마나 행복한 일입니까! 비록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눈으로 본 적이 없고 그 음성을 들은 적도 없지만, 복음서를 비롯한 신약성경을 통해서 직접 눈으로 보고 귀로 들은 것 이상으로 소상하게 알고 믿는 것이니 얼마나 복된 일입니까!

    사랑하는 성도님들, 천국은 단지 성도들이 죽어서 가는 피안의 세계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이 땅에 살면서 천국을 누리면서 살아야 합니다. 우리 마음에 천국이 임하고, 우리의 가정에 천국이 임하고, 우리 교회에 천국이 임하고, 우리가 가는 곳마다 천국이 임해야 합니다. 또한 우리 주님께서 주신 권세를 가지고 귀신을 쫓아내고 불신 영혼들을 주님께로 인도함으로써 하나님 나라를 확장해 나가야 합니다. 그와 동시에 새 하늘과 새 땅, 새 예루살렘에서 하나님 아버지와 함께 살게 될 그 날을 소망하면서 살아야 합니다.

    이제 성도님들께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하고 천국 시민의 자격을 얻었으므로 날마다 천국의 행복을 누리면서 천국의 비밀을 전파하며 살아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예수님의 비유와 천국의 비밀 : 깊이 있는 이해

    예수님은 공생애 동안 여러 가지 비유를 통해 하늘나라의 진리를 전하셨습니다. 이 비유들은 단순한 이야기라기보다는, 천국과 하나님 나라의 본질을 드러내는 중요한 도구로 사용되었습니다.

    성경을 읽다 보면 예수님이 자주 비유를 통해 천국의 개념을 설명하신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이러한 비유들은 겉으로 보기에는 이해하기 쉬운 이야기 같지만, 그 안에는 깊은 영적 진리가 담겨 있습니다.

    1. 천국은 어떤 곳인가?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비유들 중에는 천국이 무엇인지, 그리고 그 나라가 어떤 본질을 가지고 있는지 설명하는 내용이 많습니다.

    사람들은 흔히 천국을 물리적인 장소로만 생각하곤 하지만, 예수님의 비유에서 천국은 단순한 장소가 아닌 '하나님이 다스리는 영적 질서'로 나타납니다.

    즉, 천국은 하나님이 통치하시고, 그분의 뜻이 온전히 이루어지는 곳입니다.

    2. 씨 뿌리는 자의 비유: 천국의 성장 과정

    씨 뿌리는 자의 비유는 마태복음 13장에 기록된 중요한 비유 중 하나입니다. 이 비유에서 예수님은 씨를 뿌리는 자가 다양한 종류의 땅에 씨를 뿌리는 모습을 설명하십니다. 씨는 하나님의 말씀을 상징하고, 땅은 사람들의 마음 상태를 의미합니다.

    • 길가에 뿌려진 씨: 말씀이 뿌려지지만 이해하지 못하는 자들. 악한 자가 그 마음에서 말씀을 빼앗아 가 버립니다.
    • 돌밭에 뿌려진 씨: 기쁨으로 말씀을 받지만, 뿌리가 깊지 않아 시험이나 어려움이 닥치면 쉽게 넘어지는 자들입니다.
    • 가시덤불에 뿌려진 씨: 세상의 염려와 재물의 유혹에 억눌려 열매를 맺지 못하는 자들입니다.
    • 좋은 땅에 뿌려진 씨: 말씀을 듣고 깨달아 열매를 맺는 자들입니다.

    이 비유를 통해 예수님은 천국이 어떻게 사람들의 마음 안에서 자라나고, 그 열매를 맺는 과정을 설명하셨습니다. 결국, 하나님의 나라는 우리의 마음 상태에 따라 다르게 반응하게 됩니다. 좋은 땅에 심겨진 말씀은 풍성한 열매를 맺는 반면, 돌밭이나 가시덤불 같은 마음에서는 성장을 방해받습니다.

    3. 겨자씨 비유: 작은 것이 큰 것으로

    또한 마태복음 13장에 나오는 겨자씨 비유는 천국이 어떻게 작게 시작하여 큰 것으로 성장하는지에 대한 중요한 교훈을 줍니다. 겨자씨는 매우 작은 씨앗이지만, 시간이 지나면 큰 나무로 자라 새들이 깃들일 만큼 성장하게 됩니다.

    이 비유는 천국이 사람의 마음 속에서 작은 시작일지라도, 결국은 크게 성장하여 세상에 영향을 미치는 나라가 될 것이라는 것을 보여줍니다.

    이 비유는 하나님 나라가 처음에는 작게 시작될 수 있지만, 시간이 지남에 따라 그 영향력이 확대되고, 많은 이들이 그 나라 안에서 안식을 누리게 될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줍니다.

    4. 보물과 진주의 비유: 천국의 가치를 아는 자

    마태복음 13장 44-46절에서는 천국을 보물과 진주에 비유하십니다. 밭에 감추인 보물을 발견한 사람은 자신의 모든 소유를 팔아 그 밭을 사고, 좋은 진주를 발견한 상인은 모든 것을 팔아 그 진주를 사는 모습이 그려집니다.

    이 비유는 천국의 가치를 깨달은 사람은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을 정도로 그 가치를 높이 평가하게 된다는 것을 강조합니다.

    천국은 그만큼 소중한 것이며, 이를 얻기 위해서는 우리가 가진 모든 것을 희생할 가치가 있다는 메시지를 담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천국의 진정한 가치를 깨닫고 그에 합당한 삶을 사는 것이 중요함을 이 비유를 통해 가르치셨습니다.

    5. 가라지 비유: 심판과 선택

    마태복음 13장 24-30절에 기록된 가라지 비유는 천국과 관련된 중요한 교훈을 제공합니다.

    이 비유에서 예수님은 좋은 씨와 가라지가 함께 자라는 밭을 비유로 들며, 마지막 심판의 때에 이들 사이의 구분이 이루어질 것임을 말씀하십니다. 가라지는 악한 자들을 상징하고, 좋은 씨는 하나님의 나라 백성들을 상징합니다.

    이 비유는 하나님 나라의 본질적인 특징 중 하나인 '심판'과 '선택'을 강조합니다. 지금 당장은 선과 악이 함께 공존하지만, 마지막 때에는 하나님께서 악을 제거하시고, 선한 자들을 구원하실 것을 나타냅니다. 결국, 천국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기준에 맞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교훈을 줍니다.

    6. 열 처녀의 비유: 준비된 자의 중요성

    마태복음 25장에 나오는 열 처녀의 비유는 천국을 맞이할 준비의 중요성을 강조합니다. 이 비유에서 신랑을 맞이하기 위해 등불을 준비한 다섯 명의 슬기로운 처녀와 준비하지 못한 다섯 명의 미련한 처녀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슬기로운 처녀들은 신랑을 맞을 준비를 철저히 했지만, 미련한 처녀들은 준비가 부족하여 신랑을 맞이하지 못하게 됩니다.

    이 비유는 예수님의 재림과 하나님 나라의 도래를 준비해야 한다는 교훈을 주며, 항상 깨어 준비된 자만이 천국에 들어갈 수 있음을 강조합니다.

    결론: 천국은 우리의 마음 속에서 시작된다

    예수님의 비유는 천국이 물리적 장소라기보다는, 우리의 마음속에서 시작되는 영적 실재라는 것을 보여줍니다. 씨 뿌리는 자의 비유처럼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 마음에 뿌려지고, 그 말씀을 어떻게 받아들이느냐에 따라 천국의 열매가 맺힙니다.

    또한 겨자씨 비유나 가라지 비유를 통해 천국은 작은 시작이지만 결국은 크게 자라나고, 마지막에는 하나님이 그 나라를 온전히 통치하실 것이라는 진리를 보여줍니다.

    천국의 비밀을 깨닫는 것은 우리가 천국의 소중함을 알고, 그 가치를 위해 우리의 삶을 헌신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천국은 이미 우리 안에서 시작되었고, 우리는 그 나라의 일원으로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맡기신 사명을 감당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예수님이 전한 비유들은 천국의 본질과 하나님 나라에 대한 깊은 진리를 담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 비유들을 통해 천국에 대한 이해를 넓히고, 하나님 나라를 준비하는 삶을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이와 같이 예수님의 비유를 통해 천국의 비밀을 탐구하는 것은 신앙 생활에서 매우 중요한 부분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가치를 알고, 그에 따라 삶을 준비하는 것이 천국 백성으로서의 책임임을 기억합시다.

    현세적 천국(누가복음 17:20-21)
    바리새인들이 하나님의 나라가 어느 때에 임하나이까 묻거늘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하나님의 나라는 볼 수 있게 임하는 것이 아니요.
    또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도 못하리니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


    미래적 천국(요한계시록 21:2-4) 

  • 또 내가 보매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이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니 그 예비한 것이 신부가 남편을 위하여 단장한 것 같더라.
  • 내가 들으니 보좌에서 큰 음성이 나서 가로되 보라 하나님의 장막이 사람들과 함께 있으매 하나님이 저희와 함께 거하시리니 저희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은 친히 저희와 함께 계셔서.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씻기시매 다시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
  •  







    안식일(安息日)은 '편안히 쉬는 날'이라는 뜻으로, 성경에서 하나님께서 천지 만물을 창조하시고 일곱째 날에 쉬신 것에서 유래합니다. 
    본래는 금요일 해 질 녘부터 토요일 해 질 녘까지의 '일곱째 날'을 가리키지만, 기독교에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기념하며 '주일'이라고 부르는 '일요일'을 주일로 지킵니다. 

    안식일의 유래와 의미 

    창조 기념
     :
    하나님이 엿새간 세상을 창조하시고 일곱째 날에 안식하신 것을 기념하는 날입니다. 

  • 하나님의 은혜 :
    인간이 하나님의 은혜로 창조되고 구원받았음을 깨닫는 날이기도 합니다. 
    안식일에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은 인간이 스스로 할 수 있는 것이 없음을 인정하고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 안식일과 주일 

    유대교 및 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회 
    :
    성경에 기록된 대로 금요일 해 질 때부터 토요일 해 질 때까지를 안식일로 지킵니다. 

  • 기독교 :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신 첫째 날인 일요일을 예배하는 날로 여기며 '주일'이라고 부릅니다. 
    이는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기념하는 의미입니다. 

  • 문화적 영향 :
    초기 기독교인들이 로마의 문화적 영향(일요일 숭배 등)을 받으면서 주일이 오늘날과 같이 일요일로 자리 잡게 되었습니다. 

  • 휴식과 예배 :
    일상의 노동에서 벗어나 쉬고,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며 경건하게 보내는 거룩한 날입니다. 

  • 왜 예수님께서 안식일의 주인이라고 하셨습니까?
    안식일의 유래가 창조에서 시작한 것처럼 창조의 사역에 예수께서 첨여하셨기 때문입니다.

    태초에 하나님이(엘로힘)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 אֱלֹהִים Storng numbe r430

    1. 신들.  2. 신과 같은 모습. 3. 유일하고 참된 하나님
    Pronunciation [ ’ĕlôhîym ] 
    Old Testament / 
    관련 성경 /  하나님(창 1:1, 시 109:1, 욘 4:6), 엘엘로헤 이스라엘(창 33:20), 신상(창 35:2, 출 20:23, 신 7:25), 신(출 7:1, 신 4:34, 삼상17:43), 재판 장(출 21:6), 여호와(레 21:7), 여신(왕상 11:5).

  • אֵל Storng number 410

    1. 강한.  2. 힘.  3. 신.
    Pronunciation [ ’êl ]
    Old Testament  / 235회 사용
    관련 성경 /  하나님(창 14:18, 삼하 22:31, 사 45:14), 능력(창 31:29), 엘엘로헤이스라엘(창 33:20), 신(출 15:11, 34:14, 신 3:24), 힘(신28:32, 느 5: 5, 잠 3:27), 권능자(시 29:1), 임마누엘(사7: 14, 8:8), 강한 자(겔 32:21), 벧엘(렘 48:13, 슥 7:2).
     [형]  능하다(겔 31:11).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는 창세기 1장 1절의 말씀에서 '하나님'이란 히브리 단어가 '엘로힘'이라는 단어를 사용했습니다.그런데 '엘로힘'이란 히브리 단어는 '엘'이란 단어의 복수형입니다.
    '엘'은 '신' '하나님'이란 단수형입니다.
    '엘'의 복수형은 "엘로힘"입니다.
    문제는 태초에 하나님들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고 번역하면 기독교 신앙의 신관은 유일신 신앙이므로 그 신앙에 어긋나기 때문에 하나님이란 단수형으로 번역한 것입니다.
    더구나 주어가 복수형일 때는 동사는 반드시 복수형으로 사용해야 합니다.
    그런데 창조하신다는 동사는 단수형으로 사용했습니다.
    그 이유는 주어는 복수형이지만 그 복수형은 특별한 



  • 창세기 1장 1절


    베레쉬트 바라 엘로힘 엩 핫솨마임 웨엩 하아레츠

    히브리어구약BHS,1 בְּרֵאשִׁית בָּרָא אֱלֹהִים אֵת הַשָּׁמַיִם וְאֵת הָאָרֶץ׃

    새번역,1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다. / ㉠또는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실 때에' 또는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기 시작하셨을 때에' 
    우리말성경,1 하나님께서 태초에 하늘과 땅을 창조하셨습니다.  
    가톨릭성경,1 한처음에 하느님께서 하늘과 땅을 창조하셨다.  
    영어NIV,1 In the beginning God created the heavens and the earth. 
    영어NASB,1 In the beginning God created the heavens and the earth. 
    영어MSG,1  First this: God created the Heavens and Earth--all you see, all you don't see. 
    영어NRSV,1 In the beginning when God created the heavens and the earth, 
    헬라어구약Septuagint,1 εν αρχη εποιησεν ο θεος τον ουρανον και την γην 
    라틴어Vulgate,1 in principio creavit Deus caelum et terram

    개역개정,1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태초에(בְּרֵאשִׁית - 베레쉬트) 

    ‘베레쉬트’는 '베'와 ‘레쉬트’의 합성어이다. '베'는 명사들과 결합하여 그 명사와 관련된 특정한 때를 가리키는 불분리 전치사로서 영어의 ‘IN’에 해당한다. 그리고 레쉬트는 '근원'(2:10), '머리'(3:15), '꼭대기'(왕상 18:42) 등의 의미를 가진 어근 '로쉬'에서 유래한 것으로서 ‘시작'(10:10), '근본'(시 111:10), ‘으뜸’(욥 40: 19) 등의 의미를 갖는다. 이처럼 ‘베’ 와 ‘레쉬트’의 합성어인 ‘베레쉬트’는 직역하면 시간이 막 흐르기 시작한, 시간의 시작인 '시초에'라는 뜻이며 인간 역사의 시작을 의미한다. 

    그리고 이 '태초에'는 시간의 시작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주 공간 자체와 우주 만물의 구성 재료가 될 모든 기본 물질들을 '무'에서 '유'로 한 순간에 생겨나게 하신 ‘때’를 가리키는 말이기도 하다.

    요한복음 1:1에도 '태초에'라는 말이 나오는데 이는 헬라어 '엔 아르케'를 번역한 말로 '영원부터'라는 뜻이다. 즉, 요한복음 1:1의 '태초에'인 '엔 아르케'는 시간이 시작되기 이전의 영원한 때를 가리키는 반면 창세기 1:1의  '태초에'인 '베레쉬트'는 시간이 시작되었던 때, 즉 영원과 시간의 시작이 접촉되는 때를 가리킨다.   

    따라서 두 단어 모두 한글로는 '태초에'로 번역되었지만 그것이 가리키는 근본적인 의미는 조금 다르다고 할 수 있다. 

    정리하면 '태초에'는 하나님이 천지 창조를 개시함으로 시작된 '역사적 시간의 출발점'을 가리킨다. 
    이는 창세기가 영원 전 사건을 다루는 것이 아니라 우주 및 인류가 탄생하는 시점으로부터 시작되는 역사에 관한 서술임을 보여준다. 

    하나님이(אֱלֹהִים - 엘로힘) 

    앞의 '태초에'는 천지가 언제 창조되었는지를 밝힌 것이고, '하나님'은 천지를 누가 창조하였는지를 밝히는 것이다.

    이 엘로힘은 ‘권세 있다’, ‘강하다’란 뜻을 가진 '울'에서 유래한 것으로서 '권세 있고 힘 있는 뛰어난'이란 뜻을 가진 '엘로아흐'의 복수형이다. 
    즉, 엘로힘은 '두려워해야 할 강하고 능력있는 자', '경외해야 할 최고의 존재'라는 의미이다. 

    '여호와'란 명칭이 '언약을 지키시는 자', '택한 백성을 구속하는 자'란 의미로 쓰였다면(출 6:3), 
    이 '엘로힘'이란 명칭은 성경에서 주로 하나님의 주권과 능력을 강조할 때 쓰였다(출 20:1; 신 6:4; 삼하 22:32). 
    한편 일부 학자는 '엘로힘'이 '엘로아흐'의 복수형인 점을 들어 이를 다신론적 사상의 반영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 '엘로힘'이라는 단어는 비록 형태는 복수형이나 실질적으로는 단수로 사용되었다. 
    왜냐하면 이 '엘로힘' 뒤에 나오는 '창조하시니라'란 동사가 단수 형태로 사용되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하나님을 '엘로힘'으로 표현한 것은 삼위이시나 일체이신 하나님의 존재 양식에 대한 암시로 볼 수 있다(26절). 
    그리고 존귀하거나 장엄한 것을 표현할 때 복수형을 쓰는 히브리인의 독특한 관습에 따라 이를 장엄의 복수형으로도 볼 수 있다.

  • אֱלוֹהַּ Storng number 433

  • 1. 신성.  2. 참된 하나님.  3. 신
    Pronunciation [ ’ĕlôwahh ] 
    Etymology  /  410에서 유래한 강조의 연계형 
    Old Testament / 57회 사용
    • 1. Noun 신성, 출 12:12.
    • 2. Noun 참된 하나님, 신 32:15.
    • 3. Noun 신, 단 11:37.
    • 4. Noun 왕, 시 82:1.
    • 관련 성경  /  하나님(신 32:15, 욥 19:6, 합 3:3), 신(대하 32:15, 사 44:8, 단 11:39).
  • 천지를(אֵת הַשָּׁמַיִם וְאֵת הָאָרֶץ - 엩 핫솨마임 웨엩 하아레츠) 

    이제 창조의 대상이 무엇이었는지를 밝힌다. 히브리어 '엩'는 우리말 '~을', '~를'이고 '핫솨마임'은 복수로 '그 하늘들'이라는 뜻이다. '그리고'에 해당하는 접속사 '웨'와 '엩'가 결합하여 '웨엩'가 되었고 '하아레츠'는 '그 땅'이라는 뜻이다. 따라서 이 문장을 직역하면 '그 하늘들을 그리고 그 땅을'이다.

    여기서 하늘이 복수형으로 표기된 것은 고대 히브리인들의 하늘 개념이 반영된 것이다. 고대 히브리인들은 하늘을 세 개의 층으로 이루어진 것으로 보았다. 새들이 날아다니는 우리 눈에 보이는 공중인 첫째 하늘, 그리고 우리들이 살고 있는 땅을 반원형으로 둘러싸고 있는 것으로 해, 달, 별 등이 붙어 있는 궁창(Firmament)과 그 위에 보관된 엄청난 양의 물로 구성된 둘째 하늘, 그리고 그 너머의 순수한 영적 존재들인 천사들이 하나님의 영광의 현현을 매일 보며 거하는 셋째 하늘. 이렇게 히브리인들은 하늘이 모두 세 개의 층으로 이루어졌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하늘을 표현할 때에 복수로 표현했다. 

    또한 여기서 '땅’을 표현하는 ‘아레츠’도 하늘과 대조된 의미에서의 ‘온 땅’ 곧 우리들이 발붙이고 사는 이 '지구' 뿐만 아니라 넓게는 땅 아래의 ‘지하 세계(the Underworld)’까지 가리킨다. 

    그리고 여기서 천지를 만드셨다는 뜻은 문자적으로 하늘과 땅만 만드신 것이 아니라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을 다 만드셨다는 의미이다. 성경에는 ‘해 돋는 데서부터 해 지는 데까지'(시 113:3), ‘단에서 브엘세바까지’(삼하 17 :11) 등과 같이 양 극단을 사용하는 표현이 나오는데 이것은 그 양극단 뿐만 아니라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을 다 포함하고 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천지를 만드셨다는 표현은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을 다 창조하셨다는 뜻이다. 

    히브리인들의 하늘 개념(그랜드종합주석 p.194)

     창조하시니라(בָּרָא - 바라) 

    창세기 1장 1절에서 '태초에'는 '언제(when)'를, '하나님이'는 '누가(who)' 를, ‘천지를’은 ‘무엇(what)'을, 끝으로 ‘창조하시니라’는 ‘어떻게(how)'를 보여 준다. 

    ‘창조하시니라’에 해당하는 히브리 원어는 ‘바라’인데 이 단어의 어원은 불명확하다. 
    그러나 용례상 대략 '자르다(cut)', '새기다 (carve)' 그리고 '낳다' 또는 '출생하다(bear or be born)', 그리고 '먹다(eat)', '양육하다(bring up)', '살이 오르다(get weight)' 등의 뜻으로 쓰였다. 그런데 이 '바라'가 '만들다', '지어 내다'라는 뜻으로 쓰일 때에는 오직 하나님과만 관련되어 쓰였다. 그리하여 그 이전과는 자르듯이 완전히 단절된 상태에서 전혀 새로운 것을 만드시고 또 있게 하시는 하나님만의 절대 주권적 행위를 나타낸다(신 4:32; 시 89:12; 사 43:1; 렘 31:22). 따라서 '바라'는 이전에는 전혀 없었던 일을, 이전의  그 어떤 것과도 상관없이 새로이 있게 하는 절대적 창조 행위를 가리킨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하나님의 창조 활동은 그분의 자유로운 의지에서 기인한 단독 사역이다. 그리고 하나님의 창조 능력은 제한적이거나 부차적이지 않고 완전한 무에서 유에로의 창조를 가능케 하는 새롭고 신비한 성격의 것이다. 또한 절대적이고 초월적인 존재인 하나님은 모든 피조물의 주인으로서 그 모든 것을 자신의 기쁘신 뜻에 따라 말씀으로 만드셨다(시33:6-9; 렘10:12).

    이와 같은 절대적 창조 행위는 만물을 초월하여 자존하시는 절대 주권자이신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형상(Imago Dei)인 우리 인간도 우리의 능력을 활용하여 새로운 것을 만들어 낼 수는 있으나 그것은 과거와의 연속성 안에서, 이미 있는 것을 활용해서만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바라'는 '만들다', '지어내다'라는 뜻으로 구약에서 총 44회 쓰였는데, 이 때에는 오직 ‘하나님’을 가리키는 단어와만 짝을 이루어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절대적 창조 행위를 가리키고 있다. 그리하여 여기 창세기 1장 1절의 '창조하시니라' 곧 '바라'는 무에서 유로 광대한 우주 공간은 물론 그 안의 천하 만물을 구성할 재료가 될 모든 기본 물질들을 동시에 존재하게 하신 하나님의 절대적 창조 행위를 가리킨다.

    * 성경의 창조 이야기 외에도 수메르 신화에는 아트라하시스의 태초 이야기, 사람이 태어난 이야기, 지우수드라의 홍수 이야기, 길가메쉬의 홍수 이야기, 바빌로니아 창조 서사시(에누마 엘리쉬), 길가메쉬 서사시 등 창조와 관련된 고대근동문학이 있습니다. 창세기와 다른 신화들의 차이를 알고 싶으면 아래의 글들을 반드시 읽어보시길 바랍니다^^




  • 10월 21일(화) 마태복음 11-12장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안식일의 주인(12:8)

    인자는 안식일의 주인이니라 하시니라. 
    For the Son of Man is Lord of the Sabbath. 

    안식일의 주인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이는 성경(마태복음 12:8, 누가복음 6:5)에 기록된 예수님의 말씀으로, 예수님 자신이 안식일을 제정하고 주관하는 궁극적인 권한을 가진다는 의미입니다. 

    안식일의 주인이라는 말은 단순히 시간의 주관자를 넘어, 안식일의 참된 의미를 해석하고 그 정신에 따라 안식을 주는 분이심을 나타냅니다.  

    창조주로서의 권위 :
    예수님은 만물을 창조하셨으며, 안식일 또한 예수님이 제정하셨습니다. 

    참된 안식 :
    안식일의 주인은 율법의 문자적인 규칙을 넘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참된 안식을 얻게 하시는 분이십니다. 


  • 안식일의 의미 :
    예수님은 안식일이 사람을 위해 존재하며, 사람을 살리고 돕는 본질적인 목적을 가지고 있다고 가르치셨습니다. 

  • 어떤 문제에 있어서 일이 잘되려면 종은 주인의 뜻을 잘 헤아릴 줄 알아야 합니다. 
    종이 주인의 뜻을 무시하고 자기 뜻대로 행동하면 그 일은 망가져 버립니다. 
    그런데 말도 안 되는 이런 일이 안식일 문제에서 발생했습니다.

    ​안식일의 주인이신 우리 예수님은 안식일에 선을 행함으로 아버지의 기쁜 뜻을 행하셨습니다. 
    그러나 무지한 바리새인들은 그들이 만든 장로의 전통으로 예수님을 비난했습니다(마태복음 12:1-21). 
    그러면 안식일 주인 예수님은 어떤 분이신가요?

    1. 안식일의 주인 예수님은 제사보다 자비를 원하시는 분입니다(마태복음 12:1-8)

    예수님은 자신을 성전보다 크며 인자는 안식일의 주인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바리새인들은 제자들이 시장하여 밀 이삭을 잘라 먹는 것을 보고 안식일에 하지 못할 일을 한다고 예수님을 비난합니다. 예수님은 다윗과 함께한 사람들이 시장할 때 하나님 전에 들어가서 진설병을 먹은 일을 통해, 자신이 성전보다 더 큰 이라는 사실을 깨우쳐줍니다.

    제자들이 한 일은 모세 율법에 보면 위배 된 일이 없습니다(신 23:24-25). 오히려 바리새인들이 만든 장로의 전통인 금지 규정(추수 금지, 탈곡 금지, 키질 금지)에 위배 될 뿐입니다. 바리새인들은 랍비 전통을 하나님의 율법과 동등하게 간주하였습니다. 제자들의 행위는 모세 율법에는 배고픈 자에게 허락된 규정이었습니다.

    안식일의 주인이신 예수님은 안식일의 제사보다 자비와 긍휼을 원하시는 분이십니다. 인간의 생명과 건강을 보전하는 일이 어떤 의식이나 규정을 준수하는 것보다 더 중요하게 보십니다. 그분이 바로 성전보다 더 크신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마태복음 12장 1-8). 또 안식일의 주인 예수님은 어떤 분이신가요?

    2. 안식일의 주인 예수님은 안식일에도 선을 행하시는 분입니다(마태복음 12:9-13)

    예수님께서 밀밭을 떠나 회당에 도착했을 때,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을 고발하려고 손 마른 사람을 앞에 두고 예수님께 안식일에 병 고치는 것이 옳은지 여부를 물어보았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안식일에 구덩이에 빠진 양을 구하는 것보다 사람 살리는 선을 행하는 것이 옳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손 마른 자에게 손을 내밀라 하시고 그 손을 다른 손과 같이 완전하게 회복시켜주셨습니다.

    이 사건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주님께서는 모든 사람에게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일이, 바로 사람의 생명을 살리는 일이라는 사실을 분명하게 보여주십니다(마태복음 12장 9-13). 이렇게 선을 행하시는 안식일의 주인 예수님은 또 어떤 분인가요?

    3. 안식일의 주인 예수님은 상하고 연약한 심령을 불쌍히 여기시는 분입니다(마태복음 12:14-21)

    바리새인들과 예수님의 행동이 어떻게 대조적인가요?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의 옳은 말씀을 듣고 선행을 볼수록 예수님을 죽이려고 합니다. 반면에 예수님께서는 자기를 따르는 많은 병자를 고쳐주시고, 그들에게 자기를 나타내지 말라고 경고하셨습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우리 예수님에 대해서 어떤 분으로 예언했나요? 그는 다투지도 않고 들레지도 않으며 상한 갈대를 꺾지 않고 꺼져가는 심지도 끄지 않는 분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 택함과 사랑을 받으신 예수님은 이방에 심판을 알게 하시며, 이방이 그를 바랄 것이라는 예언을 이루십니다. 심판 가운데서 죄인과 연약한 자들을 불쌍히 여기셔서 그들을 구원해주시는 분이 바로 안식일의 주인이신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마태복음 12:14-21).

    ​안식일의 주인 예수님은 누구신가요? 예수님은 자기에게 나오는 자는 누구에게나 종교적 의식과 규정의 준수 차원을 넘어 자비와 긍휼을 베푸시고 생명을 주시며 소망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이점이 세상의 왕과는 확연히 다른 점입니다.​

    왜 안식일의 주인 예수님을 믿어야 할까요? 예수 그리스도만이 절망과 좌절뿐인 이 세상에 진정한 구원과 소망이 되시기 때문입니다. 불순종의 죄로 인한 저주와 절망의 뿌리를 제거하는 길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속량의 은혜뿐입니다. 예수 그 이름만이 우리의 유일한 소망이 됩니다(마태복음 12:1-21)


    사람을 위한 안식일, 안식일의 주인 되신 예수님(누가복음 6:1-11)


    본문은 예수님의 사역에 반대하는 자들과의 충돌을 기록한 5:1~6:11의 마지막 단락이다. 예수님에 대한 반대가 정점에 이른 것을 묘사하고 있다. 1~5절과 6~11절의 이야기는 각각 안식일을 배경으로 일어나서 이른바 “안식일 논쟁”이라고도 불린다. 안식일의 의미와 정신을 정확히 해석하는 권위가 누구에게 있는지, 또한 안식일을 두신 하나님의 뜻을 어떻게 실현하는지 보여준다.

    할례와 음식 규례와 더불어 안식일 준수는 유대인들과 이방인들의 경계를 표시하는 기능을 했다. 안식일 준수의 중요성은 구약에도 강조되었으나 제2성전기에 훨씬 더 강화되었고 이스라엘의 정체성을 규정하는 것이다. 안식일 준수는 공동체의 결속력을 보여주는 상징이었다. 이런 목적을 위해 후대에 안식일 규례가 추가되었고 예수님 당시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안식일 관련 규례를 해석하는 절대적인 권위를 갖고 있었다.

    1. 안식일의 주인(1~5절)

    안식일에 예수님이 밀밭 사이로 지나가실 때 제자들이 이삭을 잘라 손으로 비벼 먹었다(1절). ‘누가’는 이 사건이 “안식일”에 일어난 것을 강조한다. 제자들의 행위를 본 바리새인들은 “너희들”이 안식일에 금지된 일을 행한다고 비난했다(2절). 제자들은 율법에 따라 농부들이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남겨둔 곡식의 이삭을 잘라 먹었던 것으로 보인다(레 23:22). 신명기 규례는 다른 사람의 밀 이삭 자르는 것을 허락하기에 제자들이 밀 이삭을 자른 것은 절도가 아니었다(레 23:25). 그런데 문제는 바리새인들의 관점에서 제자들이 안식일 전통을 어긴 것으로 본 것이다. 바리새인들의 전통에 따르면 제자들이 밀 이삭을 잘라 먹은 행위는 추수, 탈곡, 까부르는 것, 가는 것에 해당할 수 있었다. 이삭을 자른 행위를 바리새인들이 추수로 해석한 것은 구약의 율법이 아니라 후대 유대교가 추가한 규례에 따른 것이었다.

    예수님은 바리새인들의 질문에 다윗의 이야기(삼상 21:1~6)를 근거로 대답하며 제자들을 변호하신다(3~4절). “다윗이 자기와 및 자기와 함께 한 자들이 시장할 때에 한 일을 읽지 못하였느냐?”라고 질문하신다(3절). “읽지 못하였느냐?”라고 바리새인들의 오해를 지적하신 것이다. 본문의 초점은 해석의 권위를 가진 예수님이 안식일의 의미를 제대로 드러내는 데 있다. 예수님은 바리새인들이 다윗의 이야기를 당연히 알고 있겠지만, 정작 그 사건의 정확한 의미는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고 판단하신다. 다윗은 하나님의 전에 들어가서 제사장만 먹을 수 있는 진설병(레 24:5~9)을 먹고 자신과 함께한 사람들에게도 주었다(4절). 다윗이 먹을 것을 찾으러 간 곳은 하나님의 집, 곧 성막이었다. 성막에는 안식일에 제사장들을 위해 준비해 둔 열두 개의 빵이 있었다(출 40:23; 레 24:5~9). 다윗과 일행은 제사장들에게만 허용된 규례를 ‘안식일’에 침범했다.

    다윗과 일행이 안식일에 진설병을 먹은 사건이 어떤 점에서 제자들이 안식일에 밀 이삭을 잘라 먹은 행위를 정당화하는 근거가 되는가? 대답은 “인자는 안식일의 주인이니라(5절)”에 나온다. 바리새인들은 안식일 규례에 담긴 하나님의 뜻을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에 사람들을 규례로 구속하고 심지어 생명을 악용하기도 한다(6~7절). 그러나 예수님은 안식일의 주(퀴리오스)로서 안식일 규례에 나타난 하나님의 뜻을 정확히 대변하신다. 5절의 “인자(단 7:13)”에 근거하는 예수님의 자기 호칭은 죄 용서의 권위를 주장할 때 이미 등장한 바 있으며(5:24), 여기서도 안식일에 대한 주권을 명시하기 위해 사용되고 있다. 다윗과 일행은 목숨을 잃을 정도로 배가 고팠고, 다윗은 안식일 규례가 배고픔의 문제에는 탄력성 있게 적용되는 것으로 해석했다. 예수님은 안식일의 주로서 다윗보다 훨씬 높은 권위로 안식일을 해석하신다.

    제자들은 다윗 일행처럼 허기진 상태였을 것이다. 안식일은 선(6:9)과 자유(13:16)와 치유(14:3)의 날이므로, 안식일에 배고픔 문제가 해결되는 것이 안식의 의미에 맞는다. 이미 구약에서 배고픔과 같은 인간의 필요를 위해 안식일 규례도 유연성을 보였다. 예수님의 나사렛 선언처럼 가난한 자들에게 기쁜 소식이 전해지는 하나님 나라가 도래했고 희년의 복음이 안식일에도 실행되고 있다(4:18). 안식일은 하나님 나라의 일꾼들이 굶으면서 고통 가운데 보내는 날이 아니다. 희년의 복음이 실현되는 날이라는 관점에서 인간을 속박하는 날이 아니라 인간을 위한 날이다(4:18~19, 21).

    이처럼 예수님은 안식일에 무엇을 하는 것이 옳고 그른지 판단할 수 있는 안식일의 주로서 제자들의 행위가 안식일 규례를 어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를 조금이나마 맛본 것으로 변호하신다. 교회의 역사에서 규정되고 추가되는 규례와 전통은 안식일의 주가 되시는 예수님의 시각에서 항상 해석돼야 하고 복음의 관점에서 점검받아야 하는 것이다. 인생의 어려움과 눈물보다 규례를 더 중요한 가치로 여긴다면, 그것은 희년의 복음에서 멀리 이탈한 판단이다. 예수님은 제자들의 궁핍을 긍휼의 마음으로 이해 하셨고, 가난한 자들에게 전해지는 기쁜 소식을 유대교의 전통이 막을 수 없다고 해석하신 것이다.

    2. 안식일의 치유(6~11절)

    또 다른 안식일에 예수님이 회당에서 가르치실 때 오른손 마른 사람이 있었다.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한 손 마른 장애인을, 예수님을 고발할 증거로 확보하기 위해 이용한다. 그들은 예수님이 안식일에 밀 이삭을 잘라 먹은 제자들을 변호한 행위와 더불어 안식일에 금지한 치유를 증거 삼으려고 했다. 예수님은 물론 그들의 의도를 알고 계셨다(2:35; 5:22; 9:47; 24:38). 예수님은 손 마른 사람을 한가운데에 세우셨다. 사람들의 초점이 장애인에게 집중된다. 예수님은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에게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과 악을 행하는 것, 생명을 구하는 것과 죽이는 것, 어느 것이 옳으냐?”라고 물으신다(9절).

    당시 유대교 전통에서 안식일에는 응급 처치만 가능했고 실제적인 치료는 안식일이 지나야 가능했다. 이런 전통의 시각은 한 손 마른 장애는 안식일에 당장 해결해야 하는 응급 처치가 아니다. 하지만 안식일의 주가 되는 주님의 시각에서 치유는 안식일에도 일어나야 하고, 생명이 살아나는 것은 안식일의 본래 의미다. 생명을 살리는 것이 선이며, 선을 행해야 하는데도 행하지 않는 것은 악이다.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안식일에 악한 행위를 하고 있었다. 그들은 타인에게 의존해 살 수밖에 없는 장애인의 인격을 존중하고 회복하지 않고 도구로 악용했다. 사회에서 약한 사람을 도구로 사용하는 행위 자체가 악이다. 또한 염탐꾼처럼 덫을 설치하고 엿보는 모습은 이미 선생의 자세가 아니다.

    예수님은 손 마른 사람에게 장애가 있는 손을 내밀라고 하신다. 일반적으로 장애가 있는 사람의 경우 손을 숨기게 마련이지만 예수와 바리새인들 사이의 논쟁을 지켜보면서 손 마른 사람은 예수에 대한 신뢰가 생겼는지 용기를 내어 자신의 치부를 내민다. 예수께 치부를 드러내는 것은 치유의 출발이라 할 수 있는데, 그가 말씀에 순종하여 손을 내밀자 곧 회복된다(10절).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생명을 위협하는 문제가 아닌 경우 안식일이 지날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고 해석했다. 그들의 판단에는 손 마른 사람의 치유가 안식일 법보다 우선될 수 없었다. 그러나 예수께는 신체의 문제를 해결 받는 날에서 안식일이 제외되지 않는다. 가난한 자들에게 기쁜 소식이 전해지고 갇히고 눌린 자들에게 자유가 주어지는 것이 복음이다. 빈궁한 인생에게 치유로 안식을 선사하는 것이 안식일의 진정한 의미다. 오늘이 안식일이라고 해서 생명을 살리고 회복하는 일을 내일로 미룰 이유가 없다. 복음의 혜택을 누리는 “오늘(4:21)”에서 안식일이 예외가 될 수는 없다. 예수의 치유는 나사렛 회당에서 선언한 희년의 복음이 실현된 사건이다(4:18~19).

    현장을 목격한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분노하면서 예수님을 어떻게 처리할 것인지 의논하기 시작한다(11절). 안식일을 만드신 하나님의 뜻을 공동체에 실현해야 할 신앙의 선생들이 하나님의 마음을 가로막는 도구 역할을 하고 있다.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의 뜻을 잘못 해석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뜻이 실현되는 상황을 보고 분노할 수 있다. 그래서 성경에 대한 오해를 유발하는 자기도취적 분노는 선의의 피해자를 만드는 비극으로 귀결된다.

    예수님의 긍휼은 손 마른 사람을 회복시켰으나 이제 위험을 감수해야 한다. 긍휼은 반드시 희생을 동반한다. 희생 없는 긍휼은 진정한 회복을 일으킬 수 없다.

    나는?

    -사람을 살리는 안식일이다. 온 세상의 주인이신 예수님과 함께하는데도 제자들은 나그네와 약자들을 위해 추수하지 않고 남겨둔 밀 이삭을 즉석에서 손으로 비벼 알곡을 먹어야 할 만큼 넉넉하지 못했고 배고팠다. 안식일을 아는 바리새인이라면 자기 것을 내줌으로 그들의 허기를 채워 안식을 누리게 해주어야 마땅했다. 다윗이 안식일에 하나님의 전에 있는 제사장의 진설병을 허기진 군사들에게 준 것이나, 예수께서 안식일에 손 마른 자를 고치셨듯이 말이다. 안식일은 우리에게 자유와 해방, 배부름과 기쁨을 주기 위해 주신 축제의 날이기 때문이다.

    -유대교 종교 지도자들은 안식일의 참 의미를 몰랐기에 안식일을 성취하러 오신 예수님도 알아보지 못했다. 이제 금식의 시대가 가고 잔치의 시대가 왔으며, 안식일의 그림자 시대는 가고 그 실체이자 주인이신 예수님 안에서 참 안식을 누리며 ‘먹는’ 날이 온 것이다. 이젠 ‘주일’만이 아니라 주 안에 거하고 주의 은혜를 받아 누리는 모든 날이 참 안식이 실현되는 날이 되게 하셨다. 안식일은 ‘날’을 지키도록 주신 것이 아니라 ‘나를’ 자유롭게 하려고 주신 날이다.

    -즐거이 순종하고 기쁘게 구원과 축복을 누리도록 주신 안식일에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감시와 정죄를 일삼았다. 예수를 고발할 증거를 찾기 위해 형제를 시험하였으며, 결국엔 안식일의 주인이신 ‘인자’ 예수를 죽일 모의까지 하기에 이르렀다. 그들은 안식일의 참 의미를 감추고 지우며, 왜곡하여 망가뜨렸다. 기쁨과 해방의 날을 신음과 짐과 의무의 날로 변질시켰다. 모두가 누리는 날이 아니라 율법을 해석할 권한을 가진 소수만 독점적으로 지키는 날이 되게 만들었다. 되려 그들은 안식일 준수자가 아닌 파괴자였다.

    -예수님은 안식일에 회당에서 손 마른 자를 말씀으로 고치심으로써 그에게 안식을 주셨다. 이로써 자신이 선을 행하고 생명을 구하는 안식일의 주인으로 오셨음을 증명해 보이셨다. 주님은 손 마른 자와 접촉하지 않고 말씀으로만 낫게 하심으로써 바리새인의 전통마저 어기지 않으시지만, 서기관과 바리새인에게는 예리한 질문을 던져 그들이 안식일의 본래 정신과 의도를 훼손하고 껍데기뿐인 전통만 붙잡고 있음을 드러내셨다. 손 마른 자의 치유는 예수님과 함께 도래한 하나님 나라가 안식의 나라요, 생명의 나라임을 보여주는 증거다.

    -예수님의 오심으로 더는 안식일이 “날” 준수의 문제가 아니라 한 인격, 예수님과의 관계의 문제가 되었다. 예수님 안에서 왜곡되어 온 안식일의 본래 의미가 살아났고, 누리지 못했던 온전한 축복이 향유되기 시작했다. 안식일은 선을 행하는 날이고 생명을 살리는 날이다. 굶주린 자가 배불러야 하는 날이고 손 마른 자가 일어나야 하는 날이다. 그리하여 유대교에 의해 말라비틀어져 핏기 없던 말씀에 화색이 돌고 생기가 넘치게 하는 날이다. 예수님 안에 거하며 그분과 교제하고 그분으로 기뻐하고 예배하는 날이다.

    -예수님은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포로가 되고 눌린 자에게 자유를, 눈먼 자를 다시 보게 하는 구원의 날(4:18), 즉 “선을 행하고 생명을 구하는’ ‘주의 은혜의 날’을 안식일 치유를 통해 맛보게 하셨다. 그러나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안식일에 그 안식일을 성취하시는 메시아의 자비로운 역사를 보고도 생명이 회복되는 기쁨의 잔치에 참여하지 않고 도리어 생명을 죽일 모의를 한다. 안식을 배우고 가르쳤지만, 안식을 누리지 못하고 있었음을 스스로 드러냈다. 그들이 기대한 메시아는 사망의 세상을 뒤집고 뒤엎는 생명의 나라가 아니라 힘 있는 자가 득세하는 또 하나의 로마였다.

    *주님, 안식일의 주인이신 주님의 살리고 회복하여 기쁨의 잔치를 누리는 날로 우리의 예배의 날이 풍성하여 지기를 소망합니다.

    *주님, 사람을 사랑하고 살리는 주님의 날이어야 할 우리의 주일이 주님 덕분에 즐겁고 행복한 날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안식일의 주인(마가복음 2:23-28)

    묵상을 위한 질문
    1. 안식일에 제자들이 일한 것(이삭을 자른 것)에 대한 바리새인의 태도와 예수님의 태도를 비교해 보세요.
    2. “인자가 안식일의 주인이다”라는 말의 뜻은 무엇인가요?

    출애굽기 31장 15절은 “엿새 동안은 일할 것이나 제 칠일은 큰 안식일이니 여호와께 거룩한 것이라 무릇 안식일에 일하는 자를 반드시 죽일찌니라”라고 명령합니다. 
    안식일 계명은 유대교의 근간이며, 십계명 가운데 가장 강조되는 계명입니다. 또한 할례와 더불어 유대교의 표지로 간주되었습니다. 따라서 예수님의 제자들이 안식일에 이삭을 잘라 먹은 것은 유대교의 가장 중요한 계명을 어긴 범죄로 사형에 처해질 만한 중죄입니다. 또한 스스로 유대교 신앙을 부인하고 유대인의 정체성을 부정하는 행위였습니다. 이 사건은 제자들의 생명뿐 아니라, 예수님의 생명을 위협하는 중대한 사건이었습니다.

    어떻게 제자들은 이렇게 중한 죄를 스스럼없이 저지를 수 있었을까요? 안식일의 의미에 대한 예수님의 철저한 가르침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당시 유대교의 전통에 따르면, 제자는 오직 스승의 가르침만 따라야 했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가르침에 순종하여 그 결과는 예수님께 맡긴 채 그대로 실천했습니다. 스승의 가르침을 실천한 제자들의 행위는 스승이 책임집니다. 따라서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에게 당신의 제자들이 어찌하여 안식일에 해서는 안 되는 일을 하느냐고 질문한 것은 왜 그렇게 가르쳤느냐고 예수님에게 책임을 묻는 것입니다.당신은 하나님의 진리와 세상의 전통, 관습, 문화, 법 등이 충돌할 때, 기꺼이 대가를 지불할 각오로 진리에 순종하십니까? 순종에 대한 결과는 하나님이 책임지십니다.

    제자들의 행위를 보는 예수님의 시각과 바리새인들의 시각은 대조적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의 필요를 보시고 이를 옹호했다면, 바리새인들은 율법의 잣대로 제자들을 비판하면서 고소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자녀들에 대한 하나님의 태도와 사단의 태도를 잘 보여 줍니다. 예수님과 성령님은 우리를 위한 보혜사, 즉 우리를 변호하시고 옹호하시는 분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신뢰하고 그분과의 교제를 지속하는 한, 하나님은 언제나 우리를 이해하고 옹호하고 도우십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우리의 피난처가 되시고 환난 중에 큰 도움이 되십니다. 사람들의 비판, 고소, 험담, 중상, 모략, 질시에 고통 당할 때, 주님은 전적으로 나를 도우십니다.

    이 사건을 통해 드러난 예수님의 가르침은 둘입니다. 첫째, 주님은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있다.’라고 선언하십니다. 모세오경을 잘못 해석한 유대교인들은 사람이 계명을 위해 존재하는 것, 사람이 안식일을 위해 존재하는 것으로 해석했습니다. 사람에게 쉼과 축복과 거룩함을 주시려고 만드신 안식일이 사람을 구속하고 짐을 지우는 것으로 바뀌었습니다. 주님은 이런 잘못된 역전을 비판하고 원래의 목적을 다시 선포하셨습니다.

    둘째, ‘예수님 자신이 안식일의 주인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안식일의 주인은 안식일 계명이 아니라 하나님이십니다. 인자가 안식일의 주인이라는 말은 예수님이 창조주라는 선언입니다. 예수님이 만물을 창조하신 온 우주의 주인이라는 뜻입니다. 이 진리는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있다’는 선언보다 훨씬 근원적입니다. 하나님이 없다면, 안식일도 없고 하나님 나라와 영생도 존재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유대교는 하나님보다 율법을 우위에 두는 심각한 오류를 범했습니다. 이 죄악 때문에 그들은 하나님의 아들을 율법에 근거해 십자가에 못 박는 죄를 지었습니다. 하나님보다 우선하는 그 어떤 것(종교적인 것을 포함)도 우상입니다. 하나님보다 우선하는 것을 위해 살고 있다면, 그것은 철저한 우상숭배입니다.

    적용을 위한 질문

    1. 세상의 가치 기준과 하나님의 말씀이 충돌할 때, 진리를 따릅니까?
    2. 당신의 삶에서 이웃보다 중요하고 하나님을 우선하는 것(가치, 목적, 목표…)은 혹시 없나요?

    언제나 나를 사랑하시고 내 갈 길을 인도하시는 주님! 나를 향하신 당신의 뜻을 깨닫게 하시고, 
    그 뜻이 비록 세상의 가치와 충돌할지라도 결과를 주님께 맡기고 순종할 수 있도록 도우소서. 
    내 삶에 하나님보다 우선하는 것이 있다면, 깨닫게 하시고 버리게 하여 주옵소서.  


    작은 것에서 큰 것을(마태복음 25:31-46)

    아드 저드슨(Adoniran Judson 1788-1850)은 미국 교회가 해외에 파송한 최초의 선교사입니다. 
    그는 지금의 미얀마인 버마로 건너가 37년 동안 버마의 복 음화를 위하여 애쓰다가 1850년 4월에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회중교회의 목사 아들로 태어난 (아도니람 저드슨)은 젊은 시절 한때 하나 님을 등진 때도 있었으나, 선교사가 되기로 결심한 후, 우여곡절 끝에 1813년 버 마 랭구운에 상륙하게 됩니다.

     당시 버마는 종교의 자유를 허락지 않아 그의 선교 사역은 고통과 궁핍과 좌 절의 연속이었습니다. 열병과 이질로 인한 아내와 자녀의 죽음은, 버마를 향한 그의 선교에 대한 열정을 감소 시킬 수는 없었습니다. 6년만에 처음으로 결신 자 를 얻게 되었습니다. 그후에 굳게 닫혀 있던 버마의 복음의 문이 열리게 되었습 니다.

     그는 계속적인 성경 번역 작업으로 23년만에 성경의 전권을 버마어로 번역함 으로써 버마 복음 화에 결정적 계기를 마련하였습니다.

     (아도니람 저드슨)은 작은 민족, 작은 나라를 사랑한 믿음의 사람이었습니 다. 그는 다른 사람들이 업신여기는 나라와 국민을 귀중히 생각하는 사람이었습 니다. 그는 작은 것을 사랑하다가 죽어 간 사람이었습니다. 하지만 (아도니람 저 드슨)은 우리 모두에게 작은 것을 사랑했던 소리 없는 영웅으로 영원히 기억되 고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온통 큰 것, 많은 것, 높은 것을 추구합니다.

    현대인들의 추구하는 대상은 모두가 큰 것에 대한 집착입니다. 큰 집, 많은 재물, 높은 지위를 원합니다. 따라서 이 세상에서는 작은 것, 적은 것, 낮은 것은 무시 하는 생각들이 많습니다. 작은 승용차를 타면 경찰관이나, 회사의 수위들에게도 무시를 당하는 것이 사실입니다. 가난하게 사는 것을 수치스럽게 생각하기 때문 에 교인들도 목사들의 심방을 꺼리는 것이 현실입니다. 그러다 보니, 그런 무시 를 당하지 않으려고 없는 가운데서도 있는 것 척하기 위하여 큰 차를 사서 타고 다니고, 없으면서도 있는 척하기 위하여 비싼 옷을 해 입고 다니는 것이 현실입 니다.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은 작은 것을 위한 삶, 적은 것을 소중히 여기는 삶, 낮은 것을 사랑하는 삶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작은 것 을 통하여 큰 것을 바라보게 하는 말씀입니다.

     1. 작은 것에서 큰 것을 보시는 하나님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지극히 (작은 자)란 소외되고, 무시되고, 하찮게 여기는 자들을 가리킵 니다. 그들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단순한 박애 정신을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주의 이름으로) 라는 단서가 들어가 갑니다.

    내 이름으로 이 소자중 하나를 영접하는 자는 하늘에서 상이 크다고도 하였습니 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이제부터 성경에 가르쳐 준 그대로 실천하는 운동입니 다. 작은 것에서 큰 것을 볼 수 있는 눈이 열려야 하겠습니다.

     무엇에서부터 작아져야 하겠는가 자신의 삶의 고백에서부터 작아져야 하겠습니다.

    더더욱 신앙의 성숙을 위하여 작아져야 하겠습니다.

    대부분의 덜 성숙한 사람에게는 여유가 없습니다. 교만으로 차 있습니다.

    그러나, 스스로 낮아진다는 것은 그마큼 여유를 가졌다는 증거입니다.

    우리 주님께서 하늘 보좌를 버리시고 스스로 낮은 자리로 내려 오셨습니다.

    오늘까지 우리는 너무나 높은 자리들만 쳐다보면서 살았습니다.

    작은 것, 낮은 것, 그리고 스스로 작아지는 것, 그런 신앙적 훈련을 받아야 하겠 습니다.

     2. 작은 것에 관심을 가지는 한 큰 것을 맡겨 주심

    작은 것에 충성하는 자는 큰 것에도 충성하고, 작은 것에 불 충성한 자는 큰 것에도 불 충성한다고 했습니다. 교회 안에 봉사도 마찬 가지입니다. 얼마나 남 이 하찮게 여기는 일을 크게 보고하였습니까 하나님은 그 모든 것을 살피시는 하나님입니다.

     성경의 인물 중 큰 자가 변하여 작은 자가 된 경우의 대표적 인물은 바울일 것입니다. 그는 본래 사울이란 이름을 가졌던 사람이었습니다. 사울이란 본래 큰자란 뜻입니다. 그 이름에 맞도록 그는 세상에서 큰 사람이 되려고 온갖 노 력을 다했습니다. 그는 히브리인 중에 히브리인이요, 벤야민의 지파요, 율법으로 는 바리새인이요, 학문으로는 다소 대학의 가말 리엘 문하에서 당시에 헬라 철학 을 통달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자기가 믿는 신앙의 기준으로도 완전 한 사람이었습니다. 대제사장들도 그를 인정하는 촉망받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 기에 그에게 모든 권한을 위임하여, 나사렛 예수를 따르는 무리를 압송해 오도록 권력을 위임해 주었습니다. 어느 날 예수를 따르는 이단을 믿는 스데반이라는 한 청년이 붙잡혔습니다. 그를 돌로 쳐죽이는 일에 가표를 던질 만큼 사울을 당당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후부터는 완전히 변해 버렸습니다.

    그렇게 큰 자라고 자부하면서, 또 그렇게 높은 사람들과만 교제하려던 그가 이제는 가장 작아졌습니다. 과거의 자랑거리를 다 버렸습니다.

    이제 그는 생의 전환점을 예수 그리스도에게 두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의 대한 것 이외에는 아무것도 알기를 원치 아니 했습니다. 그리고 자신을 일컬어 만삭되지 못하여 난자 같다고 하였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죄인 중에 괴수라고 까지 하였습니다.

    사람이 변해도 이렇게 변할 수가 있을까 하리 만치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이것이 작은 사람이된 대표적 경우입니다.

     우리 주변에는 바울과 같이 변화된 사람들이 한 두 사람이 아닙니다.

    과거에는 주먹으로 세상을 주름잡던 사람들이 봉사의 일꾼이 되었고, 과거에는 온통 감투라감투는 혼자 쓰기를 좋아하던 사람이 아무도 모르게 세상 의 소금으로 자신을 녹이며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우리들 가운데도 아마 그런 사람들이 있을 줄 압니다.

    만일 예수를 모르고 살았다면, 오늘 이 자리에 나와 앉아 있겠는가 상상도 하지 못할 일일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면 스스로 낮아 질 수밖에 없습니 다. 왜냐하면, 그가 스스로 하늘 보좌를 버리고 강생하여 죄인의 모습으로 이 세 상에 오셨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만일 우리 믿는 사람들이 예수님을 따라 나셨다고 하면서도, 높아지기 만 좋아한다면, 그것이 과연 예수를 따르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3. 작은 것을 사랑하는 사람 

    바울은 그후에 그 이름처럼 바울 즉 작은 자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세상에 온갖 큰 것들을 다 포기하고, 오로지 한 생명을 천하보다 더 크 게 보고 복음을 들고 나셨습니다. 
    그러면서 궁핍과, 고난과, 매맞음과, 갇힘과, 잠 못 잠과, 소란을 몸소 겪어야 했습니다. 
    요즘 이렇게 바울처럼 궁핍과 고난과 매 맞음과 갇힘과 잠못잠을 겪으면서 선교하는 선교사들이 얼마나 될까 한번쯤 생 각해 보게 됩니다. 그러면서, 나 자신을 살펴 보기도 합니다.

    저는 신앙의 가정에서 태어나, 부모님들의 신앙적 분위기에 성장한 모태신앙 자입니다. 
    그러기에 어려서부터 보고 들은 것이 오늘의 다져진 신앙의 터전이 된 줄 압니다. 
    저는 오늘까지 한번도 내 자신이 훌륭하다고 생각해 본 적이 없습니 다. 
    모두 우리 부모님들의 못 먹고, 못 누리면서 증거한 전도인의 희생적 봉사의 결과라고 그렇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우리 아버님의 기도의 능력에 비하면, 나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우리 아버님의 영역에 충만한 말씀 증거에 비하면 나는 비교도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나의 나 된 것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라고 고백한 사도 바울 처럼 나도 마찬 가지입니다. 
    오늘의 나의 모든 것은 나 자신의 것이 아니고, 부모님의 물려 준 신앙의 유산의 힘이라고 고백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감히 말할 수 있는 것이 있다면, 작은 것에서 큰 것을 볼 수 있는 눈을 열게 해 준 은혜를 결코 등한히 할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오늘까지 살아오면서, 누구를 넘어뜨리고 그 자리에 타고 올라앉아야 하겠다는 생각은 가져 보지도 못했습니다. 
    이렇게 말하는 것 자체가 어쩌면 어떻게 들려지 겠는지 모르나, 나의 진실을 말하는 것뿐입니다.

    욕심을 버리면, 사람들은 낮아 질 수밖에 없습니다.
    마음을 비우면, 작은 것에서 큰 것을 볼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우리 사회의 허풍을 빼어 버리는 운동은 바로 작은 것에서 큰 것을 볼 줄 알아 야 하겠습니다.

    주님은 지금도 그런 사람들을 찾고 있습니다.

    교회에서, 무슨 직분, 무슨 직분 하지만, 평신도로 있으면 어떻습니까 직분이 없어 신앙생활 못하는 것도 아니고, 맡은 직분이 없어 봉사할 수 없는 것 도 아닌데, 작은데서 큰 것을 볼 줄 아는 눈들이 열리게 되길 바랍니다.

    쓰레기 하나도 바로 보고 치울 줄 아는 그런 눈, 교회의 기물 하나 하나를 바르게 원 위치에 돌려놓을 줄 아는 그런 눈, 바로 그런 눈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큰 것만 보이는 눈은 아무래도 장애자의 눈입니다. 신앙의 장애인이기 때문에 큰 것만 본다는 것입니다.

    작은 것에서 예수님을 볼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작은 자, 하찮은 자, 보잘것없는 일, 그곳에서 예수님을 볼 수 있을 때, 그 사람 이야말로 주님의 옳은 편에 설 사람들입니다.

    심판 날에 왼편에 선 사람들의 변명을 들어보시기 바랍니다.

    우리도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 도하고, 주의 이름으로 권능도 행하고, 주의 이름으로 이것도 저것도 하지 아니하였나이까 라고 할 때 불법을 행한 자들아, 내가 도무지 너희를 알지 못하노라고......오늘 본문에도 저주를 받을 자들아! 나 를 떠나 마귀와 그 사자들을 위하여 예비된 영영한 불에 들어가라고.....얼마나 무서운 말씀입니까 바라옵기는, 이 한해 동안 작은 것에서 큰 것을 볼 수 있는 귀한 한해가 다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소탐대실"이란 무엇일까요?

    "소탐대실(小貪大失)"은 아주 유명한 속담으로, 그 뜻은 작은 것을 탐하려다 큰 것을 잃게 된다는 의미입니다. 쉽게 말해, "조그만 이익을 얻으려고 하다가 더 중요한 것을 잃는다"는 교훈을 담고 있습니다. 이 속담은 우리가 일상에서 자주 겪을 수 있는 상황들을 경고하는 말로, 아무리 작은 이익이라도 큰 대가를 치르게 될 수 있음을 경계하는 뜻을 담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친구와의 약속을 지키지 않고 소소한 일을 하려고 시간을 쓰다가 결국 중요한 일을 놓치는 경우가 있습니다. 또, 조금 더 많은 돈을 얻으려는 욕심으로 위험한 투자를 하다가 큰 손실을 보는 경우도 이에 해당합니다. 이렇게 소탐대실은 우리에게 '너무 작은 것에 집착하면 더 중요한 것을 잃을 수 있다'는 중요한 교훈을 줍니다. 

    소탐대실의 특징

    "소탐대실"이라는 속담의 특징은 바로 '작은 것'과 '큰 것'을 비교하여 그 중요성을 강조하는 점입니다. 
    속담에서 말하는 '소탐'은 작은 욕심, 즉 작은 이익을 탐하는 것을 의미하고, '대실'은 큰 손해나 중요한 기회를 잃는 것을 뜻합니다. 
    이 속담은 우리에게 지나치게 작은 이익을 추구하는 것이 결국 더 큰 손해로 이어질 수 있다는 사실을 알려줍니다.

    사실, 우리는 종종 작은 이익을 얻으려고 무리하게 행동할 때가 있습니다. 
    예를 들어, 단기적인 성과나 눈앞에 보이는 이득만을 쫓다 보면 장기적으로 더 중요한 것들을 놓칠 위험이 있다는 점을 간과할 수 있습니다. 
    이 속담은 그런 짧은 눈치로는 큰 그림을 놓칠 수 있다는 경고로도 해석될 수 있습니다.



    10월 20일(월) 마태복음 9-10장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믿음을 보시고(9:2)

    침상에 누운 중풍병자를 사람들이 데리고 오거늘 예수께서 저희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병자에게 이르시되 소자야 안심하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Some men brought to him a paralytic, lying on a mat. When Jesus saw their faith, he said to the paralytic, "Take heart, son; your sins are forgiven.

    믿음을 보시고(When Jesus saw their faith) 마가 2:5, 누가 5:20

    믿음을 보셨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우선 헬라어 동사에 '본다'는 단어가 신약 성경에서 다섯 가지로 사용됩니다.

    첫째, 오프타노마이(ὀπτάνομαι) 응시하는 것
    둘째, 에이도(εἶδω) 보이는 그대로 보고 판단하는 것 
    셋째, 블레포(βλέπω) 자세히 보아 경험과 마음으로 아는 것 / 마 7;3 - 티를 보고 
    넷째, 데아오마이(θεάομαι) 가까이서 보다, 지각하다, 주목하다, 자세히 보다  
    다섯째, 호라오(ὁράω) 깨달아 알게 되어 인지하는 것 / 마 9:2, 9, 22, 23, 36

    사람은 겉모습만 보려고 합니다. 

    사무엘상 16:7
    여호와께서 사무엘에게 이르시되 그 용모와 신장을 보지 말라 내가 이미 그를 버렸노라 나의 보는 것은 사람과 같지 아니하니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

    믿음의 3요소는 무엇인가요?

    지식(notitia), 동의(assensus), 신뢰(fiducia)
    이는 성경적 믿음을 구성하는 세 가지 주요 요소로, 먼저 성경을 통해 사실을 지식으로 받아들이고, 그 지식이 참됨을 동의하며, 마지막으로 그 진리(예수 그리스도)에 자신의 삶을 신뢰하고 맡기는 과정입니다. 

    지식 (Knowledge, Notitia
    믿음의 내용은 무엇인지 아는 것입니다. 
    이는 맹목적인 것이 아니라 성경 말씀을 통해 얻는 지적인 지식입니다. 


    동의 (Assentassensus) :
    단순히 아는 것을 넘어, 그 지식이 참되고 개인에게 유익하다는 것에 대한 지적 확신입니다. 
    자신이 죄인임을 인정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 신뢰 (Fiducia) :
    믿음의 가장 중요한 요소로, 지식과 동의를 바탕으로 그리스도께 자신을 맡기고 의존하는 것입니다.

  • * 보시고(3708) 호라오 

    침상에 누운 중풍병자 
    - 본 사건에 대한 마가와 누가의 평행 기사에 의하면 예수가 계신집에 사람들이 많이 몰려있어 문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병자의 친구인 듯한 자들이 지붕으로 올라가 지붕을 뜯어내고 그를 줄에 매달아 예수앞에 데려다 놓았다고 설명되고 있다(막 2:1-12; 눅 5:17-26). 
    여기서 침상을 뜻하는 '클리네스' (*)란 그것을 들고 돌아가라는 6절의 예수의 명령에서도 암시되어 있다시피 한사람의 힘으로도 들 수 있을 만한 가벼운 메트리스(mattress)같은 것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저희의 믿음을 보시고 
    - 여기서 '저희'란 것은 데리고 온 사람들 뿐만 아니라 병자 자신도 포함된 것으로 보아야 하겠다(Clarke, Plummer). 
    '저희의 믿음'이란 것은 예수께서 이 병자의 질병을 고쳐 주실 능력이 있음을 그들이 믿었다는 것을 뜻한다. 

    칼빈(Calvin)은 이를 문자적 의미로 이해하여 하나님만이 우리들 마음속에 있는 믿음을 보실 수 있다는 의미심장한 말을 남겼다. 
    한편 여기서 놓쳐서는 안 될 한가지 사실은 예수께서 구원의 은총을 베푸신것이 그들의 열심 때문이 아니라 그들의 예수께 대한 '믿음'때문이었다는 사실이다. 
    실로 육체적이든, 영적이든 하나님의 구원의 은총은 오직 그분을 전적으로 신뢰하는 믿음에서 비롯된다(히 11:1, 6). 
    더욱이 중풍병자의 치유는 단지 동료들의 믿음에 근거하기 보다 근본적으로 중풍병자 자신의 예수께 대한 강한 믿음이 있었으므로 가능했다(겔 18:1-4).

    에스겔 18:1-4
    여호와의 말씀이 또 내게 임하여 가라사대. 
    너희가 이스라엘 땅에 대한 속담에 이르기를 아비가 신 포도를 먹었으므로 아들의 이가 시다고 함은 어찜이뇨.
    나 주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가 나의 삶을 두고 맹세하노니 너희가 이스라엘 가운데서 다시는 이 속담을 쓰지 못하게 되리라. 
    모든 영혼이 다 내게 속한지라 아비의 영혼이 내게 속함 같이 아들의 영혼도 내게 속하였나니 범죄하는 그 영혼이 죽으리라

    소자야(*, 테크논
    - '테크논'은 연장자가 손 아래 사람을 다정하게 부를 때 사용되는 말이다(요일 2:1).

    안심하라(*, 다르세이) 
    - '용기를 가지라', '무서워 말라'는 뜻으로 중풍병자가 지니고 있던 철저한 절망의 파도를 일거에 잠재우시는 위로의 메시지이다. 
    그리스도께 자신을 맡긴 자는 진정 무서움의 그늘을 벗고 용기의 햇살을 맞이하게 될 것이다.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아피엔타이' (*)는 현재 수동 직설법으로서 진행의 의미보다는 완료의 뜻이 강하다. 
    즉 이는 예수께서 사죄(赦罪)를 선언하시는 그 순간 이미 그 은총이 실현되었음을 나타낸다(Burton). 
    이 말씀은 적어도 이 중풍병자의 경우에 있어서 죄와 질병이 어떤 밀접한 관계에 놓여 있었음을 강력히 시사하고 있다. 
    어찌되었든 주목할만한 것은 이 사람이 예수를 찾아온 이유란 다름아니라 자신의 질병을 고침받기 위해서였는데, 예수께서는 질병 치료에 앞서 그의 죄가 사함받았다고 선언했다는 점인 것이다. 
    이 같은 사실에 대한 설명은 다음과 같이 제시할 수 있다. (1) 그는 오랫동안 나쁜 죄악에 빠져있다가, 즉 오랫동안의 타락과 방탕이 원인이 되어 이 중풍병에 걸렸으며, 그후 지난 날에 범한 죄악에 양심을 가책을 느끼고 있었기 때문에 그리스도가 자신과 같은 나쁜 인간을 주목해 주시지 않을 것이라는 두려움을 느끼고 있었다. 따라서 예수께서 지난 날 지은 범죄가 용서받았음을 먼저 선언한 것은 질병의 치유선언과 같은 뜻인 동시에 나아가 질병의 원인까지도 제거해 주신 것이었다. (2) 예수께서는 이 사건을 자기에게 죄를 용서할 권한이 있음을 보이려는 적절한 기회로 삼았다. 만약 그가 어떤 기적도 행치 않고 말로만 죄 용서함을 선언했다면 유대인들은 이를 믿지 않았을 것이고 또 제자들까지도 의심하고자 했을 것이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죄 용서함과 아울러 이적을 행하심으로 어느 누구도 그의 이런 권능을 부인할 수가 없도록 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이 두 이유는 서로 대치되는 것이 아니라 전자는 중풍병자의 관점에서 이 구절을 이해한 것이고 후자는 예수의 관점에 초점을 맞추어 이해한 것으로 두 가지 견해를 모두 취할 수 있다.

    보다

    한글 성경은 “보다”라는 단어를 그냥 단순하게 번역하였지만 원문 속으로 들어가면 '보다'라는 의미를 좀 더 상세하게 사용하고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첫째, 응시하는(ὀπτάνομαι) 단계
    둘째, 보이는 그대로 보고 판단해 버리는(εἶδω) 단계 
    셋째, 자세히 보아(θεάομαι) 경험과 마음으로 아는(βλέπω) 단계
    넷째, 데아오마이(θεάομαι)는 가까이서 보다, 지각하다, 주목하다, 단계 
    다섯째, 깨닭아 알게 되어(ὁράω ) 인지하는 단계

    1. 호라오(ὁράω )

    '보다' 라는 뜻을 갖은 동사로서 눈으로 보다, 마음으로 보다, 인지하다, 알다, 경험하다. 깨닫다 라는 깊은 의미를 가지고 있다.

    . 요1:18 본래 하나님을 사람이 없으되 아버지 품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셨느니라

    . 요1:34 내가 보고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증언하였노라 하니라

    . 요3:11 진실로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우리는 아는 것을 말하고 것을 증언 하노라 그러나 너희가 우리의 증언을 받지 아니하는도다.

    2. 옵타노마이(ὀπτάνομαι) 

    응시하다, 보여지다'( 눈으로, 향한 것처럼, 관찰하다. 나타내다라는 의미로 관심을 가지고 보다라는 의미가 담겨 있다.

    ​요 1:50-51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너를 무화과나무 아래에서 보았다 하므로 믿느냐 이보다 더 큰 일을 보리라 또 이르시되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사자들이 인자 위에 오르락 내리락 하는 것을 보리라 하시니라

    3. 에이도(εἶδω)

    수동적이거나 우연한 바라봄으로 ‘겉을 보고 깨닫다, 지식을 갖다, 확신하다, 발견하다, 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에이도는 ‘우상’이라는 ‘에이돌로’(εἴδωλο)에서 유래되었으며, 우상이란 눈에 보이는 형태, 외모를 보고 확신해 버리면 그것이 우상이 된다는 것을 의미 한다.

    . 요1:33 나도 그를 알지 못하였으나 나를 보내어 물로 세례를 베풀라 하신 그이가 나에게 말씀하시되 성령이 내려서 누구 위에든지 머무는 것을 보거든 그가 곧 성령으로 세례를 베푸는 이인 줄 알라 하셨기에

    . 요1:47-48 예수께서 나다나엘이 자기에게 오는 것을 보시고 그를 가리켜 이르시되 보라 이는 참으로 이스라엘 사람이라 그 속에 간사한 것이 없도다

    나다나엘이 이르되 어떻게 나를 아시나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빌립이 너를 부르기 전에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에 있을 때에 보았노라

    4. 데아오마이(θεάομαι) 

    가까이서 보다, 지각하다, 주목하다, 보고 배우다, 방문하다’는 뜻을 가지고 있다.

    .요1:14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요1:32 요한이 또 증언하여 이르되 내가 보매 성령이 비둘기 같이 하늘로부터 내려와서 그의 위에 머물렀더라

    5. 블레포’(βλέπω)

    자발적인 관찰이라는 의미로 ‘경험으로 알다, 마음의 눈으로 보다, 이해하다, 생각하다’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요1:29 이튿날 요한이 예수께서 자기에게 나아오심을 보고 이르되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

    .요5:19 그러므로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들이 아버지께서 하시는 일을 보지 않고는 아무 것도 스스로 할 수 없나니 아버지께서 행하시는 그것을 아들도 그와 같이 행하느니라

    성경 원어에서 이렇게 다양한 의미로 상황에 따라 다르게 표현하고 있는데는 분명히 저자의 전달하고자 하는 깊은 의도가 분명이 담겨 있다.

    "보다"라는 단어의 의미
    첫째, 응시하는(ὀπτάνομαι) 단계
    둘째, 보이는 그대로 보고 판단해 버리는(εἶδω) 단계 
    셋째, 자세히 보아(θεάομαι) 경험과 마음으로 아는(βλέπω) 단계
    넷째, 데아오마이(θεάομαι)는 가까이서 보다, 지각하다, 주목하다, 단계 
    다섯째, 깨닭아 알게 되어(ὁράω ) 인지하는 단계

    히브리서 10:22
    우리가 마음에 뿌림을 받아 양심의 악을 깨닫고 몸을 맑은 물로 씻었으니 참 마음과 온전한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자.

    야고보서 2:22
    네가 보거니와 믿음이 그의 행함과 함께 일하고 행함으로 믿음이 온전케 되었느니라.

    信行一致
    言行一致











    마태복음 7:1-5

    1. 비판을 받지 아니하려거든 비판하지 말라
    2. 너희의 비판하는 그 비판으로 너희가 비판을 받을 것이요 너희의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가 헤아림을 받을 것이니라
    3. 어찌하여 형제의 눈속에 있는 티는 보고 네 눈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4. 보라 네 눈속에 들보가 있는데 어찌하여 형제에게 말하기를 나로 네 눈속에 있는 티를 빼게 하라 하겠느냐
    5. 외식하는 자여 먼저 네 눈속에서 들보를 빼어라 그 후에야 밝히 보고 형제의 눈속에서 티를 빼리라



    누가복음 6:41-42

    41.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고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42. 너는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를 보지 못하면서 어찌하여 형제에게 말하기를 형제여 나로 네 눈 속에 있는 티를 빼게 하라 할 수 있느냐 외식하는 자여 먼저 네 눈 속에서 들보를 빼라 그 후에야 네가 밝히 보고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를 빼리라. 

    티는 보라(991) βλέπω Storng number 991

    1. 보다.  2. 들보.  3. 큰 건물들
    Pronunciation [ blĕpō ]
    관련 성경 / 보다(마 5:28, 눅 6:41, 요 1:29), 보게 되다 (마 12:22), 뵙다(마 18:10), 주의하다(마 24:4, 막 8:15, 눅 21:18), 삼가다(막 4:24, 눅 8:18), 보이다(막 8:23), 조심하다(막 13:9, 고전 8:9), 돌아보다(눅 9:62), (눈이)밝아지다(요 9:7).

    들보는 깨달으라(2657) κατανοέω Storng number2657

    1. 주목해보다.  2. 보다.  3. 생각하다  
    Pronunciation [ katanŏĕō ]  
    Etymology  / 미완료 κατενόουν, 제1부정과거 κατενόηασ, 2596과 3539에서 유래


    이소견대(以小見大) / 이(以) : 써 이.  소(小) : 작을 소.  견(見) : 볼 견.  대(大) : 큰 대
    - 작은 것을 통해 큰 것을 보는 법

    소중대견(小中大見)

    이 뜻은 작은 것으로 큰 것을 본다는 말이다. 중국의 속담에 있는 말이라고 한다. 하지만 이 속에는 속담 이상의 의미가 숨겨져 있다. 
    작은 것은 하나의 모든 결정체가 모여 있는 것이다. 이곳을 통해서 세상을 보는 것이다. 우리는 과학자들이 하는 원자를 보면 그 속에 우주가 있다는 말을 자주 듣는다. 세상의 가장 작은 것이지만 그것을 통해서 세계의 움직임을 알 수가 있고 세상을 보는 원리도 알 수가 있는 것이다.

    이와 상반되지만 동일한 의미로 통하는 말이 있다. 
    이대관소(以大觀小)로 큰마음으로 작은 것을 살핀다는 뜻이다. 즉 눈을 크게 뜨고 세상을 바라본다는 의미이다. 
    때로는 이런 관점도 필요하다. 작은 것을 통해 큰 것을 볼 수도 있어야 하지만 커다란 시각으로 작은 것도 살필 줄 알아야 하는 법이다.

    작은 것은 단순히 작은 것이 아니라 응축되어 있는 것이다. 마치 모든 향이 한곳에 모여 있어서 확장되기 전에는 조그만 물방울에 불과하다. 하지만 이것이 공기 중으로 펴지는 순간 온 방 안을 가득 채울 정도로 강한 향기를 내어 뿜는다. 이와 같이 작은 것이라고 하여도 큰데 확장이 가능한 것이다. 또 비슷한 비유가 바로 망원경이다. 망원경의 렌즈는 너무나 작다. 우리 눈만 한 크기임에도 불구하고 온 우주를 볼 수가 있다.

    소중대견(小中大見)의 의미를 가장 명확히 보여주는 것이다. 망원경을 통해서 우주를 보듯이 우리는 조그만 아름다움을 통해서 세상 모든 아름다움을 볼 수 있는 것이다. 아주 작지만, 그 속에 담긴 세상의 아름다움의 원리 그 자체를 보여 줄 수 있을 때 작은 것을 통해 큰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우리가 가장 귀하게 생각하는 것 중 하나가 보석이다. 이 보석은 작아도 엄청난 가치를 지닌다. 귀하여서 그런 것도 있고 실제 아름다움이 응축되어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세상의 아름다움을 모두 모아서 하나의 덩어리로 만든다면 어쩌면 보석일지 모른다. 실제 수 없는 사람들이 보석의 아름다움 자체에 빠진다. 보석을 들여다보고 있으면 그것도 현미경으로 들여다보면 세상의 아름다움이 다 보인다고 한다.

    가장 작지만 가장 가치가 있는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는 것이 보석이다. 작은 것을 통해서 큰 것을 보는 것이다. 이와 비슷하게도 예술작품 중에서도 단순히 한두 가지의 사소한 물건을 그려 놓은 정물화나 한 구절의 시로 이루어진 하이쿠 같은 시는 모든 아름다움의 절정을 표현해 놓은 것이다. 그것으로도 충분하기 때문이다.

    아름다움을 표현하는 것은 긴 문장이나 큰 그림이 아니라 아주 작지만 사소한 것을 통해서 사람을 감동시킬 수 있다. 아름다움의 목적이 사람을 감동시키는 것이라면 그 작고도 별 볼일 없는 것으로도 사람을 감동시킬 수 있다면 그것은 바로 작은 것으로 큰 것을 느끼게 하는 소중대견(小中大見)의 정신인 것이다.

    그럼 소중대견(小中大見)의 예술은 무엇이 있을까? 아마도 제일 처음 생각할 수 있는 것은 바로 보석디자인이다. 보석을 다듬고 가공하여 아름다움을 드러내 주는 그런 미학은 확실히 돋보인다. 가끔 명품 보석상 앞을 지날 때 보이는 보석이나 수동 시계의 아름다움은 어디에 내어놓아도 아름답다. 그 가격만큼 아름답다.

    또한 시로는 한 문장의 시로 시의 아름다움을 모두 표현해주는 하이쿠나 중국의 사자성어도 그런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다. 또한 네 컷 만평이나 시사만평의 아름다움도 뒤지지 않는다. 세상의 아름다움은 크다고 하여 다 아름다운 것이 아니다. 아름다움의 크기는 작품의 크기가 아니라 생각의 크기이다. 그리고 그 큰 생각을 작고도 작은 하나의 예술 속에 놓여 내면 그것이 완성된 형태의 아름다움을 불러일으키는 것이다.

    사소하지만 그것이 아름다움으로 완벽히 마무리될 때 미학은 빛이 나다. 소중대견(小中大見)의 미학적 시각은 예술을 하는 모든 사람에게 필요하다. 가능한 압축시켜 낼 수 있을 때 그 미학적 가치는 더욱 빛나기 때문이다. 예술의 행위는 무의미를 걷어 내고 그 진실한 미적 의미만 남기려는 노력이기 때문이다.




    티는 작은 것이고 들보는 큰 것이다. 
    남을 아주 정죄하는 그것은 벌써 큰 죄이다. 
    그 뿐 아니라 그가 남을 아주 정죄하기 좋아하는 것을 봄녀 그의 생활이면에도 여러가지 다른 죄과들이 있을 것이다. 
    우리는 어떤 사업을 위하여 인물을 비판하여 혹은 채용 혹은 퇴직시킬 수 있다. 
    그러나 그를 아주 정죄하는 것은 죄이다.

    헬라어의 ‘크리노’(비판하다, 판단하다)의 뜻은 ‘정죄하다’라는 의미를 동반합니다. 

    무엇이 옳고 그른지 판단하는 행위는 결국 그 사람의 됨됨이를 판단하여 잘잘못으로, ‘정죄’하는 것으로 자연스럽게 이어지기 때문입니다. 사람을 평가하다 보면 결국 행위에 대한 평가가 아니라 사람됨에 대한 평가로 이어지게 마련이고요. 그러나 사람을 정죄하고 평가하는 권한은 하나님께만 있습니다. 무엇이 선이고 악인지를 정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니까요. 1절의 “너희가 비판(‘판단’이라는 번역이 더 적실)을 받지 아니하려거든...”이라는 종속절은 사람으로부터의 판단이 아닌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판단을 의미하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즉 다른 사람들뿐만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심판과 정죄를 받을 수 있다는 뜻입니다. 

    κρίνω  Strong number2919

    1. 나누다.  2. 판단하다.  3. 결정하다
    Pronunciation [ krinō ] 
    관련 성경  /  고발하다(마5:40, 고전6:6), 비판하다(마7:1), 심판하다(마19:28, 눅19:22, 요3:17, 계18:8), 정죄받다(눅6:37), 판단하다(요8:16, 롬2:1), 다스리다(눅22:30), 심판받다(요3:18, 벧전4:6, 계20:12), 재판하다(요18:31), 결의하다(행3:13, 21:25), 작정하다(행20:16, 고전2:2, 딛3:12), 심문받다(행23:6, 24:21, 25:20), 판단받다(롬3:4, 고전11:32), 정죄하다(롬 14:22), 결심하다(고후2:1).

    티와 들보의 교훈

    1. 자기 자신을  먼저 생각하라
        - 다른 사람의 티는 보고 나의 들보는 깨달아야 한다.
       - 소크라테스 ; 너 자신을 알라(know thyself) 그노티 쎄아우톤(γνῶθι σεαυτόν)

    2. 비판하는 것은 정죄하는 것이다
       - 사람이 다른 사람을 정죄할 수 없다.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않는다. 가서 다시는 죄를 짓지 말아야 한다.
      -  공자 ; 지지위지지 부지위부지 시지야(知之爲知之 不知爲不知 是知也)
                   아는 것을 안다고 하고, 모르는 것을 모른다고 하는 것, 그것이 곧 앎이다.

    metacongnition
    ˌmedəˌkäɡˈniSH(ə)n
    메타인지 

    자기객관화. 1970년대에 발달심리학자인 존 플라벨(J. H. Flavell)이 창안한 용어로, 남의 지시 이전에 스스로 자기 생각· 평가에 대해 생각하는 능력을 말한다. 상위인지, 초인지라고도 한다. 갈등 관계에서 이 능력이 발휘될 경우 반성, 사과, 화해 등이 원활히 이루어질 수 있고, 메타인지가 전략적 사고와 합쳐 이상적으로 발휘된다면 그런 상황이 발생하지 않도록 예방할 수 있다.

    자기 성찰과도 연결된다. 자신의 생각이나 느낌이나 지식이나 말·행동 등에 대해 곧이곧대로 받아들이지 않고 이게 맞는가 아닌가 스스로 검증을 거치는 것이다. 더 나아가서 내가 맞는 건가 하면서 스스로 의심할 수도 있다. 그렇기에 자신의 정신 상태, 곧 기억력이나 판단력이 정상인지를 판단하는 데에도 사용한다. 예를 들어 술을 먹었을 때 자신의 발언과 행동이 혹시 잘못되지는 않을지 생각해 보는 사람이라면 뛰어난 지성을 발휘한 것이다.

    이 능력이 부족할 경우 암기력과 무관하게 학습 능력에 관련하여 장애가 생길 수 있다. 모르는 것을 안다고 판단했으므로 암기나 기억 자체가 이루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이런 경우 자칫 잘못 실행하면 셀프 가스라이팅을 거쳐 올바르지 못한 가치관을 가질 수도 있으므로 주의해야 한다. 


    비판하지 말아야 할 일곱 가지 이유

    1. 우리는 모든 사실을 다 알지는 못한다

    정당한 비판을 위해서는 모든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늘 제한된 사실에 대한 지식만 가지고 있을 뿐입니다.
    이렇게 제한된 사실만 알고 있다면, 우리는 비판은 늘 불완전할 수 밖에
    없습니다. 비판은 사실에 기초해야 하는데, 제한된 사실로 어떻게 올바른
    비판을 할 수 있겠습니까?

    2. 우리는 그 동기를 다 이해할 수 없다

    우리가 누군가를 비판할 때 우리는 그 사람의 동기를 완전히 파악할 수
    없습니다. 겉으로 드러나는 행동이나 말, 표정을 통해서 그 동기를 100%
    알 수는 없는 것입니다. 동기란 내적인 것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동기를 이해하지 못하면서 무조건 비판하는 것도 잘못된 것입니다.
    동기를 다 이해할 수 없는 만큼 우리는 비판을 자제할 필요가 있습니다.

    3. 완전히 객관적으로 사고할 수 없다

    인간의 판단은 항상 객관성과 주관성을 모두 가지고 있습니다.
    어느 누구도 자신의 판단이 객관적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모든 사람의 각자의 판단은 늘 어느정도 주관적일 수 밖에 없습니다.
    그 사람의 판단처럼 다른 모든 사람들이 동일한 판단을 할 때에만 그것은
    객관적이라고 말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상대방을 비판하고자 할 때 그것은 우리 자신의 주관성이
    개입된 것이라는 점을 늘 인식해야 합니다.

    4. 상황을 완전히 알지 못한다

    어떤 사실이나 사건은 모두 상황맥락적입니다.
    동일한 사실도 어떤 상황에서는 다른 의미를 갖게 됩니다.
    유명한 비트겐슈타인의 예를 봅시다. 미장이가 벽돌을 쌓다가 조수에게 “벽돌!”
    하고 외치면 그것은 “벽돌을 가져오라”는 의미입니다.
    그런데, 만약 공사장 아래를 지나가는 사람에게 “벽돌!”하고 외치면 그것은
    “떨어지는 벽돌을 피하라”는 의미가 되기도 합니다.
    이처럼 상황을 제대로 알지 못하고서는 쉽게 누군가를 비판할 수 없는 것입니다.

    5. 보지 못하는 부분들이 있다

    우리의 인식은 늘 제한적입니다.
    제한적이기 때문에 우리가 보고 싶어도 보지 못하는 부분들이 있습니다.
    누군가를 비판하고자 할 때 우리는 늘 이 점을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
    우리가 보지 못한 어떤 부분들이 있고 그것이 칭찬받아야 할 부분일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또한 불쌍히 여겨야 할 부분일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만약 우리가 비판하고자 하는 사람이 정말 드러내기 힘든 장애를 가졌거나
    남모르는 고통을 가졌다면, 우리의 비판은 불완전할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6. 우리는 편견이 있으며 시야가 흐려질 수 있다

    모든 사람들에게는 편견이 있습니다.
    이것은 주관성보다 훨씬 더 우리자신을 슬프게 하는 모습입니다.
    어떤 경우에는 비판하려고 하는 상대방에 대한 첫인상이 편견으로 작용할 때가
    있습니다. 또한 비판하려는 상대방에 대해서 주위 사람들이 평가를 내린 것이
    편견으로 작용하기도 합니다. 이러한 편견이 있는 한 우리의 평가는 사실에
    근거한 평가가 될 수 없습니다. 이미 평가를 내려놓고 거기에 필요한 사실들만을
    열거하는 것이 될 수 있습니다.

    7. 우리 자신은 불완전하며 일관성이 없다

    마지막으로 인간은 늘 불완전합니다. 특별히 일관성이 없습니다.
    C S 루이스는 자신이 가르치던 옥스퍼드 대학원 학생이 일관성없는 태도를
    가졌던 일화를 소개한 적이 있습니다.
    그 학생은 저명정치인에 대해서 매우 비판적인 시각을 가지고 있었는데,
    어떤 파티에서 그 정치인이 자신을 사람들 앞에서 칭찬하자, 그 다음부터는
    그 정치인에 대해서 우호적인 시각으로 바뀌었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불완전하며 일관성이 없는 것이 그 사람만의 문제는 아닐 것입니다.
    우리 모두의 문제입니다.
    그렇다면, 누군가를 비판하는 것은 자제해야 하지 않을까요?

    우리 중에 아무도 비판하고자 하는 유혹으로부터 자유로운 사람은 없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이런 유혹 속에서 쉽게 험담과 비판을 즐기고 있습니다.
    그런 면에서 우리는 비판하지 말라는 주님의 명령을 간단히 넘어가서는 안됩니다.
    누군가를 비판하고 싶다면, 위에서 언급한 일곱가지 근거를 늘 생각하십시오.
    비판하지 않는 사람이 진정한 지도자입니다.

  • 관련 성경 / 깨닫다(마7:3, 눅6:41), 생각하다(눅12:24, 27, 히3:1), 알아보다(행7:31,32), 보다(행11: 6, 약1:23,24), 알다(행27:39, 롬4:19), 돌아보다(히10:24).

  • 티와 들보의 비유(누가복음 6:41-42)

    오늘의 본문은 비판에 대한 성도의 자세를 가르치려는 예수님의 교훈 중결론 부분으로 자기의 눈 속에는 엄청나게 큰 들보를 가지고 있으면서 형제의 눈 속에 지극히 작은 티를 비판하기를 좋아하는 인간성을 외식하는자로 꾸짖으면서 남의 문제보다 더 큰 자기 문제부터 해결하라는 교훈이다. 
    들보가 든 눈으로 남의 눈의 티를 볼 수 없으므로 과장된 표현이지만이같은 생활을 실제로 하고 있다는 것이 현실이다.

    다른 사람에 대해서는 언제나 현미경을 사용합니다.
    그러나 자기 자신에 대해서는 너그럽게 생각합니다.




    첫째, 형제의 눈 속의 티(41)

    남의 눈 속의 티 : 자기는 의롭다고 믿고 다른 사람을 멸시하는 자들이 범하는 과오에 대해 본 비유는 상대방을 판단할 자격조차 없으면서 지극히 작은 형제의 과오를 비판하는 자를 경계한다. 사실은 사람은 비판하는 자나 비판을 받는 자나 모두 문제를 갖고 있으면서 자기 자신을 의식하지 못하고 남의 눈 속의 티를 비판코자 한다. 남을 비난하는 자들의 마음속에는 비교적 비난하는 죄악성이 숨어 있음을 보게 되는데 인간은 대개가 자기 자신의 속에 있는 것을 밖으로 나타내기 때문이다.

    비판하기를 좋아함 : 대부분의 인간들은 남을 칭찬하기보다는 비판하기를 좋아하는데 그 이유는 사랑이 결여되어 있기 때문이다. 예수께서 '비판을 받지 아니하려거든 비판하지 말라'(마 7:1)라고 말씀하셨고 바울은 때가 되면 하나님께서 너를 판단할 것이며 그때에 비판보다는 칭찬받는 자 되라고 말했다. 그러므로 성도는 남을 판단하는 생활보다는 주의할 것이 있는데 비판받을 만한 것이 없도록 자신을 성찰하는 자세가 보다 중요하며(롬 14:13) 비판하지 않는 생활이 곧 사랑의 첩경임을 알아야 한다.

    둘째, 자신의 눈 속의 들보(42)

    외식하는 자 : 외식하는 자는 본래 가면을 쓴 연극 배우를 가리키는 말로 후대에 오면서 겉과 속이 다른 자를 말하게 되었는데 예수께서는 '자기를 의롭다고 믿고 다른 사람들을 멸시하는 자들' 즉 당시 지도자인 바리새인들을 책망하는데 별명처럼 서슴치 않고 사용한 용어이다(눅 12:56, 눅 13:15, 눅 18:19). 특히 본문에서 외식하는 자는 겉과 속이 다른 사람을 가리키는 말로 사용되었는데 종교인들에게 있어서 외식은 일부로 자기를 드러내기 위한 이유도 있지만 다른 한편 맹목적인 열심 때문에 오류를 범할 수도 있음을 알아 외식하는 자가 되지 않도록 삼가 조심해야 한다.

    먼저 빼야 할 들보 : 바리새인이나 서기관들이 남의 죄를 지지하는 부분이 티끌이라면 비판하기를 좋아하는 자신의 죄악은 들보에 해당한다는 과장된 표현이지만 이같은 생활은 실제로 많은 사람들 이 하고 있다. 들보는 집 구조의 대들보를 뜻하며 작은 티라도 눈에 들어가면 견딜 수 없는 것이 상식인데 들보를 가지고도 태연한 자들에게 예수께서 먼저 네 눈 속의 들보를 빼라 하심은 자신에 게는 관대하고 남에게는 엄격하게 행동하는 위선적인 태도를 버리고 도리어 자신에게 엄격하기를 가르치기를 위해 본 비유로 교훈하셨다.


    티와 들보(누가복음 6:41)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고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누가복음에 의하면 예수님께서 12제자를 택하십니다(6:12-19). 

    그리고 제자들에게 크게 4가지를 말씀하십니다(6:20-49). 

    먼저, 복과 화를 선포하시고(20-26) 두 번째로 원수를 사랑하라(27-38), 세 번째로 심판 비판하지 말라(39-45). 마지막으로 듣고 행하라(46-49)고 하십니다. 오늘의 본문은 세 번째 말씀 중의 일부입니다. 본 내용들은 마태복음에서 산상수훈 설교(5장~7장)내용에도 등장합니다. 그 중에서 오늘의 본문은 7장의 삶의 원리(1-15)에 대하여 하신 비유 중 일부 말씀입니다.

     ‘네 속에 있는 들보’ ‘비판하지 말라’ 등의 소제목으로 소개되고 있습니다. 비유 내용은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면서 내 눈 속의 들보는 깨닫지 못하는 것에 대한 말씀으로 죄 있는 자가 자신의 죄는 외면하고 다른 사람의 죄를 정죄하려는 것에 대한 말씀입니다. 그러한 사람을 외식하는 자 즉, 위선자라고 하십니다. 마태복음7:5에서는 이와 같은 자를 외식하는 자라고 하십니다. 누가복음에서 본문의 말씀을 하시기 전에 맹인이 맹인을 인도할 수 있느냐 둘 다 구덩이에 빠지리라(6:39)하시며 본문의 말씀 뒤이어 열매 말씀을 하시면서 가시나무에 무화과를 찔레에서 포도를 따지 못한다고 하십니다(6:44) 그리고 결론적으로 하신 말씀이 사람은 마음에 가득한 것을 입으로 말한다고 하십니다.

    주님은 우리가 형제를 비판하지 말아야 할 이유로 “어찌하여 네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고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고 하셨습니다. 
    들보와 티는 그 크기에 엄청난 차이가 있습니다. 
    들보는 ‘도코스’(δοκὀς)로 대들보를 말합니다. 
    티는 ‘칼포스’(κἀρφος)로 짚이나 겨의 작은 조각을 말합니다. 

    들보란 남을 비판하는 자신이 갖고 있는 죄를 말하는 것이요, 
    티는 형제가 갖고 있는 죄를 말합니다. 
    남을 비판하거나 남을 헤아리는 자는 적어도 그들 자신은 들보와 같은 죄의 소유자임을 알아야 합니다.

    ‘비판’ 이라는 말은 헬라어로 ‘크리노(krivnw)’를 번역한 것인데, 이는 근본적으로 '사람을 구분하고 구별하기 위해 ‘정죄하고, 비난하고, 비판하고, 나누는 것’을 의미합니다. 자신의 거룩함, 분별됨을 강조하기 위해 타인을 비판하는 것을 뜻합니다.

    그리스도인은 자기로부터 죄를 발견하되 들보와 같은 죄를 발견하여 “오호라 나는 곤고한 자로다”고 하는 바울의 탄식이 나올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언제나 형제의 허물을 보았을 때 자기의 허물보다 적은 티로 보여지기 때문에 자신의 경종으로 삼게 되는 것입니다. 성전에서 자기를 자랑하며 기도한 바리새인은 자신의 죄는 티만도 못하고 세리의 죄를 들보보다 더 큰 것이라고 여겼습니다. 주님은 이런 사람을 향하여 “외식하는 자여 먼저 네 눈 속에서 들보를 빼어 내라”고 하셨습니다. 자신의 죄를 과소평가하고 다른 사람의 죄를 과대평가 하는 사람을 외식하는 자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은 우리에게 형제를 비판도 하지 말고 헤아리지도 말것을 명하셨지만 한편으로는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를 뺀 후,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를 빼야 할 것이란 점도 말씀하신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의 이 말씀의 뜻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우리 형제들이 범죄하고 죄악의 길을 걸어가고 있을 때 그들을 비판하지 말고 그들을 헤아리지 말하고 하셨다고 해서 그저 방관하고 방임하라고 하신 것은 아닙니다.

    티와 들보

    티와 들보는 크기가 다릅니다. 
    티는 눈 속에 들어갈 수 있는 작은 물질이지만 들보(beam)는 눈에 들어갈 수 없는 큰 목재입니다. 
    그런데 사람마다 눈 속에는 저마다 집의 기둥으로 쓸 만한 크고도 굵고 긴 편견, 위선, 거짓, 선입관 등의 들보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사물을 보아도 제대로 볼 수 없습니다. 
    사람의 눈은 공간적으로 멀리 볼 수도 없고, 시간적으로 앞을 볼 수도 없습니다. 
    다만 지난 간 일들을 되돌아 보는 것이 전부입니다. 
    여러분의 눈 속에는 무엇이 있습니까? 
    사람은 자신이 보고 싶은 것이 보입니다. 
    예를 들어 여러분이 어떤 사진을 보면 자신의 얼굴을 제일 먼저 찾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자신이 아는 사람의 얼굴들이 눈에 들어옵니다. 
    나머지 사람들은 모두 배경으로 보입니다. 
    책을 읽어도 마찬가지입니다. 
    자신이 아는 이야기는 훨씬 눈에 잘 들어옵니다. 
    그러나 자신이 보기 싫고 듣기 싫은 것들을 보게 되면 눈살이 찌푸려지고, 눈빛이 변하게 됩니다.
    주님은 무리들과 제자들을 향해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생각하지 못하느냐?”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자신 안에 어떤 들보가 있는지 생각 해 보아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남을 정죄하고 판단하는데 오류와 실수의 연속이요, 실패를 거듭하게 될 것입니다. 
    주님은 성도들이 가져야 할 눈이 비둘기 같이 순결한 눈, 즉 ‘단일한 눈’이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그런 순결한 눈을 가지기 위해서 끊임없이 말씀의 물로 자신을 씻고, 말씀의 빛이 그 눈 속으로 들어오게 해야 합니다. 
    이미 말씀드렸듯이 눈은 빛을 만드는 기관이 아니라 빛을 통해 보는 기관입니다. 
    단순히 빛을 받는 것이 전부입니다. 
    세상의 빛, 생명의 빛이신 주님을 바라보기만 하면 됩니다. 
    빛이신 주님이 우리 눈을 통해 들어올 때 온 몸이 밝아지고, 우리는 무엇이든 주님이 보시는 대로 볼 수 있게 됩니다.
    요즘 들어 눈이 어두워지고 있습니까? 
    우리는 나이가 들면서 노안을 경험합니다. 
    그래서 안경을 쓰고 돋보기를 필요로 합니다. 
    육신의 눈은 그렇다하더라도 영적인 눈은 어떻습니까? 
    영적 감각이 둔해지고, 성경을 읽어도 잘 들어오지 않는다면 눈이 어두워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 때는 하나님 앞에 눈물을 쏟으십시오. 
    [내 친구들은 나를 비웃되 내 
    눈은 하나님께 눈물을 쏟으니](욥 16:20). 
    회개와 간구의 눈물이야 말로 눈을 맑고 밝게 하며 눈 속의 티끌과 들보를 제거하는 가장 좋은 것입니다. 
    다윗은 고백하기를, [내가 신음하므로 피곤하며 밤새도록 내 잠자리를 띄우고 눈물로 내 침상을 적시나이다.](시 6:6)
    눈은 언제나 물기로 적셔져 있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안구 건조증으로 인해 눈이 아프고 상하게 됩니다. 
    시력이 떨어집니다. 
    안경을 쓰신 분들이 안경을 벗었을 때 느끼는 그런 느낌입니다. 
    사물이 흐릿하고 분간이 되지 않습니다. 
    눈 속에 뭐가 들어갔나 하면서 눈을 부비고 보기도 합니다. 
    계속 불편을 느끼면 안약이라도 사서 발라야 합니다. 
    눈물이 마르지 않는 사람들은 정서가 풍부한 사람들이 아니라 주님의 마음을 가지고 세상과 사람들을 보는 눈을 가진 이들입니다. 
    우리는 이 땅을 살면서 웃을 일보다 울어야 할 일이 많습니다. 

    [고난으로 인하여 내 눈이 애곡하나이다. [주]여, 내가 날마다 주를 부르며 주를 향해 내 두 손을 내밀었나이다.](시 88:9). 

    다윗은 결코 메마른 눈을 가지지 않았습니다. 
    이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모든 대언자의 공통적인 특징이기도 했습니다. 
    눈물보다 자신의 눈을 더 깨끗하게 하는 것이 없다는 점은 이미 의학적으로도 증명된 일입니다. 
    예레미야는 자기 백성들로 인해 눈물을 흘렸습니다. 
    [이 일들로 인하여 내가 우나니 내 눈에서 곧 내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리는도다. 
    내 혼을 구제(救濟)할 위로자가 내게서 멀리 계시는도다. 
    원수가 이겼으므로 내 
    자녀들이 황폐하게 되었도다.](애 1:16), 
    [내 백성의 딸의 파멸로 인하여 내 눈에서 /눈물이/ 강물같이 흐르는도다. 내 눈에서 /눈물이/  줄줄 흘러 그치지 아니하고 쉬지도 아니하니](애 3:48-49). 

    우리가 구원받지 못한 혼들로 인해 이런 눈물을 흘리지 않고 그들의 죄만 비난하고 정죄한다면 우리는 사실 마귀와 같은 참소자 외에 아무 것도 아닙니다. 
    마귀의 심성을 지닌 자의 눈은 악한 눈입니다.

    내 눈 속에 들보가 있으면 남의 눈에 있는 티가 보입니다. 
    이는 참으로 특이한 일입니다. 
    일반적으로 남의 눈 속에 있는 티는 안과 전문의가 눈을 렌즈를 끼고, 눈을 뒤집어서 보아야 보이는 것입니다. 
    하지만 내 안에 들보가 크면 클수록 남의 눈 속에 있는 작은 티까지 선명하게 보이게 됩니다. 
    이는 우리 주님이 하신 말씀입니다. 
    3절입니다. 

    [너는 어찌하여 네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면서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깊이 생각하지 못하느냐?](3). 

    *티와 들보, 보는 것과 깊이 생각하는 것. 

    말씀을 주목해서 보십시오. 
    남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이는 것입니다. 
    그러나 나의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깊이 생각(consider)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반대로 해야 합니다. 
    남의 눈 속에 있는 티는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긍휼을 가지고 오래도록 인내하며 생각해 주어야 합니다.
    이것이 배려입니다. 
    이것이 온유입니다. 
    이것이 사랑입니다. 
    남의 눈 속에 있는 티를 보고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왜 저런 티가 생겼을까? 
    저 티로 인해 고통이 얼마나 심할까?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그리고 자신의 눈 속에 있는 들보는 살펴보아야 합니다. 
    그런데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남의 눈 속에 있는 티를 보고, 자신의 눈 속에 있는 들보는 생각조차 해 보지 않습니다.

    여러분은 자신의 눈 속에 있는 들보를 생각해 보신 적이 있습니까? 

    탐욕의 눈빛이라면 그의 눈 속에는 탐욕이란 들보가 있는 것입니다. 
    음욕의 눈을 가진 이라면 그는 음욕이란 들보가 있는 것입니다.
    야심에 찬 눈을 가졌다면 그의 눈에는 야심의 들보가 있습니다. 
    이런 들보를 가진 이들은 모든 것을 그런 관점에서 바라보고 해석합니다. 
    보이는 대로 판단하고 그렇게 받아들이고 믿습니다. 
    들보를 빼지 못한다면 참으로 영적 생활이 고통스럽습니다. 
    들보가 크면 클수록 시야는 좁아지고, 장기적인 안목이 사라지고 조급해 집니다. 
    들보로 인해 눈이 볼 수 있는 것의 범위나 시야가 적어지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대언자들은 짧게는 수십 년 멀리는 수천 년 뒤의 일을 바라 보았습니다. 
    보이지 않는 것들을 믿음으로 바라 보았고, 아직 오지 않는 것들을 내다 보았습니다. 
    우리는 늘 최고의 의사이신 주님께 나아가 우리 눈을 순결한 눈으로 빚어 주시고, 볼 수 없는 것들을 보게 해 주시기를 구해야 합니다. 
    들보를 뽑아 주시기를 구해야 합니다. 
    주님께서는 우리 눈 속에 무엇이 있는지 다 아시기 때문입니다. 
    구원받지 않는 사람들의 눈에는 구원받은 사람들의 말과 행동이 눈에 잘 보입니다. 
    그래서 성도들이 하는 실수나 잘못은 금방 적발되고, 비난과 고소거리가 되곤 합니다. 
    성도들은 자신 속에 세상을 비추는 빛이 있기 때문에 어둠 속에 있는 사람들이 잘 알아보는 까닭입니다. 
    이와 비슷한 이치로 육신적인 성도들은 영적인 성도들을 금방 알아 봅니다. 
    구령, 기도, 선교에 열정이 있는 분들은 벌써 한 두 번만 이야기 해 보아도 알아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다른 사람의 장점이나 영적인 면이 전혀 보이지 않고 그들의 약점, 허물, 단점, 죄만 눈에 확연히 들여다 보이면 내 눈 속에 들보가 있는 것이라고 판단하면 이는 정확한 판단입니다. 

    성경에는 이런 예가 많이 나옵니다.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면서 자신의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거의 생각하지 못합니다. 
    말씀을 유념해서 보십시오.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깊이 생각하지 못하느냐?’ 
    우리는 자신이 어떤 존재이며, 내 눈 속에 무엇이 있는가를 보아야 합니다. 
    눈은 몸의 등불입니다. 
    눈이 밝으면 온 몸이 밝습니다. 

    다윗을 보십시오. 

    [이에 다윗의 분노가 그 사람을 향해 불같이 크게 타오르매 그가 나단에게 이르되, 주께서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노니 이 일을 행한 사람은 반드시 죽을지니라. 그가 불쌍히 여기지 아니하고 이 일을 행하였으므로 그 양 새끼를 네 배나 갚아 주어야 하리라, 하니라.](삼하12:5-6). 

    다윗은 나단이 들려주는 어떤 불의한 부자의 이야기를 듣고 그는 죽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빼앗은 것의 4배를 갚아 주어야 한다고 열변을 토했습니다. 
    왕으로서 당연한 판결이었습니다. 
    그는 남의 눈 속에 있는 티를 보았습니다. 
    그리고 판단했습니다. 
    하지만 자신의 눈 속에 있는 들보는 전혀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다윗은 나단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사실 저도 그렇습니다!” 와 같이 말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자신의 눈 속에 있는 들보를 전혀 생각하지 않고 급하게 어떤 부자의 탐욕, 사악함, 도둑질을 판단하고 정죄했던 것입니다. 
    나단은 즉시 다윗에게 ‘자신의 눈 속에 있는 것’을 생각해 보도록 했습니다. 

    [이에 나단이 다윗에게 이르되, 왕이 그 사람이라. 주 이스라엘의 하나님께서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내가 
    네게 기름을 부어 이스라엘의 왕으로 삼았고 너를 사울의 손에서 구해내고 네 주인의 집을 네게 주고 네 주인의 아내들을 네 품에 주고 이스라엘의 집과 유다의 집을 네게 주었느니라. 만일 그것이 너무 조금이었을 것 같으면 내가 네게 이것 저것을 더 주었으리라. 그러한데 어찌하여 네가 주의 명령을 업신여기고 주의 눈앞에서 악을 행하였느냐? 네가 칼로 헷 족속 우리야를 죽이되 암몬 자손의 칼로 죽이고 그의 아내를 빼앗아 네 아내로 삼았도다.](삼하 12:7-9). 

    그는 양을 빼앗은 부자 정도가 아니라 남의 아내를 빼앗고 그 남편을 죽인 강도 중의 강도였던 것입니다. 
    그의 탐욕은 이웃집의 양을 빼앗은 부자와 비교될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다윗은 자신의 눈 속에 있는 ‘안목의 정욕’을 깊이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자신 안에 있는 육신의 정욕을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이번에는 유다와 사마리아의 예를 보겠습니다. 
    유다의 아하스 왕은 우상 숭배를 유대 내에 공식화하는 정책을 쓰고, 바알을 섬겼습니다. 
    그 때 주님은 유다를 심판하셨습니다. 

    역대기하 28:9-10절입니다.
    [그러나 거기 주의 대언자가 있었는데 그의 이름은 오뎃이라. 그가 사마리아로 오는 군대 앞으로 나아가 그들에게 이르되, 보라, 주 너희 조상들의 하나님께서 유다에게 진노하셨으므로 너희 손에 그들을 넘겨주셨거늘 너희가 하늘에까지 닿은 격노로 그들을 죽이고 이제 또 너희가 유다와 예루살렘  자손을 밑에 두어 너희를 위해 남자 노예와 여자 노예로 삼으려 하는도다. 그러나 너희에게는 곧 너희에게는 주 너희 하나님께 지은 죄들이 없느냐?](대하 28:9-10). 

    사마리아가 유다를 이기고 그들을 포로로 잡아 왔습니다. 
    유다가 범죄함으로 심판을 받은 것을 기회로 그들은 아예 노예로 삼아 버린 것입니다. 
    그 때 *오뎃이란 대언자가 이들을 향해, “너희에게는 주 너희 하나님께 지은 죄들이 없느냐?”고 말한 것입니다. 
    남의 죄를 판단할 때 우리 역시 그 죄로 인해 심판받을 수 있고, 주님의 진노를 불러 올 수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유다가 티라면 사마리아는 들보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눈 속에 있는 들보를 전혀 생각하지 못했기 때문에 유다를 향해 격노하고 그들을 노예로 삼았던 것입니다. 남을 정죄하고 판단하는 일은 쉽습니다. 그러나 자신을 판단하는 일은 매우 어렵습니다. 남의 민족성을 판단하는 일은 쉽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주변 국가를 향해서 ‘왜놈, 뗏놈’하면서 비하합니다. 그들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3절입니다. [너는 어찌하여 네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면서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깊이 생각하지 못하느냐?](3). 

    사람은 누구나 남의 잘못은 쉽게 보입니다. 
    부부들은 결혼한 신혼 초에 가장 많이 싸운다고 합니다. 
    가장 사랑이 넘칠 것 같은 그 때에 평생에 싸울 싸움의 대부분을 합니다. 
    왜 그런가 하니 연애 시절에 보이지 않던 것들이 같이 살면서 다 보이기 때문입니다. 
    남편은 아내의 눈 속에 티가 보이고, 아내는 남편의 눈 속에 있는 티가 보입니다. 
    한국 속담에 ‘똥 묻은 개가 겨 뭍은 개를 나무란다.’는 말이 있습니다. 
    남의 모습은 잘 보입니다. 
    그런데 머리 모양이나 얼굴, 옷, 신발은 잘 보이지만 남의 눈속에 있는 티는 웬만큼 유심히 보지 않고서는 도저히 보이지 않는 것 중의 하나입니다. 
    이미 앞서 말씀드렸듯이 눈이 밝다고 해도 남의 눈 속에 있는 티를 봐 내기란 쉽지 않습니다. 
    눈이 불편해서 좀 보아 달라고 눈을 뒤집어 주어도 한참을 찾아야 하는 것이 남의 눈 속에 있는 티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보아 낸다고 하는 것은 대단한 관찰력입니다. 
    털면 먼지 안 나는 사람 없다는 식으로 조사하고 뒤질 때 보이는 것이 남의 눈 속에 있는 티입니다. 
    저는 신문이 뉴스를 통해서 어떤 사람이 장관이나 고위 공직에 임명 될 때 ‘인사 청문회’라는 것을 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얼마나 낱낱이 과거의 전력이나 잘못 등을 캐는지 요즘은 대통령이 임명을 해도 청문회 때문에 고사하는 이들이 많다고 합니다. 

    정보기관을 동원해서 사생활까지 모두 조사하는데 그것이 드러나는 것이 싫어서 차라리 장관직을 고사해 버리는 것입니다.
    우리는 남의 약점이나 허물이나 죄를 통해서 비난을 할 것이 아니라 우리 속에 있는 들보를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남의 티가 보일 때 자신이 스스로 할 일은 ‘나의 눈 속에 있는 들보’를 깊이 생각해 보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모든 사람이 다 나의 스승이요, 거울이 됩니다. 
    어떤 사람은 자신 안에 맹렬한 야수가 한 마리 있는데 이놈을 어떻게 잡아야 할지 모르겠다고 고민을 토로했습니다. 
    여러분 안에는 무엇이 있습니까? 
    바울은 자신 안에 있는 들보를 보았습니다. 
    그는 그것을 ‘죄의 법’이라고 했습니다. 
    죄의 정욕은 우리를 진리와 반대의 길로 이끕니다. 
    [이제 내가 원치 아니하는 그것을 행하면 그것을 행하는 자가 더 이상 내가 아니요, 내 안에 거하는 죄니라. 
    그런즉 내가 한 법을 발견하였나니 곧 내가 선을 행하기 원할 때에 악이 나와 함께 있는 것이로다. 
    이는 내가 속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내 지체 안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안에 있는 죄의 법에게로 나를 사로잡아 가는 것을 보기 때문이라.] (롬 7:20~23). 

    죄의 법이야 말로 각각 사람들 속에 있는 가장 큰 들보입니다. 
    내 눈 속에 있는 들보는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인생의 자랑입니다.

    4절입니다. 

    [보라, 네 눈 속에 들보가 있는데 네가 어찌 네 형제에게 이르기를, 내가 네 눈에서 티를 빼 주겠노라, 하려느냐?](4). 
    주님은 “네 눈 속에 들보가 있는데”라고 하십니다. 
    눈에 들보가 있는지 살펴보라! 가 아니라 “네 눈 속에 들보가 있는데”라고 하심에 주목하십시오. 
    우리 눈에는 안목의 정욕이 있습니다.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 곧 육신의 정욕과 안목(眼目)의 정욕과 인생의 자랑이 다 아버지에게서 나지 아니하고 세상에서 났음이라.](요일 2:16). 

    그래서 전도서에 말하기를, 
    [모든 것이 수고로 가득하여 사람이 그것을 말할 수 없나니 눈은 보아도 만족하지 아니하고 귀는 들어도 채워지지 아니하는도다.](전 1:8)라고 합니다. 
    거의 대부분의 죄는 보는데서 출발합니다. 
    에덴의 동산에서 여자가 그러했듯이 눈에서 시작됩니다. 
    탐욕은 눈에서 시작됩니다. 
    하와가 그러했고, 아간이 그러했고, 게하시가 그러했습니다. 
    롯 역시 보는 데서부터 그의 타락이 시작되었습니다. 
    눈속에 있는 들보는 의지(will)를 가지고 있습니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욕망(desire)을 가지고 있습니다. 눈 속에 들보가 있으면 보아도 바르게 보이지 않습니다. 
    선입견과 편견, 자신의 정욕, 죄의 욕망을 품고서 볼 때 아무 것도 제대로 볼 수 없습니다. 
    사람들은 서로의 견해를 물을 때, ‘당신이 보기에는 어떻습니까?’라고 합니다. 
    ‘제가 보기에는...’ 이런 말을 합니다. 
    동일한 사안이라도 보는 이마다 의견이 다릅니다. 
    다 다르게 본다는 것입니다. 
    사람마다 눈[시각]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사실은 눈 속에 있는 들보가 다양한 것입니다. 
    들보를 가진 이들이 남의 눈에 있는 티를 그냥 놔두지 않고 빼주려고 하는 것은 사람의 본성인 듯합니다. 
    사람들은 저마다 자신이 먼저 고침 받고, 적응하고, 순종하기보다는 자신을 기준으로 남이 따라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부부 간에도 그렇고 부모 간에도 그렇고 친구 간에도 그러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남을 고쳐 주는 일이 결코 쉽지 않다는 사실을 잘 압니다. 
    남의 성격이나 습관을 고쳐 주는 일은 쉽지 않습니다. 
    때로 부모나 교사들이 아이들의 버릇을 고쳐 놓겠다며 매를 들지만 버릇은 좀처럼 고쳐지지 않습니다. 
    우리는 어떤 사람의 마음 속에 들어 있는 쓴 뿌리를 마치 잡초를 뽑아내듯이, 썩은 이를 뽑듯이 뽑아 내 버리고 싶지만 그렇게 되지 않습니다. 
    부부 간에 서로 자신에게 맞추기를 강요하며 싸움을 벌이지만 아무리 해도 소용이 없습니다. 
    소용없다는 것을 알고 인정할 때부터 싸움이 멈추고, 불평이 줄어들고, 잔소리가 없어집니다. 우리는 쉽게 “내가 네 눈에서 티를 빼 주겠노라”고 말합니다. 또 시도해 봅니다. 
    그러나 ‘티’를 빼 주기는 고사하고 오히려 눈을 찔러 버리거나 더 엉망으로 만들어 버립니다. 

    5절입니다. 

    [너 위선자여, 먼저 네 눈에서 들보를 빼내어라. 그 뒤에야 네가 분명하게 보고 네 형제의 눈에서 티를 빼내리라.](5). 
    주님은 자신을 고치기에 앞서 남의 잘못을 고치려는 이들을 향해 “너 위선자여!”라고 말씀하십니다. 
    자신의 눈 속에 있는 들보를 깊이 생각하지 못하는 자들은 다 위선자들입니다. 위선자들의 특징은 자신의 실체를 숨기거나 보지 않고 남의 실체를 드러내는데 열중합니다. 주님은 남을 판단하기 전에, 남을 고치려고 하기 전에, 남을 지적해 주기 전에 먼저 자기 자신을 먼저 성찰해 보아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자신을 고친 후에 남을 고칠 수 있습니다. 우리 자신이 고침 받았다면 그것을  소개해 줄 수 있고, 증인이 될 수 있습니다. 우리 눈 속에 있는 들보를 빼내는 법을 아십니까? 

    - 안약을 사서 발라 보라. [내가 네게 권고하노니 내게서 불로 정제한 금을 사서 부유한 자가 되고 흰 옷을 사서 입어 네 벌거벗은 수치를 드러내지 말며 또 네 눈에 안약을 발라 볼지니라.](계 3:18). 

    육신의 눈에 안약은 안과 의사의 처방이 필요하지만 영적인 눈이 멀거나 침침한데는 주님이 주시는 안약이 필요합니다. 
    눈을 밝게 하는 것은 주님의 역사입니다. 

    [가난한 자와 속이는 자가 서로 만나거니와 그 
    두 사람의 눈을 밝게 하시는 이는 [주]시니라.](잠 29:13). 
    주님은 눈을 밝게 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 말씀의 빛을 받으라. 

    [주]의 법규들은 정당하여 마음을 기쁘게 하고 [주]의 명령은 순수하여 눈을 밝게 하는도다.(시 19:8). 

    하나님의 말씀은 눈을 밝게 합니다. 
    말씀보다 눈에 좋은 음식이나 약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눈에 관한한 최고의 영약입니다. 

    여러분의 육신의 눈 속으로 T.V나 컴퓨터 모니터, 영화관의 영사기가 비추는 빛을 받는다면 여러분의 몸은 어둠으로 가득차고 말 것입니다. 성경은 흰 종이에 검은 글자로 인쇄되어 있지만 그 말씀이 내 속에 비추어 지는 빛은 사막의 모래 위에 비치는 햇빛보다 강한 것입니다. 

    말씀의 빛을 받을 수 있도록 성경을 펴서 눈을 거기에 고정하십시오.

    - 주를 바라보라.

    예수를 바라보십시오.
    [우리의 믿음의 창시자요 또 완성자이신 예수님을 바라보자. 그분께서는 자기 앞에 놓인 기쁨으로 인하여 십자가를 견디사 그 수치를 마음에 두지 아니하시더니 이제 하나님의 왕좌 오른편에 앉으셨느니라.](히12:2). 사람들은 하나님을 어떻게 볼 수 있는가? 생각합니다. 예수님이 보입니까? 보이지 않는다면 볼 수 없습니다.
    “예수님을 바라보라” 예수님이 보여야 합니다. 시편123:1, [오 하늘들에 거하시는 주여, 내가 눈을 들어 주께 향하나이다.](시123:1). 빛이신 주님을 향해 눈을 들 때 우리 눈 속으로 주님이 들어오십니다. 주님께서 우리 지각의 눈을 열어 주시고, 믿음의 눈을 열어 주시기를 늘 기도합니다. 우리의 눈을 여시고 주님의 놀라운 것들을 보게 해 주시옵소서!!

    - 성령의 인도함을 받으라.
    이사야 28:6에 이르기를, [재판하려고 앉는 자에게는 판단하는 영(靈)이 되시며 싸움을 돌이켜 성문에 이르게 하는 자들에게는 힘이 되시리로다.](사28:6)고 하십니다. 주님의 판단을 받아서 판단한다면 우리는 영적인 판단, 성경적인 판단이 됩니다. 우리는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를 먹은 아담의 후손으로서가 아니라 만물의 심판자가 되시는 주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서 판단하는 판단자가 되어야 합니다. 성도들은 장차 세상을 판단하고 천사들을 판단하는 자들입니다. [성도들이 세상을 판단할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세상도 너희에게 판단을 받겠거든 너희가 지극히 작은 문제를 판단하는 것도 감당하지 못하겠느냐? 우리가 천사들을 판단할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하물며 이 세상 삶에 속한 일들은 더 많이 판단하겠느냐?](고전6:2-3). 주님은 우리를 왕과 제사장으로 삼으셔서 세상을 판단하고 천사들을 판단하게 하십니다. 그렇다면 이 땅에서 사는 동안 우리는 먼저 우리 자신을 판단하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오늘 우리는 ‘티와 들보’란 제목으로 말씀을 살펴 보았습니다. 우리 눈 속에 있는 들보를 뽑아내고 건전한 눈, 단일한 눈, 맑고도 밝은 눈을 갖도록 함께 기도합시다.


    교만의 죄를 피하는 방법‍ / 겸손순종

    겸손을 통해 사람은 자기 자신을 진정으로 알게 되며, 자기의 뛰어난 점을 우러러보는 대신 항상 그런 것이 쉽게 깨어질 수 있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겸손에는 세 종류가 있습니다(心言行). 
    마음으로 겸손하고, 말로써 겸손하고, 행동으로 겸손해야 한다. 

    마음의 겸손은 다시 네 가지로 나뉜다. 

    첫째는 자기 자신을 하느님 앞에서 전혀 가치 없는 존재로 여기는 것
    둘째는 아무도 경멸하지 않는 것 
    셋째는 사람들이 자기를 존경해도 그런 것에 개의치 않는 것
    넷째는 수모를 당하더라도 절대로 슬퍼하지 않는 것

    말의 겸손도 네 가지가 있다. 

    겸손하게 말하고, 
    단순 명료하게 말하며, 
    마음속에 지닌 그대로 말을 하고, 
    남의 장점을 솔직하게 칭찬하는 것이다. 

    행동의 겸손도 마찬가지로 네 개로 나뉜다. 

    첫째는 자기 자신보다 남들을 먼저 좋은 자리에 앉히고, 
    둘째는 모든 사람 중에서 가장 낮은 자리를 선택하고, 
    셋째는 남의 충고를 기꺼이 받아들이고, 
    넷째는 상급자나 손윗사람들의 결정을 즐겁게 받아들이는 것이다.


    캔터베리 이야기》(Tales of Caunterbury)
    제프리 초서. 
    중세 영어로 쓴 이야기 모음집 
    집필 시기는, 브리태니커 백과사전에 따르면 1387년부터 1400년 사이라고 한다. 
    영화, 연극, 오페라, 회화, 음악, 애니메이션 등 여러 장르로 각색되었다.

    총 30명 내외의 사람들이 런던의 어느 여관에 모여, 순교자 토머스 베켓을 모시는 캔터베리의 유명한 사원으로 순례를 떠나게 된다. 
    그리하여 여관집 주인이 자진하여 안내자가 되어 왕복길을 지루하지 않고 재미있는 순례길이 되기 위해 한 사람이 두 가지씩 이야기를 할 것을 제안한다. 
    이리하여 순례자들은 각자 자기 나름대로의 재미있는 이야기를 하게 된다.


    사울의 실패(사무엘상 15:17-19)

    사울의 여정을 따라가다 보면, 그가 왜 실패한 왕으로 기억되는지, 그리고 그 속에서 우리가 무엇을 배울 수 있는지 깨달을 수 있어요. 이 글은 사울의 이야기를 기승전결로 풀어내며, 성경을 읽는 당신에게 작은 통찰을 드리고자 합니다.

    작은 자로 시작한 사울, 하나님의 선택을 받다

    사울의 이야기는 화려한 왕궁이 아닌, 평범한 들판에서 시작됩니다. 삼상 9장에 보면, 그는 아버지의 잃어버린 나귀를 찾으러 다니던 젊은이였어요. 키 크고 잘생긴 외모를 가졌지만(삼상 9:2), 그는 스스로를 별 볼 일 없는 사람으로 여겼습니다. 삼상 15:17에서 사무엘이 사울에게 이렇게 말하죠. “네가 스스로 작게 여길 때에 이스라엘 지파의 머리가 되지 아니하였느냐?” 이 구절은 사울의 출발점을 잘 보여줍니다. 그는 베냐민 지파, 그중에서도 가장 작은 가문 출신이었어요(삼상 9:21).

    그런데 놀랍게도, 하나님은 바로 그를 택하셨어요. 겸손하고 부족한 자를 들어 쓰시는 하나님의 마음이 여기서 드러납니다. 사울은 왕이 될 자격이 없다고 느꼈을지 몰라도, 하나님은 그를 이스라엘의 첫 왕으로 세우셨죠. 이건 우리에게도 큰 위로가 됩니다. 우리가 스스로 부족하다고 느낄 때, 하나님은 오히려 그 순간 우리를 부르실 수 있다는 거예요. 사울의 시작은 그렇게 희망적이었습니다. 하지만 이야기는 여기서 끝나지 않아요.

    명확한 명령: 아말렉을 진멸하라

    사울이 왕이 된 후, 하나님은 그에게 중요한 임무를 주십니다. 삼상 15:3에서 사무엘을 통해 전하신 명령은 이랬어요. “너는 가서 아말렉을 쳐서 그들의 모든 소유를 진멸하라. 그들을 아끼지 말고 남녀와 아이와 젖 먹는 자와 소와 양과 낙타와 나귀까지 죽이라.” 이건 단순한 전쟁 지시가 아니었어요. 아말렉은 이스라엘 백성이 출애굽 후 광야에서 만난 적으로, 약한 자들을 공격하며 하나님의 백성을 괴롭혔던 민족이었죠(출 17:8-16). 하나님은 그들의 죄악을 심판하시기로 결정하신 겁니다.

    이 명령은 굉장히 구체적이고 단호했어요. “아끼지 말라”는 단어가 특히 눈에 띕니다. 하나님은 사울에게 절대적인 순종을 요구하셨죠. 단순히 전투에서 이기는 게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온전히 따르는 게 핵심이었어요. 여기서 사울의 믿음과 리더십이 시험대에 오른 셈입니다. 우리 삶에서도 비슷한 순간이 있죠.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을 때, 그걸 반만 따를지, 온전히 따를지 선택해야 하는 때가요. 사울은 과연 어떻게 했을까요?

    탈취에 급급한 사울, 순종을 저버리다

    이제 이야기가 전환점을 맞습니다. 사울은 아말렉을 공격해서 승리를 거뒀어요. 겉보기엔 성공처럼 보였죠. 하지만 삼상 15:9을 보면 충격적인 장면이 나옵니다. “사울과 백성이 아각과 양과 소와 어린 양과 모든 좋은 것을 아껴서 진멸하기를 즐겨 아니하고, 가치 없고 하찮은 것은 진멸하니라.” 하나님의 명령은 “모두 진멸하라”였는데, 사울은 좋은 건 남기고 나쁜 것만 없앴어요.

    심지어 사울은 아말렉 왕 아각을 살려두고, 전리품 중 좋은 가축들을 챙겼습니다. 삼상 15:19에서 사무엘이 사울에게 묻죠. “어찌하여 네가 여호와의 말씀을 청종하지 아니하고 탈취하기에만 급급하였느냐?” 이 질문은 사울의 실패를 적나라하게 드러냅니다. 그는 하나님의 뜻보다 자신의 욕심을 앞세웠어요. 겉으로는 “제사 드리려고 남겼다”고 변명하지만(삼상 15:21), 그건 핑계일 뿐이었죠. 사무엘은 단호하게 말합니다. “순종이 제사보다 낫다”(삼상 15:22).

    이 장면은 우리에게도 질문을 던집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 내가 원하는 대로 해석하며 살진 않는지. 사울처럼 좋은 건 챙기고, 불편한 건 버리는 선택을 하진 않는지 돌아보게 되죠. 사울의 실패는 단순한 실수가 아니라, 순종의 가치를 잊어버린 결과였어요.

    사울의 교훈: 순종의 길을 택하자

    결국 사울은 왕으로서의 권위를 잃고, 하나님께 버림받는 길로 들어섭니다. 삼상 15:23에서 사무엘은 “네가 여호와의 말씀을 버렸으므로 여호와께서 너를 버리사 왕이 되지 못하게 하셨느니라”고 선언해요. 이건 사울 개인의 비극일 뿐 아니라, 우리 모두에게 경고가 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겉모습이나 성과를 보시는 게 아니라, 마음의 중심과 순종을 보세요.

    사울의 이야기는 몇 가지 해결책을 제시합니다. 첫째,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 내 기준이 아니라 그분의 뜻을 먼저 생각해야 해요. 둘째, 욕심이 앞설 때 멈추고 기도하며 방향을 점검해야 합니다. 셋째, 실패하더라도 회개하며 돌아올 기회가 있다는 걸 잊지 말아야죠. 사울은 끝까지 변명했지만, 다윗은 실수 후 회개하며 달랐던 점을 떠올려 보세요(시 51편).

    현대적으로 적용해 보면, 우리는 일상에서 어떤 “아말렉”과 싸우고 있을까요? 나쁜 습관, 관계의 갈등, 물질적 욕심일 수도 있죠. 하나님께서 “진멸하라”고 하시는 걸 두고 내가 “좋은 건 남겨놓자”며 타협하진 않는지 점검해 봅시다. 사울의 실패는 우리의 성공을 위한 발판이 될 수 있어요.

    마무리하며

    사울의 이야기는 화려한 시작과 비극적인 끝을 보여줍니다. 그는 작았을 때 택함 받았고, 큰 임무를 맡았지만, 결국 순종하지 못해 넘어졌어요. 이 글을 읽는 당신은 사울과 다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귀 기울이고, 순종의 길을 선택한다면, 실패가 아닌 승리의 이야기를 써내려갈 수 있어요. 삼상 15:17-19을 다시 펼쳐 읽으며, 오늘 나의 순종을 점검해 보는 건 어떨까요?

    사울의 실패와 타락

    첫 번째 실패: 번제 사건

    사울의 첫 번째 큰 실패는 길갈에서 일어났습니다. 블레셋과의 전쟁을 앞두고 사무엘을 기다리던 사울은 참지 못하고 스스로 번제를 드렸습니다. 이는 제사장만이 할 수 있는 일이었고, 하나님의 명령에 대한 직접적인 불순종이었습니다. 사무엘은 이로 인해 사울의 왕조가 영원히 계속되지 못할 것이라고 선포했습니다.

    두 번째 실패: 아말렉과의 전쟁

    더 결정적인 실패는 아말렉과의 전쟁에서 나타났습니다. 하나님은 아말렉을 완전히 진멸하라고 명령하셨지만, 사울은 아말렉 왕 아각과 좋은 가축들을 남겨두었습니다. 그는 "하나님께 제사드리기 위해서"라고 변명했지만, 실제로는 자신의 판단을 하나님의 명령보다 우선시한 것이었습니다.

    질투와 분노

    다윗이 골리앗을 물리치고 백성들의 사랑을 받기 시작하자, 사울은 깊은 질투에 빠졌습니다. "사울은 천천이요 다윗은 만만이로다"라는 노래는 그의 마음을 더욱 어둡게 만들었습니다. 이후 사울은 다윗을 죽이려고 여러 번 시도했고, 이는 그의 통치 말기를 비극으로 이끌었습니다.


    사울 실패의 근본 원인

    불순종과 자의적 해석

    사울의 가장 큰 문제는 하나님의 명령에 대한 불순종이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명령을 자신의 상황과 판단에 따라 수정하려고 했습니다. 이는 하나님의 권위에 대한 도전이었고, 결국 그의 몰락을 가져왔습니다.

    두려움과 체면치레

    사울은 백성들의 눈치를 보며 하나님보다 사람을 더 두려워했습니다. 아말렉 전쟁에서도 "백성들이 두려워해서"라고 변명했지만, 실제로는 자신이 백성들의 반응을 두려워한 것이었습니다.

    교만과 자기 의존

    초기의 성공은 사울로 하여금 교만해지게 만들었습니다. 그는 점차 하나님의 도움보다는 자신의 능력과 판단에 의존하기 시작했고, 이는 영적 타락의 시작이었습니다. 

    사울 왕이 주는 교훈

    순종의 중요성

    사울의 이야기는 하나님의 명령에 대한 완전한 순종의 중요성을 보여줍니다. "순종이 제사보다 낫다"는 사무엘의 말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효합니다. 하나님의 뜻을 우리 방식으로 수정하려는 시도는 언제나 실패로 이어집니다.

    리더십의 책임

    지도자는 자신의 편의나 체면보다 하나님의 뜻을 우선시해야 합니다. 사울은 백성들의 눈치를 보며 하나님의 명령을 타협했지만, 진정한 리더는 하나님 앞에서 책임을 져야 합니다.

    겸손의 필요성

    사울의 교만은 그의 몰락을 가져왔습니다. 성공할 때일수록 더욱 겸손해야 하고, 모든 성취가 하나님의 은혜임을 인정해야 합니다.

    질투와 분노의 위험성

    사울의 질투는 그를 파멸로 이끌었습니다. 다른 사람의 성공을 시기하고 분노하는 것은 자신만을 해칠 뿐입니다. 대신 다른 사람의 성공을 축복하고 격려하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말씀 앞에 자신의 생각을 좇은 사울왕의 비참한 최후

    이스라엘 사울왕 이야기

    사무엘상 15장 10절과 11절 말씀을 읽었습니다. 여러분도 잘 아시다시피 사울은 아주 키가 큰 사람이었습니다. 품위도 있고 정말 다방면으로 뛰어났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하나님이 “내가 사울을 세워 왕 삼은 것을 후회한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사울이 도둑질을 했다거나 다른 어떤 죄를 지었던 것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이 사울을 이스라엘 왕으로 세운 후 그에게 아말렉을 진멸하라며 “그들의 모든 소유를 남기지 말고 진멸하되 남녀와 소아와 젖먹는 아이와 우양과 약대와 나귀를 죽이라”(삼상 15:3)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아말렉 사람을 다 죽이라! 짐승을 다 죽이라!”라고 말씀하시지 않고 정확하게 “남녀와 소아와 젖먹는 아이와 우양과 약대와 나귀를 죽이라”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남녀와 소아와 젖먹는 아이’라며 사람을 3가지로 나누고, ‘우양과 약대와 나귀’라며 짐승을 3가지로 나누어 총 6가지로 나누면서 진멸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사울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아말렉을 진멸하러 갔다가 자기 생각대로 했습니다. “아각과 그 양과 소의 가장 좋은 것 또는 기름진 것과 어린 양과 모든 좋은 것을 남기고 진멸키를 즐겨 아니하고 가치 없고 낮은 것은 진멸하니라”(삼상15:9) 이 말씀처럼 사울은 모든 아말렉에 속한 것을 진멸했으나 왕 아각을 사로잡고 양과 소의 좋은 것은 남겼습니다. 

    아말렉을 진멸하라 했지만

    여러분, 창세기 3장에서 사단은 에덴동산 중앙에 있는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를 인간에게 먹도록 유혹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지혜가 아닌 사단의 지혜를 인간이 사용하도록 만든 것입니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를 먹은 인간이 아무리 하나님을 진실하게 섬긴다 해도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과 다릅니다. 
    사무엘상 15장에서 하나님이 사울에게 아말렉을 진멸하라 말씀하시면서 ‘남녀’, ‘소아’, ‘젖먹는 아이’와 ‘우양’, ‘약대’, ‘나귀’를 죽이라고 하셨습니다. 여기 말씀을 보면 하나님이 멸하라고 하신 종류가 총 6가지 입니다. 성경에 나타난 모든 숫자에는 의미가 있습니다. 6이란 숫자는 인간을 가리키는 숫자입니다. 6가지를 멸하라는 것은 말그대로 6가지를 모두 멸하라는 말이지만 인간적인 것을 다 멸하라는 의미로도 해석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사울은 자신이 볼 때 좋은 것은 남기고 가치 없는 것은 멸한 후 남긴 것들을 가져다가 여호와께 제사하려 했습니다. 그것은 사울의 생각이었습니다. 

    춥고 가난했던 어린 시절

    제가 어렸을 때 6.25전쟁이 일어났습니다. 이듬해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시고 아버지와 형님은 전쟁에 참여해서 집에 어른이 계시지 않았습니다. 당시 큰 누님이 열다섯 살, 작은 누님이 열세 살, 동생이 네 살, 저는 여덟 살이었습니다. 저희는 참 많이 굶었습니다. 겨울은 무척 추웠는데 난방도 제대로 못하니까 자고 일어나면 거리에 얼어 죽은 사람들의 시체가 즐비했습니다. 그리고 굶어죽은 사람들도 참 많았습니다. 
    저는 열다섯 살 정도 되면서부터 남의 밭에 들어가 밀을 꺾어 먹거나 사과를 서리하는 등 도둑질을 했습니다. 어려서부터 교회를 다녔는데 이렇게 매일 죄를 짓게 되니까 분명히 지옥에 간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죄를 씻고 하늘나라에 가고 싶어서 더 열심히 교회를 다녔습니다. 교회 목사님께서 회개하면 죄가 사해진다고 해서 계속 회개했지만 여전히 죄가 마음에 남았습니다. 

    회개하면 죄가 씻어진다?

    그래서 저는 창세기부터 자세히 성경을 읽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레위기 4장의 속죄제사에 대해 기록된 말씀이 보였습니다. 레위기 4장의 속죄제사에서는 회개해서 죄를 씻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성경에는 “율법을 좇아 거의 모든 물건이 피로써 정결케 되나니 피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느니라”(히 9:22)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회개하면 죄가 씻어진다는 말은 성경과 달랐습니다. 
    속죄제사에는 네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 제사장이 죄를 지었을 때 둘째, 이스라엘 회중이 죄를 지었을 때 셋째, 족장이 죄를 지었을 때 넷째, 평민이 죄를 지었을 때입니다. 저는 평민이라고 생각해서 평민의 속죄제사를 자세히 읽었습니다. “만일 평민의 하나가 여호와의 금령 중 하나라도 부지중에 범하여 허물이 있었다가 그 범한 죄에 깨우침을 받거든 그는 흠 없는 암염소를 끌고 와서 그 범한 죄를 인하여 그것을 예물로 삼아 그 속죄제 희생의 머리에 안수하고 그 희생을 번제소에서 잡을 것이요.”(레 4:27~29) 성경을 보면 염소를 끌고 간 후 그 머리에 안수하라고 되어 있습니다. 처음에 이 부분을 잘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목사나 장로가 될 때 안수를 받던데 왜 염소가 안수를 받지?’ 하며 저는 안수의 의미를 알기 위해 성경을 찾기 시작했습니다.

    성경 말씀에도 짝이 있어

    하나님이 인간을 만드실 때 남자와 여자가 짝이 되게 하신 것처럼 성경 말씀에도 짝이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을 읽을 때 짝을 찾아서 읽어보면 성경의 의미가 풀립니다. 레위기 4장 29절에는 안수하는 이야기가 나오고 레위기 16장 21절에는 그동안 궁금했던 안수하는 의미가 정확히 나왔습니다. “아론은 두 손으로 산 염소의 머리에 안수하여 이스라엘 자손의 모든 불의와 그 범한 모든 죄를 고하고 그 죄를 염소의 머리에 두어” 여기 말씀을 보니 염소에게 안수하는 것은 죄가 염소에게 넘어가는 과정이었습니다. 죄를 사함 받기 위해서는 먼저 죄를 염소에게 넘기는 일을 해야 합니다. 그래서 죄를 넘겨받은 염소가 죽을 때 그 죄가 사해지는 것이 바로 구약 성경의 속죄제사입니다. 속죄제사에서 대속물이 되는 그 양이나 염소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그림자입니다. 저는 성경을 자세히 읽으면서 죄 사함에 대해 정확히 알 수 있었습니다.

    좋아 보이는 것을 남기고

      여러분, 성경에는 하나님의 뜻과 말씀이 있고 인간에게는 생각의 세계가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어떤 문제가 있을 때 인간의 지혜와 방법으로 해결해 나가는 것입니다. 그런 인간의 생각이 신앙의 길을 좌지우지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사무엘상 15장에서 하나님이 사울을 불러서 아말렉을 진멸하라고 말씀하셨을 때 사울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아말렉에 속한 모든 것을 죽이면 됩니다. 그런데 사울은 자기 생각에 좋은 것과 가치 있는 것을 남겼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하나님을 믿고 신앙을 해도 우리는 사람이기 때문에 자기 생각과 판단력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순종할 때 자신의 생각이나 판단을 더하면 아무리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한다고 해도 참된 순종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여호와의 말씀에 내 생각은 너희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 길과 달라서”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생각과 인간의 생각이 달라서 우리는 말씀을 그대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사울이 하나님의 뜻대로 아말렉을 치러 가서 아말렉에게 속한 모든 것을 멸해야 했습니다. 그런데 아말렉 왕 아각을 사로잡아 두었고 양과 소의 가장 좋은 것 또는 기름진 것을 남겼다가 하나님께 제사하면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마음과 다른 인간의 생각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성경을 읽고 신앙생활을 할 때 우리 생각이 좋아 보이면 그것을 그냥 따라갑니다. 

    큰 죄악에 빠진 다윗

    어느 날부터 다윗이 전쟁에 나가지 않고 왕궁 지붕 위를 거닐었습니다. 왕궁 지붕 위를 거닐다가 목욕하는 여인이 보였는데 그 여자가 무척 아름다왔습니다. 그 여인은 왕궁 아래 사는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였습니다. 밧세바가 다윗이 왕궁 지붕 위를 거닐 시간에 맞춰서 담 밑에서 옷을 벗고 목욕을 한 것입니다. 제 추측에는 남편이 군에 있어 남자 생각이 나서 다윗을 유혹했을 것입니다. 다윗이 신하에게 그 여자를 데려오라 한 후 동침을 했습니다. 얼마 후 그 여자는 임신을 했다고 연락했습니다. 다윗은 그 여자와 같이 하룻밤 잔 것 뿐인데 임신을 했다는 소식에 심각해졌습니다. 궁리 끝에 요압 군대장관을 시켜 그 여자의 남편 우리아를 왕궁으로 불렀습니다. 그에게 군사의 안부와 전쟁이 어떠한지를 묻고 이왕 이곳에 왔으니 집에서 며칠 쉬었다 가라고 했습니다. 우리아는 아주 충성된 사람이라서 다른 병사들이 전쟁 중이기 때문에 자기만 집에서 편히 쉴 수 없어 집으로 가지 않았습니다. 그 사실을 안 다윗은 너무 괴로웠습니다. 결국 우리아 손에 군대장관 요압에게 보내는 편지를 쥐어주고 그를 보냈습니다. 그 편지의 내용은 “우리아를 맹렬한 싸움에 앞세워 두고 너희는 뒤로 물러가서 저로 맞아 죽게 하라”라는 것이었습니다. 마침내 우리아는 맹렬한 전투에서 적군의 칼에 맞고 죽음을 맞이했습니다. 다윗은 밧세바를 데려와 아내로 삼고 아들을 낳았습니다. 이후 다윗은 나단 선지자의 큰 책망을 들었으며 그일로 말미암아 일생동안 고통 속에서 지냈습니다. 

    우리아의 아내 일을 통해

    이 세상에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말씀이 아닌 자기 생각을 따라갈 때가 있습니다. 다윗도 그럴 때가 있었지만 그 일 후로는 하나님의 말씀을 그대로 따르는 삶을 살 수 있었습니다. 이제 더는 자기 자신을 믿지 않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분명 다윗이 인간적인 생각을 하거나 교만한 생각을 할 때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때 다윗은 ‘나는 단순히 마음에 드는 여자와 하룻밤을 지내면 좋을 거라는 내 생각을 따라갔는데 결국 큰 악을 저지르고 하나님의 책망을 받았어’라고 생각하며 자기 생각을 따라갔던 일이 너무나 지긋지긋하고 싫어서 말씀만 좇게 된 것입니다.
    만일 그에게 이런 일이 없었다면 다른 죄의 유혹을 받을 때 인간적인 생각에 이끌려 얼마든지 하나님을 떠날 수 있었을 것입니다. 다윗은 우리아의 아내 일을 통해 자기 생각을 따라갔을 때 뼈에 사무치는 고통을 겪어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비참한 최후를 맞이한 사울

      하지만 사울은 달랐습니다. 사울은 다른 사람보다 출중했고 성실했기 때문에 자신의 악을 발견할 기회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아말렉을 쳐서 그들의 모든 소유를 남기지 말고 진멸하되 남녀와 소아와 젖먹는 아이와 우양과 약대와 나귀를 죽이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지 않았습니다. ‘아각 왕은 살려두면 써먹을 데가 있겠다. 기름진 양과 소는 하나님께 제사 드리면 좋겠네.’ 사울은 하나님의 말씀만 가지고 간 것이 아니라 ‘이것쯤은 괜찮겠지’라며 말씀에 자신의 생각을 더했습니다. 결국 사울은 하나님께 버림을 당하고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게 됩니다.
    성경을 읽으면 이런 하나님의 마음이 너무나 명백하게 보입니다. 사단은 인간에게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도록 했습니다. 그래서 말씀을 따라 신앙생활을 하다가도 종종 그 선악과의 지혜로 살아도 괜찮을 것 같을 때가 있습니다. 그런 생각을 따라간 사람들은 전부 하나님께 버림을 받았습니다. 사울이 조금만 더 깊이 생각했다면 자기 생각을 따라가지 않았을 텐데 그는 자기 자신을 믿었기 때문에 너무나 쉽게 자기 생각을 따라가고 말았습니다.

    요셉의 아버지 야곱

    구약 성경에 나오는 요셉의 아버지는 야곱입니다. 야곱은 라헬을 사랑해서 결혼하려고 했는데 장인인 라반이 결혼식 날 몰래 첫째 딸 레아를 야곱에게 들여보냅니다. 아침에 일어나 보니 라헬이 아닌 레아가 자기 곁에 있어서 라반에게 따집니다. 그러자 라반이 “형보다 아우를 먼저 주는 것은 우리 지방에서 하지 아니하는 바이라” 하며 칠 일 후에 라헬을 줄 테니 칠 년을 더 봉사하라고 합니다. 그래서 야곱은 레아와 라헬을 아내로 맞게 됩니다.
    문제는 야곱이 사랑한 라헬은 아기가 없었는데 레아는 자녀를 잘 낳았습니다. 레아가 첫아들을 낳자 너무나 기뻐 이름을 르우벤이라고 지었습니다. 르우벤은 ‘보라 아들이라’는 뜻입니다. 라헬은 아기를 갖지 못하자 여종을 통해 야곱에게 자녀를 얻게 했습니다. 그러다 늦게 라헬도 아기를 가지게 되었습니다. 라헬은 아이 이름을 요셉이라고 지었는데 요셉은 ‘더함’이라는 뜻으로 라헬이 아이를 더 갖기 원하는 마음을 표현한 것입니다. 몇 년 후 라헬의 바람대로 또 아이를 갖게 되었습니다. 출산 때가 되었는데 야곱 가족들이 벧엘에서 다른 곳으로 이동하는 중이라 라헬이 난산을 하게 되면서 아이를 낳고 죽었습니다. 라헬이 죽으면서 아이의 이름을 베노니(슬픔의 아들)라고 지었는데 야곱이 베냐민(오른손의 아들)이라고 다시 이름을 지어 주었습니다.

    애굽의 총리가 된 요셉

    요셉은 어려서 어머니를 여의게 되었습니다. 다른 형제들은 다 엄마가 있어서 어디 갔다가 돌아오면 엄마가 씻겨 주고 챙겨 주는데 요셉은 그런 엄마가 없었습니다. 요셉은 엄마가 너무나 그리웠을 것입니다. 저도 여덟 살 때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셨습니다. 한번은 선생님께서 반 아이들에게 손톱을 깎고 오라고 하셨습니다. 당시는 손톱깎이가 있는 집이 드물어 가위로 손톱을 잘랐습니다. 제가 오른손잡이라 왼손 손톱은 자를 수 있는데 오른손은 아무리 해보려 해도 안 되었습니다.
    그래서 왼손 손톱만 깍은 상태로 등교했습니다. 선생님께서 손톱 검사를 하시는데 제 손을 보시더니 “넌 왜 왼손만 깎고 오른손은 그대로니?”라고 하셨습니다. 제가 “오른손잡이라 왼손으로는 가위질이 안 되어 못 깎았습니다”라고 하자 선생님께서 “그럴 땐 엄마보고 깎아달라고 하면 되지. 다음부터는 엄마에게 부탁해”라고 하셨습니다. 제가 선생님께 엄마가 없다는 말을 차마 하지 못했습니다. 그날 엄마가 너무나 그리웠던 기억이 납니다. 요셉은 엄마가 없어서 하나님과 마음을 나누었습니다. 엄마가 죽고 난 후 사랑을 받지 못하고 어린 동생을 데리고 외롭게 자랐을 것입니다. 인간적인 면으로는 요셉의 삶이 불행한 것처럼 보였지만 대신 그는 하나님과 가까워졌습니다. 결국 요셉은 하나님의 은혜로 온 나라를 살리는 애굽의 총리가 되었습니다.

    다윗의 삶을 보면

    하나님이 제 인생에도 많은 어려움을 허락하셨습니다. 어려서는 가난한 시절에 태어나 굶기도 했는데 그것이 꼭 나쁜 일이 아니란 것을 알았습니다. 그 어려움을 통해서 하나님만을 바라보고 믿음으로 사는 삶을 배울 수 있었습니다. 
    다윗은 우리아의 아내와 동침하고 그의 남편, 우리아를 죽이는 죄를 짓고 하나님으로부터 재앙과 큰 고통을 받았습니다. 그는 하나님을 거스르고 자기 생각을 따라가는 것이 얼마나 무서운 일인 줄 알았습니다. 그때 다윗은 ‘내가 내 생각을 보태지 않아야 한다. 하나님의 말씀대로만 살아야 한다’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왕이었지만 자신을 낮출 수 있었고 평생 하나님을 거스르지 않고 말씀을 따라 살 수 있었습니다. 

    고난을 통해 겸비한 삶으로

    여러분, 우리가 신앙생활에서  나만 어려움을 당하는 것 같을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그런 일을 통해 우리가 가진 인간적인 생각을 다 뽑아 버리십니다. 평소 하나님을 잘 섬기던 사람이 어느 날 사울처럼 하나님에게 버림받는 경우를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큰 죄를 짓고 많은 어려움과 고난을 겪었습니다. 사울에게 쫓겨 죽을 고비도 여러 번 넘겼습니다. 그런 어려움이 하나님 앞에 다윗을 겸비케 해서 죽을 때까지 충성스럽게 하나님을 섬길 수 있었습니다. 이런 은혜를 경험하지 못한 사울은 자기 생각대로 일을 했습니다. 그런 사울을 향해 하나님이 너무 섭섭해하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내가 사울을 버렸노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도 다윗처럼

    우리는 어려움이 없는 평안한  삶을 원합니다. 그렇지만 문제와 어려움이 생깁니다. 그때 우리는 생각을 따라갈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야 합니다. 다윗이 사울에게 쫓기고 죽을 고비를 여러 번 넘겼는데 그때마다 하나님의 도움으로 살 수 있었습니다. 반대로 사울은 자기 생각을 따라 그대로 흘러가서 하나님의 말씀을 거스른 결과 하나님으로부터 버림을 받았습니다. 
    여러분 가운데 단 한 사람도 사울처럼 되지 않길 바랍니다. 다윗처럼 하나님을 섬기는 귀한 일꾼이 되십시오. 이 귀한 복음을 전하는 하나님의 일꾼이 정말 많이 필요합니다. 문제와 어려움이 찾아올 때 하나님이 도우실 것을 생각하면서 어려움을 뛰어넘고 하나님의 말씀만 따라 사는 귀한 일꾼이 되길 바랍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여러분을 통해서 마음껏 역사하시는 복된 삶을 살게 될 줄 믿습니다. 






    티와 들보(마태복음 7:1-5)

    이제 주신 본문 말씀의 주제는 비판하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이 비판하지 말라는 말은 우리가 일반적으로 넓게 해석하여 남의 말, 그것도 특별히 허물이나 단점에 대해서 말하지 말라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원문에 나타난 그 좁은 의미로 생각을 하면 반드시 그런 의미의 이야기만은 아닙니다. 이것은 판단하지 말라는 말입니다. 마치 재판장이 판결을 내리는 것과 같이 결정적인 판단을 하지 말라는 이야기입니다. 다시 말하면, 이것은 이렇다. 저것은 저렇다. 혹은 나쁜 뜻에서 저 사람은 저래서 나쁘고 이 사람은 이래서 나쁘다는 식의 결정적인 말을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원문 그대로의 뜻은 재판장이 재판의 판결 결과를 선언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그래서는 이 사람은 유죄, 혹은 무죄하고서는 땅 땅 땅 치고 나면 그것으로 끝나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판단하는 것으로 이제 예수님께서는 그런 판단을 하지 말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인간은 누구나 이성을 가진 존재로서 판단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태어났으며 또한 그 능력을 지니고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 인간만이 가진 특권 중에서도 대단히 중요한 부분이요, 기능입니다. 그로 인해 선과 악을 판단하는 것은 물론 해야 할 일과 하지 말아야 할 일, 오늘 할 일과 내일 할 일, 그리고 먼저 할 일과 나중에 할 일 등 모든 것을 다 판단하게 됩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러한 것을 판단을 하지 말라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일에 대해서는 판단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자신에 대해서는 끊임없는 비판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다른 사람에 대해서는 비판하지 말라! 비단 말로써 뿐만 아니라 생각 속에서라도 이렇고 저렇고 하는 비판은 할 것이 아니라는 이야기입니다.

    우리의 이성은 비판의 기능을 가지고 있고 그것은 참으로 소중한 것입니다. 만약 우리에게 이러한 기능이 없다면 우리는 제대로 살아갈 수가 없을 것입니다. 따라서 종교적으로, 도덕적으로, 윤리적으로, 일상 생활의 모든 영역에서 우리는 옳고 그른 것, 그리고 선택의 여지를 판단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판단에 대하여 다시 한번 판단을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는 무엇을 뜻하는 말이냐 하면 이성의 판단을 제한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이성이 있고, 판단의 기능이 있다고 하여 무엇이나 다 판단하는 것이 아닙니다. 분명히 내가 판단해야 할 일이 있는가 하면 하지 말아야 할 일이 있어요. 내게 주어진 바가 따로 있단 말입니다. 내가 판단해서는 안될 것이 보다 많아요. 이젠 하나님께서 하실 일은 하나님께 맡기세요. 그것은 내가 판단할 일이 아니라 그분이 하실 일입니다. 따라서 내가 하여야 할 이상의 월권, 그러한 판단은 옳은 것이 아닙니다. 그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판단을 제한하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또한 우리는 판단 자체가 죄악성을 지니고 있음을 시인하여야 합니다.

    그러므로 이성 자체가 중생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오랫동안 죄 가운데 살면서 이것이 이지러지고 뭉개져서 병적으로 잘못된 판단력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나의 판단력 자체가 확실하지 못하다는 것을 항상 알고 있어야 하고 그러한 나의 판단력이 선명하고 깨끗하게 회복되도록 먼저 중생 되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이는 판단력을 흐리게 하는 많은 요소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죄가 흐리게 하고, 자기를 주장하는 마음이 흐리게 하며, 소중히 여기는 자기 경험도 판단을 흐리게 합니다. 우리는 가끔 경험을 과시하는 말로 "내 다 해 보았어"라고 합니다만, 그러나 그것은 잘못된 소리인 것입니다. 사람이 다르고 시대가 다르며 환경이 다른데 어떻게 내가 해본 것과 저 사람이 해보는 것이 같을 수가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자기 경험에 집착하는 것처럼 무지한 것은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체로 보면 자기가 경험한 것에 대해서는 어딘가 모르게 그 경험을 절대화하려는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바로 그런 연유에서 "내가 다 해 보았다"며 힘주어 말을 하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대개 고집이 세고 그로 인해 판단이 흐려집니다. 내가 할 수 있었다고 다른 사람도 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못할 사람은 끝까지 못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이와 같이 자기 경험, 자기 우월감 같은 것들이 앞서 있기 때문에 판단이 흐려지고 나아가서는 이기적인 생각과 악한 동기가 있을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이성은 이미 흐려져 가고 있습니다. 따라서 흐려진 마음, 흐려진 척도, 흐려진 이성을 가지고 판단한 것은 그 판단 자체가 이미 옳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항상 조심해야 하고 판단을 지나치게 결정적으로 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참으로 거듭거듭 조심스럽게 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사람들이 말하는 랍비들의 교훈을 보면 인간 생활을 하는 데에 있어서 여섯 가지의 덕이 있다고 합니다. 그 첫째 덕은 공부하는 것이요, 둘째 덕은 환자를 방문하는 것이며, 그리고 셋째 덕은 대접하는 일, 넷째 덕은 기도하는 것, 다섯째 덕은 자녀들에게 율법을 가르치는 것인데 이제 마지막 여섯째 덕이 무엇이냐 하면 다른 사람의 최선을 생각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고 보면 우리에게 다른 사람을 생각하는 덕이 있어요. 일생 동안 언제, 어디에서나 누구에게든 겸손히 배우고 익히며 공부하는 것이 덕이요. 환자를 찾아다니며 위로하고 용기를 주는 것도 덕이요, 오가는 모든 이들에게 물질로 기쁘게 대접하는 것도 덕이요, 자신과 다른 사람을 위해 기도하는 것이 덕이며 배울 뿐만 아니라 자녀들에게는 율법을 가르치는 것이 덕인데 그 다음에 또 하나의 마지막 덕이 있으니 곧 다른 사람의 장점을 생각하는 것이란 말입니다. 덕이 있는 사람은 언제나 다른 사람의 좋은 점을 생각합니다. 반면에 덕이 없는 사람은 항상 좋지 않은 나쁜 방향으로만 생각하게 됩니다. 그러다가 보니 꿈자리까지 사납고 뒤에 그 사람을 만나게 되면 애매하게 기분이 나빠지는 겁니다. 만약 좋은 점을 생각했다가 그 사람을 만났다면 반가울 것이 아니겠습니까? 바로 이것이 덕이요, 덕이 이렇게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다른 사람의 나쁜 점을 생각지를 마십시오. 그런 점에서는 건망증이 있을수록 좋겠습니다. 나쁜 점은 아예 깨끗이 잊어버리고 좋은 점, 그의 장점에 대해서만 항상 생각하고 기억하는 그런 것이 이스라엘 사람들이 말하는 덕이라는 것으로 이것은 매우 중요한 이야기입니다.

    그러면 이제 여기에 비추어 오늘 말씀을 한번 생각해 보십시다. 본문에 의하면 비판하지 말라고 하셨는데, 이 비판은 왜 어떻게 하여 하게 되는 것이겠습니까? 그것은 다름이 아니라 나쁜 점을 보자니까 비판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좋은 면을 보고 좋은 점만 생각해 보세요. 이것이 덕이요, 거기에 덕스러움이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비판이란 도대체 하지 말라며 아주 잘라서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렇다면 이제 우리는 예수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신 이유를 한번 생각해 봐야 하겠습니다.

    그 먼저는 우리가 남에 대하여 이야기를 할 때 그 전체에 대해서는 알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남을 안다는 것은 언제나 부분적으로 아는 것일 뿐 결코 전체를 아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사람의 외모를 대할 때에도 눈은 어떻고, 코가 어떻고 하는 정도의 얼굴 하나를 보는 것이지 전체가 어떻다 할 정도로 모두를 보는 것은 아닙니다. 누가 그 사람의 발가락이 예쁜지 안 예쁜지를 어떻게 알겠느냐 말입니다. 기껏 본 것이 얼굴 하나라면 정말로 그 사람을 보았다고 할 수 있는 것이겠습니까? 이렇게 나타난 육체의 외모도 다 못 보는 것이라면 하물며 그 사람의 속마음, 그 사람의 과거를 우리가 언제 보았느냔 말입니다. 그리고 또한 그 사람이 앞으로 어떻게 될 사람인지 우리가 어떻게 알겠습니까? 그러면서도 어떻게 남에 대해서 쉽게 말할 수 있는 것이겠습니까? 다시 말하자면 우리는 인격의 전체와 인간 전체를 다 보는 것이 못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쉽게 그 사람은 좋다 나쁘다. 혹은 이렇고 저렇다며 말할 수 있게 되어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실로 부분적이요, 일방적이며, 어떤 때는 현세적으로, 이렇게 어느 한쪽으로 치우쳐서 내가 경험한 그 조그마한 한 부분을 보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 때문에 어떤 경우에는 생전 처음 만나 단 한마디 주고받은 말인데도 그 한 마디가 내게 거슬려서는 그 사람 전체를 나쁘게 보는 것입니다. 여러분! 한번 생각해 보세요. 이 얼마나 잘못 된 것인지를! 그 사람은 실은 좋은 일을 많이 한 사람이요. 칭송 받는 사람이며, 앞으로도 얼마든지 좋은 일을 많이 할 사람인데 나하고 만난 그 한 순간 때문에 그 사람을 그렇게 결정적으로 나쁘게 보겠냐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판단을 쉽게 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이제 두 번째로 생각할 것은 내게 판단할 자격이 있느냐는 것입니다. 도대체 누가 감히 남을 판단할 수 있는 것이겠습니까? 정말 다른 사람을 판단할 수 있을 만큼의 선한 사람이 몇이나 있겠습니까? 어찌 생각하면 어느 쪽이 더 큰 것인지, 어느 쪽이 더 잘못된 것인지조차 알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겸손한 사람은 아무 말도 안 하는 거예요. 내 자신을 보노라면 감히 남을 평할 수가 없으니까 말입니다.

    그리고 세 번째 생각할 것은 우리는 그 사건 자체를 완전히 알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이는 왜냐 하면 사건이 오늘 여기에 이르기까지에는 깊은 원인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나타난 어느 한 부분을 보는 것으로 하여 그 사건 전체를 평하려고 드는 것은 잘못이란 말입니다. 언젠가 이런 재미있는 이야기를 읽은 적이 있습니다. 한 선교사가 파키스탄에 들어가 선교를 하는데 이제 이 마을 저 마을을 다니면서 보니 그곳 사람들이 매우 한심한 짓을 하고 있더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뭐냐 하면 더운 지방이니까 집이라는 것은 그저 대충 나뭇가지로 간단하게 지어 놓고는 그 방에다 돌 세 개를 고여 남비를 거는 것입니다. 그러고는 이제 거기에다가 소똥 말린 것을 넣어 불을 붙여서는 입으로 후후 불어가면서 카레라이스를 끓여 먹는 것입니다. 실은 카레라이스의 원조가 인도, 파키스탄 그쪽이고 보면 이것이 세계에서 제일 맛있는 카레라이스인 것입니다. 본래 카레라이스는 가스 불같은 데서 급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그저 담배 불처럼 연한 불에다가 오래 오래 끓여야 된다고 합니다. 어쨌든 저 사람이 그렇게 끓이고 있으니 그 연기가 어떻게 되겠습니까? 집집이 방안에 연기가 자욱하고 여자들은 전부가 눈이 빨갛게 병이 나 있더랍니다. 이것을 보는 선교사의 마음에는 이 야만적이고 미련한 사람들을 보았나! 하는 한심한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러한 생각이 곧 정죄 하는 것이요, 판단하는 것이지요. 아무튼 이렇게 한참 비판을 한 다음, 그러나 어떻게 이 우매한 사람들을 구제할 수 있을까를 생각한 끝에 양철을 말아 만든 2미터 정도의 굴뚝 하나씩을 집집마다 나누어주면서 지붕에다 구멍을 뚫고는 집어넣으라고 했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여 냄비 걸린 뒷부분에 고여 놓으면 이제 연기가 그리로 나갈 것이란 말입니다. 그랬더니 정말 연기가 솔솔 잘 나가서 이제 방안에는 연기가 없어지고 눈병도 없어졌습니다. 문제는 거기까지는 좋았는데 그러고 난 후 두 달도 못 되어서 집이 폭삭 내려앉고 마는 것입니다. 그래서 왜 무너지나 하고 그 원인을 찾아보았더니 그 지방에는 이상한 불개미가 있어서 산 나무는 갉아 먹지 않고 죽은 나무는 갉아먹는데 이것들이 소똥 불 피우는 냄새가 났을 때에는 도망을 갔다가 이제 그 냄새가 빠져나가자 다 모여들어서는 기둥뿌리를 전부 갉아먹어 집이 무너지고 말았더라는 것입니다. 이때에 그 선교사는 회개를 했다는 것입니다. 수천 년 동안 내려온 지혜인데 내가 굴뚝 하나로 해결하려고 했으니 그것이 되겠느냔 말입니다.

    내 생각에는 잘못하는 것 같고, 무슨 일을 그따위로 하나 생각될지 모르지만 그것이 그런 것이 아니예요. 그 사건 하나가 있기 위해서는 많은 경험과 오랜 생활이 있어야 했고, 그 결과, 그 끝에서 비로소 그 사건이 있어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느 한 시점에서 쉽게 말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에 우리 속담에는 "나무에 가리워서 숲을 못 본다"는 말이 있지요. 숲은 큰 것입니다. 따라서 멀리서 보아야 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너무 가까이 가면 나무에 가리워서 진작 보아야 할 숲은 보이지를 않는 것입니다. 마치 우리의 판단은 이와 같아서 도저히 정확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실 그대로를 알아볼 수 없는 우리로서는 쉽게 판단하는 이야기를 할 수 없다 하는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 더욱 중요한 말은 "네 형제의"란 말입니다.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 이는 내가 판단할 대상이 바로 형제란 말이요, 형제의 아픈 곳을 쑤시면 결국은 내가 아파지는 것이란 말입니다. 이것은 남이 아니라 형제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를 비판할 수가 없어요. 내가 비판받을 때에 아프다면 내 형제를 비판하면 또 저가 아플 것이란 말입니다. 그가 아픈 것이나 내가 아픈 것이나 그 아픔은 마찬가지로 아픈 것입니다. 그러므로 형제를 비판하지 말라! 는 것입니다. 형제는 사랑할 대상이지 비판받아야 할 대상은 아닙니다.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습니다. 그는 사랑해야 하는 형제라는 것을 먼저 생각할 때 우리는 그렇게 쉽게 비판할 수가 없다는 말씀입니다.

    이제 오늘 본문의 3 - 4절 말씀을 보면 매우 과장된 점이 있습니다. 여기에서 티라고 하는 헬라어 '칼포스'는 매우 작은 먼지 같은 것을 뜻하며 무의미한 것을 말합니다. 그러나 이렇게 작은 것도 눈에 들어가면 아프게 합니다. 어쨌든 여기에서 말하고 있는 티는 눈에 들어갈 정도의 작은 것을 말합니다. 반면에 들보라고 하는 말은 헬라 원문에는 '도콘'으로 표현되고 있는데 이는 그야말로 들보입니다. 우리가 집을 지을 때에 쓰여지는 큰 재목인 대들보 말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눈 속에 들어갔다니 과장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앞서 티가 눈 속에 들어갔다는 말씀은 이해가 되는데 들보가 눈에 들어갔다는 이 비유는 예수님께서도 너무하셨다는 생각이 들게 합니다. 그러시려면 "형제의 눈에 있는 티는 보면서 네 눈을 가리우고 있는 들보는 못 보느냐?"고 하셨으면 차라리 어떨지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들보가 아예 눈에 들어갔다고 하셨으니 이것이 극단적인 극과 극의 비유가 된단 말입니다.

    이제 우리는 여기에서 깊이 생각해야 할 문제가 있습니다. 이 극단적인 비유의 말씀은 예수님께서 보신 비판에 대한 비판의 말씀인 것입니다. 너희 사람들의 비판이라는 것이 도대체 어떤 것이냐? 그것은 티를 보는 사람이 들보는 깨닫지 못하기 마련이며 나아가서는 다른 사람을 보는 사람은 자기를 못 본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것을 알아야 합니다. 다른 사람의 이야기만 자꾸 하며 다니는 사람은 자기 일에 충실치를 않습니다. 그래서 어느 처세학 책에서 보니까 남의 집에 가서 다른 사람의 흉을 보는 아낙네가 있으면 빨리 집으로 돌아가 반짇고리가 제자리에 있는가 보라고 하였습니다. 자위가 제자리에 있고 바늘꽂이가 제자리에 있는지를 가서 보면 틀림없이 제대로 정리되어 있지 않을 것이라는 이야기입니다.

    이와 같이 남의 말을 많이 하는 사람은 예외없이 자기 일에는 충실치를 못합니다. 남의 일에 관심이 많은 사람은 자기의 가장 중요한 일에는 관심이 없어요. 남의 일을 너무 많이 생각하는 사람은 진작 자기가 마땅히 해야 할 도리는 생각지를 못하더란 말입니다. 우리는 그것을 알아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께서 보시는 비판에 대한 비판입니다.

    이제 남의 눈의 티를 비난하는 사람은 자기 눈의 들보에 대한 의식이 없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하시는 말씀이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는 것인데 이는 모른다는 이야기입니다. 이와 같이 비판이란 대체로 자기를 모르는 것에서 비롯되는 남의 이야기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제 그 다음의 문제로 넘어가서 오늘 본문 중의 "먼저"라고 하는 말씀을 한번 생각해 보십시다. 먼저 네 눈 속에서! 할 때에 이 '먼저'라고 하는 프라이어리티(Priority)가 중요하고 그 다음이 다른 사람입니다. 이에 자기를 먼저 생각하고, 그 다음에는 다른 사람을 생각하며, 자기를 먼저 비판하고 그리고 남을 비판하여야 합니다. 그런데 이와는 반대로 남의 일에 대해서는 바늘 끝처럼 예민하게 비판하면서도 자기 자신에 대해서는 바다처럼 관용을 베푸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면서 또 하는 말이 인간인 고로 다 그런 것이 아니겠느냐는 식으로 나오는데 바로 여기에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언제나 자기 먼저라고 하는 이 프라이어리티가 있어야 함을 잊지 말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또 한 가지 생각할 것은 "밝히 보고"하는 말씀입니다. 이는 곧 자기의 상태, 자기의 의무, 내가 해야 할 일이 무엇인가를 먼저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나의 충실을 먼저 생각하라! 그렇게 밝히 본 다음에 이제 다른 사람의 눈의 티를 볼 수 있게 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여기에서 다시 한번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티와 들보에 대한 신학적 해석을 추가해 드리자면 이 티라고 하는 것은 일반적인 죄를 의미하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니까 이는 마치 눈에 먼지가 들어가서 아픈 것처럼 순간 순간 의식이 되는 것으로, 예를 들면, 거짓말하는 죄나 도둑질하는 죄, 간음하는 죄 등 눈에 띄게 형식적으로 나타나는 것으로 우리가 말하는 일반적인 죄를 의미합니다. 그런가 하면 들보라고 하는 것은 종교적인 죄를 말합니다. 이는 너무 커서 생각도 나지 않고, 너무 오랫동안 젖어 왔기에 이제는 당연한 듯이 가리워져서 무의식 상태로 돌아가 버린 그러한 죄를 말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이점을 알아야 합니다. 죄가 적을 때에는 비판도 받습니다마는 죄가 아주 클 때에는 흔히들 담대하다고도 하고 때로는 영웅이라는 말까지 하면서 하나의 위대함으로 평가받기도 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을 통하여 말씀하시는 예수님의 의도는 아마도 이렇게 짐작이 되어집니다. 여기 들보라고 하는 것은 일반적으로 죄인 줄 모르는 죄이면서도 큰 죄요, 그리고 이 티라고 하는 것은 작은 것이면서도 눈에 들어가면 아프고 괴롭습니다. 그러나 들보에 대해서는 감각이나 의식이 없습니다. 따라서 아픈 것도 없기 마련이지요. 그러니 이 죄는 곧 교만이요, 불 신앙이며, 외식하며 다른 사람을 멸시하는 바리새인적인 죄를 말하는 것입니다. 너무도 오랫동안 죄에 젖어 있다 보니 이제는 엄청나게 큰 죄인데도 불구하고 그 죄에 대한 의식은 전혀 없는 가운데 죄인 줄도 모르고 오히려 다른 사람의 보잘것없는 티만 보며 열심히 비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자기 교만과 자기 우월감에 빠져서 그것이 얼마나 큰 죄인가를 깨닫지 못하고 있는 상태, 다시 말해 자기 눈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참으로 이것이 문제입니다.

    이와 같이 무의식 상태에까지 들어와 버린 죄! 이를 두고 예수님께서는 들보를 빼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빼어 버린 후에라야 밝히 보게 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이제 우리는 새로운 안목을 가져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안목 자체가 중생 되어야 하겠습니다.

    여러분! 여러분의 눈에는 무엇이 보이고 있습니까? 예수님처럼 꽃을 볼 때에도 하나님이 보이고 새를 보는 데에도 하나님이 보이며 풍랑이 일어나는 때에도 하나님의 손길이 보이고 있는 것이겠습니까? 아니면 눈앞에 보이는 전부가 불만스럽고 그리고 남의 죄만 보이는 것입니까? 그렇다면 그것은 분명 큰 병이요, 그렇게 병든 눈은 수술을 해야 하고 다시 고쳐야 합니다. 선지자 이사야가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라고 고백할 때에 스랍 천사 중 하나가 숯불을 가지고 와서는 이사야의 입을 지져 정하게 하듯이(사 6 : 5-7)이 눈도 아주 지져서 새롭게 해야 하겠습니다. 그렇게 하지 않고서는 그런 눈을 가지고 살기가 힘듭니다. 보면 볼수록 좋은 것도 많은데 하필이면 왜 자꾸 그런 것만 보이는가 말입니다. 그러니 여기에 문제가 있지 않습니까?

    이제 우리의 기도 제목이 하나님이여 나의 눈을 고쳐 주시옵소서! 하는 것이어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 저의 눈에는 어둡고 이상한 것들만 자꾸 보이는데 제발 이런 것이 보이지 않게 해주십시오 하는 그런 기도 말입니다. 미국에 계시는 어느 목사님 한 분이 중공에 선교를 하러 가면서 성경책을 가지고 가는데 자그마치 그 무게가 91kg이나 되는 200권의 성경책을 가지고 가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아시다시피 중공은 성경책이라면 단 한 권만 가지고 가다가 발각되어도 큰일이 나는 곳입니다. 그래서 이 목사님은 사흘 동안 금식을 하면서 무사히 들어갈 수 있도록, 검사하는 세관원의 눈을 잠깐만 멀게 해서 이것이 좀 보이지 않게 해 달라며 간절히 기도를 하고 출발을 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공항에 도착하여 그 자리에 서게 되었는데 "이게 뭐요?"하고 묻고서는 이 목사님이 이것, 저것이라며 대충 대답하니까 더 살펴보지도 않고 그냥 "가세요"하고 보내 주더라는 겁니다. 그래서 이 목사님은 아멘하고 들어가서 성경책 200권을 무사히 전달하고 돌아왔습니다. 그러자니 얼마나 긴장을 하셨든지 돌아와서는 몹시 앓았다며 저에게 상세한 이야기를 들려주시는 것을 보았습니다.

    눈이란 보기 위해 있는 것입니다 마는 보지 말아야 할 것은 보지 않아야 합니다. 그런데도 이상한 것이 곧잘 보이거든 아무래도 수상하다고 생각하셔야 합니다. 그래서 '눈'하면 제가 자주 말씀드리는 이야기가 하나 있습니다. 이제 교도서에 가보면 8범, 9범되는 절도범들이 들어와 있는데 그들에게 "한두 번 들어 왔으면 되었지 여덟 번, 아홉 번씩이나 왜 들어오느냐?"고 물어보면 그들의 하는 대답이 교도소에서 출감할 때에는 이제 다시는 도둑질하지 않으리라며 맹세하고 나가는데 이리 저리 돌아다니다 보면 남의 주머니에 있는 돈이 환하게 보인답니다. 뿐만 아니라 담장 너머 집안 깊숙이에 있는 것까지도 환하게 보인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그 병은 눈이 병이지요. 우리는 자신이 둔 것도 못 찾을 정도인데 다른 사람이 깊이 감추어 둔 것까지 찾아낸다니 이것은 아무래도 보통 사람은 아니란 말입니다.

    네 눈 속에서 들보를 빼어라! 네 눈을 수술하라! 네 눈이 먼저 깨끗해져서 밝히 본 다음에, 그리고 이야기하자는 것입니다. 이는 곧 무엇을 뜻하는 말씀이겠습니까? 이제는 진정 겸손과 사랑과 진실, 그리고 그리스도의 마음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그런 후에야 비로소 형제의 눈에 있는 티를 볼 수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제는 중생한 눈을 가지고 사랑으로 보고, 겸손과 진실로 보게 될 때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를 정확하게 볼 수가 있으며 나아가서는 그 티를 빼라는 권면도 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그 권면의 말도 받아들일 수가 있어서 둘 다 구원에 이르게 될 것입니다.

    이제 마지막으로 생각할 것은 너희가 남을 비판하면 비판하는 그 비판으로 너희가 비판을 받을 것이요, 너희가 남을 헤아리면 너희는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가 헤아림을 받을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이 말씀을 하나님 앞에서 엄숙히 받아들여야 합니다. 이제는 하나님 편에서 심판하시겠다는 말씀입니다. 내가 어느 누구를 비판할 것이 있습니까? 그 만큼 내가 비판을 받게 될 것입니다. 그와 똑같은 비판이 내게도 올 것이란 말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는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마 5 : 7). 따라서 내가 용서하면 용서를 받을 것이요, 사랑하면 사랑을 받을 것이며, 남을 불쌍히 여기면 나 또한 불쌍히 여김을 받게 될 것입니다. 이러한 신앙적 비판의 자세는 나와 그 서로를 하나님 앞에 밝히 세울 수가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형제"라고 하는 이 생각을 잊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결코 남이 아닌 형제를 보는 참사랑의 마음, 사랑의 눈에는 아마도 그 작은 티는 보이지를 않을 것입니다. 진정 그렇게 된다면 그 후에는 우리도 무엇이라고 말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티와 들보

    과장법이 사용되었습니다만 사람들의 일반적인 심리와 인간사회의 보편적인 단면을 날카롭게 지적한 말씀입니다.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느 티는 보고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마 7:3)

    티와 들보. 크기와 무게에서 비교불가 합니다. 그런데 우리 인간들의 마음 속을 자세하게 들여다보면 내 잘못과 죄는 덮고 변명합니다. 축소하며 합리화합니다. 그리고 상대방의 실수와 허물은 침소봉대합니다. 발본색원해야 한다고 울대에 힘을 줍니다. 반드시 척결해야 세상이 좋아질 것이라고 난리법석 댑니다.
     
    그럴까요?

    "소가 없으면 구유는 깨끗하려니와 소의 힘으로 얻는 것이 많으니라"(잠 14:4)

    "여호와께서 온갖 것을 그 쓰임에 적당하게 지으셨나니 악인도 악한 날에 적당하게 하셨느니라"(잠 16:4) 새번역은 "악인은 재앙의 날에 쓰일 것이다"고 번역했습니다.

    따지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겠지만, 믿고 아멘으로 받아들이며 하나님의 섭리에 맡기는 겸손이 범사에 훨씬 더 유익할 것입니다.

    내 눈의 들보를 깨달은 사람이라면 그 사람은 교양과 상식을 가진 사람입니다. 내 눈의 티를 먼저 보는 사람이라면그 사람은 분별력이 있는 사람이요, 지혜로운 사람이며, 경건하고 신령한 사람임에 틀림없습니다.

    열심은 좋은 것이로되, 열심이 지나치면 착각합니다. 사도 바울로 변화 되기 전, 바리새인 사울의 모습과 행동을 보면 교회를 진멸하려고 제자들에게 대하여 살기기 등등하여 핍박하고 투옥시키고 죽이는데 앞장섭니다.

    우리도 이데올로기 신앙에 붙들리면 똑같은 모양으로 전락하고 만다는 것을 인정해야 합니다. 열심이 광기로 매몰되면 이성을 상실하고 미친 짓을 찾아서 앞장섭니다.

    종교가 이데올로기에 편승하면 집단 광기를 발산하는 도구로 전락하기 십상입니다. 현실 세계에서 눈에 보이고 귀에 들리는 비참한 뉴스의 대부분은 종교와 정치가 제 기능을 마다하고 이데올로기로 기울 때 나타난 현상입니다. 비극입니다. 슬픈 일입니다. 정말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이 모독을 당하는 참담한 일입니다.(롬 2:24)

    다른 사람의 허물은 당연하게도 없을 수는 없습니다. 그러면 다른 사람의 티와 들보를 어떻게 볼 것이냐, 티는 예수의 피로 씻어 내면 좋습니다. 들보라면 예수의 보혈로 덮어서 보면 은혜입니다. 예수의 복음으로 변화된 눈과 심령으로 보면 불쌍히 여겨 용서할 수 있으리라.(엡 4:32)

    남의 눈의 티만 보는 사람은 남의 허물을 찾는 데 혈안이 된 사람이라면 주님께서는 그런 사람을 이렇게 부르십니다. 

    외식하는 자여! 위선자야!(마 7:5 새번역)

    주님의 말씀을 기준 삼고 자신을 성찰해 봅시다. 나는 어떤 사람입니까? 남의 티는 보고 자기의 들보는 깨닫지 못하고 있습니까? 자기 허물을 크게 볼 수 있는 사람이라면 그 사람은 경건한 사람이요 겸손한 사람입니다. 영안이 열린 사람이라 할 수 있습니다.

    남의 허물을 지적하려고 검지가 표적을 향하는 순간에 나머지 네 개의 손가락이 자신을 향합니다. 너무도 잘 아는 교훈입니다만 사실 가장 까먹기 쉬운 불편한 진실입니다.

    "여호와여 주께서 죄악을 지켜보실진대 주여 누가 서리이까 그러나 사유하심이 주께 있음은  주를 경외하게 하심이니이다"(시 130:3-4)

    "하나님께서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하나님이여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하지 아니하시리이다"(시 51:17)

    자기의 티를 보고, 자신의 들보를 깨닫고, 회개하고 돌이켜 은혜의 보좌로 나아오는 사람을 주님께서 멸시하지 아니하시고, 은혜와 긍휼로 관을 씌워 주시리라.(히 4:16, 행 3:19)



    ‘똥 묻은 개가 겨 묻은 개를 나무란다’와 같은 의미일까요? 아닙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아니 성경의 모든 말씀은 성경 전체의 메시지를 담고 있습니다.

    티와 들보의 비유도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거룩하신 소원을 모두 함축하고 있습니다. 판단의 문제, 즉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를 먹은 우리의 문제를 지적하시는 동시에 그 해결을 제시하고 계신 비유인 것입니다. 즉, 구원에 대한 비유인 것이지요. 지나친 비약이 아니냐고요? 아래 사도 바울의 말씀을 먼저 보시지요.

    “신령한 자는 모든 것을 판단하나 자기는 아무에게도 판단을 받지 아니하느니라.”(고전 2:15)

    모든 것을 판단하는, 즉 눈에서 들보가 빠진 자를 사도 바울이 ‘신령한 자’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예수님의 이 비유와 사도 바울의 말씀을 합쳐서 보면 이런 뜻이 됩니다.

    “너희 모든 인간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를 먹음으로써 각자 자기의 선악 판단의 기준을 갖게 되었다. 이 선악 판단은 하나님의 선악 판단과 상치되는 것으로서 각자 자기의 생존과 번영을 위해하는 판단에 불과하며 따라서 그런 기준으로 남을 판단하는 것은 참으로 무의미한 일일 뿐더러 결국은 악한 판단이 되고 만다. 따라서 너희는 판단을 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그러나 너희가 신령한 자가 되어서 자기의 선악 판단의 기준이 제거되고 하나님의 선악 판단의 기준을 갖게 되면 비로소 정확한 판단을 할 자격을 갖게 된다. 즉 신령한 자는 그 판단의 동기가 자기의 유익에 있지 않고 이웃의 영혼 구원에 있기 때문에 그가 하는 모든 판단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 된다. 그때에는 적극적으로 판단하라.”

    육에 속한 크리스천들이 진리를 외치며 남을 판단하고 정죄하며 결국은 자기 자신이나 자기 공동체의 생존과 번영을 추구하는 이기적인 모습을 많이 보게 됩니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지요.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마 16:24)

    진리를 외치고 사람의 생명을 살리는, 예수님이 하신 그 일을 우리가 하기 위해서 첫 번째 ‘자기를 부인’해야 합니다. 그 핵심이 바로 자기의 선악판단의 기준을 포기하는 것입니다. (자기의 탐심을 버린다는 것은 오히려 부수적인 일입니다. 육에 속한 크리스천이 자기의 탐심을 버리고 이웃을 위해 살겠다고 열심을 내면 오히려 큰 일이 생기게 되지요.)

    우리가 모두 영에 속한 크리스천, 신령한 자가 되기를 소원합니다. 그때에야 우리가 하나님의 동역자로서 생명을 살리는 일을 할 준비가 되는 것입니다. 어떻게 해야 우리가 실제로 신령한 자가 될 수 있을까요? 앞으로 이어질 예수님의 다양한 비유에서 하나씩 하나씩 살펴보기로 합니다.

    티와 들보 - 마틴 로이드 존스 


    본문에서 주님은 판단에 근거한 평가를 해서는 안된다고 말씀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 <역자 주(註):  주님께서는 사람들을 평가하는 것을 피하거나, 모든 형태의 판단을 금하거나,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분별력이나 지혜를 사용하지 말라고 말씀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은 믿는이들에게 판단하고 분별하고 구별할 것을 명령합니다(고전 6:1-8; 5:9-13; 14:29; 고후 6:14; 딤전 3:1-13; 살전 5:14). 세상은 거짓 그리스도인들과 심지어 사탄의 사역자들로 가득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반드시 깨어있어야 하고 "영들을 시험해야"합니다(요일 4:1)>

    주님은 정죄 문제에 관하여 큰 관심을 갖고 계십니다. 
    사람들은 흔히 남을 정죄하는 이 성향을 피하려 애쓰면서 반대편 극단으로 돌아가 다시 잘못된 입장을 취합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그와 같이 결코 쉬운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항상 균형 잡힌 삶의 하나입니다. 
    믿음으로 걷는 것은 칼날 위를 걷는 것을 의미한다는 견해에 대하여 많은 말들이 있을 수 있습니다. 
    여러분은 이편이나 저편으로 넘어질 수 있습니다. 
    여러분은 이편이나 저편의 오류를 피하여 계속해서 진리의 중심을 붙들어야만 합니다. 
    그리하여 이것이 분별하거나 판단하는 것을 거부하는 것을 의미하지 않음을 알리면서, 무엇보다도 먼저 이것이 남을 정죄하는 무서운 위험과 최종적인 의미에서 심판을 선언하는 무서운 위험을 경고하고 있음을 알려야 하겠습니다. 

    이에 대한 예증으로 가장 좋은 방법은 바리새인들에 대하여 고찰하는 것입니다. 
    이 신상설교에서 우리 주님은 바리새인들을 내내 마음에 두셨습니다. 
    주님은 그의 백성들에게 율법관과 생활 방식에서 바리새인들처럼 되지 않도록 매우 조심할 것을 말씀하고 계십니다. 
    바리새인들은 율법을 잘못 해석했습니다. 
    그들은 구제할 때 자랑하며 과시했습니다. 
    그들은 길모퉁이에서 기도하는 것과 성구함을 넓히는 것에서 과시적(誇示的)이었습니다. 
    그리고 자기들이 금식 중임을 널리 알렸습니다. 
    동시에, 그들은 이 세상사에 관한 견해에 있어서 금전만능주의적이고 유물론적이었습니다. 
    주님은 이 특별한 점에서도 그들을 마음에 두셨습니다. 여러분은 주님께서 누가복음 18:9-14에서 보여주신 성전에 기도하러 올라간 바리새인과 세리의 기도하는 장면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바리새인은 "하나님이시여, 저는 다른 사람들과... 같지 아니하고 더욱이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라고 말했습니다. 다른 사람들을 판단하고 정죄하는 바리새인들의 태도는 크게 잘못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신약성경은 이 태도가 바리새인들에게만 국한된 것이 아님을 애써 분명히 밝히고 있습니다. 이 태도는 초대교회를 끊임없이 괴롭혔습니다. 그리고 그 이후로도 하나님의 교회를 계속하여 괴롭혀 왔습니다. 오늘날 하나님의 교회를 괴롭히는 것도 이것입니다. 우리가 이 주제에 접근할 때 이 점에 관한 주님의 말씀을 기억해야 하겠습니다. "너희 중에 죄없는 자가 먼저 돌을 던지라"(요 8:7). 산상설교 중에서 우리가 연구하고 있는 이 말씀보다 더 우리에게 정죄감을 주는 것은 없다고 생각합니다. 이 점에 있어서 우리 모두는 얼마나 죄가 많은지요! 이것은 우리의 모든 삶을 망치고 우리로부터 행복을 빼앗아 가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교회를 얼마나 황폐케 했으며 지금도 황폐케 하고 있는지요! 이 말씀은 우리 각자에게 대한 말씀입니다. 이 주제는 고통스럽지만 매우 필요한 것입니다. 이 설교가 우리에게 와서 말씀하지만, 우리 주님께서 이곳에서 상기시켜 주듯이, 우리는 우리의 책임으로 이것을 무시합니다. 비록 이 주제가 고통스럽겠지만 너무나 중요하므로 필히 계속해서 더 분석해야 할 것입니다. 상처를 치료하는 방법은 단지 상처를 무시하거나 또는 상처 부위만을 피상적으로 치료해서는 안됩니다. 올바른 치료법은 그 상처를 탐침(probe)으로 조사하는 것입니다. 이 일은 고통스럽지만, 반드시 그렇게 해야 합니다. 여러분이 깨끗해지고 정결해지고 건강해지려면 반드시 탐침을 대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 깨끗해지기 위하여 이 상처를, 혼 속에 썩고 있는 이 창(瘡)을 탐침으로 조사합시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경고하고 계시는 이 위험은 어떤 위험입니까? 우선 이 영은 어떤 점에서 자신을 나타내는 영의 일종이라 하겠습니다. 정죄하는 이 영은 어떤 영입니까? 이 영은 스스로 의롭다하는 영입니다. 그 배후에는 항상 자아(自我)가 도사리고 있습니다. 이 영은 항상 자기의(自己義)의 나타냄이요, 우월감이요, 다른 사람들은 틀리고 우리는 모두 옳다는 감정입니다. 그리고 이 영은 다른 사람을 비난하게 만듭니다. 이 영은 항상 경멸하는 태도로 자신을 표현하려는 영입니다. 이러한 것에 곁들여서 이 영은 다른 사람들을 멸시하며 경멸적으로 대하는 성향이 있습니다. 저는 지금 바리새인들을 말하고 있을 뿐 아니라 바리새인의 영을 갖고 있는 모든 사람들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 영의 핵심부는 혹평적 성향인 것 같습니다. 비평적인 것과 혹평적인 것 사이에는 매우 큰 차이가 있습니다. 참된 비평은 뛰어난 것입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참된 비평은 거의 없습니다. 문학이나 미술이나 음악이나 기타 어떠한 것이든지 참된 비평은 인간 정신의 최고의 활동 중 하나입니다. 참된 의미에서의 비평은 결코 파괴적인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건설적입니다. 그것은 감상입니다. 비평을 하는 것과 혹평적인 것 사이에는 매우 큰 차이가 있습니다. 주님께서 여기서 사용하신 용어의 의미에서 판단하는 죄를 범하는 사람은 바로 혹평적인 사람으로서, 비평을 위한 비평을 기뻐하며 그것을 즐기는 사람을 뜻합니다. 더 나아가 이러한 사람은 결점을 발견하기를 기대하고, 실제로 결점을 발견하기를 바라며 비평을 요청 받은 일에 접근하는 사람임을 분명히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그리스도인이 판단하지 말아야 하는 첫 번째 이유는 주님께로부터 심판을 받지 않기 위함입니다. 
    우리는 주님의 모습 그대로 그분을 보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그분을 만날 것이며, 심판이 있을 것입니다. 요한이 표현한대로 우리가 그 때에 부끄럽지 않기를 원한다면, 지금 주의합시다(요일 2:28). 만일 우리가 심판날에 담대함을 얻고자 한다면, 반드시 이생에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에 주의해야 합니다. 우리가 다른 사람을 판단하면 우리가 판단하는 바로 그 판단으로 판단을 받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반드시 잊지 말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비록 우리가 그리스도인이며,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얻었으며, 구원의 확신을 가지고 있으며, 하늘에 가게 될 것을 알고 있을지라도, 우리는 여전히 이곳 이생에서, 그리고 이생 후에 이 심판을 받아야 합니다. 이것이 명백한 성경의 가르침이요, 우리 주님께서 산상설교의 이 대목에서 첫 번째 말씀으로 요약하신 것입니다. "너희는 판단받지 아니하도록 판단하지 말라." 이 말씀은 단순히 '다른 사람들이 너희에게 불친절한 말을 하는 것을 원치 않는다면 너희도 그들에 대하여 절대로 불친절한 말을 해서는 안된다'라는 의미가 아닙니다. 물론 그것은 옳으며 분명한 사실입니다. 그러나 훨씬 중요한 것은 여러분이 자신을 심판에 노출시키고 있으며, 장차 이러한 일들에 대해 답변을 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여러분이 구원을 잃지는 않지만 분명히 무언가는 잃게 될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 주님께서 제시하신 바 판단하지 말아야 하는 두 번째 이유로 우리를 인도합니다. 그 이유는 두 번째 절에 있습니다. "너희가 판단하는 그 판단으로 너희도 판단을 받을 것이요, 너희가 재는 그 척도로 너희가 도로 재어질 것이니라." 우리는 이것을 한 원리의 형태로 표현할 수 있습니다. 판단하지 말아야 하는 두 번째 이유는, 우리가 판단을 하는 것이 우리 자신에 대한 판단을 낳을 뿐 아니라, 심지어 우리 자신에 대한 판단의 표준을 정하기 때문입니다. "너희가 재는 그 척도로 너희가 도로 재어질 것이니라". 다시 한 번 말씀 드리거니와, 이것은 단지 다른 사람들이 우리에게 해주기를 바라는 것만을 가리키지 않습니다. 사람은 항상 '앙갚음을 당한다'고들 말합니다. 이는 더할 나위 없는 사실입니다. 다른 사람들을 면밀하게 살피고 조사하여 그들 속에 있는 사소한 결함에 대해 말했던 사람들이 거꾸로 그들에 의해 자신들이 판단을 받을 때에 흔히 크게 놀랍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받는 판단을 이해할 수 없지만 자신들의 기준과 자신들의 척도로 판단을 받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진술을 여기서 그칠 수 없습니다. 우리는 필히 더 나아가야 합니다. 왜냐하면 성경이 그러하기 때문입니다. 우리 주님께서 실지로 선언하시는 바는 하나님께서 친히, 제가 앞에서 설명해 온 이 판단으로, 우리 자신의 표준에 따라 우리를 판단하실 것이라는 점입니다. 이 해석에 대한 몇 가지 성경의 권위를 살펴봅시다. 누가복음 12장에 기록된 주님의 말씀을 봅시다. 거기서 주님은 "알지 못하고 채찍 맞을 일을 한 사람은 적게 맞으리라. 누구든지 많이 받은 자에게는 많이 요구할 것이요, 사람들이 많이 맡긴 자에게는 그들이 더 많이 달라고 하리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눅 12:48). 다음으로 로마서 2:1의 말씀을 보십시오. "그러므로 오 사람아, 판단하는 네가 누구이든지 변명하지 못할 것은, 다른 사람을 판단하는 것으로 네 스스로를 정죄함이니, 이는 판단하는 네가 같은 일을 행함이니라." 여기서 바울은 '다른 사람을 판단하는 것으로 너는 무엇이 옳은 것인지 네가 알고 있음을 입증하고 있다. 그러므로 네가 만일 옳은 것을 행하지 않는다면 네 자신을 정죄하고 있는 것이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아마도 이것에 대한 가장 명백한 말씀은 야고보서 3:1에 주어졌을 것입니다. 이 구절은 매우 중요한 구절이지만, 야고보가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은 의롭다함을 가르치지 않는다고 생각하며 야고보서를 좋아하지 않기 때문에 자주 무시하는 구절입니다. 이 구절은 야고보가 이 특정한 문제에 관해 어떻게 말씀하는지를 보여줍니다. "내 형제들아, 많이 선생이 되지 말지니, 우리가 더 큰 정죄를 받을 줄 앎이라". 달리 말하면, 만일 여러분이 권위자인체 한다면, 만일 여러분이 선생이 된다면, 그래서 여러분이 선생으로 권위자로 행동한다면, 여러분은 여러분 자신의 권위에 의해 판단을 받을 것입니다. 여러분이 주장하는 바로 그 주장에 의하여 여러분은 판단을 받을 것입니다. 여러분은 자신을 권위자로 자청하십니까? 좋습니다. 그것이 여러분 자신의 판단에 따라 여러분에게 적용될 바로 그 표준이 될 것입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지금 우리가 고찰하고 있는 구절에 분명하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판단받지 아니하도록 판단하지 말라. 너희가 판단하는 그 판단으로 너희도 판단을 받을 것이요, 너희가 재는 그 척도로 너희가 도로 재어질 것이니라." 이 말씀은 성경 전체에서 가장 놀라운 진술의 하나입니다. 내가 성경에 대해 뛰어난 지식을 갖고 있다고 주장합니까? 만약 그렇게 주장한다면 나는 내가 주장하는 그 지식의 관점에서 판단을 받을 것입니다. '나는 이 일들에 관하여 실지로 잘 알고 있는 종이다'라고 주장합니까? 그렇다면 내가 매를 많이 맞는다고 해서 결코 놀라서는 안되겠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자신을 어떻게 표현하는가에 매우 조심해야 합니다. 만일 우리가 다른 사람을 판단하는 일에  권위자로 자처한다면, 바로 그 표준에 따라 판단을 받을 경우 우리는 불평을 할 아무런 권리가 없습니다. 그것은 지극히 공평하고, 지극히 정당한 것입니다. 우리는 불평할 어떠한 근거도 갖고 있지 않습니다. 우리는 이 지식을 갖고 있다고 주장합니다. 만일 우리가 이 지식을 갖고 있다면, 필히 이 지식에 맞는 삶을 삶으로 이 지식을 보여줘야 합니다. 내가 주장한 그 주장에 의해 나 자신이 판단을 받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만일 내가 다른 사람들과 그들의 삶을 유심히 살피는 일에 용의주도하다면, 바로 그 표준이 내게로 돌아올 것이며, 나는 전혀 불평할 근거가 없는 것입니다. 만일 내가 불평한다면 내게 이런 반론이 주어질 것입니다. '너는 그것을 알고 있었다. 너는 다른 사람들에 대하여 그것을 실행할 수 있었다. 그런데 자신의 경우에 대해서는 왜 실행하지 않느냐?'라고 말입니다. 이것은 매우 놀랍고 두려운 생각입니다. 내가 알기로 다른 사람들을 정죄하는 이 죄악스러운 습관으로부터, 그리고 그같이 하는 것을 즐거워하는 더럽고 추악한 영으로부터 우리를 지켜주는 것은 없는 것 같습니다. 

    이것은 우리를 주님께서 주시는 마지막 이유로 인도합니다. 주님께서는 이것을 3∼5 절에서 말씀하십니다. "너는 어찌하여 네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면서,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생각하지 못하느냐? 보라, 너 자신의 눈 속에 들보가 있는데도 어찌 형제에게 말하기를, 나로 하여금 네 눈에서 티를 빼내게 하라, 하겠느냐? 너 위선자여, 먼저 네 눈에서 들보를 빼내어 던져 버리라. 그래야 네가 밝히 보고 형제의 눈에서 티를 빼내어 던져 버리리라." 이같은 풍자가 일찍이 어디에 있었습니까? 이보다 더 완전한 반어법의 실예가 일찍이 어디에 있었습니까? 얼마나 값진 것인지요. 이같은 방식의 논증을 많은 원리의 형태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우리가 다른 사람을 판단하지 말아야 하는 세 번째 이유로 우리가 판단할 능력이 없다고 가르치십니다. 우리는 판단을 할 수 없습니다. 올바르게 판단할 수 없기 때문에 결코 판단을 시도해서는 안됩니다. 주님은 우리의 영이 이러하기 때문에 판단할 자격이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우리 자신이 판단을 받을 것이고, 판단의 표준을 우리가 결정한다는 사실을 필히 기억해야 할 뿐 아니라, 더 나아가 주님은 '잠깐 멈추어라, 너희는 판단할 능력이 없으므로 판단할 수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우리 주님은 이것을 이렇게 증명하십니다. 주님은 우선 우리가 의나 참된 판단에 전혀  관심을 두고 있지 않음을 지적하십니다. 왜냐하면 만일 우리가 관심을 두었다면, 그것을 우리 안에서 처리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실지로 진리와 의에 관심을 두고 있으며 우리의 유일한 관심사라고 자신을 설득하기를 좋아합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들에게 불공평하기를 원치 않으며 비판하기를 원치 않으며, 오직 진리에 관심을 두고 있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주님은 사실상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만일 너희가 진실로 진리에 관심을 두었다면 너희 자신을 판단하고자 했을 것이다. 그러나 너희는 자신을 판단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너희의 관심은 실지로 진리에 있지 않다"고 말입니다. 이것은 공평한 논증입니다. 만일 어떤 사람이 자신의 유일한 관심사가 의와 진리에 있으며 인신 공격에는 아무런 관심이 없다고 주장한다면, 그는 다른 사람들에 대해서 비판적인 것처럼 자기 자신에 대해서도 비판적일 것입니다. 참으로 위대한 예술가는 항상 자신에 대하여 가장 가혹한 비평가입니다. 그것이 어떠한 직업인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노래이든, 연극이든, 그림이든, 기타 어떤 것이든, 참으로 위대한 예술가와 참된 비평가는 다른 사람들의 작품에 대한 것만큼, 어쩌면 그 이상으로, 자기 자신에 대해 비판적입니다. 왜냐하면 그는 객관적 표준을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께서는 "너희는 객관적 표준을 갖고 있지 않다. 너희는 진리와 의에 관심이 없다. 그렇지 않다면 항상 그랬듯이 너희 자신은 눈감아주고 다른 사람들만 비판하는 일은 결코 없었을 것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더 나아가 주님께서는 그러한 사람들이 이같은 원리에는 관심이 없고 단지 사람들에만 관심을 갖고 있음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계십니다. 이미 살펴본 바와 같이 혹평의 영은 원리보다는 인신 공격에 관심을 갖는 영입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그것은 우리 중 많은 사람들에게 문제거리입니다. 우리는 실지로 특정한 주제나 원리가 아니라 우리가 비판하고 있는 사람에게만 관심을 갖고 있습니다. 우리가 실제로 원하는 것은 그 사람 안에 있는 악을 제거하기보다는 그 사람을 정죄하는 것입니다. 당연히 혹평의 영은 우리로 참된 판단을 할 수 없게 합니다. 만약 편견이 있다면, 만약 사적인 감정과 개인 의사가 있다면,  우리는 더 이상 참된 심문관이 아닙니다. 율법조차도 이것을 인정하고 있습니다. 배심원중 한 사람과 재판받고 있는 사람이 어떤 관련이 있다는 사실이 입증되면 그 배심원은 자격을 박탈당합니다. 배심원에게 요구되는 것은 공평입니다. 절대로 편견이 있어서는 안됩니다. 절대로 사적인 것이 있어서는 안됩니다. 반드시 편파적이지 않은 객관적인 재판이어야 합니다. 바른 재판이 되려면 사전에 반드시 사적인 요소가 완전히 제거되어야 합니다. 이것을 다른 사람들을 판단하는 일에 적용할 때, 우리는 우리가 개인이나 인신 공격에 너무나 관심을 갖기 때문에 전혀 판단할 능력이 없다고 말씀하시는 주님께 동의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우리의 판단에는 이처럼 숨은 동기가 너무나 잦습니다. 우리는 그 사람과 그의 행동을 구별하는데 너무나 자주 실패합니다. 

    주님의 분석을 따라가 보기로 합시다. 주님의 다음 논증은 4절에 있습니다. "보라, 너 자신의 눈 속에 들보가 있는데도 어찌 형제에게 말하기를, 나로 하여금 네 눈에서 티를 빼내게 하라, 하겠느냐?" 이 말씀은 최고의 풍자입니다. 주님은 우리 자신의 상태가 다른 사람들을 돕는데 전혀 무능하다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사람들과 그들의 허물에 큰 관심을 갖는 체하고 그들의 유익에만 관심을 두고 있다는 인상을 주려고 애씁니다. 우리는 그들 속에 있는 이 사소한 결점으로 괴로워하며 이 티를 제거하고 싶어한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께서는 "이 티를 제거하는 일이 너무 섬세한 과정이기 때문에 너희가 할 수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여러분의 눈 속에 있는 이 들보가 여러분을 그렇게 할 수 없게 만듭니다. 

    이것을 완벽하게 설명하는 매우 통렬한 비평을 읽은 일이 있습니다. 그 비평에는 눈먼 사람이 다른 눈먼 사람을 인도하려고 애쓰는 것이 매우 우스꽝스런 일이지만 그보다 훨씬 더 우스꽝스러운 일은 눈먼 안과의사라고 쓰여있습니다. 눈먼 안과의사가 다른 사람의 눈에서 티를 빼내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눈먼 사람이 다른 사람을 돕는 일에 아무 쓸모가 없다면 눈먼 안과의사는 얼마나 더 쓸모가 없겠습니까? 이것이 바로 본문에서 주님이 말씀하시는 바입니다. 만일 여러분이 관심을 가지는 체하는 사람의 민감한 눈에서 작은 알갱이의 티를 빼낼 수 있을 만큼 분명히 볼 수 있기를 원한다면, 여러분 자신의 눈이 완전히 맑은지를 확인하십시오. 여러분의 눈 속에 있는 들보에 의해 눈이 멀어 있는 한 여러분은 다른 사람을 도울 수 없습니다.

    끝으로, 주님은 실제로 우리를 위선자라고 정죄하고 계십니다. "너 위선자여, 먼저 네 눈에서 들보를 빼내어 던져 버리라. 그래야 네가 밝히 보고 형제의 눈에서 티를 빼내어 던져 버리리라". 얼마나 정확한 말씀입니까? 문제의 진상은 우리가 다른 사람을 돕는 일에 실제로는 관심을 갖고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단지 정죄하는 데에만 관심을 갖고 있습니다. 우리는 큰 관심을 갖고 있는 척합니다. 우리는 이 결점을 발견하는데 매우 고통스러운 척합니다. 그러나 실제로 주님께서 이미 보여주신 바와 같이 (이것은 무서운 부분입니다) 사실은 그 결점을 발견하는 것을 기뻐합니다. 그것은 위선입니다. 어떤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자칭 친구인 것처럼 찾아가서는 '이런 결점이 당신 속에 있다니, 매우 부끄럽군요'라고 말합니다. 이같은 행동에 의해 흔히 나타나는 악의와, 이러한 사람이 흔히 즐기는 쾌감은 어떠한 것인지요! 그러나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다른 사람들을 진정으로 돕고 싶다면, 너희가 이 문제에 순수하며 참되다면, 너희 자신에게 해야 할 일들이 있다. 첫째 - 우리는 반드시 이것을 주의해야 합니다 - 먼저 네 눈에서 들보를 빼내어 던져버려라. 그래야 네가 밝히 보고 형제의 눈에서 티를 빼내어 던져버리리라."

    이것을 이같이 해석할 수도 있습니다. 만일 여러분이 진실로 다른 사람을 돕고 싶다면, 그리고 그들에게서 결점과 허물과 연약함과 약점을 제거하고 싶다면, 먼저 여러분의 영과 여러분의 태도 전체가 잘못되었음을 인식하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속에 있는 판단과 혹평과 비판의 영은 다른 사람의 눈에 있는 미세한 티와 대조해 볼 때 실지로는 들보와 같습니다. 주님은 사실상 이렇게 말씀하시고 계십니다. "너희의 이 판단하는 영보다 더 무서운 형태의 죄는 없다는 것을 알아라. 그것은 들보와 같다. 다른 사람이 불륜과 부도덕과 정욕의 죄에 빠지거나, 여기 저기에서  작은 과실을 저지를 수도 있다. 그러나 너희 속에 있는 마치 들보와 같은 이 영과 비교할 때, 그것은 단지 눈에 있는 작은 티일 뿐이다. 너희 자신의 영에서부터 시작하라." 주님께서 바꾸어서 이같이 말씀하고 계십니다. "너희 자신을 온전히 정직하게 직시하라. 자신에 관한 진실을 인정하라!" 우리가 이 모든 일을 어떻게 실제적으로 행해야 합니까?  매일 고린도 전서 13장을 읽으십시오, 매일 우리 주님의 말씀을 읽으십시오. 다른 사람들에 대한 여러분의 태도를 살피십시오, 그리고 여러분 자신의 진실에 대하여 직시하십시오. 다른 사람들에 관하여 한 말을 앉아서 분석해 보십시오. 그리고 당신이 의미하는 바가 실지로 무엇인가를 자문해 보십시오. 이것은 매우 고통스럽고 괴로운 과정입니다. 그러나 우리 자신과 우리의 판단과 우리의 선언을 정직하고 참되게 살핀다면, 우리는 눈에서 들보를 빼내는 중에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함으로 우리는 충분히 겸손해져서 비판과 혹평의 영에서 완전히 해방될 것입니다. 

    얼마나 놀라운 논리의 표본입니까! 사람이 진정 참되게 자신의 모습을 보았다면 결코 누구도 잘못된 방법으로 남을 판단하지 않습니다. 그는 자신을 정죄하고 자기 손을 씻고 자기를 깨끗케 하고자 애쓰는 일에 모든 시간을 사용합니다. 비평과 혹평의 영을 제거하는 한 가지 길이 있는데, 그것은 자신을 판단하고 정죄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를 먼지와 같이 낮추어, 그 결과 우리의 눈에서 들보를 제거하며, 필연적으로 우리는 다른 사람을 도우며 그의 눈 속에 있는 작은 티를 빼낼 수 있는 적합한 상태가 될 것입니다. 

    눈에서 티를 빼내는 과정은 매우 어려운 수술입니다. 눈보다 더 민감한 기관은 없습니다. 손가락이 눈에 닿자마자 눈은 닫힙니다. 눈은 너무나 예민합니다. 눈을 치료하는데 무엇보다 먼저 요구되는 것은 동정과 인내와 침착과 냉정입니다. 이것들이 요구됨은 수술의 섬세함 때문입니다. 이 모든 것을 영적 영역으로 옮기십시오. 여러분은 지금 혼을 다루려고 합니다. 여러분은 사람 속의 가장 민감한 부분을 손대려고 합니다. 어떻게 해야 이 작은 티를 빼낼 수 있을까요? 이 점에서 중요한 것은 오직 한 가지 뿐입니다. 그것은 여러분이 겸손해야 하고, 동정심이 있어야 하며, 자신의 죄와 자신의 가치 없음을 깊이 인식하여, 그 결과 다른 사람 속에서 그것을 발견할 때 정죄하기는 커녕 슬피 울고 싶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동정과 연민으로 가득합니다. 여러분은 진정으로 돕기를 원합니다. 여러분은 자신 안에 있는 것을 제거하는 것을 심히 기뻐하여 그도 동일한 기쁨과 즐거움을 갖기를 원합니다. 여러분이 맑은 시력을 가진 후에야 비로소 영적 안과의사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자신을 직시하고, 이 들보를 제거하며, 우리 자신을 판단하고 정죄하며, 겸손하고 이해하며 동정적이고 관대하며 사랑이 넘치는 이러한 상태에 있을 때, 비로소 우리는 성경이 말씀하는 바, 다른 이에게"사랑 안에서  진리를 말할 수" 있으며, 그것에 의해 그를 도울 수 있습니다(엡 4:15). 이 일은 삶에서 가장 어려운 일 중에 하나입니다. 우리가 도달해야 할 마지막 일들 중에 하나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긍휼을 베푸시고 계십니다. 그러나 감사하옵게도, "사랑 안에서 진리를 말할 수 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이 여러분에게 이것을 말할 때, 여러분은 그들이 진실을 말하고 있다는 것을 알뿐 아니라, 그 일에 대하여 감사합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은 동일한 진리를 말하지만, 여러분으로 하여금 즉시 자신을 방어하도록 이끌고, 그렇게 하여 다른 사람들을 미워하도록 이끄는 태도로 말합니다. 그 까닭은 그들이 "사랑 안에서 진리를 말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다시 야고보서를 인용합니다.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각 사람마다 듣기는 속히 하고, 말하기는 더디 하며, 성내기도 더디 할지니라."(약 1:19).

      이상 말씀드린 세 가지 이유로 "판단하지 마십시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긍휼을 베푸시고 계십니다. 우리가 갈보리와 그리스도의 흘리신 피에 비추어서 이러한 진리를 대할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즐거운 일입니까. 그러나 만일 여러분이 이생에서 징계를 피하고 싶다면, 그리고 - 이것이 성경의 말씀이거니와 - 오는 세상에서 손실의 괴로움을 피하고 싶다면, 먼저 여러분 자신을 판단하는 것 외에는 판단하지 마십시오













  • 10월 18일(토) 마태복음 7-8장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티와 들보(7:3)

    어찌하여 형제의 눈속에 있는 티는 보고 네 눈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Why do you look at the speck of sawdust in your brother's eye and pay no attention to the plank in your own eye? 

    티와 들보(the speck and the plank)
    KJV / the mote  & the beam
    NASB / the speck & the log

    티는 작은 것이고 들보는 큰 것을 의미합니다.

    '티'는 작은 '티끌'이나 '나뭇가지'를, '들보'는 '건축 구조물'이나 '큰 들보'를 뜻하며, 종교적으로는 '티'가 남의 작은 허물을, '들보'가 비판하는 자신의 큰 죄를 상징하는 비유로 사용
    됩니다. 이 비유는 예수의 산상수훈에 나오는 말로, 남을 비판하기 전에 자신의 큰 허물을 먼저 성찰하라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티'와 '들보'의 의미
    • 건축 용어:
      • : 짚이나 겨의 작은 조각을 의미합니다.
      • 들보: 건축 구조에서 기둥과 기둥 사이에 놓는 굵은 나무나 보를 뜻하며, 건축물의 하중을 지탱하는 역할을 합니다.
    • 종교적 의미 (성경 비유):
      •  : 형제의 눈에 있는 '작은 티'로, 다른 사람의 작은 잘못이나 허물을 비유합니다.
      • 들보 : 자신의 눈에 있는 '큰 들보'로, 남을 비판하는 자신에게 있는 더 큰 죄나 잘못을 의미합니다. 

    '티와 들보' 비유의 의미
    • 비판의 역설 : 이 비유는 남을 비판하는 자신의 모습이 더 크고 심각한 허물을 가진 것임에도 불구하고, 타인의 작은 허물만을 지적하는 위선적인 행동임을 경고합니다.
    • 자기 성찰의 중요성 : 남을 돕기 전에, 자신의 눈 속에 있는 '들보'를 먼저 제거해야만(성찰해야만), 비로소 다른 사람의 '티'를 제대로 보고 도와줄 수 있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 적용 : 이 비유는 특히 남을 판단하기 좋아하는 영적 지도자들을 염두에 두고 한 말씀이지만, 모든 사람에게 적용됩니다



    형제의 눈속에 있는 티는 보고 네 눈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 티는 작은 것이고 들보는 큰 것이다. 남을 아주 정죄하는 그것은 벌써 큰 죄이다. 그 뿐 아니라 그가 남을 아주 정죄하기 좋아하는 것을 봄녀 그의 생활이면에도 여러가지 다른 죄과들이 있을 것이다. 우리는 어떤 사업을 위하여 인물을 비판하여 혹은 채용 혹은 퇴직시킬 수 있다. 그러나 그를 아주 정죄하는 것은 죄이다.

    티(카르포스. karphŏs) κάρφος

    1. 티.  2. 깨진 조각.  3. 마 7:3-5
    Pronunciation [ karphŏs ]

    Etymology / κάρφω ‘시들다’에서 유래
    •  1. 티, 깨진 조각, 마7:3-5, 눅6:41,42.
    • 관련 성경 / 티(마 7:4, 눅 6:41,42).
    δοκός, οῦ, ἡ Storng number1385

    1. 대들보.  2. 마 7:3-5.  3. 눅 6:41,42.
    Pronunciation [ dŏkŏs ]  
    Etymology  /  1209에서 유래
    • 1. 대들보, 마7:3-5, 눅6:41,42.
    • 관련 성경  / 들보(마 7:3, 눅 6:41, 42).




    역설의 진리와 신앙(마태복음 5:3-12)

    세상에 살다 보면 모순되는 것 같지만 역설의 진리가 많이 있습니다. 예를 들면 “소리없는 아우성” “죽어도 아니 눈물 흘리오리다”(소월의 시) “지는 것이 이기는 것이다.”라고 말한다면 역설입니다. 지는 것은 지는 것이고 이기는 것은 이기는 것이지 어떻게 지는 것이 이기는 것입니까? 그러나 논리는 모순되는 것 같아도 그 내용은 진리입니다. 이것이 역설입니다. 역설은 궤변과 다릅니다. 궤변은 논리도 모순이고 내용도 참이 아닙니다.

    미국의 켄트 케이스라는 사람이 역설적 진리 십계명을 만들어 발표한 적이 있습니다. 
    그는 주장하기를 “세상은 미쳐있다 이런 미친 세상에서 올바르게 살아가려면 역설적 진리를 깨닫고 살아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이나 성경의 교훈을 보면 이와 같은 역설적인 진리들이 많이 발견됩니다. 
    이것은 케이스의 말처럼 “미친 세상을 살아가는 하나님의 백성들의 생활 지혜”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세상은 무언가 잘못되어 있고 그 속에서 사는 그리스도인의 삶은 손해를 보고 공격을 당할 수 있습니다. 오해를 받고 살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개의치 말고 진리의 길을 묵묵히 걸어가야 합니다.

    예수님이 가르치신 교훈 중에 대표적인 역설적 진리가 두 가지 있습니다. 하나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그 길은 좁고 찾는 이가 적지만 생명의 길이다” 또 “남이 너를 대접해 주기를 바라는 대로 먼저 남을 대접하라”는 것입니다. 이런 교훈들은 세상 사람들이 추구하는 삶과는 정반대의 일입니다.

    기독교인들이 주님의 가르침대로 살면 이 세상에서 살기 힘들고 손해만 보는 일들이 생길 것이 너무나 뻔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살아야 합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뜻이기 때문이고 그것이 진리의 길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결국 진리는 승리하고 하나님의 뜻은 이루어 질 것입니다.

    예수님은 요12:24-26에서 세 가지 역설의 진리를 말씀하십니다. 이것은 십자가 죽음을 앞두시고 하신 말씀입니다. 이 역설은 자신의 죽음의 가치를 말씀하신 것이기도 합니다.

    요약하면

    1) 한 알의 밀이 떨어져 죽음으로 많은 열매를 맺는 것처럼

    2) 자기 생명을 아끼지 않고 버림으로 영원한 생명을 보전하고

    3) 종처럼 자기를 낮추고 섬기는 것이 오히려 귀하게 여김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이 곧 복음입니다. 복음은 역설적 진리입니다. 그러나 이것을 믿고 순종하는 사람에게는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이 임합니다.

    기독교의 진리는 역설의 진리입니다. 죽어야 사는 것입니다. 내가 죽을 때 내 속에 주님이 사는 것입니다. 주님으로 말미암아 사는 것입니다. 그런데 요즘 죽은 척 하면서 죽지 않은 교인들이 많습니다.

    “자기의 생명을 사랑하는 자는 잃어버릴 것이요 이 세상에서 자기의 생명을 미워하는 자는 영생하도록 보전하리라.”(요12:25)

    우리 교회에서 힘쓰고 있는 것 중에 하나가 ‘골방의 시간 갖기’입니다. 날마다 큐티하기, 1시간 기도하기, 성경일독하기 등등이 그 내용입니다. 감사한 것은 이것이 구호에 그치지 않고 많은 교우들이 실제로 골방의 시간을 갖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믿음은 저절로 자라나지 않습니다. 날마다 말씀을 먹고 기도하고 순종하는 그 과정을 통해 성장하게 됩니다.

    우리가 성경을 읽다보면 발견하는 역설들이 있습니다. 역설, 혹은 역설적이다 라는 말이 무슨 뜻입니까? 어떤 주장이나 이론이 겉보기에는 모순되는 것 같으나 그 속에 중요한 진리가 함축되어 있는 것을 역설이라고 합니다.

    즉 성경에 나오는 말씀 중에 많은 것들이 세상의 일반적인 경향이나 가치와 사고 등과 상반되는 것이 많다는 것이죠. 그래서 모순되는 것처럼 여겨지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 역설에 참 진리가 담겨져 있습니다.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인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사람들의 논리와 세상의 가치를 거스르고 모순되는 역설로 가득한 것이 성경이기에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이런 역설에 해당되는 말씀들의 예는 이런 것들입니다.

    "원수를 사랑하라. 너에게 잘못한 사람을 일흔 번씩 일곱 번 용서하라. 네가 대접 받고자 하는 대로 하라. 높아지려는 자는 낮아지고 낮아지는 자는 높아진다."

    그 말씀들 하나하나를 보십시오. 세상의 가치와 우리 인간의 사고와 생각과는 전혀 다르지 않습니까? 모순되지 않습니까? 그러나 그 안에 참된 진리가 담겨져 있습니다. 그래서 이 말씀이 역설이 되는 겁니다.

    오늘 본문 말씀도 마찬가지입니다. 산상복음, 산상설교라고 하는 부분의 첫 대목인데, 특별히 이 부분을 팔복이라고 부릅니다. 여덟 가지의 복에 대해 주님께서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그 첫 번째 복인데, 보십시오.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가난한데 복이 있다? 모순 아닙니까? 우리야 이미 신앙생활을 해왔기에 이 말씀을 가지고 모순이라고 하지는 않지만 세상적인 시각으로 보면 모순입니다. 같은 내용을 담고 있는 누가복음 6:20을 보면 더 그러합니다. 누가복음에는 '심령이'라는 말을 빼고 그냥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가난한 자가 복이 있다니, 무슨 뚱딴지같은 말입니까? 가난이 어떻게 복입니까? 가난은 화죠. 저주입니다. 그것이 일반적인 사고 아닙니까? 세상 사람들 중에 누가 가난한 것을 복으로 여깁니까? 스스로 가난을 택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그렇다고 그것을 복으로 여기지는 않습니다.

    가난한 자가 복이 있다, 이 모순되는 말에 진리가 담겨져 있습니다. 그래서 역설입니다. 역설적인 진리입니다.

    이 말씀은 구약성경의 흐름에서 봐야 합니다. 구약 성경에 보면 가난과 경건은 밀접한 관계를 가진 것으로 이해가 되었습니다. 가난한 사람들은 물질적으로 가난하지만 마음도 가난한 경우가 많습니다. 가난한 사람들이 의지할 데라고는 하나님에 대한 자신들의 믿음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가난한 사람들은 하나님을 온전히 의지할 수밖에 없었고 그러한 사람들은 하나님의 특별한 관심의 대상으로 간주되었습니다.

    반면에 부자들의 경우는 많은 경우 경고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물질적인 부유함이 자칫하면 자기를 신뢰하는 교만으로 빠질 수 있고, 충분히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끝없는 탐욕으로 인해 죄를 질 수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지요.

    이러한 구약의 배경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는 그런 구약의 배경을 가지고 가난한 자는 복이 있다고 하셨을까요? 어느 정도는 맞지만 전부 다 그런 것은 아닙니다. 여기에는 중요한 전제조건이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겸손입니다.

    아무리 가난한 자라 해도 그 안에 겸손이 없으면 아무 것도 아닙니다. 가난하다고 해서 다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이 아니거든요. 물질적으로 가난한 것이 오히려 하나님과 세상에 대한 불평불만과 증오심이 되어서 가진 이들을 증오하고 자신의 인생을 함부로 살고 포기하는 경우도 많기 때문입니다.

    가난한 자가 교만한 경우가 얼마나 많은지 아십니까? 그런 사람이 나중에 부자가 되면 아주 악독하고 탐욕스러운 부자, 우리가 보통 말하는 졸부가 되어 버립니다. 가난하다고 해서 다 복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부자도 마찬가지입니다. 부자라고 해서 다 화가 있는가? 그렇지 않습니다. 역시 겸손입니다. 자신이 지금 가지고 있는 부와 재물, 권력이 원래 나의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게서 나온 것임을 겸손히 인정하는 마음이 있을 때 부자 역시 복 있는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이러한 겸손이 있는 부자는 자기가 가지고 있는 것 가지고 거만하거나 없는 사람을 무시하거나 더 가지려고 탐욕을 부리지 않습니다. 오히려 자신에게 부를 허락하신 하나님께 감사하는 마음으로 없는 이들을 돌아보고 자신이 가진 물질로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는데 사용할 수 있는 사람이 됩니다. 그런 부자라면 복 있는 사람입니다.

    가난한 사람이든 부자이든 그 중심에 겸손이 있는 사람, 그 사람이 복 있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마태는 누가와 달라 그 앞에 '심령이'라는 말을 추가하고 있는 겁니다. 예수님께서 그런 뜻으로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결국 심령이 가난하다는 것은 하나님 앞에 겸손한 자를 말합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겸손은 이런 것입니다.

    겸손은 먼저 하나님 앞에 자신이 죄인됨을 깨닫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또한 하나님의 뜻을 행할 수 없는 무능한 사람임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내 힘으로는 할 수 없다는 것이지요. 그러기에 스스로 자랑하지 않고 하나님께 긍휼과 자비를 구하고 도우심을 구하고 늘 은혜를 구하는 겁니다. 그것이 바로 성경에서 말하는 겸손입니다.

    즉 하나님 앞에서의 겸손이 진정한 겸손입니다. 하나님 앞에서의 그 겸손이 사람들과의 관계에서도 나타난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하나님 앞에서나 사람들 앞에서나 겸손한 사람, 이것이 성경에서 말하는 겸손입니다. 그렇다면 교만이 무엇인지 아시겠지요? 자신의 죄인됨과 무능함을 고백하지 않는 것, 하나님의 은혜와 도우심을 구하지 않는 것, 하나님을 찾지 않는 것, 이것이 교만입니다.

    겸손을 히브리어로 'ענו'(아나브)라고 하는데 '가난한 사람'과 같은 의미로 쓰입니다.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죄인됨과 무능함을 고백하며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을 구하는 겸손한 사람이 곧 가난한 사람이라는 것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결국 예수님께서 '심령이 가난한 자'라고 했을 때는 이런 의미로 말씀하신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겸손한 심령이 있는 사람을 말하는 겁니다. 하나님 앞에 자신이 죄인됨을 깨닫고 고백하고 하나님의 뜻을 행하기에는 무능한 사람임을 고백하면서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와 도우심을 구하는 겸손한 심령을 가지고 있다면 물질적으로 부자든 가난하든 그것과 상관없이 그 사람은 가난한 사람입니다.

    왜 이렇게 심령이 가난한 사람이 복이 있는지 아십니까? 이 겸손을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에게 바라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미가 6:8, "사람아 주께서 선한 것이 무엇임을 네게 보이셨나니 여호와께서 네게 구하시는 것은 오직 정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하게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

    겸손하게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 이것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신다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사람이 되는 것, 그것 자체부터 복이 아니겠습니까?

    또 이사야 57:15을 보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지극히 존귀하며 영원히 거하시며 거룩하다 이름하는 이가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내가 높고 거룩한 곳에 있으며 또한 통회하고 마음이 겸손한 자와 함께 있나니 이는 겸손한 자의 영을 소생시키며 통회하는 자의 마음을 소생시키려 함이라"

    잘 보십시오. 하나님의 말씀이십니다. 어떤 사람과 함께 하시겠다고요? "통회하고 마음이 겸손한 자" 통회한다는 말과 겸손하다는 말은 같은 의미입니다. 누가 통회하겠습니까? 자신의 죄인됨과 무능함을 깨닫는 사람, 하나님의 긍휼과 은혜를 구하는 사람이 통회하는 겁니다. 결국 하나님께서는 그런 겸손한 자와 함께 하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께서 함께 하실 때 어떻게 될까요? "겸손 자의 영을 소생시키며 통회하는 자의 마음을 소생시키려 함이라" 이건 당연한 것 아닙니까? 생명의 근원이시고 만복의 근원이신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는데 어찌 그 영이 소생되지 않겠습니까?

    여기서 '영을 소생시킨다'는 말은 다시금 힘을 주어서 일어서게 한다는 뜻입니다. 또한 통회하는 마음을 어루만져 주셔서 아물게 해주십니다. 그 마음 가운데 깊은 평안과 기쁨과 용기를 주신다는 뜻입니다. 이것이 복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또한 시편 10:17을 보면 겸손한 자의 소원을 들어주십니다.

    "여호와여 주는 겸손한 자의 소원을 들으셨사오니 그들의 마음을 준비하시며 귀를 기울여 들으시고"

    하나님께서는 겸손한 자에게 귀를 기울이십니다. 여러분, 반드시 기억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교만한 자의 소리에는 귀를 막으시고 겸손한 자의 기도에 귀를 기울이십니다. 겸손한 자가 구하는 소원을 들으십니다.

    겸손한 자가 구하는 것이 무엇일까요? "하나님, 저 부자 되게 해주세요. 돈벼락 맞게 해주세요. 저 출세하게 해주세요. 성공하게 해주세요." 이런 것일까요?

    겸손한 자가 구하는 것은 그런 것이 아닙니다. 무엇보다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하나님의 긍휼입니다. 하나님의 자비입니다. 하나님의 도우심입니다.

    "하나님, 저는 죄인입니다. 오늘도 죄에 대해 졌습니다. 불쌍히 여겨주십시오.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지 못했습니다. 사랑하며 살지 못했습니다. 또 악한 생각을 품었고 상처주는 말을 했고 사랑의 행동을 하지 못했습니다. 거룩한 삶을 살지 못했습니다. 노력은 했는데 그렇게 하질 못했습니다. 불쌍히 여겨주십시오. 죄를 이길 수 있도록, 순종할 수 있도록, 사랑하며 살 수 있도록, 거룩한 삶을 살 수 있도록 도와주옵소서. 당신의 거룩하심으로 옷 입혀 주옵소서. 당신을 더 알기 원합니다. 믿음 주옵소서. 능력 주옵소서..."

    이런 기도를 드릴 겁니다. 삶에 문제에 대해서도 동일하겠지요.

    "하나님 저의 삶에 이런 문제들이 있습니다. 가정에 이런 문제가 있고, 자녀들에게 이런 문제가 있고, 나의 장래에 이런 일이 있습니다. 내 힘으로 어찌할 수 없습니다. 저의 무능함을 불쌍히 여겨주옵소서. 주님께서 친히 다스려주옵소서. 주님께 의탁합니다. 인도해주시고 열어주시고 불쌍히 여겨주옵소서. 어떤 상황 가운데서도 감사할 수 있게 하시고, 모든 상황 속에서 주님만 바라보게 하옵소서."

    문제가 해결되고 모든 일들이 잘 풀려나갈 때도 동일한 고백을 할 수 있을 겁니다.

    "하나님, 이 부족한 자를 불쌍히 여겨 은혜주심을 감사합니다. 모든 것이 주님에게서 왔음을 고백합니다. 이것으로 인해 제 마음이 높아지지 않게 하시고 이것으로 인해 죄짓거나 어려운 이들을 멸시하는 일이 없게 하옵소서. 오직 주님의 영광을 위해, 이웃을 사랑하는 일에 사용하게 하옵소서."

    저는 이런 기도가 겸손한 자들이 드리는 기도이고 하나님께 아뢰는 소원이라고 생각합니다. 그 심령에 겸손이 없으면 성황당 앞에서 정한수 떠놓고 비나이다 하는 것과 다를 것이 없는 기도를 하게 될 겁니다. 하나님 앞에서 겸손한 마음, 가난한 심령을 가지고 구하시기 바랍니다. 그 기도에 귀 기울이십니다. 하나님께서 귀를 기울이시면 되는 겁니다. 그것이 곧 응답입니다.

    우리는 눈에 무언가가 보여지는 것만을 응답이라고 생각하는데 하나님께서 들으시는 것 자체가 응답입니다. 구체적으로 나타나는 것은 하나님의 때에 달려있어요. 하나님께서 가장 적합하다고 생각하시는 그 때에 구체적으로 나타내주십니다. 그러기에 겸손한 자는 조급해하지 않습니다.

    겸손한 마음, 가난한 심령, 이것을 다른 말로는 상한 심령이라고 하는데, 적어도 내가 그런 상한 심령, 가난한 심령, 겸손한 심령으로 하나님 앞에 구했다면 하나님께서 들으셨습니다. 이것은 분명한 약속입니다. 상한 심령을 구하시는 하나님께서 겸손한 자의 소원을 들으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이미 응답받은 것입니다. 내 눈에 보여지고 내 손에 주어지는 것은 하나님께서 정하신 때에 주십니다.

    행여 주어지지 않아도 그것 역시 응답입니다. 나는 상한 심령으로, 가난한 심령으로, 겸손한 심령으로 구했지만 하나님 보실 때 그것이 아닌 경우가 있습니다. 내 판단보다 하나님의 판단이 백배 천배 옳습니다. 나를 가장 잘 아시는 하나님께서 내게 가장 좋은 것, 가장 옳은 것으로 응답해주십니다.

    내가 구했는데 응답해주시지 않았다? 그것 역시 응답입니다. 사도 바울이 그랬지요? 자신의 육체의 가시, 곧 질병인데, 그것을 고쳐달라고 얼마나 구했습니까? 정말 겸손한 마음으로, 상한 심령으로 구했단 말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응답은 No였습니다. "내 은혜가 네게 족하는 겁니다."

    때로는 응답이 주어지는 않는 것이 내게 은혜가 됩니다. 사도 바울에게는 응답되지 않는 그것이 오히려 그를 바르게 세워주고 끝까지 하나님만을 의지하고 겸손히 사역할 수 있는 힘이 됩니다. 얼마나 존경을 받았겠습니까? 자칫하면 교만해질 수 있는 여지가 많았습니다.

    그러나 자신의 간절한 기도에 응답하지 않으신 것이 오히려 은혜가 되어 끝까지 자신의 연약함을 고백하면서 겸손히 충성되게 사역을 감당할 수 있었던 겁니다. 결국은 그것이 응답이었던 것입니다.

    겸손한 자의 기도에는 하나님의 은혜를 간절히 구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깊이 신뢰하는 믿음이 주어집니다. 그것이 겸손한 자에게 주어지는 가장 큰 복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실제로 여러분 자신의 경험을 돌아보십시오. 제 경우도 하나님 앞에 상한 심령이 되어 겸손하게 구했을 때 주어지는 것은 마음 가득한 평안과 기쁨뿐만 아니라 하나님께 대한 깊은 신뢰였습니다.

    여러분, 하나님 앞에 가난한 심령으로 나아가보십시오. 주님께서 주시는 평안과 기쁨으로 채워질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 대한 깊은 신뢰가 생깁니다. 이것은 겸손한 자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이 은혜를 받아야 믿음이 성장하는 겁니다. 하나님 앞에 겸손하십시오. 가난한 심령으로 하나님 앞에 나아가십시오.

    여기서 우리는 다시 한 번 성경에서 말하는 복이 무엇인지를 확인할 필요가 있습니다. 복이 무엇입니까? 세상은 무엇인가를 가졌다라고 했을 때 복이라고 말합니다. 특히 우리나라 사람들은 복하면 다 그런 복입니다. 오복이니 칠복이 하는 것도 보면 대부분 물질적이고 현세적인 복입니다.

    그러나 성경에서 말하는 복은 다릅니다. 물론 성경에서도 물질의 복, 현세적인 복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은 그런 복도 주십니다. 그러나 그것이 복의 본질이 아닙니다. 복은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입니다. 복은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에서 나옵니다.

    시편 33:12에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여호와를 자기 하나님으로 삼은 나라 곧 하나님의 기업으로 선택된 백성은 복이 있도다"

    누가 복이 있다? 하나님의 기업으로 선택된 백성은 복이 있다는 겁니다. 즉 하나님께 선택되어 하나님을 사랑하고 전심으로 경배하고 그 말씀에 순종하며 살아가는 그것이 곧 복이라는 겁니다. 그 사람에게는 하나님이 곧 자신의 분깃이 됩니다. 기업이 됩니다. 즉 하나님이 자신의 재산이 되는 겁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제대로 되면 그 영혼이 잘됩니다. 그러면 범사에 잘되고 강건하는 복도 덤으로 오는 겁니다. 그렇지 않더라도 그 영혼이 잘 되어 있으면 그건 복입니다.

    하나님과 관계가 올바르게 되면 그 사람의 영혼이 잘되는데 그건 다른 것 아닙니다.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게 된다는 겁니다. 정말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경험적으로 알게 되고, 하나님의 거룩과 영광을 체험하게 된다는 것이지요. 그러면서 하나님께서 내 삶을 다스려주시고 인도해주시게 됩니다.

    그럼 내 안에 무엇이 이루어지는지 아십니까? 천국이 이루어지는 겁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지는 겁니다. 예수님이 그러셨죠?

    "...하나님의 나라는 볼 수 있게 임하는 것이 아니요 또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도 못하리니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눅 17:20-21)

    하나님과의 관계가 올바르게 되면 내 안에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지게 됩니다. 천국을 미리 맛보면 살 수 있게 되는 겁니다. 천국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우리가 천국을 이해할 때 하나님의 나라로 이해를 해야 합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불교적인 극락이나 무속신앙적인 저승개념으로 천국을 이해하는데 그런 의미가 아닙니다.

    천국, 즉 하나님의 나라는 쉽게 말하면 하나님으로 충만한 나라입니다. 그 나라에는 죄악이 없고 사탄도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영광만이 충만합니다. 그러기에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영광에 젖어 온전히 하나님만을 경배하며 하나님과 형제자매를 사랑하며 거룩과 공의를 행하며 살아가는 나라입니다. 충만한 기쁨과 행복과 평안으로 넘치는 나라입니다.

    이건 단순히 죽어서 가는 저승이 아닙니다. 지금은 우리의 영혼이 가는 곳이고, 장차 예수님께서 다시 오셔서 세상을 심판하신 후에 세워질 나라입니다. 또한 우리가 이 땅에서 살아가면서 세워나가야 하는 나라입니다.

    하나님으로 충만한 나라,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영광이 충만한 나라, 그래서 죄악이 없고 사랑으로 충만하고 평화로 충만하고 기쁨으로 충만한 나라가 하나님의 나라인데, 내가 하나님과의 관계가 올바르게 되면 이러한 하나님의 나라를 경험하게 되는 겁니다. 장차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것이라는 약속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이 땅에 살면서 하나님의 나라를 경험하는 겁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라고 했을 때, 현재형을 쓰신 겁니다.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 여기에 쓰인 동사형이 미래형이 아니고 현재형입니다. 심령이 가난한 사람, 겸손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찾고 그래서 하나님과의 관계가 올바르게 된 사람은 장차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뿐만 아니라 이 땅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경험하며 살아가는 복을 받게 된다는 겁니다.

    여러분, 이것이 진정한 복 아닙니까? 잘 생각해보세요. 무엇이 진정한 복인지. 예수는 믿는데, 교회는 다니는데 아직도 세속적인 복에만 매달려 있지 않습니까?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가 되어 이 땅에서 미리 하나님의 나라를 맛본다, 놀라운 축복입니다.

    이 복을 발견한 사람, 이 복을 맛 본 사람은 신앙이 차원이 달라집니다. 신앙의 깊이가 달라집니다. 정말 예수 믿는 복이 이거구나, 정말 천국을 맛보며 산다는 것이 이런 거구나 깨닫게 됩니다. 그러니 신앙의 차원과 깊이가 달라질 수밖에요.

    또한 이런 분들은 세상적인 복에서도 자유할 수 있습니다. 돈이 없어도 그것 때문에 죽지 않습니다. 불편하죠. 어렵지요. 하지만 그것 때문에 죽지 않습니다. 마음이 죽으면 죽는 겁니다. 물질 때문에 염려하면 마음이 죽어요. 마음이 죽으면 하루하루가 고달파요. 죽지 못해 사는 것이 되고 맙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염려하지 말라고 하신 겁니다. 모든 것이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맛본 사람은 세상적인 복에 연연하지 않습니다. 집착하지 않게 됩니다. 염러하지 않게 됩니다. 집착할 때, 염려할 때 위험해지는 겁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제대로 맛본 사람은 세상에서 열심히 삽니다. 단순히 자기의 성공과 안위를 위해 열심히 사는 것 아닙니다.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기 위함입니다. 힘들어도 타협하지 않고 싸우며 나아갑니다. 세상을 살아가는 방식이 달라집니다. lifestyle이 달라지는 겁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주님께서 말씀하신 이 복을 누리고 싶지 않습니까? 현재의 상태에 만족하며 사시렵니까? 지금 이대로가 좋습니까? 지금처럼 적당히 믿고 적당히 주님과 거리를 두고 믿는 지금 이대로가 좋습니까?

    주님께서 말하신 복이라면 진짜 복입니다. 최고의 복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너무나 사랑하시기 때문에 우리가 이 복을 받기를 원하십니다. 그 길을 보여주고 계십니다. 그리고 초대하고 계십니다. 천국이 나의 것이 되는 복을 받으십시오. 이 복에 욕심을 내십시오. 이런 욕심은 거룩한 욕심입니다. 거룩한 욕심을 내십시오.

    여러분, 잘 기억하시고 행하여야 합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나의 것이 되기 위해서는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가 맺어져야 합니다. 이것은 심령이 가난해질 때 가능합니다. 심령이 가난하다, 그것은 겸손한 마음을 말합니다. 하나님 앞에 겸손한 마음으로 나아가십시오. 자신의 죄인됨을 고백하시고 무능함을 고백하십시오.

    하나님의 긍휼 없이는, 하나님의 은혜 없이는, 하나님의 자비 없이는, 하나님의 도우심 없이는 살 수 없다는 것을 고백하고 구하십시오. 날마다 십자가 앞에 나아가십시오. 우리의 죄악과 연약함과 무능함을 모두 지시고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묵상하세요. 나는 온유하고 겸손하다고 하신 예수님을 묵상해보세요. 그래서 겸손이 무엇인지를 깨닫고 더욱 더 하나님 앞에 가난한 심령으로 상한 심령으로 나아가시길 바랍니다.

    시편 107:9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가 사모하는 영혼에게 만족을 주시며 주린 영혼에게 좋은 것으로 채워주심이로다"

    분명한 약속이며 수많은 사람들을 통해 확인된 약속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모하는 영혼에게 만족을 주십니다. 겸손한 마음으로, 가난한 심령으로, 상한 심령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갈급해하는 주린 영혼에게 좋은 것으로 채워주십니다. 구하십시오. 겸손한 마음으로 구하십시오. 가난한 심령으로 구하십시오. 반드시 만족케 해주시고 좋은 것으로 채워주실 것입니다.

    성경에 나타난 역설


    1. 고린도후서 6:8-10

    영광과 욕됨으로 말미암으며 악한 이름과 아름다운 이름으로 말미암으며 속이는 자 같으나 참되고
    무명한 자 같으나 유명한 자요 죽은 자 같으나 보라 우리가 살고 징계를 받는 자 같으나 죽임을 당하지 아니하고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2. 고린도후서 12:9-10

  • 내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이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내게 머물게 하려함이라
  •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핍박과 곤란을 기뻐하노니 이는 내가 약할 그 때에 곧 강함이니라

  • 3. 고린도전서 3:18- 20

  • 아무도 자기를 속이지 말라 너희 중에 누구든지 이 세상에서 지혜 있는 줄로 생각하거든 미련한 자가 되어라 그리하여야 지혜로운 자가 되리라
  • 이 세상 지혜는 하나님께 미련한 것이니 기록된바 지혜 있는 자들로 하여금 자기 궤휼에 빠지게 하시는 이라 하였고
  • 또 주께서 지혜 있는 자들의 생각을 헛것으로 아신다 하셨느니라

  • 4. 마태복음 16:25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코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찾으리라

    5. 마태복음 19:30

    그러나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고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될 자가 많으니라.

    6. 마태복음 23:12

    누구든지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누구든지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7. 요한복음 12:25

    자기 생명을 사랑하는 자는 잃어버릴 것이요 이 세상에서 자기 생명을 미워하는 자는 영생하도록 보존하리라.

    역설의 신앙

    1.  낮아짐과 높아짐

    약 4:10, 막 9:35

    2. 약함과 강함

    고후 12: 9-10

    3. 내려놓음과 얻음

    마 10:39, 눅 5:11

    4. 죽음과 생명

    빌 2:8-9, 고후 4:10, 갈 2:20, 갈 5:24, 갈 15:31

    믿음으로 산다는 것은 세상을 거스리면서 사는 것입니다. 
    그것이 역설의 신앙입니다.

    성도는 세상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상식을 거스리면서 살아가야 합니다.

    요 17: 14- 16 내가 아버지의 말씀을 그들에게 주었사오매 세상이 그들을 미워하였사오니 이는 내가 세상에 속하지 아니함 같이 그들도 세상에 속하지 아니함으로 인함이니이다 내가 비옵는 것은 그들을 세상에서 데려가시기를 위함이 아니요 다만 악에 빠지지 않게 보전하시기를 위함이니이다 내가 세상에 속하지 아니함 같이 그들도 세상에 속하지 아니하였사옵나이다

    롬12:2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세상의 지식과 지혜를 좇지 말고 진리에 대한 욕심을 내셔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과의 관계가 더욱 더 올바르게 되어서 하나님의 나라를 소유하고 맛보는 복이 있기를 바랍니다.

    역설의 진리는 이 세상에서 경험되기도 하지만,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에서 완성이 됩니다.

    예수님은 공생애 기간 중에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하셨습니다. 하나님 나라가 가까웠다! 하나님의 나라는 이런 것이다! 하나님의 나라의 원리와 비밀을 말씀하셨습니다. 때가 되면 하나님의 나라가 도래할 것임을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세상의 기존 질서가 뒤집히는 날이 올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나라라는 개념은 세상에 질서와 반대되는 것이고 세상의 질서를 대체하는 개념입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 나라를 말씀하실 때에는 우리는 단지 저 멀리 높이 있는 하늘에 있는 나라만을 생각하지 말고, 세상의 질서와 반대되고 세상의 질서를 넘어서는 하나님이 다스리는 영역에서 하나님께서 이루시는 질서를 생각하시며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마태복음 20장 16절에, “이와 같이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되고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리라” 누가복음 6장 21절에, “지금 주린 자는 복이 있나니 너희가 배부름을 얻을 것임이요 지금 우는 자는 복이 있나니 너희가 웃을 것임이요” 25절, “화 있을진저 너희 지금 배부른 자여 너희는 주리리로다 화 있을진저 너희 지금 웃는 자여 너희가 애통하며 울리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지금은 이 말씀이 이 세상에서는 앞뒤가 안 맞고 논리적이지 않은 것 같은 역설의 진리이지만, 마침내 새로운 세상, 다가오는 세상, 하나님의 통치가 완전하게 이루어지는 세상에서는 그대로 이루어질 진리임을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땅에 살면서 역설의 신앙을 소중히 갖고 역설의 진리가 완성되기를 소망해야 합니다.

    역설의 진리의 말씀은 겉으로의 기준과 평가와 안으로의 기준과 평가가 분명히 다르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역설의 진리의 말씀은 보이는 세상의 기준과 평가와 보이지 않는 세상의 기준과 평가가 분명히 다르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역설의 진리의 말씀은 물질세계의 기준과 평가와 영적인 세계의 기준과 평가가 분명히 다르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역설의 진리의 말씀은 현세의 기준과 평가와 내세의 기준과 평가가 분명히 다르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역설의 진리의 말씀은 순식간에 지나가는 세상의 기준과 평가와 영원한 세상의 기준과 평가가 다르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세상에 속한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에 속한 사람이라면, 이 세상이 전부라고 생각하고 이 세상에 소망을 두고 사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에 소망을 두고 사는 사람이라면, 이 세상의 물질과 이세상의 가치와 이 세상의 평가에 연연하는 사람이 아니라 영원한 것을 추구하는 사람, 하나님께서 어떻게 평가하시느냐, 하나님의 나라의 영원한 가치가 무엇이냐를 추구하는 그리스도인이라면 이 세상에서 역설적인 삶을 살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역설적인 진리를 따라 살아가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역설의 신앙을 가지고 삽니다. 역설의 신앙을 소중히 여깁니다. 역설의 신앙으로 성숙해집니다.

    요한복음 12장 24절에,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이 생명의 역설입니다. 성경에 나오는 신앙의 영웅들, 신앙의 선배들은 역설의 신앙으로 산 사람들입니다. 세계 교회사와 우리나라 교회사에 기록된 위대한 신앙인들은 역설의 신앙으로 산 사람들입니다.

    1885년 4월 5일 부활절 아침에 아펜젤러가 한국 땅에 도착하였습니다. 
    그는 배제학당을 창설하였고, 정동제일교회를 창설하였습니다. 
    그리고 성서 번역에도 크게 이바지하여 우리나라 선교에 크게 이바지하였습니다. 
    그런데 1902년 6월11일. 성서번역의 일로 아펜젤러를 태운 배가 군산 근해에 도착했습니다. 
    그런데 선박이 충돌해 이화학당의 여학생 두 명이 바다에 빠졌습니다. 
    아펜젤러는 여학생들을 구출하기 위해 바다에 뛰어들었습니다. 
    자기 자신은 얼마든지 살아날 수 있었으나 마흔넷의 나이에 목숨을 잃었습니다. 
    미국인들은 그의 죽음을 애석하게 여겼습니다. 

    “아펜젤러는 총명하고 잘 생긴 사람이다. 미국에서 얼마든지 장래가 보장된 사람이었다. 그가 낙후된 한국에서 죽은 것은 매우 슬픈 일이다” 

    그러나 아펜젤러의 희생은 결코 헛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가 세운 배재학교와 정동제일교회에서 수많은 인재들이 배출됐습니다. 그의 세 자녀는 모두 한국의 선교사로 헌신했습니다. 한 알의 밀알이 한국 땅에 떨어져 죽고, 많은 열매를 맺었습니다.

    대동강변에서 복음을 제대로 전하지도 못하고 칼에 맞아 죽은 토마스 목사님도 그렇습니다. 그가 죽기 전 몇 권의 성경책만 던지듯 전해 주었는데, 그것을 주어간 소년과 그 성경책을 찢어 벽에 붙인 사람이 나중에 예수님을 믿고 우리나라 교회사에 중요한 인물들이 되었습니다. 한 알의 밀이 죽으니까 많은 열매를 거두었습니다.

    기독교는 역설의 종교입니다. 기독교 신앙은 역설의 신앙이 있습니다. 세상적으로 똑똑하고, 타산적이고, 이기적인 사람은 역설의 진리를 받아드리지 못합니다. 세상적 관점에서 바보가 되는 것이 믿음입니다. 세상적 관점으로는 바보 같아 보일지 모르지만 역설의 신앙을 가진 사람은 예수님 안에서 하늘의 지혜로 살아가고, 예수님의 능력으로 온전해 지고, 예수님으로 인해 모든 것을 가진 사람으로 살아갑니다.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속이는 자 같지만 참된 사람들입니다. 무명한자 같지만 유명한 사람들입니다. 죽은 자 같지만 살아 있고, 징계 받는 자 같지만 죽임을 당하지 않습니다. 근심하는 사람 같지만 항상 예수님 때문에 기뻐합니다. 가난한 사람 같지만 다른 사람을 부요하게 해 주는 사람입니다. 아무 것도 없는 사람 같지만 예수님으로 인해 모든 것을 가진 사람임을 확신하며 사시기 바랍니다.

    진리이신 하나님 아버지, 우리 영적인 눈이 열려서 천국의 소중함을 알게 하소서. 지금 당한 고난이 견디기 어려울지라도 극복하게 하시고 하나님의 일, 가치 있는 일에 투자할 수 있는 믿음을 주옵소서. 주님을 따르는 일을 최우선에 놓게 하소서. 먼저 그 나라와 의를 구하는 삶을 살게 해주소서.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하나님의 역설적 은혜(Paradox of God’s Amazing Grace)(사도행전 9:1~22)

    모두를 얻기 위해 세상에서 유일한 하나를 버려야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세상의 모든 영혼을 얻기 위해 자신의 소중한 전부를 과감히 버려야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온 인류의 영혼을 구하기 위해 유일한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구속의 속죄물로 단번에 내어주신 하나님의 사랑은 바로 <하나님의 역설적 은혜>에 비유할 수 있습니다. 

    또한, 개인적으로 그러한 인생을 <역설적 인생>이라 부릅니다. 행 9장의 바울의 회심사건은 여기에 가장 적절한 말씀입니다(행 9:1~22). 사도 바울이 회심이후에 갖게 된 <바울>이란 이름을 얻기 전에 그는 <사울>의 인생을 살고 있었습니다. 정확하게 말하면 <다메섹에서의 예수님 만남 이전과 만남 이후>의 기준이 되는 “회심의 터닝 포인트(Turning Point)가 있기 이전의 삶”과 “그 이후의 회심(Conversion)”으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바울처럼 <축복된 터닝 포인트의 인생이 되려면> 적어도 <세 가지>가 전제되어야 합니다. 

    첫째로, 절대적 대면
    둘째로, 영성의 중심 
    셋째로, 지속적 추구 

    사도 바울은 이 세가지 전제조건을 만족시킨 사람입니다. 그는 다메섹 도상에서 이 땅에 복음으로 우주화를 성공시킨 예수 그리스도와 직접 대면하므로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역설적 은혜>와 <역설적 인생>을 동시에 맞이하게 되는 <터닝 포인트의 인생>이 된 것입니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의 중심으로 거듭나기 위해 <철저한 회개와 회심의 바울>이 됩니다(행 9장, 22장, 26장). 다메섹에서 철저하게 회심한 사도 바울은 “지속적인 하나님의 나라와 그 의를 위해” “나는 날마다 죽노라”고 고백합니다(고전 15:30). 지속적인 하나님의 나라와 그 의를 위해 날마다 죽음을 각오하고 하나님의 나라를 찾고 구하고 부르짖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진정한 부활신앙>입니다.

    <하나님의 역설적 은혜>의 가장 중심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메시아적 주권>이 자리잡고 있습니다(행 9:20~22). 구약 39권이 초점을 맞추는 단 하나의 주제는 <메시아이신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신약 27권이 초점을 맞추는 단 하나의 주제는 <그리스도이신 예수님>입니다. 그러므로, 다메섹 도시의 길 한복판에서 사울(바울이 되기 이전)이 누리는 <하나님의 역설적 은혜>의 중심도 당연히 <메시아이신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사울(바울의 옛 이름, “큰 자”)이 회심한 현장, <다메섹> 도시는 아브라함 시대 때부터 남 유다, 북 이스라엘로 분단국가 시대에 이르기까지 <역사의 중심무대>입니다. 바로 그 자리에서 예수님이 바울(회심 이후의 이름, “작은 자”)을 만나주셨다는 것은 바울을 <하나님의 역설적 은혜의 최고 수혜자>로 만드시려는 목적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역설적 은혜>로 회심하자마자 바울의 실천적 신앙은 “즉시로, 각 회당에서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메시아)이심을 전파하니.”(행 9:20)로 일관된 <참 회심자, 사도 바울>의 길을 걷게 됩니다. <하나님의 역설적 은혜>를 맛본 자만이 <역설적 인생>을 살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수제자 베드로의 신앙고백 위에 “내 교회를 세우겠다” 천명하신 예수님의 말씀은 일관된 <하나님의 언약>입니다.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마16:18). 아직 끝나지 않은 <21세기 역병의 대란기>에도 바울처럼, 베드로처럼 “예수 그리스도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신 <메시아 신앙의 확신>에 거할 때, 다음과 같은 신앙고백을 날마다 할 수 있습니다. “야훼와 그의 능력을 구할지어다. 그의 얼굴을 항상 구할지어다.”(시 105:4)


    밀알 신앙(요한복음 12:23~28)

    성경을 보면 역설(逆說)이 많이 나옵니다. 
    흔히 ‘패러독스’(Paradox)라고 하죠. 
    역설이란 잘 아시는 대로, 얼핏 보면 틀린 말 같은데 사실은 진리인 것을 말합니다. 
    우리의 인생 가운데 이런 역설적 진리가 많습니다. 
    특히 신앙의 세계에는 더더욱 많습니다. 
    그래서 성경에 보면 무수한 역설이 등장합니다. 
    그 중에 몇 가지만 소개해 드리면 이런 구절들입니다. 

    마가복음 10:44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 

    고린도후서 12:10 
    “ ... 내가 약한 그 때에 강함이라” 

    사도행전 20:35 
    “ ...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 ... ”  

    오늘 본문에도 보면 역설적 진리가 등장합니다.
    뭔가요? 한 알의 밀알이 썩어져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는 겁니다. 죽으면 오히려 산다는 진리요, 잃으면 오히려 얻는다는 진리입니다. 이것이 곧 십자가의 진리입니다. 십자가는 역설 중의 역설입니다. 피흘려 죽는데 사는 것이요, 수치를 당하는데 영광스러워지는 겁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이 역설적 진리를 터득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저와 여러분도 예수님처럼 ‘한 알의 밀알’로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이게 바로 ‘밀알 신앙’입니다. 

       본문 바로 앞에 20절 이하를 보면, 헬라인 몇 사람이 예수님을 찾아옵니다. 아마 그들은 유대인 교포(디아스포라)를 통해 하나님을 알게 된 사람들이 아닌가 싶습니다. 유월절에 맞춰 예루살렘에 왔다가 예수님을 찾아온 겁니다. 성경에 나오지 않은 내용이지만, 전승에 의하면 이런 사연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들은 당시 헬라(Greece)의 도시 국가 ‘에뎃사’에서 온 사신들입니다. 에뎃사 왕의 아들이 나병에 걸려 절망 중에 있었는데, 예수님의 소문을 들었습니다. 각종 병자들을 고쳤는데 특히 나병 환자를 고쳤으며, 심지어 죽은 자를 살린 분이라는 겁니다. 

    그 소문을 듣고 그들은 어찌하든 예수님을 모시고 가려 했습니다. 그러면 왕자의 병을 고칠 수 있을 것이고, 더 나아가 나라의 스승(국사)도 얻을 수 있을 것으로 판단한 겁니다. 그 때는 유대인 대제사장과 바리새인 등 당국자들이 예수님을 어떻게 해서든 죽이려고 하던 시기였습니다. 그러니까 그들이 생각하기에 예수님께도 좋은 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 제안을 거절하셨고, 끝내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1] 밀알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 : 십자가 죽음, 부활 승천

    본문은 그들이 면담 요청을 했을 때 하신 말씀입니다. 그들이 보기에는 십자가를 피해 그 나라로 가서 호강을 하는 게 영광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오히려 십자가를 지는 게 영광임을 분명히 밝히셨습니다. 이를 위해 밀알의 비유를 언급하십니다. 예수님 자신이 마치 한 알의 밀알과 같은 존재라는 겁니다. 

    먼저 23절을 보시죠.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인자가 영광을 얻을 때가 왔도다”

    인자(人子 Son of Man)는 예수님이 당신 자신을 지칭할 때 사용하는 표현인 것 아시죠. 마치 왕이 자신을 지칭할 때 “짐이 ...” “과인이 ...” 이렇게 말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니까 “... 인자가 ...” 이 말은 “내가 ... ” 그런 뜻이죠. ‘영광을 얻을 때’라고 했는데, 이 말이 무슨 뜻인가요? 십자가 지실 때를 가리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은 십자가를 회피해서 세상의 부귀영화를 선택하는 것을 단호히 거부하신 겁니다. 24절을 보면, 예수님의 십자가 의미를 밀알 비유로 분명히 설명하십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 진실로 진실로 ...” 

    이 말은 헬라어 원어로 “... 아멘 아멘(ajmh;n ajmh;n) ...”인데, 예수님의 말씀이 진리임을 강조합니다. 물론 예수님의 말씀은 항상 진리입니다. 그러나 그 중에서도 정말 금과옥조처럼 명심할 진리임을 강조하신 겁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정해놓으신 자연의 법칙인 동시에 인생의 법칙이요 신앙의 법칙입니다. 한 알의 밀알이 땅 속에 심겨지지 않고 그대로 있으면 한 알 그대로 있습니다. 아무런 가치도 생산해내지 못합니다. 오래 전에 고대 분묘에서 발굴됐는데, 그 가운데 곡식 낟알들이 있었습니다. 신기하게도 오랜 세월이 흘렀음에도 불구하고 썩지 않고 그대로 남아 있었습니다. 고고학적 가치야 있겠지만 곡식이라는 측면에서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그 낟알들이 땅 속에 심겨졌다면 어떻게 됐을까요? 그 오랜 세월 동안 수많은 곡식을 계속 생산해 냈을 겁니다. 남아 있는 게 이익이 아니라, 오히려 엄청난 손실이죠. 

    예수님은 자신이 이 세상에 땅 속에 심겨지고 썩어지는 밀알과 같은 존재가 되기 위해 오셨음을 밝히 증거하십니다. 죄 없으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가 많은 인간을 위해 대속의 십자가에 못 박힐 것이고, 그로 인해 많은 영혼들을 구원하실 것임을 말씀하셨습니다. 정말 예수님 한 분이 피 흘려 돌아가심으로 무수한 인생들이 죄와 사망에서 영원한 생명으로 구원을 받았습니다. 그때로부터 지금까지 2천년 동안 구원의 역사가 계속됐습니다. 앞으로도 십자가 구원의 역사가 계속 될 겁니다. 

    이런 사실을 롬5:19에서는 뭐라고 말씀합니까? “한 사람(=아담)이 순종하지 아니함으로 많은 사람이 죄인 된 것 같이 한 사람(=예수님)이 순종하심으로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되리라” 무슨 말인가요? 인류의 시조 아담이 범죄함으로 모든 인간이 다함께 죄인이 되었고, 예수님이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여 십자가를 지심으로 많은 사람들이 믿음으로 의인 되었다는 겁니다. 

    그런데 십자가 죽음이 그리 쉬운 게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를 앞에 둔 고뇌를 토로하십니다. 마치 겟세마네 동산의 기도를 연상시키는 대목입니다. 27절~28절 보시죠.

    “27 지금 내 마음이 괴로우니 무슨 말을 하리요 아버지여 나를 구원하여 이 때를 면하게 하여 주옵소서 그러나 내가 이를 위하여 이 때에 왔나이다 28 아버지여, 아버지의 이름을 영광스럽게 하옵소서 하시니 ... ”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로서 신성을 갖고 계시지만, 동시에 인성을 갖고 계셨습니다. 그러므로 십자가를 생각할 때 정신적으로 큰 고통을 이미 느낄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결국 하나님 아버지의 뜻대로 십자가를 지실 것을 결단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입니다. 

    그러자 하늘에서 하나님 아버지의 음성이 들려왔습니다. 28절(하). “ ... 이에 하늘에서 소리가 나서 이르되 내가 이미 영광스럽게 하였고 또다시 영광스럽게 하리라 하시니” 놀라운 일이죠. 예수님이 공생애를 시작하기 직전 요단강에서 요한에게 세례 받으실 때도 이런 일이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메시아 구세주로 공식 인정하는 표적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사실을 너무도 잘 알고 계셨기에, 또 십자가 후에 부활과 승천의 영광이 있을 것을 아셨기에 십자가를 당당히 지셨습니다. 히12:2 “ ... 그(=예수)는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십자가 자체는 고통이지만, 그 이후를 내다 보셨기에 십자가를 감당하셨다는 말씀입니다. 

    이렇게 해서 우리가 대속의 십자가를 믿음으로 죄인이 아니라 의인이요, 하나님 자녀와 천국 백성이 되었음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특별히 이 사순절에 그 은혜에 감사 찬송하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 바랍니다. 

       [2] 밀알 신앙의 계승자 그리스도인 : 예수 제자의 길 

    십자가 은혜로 구원받은 우리는 한 걸음 더 나아가 예수님을 따르는 밀알 신앙의 계승자가 되어야 합니다. 이게 바로 예수 제자의 길입니다. 제자의 길을 흔히 ‘제자도’(弟子道 Discipleship)라고 하죠. ‘밀알 신앙’이 곧 ‘제자도’인 것입니다. 

    여러분, 밀알 신앙의 소유자로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예수님께서 설명해 주셨습니다. 25절 보세요. “자기의 생명을 사랑하는 자는 잃어버릴 것이요 이 세상에서 자기의 생명을 미워하는 자는 영생하도록 보전하리라” 여기서 생명은 육체의 생명을 가리킵니다. 육신의 본능을 위해서 전전긍긍하면 실패하고 망한다는 겁니다. 오히려 육신의 본능을 극복하고 초월하면 승리하고 영생을 얻는다고 말씀하십니다. 이런 삶의 방식을 가리켜 자기부인(自己否認 Self-Denial)이라 부릅니다. 

    우리가 아무리 예수 믿는 사람이라도 육신을 입고 사는 동안에는 항상 죄의 본능이 내재되어 시시때때로 솟아오릅니다. 육신의 욕망이죠. 우리가 죄에서 구원받았다는 것은 죄의 책임(죄책)에서 구원받았다는 것이지 죄성 자체가 완전히 없어졌다는 것은 아닙니다. 

    이러한 죄의 본능에 이끌려 살다보면 예수님의 모습을 닮아가기보다 철저히 세속인의 모습으로 살게 됩니다. 그러면 예수 믿는 사람이나 믿지 않는 사람이나 구별이 안 됩니다. 예수님이 예비하신 풍성한 축복을 경험하지도 못합니다. 세상 사람들에게 손가락질을 당하기도 합니다. 결국 이도 저도 아닌 어정쩡한 삶을 살아가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늘 자기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보면서 육신의 본능과 욕망을 죽여야 합니다. 이미 십자가에 못 박았지만 계속해서 ‘확인사살’(確認射殺)을 해야 됩니다. 갈5:24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sinful nature)와 함께 그 정욕과 탐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 ‘육체’는 죄의 본능 즉 육신의 욕망을 가리킵니다. 예수 믿는다는 것은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다가 예수와 함께 새 생명으로 부활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제는 육신의 뜻대로 사는 게 아니라, 주님의 뜻대로 사는 겁니다. 

    그런데 이게 쉽지 않아요. 정신을 차리고 발버둥치지 않으면 어느새 죄의 본능이 솟아오릅니다. 그럴 때면 이 말씀을 기억하세요! 

    마태복음 16장을 보면, 베드로의 신앙 고백이 나오죠. 베드로가 분명하게 신앙고백을 합니다. “주는 그리스도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마16:16) 너무 기특해서 예수님이 크게 칭찬하셨습니다. 그 전에는 제자들이 미성숙해서 십자가 고난에 관핸 언급을 회피했었는데, 이때 비로소 십자가를 언급하십니다. 그런데 베드로의 반응이 뜻밖이었습니다. “예수님! 그러시면 안 되죠. 미쳤어요? 예수님이 죽기는 왜 죽어요?” 이런 식이었습니다. 

    베드로와 제자들은 지상의 이스라엘 건국을 꿈꾸고 있었는데, 예수님이 왕이 되시면 자기들도 한 자리씩 할 것을 기대했던 겁니다. 그런데 뜬금없이 십자가를 말씀하시니까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던 겁니다. 그러자 예수님이 베드로를 향해 뭐라고 책망하셨습니까? 

    마16:23 “예수께서 돌이키시며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사탄아 내 뒤로 물러 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 하시고” ‘사람의 일’은 죄의 본능 즉 육신의 욕망을 가리킵니다. ‘하나님의 일’은 주님의 뜻이고 십자가의 길입니다. 그럴 듯하게 신앙 고백을 했지만 베드로의 마음속에서 죄의 본능이 솟아오르는 것을 이길 수 없었습니다. 사단의 시험에 넘어진 겁니다. 예수님이 오죽하면 “사단아! 내 뒤로 둘러가라!”고 하셨겠습니까? 

    육신의 욕망을 제어하는 것은 너무 어렵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영적 싸움에서 승리하는 게 제자의 길이요, 예수님을 섬기는 길입니다. 그럴 때 하나님께서 우리를 기뻐하시고, 진정한 승리의 삶이 펼쳐지게 됩니다. 

    본문 26절을 보세요. “사람이 나를 섬기려면 나를 따르라 나 있는 곳에 나를 섬기는 자도 거기 있으리니 사람이 나를 섬기면 내 아버지께서 그를 귀히 여기시리라” 예수님을 섬기는 것은 제자로서 육신의 욕망을 이기며 밀알 신앙을 실천하는 겁니다. 

    여러분! 기억하십시오. 십자가 없는 축복, 십자가 없는 영광은 있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이런 말이 있어요! “십자가 없이는 면류관도 없다.”(No Cross, No Crown)(스펄전)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겉모습은 신앙인의 모습으로 바뀌었지만, 속은 여전히 옛사람의 모습으로 남아 있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내용물은 그대로이고 포장지만 바뀐 겁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속사람, 내면의 영혼이 지향하는 방향이 달라져야 합니다. 세속인들처럼 무조건 복만 받겠다고 아우성치는 이른 바 ‘수복(受福)의 신앙’을 탈피해야 합니다. 복을 받는 것보다 우선되어야 하는 것은 고난을 당하더라도 주님의 뜻을 따라가는 겁니다. 이게 ‘자기부인’(自己否認)이요 고난을 불사하는 ‘수난(受難)의 신앙’입니다. 

    이런 삶을 살다 보면 순교도 가능합니다. 기독교 2천년 역사는 순교의 역사입니다. 그래서 신학자 터툴리안이 이런 말을 했어요. “순교의 피는 교회의 밑거름이다.” 오늘날도 전 세계적으로 보면 곳곳에서 순교가 일어나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살고 있는 이곳은 순교를 하고 싶어도 기회가 없는 상황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흔히 순교 하면 신앙을 지키다 피 흘려 죽는 것을 말합니다. 이를 가리켜 ‘적색순교’(赤色殉敎)라고 합니다. 그런데 또 다른 순교가 있어요. ‘백색 순교’(白色殉敎)입니다. 이것은 살아 있는 동안 주님의 뜻에 순종하기 위해 복음과 하나님 나라를 위해 눈물과 땀을 흘리며 사는 것을 의미합니다. 엄밀한 의미에서 이건 순교가 아니죠. 그러나 평소에 이런 삶을 살지 못한 사람이 어떻게 적색 순교를 할 수 있겠습니까? 적색순교를 한 사람들은 예외 없이 평소에 백색순교를 실천한 사람들입니다. 자신의 육신의 본능조차 이기지 못한 사람이 결코 피흘려 순교할 수 없습니다. 그런 뜻에서 백색순교라는 말을 사용하는 겁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순간순간 솟아오르는 육신의 욕망을 십자가를 의지함으로 이겨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 자신을 한 알의 밀알로 드려야 합니다. 이게 바로 헌신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희생은 결코 손해 보는 게 아닙니다. 더 큰 영광과 더 큰 축복 경험합니다. 

    그러면 우리가 밀알 신앙을 구체적으로 어떻게 실천할 수 있을까요? 몇 가지 소개해 드립니다. 

    ① 기도의 밀알 :

    그리스도인이라면 기도해야 되고, 기도하는 게 좋은 줄은 다 압니다. 그러나 기도가 잘 안 됩니다. 왜냐하면 육신의 본능으로는 기도하기 싫거든요. 요리조리 핑계대고 빠져나가려 합니다. 그러나 십자가를 바라보면서 이런 본능을 이기십시오. 그리고 기도하십시오. 그럴 때 비로소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가 나타납니다. 그냥 막연히 축복을 구하고 기적을 바라지 마십시오! 그것은 기복 신앙이요 수복의 신앙입니다. 기도의 수난을 각오해야 비로소 축복의 문이 열리고 기적의 문이 열린다는 사실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에스더 4장을 보면, 바사 왕국에 포로로 집혀 있는 유대인들이 큰 위기를 만나죠. 간신 하만이 모르드개를 미워해서 아예 유대인 전체를 학살하려고 흉계를 꾸밉니다. 그때 모르드개와 유대인들이 금식하며 기도합니다. 그 소식을 들은 에스더 왕후가 고민합니다. 왕에게 탄원하면 좋겠는데 불가능한 상황입니다. 왜냐하면 당시 왕실의 경호법으로는 왕이 부르기 전에 왕후조차 먼저 찾아갈 수 없습니다. 육신의 안일을 위해서는 숨을 죽이고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에스더가 결단합니다. 에4:16 “당신(=모르드개)은 가서 수산에 있는 유다인을 다 모으고 나를 위하여 금식하되 밤낮 삼 일을 먹지도 말고 마시지도 마소서 나도 나의 시녀와 더불어 이렇게 금식한 후에 규례를 어기고 왕에게 나아가리니 죽으면 죽으리이다 하니라” 결국 금식하며 기도하고 나아간 에스더가 승리합니다. 자기도 살고 유대 민족도 살았습니다. 그 이전보다 더 존귀해졌습니다. 자신을 기도의 밀알로 바쳤을 때 하나님의 영광과 축복을 경험할 수 있었던 겁니다. 

    저와 여러분도 마찬가지입니다. 기도의 밀알이 되어야 합니다. 여러분, 가정이 잘 되기를 소원합니까? 교회가 잘 되기를 소원합니까? 나라가 잘 되기를 소원합니까? 세계가 잘 되기를 소원합니까? 그냥 편하게 앉아서 되는 게 아닙니다. 기도의 밀알로 썩어지고 죽어야 합니다. 육신의 안일을 떨쳐 버리고 줄기차게 기도해야 됩니다. 아무쪼록 기도의 밀알이 되셔서 나도 살고 남도 살리는 하나님의 역사를 경험하시기 바랍니다. 

    ② 전도/선교의 밀알 :

    한 영혼이 주님께 돌아와 구원받기까지 얼마나 많은 수고와 헌신이 요구되는지 모릅니다. 내가 구원받은 것도 누군가의 희생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말씀을 준비하면서 저 자신에 대해 생각해 보았습니다. 대학 3학년 때 복음을 받았는데 한 마디로 ‘뺀질이’였습니다. 친구가 전도할 때 너나 믿으라며 핀잔을 주며 여러 차례 거부했습니다. 대학생 선교단체에 인도됐는데 거기서도 많은 형제자매들의 수고를 무시하고 거절했습니다. 핑계를 대고 뛰쳐나왔는데, 계속 인내하면서 전화도 하고 편지도 하고 그랬습니다. 그들의 수고를 보신 하나님께서 강권하셔서 저를 변화시켜주신 겁니다. 

    사도 바울이 예루살렘에 가서 체포되기 전 밀레도를 거쳐 가는데 그곳에서 고별설교를 합니다. 그 가운데 이런 고백을 했죠. 행20:24 “내가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 

    이러한 희생들이 있었기에 오늘 우리에게까지 복음이 다가온 것입니다. 우리나라에 최초로 입국했던 선교사들의 희생을 기억해 봅니다. 최초로 언더우드와 함께 온 아펜젤러 선교사(Henry Gerhart Appenzeller 1858~1902)가 생각납니다. 그분은 배재학당과 정동교회 설립자로 유명하죠. 특히 성경 번역을 위해서도 많은 공헌을 한 분입니다. 그는 군산 앞바다에서 선박 사고로 순교했습니다. 성경 번역을 위한 회의 참석을 위해 제물포에서 배를 타고 목포로 가는데, 군산 앞 바다에서 선박 충돌 사고가 발생했습니다. 본인은 살 수 있었는데 몸을 던져 조선 소녀 한 명을 구하고 순교하고 말았습니다. 어떻게 보면 비효율적인 것 같지만, 한 사람을 구원할 수 있는 사람이 많은 사람들을 구원할 수 있는 겁니다. 사춘기 아들은 아버지의 죽음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하나님을 원망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철이 든 후 하나님의 뜻을 이해하게 되었고 그 역시 이 땅을 위해 헌신합니다. 그가 노년에 신병 치료 차 한국을 떠나면서 유언을 남겼습니다. “내가 죽으면 미국에 묻지 마십시오. 꼭 한국 땅에 묻어주십시오.” 그 유언대로 그는 지금 양화진에 묻혀 있습니다. 그리고 그 옆에 아버지 아펜젤러의 기념비가 서 있습니다. 

    이제 우리도 내가 다른 이들의 헌신으로 구원받은 것처럼 다른 영혼들을 구원하기 위해 전도와 선교의 밀알이 되시기 바랍니다.

       ③ 사랑의 밀알 :

    세상의 이치는 희생이 있어야 그 결과가 생긴다는 사실입니다. 자식이 잘 되는 것도 부모의 희생이 전제됩니다. 공동체가 잘 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가정이 잘 되려면 누군가, 교회가 잘 되려면 누군가, 나라가 잘 되려면 누군가의 희생이 있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이 말했습니다. 갈4:19 “나의 자녀들아 너희 속에 그리스도의 형상을 이루기까지 다시 너희를 위하여 해산하는 수고를 하노니” 

    옛날 영국의 웨일즈 남부 지방에 눈보라가 치던 날이었습니다. 한 여인이 길에 쓰러져 얼어 죽은 채로 발견됐습니다. 민망하게도 옷을 홀딱 벗은 모습이었습니다. 그 옆에는 젖먹이 아이가 작은 소리로 울고 있었습니다. 그 여인이 아이를 위해 옷을 다 벗어 덮어주고 자신은 얼어 죽은 겁니다. 그 아이가 철이 들자 양부모가 그 사연을 들려주었습니다. 그는 친부모로부터 아무 것도 받은 게 없었지만, 그 사랑을 받았기에 훌륭한 크리스천으로 자랐습니다. 그가 바로 1차 세계대전 당시 영국의 수상을 역임한 데이비드 로이드 조지(David Lloyd George 1863~1945)입니다. 부모가 사랑의 밀알이 되는 한 자식은 절대로 망하지 않습니다. 

    오늘 이 시대는 사람들이 무조건 편안함과 안일함만을 추구합니다. 그 가운데 살다보니까 우리 자신도 모르게 이기적이 되어가고 육신의 욕망에 이리저리 끌려 다니게 됩니다. 이 사순절에 나 자신 속에 있는 육신의 욕망을 죽이고 한 알의 밀알이 됨으로 나도 살고 많은 사람들을 살리는 풍성한 열매가 있기를 소원합니다.



    역설들 / 앙리 드 뤼박 추기경 / 곽진상 신부 옮김 / 가톨릭출판사

    프랑스의 대신학자 앙리 드 뤼박(Henri de Lubac, 예수회, 1896~1991) 추기경의 「역설들」이 출간됐다. 400여 쪽을 관통하는 핵심 개념은 책의 제목이기도 한 ‘역설’이다.

    “패러독스(paradoxe)! 역설(逆說) 또는 모순(矛盾)으로 번역되는 이 단어는 그리스어 접두사 파라(~위에, ~옆에, ~와 반대로)독사(의견, 신조)의 합성어로서, 어원적으로 볼 때 서로 대립하는 의견이나 주장을 일컫는다. 일상에서 자주 접하는 역설은 우선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게 하는 특성이 있다.”(8쪽)

    그러나 모든 대립이 역설은 아니다. 역설은 또 아직 드러나지 않은 신비적인 특성이 있다. 그리스도교의 역설적 신비는 비이성적이라기보다 초이성적이다. 이성의 틀에 갇힐 수 없는, 곧 이성을 넘어서는 초월적 특성 때문이다.

    “그리스도교의 가장 근본적인 교리이며 핵심인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 자체가 역설이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이시면서 동시에 인간이시다. (중략) 그리스도의 육화는 영원성이 시간 속에 개입한 역사 내 유일한 사건이다. 시공을 초월하는 존재가 인간의 시간과 공간 속에 자신을 드러냄으로써 역사를 완전히 새롭게 변모시켰다는 것이 그리스도 신앙이다.”(13쪽)

    신학은 역설을 신앙의 근본적 특성으로 인식하고 수용한다. 그리스도교 신앙 자체가 역설이기 때문이다. 달리 말하면, 역설은 그리스도 신앙 이해의 열쇠다. 저자는 신학의 일반적 정의로 알려진 ‘신앙의 이해’를 넘어 ‘신앙을 통한 이해’를 강조한다.

    “가장 심오한 신앙에서 가장 철저한 무신론으로 가는 데에는 머리카락의 굵기만 한 거리가 있을 뿐이다. 그러나 이 굵기는 심연이다. 신랑은 신부를 ‘그의 목에 있는 머리카락 한 올’만으로도 알아본다.”(331쪽)

    드 뤼박을 연구한 신학자로 수원가톨릭대학교 총장을 지낸 곽진상(수원교구 서판교 주임) 신부는 “합리주의적 사고방식에 함몰되어 이해를 넘어서는 역설을 없애려 하지 말고, 오히려 역설을 역설로 존중하고 지키는 일이 신학의 중요한 책무”라며 “한국 교회의 신학이 발전하고 신자들이 영적으로 성장하길 바라는 마음으로 번역에 임했다”고 전했다.

    이번에 출간된 「역설들」은 드 뤼박 추기경이 펴낸 「역설들Paradoxes」(1946), 「새로운 역설들Nouveaux paradoxes」(1955), 「다른 역설들Autres Paradoxes」(1994)을 하나로 엮은 책이다. 저자의 사상을 잘 알 수 있는 내용과 제2차 바티칸 공의회 관련 미간행 자료까지 더했다.

    1929년부터 리옹가톨릭대학교에서 신학 교수로 재직했던 저자는 20세기 중반에 나타난 ‘새로운 신학’의 주창자로 혹독한 의혹에 시달리다 1964년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준비위원으로 임명되며 정통성을 인정받았다.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은 1983년에 그를 추기경으로 임명하며 당대 가장 뛰어난 신학자 중 한 사람이라고 공표했다.



    성경의 패러독스, 그 특별한 지혜
    워렌 위어스비 | 장택수 역 | 디모데 | 211쪽 | 13,000원

    유명 기독교 작가이자 목회자인 워렌 위어스비(Warren Wiersbe)가 2일(현지시간) 89세의 나이로 별세했다.
    2019년 5월 2일 

     ‘목회자들의 목회자’로 알려진 위어스비 목사는 약 150권의 책을 저술했다. 특히 갈보리 교회에서 사역하며 10여년에 걸쳐 저술한 ‘핵심 성경 연구’와 설교의 핵심 원리를 전달하는 ‘설교의 정석’ ‘말씀으로 채우는 하루’ 등이 유명하다.

    영국 크리스천투데이에 따르면, 그는 유스포크리스천(Youth for Christ) 집회에서 빌리 그래함 목사의 연설을 듣고 회심한 후, 1951년 일리노이 주 롬바르드에 소재한 북침례신학교에서 목사 안수를 받았다.

    이후 1957년까지 인디애나 주 시카고 동부에 소재한 중앙침례교회에서 목회를 시작했다.

    1961년부터 10년 동안, 켄터키 주 커빙턴에 위치한 갈보리침례교회에서 목회를 했으며, 1971년부터 1980년까지 시카고에 소재한 무디기념교회에서 목회를 시작했다.

    무디기념교회에서 전한 그의 설교는 교회에서 운영하는 라디오 채널을 통해 전파를 탔으며,  ‘월간 무디’에서 목회자들을 위한 칼럼을 저술하며 목회자들의 멘토로 활동하게 됐다. 

    밥티스트프레스에 따르면, 무디기념교회를 떠난 이후에도 그는 계속 글쓰기를 계속하면서 라디오를 통해 자신의 설교와 가르침을 공유했다. 특히 ‘백 투 더 바이블’(Back to the Bible)이라는 유명한 라디오 프로그램을진행하며 다양한 활동을 했다.

    그의 소천 소식이 알려진 후, 많은 이들이 SNS에 애도를 표했다.

    제리 바인스 남침례회 전 총회장은 “나의 위대한 멘토이자 친구인 워렌 위어스비 박사가 지난 5월 2일 하늘로 갔다. 여기 손자의 헌사가 있다. ‘할아버지는 제게 하나님의 말씀을 어떻게 자세하게 설명하는지 가르쳐주신 분입니다’”라는 글을 남겼다.

    무디교회 어윈 루처 목사는 “그분은 이미 ‘잘 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주인의 기쁨에 참여하라’는 말씀을 들었을 것이라고 확신한다. 그리고 이 땅에 남겨진 우리에게 그분의 유산은 계속 이어질 것”이라고 말했다.

    리 스트로벨 작가는 “150권의 책을 저술한 워렌 위어스비 박사가 90세 생일을 며칠 앞두고 주님 곁으로 가셨다. 나 역시 그분의 책으로 유익을 얻은 수 많은 사람들 중 한 명이다”라고 말했다.

    <성경의 패러독스, 그 특별한 지혜>
    원제는 ‘Truth on Its Head: Unusual Wisdom in the Paradoxes of the Bible’

    워렌 위어스비의 글에는 성경의 흔적이 가득합니다. 직간접 인용뿐 아니라, 참고 구절도 끊임없이 제공됩니다.

    특히 이 책은 성경이 말하는 역설 열다섯 가지를 추려 설명하는 방식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역설처럼 보이는 성경 구절뿐 아니라 그 역설 가운데 특별한 지혜를 발견하도록 계속해서 성경의 증언을 인용하고 설명합니다.

    때로는 성경에 나오는 사건이나 인물을 예시로 들어 진리를 확증합니다.

    이것이 이 책의 큰 장점 중 하나라고 생각하는데, 어떻게 모순처럼 보이는 성경의 역설적 가르침이 성경의 다른 증언에 의해 참이 되고 진리가 되는지, 우리에게 분명하게 설명해준다는 점입니다.

    특별히 오늘날 성경의 역설에 반대하는 세상의 사상(예, 높아지려는 자가 높아진다)이 지배적이라는 점, 그것이 그리스도인의 생각을 끊임없이 위협한다는 점에서, 위어스비의 이 책은 성경을 근거로 성경의 권위를 가지고 역설을 살아내야 할 우리에게 확실한 메시지를 남깁니다.

    그래서 가령 우리는 낮아지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것이 성경이 분명히 말하는 높아지는 방법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이 책은 두 가지 점에서 독창적이라 할 수 있습니다. 

    첫째로 주제가 독특합니다. 

    바로 역설이라는 점인데, 저자는 들어가는 글에서 다음과 같이 역설이 갖는 의미를 설명합니다.

    “역설은 반대되기 때문에 언뜻 보면 말이 안 된다. 그래서 우리는 역설적인 말에 논리적 모순이 있음을 감지하면서도 호기심을 느낀다. 그런데 이 역설을 곰곰이 묵상하면 인생의 중요한 단면을 깊이 보고 새로운 교훈을 얻을 수 있다. 역설은 훌륭한 교사다(7쪽)”.

    두 번째로 표현이 남다릅니다

    처음에 소개한 것처럼 위어스비는 소위 명언 제조기처럼 오늘날 우리에게 필요한 잠언을 남기는데 탁월한 재능이 있습니다. 때로는 다른 사람의 말을 사용해서라도 확실하게 마음에 새길 수 있는 교훈을 제공합니다. 몇 가지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강함이 강함인 줄 알면 약함이 되지만, 약함이 약함인 줄 알고 주 여호와를 온전히 신뢰하면, 그 약함은 강함이 되는 것이다(27쪽)”.

    “자신의 명성과 성품이 거리에서 만나면 서로 알아보지 못할 사람이 많다(123쪽)”.

    심지어 그의 머그잔에 있는 문구까지 사용합니다.

    “명성을 얻는 것은 한 순간이지만 성품을 얻으려면 평생이 걸린다(123쪽)”.

    이처럼 이 책을 읽다 보면 수시로 받아 적고 싶은 교훈이 가득합니다.

    또한 독자들이 성경에 나오는 역설이 이해되지 않는다면, 이 책은 분명 그 부분을 해결해줄 유익을 제공할 것입니다.

    성경에 나오는 역설이 가르치는 교훈을 따르기 힘들고, 그렇게 해야 할 동기가 충분히 제공되지 못하고 있다면, 이 책은 생각을 교정하고 삶을 바로 잡는 일에 유익을 가져다줄 것입니다.

    특히 저자가 풍성하게 인용한 말씀을 같이 살펴본다면, 분명히 더 큰 유익을 얻을 수 있을 것이라 확신합니다(11쪽).

    또한 이 책이 갖는 장점은 이해하기 쉽다는 것입니다.

    저자가 말한 것처럼 역설은 언뜻 봐서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하지만 저자는 그것을 잘 풀어 설명했고, 그래서 이해하기 쉽습니다.

    익숙한 성경 구절이나 성경의 이야기를 주로 사용하기 때문에, 성경을 잘 아는 사람이나 많이 들어본 사람에게는 이해하기 더 쉬운 책이라고 생각합니다.

    특히 저자가 예화나 비유 등 여러 방법으로 강조하여 설명하기 때문에, 충분히 저자가 말하려는 바를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개인적으로는 아주 가끔 저자의 탁월한 표현이나 적절한 비유에 감탄하다가, 다음 문장으로 자연스럽게 이어지지 못하고 시간을 들여 다시 집중하려고 애쓴 적이 있습니다.

    그만큼 쉽고 빠르게 읽을 수 있다 해서 대충대충 읽을 수 있는 책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중간 중간에 오래 묵상하며 깊이 그 문장의 의미를 우려내 충분히 맛볼 수 있는 책이라고 생각합니다.

    끝으로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저자가 성경이 말하는 역설 안에 감춰진 특별한 교훈을 제공하기 원했고, 그 목적을 충분히 달성했다고 생각합니다.

    저자가 다루지 않은 성경의 역설이 남아 있지만, 성경의 주요한 역설은 충분히 다뤘고 그 의미를 확실하게 설명했습니다.

    역설을 대하는 저자의 설명 방식은 독자로 하여금 아직 다루지 않은 성경의 역설에 강한 호기심을 갖게 하고 그 특별한 지혜를 탐구할 길로 인도합니다.

    저자 워렌 위어스비는 본서에서 성경의 패러독스가 가르치는 그 특별한 지혜, 즉 여호와 안에서 두려움이 즐거움이 될 수 있다는 것, 약함이 도리어 강함이 된다는 것, 주는 것보다 받는 것이 하나님 앞에서 복된 이유, 높아지는 비결인 겸손, 우리의 어리석음이 어떻게 하나님의 지혜가 되는지 등 흥미롭고 유익한 교훈을 성경을 근거로 성경의 권위를 가지고 충분히 설명해 주었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에 필요한 특별한 지혜가 이 역설에 담겨 있으며, 무엇보다 예수 그리스도가 그 역설을 가르치셨을 뿐 아니라 역설적인 삶을 사셨다는 것을 분명히 보여주었습니다.

    마지막으로 저자가 직접 설명한 이 책의 사용법을 인용하며 서평을 마치겠습니다.

    “이제 성경의 15가지 역설에 담긴 의미를 살펴보고, 우리 삶의 모든 영역에서 신앙적으로 성숙하는 데 어떤 도움이 되는지 알아보려고 한다. 역설을 소개하는 순서에는 아무런 의도가 없기 때문에 관심 있는 내용부터 읽어도 좋다.

    다만 성경을 곁에 두고 내가 언급만 하고 기술하지 않은 구절도 찾아 읽기 바란다. 모든 구절이 중요하므로 그냥 넘겨서는 안 된다(11쪽)”.

    신앙의 역설, 인생의 역설

  • 고린도후서  6:8-10
  • 영광과 욕됨으로 말미암으며 악한 이름과 아름다운 이름으로 말미암으며 속이는 자 같으나 참되고
  • 무명한 자 같으나 유명한 자요 죽은 자 같으나 보라 우리가 살고 징계를 받는 자 같으나 죽임을 당하지 아니하고
  •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아무 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로다.

  • 기독교 신앙을 가리켜 역설의 종교, 역설의 진리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의 인생 역시 역설입니다. 
    기독교 신앙의 핵심인 역설은 인간의 상식과 세상의 눈으로 볼 때에는 이해될 수 없는 걸림돌입니다. 
    지는 게 이기는 것이고, 버리는 것이 얻는 것이며, 죽는 것이 곧 살게 되는 것이다. 
    세상에서 말하는 진리와는 정반대입니다. 
    논리적으로 맞지 않는 말 같습니다. 
    지는데 어찌 이길 수 있습니까? 
    버리는 데 어찌 얻을 수 있습니까? 
    한번 죽으면 끝인데 어찌 살 수 있습니까? 
    보편적인 지식과 상식으로 이해할 수 없는 세계관입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의 신앙이 이 역설에 바탕을 두고 있고, 우리네 인생 역시 역설이 없으면 인생이 해석이 되질 않는다는 점입니다. 세상에서 가장 큰 역설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인간의 몸을 입고 오셨다는 것은 세상의 보편적 상식으로 받아들일 수 없는 지혜입니다. 극악무도한 죄인을 처형하는 십자가가 구원의 상징이 된다는 것은 대단한 역설입니다. 사람의 지혜로서는 받아들일 수 없는 것입니다. 세상의 권력에 의해 처참하게 짓밟힌 패배의 상징 십자가가 우리를 죽음과 죄에서 해방시키기는 승리의 상징이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 상황을 리얼하게 상상해 보십시오. 참 우스꽝스럽지 않습니까? 눈에 보이는 모든 상황은 온통 패배 투성이입니다. 예수도 패배자고, 예수의 메시지를 전하는 사도들도 패배자의 신세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가 승리자라고 믿고 말한다는 게 참 웃기지 않습니까? 마치 이런 것하고 비슷합니다. 날마다 빌어먹는 거지가 자기 아버지는 재벌이라고 말하는 것이나 크게 다를 바가 없습니다.

    예수님이 온 세상의 구주가 되신다는 것은 자신을 못 박는 유대의 종교 권력과 로마의 정치권력을 짓밟음으로써가 아니라 십자가의 패배를 통해서였습니다. 원수를 희생제물 삼아서가 아니라 자신을 제물로 드림으로써 이루신 것입니다. 이것은 인류 역사상 유일무이한 사건입니다. 힘과 승리를 숭배하고 찬양하는 세상에서 약함과 고난을 통해 보여준 최고의 역설입니다. 세상의 상식을 완전히 뒤집는 기막힌 역설이고, 역전입니다. 그리고 이런 모순과 역설이 바로 기독교 신앙의 진수이고 복음의 핵심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이 하신 일을 샅샅이 살펴보십시오. 모순과 역설 아닌 것이 없습니다. 인생도 지혜의 눈을 가지고 자세히 관찰해 보면 역설입니다. 인류 역사상 가장 뛰어난 지혜를 가졌던 솔로몬은 전도서에서 여섯 가지 역설의 진리를 말씀합니다. 이름이 기름보다 낫고, 재산보다 명예를 지키라. 초상집에 가는 것이 잔칫집 가는 것보다 낫고, 떠들썩한 분위기보다 초상집에서 자기 성찰의 기회를 삼으라! 슬픔이 웃음보다 낫고, 인생의 참된 의미는 웃음보다는 눈물 속에 있으니 눈물을 흘리며 씨앗을 뿌려라 기쁨으로 단을 거둔다. 지혜자의 책망을 듣는 것이 우매자의 노래를 듣는 것보다 낫고, 자기 마음을 알아주는 유행가를 듣는 것보다 지혜자의 책망을 듣을 때에 영혼의 기쁨이 있다. 일의 끝이 시작보다 낫고, 시작이 아무리 좋아도 끝이 좋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다. 참는 마음이 교만한 마음보다 낫고, 분노를 참고 이겨서 하나님의 의를 이룬다. 이처럼 우리 인생의 지혜도 역설로 가득 차 있습니다.

    예수님의 팔복 역시 역설입니다. 부자가 복이 있다고 생각하는 세상에서 가난한 사람이 복 있다. 웃는 사람이 복 있다 말하는 세상에서 애통하는 사람이 복 있다. 약삭빠르고 거머쥐는 사람이 떵떵거리고 사는 세상에서 온유한 사람이 복 있다. 힘 있는 사람이 정의마저 쥐락펴락 세상에서 의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이 복 있다. 가난한 사람을 돌아보지 않고 자기만 가는 사람이 출세하는 세상에서 긍휼히 여기는 자가 복 있다. 술수가 능한 사람이 성공하는 세상에서 마음이 청결한 자가 복 있다. 다른 사람의 어려움에 연루되지 않는 것이 지혜라고 말하는 세상에서 화평케 하는 사람이 복 있다. 어려운 일 겪지 않는 사람을 곱다고 말하는 세상에서 의를 위하여 박해받는 사람이 복 있다 말씀하셨습니다. 세상 사람들에게 이런 것들을 절대로 복이라 말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이렇게 산다는 것은 복 없는 사람들의 구체적인 실상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것을 복 중에 복이라고 말씀합니다. 엄청난 모순이고 역설입니다. 여기에 세상 지혜와 하나님의 말씀의 충돌이 일어납니다. 문제는 다른 사람의 인생 속에서가 충돌이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주인삼고 살아가려는 내 인생 한복판에서 충돌한다는 점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복음 안에 내재되어 있는 이 모순과 역설에 걸려 넘어집니다. 유대인들은 십자가가 무능력한 것이라고 넘어졌습니다. 헬라인들은 십자가가 어리석은 것이라고 넘어졌습니다. 오늘 이 땅을 살아가는 사람들은 예수의 십자가가 인생살이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넘어집니다. 충분히 이해가 됩니다. 현실의 눈으로 보면 그게 사실입니다. 십자가는 어리석은 것이고 무능력한 것이니까 사람들이 걸려 넘어지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합니다. 인생의 도움이 되지 않을 것 같으니 당연히 걸려 넘어집니다. 문제는 다른 사람이 아니라 오늘의 그리스도인입니다. 다른 그리스도인 말고 우리 자신을 살펴보십시오. 우리는 어떻습니까? 예수가 지신 십자가는 자랑스럽게 내세우지만 내가 져야하는 십자가는 부담스러워하지 않습니까? 모순과 역설로 가득한 십자가를 삶으로 살아내는 일을 피하고 싶지 않습니까? 그리하여 교회도 예수의 십자가는 말하지만 자신이 져야하는 십자가는 말하지 않고 축복만 말하는 것 아닙니까? 하지만 생각해보십시오. 그리스도인이 어떤 사람입니까? 이 세상의 지혜로 사는 사람이 아니라 십자가의 지혜로, 역설의 지혜로 사는 사람들 아닙니까? 그런데 이 역설을 포기하고 세상 지혜를 따라서 산다면 믿음의 역사는 결코 일어나지 않습니다. 오늘의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이 사회의 지탄을 받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십자가의 지혜를 말하지만 십자가의 역설로 살지 않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절대 잊어서는 안 됩니다. 그리스도인과 교회는 세상과의 경쟁에서 승리하기 위해 부름 받지 않았습니다. 세상보다 더 큰 힘을 휘두르고, 세상보다 더 높은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부름 받지 않았습니다. 그리스도인과 교회는 제물이 되기 위해 부름 받았습니다. 십자가 복음을 증거 하는 일을 위해 부름 받았습니다. 그리고 십자가의 복음은 자기 존재를 과시함으로써가 아니라 자기 존재를 숨김으로써, 강함으로써가 아니라 약함으로써, 부유함으로써가 아니라 가난함으로써, 이김으로써가 아니라 짐으로써 증거 됩니다. 바로 이것이 그리스도인과 교회가 짊어져야 할 역설이고 모순입니다. 그런데 저를 포함해서 모든 사람에게는 힘을 사랑하는 권력 의지가 있습니다. 자기 존재를 증명하고 과시하고자 하는 자아 욕구가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에게는 하나가 더 있습니다. 나의 약함이 곧 주님의 약함이요, 나의 승리가 곧 주님의 승리라는 생각이 깊이 박혀 있습니다. 그래서 주님을 위해서라도 나는 강해야 하고 승리해야 한다는 생각이 보편화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반대로 말씀하십니다. 너의 약함이 나의 강함을 드러내고, 너의 아픔이 나의 승리를 드러낼 것이라고 말입니다. 모순이고 역설입니다. 그때에 교회와 그리스도인은 세상에서 감당하지 못하는 사람이 됩니다.

    바울은 이런 그리스도인의 신비와 역설을 깊이 알고 있었습니다. 바울은 그 신비를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는 속이는 자 같으나 참되고, 무명한 자 같으나 유명한 자요, 죽은 자 같으나 보라 우리가 살아있고, 징계를 받는 자 같으나 죽임을 당하지 아니하고,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아무 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로다.” 그렇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이런 역설의 신비를 아는 사람들이고, 이렇게 사는 사람들입니다. 우리가 속이는 자 같으나 참되다는 것을 압니다. 무명한 자 같으나 유명한 자라는 것을 압니다. 죽은 자 같으나 살아있고,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아무 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라는 것을 압니다. 이 신비, 이 역설을 알기 때문에 현실의 고난과 가난과 약함에 넘어지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도 바울이 걸어갔던 것처럼 역설의 진리를 믿고 역설적인 인생을 살아야 합니다.

    우리는 이 세상이 이성과 합리적인 법칙으로만 굴러간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만나는 일상은 우리의 논리처럼 척척 맞아 떨어지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사람의 생각은 논리적인데, 우리네 인생은 결코 논리적이지 않습니다. 쉽게 말씀 드리면 1+1=2, 2*2=4라는 수학의 공식처럼 세상의 모든 일이 딱딱 맞아 떨어져야 하는데 10 나누기 3이라는 난제가 등장했습니다. 답이 3하고 0.3333이 계속됩니다. 문제는 풀려지지 않는 0.333어떻게 하겠습니까?

    역설이란 이렇게 이성의 논리가 도저히 적용되지 않는 사건을 풀 수 있는 열쇠입니다. 오늘 우리는 신앙 안에서 인생의 역설을 푸는 열쇠를 선물로 받았습니다. 역설은 이성과 상식을 뛰어넘는 하늘의 지혜입니다. 역설은 세상의 논리로는 이해할 수 없는 세계에서 통하는 진리입니다. 우리의 논리로 풀 수 없는 0.333이 많이 있습니다. 예를 든다면, 만취 음주운전자 모는 차가 길가 식당으로 돌진해 들어왔습니다. 음주운전을 한 사람은 즉사를 했고, 식당에서 밥을 먹던 사람들이 많이 다쳤습니다. 식당에서 밥을 먹던 사람 중에 내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사고를 낸 사람은 자신이 음주운전을 했기 때문에 사고를 냈고, 죽거나 다치는 것은 이성적으로 이해가 됩니다. 그러나 식당에서 밥을 먹다가 다친 나는, 아무런 잘못이 없는 사람은 왜 다쳐야 합니까? 이성적으로 이해가 됩니까? 사람들은 이해되질 않는 일을 당할 때, 이성과 합리의 논리가 작동되지 않을 때 사람들은 재수라는 말을 만들었습니다. 그냥 재수가 없어서 당한 일이라고 스스로를 위로합니다. 논리로 이해되지 않는 일을 자꾸만 생각하니 머리가 아프니 운이나 재수에 맡겨서 잊으려하는 것입니다. 사실 인생에 있어서 논리적으로, 이성적으로, 합리적으로 모든 것이 다 설명이 되고, 이해가 된다면 종교가 필요 없고 신의 도움 없이 인간들끼리 잘 먹고 잘 살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참으로 안타까운 사람은 이성의 논리만으로 세상을 이해하려는 사람입니다.

    고린도후서 12장에 보면, 사도 바울이 자신의 몸에 있는 질병 때문에 주님께 기도한 내용이 나옵니다. 바울은 이 질병이 자신에게서 떠나게 해달라고 주님께 세 번이나 절박하게 간구했습니다. 그런데 그가 받은 주님의 응답은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입니다. 사도 바울은 주님의 말씀을 새기고 또 새겼을 것입니다. 이것이 무슨 말씀인가? 무슨 뜻인가? 그 결과 자신의 연약함 때문에 주님을 더욱 붙잡고 의지하게 되고, 그때 자신에게 예수님의 능력이 머물러 온전하게 나타난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반대로 자신이 강하고 잘났다고 생각하고 자신의 능력으로 뭔가를 하려고 할 때에는 예수님을 찾지 않고 의지하지 않기 때문에 예수님의 능력이 자신에게 머물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은 것입니다. 그래서 자신의 약함을 통해서 그리스도의 능력이 온전히 드러난다는 것을 깨닫고 경험했습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개입, 예수님의 역사, 예수님의 은혜를 통한 역설적 경험, 역설적 체험입니다. 이렇게 그가 깨달은 '약한 그때가 곧 강한 때다'라는 역설의 신앙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 결과, 사도 바울은 자신의 약한 것들, 능욕 받는 것, 궁핍, 박해, 곤고를 기뻐하였습니다. 그런 때에 자신은 약하고 무능력하지만 예수님은 더욱 드러나고 예수님의 능력은 더욱 강하게 역사하시기 때문입니다.

    본문 말씀은 바울은 자신의 역설적 경험들을 서술함으로써 고린도교회 교인들에게 신앙생활의 깊이를 더해주고 있습니다. 주석학자들은 이 본문 말씀을 감동적인 역설, 아름다운 역설이라고 말합니다. “우리는 속이는 자 같으나 참되고, 무명한 자 같으나 유명한 자요, 죽은 자 같으나 보라 우리가 살아 있고, 징계 받는 자 같으나 죽임을 당하지 아니하고,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아무 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로다” 바울은 다른 사람들이 이성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역설의 신앙을 고백하였습니다. 그리고 역설의 인생을 살았습니다. 사도 바울은 본문 말씀을 통해 우리들에게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겉으로 보기에 “하나님의 자녀들, 그리스도인들, 하나님의 사역자들은 얼핏 보기에는 속이는 사람 같지만, 복음의 진리, 영생의 진리, 하나님의 진리를 전하는 참되고 진실한 사람입니다. 겉으로는 무명한 사람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하나님이 알아주시고, 예수님께서 인정하시는 유명한 사람입니다. 때로는 죽어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 속은 예수님으로 인해 살아있습니다. 징계를 받아 고난 속에서 고생하면서 살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예수님 안에서 죽지 않고 하나님의 평강을 누립니다. 근심하며 살 것 같지만, 예수님 때문에 기뻐하며 삽니다. 가난한 사람 같지만, 예수님을 구주로 모셨기 때문에 많은 사람의 영혼과 삶을 부요하게 합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아무것도 없는 사람 같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소유했기에 가장 가치 있는 것, 영원한 것, 모든 것을 가진 사람입니다.”

    바울은 가난해 보이지만 절대로 가난하지 않는 사람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별 볼일 없어 보이는 사람이지만 실제로는 세상이 감당할 수 없는 사람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우스워 보이는 사람이지만 결코 우습게봐서는 안 될 사람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성도 여러분, 누가 그런 사람입니까? 바로 오늘 이 자리에서 주님을 주인으로 고백하는 저와 여러분이 이렇게 당당하고 멋있는 사람입니다. 역설의 진리는 이 세상에서 경험되기도 하지만,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에서 완성이 됩니다. 예수님은 공생애 기간 중에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하셨습니다. 하나님 나라가 가까웠다! 하나님의 나라는 이런 것이다! 하나님의 나라의 원리와 비밀을 말씀하셨습니다. 때가 되면 하나님의 나라가 도래할 것임을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세상의 기존 질서가 뒤집히는 날이 올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나라라는 개념은 세상에 질서와 반대되는 것이고 세상의 질서를 대체하는 개념입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 나라를 말씀하실 때에는 우리는 단지 저 멀리 높이 있는 하늘에 있는 나라만을 생각하지 말고, 세상의 질서와 반대되고 세상의 질서를 넘어서는 하나님이 다스리는 영역에서 하나님께서 이루시는 질서를 생각하시며 말씀하셨습니다.

    지금은 이 말씀이 이 세상에서는 앞뒤가 안 맞고 논리적이지 않은 것 같은 역설의 진리이지만, 마침내 새로운 세상, 다가오는 세상, 하나님의 통치가 완전하게 이루어지는 세상에서는 그대로 이루어질 진리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땅에 살면서 역설의 신앙을 소중히 갖고 역설의 진리가 완성되기를 소망해야 합니다. 역설의 진리의 말씀은 겉으로의 기준과 평가와 안으로의 기준과 평가가 분명히 다르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역설의 진리의 말씀은 보이는 세상의 기준과 평가와 보이지 않는 세상의 기준과 평가가 분명히 다르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역설의 진리의 말씀은 물질세계의 기준과 평가와 영적인 세계의 기준과 평가가 분명히 다르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역설의 진리의 말씀은 현세의 기준과 평가와 내세의 기준과 평가가 분명히 다르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역설의 진리의 말씀은 순식간에 지나가는 세상의 기준과 평가와 영원한 세상의 기준과 평가가 다르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어떻게 평가하시느냐, 하나님의 나라의 영원한 가치가 무엇이냐를 추구하는 그리스도인이라면 이 세상에서 역설적인 삶을 살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역설적인 진리를 따라 살아가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역설의 신앙을 가지고 삽니다. 역설의 신앙을 소중히 여깁니다. 역설의 신앙으로 성숙해집니다.

    요한복음 12장 24절에,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이 생명의 역설입니다. 성경에 나오는 신앙의 영웅들, 신앙의 선배들은 역설의 신앙으로 산 사람들입니다. 

    세계 교회사와 우리나라 교회사에 기록된 위대한 신앙인들은 역설의 신앙으로 산 사람들입니다. 
    1866년 8월 27일에 대동강 평양의 한 포구에 큰 배 한척이 정박했습니다. 
    이 배 이름은 제너널 셔먼호입니다. 이 배는 조선의 개항과 통상을 요구하며 총과 포를 쏘아대었습니다. 그러다가 이 배는 9월 2일에 양각도 모래톱에 좌초되었는데, 이 배에서 탈출을 시도하던 영국인 토마스 선교사도 스물 일곱 살의 꽃다운 나이에 제대로 복음 한번 전하지 못하고 안타까운 순교를 하고 말았습니다. 
    우리나라에 내한했던 첫 번째 선교사 아무런 활동도 하지 못하고 죽었던 것 같습니다.

    그때 토마스 선교사를 죽인 병사 박춘권은 이렇게 회고했습니다. 
    “내가 서양 사람을 죽이는 중에 한 사람을 죽인 것은 내가 지금 생각할수록 이상한 감이 들었다. 
    내가 그를 찌르려고 할 대에 그는 두 손을 마주잡고 무슨 말을 한 후 붉은 베를 입힌 책을 가지고 웃으면서 받으라고 권하였다. 
    내가 죽이기는 하였으나 이 책을 받지 않을 수가 없어서 받아왔노라.” 
    토마스를 선교사를 죽인 박춘권은 한문으로 된 성경을 영문주사였던 박영식에게 건넸습니다. 
    박영식은 종이가 귀하던 시절 한문 성경 종이를 떼어서 도배를 했습니다. 
    나중에 최치량이라는 사람에게 이 집을 팔았습니다. 
    최치량은 이집을 개조하여 여관으로 영업을 했습니다. 
    이후 사무엘 마펫, 마포삼열 선교사가 평양에 첫날밤을 보냈는데 공교롭게도 토마스 선교사가 던져준 성경으로 도배한 방에서 숙박을 했습니다. 
    가만히 보니 예사 벽지가 아니라 성경이었습니다. 
    사무엘 마펫 선교사는 이집을 매입하여 널다리골 교회를 세웠습니다. 
    이 교회는 나중에 이름을 바꾸어 장대현교회가 되었습니다. 
    1907년 길선주 목사님이 대부흥운동을 일으켰던 그 유명한 교회입니다. 
    또한 토마스 선교사를 죽인 박춘권과 여관집 주인 최치량은 장대현 교회 장로가 되었습니다. 
    사람이 아무리 잘 짜맞춘 드라마라도 이런 역사가 일어날 수 없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드라마입니다. 
    이 하나님의 드라마를 우리는 역설의 신앙이요, 역설의 인생이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기독교는 역설의 종교입니다. 
    우리의 신앙은 역설의 신앙이고, 우리의 인생도 하나님의 역설이 아니고는 이해할 수 없는 신비로 가득 차 있습니다. 
    세상적으로 똑똑하고, 타산적이고, 이기적인 사람은 역설의 진리를 받아드리지 못합니다. 
    세상적 관점에서 바보가 되는 것이 믿음입니다. 
    세상적 관점으로는 바보 같아 보일지 모르지만 역설의 신앙을 가진 사람은 예수님 안에서 하늘의 지혜로 살아가고, 예수님의 능력으로 온전해 지고, 예수님으로 인해 모든 것을 가진 사람으로 살아갑니다. 

    여러분은 속이는 자 같지만 참된 사람들입니다. 
    무명한자 같지만 유명한 사람들입니다. 
    죽은 자 같지만 살아 있고, 징계 받는 자 같지만 죽임을 당하지 않습니다. 
    근심하는 사람 같지만 항상 예수님 때문에 기뻐합니다. 
    가난한 사람 같지만 다른 사람을 부요하게 해 주는 사람입니다. 
    아무 것도 없는 사람 같지만 예수님으로 인해 모든 것을 가진 사람입니다.

    눈에 보이는 가치관을 따라서 사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영원토록 행복하게 하는 역설의 신앙으로 역설의 인생을 살아가십니다. 
    그리하여 세상 감당할 수 없는 당당함으로 멋진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시기를 바랍니다.




    출애굽기 21:23-25
    그러나 다른 해가 있으면 갚되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데운 것은 데움으로, 상하게 한 것은 상함으로, 때린 것은 때림으로 갚을찌니라.


    레위기 24:17-22
    사람을 쳐 죽인 자는 반드시 죽일 것이요
    짐승을 쳐 죽인 자는 짐승으로 짐승을 갚을 것이며
    사람이 만일 그 이웃을 상하였으면 그 행한 대로 그에게 행할 것이니
    파상은 파상으로,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을찌라 남에게 손상을 입힌 대로 그에게 그렇게 할 것이며.
    짐승을 죽인 자는 그것을 물어 줄 것이요 사람을 죽인 자는 죽일찌니
    외국인에게든지 본토인에게든지 그 법을 동일히 할것은 나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임이니라.

    신명기 19:21
    네 눈이 긍휼히 보지 말라 생명생명으로,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으로, 발은 발로니라. 

    마태복음 5:38-44
    또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으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악한 자를 대적지 말라 누구든지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 대며.
    또 너를 송사하여 속옷을 가지고자 하는 자에게 겉옷까지도 가지게 하며.
    또 누구든지 너로 억지로 오리를 가게 하거든 그 사람과 십리를 동행하고
    네게 구하는 자에게 주며 네게 꾸고자 하는 자에게 거절하지 말라
    또 네 이웃을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동태복수법(同態復讐法)

    '똑같이 보복한다'라는 의미의 동태복수법(同態復讐法, lex talionis) 문장 중 가장 유명한 글귀이며 인과응보와 비슷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고바빌로니아의 왕 함무라비가 만든 성문법 〈함무라비 법전〉을 설명하는 문구로도 유명하다.

    형벌의 내용이 피해의 정도와 동일해야 한다는 원칙 

    함무라비 법전 (Hammurabi Code)은 고대 바빌로니아의 왕 함무라비 (Hammurabi)가 기원전 18세기경에 제정한 법전으로, 
    눈에는 눈, 이에는 이로 대표되는 동태복수법 (同態復讐法, Lex Talionis)을 명시한 가장 오래된 법률 문서 중 하나입니다. 

    렉스 탈리오니스(Lex Talionis)
    라틴어로 ‘동해보복법’ 또는 ‘보복법’
    받은 그대로 되갚아주는 원칙으로, 함무라비 법전과 성경 등 고대 법률에 나타난 개념입니다. 
    이는 ‘눈에는 눈, 이에는 이’와 같이 피해를 입은 만큼 가해자에게 동일한 피해를 주는 것을 의미합니다.

    동태복수법(同態復讐法)이란?

    원시사회나 고대사회에 적용되던 형벌원칙으로, 피해자에게 입힌 傷害․ 損害를 가해자에게 정확히 그대로 보복한다는 것.
    이는 신체 상해의 경우 가장 흔히 적용되었다.

    즉 가해자가 피해자의 눈을 상하게 했다면, 가해자도 피해자가 당한 눈의 상처만큼의 형벌을 받는다.

     

    *동태복수법 : 

    그 이전 사회에 적용되었던 '피의 보복원칙'
    (살인행위에 의해 희생된 자가 속한 가문이나 혈연이 살인행위를 한 사람이나 그 사람의 가문, 혈연에게 처벌을 가하는 것)이 발전된 형태이며, 그 뒤 더욱 사회가 복잡하게 됨에 따라 점차 '금전적 보상'이라는 형태로 전환된다.

    변천 : 피의 보복원칙 → 동태복수법 → 금전적 보상 → 예수님에 의해 폐기

    *구약에서 동태복수법적인 원칙 :

    출애굽기 21:23-25, 레위기 24:17-21, 신명기 19:21 등에 나타나 있고, 고대 근동의 유명한 하무라비법전의 영향을 받은 듯하다.

     

    *동태복수법은 : 신체의 상해에만 적용된 것은 아닌 듯하다.

             신명기 19:25-21은 거짓 고발자에게도 동태복수법의 원칙을 적용하고 있다.

             그러나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는 동태복수법의 원칙은  많은 모순과 갈등 속에서 점차 퇴색되어 갔다.

             즉 랍비들은 모세의 법을 지키려는 결의와 동태복수법의 실행 상 어려움 사이에서 많은 갈등을 겪었다.

     

    *강력한 폐기론의 근거
    어떤 두 사람도 동일한 신체조직을 갖고 있지 않으므로 동태복수법의 적용은 결코 공정을 기할 수 없다는 데 있다.
    결국 동태복수법은 금전적 보상제도로 대치되었고,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완전히 폐기되었다. 

    *예수께서는 악행과 학대를 당할 때 보복하지 말라고 가르쳤다.
    예수는 '눈에는 눈, 이에는 이' 대신에 '원수를 사랑하라'는 원칙을 제시하고 있다

    마태복음 5:38-48

    누가복음 6:27-30


    레위기 19:18
    원수를 갚지 말며 동포원망하지 말며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과 같이 하라 나는 여호와니라.

    마태복음 5:43-44
    또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누가복음 6:27
    그러나 너희 듣는 자에게 내가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미워하는 자를 선대하며.

    누가복음 6:35
    오직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고 선대하며 아무 것도 바라지 말고 빌리라 그리하면 너희 상이 클 것이요 또 지극히 높으신 이의 아들이 되리니 그는 은혜를 모르는 자와 악한 자에게도 인자로우시니라. 

    로마서 12:19 
    내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진노하심에 맡기라 기록되었으되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고 주께서 말씀하시니라. 

    동태복수법(同態復讐法)

    잠언 24:29
    너는 그가 내게 행함 같이 나도 그에게 행하여 그 행한 대로 갚겠다 말하지 말지니라.

    동태복수법은 내가 당한 대로 그대로 복수하라고 법으로 허락한 것입니다. 
    눈엔 눈으로, 이엔 이로 갚아 주라는 법입니다. 
    어찌 보면 원시적인 것 같지만 나름 피해자의 입장을 고려한 것 같습니다.

    구약 성경 출애굽기에서도 동태복수법에 대하여 언급하고 있습니다. 
    피해를 주었으면 갚아 원망이나 억울하게 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 율법입니다.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손은 손으로, 발은 발로, "(출 21:24)

    그렇다면 동태복수법을 집행한다고 해서 모든 것이 원만하게 해결될까요? 
    사회가 복잡하고 다양하게 되니 이것으로는 할 수 없게 되어 복잡하고 이해하기 어렵게 되었습니다. 
    오늘의 잠언은 그리스도의 가르침이 담겨 있음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당한 대로 갚겠다 말하지 말고 사랑하는 게 어떨까요

    네 이 뺨을 치는 자에게 저 뺨도 돌려 대며 네 겉옷을 빼앗는 자에게 속옷도 금하지 말라(눅 6:29)



    역설적 신앙은
    세상의 상식과 반대되는 듯 보이지만, 그 안에 진리가 담겨 있다고 믿는 신앙의 형태입니다. 이는 세상의 관점과 하나님의 관점이 다르기 때문에 발생하는 모순처럼 보이는 진리를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것을 의미합니다. 대표적인 예로, '지는 것이 이기는 것이고', '죽는 것이 사는 것'이며, '가난한 자가 복이 있다'는 예수님의 가르침 등을 들 수 있습니다. 
    역설적 신앙의 특징
    • 세상과 반대되는 상식: 세상의 기준이나 상식과는 다른 방식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 모순처럼 보이는 진리: 겉보기에는 모순되지만, 신앙의 눈으로 보면 올바른 진리입니다.
    • 믿음을 통한 이해: 이 역설적인 진리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믿음'이 필수적입니다.
    • 그리스도교의 핵심: 기독교 신앙 자체가 역설적이며, 이해의 열쇠라고 보기도 합니다.
    • 삶의 적용: '지는 것이 이기는 것이고, 버리는 것이 얻는 것' 등, 역설적인 진리를 삶으로 살아내는 것을 강조합니다.


    역설의 신앙(고린도전서 4:9-13)

    역설이라는 단어가 있습니다. 역설은 한 마디로 논리대로 진행되는 것이 아닙니다. “이렇게 하면 이렇게 되어야 하는데...” 반대 결과가 나오는 것입니다. 제가 역설이라는 주제를 수학으로 표기하면 1 더하기 1은 2가 되어야 하는데, 1 더하기 1은 -1이 되어 버리는 것입니다. 반대 결과가 나오는 것입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기독교 신앙은 역설에 의해서 진행된다는 것입니다.

    가장 대표적인 역설이 요한복음 12장24절입니다.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죽으면 죽은 것이지요.. 완전한 생명의 끝남이지요...그런데 죽으면 한 알의 열매를 맺는 것도 아닙니다. 많은 열매를 맺는 것입니다. 완전 역설이지요..

    이렇게 하면 이런 결과가 나와야 하는데, 완전 반대의 결과가 나오니 말입니다.

    이에 비슷한 비유로 씨 뿌리는 비유...좋은 땅에 씨가 뿌려지면, 좋은 땅에 씨가 떨어져 죽으면 30배, 60배, 100배의 열매가 맺혀지는 것입니다.

    말라기 4장10절을 보면.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의 온전한 십일조를 창고에 들여 나의 집에 양식이 있게 하고 그것으로 나를 시험하여 내가 하늘 문을 열고 너희에게 복을 쌓을 곳이 없도록 붓지 아니하나 보라...” 하나님께 십일조를 드려 보십시오. 헌금 해 보세요. 인간적인 논리에 의하면 내 지갑에서 돈이 빠져나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결과는 하나님께서 복을 쌓을 곳이 없도록 부어주신다는 것입니다.

    예전에 학창시절에 불렀던 찬양의 가사가 떠오릅니다.

    “사랑은 참으로 버리는 것 버리는 것, 이상하다 동전 한 닢 움켜잡으면 없어지고, 쓰고 빌려주면 풍성해져 땅 위에 가득하네...”

    이것이 기독교의 역설의 신앙입니다.

    심지어 하나님께서 쓰시는 사람들을 보아도 이 역설의 진리에 적용됩니다.

    고린도전서 1장26-29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형제들아 너희를 부르심을 보라 육체를 따라 지혜로운 자가 많지 아니하며 능한 자가 많지 아니하며 문벌 좋은 자가 많지 아니하도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 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 이는 아무 육체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나님께서 쓰시는 사람은 이상하게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가진 것도 없고, 학식도 없고, 세상적으로 볼 때 인정할 만한 것이 하나도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수제자 베드로는 많이 배우지 못한 사람이었지요..예수님의 제자였던 마태는 민족의 배신자라고 욕을 먹던 세리였지요. 셀롯이라 하는 시몬이라는 사람은 심지어 어떤 사람인줄 아십니까? 일명 열심당원으로서 로마에 무력으로 대항했던 무서운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런 자들을 택하셔서 큰일을 이루시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도 마찬가지입니다.

    본문에서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자신과 선교 동역자인 소스데네를 이렇게 말합니다. 9절에 보면, “하나님이 사도인 우리를 죽이기로 작정된 자 같이 끄트머리에 두셨으매 우리는 세계 곧 천사와 사람에게 구경거리가 되었노라.”

    너무나 눈물나는 구절 아닙니까? “끄뜨머리” 라는 단어는 가장 보잘 것 없고, 아무 것도 없고, 완전히 극빈 상태가 되는 비천한 처지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이름을 전했던 복음 전도자들, 사도들은 어떤 삶을 살았습니까? 도망다니며 살았습니다. 만약 도망다니면서 복음을 전하다가 로마에 의해 잡히면, 체포당해서 대다수 원형 경기장에서 사자 밥으로 내던져졌습니다. 그러면 그들은 수많은 관중들이 구경하는 가운데 맹수와 사투를 벌이다 죽어야 했습니다.

    그리고 10절에서는 “끄뜨머리”가 된 삶을 구체적으로 언급합니다. “우리는 그리스도 때문에 어리석으나 너희는 그리스도 안에서 지혜롭고 우리는 약하나 너희는 강하고 너희는 존귀하나 우리는 비천하며,,,”

    끄뜨머리의 삶을 대변해주는 동사는 “어리석다” “약하다” “비천하다”입니다.

    자신들은 배운 것도 없고, 세상 지혜가 없어서 어리석고, 가진 것도 없이 약하고, 비천하다는 것입니다. 세상적으로 볼 때는 아무 것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11절에 보면, 바로 이 시각까지,,즉, 지금 고린도전서를 쓰고 있는 지금 이 순간까지 주리고 목마르고 헐벗고 매맞으며 쉴 때도 없다는 것입니다.

    게다가 자비량 선교이기 때문에 수고하여 친히 손으로 일을 한다는 것입니다. 바울이 하는 일은 텐트 만드는 일을 했습니다. 거기에서 번 돈을 다 선교비에 사용했습니다. 그리고 모욕을 당하고, 박해를 받았습니다.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믿지 않았음으로 유대인에게도 왕따였고, 로마인들에게도 핍박을 받았습니다. 비방을 받았습니다. 믿을 만한 사람 한 사람도 없는 고난의 삶을 산 것입니다.

    그래서 13절에 보면, 자신들의 삶을 “세상의 더러운 것과 만물의 찌꺼기” 라고까지 표현합니다. “더러운 것”은 오물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찌꺼기”는 때를 의미합니다.

    그야말로 복음을 전하는 사도들은 이렇게 보잘 것 없는 존재들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세상의 관점입니다. 하나님의 관점은 반대입니다.

    이런 자들이 되어야 하나님께서 쓰시는 것입니다. 세상적으로는 가장 비천하고 초라한 사람이지만 예수님께서 인정하시는, 예수님의 십자가를 지는 진짜 제자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16절에 보면 고린도교인들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권하노니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가 되라”

    그래서 이 말씀도 역설이 작용하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살펴본 “역설”

    이 역설을 살펴보면서 발견되는 것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역설에는 믿음이 작용한다는 것입니다.

    사람들 사이에서는 세상적 관점에서는 논리 불가, 논리체계의 파괴이지만, 하나님 측면에서는 이것이 순환 논리라는 것입니다.

    역설이 왜 나왔어요? 하나님의 관점과 인간의 관점이 맞지 않기 때문에 그것을 설명하다 보니까 역설이 나온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관점과 인간의 관점을 연결하기 위해서는, 즉, 역설을 이해하기 위해 필요한 것은 바로 바로 “믿음”이라는 것입니다.

    세상적으로 보았을 때는 저주고 고난이고, 희생이지만 하나님을 믿음으로 이것이 복이 되고, 은혜가 되고,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것이 된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보면, 하나님의 관점과 인간의 관점은 어찌 보면, 반대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신앙생활은 어려운 것이고, 이 테스트에 통과해야 진짜 신앙의 세계가 열리는 것입니다.

    역설의 관점에서 신앙을 이해하고, 오직 믿음으로 하나님의 시각을 인정하고 살아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소망합니다. 아멘.




    기독교의 역설적 진리(요한복음 12:24-25)


    기독교의 진리에는 보통 인간적인 지혜나 세상 상식으로는 정반대되고 모순되는 것과 같은 진리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 "기독교의 역설적 진리"라 하는 제목으로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역설"이라고 하는 말은 영어로 "Paradox"(파라독스)라고 하는데 이 말은 "모순같이 보이지만 올바른 진리"입니다. 오늘 이 말씀 몇 가지를 생각해 보는 가운데 우리의 신앙을 더 두텁게 하고 또 은혜받 으시기를 바랍니다. 

    마태복음 5:44에 보면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말씀했습니다. 
    또 5:11에 보면 "나를 인하여 너희를 욕하고, 핍박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스려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하고 말씀했습니다. 

    원수는 미워하고 복수해야 한다는 것이 세상 상식인데 하나님의 말씀은 그와 반대로 핍박하고 손해주 는 자에게 축복하고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그 한 예를 요셉을 통해서 볼 수 있습니다. 요셉이 아버지의 사랑을 독차지 하자, 그 형들이 요셉을 시기하고 증오하던 나머지 요셉을 구덩이에 빠뜨려 죽이려다가 지나가는 상인들에게 팔아 버렸습니다. 

    요셉은 애굽으로 팔려가서 13년 동안 갖은 고생을 다하며 종살이를 하고 감옥살이를 했습니다. 그러다 가 하나님의 은혜로 바로 왕의 꿈을 해석함으로 일약 대 애굽제국의 총리대신이 되었습니다. 

    그 때 온 땅에 흉년이 들어서 곡식을 사려고 애굽으로 형들이 왔을 때에 보통 사람들 같으면 복수하고 아마 형들을 내쫓았겠지만 요셉은 반대로 이렇게 말했습니다. "당신들이 나를 이곳에 팔았으므로 근심하지 마소서. 한탄하지 마소서. 하나님이 생명을 구원하시려고 나를 당신들 앞서 보내셨나이다"(창 45:5) 하 고 위로하고 사랑했습니다. 

    또 그후 17, 8년이 지난 후에 아버지 야곱이 세상을 떠나니까 형들은 이제 라도 요셉이 복수를 할까봐 찾아와 엎드려 비는 말이 "아버지가 돌아가시면서 이 형들의 죄를 용서해 주십시오" 하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요셉은 이 형들이 의심하고 두려워하는 것을 보고 기가 막혀서 울었다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요셉이 그들에게 이르되 두려워마소서 내가 하나님을 대신하리이까. 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 오늘과 같이 만민의 생명을 구원하게 하시려 하셨나니, 당신들은 두려워 마소서. 내가 당신들과 당신들의 자녀를 기르리이다" 하고 간곡한 말로 그들을 위로하였습니다. 

    원수를 사랑하는 것은 자기 자신에게도 유익이 되고 축복이 되는 것입 니다. 남에게 진흙을 던지려면 내 손에 먼저 진흙이 묻어야만 됩니다. 우리는 세상 사람들의 감정과 같이 원수를 미워하거나 복수할 것이 아니라 사랑하고 원수를 위하여 기도해야 합니다. 

    태평양 가운데에 있는 "피지"라는 섬나라에 빌리부쓰(Billy Booth)라는 사람이 예수를 믿고 전도를 열심히 하고 있었습니다. 하루는 어느 집에 가서 전도를 하다가 집 주인에게 질그릇으로 머리를 얻어 맞았습니다. 빌리부쓰는 전에 훌륭한 군인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 믿고 구원받은 후에는 그가 군에서 차고 다니던 큰 칼을 벽에다 걸어놓고 예수 믿기 전에 자기가 얼마나 포악했던가 하는 것을 늘 반성하고 그 앞에서 성경을 읽곤 했습니다. 

    그런데 전도하다가 질그릇으로 머리를 얻어맞고 집에 돌아와 생각해 보니 까 머리도 아프지만 마음이 아파서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그것은 그 나라에서는 여자들이나 질그릇으로 얻어 맞지, 남자들은 질그릇으로 때리지도 않고 질그릇으로 얻어 맞는 것을 수치로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 질그릇으로 얻어맞고 집에 와서 생각해 보니까 분해서 견딜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몇번이나 벽에 걸려있는 칼을 붙잡고 가서 복수하려고 하는 마음이 있었지만 "내가 예수 믿는 사람인데…. 참아야지, 참아야지" 하고 참으면서 마침 칼 밑에 펴놓은 성경을 들어 읽어 보니까, 

    이런 말씀이 있었습니다.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는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라. 나를 인하여 너희를 욕하고, 핍박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슬려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이 말씀에 그는 은혜를 받았습니다. 그리고 마음도 편안해졌습니다. 

    그래서 그는 부엌에 들어가서 제일 좋은 질그릇을 하나 골랐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가지고 그 집을 찾아갔습니다. 찾아가 문을 두드렸더니 그 집 주인이 이제 싸우러 온 줄 알고 무기를 들고 나왔습니다. 그 때 빌리부쓰는 그 사람을 보고 웃으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당신의 질그릇이 내 머리를 때리다가 깨졌으니 대신 이 질그릇을 받으십시오. 성경에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는 자는 복이 있고, 천국이 저희 것임이라고 했는데 당신이 나를 질그릇으로 때려서 내가 그것 때문에 천국에도 가게 됐고 하나님 앞에 많은 상을 받게 되니 감사합니다" 

    그랬더니 그 사람이 질그릇을 받고 크게 감동을 받아 그도 예수를 믿고 전도해서 그 온 동네가 복음화가 되었다 고 합니다. 예수님의 말씀대로 원수를 위하여 기도하고, 원수를 사랑하란 말씀 그대로 도리어 사랑을 베풀었더니 자기도 복을 받고 그 사람도 구원받고 많은 사람도 구원받게 된 것입니다. 이 역설적인 진리를 행하기만 하면 우리에게 축복이 되는 것입니다. 

    죽으면 살리라 

    요한복음 12:24-25에 보면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자기 생명을 사랑하는 자는 잃어버릴 것이 요, 이 세상에서 자기 생명을 미워하는 자는 영생토록 보존하리라" 말씀했습니다. 

    우리가 이 육신의 생명을 버릴 각오를 하게 되면 도리어 영혼과 육신이 아울러 살게 된다고 하는 말씀입니다. 밀알이 땅에 떨어져 죽기 싫어서 한 알 그대로 있으면 사는 것 같지만 그것은 죽는 것입니다. 그러나 땅에 떨어져 죽으려고 하게 되면 도리어 백배, 이백배 많은 것으로 살게 되는 사실을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밀알이 땅에 떨어져 죽듯이 하늘 보좌를 버리시고, 이 땅에 내려 오셔서 십자가에 달려 피흘려 죽으셨고, 밀알이 흙에 묻히듯이 무덤 속에 갇히셨다가 삼일만에 부활하셨습니다. 또 이 한 알의 밀알이 죽음으로써 많은 열매를 맺듯이 예수님 때문에 많은 사람이 구원받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육에 대하여 세상에 대하여 죽을수록 많은 열매를 맺는 것입니다. 교회에서도 죽어지는 사람이 많을수 록 부흥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가정에서도 누구 한 사람이 죽어지려고 할 때 복된 가정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죽어지지 아니하고 서로 자기만 위하라고 하면 복된 가정이 될 수 없습니다. 

    고린도후서 4:10에 보면 
    "우리가 항상 예수 죽인 것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도 우리 몸에 나타나 게 하려 함이요, 우리 산 자가 항상 예수를 위하여 죽음에 넘기움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죽을 육체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니라" 말씀했습니다. 

    "이것은 예수님이 죽은 것처럼 우리도 우리의 생활에서 날마다 죽으려고 할 때에 예수님의 생명의 부활이 나를 통하여 많이 나타나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육에 대하여, 세상에 대하여 많이 죽을수록 영적으로 풍성한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죽고자 하는 자는 살고, 살고자 하는 자는 도리어 죽는다고 하는 이 역설적인 진리를 깨달아야 합니다. 

    주라

    누가복음 6:38에 "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줄 것이니, 곧 후히 되어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너희에게 안겨 주리라" 했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어찌하든지 받으려고 합니다. 

    어떻게 하든지 움켜 쥐려고만 합니다. 그러나 진정으로 하나님의 축복을 받을 사람은 주기를 힘써야 합니다. "어떻게 하면 줄 수 있을까. 바칠 수 있을까"를 생각하여야 합니다. 주려고 할 때에 하나님께서 많은 것으로 축복해 주시고 안겨 주십니다. 

    고린도후서 9:6에 보면 
    "이것이 곧 적게 심는 자는 적게 거두고 많이 심는 자는 받이 거둔다 하는 말이 로다" 말씀했습니다. 잠언 19:17에도 보면 "가난한 자를 불쌍히 여기는 것은 여호와께 꾸이는 것이니 그 선행을 갚아 주시리라" 말씀했습니다. 

    여러분, 될 수 있는대로 돈이나 옷이나 양식이나 그 무엇 하나라도 주도록 힘쓰십시오. 주면 없어질 것 같고 하나님께 바치면 없어 질 것 같지만 하나님께나 사람에게나 될 수 있는대로 많이 바치고 나누 어 주는 자에게 하나님께서는 더 넘치도록 주시는 것입니다. 

    어리석음과 지혜 

    마태복음 11:25에 보면 
    "이것을 지혜롭고 슬기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 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심 을 감사하나이다. 옳소이다. 이렇게 된 것이 아버지의 뜻이니이다" 말씀했습니다. 아담과 이브가 선악과를 따 먹은 후 눈이 밝아지기는 했으나, 쓸데없는 면으로 눈이 밝아졌습니다. 

    지혜롭고 슬기롭다는 것이 다 자기 중심적이고, 이기주의적이며, 인본주의적이고, 반신적이 되어 버렸 습니다. 때문에 인간의 지혜나 슬기는 하나님이 보시기에는 전부 어리석은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18에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내 가 지혜있는 자들의 지혜를 멸하고 총명한 자들의 총명을 혜하리라" 말씀했습니다 
    . 인간적인, 혼적인 지혜나 총명 가지고는 절대로 이 십자가의 구원의 도리를 알 수가 없습니다. 

    어린 아이와 같이 순진할수록 도리어 하나님의 놀라운 진리를 발견할 수 있는 것입니다. 아직 신앙이 유치하고 영적인 수준이 얕을 때는 이론이 많고 비판적이고 말이 많지만, 신앙이 장성해지고 영적으로 성숙해지면 어린 아이와 같이 단순해져서 세상적으로 볼 때는 어리석어 보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정상 입니다. 

    그후부터는 내 지혜로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지혜로 살게 되고 내 힘으로 살지 않고 하나 님의 능력으로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미련한 것이 사람보다 지혜있고 하나님의 약한 것이 사람보다 강하니라"(고전 l:25) 말씀했습니다. 

    약할 때 강해짐 

    사도 바울은 이상한 병이 하나 있었습니다. 다른 사람에게 기도를 해주면 다 병이 나으면서 자기의 병은 기도를 해도 낫지를 않았습니다. 

    "내 육체에 가시, 곧 사단의 사자를 주셨으니 이것이 내게서 떠나기 위하여 내가 세 번 주께 간구하였더니"(고후 12:8). 그 때 주님의 음성이 들려 왔습니다. 

    "내 은헤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데서 온전하여 짐이라…. 이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 그러므 로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핍박과 곤란을 기뻐하노니 이는 내가 약할 그 때에 곧 강함이니라" 
    말씀했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하나님 앞에 우리의 약하고 무능함을 철저히 깨달아야 합니다. 바울은 처음에 내 힘으로 죄를 이기고 의롭게 살 수 있는 줄 알고 애를 썼습니다. 그러나 웬일인지 거룩하게 살고 죄를 안 짓고 살려고 하면 할수록 점점 더 죄를 짓고 넘어지고 쓰러지는 자신을 발견했습니다. 

    그래서 로마서 7:24 에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하고 탄식하며 부르짖었습 니다. 

    로마서 7:18에 보면 "내 속 곧 내 육신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을 아노니 원함은 내게 있으나 선을 행하는 것은 없노라" 말했습니다. 

    그리고 7:16에 "만일 내가 원치 아니하는 그것을 하면 이제는 이것을 행하는 자가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 했습니다. 

    아무리 신령하게 살려고 해도 이 육체 속에는 죄의 세력이 도사리고 있어서 선을 행할 수도 없고 의롭게 살 수도 없는 지극히 약한 존재 임을 발견했습니다. 그런 다음에 로마서 "장에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 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해방하였 음이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사도 바울은 내가 내 힘으로 율법을 지켜서 죄를 안 짓고 구원을 얻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십자가의 보혈의 공로로 이미 구원받았고 의롭게 됐다는 것을 깨닫고 그리스도 만 의지하게 된 것입니다. 내 힘으로 신앙 생활 하려 할 때는 육체에 잡히고 육체에 잡히게 되면 죄에 잡히게 되고 마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붙잡혀 가시기 전날 밤에 제자들에게 말씀했습니다. "오늘 밤에 너희가 다 나를 버리리라" 이 때 베드로는 "다 주를 버릴지라도 나는 결코 주님을 버리지 않겠습니다" 하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조그만 계집애 앞에서 예수를 모른다고 부인했습니다. 

    그 후에 그가 애통했습니다. 그리고 예 수님이 부활하신 다음에 예수님께서 베드로를 찾아가서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물으셨습니다. 베드로가 대답했습니다. "주여,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 주께서 아시나이다" 예수께서 

    세 번째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물으셨습니다. 베드로는 겁이 덜컥 났습니다. 이 때 베드로는 근심하면서 "주여 모든 것을 아시오매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을 주께서 아시나이다"하 고 말했습니다. 이제는 자기의 무능력함을 철저히 깨달았습니다. 

    자기의 힘으로 믿음을 지키거나 죄를 안 지을 자신이 없었습니다. 자기 힘으로는 되지 않는 것을 깨닫고 완전히 주님께 항복했습니다. 그 때 예수님은 "내 양을 먹이라" 말씀하셨습니다. 그 후에 성신의 능력을 받고 한 번 설교할 때 3천명이 회개하는 역사가 나타난 것입니다. 

    여러분 내가 남보다 의롭다고 생각하는 것도 깨져야 합니다. 내 힘으로 죄를 안 짓고 신령한 생활을 할 줄 아는 그 생각이 깨져서 하나님 앞에 항복하게 될 때 주님은 그 때에 능력을 주시는 것입니다. 육체는 어디까지나 육체입니다. 

    교육을 받아도 육체요, 수양을 해도 육체입니다. 은혜를 받아도 육체 는 어디까지나 육체입니다.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고 했습니다. 성령님의 능력으로 붙들어 주시지 않으면 우리는 넘어질 수밖에 없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넘어지는 것은 버림받은 것이 아닙니다. 

    넘어지고 실패했어도 자기의 무능함을 깨닫고 다시 일어나서 더욱 주님을 의지하고 성령의 능력을 의 지해야 합니다. 나의 약함과 무능함을 깨달을 때 주님의 능력이 내게 나타나는 것입니다. 모세도 이 약함을 깨닫는 데 40년이 걸렸습니다. 야곱은 20년이나 걸려서 환도뼈가 위골된 다음 하나님 앞에 완전히 항복했습니다. 

    우리는 약하고 무력하고 결핍 투성이요, 죄된 육체를 쓰고 있을 뿐임을 철저히 깨닫고 성령의 능력만 의지하고 십자가의 공로만 의지해야 할 것입니다. 
    이럴 때 우리는 능력있는 삶을 살 수가 있는 것입니 다. 내가 약하다고 느껴질 때에, 나는 못한다고 생각할 때에 하나님은 새 힘을 주시고 용기를 주십니다. 

    원수를 사랑하라, 죽으면 살리라, 주라, 지혜로운 것이 하나님 보시기에 어리석다. 약할 때 곧 강해진 다. 이 모든 것이 역설적인 진리입니다. 세상 사람들의 지혜와는 반대되는 이 역설적인 진리,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지키고 행하는 여러분이 되시길 바랍니다.-아멘- 




    그리스도인의 역설적 축복(고린도후서 6:8-10)

    성경에 보면 역설적 진리가 자주 등장합니다. 역설(逆說, paradox)이란 상식적으로 판단할 때 모순적인 것 같은데 오히려 그 안에 중요한 진리를 내포하는 것을 말합니다. 영국의 소설가이며 기독교 변증가인 G. K. 체스터턴이 재치 있게 설명했습니다.

    “역설은 머리를 땅에 박고 물구나무를 서서 내 말 좀 들어달라고 소리치는 진리이다.” 물구나무를 서면 두 다리가 위로 뻗어 올라가는데 그 모습을 보면 깜짝 놀라며 주목하게 됩니다. 그와 같이 역설은 진리를 강력하게 증거합니다.

    여러분, 성경에 유난히 역설적 진리가 많은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것은 신앙의 속성 때문입니다. 신앙이 반(反)이성적인 것은 아니지만 초(超)이성적인 것이기 때문입니다. 신앙의 눈이 떠지기 전까지는 말도 안 되는 것 같은데 일단 신앙이 생기면 이해가 됩니다.

    예를 들면, 이런 것들입니다.

    막8:35 “누구든지 자기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와 복음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으면 구원하리라”

    눅14:11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고후12:10 “ … 내가 약할 그 때에 곧 강함이니라” 시119:71 “고난 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 ”

    사실은 십자가 복음 자체부터 역설입니다. 여러분, 십자가는 로마시대의 사형 틀 아닙니까? 고통과 수치요 사망입니다. 그런데 십자가로 영원한 사망에서 구원받고 영생을 얻을 수 있다니! 십자가로 승리할 수 있다니! 그게 말이 되나 싶습니다. 그러나 신앙이 생기면 이해가 됩니다. 아니, 확신하게 됩니다. 그래서 바울은 십자가 복음은 구원의 능력이며(고전1:18) 자신에게는 십자가 외에 자랑할 게 없다고 고백합니다(갈6:14).

    본문 앞부분을 보면 사도 바울이 십자가 복음을 전파하며 가는 데마다 조롱과 핍박으로 많은 고난을 당했음을 간증합니다. 하지만 그는 인내하며 당당히 승리합니다. 그리고 자신을 포함해서 그리스도인에게는 역설적 축복이 있음을 증거합니다. 얼른 보면 멸시와 천대를 받고 고난으로 망할 것 같지만 오히려 놀라운 축복이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리스도인이 세상에서 오해를 받고 조롱을 당합니다. 때로는 핍박도 당합니다. 이런 저런 고난을 당할 때도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예비하신 놀라운 축복이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결코 맛볼 수 없는 축복입니다.

    그게 바로 역설적 축복입니다. 그 맛을 알기에 우리는 이 시간에도 모여 하나님을 찬양하며 예배하는 것입니다. 아무쪼록 이 시간 말씀을 통해 그 역설적 축복을 확인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내내 그 축복을 누리며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 바랍니다.

    본문을 보면 7 가지의 역설적 축복이 나옵니다. 흥미롭게도 이런 식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XX 같으나, 그게 아니고 OO이다!” 세상 사람들이 오해하고 무시하지만 하나님이 분명히 그리스도인에게 주시는 놀라운 축복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제 하나씩 살펴봅니다.

    [1] 진리 : 속이는 자 같으나 참된 자

    첫 번째 그리스도인의 역설적 축복은 진리의 축복입니다. 그 당시 바울은 많은 사람들에게 ‘속이는 자’ ‘사기꾼’ ‘이단자’ 등으로 오해받고 있었습니다.

    행24:5을 보면 그를 고발했던 자들이 비난하는 말이 나옵니다. “우리가 보니 이 사람은 전염병 같은 자라 천하에 흩어진 유대인을 다 소요하게 하는 자요 나사렛 이단의 우두머리라” 그러나 바울은 자신은 결코 속이는 자가 아니고 참 진리를 깨닫고 증거하는 자임을 밝힙니다.

    고후6:8하 “ …우리는 속이는 자 같으나 참되고(KJV-as deceivers, and yet true)”

    오늘날도 많은 사람이 성경의 진리를 오해하고 거부합니다. 하나님에 관해 언급하면 하나님이 어디 있냐고 대듭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 구세주라고 말하면 어떻게 하나님이 사람이 되느냐고 따집니다. 천국을 증거하면 상상의 산물에 불과하다며 무시합니다. 그렇게 거부하면서도 정작 자신은 인생의 진리를 몰라 방황합니다. 세상에 숱한 지식과 정보가 있지만 인생의 진리는 모르고 삽니다. 우주만물이 어떻게 생겼는지, 인생이 어디서 왔다가 어디로 가는지, 죽으면 어떻게 되는지, … 이런 근본 문제들을 전혀 모릅니다. 세상의 지식은 탐구나 연구 등을 통해 알 수 있지만 인생의 근본 문제들은 오직 예수님을 믿음으로 알게 됩니다. 믿음의 눈이 열려야 모든 게 이해됩니다. 진리를 깨닫는 축복을 받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진리의 축복을 받은 그리스도인은 신앙이 없는 세상 사람들에게 진리를 증거할 책임과 사명이 있습니다. 바울은 딤전2:4에서 이렇게 증거합니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 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cf. 요14:6 예수 그리스도=진리) 예수님 자신이 진리입니다. 그리고 그의 말씀이 진리입니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예수님을 믿고 진리 가운데 살기를 원하십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살아있는 진리입니다. 그러므로 진리가 이깁니다. 세상이 아무리 뭐라 해도 저와 여러분은 진리를 알기에 참 차유를 누리고 담대히 진리를 전하며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2] 유명 : 무명한 자 같으나 유명한 자

    두 번째 그리스도인의 역설적 축복은 ‘유명’의 축복입니다. 바울은 지금이야 위대한 사도로 칭송받지만 그 당시만 해도 별 볼일 없는 무명 인사에 불과했습니다. 하지만 사실은 그때부터 이미 대단한 사람이었습니다. 왜 그런가요? 그는 하나님의 택한 자녀입니다. 더 나아가 복음을 전하는 사도입니다. 그의 이름이 생명책에 기록되어 있고, 또 성경에 아름다운 신앙 인물의 대명사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이 기억하는 사람입니다. 그는 이렇게 증거합니다.

    고후6:9상 “무명한 자 같으나 유명한 자요 … (KJV-As unknown, and yet well known)”

    오늘 우리도 세상에서 평범하고 하잘 것 없는 존재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세상에서 유명해 봤자 모든 인간은 다 거기서거기입니다. 여러분, 금년 노벨상 수상자 이름을 기억합니까? 시사에 밝으신 분은 기억하실지 모르지만 대부분 모릅니다. 저도 신문에서 봤지만 다 잊어버렸습니다. 작년 노벨상 수상자는 더더욱 모릅니다. 노벨상 수상자가 인간적으로 얼마나 대단합니까? 유명인사입니다. 그래도 소수의 사람들만, 그것도 잠시 기억하고 결국은 잊어버립니다. 그러니까 세상에서 유명하다는 게 별게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진짜 유명한 것은 하나님이 기억해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영원히 유명한 사람이 됩니다. 세상에서는 그리스도인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합니다. 심지어 무시하고 조롱합니다. 초대교회 시대에 그리스도인이란 칭호가 안디옥에서 처음 생겼는데(행11:26)

    그때는 부정적인 의미로 사용됐습니다. 요즘으로 말하면 ‘예수쟁이’라는 말과 비슷합니다. 그러나 나중에 존귀한 이름이 됐습니다. 특히 그리스도인의 이름은 하나님의 보좌 앞 생명책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이 영원히 기억해 주신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계3:5 “이기는 자는 이와 같이 흰 옷을 입을 것이요 내가 그 이름을 생명책에서 결코 지우지 아니하고 그 이름을 내 아버지 앞과 그의 천사들 앞에서 시인하리라(NIV-I will acknowledge his name)”

    그 가운데 신앙생활을 잘 하고, 많은 사람에게 복음을 전파한 그리스도인은 하늘에서 별과 같이 빛날 것입니다. 단12:3 “지혜 있는 자는 궁창의 빛과 같이 빛날 것이요 많은 사람을 옳은 데로 돌아오게 한 자는 별과 같이 영원토록 빛나리라” 한 마디로 천국의 스타가 된다는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이 땅에서 가장 무명한 그리스도인이라도 천국에서는 세상의 대단한 스타보다 더 유명한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세상에서 굳이 유명해지려고 기를 쓸 필요가 없습니다. 저와 여러분은 오직 하나님 앞에서 유명한 자가 되시기 바랍니다.

    [3] 영생 : 죽은 자 같으나 산 자

    세 번째 역설적 축복 셋째는 ‘영생’의 축복입니다. 바울은 복음을 전파하다 죽임을 당할 뻔했던 적이 여러 차례 있었습니다. 그래서 항상 죽은 목숨 같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영생을 확신하며 당당했습니다. 영생은 장차 육신의 죽음 후에 누리는 것으로 오해하기도 하는데 사실을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님을 영접하는 순간부터 영생이 시작됩니다. 그러므로 육신적으로 살아 있으나 죽으나 항상 산 자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이렇게 증거합니다.

    고후6:9중 “ … 죽은 자 같으나 보라 우리가 살아 있고 … (KJV-as dying, and, behold, we live)”

    예수님도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요11:25~26 “25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26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육신의 죽음 앞에서도 두려워하지 않고 담대할 수 있습니다.

    20세기 유럽의 대표적인 지성인 중 대조적인 두 인물이 있습니다. 프랑스의 실존주의 문학가 사르트르(Jean Paul Sartre, 1905~1980)와 독일의 신학자 본회퍼(Dietrich Bonhoeffer, 1906~1945)입니다.

    사르트르는 평소에 하나님의 존재를 부인하고 인간의 자유를 주장하며 젊은이들을 열광시켰지만 정작 말년에 폐수종으로 입원해 있을 때는 죽음 앞에 벌벌 떨며 발악을 했습니다. 의사에게 행패를 부리고 심지어 병문 온 사람들에게 고함을 치며 난리를 쳤습니다. 그가 끝내 비참한 모습으로 죽게 됐는데 신문들이 앞 다투어 기사를 쏟아냈습니다. 그런데 한 신문에 무명의 독자가 이렇게 투고했습니다.

    “사르트르의 말로가 그렇게도 비참했던 이유는 사르트르에게 돌아갈 고향이 없었기 때문이다.”

    반면에 본회퍼는 나치 수용소에 갇혀있던 어느 날 간수가 문을 두드리고 들어오자 죽음을 직감하고 동료들에게 이렇게 인사했습니다. “동지 여러분! 이제 나에게 죽음이 찾아왔습니다. 그러나 기억하십시오. 이것은 마지막이 아니고 시작입니다. 주님께서 나를 위해서 예비하신 아버지의 집에서 만날 때까지 평안하시기 바랍니다.” 그는 영생을 얻은 자였기에 이렇게 태연할 수 있었습니다.

    부디 저와 여러분도 죽은 자가 아니라 산 자로 영생을 축복을 누리며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육신의 죽음이 닥쳐와도 두려워하지 않고 담대함으로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4] 승리 : 징계를 받는 자 같으나 죽지 않는 자

    네 번째 그리스도인의 역설적 축복은 ‘승리’의 축복입니다. 바울은 많은 고난을 당한 사람입니다. 가는 데마다 핍박을 받고, 심지어 죽음의 위험 가운데 처했습니다. 그런 모습을 보면서 세상 사람들은 그가 징계를 당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가 사도인데, 하나님이 그를 사랑하지 않나? 이상하다는 겁니다. 그러나 그것은 오해입니다.

    성경은 그리스도인이라도 고난이 면제된다고 말씀하지 않습니다. 겉으로 보면 신자나 불신자나 동일하게 고난을 당합니다. 중요한 것은 각각 그 의미와 결과가 다릅니다. 불신자의 고난은 생고생이요 헛고생입니다. 반면에 그리스도인의 고난은 연단 혹은 섭리의 의미가 있습니다. 그래서 고난을 가리켜 ‘변장된 축복’이라 부르는 것입니다. 바울은 당당히 증거합니다. 고후6:9(하) “ … 징계를 받는 자 같으나 죽임을 당하지 아니하고(KJV-as chastened, and not killed)” 죽임을 당하지 않는다는 것은 승리를 의미합니다.

    그렇습니다. 그리스도인에게 고난이 닥치지만 중요한 것은 결국은 승리하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잠24:16 “대저 의인은 일곱 번 넘어질지라도 다시 일어나려니와 악인은 재앙으로 말미암아 엎드러지느니라” 칠전팔기(七顚八起)입니다. 그리스도인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는 롬8:28 말씀과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므로 세상 살면서 온갖 고난이 닥쳐와도 결코 낙심하지 마십시오. 부디 승리의 확신을 갖고 당당하게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5] 기쁨 : 근심하는 자 같으나 기뻐하는 자

    다섯 번째 역설적 축복은 ‘기쁨’의 축복입니다. 바울은 늘 근심 가운데 살아갔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세상 근심이 아니었습니다. 인간의 죄악 때문에 하나님 앞에 애통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교회를 위한 근심이었습니다. 오히려 그는 영혼에 솟아나는 기쁨을 맛보았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증거합니다. 고후6:10(상)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KJV-As sorrowful, yet always rejoicing)”

    정말 그랬습니다. 빌립보서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감옥에서 기록한 옥중서신인데 기쁨이 철철 흘러넘칩니다. 심지어 감옥 밖의 성도들에게 권면합니다.

    빌4:4,13 “4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 … 13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예수님과 함께 하기에 그분이 주시는 신령한 기쁨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모든 것 할 수 있다는 말은 어떤 환경에서도 근심과 걱정, 슬픔을 이기고 기쁨으로 살아갈 수 있다는 고백입니다.

    부디 저와 여러분도 어떤 환경에 처하든지 예수님 때문에 항상 기뻐하며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6] 부요 : 가난한 자 같으나 부요케 하는 자

    여섯 번째 역설적 축복은 ‘부요’의 축복입니다. 바울은 본래 부자였지만 복음을 위해 모든 것을 배설물처럼 버렸습니다. 그런 가운데 가난도 경험했습니다. 그 모습을 보고 세상 사람들은 예수 믿고 잘 된 게 뭐냐며 비아냥거렸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세상이 알지 못하는 영적 부요가 있음을 증거합니다.

    고후6:10(중) “ …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 (KJV-as poor, yet making many rich”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정말 이렇습니다. 아무리 육신적으로 가난해도 영적으로 부요하면 얼마든지 감사하며 살아갈 수 있습니다. 심지어 육신적으로 부요해도 영적으로 가난한 자들을 긍휼히 여기며 그들에게 복음을 전할 수 있습니다.

    어느 할머니의 이야기입니다. 그분은 가난한데다가 시각장애인입니다. 예수님을 믿고 나니까 영혼에 기쁨이 이었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자신을 불쌍히 여기지만 오히려 예수님을 몰라 멸망 길로 가는 사람들이 불쌍했습니다. 하지만 그런 분이 어떻게 전도할 수 있겠습니까? 그래도 꼭 전도하고 싶어서 기도했더니 하나님이 아이디어를 주셨습니다. 사람들이 자기를 불쌍히 여길 테니까 지나가는 사람 붙들고 성경 읽어달라고 해라. 미리 표시해 놓은 요3:16을 읽어달라고 해라. 그리고 그 구절의 뜻을 아냐고 물어봐라. 알면 그리스도인이니까 됐고, 모르면 죽 설명을 해주라. 그 할머니는 좋아라하며 그런 식으로 전도를 했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그리스도인은 자신만 부요한 게 아니라 다른 사람들까지 부요케 하는 자입니다. 야고보는 영적 부요에 관해 이렇게 증거합니다. 약2:5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들을지어다 하나님이 세상에서 가난한 자를 택하사 믿음에 부요하게 하시고 또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나라를 상속으로 받게 하지 아니하셨느냐” 비록 세상에서 가난해도 영적으로 부요하고 더 나아가 천국의 기업을 상속 받을 것이기에 진짜 부자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마지막 일곱 번째 역설적 축복은 ‘천국기업’의 축복입니다.

    [7] 천국기업 : 아무 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

    그리스도인은 세상에서 혹시 빈털터리 같아도 천국기업을 소유한 자이기에 최고의 부자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이렇게 증거합니다.

    고후6:10(하) “ … 아무 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로다(KJV-as having nothing, and yet possessing all things)”

    그렇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천국의 상속자입니다.

    롬8:17~18 “17 자녀이면 또한 상속자 곧 하나님의 상속자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상속자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할 것이니라 18 생각하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도다”

    세상 것은 어차피 사라집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은 영원합니다. 그 말씀 붙잡고 살아가면 영원히 사라지지 않는 천국을 기업(inheritance)으로 받을 수 있습니다.

    벧전1:24~25 “24 그러므로 모든 육체는 풀과 같고 그 모든 영광은 풀의 꽃과 같으니 풀은 마르고 꽃은 떨어지되 25 오직 주의 말씀은 세세토록 있도다 … ”(cf. 히11:24~26 모세가 애굽 궁궐의 부귀영화를 버리고 광야로 나간 이유)

    우리가 애송하는 찬송가 94장 「주 예수보다도 귀한 것은 없네」를 작곡한 조지 베브리 쉐아(George Beverly Shea, 1909~2013)의 이야기입니다. 그는 평생 빌리 그레이엄 목사와 동역한 분으로 유명합니다. 94장 찬송가를 작곡하게 된 배경이 있습니다. 그는 본래 보험회사 세일즈맨이었는데 NBC라디오에서 노래할 기회가 있었습니다. 그의 노래를 듣고 수많은 미국인들이 매료됐고 여러 방송사로부터 계약 제의가 쇄도했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 마음에 기쁨보다 왠지 모를 두려움이 엄습했습니다. 그래서 기도하는데 어머니가 책상에 종이쪽지 하나를 놓아둔 것을 보게 됩니다. 신앙 시였습니다. 그것을 읽다가 마음에 떠오르는 멜로디를 써내려갔고 그게 바로 찬송가 94장입니다. 한번은 그가 전도 집회에서 찬양을 했했데 관중이 환호하며 우레와 같은 박수를 보냈습니다. 그는 손짓으로 중지시킨 후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대단히 감사합니다. 그러나 나는 여러분의 박수갈채와 그리스도를 바꾸지 않겠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보화가 얼마나 큰지 아는 사람의 아름다운 고백입니다.

    여러분, 세상 사람들이 뭐라 하든지 그리스도인에게는 놀라운 축복이 주어져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볼 때는 별 게 아닌 것 같습니다.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역설적 축복이라 부르는 것입니다. 그게 바로 예수님을 믿는 신앙의 비밀입니다. 아무쪼록 저와 여러분은 그 비밀을 알기에 역설적인 축복을 풍성히 누리시기 바랍니다. 더 나아가 그 비밀을 아직 알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담대히 증거하며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10월 17일(금) 마태복음 4-6장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원수를 사랑하라(5:44)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But I tell you: Love your enemies and pray for those who persecute you.

    원수를 사랑하라(Love your enemies)

    회개는 천국 시민으로 살아가는 것으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이 세상에서 천국 시민으로 살아간다는 것을 어떻게 증거하겠습니까?

    원수를 사랑할 수 있는 믿음으로 증거할 수 있습니다.
    원수는 사랑의 대상이 아니라 미움과 증오와 멸시의 대상입니다.
    이러한 자세는 세상적인 방법입니다.
    그러나 천국 시민의 방법은 원수를 사랑하기 때문에 그 원수를 위하여 기도하므로 사랑을 시작합니다.

    천국시민으로 살아가려면 훈련이 필요합니다.
    가장 으뜸이 되는 훈련은 원수를 위하여 기도하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탈무드에 이런 이야기가 소개됩니다.
    어느 마을에 두 사람이 서로 가깝게 지내던 중 서로 다투고 마주 보는 것조차 싫어서 외면하며 지냈다고 합니다.
    한번은 한 사람이 언덕을 오르는데 마침 그 상대방이 술에 취하여 잠이 들었는데 조금만 더 뒹굴면 낭떠러지 아래로 떨어지게 되었다고 합니다.
    못 본척하고 지나갈 것인가?
    아니면 잠든 사람을 안전한 곳으로 옮겨 놓을 것인가?
    한동안 망설이던 사람이 그 사람을 안전한 곳으로 옮겨 놓은 후 그 자리를 떠났다고 합니다.
    얼마후 낭떠러지 옆에서 잠을 자던 친구가 찾아와서 그동안 당신에게 잘못한 것을 사과하며 용서를 구했다고 합니다.
    갑작스런 일에 놀란 사람이 당신 왜 그러느냐? 하고 물었더니 사실은 내가 잠이 든 척 하고 있었는데 당신이 나를 외면하지 않고 안전한 곳으로 옮겨놓는 것을 알고 내가 잘못했구나 하고 깨닫게 되었다고 합니다.

    아이히만과 골란즈

    1968년 조용한 사건이지만은 위대한 일이 있었습니다. 
    세계 제 2 차대전 당시에 나치 독일이 유대사람 600만을 죽였다고 하지 않습니까? 
    이 학살에 원흉이었던 아이히만 이라는 사람이 체포되어 가지고 재판을 받고 사형선고를 받았고 이제 사형집행을 조용히 기다리고 있는 바로 그 시점에서 유대사람 중에 꼴 란즈라고 하는 사람은 아이히만을 석방해 달라고 대대적으로 데모를 했어요. 
    대대적으로 석방 운동을 했습니다. 
    있을 수 있는 일입니까? 
    그는 상당한 이유를 가지고 있습니다. 
    첫째 아이히만을 죽인다고 해서 죽은 유대사람이 살아나는 것이 아니지 않느냐. 
    둘째 사형하지 않고 내 버려두어도 인생은 다 죽듯이 저 사람도 곧 죽을 텐데 뭐 미리 죽일 거 없지 않느냐? 
    셋째는 하나님은 그의 영혼을 이미 심판 하셨으니 우리가 심판할 것 없지 않느냐? 
    넷째는 동생을 죽인 가인도 하나님은 용서 하셨는데 우리가 누구를 정죄해서 그것이 옳단 말이냐
    다섯째가 너무나 가슴을 뜨겁게 합니다. 
    사랑이 식어지는 세상에 이제부터라고 참 사랑을 심어가야하지 않겠느냐. 
    여러분 언제까지 보복을 할 겁니까?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마 5:44)


    원수를 사랑하는 다섯 가지 방법

    주 예수 그리스도는 사랑과 용서의 하나님이시며 당신의 제자들이 원수를 사랑하길 원하시는 분이다. 보통의 사람들에게는 이러한 소리가 이상하게 들릴 수 있지만, 하나님을 사랑하고 온유하고 자비로운 이들에게는 당연한 것이다.

    예수님이 마태복음 5장 44절에 말씀하신대로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씀을 실천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는가?

    영국 크리스천투데이는 ‘원수를 사랑하는 5가지 방법’을 다음과 같이 소개했다.

    1. 그들을 용서하라

    그들을 용서하는 것이 당신이 해야할 최고의 일이자 첫번째 일이다. 그리고 실제로 여러분에게 도움이 된다. 당신에게 상처준 사람들을 용서할 때, 여러분이 받은 상처와 공격들로부터 자유해질 뿐 아니라 당신보다 지혜로우신 하나님께 맡길 수 있다. 그들이 당신에게 반복해서 죄를 짓고 용서를 구한다고 해도, 그들을 용서하라(마태복음 8장 21절을 보라).

    2. 그들을 위해 기도하라

    더 나아가 그들을 위해 주님께 기도하라. 당신을 해롭게 하고, 공격하고, 비방하고, 못되게하고, 당신의 명예를 훼손하는 이들을 위해 기도하라(골로새서 3장 13절을 보라). 기도는 당신이 상처받았다는 사실을 부인하는 것이 아니다. 대신, 하나님께 당신의 치유를 위해 기도하고, 그가 하나님과 바른 관계성을 맺도록 기도하라. 하나님께서 그를 회개로 이끌어주시도록 기도하라.

    3. 그들도 역시 희생자임을 생각하라

    솔직히 말하면, 우리를 해롭게하는 이들도 그들 나름의 상처가 있다는 사실을 알기는 매우 어렵다. 그러나 사실이다.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고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게 되었다. 그렇기 때문에 모든 사람이 다른 사람을 해칠 수 없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로마서 3장 23절을 보라). 실제로 우리의 적은 사단 마귀이고 그는 모든 이들을 유혹해 악한 일을 하게 한다(에베소서 6장 12절을 보라).

    이러한 관점에서 우리의 원수들을 볼 때, 그들이 죄로부터 자유해지고, 실제 원수인 사단의 역사가 그치도록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할 수 있게 된다.

    4. 지혜로운 말을 하라

    비방과 수근거림이 절대로 있어서는 안된다(야보고 4장 11절). 당신을 해롭게 한 사람들에 대해 안 좋은 말이 나오려고 할 때, 침묵하고 대신 마음으로 그들을 위해 기도하라. 그들의 명예를 훼손하거나 무너뜨리지 말고 좋은 말을 하겠다고 결심하라. 하나님께서 당신을 변호하시는 변호자이심을 기억하라. 동시에 그분이 당신의 모든 말에 대한 심판자이심을 기억하라(누가복음 6장 37절, 마태복음 12장 36절을 보라).

    5. 기회가 닿는대로 그들에게 선을 행하라

    성경은 ‘사랑이 허다한 죄를 덮는다’고 말씀하고 있다. 그리고 이는 진리이다. 온유하신 하나님께서 어떤 방법으로 우리를 회개케 하시는지 생각해보라. 왜 당신의 원수를 잘 대해주어야 하는지 이해하게 될 것이다. 당신을 통해 드러난 하나님의 선하심이 그들을 하나님 앞으로 돌이키게 할 것이다(로마서 2장 4절, 누가복음 6장 28절, 마태복음 5장 44절을보라).


    원수를 사랑하라(마태복음 5:38-42)

    또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으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악한 자를 대적지 말라 누구든지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대며, 또 너를 송사하여 속옷을 가지고자 하는 자에게 겉옷까지도 가지게 하며, 또 누구든지 너로 억지로 오리를 가게 하거든 그 사람과 십리를 동행하고, 네게 구하는 자에게 주며 네게 꾸고자 하는 자에게 거절하지 말라.(마5:38-42) 

    악인과 악행의 문제

      오늘도 주님의 율법 해석에 대한 말씀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오늘 말씀의 주제는 악인에 대한 대응법입니다.  惡人을 어떻게 대할 것인가?  악인?  ponhrov"  “나쁜, 해로운, 쓸모없는, 무익한, 도덕적으로 악한”, 그런 사람들입니다. 
      악한 자들은 타인에게 피해를 주기 때문에 문제가 됩니다.  인간은 지극히 이기적인 존재입니다.  우리 목양관에 盆栽 한 그루가 있습니다.  어느 날 보니까 잎이 우수수 떨어져 있어요.  제때에 물을 주지 않았던 것입니다.  나무 잎이 떨어지는 것은 殺身成仁입니다.  나무는 스스로 메마른 환경에서 버티기 위해 물의 소비를 줄입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 잎이 스스로 알아서 떨어집니다.  악착같이 붙어서 살겠다고 하지 않습니다.  그렇게 해서 나무 자체를 살립니다.  그런데 유독 인간만은 그렇지 않습니다.  어려운 처지에 빠지면 스스로 희생하지 않고 남에게 피해를 줍니다.  돈 없다고 남의 재산을 훔치고, 빼앗고, 생떼를 씁니다.  내 몸이 좀 불편하다고 남에게 원망 불평을 하고, 불특정 다수를 향해 보복을 합니다.  아주 고약한 본성입니다. 

      악한 자들은 자신들의 악행에 대해서 아주 뻔뻔합니다.  까뮈의“이방인”이란 소설이 있습니다.  주인공 뫼르소는 어느 날 돌발적으로 살인을 합니다.  재판정에서 그가 밝힌 살인의 동기는 단지 햇볕이 너무 강렬했다는 것입니다.  별다른 이유도 없습니다.  사람을 죽인데 대한 아무런 가책도 느끼지 않습니다.  어머니 장례식 다음날 여자 친구와 만나 코미디 영화를 봅니다.  사람들은 그 점에 대해서 욕하지만 뫼르소는 대수롭지 않게 생각합니다.  사형 선고를 받고 형이 집행되는 날까지, 그는 별다른 마음의 변화가 없습니다.  그냥 될 수 있으면 많은 사람이 와서 구경해 주기를 바라고 있을 뿐입니다.  한 마디로 한다면 그는 사람 사는 사회에서 別種입니다.  그래서 異邦人입니다.  타인에 대한 무관심, 도덕과 관습에 대한 부적응, 죄의식의 부재!  그런데, 많은 사람들은 뫼르소 대신 사회를 비판합니다.  현대 사회가 소외된 인간을 만들어 낸다!  그러면 뫼르소에게 죄가 없다는 말입니까?  모두가 뻔뻔하기는 마찬가집니다. 

      악인에게 특징이 있습니다.  첫째로, 양심이 전혀 작동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사람을 죽여도 가책이 없습니다.  그냥 무덤덤합니다.  어머니가 돌아가셔도 섭섭하지도 않고 슬프지 않습니다.  별다른 감정이 없습니다.  요즘 범죄자들을 보세요.  남의 물건을 훔치고도 미안해하지 않습니다.  살인 강도짓을 하고도 붙잡힌 것만 억울해 합니다.  양심이 움직이지 않습니다.  둘째로, 잘못을 고칠 생각이 전혀 없습니다.  도적질 하고 감옥에 가서 회개하는 게 아닙니다.  새로운 도적질을 계획하고 나옵니다.  강도질 하고 감옥에 가서 또 다른 강도질을 생각합니다.  투기꾼이 남들이 욕한다고 투기 안 합니까?  계속 투기 합니다.  독재자가 사람들이 비난한다고 독재 안 합니까?  계속 독재 합니다.  사기꾼은 계속 사기치고, 간음하는 사람은 계속 간음합니다.  왜 이렇게 생겨먹었을까요? 

      그 이유는 바로 인간의 본성적인 죄악성에 있습니다.  악한 자가 따로 있는 게 아닙니다.  모든 사람이 다 악인의 본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성경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다 치우쳐 한가지로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  저희 목구멍은 열린 무덤이요 그 혀로는 속임을 베풀며 그 입술에는 독사의 독이 있고, 그 입에는 저주와 악독이 가득하고, 그 발은 피 흘리는 데 빠른지라, 파멸과 고생이 그 길에 있어, 평강의 길을 알지 못하였고, 저희 눈 앞에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느니라.”(롬3:10-18)  성경에 보면 악인들이 줄줄이 등장합니다.  친동생을 죽인 가인(창4:8), 축첩을 하고 살인을 노래한 라멕(창4:23), 백성의 포도밭을 빼앗은 아합왕(왕상21:1), 남편을 부추겨서 살인과 약탈을 일삼은 이세벨(왕상18:24), 친 손자들을 몰살시킨 아달랴(왕하11:1), 소수 민족을 노예로 학대하는 바로왕(출5:6), 동생의 아내를 가로챈 헤롯 안디바스(마14:1), 예수님을 팔아먹은 가룟 유다(마26:14), 교회에서 착한 사람을 헐뜯고 훼방한 디오드레베(요삼1:9) 등등.  그렇다고 하나님을 믿는 신자들은 악한 짓을 안 했을까요?  결코 아닙니다.  믿음의 사람들도 고약하기는 마찬가집니다.  아브라함은 아들을 낳으려고 여종을 취했습니다.  가정불화가 일어나자 여종과 그 아들을 내 쫓았습니다.  야곱은 눈이 어두운 아버지를 속이고 장자의 축복을 가로챘습니다.  라반은 조카를 부려먹기 위해서 두 딸을 아내로 주고, 품삯을 주지 않았습니다.  야곱의 아들들은 동생을 시기하여 노예로 팔아버렸습니다.  야곱의 아들 유다는 며느리를 창녀로 알고 관계를 맺습니다.  롯의 두 딸은 아버지에게 술을 먹이고 관계를 맺어 못된 자식을 낳습니다.  아간은 전리품을 훔쳐서 동료 군인들을 패전하게 만들었습니다.  선한 왕으로 알려진 다윗은 충성스러운 신하의 아내를 가로채기 위해서 우리야를 전쟁에 앞장세워 죽게 만듭니다.  솔로몬은 일천 명에 가까운 궁녀들을 두어 백성들을 혼란에 빠뜨립니다.  수제자 베드로는 주님을 세 번이나 부인했습니다.  야고보와 요한은 자기 말을 듣지 않는 사람들을 불에 태워 죽이자고 했습니다.  이 모든 것이 평범한 보통 사람들의 스토리입니다.  악인이 따로 없습니다.  보통 사람들이 다 악인입니다. 

    오늘 말씀에 보면 악인들의 소행을 세 가지로 언급합니다.  

    첫째, 폭력(暴力), 위해(危害)

    뺨을 때리는 행동인데, 이는 신체적인 폭력과 危害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뺨을 때린다!  뺨이란 의미심장한 부분입니다.  혹간 주먹으로 때려서 갈비뼈가 부러지는 일도 있습니다.  그러나 뺨을 맞은 것보다는 덜 기분이 나쁩니다.  뺨을 때리는 것은 모욕입니다.  저는 아이들이 어렸을 때에 회초리를 많이 들었습니다.  그렇지만 뺨을 때린 적은 없습니다.  뺨을 때리는 것은 신체적 위해 이전에 경멸입니다.  요즘 드라마에 보면 뺨을 때리는 장면이 종종 등장합니다.  폭력배들이 등장하여 개판으로 싸우는 장면들도 자주 나타납니다.  그래서 그런지 학교에서 학생들도 조폭 흉내를 냅니다.  평범한 남편들도 아내를 구타합니다.  부모가 자식을 학대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신체적 폭력은 인간의 품위를 스스로 깎아 내리는 악행입니다.  특히 가까운 사람 사이에서 일어나는 폭력은 인간관계를 심각하게 손상시킵니다.

    둘째, 갈취(喝取), 송사(訟事) 

    訟事로 남의 옷을 빼앗는 행위, 즉 남의 재산을 갈취하는 행위입니다.  

    송사하여 속옷을 뺏어간다!  구약 성경에 보면 가난한 사람들에게 저당 잡은 옷은 해가 지기 전에 돌려주라고 말씀합니다.(출22:26)  왜냐하면 옛날 중동 사람들에게 옷은 단순한 옷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낮에는 옷이지만 밤에는 이불입니다.  신체를 보호하기 위한 최소한의 대책입니다.  그런데 송사하여 속옷까지 뺏어간다면 보통 잔인한 행동이 아닙니다.  요즘도 벼룩의 간을 빼먹는 놈들이 많습니다.  가난한 사람들에게 사채를 주고 말도 안 되는 높은 이자를 받아먹습니다.  취직을 하기 위해 안타까워  하는 사람들에게 취업 사기를 칩니다.  평생 노력해서 모아 놓은 퇴직금을 가로채는 놈들도 있습니다.  평생 남의 돈만 떼어먹고 사는 사람들이 있어요.  뿐만 아니라 약한 사람들의 노동력을 착취하는 악덕 업주들도 있습니다. 

    셋째, 억압(抑壓), 압박(壓迫) 

    억지로 5리를 가게하는 행위, 즉 타인의 자유를 빼앗는 행위입니다.  

    고대 페르시아의 관습에 의하면 전쟁에 징발한 被征服民들을 일정 거리를 동행하게 했다고 합니다.  지금 우리는 자유로운 세상에 살고 있습니다.  군인이라고 해도 강제 노역을 시키지는 못합니다.  그러나 요즘도 사람을 후려서 강제로 끌고 다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각종의 人身賣買犯들입니다.  어린 아이를 섬에 끌고 가서 40년이나 노예처럼 부려먹은 사람이 붙잡혔습니다.  미국의 부시 대통령은 최근 한 연설에서 한국의 여자 아이들이 인신매매의 표적이 되고 있다는 말을 했습니다.  사람이 사람을 억압하는 것은 가장 나쁜 죄악입니다. 

    악인에 대한 응징의 문제

      다음으로 생각할 것은 악인에 대한 응징입니다.  우리는 악인의 응징에 관심이 많습니다.  악인을 어떻게 응징해야 할까요?  악한 자들이 잘 먹고 잘 살게 할 수는 없지 않습니까?  뭔가 제재를 가해야 합니다.  이완용의 후손들이 재산을 찾겠다고 합니다.  독재자의 자손들이 不正蓄財한 돈으로 잘 살아요.  사기꾼이 사기 친 돈으로 떵떵거립니다.  이들을 어떻게 조치해야 되는 것 아닙니까? 

      그런데, 오늘 하나님은 우리에게 악인들을 대적하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악한 자를 대적지 말라”(39절)  대적하지 말라!  ajnqivsthmi = ajntiv +++  i{sthmi,(anti stand)  반대편에 서다.  즉, 대적하다, 대항하다, 거역하다, 반대하다는 뜻입니다.  악인에게 적대적으로 대항하지 말라는 말입니다.  무저항입니다.  과거 유대인들은 성경을 잘못 해석했습니다.  “또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으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38절)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아라!  구약에 보면 이런 구절이 나옵니다.  “사람이 서로 싸우다가 아이 밴 여인을 다쳐 낙태케 하였으나 다른 해가 없으면 그 남편의 청구대로 반드시 벌금을 내되 재판장의 판결을 좇아 낼 것이니라.  그러나 다른 해가 있으면 갚되 생명은 생명으로,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손은 손으로, 발은 발로, 데운 것은 데움으로, 상하게 한 것은 상함으로, 때린 것은 때림으로 갚을지니라.”(출21:22-25)  “사람이 만일 그 이웃을 상하였으면 그 행한 대로 그에게 행할 것이니, 파상은 파상으로,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을지라. 남에게 손상을 입힌 대로 그에게 그렇게 할 것이며”(레24:19-20)  “재판장은 자세히 사실하여 그 증인이 위증인이라 그 형제를 거짓으로 무함한 것이 판명되거든, 그가 그 형제에게 행하려고 꾀한 대로 그에게 행하여 너희 중에서 악을 제하라....네 눈이 긍휼히 보지 말라. 생명은 생명으로,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손은 손으로, 발은 발로니라.”(신19:18-21)  유대인들은 이 법을 보복법으로 해석했습니다.  그러나 자세히 보세요.  이 법은 보복법이 아닙니다.  재판법입니다.  말씀의 초점은 보복이 아닙니다.  정확한 처벌입니다.  사실상 이 법은 지나친 보복을 금지하기 위한 법입니다.  즉, 악인에 대한 최대한의 응징이 아닌 최소한의 처벌에 초점을 맞춘 법입니다.  그나마 그 처벌권은 개인에게 있지 않습니다.  개인은 어떤 이유에서도 범죄자를 응징할 수 없습니다.  그러면 악인은 누가 응징합니까?  두 가지 응징의 방법이 있습니다. 

      첫째로, 공권력에 의한 처벌입니다.  하나님은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각 사람은 위에 있는 권세들에게 굴복하라. 권세는 하나님께로 나지 않음이 없나니 모든 권세는 다 하나님의 정하신 바라.  그러므로 권세를 거스리는 자는 하나님의 명을 거스림이니 거스리는 자들은 심판을 자취하리라.  관원들은 선한 일에 대하여 두려움이 되지 않고 악한 일에 대하여 되나니 네가 권세를 두려워하지 아니하려느냐? 선을 행하라. 그리하면 그에게 칭찬을 받으리라.  그는 하나님의 사자가 되어 네게 선을 이루는 자니라. 그러나 네가 악을 행하거든 두려워하라. 그가 공연히 칼을 가지지 아니하였으니 곧 하나님의 사자가 되어 악을 행하는 자에게 진노하심을 위하여 보응하는 자니라.”(롬13:1-4)  국가는 개인을 대신해서 범죄자를 처벌합니다.  국가 권력은 하나님이 세우신 제도입니다.  입법, 사법, 행정의 모든 권력은 勸善懲惡을 담당는 기구입니다.  공권력이 제대로 작동된다면 개인적으로 당한 억울한 일을 얼마든지 풀어줄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러한 공권력이 올바로 행사되도록 감시하고 격려해야 합니다. 

      둘째로, 하나님의 심판입니다.  국가 권력이 개인을 대신해서 악인을 응징하지만, 부족할 때가 많습니다.  때로는 악인에 대한 응징이 미흡합니다.  때로는 가해자와 피해자를 잘못 판단하는 수도 있습니다.  이런 때에 피해를 입은 사람은 너무나 억울합니다.  그렇다고 낙심할 필요는 없습니다.  세상 법관 위에 하나님이 계십니다.  하나님은 사람이 심판하지 못하는 것을 심판하십니다.  사람은 잘못 판단할 수 있지만 하나님은 잘못 판단하실 수 없습니다.  “내 아들 솔로몬아 너는 네 아비의 하나님을 알고 온전한 마음과 기쁜 뜻으로 섬길지어다. 여호와께서는 뭇 마음을 감찰하사 모든 사상을 아시나니 네가 저를 찾으면 만날 것이요 버리면 저가 너를 영원히 버리시리라.”(대상28:9)  “하나님은 사람의 길을 주목하시며 사람의 모든 걸음을 감찰하시나니, 악을 행한 자는 숨을 만한 흑암이나 어두운 그늘이 없느니라.”(욥34:21-22)  아합과 이세벨은 사람들의 눈을 속이고 나봇의 포도원을 가로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를 보시고 선지자를 보내셔서 책망하셨습니다.  그는 마침내 왕조의 몰락과 함께 파멸당했습니다.  다윗의 범죄는 사람들 눈에 드러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보셨습니다.  정확하게 응징하시고 심판하셨습니다.  아들이 죽었습니다.  자식들 사이에 살인과 간음이 벌어졌습니다.  자식이 반역을 일으켰습니다.  신하들이 반란에 동참했습니다.  염병으로 백성들이 죽었습니다.  하나님의 심판은 두렵습니다.  사람들이 사용하지 못하는 엄청난 방법으로 악인을 심판하십니다.  질병, 재앙, 천재지변, 전쟁, 기근, 사고, 배신...심판의 방법은 무수합니다. 

      악인의 처벌과 응징에 대해서 걱정하지 마세요.  하나님은 살아 계십니다.  하나님은 국가 공권력으로 악인을 재판하십니다.  뿐만 아니라 친히 심판하십니다.  사람의 손으로 심판할 수 없는 부분들을 친히 심판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적어도 악인을 어떻게 응징할 것인가에 대해서는 걱정하지 않아도 됩니다. 

    악인을 어떻게 대할 것인가

      다음으로 말씀드릴 것은 악인을 어떻게 대할 것인가 하는 문제입니다.  악인을 어떻게 대해야 할까요? 

      첫째로, 마음의 복수심을 버려야 합니다.  어떻게 응징하겠다는 생각을 버려야 합니다.  복수심은 증폭됩니다.  즉, 실제로 자신이 받은 것보다 더 크게 갚으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내가 당한 것만큼 너도 당해봐라!  그런데, 실제로는 내가 당한 것보다 훨씬 크게 갚아줍니다.  우리의 정서가 그렇잖아요?  “나를 버리고 가시는 임은 십리도 못 가서 발병이 난다!”  발병만 납니까?  염병, 등창, 곱창, 다 나라!  내 돈 떼어 먹은 놈은 자손 三四 代까지 거지나 되라!  그게 바로 보복의 심리입니다.  야곱의 아들들이 세겜에 머물 때에 누이인 디나가 세겜에게 강간을 당했습니다.  야곱의 아들들은 복수심에 사로잡혔습니다.  그래서 세겜성 남자들을 모조리 죽여버리는 끔찍한 보복을 감행했습니다.(창34장)  이것은 분명히 야곱의 아들들이 당한 것보다 몇 백 배 지나친 보복입니다.  요즘 중동 전쟁이 그렇습니다.  아랍 사람들과 이스라엘 사람들 사이에 끊임  없는 피의 보복이 반복됩니다.  한 명 죽이면, 두 명 죽이고, 두 명 죽이면, 열 명을 죽입니다.  보복의 악순환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먼저 마음의 복수심을 버려야 합니다.  그렇게 하는 것이 보복의 악순환을 끊는 길입니다. 

      둘째로, 관용해야 합니다.  “누구든지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대며, 또 너를 송사하여 속옷을 가지고자 하는 자에게 겉옷까지도 가지게 하며, 또 누구든지 너로 억지로 오리를 가게 하거든 그 사람과 십리를 동행하고, 네게 구하는 자에게 주며 네게 꾸고자 하는 자에게 거절하지 말라.”(39-42절)  관용하는 것은 위선이 아닙니다.  관용은 실제로 가장 유익한 방법입니다.  관용하는 마음을 가질 때에 세 가지 유익이 있습니다. 

      첫 번째 유익은 내 자신의 평안입니다.  복수심에 불타는 사람은 마음이 편치 않습니다.  불면증에 시달립니다.  소화불량에 걸립니다.  사람들에 대해서 신경과민이 됩니다.  내게 잘못이 없는 사람에게까지 푸대접을 합니다.  잘못하면 정신병에 걸립니다.  이미 손해 본 것도 억울한데, 왜 더 시달려야 됩니까?  그럴 필요가 없어요.  이미 지난 역사는 돌이킬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차라리 잊든지 관용하세요.  그러면 마음이 평안합니다.  여유가 생깁니다. 

      두 번째 유익은 가해자에 회개의 기회를 주게 되는 일입니다.  요즘 사형제도 폐지에 대한 논란이 많습니다.  이미 세계 100개국이 넘는 나라들이 사형제도를 폐지하고 있습니다.  이미 저지른 살인이야 過去之事입니다.  범인을 사형에 처한다고 해서 죽은 사람이 돌아오지는 못합니다.  뿐만 아니라 비록 살인범이라 해도, 또 다른 생명을 강제로 빼앗을 필요가 있겠는가 하는 점입니다.  살인범을 죽이는 것보다, 살려두면 오히려 회개할 기회를 줄 수 있습니다. 

      범죄자에게 기회를 주는 것은 십자가 정신이요, 주님의 뜻입니다.  성경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주께는 하루가 천 년 같고 천 년이 하루 같은 이 한 가지를 잊지 말라.  주의 약속은 어떤 이의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같이 더딘 것이 아니라 오직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치 않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벧후3:8-9)  세상 종말을 앞당기지 않고 연장하시는 이유는 악인들에게 회개의 기회를 주자는 것입니다.  실제로 사도 바울은 한 때 살인자였습니다.  스데반 집사님을 돌로 쳐 죽이고, 또 다른 사람들을 잡아 죽이러 돌아다녔습니다.  하나님은 그런 바울을 죽이지 않고 기회를 주셨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아시아와 유럽을 복음화시키는 주역이 될 수 있었습니다.  따지고 보면 우리도 다 하나님 앞에서 큰 죄인들입니다.  그런데도 하나님은 우리에게 기회를 주셔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하셨습니다.  우리의 모든 죄를 용서하시고 자녀로 삼아주셨습니다.  이와 같이 관용은 죄인에게 회개의 기회를 줍니다. 

      세 번째 유익은 공동체를 살리는 일입니다.  미움과 복수심으로 가득찰 때, 공동체는 와해됩니다.  만일 부부가 서로 미워해 보세요.  가정은 무너집니다.  만일 성도들이 서로 미워해 보세요.  교회 공동체가 세워질 수 없습니다.  관용의 정신은 공동체를 살아나게 합니다.  그래서 성경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아무에게도 악으로 악을 갚지 말고 모든 사람 앞에서 선한 일을 도모하라.  할 수 있거든 너희로서는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평화하라.”(롬12:17-18) 

      마지막으로 말씀드릴 것은 악인을 관용할 때에 나타날 수 있는 잘못된 반응입니다.  우리가 악한 사람들을 관용할 때에, 그들이 관용을 악한 기회로 삼을 수도 있습니다.  우리를 조롱할 수도 있습니다.  우리를 더 괴롭히고 못살게 굴 수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적절한 분별력이 필요합니다.  악한 자를 대적하지 말라고 했지, 악을 추종하거나 범죄에 협력하라는 말은 절대로 아닙니다.  그 어떤 경우에도 범죄의 협력자가 되거나, 악을 방조하는 사람이 될 수는 없습니다. 

      아무튼지, 모든 악한 사람들을 관용과 사랑으로 대하세요.  그 모든 결과는 하나님이 책임지십니다.  “내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진노하심에 맡기라. 기록되었으되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고 주께서 말씀하시니라.  네 원수가 주리거든 먹이고 목마르거든 마시우라. 그리함으로 네가 숯불을 그 머리에 쌓아 놓으리라.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롬12:19-21)

    주님은 오늘 ‘원수를 사랑하라’고 도전하십니다.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라고. 이 엄청난 주님의 ‘사랑의 도전’은 무엇을 뜻할까요?

    우리는 주께서 <5장>에서 <팔복>의 말씀을 시작으로 ‘산상수훈’의 말씀을 시작하시고, 율법의 진정한 뜻을 ‘형제에 대해 노하거나’, ‘여인을 보고 음욕을 품고’ 그리고 ‘맹세하는’ 행위의 모순을 통해 올바르게 가르쳐 주셨습니다.

    사실 ‘원수를 사랑하라’는 주제의 내용은 이미 오늘 본문 앞 절 <40절>에서부터 시작됩니다. “누구든지 네 오른 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대며, 또 너를 송사하여 속옷을 가지고자 하는 자에게 겉옷까지도 가지게 하며 ~ 네게 꾸고자 하는 자에게 거절하지 말라” (v. 40~42)라고 주님은 도전하십니다.

    이제 그렇다면, 무엇이 주님의 ‘원수를 사랑하라’는 뜻일까요? 그것은

    첫째, “천국시민의 인격적 완성”을 뜻합니다: 주님은 ‘원수를 사랑하라’고 도전하시고 나서, “(하나님은)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취게 하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리우심이니라” (v. 45)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로서 천국시민이 되었다면, 이제 하나님의 선하심을 좇아 ‘원수를 사랑’함으로 인격적 완성을 이루는 것입니다.

    둘째, “나의 상처가 치유됨”을 뜻합니다: 주님의 ‘원수를 사랑하라’는 도전은 그 사랑의 실천을 통해 놀라운 실제적인 유익을 누리게 됨을 이해해야 합니다. 우리가 주님의 사랑의 명령을 좇아 기도로 순종해 나갈 때, 주님은 ‘마음이 상한 자를 고치시고, 고통으로 갇힌 심령을 자유케’ 하시는 것입니다 (사. 61:1). 이 원수에 대한 용서와 사랑만이 우리를 상하고 갇힌 상처로부터 주의 능력으로 치유 받게 합니다.

    셋째, “하나님의 형상을 온전히 닮아감’을 뜻합니다: 하나님은 원수 되었던 우리를 그 아들을 십자가에 내여 주심으로 구원시켜 주셨습니다 (요. 3:16). 만약 여러분과 제가 하나님 아버지의 형상을 닮은 자녀로 성장하기 원한다면 (v. 48), 하나님의 사랑, ‘원수를 사랑’하셔서 우리를 구원하신 그 사랑을 날마다 본받아 가야 할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도전의 핵심일 것입니다.

    선하신 하나님 아버지를 향한 사랑 가운데 기도를 통해 성령의 도우심으로 원수를 사랑함으로, 지난 날의 상처와 고통이 치유함을 받고 자유자의 삶을 살아가는 복된 성도 여러분 되시길 축원합니다.

    주님은 오늘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씀을 우리에게 하십니다. 이처럼 ‘원수를 사랑하라’는 이 주님의 말씀은 세상 사람들 뿐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으로 살아가고자 힘쓰는 우리 크리스챤들에게 있어서도 엄청난 도전의 말씀임을 우리 모두는 잘 압니다. 이제 <5장>을 마무리해 가는 가운데 주님은 ‘하나님의 자녀’ 곧 ‘천국 시민’의 정체성을 우리 성도들에게 밝혀주시며, 천국시민의 정체성 (인격)을 사랑의 실천 가운데 증명된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오늘 설교 말씀 가운데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v. 44)는 주님의 가르침을 깨닫아 나가며, 천국시민의 진정한 인격의 크라이막스가 되는 원수까지 사랑하는 그 사랑의 실천을 통해 자녀의 권세와 은혜를 풍성히 누리는 성도 여러분 되시기를 소망합니다.

    우리가 앞서 살펴보았듯이, 주님은 산상수훈을 시작하시며 먼저 크리스챤의 참된 8가지 복, 곧 ‘팔복’을 선언하시고 나서, ‘율법’의 진정한 뜻은 무엇인지를 가르쳐 주시는 것입니다. ‘무엇이 살인이며, 무엇이 간음인지?’를 하나님의 진정한 뜻을 좇아 가르쳐 주셨습니다. ‘형제에 대하여 노하는 자마다 살인한 자’요, ‘여인을 보고 음욕을 품는 자마다 이미 간음한 자’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지난 시간 ‘맹세하지 말찌니라’는 말씀을 통해 주님은 ‘우리 인간의 부정직성’을 도전하셨습니다. 유대백성들이 틈만 나면 거짓말과 헛된 맹세를 통해 그들의 ‘정직성’을 헌신짝처럼 버리고,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인격을 크게 손상시켰기 때문인 것입니다. 그럼으로 주님은 정직한 말과 행동을 통해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합당한 인격의 삶을 살아가라고 도전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서, 이제 오늘 말씀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또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v. 43-44)라고 말입니다. 제가 성도 여러분과 <원수를 사랑하라>는 주제의 오늘 말씀을 살펴봄에 있어서 먼저 잠시 살펴볼 말씀은 바로 오늘 본문 앞 절의 <38~42절>의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지난주 “맹세하지 말라”는 주제의 말씀인 <33~37절>에 이어서 연결되는 말씀인데, 주님은 이렇게 <38-39절>을 시작하고 계십니다. “또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으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악한 자를 대적지 말라” (v. 38-39)라고.

    여기서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으라”는 구약 율법의 말씀에 대해 매우 냉정하고 무서운 징계의 말씀으로 이해하는 오늘날의 크리스챤도 많은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분명히 이해해야 할 율법의 정신은 그 반대라는 점입니다. 다시 말해, ‘눈에는 눈, 이에는 이로 갚으라’는 것은 누군가가 ‘실수로 한 행동에 대해 피도 눈물도 없이 냉혹하게 갚아주라’는 뜻이 아니라, 반대로 ‘피해를 당한 당사자나 가족이 흥분한 나머지 극단적으로 가해자를 공격하고 가혹하게 처단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만약 상대가 ‘이를 손상했다면 이에 해당하는 벌’만, 그리고 ‘눈을 손상했다면 눈에 해당하는 벌’만 가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자칫 흥분된 감정으로 피해자가 극단적으로 보복하지 않도록 최소한의 형벌을 정의롭게 처벌할 수 있도록 규정한 법인 것입니다.

    그리고 <38~42절>에서 이해할 수 있는 두번째 사실은 ‘주님은 이 말씀에서 오늘 본문의 주제인 <원수를 사랑하라>는 가르침을 이미 시작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이디에서 입니까?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악한 자를 대적하지 말라 누구든지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대며, 또 너를 송사하여 속옷을 가지고자 하는 자에게 겉옷까지도 가지게 하며, 또 누구든지 너로 억지로 오리를 가게하거든 그 사람과 십리를 동행하고, 네게 구하는 자에게 주며 네게 꾸고자 하는 자에게 거절하지 말라” (v. 39~42)고 선언하시는 것입니다. 주님은 이 말씀을 통해 먼저 ‘나에게 손해를 가하고, 상처를 주고, 힘들고 귀찮게 한 자’들을 어떻게 대해야 할 것인지에 대해 가르쳐 주시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이웃을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어지는 말씀이 오늘 말씀입니다. “또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v. 43-44)라고 말입니다.

    이 말씀을 읽으면, 구약성경에서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는 말씀이 있는 것인가 하고 추측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구약에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레. 19:18)는 말씀은 있어도, 그 어디에도 “원수를 미워하라”는 말씀은 없습니다. 그렇다면, 유대인들은 왜 이렇게 주장하는 것일까요? 아마도 이렇게 유대종교지도자들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가르친 것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민족을 출애굽 시키신 이후에 약속의 땅, 가나안 땅으로 인도하시며 그곳 주민을 전쟁 가운데 멸절하라고 명령하신 말씀에 근거를 두는 것 같습니다. 이것이 <출애굽기>를 포함한 <모세오경>에 기록되어 있는데, 그 이후 유대인들은 주위 이방민족을 마치 원수처럼 여긴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한가지 분명히 이해할 것은 ‘하나님에게 이스라엘민족에게 가나안 정복을 통해 그곳 주민을 멸절케 하신 것은 이스라엘만 사랑하셔서, 가나안 족속을 희생시켰다’는 뜻이 아닙니다.

    그 이유는 그 당시 가나안 주민들의 죄악이 극도에 다다름으로 마치 타락한 ‘소돔과 고모라성’을 멸망할 때처럼,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가나안 족속의 심판의 도구로 사용하셨다는 사실을 이해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마치 이스라엘의 범죄함으로 하나님께서 이방열강 바벨론과 앗시리아 그리고 여러 나라들을 사용하셔서 자기 백성 이스라엘을 치신 것과 동일한 이유인 것입니다. 물론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사랑하시지만, 그렇다고 ‘힘없고 약한 옆집 아이를 이유도 없이 가서 괴롭히고 때리는 버릇없는 자기 아이를 못 본채 방관하는 그런 무책임하고도 이기적인 부모’와 같은 존재가 결코 하나님은 아닌 것입니다. 바로 이와 같은 하나님의 사랑의 본질에 대해서 주님은 이렇게 오늘 본문에 이어서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이는 하나님이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취게 하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리우심이라” (v. 45)라고. 그럼으로 주님께서 오늘 말씀에서 도전하시는 골자는 ‘원수를 미워하라’가 아니라,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이제 그렇다면, “무엇이 주님의 ‘원수를 사랑하라’는 뜻일까요?” 그것은

    첫째, 천국시민의 인격적 완성

    우리가 앞서 살펴보았듯이 유대민족은 잘못된 율법의 해석과 가르침으로 인해 하나님의 “네 이웃을 사랑하라”는 명령을 절반의 명령으로 축소시켜 버린 것입니다. 왜냐하면, 자기들 유대인들끼리 만이 ‘이웃’이고, 이웃 이방민족은 ‘원수’라고 하면서 율법의 말씀에도 없는 “원수를 미워하라”라는 엉뚱하게 적용했기 때문입니다. 그리하여 우리도 잘 알듯이 유대인들은 주위 이방민족들을 ‘할례 받지 못한 민족’이라고 깔보고 개처럼 업신여기고 미워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우리의 하나님 아버지는 그런 편협되고, 유대인만 사랑하는 하나님이 아니심’을 오늘 본문의 이어지는 <45절>말씀에서 분명히 밝히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취게 하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리우심이니라” (v. 45)고 말입니다. 하나님은 따사로운 햇빛을 비추시고, 은혜로운 단비를 자기 백성에게만 주시는 것이 아니라, 자기를 믿지 않는 자들에게도 그 자비하심으로 동일하게 따스한 빛을 비추시고 생명의 비를 뿌리시는 긍휼이 무궁하신 선하신 하나님이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렇게 주께서 하나님의 성품과 사랑을 우리에게 밝히시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 중심에는 그분의 자녀인 우리들도 그렇게 살아야 한다는 도전인 것입니다. 하나님만 선하시고, 우리는 내 마음데로 살아도 좋다는 것이 아닙니다. 그럼으로 주님은 이렇게 계속해서 말씀을 이어 가십니다. “너희가 너희를 사랑하는 자만 사랑하면 무슨 상이 있으리요 세리도 이 같이 아니하느냐, 또 너희가 너희 형제에게만 문안하면 남보다 더 하는 것이 무엇이냐 이방인들도 이같이 아니하느냐” (v. 46-47)라고 말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로서 너희들이 세리들과 이방인들과 다른 점이 무엇이냐?’고 주님은 도전하십니다. ‘죄인들도 자기를 좋아하는 자는 사랑한다’는 것입니다. 결론은 <말로 만이 아니라, 사랑함으로 아니 ‘원수를 사랑함’으로 진정한 하나님의 자녀 곧 천국시민의 진정한 인격과 특성을 드러내고 증명할 것이 아니냐?!’>고 주님은 반문하시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주님은 결코 ‘원수에 대한 사랑’이 쉽다고 말씀하지 않으십니다. 이것이 쉽고 누구나 할 수 있다면, 이렇게 도전하지도 않으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방인들과 세상사람들은 도저히 행할 수 없는 것이 바로 ‘원수에 대한 사랑’이요, 이것은 오직 ‘하나님의 아들과 딸’만이 가능하다고 주님은 오늘 우리에게 도전하고 격려하심을 믿습니다. 성도 여러분은 하나님의 자녀인 천국시민으로서 원수에 대한 사랑을 통해 이 복된 천국시민의 인격을 완성해 나가고 있습니까?

    둘째,  나의 상처가 치유 

    주께서 ‘원수를 사랑하라’는 이 혁명적이고도 엄청난 도전의 말씀을 주시는 이면에는 우리 각자가 이런 사랑의 실천을 통해서 누리게 될 놀라운 은혜가 주어짐을 우리는 이해할 필요가 있다고 저는 믿습니다. 그렇다면 이 ‘은혜’는 무엇일까요? 저는 그 분명한 은혜의 하나는 우리 자신의 <상처의 치유>라고 생각합니다. 여기서 먼저 생각해 볼 것은 ‘누가 원수인가?’하는 것입니다. 물론 ‘원수’의 개념은 사람마다 상당히 주관적으로 정의되고, 다양하게 이해될 수 있을 것입니다. 정말 말 그대로 ‘내 인생에 있어서 치명적으로 육체적이거나 정신적인 상처를 입혔거나, 혹은 물질적 손해를 끼친 사람’이 있는가 하면, 그 정도는 아니라 할지라도 ‘나를 성가시게 하고, 괴롭히고, 별 이유도 없이 나를 미워하고 힘들게 했던 그 누군가’가 나에게는 ‘원수 같은 존재’로 인식될 수 있을 것입니다. 비록 제 3자가 봤을 때, ‘객관적인 가해의 정도’가 그리 커 보이지 않는다 할지라도 내가 느끼고 겪은 고통과 상처가 크다면, 나에게 있어서는 ‘원수와 같은 존재’임에는 어쩔 수 없는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는 살아온 환경 가운데 그 누구도 원하진 않았지만, 원수 같은 자들을 만나게 되었고, 가슴 아픈 관계가 형성되기도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존재가 이제는 지나간 과거의 일로 남아 있을 수도 있고, 지금도 마주해야 하는 경우도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 각자가 어떤 상황에 있든 상관없이 우리가 해야 할 중요한 질문은 주님의 도전을 따라서 ‘어떻게 나는 원수를 사랑할 수 있을까?’하는 것입니다. 주님은 이렇게 가르쳐 주십니다.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v. 44)라고 말입니다. 저는 주님의 “너희를 핍박하는 자, 곧 원수를 위하여 기도하라”는 명령 속에 ‘원수를 사랑하는 첫걸음’이 있음을 깨닫습니다. 우리 모두가 인정하시겠지만, ‘원수에 대한 사랑’은 결코 나의 의지와 노력으로는 충분치 않습니다. 먼저 기도로 그 사랑하기 힘든 존재를 사랑할 수 있도록 하나님께 간구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마음을 열어 그 상대를 품어주고 용납할 수 있는 첫걸음은 주의 영, 성령께서 내 마음을 만져 주셔서 그 영혼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되게 해 주실 때 비로소 가능한 것입니다. 그럼으로 먼저 주께서 우리의 마음을 새롭게 변화시켜 주실 것을 기도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왜 그 용서하기 힘든 영혼을 위해 기도하고 사랑해야 할까요? 물론, 앞서 살펴본 것처럼 그렇게 할 때 하나님의 자녀요 천국시민의 온전한 인격으로 완성됨을 증명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뿐 아니라 ‘이런 사랑의 실천’을 통해 갖게 되는 매우 실제적인 유익은 우리 자신의 ‘상처의 치유’일 것입니다. ‘왜 원수를 사랑해야 할까요?’ 그 분명한 대답의 하나는 ‘만약 여러분이 어떤 이유가 되었건 아직까지 여러분을 힘들게 한 그 누구를 용서하지 못하고 용납하지 못할 때, 여러분은 여전히 그에 대한 미움과 증오의 감정을 버리지 못하고, 고통의 상처를 회복하지 못하게 된다는 사실’을 우리는 이해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어느 날 안식일 회당에서 <이사야서>에 기록된 오실 메시아에 관한 예언의 말씀을 읽으심으로 공생애의 시작을 선포하셨습니다. “주 여호와의 신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내게 기름을 부으사 가난한 자에게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나를 보내사 마음이 상한 자를 고치며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갇힌 자에게 놓임을 전파하며” (사. 61:1)라고. 주님은 이사야의 글을 인용하시면서 자신이 이 땅에 오신 목적은 ‘심령이 가난한 자에게 하나님의 구원의 기쁘고 아름다운 소식을 전파하고, 마음이 상한 자를 고치고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그리고 갇힌 자에게 놓임을 주시고자 오셨다’고 선포하시는 것입니다.

    저는 주님께서 ‘마음이 상한 자를 고치고,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갇힌 자를 놓임 받게 한다’는 의미가 무엇인지를 생각해 봅니다. 그 의미는 첫째, <예수님을 통한 구원을 누리게 됨>을 의미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여러분과 저를 그 강력한 힘으로 가두고 구속하던 ‘죄와 사망’의 힘에서 자유케 되고, 사단의 권세에서 해방을 된 것입니다. 그리고 둘째는, <예수님을 통해 참된 치유와 회복을 누리게 됨>을 의미합니다. 다시 말해, 우리 거듭난 성도들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생의 구원’을 받을 뿐 아니라, 이 땅을 살아가며 진정한 ‘치유와 회복’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우리 성도 내면의 상처가 치유되고, 주님의 장성한 성품으로 온전히 회복’되는 핵심이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에 포함된 원수에 대한 사랑’을 실천함으로써 가능함을 깨닫게 됩니다. 왜냐하면, 여러분이 여전히 그 누군가를 용납하지 못할 때 여러분의 마음의 상처는 결코 온전히 치유되지 않음을, 그리고 여러분이 그 누군가를 사랑하지 않고 미워할 때 여러분은 끝까지 아픈 상처와 기억을 떠나 보내지 못하고, 죽는 날까지 가슴에 안고 고통받으며, 증오의 감옥에 갇혀 살아갈 수밖에 없음을 주님은 아시기 때문입니다. 그럼으로 주님은 ‘원수를 사랑하라’고 우리에게 도전하시고 격려하시는 것입니다. 원수를 용서하고 사랑함으로써, 아픈 기억과 상처를 이제는 떠나 보내라는 것입니다. 그럼으로 원수를 사랑함으로 말미암아 진정한 자유와 유익을 누리는 존재는 누구보다도 먼저 나 자신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꼭 명심해야 합니다. 이것이 ‘원수를 향한 용서와 사랑 안에 포함된 진정한 자기 사랑이요, 치유의 능력인 것입니다.

    셋째, 하나님의 형상을 온전히 닮아감 

    만약에 성경의 수많은 말씀 중에서 가장 하나님의 성품을 잘 드러낸 대표적인 말씀을 들라고 한다면, 저는 망설임 없이 <요한복음 3장16절>을 들 것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요. 3:16)라고. 자기의 하나 밖에 없는 독생자를 아끼지 아니하시고 십자가에 내어 주셔서, 세상에 속했던 여러분과 저를 살리신 하나님의 그 놀라운 사랑만큼 그분을 잘 드러내는 말씀도 없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이 하나님의 사랑은 ‘한 사람도 예외없이 하나님을 거부하고 그분과 원수 되었던 우리 인간을 향한 사랑’인 것입니다. 이것을 사도 바울은 <로마서>에서 이렇게 잘 영적으로 묘사합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 곧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목 되었은 즉 화목된 자로서는 더욱 그의 살으심을 인하여 구원을 얻을 것이니라” (롬. 5:8,10)라고. 이처럼 하나님의 그 측량치 못할 사랑, 곧 그분의 놀라운 사랑은 한마디로 ‘원수를 사랑하시는 사랑’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바 된 우리 인간이 타락으로 인해 그분의 영광스러운 형상을 많이 훼손하게 되었지만, 이제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하나님의 형상을 팔복을 통해 회복하고 추구하게 되는데, 그 크라이막스는 바로 ‘하나님 아버지’의 ‘원수를 용서하시고, 사랑하시는 그 사랑’일 것입니다.

    이처럼 이 선하신 하나님 아버지의 아들과 딸이 되었음을 우리가 기뻐하고 감사한다면, 그리하여 그분의 선하고 아름다운 형상을 닮아 가길 소망한다면, 이제 여러분과 제가 추구하고 회복해야 할 하나님의 형상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원수 되었던 우리를 사랑하셔서 그 아들을 내여 주셔서 우리를 구원하신 사랑’일 것입니다. 바로 ‘원수까지도 사랑하신 그 하나님의 사랑’을 회복하고 연습하는 것입니다. 너무 힘들다고요? 우리는 하나님아 아니니, 불가능하다고요?!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이 ‘팔복’의 말씀을 통해 산상수훈을 시작하시고, 이제 천국시민의 진정한 인격을 마무리해 가시면서 ‘원수를 사랑하라’고 우리를 도전하시는 이유가 여기 있다고 저는 믿습니다. 이것이 주께서 <5장>을 끝내며 “그럼으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 (v. 48)라고 선언하시는 이유일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여러분과 저를 구원하신 목적은 하나님의 그 선하시고 온전하신 형상을 닮은 그의 자녀로 살아가게 하심 인 것입니다. ‘원수까지도 사랑하는 이 하나님의 사랑’은 단지 불가능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리스도의 사랑 안에서 성령의 은혜로 성취되는 것임을 주님은 우리에게 깨우쳐 주시는 것입니다. 그럼으로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고 주님은 이 온전하신 사랑을 우리에게 촉구하시는 것입니다.

    저는 오늘 말씀을 마무리하며, '원수를 사랑하라'는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살아간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너무도 잘 보여준 우리 신앙의 선진 한분을 소개하고자 합니다. 그분은 손양원목사님이십니다. 손목사님은 '사랑의 원자탄'이라는 별명이 붙을 정도로 놀라운 사랑을 실천하셨는데, 일제시대 신사참배를 반대하다가 여러해 투옥되어 옥고를 치루셨고, 6.25사변이 벌어졌을때 공산군에 의해 순교하셨습니다. 그런데, 손목사님은 순교하시게 몇 해전에 전라남도 여수에서 '애양원'교회라는 나병환자를 돌보고 섬기는 교회에서 시무하셨는데, 어떤 공산당원이었던 청년에 의해 사랑하던 두 아들이 순교하는 힘든 순간을 경험하게 되셨습니다. 이렇게 두 아들의 장례식에서 손목사님은 이렇게 참석한 성도들과 함께 감사의 제목을 나누셨습니다.

    • 나 같은 죄인의 혈통에서 순교의 자식들을 나오게 하셨으니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 허다한 많은 성도들 중에 어찌 이런 보배를 주께서 하필 내게 주셨으니 감사드립니다
    • 한 아들의 순교도 귀하다 하거늘 하물며 두 아들의 순교리요,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 예수 믿다가 누워 죽는 것도 큰 복이라 하거늘, 하물며 전도하다 순교 당함이요,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 미국 유학가려고 준비하던 내 아들 미국보다 더 좋은 천국 갔으니 감사드립니다
    • 나의 사랑하는 두 아들을 총살한 원수를 회개시켜 내 아들 삼고자 하는 사랑의 마음 주신 하나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 내 두 아들의 순교로 말미암아 무수한 천국의 아들들이 생길 것이 믿어지니 우리 아버지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이렇게 손양원 목사님은 자신의 사랑하는 두 아들을 죽인 청년을 양아들로 입양합니다. 그리고 그를 회개시켜 천국의 아들이 되게 하셨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하나님을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뜻을 다해 사랑하십니까? 이런 하나님 사랑을 통해 나를 온전히 사랑하고, 이제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하는 은혜를 누리십니까? 오늘 주님은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v. 44)고 축복된 사랑의 권면을 주십니다. 왜냐하면, ‘원수를 향한 사랑의 실천’은 우리 성도의 최종적인 축복의 통로이자, 천국시민의 참된 증거이기 때문입니다. 바라기는 여러분의 의지와 결심 이전에 주의 영, 성령의 능력과 말씀의 진리를 통해 기도로 간구하는 가운데 이와 같은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 곧 ‘원수 되었던 우리를 사랑하신 사랑’으로, 나를 상처 주고 힘들게 했던 그 영혼을 용납하고 품어줌으로, 마음의 상처가 회복되고, 아픈 기억의 억눌림으로부터 자유케 되어 우리 하나님 아버지의 온전하심을 날마다 닮아가는 이런 축복된 성도 여러분 모두 되시길 간절히 기도합니다.



    원수를 사랑하는 법

    원수를 사랑하는 법 

    광주 모교회 신모 장로(62)에게는 특수부대원인 아들이 있다. 그 아들이 96년 제대를 앞두고 사격 연습 중에 총에 맞았다. 총알이 아들의 복부를 관통했다. 단순사고로 보기 힘들었다. 가해자는 아들 부대 중사였다. 부대에서도 고의적인 면에 초점을 두고 수사를 벌였다. 수사진행 상황을 들은 신 장로는 휴가 중 아들이 한 말이 떠올랐다. "제가 사격 1등이에요. 오죽 했으면 부대 중사가 사격 시험에서 한 번만 양보해 달라고 부탁했겠어요." 진급을 앞둔 중사의 부탁이었지만 거절했다는 아들의 자랑이었다. 대수술을 받은 아들 곁에서 신 장로는 기도뿐 더 이상 다른 생각을 할 수 없었다. 다행히 결과가 좋아 아들은 생명을 되찾게 되었다. 이때 고의성에 대한 의혹을 본격 수사키로 했다는 연락이 왔다. "안 되요. 그분을 용서해 주세요." 병상에서 아들이 말했다. 중사의 어려운 집안 사정을 잘 알고 있어고 설사 고의로 쐈다 해도 용서해 주자는 것이었다. 아들의 말에 신 장로는 부대를 찾았다. 더 이상 사고에 대해 조사되는 것을 원치 않는다고 청원했다. 결국 사건은 중사가 제대하는 것으로 마무리 됐다. 지금 중사는 회사에 다니며 신 장로를 부친처럼 따르고 있다. 용서를 통해 신 장로는 아들을 한 명 더 얻은 셈이다. 사랑의 실천은 사람을 변화시켜 구원할 수 있으며, 우리에게 더 없는 기쁨과 하늘의 상이 주어진다. 우리가 원수를 사랑하면 원수를 갚는 것과는 비교할 수 없는 평안과 기쁨을 누리게 된다. 그것은 용서에 대한 복이고 사랑의 대가이다. 복수는 또 다른 복수를 낳지만 용서와 사랑은 상처를 낫게 하고 새 생명을 탄생시킨다. 출 처 국민일보. 1999. 11. 

    맹학교 교사의 고백 

    "왜 특수교육을 택했느냐?"는 질문에 이화순(40) 교사는 찢어질 듯 가난했던 어린 시절 애기부터 꺼냈다. 그는 경북 칠곡에서 빈농 집안의 7남매중 막내로 태어났다. 중학교를 졸업하고 1년 간 사환 일로 돈을 벌어 여상에 진학하고 나서 스스로 감격해 했을 정도였다. 특수교육은 '학비가 거의 공짜'라는 것에 끌려 주경야독으로 한국사회사업대(현 대구대)를 졸업하고, 1977년 대구광명학교에 처음 부임할 때까지만 해도 특수교사직은 직업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1979년 대전맹학교로 자리를 옮기면서 이 교사의 일과는 어느덧 "그들에게 무엇을 해줄 수 있을까?"를 고민하는 것으로 바뀌었다. 이 교사는 82년부터 2년여 간 아예 학교 기숙사로 이부자리를 옮겨놓기도 했다. 전학 온 학생의 손을 잡고 이곳저곳 둘러보는 도우미 역할을 도맡는가 하면, 방과 후에는 기숙사에서 상담자 역할을 지원했다. 또한 그는 시각장애인 컴퓨터 교육에 관한 한 권위자다. "정상인보다 컴퓨터가 더 필요한 이들이 시각장애인입니다. 자기 생각을 표현하려면 워드프로세서는 필수지요." 이 교사는 지난해「시각장애인을 위한 컴퓨터 길라잡이」라는 책을 펴내기도 했다. 이 교사는 "이들과 함께 있다보니 매사에 감사할 일을 알게 되고 이들에게 뭔가 해주고 싶은 생각이 들뿐입니다."라고 말했다. 맏딸 정보연(21)씨도 공주대 특수교육과 재학 중이다. 참 스승은 그들이 하는 일들이 봉사나 헌신이라고 의식하고 있지 않다. 그저 그들이 자신이 해야 할 일을 하고 있을 뿐이라고 대답한다. 예수님께서도 제자들에게 참 스승이 되셨다. 제자들이 예수님께 실망스런 모습을 많이 보였지만, 예수님께서는 오로지 제자들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그들에게 변함없는 스승으로서의 마음으로 제자들을 대하셨다. 출 처 한국일보. 2000. 4. 25 

    대통령과 책과 지식사회 

    빌 클린턴 미국 대통령은 지난 8월 23일 열흘 간의 여름휴가를 떠나면서 책 12권을 가져갔다. 책 목록도 학술서적에서 소설에 이르기까지 다양했고 수준도 높았다. 클린턴은 멀리건으로 악명 높은 골프광이기도 하지만 젊은 시절부터 독서에서 골프에 못지않은 열정과 높은 안목을 지녔다. 그래서 해마다 클린턴이 휴가 때 읽을 도서목록을 발표하는 것은 백악관의 연례행사가 되어 왔고, 출판사나 저자들은 그 무렵이면 그 목록 발표를 마른침을 삼키며 기다려 왔다. 우리 나라에서 책, 독서 이런 문제에 관한 한 가장 모범적인 정치지도자는 김대중(金大中)대통령일 것이다. 지난해 일산 사저(私邸)에서 청와대로 입주할 때 이삿짐 트럭 3대 분에 달하는 1만 5천 권의 손때 묻은 장서라고 했던 기억이 새롭다. 지난 7월 25일 지방 휴양시설로 휴가를 떠날 때 4권의 책을 가져갔다고 청와대 대변인이 발표한 바 있다. 처칠이 명연설가요, 노벨상을 받을 정도의 명문자가임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그런데 이 능력은 타고난 것이 아니라 처칠 자신이 노력해 만들었다. 처칠은 언어장애가 있었는데 눈물나는 발음교정 연습 끝이 이를 극복했다. 그의 뛰어난 산문도 일생 내내 동서고금의 고전을 탐독해 얻은 지적 바탕에다가 글의 운율까지를 고려하는 철저하고 세심한 다듬기 작업을 거쳐 탄생한 것이다. 한 나라의 교육의 수준과지적 능력은 그 나라의 독서 수준을 보면 쉽게 알 수 있다. 그러기에 한 나라의 대통령이 독서의 본을 보이고 있다고 하는 것은 우리에게 커다란 도전과 힘이 되고 있다. 마찬가지로 하나니의 말씀을 대하는 태도에 있어서도 수준 높고 그 말씀을 통하여 좋은 결과를 가져온 본보기의 모습을 갖춘 사람이 우리 시대에는 필요하다. 출 처 중앙일보. 1999. 9. 2 **후기 실학자 조선 후기의 실학자 이덕무(1741-1793). 그가 젊은 시절 자신에 대해 적은 실록「간서치전」에는 '독서광'으로서의 면모가 그대로 드러나 있다. 그는 풍열로 눈병에 걸려 눈을 뜨기 어렵게 되어도, 열 손가락이 동상에 걸려 피가 터져도 책을 읽었다. 양반가문의 서자로 태어나 가난에 찌들렸던 그는 늘 남에게 책을 빌려 봤고 중요한 대목은 베껴 적었다. 정민 한양대 교수가 펴낸「한서이불과 논어병풍」(열람원)은 이덕무가 남긴「선귤당농소」(蟬橘堂濃笑)의 전부와「이목구심서」(耳目口心書)의 일부를 우리말로 옮기고 해설을 덧붙인 책으로, 추운 겨울 찬 구들에서「논어」를 병풍 삼고「한서」(漢書)를 물고기 비늘처럼 잇대어 덮고 잤던 이덕무의 삶을 은유적으로 표현한 책제목을 달았다. 책과 벗하며 맑은 삶을 살려 했던 이덕무는 "먹고 살만해지면"이라는 글에서 "집안살림이 살만해지면 한적한 물가에서 책을 지어 명산에 굴을 판 뒤 깊이 간직해 두겠다. 먼 훗날 그것을 찾아낼 한 사람의 독자를 위해서"라고 적었다. 또 "책을 읽는 마음가짐"이라는 글에서는 "티끌 세상에서 부대끼며 살아가더라도 마음을 가지런히 하고 책 읽을 여유를 가진 사람을 군자라고 하리라."고 했다. 그가 쓴 "경계로 삼는 일"은 세파에 찌든 지식인들이 귀감으로 삼을 만하다. "알량한 재주를 믿고 함부로 날뛰지 마라. 얄팍한 지식을 과신하지 마라. 학문하는 일이 교만을 가져온다면 차라리 몰라서 겸손한 것이 낫다." 적 용 우리는 독서를 통해 더 넓은 세상을 볼 수가 있고, 다른 이들은 경험을 간접적으로 체험할 수 있다. 또한 독서를 통하여 올바른 인격이 형성된다. 그리고 많은 독서를 한 사람은 대부분 겸손함과 깊은 사고를 할 줄 아는 사람이다. 출 처 경향신문. 2000. 3. 14 ** 매케인의 참회 미국 공화당 대통령후보 경선에서 퇴장한 존 매케인 상원의원(애리조나)이 최근 예비선거운동 중 자신이 저지른 과오 하나를 공개적으로 참회했다. 그가 후회하는 것은 사우스캐롤라이나 주정부 청사에 걸려 있는 남부연방기(the Confederate battle flag) 문제이다. 남부연방기는 1861년 노예제도를 고수하며 미합중국연합을 탈퇴해 남북전쟁을 촉발시켰던 남부 11개주 연방이 사용하던 깃발이다. 사우스캐롤라이나는 '흑인에 대한 모독'이라는 비판에 대해 '전통의 상징'이라고 맞서며 11개주 중 유일하게 이 깃발을 게양해 왔다. 매케인은 지난 1월 자신에게는 결정적으로 중요했던 사우스캐롤라이나 예비선거를 앞두고 깃발 문제를 기자들이 묻자 "주 정책의 문제" 라고 얼버무렸다. 그로부터 3개월 뒤 그는 사우스캐롤라이나를 방문한 자리에서 이렇게 고백했다. "그때 나는 진심을 말하지 못했다. 정직하게 애기하면 주 예비선거를 이기지 못할까봐 두려웠다. 그래서 나는 원칙과 타협하기로 했던 것이다. 나는 언제나 진실을 말하겠다는(유권자에 대한) 약속을 깨버렸다." 그러며서 그는 "남부연방 군사들은 미국 역사의 잘못된 편에서 싸웠으며 깃발은 내려져야 한다."고 말했다. 고백한다는 것은 용기가 필요하며 사람들은 그런 용기에 감동한다. 그렇다면 이렇게 자기의 과오나 실수를 고백하는 용기는 어디에서 비롯되는가? 그것은 사람들의 매서운 눈초리와 냉대를 의식하며 사람을 두려워하느냐, 아니면 우리의 영혼이라도 능히 지옥에 던져버리시는 하나님을 두려워하느냐에 달려 있다. ** 팔 없는 천사 레나 마리아는 스웨덴 태생으로 수영선수이며 가스펠 싱어이다. 세 살부터 시작한 수영은 발군의 실력을 발휘해 스웨덴 국내대회를 횝쓸었고, 서울 장애인올림픽에서 자신의 수영솜씨를 유감없이 발휘하기도 했다. 그녀는 태어날 때부터 두 팔이 없었고 다리도 한 쪽이 다른 한 쪽에 비해 절반 길이밖에 되지 않았다. 그녀의 부모는 그녀가 태어나는 순간부터 절망하지 않고 사랑으로 키웠다. 그녀가 물에 친숙하다는 것을 알고 어려서부터 수영을 가르쳤는데, 수영은 천성적으로 약한 그녀의 심장을 튼튼하게 해주었고, 그래서 아름다운 목소리로 긴 호흡의 노래도 잘할 수 있게 되었다. 마스터스 보이스라는 가스펠 합창단에서 활동을 하기 시작했고, 스웨덴 국왕의 도움으로 국제성서학교에 입학했으며, 대중 앞에서 가스펠을 부르기 시작하면서 세계를 돌며 하나님의 노래를 전했다. 이런 그녀를 옆에서 같이 활동하며 지켜보던 한 남자가 청혼을 하게 되고 그녀는 지금도 결혼반지를 실에 꿰어 목에 걸고 다니며 아름답고도 평범한 생활을 하고 있다. 우리의 삶은 고난과 힘든 상황들의 연속이다. 그럴 때마다 우리의 입에서는 감사와 찬양보다는 불평과 짜증의 말이 나오기 쉽다. 하지만 하나님은 우리의 감사와 찬양의 입술의 열매를 받으시기 원하신다. 우리의 감정이 원하는 것(육체적 안락)과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고난을 통한 영광)의 간격이 하늘과 땅 차이임을 깨닫고 그런 상황 사이에서 갈등하고 선택해 나가는 것이 바로 우리 신앙의 실존이 아닐까? 월간 낮은 울타리. 2000.4 **저는 신의주 청년입니다 저는 견딜래야 견딜 수 없는 초고압적인 파소 총치와 공포의 흑암을 박차고 중국 땅에 와서 그렇게도 애타게 갈망하던 진리의 길, 영상의 길에 들어설 수 있는 행운을 지니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님의 십자가 보혈로 구원을 받고 예수님의 한없는 사랑을 여러 형제님을 통해서 가슴뜨겁게 느끼게 되었으며 새 생명으로 태어났습니다. 지금 평양은 사단들의 활동무대로 변하여 복음을 받을 자리를 잃었으며, 그로 말미암아 전쟁보다 더 무서운 불행과 고통을 백성들에게 강요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결코 평양을 버리지 않을 것이며, 부녘동포들은 반드시 하나님의 뜻을 따라 구원박게 될 것입니다. 그처럼 어려운 환경과 조건에서도 도욱 더 복음을 갈망하던 우리들은 여러 경로를 통해 복음의 불시를 받아 안고 전하려고 합니다. 이제 우리 백성들에게 소망이 있음을 알게 할 것입니다. 오직 굶주림 속에 아무 소망 없이 죽음만을 기다리던 자리에서 박차고 일어나 새로운 삶의 소망이 있음을 전하렵니다. 평양에서 지은 노래를 불러드리겠습니다. "사나이 이 세상에 한 번 태어나 나 하나의 안락만 찾다가 말랴. 그 누가 이 나라를 구원해 주랴. 일어나자, 대장부야! 목숨을 걸고 감옥도 죽음도 두렵지 말라. 예수와 더불어 영생하리라"(영화주제가). 죽음 이후에 대한 분명한 소망, 이것이 없다면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인이라 하겠으며 자연인들과 별다른 점이 무엇이 있겠는가? 죽음의 도가니로 다시 들어가 내 민족을 향해 복음을 뜨겁게 전하기 를 원하는 신의주 청년, 과연 그는 진정한 천국의 소망이 무엇인지 아는 자이다. ** 전국 중,고교 자발적 기도운동 확산 "샬롬. 제주도에 사는 부효경입니다. 저는 고 3이 되어 친구의 권유로 매일 아침 국기 게양대에서 찬양을 드립니다. 처음 기도할 때는 용기가 나지 않았는데 점점 담대함을 느낍니다." "청담고는 매일 점심시간 국기게양대 앞에서 기도와 찬양을 하고 있습니다. 아침에 모임을 가졌던 저희들은 더 많은 사람들이 보고 도전받을 수 있도록 점심시간을 택해 얼마 전부터 진행 중입니다." 최근 중,고등학교를 중심으로 '우리는 학교를 위해 기도합니다.'(국기게양대 기도모임)라는 기도운동이 확산되고 있다. 현재 서울, 경기, 호남, 영남, 제주, 강원 충청지역에 있는 300여 개의 중, 고등학교에서 수천명의 학생들이 이 기도운동에 참여하고 있으며, 지난 4월부터 자발적인 금주금연운동이 함께 일어나고 있다. '예수전도단 청소년사역'이 주관하고 있는 이 운동은 원베네딕트 선교사(예수전도단 청소년사역책임자)가 지난해 발생한 미국 콜럼바인고등학교 총기사건 이후 미국 청소년들 사이에 확산되고 있는 국기게양대모임(See You at the Pole)을 국내 크리스천 청소년들에게 알렸고, 이에 도전받은 청소년들이 자발적으로 기도운동에 참여하고 있는 것이다. '예수전도단'은 금년 중 1,000여 학교에 1만 명의 기도하는 학생을 목표로 이 운동을 확산시키고 있다. 오늘날 학교교육이 무너져 가고 청소년들의 탈선이 심화되고 있는 이때에 주님을 사랑하는 학생들의 순수한 기도모임은 그리스도인으로서 학교의 현장에서 어떻게 살아가는 것이 진정 그리스도의 증인으로서의 삶인지를 우리에게 잘 보여 주고 있다. 학교에서의 기도모임의 활성화는 학생들로 하여금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정체감을 고양시키는 동시에 증인으로서의 삶을 살아갈 수 있는 좋은 자극제인 동시에 동기부여가 되고 있다. ** 그리움의 무게 인도의 한 남성이 자신과 500Km 떨어진 곳에 사는 아내에게 길이가 무려 270m에 달하는 사랑의 편지를 썼으나 발송 비용이 턱없이 비싸 결국 보내지 못했다고 인도 일간 인디안 익스프레스가 지난 18일 보도했다. 인도 북부 우타르 프라데시 주 메루트 시에 사는 공무원 지반 싱비시트는 사무실 컴퓨터 용지를 사용, 장문의 러브레터를 썼으나 무게가 7.5kg으로, 발송비용도 자신의 봉급에 맞먹는 32달러(약 3만 6천 원)에 달해 결국 발송을 포기했다. 비시트는 " 이 편지에 결혼생활 20년 동안 불과 25번 밖에 만나지 못한 아내에 대한 나의 솔직한 감정을 털어 놓았다." 면서 " 편지에는 사랑 이야기뿐만 아니라 이 시대의 정치와 종교, 철학에 관한 내용도 담겨 있다." 고 설명했따. 비시트는 무게 1.7.kg짜리 가지를 재배해 인도판 기네스북인 '림카 북' 기록을 보유하고 있을 정도로 기이한 취미생활을 즐기고 있다고 한다. 우리는 하나님과 얼마나 많이 떨어져 이을까? 하나님은 우리 곁에 계시짐나 우리는 항상 그분으로부터 마치 우주적인 수치의 거리감을 느낀다. 20년 동안의 결혼생활 동안 25번 밖에 만나지 못했던 아내에 대한 그리움도 솔직한 감정을 고백하면 이와 같을진대 우리는 하나님께 진솔한 감정을 표현하는 데 너무도 익숙하지 못하다. 이제 하나님께 사랑과 나의 모든 것을 털어놓는 편지를 쓰기 시작해야 할 때가 아닐까? 내 소원만을 아뢰는 사연이 아니라 나의 주변과 내 가진 모든 것으로 하나님께 드리는 사연을 삼는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겠다. ** 만남은 우리를 치료합니다 '굿 윌 헌팅'이라는 영화의 내용이다. 보스턴 빈민가의 청년 윌 헌팅은 건달친구들과 어울려 폭행을 일삼는 반항아였다. 그러나 한편 수학자들도 끙끙 앓는 문제를 척척 푸로, 해박한 역사지식으로 하버드 대학생의 코를 납작하게 만드는 '삐딱한 천재'이기도 했다. 메사추세츠 대학에서 청소부로 일하던 윌은 수학과에서 학생들을 대상으로 낸 노벨상 수상자나 풀 만한 복잡한 수학문제를 단숨에 풀어내면서 수학과 교수 램보에게 발견된다. 램보는 그에게 체계적인 교육을 시키고 싶어한다. 하지만 누구도 윌의 거친 성격을 다스리기가 쉽지 않았따. 램보는 절친한 친구인 심리학과 교수 숀 맥과이어에게 윌을 부탁한다. 숀과 윌! 두 사람은 첫눈에 서로를 알아본다. 숀 역시 고집 세고, 상처 입은 사람으로 마음에 빗장을 지른 채 살고 있었으며, 윌의 상처 입은 영혼을 달래주려 애쓴다. 숀은 윌의 마음을 따뜻하게 감싸며 그가 어린 시절의 혹독한 경험에서 빠져나오도록 돕는다. 숀은 윌의 마음을 열었고, 숀 역시 윌을 통해 자신의 빗장을 풀게 된다. 윌은 결국 어렸을 적 의붓아버지로부터 받았던 상처를 치유받게 된다. 윌은 친구들이 조립해 만든 약간 엉성한 차를 생일선물로 받는다. 그리고 숀 선생님을 찾아가 메모를 남긴다. 자기 마음의 상처와 불신감 때문에 헤어졌던 그의 연인 스카일라를 찾아 떠나겠노라고! 그는 뻥 뚫린 고속도로를 질주하며 신나게 달려간다. 하나님 안에서 우리들은 서로를 향한 진실한 친구로 부름받았다. 믿음의 지체로서 서로의 아픔을 이해하며 부둥켜안고 기도하도록 우리는 짝지어진 존재들이다. 이를 위해 우리 각자가 먼저 서로에게 다가가는 작은 노력들을 시작할 때이다. 형제의 아픔을 나의 가슴으로, 나의 상처를 형제의 따뜻한 품으로 치료할 때이다. **마약 중독 마약의 손길이 아들과 딸 부부, 어머니 등 일가족 네 명을 파멸의 길로 몰아넣었다. 최씨는 히로뽕 판매혐의로 구속된 아들 이모(47세)씨의 친구로부터 히로뽕 20g(1억 8천만 원 상당)을 넘겨받아 서울 관악구 신림동 자신의 집에 보관해 오다 이중 1g을 지난 11일 하모(37)씨에게 30만 원을 받고 판매한 혐의다. 최씨 가족이 마약에 휘말리게 된 것은 아들 이씨가 히로뽕에 손을 대기 시작한 1984년부터이다. 이씨는 큰돈을 벌겠다며 마약밀매 조직에 가담, 상습적으로 히로뽕을 밀매, 투약하기 시작했다. 이씨가 마약사범으로 걸려든 것만도 8차례. 이씨가 구속될 때마다 마약조직은 최씨를 끌여들였고, 최씨는 아들의 변호사 비용과 생계비를 충당하기 위해 마약 판매상으로 나섰다. 그러던 중 91년 6월 최씨마저 마약밀매 혐의로 구속되자 같이 살던 딸(39)은 충격을 받게 됐다. 딸은 " 집안이 이렇게 쑥대밭이 된 것은 다 오빠 때문" 이라며 아들 이씨와 여러 차례 다퉜다. 최씨는 " 성실하게 살던 딸애가 그 때부터 자포자기하는 심정으로 마약에 손대기 시작했다." 고 말했다. 딸 역시 92년 11월 히로뽕 투약 혐의로 구속되는 등 지금까지 마약 투여 등으로 5차례 구속됐다. 지난해 4월께 고모씨와 결혼한 딸은 같은 해 6월 고씨와 함께 서울 관악구 신림동 한 여관에서 0.03g을 투약하다 경찰에 적발되어 두 사람 모두 구속됐다. 이씨는 수감 직후 임신사실이 확인돼 1년 간 형집행 정지로 풀려나 딸을 낳았다. 인간의 욕망은 본성 같은 것이므로 그 뿌리까지 없앨 수는 없지만 그 욕망의 방향을 좋은 쪽으로 바꿀 수는 있다. 자신의 욕망의 방향을 주님께서 원하시는 쪽으로 맞추어 나가기를 원하고 노력한다면 더 이상의 삶을 속박하는 노예와 같은 처지에는 있지 않을 것이다. 재물에 대한 노예근성을 버리고 자유한 인간으로서의 당당하고 깨끗한 삶을 지향해야 한다. **전능하신 하나님을 믿자 미 40대 여성의 기적. 16년 간 식물인간 투병서 돌연 회복했다는 '크리스마스의 기적'이 미국을 떠들썩하게 만들고 있다. 16년 반 동안 식물인간으로 지내온 미국 뉴멕시코 주의 패티 화이트불(42세)은 크리스마스인 25일 아침 침대 시트를 갈아주려는 간호사에게 " 괜찮으니 그냥 놔두세요."하고 말을 건넸다. 뇌사상태에 빠졌던 환자가 의식을 되찾는 경우는 가끔 있지만 대개는 정신적, 육체적 후유증이 남는다. 화이트불처럼 '전기가 나갔다가 들어오듯' 갑작스레 완벽하게 회복하는 일은 매우 드물다고 미 ABC방송이 29일 전했다. 기나긴 잠에서 깨어난 화이트불은 잠시 어리둥절해 했다. 26세 때인 83년 넷째 아이를 낳기 위해 병원에 들어왔는데 그 사이에 40대가 되어 있었기 때문. 당시 그는 제왕절개 수술로 아이를 낳고는 혼수상태에 빠졌다. 부축을 받으며 병상에서 일어난 그는 그간의 일을 전해 듣더니 이내 환자복을 벗고 일상복으로 갈아입었다. 그리고 친정 어머니한테 안부 편지를 썼다. 나흘 뒤인 29일에는 연말연시를 맞은 여느 사람들과 똑같이 쇼핑을 나갔고, 저녁에는 얼굴도 보지 못한 채 혼자 자란 아이를 비롯해 네 아이와 엣 남편을 만났다. 가족들은 그의 기적같은 회복은 하나님이 보낸 성탄절 선물이라고 믿고 있다. 흔히들 기적의 시대는 이제 지나갔다고 말한다. 그래서 성경에 나타난 수많은 기적들을 하나의 전설쯤으로 치부해 버리는 사람들이 많다. 인간의 과학과 논리로 논증된 것이 아니면 믿지 않으려는 것이다. 그러나 지식에는 초월적 지식과 합리적 지식이 있다. 바로 하나님의 전능성은 초월적 지식에 해당한다. 인간 이성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하나님의 영역이 있음을 인정해야 한다. ** 부모의 사랑 "이 세상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습니다!" 최근 영극에서는 9개월 전 태어난 한 칠삭둥이 아기의 끈질긴 생명력과 자식을 살리기 위해 그 부모가 보여 준 휴먼 드라마로 전 국민이 눈시울을 적시고 있다. 미국에서 발행되는 연예 주간지 '스타'지는 최근호에서 영국 데번 주에서 태어난 미숙아 켈리(1세)가 부모의 따뜻한 사랑을 통해 기적적으로 생명을 되찾게 됐다며 이들 가족의 감동 사연을 소개했다. 켈리의 생모 셰일러씨(32세)는 신장이식수술의 부작용으로 인해 유산과 조기출산을 거듭했다. 켈리도 예정일보다 3개월이나 빨리, 그것도 제왕절개 수술로 어렵게 태어난 미숙아였다. 담당 의사들은 켈리가 2~3시간 버티기도 어렵다는 진단을 내렸다. 당시 켈리의 몸무게는 중간 크기의 오렌지 두 갤ㄹ 합친 것보다 가벼운 340g에 불과했으며 키는 채 13cm도 안되는 심각한 상황이었다. 그러나 건설 노동자인 켈리의 아버지 게리 로저(34세)와 부인 세일러씨는 절대 그녀를 포기하지 않았다. 1%의 가능성이라도 좋으니 제발 치료를 포기하지 말아달라며 의사들을 설득했다. 지난 9개월 동안 한숨도 편안히 자본 적이 없다는 로저 셰일러 부부의 지극 정성으로 켈리는 이제 몸무게 2.7kg에 힘찬 울음소리를 내는 건강한 아이로 탈바꿈 할 수 있었다고 '스타'지는 덧붙였다. 하나님은 우리를 구원하사 자녀라고 칭하셨다. 자식을 사랑하기에 부모는 자식을 위해 희생하고 때로는 생명도 던져 버린다.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를 구원하셨듯이, 로저 부부의 사랑이 한 생명을 지켜냈다. 사랑은 기적을 만드는 원동력이다. ** 병을 치료하는 감사의 철학 제2차 세계대전 후 일본 해군장교 가와가미 기이치씨가 고국으로 돌아왔다. 그런 일본이 현실은 차마 눈을 뜨고 볼 수 없을 정도로 피폐해져 있었다. 그는 매일 불평과 불만의 세월을 보냈다. 그런데 이런 생활이 계속되자 그의 몸이 굳어져 움직일 수가 없었다. 정신과 의사인 후치다씨는 그에게 이런 처방을 내렸다. " 하루에 1만 번씩 '감사합니다'라고 말하세요. 감사의 마음이 당신의 병을 치료해 줄 것입니다." 그는 병석에서 매일 '감사합니다'라고 중얼거렸다. 하루는 그의 아들이 감 두 개를 건네주었다. 그런데 그 때부터 굳었던 몸이 풀리고 질병에서 벗어났다. 불평과 불만, 원망과 저주는 모든 질병의 원인이 될 수도 있다. 그러나 감사는 인간의 질병을 치료하는 특효약이다. 행복한 사람들의 공통점은 '감사'가 풍성하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이런 말을 많이 들었지만 막상 감사하는 삶을 살지 못한다. 우리는 그만큼 감사한다는 말이 익숙지 못할 만큼 감사에 무딘 사람들이 되었다. 그리스도인에게 감사는 기본적인 신앙고백이다. 게다가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감사할 것을 명하고 계신다. 감사는 믿는 자의 의무라고 할 수 있다. ** 시각 장애인과 함께하는 화해와 일치 장애인과 비장애인이 함께 신앙생활을 하는 교회가 있다. 교인들 중 삼분의 일 정도가 시각장애인들이었다. 주일 11시 예배를 마치고 온 교우들이 다함께 점심을 먹었다. 그 시간에는 정성스럽게 음식을 만들어 요란한 스다와 함께 온 교우들이 어울려 음식을 먹는 프로그램이었다. 그 식사시간에는 여러 상을 펴고 한 상에 여러 명이 앉아 식사를 하는데 그날 그 상에 시각장애인들끼리만 앉아 있었다. 정말 우연치 않게 불편한 일이 일어났다. 시각장애인들은 어디에 어떤 반찬이 있는지 알지 못해서 젓가락이 부딪치고 제대로 식사를 할 수 없었다. 시각장애인들에게 음식의 위치를 가르쳐 줄 때에는 시계시간을 이용해서 가르쳐 주거나 손을 잡아 한 번 설명해 줌으로써 가르쳐 준다. 그런데 그날 아무도 음식의 종류와 위치를 가르쳐 줄 사람이 옆에 없었으니 오죽 불편했겠는가? 다음주 그 교회는 광고를 했다. " 여러분 점심식사를 하실 때에 한 상에 시각장애인과 정안자가 함께 앉으세요. 그래서 함께 어울리세요. '어찌하다 보니'라는 현명한 변명도 삼갑시다. 이렇게 하지 않으려면 아예 식사를 하지 마세요." 그날 이후로 그 교회에서는 다시는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다. 하나님께서는 서로 사랑하라는 계명을 주셨다. 하나님께서는 바울을 통하여 우리에게 말씀하신다. " 우리 강한 자가 마땅히 연약한 자의 약점을 담당하고 자기를 기쁘게 하지 아니할 것이라." 우리가 우리 지체의 연약함을 함께 담당하는 것이 당연하다. 우리는 우리 가까이에 장애자들을 접하고 있다. 먼저 따뜻한 마음으로 사랑하고 장애인들과 한마음이 되어 함께하는 일에 일체감을 가져야 한다. **환경보호 운동 울산시는 오는 6월말까지 태화강, 동천, 외항강, 선암 저수지 일대를 대상으로 조류서식 실태조사를 벌여 철새도래 현황 및 주변 서식여건을 파악한 뒤 적절한 관리대책을 세우기로 했다고 24일 밝혔다. 태화강과 동천, 선암 저수지는 각각 고니와 백로, 흰 죽지 청둥오리 등 철새가 해마다 37종 5,000여 마리와 30종 3,200여 마리씩 찾아들어 지난 98년 2월 일대 298ha가 철새 집단도래보호지구로 지정되어 있다. 또 외항강 일대도 황새 쇠오리, 붉은 부리갈매기 등 23종 1,500여 마리의 철새가 찾아들고 있어 집단도래보호구에 준한 관리를 받고 있다. 이들 지역은 강물과 바닷물이 만나는 지점으로 갈대와 먹이가 풍부하고 해마다 수질도 나아지고 있어 최근 몇 년 사이 철새가 많이 찾게 된 것으로 조사되고 있다. 울산시 관계자는 "시 외곽의 산림조수보호구 등 기타 보호구역까지 치면 울산지역 모두 1,415ha가 철새보호구역으로 지정되어 있다며 이들 지역에 대한 체계적이고 효율적인 관리를 통해 인간과 자연이 공존하는 쾌적한 도시환경을 가꿔나갈 방침"이라고 말했다. 그리스도이신 예수님의 구속사업은 인간의 구원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자연의 회복에도 있다.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 만물을 창조하시고 인간에게 잘 관리할 것을 명령했지만 인간은 만물을 잘 다스리기는 커녕 오염시키고 파괴시켰다. 이제 우리는 우리가 파괴시켰던 자연을 회복해야 하며 더 이상 오염되지 않도록 환경보호운동을 해야만 한다. 

    선생님의 약속 "

    2000년 2월 22일 오후 2시 덕수궁 앞에서 브라보콘을 사줄께." 
    1977년 서울 성신여대 부속여고(현 건대부고) 2학년 '영반' 학생들은 수학담당 김학민(59, 현 건대부고 교사) 선생님과 체육대회 때 자신들이 어디에 앉게 될지 알아맞히는 내기를 했다. 지는 쪽이 100원짜리 브라보콘을 사기로 했다. 영반 학생들이 이겼지만 선생님은 칠판에 '2000년 2월 22일 오후 2시 덕수궁 앞으로' 라고 적었다. 2000년 2월 22일 오후 2시.어느덧 초,중,고생의 학부모가 된 '영반' 학생들 40여 명이 하나 둘 덕수궁 앞으로 모였다. 잠시 후 김 선생님이 브라보콘을 한아름 들고 나타났다. 초로의 선생님과 중년의 제자들은 반갑게 손을 맞잡고 학창시절 얘기를 도란도란 주고받았다. 이날 모임을 만드는데는 영반 학생이었던 박충희(41, 경기 고양시 일산구)씨의 공이 컸다. 박씨가 당시의 사연을 담은 편지를 해태제과에 보내면서 '소문'을 냈기 때문. 박씨는 "그때는 2000년이 아득히 먼 미래로 느껴져 선생님을 다시 보리라고 생각하진 못했지만, IMF로 해태가 부도났을 땐 브라보콘 생산이 중단될까봐 가슴을 졸이기도 했다."고 말했다. 김 교사는 제자들에게 브라보콘을 나눠 주면서 "아이스크림 떼어 먹을까봐 '소문'을 냈냐?"면서 " 어쨌든 23년 전 약속을 지키게 돼 기쁘다."며 환하게 웃었다. 23년 동안이나 선생님의 말씀을 기억하며 그날을 기다려온 제자의 이야기는 이 시대에 우리의 마음에 훈훈함을 주기에 충분하다. 자신에게 지식을 가르쳐 준 육신의 선생님의 말씀을 오랫동안 기억하며 살아온 제자가 있는데 하물며 성육신하신 하나님, 그리스도이신 예수님의 제자된 우리가 그분의 말씀을 하나하나 기억하며 그대로 행하는 삶을 살아야 되지 않을까? <조선일보 - 2000.2.23 >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은 오래 산다 

    원광대 복지보건학부 김종인 교수는 2일 '직업별 평균수명에 대한 조사연구'를 통해 1960년 1월~ 2000년 2월 사이에 사망한 사회 저명인사들의 직업별 평균수명을 발표했다. 이 조사에 따르면, 평균수명이 긴 직업군은 종교인(평균연령 79세)에 이어 정치인, 연예인(73세)/ 교수(72세)/ 기업인, 관료(71세)/ 법조인(70세) 순이었다. 반면에 언론인(65세), 문학인(66세)등은 비교적 일찍 세상을 뜨는 직업으로 분류됐다. 김 교수는 논문을 통해 " 종교인의 경우 생활화된 절제, 무욕, 소식 등이 장수의 주요한 요인이었을 것"이라며 " 반면 술, 담배를 즐기고 스트레스가 많은 직업의 종사자들이 단명했다."고 분석했다. 이밖에 체육인은 1960~70년대에는 무모하고 비과학적인 훈련 탓에 가장 단명하는 직업으로 분류됐지만 90년대 들어 훈련의 과학화를 통해 점차 평균 연령이 길어지고 있는 것으로 밝혀졌다. 하지만 과중한 업무, 스트레스에 시달리는 언론인, 문학인은 여전히 단명직업에 포함됐다. 우리 사회에서 성직자가 가장 오래 산다는 것은 하나님을 경외하면 장수한다고 하는 하나님의 약속과 일치한다. 세상이 아무리 타락했다지만 그래도 아직도 사회적 통념에서 볼때, 성직자는 다른 어떤 직업에 종사하는 사람보다도 하나님의 뜻, 곧 진리에 자신의 의지를 복종하기를 노력하는 사람이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을 경외하는 사람의 연수를 길게 하신다고 말씀하셨다. 

    외국 관광객의 서러움 

    얼마 전 외국인 친구 두 명이 한국을 방문했다. 이들을 목적지까지 데려다 줄 수 없는 상황이어서 택시를 태워 보내기로 했다. 그리고 택시 기사에게 " 친구들을 잘 부탁드린다."며 목적지 주소를 적어줬지만 일말의 불안한 마음은 금할수가 없었다. 아니나 다를까 다음날 친구로부터 들은 얘기는 너무 황당했다. 평서 택시를 탄 금액의 네 배나 되는 돈을 지불한 것이다. 친구에게 이것저것 물었다. 친구는 일반 택시를 탔는데 기사는 미터도 작동하지 않은 채 운전했다고 한다. 외국인이 한국에 올 때 주위에서 택시 바가지 요금을 주의하라는 충고를 해준다고 한다. 나는 이런 얘기가 과장된 것이라고 생각했으나 막상 이런 일을 보고 나니 문제의 심각성이 느껴졌다. 일부 기사 때문에 한국 전체의 이미지가 실추되는 게 아닐까 걱정된다. 남에게 보이기 위해 외면적인 친절과 호의보다는, 보이지 않는 곳에서 이름 없이 도울 수 있는 마음이 우리나라를 선진국으로 발전시키는 것이다. 이러한 우리들의 모습이라면 우리가 외국에 가서 혹 겪게 될지모를 차별에 대하여 불평할 권리가 없지 않겠는가. 우리도 낯설고 물설은 환경 가운데 처음 들어온 이가 있다면 그들의 친절한 안내자로서 역할을 감당해야 한다. 더구나 성도로서 우리의 자세는 대가를 바라지 않고 베푸는 자세로 임해야 함은 당연한 일이다.

     

     




    10월 16일(목) 마태복음 1-3장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회개와 천국(마태복음 3:2)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왔느니라. 
    Repent, for the kingdom of heaven is near.

    회개(悔改. repent)와 천국(天國. the kingdom of heaven)

    회개는 천국을 경험하는 것입니다.
    단순히 죄를 뉘우치고 돌아서는 것에서 멈추는 회개는 온전한 회개가 아니라고 하겠습니다.
    왜냐하면 세례 요한의 외침과 예수님의 첫 외침이 동일한 내용으로 소개되기 때문입니다.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왔느니라'(마태 3:2. 4:17)

    천국을 경험한다는 것은 사도 바울과 같이 삼층천에 올라갔다 오는 것이 아닙니다.
    온전한 회개는 예수님을 내 마음속에 모시고 살아가는 믿음을 말합니다.

    예수님을 마음에 모시고 살아갈 때 어떤 현상이 나타날까요?

    예수님을 마음에 모신 사람이 부정적인 생각과 언어와 행동을 할 수 있을까요?
    예수님을 마음에 모신 사람의 삶은 긍정적인 모습으로 드러나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을 증거하던 스데반은 돌에 맞아 죽는 현장에 끌려나왔습니다.
    스데반이 누구를 원망했습니까?
    스데반이 예수님을 향하여 불평했습니까?

    스데반은 그 마음속에 예수님을 보시고 살았기 때문에 돌에 맞아 죽는 죽음의 문턱에서 예수님처럼 기도했습니다.

    "주 예수여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
    "주여 이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행 7:59-60)

    어떻게 스데반이 돌에 맞아 죽는 비참한 현장에서도 예수님처럼 기도할 수 있었을까요?

    그 비결은 '성령이 충만하였기 때문입니다.'(행 7:55)

    "스데반이 성령이 충만하여 하늘을 우러러 주목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및 예수께서 하나님 보좌 우편에 서신 것을 보고."(행 7:55)

    따라서 예수님을 내 마음속에 모시고 살아가려면 항상 이런 기도를 해야만 합니다.

    '성령님이시여, 내 안에 항상 나와 함께 하옵소서'

    그러므로 오늘도 성령으로 충만한 믿음의 사람으로 부정적인 요소가 그득한 세상에서 긍정적인 믿음으로 소망의 빛을 따라 살아가는 은총의 사람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회개하라 
    - 이 말의 원어 '메타노에이테'(*)는 고전 헬라어에서 순수한 의미로는 '마음을 바꾼다'는 뜻을 가지며, 
    통속적으로는 단순히 '무슨 일을 후회한다'라고 해석되고 있다. 
    그러나 신약 성경에 도입된 이 단어의 용례(用例)는 '새 행실로 돌아 온다'는 히브리어 '슈브'(*)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서 백성들로 여호와와 맺은 언약에로 돌아오라는 예언자의 외침이다. 
    즉 유대인 중에도 믿음없는 자가 있고, 우상 숭배자가 있기에 그러한 불신과 영적 음행(淫行)에서 돌이키라는 구약적 의미인 것이다(Alford). 
    실로 이 말은 머리로서만 계획을 수정하고 감정적으로만 후회하는 정도가 아니라, 죄와 죄책으로부터 완전히 돌아서는(Turn ye) 전인격적인 참회(懺悔)인 동시에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메시야를 영접하는 마음과 행위의 철두 철미한 변화 전반을 가리킨다. 
    물론 여기에는 인간의 행위가 근본적으로 올바른 궤도를 이탈해 있으며, 따라서 인간은 철저한 변화가 절대 요청되는 존재라는 것이 전제되어 있다(롬 3:10). 
    한편 이 같은 회개는 합당한 열매를 맺음으로서만 참 회개임이 증명된다.

    천국이 가까왔느니라
     
    - 요한의 설교의 두번째 주제로서 회개의 이유를 밝히고 있다. 
    왜냐하면 천국이 이 땅에 실현되는 날에는 그 나라를 유업으로 상속받기에 합당한 자와 그렇지 못한 자가 구별될 것이기 때문이다(25:31-46). 
    따라서 그 나라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성이 요구되는 것이다. 
    여기서 '천국' 또는 '하늘 나라'(*, 헤 바실레이아 톤우라논)는 마태복음에만 나오는 표현으로 마가와 누가에는 '하나님의 나라'(*, 헤 바실레이아 투 데우)로 표현한다. 
    한편 이 표현은 구약에 약속된 메시야 왕국에서 유래한 것으로서(단 2:44;7:13, 14,27) 구약 성경에서 하나님의 나라, 곧 '왕국'(*, 말쿠트)의 주요 의미는 '통치'(reign)이다. 
    이것은 신약 성경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즉 '왕국'을 뜻하는 '바실레이아'(*)는 간혹 영토를 뜻하는 경우도 있지만(4:8) 대부분이 역동적인 의미로서의 하나님의 '통치'를 암시한다. 이는 당시 천국을 영적인것으로만 해석하고 인간의 마음안에 있는 것로 간주하던 랍비들의 해석이나 메시야 왕국이 이뤄질 때 로마의 지배가 무너지고 정치적 평화와 번영이 도래하리라던 A.D. 1세기 당시의 유대인들의 극단적 해석과는 달리 역동적(dynamic)으로 이 땅에 실현되고 있는 하나님의 통치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이러한 사실은 구약에서는 대적들을 멸망시키고 이 땅에 공평과 정의로운 나라를 세우실(사 9:7) 하나님의 강림(降臨)과 통치에 대한 기대로 고조되어 
    (1) 다윗 언약 성취에 대한 대망으로 나타나기도 하며(삼하 7:13,14). 
    (2) 여호와의 날로서 심판의 어두움(암 5:18,19)으로 이해되기도 하였다. 
    그리고 신약에서는 그리스도의 초림과 그의 십자가 사건으로 이 땅에 구체화될 천국과, 그리스도의 재림으로 완성될 영원한 천국이라는 이중적 구조를 지닌 것으로 이해되었다. 

    본문에 제시된 세례 요한의 선포는 바로 예수의 초림으로 구체화될 천국에 관한 언급인 것이다. 
    한편 여기서 '가깝다'(*, 엥기켄)라는 말은 천국이 갖는 역동적 의미와 함께 결합되어 '천국은 예수와 그의 말씀과 이적과 함께 왔고, 그의 죽음과 부활과 함께 왔으며, 이 시대의 종말에는 완성된 모습으로 올 것이다'라는 의미를 지닌다. 
    즉 하늘나라는 지금 그리스도와 함께 교회, 즉 온 세계에 왔고, 마침내는 영원히 존속될 것이다. 
    한편 마태가 '하나님 나라'라는 표현을 피한 것은 하나님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기를 꺼려했던(출 20:7) 유대인의 일반적인 완곡어법(婉曲語法) 때문일 것이다.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는 성경 마태복음 4장 17절에 나오는 예수님의 말씀으로, 잘못을 뉘우치고(회개) 하나님 나라를 받아들여야 한다는 뜻을 담고 있습니다. 
    이는 죄악된 삶에서 돌이켜 회개하는 사람에게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음을 선포하는 메시지이며, 회개만이 천국에 들어가는 길임을 강조합니다. 

    핵심 의미
    • 회개하라:
      마음을 바꾸어 이전의 잘못된 생각과 행동에서 돌아서라는 촉구입니다. 
  • 함께 나타나는 메시지:
    회개하라는 말씀과 천국이 가까이 왔다는 말씀은 분리된 것이 아니라, 천국을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먼저 회개가 선행되어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 성경적 근거
    • 세례 요한의 메시지: 예수님에 앞서 세례 요한도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고 전파했습니다. 

  • 예수님의 사역 시작: 예수님께서는 공생애를 시작하시며 이 말씀을 첫 선교 여행의 핵심 메시지로 삼으셨습니다. 

  • 제자들의 사역: 예수님의 제자들 또한 "회개하라"는 말씀을 전했습니다. 

    '회개'와 '천국'의 관계
    • 회개는 천국에 들어가기 위한 조건:
      회개가 없이는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고 성경은 말합니다.
    • 마음의 변화:
      회개는 악한 생각을 버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마음을 변화시키는 것을 의미합니다.
    • 새로운 삶:
      회개를 통해 진정한 하나님의 자녀로서 천국을 소유하고 누리는 복을 받게 됩니다. 


  •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
    하나님께서 다스리시는 나라, 즉 천국이 이미 우리 곁에 와 있음을 알리는 말씀입니다. 

  • 고린도전서 4:20
    하나님의 나라는 말에 있지 아니하고 오직 능력에 있음이라.
  • 하나님의 나라는 말에 있지 아니하고 오직 능력이 있음이라
     
    - '하나님의 나라'는 예수의 교훈 속에 자주 등장하는 주제로서 공관복음서에서 더 일반적인 표현으로 사용되었으나 바울서신 가운데서는 본서에서 제일 많이 등장한다. 
    일반적으로 '하나님의 나라'(*, 헤 바실레이아 투 데우)는 그리스도의성육신과 재림으로 성취될 메시야 왕국을 의미한다(막 1:15). 
    즉 대체적으로 다음과같은 두가지 의미가 있다. 
    (1)이 세상 끝날에 도래하게 될(마 19:28; 25:31) 하나님의 신천 신지(계 21장)이다. 
    (2) 그리스도의 초림으로 인해 이미 성도들간에 실현되고 있는 하나님의 나라(눅 17:21), 즉 하나님께서 성도들을 현재 영적으로 지배하시며 그들의 삶 속에 그의 능력을 나타내 보여주신다는 의미로서의 '하나님의 나라'이다. 
    바울이 '하나님의 나라'라는 말을 사용한 것은 두번째 의미로 사용한 말이다. 
    본절에서 바울이 하나님의 나라의 개념을 도입하여 저들을 책망한 것은 고린도 교인들이 1:5,6과 본장8절이 시사한 대로 모든 구변과 지식에 풍족한 수준에 있었으나 생활의 실제적인 모습은 하나님의 나라의 모습과 거리가 먼 시기(猜忌)와 심한 분쟁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나라가 '말'에 있지 아니하고 오직 '능력'에 있다는 바울의 말은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성도들의 새로운 삶(고후 5:17)과 그 능력(요 3:3-8)을 암시한 것이다. 
    즉 고린도 교인들의 삶의 공동체 곧 교회 속에서 구체적으로 드러나는 복음의 능력과 사랑의 실천을 요구한 것이다. 
    하나님의 나라가 '말'(*, 로고스)에있지 아니하고 에서 '말'은 '능력'과 대조적인 개념으로 사용되어 말에 상응한 내용이 따르지 않는 단순히 '헛된말'이라는 것을 시사해 준다. 
    한편 '능력'은 가시적인 것으로서 예수께서 그의 왕국을 선포할 때에 나타났던 기적들(눅 11:20)을 의미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도 있겠으나 본절에서는 인간의 공허한 웅변과 대조를 이루는 능력, 곧 하나님 나라에 대한 지식으로 인해 변화된 품성, 새 사람으로서의 옛 사람을 벗어 버린 의와 거룩함과 화평을 이루는 실제적인 모습을 뜻하는 것으로 이해함이 보다 타당할 것 같다(L. Morris, J. Calvin). 

    따라서 바울은 인격과 삶의 변화, 즉 행동으로 나타나는 능력을 강조함으로써 헛된 말과 지식 즉 영적 교만 속의 열매없는 신앙 생활을 고발하고 있다.

    로마서 14:17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 한글 개역 성경에 생략되어 있는 '가르'(*, '왜냐하면')가 사용되어 본절이 15절 하반절과 16절에 대한 근거를 제공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바울은 여기서 자신의 논거(論據)를 변화시켜 새로운 차원에서 하나님 나라의 성격과 본질을 언급하고 있다(Sanday and Headlam). 강한 자들이 특정 음식을 먹음으로써 그것을 먹지 못한 약한 형제의 영적 파멸을 가져오는 것이, 그리고 그로 인해 서로 판단하고 나아가 거룩한 믿음의 공동체가 좋지 않은 평판의 대상이 되는 것이 하나님 나라의 모습에 비쳐볼 때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가를 밝히고 있다. '하나님의 나라'(*, 바실레이아 투 데우, 바울이 여기서 언급하고 있는 하나님의 나라는 역사 가운데 진행되고 있는 현재적인 하나님의 나라를 말한다)는 먹는 것과 마시는 문제가 중요한 것이 아니다. 즉, 이 땅위에 진행되고 있는 하나님의 나라의 임재(臨在)를 입증하는 것은 어떤 특정 음식을 먹느냐 못 먹느냐의 시시비비를 가리며 또한 그것을 먹을 수 있는 자유를 외고집적으로 주장하는데 있지 않음을 책망한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 나라의 속성은 어떤 음식을 먹고 안 먹는데서 나타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오직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 
    - 바울은 여기서 전체의 논의를 단순히 먹고 마시는 문제에서 벗어나 보다 높은 경지로 끌어올린다. 
    즉 하나님이 다스리는 그 나라의 특징적인 모습은 구체적으로 어떠한 성격으로 나타나는지를 진술한다.

     '의'(*, 디카이오쉬네)는 속죄받은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신자가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아 부름받은 올바른 행동, 즉 '도덕적 의'를 말한다(Godet, Murray, Meyer, 6:13, 16, 18). 이는 예수께서 하나님 나라 백성의 생활 헌장으로 선포하신 산상 수훈(山上垂訓)의 결론에서도 나타난 '의'이다. 그리고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마 6:33)에서 하나님 나라와 그 의를 나란히 취급한 데서 더욱 확인된다. 

    δικαιοσύνη, ης, ἡ Storng number 1343

    1. 의.  2. 정의  
    Pronunciation [ dikaiŏsünē ]  
    Etymology  /  1342에서 유래

  • 관련 성경  /  의(마3:15, 눅1:75, 고후3:9), 의로움(고전1:30, 엡5:9). [동] 의롭다(롬3:25, 26).

  • 1342.  δίκαιος, αία, ον

    1. 올바른.  2. 법대로 사는.  3. 눅 1:6  
    Pronunciation [ dikaiŏs ]   
    Etymology  / 1349에서 유래

    1349. δίκη, ης, ἡ

    1. 형벌.  2. 정의의 신   
    Pronunciation [ dikē ]

    Etymology  /  1166에서 유래된 것으로 보임
    • 1. 형벌, 벌, 징벌, 행25:15, 살후1:9, 유1:7.
    • 2.  [여신으로 인격화 되어진 이름] 정의의 신, 행28:4.
    • 관련 성경  /  정죄하기(행 25:15), 공의(행 28:4), 형벌 (살후 1:9, 유 1:7).

    1166. δεικνύω 

    1. 보이다.  2. 마 4:8  
    Pronunciation  [ dĕiknüō ]


    한편 '평강'(*, 에이레네)은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하심을 믿을 때 하나님 아버지와 화목하게 됨으로써 얻게 되는 평화로운 마음의 상태를 의미한다(Calvin, 5:1; 빌 4:7). 

    εἰρήνη Storng number1515

    1. 평화.   2. 눅 11:21  
    Pronunciation [ ĕirēnē ]

  • 관련 성경  /  평안(마10:13, 눅2:29, 행9:31), 화평(마10: 34, 눅12:51, 행10:36), 평강(눅1:79, 요20:19, 롬1:7), 평화(눅2:14, 19:42), 안전(눅11:21), 화친(눅14:32), 화해(행7:26), 태평(행24:3).

  • '희락' 또는 '기쁨'(*, 카라)은 '의'를 추구하며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더불어 화평의 관계를 누리는 성도의 정서에 자연스럽게 일어나는 영혼의 기쁨을 의미할 뿐만 아니라(Calvin, Hodge) 성령 안에서 다른 사람과의 모든 관계에서 오는 사귐의 기쁨도 포함한다(Godet, Meyer, Murray). 

    χαρά, ᾶς, ἡ Storng number 5479

    1. 기쁨.  2. 고후 2:3.  3. 기쁨을 주는 사람  
    Pronunciation  [ chara ]

    Etymology  /  5463에서 유래
    • I. 기쁨, 즐거움.
      •  1. [문자적으로] 고후2:3, 갈5:22, 히12:11.
      •  2. [환유적으로]
        •  a. 기쁨을 주는 사람, 또는 사물, 기쁨의 대상, 눅2:10, 빌4:1, 살전2:19,20.
        •  b.  기쁨의 상태, 마25:21,23, 히12:2.
        • c. 즐거운 잔치, 마25:21,23, 요17:13.
    • 관련 성경 / 기쁨(마13:20, 요15:11, 고후7:13), 즐거움 (마25:21, 히12:2, 벧전1:8), 희락(롬14:17, 갈5:22).

    5463. χαίρω Storng number 5463


    1. 기뻐하다.  2. χαῖρε.  3. 안녕  
    Pronunciation  [ chairō ]
    관련 성경 / 기뻐하다(마2:10, 고후6:10, 빌4:10), 즐거워하다(마5:12, 눅19:6, 벧전4:13), 평안하다 (마27:29, 눅1:28, 요19:3), 즐겁다(눅15:5), 문안하다(행15:23, 23:26), 기쁘다(고전7:30, 요이1:4), 기쁘게 하다(고후7:7).



    따라서 성도의 삶에서 누리는 총체적인 기쁨을 의미한다. 
    왜냐하면 구원의 기쁨은 그 자체에만 머물지 않고 반드시 다른 성도와의 참다운 사귐에서 오는 기쁨을 동반하기 때문이다. 
    즉 구원의 기쁨과 다른 사람과의 정상적인 교제에서 오는 기쁨과를 분리시켜 생각할 수 없는 것은 구원이란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를 갖는 것뿐만 아니라, 구체적으로 보이는 형제인 다른 사람과의 진실한 관계를 회복하는 것으로 나타나기 때문이다. 
    아무튼 하나님이 통치하시는 하나님 나라의 속성은 이처럼 '의'와 '평강'과 '기쁨'의 공동체로 나타나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하나님 나라의 모습을 드러내는 것은 '오직 성령 안에서'(*, 알라 엔 프뉴마티 하기오)만 가능하다. 
    이렇게 볼 수 있는 근거는 다음과 같다. 

    (1) '오직'(*, 알라)이란 접속사가 '...만', 또는 '...외에는'이란 뜻으로서 성령의 사역이 아니고서는 이런 열매를 맺을 수 없음을 강조하고 있기 때문이다. 

    (2)의, 평강, 기쁨 세 명사가 모두 '엔 프뉴마티 하기오'에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Kasemann). 

    (3) 갈 5:22, 23에 나타난 성령의 열매에 '평강과 기쁨(희락)'이 나타나 있기 때문이다(Harrison). 따라서 하나님 나라에 속한 자는 누구든지 성령을 의지하여 적극적으로 의와 평강과 기쁨의 열매를 나타내야 한다. 본절을 통해 할 수도 있고 안할 수도 있는 '아디아포라'(adiaphora)의 문제로 형제끼리 서로 판단하고 비방하는 것이 하나님 나라의 성격과 얼마나 거리가 먼 어리석은 모습인가를 알 수 있다(본장 주제 강해 '아디아포라' 참조).

    누가복음 17:20-21
    바리새인들이 하나님의 나라가 어느 때에 임하나이까 묻거늘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하나님의 나라는 볼 수 있게 임하는 것이 아니요.
    또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도 못하리니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 

    라, 지금 여기서 경험할 수 있는 하나님의 통치를 뜻합니다.

    하나님 나라의 특징

    특징 설명
    내면의 변화        마음의 혁신. 회개와 믿음을 통해 하나님의 통치를 받아들이는 과정입니다.
    의와 평강과 희락       성령 안에서 누리는 복된 삶. 의로움, 평화, 기쁨으로 충만합니다.
    현재성과 미래성       이미 시작되었고, 앞으로 완성될 약속. 지금-여기에서 경험하며, 미래를 소망합니다.

    어떻게 하나님 나라를 경험할까?

    **믿음, 순종, 사랑은 하나님 나라를 경험하는 열쇠입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을 따르고, 이웃을 사랑하며, 성령의 인도를 따르면 됩니다. “하나님 나라는 너희 안에” 라는 말씀은 우리 삶 속에서 하나님 나라를 세워가는, **지금, 여기의 삶을 더욱 강조합니다.**

    우리 안에? 그 의미를 찾아서

    저는 ‘하나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는 말씀 처음 들었을 때, 내 안에 천국이 있다는 건가? 였어요. 과연 그럴까요?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세요?

    깊은 탐구의 시작

    때로는 악한 마음이 들 때, 유혹에 흔들릴 때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 나라가 우리 안에 있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요? 진정한 **의미**를 찾기 위해 탐구해 봅시다.

    나의 경험 속에서

    어려운 결정의 순간을 떠올려 보세요. 무엇이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길인지 고민하며, 기도하고 말씀을 묵상했습니다.

    고민의 순간들

    • 부정행위 vs 정직함
    • 친구의 허물을 덮어줄지, 아님 진실을 말할지
    • 험담에 동참할지, 자리를 피할지

    이러한 순간들 속에서, 하나님 나라는 단순한 감정이 아님을 깨달았습니다. 그것은 우리의 선택을 통해 드러납니다.

    상황 마음의 갈등 깨달음
    시험 부정행위 유혹 ↔ 양심 정직함의 중요성
    친구의 잘못 갈등 ↔ 진실 진실을 말하는 용기
    험담 참여 ↔ 회피 부정적인 영향력 탈피

    삶 속의 실천

    하나님 나라를 경험하기 위한 몇 가지 방법들을 소개합니다. 실천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1. 말씀 묵상 : 성경을 읽고 묵상하며 하나님의 뜻을 깨닫습니다.
    2. 기도 : 하나님께 끊임없이 기도하며, 솔직하게 마음을 아뢰세요.
    3. 실천 : 긍휼의 마음으로 이웃을 사랑하고, 정의를 실천하며 살아갑니다.

    이 과정을 통해 하나님 나라는 우리의 삶 전체에 스며든다는 것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누가는 무엇을 말하려 했을까?

    누가복음 17:21의 말씀은 당시 바리새인들이 오해했던 외적인 왕국과는 다른 차원의 하나님 나라를 의미합니다. 내면의 변화와 영적인 성숙을 통해 경험되는 하나님의 통치를 강조합니다.

    핵심 의미 파악

    첫 번째 단계 : 당시 상황 이해

    사람들은 눈에 보이는 왕국을 고대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가 개인의 마음속에서 시작된다는 점을 강조하셨습니다. 영적인 깨달음을 이끌었습니다.

    두 번째 단계 : “너희 안”의 의미

    예수님은 개인의 마음과 영적인 변화를 통해 이루어진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내면의 회개와 믿음이 핵심입니다.

    세 번째 단계 : 삶에 적용하기

    자신의 내면을 돌아보고, 믿음으로 하나님 나라를 경험하려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매일의 기도와 성경 읽기를 통해 하나님 나라를 실제 경험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 나라, 어떻게 경험할까?

    하나님 나라, 어떻게 경험해야 할까요? “하나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는 말씀의 의미를 찾아봅시다!

    현실적인 어려움

    많은 분들이 하나님 나라를 막연하게 생각합니다.

    “너무 어렵게 느껴졌어요.” – A씨

    이러한 막연함은 신앙생활의 기쁨을 잃게 할 수 있습니다.

    해결책 제안

    지금, 여기서

    누가복음 17:21 말씀처럼, 하나님 나라는 우리 안에 있습니다. 매일의 삶 속에서 하나님 나라를 경험하는 구체적인 방법들을 알아볼까요?

    1. 회개와 변화 : 마음의 정화

    회개는 하나님 나라를 향하는 첫걸음. 변화를 갈망할 때 하나님 나라는 더욱 가까워집니다.

    2. 사랑의 실천 : 이웃 사랑

    사랑은 하나님 나라의 핵심 가치입니다. 사랑을 실천하고 섬기세요.

    3. 말씀 묵상과 기도 : 하나님과의 만남

    매일의 묵상과 기도는 하나님과의 소통을 돕습니다.

    문제 해결책 효과
    모호함 회개, 사랑 실천, 말씀 묵상 & 기도 실질적인 하나님 나라 경험, 삶의 변화, 하나님과의 친밀함 증가

    이러한 방법들을 통해, 하나님 나라는 당신의 삶 속에 임하는 현실이 될 것입니다. 지금 바로 시작하세요! #하나님나라 #누가복음 #신앙생활 #묵상 #기도 #사랑 #회개

    진정한 의미, 더 깊이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 (누가복음 17:21) 말씀하셨습니다. 이 구절은 다양한 해석을 낳습니다. 과연 하나님 나라는 무엇이며, 우리 안에 있다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요? 다양한 관점을 비교하며 본질을 탐구해 봅시다.

    다양한 관점

    내면의 변화

    하나님 나라가 개인의 **마음속에 임한다**는 해석입니다. 영적인 변화를 경험하고, 삶의 방식으로 나타난다는 점을 강조합니다.

    공동체적 의미

    하나님 나라는 사회 정의 실현과 **사랑

    자주 묻는 질문

    Q: 누가복음 17장 21절의 ‘하나님 나라’는 정확히 무엇을 의미하나요?

    A: 하나님의 통치, 곧 하나님의 다스림이 임하는 영역을 뜻합니다. 우리 안에 내주하는 성령을 통해 경험할 수 있습니다.

    Q: 너희 안에 있다”는 구절은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A: 하나님 나라는 특정한 장소가 아닌, 믿는 자의 마음과 영 안에서 이루어진다는 의미입니다. 내면의 변화를 뜻하죠.

    Q: 하나님 나라를 경험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요?

    A: 회개하고 예수님을 믿음으로 받아들이고, 성령의 인도하심에 순종해야 합니다. 믿음의 삶을 실천해야 합니다.

    Q: 이 구절이 우리 삶에 주는 실질적인 영향은 무엇인가요?

    A: 내면의 평화와 기쁨을 누리고, 긍정적이고 변화된 삶을 살게 합니다. 관계 회복과 사랑의 실천으로 이어집니다.

    Q: 하나님 나라’에 대한 오해는 무엇이 있을 수 있나요?

    A: 물리적인 장소나, 죽어서 가는 곳이라고 오해할 수 있습니다. 현재적이고 영적인 의미를 이해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하나님의 나라 47구절 

    - 하나님의 나라는 무슨 문제든지 해결을 받은 곳에서 시작합니다.

    첫째는 죄의 문제(로마서 6:23)
    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이니라. 


    둘째는 죽음의 문제(히브리서 9:27)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



    1. 마태복음 12:28 

    그러나 내가 하나님의 성령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내는 것이면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임하였느니라. 

    2. 마태복음 19:24 
    다시 너희에게 말하노니 약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 하신대.

    3. 마태복음 21:31
    그 둘 중에 누가 아비의 뜻대로 하였느뇨 가로되 둘째 아들이니이다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세리들과 창기들이 너희보다 먼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리라.

    4. 마태복음 21:43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의 나라를 너희는 빼앗기고 그 나라의 열매 맺는 백성이 받으리라.

    5. 마가복음 4:26 
    또 가라사대 하나님의 나라는 사람이 씨를 땅에 뿌림과 같으니.

    6. 마가복음 4:30
    또 가라사대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를 어떻게 비하며 또 무슨 비유로 나타낼꼬. 

    7. 마가복음 9:1
    또 저희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여기 섰는 사람 중에 죽기 전에 하나님의 나라가 권능으로 임하는 것을 
    볼 자들도 있느니라 하시니라.

    8. 마가복음 9:47
    만일 네 눈이 너를 범죄케 하거든 빼어버리라 한 눈으로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두 눈을 가지고 지옥에 던지우는 것보다 
    나으니라. 

    9. 마가복음 10:14
    예수께서 보시고 분히 여겨 이르시되 어린 아이들의 내게 오는 것을 용납하고 금하지 말라 하나님의 나라가 이런 자의 것이니라. 

    10. 마가복음 10:15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하나님의 나라를 어린 아이와 같이 받들지 않는 자는 결단코 들어가지 못하리라.

    11. 마가복음 10:23  
    예수께서 둘러 보시고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재물이 있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가 심히 어렵도다.

    12. 마가복음 10:24 
    제자들이 그 말씀에 놀라는지라 예수께서 다시 대답하여 가라사대 얘들아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가 어떻게 어려운지.

    13. 마가복음 10:25
    약대가 바늘귀로 나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 

    14. 마가복음 12:34 
    예수께서 그 지혜 있게 대답함을 보시고 이르시되 네가 하나님의 나라에 멀지 않도다 하시니 그 후에 감히 묻는 자가 없더라.

    15. 마가복음 15:43 
    아리마대 사람 요셉이 와서 당돌히 빌라도에게 들어가 예수의 시체를 달라 하니 이 사람은 존귀한 공회원이요 하나님의 나라를 기다리는 자라.

    16. 누가복음 4:43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다른 동네에서도 하나님의 나라 복음을 전하여야 하리니 나는 이 일로 보내심을 입었노라 하시고.

    17. 누가복음 6:20 
    예수께서 눈을 들어 제자들을 보시고 가라사대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하나님의 나라가 너희 것임이요. 

    18. 누가복음 7:28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여자가 낳은 자 중에 요한보다 큰이가 없도다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에서는 극히 작은 자라도 저보다 크니라 하시니.

    19. 누가복음 8:1
    이 후에 예수께서 각 성과 촌에 두루 다니시며 하나님의 나라를 반포하시며 그 복음을 전하실쌔 열 두 제자가 함께 하였고.

    20 누가복음 9:2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며 앓는 자를 고치게 하려고 내어 보내시며. 

    21. 누가복음 9:27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여기 섰는 사람 중에 죽기 전에 하나님의 나라를 볼 자들도 있느니라.

    22. 누가복음 9:60
    가라사대 죽은 자들로 자기의 죽은 자들을 장사하게 하고 너는 가서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라 하시고. 

    23. 누가복음 9:62
    예수께서 이르시되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치 아니하니라 하시니라. 

    24. 누가복음 10:9 
    거기 있는 병자들을 고치고 또 말하기를 하나님의 나라가 너희에게 가까이 왔다 하라.

    25. 누가복음 10:11
    너희 동네에서 우리 발에 묻은 먼지도 너희에게 떨어버리노라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온줄을 알라 하라. 

    26. 누가복음 11:20 
    그러나 내가 만일 하나님의 손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내는 것이면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임하였느니라.

    27. 누가복음 13:18
    그러므로 가라사대 하나님의 나라가 무엇과 같을꼬 내가 무엇으로 비할꼬.

    28. 누가복음 13:20 
    또 가라사대 내가 하나님의 나라를 무엇으로 비할꼬 

    29. 누가복음 13:29 
    사람들이 동서 남북으로부터 와서 하나님의 나라 잔치에 참석하리니.

    30. 누가복음 14:15
    함께 먹는 사람 중에 하나가 이 말을 듣고 이르되 무릇 하나님의 나라에서 떡을 먹는 자는 복되도다 하니

    31. 누가복음 17:20
    바리새인들이 하나님의 나라가 어느 때에 임하나이까 묻거늘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하나님의 나라는 볼 수 있게 임하는 것이 아니요.

    32. 누가복음 17:21 
    또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도 못하리니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 

    33. 누가복음 18:16 
    예수께서 그 어린 아이들을 불러 가까이 하시고 이르시되 어린 아이들이 내게 오는 것을 용납하고 금하지 말라 하나님의 나라가 이런 자의 것이니라.

    34. 누가복음 18:17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하나님의 나라를 어린 아이와 같이 받들지 않는 자는 결단코 들어가지 못하리라 하시니라

    35. 누가복음 18:24 
    예수께서 저를 보시고 가라사대 재물이 있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가 어떻게 어려운지 

    36. 누가복음 18:24 
    약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 하신대. 

    37. 누가복음 18:29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집이나 아내나 형제나 부모나 자녀를 버린 자는 

    38. 누가복음 19:11 
    저희가 이 말씀을 듣고 있을 때에 비유를 더하여 말씀하시니 이는 자기가 예루살렘에 가까이 오셨고 저희는 하나님의 나라가 당장에 나타날 줄로 생각함이러라 

    39. 누가복음 21:31 
    이와 같이 너희가 이런 일이 나는 것을 보거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운 줄을 알라 

    40. 누가복음 22:16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유월절이 하나님의 나라에서 이루기까지 다시 먹지 아니하리라 하시고 

    41. 누가복음 22:18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가 이제부터 하나님의 나라가 임할 때까지 포도나무에서 난 것을 다시 마시지 아니하리라 하시고 

    42. 누가복음 23:51 
    (저희의 결의와 행사에 가타 하지 아니한 자라) 그는 유대인의 동네 아리마대 사람이요 하나님의 나라를 기다리는 자러니.

    43. 로마서 14:17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 

    44. 고린도전서 4:20
    하나님의 나라는 말에 있지 아니하고 오직 능력에 있음이라.

    46. 고린도전서 6:9
    불의한 자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줄을 알지 못하느냐 미혹을 받지 말라 음란하는 자나 우상 숭배하는 자나 
    간음하는 자나 탐색하는 자나 남색하는 자나.

    46. 고린도전서 6:10
    도적이나 탐람하는 자나 술 취하는 자나 후욕하는 자나 토색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하리라.

    47. 갈라디아서 5:21  
    투기와 술 취함과 방탕함과 또 그와 같은 것들이라 전에 너희에게 경계한것 같이 경계하노니 이런 일을 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것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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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사렛 사람'은
    이스라엘 북부의 갈릴리 지역에 있는 '나사렛'이라는 도시 출신을 뜻하며, 특히 신약성경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지칭하는 말로 사용됩니다. 
    예수님은 유년 시절 대부분을 나사렛에서 보냈기 때문에 '나사렛 예수' 또는 '나사렛 사람'으로 불립니다. 
    이는 종종 예수님을 경멸적으로 지칭하는 데 사용되기도 했지만, 마태복음에서는 메시아에 대한 예언을 성취한 것으로 묘사됩니다. 

    주요 내용
    • 지리적 출신 : 이스라엘 북부 갈릴리 지방의 나사렛(Nazareth)이라는 도시를 말합니다.
    • 예수 그리스도 : 성경에서는 예수님께서 이 곳에서 성장하셨기 때문에 '나사렛 예수' 또는 '나사렛 사람'이라고 불립니다.
    • 성경적 의미 :
      • 경멸 : 당시에는 시골 출신이라는 의미에서 경멸적인 표현으로 사용되기도 했습니다.
      • 예언 성취 : 마태복음 2장 23절에서는 예언을 이루기 위해 예수님을 '나사렛 사람'이라고 불릴 것이라고 말하며, 이는 메시아의 성취를 의미합니다.
    • 다른 의미 : '나사렛'은 '가지'를 의미하는 구약의 '네체르(Netzer)'와 연관 지어 이해되기도 합니다. 
      이는 이사야서의 예언과 연결됩니다.


    마태복음에 대해 알아야 할 세 가지

    마크 E. 로스 마크 E. 로스 박사는 사우스캐롤라이나주 콜롬비아에 있는 얼스킨 신학교의 조직신학 교수
    Let’s Study Mattew

    마태복음의 첫 구절은 예수님에 대해 다음의 세 가지 중요한 사실을 요약하고 있다.

    1. 마태복음은 그리스도 예수에 관한 것이다.

    마태복음은 예수 “그리스도”, 즉 구약에 약속된 기름 부음 받은 자 메시아에 대한 책이다(삼상 2:10; 시 2:2; 단 9:25; 마 1:16~18; 2:4; 16:16, 20; 22:42; 23:8~10). 마태복음은 구약성경에 드러난 구원의 이야기를 이어가며 가장 적절하게 신약성경을 시작하고 있다. 마태는 많은 구약성경을 인용하며 구약의 문체로 기록하고 있다. 

    마태복음은 구원 이야기의 연속이 아니라 성취라는 것을 매우 강조하고 있다. 마태는  예수님의 생애에 일어난 일들이 선지자들의 예언의 성취라는 사실을 열 번이나 언급하고 있다(마 1:22, 2:15, 2:17, 2:23, 4:14, 8:17, 12:17; 13:35; 21:4; 27:9). 또한 8~9장에는 선지자들이 약속한 치유와 구원을 베푸실 능력이 예수님께 있음을 보여주는 열 가지 기적이 나온다(마 8:17, 사 53:4 인용; 사 35:5 참조). 마태는 이를 강조하기 위해 예수님의 기적을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시니”(마태복음 4:23; 9:35; 10:1)라는 독특한 방식으로 보고하고 있다. 그 무엇도 예수님의 능력을 막을 수 없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 “모든 병과 약한 것”이라고 말하지 않고,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시니”라며 ‘모든’을 두 번 반복해 사용했다. 마태는 “다윗의 자손”이라는 칭호를 예수님께서 행하신 치유와 관련하여 사용했다(마 9:27; 12:23; 15:22; 20:30). 이것은 예수님의 나라가 그분의 백성을 위한 완전한 축복과 구원임을 보여준다. 참으로 예수님은 기름 부음 받은 종(마 12:18~21, 사 42:1~3 인용)이요, 오랫동안 기다려온 메시아, 선지자들이 예언한 모든 것을 성취하시는 분이시다.

    2. 마태복음은 다윗의 자손 예수에 관한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약속된 다윗의 자손이시며, 그의 나라는 끝이 없다(삼하 7:13; 시 89:3; 사 9:7). 마태는 왕족의 계보(마태복음 1:2~17)를 제시하며, 예수님의 족보를 아브라함부터 다윗까지, 다윗부터 여고냐와 그의 형제들이 바벨론으로 사로잡혀 갈 때까지, 여고냐부터 예수님을 낳은 마리아의 남편이자 다윗의 후손인 요셉까지, 세 단계로 나누어 나열하고 있다. 마태는 바벨론 포로에 대해 두 번이나 언급하면서(마 1:11, 12) 특별한 주의를 기울이는데, 이것은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하신 약속이 바벨론에 의해 끝난 것이 아님을 보여준다. 따라서 마태는 열왕기하의 마지막 말씀으로 다윗의 가계가 (시드기야의 다섯 아들이 죽었음에도 불구하고) 바벨론 포로 생활 동안 여고냐(여호야긴이라고도 부름; 렘 24:1; 왕하 24:6~17, 25:27~30)를 통해 보존되었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열왕기하는 여호야긴이 옥에서 풀려나 바벨론에 있는 모든 왕들보다 높은 자리에 앉게 되었다고 말하면서 메시아의 통치를 기대하는 가운데 끝을 맺는다. 그리고 마태복음은 다윗의 자손 예수께서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받으셨다(마 28:18)고 말하며 열왕기하 마지막 본문이 성취되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3. 마태복음은 아브라함의 자손 예수에 관한 것이다.

    마태는 예수님이 아브라함의 자손이라고 말한다. 이는 단순히 예수님이 아브라함의 후손이라는 것이 아니라 아브라함의 씨, 즉 천하 만민이 그를 통해 복을 받으리라고 약속하셨던 아브라함의 자손이라는 것이다(창 22:18; 26:4). 마태의 족보에는 예수님께서 베푸시는 구원이 “천하 만민”에게 다다르는 것이 매우 미묘하게 소개되어 있다(마태복음 1:2~6). 이 족보에는 네 명의 여인이 언급되는데 그중 세 명은 이방인(다말, 라합, 룻)이고 마지막 한 명은 이방인(헷 사람 우리아, 삼하 11:3)의 아내이다. 또한 동방 박사들은 별을 보고 따라와 유대인의 왕으로 나신 예수님께 경배했다(마 2:1~12, 사 60:1~7 암시). 이 왕의 공생애가 “이방의 갈릴리”에서 시작된 것은 그분이 베푸시는 구원이 “천하 만민”을 위한 구원이었기 때문이다(마 4:12~17, 사 9:1~2 성취).

    예수님이 행하신 첫 번째 기적은 로마 백부장의 하인을 고치신 일(마 8:5~13)이었고, 다음에는 흉악한 귀신이 들린 가나안 여인의 딸을 고치신 것이었다(마 15:21~28). 예수님이 사천 명을 먹이신 일(마가복음 7장 31절은 이 일이 갈릴리 바다 동쪽 데가볼리에서 일어났다고 말함)은 유대인들을 위해 오천 명을 먹이신 것과 같은 일을 이방인 가운데서도 행하셨음을 보여주고 있다(마 14:13~21; 15:32~38). 예수님은 감람산 설교에서 천국 복음이 모든 민족에게 증거되기 위하여 온 세상에 전파될 것이고 그제야 끝이 올 것이라고 말씀하셨다(마 24:14). 마태복음은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으라는 예수님의 명령으로 끝을 맺는데, 이는 아브라함에게 주신 약속의 완성을 가리키고 있다(마 28:18~20).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 이것이 우리가 마태복음에 대해 알아야 할 세 가지다. 


    1 예를 들어 마태는 헬라어 이두(idou)를 60회 이상 사용하고 있다. 이 단어는 헬라어 구약성경에 1000번 이상 사용되었다. 영어 번역(KJV, ESV 등)에서는 주로 “보라”로 번역되었지만, 다른 단어로 번역되기도 했다. 누가도 비슷한 문체로 기록했지만 마가와 요한은 그 단어를 자주 사용하지 않았다. NIV 독자들이 주의해야 할 것은 이 단어가 오늘날 일반적인 구어체가 아니기 때문에 자주 생략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마태복음과 구약성경은 강조를 위해 이 단어를 사용하고 있다. 마태의 영혼 깊숙이 구약의 언어가 스며들어 있음을 볼 수 있다. 마태가 이 단어를 처음 사용한 곳(1:20)이 이 단어를 사용하는 구약성서의 인용문(1:23) 바로 앞에 나온다는 것은 주목할 만하다. NIV에서는 두 곳 모두에서 이 단어를 생략했다.




    신약 27권 중에 복음서는 4권입니다.
    마태복음, 마가복음, 누가복음, 요한복음 4권 중에서 가장 먼저 기록된 복음서가 무엇인지 알고 있습니까?
    마가복음이 가장 먼저 기록되었습니다.

    그러면 왜 신약성경의 첫번째 책은 마태복음으로 결정하였을까요?

    마태는 다른 복음서보다 두 배 이상의 구약 본문을 인용한다. 
    반면 마가는 마태와 누가에 비해 덜 명시적으로 구약을 사용한다. 
    마태와 마가가 구약을 사용하는 특징을 파악하기 위해 마태복음의 경우는 구약을 사용하는 방법(인용, 인유, 모형론)에, 마가복음은 내러티브의 흐름에 따른 구약 사용의 목적에 초점을 맞출 것이다.

    마태복음은 구약의 완성으로 기록되었기 때문에 복음서의 첫번째 책으로 소개 됩니다. 

     


    구약과 신약을 이어주는 마태복음

    “사복음서는 세상의 모든 책을 합한 것보다 중요하다. 이는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알지 못하는 것보다 다른 모든 것을 알지 못하는 편이 낫기 때문이다”(헨리 할레이). “사복음서”는 우리에게 역사상 가장 위대하신 분에 관해 알려 준다.왜냐하면 그 네 권의 책은 예수 그리스도의 지상 생애를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이 “사복음서”를 기준으로 볼 때, 앞에 있는 39권의 “구약성경”은 사복음서의 주인공이신 예수 그리스도와 그분의 왕국을 예언하고 있고, 뒤에 있는 23권의 “신약성경”은 예수 그리스도와 그분의 왕국에 관해 설명하고 있다.
    성경에는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증거들이 넘쳐난다. 구약에서 신약까지 성경은 일관되게 예수 그리스도에 관해서 증거한다(요5:39). 우리는 성경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께서 어떤 분이신지를 알아야 한다. 그러나 오늘날 많은 그리스도인이 구원을 받았다고 하면서도 예수님에 관해 잘 모르고 있다. 그저 머리로만 알거나 편파적인 시각으로 주님에 대해 얼마나 많은 오해를하고 있는지 모른다. 예수님께서 어떤 분인지 모르는 사람이 어떻게 주님을 전적으로 신뢰할 수 있겠는가? 우리는 오직 성경을 통해 예수님에 관해 알 수가 있다.

    “만약 어떤 사람에 관해서 알고 싶다면 그 사람을 잘 알고 있는 사람을 찾아가서 물어봐야 한다. 이것 외에는 다른 방법이 없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을 잘 알기 위해서는 하나님과 가장 가깝게 살고 있고 하나님을 가장 잘 아는 사람에게 가서 물어봐야 한다. 그런 사람들은 어디에 있는가? 모두 ‘성경’에 나와 있다. 그래서 우리는 성경 한 구절, 한 구절 그뜻을 잘 음미하면서 차분하게 읽어 나가야 한다”(D.L. 무디). “성경은 인류 역사상 가장 고상하고 가장 친절하며 가장신실하고 가장 선한 친구였던 한 사람, 곧 주 예수 그리스도에 관하여 말해 준다”(헨리 할레이).

    마태복음의 주제는 “유대인의 왕”이신, 즉 유대인의 왕으로 오신 주 예수 그리스도와 천국이다. 마태복음은 유대인들에게“왕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제시하는 책이다. 특히 “유대인의 왕”의 모습이 두드러지기에 “다윗의 아들”(마 1:1)로오셨다는 사실이 강조된다. 왜냐하면 유대인의 왕의 정통성은 “다윗의 언약”(삼하 7:4-17)에 따른 “다윗의 보좌”에있기 때문이다. 『네[다윗] 집과 네[다윗] 왕국이 네[다윗] 앞에서 영원히 세워지리라. 네[다윗] 보좌가 영원히 세워지리라』(삼하 7:16). 이처럼 예수 그리스도의 유대인의 왕으로서의 모습이 강조되기 때문에 마태복음은 철저하게“교회의 관점”이 아닌 “유대인의 관점”으로 해석해야 한다. 따라서 마태복음에 나오는 많은 내용들이 이 교회 시대의그리스도인들에게 상당한 영적 교훈들을 줌에도 불구하고, 마태복음에 나오는 구절들 대부분은 “교리적”으로 이방인이나 교회와는 관계없이 “유대인에게만 적용”된다. 『나는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 외에는 보냄을 받지 아니하였노라』(마15: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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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위의 표에서 보듯이 구약과 신약은 서로 다른 언약이며, 마태복음은 “구약에서 신약으로 넘어가는 과정”을 다루는“과도기적인 책”(전환기적인 책)이다. “구약”은 “동물의 피로 맺은 언약”이고, “신약”은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맺은 언약”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십자가에서 “새 언약의 피”(마 26:28)를 흘리심으로써 “한 번의 속죄”를 통해 인류를 위한 “영원한 구속”(히 9:12-15)을 완성하셨다. 그러므로 구약에서는 “죄의 용서”만 있고 구속은 없지만,신약에서는 죄의 용서뿐만 아니라 “구속”(죄를 제거함, 골 1:14)도 있다. 구약에서 신약으로 넘어가는 “분기점”은“십자가 사건,” 곧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이다(마 27장). 마태복음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을 중심으로 유대인을 위한 “구약의 교리”와 교회를 위한 “신약의 교리”가 섞여 있다. 또한 마태복음은 “다윗의 아들”이신 예수그리스도가 강조되며(마 1:1; 9:27; 12:23; 15:22; 20:30,31 등), 성경 전체에서 유일하게“천국”이라는 용어가 나오는 책이다. 천국은 마태복음에서만 총 33회 언급된다.

    왕과 왕국의 전개를 알려 주는 마태복음의 주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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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태복음은 구약성경을 풍부하게 인용했고, 구약의 사건이나 인물에 관한 언급이 많다. 그리고 마태복음은 다른 복음서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내용이 제시되는데, 예를 들어 “그리스도의 왕으로서의 계보”(마 1:1-17)라든지, “요셉”에 대한 정보(1:18-25),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에게로 제자들을 보내는 내용(마 10장) 등이 그렇다.
    마태복음 안에 기록된 내용들은 사건이 일어난 순서대로 기록되어 있지 않고, “마태복음의 주제”에 따른 특별한 배치 순서를 갖는다. 전반부인 1-10장은 왕과 왕국의 준비 과정, 11,12장은 왕이 그 백성들에게 거부됨, 13-26장은 교회시대에서 천년왕국까지의 역사를 보여 준다. 이것은 성령 하나님께서 기록자인 마태를 통하여 의도하신 것으로서, 왕국의전개가 “세대주의적 전천년주의”에 입각하고 있음을 알려 준다. 왜냐하면 마태복음의 후반부 전개가 교회 시대(13장),환란 시대 및 지상 재림(14-20장), 왕의 입성을 통해 보여 주는 천년왕국의 수립(21-26장)의 순서로 전개되기 때문이다. 성령 하나님께서는 신약성경의 첫 책을 통해서 교회 시대와 그 이후에 있을 역사를 먼저 알게 하셨다. BB


    신약 속 구약 인용: 예수의 가르침에서 찾는 구약의 흔적

    Living Book
    3~4분


    성경을 읽다 보면, 신약과 구약이 마치 서로 연결된 거대한 이야기처럼 느껴질 때가 있어요. 사실 예수님은 신약에서 가르침을 전할 때 구약 성경을 자주 인용하셨습니다. 그 이유는, 구약의 예언과 율법이 바로 예수님을 통해 완성되었기 때문이죠. 오늘은 예수님의 가르침 속에서 구약이 어떻게 인용되었는지, 그리고 그 구약의 흔적이 예수님의 메시지에 어떻게 녹아 있는지 살펴보려고 해요.


    1. 예수님과 구약의 연결: 그 시작은 어디서부터?

    많은 분들이 신약과 구약이 서로 별개의 책처럼 느껴질 수 있어요. 하지만 예수님은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를 폐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하게 하려 함이라”(마태복음 5:17)고 말씀하셨어요. 여기서 ‘율법’과 ‘선지자’는 바로 구약을 가리키는 말이에요. 예수님은 구약에서 시작된 하나님의 구원 계획을 완성하기 위해 오신 거죠.

    자연스럽게 궁금한 점이 생기죠. “왜 예수님은 구약을 그렇게 자주 인용하셨을까요?
    그 이유는 구약의 율법과 예언이 바로 예수님의 오심을 미리 준비한 말씀이기 때문이에요. 구약에서 예언된 메시아가 바로 예수님이시고, 예수님은 그 예언을 성취하심으로 하나님의 계획을 완성하신 거죠. 그래서 예수님은 자신의 가르침과 사역을 구약의 틀 안에서 설명하셨어요.


    2. 산상수훈 속 구약의 흔적: 예수님의 가르침의 토대

    산상수훈(마태복음 5-7장)은 예수님의 가장 유명한 가르침 중 하나로, 여기에는 구약의 인용이 많이 등장합니다. 예수님은 “옛사람에게 말한 바”라고 언급하면서 구약의 율법을 인용하고, 그 율법의 참된 의미를 풀어주십니다.

    예를 들어, 예수님은 구약의 십계명 중 하나인 “살인하지 말라”는 법을 인용한 후, 단순히 살인을 피하는 것이 아니라 형제를 미워하지 않는 것이 참된 율법의 의미라고 가르치셨어요(마태복음 5:21-22). 여기서 예수님은 구약의 도덕적 기준을 한 차원 높여, 마음의 상태까지 다루고 계신 거죠.

    또 다른 예시는 마태복음 5:43-44에서 예수님이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는 구약의 구절을 인용하며, 대신 원수를 사랑하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이 가르침은 단순히 구약의 규칙을 넘어서, 하나님의 사랑의 본질을 더 깊이 이해하게 해줍니다.


    3. 메시아 예언의 성취: 이사야서 속 예수님의 모습

    구약에는 메시아에 대한 예언이 수없이 등장합니다. 그중에서 특히 이사야서는 예수님을 예고한 가장 중요한 책 중 하나로, 예수님은 이사야서를 자주 인용하셨어요.

    한 가지 대표적인 예로, 누가복음 4:17-21에서 예수님은 회당에서 이사야서 61장을 읽으셨습니다.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라는 구절인데요, 예수님은 이 구절을 읽으신 후 “이 말씀이 오늘 너희 귀에 응하였느니라”고 선언하셨어요. 이는 예수님이 바로 이사야서에서 예언된 메시아임을 드러내는 중요한 순간이었죠.

    이사야서 53장에 나오는 ‘고난받는 종’에 대한 예언도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을 예고한 구절로 해석됩니다.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 이 예언이 완벽하게 성취되었죠.


    4. 구약의 율법과 예수님의 가르침: 새 계명의 등장

    예수님은 구약의 율법을 존중하셨지만, 그 율법을 새로운 차원으로 해석하셨어요. 특히 요한복음 13:34-35에서 예수님은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새 계명’은 구약의 율법에 포함된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는 계명의 확장된 형태입니다.

    구약에서 주어진 율법은 주로 외적인 행위에 초점을 맞췄다면, 예수님은 우리의 내적인 마음과 동기까지 중요시하셨어요. 그래서 사랑의 계명은 단순히 이웃을 돕는 것을 넘어서, 예수님이 보여주신 희생적인 사랑을 본받아 서로를 사랑하는 것을 강조합니다.


    5. 시편과 예수님의 십자가: 구약의 예언이 성취되다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에도 구약의 시편이 깊게 연결되어 있어요.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셨을 때 외치신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마태복음 27:46)라는 말씀은 시편 22편 1절에서 직접 인용된 구절입니다. 이 구절은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라는 고통스러운 외침으로 시작되는 시편이죠.

    예수님은 이 시편을 인용하시며 자신의 고난하나님과의 단절을 표현하셨고, 이는 결국 인류를 위한 희생으로 이어졌습니다. 시편은 예수님의 고난과 승리를 미리 예언한 것으로, 구약의 시편 속에서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이 예고되어 있었음을 보여줍니다.


    6. 부활과 구약의 예언: 호세아서의 부활 암시

    예수님의 부활 역시 구약에서 여러 차례 암시되어 있었어요. 특히 호세아 6:2에서 “여호와께서 이틀 후에 우리를 살리시며 셋째 날에 우리를 일으키시리니…”라는 구절은 예수님의 부활을 예고하는 중요한 암시로 해석됩니다.

    이 구절은 구약 속에서도 부활의 개념이 존재했다는 사실을 보여주며, 예수님의 부활을 통해 그 예언이 실제로 성취되었음을 강조합니다.


    결론: 예수님의 가르침 속에서 살아 숨쉬는 구약

    신약 속에서 구약을 인용한 구절들을 보면, 예수님의 가르침이 구약의 연장선에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구약의 율법과 예언은 단순히 과거의 이야기가 아니라, 예수님을 통해 완성된 하나님의 구원 계획을 준비한 이야기였습니다. 예수님은 구약을 자주 인용하며, 자신의 사역과 구원의 메시지를 설명하셨고, 그 과정에서 구약의 예언들이 어떻게 성취되었는지 우리에게 보여주셨습니다.

    신약을 읽을 때, 구약의 흔적연결고리를 찾는 일은 우리의 신앙을 더 깊고 풍성하게 만들어 줍니다. 오늘 소개한 내용들을 마음에 새기며, 신약 속 예수님의 가르침이 구약과 어떻게 연결되는지 더 깊이 묵상해보세요!


    자주 묻는 질문(FAQs)

    1. 예수님이 구약을 인용한 이유는 무엇인가요?
      예수님은 구약의 예언을 성취하시기 위해 오셨으며, 구약의 율법과 가르침을 기반으로 자신의 메시지를 전하셨습니다.
    2. 산상수훈에서 구약을 어떻게 인용하셨나요?
      예수님은 구약의 율법을 인용하면서 그 본질을 더 깊이 설명하셨으며, 율법을 완성하는 새로운 해석을 제시하셨습니다.
    3. 이사야서에서 예수님에 대한 예언이 있나요?
      네, 이사야서에는 예수님의 사역과 고난에 대한 여러 예언이 있으며, 이는 신약에서 성취되었습니다.
    4.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은 구약의 어디에서 예언되었나요?
      시편 22편과 이사야서 53장에서 예수님의 고난과 희생이 예고되었습니다.
    5. 부활도 구약에서 예언되었나요?
      호세아서와 다른 구약 구절에서 부활에 대한 암시가 존재하며, 이는 예수님의 부활로 성취되었습니다.


    예수님이 인용하신 구약성경

    별을 보며 2022. 3. 31. 13:22

     

    출처: 윌밍턴 성경연구

     

    1. 그가 시험받을 때.

     (1) 첫번째 시험(<마 4:4;><신 8:3>절을 인용함).

     (2) 두번째 시험(<마 4:7;><신 6:16>절을 인용함).

     (3) 세번째 시험(<마 4:10;><신 6:13>절을 인용함).

     

    2. 산상수훈을 가르치던 때.

     (1) 마태복음 5장 21절에서 그는 출애굽기 20장 13절의 제6계명을 인용함.

     (2) 마태복음 5장 21절에서 그는 출애굽기 20장 14절의 제7계명을 인용함(참조, <마 5:31;>신24:1).

       주 : 그는 나중에 부자 청년 지도자와 대화할 때 같은 계명들을 인용한다(참조, <막 10:19>).

     

    3. 그의 고향에서 설교할 때(<눅 4:18,19>절에서 그는 <사 61:1,2>절을 인용함).

     

    4. 유대인 지도자들과 대면했을 때.

     (1) 그가 자기와 죄인들과의 교제를 변호했을 때(<마 9:13>절에서 그는 <호 6:6>절을 인용함).

     (2) 그가 결혼문제를 자세히 설명할 때(<막 10:7,8>절에서 그는 <창 2:24>절을 인용함).

     (3) 그가 계명 중에서 어느 것이 가장 크냐는 질문을 받았을 때(<막 12:29,30>절에서 그는 신6:4,5절을 인용함).

     (4) 그가 바리새인들의 헛된 전통을 책망할 때(<막 15:7-9>절에서 그는 <사 29:13>절을 인용함).

     (5) 바리새인들의 그의 권위에 대하여 질문할 때(<요 8:17>절에서 그는 <신 17:6>절을 인용함).

     

    5. 그가 세례 요한을 칭찬할 때.

    <눅 7:27>절에서 그는 <말 3:1>절을 인용함.

     

    6. 그의 승리의 입성 날에 : 21:16절에서 그는 <시 8:2>절을 인용함.

     

    7. 그의 성전정화 때에 : 19:46절에서 그는 <사 56:7>절을 인용함.

     

    8. 이스라엘에 대한 비유를 말할 때 : <마 21:42,44>절에서 그는 <시 118:22,23;><사 8:14,15>절을 일용함.

     

    9. 성전에서 율법에 대하여 토론할 때 : <마 12:36>절에서 그는 <시 110:1>절을 인용함.

     

    10. 그가 마지막 유월절을 지키던 밤에(세상이 그를 미워한 것같이 그의 제자들을 미워할 것이라고 예언할 때) : <요 15:25>절에서 그는 <시 35:19;>시69:4절을 인용함.

     

    11. 십자가 위에서

     (1) 그의 네번째 날(<마 27:46>절에서 그는 <시 22:1>절을 인용함).

     (2) 그의 일곱번째 말(<눅 23:46>절에서 그는 <시 31:5>절을 인용함).

     

    =============

     

    예전부터 성경을 공격하는 무리들이 성경이 불완전하다거나 고대문서들을 적당하게 짜집기 해서 만들어진 문서라고 공격을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이신 예수님께서 이세상에 오셔서 유대인이 가진 구약성경을 인용하시고, 그리고 구약성경을 직접 읽으시므로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임을 증명하고 있습니다.

    신약은 수많은 사본들이 일치하므로 성경의 정확성을 보증합니다.
    그리고 외경은 성경은 아닙니다.
    역사적으로 좀 도움이 되는 것들이 들어있기는 하나 정경에 들지 못하였습니다. 다 그럴 이유가 있기때문입니다.
    또 위경(가경)들이 있는데 이는 가짜 문서입니다.
    예전부터 이들 문서에 관심을 가지고 강조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이상한 말에 현혹 되지 말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는 성경을 만드시고 정확한 본문을 보존하시고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이런일들을 의심케하는 것은 마귀의 일입니다.

    출처: https://jikye.tistory.com/949 [THE HOLY BIBLE:티스토리]





    ■ 마태복음

    1. 책 제목

    헬라어 성경에는 ‘카타 마타이온’으로 되어 있다. 이는 ‘마태에 의한’이란 뜻으로 현대의 성경들은 여기서 유래하여 마태복음이라고 부른다. ‘복음’이라는 원어(유앙겔리온)는 ‘좋은 소식’이라는 뜻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께서 세상에 주신 가장 좋은 소식이다.

    마태복음이라는 명칭은 주후 1세기 말 디다케(80-100년경)에서 자주 사용되었고 바나바 서신(70-100년경)에서는 심지어 ‘기록되었으되’라는 표현이 사용되면서 인용되었다. 그 외에도 순교자 저스틴(100-165년경) 등 여러 사람들에 의해 인용 혹은 암시되었다.

     

     

    1. 기록자와 역사적 배경

    1) 기록자

    마태복음의 기록자는 예수님의 12제자 가운데 하나인 마태(9:9-13)라는 것이 전통적 의견이다. 당시 사람들은 흔히 이름을 두 개씩 가졌는데 그의 이름을 히브리어로는 레위(눅 5:27-32)라고 불렀다. 그는 알패오의 아들로 본래 세관에 앉아 사무를 보는 세관 관리로 가버나움에서 일했다(눅 5:27-28).

    마태는 예수님께서 저를 부르셨을 때에 모든 것을 버리고 따랐을 만큼 진실했으며 일설에 의하면 오순절에 성령을 받고 제일 먼저 유대인들에게 전도한 사람이었으며 후에 아시아와 마게도니아에서 전도했다고 전해지고 있다.

     

    2) 기록연대와 역사적 배경

    본서에 예루살렘 파괴(24:1-3, A.D. 70년)에 대한 예언이 있는 것으로 보아 이 책은 대략 A.D. 70년 이전에 기록된 것으로 보인다. 전통에 의하면, 사도 마태는 15년간 팔레스틴에서 전도사역을 했고 그 후 아시아와 마게도니아로 갔다. 그러므로 그는 아마 팔레스틴을 떠나기 전에 유대인들을 위해 본서를 기록했을 것으로 생각되어 대략적으로 A.D. 45-50년경에 기록했을 것으로 본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실 때에는 유대와 팔레스틴 지역은 로마 제국으로부터 세움을 받은 분봉왕과 총독으로부터 통치를 받고 있었으며, 많은 세금을 세리로부터 착취 및 강탈당하는 일이 빈번하여 유대인들은 율법과 선지자들을 통하여 예언되어 오리라고 한 다윗의 자손을 통한 유대인의 참된 왕을 기다리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마태가 본서를 기록할 때의 초대교회는 로마 황제로부터 뿐만 아니라 정통 유대교를 따르는 자들로부터 많은 핍박을 당했다. 따라서 마태는 이런 환경 속에서 신자들의 믿음을 견고케 하고 위로 격려하며, 또 핍박하는 유대인들에게 복음이 구약 예언의 성취임을 증거하는 것이 필요하였다.

    본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출생지 베들레헴, 예수께서 어린 시절을 보내신 나사렛, 공생애의 중심지인 갈릴리 지방, 북방 사역의 중심지 두로, 제자들을 훈련시킨 북방 가이사랴 빌립보, 그리고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심으로써 인류 구원의 대업을 완수하신 예루살렘 등이 중심 무대를 이룬다.

    예수님은 유대의 베들레헴에서 탄생하셨고, 갈릴리의 나사렛에서 성장하셨다. 그리고 갈릴리의 가버나움에서 사역을 하셨고, 유대의 예루살렘에서 돌아가셨다. 유대인들은 갈릴리가 소외 지역이라고 무시했지만(마 26:73), 이곳은 헬라 문물과 교류하던 곳이자 많은 랍비들이 활동하던 지역이었다.

     

     

    1. 주제

    1) 유대인의 왕

    마태복음은 예수께서 누구이신지를 밝히는데 중점을 두고 있는데, 그는 다름 아니라 구약에서 예언된 참된 왕이시다. 첫 부분부터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으로서의 예수님의 족보에서 이를 밝히고 있다. 그는 유대인의 왕으로 탄생하셨고(2:2), 맹인(9:27, 20:31), 이방 여인(15:22), 군중(21:9) 등 각계에서 다윗의 자손으로 불렸다.

    선지자들의 예언을 통하여 다윗의 위는 영원하리라고 예언되었으나(삼하 7:13), 사실인즉 바벨론의 침략과 예루살렘의 멸망으로 인해 중단되었다. 그런데 오시는 메시야에 의해 그 왕위는 다시 계승되었다. 예수님께서는 베푸신 여러 가지 이적을 통하여 그의 왕권을 나타내었다.

    그러나 세상 왕이 되어 세계를 통치할 것이라는 잘못된 유대인들의 메시야관은 진정한 왕이신 예수님을 배척했다. 마태는 이런 잘못된 유대인들의 메시야관을 시정하고자 했다. 유대인의 왕이신 예수님은 성경대로 십자가에 죽으시고, 성경대로 삼일만에 부활하셨다. 부활승천하사 하늘과 땅의 권세를 가지신 왕의 왕, 주의 주가 되셨다.

     

    2) 예언된 메시야

    마태는 유대인들이 대망했던 메시야(그리스도)가 바로 예수님이셨다는 것을 강조한다. 마태는 예수님께서 구약의 약속된 메시야이시며, 택하신 백성의 대속 사역을 진정으로 성취하신 분이라는 사실을 입증하기 위해 16권의 구약 성경에서 거의 70회나 인용하였다.

    또한 마태는 예수님이 모세보다 위대한 분이시며, 구약의 모세처럼 그 백성들에게 율법을 주시는 분이심을 보여주었다. 예수님은 구약의 율법을 파기하신 것이 아니라 성취하신 분이시다. 예수님의 법은 구약의 율법을 초월하였다. 따라서 유대 개종자들은 지난날 지키던 율법을 버려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시달릴 필요가 없었다. 오히려 그 율법을 더욱 완성시킨 예수님의 가르침을 어떻게 따를 것인가 고민해야 했다.

     

    3) 천국(하늘 나라)

    사람들(죄인)이 알고 있는 것은 ‘땅의 나라’, ‘유대인의 나라’뿐이다. 예수가 그리스도로 오심에 대해 인간은 ‘유대인의 왕’으로만 생각한다. 동방박사가 ‘유대인의 왕으로 나신 이’(마 2:2)를 찾고, 빌라도가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마 27:11)고 묻고, 군병들이 ‘유대인의 왕이여 평안할지어다’(마 27:29), ‘유대인의 왕 예수’라는 죄패를 통해 조롱한다. 예수는 헤롯 왕을 피해 애굽으로 피하고, 헤롯 아켈라오로 인하여 나사렛으로 피하고, 헤롯과 빌라도의 재판을 통해 십자가를 진다. 예수는 이 땅의 왕들과 경쟁하거나 충돌하지 않았다.

    그러나 사람들이 생각하는 땅의 나라와 대조하여 예수는 천국(하늘의 나라)를 선언한다. 천국이 가까이 왔음(마 3:2)을 알리고, 천국 복음(마 4:23), 천국 말씀(마 13:19)을 선포하고, 천국의 비밀(마 13:11)을 알리고, 천국의 속성을 가르친다(마 13장, 22장, 25장). 사람들은 자신들이 죄인임을 알지 못하기에 ‘이 땅의 나라’, ‘세상의 변화, 새로운 상황’을 구하였으나, 예수는 인간이 죄인임을 알기에 그리스도로 오셔서 죄로부터의 구원’, ‘새로운 존재’, ‘하늘의 나라’,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어주셨다.

    *마태복음에 천국관은 두 가지 면이 있는데 성장하는 천국과 돌연히 임재할 천국이다. 13장의 비유는 현세의 나타난 천국이요, 21, 25장의 천국 비유는 장차 임할 천국이다.

     

     

    1. 특징

    1) 유대적인 성격이 강함

    구약 성경이 예언하고 있는 구원자, 메시야가 바로 예수이심을 인정하지 않는 유대인들을 향하여 기록하고 있다. 그들이 생각하는 메시야는 이스라엘의 가장 위대한 왕이었던 다윗 왕과 같은 강력한 모습으로 이스라엘을 회복시켜야하는데, 예수 그리스도는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이스라엘은 멸망 상태로 있다. 그래서 마태복음에서는 유대인 독자들을 위해, 예수님이 구약에서 가리키는 왕이자 메시야임을 알려주고 있고, 예수님을 통해 새로운 영적인 이스라엘인 바로 교회가 세워져 있음을 설명한다.

     

    ① 하늘에 계신 아버지

    또한 유대인들이 사고를 고려하여서 “하늘에 계신 아버지”라는 단어를 마태복음에서는 15번, 마가복음에서는 1번, 누가복음에서는 전혀 사용되지 않는 것을 보면, 하나님이라는 이름 대신 우회적으로 표현으로 사용하는 유대인들의 사고를 잘 표현한 것으로 보인다.

     

    ② 예수님의 계보

    마 1:1에 “아브라함과 다윗과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라”고 말한다. 유대인들의 조상으로 여기는 아브라함으로부터 예수님으로 이어지는 계보를 밝히고 있다. 이 계보는 창세기 5장과 달리 죽음의 역사에서 생명의 역사로, 정죄의 역사에서 은혜와 긍휼의 역사로, 불순종의 역사에서 순종의 역사로 이어지는 역사를 기록하고 있다. (창세기 5장에 나오는 아담으로부터의 계보는 “낳고 죽었더라”는 말이 반복되어 나온다. 아담의 불순종으로 말미암아 아담의 후예들은 죄의 삯으로 죽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마태복음의 계보에는 “낳고”라는 말이 반복되지만 “죽는다”라는 말이 없다. 예수님은 아담 안에 죽을 인생들을 구원하시기 위해 이 땅에 오셨다. 창세기와 비교해서 예수님은 마지막 아담이다(고전 15:45)).

    ③ 구약의 예언의 성취 : ‘예언-성취’의 패턴 사용

    마태복음은 ‘그리스도이신 예수’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기에 다른 복음서들보다 유독 ‘예언-성취’ 또는 구약 인용의 양식을 자주 사용한다. ‘이는 ~을 이루려하심이라’는 (1:22~23, 2:15, 2:17~18, 2:23, 4:14~16, 8:17, 12:17~21, 13:35, 21:4~5, 27:9~10) 10번 정도 등장한다. ‘예언-성취’의 양식은 구약의 ‘약속-성취’의 양식과 함께 하나님의 일하심을 인간에게 계시하는 하나님의 방법이다. ‘예언-성취’는 그리스도에게 관한 것만이 아니라, 그리스도가 제자들에 대하여 말씀하신 것에도 재현된다. 이와 같이 마태복음은 구약과 신약을 이어주는 가교 역할을 해준다.

     

    2) 시간순이 아니라 주제를 강조함

    마태복음은 시간에 따라 연대적으로 기록되지 않았다. 마태복음은 그리스도께서 아브라함과 다윗으로 이어지는 족보를 따라 나셨으며, 다양한 이적을 통해 오리라고 한 참된 유대인의 왕이시지만, 그 왕께서 자기 백성에게 거절당하시고 온 세상을 위하여 골고다 십자가에 못박히셨고, 지금도 하늘에 살아계시다는 한 가지 특별한 진리를 전달하기 위해 그리스도의 생애로부터 자료를 정리하여 배열해 놓았다.

     

    3) 철저함과 세심한 기록

    마태복음에는 특별히 돈에 대한 언급이 많이 나오며, 다른 책에는 등장하지 않는 세 가지 표현, “반 세겔 세금”(17:24), “한 세겔 동전”(17:27), 달란트(18:24, 25:15)가 등장한다. 그는 마가복음 내용의 대부분을 포함하면서도 세리 특유의 철저함과 세밀함으로 예수님의 가르침(설교)을 더 세심하게 전달했다. 그래서 독자들이 산상수훈(5-7장), 제자파송 설교(10장), 천국 비유(13장), 종말에 대한 교훈(23-25장)을 풍성하게 읽을 수 있다.

     

     

    1. 구조

    1) 그리스도의 강림(1:1~4:11)

    ① 그리스도의 나심(1:1~2:23)

    ② 그리스도의 등장(3:1~4:11)

     

    2) 그리스도의 증거(4:12~16:20)

    ① 그리스도의 복음(5:1~7:29)

    ② 그리스도의 증거(8:1~16:20)

     

    3) 그리스도의 사역(16:21~28:20)

    ① 그리스도의 계시(16:21~26:46)

    ② 그리스도의 사역(26:47~28: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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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참조 / 

    마태복음과 구약 성취와 완성으로서의 마태복음 

    마태복음은 다른 세 복음서들에 비해 구약성경에 대한 인용구들과 언급들을 두드러지게 많이 포함하고 있다. 마태복음의 이러한 특징은 그 독자들에 대한 일반적인 이해에 비추어 볼 때 그렇게 놀라운 것이 아니다.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이 그 주된 독자들로 추정되는 마태복음은 예수를 그리스도로 제시하는 데 있어 그 어떤 다른 복음서들보다 예수의 생애와 가르침을 구약과의 연관성 속에서 다루어야 할 필요에 직면해 있었을 것이다. 따라서 마태복음을 해석하는 데 있어 그의 구약 사용의 원리와 목적 그리고 그 내용에 대한 적절한 이해는 결정적으로 중요한 것으로 보인다. 사실 마태의 구약 사용은 여러 가지 면에서 독특한 측면들을 가지고 있으며, 이는 상당수 학자들의 관심의 대상이 되어 왔다.2 본고에서는 마태의 구약 사용의 특징들을 개관하면서, 그와 관련해서 문제시되어 왔던 논점들을 제시하는 가운데 마태복음의 구약 사용의 신학적 의미들을 정리하고자 한다.

    성취 형식 인용구

    마 태의 구약 사용에 대한 가장 특징적 형태는 아마도 복음서 전체를 통해 10회에 걸쳐 나타나는 ‘성취 형식 인용구들’일 것이다(1:22~23; 2:15; 2:17~18; 2:23; 4:14~16; 8:17; 12:17~21; 13:35; 21:4~5; 27:9~10; 참조. 2:5~6). 우선적으로 이 인용구들은 동일한 형식의 도입구를 갖는다는 점이 특이하다: ‘선지자 …로 하신 말씀을 성취하려 하심이라’(ivna plhrwqh' to; rJhqe;n uJpo; kurivou dia; … tou' profhvtou levgonto").3 마태의 이 도입 형식구는 매우 독특하며, 따라서 마태 자신으로부터 온 것이 거의 분명하다.4 이와 동일한 도입구는 놀랍게도 당대의 유대교 및 기독교 문헌들 가운데서 거의 발견되지 않으며, 단지 요한복음에서만 어느 정도 유사한 형태가 발견될 뿐이다: ‘이는 성경이[또는 선지자 …의 말씀이] 성취되기 위함이다’(ivna hJ grafh; plhrwqh'/, 요 12:38; 13:18; 15:25; 17:12; 19:24, 36; 참조. 요 18:9, 32).

    마태의 형식 도입구의 특징은 모든 경우들에서 반복하여 나타나는 세 단어들에 의해 잘 드러난다. 첫째, 마태는 인용구의 내용을 지칭하는데 ‘토 레덴’(to; rJhqevn, ‘말씀되어진 것’)이라는 표현을 사용한다. 수동형 분사 ‘레덴’(rJhqevn)은 신약성경 전체를 통해 마태에 의해서만 사용되고 있는데(10개의 형식 인용구들과 3:3; 22:31; 24:15에서), 그 수동형에 내재된 주어는 하나님 자신인 것이 분명하다(참조. 1:22; 2:15).5 그렇다면 마태는 구약의 여러 저자들을 통해 기록된 다양한 인용구들을 한결같이 하나님의 계획을 선포하고 있는 ‘하나님 자신의 말씀’으로 간주하고 있는 것이다. 둘째, 모든 경우들에서 ‘선지자’(oJ profhvth")가 인용된 하나님의 말씀의 매개자로서(diav, ‘통하여’) 언급되고 있다. 마태에게 선지자는 인용된 말씀의 진정한 저자가 아니라 단지 매개자일 뿐이다(참조. 겔 38:17; 단 9:10; 눅 1:70 등). 그런데 특이하게도 마태는 13:35에서 시편을 인용하는 상황에서까지도 그 인용구를 ‘선지자’에게로 돌린다. 이는 마태가 하나님의 계획을 앞서 보여주는 예견자로서의 기능과 관련하여 ‘선지자’의 개념을 상당히 폭넓게 이해하고 있었음을 반증한다(참조. 11:13). 셋째, ‘선지자’라는 명사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는 또 하나의 특징적인 단어는 ‘성취하다’(plhrovw)라는 동사이다. 이 동사는 마태복음의 핵심 주제를 매우 간략하면서도 분명하게 드러낸다.6 사실 구약성경에 약속된 이스라엘의 소망의 ‘성취’ 주제는 신약성경 전체의 주제이다. 하지만 마태복음에서는 이 주제가 보다 더 주도적인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모든 경우들에서 이 세 단어들을 포함하고 있는 형식 도입구는 마태가 구약의 인용구들을 활용한 목적이 예수의 생애를 다름 아닌 구약 예언의 성취로 드러내 보여주는 데 있었음을 너무도 확고하게 시사한다.

    한편, 마태의 성취 형식 인용구들과 관련하여 특이한 점은 21:4~5의 경우를 제외한7 모든 인용구들이 신약성경에서 인용된 적이 없는 독특한 것들이라는 사실이다. 뿐만 아니라 형식 인용구들과 직접 연관된 이야기들 대부분(역시 21:4~5의 경우를 제외하고)은 마태복음에서만 유일하게 나타나거나(1:18~25; 2:1~12, 13~15, 16~18, 19~23; 27:3~10), 마가복음의 장황한 이야기를 매우 간략하게 요약한 형태들로 나타나고 있다(4:13~16; 8:16~17; 12:15~21; 13:34~35). 이러한 기본적인 사실들과 그 밖의 몇몇 요인들을 검토한 후 상당수의 학자들은 이 형식 인용구들이 마태 자신으로부터 기인된 것이라는 결론을 내린다.8 그럴 경우 성취 형식 인용구들에 대한 주의 깊은 관찰은 마태의 신학적 강조점을 발견하는 데 크게 기여할 수 있을 것이다.

    마태의 형식 인용구들과 그와 연관된 이야기들 사이의 관계를 살펴보는 것은 상당히 흥미롭다. 먼저 1:18~2:23의 경우, 형식 인용구들을 삭제해 버린다 해도 이야기의 흐름에는 아무런 영향을 끼치지 않을 뿐 아니라 오히려 더 자연스럽기까지 하다. 이는 이 형식 인용구들이 이야기들 중간 중간에 첨가된 마태 자신의 논평들임을 시사한다. 하지만 논평들이 그처럼 자주 삽입됨으로 말미암아 이야기의 흐름은 계속 단절되는 느낌이다. 마태가 이와 같은 이야기의 단절을 감수하면서까지 그의 논평들을 자주 삽입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여기서 우리는 마태의 주된 관심이 그 이야기들 자체보다 오히려 그와 관련해 삽입된 논평으로서의 인용구들에 있지 않았는지 추측하게 된다. 만일 그렇다면 마태가 삽입하고 있는 형식 인용구들은 그의 신학적 관심을 드러내 보여주려는 목적 을 가진 논평들인 것이 분명하다. 이러한 우리의 제안은 1:18~2:23 이외의 경우들에서 더욱 분명해진다. 4:13~16; 8:16~17; 12:15~21; 13:34~35의 경우, 그 마가복음 평행구들에서는 이야기들 자체가 관심의 유일한 대상들인데 반해, 마태복음에서는 이야기들이 단지 인용된 구약의 내용들을 확증해 주는 데 필요한 최소한의 내용들만을 제공할 뿐이며, 따라서 마태의 관심의 초점은 이야기들 자체보다는 인용구들에 맞추어져 있다는 것이 명백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와 같이 그 신학적 목적이 분명한 마태의 ‘성취 형식 인용구들’의 구약 본문 형태는 마태의 다른 구약 인용들의 경우에 비추어 볼 때 매우 특이하다. 10개의 형식 인용구들(그리고 이와 유사한 2:5~6)을 제외한 다른 구약 인용구들에서 마태는 일반적으로 70인역 본문을 사용하고 있다. 이는 초대 교회 당시 70인역이 표준적인 헬라어역 구약성경이었다는 점을 감안해 볼 때 지극히 자연스런 현상이다. 하지만 성취 형식 인용구들의 경우 그 본문 형태들은 (어쩌면 1:23의 경우를 제외하고) 70인역과 현저하게 다르다. 더욱 놀라운 점은 형식 인용구들의 본문 형태들 대부분이 70인역뿐 아니라 (우리가 현재 알고 있는) 그때 당시 존재하던 어떤 다른 히브리어 본문이나 번역본들과도 상당히 다르다는 점이다.9 실제로 각 인용구들은 단순한 인용이라기보다는, 생략, 삽입, 대체, 통합, 요약 등의 다양한 방법들을 활용한 지극히 창의적인 인용들로 드러난다. 그 구체적인 예들을 유형별로 들어보면 다음과 같다. 1) 구약의 한 기본 구절에 다른 구절(들)이 연결되어 인용된다. 2:6의 경우, 미가 5:2에 사무엘하 5:2이 첨가되고 있다. 또한 21:5의 경우, 스가랴 9:9에 이사야 62:11의 몇몇 단어들이 첨가되고 있다. 2) 구약의 긴 구절의 주제와 내용이 다른 구절을 활용하여 요약적으로 인용된다. 27:9~10의 경우, 예레미야 19:1~15(및 18:1~12; 32:6~9)의 긴 내용이 스가랴 11:12~13을 변형시켜 인용하는 가운데 적절히 반영되고 있다.10 3) 많은 경우들에 있어서 마태의 인용구들은 마태의 이야기들의 내용과 상황에 적합하게 창의적으로 변형되거나 대체되거나 생략되고 있다. 대표적으로 2:6의 경우, ‘에브라다’ 대신 ‘유대 땅’(gh' 힖ouvda)이 대체되고 있으며, ‘결코’(oujdamw'")가 첨가되고 있다. 4) 때로는 그 출처가 불분명하다. 2:23의 경우, 그 인용구의 출처는 몇몇 제안들에도 불구하고(참조. 사 4:3; 11:1; 삿 13:5, 7) 결코 명백하지 않다.11

    그렇다면 마태가 형식 인용구들을 인용하는 데 있어 이와 같은 창의적 방법을 사용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그 가장 분명한 대답은 형식 인용구들이 인용된 문맥들과 관련하여 제시될 수 있다. 마태가 인용한 인용구들은 위에서 지적하였듯이 예수의 생애와 관련하여 교회 안에서 일반적으로 널리 사용되던 구절들이 아니었으며, 그 결과 마태는 그의 독자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 그 구절들을 예수에 관한 이야기 문맥들과 보다 의미 있게 연결시켜야 할 필요를 느꼈을 것이다. 그는 이를 위해 기존의 70인역 본문을 있는 그대로 (혹은 히브리어 본문을 문자적으로 번역하여) 사용하기보다는, 문제의 본문들을 문맥들에 맞는 형태들로 적응시켜 인용하는 방법을 적극적으로 채택하였던 것으로 보인다.12 그리고 마태는 아마도 이처럼 독특한 자신의 인용들에 대해 독자들의 주의를 환기시키기 위해 그 모든 경우들마다 그의 독특한 형식 도입구를 일관성 있게 사용했던 것 같다.13

    사실 마태의 성취 형식 인용구들에 대한 논의는 그 구체적인 인용구들에 대한 해석적 작업 없이는, 특히 그 신학적 중요성 및 의미와 관련하여 그 진정한 결론에 도달하기 어렵다. 하지만 위의 개괄적인 논의들을 기초로 우리는 다음 몇 가지 잠정적인 결론들을 정리해 볼 수 있다. 마태의 성취 형식 인용구(특히 그 도입구)는 구약성경이 당시 교회에게 진리를 가늠하는 ‘하나님의 말씀’으로서의 권위를 가지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또한 그 인용구들이 예수의 생애에서 성취되었다는 사실은 마태와 그의 교회가 추종하고 있는 종교가 과거 구약 종교에 대한 반발이 아니라 그 연속이자 그 완성이라는 점을 입증해 준다. 한편 마태는 구약을 인용하는 데 있어 딱딱한 정확성보다는 신학적 의미의 연결성에 더 무게를 두었으며, 따라서 오늘날 우리의 잣대에는 무책임하고 부정확해 보일지 몰라도 당대의 잣대에는 크게 문제가 되지 않았던 탈굼적 변화들을 매우 적극적으로 활용하고 있다. 이러한 마태의 인용 방식 배후에는 어쩌면 예수의 생애가 구약성경의 문자적 의미에 의해 규정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예수의 생애에 의해 구약성경의 그 궁극적이고 진정한 의미가 드러나게 된다는 마태의 신념이 깔려 있었는지도 모른다.14

    구약 성경 내용에 관한 다른 언급/인용들

    마태는 성취 형식 인용구들을 제외하고서도 다른 복음서 저자들에 비해 구약성경과 관련된 자료들을 매우 많이 포함하고 있다. 그 대표적인 예가 12:1~8에서 발견된다. 마태복음의 본 단락을 그 평행 단락들인 마가복음 2:23~28 및 누가복음 6:1~5과 비교해 보면, 마태는 마가나 누가에서 발견되지 않는 자료들을 포함하고 있는데(5~7절), 그 자료들은 모두 구약성경과 밀접하게 관련된 것들이다. 그런데 마태의 이러한 자료 삽입은 결코 무의미한 것들이 아니라 지극히 중요한 신학적 의미를 갖는 것들로 드러난다. 본 장에서는 그 삽입된 자료들의 신학적 의미를 간략히 살펴봄으로써 마태의 구약 사용의 특징들을 예시하도록 하겠다.

    12:1~8은 안식일에 밀밭에서 이삭을 잘라먹는 예수의 제자들을 자신들의 전통적 규례에 의거해서 비난하는 바리새인들과 그들에게 답변하시는 예수 사이의 대화를 다룬다. 그 예수의 답변들 중 두 번째 답변인 5절에서, 예수는 바리새인들의 규례보다는 구약의 율법 자체에(‘율법에서’) 호소하신다. 즉 그는 구약 율법에서도 안식일보다 더 큰 권위를 갖는 성전 안에서는 제사장들이 안식일을 범하여도 죄가 되지 않는다는 점을 지적하신다(참조. 민 28:9~10). 그리고 6절에서 예수는 자기 자신이 성전보다 더 큰 자라고 선언하신다. 본 문맥에서 이 선언의 의미는 분명하다: 만일 성전이 하나님 임재의 중심으로써의 역할 때문에 안식일보다 더 큰 권위를 갖는다면, 성전의 역할을 성취하심으로써 성전 자체를 대체하시는 예수 자신은 안식일보다 훨씬 더 큰 권위를 가지신다.

    한편, 예수의 세 번째 응답인 7절의 호세아 6:6을 인용한 “나는 자비를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노라”는 말씀은 요구하는 분이라기보다는 우선적으로 자비로운 분으로 이해되어야 하는 하나님의 성품을 보여준다. 우리는 여기서 하나님의 자비로운 성품과 안식일 사이에 어떤 관계가 있는지를 살필 필요가 있다. 안식일 제도는 하나님께서 창조 후 일곱째 되는 날을 축복하신 가운데 암시적으로 나타난 그의 백성을 위한 ‘영원한 안식’의 계획을 반영하며(참조. 창 2:2~3; 출 20:8~11), 또한 이집트로부터 이스라엘을 이끌어 내신 ‘구속적 구출’ 사역 역시 반영한다(참조. 신 5:12~15). 이처럼 안식일은 그 기원에 있어서 짐이라기보다는 오히려 하나님의 은혜와 자비의 표현이었다. 그런데 마태복음 11:28~30은 안식일 제도 가운데 반영된 하나님의 자비로우심을 취하신 예수의 ‘자비로운 성품’과 안식일의 궁극적 목표를 성취하신 예수의 ‘종말론적 안식’(즉 구속) 사이에 연관이 있음을 분명히 보여준다. 그렇다면 7절은 이미 구약을 통해 존재해 왔으며 이제 11:28~30에서 보다 구체적으로 표현된 사상의 흐름에 비추어 이해되어야 한다. 게다가 본 인용구가 예수 자신이 성전보다 크다고 선언한 성전 모형론에 바로 뒤이어 나온다는 점을 주목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이러한 모든 점들을 종합해 볼 때, 그들이 무죄한 것은 그들이 바리새인들의 안식일 규례들을 범하지 않았기 때문이거나, 더 나아가서 ‘옛’(혹은 ‘성취되지 않은’) 의미에서의 안식일 율법을 범하지 않았기 때문이 아니다. 그보다는 오히려 그들이 안식일을 성취하심으로써 그들에게 ‘종말론적 안식’(즉 구속)을 제공해 주신 ‘자비로우신’ 예수의 권위 하에서 그렇게 하였기(즉 범하였기) 때문인 것이다.15

    마태는 이처럼 5~6절을 삽입함으로써 구약에 익숙한 그의 독자들에게 예수의 권위가 성전의 권위보다 크시며, 따라서 안식일(그리고 궁극적으로는 율법)의 권위를 능가한다는 기독론적 주장을 매우 대담하고 강력하게 펼치고 있고, 다른 한편 7절에서 호세아 6:6을 인용함으로써 안식일에 대한 하나님의 원래 의도가 무엇인지를 보여주어 제자들이 무죄하다는 사실을 효과적으로 입증한다. 이처럼 적어도 우리가 살펴본 12:5~7에 나타난 마태의 구약 사용은, 그의 독자들이 구약성경에 익숙할 뿐 아니라 그 권위를 인정하는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이었다고 가정할 때, 그 대담성과 적절성 그리고 유용성에 있어서 지극히 돋보인다는 사실을 부인하기 어렵다. 그 밖의 다른 경우들은 다음 장들에서도 확인될 것이다.

    모형론

    우리가 이미 고찰한 성취 형식 인용구들에서 마태는 예수께서 구약의 성취이시라는 사실을 대개 명시적으로 입증한다. 하지만 마태의 성취에 대한 관심은 그러한 명시적 방법에 그치지 않는다. 마태는 자신의 그러한 관심을 그의 모형론적 구약 사용에서도 매우 적절하고 효과적으로 보여준다. 마태는 이 모형론적 방법을 통해 예수를 구약의 몇몇 제한된 예언들만을 성취하신 분이 아니라 구약성경 전체를 성취하신 분으로 제시한다.

    물론 ‘모형론’이라는 용어는 상당히 다양한 의미로 이해되어 왔으며, 따라서 그 정확한 의미를 정의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하지만 복음서에서의 용례와 관련하여 우리는 다음과 같이 정의할 수 있을 것이다: 모형이란 하나님께서 역사하시는 원칙들의 성격은 시대에 따라 결코 변하지 않는다는 신념에 기초하여, 신약과 구약의 사건, 인물, 제도 사이에 서로 일치되는 점을 인식하고서, 신약의 사건, 인물, 제도를 구약의 모형의 견지에서 이해하고 묘사하는 것이다.16 이러한 모형론적 구약 사용은 모든 복음서들에서 발견된다. 하지만 마태복음은 이 모형론에 있어서도 다른 복음서들보다 훨씬 두드러진다는 점은 부인할 수 없다.

    1. 새로운 모세로서의 예수

    마 태복음에서 가장 중요하게 대두되는 모형론은 ‘모세­예수 모형론’이다. 이 주제와 관련된 추천할 만한 연구서는 앨리슨(D.C. Allison)의 The New Moses: A Matthean Typology이다.17 이 책의 가치는 마태의 모형론적 암시들을 확인하는 데 있어 마태복음 이전의 유대교 문서들 가운데서 모세가 모형론적 인물로 사용된 용례들을 균형 있게 활용하고 있다는 점이다. 앨리슨은 먼저 모세가 다양한 기능적 측면에서 모형으로서의 역할을 담당하고 있음을 밝힌다: 지도자(여호수아, 요시아), 구출자(기드온, 메시아), 선생(에스라, 에스겔, 힐렐), 중보자(예레미야, 제2­이사야의 종).18 앨리슨은 마태가 이러한 모형론적 전통을 익히 알고 있었다고 전제하면서, 마태가 그의 복음서에서 제시하고 있는 모세 모형론적 암시가 무엇인지를 탐구해 나간다. 앨리슨은 마태복음 거의 전체에서 모세 모형론의 암시들을 발견해 내려고 시도한다: 유아기 내러티브, 시험, 산상설교, 팔복, 예수와 율법, 8~9장의 기적, 제자 파송 설교, 표적 요청, 광야에서 먹이신 기적들, 변화산 사건, 예루살렘 입성, 23장, 종말 강화, 최후의 만찬, 예수의 죽음 등. 여기서는 지면 관계상 앨리슨의 연구 모두를 다룰 수는 없기 때문에, 유아기 내러티브를 하나의 예로 다루고자 한다.

    앨리슨이 제안한 유아기 내러티브의 모세 모형론적 암시는 다음과 같다: 1. 명시적 인용: 마태복음 2:15에서 출애굽과 관련된 명시적 인용이 나타나는데(호 11:1), 이스라엘의 출애굽은 모세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 2. 암시적 인용: 마태복음 2:19~21과 출애굽기 4:19~20 사이에는 상당한 유사성들이 존재한다. 특히 마태복음의 “아기의 목숨을 찾던 자들이 죽었느니라”와 출애굽기의 “네 목숨을 찾던 자들이 다 죽었느니라”는 축어적 일치를 보여준다. 그런데 마태복음의 경우 예수의 목숨을 찾던 자로서 죽은 자는 문맥상 헤롯 대왕 한 사람인데도(19절), 마태가 ‘찾던 자들’이라는 복수 형태를 사용하고 있는 것은 모세와 예수 사이의 모형론적 연관성을 암시하는 것이 분명하다. 이밖에도 앨리슨은 마태의 내러티브와 유대교 전통에 나타난 모세 이야기 사이의 상황적 유사성과 구조적 유사성 및 핵심 단어들과 어구들 사이의 유사성들을 주목함으로써 마태의 유아기 내러티브가 ‘모세­예수 모형론’을 얼마나 풍성하게 암시하고 있는지를 입증해 보이고 있다.19

    하 지만 앨리슨은 모세 모형론이 유아기 내러티브뿐 아니라 거의 마태복음 전체에 걸쳐 암시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모형론은 대부분 감추어져 있다는 점을 주목한다. 이는 마태의 기독론에 어떤 시사점을 던져 주는가? 여기서 우리는 마태가 모세를 예수의 모형으로서뿐 아니라 경쟁자로서도 제시하려 하고 있음을 주목하게 된다. 비록 마태는 모세가 예수의 선행자로서 모형적 기능을 한다는 점을 인정하지만, 그러면서도 마태는 진정한 지도자, 선생, 권위자, 중보자, 구원자는 모세가 아니라 ‘하늘과 땅의 모든 권위’를 가지신(28:18) 예수 한 분뿐이심을 드러내 보이는 데 더 큰 관심을 가지고 있었던 것 같다. 그래서 마태는 모세의 다양한 모형론적 기능은 암시적으로만 제시하면서, 정작 모세 자신의 모습은 감추고 오로지 예수만을 두드러지게 제시하고자 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마태의 이러한 암시적 모세 모형론으로부터 우리는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리게 된다: 예수는 모세의 모형들을 이어 받으셨을 뿐 아니라 그것들의 궁극적인 목표를 성취하신 분이시며, 따라서 그는 모세와 유사할 뿐 아니라 그를 초월하신 분이시다.20

    2. ‘더 큰이’

    마 태복음의 모형론에 대해 고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또 한 가지는 12장에서 발견되는 3중적 모형론이다: 12:6 ­ 성전 모형론; 12:41 ­ 요나 모형론; 12:42 ­ 솔로몬 모형론. 그런데 여기서 발견되는 모형론들은 모세 모형론과 달리 ‘더 큰이’(mei'zon, plei'on)라는 표현을 사용함으로써 보다 명시적인 성격을 띤다.

    먼저 12:6에서 예수는 그 자신이 ‘성전’보다 크신 분이심을 밝히신다. 그런데 예수는 이러한 선언을 위한 근거를 다른 곳에서 찾지 않으시며, 오로지 그 자신의 권위로서 선언하신다. 예수는 이 선언적 ‘성전 모형론’을 통해 하나님의 임재의 초점으로서의 성전의 기능과 권위가 이제 자신에게 이전되었고 자신에 의해 성취되었음을 밝히신다. 하나님의 임재가 예수에게 이전되었고 그에 의해 성취되었다는 개념은 마태에게 특별히 의미심장한 것으로 보인다. 이는 단지 이 성전 모형론에 의해 명시적으로 선언될 뿐 아니라 복음서 전체가 1:23의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다”(힒mmanouhvl)와 28:20의 “내가 너희와 항상 함께 있느니라”에 의해 둘러싸여 있다는 사실에 의해서도 암시되고 있기 때문이다.21 현 문맥에서 이 개념의 중요성은 명백하다. 만일 성전이 하나님의 임재의 초점으로서의 그 기능 때문에 안식일보다 더 권위가 있다면, 성전의 그 기능을 대체하시고 성취하신 예수는 안식일보다 얼마나 더 권위가 있겠는가? 한편 성전보다 더 높으신, 따라서 안식일보다 더 높으신 예수의 권위 개념은 8절에서 제시될 예수의 결정적인 메시아적 선포에로의 길을 잘 예비해 준다: “인자는 안식일의 주이니라.”

    12:39~41은 ‘요나 모형론’을 제시해 준다. 이는 아마도 예수께 적용되고 있는 모형론의 가장 좋은 본보기일 것이다. 40~41절은 요나와 예수 사이의 두 가지 역사적 일치점들을 소개한다. 첫째, 40절은 두 사람 모두 속박된 상태에 놓여 있다는 일치점을 말한다. 그들은 동일한 기간 동안(삼일 삼야), 자연적으로는 전혀 구출을 기대할 수 없는 상태로부터, 하나님의 초자연적 개입에 의해 구출되었던 자들이라는 공통점들을 갖는다. 둘째, 41절은 그들 모두가 회개의 설교를 선포하였다는 일치점을 보여준다.

    하지만 이들 둘 사이에는 일치점들 뿐 아니라 상이점들 역시 발견된다. 요나의 속박 상태는 그의 사역 첫 단계에 속하는 데 비해 예수의 죽으심과 부활은 그의 사역의 절정부를 이루고 있다. 또한 보다 중요하게, 요나가 속박된 상태에 들어가게 된 것은 그의 불순종에 대한 형벌이었던 데 비해 예수께서 땅 속에 묻히신 것은 죽음까지도 감수한 그의 순종의 결과였다. 이처럼 모형론은 모든 점들의 일치에 의존하지 않는다. 사실 모형론의 진정한 의미는 일치의 기반 위에 드러나게 되는 상이점들에 있다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모세 모형론에서도 언급하였듯이 모형론의 진정한 목표는 예수께서 모형과 유사하다는 점을 보여주는 데 있다기보다는 예수께서 모형을 훨씬 더 뛰어 넘으신 분이심을 드러내 보여 주는 데 있기 때문이다: “요나보다 더 큰이가 여기 있느니라.”

    12:42은 ‘솔로몬 모형론’을 제시한다. 이는 요나 모형론의 형식과 크게 다르지 않다. 솔로몬과 예수 사이의 일치점은 매우 분명하다. 솔로몬과 예수는 모두 다윗의 아들(자손)이다. 두 인물은 모두 지혜로 특징 지워 진다. 하지만 이들 사이의 상이점 역시 매우 분명하다. 솔로몬은 자신의 지혜에도 불구하고 그의 말년에 우상숭배에 빠졌던 것과 달리, 예수는 그의 전생애를 통해 하나님 아버지의 뜻에만 순종하며 사셨던 것이다. 그렇다면 예수의 선언은 지극히 당연하다: “솔로몬보다 더 큰이가 여기 있느니라.”

    12장의 이 3중적 모형론을 통해 마태는 예수께서 성전, 위대한 왕 솔로몬, 선지자 요나, 즉 구약성경의 세 가지 중심적인 역할들보다 더 큰 분이신 메시아라는 사실을 효과적으로 선언하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선언은 예수께서 구약성경의 성취이시라는 사실을 인상적으로 증거해 준다(참조. 5:17).

    이러한 모든 모형론들은22 예수께서 구약을 성취하셨다는 개념을 몇몇 제한된 명시적 예언들의 성취 범주를 뛰어넘어, 구약의 인물, 사건, 제도에 걸친 거의 전포괄적인 영역으로 확장시켜 준다. 또한 마태의 모형론들은 예수를 구약과 연속선상에 서 있는 분으로 제시해 줄 뿐 아니라 보다 중요하게 구약을 초월하신 최종적 권위를 가지신 분으로 제시한다.

    예수와 율법

    마태의 구약 사용을 고찰하는 데 빼놓을 수 없는 또 한 가지 중요한 문제는 예수와 율법의 관계에 대한 마태의 제시 방식이다. 마태복음에 제시된 예수와 율법의 관계를 살피는 데 있어 마태복음 5:17~20이 결정적으로 중요하다는 점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하지만 이 단락은 마태복음에 있어서 가장 심각한 석의적 문제들 중 몇 가지를 제기하며, 그래서 이 단락에 대한 수많은 제안들과 견해들이 상세하게 제시되어 왔다.23 하지만 지면의 한계 때문에 본고에서는 본 단락에 대한 상세한 논의를 할 수 없으며, 따라서 필자는 우리의 연구에 가장 밀접하게 연관된 몇몇 핵심 문제들에 대해서만 간략하게 다루고자 한다.

    1. 5:17 ­ 구약성경의 성취자로서의 예수

    ‘율법과/이나 선지자들’(to;n novmon h] tou;" profhvta")은 구약성경 전체를 지칭하는 전통적인 유대교적 어구이다(참조. 마카베우스 2서 15:9; 행 24:14 등). 11:13에서 마태는 동일한 어구를 ‘예언하다’(profhteuvein) 동사와 함께 사용한다. 이는 선지자들뿐 아니라 율법도 ‘예수께서 이제 이루어 가시려는 바’를 내다보는 예언적 기능을 갖고 있음을 시사한다.

    17절의 핵(核)은 의심할 여지없이 ‘플레로사이’(plhrw'sai)라는 단어이다. 이 단어의 의미는 아마도 구약성경의 궁극적 목표를 ‘달성하다’ 혹은 ‘성취하다’인 것으로 보인다.24 길리히(R.A. Guelich)가 적절히 지적한 바와 같이, 예레미야 31:31~34에서는 ‘마음에 쓰여진 율법’(즉 ‘시온­토라’)을 동반한 새언약이 ‘돌 판들에 쓰여진 율법’(즉 ‘시내­토라’)을 동반한 옛언약에 대조하여 약속되고 있다. 그렇다면 마태복음 5:17은 ‘시내­토라’가 내다보았던 이 ‘시온­토라’에 대한 약속이 예수의 오심 가운데서 성취된 것을 말하는 것으로 이해될 수 있다.25

    마태에게 예수는 그리스도인의 관심과 헌신 그리고 순종의 구심점으로서 율법의 지위를 대신한다. 뱅크스(R. Banks)가 지적한 바와 같이, 마태가 기술하고자 하는 바는 “율법에 대한 예수의 태도라기보다는 오히려 율법이 예수와 연관하여 어떤 위치에 있는가 하는 것이다; 이 예수는 다름 아닌 그 율법을 성취하신 분이고, 따라서 이제 모든 관심이 그에게 돌려져야 하는 분인 것이다.”26 하지만 이는 율법의 규범적 성격이 본 단락 안에서 여전히 고려되고 있음을 부인하는 것은 아니다(참조. 18, 19절). 그러나 그 규범적 성격마저도 예수의 종말론적 성취 사역에 대한 보다 폭넓은 이해의 구도 안에 설정되고 있다. 그렇다면 17절의 ‘플레로사이’라는 단어는 예수께서 (그리고 특히 율법을 성취한 그의 가르침이) 율법 자체가 내다보았던 바와 여전히 연관되어 있다는 점에서 ‘연속성’의 요소를 포함하며, 동시에 예수께서 (그리고 율법을 성취한 그의 가르침이) 이제 율법을 초월한다는 점에 있어서 ‘불연속성’의 요소를 포함한다고 제안될 수 있을 것이다.27

    2. 5:18 ­ 율법의 지속적인 유효성

    마태의 관심은 이제 성경 전체로부터 율법에로 좁혀지고 있는데, 이 초점은 뒤따라오는 절들에서 지속된다. 18절의 구문은 특이한데, 문장 구조를 좀더 의미 있게 조정한 번역은 다음과 같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하늘과 땅이 없어지기 전에는, 모든 것이 이루어질 때까지, 율법의 일점 일획도 없어지지 아니할 것이다.’

    ‘일점 일획’이라는 표현은 가장 세부 사항에까지 미치는 율법의 양적 전체성을 강조해 준다. 그렇다면 ‘율법으로부터 일점 일획도 없어지지 않을 것이다’라는 구절 전체는 율법의 손상될 수 없는 전체적 유효성을 강조적으로 확증해 준다. 하지만 이 강조적 확증은 중앙 주절을 앞뒤로 감싸고 있는 두 헤오스(e{w") 종속절들에 의해 한정되고 있다.

    첫 번째 수식 종속절인 “하늘과 땅이 없어지기 전에는” 구절은 특정 시한(時限)을 지칭한다기보다는, ‘결코’라는 의미의 통속적 과장법으로 보인다.28

    두 번째 수식 종속절은 적어도 두 가지의 상호 연관된 문제를 제기한다: 1) ‘기네스다이’(givnesqai) 동사의 의미; 2) ‘모든 것들’(pavnta)의 지시 대상. 첫째, ‘기네스다이’ 동사는 마태복음에서 일반적으로 ‘일어나다’, ‘발생하다’의 의미로 사용되는데, 이러한 의미가 본 문맥에서도 적절한 것으로 보인다. 둘째, ‘모든 것들’의 지시 대상은 예수의 전생애(즉 그의 잉태로부터 그의 재림에 이르기까지)를 지칭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 종속절의 시한(時限)이 예수의 초림 가운데서 성취되었던 ‘이미’의 측면과 그의 재림시에 완성되어야 할 ‘아직’의 측면을 동시에 포함한다고 결론 내릴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결론은 예수의 성취에 비추어 본 율법의 연속성과 불연속성 사이의 해결 불가능해 보이는 긴장을 부분적으로 설명해 준다.

    결론적으로 18절에 따르면, 마태에게 있어서 율법은 구속사의 제한된 기간 동안 그 유효성을 갖는데, 그 기간의 끝은 이미 예수의 첫 번째 종말론적 강림에 의해 시작되었지만, 그 최종적 완성은 아직 예수의 재림을 내다보고 있는 것이다.

    3. 5:19 ­ 계명을 버림/행함

    본 절의 해석에 대한 열쇠는 ‘이 계명들’(tw'n ejntolw'n touvtwn)이라는 구절에 놓여 있다. ‘이 계명들’이 18절의 ‘율법’(novmo")를 지칭한다는 것은 거의 확실하다. 하지만 여기서 우리는 ‘이 계명들’의 성격을 보다 정확하게 규정할 필요가 있다. 만일 18절에 대한 필자의 해석이 옳다면, 구속사의 시간 선상에 있어서 19절의 계명들의 지시 대상은 ‘성취 이후’ 시기에 속하는 데 반해,29 17, 18절에서의 율법의 지시 대상은 명백히 ‘성취 이전’ 시기에 속한다. 여기서 17, 18절에서 ‘율법’(novmo")이 19절에서는 ‘계명’(ejntolaiv)으로 바뀐 어휘 변화를 주목하는 것은 의미심장하다. 아마도 마태는 그러한 지시 대상의 변화를 시사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어휘를 바꾸었던 것 같다. 그렇다면 ‘이 계명’은 단지 ‘있는 그대로의 율법’(즉 성취 이전의 율법)을 지칭한다기보다는 오히려 ‘성취된 율법’을 지칭한다. 그런데 이 ‘성취된 율법’이란 옛 율법이 내다보았던 ‘새 율법’이고, 예수의 종말론적 생애와 사역에 의해 이미 성취된, 그리고 그의 재림에 의해 완성될 때까지 예수의 제자들에 의해 지켜질 것이 아직 기대되는 ‘메시아적 율법’이다. 바로 이 때문에 제자들이 토라의 모든 계율을 예수의 관점, 즉 예수의 초림에 비추어서뿐 아니라(참조. 5:21~48; 7:12; 11:28~30 ;15:19~ 20; 19:7~9; 22:36~40), 또한 그의 재림을 내다보면서(참조. 5:29~30; 18:4, 8~9; 28:20) 지키는 것은 지극히 중요하다.

    끝으로 19절에서 ‘하늘 나라’ 구절의 반복적 출현은 율법 문제와 관련하여 종말론에 대한 마태의 관심을 보여주는 것 같다. 마이어(J. P. Meier)가 지적한 바와 같이, 마태복음에서는 ‘과거, 현재 그리고 미래 모두가 하늘 나라의 도래의 다양한 단계들에 연관된다.’30 하지만 5:19과 관련해 ‘클레데세타이’(klhqhvsetai, ‘불릴 것이다’) 동사의 미래 시제는 하늘 나라의 미래적 측면, 즉 예수의 재림시에 완성될 하늘 나라의 마지막 단계를 지시해 준다.

    그 렇다면 19절 전체의 사상과 기능은 다음과 같이 정리될 수 있다. 두 쌍의 조건절들과 귀결절들은 율법(즉 ‘메시아적 율법’)의 가장 사소하고 덜 중요한 사항들까지도 순종하느냐 아니면 제쳐놓느냐가 하나님께서 ‘하늘 나라의 마지막 단계에서의 지위’를 선언하게 될 근거가 된다는 점을 분명히 해 준다. 이처럼 본 절은 18절에서 진술된 바, 예수의 성취에 비추어 이해된 ‘율법의 지속적인 유효성’을 제자들의 행함과 관련하여 잘 설명해 준다.

    4. 5:20 ­ 더 큰 의

    본 절에서 ‘하늘 나라’는 다시 한번 역사의 마지막에 완성될 나라로 이해되어야 할 것이다. 제자들이 소유해야 할 ‘더 큰 의’는 이 완성된 하늘 나라에 들어가는 기준으로 제시되고 있다. 이 의가 없이는 누구도 그 나라에 들어 갈 수 없는 것이다.

    본 절의 핵심은 분명 ‘너희 의’(uJmw'n hJ dikaiosuvnh) 구절이다. 여기서 ‘너희 의’(즉 제자들의 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의 의와 비교되고 있는데, 문제는 그 비교가 질적인 것인가 아니면 양적인 것인가이다. 21~48절의 대조법들은 양적 차이를 시사한다. 하지만 대부분의 학자들이 주장하는 바와 같이, 제자들의 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의 의와 질적인 차이를 갖는다는 점 역시 명백하다. 마이어가 신빙성 있게 주장한 바와 같이, 여기서 ‘제자들의 의’는 하나님과 맺게 된 인격적 관계에 기초한 그리고 그것에 의해 가능케 된 ‘도덕적 행동’을 의미하는데, 이 근본적인 관계는 율법과 선지자에 의해 계시된 하나님의 뜻을 성취하심으로써 하나님의 나라(즉 하나님의 통치)를 도래케 하신 메시아 예수를 통하여 가능하게 된다.31 하지만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의 의는 이러한 근본적인 관계를 결여하였던 것이다.

    마태에게 있어서 ‘새로운 종말론적 관계’는 하나님나라에 들어가는 데 필요한 의의 시발점이자 기초이기 때문에, 이러한 새로운 관계를 결여한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의 의는 그 나라에 들어가는 기준에 미치지 못한다. 마태가 율법경시론과 율법주의라는 이중적인 적을 대항하여 싸우고 있다는 점은 주지의 사실이다. 그런데 19절과 20절에서 마태가 문제를 다루는 바에 따르면, 20절에서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로 대표되는 율법주의에 대한 예수의 경고(즉 하늘 나라로부터 제외됨)는 19절에서 제자들 사이에서 나타나는 율법경시론에 대한 경고(즉 하늘 나라에서 가장 낮은 지위)보다 훨씬 더 신랄하다. 하지만 좋은 제자는 19절과 20절의 상호 보완적인 경고들에 대해 공히 충분한 주의를 기울임으로써 율법주의뿐 아니라 율법경시론에 대해서도 경계를 게을리하지 말아야 한다. 좋은 제자는 성경 전체에 계시된 하나님의 뜻을 성취하신(17, 18절) 메시아 예수를 통하여 하나님과 새로운 관계를 우선적으로 갖추는 것이 필요하지만(20절) 그러나 메시아로 오신 예수에 의해 도래케 된 하나님의 통치의 필연적인 결과인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행동도 결여해서는 안 된다(19절).

    5:17~20 에 나타난 마태의 예수와 율법에 대한 이러한 입장은 5:21~48에서 여섯 가지 대조법들을 통해 구체적으로 예증되고 있으며, 12:1~14; 15:1~20; 23:1~36 등에서도 특히 바리새인들의 율법주의적 태도와 대조적인 모습으로 일관성 있게 제시되고 있다. 마태는 이처럼 구약의 가장 핵심인 율법 문제를 다루는 가운데, 구약에 대한 자신의 입장을 가장 명백하고 확고하게 제시하고 있다. 그런데 그 입장은 앞의 경우들에서 살펴본 바와 전혀 다르지 않다. 즉 예수는 율법의 연속선상에 서 계시면서도 율법의 한계에 머물지 않으시고 율법의 궁극적 목표를 성취하심으로써 율법을 초월하신 분이시라는 것이다.

    결론

    마태복음의 구약 사용에 대한 우리의 고찰은 상당히 다양한 그러면서도 일관성 있는 그림을 그려 준다.

    첫 째, 마태의 성취 형식 인용구들은 그 도입구와 그 인용구들의 본문 형태에 있어서 다른 복음서들뿐 아니라 마태복음 자체 안에서도 매우 독특하다. 그 독특한 도입구들은 인용구들과 더불어 구약이 당시 교회에게 진리를 가늠하는 ‘하나님의 말씀’으로서의 권위를 가지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또한 그 인용구들이 예수의 생애에서 성취되었다는 사실은 마태와 그의 교회가 추종하고 있는 종교가 과거 구약 종교에 대한 반발이 아니라 그 연속이자 그 완성이라는 점을 입증해 준다. 이는 아마도 유대인들이었을 마태의 독자들에게는 다른 어떤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에게보다 의미심장하게 받아들여졌을 것이다. 한편 마태가 구약을 인용하는 데 있어 상당한 유연성을 보이고 있다는 사실은 어쩌면 예수의 생애가 구약성경의 문자적 의미에 의해 규정되기보다는 오히려 예수의 생애에 의해 구약성경의 그 궁극적이고 진정한 의미가 드러나게 된다는 신념을 반영해 주는지도 모른다.

    둘째, 성취 형식 인용구들을 제외한 그 밖의 많은 구약 인용들과 구약에 대한 언급들 중 한 예로 택한 12:5~7에 대한 고찰은 매우 인상적인 결과를 제공해 준다. 비록 제한된 예에 국한되기는 하지만 마태가 다른 복음서와 구별되게 구약을 인용하거나 그것에 대해 언급할 때 거기에는 상당히 대담하면서도 뜻깊은 신학적 의도가 있음이 확인되었다.32 마태의 구약 사용은 적어도 12:5~7의 경우에는 그의 유대 그리스도인 독자들에게 매우 효과적이고 유용하며 강력한 논증 효과를 가졌을 것임이 분명하다.

    셋째, 마태는 모형론에 있어서도 매우 풍성한 자료들을 제공한다. 그는 모형론적 방법을 통해 예수께서 구약을 성취하셨다는 개념의 범주를 단지 몇몇 제한된 명시적 예언들의 범주를 뛰어넘어, 구약의 인물, 사건, 제도에 걸친 거의 전포괄적인 영역으로까지 확장시켜 준다. 뿐만 아니라 마태는 이 방법을 통해 예수를 구약과 연속선상에 서 있는 분으로 제시해 줄 뿐 아니라 보다 중요하게 그 구약의 궁극적 목표를 성취하심으로써 구약을 초월하신 최종적 권위를 가지신 분으로 제시해 준다.

    넷째, 5:17~20에서 마태는 구약성경의 가장 핵심인 율법 문제를 다루는 가운데, 다른 경우들에서와 마찬가지로 예수를 율법의 연속선상에 서 있는 분으로서뿐 아니라, 그 율법의 한계에 머물지 않으시고 그것을 성취하심으로써 결국은 그것을 초월하신 분으로 제시하고 있다. 그와 더불어 그는 예수의 제자들도 예수의 율법 성취의 결과 율법에 대한 새로운 관계를 설정해야 할 것을 요청하고 있다.

    끝으로, 위의 모든 결론들을 종합해 볼 때, 마태의 구약 사용은 지극히 기독론적이다. 그는 구약을 사용한 대부분의 경우들에서 문제의 구약 내용을 예수와 연결시켜 제시하고 있다. 그렇게 하는 가운데 그는 예수와 구약의 관계를 연속성과 초월성의 양 측면에서 어느 정도 긴장을 유지하며 제시해 나간다. 이러한 긴장 관계는, 5:18절에 대한 우리의 해석이 보여주는 바와 같이 성취 개념의 종말론적 긴장관계와 무관하지 않다. 마태는 이 긴장 관계를 적절히 유지함으로써, 그의 유대 그리스도인 독자들에게 구약에 대한 관계를 단절도 아니고 예속도 아닌 예수의 성취 중심적 관계로 유지해 나가도록 인도하고 있다.

    주(註)

    1. 본 논문에서 필자는 본 주제에 대한 필자 자신의 신학적 사고에 지대한 영향을 주었던 필자의 은사인 R. T. France 교수의 가르침과 그의 저서들에 크게 빚지고 있음을 밝혀 두는 바이다.

    2. 예를 들어, G. Strecker, Der Weg Gerechtigkeit: Untersuchungen zur Theologie des Matth us (FRLANT, 82; G ttingen: Vandenhoeck & Ruprecht, 1962); R.H. Gundry, The Use of the Old Testament in St. Matthew’s Gospel with Special Reference to the Messianic Hope (NovTSup, 18; Leiden: Brill, 1967); K. Stendahl, The School of St Matthew, and its Use of the Old Testament (ASNU, 20; Lund: Gleerup, 2nd edn, 1968); R.S. McConnell, Law and Prophecy in Matthew’s Gospel (Basel: Friedrich Reinhardt Kommi- ssionsverlag, 1969); R.T. France, Matthew: Evangelist and Teacher (Exeter: Paternoster, 1989), chs 4, 5; et al.

    3. 하지만 2:23의 경우는 그 도입구의 형식이 약간 다르다는 점을 주목하라(o{pw plhrwqh' to; rJhqe;n dia; tw'n profhtw'n o{ti). 사실 이러한 도입구의 차이는 그 인용구를 해석하는 데 열쇠를 제공해 준다. 참조. R.T. France, Matthew(TNTC, 1; Leicester: IVP, 1985), pp. 88~89.

    4. 참조. G.M. Soares Prabhu, The Formula Quotations in the Infancy Narrative of Matthew (Rome: Biblical Institute Press, 1976), pp. 46~63; G.N. Stanton, ‘Matthew’s Use of the Old Testament’, in idem, A Gospel for a New People: Studies in Matthew (Edinburgh: T. & T. Clark, 1992), p. 359.

    5. 참조. W.D. Davies and D.C. Allison, A Critical and Exegetical Commentary on the Gospel according to Saint Matthew I (3 vols; ICC; Edinburgh: T. & T. Clark, 1988, 1991, 1997), p. 212.

    6. H. Frankem lle, Jahwe­Bund und Kirche Christi: Studien zur Form­ und Traditionsgeshichte des “Evangeliums” nach Matthaus (Munster: Aschendorff, 2nd edn, 1984), p. 388.

    7. 21:4~5에서 인용된 슥 9:9은 요 11:14~15에서도 인용되고 있다. 하지만 그 인용구의 형태는 상당히 다르다는 점을 주목하라. 참조. Stanton, ‘Use’, p. 363.

    8. Soares Prabhu, Formula Quotations, pp. 83~84; France, Evangelist, pp. 179~81; Stanton, ‘Use’, pp. 360~61; Davies and Allison, Matthew III, pp. 575~77; pace Strecker, Weg, pp. 50, 82~85; U. Luz, Matthew 1~7 (trans. W.C. Linss; Edinburgh: T. & T. Clark, 1990), pp. 159~61.

    9. 유일한 예외가 있다면 아마도 2:18일 것이다. 이 인용구는 히브리어 본문을 약간 줄여 번역한 것으로 보인다.

    10. 이와 관련된 다양한 설명들에 대해서는 Gundry, Use, pp. 125~26; D.P. Senior, The Passion Narrative according to Matthew: a Redactional Study (BETL, 39; Leuven: Leuven University Press, 1975), pp. 367~69; France, Matthew, pp. 386~87; D.A. Hagner, Matthew 14~28 (WBC, 33b; Dallas: Word Books, 1995), pp. 813~15; Davies and Allison, Matthew III, pp. 568~69 등을 보라.

    11. 이러한 상황에 대한 France, Matthew, pp. 88~89의 해석은 매우 흥미롭고 설득력이 있다.

    12. 마태의 이런 인용 방식은 1세기 당시 유대인들의 탈굼 기법과 무관한 것으로 보이지 않는다; 참조. France, Evangelsit, pp. 180~81.

    13. Davies and Allison, Matthew III, pp. 576~77.

    14. ‘성취 형식 인용구들’의 보다 구체적인 신학적 의미들에 대해서는 「그말씀」 2001년 3월호에 게재될 필자의 “마태복음 1~2장에 대한 본문 주해와 적용”을 보라.

    15. 본 구절들에 대한 자세한 논의에 대해서는 필자의 「예수와 안식일 그리고 주일」(서울: 이레서원, 2000), 제4장을 보라.

    16. France, Jesus and the Old Testament (London: Tyndale Press, 1971), p. 40; idem, Matthew, p. 40.

    17. 이 책의 논점에 대한 유용한 요약이 리치스, 「마태복음」(신약성경 가이드 1; 양용의 역; 서울: 이레서원, 2000), pp. 144~54에서 발견된다.

    18. Allison, New Moses, ch. 2.

    19. Allison, New Moses, pp. 140~65.

    20. 참조. France, Evangelist, p. 187; 리치스, 「마태복음」, pp. 152~54.

    21. 예수께서 성전을 대체하시는 것과 관련한 이 말씀의 중요성에 대해서는, B. Gartner, The Temple and the Community in Qumran and the New Testament: A Comparative Study in the Temple Symbolism of the Qumran Texts and the New Testament (SNTSMS, 1; Cambridge: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65), p. 114를 보라.

    22. 지금까지 살펴본 모형론들 이외에도 마태복음 안에는 몇몇 다른 의미심장한 모형론들이 있다: 이스라엘­예수 모형론(2:15; 4:1~11 등); 이스라엘­교회 모형론(8:11~12; 19:28 등). 이 모형론들에 대해서는 France, Evangelsit, pp. 207~13을 보라.

    23. 예. McConnell, Law, pp. 6~58; R. Banks, Jesus and the Law in the Synoptic Tradition (SNTSMS, 28; Cambridge: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75), pp. 204~26; J.P. Meier, Law and History in Matthew’s Gospel: A Redactional Study of Mt. 5:17~48 (AnBib, 71; Rome: Biblical Institute Press, 1976), pp. 41~124.

    24. Meier, Law, pp. 41~124, 160~61; Banks, Jesus, pp. 203~26, 229~35; France, Matthew, pp. 113~17; 참조. Hagner, Matthew 1~13, p. 105.

    25. R. H. Guelich, Sermon on the Mount (Waco: Word Books, 1982), p. 140.

    26. Banks, Jesus, p. 226.

    27. France, Evangelist, p. 196는 율법의 ‘권위’와 ‘기능’ 사이의 구분을 제안한다; 그리고 비록 율법이 예수께서 메시아로서 오신 후에도 하나님의 계시로서의 그 ‘권위’는 계속 유지하지만, 그러나 그 ‘기능’은 예수의 성취로 말미암아 변화되었다고 제안한다.

    28. 본 구절을 이러한 과장법적 의미로 이해하는 학자들의 목록에 대해서는 Meier, Law, pp. 49~50 n. 27을 보라; 보다 최근의 학자들로는 France, Matthew, p. 115; Luz, Matthew 1~7, pp. 265~66.

    29. 18d절(즉, 두 번째 e{w" 종속절)의 사건은 19절의 시점에서 이미 일어났다는 점을 주목하라.

    30. Meier, Law, p. 99.

    31. Meier, Law, pp. 109~10.

    32. 하지만 마태의 모든 구약 사용이 그렇다는 주장은 결코 아니다. 예를 들어, 24:20의 ‘안식일에도’의 삽입은 신학적이라기보다는 현실적인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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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태복음은 어떤 책인가?

    마태복음은 신약성경의 첫 번째 책으로, 세리 출신 제자 마태가 유대인을 대상으로 기록한 복음서입니다. 예수님을 구약의 예언을 성취하신 메시야로 증거하며, ‘하나님 나라’가 중심 주제입니다. 마태는 예수님의 족보와 탄생, 공생애, 가르침, 죽음과 부활에 이르기까지 그분의 삶을 체계적으로 서술합니다. 특히 산상수훈, 비유, 종말론적 교훈 등 예수님의 가르침을 강조하며, 구약과 연결되는 신학적 해석을 통해 예수님이 참 왕이시며 구세주이심을 선포합니다.

    마태복음 전체 구조 (주제 흐름 중심)

    1. 예수 그리스도의 신분과 출현 (1–4장)
      • 족보와 탄생 이야기
      • 동방박사와 헤롯
      • 세례 요한과 예수의 세례
      • 광야 시험과 공생애 시작
    2. 하늘나라 백성의 윤리와 삶 (5–7장)
      • 산상수훈
      • 율법의 완성자로서의 예수
      • 참된 경건과 기도
      • 좁은 길과 참된 제자도
    3. 하나님 나라의 권능과 복음 전파 (8–10장)
      • 치유, 기적, 권세 있는 말씀
      • 제자 파송과 전도 지침
    4. 메시야에 대한 반응과 비유 (11–13장)
      • 세례 요한과 세상의 불신
      • 예수님의 정체성과 안식일 논쟁
      • 천국 비유 연속
    5. 하늘나라 공동체의 성숙 (14–20장)
      • 기적과 제자 교육
      • 바리새인들과의 갈등
      • 제자도와 십자가 예고
      • 섬김과 용서, 재물의 문제
    6. 예루살렘 입성과 심판 선포 (21–23장)
      • 종료주일과 성전 정화
      • 비유를 통한 경고
      • 바리새인과 종교 지도자에 대한 책망
    7. 종말과 심판에 대한 가르침 (24–25장)
      • 감람산 종말 담화
      • 깨어 있음과 준비의 비유들
    8. 예수의 고난, 죽음, 부활 (26–28장)
      • 최후의 만찬과 겟세마네
      • 십자가 처형과 장례
      • 부활과 지상명령

    마태복음 장별요약

    마태복음의 각 장을 요약했습니다. 각 장의 제목을 클릭하시면 각장별 강해와 묵상으로 이동하여 읽어 보실 실 수 있습니다. 강해는 성경의 중요한 내용을 흐름과 주제에 따라 성경신학적으로 묵상했습니다.

    마태복음 1장 요약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를 통해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으로 오신 메시아의 정통성을 밝힙니다. 마리아가 성령으로 잉태하여 예수님이 탄생하게 된 경위를 전하며, 예수라는 이름의 뜻이 ‘자기 백성을 죄에서 구원할 자’임을 선포합니다. 이는 구약의 예언이 성취되었음을 보여줍니다.

    마태복음 2장 요약

    동방 박사들이 별을 따라 와서 예수께 경배하고, 헤롯은 예수를 죽이려 합니다. 천사의 지시로 요셉은 예수와 함께 애굽으로 피신합니다. 헤롯의 학살과 이후 귀환까지의 여정은 구약 예언의 성취로 해석됩니다.

    마태복음 3장 요약

    세례 요한이 회개의 세례를 선포하며 예수님의 공생애를 준비합니다. 예수님께서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시고, 하늘이 열리며 성령이 임하고 하나님의 음성이 들립니다. 이는 예수님의 신적 정체성을 공적으로 확증하는 사건입니다.

    마태복음 4장 요약

    예수님은 광야에서 사탄에게 시험을 받으시되 하나님의 말씀으로 물리치십니다. 갈릴리에서 공생애를 시작하시고, 첫 제자들을 부르십니다. 천국 복음을 전파하며 병든 자들을 고치시고 큰 무리를 이끄십니다.

    마태복음 5장 요약

    예수님은 산상수훈을 통해 천국 백성의 복과 의를 가르치십니다. 율법을 폐하러 오신 것이 아니라 온전하게 하러 오셨음을 밝히며, 마음과 태도의 의로움이 외적 행위보다 중요함을 강조하십니다.

    마태복음 6장 요약

    참된 경건은 사람에게 보이기 위함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이루어져야 함을 가르치십니다. 주기도문을 통해 기도의 본질을 가르치시며, 염려하지 말고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구하라고 권면하십니다.

    마태복음 7장 요약

    예수님은 판단하지 말고 먼저 자신을 돌아보라고 가르치십니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하시며, 거짓 선지자와 열매로 그들을 분별할 것을 말씀하십니다. 말씀을 듣고 행하는 자가 지혜로운 자임을 비유로 선포하십니다.

    마태복음 8장 요약

    예수님은 문둥병자, 백부장의 하인, 베드로의 장모를 고치시는 등 권능을 보이십니다. 자연을 다스리고 귀신을 쫓아내시는 모습을 통해 예수님의 권위가 드러납니다. 제자도에는 희생과 결단이 따름을 강조하십니다.

    마태복음 9장 요약

    중풍병자, 세리 마태, 혈루증 앓는 여인, 회당장의 딸 등을 치유하시며 죄 사함과 생명의 주되심을 나타내십니다. 예수님은 무리를 불쌍히 여기시며 추수할 일꾼을 보내달라고 기도하라고 하십니다.

    마태복음 10장 요약

    예수님은 열두 제자를 부르시고 권능을 주어 전도 여행을 보내십니다. 복음을 전함에 따르는 박해와 고난을 예고하시며, 끝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 하십니다. 예수님보다 가족을 더 사랑하는 자는 합당하지 않다고 말씀하십니다.

    마태복음 11장 요약

    세례 요한은 예수께 메시아 되심을 확인하고자 제자들을 보냅니다. 예수님은 요한을 칭찬하시며 회개하지 않는 고을들을 책망하십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을 초청하시며 참된 안식을 약속하십니다.

    마태복음 12장 요약

    예수님은 안식일 논쟁을 통해 인자는 안식일의 주인임을 밝히십니다. 귀신을 쫓고 병자를 고치심으로 성령의 능력을 드러내시나, 바리새인들은 비방합니다. 회개하지 않는 세대를 책망하시며 참된 가족이 누구인지 가르치십니다.

    마태복음 13장 요약

    예수님은 천국 비유들을 통해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가르치십니다. 씨 뿌리는 자, 가라지, 겨자씨, 누룩 등 다양한 비유를 통해 천국의 성장과 심판, 가치와 선택의 중요성을 강조하십니다.

    마태복음 14장 요약

    세례 요한의 죽음을 통해 세상의 악함이 드러나고, 예수님은 오병이어로 무리를 먹이시며 하나님의 공급을 나타내십니다. 물 위를 걸으시는 주님의 권능과, 제자들의 믿음 없음도 함께 나타납니다.

    마태복음 15장 요약

    장로의 전통과 하나님의 계명에 대한 논쟁이 이어지며, 예수님은 마음에서 나오는 것이 사람을 더럽게 한다고 가르치십니다. 가나안 여인의 믿음을 칭찬하시고, 다시 한 번 많은 무리를 먹이십니다.

    마태복음 16장 요약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자신이 누구인지를 묻고, 베드로의 신앙 고백 위에 교회를 세우시겠다고 하십니다. 처음으로 고난과 죽음을 예고하시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를 것을 명하십니다.

    마태복음 17장 요약

    예수님께서 변화산에서 영광스럽게 변모하시고, 이는 그분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확증하는 사건입니다. 산 아래에서 귀신 들린 아이를 고치시며 믿음 없는 세대를 책망하시고, 두 번째 죽음 예고를 하십니다.

    마태복음 18장 요약

    제자들의 질문을 통해 천국에서 큰 자는 자신을 낮춘 어린아이 같다고 가르치십니다. 실족하게 하는 자에 대한 경고, 잃은 양의 비유, 형제를 용서하는 법과 일만 달란트 비유를 통해 공동체의 용서와 겸손을 강조하십니다.

    마태복음 19장 요약

    이혼에 대한 가르침을 통해 하나님이 세우신 창조 질서를 회복하십니다. 어린아이와 같은 자가 천국에 합당함을 말씀하시고, 부자 청년의 이야기를 통해 재물보다 하나님을 우선시할 것을 요구하십니다. 제자들에게는 모든 것을 버리고 따를 때 백배의 상과 영생이 있음을 약속하십니다.

    마태복음 20장 요약

    포도원 품꾼의 비유를 통해 하나님의 은혜는 사람의 계산과 다름을 가르치십니다. 예수님은 다시 죽음과 부활을 예고하시며, 섬김의 삶을 강조하십니다. 맹인 두 사람을 고치심으로 긍휼과 능력을 나타내십니다.

    마태복음 21장 요약

    예수님은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며 메시아로서 환영받으십니다. 성전을 정결케 하시고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시며, 열매 없는 신앙을 책망하십니다. 비유들을 통해 이스라엘의 불신앙을 고발하십니다.

    마태복음 22장 요약

    혼인 잔치 비유를 통해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하지 않는 자들을 경고하십니다. 바리새인, 사두개인들과 논쟁하시며, 하나님의 나라의 본질과 계명의 핵심을 밝히십니다. 메시아에 대한 질문으로 그들을 침묵하게 하십니다.

    마태복음 23장 요약

    예수님은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의 위선을 신랄하게 책망하십니다. 일곱 가지 화를 선포하시며 외식과 탐욕을 고발하십니다. 예루살렘을 향한 애통한 마음으로 예언자들을 죽인 자들을 경고하십니다.

    마태복음 24장 요약

    예수님은 감람산에서 제자들에게 종말에 대한 징조와 대환난을 예고하십니다. 거짓 그리스도들과 재난, 핍박의 날들이 임하겠지만 끝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받습니다. 인자가 임하는 날에 깨어 있으라 경고하십니다.

    마태복음 25장 요약

    열 처녀, 달란트, 양과 염소의 비유를 통해 종말의 심판과 준비된 자의 상을 말씀하십니다. 깨어 있고 충성된 종은 주인의 기쁨에 참여하나, 게으른 자는 바깥 어두움에 처하게 됨을 경고하십니다.

    마태복음 26장 요약

    예수님은 유월절을 준비하시고 제자들과 마지막 만찬을 나누십니다.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시며 고난을 준비하시고, 가룟 유다의 배신과 베드로의 부인을 예고하십니다. 불법적인 재판과 베드로의 통곡이 이어집니다.

    마태복음 27장 요약

    예수님은 빌라도에게 재판받으시고, 십자가에 못 박히셔서 죽으십니다. 이는 구약 예언의 성취로, 죄인을 위한 대속의 죽음입니다. 무덤에 장사되셨으며 무덤은 봉인되고 지켜집니다.

    마태복음 28장 요약

    예수님은 안식 후 첫날에 부활하시고, 천사는 여인들에게 이를 알립니다. 부활하신 주님은 제자들에게 나타나셔서 모든 민족에게 복음을 전하라는 지상명령을 주십니다.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며 말씀을 맺으십니다.





































































































































































































    문서선지자와 구전선지자



    선지자(prophet)

    섡지자(נביא 나비)의 원뜻은 '쉬임없이 말하다'로 신적 영감을 받아 말하는 '대언자'(출 7:1)를 가리킨다. 이런 자는 하나님의 뜻을 사람에게 전하는 일차적 사명 외에 하나님과 사람을 중재하는 역할도 맡는다.

    1. 구약에서 선지자

    1) 선지자의 임무

    모세는 그 이후의 모든 선지자들을 필적하는 표준인물로 지명받았다(신 18:15이하). 그는 특별히  개인적으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다(출
    3:1-4:17;참고. 사 6장;렘 1:4이하;암 7:14,15).

    거짓 선지자는 단지 자기 마음의 속임으로 예언한다(렘 14:14). 따라서 선지자는 하나님 앞에 서 있는 자로서 백성들 앞에 섰다(왕상 17:1). 선지자를 통하여 역사가 계시되었는데, 그것은 이방신들이 결코 알려 줄 수 없는 일의 참된 의미를 말하도록 예비된 인물이(출애굽 당시 모세가 했던 일처럼) 그 상황 가운데 존재하였기 때문이다(참고. 사 45:20이하).

    선지자들은 백성들이 개인적 경건뿐만 아니라 사회 윤리에도 관여함으로써 전 삶에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모세는 불쌍한 자를 돌아보고(신 24:19이하), 압제자를 반대하는(레  19:9이하), 고대 세계에서는 가장 박애적인 법체계의 기초를 잡았다. 많은 선지자들도 모세와 같이 국가의 중대사 앞에서는 적극적인 정치인의 역할을 담당하였다. 모세처럼  그들도 자기들의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해 말씀과 상징(민 21:8)을 함께 사용하였으며, 또한 중보기도가 자신들의 사역의 핵심 요소임을 알고 있었다(민 27:5).

    2) 선지자들의 칭호

    선지자들은 가끔 하나님의 사람들로 불렸고(신 33:1;삼상 9:6), 하나님은 때때로 그들을 자신의 종들이라고 하셨다(왕하 17:13). 구약의 핵심 단어 가운데 하나인 선지자라는 말은 '부름받은 자' 또는 '외치는 자'를 뜻하지만 그 의미는 불확실하다. 하지만 이 두 가지 의미만으로도 구약에서 일컫는 선지자의 본질을 아는데는 충분하다. 두 개의 서로 다른 단어가 '선지자'라는 말로 번역됨과 아울러 '보는 자'(대상 29:29)로 번역된다. 구약의 용법은 그 두 단어를 동의어로 보고 있는 것이지, 서로 다른 부류의 선지자들을 가리키는 것은 아닌 것 같다.

    "이스라엘(야곱)이 우수를 펴서 차자 에브라임의 머리에 얹고 좌수를 펴서 므낫세의 머리에 얹으니 므낫세는 장자라도 팔을 어긋맞겨 얹었더라"(창 48:14)

    3) 예언의 말씀

    선지자들은 주로 하나님의 말씀을 백성들에게 전달하는 데 관심을 집중하였다. 그들은 자기들이 선포한 말씀이 하나님의 뜻임을 확신하였고 그 선포  자체가 근본적으로 모든 상황을 변화시키리라고 믿었다.

      하나님은 그들을 통하여 이스라엘에 간섭하시고 단호하게 말씀하셨다. 거의 모든 선지자들이 먼저 미래의 사건들을 예언하는 자로서 성경의 무대에 등장한다(예. 암 1:2).

      도래할 하나님의 진노에 대한 환상은 회개를 촉구하는 바탕이 되었고 미래의 태평성대에 대한 환상은 신앙을 지킬 것을 촉구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것이 선지자들이 이방의 역술가들과 다른 점이었다. 그래서 이스라엘은 재앙을 피하듯 그들을 피하도록 권고받았다(신 18:9이하). 그러나 일부 선지자들은 초월적인 영역과 투시적인 재능을 소유하였다. 예를 들면 엘리사는 먼곳에서 말하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왕하 6:12).

      그러나 먼 미래를 개인의 이름으로 예언하는 선지자들의 능력에 의구심을 가질 실재적 이유는 하나도 없다(왕상 13:2). 왜냐하면 그들은 모두 그 사건이 앞날에 일어날 것임을 알았으나 그것은 여전히  예언의 말씀이기 때문이었다.

    4) 선지자들의 영감성

    대부분의 경우 선지자가 하나님으로부터 말씀을 받는  형식은 아주 막연하게 묘사되어 있다. 단순히 '주님의 말씀이 임하사...'등으로 나타나 있다.

      그러나 그것은 직접적, 인격적 깨달음을 진술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자신과의 친밀한 교재 속에서 선지자에게 말씀을 주신다(렘 1:9).

      꿈이나 환상은 항상 주님에게서 온 것은 아니지만(참고. 렘 31:26;23:28), 어떤 때에는 예언적인 영광을 재공하기도 한다. 그렇지만 이것은 여전히 영감적인 이적이 주어지는 방식으로 볼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선지자들에게 영감을 주는 데 성령의 역사가 개입되어 있는 것을 밝히는 구약의 구절은 열여덟 군데나 있다(예. 대상 12:18;미 3:8).

      물론 이 구절들이 구약의 시대적 범주를 벗어나 제시되는 것이기는 하다. 그러나(성령을 전혀 언급치 않는) 예레미야와 같은 일부 선지자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읽을 때 그러한 자기를 통한 하나님의 창조적 사역의 한 면을 경험하였기 때문에 가능할 수 있다.

      어떤 선지자들은 아주 강력하게 '영에 사로잡힘'을 경험하였다(예. 삼상 10:6,10).

    5) 교제의 방법

    각 선지자들은 자신의 특성에 맞는 특유의 방식으로 메시지를 선포하였다. 따라서 그가 선포한 말씀은 하나님의 말씀이면서 동시에 구체적인 한 인간의 말이기도 했다. 그렇다고 해서 그 말에 오류가 있다고 단정하는 것은 아니다. 그들은 하나님이 자기들을 통해 말씀하신다는 사실을 절대적으로 확신하였다. 이떤 경우에 선지 자들의 말은 엘리사(왕하 13:14), 이사야(사 20장), 예레미야(렘 19장), 에스겔(겔 12장) 등의 상징 행위와 같이, 들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볼 수 있는 것이었다.

    6) 선지서

    구약에서 각 선지서는 선지자들의 말씀만을 묶어 놓은 것을 말한다. 그래서 많은 선지서가 편집된 흔적이 있다. 예를 들어 호세아서에서 유대인에 대해 언급한 구절은 호세아의 예언이 사마리아에 널리 퍼졌을 때인, 사마리아 함락 이후에 첨가된 것으로 볼 수 있다. 또 사 38,39장은 연대기적 순서에 따를 때, 40-55장의 서론  역할을 한다. 예레미야의 경우를 보면 적어도 그예언의 긴 부분을 대필자가 기록했음을 알 수 있다(렘 36장). 또한 예언은 때때로 추측할 수 있듯이 선지자가 말씀을  가르치고 그 말씀을 보존하는 집단과 연루되었다(사 8:16).

      이사야서는 이사야가 제자들을 가르치는 교훈을 손으로 기록하였을 것이다. 선지자들의 집단(또는 후손)은 선배 선지자의 전반적인 감독하에 수련받은 것으로 생각된다(왕하  2:3이하;4:38;9:1이하). 암 7:14에서 아모스는, 우리가 일부 구약에서 확인한 선지자 집단을 비방하기보다는 공신력이 결여된 그들의 비난에 직면하여 자신의 소명이 확실함을 천명하는 것일 것이다.

    7) 참된 선지자와 거짓 선지자

    이 구별은 아주 중요하다. 성경의 참된 선지자들은 거짓 선지자들의 도전에 직면한다(예. 렘 28장). 이 둘 사이를 잘 판단한다는 것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혹자는 예언적 '황홀경'을 거짓 선지자의 표징으로 간주한다. 그것은 바알 숭배의 한 특징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것은 참된 선지자의  표징이기도 했다(삼상 9-10장). 마찬가지로 '직업적인' 선지자들이라 해서 자동적으로 거짓 선지자라고 낙인 찍을 수는 없다. 사무엘도 그런 선지자였고 나단도 거의  확실하게 궁정 관리였기 때문이다. 구약은 이 문제를 네 곳에서 거론하고 있다. 신 18장에는  부정적인 시험 장면이 나온다. 만약 예언된 사건이 일어나지 않으면 그 선지자는 거짓 선지 자인 것이다. 그렇지만 그 성취가 참된 선지자임을 증명하는 충분 조건은 아니다. 거짓 선지자도 그렇게 할 수가 있기 때문이다(신 13:1이하). 신 13장에서는  그  시험의 기준이 신학적인 것이다. 만약 선지자가 백성들을 다른 신에게 이끈다든가, 아니면 모세를 통해 주어진 하나님의 율법에 도전하거나 하면 그는 거짓 선지자로 간주된다.

         예레미야도 비슷한 결론을 내린다. 렘 23:9이하를 보면 그는 '황홀경', 직업적 지위 또는 사용하는 능력과 같은 외적인 기준은 결코 그 진위 여부를 가리는 절대적 표준이 아님을 알고 있었다. 대신에 그는 거짓 선지자는 백성을 부도덕으로 이끌거나 순종을 요구하지 않고 평화를 약속하지만, 참된 선지자는 백성을 거룩으로 인도하고 평강이 이루기 전에 청산되어야 할 죄의 심판에 대해 말한다고 지적했다. 궁극적으로 예레미야는 자기는 모세처럼 오직 하나님 앞에 서있기 때문에 옳다고 생각한다(렘 23:18,21,22;참고. 민 12:6이하). 에스겔(겔 12:21-14:11) 역시 거짓 선지자는 하나님의 지식이 아닌 자기의 지식으로 백성을 미혹함으로써 도덕적 내용이 결여된 천박한 낙관주의로 인도한다고 했다.

    8) 선지자들과 이스라엘의 종교

    이스라엘에서는 종교 의식을 집행하는 사람들 몇몇도 선지자로서 행세하였다. 예를 들면 어떤 레위인은 하나님의 영의 영감을 받아 국가의 재난이 있을 때 예언의 메시지를 선포하였다(대하 20:14). 어떤 시편에서는 예언의 음성이 예배의식에 연루되어 있는 선지자를 통해 퍼뜨려지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예.
    60,75,82편). 포로기 이후에 레위인 찬양대는 평소에 예속된 예배 담당 선지자 무리의 후손들이었을 것이다. 선지자의 무리는 예컨대 삼상 10:5에서 언급되고  있다. 대하 29:25을 보면 선지자들이 성전 찬양대로 봉사하였다.

      또 선지자들과 제사장들은 종종 전문적인 회합을 위한 자리에 함께 참석하였다(예. 왕하 23:2). 그러나 공중예배에 선지자들이 참여했다는 것은 여전히 한 이론으로만 남아있을 뿐이다.

         때때로 선지자들은 솔직한 이스라엘 종교의 반대자들이 되었다. 아모스는, 하나님은 당시의 예배 관습을 인정치 않으신다고 말하며, 그 이유는 하나님이 그 관습 자체를 싫어하시기 때문이 아니라 예배에 참여하고 희생제물을 드리는 사람들이, 도덕적 관심이 결여되어 있고 거룩한 삶이 없는 모습을 혐오하시기 때문이라는 점을 분명히 하고 있다(암 5:21이하). 이사야도 희생제물, 안식일 그리고 심지어 기도까지도  강력하게 규탄한다(1장). 그러나 그의 이러한 비판의 핵심은 어디까지나 뻔뻔스러운 죄악의 삶 속에서는 그러한 일들이 아무 소용이 없다는 데 있다(15절). 참으로 이사야 자신은 하나님에 대한 커다란 환상을 체험하였고 예배를 드리는 상황 속에서 거듭난 삶을 살았다(사 6장). 레 7:22에 보면 하나님은 계속 희생제사를 드리는 것을 부인하는 것으로 보인다('나는 그들에게 희생제사에 대하여 명하지 아니하였고'<NIV>). 그러나 여기서 '대하여'(about)로 번역된 낱말은 정확하게 '때문에' 또는 '위하여'로 이해되어야 한다. 달리 말하면, 하나님은 희생제사를 행하고 선포하라고  강요하시거나, 또 그것을 필요로 하시는 것도 아니라는 것이다. 예배는 당연히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도덕법에 순종하도록 요청을 받은 백성들의 영적인 필요를 위해 존재하는 것이다. 구약 시대 전반에 걸쳐 선지자의 임무는 백성들을 하나님께 순종하는 길로 인도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제사장은 백성들에게 그들의 죄를 용서받도록 하기 위해서 흘린 피의 유효성을 상기시켰다. 선지자와 제사장직을 겸했던 모세로부터 시작된 이스라엘 종교의 이 양 직책의 밀접한 연계성은 이스라엘 역사에 면면히 이어졌다. 그것은 모세와 같이 그의 인격 속에 이 두 직무가 조화를 이루고 있는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궁극적으로 성취되었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새 언약을 계시하시는 선지자로서 그리고 그 언약이 성취되므로 궁극적 희생제물을 드리는 제사장으로서의 역할을  공유하셨다.

    2. 신약의 선지자

    1) 구약과의 연속성

    구약의 선지자 반열은 세례 요한으로 마감되었다(마 11:33). 세례 요한과 예수님의 출생은 미리 예언되었다(눅1:46이하, 67-79절). 복음서 저자들은 자주 예수님의 사역을 구약 선지자들이 선포한 예언의  성취로 이해 한다(예. 마 1:22,23;26:56;눅 24:25이하). 주님 자신도 율법과 선지자를 완성하러 오셨다고 말씀하셨다(마 5:17). 주님은 율법과 선지자가 백성들을 회개로 이끌기에 충분한, 하나님의 영원한 계시를 들어내는 것으로 생각하셨다(눅 16:29이하). 또 주님은 자신에게 선지자라는 호칭을 사용하셨고 그것을 인정하셨다(마 13:57;눅 13:33). 사도들은 궁극적으로 예수님이 모세와 같은 약속된 대선지자이심을 확신하였다(행 3:22이하). 그러나 예수님은 아울러 완전한 교사로서 선지자들을 보내신  하나님의 아들이시고(마 23:34,37) 육신이 되신 하나님의 말씀이셨다(요 1:1이하).

    2)교회의 예언

    예수님은 약속하신 성령의 사역 가운데 예언적 영감이 있다는 사실을 분명히 밝히셨다(마 10:19,20;요 16:12이하).

      초대교회의 설교자들은 구약의 선지자들처럼 성령의 권능을 힘입어 선포하였다(벧전 1:10이하). 이 성령은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예언의 능력을 부여한다. "예수의 증거는 대언의 영"이기 때문이다(고전  14:1,31; 계 19:10). 예언은 성령의 은사로 거듭 강조되었다(롬 12:6;고전 12:10;살전 5:19,20; 벧전 4:10,11). 물론 그것은 성경의 진리를 반복하고 있기는 하지만 성령의 역사에 따라 직접적인 계시로 영감된 말씀이라는 점에서 가르침과는 다르다.

         바울은 고전 14장에서 은사의 사용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은사는 성령의 주관적인 분배에 따라 누구에게나 주어졌다. 은사는 성도를 일으켜 세우고 용기를 복돋아  주기 위하여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지성적인 계시의 말씀이었다. 은사는 무분별한 열정에 빠진 사람들에 의해 남용되는 것도 아니었고, 장로들과 다른 선지자들에 의해 규제를 받지 않고 무절제하게 행사되는 것도 아니었다. 그 이유는 거짓 선지자들과 거짓 예언이 세상에 나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참고. 마 7:15;행 13:5이하;요일 4:1이하). 거짓 선지자들은 이적을 행하기도 했지만 그렇다고 그것들 때문에 그들을 믿을 수는 없다(참고. 막 13:22;마 7:22). 반면에 참된 선지자들은, 성경과 사도들의 가르침에 일치하는 지와 그들의 거룩성(참고. 고전 14:37,38), 그리스도에게 영광을 돌리는지의 여부(요 16:14) 그리고 그들과 다른 선지자들의 메시지와 일치하는지의 여부에 따라 결정된다. 무엇보다도 은사는 사랑하는 마음에서 우러나오지 않고 사랑의 방식으로 행사되지 않으면 아무 유익이 없다(고전 12:31-13:3).

         어떤 예언들은 아가보의 경우처럼 정규적 사역을 위해 따로 준비되었던 것처럼 보인다(행 11:28;참고. 엡 4:11). 예언적 사역은 디모데가 자신의 사역을 위해 따로 준비했을 때에 행사되었다(딤전 1:18;4:14).

    선지자들은 선포와 예언을 겸하여 했다. 그들은 직접 말씀을 받았을 뿐 아니라 꿈과 환상도 받았다(행 10:9이하). 아가보는 상징을 사용하였는데(행 21:10,11), 이 경우에 그의 말은 정확한 것으로 받아들여지긴 했지만 명령으로 취해지지는 않았다.

    3) 오늘날의 예언

    혹자는 오늘날에는 예언이 있을 수 없다고 주장한다. 그 까닭은 부분적으로는 선지자들과 사도들이 엡 4:11에서 보는 것처럼 신약 교회의  창립자들로서 유기적인 관련을 맺고 있기 때문이고, 부분적으로는 신약의 정경이 확정됨으로 말미암아 이제 계시는 종결되었다고 보기 때문이다. 그러나 고전 13:8이하에 보면 오직  '온전한 것'이 올 때에(저 세상에서) 예언이 폐할 것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교리에  대한 새로운 계시가 없다고 해서, 말씀도 하시고 활동도 하시는 살아 계신 하나님이 국가나 교회 또는 개인을 세밀하게 인도하기 위해서, 또는 성경에 따라서 예언이나 남은 자들을 통해 경고하시기 위해서 예언의 은사를 사용하실 수 없다는 데 대한 충분한 이유는 없는 것으로 생각된다.


    문서를 남기지 않은 선지자들 

    구전(口傳) 선지자(先知者)
    - 입 구(口), 전할 전(傳)

     1.  말로 전(傳)하여 내려옴. 또는 말로 전(傳)함

    문서선지자와 구전선지자 

    Ⅰ. 갓

    선지자 갓은 다윗이 도망다니며 표류할 때 그에게 요새에 있지 말고 유다 땅으로 들어가라고 권했었다(삼상22:5). 다윗이 백성의 수를 조사함으로 하나님께 범죄했을 때 하나님의 말씀이 갓에게 임하여 그로하여금 다윗에게 가서 하나님이 내릴 세 가지 재앙 중에서 하나를 택하라고 말하게 했다. 또한 3일간의 온역(瘟疫)이 지난 후 다윗을 만나 그에게 여부스 사람 아라우나의 타작마당에 올라가 여호와를 위하여 단을 쌓으라고 말해 주었다. 다윗이 그곳에서 하나님을 위하여 단을 쌓고 번제와 화목제를 드림으로 이스라엘 중에서 온역이 그쳤다(삼하 24장).

    Ⅱ. 나단

    다윗이 왕으로 있고 하나님을 위하여 전을 건축하려는 뜻을 세울 때 하나님의 말씀이 선지자 나단에게 임하여 다윗에게 하나님이 그를 위하여 집을 이루고 그 몸에서 날 자식을 뒤에 세울 것이며, 그의 자손이 하나님의 이름을 위하여 집을 건축하고 하나님은 그의 나라 왕위를 영원히 견고케 하리라는 것을 말하라고 했다(삼하7:1-17). 위의 예언들이 먼저는 일시적으로 솔로몬에게 응했으며 후에 그리스도에게서 완전히 성취되었다(눅1:32-33). 다윗이 범죄했을 때 하나님은 나단을 보내어 그 죄를 밝히 꾸짖고 그의 집에 재화(災禍)가 일어나 공격하며 칼이 그 집에서 영영히 떠나지 않을 것을 알려 주었다(삼하12:1-15). 하나님은 솔로몬을 사랑하셨기 때문에 다윗이 밧세바로부터 솔로몬을 낳았을 때 나단을 통하여 솔로몬에게 여호와께 사랑을 입음이라는 뜻의 「여디디야」라는 이름을 주셨다(삼하12:24-25). 다윗이 나이 많아 늙었을 때 학깃의 아들 아도니야가 스스로 높여 음모로 왕위를 빼앗으려 했다. 그러자 나단과 밧세바는 다윗으로 하여금 솔로몬을 왕으로 세울 것을 맹세하도록 계획을 세워 아도니야의 반역을 좌절 시켰다(왕상 1장).

    Ⅲ. 늙은 선지자

    열왕기상 13장은 늙은 선지자에 대해 기록한다. 늙은 선지자의 늙음은 그가 영적으로 노련하다는 것이 아니라 이미 낡아서 하나님 손에서 쓸모없음을 말한다. 하나님은 늙은 선지자로는 말할 수 없고 오직 하나님의 사람으로만 여로보암에게 말씀하실 수 있었다. 이뿐 아니라 이 늙은 선지자는 또한 선지자의 칭호를 사용하여 사람들을 속였다. 그가 하나님과의 교통을 잃었는데도 거짓으로 천사가 여호와의 명을 받아 그에게 말했다고 했다. 결국 함께 음식을 먹을 때 여호와의 말씀이 늙은 선지자에게 임하였다. 이는 늙은 선지자가 신령해졌다는 말이 아니라 하나님이 그의 명령을 어긴 하나님의 사람을 다루려는 것이다. 하나님은 늙은 선지자에게 요구할 것이 없어졌으므로 그를 한쪽으로 제쳐 놓으셨고 늙은 선지자는 다만 죽음을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왕상13:31).

    Ⅳ. 아히야

    솔로몬이 그가 취한 이방 여자를 좇아 우상을 숭배하여 하나님 보시기에 악을 행할 때 하나님은 노하시어 결단코 솔로몬의 나라를 빼앗아 그의 시종 여로보암에게 주리라고 말씀하셨다. 어느 날 여로보암이 예루살렘에서 나아갈 때 실로 사람 선지자 아히야가 길에서 그를 만났다. 아히야가 그 입은 새 옷을 잡아 열두 조각으로 찢고 여로보암에게 이르기를 「너는 열 조각을 취하라. 이는 하나님이 나라를 솔로몬의 손에서 찢어 빼앗아 열 지파를 너에게 주리라」고 말했다. 이와 같이 아히야를 통하여 하나님은 나라가 나누어질 것을 예언하셨다(왕상11:29-39).

    여로보암이 왕위에 오를 때 야심으로 인하여 산당을 세우고 다른 경배 장소를 세움으로 분열을 일으켜 하나님의 노를 격발했다. 하나님은 다시 아히야로 말미암아 여로보암의 집에 재앙을 내려 여로보암에게 속한 사내는 이스라엘 가운데 매인 자나 놓인 자나 다 끊어 버리되 거름을 쓸어버림 같이 여로보암의 집을 말갛게 쓸어버릴지라고 예언하셨다(왕상14:1-18).

    Ⅴ. 엘리야

    엘리야는 「여호와 나의 하나님」이라는 뜻이다. 아합 왕과 백성이 바알에게 우상 숭배할 때에 그는 하나님의 강한 증인이며 기도의 사람이었다(약5:17). 엘리야는 열왕기상 17장과 18장에서 하늘에서 비를 내리지 않도록 구했고, 과부의 아들이 살아나도록 구했으며, 하늘에서 불을 내려 번제를 불사르도록 구했고, 비가 내리도록 구했으며, 열왕기하 1장에서는 하늘로부터 불을 내려 아하시야가 보낸 군병들을 불사르도록 구했다. 이 모든 기도들이 모두 다 하나님의 응답을 받았다.

    그러나 엘리야에게도 실패가 있었다. 그가 갈멜산에서 여호와는 하나님이시고 바알은 거짓 신임을 증명함으로 바알의 선지자를 멸망케 했으나 이세벨의 위협을 견디지 못하고 유다 땅으로 도망하여 로뎀나무 아래 앉아서 죽기를 구했다. 하나님이 그를 크게 쓰실 때, 그는 도리어 죽음을 무서워하여 자신을 감추었다. 바울은 로마서 11장 2절부터 4절까지에서 엘리야가 이스라엘을 하나님께 송사하기를 「그들이 하나님의 선지자들을 죽였으며 주의 제단들을 헐어 버렸고 나만 남았는데 저희가 나의 목숨도 찾는다」고 말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에게 내가 나를 위하여 바알에게 무릎을 꿇지 아니한 사람 칠천을 남겨 두었다고 답변하셨다. 이러므로 그 연약함도 하나님의 택하심의 은혜를 나타내었다. 그는 항상 승리한 선지자였고 결국은 하나님께 산채로 들림을 받았다(왕하2:11).

    Ⅵ. 엘리사

    엘리사는 여호와가 구주임을 뜻한다. 그는 이스라엘 나라에서 엘리야를 계승한 선지자이다. 주 예수님은 누가복음 4장 27절에서 엘리사의 병을 치료하는 은사가 이방인에게 임했음을 증거했다. 심지어 그는 좋지 못한 물을 고쳐 생수로 변케 했다(왕하2:19-22).

    Ⅶ. 미가야

    유다 왕 여호사밧과 이스라엘 왕 아합이 아람 왕과 싸워 그의 손에서 라못을 취하기 위하여 여호와께 물었다(왕상22:1-4). 그때 모든 선지자들은 이구동성(異口同聲)으로 거짓 예언을 했고 오직 선지자 미가야만이 하나님을 대신하여 예언했다. 이러므로 그는 감옥에 갇혔고 아합은 미가야의 예언대로 전쟁 중에서 죽었다(왕상22:19-22, 29-35).







    성경에 기록된 선지자들

    선지자란, 하나님으로부터 소명을 받고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하는 사람을 가리킨다(렘 1:5-9; 암 7:12). ‘선견자’라고도 불리는(삼상 9:9) 선지자는 언제나 하나님이 주시는 말씀만을 전해야 했다. 심지어 자신의 의지나 주변 환경에 반하는 것일지라도 자기 입장에서의 해석이나 일체의 가감없이 오직 하나님이 계시하시고 명하신 것만을 선포해야만 했다(신 18:18; 렘 38:1-6).

    ​한편, 성경에는 단지 ‘문서 선지자’(예언 내용을 자신의 이름으로 된 책으로 남긴 선지자들. 대개 B.C. 8-5세기경에 활동)만이 있는 것이 아니라 문서로 남기지는 않았지만 하나님으로부터 계시와 환상을 받고 메시지를 이 땅에 전한 선지자들도 많이 있는 것을 보게 된다.

    ​이들을 시대별로 나누어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 왕국 이전 및 왕국 초기의 선지자들

    선지자의 기원을 사무엘로 보는 사람들도 있지만, 성경에는 아브라함을 처음 ‘선지자’로 불렀으며(창 20:7), 모세를 이스라엘의 첫 선지자요 선지자 이상의 신분(하나님의 종)으로 보고 있다(신 18:15; 34:10; 민 12:6-8).

    참고로, 신약성경 유 1:14에는 에녹이 예언한 사실을 언급하고 있다.

    이외에도 출애굽을 전후한 때에 아론(출 7:1), 아론의 누이 미리암(출 15:20), 칠십 장로(민 11:25), 엘닷과 메닷(민 11:27), 모세와 같은 선지자(신 18:15)가 있고, 사사 시대에는 랍비돗의 아내 드보라(삿 4:4), 한 선지자(삿 6:8), 그리고 왕정 초기에는 사무엘(삼상 3:20), 선지자의 무리(삼상 10:5), 사울(삼상 10:11-12), 사울의 사자들(삼상 19:20), 그리고 다윗(행 2:29-30) 및 다윗의 인구 조사를 책망한 갓(삼상 22:5), 다윗의 간음과 살인을 책망한 나단(왕상 1:8), 여로보암에게 북이스라엘을 세울 것을 권한 아히야(왕상 11:29-39), 솔로몬의 행적을 기록한 잇도(대하 9:29) 등이 있다.

    2. 분열 왕국 시대의 선지자들

    〈남왕국 유다와 관련한 선지자들〉

    • 잇도-아비야의 행적 기록(대하 13:22)

    • 스마야-르호보암에게 여로보암과 전쟁하지 않도록 권유(대하 11:1-4)

    • 아사랴-아사에게 하나님과의 언약 준수를 권함(대하 15:1-7)

    • 하나니-아람과 친교하는 아사를 책망함(대하 16:7-9)

    • 예후-아합과 동맹한 여호사밧을 꾸짖음(대하 19:1-3)

    • 아하시엘-모압과 암몬 연합군과의 전쟁에서 승리할 것을 예언(대하 20:14-17)

    • 엘리에셀-아하시야와 교제하는 여호사밧을 책망(대하 20:37)

    • 엘리야-여호람에게 처참한 죽음을 예언(대하 21:11-15)

    • 스가랴-요아스와 그 신하들의 우상 숭배 책망(대하 24:20)

    • 요엘-성령의 임함을 예언(욜 2:28)

    • 이사야-이스라엘의 운명과 메시야의 탄생 예언(사 49-53장)

    • 무명의 여선지자(사 8:3)

    • 미가-베들레헴에서의 메시야 탄생 예언(미 5:2)

    • 나훔-앗수르의 멸망 예언(나 2:8-13)

    • 하박국-바벨론의 멸망 예언(합 2:4-17)

    • 여두둔-요시야를 도와 유월절을 준수함(대하 35:15)

    • 훌다-살룸의 아내로서 유다 멸망을 예언(왕하 22:15-20)

    • 스바냐-여호와의 날 예언(습 1:14-16)

    • 예레미야-유다 멸망 예언(렘 34:2-5)

    〈북왕국 이스라엘과 관련한 선지자들〉

    • 아히야-여로보암 집의 멸망 예언(왕상 14:6-16)

    • 유다 출신의 한 늙은 예언자-요시야 출생 예언(왕상 13:1-32)

    • 예후-바아사의 우상 숭배와 악행을 꾸짖음(왕상 16:7)

    • 엘리야-아합 집안의 멸망 예언(왕상 21:20-26)

    • 미가야-아합의 죽음을 예언(왕상 22:19-28)

    • 엘리사-아합 집안의 멸망 예언(왕하 9:6-10; 13:21)

    • 호세아-하나님을 떠나 이방 세력을 의지하는 이스라엘을 책망(호 7:8-16)

    • 아모스-이스라엘의 심판과 회복 선언(암 9:1-15)

    • 요나-이스라엘의 부흥을 예언(왕하 14:25)

    • 오뎃-베가에게 유다인 포로 석방을 권함(대하 28:9-13)

    3. 바벨론 포로 시대의 선지자들

    • 에스겔-유다의 멸망과 회복 예언(겔 12:8-16)

    • 오바댜-에돔의 멸망 예언(옵 1:18)

    • 예레미야-예루살렘(유다)의 회복과 바벨론의 멸망 예언(렘 50:1-5)

    • 다니엘-네 왕국(바벨론, 바사, 헬라, 로마)과 70이레 예언(단 7:1-12:13)

    4. 포로 귀환 이후의 선지자들

    • 학개-메시야의 임재 예언(학 2:6-9)

    • 스가랴-메시야의 도래와 하나님 나라의 실현(슥 12:1-14:21)

    • 말라기-메시야의 임재(말 3:1-4:6)

    5. 신약성경의 선지자들

    • 예수 그리스도(마 21:11)

    • 안나(눅 2:36)

    • 세례 요한(눅 7:26-28)

    • 아가보(행 11:28)

    • 바나바(행 13:1)

    • 구레네 사람 루기오(행 13:1)

    • 마나엔(행 13:1)

    • 사울 곧 바울(행 13:1)

    • 니게르라 하는 시므온(행 13:1)

    • 바예수(엘루마)(행 13:6)

    • 유다(행 15:32)

    • 실라(행 15:32)

    • 빌립의 네 딸(행 21:9)

    • 이세벨(계 2:20)

    • 거짓 선지자(계 19:20)

    /출처ⓒ† : http://cafe.daum.net/cgsbong







    구분

    이름

    활동 연대

    활동 지역

    시대 배경

    메시지

    참조 구절

    바벨론

    포로

    이전

    요엘

    835-796

    남유다

    웃시야(요아스)

    여호와의 날

    왕하 11-15장; 행 2:16

    요나

    793-753

    니느웨

    여로보암 2세

    하나님의 보편적 구원

    왕하 13:1-14:25

    아모스

    760-755

    북이스라엘

    여로보암 2세 말엽

    하나님의 공의

    왕하 14:23; 15:7; 암 1:1

    호세아

    746-724

    북이스라엘

    여로보암 2세 말엽에서 사마리아 함락 직전까지

    사마리아 함락, 하나님의 신실한 사랑

    왕하 15, 18장

    롬 9:25

    이사야

    739-680

    남유다

    아하스와 히스기야 시대

    하나님의 은혜로 인한 구원

    왕하 15-20장

    미가

    737-690

    남유다

    요담, 아하스, 히스기야

    심판과 회복

    왕하 15:8-20

    렘 26:17-19

    나훔

    664-612

    남유다 및

    이방

    히스기야 말년, 므낫세(앗수르의 앗술바니팔)

    니느웨의 멸망

    사 10장

    나 1:1

    스바냐

    640-609

    남유다

    요시야

    여호와의 날

    왕하 22-23장; 습 1:1

    하박국

    609-600

    남유다

    여호아하스, 여호야김(바벨론의 나보폴라살)

    신앙의 고뇌와 승리

    왕하 23-24장

    합 1:1

    포로

    시대

    예레미야

    627-580

    정복당한

    남유다와 애굽

    요시야, 여호아하스, 여호야김, 여호야긴, 시드기야, 총독 그달랴(바벨론의 나보폴라살, 느부갓네살)

    예루살렘의 죄와 슬픈 운명 및 미래의 영광

    왕하 22-25장

    렘 40-44장

    다니엘

    605-530

    바벨론

    여호야김, 여호야긴, 시드기야(느부갓네살에서 고레스까지). 바벨론에서 활동

    4대 왕국과 영원한 하나님의 왕국

    왕하 23-25장

    마 24:15

    에스겔

    593-570

    바벨론

    시드기야(바벨론의 느부갓네살)

    예루살렘의 죄와 슬픈 운명 및 미래의 영광

    왕하 24:17-25

    겔 1:3

    오바댜

    586년 이후(850년경?)


    예루살렘 멸망(혹은 남유다 여호람)

    에돔의 멸망

    옵 1:1

    포로

    귀환 이후

    학개

    520년경


    스룹바벨 총독(메대-바사의 다리오 1세)

    성전 재건

    대하 36:11-21

    왕하 25장; 스 5-6장

    스가랴

    520년경

    남유다

    스룹바벨 총독(메대-바사의 다리오 1세)

    메시야의 도래

    스 5-6장

    말라기

    430년경

    남유다

    느헤미야 총독(메대-바사의 다리오 2세)

    계약의 준수

    느 13장

    [네이버 지식백과] 예언서를 기록한 문서 선지자들의 연대표 (라이프성경사전, 2006. 8. 15., 가스펠서브)

    성경에 언급된 선지자들

    선지자란, 하나님으로부터 소명을 받고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하는 사람을 가리킨다(렘 1:5-9; 암 7:12). ‘선견자’라고도 불리는(삼상 9:9) 선지자는 언제나 하나님이 주시는 말씀만을 전해야 했다. 심지어 자신의 의지나 주변 환경에 반하는 것일지라도 자기 입장에서의 해석이나 일체의 가감없이 오직 하나님이 계시하시고 명하신 것만을 선포해야만 했다(신 18:18; 렘 38:1-6). 한편, 성경에는 단지 ‘문서 선지자’(예언 내용을 자신의 이름으로 된 책으로 남긴 선지자들. 대개 B.C. 8-5세기경에 활동)만이 있는 것이 아니라 문서로 남기지는 않았지만 하나님으로부터 계시와 환상을 받고 메시지를 이 땅에 전한 선지자들도 많이 있는 것을 보게 된다. 이들을 시대별로 나누어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대표적인 선지자들과 활동 무대

    1. 왕국 이전 및 왕국 초기의 선지자들

    선지자의 기원을 사무엘로 보는 사람들도 있지만, 성경에는 아브라함을 처음 ‘선지자’로 불렀으며(창 20:7), 모세이스라엘의 첫 선지자요 선지자 이상의 신분(하나님의 종)으로 보고 있다(신 18:15; 34:10; 민 12:6-8).

    참고로, 신약성경 유 1:14에는 에녹예언한 사실을 언급하고 있다. 이외에도 출애굽을 전후한 때에 아론(출 7:1), 아론의 누이 미리암(출 15:20), 칠십 장로(민 11:25), 엘닷과 메닷(민 11:27), 모세와 같은 선지자(신 18:15)가 있고, 사사 시대에는 랍비돗아내 드보라(삿 4:4), 한 선지자(삿 6:8), 그리고 왕정 초기에는 사무엘(삼상 3:20), 선지자의 무리(삼상 10:5), 사울(삼상 10:11-12), 사울의 사자들(삼상 19:20), 그리고 다윗(행 2:29-30) 및 다윗의 인구 조사를 책망한 갓(삼상 22:5), 다윗의 간음살인을 책망한 나단(왕상 1:8), 여로보암에게 북이스라엘을 세울 것을 권한 아히야(왕상 11:29-39), 솔로몬행적기록한 잇도(대하 9:29) 등이 있다.

    2. 분열 왕국 시대의 선지자들

    〈남왕국 유다와 관련한 선지자들〉

    • 잇도-아비야행적 기록(대하 13:22) • 스마야-르호보암에게 여로보암전쟁하지 않도록 권유(대하 11:1-4) • 아사랴-아사에게 하나님과의 언약 준수를 권함(대하 15:1-7) • 하나니-아람과 친교하는 아사를 책망함(대하 16:7-9) • 예후-아합과 동맹한 여호사밧을 꾸짖음(대하 19:1-3) • 아하시엘-모압암몬 연합군과의 전쟁에서 승리할 것을 예언(대하 20:14-17) • 엘리에셀-아하시야교제하는 여호사밧을 책망(대하 20:37) • 엘리야-여호람에게 처참한 죽음을 예언(대하 21:11-15) • 스가랴-요아스와 그 신하들의 우상 숭배 책망(대하 24:20) • 요엘-성령의 임함을 예언(욜 2:28) • 이사야-이스라엘운명메시야의 탄생 예언(사 49-53장) • 무명의 여선지자(사 8:3) • 미가-베들레헴에서의 메시야 탄생 예언(미 5:2) • 나훔-앗수르의 멸망 예언(나 2:8-13) • 하박국-바벨론의 멸망 예언(합 2:4-17) • 여두둔-요시야를 도와 유월절을 준수함(대하 35:15) • 훌다-살룸아내로서 유다 멸망을 예언(왕하 22:15-20) • 스바냐-여호와의 날 예언(습 1:14-16) • 예레미야-유다 멸망 예언(렘 34:2-5)

    〈북왕국 이스라엘과 관련한 선지자들〉

    • 아히야-여로보암 집의 멸망 예언(왕상 14:6-16) • 유다 출신의 한 늙은 예언자-요시야 출생 예언(왕상 13:1-32) • 예후-바아사우상 숭배와 악행을 꾸짖음(왕상 16:7) • 엘리야-아합 집안의 멸망 예언(왕상 21:20-26) • 미가야-아합의 죽음을 예언(왕상 22:19-28) • 엘리사-아합 집안의 멸망 예언(왕하 9:6-10; 13:21) • 호세아-하나님을 떠나 이방 세력을 의지하는 이스라엘을 책망(호 7:8-16) • 아모스-이스라엘의 심판회복 선언(암 9:1-15) • 요나-이스라엘의 부흥을 예언(왕하 14:25) • 오뎃-베가에게 유다인 포로 석방을 권함(대하 28:9-13)

    3. 바벨론 포로 시대의 선지자들

    • 에스겔-유다의 멸망회복 예언(겔 12:8-16) • 오바댜-에돔의 멸망 예언(옵 1:18) • 예레미야-예루살렘(유다)의 회복과 바벨론의 멸망 예언(렘 50:1-5) • 다니엘-네 왕국(바벨론, 바사, 헬라, 로마)과 70이레 예언(단 7:1-12:13)

    4. 포로 귀환 이후의 선지자들

    • 학개-메시야의 임재 예언(학 2:6-9) • 스가랴-메시야의 도래와 하나님 나라의 실현(슥 12:1-14:21) • 말라기-메시야의 임재(말 3:1-4:6)

    5. 신약성경의 선지자들

    예수 그리스도(마 21:11) • 안나(눅 2:36) • 세례 요한(눅 7:26-28) • 아가보(행 11:28) • 바나바(행 13:1) • 구레네 사람 루기오(행 13:1) • 마나엔(행 13:1) • 사울바울(행 13:1) • 니게르라 하는 시므온(행 13:1) • 바예수(엘루마)(행 13:6) • 유다(행 15:32) • 실라(행 15:32) • 빌립의 네 딸(행 21:9) • 이세벨(계 2:20) • 거짓 선지자(계 19:20)

    [네이버 지식백과] 성경에 언급된 선지자들 (라이프성경사전, 2006. 8. 15., 가스펠서브)










    2025 말라기







    10월 15일(수) 말라기 1-4장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생명과 평강의 언약(2:5)

    레위와 세운 나의 언약생명과 평강의 언약이라 내가 이것으로 그에게 준 것은 그로 경외하게 하려 함이라 그가 나를 경외하고 내 이름을 두려워하였으며.
    My covenant was with him, a covenant of life and peace, and I gave them to him; this called for reverence and he revered me and stood in awe of my name.

     

    말라기 선지자는 제사장들에 대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합니다. 

    하나님은 제사장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마음에 두지 않고 그 이름을 영화롭게 하지 않으면 그들에게 저주를 내리시겠다 하십니다. 아니, 이미 그들은 하나님의 뜻을 거스렸고, 이미 그들을 저주하셨다고 선언하십니다. 구체적으로 그들의 자녀들을 징계하며, 절기를 지켜 드리는 희생의 똥을 가증히 여겨 그들의 얼굴에 바르고, 더러운 똥을 치우듯 아낌 없이, 서둘러, 깨끗이 치워버리겠다고 하십니다. 


    말라기 2장에서는
    하나님이 레위 지파와 맺으신 생명과 평강의 언약을 회복할 것을 촉구하며, 제사장들이 율법을 어기고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아 언약을 깨뜨렸음을 경고합니다. 
    제사장들은 하나님 말씀을 마음에 두지 않고 백성을 율법에서 떠나게 했기에, 그들의 자손을 징계하고 제물 똥을 얼굴에 바르는 저주를 내리겠다고 하십니다. 

    제사장들의 잘못
    • 하나님 말씀을 마음에 두지 않고, 그 이름을 영화롭게 하지 않음.
    • 백성을 율법에서 떠나게 하고, 사람에게 치우치게 함. 
    하나님이 내리신 경고 및 저주
    • 제사장들의 자손을 징계하심.
    • 제사장들의 얼굴에 희생 제물의 똥을 바르겠다고 경고하심.
    • 모든 백성 앞에서 멸시와 천대를 당하게 하실 것임. 
    생명과 평강의 언약
    • 언약의 주체 : 하나님과 레위 지파.
    • 언약의 내용 : 하나님을 경외하고, 입술에는 진리의 법이 있으며, 불의함이 없고, 화평과 정직함으로 동행하며, 많은 사람을 악에서 떠나게 하는 것.
    • 언약의 결과 : 생명과 평강.
    • 언약의 회복 : 말라기 2장은 제사장들이 이 언약을 깨뜨렸음을 지적하며, 하나님께 돌아와 언약을 회복하고 생명과 평강의 삶을 살 것을 촉구하고 있습니다. 

    말씀을 통해, 지극히 높고 위대하신 하나님께서 이 낮고 낮은 인생들 때문에 괴로워하실 수 있음을 깨닫습니다. 사랑하는 자들이 악을 행할 때, 속상하고 화나고 슬픕니다. 진노를 참고 바로 징계하지 않고 인내하는 것이 고통스럽습니다. 마음이 괴롭고 힘이 듭니다. 제가 하나님의 크신 사랑과 구원의 은혜를 입은 자로서, 적어도 하나님을 괴롭히는 죄악된 길을 걷지 않기를 기도합니다. 부족하지만, 하나님을 경외하고, 하나님의 뜻을 순종하기에 힘쓰고, 죄를 지을 때 즉시로 진실되게 회개하는 돌이키는 자 되기를 기도합니다. 

    이스라엘의 죄악과 배반에도 불구하고 일방적인 은혜로 메시아 언약을 성취하신 하나님 은혜를 감사합니다. 죄인에게 메시아 언약을 허락하신 은혜를 감사합니다. 죄로 죽을 자에게 샬롬을 선포하신 평강의 하나님을 감사 찬양합니다. 죽음과 허무를 물리치시고 생명과 기쁨을 선물로 주신 주님, 두려움과 헛된 변명과 거짓 가면을 벗게 하시고 화평과 자유를 주신 주님, 사랑합니다, 감사합니다, 찬양합니다.


    말라기

    책 제목 / 

    12권의 소선지서가 모두 그러하듯이 소선지서의 마지막 책으로 꾸짖음과 소망의 책인 본서도 그 서두에 나타나는 선지자의 이름을 따라 ‘말라기’로 붙여졌다. (히브리어 성경에서는 ‘마르아키(מַלְאָכִי)’로, 70인역(LXX)에서는 ‘말라키아스’로 음역되었다.)

     

     

    1. 기록자와 역사적 배경

    1) 기록자

    기록자 말라기의 히브리어 이름의 뜻은 ‘나의 사자’(my messenger)이다. 이 말이 3:1에 나오고 또 선지자와 제사장을 여호와의 사자라 부르는 것을 인해(2:7; 학 1:13) 혹자는 말라기가 고유명사가 아니라 이름을 알 수 없는 통상적인 명칭이라고 한다. 이와 같은 견해는 70인역에 의해 지지를 받는다. 70인역은 1:1에서 이 말라기를 고유명사로 번역하지 않고 [그의 사자]라고 번역하였다. 그러나 모든 선지서에서 책 서두에 책을 쓴 선지자의 이름을 밝히는 전통에 근거해 볼 때 ‘말라기’를 선지자의 이름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고 본다.

     

    2) 기록연대와 역사적 배경

    본서에는 연대에 대한 직접적인 언급은 없다. 하지만 본문에 나타난 몇 가지 정황이 기록 연대를 근접하게 추정할 수 있게 한다.

    첫째, 성전은 이미 재건되었으나 제사 의식이 심히 부패한 점으로 보아(말 1:7, 10) 스룹바벨 성전이 재건된 해(B.C.516년)로부터 오랜 시간이 지난 것으로 추정된다.

    둘째, 바사(페르시야) 총독이 다스리고 있었기(1:8)에 느헤미야 시절(B. C. 444~432년)은 아닐 것이다.

    셋째, 말라기가 지적한 죄, 곧 제사장들의 부패, 십일조 무시, 이방 여인과의 결혼 언급 등이 느헤미야가 두 번째로 이스라엘에 와서(B.C.425년) 지적한 죄와 동일하다(느 13:8-31).

    이 상을 통해서 본서의 기록 연대는 주전 432년부터 주전 425년 사이로 추정된다. 이 때의 역사적 배경을 살펴보면 바벨론에서 귀환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학개와 스가랴 선지자의 사역에 힘입어 B.C. 516년에 성전을 완성했고, B.C. 458년에는 제사장 에스라와 수천의 유대인들이 귀환하여 이들 공동체는 더욱 굳건해졌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또 다시 과거의 죄악 속에 빠져들게 되었다. 즉, 내적으로 그들은 하나님의 메시아 약속이 이루어질 것인지를 의심하더니, 결국은 하나님을 섬길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인지도 의구심을 품게 되었다. 이러한 가운데 외적으로는 이러한 태도가 껍데기만 있는 예배의식, 십일조와 제물의 사취(詐取), 도덕법과 의식법에 대한 무관심으로 명백히 드러났다.

     

     

    1. 내용과 주제

    1) 내용

    말라기서의 내용을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누면 현재 이스라엘의 죄(1~2장)와 다가올 여호와의 날(3~4장)로 구분할 수 있다. 전자는 충고이고 후자는 예언이다. 즉 하나님의 특별한 사랑을 입은 자가 오히려 주를 멸시하고 괴롭히는 것을 지적한 본서는 다시 하나님께 되돌아가 하나님의 긍휼하심에 힘입을 것을 선포한다. 특히 본서에서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초림과 재림에 관한 예언이 밀도있게 전개되는데 초림은 세례 요한의 출현과 연결되어 나타나고, 재림은 세상을 심판하시는 그리스도의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성경의 통일성을 입증하여 우리의 신앙을 더욱 굳게 해주고 있다.

    (또는 다르게 두 부분으로 나눌 때는 전반부는 1-3장으로 하나님과의 단절을 야기시킨 이스라엘의 타락에 대한 논쟁, 그리고 후반부는 4장으로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으로 생각할 수 있다.)

     

    2) 주제

    말리기는 구약의 마지막 책으로서 하나님과 백성들간의 이해의 큰 간격을 여섯 가지 논쟁을 통해서 좁혀 가려고 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이 잘 나타나 있다. 즉, 다음과 같은 여섯 번의 논쟁을 통해서 그들의 죄악을 지적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 자신과 진정으로 원하는 것을 계시해 주신다.

    첫째 계시(1:2-5)는 여호와는 이스라엘 백성을 사랑하신다는 것을 선포한다. 여호와가 야곱을 사랑하셨고 에서를 미워한 것이 이스라엘 백성을 사랑하신 제일 큰 증거다. 에서와 그의 후손 에돔 백성은 황무케 되었고 파괴되었다. 비록 포로 귀환 후의 이스라엘 백성의 삶이 곤핍하며 어려웠으나 에돔 백성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을 생각한다면 이스라엘은 축복받은 백성이다.

    둘째 계시(1:6-2:9)는 주로 제사장들에 대한 엄한 책망이다. 그들은 하나님을 존귀히 여기거나 자기의 직책을 잘 수행하거나 바른 제사를 드리지 않았다. 오히려 그들은 더러운 떡과 눈 멀고, 절뚝거리고 병든 제물을 드렸다. 이런 제물을 하나님은 거절하신다. 그와 같은 제물을 바치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다. 하나님은 옛날 레위와 맺은 언약대로 제사장들이 하나님을 경외하고 두려워하며 진리와 법을 가르치고 화평과 바른 삶을 살도록 요구하신다.

    셋째 계시(2:10-17)는 포로 생활에서 귀환한 이스라엘 백성 사이에 만연한 이혼과 이방 사람과의 잡혼을 강하게 책망하는 내용이다. 어려서 취한 아내를 버리지 말라고 명하시며 불성실한 일을 행하지 말라고 하신다.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지 않는 자는 야곱의 자손이 되지 못하게 하시고 그런 자들의 제사와 헌물을 받지 않으실 것이다.

    넷째 계시(3:1-6)는 하나님이 심판하러 오신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옳은 자와 그릇된 자를 갈라내고, 제사장들을 연단하여 하나님이 받으실 만한 의로운 제물을 바치게 할 것이다. 하나님의 엄한 심판이 마술사, 간음한 자, 거짓 맹세하는 자, 품꾼의 삯을 억울하게 하는 자, 과부와 고아를 압제한 자, 나그네를 억울하게 한 자, 그리고 하나님을 경외치 않는 자들 위에 임한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야곱의 자손들을 사랑하는 마음이 변치 않으시므로 그들이 소멸되게 하지는 않을 것이다.

    다섯째 계시(3:7-12)는 이스라엘 백성이 조상 때부터 하나님의 법을 떠나 지키지 않았음을 책망한다. 특히 말라기 선지자 때에는 십일조와 헌물도 바치지 않았다. 이들에게 하나님은 하나님의 것을 도적질하였다고 말씀하시며 저주하셨다. 그러나 온전한 십일조를 드리면 하늘 문을 열고 복을 쌓을 곳이 없도록 부어주실 것이다.

    여섯째 계시(말 3:13-4:3)는 이스라엘 백성 가운데 하나님을 섬기고 그의 명령에 순종하는 것이 유익이 없다며 하나님을 모독하는 자들이 있었다. 이들에게 하나님은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의 선한 행위와 이름을 기록하는 기념책이 있음을 밝히신다. 하나님은 여호와의 날에 선한 자와 악한 자를 분별하여 상 주시고 벌할 것이다. 교만한 자와 악을 행하는 자는 지푸라기처럼 불에 탈 것이며 선한 자는 의로운 해에서 발하는 치료하는 광선을 받을 것이다.

    결론은 4:4-6이다. 말라기는 마지막으로 모세의 율법을 기억하라고 권면한다. 그리고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이 이르기 전에 선지 엘리야를 보내주실 것을 공표한다. 아울러 그가 아버지의 마음을 자녀에게로 돌이키시며, 자녀들의 마음을 그들의 아버지에게로 돌이키게 하셔서 아버지와 아들이 온전히 화해하고 하나가 되게 하셔서 참된 메시야가 오실 것을 준비하게 됨을 예언한다.

     

    말라기 개관


    •말라기는 경고에 관한 것을 다루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 대해 경고하신 것인데 경고만 하신 것이 아니라 경고하셔서 돌이키도록 하신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와 같으므로 말라기를 어떻게 볼 것인가에 대한 하나의 관점을 제시해 본다면 경고의 관점으로 볼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말라기를 경고의 관점에서 정리해서 말씀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말라기에서 대표적인 구절을 선정한다면 하나님께서 말라기를 통해 이스라엘에게 경고하셨다고 한 1장 1절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말라기를 통하여 이스라엘에게 말씀하신 경고라

    •말라기를 하나님께서 경고하신 것에 대한 것을 보여주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20여 차례나 이르시면서(1:2 등) 이스라엘에게 경고하신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렇게 많이 이르시면서 경고하신 것은 사태가 그만큼 매우 엄중하고 심각하다는 것입니다.

    •이러하므로 사자를 보내셔서(3:1, 4:5) 돌이키도록(3:7, 4:6) 해 주신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말라기를 보면 이러한 흐름이 있으므로 이와 관련된 주제를 도출해 본다면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경고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말라기를 이해하기 쉽고 적용하기 쉽도록 실마리를 제공해주고 맥을 잡아주기 위하여 하나의 관점을 제시해 본다면 경고의 관점입니다.

    •말라기는 하나님께서 경고하신 것을 다루고 있으므로 경고의 관점에서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20여 차례나 이르시면서 이스라엘에게 경고하신 것을 볼 수 있습니다(1:2, 4, 6, 8, 9, 10, 11, 13, 14, 2:2, 4, 16, 3:1, 5, 7, 12, 13, 17, 4:1, 3).

    •이렇게 많이 이르시면서 경고하신 것은 사태가 그만큼 매우 엄중하고 심각하다는 것입니다.

    •이러하므로 사자를 보내셔서(1:1, 3:1, 4:5) 돌이키도록(3:7, 4:6) 해 주신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 대해 경고하신 것인데 경고만 하신 것이 아니라 경고하시고 돌이키도록 해 주셨다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을 경외하게 되고 복을 받으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말라기를 제사와 이혼과 도둑질과 심판의 날에 대한 네 가지 경고로 나누어 살펴볼 수 있습니다.

    •이처럼 말라기를 보면 경고에 관한 것을 중점적으로 다루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말라기 1-4장을 전체적으로 본다면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경고의 관점에서 볼 수 있습니다.

    •제사와 이혼과 도둑질과 심판의 날에 대한 네 가지 경고로 나누어 볼 수 있습니다.

    •이러한 말라기를 보면 하나님께서 경고하신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은 경고는 어떻게 보면 이중적인 구조로 볼 수 있습니다.

    •경고에 그치신 것이 아니라 회복의 메시지도 있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에 대한 경고인데 경고만 하신 것이 아니라 경고를 통해 주시는 회복의 메시지도 볼 수 있습니다.

    •돌이키라는 것입니다. 제사장이 사자 노릇을 못해내자(2:7-9) 제대로 된 사자를 보내셔서 돌이키도록 해 주셨다는 것입니다.

    •나의 사자인 말라기(1:1), 언약의 사자이신 예수 그리스도(3:1), 세례 요한을 예표하는 선지자 엘리야(4:5)입니다.

    •그리하여 예배를 정성을 다해 올바르게 드리고 이혼하지 않고 십일조와 봉헌물을 도둑질하지 않고 심판의 날에 구원을 받으라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을 경외하게 되고(1:6, 11, 14, 2:5, 3:5, 16, 4:2) 복을 받으라는(1:2, 11, 2:5, 15, 3:3, 10-12, 16-17, 4:2-3) 것입니다.

    •말라기를 어떻게 볼 것인가에 대한 하나의 관점을 제시해 본다면 경고의 관점으로 볼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말라기는 경고를 다루고 있는데 하나님께서 경고하신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 대해 경고하신 것인데 경고만 하신 것이 아니라 경고하셔서 돌이키도록 하신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러한 것을 네 가지의 경고로 나누어 살펴볼 수 있습니다.

    •제사와 이혼과 도둑질과 심판의 날에 대한 경고입니다.

    •이러한 것에서 돌이키도록 사자를 보내셔서 경고하신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돌이켜서 온전한 제사를 드리고 이혼하지 않고 십일조와 헌물을 도둑질하지 않고 심판의 날에 구원을 받을 수 있도록 하셨습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도록 하게 하시고 복을 받게 하신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돌이키셔서 예배를 정성을 다해 올바르게 드리시고 이혼하지 않으시고 십일조와 헌물을 바르게 드리시고 심판의 날에 구원받게 되시길 바랍니다.

    •그리하셔서 하나님을 경외하게 되시고 복을 받게 되시길 바랍니다.


     

    1. 특징과 교훈

    1) 특징

    ① 논쟁을 통한 강조

    본서는 6개의 논쟁(하나님의 책망과 이스라엘 백성의 이의제기 그리고 하나님의 응답)으로 하나님의 뜻을 드러내는 특징이 있으며, 그 것을 통해 강조되는 것은 다음과 같다.

    첫째로 하나님의 언약을 강조하고 있다. 본서의 처음과(1:2-5) 종결 부분(4:4)이 언약을 기억하고 순종하라는 말씀으로 이루어져 있다. 또한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언약 관계를 부자관계로 설명하고 있다(1:6; 3:17). 그리고 이스라엘의 가장 심각한 죄가 하나님과의 언약을 어긴 것으로 말하고 있다(2:1-30). 따라서 말 2:2-3에서는 언약을 어긴 징계가 어떠한지 분명하게 보여 주고 있다. 둘째로 다른 민족 곧 열방들에 대한 심판의 언급이 없다. 이는 본서의 기록 목적은 이스라엘에 집중되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본서의 메시지 이면에는 열방들에 관한 심판이 적지않게 내포되어 있기도 하다(1:5, 11, 14). 셋째로 예배에 대한 자세를 다루고 있다. 특별히 예배의 형식적인 의식보다는 여호와께 대한 순종이 더욱 고귀한 것임을 지적한다.

    ② 구약 마지막 계시로서 신약 시대의 예고

    또한 말라기서는 구약 성경의 계시의 마지막을 장식하면서 다음 장면을 위한 무대를 재정돈한다. 구약 성경에 계속적으로 계시하고 있는 주인공인 메시야가 나타나지 않았지만, 이제 곧 이어질 장면은 엘리야의 영과 권세로서 예비하는 자인 세례자 요한이 올 것이라는 예언한다. 즉, 말라기는 아브라함의 시대로부터 2,000년 이상이 지난 후의 계시, 구속 및 부흥의 시기에 하나님의 택하신 백성들에 대해서 예언하고 있다.

     

    2) 교훈

    ① 오랜 시간이 지났는데도 선지자들의 예언 대로 영광스러운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지 않자 많은 백성들은 절망과 회의, 그리고 영적 나태함에 빠져 들어갔다. 이렇듯 인간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믿다가도 즉각적으로 성취되지 않으면 그에 대한 반작용으로 절망과 불신의 깊은 늪에 빠져 버리는 한계성을 자주 보인다. 그러나 말라기는 이처럼 절망에 빠져 회의하는 그들에게 하나님의 섭리와 사랑, 과거에 베푸신 은혜 등을 돌아보고 하나님 나라의 도래를 소망하며 인내할 것을 권면하고 있다. 이는 실로 오늘날 세속적인 욕망에 쉽게 유혹되고 하나님 나라에 대한 소망을 잃기 쉬운 우리 자신들에게 더욱 적절한 권면다.

    ② 말라기는 성의 없이 제사를 드리는 것보다는 성전의 문을 닫아버리는 것이 낫다고 제사장과 레위인들에게 책망하고 겉치레뿐인 형식적인 의식으로서가 아니라 열심 있는 정직한 의식 준수를 강조한다(1:6-2:9). 또한 하나님의 말씀을 경홀히 여기고 그 규례를 지키지 아니한 죄악들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을 경고한다. 오늘 우리가 드리는 예배와 말씀 순종의 모습은 어떠한지 되돌아보며 하나님께 대한 참된 경외와 순종에 힘써야 하겠다.

    ③ 말라기 선지자가 본문에서 가르치는 가장 중요한 것은 메시아 오심에 대한 약속이다. 제사장들과 레위인이 흠이 있고 의롭지 못한 예물을 하나님께 가져왔고(3:6-8, 13), 그래서 하나님께서 그것들을 받지 않으셨지만(1:9-10), 메시아가 오셔서 그들을 깨끗하게 하고 씻으심으로써 의로운 제물을 드리실 것이다(3:3). 그 때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의 제물만 받으시는 것이 아니라(3:4), 열국의 제물도 받으시게 될 것이다(1:11). 과거에 바쳤고 또 지금 말라기 시대에 바쳐지고 있는 봉헌물과 십일조는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완전한 제물을 드리실 때에야 비로소 하나님의 받으시는 것이 될 것이다(히 7:21-25; 8:1, 9-14, 23-25; 9:9, 12-14). 우리를 포함하여 만국(이방인)이 온전한 예물을 드릴 수 있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심으로써 또 그분으로 말미암아 가능하다(1:11. 비교. 3:12).

     

     

    1. 구조

    1) 서론(1:1) : 말라기를 통하여 이스라엘에게 말씀하신 경고

     

    2) 여섯 번의 논쟁(1:2-4:3)

    ① 제1논쟁 “여호와께서 우리를 사랑하시는가?”(1:2~5)

    ② 제2논쟁 “우리가 어떻게 주의 이름을 멸시하였는가?”(1:6~2:9)

    ③ 제3논쟁 “너희는 이르기를 어찌 됨이니이까”(2:10~16)

    ④ 제4논쟁 “어떻게 여호와를 괴롭혀 드렸나이까?”(2:17~3:5)

    ⑤ 제5논쟁 “우리가 어떻게 하여야 돌아가리이까?”(3:6~12)

    ⑥ 제6논쟁 “우리가 무슨 말로 주를 대적하였나이까?”(3:13~4:3)

     

    3) 마지막 경고(4:4-6)

    추가적인 두 말씀 : (모세의)율례와 법도를 기억, 선지자(엘리야)를 보내리니


    "레위와 세운 나의 언약이 항상 있게 하라" (말 2:1-9)

    우리의 신앙이 성경이라는 단 한 권의 책에 근거하고 있는 것인데, 이 사실은 참으로 놀랍고 굉장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것은 우리 인생이 이 한 권의 책에 의해서 살아갈 수 있게끔 설계되어 있다는 말입니다. 바로 이것이 신앙의 비밀입니다.

    그러다 보니 우리가 믿음의 삶을 온전히 살아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붙잡고 연구하며 나아가는 일이 필요합니다. 어떤 경우든 성경 말씀을 잘 알지 못하면 결코 바른 신앙생활을 하는 것이 불가능합니다. 그래서 일단은 성경을 읽는 것이 중요하기 때문에 <말씀의 삶>이 우리에게 필요하고, 또한 깊은 묵상으로 나아가는 큐티를 꾸준히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말라기는 구약성경의 가장 마지막에 위치한 소선지서로서, 신구약 중간시대, 소위 침묵시대로 들어가는 마지막 말씀입니다. 물론 요즘 신학자들 중에는 말라기를 에스라, 느헤미야와 같은 시대나 그보다 앞선 시대로 보기도 합니다. 어떤 것이 맞든지, 말라기 말씀 이후에는 한동안 말씀이 주어지지 않았습니다. 그러다 보니 이 책은 시대 말기적 현상을 굉장히 적나라하게 다루고 있습니다.

    말라기서는 총 여섯 개의 논쟁 형태로 진술되는데, 이처럼 질문과 대답을 반복하며 중요한 메시지를 전달하는 것을 예언자 논쟁이라고 부릅니다. 사람들이 ‘왜 이렇습니까?’ 하고 묻고 하나님도 ‘너희의 잘못 때문에 그렇다.’라고 하시는 등, 질문과 대답으로 이어지는 여섯 개의 논쟁으로 그물을 짜듯 진행되는 것이 바로 말라기의 이야기입니다.

    그렇다면 이 여섯 개의 논쟁을 통해서 말하고 있는 그 시대의 말세적 상황과 현상은 무엇입니까? 한마디로 정리하면 그 시대는 ‘하나님의 공의에 어긋난 시대’였다는 것입니다. 오늘은 이것을 세 가지로 나누어 살펴보겠습니다.

    1.   이 시대를 향한 말라기의 외침

    1)  사회적 타락

    세기말로 가면 사회적 타락이 시작되고, 사회적 타락이 시작되면 빈부의 격차가 심해지기 시작합니다. 가진 자들이 더 많이 가지려는 탐욕으로 자기들이 가지고 있는 것을 이용하여 없는 자들의 것을 착취하면서 빈부의 격차가 벌어지게 됩니다. 지금도 세상의 많은 사람들이 굶는 것은 세상에 먹을 것이 모자라서가 아닙니다. 가진 자들이 너무 많이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회가 타락하면 자연스럽게 따라오는 현상은 성적 타락입니다. 리처드 포스터가 <돈, 섹스, 권력>이라는 책에서 이 세 가지 단어를 서로 연관 지어 말한 것은 참으로 놀라운 통찰력입니다. 가진 자들은 성적 욕망을 표출하기 위해 외도를 하고 불륜을 저지르면서 가정을 깨뜨립니다. 자신의 성적인 욕망을 채우려는 이기적 현상들이 벌어지는 것입니다.

    “내가 너희를 심판하러 가겠다. 점 치는 자와, 간음하는 자와, 거짓으로 증언하는 자와, 일꾼의 품삯을 떼어먹는 자와, 과부와 고아를 억압하고 나그네를 학대하는 자와, 나를 경외하지 않는 자들의 잘못을 증언하는 증인으로, 기꺼이 나서겠다. 나 만군의 주가 말한다.” (말 3:5, 새번역)

    이처럼 말라기의 시대에는 사회적 타락이 아주 심각했습니다.

    2)  종교적 타락

    당시 종교적 기득권을 가진 종교지도자들은 영적으로 타락한 가운데, 겉으로는 굉장히 종교적인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믿음이 없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래서 백성이 형식적이고 위선적이고 가식적인 신앙생활을 하는 시대가 바로 말라기가 고발하는 시대입니다. 영적인 역겨움으로 가득한 시대라고 할 수 있습니다.

    “너희 가운데서라도 누가 성전 문을 닫아 걸어서, 너희들이 내 제단에 헛된 불을 피우지 못하게 하면 좋겠다! 나는 너희들이 싫다. 나 만군의 주가 말한다. 너희가 바치는 제물도 이제 나는 받지 않겠다.” (말 1:10, 새번역)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역겨움을 도저히 참으실 수가 없어서 성전 문을 누가 좀 닫았으면 좋겠다고 말씀하실 정도였습니다. 종교가 이토록 타락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3)  영적 타락

    영적 기대와 믿음이 아주 강하게 의심되고 조롱되는 시대입니다. 사람들은 이런 식으로 불평하며 말합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다고? 하나님을 믿으면 하나님이 우리를 돌보고 책임지신다고? 그런 게 어디 있어? 그거 다 헛된 거야. 세상을 봐. 하나님이 정말 살아 계신 거 맞아?’ 이런 영적인 조롱과 회의가 가득한 질문으로 하나님을 공공연히 원망하고 조롱하는 시대가 바로 말라기가 이야기하는 모습입니다.

    “너희가 말하기를 ‘하나님을 섬기는 것은 헛된 일이다. 그의 명령을 지키고, 만군의 주 앞에서 그의 명령을 지키며 죄를 뉘우치고 슬퍼하는 것이 무슨 유익이 있단 말인가? 이제 보니, 교만한 자가 오히려 복이 있고, 악한 일을 하는 자가 번성하며, 하나님을 시험하는 자가 재앙을 면한다!’ 하는구나.” (말 3:14-15, 새번역)

    이런 것이 바로 말라기 시대의 분위기였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진짜 문제는 이 세 가지가 서로 굉장히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마음이 사라지고 영적으로 타락하니까 종교가 타락합니다. 그렇게 헛된 거짓 예배를 드리면서도 전혀 두려워하지 않는 겁니다. 그리고 하나님에 대한 경외심이 없다 보니까 이제는 사회적 질서를 무너뜨리고 악을 행해도 아무런 죄책감이 없습니다. 이처럼 영적 타락은 종교적 타락으로, 종교적 타락은 다시 사회적 타락으로 이어지는 것이 바로 말라기 시대의 상황이었습니다.

    그런데 정말 충격적인 사실이 있습니다. 말라기 선지자가 그렇게 외치며 경고했던 그 시대의 모습이 지금 이 시대와 너무나 똑같다는 것입니다. 아니라고 부정하고 싶어도 할 수 없을 만큼 사회적 타락과 종교적 타락과 영적 타락이 이미 심각한 수준에 이를 정도로 진행된 것을 보게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러한 시대를 향해 외친 말라기의 외침이 지금 더욱 중요합니다. 이것은 그대로 우리에게도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2.   레위와 세운 나의 언약이 항상 있게 하겠다

    그렇다면 이런 상황 속에서 외친 말라기 선지자의 시대를 향한 메시지는 무엇입니까?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내가 이 명령을 너희에게 내린 것은 레위와 세운 나의 언약이 항상 있게 하려 함인 줄을 너희가 알리라” (4절)

    그는 딱 한 가지만 이야기했습니다. ‘레위와 세운 나(하나님)의 언약이 항상 있게 하겠다.’

    이것이 무슨 말입니까?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당신의 백성으로 삼으시고 그들은 하나님을 자신들의 하나님으로 모시면서 맺었던 그 언약이 지금도 생생하게 살아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오래 되어서 말라비틀어진 신앙이나 무디어지고 닳아 버린 습관과 같은 신앙이 아닌, 하나님과 처음 맺었을 때의 가슴 뛰고 눈물 나게 행복했던 그 신앙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옛날 좋았던 때를 기억하면서 그리워하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그때의 뜨겁고 순수했던 신앙이 오늘 자신의 삶에 살아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 무엇이 중요합니까? 하나님이 정말 나의 하나님이셔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말라기를 통해 그 시대에 주셨던 하나님의 처방이고, 지금도 우리에게 주시는 동일한 처방입니다.

    모든 영적 메마름과 타락과 변질에 대한 처방은 한 가지밖에 없습니다. 처음의 그 은혜와 마음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신앙은 처음 그 마음이 계속 유지되어야 합니다. 세월이 흐르면서 이제는 익숙해지고 닳고 닳아 잊어버렸다면 그것은 참 신앙일 수가 없습니다. ‘나도 옛날에는 열심히 했어.’라는 것은 참 신앙이 아닙니다. 옛날에 열심히 한 것은 감사한 일이지만, 지금도 열심히 하고 있어야 합니다.

    오래 전에 교회에 안 나오시고 안 믿으시는 분을 만났는데, 교회를 나오시라고 했더니 오래 전에 교회를 나갔다고 하셨습니다. 연세가 지긋한 분이셨는데 그러셨습니다. “나는 고등학교를 졸업하면서 신앙도 졸업했어요.” 고등학교 졸업 후 몇 십 년 동안 교회를 안 다녔다고 하셨습니다.

    물론 안 믿는 분이시니까 그렇게 말하셨지만, 믿는 사람이 신앙에 졸업이 어디 있습니까? 우리가 살아가는 데 졸업이 없습니다. 살다가 졸업하면 그것은 죽음입니다. 그런데 신앙도 죽을 때까지 하는 것이지, 졸업은 없습니다.

    진짜 신앙은 살아 있기 때문에, 신앙은 과거가 아닌 현재이기 때문에, 처음 그때의 뜨거움을 유지해야 할 뿐 아니라 더욱 자라고 성장해야 합니다. 그렇게 제대로 된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지 아닌지를 확인할 수 있는 방법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바로 간증입니다. 오늘의 삶 속에서 하나님께 감사하는 간증이 있는가 없는가를 보면 압니다.

    그래서 목장에서도 특별한 건 아니지만 감사의 제목을 나누지 않습니까? 그런데 늘 똑같다고 하거나 없다고 하면 간증이 없다는 말이고, 그것은 신앙생활을 잘하고 있지 못하다는 말입니다. 지난주와 이번 주가 같은 게 아닙니다. 지난 수요일에 운전한 길을 오늘도 똑같은 시간에 운전했다고 해도 똑같은 길이 아닙니다. 거기 있는 나무의 잎도, 기어가던 개미도, 곤충도, 부는 바람도, 또 옆의 차들도 다 다릅니다. 같은 게 아닙니다.

    그래서 우리가 잘 눈을 뜨고 보면 분명히 다르고, 거기에서 ‘아, 하나님이 지금 나를 위해 이렇게 하고 계시구나.’ 하는 것을 보는 것이 영적 실력입니다. 그래서 감사하는 것이 간증입니다. 그런데 간증 하면 ‘내가 1.4 후퇴 때...’라는 게 나오면 그 동안 제대로 한 게 없는 것이고 지금 제대로 살지 못하고 있는 겁니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힘들어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단지 상황이 어려워서입니까? 아닙니다. 그 모든 상황을 이길 수 있는 영적 능력이 없어서입니다. 영적 능력을 공급받는다면 오히려 상황이 어려울수록 더 충만한 삶을 누릴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영적 능력의 공급이 이루어지지 않으니 무너지는 것이고, 그래서 힘든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지난 1년 3개월 동안 코로나 사태로 많이 힘들었는데, 이제 백신 접종이 많이 이루어지면서 출구가 보이고 있습니다. 정말 상황이 많이 좋아졌습니다. 상황이 좋아지고 있는데, 이제는 영적으로도 회복해야 할 때입니다. 이제는 Excuse가 없습니다. 그런데 사실 코로나 사태 중에서도 충분히 잘할 수 있었습니다. 지난 1년 이상의 코로나 사태 가운데 영적 상태가 어떠하셨습니까? 잘 돌아보시기 바랍니다.

    코로나 사태 가운데 예배를 제대로 드리지 않거나 아예 예배하지 않아도 괜찮았다면 신앙인일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 없이도 편안하게 모든 것이 괜찮았다면 하나님을 믿는 사람일 수가 없지 않겠습니까? 정말 신앙인은 아무리 상황이 편안하거나 돈을 잘 벌거나 일이 잘 풀리더라도 하나님과 동행함이 없으면 그냥 있지 못합니다. 삶은 그럭저럭 괜찮아도 ‘내가 이래도 되나?’ 하는 마음이 들게 되어 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성령님이 그 안에 계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제대로 예배하지 않으면서도 모든 일이 잘 풀리고 가정도 평안하고 돈도 잘 벌린다면, 괜찮다고 생각할 것이 아니라 큰일 났다고 거기에서 위기의식을 느껴야 합니다. 신앙인이라도 어려움이 오면 영적으로 바르게 서지 못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럴 때 ‘내가 이러면 안 되는데. 내가 정말 하나님께 나아가야 되는데.’라는 마음이 드는 사람이 신앙인입니다. 예수님을 믿고 성령님을 받아서 자기 안에 계시기 때문입니다.

    만약 전혀 하나님과 상관없이 살아가면서도 그저 편안하고 조용하고 별 탈 없이 잘 살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진짜 신앙인일 수가 없습니다. 정말 그런 마음이 있다면 심각하게 자신이 정말로 믿는 사람인지를 확인해보아야 합니다. 성령님이 찔러주셔야 예수 믿는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지금 우리의 삶의 문제에 대한 대답은 바로 참 신앙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복음을 회복하는 것입니다. 말라기 선지자는 바로 그 복음을 회복하라고 외치고 있습니다. ‘레위와 세운 나의 언약’이란 곧 복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3.   생명과 평강의 언약인 복음

    “레위와 세운 나의 언약은 생명과 평강의 언약이라 내가 이것을 그에게 준 것은 그로 경외하게 하려 함이라 그가 나를 경외하고 내 이름을 두려워하였으며” (5절)

    “레위와 세운 나의 언약은 생명과 평강의 언약이라.” 이 말씀은 복음 그 자체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우리가 받는 것이 무엇입니까? 구원입니다. 생명을 얻는 것입니다. 그로 인해 우리는 화평을 누리며 평강 가운데 들어가게 됩니다. 다른 말로 하면, 복음은 생명과 평강의 언약이라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십자가를 통해 받는 은혜가 바로 생명과 평강이라는 것입니다.

    복음, 즉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은혜는 바로 생명과 평강입니다. 우리 신앙과 삶의 기초는 바로 이 ‘레위와 세운 하나님의 언약’, 곧 생명과 평강의 언약 가운데 있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영적으로 회복되기를 원한다면, 내가 신앙인으로서 정말 제대로 살기를 원한다면, 바로 이 레위와 세운 언약이 항상 생생하게 서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생명과 평강의 언약 가운데 서 있어야 제대로 살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진짜 회복입니다. 특별히 기도에 있어서 이 부분이 너무도 중요합니다. 말라기의 기도가 바로 이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어떤 기대를 가지고 기도합니까? 아니, 기도란 무엇입니까? 물론 기도는 기본적으로 하나님과의 대화이지만, 우리가 하나님께 간구한 것을 은혜로 응답받는 것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그렇게 간구하고 응답받는 것의 진짜 핵심이 무엇입니까? 돈을 많이 버는 것입니까? 건강해지는 것입니까? 명예를 얻는 것입니까? 내가 세상에서 성공하는 것입니까? 자녀가 좋은 학교 가고 높이 올라가는 것입니까? 물론 그런 것들은 좋은 것들이며 나쁜 것들이 아니지만, 그건 주변적인 것이지 핵심이 아닙니다.

    우리 인생에서 정말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아름다워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뜨겁게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나님과 아름다운 관계가 세워질 때, 하나님과 나는 그 순간 생명과 평강의 언약을 맺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약해지면 생명과 평강의 언약을 깨는 것이 됩니다.

    그래서 진짜 기도라면 기도하는 순간 이미 응답되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응답이 올 때를 기다릴 것도 없이 하나님 아버지를 부르는 순간, 하나님이 기도를 들으시고 ‘그래, 내 아들아. 내 딸아!’라고 말씀하시는 순간,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는 생명과 평강의 언약이 맺어지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것으로 이미 끝난 게 아닙니까? 더 이상 뭐가 더 필요합니까? 이걸 모르니까 자꾸 하나님을 떠나 세상에서 기웃거리며 뭐가 없나 하고 헤매게 됩니다. 모든 것을 갖고 계신 분의 밖으로 나가니까 방황하게 됩니다.

    우리는 기도할 때마다 바로 이런 은혜 가운데 있기를 사모하며 기도해야겠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가장 강력한 기도의 응답이기 때문입니다.

    4.   하나님의 치유의 광선을 붙잡으라

    모든 기도의 순간마다 그리고 모든 예배의 시간마다 바로 이런 역사가 있어야 합니다. 사실 그래야 우리가 살아날 수 있습니다. 그렇게 되어야 말라기 선지자가 자신 있게 말한 것처럼 놀라운 치유와 회복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그것이 진짜 신앙의 축복입니다.

    “내 이름을 경외하는 너희에게는 공의로운 해가 떠올라서 치료하는 광선을 비추리니 너희가 나가서 외양간에서 나온 송아지 같이 뛰리라” (말 4:2)

    하나님의 ‘공의로운 해’는 사실 죽이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공의로운 해 앞에서 죄가 다 타 버리고 악이 모두 소멸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죄인은 그 앞에서 죽을 수밖에 없지 않겠습니까? 그러므로 하나님의 공의로운 해가 뜬다는 것은 심판을 말합니다. 이것은 정말 무서운 일입니다.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보라 용광로 불 같은 날이 이르리니 교만한 자와 악을 행하는 자는 다 지푸라기 같을 것이라 그 이르는 날에 그들을 살라 그 뿌리와 가지를 남기지 아니할 것이로되” (말 4:1)

    하나님의 공의로운 해가 얼마나 뜨거운지 용광로 불 같은 날이 이르러 모든 교만한 자와 악행한 자들을 지푸라기같이 태워 버린다고 말씀합니다. 한마디로 다 죽는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다 죽어야 하는데 하나님과 생명과 평강의 언약 가운데 있는 사람들에게는 그 공의로운 해가 죽이는 빛이 아니라 치료의 광선이 된다는 것입니다.

    어떤 형편없는 죄를 지은 사람이라도 그 가운데 있게 되면 치료의 광선이 비추어 그 사람 안에 있는 죄를 모두 태우고 결국엔 치유와 회복을 경험하게 해준다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우리 신앙의 비밀입니다.

    이러한 역사가 일어나기 위하여 먼저 필요한 것은, 우리가 하나님께서 레위와 세우신 언약, 즉 생명과 평강의 그 언약 가운데 머무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정말 나의 하나님이시라면, 내가 정말 하나님의 사랑 가운데 머물러 있다면, 내 안에 어떤 죄가 있다 할지라도 주님 앞에 나아와 기도할 때 그 모든 것이 용서받고 치유되면서 새롭게 살아나는 것입니다. 그리고 마치 외양간에서 풀려 난 송아지가 힘차게 뛰어 나가는 것과 같은 능력의 역사가 일어나게 됩니다.

    우리는 흉내만 내는 신앙이나, 말라비틀어진 것만 움켜쥐고 있는 신앙에 머물러 있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그러한 가짜 신앙은 하나님의 공의로운 해가 뜨면 다 타 버릴 것들입니다.

    하나님께서 레위와 세우신 언약, 곧 생명과 평강의 언약 가운데 머무십시오. 그럴 때 기가 막힌 은혜를 누리며 이 땅에서 힘 있고 아름답게, 세상 사람들이 이해할 수 없는 비밀을 가지고 승리하며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것을 바라보고 기도하며 나아가는 기도의 사람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말라기개론 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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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 자 : 말라기('나의 사자, 하나님의 사자'란 뜻)

    ·기록한 때 : 주전 440년경

    ·내 용 : 이스라엘의 죄를 책망하고 '주님' 오실것을 예언함.

    ·제 목 : 내 이름을 영화롭게 하지 아니하면(2:2)

    1. 본서의 대지

    1) 백성과 제사장의 죄를 책망함 --------------------------------- (1:1-2:9)

    2) 잡혼과 이혼을 책망함 --------------------------------------- (2:10-17)

    3) 주님 오실것을 예언함 --------------------------------------- (3:1-18)

    4) 죄에 대한 책망과 회개하라는 권고 ----------------------------- (4:1-6)

    2. 본서의 대략적인 줄거리

    느혜미야와 동시대 인물인 말라기는 구약의 마지막 선지자로서 당시 이스라엘의 사회 적, 도덕적 부페를 책망함으로써 타락한 자들을 경고하고 있다(스7-10장 참조). 만일 하나님의 백성에게 정결함이 없으면 하나님께서 숙청하실 것이라는 것과 성실과 정결이 하나님을 섬김에 전재조건이 된다는 것과 본서에서 그리스도는 언약의 사자(3:1), 연 단하는 자의 불(3:2), 의의 태양(4:2)으로 나타난다. 말라기는 구약의 축소판으로서 신구약

    을 잇는 '다리'의 역활을 하고 있다(3:1참조). 한편 구약성서는 '저주'에 대한 말씀으로 말

    라기에서 끝맺고 있으나, 반면에 신약성서는 "주 예수의 은혜가 모든 자들에게 있을찌어

    다. 아멘" 이란 축복의 말씀으로 끝맺고 있다는 점을 상기할 수 있다.

    3. 3단계 대화 형태의 특징

    ·1단계 - 확정/너희가 나의 것을 도덕질 하는도다(3:8)

    ·2단계 - 질문/너희가 말하기를 어떻게 우리가 하나님의 것을 도적질 하였나이까?(3:8)

    ·3단계 - 반박/"십일조와 헌물이라"(3:8)/"너희가 말하도다"이다(1:6-14/2:2-3/3:7-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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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말2:2-3)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가 만일 듣지 아니하며 마음에 두지 아니하여

    내 이름을 영화롭게 하지 아니하면 내가 너희에게 저주를 내려 너희의 복을 저주하리

    라 내가 이미 저주하였나니 이는 너희가 그것을 마음에 두지 아니하였음이니라 보라

    내가 너희의 종자를 견책할 것이요 똥 곧 너희 절기의 희생의 똥을 너희 얼굴에 바를

    것이라 너희가 그것과 함께 제하여 버림을 당하리라"

    (말3:10)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의 온전한 십일조를 창고에 들여 나의 집에

    양식이 있게 하고 그것으로 나를 시험하여 내가 하늘 문을 열고 너희에게 복을 쌓을

    곳이 없도록 붓지 아니하나 보라"



    ● 십일조를 하나님께 드리라는 명령(창14:20,히7:1-10)

    1. 십일조의 성격

    ① 축복의 열매요 형통의 비결임(히스기야 왕의 형통의 비결) --- (말3:10/대하32:27-30)

    ② 천국민의 세금(하나님의 것/도적질 할 수 없음) ------------ (말3:8-9/2:3)

    ③ 하나님의 것으로 등기 난 것임(십분의 일은 여호와의 것이다) --- (레27:30)

    ④ 민생고의 해결책(십일조 바치므로/백성에게 복을 내림) ------ (대하31:5-10)

    ⑤ 도난방지의 방범비(황충이를 금하심) --------------------- (말3:11)

    ⑥ 하나님 사랑하는 믿음의 표시(물질로 인해 믿음이 떨어짐) ---- (딤전6:10/눅12:15)

    ⑦ 신앙성결의 표시(성결의 증거) -------------------------- (대하34:1-7)

    2. 어떻게 복을 내리시는가?

    ① 하늘문이 열림(현재/신령한 은혜의 복) ------------------- (말3:10/계3:8)

    ② 복을 쌓는 곳이 없도록 부어주심(창고가 차고 넘침) -------- (말3:10)

    ③ 황충이(먹는자)를 제하여 주심(손실이 없음) --------------- (말3:11)

    ④ 기한 전에 떨어짐이 없음(열매를 거두게 하심) ------------------- (말3:11)

    ⑤ 땅이 아름다워진다(기름진 땅) ------------------------------- (말3:12)

    ⑥ 치료의 광선을 보내심(치료/건강의 은총) ---------------------- (말4:2/렘30:17)

    ⑦ 하나님의 영광이 함께 하심(돌아 오리라) ----------------------- (말3:7)

    3. 성도가 받을 미래의 축복은?

    ① 기도 응답하시고 존중이 여기심 ------------------------ (말3:16/삼상2:30)

    ② 기념책에 기록하심 천국 호적에 기록됨 ------------------ (말3:16/계20:12)

    ③ 특별한 소유로 삼으시며 아들같이 사랑하심 -------------- (말3:17/에5:3)

    ④ 심판을 면하게 하심(치료의 광선) ----------------------- (말4:2/계9:1-6)

    ⑤ 외양간에서 나온 송아지처럼 삶의 자유가 있음 ------------ (말4:2/요14:10)

    ⑥ 악인을 발로 밟으리라(권세있는 자가 됨) ----------------- (말4:3/시23:5)

    ⑦ 내게로 돌아오라 그리하면 나도 돌아가리라 ---------------- (말3:7/계22:12)

    < 맺는 말 >

    주 하나님의 이름을 존중히 여길 때 하나님께서도 우리를 존중히 여기시고 하나님을

    멸시하면 하나님께서도 우리를 멸시하신다(삼상2:30).

    말라기 선지자의 외침도 하나님을 영화롭게 함이 복이라고 했다. 그렇지 아니하면

    삶을 부끄럽게 하신다고 했다(말2:2-3).

    하나님 제일 중심 사상의 표현이 곧 십일조와 첫 열매이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리는 복된 성도가 되자!


    말라기 (Malachi) 

    주제 : 죄인들에 대한 호소

    ● 통독 가이드

     3일 플랜

     6일 플랜 

       읽을 본문

      핵심 주제

     1

     1

       1:1-14

     위대한 하나님의 사랑

     2

       2:1-9

     불경건한 제사장들

     2

     3

       2:10-16

     신뢰할 수 없는 유다

     4

       2:17-3:5

     백성들을 깨끗하게 함

     3

     5

       3:6-17

     십일조를 지키지 않는 죄

     6

       4:1-6

     마지막 말씀

    ● 책명 

    히브리어 표제는 저자로 여겨지는 예언자의 이름을 따서 말라키 (מַלְאָכִי: 나의 사자使者)라고 제목을 붙였다.  70인 역은 이 표제를 음역해서 말라키아스(MAAAXIAΣ)라고 제목을 붙이고 있으며, 라틴어 역본인 불가타 역시 역시 말라키(Malachi)라는 음역된 제목을 달고 있다.  그 외의 모든 역본들도 같은 전통을 따라 음역된 제목을 표제로 삼고 있다.

    ● 저자

    말라기. 본서의 내증(1:1)으로 보아 명백하다.  본서 이외에는 저자에 대한 자료를 찾을 수 없으나, 이름이 '여호와의 사자'라는 뜻의 '말라기야'의 단축형인 것으로 보아 매우 경건한 인물이었음을 짐작케 한다.

    ● 기록 연대

    B.C. 430년경. 본서에 나타난 백성의 죄상이 느헤미야서에 기록된 것과 유사하므로 두 선지자를 같은 시기의 인물로 볼 수 있으며, 1:8의 총독이 느헤미야와는 다른 인물이므로 느헤미야가 바사 왕궁으로 소환된 후인 B.C. 430년경으로 추정된다.

    ● 신학적 특성

    말라기서의 특징은 우선 문제에 있어 논쟁 형식의 대화체를 사용하고 있다는 점을 들 수 있다.  이는 질문과 대담을 통해 가르치는 유대인 랍비들의 교육 방법을 그대로 도입한 것으로 한 문장 한 문장에 힘과 활기가 넘친다.  이러한 문체적인 특징 이외에도 여러 중요한 신학적인 주제들이 본서에서 다루어지고 있는데, 우선 보편적으로 사용되고 있는 '만군의 여호와'라는 하나님의 칭호를 예로 들 수 있다.  학자들은 이 '만군'이라는 말을 대체적으로 ①이스라엘의 군대 ②하늘에 있는 천군 천사 ③하늘과 땅에 거하는 모든 것들을 가리킨다고 해석한다.  그러나 어떤 해석을 받아들이든지 간에 강조되고 있는 것은 하나님의 주권이라는 사실의 중요성이다.  즉 본서는 특징적인 하나님의 칭호를 사용해서 하나님의 절대 주권을 강조하고 있다.  또한 본서에는 뚜렷한 결혼관이 확립되어 있다.  말라기는 이혼과 잡혼을 규탄하고, 이러한 행위가 열조와 맺은 하나님의 언약을 욕되게 행위라고 규정했다(2:10)

    ● 내용 분해

    1. 서언: 하나님의 진노와 사랑(1:1-9)

    2. 제사장들의 부당한 행동(1:6-2:9)

      ① 소홀한 제사(1:6-14)

      ② 계약 파괴와 율법 불이행(2:1-9) 

    3. 일반 백성들의 부당한 행동(2:10-4:3)

      ① 잡혼과 이혼(2:10-16)

      ② 주의 임재와 심판 예언(2:17-3:6)

      ③ 십일조와 헌물의 소홀함(3:7-12) 

      ④ 악한 자와 의로운 자의 심판(3:13-4:3)

    4. 결론적인 경고(4:4-6)

      ① 율법 준수에 대한 권면(4:4)

      ② 여호와의 날을 바라보라(4:5-6)